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2 지은이:히가시노 게이고 이선희 출판사:창해 회중시계 이쓰미에게서 받은 회중시계는 1년 6개월 동안이나 거실 장식장 서랍 안에 들어 있었다. 그때 까지 한 번도 꺼내지 않은 그것을 꺼내게 된 계기는, 갑자기 삿포르로 출장 가게 되었기 때문이 다. 생산 라인의 헤이스케에게는, 새로 도입되는 기술을 견학하러 갈 때 이외에는 좀처럼 출장갈 일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번 출장도 결국은 삿포르에 있는 제조업체에 계측기를 테스트하러 가는 것이었다. 그가 일하는 라인에서는 컴퓨터 지시에 따라 엔진 안에 가솔린을 분사하는 노즐을 만 들고 있었는데, 그 노즐이 정확한 양을 분사하는지 순식간에 판단하는 장치를 이번에 들여오게 되었다. 따라서 생산기술 부서에 있는 기시마와 가와베 콤비와 함께 계측기를 만들고 있는 제조 업체를 방문하게 된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그 날로 돌아올 수 있지만, 다음날이 토요일 휴무인 데 서둘러 돌아올 필요가 어디 있나? 자네도 한동안은 여행과 담을 쌓고 살지 않았나? 삿포르의 가을은 참으로 좋다더군. 낙엽이 끝내준다는 걸세." 고사카 과자잉 그렇게 말한 다음, 주위를 두 리번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덧붙였다. "게다가 삿포르에는 말이지, 그곳이 있다네." "그곳이라 뇨?" 그가 알아듣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거사카는 얼굴을 찡그렸다. "자네도 꽤 둔하군. 삿 포로라고 하면 증기탕이 유명하지 않은가? 그것도 모르나?"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요?" "왜 그 렇게 멍청한 표정을 짓는 건가? 부인이 세상을 떠난 다음 여자 곁에는 가보지도 못했지? 가끔은 그런 곳에 가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나쁘지는 않네. 그곳 증기탕에는 아름다운 여자가 많다고 소문이 자자하더군." 그는 목소리를 낮추더니 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히죽히죽 웃었다. 증기탕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이번 삿포르 출장은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홋카이도 지방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나오코였지만, 그것은 의외로 쉽 게 해결되었다. 삿포로 가는 날에 맞추어 나오코의 언니인 요코가 상경하기로 했다. 하나밖에 없 는 외동딸이 금년 봄부터 도쿄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어서, 예전부터 딸의 모습을 보러 가겠다 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것이다. "언니를 이모라고 불러야 하는군요. 그것도 재미있겠어요." 그렇게 결론이 나자 나오코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삿포르라는 말을 듣자 그의 마음속 에는 오래 전에 접어 두었던 기억이 펼쳐졌다. 그는 서둘러 거실 장식자에 있는 서랍을 뒤적여서, 꼬깃꼬깃하게 접혀 있는 종이조각을 찾아냈다. 오가와 운전기사 전처에게 보낸 돈의 무통장 입금 영수증이었다. 처음에는 버리려고 했지만 왠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결국 서랍속에 그대 로 넣어 둔 것이다. 주소를 적어 둔 쪽지에는 삿포로 시 도요히라 구라고 씌어 있었다. 지도를 보 니 삿포로 역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세이코 모녀의 서글픈 눈빛 을 떠올렸다.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세이코의 초라한 어깨가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육친을 잃어버린 슬픔에 대해서는, 그들도 다른 유족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모녀에게만 은 그 누구도 구원의 손길을 뻗어주지 않았다. 구원을 받기는커녕, 최후의 순간까지 밝은 햇살을 보지 못하고 주눅들어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오가와 운전사는 헤어진 잔처에게 많은 돈을 보내 고 있었다. 그 때문에 체력의 한계를 느낄 때까지 일을 하다가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사 고를 일으키고 불의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전처는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전화를 걸어 오지 않았다. 전화는커녕, 지금은 한줌의 재로 변한 오가와의 죽음을 아는지 모르는지도 분명하 지 않다. 헤이스케의 마음에는 지금도 앙금처럼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전처에게 돈을 보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역시 네기시 노리코라는 여인이게 연락을 취했어야 했었다. 적어도 전 남편 오가와 유키히로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만이라도 확인해야 했다는 후회 가, 마음의 한쪽 구석에서 똬리를 튼 것이다. 이번에 삿포르에 가는 김에 네기시 노리코라는 여인 을 만나보자. 만나서 마음속에 찌꺼기처럼 가라앉아 있는 것을 분명히 청소하고 오자. 그런 생각 이 어떤 사명감처럼 타올랐다. 그러나 사고가 일어난 지 벌써 2년 반이나 지나 버렸다. 지금에 와 서 새삼스럽게 그렇게 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사실은 안다고 해도 이미 지나간 버스는 돌아오지 않는다. 가엾게 죽은 세이코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이쓰미가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헤이스케, 그 자신의 만족을 얻는 것에 그칠 뿐이다. 모든 것을 접어 두려고 한 순간, 문득 회중시계가 떠올랐다. 그래서 오랫동안 덮어 두었던 앨범을 펼쳐보듯이 회중시계를 꺼내본 것이 다. 출장을 내일로 하루 앞둔 목요일, 그는 정확히 퇴근시간에 맞춰 회사를 빠져나와 그 길로 오 기쿠보로 달려갔다. 그곳에 있는 시계방에 볼 일이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희한한 시계를 가지고 왔구먼." 시계방 주인인 마쓰노 고조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시계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미 소를 짓고 있는 양쪽 뺨에는 깨소금을 흩뿌린 것처럼 너저분하게 수염이 자라나 있었다. "가치가 있는 시계라고 하던데요." "그나저나 이보게, 이 시계는 어디서 난 건가?" "아는 사람한테 받은 것입니다." "산 것이 아니구먼." "사지는 않았습니다. 왜 그러시죠?" "아닐세...그런데 뚜껑이 열리 지 않는군. 잠금장치가 고장났나?" 마쓰노는 큼지막한 돋보기를 이용해서 시계를 살펴보았다. "가 능하면 그것도 고쳐 주세요." 마쓰노는 나오코의 먼 친척뻘 되는 사람으로, 나오코가 취직하러 처 음 도쿄에 상경했을 때 여러 가지 신세를 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물론 그녀의 장례식 에도 달려와 주었다. 굵은 주름이 패인 얼굴을 보기 만망할 정도로 일그러뜨리면서, 주위에 신경 쓰지 않고 소리를 내며 울었던 것이 기억에도 새롭다. 자식이 없는 마쓰노는 오기쿠보 역 근처에 있는 이 작은 점포 겸 주택에서, 평생을 함께한 늙은 아내와 둘이서 살고 있었다. 시계방 간판을 내걸고는 있지만 지금은 안경이 더 잘팔린다고 한다. 그 이외에 귀금속 제품도 취급하는데, 대부 분의 손님의 주문에 맞추어 만들어 주는 것이다. 반지 사진을 보여주고 똑같은 것을 만들어 달라 고 주문하면, 조금도 틀림없이 완벽하게 만들어 준다. 실은 그와 나오코의 결혼반지도 이 가게에 서 주문한 것이었다. 회중시계를 들고 여기로 쫓아온 것은, 그 시계의 가치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 다. 만약에 생각보다 고가의 물건이라면 삿포로에 들렀을 때 오가와의 전처인 노리코에게 전해 주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저기에 알아봤더니 이 시계가 꽤 비싼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 가 가질 수 없어서 이렇게 가지고 왔습니다." 요컨대 그는 노리코를 만날 구실이 필요했고, 그가 가장 납득시키고 싶은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아, 겨우 열렸네." 작업대 앞에서 고장난 시계를 들고 끙끙대며 씨름하던 마쓰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안에서 회중시계의 뚜껑이 멋지게 열려 있었다. "값어치는 있지요?" 그는 진열장 위로 몸을 내밀면서 물 었다. "음...값어치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있겠군." 마쓰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쓴웃음 을 지었다. "무슨 뜻이지요? 가격을 매길 수 없다는 뜻인가요?" "가격 말인가? 구태여 가격을 매 긴다면 3천 엔 정도면 적당할 걸세." "3천 엔이요?" "예전에 흔하게 돌아다니던 회중시계라네. 더 구나 몇번이나 수리를 했군. 미안하지만 골동품적인 가치는 없다고 할 수 있지." "그래요...?" "하 지만 다른 면에서 본다면 가치가 있다고도 할 수 있지. 이 시계가 아니면 안되는 사람이 있을 테 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덤이 붙어있군. 자, 보게." 마쓰노는 일어서더니 뚜껑을 연 채로 회중 시계를 내밀었다. 열려진 뚜껑 안쪽에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작은 사진이 붙어 있었던 것 이다. 다섯 살쯤 되었을까. 아무리 아이들이 많이 변하다고는 하지만 이쓰미는 아닌 것 같았 다. 더구나 남자아이인 듯 머리를 짧게 깎아 놓았다. 비행기를 타는 것은 몇 년 만일까. 헤이스케는 감회에 젖어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바다가 보 이기를 기대했지만 끝없이 펼쳐진 것은 새하얀 구름뿐이었다. 게다가 날개 바로 옆좌석에 앉 아서 시야가 절반 이상은 가려져 있었다. "내일 회의가 끝난 다음에는 어떻게 하실겁니까?" 옆자리에서 아직 초롱초롱한 눈빛이 살아 이는 젊은 가와베가 물었다. 통로측 자리에는 기시 마가 앉아 있었다. "잠시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 그곳에 들렀다가 모레 아침에 돌아갈 생각이 네. 자네들은 어떻게 할 건가?" "저희는 내일 하루 종일 삿포르를 돌아다니려고 합니다. 돌아 가는 비행기는 모레 저녁편으로 잡아 놓았어요." "지방 출장의 이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정 도 국물은 있어야겠죠." 기시마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옆에 끼어들었다. 지토세 공항 에는 제조업체에서 마중나온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 타보는 중후한 느낌의 대형 승 용차로, 셋이 앉아도 여유가 있을 만큼 뒷자석이 넉넉했다. 헤이스케가 마치 정치가가 된 것 같다고 농담을 던지자, 나머지 두 사람이 배를 잡고 웃었다. 조수석에 앉은 제조업체 담단자 도 씁쓸하게 웃음을 지었다. 헤이스케 일행은 홋카이도 대학 옆에 있는 제조업체 회의실에서 이번에 도입할 예정인 계측기를 테스트했다. 이런 일에서는 예기치 않은 말썽이 생겨 시간이 걸리는 일이 종종 있는데, 이번에도 예외없이 데이터를 얻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러자 그의 일행은 점차 말수가 줄어들고, 상대측에서는 조금이라도 고객의 기분을 맞추려고 생각했 는지 점심식사는 호화로운 프랑스 음식점으로 안내했다. 물론 그런 것으로 기분이 풀릴 리가 없어서, 가와베는 이렇게 투덜거리기도 했다. "알코올이 없는 프랑스 요리라... 왠지 흥미가 안 나는데요." 오후 여섯시가 지나서야 가까스로 원하는 데이터를 전부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삿포르 시내에 있는 초밥집에서 저녁을 먹고, 오도리 공원 근처에 있는 술집에서 접대를 받았 다. 일단 일이 끝나고 긴장이 풀려서인지, 이때는 마음을 열어 놓고 스스럼없이 큰소리로 웃 기도 했다. 이제 갓 스물이 넘었을까. 아직 어린 호스티스가 바로 옆에 앉아서 헤이스케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움푹 팬 가슴선과 미니스커트에서 비져나온 허벅지가 눈을 파고 들어 와서, 그는 시선을 돌리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맛본 적 없는 가슴 떨림을 진 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호텔에 도착하자 열두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너무 늦었다고 생 각했지만 전화를 걸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번 울리기도 전에 나오코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 다. 아직 잠을 자지는 않은 것 같았다. "여기는 걱정 마세요. 이모와 이야기를 하던 참이에요. 잠깐만요 이모를 바꿔줄게요." 그녀의 목소리는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전화를 받 은 요코에게, 그는 우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요코는 지금 같이 있는 소녀 가 자신의 친동생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이런 말은 잊지 않았다. "모나미는 정 말 나오코를 쏙 빼다 박았어요. 말투에서 사소한 동작까지 어쩌면 그렇게 똑같을 수 있어요? 조금 전에 내 어깨를 주물러 주었는데, 그것까지 똑같아서 기겁할 뻔했어요." 그는 예전에 언니의 어깨를 자주 주물러 주었다고 하는 나오코의 말을 떠올렸다. 아마 그녀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 느라 옆에서 고개를 돌리고 있을 것이다. 그는 시치미를 떼고, 모나미를 잘 부탁한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눈을 뜨자 이미 해는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그는 아침 겸 점심 식사를 마 친 다음 체크아웃을 하고 택시를 잡아 탔다. 그리고 메모지에 적어 놓은 주소를 말하자, 운전사는 대강 알 것 같다고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주변에 낙엽이 아름다운 곳이 있습니까?" 인심 좋은 이웃집 아저씨처럼 생긴 초로의 운전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가까운 곳에 모이와 산이 있 긴 한데, 낙엽을 즐기기에는 조금 이르지 않을까요? 한 보름 정도 지나면 아주 멋지게 물들 겁니 다." "그러면 적어도 다음주 정도에 왔어야 했나보죠?" "그렇지요. 다음주 정도라면 슬슬 물들기 시작할 겁니다." 그가 먼저 택시 기사에게 말을 거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특별히 단풍이 궁 금했던 것이 아니라 긴장감을 풀고 싶었던 것뿐이다. "이 주변입니다." 일단 운전기사가 말한 장 소에서 택시를 내렸다. 주위에는 작은 상점들이 오밀조밀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는 번지수를 살피 며 잠시 걷다가, 이윽고 어느 가게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그가 멈추어 선 곳은 아담한 분식집 앞으로, '구마요시' 라고 씌어진 간판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가게에는 정기휴일이라는 팻말과 함 께 문이 닫혀 있었다. 셔터 윗쪽을 쳐다보자 '네기시' 라는 문패가 걸려 있었다. 셔터를 두세 번 두드려 보아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무래도 가게 이층은 살림집인 것 같았지만, 그 집에도 사 람이 없는 것 같았다. 대낮인데도 창문에 커튼이 처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간판을 올려 다보자 한쪽 귀퉁이에 전화번호가 자그맣게 적혀 있었다. 그는 어제 회의할 때 사용한 노트를 꺼내어, 전화번호를 써넣었다. 그런 다음 주위에서 잠시 어슬렁거리다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 고 오늘 숙박하기로 되어 있는 호텔 이름을 댔다. 그 순간, 체크인을 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것 을 깨달았다. "기사님, 여기에서 삿포로 시계탑까지는 얼마나 걸립니까?" "시계탑이요? 얼마 걸리 지 않는데요." 백미러에 비친 운전사의 눈이 몇 번 깜빡거렸다. "그러면 호텔로 가지말고 시계탑 으로 가주십시오. 잠시 시간을 보내야 하니까요." "예에... 시계탑으로 갈 수는 있지만, 그 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는 어려울 텐데요." 아직 이십대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은 젊은 운전기사는 어른손 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예? 왜요?" "아직 모르시나 본데, 실물을 보고 실망하는 명소 가운데 제1위로 손꼽히는 곳이거든요." "별 것 아니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 "가보시면 한눈에 알 수 있 을 겁니다." 얼마 가지 않아 택시는 큰 도로 옆에 정지했다. 왜 그런 곳에 멈추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데 운전사가 길 건너편을 가리켰다. "바로 저것입니다." "저것이요... ?!" 자신도 모르게 쓴 웃음이 흘러나왔다. 단아한 아름다움이었던 사진에서 보던 이미지와는 달리, 단지 지붕위에 시 계가 달린 평범한 서양식 가옥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만약 시간이 남으면 예전의 도청을 가 보십시오. 저 시계탑에서 왼쪽을 향해 똑바로 가면 됩니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계속 걸어 가십 시오. 홋카이도 대학 식물원이 나올테니까요." 요금을 받으면서 친절하게 가르쳐 준 운전사의 조 언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시계탑에서 십 분을 보내고, 예전의 도청에서 이십 분을 보내고, 식물 원에서 삼십 분을 보낸 다음 호텔에 갔다. 마침 체크인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방으로 들 어가자마자 즉시 수화기를 들고 조금 전에 메모한 분식집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신호음이 세 번 울렸을 때 맞은편에서 수화기를 들어올리는 기척이 들렸다. "네, 네기시입니다." 수화기를 타고 젊 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저는 도쿄에서 온 헤이스케라고 합니다만, 네기시 노 리코씨 좀 부탁드립니다." "어머니는 지금 외출하셨는데요." 아마 네기시 노리코의 아들이리라. "그래요? 몇 시쯤에 전화를 걸면 통화를 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저녁때쯤에는 통화를 할 수 있을 건데... 무슨 용건이신데요?" 남자의 목소리에는 경계의 빛이 잔뜩 묻어 있었다. 헤이스케라 는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고, 도쿄에서 왔다는 말도 수상쩍게 여겼을 것이다. "실은 오가사 유키 히로 씨에 대해서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 ."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에서 싸늘한 공기가 느껴 지고 그 이후에 이어진 남자의 침묵이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시죠? 그 사람과는 아 무런 관계도 없는데요." 남자의 목소리가 음침할 정도로 낮아졌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다만 직 접 만나서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오가와 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알고 계십니까?" 또다시 남자의 침묵이 이어졌다.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남자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것도 우리와 는 상관이 없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 하십니까?" "...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어쨋 든 어머니를 만나고 싶습니다. 전해주고 싶은것도 있으니까요. 저녁때쯤이면 돌아오신다고 하셨지 요? 그러면 그때 다시 전화를 걸겠습니다." 그러자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잠깐만요. 지금 어디 계시죠?" "삿포로 역 앞에 있는 호텔입니다." 그는 호텔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알겠습니다. 어머니가 들어오면 전화 드리라고 하지요. 계속 호텔에 계실 겁니까?" "예. 전화를 걸어 주시겠다면 계속 기다리고 있지요." 어차피 삿포로 시내 구경은 다 끝난 터였다. "그 러면 어머니가 들어오면 전화하라고 전해 드리겠습니다. 헤이스케 씨라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노리코의 아들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침대 위에서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몇 종류의 꿈이, 그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 들었다. 갑작스러운 전화벨 소리가 그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헤이스케 씨지요" 아마 교환대나 프런트에 근무하는 직원의 목소리일 것이다. "예 그렇습니다만." "프런트에 네기시라는 분이 와계 십니다. 잠시 수화기를 들고 기다리십시오." 네기시 노리코가 직접 찾아왔다는 생각에, 그는 순간 적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지둥댔다. 그런데 들려온 것은 뜻밖에도 네기시 노리코의 아들 목 소리였다. "여보세요. 네기시입니다." "아! 조금 전에는 실례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집에 오셨나 요?" "그것에 대해서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 실례가 안된다면 아래로 내려오실수 있겠습니까?" 아들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더욱 싸늘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는 수화기를 거머쥐고 상대방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보았다. "어머니께서는 함께 오시지 않았나 보군요." "예. 저 혼자 왔습니다." "그래요? 어쨌든 지금 곧 내려가지요. 어디에 있지요?" "프런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그럼 십 분만 기다리십시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일단 욕실로 뛰어들어 갔다. 지금 막 잠에서 깨어난 멍한 머리를 세수를 해서라도 맑게 만들려고 한 것이다. 서둘러 일층으로 내려가 서 프런트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운터 앞에는 체크인 하려는 손님들이 줄을 지어 서 있고, 그들 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새하얀 폴로 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키가 크고 갸름한 얼굴이 상큼한 느낌을 주었다. 근육이 울퉁불퉁하지는 않았지만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가 저절로 미소를 머금게 만들었다. 스무 살쯤 되었을까 헤이스케는 그 청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청년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다가 그에게 눈길을 향하고는 그대로 정지했다. 당신이 전화를 건 주 인공이냐는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씌어 있었다. 그는 청년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입을 열었다. "네 기시 씨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면서 회사의 주소와 전화번 호를 써넣은 명함을 꺼냈다. "전화로 실례를 많이 했군요. 헤이스케라고 합니다." 청년은 명함에 개를 떨구더니, 순간적으로 얼굴에 반가운 미소가 감돌았다. "아! 빅우드에 근무하고 계시는군요."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청년은 프런트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준비 되어 있던 메모지에 뭔가를 써서 돌아왔다. 그리고 수줍은 듯이 미소를 지으며 종이를 내밀었다. "학생이라서 아직 명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들같은 사람인데, 말씀 놓으셔도 됩니다." 종이에는 분식집 '구마요시' 의 주소와 전화번호, 그리고 네기시 후미야라는 이름이 씌어 있었다. 그들은 옆에 있는 커피숍에 들어가기로 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커피를 주문하고, 후미야도 똑같은 것을 부탁했다. "그러면 말을 편하게 놓겠네만, 회사일로 삿포로에 온 김에 겸사겸사 연락한 것이 네." "그런데 빅우드에서는 어떤일을 하십니까? 연구를 하십니까?" 그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지 나칠 정도로 손을 크게 흔들었다. "아니, 현장에 있다네. 가솔린 분사기를 만들고 있지. ECFI 라 는 부품이라네." "ECFI... 전자제어식 연료분사장치 말입니까?" 거침없이 대답하는 후미야의 얼굴 을, 그는 놀라움과 함께 빤히 쳐다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나?" "대학에서 자동차 동아리에 있거든요." "그래? 어느 대학인가?" "호쿠세이 대학입니다." "몇 학년?" "3학년이요." "아! 그런 가?" 호쿠세이 대학이라면, 공과계 대학 중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었다. 웨이트리스가 커 피를 가지고 오는 바람에 잠시 대화가 끊기고,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어머니는?" 후미야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처럼, 입술에 침을 한 번 묻히고 나서 입 을 열었다. "실은 아직 어머니에게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우선 제가 용건을 듣고 나서 말씀 드리려구요." "흠... 무슨 이유가 있나?" "분명히 어떤 사람에 관한 일인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라고 말했을 때 후미야의 얼굴에 나타난 혐오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오가오 유키히로 씨는 자네를 낳아준 아버지가 아닌가? 즉 어머니의 남편이었던 사람이지." "모 두 다 옛날 이야기 입니다. 지금은 생판 모르는 남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니, 남보다 더 못한 사이 죠." 후미야의 뺨이 움찔거렸다. 화가 난 탓인지, 눈도 조금 치켜올라간 것 같았다. 그는 커피잔 을 만지작거리면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지 생각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지만, 막상 눈앞에서 후미야의 분노를 대하자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헤이스케 씨는 그 사람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실은 그것을 설명하기가 좀 어렵네만." 그는 들어올렸던 커피 잔을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아까 오가와 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당연히 어떻게 해서 돌아가셨는지, 사인에 대해서도 알고 있겠군." "스키 버스가 전복 된 사건은, 신문이며 방송에서 워낙 떠들어댔으니까요." "운전하던 사람이 아버지라는 사실은 금 방 알았나?" "이름이 똑같은 데다 여기 살았을 때도 버스를 운전했으니까,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 다." "그래? 여기에서도 운전기사로 일했군."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후미야의 눈을 파고들 듯이 똑바로 바라보면서 덧붙였다. "그는 사고로 아내를 잃은 사람이네." 후미야의 얼굴에 한 순 간의 놀라움과 동시에 낭패스러움이 스쳤다. 그리고 푹 떨군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 입술을 일자 로 다물고 있었다. "그런가요? 그거 안되셨군요. 하지만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것처럼, 우리는 이 제 그 사람과 아무 관계도 없고... ." 그는 조금 허탈한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아닐세, 자네를 원망할 생각은 전혀 없네. 그것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전화로 얘기한 것처럼 전해 주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다네." 그는 안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테이블위에 올려놓고, 그 시계가 손에 들어오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요약해서 설명했다. 후미야는 계속해서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오가와가 노리코에게 계속해서 돈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가벼운 비명을 질렀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 같았다. 그는 회중시계의 뚜껑을 열고, 안에 있는 작은 손톱 만한 사진을 내밀 었다. "자네를 처음 본 순간, 무릎을 치고 싶었다네, 이 사진에있는 남자아이는 자네가 틀림없지? 오가와 씨는 단 한순간도 자네를 떼어놓은 적이 없다네. 목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이 회중시계를 가지고 다녔으니까 말일세." 후미야는 잠시 시계에 붙은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렇게 먼 곳 까지 시계를 가져다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계를 ... ." 그는 해야 할 일 을 마친 심정으로 회중시계를 내밀었다. "하지만 이 시계는 받을 수 없습니다. 아니, 받고 싶지 않습니다." "어째서 인가?" "저나 어머니에게 있어서 그 사람은 잊어버리고 싶은 대상입니다. 아 니, 이미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이런 유품은 받고 싶지도 않고, 받아도 쓰레기통에 들어갈 것이 뻔합니다. 그렇다면 받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아버지를 상당히 싫어하나 보군." 후미야의 눈에서는 증오의 불길이 타올랐다. "솔직히 말해서 경멸하고 있습니다. 그 남자는 어머니와 저를 버리고, 젊은 여자와 눈이 맞아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랜 세월 동안, 어머니가 저를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는 만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조촐하게나마 분식집 을 하고 있지만, 어머니는 한때 공사 현장에서 막일을 한 적도 있습니다. 고등하교를 졸업하고 취 직하려는 저에게, 어떻게든 등록금을 마련해 주겠다고 하면서 재수까지 시켰었지요." 헤이스케는 쓰디쓴 한약이라도 마신 것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이혼을 한 이후에도 돈을 보내준 데에는 그런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은 했다. 그렇다면 오가와와 함께 도망을 쳤다는 젊은 여자는 어떻 게 된 것일까. 분명히 세이코는 아닐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정식으로 이혼하신 것이 아닌 가? 그렇다면 어머니도 어느 정도 이해했기 때문에 도장을 찍으셨지 않을까?" "젊은 여자와 도망 친 사람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어머니 얘기로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혼장이 날아왔다고 하더군요. 물론 정식으로 고소하면 무효로 만들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이미 그 사 람을 마음속에서 밀어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내가 조금 더 컸었다면 절대로 순순히 물러나지 않 았을 겁니다." 그는 차라리 귀를 막고 싶었다. 후미야의 말이 사실이라면 오가와를 증오하는 것에 도 무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돈을 보낸 것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싶었기 때문 인지도 모르겠군." "돈을 보냈다는 것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그 남자는 인간의 도리를 내동댕 이쳤으니까요." "어머니도 그런가? 어머니도 역시 오가와 씨를 원망하고 계시나? 그래서 오가와 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장례식에 조차 참석하지 않은 건가?" 후미야는 잠시 눈길 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긴 듯이 입을 다문 다음,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어머니는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했습니다. 헤어졌다고는 하지만 한때는 부부로 인연을 맺은 사 람이니까 부의금 정도는 내고 싶다고 하더군요. 어쩌면 계속 돈을 받은 꺼림칙함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제가 어머니를 말렸습니다.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구요." "어리 석은 짓... 이라." 후미야의 원망과 한탄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오가와가 그들에게 돈을 보내기 위해 자신뿐만 아니라 당시의 가족들이 얼마나 희생했느냐에 대해서도 이 자리에서 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결국, 헤이스케는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것은 후미야 모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게다가 오가와가 저 세상으로 떠난 시점에서, 후 미야는 돈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아마 어머니 노리코가 말하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런 사정이 있어서, 이 회중시계는 받을 수 없습니다." 