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보는 눈 지은이 : 호미고메 요조 출판사 : 개마고원 제 1장 역사란 위기시에 나타나는 자각의 한 형태 앞으로 12개의 장에 걸쳐서 '역사를 보는 눈'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만 먼저 역사에 대한 관심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기로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역사를 보는 눈'이라고 했 지만 이에 관해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어쩌면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문제 자체가 또 너무 까다로운 것이어서 이 문제 하나만 을 풀어 나가자고 해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문제는 '역사를 보는 눈'이라 는 이 책의 전체를 통해서 하나씩 풀어 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러기 위한 최초의 실마리로서 '역사에 대한 관심'이란 문제를 먼저 이야기함으로써 역사란 무엇인 가, 즉 역사의 정체를 향해 접근해 보자는 것이 이 주제를 먼저 꺼낸 이유입니다. 그런데 제가 느끼기엔 최근 들어 역사에 대한 관심이 제법 높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최근 들어 역사에 대한 관심 이 상당히 높아졌기에 가능해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저는 역사에 대한 관심이 '최근 들어' 높아지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정직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일반적인 경향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최근의 수년 동안에 그러한 경향이 특히 두드려졌습니다. 가까운 예로 제가 일하고 있는 동경대학의 사학과를 높고 생각해보면 전후에 들어서면서 사학과 학생의 수가 놀라울 만큼 증가했습니다. 특히 제가 관계하고 있는 서양사학과의 지 난 2년간을 보면 예전 같으면 두 해 동안에나 들어올 만큼의 학생들이 한 해 동안에 들어오 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해에 들어오는 학생들의 수가 배로 늘어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물 론 이러는 데에는 그 나름대로 다른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 지 않다면 다른 어떤 이유가 있다 해도 학생들이 그렇게 배로 증가하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 았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역사에 대한 책들도 아주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 출판 사들이 다양한 형태로 대규모의 일본사나 세계사를 기획하고 있고 또 그것들이 서점에서 예 상 외로 잘 팔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에도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현실 이 반영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영화나 소설 같은 것들을 보더라도 역사물이 차지하 는 비중이 전과 같지 않게 아주 높아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흐름은 일종의 리바이벌 무드라고 정리해 볼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결코 아닌 것 같습니다. 그 한 가지 이유로서 제가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일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언제였던가, 가이온지 조고로(海音寺潮五限)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라는소설 이 신문에 연재된 적이 있습니다. 이 [사이고 다카모리]라는 가이온지 조고로의 작품은 상당 히 치밀한 고증을 거친 소설로서, 역사소설치고는 노력이 제법 많이 든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가이온지 조고로는 만일 이것이 소설이라면 그때 다카모리는 아 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이라는 투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이 소설이 아니었 구나 하고 그제서야 깜짝 놀랐습니다만 가이온지 조고로는 그 후로도 열두번이나 같은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가이온지 조고로는 아무래도 [사이고 다카모리]란 작품을 역사소설로서가 아니라 역사로서 쓴 것 같습니다. 그런 것도 모르고 그것을 역사소설로만 알고 읽었으니 변 명할 여지가 없이 되긴 했습니다만, 어쨌든 그 작품은 역사에 대한 관심이라는 현재의 문제 를 다시금 생각해 볼 하나의 계기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요컨대 역사소설을 쓰는 작가가 많은 사람들이 접하는 신문소설 속에서 논문에 버금가는 역사론을 펼치고 있다는 것은 통상 적인 신문편집의 상식으로 볼 때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소설도 논문도 아닌 역사소설이 일간신문의 소설란에 날마다 실리는 현상 앞에서 우리는 역사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뿐 아니 라 2년에 걸쳐 [아사히저널]에 연재된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郞)씨의 [파리는 불타고 있다]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파리코뮌을 다룬 이 방대한 역사 소설은, 문학엔 문외한인 역사가의 평가도 허락된다면, 소설로서보다는 역사서술로서 더 많 은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이에 대해 이 이 상은 다룰 여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예를 들어가며 지적한 역사에 대한 관심의 고조는 전후 우리가 살고 있 는 세계가 아주 커다란 전환을 이루었고 또 지금도 전환되고 있다는 사실과 매우 밀접한 관 련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선 첫째로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무 렵에는 전쟁 전의 역사교육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사람들이 새삼스레 우리 역사의 진실을 알고자 서로 앞을 다투어 역사에 의문을 던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전후에 전개된 여러 가지 상황도 역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일 조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전후에 한편으로는 그때까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태들이 속속 일어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갈 것 인가 하는 판단도 제대로 서지 않는 불확실한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앞 으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이제까지 역사가 어떠했는가를 알지 못하 고는 정확히 내려질 수 없다는 생각이 싹텄는데, 바로 이런 생각이 역사에 대한 관심을 불 러일으키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그러나 오늘날 날로 고조되고 있는 역사에 대한 관심을 단순히 이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 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미 많은 역사가들이 지적하고 있는 요인도 있겠습니다만, 그 무엇보다도 제2차 세계대전을 경계로 하여 우리가 이제 완전히 새 로운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는 사실이 점차로 분명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역시 긴 안목으로 전망할 때 그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사용되던 에너지의 변화가 각 사회의 발전, 나아가서는 역사 그 자체의 발전 을 규정한다는 사실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에너지의 발달이 역사의 발전단계를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오랜 옛날의 일은 제쳐두더라도 증기 에너지 없이는 산업혁명도, 19세기의 자본주 의 사회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비단 그뿐이 아닙니다. 그 후로 일어난 전기와 내연기관의 발달 없이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기에 이르는 역사의 발전은 도저히 설명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머물지 않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에 원자 에너지가 탄생됨으로써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위대한 에너지가 세상에 알려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만일 에너지의 발달이 역사의 발전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원자 에 너지에 의해 열리게 될 미래의 역사는 우리의 상상을 훨씬 벗어난 것이라고 감히 미루어 짐 작할 수 있습니다. 원자 에너지 그 자체가 도대체 어떤 사태를 초래할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말입니다. 역사의 미래를 놓고 지금의 시점에서 쉽사리 상상할 수 없다고 하는 까닭은 계속되는 에 너지의 발달과 그에 기초하는 기술의 진보로 인해 역사의 진전이 무서운 속도로 일어났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본래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약간의 무리를 무릅쓰고 비교를 하자면, 아마도 19세기의 10년은 20세기 후반의 1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 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이 점은 오늘날 세계가 19세기의 시점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정도로 좁아지고 있는 현실, 또 종래에는 원시문명의 단계에나 속하지 않을까 싶던 지역들이 급속히 근대 기계문명 속으로 편입되고 있는 사정을 떠올리면 어렵지 않게 이해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20세기도 저물어가는 현재의 시점에 서서 장래를 내다보며 무엇을 해야 할 것 인가 하는 문제로 헤매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 줄 압니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성취되지 않는 것이 또한 세상의 이치인 까닭에 어떻게든 장래에 대해 전망해 보 고 우리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우리는 단순히 현재만을 응시하는 데 머물 것이 아니라 그 현재가 생겨난 모태로서의 과거에 눈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현재가 아무리 급속하게 변해간다고 하더라도 과거와 단절된 현재란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습이 아무리 무서운 기세로 변해간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서 살고 있는 인간과 그 사회는 결코 몇 단계를 한꺼번에 건너뛰며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급격한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현대에 살고 있을망정, 아니 그렇기 때 문에 더욱 더 과거를, 역사를 되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날 역사에 대한 관심이 눈에 띄게 고조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급격한 변혁의 시대에, 바꾸어 말하면 일정한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역사에 쏠리는 관심이 가장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제가 전공하고 있는 서양사 분야 에서 두 가지 예를 들어볼까 합니다. 아주 넓은 의미에서 역사라는 학문이 태동한 것은 아주 오랜 옛날의 일입니다. 그러나 진 정으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가 출현한 것은 비교적 빠르다고 하는 서양의 경우에도 모든 학문의 출발점이라고 일컬어지는 그리스 고전기(기원전 4~5세기경)의 일이었습니다. 헤 로도투스, 투키디데스 그리고 폴리비오스가 그들입니다. 이 세 역사가는 각기 유명한 역사를 쓰고 있는데, 그들은 도대체 어떤 시대를 산 인물들이었을까요? 흔히 역사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헤로도투스는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의 아테네가 동 방의 대국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던 시대에 살던 인물로서 그가 남긴 [역사]는 바로 페르시아와 아테네의 전쟁, 그러니까 성격을 달리하는 동-서 두 문명 간의 결전이라 할 소 위 페르시아 전쟁을 주제로 하고 있는 책입니다. 아테네와 아테네가 주도하는 그리스는 이 대결전에서 승리함으로써 그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는데, 헤로도투스는 바로 그 극적인 긴장 의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투키디데스는 이 페르시아 전쟁을 거치면서 아테네가 전체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헤게모니 를 장악한 후 다른 도시국가들, 가령 테베나 스파트나 등이 아테네의 헤네모니에 도전해옴 으로써 빚어진 전쟁, 이른바 펠레폰네소스 전쟁에 몸소 종군하면서 그 역사를 서술한 인물 입니다. 그래서 투키디데스는 아테네가 전성기를 지나 그리스의 패권을 바야흐로 다른 도시 국가에게 막 넘겨주려고 하던 일종의 위기의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폴리비오스인데, 이 사람은 그리스가 로마에 의해 최종적으로 독립을 잃게 되 는 바로 그 시기에 태어나서 그리스 최후의 반(反)로마 운동에 직접 뛰어들었던 인물입니다. 이렇게 그리스 시대의 유명한 세 역사가들은 어느 사람이고를 막론하고 모두 얼마간의 의 미에서 하나의 전환기 내지는 위기 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 한 상황이 그들로 하여금 제각기 위대한 역사를 쓰게 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예는 고대의 경우에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만 지금까지 든 예보다 한층 커다란 전환기를 예로 들어볼까 합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고백록]이라는 책 을 서술한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사람이 고대 말기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고대 세계 가 멸망하고 새로운 중세라는 세계가 막 도래하려고 하는 바로 그 전환기에 살았던 인물입 니다. 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에는 바로 위에서 든 [고백록] 말고도 [신국론(神國論)]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신국론]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은 서양의 수많은 역사론 중에서도 역사의식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준 최초의 책이라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책입니 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책을 쓰게 되었던 것일까요? 우선 떠 오르는 하나의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원후 410년의 일로 게르만 민족의 하나인 알라리 크족이 이끄는 서고트족이 로마를 점령하여 로마를 철저하게 유린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로마의 시민 가운데 일부가, 이 야만족의 점령과 만행을 두고 로마인들이 기독교 를 신봉한 결과 로마의 옛 신들이 분노하는 바람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선전을 하고 다녔습 니다.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 교회를 대표하는 입장에 서서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점을 강력히 천명하고 나섰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 교회야말로 보이지 않는 천상의 나라, 곧 신의 나라가 지상에 표현된 것으로 이 교회가 수많은 고절을 겪는 가운데 마침내 인류 전체를 뒤덮게 될 때 비로소 지상의 교회는 천상의 신의 나라와 일체가 되며, 그때에는 역사의 종말이 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나아가 그는 이러한 교회의 발전에 서 로마인들이 할 역할은 없다는 것을 강력히 역설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 속에는 이교도 신들의 시대인 고대가 끝나고 그리스도 교회 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확고한 의식이 스며 있었습니다. 바로 이 런 의식의 면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와 중세의 전환기에 서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습 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는 야만족인 게르만인들에 의해 로마가 정복당하는 그 위기 국면 에서 이런 의식을 가지고 인류의 시작으로부터 그 종말에 이르는 역사에 나름대로의 전망을 제시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신국론] 역시 위기에 선 인간이 역사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고 하는, 역사가 태어나는 근본적인 계기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 겠습니다. 이런 점을 보여주는 예는 이것 말고도 얼마든지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서양의 실례 는 이 정도로 새두고, 이제 일본의 예를 들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고대 시대의 역사 서로서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이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일본의 고대국가가 확립되는 바로 그 시점에서 쓰여 진 것이며, 그리고 일본이 고대국가를 건설했음을 내외에 천명할 의도에서 쓰여진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줄 압니다. 이들 역사서들이 쓰여진 배경은 이런 의미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와는 반대라고 하겠 습니다. 다시 말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과는 정반대로 일본의 고대국가가 확립되었다 고 하는 바로 그러한 정황에서 쓰여진 역사서란 말입니다. 그러나 고대국가의 확립이란 사 건 역시 하나의 거대한 역사적 전환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볼 수 있기에, 그런 점에서는 일 본의 역사서들이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이나 서로 일맥상통하는 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역사에 대한 관심이란 것이 시대의 커다란 전환이라는 위기사태에 직면하여 고 조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더 상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봅니다. 오늘의 시점에서 고조 되고 있는 역사적 관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는 슈펭글러의 [서양의 몰락]이라는 책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은 그것이 세계적인 규모로 일어난 전쟁이었다는 의미에서 말할 것도 없이 대전(大戰)임에 틀 림없습니다만, 그러나 유럽을 중심에 놓고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유럽의 운명과 관련하여 아 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 전쟁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때까지 어느 누구도 학문적으로나 공상으로밖에 생각한 적이 없던 사회주의가 역사상 처음으로 러시아에서 실현되었다는 사실을 그 하나의 이유로 들 수 있겠습니다. 또 한 가지는 미국이라는 유럽 이외의 나라가 제1차 세계대전의 과정을 통해 유럽에 대해 강력 한 발언권을 획득하게 됨으로써 그간 유럽이 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던 중심적인 위치가 급격 히 허물어지는 사태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결론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한편에서는 사회주의 국가로서 소련이 성립되었고, 다 른 한편에서는 미국의 영향력이 급속히 강화됨으로써 유럽의 중심적인 위치가 크게 흔들리 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태에는 선견지명이 있는 철학자라면 누구나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슈펭글러가 남들보다 좀 더 민감하게 느꼈기 에 [서양의 몰락]이라는 역사서를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서양의 운명에 대해 일종의 비관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한 슈펭글러의 운명관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다 시금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토인비의 저서인 [역사의 연구]가 있고, 그 외에 니버나 베르쟈에프, 혹은 야스퍼스 등과 같은 철학자 내지는 신학적인 경향을 가지 학자들의 역사철학적 저서들 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저서들이 단순히 역사가들에 의해 책으로 저술되는데 머물지 않 고 세계적으로 널리 읽혀졌다는 사실, 이런 사실은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이래로 가일층 심 화되고 있던 유럽의 위기의 산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제까지 이야기해온 것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역사에 대한 관심은, 사람들이 하나의 위기적인 시점에 서서 이 세계가 장차 어떻게 될 것 인가 그리고 이 변화해가는 세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고 또 어떤 일을 해야 할 것 인가 하는 심각한 결단의 순간을 앞에 두고 자기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봄으로써 그 속에서 어떤 해답을 찾으려고 할 때에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자신이 옳다는 증거를 역사 속에서 발견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역사 라는 것은 어떻든지 간에 우리들 인간 경험의 집적에 다름 아닌 까닭에 어떤 인간의 입장에 대해서건 얼마간은 그 사람의 결단을 뒷받침해줄 만한 사례를 제시해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판단을 그 일이 선한 일이냐 악한 일이냐를 따지는 것만으로 결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가능하지 않 은지에 대한 판단, 이것이 오히려 선악에 대한 판단 이상으로 우리의 장래에 대한 결단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왜냐하면 장래에 대한 결단은 우리들 각자가 혼자서만 특별히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 람들과의 경쟁 속에서 혹은 함께 공동으로 하는 것이므로, 자기자신의 입장이라 하더라도 자기 혼자서 확신하는 것만으로 끝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의 입장을 확신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경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입 장이 처음부터 일치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그것이 서로 다른 경우가 보통일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나 타인이 모두 확신할 수 있는 공통적인 입장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어떤 사안의 선악이 아니라 그것의 객관적 가능성에 대한 통찰이 더 큰 중요성을 갖게 됨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판단은 현재를 보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 니다. 아니 오히려 불가능하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재는 항상 과거의 그림자를 간직하고 있으며 또 과거가 누적된 위에서 존재하 는 것이므로, 현재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위해서는 현재가 그 축적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과거를 향해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무엇이 현재 가 능하고 무엇이 현재 가능하지 않은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경우 과거를 향한 물음은 역사상의 개별적인 사건이나 혹은 개별적인 인물, 또는 그 인물들의 사적인 행적에 대한 물음이라기보다 오히려 역사의 동향에 대한물음의 형 태를 띠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제까지 역사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 어 왔으니 앞으로는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라고 하는 판단이 서면 앞으로 무엇 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해답도 좀 더 쉽게 얻어낼 수 있으리라는 말입니다. 역사에 대한 관심이라는 것은 대략 이상과 같은 양태를 띤다고 생각되지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에 대해 아주 중요한 예를 드는 것으로 이 장의 결론으로 삼을까 합니다. 뭉뚱그려 역사에 대한 관심이라고는 했지만 그 구체적인 표현은 사람에 따라 또 시대에 따라 가지각색이게 마련입니다. 여기서는 제가 마친 서양사를 전공하고 있는 관계로 우리가 왜 서양사에 대해 관심을 갖는가 하는 문제를 포괄적으로 하나의 예를 들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일본에서 서양사에 대한 관심은 일본사에 대한 관심에 비해 그다지 일반적이지 못하다는 게 솔직한 평가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서양사에 대한 관심을 분 석하는 작업은 역사에 대한 관심 그 자체를 좀 더 분명하게 밝히는 작업이기도 한 것입니 다. 그런데 우리의 서양사에 대한 관심은 일단 몇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일본 역시 세계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이 세계 속에는 유럽이나 아메 리카의 여러 나라들, 그러니까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예전과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또 이 중요한 나라들과 일본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이들 나라들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 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확실히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 은 너무나 막연해서 그저 재미있으니까 재미있다고 답하는 어린아이들의 선문답과 크게 다 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면 다음으로 이제까지 세계 속에서 차지해온 서양의 지도적 역할을 강조하면서, 따라 서 그 역사에 등장하는 정치가나 군인 혹은 예술가들의 행적에 우리가 관심을 쏟는 것은 너 무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는 식으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 심은 어디까지나 역사상의 에피소드와 관련된 관심일 뿐 역사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좀 더 역사 그 자체와 관련된 차원으로서 일본과 유 럽 사이에 어떤 역사발전상의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어보면 어떨까요? 이것은 우리가 서양사를 연구하는 이류로서 많은 사람들이 자주 들먹이는 것입니다. 예컨 대 봉건제도의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물론 이때의 봉건제도란 결코 무엇이든지 낡고 나쁜 것으로서의 봉건제도가 아니라 중세시대의 정치나 그 밑바탕을 규정하고 있던 제도로서의 봉건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봉건제도에 관한 한 서양과 일본 사이에는 서로간의 아무 런 상호작용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의 유사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점에 대 해서는 우리 역사가들과 마찬가지로 서양의 학자들도 크게 주목하고 있는 바입니다. 이와 같이 중요한 역사적 발전을 규정하는 요소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역사 그 자체에 뭔가 거로 공통되는 측면이 있는 것이 아니냐, 따라서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에 서양사에 대한 연구가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식의 견해가 성립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우리가 서양인들에게 왜 우리가 서양사를 연구하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할 때 에 아주 편리한 구실이 될 수 있고, 또 상대방도 이러한 답변에 쉽사리 납득할 수 있는 성 질의 견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이유 또한 우리가 서양사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으로 도대체 왜 우리가 서양사에 대해 관심을 갖는가 하는 그 이유로 서 저는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요컨대 서양사는 우리와 무관한 역사가 아니 며, 서양사 자체가 우리의 역사 속에 살아 있다고 하는 점입니다. 이런 말은 너무 대담하고 심지어 듣기에 따라서는 당돌하기까지 한 말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명치유신 이 래 우리는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대거 수입해 돌여옴으로써 오늘날의 근대국가를 이룩해냈 다고 해도 과히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이는 명치 이래의 일본이 서양의 근대국가와 아무리 다르다고 주장한다 해도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일본에는 일본 나름의 학 문적 전통이 있었음은 물론 제도의 전통도 있습니다. 그러나 명치유신을 고비로 하여 그와 같은 전통은 일단 중지되었고, 그 대신 서양의 전통이 그 자리에 들어섰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과거 역사에는 이 점에서 커다란 단절이 있습니다. 물론 일본의 역사가 거기에서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관점에 따라서는 거기에 세계의 역사 그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단절이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단절을 거치면서 우리는 급속한 템포로 근대 문명을 건설해왔습니다. 그렇기 때 문에 우리의 역사 속에 서양이 들어 있다는 것은 하나의 비유라고 할망정 결코 허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서양의 전통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그러한 서양의 전통을 진정 우리의 것으 로 삼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 형태를 위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전통의 근원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끝내 서양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근대 일본 혹은 일본의 근대 문화를 창조할 수도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서양사를 배우고 있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우리가 서양사를 공부한다지만 실은 그러는 가운데 우리 자신에 대해 공 부하고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이 점을 역사에 대한 관심이라는 애초의 문제와 관련 지어 말하면, 우리가 어떤 나라의 역사 혹은 어떤 시대의 역사를 공부한다든지 그것은 사실 우리 자신이 서 있는 현재의 장을 밝히려는 것에 다름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 로부터 미래에 대한 결단, 태도를 결정하기 위한 그 어떤 교훈을 이끌어내려는 것이라고 말 입니다. 역사에 대한 관심은 결국 그 근본에 있어서는 항상 현재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실천적 과제와 맞닿아 있는 문제라는 것, 바로 이 점이 이 장에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결론입니다. 제 2장 역사라는 말의 의미 앞 장에서 다룬 역사에 대한 관심이라는 이야기에 이어서, 이 장에서는 '과거를 여는 실마 리'에 대해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그런데 우선 이 문제에 들어가기 위한 실마리로서-실마리란 말이 이중으로 나와서 좀 혼 동이 되긴 하겠습니다만-역사라는 말을 설명하는 데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기로 하겠습니 다. 역사라는 학문이 원래 복잡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이미 앞장에서 말씀드린바 있거 니와 역사라는 말의 의미 또한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역사라는 단어는 원래 중국에서 빌어온 말입니다. 그런데 역사라는 말을 구성하는 '역(歷)'과 '사(史)'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사'자라고 합니다. 이 '사'자는 원래 사람이 책을 받쳐들고 있는 형상 을 나타내는 글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사'라는 글자는 사물이나 사건을 글로 써 서 남기는 인간, 기록하는 인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차용해온 이 글자만으로는 이제부터 말씀드리려고 하는 실마리를 얻어낼 수 없습니다. 반면에 같은 역사를 의미하는 유럽의 언어에서는 이제부터 말씀드릴 '과거를 여는 실마리'를 잡기 위한 훌륭한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역사를 의미하는 말로서 대체로 두 가지 문자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 데 하나는 유럽 문명의 원류를 이루는 그리스-로마 계열의 문자이고, 다른 하나는 중세 이 후에 유럽 문명을 담당하게 되는 게르만계 민족의 언어입니다. 그 그리스-로마 계열의 언어 란 곧 현대 영어의 '히스토리(history)'라는 단어를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로는 '히 스토리아'라고 하는데, 이때 히스토리아라는 말은 원래 '히스토리오'라는 동사에서 전화된 명 사입니다. 이 히스토리오라는 동사의 의미는 '사물을 탐구하다, 조사하다'라는 뜻입니다. 그 러므로 히스토리아는 결국 조사된 것, 탐구된 것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로마의 경우에도 이에 해당되는 말은 그리스어와 마찬가지로 히스토리아입니다. 이히스토리아라는 말은 이탈 리아어로는 '이스토리아', 프랑스어로는 '이스토아르', 영어로는 '히스토리'가 됩니다. 이야기 를 뜻하는 영어의 스토리(story)도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게르만 계열의 언어에서는 역사를 게쉬히테(Ceschichte)라고 합니다.이 게쉬 히테라는 말은 또 어떤 말에서 유래한 것일까요? 그것은 '게쉐엔', 즉 '일어나다'라는 의미를 갖는 동사에서 온 말입니다. 그르므로 게쉬히테는 이미 일어난 일, 곧 과거의 사실을 의미하 게 됩니다. 이와 같이 유럽에서 역사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을 탐구해낸 결고, 곧 탐구된 사실이라는 의미를 갖는 히스토리라는 단어이고, 다른 하나는 게쉬히테, 즉 이미 일어난 사실을 가리키는 두 가지의 문자가 사용되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유럽에서 사용되고 있는 이 두 가지의 말은 역사라는 말, 그 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역사라는 말의 용법을 그래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자못 흥미롭습니다. 우리가 막연하게 역사라고 말할 때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리는 역사책에 쓰여진 사건 혹은 과거에 대해 탐 구한 사건을 역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학문적으로 사용되는 역사란 말의 뜻은 물론 후자 의 의미에 속합니다. 어쨌든 과거에 일어난 사건과 그것을 탐구하여 글로 적은 역사라는 역 사의 이중의 의미가 서양의 언어 속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라는 말의 뜻을 이렇게 더듬어 볼 때, 어쨌든 우리는 과거의 사실을 탐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역사를 서술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탐구하는 사건이면 모두 그대로 역사가 되는 것일까요?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과거에 일어난 그 복잡하기 짝이 없는 모든 사실이 역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설사 그 모든 과거의 사실을 탐구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대로 역사가 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오늘 하루, 아니 어제 하루에 있었던 일만을 잠시 생각해 보아도 그것은 금세 분명해집니다. 비록 단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일이라 하더라도 이것저것 꼼꼼하게 따지 고 보면 한도 끝도 없이 복잡하여 그것만을 서술해도 책이 몇 권이나 될 정도로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일기를 쓰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일기를 쓰는 경우 그 날에 경험한 모든 일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일까요? 우리는 결 코 그런 식으로 일기는 쓰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날 경험한 일 가운데 필요하고 의미 있다 고 생각되는 것만을 골라서 일기장에 기록으로 남깁니다. 역사의 경우도 일기를 쓰는 것과 똑같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남김없 이 모두 긁어모아 역사를 쓰는 경우란 결코 없습니다.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우리는 잡다한 여러 가지 사실들 가운데서 몇 가지의 사실만을 골라내서 역사를 씁니다. 결국 그것은 우리 가 날마다 쓰는 일기의 경우와 다를 바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잡다한 사실들 중에서 도대체 어떤 사실을 취하고 어떤 사실은 버리는 것일까요? 그러니까 여기서 소위 취사선택이라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말인데, 이 취사선택은 반드시 일정한 기준이 있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 기준에 따라 우리는 과거 의 사실에 대한 평가를 한 다음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취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가려 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기준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앞에서 과거의 사실을 탐구한다고 했거니와 그것은 무턱대고 그렇게 탐구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 을 때 비로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이유란 무엇일까요?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그 이유는 우리가 뭔가 그것에 대해 탐구할 필요가 있다든가 탐구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탐구를 하는 것입니다. 아까 일기를 예로 들어 말 씀드린 '기준'이 라는 것도 결국에는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뭔가를 기록한다 고 할 때 그것은 우리가 기록하려고 하는 그 사실 속에서 뭔가 기록할 만한 필요 내지는 가 치를 찾아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이 점을 '역사에 대한 관심'이라는 문제와 관련시켜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즉, 앞에서 우리가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까닭은 미 래에 대한 우리의 결단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과거의 사실, 다시 말해 미래에 대한 우리의 결단에 어떤 이유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과거의 사실을 그 속에서 찾아내기 위함이라고 지적 한 바 있습니다. 바로 이때 그 어떤 이유를 부여해 주는 그 무엇인가가 취사선택의 기준이 요 이유인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점을 구체적으로 하나의 예를 들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소크라테스 는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기원전 5세기경에 아테네에서 활약한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입니다. 이 자리는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이므로 굳이 철학자를 예로 끌어 들일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자는 여기서 문제로 삼기에 매우 적 절한 인물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앞 장에서 저는 '역사에 대한 관심'이라는 문제를 일본사람들과 직접적으로 무관한 서양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라는 문제로 바꿔놓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렇게 한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역사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때 그것은 결코 단순한 회고 취미나 상고(尙古) 취미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 속에 들어 있는 과거, 따라서 그것은 어쩔 도리 없이 우리 자신에 대한 관심인 바, 이 점을 일단 우리와는 별개의 존재인 서양사에 대한 관심과 관련하여 마찬가지로 증명해낼 수 있다면 역사에 대한 관심이라는 문제를 더 한층 분명히 여러분에게 이해시길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이와 같이 역사에 대한 관심이란 자기자신에 대한 관심 혹은 적어도 그와 관련되는 것이 라고 한다면 이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던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직 접 맥이 통하는 셈이라 하겠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아는' 방법과 역사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아는' 방법이 반드시 똑같지는 않다고해도 궁극적인 목적에 있어서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역사의 근본이념을 생각할 때마다 으레 이 대철학자의 사상을 떠올리곤 합니다. 원래 '너 자신을 알라'라는 이 격언은 소크라테스가 처음으로 한 말이 아니라 그리스인들 이 숭배해 마지 않던 중부 그리스의 델피에 있는 아폴로 신전에 내걸려 있던 말이라고 합니 다. 그러나 그것이야 어찌됐든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청년들에게 교사로서 설파한 내용은 언제나 반드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로 귀착되었으므로, 그 격언을 소크라테스의 것이라 고 간주해도 그다지 무리는 없을 줄 압니다. 그러면 이제 본래의 문제로 돌아가기로 합시다. 소크라테스는 대략 70세 정도 살다 간 사 람입니다. 이 소크라테스의 칠십 평생에 대해서는 실로 온갖 잡다한 사실들이 세상에 알려 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흔히 알고 있는 것을 말하면 대략 다 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청년들과 어울리며 청년들을 가르치는 교육자로 살았다. 그런데 그의 교육자로서의 명성이 너무나 높다보니 그 명성을 시기하는 자가 있어 그가 소크라테스 를 음해할 목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국가가 신봉하는 신을 믿지 않고 따로 새로운 신령을 믿었다'라고 참언을 하는 바람에 투옥당했다. 이어서 재판을 받은 결과 사형을 선고 받았다. 마음속 깊이 진정으로 아테네를 사랑했던 소크라테스는 친구가 탈옥하 여 도망칠 것을 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의와 양심이 명하는 바대로 국법에 따라 순순히 독배를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런 정도의 사실들이 대체로 우리가 교과서 등을 통 해서 소크라테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리들일 것입니다. 그러면 소크라테스의 칠십 평생 가운데 어째서 겨우 이런 정도의 사실만이 우리의 교과서 에 실려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 겠지만, 일본의 경우 한정시켜 생각해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 교과서 가 발행된 시기가 전쟁 전이라면 그것은 국가라는 절대자에 순종하는 국민도덕의 모범을 보 이기 위함이었을 것이고, 만일 그것이 전쟁 후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발행된 교과서라면 삶 과 죽음의 선택의 기로에 서 있으면서도 자신의 나라와 정의를 사랑하는 신념에 따라 미동 도 하지 않고 의연히 죽음을 택한 소크라테스의 고귀한 정신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말입니 다. 