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c 내인생은 내가 만든다 1 ---------------------------- 서명: 내 인생은 내가 만든다 1 저자: 오토다케 히로타다 역자: 전경빈 출판사: 도서출판 창해 출판일: 2000. 7. 29 점역자: 대한불교청소년교화 연합회 주소: 서울시 종로구 견지동 39 - 1 상운중심 3 층 전화: (02) 735 - 8165 점역처: 마포평생학습관 시각장애인실 후원: 서울특별시 점역일: 2000. 11. 1 ------------------------- @FF @fc 차례 ------ 전권 차례 ------ 제1 권 옮긴이의 말: 오토다케의 삶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제1 장 전파에 실례하는 것이 아닌가? 오토, 뉴스 프로의 리포터로 나서다 전파에 실례하지 말라구! 베르사체를 찾아 헤맨 사연은? '당고 삼형제' 냐 '오체 불만족' 이냐 제2 장 새로운 리포터 오토다케를 소개합니다 (뉴스의 숲)으로 들어가다 내가 속은 건가? 첫 기획에 단서를 붙이다 그녀는 떠나고 나는 왔다 제3 장 역시 시작이 어려워 비정한 비즈니스 세계 상처받은 아이들 나는 인터뷰 능력이 없는 건가? 잠 못 이루는 밤 제4 장 난 정말로 운이 좋아 러브레터가 영수증으로 코디는 하기 나름 취재현장에서의 승리 클린턴 대통령을 두들긴 남자 제5 장 내 모습이 시체보다 더 충격적? 스스로 제작하는 즐거움 절반의 성공 뉴스는 무엇을 전해야 하는가? 나는 나일 뿐이다 제6 장 진정한 프로의 실력을 보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감동 나를 한방 먹인 공무원과의 인터뷰 인터뷰는 집요하게, 집요하게! 제7 장 '오체 불만족' 열풍, 어떻게 봐야 하나 글을 보는 안목을 갖춰라! 다른 세계에서 보내는 통신 장애와 싸우는 사람, 장애를 즐기는 사람 제2 권 제8 장 나의 눈물은 과거에 대한 감사였다 어머니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사랑 취재하는 사람의 자격은 무엇인가? 눈물은 언제, 왜 흐르는가? 제9 장 오체는 불만족, 밤은 대만족? 오토, 원조교제를 찾아 나서다 색다른 이별잔치 말을 생략하면 생기는 오해 제10 장 오토, 미국으로 취재 가다 배리어프리, 유럽인가 미국인가 '거시기' 와 '수달' 의 취재 삶의 무게를 덜어주는 사회 취재보다 편집이 더 고역! 제11 장 이지메, 그 후의 이야기 나를 찾아 떠난 여행 약속은 지켜지고 있나? 이지메의 고통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제12 장 괴물투수 이시이와 한국에서 온 이구원 뜨거웠던 여름의 아쉬움 난청 때문에 프로 진출이 좌절된 야구선수 구원이와의 특별한 만남 사회 속에서 어우러져 살고 싶어요 제13 장 바람 부는 오키나와의 바닷속을 누비다 다이빙 라이센스를 써 먹을 찬스! 여자친구와의 이별, 그리고 추억 바닷속에 거대한 신전이 있다 광란의 크리스마스 이브 제14 장 나의 리포터 성적은 몇 점인가? 이별을 위한 마음의 준비 나는 아직도 아마추어인가? 제15 장 두 개의 졸업장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던 대담 나를 위한 (오토다케 스페셜) 고맙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후기: 나는 끝없이 도전한다 @FF @fc 옮긴이의 말 옮긴이의 말 오토다케의 삶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야, 이 팔다리 없는 놈아!" "왜? 이 팔다리 있는 놈아!" KBS - 1 TV (일요스페셜)프로그램에 나온 오토다케가 어렸을 적 친구와 이처럼 입씨름을 벌였다는 말을 했다. 정말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 그에게 인생은 '어떻게 태어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 가 더 중요했다. 1999 년 한일 양국에서 최대의 베스트셀러로 기록된 "오체 불만족". 이 책에서 그는 장애를 오히려 '자신만의 신체적 특징' 으로 전환시켜 나가는 눈부신 정신적 성장을 보여주었다. 그때의 감동이 채 가시지 않은 지금, "오체 불만족" 의 후속편인 "내 인생은 내가 만든다" 가 나왔다. 원제가 '오토다케 리포트' 인 이 책은 지은이가 1999 년 3 월부터 2000 년 봄까지 1 년 정도 일본 TBS 방송국의 (뉴스의 숲)이란 프로그램 리포터로 활약하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내용들을 아주 재미있게 정리해 놓은 것이다. 전체 15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자신이 리포터로 나서게 된 경위와 소감을 비롯, 각종 기획, 취재, 인터뷰, 생방송 출연 장면 등을 한눈에 들어오게끔 소개한다. "오체 불만족" 의 감동 이후 그의 삶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해소시켜 준다. 오토다케는 자신의 특별한 신체만큼이나 독특한 시각을 갖고 살아간다. 안목 있는 방송인들이 그의 장점을 알아보고 제안한 리포터 활동. 그에게 커다란 기회임에는 분명하지만, 엄청나게 많은 제약들이 있었다. 팔다리가 없는 장애인 리포터는 지금까지 유례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해냈다. 격변하는 21 세기, 도전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오체 불만족" 이 신체의 장애를 극복하고 자립적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 감동과 희망의 드라마였다면, 이 책은 그 자립적 인간이 당당하게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는 모습을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나는 오토다케의 인생을 지켜보면서 참으로 많은 놀라움을 겪었다. 또 헤아리지 못할 만큼의 교훈도 얻었다. 아마 장애인뿐만 아니라 모든 정상인도 똑같이 느끼리라고 본다. 이 책은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읽고 생각해 볼만하다. 또 도전적 의욕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가져다 줄 책이기도 하다. 많은 독자들과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과연 우리는 오토다케의 삶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2000 년 7 월 7 일 옮긴이 전경빈 @FF @fc 1 장 1 전파에 실례하는 것이 아닌가? 오토, 뉴스 프로의 리포터로 나서다 "오체 불만족" 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나서 1999 년 2 월 7 일, 일본 TBS 방송국의 세키구치 히로시의 (선데이모닝)에 출연했다. 그 방송이 끝난 후 스튜디오에서 나오는데, 세 명의 남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TBS 에서 (뉴스의 숲)이란 프로그램을 만드는 핵심인물들이었다. 다카하시 히로시게 프로듀서. 후지와라 야스노부 편집장. 마츠바라 코지 메인 캐스터. (뉴스의 숲)은 TBS 에서 내보내는 인기 만점의 저녁 뉴스 프로그램이다. 나는 1998 년 가을에 "오체 불만족" 을 내고 나서, 이 프로그램에 나간 적이 있었다. 그 후에도 (21 세기 일본인에게)라는 시리즈에 한 번 더 출연했는데, 그때 마츠바라 메인 캐스터와 인터뷰를 한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그들이 날 찾아와, 난데없이 내게 (뉴스의 숲)리포터를 맡아 달라는 게 아닌가! 지금까지는 취재를 받는 입장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직접 리포트를 해서 시청자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난데없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사실 이 제안은 이전에 주고받은 농담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앞서 말한 (뉴스의 숲)출연 때 취재를 담당한 디렉터들과 이상하게 마음이 잘 통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함께 한 잔 하러 가기로 했는데, 거기서 이런 말이 오가게 되었던 것이다. "오토는 대학을 졸업하면 무슨 일을 할 거지?" "글쎄요..... 아직 깊이 생각해 보질 않았는데요." "혹시 우리가 하는 방송일은 어떤 것 같아?" "굉장히 재미있을 것 같아요. 물론 제 적성에 맞는지 안 맞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때 디렉터들 가운데 한 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었다. "응! 적성에 맞아. 그건 틀림없어!" 그 후 몇 개월 지나는 사이에 그 농담이 어느덧 나도 모르게 실현 가능한 이야기로 하나하나 변모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바로 그날, 2 월 7 일에 (뉴스의 숲)을 담당하는 세 분이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에 관해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것이었다. 세상에, 내가 방송계로 진출하다니! 일본인들에게 빅하트(big heart)란 애칭으로 불리는 TBS 사옥은 아카사카에 있다. 세 사람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2 층으로 올라가니, 거기에 보도국이 있었다. "오토, 지금 우린 (뉴스의 숲)사무실로 가고 있는 거야." 통로가 좁은 편이다. 내가 탄 휠체어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다. "미안, 길이 좁지?" 후지와라 편집장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상자와 테이프가 잔뜩 쌓인 간이선반들을 한쪽으로 치워가며 길을 만들어 준다. 나는 방송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일하는 현장을 처음 목격했다. 자연히 두리번 두리번, 주위를 살피며 뒤를 좇는다. 이윽고 2 층 한 귀퉁이에 있는 응접세트에 도착했다. "이거, 준비가 영 소홀하지? 미안해." 오늘 손님 맞는 주인 역할은 아무래도 후지와라인가 보다. 호기로운 간사이 사투리로 계속 말을 걸어왔다. 모두 자리에 앉았다. 그때 다카하시 프로듀서가 커피를 사들고 나타나, 사람 수대로 봉지에서 꺼냈다. 일본에서 크게 히트 치고 있는 스타벅스 커피였다. 프로듀서는 한 프로그램의 최고책임자이다. 가장 윗사람이지만, 그는 조금도 권위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언제나 얼굴 가득 환한 미소가 배어 있었다. 내 커피에 손수 빨대를 꽂아 주었다. 손이 없는 나를 알아서 배려해 주는 것이리라! 마츠바라말고는 두 사람 다 초면이었다. 또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제대로 알지 못했으니 자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 속으로는 절대 어수룩하게 보여선 안 된다고 다짐을 해봤지만, 역시 두근거리는 마음이 잘 진정되지가 않았다. 그래도 안면 있던 마츠바라 캐스터와 함께여서 적잖이 마음이 놓였다. 마츠바라가 먼저 말을 꺼냈다. "(선데이모닝)방송, 굉장히 좋던데." 텔레비전으로 보는 마츠바라는 아주 스마트해 보인다. 방송을 할 때는 물론 표준어를 써서 잘 몰랐다. 하지만 그는 사석에선 자기 고향 말투를 썼다. 그는 규슈의 후쿠오카 태생인데, 거기 말씨에다 간사이 말투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지금 쓰시는 그 말투는 하카다 사투리예요, 아니면 간사이 사투리?' 라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껄껄 웃어대며, 이쪽 저쪽 아저씨들 말투를 짬뽕시킨 거라며 받아넘겼다. 그러면서 보태는 말이 가관이었다. "오토, 질문이 정말 날카로운데!" 이게 칭찬일까, 야유일까? "맞아, 이런 거야. 오토 나름의 관점이 살아 있는 거지." 그 말을 놓칠세라, 후지와라 편집장이 말을 잇는다. "오늘 우리가 하고 싶은 얘기가 바로 그거라구. 그런 관점을 갖고 일해 보자는 것이지." 후지와라는 언제 봐도 방송을 사랑하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열정이 담겨 있는 것이다. "가령 똑같은 대상을 동일한 방향에서 보더라도, 오토의 관점이라는 필터를 통하게 되면 전혀 달라 보이지. 그 차이가 잘 드러나도록 (뉴스의 숲)을 제작해 보자고. 아, 이건 물론 오토가 우리에게 협력한다는 전제하에서 하는 얘기지만 말야." 자기들끼리 하는 이야기? 어쨌거나 그렇게 오가는 말들을 통해 어렴풋이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렇게 정리를 해 봤네." 다카하시 프로듀서가 내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뉴스의 숲)출연을 부탁드리며, 라고 앞머리에 제목이 붙어 있었다. (뉴스의 숲)에서는 오는 4 월 프로그램 내용을 새롭게 개편함에 있어, 오토다케 히로타다를 리포터로 기용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오토다케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혹시 그가 우리 프로그램에 리포터로 활동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 혹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여 한번도 의심해 보지 않던 것들이 그의 관점으로는 어떻게 보일까? 이런 생각에서 함께 프로그램을 만들면 대단히 유익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에게 프로 저널리스트의 안목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나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자신의 언어로 그대로 전달하면 좋으리라고 봅니다. 이런 일들을 함께 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 (뉴스의 숲)리포터로서 가능한 범위 내에서 방송 출연 - 인터뷰 혹은 현장취재 - 취재 아이디어는 함께 제안하되, 오토다케의 의사를 최대한 반영 - 취재시 전속 디렉터 등 취재팀 마련. 동시에 취재환경 정비. "우리는 아무쪼록 함께 일할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정중하게 잘 짜여진 문장이었다. 그 글을 읽는 순간 내 마음속에는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솟아올랐다. 아직 대학생에 불과한 내게 이런 일이 주어지다니! 게다가 무엇보다도 평소 우러러보던 대선배들이 나를 필요로 한다니!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다카하시 프로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고맙습니다!" 이때 내가 고른 말은 '잘 부탁드립니다' 가 아니라 '고맙습니다' 였다. 이렇게 해서 1999 년 2 월 7 일, 이날은 내가 평생 잊을 수 없는 하루가 되고 말았다. 전파에 실례하지 말라구! 다음날인 2 월 8 일. 나는 약 한 달 보름에 걸친 여행길에 나섰다. 장소는 남태평양의 오스트레일리아였다. "오체 불만족" 이 출판되고 나서 처음 예상과는 달리, 독자들의 호응이 높아지면서 갑작스럽게 매스컴에 출연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부쩍 힘들어졌다. 그래서 (선데이모닝)출연을 마치고, 어떻게든 휴식을 취하기 위해 여행을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때만 해도 나와 관련한 '엄청난 사태' 가 벌어지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한마디로 지금까지의 상황은 전초전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로 향하는 비행기 속에서 흰구름을 내려다보았다. 모든 걸 잊고 느긋하게 쉬겠다는 일념으로 여행길에 나섰지만 왠지 머릿속엔 (뉴스의 숲)에 대한 생각들이 뱅뱅 돈다. 그날 '고맙습니다' 라고 말한 뒤 나눈 대화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우선 현재상황을 말해 줘야겠지." 후지와라 편집장이 또다시 말을 꺼냈다. "갑작스럽게 이런 내부적인 이야기를 하면 부담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오토도 우리 (숲)의 일원이 됐으니까 알아둬야 할 것 같아." 아하, (뉴스의 숲)을 그냥 (숲)이라고도 하는구나. 눈치로 때려잡는다. 그러고 문득 테이블 위를 보니, (N 숲)이라고 적혀 있는 자료가 있었다. "(뉴스의 숲)과 똑같은 시간대에 방송 중인 니혼 텔레비전의 (플러스 1) 시청률이 제일 높아. 그 뒤를 쫓는 것이 우리 회사와 후지 텔레비전이지만, 톱과는 차이가 좀 많이 나는 편이야. TV 아사히는 계속 부진하다가 최근 여성 시청자를 타깃 삼은 새로운 내용을 내보내면서 시청률이 오르고 있어." 마츠바라 캐스터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인다. 방송국끼리 시청률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뉴스 프로그램조차도 예외가 아님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방송에 나가게 되면, 그 책임의 일부가 내게도 존재하게 될 것이다. 막중한 책임이 느껴졌다. 만일 내가 방송에 나온 날 시청률이 최하위라도 기록한다면, 보통 망신이 아니리라. "그런데 요즘 (플러스 1)방송이 이상해졌더라고. 그거 특집으로 내보내는 건가?" "글쎄요, 온통 먹거리 얘기뿐이던데." "그래, 나도 그걸 죽 이상하게 생각했었거든." 후지와라 편집장이 얼굴에 화색이 돈다. "나도 이상하게 생각했었어. 뉴스 프로그램인데도 신문에 나는 걸 보면 '파격적인 가격' '뷔페' '줄서서 기다려야 먹는 집' 들뿐이잖아. 그렇다면 그게 와이드쇼하고 뭐가 다르냐고?" 후지와라 편집장이 바로 그거 아닐까, 하며 무릎을 친다. 마츠바라와 다카하시는 그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긴, 그렇다고 그들이 먹거리 주제를 다루는 걸 가지고 시비 걸 필요는 없겠지. 어떤 면에서 시청률 끌어올리는 데는 최적인지도 모르지. 솔직히 그 시간대에 시청률을 높이려면 얼마나 신경쓰이는지 우리도 잘 알잖아. 하지만 우린 반대로 생각해 보자구. 순수한 뉴스를 어떻게 하면 시청자들이 알기 쉽게 만들 수 있는지로 승부를 걸어보는 거야." 그는 약간 흥분한 것처럼 얼굴이 불그레해졌다. 그의 말을 마츠바라가 이었다. "다행히 우리 다카하시 프로듀서는 시청률에만 얽매여 사는 분은 아니잖아. 구성원들 모두가 힘을 합해 하고 싶은 대로 해가며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자는 생각을 갖고 계시고." 수줍음을 탄다고 해야 하나 부끄럼을 탄다고 해야 하나. 다카하시 프로듀서는 그저 빙긋이 웃고만 있었다. 마음이 한없이 좋아 보이고, 실제로도 상냥하기 그지없다. 그야말로 절에 모셔 놓은 부처님 같다는 느낌이어서 나는 속으로 '다카하시 부처님' 이라고 별명 붙였다. "그런데 오토, 후지와라가 말끝마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 마츠바라가 싱글거리며 질문하자, 후지와라는 슬그머니 담뱃갑으로 손을 뻗는다. "아니요, 모릅니다. 뭔데요?" "후지와라는 신경에 거슬리면 '전파에 실례하지 말라구!' 하고 고함을 치는 거야." "전파에..... 실례요?" "디렉터들이 방송용 원고를 써오잖아. 그럼 그걸 결국 편집장이 체크하게 되고 말야. 그런데 그 글이 형편없다고 생각되면, 바로 한방 먹이는 거지. 전파에 실례하지 말라구!" "아니, 그건 말야....."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후지와라가 말한다. 변명이 아니라 오히려 방송에 대한 그의 철학이 엿보이는 말이었다. 그가 하는 말이 내 뇌리에 콕콕 박혔다. "원고가 엉망인 것까진 좋다고. 아니, 솔직히 좋다고는 못하지. 하지만 일을 좀 못할 수도 있잖아? 내가 문제삼는 건, 그 결과가 아니라 그 친구들 자세라고. 그래, 자기들이야 대충 만들어도 좋다 이거야. 하지만 그게 전파를 타고 전국적으로 방송이 된다고 생각해 봐. 그 전파 너머로는 수백만,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있는 거 아니냐고. 만일 그 사실을 잊고 있다면, 그건 틀림없이 전파에 실례를 범하는 거라구!" "알겠어. 그러니까 정신자세가 투철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전파 너머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잘못을 저지른다는 거지?" "이해해 주니 고맙군. 어떨 땐 말야, 도대체 자기가 무슨 말을 썼는지조차 모르는 친구들도 있다니까."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리면서 들고 있던 사과 주스를 쏟을 뻔했다. 문득 현실로 돌아온 나는 후지와라의 입버릇이라는 바로 그 말을 되뇌어본다. "전파에 실례를 범한다....." 다시 생각에 잠긴다. 혹시 내가 (뉴스의 숲)에 출연한다는게 전파에 실례를 범하는 건 아닐까. 이번에 나는 단지 취재 대상이 아니다. 내가 취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도 리포터라는 어마어마한 자리에서.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으로서 브라운관에 나가는 것이다. 걱정이 태산 같다.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모르고, 그렇다고 신문을 열심히 보는 편도 아니다. 기껏 스포츠면이나 챙겨 볼 뿐이다. 게다가 매스컴이 무어냐고 누가 물어오면, 아마도 쥐구멍에라도 도망치고 싶을 것이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그들은 내 나름의 차별성 있는 관점을 원한다고 했지만, 도대체 나는 내 관점이 다른 사람과 어떻게 다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물론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특별한 기회인 것은 분명하다. 평범한 대학생이 유명한 뉴스 프로그램의 리포터로 출연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그 기회가 지금 내 코앞에 와 있는 것이다. 아니다. 나는 벌써 그 기회를 덥석 잡았다. 그런데 막상 생각해 보니 두려움이 앞서는 것이다. '아니야, 난 괜찮을 거야. 잘 해내지 못한다해도 난 아직 학생이잖아! 난 프로가 아니니까. 어쨌든 무지막지하게 많은 걸 배우게 될 거라구. 그러니까 너무 겁먹지 말고, 내 나름으로 열심히 하면 되지 않겠어? 아냐, 아냐. 그런 말은 무책임해. 일단 자신의 역할을 맡은 이상 그건 제대로 해내야만 해. 그렇지 않다면 내가 그 일을 맡을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생각은 끊임없이 오락가락 한다. 그러면서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휘말리기도 한다. 불안감이 엄습하다. 억지로 눈을 감는다. 잠깐이나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쉬고 싶었다. 베르사체를 찾아 헤맨 사연은? 골드코스트에 도착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이미 한여름이었다. 태양과 바다, 그리고 자유로운 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민거리에 대해서는 잠시 잊어버릴 수 있었다. 케언즈에서는 바라고 바라던 스쿠버다이빙에 도전했다. 나는 물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닷새간의 강습을 받아 라이선스를 따는 한편 많은 친구들도 사귀게 되었다. 뉴질랜드의 남섬에 가서는 영국풍의 거리와 대자연을 마음껏 즐겼다. 마지막에 들른 시드니에서도 낯선 곳에서 겪을 수 있는 재미나고 진귀한 체험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여행 중 쇼핑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유명한 '베르사체' 때문이다. 잠깐, 독자 여러분들께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나 자신은 베르사체의 제품을 사본 적이 없다. 아니, 구경한 일조차 없다. 그런데 왜 갑자기 베르사체가 나를 사로잡았는가? 대답은 딱 하나, 한신 타이거즈의 노무라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독자분들께선 이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된 데는 다 그만한 사정이 있다. 사실은 내가 여행을 떠나기 전, 마츠바라 캐스터와 나눴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오토, 개인적으로 꼭 만나보고 싶은 사람 있어?" "그냥 아무나 말입니까?" "글쎄, 예를 들어 와세다 대학과 연결시켜 생각한다면 히로스에 료코(일본의 인기 탤런트, 추천으로 와세다 대학에 입학함. 우리에겐 영화 (철도원)으로 잘 알려져 있음)라든가....." "히로스에요? 물론 미인이니까 당연히 보고 싶기는 하죠. 하지만 그렇게 꼭 보고 싶은 건 아니에요." "앞으로 자넨 다양한 리포트를 해야 하잖아. 인터뷰도 하게 될 텐데. 인터뷰란 담당자가 제일 만나보고 싶은 사람과 할 때 효과 만점이거든." "제가 인터뷰를요? 어휴, 자신없는데요. 그렇게까지 해도 괜찮겠어요?" "괜찮아. 모든 건 하기 나름이라구. 방송 일은 힘들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힘들어. 애당초 정나미가 떨어지고 말지. 하지만 그걸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면, 한마디로 세상에서 최고야. 너무 재미있어 그냥 중독되고 마는 거라구. 그러니까 혹시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말해 보라니까." 방송이란 게 원래 이런 걸까? 세상에! 내가 원하는 사람을 마음대로 만날 수 있다니, 또 그게 바로 일이라니!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유명인사들을 자유로이 만날 수 있다는 즐거움에 내 가슴은 벌써부터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저, 제가 한신 타이거즈의 팬이거든요." "아, 그랬었지. 기억 나." "지난번 (선데이모닝)에 출연했을 때, 노무라 감독님께서 화상전화를 통해 잠깐 출연하셨거든요." "봤어. 오토가 노무라 감독하고 이야기 했잖아.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던데?" "그렇긴 하지만, 언젠가 실제로 만나게 되면 정말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때까지 우리의 얘기를 듣고만 있던 후지와라 편집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끼여들었다. "그거, 괜찮을 것 같은데....." 뭐? 설마..... 그렇다면 정말 노무라 감독을 만날 수 있다는 건가? "지금 노무라 감독인 인기 절정이잖아. 오토도 한신 타이거즈 팬이라며? 그럼 화제가 될 만하지. 마츠바라, 어떤 것 같아?" "음, 괜찮은데. 시청자들 관심을 끌 만한 주제야. 한신 타이거즈의 노무라 감독과 열렬한 팬 오토다케의 전격 인터뷰!" 이런 게 방송의 묘미인가! 이렇게 박자가 척척 맞아떨어지다니.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오토. 내일 여행 떠난다며? 아무 걱정 말고 푹 쉬고 오라구. 그 동안 우리가 차질 없도록 준비해 놓겠어. 물론 노무라 감독건도 포함해서."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노무라 감독을 만나고 싶어한 것은 그가 한신 타이거즈의 감독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노무라라는 인물의 생활, 그의 철학에 일찍부터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예전 야쿠르트 감독 시절부터 그를 주목해 왔으며, 그래서 만일 그를 만날 수 있게 된다면 조그마한 선물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랬기 때문에 여행 중 나는 줄곧 베르사체 매장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 헤맸던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잠시 잊기 위해 떠났던 여행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떠나면서는 (뉴스의 숲)출연 결정 때문에, 여행지에 와서는 노무라 감독과 베르사체 덕분에 온갖 생각이 뒤죽박죽이었다. 하지만 이건 약과였다. 그 모든 사연들을 한방에 날려 버릴 만한 큰 사건이 일본에서 벌어져 있었다. 그것은 내가 도쿄를 떠난 지 1 주일 정도 지나서였다. 나만 모르고 있었을 뿐..... '당고 삼형제' 냐 '오체 불만족' 이냐 "오체 불만족" 을 출간한 고단샤(일본 최대의 출판사)의 오자와 이치로 씨. 유명한 정치가와 이름이 같은 그분은 "오체 불만족" 의 기획 겸 편집 담당자이다. 180 센티미터 가까운 키에 짧은 머리, 언제나 싱글거리는 미소를 트레이드 마크로 지니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맡은 일에 관해서는 정말 칼같이 엄격한 분으로, 내가 깊이 믿고 의지하는 분이다. 여행 중 근황보고라도 할 겸, 그분께 국제 전화를 걸었다. "아, 오자와님이세요? 건강하시죠? 전 햇볕에 너무 익어 버렸어요. 콧등은 벌써 살갗이 벗겨지기 시작했구요. 예, 전 정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것 참 부러운걸. 기분 좋게 재충전하고 있는 거지? 그나저나 여기선 큰일났어." "예?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니, 어머니께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니?" "예? 못 들었는데요. 사실 아직까지 한 번도 연락을 안 했거든요. 집에 무슨 일이 있나요?" 괜히 가슴이 두근거린다. 제발 나쁜 소식이 아니면 좋겠는데. "오토가 떠나기 전날 (선데이모닝)방송이 나갔잖아? 그 나흘 뒤에 전에 녹화해 뒀던 (구로야나기 데츠코의 초대석)까지 방송이 되었거든. 그런데 그것 때문인지, 책 판매량이 갑자기 기하급수로 늘어 버린 거야. 정말 굉장하다구!" "굉장하다니, 어느 정도인지.....?" "어제, 아니 그저께였나? 다시 재쇄를 찍었는데, 그게 무려 50 만부라고. 우리 출판사 영업부에 물어보니 50 만 부 재쇄는 이제까지 유례없는 일본 신기록이래."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잠시 현기증이 나고 어지러웠다. "저희 집은, 저희 집은 괜찮은가요?" "어제 어머니와 통화를 했어. 잘 말씀드렸고, 지금은 괜찮아 지신 것 같아. 자네가 돌아올 때까진 안심해도 돼!" 내가 쓴 책이 사람들로부터 폭발적 반응을 얻으면서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 변화가 내게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 즉 부모님과는 관계가 없다. 사실 내가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우리 부모님께도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적지 않았다. 물론 부모님은 그 모든 요청을 다 거절했다. 매스컴에는 일절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 부모님의 확고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 때문에 우리 부모님께 취재 의뢰가 쇄도한다면..... 이건 정말 불효도 보통 불효가 아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곁에 있던 친구가 무슨 일 있냐며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내게는 그 소리가 멀리서 윙윙 울려대는 것만 같았다. 일단 서둘러 집에 전화를 해보기로 했다. 하지마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어머니 목소리를 듣자마자 오히려 맥이 탁 풀려 버리고 말았다. "그저껜 징그럽더라, 얘. 너도 알겠지만 난 전철을 잘 안 타잖니? 그런데 오랜 만에 친구들하고 교토로 여행을 갔어. 그랬는데 네 얼굴이 'AERA (아에라)' 란 잡지의 표지에 나왔더구나. 야마노테선(도쿄 내의 순환 전철선)의 전철 안에도 네 얼굴이 내걸려 있고, 키오스크(전철역 내의 가판대 명칭)에 가봐도 네 얼굴이 잔뜩 붙어 있고. 정말, 부끄럽지 뭐니. 어휴, 이제 그만들 했으면 싶더구나. 아 참, 그나저나 잠깐 기다릴래? 아버지를 바꿔줄 테니까." "여어, 대스타님!!" 이젠 됐다. 염려를 한 내가 바보였다. 세상에. 두 분은 아무런 변화 없이 태평스런 나날을 보내고 계셨던 것이다. 내 일생의 소원은 이런 가족의 평화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뿐이다. 이 성역을 침입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누구건 간에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 오자와와 부모님께서 보내주는 일련의 소식들은 정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도록 만들었다. "오토, 또 재쇄를 찍었어. 이제 곧 300 만 부를 넘어설 거야." "얘, 너 일본에 돌아오지 않는 편이 낫겠다. 길에 나섰다간 틀림없이 난리가 날 거다. 게다가 넌 휠체어를 타고 있으니, 사람들이 얼마나 잘 알아보겠어!" 시드니에서 나는 일본에서 여행 온 사이토라는 친구와 사귀게 되었다. 그가 전하는 일본의 최신 정보를 듣고는 내 귀를 의심했다. "너 지금 일본에선 뭐가 제일 유행인지 알아?" "몰라, 뭔데? 빨리 말해 줘. 일본을 떠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구." "너 모르니? '당고 삼형제' 란 노래가 엄청나게 히트를 쳤잖아. 그래서 요 몇 달은 그게 줄곧 베스트를 차지했었어. '글레이' 보다 인기가 높았다구." "무슨 노래인데?" "나도 다는 몰라. 어떻게 되더라? 그래, '당고, 당고, 당고 삼형제!' 라고 부르는 거야." "에이, 그런 허풍에 내가 속아 넘어갈 줄 알고?" "아니야, 사실이라니깐. 그게 말야 지금은 베스트 자리를 놓고 '당고' 냐 '오체 불만족' 이냐, 한마디로 난리가 나 있다구!" 눈 앞이 캄캄해졌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누리던 평화로운 생활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일까? 불안한 나를 태우고 꼭 추락할 것만 같은 비행기는 1999 년 3 월 22 일, 나리타 공항에 무사히 내려앉았다. @FF @fc 2 장 2 새로운 리포터 오토다케를 소개합니다 (뉴스의 숲)으로 들어가다. 한 달 보름만에 돌아온 즐거운 우리집! 그런데 정말 난리가 나 있었다 전화로, 팩스로, 우편으로 온갖 곳에서 강연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신문사와 잡지사에선 연일 취재를 해서 기사화하겠다고 법석이었다. 게다가 무수히 많은 방송국에서도 출연해 달라고 줄을 이었다. 그 중에는 "오체 불만족" 을 영화로 만들자는 요청까지 들어와 있었다. 어떤 사람은 아예 우리집까지 찾아와 강연해 달라고 매달렸다. 나는 이미 1998 년 이후에는 일체의 강연을 중단하기로 결정한 바 있었다. 그래서 어느 경우나 정중히 거절해 왔다. 그러나 출판사가 아닌 우리집으로 직접 의뢰해 오는 경우는 대부분 중간에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이기 때문에 거절하기가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었다. 오자와에게서도 몇 가지 연락 온 사항이 있길래, 그에게 귀국 후 최초의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 전화로 나는 질겁을 하고 말았다. 2 월 중순, 판매가 비약적으로 늘어난 이후 강연의뢰 건수가 고단샤로 하루 300 통 이상 걸려 온다는 것이었다. 그가 소속된 학예도서 제2 출판부의 다섯 대 전화가 잠시도 쉬지 않고 종일 울려댔다고 했다. 그런데 3 월이 다 지나가고 있는데도 도무지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가 말을 확 말을 돌렸다. "그런데, 오토, 이것 참. 지금 이렇게 말하면 곤란하겠지만 말야. TBS 에서 빨리 오토를 만나 업무협의를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그게 내일이라고 하던데." "내일? 맙소사, 전 말이에요, 오늘 지금 막 돌아왔다구요!" 묵묵부답의 오자와. 하긴, 그에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내가 불평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여행을 떠나기 전에 4 월부터 출연하기로 약속은 해놓았지만, 현재까지 어떤 일정도 아는 바 없다. TBS 에서 내일 보자고 하는 게 무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내일이라고 하셨죠? 그럼 내일 오후 1 시에 로비에서 뵙겠습니다." 왜 이렇게 정신없는 거지? 제기랄, 투덜투덜. 그러면서도 벌써 내일부터 벌어질 새로운 상황, 새로운 세계의 소용돌이 속으로 이미 내 관심사는 모두 휩쓸려가 있었다. 1993 년 3 월 23 일, 일본으로 돌아온 다음날. 약속대로 TBS 1 층의 커피숍에 갔다. 오자와가 전해 준 내용에 따르면, 먼저 그 다음주에 내가 출연하기로 돼 있는 (하나마루 마켓) 의 스태프들과의 협의가 끝난 뒤, (뉴스의 숲) 담당자들을 만나기로 돼 있었다. 오자와와 둘이서 기다리고 있는데, 낯익은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내가 '부처님' 이라고 별명을 붙인 다카하시 프로듀서였다. 그의 뒤로 처음 보는 사람이 둘이 있었다. "오토, 여행 잘 다녀왔어? 우리 (숲)의 스태프들 소개를 하지. 우선 이 두 사람이 오토의 기획을 담당할 거야." 다카하시는 예나 지금이나 빙긋빙긋 미소 띤 얼굴이었다. "아니, 후지와라 편집장님과 일하는 게 아닌가요?" "후지와라는 편집장이라고, 편집장은 취재팀이 수집해 온 뉴스를 어떤 순서로 얼마나 내보낼 것인가를 조정하는 역할을 해. 그러니까 뉴스를 수집해 오는 것은 여기 있는 두 사람을 포함한 디렉터들의 일이고." 아하, 그렇구나, 그렇다면 후지와라 편집장이 현장에 나서는 일은 거의 없고, 앞으로 취재는 이 두 사람과 해야 되는구나. "자, 그럼 난부부터 소개할까?" 다카하시 곁에 서 있던 남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앞으로 오토다케의 기획을 담당하게 되어 여러 가지로 신세를 많이 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성실해 보인다. 키가 170 센티미터 전후, 연령은 삼십대 후반쯤 되었을까? 두꺼운 검은 테 안경이 인상적인 그는, 수수한 옷차림으로 보아도 도저히 이쪽 계통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난부 디렉터가 한 걸음 물러서자 또 한사람의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미야자와입니다. 일단 제가 오토다케 씨와 나이 차가 제일 적을 겁니다. 한 번 신나게 해 봅시다. 잘 부탁드립니다!" 정말 능숙한 말솜씨였다. 거기다 빙그레 웃는 미소까지! 나와 나이 차가 가장 적다는 것은 그가 아직 이십대란 뜻이리라. 키 180 센티미터 정도에 풍채가 좋았다. 가죽 재킷을 세련되게 차려입은 그의 모습은 한눈에 이 계통에서 일하는 사람이란 느낌을 주었다. 난부와는 대조적이었다. "자, 그럼 (하나마루)와 미팅이 끝날 때쯤 보자구." 그 말을 뒤로 하고 다카하시 프로듀서가 자리를 뜬다. 난부는 그럼 나중에 보자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고, 미야자와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다시 보자는 사인을 보낸다. 두 사람의 행동이 참 대조적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곧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마침내 미리 예정된 미팅을 끝내고, 다시금 세 사람을 맞이한 나는 2 층의 보도국으로 향했다. 지난 2 월 7 일 이후 약 한 달 보름 만에 다시 출근한 셈이다. 내가 속은 건가? 처음 TBS 보도국을 방문했을 때는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한산해 보였다. 그러나 그날은 활기로 가득했다. 아니, 그보다는 정신없이 뛰어다닌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책상 너머로 누군가가 간간이 큰소리를 내고 있었고, 여기저기 놓여 있는 전화는 돌아가며 자기의 존재를 끊임없이 과시하고 있다. 그 전화벨 소리에 지지 않겠다는 듯 서류를 들고 전속력으로 소란스럽게 우당탕 달려가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 초등 학교 교실이었다면 엉덩이에 불이 나게 얻어터졌으리라. "여기가 니시자키 편집장님." 여태껏 컴퓨터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사내가 돌아보았다. "오토다케, 잘 부탁해." 시원시원해 보인다. 거기에 난부가 설명을 보탠다. "우리가 찍어 온 뉴스가 얼마나 방송되는지는 전부 니시자키 편집장님 손에 달렸다구. 그야말로 살생부를 만드는 분이지." "그런 매정한 소리 그만두라고. 이게 얼마나 신경쓰이는 일인지 잘 알잖아." 니시자키 편집장이 난부의 말을 받아치며, 사람 좋게 웃는다. "어, 그 일은 후지와라 편집장님 담당이 아닌가요?" "물론 후지와라 편집장님도 담당하지. 다만 편집은 일이 엄청나게 많아 하루 걸러 담당이 바뀌거든. 그러니까 (뉴스의 숲)은 후지와라, 니시자키 두 편집장님 체제인 셈이고." 소파까지 나를 안내해 준 후지와라 편집장이 손바닥을 탁탁 쳤다. "자, 모두 모입시다!" 자료를 보던 사람, 컴퓨터와 씨름하던 사람, 저마다 잠시 일손을 접고 모여들었다. 왠지 미안했다. 일을 꼭 방해하는 것만 같았다. 대충 열두세 명쯤의 인원이었다. 후지와라 편집장이 하나하나 소개시켜 주었지만, 내가 무슨 수로 단번에 기억하겠는가? 다만 그들 모두의 인상이 참 좋았다. 다들 정감 있어 보이고 성실해 보였다. 담배를 꼬나 물고 연기를 내뿜으며 인사하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솔직히 평소 방송국 사람들은 하나같이 거만하고, 안하무인이고, 자기 말만 앞세우는 사람들일 거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 참. 그런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건 모두가 나의 편견에 불과했던 것이다. "자, 다들 모인 셈이니까 작전회의를 해 보자구." 후지와라 편집장의 말에 따라 우리는 3 층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다카하시 프로듀서, 니시자키와 후지와라 편집장, 마츠바라 캐스터, 난부와 미야자와 디렉터, 히구치 카메라맨, 그리고 나를 포함한 여덟 명이었다. 긴 테이블을 중심으로 저마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화이트보드 앞에 선 사람은 후지와라 편집장. 그의 위상이 새삼 느껴졌다. "자, 그럼 시작하자구. 오토. 그간 우리들도 여러 방향으로 생각한 결과 몇 가지 안을 만들었거든. 맨 처음 다룰 주제로는 이지메 문제를 택했어. 물론 자네 의견을 듣고 나서 궤도를 수정할 수도 있겠지만. 앗, 그럼 한신 타이거즈의 노무라 감독은? 이지메 문제도 좋지만, 난 지난 한 달 보름 내내 노무라 감독과 어떻게 인터뷰할까로 고민하며 지내지 않았던가! 그래서 내 머릿속엔 '뉴스의 숲 = 노무라 감독' 의 등식이 자리잡힐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지메라니? 도대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런 내 기색을 눈치챘는지, 후지와라 편집장이 설명을 보탰다. "미리 설명을 했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하네. 여행 떠나기 전 얘기했던 노무라 감독 인터뷰 건은 일단 보루하기로 했네. 지금은 시즌 개막 직전이라 상당히 많은 방송국에서 집중적으로 취재가 들어갔지. 그래서 우리가 지금 그걸 다루면, 효과가 너무 약해. 다른 방송국과의 차별성도 없어지고. 그래서 하는 얘긴데, 노무라 감독은 다음 기회를 봐서 하자구." 내가 그만 순진하게 속아 버린 건가? 그럼 결국 나는 허수하비에 불과한 것 아닐까? 머리 한 구석에서 모락모락 불신감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곧 이어진 마츠바라 캐스터의 냉철한 이야기를 들으며, 내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오토가 그 의견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봐. 그 전에도 얘기했던 것처럼 (뉴스의 숲)을 통해 만나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분명 신나고 멋진 일일거야. 그렇지만 자칫 맨 먼저 그런 대중적인 인터뷰를 내보내게 되면 우리의 처음 의도와는 달리 시청자들이 오해할 소지가 다분해. '이거 뭐야,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니까 텔레비전에 나오는 거야? 그 바람에 뜨고 보자는 건가?' 라고 인식해 버릴 수도 있다고." 그 대목에서 그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솔직히 우리 쪽에서 부탁해 놓고, 오토에게 그런 이미지가 붙어 버리면 정말 면목없지 않겠어? 우리는 다만 오토와 함께 일해 가며 보람을 느끼고 싶었을 뿐인데, 그게 마치 시청률 경쟁인 것처럼 보여지는 것은 피해야 된다고 봐." 그의 말이 분명 옳았다. 노무라 감독의 인터뷰가 설사 내가 방송 일을 하게 되는 데 큰 촉매제가 되었고, 또 지금 그들이 말하는 것이 설령 변명에 불과할지라도, 마츠바라 캐스터의 지적만큼은 옳았다. 내가 방송 일을 하면서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인 것이다. 가능한 한 환하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잘 알겠습니다. 열심히 해 보죠." 첫 기획에 단서를 붙이다. "그런데 이지메 문제란 게 정확히 어떤 기획을 말하는 거죠?"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주도면밀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도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말이다. 그 기획의 출발점은 "오체 불만족" 이었다. "오체 불만족" 이 출간되고 베스트셀러가 된 지 이미 5 개월 정도 지난 때였다. 그 책을 읽고 자신의 고민거리를 솔직하게 적어 보낸 아이들이 정말로 많았는데, 그 내용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 것이 바로 이지메와 등교 거부였다. (뉴스의 숲)팀은 어째서 이지메가 일어나고 왜 학교가 가기 싫어지는가를 함께 짚어보자는 기획안을 마련했다. 그래서 이미 다섯 명의 출연자 섭외를 끝내고, 그 중 도쿄에서 먼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의 인터뷰를 위해서는 기차나 비행기편 예약까지도 마쳐 놓았다고 했다. 물론 맨 뒤에는 '오토다케의 판단을 존중할 것임' 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이렇게 철저히 준비한 것에 대해 내가 어떻게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무작정 수용하기보다는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방송이라는 매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고 있는 건 아닌가, 또 출연하기로 결정했다는 아이들 또한 자신의 결정에 대해 뒤늦게라도 후회하는 일이 발생하지는 않을까? 물론 결론적으로 그렇지는 않다는 판단이 섰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한 가지만큼은 분명히 해둬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처음부터 이런 말을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이라고 단서를 붙이고는 그들 모두에게 내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저는 (뉴스의 숲)리포터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오토다게 리포터의 제일 큰 장점은 아무래도 이제까지 줄곧 취재를 받는 입장이었다는 사실이 아닐까요? 그렇게 때문에 저는 취재받는 사람들의 입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아울러 그들의 입장을 누구보다 존중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후지와라 편집장과 시선이 부딪쳤다. 그는 진지하게 내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순간 내 얼굴이 조금 상기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아이들이 출연을 허락한 데는 나름대로 상당한 결심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주제가 주제인 만큼 그 방송이 나가고 나서, 자칫하면 그들이 겪은 이지메의 고통이 더더욱 심각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만에 하나라도 촬영이 다 끝난 뒤에라도 출연자 중 누군가가 '역시 이건 방영되면 안돼' 라고 한다면, 우리는 방송에 내보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침묵이 흐른다. 