우연의 과학 지은이: 이야마 히로유키, 옮긴이: 이정임 출판사: 학민사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하늘이 무너져 내리지는 않을까 하는 기나라 사람의 걱정을 그냥 웃어넘길 수 있을까? 중 국의 고전인 열자 '천기편'에 나오는 이 고사는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재난을 두려워하는 소심증을 가진 사람의 어리석음을 우화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인가가 떨어질 것을 미리 예측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우화는 그러한 예측 불허의 사태 에 대해 인간이 마음속 깊이 품고 있는 공포를 상징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여름 밤하늘에 커다란 국화꽃을 피우는 불꽃놀이를 올려다보며 즐기는데, 그 엄청난 양의 화약 잔해가 사 람들이 모르는 곳에 낙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피서의 한때가 서늘하게 변해 버릴 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어버이날 선물을 사러 백화점에 가던 젊은 남성이 희생된 실제 사건 이다. 아무 것도 모르고 길을 지나가던 청년을 백화점 옥상에서 자살하려고 떨어지던 다른 남성이 그대로 덮친 것이다. 이 고통스러운 사고는 어떤 것의 낙하가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 비극의 일례이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우연한 사건의 인상적인 형식들 중에 낙하와 충돌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려 준다. 우연에 대해 말하려고 할 때,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을 이야기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다. 아이스킬로스는 고대 아테네에서 활약한 그리이스의 대표적인 비극시인으로, 아이스킬로스 의 비극이라고 하면 없어진 것도 포함해 70편 가량인 그의 희곡 중 어느 하나를 의미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비극이란, 실제로 시인 본인의 신상에 발생한 전례가 드문 재난을 말한다. 게노스라고 불리는 게노스라고 불리는 단편에 기록된 짧은 전기에 의 하면 비극 작가 자신의 비극은 다음과 같이 발생했다. 그리고 아이스킬로스는 참주 히에른과 게라 시의 시민들에게도 커다란 호의를 받았는데, 3년 간 그롯에서 산 후 나이가 들어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독수리 한 마 리가 거북 한 마리를 홱 낚아챘는데, 그 먹이를 뜻대로 할 수가 없자 등껍질을 깨뜨리려고 바위에 거북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거북은 비극 시인의 머리 위에 떨어져 그를 죽이고 말았 다. 사실 이전부터 아이스킬로스에게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일격이 당신의 생명을 빼았 는다'는 신의 계시가 있었다. 이 사고 이야기를 듣고 웃는 것은 좀 미안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외에도 여러 번 의 죽을 기회를 넘긴 것을 생각하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황당한 경우라 할 수 있 다. 원래 아이스킬로스는 용맹스러움으로 이름을 날린 형 키네게이로스와 함께 마라톤 싸움 에 출전하였다. 사라미스 해전에도 참전하였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에레우시스의 비밀의식 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는 비운도 맛보았다. 이렇게 몇 번이나 저승의 문을 두 드리면서도 살아 남아 나중에 영예로운 노후와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시인이 비 운을 당한 게라라는 곳은 현재 시실리섬에 있고, 그 땅에 군림한 참주 히에른이 문화유치 정책의 일환으로써 인기있는 예술가였던 그를 멀리서 불러들인 것도 뜻밖의 사고로 죽게 되 는 한 원인이었다. 역사에 남는 우연한 발견을 이룬 200년 후의 아르키메데스도 같은 시실 리섬에서 이 참주와는 다르지만 같은 이름의 히에른을 섬겼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자세히 전개하도록 하겠다. 역사가들은 게노스에 기록된 이 불가사의한 사건에 신빙성에 대해서 의 문을 품고 있다. 이야기 내용으로 보아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는 사건의 진위보다도 이 일화가 현재까지 전승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싶다. 그러면 거북이에 관한 것으로 화제를 옮기도록 하자. 아무래도 거북이와 우연 사이에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것같다. 달리기 시합 때에는 상대의 생각지도 못한 실 책으로 행운을 잡아 토끼를 이길 수 있었던 거북이였지만 독수리에게는 깜쪽같이 당했다. 잘 알려진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거북이가 독수리에게 나는 것을 자신에게 가르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독수리는 거북이의 태생이 태생인 만큼 그런 일은 아무래도 불가능하다고 충고했지만, 거북이는 그래 도 계속해서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독수리는 거북이를 발톱으로 움켜잡고 하늘 높이 데려간 후 거기서 놓아 버렸습니다. 거북이는 바위 위에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가 말하 는 것은 모험을 좋아해서 지혜로운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그 몸을 상하게 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에피뮤토스라고 불려진 작자 본인이 덧붙인 처세훈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 그 부분은 그대로 두기로 하겠다. 아이스킬로스의 사고에 대해 적어도 말할 수 있는 것은 상처 를 입은 주인공은 거북이가 아니라 무방비 상태였던 시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 그 리이스의 푸른 하늘에서 거북이가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는 점에서는 흥미진진하다. 어쩌면 거북이의 추락 사고는 우연이 아니라 흔히 일상 생활에서 볼 수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눈으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사건이 사실은 거북이와 독수리 사이에서 자주 있었던 것이라는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쓰여진 프리니우스의 기술에서 찾아 볼 수 있 다. 제3의 종류에 속하는 독수리는 모노프노스로...크기나 힘이 두 번째이고, 호수 근처에 살고 있었다...이빨을 가졌지만 벙어리로 소리를 내지 못하고 독수리 중에서는 가장 색이 검고 매 우 멋있는 꼬리를 갖고 있었다...이 독수리는 거북이를 높은 곳으로 낚아채 가서 떨어뜨린 후 거북이 등을 깨뜨리는 교묘한 재주를 갖고 있었다. 이야기에 의하면 이러한 우연의 사건 이 시인 아이스킬로스의 죽음을 야기했다고 한다. 분명히 그는 운명의 여신들에 의해 예언 된 이런 류의 재난을 피하고자 하늘에 빌고 있었다. 프리니우스의 이야기중에는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될 이야기들도 있다. 어린시절에 동굴 에 들어가서 57년간을 하루같이 잠을 잔 후 일어난 립반 윙클의 이야기라든가, 모노꼬리라 고 불리는 발이 하나밖에 없는 산족종족의 이야기와 같이 속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읽어야 할 일화가 실제로 많다. 원래 그런 기술은 대게 저자가 비판적으로 음미하지 않고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승이나 이국의 여행담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에서 유해한 것이기 때문에 진 실성에 대해서 적당히 감안해서 읽으면 내용의 풍부함만으로도 그 나름의 효용은 있다고 생 각한다. 특히 "우리들의 운명은 어려 가지 우연으로부터 태어난다"는 그의 지론은 이 책의 테마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어서, 우연의 본성을 조금씩 쫓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들은 다시 한 번 프리니우스와 만나게 된다. 독수리에게 거북이를 낚아채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는 본성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종류는 다르더라도 마찬가지 습관이 현재의 독수리에게서 관찰되는 점으로 보아도 어쩌면 사실일 수 있겠다. 아이스킬로스도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프리니우스가 말했듯이 신의 계시에 나타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일격'을 무언가가 건물 위에서 떨어질 위험이라고 시 인이 해석하고 그것을 피해 건물이 없는 평지를 선택했다고 하면 그는 결국 얄궃은 종말을 맞이한 셈이다. 하늘의 별을 열심히 바라본 나머지 발밑의 구멍을 발견하지 못하고 떨어져 부상을 입은 이오니아의 철학자 탈레스의 이야기와 같아 아무래도 고대 그리스에는 어리숙 한 지식인이 많았던 것같다. 아이스킬로스의 기구한 운명에 주목하고 유래가 드문 우연 사 고로서 멋있게 각색해서 그려보고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다름아닌 나츠메 소세끼다. 좀 길 게 인용해서 미안히지만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중의 한 번 읽으면 좀처럼 잊을 수 없 는 유명한 부분을 읽어보자. 옛날 그리이스에 이스킬라스라는 작가가 있었다고 한다. 이 남자는 학자와 작가들에게 공 통적으로 나타나는 머리를 가졌다고 한다. 학자와 작가에게 공통된 머리란 대머리라는 의미 다. 왜 머리가 벗겨지는가 하면 머리의 영양 부족으로 털이 성장할 만큼 활기가 없기 때문 임에 틀림없다. 학자와 작가는 가장 많이 머리를 사용하는 자이며, 대개는 가난할 게 뻔하 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와 작가의 머리는 모두 다 영양 부족이며, 모두 다 벗겨져 있다. 그 런데 이스킬라스도 작가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벗겨지지 않을 수는 없다. 그는 반들반들한 금귤간은 머리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머리를 치켜들고 태양을 비추면서 길을 걷고 있었다. 이것이 실책의 원인이다. 대머리는 햇빛을 받으면 굉장히 반짝거리는 법이다. 높은 나무가 바람을 많이 맞 는 것처럼 빛나는 머리도 수난을 겪기 마련이다. 이 때 이스킬라스의 머리 위에 한 마리의 독수리가 날고 있었는데, 어딘가에서 낚아챈 한 마리의 거북이를 발톱 끝으로 움켜쥔 채다. 거북이나 자라 따위는 맛이 좋은 것은 틀림없으나 그리이스 시대로부터 딱딱한 껍데기를 쓰 고 있었다. 제아무리 맛이 좋다고 해도 껍데기가 붙은 치로는 어쩔 수가 없다. 새우를 껍질 째 구운 것은 있지만, 거북 새끼를 껍질 째 굽는 것은 지금까지도 없는 것으로 보아 그때도 물론 없었을 게 뻔하다. 한다하는 독수리도 어쩌지 못하는 참에 아득한 하계에 반짝 빛나는 것이 보였다. 독수리는 됐다고 생각했다. 저 빛나는 것 위에다가 거북 새끼를 떨어뜨린다면 껍데기는 틀림없이 깨어질 것이 뻔하다. 깨어진 뒤에 날아내려가 알맹이를 가지고 가면 간 단하리라. 그렇게 되겠다고 결정한 후에 그 거북 새끼를 높은 데서부터 기척도 없이 머리 위로 떨어뜨렸다. 얄궃게도 작가의 머리가 거북이 껍데기보다 연했기 때문에 대머리는 끼지 고 유명한 이스킬라스는 여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건 그렇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독수리의 생각이다. 그 머리를 작가의 머리인 줄 알고 떨어뜨린 것인지, 아니면 민둥 바위인 줄 착각하고 떨어뜨린 것인지에 따라 라쿠운칸의 적 과 이 독수리를 비교할 수도 있고, 또 안할 수도 있다. 주인의 머리는 이스킬라스나 저 고명 하신 여러 학자님들처럼 반짝반짝 빛나지는 않지만. 문장 중의 이스킬라스는 물론 아이스킬로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것을 영어로 읽은 것이 다. 피렌체시의 메디치 도서관 소장의 11세기 전기 사본이 이 일화의 출전으로 여겨지고 있 는데, 그래서 그것이 '출자'와 같은 내용의 것이라면 이미 소개한 것과 같이 거기에는 대머 리에 관한 지적은 없었을 것이다. 팔로스섬 대리석 비문에 기록된 노시인의 향년이 69세인 것을 생각하면 머리가 벗겨진 것이 이상할 것은 없지만, 사실이 어찌되었든지 소세끼가 풍 부한 재치로 창작했다고 보는 것이 납득하기 쉽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고양이'중에 이 대머리 일화의 삽입을 마치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하는 내용들이 도처 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구샤미선생이 아내에게 조루리(악극 비슷한 일본의 연극 대본)<산주산겐도>에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다가 갑자기 병이 났을 때의 일이다. 서재로 아내를 부른 선생은 예기 치 않은 일이 발생한 경우에 당황하지 않도록 어느 서양 속담을 들려준다. '입에 든 떡도 넘어가야 제것이다'. 아무 생각없는 일상의 한 때라도 갑자기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다. 그때에 구샤미 선생은 아내의 머리가 약간 벗겨진 것을 미리 알았 더라면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계속해서 읽어나가면 대머리에 관한 에피소드가 쾌 나온다. 도둑이 든 다음날 찾아 온 제자 다타라 산페이군은 후두부에 직경 한치 정도가 벗겨졌는 데, 영어로 대머리를 오탄친 팔레오로구스라고 말할 뿐 아니라 메이테이가 독신을 고수하게 된 원인이 대머리와 관계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에치고 지방의 간바라군의 다케노코다니를 지나서 다코쯔보 고개로 접어든 산골 마을에서 하루 밤을 머물며 식사 대접을 받은 메이테이는, 거기에서 높이 빗어올린 머리 스타일을 한 미인을 만나 첫사랑을 경험한다. 그러나 다음날 그 여자 머리의 정체가 완벽한 대머리였다 는 것을 알고 실연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그만 대머리 방향으로 흘렀지만, 물건이 떨 어지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사태를 초래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샘솟는 우연이란 어떤 것일까? 안타깝게도 18세기 프랑스의 유물론 철학자인 드라메트리가 "매일매일 생겨나는 버 섯과 같다."고 우연의 사상을 형용하고 있는 예 정도밖에 찾을 수 없지만, 샘솟는 것은 아닐 지라도 떠 다니는 정도의 우연은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도 역시 거북이가 관계되어 있다. 연약한 다리를 이끌고 참고 걸어가는 길을, 운정을 빗겨 돌아 하늘도 이별하는 동운의 도 로를 오늘 처음으로 만났지만, 또 언제 돌아갈 지도 모르는 의지할 곳도 없는 몸의 행방, 부 목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눈먼 거북이와 같은 이 내 신세는 어두운 길을 더듬어 떠도 는 구름도 떠오르는 아이사카산에 도착했네... 이것은 유명한 가사인 <세미마루>중의 한 절이다. 글 중의 '눈먼 거북이의 어두운 길'이 란 잡아함경에 들어 있는 '눈먼 거북이의 부목'이라는 비유를 근거로 한 것으로, 부처의 가 르침이나 행운과 한 번도 만날 수 없는 것을 예를 들고 있다. 깊은 바다 속에 백년에 한 번 수면에 떠오른다는 눈먼 거북이가 살고 있는데, 바람에 따라 바다 위를 동서로 표류하고 있 는 단 하나의 부목에만 있는 구멍을 그 거북이가 만나는 정도로 가능성이 희박한 우연을 말 하고 있다. 세미마루는 '고쿠라 햐쿠닝 잇슈' 중에서도 비교적 외우기 쉬운 '이것이 이것'으로 시작 되는 시의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실존 인물인지는 의심스럽다. 이 가사에서 그는 다이고 천 황의 네 번째 왕자로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장님이었기 때문에 가혹하게도 천황의 명으 로 내쫓겨 아이사카산에 버려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었다. 왜 세미마루를 눈먼 거북이에 비교한 것일까? 눈이 안보인다는 것도 당연히 한 가지 이유 가 되지만, 아이사카산이라는 장면 설정이 암시하듯이 이후에 있을 해후 때문이다. 초가집에 비파를 안고 홀로 엎드려 울고 있던 세미마루는 마침내 비파를 타기 시작한다. 그곳에 머리 가 엉크러지고 뻗친 채 살고 있는 누님이 우연히 지나간다. 미친여자라는 이유로 왕인 아버 지로부터 버림받아 궁에서 떠나온 그녀는 초가집 안에서 그 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비파 가 락을 듣고 멈춰선다. 그리운 동생인 세미마루임을 알게 되어 그에게 다가간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손에 손을 마주잡고 소매를 적시며 서로의 괴로운 신세를 위로하였다. 즉 '눈먼 거 북이의 부목'의 예는 생이별한 남매의 만남이 눈먼 거북이가 구멍을 뚫린 부목을 만난 것 과 같이 어렵고 드문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극히 드문 우연의 사고로 이제까지 소개한 두가지 이야기-'눈먼 거북이의 부목'과 '하늘 에서 떨어진 거북이와의 충돌'-는 공통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점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자. 눈먼 거북이나 하늘에서 떨어진 거북이나 모두 하늘과 바다의 차이는 있지만, 연직 방향 으로 운동하고 있다. 한편 그러한 사정을 전혀 모르는 노시인과 부목은 한가로이 수평 방향 의 운동에 몸을 맡기고 있다. 양자는 모두 다른 인과의 계열에 따라 운동을 하고 있는 관계 로 각각 인과의 운동표에는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예정되어 있지 않다. 즉 우연을 대표하는 이러한 사례에 있어서는, 첫 번째로 두 개의 독립된 현상의 계열이 시공상의 한 점에서 생 각지도 않게 교차하고, 두 번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충돌의 운인이 관찰자에게는 떠오르지 않는다는 상황이 성립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 교차하는 현상이 거듭되는 경우가 있더라도 결코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매일매일의 신문에 보고되는 자동 차 충돌 사고나 해난사고는 넓은 의미에서는 우연으로 분류될 수 있는데, 원인의 부재라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먼저 말한 우연의 부류에는 속하지 못한다. 장거리 운전수의 졸음이나 레이더 기기의 고장으로 원인이 특정된다면 오히려 발생할 수밖에 없는 현상으로 해석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에 소개하는 예는 우리에게 새로운 시점을 제공해준다. 하늘로부터의 선물-만나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 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실 양식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 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 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같고도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같았더라...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우연의 대표적인 예로 낙하가 된 이유는 우리들의 생활 공간이 거의 지표 부근으로 한정 되어 있는 사실에 있다. 대부분의 일상적인 일들이 수평좌표 위에서 일어나는데 반해 낙하 현상은 그 좌표에 수직방향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예측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예를 들면 렘브란트가 그린 <다나에>를 생각해보자. 황금비로 변해 다나에의 침실을 쳐 들어온 제우스에게 있어서는 하늘로부터의 낙하 자체가 계산되고 예정된 행동이었지만, 나 체의 다나에에게 있어서는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인 우연이었을 것이다. 신에게 있어서는 신 의 의지에 따른 필연의 행위라도 그것이 수직축을 따라 이루어지는 한 받아들이는 측인 지 상의 인간에게는 우연의 사건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인용문의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잠자는 사이에 떨어진 서리를 다음날 본 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수상히 여긴다. 신의 말씀을 모세로부터 전해 듣고서야 비로소 그것이 배고픔 을 견디어 내기 위해 신이 준 것이라는 것을 안다. 이리하여 만나가 내리는 것은 우연이 아 니게 된다. 얼핏 보기에는 우연이라고 생각되는 사건이 자주 신의에 따른 것으로 해석될 여 지가 있다. 이 우연의 제2의 요소에 대해서는 다른 장에서 다시 한번 논하도록 하겠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탈출해 엘림과 시내산 사이에 있는 광야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심각한 식량 부족을 겪는다. 그들은 신과 자신들 사이를 이어주는 모세와 아론을 향해 굶주림에 고통받을 바에야 애굽에서 죽는 것이 낫다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신 이 보내준 만나는 이러한 불평을 해소하는 역할을 하고,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지탱해준 것 이다. 그렇다고 해도 에덴동산에서 토지를 경작하도록 명령받은 아담의 후예인 것을 생각하 면 오히려 관대한 배려라고도 말할 수 있다. 굴러 들어온 호박과 같은 이 사건은 성서의 세 계에서는 오히려 예외에 속하는 것같다. 대체로 하늘에서 낙하하는 것은 갑자기 사람에게 재난을 초래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한 후 사십일 동안 밤낮으로 내린 비도 그렇고, '요한계시록'에 이르러서는 천사가 나팔을 불 때마다 하늘에서 피섞인 우 박과 불이나 횃불같은 큰 별 등이 장소에 상관없이 엄청나게 떨어지는 것도 그렇다. 성경이 나 신화를 제외한 다른 문헌을 찾아보아도 이러한 은혜의 물질(하사품)에 관한 일화는 매우 드문 것을 알 수 있다. 겨우 2세기 로마의 아테나이오스가 다음과 같이 전하는 이야기가 있 을 정도이다. 나는 물고기 비가 온다는 이야기도 알고 있다. 파이니아스는 '에레소스의 위정자' 제 2권 에서 몇몇 사람이 여기저기서 물고기 비를 보았다고 이야기한다. 헤라클레이데스 렌보스(기 원전 2세기)는 '역사'의 제 21권에서 "마케도니아의 파이오니아와 소아시아 북단의 다르다 니아에서는 개구리 비가 내리는데, 그 수가 엄청나 거리는 말할 것도 없고 집안에도 개구리 로가득찼다고 한다. 처음 하루 이틀은 개구리를 죽이고 문단속을 해서 하늘로부터의 은혜 를 크게 활용했다. 그러나 그 후에는 그렇게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집안의 그릇이란 그 릇엔 개구리가 가득 차 음식을 찌거나 볶을 때에도 함께 들어가 있었다. 그밖에 물도 마실 수 없게 되고 밖으로 나가려고 발을 내밀 수도 없었다. 온통 개구리로 가득찼기 때문이다. 결국 죽은 개구리로 인한 악취에 질려 사람들은 토지를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개구리를 전계라고 칭하며 귀중히 여기는 중국인과는 달리 일본 사람은 평소 개구리를 먹 는 습관이 없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그다지 은혜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에 대해 당사자 들조차 매일 개구리를 먹는데 질려서 마침내 하늘의 은혜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친절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어떤 진수성찬이라도 계속해서 먹으면 미각에 민감할 사람일수록 질려버리 는 것이다. 이에 반해 만나를 40년간 계속해서 먹은 이스라엘 백성은 기특하게도 신이 내려 주신 식탁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다시 만나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만나의 유래를 다른 원인에서 구하는 학자들 중에 과학계에 파문을 일으킨 이마뉴엘 베리 코프스키가 있다. 1895년에 러시아에서 태어난 베리코프스키는 영국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후 귀국해 모스크바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다음 베를린에 가서 생물학을 전공하는 한편, 후에 예루살렘 대학 창립의 계기가 된 잡지 '스크립터 우니벨시타티스'의 창간에 관여하고, 특히 팔레스틴에서 개업의로서 실적을 쌓은 후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 취리히와 빈에서 정신 분석을 공부한 후, 1938년 미국으로 건너가는 등 어지러울 정도로 바쁜 인생을 보낸 학자이 다. 그는 미국에서 문제의 문서를 공표한다. 1950년에 간행된 '충돌하는 우주'가 그것이다. 처음에는 맥미란사에서 출판되었는데, 더 이상 인쇄를 계속하면 교과서를 집필하지 않겠다 고 과학자들이 모두 항의하고 압력을 가한 결과 다른 출판사에 판권이 양도되었다고 하는 복잡한 사정이 있는 문서이다. 과학자가 서적을 탄압하는데 협력한 진기한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과학계에 파문과 동요를 야기시킨 '충돌하는 우주'에는 어떤 것이 쓰여져 있을 까? 우연과 관련이 깊은 부분에 초점을 맞춰 소개하도록 하겠다. 기원전 1500년 경 목성의 일부가 분리돼 혜성이 되어 태양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이 혜성은 돌고 돌아 현재의 금성이 되었는데,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 중에 몇 번인가 지구에 근접한다. 혜성에는 긴 꼬리가 있고 지구에 가장 가까웠을 때에 그 꼬리는 지구와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혜성의 꼬리에 완전히 뒤덮인 지구에는 여러 가지 천재지변이 발생한다. 하 천은 피와 같이 붉게 물들고, 낙하하는 운석으로 인해 하늘은 불로 뒤덮인다. 태양은 보이지 않게 되어 깜깜한 날이 며칠씩 계속된다. 혜성의 중력으로 인해 지구의 자전은 늦어지고 그 로 인해 지표에는 폭풍이 발생하고 지진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천재지변 의 모든 것이 성서를 비롯한 고대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다시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 이야기를 하면 혜성의 꼬리 속에는 탄소와 수소가 포함되어 있어 지구의 대기중에 있는 분진이나 수증기와 화학반응을 일으켜서 탄수화물을 만든다고 베리코프스키는 주장한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구한 불가사의한 음식인 만나는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최종적으로는 지구와 혜성과의 우연의 충돌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이 이야기는 물론 액면 그대로 신용할 수 없다. 오카르트 학설을 계통적으로 비판한 하인즈가 지적하듯이, 천문관측이나 에너지 물리학이나 유기화학 분야에서 우리들이 현재 받아들이고 있는 지식과 정반대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만나가 탄수화물인 것은 그렇다고 해도 탄소와 수소의 충돌로 만들어지는 것은 어렵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 조건에서는 탄화수소는 만들어져도 탄수화물은 만들어지지 않 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충돌현상이 사실이 아니었더라도 베리코프스키가 얼토당토 않은 결론에 달할 때까지의 추론 과정에는 우연에 얽힌 중요한 특징이 포함되어 있다. 하늘로부 터 내려온 만나의 일화와 비슷한 이야기가 구약성경 이외에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 다. 예를 들면 아이슬랜드의 전설에서는 세계적인 화재가 있은 후에 한파가 엄습해 북방지역 에서는 한 쌍의 부부밖에 남지 않게 된다. 두 사람은 혹한 동안 아침이슬을 먹으며 연명했 다고 되어 있다. 불경에서는 세계 윤회의 종말에 밤낮의 구별이 없어지고 하늘의 음식이 인 간의 음식이 되었다는 기술이 있다. '리그베댜'에는 '매두'라고 불리는 꿀이 구름에서 내려 오는 이야기가 있고, 그리이스 신화에는 안브로지아라는 꿀맛이 나는 방이 등장한다고 한 다. 또 이집트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나일강에서 한때는 꿀이 흘렀다고 한다. 어느 것이나 하늘로부터 인간의 굶주림을 채우는 은혜의 식량이 내려왔다고 이야기하 고 있고, 그것이 거의 세계 전체에서 관측되는 것을 베리코프스키는 발견했다고 말하고 있 다. 만나의 기원을 규명한 이 기묘한 학설의 논리는 융이 공시성이라고 부른 현상을 그 중 심에 두고 있다. 거기에서는 교차하는 것 없이 오히려 병행관계에 있는 서로 독립된 사상이 기묘한 우연의 일치를 성립시키고 있다. 불쌍한 아이스킬로스와 거북이가 직교성의 우연을 경험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마치 병행성의 우연이 존재하는 것과 같다. 베리코프스키는 예 를 들면 집단무의식과 같은 공시성의 개념으로 설명하기보다는 그러한 병행계역을 수직으로 관통하는 거대한 충돌을 가정함으로써 수없이 많은 불가사의한 우연을 지구와 혜성의 충돌 이라는 단 하나의 원초적인 우연으로 환원한 것이다. 우연의 원의 여기에서 잠시 언어의 뜻을 탐색해보자. 우연과 낙하와 충돌 사이에 특히 긴밀한 관계가 존재하는 것이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영어에서 우연을 의미하는 찬스는 민중 라틴어 카덴티 아에서 파생된 고프랑스어 챈스를 그 어원으로 하는데, 카덴티아의 동사형 카도(부정형은 카데레)는 원래 '떨어진다' 또는 '강하한다'를 의미하고 있다 또 이 단어를 보면 생각나는 단어가 있는데, 음악회에서 솔리스트가 실력을 자랑하는 카덴차(화려한 무반주 악구)도 본래 는 '하강'을 의미하지만 그 의미가 바뀌어 '리듬감 넘치는 율동적인 부분'을 가리키게 되 었다. 또 콘티젠시도 우연이나 우발성을 의미하는데, 그 유래는 라틴어 콘티젠티아에서 찾 을 수 있다. 이것들은 흥미진진하게도 같은 라틴어 동사 콘티고(부정형은 콘티그레)로 '접촉 한다' '충돌한다'라는 의미가 있다. 독일어의 경우가 가장 본래의 뜻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연을 나타내는 독일어는 주펠이기 때문이다.(주펠른은 낙하를 의미한다.) 이것은 라 틴어로 '우연히 만나다'를 나타내는 인시도(부정형은 인시드레)를 그대로 번역한 형태로 되 어 있다. 물론 인시도는 '추락한다'라는 의미도 있다. 계속해서 말하면 명사형의 인시덴티 아에는 '돌비'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프랑스어의 해사드는 조금 이해하기 어렵지만 카드레에서 카서스를 거쳐 성립되었다고 한 다. 중간형으로서 체서스였던 것이 씨음이 탈락해서 해사스가 된 것일까? 안타깝게도 이 점 은 확증할 수 없다. 또 '로벨 불어사전'에서는 별도의 원어설이 소개되고 있다. 주사위를 의미하는 민중 아라비아어의 아즈-자르에서 스페인어 아자아(주사위 도박에서 나쁜 패)를 거쳐 해자드로 변화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주사위인가 하면, 고아라비아어의 자하아가 꽂 을 나타내고, 거기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꽃무늬 주사위가 있었던 것같다. 다시 영어로 되돌아가서 '사건'을 인시던트라고 말하고, 두 가지 사건이 '우연의 일치' 를 이루는 것을 코인시던트라고 쓰는데, 이것도 또 '우연히'를 의미하는 라틴어 인카데레 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리이스어에 대해서는 우연에 관한 개념 분석을 맨처음 체계적으로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제2권 4-6장)에서 그 용례를 엿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연을 주로 두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하고 있다. 예를들면 '연회에서 징수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채무자한테 가서 가끔 징수할 수 있다'라고 할 경우 이런 종류의 우연을 듀 케라고 부른다.('우연'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한편 '삼각대가 혼자서 떨어졌다'라든가 '돌이 떨여져 사람을 쳤다'는 경우와 같이 인격 을 지니지 않은 자연물의 낙하와 같은 사건을 아우토마톤이라고 한다.('자기우발'이라고 번 역되어 있다) 이 듀케는 운명의 여신이기고 하며, 로마신화에서는 포르튜나라고도 불린다. 여기에서 행운을 나타내는 포툰이 나왔다. 듀케의 동사형에 '당첨되다'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덧붙여 두자. 또 한가지 아우토마톤은 그대로 음역된 형태로 영어의 오토메이션으로 바뀌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중에 습베베코스라는 개념을 도입해 두고 있는데, 이것은 독 립된 두 가지 것이 우연하게 부대적으로 구비하고 있는 상황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엇다. 습 베베코스를 라틴어화한 것이 엑시던스이다. 동사형인 엑시드(부정형은 엑시데레)는 '낙하한 다' '발생한다'나 '만난다'는 의미가 있다. 이렇게 서구의 우연에 관련된 단어를 조사해보 면 어느 단어라도 '낙하'나 '충돌'과 인연이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조사하는 김에 한자에 대해서도 약간 다루어볼 필요가 있다. '우'는 '가끔' 이라 고 훈으로 읽는 습관이 있는데 '우수'와 같이 하나 하나가 만사서 둘이 되듯이 서로 마주 보거나 나란히 하는 것이 본래 의미이다. 배우자는 남녀가 나란히 있거나 또는 만나는 것 에서 유래된 것이다. 또 '우감'이나 '우성' 등이 '상념이 문득 떠오르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 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동양권에서는 낙하 현상과의 관련은 희박하고 오히려 '부상'하 는 이미지를 동반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눈먼 거북이가 바다속에서 떠올라오는 이야기 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왕충이 쓴 '논형'(제3권 물예편)에 이런 용례가 있다. 유자논왈 '천지고생인'. 비언망야. 부천자생야, 유부부합기, 자즉자생야, 부부합기, 비당시 욕득생자, 정욕동이합, 합이생자야. ("천지는 특정한 목적이 있어서 인간을 만들었다."라고 유자는 말했지만 그것은 거짓이다. 천지가 음양의 기를 반응시켰기 때문에 인간은 가끔 저 절로 생겨난 것이다. 남녀가 욕망의 흐름에 따라 기를 합쳤기 때문에 자식이 그 결과로서 저절로 생겨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는 우연의 형태로서 우와 자가 나열되어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듀케=아 우토마톤의 이분법과 기묘하게도 부합하고 있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원래 '자'의 용례는 노 장사상의 핵심인 무위자연의 개념을 포함한 경우가 많아 정확하게는 아우토마톤의 원래 뜻 과 일치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저절로 생겨났다고 해도 단 한가지 원인도 없는 상태를 말 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그 자체에 갖고 있는 원인이나 원리에 의해 생겨났는 것인지 해석이 나누어진다. 그렇지만 일부러 왕충의 예를 든 데는 이유가 있다. 당시는 아직 생식의 신비가 해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녀의 화합이 결국 정자와 난자와의 만남을 의미한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지만, 인간존재의 본질에 있어서 그 탄생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과, 그 우연 이 궁극적으로는 다른 유전자끼리의 충돌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 앞으로의 이야기 흐름 에 따라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의 분석의 마지막으로 일본어에서는 '우연'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검토해보자. 먼 저 말해두면 이제까지 유럽어에서 본 것과 같은 우연을 낙하나 충돌로 보는 경향이 일본어 에서는 거의 보여지지 않는다. '우'를 '가끔'이라고 읽듯이 우연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일본 어의 표현은 '가끔'이나 '이따금' 또는 '어쩌다'라는 부사를 파행하는 '가끔'이라는 명사이 다. 이 언어의 어원에 대해서는 주로 다음 세 가지를 들고 있다. 1. 잠깐동안 2. 오랫동안 3. -틈, -사이 '일본국어대사전'에는 그 외에도 또 다른 학설이 소개되어 있는데, 위의 세 가지 모두 시 간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고, 특히 간과 간사이가 벌어져 있다는 것, 즉 시 간 간격이 크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한 번 일어나서부터 다음에 일어날 때까지의 시간이 길게 벌어져 있어서 드문 사건을 말한다는 것이 보통인데, 이 '드 문'이라는 말도 또 '대언해'에서는 '간유'의 약어로 되어 있어 사건이 발생하는 빈도가 적 은 것을 의미하고 있다. 한편 드문 일은 '전혀 없다'라고도 말하는데, 이것은 별도의 계통에 속해 있다. 보통 '조 멏럼'라고 쓰는 것에서 '많지 않고 드물게'라고 해석하지만, '속어고'에 의하면 고어의 '공 연히'가 어원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공연히'는 근거나 이유가 없다는 의미로 쓰기도 한다. 즉 겪은 경험이나 사건에 원인이 될 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한 경우에 이용되던 말이 빈도가 적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변용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어의 우연 개념은 주로 발생하는 경 우가 적거나, 아예 없거나, 또는 확률이 낮은 것을 가리키고 있다. 이제까지 본 다른 문화권 의 방식과는 꽤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한가지 잊어서는 안되는 야마토 말이 있 다. '일포사전'에도 베쿠레우아라는 가어(와카에서 잘 쓰이는 말씨)로 기재되어 있는 '와쿠 라바'라는 말이다. 가장 잘 사용한 용례는 다음 야마카미의 '빈궁문답가'의 한 절인 것이다. 추운 밤 나보다도 가난한 부모는 얼마나 굶주리고 추울까. 처자는 얼마나 기원하며 울까.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너의 세상은 지나간다. 천지는 넓다. 하지만 나에게는 넓지 않 다. 일월은 밝으나 나에게는 비추지 않는다. 모두에게 그럴까. 아니 나에게만 그렇다. 하필이 면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나도 남만큼 할 수 있는 데도, 면으로 만든 옷도 없이 누더기만 어깨에 걸치고 찬바람 부는 해성들 사이를 혼자서 걸어가야만 하는가. 남의 일이라고 해도 몇 번씩 읽으면 가슴이 죄어올만큼 안타까운 노래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 후세에 '혹시라도 찾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스마노우라에 모시오(옛날 해조에 바닷물을 적셔 염분을 함유시킨 다음 그것을 태워서 물에 풀고 그 웃물을 끓여서 만든 소금)을 얻어 서 극진히 대접할텐데"라고 읊었을 때에는 이미 잃어버리고 있는 또 한가지 우연의 의미가 감추어져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후자의 와쿠라바의 용도는 '좀처럼 사람이 올 것 같지도 않지만 만약 가끔 방문하는 사람 이 있으면'이라는 의미로 빈도가 적은 것을 나타내는 용례인 것에 반해, 전자에는 '가끔 인 간이 태어나 이런 가난한 생활을 하지만 다른 인생도 있지 않을까'하는 한탄이 있다. 의복 도 없이 추위를 참으며 먹을 것도 곤궁한 나의 생활은 수많은 인생 가운데서 우연하게도 선 택되어진 것으로 새나 벌레나 본래 다른 생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자문자답하고 있다. 다 른 것들에도 당연히 있는 존재의 선택지를 취급하는 방법은 동물전체를 생각하고 있는 것인 지, 또는 인간 삶의 귀천의 차이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윤회전생 끝에 행복인지 불행인지 가끔 인간으로 태어난 자의 내일에 희망이 없고 괴로운 인생이 선 택되어진 것을 작가가 한탄하고 있다면 거기에는 이중의 가능성이 가정되어 었다고 할 수 있겠다. 카프카 '변신'의 주인공 그레골 자무자와 비교해 보면 그 이중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자무자는 어느날 아침 일어나보니 이유도 알 수 없이 독충으로 변해버린 자신을 발견하다. 예를 들어 그 생활이 가난하지 않을지라도 역시 '하필이면 벌레가 되다니'라고 자신의 운 명을 저주하고 있는데, 같은 벌레 중에서도 왜 독충이었을까? 등을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벌레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불행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다른 경우도 있을 수 있다'라는 우연의 의미를 노랫말에서 찾아낸 것은 쿠 키 슈우조우였다. 쿠키는 우연 개념을 분석하면서 독자적으로 분류 체계화한 저서 '우연성 의 문제' 중에서 이런 류의 우연을 '이접적 우연'이라고 부르고 있다. 앞으로는 이렇게 부 르기로 하겠다. 그런데 '와쿠라바'란 무엇일까? '병엽'이라고 쓰듯이, 원래는 질병이나 벌 레에 먹힌 마른 잎을 말한다. 여름에 단풍진 것같이 보이는 썩은 잎을 말한다. '와쿠라바' 는 '와쿠루하'가 변형된 것이라고도 하고, '와(어린 잎)쿠라우(벌레먹다)'에서 생긴 말이라고 도 한다. 두 가지 모두 후세에 '해후'라고 쓸 정도로 만남이 드문 것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마침내 긴 어의 해석 작업을 끝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장에서는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을 시작으로 우연의 본래의 뜻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낙하'에 대해 알아보고, 거기에서 '다 른 사상의 계열의 교차'로서 '충돌'이 관련된 사정을 관찰했다. 그러나 그냥 보기에는 원인 이 확실치 않아 불가사의한 현상도 그 속에서는 '신의 개입'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지적했 다. 또한 우연 개념 중에 우연의 빈도 해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우 연도 알게 되었다. 야마카미의 문답가에서 볼 수 있듯이 '수많은 후보 중에서 하필 선택되 었다"라는 의미의 이접적 우연의 존재도 인정하게 되었다. 우연과 의미 여기에서 또다시 원의의 낙하로 되돌아가 그로부터 다른 의미 성분이 생길 수 있는 국면 을 또 몇 가지 생각해 보자. 낙하체는 수평축에서 운동 또는 정지하고 있는 물체와 반드시 충돌하는 운명에 있다. 이 광경을 공간좌표 중에서 수직축을 시계방향으로 90도 회전 시키 면 낙하는 공간에서의 이차원적인 교차를 수평면 위에서의 일차원적인 충돌로 바꿀 수 있 다. 인생에서 인간의 만남이나 물체간의 사고도 이 형식을 갖고 있다. 우선 대머리에 관한 대화 중에서 작가 자신이 등장하는 창작 작품의 한 절을 살펴보자. 어느 날 소세끼는 출판사인 히로부미관으로 향했다. 거기에서 구상이 점점 무르익고 있던 소설 '도련님'에 대해서 잡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돌아오던 길에 쿄토제국대학으로 가는 우 에다를 배웅하기 위해 신바시역에 서 있었다. "어, 저 사람은?" 소세키는 의외의 커플을 목 격했다. 그것은 모리다 소우헤이가 짝사랑으로 고민하는 상대인 히라츠카 아키꼬와 이쥬잉 가케아키였다... "구니기다씨, 전 결심했습니다. 모든 성적인 죄를 후회하기 때문에 이제부터 이카호 온천에 가겠습니다." "그러나...그것은." 토쿠토미 켄지로우와 돗포구니기 다데츠오는 가끔 왕래가 있었지만, 극도의 조울증인 토쿠토미는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구니기다 에게 스스로의 악덕에 지친 듯이 고백하면서 머물 곳을 알려주지 않았다...(여기에서 소세끼 는 인파로 혼잡한 복도에서 어느 청년과 부딪쳐 보자기의 책들이 바닥 여기저기에 떨어졌 다. 어느 청년 장교가 달려와 책을 줍는 일을 도와주었다) 역사는 때로는 극적인 연출을 좋 아한다. 그날 오후, 신바시역 중앙 광장 지붕 아래에서 수많은 역사적인 인물이 본인들은 모 른 채 한 곳에서 만나고 있었다. 소세끼가 부칮친 인물은 안중근이라는 조선 청년으로 수년 후 하얼빈에서 이토오 히로부미에게 총탄을 쏜 지사였다. 또 소세끼의 책을 주워준 젊은 육 군 소위의 이름은 도조 히데키라고 했다. 명치 38년 섣달 그믐날의 혼잡 가운데에서 발생한 일이었다. 야마다 가제타로우를 생각나게 하는 화려한 멤버가 세그룹이나 같은 날 같은 장소에 모였 다. 물론 이것이 사실인지를 확인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 오히려 이와 같은 만남이 독자의 흥미를 끄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마지막 광장에서의 접 촉에 대해 초점을 모아보자. 