그렇지만 소크라테스의 칠십 평생 중에는 이런 사실들 말고도 알려져야 할 사실들이 아주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하나의 예를 들자면 그가 아테네의 청년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게 그가 청년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는가 하면 그것은 그가 진리에 이르 는 길을 누구나가 승복하지 않을 수 없는 합리적인 방식으로 그들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입니 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그는 학문 내지 학문적 방법의 창시자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입니 다. 바로 이런 까닭에 학문의 역사, 혹은 좀 더 범위를 넓게 잡아 문화의 역사를 생각하는 경우 반드시 소크라테스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여담입니다만, 소크라테스의 사적인 행적과 관련하여 플라톤(소크라테 스의 제자로 유명한 철학자)이 기록으로 남긴 [대화편]에 의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일화가 있는데, 이에 따르면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청년들에게 설파하고 다닌 것은 시민 (국민)의 윤리였다고 한마디로 잘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입만 열면 항상 육체에 대한 정 신의 우위를 설파하고 다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시민된 자는 반드시 훌륭한 육체 의 소유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였습니다. 그저 청년들에게만 강조 하고 다닌 정도가 아닙니다. 그 스스로가 육체의 훈련, 다시 말해 체육에 남보다 몇 배나 더 열의를 쏟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흔적도 여기저기서 발견됩니다. 이것은 그리스인들의 전인적(全人的) 이상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매우 흥미로운 일화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육체의 아름다움을 얼마나 찬양했는지, 그것은 오늘날의 우리의 상상을 훨 씬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전쟁을 중단하면서까지 치렀다고 하는 저 올림픽 경기도 거기에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의 이러한 태도는 경기를 그저 구 경이나 하는 것으로 여겨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 사이의 목숨을 건 싸움을 앉아서 즐기 기만 하던 로마인들과 비교할 때 아주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자신이 직접 하기보다는 구경 하는 쪽으로 기울기 쉬운 것이 현대인들의 스포츠입니다. 이런 점과 관련하여 소크라테스가 살던 그리스 고전기의 정신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지 않을까요? [대화편]을 기록한 대철학자 플라톤 자신도 체육과 경기를 몹시 사랑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도 덧붙여두겠습니다. 잠시 줄거리를 벗어났습니다만, 이제까지 제가 소크라테스를 끌어들여 그리스 문화의 일 단을 조금은 장황하게 논한 까닭은 역사란 결국 우리의 관심 문제에 따라 수많은 사실들 가 운데 이에 들어맞는 한에서 우리가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을 골라내는 것이라는 점, 따라서 과거의 사실을 무차별적으로 재현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이와 같다 해도 우리는 다치는 대로 아무데서나 사실들을 골라낼 수는 없 습니다. 사실을 끌어내기 위해 바탕으로 삼아야 할 신뢰할 수 있는 재료, 즉 사료(使料)가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앞서 잠깐 말씀드린 플라톤의 [대화편]은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을 아는 데에 가장 중요한 사료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그리스 시민의 이상과 윤리와 학문,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들의 삶에 대해서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기도 합 니다. 이런 사료들이 없이 그리스 고전기의 문화사를 쓸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플라톤의 [대화편]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냐 하면 그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불충분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것 외에도 그리스 고전기의 문화사와 관련 된 사료는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부를 남김없이 모아도 어떤 의미에서는 불 충분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숱한 사실들에 비한다 면 지극히 제한적인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설사 과거의 사실이 무제한이라 하더 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추상적 가능성으로 그럴 뿐, 실제로는 사료가 보여주는 것 이상의 과거의 사실이란 원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바로 이 점이 픽션 과 논픽션의 다른 점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에서는 주어진 사료 없이 단지 그럴 가능성만 가지고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하여 기록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역사가에게도 상상력은 소설가 못지 않게 매우 필요한 것 입니다. 그렇지만 역사가는 소설가와 달리 상상한 내용을 그대로 사실로서 기록할 수는 없 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사료라고 하는 것이 역사가의 사활을 좌우하게 되는 것입니 다. 그렇다면 사료에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요? 사료 가운데 우선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문자로 쓰여진 사료입니다. 앞 장 에서 말씀드린 [고사기]와 [일본서기] 같은 것들이 그것입니다. 그밖에 비문(碑文)이나 증서 등 과거에 관한 기록도 모두 문헌사료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사료로부 터 우리가 과거의 어떤 사실을 끌어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그 사실이 올바른 것인지 올바르지 않은 것인지를 판단할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사료 그 자체는 과거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올바르게 전달하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자격을 구비한 사료가 되려면, 우선 어떤 사건과 관련하여 그 사건이 일어난 동시대의 사료 여야 하며, 또 그것을 잘 전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의 기록이어야만 합니다. 이런 이 유 때문에 일반적으로 문헌사료라고 불리는 것들에는 과거의 사실과 사료의 관련 정도에 따 라 1등사료니 2등사료니 하는 차등이 주어지게 됩니다. 어떤 사건에 대해서나 모두 1등사료만 있다면 역사가라는 직업도 참으로 행복한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실제로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원하는 사료가 처음부터 존 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존재한다 하더라도 원형 그대로 전해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원본 자체가 아예 사라져버린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 복사본만 존재하는 경우 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그것이 정말로 올바르게 쓰여져 있는지 어떤지가 문제되 며, 또 단순히 오류가 없어야 한다는 정도만이 아니라 그것을 베껴 쓴 사람의 가필이 있는 지 어떤지도 문제가 됩니다. 이런 식으로 사료의 원형이 어떤가를 검토하고 따지는 작업을 우리는 '사료비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료비판의 작업에는 단순히 사료 그 자체의 원형 여부를 확인하는 작업 말고 도 그 안에 기술되어 있는 내용이 진실인지 어떤지를 따지는 작업도 포함됩니다. 이러한 두 측면을 모두 포함하여 사료비판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사료비판은 아주 번거로운 작업이지 만 그러나 역사가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작업입니다. 그것이 번거로운 작업이라고 하는 주된 이유는 어떤 사료를 기록으로 남겨준 사람도 우리 들과 마찬가지로 좋고 나쁨과 사랑과 미움과 이상과 이해(利害)를 가진 살아 있는 인간이고, 또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제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기록을 남긴 사람이 아무리 양심적이고 객관적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어쩔 수 없이 한계가 있게 마련이고, 또 설사 기록상의 잘못은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완전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 다. 게다가 그렇게 양심적이고 객관적으로 기록을 남기는 경우는 오히려 예외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적어도 사료비판의 작업에 있어서는 언제나 성악설(性惡說) 의 입장을 견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료 제작자의 주관이 개입되기 어렵거나 혹은 완전히 개입되지 않은 종류의 사료가 중시되고, 또 증서류인지 아니면 내용의 단순한 기록인지가 중요해질 뿐만 아니라 문자에 의한 사료와는 다른 고고학 및 고전학적(古錢學的)인 사료, 바꾸어 말하 면 유물사료(遺物史料)의 이용이 고려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물사료는 오늘날 실제로 많이 이용되고 그에 따른 성과도 많은 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유물사료는 스스로 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그러한 유물사료들로 하여금 입을 열게 하기 위해 다시 문헌사료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사료비 판으로서 역사의 번거로운 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단 이렇게 번거로운 사료비판 작업이 모두 완벽하게 이루어졌다고 가정합시다. 그렇게 되면 이것으로 만족스러운 재료가 전부 갖추어진 것이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 다. 왜냐하면 사료 제작자는 오늘날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을 기록하 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 기록으로 남긴 데 지나지 않기 때 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기로한 데 반해, 우리가 진정으로 알고 싶어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밖에,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기록 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말해 우리의 관심과 사료 제작자와의 관심이 결 코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진정으로 알고 싶어하는 것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는 경우란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보충을 해야 할까요? 물 론 우리의 상상력도 필요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입니다. 오랜 세월 에 걸친 사료연구는 이런 경우에도 과거의 사실을 재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유력한 방법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방법은 사료 제작자의 숨은 의도를 파헤쳐 드러내는 방법입니다. 말하자면 사료 제작자 역시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살아 있는 인간이라서 우리가 마찬가지로 다종다양한 이상이나 이해, 좋고 나쁨이나 사랑과 증오 따위 의 감정에 따라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허위의 사료나 혹은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사 료를 쓰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때 그러한 불완전성 내지 부정확성 혹은 허위성이 명확하 게 확인되는 경우에는 불완전하거나 허위라는 사실 그 자체가 오히려 과거에 대한 확고부동 한 증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명치 시대의 어떤 사학자는, [태평기(太平記)]는 문학이지 역사서가 아니며, 따라서 '[태평 기]는 사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는 취지의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태평 기]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신뢰를 보낼 수 없다 하더라도 [태평기]의 저자 로 하여금 그와 같은 서술을 하게끔 만든 이상이나 동기에는 그 시대의 배경을 엿보기에 충 분한 중요한 증언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아까 말씀드린 1등 사료니 2등사료니 하는 사료의 등급도 의미가 없어지고, 때로는 그러한 등급의 순위가 뒤바 뀌는 경우조차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료 제작자의 숨은 의도를 따라가는 방법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른바 위조문서(僞造文書)에 대한 연구와 비판의 방법입니다. 허위의 진술은 보통 연대기나 전기와 같은 역사서 속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그러나 보다 많이 발견되는 것은 아무래도 서 한류나 증서류에서라고 하겠습니다. 족보나 도면 따위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사료에 허위로 기록된 내용은 확실히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른 관점 에서 보건대 위조를 하는 경우에는 그렇게 위조를 하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게 마련입니 다. 마일 그 이유가 그 어떤 방법으로든 확인될 수 있다면 그것은 다른 어떤 기록에 못지 않게 과거에 대한 확고부동한 증언을 제공해 주게 됩니다. 물론 그것이 직접 증언해 주는 범위는 그다지 넓은 것이 못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조된 사료를 광범하게 연구하고 그 결과를 종합할 때에는 사료 속에 충분히 기술되어 있지 않은 내용에 대해 어떤 중요한 결론 을 끌어낼 수도 있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상 중세사 연구의 진전은 이와 같은 위조문서의 연구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과거를 여는 실마리라는 의미에서의 사료와 그 비판에 대해서는 이외에도 말씀드려야 할 내용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만, 그 하나하나를 모두 다루면 지나치게 교과서적이 되고 말 것 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는 그 핵심만을 간추려서 말씀드렸습니다. 마지막에 언급한 위조 문서에 대해서는 내용 그 자체에 재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결론 도 역사라는 학문의 성격, 나아가서는 '역사를 보는 눈'에도 중요하기 때문에 다음 장에서 다시 좀 더 상세하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 3장 거짓으로부터 나오는 진실 앞 장에서는 과거를 여는 실마리로서의 사료에 대해 몇 가지 말씀드렸습니다. 사료 중에 는 과거의 진실을 절달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의도적으로 허위를 전달하려고 하는 사료가 적지 않으며, 그러나 이렇게 의도적으로 조작된 사료도 연구와 비판을 통해서 사료를 기술 되어 있지 않은 진실을 이끌어낼 수 있고, 또 그러한 연구를 통해서 역사학의 기초가 되는 사료비판의 기술이 더욱 발달하게 된다는 점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앞 장에 이어서 이렇게 의도적으로 조작된 사료의 실례를 들어 여러분에게 참고가 될 수 있도록 하 고자 합니다. 이 또한 '역사를 보는 눈'을 단련함에 있어 중요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의도적으로 조작된 사료나 허위문서 같은 것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 제 어디서나 발견됩니다. 그러나 역시 뭐니뭐니 해도 그것은 옛날, 특히 봉건시대에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일본사의 예로는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가신이었던 고사카 간세이(高坂彈 正)가 작성한 것으로알려져 있는 [갑양군감(甲陽軍鑑)]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일본 제일의 병서'로서 명치 시대의 사학자들에 의해 도꾸가와 초기의 작품인 것으로 단정되고 있는데, 바로 이런 것이 대표적인 위서(僞書)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일본에는 그렇게 대단한 의미를 갖는 위조사료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사 소한 것들은 그런대로 제법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흔히 발견되는 것 은 아마도 가짜 족보들일 것입니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족보의 대부분은 도꾸가와 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인데, 예컨데 선조의 이름이 源平藤橘로 명기되어 있는 식입니다. (일 본의 양대 성씨인 '源'씨와 '平'씨가 뒤섞여 있다) 또 다른 것으로는 허무승법도(虛無僧法度)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도꾸가와 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위조법도일 뿐 막부 시대의 법령은 아닙니다. 이 법령은 도꾸가와 정권이 완전한 안정기에 접어드는 과정에서 각 나라의 낭인(浪人)들이 신분을 숨기며 여행하기에 편리한 승직(僧職)의 특권을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막부 말기 무 렵이 되면 막부 자체가 이것을 허위가 아닌 진짜 법령으로 취급했다는 점입니다. 거짓으로 부터 나온 진실이라는 얘기가 되는 셈인데, 이러한 예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 나 허위로 작성된 문서가 진짜 문서로 통용되는 예는 도처에 발견됩니다. 서양의 중세사를 보아도 이런 류의 예는 무수히 많습니다. 프랑크의 메로빙가 시대에 국왕 이 교회와 수도원 앞으로 시장 개설을 허가한다는 취지로 발부하는 특권장은 그 종류가 가 지각색이지만 거의 대부분이 후대에 날조된 것이며, 기타 통상적으로 메로빙 국왕이 발급한 것으로 되어 있는 공문서들도 그 절반 이상이 허위로 작성된 문서로 밝혀졌습니다. 중세 시대에 이런 허위문서가 주로 성직자들에 의해 작성된 데는 그 나름대로의 사회적인 배경 내지 원인이 있습니다. 중세에는 교회의 성직자들이 독립된 계측으로는 그을 읽고 쓸 줄 하는 유일한 계층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본래부터 충분한 무력을 갖추고 있지 못함으로써 끊임없이 세속의 권력으로부터 압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교회의 성 직자들은 아주 빈번하게 이런 식으로 공문서를 위조하여 국왕 내지는 대제후의 특권을 빙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위조는 비단 성직자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계층에서 공통적으로 엿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러한 위조문서들은 어디가지나 위조이므로 죄가 됨은 틀림없지만, 그 죄질에 있 어서는 악질적인 것에서부터 가벼운 것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었습니다. 죄질이 가벼운데 다 보기에 따라서는 유머러스하기까지 한 예가 있는데,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과 옥스프드 대학이 각기 자기 대학의 역사를 내세우기 위해 벌인 위조문서 사건이 그것입니다. 이 두 대학은 영국의 명문 대학으로서 오늘날에도 부딪치기만 하면 서로 우열을 다투지 않고는 못 배기는 대학들이지만, 과거에 한때 둘 가운데 어느 대학의 역사가 더 오래냐는 문제를 놓고 싸우다가 마침내는 고문서를 위조하기까지 한 에피소드가 아직도 사람들의 입 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물론 좀 더 근세로 들어오고 난 후의 일이었는데, 이 사건을 구체 적으로 소개하기 전에 먼저 역사적 진실부터 말해두자면 두 대학 중에서 캠브리지 대학이 옥스퍼드 대학에 비해 그 역사가 좀 짧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캠브리지 대학 측에서 자기 대학의 역사가 옥스프드 대학보다 더 오래되었음 을 내세우기 위해 위조문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아직 여왕이 되기 전이었던 엘지자베드 공주가 마침 캠브리지 대학에 방문한 것을 계기로 캠브리지 대학측이 아더 왕이 라는 전설적인 국왕을 캠브리지 대학의 창설자로 내세우는 가짜 문서를 만든 것입니다. 그 러자 그로부터 얼마 후 이번에는 옥스퍼드 대학 쪽에서 알프레드 대왕이라는 아더 왕보다도 실존 가능성이 더 적은 인물을 끌여들여 그가 바로 옥스프드 대학의 창립자라는 문서를 만 들어 당시에 출판된 옥스퍼드 대학사 속에 살며시 끼워 넣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더 재미있는 것은 이 위조문서를 만든 사람이 바로 당시에 내노라 하던 대표적인 고문서 학자 였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같은 두 대학의 문서는 얼마 가지 않아 날조된 것으로 발각되고 말긴 했지만, 설 사 발각되지 않았다 해도 그렇게 문제될 만한 사건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여두면 옥스퍼드는 12세기 말경-확실한 연대는 미상입니다만-에 창설되었고, 캠브리지 대학은 1209년경, 그러니까 13세기 초에 설립되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결국 함께 커피나 나누면서 가볍게 농담을 주고 받을 만한 죄랄 것도 없는 이야기지만, 그러나 이런 것과는 종류를 달리하는, 그래서 후세에까지 중대한 영향을 미친 위조문서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런 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두 가지 정도를 들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들 외에도 더 있기야 하겠지만 그렇게 중요하다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 본래의 목적과는 상관없이 문서의 일부 다른 내용이 이용되어 정치적으로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친 예로는 다음에 살펴볼 이 두 가지가 가장 적절한 예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위조문서가 진 짜 문서보다 오히려 과거에 대해 더 유력한 증언을 제공해 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아주 훌 륭한 예이기도 합니다. 그 하나는 흔히 '가짜 이시도르 문서'라고 불리는 것인데, 정확히 말하면 '가짜 이시도르 법령집'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이법령집은 대략 9세기 중반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 로 전해지는데, 교황권의 절대성에 관한 주장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서의 진정한 의도는 교황권의 절대화에 있었다기보다 북프랑스의 프랑스 대사교 관구 -비단 이곳뿐만이 아닙니다만-에서 특히 문제가 되고 있던 대리사교제(代理司敎制)-이것은 세속권력이 교회권력을 조종할 목적으로 이용하는 경구가 많았습니다-를 배제하는 데 있었 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리사교제를 폐지하고 사교의 지위를 세속의 권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사교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교황의 권력을 절대화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 하여 초기 기독교 교회 이래 만들어진 진짜와 가짜를 망라한 여러 가지 교황문서, 공의회 결의, 역사상 저명한 사교의 저작물 발췌 및 기타 로마 게르만의 법전 등을 모아 교왕권의 절대성을 입증하려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법령집은 아주 방대한 것이었는데, 전부 약 1만 점이나 되는 자료 를 이리저리 끼워맞추는 식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방대한 편찬물로 이루어진 법령 집 사이에 진짜 의도하고 있던 대리사교에 관한 위조문서를 슬며시 끼워넣었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문서를 위조하는 경우에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만 늘어놓아서는 오히려 쉽게 발 각되고 말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진실인 것처럼 보이도록 진짜와 가짜를 교묘하 게 섞어놓는 방법이 자주 이용되곤 합니다. 이 경우에는 자료의 배열이 그야말로 교묘하게 이루어진데다가 그 위조문서를 작성한 사 람의 이름도 7세기 전반에 활약한 스페인 세빌리아의 사교이자 아주 저명한 학승이었던 이 시도르의 이름을 채용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용의주도하게도 이시도르의 이 름을 그대로 빌려 쓴 것이 아니라 이시도르 메르카토르라는 얼핏 헷갈리기 쉬운, 그러나 어 딘지 권위가 있어 보이는 이름을 붙인 법령집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법령집은 위조한 사람의 목적만을 달성시켜주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중세를 통해서 이 위조법령집은 진짜처럼 통용되면서 로마 교황청의 권위를 내세우는 데 있어 유력한 근거 로 이용되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원래의 목적은 그 후로 묻혀 버리고, 이 위조문서 에 의해 한껏 높여진 교황권이 계속해서 그것을 십분 활용하는 기묘한 사태가 벌어진 것입 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기서 주로 이야기하려고 했던 가짜 문서의 예는 아닙니다. 위조문서의 또다른 예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부장(寄附狀)'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이 것은 단일한 문서로 된 것으로,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가짜 이시도르 법령집'과 같이 대규 모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미친 영향이란 면에서는 가짜 이시도르 법령집보다 크 면 컸지 절대로 그에 못지 않았습니다. 덧붙여 말씀드리면 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부장' 은 그 후에 만들어진 위의 가짜 이시도르 법령집 속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것 또한 교황권의 절대성에 근거를 부여하려 한 것으로, 그 내용을 한다미도 간추리자 면 교황은 실베스타 1세 때에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로부터 서로마에 대한 일체의 지배권을 할애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문서는 다각적인 연구를 거친 결과 대체로 8세기 중반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는데, 역시 본래 작성된 동기나 목적과는 다른 내용을 가지 고 있습니다. 이 점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이 문서의 내용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자면 우선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부장'이라는 문서 이름에 나오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라는 인물이 과연 어떤 인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서양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로마의 황제로서 4세기 초에 로마에서 기독교를 공인한 바로 그 황제입니다. 그때까지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즉위하기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로마에서는 기독교도들이 혹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러한 기독교를 공인한 것만이 아닙 니다. 더 나아가 기독교에 각종의 편의를 제공해 주는 한편으로 고대 말기의 혼란스럽던 로 마제국을 이 기독교를 이용하여 통일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교회에 게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특별히 훌륭한 황제로 받들어졌을 뿐 아니라 기독교적인 중세 유럽 에서는 각별한 존중을 받는 황제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황제의 이름을 빌어 분서를 작성하면 그만큼 그 문서의 가치가 높아지는 효과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황제가 아직 이교(異敎)를 믿던 시대에 아주 몹쓸 병, 즉 문둥병에 걸렸 다고 이 위조문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갖 치료를 다 해보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 어서 마지막으로 이교 신들의 신탁을 받으려고까지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의 듯을 받은 제사장들의 말에 따르면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기의 피를 모아 그 피에 목욕을 하면 즉시 나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많은 어린아이들을 모이게 한 다음 그들의 피를 받으려고 했는데, 함께 따라온 아기 어머니들의 비통한 울음에 감동을 받아 그 만 갓난아기들을 죽이기는커녕 도리어 선물을 주어 돌려 보내고 말았습니다. 그 날 밤 잠자리에 든 황제의 눈 앞에 사도 베드로와 바울이 나타나 갓난아기들의 목숨을 구해준 것을 칭찬하면서, 황제의 손에 의해 박해를 받고 있는 기독교의 사교 실베스테르-당 시 로마 교황입니다-를 찾아가 그의 힘에 의지하라고 일러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황제는 새벽같이 일어나 곧바로 로마의 사교 실베스테르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 자 그 즉시로 기적이 일어나 황제의 문둥병이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황제는 신의 힘에 크 게 감복해 하며 로마 교회에 대해 온갖 선물을 하사하였는데, 구중에서 특히 중요한 선물이 바로 이탈리아 및 그 서쪽 지방에 대한 황제의 지배권을 모두 교황에게 양도해 주었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부장'이라는 가짜 문서의 간추린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내용의 가짜 문서가 작성된 것일까요? 그것은 대략 8세기 중반 무렵에 로마 교황청이 처해 있던 사정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 시대의 이탈리아에는 로 마 교황청의 권력과 동해안의 라벤나를 중심으로 한 로마 황제의 권력, 오늘날 롬바르디아 라는 지명의 근원이 되는 랑고바르도인으로 불리는 게르만 부족의 권력, 이렇게 3대 권력이 할거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북방으로부터는 지금의 프랑스 국가를 세운 프랑크 부족의 권력이 끊임없이 간섭을 하고 있는 형세로, 모두 합해 4대 권력이 합종연횡을 거듭하며 복 잡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8세기 중반에 이탈리아가 처해 있던 상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로마의 사교, 즉 로마의 교황이었습니다. 로마의 교황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라는 로마 황제의 입장에서 보면 제국의 제1사제라는 지위에 있긴 했지 만, 중세에서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완전히 로마 황제 권력의 밑의 존재였습니다. 즉위를 하 려고 해도 황제의 승인을 먼저 얻어야만 했고, 또 원래는 교황이 소집하기로 되어 있는 기 독교 세계의 회의인 공회의(公會議)도 황제가 소집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심지어 황제의 날 인이 없으면 설사 그 회의의 결정이라도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형편에 처해 있었 던 것입니다. 결국 로마 교황청은 아직도 완전히 황제권에 종속되어 있어서 독립된 권력이라고는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한 셈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는 또 이슬람 교도인 아라비아인들 이 지중해 세계로 진출해온 결과로 동로마의 서방 지배력이 그 만큼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탈리아에 직접적인 힘을 행사할 만한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롬바 르디아의 랑고바르도 왕국이 끊임없이 로마에 손길을 뻗치며 로마 교회를 위협하였습니다. 로마 교회는 하는 수 없이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의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별로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프랑스에 나라를 세우고 있는 프라으 쪽에 도움 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상기해 두어야 할 것은 이 시대, 그러니까 8세기의 전반 무렵에 로마 교 황 사이에는 성상예배(聖像禮拜) 문제, 즉 성모 마리아나 그리스도 상, 혹은 성서에 나오는 성화(聖畵)와 같은 성상들에 대한 숭배 문제를 놓고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던 시대였다는 점입니다. 성상예배9정확히는 숭배)는 기독교 세계의 오랜 전통이지만 로마황제(편의상 동로 마 황제라고 합니다만)는 주로 정치적인 이유에서 이것을 금지하였고, 이에 따르지 않는 로 마 교회에 대해서는 가혹한 탄압을 가하였으며, 심지어는 랑고바르도 족을 이용하여 로마 교회에 압박을 가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이 훗날 동 서 양 교회가 분열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가 되긴 합니다만, 어쨌든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로마 교회는 당면한 곤경을 타개하기 위해 프랑크에 도움의 손길을 뻗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황제와 로마 교황 사이에는 역사상 뿌리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런 관 계를 하루 아침에 단절하고 일개 야만 국가에 지나지 않는 프랑크와 동맹을 맺는다는 것을 말처럼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 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프랑크가 동로마에 신경 쓰지 않고 로마 교회에 원 조를 보낼 수 있도록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또 동로마에 대해서도 교황청이 프랑크에 원조 를 요구하는 것을 합법화하기 위해 이제 말씀드린 것과 같이 문서를 꾸며냈다고 일단 설명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린 바 있듯이 이 문서에 따르면, 로마 교황은 콘스탄 티누스 대제 이래 서방의 지배권을 양도받고 있으므로 로마 교황이 이 지방의 정치 문제에 대해 어떤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고 해도 그것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 교황이 서방에서 동시에 황제권을 갖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야 그럴 수도 잇는 일이겠지만, 당시 무기력한 처지에 있던 로마 교황이 황제권을 장악하려 든다는 것은 실로 넌센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황제권에 대한 요구를 내세움으로써 로마 교황 이 진정으로 얻어내려 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문제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 분제에 대해 서는 오랫동안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끊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직까지도 어떤 최종 적인 결론이 내려져 있지 않습니다. 동로마의 총독령이었던 라벤나를 중심으로 한 영토 문 제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어떤 다른 지배권과 관련된 문제라고 해 석하기도 합니다. 그 어느 쪽이든 간에 그것은 프랑크 국왕인 피핀에게 보이기 위해, 그리고 그것이 동시에 동로마측에 알려져도 특별한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한 배려에서 작성되었다 는 사실만은 이 문서에서 사용되고 있는 어투로 보아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문서는 그 후 얼마 동안 사람들의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가 11세기 중엽, 그러니까 로마 교황권이 이번에는 정말로 중세 유럽의 중심이 되려고 하는 시기에 교황 레 오 9세에 의해 갑자기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칼 대제의 황제권을 이양 받은 소위 신성로마의 황제권이 독일에 성립되어 있었고, 그 보증 아래 로마 교황권도 서방 유럽 전체 를 관할하는 교회의 권위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지 않고 동방의 황제 와 서방의 황제 모두로부터 동시에 독립적인 권위를 세우고자 로마 교황은 새삼스레 이 위 조문서를 이용하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11세기에 들어 일단 교황권이 황제권 에 대해 승리를 거둔 후에는 중세를 통해서 교황권의 세계지배의 근거로서 항상 이용되었습 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허위 날조된 것이라는 사실을 당시의 로마 교황이 까맣 게 잊어버리고 있었음은 물론 상대측인 황제도 이에 대해 전혀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 또한 당초 날조할 때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문서가 이용된 보기라고 하겠습니다. 또 정치적 영향 면에서 이보다 더 커다란 영향을 미친 예는 아마도 다시 없을 것입니다. 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부장'이라는 문서가 날조된 것이라는 사실은 르네상스 시대가 되어 휴머니스트들의 손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이탈리아의 롤렌티오 바로와 영국인인 레디 날드 피코크, 그리고 독일의 니콜라우스 크자누스, 세 사람이 거의 동시대에, 그러니까 15세 기 중반에 서로 독립적으로 이 문서가 날조된 것임을 입증한 것입니다. 그 후 오늘날에 이 르기까지 많은 연구가 거듭되어 그 문서의 허위성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이나 그 문서가 작성된 시기에 대해서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몇 가지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이상에서 든 몇 가지 실례를 통해 밝혀졌듯이, 사료들 가운데는 진실을 전하는 것도 있지 만 또 애초부터 의도적으로 날조된 것도 없지 않습니다. 또한 진실을 담은 기록이라 하더라 도 그것을 작성한 사람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서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게 마 련이기 때문에 그것이 반드시 객관적인 진실을 전하고 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바로 그렇 기 때문에 사료 그 자체의 진실성, 나아가서는 사료에 기록된 내용의 진실성을 밝히는 작업 은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대략 17 세기 이래로 아주 치밀하고 용의주도하게 사료를 비판하는 기술이 개발되었습니다. 이러한 기술 중에는 거의 법칙적이라고 해도 좋은 만큼 널리 적용할 수 있는 원칙들이 있 는데, 그 가운데 몇 가지는 우리의 일상 생활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여기므로 이 자리에서 간단히 소개할까 합니다. 그 첫 번째 원칙으로서 '침묵의 논단'이라는 원칙이 있습니다. 침묵 의 논단이라는 것은 사료에 언급이 없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해당 인물이나 사건이 존재 하지 않았다고 볼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는 규칙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좀 더 재미있는 원칙이 있는데, 것은 '금령(禁令)이 존재하는 곳에는 반 드시 그에 대응하는 사실이 존재한다'라고 하는 원칙입니다. 침묵의 논단이라는 원칙은 사료 에 나와 있지 않다고 해서 반드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지만 이 '금 령 운운'하는 원칙은 정확히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어떤 법률이든 금령이 없는 법률은 없습니다. 예컨대 유럽의 중세사를 보면 교 회법상 성직자는 결혼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교황의 칙서나 공회의의 기록 등을 보면 되풀이해서 그러한 금령을 규정해 놓고 있는 부분 이 많이 나옵니다. 이것은 당시에 결혼하는 성직자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 로 해석해도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일반론 차원에서 금령을 규정해 놓는 경우란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중세의 기독교 성직자들은 공공연하게 혹 은 은밀하게 오늘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결혼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료비판의 원칙은 비단 사료를 연구함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신문을 읽는 경우나 뉴스를 듣는 경우에 도 이런 원칙을 활용하면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어떤 사료로부터 정말로 아무런 오류가 없는 사실을 이끌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문자로 서술된 사료로부터 객관적인 사실을 끄집어낸 것이 곤란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술사료 이외의 재료를 이용하여 사료를 보완할 필요가 있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고고학상의 발굴물, 옛 시대의 화폐, 인류학상의 유물, 혹은 인간의 습속이나 전설, 나아가서는 언어, 지명, 지리 기상학 및 천문학상의 자료 등 여 러 종류의 다양한 재료를 동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라 역사에 대한 보조과학의 성과가 역사를 연구하는 데 응용되어 많은 효과를 거두고 있습니 다. 그런 만큼 이런 경향은 갈수록 두드러질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것들 중에서 특히 흥미를 끄는 것은 항공사진을 이용하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예를 들면 옛날의 경지제도(耕地制度)를 복원하는 데에 이용되는 것인데, 보통 때에는 군대의 발 전이라는 그림자에 가려져 전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옛날 밭의 형상 따위가 고도가 높은 상공에서 찍은 사진에는 또렷이 떠오르는 점을 이용한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제1차 대전 후 영국에서 개발되어 주로 근대적 엔클로져 운동이 전개되기 이전의 경지 형태를 연 구하는 데 이용된 것인데, 오늘날에는 훨씬 더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그리스 시대에까 지 응용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방법이야말로 기술적인 진보가 사료 내지는 과거를 여는 실마리를 넓혀나가는 가장 재미있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설사 이런 새로운 형태 의 사료라 하더라도 기타 고고학, 인류학, 지리학, 천문학, 기상학, 지진학, 언어학, 민속학 등이 제공해주는 보조적인 사료는 그 자체로서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못한다고 하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우리에게 말을 하지 않는 사료, 즉 유물적(遺物的)인 사료는 그것으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다른 재료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 재료란 역시 서술자료, 즉 연대기나 전기 등과 글로 쓰여진 사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 만 거듭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런 종류의 사료 역시 그 나름대로 갖가지 제약을 가지고 있 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사료를 해석하는 데는 당연한 말이지만 아주 힘든 훈련이 필 요할 뿐 아니라 세심한 주의를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시대가 크게 다른 서술사료를 작성한 사람의 심리나 의식을 항상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는 점에 우리는 더욱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작성된 사료가 고대의 것이든 중세의 것이든, 아니면 그것이 좀 더 새로운 시대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작성한 사람들이 일상 생활 속에서 가지고 있던 상식, 도덕관념, 종교의식, 또는 정치적인 사고방식 등은 우리들의 그것과 반드시 일치하지만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아니 일치하지 않는다기보다 원칙적으 로 다르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이 글로 써서 남긴 것을 읽을 때에는 항상 그 사람들의 그런 심리적인 태도를 고려하면서 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깊 이 명심해야만 합니다. 예컨대 중세의 사료 등을 살펴보면, 교회에 대한 토지의 기부나 농노의 해방과 관련하여 그와 같은 행위의 이유로서 항상 경건한 종교적 동기가 서술되고 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 다. 