입술이 타들어가는 것 같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기차나 비행기 티켓이라든가, 그 밖에도 많은 비용이 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취재 때문에 그들에게 평생의 상처를 안겨 줄지도 모르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침묵이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모든 계획이 어긋나 버리는 건 아닐까. 그들은 이제껏 이렇게 많은 준비를 해왔는데..... "그렇게 하도록 하지." 후지와라 편집장의 말이었다. 계속 압력이 높아져 곧 펑 하고 터져 버릴 것만 같던 풍선. 그 아슬아슬한 순간에 공기 주입이 멈추고, 이윽고 두둥실 날아오른다. 나는 그 풍선이었다. "오토 말이 틀린 것 없잖아. 우리들 취재 때문에 아이들이 상처를 입는다는 건 말도 안 돼. 그건 나라도 막고 나설 거야." 단순히 그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는 소리로는 들리지 않았다. 그 또한 근본적으로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취재를 다 끝냈더라도, 어쨌든 당사자들이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 우린 방영할 수 없겠지." 난부의 말이었다. 그 또한 확실한 원칙과 소신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임에 분명하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말을 해놓고도 큰 걱정이 앞섰다. 내 말이 혹시 억지가 아닐지..... 하지만 그들 모두가 내 의견을 진심으로 존중해 주었다. 한편으로는 부담이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지메 문제를 다루는 이 최초의 기획뿐 아니라, 앞으로의 다른 기획에도 이런 원칙은 고수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회의가 끝나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마츠바라 캐스터가 나를 불러 세웠다. "오토, 마지막에 한 말 말야. 정말 훌륭해. 처음부터 취재받는 사람의 입장에 서겠다는 발상이 참 좋아. 하지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한가지만은 명심해 줬으면 좋겠어. 앞으로 오토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야 해. 그러다 보면 상대방이 말하기 싫거나 힘들어 하는 것, 또는 감추고자 하는 것까지 집요하게 추궁해야 할 때가 있어. 그건 절대 잊어버리지 말기를!" 이제부터 방송계에서 배워야 할 일은 그야말로 산 넘어 산, 강 건너 강이다. 다부지게 각오를 다져본다. 그녀는 떠나고 나는 왔다. "오토, 금요일 저녁에 약속 있어?" 신참이 왔으니까, 저녁이라도 사주겠다는 걸까? "글쎄요, 지금으로선 별일 없는데요." "후쿠시마 유미코 알지? 지금까지 죽 스포츠를 담당해 온 아나운서였는데, 3 월 말로 그만 두게 됐어. 그래서 금요일 방송 마칠 무렵에 시청자들에게 그 소식을 알리고, 4 월부터 새로 담당할 여성 아나운서들도 인사하기로 했거든. 그 때 자네도 첫 인사를 하면 좋을 것 같아서." 그럼 드디어 첫 출연? 게다가 여자 아나운서들과 함께! 만일 이 소식을 전해 주면, 내 친구들은 거의 까무러치고 말리라. "출연 시간은 30 초밖에 안 돼. 너무 짧아서 미안해." 난부는 정말 겸손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안할 것 하나도 없는데..... 이번엔 후지와라 편집장이 말했다. "그런데 말야, 그 다음날은 아침부터 취재하러 가야 되거든. 드디어 최초로 방송 일을 하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혹시라도 피곤할 것 같으면, 꼭 출연하지 않아도 돼. 느긋하게 쉬어도 괜찮다고." 늘상 듣는 소리다. 나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대체로 나를 염려하는 말들을 한다. 하지만 그 정도 일쯤은 사회생활을 하는 데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긴 그들은 내가 어느 정도의 체력을 가지고 있고, 평소 어떻게 생활하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자연히 나를 걱정하는 것이겠지만. "전혀 문제없습니다. 걱정 붙들어매세요!" "그래? 그럼 그날 5 시에 방송국에서 보자구." 금요일 오후 TBS 로 갔다. 우선 1 층 커피숍에서 신문과 잡지사 기자들과 인터뷰를 했다. 모두 네 건이었다. 나는 내 개인적인 삶을 소중히 여긴다. 그래서 1 주일에 2, 3 일을 '취재일' 로 정해, 가급적 한꺼번에 일처리를 한다. 그래야만 그 나머지 시간 동안 가족과 식사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때로는 데이트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취재를 모두 마치고 시계를 보니 5 시였다. 예정대로 드디어 리포터로서 첫 출연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러 가듯 두근거리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 층 보도국으로 올라갔다. 이제 낯설지 않다. 처음으로 혼자서 소파 있는 곳으로 간다. "왔어?" 나를 발견하고는 두 팔을 활짝 펴며 맞아주는 마츠바라 캐스터. 곧 시작될 방송 준비로 다급히 서두르면서도 번쩍 손을 들어 알은 체를 하는 후지와라 편집장. 누군가 어깨를 툭 치길래 돌아보니, 빙긋 웃으며 반가운 표정을 짓는 미야자와 디렉터. 그랬다. 이들 모두가 나를 두근거리게 한 내 마음속 연인 같았다. 나는 그들에게서 진심에서 우러난 환영을 받고 있다고 느꼈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6 시에 임박했다. 나에게 '주조종실 앞' 에서 기다리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하지만 거기가 어딘지 내가 알 도리가 있나! 멀뚱멀뚱 서 있는 내게 미야자와가 위치를 알려준다. "엘레베이터 앞을 지나가면 바로 앞쪽에 모니터가 여러 대 늘어서 있잖아. 거기 가면 한눈에 온갖 화면들을 훑어 볼 수 있어." "아, 거기요. 진짜 방송국같이 보이는 곳을 말씀하는 거죠?" "그렇게 보였나? 그래 거기야. 함께 가자구." 주조종실이란, 시간에 맞춰 영상을 내보내고 광고도 집어넣는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뉴스처럼 생방송으로 진행될 때는 업무가 더더욱 긴박하게 돌아가기 마련이다. 나 같은 사람이 괜히 근처를 어슬렁댔다간 아무래도 한 대 얻어맞을 것만 같았는데..... 그때 갑자기 내 눈앞에 아름다운 요정이 나타났다. 후쿠시마 유미코 등장. 눈부신 순백의 정장이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후쿠시마 유미코예요."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요, 시원시원한 미소가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줬다. "아, 안녕하세요, 오토다케입니다. 저..... 에비텐(일본식 새우덮밥에서 이름을 다 붙인 TV 프로그램)을 봤거든요." "에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오토! 후쿠시마 씨가 나온 건 이카텐(일본식 오징어덮밥에서 이름을 따 붙인 TV 프로그램) 아니야? 미야자와가 끼여들어 가벼운 설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나도 고집이 만만찮은 사람,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아니에요, 그건 다른 거라고요. (에비텐)은 영상 콘테스트 프로그램이고요, 뭐라더라, 영상미학이라고 했던가....." "맞아요. 제가 사회를 본 건 (에비텐) 이었어요. 그걸 보셨다니, 기분 좋은데요." 내가 맞췄다. (에비텐) 은 내가 중학교 다닐 때 방송됐던 심야 프로그램이었다. 거기서 사회를 봤던 분과 오늘 함께 출연한다니, 정말이지 신바람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우리 세 사람 곁으로 새로 출연할 여성 아나운서 두 사람이 다가왔다. 기무라 이쿠미와 오쿠라 히로미. 세상에! 이제껏 만나본 적 없는 아름다운 여성들을 그것도 한꺼번에 세 명씩이나 만나다니! 이건 오토 일생일대의 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 문화적 충격(?)으로 어리벙벙한 나에게 갑자기 미야자와가 날카롭게 일격을 가했다. "오토, 미인들 만나니까 정신이 없지? 빨리 전화번호라도 물어 보라구." 요정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그런데 미야자와, 이 남자는 어떻게 내 속을 이렇게 잘 꿰뚫지? 사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무턱대고 나를 성실하고 얌전한 사람으로 단정짓곤 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잘못 본 것이다. 나는 아름다운 여성 앞에서는 어쩔 줄 모른다. 엉큼한 Y 담 즐기기는 내 취미 중의 취미! 그런 나의 본모습이 물론 처음부터 드러나지는 않는다. 다만 오랫동안 함께 지내다 보면 자연히 그런 모습을 알게 된다. 그런데 미와자와는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벌서 나를 완벽하게 파악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나의 출연은 프로그램이 끝나갈 무렵, 기상예보 뒤에 잡혀 있었다. 마츠바라 메인 캐스터의 모리타 기상 캐스터와의 대화가 오간다. "일요일엔 날씨가 좋아졌다가 또다시 추워지겠습니다." "예. 그럼, 다음주 날씨는 어떤가요? 계속 흐릴까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4 월 1 일엔 기온이 20 도까지 오를 것으로 보입니다. 시청자 여러분, 환절기이므로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마츠바라가 날씨 얘기를 마친 뒤, 한 박자 쉬었다. "저희 프로그램에 다음 주부터 새로운 리포터가 출연합니다. 바로 이 사람입니다." 마츠바라의 신호에 따라 내 모습이 담긴 화면이 나간다. 이전 방송국 인터뷰 때 찍었던 것이다. 괜히 쑥스러웠다. 집에서 TV 로 보고 있다면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을 텐데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내가 나오는 화면을 보고 있자니, 이무래도 느낌이 묘했다. 하지만 앞으로 이런 일도 매번 반복되다 보면 곧 익숙해질 것이다. "오토다케 히로타다 씨를 소개하겠습니다." 자료화면이 끝나면서, 생방송 중인 카메라가 내 얼굴을 크게 클로즈업시킨다. 내가 말을 해야 할 차례다. 미리 생각해 둔 말들을 또박또박 발음하려 애쓰는 내 표정은, 아무래도 신출내기티가 무성하기 그지없다. 짧다는 그 30 초가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마츠바라가 마감의 말을 덧붙인다. "시청자 여러분, (뉴스의 숲)에서는 앞으로 오토다케 씨와 함께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함께 짚어보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교육문제, 가정문제, 배리어프리(장애인과 고령자가 전혀 불편없이 사회와 어우러져 살 수 있도록 정신적 물질적 장벽을 없애 나가자는 운동)를 없애 가기 위한 노력 등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마치바라 캐스터님, 이게 웬 실수! 없애 가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배리어(장벽)' 지, '배리어프리(장벽 없애기)' 가 아니라고요. 그랬다간 보통 큰일이 아니잖아요. 아,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생방송이니. 오늘의 방송 완료! 여기저기서 수고했다는 말들이 오간다. 오늘로 (뉴스의 숲) 출연을 마감하는 후쿠시마 아나운서를 중심으로 모두 모여들었다. 누군가가 꽃다발을 건넸다. 후쿠시마가 고마운 마음을 담아 인사말을 건넨다. 나도 한쪽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다. 눈물짓는 사람도 있었다. 그녀가 3 년간 출연했다니, 참으로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아니다, 어쩌면 너무 짧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어찌됐건 그녀는 오늘 떠나고, 나는 오늘 이곳에 왔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그녀처럼 떠나는 날이 올 것이다. @FF @fc 3 장 3 역시 시작이 어려워 비정한 비즈니스 세계 1999 년 3 월 27 일. 드디어 첫 취재의 날이 다가왔다. 취재 장소는 나의 모교인 요가 중학교. 원래 후보지로 스튜디오나 공원 등의 장소도 거론되었지만, 역시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만큼 학교에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되었다. 나아가 실제로 내가 3 년 동안 생활한 요가 중학교에서 취재하게 된다면 아이들도 무언가 남달리 느끼는 게 있지 않을까 하는 디렉터들의 생각도 있었다. 취재 장소를 내 모교로 정하는 데 있어 나는 처음부터 흔쾌히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이번 취재의 대상은 내가 아니라 아이들이고, 나는 단지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섣부른 걱정일지는 모르겠으나 그 속에 내 이야기가 강하게 부각된다면 이야기의 초점이 흐려질 뿐 아니라 시청자들이 오해할 소지마저 생길지 모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컸기 때문에 나는 경험 많은 분들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아침 8 시. 나는 집 부근에서 후지와라를 기다렸다. 보통 편집장은 취재에 나서는 일이 없지만, 이번만큼은 나와 함께 하고 싶다며 기꺼이 나서 주었다. 조금 일찍 도착했나 보다. 후지와라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후우,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하며 몸을 풀고 있는데, 낯선 편의점이 눈에 들어왔다. 틀림없이 내가 여행 떠난 한 달 보름 사이에 생긴 것이다. 오랫동안 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문득 여행 전과 달라진 것을 발견하곤 한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놀란 것은 어느 휴대폰의 TV 광고였다. 인기 배우인 오다 유지는 원래 일본에서 가장 큰 이동통신업체로 꼽히는'NTT 도코모'의 메인 광고 모델이었다. 그런데 여행 후 어느 날 TV 를 보니 그가 라이벌 회사인 '이도' 의 TV 광고에 나오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그 내용도 기가 막힌다. '이도' 의 휴대폰 대리점 카운터에 서 있는 오다 유지가 점원에게 이렇게 묻는다. "지금까지 제가 쓰던 것과는 뭐가 다르죠?" 설명을 듣던 그가 이어서 말한다. "아니, 그렇게나 많이 다른가요? 팸플릿 좀 주세요!" 정말 황당했다. 처음엔 도코모의 신제품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건 같은 회사에서 나온 구제품과 신제품 비교가 아니라, 경쟁사인 이도의 광고가 아닌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내게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맞아, 상당히 화제가 됐던 광고야." 프로야구에 프리 에이전트(FA) 제도가 도입된 지 5 년 이상이 지났다. 이것은 선수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으로, 입단 후 1 군에 등록되어 일정한 수 이상의 시합에 참가하고 나면 자신이 가고 싶은 구단으로 이적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이것은 미국 메이저 리그의 제도를 모방한 것인데, 처음부터 다음과 같은 사항이 우려되었다. 미국에서는 한 지역의 팬과 팀이 밀착되어 있다. 그들은 팀의 전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든 가리지 않는다. 가령 이 선수를 방출해 저 선수를 데려오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다. 경우에 따라선 팀의 중심선수라도 예외가 아니다. 실제로 메이저 리그에서는 대형선수의 교환이 빈번하게 이루어 진다. 10 승 이상을 올린 노모 투수나 요시이 투수가 순식간에 유니폼을 갈아입는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에선 어떤가. 물론 팬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팀을 응원하는 것은 똑같지만, 그 구단과 선수를 떼어 놓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히로시마(히로시마 카프. 일본의 유명한 프로야구 구단)에서 오랫동안 4 번을 달고 뛴 에토 선수가 요미우리(요미우리 자이언츠)로, 10 년 이상 오릭스(오릭스 블루에이브.)의 에이스로서 활동해 온 호시노 투수가 한신 타이거즈로 간다면? 그렇게 떠나버린 구단의 팬들은 어떤 기분일까. 이렇게 대형선수가 속속 이적해 가는 상황이 되면, 구단과 선수를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는 많은 일본인들은 선수에 대한 애착이 시들해질지도 모른다. 이 휴대폰 광고가 그런 상황을 떠올리게 했다. 확실히 새롭다. 그러나 솔직히 재미있는 발상이라고 단순하게 받아들이기는 버겁다. 이 같은 일들은 비즈니스상 정상적인 계약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하등 이상하게 바라볼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걸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가 오히려 시대에 뒤처진 것일까?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엔 지금까지 일본에는 그런 무딤을 허용해 주는 토양이 있었다. 그러나 오랜 만에 귀국한 일본의 현실에는 이처럼 충격적인 광고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후지와라 편집장이 왔다. 함께 택시를 타고, 취재 현장으로 향했다. 20 년 가까이 매스 미디어라는 세계에서 분투해 온 프로는 그 광고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아, 그거? 굉장해. 틀림없이 '변혁' 이란 걸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지. 그걸 제작한 사람은 요새 광고쟁이들의 우상이라고. 하지만 난 무리야. 도무지 그렇게까지는 못하겠어." 그 대답을 듣고, 얼어붙어 있던 마음 한 구석이 녹아 내렸다. (뉴스의 숲) 이라는 프로그램에 대한 신뢰, 후지와라라는 사람에 대한 신뢰, 이 프로그램은 정말 모두가 성실하게 만들고 있구나, 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그렇다면 나도 마음껏 날개를 펼 수 있을지도 모른다. TV 라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커다란 불안감이 한 꺼풀씩 걷혀 나가는 것을 느꼈다. 상처받은 아이들 오전 9 시, 요가 중학교에 도착했다. 날씨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불안, 기대, 긴장....... 모든 생각을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 낮게 드리워진 구름. 때때로 빗방울이 흩날린다. 이윽고 마츠바라가 도착했다. 휴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특별히 합류한 것이다. "안녕, 오토. 오늘 잘 부탁해." 버튼 다운 셔츠에 감색의 브이넥 스웨터를 입고 나타난 마츠바라. 캐주얼을 입고 나타난 그는 한층 더 젊어 보였다. 후지와라가 나에게 귓속말을 건넨다. "저 친구 말야, 오늘 새벽 2 시까지 술을 마셨다구. 술이 아직 덜 깼을 거야."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츠바라는 태연히 뒷짐진 채 오늘의 '취재 현장' 인 요가 중학교 주변을 천천히 걷고 있다. 이어서 취재진이 탄 차가 도착했다. 속속 내리는 스태프 가운데 유달리 커다란 덩치가 보인다. "아니, 와카 선배!!" "야, 오토! 정말 오래간만이야." 중학교 다닐 때 여러모로 신세를 많이 진 1 년 선배, 와카바야시였다. 나는 평소 그를 그냥 와카 선배라고 불렀었다. "뭐야, 이거. 둘이 아는 사이?" 후지와라와 미야자와가 흥미롭다는 듯이 우리 둘을 번갈아 본다. "중학교 선배예요. 제가 염치없을 정도로 신세를 많이 졌죠." "아, 그러면 그 "오체 불만족" 에도 등장했었나?" 어쨌거나 참 묘한 우연이다. 이런 곳에서 와카 선배를 만나다니. "나 말야, 여기 취재부에서 일하고 있어. 그런데 어제 취재부로 온 '알림장' 을 보니 '오토다케 최초의 리포트' 라고 돼 있지 뭐야. 내가 꼭 와 봐야겠다는 생각에, 데스크한테 억지로 부탁을 했지." 그는 예전과 별로 달라진 것 없이 여전히 믿음직스러웠다. 첫 번째 일을 앞두고 불안하기만 하던 내게 하느님이 큰 배려를 해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9 시 반이 지났다. 오늘의 주역인 아이들을 태운 야외촬영용 버스가 도착했다. 우선 마츠바라가 그쪽으로 향한다. 나는 정문 가까이에서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았다. 드디어 시작되는 것이다. 앞장선 마츠바라 뒤로 다섯 아이들이 따라온다. 이윽고 내 앞에 도착한 그들은 한 줄로 늘어섰다. 대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만나서 반가워." 인사를 했지만, 그런대로 반응을 보이는 아이는 두세 명 정도였다. '잘 부탁해' 라고 계속 말을 걸어 보았지만,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흐음, 만만치 않겠는걸. "이곳은 원래 계단이었는데, 내가 학교 다닐 때 경사로로 바뀐 거야."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바깥 회랑을 지나가며 학교 안을 안내한다. "예에, 그래요." "굉장하네요." "그래요......." 내 말에 유일하게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고등학생인 사이토마미. 마치 초상집 같은 분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그녀만이 희망의 통로 같았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까지는 그녀를 중심으로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다른 아이들에게도 계속 말을 걸지 않으면 안 된다. "사쿠라이는 이젠 머리가 좀 자랐어?" "아뇨, 아직인데요......." "어디, 한번 보여줘 봐." 앳되어 보이던 고등학생 사쿠라이 마사히로가 눈가까지 푹 눌러 쓴 모자를 벗자, 귀여운 까까중 머리가 드러났다. 한바탕 웃음이 터진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사이토가 끼여든다. "어쩌다 까까중 머리가 됐어요?" "그게 저...... 근신 처분을 받아서......." 모두 또 한번 크게 웃는다. 이지메를 했다가 근신 처분 중이라는 사쿠라이는 '만나고 싶어요. 그 이유는 제 마음속에 있어요' 라며 편지를 보내왔었다. 체육관이 보였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농구부였다는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진다. "드리블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요. 책에도 '백 번 듣느니 한 번 보는 게 낫다' 고 썼잖아요." 사이토의 요청으로 체육관에서 농구를 하게 됐다. 강연을 하거나, 초등학교를 돌아다닐 무렵엔 자주 사람들 앞에서 했지만, 최근엔 거의 해본 적이 없었다. 오랜 만에 느껴 보는 농구공의 감촉! 탕, 탕, 탕, 탕....... 내 드리블을 보며 무의식중에 환호성을 지르는 그들. 굳어져 있던 표정도 많이 누그러져 보였다. 뺨과 짤막한 팔 사이에 끼인 볼을 '패 - 스!' 라고 외치며 던졌다. 오카야마에서 온 중학생 고마츠바라 아키코의 두 손으로 빨려 들어간 볼. 그러나 그녀는 표정을 조금도 바꾸지 않은 채 그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짧은 미소조차 없다. 학교에서 이지메를 받았다던 그녀. 마음의 생채기가 난 사람들은 자기만의 성에 갇혀 지내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난공불락처럼 보이는 성을 상대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인터뷰 능력이 없는 건가? 교실의 책상을 모두 뒤로 물리고 넓은 공간을 만들었다. 다섯 개의 의자를 반원 모양으로 늘어놓고 그곳에 앉도록 했다. 그리고 그들을 마주볼 수 있는 자리에 의자 두 개를 놓았다. 나와 마츠바라의 의자였다. 조금은 뜻밖이었다. 나 혼자서 진행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사쿠라이가 자신의 수첩을 꺼내 마츠바라와 내 앞으로 와서는 페이지를 뒤적거린다. 유별나게 컬러풀한 페이지에 온통 스티커 사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사진, 제 여자친구예요." "누구? 우와, 멋있다!" "나도 좀 보여줘!" 이런 야단법석을 떨면서 분위기가 상당히 좋아졌다. 그러나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다시금 어색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마츠바라가 말머리를 꺼낸다. "오토를 실제로 만나보니까, 어떤 기분이 들어?" 차례차례 대답하는 아이들. 그리고 그들의 대답을 들으면서 차례로 질문을 이어나가는 마츠바라. 그 흐름이 매우 자연스럽고, 대단히 훌륭했다. 내가 감탄하고 있는 사이,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어 간다. 내 마음이 동요되기 시작했다. 감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나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려면 어차피 뛰어드는 수밖에 없다. 마침 대화는 '친구' 문제에 이르렀고, 사쿠라이의 말문이 열렸다. "전 말예요, 여러 친구에게 참 못된 짓을 많이 했는데도, 모두 정말 따뜻하게 대해 줘서...... 기뻤어요.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되고, 처음으로 친구들과 떨어져 혼자가 되니까 슬퍼서요...... 빨리 학교에 가고 싶었어요." 하나하나를 되짚어가며 이야기하는 소년. 이지메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제가 가장 심하게 괴롭혔던 애가 다른 애들보다는 제게 더 다정하게 대해 줬어요. 왜 제가 이지메를 했는데도 다정하게 대해 주는 것일까요....." "그래. 친구의 소중함이란 자신이 심하게 상처 입거나 침울해서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느끼게 되는 것 아닐까?" 아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들의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것이 내 역할인데, 이건 내 생각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게 아닌가. 이제껏 나는 신문이나 잡지의 인터뷰를 받는 입장이었다. 즉 질문에 대해 마음껏 얘기하면 됐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나 스스로에게 그렇게 여러 차례 마음의 다짐을 해왔건만..... 최악의 인터뷰어다. 차츰 이야기가 오늘의 주제인 '이지메' 로 옮겨갔다. 이 즈음의 화제 전환 또한 마츠바라의 능숙한 진행 솜씨에 의한 것이었다. 왜 이지메를 하는가, 어떻게 이지메를 하는가. 가해자의 입장인 사쿠라이에게 물어보았다. "뭔가 조금이라도 기분이 좋지 않으면, 괜히 두들겨 패기도 했구요..... 하지만 즐거웠던 건 아니에요. 좋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 저도 막 초조했어요.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나면, 벌써 이지메를 해버렸고....." 주제가 주제인 만큼 군데군데 말이 끊어지기도 했다. 그 틈새를 마츠바라가 질문으로 이어준다. 그 질문들은 모두 시청자들이 듣고 싶어할 만한 대답을 이끌어낸다. 질문: 이지메를 한 뒤 기분이 어땠어? 대답: 친구들과 볼링을 하거나 당구를 치러 가서 놀 때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하지만 집에 가서 혼자 있으면 '아, 내가 또 그랬구나' 하게 돼요. 질문: 많은 친구들과 함께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 대답: 저는 초등학교 때 친구들을 잘 사귀지 못하는 편이어서 굉장히 고통스러웠어요. 그게 억울하기도 했고. 그래서 모두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올라서고 싶고, 상위그룹에 속하고 싶다고 이전부터 쭉 생각해 왔어요. 어째서 마츠바라에게만 온통 의지하고 있는 거지? 나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졌다. 오늘은 내가 처음으로 리포터를 하게 된 날이 아닌가. 그러나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 혼자였더라면 틀림없이 지금껏 초상집 분위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빌빌거리고 있을 것이다. 문득 사쿠라이 옆에서 변함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고마츠바라의 모습이 보였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얹고, 입은 굳게 다문 채,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이지메 경험담을 말하는 사쿠라이 곁에서 그녀는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질문: 만약 학급 내에서 새로운 타깃이 발견되어 모두가 그 아이를 무시하거나 이지메를 했다고 하자. 다른 아이들이 '고마츠바라, 너도 끼여' 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니? 대답: 안 낄 거예요. 당해 본 경험이 있으니까, 그 친구의 기분도 알구요. 적어도 나는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요. 질문: 하지만 그 아이를 감싸고 돌다가 너까지 당하게 될지도 모르잖아? 그래도 다수파에 끼여들지 않을 거니? 대답: 지금이라면 이지메 당하는 친구를 도와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전에는 몰랐어요. 차분한 그녀의 말에는 설득력이 느껴졌다. 결코 뒤돌아보고 싶지 않을 과거를 그녀는 확실하게 긍정적인 힘으로 전환시키고 있었다. 강한 여학생이다. 쓰치미 아스카라는 여학생. 중학교 시절 건강 문제로 잠시 학교를 쉬게 되자, 사이좋던 친구들이 갑자기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이후 학교라는 곳에 공포를 느끼게 되어 결국 고등학교를 두 번 중퇴, 현재는 대입 검정고시를 목표로 공부 중이다. 질문: 왜 학교에 가지 않게 되었지? 대답: 가지 않았다기보다 '갈 수 없게 되었다' 고 할까요..... 가야 한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친구들 사이에 끼일 수 없으니 따분하고 재미없었어요. 정신적으로도 피곤해졌구요. 질문: 어째서 친구들이 떨어져 나갔을까? (오래 침묵을 지키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 대답: 그건......사실 걔들 마음을 몰라서 좀 당황했어요..... (마츠바라의 집요한 질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질문: 그때 쓰치미는 어떤 기분이었어? 대답: 친구라는 사이가 이렇게 변해 버릴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됐으니까 제발 그만! 귀를 막아버리고 싶었다. 더 이상 그녀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지 마세요. 이제 그만 내버려 두라고요. 그때, 퍼뜩 마츠바라가 이전에 했던 말이 기억났다. "앞으로 오토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야 해. 그러다 보면 상대방이 말하기 싫거나 힘들어하는 것, 또는 감추고자 하는 것까지 집요하게 추궁해야 할 때가 있어. 그건 절대 잊어버리지 말기를!" 바로 이런 경우였다. 틀림없이 개인의 프라이버시라는 측면에서 상대방의 해묵은 상처를 들춰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건 취재다. 들춰내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어느 정도의 각오를 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 임했을 것이다. 내가 너무 안이한 것일까. "면이 퉁퉁 불어터지지나 않았을까?" 점심식사로 라면이 나올 걸로 착각한 마츠바라의 말이었다. 그 말을 신호로 드디어 점심식사가 시작되었다. 이미 12 시 반이 넘은 시각, 3 시간에 걸친 인터뷰였다. 옆 교실에 후닥닥 '식당' (?)을 만들기로 했다. 모두 힘을 합쳐 책상을 옮긴다. 그때 미야자와가 갑자기 우렁찬 소리로 말했다. "마츠바라가 작아지면 고마츠바라(일본어로 '고' 는 '작은' 이라는 뜻이다.)가 되지 않아?" "그렇지, 그렇지. 그래선지 나도 아까부터 친근감이 들더라니깐." 그 싱거운 얘기에 나도 모르게 웃어 버리고 만다. 3 시간 동안 위축돼 있다가 휴 - 하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요가 중학교 시절 자주 가던 죠주안 식당에서 배달시켜 온 음식이었다. 정겹고 그리운 맛이다. 내 곁에 앉아 있던 사이토는 계란 덮밥에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정말 맛있어요. 이 집 음식 많이 먹어 보셨어요?" "그럼. '요가의 메밀면집' 하면 바로 이 집인걸." "그래요! 그렇게 유명하면 요코하마의 우리 집까지는 배달해 줄 시간이 없겠네요." 모두 배꼽을 잡고 웃는다. 지금까지 줄곧 바닥만 쳐다보던 고마츠바라의 얼굴에도 어느덧 미소가 배어든다. 하지만 그래도 표정을 바꾸지 않는 남학생 한 사람이 있었다. 잠 못 이루는 밤 점심식사 후에도 1 시간 정도 계속된 인터뷰. 나는 흠씬 두들겨맞은 권투선수처럼 완전히 뻗을 지경이었다. 1 층으로 내려가 세워 두었던 휠체어에 오르고서야 간신히 정신을 좀 차렸다. 내 가슴에 부착했던 핀마이크를 떼어내기 위해 투박한 손이 쑤욱 뻗쳐왔다. "아, 와카 선배! 수고하셨어요." "나보다도 오토가 더 수고했지, 뭐."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남아 있는 또 하나의 일. 오늘의 참가자 중 한 사람인 다케우치 아키히로의 집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사이타마 현 시키 시. 결코 가깝진 않다. 자아, 한번 더 힘을 내자. 운동신경이 발달해서 축구에 빠져 지내던 다케우치는 최근 들어 갑자기 외박을 한 채 아침이 돼서야 집에 들어오고, 학교에도 가지 않게 됐다고 한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널에 갇힌 것 같다' 고 내게 편지를 보낸 다케우치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걱정이 태산 같기만 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다케우치는 전혀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는다. 4 시간이나 되는 인터뷰 도중에도 할 수 없이 띄엄띄엄 입을 연 것이 두세 차례 정도. 중 2 라고는 도저히 생각지 못할 큰 몸집을 웅크린 채 시종일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적이다. 그곳에 도착할 무렵 빗발이 약간 더 굵어졌다. 다케우치의 집에는 가족이 모두 모여 있었다. 어머니는 벌써부터 젖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다케우치도 이야기하기 어려우리라는 생각이 들어. 2 층에 있는 그의 방으로 가보기로 했다. 계단을 다 올라가니 벽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있다. "이거, 다케우치가 그런 거야?" 그는 여러 차례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는 의사 표시일까? 방바닥에 앉은 나는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가기 전에 그의 흥미를 끌 만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어떤 만화를 좋아하니? 음악은 어떤 걸 들어? 저기 있는 스케이트보드는 언제부터 타기 시작했지? 그에게 아양을 떨고 있자니, 갑자기 내 자신이 슬퍼졌다. 대답을 하는 동안 다케우치는 쭉 쿠션을 껴안고 있었다. 체격도 크고 풍채 또한 당당하지만, 마음은 아직 여리디여린 중학생인 것이다. "오늘도 아침에야 집에 들어왔다고 들었어. 어디에서 놀다 온 거지?" "......아, 공원요." "공원? 누구하고?" "......선배들도 있구요." 1 대 5 보다는 맨투맨으로 인터뷰하는 편이 이야기를 듣기 수월하다. 그렇지만 조금도 흥이 나지 않는다. "선배들하고 뭘 하지?" "이야기해요." "무슨 이야기?"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 결국 아무런 성과도 올리지 못한 패자 오토, 맥없이 돌아가는 길. 난부와 함께 택시를 탔다. 자동차 유리창으로 빗물이 흐른다. "오늘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아니, 뭐가 죄송하다는 거야. 엄청 잘했는걸. 처음 하는 사람치고 그렇게 잘하는 사람은 없어." "아니에요. 마츠바라 캐스터님을 보고 있자니까 제가 얼마나 실력이 없는지 절감했어요. 부끄러워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마츠바라하고 비교를 하다니, 말도 안 돼. 그 사람은 벌써 10 년 이상이나 인터뷰를 해왔다구. 정말 솔직히 말하는데, 오토야말로 잘했어." 허물이 없어진 탓인지, 난부의 말투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런가요....." "특히 다케우치에게 던진 질문이 좋았어." "어떤 것 말입니까?" "다케우치에게 그랬잖아. '장래에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그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다고 쳐. 그 아이가 자라 중학생이 되었을 때. 지금의 다케우치처럼 매일 아침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생각할 것 같아?' 라고 했지." "다케우치는, '똑바로 살아가라고 말해 줄 것 같아요' 라고 했죠." "맞아. 그런 질문은 여간해서는 하기가 어렵다구." "하지만 말예요, 일단 일을 맡는 이상 '아직 나는 학생이니까' 라든지 '아직 능숙하지 않으니까' 따위의 변명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더더욱 화가 나고....." 길고 긴 하루가 드디어 끝났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내 방에 돌아와, 당시 사귀고 있던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지금 정말 신경질 나. 정말 신경질 난다니까. 이런 기분, 처음이야." 그녀는 이럴 때 상냥하게 위로해 주는 스타일이 아니다. 또 그렇다고 '옳지 잘 걸렸다' 하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타입도 아니다. 다만 '응, 그래?' 라며 들어줄 뿐이다. 어쩌면 한 귀로 흘려 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내게는 마음 편하다. "신경질도 나고, 짜증도 나고. 어쨌든 나 오늘밤은 잠을 못 이룰지도 몰라....." 그러나 오히려 피곤에 절은 나는 밤 10 시 조금 넘은 시각 평소보다 빨리 꿈나라로 갔다. @FF @fc 4 장 4. 난 정말로 운이 좋아 러브레터가 영수증으로 팩스 한 장이 들어왔다. 뭐가 뭔지 알아보기 힘들게 구불구불한 선이 그려진 그래프였다. 게다가 선이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였다. 팩스를 보고 있는데, 곧바로 전화 벨이 울렸다. 난부였다. "지금 말야, 어제 방송 숫자를 보냈는데 받았나?" "숫자라니요?" "거 왜, 일반적으로 시청률이라는 거 말야. 신경을 많이 쓴건 아니지만, 결과가 너무 좋아서 일단 알려주려고 보낸 거야." 이지메나 등교 거부로 괴로워하는 아이들 세계를 파헤친 오토다케 리포트 제1 탄. 시청률로 볼 때 산뜻한 출발인 셈이다. 톱은 니혼 텔레비전의 (플러스 1) 로, 평균 12.9% 이다. 그 다음이 (뉴스의 숲)으로 평균 10.5%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합격선이란다. "그래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역시 오토가 나오는 장면에서 시청률이 높잖아." "아, 그렇네요." 후반의 특집 부분. 6 시 42 분부터 50 분까지는 실선이 점선을 앞지르고 있었다. 이 8 분간은 (플러스 1) 보다도 (뉴스의 숲) 을 시청한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기쁜 마음이 왜 없겠는가만은, 다소 복잡하기도 했다. 분명 첫 회는 '오토다케가 어떤 리포트를 할 것인가' 하는 궁금증에서 시청해 준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에나 유효할 뿐이다. 앞으로 계속 시청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리포트 자체가 재미있어야만 한다. 어쨌든 첫회가 중요하긴 한데, 그 결과는 지금 나와 있는 대로다. 그러나 내가 출연한 시간 동안에는 당면 목표인 '타도! (플러스 1)' 을 성취했다는 기쁨이 있었지만, 한심스러운 내 리포트 솜씨를 생각하면 결코 드러내 놓고 즐거워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슬럼프를 탈출하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메일이나 편지, 팩스 등을 통해 속속 들어오는 시청자들로부터의 메시지와 프로그램에 대한 감상들이 삽시간에 나에게 큰 용기를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대화할 때, 강요하는 태도가 전혀 없었고 설교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무리하게 말을 끊거나 끼여들지도 않았죠. 도저히 처음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이지메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고생들의 마음이 차례로 열리는 모습을 보고. 이것이야말로 진정 마음의 배리어프리를 가꿔 나가는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이지메를 하는 쪽도 괴로워하고, 이지메를 당하는 쪽도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절감했어요. 오토다케님의 리포터로서의 첫 활약상은 정말 대단했어요. 다른 캐스터들과도 호흡이 척척 맞아 정말 훌륭했답니다." '나는 오토다케의 팬이므로 즐겁게 시청했어요.' 라는 말도 많았다. 물론 과대 평가가 있었다는 점을 부인하진 않는다. 그러나 다소 침울해 있던 내게는 정말 고맙기 그지 않는 메시지들이었다. 그런데 방송 후에 이메일을 받았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미야자와에게도 몇 통인가의 메일이 왔다. 그러나 그것은 다수가 아닌, 단 한 사람에게서였다. 요가 중학교에서 취재에 참가했던 여학생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취재 후 함께 이야기 나누며 미야자와와 이메일 주소를 교환했던 모양이었다. 미야자와는 이십대의 독신 디렉터로 잘생긴 편이다. 그 학생도 여고생이지만 꽤 성숙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다른 스태프들이 놀려대기 시작했다. "좋겠다, 미야자와. 입이 찢어지네." "이거 순 바람둥이 아냐. 취재하러 가서는 수작이나 걸고 말야." "여고생이라고라? 열 살 이상 넘어가면, 그건 범죄라구 범죄! " 물론 미야자와 본인은 두 사람 다 특별한 의도가 없다고 거듭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역시 열 살 이상이나 연하인 여고생이 그들 마음에 두고 있다니 기분 나쁠 일은 아니다. 그로부터 2, 3 일 뒤 이번에는 난부에게 편지가 날아들었다. 그녀에게서였다. "허어 참, 이번엔 난가." 당혹해하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난부. 봉투를 여는 순간 주위에 있던 스태프들은 모두 일하는 척하면서도 슬며시 곁눈질을 멈추지 않는다. "제길, 이게 뭐야. 별볼일 없잖아." 봉투 안에서 나온 것은 웬걸? 그것은 택시 영수증이었다. 취재 때 그녀가 쓴 비용으로, 또 다른 종이 쪽지에는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단정한 글씨가 씌어 있었다. "뭐야, 이거! 러브레터가 영수증으로 뒤바뀌어 버렸잖아." 주위가 온통 웃음바다로 변해 버렸다. 난부도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그런데 또 이게 웬걸, 속편이 남아 있었다. "그때 스튜디오 안내를 해주신 아저씨께도 안부 전해 주세요." 도대체 누굴까? 스테프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본다. 녹화 현장은 요가 중학교였지만, 집합 장소와 해산 장소는 TBS. 아마도 그때 스튜디오를 견학했던 모양이다. 도대체 누가 그 안내를 맡았던 것일까. 그때 데스크 쪽에서 마츠바라가 고개를 돌렸다. "그거 말야, 내가 했는데......" 천하의 명캐스터도 여고생들에게 걸리면, 그저 '아저씨' 에 불과할 뿐이다. 코디는 하기 나름 4 월 1 일, 와세다 대학 입학식. 두 번째 취재는 이 입학식에 대한 리포트로 정했다. 신입생들에게 어떤 생각으로 입학식에 참석하는 가를 물어 봄으로써, 요즘 젊은이들의 생각을 엿보고자 하는 기획이었다. 내가 졸업생이었다면 좋았을지 모르겠지만, 당시 나는 대학 4 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신입생에게 마이크를 들이밀면, 경우에 따라 잘난 체하는 것으로 보일지도 몰라 내심 불안했다. 그렇지만 첫 번째의 리포트가 워낙 무거운 주제를 다뤘기 때문에, 이번엔 가벼운 터치의 순수한 리포트를 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이번 담당 디렉터는 미야자와였다. "오토, 우선 결정해야 하는 사항이 히로스에 료코를 어떻게 다루느냐인데 말야....." "어떻게 다루다니요?" "역시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빅뉴스니까 전혀 다루지 않을 순 없다고 생각하는데, 가볍게 터치하는 정도로 넘어갈지, 아니면 학생들 반응이나 인터뷰 장면을 찍어 제대로 부각시킬 것인지. 오토 의견은 어때?" "음, 글쎄요. 터치하는 정도면 좋지 않을까요. 가능하다면 건드리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것 같구요." "왜?" "(숲)은 뉴스 프로지 와이드 쇼가 아니잖습니까. 본인 또한 대학과 관련된 기사거리로 다뤄지는 걸 싫어할 것 같구요. 순수하게 보통 신입생들만 인터뷰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 그런가?" 어쩐지 마야자와와는 마음이 잘 통한다. 그다지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고 그저 친구처럼 말이다. 그것은 그의 인품에서 오는 것인지, 단순히 나이 차가 적어서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어쨌거나 미야자와의 이런 탁 트인 성격, 나와 상당히 비슷하다고 느껴진다. "아, 그리고 그날 취재할 땐 뭐 편한 복장이라도 괜찮지만, 스튜디오용으로 정장 한 벌을 준비해 두라고. 취재용 차량에 실어 놓을 테니까." "예? 그럼 취재한 그날 방송되는 겁니까?" "당연하지. 지난번에 다룬 주제라면 언제 방송을 내보내도 관계없지만, 이번 같은 행사 취재는 당일날 내보내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뉴스니까." "아, 그렇군요." 아침 8 시 반이 지나면서 대기 태세에 돌입했다. 취재 자체는 즐거운 일이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은 그야말로 '이른 아침' 이다. 그나저나 뭘 입고 갈까. 지난번엔 처음 나서는 자리라서 평소 즐겨 입던 스웨터를 입고 나갔다. 