혼잡한 가운데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는 것은 일상중에 다반사이다. 상대가 보자기를 떨어 뜨린 것도 있을 수 있고, 그 속에서 책이 쏟아져 나오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아만 큼의 조건만으로도 서로 독립된 인생을 살고 있는 복수의 인간이 평면상의 한 점에서 예기 치 못한 해후를 한 것이기 때문에 우연한 사건이라고도 해도 이의는 없을 것이다. 단 그다 지 커다란 우연이라고 느낄 수 없는 이야기이다보면 크지 않은 우연에 다른 우연이 새롭게 부대적으로 첨가됨으로써 우리들의 흥미를 돋구게 된다. 안중근과 도조와 소세끼가 한 점에 서 만났다는 것 때문에 더욱 그렇다. 세키가와씨의 창작으로 덧붙여진 이 우연은 이제까지 는 언급하지 않은 형태의 것이다. 나는 이 새로운 타입의 우연을 '의미 부여에 의한 우연'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모노크롬 펜으로 그려진 우연한 충돌에 당사자를 각각 다른 장소에서 들어 알고 있던 독자가 각양각 색의 색채가 칠해 나누어 놓은 것이다. 요시츠네가 칭키스칸이 되어 활약하거나 셰익스피어 의 정체가 프란시스 베이컨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 진위는 자치하더라도 재미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의미 부여에 의한 우연이 작용한 것임에 틀림없다. 최근 화제가 되었던 오스 트레일리아의 언어학자 바바라 시링의 저서 '예수의 미스테리'를 읽고 죽었다 살아났다는 나 사로가 열혈당 시몬이었다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았던 것도 역시 같은 우연의 작용을 경험 했기 때문이다. 쿠키 슈우조우가 예로 들고 있는 '의미 부여에 의한 우연'(쿠키 자신은 목적 적,적극적 우연이라고 분류하고 있다) 중에서도 재미있는 걸작을 소개하겠다. 무적함대 이소래이의 함장으로부터 초대받아 19일 오사카에 입항중의 순양함 이소래이를 방문해 야마다 함장을 비롯한 젊은 사관들의 환대에 감격한 제일영화사의 스타 야마다 이소 래이는... 기념 촬영한 확대 사진을 걸어두고 영원히 이 기록을 기념하였다. 이 경우 우리들은 여배우는 알고 있어도 함장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소세끼의 충 돌 사건 정도로 유명인이 모여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함대의 명칭과 순양함의 이름이 여배우 의 예명과 일치한다는 것에 이야기의 재미가 있다. 사람을 치어 죽인 차의 등록번호가 1564(히토고로시:사람을 죽인다는 뜻)여서 신물의 기 사거리가 된 사고가 있었는데, 더욱이 운전한 사람이 셰익스피어(1564년생)를 애독하였다면 의미 부여 효과는 더욱 커지고, 사람은 그 불가사의한 인연으로 놀랄 것이다. 그 사람이 다 이쇼 15년 6월 4일생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같은 자동차 사고라도 다음에 말할 충돌사고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스스로의 힘으로 난치병인 교원병(피부와 근육이 붙거나, 근육과 뼈가 이어져 붙거나, 세표와 혈관 사이가 메워지거나 하는 병의 총칭)으로부터 기적적으로 회복 된 미국의 의료 저널리스트 엔. 카즌즈의 글을 한 번 보도록 하자. 슈바이처 병원에서의 생활은 젊은 의사나 간호사들에게 있어서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었 다. 슈바이처 박사는 그것을 잘 알고 있어서 그들의 정신에 양분을 보급하는 것을 자신의 업무로 여겼다. 직원 회식 때 슈바이처는 언제나 식탁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 두 가지씩 늘어놓았다. 식사 때 큰소리로 웃는 것은 매우 중요한 메뉴 코스로 되어 있었다. 직원들이 그의 유모어의 묘미로 생기를 되찾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식사 시 간에 슈바이처 박사는 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병원 에서 75마일 이내에는 자동차가 두 대밖에 없는데 오늘 오후 불가피한 사건이 발생했습니 다. 그 두 대가 충돌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두 운전수의 찰과상을 치료했습니다. 기계 만지 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차를 치료해도 좋습니다." 카즌즈는 나이 90을 바라보는 만년의 슈바이처를 취재하고 있었다. 이것은 밀림 속의 랑 바레네 병원에서의 에피소드 중하나이다. 카즌즈는, 창조력이 풍부한 인간은 특별한 유모어 감각을 갖고 있어 마음속으로부터 웃길 수 있는 사람으로 그 웃음의 힘에 의해 육체도 치유 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게 믿고 하루 2시간 이상 계속 웃어 교원병을 치료한 불 굴의 사람이기도 하다. 이 일화가 재미있는 이유도 역시 우연과 관련되어 있다. 자동차끼리의 충돌은 이미 말했 듯이 흔히 있는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랑바레네촌 부근에 단 두 대밖에 없는 것이 라고 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오랜 시간을 두고 겨우 한 번 일어날까 말까한 사고이기 때문 에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흥미를 갖게 한다. 거기에는 확률의 산정이 관여되어 있다. 우리들 은 확률이 극히 낮은 현상에 대해 우연을 느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유모어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웃음과 창조성과의 밀접한 관계를 우연의 이종 결합에 따라 설명하고자 한 사람이 아사 케스트라였다는 것을 말해 둘 필요가 있다. 우연은 때에 따라서 창조력을 인간 에게 부여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뒤에서 검토하기도 하자. 늙은 아이스틸로스의 대머리에 거북이가 떨어진 이야기는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굴절되 어, 동서문헌에 실린 낙하와 충돌과 관련된 여러 가지 우연의 양상을 살펴보게 했다. 원의인 '낙하'를 비롯해 '교차'나 '충돌'과 만난 우리들은 인격신의 개입을 인정함으로 우연의 아 주 깊은 곳에서 '신의'를 느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의를 따져 들어감으로써 원의의 보편 성이 명백해짐과 동시에 '드문 일'로서의 우연, 즉 확률이 낮은 사건으로서의 우연의 존재가 해명되는 한편, 인간 존재 그 자체를 우연이라고 달관하는 '와쿠라바(병든 잎)'의 우연, 이접 적 우연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의해, 흔히 볼 수 있는 우연 을 좀 더 특별한 것으로 보는 것도 지적했다. 다음 장 부터는 필연적 과정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 자연과학 세계에 발을 내딛어 거기 에도 이러한 여러 가지 우연적인 요소가 그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광경을 살펴보도록 하겠 다. 프랭클린과 벼락 우연과 낙하 현상과의 의외의 관련이 앞 장에서는 명확해졌다. 담시 과학 역사 속에서 소 문난 낙하사건을 우연과 관련지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가장 무서 운 것은 벼락이다. 벼락 현상은 천상의 신에 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벼락은 그리이스 신화 에서는 제우스가 가진 활활 불타는 창이었고, 리투아니아의 민간 전승에 의하면 하늘의 대 장장이 페르쿠나스가 지상으로 떨어뜨린 불이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의 찬가 베다에 기록된 폭풍의 신 인드라는 바쥬라라고 불리는 번개를 항상 가지고 다녔는데, 그것들은 막대나 원반 무기로서 자주 그려졌다. 천둥은 신들끼리 싸울 때 의 생생한 소리로 기록되는 경우도 있고, 또는 지상의 인간에 대한 분노를 직접 표현하는 것으로써 무방비 상태인 인간의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벼락이 신들의 무기 인 이상 우러러보는 인간으로써 어느 정도 그 낙하를 예상치 못한다고 해도 그 공격 행위의 배후에는 반드시 신의 결연한 의지가 존재했다. 인간 측에서는 불투명하지만, 거기에는 우연 이 아닌 노여움을 받을 만한 원인이 상정되어 있다. 제1장에서 소개한 이야기 중에서 불쌍한 세미마루를 역경으로 몰아낸 것은 부왕인 다이고 천황이었는데, 그 다이고 천황의 신상에도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부상악기'의 기술에 따 르면, 연장8년 6월 26일 벼락이 청량전에 떨어진 후 천황은 병에 걸려 3일 후에 죽었다. 또 세미마루를 오사카 관문까지 데리고 가서 임금의 명령이라고 냉혹하게 버리고 온 태정관 차 관 후자와라 기요츠라는 이 벼락에 맞아 즉사했다. 이것은 유명한 이야기인데, 이 930년의 낙뢰도 우연에 의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연희 원년(901)에 또 다른 후지와라 도키히라의 중상모략으로 태재부에 좌천된 불운의 사나이 스가와라의 한맺힌 혼령이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쿄토의 키타노에 있는 텐만궁이 건립되었던 것도 이러한 해석 에 의한 것으로, 벼락이 치면 사람들이 "구와바라 구와바라"라고 소리높여 부르는 것도 같 은 이유에서이다. 구와바라란 스가와라공의 봉토가 있던 곳으로 930년 이후 한 번도 벼락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주문이 생겨났다고 한다. 신의 원령을 번개불의 원인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낙뢰현상의 배후에 인격작인 존재의 관여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프리니우스는 인간에게 재난 을 초래하는 하늘로부터의 여러 가지 강하 현상에 대해서 기록한 곳에서 이러한 현상은 "우 연의 지배하에 있고 신조차도 예기치 못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박물지' 제2 권) 특히 벼락은 별이 있는 불이 낙하한 것으로 보고, 섬광이 구름을 갈라 관통하여 번개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과연 프리니우스의 말대로 벼락은 우연히 떨어진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원인이 있어서 필연적으로 떨어진 것일까? 18세기가 되어 마침내 한 가지 해결을 보게 되었다. 상 대성이론을 완성한 아인슈타인이 다시 태어나면 물리학자가 아니라 연관공이 되고 싶다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지금까지의 생 애를 처음부터 그대로 반복하는 것에 조금도 이견이 없다"고 '자서전'의 머리말에서 자신 의 생애를 회고한 사람이 있다. 미국 자본주의의 완성자라고 불리는 벤자민 프랭클린이 바로 그다. 프랭클린의 정치상의 공적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팔라델피아에서 실행된 거대한 연의 실험이라면 한번 정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현재도 펜실베니아 대학 구내 에 역사적인 실험 현장이었던 지점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미 인쇄업자로서 성공하고 문필 활동도 정력적으로 하고 있던 프랭클린 앞으로 영국의 왕립협회 회원 코린슨이 보낸 전기 실험용 유리관이 도착한 것은 1746년의 일이었다. 전기 실험이라고 해도 당시는 마찰 에 의해 생기는 정전기를 순간적으로 방전시켜 그 결과 발생한 쌀알눈만한 전기 불꽃을 경 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거나, 가벼운 것으로 끌리는 인력에 호기심에 가득 찬 시선을 보내거 나, 손이나 발에 대고 감전 쇼크를 즐기는(전기가 너무 강해 고통을 당한 경우도 있다) 것과 같은 실험이 주류를 이루었다. 라이덴병(뇌전:라이덴, 벼락)과우연히도 일치하지만, 네달란드 의 도시 라이덴의 학자가 발명한 축전병을 말함)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 것도 1746년으로, 그때까지는 마찰에 의한 대전체(유리나 송진이나 유황등)가 유일한 전기원이었다. 여명기의 전기 연구 프랭클린이 취미로 전기 실험을 시작한 후 최초의 논문을 쓴 해까지 영국 왕립협회 기관 지인 '필로서피컬 트랜잭션션즈'에 투고된 전기 연구 역사를 살펴보자. 이 과학잡지는 1665 년에 창간된 이래 본국 영국은 물론이고,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의 일선에서 활약한 연구자 의 논문을 계속해서 실었다. 19세기 초까지 서구 근대과학의 활동 상황을 이해하는데 있어 서 아마도 가장 좋은 정보매체였을 것이다. 당시 대표적인 전기학자들의 논문들이 현재의 과학논문으로 생각되는 것과 크게 다른 것은 읽어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1) '여러가지 물체의 마찰로 발생하는 전기와 빛에 관한 실험 보고'(호크스피, 26권, 1708, 89-92페이지)-원통형으로 자른 나무판을 밀납으로 싼 것을 프란넬천이나 손가락으로 문지를 때에 생기는 전광을 야간에 관찰한 것. (2) '전기 인력을 동물이나 무생물에 작용시킬 때에 생기는 빛이나 그것에 따른 매우 놀 라운 효과에 관한 실험과 고찰'(그레이, 39권, 1734, 16-24페이지)-강한 비단실로 건강한 사 내아이를 묶고 거기에 마찰 전기를 띠게 한 후 그 아이의 손이나 발에 가까이 대면 쇼크를 느끼는 실험등, 같은 것을 닭이나 소등심에도 실시했다. (3) '전기를 띤 물체가 가진 반발력에 관한 보고'(필라, 39권, 1734, 400페이지)-마찰시 켜 대전시킨 송진 위에 작은 쇠공을 놓고 가는 실로 작은 코르크 등을 묶고 그 쇠공에 가 까이 대면 행성과 같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돌기 시작하는 것을 관찰했다. 실험하는 중에 필자가 사망했기 때문에 편집자는 얼마 안 있어 소형의 플라네타륨(천계의 운행을 나타내 는 기계) 이 만들어진 것을 보고 그 죽음을 애석해 했다. (4) '1738년 4월 15일에 황태자의 크리후덴 저택에서 실시된 전기를 직선으로 420피트 전 달시킨 실험 보고'(데자규리에, 41권, 1738, 209-10페이지)-포장용 끈이나 고양이 장을 이용 해서 전기가 어느만큼 멀리까지 전달되는가를 실험했다. 저택의 정원에서 마찰 전기를 일으 켜 거기부터 끈을 통해 저택의 실내문까지 전달시키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던 실험. (5) '인체나 동물의 몸에서 나오는 발광체의 방산에 대한 고찰'(마이루즈, 43권, 1745, 441-46페이지)-스잔나 시월 부인의 촛불 미사를 드리는 동안 계속 불꽃에 감싸여져 있었다는 이야기와, 그 친척이 페치코트를 벗으려고 했을 때도 불꽃이 나왔다는 사건에 대 해서. 고양이 털을 빗으로 빗었을 때도 같은 현상이 관찰되었다는 것이 보고되었다. (6) '전기에 감전된 사람과 그 아내가 받은 전기 효과에 관한 편지'(빈크라, 44권, 1746, 211-12페이지)-네덜란드의 연구자 뭇센브레이크의 실험을 전해 듣고 자신의 몸에 전 기를 통하게 하자 큰 쇼크를 받았다는 논문. 맥박은 빨라지고 체온도 올라갔기 때문에 해열 제를 복용했지만 머리는 무겁고 코피까지 나왔다. 실험적으로 아내에게도 전기를 감전시켜 보았는데 역시 쇼크를 받아 걸을 수 없게 되었다는 보고가 이어진다. 따라서 전기가 생명 이 있는 것에 흐르게 하는 것을 중지하자고 간절히 호소하고 있다! (7) '식물에 대한 전기 효과에 관한 편지'(브라우닝, 44권, 1746, 373-75페이지)-가끔 자 기 집에 있었던 인동덩굴과 식물에 전기를 흘려보내 관찰했을 때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끝 에서부터 보라색 빛을 발했다는 편지이다. 사람을 설득해서 피를 흘리게 한 후 전기를 통 하게 했는데, 피가 흐르는 속도에는 변화가 없었다는 잔혹한 추가 실험도 이루어졌다. (8) '파스티앙 직물 상의에 전기로 불을 붙인 것에 관한 편지'(로쉐, 45권, 1748, 323-25 페이지)-아들이 10세 경에 발작으로 쓰러져 성바소로뮤병원에서도 불치병이라는 진단이 내 렸기 때문에 마지막 수단으로 하루 2회 전기를 흐르게 하자 병세가 약간 회복되고, 훨씬 강 한 전기를 흐르게 하자 아들이 입고 있던 상의에 불이 붙었다는 관찰 보고. (9) '왕립협회의 신사연합에 의한 전기 절대 속도의 측정실험'(워트슨, 45권, 1648, 491-96페이지)-2마일 정도의 회로를 만들어 한쪽 단자에 전기충격을 준 후 다른 단자를 잡 은 사람이 쇼크를 받을 때까지의 시간을 측정했다. 몇 번 길이를 바꾸어 보아도 전기는 순 간적으로 흐른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10) '전기력에 의해 유리 너머로 악취를 전달시키는 것에 다른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 로 실패했다는 것을 선언하는 편지. 특히 보제 교수가 위덴베르그에서 실시한 전기에 의한 인간 미화 실험과 역시 전기로 사람의 머리 주위에 후광을 만들어내는 실험에 대한 검토가 포함되어 있다'(위트슨, 46권, 1749, 348-56페이지)-수지나 역청을 바르고 그 위에 사람을 눕 힌 후 전기를 흐르게 하면 발끝이나 손끝부터 머리 방향으로 차례차례 빛을 띠게 되어 마지막 에는 화가가 성인을 그린 것같이 멋있는 후광이 만들어진다는 보제 교수의 실험을 해보았지 만, 그런 불가사의한 현상은 없었다고 분하게 여기는 논문이다. 그 내용을 본인에게 전달하 자 실제로는 잘 닦은 갑옷을 입은 사람을 데리고 실험했고, 표현이 너무 시적으로 되어 오 해를 일으킨 것같다는 사죄의 답변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첨부되어 있다. (11) '전기에 의해 생기는 일부 현상에 관한 검토'(노레, 46권, 1750, 368-69페이지)-후 에 프랭클린의 논적이 된 프랑스 신부가 이탈리아 여행중에 보 불가사의한 빛에 대해 보고했 다. 어둠속에서 바다가 발광성 곤충으로 인해 빛나고 있는 광경을 전기가 원인이 되지 않았 을까 하고 편지로 알려왔다. 한 번 읽어보면 여러 가지를 알 수 있다. 우선 첫 번째로 전기는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는 예측불허의 제어하기 어려운 현상이었다는 점이다. 여기 저기에서 '놀라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새로운 에너지원으로서 주목받으며 실용적인 편익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1세 기 반 정도의 세월이 지나야만 되었다. 그것도 18세기 말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우연한 발견이 없었다면 도시의 조명이나 기계의 동력원 등은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었을뿐더러 실 현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그 귀중한 발견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상세하게 설명하도 록 하겠다. 브라우닝의 연구 등은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색다른 실험을 좋아하는 사람의 대표적인 실험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선인장에서 모차르트를 듣게 하거나(예를 들면 일본 에서는 후쿠시마현 키타가타시의 고하라 주조가 효모에 모차르트 음악을 들려줘서 향이 좋 고 맛이 있는 청주 '클래식'을 제조하는데 성공해 판매하고 있다). 벅스터와 같이 미모사에 폴리그래프(거짓말 탐지기)를 접속하거나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브라우닝의 직계 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데자규리에의 보고 논문에서는 영국 황태자가 참석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정 을 잘 모르면 기이하게 비춰질 수도 있다. 이것은 씨름판에 왕(천황)이 참석한 가운데 시합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실험은 이제부터 말한 연 실험이나 혹은 파리 시민을 열광의 도가니에 바뜨린 기구 실험인데, 세상에 도움을 주기 위한 실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민중이나 귀족을 즐겁게 하는 오락으로서의 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오락으로서의 실험 이런 전기 연구의 얼마되지 않은 전통을 이어받아 프랭클린은 멀리 떨어진 식민지에서 홀 로 실험을 시작했다. 그 무렵 그는 펜실베니아주 서기로 일하면서 도로에 포장 외에 조명에 관한 조항을 첨부하는 법안을 기초하고 있었다. 후에 역사의 전개로 볼 때 매우 흥미진진한 점은 공익을 생각해서 램프로 도로 조명계획을 세우고 있던 그 사람이 취미로 전기 실험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명과 전기라는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과제가 상상력이 풍 부한 프랭클린에게는 꿈속에서도 나타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그만큼 전기는 실용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렇지만 전기 실험은 우리들이 알지 못한 다른 요소를 갖고 있었다. 예를 들면 프랭클린은 이런 실험을 통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스크루킬 호반에서 전 기에 관한 연구 모임을 개최했을 때에 이야기다. 강의 오른쪽 기섥에서 왼쪽 기섥까지 전기 불꽃을 날려 술에 불을 붙이고, 전기 쇼크로 칠면조를 잡고, 그것을 회전기구 꼬챙이에 끼워 라이덴병으로 점화한 불로 구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에는 전기 장치를 한 포병대가 공포 를 쏘고 전기를 띤 잔으로 각국의 유명한 전기학자를 찬양하면서 건배하는 파티를 했다. 다 시 말해 이 시대 사람들은 전기가 직접 생활에 도움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가능성조차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분한 인생의 경이로움과 감격을 주는 오락의 한 가지 정도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음에 틀림없다. 전기 실험이 18세기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는 다음 이야기에서도 잘 알 수 있 다. 지금은 믿을 수 없지만 그 시애의 전기 실험은 실업자 구제에 한 몫을 했다. 프랭클린의 '자서전'중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새로운 기적'으로서 사람들의 이목을 모으기 시작한 전 기 실험을 한 번 보려고 매일같이 많은 손님이 프랭클린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나는 이 번거로움을 조금씩 친구들과 나누기 위해 그 지방의 유리공장에 부탁해서 같은 모양의 유리관을 몇 개 만들어 이것을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마침내 이 실험을 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이 몇 명 생겨나게 되었다. 그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친구는 키나즈리씨로, 그는 이웃에 있었던 재주있는 사람으로 그 때 당시에는 실업자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돈을 받고 실험을 보여주면 어떻겠냐고 권유하며 그를 위해 두 편의 강의안을 작성했는데, 그 강 의안은 실험 순서나 설명하는 방법이 있었고, 앞의 내용을 이해하면 다음 것도 할 수 있도 록 작성되어 있었다. 그는 이 실험을 위해 매우 훌륭한 실험 기계를 갖추었는데, 내가 전에 혼자 힘으로 만들었던 조잡했던 기계류가 모두 기계 전문가의 손에 의해 훌륭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의 강의에는 많은 사람이 참가했고 모두 크게 만족해했다. 얼마 후 그는 각 식민 지를 순회하며 각 식민지의 수도에서 이 실험을 공개해서 상당한 돈을 손에 쥐었다. 이와 같이 관중을 모아 거리의 악사처럼 사람들이 던져주는 돈이나 입장료를 모아 실험을 하는 강연회가 이 시대에 나타나서 과학자가 직업으로서 성립된 19세기 중반가지 백년간, 일부 연구자에게 생계나 발표의 장을 보장하고 있었다는 것은 과학의 역사를 회고하는데 있 어서 간과해서는 안될 사실이다. 파리의 왕립식물원에서 실시된 공개 실험과 같이 사실상 오늘날의 대학 이학부의 강의 수준의 내용도 있었고, 골목 안에서 대중에게 사기 실험을 하 거나 가짜 의료행위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역사가는 이 시대의 과학 활동을 '아마추어 과학'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 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활동이라는 의미 이상의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닌 듯 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과학을 실질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과거의 중요한 발견이나 연구의 대부분 이 이 아마추어 과학 세계에서 성립된 것을 생각하면, 과학이 미숙했던 시대의 활동이라고 한마디로 잘라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번개와 전기 전기 실험에 흥미를 느껴 혼자서 연구 실적을 쌓아 훌륭한 실험가가 된 프랭클린은 기구 를 보내준 코린슨에게 실험 성과를 빠짐없이 기록한 감사장을 보냈다. 이렇게 해서 당시 과 학의 선진국이었던 영국의 과학 애오가들과의 편지 왕래가 시작되고, 그러던 중 프랭클린은 번개와 전기는 같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역사적인 논문을 1749년 11월 7일에 보내게 된 다. 그는 다음과 같은 점을 이유로 번개의 정체를 전기라고 단정했다. (1) 결과적으로 빛과 소리가 닮았고, 둘 다 거의 순간적으로 전달된다. (2) 전기 불꽃은 벼락과 마찬가지로 물체에 불을 붙인다. (3) 둘 다 생물을 죽인다. (4) 둘 다 기계적인 손상을 입히고 유황이 타는 것과 같은 냄새가난다. (5) 번개와 전기도 같은 도체에서 흘러가고 신속하게 뾰족한 끝에 이른다. (6) 둘 다 자석의 효력을 없애거나 자석의 극을 바꾸어 버린다. (7) 둘 다 금속을 녹이는 경우가 있다. 프랭클린 시대에도 벼락의 유래를 신적인 관여에서 찾고자 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비인격 적인 자연현상으로서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예를 들어 이 시대의 자연 연구가는 이전 세기의 데카르트의 자연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는데, 데카르트는 1636년에 쓴 '기상학'에서 벼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벼락이나 번개나 회오리바람이나 낙뢰를 동반한 폭풍은 얼마만큼의 구름이 모여 있을 때 에 위의 구름이 아래 구름의 위로 갑자기 낙하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그로 인해 일어난 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번개나 회오리바람이나 낙뢰의 여러 가지 차이를 말하자면 그것은 두 개의 구름 사이의 공간에 있는 증발물의 성질 및 위의 구름이 아래 구름 위에 낙 하하는 방법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앞에 건조하며 매우 뜨거운 열이 있고, 이 공간에 매우 미세하고 매우 타기 쉬운 증발물이 많이 함유되어 있으면, 위의 구름은 대게 커지고 신속하 게 하강하기 때문에 그 구름과 아래 구름과의 사이에 있는 공기를 몰아내고 그 공기에서 전 광, 즉 순간적으로 사라져버리는 가벼운 불꽃을 내는 것이다... 이것에 반해 타기에 적합한 증발물이 공기중에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는 천둥 소리는 들리지만 번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더 높은 구름이 조각 조 각으로 차례차례 낙하할 때는 대부분의 경우 번개와 천둥이 발생한다... 구름의 상층부와 하층부 사이에 있다고 데카르트가 생각한 '타기 쉬운 증발물'을 18세기 의 많은 지식인은 유황을 포함한 가연성 증기 또는 질산칼륨 공기가 아닐까하고 상상했다. 하늘에 울려퍼지는 천둥은 마치 폭발음같이 들리기 때문에 13세기 경에 사라센인에 의해 전해진 흑색화약의 주성분(유황, 질산칼륨, 목탄)이 구름에 떠다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특히 질산칼륨은 라틴어로 사르 페트라에라고 하는데, 문자 그 대로 해석하면 '태양의 돌'이 된다. 가연성을 가진 돌이기 때문에 태양 기원의 물체 즉 하늘 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천둥이나 번개의 원인을 하늘에서 발생한 폭발로 설명하려는 것이 당시의 주류 였다. 이 시대의 자연 연구가의 기교스러운 활동을 풍자한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 제3편에는, 라가드학사원(영국 왕립협회를 야유한 것)이라는 국립과학연구소가 있는데, 그곳 에 근무하는 어느 이상한 연구가는 얼음에서 화약을 만들려고 하였는데, 천둥이 친 직후에 우박이 내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박을 분석하면 그 중에 화약의 원료인 유황이나 질산 칼륨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치기 쉬운데 너무 나 정상적인 발상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프랭클린의 논문은 꽤 독창적인 것으로 사람들의 눈에 비춰졌을 것이다. 확실히 빈클러와 같은 선구자는 있었다. 라이프치히 대학의 고전어학 교수였던 그는 전기 충격에 의한 불꽃을 번개와 벼락의 일종으로 가정하는 논문을 1746년에 발표했다. 그러나 이것은 실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어서 확실한 증거가 부족했다. 예를 들면 오일러와 같은 대표적인 지식인으로부터 몽상가의 허튼 소리로 간주되었다. 그에 비하면 프랭클맅의 번개전기설은 가설의 설득적인 어조로도, 결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후 의 실험으로도 당대 제일의 것이었다. 부인과 함께 전기 쇼크를 받고 깊이 잠들어 버린 빈 클러를 훨씬 능가한다고 생각된다. 빈클러를 알 리 없었던 프랭클린이 멀리 떨어진 신대륙에서 쓴 논문은 이미 제출된 것과 함께 식물학자 미첼의 노력으로 런던왕립협회에서 구두 발표되는 단계에 이른다. 1751년 6 월 1일의 일이었다. 최초의 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유황이나 질산칼륨 공기의 폭발설을 지지하고 있던 사람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유감스럽게도 정보와 물자가 부족한 식민지 로부터의 보고라는 이유만으로 구세계에 선구적인 새로운 법칙을 초래하는 획기적인 논문이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생떽쥐베리가 '어린왕자' 중에서 아무렇지 않게 썼던 이 야기는 18세기 런던에서도 해당될지 모른다. 어느 천문학자가 새로운 별의 발견을 학회에 보고했는데, 민족 의상을 입고 있어서 신용을 못 받았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프랭클린이 그 당시 학회로부터 과학의 총아로서 무조건적인 칭찬을 받게 되기까지의 경 위에는 번개가 떨어지는 경우의 우연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우연이 작용했다. 프랭클린의 논문이 읽혀진 학회에서 알게 된 의사가 있었는데, 평생 식민지 지지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 었던 포자길 박사가 바로 그였다. 박사는 논문을 인쇄할 수 있도록 조처를 취하고 일부러 서문까지 써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자서전'에 의하면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행해 진 전기에 관한 새로운 실험과 관찰'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팜플렛은 중판을 거듭해 5쇄까지 세 상에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프랭클린은 1펜스도 인세를 받지 못했다고 투덜댔다. 그러나 런 던 학계의 반응은 한결같이 냉담했고, 처음에는 이렇다할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변 화가 일어난 것은 오히려 영어로 쓰여진 처음의 논문집이 시판되지 않았던 파리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알 사람은 다 알게 되는 것일까? 후대의 역사가는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가치있 는 연구가 역사 속에서 묻혀버리려는 순간에 선견자의 눈을 가진 인사가 등장해서 그것을 옹호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프랭클린의 문제의 논문집을 우연히 입수해 프랑스어로 번역 한 다음 인쇄하도록 배려한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세기를 대표하는 박물학자 뷰퐁이었다. 그 후 번개전기설을 포함한 프랭클린의 논문집은 이태리어, 독일어, 라틴어로 번역되어 전 유럽에서 읽히게 되었는데, 그 보급에 가장 힘을 써 준 인물은 재미있게도 프랭클린의 학설 에 이론을 제기한 노레 신부였다. 노레 신부는 프랭클린이라는 연구자는 틀림없이 가공의 인물로 자신의 학설을 반박하기 위해 파리 사람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쓴 것이라고 생각했 다. 당시에는 변경이었던 필라델피아라는 지명을 보고 수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프랭클린이 실재하는 것을 확인하자 아카데미에 부지런히 반론을 투고했다. 당연히 그 반론에는 프랭클린의 이름이 재삼 등장하게 되었기 때문에 번개의 정체를 전기로 단정하는 이설의 장본인으로서 사람들의 눈에 띄는 기회가 된 것이다. 동시대의 프리스틀리 박사로부터 '인류에 대한 최대의 실용상의 공헌'이라고 절찬을 받 은 이 논문집을 읽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일년이 채 지나지 않아 '프랭클린주의자'라고 불리는 연구자를 대량으로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역사적 실험 프랭클린의 이름을 높이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은 1752년 5월 10일 수요일 오후 2시에 일 어났다. 논문집에는 번개의 본성을 확인하는 실험 방법이 명기되어 있었다. 비오고 번개치는 날에 지상에서 긴 철봉을 들고 있으면 번개에 있는 전기로 인해 철봉을 대전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것을 두 명의 프랑스인이 시도했다. 다리바르 와 드 로르가 각각 독립적으로 했다고 되어 있는 실험에 대해서 같은 시기의 프리스틀 리가 쓴 '전기 연구의 역사와 현상'(초판, 1767년)이라는 가장 오래된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 록 되어 있다. 다리바르씨는 파리에서 24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마르리 라 뷰 마을에 실험 기구를 설치했다. 드 로르씨는 수도 파리의 고지대에 있는 자택을 실험 장소로 선택했다. 다리바르 씨의 기계는 길이 12미터 정도의 철봉으로 하단을 상자로 싸여 있어서 빗물로부터 안전했 다. 외부는 세 개의 나무 막대로 지탱하고 비단 끈으로 확실히 붙들어 매어져 있어서 역시 빗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기계야말로 하늘의 불의 방문을 사상 최초로 받 아들이는 영애를 차지하게 되었다. 본인은 그 순간에 현장에 마침 없었지만 그가 없을 때에 는 코아피에라는 14년의 경력을 지닌 체력도 이해력도 있는 용기병(16-17세기 유럽에서 갑 옷에 총을 든 기마병)이 책임을 지고 기계를 지키도록 의뢰해 놓았다. 그는 무엇을 어떻게 관찰하면 좋은지, 어떻게 위험을 피하면 좋은지 적절한 지시를 받았다. 거기에다가 폭풍이 온 시점에서 근처 사람을 불러 입회시키고 특별히 마르리 교구의 사제를 불렀다. 마침내 오 랜 시간 기다리고 기다리던 폭풍이 몰려왔다. 1752년 5월 10일 수요일 오후 2시와 3시 사이 에 코아피에는 무시무시한 천둥 소리를 들었다. 그는 바로 뛰쳐나가 놋쇠 끈을 댄 대전용 병을 철봉 하단의 상자에 접촉시켰다. 그러자 거기에서 작지만 눈부신 불꽃이 생기는 것이 보였다. 게다가 톡톡하고 튀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그는 불꽃과 파열음을 다시 관찰함과 동 시에 근처 사람들을 시켜 사제를 불러오도록 부탁했다. 사제는 숨을 헐떡이며 뛰어왔다. 그 다음부터는 영혼을 인도하는 손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광경을 본 교구민들은 벼락에 맞아 불 쌍하게 죽은 코아피에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모여들었다. 놀라는 소리가 마을 전체로 퍼져나 갔다. 우박이 내리는데도 모여드는 사람들의 수는 줄지가 않았다. 실험 기계가 있는 곳에 도 착한 성실한 성직자는 더 이상 위험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스스로 놋쇠 끈에 손을 대보았 다. 그러자 강한 전기 불꽂이 일어나고 확실히 그것이 전기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 리하여 원하던 발견은 실현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신앙심이 깊은 교구민들은 실험의 성과를 보고 싶어서 모인 것이 아니었 다. 모독죄를 범한 실험가가 신의 노여움을 받아 죽는 것을 보러 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 의 기대와는 달리 코아피에는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그렇다고 과학이 승리했다고 단정지 을 수는 없다. 이후 경과를 생각하면 코아피에가 죽지 않고 실험이 끝난 것은 우연이라고밖 에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벼락의 정체가 전기인 것을 증명했다는 기념할 만한 실 험의 일부이다. 한편 드 로르씨는 8일 후에 자택에서 같은 현상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 때는 구름만 지나 가고 천둥은 치지 않았기 때문에 대기(지구를 둘러싼 공기의 전체)에서 전기를 모으는 실험 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 물론 이것만으로 이야기를 끝낼 수는 없다. 대부분의 독자들 은 획기적인 실험은 오히려 프랭클린 본인에 의해 필라델피아에서 이루어졌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조금 더 기다려주기 바란다. 다리바르의 실험 성공에 관한 소문은 즉시 파리 궁정까지 전달되었다. 루이 15세는 너무 나 호기심이 생겨서 측근에게 명령해 드 로르에게 수도에서 재실험을 하도록 지시했다. 32 미터 정도의 철봉을 세워 다시 한 실험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국왕은 경이로운 실험의 발 안자 프랭클린의 영예를 찬양하고, 이후 프랭클린은 직접 한 실험이 아니라 다리바르와 드 로르가 '필라델피아의 실험'이라고 경외감을 안고 부른 실험에 의해 유럽에서 더욱 유명 한 전기학자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전신 기술 등을 생각할 수 없었던 시대의 일이었다. 대륙에 서의 이러한 상황 변화가 프랭클린에게 전달되기까지는 수개월이 걸렸는데, 그것도 모르고 프랭클린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눈으로 벼락의 정체를 보고자 했다. 맨 처음은 다리바르 등 에서 제안한 것과 같은 방법을 취할 예정이었지만, 비 내리며 벼락치는 날을 기다리던 중에 연으로 하늘에서 직접 벼락을 지상까지 강하시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1752년 6월의 일 이다. '문득 생각이 떠오르다'라는 영어 표현은 풀 어폰이고, 또 독일어에서도 에인폴른인 것을 생각하면 마치 프랭클린의 착상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우연같기도 하다. '자서전' 쓰는 것을 도운 친구 스튜버의 이야기에 의하면 필라델피아에서의 실험은 매 우 소박했다고 한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동행한 23세의 아들 이외에는 누구에 게도 실험의 진행을 알리지 않았다. 비와 벼락을 피하면서 연을 날려 상황을 지켜 보았는데, 전기를 떠올리게 하는 어떤 징후도 나타나지 않았다. 절망하고 있을 때 비단끈에 보풀이 일 어나는 것을 관찰하고 끈 끝에 매달아 둔 종에 손가락을 대보니 불꽃이 일었다. 이 순간이 야말로 프랭클린이 고대하고 있던 감동의 순간였다. 국왕도 없었을뿐더러 호기심 많은 군중 도 없었다. 그는 아들과 단 둘이서 그 기쁨을 나누었다. 여기에서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하늘 의 물질을 인위적으로 유도하는 실험이 성취되었던 것이다. 연의 유래 프랭클린이 실험에 이용한 연에 대해서는 같은 해 10월 19일에 왕립협회 앞으로 보낸 서 간 논문에 만드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두 개의 가벼운 삼나무 막대를 십자로 묶고 네 귀퉁이 안을 얇은 비단천을 한 장 붙여서 만든 연에 꼬리에 붙여 실을 연결하면 종이로 만든 연과 마찬가지로 공중에 날아오른다. 비 단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비나 바람에도 찢어질 염려가 없었다. 이 연의 정점에 끝이 날카로 운 바늘을 붙이고 다시 마로 된 끈의 잡는 부분에 비단 끈을 연결해 둔다. 그리고 마로 된 끈과 비단 끈을연결한 부분에는 종을 달아 부면 된다... 벼락을 몰고 오는 구름이 연 위에 이르면 즉시 구름에서 날카로운 바늘 끝으로 전기가 내려와 마로 된 끈에 보풀이 일어나게 되고... 연결 부위의 종에서는 전기가 다량으로 흐르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 종을 유리병 에 접속하면 병을 대전시키게 되어, 이와 같이 해서 얻을 수 있는 전기를 사용해서 알콜에 점화하는 것도 가능하게 된다... 이상을 통해서 전기와 번개를 각각 구성하는 물질이 동일하 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프리스틀 리가 '매우 간편한 방법. 매우 저렴한 제작비. 얼핏 보기에 진부해 보이는 장치 '로 이 경이로운 실험에 성공했다고 감탄한 기분을 알 수 있을 것같다. 일부러 연을 사용 한데는 적극적으로 자연에 동참하고자 하는 능동적인 과학의 심성이 충분히 발휘되어 있었 던 것이고, 동시대의 학자에게는 흉내낼 수 없는 프랭클린만의 독창성이 엿보였다. 연을 이 용한 사람은 그 때까지 없었던 것일까? 연에 대해서 약간 설명하면, 연은 영어로 카이트라 고 하는데, 볼래 소리개를 의미한다. 이것은 연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 있는 중국에서 '지연'이라고 부르던 것이 그대로 번역된 것이다. 원래는 종이를 발명한 중국에서 고대부터 사용되었던 것이 아라비아를 경유해서 서유럽에 르네상스 시대에 도래했다고 한다. 문헌에 의한 기록은 나폴리에서 1558년 출판되 장바티스타 데라 포르타의 '자연 마술'의 기술이 가 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하늘을 나는 드래곤, 또는 코메트(혜성).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만들어졌다. 자른 갈대를 가 로 세로 1:2의 비율로 두 개를 대각선으로 연결해 사각형을 만든다. 그 대각선으로 나머지를 자르고, 같은 크기의 작은 끈으로 연결해 엔진의 머리 부분인 다른 두 개와 서로 묶는다. 그 리고나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종이나 얇은 린넨을 붙인다. 다음으로 탑꼭대기나 높은 곳 에서 만든 연이 망가지지 않도록 큰 바람이 아니라 일정하게 바람이 불 때에 날린다. 그러 나 바람이 적을 때에는 연이 날지 않는다. 직선으로 날리지 말고 옆으로 날리도록 한다. 그 것은 양끝에 붙어 있는 끈이 영향도 받는다. 또 종이를 붙여 만든 같은 길이의 긴 꼬리의 영향도 받는다. 기술자의 조작으로 힘있게.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놓으면 이 하늘을 나는 배는 공중을 날 게 된다. 그것이 조금밖에 올라가지 않을 때(집들 사이에 바람이 불지 않기 때문이다)에는 조작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대로 잡고 있는 것이 좋다. 여기에 각등을 달면 혜성과 같이 보 인다. 종이에 탄환을 넣은 폭죽을 실어 공중에 띄우면 이 날아 다니는 배는 천둥과 같은 소 리를 내며 날고 폭발해서 조각조각나서 땅에 떨어진다. 개나 고양이 새끼를 붙잡아 공중에 서의 울음소리를 듣는 사람도 있다. 최후의 실험 이야기는 거리낌없이 동물을 학대하는 자연학자의 무신경한 면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또 한 가지 어이없는 이야기이지만 당시 이탈리아에서 드래곤(연을 나타내는 현 대의 독일어 드레첸은 이 이탈리아어에서 유래되었다)이라고 불리는 연에 폭죽을 붙여 벼락 을 흉내낸 일은 그로부터 200년 후의 프랭클린의 실험을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매우 흥미 진진하게 느껴진다. 바람이 강한 날에는 연을 날리지 않기 때문에 비가 오고 벼락이 치는 날에도 당연히 연을 날리지 않겠지만, 만약 프랭클린과 같이 그것을 실행했다면 일부러 폭죽 등을 장착할 것가 지 없이 벼락이 그곳에 치게끔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끝에 바늘을 연결해야 하고, 그 결정적인 차이에 의해 프랭클린은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만의 하나 포 프타의 연에 바늘이 연결되어 있어서 벼락이 떨어졌다고 해도 18세기의 연 실험과 같이 해 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벼락의 정체를 화로나 화덕의 불로 간주하거나, 벼락은 벼락 그 자체라고 일체의 설명도 거부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년의 세월은 무익하게 지나간 것만은 아니었다. 호박이나 유황이나 유리를 마찰시킴으로 인력과 척력이 신비한 교착을 반복하는 불가사의한 현상과 같은 지상의 정전현상에 '전기 ' (일렉트리시티: 호박을 타타내는 그리이스어의 일렉트론에서 유래한 말)라는 이름을 부여했 고, 그 배후에 묘한 유체의 존재를 가정하는 사고의 틀이 프랭클린 등장까지 이미 성립되어 있었다는 것이 결정적이었다. 