그러나 실은 그것과는 정반대되는 목적이 그 속에 숨겨져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숨겨져 있는 목적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역사연구에 있어서 항상 중요한 작업이라 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일단 그렇게 숨겨진 목적을 찾아내게 되면 이번에는 중세의 인간도 역시 적어도 이해관계에 있어서는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구나 하는 식으로 쉽게 단정해 버리고는 무엇이든지 우리의 생각을 그대로 중세의 사료를 해석하는 데 끌고 들어가 버리기 쉽습니 다. 이것은 누구나가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이로 인해 이런저런 잘못, 그러니까 과거를 무리하게 현대의 사고와 관습에 따라 해석해 버리는 잘못을 범하게 되고 그리하여 결국에는 역사를 크게 왜곡해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인간의 사고와 감정을 이해하고 사료를 읽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입니 다. 하지만 이 문제는 역사를 공부함에 있어 언제나 반복해서 문제가 되는 보다 중요하고 또 보다 어려운 문제, 그러니까 요컨대 역사에 있어서 주관성과 객관성이라는 문제와 연결됩니 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또다른 관련 속에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입니다. 제4장 역사는 항상 다시 쓰여진다 역사의 주관성과 객관성이라는 문제는 앞서 사료의 해석이라는 작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마지막 부분에서 사료를 해석함에 있어서 우리의 주 관을 제멋대로 사료 속에서 끌고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점. 바꾸어 말해 원래 그 사료를 쓴 사람의 심리를 감안하고 거기에 따라서 사료를 해석해야 한다는 점을 간략히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바로 이 문제로부터 우리가 역사를 연구할 때 항상 따라다니는 문제, 즉 역사 에 있어서의 주관성과 객관성이라는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역사를 연구하거나 서술함에 있어서 우리가 항상 부딧치게 되는 아주 골치아픈 문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은 또 우리가 역사를 연구하거나 서술해 나가는 여러 단계에 서 불쑥 불쑥 튀어나와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이며, 당시에 이제까지 살펴본 여러 장에서 다 루어온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이 장만으로 완전히 끝 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장에서 우선 그 실마리가 될 중요한 쟁점 두 가지 정도를 끌어내어 이 문제가 어떤 성질 의 문제인가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우선 첫째로 역사의 재료인 사료를 연구하여 그로부터 우리가 아무런 오류가 없는 사실, 즉 역사상의 진실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가정하기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작업이 끝났느냐 하면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연구로부터 우리가 끌어낸 것은 단순한 역 사상의 사실일 따름입니다. 또 설사 그것을 연대순으로 배열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역사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잡다한 사실들이 그저 연대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학자에 따라서는 이렇게 해서 모아진 사실들 상호간의 관련을 더듬어가면 그로부 터 저절로 역사가 생겨 나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습니다. 19세기만 해도 오히려 이러한 사고방식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실증적인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여전 히 이러한 사고방식이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들 실증적인 역사가들의 사고방식에는 바로 앞 장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료 속에 주관 을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는 기본적인 생각이 그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고방식은 그 자체로서는 결코 잘못이라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문제는 그들이 단순한 사료 해석상의 이러한 규칙을 그 적용 한도를 넘어서서 역사학 전체의 원칙으로까지 확대하고 있 다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류의 실증적 역사가들은 각자의 개인적인 관점을 되도록 제거하고 사료로부터 획득된 사실로 하여금 스스로 말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 역사의 최대의 요건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견해는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그것은 이중의 의미 에서 잘못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로 우선 다음과 같은 점을 문제로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의 사료라고 하더라 도 그 종류는 엄청나게 많습니다. 문자로 쓰여진 서술사료가 있는가 하면 그 자체로서는 우 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유물적 사료도 있습니다. 고고학이나 고천학(古泉學)을 비롯 한 역사보조학이 제공해주는 자료들이 바로 그런 류의 것들입니다. 또한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해도 각종의 증서류 같은 것은 너무나 구체적인 사실과 밀착되어 있어서 그 하나하나 는 대부분 역사의 단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증서류나 여타의 유물적인 사료를 설명 해주고 그 각각을 역사 속에 자리메김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연대기나 전기 혹은 각서 따위 의 서술사료들도 그러한 서술사료를 제작한 사람의 주관에 따른 고찰, 그 사람의 주관에 따 른 각 시대에 있어서의 역사일 뿐입니다. 그뿐아니라 또한 거기에는 이미 그 서술사료를 작 성한 사람들에 의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취사와 선택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런 사료를 작성한 사람의 주관이 우리의 주관이나 우리의 사고방식, 혹은 우리 의 문제의식과 동일하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원칙적으로 다르다고 하 는 것이 옳은 말일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다른 유물적 사료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하나 의 재료는 될지언정 그러한 설명이 곧바로 우리를 만족시켜주는 설명으로 될 수는 없습니 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런 설명도 제시해주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과거의 사실이란 우리가 그것을 어떤 하나의 문맥속에 집어넣어 말을 하게 하지 않는 이상 결코 그 스스로 말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스스로 말을 한다'고 하는 실증적 역사가들의 견해는 하나의 수사학은 될지언정 그대로 진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따금 역사가가 자신이 서술한 역사 속에는 단 한 행도 사료에 기초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장황하게 떠벌이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이 또한 단순한 수사학에 지나지 않든가 기껏해야 자기만족 이상의 것이 되지는 못합니다. 둘째로, 역사가는 자신의 주관을 제거하고 사실로 하여금 스스로 말을 하게 해야 한다는 식으로 문제를 설정하는 방식 그 자체가 처음부터 우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역사 를 쓰고자 하여 사료에 접근할 때에는 무슨 '황소 뒷걸음질에 쥐잡는' 격으로 무턱대고 사료 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사료를 탐구할 때에는 이미 우리 스스 로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 의도에 따라서 사료에 접근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런 의도를 가리켜 우리는 보통 가설(假說)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을 상식적인 말로 표현 하면, '예상'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요즈음 휴행하는 추리소설적 어법으로 말하자면, 아마도 아무런 가설도 없이 범죄 수사에 뛰어드는 탐정이나 형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 치라고 하겠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역사가도 나름대로 이 시대에는 이런 식으로 사건이 전개되었을 것이라든가 혹은 그런 식으로 사건이 전개될 가능성이 있었다든가 하는 식의 가설을 세우고 사료에 접근한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사료라는 것도 연구자를 위해 빠짐없이 전부 갖춰져 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어차피 새롭게 사료를 발굴하고 발견하려는 노력을 해야만 하게 되는데, 이렇게 부족한 사 료를 발굴하고 발견하려는 노력을 해야만 하게 되는데, 이렇게 부족한 사료를 발굴하려고 하는 경우에도 어떤 하나의 예상이 없고서는 사료 그 자체를 발견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 하게 됩니다. 오히려 예로부터 위대한 역사가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그와 같은 사료를 탐 구하는 데 있어서 예상이나 가설을 아주 절묘하게 내세운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예상이나 가설을 아주 절묘하게 설정한 덕택에 유력한 사료를 발굴해낼 수 있었고 또 발견할 수도 있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한 의도 없이는 우리의 역사연구작 업은 애당초 성립되지 않을 뿐더러, 또한 그것 없이는 역사를 쓸 수도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역사를 연구하기에 앞서 세워야 하는 예상이나 가설이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것이어야만 하느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니 반드시 그렇지 않다기보다 오히려 그것은 역사연구의 각 단계에서 항상 좀더 잘 다듬어져서 보다 객관적인 진실에 접 근해가는 식으로 끊임없이 개선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를 연구하는 우리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맨 처음에 세운 예상이나 가설이 자기도 모르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우리가 연구를 할 때에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과 경쟁하는 가운데 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 에, 다른 사람의 생각보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지는 것은 어쩌면 인지 상정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서 우리는 가설을 개선하기보다는 오히려 처음에 세운 가설 을 고집하는 경향을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 결과 무리하고 자의적이라는 의미에서의 주관적 인 해석에 빠지는 잘못을 범하기 십상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 다. 그러다 보니 실증적인 역사가들 중에는 애초에 역사를 연구하면서 '해석'을 끌어들인 것 부터가 잘못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그와 같은 해석, 즉 주관을 제거하고 사료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스스로 말하도록 놔두는 것이 역사를 연구하는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뭔가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가의 가설이 처음부터 잘못 설정되어 있든가 아 니면 그 가설을 고집하는 태도에 있는 것이지 가설을 세우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닙니 다. 거듭 말하거니와 가설 없이는 우리는 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해낼 수가 없습니다. 이는 가설도 없는 탐정이 아무리 현장을 둘러보고 거리를 헤매봐야 무엇 하나 찾아낼 수 없는 것 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주관성과 객관성이라는 것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라 좀 더 까다로운 문제가 또 한편에 남아 있습니 다. 그것은 우리가 '역사에 대한 관심'을 다룬 장에서 이미 말씀드린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읽기도 하고 혹은 연구하기도 하는 이 유가 도대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결국 우리가 장래를 앞에 두고 어떤 행위를 결단하고자 할 때에 그런 결단을 내리기 위한 근거를 구하고자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이라 했습니다. 말 하자면 장래의 결단을 위해 우리는 과거에 물음을 던진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두고 '만들어 지는 것'이라고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각각의 시대, 각각의 영역에서 어떤 문제에 직면하여 그 문제를 해석하기 위 해 과거에 물음을 던진다고 한다면 그 문제는 원칙적으로 항상 다른 것일 것이고, 따라서 과거에 물음을 던지는 방식도 항상 달라질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흔히들 하는 말입니다 만, 역사는 시대와 함께 다시 쓰여지는 것입니다. 역사가 시대와 더불어 다시 쓰여진다는 것 을 보여주는 좀 더 분명한 예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아주 가까운 과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 다. 즉, 일본의 역사와 관련하여 전쟁 전에 가지고 있던 지식이나 역사 서술과 전쟁 후의 그 것을 비교해보면 이 점을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의무 교육을 시작해서 각 단계의 학교에서 사용되는 교과서를 살펴보더라도 전 쟁 전의 교과서와 전쟁 후의 교과서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당면한 문제 내지는 그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시대에 따라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것입 니다. 게다가 또한 우리가 앞으로 하려고 하는 것, 즉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결해야만 하 는가 하는 우리의 태도까지도 달라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역사도 달리 쓰여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태평양 전쟁은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에게 역사의 본질에 대해 아주 훌 륭한 시사를 던져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역사는 이렇게 단지 시대와 더불어서만, 그러니까 시간적인 관련에서만 달리 쓰여 지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에 대한 물음은 세계 도처의 인간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므로 일본 사람이 역사에 던지는 물음과 미국인이나 영국인 혹은 독일인이 역사에 던지는 물음은 다를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서양사를 전공하고 있기 때문에 서양 역사가의 연구서를 누구보다 자주 읽어야만 하 는 입장에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근대의 역사학은 서양에서 발달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배움으로써 오늘날의 학문적인 역사학을 이룩해 놓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보 기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만일 서양의 역사를 서술하는 경우에 영국 이나 프랑스, 혹은 독일 출신의 위대한 역사가의 저서를 그대로 취해 저의 것으로서 가르치 거나 쓰거나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왜나하면 한마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나 문제의식이 그들의 것과는 다르기 때문입 니다. 설혹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독일의 랑케의 저서라 하더라도 제가 그 것을 빌려 학생들을 위해 강의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랑케의 역사는 그 자체로 대단히 훌 륭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일단 그것을 내 자신의 강의로서 혹은 역사서술로서 이용하려고 들면 그 순간 아무래도 그것이 내 자신의 것이 아니고, 따라서 학생에게나 일반 독자에게나 그것을 그대로 제공할 수는 없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특별히 서양의 위대한 역사가들의 저술이 틀리거나 나빠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문 제와 문제의식이 우리와는 다르다는 데서 기인합니다. 방금 위에서 예로 든 랑케 자신도 펠 레폰네소스 전쟁의 역사를 서술한 그리스의 대표적인 역사가 투키디데스를 두고 투키디데스 를 능가할 만한 역사가는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랑케가 이렇게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일 까요? 적어도 펠레폰네소스 전쟁에 관한 한 투키디데스의 역사로 충분하고, 따라서 이에 대 해서는 더 이상 연구를 하거나 서술을 하거나 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랑케가 믿고 있기 때 문일까요? 만일 그렇다고 답한다면 그것은 랑케의 진의와는 전혀 동떨어진 대답이 될 것입 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어쩌면 역사란 스스로 문제를 느끼고 과거에 물음을 던지는 곳에 서만 생겨나는 것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도 관심도 다른 사람에 의해 쓰여진 역사는 설사 투키디데스나 랑케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우리 자신의 역사 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시대와 더불어 원하든 원치 않든 다시 쓰여지게 마련이지만, 그것은 시간적인 관련 속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렇게 공간적인 관련 속에서도 다시 쓰 여지게 됩니다. 나라가 달라지면 같은 과거에 관해서도 다른 역사가 쓰여지는 것이고, 또 달 리 쓰여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제 막 제가 한 말이 옳다면, 여러분의 뇌리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고개 를 내밀 것입니다. 즉, 그렇다면 역사는 항상 그것을 쓰는 인간의 주관의 산물일 뿐 객관적 인 역사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란 말이냐 하는 의문, 혹은 역사는 항상 단지 변화 하고 유동하는 것일 뿐이며 따라서 역사상의 진리는 기껏해야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진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냐 하는 의문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는 일단 역사에는 절대 로 객관적인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답변을 해두어야만 하겠습니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 의 출판물 가운데 [캠브리지 역사총서](고대, 중세, 근세의 3부로 이루어진 세계사)란 것이 있는데, 이 총서를 편집하면서 편집자인 액튼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 역사는 최종적으로 객관적인 역사를 서술한 것이어야 하며, 따라서 이 총서의 계획 에 참여한 집필자들은 만일 그 자신들의 이름을 삭제하고 나면 시대나 영역이 변화하고 그 에 따라 필자가 교체되더라도 그 사실을 독자들이 눈치챌 수 없도록 할 것을 목적으로 해야 만 하고, 또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객관적 진실의 합성이어야 하며, 바야흐로 이제 연구의 진보와 더불어 객 관적 진실의 합성으로서의 역사가 가능해졌다는 확신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하 겠습니다. 이는 방금 위에서 말씀드린 바, 객관적인 역사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마로 가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액튼 교수의 이러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잘못이었습니다. 그것이 잘못되 었음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캠브리지 역사총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 습니다. 액튼 교수의 확신이나 희망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장 직접적인 책임을 지고 집필했 던 근세사야말로 그 총서 가운데서 가장 불완전한 부분인 것으로 지적되었고, 따라서 결국 그부분을 전면적으로 수정한 개정판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액튼 교수나 근세 사를 집필한 역사가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고대나 중세사의 경우에도 거의 같 은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역사에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역사가 언제 나 문자 그대로 다시 쓰여지는 것이냐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갑작스런 단절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에 있어서도 돌연한 급변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 다. 물론 혁명이라든가 우리가 경험한 바 전면적인 패전과 같은 사건에 의해 역사가 대폭적 으로 다시 쓰여지는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이전 역사의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올바른 것으로 간주되던 것이 그 후의 연구에 의해 부정되는 일은 물론 흔히 일 어나는 현상입니다. 또한 이전에 중요시 되던 것이 그 후의 연구에 의해 그 의의가 감소되 거나 혹은 완전히 서술에서 빠져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사료처리의 절차 를 거쳐 확립된 사실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올바른 것으로 남게 됩니다. 예를 들어 1914 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시대가 변했다고 해서 변할 수 있는 사실이 아 니며, 또한 그와 관련된 다양한 사실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 쨌든 이러한 객관적인 사실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역사도 일단은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완전히 새로 쓰여지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사료로부터 획득된 사실이 스스로 역사를 만들지는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사실이나 사실 상호간의 관련에 해석을 가함으로써만 역사는 하나의 통합된 전체를 형성하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씌어짐으로써 변하는 것은 사실이나 사실 상호간의 관련 그 자 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갖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당면하는 새로운 문제나 시대 와 더불어 변해가는 우리의 문제의식의 변화와 함께 변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단 확 립된 객관적인 사실이 그 즉시 잘못으로 밝혀지는 경우란 없으므로, 역사가 다시 쓰여지는 것이라고는 해도 이는 결코 문자 그대로 전면적으로 다시 쓰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이전의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그 위에 새로운 연구를 쌓아가는 것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주관성과 객관성의 문제를 생각함에 있어서 우리는 항상 역사의 소재로 서의 사실이나 데이터와, 그것들에 해석을 가함으로써 성립되는 역사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 니다. 동일한 사실에 대해서도 해석은 항상 달라질 가능성이 있으며, 또 사실 그자체도 항상 새롭게 추가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국 역사는 이렇게 이중의 의미에서 항상 다시 쓰여지 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에 완전히 객관적인 역사란 존재하지 않 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점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이 자리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역사의 과정, 다시 말해 우리가 연구에 의해서 쓰게 되는 역사가 아니라 과거의 모든 것이 라는 의미에서의 역사의 과정은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의 점진적이고도 무한한 전 개의 과정이라는 점입니다. 이 과정에 있어서는 지난 시대의 문제라든가 그 문제에 대응하 여 생겨난 역사가 단순히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말해 새로운 문제나 그 문제에 대응하는 새로움 역사 속에 포섭되어가는 형태로 부정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시야는 끊임없이 넓어지고 또 끊임없이 깊어집니다. 바로 이 점에 역사라는 학문이 점진적 으로 축적되면서 우리의 역사인식에 깊이와 넓이를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 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점은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비단 역사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모든 학문에 있어서도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이야 기가 아니라 다른 모든 학문에 있어서도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의 기술적 진보는 언제나 외계의 자연을 지배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이루어지 는 것인데, 외계의 자연을 지배하는 정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우리의 시야도 또한 그 만 큼 당연히 넓어진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에서 그 예를 찾자면, 사료 연구의 측면에 서 옛날 사람들이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방법이 새로이 개발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입니다. 앞 장에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비행기를 이용함으로써 우리는 옛날의 경지제도나 농 업상의 토지제도 따위에 대해 19세기의 역사가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자료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고고학적인 유물 등의 연대를 확정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탄 소연대측정법, 즉 해당 유물 속에 포함되어 있는 탄화물의 방사능을 검사함으로써 그것의 연대를 측정하는 방법이 제2차 대전 후에 널리 행해지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아주 오랜 옛 날의 연대까지 비교적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현재 이 방법은 아직 완전한 단 계에 이르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오차가 상당히 큰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달리 비 교할 아무런 자료 없이도 대략적인 연대를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놀랄만한 기술의 진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술적인 진보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만, 우리는 과거에 인간적인 혹은 사회적인 온갖 다양한 경험을 수도 없이 쌓 음으로써 오늘은 우리의 물음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아주 다양한 답변을 제공해 줍니다. 이와 같이 풍부한 인간경험의 보고를 연구함으로써 또한 우리의 역사에 대한 해석도 그 깊 이와 넓이를 더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의 역사가 언제나 얼마간은 주관적인 계기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주관 이란 것이 우리의 단순한 착상이나 개인적인 편견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한다는 것을 의미합 니다. 사실 우리가 스스로를 되돌아보면 그때까지는 완전히 자명한 것으로 생각되던 자신이 전 혀 알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자기자신만의 문제인 것처럼 여겨지 는 것 가운데 역사나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것입 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자아가 모두 역사나 환경에 의해서만 형성된다는 말은 아 닙니다. 우리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주체인 까닭에 자신에 대해 항상 책임을 지지 않으 면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바라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답변이 누구에게나 결코 자명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소크라테스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것도 무엇보다 이와 같은 의문을 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다시 역사에 있어서의 주관성과 객관성이라는 애초의 문제로 되돌 아가면, 이 문제는 결국 다분히 역사에 대한 우리의 전체적인 시각, 즉 역사관의 문제로까지 귀착되는 것입니다. 이 역사관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 함께 논의할 시간이 없기 때 문에 다음 기회에 다른 맥락에서 이야기를 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이제까지 말씀드린 점과 관련하여 한마디만 결론적인 말을 덧붙여두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역사를 볼 때에 이용하게 되는 예상이라든가 가설 같은 것은 결국 우리의 역 사관과 관련되는 문제라는 점이 그 하나입니다. 이 장의 맨 앞 부분에서 역사적 사실로부터 역사를 구성할 때에는 주관이 필요하다는 점과 아울러 이런 주관을 거치지 않고는 역사적 사실을 구성할 수 없다고 하는 점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역사를 연구할 때 에는 논리상 언제나 어떤 주관이 선행하게 마련이라는 말씀도 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중 요한 것은 바로 이 주관이라는 것이 역사관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 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만, 일단 여기서는 우리가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는 항상 역사관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확인해 두는 데 그치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덧붙여자면, 이 역사관이나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역사 연구상의 가설이나 모두 역사 그 자체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런 관계를 잘못 이해하면-이 것을 오해할 위험이 항상 따라다닙니다만-우리가 지극히 경계해야 할 역사에 대한 주관적 인 해석, 그것도 나쁜 의미에서의 주관적인 해석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일단 이러한 바람 직하지 않은 사태가 일어나게 되면 역사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하루 아침에 무너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점에 항상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역사는 사람의 인간적인 체취가 너무나 강하다든가 혹은 또 지나 치게 계급적인 입장에 기울어 있다든가 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이러한 일은 모두 이 역사관 내지 역사상의 가설을 역사 그 자체인 것으로 잘못 생각한 데 기인하는 것입니 다. 우리가 역사를 연구할 때나 역사를 서술할 때나 가장 주의를 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이 와 같은 의미에서의 주관적인 해석입니다. 그렇지만 이 주관적인 해석의 유혹은 역사관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성격으로부 터 나오는 것이어서 지극히 극복하기 어려운 유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관이 가지고 있는 이렇게 강력한 유혹에 대해서는 역사와 역사관에 대해 다루는 곳에서 다시 말씀드릴까 합니다. 제5장 시대구분은 역사에 대한 판단이다. 시대구분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어쨌든 이 문제를 고찰하다 보면 결국 역사의 본질에 대해 전혀 뜻밖의 아주 재미있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의외로 시대구분의 문제를 아주 가볍게 보아 넘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 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시대구분이란 것이 원래 단절이 없는 시간으로서의 역사의 흐 름 속에 우리가 제멋대로 어떤 시점을 설정하여 여기서부터는 근세가 시작된다느니, 이제까 지는 중세였다느니 하고 자의적으로 구분한 데 지나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그러고는 애초부 터 그것이 무리였다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역사를 연구하거나 역사를 생각하거나 하는 경우 에 이용하기 위한 편의적인 수단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가볍게 생각해 버립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사람들의 생각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에는 전문가들조차 흔히 빠지기 쉬운 커다란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저는 이 시 대구분의 문제에 대해 먼저 현재에는 어떠한 시대구분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또한 이제까지는 어떠한 시대구분이 이루어져왔는지 하는 점에서부터 논의를 풀어가고자 합니다. 우선 가장 먼저 생각해둘 필요가 있는 것은 시대구분이 비단 역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 라는 점입니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다소 넓은 시각에서 전체를 파악하려 할 때 도무지 한눈으로 일별해 볼 수 없는 경우 우리는 그 속에 몇 개의 단락을 설정하여 보는 사고상의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인생을 생각하는 경우에도 유년기라든가 청년기 혹은 노년 기라는 식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여행을 하는 경우에도 오랜 옛날부터 이와 비슷한 구분을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곳은 이번이 몇 번째 여행이고 또 다른 곳은 몇 번째 여행이라는 식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방식이 그것입니다. 이 런 방법은 모두 나중에 하나하나의 단락을 합쳐서 전체를 이해하려고 하는 사고방식과 다르 지 않습니다. 이렇게 볼 때 어떤 커다란 사건의 전체적인 면모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려고 할 경우, 전 체를 한꺼번에 꿰뚫어보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몇 개의 부분으로 나누고 그 위에서 전체를 파악하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고방식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역사에 관해서만 이런 사고방식이 문제가 된다는 것은 처음부터 터무니없는 말인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까지 어떠한 시대구분이 이루어져 왔는가부터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시대구분의 기준을 보면 그것은 실로 천차만별이라고 할 정도로 다양합니다. 옛날에는 정치의 중심이라든가 혹은 가 시기에 지배했던 왕조의 이름을 기준으로 하여 시대구분을 하 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경우에는 주周, 진秦, 한漢과 같은 왕조의 명칭이 시대구분의 기준으로 이용되는 것이 그러합니다. 그뿐 아니라 정치의 내용에 착안점을 두고 시대를 구분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왕조시대와 그에 대비하여 무신정권 시대라는 식으로 정치의 내용을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경우도 있었고, 또 노예제 시대, 봉건제 시대라는 식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구분의 방법이 오늘날 모두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와 같은 시대 구분을 하게 된 애초의 이유는 오늘날 대부분 사라져버렸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대구분은 요컨대 단순히 역사의 표면에 나타난 외적인 특징으로 역사를 구획한 것일 뿐, 그 각각의 시대가 어째서 하나의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발전해 가느냐 하 는 발전의 의식이 그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역사를 진정한 의미에서 이해 하지 못하던 때의 시대구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대구분이라고 하면 곧바로 우리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는데, 소위 3분법이 라는 것입니다. 보통 서양의 고대-중세-근세라는 3분법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되겠습니다만, 일본이나중국에도 이런 구분법이 없지 않습니다. 일본의 경우 이미 도꾸가와 시대에 상대 (上代), 중세, 근대라는 구분법이 등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구분법이 서양 의 그것을 모방한 것이냐 하면 단순히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시점에 있는 지금의 세상이라는 의미에서 근대, 그로부터 아주 먼 옛날의 시점을 고 대 혹은 상대, 그리고 그 사이에 하나의 중간 시대를 설정한 데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시 대구분법은 결국 우리가 가장 상식적으로 생각해내기 쉬운 보편적인 시대구분일 뿐입니다. 하지만 서양의 경우에 이와 같이 고대-중세-근세로 이루어지는 3분법이 만들어진 데는 그 나름의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이야기됩니다. 그것은 중세기 말 그러니까 이탈리 아에 르네상스 문화가 열리기 시작한 무렵의 일입니다. 그 당시 휴머니스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과 세상 돌아가는 방식이 그때까지의 중세의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그리스-로마의 고대세계에서 자주 표현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로마의 고대시대를 그 이후의 역사와는 분명히 다른것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리 하여 그들은 이러한 고대와 자신들의 현대, 즉 르네상스기라는 현대를 양극에 위치시키고 그 중간에 중세라는 시대를 끼워넣어 오늘날의 3분법적 시대구분을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3분법적 시대구분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의 사고습관과도 맞아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광범하게 채용되었습니다. 일본에서도 전통적인 시대구분법과 병행하여, 혹은 그러한 전통적인 시대구분법의 바탕으로 이러한 3분법이 널리 이용되고 있습니다. 구 체적으로 말해 오늘날 나라시대奈良時代-헤이안시대平安時代-가마쿠라시대등鎌倉時代-무로 마치시대室町時代로 나누는 식의 낡은 시대구분법이 이용되는 경우에도 그 밑바탕에는 서양 의 3분법적 시대구분의 발상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3분법적 시대구분은 너무나 포괄적인 구분이라 서 그것만으로는 결코 만 족스런 시대구분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연히 좀 더 세밀하고 구체적인 규정이 필요하 게 됩니다. 단순히 좀 더 구체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내재적인 발전의 계기를 그 속에 포괄할 수 있는 그러한 구체적인 규정이 필요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고대-중세-근세라는 3분법적 시대구분을 이용하는 경우에도 그 각각의 시대 속에 좀 더 구 체적인 역사적 규정을 포함하고 있는 구분법이 채택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3분 법적 시대구분이 그대로 쓰이는 경우는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이 3분법적 시대구분에는 아주 곤란한 문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서양을 예로 들어 살펴보면 그리스-로마의 고대, 그로부터 게르만 민족이 들어오고 난 이 후의 중세, 그 후에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경계로 시작되는 근세로 나누는 것이 통상적인 3분법적 시대구분이라 하겠는데, 이대 이 마지막의 근세 이후에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현 대라는 시기를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근세와 현대의 구분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다시 말해 근세 속에 현대가 들어가는 것인가, 아니면 근세는 어떤 일정 시점에서 끝나고 그 후에 근세와는 질적으로 다른 현대라는 시대가 이어지는 것 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르네상스나 종교개혁이 일어난 14-16세기와 오늘날 사이에는 이미 상당한 시간이 경과하였고, 또 그 사이에는 그것을 전부 일괄하여 근세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인 사 정들이 많이 개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현대를 어떻게든 근세와 구분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3 분법이 아니라 4분법적 시대구분이 되어 버리는데, 이 4분법이라는 것이 아주 골치 아픈 문 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대라는 것은 요컨대 역사가가 역사를 보고자 할 때, 혹은 우리가 역사를 고찰 하려고 할 때에 언제나 자신이 서 있는 시점을 현대라고 부르고 있는 데다, 또 중세인의 경 우에도 그가 역사를 쓰려고 했을 당시에는 역시 현대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현대라는 명칭 은 고대, 중세, 근세라는 각기 명료한 성격을 가진 시대의 명칭에 비해서 무성격적인 명칭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는 말하자면 무명無名의 시대, 어노니머스anonymous 곧 '익명의 시대'가 되는 셈입니다. 현대라는 구분을 굳이 내세운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로 근세의 단순한 여낭이 아니라 특정 의 의미 내용을 갖는 시대를 내세우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다시 현대라는 무성격인 명칭 말고 다른 어떤 명칭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 명 칭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그것은 아주 까다로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고대-중세-근세라는 3분법은 그것으로 전체가 완결되는 구분법이므로 거기에 새로운 구체 적인 명칭을 부여하는 것은 거꾸로 3분법 그 자체를 파괴하는 셈이 되고 맙니다. 이와 같이 3분법적 시대구분에는 현재 도저히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3분법 고유의 딜레 마가 있습니다만,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현재 이 딜레마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현재에도 아직 나름의 존재 이유 를 가지고 있는 이 3분법에 그 의미를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아래에서 검토해 보고자 합니다. 이 3분법적 시대구분은 오늘날에도 활용되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역사의 파악방식에는 발 전단계라는 역사의 사고방식이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몇 개의 단계로 구분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는 결 코 최근에 들어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가 진정으로 발전의 학문으로서 이해 되기 시작한 계몽주의 시대, 그러니까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 사이에서 먼저 시작되 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에 앞서 위대한 이탈리아의 천재로서 비코라는 인물이 있긴 했지만 일반적으로 말할 때는 위와 같이 말합니다. 