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체불만족 오토다케 히로타다 지음 전경빈 옮김 타이핑 봉사자:추성희(conE@shinbiro.com) 머리말 1976년 4월 6일. 활짝 피어난 벚꽃 위로 다가선 부드러운 햇살. 정 말 따사로운 하루였다. 응애! 응애! 불에 데여 놀란 것처럼 울어 대며 한 아이가 갓 태어났다. 건강한 사내아이였고 평범한 부부의 평범한 출산이었다. 단 한가지, 그 사 내아이에게 팔과 다리가 없다는 것만 빼고는. 선천성 사지절단. 쉽게 말해 태어날 때부터 팔다리가 없는 장애 아 였다. 출산과정에서 어떤 잘못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당시 떠들석 하게 문제가 되었던 살리드마이드를 잘못 복용해서 생겨난 결과도 아니었다. 원인은 지금도 모른다.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간 에 나는 초개성적인 모습으로 태어나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을 놀라게 하다니, 그건 나말고는 복숭아에서 태어난 동화의 주인공 모모타로나 할수 있는 일일 것이다. 정상적인 출산이었다면 감동적인 모자상봉의 장면이 연출되었을 것 이다. 그러나 이제 막 출산의 고통에서 벗어난 산모에게 너무 큰 충 격이 될 것을 염려한 병원 측에서 황달이 심하다 고 둘러대는 바람 에 어머니와 나는 한 달이 넘도록 만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어머니는 정말 태평한 분이다. 아무리 황달이 심하다 하더라도 자기 자식을 한 달 동안이나 만나지 못하게 하는데도 아, 그래요 라며 그냥 넘어가다니, 그때까지 아들의 얼굴 한 번 제대로 못 본채 말이 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 어머니은 초인 이라는 생각이 든다. 드디어 모자간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는 날이 찾아왔다. 어머니는 그날 병원으로 오던 중에야 비로소 내가 황달이 아니었다는 말을 들 을 수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곁에서 보기 민망할 정도로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차마 팔과 다리가 없다는 말은 하지 못한 채 그냥 몸에 약간의 이상이 있다고만 했다. 일단은 직접 만나보게 한 후에 사태를 수습하자는 생각에서 였다. 또한 어머니가 날 보는 순간 기절할 것에 대비해서 병실까지 준비해 두었다. 아버 지와 병원, 그리고 어머니를 둘러싼 긴장감은 그렇게 높아만 갔다. 그러나 모자 상봉의 그 순간 은정말 상상 밖이었다. 어머, 귀여운 우리 아기……. 대성통곡을 하다가 정신을 읽고 그 자리에 쓰러질 것을 염려한 사 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어머니의 입에서 흘러나온 첫마디였다. 비록 팔과 다리는 없지만 배 아파 낳은 아들, 한 달이나 만날 수 없었던 아들을 비로소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이 어머니에게는 무엇보 다 더 컸던 것이다. 이렇게 성공적인 모자간의 첫 대면 은 곁에서 바라보았던 사람들 의 감동 그 이상으로 내게는 큰 의미가 있다. 누군가를 만날 때 받 았던 첫인상의 기억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고 먼 훗날까지 그대로 남 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그것이 모자간의 첫 대면이라면 그 중요성 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랬다. 어머니가 나를 만나 처음 느꼈던 감정은 놀라움 이 아니 라 기쁨 이었다. 생후 1개월, 비로소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 차례 1부 행복한 아이 유아기, 초등학교 시절 2부 축제의 사나이 중고등학교와 재수시절 3부 21세기가 원하는 사람 마음의 장벽 없애기 1부 행복한 아이 유아기,초등학교 시절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는 손의 작용 이라는 제목을 칠판에 쓴 뒤 아이들에게 오늘 손을 사용하여 어떤일을 하였는가? 를 쓰도록했다. 모두들 이를 닦았다 글씨를 썼다 는 등의 내용을 적었지만 난 휠체어에 올라갔다 라고 썼다. 미운 일곱 살 어린 나폴레옹 우리 세 식구의 새로운 생활은 에도가와 구 가사이에서 시작되었 다. 처음 이사 온 곳이라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대개 장애아를 둔 부모들은 혹시라도 이웃이 알게 될까봐 쉬쉬 하는 경향이 있다고 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달랐다. 어디를 가든 나를 데리고 다니며 아들의 존재를 이웃들에게 스스럼없이 알려주었다. 지금이야 10센티미터 조금 넘게 자란 팔과 다리가 있지만 어렸을 때 나의 팔다리는 정말이지 둥글둥글한 작은 감자를 연상시켰다. 그 런 내 모습이 영락없는 곰인형처럼 보였는지 동네 사람들의 귀여움 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비록 인형처럼 예쁘구나 가 아니라 곰인 형처럼 귀엽구나 라는 좀 색다른 표현이기는 했지만…….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내가 문제아가 될 소지는 이미 갓난아기 때부터 엿보였다. 무슨 아이가 도대체 잠을 안 자는 것이다. 낮잠을 자는 것도 아니면서 밤새 목이 터져라 울어 제꼈던 모양이다. 하루 종일 시달리던 어머니가 노이로제에 걸릴 정 도였다고 하니 그 심각성을 짐작할 만하다. 그때부터 내게는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잠을 자지 않았다던 나폴레옹 이라는 별명이 붙여졌 다. 그 뿐이 아니었다. 나는 우유도 다른 아기들의 반 정도밖에 먹 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병원을 찾아다니며 상담까지 하는 등 별의별 노력을 다했지만 허사였다. 고생이 지나치면 달관하게 되는 것일까. 그 무렵 우리 부모님은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이 녀석은 태어나면서부터 개성적이었잖아. 그러니 우유마시는 양 이나 잠자는 시간도 딴 애들과 달리 저만의 개성이 있는 것 같아. 우리 이제부터 비교하지 말자구. 흐음, 훌륭하신 판단. 잠도 적게 자고 우유도 적게 마셨지만, 난 잔 병치레 하나 하지 않고 쑥쑥 잘 자랐다. 생후 9개월 되던 어느 날, 처음으로 말을 시작했다. 옹알 이만을 하던 내가 갑자기 아아압바, 압바, 아빠 라고 말문을 연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 한 말이 엄마 가 아니고 아빠 였으니 어머니가 무 척 서운하셨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그래, 엄마보다는 아빠 라는 발음이 더 쉬웠나 보지, 뭐 라고 생각하셨다나. 그 후 나의 수다는 걷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돌을 맞이할 무렵에 는 그야말로 왕수다 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도 그런 내가 대견했는 지 네모난 나무조각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장나감 세트를 사오셔서 는 레슨 을 해주셨다. 세탁기 그림이 그려진 나무조각을 내게 보이 면서, 이게 뭐지? 털털털털. 이건? 압바 앙교(아빠 안경). 그럼 이건? 싱뭉(신문) 이런 식의 레슨은 아버지의 퇴근과 함께 매일 반복되었다. 우리 어머니라고 가만히 있을 분이 아니다. 어머니는 어느 날 신문 에서 아기에게 책을 읽어 주지 않는 것은 뇌의 전두엽(사고와 판단 들을 담당하는 부분)을 절단하는 수술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라는 글을 읽고 자극을 받으셨다. 그래서 틈만 나면 내게 책을 읽어 주셔 다. 두 분은 한마디로 아기 교육에 관한 한 극성아빠, 극성엄마이였 던 것이다. 왜 팔다리가 없니? 네 살이 되자 나는 세타가야 구 요가에 있는 성모유치원에 들어갔 다. 그곳은 특별히 장애아를 돌보는 곳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유치 원이었다. 그런데 집에서 좀 멀었기 때문에 우리 식구는 아예 그 근 처로 이사를 했다. 유치원까지는 자동차로 10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 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어린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 고향이 어디니? 라고 물으면 난 요가라고 대답하곤 했다. 낯선 동네로의 이사, 과연 여기에는 어떤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 을까? 성모유치원의 기본 교육이념은 아이들의 개성을 존중해 주는 것이 었다. 틀에 박힌 생활은 전혀 없었다. 그저 저마다 일정한 규칙을 정해 놓고 그 안에서 저 하고 싶은 대로 재미있게 노는 것이 전부였 다. 단체생활이 부담스러운 나의 경우. 성모유치원의 지도방침은 정 말 안성밪춤이었다. 곧 친구들도 사귀었다. 내가 친구를 많이 사귈 수 이었던 이유 가 운데 첫째는 내게 팔과 다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또 한 아이들의 눈 에는 신기하고 부럽기만 한 전동 휠체어 도 톡톡히 한몫을 했다. 그들의 눈에 멋있게만 보였을 전동 휠체어, 그리고 거기에 앉아 있 는 팔과 다리가 없는 나, 언제나 내 주위에는 아이들이 개미처럼 몰 려들었다. 짤막한 팔과 다리를 만져 보며 왜 이러니? 왜 이렇게 됐 는데? 라며 계속 질문해 온다. 으응,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말야, 병에 걸렸대. 그래서 팔과 다리가 생기지 않은거래 라고 설명해 주 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으응, 그러니 라며 우린 곧 사이좋은 친구 가 되곤 했다. 지금에야 말이지만 그때 난 정말 힘들었다. 성모유치원에 있는 모 든 아이들이 한 명씩 와서 묻는 바람에 답하고 또 답하기까지 두 달 이 가까이 걸렸다. 매일 같은 질문을 듣고 설명해 주는 것이 어린 나에게는 힘겨웠던 모양이다. 어느 날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엄마 너무 힘들어 라며 와앙 울음을 터뜨렸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의 말 에 따르면 그 무렵 유치원 선생님도 오토가 힘들어 하지 않나요? 라며 걱정해 주셨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와 선생님의 걱정 과는 달리 아주 늠름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골목 대장 남달리 짧은 팔다리와 전동 휠체어 덕분에 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친구들이 많았다. 내가 가는 곳에는 늘 많은 아이들이 모 여 있었고, 그래서 골목대장 특유의 기질이 그 무렵부터 비죽이 튀 어나오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들은 생일이 몇 달만 빨라도 체격에서 차이가 난다. 4월 6 일생이었기 때문에 또래들 중에서 몸집이 제일 컸던 나는 맡아 놓고 골목대장 노릇을 했다. 아이들이 유치원 마당에서 술래잡기를 한다. 휠체어를 굴려 가며 아이들과 함께 술래를 잡아야 하는 것이 불편하기만 한 나는 술래잡 기가 제일 싫은 놀이 중의 하나였다. 놀다가 싫증나면 모래밭에서 놀 사람 여기 모여라 라고 외친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재 미있게 술래잡기를 하던 아이들이 모두 내게로 모여들어 전동 훨체 어 뒤를 졸졸 따라 온다. 손이 없는 나는 모래놀이를 할 수 없다. 그러면 나는 성을 만들 어! 라고 명령한다. 만약 다른 아이가 나는 터널을 만들고 싶은데 라고 했다가는 내 말투가 금방 거칠어진다. 오늘은 성을 만들고 놀 거야. 싫으면 너 혼자 절루 가서 놀아. 이렇게 제멋대로였지만 친구들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오토하고만 잘 놀면 다른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하지 않는다 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점점 더 버릇이 없어지고 고집쟁 이로 변해 갔다. 차츰 어머니나 선생님께까지 생떼를 쓰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 무렵 부모님은 나 때문에 무척 마음고생을 하셨다. 그러나 그 버릇없던 문제는 내가 유치원 반장으로 뽑히면서 서서히 해결 기미 를 보이기 시작했다. 반장이 되면서 태도가 수그러들었던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유치원 학예회 때 우리 반의 작품은 꿈 동산 유치원 이었다. 그중 지지 라는 자동차 수리공 역이 있었다. 그런데 지지 라는 이름이 할아버지 같아서 싫다면서 아무도 그 역 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 손을 번쩍 들며 하겠다고 나섰던 친구, 나와 가장 사이 가 좋았던 싱고였다. 그래? 그럼 내가 할게 라던 그 친구가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싱고에게 지기 싫어서 지지 다음으로 인기가 없던 나레이터를 하겠다고 선뜻 나섰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 만 싱고처럼 멋있고 싶은 나름대로의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잘난 체 하기 좋아하는 성격은 어쩌면 이 무렵부터 싹텄는지도 모른다. 나레이터는 무대에는 올라가지 않고 뒤에서 목소리로만 출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맡은 나레이션은 학예회가 끝난 뒤 학부모들 로부터 저 아이는 이 다음에 아나운서를 시켜도 되겠어 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아주 좋은 반응을 얻었다. 원래 튀기 좋아하고 항상 아 이들을 많이 몰고 다니던 나로서는 나레이터가 좋은 평가를 받으리 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 난 처음으로 세상일은 무대 앞만이 아니라 무대 뒤를 포함해 모든 사람들의 협력 아래 이루어진 다는 것을 배운 셈이다. 그 학예회를 계기로 개구쟁이 유치원생은 조금이나마 어른스러워질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누구하고나 사이 좋게 지냈다. 유치원을 졸업할 무렵에 는 매일 친구들 집에 놀러가곤 했다. 심술궂은 골목대장을 하며 부모 속을 썩이던 미운 일곱 살 시절은 이렇게 서서히 마감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까탈스러운 문제가 기다리고 있는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좁은문 문전박대 초등학교 입학. 이때 새로운 학교생활에 대한 기대와 불안은 아이보 다 오히려 부모가 더 심할지도 모른다. 특히 장애아를 둔 부모의 경 우는 기대보다는 불안한 마음이 훨씬 더 클 것이다. 학교에서 우리 아이를 받아줄까? 만일 받아 주지 않으면 어쩌지, 라는 문제가 기다 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부모님은 장애아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가 이렇게도 힘든 것인지 그 두터운 벽을 그때 실감하였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당연한 의무교육을 받기가 그렇게 힘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장애아가 갈 수 있는 학교는 따로 있었다. 이름하여 특수학 교. 그곳은 보통교육과는 다른 교육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가는 학교다. 우리 부모님은 의문을 가졌다. 우리 아이가 보통교육을 받 는 것이 과연 불가능한 일일까. 유치원에서 반장까지 하며 늠름하게 자라 온 이 아이에게 특별한 교육을 시킬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그 생각은 우리 아이에게 평범한 교육을 받게 하고 싶다 는 간절한 소망으로 바뀌어 갔다. 그 소망으로 가는 길은 너무나도 힘들었다. 까다로운 공립학교보다 는 사립학교를 우선적으로 알아보았다. 사립이 장애아에 대한 이해 의 폭이 더 넓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몇몇 학교를 돌아다녀 봤 지만 입학원서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말하자면 문전박대 인 셈이 다. 부모님은 나를 보통학교에 넣는 것은 무리라 생각하고 포기하려 했 다. 그런데 한 통의 통지서가 날아들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취학을 위한 신체검사 안내 였다. 너무나 놀랐다. 처음부터 포기하고 있던 공립학교에서 날아든 입학 안내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받아줄지도 모르다는 기대감이 부풀어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그러나 상황은 다시 반전. 학교 측에서는 내 가 장애아임을 몰랐던 것이다. 어머니는 전화로 통사정을 했다. 약 간 마음이 흔들렸는지 하여튼 신체검사 하는 날 데리고 와보세요 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마침내 나는 어머니를 따라 학교로 갈 수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요가 초등학교 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다. 신체검사장은 마치 동물원 같았다. 건강한 아이들이 온통 휘젓고 뛰어다녔다. 익숙치 않은 환경 탓인지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울어대 는 아이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나는 얼마나 얌전했던지 담당 선생 님들로부터 칭찬까지 들었다. 어머니는 예의 바르다고 칭찬받는 나 를 보면서 틀림없이 학교생활도 잘할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셨다고 한다. 신체검사가 끝나자 교장실로 갔다. 어머니의 긴장감은 어댔을까. 그때 나는 어떤 상황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렴풋 하게나마 아주 중요한 순간이라고 느겼던 기억이 난다. 교장 선생님이 첫인상은 무척 부드러웠다.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 면서도 간간이 나를 바라보며 빙긋이 미소지어 주셨다. 어머니와의 긴 상담이 끝날 무렵, 교장 선생님은 가는 눈을 더 가늘게 뜨고 내 게 물으셨다. 싫어하는 음식이 뭐지? 음,빵이요. 밀가루 냄새가 풀풀 나는 빵이 나는 싫었던 것이다. 그럼 어쩌지? 빵을 싫어한다니 문제구나. 급식에선 거의 매일같이 빵이 나오니까 말이야. 긴장으로 한껏 굳어 있던 어머니의 환한 웃음이 기억난다. 드디어 입학을 할 수있게 된 것이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어머니는 기쁨에 겨워 아버지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여보, 우리 오토가 다른 애들과 똑같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됐어 요. 평범한 교육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교장 선생님은 요가 초등학교가 있는 구역에 살고 있다면 입학을 해도 좋다 는 관대한 회신을 보내 주셨 지만, 그때 잠깐! 하며 제동이 걸린 것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교 육위원회. 이유는 그 정도로 심각한 장애아가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선례가 없는 일이라고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 이다. 입학허가가 백지상태로 돌아가자 부모님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급식 이야기까지 나와 틀림없이 입학할 수 있으리라 믿었 다. 그런 만큼 충격도 컸다. 그러나 지금부터가 우리 부모님이 얼마 나 대단하신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언제까지고 낙심해 있을 수는 없다. 어떻게 하면 인정받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어머니는 그들이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셨다. 그들을 설 득시키기 위해서 나와 함께 행동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기로 결정했 던 것이다. 교육위원회에서 잠깐! 하고 제동을 건 가장 큰 이유는 나를 잘 모 르기 때문일 것이다. 하긴 무리도 아니다. 팔 길이가 10센티밖에 되 지 않는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글씨를 쓸 수 있다고 누가 상 상이나 하겠는가.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가서 우리 아이는 이렇게 잘할 수 있다 며 그들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글씨는 어떻게 씁니까? 자신만만하게 써 보였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뭉툭한 팔과 뺨 사이에 연필을 끼고 글씨를 써 보였다. 접시의 가장 자리에 스푼과 포크를 놓고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음식을 입에 넣고 먹는 시범도 보였다. 가위의 한쪽은 입에 물고 또 다른 한쪽은 팔로 눌러 가면서 얼굴을 움직여 종이도 잘라 보였다. 짧은 다리 때문에 L자처럼 되어 있는 몸을 움직이며 혼자 걸을 수 있다는 것도 보여 주었다. 내가 보여 주는 행동 하나하나에 교육위원회 사람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모르는가 하면 마른침을 꿀꺽 삼키기도 했다. 뭔가에 홀린 듯한 표정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대체 팔도 다리도 없는 아이 가 상상하기도 힘든 여러 행동들을 눈앞에서 착착 해치우고 있으니 ……. 마침내 부모님의 열성과 나의 노력으로 입학허가 를 받을 수 있었 다. 단, 한 가지 조건이 따라붙었다. 정상적인 아이라면 아침에 학 교에 다녀오겠습니다 라며 씩씩하게 집을 나선다. 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한 뒤 오후가 되면 다녀왔습니다 라며 귀가하는 것이 초등학생의 하루다. 나의 경우엔 달랐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부터 보호자가 함께 있어 야 하고 수업중이나 쉬는 시간에도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집에 돌아갈 때도 보호자가 동행해야만 했다. 그것이 조건이었다. 보호자, 즉 부모님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큰 부담이었겠지만 네가 보통의 교육을 받을 수만 있다면 뭐가 문제겠니? 라며 그 조건 붙은 입학허가를 진심으로 기뻐해 주셨다. 이렇게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배려 덕분에 나의 길은 열렸다. 내가 그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학교 생활을 즐기는 것 이었다. 내 인생의 스승님 도와주면 안된다 초등학교 입학식 사진을 꺼내 보면 지금도 쿡쿡거리며 웃음이 나온 다. 내 옆에 서 있는 여자짝꿍, 온몬에 뻣뻣하게 굳어 있고 얼굴도 말도 못할 정도로 긴장된 표정이다. 그 옆에서 온 얼굴에 환한 웃음 을 가득 담고 있는 내 모습. 이 사진 한 장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과연 학교생활에 잘 적응 할 수 있을까 염려를 받던 장본인은 아무 런 근심걱정 없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놀라고 당황스러워 했 던 것은 오히려 주위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을 졸였던 분은 1학년부터 4학년 때까지 담 임을 맡으셨던 다카기 선생님이었을 것이다. 그분은 할아버지 선생 님 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경험이 풍부하다해도 나처럼 팔다리가 없는 아이를 맡아 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나와 함께 지내는 모든 생활은 생전 처음 겪는 경험 이었다. 선생님이 맨 처음 나를 대하고 가장 걱정했던 것은 다른 아이들의 반응이었다. 너는 왜 손이 없니? 뭣 때문에 이런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니니? 조심스럽게 짤막한 나의 팔다리를 만져 보는 아이도 있었다. 선생 님께선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식은땀을 흘리신 모 양이지만, 나야 이미 익숙했다. 친구가 되기까지의 통과의례 정도 로 생각했던 것이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말이야…… 하며 언제나 같은 설명을 반복했다. 드디어 나를 둘러싼 아이들의 의문은 다 풀리고, 우리 반에서 내 팔다리에 관해 묻는 친구는 더 이상 없었다. 선생님께선 간신히 한 숨 돌리셨지만 또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다카기 선생님은 굉장히 엄격한 분이셨다. 예전에는 선생님 반에 장애아가 있을 경우, 이것 저것 많은 것을 도와 주셨다고 한다. 그 러나 나에게만은 굳이 도와주지 않으셨다. 또 한 아이들에게도 도와 주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선생님의 그런 냉정한 태도와 행동이 오히려 나를 도와주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늘어나게 만들었다. 특히 여자아이들은 누나처럼 행동하고 싶은 마음에서인지 내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 주었다. 선생님은 고민하셨다. 오토를 도와주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마음은 학급의 단결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바람직한 일이다. 그것을 억지로 못하게 막는다면 아이들에게 저항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렇다고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오토는 기다리기만 하면 누군가 도와줄 것 이라는 안이한 생각에 젖어 버릴 것이다. 이런 갈등 끝에 선생님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하게 내버 려 두자. 그 대신 도저히 혼자 할 수 없는 것은 모두가 힘을 합해 도와주자 라는 결론을 내렸다. 반 아이들은 선생님의 제안을 듣고 실망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 만, 그들은 이제 겨우 초등학교 1학년생. 일제히 입을 모아 예! 라 고 큰소리로 대답했다. 며칠 후, 선생님은 난감하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교실에는 아 이들의 사물함이 하나씩 있어서 그 안에 곧은 자와 작은 돌들이 들 어 있는 산수세트 와 풀과 가위들이 들어 있는 도구상자 를 함께 넣어 놓았다. 그리고 수업중에 수시로 사물함에 가서 필요한 것을 가져오곤 했다. 그런데 나의 경우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선생님의 지시가 떨어지 면 아이들은 모두 사물함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가져오지만 나는 아 이들이 제자리에 앉고 난 후에 가지러 가야 한다. 아이들의 허리 아 래 정도의 높이에서 걸을 수밖에 없는 내가 붐비는 아이들 속에 함 께 줄을 선다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출발부터가 늦었다. 게다가 도구상자 뚜겅을 열고 내용물을 꺼 낸 뒤 뚜껑을 닫고 돌아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날도 나는 도구상자를 상대로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다. 보통때 같았으면 짝꿍이 내가 갖다줄게 라며 필요한 것을 가져다 주었겠지만 바로 며칠 전 선생님께서 주의를 주지 않으셨던가. 모두 들 내가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 알았지만 거들어 주지 않았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나를 뒤로 한 채 수업은 시작되었다. 흑흑, 흑흑 나는 결국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학교에서 흘린 최조의 눈물이었 다. 그것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시작할 수 없다는 분함보다 는, 혼자 남았다는 슬픔이 훨씬 더 컸다. 당황한 선생님께서 쏜살같 이 달려오셨다. 잘했어, 너 혼자 이렇게까지 해냈잖니? 따뜻한 선생님의 말씀에 나는 마침내 으앙 하며 봇물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선생님은 생각하셨다. 이 아이는 아무리 힘든 일을 시켜도 저항감 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다른 아이들과 구별된 다든지,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을 극단적으로 싫어한다. 오토 때문에 나머지 애들 전부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도와주는 것이 그 아이를 위한 것은 아니다. 고민 끝에 선생님이 내린 결론은 사물함을 두 개 쓰도록 하는 것이 었다. 도구가 든 상자와 산수세트를 각각 다른 사물함에 넣어 두고 뚜껑을 열어 둔다. 그러면 뚜껑을 여닫을 필요 없이 아주 쉽게 학습 도구를 꺼낼 수 있으니 그만큼 시간이 단축되었다. 이런 식으로 선생님은 언제나 내가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학교생활 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미끄러진 왕자님---------------------------------- 내가 교정에 나서면 순식간에 인기스타가 된다. 팔다리가 없는 아 이, 그 아이가 타고 있는 전동 휠체어. 누구에게나 신기하게 보였을 것이다. 특히 내가 짧은 팔로 조작했기 때문에 아이들 눈에는 휠체 어가 저절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다른 반이나 다른 학년 아이들이 나를 볼 기회는 쉬는 시간밖에 없 다. 그래서 교정에 나서기만 하면 마치 꿀을 발견한 개미떼처럼 주 위에 몰려들었다. 왜 팔다리가 없니? 라며 물어 오는 아이도 있고 휠체어에 타 보고 싶어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면 우리 반 아이 들이 다가와서 잘난 체하는 표정으로 설명을 했다. 아하 그건 말이야, 오토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말이야……. 나는 학교에서 스타였다. 내가 가는 곳에는 이중 삼중의 원이 만들 어지곤 했고, 내가 이동을 하면 아이들이 줄지어서 휠체어 뒤를 졸 졸 따라왔다. 튀기 좋아하는 내가 이런 상황을 마다할 리 없다. 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좋았다.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아 이들은 왕자님 같다 며 추켜세워 주기도 했다. 어느 날 나는 왕자님 자리에서 쫓겨났다. 오토는 앞으로 선생님의 허락 없이 훨체어를 타서는 안된다. 마침내 다카기 선생님으로부터 휠체어 사용을 금지당하고 만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우선은 전동 휠체어를 타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우월감을 들 수 있 다. 나 자신은 뒤꽁무니를 쫓아오는 아이들을 보며 기분 좋아했지만 선생님의 생각은 달랐다. 아이들이 오토를 쫓아다니는 것은 전동 휠체어가 신기해 보이기 때문이다 라고 정확히 판단하셨던 것이다. 또 장애인=특별한 사람 이라는 상식을 깨기 위해 나를 보통아이들 과 똑같이 다뤄 왔는데, 전동 휠체어로 인한 우월감이 그 모든 것을 헛수고로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다는 생각도 하셨다. 또 하나, 선생님은 나의 체력을 염려하셨다. 초등학생은 성장기에 있다. 팔다리가 없지만, 성장기에 접어들어 근육의 힘을 한창 키워 야 할 나이에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것이 도움이 될 리 없다고 생각하셨다. 아주 가혹한 지시였다. 어쨌거나 나에게는 발과 다름없는 휠체어. 다른 아이들의 허리에도 미치지 못하는 짧은 몸을 털썩 땅바닥에 붙 이고 엉덩이를 끌어당기듯 해서야 간신히 걸음을 옮길수 있는 내게 휠체어 없는 교정은 너무도 멀고 넓기만 했다. 체력적으로도 견디기 힘들었다. 당연히 교내의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휠체어 없이 교정을 걸 어다니기 시작한 후 얼마 동안 여선생님들로부터 너무 가여워요 라 는 말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여름이나 한겨울에는 그런 반대 의견이 더욱 거셌다. 엉덩이를 땅바닥에 철썩 붙이고 걷는 내게 있어 여름의 뜨거운 지열과 겨울의 차가운 기운은 끔찍할 정도로 견디기 힘들었다. 또 조회 시간에도 문제가 발생했다. 조회가 끝나면 아이들은 음악 에 맞춰 행진을 하며 교실로 들어간다. 남학생의 선두가 바로 나였 기 때문에 우리 반은 늘 맨 나중에 교실로 들어가야 했다. 그래서 선생님은 오토를 기준으로 걷지 말고 모두들 먼저 들어가라 고 지 시를 내렸다. 그 넓은 교정에 혼자만 덩그러니 남은 나. 이를 보다 못한 선생님들에 의해 휠체어 허가론은 더더욱 거세게 주장되었다. 그러나 다카기 선생님은 끄떡도 하지 않으셨다. 지금은 오토가 어 리니까 사람들이 가여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자립을 해야 한다. 앞날을 내다보고 지금 오토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를 생각 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그런 신념을 갖고 계셨기 때문이다. 다카기 선생님의 이 결단은 내 인생의 정답이었다. 그 뒤 내가 진 학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는 장애를 위한 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나는 휠체어서 내려 내 짧은다리(혹은 엉덩이?)로 계단을 오르내리고 학교 건물들을 오가야 만 했다. 그렇다. 오늘날 내가 어디든 혼자 갈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다카기 선생님 덕분이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휠체어에만 의지했더라면 휠 체어 없이 살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적극 적으로 살아가는 열의나 삷에 대한 여유를 갖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의도적으로 내게 엄격하셨다. 오토가 나를 무서운 선생 님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그 대신 내가 담임이었던 것이 정말 다행 이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는 말씀을 아주 나중에 들은 적이 있다.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주고 예쁜 아이 매 한대 더 때린다 는 말이 있다. 다카기 선생님은 생각하면 이 말의 깊은 의미를 뼛속 깊이 느 낄 수가 있다. 오토의 룰 손은 무엇에 쓰이는가 반 아이들이 나를 도와주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외톨이가 된 것은 아니었다. 친구들이 일일이 신경써 주지 않아도 나 혼자 모든 것을 잘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드디어 내 가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반의 한 사람 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1학년의 국어 교과서에 손의 작용 에 대해 공부하는 대목이 있다. 문자 그대로 손 은 어떨 때 쓰이는가, 무엇 때문에 있는가 등을 공 부하는 단원이다. 손이 없는 아이를 맡고 있는 선생님으로서는 아무 래도 신경이 쓰이는 단원이다. 교과서 진도가 그 어름까지 갔을 때, 다른 반의 선생님들까지도 다카기 선생님,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라며 걱정해 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카기 선생님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단원을 건너뛸 생각은 없 어요. 나중에 선생님은 이렇게 회고하셨다. 항상 함께 생활하다 보니 네가 팔다리가 없는 장애아라는 사실을 차츰 의식하지 않게 되었던 것 같아. 그저 내가 맡고 있는 서른여덟 명 가운데 한 아이로 느끼게 되었다고 나 할까. 만일 그때 우리 반 아이들이나 내가 너를 장애인이라는 생각으로 대했다면 아마도 그 단원을 공부하기는 좀 어려웠을 거야.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는 손의 작용 이라는 제목을 칠판에 쓴 뒤 아이들에게 오늘 손을 사용하여 어떤 일을 하였는가? 를 공책에 쓰 도록 했다. 모두들 이를 닦았다 글씨를 썼다 는 등의 내용을 적 었지만 난 휠체어에 올라갔다 라고 썼다. 휠체어란 앉는 것이지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게다가 그 동작에 손 의 도움은 필요없다. 그러나 나는 휠체어에 앉기 위해 기어올라야만 한다. 손에 힘을 주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놀려 대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래 오토는 휠체어 에 앉을 때 손을 사용해 라고 모두들 당연한 일로 여겨 주었다. 어 쩌면 선생님은 그것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나의 최대 무기는 물어뜯기 유치원에서 반장도 하고 골목대장도 하던 나였다. 그래서 인지 콧대 가 세서 친구들고 싸우는 일도 적지 않았다. 대개의 경우는 전매특 허인 입씨름으로 끝났지만, 때로는 인정사정 없이 한판 붙는 싸움이 벌어질 때도 있었다. 네가 잘못했잖아. 사과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네 잘못이야, 너야말로 사과하지 못하겠 어? 뭐라구? 억울하면 여기까지 와봐. 상대는 내 사정거리 밖에 있는 책상 위에 서서 나의 성질을 돋군 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나는 단숨에 뛰쳐들어가 몸으로 부딪쳐 책상을 뒤집어 엎는다. 그러고서 굴러떨어진 녀석에게 다시금 육탄 공격을 해댄다. 너 정말 이럴래? 무슨 짓이야? 녀석 또한 내게 덮쳐 온다. 연거푸 주먹을 내뻗지만 허리 아래에 있는 내게 펀치는 미치질 못한다. 이번에는 녀석이 발길질을 해대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나도 견뎌낼 재간이 없다. 그렇다고 포기할 내 가 아니지. 어떻게든 이기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나를 포기하지 못하 게 만든다. 나도 반격에 나선다. 녀석이 내지른 발을 붙잡고는 죽기살기로 물 어뜯는 것이다. 녀석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물고는 절대로 놓지 않는다. 으아악! 드디어 녀석이 비명을 지른다. 정말 힘껏 물고 늘어졌다. 모든 것을 손 대신 입으로 처리해 오면 서 내 턱은 다른 사람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발달해 있었다. 이빨 에서 놓여난 녀석의 발에는 이빨 자국이 선명했다. 정말로 아팠을 것이다. 어린아이들의 세계에서 싸움이란 상대가 강한지 약하지 따져 볼 겨 를이 없다. 서로 화가 나면 그냥 한판 붙는 것이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아이들의 싸움. 그래서 오토 소년은 오늘도 이빨을간다!? 같이 놀자 나 같은 장애인에게 학교생활에서 가장 괴로운 때가 언제냐고 물어 오면 대부분 쉬는 시간 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웬만한 공부벌레가 아닌 이상 아이들은 쉬는 시간을 가장 좋아한 다. 그러나 장애아는 다르다. 수업시간에야 모두가 앉아서 공부하니까 45분이나 50분은 금방 지나간다. 그렇지만 쉬는 시간이 되어 아이들 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놀고 있을 때,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하 기 때문에 정말 외롭다. 쉬는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고 바란다. 내 경우는 달랐다. 싫기는커녕 다른 아이들처럼 쉬는 시간이 제일 좋았다. 이런 나를 보고 대체 뭘 하고 놀았길래 그렇게 쉬는 시간 이 재미있고 좋았을까? 궁금해 할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했던 놀이는 야구, 축구, 피구 등 보통아이들과 다를 것 이 없었다. 이런 몸으로 야구나 축구를 어떻게 할 수 있냐며 이상하 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다른 아이들처럼 할 수는 없다. 그렇 다고 그렇게 재미있는 놀이를 포기할 내가 아니다. 나도 참가할 수 있는 특별한 룰 이 있으면 되니까. 우리 반 친구들은 그것을 오토 의 룰 이라고 이름붙여 주었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것은 야구다. 배트를 겨드랑이에 끼고 몸을 빙 돌린다. 투수가 던진 볼을 때릴 때도 있다. 이것은 오토의 룰 중에 서 스윙에 해당한다. 볼을 치는 순간 내 옆에 서 있던 친구는 1루를 향해 대신 뛰어간다. 이런 룰도 있다. 투수가 던진 볼을 풀스윙한다. 회심의 일격인 셈 이다. 볼은 기세 좋게 내야 뒤쪽으로 날아간다. 나에겐 더할 나위 없는 장타인 셈이다. 야 오토! 굉장하다. 이번에 때린 것 홈런급인데! 정말 그래, 우리 오토에게도 홈런의 위치를 정해 주자. 그래 그렇게 하자. 다른 사람은 외야수를 넘기면 홈런이니까, 오 토한테는 내야수를 넘기면 홈런으로 하자. 이렇게 해서 내야와 외야의 경계쯤 되는 부분에 선이 하나 더 그려 진다. 전국 고교야구 고시엔 대회에서의 럭키 존 이 아니라 오토 존 이 생겨난 것이다. 이런 룰은 다른 놀이를 할 때도 생겨난다. 축구를 할 때도, 야, 우리 오토가 슛을 성공시키면 한 번에 3점을 주기로 하자. 3점이라면 축구에서는 엄청난 득점이다. 친구가 멋진 드리블 솜씨 로 상대팀 골문 앞까지 공격해 온다. 골키퍼가 앞으로 뛰쳐나오는 순간 골문 앞에서 기다리던 나에게 패스를 한다. 나는 텅빈 골대 안 으로 공을 차넣기만 하면 된다. 나는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해트 트릭(한 사람이 한 시합에서 3득점을 올리는 것)을 기록할 수 있었 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정말 엉터리 같은 룰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다. 바로 피구. 친구들은 오토한데 공이 넘어가면 상대팀의 몇 명은 오토의 반경 3미터 이내에 들어가 있어야만 한다 고 정했던 것 이다. 그 정도의 거리라면 나도 어느정도 위력있는 공을 던져서 다 른 아이들과 비슷한 확률도 상대를 맞힐 수 있다. 또 내야에 서면 공에 맞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항상 외야에서 뛰었 다. 공에 맞았을 때는 나 대신 다른 애가 내야로 들어간다는 룰도 정해졌다. 그때 친구들은 저 애는 장애아라서 불쌍하니까 같이 놀아 주자 는 생각으로 이런 룰을 만들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같은 반 친구들 중의 하나로서 서로 싸우기도 하고 놀기도 했다. 나 또한 그것을 너 무도 당연한 것 으로 받아들였다. 신나는 체육시간 철봉도 할 수 있어요 선생님께서 제일 좋아하는 과목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아무런 망 설임도 없이 체육 이라는 대답해 놀라게 해드린 적이 있다. 그러나 사실이 그랬다. 부모님과 이런 대화를 했던 기억도 있다. 