후미야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 는 회중시계를 헤이스케 쪽으로 밀어놓았다. 그 모습에서 그의 굳은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헤이 스케는 시계를 내려다보고, 그리고 다시 후미야를 쳐다보았다. "어머니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잠시만이라도 좋으니까 말이야." "거절하겠습니다. 그 남자에 관한 일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 라도 어머니를 접근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은 옛날 일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새출발했으니까, 그냥 내버려두시기 바랍니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말투에서, 처음부터 어머니를 만나게 할 마음 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헤이스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하는 수 없 군." "한 가지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얼마든지 물어보게." "왜 삿포로까지 오셔서 이런 일을 하시는 겁니까? 오가와라는 사람은 아내를 빼앗아간 장본인이고, 당신은 그 사고의 피해자인데 요." 헤이스케는 머리를 긁적이며 씁쓸하게 웃었다. 자기 내부에서도 그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나도 잘 모르겠네. 어쩌다 발을 들여놓게 돼서 마무리를 짓고 싶었다고나 할까?" 후미야 는 도조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오가와 모녀와의 기 묘한 만남부터 설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고 그렇게 할 가치도 없었으며 제대로 설명할 자신도 없었다. "이제 마무리를 지었다고 생각하십시오." "아무래 도 그런 것 같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속에는 어두운 장막이 드리워진 것처럼 개운하지 않 았다. 무엇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그는 회중시계를 집어넣으려고 하다가 문득 생각을 고 쳐먹고 후미야를 바라보았다. " 이 사진만이라고 받아주지 않겠나? 내가 가지고 있을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의 사진을 버릴 수도 없지 않은가?" 후미야는 난처한 표정으로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 러나 헤이스케의 말이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사진은 제가 처분하 겠습니다." 헤이스케는 명함을 이용해서 뚜껑 뒤편에 붙어 있는 사진을 빼냈다. 사진은 생각보다 쉽게 떨어졌다. 풀로 붙여 놓은 것이 아니라 뚜껑 크기로 잘라서 끼워놓았던 것이다. 그는 둥글게 잘려진 어린 후미야의 사진을 주인에게 돌려 주었다. "어쨌든 오가와 씨는 자네를 잊어버리지 않 았다는 것만은 기억해 두게." "그런 것은 면죄부가 되지 않습니다." 헤이스케의 말이 끝나기도 전 에 후미야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미야와 헤어진 다음 헤이스케는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침대에 누 워 결국 전해 주지 못한 회중시계의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잠금장치는 마쓰노가 깨끗하게 고쳐 주었던 것이다. 그는 머릿속으로 후미야와의 대화를 몇 번이고 곱씹어 보았다. 그에게 해주 지 못한 말을 생각하자 머리에 희뿌연 안개를 어떻게든 마로 표현하고 싶었다. 오가와가 무슨 생 각으로 노리코에게 다달이 돈을 보냈는지, 그것은 결국 수수께끼로 남았다. 후미야의 말에서 추측 하건대, 아마 정상적인 합의 이혼은 아닌 것 같았다. 또한 후미야의 양육비나 생활비에 대해서, 오가와와 노리코 사이에 정식으로 합의가 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면 속죄 때문이었을까. 그것 밖에는 달리 생각 할 길이 없었다. 속죄하기 위해서 자신이 버린 여자와 아들에게 돈을 보내는 것, 그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오가와에게 있어서 세이코와 이쓰미는 무엇 이었을까. 나머지 반생을 보내기 위해 선택한 동거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특히 이쓰미에 대 한 오가와의 생각이 마음에 가라앉은 앙금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이쓰미를 무엇이라 생각했 을까. 단지 같은 길을 걸어갈 여자가 데여온 아이라는 것뿐이었을까. 예전에 버린 친아들과 현재 돌봐주어야 할 수양딸 사이에서, 마음의 균형을 어떻게 취하고 있었던 것일까. 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의문과 답답함을 참지 못해, 그는 벌떡 일어나 머리칼을 마구 흩뜨렸다. 그때, 그 답 답함을 해결해 줄 것처럼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기시마에게서 온 전화였다. 오늘 이 호텔 에 묶을 예정이라는 것은 헤이스케가 미리 알려주었던 것이다. 기시마는 지금부터 식사를 하고 스스키노 근처에서 한잔 마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기시마와 가와베도, 바로 근처에 있는 호텔에 자리를 잡은 것 같았다. 헤이스케는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인 의문을 떨쳐내듯이, 손에 들 고 있던 회중시계의 뚜껑을 소리내서 닫고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해물전골로 유명한 식 당에서 배를 채운 뒤, 가와베의 친구가 가르쳐 주었다는 술집으로 가기로 했다. 가와베는 몇번이 나 바가지를 쓴 사람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모르는 가게에 가면, 자칫 옴팡지게 바가지를 쓸 수 있으니까요." 두 사람은 하루 종일 삿포로 시내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헤이스케가 시계탑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자 그들은 얼굴을 마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시계탑은 너무 했지요? 사진으로 보고 상상으로 남겨 두는 것이 훨씬 좋을 뻔했어요." "드라마 세트장이나 마찬가지죠. 화면을 통해 볼 때는 별로 이상하지 않지만, 실물을 보면 너무나 조잡해서 기가 막힐 지경이라고 하니까요." 두 사람은 오늘 구경한 것 중에서 오쿠라 산이 가장 좋았다고 한다.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까지 올라갔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돌아다녔지만 그들이 찾는 가게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술집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어두 컴컴 한 골목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이거 잘못 들어 온 것 같은데요." 가와베가 주위를 힐끗거리며 목소리를 낯추어 말했다. 그 골목에서 보통 거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수상쩍은 기척이 떠다니 고 있었다. 길가에는 제법 덩치가 좋은 사내들이 담배를 물고서 있었던 것이다. 사내들은 서로 모 르는 사람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헤이스케 일행이 길 한가운데로 걸어가자 즉시 사내 하나가 다가왔다. 하얀 바지에 하얀 점퍼, 하얀 구두를 신은 남자였다. "출장 오셨수?" 아무 도 대답하지 않자 사내는 다시 입을 열었다. "시간이 있으면 잠깐 들렀다 가슈. 물 좋은 여자들이 수두룩하니까. 우리 가게 여자들은 이 주변에서 손꼽히는 미인들이지. 아마 지금이라면 마음에 드 는 여자를 고를 수 있을거요." 아무 말 없이 손을 흔들자 사내는 코를 킁킁거리며 멀어져갔다. 그 러나 그 골목을 지나칠 때까지 계속해서 두 명의 사내가 달라붙었다. 어느 사내들마다 똑같이 말 하는 것이 신기 할 정도였다. "저렇게 유혹하는 것을 보면, 출장 오는 김에 들르는 사람이 많은가 봐요." 가와베는 웃으면서 기시마의 말을 받았다. "삿포로에 출장 간다고 하니까 다들 놀리던데요. 출장보다 증기탕이 목적일 거라고요." 그 말을 듣자 문득 고사카의 말이 떠올랐다. 그들은 골목을 나와 가까스로 찾던 술집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담하고 조촐한 술집으로 젊은 호스티스 가 다섯 명이나 있었다. 어제보다 조금 여유가 생겼지만 그래도 맞은편에 앉은 여자의 초미니 스 커트에는 시선을 향할 수 없어서 헤이스케는 눈만 떼굴떼굴 굴렸다. 분위기를 돋구는 사람은 역 시 젊은 가와베였다. 그는 도쿄의 번화가 이야기를 해주며 여자들의 관심을 끌어들였다. 평소에는 일만 생각하는 성실한 엔지니어지만, 또 다른 일면을 본 것 같아 저절로 미소를 자아내게 했다. "헤이스케 씨는 자제분이 있나요?" 몸매가 완전히 드러나는 짧은 원피스를 입은 호스티스가 조심 스럽게 물었다. "물론 있지." 그는 한 손에 위스키잔을 들고 대답했다. "남자요? 여자요?" "딸이 야. " "몇 살이에요?" "중학교 2학년." "그러면 가장 대하기 어려울 때군요." 그녀는 특별한 의미 를 품은 듯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그게 그런가?" "물론이죠. 중학교 2학년이라고 하면 사춘기 초 기에 접어들 나이잖아요? 그나이 때쯤이면 아버지가 싫어질 때거든요." "아버지가 싫어질 때라 구?" "응? 그게 무슨 말인데?" "뭐라구 할까, 그 때는 아버지가 옆에 있기만 해도 왠지 화가 나거 든요." 그러자 다른 호스티스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나도 그랬어요. 빨랫줄에 아버지 팬티가 걸려 있는 것을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으니까요. 아버지가 나온 화장실에 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고, 욕조도 사용하지 않았어요. 왠지 불결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다른 호스티스들도 하나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버지 냄새는 코를 막고 싶을 정도로 고약하다, 축 늘어진 배는 보기만 해도 끔찍하 다, 아버지 칫솔을 보면 구역질이 날 정도다, 등등 여기저기에서 아버지에 대한 비난의 화살이 쏟 아졌다. "왜 그렇게들 싫어하지?" "무엇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호스티스들의 입에서 이구동 성으로 나온 대답은 그랬다. 어쨌든 생리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스물이 될 때까지 는 거의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그 이후에는 늙은 아버지를 보면 왠지 가엾다는 생각이 들 어서 따뜻하게 대해 주려구 했구요." 가와베는 술기운이 도는지, 잘 돌아가지 않는 혀로 말을 꺼 냈다. "남자는 참 불쌍하군요. 그렇다면 아버지가 되어서 좋은 점이 뭐예요? 차라리 결혼을 포기 하고 혼자 살거나?" "좋은 일이 있어서 아버지가 되는 건 아니야.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면,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이가 생겨나 있지. 그러면 뒤로 물러설 수 없게 되어 죽을둥살둥 아 둥바둥거리며 아버지 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구. 안 그래요, 헤이스케 씨?" 아들, 딸이 있는 기시 마가 절실한 심정으로 동의를 구하자, 헤이스케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버지가 되기는 아주 간단하지. 하지만 아버지 노릇을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야. 아버지는 너무 피곤하다 구." 아무래도 기시마마저 알코올 기운이 조금 과한 것 같았다. 기시마와 가와베는 다시 2차를 간 다고 했다. 두 사람 모두 거나하게 취한 듯이 보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대로 호텔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헤이스케는 술집 앞에서 그들과 헤어져서 혼자 발길을 내딛었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서 헤매게 되었다. 삿포로의 도로는 바둑판 무늬처럼 뻗어 있지만, 알코올 기운 때문인 지 어느쪽을 향해 걷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무작정 길을 따라 걷는 사이에 눈에 익은 골목이 나왔다. 조금 전에 지나간, 증기탕이 모여 있는 골목이었다. 한 걸음 들여놓자마자 재빨리 젊은 사내가 다가왔다. 그는 귀찮은 듯이 손을 흔들어 거절의 의사를 강하게 내비치면서 걸어갔다. 그 러나 세 사람이 함께 지나갈 때에 비해서 불안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채구가 작은 사내가 옆 으로 다가와서 속삭이듯이 말했다. "좋은 아가씨가 있어요.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헤이스 케는 또 다시 손을 흔들었다. "잠시 들렀다 가세요. 가끔은 숨을 돌리고 살아야죠. 안 그래요, 아 버지?" '아버니'라는 말에 그는 한순간 발길을 멈추고 사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단어가 마음 속에서 계속 메아리치고 있었다. 반응이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사내는 그의 옆에 몸을 바싹붙였 다. "2만 5천이면 됩니다. 이 동네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아가씨로 소개할게요." "아니, 그냥 가겠 네." "모처럼 이런 곳에 와서 즐기지도 않고 가다니, 그러면 후회한다구요, 아버지." 사내는 등을 툭툭 치면서 보조를 맞추었다.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적당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사내의 입에서 나온 말은 2만 5천 엔이라는 말뿐이었다. 문득 머리에 떠오른 말은 단 하나, 그런 가게에는 가지 않겠네 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말이 되어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다른 생각 이 그의 입을 막아버린 것이다. 가끔은 긴장을 풀어도 좋지 않나. '아버지'에서 해방되어도 좋지 않은가. 그는 어느새 지갑을 꺼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사내는 현란한 간판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 앞에서 발길을 멈추더니, 지하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갔다. 헤이스케도 주위를 두리번거 리면서 사내의 뒤를 따랐다. 지하 입구에 있는 문을 열자 바로 정면에 창구 같은 것이 있었다. 사 내가 소리를 지르자 창구 옆에 있는 문이 열리고, 안에서 펑퍼짐하게 살이 찐 중년 여자가 나왔 다. 이어서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쑤근쑤근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그 동안 헤이스케는 주위를 돌려 주위를 살펴 보았다. 오른쪽으로 어두컴컴한 복도가 이어져 있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사내가 밖으로 나가고 중년 여자가 귀찮은 듯이 물었다. "손님 화장실은요?" " 예?" "화장실이요. 가고 싶으면 지금 다녀오시라구요." "아니, 됐소." "정말이죠? 정말 괘찮은 거 죠?" 여자는 끈질길 정도로 몇 번잉고 다짐을 받았다. 갑자기 지금부터 중대한 일을 할 것이라 는 생각이 솟구쳐서 가슴이 쿵쾅거렸다. 여자를 따라 들어간 곳은 비좁은 대기실이었다. 다른 사 람이 있으면 꺼림칙했겠지만 대기실에는 마침 아무도 없었고, 커다란 누드 사진이 붙어 있을 뿐 이었다. 여자는 잠시 나갔다 돌아오더니 따라오라고 말했다. 복도에는 자그만 문이 쭉 늘어서있고 안내하는 여자는 그 가운데 하나의 문 앞에 멈추어 섰다. 안에서는 새빨간 목욕가운을 입은 젊은 여자가 무릎을 꿇고 기다리고 있었다. 긴 머리칼을 하나로 묶어놓은, 마치 고양이처럼 암팡지게 생긴 여자였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뒤에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그 소리가 언제까지나 메 아리치며 귓가를 맴돌았다. 젊은 여자는 재빨리 일어서더니 그의 뒤로 가서 웃옷을 벗겨 주었다. "손님, 삿포로에 사시는 분이 아니군요." 여자는 윗도리를 옷걸이에 걸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도쿄에서 왔어.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손님이 입고 있는 양복은 아주 두텁거든요. 삿 포로에 가니까춥다고 생각한 거겠죠?" 여자의 말은 정확했다. 실은 호텔에 있는 가방 안에는 두 툼한 스웨터도 들어 있었다. "아주 예리한데." "북쪽에 있다고 하지만 결코 북국이 아니에요 옷을 벗겨 드릴까요?" "아, 됐어. 내가 벗을게." 방의 왼쪽에는 작은 침대가 놓여 있고, 그 안쪽에는 널 찍한 욕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방과 욕실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헤이스케가 옷 을 벗는 동안 여자는 욕조에 물을 받고 있었다.어느 사이엔가 실오라기 하나 없이 옷을 벗은 여 자의 몸은 생각보다 몹시 갸냘퍼 보였다. 여자가 재촉하는 대로 욕조에 몸을 넣자, 여자는 스폰지 에 거품을 내기 시작했다. 밥공기를 엎어놓은 것 같은 볼록한 가슴이 욕망을 자극했다. 피부는 조 금 거무스름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여자를 생기있게 만들어 주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자의 알몸을 보는 것은 몇 년 만일까. 물론 나오코의 알몸은 빼고 말이다. 예전에 나오코의 알 몸을 본 것은 분명히 사고가 일어나기 전으로, 벌써 2년 반이나 지난 일이다. 그 동안 나는 진정 한 의미에서 남자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었을까."이런 곳은 처음 왔어." "아, 그래요? 길가에 서 있는 남자를 따라온 거에요?" "그래."그러면 2만 5천 엔 정도 내셨겠네요?" "그래, 정 확하군." 여자의 입가가 일그러지며 히죽거리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 가운데 9천 엔은 손님을 데리고 온 남자의 몫이에요." "뭐야? 그렇게 많아?" "다음부터는 직접 오셔서 에리카를 지명해 줘 요. 그럼 1만 6천 엔이면 되니까요." "흐음." 그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곧바로 또 다른 의문이 얼굴을 내밀었다. 왜 중계료가 1만 엔이 아니라 9천 엔이라는 어중간한 금액일까. 그는 매 트에 누워서 여자에게 몸을 맡겼다. 여자는 그의 온 몸에 로션을 바르고 있었다. 한순간, 여자의 음부가 눈앞을 스쳤다. 여자의 성기를 보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순간적으로 가벼운 현기증 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떤 모양인지 냉정하게 관찰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거렸 다. "별로 기운이 없군요." "아, 미안." "술을 드셨나봐요." "그래, 조금." "그러면 침대로 가요." 침대를 낀 벽은 온통 거울로 도배되어 있어서, 옆으로 드러눕자 자신의 초라한 알몸이 보여 얼굴 이 화끈 달아올랐다. 베개맡에는 작은 자명종이 놓여 있었다. 그 시계로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라 고 생각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일까.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조바심이 솟구쳐 올라왔 다. 어쩌면 그 조바심이 그에게서 힘을 빼앗아간 것인지도 모른다. 에리카라는 여자가 아무리 서 비스를 해도 그의 남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술을 마신 사람은 이게 제일 좋아요." 에리카는 차가운 물에 적신 수건을 고환에 댔지만 별로 효과가 없었다. "손님 어떻게 된거에요?" 그녀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미안하군 틀린 것 같아." "그 동안 하지 않아서 쌓였기 때문에 여기 온게 아니에요?" "쌓여도 많이 쌓였지." 2년 반 동안이나... .물론 그 말은 입 안으로 삼켰다. "어떡하죠? 이제 시간이 별로 없는데." "괜찮아. 나는 됐으니까 신경쓰지 말아." 그는 몸을 일으켜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옷을 집어 주겠어?" "정말로 괜찮겠어요?" "그래." 에 리카라는 여자는 불퉁한 표정으로 그의 옷을 들고 왔다. 그는 옷을 하나씩, 천천히 몸에 걸쳤다. "부인은 있어요?" 없다고 대답하려다가 그는 잠시 망설였다. 그 나이에 홀아비가, 더구나 이런 곳 까지 와서 아무 쓸모도 없이 돌아서서는 너무 초라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있어." 여자의 입술이 비웃는 것처럼 비틀어졌다. "그렇다면 부인하고만 하면 되겠네요." 수치감으로 얼굴이 불에 덴 것 처럼 화끈거렸다. 여자의 뺨을 세차게 후려 갈기고도 싶었다. 그러나 물론 그렇게 할 수 없는 자 신에게 화를 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면 되겠지." 이윽고 조금 전에 본 중년 여자가 나 타나더니, 올 때에는 타지 않았던 엘리베이터 앞으로 안내해 주었다. "일층에 내리면, 들어왔을 때와 반대편으로 나갈 거에요." 들어올때보다 나갈 때에 더욱 수치를 느낀다는 손님의 심리를 파 악한 결과이리라. 그는 그 상태에서도 그러한 배려에 순순히 감동했다. 여자의 말에 따라 일층에 서 내리자 그곳은 가로등 하나 없는 쓸쓸한 거리였다. 쌀쌀한 바람이 거리를 헤매다니고, 도로 옆 에 있는 쓰레기통에는 도둑고양이가 코를 박고 음식을 후벼 파고 있었다. 오늘밤은 달마저 고개 를 내밀지 않아, 주위는 어두운 장막 밑에 깔린 것 같았다. 이 어둠만이 그를 구원해 주는 유일한 손길이었다. 지금부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나는 아버지가 아니다. 남편이면서 남편이 아니다. 더구나 발기조차 하지 않는다. 즉 남자이면서 남자가 아니다. 몸을 떠는 것은 차가운 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남녀공학 나오코의 입에서 그 선언이 튀어나온 것은 설날 아침의 일이었다. 탁자 위에는 그녀가 손수 만 든 요리가 널려 있었다. 두 사람은 새해의 덕담을 나누고 정종을 나누어 마셨다. 중학교에 합격한 이후, 그녀는 홀짝홀짝 술을 마시곤 했다. 텔레비젼에서는 설날의 흥겨운 프로그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창 잘 나가는 탤런트들이 설날 의상을 입고 나와 게임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프로그 램이었다. 코미디언들은 벌칙을 받는 게임을 하고 운동선수는 퀴즈에 도전하는 등, 적어도 오늘만 은 골치 아픈 일은 잊어버리겠다는 분위기가 나라 전체를 뒤덮고 있는 것 같았다. 헤이스케도 나 오코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오랜만에 편안한 분위기에 마음껏 잠겨 있었다. " 고등학 교 입시?" 텔레비전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직 그때까지는 웃음이 얼굴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요. 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보게 해주세요. 내년이면 고등학교에 가야 하잖아요." 그 녀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겠다는 듯이 등을 쭉 폈다. "왜 시험을 보겠다는 거지? 지금 다니는 학교에는 같은 재단의 고등학교도 있으니까, 형편없는 성적을 받지 않는 한 그대로 올라갈 수 있 잖아? 어째서 시험을 보겠다고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군." "다른 고등학교에 가고 싶으니까요." "다른 고등학교? 지금 학교에 불만이 있어?" "불만이 있는게 아니라, 내 목적에 맞지 않아요." "목적이라니?" "장래의 진로라고 하는 편이 이해하기 쉬울 거예요." "특별히 가고 싶은 길이 있 어?" "예." "어떤 길이지?" 그는 심각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 텔레비전을 껐다. 그녀는 그의 눈 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분명하게 말했다. "의과대학이에요." 주위를 시끄럽게 달구던 텔레비전 소 리가 꺼진 직후라서 그런지, 그녀의 목소리는 천둥처럼 고막을 때렸다. 그는 나오코의 얼굴을 똑 바로 바라보았다. 나오코도 기싸움에서는 지지 않으려는 듯이 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두 사람의 시선에서 가벼운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의과대학이라니, 의사가 되고 싶은 거야?" "그것은 아직 모르겠지만, 어쨌든 의학을 공부하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 다니는 학교의 대학교에 는 의과대학이 없잖아요." "의과대학이라... ." 그는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머리가 멍한 탓인지, 그 녀의 말이 아직 가슴이 와닿지 않았다. 의과대학이라는 말 자체가 왠지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다. "왜 의학을 공부하고 싶은 거지?"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줄곧 생각해 왔어요. 그런데 결론이 나지 않아, 그렇다면 어떤 일에 관심이 있는지 생각해 봤어요. 그러자 대답은 뜻밖 에도 간단했어요. 나는 나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거에요. 왜 이렇게 신기한 일이 일어났는지, 살 아 있다는 것은 어떤것인지, 의식과 육체라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바로 그거예 요. 따라서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의학을 공부하는 수밖에 없잖아요." "흐음, 의식과 육 체라... ." 역시 나오코는 자기 나름대로, 자신이 놓여 있는 이상한 상황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 던 것이 틀림없다. 그것이 관심을 끌어당기는 최대의 사항이라는 것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긴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안이 벙벙해서 말이 나오지 않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대학 이야기잖아. 고등학교는 지금 그대로 올라가도 좋지 않을까?' "그렇지도 않아요." 나오코의 주장은 다음과 같 았다.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는 분명히 수준은 높지만, 그다지 노력하지 않아도 대학까지 갈 수 있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 별로 긴장감이 없다. 그런 분위기는 고등학교에 가면 더욱 심해질 것 이고, 자기 혼자 의과대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도 주위 환경에 휩쓸릴 우려가 있다. " 하지만 그것은 본인의 노력에 달려 있지 않을까? 마음만 있으면 어디에서도 열심히 공부할 수 있 잖아?" 그는 입시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자신감 없이 말했다. 자신이 학교 다니던 그때와 지 금은 입시제도가 또 달랐기 때문이다. "실은, 또 한가지가 있어요." "또 한 가지?" "고등학교는 남 녀공학에서 보내고 싶어요." 그의 입이 딱 벌어졌다.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실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 입시 준비를 하겠다는 말을 꺼냈을 때부터, 왠지 그런 생 각이 머리를 맴돌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계속해서 부정적인 의견을 말했다고 도 할 수 있다. 남녀공학 고등학교에 가고 싶다는 이유도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요컨데 의과대학을 목표로 공부하는 수험생 대부분이 남자이기 때문에, 그들을 가까이에서 의식하는 편 이 경쟁심도 불타고 자기 위치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 다. 그는 납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일이라면, 라이벌이 옆에 있는 편이 없 는 것보다는 훨씬 승부욕이 불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침전되어 있는 응어리 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오코를 같은 또래의 남자들과 똑같은 공간에 둔다는 생각만 해도, 표현할 길 없는 저항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정마로 공부 때문에 남녀공학에 가고 싶은 것인가, 그는 진심 으로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젊은 남자들과 놀고 싶어서 적당한 이유를 갖다붙이는 것은 아닌 가. 모나미의 몸을 빌려 다시 한 번 청춘을 즐기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지나친 억지라고 하면 대꾸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향학심에 불타서 하는 이야기라면, 남녀공학을 곧 이성관계에 연결시켜 버리는 그의 빈곤한 발상은 경멸의 도마 위에서 난도질 당할지도 모른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나오코에게 경멸당하는 것이었 다. "알았어. 그러면 또 일년 동안 공부에 빠져 살겠군."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유유히 술을 따랐다. 이해심 많은 아버지, 이해심 많은 남편인 척한 것이다. "내 고집만 피워서 미안해요. 하지만 지금 우리 집은, 의과대학에 갈 정도의 여유가 있잖아요." 그녀는 주저 하면서도 분명한 태도로 말을 꺼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즉시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받은 보상금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 돈은 전혀 손 대지 않고, 여러 은행에 나누어 예치해 두었다. 어떻게 사용해야 죽은 모나미의 의식과 나오코의 육체가 만족해할지, 둘이 서 차분히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대답은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최적의 사용처를 떠올린 것이다. "모나미도 틀림없이 찬성해 줄 거야." 그는 술잔에 있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지금까지 그녀의 행동에서 예상을 했지만, 고등학교 입시 공 부에서도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젓게 만들었다. 예전에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은 쉬었지만 이제는 그 휴식도 거의 없애버리고 친구집에 놀러가는 일도 없어졌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입시 공부를 한다고 하니까 아무도 놀러가자고 하는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는 편이 일일 이 거절하지 않아서 마음이 편하다고 덧붙였다. 사치스러운 마음의 여유는 잠시 뒤로 미루자고 해서, 소설책도 사지 않았다. 그 대신 엄청난 양의 참고서난 문제집이 그녀의 책장을 가득 채웠 다. 유일한 오락거리는 음악이었다. 레드 제플린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왠지 수학 문제가 잘 풀린 다고 했다. 영어 공부에는 모차르트, 사회는 카시오페아, 국어는 퀸, 물리는 차이코프스키가 좋다 고 했다. 덕분에 그녀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따라 지금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 었다. 편안한 길을 마다하고 구태여 힘든 길을 선택하고 즐거운 시기를 희생하면서 열심히 공부 하는 것, 이러한 자세와 노력이 보상받지 않을 리 없다. 그 이듬해 봄에, 나오코는 지망하는 보라 는 듯이 합격했다. 그때도 두 사람은 함께 합격자 발표를 보러 갔다. 합격자 명단에서 자기 수험 번호를 찾아낸 나오코는 중학교에 합격했을 때보다 훨씬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인젝터 공장에 발길을 들여놓았다. 에어컨이 시원한 바람을 뿜어내는 것은 사람을 위 해서가 아니라 기계를 위해서로, 그곳에는 정밀기계가 많이 놓여 있었다. 헤이스케의 모습을 발견 한 다쿠로가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의 손놀림을 멈추지 않고 인사말을 건넸다. 여전히 모자는 뒤 로 젖혀쓰고 있었다. 보안경도 회사에서 지급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사들인 패션용이었다. "뭐 하러 오셨어요? 시찰인가요?" 다쿠로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뭐 비슷한 거지. 신혼 재미에 푹 빠진 자네가 농땡이를 치지 않나해서 말이야." "쳇. 신혼, 신혼이라고 하면 서 다들 놀리기만 한단 말이야! 나 원!" 요즘 들어 계속 놀림을 당하고 있는지,다쿠로는 얼굴을 찡그리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그렇게 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앞에서 나카오가 걸어오다 가 그를 발견하고는 안경 속의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계장님께서 여긴 무슨 일인가?" "별일 은 아니야. 최근에 이쪽으로 발길이 뜸해서 잠시 들러 보려고 생각했을 뿐이지." "흐음. 그러면 커 피라도 마시겠나?" 나카오는 종이컵을 드는 시늉을 하면서 물었다. "그거 좋지." 두 사람은 자동 판매기에서 커피를 뽑아 휴게실로 들어갔다. 창 밖에는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미 잔 업시간에 들어간 것이다. "자네, 현장으로 돌아오고 싶은 게 아닌가?" 나카오의 모자 색깔은 빨간 색에서 감색으로 변해있었다. 그 모자는 예전에 헤이스케가 쓰던 것으로, 반장이라는 표시이다. "그렇지는 않지만."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자동판매기 특유의 진한 맛이 목구멍을 타고 흘 러내려갔다. 그렇게 맛이 없는 커피라도 동료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마시는 것을 그는 좋 아했다. "반장일은 어떤가? 이제 익숙해졌나?" "음, 특별한 일이 없으니까." 