이들 계몽주의자들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인간문명의 진보의 근원으로서 이성(理性)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 계몽주의자들은 인간이 야만적인 상테로부 터 문명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이성의 진보를 기준으로 삼아 몇 개의 단계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단계론은 상당히 유치한 것이어서 역사적으로 명확한 단계를 보 여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뿐아니라 이들은 역사를 설명하는데 오히려 이성에 대한 신뢰 내지 신앙을 무매개적이고 선험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역사의 발전을 내재적으로 파악해내는 데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후 19세기의 독일에서 발전단계에 관한 새로운 사고방식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주로 독일의 경제학자 및 경제사가에 의해 고안된 경제생활을 중심으로 한 발전단계의 관점인데, 그것이 경제의 측면에 비중을 두게 된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발전단계의 관점은 인간의 다양한 문화현상 중에서 경제가 넓은 의미에서 계량적 으로 파악하기가 가장 쉽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즉 역사를 발전단계라는 관점에서 말하면 거시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계량이 어떻든 불가결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경제 현상이야말로 그 어떤 다른 역사현상보다도 객관적 계량이 용이하다는 사실에 따른 것입니 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경제의 발전단계를 상정하고, 나아가 그것을 기초로 하여 인간의 역 사를 구분해 보려고 하는 사고방식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일 뿐 아니라 또 가장 중요한 발전단계를 제시한 사람은 독일에서 '국민경제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프리드리히 리스트입니다. 이 리스트라는 사람은 재화財貨의 생산과 교환이라는 두 가지의 계기를 기준으로 경제상태가 인간의 역사 단계를 구획하면서 변해간다는 데 착안하여 '미개상태''목축상태''농업 및 공업상태' 그리고 나아가 '농공상(農工商)의 상태'라는 식으로 경제의 상태에 관한 몇 개의 단계를 설정했습 니다. 그 뒤를 이어 브루노 힐데브란트가 교환형식-재화를 교환하는 형식을 말합니다-의 발전 을 기준으로 하여 '자연경제' 혹은 '현물경제''화폐경제''신용경제'라는 세 개의 발전단계를 고안해냈습니다. 그리고 또한 [국민경제의 성립]이라는 저서로 유명한 칼 뷔셔는 경제재經濟財의 생산자로 부터 소비자에 이르기가지의 거리를 표준으로 하여 몇 개의 발전단계를 설정하였습니다. 우 선 최초의 것이 '자기경제'인데, 이것은 생산자가 동시에 소비자가 되는 단계입니다. 이러한 '자기경제'에 이어서 '도시경제', 다음으로는 '국민경제'라는 세 개의 단계를 뷔셔는 설정해 놓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정책학의 분야에서 널리 알려져 잇는 구스타프 슈몰라는 '촌락경제' '도시경제' '국민경제' '세계경제'라는 발전단계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이상은 주로 역사파 경제학이라고 일컬어지는 학파에 속하는 경제학자들의 발상입니다. 이에 비해 원래의 역사학 분야에서는 중세 독일 경제사의 영역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긴 칼 람프레히트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칼 람프레히트는 사회심리에 착안하여 경제학자들이 내놓 은 것과는 다른 발전단계를 상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람프레히트도 처음에는 역시 경제사의 발전단계와 아주 흡사한 발전단계를 생각하 고 있었습니다. 즉 '원시적 경제' '씨족적 경제' '촌락적 경제' '장원(莊園)경제' '도시경제'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라는 도식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훗날 그는 이러한 발상을 사 회심리 및 민족심리에 기초를 두고 이론화함으로써 다시 '상징주의 시대' '유형주의 시대' ' 전통주의 시대' '사회주의 시대'라는 발전단계를 상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상이 19세기의 독일학자들이 발전단계를 설정하고자 시도한 노력들입니다. 이러한 발전단계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한 번쯤 고려해볼 만한 학문적 내용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이러한 단계를 실제로 역사 속에 설정해보고 구체적으로 어 디서부터 어디 까지를 어떤 단계에 맞춰볼 것인지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그것은 너무 나도 추상적이어서 아무래도 역사의 구체적인 사실에 적용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곧바로 깨 닫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날에는 다들 발전단계론을 실제로 응용하려고 하는 사 람이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자들의 노력과 거의 병행하여 칼 마르크스와 프리 드리히 엥겔스가 새로운 발전단계 및 시대구분을 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먼저 칼 마르크스 가 '아시아적 사회' '고대적 사회' '봉건적 사회' '시민적 사회'의 4단계를 자신의 [경제학비 판]1858에서 내세웠는데, 그 뒤에 엥겔스가 미국의 민속학자 모건의 저서인 [고대사회]1877 를 높이 평가하고 그 속에 들어 있는 원시공산제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마르크스의 '아시아 적 사회' 앞에 '원시공산제 사회'를 추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 시민사회' 다음에 '사회주의 사회'를 놓고 있는데, 이것까지 합하면 모두 여섯 단계의 발전 단계를 규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의 이러한 발전단계론은 이전의 그것들과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하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발전단계론은 이전의 그것들 처럼 단순히 몇 개의 발전단계를 설정한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의 단계로부터 다음 단계로 계기적으로 이행해가는 필연적인 과정에 대한 설명, 말하자면 역사의 내재적인 운동 법칙을 아울러 설명해냄으로써 그 어떤 이론보다도 강력한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는 점입니 다. 즉, 마르크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순을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러한 모순으로부터 방금 위에서 말한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까지의 발전단 계를 경과하는 역사발전이 일어난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역사발전이 필연적인 것이라는 점 을 구체적으로 설명해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이러한 발전단계론은 기묘하리만큼 우리가 흔히 이용하고 있는 고대-중세-근세의 3분법적 시대구분에 딱 들어맞는다는 점입니다. 즉 마르크스는 고대 사회를 노예제 사회로 규정하는데, 이 노예제 사회는 흔히 말하는 고대 사 회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마르크스에게 있어 봉건제 사회는 농노제 사회인데, 이 또한 우리가 보통 생각하고 있는 중세 사회와 거의 일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 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로서, 이것은 근대의 소위 시민 사회가 됩니다. 이렇게 보면 고대- 중세-근세라는 3분법적 시대구분이 마르크스의 고대적-노예제적, 봉건적-농노제적, 그리고 시민적-자본제적이라는 세 개의 발전단계와 거의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역사의 3분법적 시대구분은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매우 강력하게 보완되었다 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는 단순한 학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변혁의 실천적 이론으로서 세계 도처에서 각 민족, 각 사회에게 그 나름의 실천방식을 보여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하여 각 나라나 민족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이제까지의역 사발전을 설명해주는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역사발전의 목표를 제시해주는 것으로 이해되 었습니다. 그리고 종래의 3분법적 시대구분으로는 자신들이 역사를 설명하지 못했던 나라나 민족들도 이제는 고대, 중세, 근세의 세 시대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이러한 예를 들자면 중국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중학교에서 동양사 를 배우면서 중국사에 대해 들어 잘 알고 있겠습니다만, 중국사는 단지 왕조의 교체만이 있 을 뿐 역사의 발전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심히 의심스러운 역사였던 것으로 저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특히 중국사에는 중세가 없습니다. 적어도 유럽이나 일본의 중세에 비견할 만한 중세가 없다는 것이 중국사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지식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런 중국에서도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중국사에 고대노예제, 중제농노제라는 시대구분을 설정하려는 시도가 강력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편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 사회를 역사가 바야흐로 도달하게 될 목표로 상정하고 있 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입장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국가면 국가 혹은 민족 이면 민족이 현재 마르크스주의의 발전단계 가운데 과연 어떤 단계에 놓여 있느냐 하는 것 을 현대사 분석의 주요 과제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후진 국가들의 경우에는 마르크스 주의에서 말하는 시민사회의 단계에 도달한 곳이 한 곳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편에서 는 그러한 단계로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하나의 중요한 정치목표가 됨과 아울러, 다른 한편 에서는 세계적인 제국주의의 환경에서는 발전단계의 도약이 있을 수 있다고 하여 시민사회 를 생략한 역사발전의 이론을 고안해내기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3분법적 시대구분을 보완한 이래 이와 같 은 마르크스주의적 발전은 보편적인 역사발전의 법칙으로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어디에서나 그러한 법칙의 실현을 추구하려는 노력이 활발하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것이 대체로 최근에 이르기까지 역사연구를 지배해온 두드러진 경향이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원래의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이와 같은 시대구분을 우리는 이제까지 이 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대구분에 관해서는 끊임없이 다양한 측 면에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의문 가운데 가장 흔한 의문은, 이 장의 맨 앞 부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원래 단절이란 것이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 제멋대로 단절을 만드는 것은 역사를 무리하게 하나의 틀 속에 집어넣으려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입니다. 발전단계를 규정하는 그 어떤 이론이든 일정한 시점을 택해 역사를 칼로 무 베듯 명료하 게 앞뒤로 자르는 일은 지극히 예외적으로밖에 행해지지 않는 일입니다. 시대구분을 아무리 정밀하게 하더라도 그러한 시대구분과 모순되는 사실은 언제나 남게 되는데, 이것은 문제의 성격상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시대구분에 대한 일종의 불신, 나아가서는 편의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3분법적 시대구분의 근거가 된 르네상스 시대와 관련하여 연구가 진행됨에 따 라 도저히 르네상스라고는 인정할 수 없는 시대, 곧 중세시대 자체 속에 르네상스적인 현상 이 도처에 스며들어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 결과 중세 속에 르네상스가 확대 적용되기에 이르렀고, 그럼에 따라 르네상스의 의미도 그 만큼 퇴색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런 데 또 한편으로는 이 르네상스 속에서도 중세적인 요소가 얼마든지 발견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측면에서도 르네상스라는 시대구분의 의미가 마찬가지로 희석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시대구분이란 완전히 편의적인 것, 다시 말해 역사를 서술하기 위한 단순 한 수단일 뿐, 하등의 본질적인 중용성을 갖지 않은 것이라는 사고방식이 생겨나기에 이르 렀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실제로 전문적으로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에게서 많이 찾 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 이러한 사고방식에는 커다란 오류가 숨어 있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먼 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도대체 왜 시대구분을 하느냐, 즉 실재하는 과거의 총체로서의 역사의 흐름속에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나의 단락을 지으려고 하느냐는 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어느 정도 언급을 한 바가 있습니다만, 우리가 말하는 역사란 존재하는 역사 그대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객관으로서의 역사에 대해 우리의 역사는 주관 적인 계기에 의해 정리된 객관적 역사에 대해 우리의 역사는 주관적인 계기에 의해 정리된 객관적 역사의 한 단편인 것입니다. 따라서 바로 이런 주관적 역사 속에만 시대구분이 있는 것이지, 존재로서의 역사 속에 단절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지적해 두어야 할 점이 바로 이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대구분이 사실상 이와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객관적 역사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가공의 설정, 가공의 시대구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 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 속의 구분이라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것이 객관적일 것 을 요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아주 어려운 문제가 대두되는 것입니다. 그 러나 우리가 여기서 특히 강조해두어야 할 것은 시대구분이란 본래 역사에 대한 우리의 해 석을 표현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근세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 그것은 근세라는 하나의 개념 속에 포함되는 의미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지, 실제로 존재하는 역사를 근세라는 하나의 척도로 재서 거기에 하나의 단락을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근세라는 하나의 역사적 의 미연관을 역사의 사실 속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 시대구분의 본래 목적이고, 역사에 대 한 통일적 이해의 작업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역사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우리의 해석과 판단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라면 시 대구분이란 역사연구 자체의 본질거인 작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만큼 이것을 편의적인 것이라고 치부한다면 아주 커다란 잘못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의 시대구분은 어디까지나 객관적으로 엄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확실히 어려운 문제이고 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한 문제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역사에 대한 우리의 해석과 판단을 기준으로 하는 것인 이상, 어디까지나 회피할 수 없는 작업임과 동시에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가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항 상 사실에 비추어 검증을 거듭함으로써 좀 더 객관적인 것으로 만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통일적인 역사상(歷史像)도 좀 더 정확하게 형성될 수 있을 것입 니다. 제 6장 역사가는 자기 나름의 시대구분이 있어야 앞 장에서 다룬 시대구분의 문제에 이어서 이 장에서는 현재 시대구분이라는 것이 어떤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지, 바꾸어 말하면 새로운 시대구분을 설정하기 위해 어떠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경우 기본적인 관점은 어떠한 것인지를 이야기해볼까 합니 다. '역사에 대한 관심을 다룬 장에서 역사는 시대와 함께 다시 쓰여지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역사가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다시 쓰여지듯 역사의 시대구분도 또한 시대와 더불어 새로워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대구분이 역사에 대한 해석과 판단 을 기초로 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시대구분이라는 것도 역사에 대한 우리의 해석 및 판단과 더불어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장에서는 일단 근세라는 한 시대를 선정하고, 이 근세라는 시대구분과 관련하여 현재 제기되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를 생각해 볼까 합니다. 앞 장에서는 역사를 3분법적 시대구분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주요한 시대구분으로서 이용 되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3분법은 현대라는 시기를 어떻 게 취급할 것이냐의 문제와 관련하여 아주 어려운 곤란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해 현대라는 시대는 이름이 없는 무규정적인 시대 규정이 되고 있다는 점과 나아가 현대를 근 세로부터 분명히 이질적인 시대로서 구분해 버리면 3분법 자체가 그 근본에서 무너지지 않 을 수 없다는 의미의 이야기를 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흔히 근세라고 일컬어지는 시대의 단락은 대체로 르네상스 혹은 리포메이션 (Reformation), 곧 종교개혁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근세라고 부르 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근세가 전체적으로 하나의 기간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르네상스와 오늘날 사이에 시민혁명-그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1789년의 프랑스 대 혁명이 있습니다-혹은 자유주의 혁명을 그 중간에 설정하고 그 이전을 근세의 전기, 그 이 후를 근세의 후기로 나누는 것이 보통입니다. 어쨌든 이 근세의 2분법은 시민혁명이라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변혁을 하나의 기준으로 하 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민혁명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정치적인 의미를 잃지 않은 한 이 구분은 아직도 타당성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민혁명이 그와 같은 타당성을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지고 있느냐하면 거기에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문 제가 있습니다. 첫째로, 시민혁명의 목표가 달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세기 전반 이래 혁명에 의해 달 성된 개인의 자유가 도리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다양한 사회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소위 레세 페르(laissez-faire), 곧 개인의 자유방임-이것은 특히 경제상의 자유방임을 가르킵니다만-이 강자에게는 자유를 의미하지만 약자에게는 억압을 의미하는 사태가 초래되었고, 또한 그런 사정으로부터 갖가지 사회문제와 노동문제가 야기 되어 왔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시민혁명이 일어날 당시에는 단일한 존재로 파악되고 있던 소위 시민계급 혹은 제3계급이 그 이후 단일한 계급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자유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그에 따라 이 제4계급에 의한 새로운 혁명이 그 깃발 을 높이 쳐들게 되었습니다. 이에 맞서 자유주의라는 정치적 입장을 대표하는 시민계급은 그러한 혁명을 회피하기 위해 사회개량 정책을 소리 높이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자유방임주의라는 자유주의 본래의 원칙은 19세기를 경과하면서 여러가지 다양한 요소와 혼 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 후 20세기에 접어들고 나서는 자유주의 시대에 생겨난 새로운 요소가 점점 확 대되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한편으로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사회주의 국가로서 소련이 탄생하는 사태가 일어났고, 다른 한편으로 전후에는 자본주의 국가들 자체내에 자본 주의의 대전환을 불어오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1929년에 시작된 세계 ' 대공황'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세계적인 대공황을 계기로 하여 그때가지 자유방임에 기초 한 자본주의는 더 이상 어쩔 수 없이 원리적으로 전환할 것을 강요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대공황을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미국의 플랭클린 루즈벨트는 새로운 정 책, 이른바 뉴딜 정책을 제창하면서 거의 종교적인 개종과도 맞먹는 의식상의 변화를 경험 했다고 실토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그때까지의 자유주의에 대한 신앙을 근본적으로 재고하 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루즈벨트 자신이 느꼈기 때문에 다름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뉴딜이라고 불리는 이 정책이 자본주의의 아주 커다란 방향 전환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 다. 바로 이런 맥락에 뉴딜정책의 위헌론, 그러니까 뉴딜정책이 위헌이냐 아니냐를 둘러싸고 미국 전역이 들끓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 문제야 어떻든 이번에는 그 후에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대량의 사회주의 국 가들이 한꺼번에 성립됨으로써 세계는 이제 동과 서로 양분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이제 19세기 초에 등장한 자유주의 시대는 이미 완전히 과거에 묻힌 시대구분 에 속하는 것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시대구 분의 문제가 우리 역사가들 앞에 던져져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19세기의 발전을 통해서 사회문제나 사회주의가 논의되는 가운데 역사의 원동력 내지 기본적인 발전의 요인으로서 사회경제상의 변화를 정치적인 변화 이상으로 중요시하는 역사의 사고방식이 등장하였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근세의 2분법은 정치적인 중요성을 기준으로 하여 시민혁명을 그 2분법의 분기점으로 삼았으나 이번에는 경제적인 것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기술의 발전이 바탕이 되어 경제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이것이 다시 역사를 움직여 간다는 사실, 다시 말해 기술이 근본적으로 역사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는 사실이 승인되 기에 이른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기술의 발전을 기준으로 역사의 시대구분을 하려 는 관점이 대두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19세기와 20세기가 교차하면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시민혁명 이상 으로 중시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입장에 서게 되면, 시민혁명이란 것도 이 산업혁명과의 관련 속에서 비로소 역사적인 의미가 제대로 조명될 수 있다는 생각이 뒤 따르게 됩니다. 산업혁명은 한마디로 그때가지 우리가 사용하고 있던 사람이나 동물, 혹은 바람이나 물과 같은 이른바 유기적 에너지를 역사상 처음으로 비유기적인 에너지로 대체한 그야말로 획기적인 역사적 현상입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우리는 도구가 아닌 기계를 생산의 기초로 삼게 되었으며, 이러한 산업혁명 이래 이른바 기계와 산업의 시대가 시작되어 오늘 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에너지의 전환은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습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산업혁명은 단순히 근세를 둘로 나누는 기준이 되는 데 그치지 않고 인류사 전체를 양분하 는 분수령이 된다는 견해까지 나오게 됩니다. 그 결과 한편으로는 근세 전기(前期)라고 불리 는 시기, 즉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으로부터 시민혁명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에 부여되던 한 시 대로서의 특성이 희박해집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와 같이 기술의 발전을 중심으로 한 사고방식을 산업혁명 이전의 시대에 적용해 보면 유기적 에너지를 이용하던 그 시대에도 여러 단계가 있다는 것 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산업혁명 이전의 사회변화에 대해서도 이러한 에너지 이용의 발 전, 즉 기술의 발전을 측도로 하여 단계를 설정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이것 또한 지극히 재미있는 시도일 것인 바, 그렇게 되면 이제까지의 봉건시대면 봉건시대, 절대주의시대면 절 대주의시대를 더욱 구체적으로 잘게 구분하는 것도 가능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간과 가축의 힘, 혹은 바람과 물의 힘과 같은 유기적 에너지를 이용하던 산업혁명 이전의 시대는 설사 그 사이를 좀 더 세분하여 단계를 설정한다 하더라 도 산업혁명 이후의 시대에 비하면 일괄하여 취급할 수 있을 정도의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 다. 바로 이 점이 한 가지 중요한 점입니다.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기술의 진보를 기준으로 새롭게 단 계를 설정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19세기 전반까지를 증기에너지의 시대였다고 한다면, 19세 기 후반의 시대는 이 증기에너지에 더하여 전기에너지가 이용되게 된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나아가 19세기 말에 들어서면 디젤 등의 발명에 따른 내연기관이 새로이 등장함으로써 우리 의 기술에 커다란 혁신을 불어일으키게 됩니다. 이 기술이 자동차와 비행기 혹은 여타 각종 의 산업기계에 적용되어 위대한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2차 대전 이후가 되면 내연기관의 이용이 더욱 눈부신 발달을 거듭하는 한편 제트엔진, 로케트 같은 것들이 새로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 제트엔진, 로케트의 기술은 우리 의 생산 내지 산업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주었을 분만 아니라 우리의 사회생활, 나아가서 는 문화 그 자체에까지 막대한 변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기술의 진보는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또 원자에너지라는, 그때가지의 에너지와는 전혀 질 을 달리하는 에너지가 이용되기에 이릅니다. 다시 계속해서 핵융합반응이란 것이 알려졌는 데-이른바 수소폭탄의 원리를 말합니다-이것은 인간이 태양을 수중에 넣은 것이나 다름없 는 의미를 갖는 사건이라고까지 말해지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산업혁명 이후의 시대도 기술의 발전에 따라서 여러 단계를 설정할 수가 있습니 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맥락에서 근세를 단순히 두 단계로 나누는 것만으로 되겠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 됩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에너지의 이용은 그것이 갖는 획기 적인 의미로 볼 때 그 자체 새로운 시대구분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제기인 것 입니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대학에서 역사를 배워서 그런지 산업혁명을 기준으로 하여 그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는 아주 순조롭게 흐르고 있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 습니다. 그런 까닭에 자연히 산업혁명을 기준으로 하여 그 이후를 현대라는 시대로 보는 시 각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을 곰곰이 따져보 면 이제 더 이상 이런 식의 구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다시 말해 이상에서 언급한 새로운 기술의 발전을 앞에 둔 상황인 만큼 산업혁명에 서부터 오늘날까지를 하나의 단일한 역사로 보기보다는 이제 그 안에서 다시 새로운 시대를 구분해야만 하지 않겠느냐는 느낌인 것입니다. 이런 사정을 두고 또 유럽에서는 일찍이 세계 정치의 중심이요 문화의 중심으로서 유럽이 누리고 있던 지위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유럽 몰락관(沒落觀)이 한층 고개를 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현재야말로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날의 탄생이나 다름 없는 시기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시대가 나타날지, 우리 모두가 함께 희망과 공포를 품은 채 그것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새로운 시대감각은 말할 필요도 없이 역사상의 다양한 사실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저 단순히 기술의 발달을 한편에 두고 거 기에 대응하는 역사의 새로운 단계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술의 발달에 대응하여 다 양한 역사상의 새로운 사실을 전체적이고 조직적으로 고찰하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상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새로운 시대구분의 의식을 떠받치는 역사상의 사실로서는 세계가 무서운 기세 로 좁아져 가고 있다는 사정을 들 수 있을 것이고, 세계의 3대 극점-남극, 북극, 그리고 에 베레스트 산-이 정복되었다는 사실도 또한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오늘날 우주시대가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 이 또한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극대(極大)의 세계를 알게 된 것이겠는데, 그 반대로 이제까지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던 극소(極小)의 세계도 날마다 새롭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학자는 이와 같은 과학의 발달을 겁에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역사학자는 그와 같은 발달에 수반하여 일어나는 보다 인간적인 현상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예를 들자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정치 형태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정치의 형태라고 할 때 시민혁명 이후에는 자유주의를 하나의 정체체제로 간주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리고 이 자유주의는 국가의 존재방식으로는 민족국를 단위로 하며, 주권을 불 가결한 요소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주권국가는 근세 이후 국가의 결정적인 특징이 되 고 있습니다. 현재에도 여전히 이 주권은 국가의 불가결한 속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주권 개념과 관련하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아주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 습니다. 물론 이 주권 개념의 변화가 반드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어났다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국제연맹이 결성되었을 대에 벌써 그 싹이 트기 시 작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알다시피 국제연맹은 국가주권의 벽에 부닥쳐 사실상 아무런 기능도 수행하지 못한 채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다시 국제연합이 결성되었지만, 이 국제연합도 국가주권의 문제에 관 한 한 아주 민감해서 국가주권을 부정하려는 발상은 아예 내놓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 다. 그러나 국제연합에 가입해 있는 각 회원국들도 국제연합 총회의 약관을 전적으로 무시 할 수만은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만큼은 우리가 이 자리에서 주의를 해두지 않 으면 안 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연합의 안전보장이사회를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이사회를 구성하는 상임이사국들은 각기 최종적인 거부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국 가주권의 절대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지만 결코 그렇게 글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 거부권은 얼핏 보면 국가주권의 무제한적인 행사에 의해 일어날 수 있 는 예측불가능한 충돌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설치된 측면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안정보장이사회를 포함하고 있는 국제연합이 국가주권 자체에 법적인 의미에서 손을 대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제연합은 실제에 있어 국가주권을 제한하는 요소를 그 안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세계의 대부분 국가들이 동시에 국제연합이라 는 하나의 조직을 갖기에 이르렀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국제사회는 법적으 로 그렇게 분명한 형태로 존재하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국제연합이라는 조직이 결성됨으로써 국제사회는 점차로 많은 법적 제약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 자체가 국 가주권을 사실상 점차로 변화시켜가리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국제연합의 문제와는 또 다르게 최근에 유럽의 경제통합, 즉 EEC(1957년 서독, 벨기에,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그리고 프랑스에 의해 관세 철폐와 노동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경제공동체. 유럽연합 EU의 모태가 된다)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 습니다. 이 EEC는 우선 당장에는 유럽 광역시장의 문제일 뿐, 국가주권의 문제와 곧바로 어떤 관련을 갖는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EEC 헌장을 보면 처음부터 이 시장의 통합 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는 국가주권의 문제를 검토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EEC를 구성하는 유럽의 국가들은 그 어떤 단계에 이르러 서는 각 국가의 주권에 관해 어떤 변화가 오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 떻게 되면 결국 유럽의 EEC 국가들은 언젠가는 유럽연방을 형성하게 될 것으로 미루어 짐 작할 수 있습니다. 이는 현재의 국가주권이란 것이 언젠가는 제한 내지 폐지되리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며, 길게 잡아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경우 이 문제가 EEC의 가장 중요하 고 주목할 만한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EEC를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로 만 보는 것은 역사의 동향에 눈을 감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이와 같은 정치 형태의 변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기술의 진보를 불가 결한 전제로 하여 일어난 것이고,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을 또 하나의 새 로운 시대의 출발점으로 성격지워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시대와 그 구분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여러분은 아마도 최근에 아주 평판이 높은 미국의 로스토우의 경제발전 단계에 관한 이론을 떠올릴 것입니다. 이 로스토우의 이론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세계의 역사를 대략 다섯 단계의 시대로 구분 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시대는 전통적인 사회, 두 번째 단계는 도약의 조건이 마련되는 시대, 즉 테이크 업(이륙단계)을 하기 위한 선행조건기로 분류됩니다. 그리고 이 테이크 업 을 하기 위한 선행조건의 준비기는 대체로 17세기의 초엽까지를 말하는데, 이때까지가 산업 혁명 이전의 시기에 해당됩니다. 앞에서 저는 산업혁명을 세계사를 둘로 나누는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고 말씀드린 바 있 거니와, 로스토우의 경우에도 이 산업혁명 이전의 시기를 단 두 시기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로스토우가 말하는 테이크 업을 위한 선행조건기라는 것도 지극히 짧은 17세기부터 18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입니다. 따라서 로스토우에게 있어서도 그 이전의 모든 시대는 전 통적인 사회로서 일괄적으로 파악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산업혁명을 기준으로 하여 인류의 역사를 전기와 후기의 두 시기로 나누어 보는 관점이 로스토우의 이론에도 여 전히 반영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산업혁명과 함께 세 번째로 도약의 시대, 즉 테이크 업의 시대가 시작되며, 이어서 네 번재 단계인 성숙을 향한 전진의 시기가 뒤따르고, 계속해서 현대의 선진국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고도대중소비시대로 접어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로스토우의 경제발전 5단계 이론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각각의 시대에 제각기 분 명한 성격-주로 경제적인 모멘트를 중심으로 한 것이긴 합니다만-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게 다가 이 로스토우의 이론은 경제상의 통계를 이용하여 국민소득을 기초로 구성된 이론이기 때문에 수학적으로 상당히 엄밀한 규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새롭게 시대구분을 하려는 시도는 비록 그것이 어느정도까지 이용가능한 것이 냐는 문제가 남겠지만 꼼꼼하게 검토해 볼 만한 가치는 있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세계사에 대한 3분법적 시대구분이 마르크스주의에 의한 보완을 거쳐 비교적 최근에 이르기까지 일반 적으로 이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오늘날 여러가지 점에서 문제를 들어내고 있는 상황임을 감안할 때 특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문제인 것입니다. 로스토우의 이론은 그러기 위한 하나의 이론일 뿐이며, 우리는 로스토우의 이론 외에도 다른 새로운 이론을 고려해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한 이론으로는 이 밖에도 여러가지 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각각의 역사가는 역시 자신의 전공을 기초로 하면서 사진의 시대구 분을 고안해내고 그것을 세상에 공표하여 비판을 받는 태도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 자신도 전공인 중세사 연구를 출발점으로 삼아 새로운 시대구분을 생각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상세히 말씀드릴 여유가 없어 아쉽긴 합니다만, 간단하게 한마디 만 말씀드리자면 저는 평화단체의 점진적인 발전을 중심으로 하는 시대구분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고 있는 이 평화단체의 확대이론은 말할 필요도 없이 기술의 진보를 기초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즉, 기술의 진보와 함께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확대되어 갑니다. 이와 병행하여 평화단체의 규모가 대구모화되어 간다는 사실, 이것이 제가 역사의 발전에 주목하고자 하는 현상입니다. 평화단체라고 하면 약간의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으므로 말을 바꾸면 그 내부에서 폭 력의 행사가 일체 금지되어 있는 단체, 즉 그 안에서는 정당방위를 제외한 그 어떤 폭력행 사도 일체 정당화 될 수 없는 단체, 바로 이러한 단체를 저는 평화단체라고 이름하는 것입 니다. 평화단체를 이렇게 규정할 때 그 가장 최초의 형태는 가족이 될 것입니다. 이때 가족 도 내용적으로 살펴보면, 가부장적 대가족에서부터 핵가족에 이르기까지 그 규모가 다종다 양할 것이지만 여하튼 그 모든 것들을 가족이라는 명칭으로 일괄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가족적 평화단체는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지역적인 평화단체로서 농촌공동체로 발 전하는 경우가 있는데, 특히 유럽에 관한 한 평화단체로서의 성격을 가장 선명하게 갖추어 가는 것이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도시는 다시 하나의 영역적 평화단체로서 도시국가 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와 병행하여 봉건시대의 크고 작은 지방권력들도 점차로 평화단체로서의 성격을 갖추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발전이 더욱 진행되면 결국 대제후와 국 왕 등이 그들의 직접적인 지배지역을 중심으로 좀 더 커다란 평화단체를 형성하게 되고, 마 지막으로 하나의 통합된 평화단체로서 국가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바로 근대적 절대제 국가라고 하겠는데, 평화단체로서의 국가가 처음으로 성립되는 것이 바로 이 시기입니다. 주권을 갖춘 국가가 다시 권력균형을 원리로 하는 국제사회를 형성하게 되는 것은 이 시기 이후의 일인데, 이러한 움직임은 최근에까지 계속되는 상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상태가 결코 영구적으로 계속된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일단 근대 이전의 문제를 제외하고 이러한 발전의 배후에 있는 기술의 발전만을 고려하면 권력균형을 원리로 하는 국가와 평화단체의 대립은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그 절정 에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에 자연히 국가에 의한 폭력의 행사, 즉 전쟁을 국제분쟁의 해결법으로 삼는 데에 제한을 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됩니다. 불가침조약, 군축(軍縮) 등이 모두 이러한 움직임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고, 국제연맹 및 국제연합도 바 로 이런 움직임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7장 역사를 이해함은 역사의 법칙을 안다는 것 이번에 다룰 주제는 역사에 있어서 필연과 우연이라는 문제입니다. 이 장에서는 먼저 필 연의 문제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역사 속에서 뭔가 중요한 사건의 전개, 예컨대 혁명이라든가 전쟁 같은 커다란 사건을 서 술하는 경우 우리는 그러한 혁명이나 전쟁이 필연적 사태였다느니, 특히 상황이 이런저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전쟁이 발발하는 것은 필연이었다느니 하는 식의 서술을 종종 접하게 됩 니다. 그러나 필연이라는 말은 이렇게 단기간의 현상에 대해서만 쓰이는 것은 아닙니다. 