그러나 앞으로 취재할 때마다 그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얼마 가지 않아 그만 바닥을 드러내고 말 것이다. 그런 고민에 싸여 있는데, '오늘은 뭘 입고 갈 거니? 내가 준비해줄게.' 라고 어머니께서 거들어 주신다. 그래서 나는 고르고 또 골랐다. "저기 있는 베이지색 니트." "한국에서 사온, 저거 말이니?" "그래요. 800 엔인가 줬죠!" "텔레비젼에 나가는데, 이 옷으로 되겠니?" "그 밑에 흰 칼라 셔츠를 받쳐 입으면 돼요. 그렇게 하면 아무도 800 엔 짜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 위에다 회색 재킷을 걸치면 그럴 듯하잖아요!" "어머, 그렇다 얘! 의외로 잘 어울리는걸." "하하하, 이거야말로 오토다케식 마술! 이젠 됐다." 입고 나갈 양복도 결정한 나는 무사히 출발, 곧바로 취재진과 합류했다. 그러나 숨돌릴 틈도 없이 문제가 생겼다. 미야자와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자, 리포터 제자리! 흐음, 그러지 말로 여기서부턴 걸어가면서 해보는 게 어때?" "예엣?" "예엣 말고 리포트!" "리포트라니요, 그걸 어떻게 하죠? 아직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는데....." "아, 그랬던가! 미안, 미안. 대충 걸어가면서 말야, 오늘은 무슨 날인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쳐다보며 주변 상황을 전해 보라고." 세상에. 무슨 선생이 저 모양이람. 히구치 카메라맨에게서 OK 사인이 떨어지고, 이윽고 촬영이 시작된다. "다카다노바바 역에서 와세다 대학으로 이어지는, 이곳 와세다 거리. 여느 때와 달리 정장 차림의 학생들이 많이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은 4 월 1 일, 와세다 대학의 입학식이 있는 날입니다." "우와, 굉장한데!! 그거 즉석에서 생각해 낸 건가?" "당연하죠! 난생 처음으로 여기서 리포트란 걸 하라는 말을 들었으니까요." 아, 걱정된다! 그런데 이런 엄벙덤벙한 취재진으로 과연 괜찮을지 모르겠다. 취재현장에서의 승리 드디어 와세다 대학 도착. 넘치는 인파로 가득했다. 바로 3 년전 나도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활력적인 생활이었다. 동아리 활동, 연애, 생명의 거리 만들기, 강연 활동, 책 출간, 그리고 뉴스 프로그램의 리포터..... 그리고 마침내 여기에 와 있는 것이다. 교내에서 슬슬 인터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일이 조금도 진척되질 않는다. 아주머니들의 방해 때문이었다. 카메라 팀이나 나를 보고서도 그다지 반색하지 않는 신입생들. 뜻밖에 냉정하다. 그러나 그들을 따라온 어머니들은 그 반대였다. "아니, 오토 아녜요! 이런 데서 만나게 되다니. 우리 아이도 와세다 대학 학생이에요. 오토와 같다니까요!" 그렇겠죠. 지금 여기 계신 걸로 봐서..... "함께 사진 한 장 찍어도 괜찮죠? 얘, 이리 와 곁에 서!" 이직 제가 승낙한 건 아닌데.... 그때 후지와라가 필사적으로 사진 찍는 걸 말린다. "죄송합니다. 오토는 지금 리포트 중이어서." 그러나 어머니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금방 끝나잖아요. 좀처럼 얻기 힘든 기회고. 얘, 가까이 와. 치이즈!" 오 마이 갓! 이게 뭐야, 정말 당신들 마음대로라니까. 원자력 대신 저 아줌마들의 힘을 어떻게 새로운 동력원으로 활용할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들은 시달리고 또 시달렸다. 입학식이 치러진 기념회 강당이 자리한 문학부 캠퍼스에서 우리는 그야말로 도망치듯 나와 본부 캠퍼스로 향했다. 보통 때라면 2, 3 분 거리지만, 극도로 혼잡한 상황이라 10 분 이상 걸렸다. 그곳에서도 몇몇 무리를 지은 신입생들과 인터뷰 장면을 찍고, 정오가 지나서야 대학을 빠져 나왔다. 물론 좀더 다리품을 판다면 더 나은 인터뷰가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은 역시 시간과의 승부가 관건이었다. 6 시 방송 시작 전까지 편집을 마쳐야만 한다. 오후 2 시가 넘은 시간에 TBS 에 도착, 이제 남은 시간은 4 시간도 되지 않는다. 스태프 룸에 마츠바라가 있었다. "어이, 오토. 어서 와. 어떻게 잘 됐어?" "엄청 고생했어요. 하지만 생각보다는 다양한 모습과 목소리를 담을 수 있었습니다. 먼젓번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거 다행인걸. 나중에 천천히 보기로 하지." 미야자와는 시간에 늦지나 않을까, 제정신이 아니었다. "좋아, 오토다케. 편집실로 가자구." "예, 그럼 마츠바라 캐스터님.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다녀와." 얼마나 근사한지. 사간을 다퉈가며 일하는 사람들의 세계. 정말 멋있다! 편집실은 2 층에 있었다. 100 평 정도의 넓이와 공간이 20 여 개의 개별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휠체어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아터진 통로에는 비디오 테이프가 쌓인 선반과, 움직이기 쉽게 바퀴 달린 의자들이 흩어져 있다. 그러나 나는 이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생방송 직전이 되면 긴박감이 마침내 최고조에 달하는 편집실. 어떤 의미에서 전쟁터라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프로들의 목숨을 건 승부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미야자와와 나는 그 가운데 한 자리를 오늘 우리들의 전쟁터로 잡았다. 어디에 쓰는지 알지도 못하는 기자재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모니터만도 4 개. 그 앞에는 스위치, 레버, 손잡이 등 잘못해서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고장날 것 같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더욱 놀란 것은 편집 실무자가 디렉터인 미야자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어떤 부분을 어떤 타이밍에 맞춰 연결시키는가를 지시하는 것은 미야자와이지만, 이들 기자재를 사용해서 실제로 편집 작업을 담당하는 것은 '편집맨' 이라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날 우리를 담당한 편집맨은 다케다. 완전히 마스터하는 데만도 1년 이상 걸릴 것 같은 기자재를 자유자재로 조작해 가며 물 흐르듯 작업을 진행시켜 나간다. 그 모습은 마치 '마술사' 같다고나 할까. 여기서 더더욱 경악할 만한 사실은 그 사람의 나이가 스물세살이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어려운 작업을 척척 해내는 저 사람이 나하고 같은 나이라니! 어쩌면 다케다 씨라고 부를 일이 아니라, 말을 터야 할 사이가 아닌가. 하지만 나는 그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앞으로도 '다케다씨' 라고 깍듯이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미야자와가 맨 오른쪽 모니터의 스위치를 누르자 시계가 클로즈업된 화면이 현재 방송중인 다른 방송국 프로그램으로 바뀌었다. 와이드쇼 시간대였다. 다른 방송국들도 저마다 리포터를 파견하여 와세다 대학의 입학식 상황을 생중계하고 있다. 왜들 저렇게 법석이지? 아, 그건 물론 히로스에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느 방송에도 히로스에는 나오지 않고, 리포터의 중계만이 하릴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입학식에 불참했는지도 모른다. 모두들 도리 없이 다른 학생들을 붙잡고 인터뷰를 하고 있다. "오토, 우리가 정답이었어. 우리 선택이 옳았다고." "그런 것 같네요." "히로스에를 중심으로 계획을 짰다면 큰 구멍이 뚫리고 말았을 거야." "그랬을 거예요." "이 정도 만들었으면 무리 없이 합격점이야."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승리를 자축하는 미소를 띠었다. 도대체 무엇에 승리했다는 건지는 지금도 잘 모르지만. 편집 작업은 클라이맥스에 다다라 있었다. 클린턴 대통령을 두들긴 남자 오후 5 시가 지났다. 슬슬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아무리 학생신분이라곤 해도, 뉴스 프로그램의 스튜디오에서 스웨터 차림의 캐주얼한 모습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혼자서 옷을 갈아입는 것이 불가능한 나는 누군가에게 그 작업을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날은 미야자와가 편집 중이라서 그렇게 못 했지만 평소에는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뉴스의 숲) 출연자가 이용하는 곳은 같은 2 층에 있는 'D 화장실' (우리나라에선 흔히 '분장실' 이라고 한다.)이다. 일반적으로 '화장실' 이라고 하면, 각자 나름의 용무(?)를 보는 곳이지만, 이곳은 텔레비전 방송국! 진짜 화장, 즉 메이크업하거나 옷을 갈아입는 장소이다. 코디네이터가 있을 리 없는 나는 양복, 와이셔츠, 넥타이를 어떻게 맞춰 입을지 고심했다. 아니 이리저리 짜맞춰 볼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의상이라고 해봐야 전부 한두 벌. 좀더 넉넉하게 구입하지 않는 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아, 출연료 날아가는 소리..... 미야자와가 휠체어 밑에 쌓아놓은 정장을 꺼냈고, 나는 얌전한 인형이 되어 옷을 갈아 입혀 주기를 기다린다. "어이, 오토, 자네 말야, 와이셔츠가 작아서 목둘레에 혈관이 툭 튀어나오는걸." "도리가 없잖아요. 고등학교 졸업식 때 산 것이어서." 와이셔츠를 입고, 바지도 갈아입는다. 이제 남은 건 넥타이뿐. 그런데 이게 큰일이었다.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본인 스스로도 매기 어려운 것이 바로 넥타이다. 하물며 남의 넥타이를 매주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아닌가! 누가 해줘도 늘 악전고투이다. 그때 세 명이 연속 도전하여 실패를 기록하자, 우연히 옆 부스에 있던 한 코디네이터가 차마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나의 넥타이를 매주었다. 으음, 역시 매듭이 산뜻하게 만들어져,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메이크업을 맡은 이나가키는 대단한 사람이다. 무엇이 대단하냐고? 1998 년 11 월에 클린턴 대통령이 일본에 와서 방송에 출연했을 때, 그 메이크업을 담당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의 경험담을 결코 자만하는 기색 없이 얘기해 주었다. "어휴, 그때는 정말 긴장했어요. 메이크업에도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거든요. 예를 들어 문지르듯 하는 메이크업도 있는데, 내 경우에는 스폰지로 두들기는 방식의 메이크업을 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통령을 두들길 수는 없는 노릇이라 살짝살짝 눌러가며 메이크업을 하기로 했죠." 이제껏 몇 번인가 이나가키에게 메이크업을 받아봤지만, 그때마다 나는 분명 두들김을 당했다. 그 움직임은 상당히 날쌔고, 강하다. "그런데 말이죠, 조금씩 하다 보니까 슬슬 두들김이 강해지는 거 있죠. 평소대로 말예요. 그러자 뒤에 쭉 늘어선 클린턴 대통령의 수행원들이 움찔움찔 놀라는 겁니다." 어쨌든 무사히 입학식 리포트의 편집을 마치고, 두 번째 방송을 마친 우리들은 앞으로 어떤 주제를 다룰까, 회의를 겸해 TBS 의 11 층에 있는 레스토랑에 모였다. "어때, 오토? 오늘 하는 걸 보니 이제 상당히 익숙해진 것 같던데." 주문을 마치고 다카하시가 말을 꺼냈다. "글쎄요. 첫회 때보다는 훨씬 재미있게 했습니다." "그래, 다행이야.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할지가 문젠데 말야." 그렇게 말한 그는 한 장의 종이를 내 앞에 내밀었다. 앞으로 다룰 주제의 후보들이 적힌 것이었다. - 입술밖에 움직이지 못하는 근위축증 환자인 전 종군기자. - 다네가시마에서 벌어지는 휠체어 마라톤. - 다리를 잃고서도 여전히 지뢰를 파내며 사는 캄보디아인들. - 난치병과 싸우는 아이들의 꿈을 이루어 주는 단체. 대충 훑어본 나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잠시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해 본다. 어떤 주제를 다룰지로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입에 올려도 괜찮을지 고민한 것이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고, 오토의 의견을 들려주기 바란다' 는 다카하시의 말에 결심을 굳혔다. "저, 기본적으로 여기에 적힌 내용들은 '장애가 있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런 주제만 다루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럼?" "저에게 요구되는 것은 '배리어프리 리포트' 라고 생각합니다만, 여기에 적힌 것들은 '감동 드라마' 라고 생각합니다." 마츠바라는 주제넘은 애송이의 의견을 가감 없이 받아들이며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오토. 솔직히 말해 우리들은 어떤 것이 '배리어프리 리포트' 인지 잘 모르겠고, 얼마 가지도 못해 다룰 주제가 바닥나 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거든." "마츠바라 캐스터님, 그 문제라면 걱정 없습니다. 모두 각자의 일상생활을 떠올려 보세요. 보통 아침에 집에서 나와 회사나 학교로 갑니다. 그때 탄 전철이나 버스에 장애인이 있다면 어쩐 곤란을 겪을까? 점심시간이나 업무가 끝난 후 어딘가로 식사하러 갑니다. 그 식당은 휠체어로 이용이 가능한가? 휴가를 맞아 여행을 갑니다. 장애가 있어도 자유로이 여행을 할 수 있는가? 생활이 이루어지는 모든 장면마다 그 수만큼의 '배리어프리' 에 관한 문제가 반드시 있을 겁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생활이 이루어지는 모든 장면마다 그 수만큼 할 말이 있다. 이 말인가? 그거 맞는 말인데." 마츠바라가 다시 한 번 입 속에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는 이미 내 의견을 수용한 것이다. 틀림없이 다음 번 계획안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다카하시도 이미 이해해 주었다. 여러 네트워크 담당자들이 필사적인 노력 끝에 제시한 주제들을 모두 폐기해 버린 격이 되어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만약 그가 권력 과시형 프로듀서였다면 자신의 뜻대로만 일을 진행시키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내 의견을 선뜻 받아들여 즉석에서 방향 전화를 수락했다. 정말 멋진 보스와 만난 것이다. 난 정말 운이 좋다! @FF @fc 5 장 5. 내 모습이 시체보다 더 충격적? 스스로 제작하는 즐거움 4 월 6 일은 내 생일이었다. 그날 난부에게서 팩스가 왔다. "스물세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내가 스물세살 때는 대학 3 학년에서 4 학년, 시시한 생활을 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오토가 참 부럽습니다. 그럼, 팬레터 같은 이야기는 그만 접고 진행 중인 일들에 관해 상의하고자 합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다음 번 취재에 관한 협의를 하더라도 사무적인 태도로만 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인품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번에 다룰 주제는 '역의 배리어프리 상황'. 투 번째 방송 뒤 협의한 내용에 착안해서, 누구나 사용하는 교통기관에 초점을 맞춰 취재하기로 했다. 난부와 거듭 진지한 회의를 했다. "이번에 오토가 전하고 싶은 핵심은 무엇이지?" "일반적으로는 누구나 편리하다고 느끼는 전철역이 휠체어로 이용할 때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죠. 그걸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모두 부정적으로만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라는 식의 논조가 아니라 '이렇게 편리한 부분도 있다' 라는 정보도 전하고 싶습니다." "그거 좋겠는걸. 구체적으로는 어떤 노선이 편리한가?" "무엇보다도 역무원에게 도움을 받지 않고 장애인이 혼자 힘으로 탈 수 있는가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도에이 12 호선이 편리하다고 봅니다.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거든요." "흐음, 역시 새로 만들어진 곳이라 잘 정비돼 있는 게로군." 난부가 메모를 해가면서 내 말에 맞장구를 친다. "글세, 꼭 새로 만들었다고 해서 그런 건 아녜요. 의외로 배리어프리가 잘 돼 있는 곳은 도덴 아라카와선이라구요." "그래? 굉장히 오래됐잖아, 그 전철은?" "그렇죠. 하지만 노면전철이라서 기본적으로 휠체어에 편리하죠. 계단도 적고. 특히 도덴의 경우는 도로에서 승강장까지가 경사로로 되어있어서 저도 혼자서 탈 수가 있습니다." "아하, 그렇군. 그거 참 좋은 얘긴데. 한번 다뤄 볼까?" 이런 식으로 난부와 주고받으며 구성안을 짜 나갔다. 이지메나 입학식 때와 달리, 처음 기획 단계부터 참가하는 이번 리포트. 준비된 요리를 맛만 보기보다는, 스스로 고생을 하며 만든 요리가 훨씬 더 맛있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난부와 함께 신바시로 향했다. 새로운 교통기관의 대표로서 오다이바 (전시, 쇼핑, 오락 등의 명소로 떠오르는 도쿄 인근의 신도시) 로 연결되는 '유리카모메 (승무원이 타지 않는 새로운 개념의 무인부상전철로, 오다이바를 일주한다.)' 를 취재하기 위해서다. 도덴과 비교가 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사장님의 기합 불어넣기는 굉장해." "예? 도대체 누굴 말하는 거죠? 사장님이라니?" "응? 아, 사장님이란 후지와라 편집장을 말하는 거지." 도요 경제신보 기자를 거쳐, TBS 경제부까지, 후지와라 편집장은 쭉 경제통으로 살아왔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인터뷰하게 되는 사람이 모두 기업의 최고경영자, 즉 사장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군요. 그래서 사장님인 겁니까?" 그런데, 그렇게 된 데는 사정이 있었다. 인터뷰를 하는 상대가 항상 기업의 최고경영자인 것만은 아니다. 사원을 만나게 될 때도 많았다. 그래도 늘 '사장님, 사장님' 이라고 불러,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만든 뒤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이 후지와라의 방법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그것이 본인의 닉네임이 된 것이다. 난부가 계속 말한다. "오토, 우린 역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 이고 싶어하잖아. 현장에서 취재를 해가면서 말야. '사장님' 같은 경우엔 다른 사람들이 찍어 온 걸 교통 정리하는 것이고. 그런데 이번엔 오토의 일을 계기로 사장님도 오랜만에 취재하러 나오시니 정말 기쁘더라고. 기운이 불끈 솟는 기분이라고." 그런 이야기를 듣고서도, 미적지근하게 일할 내가 아니다. 좋다! 절반의 성공 '유리카모메' 를 이용해 보기는 나도 처음이었다. 엘리베이터나 휠체어 자리의 확보 등 시설적인 부분은 과연 새로운 교통기관다웠다. 더욱 놀라운 것은 승차권 판매나 승강장 등에 제복을 입은 아르바이트 직원이 항상 대기한다는 사실! 나처럼 장애가 있는 사람이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승객이 왔을 때, 즉시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도착한 열차에 재빨리 올라타, '오다이바 가이힌 공원' 역을 향한다. 난부에게서 지시가 온다. "오토, 잠깐 창밖을 바라보며 코멘트를 해줘." "예..... 오늘은 공교롭게 비가 내리고 있지만, 활짝 갠 날 여기서 창밖을 보면 정말 기분 좋을 것입니다. 저기에는 후지텔레비전의 신사옥도 보이는군요." 사장님의 입이 일그러진다. "오토, 그렇게 하면 안 되잖아!" "앗!" 한 주가 지나고, 도덴과 JR 의 취재가 시작되었다. 좋은 날씨다. 햇살이 따뜻하면 기분까지도 포근해진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이날 스태프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는 우리 집에서 10 분 정도의 거리였다. 그런데도 '택시를 평상시 세우던 곳에 준비해 두었다' 는 난부의 전화가 왔다. '정말 가까우니까 그만 두세요' 하고 몇 차례나 만류했지만, '무슨 일이 있으면 곤란하니까' 라고 말하며 밀어붙이는 게 아닌가. 고맙기는 하지만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나를 지나치게 응석받이로 만드는 행위일 뿐이다. 이렇게 되면 나도 신경이 쓰이게 된다. 좀더 인내력을 발휘하자고 다짐한다. 이 사나이가 그렇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난부와 카메라맨들 외에 또 한 사람의 젊은 남자가 있었다. 신장이 180 센티미터에 가까운 상당한 거구였다. 흰색의 버튼 다운 셔츠에 청바지, 그리고 갈색의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어서인지 멀리서 보기에는 무서워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싱긋거리는 얼굴에 상냥한 눈으로 무서워할 구석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마츠다 다카히로. 지금까지 그는 사회부의 경시청 출입 기자였는데, 도지사 선거 취재를 마치고, 이번 주부터 (뉴스의 숲)에 배속된 모양이었다. 난부, 미야자와에 이어 세 번째의 오토다케 담당 디렉터이다. 어떤 사람일까? 새로운 만남이 이루어질 때마다 가슴이 뛴다. 도덴의 취재를 무난하게 마치고, JR 의 시부야 역으로 향했다. 난부와 협의를 한다. "오토, 시부야 역에서의 취재 포인트는 어디에 둬야 할까?" "음, 불친절한 태도!" "그래?" "그건 농담이구요, 역시 큰 역의 경우엔 그만큼 휠체어에 대한 대응이랄까, 기다리게 하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죠. 도쿄 역 같은 데선 5 분이나 10 분 정도 기다리는 건 예사지요. 스톱 워치 같은 걸 이용해서 얼마나 기다리는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을까요?" 난부의 미간뿐 아니라 얼굴에 온통 주름이 잡힌다. "굉장히 재미있는 아이디어긴 하지만 틀림없이 무리야." "어째서요? 한번 해 보죠?" "오토는 처음이겠지만, 이런 텔레비전 카메라가 동원된 취재는 허가가 필요하다구. 그건 기본이지. 그렇게 되면 사전에 연락을 해둬야 한다고. 몇 월 며칠 몇 시경 어떤 취지의 취재를 하는지를 말해 줘야해. 그렇게 되면 상대쪽도 홍보 담당자가 현장에 나타나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거지. 아, 물론 기업이니까 당연한 일이긴 해도." "그러니까, 평상시의 모습을 취재하긴 어렵다는 뜻이군요." "아마도." "참 별일이군요. 꼭 관공서 느낌이네요. 그렇지 않나요?" "정말, 그래. 그러니까 이번 취재에서는 승강장이 곡선으로 휘어 있어서 열차와 승강장의 사이가 많이 벌어져 있다는 것하고, 역무원과 인터뷰할 때 이 역에 불편한 점이 얼마나 많은가를 찾아내야 해. 부탁해, 오토." 그래, 좋아, 한번 해보는 거야! 오후 3 시가 되기 전 JR 시부야 역(최신 유행의 패션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젊은이들의 명소로, 하라주쿠 인근에 있다) 에 도착. 이미 '홍보' 라는 글씨가 적힌 완장을 찬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들과 조금 사이들 둔 채 뒤따라온다. 흐음, 이렇게 해서는 취재가 만만치 않겠는걸. 리포트를 하면서 역 구내로 향했다. 개찰기에 다다르자 나는 언제나처럼 창구 쪽에 말을 걸었다. "죄송합니다. 휠체어로 야마노테선을 타고 싶은데, 부탁드려도 될까요." "예예, 이쪽으로 오시죠." 내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정면에서 역무원이 나타났다. 잠깐! 이렇게 해줄 리가 없잖아! 평상시와는 완전히 다른 대응에 나는 넋이 나갈 지경이다. 이것이 난부가 말한 바로 그런 상황이구나. 입술을 깨물면서 역무원의 안내에 따랐다. 개인적으로 시부야 역을 이용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불편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8 년 12 월, 즉 취재하기 4 개월 전쯤에 승강장까지 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이건 참 편리하다. 시부야에 올 기회가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이 또한 취재 덕분이라고 생각하면 참 고마운 부분이다. 이어서 JR 시부야 역 부역장과의 인터뷰. 이것 참, 한 사람 한 사람 이야기를 해나가다 보니 정말 좋은 사람들이 아닌가. 역시 대단한 것이다, 조직이란! 나로서도 정말 어려운 인터뷰를 해냈다고 자위하면서, 시부야 역에서 하라주쿠 역까지의 취재를 마치고 택시에 올라탔다. "오토, 수고했어. 이걸로 이번 취재는 모두 끝났어." "수고하셨어요. 그런데, 난부 디렉터님, 그 계단 승강기 취재는 어떻게 됐어요?" "아, 오토가 '그거 무서운 걸로 소문났으니까 꼭 취재하자' 고 했던 것 말인가?" "신오쿠보 역엔가 있다고 하던데." 계단 승강기란 이름 그대로 휠체어를 위에 싣고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기계인데, 휠체어 이용자에겐 대단히 평판이 나쁘다.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경사가 급격한데다, 휠체어를 탄 사람이 지금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전혀 알 수가 없다. 한 번 사용할 때마다 수명이 3 년은 줄어든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로, 희한한 장치다. "부딪쳐 보긴 했는데 말야......취재를 완전히 거부한 건 아니지만, 온갖 핑계를 다 대면서 촬영을 못하게 하더라고, 역시 불편한 점들이 촬영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지. 내가 잘 모르긴 하지만 말야." "에이단선 쪽은요?" "거긴 더 심했어. 취재 자체를 전혀 받아들이질 않았어." "제길, 꼭 다루려고 했는데. 휠체어에 탑재한 디지털 카메라 영상을 써서 현장감을 더 살리든가, 역무원을 거기에 태워 체험시켜 볼 생각도 했거든요." 모처럼의 기분 좋은 취재였지만, 가슴속의 답답함은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 뉴스는 무엇을 전해야 하는가? (역의 배리어프리) 방송이 끝나고, 다시 언제나처럼 참여한 멤버들이 모여 술 한잔 하러 간다. 그렇지만 술이 약한 나는 우롱차를 마실 뿐. 그들도 그걸 이해해 줘서 무리하게 술을 마시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리에 앉자 나를 제외한 사람 수대로 생맥주를, 그리고 우롱차 한 잔을 주문했다. "감자 샐러드 만들어 줄 수 있습니까?" 감자 샐러드는 마츠바라 캐스터가 엄청 좋아하는 안주. 메뉴에 있든 없든, 그는 일단 주문하고 본다. 술이 들어오자, 각자의 성격이 한층 또렷하게 발휘되기 시작한다. 열심히 얘기를 하는 사람은 역시 사장님, 바로 후지와라 편집장이다. "오토, 뉴스 프로그램은 크게 나눠 두 가지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구. 하나는 사회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다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전하는 것. 제일 먼저 소식을 전하려는 특종 경쟁이 그걸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할까, 또 하나는 우리들의 생각을 메시지로써 전달하는 거야. 그건 지금까지 다뤄 온 뉴스를 심층취재해서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우도 있고 전혀 새로운 영상과 언어로 조립해서 해나가는 경우도 있지." 꿀꺽꿀꺽, 듣기만 해도 맛있어 보이는 소리를 내며 후지와라는 맥주를 들이킨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본래는 그래야 하지만, 아무래도 일상에 쫓기다 보면 뉴스를 쫓아다니기도 바쁘지. 그러니 메시지를 전하는 일에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고. 그래서 말인데, 그런 점을 오토가 메꾸어 주었으면 하고 희망하는 거라구." "그런 중요한 역할을 감히 제가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무슨 소리. 벌써 충분해. 통상적인 뉴스란 재빨리 전함으로써 시청자에게 놀라움을 안겨주는 거야. '허어, 그런가' 하게 만드는 거지. 그런데 오늘 오토가 한 전철역에 관한 리포트는 시간을 다투는 주제는 아니지만, 그 또한 틀림없이 '허어, 그런가' 하는 놀라움을 줄 수 있어. 앞으로도 그런 것들을 찾아서 방송해 나갔으면 하네." '메시지를 전해 주는 일'. 틀림없이 사건은 예기치 못한 곳에 일어나지만 우리는 그 사건을 시청자들에게 전해 주어야만 한다. 나 자신의 의지대로 주제와 소재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전하고자 하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 귀가 길은 니시자키 편집장과 함께였다. 니시자키가 '함께 가도 괜찮겠느냐' 고 물어왔던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아카사카에서 가이엔을 향해 가는 차안에서 '사실은' 하면서 니시자키가 말문을 열었다. "오토와 함께 일해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처음 꺼낸 사람이 바로 나야." "예에? 그래요?" "나는 입사하고 나서 처음엔 카메라맨을 했거든. 기자가 되고 나서도 해외 지국에서 일한 기간이 길어. 지금까지 수많은 역사적 장면을 목격했지. 마닐라 혁명에서 마르코스가 쫓겨나는 것을 보기도 했고, 르완다의 학살 현장에서 시체를 헤쳐나가면 취재한 적도 있었고.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말야,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냉혈한이 되어 있더라구." 이 또한 보도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리라. 만약 나였더라면 그 자리에서 까무러쳤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난해인 1998 년 가을에 우리 회사 특집에서 처음으로 오토를 본 후 내가 말야, 몇 년 만에 깜짝 놀랐다는 거야." 아니 내가 시체보다도 진귀했다는 건가! "물론 오토의 몸 때문에 놀란 것이 아냐. 존재 자체에 대한 감탄이라고나 할까. 뭐랄까, 이런 사람도 있다니! 그래서 꼭 저 친구하고 함께 일해 봐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됐지. 오토의 시각을 통해 무언가를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게 말야." 나는 평범하게 살아왔다. 나 자신은 그런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꾸며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내보였을 뿐이다. 그런데 나의 모습이 역전의 용사에게 전 세계를 둘러싼 엄청난 뉴스나 시체가 굴러다니는 장면보다도 더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어쩐지 나 자신이 무서워졌다. 내 존재란 무엇일까. 다른 이들은 나를 어떻게 보고 있고, 나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있을까. "오체 불만족" 이 한창 기세좋게 베스트셀러에 오름과 동시에 난데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아까 후지와라 편집장님도 말씀하신 것처럼 오토다케는 '전한다' 는 점에 관해서 발군의 자질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 경험이 많은 나 같은 사람도 갖고 있지 않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 내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지원을 할 테니까, 한번 해보자구. 정말 잘 부탁해." 니시자키는 약간 취해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이 본심에서 우러난 것임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내가 무엇을 갖고 있다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내가 진지하게 몰두하면 몰두할수록 눈에 보일지도 모른다. 바로 거기에. 내가 이 일을 하는 '의미' 가 있을지도 모른다. 네 번째의 리포트는 '밀실의 배리어' 인 엘리베이터를 취재하기로 했다. 나 같은 휠체어 이용자에게 엘리베이터는 없어서는 안 될 고마운 존재. 그러나 단지 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난번 취재 중에 역의 엘리베이터를 둘러싸고 난부 등의 스태프들과 이런 이야기가 오갔었다. "엘리베이터에 커다란 거울이 달려 있는 이유를 혹시 알고 계세요?" "모르겠는데....." "이렇게 휠체어를 타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면, 그 속에서 회전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요. 좁아서 그럴 수도 있고, 사람이 많아서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안에 거울이 달려 있으면, 이렇게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후진하여 밖으로 나갈 수가 있거든요." "음, 그렇구만, 아가씨가 화장을 고치거나, 샐러리맨이 넥타이 고쳐 매라고 달려 있는 게 아니었는걸." "물론 그런 쓰임새도 있겠죠." "그래, 오토. 역의 배리어프리를 다뤘으니까, 이번엔 좀더 작은 부분에 초점을 맞춰 해보자구. 엘리베이터로만 시각을 좁혀 다루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좋습니다. 뭐가 불편한지 보여 주자구요!" 나는 나일 뿐이다 엘리베이터와 관련된 특집은 원래 마츠다와 함께 하기로 했다. 경시청 출입기자였다는 사실만으로 왠지 무시무시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도대체 경시청 클럽이란 게 뭘까? "경시청처럼 뉴스가 모이는 곳에는 각 매스컴의 기자들이 모이는 방이 있지. 일종의 집합소라고나 할까. 그걸 두고 경시청 클럽이라고 하는 거야. 수상 관저에 모이는 곳은 수상 관저 클럽이라고 하고." "그런 곳에 드나드는 일은 역시 고되겠죠?" "그렇지. 우선 생활이 불규칙하기 때문이야. (숲)으로 자리를 옮긴 지 이제 겨우 1 주일이 되었지만, 정말 1 년여 만에야 겨우 사람다운 생활을 하고 있다고나 할까." 마츠다에겐 아직 돌이 지나지 않은 쌍둥이 딸이 있다고 한다. 단지 쌍둥이를 재우는 일조차도 힘들 터인데, 그 모든 일을 아내에게만 맡긴 채 한방중이나 새벽녘에나 귀가하는 경시청 클럽 생활은 정말 괴로웠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번 리포트야말로 마츠다의 '인간 복귀' 제1 탄이 될지도 모른다. 잘해야겠다. '엘리베이터 협회' 라는 단체는, 엘리베이터를 제작하는 각 기업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있다. 그 엘리베이터 협회가 보다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시각장애인을 초청하여 에로사항을 청취하는 자리를 마련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랜만에 좋은 소식이라는 생각이 들어 취재하기로 했다. 10 분 전에 현장에 도착했다. 앞의 일이 늦게 끝나는 바람에, 아직 점심을 먹지 못한 상태였다. 서둘러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로 뛰어갔다가 다시 현장으로 오니, 마츠다도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마츠다도 덩치가 큰 편이지만, 거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풍채가 정말 좋아 보였다. 제법 관록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는데, 과연 무슨 일을 맡은 사람일까? "아니, 오토. 아직 점심도 못 먹은 건가?" 마츠다가 내가 든 맥도널드 봉투를 발견했다. "예, 앞의 일이 생각보다 늦게 끝났어요." "그랬어? 그럼 빨리 먹어.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가사오, 좀 거들어 줘." 엥, 반말?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마츠다는 그 나이 들어 보이는 거구에게 거침없는 반말투다. "오토, 소개할게. 이 친구는 올해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가사오. 지금 연수 중이구 (숲)에 와 있어. 무언가 도움되는 일이 있을까 해서 데려왔지." "가사오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마츠다보다 한참 위의 연배로 보이는 이 남자가 신입사원이라니. 세상에! "오토다케 씨도 와세다 다니시죠? 저는 올해 졸업했습니다. 럭비부에 있었구요." 과연! 체격만 봐도 알겠다. 어쨌든 가로나 세로나 엄청나다. "이케다라고 알고 있죠? 도야마 고등학교 출신인....." 도야마의 이케다? 아, 럭비부 주장을 했던 1 년 위의 이케다 선배다. 내가 속했던 미식축구부와 럭비부는 엄청 사이가 좋았다. 그런데 그 선배는 럭비부원에게는 물론 우리 미식축구부원에게도 카리스마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아니, 이케다 선배를 어떻게 아시죠?" "그 친구도 와세다에서 럭비부에 있었고, 저랑은 동기죠. 하지만 이케다는 1 년 재수를 했으니까 나이로 따지자면 전 오토다케 씨와 같은 나이일 겁니다." 관록 있어 보이는 동년배라니, 참! 게다가 이케다 선배와 친구 사이고. 정말 세상은 좁다. 햄버거를 먹으면서, 참으로 신기한 첫 인사를 나눴다. 애로사항 청취에 관한 취재를 마치고, 시각장애가 있는 하가와 다카하시, 두 분께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오늘같이 업계 사람들에게서 애로사항에 관해 말해달라는 부탁이 자주 있습니까?" "그래요. '변기를 만들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편리하겠습니까?'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최근 들어 부쩍 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느끼십니까?" "옛날에는 큰 회사가 우리 장애인을 '일반적이지 않은 특별한 요구를 하는 까다로운 사람들' 로 대했지만, 최근에는 '손님' 으로 대접해 주는 느낌입니다. 기쁩니다." "아, 그렇군요." "예전엔 큰 회사가 우리 장애인들 생각이나 했나요? 한마디로 장애인들이 자기네 제품을 사용한다는 감각이 없었던 거지요. 최근 들어서야 사고가 많이 바뀐 것 같습니다." 아주 간결하면서도 의미 있는 답변이었기 때문에 점차 인터뷰에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그럼 이전에 비해 확실하게 진보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십니까?" "일단 우리 얘기를 들어나 보자는 입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가능한 것은 전부 시도해 보겠다는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상대가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뭐든지 이야기하겠다는 생각이 들겠군요?" "예, 말 그대로입니다. 다만....." 지금까지 시원시원하게 잘 대답하던 다카하시의 표정이 처음으로 그늘졌다. "저는 저 나름의 감각으로밖에 말하지 못합니다. 수많은 시각장애인들이 있지만 저마다 사정은 다르거든요. 처음부터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도중에 그렇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잘 걸어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바깥 출입을 거의 못하는 사람도 있지요. 천차만별입니다. 그래서 가급적 폭넓은 관점에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의식은 합니다만,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하가가 동조한다. "결국은 그렇습니다." 역시 그렇다. 그분들도 나와 똑같은 지점에서 벽에 부딪치는 것이다. "오체 불만족" 이라는 책 덕분에 나는 일본 전역에서 얼굴과 이름이 가장 잘 알려진 장애인이 되었다. 물론 의도한 것은 아니다. 장애인은 '착실하고, 조심스럽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 이라는 고정관념에 대해 나처럼 '착실하지 않고, 주제넘게 참견하고, 놀아가며 사는' 장애인도 있다는 소개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랬는데 "오체 불만족" 이 그만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그 바람에 그때까지는 전자였던 장애인의 이미지가 후자, 즉 나에게로 옮겨와 버렸다. 오른쪽으로 너무 기울어있는 것을 가운데로 끌어오려다 힘이 지나쳐 왼쪽으로 기울어져 버리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장애인들도 '오토다케처럼 즐겁게 살고 있다' 라는 감각이 주류가 되면, 장애인이 괴로워하고 있는 현실을 일반인들이 외면해 버릴 위험이 있다. 우리 사회엔 장애인과 관련하여 개선해야 될 문제점이 아직도 무수히 많다. 혹시 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문제점을 개선하려는 노력들이 타격 받지나 않을까 너무나 걱정되었다. 책을 출판하고 나서 나를 장애인의 '대표' 로 바라보는 시각이 강해짐을 느꼈고, 그런 취지의 인터뷰도 늘어갔다. 그러나 내가 '대표' 가 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장애인으로서의 의견을 요구받는다 해도, 나는 오토다케 히로타다로서 대답하는 수밖에 없다. 어디까지나 나는 나일 뿐, 전형적인 장애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분들도 똑같은 점으로 고민하고 있다고 듣고 나서, 기분이 착잡해졌다. 원래 나는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만난 적이 별로 없다. 그런 내가 이처럼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게 된 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미디어에 얼굴을 내민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소모시킨다는 말이 있다. 나는 그 말이 틀리다고는 생각하진 않지만, 소모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있는 동안에는 이 일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엘리베이터의 특집도 무사히 방송되었다. 언제나처럼 모두 함께 한잔 하러 가겠지, 라고 생각하며 스튜디오에서 스태프룸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웬걸, 담당 디렉터 마츠다가 웃옷을 입고 가방을 들고는 손을 흔든다. "오토, 미안. 오늘 딸 목욕시키는 당번을 맡았거든. 먼저 갈게!" 멍하니 있던 내 뒤로 난부가 다가와 말을 건넨다. "마츠다 저 친구, 상황이 말이 아니야. 애들이 아직 돌도 안 지났지, 게다가 쌍둥이잖아. 마누라 혼자서는 역시 버거울 거라구. 오토, 이해해 줘." 나는 깊이 감동했다. 일본에는 오로지 일, 일, 하며 가족 돌보기를 소홀히 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살지는 않으리라!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과 술 마시러 가는 시간은 고통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아내나 아이들의 생일날엔 서둘러 집에 가고 싶다. 그러나 조직에 속하게 되면, 꼭 그렇게만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마츠다는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동료들도 '이상한 놈' 으로 취급하지 않고, 이해해준다. 얼마나 멋진 분위기인가! 무엇보다 마츠다의 그런 행동 수칙! 열 살 가까이나 어린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완전히 '마츠다의 팬' 이 되고 말았다. @FF @fc 6 장 6. 진정한 프로의 실력을 보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감동 "오토, 이거 어떤 기획이지?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 줄 수 있겠어? 다뤄보고 싶은 주제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할 것 같은 주제에 대해 기획안을 내달라고 하여 짧은 보고서를 올렸는데, 그 중에 '진자와 절의 배리어프리' 라는 안이 후지와라 편집장의 시선을 끌었다. "얼마 전에 나가노에 있는 젠코지란 절에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경사로가 제대로 설치돼 있어 아주 쾌적했습니다. 하지만 그걸 머지않아 철거해야 한다는군요." "무슨 일이야, 편리하다면서? 누가 불평이라도 했나?" "아니요, 그게 아주 잘 만들어졌어요. 주변경관과 어울리게 디자인돼 있어 젠코지에도 손색없이 어울려요. 마치 옛날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요. 아마 평판도 상당히 좋을 겁니다." "그렇다면 좋은 거 아닌가?" "그런데 젠코지가 중요문화재 지정을 받은 모양입니다." "중요문화재라? 그렇겠군. 그 정도의 절이라면......" "저도 몰랐는데, 중요문화재가 되면 원칙적으로 허가 없이 못 하나도 박을 수 없대요. 그러니까 경사로를 설치한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머잖아 없앨 테니까 임시로라도 허락해 달라' 고 요청하는 형식을 취했구요. 또 못을 박지 않는 공정으로 경사로를 설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규정상 곧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거 참 흥미로운 이야긴데....." "다만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다뤘던 기사거리라, 그 점이 좀 걸립니다만....." "아무튼 젠코지에만 얽매일 필요는 없겠지. 나가노 말고 교토에 가면 중요문화재 지정을 받은 곳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말이야. 거기서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대처해 나가고 있는가를 취재하면 아주 좋을 것 같아." "아하, 그렇겠네요." "완고하게 전통을 지키려 한다면 그건 그것 나름으로 교토답다고 할 수 있겠고, 우린 우리대로 배리어프리를 주제로 덤벼들어 사람들 사이에 화제가 되도록 할 수 있으니, 괜찮을 거야." 최초의 출장 결정! 하지만 그저 기뻐할 수만도 없었다. 혼자서는 화장실도 이용할 수 없는 내가 출장을 떠나 숙박을 해야 한다니. 그것은 괴롭고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다. 물론 나를 보살펴주는 사람이야말로 더 번거롭고 힘들겠지만, 나 나름으로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부모님이나 애인도 아닌 사람에게 화장실 시중을 들게 한다는 것은....., 하지만 여기서 망설인다고 뭘 어쩌겠는가! 황금 주말이 시작되는 5 월 6 일. 이번 리포트에 참가하는 전사들이 도쿄 역으로 모여들었다. 담당 디렉터는 미야자와, 복수 진행요원으로 합류한 난부, 힘(?)쓰는 사람으로 가사오, 나아가 히구치 카메라멘을 비롯한 카메라팀 세 명을 포함한 총 일곱 명의 대부대. 우리가 탄 고속전철 신칸센에는,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 객실이 있었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곳으로 쓰이기도 하고, 나처럼 휠체어를 탄 사람들이 이용하는 자리였다. 