오토 엄마 혹시 말예요, 손과 발 가운데 어느 한쪽이 생겨난다면 전 어느 쪽을 선택할 거라고 생각 하세요? 엄마 글쎄,잘 모르겠는걸, 어느 쪽이니? 오토 발이요. 엄마 왜? 손이 생기면 이것저것 뭐든지 할 수 있을텐데……. 오토 손으로 하는 일은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 하지만 발만 있으 면 다른 아이들과 함께 축구를 할수 있잖아요. 손이 없는 탓에 주위 사람들의 신세를 져야 하는 경우가 많은 내가 손으로 하는 일은 그다지 힘들지 않다고 하면 코웃음을 칠지도 모른 다. 그만큼 체육을 좋아했다. 나의 이런 생각과는 달리 다카기 선생님께선 체육시간 때문에 골머 리를 앓고 계셨다. 무엇이건 하겠다 는 의욕은 좋지만, 오토로서는 정말 할수 없는 것도 있다. 어떻게 하면 그 아이에게 상처 입히지 않고 견학을 시킬 수 있을까. 그러나 선생님의 이런 갈등과는 상관없이 나의 도전은 끝이 없었 다. 준비운동으로 시작되는 체육시간. 선생님이 나를 눈여겨 보신다. 나는 다른 아이들의 움직임에 맞춰 짧은 팔을 돌리거나 몸을 통통 튕겨올렸다. 이를 본 선생님께서는 그래, 모든 것을 똑같이 할 필 요는 없어. 오토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다면 된거야 라고 결론을 내리셨다. 다른 아이들이 운동장을 두 바퀴 돌 때는 오토, 넌 저기 수돗가까 지 갔다 와! 하셨고, 높이뛰기를 할 때는 다른 애들은 다 가로대 를 올리지만, 오토가 할 때는 내린다. 그걸 멋지게 넘어봐 라고 해 주셨다. 그냥 앉아서 견학하는 것을 너무도 싫어했던 나에게는 정말 신나는 체육시간이었다. 이런 적도 있다. 철봉시간, 선생님이나 나나 철봉은 도저히 무리라 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들 틈에서 벗어나 철봉에 매달려 안간힘을 쓰는 친구들을 향해 파이팅을 외쳤다. 그때 내 눈에 정글짐이 한눈 가득 들어왔다. 앗, 이 정글짐이 나한테는 정말 꼭 맞는 철봉이 되잖아! 시험삼아 겨드랑이 밑으로 끼워 본다. 끙! 하고 힘을 주니 내 몸이 쑤욱 올라갔다. 저쪽을 보니 친구들이 철봉에 매달려 몸을 앞뒤로 크게 흔들고 있다. 나도 땅바닥을 차고 몸을 앞으로 내밀어 본다. 그러자 내 몸이 기세 좋게 앞으로 쑤욱 나가더니 반동으로 다시 뒤 쪽으로 밀려간다. 야! 나도 철봉을 할 수 있다. 통! 통! 통! 1월이 되자 줄넘기 수업이 시작되었다. 다카기 선생님은 어떻게 하 면 내가 수업에 참여할 수 있을지에 대해 연구하셨다. 체육시간을 제일 좋아하던 나도 줄넘기가 시작되고 나서는 그만 우울해지고 말 았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친구들이 줄넘기 하자 며 다가왔으니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하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부르시길래 가보았더니 친구들이 고무즐을 양 쪽에서 잡고 돌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가운데에 날 세우고는 자, 고무줄이 땅에 닿으면 체조할 때처럼 뛰어 올라 보는 거야 라고 말 씀하셨다. 몇 차례 시도해 보았지만 만만치 않았다. 선생님도 거의 포기하려 던 참이었다. 바로 그때, 통! 타이밍에 맞춰 딱 한 번 뛰어오를 수 있었다. 사실은 뛰어올랐다기보다는 어쩌다 간신히 들어올린 몸 아래를 고무줄이 지나갔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잘했어, 정말 잘했어. 바로 그거야. 타이밍에 맞춰서 통! 통! 그렇게 하면 돼! 라며 잔뜩 흥분해서 칭찬해 주셨다. 나는 머릿속으로 리듬있게 타이밍을 계산하면서 통! 통! 고무줄의 움직임과 호흡을 맞추었다. 한 번이 두 번, 두 번이 세 번으로 늘어났다. 여기까지가 한계. 짧은 다리를 용수철 삼아 온몸을 뛰워 올려야 하 니 힘이 여간 많이 드는 게 아니었다. 평소에는 선생님이 힘들지 않 냐고 물으시면 절대로 힘들지 않다고 대답하던 나였다. 그러나 줄넘 기 연습을 한 후에는 영락없이 녹초가 되고 말았다. 연습을 하면 이렇게까지 발전하게 되는 것인가? 선생님, 저요, 줄넘기를 스물세 번이나 할 수 있게 됐어요! 그래애? 어디 한번 볼까? 미야하고 함께 뛰었어요. 선생님 보세요! 미야가 나와 마주서서 줄넘기 준비를 한다. 하나 둘 셋! 신호에 맞춰 고무줄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내가 호흡을 맞춰 뛰어올라야 하 는 것은 물론이고 미야가 고무줄에 걸려도 실패다. 그래서 난 운동 신경이 발단한 미야하고 짝을 이뤄 연습을 했던 것이다. 통, 통, 통, 통. 피나는 연습의 보람이었다. 미야와 난 호흡이 착착 맞았다. 우와, 굉장하다. 둘 다 정말 연습을 많이 했구나. 조금 더 연습해 서 어디 서른 번까지 목표를 세워 볼까? 우리들은다시 연습에 매달렸다. 한 번 뛰고 쉬고, 또 한 번 뛰고는 쉬어야 하는 나. 이렇게 느려터진 연습에도 불구하고 미야는 불평 한마디 없이 잘 도와주었다. 드디어 서른네 번. 가장 최고기록이었다. 야, 우리 선생님께 가보자! 마음이 들떠서 덩달아 미야도 자랑스러워 했다. 다카기 선생님 앞 에서 우리는 훈련성과를 제대로 보여 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긴장한 탓인지 스물아홉 번밖에 하지 못했다. 선생님께서는 정말 잘했다 며 온 얼굴에 주름이 잡히도록 활짝 웃 어 주셨다. 나는 미야 덕분에 다른 아이들보다 수십 배는 더 재미있게 줄넘기 를 즐길 수 이었다. 마라톤 호위대 줄넘기 재미에 푹 빠져 지내던 그즈음에 학교에서 마라톤 카드 란 것을 나누어 주었다. 운동장을 한 바퀴 돌 때마다 도코에서 하코네 까지 지도가 그려진 카드에 철도역을 하나씩 색칠해 가는 아침 마라 톤이었다. 다카기 선생님은 나를 어떤 식으로 참가시키면 좋을까 사 흘 정도 고민하던 끝에 이런 제안을 반 아이들 앞에 내놓으셨다. 다른 사름은 한 바퀴 돌면 기차역 하나를 색칠할 수 있지만 오토 가 한 바퀴를 돌면 기차역 네 개를 칠할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좋아요- 오토, 우리 열심히 해보자. 네, 저도 열심히 뛰겠습니다. 말하자면 선생님께서 고안해 내신 오토의 룰 인 셈이다. 이 정도 면 나도 다른 친구들과 함께 마라톤을 해도 색칠하는 진도에 크게 뒤질 이유가 없다. 기운이 바짝 났다. 다음날부터 하코네를 향한 여행길에 나섰다. 아침 등교시간이 빠르 면 빠를수록 달리기할 시간을 많이 번다. 집을 나설 준비를 하면서 빨리요, 빨리요 하며 어머니를 재촉했다. 그러나 다카기 선생님의 고민은 정작 따로 있었다. 나는 평소에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에는 가까이 가지 않는다. 위 험에 대비하는 민감한 성격 때문이다. 아무리 덥고 목이 말라도 수 돗가에 아이들이 북적거리면 절대로 가지 않고 그냥 꾹 참고 있을 정도로 철저했다. 그런데 마라톤은 여러 겹 줄을 서서 달린다. 엉덩이를 끌어당기며 간신히 달려야 하기 때문에 선생님은 내가 학생들에게 걷어 차이지 나 않을까 걱정하셨던 것이다.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6학년 형들이 함께 달려 주기로 했던 것이 다. 함께 달린다고는 하지만 조깅도 되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이 느 린 속도. 그래서 순번을 정해서 자신의 마란톤 코스를 끝내고는 다 시 내게로 돌아와 대열을 만들어 주었다. 다른 아이들이 잘못해서 나를 걷어차지 않도록 전후좌우에서 6학년 형들이 지켜 주었던 것이 다. 그날따라 웬 눈이 그리도 많이 내렸는지, 운동장 여기저기에 눈이 녹아 질퍽거렸다. 엉덩이가 젖으면 안되잖아 형들은 나를 덥석 들 어다가 마른 땅으로 옮겨주곤 했다. 마치 달리는 호위팀 같았다. 다카기 선생님은 이런 모습을 보며 정말 흐뭇해 하셨다. 선생님께서는 한 바퀴 돌 때마다 철도역 네 개 를 제안 하시면서 달리기를 싫어하는 아이들이 반발하지 않을까 걱정하셨던 모양이 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년간을 함께 생활하면서 모두가 나를 이해해 주었고, 오토가 뭘 힘들어 하는지 이해만 해주 면 뭐든지 우리하고 똑같이 할 수 있다 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카기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배웠는지도 모른다. 오토의 룰 을 처음 만들어 낸 것은 우리 반 아이들이었으니까 말이다. 잊을 수 없는 주먹밥 험난한 소풍길 1년에 두 차례 있는 소풍. 나는 소풍이 늘 즐거웠다. 물론 친구들 과 멀리까지 나가 보는 것도 좋았지만 나를 더욱 가슴 설레게 하는 것은 전철이었다. 가족과 외출을 할 때는 자동차를 주로 이용하기 때문에 전철을 타 볼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소풍은 선생님, 친구들과 함께 나들 이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전철을 탈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늘 즐거 워했다. 저학년 때는 가까운 공원이나 동물원 등으로 가기 때문에 특별히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소풍 코스도 내 게는 만만치 않았다. 4학년 소풍은 산으로 간다! 알아보니 어른들도 오르기 힘든 가파른 산이라고 했다. 내 머릿속 에서 휠체어로는 아무래도…… 라는 생각이 맴돈다. 무슨 일이건 빠지기 싫어하는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 머니도 이번 소풍은 결석을 시키겠다는 뜻을 선생님께 전했다. 그러 나 선생님은 어떻게든 나를 데려가고 싶어하셨다. 일단 함께 나서면 어떻게든 되겠지요. 설마 산에 두고 오겠습니 까. 그러나 사전답사를 해보고는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절실히 깨달 으셨다. 정말 험준한 산이었던 것이다. 소풍처럼 먼 길을 나설 때는 무거운 전동 휠체어보다는 가볍고 접기 편한 수동식 휠체어를 이용 하지만 이번에는 그걸로도 무리라는 의견이 속속 튀어나왔다. 사전 답사를 하면서 여기서는 휠체어로도 무리일 것 같습니다 혹은 이 정도라면 어떻게든 밀고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라는 등 선생님 들끼리 의견을 교환하여 길을 살펴보았던 것이다. 원래 사전답사란 화장실 위치를 확인하거나 휴식을 취할만한 장소 혹은 전 학생이 정렬할 공간이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가는 것이 다. 그것이 순식간에 다른 반 선생님들까지 가세하여 오토를 어떻 게 하면 함께 데려갈 수 있을까 하는 과제로 뒤바뀌어 버렸다. 4학년을 맡고 있는 체격이 아주 좋은 남자 선생님도 정 안되면 제 가 업고라도 갈 테니 걱정하지 말고 오토를 데리고 오세요 라고 말 씀해 주셨다. 아무튼 모두가 나를 산의 정상까지 데리고 갈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다음 주, 학급회의가 열렸다. 의제는 오토를 어떻게 할까 였다. 참 이상한 학급회의다. 이번 소풍은 고보 산으로 간다. 여러분 모두 등산을 할 준비가 되 어 있나? 네! 다른 반 선생님들과 서전답사를 해보았는데 정말 험준한 산이었 다. 그래도 괜찮겠나? 네, 괜찮습니다. 그런데 다들 알다시피 그렇게 험한 산은 오토에게는 좀 무리일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소풍에는 함께 가지 못할 것 같다. 말도 안돼요!! 예상치도 못한 대답이었다. 다카기 선생님도 놀라움을 그치 못했 다. 힘든 산인 건 알겠는데요. 그렇다고 오토만 빠진다는 건 정말 말 도 안돼요! 더구나 오토는 감기에 걸린 것도 아니잖아요! 다른 아이들도 맞아요, 맞아요 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함께 가면 고생스러운 것은 친구들이다. 혼자 오르기에도 벅 찰 텐데 휠체어를 함께 끌고 가야 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 아이들의 반응은 오토만 빠진다는 건 말도 안돼요 였 다. 모든 것을 함께 해왔던 같은 반 친구인 내가 소풍에서 빠진다는 것을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토, 정상에 오르다 하늘은 우리를 편들어 주지 않았다. 소풍 가는 날 아침부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그래서 다음날로 연기되었다. 또 그 비로 인해 마음 든든한 후원자를 놓쳐 버렸다. 보통때 같으 면 어머니가 함께 가주셨지만 이번에는 체력이 든든한 아버지가 회 사를 하루 쉬고 함께 가주시기로 했다. 그러나 소풍이 하루 연기되 자 아버지는 회사의 스케줄 때문에 함께 갈 수 없었던 것이다. 비는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억수같이 쏟아지기만 할 뿐이었다. 점심때가 지나서야 비가 개이고 거짓말처럼 날이 쨍하니 좋아졌다. 그래서 아침에 내린 비가 더욱 원망스러웠다. 하루 연기된 소풍날은 날씨가 정말 좋았다. 그리고 오늘의 도전! 고보 산은 어디 오를 테면 올라 보라는 듯 우뚝, 정말 우뚝 솟아 있 었다. 선생님의 얼굴에도 한순간 걱정스런 빛이 스쳐 지나갔다. 나 도 높은 산을 보니 그만 주눅이 들어 버렸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 는 없었다. 고보 산은 그렇게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10분도 안돼서 급격한 경사면이 나타났다. 아주 좁고 가파른 오르막길이 전날 내린 비로 인해 질퍽거려서 몇 번 굴러가지도 않았는데 휠체어의 바퀴가 빠져 버리곤 했다. 그래서 뒤에서는 밀고 앞에서는 앞바퀴를 들어올려야만 했다. 모두들 고생 하는 가운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교감 선생님도 옆에서 거들고 계셨 다. 시작부터가 이 고생이니 오늘 하루가 정말 걱정이다. 과연 정상에 오를 수 있을까. 등산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급격한 오르 막길만 나타나면 간이 콩알만해지고 당장 이라도 심장이 멎어 버릴 듯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한동안 계속된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은 곧 비교적 평탄한 길로 바뀌 었다. 다카기 선생님은 그렇게 평찬한 길은 아이들에게 맡겼다. 4학년쯤 되면 체격 좋은 아이들이 몇몇은 있기 마련이다. 그 중에 서 다이스케와 신쿤이 가장 체격이 좋았다. 그러나 아무리 몸집이 커도 열 살 짜리 소년의 힘에는 한계가 있다. 평탄하다 해도 산길이 아니던가. 휠체어는 여간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몸집이 크지 는 않지만 운동신경이 발달해서 행동이 잽싼 아이들이 휠체어 앞에 돌이나 나뭇가지가 걸리지 않도록 빠른 손길로 치워 주었다. 뒤에서는 다이스케와 신쿤이, 오른쪽에서는 미야가, 왼쪽에서는 다 카유키가 호위해 주면서 휠체어가 뭔가에 걸리면 번뻑 들어올려 주 는 등 친구들의 호흡은 착착 맞았다. 그러다가 급격한 경사면이 나 오면 다카기 선생님과 교감선생님이 교대해 주신다. 이렇게 멋진 팀 워크 때문에 가파른 고개들을 단박에 오를 수 있었다. 모두들 힘이 들어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다. 목은 온통 땀으로 뒤 범벅이고 무릎 아래로는 진흙투성이다. 젖 먹던 힘까지 다했다고 표 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정말 열심히들 도와주었다. 고맙다 는 마음과 죄송하다 는 마음이 내 가슴속에 함께 자리했 다. 가슴이 뭉클했다. 휠체어에서 뛰어내려 그들과 함께 뒤에서 밀 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1초라도 빨리 정상에 도착하기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정상은 멀고도 멀었다. 한 사흘은 걸은 것 같았다. 그러나 드디어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연히 모두의 걸음이 빨라 졌다. 마지막 힘 을 다해 정상에 오르자 온 세상이 한눈에 쏙 들어왔다. 드디어 고보 산 꼭대기에 올라선 것이다. 야아호! 선생님 보세요, 저기를 좀 보세요. 우와아!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피어난다. 큰 대자로 누워 버린 아이, 물을 마시는 아이, 오토, 우리가 해냈어! 라며 악수를 청해 오는 아이, 수많은 아이들이 하나같이 밝고 활기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먼저 정말 고마워, 힘들었지? 라고 인사를 해야 옳았지만 정 상에 오르자 갑자기 기운이 빠지고 온몸이 뻣뻣해지더니 움직이기조 차 힘들었다. 아마 휠체어에 앉아 너무 용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고생할 때 나도 하나가 되어 온몸에 힘을 주고 있었던 것이 다. 지금까지 먹어 본 것 중에서 가장 맛있었던 음식이 뭐냐고 물어 오 면 나는 망설임 없이 고보 산꼭대기에서 먹었던 주먹밥 이라고 대 답한다. 내 등에 새겨진 V사인 반복되는 악몽 체육시간에 옷을 갈아입을 때나, 여행지에서 욕실에 들어 갈 때, 나의 등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깜짝 놀라 침을꿀꺽 삼킨다. 좌우의 어깻죽지부터 허리 중심부에 걸쳐 마지 V자를 그려 놓은 것과 같은 흉터가 눈에 뛰기 때문이다. 이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받았던 수술 자국이다. 첫 수술은 유치원 때였다 사람의 뼈가 자라는 속도는 근육의 속도 보다 빠르다고 한다. 팔꿈치 앞이 없는 나의 경우 그대로 방치하면 뼈가 근육을 뚫고 솟아나오게 된다. 그런데 그 현상이 유치원 때 시 작되었다. 팔의 끝 부분에 빨갛게 화농이 잡히더니 드디어는 수술을 받기에 이르렀다. 허리의 뼈를 들어내 팔 끝에 쐐기 모양으로 박아 넣어 뼈의 성장을 막는 수술이었다. 너무 어려서인지 그때의 기억은 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부모님은 다르시리라. 어린 나를 수술실로 들여보내야 하는 그 쓰라린 마음. 수술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그 영원처 럼 느껴지던 긴 시간. 그리고 몇 달이나 깁스를 한 채 꼼짝 못하고 누워 있어야 했던 입원생활. 두 분에게 그런 기억은 두 번 다시 껶 고 싶지 않은 악몽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서 내 팔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감자처럼 둥글고 몽톡했던 팔이 서서히 부 풀듯 솟아났다. 처음에는 신경쓰지 않았지만 상태는 심각해졌다. 지 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통증이었다.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어 보았더니 예상대로 뼈가 살을 찢으며 파고든다는 것이다. 성장 기에 접어들면서, 뼈의 성장도 활발해졌던 것이다. 상태는 시간이 지날수록 심각해졌다. 옷을 갈아입을 때 약간 스치 기만 해도 심한 통증이 내 온몸을 훑었다. 그래서 체육시간에 체육 복으로 갈아입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아픈데도 체육시간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던 것 을 보면 저 좋은 것은 역시 어쩔수 없는가 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좋아하던 체육이나 쉬는 시간에도 변화가 있었 다. 우선 가장 좋아하는 공놀이를 할 수 없었다. 옷깃만 스쳐도 엄 청 아팠으니 손으로 공을 튕기는 것은 엄두도 못 냈다. 드디어는 달 리기도 하지 못했다. 나의 경우 달리기는 엉덩이로 튕기듯 해야 하 는 전신운동이다. 당연히 팔에 그 진동이 전해진다. 마치 온몸 속에 서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나를 괴롭혔다. 통증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줄어 간다는 사실이 더 큰 고통이고 슬픔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 침내 두려운 그날이 다가왔다. 팔 끝에 화농이 잡히기 시작한 것이 다. 재수술이 결정되었다. 4학년 여름방학 무렵이었다. 드디어 수술하는 날 수술에 앞서 팔과 다리가 없다는 이유로 병원에서는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우선 전신마취. 몸집이 보통사람보다 작은 탓에, 마취제 의 양이 조금만 틀려도 돌이킬 수 없는 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에 마 취과 의사 선생님의 고민은 엄청났다고 한다. 다음은 채혈. 보통사람은 팔에 있는 혈관에 바늘을 꽂지만 나에겐 그럴 만한 팔이 없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팔짱을 낀 채 곰곰이 생각 에 잠겼다. 그러다 묘안을 찾아냈지만, 그말을 들은 나는 그만 얼굴 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그래, 맥박을 잴 때 목에 손을 대잖아. 그렇다. 보통 같으면 팔에다 꽂아야 할 채혈바늘을 나는 목에다 꽂 아야 했다. 얼굴 옆으로 바늘이 다가왔을 때의 섬뜩함. 그것만큼은 아무리 여러 번 겪어도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고, 살아 있다는 기분 마저 싹 가셔 버린다. 입원한 지 닷새째, 드디어 수술하는 날이다. 무더운 한여름이었다. 처음에는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러나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나서야 드디어 수술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명치 끝이 뻐근해지는 느낌 이 들었다. 등짝의 근육을 떼어내어 팔끝을 감싸듯이 이식할 거라고 했다. 내 근육의 성장속도가 뼈의 성장보다 비교적 빠르기 때문에 더 이상은 뼈가 살을 파고 나오지 않으리라는 판단이었다. 텔레비전에서 흔히 보았던 이동침대에 올라 수술실로 향했다. 부모 님의 모습이 멀어지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나 절대 눈물을 보이지 말자며 꾸욱 참았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생 각을 할 여유가 있었을까, 대견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동침대가 부모님을 지나고, 쾅! 수술실이 문이 닫힘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무리 강해 보이려 해도 나는 열 살짜리 철부지. 무서웠던 것이다. 상태를 짐작한 간호사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넨다. 무섭니? 네. 괜찮아. 수술실에 들어오면 말이야, 약을 먹고 곧 잠들게 돼. 수 술은 네가 잠든 사이에 모두 끝나는 걸 뭐. 그러니까 조금도 아프지 않아. 간호사의 말대로 수술실에 들어가자 곧 마취작업이 시작되었다. 세 상이 빙빙 돌면서 점점 멀리 사라져 간다. 어딘가 깊숙이 빨려 들어 가는 느낌이 들면서 서서히 의식을 잃어 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때 나의 머리맡에서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가 나누었던 대화가 지 금까지 뚜렷이 남아 잊혀 지질 않는다. 선생님 아이는 몇 살이에요? 우리 아이? 지금 중학교에 다니지. 벌써 그렇게 컸나요? 이름이 뭐였더라……. 류타로. 요즘엔 이름에 쓰이는 한자 획수가 너무 많아서 시험 볼 때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불평이 말이 아니야. 의식이 돌아와 주위를 둘러보니 저녁 무렵이었다. 3시간으로 예정 된 수술이 생각보다 길어졌던 모양이다. 일단은 성공이라는 말을 들 었다. 친구들이 보고 싶어요 내가 입원했던 병원은 환자의 간호를 완전히 책임지는 완전간호제 였다. 그래서 부모라 하더라도 면회시간은 오후3시에서 7시까지로 정해져 있었다. 그 규정은 수술한 날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7시가 되자 병원 측에서 지금 부터는 저희가 돌봐 드리겠습니다. 안심하고 집에 돌아가 계세요 라며 부모님을 돌려 보냈다. 수술 당일은 의식이 몽롱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자 우울증에 빠져들었다. 7시가 가까워지고 부모님께서 이제는 가봐야겠구나 라고 말씀하시면 나는 1분만 더 라고 떼를 쓰며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그때 나를 두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고 지금도 회상하신다. 우울증에 빠진 것은 수술한 뒤에 심신이 허약해졌기 때문이기도 했 지만 가장 근 이유는 병원에서 사귄 친구들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무시당하거나 소외를 당했던 것은 아니다. 장소가 병원인 만큼 입원과 퇴원에 따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매일처럼 되풀이 되 어 적응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특히 내가 입원해 있던 병동은 정형 외과여서 골절 따위로 입원하는아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퇴원도 그만 큼 빨랐다. 나 같은 장기 입원 환자가 친구를 만들기는 너무나 힘든 상황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내가 장애아였기 때문에 친구를 사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는 점이다. 나를 처음 본 아이들은 우선 놀라운 마음에 쉽게 친구가 되어 주지 않는다.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도 내게 익숙해져 친구가 될 수 있었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다시 말해서 친구가 되어 사귈 만하면 그들은 곧 퇴원을 해버리는 것이다. 또 하나 나를 슬프게 만드는 것은 병원의 규칙이었다. 병원이 소란 스러우면 안된다는 이유 때문인지 면회는 14세 이상에게만 허락되었 다. 오토에게 문병을 가고 싶다 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병원 측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친구들과의 놀이가 생활의 중심이고 가장 큰 즐거 움이었던 나에게 두달 동안이나 친구를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은 넓 고 넓은 사막에 홀로 내버려졌다는 느낌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때 난 정말 우울했다. 그러던 어느 날 풀이 죽어 있던 나에게 간호사 누나가 말을 걸어 왔다. 서로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없던 나는 간호사 누나와 여러 가 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술, 학교, 입원생활 좋아하는 만화책 등 끝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왜 이렇게 우울한지도……. 간호사 누나는 미소를 지으며 내 얘기를 끝까지 들어 주었다. 이야 기가 끝나자 내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었다. 이렇게 따뜻한 느낌! 정말 얼마 만이었던가. 그때 어깨에서 전해 오는 따스함에 마음이 풀리면서 지금까지 팽팽하기만 하던 긴장의 끈도 끊어지고 말았다. 잔뜩 참고 있던 눈물이 한 순간 터져 나오더니 드디어는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빨리 집에 가고 싶어요 작은 친절이 나의 온몸을 지배했다. 상냥하고 따뜻했다. 늘 친구들 이나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왔기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이 무뎌 있던 나에게 그녀의 상냥하고 따뜻한 마음은 큰 위안이 되었다. 그런 내 모습을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다카기 선생님은 우리 모 두 오토에게 편지를 쓰면 어떨까? 하고 제안하셨다. 그것은 뜻밖의 상황을 연출했다. 선생님 저는요, 아이들에게 노트를 돌려서 오토에게 하고 싶은 말 들을 모두 쓰라고 했어요. 선생님 우리는요, 지금 학을 접고 있어요. 우리 둘이서 천 마리 학을 전해줄 거에요. 저는 지금 오토네 집에 과자를 전해주고 왔어요. 병원에서 맛있게 먹으라구요. 이렇듯 나를 위하는 반 친구들의 소중한 마음은, 그 후 내가 입원 생활을 버티는데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드디어 수술한 지 두 달이 지났다. 실밥도 다 풀었고, 깁스도 풀었 다. 거울에 비친 내 등짝을 쭈뼛거리며 바라본다. 팔 끄트머리에서 겨드랑이 밑을 거쳐 허리의 중심부까지 단칼에 베 인 듯한 수술자국.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겨울방학이 되면 오른쪽팔도 수술을 해야 하니까, 반대편에도 똑 같은 흉터가 남을 거다. 오토야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아니? 바로 V 사인이 되는 거야. 승리의 V 사인 말이야 가슴 아프게 여겨질 수술의 흔적. 그러나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순 간 그 상처는 내 눈에 마치 훈장처럼 다가 왔다. 오토히로 인쇄소 눈높이 선생님 5학년이 되자 담임 선생님이 바뀌었다. 학창시절 미식축구를 하셨 다는 5학년 담임 선생님은 키가 180센티미터나 되는 거구의 20대였 다. 고보 산으로 소풍 갈 때 정 안되면 제가 업고라도 갈 테니 걱 정하지 말고 오토를 데리고 오세요 라던 바로 그 선생님이다. 아무 래도 젊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감각을 잘 이해해 주셨고 그 때문인지 인기 또한 최고 였다. 사실 내가 처음 요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두 분 선생님께서 담임을 자청하셨다고 한다. 한 분은 다카기 선생님이고. 또 한분이 바로 오카 선생님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오카 선생님은 교사 초년생 이었다. 특별한 배려를 요하는 아이를 담당하기에는 너무 젊다 는 교장 선생님의 판단에 따라 담임은 다카기 선생님으로 정해졌다. 그 뒤 4년의 세월이 흘러 어느덧 다카기 선생님께서는 정년퇴임을 하셨 다. 그리고 입학 당시에 담임을 자청하셨던 오카 선생님이 나의 담 임이 되어 주셨다. 선생님이 바뀌고 나 자신도 어느 정도 긴장했던 5학년초. 선생님과 의 첫 출발은 대청소로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마루를 닦을 때는 늘 그랬듯이 발밑에 걸레를 끼고 바닥을 문지르며 다녔다. 걸레를 손에 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창틀이나 책상을 닦을 수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닥청소뿐이었지만 그나마 마른 걸레질만 할 수 있었 다. 물걸레질을 하면 아무래도 내 엉덩이까지 젖어 버리고 말기 때 문이다. 그런 내 모습을 오카 선생님은 처음 보셨던 것이다. 오토, 할 얘기가 있으니까 잠깐 따라오너라. 한참 청소를 하고 있는데 나를 교무실로 부르신다. 무슨 일이지, 내가 뭘 잘못했나? 나는 무슨 영문인지 종잡지 못한 채 선생님의 뒤를 따라 갔다. 교 무실의 오카 선생님 자리에 도착하자 선생님은 의자가 아닌 마룻바 닥에 털버덕 앉으신다. 1미터가 훨씬 넘는 키 차이가 줄어들면서 눈 높이가 맞춰진다. 선생님과 정면으로 눈길을 마주하며 대화를 나누 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상한 기계 선생님께서는 책상 위에서 기계 같은 것을 들어 마루 위에 놓고 나 에게 보여 주신다. 워드프로세서였다. 청소 말이다, 내 생각에는 오토 네가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하기 는 좀 힘든 것 같은데, 어떠니? 네, 그렇기는 해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오토가 청소말고도 학급을 위해서 할 수 있 는 일이 따로 있을 것 같아. 다른 아이들의 도움은 전혀 필요없는 일 말이야. 정말요? 그래, 선생님은 오토가 이걸 한번 해봤으면 해서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다카기 선생님의 발상과는 전혀 반대였다. 특별 취 급하지 말고 다른 아이들과 가능한 한 똑같이 가르치는 것 이 다카 기 선생님의 기본 생각이였다면, 오카 선생님은 어차피 다른 아이 들과 똑같이 할 수 없다면 오토만이 할 수 있는 다른 일로 보충하면 된다 는 생각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발상의 차이는 아니었다. 고학 년이 되면서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가는 아이들 속에 있는 오토에게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할 수 있는 일의 폭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 라는 현실적인 배려도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오카 선생님은 이런 생각도 하고 계셨다. 오토가 앞으로 학교생활 을 계속하다 보면 담임인 자신이나 반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을 것이다. 친구들 또한 전혀 싫은 기색 없이 도 와줄 것이다. 그러나 남에게 도움을 받는 행위 가 반복될 수밖에 없는 오토 본인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혹시라도 어느 순간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고 느끼지나 않을까. 오토만이 할 수 있는 어떤 일이 있으면 좋겠다. 주위에 대해 열등 감을 느낄지도 모를 그때, 가슴을 펴며 하지만 나는 모두를 위해 이걸 할 수 있잖아! 라고 스스로 격려할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궁 리하던 선생님은 내가 워드프로세서를 활용해 우리 반을 위해 뭔가 를 해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신 것이다. 이 짧은 팔로 과연 키보드를 조작할 수 있을까. 결코 기계에 능하 다고 할 수 없는 내가 정말 이 워드프로세서를 잘 다를 수 있을까. 난 그런 생각을 해볼 겨를도 없이 하겠습니다 라고 덜컥 대답부터 했다. 잘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보다는 해보고 싶다는 의욕이 앞섰던 것이다. 키보드를 두드리면 문자가 나오는, 내 눈앞에 있는 이 희한 한 기계를 두고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어떻게 흥미를 느끼지 않 을 수 이었겠는가. 다음날 선생님께서는 새로운 회사를 만드셨다. 이름하여 오토히로 (OTOHIRO)인쇄소 노란 서류봉투에 내 이름을 딴 회사 이름이 깔끔 하게 인쇄되어 있다. 사장님, 건투를 빕니다. 내게 봉투를 건네며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 후 원고를 주고받을 때는 반드시 이 봉투가 이용되었다. 비서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빌린 워드프로세서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재 미도 있었지만 선생님께서 이런 멋진 일을 내게 맡기시다니, 하루 라도 빨리 익혀서 선생님께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는 사명감 같은 의욕이 강했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 작성한 원고 초안을 받아서 워드프로세서에 입력하고 편집을 한다. 보기 좋게 프린트를 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 리지 않았다. 학급의 게시물, 수업시간에 쓰이는 프린트물, 소풍에 대한 안내장 등 날이 갈수록 오토의 작품 이 등장하는 기회가 늘어났다. 우와, 내게 엄청난 비서가 생겼는걸. 선생님은 기뻐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반 아이들이 하는 청소보다 훨씬 힘들고 일감도 많 았다. 그러나 워드프로세서에 푹 빠져 있던 당시의 나에게 그런 건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힘들기는커녕 팔과 다리가 없는 아이가 정말 서류를 작성해 줄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일거리를 맡긴 선생 님들께 완성된 작품을 넘겨 드릴 때 그분들의 놀라는 얼굴, 또는 우 리 반 아이들이 야, 이거 정말 오토가 만든 거야? 굉장한데! 하며 감탄하는 소리를 들을 때면 나는 너무 좋아 하늘을 날 것만 같았다. 오카 선생님도 처음에는 불안하셨을 것이다. 담임을 맡자마자 오 토에게 무리가 되는 일은 과감하게 제외시키고 대신 오토만이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시키는 것이 정말 옳은 판단인지 고민하셨을 것 이다. 오토 본인이 차별 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고 다른 아이들 사이에서 오토만 특별 취급한다 는 반감을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었 기 때문이다. 결국 오카 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단호하게 결론을 내렸 다. 이제부터는 오토가 할 수 있는 일 과 할 수 없는 일 을 확실하게 구별해 줘야 한다. 이것은 나와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이 사회에 나가 직업을 선택할 때 매우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재 만이 아니라 미 래 까지도 염두에 두고 교육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나는 오카 선생 님의 생각에 정말 동감한다. 오토히로 인쇄소 라고 새겨진 서류봉투, 셀 수 없이 많이 주고 받 아서 나달나달해진 그 봉투를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운동회 50미터만 달리자 매년 5월이 되면 열리는 운동회는 신학년이 되면서부터 연습이 시 작된다. 지금까지 달리기 경주 때는 견학으로 때워야 했다. 하지만 매스 게임 같은 경우는 어떻게든 참가했다. 공 집어넣기를 할 때는 골대까지 공을 던질 수 없었기 때문에 땅바닥에 떨어진 공을 주워서 친구들에게 건네주는 역할을 맡았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가장 싫었던 것은 다른 아이들이 하는 것을 함 께 하지 못한 채 구경만 해야 할 때였다. 그래서 운동회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더구나 운동회 때는 학년별로 줄을 지어 서 있어야 한다. 우리 학년 모두가 경기에 참가하고 있을 때, 나 혼 자만 덩그러니 빈 자리에서 응원을 해야 할 때는 정말 괴로웠다. 그렇게 4년을 보냈다. 내게 다섯 번째 운동회 날이 다가 오던 어느 날 오카 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올해에는 어떻게 할까? 처음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알아듣질 못했다. 달리기 경주 말이야. 반 아이들과 함께 달리고 싶지 않니? 내게 어느 정도 체력이 붙었다고 생각하셨는지 선생님은 내가 달리 기 경주에 참가할 수 있는 방법을 검토중이였던 것이다. 순간 내 입 꼬리가 자꾸만 귀옆으로 달려갔다. 너무 기뻤다. 그래서 나도 모르 게 저도 달리고 싶어요, 선생님 이라고 말해 버렸다. 그러나 내가 100미터를 완주하려면 2분 이상이 걸린다. 보통 애들 이라면 아무리 늦어도 20초 정도면 충분하다. 이미 그런 점까지 고 려한 선생님께선 이런 제안을 하셨다. 오토, 중간지점에서 출발하자. 꼭 절반인 50미터 정도면 어떨까?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100미터를 다 달릴 자신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카 선생님의 용기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내가 달리기 경주 에 참가할 수 없었던 이유는 내가 엉덩이를 질질 끌어가며 달리는 것을 본 학부모들이 왜 저런 얘를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달리게 하 는 거지? 정말 가여워서 못 보겠어. 너무 심한 것 아냐? 라며 불평 을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장 애인을 보고 가엾게 여기는 우리나라에선 도리가 없는 일이다. 오카 선생님은 그런 일반적인 견해에는 의연하셨다. 중요한 것은 관객들의 기분이 아니다. 내 친구 미노루 미노루, 5학년 시절 나의 절친한 친구. 집이 가까웠기 때문에 더욱 더 친할 수 있었던 그 친구는 5학년 때 나의 뒷바라지를 도맡아서 다 해주었다. 워낙 마음이 넓고 심지가 굳어서 다른 친구들의 어머 니들도 미노루 하면 알아줄 정도였다. 순박함을 그림으로 그려 놓은 듯한, 정말 좋은 친구였다. 요가 초등학교는 등교할 때 같은 지역에 사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의 모든 학생들이 모여 등교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 지역에 는 6학년생이 없어서 5학년생인 미노루가 반장을 맡았다. 야무지고 책임감이 강하다는 것이 그 아이의 이미지였다. 중학교 시절,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고등학교 시험을 앞둔 3학년 의 어느 가을날, 학교에서는 사립고등학교의 수험을 대비해 사립에 응시를 하든 안 하든 전원이 교장선생님을 면접관으로 삼아 모의 면접 시험 을 치르게 했다. 그때 나는 세상에서 누구를 가장 존경하느냐? 는 질문을 받았다. 이럴 경우 대부분은 부모님입니다 라거나 헬렌 켈러 같은 역사적 인물을 거론하겠지만, 사립학교에 갈 생각이 없어서 면접에 대한 준 비를 조금도 하지 않았던 나는 그만 대답이 궁해지고 말았다. 바로 그때 한 사람이 내 머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같은 반 친구인 미노루입니다 교장 선생님은 예상치 못한 나의 대답에 깜짝 놀라셨다. 그래…… 그 이유는? 교장 선생님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미노루는 정말 멋진 친구입 니다. 우리들 또래는 자신만 생각하기 바쁘지만 그 친구는 자신보다 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해 줍니다. 그래서 전 그 친구를 존경합니 다. 나도 미노루에 대해서는 알고 있단다. 정말 마음이 넓고 밝은, 멋 진 소년이지. 그랬다. 미노루는 그런 친구였다. 그러나 미노루를 그저 성실하고 착하기만 한 샌님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함께 어울려 엉뚱한 일도 곧잘 저지르곤 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 건너편에 있는 아파트에도 나와 친한 친구가 살고 있었는 데 그 친구는 미노루와는 또다른 성격이었다. 항상 자기 주장이 강 하고 타고난 리더십과 톡톡 튀는 정신으로 무장돼 있어 무슨 일이 생겼다 하면 늘 앞장서는 우리 반의 중심인물이었다. 재미있는 표현 으로 단순, 무식, 과감 이라는 말이 꼭 들어맞는 아주 매력적인 친 구였다. 그 친구와 미노루 그리고 나 이렇게 세명은 개구쟁이 삼총 사 라 불리며 언제나 함께 몰려다녔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진자(일본의 전통종교인 신도의 신을 모셔 놓은 곳)에 서는 말이 야, 제사가 끝난 다음날에는 경내에 돈이 잔뜩 떨어져 있대. 난 처음 듣는 말이었지만 듣고 보니 정말 그럴듯했다. 하지만 그 돈을 노리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그걸 주우려면 새벽에 움직여야 할 거야. 미노루와 나는 돈 이야기에 솔깃하여 눈이 반짝반짝했다.그리고 누 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른바 돈 수거대 를 결성하기로 했다. 제사가 끝난 다음날. 고요한 새벽 6시 반경. 요가 진자의 경내에 있는 돌계단에 시무룩한 표정으로 세 명이 소년이 콜라를 한 병씩 들고 앉아 있었다. 야, 이게 뭐야! 제사 다음날에는 바닥에 돈이 잔뜩 떨어져 있다고 했잖아? 진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청소한답시고 일찌감치 돈을 전부 가져 가 버린 것이 틀림없어. 떨어져 있는 것이라곤 먹다 남은 소주병뿐이잖아. 잠을 깨려고 콜 라까지 이렇게 사가지고 왔는데, 돈을 벌기는커녕 돈만 잔뜩썼잖 아! 이른 새벽부터 부산을 떨며 나았는데 이게 뭐냐며 투덜거렸지만 사 실 속으로는 너무 재미있었다. 비록 돈은 줍지 못했지만 나에게도 이렇게 엉뚱한 일을 벌일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행복했고 또 마음 든든했기 때문이다. 