역 사의 커다란 동향, 그러니까 어떤 한 시대 혹은 몇 단계의 시대에 걸친 장기적인 시간의 맥 락 속에서 뭔가 중심적인 발전의 법칙성이 확인된다든가 하는 경우나 또는 유사한 현상이 거의 반복적이고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경우에 그러한 현상을 가리켜 필연이라는 말로 표현 합니다. 이 자리에서 이러한 필연성의 문제와 관련된 내용을 전체적으로 모두 논의할 수는 없습니 다. 왜냐하면 이 필연과 우연의 문제야말로 역사학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숙제 가운데 하나 이기 때문입니다. 이 장에서는 다만 우리가 역사 속에서 필연성을 인식한다고 한다든가 혹 은 어떤 필연적인 움직임이 있다고 말하는 경우, 그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제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바를 간략하게 이야기할까 합니다. 그런데 본론에 앞서, 우리는 '역사란 사건이나 사물을 시간적인 인과관계 속에서 파악하 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경우를 이따금 보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이 하나의 원인에 의해 모두 다 설명되는 경우란 애초에 있을 수 없습니다. 사건이면 사건, 현상이면 현상을 그렇게 일어나게끔 한 원인 혹은 이유는 아무래도 복수로 존재한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면 또한 단순히 그런 원인들을 있는 그대로 다 늘어놓는 것만으로 문 제가 끝난 것이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을 하나의 예로 들어봅시다.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에 대해서는 루이 왕조의 재정적 파탄이라든가, 또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개혁적 시도로서 귀족에게 과세하려는 국왕 의 움직임을 국왕의 전횡이라며 들고 일어난 귀족 측의 반발, 혹은 경제적 실력은 충분하면 서도 정치적인 발언권은 부여받지 못한 시민계급의 불만, 그리고 농민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봉건적 부담 등이 혁명의 발발과 관계가 있을 법한 이유들로 열거될 수 있을 것입니 다. 그러나 이런 몇 가지 이유들만으로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이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할 사 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몇 가지 원인들은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이 별 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여러가지 원인들의 상호관계를 고찰하고, 그럼으로써 이들 여러 원인들의 시스템을 찾아낼 필요가 있게 됩니다. 그러한 시스템을 찾아내게 될 때 비로소 하나의 중요한 사건의 원인이 해명되었다거나 혹은 그에 대한 역사적 설명이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역사의 다양한 현상들과 관련지어 고찰해가는 동안에 역사적 사건이 갖는 사실적 인과관계는 더욱 추상되게 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역사가는 자주 반복되는 법칙적인 것 혹은 개연성 같은 것을 발견하려 하게 됩니다. 나아가 역사가는 단순히 반복되 는 이런 법칙성만을 찾는 데서 머물지 않고 하나의 발전적인 법칙을 인식하려 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역사가는 역사적 사건의 인과관계를 추상해 가는 과정에서 어떤 한 시 대의 경향으로부터는 역사발전이 다른 방향이 아니라 꼭 이런 방향으로만 전개되며, 그러한 발전이 또한 모든 나라의 역사에서 규칙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때 이러한 규칙성은 역사 속에서 단순히 반복될 뿐인 법칙성과는 다른 그 어떤 경향이나 개 연성 혹은 법칙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금 저는 법칙이라는 말을 썼는데, 이 말은 자칫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는 것 같 습니다. 그러나 저는 동시에 이 법칙이란 말을 개연성 혹은 가능성이라는 말로 바꾸어 쓰기 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이 법칙이란 말을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법칙과 같은 것으 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역사학에서는 법칙이라는 말을 되도록 피하려는 것이 오히려 일반적인 경향입니다. 또한 그러한 경향은 유독 역사학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 라 다른 사회과학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자연과학에서조차 그런 경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에는 물리학에서조차 언제 어떠한 경우에나 타당한 법칙이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고 보고, 다만 고도의 개연성 혹은 경향성을 편의상 법칙이 란 말로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를 논의하면서 법칙이란 말을 아무런 제한도 없이 사용하는 것은 대단히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여기서는 편의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자연 과학보다는 훨씬 느슨한 의미에서 법칙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으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 다. 위에서 말씀드린 내용을 전제로 하여 이제까지 이야기한 것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역사란 결국 개별적인 사실들과 그 인과관계만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그러한 사실들 모두를 관통하는 법칙을 인식하는 것을 하나의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역사를 관철하는 법칙이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하나로 한정될 필요는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가지 법칙이 있을 수 있다는 점도 동시에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법칙이 있는 경우 단순히 그러한 법칙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상호간의 관계, 나아가 여러가지 법칙들 중에서 다른 모든 법칙들을 설 명하는 하나의 혹은 적은 수의 법칙을 찾아내는 것이 또한 역사가의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이 문제는 다른 주제를 이야기할 때 다루는 것이 더 적절한 것 같으므로, 이 자리에서는 이 정도로 언급해 두겠습니다. 우선 강조해두고 싶은 것은 역사연구에 있어서는 현상이나 사건의 설명을 위해 가능한 한 적은 수의, 그러나 중요한 원인을 발견해내고, 그 원인들을 더욱 추상하여 법칙적인 인식으 로까지 나아가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고 또 이러한 경향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점 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역사연구의 경향에 대해서는 역사를 자연과학적으로 보려는 것이 아니냐, 역사를 하나의 자연사로서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할 것 입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의문을 부정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점을 특별히 강조하는 까닭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법칙적으로 인식하려는 노력은 역사학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근본적인 욕구가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노력의 결과로 어떤 근본적인 인식을 획득할 때 비로소 역사에 대한 우리의 물음도 일단 끝이 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바로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중심적인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 점을 구체적 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약간 까다로운 문제를 먼저 이야기해야만 할 것 같습니 다. 방금 위에서 저는 법칙적인 인식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드렸거니와 이것은 사물을 일반화시켜보는 인식방법과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또는 그러한 방법의 일부 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 일반화적 인식방법과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 으며, 또는 그러한 방법의 일부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 일반화적 인식방 법이라는 것은 무슨 특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외계의 사물을 이해하고자 할 때 흔히 사용 하는 방법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보통 어떤 사물에 대해 일정한 개념이나 명칭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는데, 바로 이때 그와 같은 개념이나 명칭 자체를 하나의 일반화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일반화가 법칙화와 관계가 있습니다. 이 점은 인간의 원시적인 상태, 그러니까 갓난아기의 상태라든가 혹은 문명적으로 아주 뒤떨어진 민족을 고찰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일본의 원시부족인 아이누족 의 언어에는 다음과 같은 독특한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가령 어떤 나무 한 그루가 있을 때 아이누족들은 그 나무의 각 부분에 대해서는 제각각 별도의 이름을 붙여놓고 있지만 그 나 무 자체를 가리키는 이름은 별도의 이름을 붙여놓고 있지만 그 나무 자체를 가리키는 이름 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언어학자가 웃으면서 제게 해준 이야기인데, 이런 특징은 어린이에게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정신상태가 지극히 원시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눈에 띄는 모든 사물을 각각 별 개의 것으로 인식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령 벛꽃을 보든 국화꽃을 보든 튜울립꽃을 보든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꽃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결국 우리는 이와 같이 꽃이라는 명 칭으로 그 속에 있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현상들을 통일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현 상은 눈에 보이는 외계의 사물과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추상적인 내용과 관련해서도 마찬가 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시민족에게는 모든 것이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다신교와 유일 신교 가운데 어느 것이 문명적으로 우수하고 어떤 것이 열등하냐를 논하기는 어렵지만, 세 계 역사상 보기 드문 유일신교로 평가되는 유태인의 여호와 신앙을 살펴보아도 그렇습니다.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보면 다신교의 흔적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결국 유일신인 여 호와 신앙은 이러한 다신교로부터 탄생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에게는 사물에 대한 다원적인 인식으로부터 일원적인 인식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인류의 지적인 진보를 더듬어 확인할 수 있는 것 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처럼 개념적인 추상화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성의 본질적인 속 성일 것입니다. 이 점을 역사와 관련하여 생각해보면 이 경우에도 완전히 똑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잡다한 사실들을 있는 대로 마구잡이로 늘어놓고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역사 를 이해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늘상 부딪치는 일인 데, 어떤 아주 복잡한 사건이나 이리저리 뒤얽힌 발전을 고찰하는 경우 그 하나하나의 사건 과 그것들의 상호관계는 잘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사실들의 계열을 따라 최후 까지 추적해 들어가도 전체적으로는 결국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벽에 부닥친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비단 역사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모든 분 야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이야기겠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 그러한 난관을 이겨내고 뭔가를 '알았다'고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다종다양한 사건의 인과계열 전체를 하나로 꿰뚫 어볼 수 있는 통찰이 떠올랐을 때입니다. 가령 우리가 어떤 역사적인 문제에 대해 논문을 쓰려고 한다고 합시다. 그리고 그 논문을 쓰기 위한 사료도 갖출 만큼 갖췄고 연구문헌 또 한 모을 만큼 모아서 나름대로 대충 다 훑었다고 칩시다. 이런 정도면 일사천리로 붓을 움 직이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찌된 일인지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우선 당장 뭐라고 써야 좋을지 아무리 머리는 짜내봐도 그 첫마디가 쉽사리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경 우가 자주 있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 얼마나 당혹스러운지 아마 직접 경험해보신 분들은 말 씀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줄 압니다. 그러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아직 문제의 사안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한데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 런데 머리를 감싸고 악전고투한 끝에 어쩌다가 문득 어떤 말이 우리의 머리 속에 번쩍 떠오 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까지 전혀 감조차 잡히지 않던 사실 전체가 하나하나 제자리 를 찾으며 눈에 잡히듯이 선명하게 떠오르게 됩니다. 이렇게 첫마디가 어떤 순간에 번쩍 떠 올랐다는 것은 우리의 문제의식이 그 사안이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연관을 비로소 파악했다 는 말이 됩니다. 좀 더 단순화 시켜 말씀드리면, 써야 할 첫마디가 떠올랐다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의 머리 속에 순간적으로 떠오른 '통찰'이 잘못된 것일 가능성은 언제든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통찰이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거친 결과로 얻어진 것이라면 그것 에 기초한 최초의 말은 그 이후의 모든 서술을 함축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습 니다. 따라서 그러한 논문을 읽는 독자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논점이나 사실이 전혀 뜻밖의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 논문의 서술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스스로 예상할 수 있게 됩니다. 이같은 예상을 독자들에게 무리없이 제공해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러한 서술을 가장 성공적인 서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서술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가능하게 되는 것일까요? 위에서 저는 어 떤 사건 전체를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력이라는 말을 쓴 바 있습니다. 문제는 그와 같은 통 찰력이 어떻게 해서 얻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제 경험을 반추해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그것은 개별적인 사실의 인과관계나 그것들의 중복만으로부터는 절대로 생겨나지 않는 그 어떤 것입니다. 오히려 개별적인 것들을 뛰어넘는 전체적인 인식이 중요하다고 하 겠습니다. 그것을 개별적 사실의 인과관계를 관통하며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인과적 인식,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한가지인 경우는 유감스럽게도 역사의 세계에서는 좀처럼 찾아보 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과적 인식이 적으면 적을수록 우리는 그것들의 결합에 의 해 좀 더 쉽게 전체를 꿰뚫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역사연구는 결국 항상 수많은 사실들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있는 소수의 인과 관계를 규명해내는 것을 하나의 중요한 인식목표로 삼는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추 상에 추상을 거듭한 인과인식은 다른 측면에서 말하면 역사에 있어서의 고도의 가능성이나 개연성 혹은 법칙성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개별적인 사실들을 서술해가다 보면 우리는 그 과정에서 어떤 사건이 왜 하필 꼭 이렇게만 전개되고 저렇게는 전개도지 않았는가 하는 그 까닭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쯤에서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모든 인과관계에 대한 인식은 결국 하나의 단일한 인과인식으 로 수렴되어가는 것이라거나 또 역사연구는 이와 같은 인과=법칙=필연에 대한 인식만을 목 표로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왜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다만 역사 연구 역시 다른 모든 학문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사건을 복잡 한 채로 고대로 인식하려 하지 않고 가능한 한 단순한 법칙에 대한 인식으로 그 범위를 좁 히려고 하는 필연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로 이 점 이 제가 이 자리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싶었던 점입니다. 제가 필연이라는 말을 썼습니다만, 이 장의 맨 앞부분에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역사학에 서는 그것이 아주 느슨한 의미로만 사용되는 것입니다.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필연이라는 말 의 용법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 필연이라는 말이 역사가로서는 써 서는 안 될 말로 간주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이 점에 대해 짧 게나마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그에 앞서 근대 역사학의 성립 과 발전에 얽힌 복잡한 사정을 잠시 되돌아보아야만 할 것 같습니다. 역사가 하나의 과학으로서 독립적으로 성립하게 된 것은 계몽주의 시대 이후부터입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는 계몽주의가 아니라 그 계몽주의 이후에 나타난 낭만주의가 역사학을 발전시킨 주역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계 몽주의가 역사나 인간현상을 단순화시켜서, 이를테면 기계론적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데 있 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낭만주의는 역사를 기계론적으로 취급하는 계몽주의에 반발하여 역 사의 복잡하고 법칙으로 환원되지 않는 비합리적인 측면을 강조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점을 들어 낭만주의야말로 역사를 진정으로 발전시킨 주역이라고 간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말 그대로 전적으로 타당한 견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어찌됐든 이와 같은 계몽주 의에 대한 반발이 동시에 역사에 대한 필연적 해석 혹은 법칙성의 인식에 대해 반발을 느끼 게 한 이유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필연적 해석이라는 면에서는 계몽주의에 뒤지지 않는, 아니 오히려 그 이 상인 마르크스주의가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이론으로서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계 어디서나 가장 강력한 이론이었다고 할 수 있고, 또 앞으로도 이런 마르크스주의가 하루 아 침에 그 지위를 잃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 마르크스주 의야말로 그 어떤 역사이론보다도 역사 속에서 필연적인 발전법칙을 인식하는데 가장 적극 적인 사상입니다. 물론 일각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이론이 복잡한 인간 현상 속에서 발 전법칙을 발견해내는 데만 급급하다 보니 자주 기계적인 설명에 치우쳐 인간의 풍부한 역사 적 가능성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해석에 대한 반발이 동시에 필연이라든가 법칙과 같은 표현들에 대해 거부감을 갖게 하는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이론에 대해서는 이 강의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좀 더 상세히 다룰 생각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더 이상 말씀 드리진 않겠습니다. 다만 제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비판은 비판 그 자체로서야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속에서 필 연적인 것을 인식하려는 우리의 근본적인 지향까지를 내던져 버린다면 아마도 우리는 역사 의 인식 혹은 역사의 이해를 송두리째 포기해 버리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것이 이 장에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첫 번째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그렇다면 우리의 과거에는 역사의 필연성을 인식하려는 시도로서 어떤 것들이 있 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역사의 필연성을 인식하려는 시도만을 보자면 거기에는 방금 말씀드린 마르크스주의 도 포함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인간은 역사 속에서 필연성을 인식하고자 역사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을 던져왔습니다. 역사에 있어 서 필연성을 인식하려는 태도는 우리의 역사탐구만큼이나 오랜 것이고 또 언제 어디서나 있 어 왔습니다. 이러한 경향을 이미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그리스의 헤로도투스에 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헤로도투스는 예컨대 이집트에 대해 이야기하는 가운데 풍토 혹은 지리적이 조건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상세히 논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 고방식은 비단 헤로도투스에게서 만이 아니라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언제 어떤 세계 에서나 항상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특별히 위대한 사상가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우리의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 속에 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가령 남방 사람들은 정열적이고 북방 사람들 은 냉정하다든가, 풍수가 좋은 땅에서는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온다든가 하는 사고방식들이 그런 것들인데, 이런 예를 들자면 끝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굳이 그 근원을 따져보자면, 지리적인 요인이 항상적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만큼 인간성의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소박하기 짝이 없 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터무니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릴 수는 없는 사고방식이라고 하 겠습니다. 역사가나 지리학자들 중에는 이런 사고방식의 연장선상에서 지리라든가 풍토와 같은 것이 인간의 성격에, 따라서 또한 역사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고찰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 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우리는 지리결정론(地理決定論)이라고 부르거니와 잘 알려닌 [법의 정신]을 저술한 프랑스 계몽주의의 대표적인 사상가 몽테스키외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한 사 람이라고 할 수 잇고, 동시에 계몽주의자이자 낭만주의자이기도 했던 독일의 헤르더 같은 사람에게서도 이런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은 지리학자인 럿셀에 이르러 체계적으로 확립됩니다. 나아가 그것은 스웨덴의 첼렌에 의해 지정학(地政學)으로까 지 발전하게 되는데, 나찌 독일의 하우스호퍼는 그것을 나찌식으로 해석하여 [태평양지정학] 이라는 책을 쓰기까지 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연 이런 사고방식이 전쟁의 종료와 더불어 혹은 전체주의의 붕괴와 함께 사라졌느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정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예가 적지 않으니 말입니다. 환경론의 한 형태라고도 할 수 있는 이같은 지리결정론은 일반적으로 인간에 대한 환경의 영향을 일면적으로 그리고 기계적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렇지만 헤르더 이후에 이르게 되면 기계적인 성격이 점차 약화되면서 환경에 대한 인간의 반작용이라는 측면을 강 조하는 경향도 한편에서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여전히 외적인 자연이 인간생 활에 미치는 영향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 다. 어쨌든 여기서 보다 중요한 점은 외적인 요인, 곧 자연적인 요인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 의 사회생활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밝혀내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날에 이르도록 환경론은 이 점을 밝혀낼 방법을 개발해내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과히 틀린 지적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아직도 소박한 패럴랠리즘(Parallelism, 병행 론)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패럴랠리즘이란 나란히 일어난 두 가지 현상 가운데 한 현상 을 나머지 한 현상의 원인으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을 말하는데, 이것은 어떤 사건을 설명하 는 데 흔히 사용되는 방법이긴 하지만 언제나 논리가 비약해 버리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란히 일어난 두 현상 간에 있을 수 있는 인과관계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방법이지만 그러한 인과관계를 직접적으로 설명해내는 데는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기후에 대한 연구로부터 문명의 발전을 설명해내려고 했던 미국의 문명사가(文明史家) 헌 팅턴에 대해서도 같은 지적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기후와 문화]라는 저술에서 고대 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장구한 역사발전을 기후의 건조와 습윤이라는 현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세계의 몰락과 같은 거대한 현상을 나무의 나이테에 대한 연구 결과로부터 설명해내려고 하였지만, 그 이후의 연구에 따르면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 기까지 인간의 문명을 크게 변화시킬 만큼 급격한 기후의 변화는 아직까지 일어난 적이 없 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지리결정론 내지 환경론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컨 대 그것들 대부분은 나름대로 진리의 일면을 내표하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의 필연성을 인식하고자 하는 이론치고는 너무 유치한 것이었습니다. 외계의 자연이 인간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개개인의 인간을 통해서 미치는 것만이 아니라 반드시 그 사 회의 구조를 통해서 미치게끔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생활의 구조 혹은 사회적인 생산 을 통해서 비로소 외계의 영향은 역사적인 것으로 전화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앞서 잠시 언급한 바 있는 경제발전 단계론이 오히려 역사의 법칙적 인식이란 면에서는 환경론보다 훨씬 수준 높은 인식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리고 그와 같은 이론을 배경으로 하여 성립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발전단계론이야말로 이제까지 나타난 발전단계론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만큼 역사의 필연성 인식에 있어서도 앞서 살펴본 환경론보다 훨씬 우수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겠습니 다. 최근의 예로는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의 이론'을 들 수 있겠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 사의 이론이라기보다 하나의 역사철학일 뿐 역사가에 의해 오늘날 승인되고 있는 것은 아닙 니다. 이제까지 여러 가지 역사발전의 필연성을 인식하려는 시도들을 논의해왔지만 현재 그 어 느 것도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실패로 끝난 시도를 장황하게 설명한 까닭은 그것들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있는 욕구 에 다름 아니고, 또한 어떻든 그러한 욕구를 갖지 않고는 역사 그 자체도 성립할 근거를 찾 을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제 8장 우연이란 주어진 것이라기보다 판단하는 것 앞 장에서 다룬 역사에 있어서의 필연과 우연의 문제에 이어서, 이 장에서는 그 두 번째 주제로서 역사에 있어서 우연이 수행하는 역할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있어서 필연적인 계기를 인식하려고 하는 욕구는 우리가 역사에 대해 물음 을 던진다고 하는, 역사가 성립하는 근본적인 계기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 속에서 우연을 찾아내려는 시도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을 인식하려는 것이고 마찬 가지로 우리가 역사를 인식하려고 하는 근본적인 태도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최 근의 경향을 살펴보건대, 역사에 있어서 우연이 수행하는 역할은 역사에 있어서 개인이 수 행하는 역할과 관련하여 특히 강조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경향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이유로는 지극히 복잡하고 기계적인 기구 로 구성되어 있는 현대사회에 있어서 개인이 가지는 의미가 새롭게 확인되었다는 점을 지적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케네디 암살사건을 예로 들어봅시다. 케네디가 그렇게 갑자기 암살당하리라고는 어 느 주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기에 케네디가 전혀 예상치도 못한 때에 전혀 예상치 못한 방 식으로 암살을 당하자 새삼스럽게 그가 세계에서 수행하던 역할의 중요성이 관심의 초점으 로 등장하게 되었고, 그런 점에서 개인이 역사에서 수행하는 역할의 중요성이 새롭게 주목 되었던 것입니다. 케네디의 경우와 그 의미는 정반대이지만, 히틀러나 스탈린에 대해서도 같 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경향은 기계적으로 짜여 있는 현대사회와 관련하여 생각해보면 참으로 재 미있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가 문제로 삼고자 하는 것은 이런 점과 직접적으로 관 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경향에서는 우연이라는 말이, 또한 역사에 있어서 우연이라는 계기가 상당히 애매하게 취급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우선 이 우연이란 무 엇인가? 다시 말해, 역사에 있어서 우연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해 먼저 우리의 개념을 정리한 다음에 역사에서 우연이 수행하는 역할의 문제를 조금이나마 밝혀보려 합니다.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우연이라는 말의 용법을 검 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우연이란 말의 가장 일반적인 용법으로는 우리가 미처 예상 하지 못했던 혹은 미리 짐작하지 못했던 것을 우연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외에 본질적인 것에 대한 비본질적인 것, 본질적인 속성에 대한 비본질적인 송석을 우연적인 요 소라고 보는 용법도 있습니다. 우연이란 말의 용법과 관련해서는 일단 크게 이 두 가지 용 법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연이란 말의 용법을 살펴보는 것 만으로는 역상 있어서 우연과 그것이 수행하는 역할이라는 문제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말한 것이 없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예외 없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차원 속에 존재하고 또 그 속에서 생성 소멸하는 것이므로 이 세상에 완전히 동일한 사물이란 이론상 있을 수 없습니 다. 다시 말해 두 가지 별개의 사물 혹은 사건이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장소를 차지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모든 사물은 제각기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 미에서 우연적이라 할 수 있고, 다리서 세상은 온통 우연적인 것으로 가득차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 점을 역사에 적용한다면 과거는 모두 우연의 퇴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연이라는 말을 이런 식으로까지 넓은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렇게 되면 예컨대 어린아이가 모든 외계의 사물을 각기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는 것과 마찬 가지로 역상 대해 아무것도 분석을 할 수 없게 되고 맙니다. 즉 아무런 역사적인 인식도 하 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특별히 꼬집어 언급할 필요도 없는 말이지만, 우연의 문제를 논의함에 있어서 왕왕 이런 종류의 혼란이 끼어드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서 일단 짚고 넘어갈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이 세상에 원인이 없는 사건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모든 사건에 는 반드시 그 나름의 원인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라서 이런 시각에서 보면 아무런 이유도 없고 아무런 원인도 없다는 의미에서의 우연이란 역사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뭔가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나게 되면 마치 그것이 아무런 원인 도 없이 우리에게 닥쳐온 것처럼 생각되지만 따지고 보면 이론적으로 그런 경우란 있을 수 없는 셈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일이든지 알려고 들기만 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원인을 찾아 낼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이론에 불과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이것저것 시시콜콜 알려고 들지 않는 것이 보통이고, 또 설사 알려고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경우도 있습 니다. 어떤 사건의 원인과 관련하여 그것을 알아낼 실마리가 전혀 없는 경우는 차지하고라 도 다음과 같은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즉 어떤 사건이면 사건, 현상이면 현상이 일어나리라 는 것은 분명히 예견할 수 있겠는데 그것이 현실 속에서 언제 어떤 형태로 일어날 것인지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다음이 아니면 절대로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 의 사건의 경우에도 어떤 특정한 때와 장소에서 어떤 특정의 방식으로 사건이 일어날 것인 지에 대해서는 설사 그에 앞선 자료들을 속속들이 검토하더라도 딱 잘라 결론을 내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 잠시 프랑스 대혁명을 예로 들었지만, 프랑스에서는 18세기 말에 이르러 루이 왕 조의 정치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정도 있고 해서 누구나가 뭔가 커다란 변혁 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할 수 있었으며, 또 사람에 따라서는 이런저런 조건으로 보건대 혁명 까지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예견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1789년 7월 14일에 바스티유 감옥에 대한 기습이라는 형태로 거대한 혁명의 물결이 시작되리라고는 아 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무한히 복잡한 인간관계가 엄밀한 예측이나 계산을 허용 치 않는 인간의 행동을 통해서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분명 우연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역사 속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우연의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입 니다. 그것은 또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다르며,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하에 모든 사물이 각기 독자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사고방식과도 완전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역상 있어서의 우연이라는 두 개의 인과계열이 상호 충돌하는 데서 기인한다 고 보는 사고방식과도 완전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역사에 있어서의 우연이라는 두 개의 인과계열이 상호 충돌하는 데서 기인한 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정한 인과계열 속에 잇는 사실들은 모두 제각기 원인 과 결과의 연쇄를 이루고 있는데, 그 두 개의 계열이 어디서 충돌할지는 그 어느 쪽을 보 아도 예측할 수가 없지만, 그러나 역사상의 사실은 원칙적으로 이와 같은 인과계열 상호간 의 충돌로서 나타나는 것이기에 이를 우리는 우연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일단 이론상으로는 별로 잘못이 없고 또 일반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설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연에 대한 설명치고는 아무래도 좀 막연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저 간단하게 인과계열의 충돌이라고 하지만 그 인과계열이 서로 충돌하는 방식이나 양태는 실로 천차만 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역사상의 사실은 어떤 것을 취하 든 모둔 두 개 이상의 인과계열의 충돌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결국 이러한 설 명은 역사를 우연의 퇴적이라고 간주하는 설명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한 셈인 것입 니다. 따라서 약간 애매한 말이긴 하지만, 우리가 어떤 사건을 두고 그것이 우연이니 필연이니 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예측이나 예견과 관련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어떤 한 사건의 이유나 원인을 일단 그 자체로서는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 도 그러한 사건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역사의 커다란 줄기와 무관하게 일어나고 또 그 사 건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역사의 커다란 줄기와 무관하게 일어나고 또 그 사건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역사의 커다란 줄기에 연결되는 경우, 우리는 이런 사건을 우연이라고 부 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의 우연은 개개의 경우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한계와 관 계가 있다는 의미에서는 상대적인 성질의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어쨌든 전지전능하지 않 다는 의미에서는 절대적인 성질의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앞서 예로 들었던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사건을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일반적으로 요인에 대한 암살은 언제라도 일어날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도 경호원 따위를 거느리고 다니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달라스라는 시에 오스왈드라는 이상 성격의 저격수가 있고 그가 암살 계획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은 FBI의 예측 속에나 우리의 예상 속에나 전혀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케네디의 죽음은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 했다는 점에서 일단 우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범인인 오스왈드가 아직 채 취조도 끝나지 않은 사이에 루빈 이라는 또 한 사람의 이상성격자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중의 의미 에서 케네디 암살사건의 우연성을 감소시킵니다. 케네디를 죽인 오스왈드는 어떤 의미에서 는 이미 케네디에 버금가는 VIP(중요인물)가 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VIP가 또다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암살을 당한 것입니다. 그만틈 FBI의 경호나 달라스 경찰의 경비에 구멍이 있었다는 말이 되는 셈인데, 이를 되짚어보면, 케네디 암살은 일반적 으로 예상되는 것보다 그 가능성이 좀더 높은 것으로 예상되었어야 했던 것입니다. 또한 상 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은 오스왈드의 피살은 달라스 시가 종전 이상으로 '검은 안개'에 뒤덮여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므로, 이 점으로부터도 케네디의 암살 가능성은 좀 더 높은 것 으로 사전에 예상되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케네디의 암살 사건은 그 우연성이 반감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렇다 고 케네디 암살을 필연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FBI의 예 상이 훨씬 더 치밀했다 하더라도 암살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암살이라는 사 실이 일어나기까지 모든 것은 불투명하고 그 사이에는 무수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한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어떤 것이 현실적으로 실현될 것인지는 인간의 예측을 벗어나는 것입 니다. 이와 같은 논리는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다른 여러 사건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 습니다. 굳이 역사적 우연의대명사로 일컬어지는 '클레오파트라의 코'에만 한정될 필요는 없 다는 말입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중요한 현상 몇 가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 습니다. 로마제국은 2, 3세기 이래 걷잡을 수 없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 의 자기 해체는 스스로 순조롭게 전개 된 것이 아니라 게르만 민족의 침입에 의해 더욱 촉 진된 것이 었습니다. 게르만 민족은 예로부터 로마제국과 관계가 있었던 민족이기 때문에 게르만 민족의 침입을 단순한 우연이라고 볼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슬람교 도 쪽은 어떨까요? 