이번 4월에 그의 부서 는 커다란 변동이 있었다. 과(課)와 몇 개의 계(係)로 나뉘어지면서 헤이스케가 계장으로 승진한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이야기로, 처음 들었을 때는 자기의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업무 내용 도 크게 바뀌어서 지금까지 과장인 고사카가 하던 일을 그가 맡게 되고, 고사카는 몇 개의 계를 전체적으로 통솔하는 입장이 되었다. 따라서 예전처럼 위에서 지시를 받는 대로 일을 하기만 하 면 되는 것이 아니라, 몇 개의 반의 상황을 파악해서 보다 효율적으로 생산 할 수 있도록 관리하 는 관리자의 능력이 요구되었다. 문제가 발생해도 그가 직접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내용 을 파악한 다음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계획을 세우고, 그 동안 다른 생산 라인의 일정을 조절해 위에 보고 해야한다. 새로운 라인을 가동하는데 따른 현장과의 마찰을 해결하는 문제도 그의 중 요한 일이었다. 그의 책상에는 연일 보내오는 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그 자신의 서류를 만 드는 일도 종종 있었다. 밑에서 보고를 받으면 위에 전달하고, 다른 부서와 협의해 그 내용을 다 시 다른 부서에 전달하는 동안 그의 눈 앞에는 매일매일 서류가 획획 지나가곤 했다. 그것은 예 전에 생산 라인에 있었을무렵, 컨베이어 벨트 위를 제품이나 부품이 지나가는 것과는 전혀 의미 가 달랐다. 서류는 곧 정보로, 정보에는 실체가 없다. 그만큼 제품이나 부품보다 취급하기 휠씬 어렵고, 그 때문에 일을 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얻기 힘들었다. "오랫도안 현장 일을 하다 보면 출 세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기 마련이지. 아무리 출세를 해도 고작해야 반장이 아닌 가? 그보다 더 위로 올라가면 잔업수당이 없어지는 데다가 일이 완전히 바뀌니까, 골치만 썩히게 되지 않는가?" "그건 그래." 헤이스케는 진심을 담아 솔직하게 말했다. 나카오도 이해한다는 듯이 종이컵을 바라보면서 쓸쓸하게 말했다. "하지만 어쩔수 없는 일이겠지. 회사는 인생의 중요한 게 임을 하는 데니까. 회사에서 출세를 한다는 것은 나이를 먹는다는 것과 똑같은 뜻이 아닌가? 출 세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나이를 먹고 싶지 않다는 것과 마찬가질세." "그럴까?" "사람은 누구나, 언제까지 어린애로 있고 싶어하지, 바보짓도 하고싶고,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 네. 이제 아버지가 됐으니까 정신 차려서 일해야 한다든지, 이제 할아버지가 됐으니까 차분히 있 어야 한다든지 하면서 자기들의 잣대로 보려고 하지. 아니야! 나는 아버지나 할아버지이기 이전 에, 한 사람의 남자일 뿐이라구! 그렇게 소리쳐보아도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는다네. 아들이 태어 나면 아버지가 되고 손자가 태어나면 할아버지가 되니까. 그 사실에서 도망칠 수는 없지.그렇다면 어떤 아버지가 돼야 하는지, 어떤 할아버지가 돼야 하는지 생각하는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는 조용하게 미소지으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내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주제넘지만 말이야." "자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불쑥 생각났을 뿐이네. 장남 으로서 한마디 했을 뿐이지." "장남?" "그래. 반장은 장남, 계장은 아버지, 과장은 할아버지. 그보 다 위쪽은 뭔지 잘 모르니까 부처님 정도라고 해둘까?" 나카오는 다 마신 종이컵을 꾸깃꾸깃하더 니 휴지통에 내던졌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일곱 시가 다 되어 있었다. 그러나 창문에서는 불빛이 새어나오지 않았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는 자신을 느끼면서 현관문을 열었다. 실내의 공기 는 음습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곧장 거실에 있는 에어컨을 작동시켰다. 그 는 옷을 갈아입은 뒤 텔레비전에서 하는 야구중계를 보기 시작했다. 자이언츠 팀과 야쿠르트 팀 의 시합으로, 그가 텔레비전을 켜자마자 야쿠르트 선수가 홈런을 쳤다. 헤이스케는 탁자 끝을 치 며 혀를 찼다. 그러나 시합 내용이 머리에 들어온 것은 그때가 전부였다. 그 다음에는 텔레비전 화면보다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는 일이 훨씬 많아졌다. 시계바늘은 일곱 시 반을 지나고 있는 데, 나오코는 아무런 연락도 없이 아직 집에 오지 않은 것이다.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일까. 그토록 원하던 고등학교에 합격하여, 그녀는 올해 새봄부터 고등학생으로서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그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나오코가 테니스부에 들어간 것이다. 의과대학 을 목표로 공부할 예정이기 때문에, 당연히 서클활동은 하지 않을 것어라고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러나 테니스부 연습으로 인해 요즘 들어 귀가가 늦어지곤 했다. 여덟 시가 넘는 일도 있었다. 실은 오늘도 정시에 퇴근한 다음 인젝터 공장에 들른 것은, 곧바로 집에 가서 이제나저제나 조바 심 내며 나오코를 기다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눈길은 또다시 시계로 향했다. 일곱 시 오십오 분.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나오코는 테니스부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하지 않 았다. 그래서 어떤 부원이 있는지, 어떤 연습을 하는지, 헤이스케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부원들이 많다는 것만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언젠가 나오코가 명부를 정리해야 한다 면서 수십 명이나 되는 이름이 기입된 리포트 용지를 가지고 돌아온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절반 이상이 남학생이라는 것이, 날카로운 얼음 조각처럼 그의 마음을 파고 들었다. 그는 짧은 테 니스복을 입고 라켓을 흔드는 나오코의 모습을 떠올렸다. 가늘고 긴 다리에 젊은 남자들의 시선 이 박힌다고 생각하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나오코의 몸은, 즉 모나미의 몸은 최근 들어 갑자기 여자답고 성숙해진 것 같았다. 여덟 시 정각이 되어서야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다 녀 왔어요, 하는 나오코의 활기찬 목소리. 헤이스케는 벌떡 일어나서 현관문까지 나갔다. 어깨에 커다란 가방을 메고 테니스 라켓을 손에 든 나오코가 신발을 벗다가 고개를 들었다. 라켓을 들고 있지 않은 손에는 슈퍼마켓 봉투가 들려 있었다. "아니? 아빠! 뭐 하러 여기까지 나왔어요?" "꽤 늦었구나." 그의 말에는 불쾌감이 깊이 박혀 있었다. 영리한 나오코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런가요?" 그녀는 현관입구에 가방과 라켓을 놓고, 슈퍼마켓 봉투만을 들고 거실로 들 어가서 발을 쭉 뻗고 앉아 허벅지와 종아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 피곤하다! 오늘 훈련이 너 무 힘들었거든요. 미안하지만 십 분만 기다려요. 그런 다음 저녁을 준비할게요." 곧게 뻗은 다리 가, 그의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그는 눈길을 피하면서 나오코 옆에 앉았다. "벌써 여덟 시야. 요 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전에는 아홉 시가 넘어서 저녁을 먹었잖아요. 아빠가 늦게 들어왔 으니까요." "저녁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아직 어린 고등학생이 이렇게 늦게 다녀도 돼? 내가 보기 엔 정상은 아니야." "하지만 테니스 연습을 해야잖아요. 1학년이니까 뒷정리도 해야 하고, 그런 다 음 슈퍼마켓이 들러 찬거리를 사와야 하니까 아무래도 이 정도 시간은 된다구요." "그렇다고 매일 이렇게 늦게 와야 한단 말이야? 도대체 무슨 서클이 그래?' "그냥 평범한 서클이에요." 그녀는 더 이상 대꾸하기 싫다는 듯이 슈퍼마켓 봉투를 들고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 싱크대에서 손을 씻은 다음, 물을 넣은 냄비를 가스 레인지 위에 올려놓았다. "의과대학을 간다고 했으면서, 그것은 포 기 했나보지?" 그는 나오코의 등을 향해 이죽거렸다. "무슨 말씀이세요?" "시험을 안 볼거냐구? 의과대학에 가기 위해 그 고등학교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나?" "물론 의과대학에 갈 거예요." 그녀 는 생선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놀기만 해서 어떻게 의과대학에 가겠다 는 거야?" 그의 말투에는 계속 가시가 박혀 있었다. 그녀는 문득 칼질 하던 손을 멈추더니 몸의 방향을 바꾸고는 조리대에 기대고 섰다.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부엌칼이 들려 있었다. "입시에는 머리만 중요한 게 아니라 체력도 중요해요. 나처럼 남자들과 경쟁해야 하는 경우에는 하는 경우 에는 특히 더 그렇죠. 게다가 아빠는 모르겠지만, 우리 고등학교에서는 서클 활동을 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는 비율이 훨씬 높아요. 왜 그런지 아세요?" 물론 그 가 알 리 없었다. 나오코는 부엌칼을 휘두르면서 말을 이었다. "집중력이 달라서 그래요. 서클 활 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당연히 입시 준비를 빨리 하겠지만, 시간이 있다고 생각해서 안심하는지 도중에 해이해지는 일이 많지요. 하지만 서클 활동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뒤쳐졌다고 생각하고 입시 당일날까지 딴 짓을 하지 않아요. 골인 지점까지 맹렬한 속도로 달려가는 거죠.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는 체력도 있고요. 따라서 효율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서클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게 마음대로 되겠어?" "적어도 서클 활동이 대학 입시에 방해가 된다는 것만은 인정할 수 없어요. 안 그래요?" 나오코는 다시 도마를 향하더니 생선을 손질했다. 그 뒷 모습은 젊은 시절의 나오코와 판박이처럼 똑같았다. 부엌칼을 들고 요리할 때 등이 조금 구부러지고 오 른쪽 어깨가 올라가는 것이다. "지금 말을 듣자니, 마치 입시 공부를 위해서 테니스부에 들어간 것 같군." "입시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런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에요." "사실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야?" "다른 목적이라뇨?" "남자 녀석들이 실실 웃으면서 잘 해주지까 기고만장한 것이 아니냐구?" 그녀의 손길이 또다시 멈추었다. 그녀는 가스 레인지의 불꽃을 줄이고 나서 그 를 돌아보았다. "기가 막히군요.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죠? 너무 어이가 없는 말이라서 대꾸할 가 치도 없어요." "뭐가 어이가 없지? 남자들과 공놀이를 하는 것은 사실이잖아?" "미리 말해 두겠지 만, 우리 남자 선배들은 보통 혹독한 것이 아니에요. 여자라고 해서 살살 봐주지 않는다구요. 분 명히 아빠가 말하는 이유로 들어온 애들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 애들은 혹독한 연습에 견디지 못 해 옛날옛적에 그만 두었다구요. 대학의 동아리와 혼동하지 마세요. 우리 학교는 어엿한 운동부라 서 시합에까지 나가니까요." "운동부든 뭐든, 남자가 여자에 대해서 흑심을 품지 않을 리가 없잖 아? 기회가 있으면 어떻게 해보려고 할 것이 뻔하다구."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죠?" 그녀는 고개를 한 번 흔들더니, 봉투에 손을 넣어 가다랭이포를 한 움큼 움켜지고 물이 끓는 냄비에 집어넣었다. 그 손길에서 억제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원래 남자라 는 것은 여자를 보면 그런 생각밖에 하지 않는다구. 그걸 알고 있어?" 그러나 그의 말에 나오코 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꼼짝도 하지 않는 그녀의 등이, 대답할 뜻이 없다는 것을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옆에 있던 신문을 펼쳐들었다. 여전히 땅값이 상승한다는 타이틀이 커다랗게 실려 있었다. 하지만 그 기사를 읽지는 않았다. 가슴속에서 싸목싸목 자기혐오가 퍼져 나갔다. 그 는 입에서 튀어나온 말 만큼 나오코에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아니, 분노의 감정은 손톱만큼도 없 다는 것이 진실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말이 옳다는 것도 충분히 납득이 되었다. 귀가시간이 늦어 지는 주된 원인은 서클 활동이 아니라, 실은 시장에 들렀다 오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또한 입시 공부에 돌입한 상황에서 서클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강인한 정신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녀는 집에 돌아와도 보통 고등학생처럼 피곤한 몸을 침대에 내던질 수 없다. 누군가가 저녁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흠뻑 물 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있어도 집 안 살림에서 도망칠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서클 활동을 그만두지 않는 것은, 그것이 지금 해야 할 일이라는 강인한 신념으로 뭉쳐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 나오코를 책망 하다니, 그것은 무엇때문일까? 자신은 추악한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젊음을 손에 넣은 나오코 를 질투하고 있다. 그런 나오코와 청춘을 즐길 수 있는 젊은 남자들을 질투하고 있다. 동시에 나 오코에게 연애감정이나 육욕(肉慾)을 가질 수 없는 자신의 입장을 저주하고 있다. 그날 밤의 식사 는, 나오코와 결혼한 이후 최악의 만찬이었다. 두 사람 모두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다만 묵 묵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예전에 몇 번인가 부부싸움을 했을 때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어색함 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것이 분노가 아니라 슬픔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화를 내고 싶어도 화 를 낼 수 없었다. 그 대신 나오코와 자기 사이에 놓여 있는, 영원히 메울 길 없는 늪의 존재를 인 식하고 견딜 수 없는 서글픔을 느꼈다. 그녀도 그와 똑같은 생각을 하리라는 것은, 몸에서 발산되 는 분위기로 알 수 있었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런 때만이 부부만이 가질 수 있는 이심전심 이 작용하는 것이었다. 여름방학으로 접어든 다음에도, 나오코는 테니스를 치기 위해 학교에 갔다. 그러나 연습은 낮 에만 했기 때문에, 그가 집에 들어갔을 때는 대부분 그녀는 저녁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가끔은 저녁이 늦어지는 일도 있었는데, 그것은 저녁 반찬거리를 깜빡해서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으로 달려나갔을 때 정도였다. 또한 토요일과 일요일은 연습이 없어서, 그도 혼자 있는 적적함을 맛보 지 않아도 되었다. 자신이 집에 있을 때는 항상 그녀가 있었기 때문에 불만이 생길 리가 없다. 세 탁기 옆에 있는 바구니에 매일 테니스복이 쌓이는 것이나 날이 갈수록 얼굴과 손발이 초콜릿처 럼 검게 그을리는 것은 개의치 않았지만, 테니스 이야기에서만은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그녀에게 서 서클 이야기를 들으면 당연히 남학생들의 존재를 떠올리게 되고, 그러면 어찌할 수 없이 불쾌 감의 늪에 빠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다시 질투를 못 이겨 불만을 터트릴 것이고, 두 사람 사이에는 또다시 납덩이처럼 무거운 공기가 흐를 것이다. 일단 그렇게 되면 스스 러없이 이야기 할 수 있을 때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난번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조심을 하는 것은 나오코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녀는 결코 테니스에 대해서 화 제로 삼지 않았고, 예전에는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테니스 시합도 잘 보았지만 그와 말다툼을 한 이후에는 일부러 고개를 돌리는 것 같았다. 탁자 위에 테니스부의 연습 일정표가 놓여 있는 일도, 거실에서 라켓이 굴러 다니는 일도 없어졌다. 때마침 두 사람의 관계 회복을 위해 다행스러 운 일이 있었다. 음력 8월 15일을 전후해서 추석 연휴가 있는데, 마침 그동안만은 테니스부도 연 습에서 쉰다는 것이었다. 그는 오랜만에 나가노에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나가노란 나오코의 친정집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고가 일어난 이후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다. 사고 일주기를 기념해 위령제를 지내느라 그 근처까지 간 적은 있지만, 그때도 나오코의 친정 집에는 들르지 않았던 것 이다. 중학교 입시와 고등학교 입시 때문에 공부하느라 가지 않았다는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그 러나 가장 큰 이유는, 나오코가 친정 아버지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연히 모 나미의 정신이 나오코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녀를 모나미로 대할 것이다. 손녀를 보면서 딸을 떠올리고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당신의 딸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사 실을 이야기할 수 없다. 연로한 아버지를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빠뜨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러나 나오코는 아버지를 보면서 언제까지나 말하지 않고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고 했다. 예 전에 출장을로 삿포로에 갔을 때 언니인 요코가 며칠 동안 집에 와 있었지만, 그때는 아무런 문 제도 없었다. 그녀는 언니를 속이는 것에 쾌감마저 느낀 것 같았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도 그런 기 분으로 대할 수 있을지, 도저히 자신이 없다는 것이 나오코의 주장이었다. "언제까지나 아버님을 안 보고 살 수는 없잖아? 이대로 영원히 친정집과 교류를 끊을 수는 없어. 당신은 나오코가 아니 라 모나미로서 그들을 대해야 한다구." 그녀는 꽤 오랫동안 생각에 잠기는 듯 했지만, 어느 날 저 녁을 먹으면서 불쑥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추석 연휴 때 나가노에 가요." 추석 때 나오코의 친 정집에 가는 것은 10년 만의 일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지독한 교통정체에 시달리면서 그들은 밤 늦게야 녹초가 되어 간신히 도착한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모두 저녁을 먹지 않고 기다려 주었 다. 나오코의 아버지 사부로는 전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쭈그러든 것 같았다. 주름밖에 보이지 않 는 바싹 여윈 목은, 마치 털 뽑힌 닭을 연상시켰다. 그래도 사보로는 얼굴이 쪼글쪼글해질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모나미를 만난 것이 기뻐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아아, 이제 완전히 어른이 다 됐구나. 키가 이렇게 많이 크다니, 이 할아버지보다 훨씬 더 크구나. 벌써 고등학생이 됐니? 그래그래, 정말 잘 왔다!" 애처로운 눈길로 손녀를 바라보면서 사부로는 어떻게든 기쁨과 놀라움, 그리움을 표현하고 싶은지 끊임없이 주저리주저리 늘어 놓았다. 그가 모나미의 모습을 통 해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는지 주위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말을 입에 담지는 않 았다. 그는 나오코가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안절부절못했다.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면 어떡하나. 그때는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그러나 다행스럽게 그런 일은 없고, 그녀는 할아버지를 만난 손녀 의 역할을 멋지게 연기했다. 도중에 헤이스케를 힐끔 쳐다보고,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윙 크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다만, 처음에 아무 일이 없다고 해서 모든 것이 순조롭다고는 할 수 없다. 그녀의 마음이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타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것이 무너진 것은 모두 함께 늦은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 그 날의 요리는 사부로의 큰딸인 요코와 사위인 도미오가 장만해 주었다. 메밀국수 가게를 이어받은 만큼, 두 사람의 요리 솜씨는 어디에서도 맛 볼 수 없을 정도로 입에 착착 감겼다. 그들은 맛뿐만 아니라 시각적인 효과도 훌륭히 연출해 내 서, 어설픈 솜씨로는 도저히 흉내도 내지 못할 만큼 그날의 요리는 호화롭고 섬세했다. 이야기꽃 을 피우며 식사하는 도중에, 잠시 사부로가 자리를 떴다. 처음에는 화장실에 갔다고 생각했지만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모두가 궁금해하고 있을 때 나타난 사부로의 손에는메밀국수 쟁반이 들 려 있었다. "그게 뭐예요?" 사부로는 나오코를 바라보며 입이 귀에 걸릴 듯이 싱글벙글 웃었다. "아주 오래전에 모나미와 약속했지. 설마 이 할아버지와 약속한 것을 잊지 않았겠지?" 나오코는 불안한 눈길로 헤이스케를 흘깃 쳐다보았다. "잊어버렸니? 이 할아버지가 만든 메밀국수를 먹어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니?" "아아!" 나오코의 입이 조금 벌어지며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퍼져 나 갔다. "모나미는 할아버지가 만든 메밀국수를 먹어본 적이 없었나?" 도미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엉보았다. "한 번도 없었다네. 그렇지?" 사부로가 동의를 구하자 나오코는 자그맣게 고개를 끄 덕였다. "원래 그런 법이에요. 집에서 장사하는 음식은 잘 먹지 않으니까요." 요코가 사부로를 흘 겨보며 쿡쿡거리고 웃었다. "나는 언제든지 먹여주고 싶었지. 하지만 나오코가 메밀국수 따위는 질렸다고 하면서 먹지 않으니까, 그만 모나미도 못 먹었지 뭐냐?" 나가노에 도착한 이후, 나오코 의 이름이 나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모두 피해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순간 나오코가 움찔하는 것을, 헤이스케는 놓치지 않았다. "자, 어쨌든 먹어보렴. 모나미를 위해 서 이 할아버지가 직접 만들었으니까. 이보게, 자네도 많이 먹게." 사부로는 나오코와 헤이스케 앞에 메밀국수와 장국을 내밀었다. "아버지. 오늘 하루 종일 가게에서 꾸물대더니, 이걸 만드느라 그랬군요." 요코가 말했다. 헤이스케는 사양하지 않고 순순히 먹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그 자신 도 사부로의 메밀국수 맛을 본 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메밀국수는 찰기가 있어서 치아에 씹 히는 감촉이 좋고, 메밀국수 특유의 은은한 향기가 입맛을 돌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탄 성을 자아냈다. "정말 꿀맛인데요!" 사부로는 기분이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 미소를 지었다. 그리 고 그 미소 띤 얼굴을 그대로 나오코에게 향했다. "모나미는 어떠니?" 그 순간 사부로의 얼굴에 낭패스런 빛이 퍼져 나갔다. 나오코가 메밀국수를 장국에 넣고 젓가락을 든 채 고개를 숙이고 흐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식탁과 바닥을 적셨다. 왜 그러니, 고추냉이 를 너무 많이 넣었니, 하는 농담을 할 만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말을 잃고 멍하니 나 오코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그 분위기를 수습할 사람은 헤이스케밖에 없었다. 나오코는 미소 를 담고, 옆에 놓인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얘야. 이 할아버지가 뭔가 잘못한 거냐?" 사부로가 미안한 듯이, 이미 숱이 적어진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에요. 그냥 엄마 생각이 나서요... .엄마는 할아버지 메밀 국수를 좋아한다고 했거든요. 이것을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이 터 져나왔어요." 다음에는 요코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사부로는 눈물을 참는 것 같았지만,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식사를 마친 다음 헤이스케와 나오코는 잠을 자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요코와 도미오가 이불 두 채를 가지고 와서 나란히 깔아 주었다. 그들이 밖으로 나간 다음 나오코가 불쑥 입을 열었다. "완전히 실패예요." "아까 울었던 것 말이야?" "예." 나오코는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기 전까지는 너무나 태연했어요.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죠. 아빠가 자신을 할아버지라고 말해도 웃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거든요. 하지만 그 메밀국수... ." 거기까지 말하고 나오코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꽉 쥐었다. "그 메밀국수는 아빠의 메밀국수였어요. 어린 시절부터 지겹도록 먹어온, 입에 익숙한 맛이었지요. 그런 생각을 하자 주마등처럼 스치고, 문득 정신을 차리자 눈물이 흐르고 있었어요. 어떻게든 눈물을 그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어요." 뺨을 타고 흘러내린 한 줄기 눈물이 턱에 도착 하더니 물방울이 되어 매달렸다. 그는 나오코 옆으로 가서 떨리는 어깨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 녀의 눈물로 셔츠의 가슴 부분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그의 가슴팍에서 나오코가 다시 입을 열 었다. "아빠 빨리 도쿄로 돌아가요. 역시 여기는, 나에게는 너무 괴로운 곳이에요." "그러지." 한순 간, 그녀에게는 '아빠'라고 부르는 상대가 두 명이나 있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치고 지나갔다. 다음 날에는 여기저기에서 친척들이 몰려들었다. 명절이라고 몰려든 것이다. 헤이스케와 나오코는 인사 를 하는 것만으로 완전히 진이 빠져 버렸다. 사람들은 모두 나오코를 보고 놀라움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머! 나오코와 똑같이 닮았네!" 그녀를 특별히 귀여워했던 숙모는, 마치 나오코가 살아 돌아온 것 같다고 눈물을 머금었다. 다같이 성묘를 갔다 온 뒤에 어젯밤과 똑같은 자리에서 식사 를 했다. "모나미는 남자친구가 있니?" 펑퍼짐한 몸매에 천진난만하게 잘 웃는 나오코의 사촌이 었다. "남자친구는 없어요." 나오코가 고등학생같은 말투로 대답했다. "어머, 이상한데! 모나미처럼 예쁜 여자애를 남자애들이 그냥 놔둘 리가 없는데." "아직 어리니까요." 헤이스케의 말에 나오코 의 숙부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원래 아버지뿐이라네. 고등학생 정도가 되면 남자친구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사부로 형님도, 나오코를 남자와는 인연이 없는 아이 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어떤가? 재빨리 자기 짝을 찾아내서 결혼하지 않았나? 피로연을 할 때, 형님은 대기실에서 혼자 울었다네." "아니, 이 녀석! 말도 안되는 소리! 울긴 누가 울었다고 그 래?" 발끈하는 모습이 마치 어린애 같았다. "울었잖아요. 사위를 한 대 때려주고 싶다면서요." "예?" 그는 자신도 모르게 뺨에 손을 댔다. "언제 그랬어? 그렇게 늙어서 아직도 거짓말을 하냐?" "그만들 하세요." 같이 늙어가는 형제의 장난스런 말다툼을, 주위에 있는 친척들이 웃으면서 말렸 다. 그런 다음에도 사부로는 연신 투덜거렸다. 친척들은 여덟 시가 지나서야 자기 집으로 돌아갔 다. 술을 마신 사람은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떠나고, 개중에는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집이 가까운 사람도 있었다. 나오코는 샤워를 마치고 이불 위에서 소설책을 뒤적거리는가 싶더니, 문득 고개를 돌리자 어느 사이엔가 건강한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어있었다. 역시 피곤했던 것 같았다. 그는 아홉 시 반이 넘도록 텔레비전을 본 다음 욕실로 들어갔다. 그 집에는 아직 나무욕조를 사 용하는데, 끝에 머리를 올려놓으면 두 다리를 마음껏 뻗을 수 있을 정도로 널찍했다. 그는 맨 처 음 그 집에 왔을 때를 떠올렸다. 이렇게 욕조에 잠겨 있을 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 것이다. 그리고 창문이 살짝 열리더니 나오코가 삐죽이 얼굴을 내밀었다. "물은 따뜻해요?" "딱 좋아." "그렇다면 됐어요. 미지근하면 말하세요. 장작을 더 땔 테니까요." "뭐야? 여기는 아직 장작을 때 고 있어?" "그래요. 골동품 전시장에나 있어야 할 목욕탕이죠?" 나오코는 싱긋 웃으면서 창문을 닫았다. 머리와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욕조에 들어갔더니 물이 조금 미지근해져 있었다. 그래서 밖 에서 기다리고 있을 나오코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장작을 더 때주지 않겠어?" 그러나 대답은 없다. 이봐! 이봐! 몇 번인가 소리를 내어 불렀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하는 수 없다고 고개를 돌 렸을 때, 그것이 눈에 들어왔다. 목욕물을 끓이는 스위치가 벽에 붙어 있었던 것이다. 장작을 때 다니, 당치도 않다! 그곳은 일반적인 가스 욕조였던 것이다. 나오코에게 멋지게 한방 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도 헤이스케를 속일 마음은 없었으리라. 잠깐 생각해 보면 농담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낡은 앨범을 뒤적거리듯이 추억을 떠올리며 샤워기를 사용해서 머리를 감았다. 그때는 욕탕에서 나온 다음에도 나오코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오코도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창밖을 향해 소리치는 것을, 그녀가 웃음을 참으면서 듣고 있었는지 어 떤지는 지금도 알 수 없었다. 욕조에서 나와 방으로 가는데 안방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자 넨가?" 장지문을 열어 보니 사부로가 혼자 위스키를 마시고 있는 참이었다. "또 드시는 거예요?" "자기 전에 반주로 조금 마시는 걸세. 어떤가? 한잔 하지 않겠나?" "좋습니다." 그는 사부로 건너 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위스키에 얼음을 넣어 줄까?" "예." 사부로는 그를 위해 위스키잔에 얼음을 넣기 시작했다. 얼음통이나 예쁜 술잔이 준비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애당초 그와 마실 생각 이었던 것 같다. 저녁에 먹던 요리는 어디에도 없고, 그 대신 간단한 안주들이 접시에 담겨 있었 다. "우선은 건배!" "감사합니다." 술잔을 가볍게 부딪치고 나서, 헤이스케는 장인이 얼음을 섞어 만들어 준 위스키를 들었다. 너무 진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목욕을 마치고 마시기에는 딱 좋은 정 도였다. 요리사는 이런 것에도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구나! 그는 절로 감탄했다. "이번에 정말 잘 왔네. 다들 기뻐하고 있다네." 사부로는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아닙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그는 당황해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와 나오코는 내일 도쿄로 돌아가기로 되어 있었고, 그것은 이미 사부로에게 말해 두었다. "그나저나 잠시 보지 못하는 사이에 모나미는 어른 이 다 됐더군. 이제 걱정할 것이 없겠어. 어머니가 없어서 걱정했네만 자네 혼자서 그렇게까지 잘 키워주다니, 정말 고맙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죽은 나오코를 대신해서 다 시 한 번 고맙다고 말하고 싶네." "제가 특별히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오... 모나미가 알아 서 다 했으니까요." "아닐세. 자네 고생은 누구보다도 내가 알지. 회사 일만 해도 바쁠 텐데 정말 대단하이." 안주를 씹으면서 연신 '대단하다'고 되뇌이는 사부로의 말에, 그는 조금 어색해직 시작 했다. "하지만 남자 혼자 살아가기에는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도 많을 텐데." "아니. 그렇지 않습 니다. 나... 모나미가 잘 해주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모나미도 앞으로는 힘이 들 것이 아닌가? 조 금 전에도 언뜻 들었지만, 의과대학에 가고 싶다던데. 