지상을 향하여 수직으로 떨어지는 하늘의 벼락과 지상 생활 평면에서 인정되고 있었던 전기 유체가 연을 매개로 해서 직교성의 충돌을 이룬 사건이야말 로 필라델피아의 실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연에 불꽃을 매달고 공중에서 폭발시킨 취향은 17세기 중반의 영국에는 자주 있었다고 '비행의 고대사'의 저자 베르트르트 라우파는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필라델피아의 실험이 사람들이 모르는 가운데 성공을 거두기 3년 전인 1749년 에도 글라스고 대학의 천문학 교수 알렉산더 윌슨이 '전기 실험용 도선을 부착한 4, 5개의 종이연을 세로로 이어서' 연을 날렸다고 한다. 900미터 상공의 구름 온도를 측정하기 위해 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의 이 지적은 프랭클린의 실험으로부터 26년이나 지난 다음의 일로, 콜럼부스의 달걀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된다. 그 실험에서 도 가장 중요한 전기 유도용 바늘이 없었기 때문이다. 프랭클린은 비오고 벼락이 치는 날에 제우스의 변덕을 조용히 기다리며 조바심내는 것을 두 번 다시 경험할 필요가 없었다. 자택의 안락의자에서 편안히 쉬면서 번개를 유도하는 방 법을 생각해낸 것이다. 같은 해 9월에 그는 마당에 철봉을 세우고 거기에 도선을 연결해서 실내에 있는 벨에 연결시켰다. 이렇게 하면 벨소리로 벼락이 그곳에 내리는 것을 알 수 있 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실험도 한번밖에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1753년 9월 프랭클린이 실내에 벼락의 전기를 끌어들이는 실험의 상세한 내용을 보고하는 편지를 런던에 보낸 직후 에 비참한 소식이 왕립협회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프랭클린과 거의 같은 장치를 만들어 실 내의 검전기에 벼락을 유도하려고 했던 페테르부르크의 자연학자 리히만이 불꽅에 맞아 즉 사한 것이다. 그 보고가 프랭클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상 유명한 연 실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마찰 이외에 전기를 모으는 방 법을 고안한 것이고, 또 하나는 벼락에 의한 재해를 방지하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다. 후자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남아 있다. 프랭클린은 필라델피아의 마을에 1752년 사 상 최초로 피뢰침을 세웠다. 이후 유럽 각국에서 피뢰침은 실용화되어 취미로만 했던 전기 연구가 마침내 공익에 도음을 주게된 것이다. 그러나 각 종파의 성직자들은 이 설비에 대해 반대했다. 벼락은 하나님의 뜻으로 벌을 받아도 어쩔 수 없는 못된 사람이 있는 장소에 떨 어지는 것인데, 피뢰침으로 본래 피해를 받을 사람이 거기서 벗어나게 된다고 보았기 때문 이다. 이 논리는 종두레 의해 천연두를 예방하려고 한 젠나 등이 나중에 반종두론자에게 받 은 비판에도 쓰였다. 질병도 신이 인간에게 내린 벌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프랭클린은 너무나도 심각한 성직자의 항의를 풍부한 재치로 가볍게 흘려보냈다. 그는 18 세기 중반까지 벼락 사고 대부분이 교회에 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당 시는 오래된 고딕 건축 교회를 제외하면 높은 건물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 이기도 했다. 프랭클린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인해 마침내 교회측도 피뢰침 설치를 인정했다 고 한다. 분명 교회에 떨어진 벼락은 피뢰침을 설치하지 않은 성직자에 대한 주님의 노여움 이었을런지도 모르는 것이다. 프리니우스 이래 우연 사상의 대표격이었던 낙뢰 현상은 프랭클린의 교묘한 장치에 의해 천지간의 방전작용으로서 받아들이게 되었고, 라이덴병에 축적된 강력한 전기는 새로운 실 험에 응용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인류가 또 하나의 중요한 실험을 만나지 않았다면 역시 전 기 현상은 실험을 흥미나 취미로 하는 사람들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중요한 실험은 개구리에 관한 것으로, 보통은 생각할 수 없는 우연이 그 발견의 계기가 되었다. 다음 장에서는 이탈리아의 연구가 갈바니가 겪은 불가사의한 사건을 다루어보겠다. 갈바니와 개구리 다리 지금도 이과대학 학생들은 생물학 실험 커리큘럼으로 개구리 해부를 한다. 냉철하고 정확 한 관찰안을 키우는 것과 동시에 무자비한 행동을 참아낼 수 있는 정신을 키우는 전통적인 연습 실험이다. 그렇지만 불쌍하게 뼈를 드러내놓고 있는 그 징그러운 생물이 학생이 메스 를 댔을 때 갑자기 움직인다면 그 학생은 어떤 느낌일까? 메스를 구성하는 금속물질과 개구 리의 척추신경 사이에 원인불명의 반응에 대해서 즉시 조사하기 시작할까? 아무래도 일단은 자제하고 생명에 대한 감탄이나 불쌍하다는 생각을 다시 마음속에 품을는지 모른다. 이 장의 주인공으로 약 200년 전에 살았던 갈바니도 그러한 기로에서 있었던 사람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뒤돌아 보면 아마추어 과학의 전성기라고도 불리는 18세기 시대에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존재의 세속화가 진행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옛날에는 네 가지 원소인 불, 공기, 물, 흙이 다양한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장으로서 신비와 기적으로 이루어졌던 물질세계는 실험실의 천칭으로 측량할 수 있는 단순한 물질의 총화로서 기술되 고, 신성한 근원물질은 원소의 주기율표 밖으로 밀려나기에 이르렀다. 2장에서 소개한 프랭클린의 실험에서도 성스런 하늘의 불인 번개를 일상 세계로 끌어내려 식탁 위에 놓여진 모슬린 천과 유리관의 마찰에 의해 발생하는 유체라고 규정하는데 성공햇 다. 연 실험으로 전기가 세계에 널리 펴져 있다는 것이 증명됨과 동시에 낙뢰 현상은 피뢰 침으로 유도되는 커다란 규모의 전기 불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게 되었다. 1841년에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지금까지 말한 사건에 대해서 매우 인상적으로 소개하 고 있다. 1789년과 1815년 사이에 일어난 가장 새로운 사실. 우리들의 현재 생활 속에서 인식할 수 있고, 만인이 감지하고 있는 가장 두드러진 사실은 아마도 대혁명과 제1제정을 구성하는 전 통적인 역사적 유형의 커다란 사건이 아니다... 한 사건의 중요성은 어느 사람의 생활 속에 그 사건이 연출하는 역할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사자가 그 역할을 의식할 수 있는 그 범위 에 의해서 결정된다. 따라서 1789년과 1815년 사이의 시기에 가장 중요한 사건은 1800년의 볼타에 의한 전지 발명과 전류 발견이 된다. 인용문 중 "우리들의 현재 생활 속에서 인식할 수 있고, 만인이 감지하고 있는 가장 뛰어 난 사실"이라는 난해하고 긴 표현을 약간 알기 쉽게 쓰면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현재 숨 쉬고 있고 확실하게 그 은혜를 받고 있다고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역사상의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발레리는 전지 발명과 전류 발견을 인류에게 있어서 역사상 최대의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 다. 그것은 뉴턴에 의해 이루어진 고전역학의 완성도 아니고, 라부아지에에 의한 새로운 물 질의 명명법도 아니다. 물론 프랑스 시민혁명도 아니고 미합중국의 독립도 아니다. 오로지 전지 발명과 전류 발견에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우리들 현대인에게 있어서 빛 나는 전등 불빛에 싸여있는 밤도시는 근대문명을 생각하게 하고, 생활 구석구석까지 침투한 여러 가지 전기제품의 존재는 과학의 힘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내가 인상적이라고 말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마지막 문장에 나와 있는 사람 이름이다. 볼타에 의한 전지 발명 이 회기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고 해도 그 발명을 아무말 없이 재촉한 불 쌍한 늙은 갈바니에 대해 언급되어 있지 않은 점은 공평치 않다고 생각한다. 발레리는 인용문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썼다. "새로운 사실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모험 소설의 돌발적인 사건을 생각나게 하는 진행을 답습하며 집적되어 간다. '과학' 은 우연적인 사건에 의해 발전한다. 그리고 '자연'의 모든 소송은 한두 번이 아니라 재심하 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하는데, 예를 들어 재심에서 승소한 볼타 뿐만 아니라 자연에 맞 서서 최초의 소송을 낸 갈바니의 일을 우리들은 기억해야 한다. 갈바니와 그 아내 갈바니는 1737년에 볼로냐에서 태어났다. 그것은 만유인력의 발견자인 뉴턴이 세상을 떠 난 지 10년 후의 일로 31세의 프랭클린이 자기가 살고 있던 지역의 우체국장으로 취임해 바 쁜 관계로 전기 실험에 대한 취미를 실행하지 못하고 있든 해이기도 했다. 유서깊은 가문의 태생으로 평판이 높았던 갈바니는 22세 때에 볼로냐 대학에서 의학과 철학 학위를 받는다. 이후 해부학과 신경생리학 연구에 일생을 바치는데, 졸업 다음 해에 대학시절 은사인 가레 아티의 딸 루치아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항간에 떠돌던 말로는 이 루치아가 불가사의한 현상 발견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예를 들면 물리학사가인 가 죠리는 1780년 11월 6일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다. 부인이 병에 걸렸는데 개구리를 먹으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갈바니는 아내를 위해 손수 요리를 만들었다. 껍질을 벗긴 개구리를 식탁 위의 대전된 기전기(마찰이나 정전기 유도에 의해 전기를 일으키는 장치)의 전극 부분에 둔 채로 방을 나간 후, 부인이 기전기 가까이에 있었던 메스를 들고 그 끝을 껍질이 벗겨진 채 있는 개구리 다리의 신경에 살짝 댔을 때 불 꽃이 일어남과 동시에 다리가 심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부인이 그 사실을 갈바니에게 알리 자 그도 직접 실험을 반복해 보았다. 역사에 남아 있는 우연적인 발견을 전하는 이야기로서는 다른 이야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독특한 이야기이지만, 안타깝게도 이 일화는 갈바니 본인이 남긴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래 갈바니는 논문이나 편지를 많이 썼다고는 할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 에 조수로 일한 조카 아르디니가 이야기의 발설자였을 가능성만이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 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에일대학 의 프루톤과 쿠싱이 발견한 문헌에서는 갈바니는 루치아를 위해 개구리 뿌이용(고기와 뼈를 삶아 우려낸 국물,스프)를 만든 걸로 되어 있다. 뿌이용이라는 것은 날고기가 아니었다. 삶 아서 소금 간을 한 개구리가 전기 충격으로 움직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당연히 삶지 않 은 상태였을 것이다. 메론에 날 햄을 얹은 이탈리아 요리 오도부르를 먹은 사람도 있었지만, 개구리를 회로 먹거나 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부인이 병상에서 일 어나서 메스를 잡았다는 것은 웬지 마음에 걸린다. 갈바니의 집에서는 고기 자르는 칼 대신 에 메스를 사용해서 식사를 했던 것일까?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이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를 의심스럽다고 생각한 역사가는 많이 있었지만 납득할 수 있게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첫 번째로 갈바니가 아내의 병을 염려하고 있었던 것은 치료의 샘으로 당시 알려져 있었던 파렛타의 물을 분석하고 있었던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신경이나 근육 또는 과민반응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고, 또 생리학에 중심을 둔 그의 연구 경력 때문에 광천수에 대한 분석은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다. 병약한 아내에게 광천수를 주어 영험이 나타나기를 기대했기 때문에 그 효능을 조사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파렛타의 샘이 팔려버려 갈바니는 그 일을 한탄할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개구리 요리를 남편이 만들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사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단 메스에 닿은 개구리가 갑자기 움직였다는 결정적인 사건은 개구리를 요리한 날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갈바니는 1773년경부터 개구리 근육의 움직임을 연구하고 있었고, 식용이 아니라 실험용으로 다량의 표본을 구입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했 던 갈바니에 대해 기록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 개구리 요리의 일화와 개구리 실험을 연결시 켜 버린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두 번째로 부인이 칼 대신에 메스를 쥐었을까 하는 점을 생각해 보자. 확실히 가정주부가 메스를 흔드는 모습은 그다지 기분좋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루치아 자신도 갈바니와 비 교해 뒤지지 않는 연구가였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루치아가 실험하는 여성이었다고 하 면 메스를 사용한 것 자체가 불가사의하지 않다. 사실 루치아는 연구가였다고 한다. 당시 볼 로냐 대학에서는 학술에 뛰어난 여성에 대해서 그에 상응하는 평가를 주는 분위기가 있엇 다. 예를 들어 자연발생설을 부정하는 실험을 고안한 것으로 알려진 스파란차니를 지도한 라우라 바시라는 여성은 보편 철학의 교수직에 임명되었고, 안나 모란디에 이르러서는 해부 표본을 완성하는 기술에서 남편 만초리니를 능가해 1777년 볼로냐 해부학 박물관의 개관 강 연으로 그 탁월한 기량을 갈바니로부터 칭찬받을 정도였다. 그곳에는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과학에 공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축복된 환경이 있었다. 한편 연구가가 되지는 않았지만, 전기에 흥미를 가진 남편의 실험에 참가하는 여성도 이 시대에는 많았다고 생각된다. 앞장에서 약간 다룬 빈클러의 아내는 호기심에 이끌려 라이덴 병으로 전기 쇼크를 받았고, 그 라이덴병의 발상지에서는 자연철학자인 뭇센브레이크의 아 내가 헌신적으로 남편의 실험을 보좌하다 감전을 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 루치아의 경우 남편인 갈바니가 의학교수였고, 그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새로 이사간 곳에 해부실험 실을 둘 정도였기 때문에 루치아에게도 과학의 소양이 꽤 있었다고 보는 것은 납득할 만하 다. 갈바니 또는 아르디니가 썼다고 하는 익명 논문에 "갈바니 부인이 언제나 만들었던(개 구리) 표본과 같이"라는 한 구절로도 상상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루치아는 명확한 실험 의도를 갖고 개구리의 신경에 메스를 댄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발견과 유익한 조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갈바니 본인의 논문 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발견되었다고 말하고 있는지 읽어보도록 하자. 세 가지 실험 보고로 되어 있는 그 논문이 발표된 것은 약 10년 후인 1791년의 일이었다. 갈바니의 발견 첫 번째 실험에서 개구리 다리를 남겨둔 절단된 표본이 사용되고 있다. 즉 척추 끝에 노 출된 좌골신경이 연결되어 있어 그 끝에 대퇴부와 다리가 늘어져 있는 형태의 표본이다. 그 중 하나를 가끔 기전기를 올려 둔 책상 위에 둔 것이 계기가 되어 생각지도 못한 발견을 하 게 되었다. 조수 중 한명(루치아가 아닐까!)이 메스 끝을 개구리의 노출된 신경에 댔는지 어땠는지 갑자기 개구리의 근육이 경련한 것같이 수축되었다. 또 한 명의 조수는 기전기에서 전기 불 꽃이 튄 순간에 이 불가사의한 현상이 발생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메스를 쥔 손가락이 개구리 견갑골을 고정하고 있었던 못에 닿는 순간 수수께끼 같은 경련이 일어 났다. 반대로 회로를 차단하고 신경을 접지시키지 않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갈바니 는 표본을 정확하게 절연시킨 후 같은 실험을 반복했는데, 그런데도 역시 죽은 개구리는 움 직였다. 10년 동안 개구리로 실험한 갈바니조차도 이 원인 불명의 현상을 그 자리에서 설명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기전기에서 불꽃이 튈 때 공중을 경유해 서 직접 개구리의 신경에 작동할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절연된 표본에 전기는 정말 로 날아들어갈까? 둘다 처음 체험하는 것 투성이로 그는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고 쓰고 있 다. 공중을 나는 전기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갈바니의 뇌리에는 1735년 번개에 맞았던 리히 만의 비극이 떠올랐다. 그는 주도면밀하게 두 번째, 세 번째 실험을 계획했다. 우리집의 발코니를 둘러싼 철책에 동으로 만든 갈고리를 달아 개구리의 하지 표본을 여러 개 매달아 두었는데, 그 발은 벼락칠 때뿐만 아니라 맑은 날에도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관 찰했다. 그것을 보고 개구리의 근육 수축이 공중에 있는 전기로부터 유래한 것인가 철저하 게 조사해보고자 마음 먹었다. 그래서 나는 근육의 움직임에 날씨가 미치는 효과를 기대하 며 관찰하기 시작했다. 다리 표본을 많이 만들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며칠씩 철책을 달아두 고는 그 움직임에 주목했다. 마침내 기다리는데 지친 나는 무익하게 결과를 기다리는 것을 그만두고 개구리의 등뼈에 확실하게 고정되어 있었던 갈고리를 철책에 강하게 마찰시켜 보 았다. 이렇게라도 하면 무언가 일어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있었고, 공중 전기의 상태와는 관계없이 별도의 조건 변화가 효과를 미치는 것이 아닐까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일까? 개구리 다리가 계속해서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더 이상 날시 변화에는 영향을 받지 않는 사건이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와 개구리를 철로 만든 판 위에 놓고 등뼈에 접속된 갈고리를 판에 대보았다. 역시 밖에서와 마찬가지 수축이 일어 났다!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각에 몇 번씩 실험을 반복했다. 갈고로 사용하는 금속 종류를 바꾸어도 종류에 따라서 경련의 강도에 차이를 보일 뿐 어느 경우나 근육 수축은 관 찰되었다. 마지막으로 전기가 거의 통하지 않거나 전혀 통하지 않는 유리, 고무, 수지, 돌이 나 나무판 등을 사용해 보았는데 그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관찰했다. 근육 수 축도 다리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러한 실험 결과의 원인에 대해서 나는 심각하게 생각해보았다. 그러던 중에 동물 자체에 전기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매우 섬세한 신경 유체가 신경을 통해 근육에 흘러들어가는 것과 라이덴 병의 전기 흐름과 같다고 가정하면 그 생각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전기학의 초보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이 갈바니의 결론은 쉽게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개구리뿐만 아니라 일반 동물의 체내에는 전기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나중에 갈바니즘 또는 동물전기설이라고 불린 이 이론은 꽤 오랜 시기 동안 면면히 계승되어 오늘날에는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상식이 되었다.(우리 체내에 존재하는 전기는 갈바니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미약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정말로 이 논문에서 갈바니가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추리의 순서를 거쳐 동물전 기설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일까? 좀 의심스럽다. 실제로 이 기술에는 오랜 기간 고생하지 않고 성공할 수 있었던 비빌이 감추어져 있다. 많은 역사가는 그 비밀을 해독하지 않고 이 사건의 밑바닥에 있는 우연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지금도 수족관에 가면 전기뱀장어의 발전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물론 전기 자체는 볼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한 전기를 소리나 빛으로 변환해서 관람객에게 들려주거나 보여준다. 즉 동물 중에는 체내에 발전기관을 갖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동물전기설은 부분적으로 옳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그런 특수한 동물이 발견된 경우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실제로 갈바니는 그러한 변종 생물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천문학자 리쉐는 남미의 불란서령인 기아나에 있는 가이에누섬에 관 측을 위해 체류하고 있던 1671년에 하천에서 포획한 전기뱀장어의 불가사의한 성질에 대해 서 보고했고, 18세기에 들어서는 '필로소피컬 트랜잭션즈'지 제 65권(1759년)에 세 편의 전 기 뱀장어에 관한 논문이 실려 있다. 또 시끈가오리의 이야기는 프리니우스가 "상당히 먼 곳이 라도, 또 창이나 장대가 닿기만 해도, 또 아무리 힘있는 팔이라도 저리고 아무리 빠른 발이 라도 마비되어 버린다"라고 '박물지'(제 32권,7)에 썼듯이 꽤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1772년에는 올슈라는 전기학자가 미국의 프랭클린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시끈가오리에 의해 저려오는 것의 정체가 전기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또 민간의료에서는 전기동물들이 마비성 질환의 치료에 오래전부터 이용되어 왔다. 새로운 것으로는 1777년 런던 신문에 1회 2실링 6펜스로 전기뱀장어의 쇼크를 경험할 수 있다는 광고가 게제되어 있다. 이러한 가능성이 선 경쓰인다면 알프스 남쪽의 학자가 이러한 영국이나 프랑스의 종보에 늦고 대부분 몰랐었다 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갈바니가 전기뱀장어나 시끈가오리를 모른다고 해도 논문의 첫 번째 실험 결과는 그에게 있어서 결코 의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갈바니는 초기에는 뼈 의 구조나 병리학, 또는 조류의 신장이라든가 귀의 비교해부학을 연구했지만, 1772년부터 연 구 대상을 대폭적으로 변경했다. 주로 표본이 개구리였던 것은 이미 말했지만, 1774년에는 노출된 신경조직에 아편을 투입해 그 효과를 관찰하거나 했다. 실제로 이러한 동물 신경에 인위적읹 자극을 주는 연구방법은 당시 볼로냐 의학계의 한 가지 전통이기도 했다. 갈바니 가 직접 가르침을 받은 베카리아, 카르디니, 폰타나같은 선배 의학자들은 모두 신경에 미치 는 전기자극을 조사했고, 실제로 환자를 피실험자로 이용하거나 동물을 실험 대상으로 삼기 도 했다. 예를 들어 베카리아는 1753년에 살아 있는 수탉의 노출된 근육에 전기 자극을 가했고, 1756년에 카르디니는 신경 표본이나 개의 횡경막 신경에 똑같은 전기 자극을 가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고, 폰타나는 미주 신경에 전기 자극을 일으키는 실험을 했다. 계속해서 볼로냐 대 학에서도 읽을 수 있었던 프랑스의 의학잡지 '쥬르나르 드 메디시누'에는 1750년부터 1780 년 까지 26편의 연구논문이 제출되었는데, 모두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신경계에 전기 쇼크를 준 다음 그 효과를 검토한 것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증거 자료가 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전기 자극에 의해 개구리의 근육이 수축했다는 사실 그 자체는 갈바 니가 굳이 말할 것까지 없이 1784년에는 이미 생리학자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이해된 사항이 었다. 실험의 진상 그렇다면 왜 갈바니는 그런 일을 기록했을까? 수수께끼 실험의 진의를 밝혀보자. 우연히 (본인은 그렇게 적고 있다) 기전기가 놓여 있는 테이블 위에 개구리 표본을 두었던 것까지 이야기를 되돌려 보자. 베카리아외 여러 선배들의 실험을 알고 있던 갈바니는 자택에 실험실용으로 기전기를 구 입한 시점에서 그것을 사용해서 마찰전기를 일으켜 개구리 척추신경에 흐르게 하고자 했다. 그 이외의 용도로 이용했다는 논문은 한 편도 없기 때문이 이 점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 는 기전기가 놓여 있던 테이블 위에 표본을 고의로 즉 어떤 실험 의도를 갖고 놓아 두었을 것이다. 계산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수에게 발전 작업을 맡기고 자신은 도선을 신경에 연결시켜 관찰했다. 물론 예상했던대로 개구리의 다리는 움직였다. 첫 번째 우연은 조수 중 한 명(갈바니 본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이 표본을 조정하기 위 해 메스를 개구리 살에 대었을 때 또 한명의 조수가 기전기를 돌려버렸기 때문에 생겼다고 생각된다. 도선없이 다리가 움직이는 것을 본 것이다. 1791년에 발표된 갈바니의 기념할만한 논문에서 무엇보다 새로운 점은 이 도선없이 한 전기 자극이었다. 도선 없이 자극이 전달된 것에 놀란 갈바니는 기전기 이외의 전기 유체의 근원으로 알려진 벼락에 의한 방전을 이용 해서 자극의 공중 전달 가능성을 확인하고자 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두 번째 우연이 생긴 것이다. 여기에서도 다시 잘못 해석해서는 안된다. 벼락치는 날이 아닌 맑은 날에도 경련이 일어난 것은 갈바니의 예측 범위에 들어 있었다. 벼락의 존재와는 관계없이 구름이나 대기 자체가 전하(모든 전기 현상의 근원이 되는 실체)를 띠고 있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었기 때 문이다. 확실히 여러 마리의 머리없는 개구리의 다리가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한 광경은 이상했을 것이다. 그 보기에 이상한 모습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외부에 드러난 개 구리의 몸에 생각지도 못한 우연이 작용한 것같이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절대절명의 우연은 발코니에 달려 있었던 선반과 개구리의 다리를 매달아두는데 사용한 갈고리가 각각 다른 금 속으로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른 금속의 접척이 개구리의 신경을 매개로 해서 성립되 었다는 것에 세기를 대표하는 우연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예측을 전제로 해서 현재 전해 내려오고 있는 일화가 왜 생겨났을까 생각해보자. 그리고 같은 이야기이자만 앞에서 감추어 졌다고 지적한 비밀을 풀어보자. 사랑하는 아내 루치아가 우연히 이룩한 내조의 공헌에 관 한 전설과 메스를 갖고 있던 조수의 우연한 공적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었을까? 현재 남아 있는 자료로 직접 판단하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다. 일반적으로 후자는 공 표된 논문에 쓰여져 있어서 근원이 확실치 않은 전설보다는 신뢰할 수 있다. 그렇지만 둘 다 놓칠 수 없는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 일련의 발견에 최초의 일격을 가한 인물은 모두 갈 바니가 아니라는 점이다. 갈바니는 개구리의 척추에 메스를 댄 사람이 아니라고 암암리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둘 다 진실했는지 하는 문제보다도 왜 갈바니 본인이 이 우연 적인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 이미 말했듯이 그는 동물의 신 경계통에 여러 가지 자극을 가해 그로 인해 생기는 반사를 연구하고 있었다. 온갖 금속이나 전기 부도체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조건을 바꾸면서 할 정도로 철저한 분석을 해낸 숙련된 연구가가 도체를 사용해서 개구리의 신경을 집는 루프를 만드는 실험만은 시도해보지 않았 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시간은 8년이나 있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다음에 얘 기한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하면 갈바니에게 있어서 첫 번째 실험의 핵심 부분은 직접 손을 대고 싶지 않았던 성질의 것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단서는 인용문 중의 다음 표현 중에 있다. 이러한 실험 결과의 원인에 대해서 나는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러던 중에 동물 자체 에 전기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맨처음 설명해 둘 필요가 있다. 동물의 체내, 바꾸어 말해 신경에서 근육에 이르는 전달체계 중에 당시는 유체라고 생각된 전기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학설은 예를 들어 화이트가 "최근의 자연학자에게는 자연의 밑바탕에 감추어진 온갖 작용을 전기로 설명하려고 하는 경향이 인정된다"라고 1766년의 저서 '생리학 논집' 에서 말하고 있듯이 오히려 알려진 것이었다. 이 시대에 널리 읽혀진 알브레히트 폰 하라의 생리학설을 높이 산 갈바니의 은사인 교수 들이 그의 수행시대에 해당하는 1750년대부터 60년대에 걸쳐 뜻을 모아 밝히려고 했던 점은 외부로부터의 전기 자극에 의해 근육이 수축하는 현상을, 생명의 본질은 전기 작용이라고 생각하는 학설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다. 즉 동물정신=전기설이 우선 있었고, 다른 한편으 로 전기 자극이 근육의 수축반사를 일으킨다고 해도 마찰전기와 동물정신과는 별개의 것이 라고 말하는 볼로냐 학파의 학설이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물 자체에 전기가 들어 있다'라는 발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며, 누구나 알고 있던 유행하던 이론이었다. 실험을 축적 해가던 중 번뜩 떠오르는 성질의 생각이 아니다. 마침내 수수게끼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만일 현재의 대학 이학부에서 동물학 을 전공하는 과학자 지씨가 갈바니의 입장였다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상상해보자. 지씨는 전기 측정에 열중한 동료 브이씨에게 공동연구자가 되어 줄 것을 요구하고 정부나 민간재단 에서 여눅비를 얻어내기 위해 신청서를 작성할 것이다. 제목은 예를 들면 '척추 동물의 신 경-근육간에 보여지는 내부 전기 작용에 대해서'정도가 될 것이다. 다음 수속이나 실험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생략하기로 하고, 갈바니의 입장과 비슷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지씨 와 브이씨는 어떤 형태로 학회에 발표를 할까? 이미 신청서 단계에서 무엇을 발견하고자 하 는지 명시되어 있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거기에는 우연을 상상케 하는 단어는 한마디 도 들어 있지 않았다. 실험 결과를 정리했다면 세포내에 전기가 작용하고 있는 '이런 생각 이 떠올랐다'와 같은 표현으로 보고할 수 없을 것이다. 과학자가 어떻게 자신의 연구 성과 를 공표할까? 그 때의 표현형식이나 설명 이론에는 과학자가 살았던 시대에 유행한 방법론 이 크게 반영되어 있다. 그것은 때로는 강력한 사고의 틀을 제공하고 정신의 내면에 잇는 진실을 은폐하기조차 한다. 그리고 그 자체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동 있다. 발견방법으로서의 우연 여기에서 약간 시점을 바꿔 새로운 것에 대한 사상의 변천으로 되돌아보자. 갈바니가 논 문을 쓰는데 있어서 어떤 방법론을 염두해 두었을까, 그것부터 대강 예측해 보자. 과학 역사의 오랜 기간을 고전주의 시대가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한 고전주 의란 예술사에서 말하는 르네상스 시대에 볼 수 있는 정신활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 연에 관한 지식은 기본적으로는 그리이스 시대에 쓰여진 고전에 의해 뒷받침된다고 하는 수 구적 태도를 의미하고 있다. 고전으로서 자연학자의 사고를 기재하고 있던 저서로는 아리스 토텔레스의 '자연학'이나 '형이상학'(기원전 4세기),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2세기,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지동설을 제창하였다). 에우크레이데스의 '원론'(기원전 3세 기, 유크리드 기하학의 원전), 그리고 가레노스의 '의학집성'(2세기)등이 있다. 이러한 서적 은 집필 당시 알려져 있었던 광대한 사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일반적인 현상이라 면 쉽게 설명하는 원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새로운 사실에 의해 변경된 것은 거의 없었다. 그리이스어에서 일부 아라비아어를 거쳐 라틴어로 번역된 유구한 과정에서도 기본적인 내용 변경없이 시대마다 주석이 붙는 정도로 모든 지식의 근원으로 영원히 지식계에 군림하고 있었다. 17세기 근대과학의 탄생은 어떤 의미로는 이와 같은 과거의 유산으로부터의 이탈이거나 때로는 반역이기도 했다. "자연에 대해서 이미 모두 탐구한 듯이 감히 말하는 사람들은 철 학 및 모든 과학에 최대의 장애를 끼친다"고 가식없이 말한 사람은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다. 책에서만 지식을 얻으려 하고 자연으로부터 직접 배우는 것을 잊은 강단의 학 자를 비판한 것이다. 베이컨은 관찰과 실험에 근거한 경험 철학의 방법을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세상에 처음으로 제창한 사상가이다. '대혁신' 제1부 중에서 "신은 인간의 혼을 전세계를 비출 수 있는 거울과 같이 만드셨다"(학문의 존엄과 진보, 1623년, 제1장)고 말하 고, 외부로부터 얻어진 시식은 고전에 쓰여진 학설 등의 선입견을 일체 배제한 것이어야 하 고, 억측이나 편견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책을 버리자, 거리로 나가자"라고 테라야마 슈지는 말했는데, 베이컨은 "책에 의지하지 말고 숲으로 나가자", 그리고 자신의 눈과 귀로 자연으로부터 배우라고 독려했다. 베이컨은 항해술의 진보로 세계가 넑어지고, 책에는 없는 지식이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대상을 거울처럼 비춰 관찰하고 이를 집적하여, 축적된 지식을 가지고 새로운 법전을 작성 해야만 하는 시기가 왔다고 주장햇다. 베이컨의 장대한 계획은 제도면에서는 과학에 뜻을 둔 사람들의 조직화를 촉진해 1660년에는 런던의 왕립협회를, 1666년에는 파리의 왕립학회 아카데미의 설립을 실현시켰다. 그렇지만 많은 역사적인 사정으로 자연학자가 베이컨 사상 을 널리 받아들여 논문이나 저서의 구성이나 표현 스타일에 활용하게 되는데는 18세기 말까 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런 경향은 19세기 전반까지 이어졌다. 즉 갈바니가 활약했 던 시기에는 베이컨류(계몽기의 철학자가 이해한 의미로서의 속류 베이컨주의)의 서술 스타 일이 일부 연구가에게 보여진다. 마침내 본론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다시 한 번 우리 들은 우연이 과학 무대에서 효력을 발휘하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베이컨류의 서술법이란 새로운 지식이 우연히 나타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측을 해서는 안된다는 베이컨은 요청을 융통성없는 규정으로 해석해서 어떤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을 사전에 예측 하는 것과, 혹은 이미 이렇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실험이나 관찰 을 하는 것은 모두 편견과 선입견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해 기피했다. 이러한 이유로 중요한 발견은 경이로움을 동반한 우연의 산물이 아니면 안되었다. 8장에 서 잠깐 다루게 될 프리스틀리에 의한 산소 발견에 관한 서술도, 돌턴의 원자론에 접한19세 기 초의 화학자들의 평가도 같은 방법론상의 신념에 지배되었다. 그들은 어떤 새로운 지식 도 실험을 통해서 우연히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새로운 지식은 이미 확 신하고 있는 가설을 증명함으로써 얻어진다는 설-연역법에 근거한 제3의 태도가 출현한 것 은 19세기 중반에 '과학자'라는 용어를 발안한 캠브릿지의 지식인 윌리엄 휴엘 이후의 일로, 그 때까지 약 반세기는 가설을 말하는 것이 금지되어서 일부 자연학자에게 있어서 실험이나 관찰은 생각지도 모산 우연 사상을 찾는 것의 연속이었다. 갈바니는 동물의 체내에는 전기가 들어 있다고 믿고 있었다. 동물 전기의 가설이다.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개구리의 척추와 근육을 연결하는 회로를 만들어 보았다"라고 말했다 면, 지금 말한 베이컨주의의 규약에서 일탈하는 것이 된다. 예를 들어 현실적으로 그렇다고 해도 논문으로 공표할 때는 사전에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해야 한다. 주수나 루치아가 가 끔 기전기에 놓여 있던 테이블에 개구리의 다리 표본을 둔 것도, 혹은 갈바니 자신이 동으 로 만든 갈고리를 철책에 마찰시킨 것도 사실은 동물전기설을 입증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 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연한 발견처럼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논문 전체의 구도를 살펴보자. 첫째, 개구리의 신경계에 직접 마찰전기를 흘린다(이 기술 은 생략되어 있다). 둘째, 개구리만의 폐쇄회로를 만들어 전기 스파크를 일으킨다. 셋째, 철 책에 개구리를 매달아 공중전기를 유도한다. 넷째, 철책과 동으로 만든 못을 박은 폐쇄회로 를 만들어 옥외에 방치한다. 외부에서 전기가 통하게 한 경우와 폐쇄계를 만들어 외부로부 터의 유입을 차단한 경우가 교대로 반복되는 완전한 실험 계획을 알아챌 수는 없을까? 여기 까지는 우연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우연의 명암 갈바니의 우연 발견 이야기가 재미있는 것은 이와 같은 위장된 우연이 기록으로 남겨져 있기 때문이 아니다. 위장하려고 해도 본인이 알아차리지 못했던 진정한 우연이 존재하고, 그런 우연이야말로 발레리를 감탄케 하는 세기의 발견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에 게 충성을 맹세치 않은 혐의로 관직을 잃고 초라하고 빈곤한 가운데 축은 불쌍한 갈바니가 불후의 영예를 목전에 두고 놓친 우연은 과연 무엇이였을까? 그것을 이제 이야기하기로 하 자. 전지 발명자인 볼타는 여러 가지 점에서 갈바니와는 대조적이다. 8살 연하인 그는 같은 파비아대학에서 활약한 전기학자로, 결혼은 늦은 49세에 했지만 나폴레옹과의 사이에 우호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만년은 명예롭고 행복했다. 볼타는 처음에는 동물전기설에 매료되어 지지했지만, 갈바니의 논문에 감추어진 우연을 발견해 1792년 무렵 새롭게 접촉 (금속) 전기설을 만들었다. 갈바니가 자택의 발코니에서 관찰한 개구리의 근육 수축은 2종의 금속(철책과 동으로 만든 못)이 루푸(닫혀진 회로)를 만들기 위해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즉 이 현상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한 것은 개구리가 아니라 금속 인 것이다. 갈바니는 개구리를 남겨둔 채 연결부의 금속을 부도체로 바꾸는 실험을 실시했 는데, 볼타는 그것과 반대로 금속을 그대로 두고 개구리를 다른 것으로 바꾸었다. 전기 유체의 통과를 가르쳐주는 것 중 우리 주변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인간의 혀이 다. 볼타는 폭이 넓은 은종이와 은돈의 끝을 동선으로 연결하고 다른 한쪽 끝에 자신의 혀 를 삽입해 보았다. 신맛을 느꼈는데, 상하의 금속을 바꿔보자 이번엔 쓴맛을 느꼈다. 볼타는 이 실험으로 기분이 좋아져 더욱 많은 서로 다른 금속의 접촉으로 전기가 흐르는 것을 확신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 실험은 이미 1762년에 베를린의 수학교수인 즈루차에 의해 실 시된 적이 있다. 이 선구적인 연구에서는 납과 은을 혼합해 자신의 혀에 대고 실험한 결과 녹반(시고 떫은 맛) 맛에 가까운 것을 느꼈다고 보고되어 있다. 금속으로 둘러싼다고 해도 상하가 같은 종류라면 이와 같은 맛을 경험할 수 없다고 쓰여져 있다. 그러나 즈루차의 결 론은 매우 흥미롭다. 금속을 구성하는 입자가 진동을 일으켜 "그 진동이 혀의 신경을 흥분 시킨다"라고 말한 것이다. 30년 후의 볼타의 실험과 거의 같은 것이었지만 그 사이에 갈바니의 동물 전기설이 개입 되었기 때문에 얻어진 결론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볼타는 특히 이마와 입천장을 이종 금속 의 회로로 연결해 실험을 했는데, 접촉한 순간에는 밝은 빛이 보였다고 한다. 개구리의 해부 표본을 이용한 갈바니의 실험에서는 이제까지 말한 것과 같이 개구리 자체는 전기를 검출하 는 이외에 어떤 의미도 갖고 있지 않다. 모스린 실이나 종이 혹은 보릿짚으로도 대용할 수 있다. 이것이 노생물학자가 놓친 '다른 것에서도 있을 수 있는 우연" 즉 이접적 우연이었다. 즈루차 때에는 발견되지 않았던 금속의 접촉에 의한 전기 발생은 얼마 안 있어 관계가 없 는 것으로 버려진 개구리의 근육을 이용해 처음으로 달성되었다. 볼타는 금속 종류의 차이 에 따라 전기 힘의 차이를 수치로 나타내고, 그 차이(전위차)가 각 금속의 고유한 순위에 근 거하여 결정되는 것을 발견했다. 이른바 이온화 경향의 순서를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 내 1800년의 논문에서 라이덴병과 같이 순간적으로 강한 전기 불꽃을 일으키고 소진해버리 는 전기와는 달리 그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오랜 시간 일정한 효력을 갖는 전기(전류)의 존 재를 밝혀 이른바 볼타 전지를 만들었다. 이것이 현재 사용되고 있는 전지의 원형이 되었다. 우리들은 발전소에서 보내진 전기로 일상 생활을 영위하고 있고, 기껏해야 휴대용 기계에 만 전지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전지 발명의 고마움을 상상하는 것이 조금 어려울 수도 있 다. 그렇지만 텔레비젼이나 조명등을 가동시키는 교류 전원은 볼타가 개구리의 우연의 본질 을 알아차림으로써 발명한 이 이종 금속을 접촉시킨 전지가 없었다면 결코 만들 수 없었던 것임을 알아두지 않으면 안된다. 전기의 역사는 1800년에 방향 전환을 하고 인류에 공헌할 수 있는 에너지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볼타는 18세기 자연학자를 고민케 한 시끈 가오리의 발전기관이 자신이 만든 전지와 아주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동물전기의 신비 함을 추구하다 쓰러진 갈바니가 아니라 개구리 다리 경련에는 신경쓰지 않고 오히려 다른 종류의 금속에 대한 수수께끼를 뒤쫓은 볼타가 성과를 이룬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문학 속의 갈바니즘 개구리 근육 수축에 관한 해석을 둘러싸고 명암이 나뉜 두 명의 이탈리아 자연학자에 대 한 이야기는 소설이나 시 등의 허구 세계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원자로 건설에 해당하는 혁명적인 에너지의 발견이었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말하면 당연한 것이지만, 재미 있는 점은 이 과학의 일대 쇄신을 상상력의 세계에서 겪은 작가들의 반응이었다. 마지막으 로 그 일부분을 소개하겠다. 내가 고생 끝에 완성을 본 것은 11월의 쓸쓸한 밤이었습니다. 힘들수록 열의를 다해 발 밑에 누워있는 생명이 없는 물체에 생명의 불꽃을 붙여 주고 생명 기계를 주변에 모았습니 다. 