게르만 민족의 침입에 대해서는 그럭저럭 견뎌낸 - 물론 그렇다고 해도 서로마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만 - 로마제국은 7, 8세기에 이슬람 세력이 지중해 세계를 정 복하면서부터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됩니다. 고 로마제국의 체제는 이로써 완전히 결정타를 맞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게르만 민족의 침입을 그럭저럭 견뎌낸 시점에서 로마제국의 어느 누가 이슬람의 대두를 예측할 수 있었을까요? 이슬람교를 믿고 있던 아랍인들도 로마제국 주변의 민족이었던 만큼 로마문명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아랍인들이 교주 모하메드의 영감에 의해 마침내 일대 종교세력 및 군사세력으로까지 발전하리라고는 후대인 우리조차도 정확히 예측 할 수 없는 측면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나아가 이슬람의 지중해 지배로부터 동 서 두개의 유 럽이 생겨난 중세 전기의 상황을 염두에 두면 성화상의 숭배를 둘러싼 동 서양 교회의 분 쟁, 프랑크 부족국가에서 일어난 혁신, 조연격인 랑고바르도족의 미묘한 역할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발전은 실로 소설 이상으로 기묘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얽히고 설치는 방식은 그야말로 '절묘하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또한 역사의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와는 성질이 좀 다른 우연의 실례를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중세 독일의 국 왕들은 하나같이 모두 단명으로 끝났습니다. 그에 비해 프랑스의 국왕들은 단 한 사람을 제 외하고는 모두 장수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왕권은 처음에는 형편없는 약체로 출발 했지만 뒤로 가면서 마침내 강력한 통일왕권을 확립하게 됩니다. 이에 비해 초기에는 강력 했던 독일의 왕권은 그뒤로 분열만을 거듭하다가 19세기가 될 때까지도 끝내 중세의 분열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결국 첫째로 한쪽에서는 국왕이 왕위에 오르는 족족 단명으로 끝나고 다른 쪽에서는 국왕등이 모두 장수를 누렸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고 일 단 설명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 수명의 단명이라 우연이 독일의 분열을 초 래하였고, 반대로 인간의 장수라는 우연이 프랑스에 통일과 근세에 있어서의 번영을 가져다 주었다고 설명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 수명의 단명이라는 우연이 독일의 분 열을 초래하였고, 반대로 인간의 장수라는 우연이 프랑스에 통일과 근세에 있어서의 번영을 가져다주었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설명이 옳다고 한다면 이것은 역사의 발전이 우연에 의해 크게 좌우됨을 보여 주는 아주 훌륭한 실례로 간주해도 좋을지 모릅니다. 확실히 전 근대사회에서는 나라의 제 도가 근대국가처럼 정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이 역사에서 차지하는 역할도 근대 사 회에서보다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그저 국왕이 자리를 지 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국왕의 교체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혼란을 그 만큼 미연에 방지할수 있었고, 이런 맥락에서 그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실 자체가 심지어는 국왕의 공적으로 인정되는 경우조차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실 자체 가 심지어는 국왕의 공적으로 인정되는 경우조차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한에서는 단명이냐 장수냐를 기준으로 한 우연에 대한 평가도 전혀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이러한 설명은 사실 그다지 적절한 설명이 못됨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접근함에 있어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은 단순히 독일의 국왕들은 단명 으로 끝났고 프랑스의 국왕들은 장수를 누렸다는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어째서 독 일의 황제는 프랑스의 국왕보다 단명으로 끝났고 프랑스의 국왕들은 장수를 누렸다는 역사 적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어째서 독일의 황제는 프랑스의 국왕보다 단명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가, 그것도 한두 사람이 아니라 황제에 오르기만 하면 하나같이 모두 단명으로 끝나 야 했던가, 여기에는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점들을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 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그 이유를 살펴보면 이런 설명이 가능합니다. 당시의 독일은 오늘날의 독일만이 아니라 스위스, 브루고뉴, 이탈리아, 후에는 시실리아까 지를 모두 포함해서 신성로마제국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을 먼저 고려하지 않으면 안됩니 다. 그런데 교통 사정이 좋지 않고 또 정비된 관료나 군대조직이 없던 그 시대에 이처럼 알 프스의 남북에 걸쳐 있는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데에는 엄청난 육체적인 노력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아마도 중세의 지배자들 중에서 독일의 신성로마 황제만큼 1년 내내 여행을 계속한 황제는 없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당시 독일에는 수도가 따로 없고 정치는 항 상 순회하면서 다스린다는 원칙마저 있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독일의 국왕들은 단순히 독 일 전역을 순회하면서 정력을 소모시킬 뿐만 아니라 기후와 풍토 조건이 전혀 다르고 또 말 라리아 같은 악질의 풍토병이 유행하는 이탈리아를 쉴새없이 넘나들며 정치도 하고 투쟁도 해야하는 실로 감당키 어려운 책무를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독일의 황제들은 이처럼 처음부 터 단명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짊어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정이 여기에 이르면 독일의 황제는 어째서 이러한 대제국을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가, 그리고 또한 그것을 단순히 군사적으로 지배하는 데서 그칠것이 아니라 어째서 보다 좋 은 정치 조직을 확립해 두지 못했던가, 좀 더 효율적으로 정치의 틀을 마련해 두면 되지 않 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의 국가가 처해 있던 조건으로 환원될 성질의 문제이지 결코 국왕이 단명이었느냐 장수를 누렸느냐와 관련된 문제는 아닙니다. 오 히려 그 당시에 있어서는 일반적인 역사상의 조건 속에 독일의 분열, 프랑스의 통일을 설명 할 열쇠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장수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그것을 전제로 할 대 에야 비로소 고려될 수 있는 사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든 예들은 원칙적으로 말해 일단 예측할 수 없는 몇몇 인과계열의 충돌 에 기인하는 우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과계열은 어떤 역사가 전개되는 특정 세계의 내부적인 것이거나 혹은 이슬람의 경우에서 보듯이 외부로부터 들어온 것이었 습니다. 그런데 인과관계가 내부적인 것이든 외부적인 것이든 상관없이 모두 기본적으로 유 럽세계의 발전에 오래도록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성질의 것이었다는 점에는 차이가 없 습니다. 그렇지만 역사 속에는 이런 것들과는 종류가 다른 외부적인 우연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백년전쟁의 초기에 유럽을 뒤덮으면서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간 것으로 전해지 는 흑사병과 같은 것이 그런 종류입니다. 이 흑사병은 1348년에 흑해지방 내지는 아시아의 다른 지방에서 들어온 유행병으로 1년정도 유럽전역에서 맹위를 떨치다가 수그러들었습니 다. 그 후로도 규모는 좀 작지만 10년 정도마다 두세 차례 더 흑사병이 창궐했습니다. 흑사 병이 유럽에 미친 영향은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의 유래는 제쳐놓더라 도 흑사병을 배놓고는 17세기 후반의 사회사, 사회경제사를 얘기조차 할 수 없을 정도입니 다. 이것은 유럽 중세사의 커다란 우연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흑사병을 유럽 중세사의 본질적인 발전을 좌우한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민족 대이동기에 아탈리의 지휘 아래 들어온 훈족의 침입과 같은 것으로, 일시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그 영향은 얼마 안 가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것은 유럽 속에 그 원인을 가질 힘이 없었기 대문입니다. 12, 13세기에 서유럽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이단운동의 경우도 마찬가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역사서술에서는 13세기 전반에 아르비죠나 십자군의 대상이 되었던 카탈리파가 그 화려함과 당시의 프랑스사에 미친 영향의 중대성으로 인해 특별히 부각 되는 것이 보통 이자만, 저는 같은 시대에 일어난 월드파라는 이단 쪽을 중시하고자 합니다. 그 까닭은 카탈 리파는 페르시아의 이원론적 종교인 마니교의 계보를 이어받은 것으로, 십자군 시대의 동서 교류를 틈타 유럽에 들어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커다란 세력으로 성장한 데에는 유 럽사회에 그것이 성장할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임에 틀림없긴 하지만, 어쨌든 그것은 유 럽인들의 기독교에게는 이질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 활동 면에서는 카탈 리파만큼 화려하진 못했지만 12, 13세기의 종교운동의 일환으로서 카톨릭 교회 그 자체로부 터 생겨난 월드파 쪽에 역사분석의 중점을 두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월드파를 분석하면 중세 말기의 종교운동에서부터 종교개혁에 이르는 다양한 예측을 가능케 하는 요소를 파악할 수 있는 데 비해 카탈리파로부터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역사가들 중에는 카탈리파처럼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영향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를 딱히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일반적으 로 문명은 이질적인 것들의 접촉을 통해서 발전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외부적인 영 향은 그것이 들어와 활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내부적인 조건이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영향 이 될 수 있도록 해주는 내부적인 조건이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영향이 될 수 있는것입니 다. 여기서 외부적인 영향을 우연이라고 한다면 내부의조건은 필연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 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연이라는 것도 필연적 요인과 결합될 때에만 비로소 역사상 중 요상을 갖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일본의 문화는 인도나 중국 등 외래문화의 강한 영향 아래 형성되었 습니다. 그러나 인도나 중국의 문화를 아무리 상세히 연구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인 일본의 역사적 사회적 조건을 알지 못하고는 일본의 문화 그 자체에 대해서는 무엇하나 충분히 설 명할 수가 없습니다. 서양문화의 유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 극히 당연한 일임에도 자칫하면 안이하게 지나쳐 버리기 쉽지만, 동시에 그것을 새로이 문 제로 삼게 되면 역사에 있어서 우연의 역할에 대해 중요한 이해를 얻을 수 있기도 합니다. 이제까지 저는 역사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외적인 요인, 따라서 그것이 외적이라는 의 미에서 우연적인 요인을 문제로 삼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연적인 요인을 취급함에 있 어서는 항상 내부의 역사적인 조건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을 누차 강조한 바 있 습니다. 도한 그 외부적이고 우연적인 요인과 관련해서도 두 종류로 구별하였습니다. 마니교 적인 이단이나 흑사병의 경우와 같이 그 영향은 강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사라져버리는 것 이 그 첫번째 종류인데, 이러한 요인들은 분석을 해보았자 그 이후의 유럽사의 발전을 아는 데 도움이 되는 인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앞서 예로 든 중세의 이슬람도 그렇거니와 특히 일본의 외래문화의 경우에는 그 양태가 크게 다릅니다. 이런 경우에도 물론 받아들이는 쪽의 조건, 그러니까 주체적인 조건 에 대한 연구가 중요하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아니 점 점 더 열심히 중국사나 인도사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인도사나 중국사에 대한 연 구가 일본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인식을 제공해 주리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입 니다. 이는 인도나 중국의 문화가 일본의 문화와 그 발전의 본질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카탈리파의 경우에는 그것의 일시적인 영향이 아무리 크다 해도 결국 유 럽의 문화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영향은 장기적으로 볼 때는 무시해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쯤에서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역사상의 현상이 우연으 로 간주되거나 우연으로 간주되지 않는것은 일차적으로 현상 그 자체의 성질에 따르지만 결 국에는 그 현상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의미에, 다시말해 우리의 판단에 따른다는 것입니 다. 이렇게 보면 어떤 역사적인 현상이 우연으로 간주되느냐 우연으로 간주되지 않느냐는 그 것이 외부로부터 들어온 영향이나 어떠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떤 현상이 문제가 되고 있는 역사의 본질과, 즉 역사발전의 커다란 흐름과 얼마나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무엇이 역사의 본질이냐 하는 점 은 역사적인 가치판단이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다른 내용을 가질 수 있고, 또 시대에 따라 서도 그에 대해 다른 대답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입장이나 특정한 시대에는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되던 것이 다른 입장이나 다른 시대에는 우연적인 것은 항상 명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질적인 것은 필연적이든가, 적어도 그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 입니다. 여기까지 논의를 이끌어오다 보니 우연적인 것이란 결국 필연적이지 않은 것이라는 이야 기가 되는 셈이어서 너무나 뻔한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 독자 여러분들 중 에는 여태까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며 온통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더니 너무나 번한 결론으로 끝나는것이 아니냐, 사람을 놀려도 분수가 있지 이게 뭐냐 하고 화를 내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아직 몇 마디 더 덧붙일 이야기가 남아 있으니 분을 가라 앉히고 마저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첫째, 아무리 해당 역사의 본질적인 흐름으로부터 벗어난 현상이라 하더라도, 즉 아무리 우연적인 현상이라 하더라도 예컨대 흑사병이나 카탈리파 이단 혹은 이슬람이 미친 영향에 서 볼 수 있듯이 어쨌든 그것들이 유럽의 역사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이며, 따라서 명확하게 그 한계 자각한 위에서는 이상에서 논의한 바와 같은 본질 = 필연과 우연의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아무리 본질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그대로 역사상의 사실로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역사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반드시 우연적인 계기와 결합되어 나타나 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연적인 계기란 말할 것도 없이 본질적인 것과의 대비 속에서 말하는 우연이지 첫 번째 의미에서의 우연, 즉 앞서 살펴본 바 있듯이 두 개 내지 그 이상의 인과계열의 충돌이라는 의미에서의 우연을 달리 설명하면 그것은 역사상의 개별 적인 사실이나 각각의 현상에 대해 그 나름의 개성적인 성질을 부여해준다는 의미에서의 우 연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런 의미에서의 우연은 역사의 연구나 서술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에 못 지 않게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 혹은 그 발전에 대한 개성적인 서술이야말로 역사연구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 한 서술은 말할 것도 없이 역사의 본질에 대한 구명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본질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것이 어떠한 개성적인 실현의 방식을 취 하느냐를 밝히는 데에 역사의 재미가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결국 역사에 있어서 필연과 우 연의 관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역사에 대한 안목도 더 한층 명확해지는 것이 라고 하겠습니다. 제 9장 역사의 과학성은 자연과학의 모방이 아니다 이 장에서는 학문적으로 양 극단에 위치하고 있다고 할수 있는 역사와 자연과학을 예로 들어 양자를 비교해 봄으로써 역사가 가지고 있는 학문으로서의 성격을 조금 더 분명히 밝 혀보고자 합니다. 이제까지 학문으로서의 역사의 성격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해 왔지 만, 여기서는 역사라는 학문을 그것과는 크게 다른 것을 보이는 자연과학이라는 학문과 대 조해 봄으로써 양자간의 원칙적인 차이 혹은 공통점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역사에 대한 과소평가와 과대평가를 동시에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선 먼저 저는 이 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해명을 제공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널리 읽혀진 저서 한 권을 소개함으로써 이 문제를 풀어갈 실마리로 삼아볼까 합니다. 그것은 다 름 아니라 캠브리지 대학의 역사가인 애드워드 H. 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 란 책입니다. 카 아는 러시아사 전문가로서 러시아에 관한 다수의 유명한 저술을 펴낸 것 말고도 역사의 이 론적인 면에 대해서도 몇편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 저명한 역사학자 입니다. 여기서 카아의 저서를 소개하는 까닭은 그가 단순한 역사이론가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탁월한 역사가임과 아울러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역사란 무엇인가 야 말로 역사연구를 통해 그 자신의 경험에 깊은 성찰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역사가에 의한 역사의 학문적 반성으로서 가장 훌륭한 저서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우선 이론적으로 말해 학문에는 두 종류가 있을수 없다고 하는 근본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개별적인 사실의 인식과 일반적인 인식 내지 법칙적인 인식은 역사 에 있어서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사실은 그 자체 로서 그대로 역사의 사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의 해석 가쳐서 비로소 역사의 사실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는 역사나 자연과학이나 원칙적인 차이를 인정하려고 하는태도에 반대를 표명했던 것입니다. 카아의 이런 견해에 대해서는 저도 어느정도 견해를 같이합니다. 확실히 역사나 자연과학 이나 모두 심적 혹은 물적인 현상을 지적 합리적으로 지배하려고 하는 인간의 활동이라는 점에서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정의에 지 나지 않습니다. 결국 이런 정의는 역사나 자연과학이나 공히 학문이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을 뿐입니다. 역사상의 사실, 다시 말해 사실은 이미 그 인식에 있어서 두 가지 계기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양자를 서로 구별할 수 없고 따라서 양자를 떼어놓을수 없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언어의 수사가 아닐까요? 과거의 사실이 하나의 사실로 고양되어 가는 절차, 역사가의 해석에 의해 과거의 사실이 역사상의 사실로 고양되어 가는 그러한 절차 자체가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러한 절차를 검토함으로써 우리는 과학과 역사 사이의 공통성 및 차이성을 밝힐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역사나 자연과학이나 공히 가설적인 인식인만큼 가설을 세워서 시실을 해석하고 또 그러한 해석에 의해 제공된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도다시 새롭게 가설을 세워 간다는 점에 서는 양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하겠습니다.그러나 이 가설이 반드시 자연과학과 역사 양자에 있어서 완전히 동일한 성질의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뿐 아니 라 가설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 하더라도 내용적으로는 자연과학과 역사학 사이에 커다 란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점들이 카아의 견해에 대해 제가 느끼는 의문들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논의함에 잇어서 저의 관점을 곧바로 밝히기 앞서 먼저 최근 철학계에 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분석철학이 이 문제에 대해 어던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부터 살펴 보고자 합니다. 분석철학의 입장에도 좀 깊이 파고들면 다양한 입장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 장 상식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논문 한 편을 실마리로 삼아 이 문제를 생각해보기로 하겠습 니다. 그것은 역사와 이론 이라는 분석철학 분야 잡지에 실려 있는 한 논문입니다. 이 잡지의 출판은 네덜란드에서 이루어지지만 거기에 실린 글들은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기고되는 잡지입니다. 동시에 그 편집자들도 이들 여러 나라에서 모여 공동으로 편집을 하는 국제적인 성격의 잡지입니다. 이 잡지 안에 미국 학자로 생각되는 죠인트와 레 셔라는 두 젊은 학자가 발표한 역사에 있어서의 개성의 문제 라는 공동논문이 실려 있습니 다. 이 자리에서 이 논문을 살펴보려는 까닭은 그것이 너무 상식적이라서 분석철학 관련 논 문치고는 가장 이해하기 쉬우며, 또한 분석철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견해를 가장 상식적으로 그리고 가장 표준적으로 보여주고 있어서 입니다. 먼저 죠인트와 레셔라는 이 두 학자는 역사와 자연과학의 공통성과 차별성을 논의하는 것 에서부터 문제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우선 그들은 이 두 학문의 연구대상을 비교 검토하는 데서 출발하여 그러한 대상을 취급하는 방법으로 논의를 옮겨갑니다. 그들에 따르면 이런 점들, 즉 연구대상이나 연구방법과 관련하여 역사와 자연과학이 같으냐 하면결코 그렇지 않 다고 합니다. 즉, 그들에 다르면 역사와 자연과학 사이에는 다른것은 몰라도 적어도 목적에 있어서만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과학에 있어서는 일반적인 명제라든가 보편적인 법칙 같은 것을 발견 해내려는 목적에서 개별적인 데이타를 검토하며 따라서 개별적인 사실들은 과학에 잇어 엄 격하게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가지는 데 비해, 역사의 경우에는 그 반대라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과학의 경우 개별적인 사실은 일반명제 내지 보편적인 법칙에 도달하려 는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의 구실을 하지만 역사의 경우에는 그 관계가 과학에 있 어서와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가는 과학자가 제공해주는 여러가지 일반적인 법칙이나 명제를 이용하여 개별적인 사실을 인식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이 런 점에서 과학자와 역사가 사이에는 인식의 목적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고, 바 로 이 점을 근거로 죠인트와 레셔는 과학과 역사의 차이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주장을 다소 도식적이긴 하지만 어느정도 사실상의 실례를 이용하여 설명 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 역시 역사가가 사실을 모은다 하더라도 그 사실이 그대로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며, 또 그러한 사실들을연대순으로 늘어놓는다 해도 그것이 역사가 되지 않 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들은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습니다. 오전 10시, 나폴레옹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참식사를 들기 시작했다. 10시12분, 잠옷을 벗 고 승마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10시 35분에 아내에게 키스를 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11시, 휘하의 장교들과 회의를 열고 10일 후에 원정을 개시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을 내 린 다음 오후 1시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1시 2분, 머리를 빗어 앞머리를 곱게 손질하고 1 시 3분에 전 부인의 커다란 초상화 앞엇 수심 깊은 얼굴을 하고 꿇어앉았다. 위에 인용한 일련의 사실들은 나폴레옹의 어느 한나절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서도 아주 엄밀하게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배열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는 누구도 이것을 역사라 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역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과 학적인 일반론과 법칙이라는 관념이 등장하는 것이라고 죠인트와 레셔는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과학적인 일반론과 법칙은 이제 막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은 과거의 개별적인 사실 들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줌과 아울러 이들 사실 상호간의 기능 적인 연관을 설명할 수 있는 기본적인 도식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 리는 위에서 서술한 단편적인 사실들의 나열에 하나의 일관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 는 것입니다. 이제 죠인트와 레셔의 과학과 역사에 대한 논의는 더 이상 길게 언급할 필요가 없어졌으 리라 봅니다. 가설적인 인식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얻으려고 하는 목적은 양자가 서로 정반 대라는 것이 그들의 견해입니다. 한마디로 과학은 일반명제를 발견하기 위해 사실을 이용하 는 데 반해, 역사는 일반명제를 이용하여 개별적인 사실들의 의미를 이해하려 한다는 것입 니다. 그러면 그러한 일반명제 내지 법칙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죠인트와 레셔는 바로 그것을 과학이 제공해준다고 말합니다.따라서 역사와 과학의 관계 에 있어서 역사는 과학이 제공해주는 이론의 소비자 곧 컨슈머(CONSUMER)에 해당되고, 과학은 말하자면 그러한 일반명제를 제공해주는 공급자 곧 프로듀서(PRODUCER)의 관계 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죠인트와 레셔 결론입니다. 제가 너무 잘막하게 소개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죠인트와 레셔의 이런 설명은 그야말로 너 무나 단순명쾌합니다. 그렇지만 타아의 입장과 비교해보면 너무 소박하다 못해 아무런 뉘앙 스도 없는 것 같은 느낌마져 듭니다. 게다가 이들의 설명은 어디가지나 역사가의 작업을 극 단적으로 도식화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엔 카아가 특별히 강조하고자 했던것, 즉 과거의 사 실과 역사상의 시실내지 역사적 사실이 서로 구분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선 자연과학은 일 정범위의 사실을 무차별적으로 취하지만 역사에서는 과거의 사실을 닥치는 데로 아무렇게 취하지 않고 일정한 기준을 세운 위세서 과거의 사실을 취한다고 하겠는데, 이들의 설명은 역사에 있어서의 이런 기본적인 조작을 충분히 해명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학적인 명제 내지 법칙이 사실에 대한 인과적 혹은 개념적 파악을 가르쳐준다고 그들은 말하지만, 역사 라는 학문에 있어서 과연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인가, 역사학 자체에서도 개념구성은 필요하 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이 점은 동시에 카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제기되는 의문으로, 역사는 과학이 제공해주 는 일반적 명제 내지 법칙에 의지하기만 하면 그 작업을 해나감에 있어 아무런 장애도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 또한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역사는 과학이 세워주는 일반명제 내지 가설의 소비자일 뿐 그 생산자가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고 보면, 우리 의 의문에 대해서도 그들이 그 어떤 긍정적인 답변을 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됩니 다. 하나의 실례를 들어 말씀드리면, 이런 의문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바궈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예컨대 역사가가 프랑스 혁명이라든가 혹은 독일 혁명 같은 것을 다루고자 하는 경우 정치학이 세워주는 혁명이라는 개념만 있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냐, 정치학에 서의 혁명 개념은 혁명 일반에 대한 개념이지 프랑스 대혁명과 관련하여 역사가는 거기에 추가할 무언 가를, 즉 역사적인 구체적 요인을 포함하는 개념을 따로 만들 필요가 있지 않느냐, 아아가 그러는 경우에도 단순히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요소를 거기에 덧붙이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 은 아니지 않느냐 하는 식으로 문제를 바꿔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즉 죠인트와 레셔의 사고방식을 더욱 발전시켜, 자연과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의 여러 학문들이 내세우고 있는 일반명제 내지 법칙을 끌어들여 그것을 체 계적으로 구성하기만 하면 그것으로써 마침내 역사학의 학문적인 조작을 완전히 가능케 해 주는 역사의 철학 내지 역사의 과학이 완성된다고 할수 있을 것인가, 혹은 그러한 역사의 과학이 완성된다고 기대해도 도리 것인지에 대해 긍적적인 답변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하 는 의문조차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실 이러한 문제는 분석철학만이 아니라 분석철학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이미 다 각적으로 검토되어온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오늘날 대체로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하나는 물론 역사의 과학을 기대할 수 있다고 보는 사고방 식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는 부정적인 관점입니다. 그런데 분 석철학을 전공하고 있는 학자들 중에서도 이 문ㅈ에 관해서는 학자마다 상당히 다른 답변을 내놓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중에서 특히 제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의 과학이라는 문 제에 대해 그것이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입장의대표적 인물은 옥스포드 대학의 철학자 이사야 벌린입니다. 이사야 벌린이라는 인물은 앞서의 역사와 이론 이라는 잡지의 편집자 가운데 한 사람 이 면서 동시에 이 잡지 제1호에 권두논문을 기고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이 벌린의 견해를 소개함으로써 제 생각도 간접적으로 밝혀볼까 합니다. 그리고 이 벌린이라는 인물은 역사란 무엇인가 에서 줄곧 카아의 주된 논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카아에 따르면 버린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대단히 보수적인 학자라고 합니다. 버 린은 말하자면 카아에 의해 영국 보수진영의 대변자쯤의 지위를 부여받고 있는 셈입니다. 또한 카아는 바로 버린 류의 견해를 논파하기 위해 그의 책을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떨치기 어려울 만큼 벌린에 대해 시종 노골적인 적의를 - 그러나 상당한 유머를 섞어서 -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카아와 벌린의 저술을 나란히 놓고 읽으면 벌린은 카아도 인정하 고 있는 바와 같이 유머감각이 상당히 풍부한 인물임을 피부로 느낄수 있습니다. 카아가 벌 린의 약점으로 들고 있는 것은 벌린의 모든 것이 아니라 그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점을 제외하더라도 벌린의 주장 속에는 우리가 고려할만한 견해가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 습니다. 벌린의 견해를 살펴보려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입니다. 우선 벌린의 견해에 대해서 는 역사와 이론 에 실린 그의 논문 과학적 역사의 개념을 중심으로 소개할까 합니다. 그러 나 벌린의견해를 이 자리에서 모두 다룰 수는 없기 때문에 주요 논점 한가지에 대해서만 말 씀드릴 것입니다. 벌린의 결론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하면, 역사는 결국 상식과 매우 비슷한 학문이고 또 그러한 상식성이라는 점에서 역사는 자연과학과 원리적으로 다르다고 하는 주장입니다. 물 론 벌린 자신도 역사가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가설적인 인식의 방법을 취한다고 보는 점에 서 카아나 레셔, 죠인트 등과 견해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적어도 이 점에 관해서는 양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역사와 과학이 전연 별개 의연구대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두말 할 필요 없는 사실로서 이런 측면에서 역사와 자연과학을 구별하려고 하는 시도는 이미 19세기에 극복된 관점이라고 봅니다. 요컨 대 벌린 역시 인식의 방법 내지 인식의 목적이라는 면에서 역사와 자연과학 사이에 어더한 차이가 있느냐를 문제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벌린도 자연과학과 역사의 차이가 인식 의 목적에 있어서의 차이라고 보는 점에서 죠인트나 레셔와 견해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 러나 벌린은 바로 그 차이에 대한 해석에서 그들과는 다른 관점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벌린의 이같은 관점에 대해서는 저 역시 공감하는 바가 많습니다. 즉 저 역시 역사와 과 학은 여러가지 면에서 공통점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상식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과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하나의 결론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점을 간단히 설명하기 위해 우선 다음과 같은 벌린의 설명을 소개 할까 합니다. 벌린에 따르면, 과학은 개별적인 사실보다 일반법칙에 더 많은 신뢰를 보내고 있다고 합 니다. 바꾸어 말하면 과학은 개별적인 현상에 대해서보다 그것을 지배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일반번칙에 언제나 원칙적으로 더 커다란 신뢰를 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역사 는 정확히 그 반대라는 것입니다. 역사에서는 개별적인 사실에 많은 신뢰를 보내는 반면 그 것을 지배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일반법칙 내지 일반명제에 대하서는 오히려 그보다 신뢰를 덜 보내는것이 보통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벌린이 차용하고 있는 예를 제가 잘 알고 있는 다른 예로 바꾸어 말씀드리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예컨대 자연과학에서는 천체의 운행이 하나의 엄밀한 법칙에 따라 이 루어지고 있다면 확신 내지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드러한 법칙에 대해 연구를 해 본 결과 반드시 그 이론에 들어맞지만은 않는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에 후루사이라는 사람이 지구의 모양에 관해 수학적인 계산을 통해 종 래와는 전혀 다른 이론을 밝혀내고 공개주를 향해 발사되었을 무렵 미국의 스미소니언 천문 대가 중심이 되어 세계적인 학자들의 협력 아래 그 인공위성의 궤도를 측정하던 때의 일입 니다. 후루사이씨도 미국의 초청을 받아 그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후루사이씨는 거기에서 스푸트니크의 궤도를 연구한 결과, 만일 지구가 소위 타원형이고 남북 대칭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면 실제의 연구 결과와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 견했던 것이빈다, 그런데 지구의 모양이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것과 다르다는 점에 대해서 는 그 이전에도 이미 일식에 대한 관측 결과 등을 통해 조심스럽게 문제가 제기되고 있었습 니다. 그러나 지구의 모양에 관한 종래의 사고방식은 좀처럼 수정되지않았습니다. 이런 상황 에서 후루상씨는 지구는 북극에 튀어나온 부분이 있고 남극에는 오히려 움푹 들어단 부분이 있으며, 그러므로 지구는 이를테면 서양배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극히 엄밀한 수학적 계산을 통해 나온 결론임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그러 한 결론에 대해 온갖 반론이 빗발치듯 쏟아졌습니다. 수식을 세운 방법이나 계산의 어느부 분인가에 오류가 있다는 것이 그런 반론의근거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러한 결론에 대해 선뜻 신뢰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요컨대 이제까지 일반적으로 믿어져온 것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믿음을 뒤집는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곧바로 부정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후 많은 인공위성이 발사 되기 시작하면서 후루사이씨의 이론이 옳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리하여 지구의 모양에 관한 종래의 이론, 즉 지구는 타원형이고 남북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이론은 마침내 폐기 되기에 이른것입니다. 이러한 예로써 보건대 과학에 있어서는 일반명제 내지 법칙에 대한 신뢰가 개별적인 현상에 대한 신뢰보다 더 강하다고 해도 틀림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있어서는 이것과 정반대입니다. 예를 들어 다름과 같은 예를 들어볼 수 있 습니다. 나폴레옹은 1804년에 로마제국의 황제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그간의 전통에 따르면 로마의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로마교황이 주관하는 대관식을 반드시 거쳐야만 했습 니다.이것은 찰스 대제 이래 절대로 빠트릴수 없는 의식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도 일단은 거기에 따라 대관식을 갖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황의 대관을 기 다리지 않고 자기 스스로 왕관을 써버렸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당시의 역사화, 예컨대 다비 드 등의 그림을 통해 잘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 우리는 나폴레옹이라면 그럴 법도 하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고수되어온 의식이나 전통에 대해서보다 다비드의 그림이나 기타의 기록에 더 많은 신회를 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자연과학과 달리 상식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학문임을 보여주는 좋은 실 례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실례일 뿐, 역사의 상식적 성격이라는 명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측면을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10장 역사의 논리와 상식의 논리 앞 장에서는 역사가 상식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학문이라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 과학 에 있어서는 개별적인 사실에 대해서보다 일반적인 것에 대한 신뢰가 더 강한데 비해 역사 에서는 정확히 그 반대라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어서 지구의 모양에 관한 후루사이씨의 연구 결과와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각각의 예로 들었습니다. 이제 이장에서는 계속 이어서 역사에서는 왜 개별적인 사실들에 집착하느냐 하는 점을 살펴 볼까 합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결국 역사에서 취급하는 인간적인 현상은 과학의 경우와 달리 실험이나 관찰에 의한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데에 그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다비드의 그림을 통해 나폴레옹이 스스로 왕관을 쓰는 데 그치지 않고 한술 더 떠 그의 황후 조세편에게도 직접왕관을 씌워주는 것을 보고 그것이 종래의 전통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인식이 올바른 것인지 어떤 것 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단정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여타의 그림이나 기록 등 그에 관 한 사료가 신뢰할 수 있는 한에서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좀더 쉬운 예를 들어 보자면, 우리가 현실적으로 자신의 부모라고 믿고 있는 사람의 자식이 틀림없는지 어떤지를 의심해 본다고 합시다. 그런 경우 우리는 행정관청에 있는 호적부 기 록이라든가, 부모의 인격이나 얼굴 모습, 혹은 골격의 유사성, 혹은 자신의 가정에 대한 주 위의 태도 같은 것 이외에는 원칙적으로 그것을 증명 할 방법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우 리 자신이 부모의 자식이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무엇 하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바로 위에서 거론한 것 같은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이 부모의 자식이라고 믿고 있는 것에 불 과할 따름입니다. 바로 이런 까닭에 이를 거꾸로 이용하여 그로부터 미스터리나 소설 따위 의 줄거리를 구성하는 것도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 현상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최후에는 결국 어떤 상식적인 것에 대한 신뢰에 기 초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의 결론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상식은 경험이나 학문 의 연구에 의해 끊임없이 개선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백년 전의 상식과 오늘날의 상식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식은 결코 그 하나하나가 일시에 검증되어 한꺼번에 동시에 변할 수 있 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런 사태가 일어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예컨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는 것이지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발견됨으로 인해 천문학에서는 근본적인 전환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식은 태양이 아침에 동쪽에서 떠서 저녁에 서쪽으로 진다 고 하는 식으로 여전히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여기던 때와 같은 상식에 머물 러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의 상식이란 것도 부분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 변화는 어디까지나 다른 부분에 별로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일 없이 그리고 그 속도에 있어서도 완만하게 변해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그와 반대로 자연과학에서도 상식이나 직감 혹은 경험적인 지식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안는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하나의 질병, 이를테면 암 바이러스와 관련하여 어떤 특 수한 곰팡이를 발견하려고 하는 경우에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의 직감이나 다년간 쌓아온 경 험적인 지식이 어떤 결정적인 힌트를 제공해준 사실도 있었듯이 말입니다. 