그러면 공부에 시달리느라 집안일도 제대로 못할 것이 아닌가?" "예. 하긴 그렇겠지요." 그는 술잔 속에 있는 옅은 호박색 액체를 바라보았다. 사부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조금씩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보게, 우리 딸에게 의리 를 지킬 것은 없네." 그는 장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역시 그 말을 하려고 하는가. "자네 는 아직 젊어. 내 나이가 되려면 수십 년이나 남아 있지. 그 많은 세월을 어떻게 혼자 살아가려고 하는가? 만약에 상대만 있으면 누구에게도 신경 쓸 필요 없이 재혼하면 되네. 그때는 나도 기꺼 이 찬성하지." "감사합니다만,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사부로는 연신 고개를 가 로저으며 고집을 피웠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시간은 말 그대로 쏜살같이 지나가고 만다네. 지금 자네를 젊다고는 했지만, 사실은 자네 나이도 만만치 가 않으이. 이제 슬슬 진지하게 생각해야 될 때가 아닌가?" "예에... ." 헤이스케는 웃음으로 얼버 무리려고 했다. "물론, 억지로 가라는 건 아니네만." 그의 술잔이 빈 것을 보고, 사부로는 즉시 한 잔 더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면 딱 한 잔만 더 하겠습니다." 방으로 돌아올 무렵에는 몸의 열기 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에어컨을 틀어놓은 것도 아닌데, 역시 북쪽 지방은 다르다는 것을 실감 했다. 그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때 나오코가 몸을 뒤척였다. 눈은 감고 있지 않았다. "아빠와 얘기를 나누는 것 같더군요." "음, 그래." "재혼에 대해서 말씀하셨죠?" "들 었어?" "우리 아빠, 원래 목소리가 크잖아요." 이 경우의 아빠는 사부로를 가리키는 말이리라. 그 는 왠지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곤란해서 혼났어." "재혼에 대해서 생각한 적은 있어요?" 나 오코의 말에서 오랫동안 고뇌한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물론 막연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지. 주 위에서 하도 난리를 피우니까. 그러나 구체적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어. 한순간 모나미의 초등하교 담임이었던 다에코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즉시 사라졌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 요?" "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나에게는 나오코가 있으니까." 그러자 그녀는 눈길을 내리깔고, 반 대편으로 몸을 뒤척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그런데, 그래도 괜찮겠어요?" "물론 괜찮지." 그는 그녀의 연약한 등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 이후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래, 괜찮다.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나에게는 나오코가 있다. 다 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아도, 나에게만 보이는 아내가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충분히 행복하 다. 어느 사이엔가 의식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괜찮다는 생각을 껴안은 채 잠의 세계로 여 행을 떠났다. 다음날 아침, 헤이스케와 나오코는 일찍부터 서둘러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시골에 가면 항상 그렇듯이 이것저것 챙겨 주어서 그것만으로도 트렁크가 가득 찼고, 뒷좌석에도 종이봉 투나 상자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아버지 말씀 잘 들으렴. 그리고 설날에 또 와야 한다." 조수석 창문 밖에서 사부로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 또 올게요. 할아버지도 건강하세요." "그래 그래. 고맙다, 고마워." 사부로는 눈이 더욱 작아져서 주름에 파묻할 것 같았다. 아스팔트에 반사 되는 햇살이, 오늘도 뜨거운 하루가 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귀경길 정체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어젯밤의 텔레비전을 통해 알고 있다. 그는 미리 각오를 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조금 멀어지자 나오코가 입을 열었다. "잠시만 세워 주세요." "왜 그래?" 그는 도로 옆쪽에 차를 세웠 다. 나오코는 뒤를 돌아보고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이제 두 번 다시 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 니 슬픔이 밀려와서요." "왜? 오고 싶으면 오면 되잖아?"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 시는 오지 않을 거예요. 나에게는 그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니까요. 그들에게 있어서 나 는 이미 죽은 사람으로, 그들의 세계는 나 없이 형성되어 있어요. 그런 곳에 가면 나는 유령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을 수 밖에 없잖아요." 눈이 촉촉이 젖어들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참지 못하고 나오코는 손수건을 꺼냈다. "미안해요. 오늘 하루만 더 울게 해줘요." 그는 아무말 없이 차를 출발 시켰다. 나만이 이 여자의 진정한 가족이다. 이 세상에는 우리 둘 밖에 없다. 이 여자를 지켜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질투 전화가 걸려온 것은 일요일 저녁때의 일이었다. 나오코는 저녁 찬거리를 사러 나가고, 헤이스 케는 좁다란 정원 손질은 마치고 문턱에 걸터앉아 멍하니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스름 하게 저물어가는 저녁 햇살이 서쪽 하늘을 검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한가로운 가을날이었다. 내일부터는 또 다시 상쾌한 마음으로 일에 착수해야지. 그는 오후의 평화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런 만큼, 날카롭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는 불길한 예감을 재촉했다. 그의 집에서는 여간해서 전하벨이 울리지 않는다. 나오코가 나오코로서 살았던 시절은 나가노에 있는 처갓집이 나 그녀의 친구들에게서 자주 전화가 걸려왔지만, 지금은 전화벨이 울리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또 부동산업자에게서 걸려온 전화인가. 부동산에 투자하지 않겠느냐는 전화가 가끔 걸려오는 것 이다. 그는 거실 서랍장 위에 놓여 있는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예, 헤이스케입니다." 상대방은 즉 시 말을 하지 않았다. 극히 짧은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는 것을 확신 했다. 어떤 물리적인 사정으로 인해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목소리를 듣고서 당황했기 때 문이리라. 잠시 후,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저... 모나미, 집에 있나요?" 같은 학교에 다니는 남학생일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맑게 갠 마음에 검은 구름이 걸리는 것을 느 낄 수 있었다. "지금 없는데." 그의 목소리에서 노골적인 불쾌함이 담겨 있었다. 절반은 무의식, 절반은 의식적으로 낸 목소리였다. "그러세요?" 상대 남학생은 조금 위축된 것 같았다. 이대로 전 화를 끊으려고 하면, 남의 집에 전화를 걸고 이름도 밝히지 않는 무례한 녀석이라고 호통을 쳐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상대방도 그렇게 상식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저는 소마라고 하는데요, 모 나미가 돌아오면 전화가 왔었다고 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소마? 모나미와는 어떻게 아나?" "같은 테니스부 서클에 있습니다." 또 테니스부인가, 그의 입안에서 쓰디쓴 즙이 퍼져 나갔다. "급 한 일인가?" "아닙니다. 급한 일은 아닌데요." "하지만 일요일에 전화를 건 것을 보면, 무슨 용건 이 있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인지 말하면 모나미에게 전해 주겠네." "저, 조금 복잡한 일이라서 나중에 직접 말하겠습니다. 어쨋든 전화가 왔었다는 것만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흐음." "그러 면 실례하겠습니다." 소마라는 이름의 남학생은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의 가슴에는 폭발할 것 같은 덩어리가 생겼다. 그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나오코는 조금 전에 나가서, 평소대로라면 한 시간 내에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가라앉히기 위해 텔레비 전을 켰다. 화면에서는 뉴스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내용인지 조금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 고, 다만 멍하니 화면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는 텔레비전을 그대로 켜둔 채 이층으로 올라가서, 나오코의 방문을 살그머니 열고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방은 깨끗이 정리되어 있고, 역학 관계 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었는지 책상 위에는 물리 참고서가 펼쳐져 있었다. 경사면 위에 놓여진 물 체를 압박하는 힘. 마찰계수. 작용과 반작용. 몇 가지 용어는 그의 머릿속에도 머물러 있는 것이 었다. 책상 안쪽에는 파일과 노트, 사전 종류가 키에 맞추어 정갈하게 꽂혀 있었다. 파일은 전부 다섯 권으로, 빨강, 파랑, 노랑, 초록, 오렌지색이었다. 등에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지만 색깔에 따라서 용도가 구분되어 있는 것이리라. 그는 예전에 옆에 파일을 놓고, 테니스부 친구와 전화로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마 그 파일에 테니스부에 관한 서류가 들어 있는 것이리라. 틀 림없이 빨강이나 오렌지색 파일이었다. 꺼림칙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혹을 물리칠 정도는 아 니었다. 그는 두 권의 파일을 꺼내들었다. 빨간색 파일은 요리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잡지나 신 문에서 오려낸 조각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예상한 대로 오렌지색 파일이 테니스부에 관 련된 것이었다. 가을 정기전 일정이라는 문구가 적힌 복사용지가 가장 앞에 철해져 있었다. 그는 책장을 들추다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손길을 멈추었다. 부원들의 이름과 연락처가 씌어진 종이가 철해져 있었다. 분명히 소마라고 했었지. 헤이스케는 명단을 손가락으로 짚어 내려가며 그의 이름 을 찾았다. 이윽고 소마 하루키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2학년 이었다. 책상 서랍을 열자 문구류 들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는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메모지를 한 장 떼어내서, 그곳에 소 마 하루키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 놓았다. 특별한 목적은 없이, 다만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 는 메모지를 스웨터 주머니에 넣고 파일을 제자리에 넣어 두었다. 나오코에게 전화를 건 남자에 관해서 조금이라도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는 만족감이 불쾌감을 뒤쪽으로 밀어 놓았다. 방에서 나와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으려고 했을 때, 나오코가 계단을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계 단 중간에서 멈추어 서서 이상한 표정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내 방에 무슨 볼일이라도 있었나요?" 말에서 날카로운 가시가 느껴졌다. 방에 들어간 것이 뭐가 나쁘냐는 반발 감과, 사생활을 침해했다는 죄의식이 뒤섞였다. 그것은 부자연스러운 거짓말이 되어 그의 입을 뚫 고 나왔다. "아니야. 잠시 필요한 것이 있었는데, 어디 있는지 몰라서 그만두었어." "뭐가 필요했 는데요?" "그게 저... 맞아. 책이야." "책? 무슨 책이요?" "그게...나쓰메 소세키가 쓴책." 그는 너무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한 것을 후회했다. 나오코가 어떠한 작가의 책을 읽고 있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 읽었을 만한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이라고 말한 것이었다. "고양이 요?" "고양이라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냐구요. 내가 가지고 있는 소세키의 책은 그것뿐이에 요." "아아, 그래. 바로 그 책이야.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 책 이야기가 나오지 뭐야? 그래서 한 번 읽어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지." "흐음, 신기한 일도 다 있네요." 그는 쾅쾅 소리를 내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나오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즉시 책장으로 다가가더니 아 무런 망설임 없이 두터운 책을 꺼냈다. "대체 어디를 찾은 거예요? 여기 있잖아요." "아아, 그렇 구나. 아까는 왜 안 보였지?" 나오코는 책을 내밀고, 헤이스케는 그 책을 받아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녀는 그대로 나가려고 하다가 문득 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리고 얼굴을 찡그리더니 책상으로 다가갔다. " 내 책상에 손댔어요?" "아니, 손대지 않았는데." 잡자기 허를 찔린 듯이 움찔했지만 그는 태연을 가장하고 대답했다. "흐음." "아니에요. 손대지 않았으면 됐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오렌지색 파일과 빨간색 파일을 바꿔 놓았다. 그는 결국 소마 하루키에게서 전화가 왔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소마라는 남학생에 대해서 묻고 싶은 마음 은 굴뚝 같았지만, 예리한 나오코는 파일 위치가 바뀐 것과 즉시 연결시켜 생각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제멋대로 그녀의 소지품을 살펴보는 일은, 가능하면 눈치채이고 싶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나오코가 지켜보는 가운데 특별히 읽고 싶지도 않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펼쳐들 었다. 한 장을 넘기기도 전에 잠이 쏟아졌다. 역시 문학작품은 졸음을 재촉한다는 사실을 새삼스 럽게 깨달았다. 그 다음날은 귀가시간이 조금 늦어져서, 손목시계의 바늘은 여덟 시 십오 분을 가 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집의 창문에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 약에 나오코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또다시 마음을 졸이고 불안에 떨어야 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녀의 귀가시간이 늦어지는 일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예전의 말다툼을 하고 어색함이 계속된 이후, 그는 될 수 있는대로 불평하지 않기로 했다. 나오코도 어느 정도 조심을 하는지, 여덟 시가 넘어서 집에 오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현관문을 열고 안쪽에 소리치려고 한 순간, 말이 입을 뚫 고 나오기 전에 속삭이는 듯한 말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어 왔다. 나오코가 누군가에게 말을 하 고 있었다. 가끔 재미있어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쿡쿡거리고 웃으면서.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것 이다. 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말소리는 분명히 거실에서 들려왔다. "아리사카 선 배님이 분명히 그랬다구요. 내가 백핸드하는 것을 보고 배꼽을 잡고 웃었다면서요? 조금 심하다 고 생각하지 않아요?" 목소리는 틀림없이 나오코의 것이지만 말투는 그에게 말할 때와 전혀 달랐 다. 여고생 같은 말투 때문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느낌이 전해졌기 때문이 다. "예? 그러세요? 도저히 믿을 수 없는데요. 그러면 선배님, 다음에 나와 같은 팀이 되어 게임 해 줄 거예요? 예? 정말이세요? 굉장해요! 예? 아이, 선배님. 그런 것은 싫어요.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하는데요?" 그녀의 웃음은 가짜 웃음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짜 웃음이 었다. 그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서, 일부러 크게 소리쳤다. "모나미, 있니? 아빠 왔다!" 나오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당황하는 기척은 역력했다. "아! 그러면 내일 봐요. 네... 네. 안녕." 거실 에 발을 들여놓는 것과 나오코가 전화기에서 떨어지는 것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지금 오세 요? 금방 저녁 차릴게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말투도 평소의 말투로 돌아가 있 었다. "전화하고 있었나 보지?" "예. 영어 숙제 때문에 친구에게 전화가 와서요." 거짓말하지 마! 그는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조금 전의 말투는 교태마저 느끼게 하지 않았는가. 더구나 영어 이 야기를 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상대는 여자가 아닌 남자였던 것이 다. "그러고보니 어제 전화가 걸려왔었어. 테니스부의 소마라고 하던데." "아, 그랬어요?" 싱크대 를 향하고 있는 나오코의 어깨가 움찔한 것처럼 보였다. "전화가 왔었다는 이야기만 전해 달라고 했는데 깜빡 잊어 버렸지 뭐야. 오늘 만났겠지? 무슨 급한 일이었어?" "예에, 이번에 새로 들어온 1학년들 시합이 있는데, 틀림없이 그것 때문에 전화했을 거예요. 어제 전화했다는 말은 하지 않던 데요?" "일요일에 전화를 할 정도니까 상당히 급한 용건이 아니었을까?" "급하다고 하기보다 잊 어버리기 전에 연락하려고 했을 거예요." "흐음. 하긴 아무래도 상관없지." 그는 태연을 가장하며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으면서 여전히 전화에 대해서 생각했다. 조금 전에 나오코 와 전화로 대화를 나눈 상대는 틀림없이 소마 하루키라는 2학년 남학생일 것이다. 테니스부 선배 라는 한 마디를, 왜 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군 그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나오코는 오늘 도 테니스부 연습에 참가했을 것이다. 실제로 소마와도 이야기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왜 집에 돌 아와서까지 그와 수다를 떠느냐는 당연한 의문이 생긴다. 그녀는 그 의문에 대답할 자신이 없었 던 것이다. 전화는 소마가 걸어온 것이 틀림없다. 자신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오코 가 걸 리가 없다. 스웨터 주머니에 손을 넣었더니 작게 접혀진 메모지가 손 끝에 닿았다. 소마 하 루키의 연락처가 적힌 메모지다. 한 번 전화를 걸어 볼까. 아무 쓸데없이 딸에게 전화하지 말라고 하면, 대부분의 남자라면 주눅들 것이 틀림없다. "아빠. 식사하세요." 그는 큰 소리로 대답하고, 주 머니에서 손을 뺐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다음주에는 일주일 동안 늦게 올지도 몰라요." 식사하 는 도중에, 나오코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또 테니스야?" "테니스가 아니라 축제 준비를 해 야 하거든요. 다음주 토요일, 일요일이 우리 학교 축제예요." "무얼 하느라 늦게 오는데?" "우리 반은 영화 찻집을 해요. 교실을 어둡게 만들어 직접 만든 단편 영화를 보여주면서 겸사겸사 커피 라든지 주스도 파는 거예요. 그래서 다음주에는 영화를 편집하거나 교실을 장식해야 하거든요." " 모두 다 참가해야 하는 거야?" "당연하죠." "얼마나 늦게 오는데?" "아직 모르겠어요. 실행위원들 은 매년 며칠 동안 밤을 새운다고 하던데요." "밤을 새워? 학교에서 잔다는 거야?" "물론이죠." " 설마 실행위원으로 선발된 것은 아니겠지?" "서클에 들어간 사람은 양쪽 일을 모두 할 수 없으니 까 실행위원으로 선발되지 않아요. 나머지 사람들은 실행위원이냐 아니야에 상관없이 이미 일을 하고 있구요. 그래서 일주일 동안 서클을 쉬고 도와주기로 했어요." "고작해야 고등학교 축제에서 왜 그렇게 복잡한 일을 하지? 도쿄 대학 진학률로 손꼽히는 학교가 그렇게 여유만만해서야 되겠 어?" "열심히 놀고, 열심히 공부해라. 재충전의 중요성은 학교가 가장 잘 알고 있죠. 책상에 매달 려 있기만 해서는 절대로 도쿄 대학에 합격하지 못해요." 그녀는 일일이 설명해야 하는 것에 조 금 조바심이 나는 듯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미 예고한 대로 나오코의 귀가는 종전 이상으로 늦어졌다. 일곱 시가 넘어 전화를 걸어서는, 오늘은 늦어질 테니까 뭐라도 시켜먹으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헤이스케는 하는 수 없이 근처 식 당에 가서 야채볶음 정식을 먹었다. 결국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것은 아홉 시가 넘어서였다. 그는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축 늘어진 그녀의모습을 보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녁은 학교 옆 에 있는 분식집에서 간단히 먹었다고 했다. 샤워를 마친 나오코가 이층으로 올라가고 조금 지났 을 때였다. 서랍장 위에 있는 전화기가 미친 듯이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는 흠칫 놀라 무의식적으 로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계바늘은 열한 시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전화를 받으려고 일어서는 순간, 울릴 때와 마찬가지로 느닷없이 벨 소리가 그쳤다. 잘못 걸려온 전화라고 생각하다가 그렇 지 않다는 사실을 금세 깨달았다. 전화기에 달려 있는 작은 램프가 켜져 있었기 때문이다. '리모 트 사용중'이라는 램프였다. 말하자면 나오코가 이층에서 전화를 받았다는 뜻이다. 유선전화기가 무선전화기로 바뀐 것은 이번 봄의 일이었다. 이층에서 전화를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 들여서, 이층 복도에 설치한 것이다. 그는 작은 램프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단순히 사무적인 용건이라면 이삼 분 만에 꺼질 것이리라. 그런데 램프는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그는 일 단 텔레비전으로 눈길을 돌려 일기예보를 보고 나서 세삼스럽게 램프를 확인했다. 램프는 아직도 켜져있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상식이 없군...! '리모프 사용중'이란 램프가 꺼진 것은, 결국 약 한 시간 뒤였다. 그 동안 텔레비전을 보거나 신문을 보았지만, 말할 것까지도 없이 그 내용을 하 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오코의 귀가는 다음날에도 아홉 시를 넘겼다. 덕분에 그는 이틀 동안이나 계속 분식집을 들락거려야 했다. 대체 뭐하는 거야? 그의 불만은 점점 고조되어 갔다. 축제를 준비하는데 이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고작해야 고등학생들의 장난거리가 아닌 가. 그런 식으로 분노의 덩어리가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였다. 또다시 전화벨이 시 끄럽게 울어댔다. 그는 반사적으로 시계를 쳐다보았다. 열 시 오십 분, 어제와 거의 같은 시각이 었다. 벨 소리는 한 번 밖에 울리지 않았다. 그 대신 어제와 똑같이 '리모트 사용중'이란 램프가 붉은 빛을 뿜어냈다. 자기 방으로 들어간 나오코가 복도로 나온 기척은 없었다. 따라서 전화가 걸 려올 것을 예상해 미리 전화기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간 것이 분명하다. 요컨대 누군가가 '오늘밤 열 시 오십 분경에 전화할게' 라고 말한 것이다. 그 사람이 대체 누구인가. 그는 불안을 이기지 못해 한쪽 다리를 덜덜 떨면서 텔레비전과 시계, 그리고 전화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텔레비전에 서는 프로야구의 결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이언츠 팀의 우승은 이미 정해졌지만 재팬 시리즈 에서 대전할 상대가 정해지지 않았고, 긴테쓰, 세이부, 오릭스의 순위가 매일 눈이 핑핑 돌 만큼 바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열렬한 자이언츠 팬인 그로서도 올해만큼은 야구 자체를 즐기고 있었 지만, 지금은 야구가 문제가 아니었다. 시계 바늘이 열한 시 반을 지났을 때, 그는 발소리를 죽이 고 계단 밑에 섰다. 그리고 마치 도마뱀처럼 납작 엎드려서 살금살금 기어올라갔다. 나오코의 방 에서는 두런두런 목소리가 새어나왔지만, 이야기의 내용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소마 하루키라는 이름이 머리에 떠올랐다. 상대는 그 남학생이 틀림없다. 대체 어떤 남학생인가. 무슨 속셈으로 나 오코에게 전화를 거는 것인가.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그는 조금 더 문 앞으로 가까이 가려고 몸을 숙였다. 그때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고, 문의 모서리가 그의 머리를 칠 뻔했다. 그녀가 밑을 내려다보면서 한 순간 짧게 비명을 질렀다.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아니, 그냥." 온몸에서 식은땀이 솟았지만 좋은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한 손에 들고 있는 무선전화기를 벽에 고정되어 있는 충전기에 꽂아 놓으려고 하다가, 무엇인가를 알아챈 것처럼 날 카로운 눈길로 그를 쏘아보았다. "엿들었어요?" "그런 추악한 짓은 하지 않아. 다만 어제와 오늘 이틀 동안, 상당히 늦은 시간에 전화가 걸려온 것 같기에 신경이 쓰여서 보러 왔을 뿐이야." "그 게 엿듣는게 아니고 뭐예요?" "말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어. 그보다 전화 한 번 지독히 오래 하 더군." "서클 친구예요." 그녀는 불퉁하게 말하면서 무선전화기를 본래의 장소에 돌려놓았다. "소 마라는 녀석이겠지?" 나오코의 어깨가 한순간 움찔거렸다. 허를 찔린 것이리라. "그 녀석은 2학년 이지? 그렇다면 친구가 아니잖아?" "소마 선배님이 2학년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어요?" 이번에 는 그가 궁지에 몰렸다. 나오코의 입이 약간 비틀어졌다. "역시 요전에 내 파일을 봤군요. 이상하 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보면 안돼?" "파라이버시라는 말도 몰라요?" "소마라는 녀석은 뭐 하는 녀석이야? 왜 너에게 전화를 거는 거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쪽에서 걸어오는 건데요." "모 른다는 게 말이 돼? 아무 볼일도 없는데 남자가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 이유는 한 가지잖아?" 나 오코는 숨을 크게 내쉬더니 한 마디씩 잘라서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면 솔직히 말하죠.아마 나 를 좋아하는가 봐요. 이번 주에는 테니스 연습이 없어서 학교에서 만날 수 없으니까 전화하는 거예요. 그러면 됐나요?" "앞으로 전화하지 말라고 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정식으 로 교제를 신청한 것도 아닌데." "이제 곧 사귀자고 할 거야." "그때 거절하면 되잖아요." "사실은 즐기고 있는 거지? 젊은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그렇게도 좋은가?" 스스로도 뺨에 경련이 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요. 좋아요. 즐기면 안되나요? 나는 그 정도의 권리도 인정받을 수 없나요? 기분을 전환하면 안돼요?" "나와 이야기하는 것보다 즐겁다는 뜻인가?" 그녀는 그 말 에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며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오늘은 피곤하니까 그만 자겠어요. 안녕 히 주무세요." 잠시 기다리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세찬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혀버렸다. 이불로 들 어간 이후에도 그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전화 정도로 소란을 피우는 자신의 소심함이 지긋지긋한 한편, 그 마음을 이해해주지 않는 나오코에게도 화가 났다. 그는 나오코가 소마 하루 키를 '소마 선배님'이라고 다정하게 부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선배일지 도 모른다. 그러나 정신적인 부분을 말하자면, 나오코에게 있어서 고등학교 2학년짜리 남학생은 새카만 어린애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초등학교 담임 선생이었던 다에코에게 조차 '그녀'라든지 '그 아이'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소마 하루키 앞에서는 정신적으로도 고등학교 1학년 짜리 소녀가 된다는 뜻인가. 그래서 소마는 '선배님'이라고 부를 만한 대상이라는 뜻인가. 헤이스 케는 그 변화가 한순간으로 지나가기를 기도했다. 나가노에서의 마지막날 밤, 나오코 때문에 재혼 을 안 한다고 했을 때 그녀는 고맙다고 말했다. 그에게 있어서는 그 한 마디만이 유일한 구원이 며 마음의 버팀목이었다. 그로부터 이어지는 사흘 동안, 나오코는 한 마디도 한지 않았다. 매일 아홉 시가 넘어서 들어와 서는 곧장 자기 방에 틀어박혀 화장실 갈 때 이외에는 나오지도 않았다. 전화벨이 울린 것은 수 요일 밤뿐으로, 목요일과 금요일은 걸려오지 않았다. 소마에게 전화를 걸지 말라고 했을지도 모른 다. 축제 첫날인 토요일 아침, 나오코가 불쑥 그의 침실로 들어왔다. 헤이스케는 아직 이불 속에 서 뒹굴고 있는 참이었다. "이거 받아요." 그는 졸린 눈을 비비며 베개맡에 놓인 종이를 쳐다보았 다. 핑크빛 종이에 '한손에는 음료를! 영화 찻집 앤드'라는 문구가 적혀 있고, 밑에는 어디에서 하 는지 학교 내부의 약도도 그려져있었다. "이게 뭐야?" "마음이 내키면 오세요." "내가 가기를 원 해?" "그러니까 마음이 내키면 오시라고 했잖아요. 그럼 다녀올게요." 그는 이불 위에서 책상다리 를 하고, 오랫동안 그 팸플릿과 눈싸움을 했다. 물론 가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나오코가 학교 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자기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집 이외에서 의 그녀의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보고 싶지 않은 마음도 뭉게구름처럼 피어났다. 솔직히 말해서 두려운 것이다. 그녀가 과연 학교 생활을 잘 보내고 있는지 걱정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 점에서는 전혀 걱정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녀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완벽한 여고생으로서 사람들 속에 융화되어 있는 것을 보기 두려운 것이다. 그것을 확인했을 때 자신이 맛보게 될 상실감이나 고독감, 초조감을 두 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어쩔까 망설이다가 결국 저녁을 맞이했다. 여덟 시쯤집에 돌아온 나 오코는, 마치 입에 자물쇠를 채운 듯이 축제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에도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그대로 나갔다. 어차피 보고 싶은 마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도 모른다. 그는 결심이 서지 않아 점심시간이 지나도록 이불 속에서 잡지를 읽고, 오후에 들어서 는 골프와 야구중계를 보았다. 그러나 머리가 텅 빈 공백 상태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가 보려는 마음이 생긴 것은 텔레비전에 어느 유명한 레스토랑이 나왔기 때문이다. 남녀 탤런트가 그 레스토랑이 자랑하는 음식을 맛보는 프로그램이었다. 실은 어젯밤 오랜만에, 그의 식탁에는 요 리다운 요리가 차려졌다. 단, 모두 백화점 지하 식품코너에서 사온 음식들로, 오늘도 그렇게 될 우려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축제에 참석하면, 돌아오는 길에 둘이서 외식을 하는 방법 도 있는 것이다. 시간은 벌써 오후 두 시를 훌쩍 지났고,팸플릿에 따르면 축제는 다섯 시까지로 되어 있었다. 그는 서둘러 준비를 시작했다. 그녀의 고등학교에 가는 것은 합격자 발표를 보러 간 이후 처음있는 일이지만, 그때와는 몰라볼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정문에는 화려하게 장식한 입간 판이 늘어서 있고, 벽에는 포스터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학생들이었다. 