이미 새벽 1시. 나는 비가 추적추적 음산하게 창문을 때리고 있던 그 때 거의 꺼지려 하 는 약한 빛에 생물의 생기없는 노란 눈이 떠지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것은 천천히 숨을 쉬 며 팔다리에 경련이 일어났습니다. 이 유명한 고딕소설의 화자의 이름은 빅터 프랭켄슈타인이다. 보리스 카로프 주연의 공포 영화로 유명해진 괴담의 클라이막스 장면이다. 자주 오해를 받기 때문에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말해 두면 주인공인 프랭켄슈타인은 인조인간을 만드는 제작자이고 그 인 조인간은 이름이 없다. 즉 프랭켄슈타인은 괴물이 아닌 것이다. 작가가 확실하게 이름을 붙 였다면 무서운 괴물을 프랭켄슈타인이라고 부르는 습관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다 이 괴물에 대해서는 원어 몬스터라는 외래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깨닫지 못하지만 사용된 연대로 생각하더라도 '기쁨'이라고 해야 한다. 소설명은 '프랭켄슈타인의 기형아' 인 것이다. 이것은 쿠키 슈우조우가 정언적 우연(즉 본래 갖고 있어야 할 성질이 없는 경 우를 말한다)으로 분류하고 있는 예외로서의 우연의 한 예로 당연히 나타나야 할 모습과는 다르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근원을 밝히면 라틴어의 몬스트럼이 그 원어인데, 동사형 모니레는 '경고한다'라는 것을 의미하고, 보기 드문 모습의 탄생은 '신으로부터의 경고'이기 도 하다. 외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르네상스 시기의 앙브로와즈파레에게 '기형과 경이에 대해 서'(1573년)라는 저서가 있는데 파레는 기형이 존재하는 첫 번째 원인을 '신으로부터의 축 복'이라고 해석하고 있다.(원래 두 번째 원인은 '신의 노여움'으로 되어 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기형아'에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부제가 붙여져 있는 것은, 줄거리가 프로메테우스에 관한 그리이스 신화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당연하다. 프로메 테우스는 천계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고도 하고, 인간을 창조하였다고도 하기 때문 이다. 주인공 빅터는 소년 시설에 벼락의 경이로움과 만나 갈바니 전기를 배울 결심을 한 다. 천계의 불인 벼락을 실험실에서 실현한 것이 갈바니의 전기이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는 사체 에서 생명의 호흡을 일으킨 힘을 하늘에서 유래한 전기로부터 빌리고 있다. 간행 연도는 1818년이지만, 이야기의 설정이 1700 몇 년으로 되어 있는 점도 간파할 수 없다. 19세기가 되었다면 이미 말했듯이 볼타의 전지가 발명되었는데, 어째서 사용하지 않았는 지가 의문스럽다. 썩은 냄새를 풍기는 사체를 소생시키는 마술의 도구로서는 신식 금속 전 기보다도 구식 마찰에 의한 전기 불꽃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고, 또한 동물 전기설을 제창한 갈바니에 대한 공감도 있었을 것이다. 1831년판 서문에 메어리 본인은 이렇게 적고 있다. (에레즈마스) 다윈 박사의 실험도 화제가 되었다... 박사가 바미세리(파스타(풀)같은 것)의 자투리를 유리상자 속에 넣었을 때 어떤 경위에선지 그것이 자기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 한다.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생명이 주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사체를 소생 시키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미 갈바니 전기는 그 예고가 아닐까? 순식간에 생물의 구성 부분을 창조하고 그것을 조립해서 생명의 온기를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빅터가 프로메테우스에 비유한데는 깊은 의미도 있다. 헤시오도스의 '일과 나날'에 있는 판도라의 상자 신화에서는 형인 프로메테우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동생 에피메테우스 는 제우스의 계략도 모른 채 판도라를 재해가 가득 찬 병과 함께 받고 만다. 선견지명이 있 다고 자부하는 지적인 인간에게는 함정이 있고, 결국 실패한 후 제물이 되어버린다는 것의 우화인데, 빅터는 인조인간을 만든 것을 즉시 후회하게 되고 마침내 그 기형인간 때문에 애 인이 살해당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보면 갈바니 논문의 되는 대로 쓴 저술방법은 아무리 봐도 프로메테우스적이라고 하기보다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놀라는 에피메테우스에 가깝 다. 메어리의 남편인 시인 셀리에게도 '결박을 푼 프로메테우스'라는 작품이 있다. 셀리는 자 택에 실험실을 갖추고 라이덴병이나 기전기를 사용해서 프랑켄슈타인 못지 않은 실험을 했 다고 전해지고 있다. 메어리가 남편이 바이런의 도발에 힘입어 괴기소설을 쓰기에 이른 동 기에 대해서는 1831년판 서문에 쓰여져 있는데, 켄 러셀 감독이 '고딕'이르는 작품으로 영화 화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생명의 생기를 주는 수단으로 전기 불꽃이 이용된 예는 이외에도 있다. 비리에 드 리라딘 의 '미래의 이브'는 하다리라는 여성이 인공적으로 창조되는 이야기인데, 그 제작자인 주인 공 에드슨에게는 "모든 인간은 신성한 생명의 불꽃을 갖고 있고, 그 불꽃은 전기같은 것이 다"라는 사상이 있었다. 하다리는 금으로 만든 폐, 강철로 만든 관절을 가진 로봇으로 지하 실에서 전기 불꽃을 맞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또 독일 시인 노바리스의 '푸른 꽃'의 제 9장 에는 볼타의 전지가 시적인 분위기 속에 상징화되어 있어 무척 흥미롭다. 시의 정기 파베르 가 체험한 재생의 여행 도중 발작으로 인해 전신이 마비되어 고통을 겪고 있는 거인 아트라 스와 만난다. 파베르는 아연과 금과 트리마린(전기석)의 도움을 빌려 이 거인을 수술하여 소 생시킨다. 아트라스의 입 안에 금화 한 잎을 넣고, 정원사인 아연이 허리 아래에 접시 하나 를 끼워 넣으면 이번에는 파베르가 아트라스의 눈에 대고 이마 위부터 물을 붓는다. 눈에서 입으로 물이 통과해서 아래에 있는 접시까지 도착하는 순간에 전신의 근육에 생명의 번개가 달린다. 전지의 기본 구조를 이루는 서로 다른 두 금속과 습기에 대해 매우 진지할이만큼 문학적 색채가 가미되어 있다. 프로메테우스가 아닌 프랭클린에 의해 지상의 인간에게 전해 진 천계의 불인 벼락은 갈바니의 몽상 속에서 생명과 정신을 지배하는 세계적인 영으로서 받아들여지고, 그 사상은 마침내 볼타의 전지에도 적용되어 낭만파의 작가들에게로 이어지 게 된 것이다. 이장에는 갈바니가 관찰한 개구리의 자극 반사를 둘렀나 여러 가지 우연의 본성을 생각하 면서 이야기를 진행해 왔다. 앞 장에서는 하늘로부터 떨어진 우연을 화제로 해서 가장 큰 두려움의 예로서 벼락의 일화를 소개했는데, 이 장에서는 개구리 다리에 관한 이야기로 빠 져버렸다. 다음 장에서는 다시 '떨어지는' 것에 관한 이야기로 궤도를 수정하도록 하겠다. 벼락이나 거북이나 만나나 개구리 이외에도 떨어지는 것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뉴턴과 사과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1987년이라는 해는 고전역학의 금자탑이라고도 하는 뉴턴의 저서 '프린키피아'가 출판된지 꼭 300년째 해당하는 해였다. 그 때문에 연구 심포지움이나 기념회 가 실시되는 것과 동시에 기념우표나 캠브릿지 바로크 카메라타에 의한 '프린키피아 무지카 ' 라는 타이틀의 씨디도 발매되었다. 모두 사과 디자인이 들어 있는데 지금까지도 뉴턴의 사 과 일화가 사람들에게 친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장에서는 그 유명한 전설에 포함되어 있는 우연을 주제로 살펴보고자 하는데, 그 전에 사과보다 큰 자연낙하물인 운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다음 이야기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운석의 원인 운석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일반적으로 히타이트왕 무르실리슈 2세의 연대기에 있는 기록 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적국인 에페소스왕 아파샤슈의 머리 위로 불덩어리가 떨어졌다고 하는 당시 사람들을 기쁘게 한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문자가 발명되지 않았 던 태고의 오랜 옛날에도 당연히 돌로 된 비는 내렸겠지만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소개할 수 없다. 하늘의 불인 유성 현상의 결과로서 운석을 만든다는 인과관계는 그러나 꽤 오랜 기간 인정받지 못했다. 예를 들어 기원전 467년에 트라키아의 아이고스포타모이에 낙하했다고 하는 '짐차 정도의 ' 갈색 운석에도 신의 뜻에 의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생각하는 이외에 그 유래를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숭배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누구도 직접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리니우스 본인이 봤다고 하는 것은 이미 명소로서 여행자의 참배를 받던 낙하 후의 돌에 지나지 않는다. 페리클레스 시대에 아테네에 살았던 자연철학자 아낙사고라스는 기원전 423년에 그 운석 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그 돌은 균열된 태양의 파편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들이 보기에는 선 구적인 발견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여하튼 그 태양을 펠로폰네소스반 도보다 약간 큰 정도의 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서 불경죄로 고소당했을 정도의 인물로, 아테네 사람들에게 "당신은 버려졌다"라고 까지 말을 들을 정도인 사람의 말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고대에 알려진 자연 현상을 망라해서 설명하고 있는 아 리스토텔레스도 유성을 겨우 기상의 변화로 받아들였을 정도로 운석의 낙하에 대한 기록은 없다. 나중에 말할 학술상의 이유로 운석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운석이 마침내 인정받게 된 것은 1770년 7월 24일의 일이었다고 한다. 이날에는 프랑스 남서부에서 유성비가 내려 많은 사람이 그것을 목격했다. 즉시 과학아카데미까지 그 사건의 운석 표본이 전달되었기 때문에 지식인 사이에서도 운석 현상을 믿은 경향이 조금씩 나타나 기 시작했다. 1807년에 미국 코네티켓주에 중량 300파운드의 운석이 떨어져 그 일을 두 명 의 예일대학 교수가 보고하자, 독립선언의 기초자이며 과학자이기도 한 제퍼슨은 믿을 수 없어 웃어넘겼다고 한다. 적어도 19세기까지는 운석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았지만, 운석을 자 연 현상으로 있을 수 있다고 받아들일 태세는 그 전 세기에도 어느정도 있었다. 그것은 뉴 턴의 학설을 지성있는 궁정 부인이나 과학애호가도 알기 쉽도록 고쳐 쓴 볼테르나 펜바튼 등의 해설서가 나오고 나서부터이다. 그러한 뉴턴 역학의 해설서로 인해-달도 혜성도 운석도 같은 원리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지표에 떨어진 돌이 있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을 초래할 수도 있는 무거운 돌이 극히 낮은 확률로 머리 위에 떨어지는 일은 뉴턴 이전은 원 리적으로 가능하였지만, 고전 역학의 덕택으로 만약 떨어진다고 해도 그 궤도는 예측할 수 있는, 우연이 아닌 것이 되었다. 인류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의 백악기에 서식했던 공룡들은 그런 역학서 등을 읽을 수 없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생각지도 못한 운석의 낙하로 인해 그들이 멸종하기에 이르렀다는 학설이 등장해서 일부 공룡 매니아를 놀라게 한 것은 기억에 도 새롭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을 했을까? 당연히 그 현장을 본 사람은 없다. 어 떻게 거대한 바위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을 입증했을까? 지표에 남겨진 운석 자체나 그 흔적 으로 여겨지는 크레이터가 직접 그 증거로 채택되지는 않았다는 점을 미리 말해두겠다. 충격적인 멸종설은 '사이언스' 1980년 6월 6일호에 게재되었다. 아레바레즈 부자와 아사로 의 공저 논문인 '백악기-제3기의 생물 멸종을 초래한 지구 밖의 원인에 대해서=실험 결과 와 이론적 설명'의 결론은 운석에 의한 멸종설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백악기와 그에 이어지 는 신생대 제3기의 지층 간에는 구비오와 점토라고 불리는 경계층이 존재한다. 구비오는 이탈 리아의 아페닌 산맥의 산기슭에 있는 마을의 이름이다. 아레바레즈 부자는 이 점토층에 주 목했다. 어쨌든 이 층 아래에는 공룡이 살았던 최후의 시대에 바다생물의 사체가 해저에 퇴 적되어 만들어진 석탄층이 있고, 위에는 이미 공룡이 없어진 시대의 층이 있다. 이 중간층에 는 화석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고생물학자들은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 문에 선행 연구는 전무하다고 해도 좋을만한 상태였다. 아레바레즈 부자는 목적지를 몰랐기 때문에 해도도없이 항해하는 것과 같은 형편이었다. 이미 알려진 사실 중에서 희망이 있었던 것은 유성의 파편에는 백금족의 원소(백금, 이리듐, 오스뮴)가 다량 함유되어 있어서 지각에 존재하는 농도의 일만배에 가깝다는 사실뿐이었다. 즉 암석에서 소량 발견되는 귀중한 백금족 원소는 모두 근원을 찾아가면 운석에서 유래했다 고 생각할 수 있다. 아레바레즈 부자가 로렌스 버클레이 연구소의 아사로에게 의뢰해서 구 비오의 점토층에 함유되어 있는 배금족 원소 이리듐의 양을 측정하도록 한 시점에서는 점토 층의 퇴적 연수가 정밀하게 측정되어 이미 예측하고 있던 2만년에 가까울 것으로 기대되었 다. 그렇지만 실험결과는 예상 외의 이상한 높이를 기록했다. 백악기의 석탄층에 비해 600배 정도의 이리듐 농도가 검출되었다. 백금족 원소 이리듐이 운석 기원의 물질이었다는 가정을 인정하면 구비오의 점토에 있어서는 전후의 지질시대를 매우 상회하는 중량의 운석이 낙하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레바레즈는 덴마크나 뉴질랜드 등 같은 지층의 경계 점토를 채취해 서둘러 조사해 보았 다. 시료에 포함된 백금족 이외의 27원소에 관해서는 석탄층만큼의 농도를 검출할 수 없었 고, 더욱 더 심상치 않은 이리듐의 증가가 인상에 남게 되었다. 도중의 추리 과정은 생략하 더라도 이와 같은 경위에서 6500만년 전의 지구에 직경 10킬로미터 정도의 운석이 해양에 떨어져 폭발해서 분진을 흩날리고, 그 결과 대규모의 기상 변동을 유발해 마침내는 공룡을 포함한 동식물 전체의 괴멸을 초래했다는 획기적인 학설이 탄생한 것이다. 아레바레즈 부자 의 운석 멸종 원인설을 이야기하면, 공룡만을 생각하기기 쉽지만, 뉴턴의 사과 에피소드나 뉴턴 본인의 생전 건강 상태와 의외의 곳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순서대로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천계와 지계의 구별 우선 이리듐의 함유율 차이에 의해 지구에 원래 있는 돌과 우주가 기원인 돌(운석)이 구 별된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운석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라는 것이 인정되지 않았던 고대세계에, 기발한 가정이지만 아레바레즈 부자의 데이터와 논리를 가져오면 어떻게 될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체론'(기 원 전 4세기 후반)에서 우주는 달의 궤도를 경계로 해서 세계는 엄밀하게 두 개로 분류되어 있 다. 우리들이 사는 달 아래에 세계는 4종류의 원소(불, 공기, 물, 흙)가 생성과 소멸을 반복 하는 가변적인 세계인 것에 반해 신과 별들이 사는 천상의 세계 우라노스는 이 네가지 원소 어느 것도 포함되어 있지않고, 영원불멸의 제5원소로 구성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옳다고 생각하는 소요학파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 다. 이리듐이라는 명칭은 들은 적은 없지만, 결국 흙을 약간 많이 포함한 4원소의 혼합물일 것이다. 다른 돌과 조성이 틀릴뿐, 제5원소로 만들어지지 않은 그 돌이 어떻게 해서 천계로 부터 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더욱이 운석 낙하설을 부정하는 본질적인 반론이 더해진 다. 왜냐면 그들이 엄격하게 구별하는 지상의 세계와 하늘의 세계에서는 운동의 원리가 근 원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성좌를 엮는 항성군과 일곱 개의 행성(태양이나 달도 포함된다)으 로 되어 있는 하늘의 세계는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일정불변의 원운동을 하고 있어서 그 이 외의 운동은 있을 수 없다. 반면 지상계에서는 4원소가 본래의 장소로 되돌아가려는 직선운동(자연운동)과, 거기에 역 으로 인간 등의 작용자가 작용해서 물체의 위치를 바꾸려 하는 직선운동(강제운동)의 두 가 지 운동만이 허락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달보다 위에 있다고 운석은 원래 제5운소로 구 성되어 있어 원운동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달 아래의 세계에 낙하(직선운동)하는 것은 있 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실제로 아레바레즈 부자의 논문에는 너무 당연해서 일부러 기록하지 않은 전제가 있었다. 물론 현재의 자연과학자도, 그리고 우리들도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우주는 하나로 몇억 광년이나 떨어진 은하에서도 우리들 주변의 지상 세계와 같은 법칙, 같은 원리 가 지배되고 있다고 하는 전제이다. 보편 법칙의 전제라고 부르도록 하자. 실제로 이 보편 법칙의 전제야말로 뉴턴이 자신의 저서인 '프린키피아' 전편을 통해서 증명하려고 노력한 근 대과학의 기초가 되는 전제 중의 한 가지이다. 그리고 진위는 차지하더라도 사과의 일화도 실은 이 전제의 우연 발견을 전해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2천년 가까운 세월, 법칙도 원리도 다르고 일체의 교류가 없는 신성 한 천계가 사람들의 머리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는 것은 단테의 '신곡'이나 중세 회화작품 에 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지구를 전세계의 중심에 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은 훗날 알렉 산드리아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속칭 천동설이라고 불리는 학설로서 체계회된 다. 특히 아라비아어명으로 '알마게스트'(위대한 책이라는 뜻)라고 언급되는 그 천문서는 몇 세기 동안 표준적인 교재로서 자연학자 사이에서 받아들여졌다. 거기에는 일곱 가지 행성이 들어 있는 동심 천구가 층을 이루고 있고, 가장 바깥쪽에 12궁을 포함한 항성 천구가 위치 하고 있다. 나중에 기독교 신학 속에 흡수되어 천사나 정령이 사는 곳으로서 아홉 번째 천 구도 도입되고 있다. 또 달 아래의 세계도 4원소의 고유한 거처가 계층구조로 존재하고, 위 부터 불, 공기, 물, 흙(대지) 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확실히 현실로 관측되는 행성 외관의 움 직임을 설명하기 위해 천구면 상에 중심을 두는 주전원이나, 지구를 중심으로 하지 않는 이 심원과 같은 개념이 도입되어 있지만, 그러한 연구는 '현상을 구하기 위해' 즉 별의 운행을 설명하기 위한 수학적인 기술로서 이해되어져 실재하는지 어떤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그래 도 영원히 멈추지 않는 원 운동이 지배하는 성역이 존재한다는 것은 오랫동안 의심하지 않 았다. 세계를 성과 속으로 이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은 오래되고 잘못된 생각이었을까? 잠시 생각해 보면 무조건 그렇다고도 말할 수 없다. 제1장에서 소개한 왕충의 '논형' 중에는 미나미가타구마구스도 즐겨 인용한 유령부정설이 있다. 꽤 오래전부터 문자로 기록이 남아 있는 중국의 이야기인데, 왕충은 그가 살던 시대까지 살았던 사람의 숫자를 대략 계산해 보 았다. 만약 일부 사람들이 말했듯이 이러한 사람이 모두 유령이 되어 어딘가에 출몰하고 있 다고 하면 이미 인구 과밀로 거동조차 못할 것이라고 그는 결론지었다. 돗자리 한 장 위에 유령집단이 입추의 여지없이 꽉들어차 있게 된다. 비록 확실하게 쓰여있지는 않지만 이 이 야기는 유령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역학의 법칙에 따른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비로서 성립되 는 것이다. 다른 물체는 동일 공간을 동시에 점유할 수 없어야, 유령의 인구 과밀 문제가 생 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대개 그 성역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는 다른 원리가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왕충 이후로도 유령 이 야기는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생활하는 현대사회에서도 아리스토텔헤스가 가정한 것과는 다르지만 과학 교과서에 실려 있는 법칙이나 원리가 통용되지 않는 다른 세계가 존 재하고 있는 것이다. 성과 속이라는 근본부터 다른 세계를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 치의 체계가 공존하는 젓을 말하는 문화상대주의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뉴턴 의 학설을 유럽에 보급시키는 역할을 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인 계몽주의 시대의 프랑스 철학 자 볼테르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런던에 도착한 프랑스인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에 있어서도 크게 다르다는 것 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충만한 세계를 떠나 지금은 그것이 공허라고 보기 시작한다. 파리에 서는 미소물질의 소용돌이로 이루어진 우주를 볼 수 있지만, 런던에서는 그러한 것은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달의 압력이 만조를 일으킨다고 하지만, 영국에서는 바다 가 달의 인력에 의해 끌어당겨진다고 본다. 여기에서는 진공의 존재를 인정하는 뉴턴의 우주관과 진공의 존재를 부정한 데카르트의 충만우주설의 대비가 유모어와 함께 소개되고 있다. 다른 법칙이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고 까지는 말하지 않지만, 마치 두 가지 다른 별도의 세계가 있는 것처럼 그는 느꼈던 것이다. 도버해협을 사이에 두고 지식인이 갖고 있는 사상이 전혀 다른 것에 볼테르가 눈을 뜬 후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영국과 프랑스 양국민을 동시에 놀라게 한 발견 보고가 발 표되었다. 18세기를 대표하는 탐험가 제임스 쿡선장의 보고가 그것이다. 1768년부터 3차에 걸쳐 계속된 쿡의 남양 항해 기록은 기독교 세계를 놀라게 했다. 쿡은 원래 금성 관측과 남 방대륙을 탐색하기 위해 엔데이베호로 출범했다. 이 배는 동명의 스페이스셔틀보다도 아마 귀환할 가능성이 낮은 석탄선이었을 것이다. 좌초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그렇 지만 관측소의 건설지 조지(타히티)섬에서 의외의 사실과 조우한다. 후에 그를 살해하려 한 포악한 하와이섬의 원주민과는 달리 하히티섬 사람들은 성향이 온순하고 기독교의 복음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보였다. 일부다처제임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에서 엄격하게 가르치고 있는 일부일처의 원칙은 지상낙원인 타히티에서는 통용 되지 않았다. 기독교 도덕이 유일무이의 바른 길이라는 사상에 대해 많은 지식인이나 궁정 사람은 그것을 계기로 의문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낭만파 사상가 사이에서는 '고 귀 한 야만인'이라는 호칭이 생겨났다. 나중에 그림도구와 캔버스만을 갖고 아내와 자식을 버 리 고 타히티로 떠난 화가가 나타났다. 서머셋 모옴이 '달과 육펜스'에서 묘사한 화가 고갱이 바로 그다. 그만큼 기독교 세계 사람들에게 있어서 낙원 타히티는 매력적인 다른 세계로 예 술가의 관심을 강하게 끌었다. 물질세계에 있어서는 뉴턴의 보편법칙이 우주 전체에 빠짐없 이 골고루 퍼져 있다는 전제를 명백히 하는 한편, 인간 세계에서는 많은 다른 세계, 다른 문 화가 발견되어 복수 세계의 가능성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사과에 관한 일화 꽤 이야기가 벗어났지만, 성스러운 천계의 사건을 속세의 현상으로 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 뉴턴의 말년 친구인 스튜클리의 '회상록'에 기록된 것이다. 사과에 관한 에피소드를 읽 어보도록 하자. 1726년 4월 15일 나는 켄싱톤의 오베르즈에 살고 있던 아이작경을 방문해서 함께 식사를 하고 단둘이서 하루를 보냈다... 저녁식사를 한 후 따뜻한 저녁이어서 정원으로 나가 차를 마시기로 했다. 사과나무 그늘에는 아이작경과 나 둘분이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 도 중에 중력에 관한 생각이 마음속에 떠오른 것도 그 곳에서의 일이었다고 그는 나에게 가르 쳐주었다. 명상에 잠겨 앉아있을 때 갑자기 사과가 하나 떨어진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어째서 사과는 지면을 향해 언제나 수직(연직)으로 떨어지지 않으면 안될까라고 그는 그 때 자문햇다. 옆으로 빗나가거나 위로 올라가지 않고 언제나 지구 중심을 향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 이유는 지구가 사과를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 속에는 끌어당기 는 힘이 있음에 틀림없다. 지구상의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의 본체는 지구의 가장자리가 아 니라 중심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과는 수직(연직)으로, 즉 중심을 향해 떨어지 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물질이 물질을 끌어당긴다면 그것은 물질의 양에 비례함에 틀림없다. 그렇기에 지구가 사과를 끌어당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과도 지구를 끌어당기는 것이 된다. 우주 전체에 빠짐없이 골고루 퍼져 있는 '중력'이라고 부르는 힘이 존재한다.(고 그는 생각 했다고 한다)... 뉴턴 본인에 의한 이 설명이 60년 가까운 옛날 일을 생각해낸 것이라고 하면 놀랄 사람도 많을 것이다. 1692년에는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기억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로 선명하게 기억한다는 것은 이 사건이 인상에 강하게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날 짜는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이 역사에 남는 사과의 낙하는 뉴턴이 학생시절 때 페스트 유 행으로 캠브릿지대학이 폐쇄되어 고향인 울소프에 돌아간 1665년 후반부터 다음해 3월 사이 에 일어난 일로 추정되고 있다. 포츠마스 원고에는 1666년에 "중력이 달의 궤도에까지 미치 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었고, 또 페스트 덕택에 한가로왔던 이 2년 동안이 인 생 최고의 창조기가 되기도 했다. 뉴턴 연구자는 이 해를 '경이로운 해'라는 이름으로 부른 다. 스튜클리의 뉴턴 회상록은 오랫동안 출판되지 않고 2백년 이상 경과한 1936년에 비로소 활자화되었지만, 유명한 전설을 후세에 남긴 것은 결코 이 문헌뿐이 아니었다. 20세기를 기 다릴 것도 없이 뉴턴의 사과나무에 관한 에피소드는 널리 전해졌다. 예를 들면 1831년에 출 판된 브류스타의 '아이작 뉴턴경의 생애'에는 "열매가 떨어졌을 때에 뉴턴의 관심을 중력 에 관한 문제로 향하게 했다고 하는 그 유명한 사과나무는 4년 전쯤에 강풍으로 쓰러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화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이 저자는 회의적이었지만, 적어도 1827년 경까지 뉴턴과 관련된 이 나무는 살아 있었고, 전설도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을 말하면 뉴턴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이 이야기는 해외까지 전해졌다. 앞에서 인 용한 볼테르의 '철학서간'의 제15서간에는 이렇게 지적되어 있다. 1666년 캠브릿지 근교에서 칩거하고 있던 어느 날 정원을 산책하다 과일이 나무에서 떨어 지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모든 철학자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그 원인을 규명하려고 해도 보람도 없고, 세상 사람들은 거기에 무언가 불가사의가 있다고조차 느끼지 못한 이 중력에 대해서 깊은 명상에 빠져들었다. 그는 자문했다... 우리들의 반구에서 어떤 높이에서나 이렇 게 물체가 떨어진다. 그 낙하는 확실히 갈릴레이에 의해 발견된 과정을 밟는 것이고, 그 통 과한 공간은 그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 무게가 있는 물체를 낙하시키는 힘은 아무런 눈에 띄는 감소도 없고 땅 속의 아무리 깊은 곳에서도 또 가장 높은 산의 정상에서도 동일하다. 그렇다면 이 힘이 달까지 미칠 수 있을까? 그리고 만일 그것이 달까지 진입하는 것이 사실 이라면 이 힘이 달을 그 궤도 내에 유지시키고 그 운동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 가능하지 않 을까? 그렇지만 만일 달이 이 원리에 따르는 것이라면 다른 행성도 똑같이 이것에 지배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이치에 맞지 않을까?-뉴턴은 이렇게 추리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전해내려오고 있는 뉴턴과 같은 시대의 전기작가인 콘딕트의 증언도 들어본 후 검토해 보도록 하자. 스튜클리의 것과 거의 같은 내용의 자연철학자 그린에 의해 남겨진 기록도 있는데 이것으로 '사의 전설'은 끝이난다. 정확히 네 종류이어서 마치 사복음서를 생 각나게 한다. 1666년 그는 다시 캠브릿지에서...랭카시아 어머님에게로 갔다. 그는 정원에서 명상하고 있 을 때 중력(사과를 나무에서 지면으로 끌어당기는 힘)은 일정한 거리에 한하지 않고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멀리까지 미치고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째서 달의 높이까지는 아닐까라고 그는 자문했다. 만일 그렇다면 달의 운동에 영향을 미쳐 아마도 달을 그 궤도에 머무르게 할 것이다. 그래서 이 가설로부터 나온 것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책이 없었 기 때문에 노우드가 지구를 측정하기 이전에 지리학자나 우리나라의 배를 타는 사람들 사이 에서 사용되고 있던 일반적인 견적-지표의 위도 1도당 60마일-을 사용했는데, 계산한 수치 는 원리와 일치하지 않고, 만일 달이 소용돌이 속을 지난다면 중력과 함께 달이 갖고 있는 힘이 혼합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들에게 남겨진 이 세 가지 전설을 읽어보면 미묘한 점에서 내용이 차이가 난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사람들과의 만남이 싫어서 자신에 대해서 말이 없었던 뉴턴이 각각 다른 기 회에 말한 내용이 이와 같이 전해졌다는 것은 보통은 생각하기 어렵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일까? 직접 들은 것은 캠브릿지 대학의 후배 스튜클리뿐이다. 그렇지만 과학사 가 매키와 드비어는, 볼테르는 아마도 뉴턴의 조카 캐서린 버튼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린은 마틴 폭스라는 인물로부터 정보를 제공받았다고 보 았다. 그렇다고 본다면 뉴턴은 스튜클리를 포함해서 친한 사람들에게 한 두 번이 아니라 여 러 번 기회 있을 때마다 중력이론 탄생의 비화를 이야기했기 때문에 조금씩 표현에 차이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 사과에 관한 수수께끼를 추적하도록 하자. 쉽게 이해해 보면 사과의 낙하를 본 뉴턴은 타고난 천재적인 재치로 만유인력의 이론을 생각해 냈다고 볼 수 있다. 우연의 원뜻인 낙하현상과 종종 그 본질이 우연에 기초하는 창조성이 하나의 삽화 속에 들 어 있는 광경을 우리들은 여기서 볼 수 있다. 발견은 우연히 일어나는데, 준비된 정신에서만 일어난다는 파스퇴르의 말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쉽도록 쓴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사과 낙하 자체는 흔한 현상이었지만 그것을 목격한 사람이 세상에 드문 천재였기 때문에 인류 역사상 최대의 발견으로 이어진 것이다. 뉴턴 시대부터 계속해서 전해내려온 이 우연 발견의 일화는 맨처음에 말한 스튜클리의 기 술을 보는 한, 물리학을 그다지 모르는 독자가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다. "중력에 관한 생각이 마음에 떠올랐다."라고 확실히 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볼테르의 일화를 앍으 면 원래 뉴턴은 낙하 현상의 원인에 대해서 그것을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로 여기고 명상 에 잠겨 있던 것으로 되어 있고, 콘딕트와 마찬가지로 중력 자체는 이미 자명한 것으로 이 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중력은 만유인력으로 해석해도 되는 것일까? 뉴턴은 무엇을 생각해 냈을까 고대 그리이스의 엔페도클레스가 사랑과 증오에 의해 세계가 지배되고 있다고 말했을 때, 아마도 그 상황에는 물체와 물체가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상정되어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1600년에 출판된 영국의 윌리엄 길버트의 저서 '자석에 대해서' 에 는 자석이 떨어져 있는 철 파편을 모으는 것처럼 지구 자체가 거대한 자석이라는 구상이 기 록되어 있다. 뉴턴이 말한 케플러 학설에서의 행성 운동의 근원에 자기력이 상정되어 있다 는 것을 고려하면 1666년의 시점에서는 물체의 인력 작용이라는 발상을 결코 혁신적인 생각 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중에 상세히 말하겠지만, 뉴턴 본인은 인력 개념을 자신이 처음으로 생각해냈다고는 생 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전제에서 행성의 공전운동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리고 그 설 명에 필요한 미적분학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게다가 말년에는 가능한 한 원격작용인 만유인력을 배제하고 싶다고까지 바라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과의 갑작 스런 낙하가 만유인력의 발상을 만들어냈다는 속설은 사실이 아닌 것이다. 그래도 사과에 관한 에피소드에는 또 한 가지 익숙한 해석이 있다. 볼테르와 콘딕트의 기 술에서는 뉴턴이 달까지 중력이 미칠 가능성에 대해서 사색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뉴턴은 울소프에 있는 건물의 정원에 앉아 사과 열매와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동일한 시야에 두었을 지도 모른다. 갑자기 사과 하나가 지면에 떨어지자 그것과 달을 비교해서 사과가 떨어진 것 도 달이 공전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상상하고 싶어질 것이 다. 거기에는 다른 사건의 교차에 근거한 우연이 작용하고 있다. 달을 바라보는 뉴턴의 시선 과 사과의 낙하 궤도가 약간 기울어지면서 돌연적인 교차가 이루어졌다면 확실히 이 이야기 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흥미진진한 의미를 갖게 된다. 옛날부터 믿어 온 영구불멸의 성역에 있는 달과 변화무쌍한 달 아래 현상계의 사과가 예고도 없이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맨처음 말한 통속적인 것보다는 이 해석에는 약간은 사실에 가까운 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볼테르는 이것이 '갈릴레이에 의해 발견된 과정'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 기 때문이다. 약간 이야기를 옛날로 돌이키면 태양을 우주의 중심에 둔 코페르니쿠스의 저 작 '천구의 회전에 대해서'가 출판된 것은 1543년의 일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사망한 해이 다. 그 21년 후에 태어난 갈릴레오(세익스피어와 같은 해이다)가 코페르티쿠스설을 세상에 알리 기 위해 기록한 대화편 '천문대화'를 이탈리아에서 간행한 것이 1632년이다. 10년 후에 갈릴레오는 타계하고, 그 해 크리스마스에 뉴턴이 탄생했다. 그 뉴턴은 '경이로 운 해'의 5년 전인 1661년, 19세 때 솔즈베리가 영역한 '천문대화'를 읽었다. 거기에는 물 체 가 자연낙하하는 거리는 경과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고 하는 이른바 티법칙을 주장하고 있 다. 물론 갈릴레오 자신은 만유인력에 대한 발상으로 이것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달까지 미치는 중력이란 물질 자체가 갖고 있는 무게를 힘으로 보는 것이고, 낙하 원인이 되는 성질이나 경향 정도의 의미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만유인력을 가정하지 않고도 뉴턴 은 이런 식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사과가 따르는 티법칙이 달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데카르트가 1637년에 '철학원리' 중에 명백하게 밝힌 관성의 원리 때문에, 달은 궤 도의 접선 방향으로 직선운동을 계속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달은 사과와 마찬가지 낙 하운동과 데카르트가 말한 관성운동 모두를 동시에 하고, 그 결과 지구로 떨어지지 않고(그 리고 멀어지는 일도 없고) 원운동을 계속하는 것은 아닐까? 이와 같은 동력학의 구상이 뉴 턴의 마음에 싹텄다고 추리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있다. 사실 콘딕트가 말한 계산이란 달의 경우에 딱 맞는 동력가속도를 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유인력의 강도를 계산한 것이 아니었다. 콘딕트가 마지막에 말한 "만약 달이 소용돌이 속을 지난다면"이라는 사고의 단면 은 우리들에게 전혀 다른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조용히 독서를 즐기는 청년이었던 뉴턴은 이미 원심력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이 시대에 쓴 원고에는 원통의 안측 표면을 회전운동하는 물체가 떨어지지 않는 것은 원 심력과 원통벽의 압력이 평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다. 원통벽의 압력 은 달에 맞게 이야기하면 궤도의 외측에서 더해지는 압력에 해당한다. 실제로 우주에는 크 고 작은 여러 가지 소용돌이가 충만해 있어서 그 소용돌이가 물체를 누르는 힘에 의해 회전 운동이 생겨난다는 학설은 관성원리를 창안한 데카르트의 것이었다. 젊은 뉴턴은 이 대선배 의 설명을 아마도 가능성 많은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소용돌이가 지구쪽으 로 누르는 힘과 원심력이 균형을 이뤄서 달의 공전이 이루어진다는 이 설명에서는 만유인력 은 전혀 불필요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방법을 뉴턴은 버렸지만, 1666년의 시점에서는 아 직 가능성의 범위에 포함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소용돌이의 누르는 힘이나 지 구의 인력이나 어느 것을 가정했다고 해도 달을 사과로 간주해서 낙하할 때의 가속도를 계 산하는 것은 가능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두 가지 해석을 소개했는데, 웨스트폴이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방대한 양의 평 전인 '쉼도 없이'에서는 중요한 내용이 시사되어 있기 때문에 말해두고 싶다. 우선 '경이로 운 해'는 후의 평범치 않은 지적 분투를 생각하면 고전역학의 완성은 결코 경이로눈 것도 아무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오히려 프리즘을 구입해서 실시한 고독한 연구야말로 뉴턴이 백색광 의 이종 혼합설에 생각이 미친 해였다는 것을 그는 강조하고 있다. 백색은 원래 '순수'나 ' 더 러움이 없는 것'을 상징하고 있고, 단일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뉴턴은 외부에서 끌어들인 태 양광선이 프리즘을 통과함으로써 얻어진 스펙트럼을 아마도 사상 처음으로 백색광이 분해되 어 생성된 것으로 본 사람일 것이다. 분광된 일곱 색깔의 광선을 다시 별도의 프리즘으로 합성해서 원래의 백색광으로 만드는 실험도 실시해 이종 광선의 혼합설을 증명하기도 했다. 18세기가 되어 문호 괴테가 '색채론' 중에 혹평한 뉴턴의 광학이론은 이미 이 시기에 만 들 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발견에 대해서는 사과 이야기에 필적하는 일화는 존재하지 않지만, 뉴턴 자신이 우연을 가장하고 있는 구절이 있기 때문에 매우 흥미롭다. 그는 광선을 프리즘 을 통과시켜 투영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가늘고 긴 스펙트럼을 얻기 위해서는 굴절된 빛을 확산시키지 않으면 안되고, 그러기 위해 충분한 거리를 두어야 했다. 데카르트나 후크는 거 리가 너무 짧아서 양 끝에 색을 띤 빛의 반점밖에 볼 수 없었다. 뉴턴은 프리즘과 스크린용 벽과의 거리를 22피트나 두고(데카르트의 경우는 몇 인치였다) 5배로 확대된 스펙트럼을 보 는 것에 성공했지만, 1672년 초고에서는 그것이 우연히 이루어졌다고 강조하며, 경이로움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표현을 남발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갈바니의 위대한 선구자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과학의 중요한 발견은 본질상 우연히 이루어진다는 사상이 그것이다. 사과 이야기도 뉴턴 본인에 의한 우연을 가장한 허구였을 가능성도 나온다. 논적후크 또 한 가지 잊어버려서는 안되는 일은 7살 많은 논적 후크의 존재다. 후크의 이름을 보통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용수철의 늘어난 길이는 작용한 힘에 비례한다는 '후크의 법 칙'을 학교에서 배울 때 뿐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뉴턴이 페스트로 한가로왔던 무렵, 런 던학회에 그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던 것에 반해 후크는 이미 왕립협회의 실험기구 관리자 로서 실험과학의 최첨단에서 활약하는 유명인이었다. 음악에서 말하는 살리에르와 모짜르트 의 관계와 비슷할지도 모른다.(후크는 뉴턴을 독살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반대였다면 가능 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뉴턴은 후크를 싫어했다) 뉴턴이 캠브릿지 대학 출신이었던 것에 반해, 한 발 앞서 과학계에 데뷔한 후크는 옥스퍼 드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1665년에 현미경에 의한 보고 논문집 '미크로 그래피아' 를 출판했다. 이 책에는 벼룩의 훌륭한 스케치와 코르크 세포(후크는 작은 방이라는 의미로 셀 이라고 처음 명명했다)의 관찰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후크는 '경이로운 해'의 광학실 험에 대해서 뉴턴에게 논쟁을 걸었다. 1672년에 왕립협회 앞으로 보낸 색채에 관한 서간 논 문이 후크의 눈에 띄어 실험을 재현해 보았는데, 거기에서 얻어진 결론은 틀린 것같다는 장 대한 비판 편지를 2주일 후에 보낸 것이었다. 그 상세한 내용은 본 이야기에서 벗어나기 때 문에 생략하지만, 이 두 사람의 논쟁은 뉴턴의 저서 '프린키피아'의 출판을 준비하고 있었을 무렵 이전보다도 더 격렬하게 재연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인력이 라는 아이디어를 뉴턴이 후크로부터 훔쳤다는 것이었다! 후크는 1679년 말 뉴턴 앞으로 보낸 서간에서 자신이 쓴 '지구의 운동을 증명하는 시도 ' 중에 만유인력의 발상이 적혀 있어서 뉴턴이 그것을 힌트로 했다고 주장했다. 맨처음에는 상대하지 않았던 뉴턴도 마침내 꽤 감정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다음 한 문장은 친구인 헬리 (헬리혜성의 발견자) 앞으로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이것은 정말이지 놀랍지 않습니까? 발견하고 해결하고 모든 일을 하는 수학자는 단순히 계산실에서 짜증나는 일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파악했 다고 입으로만 말하는 사람이 선조나 후배의 모든 창조적인 생각을 가로채 버리는 것입니 다... 