그렇지만 자연과학이 역사와 다른 점은 일단 상식이나 경험 혹은 직감 등에서 힌트를 얻 어 어떤 인식에 도달하게 된 경우라 하더라도 경험이나 직감의 역할은 단지 어떤 인식에 힌 트를 제공해주는 데 그칠 뿐이라는 점이며, 따라서 자연과학의 인식 그 자체는 실험이나 관 찰에 의해 검증되고 귀납과 연역의 논리에 의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조직되지 않으면 안 된 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현상을 취급하는 역사에 있어서는 그러한 실험이나 관찰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마지막까지도 도저히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요소가 따라다닌다는 사실, 바로 이런 사실들이 역사의 상식적인 성격 내지 구조를 결장하는 매우 중요한 이유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과학과 역사 사이의 이러한 차이는 개념을 구성하거나 일반명제를 설정하는 방식에 있어서 존재하는 자연과학과 역사간의 차이를 분석함으로써 좀더 분명하게 설명도리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개념을 구성하는 절차는 어떤 학문에서든지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학문의 성격과 목적에 따라서 현상의 본질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을 가려낸 다음 본질적인 것을 취하고 우연적인 것을 버린다고 하는, 말하자면 추상과 사상(捨象)의 조작을 반복함으 로써 완성됩니다. 수학의 경우를 보면 사물 내지 사물간의 수량적인 관계만을 취하고 그 외의 모든 성질을 버림으로써 수학의 개념 내지 일반명제를 설정합니다. 마찬가지로 물리학은 사물의 역학적 인 성질만을, 화학은 또 사물의 화학적인 성질만을 취하고 다른 성질을 버림으로써 각 학문 나름의 개념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하나의 개념이 얼마만한 타당 범위를 가지느냐, 또 하나의 일반명제가 얼마 만한 타당성을 가지는 것이냐 하는 것은 그 개념이나 명제의 추상성이 어느 정도냐에 달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 대상이 되는 사물의 어떤 특정 성질만을 취하는 식으로 그 성질을 한정하면 할 수록 그 결과로 얻어지는 개념이나 명제의 적용 범위는 그만큼 넓어지게 됩니다. 즉, 취해야 할 사물을 추상화하면 할수록 그것이 여러 가지 사물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게 된다는 것입 니다. 수학은 사물의 수량적인 성질에만 한정하기 때문에 현실의 사물 속에서 그 개념 속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반해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 같은 인간적인 현상을 취급하는 학문에 있어서 는 그와 같이 사물의 성질을 추상하고 그럼으로써 그에 대한 개념을 구성하는 데에도 어절 수 없이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오히려 어떤 하나의 복합체, 즉 몇 개의 요소가 합성된 것 을 하나의 단위로 하여 개념구성의 기초로 삼는 것이 이런 학문에 있어서는 필연적입니다. 왜냐하면 그 경우 복합체의 각 구성요소는 더 이상 도저히 분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찻잔 한 개가 있다고 합시다. 이때 그 찻잔이 가지고 있는 자연 과학적 성질을 결정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찻잔의 사회과학적인 성질을 결정하려 고 하게 되면 그것을 만든 사람의 노동이라든가, 그것을 생산한 조직 혹은 생산비용이라든 가, 혹은 시장에서의 유통경로라든가 등등 모든 것이 그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요컨대 이 한 개의 찻잔도 단순히 찻잔의 일례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사회적 생산의 결과로 서 성립되는 것이므로 비할 데 없이 복잡한 성질을 갖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을 취급하는 학문, 곧 인문과학 내지 사회 과학에서 사용하는 개념은 항상 복잡한 성질을 띠기 쉽습니다. 따라서 그 만큼 그 개념의 타당성은 제한적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적 사회적인 것으로서 역사와 관련 되지 않는 것은 원칙적으로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역사는 지극히 좁은 범위에서 만 타당하고, 따라서 그 대신 복잡하고 구체적인 개념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 다. 이상은 자연과학과 인문, 사회과학 간의 개념 차이를 형식적으로 살펴본 것입니다. 그렇지 만 이러한 차이를 한쪽 끝에 있는 가장 추상적이고 보편타당한 수학의 개념으로부터 다른 쪽 끝에 있는 역사학의 개념에 이르기까지 인간적인 현상에 접근해감에 따라 점차적으로 구 체성과 복잡성이 늘어나는 점진적인 차이라고 받아들여도 좋을지, 또는 이러한 단계적인 서 열의 어떤 지점에 이르러 개념구성 그 자체의 방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닌지 하는 점은 당연 히 좀 더 깊이 따져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조금 전의 소개 드린 이사야 벌린의 논리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독일의 유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 만큼 이 문제를 생략하고서는 역사에 있어서 개념구성의 문제를 논의할 수 없다고 생 각합니다. 그러면 일단 여기서 우리가 봉건제라든가 영주의 장원 같은 역사상의 문제에 대해 논의한 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런 경우에는 우선 봉건제도나 장원의 개념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 다면 이런 개념을 구성하는 데에는 어떤 방법과 절차가 이용되는 것일까요? 봉건제도나 장 원에 관한 기록을 검토하고 거기에서 나타나는 공통의 성질을 추출해냄으로써 봉건제도 내 지 장원의 개념을 구성하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말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방식에 따릅니다. 봉건제도라 할 때 그것이 예 컨대 서양의 봉건제도라면 우리는 각종의 기록에 비추어본 후 거기에 기초하여 서양의 봉건 제도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는 것입니다. 일본 봉건제도의 경우에도 그렇고, 또 장원이나 여타 역사상의 현상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 음 속에 그려진 상, 곧 심상(心象)은 하나의 이념적인 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을 추상화하여 하나의 이념상을 만들어 가게 되는데, 이념상을 만들어가는 과정 에서 우리는 어떤 봉건제나 장원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그 특징을 찾아볼 수 있지만 다른 봉 건제도나 장원에서는 그러한 특징을 별로 찾아볼 수 없고, 또 어떤 다른 경우에서는 전혀 그런 특징을 찾아볼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봉건제도가 존재했던 중세사회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가능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종류의 여러 가지 특질을 우선 적출해내고, 그런 다음에 이런 여러 요소들 상호간에 모순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런 요 소들 가운데 어떤 것의 기능은 확대하고 또 어떤 것의 기능은 축소하거나 함으로써 그것들 의 가장 적합한 관계를 구상해내며, 마지막으로 그것들을 하나의 전체상으로까지 통합해가 게 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의 상식적인 이미지로부터 출발하여 그러한 이미지를 학문 적으로 세련시켜감으로써 하나의 이념상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이념형(理 念型)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이 이념형과 관련하여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요소들은 서로간에 아무런 모순이 없는 관 계에 놓여 있다고 했지만, 그러나 그 모순이 없는 관계라는 것은 자연과학에 있어서와 같은 논리필연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합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이념형은 어떤 일정한 조건하에서 가증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의 기능에 바탕을 둔 일종의 정신적 합성물인 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념형 은 현실적으로 존재한 넋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음은 물론, 범주라는 의미에서의 전형(典刑) 도 아니고, 또 평균적인 유형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이념형은 우리가 연구를 함에 있어서 구체적인 사례의 특징을 식별해내고 그 의미를 규정하려 하는 경우 실로 커다란 유용성을 발휘하게 됩니다. 중세의 장원을 예로 들자면, 장원은 일반적으로 많든 적든 자급자족 경제를 원칙으로 하 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교환에 의존하고 잇는 경우라면 애초부터 장원이 성립될 여지가 없 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일단 여기에 어떤 장원이 있고 거기에서는 어떤 특산물의 생산이 두 드러진 양상으로 나타난다고 합시다. 이것을 보고서 우리는 이 장원이 봉건사회의 해체기에 존재하던 장원이라든가 혹은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교환시장을 가지고 있는 장원이라고 생각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장원도 어디까지나 장원인 한 얼마간은 자급자족적인 경제 를 영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므로, 얼핏 보아서는 사료에 나타나지 않는 이러한 교 환활동에 대해서 거꾸로 사료 쪽에 물음을 던질 수도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이 장 원의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밝힐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념형이란 것이 적절하게 만들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연 구의 관심이나 그 추이에 따라 이념형이 변화하는 경우도 당연히 있게 됩니다. 또 한편으로 는 개별적인 사물이나 제도와 관련하여 이념형이 만들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의 발 전과 관련하여, 나아가서는 시대의 발전 그 자체와 관련하여 이념형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이념형은 자연과학에서 사용되는 개념과는 아주 커다란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 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이념형을 이용하여 역사라든가 기타 인간 현상을 연 구하고 그 결과로 어떤 인식을 획득했다고 하는 경우 그 인식도 자연과학에서의 그것과는 당연히 크게 다를 것입니다. 이 점은 다음의 예를 보면 아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예는 이사야 벌린이 사용한 것으로, 벌린 그 자신이 막스 베버의 발상을 해설하면서 사용하고 있는 예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사가 나에게 다가와 '당신의 폐렴은 다 나았다. 왜냐하면 내가 당신에게 페니실린 을 주사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내가 의사의 설명에 납득했다고 할 때 나는 도대 체 무엇 때문에 의사의 설명에 납득한 것일까? 그것은 페니실린이 폐렴에 잘 듣는다는 자연 과학 및 의학에서의 일반명제가 옳다고 믿는 한 나는 의사의 말에 납득하는 것이다. '페니실 린은 폐렴에 잘 듣는다'라는 이 일반명제의 진실성은 반복적으로 행해진 실험과 관찰을 통 해서 확립된 것이다. 여기에 오류가 없는 한 나는 그에 따른 처치를 납득하는 것이다. 이것 이 자연과학의 경우이다. 이상은 자연과학의 경우에 대해 벌린이 예를 들어 설명한 것입니다. 역사의 경우에 대해 서는 제 자신이 고안해낸 한가지 예를 소개할까 합니다. 마르크스가 쓴 역사적 저술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나폴레옹 3세의 쿠테타를 묘사한 저작으로서, 마르크스 의 가장 대표적인 역사서술임과 동시에 유물사관의 방법을 가장 훌륭하게 적용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책입니다. 이 [루이 보타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잡히는 대로 아무렇게나 펼쳐서 읽어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문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보나파르트는 완전한 보헤미안에다 귀족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였기 때문에 비열한 부르조 아보다도 더 질이 낮은 투쟁을 할 수 있었다'라는 문장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보나파르트'라 는 자는 물론 '루이 보나파르트', 즉 대(大)나폴레옹의 조카인 나폴레옹3세를 말합니다. 마르 크스는 여기서 '루이 보나파르트는 비열한 부르조아보다도 더 질이 나쁜 투쟁을 할 수 있엇 다. 왜냐하면 그는 와전한 보헤미안에다 귀족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였기 때문이다'라고 설명 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말을 과연 그렇구나 하고 납득했다고 합시다. 물론 저도 그 말에 대해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이런 경우 저나 여러분이 마르크스의 설명에 납득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일반적인 이유에 다른 것일까? 이 덤을 설명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 니다. 즉 여러분은 아무런 생활상의 규칙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 귀족적 정신을 망각해 버린 영락자는 그 어떤 인간보다도 더 비열한 이기심에 따라 행동하기 마련이라는 마르크스 의 생각이 이런 경우에 적절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의 설명에 납득하는 것이라고 말입니 다. 그러나 곰곰이 따지고 보면 이것은 지극히 일면적인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생활상의 규칙 을 가지고 있지 않은 보헤미안이라고 해서 반드시 어떤 한가지 방향의 행동만을 하도록 정 해져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또 영락한 귀족이라고 해서 반드시 어떤 특정한 방향의 행동만 을 하도록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문 현상에 관한 설명은 그것이 일면적인 성격을 띰으로써 오히려 강한 심리적 효과를 발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설적인 설명의 경우가 그 가장 두드러진 예입 니다.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행동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한 것은 바로 그 역설 적인 논리를 이용하고자 한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런한 일면적인 진리는 그것이 아무리 설득력 있게 보이더라도 역시 일면적인 진 리라는 것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습니다. 마르크스이 말을 고쳐서 가령 '보나파르트는 보헤미 안에다 영락한 귀족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이긴 했지만 그래도 비열한 부르조아만큼은 질 나 쁜 투쟁을 할 수 없었다'라고 해도 경우에 따라서는 고쳐 쓰기 이전의 말과 완전히 똑같은 정도의 설득력을 지닐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만일 이 보나파르트를 추상적인 A라는 인물로 바꿔놓고 그 인물에 대해 예상할 수 있는 정신적 태도를 상정하는 경우, 그것이 설사 마르크스의 경우와 정반대인 것으로 나 타난다 하더라도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요컨대 '생활상의 규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영락한 귀족은 비열하기 짝이 없는 자라는 마르크스의 일반명제는 그 속에 너무나도 많은 불확정적 요소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루이 보나파르트라는 인물과 결합될 때에야 비로소 겨우 일면적인 진리성이나마 띨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설명에 사용되는 인과관계 속에서는 이러한 예가 비일비재합니다. 따라서 자연과 학에서 사용되는 'because', 즉 인과관계의 설명과 인간적 현상을 다루는 역사학 같은 학문 에서의 'because' 사이에는 결정적으로 다른 그 무엇인가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인간 현상에 관한 학문에서 이용되는 인과 관계의 설명에는 귀납- 연역적인 논리가 아니라 이해(Verstehen)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자 연과학과, 역사를 포함하는 인문-사회과학이 자연과학과는 달리 상식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식이 그대로 학문이 될 수 없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제부터 상식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인문-사회과학이 과연 어떻게 해서 하나의 학 문으로서의 자격 내지 성격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따져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문 제도 또한 자연과학과의 대비 속에서 생각해보는 것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연과학에서는 설사 직감이나 경험에 의해 이해할 수 잇는 대상을 취급하는 경우에도 객 관적인 실험과 관찰을 이용하고 또 그러한 방법에 의해 확정할 수 있는 데이터만으로 개념 을 구성하거나 명제를 설정하거나 합니다. 예를 들어 자연과학에서는 다른 사람의 슬픔과 기쁨을 심리적으로 혹은 생리학적으로 연구하려 할 때, 다른 사람의 슬픔이나 기쁨을 직감 을 통해서 곧바로 이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래서는 무엇 하나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객관적으로 확정할 수 있는 데이터를 통해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인간의 심적인 현상이 가지고 있는 생리학적 및 심리학적인 조건이나 성질에 대해 분명한 결론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의 슬픔이나 기쁨의 내용 혹은 그 미묘한 차이 등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또 애초에 이런 방식으로는 이해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 다. 그 까닭은 심리학이나 생리학 아직 발달하지 못한 탓이라든가 하는 이유 때문이 아닙니 다. 예컨대 대뇌생리학이 현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하여 뇌의 현상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훤히 알 수 있게 된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연과학이 밝히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심적인 현상이 가지 고 있는 생리적-심리적 조건이지 심적인 현상 그 자체는 아닌 까닭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염두에 두면, 이제 인간 현상에 관한 학문의 특질을 좀 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 다. 나아가서 만일 이 보나파르트를 추상적인 A라는 인물로 바꿔놓고 그 인물에 대해 예상할 수 있는 정신적 태도를 상정하는 경우, 그것이 설사 마르크스의 경우와 정반대인 것으로 나 타난다 하더라도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요컨대 '생활상의 규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영락한 귀족은 비열하기 짝이 없는 자라는 마르크스의 일반명제는 그 속에 너무나도 많은 불확정적 요소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루이 보나파르트라는 인물과 결합될 때에야 비로소 겨우 일면적인 진리성이나마 띨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설명에 사용되는 인과관계 속에서는 이러한 예가 비일비재합니다. 따라서 자연과 학에서 사용되는 'because', 즉 인과관계의 설명과 인간적 현상을 다루는 역사학 같은 학문 에서의 'because' 사이에는 결정적으로 다른 그 무엇인가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인간 현상에 관한 학문에서 이용되는 인과 관계의 설명에는 귀납, 연역적인 논리가 아니라 이해(Verstehen)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자 연과학과, 역사를 포함하는 인문 사회과학의 학문적 성격을 가르는 중요한 차이점이고, 동시 에 인문 사회과학이 자연과학과는 달리 상식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 다. 그러나 상식이 그대로 학문이 될 수 없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제부터 상식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인문 사회과학이 과연 어떻게 해서 하나의 학 문으로서의 자격 내지 성격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따져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문 제도 또한 자연과학과의 대비 속에서 생각해보는 것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연과학에서는 설사 직감이나 경험에 의해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을 취급하는 경우에도 객 관적인 실험과 관찰을 이용하고 또 그러한 방법에 의해 확정할 수 있는 데이터만으로 개념 을 구성하거나 명제를 설정하거나 합니다. 예를 들어 자연과학에서는 다른 사람의 슬픔과 기쁨을 심리적으로 혹은 생리학적으로 연구하려 할 때, 다른 사람의 슬픔이나 기쁨을 직감 으로 통해서 곧바로 이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래서는 무엇 하나 이해할 nt 없다 는 듯이 객관적으로 확정할 수 있는 데이터를 통해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는 인간의 심적인 현상을 가지고 있는 생리학적 및 심리학적인 조건이나 성질에 대해 분명 한 결론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의 슬픔이나 기쁨의 내용 혹은 그 미묘한 차 이 등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또 애초에 이런 방식으로는 이해될 수 있는 것도 아닙 니다. 그 까닭은 심리학이나 생리학이 아직 발달하지 못한 탓이라든가 하는 이유 때문이 아 닙니다. 예컨대 대뇌생리학이 현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하여 뇌의 현상을 손 바닥 들여다보듯이 훤히 알 수 있게 된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연과학이 밝히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심적인 현상이 가지 고 있는 생리적, 심리적 조건이지 심적인 현상 그 자체는 아닌 까닭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염두에 두면, 이제 인간 현상에 관한 학문의 특질을 좀 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 다. 인간 현상을 취급하는 작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자연과학자와는 달리 연구의 대상이 되는 현상에 대해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른다는 태도로 접근하는 경우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습 니다. 오히려 직감이라든가 경험에 의해 알고 있거나 혹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나서 대상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쉬운 비유를 들어 설명해 보기로 하 겠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성서의 [출애굽기] 제23장 9절에 유태인에 대한 다음과 같은 계율이 쓰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즉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 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정경을 아느리라'라는 구절입니다. 우리 중의 어느 누구도 이 말 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없으리라 보지만 어쨌든 이 말 속에서 사용되고 있는 인과관계의 논리는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생리학이나 심리학에 의해 이방인의 조건을 분석한 데 따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보호도 없고 가난하고 배고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경 험이나 연상에 의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귀절의 인과논리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처 럼 바로 우리의 경험이나 연상이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한에서 인문 사회과학과 같은 학문이 성립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이와 같은 인과의 논리가 언제 어떤 경우에나 성립된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습 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 입니다. 이를테면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안 쬔다'라고 하는 속담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라는 말도 있다는 것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도대체 어떤 것이 주어진 조건하에서 가장 가능성이 있는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구체적인 어떤 사상(事象)이 제시되는 경우 그것을 인간 행동의 어떤 패턴으로 이 해할 수 있는 것이냐와 관련된 패턴의 객관적인 정립, 그리고 주어진 조건하에서의 각종의 패턴들로부터 어떤 패턴을 선택하는 경우 그 선택의 정확성의 확보, 바로 이 점을 우리는 인문 사회과학의 가장 기초적인 수련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조작이 자연과학 에서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문 사회과학이 자연과학과 완전히 무관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결코 아닙 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자연과학의 방법을 이용하는 경우도 결코 드물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통계가 그렇습니다. 또한 자연과학적으로 증명된 확실한 데이터는 인문 사회과학에서 도 기꺼이 이용되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러한 데이터 없이는 인문 사회과학의 작업이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입니다. 또한 자연과학의연구에 의해 우리 의 학문의 방법이 정밀해지는 경우도 물론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 사회과학, 특히 역사에 있어서는 기본적인 개념구성이나 명제를 정립하는 작업에 있어 그 방법이 자연과학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긴 인간의 역사를 자연사로서 파악하려는 경향을 마르크스주의에서 자주 엿볼 수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장기적인 현상을 측정하는 경우에나 해당되는 이야기이고, 또 그것도 부분적으 로 가능한 데 지나지 않습니다. 이와같이 역사의 연구에 있어서는 역사 이외의 학문의 성과를 이용함으로써 개념이라든가 방법에 있어 항상 개량이 이루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라는 학문의 근본적인 성격에 어떤 변호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요컨대 역사에 있어서 개념을 구성하거나 명제를 설 정하는 데 사용되는 것은 여러 요소들 상호간의 적합적인 연관의 논리와 이해의 논리인 것 입니다. 바로 이런 성격 때문에 역사라는 학문에는 마지막까지 직감, 기억, 연상, 경험 등 과 같은 비합리적인 요소들이 따라다니게 되고, 심지어는 그 속에 그런 요소들이 구성적으 로 스며들게 되어 결국 학문 그 자체가 상식적인 구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경국 역사에는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계기가 따라다닌다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주관적인 계기를 벗어 던질 수 없는 학문은 결국 상대적인 진리밖에 내세우지 못할 것이므로 과학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다는 부정적인 생각이나 회 의가 들 수도 있겠는데,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불신이나 회의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하는 수박에 없을 것 같습니다. 즉, 역사에 있어서 주관적인 계기가 아무리 불식하기 어려운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방치해 둘 수 없는 일이므로 그것을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진리로 접근시켜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 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하는 과정에서 역사학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진보를 해온 것이라 고 말입니다. 현재로서는 이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논의를 해놓고 보니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이 책의 전반부에서 논의한 바 있는 '역사의 주관성과 객관성'의 문제로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다시금 역사의 연구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주관적 계기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되돌아가고 말았다는 것 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결국 역사와 역사관의 문제 혹은 세계관과의 관계를 묻는 문제라 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이제 이 책의 마지막 주제로서 역사관의 문제를 생각 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 11장 역사에 질문을 던진다는 것 역사와 역사관의 관계에 대해서는 앞 장에서 학문으로서의 역사의 성격과 그 논리를 다룰 때 그 결론으로서 이 양자의 결합이 예상된다는 식으로 말씀드린 바 있고, 또 이 문제는 사 실 이제까지 방법은 다르지만 여러 곳에서 이야기해온 내용이기도 합니다. 요컨대 역사는 우리에게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물음을 던질 때에만 우리 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에 대한 우리의 물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 은 우리가 던지는 물음의 내용이 어떤 것이냐에 상관없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실천적 관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잇는 실천적 관심이라고 했지만, 사실 우리의 실천적 관심에 는 고급스런 것에서부터 저급스런 것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입니다. 예컨대 올림픽이 개최 되면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올림픽에 쏠립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관심은 같은 올림픽 에 쏠려 있으면서도 그 냉용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인 것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올림픽이 그 리스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더올리고는 그리스가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를 알아보려고 하 는 식의 취미지향적인 관심을 보이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올림픽의 정신이나 의미를 염두에 두면서 그러한 정신이 가능했던 그리스의 국가나 사회, 특히 그 폴리스적인 사회의 성격이나 성립을 알아봄으로써 올림픽의 정신을 이해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이런 관심은 아 무래도 취미 차원에서 올림픽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그것보다 조금 더 심각해지게 마 련일 것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올림픽의 역사는 제 전공 분야가 아닙니다. 그렇게 때문에 제가 이 장에서 '역사와 역사관' 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드른 예들도 그리스에 고나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유럽의 중세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을 미리 말씀 드려두고자 합니다. 부분적으로는 이미 앞에서 거론됐던 예들입니다만, 다시 반복해서 이야기함으로써 더 한층 문제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으로 믿기 때문에 애써 그러한 예들을 다시 거론하 려는 것입니다. 제가 들고자 하는 예는 바로 최근 들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유럽의 EEC문제입니다. 이 EEC가 경제적으로 중요한 시사를 던져주고 있어서 그런지 최근 매스컴 들도 EEC 관련 기사를 자주 싣고 있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특히 EEC가 지향하는 미래의 이상이 과거에 어떤 현실적 근거를 가지고 있었느냐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가운데 유럽 의 중세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역사를 되짚어보는 작업도 많이들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 EEC의 이상이 실현될 가능성을 찾아 중세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해도 그 중세 세계가 샤를마뉴 대제 치하에서 하나의 통일체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만 으로도 단순한 복고주의에 그치고 말 뿐입니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EEC의 유래 혹 은 그것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유럽의 중세에 눈을 돌리는 것 이 전혀 무의미하지만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단 이런 시각에서 중세에 눈을 돌린 결과. 특히 중세 시대에 국경이나 민족의 벽을 뛰 어넘어 유럽에 일체성의의식이 자리잡았으며 그런 의식의 근저에는 무엇보다도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적 일체성이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그러한 의식이 성립할 수 있었던 조건으로서 로마교회가 유럽 속에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조 직을 결성하고 그 조직을 통해서 유럽의국가들과 국민들을 지도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 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확실히 중요한 인식상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체성이 가장 잘 나타난 사실을 찾는 과정에서 십자군을 머리에 떠올리게까지 되면 우리의 인식은 더 한층 깊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머물지 않고 한걸음 더 나 아가 그러한 인식으로부터 오늘날의 문제에 대한 그 어떤 해답까지도 경우에 따라서는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유럽의 중세에 대한 이러한 물음은 도대체 어떤 관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또 그러한 관심은 현대의 어떠한 문제와 결부되는 것일까요? EEC가 단순히 현대의 유럽이 가 질 수 있는 하나의 바람직한 이상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점을 밝히려함에 있어서 중세 유럽에 성립되었던 일체성의 의식을 이해하는 것은 확실히 커 다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이러한 일체성이 가톨릭적인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 었음을 이해하게 되면 그러한 이해로부터 이번에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유럽의 정신적 통일 이 가장 긴급한 과제이며, 따라서 이를 해결하는 데에는 기독교의 부흥이 필수적이라는 식 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는 대체로 이와 같은 의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듯합니다. 그렇다 면 가톨릭이 아닌 프로테스탄티즘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의문이 당연히 고개를 들게 됩니 다. 다시 말해 프로테스탄티즘의 성립과 발전이 전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면.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가톨릭 모교회로 복귀하는 것이 프로테스탄트의 현대적인 과제가 되겠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적어도 유럽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 다. 그런데 중세 유럽의 일체성이란 것이 과연 사람들이 말하듯이 그렇게 완전한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접하게 되면 결론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리면, 이런 시각에서 EEC의 실현을 위한 조건을 중세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결실도 없는 헛수고로 끝나고 말 것으로 저에게는 생각됩니다. 정신적인 통일이 성 립되기 위한 조건을 망각한 채 단순히 정신적인 통일이란 사실만을 염두에 두고 중세의 유 럽을 바라보는 것은 완전히 헛수고로 끝나고 말 우려가 많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중세 유럽에 가톨릭적인 정신의 통일이 존재했다고 가정하고 그러한 정신 적 통일에 의해 유럽의 각 국가들 및 민족의 벽을 뛰어넘는 일체성이 실현된것이라고 이해 한다면 오히려 그러한 정신적 통일에 앞서 그것을 가능케 한 조건이 있어야만 하고, 따라서 바로 그러한 조건이 좀 더 근본적인 것이 아니었던가를 따져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기 때 문입니다. 이런 각도에서 생각해 볼 때 그러한 조건, 다시 말해 가톨릭적인 통제가 존재할수 있었던 조건은 반드시 가톨릭 교회 쪽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정치가 지극히 미발달된 상태여서 국가들도 오늘날과 같은 배타성을 가 지지 않았으며, 따라서 각 국가들 서로간에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국경이 없었다는 사실 속 에 그러한 조건이 존재한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정치의 미성숙이 라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가톨릭적인 교회조직이 유럽에 보편적으로 성립될 수 있 었고, 동시에 유럽 전역에 걸쳐 커다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좀더 추상적으로 말씀드리면, 중세에는 정치가 미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근대국가에서와 같은 국가의 독점적인 주권이 성립되지 않았었고, 또한 그로 인해 각국 내에는 봉건적인 정 치권력들이 서로 대립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초월적인 권위로서 로마교회의 힘을 끌어들이게 되었는데, 바로 이런 조건하에서 유럽전역에 걸친 가톨릭 교회의 조직이 성립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십자군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군만틈 통일 유럽의 이 념을 잘 보여주는 것도 달리 없다고들 합니다. 그렇지만 십자군이 그렇게 기독교적 유럽의 공동작으로서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유럽의 국 가들은 봉건제도에 의해 이제 겨우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을 뿐인데다 정치의 밀도도 아직 현저히 낮았으며 국가의 조직도 미처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던 시대입니다. 이런 조건이 있 었기에 비로소 그와 같은 전 유럽적 공동작업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십자군이 제2차, 제3차로 회를 거듭함에 따라 전 유럽의 공동사업으로서의 성격 이 점차 희박해졌다는 사실에서 자명하게 드러납니다. 각국의 군주들은 2차, 3차로 자꾸만 십자군의 원정 및 횟수가 늘어나자 불안정한 국내 정치의 압박에 내몰려 장기원정으로 인한 국내의 공백만을 걱정하느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면 로마교회의 최전성기를 구가하였고 중세 로마교황 가운데 최대의 정치가였던 이노센트 3세 가 주창한 제4차 십자군 에 단 한 명의 국왕도 참여하지 않았고, 게다가 그렇게 성립된 십 자군이 교회의 통제를 벗어나 교회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탈해 버렸던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사태가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유럽자체의 발전에 따른것, 즉 다시 말해 유럽에 있어서 정치가 발달하여 국가의 조직화가 진전된 데 따른것이라고 답변해도 과히 틀 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십자군이 이러한 유럽의 발달에 근본적인 기여를 했다는 점은 교과 서에 나오는 그대로라 하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십자군의 기여 등으로 해서 촉진된 유럽의 발달 자체가 십자군이라는 전 유럽적 공동사업을 점차로 곤란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참으 로 역설적인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항상 이러한 역설을 증명하는 것이 또한 역사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십자군의 쇠퇴는 혹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신앙심의 퇴조에 따른 것도, 로마 교황권의 통제력이 약화된 데 따른 것도 아닙니다. 이슬람 세력의 저항력이 증대되었고 또 그만큼 조직화도 진전되었다는 또다른 중요한 조건을 제외한다면, 그 이유는 오히려 유럽 내부에서 정치가 발달한 데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러한 사실이 일반적으로 승인될 수 있다면 맨처음에 말씀드린 가톨릭적인 관점에서 던지는 중세사에 대한 물음은 완 전히 잘못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상당히 불충분한 물음임엔 틀림없습니다. 따라 서 결국 그러한 물음은 EEC와 관련한 현대의 관심에 해답을 제시해주는 바도 많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를 바꿔서 EEC가 전개되고 있는 현대의 시점에서 중세사에 물음을 던지는 것은 전혀 무의미한 일일까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EEC와 관련한 현대의 관심에 답변을 주는 중세사의 사실은 무엇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는데, 이에 대 해 저는 이제까지 말씀드려온 바를 근거로 하여 바로 국가의 역사성-이것이 그에 대한 답 변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국가의 역사성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국가라는 것도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그것이 역사적 산물이라고 한다면 국가에도 발 생이 있음과 동시에 그 종말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적어도 우리가 현재 그 속에서 살고 있고 또 알고 있는 근대국가에 관한 한 저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넓은 의미에서 국가라고 불리는 단체는 중세 초기에도 존재하였고, 또 그 이전에도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의 국가는 십자군 시대를 거치 면서 점차 스스로 그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한 근대국가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주권을 그 불가결한 조건으로 하는 바의 근대국가는 십자군 시대의 초기에는 아직 생겨나지 않았고, 그 시대의 흐름속에서 싹이 트기 시작하여 근대 초엽에 성립되었다 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이와 같은 국가를 대신하여 국가에만 고유한 것으로 생각되는 주권을 행사하고 있던 것은 국가속에 포함되어 있던 각종의 작은 집단들이었습니 다. 근대국가가 성립되는 초기에는 국왕이나 귀족만이 아니라 가문이나 가장들도 오늘날에는 국가만이 행사하고 있는 주권이란 것을 어느 정도씩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과 같이 경찰이나 군대, 사법제도 등에 의한 일반적인 보호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누 구든지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자신의 실력으로써 지킬 필요가 있었 기 때문입니다. 