그곳은 두 명 정원의 별도 공간으로 문을 잠글 수도 있었다. "오토, 잠깐 업무 협의를 할 게 있어서 그런데....." 미야자와가 내 객실로 왔다. 에이, 기차 안에서까지 일 얘기를 해야 하다니. 게다가 교토까지는 2 시간 반이나 걸리는데. 속으로 구시렁거리고 있는데, 취재에 관한 업무 협의는 처음 15 분뿐. 그 뒤로는 잡담 논스톱! 게다가 주제란 게, 여자, 여자, 그리고 또 여자 얘기. 나고야를 지나고, 교토가 가까워지자 짐을 정리하여 객실을 나왔다. 일반석에 앉아 있던 스태프들과 합류했는데, 난부가 의아한 얼굴로 묻는다. "미야자와 저 친구 깔깔거리는 소리가 몇 번씩이나 들려오던데, 정말 업무 협의를 한거야?" "했다구요! 어이, 오토, 어떻게 말 좀 해줘! "아주 조금....." "또 엉큼한 얘기만 잔뜩 한 거 아냐?" "윽, 오토다케가 그런 얘기를 너무 좋아해서요. 저도 모르게 맞춰 주다 보니." 아니, 이게 웬 자다가 봉창 뜯는 소리람. 덮어씌우지 말라고. 하지만 어쨌거나 1 시간 반 동안 밀실에서의 잡담으로 미야자와의 성격을 상당히 파악한 셈이다. 엄청 잘 지낼 사이가 될 것 같았다. 도착한 교토 역에서는 한 여성과 만나기로 돼 있었다. 시각장애인인 다케시타 야치요 씨. 스물세 살의 아름다운 여성이다. 이번 리포트를 진행하면서 그녀에게 취재 동행을 해달라고 부탁한 까닭은 시각장애인에게 배려한 절의 시설들을 검증하기 위해서이다. 최초로 방문하게 된 곳은 류안지. 류안지의 돌 정원은 교토 안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명소이다. 툇마루에 앉아 새하얀 모래 위에 늘어선 돌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다케시타 씨에게는 아름답고 촘촘하게 깔린 흰 모래나 돌의 배치가 보이지 않는다. 귀에 들려오는 소리의 세계에만 의존하는 그녀로선, 물이 흐르는 소리나 나뭇잎새들이 부대끼는 소리가 없는 정원이란 도무지 느끼기가 힘들 것이다. 잠시 정원을 바라보던 우리들은 장소를 옮겼다. 받침대 위에 놓여 있는 가로 1 미터, 세로 50 센티미터 정도 되는 상자 안에는 돌 정원과 똑같은 구조로 똑같은 수의 돌이 놓여 있었다. '미니 돌 정원' 이라 이름붙여진 이 미니어처야말로 이번 리포트에서 우리가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시각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자유로이 만져 보게 함으로써, 조금이라도 돌 정원을 느껴 보도록 하려는 류안지 측의 따뜻한 배려가 느껴진다. 다케시타가 손가락 끝으로 하나하나 확인해 가듯 돌을 만진다. 그녀의 표정이 차츰차츰 변해 간다. 손끝, 모래, 돌, 어떤 내레이션도 덧붙지 않는 장면이었지만 카메라는 대단히 아름다운 감동을 잡아내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활자와는 다른 영상의 힘이었다. 취재를 끝냈을 무렵, 주위는 벌써 어둠이 번져 있었다. 2 박 3 일의 취재일정 중 하루가 끝났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들어갔다. 나의 룸메이트는 미야자와였다. "수고했습니다아!" 룸 키를 홀더에 집어넣자 방 안에 불이 환하게 들어왔다. "전동 휠체어, 충전해야지?" "아, 부탁드립니다. 거기에 코드가 있습니다." 촬촬촬촬..... 욕조에 더운 물을 받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진다. 그 동안에 미야지와는 가지고 온 노트북을 인터넷에 연결시켜 이메일을 체크한다. 나는 침대에서 뒹굴며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있었다. "나 말야, 목욕 좀 할게. 그 전에 화장실에 다녀오는 게 좋지 않겠어?" "좀, 부탁합니다." 미야자와가 있는 곳까지 간다. 그가 허리띠를 풀어준다. 벽에 붙은 자세로 그가 바지와 팬티를 벗겨 주는 걸 기다린다. "미안합니다." "아아, 그런 말 말라고. 나는 학생 때 보트부에 있었는데 말야, 줄곧 합숙생활을 했지. 그래서 사내놈들 홀딱 벗은 몸엔 이골이 났다구. 그러니까 전혀 신경쓸 것 없어." 말은 그렇게 해도 역시 신경이 쓰인다. 만일 친구나 애인이라면 이런 부담을 충분히 이해하고 나와의 관계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미야자와의 경우는 순전히 일로써 만났다. 방송국에 들어와 다른 사람 밑을 닦아줘야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미안하고, 또 고맙습니다." 촬촬거리는 물 소리 때문에 내 말이 들리지 않았는지, 아니면 못 들은 척을 하는 건지 미야자와는 경쾌하게 콧노래를 부르며 욕조의 물을 살피고 있었다. 나를 한방 먹인 공무원과의 인터뷰 류안지, 산쥬산겐도, 니시혼간지. 치온인, 교토에서도 특히 유명한 절들을 돌아다녔지만, 어디를 가나 배리어프리를 위해 노력하는 열기가 느껴졌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참배할 수 있기를 바라는 생각이, 전통을 중시하는 진자와 절에 '개혁' 의 바람을 안겨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생각을 가로막는 중요문화재라는 커다란 벽. 각 절의 담당자가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은 '경사로를 설치하려고 해도경관을 해친다는 등의 이유로 허가를 잘 내주지 않는다' 는 것이었다. 허가가 나지 않는다니! 우리는 왜 허가를 내주지 않는지를 물어보기 위해 교토 부청(일본의 행정구역은 크게 도도부현으로 나뉘는데, 그 중 교토는 부이다. 그러므로 부청이 있다)을 방문하기로 했다. 교토 시내에서도 전동 휠체어를 탄 채로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도록 미야자와가 필사적으로 찾아준 리프트가 부착된 택시. 우리는 그 차 안에서 교토 부청에서의 인터뷰에 대한 면밀한 협의를 거듭했다. "어때, 오토! 잘 알겠지만 이번 취재에서 절은 배리어프리를 추진하고 싶은데 비해, 관청은 여기에 딴지를 거는 것으로 드러났잖아. 그러니까 이번에 하는 인터뷰가 관건이 되는 거지. 이 점 잊지 말고, 기합을 단단히 넣고 부딪쳐 보는 거야." 자라난 수염에 이따금씩 손을 대는 미야자와. "상당히 자랐네요." "그런 것 같아. 정말 바빴잖아. 빨리 면도 좀 해야지." "괜찮은걸요. 잘 어울려요. 뭐랄까, 꼭 유럽 귀족같은 분위긴데." "그래? 그거 듣기 괜찮은데. 하하하!" 이야기를 나눌수록 나와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다. 아부에 약한 것까지도 꼭 붕어빵 아닌가. 그때부터 그는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교토 부청에서의 인터뷰 상대는 '복지의 거리' 추진실 실장과 문화재 보호과의 과장. 과연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어째서 경사로를 설치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 어쨌든 막다른 곳까지 추궁해 보리라. 그러나 그런 각오는 보기 좋게 꺽이고 말았다. 먼저 배리어프리를 지향할 것으로 생각되는 복지의 거리 추진실부터. 질문: 역시 문화재는 보호되어야 함과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 사이에는 어떤 난점이 있을까요? 대답: 보호하면서도 관람의 편의를 확보해 나가야 하므로,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법을 꾸준히 찾아가는 과정을 중시해야겠지요. 그런 과정을 거칠 때 서서히 좋은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문화재 보호와 배리어프리는 상호대립이 아니라, 얼마나 원만하게 공존시켜 나가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배리어프리를 추진해 나가는 데 같은 교토 부청 내의 문화재 보호과로부터 '불가' 라는 통보를 받는 일은 없습니까? 대답: 추진하고 나서 협의하는 것이 아니라, 일의 추진과 병행하여 협의하고 있으므로, 최종단계에서 'NO!' 라고 하는 일은 없다고 볼 수 있겠죠. 횡적으로 일을 추진해 나간다는 말이 있는데, 최근 행정에서도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질문: 아, 그 말을 공동작업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대답: 저희들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건 좀 뜻밖인데. 배리어프리가 문화재 보존에 방해된다는 말은 들을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그들은 매우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물어볼 말이 좀더 남았지만, 이번에는 문화재 보호과를 향했다. 질문: 휠체어를 탄 사람들의 관람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는 경사로를 설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문화재에 그런 시설을 설치해도 괜찮겠습니까? 대답: 중요문화재로 지정되면 어떤 변경도 해선 안 된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질문: 문화재 보호정책을 추진하다 보면 상호 의견이 다를 수 있는데, 복지의 거리 추진실과는 어떤 관계 속에서 대처해 나가십니까? 대답: 저희들은 일을 분담하고 있습니다만, 넓은 의미에서는 교토 부라는 같은 조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추진실과 사전에 상의해 가면서, 가능한 한 쌍방의 의견을 존중하며 협조하고 있습니다. 질문: 그렇다면 전혀 다른 방향의 일을 추진하다 부딪치는 경우는 없다는 말씀입니까? 대답: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건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질문: 그건 두 부서의 목표가 똑같다는 말씀이신지? 대답: 같습니다. 훌륭하다! 나는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배리어프리를 추진해 나가는데 문화재가 커다란 족쇄 역할을 하고 있고,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리프트나 경사로 설치 등이 불가능하다고 해석해 왔다. 그런데 양자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하,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빙글거리며 교토 부 청사를 나오는 나에게 난부가 당황하며 손을 내젓는다. "뭘 잘못 알았어, 오토." "우하하하하!" 미야자와가 갑자기 폭소를 터뜨린다. "아니, 뭐가 잘못 됐습니까?" "오토, 그 얘기를 진짜로 받아들인 거야?" "그럼, 아니란 얘기예요?" 난부가 가까이 오더니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한다. "저기, 오토. 관공서라는 곳은 하나의 조직이라고. 서로 모순점이 있다고 절대 인정할 수가 없는 곳이야. 물론 세상 모든 것들이 흑백으로 완전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처럼 개념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지. 그건 정말 도리가 없는 것이고." "그렇겠군요." "그러나 관공서는 성질상 그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고, 어떻게든 잘해 나가고 있다는 듯 폼을 잡아야만 돼. 말하자면 그것이 그들의 일이기도 하니까 말야." "그래, 오토는 거기에 그대로 속아 버리고 만 거라고." 뒤에서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미야자와가 한마디 더 거들었다. 갑자기 눈앞이 노래졌다. "세상에..... 그러면 도중에 그만두게 하든지, 두 분께서 좀 더 세게 밀어붙이는 질문을 던지셨으면 좋았을텐데....." "그건 안 돼. 이번 인터뷰를 하는 건 오토니까." "괜찮아, 어쩔 수 없었어. 우리처럼 몇 년씩 경험 있는 기자들도 여간해선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공무원들과 인터뷰하는 게 제일 어렵다니까." 프로의식을 촉구하는 미야자와에 비해 나를 열심히 위로해 주는 난부. 모두 나를 배려해 주는 말들이지만, 내 마음은 불편하기 그지 없었다. 마지막 날인 3 일째의 취재도 끝났다. 도쿄에서의 약속 때문에 나는 정오 무렵 신칸센을 타고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나 카메라팀은 취재에 부족한 부분이 남아 있다고 한다. 흔히 그들 사이에선 '잡감' 이라고 불리는데,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는 영상을 말한다. 예를 들면, 이번 리포트의 경우 돌담이나 돌계단, 그 사이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장면은 교토를 상징하는 영상이다. 리포트 내용을 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지만, 이런 영상이 많으면 많을수록 아주 세심한 편집이 가능해진다, 그들은 '잡감' 이 약간 모자라기 때문에 좀더 촬영을 한 뒤 저녁 때 신칸센으로 올라온다고 한다. 그러나 나 혼자서 가게 하는 건 불안하다며 가사오가 동행해 주기로 했다. 이전에 미야자와도 끝도 없이 수다를 떨었던 휠체어용 객실. 똑같은 방인데 가사오와 함께 있자니 훨씬 좁게 느껴진다. 도시락을 까먹으면서 같은 세대로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거 정말 폐를 끼치네요." "무슨 폐?" "다른 신입사원들 연수기간은 각 부서별로 한두 주일씩만 한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가사오 씨 경우에는 오토다케 담당격이 돼서 (숲)에서만 두 달 가까이 일하고 있잖습니까?" "한두 주일 있어 봤자 결국 일을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채 다른 부서로 가게 되죠. 그래도 두 달 정도 지내다 보면 선배님들한테 귀여움을 받을 수도 있고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취재할 때는 언제나 그 일이 그 일이잖습니까. 바쁘게 뛰어다니기만 하게 되고. 다른 신입사원들은 자기들 일을 하고 있는데, 이번만 하더라도 사흘간 꼼짝없이 구속당한 셈이 되었고." "일이라고 해봤자 대개가 데스크 작업뿐이더라구요. 제 경우 도리어 '오티' 덕분에 이렇게 현장에 나와 보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그 점 참 고맙게 생각합니다." 겉보기와는 달리 마음가짐이 아주 상냥하다. 신경을 참 많이 써준다. 그런데..... "그런데 '오티' 가 누구에요? 절 말하나요?" "그래요, 오티! 오토다케 씨라고 말하면 길잖습니까. 그거, 괜찮은지?" "좋긴 하지만, 처음 듣는 것이라서....." "자, 그럼 그 이름은 제가 붙인 겁니다!" "푸하!" 신칸센이 도쿄 역 승강장에 미끄러져 들어간다. 가사오도 피곤할 터인데 내가 갈아타는 전철 승강장까지 바래다준다고 했다. 전철에 올라타서 뒤돌아보니 문이 닫히고 있었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창밖 너머로 거대한 덩치가 보인다. 빙그레 웃음지으며 머리 숙여 인사까지 한다. "수고하셨습니다!" 가사오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마음속으로 위로의 말을 건넨다. 그 동안 잊고 있었던 피로감이 한꺼번에 밀어닥친다. 인터뷰는 집요하게, 집요하게! 그 다음 주부터 편집 작업에 들어갔다. 편집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떤 테이프에 어떤 내용이 들었는지, 인터뷰에선 어떤 대화를 주고받았는지 등을 확인하기 위해 우선 촬영한 테이프를 모두 봐야 한다. 그걸 '프리뷰(pre - view)' 라고 하는데, 이번처럼 카메라 촬영이 오랫동안 이루어진 경우에는, 이 작업만으로도 보통 2, 3 일이 걸린다. 나아가 방송용 녹화 테이프를 만들기 위해서는 1 분당 1 시간 가까이 걸린다. (뉴스의 숲)특집편의 평균 방영시간은 12 분이므로, 편집에 걸리는 시간만 해도 대충 따져 12 시간. 그 뒤 내레이션을 집어넣거나 자막을 넣는 작업 등을 거쳐 비로소 완성된다. 지금까지 아무 생각 없이 보던 뉴스 하나에 이렇게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리라고는 전혀 알지 못했다. 물론 거기에 내가 가담하리라는 사실도. 미야자와는 절대 봐주지 않는다. 나의 미숙한 인터뷰 기술에 대해 일일이 멈춰가며 주의를 주고, 충고를 해준다. "질의응답시 사이를 두는 타이밍이 나빠. 상대가 아직 무언가 말할 것 같은 분위기인데, 오토가 다음 질문을 하는 바람에 그걸 놓치고 있잖아." "시청자가 듣고 싶어하는 것은 인터뷰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취재 대상의 목소리라구. 질문은 더욱 간결하게. 장황하게 많은 말을 하면 곤란해." "상대의 의견에 동의를 표해서 기분 좋게 이야기하도록 만들겠다는 의도는 이해하지만, 오토가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라고 수긍하는 소리가 계속 거슬려. 그럴 땐 고개만 끄덕이면 돼. 소리는 내지 말고." 방대한 시간이 걸리는 편집 작업. 일일이 멈추지 않고 그대로 작업을 진행시켜야 훨씬 빨리 진행될 것이다. 그런데도 일부러 충고해 주는 것은 내 실력을 키우고자 하는 배려일 것이다. 지적받은 부분은 모두 옳았다. "오토, 잘해 보고 싶은 마음은 있는 거지?" "물론이지요." "마츠바라 캐스터란 사람은 인터뷰의 귀재라구. 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한 게 있는데, 그거 비디오로 한번 볼 텐가?" "예, 보여 주십시오." "아니, 억지로 그럴 필요는 없고....." "이런 경험은 자주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이왕 하는 거니까 잘하고 싶어요!" "그래! 내가 그럼 찾아가지고 오지. 잠깐 기다려." 미야자와가 가져온 한 편의 비디오. 전철 역내에 독가스 사린을 살포하여 일본 전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옴진리교 마츠모토 치즈오 피고의 변호인단 단장인 와타나베 오사무를 인터뷰한 것이다. 그때까지 주임변호인으로 활약하던 야스다 요시히로가 체포됨에 따라 마냥 늦추어지기만 하던 재판. 그 재판이 더더욱 늦어지는 게 아니냐는 여론이 팽배하던 상황에서 마츠바라가 한 인터뷰였다. 우선, 사형 폐지론자로 알려진 야스다가 어느 잡지에 밝힌 의견을 마츠바라가 인용한다. 질문: 전형적으로 사형이 예상되는 소송사건에서는 오래도록 재판을 계속해 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지 않은가, 했습니다. 사형 확정을 늦추는 것이 최대의 변호가 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이번 사건의 변호 방침입니까? 대답: 그런 방침은 저희 변호인단 중 누구도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질문: 재판을 연기시키는 것이 전술이다, 라고 했습니다. 가능한 한 재판을 늦추도록 하라. 그것이 사형 폐지론자로서 최고의 방침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데요." 대답: 그가 어떻게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때 미야자와가 화면을 정지 모드로 전환시키며 말했다. "어때, 바로 여기야. 마츠바라의 첫 번째 질문과 두 번째 질문 말인데, 잘 들어보면 사실은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지. 똑같은 말을 다르게 바꿔 다시 물어봄으로써 상대방에게서 앞서와는 다른 대답을 이끌어내려 하고 있는데, 그거 알겠어?" "아하, 그렇군요." "자, 그럼 계속 볼까?" 재생 버튼을 누르자 인터뷰가 다시 시작된다. 질문: 가능한 한 신속하게 진상을 규명하자는 생각은 전혀 없으십니까? 대답: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신속하지 않습니까, 현재.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빠르지 않습니까, 심리진행이. 질문: 지나치게 느리지 않습니까? 대답: 아닙니다, 너무 빠릅니다. 질문: 너무 느린 편이 아닌지요? 대답: 전혀 느리지 않습니다. 너무 빠릅니다. 그건 강조합니다. 이걸 느리다고 한다면, 이야기가 전혀 되지 않습니다. 질문: 하지만 지나치게 빠르다고 하는 건 변호인단뿐이지 않습니까? 대답: 그렇지 않습니다. 미야자와가 폭소를 터뜨리며 정지 버튼을 누른다. "마치 아이들 싸움 같지, 이쯤 되면." "굉장하네요." "싸움이 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만하지. '신속하게 진상을 규명하자는 생각은 전혀 없으십니까?' 란 말을 듣고 어떻게 참겠나?" "분명....." "하지만 그것이 마츠바라의 작전인 거지. 상대를 화나게 함으로써 어떻게든 진실을 끄집어낸다! 이 인터뷰에서는 이런 수법을 썼지만, 상대가 바뀌면 곧바로 다른 작전을 펼치는 거지. 어쨌든 말야 '집요하게' 묻는 것은 마츠바라 캐스터의 인터뷰에서 공통적으로 두드러지는 점이야." "처음부터 다시 한 번 봐도 될까요?" 결구 미야자와와 함께 집으로 가는 택시를 탄 것은 날짜 변경선을 넘은 다음날이었다. @FF @fc 7 장 7. "오체 불만족" 열풍, 어떻게 봐야 하나 글을 보는 안목을 갖춰라! "오타 하루야란 분은 어떤 분이세요?" 특별히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스태프 룸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질문을 던졌다. "오타 씨? 3 월까지 로스앤젤레스 지국장을 했던 사람이지. 이제 일본으로 돌아온다고 하던데 오토가 오타 씨를 알아?" "그게 아니고, 벽보에 적혀 있길래요." 오는 5 월 11 일. 올해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올바른 뉴스 원고 작성법과 편집에 대한 스터디가 있습니다. 강사로는 그 유명한 오타 하루야 씨, 또 (뉴스의 숲)편집장 니시자키 히로부미 씨를 모십니다. 아무쪼록 모두 참석하시길 바랍니다. 이상이 벽보에 적힌 내용이었다. 흐음, 틀림없이 재미 있을거야. "..... 저도 가도 되지요?" "물론 가도 되겠지만, 오토에게 일부러 와달라고 하지 않은 것이어서....." 혹시 여태껏 '손님 취급' 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모처럼의 기회니까 어떻게든 참석하고 싶네요. 그런데 '그 유명한 오타 하루야' 라니, 역시 대단한 분인가 보죠?" "물론 굉장하지. 뭐가 굉장하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하겠지만, 리포트를 보내 오는 것만 봐도 그 사람에겐 상당히 독특한 세계가 있어. 이 계통에서 보기 드문 '자신의 색깔' 을 가진 사람이랄까. 예전에 (뉴스의 숲)편집장도 했었어. 굉장한 실력을 발휘했지. 5 월 11 일 그날도 오후에 잡지 인터뷰 3 건을 마치고, 7 시 전에 TBS 에 도착했다. 마침 (뉴스의 숲)이 끝나고 그 스튜디오의 파이프 의자가 늘어서 있는 곳으로 갔다. 스터디가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앞에서 두 번째 열, 오른쪽 끝에 가사오와 둘이서 미리 진을 쳤다. 다른 신입사원들도 속속 모여들었다. 짙은 갈색 정장에 같은 색 계열의 넥타이를 맨, 스타일리시 한 차림, 가는 테 안경에 갸름한 얼굴. '오타 하루야' 의 등장이다. 순간적으로 공기가 얼어붙었다. 웃음 띤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오타. 말투도 상냥하고 정중하다. 그러나 내부의 분위기는 전혀 부드러워질 기색이 없다.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듣고 있는 신입사원들의 등뼈는 더더욱 뻣뻣해져 간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이런 사람은 정말 처음이었다. 그가 아무리 부드럽게 이야기해도, 온몸으로 발산되는 저 프로페셔널한 카리스마! 마치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전형적인 캐릭터였다. 무슨 일이든 멋지게 이뤄낼 것 같은 신뢰를 주는 풍모. 오타 하루야는 그런 사람이었다. 오타는 진행도 능숙했다. 과거에 사용된 뉴스 원고를 스크린에 크게 비춰놓고, 어디가 알기 어려운 부분인지를 명확히 지적하며 자신이 바꿔놓은 원고와 비교시켜 설명한다. "자, 그럼 다음." 화면의 원고가 바뀐다. 어젯밤 오후 10 시 반경. JR 오미야 역의 장애인용 화장실에 두 살 정도의 여자아이 시체가 있는 것을 청소하러 온 남자 직원이 발견했습니다. "이건 뭐가 이상합니까?" 이윽고 한 사람씩 지명하여 대답을 하도록 시켰다. 더더욱 높아지는 긴장감. 지명받은 여성 신입사원은 그저 곤혹스러워 할 뿐이었다. "에, 그러니까..... '청소하러 온' 이후는 필요없.....인가. 아닌가? 히히힛." 이쯤 되면 웃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들 누구 한 사람도 웃지 않는다. 아니 웃을 수 없다. 우리 또한 그 대답을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 "저, 그럼 당신은?" ".....두 살 정도의.....라고 한 부분....."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다. 이건 거의 고문에 가깝다. "그럼 당신은? 미안, 내가 이름을 몰라서." "직원이라고 한 부분..... '남자' 는 필요없지 않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이 부분입니다. 오른손을 높이 뻗어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낸다. 그러자 뜻밖의 부분이 빨간 글씨로 반짝인다. "여기. '어젯밤 오후 10 시 반경' 이란 부분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니, 어째서? 어디가 틀렸지? "이것은 '어제 오후 10 시 반경' 이라고 하든가 '어젯밤 10 시 반경' 이라고 하지 않으면 이상하지요. 이걸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이런 원고가 들어오는 겁니다. 자, 그럼 다음!" 강의 템포는 매우 훌륭했지만, 왠지 두렵다. 스윽스윽 마음속 뭔가가 베여나가는 느낌이다. 일본 에어 시스템은 조종사 등으로 구성된 승무원 노동조합의 파업 영향으로 30 편의 결항을 결정해, 오늘 아침부터 일부 항공편이 이미 결항되고 있습니다. 결항이 결정된 것은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고 출발하는 주요 노선을 중심으로, 모두 30 편입니다. "이것은..... 오토다케 군, 어디가 이상한가?" 오토다케. 엄청난 위기에 몰리다! 게다가 이걸 어쩌나. 분명하게 이름까지 제대로 거론되었으니.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천천히 읽어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머릿속에 문득 '결항, 결항' 하고 걸리는 것이 아닌가! "예, '결항' 이란 단어가 지나치게 많이 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휴 -. 성공이다. 이건 그야말로 신이 보살펴준 덕분일 터. 뜻밖의 행운에 감사, 또 감사! 오타가 계속 잇는다. "결항이란 단어가 세 번이나 나왔는데, 이건 결코 좋지 않습니다." '결항' 이란 단어에 '결코' 를 연결시켜 재미있게 말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런 재치 있는 말에 반응할 만큼 우리 참가자들의 마음엔 여유가 없었다. 잘못 쓰인 원고의 예를 세 가지 더 다룬 뒤, 오타는 정리에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잊지 말길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누구를 향해서 뉴스를 내보내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하시 교센이라는 명사회자가 있습니다.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카메라 너머로 가족들 식사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 말은 곧 자신이 지금 누구를 상대로 뉴스를 전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지금 나는 누구를 향해 이 뉴스를 전하고 있는가를 늘 마음속에 담아두기 바랍니다." 깊은 침묵. 처음으로 오타의 표정이 바뀌며 수줍은 미소마저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뉴스의 숲)편집장을 지낼 때 '나는 옛날 애인을 향해 뉴스를 내보낸다' 고 했지요. 정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조금 전까지 이 살벌한 프로에게 느껴지던 독특한 느낌이 없어졌다. 어느새 그는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쑥스러워하고 있었다. "여러분, 부디 '이 사람이 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뉴스를 전하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상냥하고 정중하게 되며, 괴로운 일도 최선을 다해 치러내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부끄러운 강의 열심히 들어준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뉴스의 숲)편집장에게 배턴을 넘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끝무렵에 오타 하루야는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나는 누구를 향해 뉴스를 전하고 있는 것일까. 누가 보기를 바라는 것일까. 다른 세계에서 보내는 통신 "오체 불만족" 저자. 잡지나 신문에 기사가 실릴 때마다 따라 붙는 나의 이력이다. 그런데 나는 이 이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분명 "오체 불만족" 은 많은 사람들이 읽은 책이며, 그 저자가 나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대로 계속되다가는 그것을 한계로 끝나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늘 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옛날에 "오체 불만족" 인가 하는 책이 있었지. 아마, 그걸 쓴 사람이..... 오토, 오토 뭐였더라. 오토 보케였나?" 마치 '추억 속의 그는 지금 뭘하나' 하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일에 도전해 나가는 모습을 빨리 보여줘야 해, 라는 초조함이 있었다. 이런 내 생각을 잠재우는 데 (뉴스의 숲)리포터라는 이력은 아주 좋은 수단이었다. 그래서 인터뷰를 받을 때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프로필에 (뉴스의 숲)리포터라고 써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고 부탁했다. 물론 열심히 리포터하는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이기도 하다. 그런 보람이 있어선지 "오체 불만족" 이나 장애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뉴스의 숲)에서 분투하는 나에게 초점을 맞춰 취재하는 경우도 늘기 시작했다. 명캐스터로 이름을 날리는 도리고에 순타로, 안도 유코와 이야기 나누는 행운을 얻은 것도 그 즈음이다. 과연 명캐스터는 이야기를 꺼내고 경청하는 자세가 정말 대단했다. 템포, 질문의 관점, 상대와의 거리두기, 어디를 봐도 참고해야 할 점들 투성이였다. 얼굴이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나름으로 별별 괴로운 일들도 많이 당했지만, 이런 분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만큼은 유일한 특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기사가 났다. 사쿠라다 쥰, 그는 "쇼쿤!" 이라는 잡지에 '"오체 불만족"을 둘러싼 기묘한 논리' 라고 제목을 붙인 글을 발표했다. 아이치 가즈오 중의원의 정책 담당 비서인 그가 왜 나에 대한 글을 썼는가. 그것은 자신이 뇌성마비라는 장애인의 입장에서 남달리 생각하는 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쿠라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장애를 가진 사람은 '장애인' 처지에서 인생을 바라볼 때, 그 누구라도 한 권의 책은 쓸 수 있다, 해마다 몇 권씩 그런 장애인의 책이 출판되고 있다. 이번에 나온 "오체 불만족" 도 그런 '다른 세계에서 보내는 통신' 에 다를 바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전혀 새로운 맛이 없는 책이다. 나아가 이 책이 폭발적으로 팔린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 '다른 세계에서 보내는 통신' 에 꼭 등장하기 마련인 '어두움^5,23^그늘^5,23^괴로움' 이란 부분이 보이지 않고 그 대신 '밝음^5,23^양지^5,23^즐거움' 이란 부분이 전면에 등장하였기 때문이라고 분석된다. 훌륭한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내가 지향하는 바는 틀림없이 '다른 세계에서 보내는 통신' 이며, 지금까지 '마이너스' 일변도였던 장애인의 이미지를 뒤엎고 싶다는 생각으로 출판한 것이 "오체 불만족" 이다. 나아가 그는 이렇게 이어나갔다. "오체 불만족" 이 '다른 세계에서 보내는 통신' 으로서 지나치게 성공한 까닭에 염려스러워지는 부분이 있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밝음^5,23^양지^5,23^즐거움' 이란 부분이 강렬하게 부각됨으로써, 장애인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어둠^5,23^그늘^5,23^괴로움' 의 부분이 덮여 버리지는 않을까. "오체 불만족" 은 오토다케 히로타다라는 청년의 사적인 기록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반향이 '장애인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새로운 고정관념을 만들어낼지도 모르는 일이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여기에 관해서는 나도 가장 크게 염려하는 점이다. 이런 일련의 상황에 대해 나 이외에도 의문을 갖고 바라보는 사람이 있음을 알고 마음 든든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동조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사쿠라다는 내가 (뉴스의 숲)에서 리포터를 하는 것에 대해 크게 의문을 품고 있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장애인의 입장에서만 사물을 이야기해선 안 된다' 고 생각하는 그에게 있어서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그 방송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배리어프리' 이므로. 장애를 가진 내가 '배리어프리' 를 전하는 것은 그의 입장으로는, 장애인이 장애인이라는 입장에서만 사물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묻고 싶다. '다른 세계에서 보내는 통신' 은 도대체 누가 보내야 한단 말인가.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겠지만, 장애가 없는 사람들에겐 장애인이야말로 '다른 세계' 의 사람들이다. 그리고 양자의 세계를 통합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과도기적으로 어떤 '메시지' 가 필요하게 된다. '다른 세계에서 보내는 통신' 이 없으면, 그 둘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평행선을 달릴 뿐이다. 장애인이 장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면 '다른 세계에서 보내는 통신' 은 대체 누가 띄어야 한다는 것인가. 그의 비판은 주로 TBS 를 겨냥하였다. 내가 만약 훌륭한 자질과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TBS 는 나를 허겁지겁 캐스터로 쓸 것이 아니라 정식 사원으로 받아들여 보도기자로서의 기본을 철저히 교육시키고 오랜 경험을 쌓게 한 후에 텔레비전에 등장시켰어야 한다고 썼다. 그런 각오가 없다면 TBS 의 대응은 "오체 불만족" 의 베스트셀러 붐에 편승한 것에 불과하며, 나를 그저 소비하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 사람은 텔레비전을 그다지 보지 않는 걸까. 한창 스타덤에 오른 사람을 브라운관에 등장시켜 이런저런 내용을 전하는 것이 원래 텔레비전 방송국의 스타일이 아닌가. 텔레비전 방송국이 자선 사업을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TBS 같은 인기있는 기업이 왜 경험 없는 젊은이의 장래까지 떠안아야만 하는가. 또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자. 나는 아직까지 방송계에 뿌리 내리겠다고 결심한 적이 없다. 일반적으로 접하기 힘든 텔레비전 방송의 세계, 보도의 세계를 들여다볼 기회가 생겼고, 난 그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그뿐이다. 만일 내가 방송계의 길을 걷기로 결심이 서면 그때 다시 취직을 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아가 그는 나의 장래에 대해서까지 언급했다. 명문 대학의 장애 학생인 나는 장래 '비즈니스맨' '정치학자' '경제학자' 같은 입장에서 사물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했다. 아무리 좋게 봐도 그는 내가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 학생(당시는 그랬다)이라는 사실에 얽매이고 있다. 그는 나에 관해 '장애를 가진 사람은 장애인이라는 입장에서밖에 사물을 이야기하지 않는 고정관념' 을 타파할 '귀중한 인재' 라고 평가해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성격이나 개성을 염두에 둔 평가가 아니다. 단지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의 학생' 인 오토다케라면 가능하다. 그 말을 반복했을 뿐이다. 용서해 주시길. 이력이나 학력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행위, 나하고는 참 거리가 멀다. 나에게는 아주 많은 요소들이 득실거리고, 학문이란 세계에 구속받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 무엇보다 공부하기를 조금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사쿠라다가 지적한 그대로 장애인이라는 요소에만 얽매일 생각도 없다. 앞으로 무엇을 할지 나 자신조차 모른다. 흥미를 느끼는 일을 하고 싶기는 하지만,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 여러 가지로 실험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말할 수 있다. "오체 불만족" 이나 (뉴스의 숲)에서 이룬 나의 역할, '다른 세계에서 보내는 통신' 은 잘못된 것이 없었다고 생각하며, 장애인과 정상인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데 조금이나마 공헌했다고 확신한다. 장애와 싸우는 사람, 장애를 즐기는 사람 TBS 에 얼굴을 내밀자 사쿠라다의 기고문이 화제가 되어 있었다. 가장 크게 반응을 보인 사람은 마츠바라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내게로 다가왔다. "읽었어, 그거?" "읽어봤습니다." "어떻게 느꼈지, 오토는?" "TBS 에 폐를 끼친 것 같아 죄송할 뿐입니다." "아냐, 그런 건 그다지 상관없어. 나는 말야 이렇게 생각했거든. 어떤 세계에나 능력 있는 사람은 있기 마련인데, 그 중에는 일찍부터 재능을 꽃피울 기회를 얻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이거야." "글쎄요....." "축구선수 나카타 히데토시(현재 유럽에서 활동 중인 일본 국가대표 미드필더. 그의 독특한 가치관과 거침없는 행동은 일본 젊은이들에게 크게 어필하고 있다.) 같은 경우가 아주 좋은 예라고 생각해. 그의 능력을 보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봐. 하지만 일본이라는 좁은 범위 안에서만 활약해 가지고는 세계적으로 두드러질 수 없어. 그렇지만 보라구. 올림픽하구 월드컵이란 세계적 무대에서 힘을 발휘함으로써, 세리에 A 란 세계 굴지의 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하는 기회를 얻었잖아. 난 오토도 똑같다고 생각해." 아니, 세계적인 선수 '나카타' 와 내가 똑같다고 하다니, 그의 팬들에게는 칼맞을 소리가 아닌가. "오토다케라는 능력 있는 사람이 있다고 쳐. 능력은 사람들에게 뭔가를 전하는 능력을 말한다고 보자구. 그 오토다케가 "오체 불만족" 이라는 책으로 일약 많은 사람들에게 그 개성과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그 결과, 능력을 발휘할 무대가 주어진 거지. 그런데 그 사람은 놀랍게도 손과 발이 없었다." "아니, 무슨 소설 쓰십니까? 말도 안 되는 칭찬을....." 내 말을 막으며 마츠바라는 계속 이야기했다. "나는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 사쿠라다 씨는 TBS 가 오토다케를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기용했다고 썼지만, 그건 웃기는 말이야. 장애를 가진 사람은 오토말고도 엄청나게 많아. 오토처럼 우리 쪽에서 꼭 부탁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어. 그건 정상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야. 뉴스 캐스터를 할 만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구. 그건 양쪽 다 똑같아." 그의 칭찬은 나를 몸둘 바 모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쿠라다가 말하는 '보도기자로서의 기본을 철저히 교육받고 오랜 경험을 쌓은 후에' 메인 캐스터로 일하는 마츠바라에게 능력 있다고 인정받았으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을까. "내 생각에 말이야, 사쿠라다 씨가 쓴 글에 대해서 TBS 는 이런 의도로 오토다케를 기용했다, 라는 내용을 그 "쇼쿤!" 이 돼든 다른 잡지가 됐든, 글로 써서 발표해야 한다고 봐." "글쎄요....." "왜, 오토는 반대야?" "반대할 것까지는 없지만, 썩 마음이 내키진 않네요. 그 사람하고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접점을 찾기가 힘들 것 같아요." "어째서?" "직접 이야기를 나눠 본 건 아니지만, 그 글을 읽다보면, 그분은 장애와 싸워 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수한 두뇌와 불굴의 의지로. 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장애를 괴로움으로 생각한 적 없고, 오히려 즐기고 있지요. 그러니까 그분은 제 느낌이나 생각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럴까....." 왠지 서글퍼졌다. 그러나 내 문제에 대해 이렇게까지 열심히 생각해 주는 마츠바라의 모습에는 너무나 기뻤다. 사쿠라다가 지적한 대로 미디어는 분명히 나를 '소비' 시키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성장' 을 안겨주는 세계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성장을 촉진시켜 주는 커다란 요소 가운데 하나인 '동료' 라는 면이 있다. 그 점에서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로 축복받고 있다. 그 다음은 나 하기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FF @fc 내인생은 내가 만든다 2 ---------------------------- 서명: 내 인생은 내가 만든다 2 저자: 오토다케 히로타다 역자: 전경빈 출판사: 도서출판 창해 출판일: 2000. 7. 29 점역자: 대한불교청소년교화 연합회 주소: 서울시 종로구 견지동 39 - 1 상운중심 3 층 전화: (02) 735 - 8165 점역처: 마포평생학습관 시각장애인실 후원: 서울특별시 점역일: 2000. 11. 1 ------------------------- @FF @fc 차례 ------ 차례 ------ 제2 권 제8 장 나의 눈물은 과거에 대한 감사였다 어머니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사랑 취재하는 사람의 자격은 무엇인가? 눈물은 언제, 왜 흐르는가? 제9 장 오체는 불만족, 밤은 대만족? 오토, 원조교제를 찾아 나서다 색다른 이별잔치 말을 생략하면 생기는 오해 제10 장 오토, 미국으로 취재 가다 배리어프리, 유럽인가 미국인가 '거시기' 와 '수달' 의 취재 삶의 무게를 덜어주는 사회 취재보다 편집이 더 고역! 제11 장 이지메, 그 후의 이야기 나를 찾아 떠난 여행 약속은 지켜지고 있나? 이지메의 고통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제12 장 괴물투수 이시이와 한국에서 온 이구원 뜨거웠던 여름의 아쉬움 난청 때문에 프로 진출이 좌절된 야구선수 구원이와의 특별한 만남 사회 속에서 어우러져 살고 싶어요 제13 장 바람 부는 오키나와의 바닷속을 누비다 다이빙 라이센스를 써 먹을 찬스! 여자친구와의 이별, 그리고 추억 바닷속에 거대한 신전이 있다 광란의 크리스마스 이브 제14 장 나의 리포터 성적은 몇 점인가? 이별을 위한 마음의 준비 나는 아직도 아마추어인가? 제15 장 두 개의 졸업장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던 대담 나를 위한 (오토다케 스페셜) 고맙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후기: 나는 끝없이 도전한다 @FF @fc 8 장 8. 나의 눈물은 과거에 대한 감사였다 어머니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사랑 '당고 삼형제' 가 크게 유행하던 것에 착안해, 우리는 '오비히로 삼남매' 를 취재하기로 했다. 이 테마는 내가 가장 다뤄보고 싶었던 것 중의 하나로, 즉 통합교육에 관한 것이다. 홋카이도 오비히로 시에 사는 마츠시타 가오루, 리호, 사요코는 세 쌍둥이 남매. 그해부터 모두 초등학생이 될 세 아이. 그러나 같은 초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가 미묘한 문제였다. 큰딸인 리호가 뇌성마비로, 걷는 것이 부자유스러웠기 때문이다. 같은 보육원에 다니며 함께 놀고, 때로는 싸움도 하던 세 아이였다. 부모인 마사코와 야스키 부부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장애아가 다니는 특수학교에 보내야 좋을지, 지역에 있는 학교에 셋을 함께 다니게 해야 좋을지 큰 고민이었다. 세 쌍둥이의 어머니가 말했다. "분명히 리호만 생각하자면 재활센터에서 훈련을 받으며, 적합한 공부를 하도록 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남매간이니까 서로 돕고 지내야죠. 그 점을 고려해서 세 아이가 함께 다니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했지요." 어머니의 결단에는 장남 가오루와 관련된 한 가지 경험이 영향을 미쳤다. "가오루한테는 엄마가 없다는 거예요. 저는 리호의 엄마일 뿐이라는 거지요. 그 말을 듣고 많이 고민했습니다." 가오루는 언제나 엄마와 함께 지내는 리호에 대해 질투를 했던 것이다. 걷든, 걷지 못하든 엄마를 독점하고픈 기분은 마찬가지. 리호에게만 엄마가 애정을 쏟는 것이 싫은 것은 가오루에게 당연한 일이다. 그 뒤 교육위원회와의 대화를 거친 결과, 1999 년 4 월 세 아이는 오비히로 시립 미도리가오카 초등학교에 함께 입학했다.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 나서는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풀렸다. 장애아가 지역학군 내의 학교를 지망했을 때 이처럼 쉽게 입학허가를 내주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윽고 삼남매와의 대면. 저녁을 마친 그들의 집을 찾아갔다. "끼야악! 우히히히히!" 갑자기 괴성이 우리를 맞이했다. 둘째 딸 사요코가 창문을 열고 '안녕하세요' 인사를 한다. 주변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장남 가오루. 방긋거리며 현관까지 마중 나온 리호. 그 아이가 나를 처음 보고 건넨 말은 '걸을 수 있어요?' 였다. 나는 '너도 걸을 수 없잖아!' 라고 말해 주고 싶은 기분을 누르고 '그럼, 걸을 수 있지. 약간이라면.' 하고 대답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도 세 아이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아 그야말로 동물원 같은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기이한 함성이 계속 터져나온다. 침착하게 인터뷰할 상황이 되기까지 20 분 가까이나 걸렸다. 