합격 발표 때에는 불안한 표정에다 어린 티까지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자신감에 넘친 활기찬 모 습만이 보일 뿐이다. 학교 안에는 학생들의 부모인 듯한 중년의 사람들도 배회하고 있었는데, 그 들은 축제의 구경거리에는 관심이 없이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 분위기를 확인하러 온 것처럼 보였 다. 1학년 2반의 교실 입구는 색종이를 바른 상자들과 풍선들로 장식되어, 조금 유치하기는 하지 만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입구에 서 있던 앞치마를 입은 여학생이 헤잉스케를 쳐다보고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세요!" "아니 저... ."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슬쩍 안을 들여다보았 다. 두 개의 책상을 붙인 테이블이 몇 개인가 놓여 있고, 그럭저럭 썰렁하지 않을 정도로 손님들 이 앉아 있었다. 교실 뒤쪽에는 칸막이로 가려져 있었는데, 그 건너편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주 방으로 이용하는 모양이었다. 칸막이에는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어서 쟁반을 든 여학생이 들락날 락하고 있었다. "스키타 모나미는 어디있니?" "아! 모나미의 아버님이세요?" 앞치마를 두른 소녀 의는 눈동자를 빙글빙글 돌리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단다." "우아! 모나미의 아버님이 오 셨어!" 소녀가 비명을 지르면서 칸막이 건너편으로 사라지자마자 즉시 나오코의 모습이 나타났다. 조금 전의 소녀와 똑같이 앞치마를 두르고, 길다란 머리를 발레리나처럼 뒤로 묶어놓은 모습이었 다. "오늘은 오셨네요." 특별히 반가워하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불쾌하지도 않은 것 같았 다. "그래. 잠시 봐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요...?" 그녀는 아무런 표정없이 창가 자리로 걸어갔다. 바로 옆에는 텔레비전과 비디오가 놓여 있었다. 교실에 있는 비디오는 각각 네 대, 여기로 가져오는 것만 해도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이상하게 감동의 물결이 밀려 왔다. "뭐 좀 마실래요?" "아아, 그래. 커피를 주겠어?" "커피요." 그녀는 빙글 등을 돌리더니 칸 막이 건너편으로 사라졌다. 그때 깨달은 것이지만 학생복 치마가 평소보다 상당히 짧아져서, 길게 뻗은 새하얀 다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웨이트리스 역할을 맡은 소녀들은 모두 그랬다. 대체 무슨 생각들일까. 몸을 숙였을 때 속옷이 보이지나 않을지 조마조마할 정도였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학생들이 직접 만든 영상이 끊입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두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영상들이 었다. 다만 쓰레기더미를 뒤적이는 까마귀와 고양이 화면에 지방에서 활약하는 건달들 말투로 더빙한 것이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재미있어요?" 나오코가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들고 돌 아왔다. "이해되지는 않지만, 아이디어가 독특해 보이는군." "유치해 보여도 남학생들이 날밤을 새 워가며 만든 것이에요." 그녀는 옆에 앉아 작은 용기에 들어 있는 설탕과 프림을 커피에 넣고는 가볍게 휘저었다. 오랜만에 마셔보는 나오코의 커피였다. 특별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 젊은 분 위기 탓이리라. "이 장식을 전부 직접 만들었나?" 그는 벽과 유리창에 붙어 있는 색종이와 셀로 판 장식을 쳐다보고 물었다. "그래요. 별로 잘 만들지는 않았지만 시간은 많이 걸렸어요." 그렇겠 지. 그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준비하려면 매일 귀가가 늦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칸막이 건너편에서 몇몇 여학생들이 고개를 삐죽 내밀고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재빨리 얼굴을 감추었다. "다들 나만 주목하는 것 같군." "아빠가 오신 것 이 너무나 뜻밖이라서 그럴 거예요. 학교에서는 거의 집 이야기를 안 하거든요." "그래?" "사실을 말할 수는 없잖아요. 한 번 거짓말을 하면 그것을 숨기느라 계속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요." 그는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축제는 다섯시면 끝나지?" "예." "오랜만에 식사 라도 같이 할까?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줄테니까." 좋아할 것이라는 그의 예측은, 나오코의 당황하 는 표정과 함께 멋지게 빗나갔다. "물론 축제는 다섯 시까지 하지만, 그 뒤에 또 일이 남아 있거 든요." "무슨 일이 남아있는데?" "뒷정리도 해야하고, 캠프파이어도 있고... ." "캠프파이어라... ." 고등학교 축제에 그런 것이 있었나. 그는 아득히 먼 기억에 있는 것을 꺼내 보았다. "그렇다면 집 에 꽤 늦게 오겠군." "그렇게 늦어지지는 않겠지만 시간을 분명히 알 수 없어서요... ." "그래?" "죄송해요."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그녀의 표정에서는 미안한 마음을 엿볼 수 없었다. "아니, 상 관없어. 그러면 오늘은 초밥이라도 사가야겠군. 저녁에 돌아와서 금방 먹을 수 있도록. 어때, 나오 코?" 그녀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그의 귓가에 입을 바싹 대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나오 코라고 부르면 어떡해요?" "아아, 그렇지. 미안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라 손을 흔 들었다. 그때 조금전에 보았던 앞치마를 두른 소녀가 옆으로 다가왔다. "모나미. 잠깐만." "무슨 일이야?" "커피 필터가 떨어졌어." "거봐. 내가 모자란다고 했잖아. 일단은 키친 타월을 사용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잘 모르겠어." "하는 수 없군." 나오코는 마지못해 일어서더니 앞치마를 두 른 소녀와 함께 칸막이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는 엉거주춤 일어서서 칸막이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몇몇 여학생이 샌드위치나 주스를 만들기 위해 과일을 자르고 있었다. 나오코는 그 옆에서 친구 들을 둘러보며 키친 타월을 잘라서 커피 메이커에 넣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 행동을 보자면 소녀들의 어머니처럼 느껴졌다. 그가 조금 전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였다. 키가 큰 남학생이 바로 옆에 서 있었다. 햇볕에 그을린 얼 굴은 건강미가 넘쳐 보였고 이목구비도 뚜렷한 호남형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과 상관없는 학 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남학생은 그가 자리에 앉은 다음에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남학생 이 쭈뼛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의 가슴은 쿵쾅쿵쾅 방망이질 하기 시작했다. 그토록 자신을 괴롭혔던 목소리, 자신을 질투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목소리, 자 신에게 고뇌의 밤을 지새우게 했던 목소리였다. "모나미의 아버님이시죠?" "그런데... ." 목소리가 갈라지고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온몸이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지난번에는 전화로 실례했습니다. 모나미와 같은 테니스부에 있는 소마라고 합니다." 남학생은 그렇게 말하고 일어선 상태에서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아아... ." 무슨 말인가 해야 한 다고 생각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문득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단은 여기에 앉는게 어떻겠나?" "예." 소마는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칸막이를 보았을 때 나오코와 시선이 마주쳤다. 칸막이 안에서 삐죽 얼굴을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놀라는 표정으로 봐서 그녀가 소마를 여기로 부른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밤늦게 전화를 걸어서 죄송합니다. 무례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소마는 새삼스럽게 다 시 고개를 숙였다. "모나미가 뭐라고 하던가?" "예. 아버님께서 일찍 출근하시니까 밤늦게 전화를 걸면 곤란하다구요." "아하!" 그래서 이틀 동안은 전화가 없었던 것이군. "제가 무례를 저질렀습니 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이제 됐네. 그렇게 화가 많이 난것도 아니네." 바로 앞에서 사과를 하는 사람에게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 다면 다행입니다만." 소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을 하기 위해 일부러 여기에 온 것인 가?" " 후배가 달려와서 모나미의 아버님이 오셨다고 알려 주었거든요." "흐음."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그 후배라는 학생은 내가 온 것을 왜 소마에게 가르쳐 준 것일까. 그렇다면 두 사람은 공 공연한 사이란 말인가. "그런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잘 가게." 소마는 칸막이 뒤쪽으로 손을 흔들더니, 무슨 말을 하는 것처럼 입술을 움직이고는 싱긋 미소를 짓고 밖으로 나갔다. 누구에게 미소를 지었는지는 새삼스럽게 확일 할 필요가 없었다. 나오코가 곧장 그의 곁으로 달려와서 목 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그가 무슨 말을 했어요?" 그는 있는 그대로 말을 하고 나서 이렇게 덧붙 였다. "마치 청춘 드라마 같군." 비아냥이 절반, 솔직한 느낌이 절반이었다. "쉽게 뜨거워지는 사 람이에요." "그 녀석은 너를 애인으로 생각하는 것 같던데." "말도 안되는 소리. 아직 고등학생이 무슨 애인이에요?" 그녀는 거의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속사포처럼 재빨리 말했다. 그때 차임벨과 함께 교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앞으로 십오 분만 있으면 축제가 끝난다는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한숨과 함께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그는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 어섰다. "그러면 그만 갈게." "조심해서 가세요. 와줘서 고마워요." "너무 늦지는 말아." 그는 그 말을 남기고 교실을 나섰다. 다섯 시가 되기 전에 학교를 뒤로 했지만 집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 다. 그는 전철을 타고 신주쿠에 나가서, 대형 전자 대리점에서 아이 쇼핑을 한 다음 책방에라도 들러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전자 대리점에서 나오는 남녀를 본 순간, 마치 그 자리에서 얼엉붙은 것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머리가 길고 여자는 보일 듯 말 듯 화장을 했지만, 두 사람 모두 학생복 차림으로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커플이었다. 남자가 여자의 어깨를 껴안고, 여자 는 남자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금방이라도 입술이 부딪힐 정 도로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의 모습에 나오코와 소마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는 등골이 오싹해지며 온몸에 싸늘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무엇인가가 머리에서 번뜩 였다. 소마가 교실에서 나가기 직전 나오코를 바라보며 입술을 움직인 것,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봐. 소마는 그렇게 말한 것이 틀림없다. 그는 입술의 움직임을 영 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정확히 떠올릴 수 있었다. 나중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인가. 불안이 치밀어 올라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무엇엔가 이끌리 는 사람처럼 전철역을 향해 뛰어갔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일까. 그는 계속 그렇게 자문해 보았다. 그러나 그대로 발길을 멈출 수는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나오코의 학교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석양은 완전히 서쪽으로 넘어가서, 한 줄기 빛조차 남겨 놓지 않았다. 평 소 때 같으면 학교 전체가 정적과 어둠으로 감싸일 시간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라서, 교정 안 에 많은 학생들이 남아 있었다. 어디에선가 반주에 맞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노래하는 사람은 노래 서클 학생들일까. 그는 미끄러지듯이 교문을 통과했다. 운동장 안으로 들어가자 캠프파이어 의 불꽃이 보이고, 그것을 둘러싸는 것처럼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앉아 있는 사람도 있고 서 있 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의 얼굴이 추억과 그리움에 젖어 있는 것은 분명했다. 한쪽 구석에는 간 단한 무대가 놓여 있고, 그 무대 위에서 몇 명의 밴드가 연주하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불꽃을 반사하는 검은 반짝이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어른스럽게 보이지만 물론 이 학교 학생일 것 이다. 시대에 따라 캠프파이어도 변하는 법이군. 새삼스럽게 자신이 구세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포크 댄스 같은 것을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자 학부형 같은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주위가 어두운 데다가 노래에 마음 을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오코를 찾아 정신없이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남학생 들 중에는 그보다 키가 큰 사람이 많아서, 그들 사이로 들어가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노래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는 발라드풍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갑지가 빠른 템포 의 노래로 바뀐 것이다. 그와 동시에 학생들도 눈에 띄는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앉아 있던 학 생들도 일어서더니, 모두가 손뼉을 치고 박자를 맞추며 몸을 흔들었다. 학생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공기가 희박해진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그는 헐떡거리면서 사람들의 숲을 헤치며 앞 으로 걸어갔다. 그때 누군가의 발에 걸렸는지 갑자기 몸이 휘청거렸다. 그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둥거렸지만 허사였다. 그리고 하는 수 없이 땅에 엎드린 채 이동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 이 리듬에 맞추어 발을 구르자 그의 얼굴은 흙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무대에서 멀리 떨어지자 겨 우 학생들의 수가 적어졌다. 그는 일어서서 옷에 묻은 흙을 털었다. 그때 그의 눈에 낯익은 모습 이 들어왔다. 나오코였다. 그녀는 모닥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손으로 박자 를 맞추지는 않았지만 눈은 무대로 쏠려 있었다. 그리고 예상한 것처럼 나오코의 옆에는 소마가 있었는데, 두 사람의 간격은 1미터도 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으로, 나오코는 몸 앞쪽으로 두 손을 모아쥐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쉬지도 않고 박자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고 있는데, 나오코와 소마만이 꼼짝도 하지 않고 이 시간 과 공간을 음미하고 있는 것 같았다. 헤이스케는 그 자리에서 돌이 된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 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캠프파이어의 불꽃이 격렬하게 타오르면서 나오코와 소마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었다.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며 흔들릴 때마다 두 사람의 그림자도 함께 흔들렸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약속 12월에 접어들어 두 번째 맞이하는 토요일, 헤이스케의 집에 상자 하나가 집에 도착했다. 마침 나오코는 학교에 가고 집에 없었다. 수업이 끝나면 테이스 연습이 있어서 해가 저물기 전에는 돌 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느 상자를 껴안고 거실로 들어가 테이프를 벗기고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다시 자그마한 두 개의 상자가 들어 있고, 그는 하나씩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하나는 손바닥에 올려 놓을 정도로 작은 녹음기였다. 보통 녹음기와 다른 점은 음성감응방식이라는 점으로, 소리가 나면 자동적으로 녹음이 시작되고 소리가 나지 않을 때는 녹음이 중단된다. 회의나 강연을 녹음 하는 경우에도 빈 공백이 없어지는 것이다. 물론 헤이스케는 회의나 강연을 녹음하기 위해 녹음 기를 주문한 것은 아니다. 다른 상자에는 성냥갑 크기만한 부품이 들어 있었다. 전자 텔레폰 피크라는 것으로, 부속 부품 으로는 전화용 코드와 이중 플러그가 있었다. 그는 각각의 취급설명서를 읽어본 다음, 우선 서랍 장 벽에 붙어 있는 전화기 플러그를 확인했다. 그는 서랍장 앞에 쌓여있는 낡은 신문지를 치우 고, 전화기 플러그를 빼고는 그 대신 이중 플러그를 부착했다. 그리고 이중 플러그의 한쪽에 전화 기 코드를 끼워놓고, 다른 한쪽에는 부속으로 딸려 있는 전화용 코드를 끼워넣었다. 한편 녹음기 에는 건전지와 테이프를 넣고, 마이크용 잭에는 전자식 텔레폰 피크를 접속시켰다. 그런 다음 텔 레폰 피크에 전화용 코드 한쪽을 연결시키면 모든 것은 끝난 것이다. 그는 수화기를 들고 177버 튼을 눌렀다. 그러자 수화기를 타고 일기예보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기상청 발표에 따라서 12 월 10일 오후 한 시 현재의 기상정보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현재 도쿄 지방은 맑은 날씨가 계속 되고 있으며... ." 그는 음성감응방식 녹음기가 작동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일단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그리고 다시 테이프를 감아 재생을 시켜보았다. 스피커를 통해 방금 들었던 안내방송이 그대로 흘러나왔다.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테이프를 처음까지 되감았다. 헤이스케는 다시 서랍장을 움직여 벽 사이에 녹음기와 텔레폰 피크를 끼워넣고, 그것들이 보이지 않도록 낡은 신문지를 높다랗게 쌓아 두었다. 낡은 신문지를 처분하는 것은 그의 일이기 때문에, 나오코가 손을 대는 일은 절대로 없 을 것이다. 그는 서둘러 빈 상자를 정리했다. 그것을 들키면 변명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스스 로도 비열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잡지에 실린 전화 도청장치 광고를 발견했을 때 어 느 사이엔가 주문 전화를 걸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과장스럽게 말하자면 그 광고가 자신의 구 세주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나오코가 밖에서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어떤 사람들과 만나는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신경이 쓰여 견딜수가 없었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나오코는, 그가 익히 알고 있는 지금까지의 그녀와 아무런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최근 들어 알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나오코로서의 그녀는 그의 앞에서만 통용되는 것으로, 집 밖으로 한 걸음만 내딛어도 모나미로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는 겉으로 보이는 나오코의 얼굴에 대해서 신경 쓴 적은 별로 없다. 모나미의 흉내를 내고 살아가더라도 그녀의 본질은 나오코이고, 나오코는 여전히 자신의 아내라고 믿고 있었기 때 문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러한 자신감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아니, 자신감의 한 조각마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나오코를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럴 가능성이 점점 커지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빈 상자들을 잘게 잘라서 쓰레기통에 버렸을 때, 현관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우편함에 우편물을 넣는 소리였다. 그는 쏜살같이 현관으로 향 했다. 전달된 우편물은 세 종류였다. 그의 이름으로 된 편지가 한 통, 신용카드 청구서가 한 통, 그리고 나머지 한 통은 모나미앞으로 온 것이었다. 그는 모나미 앞으로 온 편지의 뒷면을 보았다. 예전에 그녀가 다니던 초등학교의 이름과 제55회 동창회 총무라는 글자가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아마 초등학교 동창회가 열린다는 안내장이리라. 그는 거실로 돌아가 편지 세 통을 탁자 위에 올 려놓고 텔레비전을 켰다. 그러나 시선은 화면이 아니라 모나미 앞으로 온 편지에 쏠리기 시작했 다. 정말로 단순한 동창회 안내장일까. 어쩌면 대규모 동창회가 아니라 친한 사람 몇 명 모일지도 모른다. 그는 봉투에 씌어 있는 발신인의 이름을 보았다. 분명히 남자 글씨체였다. 문득 언젠가 본 잡지의 내용이 생각났다. 어느 남자 고등학생이 동창회라는 명목으로 미팅을 주선했다고 하지 않은가.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을 더듬다가 혹은 졸업 앨범을 보고, 아름다운 여고생으로 변신했을 여학생에게 눈독을 들여 동창회 안내장을 보낸다고 하지 않던가. 한창 이성에 관심이 있을 시기 의 남자 고등학생이 저지른 일이었지만, 그때는 너무나도 기막힌 발상에 웃음까지 터트렸던 것이 다. 일단 그러한 상상이 머리에 둥지를 틀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부엌으로 가서 주 전자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내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닐까. 스스로도 허탈한 생각이 들었다. 그 러나 가슴에서 솟구쳐 오르는 무엇인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주전자 주둥이에서 김이 오르기 시작하자 그는 편지를 가져와서 풀이 묻어있는 부분에 증기를 쏘이기 시작했다. 종이는 순식간에 촉촉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풀이 충분히 녹아들자 그는 손톱을 이용해서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었다. 이윽고 봉투 입구는 완전히 벌어졌다. 봉투 안에는 정성스레 접힌 종이가 두 장 들어 있었다. 한 장은 지도를 복사한 것으로 어느 회관으로 가는 약도가 그려 져 있었고, 또 한 장은 역시 동창회 안내자이었다. 그러나 그가 상상하던 불순한 동창회가 아니라 55회 졸업생 전체의 모임이었다. 교사도 몇 명인가 참가한다고 적혀 있었다. 이 정도면 아무 문제 가 없으리라. 그는 종이를 봉투에 넣고 다시 입구를 봉했다. 나오코에게 온 편지를 몰래 뜯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두 번, 오늘과 똑같은 일을 저질렀다. 그녀보다 일찍 돌 아오는 날이면 그가 우편물을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맨 처음 뜯어 본 것은 나오코의 중학 교 친구에게 온 편지였다. 물론 여자친구였다. 내용도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갔기 때문에 그 동안 잘 있었느냐는 안부 인사가 전부였다. 물론 봉투를 보면 보낸 사람이 여자라를 것쯤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번 그 봉투가 수상쩍게 느껴 지자 상상의 날개는 엉뚱한 방향으로 그를 이끌고 갔다. 예쁜 무늬가 들어있는 핑크빛 봉투, 소녀 다운 아기자기한 글씨. 그것에서 작위적인 요소를 느낀 것이다. 혹시 남자가 아닐까. 소마 하루키 라는 녀석이 보낸 편지가 아닐까. 차분히 생각해 보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지만, 나오코에 관한 일에서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냉정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느 결국 봉투를 뜯어 내용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상상이 너무나도 사악한 의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자기 자신이 혐 오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일 뿐, 마음에 더크게 자리한 것은 편안한 안도감이었다. 두 번째 편지를 개봉했을 때는 자신의 치졸함에 화가 치밀었다. 그것은 백과서전을 홍보하는 안내전단이 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수취인의 신경을 끌기 위해, 마치 개인적은 편지처럼 만들어 놓 았던 것이다. 보낸 사람을 쓰는 곳에는 남자 이름 같은 사장의 이름이 씌어 있었고, 물론 출판사 명도 씌어있었다. 그러나 남자 이름에 눈길이 쏠린 헤이스케는 머리에 피가 올라간 상태에서 봉 투를 개봉해 버렸다. 잠시 후, 컬러로 인쇄된 백과산전 안내전단을 들었을 때는 허탈한 웃음을 지 을 수밖에 없었다. 공허한 웃음이 허공을 맴돌다가 어딘가로 날아갔다. 그리고 세 번째가 오늘 받 은 동창회 안내장이었다. 죄책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오코에 관한 어떤 문서도 봉인된 상태로 놓여 있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내용물을 보고 편해지는 방법을 알아버린 이상, 더욱더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일종의 마약이라고 할 수밖 에는... . 그 중독증상은 편지로 그치지 않았다. 실은 최근 들어 나오코가 집에 없을 때 몇 번인가 그녀의 방에 들어간적이 있다. 그리고 책상 서랍 속을 뒤지고 책장에 꽂혀 있는 노트를 펼쳐보았 다. 이유는 편지를 뜯어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나오코에 대해서 미리 알아두고 싶다는 마 음뿐이었다. 어쩌면 나오코가 일기를 쓰지 않을까. 계기는 바로 그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여학생 은 흔히 일기를 쓰지 않던가. 그런 생각이 들자 좀이 쑤셔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마침내 있는 지 없는지도 모르는 일기장을 찾기 위해 방에 몰래 들어가는 일까지 저지른 것이다. 결국 일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는 나오코의 방에 무엇이 있는지 거의 파악할 수 있었다. 친구들 주소록은 다른 종이에 옮겨 써놓았고, 달력에 적혀 있는 일정도 이미 그의 수첩에 옮겨 적은 상태였다. 그 녀의 다음 생리 예정일이 언제인지도, 생리대를 어디에 두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불안은 눈꼽만큼도 해소되지 않았다. 그를 고민하게 만드는 최대의 원인은, 역시 전화였 다. 전화는 적어도 아홉 시 반 이전에 걸려와서 열 시가 지나기 전에 끊어졌다. 물론 상대는 소마 하루키일 것이다. 그는 늦은 시간에 전화한 것에 대해서는 사과했지만, 전화를 거는 것 자체는 나 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것과 함께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 아무래도 나오코 쪽에서 도 전화를 걸고 있는 것 같았다. 매달 나오는 전화요금을 보면 뻔한 일이 아닌가. 그로부터 전화 가 걸려오지 않는 날에는 거의 몇 분에 한 번 간격으로 전화기를 살폈다. 그녀가 전화를 걸 경우 에도 '리모트 사용중'이란 램프에 불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전화가 걸려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그 램프가 켜져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나오코는 전화를 걸지 않는 다는 뜻인가. 아니다. 그래서는 전화요금과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다. 그는 집에서는 좀처럼 전화를 걸지 않기 때문 이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그가 집에 없을 때 전화를 거는 것이다. 잔업을 해서 늦게 퇴근할 때, 휴일에 출근했을 때, 이발소에 갔을 때. 등등. 또 한 가지, 집에 있는 경우에도 그에게 들키지 않고 전화를 걸 수 있는 때가 있다. 바로 목욕을 할 때다. 목욕을 좋아하는 헤이스케는 최 소한 삼사십 분은 목욕탕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통화를 할 수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부터 그는 이미 버릇처럼 굳어진 목욕습관을 포기했다. 간단히 샤워만 하고는 서둘 러 나오는 것이다. 아무리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그 녀가 전화를 거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불안을 껴안 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전화도청장치를 발견했을 때 구제받은 생각이 든 배경에는, 그런 사정 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오후 네 시 반, 이제 슬슬 테니스 연습이 끝날 시 간이다. 오늘은 조금 쌀쌀하니까 '유킨코'에 갔을까... . 그는 삿포로 라면을 주된 메뉴로 삼고 있는 분식집을 떠올렸다. 나오코가 다니는 고등학교 옆 에 있는 분식집이었다. 그 가게에 자주 간다는 것은, 휴지통에 버려져 있는 영수증을 보고 알았 다. '유킨코' 이외에도 '아지후쿠' , 커피숍 '구루루' 등의 영수증도 발견되었다. 그밖에도 자주 들르 는 가게가 있겠지만, 고등학생을 상대로는 영수증을 발행하지 않는 곳이 많을지도 모른다. 만약에 '유킨코'에 갔다면, 아마 된장찌게를 먹겠군... . 그것이 나오코가 좋아하는 메뉴로, 660엔이라는 것 도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콧노래까지 부르며 욕조에 느긋하게 잠겨 있었다. 그리고 욕조 밖으로 나와 머리와 온몸에 묻어 있는 물기를 닦아내고, 헤어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린 다음 욕실에서 나왔다. 거실로 돌아와서 시계를 올려다보자 약 사십오 분을 목욕에 허비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전화리를 살펴보 니 '리모트 사용중'이라는 램프는 꺼져 있었다. 그러나 서랍장 뒤에 숨겨져 있는 녹음기에서 테이 프를 꺼냈더니 역시 녹음이 되어 있었다. 그가 욕실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전화를 끊은 것이리 라. 욕실 문을 열고 닫는 소리가 의외로 크다는 사실을 그는 최근에야 깨달았다. 바오 옆에 계단 이 있어서 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이층에도 잘 들리는 것이다. 헤이스케는 테이프를 들고 이층으 로 올라갔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오코의 방에서는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전화를 끊고 난 지금 은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는 중이리라. 그는 침실로 들어가 책장에 올려놓은 소형 워크맨을 들고, 뚜껑을 열어 테이프를 넣었다. 그리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테이프를 되감았다. 요즘의 즐거움은 뭐니뭐니 해도 이것을 듣는 것이었다. 도청을 시작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 다. 그 동안 나오코가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대강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마음 놓이는 일 이 있었다. 최근 일주일 동안 소마 하루키에게 걸려온 전화를 한 통도 없었다는 것이다. 나오코가 그에게 건 적도 없다. 가장 자주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은 가사하라 유리에라는 같은 반 친구로, 아무래도 나오코와 가장 친한 친구인 것 같다. 나오코가 전화를 거는 상대도 대부분은 그 여자아 이였다. 여자친구에게 거는 것이라면, 특별히 내가 목욕하는 틈을 노리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처 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것이 곧 그녀의 배려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쓸데없는 걱정을 할까 봐 일부러 피하는 것이다. 