좀 빗나갔지만 다시 운동회로 이야기를 돌리자. 달리기 경주의 참 가가 결정되자 나는 모처럼 참가하게 되었으니 사람들에게 절대로 볼썽사나운 모습은 보이지 말 것 을 다짐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엉 덩이를 질질 끌며 달리는 모습에는 변화가 없겠지만 어린 마음에, 또 튀기 좋아하는 셩격이 그래도 보기 좋게 달리자! 라는 결심으로 작용했던 모양이다. 스포츠 만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일까. 나는 만화에서 주인공들이 늘 그랬듯이 새벽훈력! 을 결정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50미터나 되는 거리를 달려본 적이 없다. 운동회 당일날 지치고 힘든 모습을 보이 지 않고 완주하기 위해서는 새벽에 연습을 해서 체력을 키워 놓아야 한다. 나는 미노루를 꼬드겼다. 왠지 그 친구와 함께 연습을 하면 마음이 든든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운동회가 열리기 2,3주 전부터 특별훈 련 이 시작되었다. 매일 아침6시 반이면 미노루와 함께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비록 30분 이상 걸리는 더딘 연습이었지만 나와 미노 루는 비 오는 날만 빼고는 매일같이 연습을 했다. 나는 눈에 띄게 자신감을 얻어 갔다. 이렇게 열심히 연습을 하고 있으니 운동회 당일에는 힘차게 완주할 것이 틀립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운동회 날이 어서 빨리 왔으면 했고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미노루는 어땠을까. 나야 특별훈련 이라고 이름붙였지만, 그 친구 입장에서는 걷는 속도보다 느리니 연습은커녕 조깅 정도의 운동도 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조금도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새벽 6시 반이면 약속장소에 나와 밝게 웃는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 다. 일등보다 행복한 꼴찌 드디어 운동회 날이 되었다. 높고 푸른 5월의 하늘. 5학년 100미터 달리기 순서가 가까워졌다. 내 가슴이 갑자기 콩콩콩 뛰기 시작한 다. 마침내 출전. 50미터 지점에 하얀색 라인이 그려지고 참석한 학 부모들은 저게 뭐지? 라며 의아해 한다. 그때 아장거리며 등장하는 오토. 순간 놀라는 사람들의 웅성거림. 그러나 난 어쩐지 스타가 된 듯한 기분이다. 빵! 하는 총소리와 함께 일제히 스타트. 나도 50미터 지점에서 신 호음과 동시에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50미터의 차이는 순식간에 좁혀지고, 코너를 돌아야 하는 지점에 이르자 모두가 나를 추월했 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100미터라면 아무리 느림보라도 20초 정도면 충분하다. 다시 말해 총소리가 나고 20초 후부터는 넓은 운동장에 나 혼자만 남게 된다. 한마디로 독무대인 셈이다. 달려라, 오토! 오토, 파이팅! 오토! 오토! 오토! 박수와 함께 응원 소리가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점점 더 커지는 박수 소리. 왠지 쑥스럽기도 했지만 기쁜 마음이 더 컸다. 마지막 10미터, 나는 지진 나머지 스피드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 다. 그때였다. 오토 정신차려! 끝까지 달리는 거야! 오카 선생님께서 외치는 소리를 듣자 처음 선생님으로부터 달리기 경주에 참가하자는 말을 들었을 때의 그 기쁨이 되살아나면서 온몸 에 풍풍 힘이 솟았다. 다른 친구들보다 20초 이상이나 늦은 골인. 그러나 나는 완주를 해 냈다는 충만감에 가득 차 이었다. 운동장 가득 메워지는 박수를 받 으며 나는 6위라고 씌어진 깃발 아래 서 있었다. 그러나 6위에 자리 에 있으면서도 마치 1등을 한 것처럼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이 는 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카 선생님이 내게 물으셨다. 내년에도 달릴 거니? 네! 나의 대답은 0.1초도 걸리지 않았다. 자존심 한자 챔피언 오카 선생님은 아이디어맨으로 유명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 다. 교실 입구에 마련된, 이름하여 유배의 자리. 말썽 많은 아이들을 앉히고는 반성을 하게 만드는 자리다. 또 준비물을 가져오지 않는 아이에게는 한자연습을 시키셨다. 반면에 한자연습 프리패스 카드 란 것도 발행해서 착한 일을 한 학생에게 나누어 주셨다. 이 프리 패스 카드 를 제시하면 한자연습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여러 아이 디어 중에서 선생님이 가장 공들여 만든 한자 챔피언 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가장 맘에 들었다. 한자 챔피언 은 한자 테스트 점수로 순위를 정한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채점방식이었다. 일반적인 한자 테스트라면 백화점을 개 장하다 라는 문제가 나오면 개장(開場)이라는 한자만 쓰면 된다. 그 러나 오카 선생님의 한자 테스트 용지에는 답을 쓰는칸이 아주 넓 다. 동음이의어를 써넣을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예를 들어 개장의 경우에는 改裝 (다시 새롭게 꾸밈)이라고 쓰면 10점을 더 얻는다. 또 改葬 (다시 장사 자냄)이라고 쓰면 10점이 더 추가 된다. 그러므로 최고득점이 100점일 수가 없다. 150점도 받을 수 있고 능 력에 따라 200점을 받는 아이들도 많았다. 대신 이라는 문제가 나 왔을 때 어떤 친구가 大信 이라고 써 넣었다. 선생님께서는 이런 단어는 없는데…… 라며 표를 하셨다. 그러나 그 아이는 그건 대 신증권(大信證券)이라는 회사 이름의 약자예요. 선생님께서는 신문 도 안 보시나봐! 라며 물고 늘어졌다. 이쯤 되면 우리들뿐 아니라 선생님까지도 배꼽을 잡고 웃게 된다. 모두가 그렇게 나오니 정작 괴로운 것은 선생님이셨다. 채점을 하 면서 정말 이 단어가 맞는지 일일이 사전을 찾아 봐야 했기 때문이 다. 특히 동음이의어가 많은 문제일 경우에는 채점하는데 시간이 정 말 많이 걸렸다. 테스트는 모두 5회로 끝이 난다. 그리고 종합점수가 가장 높은 사 람이 한자 챔피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챔피언은 늘 내 차지였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방과후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 은 나로서는 사전을 일일이 뒤적이며 조사해야 하는 그 시험이 적성 에 꼭 맞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 한자 공부에 대한 열의를 더욱 불붙였다. 이 한자 테스트는 얼마나 꼼꼼하게 조사하는가 얼마나 잘 암기 할 수 있는가 에 따라 우열이 가려진다. 작은 국어사전은 단어의 양 이 별로 많지 않기 때문에 그걸로는 게임이 되질 않는다. 그러던 어 느 날 신문을 읽던 나의 눈길에 어떤 광고에 쿡 못박히고 말았다. 나는 단번에 그 사전을 점찍어 두었다. 국어 대사전 이라고 이름 붙은 그 소중한 보물은 두께가 10센티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이른 바 슈퍼 사전. 이 정도라면 단어가 수도 없이 수록되어 있을 거야 라고 생각하며 꿀꺽 침을 삼켰다. 마치 두툼한 스테이크를 보며 만 족해 하는 착각에 빠져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값이 만만치 않았다. 5만 8천원이나 되는 책값은 초등학생 인 나로서는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돈이 아니다. 그러나 한자의 여신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후-하고 불면 하얀 입김이 몽실몽실 피 어나는 12월,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던 것이다. 할머니께서 오토야, 올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무엇을 해줄까? 라고 물어 오셨다. 흐음,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나는 망설이지 않고 국어 대사 전을 사달라고 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전을 사달라니 웬 공부벌 레? 하셨겠지만 나에게 한자 테스트는 일종의 게임과 같았다. 따라 서 겉으로 보기에는 공부할 때 필요한 두툼한 사전이었지만 내게는 조금 비싼 장난감 정도로 생각이 들 만큼 한자 테스트는 재미있었 다. 그 장남감 을 손에 넣은 나는 한자 테스트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것 챔피언은 항상 내 차지였다. 그런데 늘 2등 자리에서 나를 넘보는 아이가 있었다. 그 라이벌은 우리 반에서 제일 공부를 잘하는 수재. 느긋한 말투에 쉬는 시간에도 책을 읽는 아이였지만, 작정하고 말문 을 열면 여학생 맞아?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가 세서 남자아이들 조차 쉽게 건드리지 못했다. 어느 날 그 여자애가 나에게 선전포고 를 해왔다. 이번 시험에서는 절대로 지지 않을 꺼야. 어쩌면 오카 선생님으로부터 일등을 오토에게만 맡겨 놓을 거니? 하는 부추기는 말을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지기 싫어하는 나 또한 만만치는 않다. 당연이 맞받아쳤다. 글쎄, 다음에도 챔피언은 내 차지일 것 같은데. 그렇게는 안될걸. 난 오토 너에게는 뭐든지 이길 자신이 있어. 흐음, 그래? 하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나를 이길 수 없는 것이 하 나 있을 텐데……. 뭐, 뭐라고? 공부라면 나도 너한테 지지 않아. 내 말은 그게 아니야. 그래애? 그게 뭔데? 봐, 나한테는 팔다리가 없잖아. 결코 홧김에 나온 말이 아니었다. 팔다리가 없기 때문에 바로 나인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나를 흉내낼 수 없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 만 이미 그런 생각이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무렵 국어시간에 특징(特徵) 고 특장(特長) 에 대해서 배웠 다. 특징 이란 다른것과 비교해 특히 두드러지는 점을 말한다. 그 에 비해 특장 은 그 무엇을 특징지을 수 있는 장점을 가리킨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는 자기소개서에 특징-손과 발이 없는 것 이 라고 쓰던 것을 특장 이라고 고쳐 썼던 기억이 있다. 나에게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특장이 있다. 그것은 바로 손과 발이 없다는 것. 그 여자아이는 조금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내가 한 말을 이해해 주었다. 수영장에서 생긴 일 물이 무서워요 6학년 여름, 수영기록을 작성하는 때가 다가왔다. 6학년 전원이 25 미터를 끝까지 헤엄치는 것이 목표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러 나 이번에는 정말 만만치 않았다. 이야기를 초등학교 1학년 때의 6월로 되돌려 보자. 입학하고 나서 체육, 소풍, 운동회등 새롭게 부딪치는 문제들을 차례로 해결해 온 다카기 선생님을 기다리는 또다른 문제는 바로 수영 이라는 장벽이 었다. 그때 내 키는 70센티미터가 조금 넘었다. 수심 1미터가 넘는 수영 장은 정상적인 아이들에게는 별 것 아니겠지만 발이 닿지 않는 나는 혼자서 수영장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카기 선생님은 견학과 참가를 놓고 고민하셨다. 궁리 끝 에 선생님은 나를 안고 수영장에 들어가기로 하셨다. 나이 든 선생 님이 나를 안고 수영을 한다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하신 교장 선생님 께서도 그 나이에 아무래도 무리예요 라고 말리셨지만 다카기 선생 님은 담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 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그렇개 해서 나도 수영수업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반은 기뻤고 반은 불안했다. 어릴 적부터 위험에는 대단히 민감했다. 아 이들이 많이 모여 있으면 아무리 목이 말라도 붐비는 수돗가에 다가 서지 않았다. 그런 내가 발도 닿지 않는 수영장에 들어간다니, 그렇 게 위험천만한 일을? 게다가 감자처럼 짧고 뭉특한 팔로는 얼굴에 묻거나 눈에 들거간 물기를 도저히 닦아낼 수 없기 때문에 물에 대 한 나의 공포는 한층 더했다. 드디어 수영수업을 시작하는 날. 선생님과 함께 들어가겠다 고 철 석같이 약속했지만 결국 그날은 수영장에 들어가지 못했다. 수영복 까지 갈아입고 근처까지는 갔지만 역시 너무 무서웠다. 선생님께서 는 물속에서 잠깐이라도 좋으니 들어오라 고 하셨지만 나는 슬금슬 금 꽁무니를 뺐다. 선생님도 그런 나를 이해해 주셨다. 그러나 어떻게든 내가 물에서 스스로 뜰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만약의 경우 물 에 빠지는 일이 생기더라도 누군가 도와주려 올 때까지는 최소한 물 속에 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 떴다! 첫날은 실패했지만 그 후 나는 수영장에 들어갔다. 우선 선생님의 팔에 안겨 몸을 적시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건 그다지 무섭지 않았 다. 다음은 얼굴 잠수. 입 언저리까지는 괜찮았는데 물이 코 위로 차오르자 너무 무서웠다. 그러나 선생님의 도움으로 간신히 얼굴이 물에 잠기는 것까지는 익숙해졌다. 이제는 물위에 뜰 단계다. 선생님은 내가 물에 누울 수 있도록 손으로 받쳐 주셨다. 너무나 무서워 팔다리에 잔뜩 힘이 들어가더니 드디어는 온 몸이 오그라드 는 것만 같았다. 선생님은 팔과 다리의 힘을 빼고 쭈욱 뻗으라고 하 셨다. 그제서야 선생님의 손이 받치고는 있지만 내가 물위에 떠 있 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선생님이 손을 떼어도 되겠니? 라고 하시면 나는 절대 안된다며 펄쩍 뛰었다. 그렇게 연습하기를 몇 번, 물위에 엎드린 채 얼굴을 물에 담그는 연습을 하고 있을 때, 아주 잠깐이기는 했지만 선생님이 나 몰래 살 짝 손을 놓았다. 비록 몇 분의 1초라는 짧은 순간이기는 했지만 그 때 나는 분명히 떠 있었다. 봐, 오토 떴잖니! 선생님께서는 별일 아닌데도 부풀려 칭찬해 주셨다 점차 손을 떼어 놓는 시간이 늘어 갔다. 처음에는 1초였지만 2초 그리고 3초, 나중 에는 10초 이상이나 혼자서 떠 있었다. 그러나 한숨 돌리려고 고개 를 옆으로 젖히자 그만 균형을 잃고 내 몸이 휘리릭 물속에서 한 바 퀴 뒤집어져 버렸다. 바로 그 점이 문제였다. 아무리 연습을 해도 숨을 쉬기 위해 고개를 돌리면 몸이 뒤집어졌 다. 그래서 호흡을 참을 수 있는 데까지만 참고 앞으로 나아가려 해 보았지만 물살을 헤치고 나아갈 팔이 내겐 없다. 팔보다는 조금 긴 다리를 필사적으로 움직여 보지만 몸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질 않 았다. 길이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물장구를 아무리 힘들여 쳐도 그 자리에서 빙글 맴돌아 버리거나 심한 경우에는 뒤집어져 버리고 말 았다. 6미터, 내가 5년이나 걸려 헤엄칠 수 있게 된 거리이다. 슈퍼 비트판의 탄생 수영대회. 무슨 수를 써서라도 25미터를 헤엄쳐 가야 한다. 비록 중간에 쉬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아이들은 완주를 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잠깐 쉬기 이해서 멈춰 설 수가 없다. 그래서 보조기구를 사용 해서 25미터를 완주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처음 시도한 것은 헬퍼. 찐빵처럼 동그란 것이 여러 개 붙어 있 는 부력이 강한 수영 보조기구였다. 이것을 허리에 감고 물속에 들 어갔다. 그러나 실패! 무거운 머리가 물속으로 가라앉으면서 거꾸로 허리만 퐁 떠오른 것이다. 다음으로 비트판 에 도전. 그러나 결과 는 꽝! 내 체중을 견디기에는 부력이 너무 약했던 비트판은 나와 함 께 보기 좋게 침몰하고 말았다. 거의 포기상태에 있던 우리에게 재미있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떠 있는 섬 이란 이름의 120센티미터짜리 우레탄 매트가 있다는 것이었 다. 그 정도라면 나의 체중을 받쳐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카 선생님께서 재빨리 그 매트를 구해 오셨다. 실제로 보니 크기 가 정말 대단해서 교실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말았다. 우리는 그것을 수영장으로 가져갔다. 도구는 커터와 날카로운 식칼. 그리고 그것을 다루는 분은 바로 오 카 선생님. 아이들이 조수 역할을 하며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작업 을 진행한다. 우선 앞면을 유선형으로 깎아냈다.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서다. 그 다음 뒷부분을 나의 몸에 맞춰 가며 잘라나간다. 물속에서 앞으 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허리 아래를 많이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나 는 몇 번이고 실제로 올라타 보면서 내 몸 사이즈에 맞게 자를 수 있도록 도왔다. 선생님 좋아, 스스무. 이제는 오토를 여기에 태워서 실험해 보 자. 스스무가 윗옷을 벗고 물속으로 첨버덩 뛰어든다. 매트위에 나를 태우고 뒤에서 쑤욱 밀어 본다. 스스무 이런 안되겠어요. 중심이 너무 앞에 쏠려 있거든요. 이대 로 두면 그대로 침몰이에요. 몇 번이나 테스트를 해가며 조정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완성되려 는 순간 우리는 정말 엉뚱한 문제에 부딛쳤다. 미노루 선생님, 이렇게 판때기만 만들어서는 손이 없는 오토에게 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잖아요. 일동 으아악~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제야 우리는 서둘러 매트 좌우에 작은 구멍을 하나씩 만들었다. 위에서 보니 마치 눈을 그려 놓은 것 같아 매트가 사람의 얼굴처럼 보였다. 나는 그 구멍에 손을 집어 넣어 보 았다. 매트와 내가 드디어 하나가 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6학년, 그해 여름. 이렇게 해서 내 여름날 수영 파트너가 탄생했 다. 이름하여 슈펴 비트만. 아줌마들이 울고 계세요 9월 9일 드디어 수영대회 날이 돌아왔다. 이 대회는 근처에 있는 다른 두 학교와 합동으로 치러지기 때문에 다른 초등학교 아이들도 눈에 띄었다. 나 자신과 학교의 명예를 위해서 꼭 잘해 내자고 다짐 에 다짐을 거듭했다. 25미터 남자 자유형! 안내방송이 나오자 바짝 긴장이 되었다. 드 디어 나의 파트너와 함께 했던 특별훈련의 성과를 보여줄 때다. 아 무리 자유형이라지만 특별제작한 비트판을 이용해 헤엄치는 모습을 사람들은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시간은 너무도 빨리 휙 지나가고 어 느새 마지막 조를 호명하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내 차례 다. 19조1코스, 오토다케, 요가 초등학교! 그 안내방송이 내게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어쩐지 부끄럽다. 다이 빙대에 올라서자 가슴이 쉴새없이 쿵쾅거려 숨쉬기 조차 힘들다. 탕 기분 좋은 신호탄 소리와 함게 물속으로 뒤집어져 떨어진다. 처음 본 사람들은 잘못 떨어졌다고 가슴 졸이겠지만 사실 이것은 그 해 여름 내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나만의 멋진 다이빙 포즈 였 다. 일단 가라앉은 몸이 스르륵 떠오르고 나서 자맥질을 한두번 하면 물속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미노루가 다가와 나를 들어올려 슈퍼 비트판 위에 올려 준다. 오토 화이팅! 이라는 말과 함께 쑤욱 앞으 로 밀어 준다. 긴긴 여행길의 시작이다. 언제나처럼 중간까지는 순조로운 페이스를 유지했다. 그러나 물이 너무 차다. 그래서 다리가 생각대로 잘 움직여 주질 않는다. 다른 아이들은 쑥쑥 앞으로 나아가 버리고, 그 넓은 수영장에는 이제 나 만 남았다. 정적. 그때를 표현할 수 있는 딱 맞는 단어일 것이다. 나만 남게 되자 수영장이 갑자기 쥐죽은 듯이 조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정적은 곧 무너졌다. 커다란 환성과 박수 소리. 게다가 그것은 다른 두 학교에서 보내 주는 응원이었다. 물속에서 악전고투 하던 나는 비로소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를 깨달았다. 다른 학교 학 생들로부터 받은 응원이라서 기쁘기도 했지만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었다. 1분 57초. 겨우 25미터를 헤엄치는 데 2분 가까운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그러나 다른 두 학교에서 또다시 힘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좀처럼 끝나지 않는 엄청난 박수세례였다. 그때 반 친구들이 이상하 다는 듯이 선생님께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 저기 저 아줌마들이 울고 계세요! 학부모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던 것이 다. 어리둥절한 아이들의 반응에 선생님은 내심 흐뭇해 하셨다. 나 라는 존재를 그냥 평범한 반 친구로 대했던 그 아이들. 25미터를 헤 엄치는 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지만 그 아이 들에게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겨질 만큼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릴 수 있었던 환경을 실감했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선생님은 정말 잘했다 며 나를 끌어안는 감격적인 장면 대신에, 1분 57초가 뭐야? 연습할 때보다 훨씬 늦었잖아 라며 꾸짖으셨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 꾸지람 속에 얼마나 따뜻한 사랑 이 숨쉬고 있는지를……. 축하한다. 너를 특별한 눈으로 대하지 않는 친구들이 저렇게 많지 않니? 장애인은 구세주 폐를 끼친다니요?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보살핌 속에서 6년을 보냈다. 내가 그 동안 얻은 것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보통교육을 받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가 장애아를 위한 특수학교를 부정하는 것은 절대 아니 다. 장애의 정도, 증상에 따라서 특수한 교육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아이에게 정말 특수교육이 필요한가? 라는 냉정한 판단이다. 당시는 약간의 장애만 있어도 양호학교 혹은 특수학급 으로 분 류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보통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무리 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애아라고 해서 무조건 특 별교육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장애인이 일반적인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여 러 가지 일도 있고,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경우도 있 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예로 들어 보자. 공부를 못하는 아이가 있으 면 잘하는 아이가 도와주기 마련이고, 철봉에서 거꾸로 매달리지 못 하는 아이가 있으면 그걸 잘하는 아이가 방법을 일러 준다. 장애도 마찬가지다. 다리가 불편한 아이는 휠체어를 밀어 주면 된 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아이가 있으면 옆자리의 친구가 노트 정리 를 도와주면 된다. 그러면 장애인 이라고 한묶음으로 솎아내졌던 사람들도 보통교육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장애아의 부모가 보통교육을 희망하면 당신네 아이를 위한 학교가 있는데 왜 그곳으로 보내지 않는가? 라 며 완강하게 특수학교를 권장한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다른 정상 적인 아이들의 보호자들로부터 비난을 사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 이다. 장애를 가진 아이가 반에 있으면 선생님이 그 아이만을 너무 염려한 나머지 다른 아이들에게 소홀하지 않을까 하는 학부모들의 의견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장애아가 반에 있으면 친구들에게 폐를 끼친다고? 성가시게 된다 고? 정말 그럴까? 행복한 아이 4학년 운동회 때 봉체조를 한 적이 있다. 봉을 휘드르며 하는 체조 로서 둘이서 한 조가 되어 동작을 취한다. 3학년때까지는 다카기 선 생님이 늘 파트너가 되어 주셨다. 그런데 4학년이 되자 반 아이들이 오토와 파트너가 되고 싶다 고 했다. 나와 파트너가 되면 속도도 느려지고, 또 다른 아이들처럼 할 수 없는 부분도 있기 마련이어서 선생님께서는 처음에는 고민을 하 셨다. 그러나 모처럼 아이들이 해온 제안이었기에 받아들이기로 하 셨다. 운동회가 끝나고서 나흘 뒤 , 학부형 회의가 열렸다. 그때 내 파트 너였던 아이의 어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 아이가 오토와 함께 파트너가 된 것을 보고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함께 체조도 하고 마지막에 휠제어를 밀며 운동장을 한 바 퀴 도는 것을 볼 때는 감격해서 목까지 메였답니다. 우리 애도 정말 행복했다고 하더군요. 그분은 이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고 한다. 나와 파트너가 된 것을 질책받을지언정 감사의 말을 들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선생님께서 오히려 당황하실 정도였다. 그만큼 다른 학부형들도 나를 따뜻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다.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할 때면 내가 화제로 떠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고 한다. 우리 아이가 오토와 같은 반이 되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오 토는 몸이 불편한데도 저렇게 열심이니까 너도 좀 더 열심히 하라고 했더니 알았다면서 고개를 끄덕거리지 뭐에요. 이런 일도 있었다. 다카기 선생님이 출장 갈 일이 있어서 옆반 선생님이 대신 체육수 업을 해주셨다. 그때 선생님께서 모두들 창고에가서 공을 하나씩 가져와라 하자 몇몇 아이들은 양손에 공을 들고 오는 것이었다. 선 생님께서 너희들, 공은 하나씩만 가져오라고 했잖아? 라고 했더니 그 아이들은 이건 오토 거예요 하더란다. 그리고 차례로 돌아가며 나의 공놀이 상대를 해주는 아이들은 보고 는 선생님네 반은 아이들이 모두 아주 잘 어울리더군요 라고 말씀 하셨다고 한다. 그때 다카기 선생님은 속으로 얼마나 으쓱하셨을까. 2,3년 전에 있었던 6학년 1반 동창회에서 오카 선생님은 이런 말씀 을 하셨다. 오토가 우리 반에 있어서 혹시라도 힘든 일을 겪는 아이가 있으면 우리 반은 자연스럽게 그 아이를 돕는 습관이 생겨났지. 우리 반 모 두가 협동심이 강한, 정말 착하고 멋진 반이었어! 늘 그러셨듯이 내게 열등감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에서 하신 말씀일 수도 있지만 전적으로 틀린 말씀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지금은 유치원 선생인 친구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 이번 봄부터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아이를 맡게 됐어. 처음에는 아이들도 깜짝 놀라서 그애를 슬슬 피하더라구. 그런데 한두 달 지 나면서부터는 그 아이를 중심으로 반 분위기가 아주 좋아졌어. 이런 예는 여기저기서 수도 없이 들을 수 있다. 장애아가 있는 반 은 틀림없이 멋진 우애를 다지는 근사한 상황이 연출된다는 것을. 요가 초등학교의 경우 그 효과가 단지 내가 있는 반에만 있었던 것 은 아니다. 내가 갓 입학한 4월. 매년 행해지는 1학년을 위한 환영 의 모임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기획을 담당하고 있던 6학년생들 이 결정한 사항에는 이런 것이 있었다. 올해는 OX 게임을 하기로 했습니다. O라고 생각되면 머리를 아래 위로 끄덕거리고 X라고 생각되면 머리를 가로 젓습니다. 내용은… …. 자, 잠깐. 몇백 명이나 되는데 그렇게 하면 누가 정답을 맞췄는지 잘 구별할 수가 없잖니? 선생님이 제동을 건다. 하지만 선생님! 올해는 오토가 있잖아요. 오토는 이렇게 규칙을 정하지 않으면 함께 할 수 없어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아이들을 보며 선생님들은 서로 얼 굴만 쳐다보았을 뿐 할말을 잃으셨다고 한다. 눈앞의 상대가 곤란을 겪고 있으면 언제라도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항상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기를 바라는 현대의 경쟁사회 속에서 우 리들은 어쩌면 이렇게 당연한 감각을 점점 잃어만 가는 것은 아닐 까. 서로 돕는 사회가 붕괴되고 있다는 말이 나온 지 오래다. 그러고 보면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회 를 만들 수 있는 구세주는 혹시 장 애인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2부 축제의 사나이 중고등학교와재수시절 그래 난 장애인이야. 하지만 그 친구보다야 내가 잘생겼고, 머리도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널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아. 장애가 사랑의 장벽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장애에 대한 자신의 관점과 사고가 더 큰 방해물이 되는 것은 아닐까. 친구따라 운동따라 농구부라니? 입학과정이 가장 무난했던 것은 중학교 때였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요가 중학교. 같은 동네에 살던 초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그대로 진할학 수 있었기에 더더욱 마음이 든든했는 지도 모른다. 학교 측에서도 별다른 반대 없이 선선히 받아들여 주었다. 초등학 교 상급반이 되면서 부터는 보호자 없이 통학할 수 있었다. 그때 누 구보다 즐겁게 학교생활을 보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해 주었던 것같 다. 중학생이 되고 달라진 점이 있다면 뭐니뭐니 해도 서클활동을 제일 먼저 꼽을 수 있다. 입학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서클활동. 그 런데 내가 과연 어떤 부서를 지원했을까요? 라고 묻는다면 독자들은 짐작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손발이 없고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딘 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집에 돌아가 책을 읽는다든지, 혹은 참가하더 라도 행동반경이 좁은 문화 관련 서클 정도를 상상했던 사람들이 뒤로 나자빠진다. 아니, 뭐라고? 노, 노 농구부라니? 그러나 내가 농구부에 들어간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다. 건강하고 활발한 아이들은 운동 관련 서클로, 그리고 성실하고 얌전한 아이들 은 문화 관련 서클로 나뉘어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당연한 일. 나 와 가장 친한 친구들이 모두 건강하고 활발(비록 꾸중은 많이 들었 지만)한 스타일이라 모두 농구부를 지원했으므로,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나도 당연히 농구부를 지원할 수밖에……. 그나저나 혹시 나의 뇌는 단세포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농구부에 들어가고 싶다 는 희망으로부터 시작해 가입 이라는 과 정에 이르기까지 나에게 무리는 아닐까? 라든가 친구들에게 폐가 되면 어쩌지? 하는 의문이나 걱정은 도대체 염두에도 두질 않았으니 ……. 진도 7.8의 대지진이 오토네 집을 덮쳤다. 문제아의 돌발적인 행동 에 익숙해져서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 않으시던 부모님도 이때 만큼은 아연실색하셨다. 아버지 뭐, 뭐라고? 어머니 너 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소리니? 강한 아이로 키우자 장애를 방패로 도망치는 아이는 절대로 만 들지 말자 이 두 가지는 내가 태어났을 때 정했던 우리 부모님의 교육방침이다. 그러나 농구부에 가입하겠다는 말을 들으신 부모님은 그때 처음으로 우리가 너무 심했던 거 아냐 라며 반성을 하셨다나? 아무리 타이르고 설득해도 끄떡 않는 나에게 지친 부모님은 드디어 교감 선생님께 전화로 상담을 하기에 이르렀다. 어머니 저어, 다름이 아니라 며칠 전에 우리 애가 학교에서 돌아 와서는요, 농구부에 들어가고 싶다며 저렇게 고집을 피우 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이렇게……. 선생님 에- 또, 그 문제로 선생님과도 상담을 해보았는데요. 뭐 본인이 하고 싶다면 굳이……. 어머니 다른 애들한테 미안해서……. 선생님 괜찮습니다. 그렇다고 시합에 나갈 것도 아니고……. 괴짜 감독 삐익- 울려퍼지는 심판의 호각 소리. 선수 교대. 요가 중학교 백넘버 8번. 관람석의 눈길이 일제히 요가 중학교의 벤치로 향한다. 그러나 일 어서는 선수는 아무도 없다. 감독님만이 신비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다. 문득 아래를 쳐다보니 아장아장 엉덩이를 끌며 나오는 선수가 보인 다. 백넘버 8번 오토. 마침내 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시합에! 내보내 준다고 나오는 나도 그렇지만 시합에까지 출전시키는 감독 님도 보통 사람은 아니다. 그분은 한마디로 유쾌하고 호방한 괴짜 감독님이였다. 스님 같은 머리 스타일에 콧수염이 돋보였던 그분은 곰같이 커다란 몸을 이끌고 씩씩하게 걸어다녔다. 간혹 수업시간에 창밖을 바라보면 태극권 자세를 취하고 있던 주인공, 바로 우리들의 감독님이었다. 어떤 고정관념에도 사로잡혀 있지 않은, 요가 중학교 가 자랑하는 명물 감독님이셨다. 그렇다고 톡톡 튀는 그런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상황에 서도 침착하셨고 또 어떤 행동도 잘 받아 주시는 유별나게 마음이 넓으신 분이었다. 그래서 내가 농구부에 입단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 지만. 이쯤에서 농구부 입단 과정은 그렇다 치고 도대체 농구를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 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슛을 날릴 정도로 공 을 높이 던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시절부터 피구로 다져 진(?) 탄탄한 어깨의 소유자였던 나. 웬만한 거리에서는 충분히 우 리 팀에게 패스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시합에 나갈 수 있 었던 것은 아니다. 내게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장점이 있었으니 ……. 드리블. 혹시 휠체어 농구 에서 하는 그런 드리블을 상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경우는 달랐다. 코트에서는 휠체어 없이 맨몸 으로 뛰었다. 민첩한 움직임에는 자신있다. 통통 튀며 뛰는 동작은 나만의 장기. 이제 농구공에 그 리듬만 맞추면 된다. 스피드를 떨어 뜨리지 않고 공과 함께 통통 뛸 수만 있다면 문제는 해결되는 셈이 었다. 우선은 공을 정확하게 튕기는 연습부터 했다. 탕, 탕, 탕, 탕. 처 음에는 많이 힘들었다. 보통사람이라면 튕긴 공이 다시 허리 아래 정도로 튀어오르기까지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있다. 그러나 내 경우 공이 마루에서 튀어오르는 절대시간이 짧기 때문에 남보다 휠씬 더 많이 손을 움직여야 한다. 이 점이 무엇보다 어려운 문제였다. 다음에는 뛰면서 하는 드리블. 어느 정도 공이 내 손에서 익숙해지 자 뛰면서 하는 드리블을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도대체가 공이 생 각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내 발에 부딪치기도 하고, 엉뚱한 방향 으로 굴러가 버리는 통에 나는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해야 했다. 그 렇지만 연습으로 넘지 못할 장벽은 없다! 어느 틈엔가 공을 다루는 나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던 것이다. 백 번 듣는 것보다는 한 번 보는 것이 낫다 는 말이 있다. 아무리 자세히 설명해도 내가 드리블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운 여러분들 께 자. 이렇게 하는 겁니다 라고 실제로 보여들릴 수 없어서 정말 유감! 또 유감이다. 백넘버 8 점점 노련해지는 나를 보고 친구들은 놀라워했지만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익숙해져 있던 그들이다. 그래서 이 정도는 틀림없이 해내리 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감독님은 달랐다. 처음 농구부에 가입하고 싶다고 했을 때, 들어오긴 해도 몸이나 푸 는 정도겠지…… 라고 여기셨던 감독님도 이쯤 되고 보니 생각을 달 리할 수밖에. 감독 오토, 이젠 제법 드리블을 잘하는구나. 나도 정말 깜짝 놀 랐어, 그런데 말이야. 지금부터는 왼손만 쓰지 말고 오른손 드리블도 연습하도록! 오토 네에? 감독님 저는 왼손잡이예요. 이제 겨우 공이 손에 익 었는데 오른손으로 하라뇨. 그건 무리예요. 전 오른손을 써 본 적이 없거든요. 감독 그러니까 연습이 필요한 거야. 과연 그 말씀이 옳다. 우선 해보는 거야 가 내 전매특허였는데 이 번에는 감독님께 그만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나는 처음부터 다시 한다는 각오로 오른손 연습을 시작했다. 우선 공을 튕기는 연습부터 했다. 왼손잡이라서 거의 쓰지 않던 오른손으로 공을 튕겨 보았지만 공은 튀어오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앞이 깜깜했으나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자 왼손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다음은 뛰면서 하는 드리블. 하지만 왼손으로 공을 다룰 때와는 전 혀 사정이 달랐다. 마음먹은 대로 공이 움직여 주지 않는 것은 물론 이거니와 나의 몸놀림도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왼손으로 하던 때보 다 몇 배나 더 피나는 연습을 요했다. 공과 사투를 벌이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오른손으로도 공을 제법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왼손이건 오른손이건 상관없이 공을 자연스럽 게 다룰 수 있게 되자 나는 빨리 감독님께 보여드리고 싶었다. 처음 에는 공을 튕기지도 못했는데 오른손 드리블을 하다니. 내가 생각해 도 흥분되는 일이었다. 나는 감독님을 모셔 놓고 오른손 드리블을 자신만만하게 보여드렸다. 그러나 감독님의 반응은 예상외로 싸늘했다. 감독 그래, 제법이구나. 이번에는 좌우 드리블을 연습하도록. 손 바꿀 때 재빨라야 하는 것도 잊지 말고. 오토 ……? 감독 상대가 오른쪽에서 방어하면 왼손으로 드리블을 해야 하고, 왼쪽에서 방어하면 오른손으로 드리블을 해야 공을 빼앗기 지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겠지? 상대가 공을 빼앗으로 온다고? 그런 상대가 어디에 있는데? 우왓, 그런가? 시합인가? 감독님께선 나를 시합에 내보낼 요량으로 지금까 지 왼손 오른손 드리블 연습을 시키셨단 말인가? 맹훈련에 돌입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인쪽으로. 몸을 재빨리 바꿀 때 스피드가 떨어지지 않도록 연습했다. 지금은 없는 상대 를 의식하며 공과 반대쪽으로 몸을 돌릴 때, 아무래도 오른손 드리블이 좀 약했기 때문에 공을 놓칠 때가 많았다. 단조로 운 연습이 지겨운 적도 많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눈꼼만큼 도 없었다. 시합에 나가고 싶다. 바람은 오로지 그것 하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기도취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감독님께서 그냥 지나가며 하신 말씀을 내가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여 시합, 시합 하며 목표를 세우 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시합에 내보낸 것은 아닐까. 되짚어보면 나 도 모르게 쿡, 웃음이 터지고 만다. 초저공 드리블 사실여부야 어떻든 일단 시합에 나온 이상 최선을 다할 수밖에. 아 무리 생각해도 본시합 출전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다들 알다시피 낮으면 낮을수록 상대가 빼앗기 힘든 것이 드리블이다. 그리고 바로 나의 무기는 이름하여 무릅보다 낮은 초저공 드리블. 놀라는 상대팀. 제대로 걷지도 못할 것 같은 선수가 드리블이라니? 게다가 허리 아래의 낮은 위치에서 삭삭 움직이는 바람에 우왕좌왕 하는 상대선수를 헤치며 적진까지 공격. 3점슛의 강자인 우리 팀 주 장이 상대편의 마크를 뿌리치며 나의 패스 사정거리 안으로 달려온 다. 수비선수의 인터셉트를 빠져나오며 패스하는 오토! 공을 받아든 주장의 터닝슛! 골인! 3점 득점. 자칭 비밀병기 의 대활약. 여기까 지가 나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말이 비밀병기지. 상대가 작정하고 공을 빼앗으려 한다면 못할 것도 없고 특히 수비를 보는 자리에서는 꿔다놓은 보릿자루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내가 출전하는 시합에서 우리 팀은 4대 5로 싸 우는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전의 기회를 준 감독님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팀 모두에게 진심으로 고마울 따름이다. 사실 내가 농구부에 들어 가고 싶다 고 했을 때 저희들이 있으니 걱정 말고 허락해 주세요 라며 감독님께 정중하게 부탁드렸던 나의 친구들이 아닌가. 연습중에 방해가 된 적도 많았다. 체육관 구석에서 드리블 연습을 했지만 코트 쪽으로 굴러가 버린 공 때문에 그들은 몇 번이고 연습 을 중단해야 했다. 내가 시합에 출전하면 전력이 뚝 떨어지는 것은 뻔한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토, 파이팅! 침착해야 돼. 우리가 뒤에 있다는 것 잊지 말고! 언제나 내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던 친구들. 후배들 또한 시합에 나 가고 싶었겠지만 꾹 참고 나를 응원해 주었다. 시합 때면 꼭 나와 동행해 주는 후배도 있었다. 내 기억에 영원히 남아 있을 중학교 서클활동의 추억들. 내 멋대로 인 데다 엉터리 같은 소원을 들어주었던 모두의 협동심. 나는 지금 도 본시합 출전 은 곧 멋진 우리 팀워크의 상징이었다고 자랑스럽 게 생각한다. 졸업 앨범을 펼쳐 보면 8번 유니폼을 입고 활짝 웃고 있는 내 모 습. 이 웃음은 그들 모두로부터 받은 소중한 선물이다. 