방안의 천장에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아닌데도 색종이를 가늘게 잘라 링 모양으로 계속 이어붙인 '색종이 체인' 이 장식되어 있었다. 색종이를 자르고 붙이는 작업은 리호에게 좋은 훈련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 저거 굉장히 잘 만들었는걸." 리호가 자랑스러워 하며 말했다. "오빠가 못하는 게 있으면 내가 거들어 줄게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 모두가 웃을 수밖에. 그러나 나는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다. 색종이와 관련해서도 그렇고. 앞서 '걸을 수 있어요?' 하고 물었던 이 소녀는 그다지 자신의 장애에 대해 특별하게 인식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점은 초등학생 시절의 나와 많이 비슷했다. 나도 초등학교 1, 2 학년 무렵의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소풍 갔을 때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선생님과 친구들이 나의 휠체어를 밀어준다. 그런데 근처에 스무 살 전후의 한 남자가 어머니 같은 분이 탄 휠체어를 밀어주며 지나쳐 갔다. 그때 나는 선생님께 '저 사람은 어째서 저런 차를 타고 있나요?' 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때야말로 선생님께선 '자, 지금 오토가 타고 있는 건 무엇이지?' 하며 쐐기를 박고 싶으셨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리호의 반응을 살펴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당시의 내 모습이 자꾸만 겹쳐 떠올랐다. 리호는 서서히 나에게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온다. "그런데요, 학교에 갈 땐 휠체어로 가나요?" "그럼, 휠체어로 가지." "리호 것보다 진짜 휠체어네. 책에서 봤어요." "아니, 진짜? 그럼 리호의 휠체어는 가짜인가?" "응, 아뇨. 쪼그맣걸랑요." 리호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함께 미소를 지었다. 참 귀여운 아이다. 어느덧 세 아이가 자야 할 시간. 오늘은 이 정도로 마치기로 하고, 다음날 일찍 만나기로 약속했다. "내일은 오빠하고 함께 학교에 갈까?" "현관에 경사로가 있거든요, 거기로 올라가면 문제없어요." "그런데 이 오빠도 괜찮을까? 오빠 휠체어는 훨씬 크잖아. 그래도 함께 올라갈 수 있을까?" 리호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진다. 뭔가 걱정 되는 점이라도 있는 것일까? "음, 갈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오빠는 손도 발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슬리퍼를 안 신어도 괜찮을까?" 이거 참. 그렇다면 어디에 슬리퍼를 신어야 좋을까. 머리에 뒤집어쓸 수도 없고. 2 층에 있는 침실까지 계단을 올라가는 리호. 아장아장 느리긴 했지만. 기어가진 않고 난간을 잡고서 천천히 걸어서 올라간다. 그 누구의 도움도 없다. 처음엔 다 올라가기까지 30분이나 걸렸다고 한다. "리호, 특별 훈련." 혼자서 중얼거리며 올라가는 리호. 뒤에서 어머니가 다짐하듯 말한다. "얘야, 뒤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단다. 그러니까 앞만 보고 올라가거라." 천천히, 천천히 올라가는 리호. 이제 남은 건 하나의 계단뿐. 그때였다. 갑자기 휘청하더니 온몸의 균형을 잃어버린 리호. 발은 마지막 계단에 둔 채로 갸우뚱, 머리가 뒤로 젖혀진다. 그대로 완전히 뒤집어졌다. 몇 사람이 동시에 비명을 내지른다. 히구치 카메라맨이 지고 있던 카메라를 내려놓고,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한 템포 늦었다. 여기저기 쿵쿵 부딪치며 바닥까지 굴러떨어지는 리호.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를 어머니가 껴안는다. 그때 우리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얘야, 항상 말했잖니. 계단을 오를 때 꼭 주의하라고 말야. 이번 일은 리호가 잘못한 거야." 바로 지금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리호를 어머니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야단쳤다. 멍하니 서 있는 우리 스태프에게 어머니는 말했다. "이 정도로 놀라지 마세요." 리호를 껴안은 채 잠시 울게 놔두는 어머니. 1분 정도 지났을까. "잠깐만, 리호야. 이제 그만 일어나자." 어머니는 리호를 자신의 팔에서 떼어내고, 손잡이를 붙잡을 수 있도록 일으켜 세웠다. "자, 다시 한 번"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 뭐라고 말한 거지? 바로 조금 전 계단에서 완전히 거꾸로 굴러 떨어지지 않았는가! 아직도 엉엉 울고 있는 여섯 살짜리 딸에게, 엄마는 '다시 한 번 네 힘으로 올라가라' 고 시키고 있다. 너무한다고 생각하는 우리들 곁에서 신기하게도 울음을 그치고 다시 올라가기 시작하는 리호. 거기에 다시 어머니의 말이 이어진다. "네가 자러 가는 거야.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니까." 아무도 할 수 없다. 부모밖에 할 수 없다.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다. 나를 키워준 세상에 대한 감사 초등학생의 아침은 빠르다. 그들의 등교 풍경을 취재하기 위해 우리 스태프들은 기상 시간을 6 시로 정했다. 이번 룸메이트는 난부. 그는 재빨리 내가 샤워하는 것을 도와주고, 화장실 문제를 해결해 주고, 옷 입는 것을 도와준다. 막 출발하려는데, 난부가 당황해했다. "오토, 어떻하지?" "무슨 일 있나요?" "머리 손질을 해야 하는데, 난 그걸 못하거든. 난 말야, 무스 같은 것도 써본 적이 없어." "아.....!" 둘이서 얼굴을 마주본다. 그러다 다른 방에 있던 가사오를 불렀다. 사정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솜씨 좋게 머리 모양을 세팅하는 가사오. '과연 다르군' 하고 중얼거리며, 멀찍이 구경만 하는 난부. 순식간에 오토다케 출격 준비 완료! "야, 이거 사건인데, 처음으로 가사오가 쓸모 있었군." 이거 너무 심한 말 아닌지..... 아침 7 시. 삼남매 집에 도착. 아이들은 이미 '준비 끝' 이다. 아이들은 오늘 아침 5시 반에 일어나 근처 공원을 산책하다가 다람쥐를 봤다고 법석을 떤다. 역시 초등학생의 아침은 빠르다. 리호는 내가 탄 휠체어를 천천히 바다보다 발판 부분을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에 발을 올려놓게 돼 있나요?" "응. 하지만 오빠한텐 발이 없으니까, 올려놓지 않아도 괜찮아." "근데 리호한텐 발이 있는데....." "그래, 리호는 발이 있으니까 발판이 필요하지." 리호는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똑같은 휠체어인데도 좀 다르네?" "그렇구나. 리호도 이런 휠체어 타보고 싶어?" "아직 크지 않으니까, 괜찮아요." "그러니? 자, 그럼 좀더 크면 타볼까?" 리호는 나를 조금씩 자기와 닮았다고 인식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8 시. 세 아이가 출발한다. 가오루가 리호의 휠체어를 민다. 그 옆을 아장아장 걷는 사요코. "우와, 오빠 휠체어는 굉장히 빠르다!" 내가 탄 전동 휠체어는 최고 속도 시속 6 킬로미터. 아이들이 걷는 것보다는 훨씬 빠르다. 개구쟁이 가오루는 갑자기 경쟁의식에 불타 내 휠체어 속도에 뒤지지 않겠다고 마구 달린다. "와하하하!" 그 풍경이 재미있는지 천진난만하게 웃어대는 리호. 떠들썩한 등교길이다. 세 아이 모두 정말 즐거움에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 즐거움이 과연 언제까지 계속 될까. 가오루도 성장함에 따라 누이와 행동하길 부끄러워할지도 모른다. 사요코조차도 친구들이 생기면, 그들과 함께 등교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때 리호는.....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 내가 어렸을 적에도 이랬다. 나는 매일 매일을 그저 즐겁게 보내고 있었다. 아무런 불안도 헷갈림도 업이 즐거운 나날을 보내며. 그러나 주위의 어른들은 달랐다. 좀더 학년이 높아지고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 모든 상황에 대한 염려를 하며 '어렵다' '불가능하다' 는 등의 말을 수도 없이 내게 들려주었다. 그게 어린아이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 점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데. 그런데도..... 확실히 나이 들면 기억도 가물가물해지는가? 그날 오전 중에 수업은 없었다. 사흘 후에 열리는 운동회를 위해, 전체 연습이 예정되어 있었다. 교정 한구석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드디어 아이들이 등교하기 시작했다. 병아리처럼 귀엽기 그지없는 1 학년 아이들. 교실에서 각자의 의자를 날라오는데. 그 모습이 꼭 의자를 업고 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 가운데 휠체어를 타고 리호도 등장했다. 아이들은 팀별로 다른 색깔의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리호는 노란색 모자였다. 드디어 아이들이 정해진 장소에 의자를 모두 갖다 놓았다. 행진 연습이 시작된다. 휠체어로 전진하는 리호는 빙긋거리며 행진에 참가한다. 교장선생님의 인사가 끝나자, 체조가 시작된다. 리호는 휠체어에 탄 채, 주로 상반신을 움직이며 다른 친구들의 몸동작을 따라 하려 애쓴다. 나는 코를 비볐다. 감기에 걸린 것도 아닌데, 어째서 콧물이 나는 걸까. 아니, 뺨에 따뜻한 액체가! 뭐야, 이거, 울고 있는 건가. 안 돼, 이래선. 리호에게 실례라구. 걔는 그냥 평범하게 학교생활을 할 뿐이라구. 어째서 그런 모습에 눈물을 흘리는 거야. 어렸을 적에 널 보며 주위 어른들이 눈물 글썽이는 걸 그렇게도 싫어했잖아. 아아, 그런데 멈춰지질 않는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말할 수 있다. 내가 흘린 눈물은 어렸을 때 나를 보고 어른들이 흘린 눈물과는 종류가 명백히 다르다. 그들이 흘린 눈물은 아마도 대개가 '감동' 이나 '동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런 몸으로 잘도 해내는 구나, 하고. 그러나 지금 내 눈물은 다르다. 그건 말하자면 '감사' 의 눈물이다. 휠체어를 타고서 방긋거리는 얼굴로 행사에 참가하는 리호의 모습은 16 년 전의 나와 하나도 다를 바 없었다. 틀림없이 나도 저랬을 것이다. 당시는 아무것도 모르는 일곱 살짜리 꼬마. 휠체어를 타고 있는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오히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지금부터 16 년이나 전에 휠체어를 탄 아이가 일반 학교에 들어가기란 극히 힘든 일이었고, 운동회 같은 학교 행사에 참여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준 선생님들, 학교 친구들, 그리고 부모님. 그땐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금 리호를 통해서 내가 정말 훌륭한 환경 속에서 교육 받았음을 절감했다. 지금의 내가 있는 것도 모두 그러한 환경 속에서 자란 덕분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초등학교 시절의 나를 감싸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이 넘쳐 흘렀다. 그 넘쳐 흐르는 생각이 끊이지 않는 눈물이 되어, 내 뺨을 적셨던 것이다. 취재하는 사람의 자격은 무엇인가? 아무리 홋카이도라고는 하지만 계절은 이미 6 월. 따가운 햇볕 아래 서 있자니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땀이 배어난다. 그러나 눈앞의 아이들을 보고 있으니, 더위조차도 기분 좋게 느껴 진다. 그러나 그 기분 좋은 상태가 순식간에 망가져 버렸다. 펑펑 터지기 시작한 카메라 소리에. 신문기자들이 취재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홋카이도 신문(흔히 도신으로 불림) 과 도카치마이니치 신문(흔히 가치마이로 불림) 이 여기 오비히로의 양대 신문이라고 한다. 처음엔 리호를 취재하기 위해서 왔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뭔가 행동이 달랐다. 카메라 렌즈가 리호 쪽이 아니라 아무래도 나를 향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금세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가령 리호를 취재하러 왔다면, 운동회 당일이 아니고 전체 연습일 뿐인 오늘 찾아왔다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마츠다가 나에게 다가온다. "신문사 사람들이 잠깐 오토를 취재하게 해달라고 하는데." "그거, 거절해도 괜찮습니까?" "괜찮고말고. 거절할까?" "취지는 뭐라는데요?" "그게 말야, '방송국 취재차 오토다케가 오비히로에 왔다' 는 기사인 모양이야." "그거라면 거절하도록 하죠." 양해해 주기를 바랐다. 이번에 나는 취재하는 사람으로 이곳에 와 있다. "오체 불만족" 의 저자 오토다케 히로타다가 아니라, TBS (뉴스의숲) 리포터로서 여기 오비히로에 와 있는 것이다. 이번 주역은 세 쌍둥이이며, 미도리가오카 초등학교이다. 내가 아니다. 여기에 "오체 불만족" 은 관계없다. 그러므로 그런 취지의 취재는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보도의 자유란 것도 있다. 방송국 취재 건으로 오토다케가 오비히로에 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사실을 기사로 쓰는 것은 기본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취재를 받고 싶지 않고, 사진도 찍히고 싶지 않다. 이 뜻을 마츠다를 통해 상대방에게 전했다. '가치마이' 의 여성 기자는 내키지는 않았겠지만, 내 의사를 존중해 주었다. 그녀는 마츠다와 오래도록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세 남매를 취재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그쪽이 계속 신경 쓰였다. 그런 내게 정면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이 있었다. '도신' 의 남성 기자였다. 내 옆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거구 가사오에게 겁을 먹고 있긴 했지만, 취재하고 있는 우리들 시야에까지 카메라를 틀어쥔 그의 모습이 집요하게 들어온다. 나는 머리 끝까지 열이 뻗쳐 올랐다. '온화하고 화낼 줄 모르는' 이미지로 알려져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성질을 잘내는 편이다. 이번처럼 이치에 닿지 안게 행동하는 인간들에게 대충 넘기고 마는 '어른식 대응' (?) 을 취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나는 할 말을 다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나는 그 기자를 향해 휠체어 레버를 세게 잡아당겼다. 그는 그대로 혼비백산해 도망쳤다. 기자로서의 윤리가 없는건가. 취재 허가를 요청해 왔지만, 난 그걸 분명히 거절했다. 특히 사진 찍는 것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집요하게 나를 물고 늘어졌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항의하려 하자 달아나 버렸다. 취재력, 경험, 인터뷰 기술, 어느 면을 보더라도 내가 그보다 낫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취재인으로서 그가 나보다 위라고는 인정할 수가 없다. 사회인으로서의 매너가 결여된 인간에게 과연 취재인으로서의 자격이 있는 것일까. 축구선수 나카타 히데토시는 매스컴을 싫어한다고 말한다. 매스컴을 대하는 태도가 나쁘다고 보도되는 경우도 많았다. 어쩌면 그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매스컴에 대한 그의 태도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매스컴의 태도가 나쁜 것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그가 입을 다물어 버리게 된 것은 아닐까. 알지도 못하는 것을 제멋대로 써 버리고, 공개할 필요가 없는 사생활까지 끊임없이 파고든다.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기분 좋게 이야기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카타 선수뿐만 아니라 나조차도 대답은 단연코 'NO' 다. 그러나 이번 일로 깨우친 것도 있다. 처음으로 중고생 이지메에 대한 취재를 할 때 나는 맹세했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살려 취재 받는 쪽의 기분을 배려하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리포터가 되기로. 몇 개월이 지나자 엷어지기 시작한 나의 그런 의식을 다시금 일깨워 준 그들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눈물은 언제, 왜 흐르는가? 6 월 9 일. '오비히로 삼남매' 의 생방송 중, 사건은 일어났다. 내 신호로 화면이 나가기 시작했다. 삼남매가 사이좋게 등교하는 풍경으로 시작하여, 리호가 학교에서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 식수대나 화장실이 휠체어로 이용 가능하도록 개조되어 있는 점 등에 대한 리포트. 그리고 선생님께서 하신 '아이들이 아무 거리낌없이 받아들여 주었다' 는 코멘트에 이어 화면은 이윽고 운동회로 이어진다. 행진, 체조, 공 넣기 순으로 이어지고, 이윽고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원래는 60 미터를 달려야 하지만, 리호에겐 너무나 멀다. 뭔가에 지탱하지 않고 혼자서 달리기는 어려운 리호. 보통은 휠체어를 누가 밀어주든지 아니면 보행기나 지팡이를 써서 이동한다. 선생님들이 몇 번씩이나 협의를 거친 끝에 내린 결론은 보행기를 쓰고, 다른 아이들보다 거리를 줄여 참가시키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날을 위해 리호는 열심히, 열심히 연습을 거듭했다. 리호가 달리는 거리는 다른 친구들의 3 분의 1 정도로, 40 미터 먼저 나아간 지점에서 리호는 보행기와 함께 준비자세를 취한다. 출발 신호에 달리기가 시작된다. 쫓아오는 아이들에게 순식간에 추월 당하지만, 보행기를 기우뚱거리며 앞으로 전진한다. 그 장면이 이어지면서, 리호 어머니의 목소리가 흐른다. "앞으로 2 년 3 년 지나면 이 아이가 어떻게 될까 생각했습니다. 우리들은 단지 레일을 깔아놓을 수 있을 뿐, 그 위를 어떤 모습으로 걸어갈지 결정하는 건 바로 리호 자신이지요." 그리고 마침내 리호가 골인. 여기서 녹화 화면이 끝나고, 무대는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온다. "아, 예. 굉장히 보기 좋군요. 모두가 함께 참가해서....." 마츠바라 캐스터가 조금 이상했다. 목이 메어선지 지금 이 말도 간신히 했다는 느낌이다. 이거 진짜 위험해질지도 모르겠다. 내가 제대로 해내지 않으면 큰일이다. "그렇습니다. 학교측은 장애아의 입학 신청을 받으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대체 모르겠다' 며 거부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일단 입학시키고 나면 의외로 잘 조화시켜 나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츠바라는 도대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회복되기는 커녕 내 이야기에 맞장구치는 목소리마저도 떨리고 있었다. 오늘은 아무래도 내가 계속 떠들어야 할 팔자인가 보다. "그리고 도리어 정상인 다른 아이들 쪽이 더 신경 쓰인다는 말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일부러 의식적으로 더 밝게 미소지으려 애써 본다. 자연스럽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가급적 웃는 얼굴로. 자, 이젠 마츠바라 캐스터 차례다. "아, 저..... 본인도 그랬지만, 그 주변 아이들이,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었....." 틀렸다. 마침내 멈추고 말았다. 더 이상 말을 계속하면 통곡이라도 나올 것만 같았다. 그는 '그래서요' 라는 영문 모를 '접속사' 를 쓰며, 내가 말을 이어주길 재촉한다. 방송이 끝난 후 마츠바라 캐스터와 내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가 계면쩍게 웃는다. "미안했어. 오늘." "아닙니다. 그런데, 저 정말 놀랐어요." "이거, 뭐랄까..... 망치고 말았지?" "망쳤어요." 둘이서 웃었다. "그런데 말야, 실은 방송 개시 전에도 한 번 봤거든." "그런데도 울음이 나왔어요?" "사실 그땐 대성통곡을 했걸랑." "에에? 아니 마츠바라 캐스터님, 두 번씩이나 보면서 우셨단 말예요?" "그렇다니까. 두 번째는 괜찮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리호가 열심히 달리는 모습과 그 어머니의 말씀을 듣자니 갑자기 눈물이 걷잡을 수 없더라니까." "그러셨어요?" "오토도 솔직히 말하라구. 그 녹화된 테이프 속에서 울고 있었지?" "아니,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이상한데? 난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옆모습을 보고 알았지. 이걸 보고 오토가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고뇌로 눈물짓는구나 하고 생각했더니, 더더욱 눈물이 멈추질 않는 거야." 마츠바라에게 내가 운 진짜 이유를 말하지는 않았다. 내가 눈물짓는 모습을 들켜 버렸다면, 그것까지도 포함된 하나의 작품일 뿐이다. 그걸 본 사람이 어떻게 느끼느냐는 자유이다. "하지만 마지막 마무리를 오토다케가 하다니, 이거 누가 메인 캐스터이고 누가 리포터인지 알 수가 있나!" "무슨 말씀하세요? 둘 다 헤매면 시청자들이 영문을 몰라 할거란 생각에 필사적으로 꾸며댔던 것 뿐이라구요." "아니야, 정말 훌륭했어." 그때 스태프 룸에서 전화가 왔다. 미야자와였다. "이야, 마츠바라 캐스터를 울게 만든 사나이!" "무슨 소리? 봤어요?" "그럼. 취재 때문에 밖에 나와 있다가 길거리에서 보았지. 그랬는데 길가에 서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나도 그만 눈물이 났어. 과연 천하의 마츠바라도 어쩔 수 없었을 거라 생각했지." 그 말을 듣고 나는 문득 깨달았다. 분명히 프로인 두 사람씩이나 눈물짓게 만들었으니 좋은 작품이었음은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울리기 위해 오비히로에 갔던 것은 아니며, 더욱이 휴먼 드라마를 그려내려는 것도 아니었다. '어라, 장애가 있는 아이라도 보통 교육을 받을 수 있구나. 잘 궁리만 하면 행사에도 참가할 수 있고' 라는 소중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던 거이다. 눈물을 넘어서 과연 어디까지 전할 수 있었던 것일까. @FF @fc 9 장 9. 오체는 불만족, 밤은 대만족? 오토, 원조교제를 찾아 나서다 스태프 룸의 벽에 '(뉴스의 숲)이 달의 상' 이라는 벽보가 붙어 있다. 그달 안에 가장 잘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특집에 대해, 스태프 전원이 투표하여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작품이 '이 달의 상' 의 영광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1999 년 5 월, 이 상의 향방은? (역사의 도시 교토의 배리어프리는? 미야자와 유스케) 짝짝짝짝. 우리들이 팀을 짜서, 절에서의 배리어프리를 위한 노력과 이를 가로막는 중요문화재 지정이라는 장벽을 전한, 바로 그 작품이 뽑혔다. 출판한 책이 좋은 평가를 받는 것도 기쁜 일이지만, '이 달의 상' 을 안겨준 스태프 내부의 평가가 왜 훨씬 더 기쁜 것일까. 책 한 권을 내기보다 하나의 프로그램을 만들 때 더 많은 사람이 관여해야 함을 실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디렉터, 카메라맨, 음성, 조명, 그리고 나. 현장에만도 이 정도의 인원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 이를 편집하고, 자막을 넣고, 내레이션을 붙여야 한다. 하나의 '팀' 이 뭉쳐 만든 작품이 이런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나로선 하늘로 날아갈 만큼 기쁜 일이었다. 남에게 칭찬받기를 결코 싫어하지 않는 나. 그리고 나 이상으로 칭찬받기를 싫어하지 않으며, 실은 너무너무 좋아하는 미야자와. 두 사람의 의욕이 크게 고취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두 번째 '이 달의 상' 을 노리며 미야자와와 오토다케 콤비는 새로운 테마를 찾고 있었다. 그 무렵 접하게 된 것이 포플러사에서 간행된 "17 세" 였다. 당시 고등학교 3 학년이던 이노우에 로미양이 쓴 책으로, 나는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걸 그저 흘끗 본 적이 있는 정도였다. 그 내용을 알게 된 것은 어느 텔레비전의 심야 프로그램에서였다. 어렸을 때 이지메를 당한 경험이 있는 그녀. 그때 아무리 SOS 를 외쳐도 도와주지 않았던 어른들, '여고생 = 고갸르 (고 + girl) = 걍그로(피부를 아주 검게 태운 것), 루즈삭스(무릎까지 오는 흰색의 헐렁한 양말), 엔코(원조교제)' 로 도식화하는 세상에 대해 그녀는 자기만의 관점에서 솔직하고 직선적으로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다. 나는 그 책에 흥미를 느꼈다. 정확하게는 그 책에 담겨 있는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세상에 던진 그녀에게 흥미를 느꼈다. 거듭 반복하는 말이지만 내가 "오체 불만족" 을 출판하여 미디어에 등장한 것은 '장애인 = 불행한 사람' 이라고 단정지어 버리는 도식을 무너뜨리고 싶어서였다. 한 묶음으로 '장애인' 이라고 지칭을 하지만, 장애의 정도나 개인의 성격은 저마다 다르다. 절대 한 묶음으로 다뤄선 안 된다. 그녀가 말하는 내용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원조교제를 하는 여학생들은 있다. 그렇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그러니 여고생 모두가 원조교제를 한다는 따위의 생각은 집어치워야 한다. 절대 단정짓지 말아달라, 그런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전하는 메시지에 공감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스타일인데, 일본에서 그런 타입은 고생이 심한 편이다. 주위에 순응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학교 교육 안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평범하다는 게 뭔데?' '자신을 표현하는 게 뭐가 어때서?' 나는 그녀의 외침을 하나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를 취재하기 전에 '과연 원조교제를 하는 여고생은 정말 일부일까?' '그 애들은 어떤 기분으로 원조교제를 하는 것일까?' 같은 의문들이 솟았다.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우리는 우선 시부야 중앙로로 향했다. '여고생 = 중앙로' 라는 발상 자체가 천박하다고 이노우에양에게 한 소리 들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런 실마리도 잡지 못한 우리들은 우선 발길을 그리 옮기는 데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오후 10 시. 중앙로에는 검은 머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캐주얼을 입은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정장 차림의 미야자와와 가사오는 눈에 확 띈다. 우리 세 사람은 나이 차이가 많지 않아서인지, 일을 떠나서도 함께 어울릴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여자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고, 그러면서 일도 하는' 세 가지 점이 우리 세 사람의 공통 분모였다. 일명 '드림 팀' 아닐까. 아직은 본격적인 취재 전단계였기 때문에 카메라팀은 오지 않았다. 세 사람만의 취재. '마귀할멈' 이라 해도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짙은 화장을 한 여자애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들 말에 따르면 아무래도 그 시간대에 중앙로에 모여드는 여자들 중에는 여고생보다는 졸업한 애들이 많다고 했다. 여고생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저녁 무렵에 오는 것이 좋다는 충고까지 들었다. 오늘은 안 되겠다 싶어 돌아가려 할 때, 셔터 내린 은행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자애를 발견했다. 여자애라기보다는 충분히 '여성' 이라 할 만 했다. "야아, 멋있는데." "한번 말을 걸어볼까." 나와 가사오의 눈이 마주친다. 막 말을 걸어볼까 하는 찰나, 한 아저씨가 그녀에게 접근했다. 염치없는 아저씨 같으니라고. 우리들 사냥감에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가. 그런데! 그녀는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딱 달라붙어 걷기 시작했다. 그 아저씨, 특별하게 튀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죄송한 말이지만 직장에서 아가씨들에게 구박이나 받을 것 같은 느끼한 타입. 그렇담 원조교제? 다른 곳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미야자와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역시 원조교제가 아니냐는 분석이었다. 한번 따라붙어 볼까? 두 사람의 뒤를 쫓아간다. 뚜벅뚜벅. 그들이 러브 호텔이 늘어서 있는 쪽으로 향한다. 아무래도 틀림없는 것 같다. 우리도 계속 뒤따른다. 그런데 모퉁이를 돌자마자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우리는 그대로 놓치고 말았다. 도리없이 우리 세 사람은 터벅터벅 돌아왔다. 미야자와가 운을 뗀다. "우리 이거, 완전히 얼간이짓 하고 있는 거 아닌가.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고." "뭐가 말입니까?" "그러니까 말야. 러브 호텔 거리는 커플로 다녀야 하는 곳 아냐? 우린 남자만 셋이잖아. 거, 누가 봐도 이상하다고 보지 않겠어? 그래, 틀림없다. 이런 곳에서 친구라도 만난다면, 보통 일이 아니.....! "야아, 오토다케. 뭐 하고 있는 거야, 이런 데서." "아니, 아니. 어, 오랫만이야." 재수생 시절에 알던 친구들이다. 하필 이런 시간에 만날 게 뭐람. 그렇지만 그 친구들도 남자 둘 여자 하나의 이상한 멤버 구성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이러쿵저러쿵하진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우리 쪽이 훨씬 이상해 보였을 것이다. 그 다음 주, '마귀할멈' 들의 충고에 기초하여, 오후 3 시 무렵 다시 중앙로로. 앗, 있다, 있어! 교복 입은 여고생들. 오토다케와 가사오, 약간 쭈뼛거리는 사이에 용감하게 다가서는 한 사나이가 있었다. 미야자와 유스케, 28 세 독신남. "저기 잠깐만, 함께 이야기 좀 하지 않을래?"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0 년이나 지났지만, 여고생들과 주고받는 말솜씨는 우리 두 사람이 따라갈 재주가 없다. 처음에는 수상쩍다는 표정을 지던 그녀들도 차츰 누그러졌다. "원조교제요? 그런 건 요새 아무도 안해요." "글쎄요, 가끔 그런 애들이 있는진 몰라요, 지금은 완전히 한물 갔어요!" 원조교제가 한물 갔다? 요즘 유행은 여고생들이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들 또한 유행에 민감하다. 그런 유행에 섹스도, 매매춘도 포함되고 마는 것인가. '원조교제 따위 완전히 한물 갔다' 고 하는 현재의 풍조에 우선 안심되긴 했지만, 원조교제를 유행 패션쯤으로 파악하는 그들의 감각에 나는 묘한 공포를 느꼈다. "우리들 혹시 여자애들 꼬시려는 걸로 보이지 않을까?" "그래, 그럴지도 몰라. 카메라팀도 없고 말야." 시부야 거리에서 교복 차림의 여고생에게 은근히 말을 거는 세 사나이. 아, 어떻게 보아도 여고생 사냥을 나선 사람들로 보인다. "게다가 말야 '혹시 원조교제 하는 애, 몰라?' 따위의 질문이나 던지고 있잖아. 이거 꼭 우리가 원조교제 하는 아이들 찾고 있는 것 같고. 거 참." "이거 어쩐다? 다음 주쯤 시부야에 '"오체 불만족" 의 오토다케, 원조교제 상대를 구하는 듯' 이라는 소문이라도 돌면?" "헤드카피는 '오체는 불만족, 밤은 대만족' 이 될까?" 어쨌든 그 이틀 동안의 로미양이 주장한 내용의 취재와는 연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노우에 로미라는 인물에게만 초점을 맞춰 학교 문제를 부각시키는 방법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지금까지 대강의 줄거리,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결정하고 나서 취재를 다녀왔다. 그러나 이번엔 탐색 단계부터 시작하여 어떤 방법으로 어떤 주제를 다뤄야 보다 정확히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를 연구했다. 어느 쪽이든 틀린 것은 아니다.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방송 전까지는 알 수 없다. 방송이 끝난 후에도 답이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것이 취재의 괴로움인 동시에 즐거움일 것이다. 색다른 이별잔치 미야자와와 둘이서 취재현장으로 가는 자동차 안이었다. "11 일, 약속 비어 있지?" "그럼요" 6 월 11 일은 가사오가 (뉴스의 숲)연수를 마치는 날이다. 두 달 동안의 만남이 이제 마지막인 셈이다. 물론 그 이후 전혀 만나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만, 역시 지금처럼 매일 만나던 것과는 상황이 달라진다. 슬픈 일이다. 나와 미야자와는 그날 방송이 끝난 뒤 가볍게 '가사오 송별회' 를 열어줄 생각이었다. 아니, 그건 나만 그런 것이었다. "정말 기분 좋아." "글쎄요. 좀 슬픈 생각이 들어요." "어떤 여자애들을 데리고 올까." "예?" 뭔가 아구가 맞지 않는 느낌. "지금 가사오 송별회 얘기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 송별회 얘긴데, 뭐 물어볼 거 있어?" "여자애들이라뇨?" "걱정 마. 가사오에게 잘 감춰둔 멋진 애들을 데려오라고 말해 뒀으니깐." "가사오가 여자애들을 데려 온다고요?" "당연하지. 내가 지금까지 가사오 뒤를 봐주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아니, 미야자와에겐 그럴지 모르지만, 나의 경우엔 오히려 내가 잔뜩 신세지기 바빴는데. "그거 좀 이상하잖아요? 가사오한테 '수고했어!' 라고 말해주는 자리인데." "그럼 오토는 참석하지 않을 건가?" "아아뇨, 갈게요." 나는 서둘러 손을 내두르며, 싱긋 웃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11 일. 무척이나 슬퍼해야 할 가사오와의 이별의 날이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로 바뀌고 말다니, 참으로 여자의 힘은 무섭기만 하다. 미야자와, 가사오와 8 시에 TBS 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저녁 무렵, 미야자와에게서 전화가 왔다. "에이, 이것 참. 좀 늦을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으세요?" "게이요 은행 츠다누마 지점에서 농성이 일어났거든. 지금부터 헬리콥터를 타고 중계방송을 해야 되게 생겼어." 원래 아나운서로 와이드쇼 사회까지 본 적이 있는 미야자와. 디렉터들 가운데 '말하는' 능력은 톱 클래스로, 긴급 사태가 발생했을 때는 중계요원으로 뽑히는 경우가 잦다. 본인의 '풍채가 좋아서 그렇게 된다는 점을 잊지 말라' 는 엄청난 착각은 봐줄 만한 애교였다. "세상에 말야, 이런 중요한 때에 농성을 벌일 게 뭐야. 이거 뿔따귀나는 일이라구." "운이 따라주질 않는군요." "늦더라도 반드시 갈 테니까, 자리를 굳게 지켜 달라구." 그 지시를 지켜낸 것은 내가 아니라 가사오였다. 놀랄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분들을 보자 정신을 주체할 수 없었던 오토다케. 그런 내 옆에서 가사오가 계속해서 분위기를 돋군다. 덕분에 어떻게든 견뎠다. 여자 셋과 남자 둘, 이렇게 다섯 명이서 1 시간 정도 마셨을까. 그때 미야자와 등장. "이야, 이거 늦어서 죄송. 오토다케하고 가사오보다 한 살 위인 미야자와라고 합니다." 아차, 전날 입을 맞춰둔 대로다. '나는 너희들보다 한 살 위인 것으로 할 테니까, 절대로 들통나지 않게 하라.' 고 한 것이 바로 전날의 다짐. 우리는 충실히 그 가르침을 따랐지만, 그 말을 들을 순간 여자들 중 하나가 킥킥거리며 웃는다. "미야자와 선배님, 그건 역시 좀 무리인데요." 순간 가사오의 머리에 미야자와의 군밤 세례 돌격. "도대체 도움이 안 된단 말야. 미안합니다. 이 친구들보다 세 살 많은 미야자와입니다."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나이 낮추기를 계속할 작정인가. 이리하여 즐거운 향연은 새벽 3 시의 가라오케까지 이어졌다. 미야자와 선배는 의외로 현명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남자 셋이서 울적하게 술이나 홀짝거리기보다는 이러는 편이 더 즐겁다. 다만, 다음날 아침 9 시 반부터의 취재만 아니었다면..... 말을 생략하면 생기는 오해 우다다다다닥! 통로를 빠르게 달려오는 발소리. 젊은 여성 디렉터 아오키가 큰소리를 내지른다. "노구치 선배, 원숭이죠!" 아니아니, 어떻게 저럴 수가. 아무리 노구치 선배가 사람이 좋기로 선배에게 대놓고 '원숭이' 라고 하다니. "아, 그래, 그렇긴 해도....." 노구치 선배! 코끼리냐, 다람쥐냐, 원숭이냐. 이 세 가지로 나눈다면 분명 원숭이 얼굴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후배한테 '원숭이' 라 불리우고도 '아, 그래' 라고 하다니 그건 말도 안 돼. 사람 좋은 것도 한계가 있는 법. 그러나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열받은 건 나의 엄청난 오해였을 뿐! 6 월. 아자후에 원숭이가 출몰하여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었다. (뉴스의 숲) 에서도 연일 카메라를 들이밀어 이들 원숭이의 모습을 보도했는데, 그 담당 디렉터가 노구치였던 것이다. 즉, '노구치 선배, 아자후의 원숭이 담당 디렉터죠!' 이것이 줄어들어 '노구치 선배, 원숭이죠!' 가 되었던 것이다. 물어본 아오키도 잘못이 없고, 대답한 노구치도 전혀 잘못이 없다. 모두 나의 오해였다. 이 말을 미야자와에게 했더니 그는 박장대소를 하며 말했다. "그 정도는 약과야. 나한텐 말야, 멀리서 '미야자와, 옴진리교지!' 라고 외치는 사람이 많아. 아마 모르는 사람이 들었으면 기절초풍했을걸!" 그랬을 것이다. 미야자와는 옴진리교에 의한 일련의 사건 취재에 깊이 연루되어 있어서, 거기에 관해서는 디렉터 가운데 전문가로 불릴 정도다. 그렇다 해도 '미야자와, 옴진리교지!' 란 말은 좀 심하다. 하지만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나 같은 건 문제도 아니라고. 더 심한 디렉터도 있어. 옛날엔 몰래카메라 문제를 맡았다가, 지금은 강간 문제를 맡고 있는 디렉터가 있거든. 물론 거기엔 항상 '무슨무슨 취재' 라고 붙여지긴 하지만 말야. 이걸 줄인 말로 회사안에서 물어보는 거야 문제없지만. 밖에서 '강간이죠!' 라고 큰 소리로 외쳐 보라구. 아마 틀림없이 불심검문 당하고 말지." 같은 6 월. (뉴스의 숲)에 엄청난 지진이 일어났다. 프로그램의 대장격인 프로듀서가 바뀐다고 한다. '다카하시 부처님' 이 다른 데로 옮겨가게 됐다. 그리고 새로운 프로듀서로 오는 사람이 로스앤젤레스에서 귀국한 바로 그 카리스마의 사나이. 오타 하루야였다. 얼마 전 편집실 앞을 지나가다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오타가 혼자서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디렉터도 아니고 편집장도 아닌 사람이 편집실에, 그것도 혼자서 일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그런 만큼 놀라기에 충분했다. "야아, 오토!" "안녕하십니까, 앞서 했던 스터디 정말 고마웠습니다." "자네한테도 도움이 됐는가?" "예, 아주 유익했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구만." 이유도 없이 오금이 저린다. 아무래도 오타 앞에 서면 긴장하고 만다. 오늘도 빛난다. '나는 프로!' 라는 느낌이 나의 등뼈를 바짝 곧추세우는 것이다. "함께 볼까?" "아, 방해되지 않습니까?" "무슨 말을! 어서 들어와, 어서." 오타는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도록 서둘러 거치적거리는 의자 따위를 치워 주었다. "고맙습니다."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앞으로 다가간다. 모니터로 눈길을 돌렸다. 거기에는 페루의 후지모리 대통령의 인터뷰가 재생되고 있었다. 인터뷰하는 사람은 오타 자신이었다. "저거, 어느 나라 말입니까?" "스페인어." 주로 통역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오타도 때때로 스페인어로 말을 주고받는다. 굉장하구나. 이분은 몇 개 국어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잠시 보고 있으니까 본격적인 인터뷰가 끝나고, 잡담을 나누는 장면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니까 후지모리 대통령은 일본어를 쓰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잘못 들었나? 분명히 후지모리 대통령은 일본어와 영어를 절반 정도씩 섞어서 오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후지모리 대통령은 일본어를 할 줄 아십니까?" "일본어? 그럼 아주 능숙하지." "그러면 인터뷰도 일본어로 하면 좋지 않아요?" "아니, 그건 그렇게 하면 절대 안돼." "어째서입니까?" "후지모리 대통령은 일본계잖아. 그 일본계인 대통령이 인터뷰를 할 때 일본어를 사용하는 광경을 페루 국민이 본다면 어떻게 되겠어?" "예, 기분 좋지는 않겠네요." "그래, 그렇다구." 긴장이 줄어들기는커녕, 긴장이 더하여 더더욱 존경하는 마음이 깊어져 갔다. @FF @fc 10 장 10. 오토, 미국으로 취재 가다 배리어프리, 유럽인가 미국인가 (뉴스의 숲)에서 일하는 동안에 계약서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매주 어떤 요일, 한 달에 몇 회 이상은 반드시 출연해야 한다는 조건도 특별히 없었다. 그것은 학생으로서의 생활을 해야 하기도 했고, 오래 여행을 가야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을 것이라는 TBS 측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에 대해서도 특별히 이야기 나눈 바가 없었다. 어쨌든 '해볼까?' '그러죠' 로 시작되었으므로,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난부와의 업무 협의를 하던 중이었다. "오토, 가을 이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둬야 할 것 같은데....." 왔다 왔어. 강판인가, 아니면 계속 투구인가. "어떤 걸 해보고 싶어?" 아니, 미리 이야기 한 번 해보지 않고 계속 하는 것을 전제로 삼다니! "가을 이후 계속해도 괜찮습니까?" "가능하다면 부탁하려고 생각하고 있네만. 물론 오토가 6 개월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도리가 없겠지." 아직도 해보지 못한 일이 산더미 같다. 서로의 생각이 하나로 모아졌다. "요 몇 달 동안 여러 가지 취재를 하긴 했지만, 역시 '배리어프리' 를 소재로 한 것이 대부분이었죠." "그렇지." "물론 '배리어프리' 는 중요한 주제이고, 제가 느끼는 절실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그것만 다루게 되면 제가 리포터를 하는 의미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지?" "제가 이 일을 받아들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지금까지 '휠체어를 타고 캐스터를 하는 것은 무리다' 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리자는 것입니다. 휠체어를 탄 사람도 뉴스를 읽거나 일기예보를 전할 수 있다면 좋지 않겠어요? 그 생각을 실천하고 싶어서 열심히 해왔다는 사실이 저에겐 참 소중했거든요." "음, 알 것 같아. 오토, 잘 말했어." "제가 '배리어프리' 에 관한 기사거리만 다루고 있으면, 역시 장애인은 장애에 국한된 내용밖에 다룰 수 없다고 생각해 버릴지도 모르거든요." "그럴 수 있겠군." "지금까지는 주로 물리적인 배리어프리에 대한 리포트만 해 왔잖아요? 하지만 가을 뒤로도 계속할 수 있다면 그것뿐만 아니라 좀더 '마음의 측면' 쪽으로 시선을 돌려 주는 리포트를 했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보면 나 혼자만의 생각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난부를 비롯한 많은 스태프들은 내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수개월에 걸친 활동을 총정리하여 특집을 꾸며 내보낸 뒤, 가을부터 새로이 방향을 잡아나가기로 했다. 그것은 특별방송을 의미했다. 구상이 정리될 때까지 몇 주일이나 걸렸다. 난부가 의논하러 왔다. "유럽의 배리어프리는 잘 돼 있나? 뭐 좀 알아?" "유럽은 가본 적이 없어 잘 모르긴 하지만, 미국은 확실히 한발 앞서 있어요. 교통기관만 봐도 그래요. 다만 제가 가본 곳은 서부뿐이지만요." "그렇군. 그런데 니시자키하고 얘기하다 보니까 해외의 발달 된 지역을 취재함으로써 일본이 어떤 면에 뒤지고 있는지를 부각시킬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내놓더라고." 해외의 사례다! 나도 전문가가 아니므로 상세하게는 알지 못했다. "유럽이라 해도 북유럽을 말하겠죠, 아무래도. 가본 적이 없으니까 가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세금이 비싸고 각종 제도가 복잡해서 영상을 옮기기가 만만치 않을 거구요. 거리들도 전통에 얽매이다 보니까, 아무래도 생각만큼 편리하지는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 점에서 미국 서부는 다르던데요. 버스엔 리프트가 달려 있고, 지하철 역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어서 단번에 배리어프리가 실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만들죠. 물론 그런 모든 것이 다 'ADA(장애를 가진 미국인에 관한 법률)' 라는 법률에 의해 정비된 것이라고 하고요." "음, 아무래도 그쪽이 훨씬 잘 발달되어 있을 것 같군. 게다가 일본인은 대체로 유럽보다도 미국을 더 가깝게 느끼기도 하고." 이리하여 개요가 잡혔다. 법률로 정해진 미국의 배리어프리. 일본과 대비시킴으로써, 그 차이점을 명확히 한다. 그런 가운데 앞으로의 과제와 그 해결책을 찾아나간다. 흐음, 완벽한 흐름이다. 그런데 진짜 해외로 취재를 나간다고라?! '거시기' 와 '수달' 의 취재 취재에는 돈이 들어간다. 카메라팀을 하루 사용하면, 그것만으로 수십만 엔의 비용이 들어간다. 해외 취재의 경우에는 거기에 사람 수만큼 항공권, 숙박비가 추가되고, 현지에서의 취재 보조를 해줄 코디네이터가 필요하다. 뉴스 방송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돈이 들어가는 기획은 좀처럼 세우지 않는다. 아울러 그렇게 덩치 큰 기획은 매일 벌어지는 사건 사고를 다루는 (뉴스의 숲)을 통해 방영되기도 어렵다. 그때 우리 손을 들어준 것이 일요일 저녁 6 시부터 1 시간 동안 방영되는 (보도특집). 이번 취재에 들어가는 비용을 (보도특집)이 지원하되, (보도특집)내에서 방송한다. 그러나 그 내용을 만드는 책임은 우리 (뉴스의 숲)취재진에게 있다. 이런 시도는 지금까지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사례로, 말하자면 '프로그램간의 배리어프리' 인 셈이다. TBS 보도국에 있어 (보도특집)은 꽃 중의 꽃. 