나오코와 유리에의 대화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 들어도 저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유리에가 선생님의 남자친구의 흉을 보는 것을 나오코가 웃으면서 들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유리에의 신랄하기 그지없는 비판은 굉장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꺼림칙한 기분이 들기는커녕 통쾌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녀들의 대화에는 학 교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정보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헤이스케는 스가와라라는 교감 선생이 병적일 정도로 학생들에게 까다로운 반면 자기가 좋아하 는 몇몇 여학생들에게는 신기할 정도로 친밀하게 대하는 것이나, 모리오카라는 남학생이 다른 고 등하교 여학생을 임신시켰다는 소문이 떠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도쿄 대학의 입학 경쟁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입시명문 고등학교도, 내부에는 여러 가지 병소를 껴안고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 했다. 테이프가 처음까지 돌아가서 그느 재빨리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가슴이 설렐 정도였다. '... 여보세요. 모나미입니다.' 우선 나오코의 목소 리가 들렸다. 전화를 받은 느낌으로 보아하니 상대편에서 걸어온 전화인 것 같았다. '아, 여보세 요. 나야, 소마.' 갑자기 온몸에서 뜨거운 열이 솟구쳤다. 드디어 그 남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완전히 끊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것 같다. '아아, 안녕?' '지금 괜찮 아?' '응, 괜찮아. 우리 아빠 목욕탕에 들어가셨거든.' '역시 그렇구나. 모나미의 말이 맞았어. 정말 정확한데.' '오랫동안 습관이 돼서 본인은 의식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아홉 시 반이면 목욕하는 거?' '그래. 프로야구 시즌중에는 대개 아홉 시 반까지 야간경기를 하잖아? 아빤 그 야구중계를 보고 나면 항상 목욕을 하시거든. 그런 습관이 몸에 배어서 야구중계가 없을 때도 아홉 시 반이 면 목욕을 하는게 아닐까?' '흐음, 그래? 정말 재미있네.' 그러고 보니 그렇군! 그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히 욕실에 들어가는 때는 언제나 아홉 시 반쯤이다. 나오코의 말처럼 야구중계가 끝나면 곧장 욕실로 향하곤 했다. 그런데 그 습관이 프로야구 시즌이 끝난 다 음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전혀 의심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자니, 아무래도 아홉 시 반 이후에 전화를 하라고 미리 다짐해 놓은 것 같 았다. 화제는 곧장 테니스부에 관한 이야기로 옮겨갔다. 거의 매일 서클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뭐 하러 전화를 걸었을까 할 정도의 내용이었다. 나오코가 선배인 소마에게 존대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도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어느 사이에 그렇게 친해진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 을 쥐어짜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봤어?' 소마가 은밀히 계획을 꾸민 것처 럼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이브 말이야?' '그래.' '생각은 해봤지만... .' 나오코가 잠시 말을 끊었 다. 그는 이어폰을 끼지 않은 쪽의 귀를 틀어막았다. 흘려들어서는 안될 대화라고 직감한 것이다. 이브라는 것은 크리스마스 이브를 말하는 것이리라. '특별한 계획이 있어?' '그렇지는 않지만.' '그 렇다면 괜찮잖아? 그렇게 데이트 신청을 해도 들어주지 않았으니까, 크리스마스 이브 정도는 내 부탁을 들어줘.' 아무래도 크리스마스 이브에 데이트를 하자는 것 같았다. 갑자기 머리 꼭대기로 피가 솟구쳤다. 건방지군! 아직 어린 주제에! 심장의 고동도 빨라졌다. '하지만 매일 만나고 있잖 아.' 그렇지.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가 싫 어?'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야. 예전부터 말했잖아. 집을 비울 수 없다고 말이야.' '그래. 알고 있어. 집안일을 모두 해야 하니까 힘들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구. 하지만 하루 정도 집을 비운다 고 해서 무슨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잖아? 너도 자기 시간을 즐길 권리가 있다구.' 어린 녀석이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어대다니! 네가 무엇을 알고 있어! ' 친구들은 모두 우리가 사귄다고 생각 해. 가끔 묻는다구. 어디에서 데이트를 하냐든지, 둘이만 있을 때는 무엇을 하느냐든지 말이야. 데 이트를 한 번도 안 했다고 하면 다들 이상한 표정을 짓는 거야. 그런면 비참해서 견딜 수가 없다구.' 그래 멋대로 비참해지거라! 나오코가 응석을 부리는 것처 럼 뾰로통하게 말했다. '그렇게 만나고 싶으면 다른 여자애를 만나면 되잖아. 전에도 몇번이나 말했던 것처럼.' '또 그 소리야? 어느 누가 너를 대신할 수 있겠어? 내가 여자가 없어서 이러는 줄 알아? 나는 너에 대해서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구.' 나오코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 이 어지는 침묵이 그는 초조하게 만들었다. 나오코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벌 써 이브 계획을 세워 놓았어 어디에서 식사를 하고, 그 다음에 무엇을 할지 말이야. 예약하지 않 으면 안되니까 빨리 결정해 줘.' '그건 곤란해... .' '나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아. 그러니까 모나 미도 조금 더 생각해 주지 않겠어? 긍정적으로 말이야.' '알았어... .' 왜 단호하게 거절하지 않는 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이제 전화하지 말라고 하면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가! '그런 데 아까 텔레비전을 보았는데 이상한 동물이 나오던데!' 어색함을 남긴 채 전화를 끊고 싶지 않았 기 때문인지, 소마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나오코도 그 말에 맞추어 맞장구를 쳤다. 그런 대 화가 얼마 동안 계속된 다음, 아빠가 욕실에서 나온 것 같다는 나오코의 말을 계기로 전화는 끊 어졌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오기까지의 일주일 동안, 헤이스케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회사에 가도 마치 영혼이 빠져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만 바라볼 뿐이었다. 다행히 연말을 맞 이해서 한해 동안 벌려놓을 일을 마무리짓는 분위기였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정신을 다른데 두고 다닌다고 상사인 고사카로부터 잔소리를 들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머릿속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나오코는 크리스마스 이브를 어떻게 보낼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 이후, 소마 하루키에게서는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따라서 두 사람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학교에서 얘기를 했을지도 모르지만, 아마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테니스연 습을 하는 도중에는 다른 사람의 시선도 있어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이 지난번 도 청에서 받은 느낌이었다. 그것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최근 일주일 동안 나오코의 모습이 조금 이 상했다. 언제나 멍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거나 건성으로 대답하는 일이 많았다. 어 쩌면 소마의 데이트 신청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 안에서 는 삼십대 후반이 되었을 나오코의 부분과 열다섯 살 소녀로서의 모나미의 부분이 미묘하게 혼재 하고 있을 것이다. 어른의 부분은 현실을 이해하고 자신이 해야 할 행동을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어린 부분은 다른 보통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정신상태가 극히 불안정하다. 그것이 나오코를 더욱 헷갈리게 만들어 어찌해야 좋을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브를 하루 앞둔 12월 23일, 드디어 소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는 두 사람의 대 화를 침실에 있는 워크맨을 통해 들었다. '내일 네 시에 신주쿠에 있는 기노쿠니야 서점 앞에서 기다릴게. 알았지?' 소마의 목소리에서는 무엇으로도 움직이지 못할 단호한 결심을 느낄 수 있었 다. 그것이 듣는 사람에게 강한 압력으로 다가왔다. '잠깐만. 아무래도 못 나가겠어.' '어째서? 아 빠 허락이 필요하다면 내가 부탁할게.' '그래도 소용없어.' '왜 그렇게 회의적이야? 일단은 부딪혀 보는 거야.' '어쨋든 내일은 안돼.' '다른 볼일이 있는 것은 아니잖아?' '다른 볼일이 있어서 도저히 집을 비울 수 없어.' '거짓말. 너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 나를 속이려고 해도 소용없어.' 나오 코가 당황한 듯이 숨을 들이마시며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날카로운 끌로 신경을 후벼파는 것처럼 그는 초조함을 느꼈다. '기다릴게. 네 시에 기노쿠니야 서점 앞에서 기다릴 거야. 오고 싶 지 않다면 오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나는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그런 말로 나는 힘들게 만들 지 마.' '힘든 사람은 바로 나야.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그래서 이제 골치 아픈 생각은 그만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기로 결심했어.' '나는 갈 수 없어.' '그래, 좋아. 하지만 나는 기다릴 거야. 네 시야.' 나오코가 대꾸할 시간도 주지 않고 소마는 전하를 끊어 버렸다. 어쩌 면 나오코가 전화를 걸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계속해서 듣고 있었지만, 그런 다음에는 아무 것도 녹음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워크맨을 서랍에 넣고 침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잠시 문 앞에서 망설인 다음 나오코의 방을 노크했다. "예." 생각 탓인지,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은 것처럼 들렸다. "들어갈게." 문을 열자 나오코는 책상을 향해 앉아 있었다. 책상위에는 노트와 참고서가 펼쳐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부하고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아직도 공부하는 거야? 밑에서 차라 도 마시지 않겠어?" "예에, 지금은 됐어요. 신기한 일도 다 있네요. 이런 시간에 차를 마시자고 하 다니." "그래? 왠지 차를 마시고 싶어서 말이야." "전자 레인지 위에 떡이 있을 거예요. 이웃집에 서 가지고 왔는데, 출출하시면 드세요." "그래? 그러면 그거라도 먹을까?" 그는 등을 돌리고 나가 는 척하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물어보았다. "아참! 내일은 크리스마스 이브지?" "예." 나오코 는 이미 책상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무슨 약속이 있어?" "음, 특별히 없는데요." "그래? 그렇 다면 맛있는 것이라도 먹으러 갈까?" "내일은 어디에 가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할 거예요. 이브에 다가 토요일이니까요." "그러면 초밥이라도 시켜먹지. 우리식 크리스마스로군." 흡족한 마음으로 방에서 나가려고 할 때였다. 나오코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입을 열었다. "아참! 잠깐만요." "왜 그 래?" "내일 어쩌면 밖에 나갈지도 몰라요." 그는 납을 씌운 듯이 얼굴이 차갑게 굳어지는 것을 느 끼며 물었다. "어디 가는데?" "친구가 같이 쇼핑을 가자고 해서요. 아직 확실한 것은 잘 모르지 만... ." "흐음." 그는 나오코의 생각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마 그녀 자신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결심이 서지 않은 것이리라. 그래서 만일의 경우에는 나갈 수 있도록 미리 포석만을 깔아 두는 것이다. "그러면 늦게 들어와?"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금방... 그래요. 한두 시간이면 충분 할 거예여." "한두 시간이라... ."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 한두 시간이라는 말 을 듣고 일단 안심했다. 약속 장소에 간다고 해도 찻집에서 이야기만 하고 돌아올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그날 밤, 그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소마 하루키에게 나오코를 맡기는 것이 고양 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오코의 마음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는 무엇인가가 불시에 표면으로 솟구쳐 오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좀처럼 잠 을 이룰 수 없었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그는 한시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크리스마스 이브의 아침을 맞이했다. 그날은 데이트를 약속한 커플들을 축복하는 것처럼 아침부터 쾌청한 하늘이 온 세상을 밝게 비추었다. 좁은 마당에 장렬한 햇살이 내리쪼이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는 나오코와 함께 아침을 먹었다. 점심을 겸한 늦은 아침식사였다. 주위를 휘감고 있던 어둠의 그림자가 사라 진 다음에야 깜빡깜빡 졸다가, 결국 이불에서 나온 것은 열 시가 지나서였기 때문이다. 그는 식사 를 마친 다음 차를 마시면서 말했다. "오늘은 창고 청소나 해야겠는데. 필요 없는 것들이 꽤 많이 들어 있을 거야. 올해 안에 재활용 쓰레기는 한 번밖에 못내놓지? 어차피 오늘 중으로 정리해야 겠군." "하지만 창고에 들어 있는 것은 활용할 수 없는 쓰레기 뿐이잖아요. 그것들은 재활용 쓰레 기 버리는 날에 버리지 못해요." "그래도 괜찮아. 지금 정리해 두면 다음에 버릴 때 편하니까." "당장 버리지 않을 텐데 왜 밖에 내놓으려고 해요? 새해도 얼마 안 남았는데, 그러면 집까지 지 저분해 보인다구요. 연말이라고 해서 특별히 대청소를 할 필요는 없어요." 그의 찻잔이 비자 나 오코는 다시 차를 따라주었다. "그럴까?" 물론 그 자신도 특별히 오늘 청소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오코를 집에 붙잡아둘 이유가 필요했을 뿐이다. 창고를 정리할 생각을 하다가 문득 머리에 번뜩이는 것이 있었다. "그게 어디 있지? 트리, 크리스마스 트리 말이야. 모나미가 어렸을 때 사주었잖아?" "아아, 그거요? 글쎄요. 반침 안에 들어 있지 않을까요?" "여기 있나?" 그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면서 반침 문을 열었다. "뭐 하려구요? 그런 것을 뭐하러 꺼내려구요?" "모처럼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인데 기분이라도 내야지." 반침 안에는 골판지 상자와 커다란 옷가방 , 종이봉투 따위가 상당히 지저분하게 들어 있었다. 나오코는 앞에서부터 순서대로 꺼내어 바닥위 에 올려놓는 그의 모습을, 이마를 찡그린 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반짝거리는 종이가 비어져나와 있는 긴 상자를 꺼냈다. "찾았다!" 뚜껑을 열자 전나무 모형의 장식용 부품이 들어 있었다. "정말로 그것을 장식할 거예요?" "그러면 안돼?" "안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 그때 나오 코가 힐끔 시계로 눈길을 돌리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시계바늘은 열두 시 정각을 지나서 조금씩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약 한 시간을 들여 트리를 완성시켜 거실 한쪽 구석에 세웠 다. "트리를 세우니까 크리스마스 기분이 나잖아." "그렇군요." 부엌엥서 설거지를 하고 있던 나오 코는 힐끔 트리를 쳐다 보았다. "이봐, 잠시 밖에 나가지 않겠어?" 나오코는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등을 똑바로 폈다. "나가다니요? 어디로요?" "쇼핑하러 가지 않겠어? 요즘 들어 새옷을 사지 않았잖아. 크리스마스 선물로 옷 한 벌 사줄게.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케이크도 사오 지. 모처럼 트리도 만들었으니까, 본격적으로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녀는 곧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떨구고 싱크대 안을 보고 있었다. 이윽고 느린 화면처럼 천천히 고개 를 들더니 거실로 들어왔다. "어제도 말했지만 오늘 잠깐 밖에 나가야 돼요."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하지 않았어? 친구에게서도 연락이 안 왔잖아?" "내가 연락하기로 되어 있어요. 열두 시가 넘으면 전화를 하겠다고 했거든요." "거절하면 되잖아. 갈 수 없게 되었다고." "하지만 나를 믿고 있는 애예요." "다른 일도 아니고 쇼핑을 하기로 한 것뿐이잖아. 아마 다른 친구에게 부탁할 거야." "어쨋든 전화를 걸어 볼게요." 말을 마치고 나오코는 몸을 돌렸다. 이층 자기 방에서 전화 를 걸려는 것이리라. "여기에서 걸어." 나오코는 쿵쾅 소리를 내며 계단을 뛰어올라 갔다. 그의 목 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전화기를 보았다. '리모트 사용중'이라는 램프 가 켜져 있었다. 실제로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것이다. 어쩌면 소마의 집일지도 모른다. 전화를 마친 나오코가 즉시 내려왔다. "역시 내가 함께 가주어야겠어요. 너무 늦지 않게 금방 돌아올게 요." "어느 친구지?" "유리에예요. 가사하라 유리에." "어디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신주쿠에서 세 시에 만나기로 했어요." "세 시?" "그래요. 그러니까 그만 나갈 준비를 해야 돼요." 나오코는 또다시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제 소마의 얘기로는 네 시에 기노쿠니야 서점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지금 소마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 시간을 바 꾼 것일까. 지금 전화도 녹음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당장 듣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나 녹음기를 꺼내고 있는 장면을 들키기라도 하면 모든 것은 끝장이다. 나오코는 두 시가 넘어서 외 출했다. 새빨간 스웨터 위에 모자가 달린 검은 코트를 걸쳐 입고서. 보일 듯 말 듯하게 화장을 한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꺼내 보고 싶은 마음을 참고, 그는 잠시 시간이 지나가기 를 기다려 녹음기를 꺼냈다. 재생 버튼을 누르는 손이 가볍게 떨렸다. '예, 유리에인데요.' '유리 에? 나야.' '모나미야? 웬일이야? 이런 어중간한 시간에?' '부탁할 게 있는데, 들어줄래?' '뭔데? 무 슨 곤란한 일이라도 있어?' '곤란하다고 할까, ... 앞으로 조금 곤란해질지도 몰라서.' '무슨 뜻이 야?' '실은 말이지, 오늘 잠시 외출해야 할 일이 있는데 너와 쇼핑 간 걸로 해주지 않겠니?' '아아! 알리바이구나.' '미안해. 우리 아빠가 너에게까지 전화를 걸어 확인하지는 않겠지만.' '알았어. 오늘 은 내가 전화를 받지 않을게. 엄마에게도 잘 얘기해 두어서, 너네 아빠가 전화를 걸었을 때 적당 히 대답하라고 할 테니까 걱정마. 우리 엄마, 그런면에서는 제법 융통성이 있거든.' '귀찮은 부탁 을 해서 미안해.' '다음에 맛있는 거 왕창 사줘야 돼. 그 보다 잘해 봐.' '무슨 뜻이야?' '시치미 떼 지 말라구. 크리스마스 이브에 알리바이 공작을 펼친다면 무슨 일인지 뻔할 뻔자 아니야? 그런 부탁이나 받고 있어야 하는 나는 비참하기 짝이 없지만.' '정말 미안해.' '그렇게 사과하면 오히려 내가 미안하잖아. 우물쭈물거리고 있으면 데이트에 늦을 거니까 빨리 가봐.' '응, 그만 끊을게.' 전 화는 여기에서 끊어졌다. 그녀는 오늘 외출에 대해서 헤이스케가 의심을 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외출했다. 그토록 소마 하루키를 만나고 싶은 것인지, 올 때까지 기다리 겠다는 그의 말이 마음에 걸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오코의 마음을 차지하는 비중이 헤이스케보다 소마 하루키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그는 팔짱을 끼고 시계를 쳐다보았다. 불길한 생각이 그의 마음을 조금씩 잠식해 갔다. 나오코를 빼앗기는 것이 아닐까 하 는 공포가, 검은 입을 벌리고 있는 거대한 파도가 되어 그를 뒤덮었다. 그는 한 시간 동안 그 자 세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난방을 하지 않았지만 조금도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이마에 굵은 땀 방울이 송글송글 맺힐 정도였다. 그는 벌떡 일어서더니 침실로 올라가서 서둘러 옷을 갈아 입었 다. 신주쿠 역에 도착하자 시계는 세 시 오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눈길도 돌리지 않고 기 노쿠니야 서점을 향해 곧장 달려갔다. 아직 네 시가 안되었다고는 해도 안심할 수는 없다. 두 사 람이 만나면 그 즉시 자리를 떠나버릴 테니까 말이다. 기노쿠니야 서점 앞에 도착한 것은 세 시 오십오 분. 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서점 앞에는 약속한 사람들이 진을 치고 서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라서 그런지 오늘은 특히 젊은 사람들뿐이다. 네모난 기둥 바로 옆에 낯익은 남학생이 서 있었다. 짙은 감색의 더플 코트가 잘 어울리는 소마 하루키였다. 손에 들고 있는 종이가방에는 아마 선물이 들어 있을 것이다. 기운이 없어 보이는 것은 나오코가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그때 가늘고 긴 눈이 무엇인가를 포착한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밝은 빛으로 가득 차는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눈을 옮기자 한 송이 목련 같은 나오코의 모습이 있었다. 그녀는 수줍은 듯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고 등학교 1학년, 열다섯 살의 표정이었다. 헤이스케는 소마 하루키를 향해 일직선으로 성큼성큼 다 가갔다. 소마와 나오코의 간격이 점점 좁아지더니, 4미터가 되고, 3미터가 되었다. 나오코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을 때였다. '많이 기다렸어?'라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말 은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전에 그녀의 눈이 헤이스케를 포착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치 시 간이 멈춘 것처럼 발길을 멈추었다. 그리고 보기에도 안타까울 정도로 온몸이, 얼굴이, 그리고 표 정이 굳어졌다. 이윽고 소마 하루키도 이변을 알아차렸는지, 인형의 목이 돌아가는 것처럼 서서히 헤이스케를 향했다. 연못에 파문이 퍼지는 것처럼 그의 얼굴 전체에 놀라움의 빛이 퍼져 나갔다. 문득 어느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착각이고, 헤 이스케 안에 깃든 다른 인격이 지금 이 장면을 냉정하게 주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주위에는 많 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나오코와 소마의 모습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 두 사람도 그랬을지 모른다. 두 사람은 모두 꼼짝도 하지 않고 자기를 향해 걸어오는 중년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헤이스케가 걸음을 멈추었을 때, 세 사람의 위치는 거의 정삼각형이 되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나오코였다. "아빠, 어떻게... ?" 몇 가지 의문을 포함한 '어떻게'였다. 어떻게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을 알고 있었죠? 어떻게 여기에 온 거죠? 어떻게, 어떻게... . 그는 나 오코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소마의 얼굴을 응시했다. "소마라고 하지?" 대답을 하려는 듯이 소마의 입술이 약간 움직였다. 그러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우리 딸에게 데이트 신청을 해줘서 고맙네."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다시 소마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모처럼의 데이트 신청이지만 모나미는 자네와 사귈 수 없네. 데이트도 시킬 수 없네." 소마는 눈 을 크게 뜨더니 그대로 나오코의 얼굴을 향했다. 헤이스케도 나오코를 바라보았다. 나오코는 두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미안하지만 모나미는 데려가겠네." 그는 나오코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그녀는 마치 밀랍으로 만 든 인형처럼 전혀 저항하지 않고 한두 걸음을 떼었다. 그때 소마가 다급히 그들을 제지했다. "잠 깐만요! 왜죠? 왜 데이트를 하면 안된다는 거죠?" 물론 자세히 설명해 주고도 싶었다. 그러나 그 렇게 할 수는 없다. 가령 설명해 준다고 해도 소마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을 놀린다고 생 각하고 화를 낼 것이 틀림없다. 헤이스케는 하는 수 없이 다른 변명거리를 꺼냈다. "세계가 다르 지. 나와 모나미가 살고 있는 세계와 자네가 살고 있는 세계는 전혀 별개의 것이네. 그러니 사귄 다고 해도 잘 될 리가 없네." 그는 반쯤 넋이 나간 나오코의 등에 손을 댄 채 성큼성큼 걸어갔다. 소마가 어떤 표정으로 자신들을 보고 있는지, 조금은 상상할 수 있었다. 망연한 표정으로 입을 벌 리고 서 있든지, 분노를 참지 못해 씩씩거리고 있든지, 그것도 아니면 아직 무슨 사태가 일어났는 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든지. 소마가 어떤 표정으로 있든,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한시라도 빨리 이 곳을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오코는 마치 몽유병자처럼 허공을 응시한 채, 걸음을 내딛는 것도 멈추어 서는 것도 자신의 의사가 아니라 다만 헤이스케와 보조를 맞추어 움직이는 것 같았 다. 그것은 지하철을 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초점이 일정치 않은 눈 으로 멍하니 발끝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헤이스케는 그녀의 손에 백화점 쇼핑백이 들려 있는 것 을, 두 사람이 내려야 할 역이 가까워졌을 때야 알아차렸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 었다. 그제서야 그녀가 왜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집을 나섰는지 이해가 되었다. 소마 하루키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서였다. 현관문을 열려고 할 때 옆집에 사는 부인이 울타리 너머 로 인사를 건넸다. 그는 웃음으로 대했지만 나오코는 아무런 표정 없이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 았다. 그녀는 이상한 표정으로 나오코를 힐끔 쳐다보았다. 현관에서 나오코는 느릿느릿 신발을 벗 더니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마치 야구중계에서 슬로 모션을 보는 것 같았다. 그대로 계단을 향한 것은 자기 방에 틀어박히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도 말리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잠시 동안 혼자 내버려두려고 했다. 그런데 나오코는 계단을 올라가지 않고 바로 앞에 멈추어 서서, 그때까지 떨구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말을 걸 틈도 없이 그녀는 들고 있던 물건들을 그 자리에 내동댕이치고 거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날카로운 눈길로 서랍장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서랍장으로 다가다서 전화기를 두 손으로 들어올렸다. 그러 자 벽과의 사이에서 코드 다발이 줄줄 미끄러져 나왔다. 그런 다음 서랍장 옆에 쌓여 있는 낡은 신문지를 난폭하게 젖혔다. 위에 놓여 있던 안내전단들이 우르르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때서야 그 녀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나 구태여 제지하 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지금에 와서 말리기에는 이미 늦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드디어 원하는 것 은 찾아낸 듯한 표정으로, 서랍장과 벽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녹음기를 꺼냈다. "이게 뭐죠?" 차 갑게 빛나는 검은 기계를 손에 들고 그녀는 중얼거리듯이 물었다. 그리고 서서히 얼굴을 일그러 뜨리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게 뭐냐구요!" 나오코는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그를 노려보고 나서 녹음기를 작동시켰다. 스피커를 통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 유리에인데요.' '유리에? 나야.' '모 나미야? 웬일이야? 이런 어중간한 시간에?' '부탁할 게 있는데, 들어줄래?' '뭔데? 무슨 곤란한 일 이라도 있어?' '곤란하다고 할까, ... 앞으로 조금 곤란해 질지도 몰라서.' 그녀는 정지 버튼을 눌렀 다. 그 손길이 떨리고 있는 것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목소리도 가늘게 떨렸다. "언제부터 이런 짓을 하고 있었죠?" "이주일 전... ." 목소리에 가래가 섞였다. 그는 한두 번 기침을 하고 나서 다 시 말했다. "이주일 전부터야." 그녀의 얼굴은 벌레라도 씹은 듯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오늘 일은 당신이 알 리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설마 당신이 이런 짓까지 하리라고는... ." "당신이 걱정됐기 때문이야." "그렇다고 해서 이런 짓을 해도 된다는 거예요?' 그 녀는 들고 있던 녹음기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뚜껑이 열리고 안에 있던 테이프가 튀어나왔다. "나에게도 프라이버시라는 게 있잖아요. 이런... 이런 비열한 짓을 하고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그렇다면,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남자를 만나는 것은 비열하지 않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냐 구!" "당신에게 쓸데없는 걱정을 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거짓말은 이제 작작 좀 하시 지. 그런 말이 통한다면, 들키지만 않으면 바람을 피워도 좋다는 거야?" "그게 아니에요. 사실 오 늘 소마와 데이트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당신도 들었으니까 알 거 아니에요. 그는 오늘, 내가 갈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일단 약속한 장소까지 간 거예요. 선 물을 주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즉시 헤어질 생각이었다구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의 마음 이 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냥 바람맞게 내버려두었으면 되잖아? 그러면 그도 쉽게 포기할 수 있고."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기다리는 것을 뻔히 알면서." "애당초 그 녀석과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거잖아? 당신이 교태를 부리지 않았다면 그 녀석 이 그런 수작을 부릴 리가 있어? 처음부터 상대하지 않았으면 됐다구." "나는 평범하게 행동했을 뿐이에요. 말을 걸면 대답하고, 전화가 걸려오면 이야기하구요.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당 신에게 평범하게 행동할 권리는 없어!" 그가 딱 잘라서 말하자 나오코가 깜짝 놀란 듯이 눈을 크 게 떴다.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은 어깨의 흔들림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나오코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잘 들어. 당신은 내 아내야! 아무리 모습이 모나미라고 해도, 당신이 내 아내라는 사실에서 도망칠 수 없어! 