축제의 사나이 멋진 한판 승부 축제의 사나이 라고 불릴 만큼 나는 축제를 좋아했다. 우리 동네 에 있는 진자에서 제사가 있을 때면 어김없이 쫓아아녔다. 피리와 북 소리를 들으면 왠지 내 가슴도 요동치는 것 같았다. 축제, 꽃놀이, 생일잔치, 소풍, 불꽃놀이, 학예회, 크리스마스, 설 날…… 그것이 학교행사든 아니든 이벤트 라는 말만 들어도 피가 솟구쳤다. 중학교에서는 운동회와 문화제가 최대의 이벤트이다. 운동회의 경 우 기분이야 화끈하지만 몸이 따라주질 않는다. 장애인이 운동회에 서 주인공이 되는 것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학부모들의 성원과 박수 라는 측면에서는 주역 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나는 문화 제로 눈길을 돌렸다. 문화제에 관여하여 멋진 이벤트를 만들어 내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문화제를 즐기고 싶었다. 각 반에서 한 명씩 선발되는 문화위원 이라는 것이 있었다. 체육 위원 은 운동회나 구기대회 등 스포츠에 관한 행사를 주관하는 한 편, 문화위원 은 문화제, 졸업생 송별회, 신입생 환영회 등 문화와 관련된 행사를 주관했다. 그리고 문화위원 에는 문화실행위원 이 란 대표격에 해당하는 직책도 있어서 각 학년에서 남녀 한 명씩 선 발했다. 문화위원 이 학급회의에서 뽑히는 것과는 달리 문화실행 위원 은 학년별로 이루어지는 선거를 통해 선발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만만한 직책이 결코 아닌 문화실행위원 에 나는 입후보 신청 을 하였다. 1학년 2학기 때의 일이다. 강력한 라이벌은 우리 집 건너편 아파트에 살고 있는 친구. 진자에 돈 주우러 가자고 선동한 개구쟁이 삼총사 가운데 한 명이다. 운 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했다. 운동회 때에는 응원단장을 맡는 등 강 력한 리더십을 지닌 친구로서 도저히 얕볼 수 없는 강적이었다. 나 와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급위원을 다퉈 온 사이로 서로 나서기 좋 아하는 성격이어서 한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었다. 드디어 승부를 겨루는 날이 다가왔다. 간발의 열 몇 표. 그가 이겼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아 슬아슬한 차이였다. 나는 그날 있었던 일을 잊을 수 없다. 방과후 기도하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드디어 개표, 그리고 당선! 뛸 듯이 기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정정당당하게 싸웠지만 왠지 그 친구에게 무척이나 미안했다.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가까이 살고 있던 우리는 당연히 집으로 향하는 길도 같았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 갑자기 그가 불쑥 말을 걸 어 왔다. 오늘 너네 집에 놀러가도 되니? 깜짝 놀랐다. 그리고 너무너무 기뻤다. 함께 집에 들어서자 그가 어머니에게 먼저 얘기를 꺼낸다. 아주머니, 오토한테 졌어요. 정말 간발의 차이였는데, 그래서 더 욱 약 오르는거 있죠. 그런데도 놀러와 주다니, 역시 사나이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 나. 나는 마음속으로 어머니께 설명을 들렸다. 엄마, 이 친구는 내가 얼마나 마음 불편해 하는지 알아차린 거예 요. 그래서 약 오르는 것도 참고 내가 마음 편할 수 있도록 해주는 거라구요. 그 친구. 지금은 무얼 하고 있을까. 중학교 시절 의사가 꿈이었으 니까 의과대학에 진학했을까. 문제없을 것이다. 그 친구라면 틀림없 이 훌륭한 의사 선생님이 될 것이므로. 오토 선배를 밀어 줍시다 문화실행위원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간판을 만들고 포스터를 붙이러 다니기도 했다. 물론 작업은 방과후에 해야 했고 덕분에 선생님들과도 친해졌다. 문화제등의 행사는 아무래도 젊은 선생님들이 적극적으로 관여하셨기 때문에 그분들과 이야기를 나누 다 보면 친구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저녁 늦게까지 작업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배달된 라면! 어떨 때는 교감 선생님이 간식을 보 내 주실 때도 있었다. 또 문화실행위원은 각 학년마다 선발되기 때 문에 선배와 접할 기회도 많았다. 중학교 시절의 1년 차는 놀라울 정도로 크다. 한결같이 대단한 형이나 누나처럼 보였다. 그런 만큼 얻는 것도 많았다. 그런데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차츰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문화 실행위원은 이미 결정된 사항을 실행에 옮기는 일만 했다. 그런데 나는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았다. 무엇을 할 것인가 를 결정하 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 의사결정기관 은 수뇌부 5 명이 담당했다. 바로 학생회 임원들인 것이다. 회장, 부회장, 그리 고 문화, 체육,생활(미화 및 청소 담당)의 각 실행워원장으로 구성 된 5명의 문화제 책임자는 학생회장이 아니라 문화실행위원장 이었 던 것이다. 문화실행위원으로 일하는 사이, 나는 그 위원장 자리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2학년 12월. 학생회 임원선거 시즌이 찾아왔다. 나는 때를 놓칠세 라 문화실행위원장 에 입후보 신청을 했다.그런데 예상치도 않았던 라이벌이 나타났다. 수영부의 학생이었는데 지금까지 위원 활동에는 별로 참가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학생회 임원이 되면 내신점수에 가산점을 받을 수 있다 는 학교의 방침이 정해지자 가산점을 받기 위해 입후보에 나섰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나는 전의에 불타올랐다. 소문의 사실여부는 지금도 모른다. 그러 나 입학한 뒤 줄공 3기 연속으로 문화실행위원으로 일해 왔다는 자 부심이 있다. 성적을 목적으로 입후보한 사람에게 절대로 져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선거에 즈음하여 입후보자들은 연설을 할 수 있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각 교실을 돌며 연설을 했는데 그 중에서도 선배들의 교실을 돌때가 가장 힘들었다. 그때 내게는 강력한 후원자가 있었다. 나보다 1년 선배였던 당시의 문화실행위원장이다. 그는 내가 1학년 실행위원으로 있을 때부터 늘 함께 일을 추진했으므로 잘 알고 있었고 누구보다 아껴 주던 터였 다. 야구부 주장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격도 화끈해서 모두가 믿음직스러워 했다. 내가 응원 연설을 해줄게 하던 그 한마디가 얼마나 든든했던가. 그 선배는 나의 연설이 끝남과 동시에 응원 연설을 해주었다. 지난 2년 간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해 왔는지를 설명했다. 3학년 사이에 서 절대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그 선배의 응원 연설은 나의 5분 연 설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 후배들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실행위원이나 농구부 그리고 가까이 에서 얼굴을 익히며 지내 온 후배들에게 내가 연설하러 가면 뜨거운 성원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교실에 들어서자 정말로 오토, 오토, 오토 선배를 밀어 줍시 다 라며 열렬하게 외쳐 준다. 너무 지나친 것 같아 쑥스럽기도 했지 만 어쨌든 그 열기는 대단했다. 나에 대해 잘 모르는 1학년 학생들 도 저 선배가 저렇게까지 인기가 있나! 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정말 열심히 뛰어다녔던 선거활동 덕분에 결과는 대승리 였다. 5명 의 멤버 가운데 문화실행위원장이 자리에 입후보한 사람은 셋이나 될 정도로 제일 많았지만 나는 3분의 2에 가까운 표를 모았다. 물론 그 당시 문화실행위원장이었던 선배와 수많은 후배들의 도움이 컸 다. 어쨌거나 요가 중학교는 정말 대단한 학교다. 두려움이라고는 조금 도 없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에게 농구부 입단을 허락할 뿐아니라 학생회 임원으로까지 만들어 주다니. 잊을 수 없는 추억 1월 4일 당선된 5명의 멤버가 모였다. 장소는 메이지 진구(明?神?: 도쿄 도 요요기에 있는 진자의 하나). 앞으로의 학생회 활동을 기원 하는 정월의 첫 참배였다. 정월 초하룻날 가야 제격인데…… 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휠체어를 타는 나 때문에 혼잡이 예상되는 사흘간 은 피하자고 배려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멋진 동료들과 함께 최고의 문화제를 치를 수 있도록…… 참 배를 하며 나는 이렇게 빌었다. 팀워크도 완벽했다. 문화제뿐 아니라 운동회를 비롯한 학교의 모든 행사에 관여했다. 행사를 할 때마다 개폐회의 인사를 하는 등 학생 들 앞에서 이야기할 기회 또한 늘어 갔다. 조회시간에 전교생을 정 렬시키는 것도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자, 자, 조용히 하고 각 반별로 두 줄로 똑바로 서세요. 지금까 지 조회시간이면 친구들과 잡담하며 줄 서는 일에는 신경도 쓰지 않 던 내가, 설마 그런 역할을 맡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매년 하던 행사는 그대로 하면서도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로 했다. 우선 4월부터 시작된 굿모닝 운동. 다른 학생들보다 30분 정도 빨리 등교해서 정문에서 대기한다. 그리고 등교하는 학생들에 게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아침부터 주머니에 손을 쑤셔넣은 채 땅바닥만 쳐다보며 걷는 학생들에게 활기를 불어 넣어 주자는 취지에서였다. 다음으로 빈병 줍기. 거리를 깨끗이 하면서도 빈병을 팔아 자금 을 마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실제로 거리에 나서고 보니 여기 있다, 저기에도 있다 라는 말들이 마구 터져 나온다. 사람들이 이렇 게도 많이 버린단 말인가, 라는 반성이 밀려들었다. 빈병을 어느 정 도 모으자 더 모으고 싶어진 우리들은 의욕이 넘쳐 요가 주변의 술 집에 도움을 청해 본다. 저, 염치없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빈병을 모으고 있습니다. 1주 일에 두 번 정도 병을 회수하러 와도 괜찮을까요……. 쉽게 OK 사인을 받았다. 그러나 한결같이 문 닫을 시간에 오라고 했다. 빈병 회수작업은 야간으로 변경됐다. 밤 8시에서 9시. 중학교 학생회가 활동할 시간은 아니다. 그러나 밤거리를 다닐 수 있었던 그 두근거리는 즐거움이란.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오늘은 실적이 빵빵한데. 이렇게 좋은 날 곧장 집으로 갈수는 없 지. 우리 모두 공원에 들렀다 가자. 체육실행위원장의 제안으로 모두 근처의 공원을 향했다. 넓은 녹지 공원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깜깜했다. 어쩐지 기분이 으스스하다. 그때 누군가가 갑자기 으악 하며 장난을 치는 바람에 우리는 몸이 오그라들고 말았다. 잔디에 둘러 앉아 손전 등을 턱밑에서 비춰 놓 고는 알고 있는 괴담을 하나씩 얘기한다. 빈병 회수 모임 이 어느 틈엔가 어두운 공원에서 괴담 발표 시간 으로 뒤바뀌어 있었던 것 이다. 집에 돌아오면 12시가 넘은 적이 많았다. 더러는 부모님께 꾸중을 듣는 경우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너무 재미있는 추억이다. 요 가 중학교의 간판이라 불리던 학생회 임원단인 5명의 멤버가 알고 보니 혹시 불량서클(?). 축제는 즐거워! 학생회 활동도 익숙해진 3학년 가을. 어느덧 마지막 문화제가 열렸 다. 지금까지는 학급대항 합창대회나 미술, 기술, 가정으로 나뉘어 만들어진 작품 전시. 이렇게 두 종류의 행사로 문화제는 이루어졌었 다. 학생들은 이 두가지 행사를 향해 맹렬히 연습도 하고 늦게까지 남아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때 우리는 생각했다. 모두가 열심히 노력하는 것으로 매듭짓는 문화제가 아니라 뭔가를 즐길 수 있는 이벤트를 기획하고 싶었다. 마침 그해에 체육관이 신축되었기 때문에 체육관 완공기념 이라는 구실을 달기로 했다. 즐거운 문화제, 추억에 남는 문화제 를 만들 자고 우리는 의견을 모았다. 지금까지 하던 형식으로 문화제를 준비하는 것도 보통일은 아니다. 그러나 2년 정도의 경험이 있고 선배들이 해온것도 눈여겨 봐왔기 때문에 어떻게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잘해낼 자 신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이른바 새로운 문화제 를 기 획하고 있는 것이다. 경험도 없고 과거의 자료도 없는 데다 모든 것 이 처음이다. 그래서 기획 단계부터 골머리를 앓았다. 언제까지 무 얼 결정하고, 무얼 준비해야 하는지 스케줄 짜는 작업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짜릿할 정도로 즐거웠다. 첫경험이었던 만큼 창조한다 는 실감을 맛보았다. 문화제 입장식에 필요한 음악 하나 를 결정할 때에도 이것도 별로야, 저것도 별로야 라며 끝없는 의견 이 쏟아져 나왔다. 히아악. 그 소란스러움이란. 활기찬 곡이 좋겠어. 24시간 싸울 수 있는가(드링크제의 CM송. 당시 대히트를 치고 있었다) 는 어때? 아니야, 역시 입장할 때는 명곡이어야 돼. 빌리 조엘의 어니스 티 같은 거 말야. 1층 복도 끝에 마련된 학생회실. 3학년이 되면서 서클활동도 그 만둔 우리들은 수업이 끝나면 그곳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이마를 맞 대고 문화제를 어떻게 치를 것인가에 대해 온갖 지혜를 짜내고 있었 다. 이벤트 부분이 결정되었다. 학급대항 게임. 서로 이기기 위해서 연 습만 하는 그 시즌에는 자연히 학급별로 단결의식이 가장 강하다. 그런데 열심히 연습한 결과가 등수로 매겨지면서 문화제를 끝내기에 는 그 정열과 그 열기가 너무 아까웠다. 그때 학급대항으로 즐길 수 있는 게임을 준비한다면 다들 너무너무 즐거워할 것이고 또 길이길 이 추억에도 남을 수있지 않을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선생님들은 탐탁치 않아 하셨다. 그러나 결국 우리들에게 결정권을 주셨다. 지금까지 열심히 일해 온 것에 대한 포상이었는지도 모른 다. 문화제 당일. 모든 프로그램을 마치고 학생들이 체육관에 모였다. 이제부터 신나는 이벤트의 시작인 것이다. 각 학급의 대표자가 단상 에 오른다. 책상 위에는 물이 잔뜩 담긴 세숫대야가 준비되어 있다. 얼굴을 그 속에 담그고 오래 견디는 반이 우승이다. 나이 든 선생님 들의 얼굴이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반대로 체육관의 열기는 대단했다. 합창대회가 끝난 뒤 달아올랐던 그 분위기와 정열이 그대로 이어져 거의 폭발적이었다. 우리들도 이 렇게까지 열광적인 호응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 이벤트가 문화제 의 성격에 맞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 나 우리들이 바라는 것, 우리들이 하고 싶었던 것을 해냈다는 면에 서는 정말 성공적이었다. 역시 이벤트는 즐거워야 한다. 그렇다. 난 축제의 사나이 기 때문 이다. 내 친구 야짱 지정석 아이들의 마음이 가장 거칠어지는 때가 중학교 시기라고 한다. 친 구와의 인간관계, 앞으로의 진로, 그리고 이성교제. 그들에게는 많 은 고민거리가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늘 막연한 불안에 사로잡혀 초조해 한다. 공부하라 는 말밖에 하지 않는 부모님과 규칙만을 강 조하는 선생님에게 둘러싸여 초조감은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그리 고 이 모순은 엉뚱하게 시대를 불문하고 약자에게로 화살이 돌아간 다. 집단으로 한 사람을 괴롭히는 이지메 가 가장 많은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그러니 장애인, 즉 사회적 약자로 평가되는 사람의 경우는 어떨까. 중학교 입학에 즈음하여 주위에서 가장 염려했던 것이 바로 이 점이 었다. 친구들과 사이 좋게 지낼 수 있었던 어린시절을 마감하고 모 두들 어른이 돼가는 중학생. 지금까지와는 달리 함께 놀아주지 않을 지도 모르고, 도와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나에게도 없었 던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웃 초등학교에서 진학해 오는 학생들이 절반이나 되니 그 들과 새로이 친구관계를 만들어 가야 한다. 철부지 예닐곱 살 적 친 구 만들기와, 몸과 마음이 훌쩍 커버린 열두 살바기의 친구만들기에 는 분명히 커다란 차이가 있다. 초등학교 시절, 나의 장애 는 친구 를 사귈 수 있는 디딤돌이 되어 주었지만 중학생이 된 지금은 걸림 돌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과연 내가 학교생활을 잘해낼 수 있을까… …. 이야기를 중학교 1학년 새로운 친구를 사귀던 그때로 거슬러 올라 가 보자. 모르는 얼굴들, 누구를 친구로 삼으면 좋을까 교실 안을 둘러본다. 시끌시끌, 와글와글. 소란스러운교실 저쪽 구석에 따분하 다는 듯이 얼굴을 책상에 파묻고 있는 아이가 눈에 들어온다. 야 짱 이었다. 같은 초등학교에 다녔지만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이 없다. 거의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머리가 좋아서 공부도 잘하는 편이었고 운 동신경이 발달해서 세타가야 구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수 영을 잘했다. 6학년 때에는 자기반에서 반장도 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늘 혼자였고 수 업도 게을리했다. 친구들과 서로 얘기도 나주지 않았으며 교복 안주 머니에는 늘 담배가 들어 있었다. 선생님들이 이른바 불량 하다고 간주하는 아이였다. 나는 그 친구에게 강하게 끌렸다. 내가 갖지 못한 면이 그에게는 있었다. 사물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듯한 그 친구에게선 독특한 사람 이라는 느낌이 발산되었다. 중학교 1학년이 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애송이 같은 솜털이 보송보송한 나의 눈에 그는 제대로 멋을 발하는 어른처럼 보였다. 그 친구에게는 지정석이 있었다. 복도 끝의 창가. 그는 언제나 거 기에 걸터앉아 멍하니 뭔가를 생각했다. 혼자 있을 때도 있었고 누 군가 함께 있을 때도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쉬는 시간이면 늘 그랬듯이 복도 끝을 쳐다보았다. 언제나처럼 그는 거기에 있었다. 혼자였다. 바로 전 수업시간에 몸 이 안 좋다며 양호실로 갔던 터였다. 친구가 되고 싶다 고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지만 좀처럼 기회가 오질 않았다. 어느새 나는 그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한걸음 다가 설 때마다 가슴이 뛴다. 마음에 둔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그의 곁으로 다가가 풀썩 앉았다. 심장이 하도 두 근거려서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는 흘끗 나를 쳐다보 았지만, 그다지 신경쓰는 눈치는 아니다. 내 자리야 임마. 방해하 지 말고 꺼져 라고 말할까봐 은근히 걱정했었는데 휴- 안심하며 가 슴을 쓸어내렸다. 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쩌면 거 의 한마디도 안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처음 느꼈던 어떤 편 안함을 기억한다. 그 때문에 내게도 지정석이 생기기는 했지만. 고독한 영웅 그는 겉으로 보기에 깡패 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격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학생들 사이에서 그렇게 흔하던 왕따 에도 전혀 가 담하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먼저 싸움을 거는 일도 없었다. 주변의 아이들에게 베푸는 말없는 친절함도 또다른 그의 매력이었다. 학생들이 싫어하는 선생님이 있었다. 그래서 그 선생님 수업이 시 작되기 전에 어떤 애가 칠판지우개를 잔뜩 털어 교탁을 분필가루 투 성이로 만들어 놓았다. 누가 봐도 혼날 일이었다. 선생님은 잔뜩 화 가 나서 담임 선생님에게 사실을 전했다. 그런데 불똥은 너무나도 엉뚱한 곳으로 튀고 말았다. 두 선생님의 부릅뜬 눈이 약속이아 한 듯이 야짱을 향했기 때문이다. 담임 선생님은 호되게 야단을 치셨 다. 야짱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고 기뻐 할만큼 유치한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취한 행동에 우리는 그 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한마디의 변명도 없었고 진짜 범인이 누구 라고 말하지도 않은 채, 묵묵히 그 죄를 다 뒤집어쓰고 있었다. 나는 야짱에게 조목조목 따졌다. 우리 사이에 처음 있는 이의었다. 도대체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어? 범인이 누군지도 알고 있었잖 아. 그만해 오토. 나는 어차피 찍힌 몸이니까 괜찮아. 하지만 그 자식 (진짜 범인)이 불쌍하잖아. 그러고는 입을 다문다. 나는 사내다운 그가 정말 좋았다. 그리고 스스로 체념하는 야짱의 모습이 그날따라 어쩐지 슬퍼 보였다. 아이들은 야짱의 그런 품성 아래 모여들었다. 거둘 길 없는 생각을 혼자 감당하지 못하는 소년들. 친구들이 어떤 것을 의논하러 와도 특별히 뭐라고 말해 주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야짱에게 모여들었다. 아마도 그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슬퍼 보였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왠지 혼 자 였다. 그의 주위를 맴도는 고독. 무엇이 그를 그토록 고독하게 만드는지 알 수 없었고, 그에게 위로가 되어주지 못한다는 것 때문 에 나는 슬펐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일어났다. 어떤 아이가 그의 이름을 팔아 싸움질을 했던 것이다. 인망도 있고, 요가 중학교에서 제일 가는 보 스적 존재였던 그는 다른 학교에서도 이름이 통했다. 싸움을 일으킨 아이는 야짱의 이름을 대면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 다. 야짱은 원래 싸움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러나 친구들 사이 에 문제가 생기면 모두가 그를 의지했기 때문에 그는 늘 싸움 속에 휘말려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 사이에서는 그의 이름이 바람처럼 떠 돌아다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싸움은 생각지도 않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가 다른학교와의 싸움에 말려들어가 있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그의 고독감은 더욱 강해 보였다. 적어도 나에 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는 한동안 의도적으로 친구들을 멀리 했다. 그런 시시한 세계가 귀찮아졌는지도 모른다. 그때, 그에게는 문제을 일으킬 소지가 전혀 없는 내가 가장 마음 편한 상대였는지도 모른다. 둘이서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쉬는 시 간이면 어김없이 우리 둘은 지정석에 나와 앉았다. 점점 수업을 빼 먹는 횟수도 늘어갔다. 물론 그러면 안되는 줄이야 알았지만 이것 도 다 한때 라며 자위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언젠가 그는 다시 친구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아니, 아이들이 요가 중학교의 넘버원 야짱 을 그냥 둘 리 없다. 아이들은 그를 간절히 원했다. 야짱도 그런 친구들을 외면할 만큼 야박한 사나이는 아니다. 다만 지금은 휴식중이다. 조금 피곤해서 지금까지의 세계와는 다른 곳에서 잠시 쉬고 싶었고, 그때 내가 그 의 상대가 될 수 있었을 뿐이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수업을 뒤로 한 채 근처의 공원으로 갔다. 딱 히 하는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따분한 듯 담배연기를 뿜는 다. 오토, 너도 한번 피워 볼래? 아니, 난 됐어. 그래……. 더 이상 강요하진 않는다. 수업을 빼먹는 것이 마음에 영 걸리기는 했지만 그와 함께 할 수 있다는 즐거움이 모든 걱정을 사라지게 해 주었다. 나의 수호신 나의 변화를 선생님들께서 곱게 볼 리 없다. 내가 그에게 괴롭힘을 당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야짱이 나를 못된 길로 끌고 가 지는 않을까 걱정하셨다. 그래서 야짱은 야짱대로 오토하고 너무 자주 어울리지 마라 는 주의를 들었고 나도 야짱하고 너무 가까이 하지 마 라는 일침을 맞았다. 그러나 그것은 선생님들의 오해였다. 이야기를 다시 앞머리로 돌리자. 이런저런 일로 심한 갈등을 겪는 중학생들 사이에 약자인 장애아가 함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왕따 를 당할 것은 뻔한 일이다. 게다가 나는 콧대가 셌다. 농구부의 멤 버이기도 했고, 위원 일도 맡고 있었으니 눈에 거슬리는 것은 뻔한 일. 어찌 보면 주제넘은 존재였을 수도 있다. 솔직히 말해 저런 장애자는 밥맛 없어 라고 느끼는 아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 는 한 번도 그런 일을 당한 적이 없다. 야짱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두렴움, 동경, 존경……. 그에 대한 아이들의 느낌은 다양했지만 어쨌든 그가 보통 존재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그런 야짱의 곁에 늘 함께 하는 오토. 누구라도 나를 건 드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나의 수호신이었다. 그는 공부 잘하고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우등생 타입은 분명 아니 었다. 오히려 선생님에게 불량학생 내지는 문제아 로 낙인찍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야짱에게 많은 학생들은 도움을 받았다. 그가 친구들의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고민의 늪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그에게 과연 열등생 이라는 딱지는 붙일 수 있을까. 졸업 후 야짱이 찾아와 주었다. 야, 오토. 너 진짜 굉장하다. 일류 고등학교에 들어가다니 말야. 난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했어. 그러니까 내 최종학력은 중졸인 셈이 지.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전기기사가 되어 있었다. 직업을 위해 머리도 짧게 깎았으며 손님이 뭐라 하든 꾹 참는다. 나로서는 도저 히 흉내내기 어려운 훌륭한 사회인이다. 그렇지만 말야, 야짱. 난 아직도 부모님께 얹혀 살고 있는 신세잖 아. 독립해서 살아가는 네 쪽이 훨씬 훌륭해. 그래? 별로 그렇지도 못한데……. 오랜만에 그만의 독특한, 사람을 끌어당기는 수줍은 미소를 보았 다.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들의 지정석 에는 지금도 학 생들이 떼지어 몰려 있을까. 그리고 그들만의 고민을 녹여내고 있을 까. 사춘기 러브레터 학생회 임원이 되어 학교의 간판 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한 3학년 4 월. 신입생을 맞이하면서 내가 벌써 졸업반인가 실감하고 있었다. 농구부에서 최종대회가 다가오자 선후배의 구별 없이 하나가 되어 연습에 열을 올렸다. 모든 면에서 충실해 있던 시기였다. 그런 봄에 뜻밖의 사건 이 일어났다. 미술시간이었다. 야, 오토. 이거 말야 1학년 여학생이 너한테 전해주라고 한던데. 뒷자리에서 나를 쿡쿡 찌른다. 뭔데? 모올라아……. 그가 킥킥거린다. 혹시, 하는 생각이 팍 든다. 낚아채듯 봉투를 빼 앗아 들고는 선생님께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며 뜯어본다. 여자애 특 유의 동글납작한 글씨체가 아닌 흐르는 물처럼 유려하게 써내려간 문자가 빼곡히 담겨있다. 안녕하세요. 처음 드리는 편지군요. 선배님은 절 모르시겠지만 전 선배님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요. 매일 아침 학생회 선배님들과 함 께 교문에서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하고 모두에게 인사를 건네 시잖아요, 저는 선배님의 그 인사를 들으면 아침부터 너무나도 상큼 한 기분이 되곤해요. 그래서 오늘 하루도 열심히! 라는 기운이 샘 솟는 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렇지 못해요. 육련(연합육상경기대 회의 약칭. 세타가야 구의 각 중학교에서 스포츠를 잘하는 학생들이 모여 학교대항으로 겨루는 육상 경기대회)연습 때문에 등교시간이 선배님보다 더 빨라져, 너무너무 좋아하는 선배님과 인사를 나눌수 없기 때문이랍니다. 매일 아침을 즐겁게 맞이했는데 지금은 아주 속 상해요. 하지만 열심히 연습하겠습니다. 선배님도 계속 노력해 주세 요. 1학년 D반 .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얼굴이 불덩이처럼 화끈거린다. 친구들이 보았 다면 야, 오토, 도대체 무슨 일이냐? 라며 다가와 지분거렸을 것이 다. 요동치는 마음을 들키지 않도록 필사적을 태연한 척했지만, 입 이 자꾸만 하마처럼 벌어졌다. 러브레터,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알다가도 모를 사나이 마음 후배로부터 날아든 편지는 예상외로 내개 큰 의미를 주었다. 그 동 안 나는 같은 반이나 특별활동 혹은 위원회 활동 등의 학교생활을 통해 함께 대화도 나누고 일을 진행하면서 오토란 사람은 이런 사 람 임을 알게 되면 연애로 발전할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왔다. 연애 에 대한 나의 지론이었던 셈이다. 편지를 보낸 그 후배의 경우는 다르다. 나는 그녀에 대해 알기는커 녕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다. 그녀 또한 내가 어떤 인간인지 모를 것이다. 흔히 있는 일 이라고 하면 그녀가 서운해 할지도 모르겠 다. 그러나 아무리 설명을 더한다 해도 후배가 선배에게 반해서 보 내온 러브레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훨체어를 탄 나를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떨린다. 여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발렌타인데이 때 선 물받은 초콜릿 양으로 치자면 우리 반에서 1,2 등을 다툴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좋아하는 남자친구에게 주는 이른바 내 사랑 초콜 릿이 아니었다. 워낙 내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친구가 많다 보니 대 부분의 여자애들이 좋은 친구 오토에게 라는 식이었다. 인기는 좋 았지만 연애대상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시절, 남자인 내가 보아도 멋있는 친구가 있었다. 축구부 였던 그 친구가 가는 곳에는 여자아이들이 늘 와 와 거리며 쫓아다 녔고 나는 그것을 지켜보며 부럽다는 생각은 했지만 아무리 노력해 도 그 친구처럼 여자아이들에게 각광받을 타입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휠체어를 타고 있는 나는 겉모습만으로 여자애들의 시선 을 끌기란 어림없는 일이다. 호기심이나 동정 어린 시선이 아니라 사랑에 푹 빠진 시선을 받기란. 사랑과 장애는 영원한 평행선이라고 결론을 내리면서도 내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어떤 감정을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그것은 바 로 알다가도 모를 사나이 마음 이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모락모 락 피어나는 그런 마음 때문에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친구들 모두가 사춘기에 접어들어 사랑의 감정을 싹틔우고 있었다. 당연히 잘생긴 남자애가 여자애들 사이에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인간 은 겉모습으로 볼 것이 아니다, 내용이 중요하다 고 아무리 외쳐도 여자애들은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함게 이야기하면 즐거운 친구 그 이상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내게 만약 손과 발만 있 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으로 얼마나 많은 밤을 뒤척였는지 모른다. 사랑의 장벽 그런데 단 한 통의 편지가 그런 나의 생각을 단숨에 날려 버렸다.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없어도 그녀는 나에게 어떤 감정을 느꼈던 것이리라. 지금까지의 내 삶을 인정받았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 기뻤 다. 내가 그만큼 인기가 있나? 라는 자만심이 아니라 그래, 나도 말야 다른 사람들처럼 사랑을 나눌 수도 있잖아! 어느새 내 마음은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사랑과 장애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단정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훨체어를 탄 그녀와 함께 걸을 생각은 없다 고 차가운 말을 내뱉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귀가 들리지 않는 너하고는 대화가 안돼 라는 말을 들으며 누군가에게 차일수도 있다. 아무리 강변해도 장애인이 사랑을 나누기에는 그벽이 너무 높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다. 하지만 나는 어떤 경우에도 장애가 변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이로부터 버림을 받을 때 가장 먼저 원망스러운 것이 자신의 장애일지도 모른다. 내 눈이 보인다면, 내 귀가 들린다 면……. 그러나 정말 그것이 실연의 원인이었을까. 제 아무리 절세 의 미녀일지라도 이루지 못하는 사랑이 있다. 생각대로 모두 이루어 지는 사랑은 없는 법이다. 어차피 나는 장애인. 내 주위에는 동정의 눈길을 보내는 여자뿐. 이런 내가 어떻게 제대로 된 사랑을 나눌 수 있겠나. 이런 마음가 짐이라면 사랑의 여신이 다가서다가도 돌아가 버릴 것이다. 그런 소 극적인 인간에게 누가 매력을 느끼겠는가. 인간의 가치관이란 정말 다양하다. 키 큰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가 하면, 뚱뚱한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여자도 있다. 우리 어 머니만 해도 난 핸섬한 남자는 별로야 라고 하신다(물론 아버지는 이에 대해 아니, 그럼 난 뭐야? 라고 항의하시긴 하지만). 물론 장애인이기에 매력을 느낀다 는 사람은 별로 없다. 결국 중요한 것 은 그 사람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라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난 장애인이야. 하지만 그 친구보다야 내가 잘생겼고, 머리 도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널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아. 이 정도 말을 할 수 있는 여유는 있어야 여자들이 한 번 더 돌아볼 것이다(좀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장애가 사랑의 장벽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장애에 대한 자신의 관점과 사고가 더 큰 방해물이 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 후배로부터 몇 통인가의 편지를 더 건네받았고 여행길에 샀다는 선물도 받았지만 그녀의 마음에 응해 줄 수가 없었다. 그러 나 내가 그녀에게 받았던 가장 큰 선물은 앞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 꼭 필요한 용기 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사랑의 여신은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입학시험 소동 이사가자 중학교 3학년이되면서 우리 반, 아니 학년 전체가 차분해지기 시작 했다. 자기 성적에 맞는 고등학교를 찾는 아이. 교복 카탈로그에서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발견하고 법석을 떠는 아이. 그들 모두의 손 에는 고등학교 수험안내서 가 들려 있다.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며, 바짝 긴장하는 시기이다. 나도 남들 못지않게 고등학교 선택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가고 싶은 고등학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도쿄도립 도야마 고등 학교.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있는 학교이다. 어렸을 적부터 날 돌봐 주시던 정형외과 선생님이 계셨다. 그분은 스포츠 광이어서 도야마 고등학교 미식축구부 팀닥터까지 맡고 계셨 다. 그래서 도야마 고등학교 이야기는 그 선생님으로부터 수도 없이 들어 왔다. 도야마 학생들은 말이야, 요즘보기 드문 젊은이들이야. 미식축구부 를 할 때 서로가 한 몸이 된 듯이 뛰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흐뭇하 지. 생각도 건실하고. 나는 무엇보다 살아있는 생동감을 그들로부터 얻는단다. 어느 고등학교를 갈까 고민하고 있을 때 왜 느닷없이 그 말이 떠올 랐을까. 나는 의사 선생님이 그렇게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도야마 학생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 자신을 갈고 닦으며, 할 수만 있다면 나도 그들처럼 매력적인 젊은이 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희망사항일 뿐. 우리 집은 세타가야 구에 있는 요 가. 도야마 고등학교가 있는 신주쿠까지는 전철을 갈아타며 1시간 가까이 걸린다. 휠체어로 전철을 타는 것도 무리지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붐비는 러시아워 속을 매일 통학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포기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로부터 뭐라구요! 하고 놀랄 만한 말씀 을 듣기 전까지는. 이사 가면 되잖아. 예엣?????? 도야마 고등학교와 가까운 동네로 이사 가자. 하지만……. 괜찮아. 우리 회사도 마침 신주쿠에 있으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 은 거지 뭐. 요가로 이사 온 것도 내가 유치원을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다니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또다시……. 이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아이들은 모르겠지만 어른 입장에서는 성 가신 일이 한둘이 아니고, 친해진 이웃들과도 헤어져야 한다. 게다 가 10년 이상이나 살아 친숙해진 요가. 떠난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부모님의 고마운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생각 했다. 너무나도 면목없다. 그러나 우리 동네에서 갈 만한 고등학교 가 있는가 하면, 그 대답은 NO! 였다. 부모님의 대담하고 따뜻한 배려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배려에 보답하기 위해 진지하게 공부를 시작했다. 그것은 6월의 어느 날이 었다. 스릴 하나 부모님도 함께 한 면담 자리. 담임 선생님께서는 무리라고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가고 싶어하는 도야마 고등학교는 도립 고등학교 가운 데 입학이 가장 어려웠던 것이다. 합격여부도 불안하고, 설령 입학하더라도 오야마 고등학교에서는 성적이 하위권에 들지도 모릅니다. 선생님의 말씀에 겁도 났지만, 사실 그 말이 옳다. 그래도 좋았다. 어쨌든 도야마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싶다. 내 머릿속에는 그 생각만 이 꽉 차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가혹했다. 도립 고등학교의 입시제도는 시험 당일의 점수만 좋아서는 합격할 수 없다. 시험 이상으로 생활기록부의 성 적, 즉 내신점수 가 중요하다. 내신점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당일 치르는 시험점수가 낮아도 되지만, 거꾸로 내신점수가 낮으면 고득 점을 얻어야만 입학이 가능하다. 도야마 고등학교에 지원한 아이들은 대부분 반에서 1,2등을 다투는 우등생들. 시험 당일에 얻어야 하는 점수는 합계 420점. 한 과목 평 균 84점이다. 이변이 없는 한 그들은 안정권 안에 있다. 그런데 나 는? 이른바 국어, 영어, 수학, 사회, 이과로 나뉘어지는 5과목은 그 런대로 성적이 괜찮지만, 아무래도 체육 이 마음에 걸렸다. 중학교는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나의 체육 점수는 낮을 수밖에 없 다. 따라서 평균점수가 낮은 내가 당일 시험에서 얻어야 할 점수는 560점까지 뛰어올랐다. 한 과목당 평균 92점 결코 만만한 점수가 아 니다. 등뒤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도야마 고등학교에만 원서를 접수시켰 기 때문에,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합격해야 한다. 고등학교 재수생 ……. 방정맞은 단어가 나를 엄습해 왔다. 스릴 둘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6개월. 입학시험 시즌이 다가왔다. 때를 맞춰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부모님은 일을 저지르셨고 나는 그로 인 해 꽈당!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계약이라뇨? 이사가 결정되기는 했지만 아파트의 입구에 문턱이 없는가, 2층 이 상일 경우엔 엘리베이터가 있는가, 현관에 휠체어를 둘 공간이 있는 가 등등의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춘 곳을 찾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 다. 게다가 늦어도 4월까지는 입주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기적적으로 딱 한 군데, 그런 집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말 고도 강력한 라이벌이 있어서 빨리 계약하는 사람이 임자였다. 이 때, 우리 부모님은 예외없이 행동력을 발휘한다. 덜컥 계약을 맺고 돌아오신 것이다!! 정말 황당했다. 합격한 후라면야 정말 잘됐다고 좋아하겠지만 합 격하면 이라는 전제조건 아래 결정된 이사가 아니었던가. 그분들의 결단력에 찬사를 보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성급하다고 해야 할 것 인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뒤의 말씀이다. 