어떻게 자신의 주장을 잘못된 것을 근거로 해서 그것으로 나를 괴롭히는 인물이 발견 했다고 기록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후크)는 자신의 이론을 나에게 가르쳐 준 것으로 대단 한 은혜를 끼쳤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누구나 알고 있는 이론을 알려주었다고 해서 큰 은혜 를 입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나는 그보다도 옳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후크의 저작에는 확실히 선구적인 면도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평가해줘야 한다. 인력의 발상 자체는 누가 먼저인지 논한다고 해도 의미도 없을 정도로 진부한 것이다. 오히려 '누 구 나 알고 있는 그 이론'에서 출발해서 어떻게 우주 현상을 수학적으로 증명할까라는 그 논증 과정이 정말로 중요한데, 그것을 이룩한 것은 뉴턴 단 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뉴턴은 미적 분법의 발견에 대해서도 뒤에 라이프니치와 선취권을 다투었고, 자신이 언제 혁신적인 발상 을 가졌는지 기록해 두는 것의 필요성을 통감했을 것이다. 그러한 경위에서 보면 '경이로운 해'에 떨어진 사과 이야기는 획기적인 새로운 발상의 기 원을 자신의 사상적 발전 속에 위치를 부여하기 위한 교묘한 알리바이였을지도 모른다. 역 사는 후대의 역사가가 과거를 되돌아보며 재구성하는 것인데, 흔히 한 인간이 자신의 처지 를 회고하며 인생의 한 장면을 각색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물론 진상은 역사의 어두음 속으로 사라져 지금은 그것을 밝히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만유인력의 수수께끼 만유인력 이론으로 천체의 운행을 증명한 뉴턴은, 아무 것도 매개로 하지 않고 멀리 떨어 진 채 접촉하지 않고 서로 작용하는 인력 현상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1692년 벤트레 앞으 로 보낸 서간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생명이 없는 무감정의 물질이 (물질적이 아닌 어떤 다른 것의 개제없이) 서로 접촉하지 않고 다른 물질에 작용해서 영향을 끼치는 것은 도무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에피클로스적 인 의미에서 중력이 사물에 본질적이고 내재적이라면 그렇겠지만... 당신에게 고유의 중력을 나에게 귀착시키지 말 것을 희망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중력은 물질에 대해 고유하 고 내재적이고 본질적이기 때문에 진공 속에 있는 어느 물체가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물체 의 중간의 또다른 것의 도움없이 힘이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터무니없이 불합리 한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철학적인 문제에 대해서 사고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 구나 나의 생각에 동의하리라 믿습니다. 태양계의 행성 궤도가 거의 타원이 되는 것을 완벽하게 증명한 뉴턴이 그 증명의 기초가 되는 만유인력에 대해서 그 존재에 의문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의외라고 생각할 수 도 있 다. 에피클로스의 이름이 나온 것은 프랑스의 철학자 가상디가 이 시대에 고대의 원자론 사 상가 에피클로스의 자연철학을 소개한 것이 계기가 되고 있다. 에피클로스의 생애를 기록한 디오게내스 라엘틸오스의 '철학자 열전'도 역시 이 무렵 번역되었고, 17세기 후반에는 잠깐 원자론이 유행하기도 했다. 뉴턴은 빛의 입자설에서도 산이나 염기의 화확이론에서도 세계 를 구성하는 기본요소로서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원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다. 에피클 로스가 말한 원자 운동은 낙하와 충돌로 이루어져 있고, 낙하 경향은 원자 자체의 본성을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뉴턴은 에피클로스의 원자론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러나 뉴턴이 가정한 만유인력은 서로 당기는 상대와 자신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상 호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즉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상대에 따라 힘의 강함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에피클로스가 생각한대로 물질 자체의 본성에 얽매이는 것 은 아니었다. 뉴턴은 살아있는 동안 이 수수께끼를 해결할 수 없었다. 아레바레즈 부자의 논 문과 뉴턴의 건강 상태와의 불가사의한 인연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살펴보자. 그들은 구비오 의 점토층에 포함되어 있는 이리윰의 양을 방사화 분석방법을 이용해서 측정했다. 시료에 방사능을 입혀서 핵을 방사성 동위체로 변환하면 시료는 선을 방출하게 된다. 이 선을 에너 지 강도에 따라서 계산하면 초미량 수준의 원소를 검출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뉴턴 시대에 이런 분석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일까? 1979년에 스파고와 파운즈는 포츠마스 백작가에0 전해내려오는 뉴턴의 머리카락을 분석해 서 그 중에 염소, 수은, 비소, 납, 안티몬이 매우 많이 함유되어 있는 것을 밝힌 논문을 발표 했다. 경매에 붙여진 원고를 사들인 경제학자 케인즈가 뉴턴을 '최후의 마술사'라고 부른 이 래 뉴턴의 연금술 연구와 그로 인한 정신장애에 대해서 지적되어 왔는데, 이 연구가 그러한 논의에 과학적인 근거를 제공하는 결정적인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여기에서는 그 진위를 밝 힐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뉴턴의 머리에서 다량의 금속 원소를 검출한 분석법이 아레바레 즈 부자가 이용한 것과 같은 방사화 분석이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폐된 나폴레옹의 머리도 같은 분석 방법으로 비소(회백색의 비금속 원소)가 매우 많았던 이유로 독살설이 생겨났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폴레옹이 연금술사였다 는 설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미 지적한 보편법칙의 전제 상에 이 검출법이 성립되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사과의 낙하가 인연이 되어 천상의 성역과 달 아래의 속세를 연결하는 보편 법칙을 생각해 낸 뉴턴에게 더욱 그 법칙의 효력을 나타낼 수 있는 분석법이 적용되었다는 것은 기이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장까지 나는 약간 맥락을 잡을 수 없는 몽유벙자와 같이 이야기를 진행했는데, 우연의 원뜻인 낙하에 관련된 이야기는 이것으로 맺기로 하겠다. 사과의 이미지에 대해서는 역사적 인 소묘를 주고자 했지만 여전히 우연의 의미 요소가 많다. 골즈와지의 소설 '임금의 나무' 에서는 서로 반발하는 두 개의 사과 표상이 중심적인 모티브로 사용되고 있다. 원래 사과 열매는 유대=기독교적 전통 중에서는 자주 사람의 탐욕을 일으키는 지혜의 열매로 해석되 는 것과 함께 에우리피데스의 '히포리타스'에 대표되는 그리이스 비극의 계보 중에서는 이 상 향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말년 뉴턴이 만난 사람들에게 말한 사과는 도대체 어느 쪽 사과였을까? 이것 역시 지금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과학자 패러데이의 탄생 인간의 존재 그 자체를 하나의 우연으로 본 예를 앞에서 지적한 적이 있다. 우연히 이렇 게 태어났다고 한탄하면서 읊은 야마노우에의 '와쿠라바'의 우연이 바로 그것이다. 또는 쿠 키슈우조우가 조사 연구한 가운데 '이접적 우연'이라고 부르곤 하는 것도 있다. 이 우연은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가능한 선택 사항에 따라 좁아지기도 하고 넓어지기도 한다. 예를 들 면 경마장에 흩날리는 빗맞은 각각의 마권은 그 구입자에게는 한 때 행복을 주었을지도 모 르는 한 조각이기도 하고, 거의 포기한 채 회사의 인사과를 돌아다니며 찾아다니는 구직난 시대의 학생들에게 있어서 마침내 손에 넣은 합격통지는 그들의 가능한 인생의 한 조각이기 도 하다. 그런데 인간 존재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뿌리깊은 '와쿠라바'의 우연도 존재한 다. 극작가인 베츠 야쿠미노루의 '조반니의 아버지에게로 가는 여행'의 제 2장에서 등장인물 은 이렇게 말한다. 남6: 조반니시, 이게 무엇이죠? 남1: 그것은...어쩌면 그것이 아닙니다. 남6: 그렇지. 모두 그래...이것은 이것이 아닙니다. 즉 이것은 이것이면서 동시에 이것인 것 을 싫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사역의 남6은 칠판에 그려진 '헤노헤노모헤지'를 가리키면서 두 명의 학생에게 묻고 있 다. '헤노헤노모헤지'는 '헤노헤노모헤지'이면서 그런 사실을 싫어하고 있다고 말한다. 명제 논 리학의 틀 속에서 사고하는 한 이 학생의 대답은 동일률을 범하고 모순된 것을 말하는 것이 된다. 동일률이 올바르다면 '나는 나'이고 '그것은 그것이 아니면 안된다'이기 때문이다. 그 러 나 여기에서는 '그 가상의 모습은 그 본래의 모습이 아닙니다.'라고 해석함으로 어떻게든 논 리학을 옹호하기보다도 더욱 중요한 내용을 말하려고 한다. 극중에 중요한 조역으로 등장하 는 남4가 마치 '그것이 아닌 그것'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남4는 제1장에서는 역원이 고, 제3장에서는 마을사람들이 하는 연극의 효과 담당, 제7장에서는 묘지기이면서도 조반니의 돌아가신 아버지의 역할을 맡기도 한다. 미야자와 겐지의 수수께끼가 많은 작품인 '은하철도의 밤'의 해석을 시도한 이 희곡에서 는 가상으로서의 자기를 의식하는 것을 거쳐 자기가 연기하는 역할을 인식하는 것을 통해 마침 내 그것을 초월해 가는 소년의 성장과정이 그려져 있다. 바꾸어 말하면 돈 벌러 나가서 돌 아오지 않는 아버지가 잇고, 병상에 누워 있는 어머니를 간병하는 효자 아들이면서 학교에 서는 언제나 괴롭힘을 당하는 조반니가 운명의 강요로 옴짝달싹 못하는 자신의 존재를 와쿠 라바의 우연으로서 받아들이기까지의 이야기가 거기에 있다. 요코미츠 리이치의 초기 단편인 '비웃을 당하는 아이'에서는 사람의 인생을 거의 결정지 어 버리는 생업 자체의 본질이 우연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주인공 요시라는 소년은 학교 성 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가족의 관심은 으레 소년의 장래 직업에 귀착했다. 오사카의 상 가에 견습생으로 보낼까, 농사를 지으면 좋을까, 도자기공에게 보낼까, 마지막에는 술집의 점원으로 보내면 어떨까하는 농담가지 나왔다. 요시는 어느 것도 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비웃고 있는 얼굴의 존재를 어느 사이엔가 의식하게 된다. 귀까지 찢긴 사자춤의 사자와 같 은 얼굴로 요시를 바보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요시는 마침내 그 얼굴을 나무판에 새기기 시작한다. 연필과 면도칼을 가지고 다락방에 올라가 시간이 있으면 증오하는 정체 불명의 비웃는 얼굴을 나무판에 새겼다. 소년은 이것이 그의 인생을 결정지어 버렸다는 사실을 조 금도 알아채지 못했다. 다락방에서 좋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 누나가 올라가 보니 오시는 흉하게 비유는 얼굴을 가진 가면을 완성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아버지는 '이거 괜 찮 은데'라고 관심을 나타내며 그 밤 어머니와 상의해서 요시에게 나막신 만드는 일을 시키기 로 결정했다. 나막신을 만드는 사람이 된 요시는 25년 동안 나막신을 만들었다. 가게 벽에는 그 가면이 변함없이 웃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요시는 분노를 모조리 털어버렸다. '당신 덕 택에 나는 나막신을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손도끼로 가면 을 쪼개버리고 마음의 평정을 찾아 변함없이 나막신 가게의 요시인 채로 이야기는 끝이난다. 요시는 가면과 자신과의 사이의 강력한 인연의 고삐를 끊어버림으로 우연이라고 할 수 있 는 자기의 생업을 자각하고 그 자체를 새롭게 받아들이게 되 것이다. 만일 요시가 학교 도 서관에서 파스칼의 다음 한 구절을 읽었다면 이렇게 멀리 돌아오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일생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직업의 선택이다. 우연이 그것을 결정한다. 습관이 석공을 만들고 병사를 만들고 지붕 고치는 사람을 만든다... 사름은 어렸을 때 이 런 이런 직업이 칭찬받고, 그 이외의 모든 직업이 경멸받는 것을 종종 듣고 난 후에 직업을 선택한다. 한 마디로 직업이라고 해도 얼마나 많은 직업이 있나! 게다가 명인은 보통 타인 이 칭찬하는 것을 듣고 우연히 그것을 선택한다... 또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중에 "경의성에서만 우리들이 우연이라고 부르는 것이 공 세 계나 환경세계에서 우연히 떨어져 올 수 있다"라는 난해한 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자신에게 내려온 것을 스스로 짊어져야 할 것으로 받아들여 그 우연을 내 것으로 하는 것이 야말로 자신답게 사는 것이라고 깨달았을 수도 있다. 학교를 싫어하는 요시에게는 아무래도 무리한 주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과학과 일의 관계 사설이 많은 것이 나의 나쁜 버릇인 것같다. 인생 그것이 하나의 우연이라면 사람의 일이 라는 것도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앞에서 두 가지 이야기를 증거로 삼았 다. 이 장의 주역은 마이켈 패러데이이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크리스마스 강연이 '촛불의 과학'으로 출판되어 남아있기 때문에 어딘가에서 이름을 들어 본 사람도 많을 것이다. 빅 토 리아 시대에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은 인물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베츠에기의 연극풍으 로 이런 의문을 던져보자. (패러데이의 초상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물론 대부분의 대답은 '과 학 자입니다'일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먼 길을 돌아가 보자. 본 문제에 들어갈 때 까지 잠시 참아보자. 고대 그리이스의 서사시인인 헤시오도스는 매일 일을 열심히 하는 것 을 존경하면서 작품 '일과 나날'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일을 내일, 모레 미루지 마라. 게으른 사람도 미루는 사람도 창고를 채울 수 없다. 정력을 다할 때 비로소 일은 잘 진행된다. 미루는 남자는 언제나 가난신과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이마에 땀 흘리는 일없이 행복한 생활이 보장된 황금시대로부터 5대째, 철의 종족 시대에 "밤이나 낮이나 노역과 고뇌에 사여 쉴 때가 없는" 상태에 처했던 인간은 내일의 식량을 얻 기 위해 밤낮으로 노동을 강요당했다.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로부터 불씨를 훔쳐서 주었다 고는 해도 생애기술이 지금보다 매우 열악했던 고대세계에서는 먹고사는 일이 큰 일이었다. 이 무렵의 일은 농업이었는데, 일은 흙과 땀투성이가 된 육체 작업을 의미했다. 프랭클린과 같이 여가로 전기 실험을 할 여유를 서민들은 갖지 못했다. 현대세계는 사정이 매우 틀리다. 한 가지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스타즈 타케르가 115가 지 직업에 종사하는 여러 계층의 사람과 인터뷰해서 정리 기록한 베스트셀러 '일' 중에서 30 대 무직 여성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저는 일하지도 않아도 될 만큼 경제적으로 해방되면서부터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되었어요. 무언가에 열중하는 것이 꼭 필요해요. 그 관계 속에서 기쁨을 발견해야 해요. 위대한 시인은 살이라든가 태만을 시로 완성하지 않습니까? 훌륭한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시인은 그것을 일이라고 부르려는 생각도 하지 않죠. 일이라는 말은 실제보다 안 좋은 인상이 있어 요. 그것은 잘못된 것이예요. 제가 일에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 모를 거예요. 하지만 일이라 고 부르는 것이 비인간화하고 짐승같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어요... 일이란 무언가 새로운 것 을 창조해내는 것이예요. 빈둥빈둥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죄악입니다. 인간은 선명하지 않으 면서 균형있는 정기를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인간적인 사람이라면 무언가 일관성이 있는 것을 창조해내기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돼요. 일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그것 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우리들은 2600년에 가까운 유구한 세월이 인류에게 가져온 것을 헤시오도스와 이 이름없 는 여인의 이야기에서 느낄 수 있다. 그녀는 일에 매진하는 노력을 이른바 정신적인 쾌락으 로 보고 있다. 무직이라고는 하지만 그때까지 수많은 직업을 경험하고 현재는 정기적인 수 입을 갖고 안정된 생활을 보내고 있는 이 미국 여성의 입장을 물론 고려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실제로 기근이나 전쟁에 휩싸이는 일이 많은 제3세계의 주민이나 미국의 히스패닉 계나 흑인 노동자에 대해서 다루지 않는다면 편파적인 논의에 빠져버릴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선진국의 평균적인 국민이 직업 선택의 자유를 갖고 있고, 스스로 선택한 일을 사 랑하는 대상으로서, 창조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잇는 환경이 성립되어 있는 것은 확실하 다. 시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사랑이나 태만을 시로 완성할 수 있고, 그것을 훌륭한 일이 라고 여기는 그녀의 언급에 대해서는 약간의 주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시인이 창조적인 일에만 전념해서 살 수 있는 사회가 실현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외국의 시작품 번역이나 대학에서의 강의라면 아직 창조의 세계에 관련된 것으로 느낄 수 있고, 씨엠송 작사나 상업 선전의 캐치프레이즈의 고안 등은 약간 인내하면 시인이 자부심을 갖고 할 수도 있다.(유명한 이야기지만 '우주소년 아톰'의 주제가 작사자는 타니가와 준이치로이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 은행원이었던 오구라케이와 같이 작사가나 시인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일을 별도로 갖고 있는 것은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생각된다. 즉 꿈이 있는 창조적인 일은 대개는 양식을 얻기 위한 힘이 많이 드는 일과 겹치는 일은 없고, 별도의 다른 차원의 것이다. 15세기 프랑스의 서정시인인 프랑소와 비용이 절도죄로 투옥되어 후에 도둑 시인이 라는 오명을 안은 이래로 이런(타자이오사무에게도 그 일부 책임이 있다) 일부 시인의 생활 고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과학연구에 대해서도 시인의 예와 같 은 것이 성립된다. 나츠메 소세끼의 소설에 등장하는 과학자의 모델이 되었던 테라다 도라 히코는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거기에는 확실히 낙관적인 모습을 느낄 수 있다. 나츠메 소세끼 선생이 일찍이 과학자와 예술가란 그 직업과 기호를 완전히 일치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 것이라는 의미의 강연을 한 적이 있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물론 예술가도 때로는 의식주를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자도 때로는 마 찬가지 목적을 위해 자신의 기호에 맞지 않는 일에 열심을 다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가 있 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경우에도 그 일 중에서 자신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기회에 봉착해서 어느 사이엔가 그것이 일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무아의 경지에 빠질 수 있는 기회도 적지 않다. 물론 의식주에 궁핍하지 않고 일에 쫓기지 않는 예술가와 과학자가 각각의 제작과 연 구에 몰두하고 있을 때의 특수한 심적 상태는 그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찾아내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테라디는 자신이 명치시대에 일본에서 태어난 것, 과학자라는 직업적 존재가 와쿠라바의 우연인 것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같다. 과거에 태어나 과학에 뜻을 둔 사람의 대부분은 '의 식 주에 궁핍하지 않고 일에 쫓기지 않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오랜 역사를 통해서 그는 보 기 드문 축복받은 시대를 살았다. 우연한 만남에 의해 과학으로 밥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 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과학자'라는 단어가 제안된 것은 1834년의 일이었다. 이 조어의 배 경 에는 마침내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실험이나 관찰에 전념하는 직업 과학자가 하나 둘 나타 나기 시작하였던 빅토리시대의 영국 사회가 있다. 대학을 졸업해서 연구실에서 봉급을 받으 며 남아 있는 것이 과학의 일반적인 길이 된 것은 금세기가 되어서부터였다. 여러 가지 혼 동하기 쉬운 점이 있기 때문에 봉급을 받고 활동하는 연구자를 '과학자'라고 부르고, 그렇게 좋은 상황에 있는 사람이나 별도 직업을 갖고 생활하면서 과학연구를 하는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총칭할 경우는 '자연학자'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자연학자의 본직에 대해서 그 상세한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서는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과 진기 한 것을 모아 시대순이 아닌 직업별로 소개하도록 하겠다. 유복한 연구자 시대에 관계없이 가장 좋은 경우는 일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다. 누구나 그런 요행을 맞고 싶다고 한 번쯤 몽상해 본 일이 있을 것이다. 자연학자로 이런 조건을 만족시킨 사람의 대 표격은 18세기 영국의 캐벤디시다. 현재 캠브릿지 대학에는 그의 이름을 기린 연구소가 있 다. 캐벤디시는 1760년 29세 때 왕립협회의 회원으로 뽑혀 이후 런던에 거주하며 과학 활동 을 계속했다. 가연성 공기(수소)의 폭발 실험이나 지구의 밀도를 측정해서 높은 세간의 평가 를 획득했는데, 그는 유복하면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디본샤 공작가에 태어난 귀족으로 "학식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부자이고, 부자 중에서 가장 학식있는 사람"이라고 당시 사람 들은 말했다. 결혼은 하지 않았는데 1810년에 죽었을 때 수백만 파운드의 유산을 남겨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패러데이가 처음으로 실험조수로 받은 급료를 생각하면 패러데이를 몇 만년 고용할 수 있을 정도의 액수였다. 또 한 사람 부럽기만 한 예를 소개하겠다. 앞장에서는 아리스토텔 레스의 우주 체계를 조금 다루면서 거기에는 영원불멸의 천상계와 끊임없이 생성 소멸을 반 복하는 달 아래의 세계라는 엄연한 두 세계의 구별이 있었다는 것을 말했다. 실제로 뉴턴보 다도 약 1세기 빨리 태어난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는 이 구별을 의심케 하는 천문 관측을 최 초로 실시했다. 1572년 11월 11일에 카시오페아좌에 새로운 별이 빛나고 있는 것을 발견했 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이 탄생할 여지가 없는 천상계에서 무에서 유가 탄생하는 것을 26세의 젊은이가 사상 처음으로 밝힌 것이다. 티코는 원래 덴마크의 귀족 출신으로 생활을 위해 일해 본 적 은 한 번도 없었다. 농가의 딸과의 결혼으로 의절당할 뻔했지만 어떻게 위기를 벗어나게 되 었다. 그는 친척이나 국왕으로부터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새로운 별을 발견하기 직전 아 우구스부르크에 유학하고 있던 무렵에는 외백부를 설득해서 헤리츠워드성에 실험실을 만들 었고, 1576년에는 덴마크 국왕으로부터 후벤섬을 그대로 연공과 함께 제공받아 우라니보르 그의 천문대를 만들었다. 이것은 네덜란드에서 망원경이 발명되기 직전의 일로 최후의 육안 관측에 의한 천문대가 되었다. 또 티코가 이 지역에서 실시한 정확한 실험 결과로, 조수로 일했던 케플러가 훗날 화성의 궤도가 타원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케플러가 이 화성의 데이터를 손에 넣을 때까지의 드라마는 안락사를 실행해서 충격을 준 저널리스트 아서 케스트라의 천 문학사 '몽유병 환자들'에 자세히 그려져 있다. 이 저서에는 근대적 우주상을 수립한 중요한 천문학자들이 각각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어서, 가끔씩 현재의 우리들에게 전승된 천문학만 이 남겨지게 된 과정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파수꾼까지 두어 케플러에게 기록을 뺏기지 않으려 했던 티코와, 티코로부터 그것을 뺏으려 했던 케플러와의 데이터 쟁탈전 등은 매우 흥미롭다. 교사와 식객 그런데 케플러는 어떻게 생활하고 있었을까? 군인의 자녀로 태어난 케플러는 어머니의 손 에서 자라나 1588년 튜빙겐 대학을 졸업하자 그리츠에 있는 프로테스탄트 신학교의 수학 교 사가 된다. 일반적으로 교직은 옛날부터 자연학자의 생활을 유지해 온 중요한 직업이었다. 물론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내용을 그대로 가르치는 일은 절대 없었고, 시대에 따라 다르지 만 대부분은 초보적인 수준 정도를 가르치는데 지나지 않았다. 알렉산더 대와의 가정교사였 던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원전 335년에 아테네에 돌아와 류케이온이라고 불리는 교육과 연구 를 함께 한 사숙을 설립해서 생활의 기반을 삼은 것은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케플러가 티코의 조수가 된 이야기로 되돌아가면, 프로테스탄트이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일도 있고 해서 두 번의 답장을 받고 후벤섬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수학교사보다 천문학을 연구하는데 조건이 좋았기 때문이다. 티코와의 공동연구는 약 1년으 로 끝나고, 1601년에 케플러는 덴마크 왕실의 천문관으로서 '루돌프표'라는 천문표 작성에 종사하게 된다. 이와 같이 왕실이나 귀족의 도움을 받아 그다지 많다고 할 수 없는 의무를 다하면서(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조차 있었다) 자유롭게 연구하는 입장에 처한 자 연학자는 많이 있었다. 바꿔 말하면 자신의 재능을 인정해 주는 후원자를 찾아 그 비호를 받으며 생활하는 것이다. 고대 중국의 거물로 알려진 맹상군이나 춘신군 등은 식객을 수천 명이나 거느렸다고 하는데, 그 중에는 닭울음소리나 도둑질을 잘 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자 연학자도 있었을 것이다. 케플러와 편지를 나누었던 이탈리아의 갈릴레오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파도바대학의 수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1610년에 토스카나 공국의 피렌체로 옮긴다. 46세 때의 일이었다. 메디치 가로부터 두터운 보화를 받을 것에 대한 확약을 받아 대우가 개선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 이다. 즉 대학의 교수직과 후원자의 식객을 천징에 달 경우 후자가 안정되고 조건이 좋았던 것이다. 갈릴레오는 이렇게 결단한 이류를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고액의 급료를 받는다고 해도 그것이 공화국으로부터 지급되는 것인 한 의무로서 해야 할 일이 따라오게 됩니다. 대중으로부터 어떤 원조를 받기 위해서는 한 사람분만 아니 라 대중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제가 강의나 공무를 할 수 있는 인간인 이상 급료 를 받고 있는 동안은 강의 등의 직무가 면제되지는 않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봉급을 받으 면서 매일매일의 일을 면제받는다고 하는) 저의 소망은 절대적인 지배자로부터만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대학 이학부라면 갈릴레오 소망의 일부를 만족시켰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메디 치가에서 일한 그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과학자보다도 많은 시간적 여유를 가졌을 것이다. 이와 같이 후원자의 도움을 받는 것을 선택한 자연학자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시실리섬의 히에론왕 밑에서 일한 아르키메데스를 필두로 로드비코 일 모로의 고용 화가가 되어 한밤중에 사체 해부를 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엘리자베스 여왕과 제임즈 1세의 시 의로 일하면서 자석에 관한 연구를 한 길버트 등이 있다. 다빈치는 로드비코의 비위를 맞추 기 위해 서투른 익살이 섞인 소설을 쓰거나 자동 오르간을 제작하거나 '세기의 제전'으로 후 세에 전해진 결혼식의 시나리오 제작, 작곡, 연출을 혼자서 하였다. 회화에 몰입할 시간이 없자 결국 로드비코를 떠났는데, 후원자의 도움을 받는 것도 모두 좋다고만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자에 대한 발상을 화학의 세계에 도입한 것으로 알려진 영국 농촌 출신인 돌턴의 경우 는 어땠을까? 돌턴은 26세가 되던 1792년에 맨체스터로 옮긴 후 같은 곳에서 죽을 때까지 52년간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가르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원자 기호에 의한 물질의 구조식 을 노트에 적으면서 한편으로는 아이들에게 영문법이나 산수셈을 가르쳤다. 19세기기 되어 시민사회가 점차 성숙되어 감에 따라 연구와 생활 모두를 돌봐주는 후원자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돌턴은 말년의 수년 동안만 영국정부로부터 약간의 연금을 받았는데, 그것이 유일한 공적 원조였다. 또 '곤충기'의 저자로 알려진 파브르는 프랑스 중학교의 교사였는데, 딱 한 번 디죵대학의 교수가 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는 이 좋아 보이는 제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왜 냐하면 그 당시 곤충학 교수는 무급으로 일했기 때문이다. 연구에 전념할 수 있기는커녕 생 활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후원자의 식개, 대학교수, 학교 교사 세 가지는 이와 같이 오 랫동안 자연학자의 활동 기반이 되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했다. 성직자의 과학연구 대학의 교수직에 있으면서 시간을 확보하기는커녕 중학교 교사직조차 얻을 수 없었던 사 람이 있었다. 완두콩이라고 하면 바로 생각이나는 요한 그레고리 멘델이 바로 그다. 멘델은 현재의 체코슬로바키아 시레지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850년(28세)과 1856년 두 차례 빈대학에 교원자격 시험을 보았다가 실패했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건망증이 원인이었다고 여겨지는데, 일티스의 전기에 수록되어 있는 시험 답안을 읽어보면 그의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된 훌륭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운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결국 그는 일생 을 부륀 수도원에 헌신하게 되었다. 즉 멘델의 본직은 성직자였다. 오히려 그레에 있어서 불 운했던 것은 그 후의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유는 멘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완두콩 교 잡실험에 대한 논문은 1865년에 지방 자연과학협회에 발표되었는데, 그대로 이렇다할 평가 를 받지 못하고 잠들어버리는 운명에 처했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에서 가장 유명했던 식물학자인 네게리에게 논문을 보냈지만, 그다지 호의적이 라고는 할 수 없는 대답을 들은 채 그 역사적인 논문은 35년간 네게리의 서재에서 두 번 다 시 읽혀지지 않고 먼지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물론 성직자의 입장이었던 자연학자는 그 외 에도 많이 있다. 산소 발견자 중의 한 사람인 조셉 프리스틀리는 1780년부터 버밍검에서 비 국교회계의 목사로 일했다. 프랑스 혁명을 지지한 일로 민중의 반감을 사서 실험실이 불태 워져버린 1791년까지 이 지역에서 성직에 몸을 담고 '루나 소사이어티'라는 자연학자의 연 구 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태양이 중심이 된다는 새로운 천문학을 펼친 코페르니쿠스를 잊어서는 안된다. 현 재 폴란드에 있는 토르니 출신의 코페르니쿠스는 이탈리아에서 유학하던 1503년 30세에 페 라라 대학에서 교회법으로 학위를 취득했다. 천문학도 물리학도 아니었다. 그는 법학박사 학 위를 받았다. 귀국한 후에도 줄곧 프라우엔부그르 대성당 참사회원이기도 했다. 그는 천문학 자로서 급료를 받은 적도 예산을 받은 적도 한 번도 없었다. 우리들 시대에는 북경원인의 발굴에 입회한 고인류학자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데이야르 샤르뎅이 가톨릭계 신부였다는 것은 유명하다. 우리들은 즉시 과학과 종교를 대립도식 속에 끼워맞춰 보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성직가가 과학에 종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의외라는 인상을 갖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드레이퍼나 화이트의 저서에서 강조된 양자의 적대관계는 너무 과장된 경향이 있다. 근대과학을 확립한 것은 프로테스탄트였다는 사회학자 마튼의 고 전적 연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해도 서구학자에게 자연연구를 재촉한 동기 중의 하나로서 신학이 있었다는 것은 현재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코 페르니쿠스설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갈릴레오를 단죄한 로마 법왕청에서도 당시 코레지오 로 마노를 중심으로 많은 예수회 수사가 자연연구를 했다는 사실이 있다. 갈릴레오 제자 토리 첼리가 1641년에 피렌체에서 실험했다고 하는 유명한 진공실험(유리관에 수은을 채우면 76 센티 정도의 높이까지만 수은 기둥이 생기고 상부에는 진공이 생긴다는 실험)에서도 거의 같은 시기에 로마의 예수회 수사 아타나시우스 키르햐가 실시했다고 한다. 키르햐의 기상천 외한 '박물서'는 최근 아라마타 히로시가 '바로크과학'에서 소개하였다. 자연학자의 의외의 본직 자유로운 식객생활과 게다가 시간에 여유가 있는 교직, 그리고 얼핏 보기에 과학과는 위 화감이 있는 성직에 대해서 말했는데, 또 한 가지 중요한 직업을 얘기할 필요가 있겠다. 공 무원 등 공직자이다. 요즘에도 취미로 하기에는 이 일이 적합하다고 할 수도 있다. 2장에 등 장한 프랭클린은 마지막에는 펜실바니아 주지사였고, 이른바 마그데부르그의 반구실험을 실 시한 오트 폰 게리케는 마그데부르그시의 시장이었다. 이 실험은 금속으로 만든 반구를 두 개 합쳐서 안의 공기를 빼고 양방향에서 말이 끌도록 한 것으로, 구경꾼이 보는 앞에서 1654년 5월 8일에 실시했다. 16마리의 말이 끌어도 진공의 힘이 강해서(요즘 말로 하면 대기압이 강해서) 반구는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과학의 탐구 를 지탱해 온 직업은 지금까지 말한 것이 대표적인 것이다. 하지만 결코 이것으로 모든 것 을 이야기했다고는 할 수 없다. 유례가 드문 것을 몇 가지 소개하도록 하겠다. 첫 번째로 말할 인물은 네덜란드의 현미경학자인 레벤후크이다. 레번후크는 공식적인 교 육은 받지 않고 독학으로 과학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16세 때 암스테르담의 직물상의 점원으로 있다가 6년 후인 1654년에 고향인 델후트로 돌아왔다. 그 때의 상황을 드 크라이 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델후트로 돌아왔다. 거기에서 결혼하고 독립해서 직물점을 열었다. 이후 20년간 그에 관해서는 연이어서 두 명의 아내를 얻고, 대부분은 죽었지만 여러 명의 아이를 두었다는 것 이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이에 그가 델후트 시공회당의 문지기로 일했 다는 것과 또 그가 유리를 연마하는데 많은 애착을 가졌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즉 사람들 입안에 수많은 미생물이 존재한다는 것 등 미시적 세계의 신비한 여러 가지를 과학의 새로운 무기인 현미경을 사용해서 보여준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현미경학자가 직물상인이며 문지기였던 것이다. 그에 관한 다른 전기에서는 델후트시 사법장관의 관리인 으로 1660년부터 99년까지 일했다고 되어 있는데, 아마도 관리인 일 중에는 문지기 일도 포 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둘 다 자연학자의 본직으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 일이라고 할 수 있 다. 레벤후크의 논문은 런던 왕립협회에 서간으로 보내져 '필로소피컬트랜잭션즈'지에 번역 되 어 게재되었다. 모든 업무가 끝난 후 저녁부터 늦은 밤까지 자신이 만든 현미경으로 관찰한 것에 대한 보고로 일생 동안 124편의 논문을 투고했다. 물론 최고 기록이다. 두 번째인 에드 먼드 하레가 81편인 것에 비하면 그의 왕성한 연구 의욕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말년에 회장이 되었던 뉴턴은 단 20편밖에 쓰지 않았다. 레벤후크가 죽은 지 3년 후인 1726년에 영국의 에딘버러에서 태어난 사람이 제임스 허튼 이었다. 에딘버러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지만 변호사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의학부에 다 시 들어가 3년 동안 공부한 후, 파리에서 화학과 해부학을 2년간 공부한 다음 이번에는 네 덜란드의 라이덴 대학에서 1749년에 의학박사를 획득했다. 24세 되던 해에 고향으로 돌아온 허튼은 개업의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유산으로 물려받은 버크샤의 작은 농장으로 옮겨가 농업으로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정력적으로 경작 방법을 개발하던 중에 지질에 흥미를 갖게 되어 마침내 1795년에 '지구의 이론'이라는 현재 지질학의 기초가 된 책을 출판한다. 그 후 프레이페어가 해설한 것을 현재 리프린트판으로 읽을 수 있다. 어튼은 손이 많이 가 는 농업과 자연연구를 양립시킨 보기 드문 예인데, 여기서 또 한 사람 벤트레이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버몬트주 제리코 마을에는 1865년에 태어난 윌리엄 벤트레이 를 칭송하는 비문이 지금까지 세워져 있다. 제리코가 낳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눈 결정의 권위자 윌리엄 에이. 벤트레이는 평범한 농 부에 지나지 않았지만 50년 동안 현미경 사진 기술을 개발해서 눈의 결정이 얼마만큼 완전 하고 신비한가를 보여주었고, 모두 육각형이며 여러 가지 아름다운 모양이 있다는 것을 세 상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벤트레이는 17세 때 현미경과 카메라를 선물받아 이후 약 반세기 동안 고독을 마다않고 눈이 내릴 때마다 열심히 촬영을 계속해서 그 수가 4,500장이 넘었다고 한다. '기상학회지 ' 등에 논문을 투고하고 계속해서 대학 연구자 사이에서도 알려지게 된 벤트레이는 위스콘신 대학의 교수로부터 "당신은 진정으로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라고 편지로 칭찬받을 정도였 다. 그 교수 이름이 스노우였던 것은 기적에 가까운 우연이었지만, 이 장에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의 직업에 관한 우연'과는 별도의 '의미부여에 의한 우연'이다. 문지기도 농부도 약 간 의외라고 느끼지 않는가? 이제 페러데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되므로 또 한 기지 예로 이 이야기는 끝내도 록 하겠다. 뉴턴 이후 천문학은 처음에는 태양계 행성의 궤도를 확정하거나 미지의 아스테 로이드 등의 탐색에 종사하곤 했는데, 차츰 천문학자의 눈은 태양계보다 훨씬 큰 은하계로 향하게 되었다. 1738년에 독일의 하노바에서 태어난 윌리엄 하셀은 18세기 굴지의 천문관측 가였다. 7년전쟁의 여파로 런던으로 1757년에 이주한 하셀은 오르가니스트를 비롯한 연주가 로서 생계를 이어나갔다. 천왕성을 발견하거나 항성천문학의 토대를 형성한 천문학자의 정 체는 음악가였던 것이다. 과학을 꿈꾸는 소년 마침내 페러데이의 일에 대해서 말할 단계가 되었다. 지금가지 말한 것과 같이 과학의 오 랜 역사의 대부분은 본직을 별도로 갖고 있는 자연학자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바꾸어 말하 면 관심과 여유가 있으면 어떠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도 과학에 참여할 수 있는 시대가 오랜 기간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18세기 말 나폴레옹 정권 하의 프랑스와 같이 국가가 제 공한 직위에 만족하는 직업 과학자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제 돈을 들여 실험기구를 살 필요도 없어지게 되었다. 페러데이가 살았던 76년간은 과학자라는 직업과 그 문제 많은 명 칭이 서서히 정착되어 가는 시대이기도 했다. 전자기학의 아버지 마이켈 페러데이가 과학을 자신의 업으로 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벤스 존즈가 1870년에 편집한 '서간집'에 수록된 편지를 읽으면서 되돌아보도록 하겠다. 마이켈 페러데이가 영국의 사리주 뉴잉톤에서 태어난 것은 1791년 9월 22일이었다. 벼락을 대지로 유인하는데 성공한 프랭클린이 애석하게 죽은 것이 1790년의 일이었다. 1834년에 '이퍼런 스 엔진'이라는 최초의 수동 컴퓨터를 완성한 찰즈 바베지는 다음 해인 1792년에 태어났다. 바 베지와 같은 켐브릿지 대학 출신 철학자로 1834년에 '과학자'라는 말을 발명한 윌리엄 휴 엘 은 1794년에 첫울음을 터뜨렸다. 페러데이가의 사람들의 직업을 한 번 살펴보겠다. 아버지인 제임즈는 대장장이로 마이켈 보다 3살 위인 장남 로버트가 그 가업을 이었다. 어머니 마가렛의 친정인 하스웰가는 농가 였다. 아버지의 백부와 숙부들의 직업을 큰형인 리처드부터 순서대로 말하면 지붕을 고치는 일, 농부, 도매상인, 잡화상, 구두 고치는 사람이었다. 서재가 있고, 거기에 자연학자의 책이 즐비하게 있는 집에서 산 사람은 누구 한 사람도 없었다. 페러데이 일가가 가난했던 것은 마굿간 2층을 빌려서 살았던 것으로도, 또 1801년에 빈궁자 구제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페러데이는 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과학으로 나아가는 길을 스스로 개척 한 것일까? "내가 받은 교육은 지극히 평범한 것으로, 읽기 쓰기와 산술의 기초를 학교에서 배웠을 뿐이다"라고 나중에 회고하였듯이, 교육기관 속에서 그 재능을 개화시켰던 것은 아 니었다. 가까운 그랜드포드 2번가에 있는 조르주 리보의 서점에서 점원으로 일한 것도 대부 분의 친척과 마찬가지로 기술을 익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서였다. 과학자라고 불리게 되 기까지 그의 인생 역정은 이 책의 주제에 맞게 마치 우연의 여신 튜케의 변덕에 의한 것이 었다고 할 수 있다. 제본공이 되기 위한 고용살이는 1805년 10월 7일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대장장이 일도 양철직공도 아닌 제본직공 공방에 들어간 것이 그를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페러데이는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리보씨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무렵 나는 직접 제작하던 과학서 읽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마셋이 쓴 '화학 대화'와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에 수록된 전기 관련 논문에 열중했 다. 