당신은 젊은 육체를 손에 넣어 다시 인생을 시작하고 싶겠지 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구!" 그녀는 바닥에 털썩 주저 않았다. 굵은 눈물이 떨어져 바닥에 무늬를 그렸다. "잊지 않았어요." "아니, 잊 어버렸어. 잊어버리려 하고 있어. 나는 지금도 당신 남편으로 살고 있는데 말이야. 그래서 당신을 배신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어. 바람도 피우지 않았고, 재혼도 생각하지 않았어. 당신 초등 학교에 다에코라는 선생이 었었지? 나는 그 선생에게 마음이 있었지. 교제하고 싶었다구. 하지만 끝끝내 전화 한 통화도 하지 않았지. 왜 그랬을 것 같아? 당신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는 어디까지나 당신의 남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구."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나오코를 내려다보았다. 무거운 침묵에 짓눌러 나오코의 육체가 주먹만하게 오그라든 것 같았다. 그때 식식 거리는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터널에 바람이 빠져나가는 듯한 소리였다. 그것이 자신이 내뿜는 호흡이라는 것을, 그는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나오코가 마치 죽음 을 앞에 둔 노파처럼 서서 히 일어섰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거실에서 나가더니, 집에 돌아왔을 때보다 더욱 불안한 걸음걸 이로 계단을 올라갔다.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허무한 마음이 칙칙한 비구름처럼 가슴에 퍼져 나갔다. 앞으로 갈 길은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뒤로 돌아갈 수도 없는 절망감이 어깨 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그는 녹음기와 테이프를 주워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다시 사용하고 싶은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았다. 그는 서랍장 옆에 손을 집어넣고 플러그에서 코드를 빼냈다. 어디에 선가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피리 소리 같기도 하고, 하프 소리 같기도 했다. 그는 귀를 기울이 면서 계단 앞으로 다가갔다. 계단 위에서 들려오는 기묘한 소리는 피리 소리가 아니라 나오코의 흐느낌이었다. 사랑의 방법 해가 바뀌어 1월도 벌써 중순이 지나고 있었다. 오랜만에 인젝터 공장에 들른 헤이스케는 휴게 실에서 반장인 나카오를 만났다. 그는 만나자마자 헤이스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걱정스러운 듯 이 물었다. "이봐, 어째 좀 야윈 것 같아." "그래?" 헤이스케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만졌다. "많 이 말랐어. 안색도 좋지 않고." 옆에 있던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아픈거 아냐? 병원에 가보는 게 어떻겠어?" "특별히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면 안돼. 되도록 이면 빨리 병원에 가보라구. 이제 나이도 적지 않잖아?" "물론 그건 알고 있지만."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계속 뺨을 어루만졌다. 어쩌면 살이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병에 걸린 것은 아니 다. 이유는 간단하다. 요즘들어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것이다. 나오코가 식탁을 차려 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퇴근을 하면 저녁밥이 차려져 있고, 휴일이면 아침, 점심, 저녁에 모두 맛있는 요리가 나온다. 다만 그녀와 함께 있으면 가슴이 막힌 것처럼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고 젓가락이 나가지 않았다. 그 사건 이후, 나오코에게서는 표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말도 하지 않았다. 집안 일을 할 때 이외에는 방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는 것이다. 그는 자기 앞 에서만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담임 선생이 전화를 걸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모나미의 건강을 묻는 것을 보면 기운이 없는 것은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또한 그녀는 해가 바뀌자마자 테니스부를 그만두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사 건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이리라. 그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그녀에게 씻지 못할 깊은 상처를 입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질문에는 적당한 해답을 찾아내지 못 했다. 퇴근 시간을 알리는 차임벨이 울리고, 그는 회사를 나섰다. 올해 들어서는 무슨 핑계를 대 서라도 잔업을 피하고 있었다. 나오코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가장 먼저 신발을 보았다. 그리고 나오코의 신발이 가지런히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무사히 돌아온 것이다. 언젠가 집을 나간 채 돌아오지 않을까 봐 밤낮을 걱정으로 지새웠 다. 그가 쫓아가지 못하는 곳에서 생활하면 그녀는 평범한 열여섯 살 소녀로 살아갈 수 있다. 연 애도 할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완전히 다른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 녀가 집을 나가지 않는 것은 아직 그런 결심이 서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는 사는 곳이 나 생활비가 걱정되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은 아닐까. 물론 이미 결심을 하고, 호시탐탐 행동 으로 옮길 날만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내일 저녁 퇴근길에는 나오코의 신발이 없을지도 모른 다. 거실에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는 계단을 올라가서 방문을 노크했다. "네." 문 뒤에서 힘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여기에서 또 한 번,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실 은 가출 이상으로 두려운 일이 있었다. 나오코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것만이 현재의 괴로움에서 도망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오늘까지는, 그 강렬한 유혹에는 굴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문을 열고 책상을 향하고 있는 그녀의 등에 대고 말했다. "다녀왔어." "예."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책을 읽 고 있는 것 같다. 요즘 들어 그녀는 탐욕스럽게 책만 읽어댔다. "무슨 책이지?" 나오코는 대답하 는 대신 책이 잘 보이도록 몸을 조금 뒤로 젖혔다. 펼친 페이지 위쪽에 제목이 인쇄되어 있었다. " 빨간머리 앤 이라... . 재미있어?" "그저 그래요. 아무 책이라도 상관없어요." '이 현실을 잊을 수 만 있다면.' 아마 그 말은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으리라. 그녀는 책을 덮으며 일어섰다. "이제 저녁을 준비해야겠군요."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아직 배가 고프지 않아." 그의 시선이 휴지통 옆에 떨어진 종이를 포착했다. 그 종이를 들어올리자 나오코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1학년 2반, 스키 여행 안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컴퓨터로 만든 인쇄물 같았다. "이게 뭐지?" "보고도 몰라요? 우리 반 아이가 이번 봄방학 때 스키 여행을 계획했는데, 그 참가 자를 모집하고 있는 거예요." "학교 행사가 아니로군." "그래요. 그래서 참가하지 않을 거예요. 그 러면 되죠?" 그녀는 독수리가 병아리를 낚아채듯이 종이를 빼앗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리고 금방 밖으로 나갈 태세로 화가 난 듯이 말해다. "저녁을 준비해야겠어요." "나오코, 나를 증오하고 있어?" 그녀는 눈을 내리 깔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증오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는 듯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렇겠지. 나도 마찬가지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두 사람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방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느껴졌다. 혹독한 겨울 바람이 창문 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거친 들판 한가운데에 자신들만이 버림을 받은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문득 나오코가 그리워졌다. 지금의 나오코가 아니라, 본래의 육체를 가지고 있던 나오 코가... . 그녀는 고집이 셌지만 잘 웃고, 잘 떠들던 여자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집에서는 웃음을 찾아볼 수 없었다. "... ." "저, 그걸 할까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발밑을 내려다보면서 중얼거 리듯이 말했다. 윤기가 있는 길다란 머리칼 사이로 새하얀 목덜미가 들여다보였다. "그거 말이 야?" 그는 새삼 확인하듯이 물었다. "결국 그것밖에는 해결할 방법이 없을 것 같아요. 마음만으론 어찌할 수 없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런가?" "당신은 지금도 마음이 내키지 않아요?" "글세. 너 무갑작스러워서... . 당신은 어때?" 그는 무심결에 말을 하고도 깜짝 놀랐다. 요전에 싸울 때 말고 는, 당신이라는 말을 입에 담은 것이 얼마 만일까? "글쎄요, 내 몸에게 물어봐야겠죠." "그래? 나 도 그럴지도 모르지." 지금의 나오코를 한 사람의 여자로 보게 된 것은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소마에게 이상할 정도로 질투심을 불태운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성행위에 이르면 결론은 전혀 달라진다. 생각한 적이 없다고 하기보다 생각하는 것 자체를 무의식적으로 거부해 왔기 때문이 다. "한 번 시도해 볼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어가더니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불을 꺼줘요." 벽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자 형광등 불빛이 사라지고, 방안은 순식간에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그러나 창문으로 들어오는 어렴풋한 불빛 덕분에 차츰차츰 눈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새하얀 등이 희미하게 보이더니 이내 이불 속으로 파고 들었다. "됐어요." 어떻게 해야 좋을까.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일단은 자신도 옷을 벗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팬티 하나만 걸친 채, 그는 손으로 더듬어 침대에 다가갔다. 나오코의 의자가 발에 닿았다. 그는 그녀의 얼굴까지 가리고 있는 이불을 조금 들어올렸다. 그 순간, 그녀 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될 수 있으면 아프지 않게 해줘요. 잊고 있 을지도 모르지만 난 처음이니까요." "아아, 그렇지... ." 그는 조금 망설이다가 팬티를 벗었다. 그의 물건은 아직 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발기할 것 같은 조짐은 있었다. "저, 그게 없는데 어떡하 지?" "그거라뇨?" "콘돔말이야, 콘돔."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이제 곧 생리가 있을 거니까 괜찮아요." "아, 그래?" 옛날에는 자주 이런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자 그는 왠 지 가슴이 아려왔다. 그는 이불 속으로 손을 넣었다. 손가락 끝에 그녀의 피부가 닿았다. 그녀가 몸을 가늘게 떠는 게 느껴졌다. 그는 더욱 깊숙이 손을 넣어 그녀의 오른팔을 잡았다. 피부는 생 각했던 것 이상으로 매끄러웠다. 부드럽지만 않으면 그리고 체온이 없으면, 틀림없이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완벽한 육체에, 그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순순히 감 동했다. 그 순간, 그의 하반신에 변화가 일어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물건이 단단해진 것이 다. 손바닥에 끈적끈적하게 땀이 배이기 시작했다. 그는 손을 움직이려고 했다. 그녀의 신체 중심 으로 이동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마치 얼어붙은 듯이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내부에 있는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것을 강력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돌아가라! 돌아가라! 돌아가라! 누군 가가 소리치고 있었다. 시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길을 가고, 헤이스케와 나오코는 어둠 속에서 완 전히 정지해 있었다. 그는 자신들의 처지를 저주하면서 입을 열었다. "나오코, 그만두지." "그래 요." 그녀는 뜻밖에 순순히 대답했다. 그는 이불 속에서 손을 빼고, 벗어 놓은 속옷을 주워입기 시작했다. 창 밖에는 여전히 차가운 겨울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빈깡통만이 요란스럽게 굴러다녔 다. 책상 위에 있는 전화기가 시끄럽게 울어댔다. 외부에서 걸려온 전화로, 내부와는 호출음이 다르 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청 공장에서 전화가 걸려오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헤이스케는 재빨리 전화기를 들어올렸다. 그런데 교환대의 여자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네기시 씨라는 분께서 헤이스케 계장님과 통화를 하고 싶다는데요." "아, 네." 대답을 하면서 네기시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때 삿포로에서 본 분식집 간판이 떠오랐다. 그렇다면 네기시 후미야인가. "여보 세요. 헤이스케 씨세요?" 그러나 들려온 것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나이가 조금 많은 중년 여성인 가. "그런데요. 저, 실례지만 누구신가요?" "저는 네기시 노리코라고 합니다. 잊어버리셨을지도 모 르지만 예전에 저의 아들이 만나뵈었다고 하던데요."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몇 년 전 의 일이었던가요?" "그때 아들이 대단한 실례를 저질렀다고 하던데, 정말 죄송합니다. 최근에야 그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특별히 실례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이야기를 이번에 들으신 겁니까?" "예. 그래서 깜짝 놀라서요... ." "그렇습니까?" 하긴 후미야의 얼굴에서 는, 자신을 만난 것은 어머니에게 비밀로 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세월 이 지났기 때문에 말할 마음이 든 것일까. 아니면 무심코 입에서 나왔을 뿐인가. "그래서 말씀인 데요, 꼭 만나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바쁘실 거라고 생각하지만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어요?" "그것은 상관없지만, 지금 삿포로가 아닌가요?" "아는 사람의 결혼식이 있어서 오늘 도쿄에 왔거든요." "아, 그러세요?" "삼십 분이라도 좋으니까 오늘이나 내일중에 시간을 내 주실 수 없을까요? 장소를 말씀해 주시면 어디라도 찾아뵙겠습니다."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도쿄 역 근처에 있는 호텔이에요." 그 호텔에서 모레 일요일에 친척의 결혼식이 열린다고 한다. 사실 내일 와도 되지만 하루 빨리 온 것은 그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그러면 제가 그 쪽으로 가겠습니다. 내일 점심시간은 어떠십니까?" "저는 상관없지만, 그러셔도 괜찮겠어요? 제가 회사 근처로 갈 수도 있는데요." "아닙니다. 오늘은 일이 몇시에 끝날지도 모르고, 우리 회사는 찾 아오시기 불편하니까요." "그러면 죄송하지만 그렇게 해주세요." 그는 오후 한 시에 호텔 커피숍 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무슨 일일까. 후미야의 말에 따 르면 노리코에게 있어서 오가와는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남자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일부러 찾아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그때의 기억은 풍화되지 않았지만 세월이 지나간 양만큼 그의 마음속에서 자리하는 비율은 확실히 줄어들고 있었다. 또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한때는 그렇게 마음에 걸렸던 사고 원인도,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오가와가 헤어진 가족에게 돈을 보내기 위해 초과 노동을 했다는 것으로 결 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몇 가지 이해되지 않는 점과 가끔 이쓰미의 창백한 얼굴이 떠올라서 걱정 은 되었지만 모두 끝난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게다가... .그의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지금은 태평하게 남의 문제에 신경 쓸 때가 아니잖는가. 나오코에게 노리코를 만나는 것을 말하지 않았 다. 그 이야기를 하면 사고의 기억이 되살아나서 모나미의 죽음과 현재의 상태라는 식으로 끊임 없이 사고(思考)의 연결고리가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또한 어색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다음날 아침, 날씨는 맑았지만 싸늘한 바람은 뺨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그는 목도리를 감고 집을 나섰다. 나오코에게는 단지 회사에 일이 있다 고 설명했다. 그녀는 난로를 옆에 두고 뜨개질을 하고 있었는데, 뜨개질은 옛날부터 그녀의 주특 기였다. 개교 기념일이라서 학교에는 가지 않는다고 한다. 최근에는 집에서도 별로 공부하는 모습 을 볼 수 없었다. 의과대학에 진학하겠다는 이야기도 전혀 나오지 않았다. 물론 그것에 대해서 질 문한 적은 없었다. 어떠한 대답이 돌아올지 명백하기 때문이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바늘 끝처 럼 피부를 찔러 얼굴이 갈라지는 것 같았다. 그는 지하철을 타고 나서야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 러나 약속한 호텔에 가기위해서는 도쿄 역에서 내려 몇 분 동안 걸어야 했다. 역시 다른 장소로 하는 것이 좋았을까. 이때만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넓은 커피숍 입구에 들어섰을 때, 그는 비로 소 상대방의 얼굴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자 검은 옷을 입은 웨이 터가 옆으로 다가와서 물었다. "혼자 오셨습니까?" "아니,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는데요." 그렇 게 말했을 때였다. 옆자리에 앉아 았던 바싹 마른 여자가 그를 쳐다보면서 쭈뼛쭈뼛 일어섰다. 엷은 갈색 니트에 똑같은 색의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저, 헤이스케 씨인가요?" "그렇습니다만." "바쁘신데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거기 앉으십시오." 그녀의 앞에는 이미 밀크티가 놓여 있었고, 그는 커피를 주문했다. "아드님은 잘 있나요?" "예에." "당시에 분명히 3학년이라고 했는데, 벌써 취직했겠네요?" "아니예요. 작년에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예에? 대단하군요!"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대학에서 못다한 공부가 있다고 해서요. 등록 금은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어떻게든 만들어 보겠다고 하더군요." "정말 장한 아드님을 두셨군 요." 그는 웨이트리스가 가져온 커피를 프림과 설탕을 타지 않은 채 한 모금 마셨다. 대학원에 다 니는 아들이 있을 정도니까 노리코의 나이는 50세쯤 되었을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주름은 많 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세련된 느낌을 주어 나이보다는 훨씬 젊어 보였다. 젊었을 시절에는 상당 한 미인이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실은 지난번에 아들 서랍에서 우연히 사진 한 장을 보았어요. 아들이 네 살 때 찍은 사진으로, 얼굴 부분만 동그랗게 오려놓은 것이었지요." "아아!" 어떤 사진인지 생각이 났다. 회중시계의 안에 박혀 있던 사진이리라. "그래서 아들에게, 그 사진이 어떻게 너에게 있느냐고 캐물었어요. 처음에는 옛날 앨범에서 찾았다고 주장했지만, 거 짓말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어요. 어린 시절의 사진은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그때 서야 마지못한 표정으로 헤이스케 씨께서 삿포로에 오셨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으니까요." "저와 만난 것을 어머니에게는 말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때 만났다면, 헤이스케 씨께서 궁금하게 생각 하시는 것들을 말해 드릴 수 있었을 텐데요." "하지만 아드님께서도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지요. 아버지인 오가와 씨를 왜 그렇게 증오하는가에 대해서도요... ." "예.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 에요. 아니 그보다... ." 노리코는 고개를 한 번 흔들고 나서 깊은 숨을 토해내고는 그를 쳐다보았 다. "사실과는 전혀 반대예요." "반대?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녀는 일단 고개를 떨구었다. 다시 들었을 때는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는 듯했다. "헤이스케 씨는 사고로 부인을 잃으셨다고 하더군 요." "그렇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에요. 그 사고만큼은 저희들에게도 절반의 책임이 있어 요. 어떻게 사죄를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오가와 씨가 그쪽에 돈을 보내기 위해서 무리한 근무를 자청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사고를 일으켰기 때문인가요?" "예. 그 무렵 저는 새로 시 작한 장사가 잘 되지 않아 돈에 쪼들리고 있었어요. 생활비는 그럭저럭 충당했지만 도저히 아들 을 대학에 보낼 만큼의 여유는 없었지요. 그러던 어느날, 그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그 사람 은 그때까지 계속 후미야의 나이를 손으로 꼽고 있다가, 이제 곧 입시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전화를 걸어왔더군요. 대학에 보낼 것인가, 대학에 보낼 만큼의 돈은 있느냐고 묻더군요. 그 사람 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그만 사정을 털어놓고 말았어요." "그러자 오가와 씨가 어떻게든 마련해 보겠다고 하신 거군요." "예. 그 사람은 그 이후, 매달 10만 엔 이상의 돈을 보내 주었어요. 기왕 그렇게 보내주는 것, 저도 후미야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만 기대려고 생각했구 요. 그런데 그 아이가 재수를 하게 돼서 결국 1년 이상 그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말았지요. 후미 야는 돈이 들지 않도록 가능한 한 국립 대학에 진학하려고 했으니까요... ." "그런 사정이 있었군 요.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사고를 책임질 필요는 없습니다. 오가와 씨가 속죄할 생각으로 돈을 보 내주었으니까요." "속죄... ." "그 옛날, 두 분을 버린 죄를 갚기 위해 돈을 보내준 것이 아닐까요? 아드님 이야기를 듣자하니 그런 것 같던데요." 그녀는 괴로운 듯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니까 그것이 반대라는 겁니다." "무슨 뜻이지요? 속죄라는 말이 과장스럽다면, 부모의 책임이라고 할 수 도 있지요. 자식의 학비를 보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 사람에 게는 책임이 없으니까요." "무슨 뜻이죠?" 그녀는 무엇인가를 주저하는 것처럼 천천히 입술을 핥 더니, 이윽고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후미야는 그 사람의 아들이 아니니까요." "예?" 그 는 너무나 뜻밖의 말에 자신이 귀를 의심했다. "그렇다면 누구의 아들입니까? 당신 자식인 것만 은 틀림없나요?"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내가 낳았으니까요." 그녀는 굳어진 표정을 조금 풀었다." 그러면 오가와 씨와 결혼하기 전에 낳은 아들입니까" 하지만 후미야군은 그런 말을 하지 않던데 요." "호적상 후미야는 오가와 유키히로의 아들로 되어 있지요." "일부러 호적상이라고 말씀하시 는 것을 보니,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뜻인가요?" 그녀는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다시 열었다. "그 사람과 결혼하기 전에 저는 술집을 경영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사귀던 남자의 자식이에요." "예 에, 임신한 상태에서 오가와 씨와 결혼하신 거군요." 그래서 나이를 먹은 지금에도 세련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것은 저도 몰랐던 일이에요." 그녀는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가 를 눌렀다. " 그 남자와는 오가와 씨를 만나기 훨씬 이전에 헤어졌지요. 그런데 결혼식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 갑자기 나타나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헤어진 여자가 다른 남자의 아내 가 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아까운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자기는 갖기 싫어도 남을 주 기는 아깝다는 말인가. 흔히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노리코의 이야기를 재 촉했다. "내가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루만 만나 달라고 했어요. 그것을 거절해야 했지만, 하루만 만나 주면 귀찮게 따라다니지 않겠다고 해서 그만... ." "그때 생 긴 아이가 후미야 군인가요?" "예." 그녀의 대답은, 목구멍 안에서 무엇인가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기어들어갔다. "결혼식을 올리기 삼 주일 전이었을 거예요. 다행히 그 남자는 정말로 내 앞에 나 타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어요. 그 남 자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남편에게 비밀로 하고 떼려고도 했지요." 그 말은 오가와의 자 식일 가능성도 있었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아무런 사심 없이 순수하게 기뻐하는 남편을 보자 도 저히 지울 결심이 생기지 않았어요. 저는 결국 남편의 자식일 가능성에 기대하기로 했지요." 그녀 는 어느 사이엔가 오가와를 남편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들렸다. "오가와 씨의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은 언제 아셨습니까?" "후미야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 거예요. 회사 에서 혈액검사를 받은 남편이 눈에 핏발이 선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집에 와서 후미야의 혈액형을 물었어요. 그때, 역시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나는 A형이고 후미야는 O형인데, 남편은 검사를 받을 때까지는 자신을 B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형제들이 모두 B형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B형이 아니었군요." "예. 회사에서는 AB형이라는 판단을 받았다고 해요. A형과 AB형 사이에서 O형이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쯤은 그 사람도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때야 비로소 당신 도 사실을 아신 거군요." "예.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크게 놀라지는 않았어요. 나중에 생각해 보 니, 나 자신은 아이를 가졌을 때부터 그 사람의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모르는 척했을 뿐이지요. 게다가 후미야는 남편을 전혀 닮지 않았으니까요." "오가와 씨에게 사실 을 말씀하셨나요?" "물론 이야기했지요. 계속해서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화 를 내고 집을 뛰쳐나가신 건가요?" "그것이 원인이 되어 집을 나간 것은 분명해요. 하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어요. 그 사람은 한 번도 나를 책망한 적이 없어요. 내 이야기를 듣고도 이상할 정도 로 침착했거든요. 술을 마시고 난동을 피우는 일도, 욕설을 퍼붓거나 고함치는 일도 없었어요. 후 미야에게도 그 이전과 똑같이 대해주었지요. 다만 말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고, 집에 있을 때도 창 밖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에 잠긴 것 같았어요. 그 사람이 집을 나간 것은, 내 이야기를 들은 지 딱 이주일 만의 일이었어요. 옷가지 몇 개와 후미야의 사진이 들어있는 앨범을 가지고 연기처럼 사라진 거예요." "편지도 없었나요?" "편지는 있었어요." 그녀는 핸드백에서 새하얀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봐도 되나요?"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몇 마디의 글이 그의 눈을 아프게 파 고 들었다. '미안하오. 아버지인 척은 할 수 없소.' "그 편지를 본 순간 눈물이 핑 돌았지요. 집을 나서기까지의 이주일 동안, 남편은 어떻게든 후미야의 아버지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한 거예 요. 그 사람의 고통을 생각하면 지금도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아요. 그렇게 착한 사람을 몇 년동 안이나 속여왔다니, 나는 아마 천벌을 받을 거예요." 자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어쩌면 폭력을 휘둘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가와 씨는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후미야 군 의 학비를... ." 노리코는 눈가에 배어나오는 눈물을 가볍게 손수건으로 누르면서 대답했다. "그래 요. 그래서 조금전에 반대라고 말씀드린 거예요. 속죄를 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 남편은 우리를 도와주려고 한 거예요." "왜죠? 당신을 좋아했기 때문인가요?" 그 말에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그 사람에게는 이미 새로운 아내가 있었어요. 그는 아내를 사랑한다고 분명히 말하더군요." "그렇다면 왜... ?"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어요. 어머니가 돈에 쪼들릴 때 아버지가 도와주는 것은 당연하다고요. 당신은 진짜 아버지가 아니지 않느냐고 말하자, 그렇다면 후미야에게 있어서 행복한 것은 어느 쪽이냐고 묻더군요." "어느 쪽?" "후미야에게 있어 서 자기가 진짜 아버지가 아닌 것이 행복하냐, 아버지를 자기로 해두는 것이 행복하냐...어느 쪽이 냐구요. 나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그야 물론 당신이 아버지인 것이 더 좋지요 하고 대답했어요. 그랬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까 나는 계속 그 애의 아버지 가 되기로 했어. 그 애의 처지가 어렵다면 아버지로서 도와주고 싶어. 예전에 나와 후미야 사이에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때는 진정한 아버지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서만 생각했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한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할 마음은 없었어. 그렇게 후미야 를 사랑했는데, 나는 왜 그토록 어리석었을까?'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며 수화기 저편에서 울음을 터트렸어요." 그녀는 등을 똑바로 펴고 말했다. 