다른 부모였다면 비록 계약은 했지만 혹시라도 아들에게 부담이 될까 봐 조심하셨을 것이다. 그러 나 우리 보모님은 달랐다. 계약까지 했으니까 도야마 고등학교에 입학 못하면 곤란해! 이렇게 압력을 가하는 부모님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하지만, 아직 어떻게 될지……. 그러니까 열심히 해! 난 속으로 구시렁거린다. 글쎄 열심히야 하겠지만……. 내가 농 구부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부모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도대체 우리 아이는 정신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 걸까. 그 말씀을 그대로 돌려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나는 대책없 는 행동기질 은 분명히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대물림이라고 확신 하게 됐다. 비 오는 날의 축제 옛날부터 나는 실전에 강했다. 학예회 때 대사나 연기 따위를 실수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중요한 기회를 놓친 적도 없다. 그런 의미 에서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장애물이 지나치게 높다. 예 상은 50대50. 발표는 시험을 치르고 1주일 후, 3월 3일 히나마쓰리(여자아이의 성장을 축하하고 행복을 기원하는 일본의 전통행사)를 하는 날과 공 교롭게 겹쳤다. 물론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날은 비 가 내렸다. 그래서 어머니 혼자 발표장으로 향했다. 합격자 발표는 10시. 30분이 지났는데도 전화가 없다. 혹시…… 불 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틀림없이 전화가 걸려올 거 라고 마음을 다독거렸다. 지금과 달리 휴대폰이 아직 보급되지 않을 때였다. 내 쪽에서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다. 날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고민하고 계신 건 아닐까.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다 는 느낌 을 경험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합격! 전화를 받은 것은 11시가 다 되어서였다. 발표장으로 가는 도중 수다쟁이 아줌마를 만났던 것이다 세상에, 오늘처럼 중요한 날 에는 좀 피해가게 하시지. 하느님도 참 심술맞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아서인지, 처음에는 그다지 실감이 나 지 않았다. 그러나 노력하면 정말 보답은 얻는구나, 아파트 계약을 깨지 않아도 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서서히 실감이 나기 시작 했다. 부모님은 아들을 믿었다 고 거듭 말씀하셨지만, 아무리 믿었 다손 치더라도 보통 강심장이 아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시험 을 앞두고 한달 가량은 입 속의 밥이 거의 모래 같았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 또한 수험준비를 하느라 마 음의 여유가 없었던 까닭에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 어쨌든 합격했다. 입학시험 소동이라고 할 만한 일련의 사간은 결 코 즐겁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낭보를 듣는 순간 그런 고통은 순식 간에 사라지면서 머릿속에는 곧 다른 생각이 가득 찼다. 다음달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고등학교 생활, 나를 기다리는 새로운 만남들. 과 연 3년 동안 어떤 일들이 전개될까? 미식축구부가 되어 저도 가입하고 싶은데요 92년 4월, 도쿄 도립 도야마 고등학교 입학. 신입생들의 입학을 상 급생들은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도야마 고등학교는 서클활동이 아주 활발한 학교이다. 40개가 넘는 서클들이 신입생을 확보하기 위해 등교시간이나 쉬는 시간이 되면 쟁탈전을 벌인다. 운동 관련 서클은 유니폼을 입은 채, 복도를 질주 하며 후배들의 시선을 끈다. 문화 관련 서클은 교실에 들이닥쳐 즉 석 연주를 하고, 즉흥극을 벌이기도 한다. 어쨌든 그 열기에 우리 신입생들은 압도되고 말았다. 난 료라는 아이와 사이가 좋았다 188센티미터에 90킬로그램이나 되 는 그는 붐비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어도 한눈에 알아볼 만큼 덩치 가 좋았다. 그러니 운동 관련 서클이 그를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쉬 는 시간이 되면 료의 자리는 상급생들로 늘 북적거렸다. 료와 나의 출석번호는 1번 차이. 자리도 가까웠다. 상급생들이 어 떻게든 료를 끌어들이려 애쓰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며, 참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나한테도 서클에 가입하라는 권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바둑부, 장기부, 합창부, 문학부…… 그러나 어떤 것도 나 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입학하고 나흘 정도 지났을까. 그날도 료의 자리에 운동부 상급생 들이 우르르 몰려와 있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 중의 한 명에게 말 을 걸었다. 저어, 저도 가입하고 싶은데……. 뒤돌아보는 상급생. 말을 건넨 사람이 나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쇠 사슬에라도 친친 매인 것처럼 표정이 굳어진다. 무리도 아니다. 내 가 말을 건넨 그 선배는 위압감을 풍기는 보호구를 착용하고, 한 손 에는 헬멧을 들고 있었다. 그랬다, 미식축구부원이었던 것이다. 다 시 한 번 그 선배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미식축구부에 넣어 주십시오. 미식축구부에 들어가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가 도야마 고등학교를 선택했던 이유가 도야마 고등학교 미식축구부 애들은 뜨거운 놈들 이라던 정형외과 의사선생님의 말씀 때문이었으 니 내가 미식축구부에 들어가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들어가고 싶으니까 들어간다. 거기에 장애 라는 두 글자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은 농구부에 들어갈 때와 똑같았다. 나의 포지션 농구보다 훨씬 격렬한 미식축구에서는 내가 선수로서 활약할 수 없 었다. 매니저 자격으로 미식축구부에 들어갔지만, 마실 것을 준비한 다든지 운동 전문점에 가서 필요한 것을 사오는 등의 매니저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바짝 약이 올라 있었지 만 연습 경기중에 남보다 갑절이나 큰소리로 응원하는 것으로 울적 한 기분을 풀어야 했다. 내가 팀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거추장스 러운 존재로 남진 않을까, 꾸역꾸역 밀려드는 그런 잡념을 하루 빨 리 부숴 버리고 싶었다. 감독님과 코치는 이미 알아채고 계셨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거의 필사적으로 연구하셨고, 드디어 결론을 내렸다. 컴퓨터. 초등학교 때 처음 만난 워드프로세서 이후 4년 만에 이루어 진 컴퓨터와의 재회였다. 미식축구 하면 덩치 큰 남자들이 몸싸움을 벌이는 운동쯤으로 생각 할지도 모른다. 분명히 그런 점도 있다. 라인이라 불리는, 몸싸움이 전문인 포지션에는 고등학생이라지만 100킬로그램급 덩치들이 늘어 서 있다. 그들이 보호구를 착용하고 상대를 공격해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스포츠라기보다는 오히려 격투기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결코 그것만은 아니다. 육탄전이라는 이미지 뒤에는 지혜, 즉 전략이 받쳐 주고 있다. 절 반은 머리로 하는 스포츠, 그것이 바로 미식축구이다. 내게 맡겨진 임무는 데이터 정리였다. 상대팀의 데이터를 모아 컴퓨터에 입력하고 그것을 분석하여 시합에 활용한다. 상대팀은 이 럴 때 오른쪽 플레이는 몇 퍼센트, 왼쪽 플레이는 몇 퍼센트. 이 럴 땐 패스를 하는 경우가 몇 퍼센트, 달려오는 경우가 몇 퍼센트. 이런 식의 데이터를 일목요연하게 표로 정리해 감독님께 제출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녹화된 테이프를 보며 밤을 새는 날도 많았다. 그뿐 아니었다. 신입생의 포지션을 결정하는 코치 회의에 특별히 참가하기도 했고, 코치가 없을 때에는 연습중에 지시를 내리는 등의 일도 담당했다. 내가 미식축구에 무슨 특별한 지식이 있는 건 아니 었지만,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선수도 아니고 매니저도 아니다. 역할을 따지자면 코치에 가까울지 도 모르지만, 코치도 아니다. 아주 애매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감독 님과 코치는 그 애매한 입장을 오히려 십분 활용하셨다. 바로 선수 와 매니저와 코치의 3자간을 연결하는 중요한 라인 역할. 드디어 나 이게도 하나의 포지션이 맡겨진 것이다. 25인의 용사 우리들 도야마 그린 호네트 는 상당히 강한 팀이었다. 덩치로만 본다면 내세울 것이 없었지만, 사립고등학교 가운데 우리를 누를 팀 이 없을 정도였다. 미식축구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체검사를 받 아야 하는 학교가 있다는 말을 듣고 깜짝놀랐다. 하지만 우리 학교 는 체중이 40킬로그램 조금 넘는 사람까지도 받아들였다. 만약 덩치 로만 따진다면 도쿄 도내 최고가 아닌 최저 5위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덩치를 능가하고도 남을 지도력 이 있었다. 과거 전일본(全日本)의 선수였던 두 분의 코치와 그분들을 중심으로 한 감독님은 전국에서 인정해 주는 환상적인 팀이었다. 그런 코치진 이 전술과 정신 면에서 확실하게 지도해 준 덕분에, 도야마 그린 호네트 는 언제나 도쿄도 대회에서 베스트4에 들어가는 강호로 꼽힐 수가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들의 구호는 관동제패(關東制覇) 로 바뀌 어 있었다 우리보다 센 상대를 차례로 쓰러뜨리고 관동지역에서 최 고 팀이 된다. 이것이 우리들의 꿈이었다. 2학년 봄. 우리들의 꿈은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도쿄 도 대회 준준결승전. 상대는 우승후보로 첫손 꼽히는 니치다 이산(日大三)고등학교. 대학 부속 고등학교일 경우 대부분은 대학의 유니폼 색깔을 그대로 따라서 입은 것이 관례이다. 니치다이산 대학 교는 피닉스(불멸의 새)를 본뜬 붉은색 유니폼이었지만, 니치다이산 고등학교는 블랙레지스탕스 라는 팀 이름 그대로는 살려서 헬멧부 터 유니폼까지 온통 검정색 일색. 시각적인 효과만으로도 상대방의 기를 질리게 만들었다. 그 팀은 막강했다. 료 정도의 덩치들이 그 학교에는 우글우글했다. 덩치뿐 아니라 힘도 강하고, 또 빨랐다. 눈앞에서 커다란 벽이 순 식간에 이동한다 (선수의 이야기)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우리에게 대단한 강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야만 한다. 관동대회에 나가는 팀은 도쿄 도에서 4개 학교. 즉 베스트4에 들어야만 한다. 이번 경기에서 준결승 진출이 결정되면 관동대회에 출전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게임에서 진다면? 끝장이다. 선배들은 졸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이었다. 그날 경기는 비 오는 날의 대결전이었다. 야구와는 달리 미식축구 는 아무리 비가 와도 경기가 진행된다. 우리 팀의 컨디션이 나쁜 편 은 아니었지만, 경기는 줄곧 상대팀의 페이스에 끌려갔다. 선취점을 빼앗기고 주도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주룩주룩 비는 계속 내렸다. 우려하는 분위기가 벤치를 감싼다. 그러나 누구하나 승리를 포기하 는 사람은 없었다. 후반전에 접어들자 시간이 촉박했다. 흙탕물에 뒤엉켜 사투를 벌이 는 선수들, 초록색과 노랑색으로 어우러진 우리의 유니폼은 이미 무 슨 색깔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등번호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지만 꿈을 향해 지치지 않고 싸우는 그들의 모습에서는 어떤 빛이 발산되 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목청껏 내지르는 응원의 고함소리. 선수 교대를 하고 벤치로 돌아온 그들을 위로하고,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정도였다. 그러나 무력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나에게도 선수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이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동료 를 믿고 승리를 확신하는 것! 14대12. 시합종료 직전의 대역전극이었다. 마지막까지 희망을 접지 않고 각자에게 부여된 역할을 완수했다. 그 결과 얻은 승리. 감동이 멈추질 않았다. 그때 눈물로 뒤범벅이된 나의 시야에 놀라운 광경이 들어왔다. 평소 그리도 무뚝뚝하고 무표정하기로 유명하던 선배가 그라운드에 무릎을 끓고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는 우리가 정말 엄청난 일을 해낸 거야. 미식축구팀에 들 어오길 정말 잘했어 라는 생각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흐르는 눈 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선수들의 얼굴은 흙탕물, 비, 땀, 그리고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 다. 둥글게 모여 우렁찬 외침을 올리면서 헬멧을 높이높이 던져 올 렸다. 모두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그들은, 아니 우리는 이 날을 위 해 미식축구에 몸바쳤던 것이다. 니치다이산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우리는 그 뒤로도 파죽지세로 승리를 거듭하며 도쿄 도대회의 우승을 거머 쥐었다. 도야마 고등학교 미식축구부 사상 두 번째의 쾌거였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은 어이없는 고배를 안겨 주었다. 관동 대회 1 회전. 상대팀은 시즈오카 현 대표팀인 미시마 고등학교. 득점을 주 고받은 결과 동점이 되어, 28대 28로 시합종료. 대회의 규정에 따라 승부는 동전 던지기로 결정했다. 난 라인 가까이에서 그 광경을 살 폈다. 심판이 동전을 튕기는 순간, 우리 편 주장이 머리를 감싸쥐며 털썩 주저앉는다. 꿈 이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오늘이 있기까지 우리 부원들의 머릿속에는 온통 관동제패 로 꽉 차있었다. 길을 걸으면서도, 수업을 받으면서도, 그리고 목욕을 하 면서도 우리는 어떻게 하면 강해질 수 있을까 만을 생각했다. 열병 을 앓듯 가꾸어 온 그 꿈이 깨지는 순간, 누구라도 허탈감에 털썩 주저앉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 이 걸리지 않았다. 관동제패라는 꿈을 향해 함께 뛰면서, 25인의 자 랑스런 동료들이 남아 있기에. 우리 손으로 만든 영화 조감독이 더 좋아! 매년 9월이면 우리 학교에서도 도야마 축제 가 열린다. 예외가 있 긴 했지만, 1학년은 전시, 2학년이 연극, 그리고 가장 상급생인 3학 년은 각 반마다 영화를 한 편씩 촬영했다. 초청객들 입장에서야 아 마추어 고등학생의 연극이나 영화보다는 파티나 먹거리에 더 관심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뭔가를 창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우리의 입 장에서 보면, 이보다 더 재미있는 문화제는 없다. 우리 3학년 C반의 영화제작은 2학년 가을부터 시작됐다. 학교 측에 서는 도야마 축제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학년이 바뀌면서 아이들도 반 배정을 새로 받기 마련이지만 우리는 3학년이 되어도 반은 2학년 그대로 였다. 영화의 제작기간이 6개월로는 모자란다는 이유로 학교 측에서 3학년이 되어도 반 변경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선 감독부터 뽑았다. 연극을 하며 친해진 멤버들이 감독은 오토 밖에 없어. 우리가 열심히 따라 줄 테니까 함께 좋은 영화를 만들어 보자 며 나를 밀어 주었다. 튀기 좋아하고 경쟁하기 좋아하는 나. 싫지는 않았다. 모두가 밀어 주는 힘을 업고 멋진 감독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나. 미치오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와는 미식축구부에서도 함께 활동했 기 때문에 1학년 때부터 사이가 좋았다. 발달된 운동신경과 뛰어난 신체균형을 지닌 그는 런닝 백이라는, 볼을 쥐고 달리는 포지션을 맡았다. 그에게는 검은 바람의 사나이 란 별명이 있었다. 여름 합 숙훈련 때, 깜깜한 어둠속에서 미치오의 하얀 이빨과 하얀 티셔츠만 이 펄럭이는 것을 본 사람이라면 그의 별명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나 그의 매력이 운동능력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말로는 표 현하기 어려운, 사람을 끌어들이는 신비한 힘이 그에겐 있었다. 나 는 이런 미치오만은 아무래도 대적하기 어렵다 며 이미 결론을 내 렸다. 나는 공부벌레에게 졌다 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라 단순한 성적의 우열이 내가 정한 인간의 잣대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어떤 점이 나를 꺾게 만들었을까. 한마디로 말해 스케일 이었다. 그의 그릇은 아무리 물을 부어도 넘 치지 않을 것 같은 도량과 무엇에도 속박당하지 않는 자유로움으로 가득했다. 그의 앞에 서면 내가 얼마나 미약한 인간인가를 절감해야 했다. 그런 미치오가 감독에 입후보한다고 한다. 나는 아쉬운 마음이 들 면서도 기뻤다. 내가 감독이 되기는 힘들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좋은 영화를 찍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었다. 미치오가 아니라 내가 감독이 돼야 라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감독 자리는 미치오가 더 어울렸기 때문이다. 미치오의 진면목을 모르던 몇몇 친구들은 그래도 나를 밀어 주었 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들을 설득했다. 정말 좋은 영화를 찍고 싶다면 내가 아니라 미치오를 감독으로 시 켜야 돼. 미치오 감독, 오토 조감독. 3학년 C반의 영화제작은 이렇게 시작됐 다. 생명의 물 영화를 통해 호소하고 싶은 테마를 설정하고 각본을 짜는 데만 거 의 6개월이 걸렸다. 결정된 각본이 취소된 적도 있었다. 두세 달이 나 걸려서 만든 작품이었던 만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까지는 상 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모처럼의 기회니까 모두가 납득할 만한 좋은 작품이 되도록 해보자 며 과감하게 백지로 돌렸다. 테마가 결정되고 각본작업에 들어간 것은 3학년 5월경의 일이었다. 테마는 죽음. 어쩌면 삶 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 다. 그해에 개최된 전국 고등학교 연극대회 에서 최종선발까지 남 은 16개 학교가 거의 죽음 을 테마로 삼은 것을 보면 그 당시 죽음 이 얼마나 우리의 관심을 맴돌았는가를 알 수 있다. 줄거리는 대충 다음과 같다. 홀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고등학교 2학년 오토루. 몇 년 전에 누나가 자살 했고, 아버지 또한 취중에 싸움을 벌이다 돌아가셨다. 그 결과 오토루는 삶의 의미 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어느 날 어머니가 아버지나 누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또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고 그는 조금씩 산다는 것 의 소중함에 대해 눈뜨게 된다. 어느 날 너무도 사랑하던 미나미가 사고를 당해 병원에 실려 간다. 방황하 는 오토루 앞에 나타난 돌아가신 아버지. 아버지는 오토루에게 생명 이 얼 마나 신비로우며 인간 하나하나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가르쳐 준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었다. 눈을 뜬 오토루에게 미나미가 의식을 되찾았다는 소식이 날아 든다. 다시 살아난 미나미를 만난 오토루는 산다는 것 의 그 멋진 의미를 소중하게 받 아들인다. 프로는 아니다. 고등학생이 생각하고 고등학생이 쓴 작품이다. 어 쩌면 너무 뻔한 스토리에 유치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들로서는 만족스러운 내용이었다. 우리들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반 친구가 처음 이 작품을 써가지고 왔을 때, 우리는 모두 다 감탄했다. 나와 똑같은 나이에 이렇게까지 생각을 해가며 작품을 쓸 수 있다니…… 솔직히 말해 놀랐고, 나는 그 정도에도 못 미친다고 생각하자 속상하기도 했다. 혹시 관심있는 분이 계시다면 꼭 한번 보기 바란다. 근처 비디오 대여점에 가 인간적인 이야기 코너를 뒤적거리면 있겠지만…… 사실 없어서 너무나도 유감이다! 제목은 평소 읽은 책이 많아 박학다식하던 미치오가 지었다. 우슈 쿠뵈하(usquebaugh).' 고대의 게일어(아일랜드어)로 생명의 물 이 란 뜻이며 위스키 의 어원이기도 하다. 우슈쿠뵈하 라는 이름이 붙여지면서 이 영화 또한 생명이 불어 넣 어졌다. 서로가 하나 되어 본격적으로 촬영을 시작한 것은 1학기 기말시험이 끝난 7월 중순부 터였다. 약 한 달 정도 걸린 촬영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곳곳에 서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인적인 더위. 7월 중순부터 한 달간은 가장 더운 시기다.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하루 종일 촬영을 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 었다. 그래도 우리들은 나은 편이었다. 30도를 훨씬 웃도는 더위 속 에서 감독의 엄격한 지도를 받아가며 연기를 해야 하는 배우들. 개 중에는 겨울 장면이라 코트를 입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저 바 라보는 것만으로도 지옥이었다. 가장 힘들었던 사람들은 카메라, 음성, 조명을 맡은 스태프진들이 다.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땀이 줄줄 나는 판에, 무거운 기자재를 떠메고 다녀야만 한다. 촬영이 시작되면 그들이 처한 상황은 더욱 가혹해진다. 눈에 땀이 들어가도 딲아낼 수 없었고 모기에 물려도 참아야 했다. 특히 카메라맨은 더 심했다. 그만큼 인내력 있는 사람 이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카메라 담당의 에노. 마음이 넉넉하면서도 힘이 억척스러웠던 친 구. 우리반 설문조사결과 장래의 좋은 아버지 상 부분에서 당당하게 1위를 차지한 친구다 맡은 일을 언제나 묵묵히 행하는 믿음직스러운 사나이. 2학년 때 함께 연극을 했을 때였다. 누구도 맡으려 들지 않 았던 일(라스트 신에 등장하는 벚나무를 떠받치고 있는 역)을 그는 혼자서 해냈다. 결코 겉으로 드러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C반의 대들보나 다름없는 사람이 바로 에노인 것을 우리 반 친구들은 누구 나 알고 있었다. 나와 미치오의 콤비 또한 멋졌다. 조감독인 내가 맡은 일은 촬영 전까지의 모든 준비였다. 어디서 촬영하고, 집합은 몇시에 하며, 배 역은 누구누구가 필요하고, 스태프진은 어떤 사람이 필요한가. 기자 재는 현재 어디에 있고, 촬영장소까지는 누가 들고 가는가 등등 세 세한 것들을 정리하고 파악했다. 내가 준비해 놓은 재료로 요리를 하는 것은 미치오의 역할, 현장에 서의 모든 지휘는 미치오가 맡았다. 그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었고, 센스도 있었다. 그가 지휘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내가 감독이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우리는 이 영화 포스터에 한 방울의 물 이라는 서브 타이틀을 붙 였는데 그것은 오토루에 꿈에 등장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준 대사 에서 따온 것이다. 인간은 한 방울의 물과 같단다. 한 방울의 물은 바다에 떨어지면 그 존재 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하지. 그러나 바다는 그 한 방울 한 방울의 물로 이루어진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오토루야, 너는 지금 혹시 사라지려는 생명을 앞에 두고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려는 것은 아니겠 지? 하나하나의 인간으로 구성된 이 세계를 생각해 보렴. 그 모두가 한결같 이 소중한 생명 을 지닌 존재란다. 나는 이 대사가 좋았다. 그러나 영화촬영을 다 끝낼 즈음에 이르러 서 물과 인간의 결정적인 차이를 깨달았다. 물은 어떤 모양을 주어 도 결국은 물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저마다가 모두 개성을 갖고 있지 않은가. 적재적소 라는 말을 실감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미치오처럼 현장을 지휘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뒤치다꺼리를 잘하는 나 같은 사람도 필요하다. 에노처럼 무대 뒤의 일을 묵묵히 봐주는 사람이 필요한가 하면 스크린에 배우로 나서야 비로소 특징을 발휘하는 사 람도 필요하다. 서로의 차이 를 특징 으로 활용해서 멋진 영화를 만들었던 우리. 나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영화를 찍은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 다. 선전용 팜플렛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적었다. 우기 모두가 다음 세대에 전해주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삶의 존귀함, 인 간과 인간의 소중한 만남……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그 문제를 되짚 어 나가는 가운데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 이었는가를 이 영화를 통해 깨닫기 바란다. 수학은 정말 싫어 5점짜리 인기스타 나는 원래 공부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고등학생이 되 자 문과와 이과로 나뉘었다. 문과에 들어간 나는 수학과 물리 같은 이과 과목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여실히 점수에 반영되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처음 치른 정기시험은 어느 정도 만족할 만 했 다. 수학도 평균점수는 되었기 때문에 일단 안심. 그러나 그 후론 내리막길을 굴러가듯 점수가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무리도 아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머릿속은 미식축구로만 가득 차 있었으니. 미식축구부의 명예를 위해서 밝혀 두지만 미식축구는 미식축구대로 열심히 하면서 공부도 열심히 한 학생들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도 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뭔가 한 가지에 집중하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내 성격 때문에 동시에 두 가지 일을 잘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난 생전 처음으로 열등생 이 되고 말았다. 어느 날 미식축구부 친구와 둘이서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 또한 성적이 형편없었다. 그때 옆반 여자애가 친구와 쑥덕이는 소리가 들 여왔다. A 바로 쟤들이야, 미식축구부의 멍청이 콤비. B 전에 친 수학 시험에서 있잖아, 둘이 합친 점수가 5점이래. A 어머, 정말 웃기는 애들이다, 그치? 깔깔깔! 나는 분개했다. 잠깐. 너희들 말야, 사실은 똑바로 알아야지. 둘 이 합쳐서 5점인 것은 사실이지만 쟤는 빵점이야, 5점은 내 혼자 몫 이라고. 쫓아가 말해 주고 싶었지만 5점이나 0점이나 망신살에는 차이가 없다고 판단하고 포기했다. 야, 우리가 화제로 떠올랐잖아. 왠지 인기스타가 된 기분인걸. 튀기 좋아하는 성격이 어디 갈까? 부끄럽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내 점수는 어디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급기야는 공부를 해야만 하는 상황 에 이르고 말았다. 웃어 주는 것도 한두 번이라고, 마침내 수학 선 생님께서 참고 참았던 인내의 끈을 끊으셨다. 1학년 가을의 일이었 다. 평소에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내게 꼭 빌려 주곤 하시던 그 선 생님은 나를 많이 아껴 주셨다. 머리카락과 두피에 좋다 면서 마요 네즈와 요구르트로 머리를 감는, 좀 별난 분이기도 하셨다. 그 분이 엄하게 나를 타이르셨다. 나는 네 성적이 점점 떨어질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원 인은 한 가지. 너무 특별활동에 빠져 있는 것 같아. 하여간 이번 시 험에서 40점 이하가 되면 특별활동은 금지다. 청천벽력이 따로 있을까. 미식축구에 빠져 있느라 공부를 소홀히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결과가 특별활동 금지라니. 무슨 일이 있어 도 40점 이상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기초 가 없었기 때문에 정해진 시험범위를 공부해 봤자 허사다. 교과서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고, 때로는 앞단원으로 다시 되돌아가서 문 제를 풀기도 했다. 수학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별일 아니었겠지만 나 처럼 수학에 질색인 사람에게는 지옥이나 다름없는 고통이었다 몇 번이고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했다. 막다른 길에 몰리면 초능력이 발휘되는 것일까. 65점! 평균점수를 살짝 넘었지만, 나에겐 그야말로 고득점이었다. 수학 선생님의 허락 하에 나는 특별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2학년이 되자 수학 선생님이 바뀌어 1학년 때 선생님과는 거의 만날 날이 없었다. 1학기말 시험이 끝나고 여름방 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학교 앞 큰길에서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 도 나를 알아 보셨다. 그러나 우리 사이에는 큰 도로가 있었기 때문 에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두 손을 메가폰처럼 만들고 큰소리로 물어 오셨다. 오토오! 이번 추가시험은 어땠니이? 우와, 선생님도 너무하시지. 그렇게 큰소리로 추가시험 이야기를 하시다니. 게다가 좋아하는 여자애와 둘이서 걷고 있는 지금…… 스 타일이 박박 구겨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억울했다. 낙제점수 를 받은 것도 아닌데……. 수학은 마지막까지 나를 괴롭혔다. 3학년이 되면 다섯 차례의 정기 시험과는 별도로 학력 테스트라는 것이 있다. 이런 건 하고 싶은 사람만 참가하면 좋을 텐데 라고 투덜투덜 대면서도 도리없이 시험 을 봐야 했다. 그렇다고 다른 과목을 잘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 다. 하지만 수학은 정말 아니었다. 문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 지경 이었으므로 답을 쓴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시험이란 왜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것일까. 한번은 채점된 시험지 를 받았지만 어디에도 점수가 써 있질 않았다. 내 출석번호인 7 이 라는 숫자만이 한 귀퉁이에 연필로 적혀 있을 뿐이었다. 몇 번을 살펴도 역시 점수가 없길래 앞자리의 답안지를 슬쩍 훔쳐 보았다. 147 이라고 씌어 있다. 그것도 연필로. 호, 혹시 하는 생 각으로 옆자리 것도 훔쳐 본다. 123, 역시 연필로 씌어 있다. 이 럴 수가! 내 출석번호라고 생각했던 7 이라는 숫자가 다름아닌 나 의 수학 점수? 200점 만점에 7점! 수학은 정말 싫다. 장래의 꿈 야구선수 다카시 선생님은 저와 쓰짱의 적이에요. 그런 선전포고를 했던 것이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가. 선생님께선 깜짝 놀라 물으셨다. 어째서 선생님이 너희들의 적일까? 선생님은 요미우리 자이언츠 팬이잖아요. 저하고 쓰짱은 한신 타 이거즈 팬이걸랑요. 오토, 너희 아빠도 자이언츠 팬이잖니. 그럼 너희 아빠도 적이겠 네? 그래요. 그러니까 아빠하고 다카기 선생님이 사이 좋게 지내면 되 잖아요. 하지만 한신은 요새 너무 약하지 않니? 예. 그러니까 제가 이 다음에 크면 야구선수가 돼서 한신에 들어 갈 거예요. 그랬다. 내가 태어나 처음 꿈꾸었던 장래희망은 야구선수 였다. 팔 과 다리가 없는 아이의 장래꿈이 프로야구 선수였다니 자다가도 웃 을 일이다. 그러나 아이들의 꿈이란 어느날은 파일럿이되고 싶다 고 했다가 어느 날은 전철의 차장 으로 바뀌는 것처럼 나도 꿈도 한결같이 프로야구 선수 만을 고집했던 것은 아니다. 내 꿈의 변천 을 한번 되짚어 보자. 초등학교 3,4학년 때에는 장기 프로 기사 가 되고 싶었다. 장기란 상대의 선수(先手)를 읽는 능력에 따라 실력이 판가름 나기 때문에 장애인도 얼마든지 실력자가 될 수 있다.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뭔가를 심어 주기 위해 다카기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 장기. 나 또 한 장기의 재미에 푹 빠졌다. 열심히 장기책을 읽어가며 공부했고,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장기를 둬가며 놀기도 했다. 그러나 몇 년 안에 상당한 실력이 될 것 이라던 선생님의 기대를 나는 보기 좋게 배반했다. 어느 정도 실력이 있긴 했지만, 다카기 선생님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반에서조차 내가 꺾지 못하는 아이들이 몇 명 있었다. 고학년이 되어서야 겨우 깨달았다. 이런 실력으로 프로 기사는 꿈도 꾸지 못한다. 6학년이 되자 미국 대통령이 되고 싶다 고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 은 말을 했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그러나 그 꿈은 사흘 만에 접고 말았다. 미국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미국 국적을 취득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일본인은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상당한 저항감을 느꼈다. 그렇다고 미국 대통령은 단념하고 일본 수상이 되자 는 생각은 없었다. 그때 내 눈에 일본 수상은 그다지 매력적인 직업으로 비치지 않았던 모양이다. 변호사 본격적으로 장래의 꿈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중학생이 되고 나서 였다. 계기는 별것도 아닌 데서 비롯됐다. 반항기의 특성을 유감없 이 발휘하는 내게 어머니께서 넌 말야 그렇게 말싸움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 기 꺾는 걸 좋아하니까 차라리 변호사나 되지 그러니 라 며 핀잔을 주였다. 어머니는 핀잔으로 하신 말씀 이었지만 난 청개 구리처럼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변호사라…… 그거 괜찮겠는데. 어머니와의 사소한 대화 끝에 비롯된 변호사 의 꿈은 5년간 계속 되었지만,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생각이 바뀌었다. 어느 날 사법시험에 관한 신문기사를 보게 됐다. 사법시험에 합격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에 대해 설명하는 그 기사 중에서 특히 합격자의 평균연령이 29.3세라는 대목에서 나는 그만 힘이 쭉 빠져 버렸다. 대부분의 수험생이 대학을 다닐 때 공부를 시작한다고 가정하더라도 사법시험 준비에 걸리는 기간은 약 10년. 그 동안 공 부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그만 등짝이 다 뻣뻣해졌다. 시험에 합격만 해봐, 그 뒤엔 장미빛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생각만 해도 신나지 않냐? 라며 위로를 해주는 친구도 있었지만 그 화려한 20대에서 10년을 통째로 뚝 떼어 낸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되는가. 그런 의문이 뭉게뭉게 피어 올랐다. 답을 찾기란 어려웠다. 공부에만 매달려 얻을 수 있는 성공. 그런 인생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나의 인생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또 그럴 만한 인내력도 내겐 없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변호사 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중학 생 때 어머니와 나눈 별것 아닌 대화를 계기로 쌓아 온 변호사의 꿈. 그러나 그것은 단지 '동경'에 불과 했다. 변호사란 한마디로 폼 나는 직업이 아닌가. 나는 남들 앞에서 이야기도 잘하고, 암기력도 좋아 열심히 하면 합격할지도 모른다. 돈도 많이 버는 것 같다. 하 지만 내가 단순히 그런 이유에서 변호사를 지망하였구나 라는 생각 이 들자 실제로 변호사를 하고 있는 분들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 법 앞에서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 대개 이런 이유로 변호사나 법률가를 희망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달랐다. 이대로 법률세계를 지망하는 것은 소신을 갖고 일하는 분들 에 대한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고 혹시 되더라도 후회하게 될 것 같 았다. 변호사는 폼나는 직업 이라는 막연한 동경만으로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라는 목표를 세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정신상태로는 오래 버티질 못한다. 어떤 직업이든 힘든 고비가 있기 마련인데, 그때 폼나는 직업으로 보였기에 기를 쓰고 얻은 직업 이라면 고비를 넘 기기는커녕 도망치기 바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사는 사회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라 고 생각한다. 그것만 확실하다면 인생의 진로는 자연히 열릴 것이 다. 그 하고 싶은것 을 실현하기 위한 직업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만일 그에 맞는 직업이 없다면 스스로 만들어 내자. 그 정도로 강한 마음이 없다면 내 일로 삼을 수 없다. 또 그 일의 내용이 납득할 만 한 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갖지 못한다. 절대로 녹 록하지만은 않은 사회생활. 그렇다고 어쩔 수 없이 직업을 선택하 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흔들리는 진로 당시 나는 주제넘었다. 정확한 인생의 목표도 없으면서 대학에 가 겠다니…… 라며 세상에 떠밀려 대학에 가는 풍조를 비판하곤 했다. 그러나 이젠 내 차례였다.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희망이 사라지자, 그 자리를 메울 만한 대안이 없었다. 하고 싶은 일 이 없어졌을 때 대학은 내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어찌어찌해서 입학원서는 냈다. 하지만 그런 마음 가짐으로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주위에서는 일단 대학에는 입학해 두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권했지만 그렇게 말하는 일단 이 난 아주 싫었다. 미식축구부도 그만두었고, 영화촬영도 끝냈다. 그리고 입시공부마저 도 하지 않는 나. 내가 시간낭비를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알았지 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목표 없는 생활을 한다는 것이 이토록 괴롭 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관동을 제패한다. 도야마 축제다 하 며 바쁘게 살아온 것에 대한 반동이었는지도 모른다. 순식간에 반년이 지나갔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부분의 친구 들이 대학에 진학했거나 재수학원을 찾아 다니는등 분주하게 새로 운 길 을 시작하고 있었다. 돌아보니 덩그러니 나 혼자만 남았다. 그때 어떤 친구가 이런 말을 해 주었다. 오토, 너무 이상(理想)에만 매달리지 마. 우린 이제 겨우 열여덟 살이야.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결정되어 있는 사람은 그리 흔하 지 않아. 물론 하고 싶은 일을 위해 꼭 배워둬야 하니까 대학에 가 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이 말 한마디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래, 대학에 가자! 재수생 시절 학원을 찾아서 다카다노바바는 학생들의 거리로 유명하다. 그리고 바로 대학진학 을 위한 재수학원 의 거리이기도 하다. 다카다노바바의 역 주변에 는 크고 작은 학원이 수도 없이 많아서 어디로 갈까 망설여질 정도 다. 따로 점찍어 둔 학원이 없어 그저 집에서 가까우면 어디라도 좋 다고 생각하던 내게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착각이었다. 친구가 아주 괜찮은 곳이라고 소개해 준 학원이 있었다. 저어, 4월부터 등록하고 싶은데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이 말을 남기고 접수창구의 여자가 안쪽으로 사라진다. 팜플렛이라 도 가지러 가나 싶어 기나렸는데 그것은 빗나간 추측이었다. 우리 학원에는 엘리베이터나 휠체어용 화장실이 준비되어 있질 않 아 받아줄 수가 없습니다.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정신을 차리고 다른 학원으로 발길을 돌렸 다. 똑같은 이유로 거절당했다. 전 제 발로 계단을 올라갈 수 있으 니까 엘리베이터는 필요없어요. 화장실도 훨체어용이 아니어도 관계 없습니다 라고 말해 보았지만, 학원 측은 결국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책임질 수가 없다 는 이유를 대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 뒤로도 학원 이라는 간판만 보이면 무조건 들어가 문의를 했지 만 줄곧 허사였다. 