한 주에 몇 펜스 정도 내 형편에 맞는 범위에서 기구를 사들여 간단한 화학실험을 해보았는 데, 처음에는 유리관으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진짜 실린더를 사용해서 기전기 등을 만들거나 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월간 어린이용 이과 교재의 부록으로 있는 것과 같은 단순한 실험 기 구였지만, 당시에는 최첨단 과학이 이와 같이 점원으로 일하는 소년의 주변에 존재하고 있 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주변에 있었다는 것이 그만큼 미숙한 단계에 있었다는 의미는 아니 다. 오히려 과학과 대중과의 사이에 바람직한 직접 교류가 있었다는 의미로, 19세기 전반의 직업제도가 확립되지 않았던 무렵의 과학은 누구에게나 가까운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대로 페러데이가 제본직공으로 독립해서 여가나 일하는 틈틈이 실험과학에 빠져들었다는 것 은 아마도 자연의 섭리였을 것이다. 가끔 직장에 마셋 여사의 과학서가 있었다는 우연에다, 특히 이시대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문화적 상황이 페러데이에게 또 하나의 우연을 부여한 것이다. 후리트가 도셋 거리 53번지에 있는 테이탐씨 짐에서는 저녁마다 자연철학 강의가 열렸는 데, 나는 부모의 허락을 받고 들으러 갔었다. 이 강의는 길가나 상점 창에 달린 포스터를 보 고 알았다. 강의가 시작되는 것은 오후 8시. 입장료는 강의 1회당 1실링으로 대장간에서 일 하는 로버트형이 여러번 사주었다. 1810년 2월 19일부터 1811년 9월 26일가지 12회나 13회 이 강의를 들으러 갔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마그라스, 뉴턴, 니콜이라는 학자의 이름을 처 음으로 알게 되었다. 이미 '프랭클린' 장에서 지적했듯이,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강의는 대학에 이학부가 없었던 시대에 유일하게 과학을 가르치는 공공의 장이기도 했다. 귀족도 서민도 음악회나 서커스에 발을 옮기듯이 구경거리로서의 과학을 기대하며 간 것이었다. 다음해인 1812년에 는 고객 중의 한 사람인 단스씨의 호의로 페러데이는 인기있던 실험 강사인 헴프리 데이비 의 강의 티켓을 받아 기대에 가득 차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들으러 가게 되었다. 데이비 의 인기는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트레니어가 쓴 에이비의 전기에 의하면, 1801년에 왕립연구소의 강사로 부임한 데이비의 강의는 연구소의 간판이 되어 모든 계층 사 람들이 쇄도하였다고 한다. "문학자도, 자연학자도, 실용가도, 사색가도, 재원으로 칭송받던 여성도, 귀족부인도, 남녀노소 누구나 열심히 강연회장에 몰려 들었다. 그의 젊음, 소박함, 타고난 입담, 해박한 화학 지식, 완벽한 설명, 능숙한 여러 가지 실험, 이러한 모든 것이 많 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라고 트레니어는 적고 있다. 데이비 강사의 아름다운 눈에 매혹되어 제발 그 눈을 실험 도구 이외의 것으로 향하게 해 달라고 많은 부 인들이 팬레터나 러브레터를 보냈다고 한다. 말하자면 데이비는 이미 스타였다. 후에 데이비의 후계자가 된 페러데이는 확실히 미모라는 점에서는 데이비에게 뒤지지만, 실험과 강연의 탁월함에 있어서는 스승보다 뛰어난 명성을 얻게 된다. 그러나 데이비의 강 연을 수려한 필적으로 노트에 기록한 페러데이가 이 때 알게 된 것은 자신이 일개 직공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허드렛일이라도 과학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갖게된 나는 세상 물정 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앞 뒤 생각없이 그 때 왕립협회 회장이었던 조셉 뱅크스에게 편 지를 썼다. 물론 답장은 없었다. 이 때 페러데이는 자신이 무시당한 것을 슬퍼했을 것이다. 아마도 제본직공 일을 계속하 면서 그래도 17세기의 레벤후크나 18세기의 허튼의 흉내를 내어 시대가 해결을 요구하는 자 연학 과제에 몰두할 결의를 했을 거라고 생각된다. 그가 고용살이 시대에 만난 뜻을 같이하 는 친구인 아보트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이 시기의 페러데이의 심경을 엿볼 수 있다. 과학이라는 것은 확실한 현상뿐만 아니라 '내가 실험하고 있는 화학반응과 같은' 정묘 한 작용이나 효과에 의해서도 예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저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은 많이 있습니다. 단지 그것들을 어떻게 분류하는 것이 좋을지 우리들이 모르고 있을 뿐입 니다. 언뜻 보기에 부족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많은 사실이 간과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생 각해 보십시오. 뉴턴이 중력법칙을 연구하며 발견하고 세계가 회전하는 구조를 발견해 낸 계기가 사과 하나의 낙하였다는 것을.(1812년 7월 20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과학 문제가 많이 있는데, 마이크 어째서 빨리 답장해 주지 않는 겁니까?"라고 이전 편지에서 아보트군은 나에게 물었습니다. 친애하는 아보트, 그것은 나에 게는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시간. 내가 무엇보다 갖고 싶은 것이 시간입니다. 요 즘 신사분들이 쓸데없이 보내고 있는 시간. 아니 나날을 싼 가격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그것은 좋은 거래입니다.(1812년 9월 20일) 어려워서 대답을 얻을 수 없는 문제가 있지만 그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전기 과학은 오나결할 수 없겠지요. 철학자는 그러한 완결성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실패로 끝난다고 해도 말입니다. 곤란한 것은 아무런 지장이 되지 않습니다. 곤란한 정도에 맞춰 철 학자의 정신력에 가해지는 작용이 강해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1812년 9월 28일) 아보트와의 사이에 주고 받은 편지의 대부분은 페러데이가 여가가 있을 때 실시한 실험과 그 해석에 관한 것이었다. 실험 강연에 나가면 최첨단 문제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페 러데이는 사비를 털어 도구를 장만해서 그러한 문제 일부에 착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 다고 해도 제본 일은 힘이 많이 드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자주 시간이 없는 것을 불평 하고 있다. 흥미진진한 점은 마지막 편재에서 자신을 철학자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후 에 봉급을 받아 실험을 하게 되어서도 실험 철학자로 자처하며, 휴엘이 새롭게 도입하려 한 과학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점은 맨 마지막에 다루도록 하겠다. 1812년 10월 8일 고용살이를 끝낸 페러데이는 남 못지 않은 제본직공으로서 런던에서 가게를 연 프랑스 이민 드라로슈씨 밑에서 일하게 된 다. 근무 시간도 일의 양도 크게 늘어나 "지금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한(현재 그런 기회는 있을 것같지 않다) 철학은 단호히 그만 두고 시간이나 재산이 있는 사람들에게 밭겨 버려야 할 것같다"고 완전히 무기력해진 것을 친구인 허크스태블에게 쓰고 있다. 그가 말한 철학이란 물론 전기학이나 화학 등 과학 일반을 가리키고 있다. 즉 본직에 전념하고 과학은 그만둘까 하고 고민하고 있던 때였다. 그 때 엉뚱한 일로 사태가 호전되었다. 런던에 다녀 온 보람이 있게 되었다. 페러데이에게 관심을 가졌던 단스씨는 생각지도 않은 제안을 했다. 직접 데이비경에게 모든 것을 말해보 면 어떨까 하고 이야기한 것이다. 젊은 혈기로 너무나 높이 있는 뱅크스에게 실없는 편지를 보내 실패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았 다. 19세기를 대표하는 과학자 페러데이의 탄생을 결정지었던 일의 순서는 페러데이가 1829 년 당시를 회고해서 쓴 편지의 한 구절로 알 수 있다. 장사를 그만두고 과학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바램을 나는 내멋대로 좋지 않은 것이 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과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좋은 성격과 자유로운 마음을 가진 사 람이라고 내멋대로 상상하고, 그 바램을 억누르지 못하고 대담하게도 데이비 선생에게 직접 편지를 쓰고 말았습니다. 내가 과학에 깊이 빠져 있다는 것을 구구절절이 말하고, 어떤 좋은 기회가 있으면 저의 바램을 들어주십시오라고 솔직하게 적었습니다. 옛날 데이비 선생의 강 연을 들었을 때의 필기록을 깨끗하게 제본해서 동봉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선생님으로부 터 받은 답장인데, 이 편지와 함께 보내니 주의해서 읽어 본 후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저의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답장이 온 것은 1812년 말이었습니다. 1813년 초에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왕립연구소의 실험실에 조수 자리가 비어 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선생 님은 과학에 관한 일을 하고 싶다는 내 소망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주는 것과 함께 장래 희 망을 결코 버려서는 안된다고 충고해 주셨습니다. 선생님의 이야기로는 과학이란 무자비한 여왕과 같은 것으로, 아무리 그 여왕에게 몸을 바쳐도 금전면에서는 거의 돌아오는 것이 없 다는 것이었습니다. 철학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도덕적인 감성은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있 다고 내가 말하자 선생님은 웃으셨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바른 이해를 얻을 때까지 수년 간 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의 배려로 1813년 3월초에 마침내 실 험조수로서 왕립연구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는 선생님과 동행해 서 외국에 가게 되었는데, 실험 조수와 서기일을 맡았습니다. 1815년 4월에 영국에 온 후 연 구소 일로 돌아가 알다시피 현재까지 그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22세의 패러데이가 왕립연구소의 실험조수로 받은 최초의 대우는 주급 25실링의 봉급과 다락에 있는 주거용 방 두칸이었다. 데이비와의 강연 여행에서 돌아 온 해에는 30실링이 되 었는데, 연 수입은 약 78파운드로 이 액수는 제본 직공을 계속했다면 받을 수 있는 수입의 절반 이하였다. 물론 데이탐씨나 데이비경과 같이 유료 강연회를 개최하게 되면 부수입도 조금이나마 있지만, 일반적으로 말해 드물게 존재하는 과학의 연구직 봉급은 직공 계층의 봉급보다도 낮았다. 데이비가 비어 있는 자리라고 말한 곳은 사실과 달리 페인이라는 이름 의 전임자가 있었다. 데이비는 패러데이의 훌륭한 필적과 서기로서의 재능에 반해 페인을 해고한 것이었다. 패러데이는 1816년 1월 17일에 처음 강의를 시작한 후 매년 실험 강의를 하면서 런던의 자연학자 사이에 끼어 연구 실적을 쌓아 차츰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1826 년부터 금요일 저녁에 과학으로 대중을 이끄는 계몽적인 강연을 시작하였는데 1862년에 은 퇴할 때까지 계속했다. 이것은 현재 왕립연구소에도 이어지고 있다. 1825년에는 아이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강연을 개최했다. 이 강연은 어른들도 마음이 설렐 정도로 재미있어서 당시 신문에 의하면 왕족의 자녀, 저명한 학자, 아름다운 귀부인들, 과학 을 좋아하는 학생, 의사, 시인, 변호사 등 모든 류의 어른들이 아이들이라고 자칭해서 숨어 들었다고 한다.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 에드워드 황태자는 공부를 싫어하는 것으로 유명했는 데, 패러데이의 강연은 빠지지 않고 들었다고 한다. 패러데이가 전자기학의 여러 가지 법칙 을 발견해 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여기에서는 깊이 다룰 여유가 없다. 또 패러데이의 발견이 그의 첫 번째 공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데이비경은 처음의 친절하고 자애에 가득찬 선배로 서의 모습에서 차츰 변모해서 패러데이를 질투하게 되어 말년에는 두 사람 사이에 적지 않 은 분쟁이 있었던 것도 역시 지면 관계로 말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과학자라는 통칭의 성립과정 과학자라는 직업이 얼마나 불확실하고 우연에 지배받는 드문 존재였는가를 이해하고 있다 면 이 장의 역할은 거의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즉 과학이라는 인류의 중요한 유산은 그 대 부분의 역사를 통해서 이른바 전속 관리인을 두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사람 들에 의해 지켜져 왔던 것이다. 마침내 패러데이와 같이 과학을 본직으로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미 말했듯이 그들은 자신들을 철학자라고 불렀다. 칸트나 데카르트를 현재 우리들이 철학자라고 보통 부 르는 것과는 매우 다른 의미로 철학자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 석을 회전시켜 전기를 일으키거나, 알칼리염을 전기 분해하거나 하는 패러데이와 같은 사람 들의 실험은 자연의 깊은 곳에 숨겨진 신비를 밝히는 성스러운 일로 매일매일을 살기위한 봉급을 목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간 수입이 백파 운드도 안되는 대우에 불평 한마디 없었던 것이다. 일부 예외는 있었지만, 패러데이나 데이 비가 자신의 연구에서 얻은 성과를 이용해서 특허를 얻지 않았던 이유도 명백하다. 우리들 에게는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자연학자의 대부분은 특허를 얻는 것을 천한 것이라고 생각 했다. 지금은 보기드문 일이 된 이런 겸허하고 사심이 없는 태도는 라듐을 발견하고도 그 제조밥 특허를 받지 않은 퀴리부인 때까지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과학을 좋아하는 견습 직공이었던 패러데이가 마셋 부인의 입문서를 읽은 것은 이미 말했 었다. 실제로 과학과 대중 사이를 이어주는 일을 했던 여성 저술사가 또 한 명 있었다. 서머 빌 부인이었다. 알기 쉽고 재미있는 그 과학서는 당시 커다란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1834년 에 부인은 '모든 자연과학의 관계'라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가모후의 계몽서와 같은 자연과 학 전체를 살필 수 있는 책을 출판하였다. 이미 데이비를 대신하는 왕립연구소의 인기있는 강사로서 완벽한 여러 가지 실험을 대중에게 보여준 패러데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 있다. 패러데이씨 덕분에 최근 많은 수수께끼가 해명되고 여러 가지 전기의 존재가 확인되었기 때문에, 이 위대한 전기학자가 교묘하고 완벽하게 그 존재를 실증한 전기의 여러 가지 작용 형태의 우연 일치에 대해서 내가 대략적으로 정리해 보아도 지장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패러데이는 자신을 철학자라고 부르고, 서머빌 부인은 전기학자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통칭의 다양성은 이 시대 특유의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마다 부르는 것이 제각각인 것도 불 편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위험도 있다. 과학자라는 기능집단이 사회에 침투되어 온 과정 중에서 그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하 는 문제가 차츰 부상하게 되었다. 실제로 이 호칭 문제는 지금 인용한 서머빌 부인의 저서 에 대한 '퀴터리 리뷰'지에 게재된 서평 속에서 처음으로 활자화되어 나왔다. 익명으로 서평 을 쓰고 있는 것은 후에 패러데이와도 친교가 있었던 휴엘이었다. 머리말 부분에서 그는 여 러 가지 자연학자가 밀접한 관계를 갖기는커녕 점점 분리되어가는 경향이 있는 것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고 있다. 최근 모든 과학의 경향이라고 하면 오래전부터 분열과 세분화의 기운이 강해지고 있다. 옛날의 학식있는 사람은 지식의 어느 부분이나 넓고 충분하게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옛날에 태어난 스카리게르...들은 수학자인 동시에 고전학자이고 자연학자인 동시에 고대를 사랑하 는 사색가였다. 그러나 그러한 나날은 이미 과거의 것이다. 책의 학생과 사물의 학생과는 습 관도 감성도 서로 다르게 되어 있다. 홉스와 같이 도덕가가 수학 분야에 머리를 내밀거나, 또는 괴테와 같은 시인이 일시적인 기분으로 실험과학의 세계에 발을 내민다면 당사자의 강 한 거부로 경멸당할 수 있다는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미 지식의 해체는 마치 로마제국의 붕괴와 같이 진행되고 있다. 자연과학은 그 자체가 제한없이 분할되어 분할된 분야끼리의 교류도 끊어지고 있다. "한 명의 천재로 하나의 과학 을 처리할 수 있다"는 격언을 새롭게 채택해야 할 정도다. 수학자는 화학자를 외면하고, 화 학자는 박물학자를 무시하고 있다. 수학자만 하더라도 순수수학자와 응용수학자로 나뉘어 서로 티격대고 있다. 전기화학만 하는 화학자가 되면 보통의 화학분석은 다른 사람에게 맡 겨버리는 형편이다. 이리하여 과학은 통일성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기묘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물질세계 전체의 지식을 배우는 사람을 표현할 수 있을만큼 좋은 언어가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3년 동안 여름에 요크, 옥스퍼드, 캠브릿지 에서 개최된 영국과학진흥협회 총회에서 회원들은 이 명명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렵다고 서로 밀담을 나누었다고 한다. 이 말투는 누군가와 비슷하다. 그렇다. 과학의 전문화 경향에 경종을 울린 현대문화론의 명저 '헤라클레이토스의 불'의 저자 샤르가프의 문체다. 왓슨이나 크릭과 서로 경쟁하면서 이중나선의 수수께끼에 도전했지만,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21번째 의자에 앉아 있는 것과 같 은 형태로 노벨상 당선을 놓친 문인 기질의 생물학자 샤르가프의 어조와 꼭 같다. 휴엘의 이 평론은 멀리 150년 후의 과학계의 어려운 입장을 알아맞춘 것이다. 시대를 초월해 중요 한 의의를 갖고 있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순수수학자나 전기화학자 등의 전문가가 아닌 과 학 전반에 권위있는 학자를 어떻게 부를까? 휴엘은 역사에 남을 해답을 여기에 제시하고 있 다. 철학자라고 하면 의미하는 범위가 넓고 기품이 너무 높아진다. 그리고 고전학자나 형이상 학자나 유능한 코올릿지씨 등은 그런 사람들을 철학자라고 부르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인이라고 하는 것은 우습고, 게다가 이 단어는 영어가 아니고 원래 프랑스어이다. 어느 창의력이 풍부한 신사는 이런 제안을 했다고 한다. 아티스 트와 마찬가지 어미를 붙여 사이언티스트라고 부르면 어떨까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가공의 신사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형태로 휴엘은 '과학자'라고 번역되 고 있는 '사이언티스트'라는 말을 1834년에 창조했다. 그러나 그 외에도 후보가 없었던 것은 아 니다. 독일어의 내츄포쳐(자연연구자)를 영어로 직역한 내츄어-포커나 내츄어-피퍼는 어떨 까 하고 소극적으로 제안하기도 했다. 전자는 '자연탐색자' 정도랄까? 그다지 좋은 의미 가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후자 등은 '자연을 엿보는 사람' 정도로밖에 해석할 수 없 기 때문에 확실히 경멸의 느낌이 엿보인다. 결국 휴엘은 여러 가지 생각다 못한 결과 1840 년에 출판한 '모든 귀납과학의 철학'이라는 책 중에 '과학 전체의 개척자'를 사이언티스트 라 고 부르고 싶다고 확실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사이언티스트'라는 용어가 받아들여지기까지 100년 가까운 세월을 필요로 했다. 어미의 '이스트'는 직업적으로 기능은 있어도 시야가 좁 은 듯한 인상을 갖고 있다. 이 제안을 들은 자연학자들은 예외없이 모두 반대했다. 패러데이 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도 사이언티스트라는 새롭고 적절한 말이 나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프랑스어의 피직슨(물리학자)에 해당하는 말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피지스트는 듣기에 나 발음하기에나 딱딱하기 때문에 안됩니다. 저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아이음이 세 번이나 반복되는 것은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결국 패러데이는 일생 동안 자신을 과학자=사이언티스트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글 중에 '적절한'이라는 말은 입에 발린 말이라고 생각해도 틀림없다. 현재 우리들이 패러데이를 과 학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본인과 관련이 없는 우연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도 리 보의 제본공방에서 기적적으로 데이비의 조수가 되었다는 우연에다 더해진 이중의 우연인 것이다. 사이언티스트라는 귀찮은 이름은 그 때의 자연학자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혀 1910 년 경까지는 '과학하는 사람'이라고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예를 들어 '옥스퍼드 영어 사 전'의 1914년 판까지는 사이언티스트가 아니라 '맨 오브 사이언스'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과학은 차츰 국가 예산의 투자 대상이 되었고, 또 전세기 말에 신설된 대학 이학부가 마침내 전문적으로 우수한 이학박사를 배출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어 느새 직업으로서의 과학자를 꿈꾸는 것 자체가 드물거나 낯설지 않게 되었다. 그런 과학의 직업화와 국가 체제로의 참가로 인해 사이언티스트가 처음에 갖고 있던 비판적이고 모욕적 이기도 한 인상이 불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은 옛날과는 정반대로 철학자보다 과학 자에 문화적인 우위를 느끼는 경우가 많아졌다. 학자라는 말조차 정치가가 말하는 '학자 선 생'이라고 빈정대는 표현에 자주 사용되듯이, 반드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 요즘 에 과학자나 사이언티스트만은 반대로 언제나 올바른 가치를 가진 좋은 용어로서 품위를 지키 고 있다. 그러나 휴엘의 예언은 나쁜 방향으로 적중한 것같다. 현재 과학자의 전문 분화는 극단적 인 단계에 이르러 패러데이가 관여한 과학 분야 전체를 연구 시야에 포함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누구보다도 먼저 발견하는 공적을 세우는 것을 제일로 여기는 경쟁원리가 작용해서 그러한 공적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실험 과제가 우선시되 는 경향조차 생기고 있다. 현대 과학자들에게 있어서 예산 획득이 쉬워지고 업적을 늘릴 가능성이 있는 실험 계획을 세우는 것을 대부분 업무의 하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기호와 업무를 일치시킨 데라다 시대는 이제는 먼 과거의 일이 되었다. 회사 조직 속에서 일하는 샐러리맨과 같이 허겁지겁 실험을 반복하는 요즘 과학자들의 모습을 보고 패러데이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진리의 시종이라고 해서 일체 생활상의 이해를 도외시했던 패러데이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 늘날의 과학행위는 세속적인 목적을 가진 그다지 희망이 없는 직업으로 비쳐질 수도 있겠 다. 처음에 인용한 '일과 나날'의 저자 헤시오도스라면 지금의 과학자들 사이에 있는 약간은 가열된 경쟁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했을지도 모른다. 실험을 내일, 모레 미루지 마라. 실험을 하는데 게으른 사람이나 미루는 사람은 연구 예산을 채울 수 없다. 정력을 다할 때 비로소 실험은 잘 진행된다. 빈둥빈둥 미루는 과학자는 언제나 예산삭감 압력과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요코미츠가 창조한 무능한 소년 요시와 마찬가지로 요즘 과학자는 다락방에서 무언가에 홀려서 했던 일이 세상의 과대한 평가와 기대를 받게 된 것이다. 달마 가면을 새기는 즐거 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존경가지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갖고 있던 원초적인 무구한 기쁨과, 이해를 초월한 공감을 잃은 요즘에 는 자신의 취미인 것과 동시에 성스러운 천직이었다가 일상적인 업무를 반복하는 정도의 일 로 되어버린 사이언티스트라는 인연의 가면을 향해 축복의 말 한마디를 건네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당신 덕에 과학자가 되었다고 말이다. 페니실린의 우연 페니실린은 인류를 구한 마법의 탄환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이 항생물질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의 이야기는 과학 역사상 두드러진 우연 사건 중 하나이다. 오래된 것으로는 르 네 타튼의 '발견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을까(1955년)'에 우연 발견의 대표적인 사례로 되 어 있고, 최근 간행된 로버트의 우연 발견의 모노그래피 '세렌디피티'에서도 역시 보기 드문 우 연이 몇 번이나 더해진 에피스드로서 다루고 있다. 이 장에서는 우선 이 이야기에 들어 있는 우연에 대해 고찰하기 위해 매우 교훈적인 영화 작품을 잠깐 살펴보고, 계속해서 플레밍 서거 전후에 간행된 루도비치와 모로아에 의한 전 기와, 전통적인 신화 여러 가지를 폭로한 최근의 맥페렌의 논문에 근거해 연쇄적인 우연으 로 이름 높은 이 사건에 대해서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세상에서 말하는 페니실린 우연의 본질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던, 우리들에게는 새로운 우연 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고 싶다. 영화속의 '우연' 폴란드 영화에 '우연'(1987년, 키스로프스키 감독, 프로덕션 토르 제작)이라는 작품이 있 다. 이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겠다. 잘 알지 못하는 독자도 있기 때문에 이야기의 줄거리를 말해보면, 갑자기 여객기 좌석에 앉아 있는 청년의 모습이 비춰진다. 계속해서 청 년의 얼굴을 확대되고 화면 가득히 공포에 가득 찬 비명이 울린다. (이 장면이 주인공의 비 극적 결말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은 마지막까지 알지 못한다. 아무래도 불안한 시작이다) 때는 1978년, 바웬사가 이끄는 '연대'의 승리가 실현되기 전 부패한 공산당 정부가 아직 연명하고 있을 무렵의 일이었다. 우치에 있는 의과대학생이었던 위테크 도우고슈는 졸업을 앞두고 아버지의 부고를 듣게 된다. 위테크는 급히 고향으로 가기 위해 우치역으로 달려간 다. 바르샤바행 급행을 타기 위해서다. 매표소로 향하던 위테크는 선물주머니를 갖고 가던 부인과 충돌한다. 떨어진 주머니에서 동전이 굴러 떨어지고 카메라가 그것을 쫓아가는데, 그 동전은 부랑자의 구두에 닿고 멈춘다. 생각지도 못한 행운을 맞은 부랑자는 구내의 카운터 바에서 맥주를 사먹는다. 그런데 위테크는 표를 사자마자 발길을 돌리고 맹렬하게 개찰구로 달려간다. 그 때 위테크 덕분에 맥주를 손에 넣게 된 부랑자와 하마터면 부칟칠 뻔하지만 카운터 앞에서 스쳐 지나 날렵하게 개찰구를 빠져 나와 이미 출발하기 시작한 급행열차를 뒤쫓는다. 바지막 차량이 막 플랫폼 끝을 벗어나려고 할 때 위테크의 손이 문 난간을 잡는 다. 사실 부인과 부딫친 후 이 장면까지는 이 영화에서 3번 반복된다. 물론 각각의 경우에 세부적인 만남이 틀려서 90분 동안의 상영 시간 중에 위테크의 그후 인생이 어떻게 진행되 는지, 그 세부적인 우연의 진행 결과가 세 가지 다른 이야기로 전개된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위테크는 간신히 난간을 붙잡아 열차에 오르게 된다. 옆자리에는 옛 날에 지하활동을 했지만 투옥되어 어쩔 수 없이 전향한 초로의 남자가 앉는다. 이것이 인연 이 되어 위테크는 공산당원이 된다. 대학에 돌아온 위테크는 고교시절 연인이었던 츄시카와 재회한다. 진로가 달랐기 때문에 첫사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4년 동안이나 서로 소식이 없 었던 가녀린 몸매의 미인이다. 츄시카와 만나는 동안에 두 사람의 관계는 친밀해져 간다. 그 런데 츄시카가 지하출판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장래가 위태로와 관객은 불안해 질 것이다. 한편 위테크는 가끔 나간 중앙평의회에서 간부당원으로부터 환자들이 의사를 감 금한 채 농성하고 있는 병원의 인질을 구조하기 위한 절충 역할을 명령받게 된다. 누가 해 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운 나쁘게 어슬렁거리며 얼굴을 비친 위테크를 보고 자네가 적임자 라며 끌어들인 것이다. 위테크의 설득이 효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그는 강한 신념을 갖고 공산당원이 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거기까지 이른 것이었다. 우연히 책상 위에서 인질 들이 갇혀있는 방의 열쇠를 발견하고 쉽게 인질을 구출하게 되지만, 그는 점거자들에게 붙 잡히게 된다. 결국 경찰당국에 의해 석방될 때까지 갇혀있게 된다. 다음날 츄시카로부터 이런 책을 만들고 있다며 건네받은 잡지를 당원 간부에게 그것이 무 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채 보여준다. 츄시카의 동료가 활동 거점으로 삼았던 지하 인쇄소 는 당국의 급습을 받아 인쇄기는 압수당하고 츄시카는 위테크의 눈앞에서 연행된다. 경찰청 으로부터 심문을 받은 후 귀가조치된 츄시카를 기다리며 자초지종을 해명하려고 했지만, 배 신당했다고 생각한 츄시카는 버스를 타고 도망가버린다. 아파트까지 쫓아가서 문틈으로 오 해라고 말해보지만 위테크는 불쌍하게도 채이고 만다. 엄청난 재난을 당한 위테크는 처음부 터 자신의 입당을 권유한 당원 때문에 이런 사태가 발생했다고 원망하며 공항에서 탈당을 결의한다. 이것으로 첫 번째 이야기는 끝난다. 두 번째 이야기는 매표소에서 개찰구로 급히 달려가던 위테크가 맥주를 들고 있는 부랑자 와 부딫쳐 맥주잔을 떨어뜨린다. 1초 정도의 차이로 위테크는 열차에 타지 못한다. 걱정이 되어서 쫓아온 역원과 부딪친 후 도망치자-우리 사회에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즉시 경찰이 와서 그를 붙잡는다. 위테크는 유죄판결을 받고 교육형을 받게 된다. 형무소에서 만 난 스테판 신부의 권유로 위테크는 지하 활동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대학 학장의 아들도 비합법활동에 가세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위테크는 자신의 아파트 에서 집회를 개최하게 되고, 당국으로부터 미행을 받게 된다. 그러던 중 친구 다니엘의 누나 베라와 만나는데, 기혼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커지게 된다. 사실 베라는 당이 보낸 스파이였다. 아지트 장소나 단원 이름 등이 침대에서 부지불식간 에 누설되어 첫 번째 이야기와는 반대 입장이면서도 위테크는 같은 배신자의 오명을 쓰게 된다. 동료들은 체포당하고 지하활동 거점은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관객은 세 번이나 반복된다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약간 의외라고 느끼지만 또 한 번 위테크가 열차에 타려고 서두르는 처음 장면으로 되돌아간다. 부인과 부딪쳐 동전이 구르고, 그것을 주운 부랑자가 맥주를 산 후, 매표소에서 돌아 나오는 위테크와 부딪친다. 두번째만큼 강하게 부딪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도 위테크는 간발의 차이로 놓쳐버린다. 두 번째와 다른 점은 역원과의 트러블이 없고 전송하기 위해 따라온 올가 매트피신과 만 나게 된다는 점이다. 올가는 위테크의 의과대학 후배다. 처음에 사체 해부 장면이 있고, 거 기에는 작은 우연이 있다. 올가는 시체가 옛날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는 것을 알고 구토를 일으킨다. 그 선생을 증오하고 있어서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올가와 위테크 는 의국에서 근무하면서 결혼하게 된다. 올가가 임신한 것이 그 계기가 된다. 위테크는 당원도 되지 않고, 지하활동에도 관여하지 않고 안정된 지위와 평화로운 가정 생활에 만족해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학장 아들이 지하 활동으로 체포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의국의 젊은이가 위테크에게 탄원서에 서명해 줄 것을 부탁한다. 여기가지의 경위 를 모두 알고 있는 듯이 위테크는 정치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를 보이고 서명을 거 절한다. 학장은 아들 사건으로 사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위테크를 만나 리비아에서의 강 의를 자기 대신 해달라고 의뢰한다. 장래성이 있다면 리비아에 강의하러 가는 것에 기쁜 마 음으로 동의한다. 뜻밖의 출장에 아내 올가는 기뻐하지 않는다.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 해 예약하였던 항공 티켓을 취소하고 다음날 파리를 경유하여 리비아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 다. 그러나 이 변경으로 위테크는 영화 첫 장면에 암시된 폭발 사고를 당하게 된 것이다. 외국영화의 제목은 원어를 의역한 것이 많은데, 그 중에 이 '우연'이라는 영화는 원제를 그대로 직역한 것이다. 즉 '푸시파데크'라는 표제는 폴란드어로 우연이나 우발적인 사건을 의미하고 있다. 동사영인 '푸시파다치'에는 '달리기 시작하다' '부딪히다'라는 의미가 있고, 특 히 그 어근인 '파다치'는 '떨어지다' '구르다'라는 의미가 있다. 모르는 부인과의 사소한 충 돌 사건이 사실은 위테크의 모든 인생의 열쇠를 쥐고 있었다는 의미로, 사람의 일생은 예기치 못한 우연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작가는 전달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인생 항로는 생각지도 못한 계기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1881년에 태어난 플레밍이 페니실린의 발견으로 노벨의학생리학상을 수여받을 때까지의 인생도 역시 하찮은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 단 위테크에게 있어서는 모두 불행한 방향으로 그를 이끌어간 사소한 우발적인 사건이 플레밍에게는 다른 사람이 부러워할 정도의 행운을 불러오는 결과가 된다. 도대체 어느 정도 많은 우연이 반복되었을까? 계산하면서 일의 줄거 리를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플레밍의 우연 인생 1. 플레밍은 스코틀랜드 남서부 록필드에서 태어나 자랐다. 일곱 살 때 농부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소작지는 큰형 휴가 이어받게 되었다. 이복형제를 포함해서 휴로부터 보면 네 번째 동생이었던 플레밍은 런던에서 안과 의원을 개업하고 있던 둘째 형 톰에게 부탁해 상 경하게 된다. 사실 장남으로 태어났다면 휴가 그랬듯이 일생 스코틀랜드 농부로 지냈을 것 이다. 그런 의미로 재혼한 아버지의 두 번째 아들이었던 것까지 '페니실린의 우연' 속에 포 함되어 있다. 약간 억지같지만, 나중의 상황에서 판단하면 플레밍 이외의 사람이 발견했을까 어땠을까 하는 의심 때문에 출생의 우연도 주목하게 된다. 물론 '와쿠라바'의 우연으로 분류 된다. 2. 1899년에 보어전쟁이 일어나자 플레밍은 동생 로버트와 함께 지원병에 응모한다. 연대 의 훈련병으로 런던에 머물고 있던 중에 전쟁이 끝나버렸기 때문에 두 사람은 케이프 식민 지(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에 파견되지 않게 된다. 전사하지 않고 끝난 것까지 우연에 포함 시키면 그가 페니실린을 발견하기까지 수 백 페이지를 쓰게 된다. 그러나 연대에 들어간 덕 분에 플레밍은 사격과 수구 지도를 받게 되는데, 거기에서 실력을 발휘해 대표팀에 선발된 것이 후에 중요한 우연을 일으키게 된다. 3. 플레밍은 16세 때부터 아메리카 라인이라는 선박회사에서 하급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 었다. 물론 이대로 일생을 마칠 가능성도 있었다. 게다가 패러데이와 같이 연구자가 될 준비 를 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20세 때 백부가 죽은 후 250파운드(그의 첫 임금 으로 말하면 약 10년분)의 유산을 받게 된다. 형이 개업의로서 성공하고 있었던 것도 있고 해서 그 유산을 학비로 보태 런던의 의과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의하게 된다. 1901년에 시험 에 합격했는데, 백부의 죽음에 의한 이 세 번째 우연은 그의 장래 직업을 결정하는 중요한 우연이었다. 4. 런던의 의과학교에 진학한다고 해도 교육기관이 함께 있는 병원은 당시 런던에 12군데 나 있었다고 한다. 입학자격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그 중에서 다니고 싶은 학교를 선택할 수 있었다. 플레밍이 선택한 것은 세인트 메어리 병원이었다. 연대 시절에 수구 시합에서 이긴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사실 다른 병원에서 페니실린을 발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했다. 그는 12분의 1의 확률로 노벨상을 받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5. 플레밍은 1906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왕립외과대학과 내과대학 자격 시험에 합격해 의 사 자격을 얻게 된다. 그 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있었다. 세인트 메어리병원을 포함한 런던 시내 병원에 숙식을 제공받으며 근무할 수도 있었고, 형과 같이 개업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사격팀의 친구인 프리맨에게 있어서 플레밍이 사라지는 것은 아미테이지컵 우승을 놓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플레밍의 솜씨는 신뢰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의 학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런 이유로 프리맨은 자신이 일하고 있던 라이트박사 연구실 하급조 수 자리를 소개하게 된다. 적은 봉급을 받는 자리였지만 권유에 못이겨 플레밍은 이 연구실 에 배속되게 된다. 그런데 49년이나 거기에 있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6. 플레밍은 암로스 라이트 예방접종연구실에서 면역요법의 가능성을 확대하는 일을 밭고 있었다. 면역요법이란 왁찐을 사용하는 것으로 어디까지나 인체의 방어기구 활성화로 침입 한 병원균을 없애는 방법이다. 버나드 쇼의 친한 논쟁 상대였던 라이트와 부인은 살균제 사용을 극도로 싫어했다. 군부 의국을 중심으로 당시는 환부 국소를 석탄산등으로 소독살균하는 화학요법이 주류를 이루었 기 때문에 라이트에게는 많은 논적이 있었다. 넓은 의미로는 소독살균법과 같이 화학요법 (외부로부터의 인체에는 유해하지 않은 화학물질을 주입해 표적이 되는 병원균을 없애는 것 으로 감염증을 치유하는 방법) 연구에 포함되는 페니실린 등과 같은 항생물질 연구는 이 연 구실에서는 중시되지 않았지만, 라이트가 프랑크푸르트대학의 엘리히와 아는 사이로 1910년 에 개발된 항매독제(606번째로 효능을 발견했다고 해서 처음에는 '606'이라고 불렸던 현재 의 살바르산)를 제공받아 세인트 메어리병원은 영국에서 매독 치료의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된 다. 즉 플레밍은 면역요법과 화학요법의 다른 두 가지 연구전통이 교차한 드문 장소에서 일 하게 된 것이다. 7. 1922년 어느날 감기에 걸린 플레밍이 엠. 리소데이크티카스라는 균을 배양한 채 방치한 샬레 속에 자신의 콧물이 떨어져 그 부분만 균의 번식이 정지되어 투명해져 있는 것을 발견 했다. 즉 그 균은 콧물에 의해 죽어버린 것이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눈물로도 시험해 보았 을 때 항균작용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후 눈물이나 콧물에 포함된 활성물질은 리조 팀이라고 명명햇다. 이 연구는 페니실린 발견의 전주곡과 같은 것으로, 생각지도 못한 균(다 른 균에서는 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과 흔한 화학물질과의 만남이 실현되었던 점에 서, 흔한 균과 생각지도 못한 화학물질과의 만남이었던 페니실린의 사례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함께 연구하고 있던 아리슨 박사는 예상외의 성과를 얻은 원인을 관찰중인 균이 배양 되고 있는 샬레를 치우지 않고 방치해 두는 일이 많았던 플레밍의 덤벙대는 실험태도로 돌 렸다. 8. 1928년 9월 휴가에서 돌아와 실험실에 있던 플레밍을 조수 프라이스가 방문했다. '세균 학 체계'에 대한 논문을 쓰기 위해 포도상구균을 연구하고 있던 플레밍은 휴가 동안 씻지 않고 산만큼 쌓아두었던 샬레를 분류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크레졸 세정액으로 씻기지 않 고 여전히 균이 살아 있는 어느 한 샬레에 곰팡이가 발생한 것을 발견했다. 게다가 그 곰팡 이는 포도상구균을 용해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플레밍은 의학연구 클래스에 서 페니실리움 노타툼이라고 불리는 곰팡이 일종에 항생작용이 있는 성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1929년 2월 13일 발표하게 된다. 항생물질의 존재를 시사하는 최초의 논문은 이런 경위로 쓰여졌다. 샬레 안에 들어간 것 이 다른 곰팡이였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일부러 집어넣는다고 해도 크레 졸액 속에 들어갔다면 모두 없어졌을 것이다. 게다가 페니실린에 대해 양성인 포도상구균이 었기 때문에 중요한 의학상의 발견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9.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추출해서 정제하고, 의약품으로서 의 가능성을 조사하는, 뒤에 남겨진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을 여름가지 방치하고 있었다. 다리 를 절단하고 패혈증으로 빈사상태에 빠진 여성에게 농도가 연한 곰팡이즙을 국소 도포해서 실험해 보았는데 전혀 효과가 없었다는 것도 그 후의 진전을 막는 원인이 되고 있었다. 페니실린을 패혈증과 같은 감염증의 특효약으로 세상에 내보낸 연구자는 플레밍이 아니라 옥스퍼드 대학의 병리학자 플로리와 생화학자 체인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 그룹이었다. 체인 은 베를린 태생의 러시아계 유태인이었는데, 나치의 박해로 영국으로 망명한 사람이었다. 플 로리와 함께 짝을 이룬 체인은 리조팀을 조사하기 위해 연구 문헌을 조사하던 중에 1929년 에 플레밍이 쓴 논문을 접하게 되었다. 1936년의 일이었다. 페니실린의 분리추출과 화학구조 의 해석을 체인이 담당하고, 그것을 이용한 생물학적 검사를 플로리가 이어받는 공동 연구 가 시작된 것은 1939년, 즉 플레밍이 이미 잊어버리고 있던 논문을 쓴 해로부터 10년 후의 일이다. 여기에서는 체인이 어쩔 수 없이 망명하게 된 일이나 최초의 연구 대상이 플레밍이 젊은 시절 발견한 리조팀이었다는 것이 우연의 사건이 된다. 10. 1940년 5월 25일 농축 페니실린을 얻은 옥스퍼드 연구단은 기념할만한 최초의 동물 실험을 실시하게 된다. 포도상구균이나 연쇄상구균에 오염된 생쥐에게 페니실린을 주사하자. 다른 생쥐들은 죽었는데 주사를 맞은 생쥐는 쾌유되는 것이 확인되었다. 훌륭한 성공이었지 만 이것은 정말 식은땀 나는 우연이었던 것이다. 사실 제2차 대전이 한창이었던 무렵의 의 료기관에서는 실험용 모르모트가 부족하였다. 생쥐가 모르모트 대신에 사용된 것이다. 나중 에 알게 되었지만, 모르모트에 대해 페니실린은 강한 독성을 갖고 있다. 즉 일반적인 실험 조건에서 실패했다면 당연히 임상시험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항생물질 페니실린 의 탄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 이런 경우도 있었다. 농축 페니실린을 얻게 된 후의 일이었는데, 1942년 8월 5일 플레 밍에게 빈사상태의 뇌막염 환자가 이송되어 왔다. 