이 실력이 훗날 국가에 집중되어 국가의 폭력행사권, 요천대 주권을 형성하 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가문이나 가장, 나아가 그것을 뛰어넘는 집단으로서의 지방 제후의 영 역 혹은 도시와 같은 것이 순차적을 그 주권성을 획득해가고 마침내 그것이 근대국가 속으 로 흡수된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과정을 연구하는 중세사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 들을 가르쳐줄 것입니다. 즉, 주권은 지극히 작은 소규모의 것에서부터 대규모의 것으로 이행해가는데, 그것은 기술 이나 생산력의 발전, 다시 말해 우리의 자연지배력이 발달함에 따라 마치 일련의 발전을 보 이다가 끝내는 근대국가라는 민족적 단위의 국가로까지 확대되어 간다. 그리고 나아가 이러 한 발전이 미래에까지 계속 확장되어 가다보면 근대국가도 또한 주권독점이라는 그 역할에 종지부를 찍을 날이 꼭 올 것이다. 국가에는 태어났을 때가 있음과 동시에 죽을 날도 또한 올것이 틀림없다. 지금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국가 특히 근대국가,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 의 주권국가 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권국가가 그 역할에 종지부를 찍게 될 때에는 그것을 몇 개나 합한 보다 더 큰 단위가 국제사회에서 각자 주권을 행사하는 단위 단체로서 등장하 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재로서는 아직 순전히 꿈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 일지 모르지만 세계 그 자체가 일체가 되는 날이 언젠가는 오리라는 점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근대국가가 그 혁할을 끝내는 시기는 도대체 언제일까요? 어쩌면 이 시기와 관련해서도 우리는 또 중세 내지 중세 이후의 역사로부터 하나의 시사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와 같은 시사를 던져주는 것으로는 19세기 전반기에 독일에서 성립된 관세동맹이 있습 니다. 이 관세동맹은 그 당시 분열을 거듭하면서 난립하던 독일의 소국가들의 국경이 독일 에서의 근대 자본주의의 발달을 방해한다고 해서 프로이센이 중심이 되어 정치적인 국경은 그대로 두되 경제적인 활동에 관한 한 국경을 철폐하고자 한 일종의 경제적 협정입니다. 이 것은 오늘날 EEC의 관세 철폐와 완전히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전반에 성립된 이러한 관세동맹이 마침내 19세기 후반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일 할때 그 전제 내지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오늘날의 문제를 생각함에 있어서도 염두에 두면 많은 시사를 받으리라고 생각합니 다. 오늘날 우리 앞에 등장한 EEC라는 것도 결국은 서구의여러나라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발 전을 지속적으로 도모하기에는 너무나도 협소해진 국내 시장을 여러 국가의 통합에 의해서 확대하려는 취지에서(광역시장의 실현) 하나의 경제적 동맹을 결성함으로써 출현하게 된 것 이라고 하겠습니다.그런데 이것은 EEC의 경제적인 측면일 뿐, EEC는 동시에 정치적인 프 로그램도 가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EEC의 궁극적인 목적은 유럽 연방의 실현입니다. EEC산하의 여러 나라들로 구성되는 이 유럽연방에 대해서는 EEC국가들 사이에서도 아 직 일치된 결론을 보는 데가지 이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EEC의 핵심적인 추진자였던 드 골은 유럽연맹이라는 비교적 느슨한 결합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따라서 EEC의 장래를 놓고 현재 어떤 확실한 예상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그런 예상을 하기 위한 실 마리로서 역사로부터 일정한 시사를 받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도시 가 중세시대에 하나의 독립된 정치단위로서 형성되어가던 때의 사정이 바로 그것입니다. 도시의 성립과정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즉 그때가지는 어느 정도 왕권에 버금가는 힘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도시 전체를 위해 서로 주권성(정당한 폭력행사권)을 포기하고 하나의 서약단체를 만들어 그 서약단체가 이제까지 각자가 가지고 있던 주권적인 권력의 행 사권을 대신해서 행사하게끔 한 것입니다. 이것이 법리적으로 본 도시의 성립인데, 도시는 이에 의해 행위능력을 갖춘 법인격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도시는 하나의 독립 된 정치단위로서 성립되었던 것인데, 근대국가의 원형을 이와같은 도시의 성립 과정에서 엿 볼 수 있다고 해도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근대국가의 탄생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일단 군주 내지 제 후가 그때까지 주권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봉건적 지방권력, 도시)로 하여금 실력 이나 혹은 평화적인 입법을 통해서 주권적인 권력을 포기하게끔 하고, 이권력을 모든 사람 을 대신하여 국가 자신이 행사하도록 함으로써 근대국가가 생겨나고, 이로써 근대적인 의미 의 주권국가가 성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통 일반치안입법이라고 부르는데, 이 것은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중세 말기의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이른바 중앙 집권화의 과정이란 법리적으로 보면 이처럼 치안입법에 의한 폭력행사권의 수탈과 집중의 과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문제는 결국 주권국가가 난립하고 있는 오늘날의 국제사회에 있어서 평화를 위한 서약단 체를 어떻게 만들 것이냐. 그러니까 이른바 일반치안입법을 어떻게 입안할 것이냐, 주권국가 의 주권성을 구속하는 상위단체를 어떻게 구성할 것이냐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국제연맹이 나 국제연합은 단순화하자면 중세 이래의서약단체 형성이나 일반치안입법의 절차를 국가를 단위로 하여 시행하려고 한시도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서 다른 장 (제 6장)에서 이미 다룬 바 있거니와 일거에 전세계를 단위로 하는 단체를 형성한다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만큼 우선 당장에는 드 일부에서 부터 시작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입 니다. 여기서 마치 그 시범을 보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역사에 등장한 것이 바로 EEC인 셈인 데, 유럽은 그 세계적인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위기적 정황 속에서 또 다시 세계 그 어 느 곳보다 앞서서 인류 최초의 정치실험을 시도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주권의 무제한적인 발동을 억제할 국제단체를 형성하기 위한 조건은 오늘날 상당한 정도까지 성숙해 있다고 보아도 좋을것 입니다. 그러한 조건은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과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가공할 만한 기술의 진보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같은 일반적인 정세 하에서 EEC의 정치적인 프로그램을 촉진시키는 특수 사정을 살펴보 면, 우선 앞서 논의한 유럽의 광역시장을 실현하자는 요청을 그 하나로 들 수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유럽이 미 소 양대 권력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음으로 인한 정치적 외압의 문제들 을 하나로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국제정치적인 정황은 중 소 논쟁이나 아시아, 아프리카, 혹은 라틴아메리카의 새로 운 민족주의의 대두로 인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역시 EEC문제 의 세계사적인 의의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가 간과해서 는 안 될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EEC에 속한 여러 국민과 그 지도자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입니다. 만일 이같은 전망에 오류가 없다고 한다면 주권국가가 그 역할을 다하고 자신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게 될 시기는 결코 그리 먼 미래의 일이 아닐 것입니다. 20세기 후반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쩌면 이미 그 시기에 접어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논의해온 역사의 동향에 대한 전망은 저 자신이 중세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파 악해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만일 제가 근대 이후의 역사에만 몰두하고 있었더라면 결 코 파악하지 못했을 문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적어도 제자 아는 한 근대사만을 연구 해서는 이와 같은 문제제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EEC가 문제되고 있는 현대 라는 시점에서 중세를 향해 하나의 문제를 던져보는 것은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며, 도리 어 하나의 귀중한 시사를 얻을 수 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이상으로 역사와 현대의 관련에 대해서는 일단 설명을 마친 셈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현대에 있어서 우리의 역사에 대한 물음, 나아가 역사에 대한 태도 결정은 과연 역사에 대 한 우리의 근본적인 견해와 도대체 어떻게 결부되는 것일까요? 이러한 물음은 원칙적으로 역사에 대한 모든 종류의 물음에 대해 항상 타당한 문제이며, 또 맨 앞에서 언급한 가톨릭적 입장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 리고 지금 제가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역사에 대한 물음이나 역사에 대한 견해 는 새로운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편의적으로 만들어지는 우연적인 성질의 것의 아니라는 점 입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의 역사관과 결부된다는 점을 이자리에서 다시 한번 강조해두고자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가톨릭적 입장 내지는 로마교회적 입장을 고려함으로써 분명해 지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유럽의 중세에 대한 물음을 던질 때에 가톨릭적 입장이 갖는 관점이란 결굴 아 우구스티누스 이래 로마교회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고 또 시대와 더불어 그 내용을 풍부히 해온 가톨릭적인 역사관, 가톨릭적인 세계관의 일부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 가지로 유럽의 중세에 대해 던지는 저의 물음도 결국에는 저의 역사관에서 나오는 것일 수 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 나아가 가톨릭적인 역사관이 전세계의 기독교화를 통해서 세계의 진보와 신의 영광을 실 현하는 데로, 요컨대 소위 보이는 지상의 교회를 보이지 않는 천상의 교회와 합일 시켜가는 과정 및 그에 대한 원대한 이상과 신앙으로 귀착된다고 한다면 저의 역사관도 단순히 역사 에 대한 일시적인 견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전체적인 판단 내지는 그 실천적 인 이상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인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현재 끊임없이 문제가 일어나는 상황에 직면하여 어떤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그에 따른 해답을 즉석에서 찾아야 하는 사태가 벌어 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결과는 항상 자기자신이 분열에 빠지는 위험을 초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저 자신의 역사관 내지 세계관을 밝히는 것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제 이 장을 마치면서 꼭 말씀드릴 필요가 있는 것은 이제까지 이야기해온 내용의 결론 입니다. 그 결론이란 우리가 역사에 대해 하나의 진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을 결국 자기자신 에 대한 물음으로 되돌아 온다는 것, 다시말해 자기 자신이 역사에 대해 전체적으로 어떤 판단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반성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역사에 대한 물음이 어차피 우리의 실천적인 이상이라는 문제에까지 관련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역사 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엄숙한 행위를 하는 섬에 된다는 것, 이것이 결국 역사와 역사관 에 대한 저의 결론 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역사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든 아니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든 관계 없이 회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에 대해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린다 함은 단순히 과거를 과거로 해석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 대문입니다. 역사란 본시 단절을 모르 는 일관된 흐름입니다. 또한 역사를 판단하기 위해 우리가 서 있는 현재라는 시점 역시 시 시각각으로 미래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습니다. 바로 그렇게 과거는 항상 그 속에 미래를 잉태하고 있습니다. 이 미래는 우리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어쨌든 그것은 우리의 이상을 내걸 수 있는 시대, 실천적인 이상을 내걸 수 있는 장이라도 해도 좋 을 것입니다. 이같은 미래를 잉태하고 있는 과거를 판단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역사에 대한 판단입니다. 바로 이로부터 우리의 역사에 대한 물음이 갖는 심각하고도 엄숙한 의미가 나 온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다른 한편에서 또다시 새로운 문제가 튀어나오게 됩니다. 무슨 말 이냐 하면 앞에서 역사에 대한 물음은 결국 역사에 대한 하나의 판단을 전제로 하고 있으 며, 게다가 이 판단은 아직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미래를 잉태하고 있는 과거에 대한 판단 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러한 판단에는 아무래도 우리의 주관이 개재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주관적인 판단이 끼어들 수밖에 없는 역사에 대한 물음이나 판단으로부터 어떻게 객관적인 역사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 가 당연히 대두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은 다음 장으로 넘기는 수밖에 없겠습 니다. 이제 이 문제를 해명함으로써 저의 이야기도 결말을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제 12장 나 자신을 알아야 객관적 진실도 알 수 있다 이 장에서는 앞 장의 결론을 이어받아 역사에 있어서 주관성이 라는 계기를 어떻게 극복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볼 것입니다. 요컨대 역사는 본래 주관적인 물음으로부터 시작 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 결과로 얻어지는 인식 역시 아무래도 주관적인 성질을 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도 학문인 이상 이러한 주관성을 가능한 한 객관적인 것으로 바꿔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을 이제부 터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도 인용한 바 있는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H. 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보 면, 영국의 대표적 중세사 연구가인 옥스퍼드 대학의 퍼워크 교수가 한 말을 인용하고 있는 부분이 나옵니다. 이 역사를 해석하려는 욕구가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어지간히 건설적인 사고방식을 갖지 않으면 우리는 자칫 신비주의나 냉소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 라는 대목입 니다. 카아는 이 말 속에 있는 건설적인 사고 방식 이라는 이색적인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 가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설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입장에서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 은 바로 그 역사를 해석하려는 욕구가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라는 구절입니다. 왜 역사를 해석하려는 욕구가 그다지도 강한 것일까요? 제가 이제까지 언급해온 내용과 관련지어 말씀드리면, 결국 우리의 역사에 대한 물음은 좀 더 깊이 캐들어가다 보면 우리의 역사관 내지 역사적 세계관과 맞닿게 되기 때문에 역사 에 대한 해석의 욕구가 그렇게도 강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카 아는 따로 설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 나름대로의 설명을 덧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문제를 설명함에 있어 또 한가지 예를 들고자 합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역 사관 혹은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이 문제를 설명하는 데 아주 적절한 예이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가 반드시 이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해답을 제공 해주기 때문은 아닙니다.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마르크스주의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기는 하나 마르크스주의 그 자체가 이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해답을 제공해주진 않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에 있어서의 주관성과 객관성이라는 문제 내지는 역사에 대한 우리의 견해가 우리의 역사적 세계관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점을 매우 심각한 형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한 예로서 마르크스주의를 선정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됩니다. 방금 저는 매우 심각한 형태로 라는 말을 썼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마르크스가 학문이 나 문화의 계급성을 지적한 점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러면 마르크스가 설파한 역사 관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요? 마르크스의 역사관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그의 저술 로는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경제학 비판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경제학 비판이라는 책에 는 서문이 붙어 있습니다. 오해가 없도록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 책에는 서론과 서문 두 가지가 딸려 있습니다. 그 중에서 서론이 아니라 보통 서문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는데, 그 서문 속에 일 반적으로 유물사관의 공식으로 일컬어지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대체로 다 음과 같은 세 가지 핵심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로 이 서문에서 마르크스는 사회의 전개 내지는 사회의 발전을 전면적으로 혹은 근본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묻고,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사회의 물질적 인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대항하여 생산관계가 만들어집니다. 이 생산관계의 총체가 곧 사회의 경제적인 구조이기도 하다고 마르크스는 규정합니다, 이것이 바로 일반적으로 하 부구조라고 불리는 것인데, 이 하부구조를 토대로 항 그 위에 법률, 정치 및 기타 다양한 사 회적 의식형태를 포함하는 상부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이러한 의식형태로는 종교, 예술, 학문 따의의 문화가 포함됩니다. 그런데 이 점을 마르크스는 매우 특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의 의 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 정한다' 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 말에 이 첫째 부분의 핵심이 담겨 있는데, 이것은 동시에 앞서 언급한 학문 내지 문화의 계급성이라는 사고방식과 연결되는 관점이기도 합니다. 둘째는 이와 같은 사회의 발전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전개되느냐하는 점과 관련된 것입니 다. 그것을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즉 '사회의 물질적인 생산력은 그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 이르면 그 생산력이 종래 그 안에서 작용해온 현재의 생산관계 혹은 그 생산 관계의 법률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 소유관계와 모순을 일으키게 된다. 이들 재관계는 생산 력의 발전형태로부터 전화하여 그 질곡이 되고, 그렇게 되면 사회혁명의시대가 시작된다. 경 제적 기초의 변화와 더불어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서서히 또는 급격히 변혁된다' 라고 언 급합니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형성된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이러한 과정은 계급투쟁이라는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이와 같은 전개를 보여주는 사회를 발전단계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점입니다. 즉, 마르크스는 역사상 사회의 발전단계를 아시아적 사회, 고대적 사회, 봉건적 사 회 및 근대시민적 사회 내지 생산약식이라는 계기적인 발전단계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리 고 이 근대시민적 사회의 모습이 더욱 심화되어 그것이 극복되게 되면 사회주의 사회가 나 타나고, 이 사회주의 사화가 더욱 발전하여 공산주의 사회에 도달하게 되며, 이로써 인류의 전사가 끝난다고 마르크스는 주장합니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설파한 사회의 발전에 관한 여 러 단계입니다. 대체로 이상과 같은 골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마르크스의 역사 이론입니다. 그런데 이러 한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은 역사이론사상 가장 포괄적이고 가장 체계적인 이론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물론 마르크스의 이러한 역사이론은 그에 앞서는 헤겔이라는 사상가에게서 힘입은 바 큰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은 역사에 좀 더 밀착해 있다는 점에서 헤겔의 그것보다 더 한층 역사적인 이론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그가 사회발전의 과정을 동적으로 묘사한 점, 그리고 사회의 물질적인 생산이 인간 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라고 주장한 점 등은 그때가지 역사를 보는 관점 을 완전히 뒤엎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역사이론에 있어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으킨 셈입니다. 그런 만큼 마르크스의 이론이 발표된 이후 그것을 전면적으로 긍정하는 쪽이든 그것을 부 정하는 쪽이든 마르크스의 이론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이론은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또 한 마르크스의 이론은 단순한 역사이론만이 아니라 역사에 입각한 하나의 세계관이라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사회주의 사회,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이라는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는 점에 서는 사회변혁의 이론이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마르크스의 역사이론, 즉 유물사관이 미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고 또 영속적 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제가 특히 중요한 문제로서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은 점입니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하는 견해를 제시함으로써. 우리가 의식하느냐 어떠냐에 상관 없이 역사에 대한 우리의 물음이나 역사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세계관으로까 지 연결된다는 것을 그야말로 명확하고도 드라마틱하게 밝혀 주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이론이 출현한 이래 우리는 자의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공부한다거나 역사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일이 한낱 취미생활이거나 사적인 관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 는 것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마르크스의 지적이 옳다고 한다면 우리가 품고 있는 역사에 대한 견해나 또는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입장은 역사관 내지는 세계관으로까지 연결되는 것이므로, 모든 역사 연구자는 자신이 서 있는 역사관과 세계관을 구명해야 할 학문적인 책임을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거듭해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의 역사관 내지 세계관은 주관적인 계기를 포함 하지 않을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관적인 계기를 포함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관으로부터 출발한 우리의 역사적 인식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객관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여 기서도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마르크스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떤 해답을 얻었을 까요? 이것이 우선 우리가 마르크스를 예로 든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관, 곧 유물사관에 대해서는 그 사실적 측면의 오류 내지 이 론상의 결함과 관련하여 19세기 이래 많은 지적이 있어 왔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일반적으 로 지적되는 결함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관이 역사를 공식적으로 단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가 세운 정식을 기계적으로 혹은 그것이 반드시 타당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식으로 역사 사실에 억지로 두들겨 맞추려는 경향이 있다 는 것입니다. 또한 마르크스의 정식이 역사연구의 수단으로 전략시킨다는 비판도 없지 않습 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은 공식주의 내지 교조주의 라는 것이 그에 대 한 비판의 골자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대해서라기보다는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역사연구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 자체 속에 그와 같은 공식주의 내지 교조주의를 조장하는 요소가 숨어 있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어는 정도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마르크스와 그의 친구인 엥겔스가 역사를 하나의 자연사로 보는 사고방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던 데서 기인합니다. 이렇게 역사를 하나의자연사로 간주한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를 자연의 역사 내지는 자연계의 현상 과 마찬가지로 자연과학적 법칙성을 가진다고 간주하는 것이고, 나아가 적어도 역사 속에서 자연과학적 법칙을 이끌어내는 것을 역사연구의 목적으로 삼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마르크스나 엥겔스도 역사를 자연과학과 완전히 똑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9세기의 시점에서 법칙이라고 할 때는 우선 자연과학의 법칙을 의미하는 것이었습 니다. 그리고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자연과학과의 유추 속에서 역사법칙이란 것을 생각하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법칙은 아무래도 보편 타당성을 요구받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로써 보건대 마르크스주의에는 어쨌든 역사의 어떤 국면에서나 결국 동일한 법칙이 관 철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려 하는 공식주의에 빠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를 모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잘못이겠지만, 그러나 그들이 얼마간 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히 말해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주의에는 또한 그 나름대로 그러한 공식주의의 위험을 극 복할 어떤 시사점도 내포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시사점은 더 나아가 바 로 역사에 있어서의 주관성을 극복할 하나의 단서를 마련해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 이 저의 생각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진실에 도달하는 길이 계급적인 입장에 철저를 기하는데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학문이나 문화 는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이냐를 불문하고 기본적으로 계급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그것을 회피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계급적인 입장에 철저를 기하는 편이 진실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주관에 철저를 기하는 것이 결국 객관에 이르는 길이 된다는 이야기 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느 정도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주관적이라는 것이 바로 그 주관 성 때문에 올바른 것이 된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실은 부르조아의 진실과 아무런 관계도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가 항상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부르조아적 유산의 올바른 계승이라는 점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조아 양자의 진리에 진리로서의 공통성 이 전혀 없다고 한다면 마르크스주의가 이런 식으로 강조할 수는 도저히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진실은 주관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객관적이기 때문에 진실인 것입니다. 물론 역사는 개별적인 진실의 잡다한 모음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체이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본 역사는 부르조아적 진실을 그 요소로서는 포함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부르조아 적 역사와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그것이 진실이라고 간주되는 까닭은 그것이 계급적 입장에 서 있다 는 사실 때문이 k니라 그 외의 방법으로는 밝혀낼 수 없었던 역사의 일면을 밝혀낼 수 있 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결과 이미 알려진 역사 사실을 보다 넓은 범위에 걸쳐 그리고 보다 무리 없이 설명해낼 수 있었다는 점에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주관적이고 계급적 이기 때문에, 바꾸어 말해 그 진실성이 계급적 입장 아래에서 미래에 증명될 것이기 때문에 현재에 있어서도 올바르다고 하는 데에 있는 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점은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주요 논점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자신 의 편견 내지는 계급적 입장에 어디까지나 철저를 기한다는 바로 그 점에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첫째로는 우리의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 나 관점이 우리의 어떤 근본적인 입장과 결부되어 있는 것인가를 올바로 자각하지 않은 채 역사에 눈길을 돌리면 그것은 종종 수미일관하지 않게 되든가, 혹은 객관적이라고 하지만 실은 점점 더 주관적으로 경도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로는 우리가 각자 의 궁극적인 입장을 명료하게 인식하면 그 입장의 주관성과 그 한계를 알게 되고, 그럼으로 써 그것을 뛰어넘어 진실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반성은 기본적으로 학문의 계급성을 폭로하고 그 계급성을 강조한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학문의 주관성을 오히려 그 주관에 철저를 기함으로써 극 복하는 일은 비단 마르크스주의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음으로는 두 번째 측면인데, 마르크스는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유물사관의 정 식을 세운 당사자이지만 그러나 그의 실제 역사연구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러한 정식을 그대 로 적용했다고만은 볼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오히려 마르크스 이후에 등장하여 마르크스 주의를 하나부터 열까지 신봉하고 있는 자들이 마르크스보다 훨씬 더 마르크스적으로 도어 버린 기묘한 현상이 나타나고 잇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컨대 앞서 인용한 경제학 비판의 서론을 보면 마르크스가 문화의 특수한 성격을 논하는 가운데 그리스의 비극 건축 조각 서사시 같은 것들이 그 훌륭함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가능 했던가, 생산력이 그렇게 낮은 단계에서 어떻게 그토록 위대한 문화가 대량으로 꼽을 피우 고 그것도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하나의 규범으로서 남을 수 있었던가, 또한 셰익스피 어의 저 위대한 희곡은 도대체 어떻게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등등에 대해 자문 하고 있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러나 문제의 이 서론은 마르크스의 초고 자체가 여기서 끝나 버림으로 해서 마르크스가 궁극적으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를 전해 주지 못하고 있습니 다. 그렇지만 추측컨대 마르크스는 그와 같이 우수한 문화가 발생하는 외적 조건은 여러 가 지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외적인 조건들을 기초로 하여 문화의 질을 설명하는 것은 어렵 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다른 한편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한 비판에 답하면서 자신이나 마르크스나 경제 적인 이유를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는 생각한 적도 없거니와 그렇게 말한적도 없으며, 그것에 의해 근본적으로 규정된다고는 했으되 그것에 의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 다고는 말한 적이 없다고 분명하게 반박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또한 마르크스 자신이 직접 쓴 역사적 저술을 보아도 그것은 분명합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마르크스는 결코 유물사관의 정식을 기계적으로 적용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상의 여러 가지 측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건대, 유물사관의 창시자인 마르크스 자신은 그러한 정식의 활용과 관련하여 실로 자유로웠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 르지만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강력한 실천적 이데올로기의 경우에는 그 추종자들이 오히려 가르침에 조금이라도 어긋날까 저어하여 공식의 창시자 이상으로 공식적으로 되기 쉬운 법 입니다. 이 점은 마르크스가 복잡한 사실의 우여곡절 속에서 법칙이 관철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이기 때문에 역사법칙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유연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 다. 마르크스는 우리가 흔히 취하고 있는 대도, 그리니까 역사가 역사법칙의 존재를 증명하 기 위한 재료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법칙이 역사를 분석하고 이해하기 위한 방법이자 작업가설이라고 보는 우리의 태도까지도 미리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던가 여겨집니다. 만일 사정이 그러하다면 그것은 하나의 가설이라 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가설인 이상 연구 결과에 의해 언젠가는 정정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몰론 마르크스가 그러한 작업을 했 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르크스는 수많은 시행착오의 결과로 그러한 역사 법칙에 도달했을 테니까요. 그러나 마르크스의 뒤를 이어 등장하여 마르크스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의 가 설로서 이용해야 하고, 때에 따라서는 거기에 정정을 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정시이라고 하는 것도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난 지 1세기도 더 지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이 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정정을 필요로 하는 시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 다. 물론 어떤 학자의 위대성은 그 사람이 처해 있던 역사적 조건을 넘어서서 얼마만큼 영속 성 있는 인식을 획득했느냐에 따라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19세기의 중반과 20세 기의 후반인 오늘날 사이에는 역사사회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이 러한 차이를 무시하고 마르크스의 역사법칙, 곧 유물사관의 정식을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대 로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방법적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하튼 우 리가 마르크스에서 배워야 할 것은 엄청나게 포괄적인 그의 역사 발전의 도심과 함께 이어 그보다 오히려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자유로운 역사분석의 방법이요 그 태도라고 해야 할 것 입니다. 우리는 마르크스를 통해 우리의 역사에 대한 물음이 결국에는 우리의 역사에 대한 궁극적 인 태도, 곧 세계관으로까지 연결되는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관은 다시 우리에게 하나의 세계상을 제시해줌으로써 동시에 하나의 연구방법을 제공해주기도 합 니다. 그것이 세계관과 결부되는 이상, 유물사관의 공식만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분석의 방법 일반은 이런저런 임기응변식의 발상일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이러한 역사분 석의 방법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고, 그러한 경향은 자연스런 일이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또한 우리의 역사연구가 주관적인 계기를 강하게 띠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경향은 자연스런 일이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또한 우리의 역사연구가 주관적인 계 기를 강하게 띠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사정이기는 할망정 결 코 옳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방법이 비록 세계 관적 입장에서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학문적으로는 단지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생각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의 가능성 내지 가능한 방법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역사를 분석하는 데 이용하는 방법은 일종의 작업가설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이렇게 그것이 하나의 작업가설에 불과하다면 그것이 일단 들어맞지 않는 경우에는 다른 작업가설 도 동시에 비교 검토를 해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때 우리는 주관적으로 심각한 좌절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업을 중지해 버릴 수는 없습니다. 또한 방법 혹은 작 업가설의 세계관 세계상 세계해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어쩌다 그것 이 아무런 기능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모든 것이 파산이고 그것을 수정하는 것은 타 협이요 절충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는 방법을 자연과 학의 법칙이나 일반명제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잘못입니다. 우리의 방법이 적합적 연관과 이해의 논리에 의해서 구성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타협과 절충 말고도 새로운 방법 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 경우 마지막으로 남은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다음과 같은 점에 있습니다 즉 새로운 방법 작업가설이 대단한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 경우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우 리 자신에게 되돌아와 우리의 역사에 대한 한 판단 내지는 세계관 자체에까지 정정을 요구 하게 된다는 덤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부과된 학문적 책임일 것입니다. 여기가지 생각하고 보면 우리의 세계관이란 것도 항상 연구에 의해 부단히 수정되어 보다 올바르고, 보다 학문 적인 세계관으로 형성되어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동시에 역사에 있어서 주관성과 객관성이라는 문제에 대해 제가 드릴 수 있는 마지막 답변이 되지않을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반복이 되긴 하겠지만 또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 리의 역사인식의 타당성은 현재 시점에서의 판단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은 경우가 있다는 사 실입니다. 그 까닭은 역사란 항상 과거와 함께 미래를 포함하고 있는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 입니다. 결국 우리의 역사에 대한 판단의 궁극적인 타당성 문제는 훗날의 판단에 의해 최종 적으로 결정되는 측면을 어쩔 수 없이 남겨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정치가와 마찬 가지로 후세의 판단을 기다려야 하는 측면이 있다는 말입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그러한 판단 속에는 또한 미래에 있어서의 실천의 과제도 드러나게 될 것이고, 역사에 있어서의 주관성과 객관성이라는 문제도 새로운 차원에서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영원한 거울 앞' 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학문 자체에 속하는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