심한 경우에는 글쎄, 훨체어를 탄 분은…… 이 라며 직설적으로 거절하기도 했다. 아니, 그렇다면 왜 입구에 휠체 어 금지 라고 써붙이지 않았단 말인가. 그러나 분노를 느끼지 않았고, 비탄에 젖어 지내지도 않았다. 그저 놀랐을 따름이다. 예에, 훨체어를 타고 있으시다구요, 다시 생각해 봐야겠는데요. 부모님, 선생님들, 친구들…… 날 아껴 주던 모든 분들의 은혜에 휩싸여 성장해 온 나로선 내가 장애인임을 의식할 기회가 그만큼 없 었다. 장애인으로서 벽에 부딪힌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저 놀라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모처럼 대학에 가자, 공부를 하자 고 결심하지 않았던가. 집에서 혼자 공부를 해낼 만큼 강한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통학할 수 있는 학원이 필요했 다. 상황이 절박했다. 그때, 신문 광고를 보고 3대 학원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슨다이 학 원이 가까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규모가 큰 학원인 만큼 등록을 받 아주지 않을까, 반신반의하며 집을 나섰다. 본관 건물에는 계단이 있었지만, 신관 건물에는 엘리베이터도 완비 돼 있었다. 전동 휠체어로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환경. 문제는 허 가를 받느냐 못 받느냐뿐이었다. 처음 상담에 나선 부장쯤 돼 보이는 분은 역시 난색을 표했다. 책 임이…… 라며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 또 나온다. 이번에도 안 되는 가 싶어 낙담하는 그 순간에 젊은 직원들이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 죠? 하며 반론을 편다. 그 덕분인가, 이야기는 입학허가 쪽으로 가 닥이 잡혔다. 상담이 끝난 후 실제로 훨체어로 이용할 수 있는지 없는지 체크하 기 위해 젊은 직원과 함께 건물 안을 돌았다. 우리 함께 잘해 봅시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 그분이 내게 말해 주었다. 그 한마디에 얼마나 용기를 얻었는지 모른다. 지금까지 수많은 학원을 돌며 퇴짜를 맞았 지만, 그 서운함이 단숨에 날아가면서 길고도 짧은 1년간의 재수생 생활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잔뜩 부풀어 왔다. 자전거 사나이 내가 다니고 있던 슨다이 신주쿠 학원은 사람들에게 유령학원 으 로 불렸다. 신주쿠라는 이름 탓에 누구나 신주쿠역 주변에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오쿠보에 있었다. 오쿠보까지는 집에서 전철로 두 정거장. 그러나 전철로 통학하기가 어려운 나는 걸어서 다닐 수밖에 없었다. 전동 휠체어로 꼭 30분 걸 렸다. 결코 가깝지는 않은 거리였지만, 다카다노바바의 거의 모든 학원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 정도 거리는 문제도 아니었다. 하지만 비라도 오는 날이면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왼쪽 어깨와 목 으로 우산을 받쳐들고,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손잡이 부분을 발로 꽉 누른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휠체어를 운전한다. 상당히 힘이 드 는 동작이기 때문에 맑은 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체력이 소모되었다. 게다가 우산 때문에 왼쪽 절반 정도는 앞이 보이지 않 아 신호등도 잘 보이지 않았고 갑자기 튀어나오는 자동차도 눈에 들 어오질 않는다. 이렇게 위험한 상황 속에서 휠체어를 20분씩이나 타 야 하는 것은 상당히 힘들었다. 그럼에도 별로 고생이라는 생각 없이 1년을 다닐 수 있었던 것은 학원생활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학원생활이 즐거웠다니? 하고 의 아해 하겠지만, 정말 즐거웠다. 슨다이는 학급제로 운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학원과는 달리 고정석이었기 때문에 친구를 사귀기 쉬 웠다. 더구나 우리 반의 대부분이 동일한 대학을 지원하고 있었으므 로 같은 목표를 향하는 동료의식 같은 것이 싹텄는지도 모른다. 처음 알게 된 친구가 리키마루였다. 180센티미터 가까운 키에 머리 는 장발이었으며 얼굴이 갸름했다. 언젠가 저 친구 마약 하는 거 아냐? 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인상이 고약했다. 쉬는 시간에 혼자 서 푸우- 담배연기를 내뿜는 모습이 어찌나 거칠었던지 도저히 가까 이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겼다. 어느 날 쉬는 시간에 물 마시러 갔다가 그만 수업에 조금 늦고 말 았다. 수업은 이미 시작된 상태였는데 마침 담배 피우느라 늦어 버 린 리키마루와 문 앞에서 마주쳤다. 다소 엄한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수업 도중 교실 문 열기가 좀 뭐해서 1층 벤치에서 수업이 끝날 때 까지 기다리기도 했다. 리키마루와 이야기를 나눈 것은 그때가 처음 이었는데, 겉으로 풍기는 이미지와는 달리 대단히 씩씩하고 좋은 친 구였다. 중학시절 농구부의 팀메이트가 리키마루의 고등학교 친구였 다는 얘기를 듣고는 둘은 곧바로 의기 투합했다. 그 뒤 우리 둘은 단짝이 되었다. 리키마루는 자전거를 아주 좋아해서 학원에도 자전거로 통학할 정 도였다. 지금까지 내 주변에는 자전거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존재는 대단히 신선했다. 내가 다니던 슨다이 학원에 는 지방에서 올라온 아이들도 있었고 사립 고등학교 출신도 있었다. 리키마루를 비롯해 그 학원에서 사귄 친구들은 내가 모르는 세계를 경험한 경우가 많았다. 그것이 학원을 즐기며 다닐 수 있게 해준 또 하나의 원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고비인 여름방학이 끝날 때쯤에는 친구들이 그룹으로 만들 어져 있을 정도였다. 한 반에 100명 정도 되는 많은 학생들이 있었 지만, 그 분위기는 학원이라기보다 오히려 학교에 가까웠다. 아침부 터 도시락을 가방에 넣고 가사이 임해공원으로 소풍을 가기도 했고, 샤부샤부 뷔페에서 큰 접시로 16개나 비우기도 했다. 어떤 면에서 미식축구에만 푹 빠져 있었던 고등학교와는 달리 놀이 라는 부분에 더 충실하던 시기였다. 친구와 서로 연락을 주고 받기 위해 삐삐를 산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러나 재수 생활을 하던 그 해에는 공부가 나의 임무. 이렇게 놀 아도 정말 괜찮은지……. 기적 그래, 지금부터 시작이야 공부하고는 담을 쌓고 지냈던 고등학교 시절이었던 만큼 나의 성적 은 형편없었다. 학원에 등록을 하고 나서 첫 수업은 영어시간이었 다. 선생님께선 'S(주어), V(동사) O(목적어) 라는 말을 연발하였지 만, 난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용기를 내어 옆자리 학생에게 물 어보았다. 미안한데 S니 V니 하는게 뭐지? 무슨 암호니? 옆자리 학생은 이 자식, 날 놀리는 거야 뭐야. 아니면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멍청인가 하는, 분노와 동정이 뒤섞인 눈길로 바라보 았다. 정말 몰라서 물어보았을 뿐인데……. 고등학교 때 모의고사라곤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성적이 어느 정 도인지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100명이 넘는 학생들 가운데 바닥을 길 정도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는 제로에서 다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과연 1년 동안 얼마나 성적을 높일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마치 그것이 다른 사람의 문제이기라도 한 것처럼 생활을 즐기 고 있었다. 내가 가고 싶은 대학은 와세다였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 흔히 인종의 도가니 라고 표현되는 이 대학에는 다양한 가치 관을 지닌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 개성이 서로 맞부딪치는 대단히 강력하고 매력있는 대학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환경에 나를 몰아넣고, 자신에게도 뭔가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일 을 찾으러 대학에 가는 나에게는 와세다가 가장 적합 한 대학처럼 여겨졌다. 거리도 가까웠다. 집에서 와세다 대학의 본관 캠퍼스까지는 걸어서 5분 정도. 문학부의 캠퍼스는 창문만 열어도 보일 정도였다. 이공학 부의 캠퍼스도 모교인 도야마 고등학교의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었 다. 수학과는 거리가 먼 내가 이공학부의 위치까지 고려에 넣을 필 요는 없지만. 이렇게 가까우면 친근감 또한 솟아나는 법이다. 다른 대학에 가게 되면 또다시 이사를 가야 하지만 집만 나서면 보이는 와세다 대학. 그러나 그렇게 가까운 대학에 들어가기가 왜 그리도 멀고 험했는지……. 학원에서 처음 치른 모의고사 채점 결과를 확인한 나는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내가 지망하는 5학부 가운데 4학부가 E판정. 나머지 하나도 D판정이었다. 재고가 필요 하다고 씌어진 회신용지 를 보고도 도대체 어쩔 셈이야, 이 성적으로 와세다 대학이 가당키 나 해? 라며 자책했다. 성적이 안 좋은 줄은 알았지만 내 실력이 알 파벳 E와 D로 확실하게 자리매김이 되는 것을 보고는 약이 오르다 못해 속이 부글부글 끊어올랐다. 내가 정말 와세다 대학에 입학할 수 있을까. 나만의 공부방법 내가 공부하는 스타일은 남들과는 좀 달랐다. 재수생이라면 모두들 새벽 두세 시까지는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을 연상하겠지만 난 밤 10시만 넘으면 잠자리에 들었다. 재수생 맞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지 만 체력이 달리는 나는 수면이 부족하면, 다음날 컨디션이 엉망이 되고 만다. 그래서 10시만 넘으면 무조건 잠자리에 들었다. 이유는 또 한 가지 있었다. 집에서는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 다. 물론 집에 들어가면 만사가 귀찮아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내 방엔 책상이 없었다. 침대, 화장실, 책장으로 이미 꽉 차버린 내 방 에 책상을 둘 공간이 없었던 것이다. 부모님께서 텔레비전을 보시는 거실에서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산 만한 분위기 때문에 책이 머릿속에 들어올 리 없다. 그래서 저녁이 되면 아예 일찍 자버렸다. 그 대신 아침 일찍 일어났다. 늦어도 6시 반이면 일어나서 아침식 사를 마치고 가급적 빨리 학원으로 가서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자 습실에서 공부를 했다. 실은 이곳이 내겐 아주 특별한 곳이었다. 왜냐하면 원래의 자습실은 본관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용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학원에서는 신관 1층에 있는 작은 교 실을 오토용 자습실 로 만들어 주었다. 정말 고마웠다. 나 혼자 있 었기 때문에 집중할 수 있었고 최상의 컨디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수업을 마치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공부를 계속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런 식으로 공부에 집중했고 집에 돌아와선 아 버지와 프로야구 중계를 보며 좀 쉬다가, 10시가 넘으면 잠드는 생 황을 계속했다. 주변에선 그야말로 마이 페이스구만 하며 웃었지 만, 나는 그 말이 칭찬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 이야말로 정말 중요하기 때문이다. 수험과목은 국어, 국사, 영어였다. 국어는 어느 정도 자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기로 했다. 국사는 고등학교 때 유 일하게 성적이 좋았던 과목이라 후반기에 접어들어 집중적으로 해도 문제 없다는 계산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필사적으로 높은 점수를 얻어야 하는 영어. 나의 영어 실력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빨간 불 이었다. 여름방학 때 영어만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그때만큼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밥을 먹으면서도 결코 영어책을 손에 서 놓지 않았다.(평소에 노력하는 성실한 학생들은 결코 나를 따라 하지 말도록!). 매일 10시간 이상은 공부를 했던 것 같다. 가을이 되어 다시 마이 페이스 생활로 돌아갔지만, 여름방학의 효과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좋았다. 거의 바닥에서 헤매던 성적 이 쑥쑥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9월 무렵에는 중간 정도 하더니 겨 울이 되자 상위권 10등 안에 들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합격할 수 있겠다 고 마음을 놓은 적은 한순간 도 없었다. 지망학교 모의고사에서는 여전히 E판정과 D판정이었다. 간혹 이번에 시험을 잘 본 것 같은데 라며 기대도 해보지만, 기껏 해야 C판정이었을 뿐이다. 내 실력이 늘기 시작한 것은 분명했지만, 와세다 대학에 합격할 정도의 수준은 아직도 멀었다. 과연 본고사 때까지 실력을 더 키울 수가 있을까. 그런 초조한 마 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직 몇 달 남았다 며 나 스스로를 위 로했다. 변함없는 마이 페이스를 무너뜨리지 않으며 공부를 계속했 다. 오늘의 운세 1월 15일. 사람들은 성인식을 준비하느라 난리들이지만 수험생은 이날 본고사 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성인식 같은 떠들썩한 분위기 와는 관계가 없다. 와세다 대학만을 지원한 나는 본고사를 치를 필 요가 없었기 때문에 다음날 신문에 실린 문제를 풀어보기로 했다. 물론 반은 재미삼아 풀어 본 문제였다. 차리리 풀어 보지 말걸. 1시간 뒤 후회하는 마음에 사로잡혔다. 90점이 되지 않으면 대학진 학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그 시험문제, 내가 가장 자신있어 하던 국 사가 70점밖에 되지 않았다. 두려운 마음에 영어와 국어는 풀어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걱정하는 부모님께 괜찮아요, 본고사와 와세 다 대학의 국사 문제는 출제경향이 많이 다르니까요 라며 안심은 시 켜 드렸지만 그때 내 얼굴은 분명 핏기가 싹 가셔져 있었을 것이다. 2월 1일. 이때부터 주요 사립대학의 입학시험이 시작된다. 어느덧 입시 시즌이 찾아온 것이다. 나도 긴장감에 휩싸인다. 2,3주 지나자 몇 명의 친구들로부터 무슨무슨 대학에 합격했다며 기뻐하는 전화를 받았다. 아직 입학시험조차 치르지 않는 나의 초조감은 극에 달했 다. 와세다 대학의 입학시험 일정은 사립대학 가운데 가장 늦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와세다 대학의 과거 입시문제를 풀어 본 다. 어이? 하며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높은 점수를 얻었다. 전 체적으로 70점 이상. 국사는 8,90점대였다.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 가 생각해 다시 몇 년 전 것 까지 풀어 보았지만, 점수는 여전히 높 았다. 그렇다면 혹시……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2월 20일. 드디어 입학시험이 시작되었다. 5학부에 지원한 나는 이 제부터 닷새 동안 연속적으로 시험을 치러야 한다. 시험은 거의 하 루 종일 걸리기 때문에 상당한 체력을 요구했다. 체력 면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뒤질 수밖에 없던 나는 꿈에도 원하던 와세다 대학 입학 을 위해 거의 정신력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첫날에는 교육학부 시험. 내가 가장 자신있던 국사의 배점이 다섯 과목 중에서 가장 높았기 때문에 국사 시험만 잘 보면 어느 정도 가 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해프닝이 벌어진다. 둘째 시간이 되 자 갑자기 소변이 마려운 것이다. 예상보다 추운 날씨와 긴장감 때 문이었다. 어떻게든 참아 본다. 보통사람이라면 시험이 끝난 다음 화장실에 다녀오면 되지만, 난 혼자서 화장실을 이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간신히 참아 가면서 셋째 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져 나중에는 온몸을 비비 꼬아야 했다. 게다 가 이번 시험과목은 국어. 암기하고 있던 내용을 시험지에 옮겨 쓰 면 되는 국사 시험과는 달리 독해력과 사고력이 필요한 시험이다. 그런데 내 머리는 온통 화장실 생각뿐으로 필자가 뭘 주장하는지 파 악할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 끝났다. 1년간 열심히 해온 공부. 그 모든 것이 결국 오줌 에 지 고 말았다. 3월 1일. 합격자 발표 첫날. 이 날은 문제의 교육학부와, 최대의 난관이라고 알려진 정경학부, 두 군데 모두 가능성이 낮았다. 며칠 전에 몇몇 학원에서 나눠 준 모법답안을 보고 채점을 해보니, 커트 라인에 닿을락말락 했다. 혹시…… 기대를 가져 봤지만, 집에서는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제 대로 시험을 치르지 못했던 교육학부와, 사립대학교 문과계열 학부 중에서 최대의 난관이라고 일컬어지는 정경학부가 아니던가. 기대를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속으로 어느 정도는 자신이 있었기에 마음이 부풀어 있었지만 부모 님은 달랐다. 합격여부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었고 어떻게 하면 풀 이 죽어 있을 나를 상처받지 않도록 위로해 줄까 고민하고 계셨기 때문에 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더구나 아침 TV에서 방송해 준 별자리로 본 오늘의 운세 가 불안해하는 부모님에게 최 후의 일격을 가했다. 오늘의 내 별자리(양자리) 운세는 수많은 사 람들 앞에서 망신당할 운세. 평소 별자리 따위는 믿지 않던 부모님 이셨지만 그날만큼은 완전히 포기하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주룩주룩 빗발이 거셌다. 눈물의 비가 되지 않기를 기도 하며 발표 장으로 갔다. 5분도 안되는 거리. 별다른 생각을 할 겨를 도 없이 도착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 때도 어머니께서 다녀오셨기 때문에, 합격자 발표 를 직접 체험하기는 처음이었다. 텔레비전에서. 보았 던 것처럼 인파를 헤치고 게시판 앞으로 나아가……. 이런 식의 광 경을 상상했던 나는 그만 실망하고 말았다. 헤쳐나갈 만큼의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이미 다른 대학 몇 군대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쏟아 지는 빗속을 아침 일찍 찾아올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다른 녀석들 하고 난 근본적으로 와세다 대학에 들어가고자 하는 의지가 달라! 터무니 없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우선 정경학부의 게시판으로 향했 다. 4664, 4664, 4664……. 수험번호를 입속으로 되뇌어 가면서 게시판을 죽 훑어 본다. 어, 어라, 이상한데. 몇 번씩이나 확인해도 틀림없다. 무슨 까닭인지 게 시판에는 4664라는 네 자리 숫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혹시 내 번호 가 6446이었나? 의아한 마음으로 수험표를 끄집어 내 다시 확인하지 만, 수험표에는 분명히 4664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합격한 것이다 와세다 대학에, 바로 내가!! 믿을 수 없었다. 꿈만 같았다. 설마 합격하리라고는. 게다가 지원 한 모든 학부에. 어떻게 해서라도 와세다 대학에 가고 싶다는 일념 뿐이었다. 거기서 무얼 공부할까에 대해선 생각도 해보지 않았고, 학과 선택에 고민을 해야 할 만큼 많은 학부에 합격하리라고도 생각 지 못했다. 그런 내가 학과 선택 문제로 사치스러운 고민을 했다. 1개월 뒤의 입학식. 나는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 정치학과의 신입생 자리에 서 있었다. 3부 21세기가 원하는 사람 마음의 장벽 없애기 오토다케 형은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이 세상에는 반드시 있다 고 합니다. 저 형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있듯이 나에게도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우리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다 는 생각이 여러분들 마음속에도 자리잡기를 바랍니다. 새내기 시절 건방진 신입생들 96년도 와세다 대학 입학식은 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열렸다. 입 학식 날 캠퍼스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파로 넘쳤다. 1만 명에 가까운 신입생이 모였을 뿐 아니라, 신입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기다리는 선배들의 수도 엄청났다. 물론 자신들의 동아리에 가입시키기 위해 서였다. 고등학교 입학 때도 그런 열기에 시달린 경험이 있었지만, 그것과 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캠퍼스에 들어서서 열 발자국만 걸어도 각 동아리의 선전지가 100장 가까기 쌓일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소란스러움과 멀리 떨어진 이방인이었다. 우리 들 이란 고등학교 시절의 미식축구부 동료들을 말한다. 약속이나 한 듯이 사이 좋게 1년 재수를 하더니 와세다 대학에 나란히 입학했다. 엄청난 인파 속에서도 머리 한 두 개 만큼은 남보다 떠 다니는 거대 한 료, 늘 대장을 맡았던 탓인지 노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나리, 검 은색 정장을 입고 다녀 마피아 라는 별명이 붙은 가게, 긴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나. 그런 모습으로 어디 정장이 어울리겠냐며 친 구들이 놀려댈 정도로 나는 머리를 기르고 다녔다. 겉모습들이 이 모양이니 선배들이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것은 당연 한 일, 내가 선배라도 이런 녀석들이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면 말을 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교정을 함께 걷던 가게가 볼멘소리로 묻는다. 방금 지나간 썬-배 말이야, 왜 선전지를 주려다 내 얼굴을 보더니 그냥 가버리냐? 당연하지. 네놈의 눈매가 얼마나 고약한데. 지당하신 말씀.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야. 내 눈이 뭐 어떻다고? 우리에게 신입생의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지방에서 갓 올라온 녀석은 한눈에도 티가 났다. 선배들이 나누어 준 선전지를 한 아름 껴안고는 조심스럽게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모습이 딱해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4년 전부터 다카다노바바를 휘젓고 다닌 우리들에겐 와세다 대학이 안방보다 훤하다. 그러니 긴장한다면 오히려 더 이상해 보일 수밖에. 어리벙벙한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불량기를 물씬 풍기는 덩 치 큰 대학 새내기들. 과연 그들 앞에는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까. 영어를 위해서라면 별로 적극적인 가입 권유를 받지 못한 나는 직접 흥미있는 동아리 를 찾아나서야 했다. 신입생들이 반 강제적으로 끌려와 듣고 있는 따분한 설명회에 끼어 들어 좀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요 라고 했다 가 단번에 그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껴야 했다. 내 친구들은 대학에서도 미식축구를 계속할 생각이었다. 도야마 고 등학교 출신들이 기둥 역할을 하는 와세다 레불스 는 관동(關東)에 서는 상대할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했다. 고등학교 시절 못 다 이룬 관동제패 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강팀이었다. 그러나 나는 레불스에 가입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미련이 없을 만큼 팀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이제는 나 자신이 주체 가 되어 활동하 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미식축구를 그만두어 응원이나 열심 히 하기로 했다. 2만 개, 혹은 3만 개라고 알려진 와세다 대학의 동아리. 그 중에서 내가 선택한 것은 ESS였다. English Speaking Society'의 악자로서 영어실력을 쌓아 두고 싶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가벼운 마음 으로 가입하기도 했지만, 잔소리라고는 모르시던 아버지가 영어 하 나만큼은 확실하게 해둬라 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신 말씀이 떠 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친구와 함께 ESS의 설명회에 참석한 나는 얼이 빠지고 말았다. 400 명은 족히 들어감직한 강의실에 학생들이 반 이상이나 들어차 있었 다. 선배의 말에 따르면 해마다 평균 200명이나 되는 회원이 가입한 다고 한다. 그뿐 아니었다. ESS는 활동이 빡빡하기로도 유명했다. 동아리에 가입하던 첫날의 일이다. 야, 이것 받아라 라며 영어가 가득 씌어져 있는 책자를 나눠 주었다. 뭐예요? 하고 물었더니 선 배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응, 이달말에 열리는 웅변대회 교재야 라고 말한다. ?? 웅변대회라면 각자의 생각을 발표하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이 동아 리의 웅변대회는 참가자 전원이 똑같은 내용으로 경쟁을 벌인다고 한다. 이번 타이틀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이라는 링 컨의 유명한 연설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화장실에 앉아서도 피플, 피플 하며 살짝 맛이 간 사람처럼 중얼거려야 했다. 빌어먹을, 입 시공부가 끝났다고 좋아했더니 이게 무슨 꼴이람. 결승전 진출 교재는 마치 악보를 연상시켰다. 여기는 강조, 여기는 비교적 빠른 속도로 소화, 여기는 천천히 열정을 담아, 라는 등등의 표시가 잔뜩 들어 있었다. 모두 같은 내용으로 웅변을 해야 했으므로 영어 발음 은 물론이고 얼마나 힘이 있고 웅대한가, 얼마나 유창한가, 억양은 얼마나 정확한가에 따라 승패가 결정났다. 얼마나 당당하게 하는가 도 물론 중요한 평가 항목 중의 하나였다. 모두들 기대하시라. 당당한 태도라면 이 몸의 전매특허가 아닌가. 발음이야 좀 서툴겠지만 남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 만큼은 자신있었 다. 중학교 시절에는 학생회의 임원으로 일했고, 고등학교 졸업식에 서도 졸업생 대표로서 답사를 읽지 않았던가! 긴장의 ㄱ 자도 느끼 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 이제부터 나의 목표는 파이널리스트. 파이널리스트란 본선 진출자를 말한다. 200명 전후의 신입생이 모 두 참가해 웅변을 했다가는 날이 저물고 만다. 그래서 본선이 열리 기 1주일 전부터 상급생을 심사위원으로 모시고 예선을 펼친다. 이 때 뽑힌 열 사람의 파이널리스트만이 본선에 진출하여 청중 앞에서 웅변을 할 수 있다. 200명 중에서 남자가 100명이라 가정했을 때, 파이널리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10대 1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외국에서 살다 온 학생들 도 많았기 때문에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예선은 3학년 선배들의 동아리방에서 치렀다. 예선을 통과한 학생 들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환호성과 박수가 터졌다. 벌써 여덟 명째 호명했지만 내 이름은 없었다. 역시나 하고 고개를 떨구려 할 때 오토다케, 신주쿠 홈 하는 소리가 들렸다. 신주쿠 홈이란 회원 수가 워낙 많아서 지역별로 만들어진 일종의 소모임 이름이다. 평소에는 소모임별로 활동하지만, 이번처럼 대회 가 열리면 모든 소모임이 명예를 걸고 실력을 겨룬다. 나는 신주쿠 에 살았기 때문에 신주쿠 홈 소속이었다. 내 이름이 불리자 동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발을 굴렀다. 마치 자 신들이 뽑힌 듯이 기뻐했다. 오토, 본선에서도 잘해야 돼. 꼭 응원하러 갈게. 따뜻한 격려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잘할 수 있을까? 외국에서 살다 온 실력자들과 당당한 태도만으로 뽑힌 나는 하늘과 땅 차이. 청중들 앞에서 망신이나 당하지 말아야 할 텐데. 트로피를 바라보며 본선에 출전하는 파이널리스트는 정장을 입어야 했다. 게다가 장소 는 강의실이 아니라 구민회관을 빌려서 개최한다고 했다. 예선에서 는 상급생이 심사위원을 맡았지만 본선에서는 외국인들로 구성된 심 사위원이었다. 한마디로 장난이 아니었다. 망신을 당하지 않으려고 발음 연습에 몰두했다. 일본에는 없는 V 발음은 의식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물며 특히 신경을 썼다. L'과 R' 의 차이도 어려웠고, th'에 이르면 아무리 애를 써도 공기 새는 소 리밖에 나지 않았다. 이래서야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내 차례는 오후로 잡혔다. 오전에 출전한 파이널리스트들은 예상대 로 대단한 실력을 자랑했다. 말 그대로 영어 를 구사했다. 점심시 간이 되었지만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혼자서 중얼중얼 연습해 보았지만 그래도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천하의 오토가 긴 장을 다 하다니 별일이군. 일본어로 웅변을 하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팔 자에도 없는 영어라니? 고등학교 시절에도 형편없던 영어점수가 아 니던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갑자기 영어실력의 향상 이라는 당 초의 목표는 온데간데 없고 한 번 부딪쳐 보자는 오기가 치밀었다. 드디어 나의 등장. Fourscore and two years ago……" 웅변이 시작되자 대회장이 다시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분위기 탓이 었을까. 거의 자기도취에 빠져 연설을 했다. 난 역시 남들 앞에 나 서는 체질인가 봐. 내가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 였다. 국민의 라는 구절에 이르자 내가 마치 진짜 대통령이라도 된 듯이 절정에 달했 다. First Prize Mr. Ototake(우승은 오토다케 군).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청중의 시선을 한몸에 모 았다는 자신감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우승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 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 근사한 우승컵을 바라보자 나도 몰래 빙 그레 웃음이 묻어났다.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들어온 와세다 대학. 어쩌면 기 대 이상의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아는가? 엄청난 스토리가 기다리고 있을지. 인생의 목표 전환점 극적인 우승을 차지하고 두 달 뒤 나는 ESS를 그만두었다. 친구 따 라 강남 가는 마음으로 들어간 동아리였기 때문에 4년을 꼬박 다닐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렇다고 시작한 지 겨우 두 달 만에 그만 둘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두 가지 있었다. 우선 활동을 하면서 갑자기 회의가 들었다. 웅변대회가 끝나자 곧 장 영어연극으로 이어졌는데 대학 광장에서 큰 소리로 대사를 외쳐 가며 연습을 해야 했다. 나는 창피했다. 그래서 이 핑계 저 핑계를 둘러대며 동아리에서 빠져 나왔다. 두 번째는 다른 동아리 활동이 바빠졌기 때문이다. 사실은 이것이 진짜 이유였다. 내가 가입한 또 하나의 동아리는 아이젝(AIESEC), 즉 국제경제 경영 학생협회 라는 학생단체였다. 이름 그대로 국제 교류와 비즈니스를 익히는 동아리였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취직과 관련된 세미나를 열거나, 해외 기업에서 인턴으로 일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는 것이 주요한 활동이었다. 나는 입학 당시부터 이 동아 리에 중심을 두었고, 여름에 열리는 큰 행사가 다가오자 준비에 바 빠진 것이다. '빈티지(Vintage) 96'이라는 여름 행사는 선배들의 거의 한해 동안 준비해 온 것이었다. 100만원 단위로 움직이는 규모가 큰 행사였다. 그러나 학생이 무슨돈이 있는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 한 그렇게 큰 돈을 손에 넣을 길은 없다. 방법은 한 가지. 스폰서를 구해야 했 다. 먼저 전화로 내용을 설명하고 방문 일정을 잡는다. 냉정하게 거절 당하는 일도 많았다. 기업을 방문할 때는 정장을 차려입고 이름표까 지 달고 가야 했다. 아이젝이란 어떤 단체인가, 이번 행사는 무엇을 목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가 등을 설명하면서 상대가 관심있는 낌새 를 보이면 돈 이야기로 넘어간다. 자금을 달라고 터놓고 부탁하는 것이다. 신선해야 할 학생시절에 왜 사회인 흉내를 내느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섭외 라 불리는 이 활동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행사 내용도 상당히 의미 깊었지만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비즈니스를 계기로 라이프 디자인, 다시 말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 를 생각하자는 것이 행사의 주제였다. 행사는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해외 학생들을 초청해 요요기에 있는 올림픽센터에서 치러졌다. 1주일에 걸친 장기 세미나였다. 낮에는 세계의 비즈니스에 대해서 토론하거나 일본의 비즈니스 현장을 견학 했고 밤이 되면 떠들썩하고 분주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국경을 뛰어 넘은 큰 잔치가 열렸다. 각국에서 가져온 먹거리와 술로 푸짐하고 시끌벅적한 파티가 열렸다. 날마다 서너 시간밖에 못 자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은 그저 즐겁고 기억에 오래 남을 추억거리로 만 여겼으나 세미나가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나의 사고에 변화가 몰 려왔다. 내면으로부터 빈티지 96 이 의도했던 본 목적이 서서히 뿌 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뜨거운 여름을 보내며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긴긴 밤 잠 못 이루며 끝없는 생각을 더듬고 있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로부터 시작된 질문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그리고 내 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라는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 어졌다. 지금까지 가장 중요하게 여겨 온 것은 돈과 지위, 명예였다. 중학 교와 고등학교 시절 변호사를 꿈꾸었던 것도 약한 사람들 돕고 싶 다 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지위와 수입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젝에 매력을 느낀 것도 국제 교류가 아니라 비즈니스 때문이었 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싶다 는 생각보 다 비즈니스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싶다는 야망이 훨씬 컸다. 슬프 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비뚤어진 나의 가치관을 직시하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크게 가로 저었다. 그렇게 살기는 싫다! 아무리 돈과 지위, 명예가 있다 해 도 주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다면 그것은 성공적인 인생이 아 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답은 비교적 간단했다. 이웃과 사회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가. 주위 사람들에게 얼마나 따뜻한 존재가 되어 줄 수 있는 가. 그리고 그들을 얼마나 많이 이해해 줄 수 있는가……. 어려운 줄 알지만 이런 것들을 실천할 수 있다면 내 인생은 행복 하다 고 가슴을 쫙 펴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살든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전제가 하나 있다. 다름아닌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가짐 이다. 소중하게 여겨야 할 나 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사람은 왜 살아야 하는가 라는 철학적이고 어려운 문제는 질색이 었던 내가 새삼스럽게 나는 어떤 사람인가 라는 문제로 고민을 시 작했다. 가장 먼저 장애인 이라는 세 글자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남의 눈에는 당연히 장애인으로 보이겠지만 정작 본 인인 나는 그 동안 장애 를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아왔던 것이다. 웬만한 일은 스스로 해결해 왔다.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은 부모님 과 친구들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거들어 주었다. 장 애인이라고 해서 왕따를 당한 적도 없고, 제약을 받은 기억도 별로 없었다. 나도 팔다리가 멀쩡한 정상인이다 라고 억지를 부린 적도 없었지만 내가 장애인이라는 것을 굳이 자각할 기회도 그리 많지 않 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 어려서부터 나를 돌보던 의사 선생님 이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대개 이런 장애를 가진 아이는 네다섯 살이 되면 자신이 다른 사 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는 왜 나는 팔다리가 없지요? 라고 물 어 오는데 오토는 그런 질문을 전혀 하지 않는군요. 어머니는 그 말이 댁의 아드님은 좀 유별나군요 라는 뜻으로 들려 서 왠지 얼굴이 뜨거웠다고 하셨다. 사실이 그랬다. 그런 질문이나 의문을 품은 기억이 없다. 장애인 으로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한 사람의 인간 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이 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라는 고민을 하는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장애 라는 단어. 왜 나는 장애인일까. 많은 사람 이 정상인으로 태어나는데. 왜 나는 장애를 지닌 채 태어났을까. 거 기에는 혹시 어떤 의미가 있지는 않을까, 생각은 이미 여기에까지 미쳐 있었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반면에, 장애인이기 때문 에 해낼 수 있는 일도 있다. 예를 들어, 정치가나 관료가 장애인을 위해 복지정책이 필요합니다! 라고 외치는 것보다 내가 계단 앞에 서서 우리에게는 이 계단 한 칸이 그 무엇보다도 높은 벽입니다! 라고 호소하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 있다. 아주 사소한 예에 불과 하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이 세상에는 반드 시 존재한다. 나는 바로 그 일을 위해 이런 몸으로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고민의 실마리가 보이자 이번에는 그렇다면 나는 뭘 하고 있었 지? 라는 생각이 잇따른다. 정말 그런 사명을 갖고 태어났다면 그 동안 나는 얼마나 안이한 삶을 살아왔는가? 라는 자책이 들었다. 주 어진 사명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방치해 두다니……. 장애가 특권의식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오토다케 나만이 할 수 있 는 일은 무엇일까? 이 물음의 답을 찾아서 실천하는 것이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내 인생의 답일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시계는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늘이 준 기회 우연한 재회 한번 일렁인 흐름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놀랍게도 다음 날부터 그 흐름에 휩쓸렸다. 시기가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 것을 생각하면 보 이지 않는 신의 손 이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전율조차 느껴진다. 새벽녘에야 잠이 들어 그만 늦잠을 잤다. 자꾸 감기는 눈을 비비며 첫 수업을 들으러 갔다. 그 때 이봐, 오토다케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요코우치 씨였다. 정말 우연한 재회였다. 요코우치 씨를 만난 것은 두 달 전이었다. 내가 아이젝 활동을 하 면서 스폰서를 구하기 위해 방문했던 도쿄 콜로니 라는 기업의 담 당자가 바로 그였다. 이 회사는 일할 의지와 능력은 있지만 일반기 업에 취직하기 어려운 중증의 장애인을 고용해서 인쇄와 컴퓨터 업 무를 맡김으로써 자립을 돕는 사회복지 법인이었다. 그러나 이익이 별로 남지 않아 그들이 자립할 수 있는 임금마저 주 기 힘든 형편이었다. 그런 회사에 행사자금을 대달라고 갔으니 우리 가 얼마나 철부지이고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이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이다. 