거기서 자신이 취재한 내용이 방송된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라고 한다. 주위의 기대가 컸다. 그러나 기대가 큰 만큼 나에겐 엄청난 압박으로 다가왔다. 또 하나의 난제. 나는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 "오체 불만족" 속에서 대학 입학과 동시에 들어간 ESS 라는 서클의 스피치 콘테스트에서 우승했다고 밝혔기 때문에, 내가 영어를 잘하리라고 짐작하는 분들이 많다. 그것은 완전 착각이다. 분명히 이미 쓰여 있는 문장을 그저 말이 통할 정도로 읽어나가는 것은 잘한다. 그렇지만 영어 회화를 능숙하게 할 정도는 전혀 아니다. 게다가 그 서클에 들어가 활동한 것은 겨우 한두 달이었다. 사용해야 하는 언어가 영어면 미야자와가 모처럼 지도해 준 인터뷰 기술도 순식간에 백지 상태로 돌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거기다 취재 기간이 약 2 주일이나 된다. 지금까지 교토와 오비히로 두 군데의 출장을 다녀왔지만, 각각 2 박 3 일이었다. 그 정도면 대충 버틸 수 있는 범위였다. 앞서도 말했지만 목욕이나 화장실을 다른 사람에게 신세져야 하는 나로선 숙박을 하는 일에 상당히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난부나 미야자와는 인품이 좋아서, 생각보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적었고 그만큼 열심히 취재에 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취재는 2 주일. 그 기간 동안 동료들에게 화장실과 목욕 따위의 신세를 져야 한다. 내 정신력이 과연 어디까지 견딜 수 있을지..... 끝없는 불안을 안고서 비행기는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떠났다. 재수생 시절 친구와 함께 여행 다녀온 이후 두 번째의 서부 탐방이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우리 일행의 코디네이터로 일할 여성인 후타미를 만났다. 순수한 일본인임에도 그녀의 이름은 미셀 후타미. 아무래도 미국에서 생활하자면 영어식 이름을 가지는 편이 편리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스태프들도 재빨리 영어식 이름을 짓기로 했다. 카메라맨 히구치 노보루는 노보루의 '보' 를 따서 '보우' 라 하기로 했다. 음향을 담당하는 오쿠다 하루히코는 하루히코의 '하루' 에서 변형시켜 '해리' 로. 이 두 사람의 이름을 붙여준 사람은 후타미였다. 미야자와는 스스로 이름을 붙였다. "난 이미 결정되어 잇습니다. 미야자와의 '자' 를 따서 '잭' 이라고 하겠습니다. 괜찮죠?" 우와, 재주 좋다! 미리 지어놓았나? 그 말을 듣고 난부가 가만 두지 않고 '잭' 에 대해 시비를 건다. "미야자와는 그런 듣기 좋은 이름과 안 어울린다구. 자네는 '데미안' 이 좋아. (오멘)이란 영화에 나오잖아. 그 악독한 놈 말야." 난부의 한마디에 출장 중 미야자와의 닉네임은 그대로 '데미안' 으로 결정되고 말았다. 이번엔 미야자와가 반격에 나선다. "너무하시잖아요. 그럼, 난부 선배는 뭘로 하실래요?" "난 말야. '딕' ! 어렸을 적 다니던 영어 학원에서 선생님이 지어 줬다고." 순간 미야자와가 나를 쳐다보며 킥킥거린다. "왜 웃는 거야?" 미야자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리며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한다. "난부 선배. '딕' 이 무슨 뜻인지 알우?" "아니, 모르겠는데, 왜?" "영어로 말이우, 그게 '거시기' 를 가리키는 말 아니오!" "아니, 말도 안돼! 오토, 그 말 사실이야?" 나도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목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거린다. "아니, 그럼 그 선생한테 내가 놀림 당한 건가! 제길......" 나의 닉네임은 '수달' 이었다. 이게 어째서 영어식 이름이란 말인가. 후타미가 처음 붙여준 이름은 '옷토' 였는데, 그보다는 수달을 의미하는 '오터(otter)' 라고 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하여, 그렇게 결정되었다. 2 주 간에 걸친 '거시기' 와 '수달' 의 취재. 과연 무사히 끝날 수 있을까. 삶의 무게를 덜어주는 사회 관광 목적으로 갔던 1 년 반 전의 여행 때도 일본과의 커다란 격차를 실감했던 미국의 배리어프리. 이번에는 그때 이상으로 미국의 배리어프리가 진전되어 있음을 실감했다. 공공 교통수단이 휠체어를 위해 준비를 갖추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에 속할 뿐. 야구장의 좌석이나 주차장, 부랑자들의 임식 숙박시설, 나아가선 형무소까지가 '배리어프리' 의 대상이었다. 그 철저함에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까지 받았다. 거리가 제대로 배리어프리를 갖추게 되면 불편한 생각을 하지 않고도 활보할 수가 있으므로 장애인들은 마음이 놓이게 된다. 장애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곳에 사는 어느 일본인 여성과의 인터뷰에서 그 점을 통감했다. 츠카고시 가에. 나보다 한 살 위인 이 여성은 어느 기업이 주최하는 '장애인 리더 육성 프로그램' 에 응모하여, 약 1 년 전부터 버클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지금 버클리는 전 미국에서 가장 장애인이 살기 편한 곳이라는 평을 받고 있으며, 가는 곳마다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확실히 편리하고 쾌적한 도시이다. 그녀의 방에 들어서자 책상 위에 놓인 "좀 이상하죠! 일본인" 이란 책이 눈에 띄었다. 이야기를 해보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미국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임은 알겠는데, 혹 모국인 일본에 대해서는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다. 그녀는 그 책의 (입에 붙은 말 '열심히!') 라는 장을 펼치고는 내게 보여 주었다. 그 장은 일본에선 흔히 헤어질 무렵, '열심히 해!' 라고 말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열심히 한단 말인가?' 하고 물어보면 다들 꿀먹은 벙어리가 되기 십상이고, 만일 말 그대로 정말 열심히 하다간 녹초가 되고 만다, 는 가벼운 조크로 시작되고 있었다. "그런데, 저는 그 말을 잘 쓰는데요....." 츠카고시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띠며 말했다. "'열심히!' 라는 말은 듣고 '뭘 말입니까?' 하고 물으면 상대방은 십중팔구 어안이 벙벙해져서 입을 다물걸요." 그렇다. 휠체어를 타고 생활을 하다 보면 숱하게 '열심히!' 란 말을 듣는다. 츠카고시는 거꾸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열심히!' 란 말, 대단히 무책임한 단어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예에?" "그 의미는요, '나는 열심히 하고 있다' 가 아니라, '네가 열심히!' 잖아요. 그것이 '열심히 하겠다' 가 되면, '나도 열심이니까 너도 열심히!' 가 돼버리고요." 과연 듣고 보니 그렇다. 요컨대 '열심히!' 를 강요한다는 뜻이리라. "그런데요, 제가 여기에 오고 나서 대단히 좋다고 생각한 것이 '굿 잡!' 이라는 말이었어요. '잘했다!' 는 뜻이잖아요." 그건 맞는 말 같았다. 그런 말을 일본에선 사용하지 않는다. "그 말은 미래에 '열심히' 가 아니라 지금까지 열심히 한 것에 대한 평가가 아닌가요? 지금까지 열심히 한 것에 대해서 '참 잘했어, 훌륭해' 라고 칭찬해 주고 힘을 북돋워주는 편이 '좀더 좀더 열심히!' 보다 훨씬 편안하게 느껴져요." '열심히!' 라는 별것 아닌 표현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깊이 생각하다니, 정말 대단하다. 그러나 그녀에게 이렇게 생각하게 만들고, 또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상황이 일본엔 틀림없이 존재한다.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열심히가 필요한 사회이기 때문이지요. 장애인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정상인과 똑같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있으니까 특히 더 '열심히!' 라고 말해 대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미국의 장애인들은 열심히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세요? 이 지역은 휠체어 타고 생활하기 편리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휠체어 탄 생활도 그다지 문제가 안 될 것 같아 보일 것이고요. 그럴 경우 장애인은 열심히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합니까?" 어려운 질문이었다. 이 대답은 그녀의 입에서 얻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음, 글쎄요. 그다지 생각해 보질 못했는데, 실제론 어떻습니까?" "저는 '장애인으로서의' 열심히는 필요 없어도, '인간으로서의' 열심히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장애' 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변명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말대로 일본에서는 나만 해도 '일본인' '남성' '1976 년생' 등 다양한 요소 가운데, 유독 '장애인' 이라는 부분이 클로즈업되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는 '차카고사 가에입니다.' 라고 이름을 말하면 '내가 어떤 인간인가' 보다 '휠체어를 타고 있다' 가 먼저입니다. 그리하여 나 자신도 그 점에 얽매이게 되는 거지요." 일본에서 학창생활을 할 때, 그녀는 평소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고 한다. 타인의 시선을 차단시켜 주는 짙은 색의 선글라스가 그녀는 쾌적했다. 주위에서도 '갑옷' 을 입혀주고, 스스로도 '갑옷' 을 차려입고 지내던 츠카고시. 자연히 삶의 무게를 감당해 내기 힘들었다. '미국에 와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나 자신이 될 수 있었다' 는 말은 대단히 인상적이었고,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취재를 마친 그 다음주, 그녀는 1 년 간의 연수 프로그램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다시금 '갑옷' 을 차려입게 될까. 그렇지 않으면.....? 취재보다 편집이 더 고역! 2 주 간에 걸친 미국 취재. 다른 스태프나 친구들이 '야 참 부럽다' 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그리 부러워할 만한 구석이 없었다. 자유시간이래봤자 출발하기 전날 두세 시간의 쇼핑이 끝이었다. 미국을 떠나던 날까지도 오전 중에만 세 건의 취재를 해야 해서, 자칫하면 비행기마저 놓칠 정도였다. 어쨌든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했다. 이제 남은 건 이 소재를 어떻게 요리하느냐이다. 그러나 그 요리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편집 작업은 취재한 내용을 확인하는 프리뷰 작업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이번엔 그 내용 대부분이 영어다. 영어가 능숙한 사람이 곁에 붙어 있어야만 한다. 게다가 통상적인 취재는 2, 3 일 간 찍은 테이프였지만, 이번에는 2 주 간이나 된다. 그 모든 걸 다 보고 일본어로 내용을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꼬박 2 주일 정도의 기간을 요한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작업이다. 그런데 (보도특집)을 한창 준비해 나가는 중에 그 일이 발생했다. 아침 9 시 반.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졸린 눈을 비비면서 전화를 받았다. 난부의 비통한 목소리가 전해져 온다. "오토, 정말 미안해." 갑자기 무슨 일인가. 잠이 덜 깬 탓도 있어 얼른 알아듣질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어째서 그런 기사가 나왔는지, 이쪽에서도 조사하고 있는 중이거든." 그런 기사라니? 도대체 뭘 말하지? 일이 중대하다는 생각에 정신을 바짝 차린다. 사정은 이랬다. 그날 아침, 즉 8 월 19 일자 스포츠 신문에 '"오체 불만족" 의 저자 TBS 취직' 이라는 타이틀의 기사가 게재되었다. 난부가 보내준 팩스를 보고 나도 깜짝 놀랐다. 텔레비전이나 잡지의 인터뷰에서 '취직은 하지 않는다' 고 누누이 말해 왔다. 지금도 그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나는 완전히 거짓말쟁이가 된 것이 아닌가, 서둘러서 기사 내용을 읽었다. 베스트셀러 "오체 불만족" 의 저자로 와세다 대학교 정경학부 4 학년에 재학 중인 오토다케 히로타다 군이 내년 봄 대학 졸업후 TBS 의 (뉴스의 숲) 리포터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해 나가기로 했음을 18 일, 확인했다. 아니 '확인했다' 니, 어떻게 확인했단 말인가. 나는 아무것도 말한 적이 없는데. 지금은 한 달에 몇 차례 리포트를 하고 있지만, 대학 졸업 후에도 그걸 계속한다고는 분명히 한마디도 한 적이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걸 '취직' 이라고 하다니, 이 기사가 엉터리임은 그 다음 내용을 봐도 분명했다. 장래의 꿈이라는 '프리 스틸 카메라맨' 을 지향하며 첫걸음을 내딛었다. 어이, 잠깐! 타인의 꿈을 제멋대로 결정하다니. 누가 '프리 스틸 카메라맨' 을 지향했다는 거야?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이 기사의 출처는 TBS 였다. 8 월 29 일 방영될 (보도특집)과 관련하여 TBS 가 그걸 홍보하기 위해 여러 매체와 접촉을 했다. 그래서 그 일환으로 TBS 담당자가 신문사의 취재에 응했다. 그런데 그때 TBS 담당자의 진의가 스포츠 신문 기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데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스포츠 신문쪽만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도 없었다. 이번엔 새로 온 오타 프로듀서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타는 정말이지 내게 싹싹 빌며 사과했다. 겨우 스물셋의 젊은이에게 그야말로 몸둘 바 모를 정도로 잘못을 빌었다. "그만 하세요. 오타 PD 께서 잘못하신 것도 아니잖아요." "아니야. (뉴스의 숲)이란 프로그램에서 오토가 활동하고 있는 이상 그 책임자는 나야. 이 지경이 돼서 정말 미안해. 이렇게 사과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드라마에서 오타처럼 '능력 있는 사람' 은 성격이 나쁘게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 영향 받아선지 아무래도 오타 PD 에 대해 나름대로 대하기 어려운 인상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일에 관한 대응을 보고 다가서기 힘든 '프로' 였던 오타의 인상이 '신뢰할 수 있는 프로듀서' '(뉴스의 숲)팀의 보스' 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난부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야, 나도 깜짝 놀랐어. 지금까지는 오타 PD 란 사람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포커페이스 타입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랬는데 이번에, 오토다케가 정말 큰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거라며 대단히 화가 났던걸."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역시 쏟아 부을 곳 없는 억울함, 까닭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방송의 세계에 있으면서 이렇게까지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개인의 장래나 진로에 대해 본인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기사가 쓰여지고, 그 기사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힌다. 그런데 그 잘못된 정보를 고치기 위해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엄청난 노력이 있어야 한다. 텔레비전의 와이드쇼나 가십 기사를 다루는 주간지. 타인의 프라이버시를 제멋대로 취급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용서할 수 없지만, 거기 실리는 내용이란 게 진실인지 거짓인지 늘 분명치 않다. 그런 내용이 확산됨으로써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어 왔는가. 이번 일로 사물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정확성을 추구해야겠다고 새삼 느꼈다. 미디어에 관여하는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자각을 다시금 뼛속 깊이 인식했다. (보도특집)을 마무리짓는 작업은 간단치가 않았다. 이 무렵 난부 디렉터에 관한 관찰 일기라도 쓴다면, 좋은 연구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날이 갈수록 수척해지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물론 편집 그 자체의 어려움도 있다. 익숙하지 않은 영어와 격투를 벌이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니터만 줄곧 들여다보는 생활, 거기다 (뉴스의 숲)에서는 12 분 정도의 특집이었지만, 이번에는 1 시간짜리 방송이다. 평상시보다 서너 배 이상 땀을 흘려야 했다. 압박 요소는 그것말고도 또 있었다. 난부가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도 그것이 방영되는 것은 (보도특집)의 틀 안에서일 뿐, (뉴스의 숲)이 아니다. (숲)의 디렉터들 사이에서는 2, 3 주마다 한 편 내외로 특집을 만든다는 암묵적인 일의 책임량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디렉터가 그 일의 책임량을 지켜 주지 않으면, 나머지 다른 디렉터들에게 하중이 걸린다. 그러므로 빨리 이 일을 마치고 (뉴스의 숲)에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초조감이 난부의 내면을 공격해 대고 있었던 것이다. (보도특집)방영까지의 2, 3 일 간. 난부는 잠도 자지 못하고, 쉬지도 못했다. 편집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의 내레이션을 집어넣는 시간도 좀처럼 결정되지 않았다. 당초엔 방송 전날 밤 8 시로 예정되었다가, 그것도 안 돼 10 시로 늦춰지더니 최종적으로 호출 받은 시간은 자정 무렵이었다. 눈이 퀭할 정도로 피곤해 보이는 난부. "미안, 오토. 이렇게 늦은 시간에 불러서." 그러나 난부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내가 오히려 더 미안해진다. 엉성하게 쓰인 원고를 그 자리에서 손봐가며 내레이션 녹음을 진행시켜 나간다. "아니, 잠깐만. 여기 원고가 좀 이상한데. 오토 기다려 봐. 지금 고칠 테니까." (보도특집)의 프로듀서와 상의해서 원고에 수정을 가하는 난부. "그러니까 여기를 이렇게 고치고, 이 말은 이곳에 집어넣고..... 흐음, 여기 이 부분은 필요없을 것 같고." 5 분 정도 흘렀을까. 문장을 뒤죽박죽 주무르던 끝에 난부가 '좋아, 이렇게 가자' 며 내준 원고. "아이고, 난부 선배! 결국 고치기 전과 똑같아졌잖아." 난부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마침내 내레이션 녹음이 끝난 것은 새벽 2 시. 이제 16 시간 후에는 방송이 나간다. 그러나 자막도 집어넣어야 하고, 나말고 다른 사람의 내레이션 작업도 해야 하는 난부의 일은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다. 마침내 오후 6 시. 이날의 메인은 마츠바라와 나, 그리고 (보도특집)의 캐스터인 다마루 미스즈였다. 텔레비전으로 보자면 날카로운 이미지가 있는 다마루. 괜히 얼빠진 실수라도 했다가 혼이라도 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약간은 불안했으나 막상 만나보고 나니 이미지가 완전히 달라졌다. 대화 나누기가 편안하고 참 싹싹한 사람이었다. 그러면 스튜디오에서의 진행이 안심된다. 녹화 테이프 편집이 끝난 뒤. 스튜디오의 대화 부분에 대해서는 난부가 구성을 짜기로 되어 있었다. 방송이 시작되고 녹화 테이프가 나간다. 마츠바라가 난부를 부른다. 반응이 없다. 다마루도 나도 뒤돌아본다. 거기엔 이번 방송의 키워드인 미국 법률 "ADA" 의 책을 쥐고, 멍하니 서 있는 난부가 있었다. (뉴스의 숲)특집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느낌을 준다면, 과연 1 시간짜리 방송은 길었다. 녹화 테이프 마지막에는 이번 취재에 나온 사람들이 '꿈' 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 머릿속에 수많은 취재 장면이 떠오르자 문득 북받쳐 오르는 눈물. 그 눈물을 억누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방송 종료. 그 순간 난부는 주위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사과하기 시작했다.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시간에 쫓겨 그로선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들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뉴스의 숲)의 대표로서 특별히 차출되었음에도,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자책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부 선배, 그건 너무 지나치게 겸손하신 겁니다. 논점도 알기 쉬웠고, 그것을 설명하는 영상도 제대로 잡혔습니다. 확실히 더 많은 시간을 들였더라면 보다 좋은 작품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미국의 배리어프리 사정' 은 충분히 전달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린 최선을 다했구요. 나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마침내 일곱 살 때부터 시작된 학창시절의 마지막 여름. 지금까지 가장 멋지게 방학숙제를 해냈다는 느낌이었다. @FF @fc 11 장 11. 이지메, 그 후의 이야기 나를 찾아 떠난 여행 피곤하다. 한계에 부딪쳤다. 난부 정도까진 아니라 해도 (보도특집)취재는 처음 생각한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그리고 정신적 피로. 텔레비전 방송이라는 익숙지 않은 세계에서 반 년 가까이 일을 해오면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 대신 피로가 축적됐다. 거리에 친구들과 함께 나섰을 때 누군가 '오토다케!' 라고 말을 걸어오면, 언제 어디서나 꼭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할아버지처럼 활짝 웃으며 대답하는 나. 마음속으로야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만이라도 제발 나를 내버려 둬!' 라고 외쳐 보지만..... '겉으론 좋아 보이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사람' 을 순위로 매겨 보라면, 나는 가장 먼저 '오토다케 히로타다' 에게 표를 던지리라. 숱한 인터뷰를 치르면서 늘 말한 바 있지만, 나는 좋은 사람도 대단한 사람도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허약함도 갖고있고, 못된 면도 많은 정말 보통의 젊은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오체 불만족" 을 읽고, 내가 (뉴스의 숲)에서 리포트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허상과 실상의 격차는 더더욱 커지기만 한다. 늘어져 지내고 싶었다.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친구와 함께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었다. (보도특집)이 끝나고 나서 1 개월 동안 휴가를 얻어 대학 친구들과 캐나다 여행을 가기로 했다. 먼저 머리를 노랗게 물들였다. 어떻게든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색을 바꾸게 한 것이다. (뉴스의 숲)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결코 할 수 없는 머리색이다. 1 개월로 기간이 한정된 노란 머리가 거울에 비친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최고의 여행이었다. 아름다운 호수의 벤푸, 토론토의 야경, 박력 있는 나이아가라 폭포, 마지막 코스로 들른 퀘벡의 아름다운 거리들, 그리고 늘쩡하게 여행을 즐기는 친구들. 마음에 불필요하게 쌓여 있던 번잡스러운 것들이 조금씩 사라져 가는 느낌. 그리고 그 대신 새로운 힘이 충전된다. 좋아, 다시 한 번 부딪쳐 보는 거야! 3 주간의 여행을 마치고, 9 월 30 일 귀국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에서 기사분에게 국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물어 본다. "아와야 노리코 씨가 죽었지요. 그리고 이케부쿠로에서 미친놈이 나타나서 여러 사람이 희생됐고, 또......" 그다지 좋은 소식들은 없는 모양이다. 뉴스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아, 맞다. 오늘 정오 뉴스에서 뭔가 중대한 보도가 있었는데. 라디오 수신 상태가 좋지 않아 전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요." 집에 돌아와 텔레비전을 켰다. 그래서 이바라키 현 도마이무라의 사고를 알았다. 그때 아이러니컬하게도 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현장의 참상이 아니라, 미야자와나 난부 같은 동료들이 정신없이 바쁘게 일하는 모습이었다. 즐거웠던 여행의 추억에 잠기는 것도 그때까지. 순식간에 현실 세계로 되돌아온 나는 다음날 미용실에서 머리색을 다시 검게 물들였다. 그 무렵 (뉴스의 숲)에서는 '간판' 이 교체되어 있었다. 3 년 반 동안 메인 캐스터를 맡았던 가도와키 리에 캐스터에서, 신도 마사코 아나운서로 배턴이 넘겨진 것이다. 가도와키와 처음 나눈 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 무서운 사람 아니에요." 그러나 처음엔 엄청 무서웠다. 3 월 말, (뉴스의 숲)에 막 들어와서, 가도와키와 면식이 없던 시기. 마츠바라 캐스터와 후지와라 편집장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가도와키는 무서운 사람이니까, 성질 돋구면 안 돼' 라고 겁주는 것이 아닌가. 텔레비전으로 보았을 때 상당히 엄격한 사람이란 이미지로 받아들인 가도와키였다. 나는 그 말을 순진하게 받아들여 그만 겁을 먹고 말았던 것이다. 이 말을 전해 들은 가도와키가 내게 처음 건넨 말이 바로 '나, 무서운 사람 아니에요' 였다. 시원시원하고 성격 좋은 여성이었다. 절대 미간을 찌푸리지 않아서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자기업무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뉴스의 숲)방송이 끝난 후에도 사회부나 정치부 기자들과 업무 협의를 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았다. 마츠바라 캐스터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가도와키 캐스터 또한 단순한 아나운서가 아니다. 마츠바라는 경제, 가도와키는 정치라는 전문분야에 정통한 기자로서 활약했다. 그러다가 캐스터로 발탁되었다. 즉, 예전엔 현장에서 취재하는 일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쪽 업무 진행에 대해서도 대단한 안목을 지니고 있다. 그런 이유로 디렉터들은 니시자키와 후지와라 편집장의 체크만 받는 것이 아니라, 마츠바라와 가도와키 두 캐스터의 체크도 받아야 했던 것이다. 방송 종료 후에도 일하는 경우가 많은 가도와키는 저녁식사나 술을 함께 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그런 만큼 캐스터 교체 소식을 듣는 순간 문득 좋은 기회가 날아가 버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나는 세상물정도 잘 모르고, 나 자신에게도 엄격하지 않다. 솔직히 가도와키와는 정반대에 있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나에게는 없는 것, 나를 위해 약이 되는 가르침을 얻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것은 확신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날아가고 그녀는 떠나고 말았다. 몇 개월 뒤, 그녀가 일하는 새로운 직장을 방문했다. TBS 본사에서 걸어서 1, 2 분 정도 걸리는 곳. 거기에 TBS 가 새로운 업무를 추진하기 위해 만든 부서가 있다. "지금 내가 하는 일마다 모두 처음 겪는 일, 새로운 일뿐이에요. 너무 재미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반짝반짝 생기가 넘쳤다. '캐스터' 일은 원래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다. 이제 그 임무에서 해방되어 더욱 편안함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가도와키 리에. 성질을 돋구면 안 되지만, 정말 매력적인 여성이다. 약속은 지켜지고 있나? 가을 이후의 리포트는 물리적인 배리어프리에만 한정짓지 말자는 방침이었다. 그리기 위해서 (보도특집)으로 일단락을 지었던 것이고, 여름 휴가도 얻었다. 말하자면 새 출발이다. 우선 처음 제안된 것이 '그 아이들은 지금?' 이었다. 오토다케 리포트 제1 탄은 이지메로 괴로움을 겪는 중고생들과의 좌담회였다. 이지메를 한 아이, 이지메를 당한 아이. 각자가 지닌 괴로움에 대해서 참가자 모두가 함께 이야기한 것이 벌써 6 개월이 훌쩍 넘어 버렸다. 지금 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우리들이 내보내는 뉴스란 게 말야, 계속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니까 정신없이 그쪽으로만 매달리게 되지. 그러다 보면 그 뒤에 어떻게 되었지, 하고 뒤돌아볼 여유를 못 가져. 이른바 속보를 챙기지 못하는 거야." 매일 벌어지는 사건 사고를 전하는 뉴스 방송은 확실히 그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나중에 그 피해자는 어떻게 되었는지를 깊이 파고드는 일이 아주 드물다. "물론 충분히 보도거리가 되는 사례에 대해서는 속보를 전하기도 하지만, 역시 대개는 그렇질 못해. 그러니까 오토의 기획에서는 '그 아이들은 지금?' 을 다루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물론 이런 후지와라 편집장의 말에 우리도 동감이었다. 첫번째 리포트를 하면서 몸과 마음이 모두 위축되었던 요가 중학교에서의 좌담회. 그 당시 참여했던 아이들은 나에게 마치 전우와도 같다.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너무나도 궁금했다. 시선을 아래로 깐 채 경험담을 들려준 고마츠바라는 지금 어떻게 학교 생활을 하고 있을까. '이제 이지메는 절대로 하지 않을 거예요' 라고 카메라 앞에서 맹세했던 사쿠라이는 약속을 지키고 있을까. 우선은 사쿠라이가 사는 야마가타 현 자오 시로 갔다. 역 앞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6 개월 전과는 딴판이었다. 이지메로 근신처분 중이라고 말하며 까까중 머리였던 사쿠라이. 지금은 단정하게 자란 머리에 교복 차림이었다. 마치 멋진 모델 같았다. 우리가 취재한 그날은 사쿠라이에게 특별한 하루였다. 놀랍게도 그는 학교의 학생회 부회장에 입후보했는데 그날 바로 그 개표 결과가 나왔단다. 이지메로 근신처분까지 받은 그가 왜 학생회 임원에 입후보하게 되었던 것일까. 그 배경에는 봄부터 사귀었다는 한 친구가 있었다. 요네자와 시에 사는 고토는 장애 때문에 휠체어를 탄다. 언어에도 장애가 있기 때문에 소리가 나는 타이프라이터를 써서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한다. 사쿠라이와 고토는 함께 탄 전철에서 몇 번씩이나 시선이 부딪쳤고, 결국 사쿠라이가 먼저 말을 건넨 것이 계기가 되어 사귀게 되었다. 사쿠라이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해 주었다. "처음 본 느낌이 무섭다고 하더라고요." "혹시 너 말야. 괜히 폼잡은 거 아냐?" "아니에요, 그런 거." 놀려대는 나에게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사쿠라이. 그때 고토가 타이프라이터의 '예' 라는 버튼을 눌러 모두 함께 웃었다. "사쿠라이가 열일곱살이고 고토씨가 스물여섯이죠. 아홉 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는데 친구가 된 건, 참 드문 일이죠?" "뭐랄까,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지는 않았어요. 훨씬 젊게 보았구요. 또 처음에 스무 살이라고 했기 때문에....." "고토 씨, 나이를 속였습니까?" "예." 또다시 기계음이 사람들을 웃겼다. 고토는 아주 낙천적인 사람이다. 나이 차가 나는 두 사람이 그처럼 사이가 좋아진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여름 휴가 때 사쿠라이와 고토가 센다이로 당일 코스 여행을 다녀왔을 때였다. "장애인들은요, 처음엔 왠지 보통 사람들과 좀 다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만나보니까 말이 통하는 거 있죠. 센다이에 갔을 때는요, 앞에 여자가 지나가면 '와, 이쁘다' 라고도 하고요." "고토씨도 여자들을 무척 좋아한다는 말?" "길을 몰라 물어보려는데, 앞에 한 남자가 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에게 물어보려고 했더니, 고토 씨가 '저쪽 여자한테 물어 보자구' 그런 적도 있어요." "하하하, 고토씨, 확실하네요." "그래서 '나하고 똑같이 생각하는구나' 라고 느끼게 됐지요. 나도 여자하고 얘기하고 싶어하니까..... 그런 말을 들으며 나와 같이 걸을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으면, 여자애들 꼬시는 것은 식은죽 먹기가 아니겠냐는 생각도 했어요." 고토, 이번엔 '아니에요' 버튼을 눌러 사쿠라이에게 항의한다. 멋진 콤비였다. 사쿠라이가 가장 흥미 있어 하는 여자에 대한 관심사는 휠체어를 탄 고토가 흥미를 가졌다는 사실이 뜻밖이었던 모양이다. 그걸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쿠라이는 '장애인도 나와 하등 다를 바 없다' 는 것을 실감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쿠라이는 '복지' 라는 거창한 주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입장에서 장애인에 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빈 깡통 모으기와 모금 활동을 통해 휠체어를 구입한다' 는 공약을 내걸고, 학생회 부회장에 입후보했던 것이다. 결과는 당선. 6 개월 전까지만 해도 학교측의 징계를 받았던 문제아 사쿠라이가 모범생으로 변신했다. 사쿠라이를 그렇게까지 변화시킨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힘을 어디에 쓸지 몰랐다고나 할까요. 그런 의미에서 요즘 사쿠라이가 학생회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의 사쿠라이에 대해 담임 선생님은 이렇게 평가했다. 나도 그 평가에 동감이었다. 보통 사람 이상의 활동력을 갖고 있던 사쿠라이. 그러나 넘치는 그 힘을 어디에 써야 할지 몰라 '이지메' 쪽으로 향하고 말았다. 그러다 근신 처분 중에 만난 마음씨 곧은 친구를 통해서 그 방향이 잘못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나아가 흥미를 가질 수 있는 대상, 힘을 쏟고 싶어진 대상을 새로 발견했다. 그가 가진 활동력이 이지메가 아닌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첩을 펼치고 여자친구와의 최신 스티커 사진을 보여주는 사쿠라이. 기타 치는 흉내를 내면서, 언젠가 자기도 음악 활동을 하고 싶단다. 학교에서 있던 일들은 손짓발짓 섞어가며 즐겁게 말하는 사쿠라이. 그는 이제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소년으로 돌아가 있었다. 무술을 배우는 가라테부 주장으로서의 특별활동, 친구들과 함께 만든 밴드, 학생회 부회장으로서의 일들, 그리고 연애. 그는 주체 못할 힘을 쏟아 부을 대상을 멋지게 찾아낸 것이다. "이젠 절대로 이지메는 하지 않습니다. 그의 맹세가 진정이었음을 확인한 나는 안심하고 야마가타현을 뒤로 할 수 있었다. 이지메의 고통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고마츠바라를 만나러 가는 신칸센 열차 안. 마음이 그다지 편치 못했다. 사쿠라이와 재회할 때는 솔직히 밝은 느낌이었는데, 고마츠바라에 관해서는 어쩐지 아직도 학교 생활로 괴로워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앞섰기 때문이다. 우리가 취재했던 두 사람이 모두 해피엔드였으면 좋겠는데..... 야마오카 시내의 절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조용한 마을. 그곳에 고마츠바라의 집이 있었다. 초인종을 누른다. 현관문이 열리고, 그녀가 나타났다. 그러나 거기에 서 있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물론 머리 모양이 바뀐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쿠라이와 만났을 때는 까까머리가 단정하게 자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응, 머리가 길었구나'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현관에서 수줍은 미소를 띠고 있는 학생은 동일 인물로 생각되지 않을 만큼, 6 개월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시점에 이미 '확신' 을 얻었다. 고마츠바라의 집 근처를 흐르는 요시이 강. 그 기슭을 인터뷰 장소로 선택했다. 상쾌한 날씨였다. 멀리서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서두를 것 없이 유유히 흐르는 강과 시간.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여기에 앉아 있으면 다 씻겨나가는 것 같아요." "그렇구나....."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살다 보면 그걸 잘 모르고 지내는 거 같아요." 좌담회 때에는 그녀에게 상처 입히지 않으려고 한마디 한마디 말을 골라 쓰느라 고심했다. 하지만 지금은 자연스런 대화가 가능하다. 본론으로 들어갔다. "학교 생활은 어떠니?" "정말 즐거워요." "뭐가 제일 즐겁지?" "농구를 하면서 친구들이 많이 생겼거든요. 그게 제일 좋아요." 올 봄에 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녀. 지금은 특별활동으로 날을 지새는 경우가 많고, 학교 생활에 아주 충실하다고 한다. 교우관계로 고민하던 그녀가 협동심을 가장 중시하는 팀 스포츠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팀 분위기는?" "엄청 밝아요. 그래서 정말 즐겁구요." "연습은 몇 시 정도까지 하니?" "6 시 반 정도까지 해요." "그럼 특별활동이 끝난 뒤에는 함께 뭘 좀 먹니?" "마실 걸 사다가 함께 먹으면서 이야기해요." "특별활동 그 자체도 재미있지만, 끝난 뒤의 그런 시간이 원래 더 즐겁잖아! 나도 중학교 다닐 때 농구부였는데, 음식 사오는 건 금지되어 있었거든. 연습이 끝난 뒤에 모두 닭꼬치 집에 가서 이것저것 잔뜩 시켜놓고 주스를 마시곤 했어. 신났지, 뭐." 음식 먹는 얘기로 분위기가 고조된다. 정말 특별활동을 즐거워하는 것으로 보였다.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서 슬쩍 과거의 상처에 대해 물어보았다. "중학교 때 특별활동과는 엄청 다르지?" "전혀 달라요!" "중학교 때 특별활동은 어떤 느낌이었니?" "같은 학년 애들하고는 아무래도 사이가 나빠서....." "즐겁지 않았어?" "....그저 연습을 하러 가는 정도였어요." 그 당시 그녀는 친구들의 이지메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당시 그녀가 내게 보낸 편지를 다시 한 번 읽어보라고 했다. 수줍음도 아니고, 옛날을 그리워하는 것도 아닌 복잡한 표정으로 편지를 읽기 시작하는 그녀, 거기에는 '죽고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매일매일 울었어요' 같은 말들이 줄지어 있다. "그 편지를 써 보낸 지가 벌써 1 년 가까이 됐네. 어때, 당시의 너를 생각해 보면?" "최악이었어요....." "당시의 자신에게 뭔가 말하고 싶다면?" "어쨌든 인간 관계로 온통 괴로운 생각뿐이었어요. 꼴도 보기 싫은 일도 잔뜩 있었구요. 그렇지만 지금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 있게 된 것은 과거의 괴로운 생각을 잔뜩 했기 때문이란 걸 알아요." "과거에 괴로웠던 내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즐거운 내가 있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해요." "괴로웠지만 그것이 마이너스는 아니었다." "전혀 마이너스가 아니에요." 딱 잘라 말했다. '신경 쓰지 않아요' 가 아니라 '그런 과거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로 파악하고 있다. 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좀 짓궂은 질문을 던져 보았다. "지금 만약 중학교 동창들의 모임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니?" "그냥 참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웃는 얼굴로 모두를 만날 수 있겠어?" "예, 만날 수 있어요." "어떻게 그렇게 강해졌니?" "이제 다 지난 옛날 일이고요, 현재가 즐거우니까 그걸로 됐다고 생각해요." 강인함이란 과연 무엇인지 일곱 살이나 아래인 그녀에게 한 수 배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해보았다. "지금 뭔가 소원을 하나 들어줄 수 있다고 한다면?" "학교에 빨리 가고 싶어요. 학교가 즐거우니까. 휴식시간은 없어도 좋아요." 방송 당일, 원고 마지막 부분에서 좋은 표현이 떠오르지 않아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미야자와가 보였다. 난부와 내가 거들어서 지혜를 모았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지 않는가. 드디어 최종 원고가 마무리되어 녹화 테이프 상황 끝! "계절은 이제 가을. 어느덧 고마츠바라 양도 사쿠라이 군도 마음의 변신을 이룬 것 같습니다." @FF @fc 12 장 12. 괴물투수 이시이와 한국에서 온 이구원 뜨거웠던 여름의 아쉬움 나는 오다쿠족(자신의 취미 분야에 광적일 정도로 깊이 파고들어 전문가 이상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또한 어렸을 때부터 야구를 엄청 좋아해서 한신 타이거즈의 열광적인 팬이다. 뿐만 아니라 고교, 대학, 사회인 야구선수가 프로야구에 지명되는 드래프트 회의의 팬이기도 하다. "내년에 저 팀은 이 선수를 지명할 것 같다." "어느 고등학교의 어떤 투수는 공이 좋은 것 같다." 그런 정보만을 다루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체크하는 나의 정보량은 보통 사람들이 볼 때 틀림없이 '오다쿠족' 이라고 할 정도이다. '그' 의 이름을 알게 된 것도 매스컴이 떠들썩하기 6 개월 정도 전의 일이었다. 요코하마 상공 고등학교의 이시이 유야. 시속 140 킬로미터가 넘는 직구, 각도가 좋은 슬라이더. 거기다 프로에서 중시되는 좌완투수. 현재 한신 타이거즈에서도 늘 140 킬로미터를 던질 수 있는 투수는 없을 정도이다. 그런 만큼 이시이 투수의 능력은 뛰어나다. 당연히 남보다 먼저 프로의 지명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6 월경 어느 스포츠지 헤드라인에 '요코하마 상공 고교 이시이' 라는 문자가 대문짝 만하게 나왔다. 기사에 눈을 돌린다. 거기에는 그가 감음성 난청이라는 장애가 있어, 거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상태에서 피칭을 한다는 사실이 실려 있었다. 나는 경악했다. 드래프트 후보로 이름이 거론될 정도의 실력파 투수에게 난청이라는 장애가 있다는 말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를 취재하고 싶었다. 왠지는 모르지만 나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를 취재하는 것은 실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스포츠 뉴스 캐스터가 아니다. 지금까지 '배리어프리' 라는 내용으로 뉴스를 전해 온 사람일 뿐이다. 그런 내가 그를 취재한다는 것은 '스포츠선수' 로서가 아니라 '장애가 있음에도 열심히 도전하는 고교야구 선수' 로 취급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취급은 그가 가장 싫어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그를 정말 취재하고 싶었다. 나만큼 스포츠에 사족을 못 쓰는 미야자와에게 상의했다. 그의 대답은 명쾌했고, 논리 또한 분명하게 통했다. "가령 이시이 군이 선수로서 2 류라면 오토 말처럼 그저 '열심히 도전하는 고교야구 선수' 로밖에 다루지 못할 거야. 하지만 그 친구는 투수로서 1 류잖아. 물론 귀의 장애에 대해 전혀 다루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실력이 있는 이상 그를 취재하는 건 조금도 실례되는 일이 아니라고." 그 생각이 틀리지 않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일단 취재를 추진해 보기로 하고, 다만 그가 취재를 거부하면 그때 포기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런 나에게 미야자와는 '괴물 좌완투수' 에 관심을 보이며, '그거 혹시 결정되면 나한테 디렉터 맡겨주지 않겠어?' 라고 말했다. 이리하여 오랜 만에 내게 두근거림을 안겨 준 이시이 유야에 대한 취재가 시작되었다. 그와의 만남은 충격적이었다. 그날은 치바현 나리타 고등학교와의 연습 게임에 등판하는 날이었다. 카메라팀도 대동하지 않았으니 취재라기보단 오히려 한 사람의 팬으로서 간, 관전에 가까운 만남이었다. 시합 전의 연습이 시작되었다. 다른 선수보다 훨씬 더 커 보인다. 의사소통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팀 동료들로부터 고립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나의 염려는 완전한 착각이었다. 동료들과 즐겁게 워밍업을 하고 있는 이시이. 그에게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어딘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어 보였다. 한마디로 그는 마운드라는 꽃병에 가장 잘 어울리는 꽃이었다. 시합이 시작되고 나리타 고교의 공격, 이시이가 마운드에 오른다. 그때 나는 놀라운 상황을 목격했다. 그때까지는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던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그러더니 완전히 전투에 임하는 사나이의 자신만만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다음 순간 휘이익,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이시이가 던진 공이 포수의 미트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아니, 빨려 들어간다기보다는 글러브를 확 때리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가 차원이 다른 투수임을 증명하는 데는 그 하나의 공이면 충분했다. 7 월. 