플레밍은 플로리에게 전화해서 본인의 실 험실에서 만들 수 없는 페니실린을 나누어 달라고 부탁하고, 덧붙여 골수에 직접 주사해도 괜찮은지를 물었다. 플로리에게서 경험이 없어 모르겠다는 대답을 들었지만, 플레밍은 결단 을 내려 위독한 환자의 골수에 5천 단위의 페니실린을 주사했다. 그 결과 다행스럽게도 환 자는 완쾌되어 9월 8일에 퇴원하게 된다. 그렇지만 치료를 한 후 플로리로부터 전화를 받게 되는데, 걱정이 되어 고양이의 골수에 페니실린을 주사해 본 결과 죽어버렸다는 것과 사람 도 위험하지 않겠냐는 연락이 온 것이었다. 이런 아슬아슬한 위기의 엇갈림이 더해져 페니 실린은 인류를 구제하는 기적의 의약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우연의 강조 1945년 10월 25닐 플레밍과 플로리, 그리고 체인에게 노벨 의학상이 돌아갔다는 전보가 도착했다. 전기작가들이 나열한 여러가지 연쇄적인 우연 끝에 알렉산더 플레밍은 학계의 정 점을 차지하는 영예를 얻게 된 것이다. 계산 방법은 여러가지 있겠지만, 10건 정도의 우연이 더해져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 플레 밍의 반생은 확실히 재미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이후 50년 이상이 흐르는 동안 몇 번이나 반복해서 회자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왜 재이있을까? 맨처음 소개한 위테크의 이야기 같이 우연은 대개 불가피한 형태로 사람을 불행의 깊은 수렁에 빠뜨리는 경우도 있다. 그래 도 '인생은 우연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싫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저주하려고 해도 그 상대는 우연의 여신 튜케가 아니라 숙명과 운명의 여신 모이라인 것이다. 결과가 나쁘고, 그것을 되돌리고 싶어한다고 해도 우연 그 자체를 기피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 않을까? 우리들이 어떤 길을 걷는지 불확실한 우연 사건의 연속으로서의 인생항로 를 바라보았을 때 인간은 놀라기는 해도 결코 불유쾌해 하지는 않는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우연을 느끼는 심리기구까지 다뤄야 할 것이다. 위테크의 비극과 비교하면 우리들이 중요한 점을 잊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존과 같이 장남으로 태어나 록필드 에 남아 평생토록 농부였다고 해도 타고난 호기심이 개화되어 박물학자로서 유명해졌을 수 도 있다. 백부가 유산을 남겨주지 않았던 경우라도 선박회사에 오랫동안 근무하며 항해기사 자격을 취득해서 왕립학회의 해양탐험대에 들어가 미지의 섬을 발견했을 수도 있다. 또는 개업의사로 일하며 결핵환자가 암에 잘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내서 마루야마왁찐과 같 은 플레밍 왁찐을 세상에 남겼을 수도 있다. 영화이기 때문에 관객이 볼 수 있었던 주인공 위테크의 세 가지 인생과는 달리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의 일생은 어디까지나 단 한 번이고 반복할 수 없다. 플레밍의 이럴 수도 있는 다른 인생은 숨겨진 채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즉 어떤 것인가 하면 노벨상 수상이라는 인상에 남는 사건이 그 외에도 있을 수 있었던 모든 이접적 우연을 하찮은 것으로 여겨 이유없이 배제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출생부터 시작되는 일련 의 우연이 주목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간과할 수 없는 측면에 관한 선례들을 언급하 였다. 이미 알고 있었던 학설을 우연히 생각난 듯이 남긴 불쌍한 갈바니와, 프리즘의 분광실 험이나 사과에 관한 일화나 우연에 의한 기원을 강조한 뉴턴의 일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려 고 한다. 플레밍의 경우도 유사한 사정이 있어 새로운 지식은 우연에 의해 초래되었다고 하 는 철학을 의식한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계획없는 실험은 성령에 대한 죄악이다"라고 역설한 라이트 박사와는 전혀 다른 과학관을 갖고 있었던 것같다. 원래 우연에 관한 일화의 출발점이 그의 탄생으로까지 거슬러 올라 가는 점을 생각해보자. 도대체 누가 이런 터무니 없는 우연을 들고 나온 걸까? 사실 플레밍 자신이 그 장본인이었다. 1945년 여름에 하버드 대학을 방문해 박사학위를 수여받던 때 했던 강연을 문필가로 이름높은 모로와가 전해주었 다. 나는 지금부터 여러분에게 운명이 그 속에서 커다란 역할을 한 어느 이야기에 대해 말하 려고 합니다. 우리들의 생애에서 우연이 어떻게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가 하는 것은 정말 로 놀라운 것입니다. 확고한 이유도 없이 우리들이 결심한 것이나 또는 타인이 결정한 것이 우리들의 일생에 깊은 영향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순진하게 자기자신 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들은 인생이라는 장기판 위에서 움직 이는 장기의 말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의 일생을 예로 들어 생각해 봅시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어느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그의 어머니나 형들-이 그를 런던으로 보내지 않았다면 아마도 농부가 되었을 거고, 약간의 유산이 학업을 할 수 있도록 허락되지 않았다면 일개 사무원에 그쳤을 것이고, 또 암로스 라이트가 연구실에 들어갈 것을 권유하지 않았다면 세인트 메어리를 나 왔어도 다른 등급생들과 마찬가지로 틀림없이 개업의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유태인이 아니었다면 학교 선생님으로 만족했을 것이고, 상대성이론은 태어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멘델이 교직에 들어갈 수 있었다면 완두콩밭과의 인연도 없고, 유전법칙은 적어도 19세기에는 발견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전기작가 들은 이러한 인생 기로에서 만난 우연의 작용에 대해서 일체 다루지 않고 있다. 아마도 거 의 모든 과학자에 대해서 그 출생은 후에 달성될 공적을 생각하면 모두 우연의 사건으로 해 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밍에게 있어서만 출생의 운명이 강조되고 있는 것은 우연을 보려고 하는 의지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겠다. 우연을 찾아내려고 하는 의지는 발견의 결정적인 장면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맥페렌은 성장한 포도상구균의 콜로니(세균집단)에 곰팡이가 들어갔다고 해도 이미 만들어진 콜로니 는 결코 녹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야기대로라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즉 사전에 페니실리움 노타툼을 배양해 두고 항생물질의 분비가 활발해졌을 무렵 포도상구균이 들어간 다면 곰팡이 주변에 콜로니는 발육하지 않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의학사를 다시 쓴 페니실린 논문에 기록된 순서에서는 플레밍이 증언한 현상은 재연할 수 없다. 플레밍이 거짓말을 했을까? 본인의 실험기록을 상세하게 검토한 맥페렌은 휴가중에는 창문을 닫아버릴 공산이 크고, 창 밖에서 곰팡이가 날아들어올 가능성도 부정하고 있다. 그 렇다면 어디에서 기적의 곰팡이가 날아들어온 것일까? 포도상구균과 곰팡이 어느 것이 먼저 있었을까? 다른 전기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연구실 건물의 2층에 있었던 플레밍의 실험실 바로 아래 에는 곰팡이 전문학자인 라드슈가 있었고, 거기에는 문제의 곰팡이도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포자의 비산을 방지하는 설비는 전혀 없었고, 여름 더위 때문에 창문도 열어둔 채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대답은 두 가지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맥페렌의 해석이다. 라두슈 의 연구실에서 페니실리움의 포자가 2층까지 날아올라와 열어둔 플레밍 연구실의 문을 통해 포도상구균을 배양한 샬레에 들어간 것이다. 만약 충분히 성숙되어 있었다면 나중에 들어온 페니실리움은 용균할 수 없다. 그렇지만 우연히도 추운 날씨가 계속되어서 포도상구균은 콜 로니를 형성할 정도로 발육하지 않았다. 거기에 페니실리움이 떨어지면 이번에는 더운 날씨 로 되돌아가서 곰팡이가 성장해 활발하게 항생물질을 분비하고, 그로 인해 포도상구균의 성 장이 저해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다. 맥페렌은 기상청의 기록까지 조사해 날씨가 불규칙했던 것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한가지 해석은 포도상구균을 가져오기 전에 플레밍은 특별한 의도없이 라드슈로부터 받은 곰팡이를 배양하고 있었다는 가정 하에서 성립된다. 즉 휴가에서 돌아 온 플레밍은 조 수인 프라이스가 방문하기 전에 곰팡이가 있는 샬레에 포도상구균을 떨어뜨려 잠시 살펴보 고 있던 중에 곰팡이가 있는 부분에는 콜로니가 형성되지 않는 것을 관찰했다는 이야기다. 이 해석은 재현성이 있다는 점에서는 납득할 수 있지만, 플레밍이 논문 중에서 사실을 왜곡 한 것이 되기 때문에, 다시 말해 위대한 과학자의 증언을 의심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제 까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겨졌지만, 표면적으로는 언급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서는 가능성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확실히 플레밍을 포함한 과학자들 사이에서 우연을 무리하게 강조하고자 한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1955년 3월 18일 에 성바울성당에서 진행된 플레밍의 장례식에서 친한 벗인 씨.에이. 페넷은 식사 중에 다음 과 같이 말했다. 은 초가을날 아침 우리들은 자신들이 금세기 가장 위대한 인물의 면전에 있을 줄은 생각 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이 아름다운 대성당에 모여 전세계에서 천 재라는 환호를 받는 그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며 경의를 표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 다. 그의 위대함에 대한 찬사는 모든 곳에서 보내오고 있습니다. 그 연구에 의해서 그가 현 존하는 누구보다도, 아마도 과거의 누구보다 많은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했다는 것을 인식하 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경력을 살펴보면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많은 우연이 그의 인생을 엮고 있는데, 그 중 어느 하나라도 없었다면 아마도 그 정상에 오를 수는 없었을 겁니다. 직업의 선택, 의 학교의 선택, 세균학으로서의 전환, 암로스 라이트와의 만남, 그의 밑에서 이루어진 업무 내 용, 우연한 눈물 사건, 우연한 곰팡이 사건, 이런 모든 사건은 단순히 우연에 의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모든 갈림길에서 그의 생애의 나아갈 방향을 지시해준 신의 인도하심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눈물은 우연히 떨어진 것은 아니다. 명확한 실험 의도 하에서 떨어뜨린 것이다. 이점 은 어느 전기작가나 인정하는 것이다. 곰팡이에 대해서도 지금 말했듯이, 우연히 낙하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해석이 존재한다. 여기에서는 명백하게 우연을 찾아내려고 하는 불굴의 의지 를 느낄 수 있다. 그 외에도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이 책의 첫머리에서 소개한 우연의 원 뜻 '떨어지는 것으로서의 우연'이 결정적인 장면에서 나오고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진진 한 일이다. 그 밖에도 이 식사는 우연이라는 개념이 포함된 여러 가지 요소를 망라하기도 한다. 제5장에서 다룬 '우연으로서의 직업'이나, 다음 장 이후에서 말하게 될 '신의 개재'나, 노벨상으로 나아가는 코스만을 응시한 약간은 강인하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의미부여에 의한 우연'까지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다. 나는 플레밍에게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연구자(플로리와 체인)가 한 일을 칭찬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자신이 한 일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고 겸허하게 말한 것에서도, 또 페니실린 특허 신청에 욕심을 보이지 않고 모두 밝힌 것에서도 영예를 얻은 사람으로서 그가 취한 태도는 훌륭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가지 말해 온 페니실린 전설은 우연을 주제로 분석해 온 우리들에게 새로운 탐구 방향 을 제시해준다. 이미 제1장에서 예고한 대상을 두고 인간측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서 초 래된 우연이다. 다음 장에서는 어느 희극배우의 자서전을 단서로 해서 우연이 가진 중요한 기능인 '의미부여 효과'를 중심으로 생각하고자 한다. 신과 주사위 우연의 정체를 확인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탐구 여행은 이미 고개에 다다르고 있다. 여기 에서는 여러 가지 우연의 양상 중에서도 아마도 가장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양상으로서 우 연의 의미 작용에 주목하려고 한다. 의외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장의 주제 검토 를 희대의 명배우 찰리 채플린의 자서전에 포함된 일화의 한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에서 시 작하려고 한다. 채플린과 우연이라는 테마는 어딘가 색다른 것처럼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이 희극배우와 우연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우선 작은 에피소드를 소개하 는 것에서 시작하도록 하겠다. 우연한 자기발견 찰리 채플린이 런던에서 태어난 것은 1889년 4월 16일이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에 공개된 '독재자'에서 채플린이 희화화해서 연기한 콧수염을 가진 아돌프 히틀러 는 1889년 4월 20일에 태어났다. 4일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감히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러나 키스톤사 시대의 좌충우돌희극에서 탄생해가는 과정에는 생각지도 못한 우연의 배열이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채플린은 목소리가 망가져 여배우 일자리를 잃게 된 어머니 한나에 의해 이복형 시드니와 함께 빈민가에서 자라났다. 아버지가 술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이혼한 한나는 가난하지만 자부심있는 교육을 시켰다. 영화 '키드'중에 내일 먹을 빵도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찰리가 버려진 아이인 키드에게 테이블 매너를 가르치고 있는 장면이 있 다. 이것은 정말로 자신이 경험한 것이었다. 배고파 울상짓고 있는 어린애를 어머니는 혼자 서 몇 사람 역을 연기하는 즉흥 희극으로 달래주었다. 이상하게 울게 만드는 채플린 연극의 근원에는 지저분한 슬램에서 그의 어머니와의 함께 한 감춰진 생활이 있었던 것이다. 길가에서 떨어진 곳에 도살장이 있었는데, 양들은 우리들 집 앞을 지나 끌려가고 있었다. 어느날의 일인데 그 중 한 마리가 도망쳐 길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모습을 보고 구 경꾼들은 너무 재밌어 했다. 잡으려는 사람, 걸려 넘어져 구르는 사람, 금새 길가에서는 큰 소동이 벌어졌다. 양은 미친 듯이 도망치려고 날뛰었다. 나는 재밌어서 웃기만 했다. 너무나 우스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마침내 양이 붙잡혀 도살장으로 끌려가버리자 갑자기 클로즈업 되어버린 것은 오히려 그것의 비극적인 현실이었다. 나는 집으로 달려가 울면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 양, 모두 죽어요! 죽게 돼요!" 그 봄날 오후의 냉혹한 현실, 그리고 그것과는 모 순되는 좌충우돌하는 희극, 그것은 오랫동안 내 기억속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에피소드야말로 장래 내 영화의 기조-즉 비극적인 것과 희극적인 것이 결합된 것 이 나오게 된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머니의 가슴에 꼭 매달린 어린 찰리의 뇌리에 남겨진 광경은 양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 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런던시대의 자신에게 일어난 행복과 불행의 불가사의한 혼합을 미국으로 건너가 희극배우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스스로 깨닫게 된다. '문지기'중에 지배인인 나를 해고하는 장면이 있었다. 나는 지배인에게 어려운 사정을 이 야기하고 계속 일하게 해달라고 간청하면서 어린 아이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애절하게 판토 마임으로 연기했다. 나는 단지 익살스럽고 우스운 모습만을 보여줄 생각이었는데, 마침 그 때 옆에서 연습하던 것을 보고 있던 원로 여배우 드로시 다벤포트를 쳐다보니 글세 울고 있 는 것이 아닌가. "물론 웃기려고 하는 건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웬지 눈물이 나서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이 한마디는 사실 내 자신이 이미 느끼기 시작한 것을 정확하게 증명해 준 것이었다. 즉 나라는 인간은 웃기는 것만 아니라 울릴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여기서는 인간이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개입하는 우연을 말하고 있다. 어 렴풋하게 느끼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접했을 때 채플린은 자신을 재발견하게 된다. 우리들이 만약 다른 사람과 접촉하지 않고 자랐다면 자아를 발견하는 것 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인도 미드나플 고아원에 올 대까지 늑대에게 키워졌다고 하는 소녀 카마라가 1924년 추정 연령으로 18세가 되었을 때 처음으로 '나는' 이라고 떠듬떠듬 발음 할 수 있었던 것은 늦게나마 인간사회 속에서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특수한 예를 들지 않더라도 정신과 의사인 라칸에 의하면, '거울 속의 나'를 처음으로 발견한 유아는 자기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게 되어 자기 인식이 가능한 가시적 자 아의 단계로 이행한다고 말한다. 신기한 거울과의 만남이 자아 각성으로 연결되는 것과 마 찬가지로 사회나 공동체가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도 새로운 자야발견을 재촉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자연학자나 다른 사람에 의한 반응 속에서 그때까지 몰랐던 자기의 일면을 인식해 그것을 과학 논문으로 한 예가 한가지 있다. 제5장에 등장한 원자론 화학자 돌턴의 신상에 일어난 사건이 그것이다. 롱스델이 쓴 전기에 있는 일화에서, 돌턴은 퀘이커 교도인 어머니의 생일 선물로 새빨간 양말을 선물하게 된다. 어머니는 놀라서 "꼭 익은 체리같구나"라고 당황스런 반응을 보였는데, 연한 갈색 양말을 사려고 했던 돌턴은 어머니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돌턴에게 있어서 체리색과 연한 갈색과는 큰 차이가 없는 색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은 형인 조나단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그는 자신을 포함한 일부 사람의 색 감각이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777년에 '필로소피컬 트랜잭션즈'지에 게재된 하다트의 논문에서 유사점을 발견한 돌턴 은 1793년 10월 3일에 실험대상자인 해리스 일가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고안한 색감각 테스 트를 받아보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것은 돌턴을 포함한 인구의 4%(현재 수치는 약 8%) 정도의 남성은 요즘 말로는 적녹색맹에 속하는데, 그들에게 "월계관 잎의 표면은 적 색 봉랍과 같은 색을 띠고 있고, 뒷면은 연한 적색에 가까운 색을 띤 것"처럼 보인다. 다음 해 10월 31일 돌턴은 이 성과를 맨체스터 문예철학협회에서 발표했다. 28세인 그에게 있어 서 과학계에 데뷔하게 한 이 연구는 우연히 알게 된 자신의 색 감각 분석을 테마로 한 것이 었다. 현재도 색맹을 돌터니즘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우연과 확률 그럼 이야기를 다시 채플린에게로 되돌려보자. 채플린의 교류 상대는 자서전에 등장하는 사람만도 엄청나다. 아직 무명이었던 카르노극단 시절에 파리에서 극작가 드뷔시와 해후한 것을 시작으로, 도미한 후 무용가 니진스키와의 만남이나 윌슨 대통령을 비롯한 저명한 정 치가와의 회견 등 각각 이름을 열거하는 것만으로 20세기의 쟁쟁한 인명록이 완성될 정도 다. 물론 상대성이론의 아버지 아인슈타인이나 맨하탄 원폭 제조 계획의 중심인물이었던 오 펜하이머도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친햇던 사람중의 한 명으로 에스에프작가이며 문명 비평가이었던 에이취.쥐. 웰즈가 있다. 언젠가 웰즈는 내가 스스로에 대해 영감이 있는 것같이 느낀다고 말한 것에 대해 여러 가 지 의문을 제시했다. 그래서 나는 단순한 우연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해서 이야 기했다. 테니스 선수인 앙리 코세와 또 다른 친구 한 명과 셋이서 비아리치의 칵테일바에 간 일이 있었다. 바 벽에는 1부터 10가지의 숫자가 쓰여져 있는 룰렛과 같은 원반이 세 개 걸려 있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거의 농담식으로 나에게는 심령 능력이 있으니 세 개의 룰렛을 한 번 돌려 보라고 했다. 첫 번째는 9, 두 번째는 4, 세 번째는 7이 나올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세 개 모두 정확히 그대로 된 것이 아닌가? 그것은 백만분의 일 정도의 확률이었다. 하지만 웰즈는 그런 것은 단순한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연 도 자주 일어나면 그것은 연구 문제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또 한가지 소년시절 에 경험한 어느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웰즈는 이 이야기도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사람의 일생에서 여러 가지 우연이 있는 것은 조금도 드문 일이 아니고, 그런 일로는 증명할 수 없 다고 말했다. 채플린이 무엇을 말했는지 조금 정리해 보자. 우선 첫 번째로 웰즈가 주장한 '단순한 우 연'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생각해보자. 맨처음 룰렛판에 태해서만 이야기하면 1부터 10 까지 어느 숫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각각 동등하게 나올 가능성이 있다. 대수법칙에 따 르면 시행 회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10번에 1번 빈도로 9가 나온다. 채플린은 맞는 회수가 1 번 정도였다면 단순한 우연으로 인정했을 것이다. 그가 연구문제라고 기세등등했던 것은 예상대로 3회 연속 맞았다는 점이다. 이 우연은 첫 번째 우연과는 다른 우연이지 않냐는 것이다. 웰즈는 백만분의 일이라는 것은 과장이고 실 제는 천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냉정하게 반론했을지도 모른다. 자네가 이런 농담을 3년 동안 매일 계속한다면 약 67%의 확률로 최소한 1번은 신접한 것을 연기할 수 있고, 이 마 을에 그런 도박꾼이 1만 명 정도 있다면 그 중 6,7명은 자네와 같은 쾌거를 올릴 수 있을 거라고 빈정거리며 답했을지도 모른다. 우연을 확률 사상으로 보고, 특히 확률을 빈도에 의 해 해석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반드시 이런 논의에 이르게 된다. 확률이 제로가 아닌 한 어 떤 것이나 우연히 발생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채플린은 다름아닌 자 신이 지금 이곳에서 알아맞힌 것에 그런 단순한 우연 이상의 의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인생 그 자체를 이런 우연의 집적으로 받아들인 과학자의 발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강하 게 반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남프랑스에서 이런 무덤을 본 일이 있다. 무덤 앞에 미소를 띤 14세의 소녀 사진이 놓여 있고, 그 아래에는 한마디 '왜'라는 말만 새겨져 있었다. 이런 깊은 슬픔 속에서 대답을 구 한 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단지 위선적인 교훈, 그리고 고통이 주어졌을 뿐이다... 어느 과학자가 말했듯이 우리들의 존재가 단지 무의미한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나 로서는 아무래도 믿을 수 없다. 생과 사, 아무래도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로 단순 한 우연일 리는 없다... 그런 사실이 일어났다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반대로 일정한 부동의 어느 목적-우리들 이른바 3차원적 정신의 이해를 초월한 엄숙한 어느 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닐까? 여기에서 채플린은 정말로 중요한 지적을 하고 있다. 14세 소녀의 무덤에 새겨진 '왜'라는 말. 이에 대해 의사가 만일 사인을 조사한다고 해도 그것은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하 고 있다. 통계학자가 젊은 사람의 사망확률에 대해서 일반론을 이야기해도 거기에는 손톱만 큼의 위로도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사랑하는 우리 아이가 '왜' 죽었는지 물을 때 그 사람이 원하는 답은 결코 불의의 사고 원인이나 확률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기치 못한 슬픔에 휩싸인 사람은 소녀의 죽음의 의미를 묻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우연으로는 해결되 지 않는다.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우연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보통 우연과 필연은 서로 대립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매 우 복잡하다. 확률론의 입장에서 말하면 어떻게 될까? 어떤 사건 이(알파벳)가 발생할 확률 을 피(알파벳)라고 할 경우에, 피-1이라면 이는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피=0라면 이의 반대 사건이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이것은 0<피<1의 막연한 범위 속에 우연은 감추어져 있 는 것이 된다. 사건의 원인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즉 인과계열을 전제로 해서 생각한다면 0<피<1의 모든 확률에 대해서 사건 이는 우연히 발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채플린 은 단순한 우연이라고 부른다. 의미에 대해서 전혀 고려하지 않은 우연이다. 그런데 3차원적 정신의 이해를 초월한 존재(신이나 운명)가 명령하는 목적을 느끼게 하는 두 번째 종류의 우연이 있다고 채플린은 주장한다. 말해보면 0과 1사이에 몇가지 의미가 있는 특이점이 있 고, 거기에서 확률적인 인과의 축에 초월적인 목적의 축이 만나고 있다는 것이다. 대개는 피 가 끝이 없이 0에 가까운 소수인 경우이다. 우연과 필연이 대립하는 것처럼 우리들이 생각 하는 것도 사실 둘의 확률에 현저한 대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과성에 중심을 둔 자연과 학자의 필연과 목적성(유의미성)에 중점을 둔 채플린 등의 필연이 서로 용납하지 않고 직교 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몇 번인가 만난, 우연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사람의 충동은 단순 한 우연을 목적론적 견지에서, 인과적 필연과는 다른 초월적 필연으로 다르게 이해하는 것 으로 볼 수 있다. 즉 우리들의 눈앞에 우연히 나타난다고 하면서도 그것은 초월자의 목적의 지에 근거한 필연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고 싶어지는 우연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런 관점은 우연의 원뜻인 '낙하와 충돌'에서 파생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낙하 현상에 포함된 예측불허의 성질이 일상적인 인과의 연쇄를 끊어버림으로써 진부하지 않은 설명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일상의 풍경 속에서 의미심장한 우연의 소재를 실감 할 수 있는 의미부여 능력을 인간이 지니고 있다는 것은 대조적인 사례를 봄으로써 한층 이 해하기 쉬워진다. 정신과 의사인 기무라씨가 인용하고 있는, 분열증으로 진단받은 남성환자 의 체험 일부를 읽어보자. 사면거울의 무한 연쇄와 같이 어떤 확률로 모든 것이 가능한데, 지금 여기에 있는 나가 하나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불가사의하다. 어느 한가지 인식 행위를 했을 때 거기에서 나눠 지기 시작한다... 미래의 자신은 하나이지만 현재의 자신이 인식한 시점에서 나뉘어져 버리 고 과거를 되돌아보면 몇 명의 자신이 평행하게 있다. 다른 자신도 확률적으로 존재하고 있 는 듯이 생각된다. 이 남성에게 있어서 신상에서 일어난 사건은 모두 첫 번째 의미에서의 즉 단순한 무의미 한 우연이 되어버린다. 이것도 가능하고 저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현존하는 자신의 우연 의 존재와 같이 생각된다. 평범한 인간에게 있으나 그에게는 없는 것이 명백하다. 그는 세계 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자신이 관련된 행위조차 그것을 의미가 있는 사건으 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확률적인 우연 사건의 캔버스 위에 다양한 의미의 색채를 칠하지 못 하고 있다. 공시성 채플린과 웰즈의 회담에서 오간 우연론에 있어서 엇갈림은 22년 전 빈에서도 역시 저명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정신분석의사인 융이 스승으로 존경하던 프로이트와 차츰 결별하는 계기가 된 사건에 대해서 본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99년에 내가 빈에 있는 그를 방문했을 때 나는 이런 내용에 대해서 그의 생각을 물었 다. 유물론적 편견 때문에 그는 내 질문이 무의미하다며 응하지 않았고, 나는 그의 행동이 피상적인 독단에 의한 것이라 생각되어 날카로운 반론이 입에서 나오려 하는 것을 가까스로 참느라고 힘들었다. 이것은 그가 초심리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오카르트주의적' 현상의 사 실성을 인정하기 수년 전의 일이었다. 프로이트가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는 사이에 나는 기묘한 느낌을 경험했다. 그것은 마치 나의 횡경막이 철로 만들어져 있어서 벌겋게 달구어진 상태로 되어가는 것같았다. 그 순간 우리들 오른편에 있는 책장 속에서 매우 큰 폭발음이 들려서 두 사람 모두 물건이 우리 위 로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하고 놀라고 당황하면서 일어섰다. 나는 프로이트에게 말했다. "정 말로 이것이 이른바 매체에 의한 외재화 현상의 한 예군요". "오오"라고 그는 외쳤다. "그것 은 완전한 허구야". "아닙니다"라고 나는 대답했다. "선생님, 선생님이 틀리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말한 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잠시 후면 또 한번 그런 커다란 소리가 들릴 것 이라는 것을 예언하겠습니다". 역시 내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똑같은 폭발음이 책장 속에서 들렸다. 이것은 자신의 방에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분명히 놀랬을 것이다. 폭발음 이 있었던 것은 두 사람 모두 인정하고 있듯이 실제로 일어난 사실이었다. 석연치 않았던 프로이트는 집안을 조사해 옆방에 있든 떡갈나무로 만든 책장이 무거운 이집트 비석 때문에 삐걱거리며 커다란 소리를 낸다는 것을 알아냈다. 같은 해 4월 16일(채플린이 태어난 날이 지만, 이것은 단순한 우연)에 보낸 서간에서 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의견을 피력하고 있 다. 나는 맨처음 당신이 여기에 있었던 때에 그렇게 여러 번 들렸던 소리가 당신이 떠난 후 들리지 않게 된다면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발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그 후 몇 번이나 들렸고, 게다가 나의 생각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내가 당신의 일이나 당신 의 특별한 문제를 생각하고 있을 때에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현상이 나에게 있 어서 가지고 있던 모든 의미는 무언가에 의해 없어져 버렸습니다... 가구는 내 앞에서 아무 런 정신을 지니지 않은 생기없는 물체로 서있고, 그것은 자연이 그리이스 신들이 사라진 후 에는 시인 앞에 침묵하고 신을 잃고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프로이트는 이 사건에서는 융이 했던 의미부여를 인정할 수 없었다. 확률적인 우연, 무의 미한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반에는 그리이스 신들을 들먹이 며 그런 신의 관여 흔적은 없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우리들이 의미부여에 의한 우연이라 고 부르는 것의 존재를 프로이트는 마치 부정하고 있는 것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 버지의 역할'을 다하면서 쓴 이 편지의 후반부에서 프로이트는 자신이 61세와 62세 사이에 죽는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것과, 그리이스여행에서 머물렀던 호텔의 방 번호가 31호(62의 절반)인 것, 새로운 전화번호 끝자리 수가 62인 것을 인상깊게 기록하고 있고, 천지간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나고, 그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우연의 협조'에 의해 이루어진다 고 결론짓고 있다. 프로이트도 융도 단순한 우연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두 번째 우연. 즉 의미부여에 기인한 신비적 우연을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단 대상 세계에 주어진 우연의 의미는 체험한 본인 각자의 내적인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이 일화는 가르쳐주고 있다. 융은 중국사상에서 '도'의 개념도 자신이 말하는 의미 작용에 해당 하다고 하지만, 그의 일반적 주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인과성의 원리는 원인과 결과와의 사이의 결합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공시성의 원리는 의미있는 우연의 일치관계가 동시성과 의미에 의해 결합되어 있는 것을 주장한다... 의미라 는 것은 의인적인 해석이지만, 그래도 그것은 공시성에 불가해한 기준을 형성하고 있는 것 이다. 그 '의미'로서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인자가 그 자체로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들은 알 수가 없다. 융의 경우는 우연의 중첩에서 의미가 강조되고 있는데, 우연 전반에 대해서 인간이 부여 한 의미 범위는 꽤 넓은 것처럼 생각된다. 그 중에서도 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분류되는 카 테고리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의 신비성이다. 타인이었던 사람끼리 각자 전혀 다른 인과계열 에 속해 있다가 나중에 사랑에 빠지게 되는 두 사람의 해후는 인과성에 근거하지 않은 의미 를 부여받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로망 롤랭의 '피엘과 류스'에서는 지하철 속에서 우연히 시선을 나눈 것이 후에 사랑에 빠 지는 계기가 되고 있다. 혼잡한 지하철 안에는 그 외에도 많은 승객이 있었을 것이라는 등 멋없이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마음이 서로 통한 두 사람의 시선이 한 점에서 교차한 것에 독자가 공감을 느끼는 한 소설 기법은 언제까지나 유효한 것이다. 과학 세계보다도 허구의 세계가 우연을 연출하기가 훨씬 쉬운 것이다. 해리슨 포드나 캐빈 코스트너는 영화 속에서 죽을 것같지만 결코 죽지 않는다. 언제나 우연한 운명으로 위기를 벗어나는 줄거리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객은 그런 긴박한 상황에 포함되어 있는 우연을 감독이나 각본가 의 연출에 의한 필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영웅같은 인간에게만 허락된 신 의 배려와 같은 우연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우연 사건의 배후에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을 초월하는 존재의 배려나 계획을 읽어내는 습성이 우리들 관객 스스로에게 있기 때문이 다. 우연에 주어진 의미 그러면 우연에 대한 의미부여라고 말할 경우,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말하는 걸까?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그 의미란 인간 주체가 살아가는 것에 관련된 의미라고 생각한다. 물론 좋은 의미도 나쁜 의미도 있을 것이다. 전자의 예로서 다니가와 준이치로가 쓴 다음 시구를 살펴보도록 하자. 당신은 거기에 있다 따분한 듯이 오른손에는 담배 왼손에 화이트와인 잔 방에는 삼백명이나 되는 사람이 있는 데도 지구에는 50억이나 되는 사람이 있는 데도 거기에 당신이 있다 단 혼자서 그 날 그 순간 나의 눈 앞에 당신의 이름을 알고 당신의 직업을 알고 마침내 후로후키무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2차방정식을 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나는 당신에게 사랑을 느끼고 당신은 그것을 웃어넘긴다 함께 노래방에 가고 그렇게 해서 우리들은 친구가 되었다. 시인은 50억분의 1 또는 300분의 1의 우연한 만남을 자신의 일생에서 심오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회고하고 있다. "당신과의 추억이 나를 살아가게 한다"라고 마지막에 말했듯이 죽어 버린 이 상대는 이성이면서 시인의 영원한 친구였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1연에서 인용되고 있는 비유는 어린왕자와 여우와의 만남을 묘사하는 데도 사용되었다는 것을 환상적인 것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즉시 떠올렸을 것이다. 친구가 된다는 것은 300분의 1이라는 단순한 우연을 초월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나쁜 의미에 대 해서도 예로 들지 않으면 공평하지 않을 것이다. 속칭 오멘이라고 불리는 불길한 징후는 어 느 것이나 당사자에게 안좋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인과적 관련인 '의미가 있는 우연의 일 치'를 인정하는 융은 이런 예를 들고 있다. 융은 새를 죽음의 상징으로 보고 있다. 어느 50대 환자의 아내가 대화 도중 나에게 그녀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임종 때 몇 마리의 새가 영안실 창문밖에 모여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그를 '심장병' 전문의에 게 서둘러서 소개했지만, 그 전문의는 그를 진찰한 후 이상한 점을 하나도 찾지 못했다고 결과를 적어보냈다. 진찰한 후에 의학 소견을 주머니에 넣고 돌아가려는 도중에 환자는 길 에서 쓰러졌다. 그가 빈사상태에서 집에 갔을 때, 그의 아내는 이미 심한 불안상태에 빠져 있었다. 왜냐하면 남편이 의사와 헤어져 나온지 얼마 안되어 새떼가 집에 내려와 앉았기 때 문이다. 사람의 죽음과 새떼라는 일치는 할머니, 어머니, 남편 모두 세 번 반복되고 있다. 채플린 이 세 번 룰렛을 맞춘 것을 단순한 우연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면 이 여성이 경험한 우연도 어떤 의도(염라대왕이나 사신, 또는 무의식계의 원형)에 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행운이나 악운이나 우연 사건에는 관련된 사람에게 깊은 의미가 감추어져 있는 경우가 있고, 우리들은 그 감추어진 의미를 해석하는 습성을 키워 온 것이다. 우연과 점 우연이 자신에게 주는 의미를 추측하는 인간의 일은 어떤 경우에는 문화로 성립되기도 한 다. 예를 들어 우연한 사건을 신의 배려 즉 신으로부터의 메시지로 여기는 점술 등이 거기 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점술의 범위는 넓어서 옛날에는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는 신궁이 나 무녀로부터 길거리 점술사에 의한 개인 운세에 대한 예언까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개인 의 중대한 결정에 관여하는 우연의 예로서 샤르트르의 희곡 일부를 살펴보자 게츠 나는 신을 벼랑 끝까지 몰아붙여 보고 싶다. 만일 신이 나에게 진다면 마을은 불탄 다. 신의 책임을 이것으로 확실히 한다. 수천명의 생명, 너의 생명, 나의 생명의 의미, 그런 모든 것이 주사위에 달려 있다. 자! 걸어라. 만약 신이 네 편이라면 너는 아무 것도 염려할 일이 없다. 볼므스 마을을 불태워버리겠다는 결의를 게츠는 신과의 주사위 승부를 구실로 실행하려고 하고 있다. 즉 신의 의지는 주사위 눈이 되어 표현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듣고 있던 나스치 는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수법을 상대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여자인 카테리나는 용기를 내어 주사위를 던진다. 그 결과 나온 눈은 2와 1. 게츠가 질 확률은 36분의 1밖에 안된다. 하지만 "신이여, 당신은 드디어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게츠가 주사위를 던 졌을 때 놀랍게도 1과 1이 나왔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런 보기 드문 사건의 배후에는 우연 을 관리하는 신의 존재가 전제되어 있다. 더욱 더 가능성이 낮은 기적적인 주사위 눈이 나온 사례가 있다. 호세끼가 '법창야화'에서 예로 들은 '죽음의 주사위'에 얽힌 이야기다. 17세기 중엽 독일에서 실제로 있었던 미소녀 살인사건에서 랄프와 알프레드라는 두 명의 병사에게 혐의가 씌워졌다. 두 사람은 고문에도 자백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사위를 던져 진 사람을 범인으로 하는 신의 재판이 열렸다. 랄프 가 먼저 던졌는데 결과는 6과 6.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 한 알프레드가 이길 가능성은 없 다. 알프레드는 그야말로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는 땅에 엎드려 간절한 기도를 신에게 올 렸다. "내가 무죄한 것을 아시는 신이시여. 바라옵건대 신의 가호를 베풀어 주옵소서". 그리 고 그는 온 정신을 양손에 모아 주사위를 땅에 던졌다. 그런데 갑자기 소리가 나며 주사위 한개는 둘로 나뉘어져 버렸다. 한 쪽은 6을 나타내고 있었다. 또 한 쪽은 1을 나타내고 있었 다. 그리고 다른 한 개의 주사위는 6울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랄프도 역시 두려운 신의 뜻에 간담이 서늘해져 자신이 하수인이었던 것을 자백했다. 여기에서도 역시 주사위의 눈에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신의가 자주 우 연 사건을 통해 우리들에게 전해진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더욱 세월이 흐 른 뒤에 상황은 많이 달라지고 있다. 