그러나 요코우치 씨는 우리를 나무라지 않고 복지, 사회, 회사, 컴퓨터 등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었고 나중에는 사무실과 인쇄공장까지 안내해 주었다. 단 하루였지만 성 실한고 사려 깊은 인품이 저절로 배어나오는 그에게 강한 인상을 받 았다. 요코우치 씨가 그날 와세다 대학에 온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였다. 96년부터 도코 23개 구에 있는 점포 사업자의 쓰레기 배출이 유료 로 전환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와세다의 상인회에서는 쓰레기를 배출한다고 돈을 내라니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냐 며 쓰레기 재 활용운동을 폈다. 그해 여름에 있었던 에코 서머 페스티벌 인 와세다(Echo Summer Festival in Waseda)'라는 행사를 통해 생명의 거리 만들기 운동 은 전개 되었다. 에코 서머 페스티벌 의 탄생 배경은 퍽 재미있다. 와세다 대학의 본부인 서(西)와세다 캠퍼스에는 평소 3만 명 이상의 학생들이 들끓 지만 여름방학이 되면 절반이하로 떨어지기 때문에 그 시기에 문을 닫는 상점도 적지 않다. 그러다보니 거리가 너무 썰렁해서 남은 사 람들끼리라도 뭔가 해보자 는 의견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에코 서머 페스티벌이었다. 행사 내용으로 초등학생의 합창대회 등 여러 가지 안이 나왔지만, 최종적으로 생명의 거리 만들기 로 결말이 났다. 그 배경에 사업자 쓰레기 배출의 유료화가 놓여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후원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신주쿠 구는 전면적으로 협력하겠다 고 약속했고, 와세다대학은 오쿠마 강당의 광장을 빌려주었다. 대학 시설을 지역주민에게 무료로 빌려준 것은 창립 이래 처음 있는 일이 었다. 이야기는 계속 진행된다. 환경을 주제로 한 행사장에서 쓰레기가 잔뜩 나왔다가는 망신만 당한다 는 의견이 나왔기 때문에 행사장에 깡통 회수기 등을 설치해서 쓰레기 제로 를 달성하기로 했다. 결 과도 좋았다. 행사가 열리는 날은 날씨가 나빠서 주스와 맥주가 200 캔밖에 팔리지 않았지만 모여진 깡통 수는 1,300개였다. 페트병은 130개나 넘게 모였다. 전국적으로도 보기 드문 행사 실적을 NHK-TV 등 언론까지 나서서 다루었다. 첫 시도치고는 대성공을 거둔 셈이 다. 그러나 어떤 대학 관계자가 학생도 없는 여름방학에 해놓고 성공 이다 아니다를 말할 수 있겠냐 며 꼬집었다. 그래서 캠퍼스가 학생 들로 넘칠 때 다시 한 번 도전하기로 했다. 그날 요코우치 씨가 와세다 대학을 찾은 이유는 이 행사를 개인적 으로 지원하기 위해 격려차 들른 것이었다. 만남 회사업무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데도 이런 활동을 하고 있으니 요코 우치 씨는 역시 대단하다고 내심 감탄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어떤 남자가 다가오더니 인사를 건넨다. 그의 이름은 기타니였는데, 와세 다 지구를 관할하는 신주쿠 구청소사무소의 소장이었다. 키나니 씨 도 쓰레기 제로 평상시 실험 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두 분으로부터 활동내용을 좀더 자세하게 듣는 중에 기타니 씨의 입에서 엄청난 이야기가 나왔다. 몇 개월 동안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문제가 재활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네. 지진대책과 지역교육문제 같은 것들이 복 잡하게 얽혀 있어서 접근하기가 쉽지는 않아. 결국 모든 문제가 동 시에 해결되어야 한다는 결론이지. 그래서 우리는 생명의 거리 만 들기 라는 관점을 중심으로 다각적인 방향에서 움직일 생각이야. 그 중의 하나로 마음의 장벽 없애기(barrier free)'라는 이름 아래 장 애인과 고령자에 대한 대책도 적극적으로 세워 볼 생각인데, 이것만 큼은 당사자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으면 전혀 의미가 없어. 그래서 자네 힘을 꼭 빌리고 싶은데, 도와주겠나? 귀를 의심했다. 장애인인 나만이 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고 결론 내린 것이 고작 어젯밤의 일이었다. 정확하게 7시간 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느닷없이 실천의 장(場) 이 주어지다니. 이 흐름은 무엇일까. 무서운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특별히 종교를 믿 는 것도 아니면서 그 순간 나는 신의 존재를 확신했다. 영광입니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내가 대답하고 있었다. 마음의 장벽없애기 란 장애인과 고령자에게 장벽이 되는것(배리어)을 제거한다(프리) 는 의미다. 그 동안 이런 단어가 있었는지조차 몰랐던 내가 과연 무엇 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하늘이 내려 준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대학생활의, 아니 내 인생의 막 이 새롭게 열리는 순간이었다. 이 운동의 지도자는 와세다 상인회 회장 야스이 씨였는데 무척 재 미있는 분이었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확실한 리더십과 강한 메 시지가 담긴 연설로 생명의 거리 만들기 를 힘있게 끌어가는 중심 인물이었다. 그의 유명한 야스이 어록 몇 가지를 소개한다. 우리 상인회에서 실패 라고 쓰고 경험 이라고 읽습니다. 다시 말해서 실패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경험을 쌓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행정가가 아닙니다. 따라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힘차게 나아갈 것입니다. 시민의 참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스타일을 거 부합니다. 우리가 장(場)을 만들고, 그곳에 행정을 참가 시키는 것 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얼핏 독특하게 들릴지도 모르는 이 표현들은 사실 우리 모두가 지 녀야 할 당연한 생각이다. 그러나 그의 입을 통해 독특하게 표현되 는 말을 들으면 와세다 거리에서 어쩐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부담 없는 외모 또한 그만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잘 빠진 남자 가 만일 그런 말을 했다면 그토록 인상적이지는 못할 것 이라는 기 타니 씨의 말대로 둥글둥글한 그의 모습은 아무리 초면이라도 친밀 감이 들게 했다. 활동도 재미있었을 뿐 아니라 야스이라는 매력적인 사람 덕분에 생 명의 거리 만들기 는 상인회말고도 엄청난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앞 에서 말한 기타니 씨와 요코우치 씨를 비롯해서 공무원, 기업가와 회사원, 대학교수와 학생, 언론인 등 각 분야에서 일꾼들이 모여들 었다. 이쯤 되고 보니 기타니씨가 수호전의 양산박 이라고 평할 만 도 했다. 일꾼들이 많이 모이자 곤란한 일도 생겼다. 과연 어떻게 의견을 교 환할 것인가? 전원이 회의에 참석한 날이 하루도 없었다. 관청과 기 업의 업무가 7시에서 8시 사이에 끝난다고 해도 9시까지 영업하는 상점은 10시가 넘지 않으면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여기에 교수와 학 생의 일정까지 고려하면 전체가 모임을 가진다는 것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인터넷의 전자우편을 이용한 의견교환이었다. 다시 컴퓨터와 만나게 되었다. 오카 선생님의 업무를 도왔던 초등 학교 시절과 미식축구부에서 상대 팀의 분석을 맡았던 고등학교 시 절에 이어 세 번째 만남이다. 이번에는 인터넷이라는 미지의 세계와 맞닥뜨렸지만 무척 재미있었다. 일반적으로 전자우편은 세계에서는 개개인이 주소(address) 를 갖 고 있기 때문에 여기로 우편을 보낸다. 그러나 우리가 채택한 것은 한걸음 더 진보한 메일링 리스트 라는 방식이었다. 메일링 리스트는 리사이클 네트(Recyle-net)의 약자를 따로 리네 트(RENET)'라고 이름 붙이고 주소로 정하였다. 회의 내용을 메일로 보내면 리네트에 등록된 모든 회원은 그것을 받아볼 수 있고 또 누 구든 회신을 보내면 그 내용이 다시 전원에게 동시에 전달되었다. 더욱 매력적인 것은 해외와의 통신이었다. 누군가가 이 문제에 대 해서 해외에서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습니까? 하고 문제제기를 하면 런던과 뉴욕, 밴쿠버 등지의 리네트 회원들이 각국의 사정을 전자우 편으로 알려 온다. 질문과 응답이 불과 몇 초 만에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인터넷이 이렇게 큰 힘을 발휘하는 데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나는 장애가 있지만 다행히도 마음껏 밖을 나돌아다닌다. 그러나 육체적, 정신적 이유 때문에 좀처럼 잡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장애 인도 많다. 그런 분들에게 나는 컴퓨터를 권하고 싶다. 집안에 앉아 서 전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는 인터넷이 그들에게 어떤 획기적인 계 기가 되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컴퓨터와의 세 번째 만남.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무기와 사귀면서 나의 활동무대는 마침내 세계로 뻗어나가게 되었다. 생명의 거리 만들기 케네디가 남긴 것 생명의 거리 만들기 실행위원회에서 여섯 개의 분과가 있었다. 첨단기기와 독특한 발상으로 와세다 특유의 재활용 시스템을 추구하 고자 하는 재활용 분과, 거리의 장애물 대학의 장애물 마음의 장애물 을 제거하고자 하는 마음의 장벽 없애기 분과, 우리의 거리 는 우리가 지킨다 를 구호로 지진대책을 강구하는 지진대책 분과, 우리 활동의 생명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터넷의 확충과 발전에 힘 쓰는 정보 분과, 와세다의거리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행사를 개최하는 지역교육 분과, 재활용 운 동을 중심으로 영세상인과 지역상인회의 활성화를 꾀하는 상인 분과 로 나뉘어져 있었다. 제2회 생명의 거리 만들기 는 지난해와는 달리 재활용이라는 주제 만으로 각 분과가 독자적인 분야에서 행사를 열기로 했다. 지진대책 분과는 지진을 체험하는 행사를 벌였고, 지역소방대는 구 조 시범을 선보였다. 인터넷을 자유롭게 체험할수 있는 코너에서는 아이들이 신기한 듯 눈을 반짝였고,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가운데 열린 자유시장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나와 요코우치 씨가 맡은 어린이를 위한 휠체어 체험 에서는 휠체어를 타고 와세다 거 리를 돌아다녀본 아이들이 휠체어 타기가 이렇게 힘든 줄 몰랐어 요 라며 한결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피날레는 신주쿠 교향악단의 여름밤의 음악회 로 장식 하기로 했 다. 반대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이 행사에는 실행위원장인 야스이 씨의 강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그가 어렸을 때, 일본을 방문한 로버트 케네디가 오쿠마 강당에서 연설을 한 일이 있었다. 미제 타도 라는 구호가 드높던 시절, 케네 디가 강연을 마치고 오쿠마 강당을 나서자 학생들이 케네디를 에워 싸고 양키 고 홈, 양키 고 홈 을 외쳤다. 무슨 일이 일어나겠다 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라보던 야스이 소년은 믿기 어려운 광경 을 목격했다. 케네디는 내가 아는 노래가 하나 있다 며 마이크를 잡고 와세다 대학의 교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 때까지 욕설을 퍼붓던 학생들이 케네디를 따라 교가를 불렀다. 야스이 소년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상과 신념과 철학을 뛰어 넘어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이 바로 음악임을 그때 깨 달았기 때문이다. 제2회 생명의 거리 만들기 는 신주쿠 교향악단의 연주가 울려퍼지 는 가운데 막을 내리고 있었다. 와세다 거리를 오가는 모든 이의 마 음속에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마음의 장벽이 없는 학교 내가 생명의 거리 만들기에 관여한 것은 제2회부터였다. 홍보물의 제작, 30년 후에는 이 거리에서 장애물이 없어지기 를 기원하며 만 든 어린이를 위한 휠체어 체험의 지휘, 회원들간에 뜨겁게 달아올랐 던 토론을 마무리하는 등 맡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중에 서도 가장 큰 성과는 마음의 장벽 없애기 제안서의 작성이었다. 열린 대학 을 추구하는 와세다 대학이었지만, 장애인에게 열려 있 는 문은 아직도 높고 험했다. 와세다의 상징인 오쿠마 강당은 훨체 어를 탄 채로 들어갈 수 없었고, 엘리베이터와 휠체어 운반기를 설 치한 건물도 손꼽을 정도로 적었다. 장애 학생이 쾌적한 캠퍼스 생 활을 보낼 수 있는 환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생명의 거리 만들기 개막 행사에서 다음과 같은 제안서를 낭독했다. 우리 생명의 거리 만들기 실행위원회 는 작년의 쓰레기 제로 실험을 계 기로, 와세다를 생명의 거리로 만들자는 취지 아래 만들어진 단체로서, 현 재는 환경과 공생하는 거리 를 추구하며 활동을 전해하고 있습니다. 주민 과 상점주인 그리고 대학, 기업, 관청, 학생 등 와세다의 거리에 애착을 갖 고, 생명의 거리 만들기 에 관심을 지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마음의 장벽 없애기 란 말이 있습 니다. 마음의 장벽 없애기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거리를 만들기위해 필 요한 것으로서, 이를 위해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와세다 대학은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충분 하지 못한 실정입니다. 전통을 자랑하는 본교에는 휠체어를 탄 채 들어가기 조차 힘든 건물도 있습니다. 혼자 힘으로는 걸을 수 없어 휠체어에 의지해 야 하는 학생에게 그런 건물은 차갑고 딱딱한 장애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 닙니다. 오쿠시마 총장님도 말씀하셨듯이 와세다 대학은 열린 대학 이라는 빛나는 이념을 갖고 있습니다. 진정한 열린 대학 이 되기 위해서는 장애인도 자유 롭게 배울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지 않을 까요. 이러한 장애물을 제거하려면 당연히 비용과 시간이 들 것입니다. 또한 기 술적으로 검토해야 할 점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의 장벽 없애기 운동에 뒤따르는 여러 문제를 포함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거리를 만드는 데 협조해 주시기를 진심으로 부탁 드립니다. 와세다 대학이 장애인에게도 열린 대학 이 되면 다른 대학도 앞다투어 따 라올 것이고, 마음의 장벽 없애기를 향한 사회의 움직임도 드높아질 것입니 다. 또한 우리 와세다에 사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긍지가 될 것입니다. 더구 나 폭탄 테러로 몸이 자유롭지 못했던 창설자 오쿠마 시게노부 선생님도 마 음의 장벽 없애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앞으로 대학과 지역이 하나가 되어 21세기를 향한 생명의 거리 만들기 를 함께 추진합시다. 검토를 부탁드립니다. 이 제안서는 해외 출장중인 총장 대신 참석한 부총장에게 전달되었 다. 내용이 심각했던 만큼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내가 건넨 농담으 로 박수가 터져나오기 전까지는. 부총장님, 친구들 하는 말이 장애설비가 제대로 갖춰지면 제가 땡 땡이 칠 수 있는 시절도 이젠 끝이라는데요. 부총장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오토다케 군이 땡땡이 치는 일이 없도록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네. 지켜보던 사람들로부터 웃음과 박수가 터져나왔다. 그 후 부총장과 내가 나눈 대화는 단순한 농담으로 그치지 않고 확 실하게 실현되었다. 98년 봄에 완공된 신축건물은 엘리베이터와 훨 체어 운반기를 완비한 마음의 장벽이 없는 건물 이 되었고, 캠퍼스 곳곳에 있는 턱에도 판자를 깔아 훨체어가 지나갈수 있도록 배려했 다. 우리의 활동이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결실을 맺자 가슴 뿌듯한 자부 심이 넘쳤다. 자, 다음에는 어떤 일을 할까? 다가서는 관심들 미니 사인회 6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와세다를 중심으로 한 마음의 장벽 없애기 운동과 학교 활동을 소개하자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중심으로 각지에서 강연요청이 들어왔다. 나밖에 할 사람 이 없다 는 생각으로 시간이 허락하는 한 모두 받아들였지만, 처음 에는 익숙하지 못해 당황한 적도 많았다. 이런 일화가 있다. 중간고사가 끝나는 다음날에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피곤 하기는 했지만, 요청한 곳이 시즈오카 현에 있는 단과대학이었다. 단과대학은 곧 여학생들이 많은 곳 이라는 엉큼한 생각으로 덜컥 허락하고 말았다. 그런데 막상 강연장에 도착하자 단과대 여학생들 은 보이지 않았다. 지역주민들에게도 강연회를 개방하는 바람에 맨 앞자리를 가득 메운 것은 아주머니들이었다. 무사히 강연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한 사람이 달려와 선생님! 하 고 불렀다. 나는 초청하신 교수님을 부르는 거겠지 하고 뒤를 돌아 보았지만 교수님은 그 자리에 없었다. 지금 저를 선생님이라고 부 르셨나요? 얼굴을 붉히며 묻자, 네 , 사인 좀 해주세요 하며 수 첩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황당해서 제가 무슨 사인…… 하고 거절했지만, 성함하 고 날짜를 적어 주시면 소중하게 간직할게요 하고 고집을 피우는 데 도리가 없었다. 사인펜으로 오토다케 히로타다 97.7.15 라고 적 고, 이제 됐지요? 하고 고개를 치켜든 나는 잠시 동안 얼얼해지고 말았다. 그녀 뒤로 10명 가까운 아주머니들이 줄지어 서 있지 않은 가. 보통사람의 팔꿈치까지도 안되는 짧은 팔과 뺨 사이에 펜을 끼우고 글씨를 쓰는 모습이 신기했겠지만, 인기스타도 유명인도 아닌 내가 미니 사인회 를 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강연을 하면서 가장 즐거웠던 것은 역시 어린이들과의 만남이었다. 30분에서 1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눈 뒤에 아이들의 질문을 받는 시 간이 있었는데, 아이들의 질문은 언제나 놀라웠다. 소박하기 때문인 지 톡톡 튀는 관점이 재미있었다. 어떤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남자아이 하나가 질문을 한다. 오토다케 형은 안경을 끼고 있는데, 어떻게 끼고 벗고 합니까? 나 는 짧은 두 팔에 안경의 양끝을 끼워서 안경을 벗고 끼는 모습을 보 여주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면서 우와, 대단하다 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안경벗은 내 모습이 이상하지는 않겠지 속으 로 생각하며 안경을 다시 끼고 있을 때 저쪽에서 와, 정말 잘생겼 다 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보고 잘생겼다니, 기분이 좋아진 나 는 그날 급식으로 나온 젤리를 그 녀석에게 주었다. 초등학생이지만 붙임성이 대단한 아이였다. 니시타마 군의 한 중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이들의 질문이 예 상보다 많아서 시간 내에 그 질문들을 전부 받기가 어려웠다. 그래 서 선생님이 이제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꼭 묻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은 손들어 보세요 하고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다. 강연장을 둘러보니 남자아이 하나가 손을 들었다. 이와사키 군 말하세요. 저……. 네. 궁금한 것이 뭔가요? 그룹 도리후타즈(4명의 남성으로 구성된 개그맨 그룹)가운데 누굴 제일 좋아하나요? ……!! 첫 강의를 마치고 지금은 강연활동이 내 생활의 중심이 되어 있다. 많을 때는 한 달 에 열 차례 정도나 된다. 수업을 받는 짬짬이 그렇게 많은 강연활 동을 하다니 정말 대단해 하고 친구들이 부추기면, 아니, 강연을 하는 짬짬이 수업을 받아 라고 농담할 정도로 나는 바빴다. 힘들기 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처음으로 강연할 때의 일을 떠올리며 힘을 낸다. 생명의 거리 만들기 실행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가장 크게 깨달 은 점은 교육은 어렸을 때부터 필요하다 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하는 환경학습 강좌 라는 것을 열었다. 쓰레 기 재활용 문제와, 지진대책 문제, 마음의 장벽 없애기라는 문제를 아이들에게 알기 쉽게 가르쳐 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번에는 오토다케에게 강의를 맡기자 는 이야기가 나왔다. 사람 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에는 별다른 거부감이 없지만, 마음의 장벽 없애기라는 단어를 알게 된 것도 고작 한 달 전이고 내가 장애인이 라는 자각을 하기 시작한 것도 불과 한 달 전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강연을 하라니……. 일단 사양했지만 기타니 씨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자네가 이 분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건 사실일지도 몰라. 하지 만 자네에겐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경험 이 있지 않은가. 장애인으로 서 20년 넘게 살아오는 과정에서 느낀 것을 자네의 감성과 자네의 말로 솔직하게 전해줄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해. 기타니 씨에게 말려들면 헤어날 재간이 없다. 나와 야스이 씨는 그 를 가리켜 칭찬의 명수 라고 부른다. 칭찬하는 솜씨가 뛰어난 그는 상대의 능력을 한눈에 간파해서 어느 틈에 상대방을 하고자하는 의 욕에 불타게 만든다. 와세다에서 벌이지는 일련의 운동도 기타니 씨 의 부채질로 여기까지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꼼짝 없이 강사로 나서고 말았다. 96년 크리스마스. 장소는 와세다 대학에서 비교적 가까운 도쓰카 다이이치 초등학교 체육관. 강연이라기보다는 좌담회라는 쪽이 더 가까웠지만 내 데뷔전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기타니 씨는 신주쿠 청소사무소 소장 자격으로 쓰레기 이야기를 했 다. 환등기로 벽면에 글씨와 그림을 비추어, 35년전과 현재의 도쿄 만(灣)를 겹쳐 보이면서 얼마나 많은 매립이 이루어졌는가를 보여주 었다. 아이들뿐 아니라 나도 숨을 삼킬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컴퓨터에 능통한 요코우치 씨는 기자재를 체육관으로 옮겨 와서 인 터넷의 세계를 선보였다. 처음으로 홈페이지 등을 본 아이들은 호기 심에 가득 찬 눈을 반짝였다. 실행위원회의 위원이기도 한 신주쿠 구 재활용 추진과 과장 구스미씨는 노래와 춤, 퀴즈 등 적절하게 뒤 섞어 재미있고 알기쉽게 재활용의 중요성을 호소했다. 모두들 정성껏 준비해 온 것을 보고 나는 슬그머니 기가 질렸다. 하지만 나에겐 아이들과 같이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동심이 있지 않은가. 어깨의 힘을 빼고 평소처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알지 못하는 휠체어를 탄 사람의 일상생활. 그러나 같은 사람으로서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것, 장애인이냐 아니냐와 관계없이 사람은 누구나 소중하다는 것 등에 대해서 나는 자연스럽게 얘기해 주었다. 아이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저학년생을 따라온 부모들도 진 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주최자인 야스이 씨가 강연을 마무리했다. 오토다케 형은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이 세상에는 반드시 있다 고 합니다. 저 형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있듯이, 나에게 도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우리들만이 할수 있는 일이 분명이 있다 는 생각이 여러분들 마음속에도 자리잡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 거리 에는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단축시키는 어린이는 한 사람도 없게될 겁니다. 그것을 부탁드리면서 이번 환경학습 강좌를 마칩니다. 형이 좋아요 그로부터 한달 후. 겨울방학이 끝난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올 때의 일이었다. 저쪽에서 초등학교 1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대여섯 명 다가왔다. 그들은 내 모습을 보더니 이 사람 뭐가 이래 에이 기분 나빠 라고 말했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별 신경쓰지 않고 그 자리를 지나치고 있을 때 였다. 하지만 난 형이 좋아요 맨 뒤에 처져 있던 사내아이가 내뱉은 말이 내 뒤통수를 때렸다. 응?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아이를 쳐다보았다. 친구들도 이 녀석 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라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 아이는 무슨 말인가를 더 하고 싶어했지만,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이 었다. 뒤에 이어질 말을 찾지 못하고 다시 한 번 중얼 거렸다. 좋다구요. 저 형은 낯설고 이상한 기계에 앉아 있지만, 그런 것은 아무런 상 관없어. 우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사람이야 라는 말을 그 아이는 하고 싶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놀랐다. 조금 전처럼 아이들 호기심의 표적이 되고, 이러쿵저러쿵 솔직한 느낌을 들은 경험이야 숱하게 많다. 하지만 형이 좋아요 라고 말한 것은 그 아이가 처음이었다. 순간, 이 아이는 지난달 환경학습 강좌를 들은 게 틀림없다는 생각 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의 짧은 이야기가 그의 작은 가슴에 다 가가 장애인도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해준 것일까?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소년이 그 말 한마디가 내 활동의 힘이 되어 주었다. 21세기를 향해서 젊은 일꾼 행사가 끝나고 1주일 뒤, 나는 감색 정장을 입고 신주쿠 구청을 향 했다. 12월에 열리는 심포지엄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이 심포지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몇 달 전이었다. 생명의 거리 만들기 실행위원회의 위원인 가쓰마타 씨가 전화로 알려주었 다. 그도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었다. 요코우치 씨가 근무하는 도쿄 콜로니의 상무이자, 장애인의 여행을 알선하는 트래블 네트 라는 회사의 사장이기도 한 슈퍼맨이었다. 전부터 안면은 있었지만, 먼 저 전화를 주어서 깜짝 놀랐다. 이야기의 개요는 이랬다. 3년 전인 94년 2월 누구라도, 자유롭게 , 어디든지 를 주제로 보 다 아름다운 여행을 위함 심포지엄 이 열렸다. 장애인과 고령자의 여행 을 초점으로 한 심포지엄은 일본에서는 처음이었다고 한다. 관광산업계를 중심으로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해서 귀중한 의 견을 교환했다. 그리고 3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사회적인 관심의 고조와 제도, 교 통 시스템의 개선 등 여러 가지 발전이 있었다. 사회환경의 변화에 발맞추어, 21세기를 향한 과제를 재확인하는 의미에서 12월에 두 번 째 심포지엄을 개최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가쓰마타 씨는 지난번 심 포지엄에서도 중심 인물로 활약했고, 이번에도 기획을 맡고 있었다. 가쓰마타 지금까지의 흐름을 이해하겠나? 오토다케 네, 대단한 걸요. 가쓰마타 그러면 자네도 실행위원으로 이 심포지엄에 참가하기 를 바라네. 오토다케 제가요? 별다른 보탬이 되지 않을 텐데요. 가스마타 아니야, 그렇지가 않아. 오토다케 그래요? 그러면 저한테도 상당한 공부가 될 테니 함 께 해보죠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졌다. 가쓰마타 잘 생각했어. 그러면 미리 자네에게 부탁할 것이 있 네 오토다케 뭐지요? 가쓰마타 자네가 이번 심포지엄의 실행위원장을 맡아 주게. 오토다케 예? 실행위원장을요? 어마어마한 이야기였다. 가쓰마타 씨를 비롯해서 지난번 심포지엄 을 개최하느라 고생한 사람들이 많았다. 당연히 그 분들이 중심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지난번 심포지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갓 스물을 넘긴 청년이 실행위원장을 맡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리 가 아니었다. 거듭해서 사양했다. 하지만 하고 가쓰마타 씨가 말을 이었다. 이번 심포지엄의 주제는 2001년을 향한 도전 이야. 내용도 21세 기를 염두에 두고 정하고 싶어. 그러니 심포지엄의 얼굴인 실행위원 장은 자네가 맡아 줘. 자네처럼 젊은 힘을 가진 사람, 21세기를 떠 맡을 인재가 필요하단 말일세. 21세기 라는 말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그렇다, 나는 21세기의 사 회를 바꾸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장애물이 완전히 제거된 사회를 만들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어줍잖은 실행위원장이 탄생했다. 내리누르는 중압감 두 번째 맞은 이번 심포지엄은 마음의 장벽을 유니버설 디자인으 로 1997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유니버설 디자인 이라는 말이 장애 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이용할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뜻이라는 것을 그 때 처음알았다. 장애인을 위해 특수한 설비를 마 들어 주는 것보다 누구나 이용할수 있는 보편적인 디자인에 힘쓰면 장애인과 고령자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니버설 디자인 이라는 말부터 시작해서 닥치는 대로 열심히 공 부했다. 내가 장애인이라는 의식을 지니기 시작한지 이제 6개월. 장 애인과 고령자가 처해 있는 현실을 이해하게 된 사람들은 휠체어 타기가 생각보다 엄청나게 힘드네 하며 놀라워 했다. 심포지엄 준비로 얻은 것은 지식만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을 안다는 것이 무엇보다 큰 재산인데, 이번 심포지엄에서도 그 재산을 늘렸다. 시노즈카 씨와의 만남도 그 하나 였다. 심포지엄에서는 SPI라는 회사가 사무국이라는 중요한 일을 맡아 주 었다. 원래는 간병인 등을 파견하는 인력송출회사였지만, 발전해서 장애인과 고령자의 여행도 취급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SPI의 사장 이 시노즈카 씨였다. 사장이라고 하면 누구나 나이 지긋한 사람을 상상하기 쉽지만, 그 는 30대의 젊은이였다. 외모도 잘생기고 깔끔해서 능력 있는 사람 이라는 첫인상이었다. 밤늦게 일이 끝나는 날이면 함께 한잔하러 가 기도 했고 가족들과 서로 어울려 포도농장에 놀러 가기도 했다. 서 로의 믿음이 깊어지면서 나는 넉살 좋게 그를 믿음직한 형 으로 모 시고 열심히 따랐다. 일에 몰두하는 진지한 자세,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는 따스함. 그에 게서 배운 것은 일일이 꼽을 수가 없다. 시노즈카 씨를 비롯한 많은 사람과의 만남. 이것만으로도 실행위원장을 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 해야 할 것이다. 지식, 경험, 만남. 이것만으로도 충분한데 하늘이 내려 준 또 하나 의 선물이 있었다. 그것은 중압감이었다. 가장 골치아픈 것은 돈이었다. 믿었던 기업의 후원금이 좀처럼 들 어오지 않았다. 경기가 나쁘다 보니 이런 행사에 돈을 내는 기업이 드물었다. 시노즈카 씨와 함께 기업을 돌아보았지만 현실은 냉혹했 다. 이때 나는 뼈저리게 통감했다. 아, 불황이구나. 후원을 따내기 위해서 관청도 돌았다. 운수성, 후생성, 노동성, 건 설성, 문부성, 총무청, 총리부. 이름만 들어도 막강한 이런 곳들을 단숨에 순례 하는 학생은 아마 드물 것이다. 그러나 즐길 여유가 없었다. 뻣뻣하게 긴장한 채 그저 시노즈카 씨의 뒤를 따라다닐 뿐 이었다 한심하다면 한심하겠지만, 스물한 살의 젊은이가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가 최선이었다. 아무리 행사를 좋아하는 오토다케라고는 하지만, 중학교때의 문화 제나 고등학교 때의 영화촬영과는 달랐다. 총예산이 수천만원에 상 당했고 심포지엄이 열리는 곳도 5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와세다 대 학의 국제회의장이었다. 1만원이라는 결코 싸지 않은 참가비를 거두 는 것도 내 어깨를 짓눌렀다. 여행은 어떤 시대에나 꿈과 감동을 준다. 자연과 만날 기회와 새로 운 사람을 사귈 기회도 준다. 우리는 돈과 시간만 주어지면 얼마든 지 여행을 즐긴다. 그러나 아무리 돈과 시간이 많아도 자유롭게 여행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장애인과 고령자다. 몸이 자유롭지 못한 사람의 여행을 막는 문제점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리고 해결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이 이번 심포지엄의 주제 였다. 무엇보다 사회에 얼마나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를 염두에 두고 준비에 임해야 했다. 그렇게 중요한 행사의 실행위원장 을 맡았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조여들었다. 해냈어요, 형 12월 14일. 마음의 장벽을 유니버설 디자인으로 1997 의 막이 올 랐다. 개막연설은 금요일의 아내들에게 일곱 남녀의 여름(가을)이야 기 로 알려진 시나리오 작가 가마타 도시오 씨에게 맡겼다. 복지 분 야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그를 과감하게 초청한 이유는 그가 젊은 세대에게 강한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가 워낙 말주변이 없어서 라며 겸손하게 시작된 가마타 씨의 이 야기는 시종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저는 늘 등장인물의 입장에서 글을 쓰는 편입니다. 장애인의 심정 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저로서는 아직 그들의 이야기를 쓸 수 가 없지요. 가마타 씨의 진솔한 이야기는 청중을 매료시켰다. 가마카 씨의 강연만큼이나 성공적이었던 것은 추억의 강변 이라는 히트곡으로 널리 알려진 와일드원스의 도리즈카 시게키 씨와 그 가 족들의 수화 음악회 였다. 도리즈카 가족은 각지에서 이런 마음의 장벽 없애기 음악회 를 열고, 일본 최초의 수화 뮤직 비디오 를 제 작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수화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함께 어울려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이렇게 깊은 감동 을 느끼기는 참 오랜만이다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심포지엄장을 하 나로 묶어 준 멋진 음악회였다. 진한 감동과 일체감을 발판으로 오후부터는 분과별로 나누어서 포 럼을 열었다. 교통환경, 제도정책, 정보, 서비스 등 네 개 분과에서 는 참가자가 각지에서 전개하는 활동상황을 들으면서 새로운 발견을 했고, 그것을 토대로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훗날 당시 강사 가운데 한 분이였던 젠코지(?光?)주지의 활동을 아사히 신문에서 다루어 줄 정도로 아주 의미있는 포럼이 되었다. 하루 종일 열린 심포지엄이 마침내 절정에 다다랐다. 실행위원장인 내개 폐회를 선언하기 위해서 전동 휠체어를 타고 미끄러지듯이 단 상으로 올라갔다. …….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지만 목이 꽉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미리 준비했던 연설 을 접어둔 채, 순간 순간 머리에 떠오르는 단어를 하나하나 이를 악 물며 말하고는 무대 뒤로 물러났다. 마지막 순간까지 못난 실행위원 장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무대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혼자서 한껏 숨을 토해냈다. 그때였 다. 딸깍 하고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들어왔다. 사무국장 시노 즈카 씨였다. 피곤하지? 늘 그렇듯이 웃는 얼굴로 그가 다가오자 긴장이 끈이 툭 끊어졌다. 나도 웃는 얼굴로 피곤하시지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은 입 속에서만 맴돌고 대신 눈물이 흘러 내렸다. 끝났어요……. 해냈어요, 형. 그래, 애썼어. 정말 애썼어. 어린아이처럼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도 만났다. 각지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것을 보고 놀랐 고 자극을 받았다. 동시에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불태우는 정열과 노력이 헛수고로 끝나고 있지는 않은가. 모두가 제각기 움직이는 탓에 효과가 반감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반성도 일었다. 사회의 흐름은 분명히 바뀌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손에 손을 맞잡 고 움직일 때다. 우리 모두가 안테나를 좀더 높이 올리고 각지에서 벌이는 활동을 배우고 정보를 나눠 갖는다면 세상은 보다 좋은 곳이 되리라. 이렇게 마음을 다잡을수록 정열과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더 욱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이제 나도 기여하고 싶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21세기를 위해서. 여행은 즐거워 세상에 이런 망신이 98년 2월은 잊을 수 없는 겨울이었다. 부모님 곁을 떠나 3주일 동 안 해외여행을 한 것이다. 장소는 미국 서부. 재수생 시절의 친구를 중심으로 5명이 다녀왔다. 그들과 국내여행을 한 일은 있었지만, 해 외는 처음이었다. 더구나 국내 여행 때는 수동 휠체어를 사용했는 데, 이번에는 전동 휠체어로 도전하는 만용 을 저질렀으니 그 고생 이란…… 자, 여행이 어땠는가 하면……. 먼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있었던 일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누구 나 그렇듯이 비행기를 탈 때는 짐을 따로 맡겨야 한다. 그런데 내 경우는 전동 휠체어를 짐으로 맡겨야 했다. 그게 말썽이었다. 전동 휠체어를 움직이는 배터리가 위험물로 분류되어 배선을 모두 걷어내 야 한다는 것이다. 배선을 걷어내는 작업은 너무 까다로웠고 그 때 문에 탑승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그러나 정작 더 큰 문 제는 도착한 다음에 벌어졌다. 배선을 다시 잇는 방법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런 낭패가! 결국 우리가 직접 배선을 해야 하는 신세가 되어, 세관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항에서 한 발을 내딛으니 그곳은 별천지였다. 하늘이 파 랗다 는 것이 첫인상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로 알려 진 금문교와 알 카포네가 갇혀 있던 교도소로 유명한 알카트라스 섬 에 페리호를 타고 가봤는데 너무 멋있었다. 푸른 하늘과 부드러운 바다. 페리호 꼬리에 달려 있는 성조기를 보니 미국에 오기는 왔구 나 하는 실감이 들었다. 2,3일 정도 관광도 하고 쇼핑을 한 뒤에 우리는 미국에서 휠체어로 가장 생활하기 좋다고 알려진 버클리 거리에 가보았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 분교에는 휠체어를 탄 학생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 었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부탁해 잡은 일정이었다. 마침 이날은 캠퍼스 페스타(Campus Festa) 98'이라는 축제가 열려 서 캠퍼스 안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여기저기서 펼쳐지는 현란한 볼거리들 때문에 그저 보는 것 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였다. 흑인과 백인뿐 아니라 아시아계 학생들도 상당히 많아서 놀랐지만, 무엇보다 오고가는 휠체어의 숫자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인파에 묻혀서 생각했다. 아, 알았다. 아무도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지 않는구나. 일본의 경우 휠체어 를 탄 사람을 만나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들 힐끔거린다. 그 러나 이곳에서는 휠체어를 탔다는 이유만으로는 관심의 대상이 되질 않았다. 그만큼 휠체어, 그리고 장애인의 존재가 일상화되어 있었 다. 그러고 보니 버클리뿐 아니라 미국에 온 후로 거리에서 사람들과 눈이 마주친 기억이 별로 없다. 남의 이목을 끄는 것을 좋아하는 나 로서는 조금 불만스럽기는 했지만, 이것이 제대로 된 모습이라는 느 낌이 들었다. 자신의 장애를 부끄럽게 생각하는사람이 있다면 미국 이라는 나라를 꼭 한 번 다녀오라고 권하고 싶다. 신체적 장애는 곧 신체적 특징 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날에는 생일을 맞은 친구를 축하할 겸 모두들 오페라의 유령 이라는 유명한 오페라를 보러 갔다. 다섯 사람 모두 일본에서 오페 라를 구경한 적이 없었던 탓에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가 얼굴이 화끈 거려서 혼이 났다. 관객들이 모두 멋지게 차려입고 온 것이 아닌가. 턱시도를 입은 대여섯살 가량의 소년 옆에 앉은 스웨터 차림의 나… … 세상에, 이런 망신이 있나. 당연히 나는 휠체어 석으로 안내되었는데, 놀라운 것은 요금 시스 템이었다. 일본에서는 아무리 많은 돈을 주고 좋은 자리를 예약해도 결국에는 한구석에 있는 휠체어 석으로 가라는 직원과 승강이를 벌 여야 하는 일이 많았다. 