고시엔(전국 고교야구 선수권을 치르는 구장 명칭. 대회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된다)출전을 걸고 싸우는 전국 고교야구 선수권 가나가와 대회인 이른바 여름 예선. 나는 그가 어떻게 싸울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해 여름 검은 구름이 드리워졌다. 공교롭게도 (보도특집)취재 건으로 인한 미국 출장과 예선 시기가 겹쳐 버린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시이의 용감한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요코하마 상공 고교가 계속 승리를 거둬 결승전에까지 진출하게 되면, 길이 열린다. 그 경우 출장 기간이 끝나 고시엔 마운드에서 그의 활약상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귀국할 때까지 탈락하지 않으면 '오토다케 리포트' 가 되고, 그 전에 탈락하면 마츠다 디렉터와 오구라 아나운서의 리포트가 된다. 그것이 편집장의 판단이었다. 나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일본을 떠났다. 부탁해! 어떻게든 결승까지 올라가다오. 그러나 '가나가와를 제압하는 자가 전국을 제압한다' 는 말이 있지 않은가. 요코하마 고교, 요코하마 상공 고교, 도인 학원, 도카이다이사가모 등등, 고교야구 팬이 아니더라도 모두 들었음직한 강호 팀들이 즐비한 속에서 결승전까지 진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침내 그날은 왔다. "오토, TBS 에서 보낸 팩스가 프론트에 도착했대. 아마 마츠다가 보낸 걸 거야." 미국 출장 중, 마츠다는 수시로 요코하마 상공 고교의 시합 결과를 신문기사와 함께 팩스로 보내 주었다. 그리하여 지금 문제는 요코하마 고교와의 준준결승전임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이기면 결승 진출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요코하마 고교는 현재 세이부 라이온스에 소속되어 있는 마츠자카 다이스케 투수를 중심으로 전년도 봄여름 고시엔 연패를 달성한 강호 중의 강호. 결코 간단히 이길 수 있는 팀이 아니다. 이시이는 너무 많을 힘을 썼다. 종반까지는 1 대 2 라는 근소한 차이로 게임을 잘 풀어나갔지만, 연투의 피로 때문일까? 8 회 들어 3 점을 빼앗겨 결과는 1 대 5. 이시이의 여름은 그렇게 끝났다. "패배는 분하지만 온힘을 다해 던졌다." 그가 최후까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고 매스컴은 전하고 있었다. 악바리다. 그 이틀 뒤 귀국한 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오구라 아나운서가 전하는 보도를 들었다. 그리고 나의 여름도 그렇게 끝났다. 난청 때문에 프로 진출이 좌절된 야구선수 그리고 11 월. 기다리고 기다리던 드래프트 회의. 그렇긴 하지만 최근에는 '역지명 제도' 에 의해 어느 선수가 어느 구단에 들어갈 것인지가 거의 알려지기 때문에, 이전만큼 왁자지껄하지는 않다. 그러나 고교생만큼은 들어가고 싶은 구단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종래대로 '운명의 날' 이 아닐 수 없다. 이시이 또한 예외가 아니다. 드래프트를 이틀 앞둔 날 그를 다시 만나러 갔다. 요코하마 베이스터즈의 2 군도 사용하는 요코스카 구장. 요코하마 상공 고교의 선수들은 한 주에 몇 차례 이 구장에서 연습을 한다. 이날 이시이는 3 년 간 함께 배터리를 이룬 포수 우다가와와 함께 구장에 나타났다. 약 반 년 만이다. "여름 예선, 참 아쉬웠어요.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약간은 그랬지요." 이시이와 이야기할 때는 입을 크게 벌리고 천천히 이야기한다. 익숙한 팀 동료에게 통역시키는 편이 이야기를 알아듣기에 빠르기는 하겠지만, 인터뷰하는 사람으로서 그와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도모하고 싶었다. 그가 하는 말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시이는 삼진 잡기에 상당히 집착하는 것 같던데. 어째서죠?" "삼진을 잡으면 기분이 좋아지니까요." 삼진은 투수에게는 훈장이라고 말하는 이시이. 여름 예선 동안 빼앗긴 삼진이 37 개. 그 숫자는 대회에 참가한 투수 가운데 가장 많다.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가나가와 넘버 원 투수' 라는 평가를 여실히 증명해 준다. 스코어보드에 삼진을 기록하는 기호는 ' K'. 그런 까닭에 미국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하는 노모히데오 선수에게 붙은 닉네임이 '닥터 K'. 그걸 본땄는지 언제부턴가 이 가나가와 넘버 원 투수 이시이의 닉네임이 '사일런트 K' 가 되었다. 통상 지명이 예정된 선수에 대해서는 구단측에서 인사를 온다. 그러나 이시이에게는 어느 구단으로부터도 접촉이 없었다고 한다. 그것은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난청이라는 장애 때문임이 명백했다. 이시이 투수가 가진 뛰어난 능력은 틀림없이 지명받아 마땅하다. 그건 오랫동안 드래프트 회의를 지켜봐 온 내가 증명할 수 있다. 그런데도 어느 구단 하나 지명에 나서지 않는 것은 역시 난청에 의한 마이너스적인 측면을 두려워하기 때문일까? 실제로 귀가 들리지 않음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장애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3 년 동안 그를 지도한 요코하마 상공 고교의 모리타 세이이치 감독은 말했다. "피칭에 관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수비만큼은 소리로 타구를 판단해야 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처음엔 염려했습니다. 그런데 수비를 맡겨 보니까 타고난 균형감각과 반사신경, 그리고 육감이 있었습니다. 다른 선수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할 수 있죠." 또 하나의 염려는 도루를 당했을 때처럼 연계 플레이가 필요할 때 어떻게 '소리' 를 듣느냐 하는 것. 그러나 이 점에 관해서도 포수인 우다가와는 '그런 경우에는 내야수 모두가 베이스를 손가락으로 지시하는 제스처를 취하니까 전혀 문제없다' 고 말했다. 이시이와 우다가와 배터리가 불펜에 들어가 투구연습을 시작했다. 나리타 고교와의 연습 게임 이후 약 반 년 만에 보는 이시이 유야의 생생한 투구. 휘이익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공이 우다가와의 미트를 파고든다. "이야! 155 킬로미터는 되겠는걸." 일본인 선수 가운데 155 킬로미터를 넘는 좌완투수는 일찍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아직 새파란 열여덟살이다. 그때 미야자와 디렉터가 배트와 헬멧을 가져왔다. 그만 두시지요, 아무리 체력에 자신이 있기로서니 이건 프로에 지명받아 마땅한 투수의 공이라고요. 물론 배터 박스에 서보면 볼의 스피드와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쉽게 전할 수 있겠지만, 그거 맞았다간 큰일 나신다구요. 그런데 갑자기 미야자와가 헬멧을 내게 푹 씌우더니, 배트를 건네준다. "아아니.....제가요?" 깜빡 잊고 있었다. 귀찮은 일이나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시키고, 새콤달콤한 일만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을. 그러나 내심 기뻤다. 야구를 좋아하는 내게 이런 엄청난 파워를 지닌 투수의 공을 쳐보는 기회를 주다니. 이런 기회는 평생에 다시 얻기 힘들다. 마음을 정하고, 자세를 가다듬어 본다. 슈 - 욱! 아니, 지금 이 소리는 공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 '진동 소리를 내는 강속구' 라는 건 이런 공을 가리키는가. 그때 허둥지둥 불펜 안쪽으로 사라지는 미야자와의 모습이 보였다. 그럼 그렇지, 그런 사람이라니까. 드디어 타자 위치에 섰다. 겨드랑이 아래로 배트를 잡고 자세를 취한다. ".....!" 격렬한 통증이 느껴짐과 동시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천장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 같더니 '오토, 괜찮아?' 하며 달려오는 미야자와의 모습. 헬멧은 완전히 두 조각이 나 있었다. .....이런 상황이 벌어져 있다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될 정도로 엄청난 공이라는 얘기다. 별 볼 일 없는 청룡열차를 타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스릴을 맛볼 수 있었다. 이런 공이 낮게 깔려 들어오면, 그렇게 쉽사리 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시이에게 물었다. "모레 하는 드래프트에 지명될 것 같아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제일 좋아하는 구단은?" "요코하마 베이스터즈예요." 그리고 이틀 뒤, 이시이 유야의 꿈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졸업 후 지역사회의 팀에서 실력을 더 키워, 다시 한 번 프로 입단을 노려보겠다는 이시이. 드래프트 회의의 팬으로서, 이시이의 팬으로서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구원이와의 특별한 만남 가을도 깊어가던 어느 날 TBS 로부터 팩스가 한 장 날아들었다. 그것은 한국의 어느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보내온 팩스를 다시 내게 보내준 것이었다. 그들은 과거에 두 차례 어느 소년에 대해 방송했다고 한다. 그 소년은 나와 마찬가지로 선천적으로 손발이 없고, 현재는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초등학교 3 학년 남자아이였다. 부모는 행방불명이어서 어느 신부가 부모 대신 양육하고 있다고 했다. 이름은 이구원. 한국에서도 출판된 "오체 불만족" 을 읽고 나서 그 소년과 내가 대면하는 다큐멘터리를 제3 탄으로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유의 이야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장애인이므로 장애인끼리 만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내가 만나는 어떤 사람은 자신이 장애인에 대한 이해심이 있음을 과시하고 싶은지, 내 앞에서 전혀 알지도 못하는 장애인 얘기만 하는 경우도 있다. 미안하지만 그런 안면 없는 사람에게 나는 흥미가 없다. 차라리 여배우 마츠시마 나나코 이야기라도 해 주는 게 훨씬 좋을 것 같다. 어쨌든 세상엔 장애인이라는 한 묶음으로 모두를 솎아 버리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이번 한국측의 취재 의뢰 또한 그런 측면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평소의 나였더라면 그 자리에서 정중히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우리가 그들을 취재할 수 있는지를 검토해 봤다. 나는 곧 오타 프로듀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오타 프로듀서님? 이번 구원이 건 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 그쪽 의뢰에는 그다지 마음이 내키진 않지만, 우리 쪽에서 카메라팀을 내보내 그 이구원이란 소년의 모습을 찍어 내보내면 어떨까요? '이웃나라 한국의 배리어프리 사정' 이란 주제로요." "아니, 사실은 나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거든, 하지만 오토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물론 그랬을지도 모르지만요. 하지만 우리 쪽에서도 취재할 수 있다면 그런 방법도 괜찮을 것 같더라구요." "이야, 오토! 프로듀서 뺨치는 걸!" 칭찬받은 건지, 한방 맞은 건지 묘했다. 우선 일본에 온 그들 스태프와 우리가 함께 만나 업무 협의를 하기로 했다. (뉴스의 숲)종료 후 TBS 3 층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들이 세 명, 우리가 나를 포함해 세 명. 통역을 사이에 두고 각자 소개부터 시작했다. 그쪽에서 온 디렉터 한 분이 인사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 생각에 방송제작도 중요하지만, 우선적으로 우리 구원이가 오토다케 씨를 만나는 것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말이 좀 의아하게 들렸다. 나는 솔직히 나와 생김새가 비슷하다고 해서 특별한 관심을 갖지는 않는다. 그리고 굳이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도 없다. 아무래도 취재인과 피취재인라는 입장에서 대면해야 되지 않을까. 그 이상을 전제로 삼는다면 서로에게 부담이 될 뿐이다. 고교 괴물투수 이시이처럼 매력적인 인간이 어쩌다 장애를 갖고 있다든가, 마음에 드는 상대가 어쩌다 휠체어를 타고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단지 똑같은 장애가 있으므로 친구가 되자는 식의 주장은 솔직히 나로선 받아들이기 어렵다. 회의가 진행되면서 그는 이런 말도 했다. "혹시 오토다케 씨께서 구원이에게 뭔가를 말해 줄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그와 나 사이에는 약간의 인식차가 있는 듯 느껴졌다. 그래서 내 의견을 명료하게 밝혀 두고 싶었다. "저는 단지 구원이가 저와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후배' 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아울러 서로간에 자라난 환경이나 성격이 다를 텐데, 딱히 뭐라고 충고하기도 어렵지요. 다만 구원이가 하는 질문에 대해 '나의 경우는 이랬다' 라고 말해 줄 수는 있겠지요." 그에게는 나의 대답이 다소 예상밖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조금 더 설명을 보탰다. "아까 저와 구원이가 만나는 것이 참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지요. 하지만 어떤 면에서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취재인과 피취재인으로 만나는 것을 전제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내가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 우리 부모님은 매스컴에 일절 나가지 않으신다. 나도 우리 집안의 개인적 영역에는 누구도 침입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래서 단지 어떤 부분이 취재 가능하고 어떤 부분이 불가능한지를 사전에 확인시켜 두고 싶었을 뿐이다. 이런저런 논의 끝에 구원이에 대한 취재, 그리고 나에 대한 취재가 시작되었다. 사회 속에서 어우러져 살고 싶어요 다행인 점은 구원이가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소년이라는 사실이었다. 한복 차림의 구원이는 정말 열심히 연습했을 일본어로 자기를 소개했다. "하지메 마시테. 와타시와 이구언데쓰.(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이구원입니다.)" 긴장한 탓일까? 처음에는 눈도 잘 맞추지 못하고 목소리도 작았다. 그러나 차츰 익숙해지자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 특기란 다름아닌 '스포츠' 였다. 나에게 손과 발이 없다고 인식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오해다. 팔꿈치까지밖에 없는 팔과, 무릎까지도 미치지 않는 짧은 다리가 약간씩이나마 붙어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짧은 팔다리는 써서, 내 힘으로 걷고 글을 쓰고 식사를 하는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행동이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그러나 구원이에게는 정말로 팔다리가 없다. 팔은 어깨부터 전혀 없어 사물을 잡을 수조차 없다. 다리도 허리 아래로 전혀 붙어 있지 않아 자기 힘으로 걷기는커녕, 기댈 곳이 없는 상태에서 바닥에 앉는 것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다. 즉 그는 휠체어에 의존하여 앉든가, 뒹굴든지 해야 되는 것이다. 똑같이 '손발이 없다' 해도 상황이 너무나 다르다. 그런데 이 소년이 운동을 잘한다고 한다. 반신반의했던 우리는 순식간에 한국이 자랑하는 '스포츠 소년' 에게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해야만 했다. 우선 축구. 해봤자 단지 공을 데굴데굴 굴리는 정도겠지 했는데, 구원이는 골대 범위를 정하라고 했다. 공은 그를 위해 특수 천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는 공을 입에 물더니 자신의 몸을 뒹굴뒹굴 고속으로 회전시켰다. 그러다 그 반동을 이용하여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공을 던진다. 탄력이 붙은 그의 '슛!' 은 상상도 못한 스피드로 내 옆을 스쳐지나갔다. 다음으로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농구. 중학교 시절 내가 농구부였다는 말을 듣고, 나와 승부를 겨루어 보자고 한다. 자유로이 설치 가능한 미니 골대를 어른 바짓가랑이 정도의 높이에 설치했다. 그는 축구할 때와 같은 요령으로 공을 입에 물더니, 이번엔 스피드에 중점을 두지 않고, 컨트롤을 중시하며 공을 던졌다. 입으로 던질 때의 타이밍을 바꿈으로써 각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휘익 떠오른 공은 멋진 포물선을 그리며 링을 통과한다. 같은 장소에서 나도 도전. 링에 걸려 결국 10 발 중에 두세 번밖에 성공시키지 못하는 나를 비웃듯, 구원이의 슛은 쑥쑥 잘도 들어간다. 그 명중률에는 혀는 내두를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의 강렬한 '인사' 를 받은 우리들은 도쿄 거리를 안내하기로 했다. 중학교에서 야구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 회사에서 바쁘게 오가며 일하는 사람들, 창밖으로 풍경이 서서히 옮겨가는 전철. 대개 수도원 밖으로 나오는 일없이 생활하는 구원이에게는 낯선 것들뿐이다. 그 초롱초롱한 눈빛에다 몸을 살짝살짝 움직이며 흥분하는 모습은 그가 얼마나 천진난만한 아이인가를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 공존하는 일종의 '어른스러운' 사고방식, 곧 강렬한 자아가 차츰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라주쿠 스가모에서의 일이었다. 가시 뽑아주는 지장보살로 이름난 고간지라는 절. 그 경내에 연기가 폴폴 피어나는 장소가 있다. 아픈 곳이나 머리, 지금보다 좋아지기를 바라는 신체 부위에 연기를 쐬는 그런 장소이다. 구원이에게 그걸 설명하고 어디에 연기를 쐬고 싶은가를 물으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일본의 문화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기독교인이므로 그런 것은 믿지 않아요. 그렇다고 흉내만 내는 것도 싫구요. 혹시 한다면 제대로 알고 나서 하고 싶어요." 통역하는 사람이 미안한 듯 옮겨주는 그의 대답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아홉 살짜리의 말이 아니다. 수도원에서 자라며 신부님을 부모 대신 삼고 있는 구원이의 꿈은 훌륭한 신부가 되는 것. 그렇긴 하지만 아직 호기심이 왕성한 초등학교 3 학년. 시험 삼아라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가 강한 자아를 갖고 있다고 느꼈다. 인터뷰를 하면서 구원이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구원이는 팔다리가 없어서 좋다고 생각한 적이 있니?" 약간 짓궂은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사람은 팔과 다리를 사용해서 죄를 범해요. 적어도 전 그런 것을 할 수 없으니까 좋다고 생각해요." 이것도 기독교인으로서의 사고방식일까. 남겨진 짧은 팔다리로 얼마나 나쁜 짓을 하겠는가, 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발상이다. 겨우 아홉 살이지만 이미 확립되어 가는 그의 신념을 접하고, 나는 많은 생각에 휩싸였다. 이것은 타고난 것인가, 종교에 의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 같은 몸으로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받은 기구한 운명이 그렇게 만든 것인가. 그 답은 아무도 모른다. 그 자신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답이 세 번째가 아니기를 빌었다. 물론 구원이 같은 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강인함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강인함 대신에 '어린이다움' 을 빼앗겨 버린다면 그건 자연스럽지 않다. 때때로 천진난만하게 웃음짓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의미없는 어른들식의 사고에 휘말려가는 내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와의 긴 인터뷰 장면을 찍기로 했다. 지금의 생활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의 생활에 대해서 구원이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아홉 살 소년에게 물어볼 만한 질문이 아닐지도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주고받은 이야기가 있으니까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 손발이 없는 두 사람이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구원이는 최근 학교에 가게 되었다지?" 1 주일에 한두 차례, 장애아 학교에 다니게 된 그에게 생활의 변화를 물어보았다. 그러나 학교에는 구원이와 같은 장애를 가진 아이가 없어, 선생님과 맨투맨 교육이란다. 그래서 수도원내에서 이루어지던 방문 교육과 큰 차이가 없다고. "그럼 건강하게 맘껏 뛰노는 애들이 다니는 학교에 가고 싶니?"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놀고 있을 때 나 혼자만 휠체어 타고 있을 모습이 생각나서, 별로 즐겁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친구 없이 생활하고 있으므로 학교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의 대답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그에겐 어떤 상황이 될지 미리 보이는 것이다. "구원이는 커나가면서 뭔가 불안한 게 없니?" "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예를 들면, 지금은 목욕을 하거나 화장실을 갈 때 누가 거들어 주잖아. 그런데 앞으로 크면 그런 것이 점점 부끄럽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구원이의 보호자 격으로 이번 취재에 동행한 수도원의 여자분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인터뷰하는 방을 나가 버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물론 어른이 되면 그렇게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지금은 내 힘으로 할 수 있도록 연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구원이는 한마디 한마디 말을 골라가면서,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요새는 1 주일에 몇 차례 학교에 가기도 하고, 이번처럼 취재가 있으면, 수도원 밖으로 나오는 기회가 많아지잖니. 그 때문에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참 힘들어!' 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어른이 돼 가지고요. 제가 외출해야 할 때 역시 힘들 거라고 생각해요. 거기에다 전 원래가 겁을 잘 먹거든요. 그래서....." "그럼, 앞으로도 계속 구원이는 수도원 안에서 보호를 받으며 살고 싶니? 그렇지 않으면 힘들어도 차츰 밖으로 나가 '사회에서' 살고 싶니?" "어른이 되면 수도원 안에선 살 수 없다고 생각해요. 무섭고 어렵다고는 생각하지만,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전해 보고 싶어요." 통역을 통한 대답이었기 때문에 사용한 언어가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내용만은 그가 진정으로 대답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자립' 이라고 하면, 타인의 힘을 빌리지 않고 혼자서 생활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타임의 힘을 빌려서라도 자신의 의사결정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충분히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터뷰 후 마츠다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정말 훌륭한 인터뷰였어. 장애가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파고들기 어려웠을 거야. 아무래도 도저히 물어보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까 말야. 잠깐 여자분을 눈물짓게 했지만, 그 정도 묻지 않으면 그의 내면을 드러낼 수가 없지." 물론 인터뷰를 하면서 내 가슴도 매우 쓰라렸다. 내가 어렸을 적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때때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만족했다. 최후까지 정에 치우치지 않고, 인터뷰어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가 있었다. 이지메로 괴로워하는 아이들과의 좌담회에서 마츠바라 캐스터의 냉혹한 질문에 그저 허둥지둥만 하고 있던 나. 그 후 8 개월 동안에 조금이나마 성장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구원이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나 아닐까, 하는 묘한 죄책감이 남아 있는 건 무슨 까닭일까..... @FF @fc 13 장 13. 바람부는 오키나와의 바닷속을 누비다 다이빙 라이선스를 써 먹을 찬스! "오토, 오키나와에 가보고 싶지 않아?" "그러고 싶죠. 아직 가본 적이 없으니까." "틀림없이 다이빙 면허는 갖고 있는 거지?" "라이선스 말입니까? 올해 2 월에 땄죠." "흐음, 그렇단 말이지." '후지와라 편집장의 수상쩍은 웃음과 함께 그 기획은 시작되었다. 2000 년 오키나와에서 정상회담이 열리기로 결정되어, (뉴스의 숲)에서도 오키나와에 특별 스튜디오를 설치하여 1 월 방송을 거기서 진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내용도 오키나와에 관한 뉴스가 중심이다. 그 중의 한 편으로서 오토다케 리포트 '오키나와의 해저 유적' 이 떠올랐다. 오키나와 현 요나구니 섬. 일본의 가장 서쪽에 위치하여 타이완과도 아주 가까운 이 섬의 해저에서 동서 250 미터, 남북으로 100 미터나 되는 거대한 바위가 발견되었다. 그 바위 위에는 계단 비슷한 것이 세로로 나타나 있어서, 일찍부터 그것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고대인들이 만든 해저유물인지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었다. 그 거대한 바위를 다이빙 라이선스를 가진 내가 해저에서 리포트를 한다는 기획이었다. 나는 수영을 하지 못한다. 잠수복 등 다이빙에 필요한 도구를 장착하는 데도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즉 나를 데리고 가서 다이빙을 시키려면, 여러 사람이 고생해야 한다. 그렇게 하느니 라이선스를 가진 정상인에게 리포트를 시키는 편이 훨씬 진행도 수월하고 비용도 덜 들어간다. 그럼에도 오토다케란 필터를 써준다는 점에 대해 나는 깊이 감사했다. 난부, 마츠다, 미야자와. 아무도 다이빙 라이선스를 갖고 있지 않았다. 디렉터 본인이 잠수할 필요는 없지만, 역시 다이빙에 관한 지식이 없으면, 이번 디렉터로는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조금수가 참여하기로 했다. 그녀는 '천연모과' 라는 별명으로 스태프들에게서 사랑받는 젊은 여성 디렉터. 나의 대학 선배이기도 하다. 취미로 휴가중에도 다이빙을 즐긴다는 그녀가 이번 기획을 담당해 주기로 했다. 그리하여 조금수와 함께 해저 유적의 자료 영상을 보았다. 아찔하다. 도대체 이건 뭘까. 지금까지 '신비로운' 이라는 말은 알고 있었어도, 그것을 실제로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해저에 갑자기 나타난 이 '신전' 은 신비하다는 말 이외의 어떤 형용사도 붙이기 어려웠다. 이것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11 월 30 일, 아침 4 시에 자명종이 울린다. 편수가 적은 요나구니 행 비행기를 갈아타지 위해서는 5 시 반까지 하네다 공항에 도착해야 한다. 졸린 눈을 비비면서, 아니 반쯤은 감긴 상태에서 준비를 한다. 푹 잠든 사이에 경유지 이시가키에 기착했다가, 드디어 요나구니에 도착했다. 비가 오고 있었다. 바람도 강했다. 잠수하기에는 가장 나쁜 상황이다. 바위를 첫 발견한 사람이기도 하고, 이번 취재를 도와주기로 한 아라타케 기하치로의 안내로 공항에서 숙소로 향했다. 그곳으로 속속 스태프들이 모여들었다. 바닷속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취재하기 때문에 이번엔 총인원이 열다섯 명 정도 되는 대부대. 우선 나하에 있는 'NAG' 라는 회사의 스태프들이 수중에서의 촬영을 담당한다. 그리고 아라타케가 경영하는 다이빙 숍의 스태프들이 촬영 전반에 걸쳐, 그릭 특히 내가 잠수할 때 지원해 주는 역할을 한다. 거기에 TBS 의 카메라팀과 난부, 조금수. 그리고 잊어선 안되는 사람, 이번 리포트의 파트너로 일해 줄 다이빙 지도원 아카보시 요타. 그는 아라타케가 이번 취재를 위해서 일부러 오사카에서 불러들였다는 전문가이다. 나는 다이빙 라이선스를 갖고 있지만, 앞서도 말한 것처럼 기구의 장착조차도 도움이 필요한데다, 내 힘으로 수영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지도원을 포함한 세 명 이상이 같이 잠수해야만 한다. 그것이 조건이었다. 그 중요한 파트너, 즉 나의 목숨을 쥔 사람이 바로 이 아카보시인 것이다. 나와 그다지 나이 차가 없어 보이는 아카보시. 갈색으로 물들인 머리에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같은 나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러나 다이빙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나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이빙을 너무나 좋아해 직업을 맡기기로 결심할 수 있었다. 수영조차 하지 못하는 인간이 바닷속으로 십 수 미터나 내려가는 것이다. 이때 상대를 신뢰하지 못한다면, 무서워서 물에 들어가기조차 힘들 것이다. 아카보시는 그런 점에서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여겨졌다. 아카보시와 나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이 '귓속 바람 빼기'. 그것은 코를 쥔 상태에서 숨을 내뱉어 귓속의 공기를 뽑아내는 것을 말하는데, 체내의 기압과 체외의 수압과의 차이를 조절하는 것이다. 이걸 제대로 하지 않으면 머리가 아프거나 고막이 파열될 위험이 있다. 이건 다이빙의 기본 중의 기본이며, 가장 중요한 동작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코를 쥘 손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카보시의 손이 내 코를 쥐고 바람 빼기의 조수 역할을 해줘야 한다. "타이밍을 어떻게 할까요?" "우선 자주 제 쪽을 봐주실 수 있습니까? 그래서 바람 빼기가 필요한 때에는 머리를 옆으로 크게 흔들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코를 쥐어 주세요." "그랬는데도 안 되면?" "다시 머리를 옆으로 흔들고, 그럼 다시 한 번 부탁합니다." "오케이, 이해했습니다!" 물 속에서는 말을 할 수 없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그 대신 손을 신호를 보내는데, 나는 하지 못한다. 그래서 머리 위쪽을 중심으로 한 '오리지널 사인' 을 조심스럽게 협의해 둘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서로의 인식에 착오가 생기면, 곧바로 죽음을 직결될지도 모른다. 둘 다 진지했다. 계속 쏟아지는 비. 첫날을 스태프들끼리의 협의가 주된 목적이었고, 잠수할 예정은 없다. 그러나 오늘 비가 멈추지 않으면, 다음날의 좋은 컨디션을 기대하기 어렵다. 식당에 모여 텔레비전의 일기예보를 집중하여 청취한다. 이렇게 진지하게 일기예보를 보는 것은 초등학교 소풍 전날 밤 이후 처음이 아닐까. "내일은 오키니와 지방 이외에는 전국적으로 맑겠....." 기분 좋게 해님 마크가 늘어선 지도 한 귀퉁이에 얄궂게 걸려 있는 우산 마크. 야속하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일기예보다. 캐스터에게 죄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그가 원망스럽게까지 느껴진다. "테루테루보즈(햇빛 나기를 기원하며 추녀 끝에 매달아두는 종이로 만든 인형) 라도 만들까!" "이 티슈 상자가 텅 빌 때까지 만들어 버릴까?" 그런 농담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스태프들의 소원은 단 하나, 태양이었다. 여자친구와의 이별, 그리고 추억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눈을 뜨자 창으로 쏟아져 들어온 따뜻한 햇살이 내 뺨을 비추고..... 이건 소원일 뿐 현실은 변화가 없었다. 추적추적 계속 쏟아지는 집요한 비.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바닷속으로 잠수해 버리면, 비는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문제는 바람이다. 바람이 세면 바다가 크게 물결치는 것이다. NAG 의 스태프, 즉 프로 다이버들이 먼저 '적정시찰' 을 나갔다. 이윽고 점심 무렵. 그들이 돌아왔다. "생각했던 대로, 약간 셉니다." 오후가 되면 바람이 좀 잠잠해질지도 모르겠네요." "기대해 보죠." 바람의 방향이라도 바뀌면 바다의 상황도 뒤바뀐다. 점심을 먹으면서 스태프 전원이 일기예보에 뜨거운 시선을 보낸다. 지금까지는 일기예보의 풍향이나 파도의 높이 따위에 주목한 적이 없었지만, 이날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화면에 눈을 붙박았다. 변화는 있었다. "잠깐, 풍향이 약간 바뀐 것 아닌가?" "기대를 좀 해봐도 될 것 같은데." "오후에 한 번 더 가볼까?" 점심식사 후 준비를 마친다. 나의 자그마한 몸에 맞춰 아라타케가 특별히 만들어준 잠수복을 입는다.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조금 타이트하게 만들었다. 몸에 꽉 죄어드는 느낌에 마음까지도 죄어온다. 함께 잠수할 아카보시도 최종 확인을 마쳤다. 기분이 고조된다. 항구까지는 차로 몇 분 거리. 크게 요동치는 배에 올라탔다. 열다섯 명 가까이 타는데다 다이빙용 기구와 수중 촬영을 위한 기자재를 식기 위해서는 상당히 큰 배여야 했다. 그런데 배가 크면 클수록 조종이 어려워진다. 조종이 가능한 사람은 아라타케뿐이었다. 턱수염을 기른 얼굴, 긴 머리를 질끈 묶고 당차게 스태프들에게 지시를 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바다의 사나이' 이 믿음직한 선장의 지도 아래, 어느덧 우리는 해저 유적이 있는 지점을 향해 나아간다. 항구를 떠나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배가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파도가 거칠다. 배가 마치 엄청나게 큰 판자 조각같이 느껴지고, 그 판자 위에서 우리는 서핑을 하는 것 같았다. 순시간에 배멀미가 찾아왔다. "오토, 얼굴이 창백해요. 괜찮아요?" 조금수 디렉터가 걱정스럽게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예, 괜찮을 거예요." "그렇지만 굉장히 힘들어 보여요. 저기여, 난부 선배!" 돌아보니 난부 디렉터 또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비닐 봉투를 펼쳐들고 있었다. 그때였다. "회항!" 아라타케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는 조종실에서 우리가 있는 곳으로 와서는 사정을 설명했다. 생각보다 파도가 거칠어서 잠수하기 어렵다는 것. 선장의 판단이다.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육지로 돌아왔는데도 여전히 속이 울렁거린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은 가셨지만, 머릿속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느낌은 오래갔다. 숙소에 돌아와 이불을 덮고, 같이 배멀미로 고생한 난부 디렉터와 함께 누웠다. "오토, 힘들었지? 역시 오늘은 무리였나 봐." "그랬어요. 상상한 것 이상이었어요." 나는 다이빙 같은 거 해본 것이 없는데, 이 배로 이동하는 건 너무 힘들지 않나 싶어. 너무 괴로워." "괴로워요. 뭐랄까, 그....." "뭐? 어쨌다고?" 서로 각자 이불을 뒤집어쓴 채 얼굴은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저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라이선스를 땄다고 했잖아요. 실은 예전에 사귀던 여자친구하고 둘이서 함께 땄거든요. 결국 꼭 2 년 사귀었는데, 역시 그것이 가장 큰 추억이었는지..... 괜히 이런저런 생각이 나서요." "그건 심각하지. 멀미 이상으로." "스스로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내일, 괜찮겠어?" "당연하죠. 그런 이유로 계획을 취소한다면, 천벌 받아 마땅하죠. 그보다도 문제는 날씨죠. 괜찮지 않다면....." 3 박 4 일의 취재. 다이빙을 한 당일은 비행기를 타선 안 된다는 원칙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남은 날은 어제 하루. 해가 뜨지 않아도 좋다. 그저 바람이 잠잠해 주기만 해도. 바닷속에 거대한 신전이 있다 하느님은 오키나와의 하늘을 먹구름으로 도배를 해버리신 걸까. 다음날도 날씨는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바람의 상태는 나쁘지 않다. 그렇지만 오후부터는 다시 상태가 뒤바뀔 것이라 한다. 아침 일찍 나가는 수밖에 없다. 나는 평소 아침식사를 하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멀미의 고통을 덜기 위해 위에 음식물을 구겨 넣는다. 그렇지만 여전히 감기는 눈을 다 뜨지 못한 채, 배는 어제에 이어 두 번째 항해에 나섰다. "어째, 어제보다 좀 심해진 느낌이 들지 않나?" "파도가 상당히 높은데요." 그때였다. 뺨을 찰싹 맞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입만 가득 짭짤한 맛! 갑판에 앉아 있던 나에게 높은 파도가 덮쳐 왔던 것이다. 일본식 씨름인 스모를 하는 선수의 기분을 맛봤다. 서로 맞붙기 전 짝짝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때리는 스모 선수들, 그들의 모습이 떠오르자 자연히 나도 기운이 돋는 느낌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졸린 기운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제 파도 덕분에 정신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다시금 멀미가 찾아든다. 그러나 오늘은 마지막 기회. 멀미에 시달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바람을 쐴 수 있도록 자리를 옮기고, 되도록 멀리 바라본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가장 즐거웠던 일을 떠올린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강사에게 배운 '배멀미를 피하는 방법'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참을 만했다. 드디어 유적이 있는 지점에 도착했다. 짙푸른 바다. 이 바다 아래 그 신전이 잠자고 있다. 떨림이 멈추지 않는 것은 추위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한시라도 빨리 뛰어들고 싶었다. 그것은 멀미를 참는 일이 한계에 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먼저 특수한 수중 카메라를 든 촬영진이 뛰어든다. 이어서 새빨간 잠수복이 잘 어울리는 아카보시. 그리고 내 차례. 풍덩 뛰어들자 아카보시가 내 산소통을 잡고 천천히 천천히 잠수해 간다. 수면에 가까운 곳은 흐름이 급해 몸이 떠밀러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흐름도 깊이 내려감에 따라 느끼지 못하게 된다. 전 세계 다이버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오키나와의 바다. 그 중에서도 이 요나구니는 해머헤드(귀상어. 식인상어의 일종으로 태평양, 인도양에 서식한다)라 불리우는 상어떼로 유명하다. 바다도 한없이 투명하다. 비바람 때문에 최상의 상태는 아니지만 멀리까지 내다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한쪽 면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산호와 난생 처음 보는 진기한 물고기들. 그러나 이번 목적은 그것들이 아니다 아카보시가 내 쪽을 향해 자기 코를 쥐고 'OK ?' 라는 사인을 보낸다. 내가 고개를 크게 가로로 젓자 내 코를 쥐어준다. 푸시싯. 코로 숨은 내뱉듯 하자 출구를 봉쇄당해 나갈 길을 잃어버린 공기는 귀를 새로운 출구 삼아 밖으로 나가려 한다. 무사히 바람 빼기에 성공하고 다시금 천천히 잠수해 들어간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신전이다. 얼마쯤 더 나아가자 갑자기 시야가 가로막힌다. 눈앞에 커다란 벽이 세워져 있었다. 어째서 여기에 있을까. 여기는 바닷속인데. 바로 이것이 해저 유적이었다. 좀더 다가간다. 문득 밑을 보니 거기에는 자료화면으로 보았던 계단 모습 부분이 있었다. 천천히 하강해 그 계단에 내려선다. 나에겐 전혀 쓸모가 없지만, 정상인이라면 오르기 쉬울 정도의 계단. 그것이 같은 간격으로 이어져 있다. 놀랄 만한 사실은 그 각도가 계산이라도 한 것처럼 거의 직각이다. 이것이 자연의 힘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의 힘이 만들어 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아카보시와 얼굴을 마주본다. 물안경 너머로 눈이 마주쳐 빙긋 미소를 교환한다. 한 가지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다는 기쁨이 우리를 에워싼다. 이번에는 멀리서 개략적인 모습을 담기 위해 유적에서 떨어져 나온다. 몇 미터를 헤엄쳐 뒤돌아본다. 거기에는 우뚝 선 신전의 모습이 있었다. 보글보글 보글보글 아카보시가 놀라서 돌아볼 정도로 내 입에서 많은 양의 거품이 나왔다. 물 속에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우와, 굉장하다!' 며 감탄사를 연발했던 것이다. 건조물이라고 단언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그 정도로 훌륭한 품새였다. 이것을 두고 자연히 형성된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들이 실제로 와서 보았으면 했다. 분명히 이면에 인간의 존재가 느껴진다. 과거를 무대로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머릿속에 아무래도 인간의 모습이 떠오르고 마는 것이다. 그날 저녁 아라타케의 집에 모여, 오전에 수중 촬영한 화면을 보았다. "앗, 거북이다!" "예, 우연히 만났어요." 배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금수와 난부 디렉터는 바닷속에서 무얼 찍었는지 몰랐다. 지금에야 처음 보는 것이다. "우와, 상당히 잘 찍었네요." "참 좋네요. 나도 잠수하고 싶었는데." 모두 한마디씩 거들며 보고 있는데, 아라타케가 '사실은.....' 하며 말을 꺼냈다. "오토다케 씨에게 모두가 함께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요나구니의 아름다운 바다가 그려진 커다란 포스터였다. 거기에 이번 스태프 전원이 글을 써넣은 것이 보였다. - 오토씨의 노력에는 언제나 머리가 숙여집니다. 조금수. - 자네가 목격자야! 난부 마사히로. 아라타케와 아카보시, 그 밖의 스태프들도 마음이 담긴 메시지를 적어놓았다. 정말, 굉장해요. 이렇게 감동적인 장면..... 정말 감동했어요. 이렇게 해주셔서. 놀람과 기쁨과 따뜻함, 한번에 이런 기분을 모두 맛볼 수 있게 해준 이 포스터는 틀림없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을 거예요. 다음날 아침은 날씨가 좋았다. 누구야? 날씨가 이렇게 심술부리도록 평소 나쁜 짓 많이 한 사람이! 가슴에 짧게 손을 얹고 반성(?)했다. 그리고는 모두에게 살짝 감사의 인사를 했다. 하네다 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 속. 나는 비어 있는 옆자리를 기회삼아, 옆으로 길게 누웠다. 두 자리만으로도 내 몸은 다 들어가고도 여유가 있었다. 그것도 '다리가 없어서 참 좋다' 고 생각하는 몇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막 잠이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내 몸 위로 모포가 덮인다. 옆자리의 조금수 디렉터이리라. 겨우 2 시간이지만, 나는 사흘 만에 푹 잠들었다. 광란의 크리스마스 이브 "오토, 다음주 금요일로 올해 방송은 마지막인데 나올 수 있지?" "그럼요. 금요일이 며칠이죠?" "24 일." "예? 크리스마스 이브 아녜요?" "아, 그렇군." "저는 아직 학생인 거, 아시잖아요?" "아, 그랬는....." "부탁드립니다, 난부 선배님. 학생으로선 최후의 크리스마스인데." "알았어. 그럼, 방송 끝나고 바로 가자고!"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닌데....." 이리하여 크리스마스 이브에 일이 생겼다. 뭐 그렇다고 해서 화를 낼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별 볼 일 없긴 했지만. 그러나 난부는 그것을 메우고도 남을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한신 타이거즈의 노무라 감독과의 대담. (뉴스의 숲)일을 시작할 때 최초의 기획안으로 잡았던 것이다. 결국 보류된 채 방치되어 있다가 9 개월이 지난 지금, 드디어 실현되는 것이다. 나는 거의 광란 상태에 빠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2, 3일 후 내게 온 팩스를 보고, 나는 창백해졌다. 이름하여 '노무라 감독과 뒤돌아보는 1999 년'. 인터뷰 내용 항목이 줄지어 있는데, 그 중심은 야구가 아니라 '도카이무라 임계 사고' '줄 잇는 지방경찰들의 불상사' '축구 올림픽 출전 결정' '고갸르와 강그로' 등 1999 년도의 주요 사건에 대한 것들로 가득했다. 노무라 감독을 상대로 지난 1 년을 뒤돌아보는 기획으로 잡은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사정이 있었다. 마침내 구단으로부터 노무라 감독의 인터뷰 허가가 떨어졌지만, 수위로 올라섰던 초봄과는 달리 최하위로 끝난 지금 아무래도 뉴스적 가치는 떨어지고 말았다. 모처럼 얻은 노무라 감독과의 인터뷰를 어떻게 하면 최대한 활용할 수 있을까 생각한 끝에 나온 이른바 '고육지책' 인 것이다. 복잡했다. 가장 만나고 싶었던 인물인지라, 인터뷰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기뻤지만, 동시에 실례라는 생각도 들었다. 상대는 프로야구 감독이다. 그런 사람에게 올해의 주요 사건에 대해 코멘트를 시킨다니, 그건 번지수가 틀린 것이다. 아마 노무라 감독조차도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해야 좋을지 모를 것이다. 무엇보다 그런 인터뷰를 함으로써 노무라 감독의 나에 대한 평가가 형편없어질까 봐 걱정됐다. 