지드의 '바티칸의 지하도'에서는 더 이상 주사위는 신 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런 동기없이 살인을 저지른 직후 사생아 라프카디오는 열차에서 내려야할지 순간적으 로 망설인다.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도 제일 싫다"며 그는 주사위를 몸에 늘 지니고 있었는데, 6이 나오면 내리겠다고 결정한다. 주사위 눈은 5였지만 "어쨌든 내려야지" 라며 점을 완전히 무시하려고 하고 있다. 우리들이 사용하는 주사위는 거의 완전한 입방체로 그 대칭성 때문에 여섯 가지 눈이 나 올 가능성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웰즈류의 합리주의라면 게츠의 패배는 단순한 우연에 지나 지 않고, 법정에서 주사위가 나뉘어진 것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주사위를 구성하는 소재의 강도 한계에 의해 그 진귀함은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사위의 전신으로 그리이스 나 로마에서 사용되었던 아스토라가루스는 균질성이나 대칭성을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것 이었다. 사슴이나 양의 견골을 깎아서 만든 아스토라가루스는 네 개의 면만 위로 향할 수 있다. 뼈에 새겨진 1, 3, 4, 6의 네 숫자 중 던졌을 때 어느 숫자가 위를 향할 것인지 그 가 능성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추리할 근거는 전혀 없어서 마치 신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 이외에 우연히 대처할 방도는 없었다. 아스토라가루스는 네 개 던져 모두 다른 눈이 나오는 것을 '비너스의 패'라고 불렀고, 개의 눈(눈의 숫자가 1)이 나올 때마다내도 록 한 돈을 혼자 다 가질 수 있도록 한 도박이 유행했던 것을 우리들은 스에트니우스의 '로마 제왕전' 중에서 읽을 수 있다. 그와 같은 오락 도구에 사용되는 한편으로 군사행동이나 결 혼 의 길흉을 점치는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예를 들어 다섯 개의 아스토라가루스를 던져 1, 3, 3, 4, 4가 나온 것은 '제우스의 패'라고 부르며, '당신이 계획한 일을 담대하게 행하라' 는 탁의를 의미했다. 방황하는 인간에게 가장 좋은 길을 나타내 결단을 촉구하는 점은 그 외에도 많이 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중에 전쟁에 나가야만 하는가로 고민하던 피엘이 선택한 것은 트 럼프 점이었고, 오다 노부나가는 오케 골짜기 전투에 나아가기 전에 네츠다 신궁에서 동전 점을 했다고 한다. 또 중국 남부로부터 일기, 대ㅁ를 경유해서 전래되어 복술가의 가업이 되 었던 거북이 점도 크게 유행하였다. 거북이 등 뒤편에 홈을 파서 먹물을 집어 넣은 후 불로 구어서 표면에 우연히 생기는 균열 방향으로 길흉을 점치는 방법이다. 물론 역술을 빠뜨릴 수는 없다. 유명한 예로 원홍 3년에 오기섬을 탈출한 코우다이고 천 황이 후네카미야마에서 가마쿠라 함락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의 일화가 '태평기' 제11권 에 있다. 쿄토로 환궁할 것인지 신하들과 협의하고 천황은 직접 역점을 보았다. "스승을 만날 운, 스승은 바르고 덕망있고 훌륭해서 허물이 없음"이라는 결과에 만족해서 코토로 개선했 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전국시대의 아시카가 학교에서는 주역 교육을 참모가 될만한 인재 에게 실시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아마도 점이 꽤 성행했던 것같다. 그런데 이렇게 한 누구에게나 우연한 점이 실제로 일어났을까? 사마천의 '사기'의 '일자 열 전' (67)에는 점이 얼마나 기회주의 같은 것인지를 말해 준 일화가 남아 있다. 다음에 적은 것은 효무제 시대에 일어났던 점술 결과로 어느 날에 부인을 맞으면 적당할지를 점쳐 본 것 이다. 오행가(목,화,토,금,수의 오행의 운행으로 점을 친다)는 "괜찮습니다"라고 말하고, 감여가 (천도, 지도에 따라 점을 친다)는 "안됩니다"라고 말하고, 건제가(건과 제 나머지 12신으로 점을 친다)는 "불길합니다"라고 말하고, 총진가(12진을 따르는 선신과 악신으로 점을 친다) 는 "대흉입니다"라고 말하고, 역가(달력으로 점을 친다)는 "소흉"이라고 하고, 천인가(천인이 라는 신을 믿으며 점을 친다)는 "소길"이라고 말하고, 태일가(태일이라는 별로 점을 친다)는 "대길"이라고 말했다. 이만큼 다르다면 회의적인 인간이 아니더라도 신용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효무제는 오행 가의 말을채택했지만, 납득할 만한 이유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점이 일의 길흉을 정 확하게 판단할 수 있든 없든 우리들 인간이 우연 사건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해 온 것은 부 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근대확률론이 성립하기 이전 세계에서는 미래의 가능한 일을 얼마 만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까라는 계량적 측면보다도 64가지 괘 중에서 지금 이 괘가 나 온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는 의미론적 견지가 우세했었다. 융이 비판한 과학적 세계관 에서는 확실히 사물의 인과적 관련이 중시되어 다른 사상간에 성립하는 보편적인 인과법칙 을 탐구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서구에서 탄생한 근대과학의 담당자들이 필연성의 틀 속에 짜 넣을 수 없었던 사실의 단편을 단순한 우연으로만 취급할 수는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 마지막에 다뤄보도록 하겠다. 법칙과 신의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원래 자연현상의 배후에 신의 생각을 간파하려는 경향은 서구 근대과학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곤충의 치밀한 기관구조를 발견한 기초에는 반드시 제 작자인 신이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우주 구조를 조화로운 기하 도형으로 파악하고자 한 기 초에는 예를 들어 갈리레오가 '위금감식관'에서 말했듯이 "자연은 제2의 성서로 수학적인 언 어로 쓰여져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경험세계에서 보여지는 규칙적인 사건을 자연법칙의 이름으로 부르는 습관은 신이 결정하 신 규칙인 자연법에서 유래하였다. 법칙이든, 법률이든 서양어에서는 동일한 단어로 표현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자연법칙 개념이 성립될 때까지 사상의 변천을 다룬 볼케나우의 고전적 저작 '봉건적 세계상에서 시민적 세계상으로'(1934년)에서는 신이 제정한 자연법칙 이 모든 현상을 빠짐없이 지배하고 있다는 사상이, 중세 길드적인 수공업에서 매니팩쳐적(공장 제수공업) 생산으로 이행됨과 동시에 차츰 성장해 가는 과정이 극명하게 그려져 있다. 여기 에서 상세하게 설명할 여유는 없지만, 기독교적인 시각 일부가 과학에 특유의 인과법칙적인 사고 틀을 제공했다는 점은 많은 연구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우리들이 사는 이 세계를 질서있고 조화로운 세계로 보는 법칙적 세계상은,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얼핏 우연으로 생각되는 사상 사이에 과학적인 의 미를 알아내려고 하는 점에서 이 장에서 추구하고 있는 의미부여 작용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계몽주의 시대까지는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가 되어 마침내 괏 학 자체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차츰 나타나기 시작한 무렵에는 신의 생각에 대한 증인으 로서의 자연법칙이 아니라, 신의 관여에서 분리된 인과법칙 그 자체가 연구 대상이 되었다. 반복 가능하고 통계적으로 규칙적인 사상은 경험법칙이라는 이름으로 일괄되고, 그런 예측 가능한 경험영역을 우리들은 신과는 관계없는 필연론의 카테고리로 분류하고 있다. 주사위 눈이 6분의 1의 확률로 나온다는 멋없는 법칙은 전혀 상상이 미치지 않는 엉터리 세계에 질 서를 가져왔다는 점에서는 역시 인간측에서 의미를 투사한 결과 생겨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신이 은근히 무시되어버린 요즘은 본래 주어진 의미는 거의 인정되지 않고 있다. 채플린이 조우한 '단순한 우연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들은 마침 내 그 윤곽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첫 번째로 그것은 의미있는 무언가이고, 두 번째로 이제 까지 과학으로 해명된 인과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법칙의 배후에 옛날에는 인 정되었던 신의 개입을 보려고 하지 않는 근대과학의 태도에 대해서 채플린이 어떤 의미도 찾아내지 못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가 주목한 우연은 확률의 법칙과 같이 과학 에 의해 이른바 키워져 익숙해져버린 우연이 아니라, 존재의 심오한 신비를 폭로할 가능성 을 감춘 마성이 있는 우연이었다. 물론 이런 마성의 우연을 취급한 과학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이스의 피타고라스 이후 우주에 음악적 조화가 존재한다고 생 각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존재했다. 수와 음계의 신비주의는 우연히 접하게 된 자연학자에게 는 의미를 투사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행성이 타원 궤도를 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 천문학자 케플러는 1619년에 슨 '세계의 조 화' 속에서 우주 구조를 화성적 조화로 설명하고자 했다. 태양에서 본 행성의 각속도의 변 동 에 그는 착안한 것이다. 예를 들어 토성은 원일점과 근일점에서 106대 135 비율의 속도를 갖는다. 이것은 거의 4대 5가 되고 장3도의 음정에 해당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행성의 최대, 최소 속도비를 구하면 어느 행성이나 음계 일곱 개의 화성 관계 중 어느 것을 나타내게 된다. 당연히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광학 프리즘 실험에서 뉴턴이 발견한 우연도 역시 단순한 우연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무지개의 일곱가지 색깔은 음계의 7음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시광선의 스펙트럼이 무슨 색으로 보일까는 언어학에서 사피어와 워프의 가설에서 이야기되었듯이, 사람이 사는 각각의 언어문화권에 의한 상대적인 문제이다. 금세기 12음 기법이나 인도음악을 생각하면 음계의 주요 구성음을 일곱가지로 한정지은 것도 역시 문화적 상대성에 귀착한다. 따라서 음계의 7과 무지개 색의 7은 어떻게 보아도 우연의 일치이다. 하지만 뉴턴은 그렇게 생각하 지 않았다. 세울이 지나 19세기가 되자 여러 가지 원소가 계속해서 발견되어 원자량이 결정되었기 때 문에 화학자에게는 바쁜 시대가 열렸다. 그런데 음악에서 기묘한 우연이 발견되었다. 1866년 에 영국의 뉴랜즈라는 화학자는 런던 화학회에서 '옥타브 법칙'에 근거한 원소의 분량법 을 제안했다. 37종의 원소를 원자량 순서로 배열하면, 가장 비슷한 성질을 가진 원소가 일정한 주기, 즉 음계와 같은 7을 주기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밑바닥에 있는 의미를 해명하지는 못한 채 이 학설은 발표되었다. 이 학설이 자극이 되어 수년 후에는 러시아의 멘델레예프가 현재의 원소 주기율표의 원형을 완성했지만, 1890년대 에 헬륨이나 네온 등의 희귀한 가스가 발견되어 표 가운데 알맞은 장소에 놓여졌기 때문에 옥타브 법칙은 환상이었던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현재 단주기라고 불리는 반복성은 여덟 종류의 원소 그룹 사이에서 인정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비교적 새로운 연구에 이런 우연이 다루어진 예가 있어서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과학잡지 '네이처' 1984년 7월 12일에 있는 편지 논문 중에서 국립암센터의 하야시 시와 무네조우씨는 디엔에이의 염기배열을 음표에 대응시켜 기록 보존하는 것의 의의를 호 소했다. 유전자의 염기는 네 종류가 있기 때문에 각각 음계에 포함되는 적당한 네 음을 대 응시킨다는 새로운 시도였다. 전체를 음으로 변환시켜 들어보면 무미건조한 알파벳 문자열 을 음악적인 인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작업을 진행하던 중 우리들의 유전 자 일부가 쇼팽의 장송행진곡의 선율과 유사한 것이 판명되었다고 한다. 그 부분이 발암유 전자라면 흥미는 한층 더할 것이지만 거기까지는 알지 못한다. 현대과학에서도 무의미한 우 연을 유의미한 조화로 바구려는 시도는 건재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제 5장에서 다룬 이접적 우연에 대항하는 우연의 의미작용을 중심으로 이야 기를 진행했다. '이것도 있을 수 있다'라는 이접적 우연을 부정하고 그런 류의 단순한 우연 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어떤 의미'를 찾고 싶어지는 제 2의 우연, 신비하고 수수께끼같아 서 우리들에게 매력을 느끼게 하는 마성의 우연이 존재하는 것을 채플린의 전기를 실마리로 해서 이제까지 이야기했다. 규칙적인 필연성의 관계로 결정화할 수 없는, 탐구의 한가운데 있는 우연은 우리들에게 우연이 갖고 있는 최후의 성질을 알려준다. 근저에 있는 의미를 찾 아내고 싶어지는 우연은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창조성을 인간에게 주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에서는 우연과 창조성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유레카는 영원히 우연히 이루어진 발견에 관한 이야기는 꽤 여러 가지가 있다. 항간에 떠도는 발명, 발견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어딘가에 우연한 요소가 들어 있어서 뉴턴의 사과 이야기를 비롯한 유 명한 이야기들은 그다지 큰 의심없이 오랜 옛날부터 계속해서 구전되어 왔다. 아무래도 우 리들은 우연한 드라마를 사랑하는 것같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탈티니의 '악마의 기술'의 선율에 취하면서도 해설 속에 나오는 악마가 작곡자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하는 꿈의 일화에 관심을 보이고, 콜리지의 시 '쿠빌라이칸'의 현묘한 언어 흐름에 감탄하면서도 그것이 백일 몽이었다는 것에 깊은 감명을 느낀다. 치밀한 천문 계산 끝에 예상한 위치에 해왕성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보다도 항상 어둔 밤 하늘에서 빛나는 별들의 천문 사진 속에서 가끔 찍혀 있는 명왕성 발견담이 더욱 재미있다 고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뛰어난 예술작품이나 시대에 획을 긋는 과학의 성과 배후에 보기 드문 우연한 발견 이야기가 숨어 있다고 해도 그것으로 창조자의 위엄을 손상 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창조의 신비를 아는 중요한 실마리로서 우연은 종종 창조적 발 견과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목욕탕에서 뛰쳐나온 철학자 우연이 발견이나 창조의 대명사로서 회자되는 계기를 만든 한 오래된 이야기에 관해서 살 펴보도록 하겠다. 시실리섬에서 시작된 본서는 희한하게도 시실리섬으로 다시 되돌아가게 되었다. 우연 발견의 기원은 기원전 187년 무렵에 태어난 아르키메데스의 기담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어로 '유리스틱'란 말이 있는데, 이는 세간에 발견적 교육으로 불리는 것 으 로, 학생에게 필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중요한 점은 스스로 이끌어내도록 유도하는 교육을 말하는 것이다. 이 언어의 어원이야말로 2천년이 넘는 옛날에 아르키메데스의 입에서 나온 외침 '유레카'(알았다! 라는 감탄사)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에피소드지만 우선 이 이야기 부 터 시작하도록 하겠다. 기계학 등으로 유명하며 면적계산법을 확립한 아르키메데스는 히에론이라는 왕을 섬기고 있었다. 히에론왕은 국사가 잘 이루어진 감사의 뜻으로 신들에게 바칠 황금관을 신전에 두 기 위해 기술자에게 황금을 주어 황금관 제작을 의뢰했다. 그런데 완성된 금관은 왕이 전해 준 황금과 같은 무게임이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술자가 일부 황금을 빼돌려 같은 양의 은을 섞었다는 고발이 들어온 것이다. 히에론왕은 자신이 바보 취급을 당했다고 분해하면서 어떤 방법으로 이 속임수를 밝혀내 면 좋을지 몰라 아르키메데스에게 그 방법을 찾아보라고 명령했다. 아르키메데스는 이 문제 에 온 정신이 빠져 있었는데, 가끔 목욕탕에 가서 욕조 속에 들어가 있곤 했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의 몸의 부피만큼 물이 욕조 밖으로 넘쳐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이 문 제의 해결법을 시사하는 것이었기에 그는 기쁨에 넘쳐 욕조에서 뛰쳐나와 벗은 채로 집으로 돌아가 해답을 찾았다고 큰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그는 달리면서 계속해서 그리이스어로 ' 유 레카, 유레카'라고 외쳤다. 실제 사건이 벌어진지 200년이나 지난 후에 쓰여진 이 기록에서 아르키메데스는 왕관과 같은 무게의 금괴를 준비해서 두 개를 물이 가득 담긴 그릇에 담그는 실험을 실시했다. 넘 쳐난 물의 부피를 계산하기 위해 감소한 물의 양을 그릇에 더하자 왕관이 금괴보다도 많은 양의물이 넘쳐났다는 것. 즉 왕관의 부피가 크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마침내 기술자의 범죄 가 밝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탕에 담긴 물 이 넘쳐나는 것은 누구나 경험하고 있는 흔한 일이다. 그러나 넘쳐난 물의 부피와 아르키메 메데스의 '목 아래의 부피'가 같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떻게 그 런 것을 알 수 있었는지는 불가사의하지 않는가? 확실히 아르키메데스는 현재의 적분법에 가까운 고도의 수학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복잡 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몸의 부피를 미리 산출해 내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경험에 의해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면, 예를 들어 입방체와 같이 단순한 형태를 지닌 것, 즉 미리 부피를 확정할 수 있는 것을 담가보고 그 때 넘쳐나온 물의 부피와 비교해 보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래 그런 실험 계획이 아이디어로 떠올랐다면 오래 전에 집에서 실험해 보았을 것이다. 공중목욕탕에서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할 필요도 없었 을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부피만큼 물이 욕조 밖으로 넘쳐났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경험 에 의해 발견될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다. 아마도 선천적이고 원리적인 사고의 결과 이끌어낸 것일 것이다. '같은 장소를 동시에 복수의 물체가 차지할 수는 없다. 따라서 물 속에 들어있 던 아르키메데스의 몸은 점유한 공간만큼 물을 배출한 것이 된다. 따라서 그 분량의 물이 넘쳐난 것이.' 이런 식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 추론은 연역적인 것이지 경험에 의해 이끌어낸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추론이 자명할 정도로 올바른 것이라고는 결코 말 할 수 없다. 물탄 술 만드는 것을 생각해 보자. 미네랄워터의 분량과 위스키의 분량을 더해 도 둘을 합친 분량이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용해 현상의 경우를 생각하면 물체는 서로 침 투해서 혼합물의 부피는 단순한 산술 합계가 되지 않는다. 거기에 표면장력 문제가 있다. 아 리스토텔레스가 이미 지적했지만, 바늘을 세워서 집어넣으면 물속에 가라앉고 종이 위에 옆 으로 해서 그대로 물속에 넣으면 종이는 젖어 물속에 가라앉아도 바늘은 뜬다. 물을 넘치게 하는 경우에도 물체의 형상이나 집어넣을 때의 속도 등에 따라 넘치는 양은 일정하지 않다. 바늘을 하나씩 넣으면 한 방울도 넘치지 않게 몇 개라도 물속에 넣을 수 있다. 배제된 공간 만큼 딱맞고 정확하게 물이 넘쳐 흐를 보증은 없다. 그래도 부피를 계산하고 싶다면 오히려 그릇에 절반 정도 물을 넣고 그 때의 수위에 표시를 해두고 물체를 담근 후 상승한 수위에 또 표시를 하면 된다. 양자의 차이에 그릇의 단면적을 곱하면 배제된 물의 부피를 측정할 수 있다. 이 편이 훨씬 정확한 값을 얻을 수 있다. 그런 때문인지 우연의 심연에 가로놓인 창조적 지평에 착안한 아서케스트러는 아르키메데스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다시 썼다. 어느날 목욕탕에 들어갔을 때 아르키메데스는 그의 몸을 욕조에 담금으로 해서 수면이 옥 조에 있는 하나의 오점에서 다음 오점으로 올라간다는 익숙한 광경을 아무 생각없이 바라보 고 있다가 빠져나간 물의 양이 그 자신의 몸이 물에 잠겨 있는 부분의 부피와 동일하다-게 다가 그것을 저울로 단순하게 측정할 수 있는 것이다-는 생각이 전광과 같이 스쳤다. 그는 자신의 몸을 그대로 아무런 손상없이 녹인 것이다. 그리고 왕관도 같은 방법이 가능했다. 케스트러는 우연히 이루어진 일을 발견의 원천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특히 깊은 발견을 촉발하는 우연은 항상 복수의 사고 매트릭스의 교차에 의해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이 예에 서는 역학이라는 학문의 습관적인 규제에 지배당한 매트릭스(왕관의 문제 상황)와 목욕을 하는 것에 관한 일상의 매트릭스(아르키메데스 자신의 생활 상황)가 창조적인 교차를 이룬 것에 착안하고 있다. 매트릭스란 원래의 주형을 이르는 말이지만, 여러 가지 상황에서 우리 들의 사고를 성립시키고 있는 전제 사항이 하나의 결과로 틀을 형성하고 있는 경우 그것을 그는 매트릭스라고 불렀다. 케스트러가 말하는 우연이란 의미의 투사를 강요하는 것처럼 매트릭스의 접점에서 생겨난 것이다. 우연적으로 교차해서 충돌하는 매트릭스는 바로 그 때 창조의 불꽃을 흩날린다. 케 스트러는 창조의 우연을 원 뜻에 가까운 충돌까지 환원해서 보였다고 할 수 있다. 17세기 갈릴레오는 '부체에 대해서'라는 논문에서 수면의 변동과 단면적으로부터 부피 를 계산하고 있는데, 당시 그리이스어 교과서가 재발견되어 라틴어로 번역된 아르키메데스의 문헌을 읽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피 측정 방법을 아르키메데스의 것이라고는 말하고 있지 않다. 갈릴레오는 아르키메데스의 공적을 다른 실험에 돌리고 있었다. 세상에 부력의 원리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이것은 '액체중의 물체는 그것이 밀어낸 액체의 무게만큼 가 벼 워진다'라는 생각인데, 보통 아르키메데스는 이 원리의 발견자로서 알려져 있다. 사실 갈릴레오가 '위금 감식관'이라는 책 속에서 아르키메데스를 찬양하고 있는 것은 부 력 (어떤 물체가 기체나 물위로 뜨게 되는 힘)의 원리를 확립한 선구자였기 때문이다. 부피 측 정방법의 고안자로서가 아니었다. 갈릴레오의 추리가 맞다면 기술자의 범죄를 밝힌 결정적 인 실험은 부력의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 위트르위우스가 말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천 칭봉의 양 끝에 순금괴와 왕관을 매달아 둘을 그릇 속에 완전히 담그면 용적(물건을 담을 수 있는 부피)이 큰 왕관이 보다 강한 부력을 받기 때문에 천칭의 평형은 깨지고 왕관측이 들리게 된다. 이 실험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아르키메데스는 왕관 위조사건을 해결하는데 어떤 방법을 사용했을까? 가능성이 있는 방 법은 지금가지 소개한 세가지 방법밖에 없다. 넘치는 물에 의한 측정법(위트르위우스설), 수 위의 변화에 의한 측정법(케스트러설)과 천칭에 매달아 물에 담그는 측정법(갈릴레오설)의 세가지다. 아르키메데스에 대해서는 위트르위우스에 의한 전승 이외에 '플루타크 영웅전' 속 의 '마르케르스전'(14-19)이나 요하네스 체제즈의 '역사서'(제2권, 103행)등의 사료에 남아 있 는데, 어디에도 왕관문제에 대한 언급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가 지닌 선천적인 총명함을 자세히 설명한 다른 예가 기록되어 있다. 아르키메 데스는 카르타고측에 붙어 로마군과 싸웠던 히에론의 의뢰를 받아 태양빛을 반사하는 거대 한 거울로 적선을 불태우거나, 활차를 이용한 크레인으로 배를 들어올려 암벽에 부딪치게 하거나, 또는 지레의 원리를 응용한 투석기를 고안하는 등 과학 원리에 근거한 지식을 활용 해서 적군을 물리치는데 협력했다고 한다. 로마군의 입장에서 보면 귀신과 같이 두려운 탁 월한 군사기술자이기도 했다. 이런 아르키메데스의 발명은 모두 본인에게는 이미 자명한 것 으로 되어 있던 원리를 활용해서 얻어진 것이었다. 결코 시행착오를 거쳐 경험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반사경에 관한 이야기는 18세기에 박물학자 뷰퐁이 시험해 보았지만 실패했다. 아 무래도 허풍이 있었던 것같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전함은 이것을 막는 방도가 있을 리 없기 때문에, 강력한 병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키르햐나 파손즈가 실험해 보았지만 플루 타크의 기술대로는 재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왕관 문제로 다시 돌리자. 아르키메데스는 선배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자 연 학' 중에서 전개한 부체에 관한 이론, 즉 물건이 뜨느냐 가라앉느냐는 그 무체의 형상에 따 른다는 학설에 대항하는 생각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연구 결과 얻어낸 답이 부력의 원리 (부력은 형상이 아니라 밀어내는 물의 부피에 따른다는 설)였던 것이다. 이 원리는 넘쳐흐르 는 물을 본다고 해도 쉽게 떠올릴 것같지는 않다. 오히려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는 현실의 과제에 맞춰 이것을 응용하려고 한 것이다. '유레카'라고 외쳤을 때 아르키메데 스는 원리나 법칙을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부력의 원리를 사용해서 사기 를 폭로한 구체적인 방법, 즉 갈릴레오가 재현해 보인 실험 순서를 생각해냈다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물이 넘쳤다는 것에 이렇다할 의미는 없다. 20세기가 되어 푸앵카레가 욕탕에 발을 담그 는 순간 훅스 함수를 떠올렸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미 성숙한 이론적인 사고가 외부로부 터의 우연한 자극에 의해 활성화되어 단번에 결정화했다고 할 수 있다. 과학사학자 브라니 건은 예를 들어 이렇게 기록했다. 이른바 '우연적 발견'조차 한 순간에 생각지도 못한 인상을 환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이해도식에 의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버리고 만다... 명 확하게 동기가 있는 일련의 행위로서의 연구라는 존재야말로 사건을 우연이 아니라 우발적 인 것으로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르키메데스에게 있어서 '정수역학적 치환' 즉 욕조의 수위 변화를 의미있는 것으로 바꾼 것은 상대밀도 및 중량문제에 대한 연구였다. 이 설명의 후반 부분은 케스트러가 바꿔 쓴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생겨 난 오해이다. 브라니건은 안타깝게도 위트프위우스를 읽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전반 부 분에는 우연 발견의 중요한 특질 한가지가 지적되어 있다. 파스퇴르가 말했듯이 우연은 준 비되나 사람에게만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면 위트르위우스가 전해들은 이야기는 어떻게 해서 차이가 생긴 것일까?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역에 의존한 추론에 불과하지만, 벌거벗 은 채 질주하는 아르키메데스의 기행의 원인이 욕탕에서의 우연한 발견에 의한 것이라는 것 을 목격자로부터 전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대 시실리 일반인들 중에 부력의 원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우선 없다. 시라크사 이에서 가장 현명한 학자가 목욕탕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선천적인 사 고의 번뜩임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상의 발견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당연하다. 즉 목욕탕에 서 흔히 있을 수 있는 현상의 발견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욕조에서의 일반적인 경험과 현 자의 창조적인 순간이 만나서 이루어진 결과로 여겨진다. 우연의 창조성 '일과 나날'의 저자인 헤시오도스는 '신통기'의 머리말에서 자매인 9명의 여신 뮤즈들 을 103행에 걸쳐 찬양하고 있다. 뮤즈들이 헤시오도스에서 월계수 가지를 꺾어 지팡이를 만들 어 준 이후 그는 신의 노래를 부르는 능력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 시인은 창조성의 원천 을 천상에 사는 뮤즈들의 목소리에서 찾고 있다. 피타고라스에 대해서도 비슷한 관계가 성립한다. 직각삼각형의 빗변의 제곱이 남은 두 변 의 제곱의 합과 같다는 정리를 발견한 수 피타고라스는 소 100마리를 신에게 바친다. 여기 에서도 또 창조의 수맥은 신의 발밑에서 솟아나온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어느 예에서나 창 작이나 발견의 근원은 인간 개인이 아니라 신의 창조성에 있다는 기하학의 공리에서 연역 논리에 따라 이끌어낸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그 증명 자체를 이끌어내는 발견의 논리는 인 간측에는 존재하지 않는 다. 그 발견은 마치 언 듯 생각난 듯한 형태의 계시를 받은 것같은 체험인 것이다. 이런 흔치 않은 순간에는 마치 우연과 창조가 함께 있는 것과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창조성으로서의 우연과 마지막으로 만나게 된다. 뮤즈나 제우 스는 인간의 머리 위 천상에서 살고 있다. 거기에서 지상의 인간에게 영감을 줄 대에는 언 제나 연직 방향의 벡터를 갖는다. 이미 제1장에서 지적했듯이 우연의 원뜻은 낙하였다. 고대 세계에서는 마치 하늘에서 떨 어진 것같은 생각은 우연히 떠오른 생각과 같은 뜻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창조적 행위의 본질에 우연을 대입한 사상은 전통적이 사고의 틀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신적인 예술가라는 개념이 생겼다. 1561년에 '천재론'을 쓴 스칼리겔과 같은 사람을 제2의 신이라고까지 부를 정도였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창조적 인간을 신 과 같은 존재로 숭배하는 경향도 생겨났다. 그러나 과학 세계에서의 그런 천재는 우연 사건 의 그림자에 감추어진 자연의 신비를 간파하는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서, 과학 세계에서는 창조적인 발견 현장에서 우연의 작용을 제외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아르키메데스의 발견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창조의 근원인 신을 무시해버린 계몽주의 시대에는 우연과 창조성이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고 생각했 다. 새로운 지식은 외부세계에서 생각지도 못한 기회에 갑자기 나타나고, 그런 우연의 기회 를 놓치지 않은 사람이야말로 높은 창조성을 가진 사람으로 여겼다. 이 시대의 철학자들은 아르키메데스가 거인과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대항하면서 새로운 부체 이론을 탐구했던 것을 이미 잊고 있었다. 준비된 정신의 존재는 천재적인 빛나는 직감 때문에 덮이고 감추어 져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경험에서 우연성 그 자체가 새로운 지식 발견에 자연스럽게 연결 된다는 사상을 창출하기에 이르렀다. 제3장에서 말한 베이컨식 과학관이 바로 그것이다. 확 실히 과학의 오랜 역사 속에는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은 사람이 중요한 발견을 한 사례가 많이 있다. 예를 들면 꽤 오래 전 일이지만 남프랑스의 도르도뉴 지방에서 1940년에 발견된 라스코 동굴의 경우 크로마뇽인이 그린 동물 벽화를 발견한 것은 인류학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네 명의 장난꾸러기들이었다. 같은 선사시대의 유물인 북서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벽 화도 1879년에 역시 배경 지식을 지니지 않은 현지 목동이 여우를 쫓아가다 발견했다. 또 말라리아에 걸려 열이 펄펄 끓던 인디오가 안데스 산중에서 쓰러져 있을 때에 나무껍 질에 더러운 물이 담겨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마신 것이 계기가 되어 특효약인 키니네가 탄 생한 것도 완전한 우연이었다. 이렇게 우연이야말로 인류에게 새로운 지식을 전해준 원천이 었다고 생각게 하는 예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이미 등장한 뉴턴과 갈바니가 직접 그린 삽화 는 모두 창조적 상황에 불가피하게 개입한 우연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그 이유를 베이컨에 서 유래하는 창조적 발견의 우연 기원설에서 찾았다. 이 사상은 페니실린을 발견한 노벨상 수상 의학자인 플레밍에게서도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연에 의한 발견을 한 가지 방법론으로까지 높여, 직접 찾은 중요한 발견에 그것을 의식적으로 응용해 본 프리스 틀리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프리스틀리는 역사상 유명한 산소의 발견자 중 한 사람 이었다. 방법으로서의 우연 산소(그는 탈플로지스톤 공기라고 불렀다) 발견 후 6년이 지나서 쓰여진 '모든 종류의 공 기에 관한 실험과 고찰'의 제4권 제1부의 머리말에서 프리스틀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에서 나는 나 자신의 학문관의 핵심에 대해서 매우 명쾌한 형태로 말하고자 한다. 그 생각은 지금가지의 과학논문에서 제삼 말해 온 것이지만, 과학 탐구를 독려하는 커다란 힘 을 지니고 있는데다 몇 번씩 되풀이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는 견해라고 생각한다. 즉 과학의 운영에 흔히 있을 수 있는 기획이나 사전에 갖고 있던 학설에 이끌어지는 것보다도 우리들 이 우연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즉 철학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알 수 없는 원인에 의해 생긴 사건의 관찰에 유래하는 것이 매우 많은 결실이 있다는 견해이다. 우연은 과학 문제에 대해 서 종합적으로 기술하려는 사람의 일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탁월한 과학의 통찰력을 가진 것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의 일에는 그들이 뭐든지 숨기지 않고 분석적으로 기술하는 경우는 반드시 나타난다는 점에 대해서 나는 전혀 의심을 갖고 있지 않다. 본인이 말한만큼 그다지 명쾌하지는 않지만, 그가 우연에 의한 발견을 중시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전에 갖고 있던 학설 운운한 부분은 베이컨의 이도라설을 차용한 것으로, 아마도 극장의 이도라를 말하고 있는 것같다. 가설을 갖고 실험이나 관찰에 임하면 생각지도 못한 함정에 빠져 실패한다고 앞에서 경고하고 있다. 1774년까지 프리스틀리는 고 대부터 원소라고 여겨졌던 공기라는 물질에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밝혀내고 있다. 물론 그도 불가사의한 공기를 역시 우연히 알게 되었다. 뛰어난 화학자이며 자연철학 강사인 월타이어씨가 당시 가끔 켄에 왔기 때문에 직접 만나 공기에 대해서 나의 견해를 말하게 되었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알게 되지 못했을 것이다. (산화수은, 산화칼슘 등의) 많은 시료를 받았다. 나는 장치를 조립해서... 1774년 8월 1일에 산화수은, 산화칼슘 자체에서 어떤 종류의 공기를 빼낼 수 있었다. 연소용 렌즈를 사용했을 때 산화칼슘에서 기세좋은 공기가 발생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표현하 면 좋을까 알지 못할 정도로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이 공기 중에서는 밀랍이 활발히 타오르 는 것이었다... 프리스틀리는 순수하게 분리된 산소를 눈앞에 두고 정직하게 놀라움을 보였다. 실제 이 저작에서는 놀랍다는 표현이 꽤 여러 곳에서 보인다. 스스로도 경이의 묘사가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듯이 변명하고 있다. 독자 여러분, 내가 너무나 놀랍다는 같은 뜻의 표현을 반복한 것에 질리지 않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아직 조금밖에 놀라운 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험 순서나 과정을 미리 결정해 두지 않고 그 상황에 맡긴 우연에 의한 방법이기 때문에 프리스틀리의 연구에는 놀라움이 들어 있다.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라고 외친 것도 교묘한 착상을 영감으로 얻은 것에 대한 놀라움으로 언제나 창조적 우연에는 경이로운 감정을 동반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산소 추출 실험은 과연 어디에 우연이 감추어져 있을까? 본인에 의하면 종 모양을 한 유리 용기 속에 월타이어씨로부터 우연히 받는 산화수은을 넣은 기기 에 렌즈로 태양광을 비춰 가열해 투명한 공기를 얻을 때까지는 실험상의 관례에서 얻은 자 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런데 그런 직후 "어떻게 실험을 하려고 했는지 생각나지 않는 상태" 가 되어 "가끔 눈앞에 밀랍이 있었기 때문에 무의식중에 그 밀랍을 수수께끼같은 공기중에 넣었다"고 말했다. 과학철학자 마스그레이브는 이런 이야기는 자신이 갖고 있는 방법론에 현실을 무리하게 맞추려고 자신을 속여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프리스틀 리가 이 렇게 말하는 것도 밀랍을 미지의 기체 속에 넣는 실험을 이미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상은 모르겠지만, 프리스틀 리가 강조하고 싶어했던 것은 어느 것이나 산소 발견의 중요한 장면에 우연이 작용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연소를 촉진시키는 성질이 있는지 조 사하려고 밀랍을 넣었다면 그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고 말 하고싶다. 또 한사람의 산소 발견자인 라부아지에는 근대화학의 아버지로, 다비드의 제자로 저명한 화가였던 미모의 아내가 있었다는 것과 혁명정부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것으로도 유 명하다. 사형당한 이유는 납세청부인이라는 민중의 원망을 사기 쉬운 일을 하고 있었기 때 문이다. 어느 시대에나 세금을 걷어들이는 사람은 미움을 받는 경향이 있는 것같다. 그런데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와는 다른 방법론을 갖고 있었다. 우선 가설을 생각하고 계속해서 그 가설을 검증하는 실험을 연구하는 가설-연역법에 근거한 실증적 방법이다. 그는 당시의 주류였던 플로지스톤 이론을 대체할 새로운 학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중에 공적을 빼앗기 는 것을 막기 위하여 1772년 10월 그 경과를 기록한 논문을 봉인해서 아카데미에 보냈다. 정말로 용의주도했다. 라부아지에의 학설은 연소는 공기중의 양질 부분이 흡수됨으로써 발생한다는 것으로, 연소란 플로지스톤이라는 불의 원질이 방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플 로지스톤 이론과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즉시 공표되지 않았던 이유는 공기중에서 흡수 된 양질의 부분만을 추출해서 그 성질을 조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부아지에에 게 있어서 행운이었던 것은 1774년 가을에 파리를 방문한 프리스틀리 목사로부터 여름에 실 시했던 실험의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즉 산화수은을 사용하면 순수한 산소 를 얻을 수 있다는 귀중한 정보를 얻은 것이다. 프리스틀리의 말을 빌리면, 라부아지에는 영국의 친구를 환송한 후 '종합적으로 기술해 야 할' 산화수은 실험을 되풀이해서 산소 발견자의 영예를 얻은 것이다. 여기서는 상세하게 다 룰 수 없겠지만, 스웨덴의 약사인 세레도 역시 거의 같은 시기에 산소의 분리에 성공했다. 프리스틀리의 우연 철학은 지금은 아무도 지지하는 사람이 없다. 확실히 존 케이지의 피아 노곡 <4분 33초>의 경우는 전혀 연주하지 않는 피아니스트를 지켜보는 청중이 만들어내는 우연의 소음이 작품이 되고, 장 틴게리나 니키 드 상팔의 사격 회화에 이르러서는 그림 도 구를 굳힌 석고를 소총으로 쏘아 흩어진 색채가 이룬 우연의 무늬를 미적 창조로 보았는데, 예외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19세기에 이르러 파스퇴르가 면역학의 기초를 쌓은 것은 앞에서도 말한 준비된 마음이 있 어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우연을 만났기 때문이다. 방치하는 것으로 니와토리 콜레라균 의 독이 약해진 것은 다른 세균을 생각하면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것을 왁찐주사로 응용해서 예방의학으로까지 높인 사람은 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생리학자 헬므호르츠는 창조적인 작업을 세 단계로 나눴는데, 그 마지막에 우연이 있다. 1. 더 이상 앞으로 진전하지 못할 때까지 속행되는 최초의 탐구 2. 휴식과 회복의 기간 3. 예측할 수 없는 우연한 해결의 도래 창조와의 관계로 우연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잠자고 있는 탐구기구에게 각 성을 축구하는 하찮은 우연 사건이 첫 번째 단계를 경험한 사람에게만 창조적인 발견을 허 락하기 때문에, 우연히 생각지도 못한 행복한 발견을 하는 것은 하나의 능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옥스포드 영어사전'에 의하면 영국작가 호레이스 월폴은 친구 앞으로 보낸 편지 속에 서 '세렌디피티'라는 말을 창시해서 그런 능력을 표현하려고 했다. "옛날에 나는 '세렌디피티 한 세명의 왕자'라는 짧은 동화를 읽었는데, 왕자들은 여행을 하면서 항상 우연과 총명함으 로 지금가지는 얻을 수 없었던 것을 발견했다"고 쓰여져 있었기 때문에 엄밀히는 탐구로 얻을 수 있었던 것과는 다른 것을 발견하는 능력을 말하고 있지만, 지식인들에게 받아들여진 후 에는 '우연히 얻은 능력'이나 '발견 능력'으로 해석되는 일도 있듯이 우연을 활용하는 귀중 한 능력 일체를 표현하는 언어로 사용되게 되었다. 아르메데스의 '유레카'라는 외침은 한때 에드가 알렌 포우의 철학시 '유리이카'에서 영감 을 환기시키는 신이 함께 한 순간으로 새롭게 해석했는데, 현재 우리들은 넓은 의미로 '세렌 디 피티'라는 단어로 고대의 천재가 선천적인 발견 능력을 충분히 발휘한 순간을 이해하고 있 다. 우연이 창조의 문의 자물쇠를 열어 누구나 볼 수 없었던 지식의 보물을 놀랍게 개시하 는 그 때, 우리들은 어느 시대에나 '유레카'의 소리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우연이라는 불가사의한 언어 주변을 떠도는 여러 가지 의미의 단편을 주워모으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적인 사건에서 같은 시실리섬의 아르키메데스의 일 화까지 우리들은 탐구의 과정에서 그 의미의 카타로그의 다양함에 재삼 놀라게 된다. 원뜻 인 낙하로서의 우연, 거기에서 파생한 충돌과 교차의 우연, 야마토말로 고유한 것이었던 '와 쿠라바'의 우연과 그것을 보편화한 이접적 우연, 그리고 점과 예언과 관련이 깊은 '신의 개 재에 의한' 우연과 '의미의 투사'를 재촉하는 우연을 우리들은 차례차례로 만났다. 창조성 으 로까지 높인 우연까지 우리들은 왜 이렇게까지 우연이 매력을 가진 개념인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반드시 세계 어딘가에서 우연이 이야기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같다. 우연에 감추어진 것 중에 필연이나 인과성을 완강히 거부하는 힘이 있기 때문 이다. 필연의 성과는 우리들의 자유를 위협하는 경우가 많다. 자유롭고 싶다는 소망은 언제나 세계에 우연의 여지를 남기게 했다. 우주에 우연의 영역이 허락되는 동안 우리들은 미래에 무언가를 찾고 몽상에 잠길 수도 있고, 지나간 추억을 그리워하고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상 상할 수 있다. 즉 우연이란 인간 존재 자유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