이것은 오페라뿐 아니라 음악회와 스포츠를 관전할 때도 마찬가지 였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휠체어 석 요금이 따로 정해져 있어서 전혀 문제가 없었다. 휠체어 석에는 나말고도 두세 사람의 휠체어 이용자가 있었는데, 다른 관객에 조금도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한 정장 차림 이었다. 오 른쪽에 앉은 부인은 분홍색 드레스에 저절로 입이 딱 벌어질 정도의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있었다. 사막의 불야성 라스베이거스 샌프란시스코에 닷새 가량 머문 뒤에 라스베이거스로갔다. 샌프란 시스코가 아름다운 자연을 자랑하는 도시라면 라스베이거스는 인공 의 미가 돋보이는 도시였다. 호텔 하나하나가, 아니 도시 전체가 유 원지였다. 피라미드 옆에 유럽 중세의 성채, 그 옆에는 자유의 여신 이 버티고 있었다. 발길을 옮기면 이번에는 해적이 날뛰고 그 옆에 서는 화산이 대폭발을 일으키는 식이었다. 아름다운 저녁놀을 보면 서 어떤 호텔에서 눈요기로 만든 것 아냐?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 다. 이렇듯 라스베이거스에는 초호화 호텔이 모여 있었지만, 뜻밖에도 휠체어를 타고 다니기는 힘들었다. 바로 카펫 때문이었다. 고급 호 텔은 어디나 푹신푹신한 카펫을 깔아 놓기 때문에 휠체어가 다니기 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모래사장에 빠진 타이어를 연상시킬 정도였 다. 라스베이거스라고 하면 뭐니뭐니 해도 역시 카지노였다. 우리는 빙 고를 할 수 있는 곳으로 향했다. 커다란 화면 가득 비춰지는 숫자를 확인할 때마다 손에 땀이 고였다. 아차, 땀이 고일 손이 없나? 이렇 게 온몸을 긴장시키는 게임을 할 때 돈을 따겠다고 작정하고 달려들 었다가는 몸살나기 십상이다. 그보다 놀이기구를 타러 왔다는 생각 으로 부담 없이 즐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빙고를 즐기는 연령층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거의가 고령자들이었 는데 곧 수긍이 갔다. 시간과 돈이 넉넉한 고령자들에게 별로 힘들 이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카지노가 안성맞춤의 오락장소니 것이다. 고령화 사회를 눈앞에 둔 일본에도 곧 카지노가 도입되지 않을까? 라스베이거스에서 조금 더 가면 그랜드 캐니언 등의 국립공원이 줄 지어 있다.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둘러볼 요량으로 렌터카를 알아보 았지만 안타깝게도 리프트가 달린 렌터카는 없었다. 여기저기 전화 를 걸어 보았지만, 끝내 구할 수 없었다. 장애인의 천국(?)인 미국 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의아했다. 어쩌면 적극적인 장애인들 이 직접 리프트달린 자동차를 몰고 다닐지도 모른다. 결국 휠체어를 넣을 수 있는 크기의 왜건을 빌려 뒷좌석을 떼어내고 휠체어를 싣기 로 했다. 국립공원을 관광하면서 일본에서는 맛볼 수 없는 자연의 위대함을 배웠다. 서부에서 가장 덥고, 해발이 가장 낮다고 하는 데스 밸리. 겨울인데도 햇빛에 얼굴이 따끔거릴 정도 였다. 여름에도 50도를 넘 는다는 말 그대로 죽음의 계곡 이었다. 반면에 브라이스 캐니언은 귀가 얼얼할 만큼 추웠다. 차안에 놓고 내렸던 음료수가 얼어 있을 정도였다. 오랜 세월 동안 강물과 비바 람의 침식으로 생긴 칼날 같은 봉우리는 자연의 조각 이라고 하기 에 손색 없었다. 레이크 파웰에서 만난 일출은 하늘을 복숭아빛으로 물들여 아릅답기 그지 없었다. 장애인 천국의 나라 로스앤젤레스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사람에 따라 다를지 모른다. 영화의 도시 할리우드, 호화저택이 줄지어 선 베벌리 힐즈, 아름다 운 해안을 자랑하는 샌타모니카 등 볼거리가 즐비했지만 가장 눈길 을 끄는 것은 유니버설 스튜디오였다. 유명한 영화에 나오는 세트를 둘러보다가 때로는 진짜 촬영장면을 구경하는 등 영화 팬이 아니라 도 가슴 설레는 테마파크였다. 먼저 할리우드를 한 바퀴 돌아보았는 데 그 크기가 내가 사는 신주쿠보다 넓어 보였다. 그 넓은 할리우드에서 ET 와 백 투 더 퓨처 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는 놀이기구와 웅장한 스턴트 쇼가 펼쳐졌다. 어디서부터 보아야 좋을지 망설여질 정도였다. 바로 눈앞에서 대화재가 일어나고 킹콩 의 습격을 받는 등 아슬아슬한 놀이기구에 넋을 잃었지만, 특히 압 권이었던 것은 쥬라기 공원 주제로 한 더 라이드였다. 수많은 공 룡과 마주치더니 마지막에는 탈것이 거꾸로 웅덩이로 처박히는 듯해 서 혼비백산했다. 휠체어에 대한 대응도 완벽했다.. 일본에서 휠체어를 타고 있으면 유원지 같은 곳으로 놀러갈 기분도 나지 않고, 가더라도 몸만 피곤 할 경우가 많지만, 이곳은 달랐다. 곳곳에서 열리는 라이브 쇼의 맨 앞줄에는 반드시 휠체어 석이 마련되어 있었고, 놀이기구를 탈 때는 바로 옆까지 휠체어가 갈수 있었다. 장애인용 화장실도 갖춰져 있었 고, 눈 씻고 찾아 보아도 문턱 따위는 없었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 가 오락 이라는 부분에까지 확실히 갖춰진 미국. 참 대단한 나라였 다. 이 책에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많은 경험을 쌓은 3주일 동안의 여행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즐거웠 다 는 한마디로는 도저히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 이번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 용기있다 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정 말로 용기가 대단한 것은 친구들이다. 학생의 신분으로 3주일이나 해외에 머무는 것도 힘든 판에 골칫덩어리 까지 동반하고 있었으니 ……. 휠체어 때문에 골치를 썩이고 내가 고집을 피워서 친구들을 난처하 게 만들기도 했지만, 어쨌든 멋진 여행이었다. 얘들아 정말 고마웠어. 우리 다음에 또 같이 가자! 못다한 이야기들 황당한 경험 재수생 시절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가 다닌 학원은 신주쿠 오쿠보에 있었다. 오쿠보라고 하면 다국적 거리로 유명하다. 자습실 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면 거리의 모 습이 낮과는 딴판으로 바뀌어져 있다. 일본어는 들리지 않고, 아시 아계 남자들의 싸우는 듯한 대화가 귀청을 때린다. 한쪽에서는 서투 른 일본어로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들도 있다. 외국인 여성들이다. 아시아, 남미 등 출신지도 갖가지인 듯하다. 그들은 어떤 시간대가 되면 거리에 불쑥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어느 겨울날이었다. 나는 자습실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향했 다.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우산을 쓰기가 귀찮아서 비를 맞으며 휠체어를 몰았다. 조금 지나자 몸이 덜덜 떨릴 만큼 추워서 따뜻한 커피라도 마시려고 자동판매기 앞에서 휠체어를 멈추었다. 아참. 나 혼자 힘으로는 지갑에서 돈을 꺼낼 수도 커피를 꺼낼 수도 없잖 아.? 순간 당황했다. 그때 열심히 남자를 유혹하던 외국인 여성이 다가왔다. ◇※☆◎※&#△ 그녀가 말을 걸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쨌 든 영어는 아닌 듯했다. 나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너무 추 워서 이 커피를 마시고 싶다 며 영어로 말해 보았지만, 짐작대로 통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내 시선과 덜덜 떨리는 몸을 보고는 의도를 알아차 렸다. 천천히 청바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더니 어떤걸 마실래? 하고 말하듯이 자동판매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노, 노 하 고 고개를 저었다. 돈은 나도 있었으므로 그녀에게 신세를 지고 싶 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어를 모르는 그녀에게 내 바지 주머니속 지갑에서 돈을 꺼내 따뜻한 캔커피를 뽑아 주세요 라고 의사를 전달하기는 불가능 했다. 도리없이 신세를 지기로했다. 털컥!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면서 기다리고 기다렸던 커피가 떨어진다. 그녀는 나에게 커피를 건네주었다. 인정 많고 친절한 여자였다. 무 슨 말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두 사람이 함께 아는 언어가 없어서 그 냥 묵묵히 커피를 마셨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웃는 얼굴을 잃지 않 았다. 장발 의 휠체어 청년과 외국인 여성.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을까? 그 후 귀가가 늦어질 때면 으레 그녀와 마주쳤다. 만날 때마다 그 녀의 일본어는 늘어 있었고, 자기 이름이 밀레나라고 했다. 이렇게 몇 차례인가 만난 어느 날, 그녀는 10자리의 숫자가 어지럽 게 씌어 있는 종이조각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 내서 열심히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마 언제든 전화하라는 뜻인 모 양이다. 그 후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쿠보에서 만난 외국인 여성은 밀레나뿐이 아니었다. 어느 날 학 원으로 향하는 나를 아시아계 여성이 불러세웠다. 웬일일까 하고 돌 아보니 그녀가 핸드백을 연다. 그리고 몇 천원을 꺼내더니 나에게 내미는 것이 아닌가, 나는 노, 노! 하고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는 내 주머니에 지폐를 밀어넣고 달려가 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 었다. 일본으로 일하러 온 외국인 여성들의 경우 고국에 질병과 장애에 시달리는 자녀를 두고 있고, 또 그 아이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 일 본으로 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 같은 장애인을 보면서 자식 생각에 가슴이 아팠을지도 모른다. 다른 이야기 또 한가지. 다카다노바바 역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 었다. 옆에는 선글라스를 낀 우락부락한 얼굴의 사나이가 서 있었 다. 그도 누구를 기다리는지 그럭저럭 5분이 넘게 흘렀다. 내 친구 도 좀처럼 오지 않았다. 이제나저제나 하고 있는데, 그 사나이가 말 을 걸어 왔다. 이봐, 형씨. 예? 예. 왜 그러세요? 시비를 거는 줄 알고 심장의 고동이 빨라졌다. 고생이 많수다. 예? 예기치 않은 말에 맥이 빠졌다. 그는 사고 당했소? 를 시작으로 내 몸에 대해서 물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아, 그래? 라며 놀라움과 동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를 삼켰다. 그러 더니 그가 하는 일 이야기를 해 주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이야기 속에 빨려들다 보니 그 남자에 대한 두려 움이 완전히 사라졌다. 내 친구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벌써 15분 지각이다. 사나이도 걱정해 주었다. 친구가 늦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형씨 같은 사람을 기다리게 하다니 호로자식이야. 나는 친구가 이 사나이에게 느닷없이 멱살이라도 잡히면 큰일이라 는 생각이 들어, 아니에요, 내가 너무 빨리 왔어요 라며 얼른 둘러 댔다. 잠시 후 자, 형씨. 미안하지만 나는 가봐야겠수다 하더니 안주머 니에 손을 넣었다. 어라, 뭘 꺼내려는 거지? 식은 땀이 흘렀지만, 그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명함이었다. 곤란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하슈. 그는 명함을 내 주머니에 찔러 넣고 그대로 가버렸다. 의리 를 소중하게 여기는 야쿠자들은 나 같은 사람에게 어떤 정을 느낄지도 모른다. 사실 이 일화에는 재밌는 뒷이야기가 있다.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 께 말씀드렸다. 놀라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머니는 태연하게 그거 야 당연하지 하고 말씀하셨다. 예? 왜요? 그런 사람들은 잘려 봐야 새끼손가락 하나 정도잖아? 그러니 팔과 다리가 없는 너를 보고 경의를 표할 수밖에. 아버지와 나는 동시에 멀뚱거리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 보았다. 멋내고 삽시다 장애인은 가엾다 는 고정관념이 아직 널리 퍼져 있다. 오쿠보의 외국인 여성도, 다카다노바바 역에서 만난 무서운 사나이도 틀림없 이 나를 가엾다 고 여기고 친절을 베풀었을 것이다. 물론 가여운 장애인 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개중에는 성격까지 나빠 아무도 상 대해 주지 않는 장애인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가여운 것은 사 실이지만 그 이유가 장애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원래 그런 사람이 우연히 장애인이 되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알맹이다. 장애인은 멋을 부리면 안된다고? 절대 그렇지 않다. 미국여행에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그 나라의 장애인은 멋쟁이라는 사실이다. 거리 에서 휠체어를 타고 가는 노신사는 쭉 빼입은 정장 차림이었고, 오 페라를 구경 갔을 때 옆자리에 앉은 여자도 멋진 드레스에 보석이 치렁치렁했다. 모두들 멋쟁이였다. 나는 깨달았다. 저렇게 멋쟁이 장애인을 보고 사람들은 과연 가엾다 고 동정의 눈길을 보낼까. 일본으로 눈을 돌려 보자. 멋을 즐기는 장애인은 아주 드물다. 외 출을 하는 빈도수가 적기 때문이라 하더라도 미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편리하기 때문인지 면이나 진 소재의 옷을 입는 장애인이 아직도 많다. 깔끔하게 정장으로 차려입은 멋쟁이 장애인과 후줄근한 옷차림을 한 장애인. 같은 장애를 지니고 비슷한 수준의 생활을 하더라도 일 반인의 눈에 가엾다 고 비치는 것은 어느 쪽일까. 본인만 편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견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장애 인에 대한 세상의 시각을 바꾸기 위해서, 그리고 의욕 넘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멋을 내자 고 말하고 싶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양복에 익숙해져 있다. 생일과 소풍 등 어떤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는 반드시 가장 마음에 드는 옷을 입어야 직 성이 풀렸다. 간혹 어머니가 빨았다 고 하면 뾰로통한 얼굴로 심통 을 부리는 아이였다. 중학교에서는 교복을 입었다. 요가 중학교의 교복은 평범한 스타일 이어서 멋을 낼 만한 곳은 넥타이밖에 없었다. 넥타이 속에는 모양 을 내기 위해 면으로 만든 심이 들어 있는데, 이것을 빼버린다. 그 러면 넥타이를 맬 때 생기는 봉이 아주 가늘어져서 불량기가 감돈 다. 어른들은 모양 사납다 고 했지만, 당시에는 크게 유행했다. 나 도 심을 뺐다가 선생님께 혼난 적이 많았다. 취미가 뭐지요? 하고 물으면 나는 얼른 산책과 쇼핑 이라고 대 답한다. 그만큼 옷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는 마가렛 하 웰이다. 신주쿠와 시부야의 백화점에는 매장이 들어와 있지만, 내 단골은 시부야 구 진구마에에 있는 마가렛 하웰 아오야마 점이다. 이곳에는 고급 수입품이 들어와 있을 뿐 아니라 매장이 넓은데도 턱 이 없어서 휠체어를 타고 천천히 쇼핑을 즐길 수 있다. 물론 점원들 도 친절하다. 그러나 곤란한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해마다 두 차례 열리는 세 일이 꼭 시험기간과 겹친다는 점이다. 내가 선택하는 쪽은?……. 물 론 말할 나위도 없다. 1월 15일. 세상은 성인식으로 들떠 있었다. 작년에 성인식을 치른 나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오로지 마가렛 하웰의 세일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창 밖에는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뉴스에서 는 관동지방에 엄청난 폭설이 내린다고 떠들어댔다. 잠깐 망설여졌다. 단념할까 생각했지만, 1년에 두 차례 라는 유혹 을 이기지 못했다. 어머니도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억지를 쓰는 아 들이 가여운 모양이었다. 전동 휠체어 대 눈의 대결. 결과는 완패였 다. 앞바퀴가 눈에 파묻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필사적 인 노력 끝에 간신히 가까운 버스 정류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버스 에 오를 때 버스기사나 승객들이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고 느낀 것은 세일에 목숨 건, 내심 찔리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럭저럭 가게에 도착했다. 역시 예정보다 30분 가량 늦었다. 이미 세일이 시작되어 가게 안은 먼저 온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늦기는 했지만…… 하고 서둘러 가게안으로 들어서자 나를 본 낯익은 점원 이 이런 날씨에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라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다. 미국 여행 때 요긴하게 입은 스웨터와 전부터 점찍어 두었던 파란 색 셔츠를 쟁취하고 의기양양하게 가게를 나왔지만 다시 눈과의 사 투를 벌여야 했다. 이번에는 아무리 기를 써도 움직이지 않았다. 바 퀴가 완전히 눈 속에 박혀 버렸다. 매서운 추위 속에서 악전고투하 고 있을 때 세일즈맨처럼 보이는 남자가 멈춰 섰다. 왜 그래요? 눈 때문에 움직이지 못해요? 네, 앞바퀴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어요. 그래요? 잠깐 기다려 봐요. 그는 들고 있던 가방을 윗도리와 함께 나에게 주고는 휠체어 뒤로 갔다. 그리고 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있는 힘을 다해서 밀었다. 눈이 거의 녹은 큰길까지 밀어 주더니 여기서부터는 괜찮 겠지요? 하고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네, 정말 고마웠습니다. 중요한 일이 뭐였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큰눈이 내리는 데 휠체 어를 몰고 나오다니 큰일날 뻔했어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붕어빵 가족 아버지 난 아직도 부모님을 아빠, 엄마 라고 부른다. 아직도 다 자라지 않아서 그런 건지……. 어쨌든 여기서 지금까지 나를 낳아 주고 길 러 주신 어머니와 아버지를 소개하고 싶다. 아버지는 서른세 살에 결혼하셨고 나는 아버지가 서른다섯 살 때 태어났다. 느지막하게 아들을 보았으니 조용하고 위엄 있는 아버지 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나를 능가하는 천진난만함이 있기 때문이 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열렬한 팬이었기 때문에 시합에 지면 금방 시 무룩해지신다. 식후에 먹는 디저트의 양이 어중간하게 나오면 반드 시 나와 경쟁을 하신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신세 대 노래를 필사적으로 따라 하신다. 형제가 없는 네가 제멋대로 자라지 않도록 마음을 쓰는 거야. 아 버지와 형의 역할을 동시에 해주니 나만큼 좋은 아빠가 또 어디에 있겠니? 라고 말씀하시지만 아무리 봐도 연기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아버지의 모습이 좋다. 아버지는 절대적인 존재 라는 완고한 분위기가 아니라 친구처럼 허물없이 대해 주신다. 휴일에는 둘이 외출하기도 하고, 저녁에 아 버지 회사에서 기다렸다가 함께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기도 한 다. 다정하고 재밌는 분이시다. 아버지는 건축가이시다. 직업 탓인지는 모르지만 멋 에 대한 집착 이 상당하다. 지금 우리가 사는 집도 아버지가 설계하셨는데, 놀러 온 친구들이 정말 멋진 집이야 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디자인뿐 아니라 당신 자신도 멋을 추구하신다. 근무지에 있는 니 시신주쿠의 패션 리더를 자처하실 정도로 요란하게 멋을 내는 분이 시다.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가 항상 소탈하게 대해 주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나이 들어도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다분히 아버 지의 영향 탓이다. 히로타다(洋?) 라는 이름을 지어 주신분도 아버지다. 태평양처럼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로 잡는다 는 의미이다. 國 자에는 울타리 속에 王이 있지만, ? 자는 한 변이 열려 있다. 아버지께서는 그 글 자를 자유롭게 이동하는, 행동력이 뛰어난 왕을 의미한다고 해석하 시곤 한다. 평소에는 털털하신 분이지만 내 이름을 지을 때만큼은 사전을 뒤져 획수가 좋고 나쁨을 일일이 체크하셨다고 한다. 히로타다 라는 이 름은 많은 사람의 애정을 받을 획수인 듯하다. 태평양처럼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로잡는다 는 그럴 싸한 해석 에 손색없는 사람으로 성장했는지 자신이 없지만, 지금까지 많은 사 람들의 애정을 받으며 자란 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내 이름을 자랑 스럽게 생각한다. 어머니 어머니 이야기를 쓰려고 하니 초등학교 시절, 복도에서 내내 나를 기다리시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다카기 선생님은 보통 장애아의 부모는 학교에 대해서 이것 좀 해 주세요, 저것도 해주세요 하고 줄기차게 요구만 하기 쉬운데, 오토 군 어머니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맡겨 주셔서 아주 편했다 고 말 씀하신다. 전동 휠체어의 사용을 금지하실 때도 사전에 어머니와 상의하신 듯 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학교에서는 모든 것을 선생님께 맡기겠습니 다 하고 선생님의 교육방침에 한마디도 간섭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선생님뿐 아니라 나에 대해서도 필요 이상의 간섭은 절대 로 하지 않으셨다. 입학 초기에는 왜 손발이 없니? 하고 묻거나 신 기한 듯이 내 짧은 팔다리를 만져 보거나 옷 속에 자신의 손발을 넣 고 내 흉내를 내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조마조 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셨지만, 어머니는 본인이 해결해야 할 문 제 라고 태연하셨다. 선생님은 눈앞에서 아들이 놀림감 이 되고 있 는데도 태연한 어머니에게 놀라면서, 한편으로 모자간의 끈끈한 신 뢰를 느꼈다고 한다. 어머니의 이런 태도가 나를 믿기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간섭하는 일이 거의 없었던 것은 확실하다. 중학교 1학년 여름에 이 런 일이 있었다. 이번 여름에 친구하고 아오모리로 여행 가고 싶은데요……. 내가 이런 말을 꺼낸 것은 처음이었다. 친구끼리 간다고? 위험해 서 안돼. 우리가 따라가지 않아도 괜찮겠니? 하면서 반대하실 것 으로 예상한 나는 어머니의 대답에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니? 언제 갔다 언제 오는지 빠른 시간내에 알려줘. 예……? 그건 왜요? 그걸 알아야 그 동안 엄마 아빠도 여행을 다녀오지. 8월이 왔다. 아오모리를 향하는 우리를 배웅한 직후, 두분은 홍콩 으로 여행을 떠나셨다. 이야기가 이쯤 되면 부모자식 간의 끈끈한 신뢰 운운하기는 힘들다는 느낌이 들지만, 나는 이렇게 적당한 거리 를 유지하셨던 어머니가 옳다고 생각한다. 장애아의 부모는 자식에 대한 과잉보호로 흐르기 쉽다. 그런데 우 리 부모님은 아들이 여행을 떠난 틈을 타서 당신들도 여행을 떠나는 낙천성을 보이였다. 다시 말해서 나를 장애아로 생각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것이 좋았다. 장애아의 부모가 과잉보호에 나서는 요인은 사랑스럽다 기보다는 가엾다 는 쪽으로 마음이 흐르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식을 가엾 다 고 생각하면 자식도 그것을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나는 가여운 인간이야. 장애아는 아무래도 가여운 인간이야 하고 뒷걸음 질 치는 인생을 살아간다. 나는 우리 부모님 덕택에, 보통은 네다섯 살에 깨닫는다는 장애에 대한 인식을 스무 살이 넘어야 자각하는 조금 둔감한 아이로 자랄 수 있었다. 그래서 쓸데없는 고민에 빠지지 않고 태연하게 잘 자랄 수 있었다. 흔히 장애를 뛰어넘어 혹은 장애를 극복하고 라는 표현을 하지 만, 난 그리고 우리 부모님에게는 그런 표현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 장애를 부정적인 요인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장애는 개성이다 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내가 듣기에는 어딘지 낯 간지럽다. 정상인에게는 단순한 강조로 들리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 다. 어렸을 때는 장점 이라고 파악했던 내 장애가 지금은 단순한 신체적 특징 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뚱뚱한 사람과 마른 사람, 키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 피부가 검은 사람과 흰 사람. 그 중에 손과 발이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있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 다. 따라서 단순한 신체적 특징을 이유로 이것저것 번민할 필요는 없다. 그런 생각을 생활 속에서 몸으로 가르쳐 주신 부모님. 이 두분 사 이에 태어난 것을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그리고 지금까지 키워 주 신 것도……. 마음의 장벽을 넘어서 신발과 휠체어 휠체어를 타신 분은 보호자와 함께 이용하세요. 백화점과 도서관 등에 설치되어 있는 엘리베이터 옆에는 이런 안내 문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전동 휠체어를 조 작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고 싶은 층의 단추를 누르고, 그 층에 서 내리는 일련의 동작을 혼자서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보호자와 함 께 이용해야 한단 말인가. 휠체어를 탄 사람이 혼자서 행동하는 것은 위험하다. 장애인은 사회가 지켜주어야 할 약자이다. 안내문의 배경에 있는 생각은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러나 나는 근본 적인 문제를 되묻고 싶다. 장애인은 정말로 사회가 지켜주어야 할 약자인가. 안타까운 일이지만, 오늘날의 일본에서는 장애인들이 거리를 자유 롭게 다니기도 힘들고, 혼사서 생활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많은 도 움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장애인을 그런 처지로 몰아넣는 것은 바로 환경 이다. 나는 환경만 정비되면 나처럼 신체가 자유롭지 못한 장애인도 더 이상 장애인이 아니다 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내가 A지점에서 B 지점까지 움직인다고 하자. 그런데 역에는 엘리베이터가 없고, 버스 나 택시도 훨체어를 탄 채로는 이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A지점에 서 B지점까지 이동하기가 불가능하거나 곤란하다. 이때 나는 분명히 장애인 이다. 그러나 역에는 엘리베이터가 있다. 플랫폼과 전철 사이에 틈과 턱 이 없어서 쉽게 탈 수 있다. 버스와 택시에도 리프트가 있어서 휠체 어를 탄 채로 탈 수 있을 때, 장애는 사라진다. 일반적으로는 집을 나설 때 현관에서 신발을 신지만, 내 경우에는 신발을 신는 대신 휠 체어를 탄다. 신발과 휠체어의 차이가 있을 뿐이고, 내 힘으로 A지 점에서 B지점까지 이동한다는 것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장애인 을 낳는 것은 다름아닌 정비되지 못한 환경이다. 아이들 앞에서 나는 흔히 이렇게 이야기한다. 여러분 중에는 안경 을 낀 사람이 있어요. 눈이 나쁘기 때문이지요. 나도 다리가 자유롭 지 못하기 때문에 휠체어를 타는 거예요. 아이들은 그러면 똑같네 요 하고 웃는다. 그런데 안경을 낀 사람이 불쌍해요? 하고 물으면 아무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지만, 그러면 휠체어를 탄 사람은? 하고 물으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입을 모아 불쌍해요 하고 대답한다. 여러분은 눈이 나빠서 안경을 끼는 것하고 다리가 자유롭지 못해 서 휠체어를 타는 것이 똑같다고 말했는데, 왜 휠체어를 탄 사람만 안경을 끼면 볼 수 있지만, 다리가 불편한 사람은 휠체어를 타도 할 수 없는 일이 많기 때문에 아무래도 가여워요 하는 대답이 돌아온 다. 아이들의 그 말은 정곡을 찌른다. 장애인이 불쌍하게 보이는 이 유는 물리적인 벽으로 인해 할 수 없는 일 이 많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사회. 바람직한 모습이 현실화되 는 날은 아직도 먼 것일까. 조금만 더 가까이 장애인을 괴롭히는 물리적인 장벽을 제거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나는 마음의 장벽을 제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탈것과 건물 따위를 만든 것은 우리 인간이다. 창조자인 우리가 얼 마나 장애인과 고령자를 이해하고 배려하는가에 따라서 장벽은 제거 될 수 있다. 그러면 장애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는 어디에서 생겨날까. 나는 습 관 이라는 부분에 주목한다. 역에서 장애인이 쩔쩔매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어떻게 말을 걸 어야 좋을지 몰라서 결국 그 자리를 지나치고 말았다. 여러분 가운 데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습관 적인 방관일 뿐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아, 왜 나는 먼저 다가서지 못했을까 하고 스 스로를 책망한다. 그렇지만 자신을 탓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평소에 거리를 나 다니는 장애인을 볼 기회는 드물다.. 평소에 별로 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익숙하게 대하기는 누구라도 쉽지 않을 것 이다. 이것은 장애인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예를 들면 우리 옆집에 외국인이 이사 왔다고 하자. 역시 처음에는 놀라고 당황할 것이다. 그러나 몇 주일이 지나 그들의 문화와 생활습관에 대한 수수께끼 가 풀리면 어느 나라에서 온 A씨 가 아니라 이웃 사람의 하나인 A 씨 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이 예에서처럼 장애인이나 외국인과 같은 사회적소수파를 이해하는 데에는 습관 이라는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잘 알 수 있 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거리를 나 다니는 장애인을 볼 기회 는 드물다. 그런 사람들에게 익숙해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 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려서부터의 교육환경이 중요하다고 생각 한다. 아이들은 장애인에 대한 장벽을 갖고 있지 않다. 강연을 하려고 내 가 아이들 앞에 서면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뒤에 다시 조용해진다.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30분 가 량 이야기한 뒤에 아이들과 함께 급식을 먹거나 간단한 게임을 하면 서 다가서면 형! 형! 하며 매달리고, 헤어질 때는 또 만나요 라면 서 즐거운 마음을 표현한다. 이상한 모습 때문에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보통 형과 똑같다 는 것 을 깨닫고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유연하다. 장애인 정상인 이라고 멋대로 선을 긋는 것은 어 른이고, 아이들 세계에서는 그 어떤 선입견조차 없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때도 그랬다. 왜 그렇게 됐니? 하고 의문을 숨 기지 않고 매달리는 아이들. 이쪽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하면 그들은 팔다리가 없다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사이 좋 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지금도 종종 길을 가노라면 스쳐 지나가는 아이가 묻는다. 저 사 람, 팔다리가 없어. 엄마, 왜 그래? 엄마는 당황해서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라고 내게 사과한 후 입 다물고 빨리 가자 하고 아 이를 잡아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안타깝다. 또 한 사람, 장애인을 잘 이해해 줄 사람을 잃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순순하다. 장애인 을 보면 왜 그렇게 됐지? 하는 의문을 품지만, 그 의문이 풀리면 서로 허물이 없다. 정말 궁금할 것이다. 왜 그렇게 됐지요? 라며 그들이 물어 오길 바란다. 그 의문이 마음에 쌓인다면 장애인에 대 한 마음의 장벽 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 의문이 풀리고, 아 이들 마음속에 장애인에 대한 익숙함 이 생겨났을 때 마음의 장벽 은 사라진다. 나는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처음에 너를 보았을 때는 깜짝 놀랐어.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어 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지. 하지만 친구로서 이야기를 나누고 함 께 밥을 먹다 보니 어느 틈엔가 네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이 머리에서 지워졌어. 그러다가 우리 한 번 멀리 놀러 갈까 하고 의견을 모을 때 비로소 오토 네가 장애인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부랴부랴 너와 함 께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어찌어찌 해야 한다고 서로들 의논을 했었 지. 물론 친구들에게 감사해야 할 부분이지만, 동시에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장애아라는 상황 때문에 특별한 배려가 필요한 일은 있어도 친구를 사귈 때 장애인이기 때문에 특별히 라는 배려는 필요없기 때문이다. 처음 만났을 때 필요 이상으로 벽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러나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갔는데도 여전히 그 장애인과 벽을 느낄 정도로 친해질 수 없다면, 그것은 그 장애인 쪽의 책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경우, 장애인이기 때문에 라고 특별한 동정을 보내고 억지로 노력할 필요는 없다. 혹시라도 그 장애인이 차별하지 말라 고 잠꼬 대 같은 소리를 늘어놓는다면 분명하게 가르쳐 주기 바란다. 네 성 격이 나쁘기 때문이야. 소중한 나를 위하여 익숙해지는 것 과 함께 장애인에 대한 마음의 장벽을 허물기 위해 서 필요한 것은 남을 인정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는 장 애인이 살기 좋은 사회를 이루어 가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것도 남 을 인정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양한 민족이 한 국가를 이루어 생활하는 미국에 서는, 남과 다르다는 이유로 부정을 시작하 면 끝이 없다. 그래서 장애인과 같은 소수파에 대해서도, 다양성 이라는 관점에서 장애를 그 사람의 특징 으로 받아들인다. 일본은 어떨까. 미국과는 달리 일본인은 단일민족으로 살아 왔다. 모든 것이 같아야 편안해 하고 거기에서 비어져 나오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비어져 나오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차별과 편견 이다. 이런 사회는 장애인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중학교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왕따. 이것은 대부분 이 녀석은 우리와 어딘가가 다르다 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한 다. 만일 아이들이 남을 인정할 수 있는 마음을 갖출 수만 있다면 왕따의 문제는 대부분 해결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개성은 있기 마련 이다. 그리고 남을 인정하는 마음의 출발점은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 이다. 내가 마음의 장벽 없애기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나에게 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그 사람밖에 할 수 없는 일 이 있다. 자 신의 역할 을 젊었을 때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이 들어 깨닫 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 경우, 장애 라는 알기 쉬운 표식 때문 에 내 역할을 조금 일찍 깨달았을 뿐이다 깨닫는 시기는 사람에 따 라 다르다. 하지만 누구나 반드시 자기의 역할 을 갖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세계를 둘러보아도 자기와 완전히 똑같은 사람 은 없다. 단 하나뿐인 사람에게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 또한 당연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더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긍지를 가져야 한다. 요즘 아이들은 왜 나만 성적이 나쁠까 왜 나만 못생겼을까 라며 왜 나만 을 자주 입에 올린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자신은 하나밖 에 없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라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 왜 나만 이라며 자신의 인생을 보잘것없게 만드는 말 따위는 입에 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으면 눈앞에 상대의 개성 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이 단 하나의 존재이듯이, 상대도 단 하나밖에 없 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장애인이 살기 좋은, 장벽을 제거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만이 아 니다. 모든 사람이 주어진 생명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고, 그 생명을 최대한 활용해서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자기다움 을 잃지 않고 자신 에게 긍지를 갖고 살아가야 한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마음의 장벽 없애기 에 조금이라도 기여함 으로써 스스로에게 긍지를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 마치면서 반듯한 얼굴에 사지만 멀쩡하다면 어떤 아이라도 좋다. 이제 막 태어나려는 아이에 대한 부모의 기대에는 여러 가지가 있 겠지만, 최소한의 조건으로서 위와 같은 말을 흔히 입에 담는다. 그러나 나는 오체가 불만족인 아이로 태어났다. 불만족은 커녕 오체 가운데 사지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최소한의 조건조차 충족 시키지 못한 불효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은 내가 장애인으로 태어난 것 때문에 비탄에 잠겨 슬퍼하시지 않았다. 어떤 아이를 키우든 마음 고생은 하기 마 련이라고 개의치 않으셨던 모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즐 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많은 친구들과 함께 휠체어를 타고 온갖 곳을 다 돌아다니는 지금의 생활에 어떤 불만도 없다. 초음파 검사라는 것이 있다.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아기에 대한 검 사로서 이때 아이에게 장애가 있음을 알게 되면 대부분의 경우 중절 수술을 희망한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도리가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장애라고는 모르고 살던 어떤 사람이 당신의 아이는 장애아입니다 라는 선고를 받으면 어느 누구라도 낳아서 키워나갈 자신이 없을 것이다. 우리 어머니도 만약 내 뱃속에 있는 아이의 팔다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솔직 히 말해 너를 낳았을 지 자신이 없다 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더욱 소리높여 외치고 싶다. 장애가 있긴 하지만 나는 인생이 즐거워요. 건강한 몸으로 태어났지만 울적하고 어두운 인생살이를 보내는 사 람도 있다. 그러므로 관계없는 것이다. 장애 따위는. 그런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라도 이 책의 타이틀을 일부러 오체 불만족 이라는 다소 충격적인 것으로 붙였다. 오체가 만족하든 불 만족하든 행복한 인생을 보내는 데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바로 그 말을 전하고 싶었다. 몸에 장애를 가진 사람 가운데에는 이 오 체 불만족 이란 타이틀을 보고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디 나의 의도를 이해해 주시면 정말 고맙겠다. 장애는 불편하다. 그러나 불행하지는 않다. -헬렌 켈러 마지막으로 이 책이 간행될 수 있도록 온갖 배려를 다해 주신 고단 샤의 오자와 이치로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1998년 초가을 오토다케 히로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