이런 상황이라면 아마도 그렇게 될 가능성은 충분하리란 생각이었다. 나는 수화기를 들고 스태프 룸에 전화를 걸었다. "그래, 오토, 물론 기분은 잘 알아. 하지만 잘 생각해 보라구. 우리 방송을 주로 시청하는 사람들은 주부층이잖아. 거기다 대고 오토의 장기인 야구에 관해 장황하게 떠들어 봐, 아무도 못 알아들을 게 뻔하잖아." 확실히 그 말이 맞다. '드래프트 1 위를 잡아낼 수 있을까' '시오야, 하마나카는 주축 후보로서 잘 성장하고 있는가' '히로사와에게 등번호 31 을 준 참뜻은 어디에 있는가'. 물어 보고픈 것을 전부 다 늘어놓으면 시청자 가운데 90 퍼센트는 달아나 버릴 것이다. "만약 여기에 죽 적혀 있는 올해의 주요 사건과 야구를 연계시키는 질문이 가능하다면, 승낙하실 수 있습니까?" "물론, 물론. 그럼 자네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구." 그날부터 나는 있는 지혜 없는 지혜를 마구 짜내느라 열심히 머리를 굴렀다. 다소 억지라도 좋다. 어떻게든 올해의 상징적인 사건과, 야구 또는 노무라 감독과 연결되는 질문을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마침내 당일. 나는 그다지 긴장하지 않는 편이지만, 노무라 감독이 지닌 분위기나 관록 때문에 그날은 나무막대기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그에게 압도되어 제대로 '나' 를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인터뷰는 시작되었다. - 닛산을 비롯해 많은 기업들이 대규모 기업 재구축을 단행하고 있는데, 감독이 이끄는 팀은 '노무라 재생공장' 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노무라식 인재 활용 비책을 한마디로 말씀하신다면? - 도카이무라 지방 경찰의 불상사 등은 프로 의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보는데, 노무라 감독이 생각하는 프로 의식이란? - 강그로나 통굽 샌들을 신은 여고생들이 거리를 활보합니다. 최근의 부모자식간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또 감독께선 실제로 어떤 아버지이신지? 되도록 많은 질문거리를 준비했다. 그러나 하나하나 질문은 던져 가면서 내 마음속에는 '뭔가 잘 안 풀리고 있다' 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질문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딱히 한신에 관한 것이 아니어도 좋다. 감독의 사고방식이나 철학을 물어 보면, 우리들 젊은 세대가 분명 귀담아 들을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끌어내야 하는데 과연 이런 질문들이 최상인 것일까? 입으로는 감독에게 계속 질문은 던지면서도 내심으로는 끊임없이 자문자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일이다. 인터뷰어로서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초엔 방송을 통해 노무라 감독을 만나게 되면 기쁘리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만나고 보니 그게 기쁨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노무라 감독이 '아니 뭐야, 이런 질문밖에 안 하는 거야?' 하고 생각하는 것만 같아 괴롭기만 했다. 오후 9시 가까이 되어 인터뷰가 끝났다. 노무라 감독과 가까이 지내는 스포츠 담당 디렉터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고 있었다. "이야아, 노무라 감독이 저렇게 말을 많이 하기는 드문 일인데! 스스로도 말한 것처럼 사람 낯을 가리거든. 그런데 오늘 굉장히 길게 이야기했잖아." 구원받는 느낌이었다. 제대로 소화에 내지 못한 채 일을 하고 게다가 그 결과까지 좋지 않으면..... 다행히 최악은 면했다는 안도감이 나를 감싼다. 하지만 만족스럽지는 않다. 언젠가 다시 한 번 승부를 겨루고 싶다. 그때야말로 내 마음속의 질문들을 제대로 풀어내며 인터뷰를 해보고 싶다. 그날을 위해 기술을 연마하고, 경험을 쌓아나가자. 12 월 24 일. 노무라 감독 인터뷰 방송이 끝났다. 크리스마스 이브이기도 한 그날, 거리는 연인들의 것이었다. 거기에 아카사카의 밤거리를 걷는 세 사나이의 모습. 마츠바라, 미야자와, 오토다케. "난부 디렉터 말야, 해도해도 너무해." "자기가 먼저 곧바로 가자고 해놓고는, 막상 때가 되니까 마누라 핑계 대고 쌩하니 도망이나 가고 말야." "하지만 속으로는 부러운 거죠?" "에이, 그런 말하지 말자고....." 먹었다. 마셨다. 울부짖었다. "이 세상 여자들은 도대체 눈이 있는 거야?" "이렇게 멋진 남자를 세 사람이나 내버려두고도 괜찮은 거야?" "게다가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잖아, 이브!" 이제 폐회식을 거행할까, 하고 누군가가 말했을 때, 시간은 깊고 깊어 새벽 3 시에 가까웠다. 비참한 모임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어쨌든 즐거웠다. 하지만 올해만으로 끝내야 하리라. 내년엔 기필코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맞으리라. @FF @fc 14 장 14. 나의 리포터 성적은 몇 점인가 이별을 위한 마음의 준비 니가타로 출장 중. 이제 그만 잘까 하며 불을 껐다. "난부 디렉터님. 저 말이에요, 3 월말까지만 하고 그만둘까 생각해요." "어?" 예상치 못한 나의 말에 난부는 다만 외마디 소리를 냈을 뿐이다. "역시 힘들었지?" "그런 뜻이 아니에요. 엄청 재미있었고, 더 계속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런데 왜?" "뭐랄까요, 역시 좀 느긋하게 살고 싶어요." "그럴 거야. 정말 바빴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마음속에 난부에게 말하지 않고 남겨둔 것이 있었다. 내가 (뉴스의 숲)리포터란 일을 받아들인 최대의 이유는 일종의 '증명' 이었다. 지금까지 휠체어를 탄 사람이 리포터를 맞아본 적이 없다. 그러나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느꼈다. 단지 그것이 무리라고 바라보는 고정관념 때문에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런데 그 기회가 나에게 주어졌다. 휠체어를 타도, 장애인이어도 리포터를 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계속해 왔지만, 나는 서서히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궁리를 해보아도 결국 다루는 내용은 역시 '배리어프리' 가 중심. 이것은 위험하다. 장애 따위는 관계가 없다고 증명하기 위해 도전했는데, 배리어프리만을 취급함으로써 도리어 거기에만 의미가 부여되고 만다. 장애인 리포터이기 때문에 배리어프리만을 다룬다. 장애인 리포터이기 때문에 배리어프리밖에 전할 수 없다..... 사람들에게 그런 생각을 주게 되면 당초의 목표를 당성하기는커녕, 오히려 마이너스 효과만 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다만 난부에게 말한 내용에 거짓은 없었다. 취재 활동, 그리고 많은 스태프들과 하나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나가다 보면, 무수히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무엇보다 그들과 헤어질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결단이 내려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몇 번씩이나 말을 삼켰다가, 그날에야 겨우 입밖으로 내뱉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좋아, 오토. 남은 3 월까지 최다한 노력해 보자구." "예. 다시 한 번 잘 부탁드립니다." 넘쳐흐르는 투지와 마음에 뻥 뚫린 구멍. 상반되는 움직임이 거기에 있었다. 2000 년 밀레니엄을 맞이하는 순간, 우리들은 따로따로 일하고 있었다. 구급병원 취재를 하는 마츠다, 새해 특집 방송을 위해 오키나와로 건너가 방송 준비하랴 취재하랴 정신없는 마츠바라와 난부. 가장 힘들게 일하는 신도 마사코 아나운서는 36 시간 동안 텔레비전 방송의 사회를 보고 있다. 나는 NHK 의 가요홍백전(매년 12 월31 일에 열리는 가요제 인기 가수들이 홍백으로 편을 갈라 솜씨를 겨룬다.) 심사위원에 위촉되어 무대 위에서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가장 비참한 사나이가 있었다. 미야자와 유스케. 그에게는 어렸을 적부터의 꿈이 있었다. "난 말야, 2000 년을 맞이하는 순간 무슨 일이 있어도 처자식과 함께 지내겠다는 꿈을 지니고 살아왔어."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독신이다.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그가 밀레니엄의 순간을 함께 맞이한 사람은, 며칠 전에 막 출소한 조유 후미히로라는 옴진리교의 전 간부였다. 옴진리교 담당인 미야자와는 그가 출소하고부터는 거의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계속 일해야 했다. 한겨울의 하늘 아래 꽁꽁 언 몸으로 요코하마 지부의 '망지기' 로서 일하는 모습은, 설사 연말연시가 아니라고 해도 동정의 여지가 있을 정도였다. 어쨌든 이리하여 그의 인생 설계대로라면 처자식과 함께 맞이하게 되었을 밀레니엄을 옴진리교 전 간부와 함께 맞이하게 된 것이다. 평소엔 나보다 한수 위인 낙천가이지만 이때만큼은 도저히 웃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저 허허로운 한숨을 날릴 뿐. 그러다 대체로 바쁜 일들이 마무리된 1 월 말, 그는 닷새간의 휴가를 얻었다. "오토, 나, 다음주부터 1 주일 정도 휴가를 가려고 하는데, 혹시 함께 가지 않을래?" "좋고말고요. 어디로 갈까요? 따라서 갈 테니까, 알아서 일정 잡아 보세요." "좋아! 그럼, 이탈리아로 갈까? 축구도 보고, 맛있는 음식도 잔뜩 먹고." "듣기만 해도 신나는데요. 난 유럽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거든요." 한껏 분위기가 달아오른 우리 두 사람이 간 곳은 웬일인지 북풍한설 몰아치는 뉴욕이었다. 춥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이드북엔 이렇게 씌어 있었다. "그다지 눈이 쌓이는 일은 없다." 그런데 20 센티미터 가까운 폭설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10 년 만이라고 한다. 여행비용을 완전히 허비해 버려도 좋으니까 그저 방안에만 있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밖은 추웠다. 아니 춥다기보다 아팠다. 살갗이 에였다. 기후만을 생각하면 지금까지의 여행 중에서 최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최고의 여행이기도 했다. 이번엔 일이 아니다. 휴가 중. 전적으로 사적인 시간이었다. 누구와 무엇을 하건 아무 탈없는 시간에 미야자와는 나를 초대해 주었다. 옷 갈아입고, 씻고, 화장실에서 일 보기. 이 모두를 돌봐 주지 않으면 안 되는 나를 초대해 주었다. 그것은 일로서 지겹게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서 만난다는 증거이다. (뉴스의 숲)이라는 방송에서 일을 하게 된 처음에만 해도 이렇게까지 인간관계를 구축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마침내 일로 만난 동료가 '벗' 이 되었음을 재확인한 여행으로서 나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1 주일이었다. 기쁨 뒤에는 언제나 슬픔이 기다리고 있다. 세상이란 그런 것이다. 귀국 보고를 하려고 스태프 룸에 전화를 하니 마츠다가 받는다. "아, 오토. 뉴욕이 되게 추웠다던데." "어휴, 말도 마세요. 추운 정도가 아니라....." 한바탕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마친 뒤, 우리의 주제는 일로 옮겨갔다. "그런데, 다음 기획은 어떻게 하죠? 앞서 말했던 것들은 다 보류하기로 했으니까요." "그런데 말야, 오토. .....내가 다른 곳으로 발령받았어. 사회부로." 무선 전화기를 들고 스토브 앞으로 가 몸을 녹이면서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체온이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인사 이동이라뇨? (숲)으로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그것도 사회부에서." "10 개월도 안 됐지, 이번엔 문부성(일본의 행정부 가운데 교육 문제를 다루는 부처) 클럽이야." 이제 두 달만 있으면 나도 그만둘 몸이다. 어쩌면 마츠다가 가버리는 시기와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내가 마칠 때까지는 끝까지 함께 하고 싶었다. 보름달같이 충만한 상태로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2 월의 마지막 날, 송별식이 벌어졌다. 지금까지 스포츠 코너를 담당하며 프로그램에 활력을 안겨줬던 기무라 이쿠미 아나운서도 (익스프레서)라는 아침 방송의 메인 캐스터로 발탁되어 (뉴스의 숲)을 졸업하게 되었다. 미야자와와 셋이서 휴일에 자주 어울렸던 기무라 아나운서, 오비히로 삼남매의 이야기를 비롯한 수많은 장면을 함께 누볐던 마츠다. 이 두 사람을 한꺼번에 보내는 내 마음은 대단히 쓰라렸다. 이제 한 달만 지나면 나도 저들과 같아지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두 사람을 보내기가 더더욱 괴로워졌다. 나는 아직도 아마추어인가? "오토, 아무래도 3 월까지밖에 못하겠지?" 마츠바라가 슬픈 눈빛을 띠고 내게 다가왔다. "에. 여러 가지로 생각한 결과....." "그런가..... 좋아! 그럼 최후의 한 편은 나하고 만들지!" 마츠바라 메인 캐스터는 아나운서가 아니라 원래는 디렉터였다고 앞서 쓴 바 있다. 그가 직접 디렉터를 하고 싶다고 나에게 말했다. "오토는 뭘 하고 싶지? 나는 오토다케가 인터뷰하는 걸 만들어 보고 싶은데. 속이 깊은 사람의 인터뷰..... 이런 사람의 얘기를 꼭 듣고 싶은데, 혹시 생각해 둔 사람 없어?" "갑작스럽게 그런 말씀을 들어서..... 조금만 시간을 주실래요?" "알았어. 자, 그럼 기다리겠네." 마지막은 내가 제일 해보고 싶던 것에 도전해 보고 싶다.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 그것은 스포츠 취재. 장애와는 전혀 관계없는 분야이고, 나아가 내가 가장 흥미를 느끼는 분야이기도 하다. 나는 작년 4 월부터 스포츠를 다뤄보고 싶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취재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다 장애가 있었던 요코하마 상공 고교의 이시이 투수 정도였다. 스포츠 담당 캐스터가 따로 존재하는 이상 내가 나설 자리는 없었다. 그런데 인터뷰를 중심으로 한 제작을 하자면 역시 드라마틱한 소재를 안고 있는 인물일 필요가 있다. 그 남자밖에 없다. 마츠바라 캐스터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에조노, 어떨까요? 쇼난 베르말레의." "그거 딱인데!" 마에조노 마사기요. 1996 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일본 국가대표 축구팀이 축구계의 황제 브라질을 격파한 시합. 온 일본이 열광했던 그 시합에서 그라운드를 누비는 멋진 드리블과 '앞으로! 앞으로!' 팀을 이끌었던 선수가, 바로 그였다. 그때의 멤버로는 나카타, 조, 가와구치 등 전전했는데 결과가 신통치 않아. 현재는 일본 대표선수에서도 탈락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지금 J2. 즉, 세계를 노리던 사나이가 일본의 2 부 리그에 속해 있다. 그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마츠바라 캐스터가 디렉터가 된다. 거기에는 뜻밖의 난점이 있었다. 6 시가 되면 화면에 얼굴을 내밀어야 하는 마츠바라에겐 오후의 취재는 불가능! 마에조노 선수가 소속된 쇼난 메르말레의 연습장은 가나가와 현 히라츠카 시. 게다가 연습은 저녁 때이다. 그래서 취재만큼은 다른 디렉터가 맡고, 내가 인터뷰한 자료화면 마츠바라가 편집하는 분업체제로 작품을 만들기로 했다. "이거 말야, 난 군기가 바짝 들었어. 오토한테 '마츠바라 별거 아니구나' 하는 말을 들으면 안 되잖아." "애인한테 처음으로 손수 만든 요리를 내놓는 그런 심정인가요?" "그런가?" 그러나 정작 군기가 바짝 든 것은 나도 마찬가지. 1 년 간 수업에 수업을 거듭해 온 인터뷰. 그 솜씨를 누구나 프로라고 인정하는 마츠바라 캐스터에게 평가받는 것이다. '뭐야, 이거. 1 년 동안이나 했으면서 겨우 이 정도?' 그런 평가를 받는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내가 성장했음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야 앞으로도 더욱 실력을 가다듬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겠는가. 취재 전날, 과거에 마에조노를 다뤘던 기사와 인터뷰가 게재된 잡지의 복사본이 팩스로 왔다. 모두 스무 매. 올림픽에서 한없는 영광을 맛본 마에조노, 베르디 가와사키로 이적한 뒤 부진에 빠져 고뇌하던 마에조노, 해외 이적의 길을 찾아 세계로 뛰쳐나간 마에조노. 그리고 활동무대를 찾지 못해 다시 돌아온 마에조노. 거기에는 다양한 마에조노 마사기요의 모습이 있었다. 그 모두에 눈을 돌리면 한 사나이의 이야기가 보였다. 보일 뿐만 아니라 함께 걷고 있다는 생각조차 일었다. 그래서 마에조노 마사기요의 '지금' 을 전하고 싶다. 자연히 그런 기분이 솟아났다. 쇼난 베르말레 연습장. 마에조노 선수는 생각보다 몸집이 작았다. 뜻밖이었던 것은 체격만이 아니었다. 눈초리, 표정, 분위기, 그 모두가 생각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야성미 넘치고 거친 분위기로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느낌을 분출하는 인상이 단번에 날아가 버릴 정도로, 내 앞에서 땀을 흘리던 마에조노 선수는 평온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직접 만나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미디어를 통해 얻고 있던 이미지를 생각하면 명백히 '변했다' 는 인상을 받았다. 연습 뒤 클럽하우스에서 마에조노 선수를 기다린다. 나는 인터뷰 내용을 머릿속에 정리하고 스포츠 선수들처럼 이미지 트레이닝을 행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목숨을 건 승부, 시합 전의 팽팽한 긴장감과 닮았는지도 모른다. 30 분 간 주어진 시간을 철저히 활용한다. 나와 상대가 이야기하는 비율은 1 대 9. 이것이 이상적인 인터뷰다. 짧은 말로 얼마나 상대방의 말을 많이 이끌어내는가. 그렇다고 무작정 짧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짧으면서도 상대와 시청자가 바짝 긴장할 수 있는 질문이어야 한다. 정해진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그날 저녁부터 나는 일종의 '공포' 에 사로 잡혀 지냈다. 취재한 화면을 본 마츠바라 캐스터가 어떤 평가를 내릴 것인가. 제 정신이 아니었다. 주말에 편집 작업을 하는 마츠바라 캐스터. 그 때문에 나의 두근거림은 닷새간이나 계속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방송 당일. 편집이 끝난 테이프를 본다. 나와 모니터를 번갈아 쳐다보는 마츠바라. 화면은 멋진 템포로 흘러가고 있었다. "어떤가?" "아, 아주 좋은데요. 볼 만한데요." "볼 만하다고?" "아, 아뇨, 아뇨! 그런 의미가 아니라 저런 볼품없는 인터뷰를 멋지게 이어주신 덕분에 볼 만하게 만들어졌단 뜻입니다!" "아, 그래. 다행이구만. 잠깐 쇼크 받았잖아!" 두 손을 가슴에 얹으며 짓궂게 익살 떠는 마츠바라. 괴로운 생각으로 지낸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마츠바라는 자신이 편집한 화면을 내가 어떻게 봐줄지, 엄청 신경 썼던 것이다. "그런데 인터뷰는 어땠습니까?" 우물쭈물 물어보았다. 1 년간의 노력에 대한 성적표를 여기서 받게 된다. "좋았어. 나는 오토의 인터뷰가 좋아. 그런데 자신은 어떻다고 생각해?" "글쎄요. 훅은 몇 차례 명중시켰지만, 한두 차례 확실하게 승부 지을 수 있는 어퍼컷이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어요." "응, 그렇지." "하지만 침착하게 해냈고 묻고 싶은 것을 전부 다물었으니까 100 점 만점까지야 안 되겠지만, 대체로 무난했다고 생각합니다." 거짓없는 솔직한 기분이었다. 마츠바라가 내 쪽을 돌아본다. "한 가지 말하자면 개중에는 정말 똑소리나는 질문이 몇 가지 있었어. '올림픽 대표로서 빛나던 마에조노' 와 '인간적으로 성장한 현시점에서의 마에조노'. 축구선수로서는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보십니까, 라고 했던 질문은 최고로 좋았어." 최고라는 칭찬에 내 가슴은 마구 뛴다. "다만 그 질문에 대한 마에조노의 대답이 약간 어정쩡했거든. 그런 때에 오토는 단념해 버린 것 같아. 그럴 때는 그러지 말고 말을 바꿔서 다시 한 번 같은 것을 물어보면 좋겠다는 느낌이 들었어. 모처럼 좋은 질문을 던졌으니까." 오토다케 히로타다, 인터뷰 수업 중. 갈 길은 아직 멀고도 험하다. @FF @fc 15 장 15. 두 개의 졸업장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던 대담 마지막 등판은 3 월 28 일로 결정되었다. 통상적인 (뉴스의 숲)이 아니라, 이날은 저녁 5 시부터 6 시까지 1 시간 동안을 '오토다케 스페셜' 로 잡아 특별방송을 마련한다고 한다. 지난 1 년 동안 방송국 사정을 어느 정도는 파악했다는 생각이 든다. 특별방송이, 그것도 1 시간이나 설정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함께 일한 지 겨우 1년 된 사람에 대한 '졸업 기념' 치고는 너무나도 엄청난 선물이었다. 틀은 쉽게 짜졌다. 그러나 내용은 완전히 백지 상태였다. 새하얀 캔버스에 자유로이 색을 입혀 가는 과정을 즐겁기도 하지만, 곤란한 경우도 많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지금까지의 취재 자료들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짜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과거 작품의 짜깁기에 불과하게 된다. 뭔가 척 보기만 해도 새로운 '알맹이' 가 필요했다. 스마프(일본 최고의 5 인조 그룹. 그룹으로서만이 아니라 개개인이 모두 솔로 활동도 하며 가수, 탤런트, MC 등으로 일본 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누구도 뒤쫓지 못할 일본 최고의 아이돌 스타 그룹이지지만, 단순한 아이돌인 것만은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빛나는 재능을 가지고, 각각의 개성을 살려나가는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한층 색다른 빛깔을 발하는 사람이 스마프 중 가장 나이가 적은 가도리 신고.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텔레비전에 나오던 스타였는데, 아니 그 대스타가 나와 같은 나이라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오토다케 스페셜' 의 '알맹이' 로서 가도리와의 대담이 엮어지게 되었다. 마에조노 선수와의 인터뷰와는 분명 차원이 다르다. 사전에 준비하고 머릿속으로 몇 번씩이나 시뮬레이션을 반복한 뒤 실전에 임한 것이 마에조노 선수와의 인터뷰였다면, 가도리와의 인터뷰는 마음을 비워놓고 자유로운 발상으로 이야기해야한다. 양자 간에 각각 다른 맛이 있겠지만, 압도적으로 후자 쪽이 어려운 일이다. 이야기의 흐름이 어디로 가고 있고, 어느 지점을 끝으로 마무리할지를 종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어려움을 덜어준 사람이 신도 아나운서였다. 보도 프로그램엔 처음 등장해서 다소 경직된 모습을 보이는 가도리를 능숙하게 리드해 준다. 게다가 오토다케 히로타다라는 재료를 솜씨 있게 요리해 나간다. 또 그러면서도 신도 아나운서 본인은 결코 지나치게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마츠바라 캐스터와는 서로 다르지만, 과연 이상적인 인터뷰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비교하자니 그 능력, 그 실력이 부럽기만 하다. 대담은 잘 진행되어 나갔다. 나와 닮았다. 가도리의 팬이 듣는다면 야유할지도 모르겠으나,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렇게 느껴졌다. 자기 자신을 대단히 좋아한단다. 스스로도 왜 그런지 모르고 다른 사람들도 신기하게 생각하지만, 매일매일이 도대체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다고 한다. 나 또한 완전히 닮은 꼴이니 그날 대담이 마냥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걱정만 했지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한 '가도리와 오토다케의 대담'. 그랬는데 좀처럼 드러내지 못할 것 같았던 그의 됨됨이, 적절한 코멘트, 어렸을 적의 에피소드 등이 튀어나와 대단히 멋진 조화를 이루었다. '오토다케 스페셜' 의 알맹이로서 충분히 기능할 것으로 보였다. 촬영 종료 후 스태프들이 건네주는 덕담을 들으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 무렵 난부, 미야자와, 조금수는 거의 빈사 직전의 중상을 입고 있었다. 범인은 동일범. 바로 나, 오토다케였다. 통상의 (뉴스의 숲)일만 해도 업무량은 방대하다. 그 일을 해나가면서도 '오토다케 스페셜' 이라는 특별방송 준비에도 시간을 소비해야만 했다. 결국 그들의 생활에서 수면 시간은 사라져 버렸다. 3 월 25 일. 와세다 대학 졸업식. 4 년 동안 다닌 대학과도 이젠 안녕이다. 친구들은 새내기 사회인이 되어 저마다 다른 길을 나선다. 대학으로부터는 오노 아자사 기념상을 단상에서 수여 받는 영광을 누렸다. 졸업식 막바지엔 와세다 대학의 교가 '수도의 서북녘' 을 소리높여 부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겠지. 아마 그럴 거라며 멍하니 상상했지만, 눈물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그것은 식장에 몰려든 매스컴의 카메라 탓이기도 했다. 여기서 운다면 '오토다케, 졸업식에서 감동의 눈물' 이란 헤드카피로 떡칠이 될 것이다. 그런 상황을 생각하면 심술꾸러기인 나는 오히려 싸늘하게 감정이 식어 버린다. 그러나 거기서 울 수 없었던 진정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졸업식 사흘 후에 '(뉴스의 숲)오토다케 스페셜' 이라는 또 하나의 졸업식이 기다리고 있다. 난부를 비롯해 스태프 모두가 마음을 담고, 시간과 노력을 담아 준비해 준 방송이 있다. 그것이 끝나지 않은 이상 '졸업' 은 없다는 생각이었다. 내 마음은 팽팽하게 긴장된 상태 그대로였던 것이다. 졸업식 다음날 세키구치 히로시의 (선데이모닝)에 다시 출연했다. 1 년 전쯤 이 방송 종료 후에 다카하시 프로듀서가 날 찾아 준 데서부터 이 드라마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어언 마지막회를 눈앞에 둔 드라마가. 아침 10 시까지의 방송을 마치고 (뉴스의 숲)스태프 룸으로 찾아가 보니,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난부와 미야자와가 출근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출근' 이 아니라 사흘간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고마움을 넘어서서 도대체 미안해 면목이 없을 따름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주는 그들에게 과연 나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앞으로 무얼 해줄 수 있을까. 드디어 나의 진짜 '졸업식' 이 찾아왔다. 나를 위한 (오토다케 스페셜) 오후 2 시, TBS 도착. 스태프 룸에 가니, 방송될 테이프에 내레이션 넣는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의 특집은 '오비히로 세 쌍둥이의 그 후'. 마츠바라 캐스터를 흐느끼게 만든 그 명작의 속편이 기념할 만한 최후의 특집이 되었다. 그러나 전편의 담당 디렉터였던 마츠다는 이미 사회부로 옮겨가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자후의 원숭이 소동)을 담당했던 노구치가 맡아 진행했다. 아나운서실. 흔히 내레이션 녹음을 위한 곳을 말한다. 방음 장치가 이루어진 그 방에서 나는 서툴기 짝이 없는 내레이션을 몇 번씩이나 반복했다. 입을 크게 벌리고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나의 말투를 두고 동료들은 꼭 학예회풍이라고 놀려댔다. 그랬는데 '오토다케는 우리들 청각장애인을 위해 일부러 입을 크게 벌리고 천천히 말해 줘서, 정말 도움이 된다' 는 시청자 편지에 어깨가 으쓱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수고했어. 거의 재녹음이 없어. 정말 잘하는데." 인터뷰뿐만 아니라 내레이션 솜씨도 조금 는 것일까. 노구치 디렉터의 칭찬에 마지막 내레이션 녹음도 기분 좋게 끝냈다. 이제 3 시부터 진행되는 리허설을 위해 4 층의 C 스튜디오를 향한다. 통상 (뉴스의 숲)은 2 층의 스태프 룸 안쪽에 있는 N 스튜디오에서 방영된다. 그러나 오토다케 최종회인 오늘은 버추얼 세트라는 특별한 세트를 쓰기로 했다 한다. 뒤에서 새파란 캔버스, 온통 푸른색 일색이다. 거기에 캐스터용 의자 하나가 오롯이 놓여 있다. 물론 그 상태 그대로 방송되지는 않는다. 거기에 바다나 석양 등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배경이 조합되어 나타난다. 오후 5 시부터 진행되는 (오토다케 스페셜), 그리고 통상의 (뉴스의 숲). 모두 합해 2 시간, 계속해서 이 버추얼 세트를 이용한 생방송 진행은 TBS 사상 최초의 일! 평상시만 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뉴스의 숲)에, 마지막회가 방영되는 오늘은 CG 담당, 기술 스태프 등 스페셜팀까지 가담한다. 저마다 다른 재능을 결집시켜 만들어 가는, 진정한 스페셜 방송이다. "마츠바라 캐스터와 오토다케 씨는 늘 옷이 겹친단 말이에요." 그렇게 의상 담당자를 울상으로 만든 적이 많았다. 같은 코디네이터가 담당해 주면 그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겠지만, 나는 내가 알아서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마츠바라의 정장과 비슷한 색의 옷을 입고 나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마지막날 엷은 회색을 입은 마츠바라에 비해 나의 정장은 갈색. 그 사이에 앉은 신도 아나운서의 시원한 오렌지색 의상까지, 오늘은 세 사람 모두 균형이 잘 맞았다. 방송은 그런 사소한 것에서부터도 기분이 달라진다. 보통 리허설하는 일은 별로 없다. 그렇게 했다간 거의 모든 스태프들로부터 성가시게 군다며 구박을 받고 말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2 시간 가까이 걸려 정성껏 치러졌다. 여느 때와는 다르다는 생각 때문인지, 기분도 붕붕 뜨는 듯하다. 5 시는 순식간에 찾아왔다. 드디어 사흘 전에 치렀던 졸업식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버추얼 세트의 배경에는 와세다 대학의 상징 오쿠마 강당. 컴퓨터 그래픽으로 이루어진, 상당히 박력 있는 화면이다. 내가 강연 활동을 하는 장면 등 "오체 불만족" 을 출판하기 이전의 영상이 차례차례 흐른다. 1 년 반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는 참 젊었다. 다음으로 내가 취재한 전반전, 즉 미국 취재까지의 방송분을 정리한 내용이 흐른다. 이것은 미야자와가 편집했다. 재미있게도 이전에 그가 담당한 '고도 교토의 배리어프리' 부분에 제일 많은 시간이 할애되었다. 만드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그대로 길이에 반영되는 것이리라. 이것이 1 주일 걸려 만든 프로그램인가 하고 생각하자니, 그냥 무심히 바라보기란 어려웠다. 드디어 스마프의 가도리와의 대담. 처음 시도해 본 방식이라 스스로도 불안했지만, 모니터에 흐르는 가도리의 매력적인 말이 스태프들의 폭소를 자아내는 것을 보며 안심할 수 있었다. '알맹이' 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한 것이다. 방송은 어느덧 종반으로 치닫는다. "저희들도 즐거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모두들 정말 수고했습니다." 마츠바라 캐스터의 마무리와 함께 화면 위의 세 사람 모습은 점점 작아져 간다. 화면은 이윽고 광고 협찬사를 소개하는 장면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 이 방송은 아래 회사들의 협찬으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스튜디오를 가로지르는 아오키 디렉터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스튜디오에서의 생방송은 모두 끝났다. 그러나 전파로 나가는 방송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뒤로 조금수 디렉터가 만든 엔딩 장면이 다 나가야 진짜 끝나게 된다. 가을 이후의 취재 활동을 정리한 것 또한 그녀가 담당했던 다이빙이 중심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야자와의 것과는 다르게 구성되어 있었다. 당시의 방송에서 사용했던 영상이 아니라 무대 뒤편에서 벌어졌던 것을 소재로 삼았던 것이다. 다이빙 목표 지점에 도착하기까지의 고충, 잠수를 끝낸 후 배 위에서의 방면 등이었는데, 그 장면들은 정말이지 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그 배경에 흐르는 음악은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노래, 플라잉 키즈의 '너에게 고백할게'. 모두 함께 걸어온 청춘의 포플러 가로수길, 지금은 아무도 없네. 두 사람을 남기고..... 스튜디오에서는 6 시부터 시작되는 (뉴스의 숲)방송 준비를 위해 스태프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뛴다. 그런 가운데 모니터에 나오는 엔딩 장면을 보고, 나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다른 프로그램 카메라팀이 '오토다케, (뉴스의 숲)졸업' 이란 테마로 취재를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물은 멈출 줄 모르고 펑펑 흘러내렸다. 아아, 울고 있는 모습이 방송이 돼 버릴 텐데..... 대학 졸업식 때처럼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나에겐 전혀 없었다. 방송이 모두 끝났다.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 크게 외쳤다. 떨리는 목소리로, 두 차례 고함쳤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뉴스의 숲)도 무사히 종료. 7 시 반부터 성대한 파티가 이어졌다. 나 하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리라고는 1 년 전엔 전혀 생각 못했다. 내가 자리에 들어설 때 이미 스태프 전원이 모여 있었다. 거기엔 멋진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축 (오토다케 스페셜)! 고맙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경험은 지금까지 없었다. 오타 프로듀서는 이렇게 인사했다. "저 플래카드에도 걸려 있지만 이 모임에는 정말 '축' 이라는 글자가 딱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거기다 '그리고 앞으로도' 라는 말로도 알 수 있듯이, 끝이 아니라 지금부터입니다. 두근두근 미래를 기대케 하는 멋진 프로그램이었다고 모두에게 감사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뉴스의 숲) 오락부장 격인 히로토모. 그가 프로 뺨치는 멋진 사회로 한 사람 한 사람씩 코멘트를 이끌어낸다. 간간이 조크를 던져 폭소를 자아내며, 그러는 동안 성대한 요리에 모두 입맛을 다시며, 스태프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한다. 남은 시간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어느덧 마지막으로 나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오늘 저를 위해 이처럼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지난 1 년간은 진정 즐거웠으며, 제가 엄청난 공부를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처음 이 방송에서 일을 해보지 않겠는가, 하는 제의를 들었을 때 혹시 이 사람들이 날 이용하려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그저 학교에나 다니는 학생이었으니까요. 그런 사람을 기용하다니요. 아니 어쩌면 그걸 덥석 받아들인 저야말로 더더욱 이상한 놈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요. 우선은 다카하시 프로듀서님. 프로그램의 장으로서 저를 기용하시려는 데 상당한 갈등이 있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멋진 1 년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다카하시 프로듀서님의 결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다카하시 프로듀서님 후임으로 오신 오타 프로듀서님. 저에 대한 취재 의뢰, 처리 등 도대체 하실 이유가 없는 일들을 결과적으로 다 맡기게 되어 정말 죄송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싫어하는 기색 하나 없이 제가 일하게 편안한 환경을 만들어 주신 점이야말로 정말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니시자키 편집장님. 그리고 후지와라 사장님! 저는 원래 사전에 계획을 세우고 그걸 하나하나 똑부러지게 처리해 나가는 편이 못 됩니다.그랬는데 두 분께선 '뭐, 어떻게 되겠지' 하며, 어떤 의미에서 대충대충 자유로운 스타일을 보이셨습니다. 그게 오히려 저에겐 '아, 이런 분들이라면 함께 해볼 수도 있겠다' 라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습니다. 두 분께 정말 신세 많이 졌습니다. 아, 마츠바라 캐스터님. 바로 조금 전에도 '오토가 나올 때, 참 즐거웠어' 라고 말씀해 주셨지요. 캐스터님, 제 마음속에서도 늘 '마츠바라님이 말야, 네가 나올 때 즐거우시단다' 라며 말을 건넸답니다. 혹시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진정으로 영광입니다. 마츠바라 캐스터님과의 가장 큰 추억은 역시 크리스마스 이브에 새벽 3 시까지 함께 마셨던 일이 아닌가 합니다. 정말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족합니다. 내년에는 저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내도록 하지요. 신도 캐스터님. 덕분에 저는 아주 곤경에 처했습니다. 신도 캐스터가 (뉴스의 숲)에 온다는 발표가 있고 나서 '넌 좋겠다!' 며 친구들이 쏟아내는 질투의 태풍을 맞이해야만 했습니다. 몇 사람의 친구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런 멋진 여성과 함께 일할 수 있었다는 것, 정말 제 일생의 자랑거리입니다. 노보루님과 니시다님. 두 분 카메라맨은 오토다케 담당자로 쭉 함께 생활하셨지요. 정말 여러 곳에 취재를 다녔습니다. 오키나와의 다이빙에서 저는 사흘째는 틀림없이 날이 맑을 것이라 확신은 했지만, 정말 고생스런 날씨였죠. 하지만 니시다님의 실력 덕분에 대단히 생동감 넘치는 영상을 얻게 되었으니까, 지금 와선 도리어 잘됐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노부루님하고도 참 여러 군데를 다녔습니다. 리호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을 때엔 정말 놀랐습니다. 미국의 훤히 트인 푸르른 하늘, 참 좋았지요. 두 분 모두 언제나 멋진 영상을 마들어 주셔서 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와 취재와 편집을 함께 하고, 행동도 항상 같이 하며 작품을 만들어 주신 디렉터 여러분들. 우선 난부 디렉터님. 저는 갑자기 방송 세계에서 일을 하게 되자 바짝 얼어 있었습니다. 혹시 밥맛인 사람들이라면 어떡해야 하나 라구요. 그런데 처음 소개받은 분이 난부 디렉터님이었어요. 그 성실한 인품에 접하고는 아무런 문제없겠다고 혼자 안심했습니다. 정말 저에게 난부 디렉터님의 존재는 컸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드립니다. 아니, 왜 웃으시죠? 진심입니다. 그리고 마츠다 디렉터님. 오비히로의 리호나 한국의 구원이와의 만남 등 따뜻한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 마츠다님을 능가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고 늘 생각했습니다. 뉴욕에서 돌아왔을 때 '사회부로 옮겨가게 됐다' 는 말을 듣고는 정말 2, 3 일 동안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마지막까지 함께 일하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멋진 작품을 여러 편 함께 만들었기 때문에 후회는 없습니다. 조금수 디렉터는 그다지 많은 일을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아아, 좀더 같이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제 가슴을 꽉 채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이빙은 가슴속 깊이깊이 최고의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제가 피곤에 겨워 드러누웠지요. 그때 조금수 디렉터님이 살짝 모포를 덮어주셨던 것, 기억하시는지요? 저에게 형제가 없어서 그런지 '꼭 누나 같다' 는 느낌이 들어 얼마나 푸근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화나는 게 있습니다. 오늘의 엔딩 장면 말입니다. 너무나도 감동적이어서 그만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덕분에 카메라에도 눈물짓는 모습이 잡혀 버렸구요. 멋진 장면,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미야자와 선배. 선배껜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일할 때나 휴일에나 언제나 함께 지냈지요. 뉴욕 여행까지도 불러 주시고. 이번 일을 하면서 이렇게까지 깊은 인간관계가 이루어지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지 때문에 더더욱 기쁘기만 합니다. 더 이상 말할 수도..... 어쨌든 오래도록 만남이 이어질 것 같군요. 앞으로도 그저 부탁드릴 뿐입니다. 다른 디렉터 분들과는 그다지 함께 일할 기회를 못 가져 참으로 유감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스페셜에서 조금이라도 함께 했기 때문에, 대단히 기쁩니다. 또 다른 직장에서 함께 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이런 멋진 방송을 만들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난 1 년 간 진정으로 멋진 시간과 만남을 이룰 수 있었던 것, 참으로 고맙습니다." @FF @fc 후기 후기 나는 끝없이 도전한다 눈물지으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울고 싶지도 않았다. 마지막 마무리 자리에서 인사하는 도중 흘러 넘친 눈물. 마지막에는 흐느낌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멈춰지지 않는 그 눈물을 나는 기쁘게 생각했다. 내가 얼마나 멋진 시간을 보내 왔는가. 얼마나 멋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가. 눈물은 바로 그 증거였다. (뉴스의 숲)에서 지낸 1 년 간.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밀도 높은 한 해일 것이다. 기쁨, 당혹감, 놀라움, 슬픔, 괴로움, 성냄, 침울함, 울음, 웃음..... 모든 감정이 내 마음의 문을 노크하며 지나갔다. 그리고 그 감정은 그저 스쳐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니고, 내 마음속에 분명하게 각인 되어 있다. 마지막 회 (오토다케 스페셜)에서 스마프의 가도리 신고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오토다케 씨는 마음이 대단히 넓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제가 지향하는 '바다' 나 '우주' 정도까지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호수' 정도의 마음 크기는 가진 사람입니다." 이번에 한 경험은 그 호수에 '깊이' 를 더해 주었다. 발목조차 잠기지 않을 정도로 얕았던 내 마음에, 튜브를 쓰지 않으면 빠져들고 말 정도의 깊이를 보태 주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또 다른 세계에서 지금까지 못해 본 경험을 쌓아나감으로써 '호수' 를 '바다' 로, '바다' 를 '우주' 로 바꿔 나가고 싶다. 지금까지 (뉴스의 숲) 시청자 여러분, "오체 불만족" 이나 두번째 작품 "내 마음의 선물" 을 읽어준 독자 여러분에게서 많은 편지를 받았다. 한 사람 한 사람 답장을 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메시지를 받았다. 정말 감사드릴 따름이다. 모든 분들이 '감명을 받았다' '훌륭하다' '참된 강인함을 지닌 사람이다' 라고 평가해 주었지만, 실제로 나는 그렇게 잘난 사람이 못된다. 그저 보통의 젊은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당연히 몸과 마음 모두 고통받는 일도 생겨났다. 그저 도망쳐 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가족과 친구와 연인만 있다면, 나는 충분히 행복하니까, 그러나 그런 나를 격려해 주는 것은 모든 이들이 보내주는 메시지에 담겨 있다. "살아 있어도 의미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몇 번씩이나 자살을 기도했어요. 하지만 잘못 생각했던 거지요. 앞으로는 나 자신을 믿으며 살아가겠습니다." "만약 휠체어를 탄 아이가 우리 반에 있으면, 전 정말 잘해줄 거예요."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괴로움만 끼치는, 장애를 가진 어머니가 밉기만 했어요. 하지만 이제 눈을 떴답니다. 앞으로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어머니에게 의지가 되는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그래, 좀더 열심히 하는 거야. 그래, 마음을 고쳐먹자. 대학을 졸업하고 (뉴스의 숲)도 졸업했다. 올해 봄부터 친구들은 취직을 해서 사회인이 되었지만, 나는 소속된 조직도 없고 딱히 할 일도 없다. 한 개인으로서 무엇을 해나갈지 진지하게 되짚어 봐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오토다케 같은 사람이야말로 교사가 되길 바랍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연활동을 하세요, 스물다섯 살이 되면 국회의원에 입후보해서...... 등 정말 다양한 충고와 요청을 받는다. 고마운 이야기지만, 모두가 상상할지도 모르는 성인군자가 아닌 나로서는 어렵기만 하다. 이십대 동안에는 여러 가지를 시험해 보고 싶다. 나에게 무엇이 맞고 무엇이 맞지 않는가. 어떤 곳에서 나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하고 있을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낄 수 있는가. 그러나 (뉴스의 숲)에서 얻을 수 있었던 '메시지를 전한다' 는 일의 재미를 어찌 잊겠는가 잠시 동안은 여기서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영상을 사용할 것인가. 활자를 사용할 것인가. 그 표현방법은 다양하다. 또 다른 사람의 메시지를 전할 것인가. 나 자신의 메시지를 발신할 것인가. 그런 차이만으로도 전혀 다른 일이 된다. 지금까지 얻은 경험들을 토대로 다시 새로운 일에 도전해 나갈 생각이다. 2000 년 4 월 6 일. 나는 스물네 살의 생일을 맞이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한 해가 막을 내렸다. 그리고 새로운 1 년이 시작되려 한다. 2000 년 봄 오토다케 히로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