그 말을 할 때는 자세를 똑바로 하지 않으면 안된 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목소리는 떨렸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곧은 자세로 그 말을 전달해야 한다는 의지로 똘똘 뭉친 사람 같았다. 그는 숨이 콱콱 막혔다. 심장의 고동이 빨 라졌다. 이런 때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남자다울까.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어요. 적어도 빈소에 가서 향이라도 피우고 싶었지요. 그 사람이 운전을 실수해서 사고가 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어요. '그 사람이 나 쁜게 아니다! 그 사람은 우리를 위해 무리하게 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미야 앞에서 나는 아 무 상관 없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신세를 져놓고도 모르는 척하기로 결심한 거 예요." 그녀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고는 미지근해진 밀크티를 한모금 마셨다. "하지만 헤이스케 씨 가 찾아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언제까지나 비밀로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후미야에게는 사 흘 전에 모두 이야기해 주었어요." "충격을 받지 않던가요?" 그녀의 입가에 먹구름이 낀 것처럼 미소가 흐려졌다. "물론 조금은 충격을 받았겠죠. 하지만 말하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그러세요?" "헤이스케 씨에게도 사실을 말씀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찾아온 거예요. 남의 집안의 개 인적인 일이라 지겨우셨을지도 모르지만요." "아닙니다. 저도 들어 두길 잘했습니다." "그렇게 말 씀하시니 말씀드린 보람이 있군요. 실은,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그녀는 테이블위에 있는 봉 투를 가방에 넣으면서 말했다. "뭐죠?" "아들에게서 들었는데, 그 사람의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더군요." "예. 그렇습니다.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지요." "자제분이 한 있다고 들었는데, 딸인가 요?" "이쓰미라는 아이죠." "혹시 그 아이의 연락처를 알고 계시나요? 만나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해주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보상을 하고 싶어요." 그녀의 눈빛에는 애틋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해마다 연하장이 왔으니까 알 수 있을 겁니다. 나중에 전화로 말씀드리죠." "번거로우시겠지만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구마요시'라는 가게 이름이 적힌 명함을 꺼내 헤이스케 앞에 놓았다. 그리 고 문득 생각난 듯이 창문 너머로 정원을 보았다. "아아! 역시 눈이 내리는군요. 아침부터 날씨가 꾸물거려서 눈이 내릴 것 같았어요." 그도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하얀 꽃잎 같은 것이 하 늘하늘 춤추며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돌아온 모나미 헤이스케는 호텔을 나와 도쿄 역으로 향하는 긴 보도를 느린 걸음걸이로 걸어갔다. 작은 새의 깃털 같은 새하얀 눈이 천천히, 똑같은 리듬으로 쏟아졌다. 노리코의 이야기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만난 적도 없는 오가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한 길을 선 택한다... . 나는 당신과는 달라요, 오가와 씨. 또다시 가슴이 막히는 것 같았다. 무엇인가가 몸 안 에서 치밀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다리에 힘이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목에 감긴 목 도리가 춤을 추듯 하늘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새하얀 눈발이 콘크리트 바닥으로 빨려들어 갔 다. 주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떨어지는 눈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를 연상시켰다. "괜찮으 세요?" 지나가던 사람이 걱정스러운 듯이 물어왔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는 상대를 쳐다보 지도 않고 한 손을 들었다. "예, 괜찮습니다. 그냥 잠시 현기증이 나서요." 그는 일어서서 다시 목 도리를 감았다. 말을 건 사람은 왜소한 체격에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회사원 같은 남자였다. "괜 찮으신 거죠?" 남자는 다짐을 하듯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예, 이제 괜찮습니다. 정말 감사합니 다." 친절한 남자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그와는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고 나서 헤이스케도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래, 알고 있다. 특별히 누구에게 대답을 구할 것까지도 없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집에 도착할 즈음에 는 이미 눈은 그쳐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 지역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땅이 젖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관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나오코의 신발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러나 거실을 둘러보아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목도리도 풀지 않고 계단을 뛰어 올라 가서 그녀의 방을 노코했다. 그러나 안에서는 묵묵부답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는 문 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나 방안에서도 그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책상위에는 책 한 권이 달랑 펼쳐져 있었다. 화장실에 갔을까.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화장실에 갔다면 그 앞에 슬리 퍼가 놓여 있을 것이다. 그는 황급히 계단을 뛰어내려 갔다. 화장실에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발 길을 부엌으로 옮기려고 할 때, 정원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밖을 내다보자 한쪽 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나오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앞에는 고양이가 앉아 있 었다. 어느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인지 푸른 목걸이에 작은 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고양이는 나오 코가 잘게 찢어 주는 가다랭이포를 기분 좋은 듯이 받아먹고 있었다. 유리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에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표정이 보기 드물게 부드러워져 있었다. 아아, 그렇다! 이 사람의 본래의 표정은 이러했다! 새삼스럽게 가슴이 저리고 코끝이 시큰거렸다. 그런 표정을 지은 것도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다. 그를 발견하자마자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꽃봉오리가 그대로 시들어 가는 것처럼 어두워졌다. 창문을 열자 가다랭이포를 먹고 있던 고양이가 경계하듯이 몸을 웅크렸 다. "어느 집 고양이지?" "모르겠어요. 요즘 들어 가끔 우리 정원에 들어오곤 해요." 그가 말을 걸 어서인지, 고양이는 재빨리 울타리를 빠져나갔다. 먹고 있던 가다랭이포만이 바싹 마른 잔디 위에 남았다. 나오코는 샌들을 벗고 거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들고 있던 가다랭이포를 종이에 싸서 탁 자 위에 놓았다. 그는 바싹 마른 입술에 침을 적시면서 말했다. "스키 말인데, 가지 않겠어?" "스 키 여행 말이야. 안내장이 왔잖아? 그 여행에 참가하는 것이 어떻겠어?" 그녀는 아무런 표정 없 이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세요?"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리고 가고 싶어하잖아?" "변덕으로 하는 말이에요?" "그렇지 않 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그녀는 몇 번인가 눈을 깜빡거리다가 비스듬하게 시선을 떨 구었다. 그의 진의를 탐색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시선을 올리자마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 다. "가지 않겠어요." "왜지?"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탈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거실에서 나가려고 했다. 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딸의 이름을 불렀다. "모나미!" 나오코가 걸음을 멈추었다. 위아래로 흔들리는 어깨의 움직임으로 보아 격렬하게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 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왜... ?" 그는 창문을 닫고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오랫동 안 괴롭혀서 미안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미안하다는 말뿐이야. 정말 미안해." 그는 나오 코를 향해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한순간 세계가 정지해 버린 것 같았다. 모든 소리가 소멸 한 것 같았다. 눈과 귀를 자극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한순간의 일이 었다. 이윽고 세상의 온갖 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차가 지나가는 소리, 아이의 울음소리, 어느 집의 스테레오 소리. 그 안에는 흑흑거리는 울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들자 나오 코가 흐느껴 울고 있었다. 뺨을 타고 몇 줄기 눈물이 떨어졌다. "모나미... ." 그녀는 두 손으로 얼 굴을 가리고는 그대로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콰당! 문이 닫히는 소리가 고막을 아프게 했다. 아니,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는 무릎이 꺾이면서 무너지듯이 주저앉았다.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의 고양이가 정원으로 돌아와서 잔디 위에 있는 남겨진 가다랭이포를 먹 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그래, 별일이 아니다. 하나의 계절이 끝났을 뿐이다. 방에 틀어박힌 나 오코는 밤이 되어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걱정이 되어서 몇 번인가 방문 앞까지 가보았다. 그때마 다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려와 일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거실로 내려오곤 했다. 말을 건 것 은 딱 한 번이었다. "저녁은 어떡할래?" "나는 필요없어요." 그녀는 눈물기가 고인 목소리로 대답 했다. 그는 여덟 시가 지나서 혼자 라면을 끓여 먹었다. 이런 때에도 배가 고프다는 사실이, 스스 로도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앞으로는 음식을 만드는 것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목욕을 하고, 그런 다음에는 신문을 읽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기묘하게도 그의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긴장으로 굳어졌던 어깨도 어느 사이엔가 부드러 워져 있었다. 그는 유리잔에 커다란 얼음을 넣고 위스키를 따라서 침실로 가지고 갔다. 그리고 이불 위에 앉아서 위스키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될 수 있으면 머리를 텅 비게 만들려고 노력했 다. 오늘이 특별히 의미가 있는 날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유리잔 이 빌 무렵에는 조금씩 수마의 습격을 받았다. 그는 불을 끄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결국 그날 밤, 그는 나오코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식사는 그렇다고 치고 화장실조차 가지 않은 것은 이상 한 일이었다. 그는 예전에 그녀와 데이트했을 때를 떠올렸다. 아직 결혼 하기 전이었다. 낮에 만 나서 그녀의 집 앞에서 헤어지는 깊은 밤까지, 그녀는 한 번도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 어쩌다 그 런 것이 아니라 만날 때마다 그랬다. 그는 그 사이에 최소한 한 번은 갔다. 영화관일 때도 있었 고, 레스토랑일 때도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화장실에 간 사이에 그녀도 화장실에 간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보통 화장실에 함께 간 경우, 여자들이 빨리 나오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고 나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수줍은 듯이 얼굴을 붉히면서 대답했다. 그것은 단순명쾌한 대답이었다. "그냥 참는 거예요." 왜 참느냐는 질문에도 그녀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화장실은 너무 현실적이잖아요." 현실적인 것이 왜 좋지 않 느냐는 의문은 여전히 남았지만,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아마 그녀 나름대로 규칙이 있 는 것이리라. 어둠 속에서 그는 눈을 감았다. 어쩌면 아주 옛날부터 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눈 꺼풀 안쪽에서 검은 입자들이 기묘한 도형을 그렸다. 그 도형을 보고 있는 사이에 세계가 빙글빙 글 반전하기 시작했다. 눈을 떴을 때, 바로 코앞에 천장이 펼쳐졌다. 언제 눈을 떴는지도 몰랐다. 영혼이 어딘가를 방황하다가 바로 육체로 돌아왔다... 눈을 뜨자 그런 느낌이 전해졌다. 그는 몸을 일으키다가 한 번 흠칫 놀랐다. 그때 처음으로, 아침 공기가 유난히 싸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서둘러 잠옷을 벗고 폴로 셔츠와 스웨터를 입었다. 바지를 입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춥다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침실을 나서자 반대편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문이 열 린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책상 앞에도 침대에도, 나오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계단을 내 려가자 밑에서 세 번째 계단에 나오코의 한쪽 슬리퍼가 떨어져 있었고, 다시 거실로 들어가는 도 중에 다른 한쪽이 뒤집혀 있었다. 그는 거실을 들여다보았다. 잠옷 차림의 나오코가 멍한 표정으 로 정원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모나미."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아빠... ." "그런 차림으로 있으면 감기 들어." 그는 말을 하면서도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녀 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만지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빠. 나 어떻게 된거예요?" "응?" "분명히 버스를 타고 있었는데... .엄마와 나가노에 가고 있었는데 어째서 여기 있는 거예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는 할 수 있었지만 받아들일 수 없 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헤이스케는 두세 걸음 나오코에게 다가갔다. "지금 뭐라고 했 지?" 그녀는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더니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머리가 아파요. 아빠, 어떻게 된거죠? 내가 무슨 병에 걸렸나요?" "모나미... .정신차려!" 그는 그녀의 두 팔을 잡고 앞뒤로 흔 들어 보았다. "아빠. 얼굴이 좀 달라진 것 같아요. 많이 마른 것 같기도 하구요." 설마 그런 일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모나미." "예?" "나이가 몇 살이지? 지금 몇 학년이지?" "무슨 말씀이세요? 아빠는 딸이 몇 학년인지도 몰라요? 지금 5학년이고 이제 곧 6학년이 된다구요." 그녀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갑자기 온몸에서 불이 솟구치고, 심장이 힘차게 파도치기 시작했다. 호흡도 거칠어졌다. 그렇다. 돌아온 것이다. 모나미 의 영혼이 살아난 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에 와서... . "모나미. 이 아빠의 말을 잘 들으렴. 아빠를 알아보겠지?" 그는 그녀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려놓고 물어보았다. "물론이죠." "좋아. 모나미는 조 금 전에 잠에서 깼지? 잠에서 깨서 바로 내려온거지?" "예. 그런데 왠지 몸이 둥둥 떠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이 꿈속 같기도 하구요." "알았다. 그러면 어쨌든, 이 아빠의 말대로 하는 거다. 우선 여기 앉으렴. 그래, 천천히." 방석 위에 앉은 그녀는 커다란 눈망울을 빙글빙글 돌렸다. 불쑥 온갖 상념이 엄습해 와서, 머리는 빠져나갈 수 없도록 정체된 고속도로처럼 뒤엉켜 있었다. 물론 나오 코는 어디 있느냐는 의문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생각하자 더욱 혼란스러울 것 같아서 일단은 생각 밖으로 밀어냈다. 지금은 눈 앞에 있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다. "잘 들어라, 모나미. 우선 네 손을 보렴. 그리고 발을 보렴." 그녀는 그의 말에 따라 우선 두 손을 살펴보고 다음에 잠옷밑 으로 빠져나온 발을 내려다보았다. "뭔가 느끼는 게 없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이상해 요." "어떻게 이상하지?" "커요. 크고... 손톱이 길어요." 그는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그렇지? 너 는 아까 버스를 타고 있었다고 했지? 실은 그 버스가 사고를 일으켰단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어. 그렇게 깊은 잠에서 조금 전에 눈을 뜬 거야. 그래서 잠들어 있는 동안에 몸이 커 져 버린 거지." "예에... ."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몸을 훑어보고는 다시 헤이스케를 쳐다 보았다. "몇 달이나 잠들어 있었어요?" 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몇 년 동안이나 잠들어 있었단다. 정확히 말하면 5년... 일 거야." 그녀는 흠칫 놀라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의 손에 서 자신의 오른손을 빼내어 얼굴을 만져보았다. "식물인간... 같았나요?" "아니, 식물인간 같지는 않았어. 그게 조금 복잡한데... ."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막막하기만 했 다. 그러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엄마는 어딨어요?" 그는 궁지에 몰린 생쥐처럼 낭패스러운 표정을 짓고, 무슨 말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무의미하게 입술만을 움직였다. "엄마는 어떻게 됐죠? 사고를 당해 어떻게 된 거예요?" 입만 벌리고 있는 그의 표정에서 무엇인가를 알아차렸는 지, 그녀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럴 수가... !" 바닥에 엎드린 그녀의 등이 파도처럼 출렁거 렸다. 입에서 오열이 새어나왔다. "모나미, 모나미. 잘 들으렴. 분명히 엄마는 없어. 하지만 아직 살아 있어. 엄마의 영혼은 살아 있다구." 그러나 그녀의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영혼이 살아 있다 는 말도 단순한 위로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모나미. 잠시 이리 오렴." 그녀는 눈물이 가득 고인 커다란 눈을 들더니 갓난아이가 고개를 흔드는 것처럼 살래살래 가로저었다. "모나미, 엄마 를 만나고 싶지 않니?" 그 말에, 그녀는 겨우 울음을 그쳤다. "엄마는 돌아가셨잖아요." "몸은 세 상을 떠났어도 마음은 살아 있어." 그는 그녀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데 려갔다. "여기는 모나미의 방이지?" 쭈뼛쭈뼛하면서 방안을 둘러보던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 를 끄덕였다. 그는 책상 앞으로 다가가서 책장에서 참고서를 두 권 빼냈다. "이것을 보렴. 여기에 있는 것은 고등학교 참고서와 교과서지. 모나미는 지금 고등학교 1학년이란다." "아!" 그녀는 겁 먹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작은 비명을 질렀다. "물론 이상하다고 생각할 거야. 실은 네가 잠들어 있는 동안 아주 신비한 일이 일어났단다. 돌아가신 엄마의 영혼이 네 몸에 깃들어 있었던 거야. 그리고 너 대신에 모나미로서 생활해 왔단다." "엄마가 나로서 생활했다구요?" "그 래." 그는 책장을 둘러보고 오렌지색 파일을 꺼냈다. 그 안에는 테니스부에서 촬영한 사진이 꽂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모나미의 얼굴이 가장 크게 찍힌 사진 한 장을 빼내고, 다시 책상 서랍을 열 고 둥근 거울을 꺼냈다. "네 얼굴을 보렴. 그리고 이 사진과 비교해 보는 거야." "왠지 무서워요." "괜찮아. 걱정하지 마." 그녀는 들고 있던 참고서를 바닥에 놓고는 거울과 사진을 받아들었다. 그 리고 멈칫멈칫하면서 천천히 거울을 들어올렸다. "아!" 그녀의 입에서 나지막한 비명이 터져나왔 다. "왜 그래?" "저, 생각보다 예쁜 것 같아요." 이런 상황에서도, 그의 입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배어나왔다. "그렇지? 이번에는 사진을 보렴." "믿을 수 없어요." 그녀는 사진과 거울을 번갈아 살펴보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무릎을 껴안고 그 안에 얼 굴을 묻었다. "지금까지 엄마가 너 대신 살아준 거란다." 그는 책상과 벽 틈에 세워져 있는 테니 스 라켓을 꺼내며 계속 말을 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학교에도 들 어갔지. 테니스부에도 들어갔단다. 엄마는 정말로 후회하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왔단다. 그러니까... ." 문득 뒤를 돌아보고 그는 말을 끊었다. 그녀가 웅크리고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얘야, 모나미! 모나미!" 몸을 흔들자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 다. 그녀의 눈망울에 그의 모습이 비쳤다.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아빠... 왜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 표정과 분위기에서 그는 사태를 파악했다. 그녀가 나오코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갑자기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안도감이 퍼져 나갔다.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그러세요?" "지금, 모나미가 나 타났었어." 오늘이 일요일이기를 천만다행이다. 자신이 회사에 간 사이에 모나미가 소생했다면, 수습할 수 없는 사태로 발전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거실에서 차를 마시면서 사건의 과정을 설명했 다. 나오코는 이야기를 듣는 도중에 벌써 흥분해서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렇다면 모나미는 죽지 않은 거군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의식이 계속 잠들어 있었다는 거예요!" "아마 그럴 거야." 그녀는 가슴에 두 손을 포갰다. "아아! 믿을 수가 없어요. 이런 일이 있다니! 세상에 이렇 게 멋진 일이 있다니!" "하지만 또 사라져 버렸어." "한 번 나타났으니까 틀림없이 또 나타날 거 예요. 괜찮아요. 틀림없이 괜찮을 거예요." 어제와는 달리 활기에 넘친 표정이 보기 좋았다. "다만 사정을 설명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야.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해 두었지만... ." "이 상황을 어떻게 쉽게 받아들이겠어요?"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었 을 때는 눈에 강렬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역시 내가 설명하는 것이 좋겠어요. 그 아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니까요." "하지만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겠어? 모나미가 나왔을 때 는 당신은 없는데." "편지를 쓰는 거예요. 내가 편지를 써놨다가 모나미가 나오면 그 편지를 읽으 라고 하면 되잖아요." "아아, 그렇군." "지금 당장 편지를 써야겠어요. 그 편지는 한시도 떼놓지 않고 가지고 다니는 게 좋겠지요? 모나미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까요." "만약에 내가 옆에 없을 때 모나미가 나오면 어떡하지? 가령 학교에 있을 때라든지." 아무리 나오코의 편지를 가지고 있 다고 하더라도, 다음에 눈을 뜬 모나미가 그것을 알 리가 없다. 주위에 낯선 사람들이 우글댄다면 엄청난 공포에 빠지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회 사에 가지도 않고 계속 내 곁에 있어 줄 수 있어요?" "그것은 어려운 일이지." 이마를 긁적이는 그의 표정에 미안함이 묻어 있었다. "만약에 그렇게 되면, 우리 딸이 조금 노이로제 증상이 있다 고 적당히 둘러대는 수밖에 없지요." 그는 못마땅한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것은 내키지 않는 데. 어떻게든 그렇게 되지 않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겠군."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어째 서?" "내가 잠들지 않는 한 괜찮을 거예요. 모나미가 나타나는 것은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 가 아닐까요? 이번에도 그랬잖아요?" "그럴지도 모르지." "수업하는 중에 깜빡 졸지 않도록 조심 을 해야겠죠." "그때 나타나면 당신 책임이야." 헤이스케는 나오코와 얼굴을 마주 보고 동시에 웃 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스스럼없이 웃을 수 있는 것이 몇 달 만일까. 그녀가 문득 진지한 표정으 로 돌아가, 손에 있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요." "무슨 느낌?" "모나미의 몸을 그 아이와 내가 공유하고 있는 거잖아요. 아니면 교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아아...! 그렇게 되는군." 나오코는 의미가 담긴 눈길로 헤이스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사라지지 않으면 안되는 거예요. 틀림없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둬." 그는 애써 그녀의 눈길을 피하고, 찻잔 바닥에 남아 있던 차를 단숨에 들이마 셨다. 밤에는 조촐한 파티를 하게 되었다. 나오코가 닭고기 튀김과 햄버거를 만들고, 그는 근처에 있는 빵집에서 가장 큰 모카 케이크를 샀다. 모나미가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잘 돌아왔다, 모나 미. 환영한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하고 와인으로 건배했다. 그로부터 얼마 동안 모나미의 의식 은 나타나지 않았다.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 얼굴을 볼 때마다 그녀의 대답은 언제가 똑같았 다. "유감스럽지만, 아직 나예요." 한 때는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을까 걱정을 할 정도로 우울증에 빠져 있던 나오코도, 이제는 완전히 활기를 되찾았다. 그녀는 또다시 큰소리로 웃고 큰소리로 말 하곤 했다. 모나미가 소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지, 그가 철저하게 아버지 태도를 보였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어느쪽이든 상관없다. 그녀의 밝은 미소를 보고 있으면 이대 로 모나미가 나타나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나오코는 모나미가 또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모나미에게 보내는 편지도 착실히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에 모나미가 나타나면 양말 속을 보라고 말해줘요." "양말 속?" "그 곳에 메모지를 숨겨 두었어요. 그 메모지에는 모나미 앞으로 쓴 편지가 어디에 있는지 적혀 있거든요." 두터운 편지를 항상 지 니고 다니는 것은 어려운 일이리라. 이런 식으로 6일이 지나고, 또다시 일요일이 찾아왔다. 그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어쩐지 예감이 들었다. 그는 황급히 일어나서 잠옷 위에 카디건을 걸쳐 입고 그녀의 방을 노크했다.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는 살그머니 문을 열어 보았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저... ." 자신을 돌아본 공허한 표정에서 그는 직감했다. 모나미다. "기분이 어떠니?" 그녀는 손바닥을 보고 나서 두통을 느끼는 듯 이마에 손을 댔다. "또 오랫동안 잠을 잔 것 같아요." "아니다. 이번에는 그렇게 오랫동안 잠들지 않았어. 겨우 일주일 정 도란다." "그 동안 계속 잠들어 있었어요?" "아니야. 전에도 말했잖니? 엄마의 영혼이 네 몸에 깃 들어 있다구." 모나미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울을 보여주세요." 그녀는 헤 이스케가 건네준 거울을 무서운 표정으로 들여다보았다. "역시 꿈이 아니었군요." "요전에 눈을 떴을 때 아빠가 해준 이야기를 기억하니?" "꿈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것도 무서운 악몽이요." "꿈 이 아니란다. 아참, 엄마가 너에게 전해 달라는 말이 있단다." "예? 엄마가요?" "다음에 네가 눈을 뜨면 양말 속을 보라고 전해 달라더구나." "양말이요?" 침대 끝에 걸려 있는 새하얀 양말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양말을 들고 안을 들여다보더니 무엇인가를 발견한 듯이 손을 집어넣었다. 다시 손을 빼냈을 때는 접혀진 종이를 들고 있었다. "이런 종이가 들어 있어요." "엄마가 보내는 메시 지란다." 모나미는 종이를 펼쳐 찬찬히 읽고 나서 그에게 내밀었다. 종이에는 '책장 가장 아랫단 에 있는 노트를 혼자 읽을 것' 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는 모나미의 얼굴을 보고 나서 책장으로 시 선을 옮겼다. 그녀도 똑같이 시선을 이동시켰다. 그런 다음 침대에서 내려와서 책장 앞에 몸을 구 부리더니 메모지에 적혀 있는 대로 노트 한 권을 꺼냈다. "노트가 있어요... ." 고양이 그림이 그려 진 노트에 핑크빛 사인펜으로 '모나미 에게'라고 씌어 있었다. 틀림없는 나오코의 글씨다. "혼자 읽으라고 씌어 있구나."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아빠는 밑에 내려가 있을 게.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르렴." 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그의 마음에서는 불안한 생각들이 들끓고 있었다. 나오코는 모나미에게 어떤 식으로 편지를 썼을까. 모나미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어떠한 사태가 일어나도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도록, 그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로 부터 두 시간 동안, 모나미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걱정이 되어 상황을 보러 가려고 몸 을 일으킨 순간 이층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톡, 톡, 톡. 그녀는 마치 한방울씩 물이 떨 어지듯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거실로 발을 들이민 순간, 눈의 초점이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괜찮니?" 마치 송곳으로 쿡쿡 찌르는 듯이 마음이 아려왔다. "예." 그 녀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더니, 잠시 동안 하릴없이 바닥만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문득 생각난 듯이 중얼거렸다.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어요." "그래, 어쨌든 벌써 5년이나 지났잖니? 5년 동안 의 일이 모두 적혀 있었니?" "아니요. 도저히 한꺼번에 쓸 수 없다고, 대강 적어 놓으셨어요. 그래 도 분량이 엄청나게 많아서 읽기 힘들었어요." "그렇겠지." 쓰기는 더욱 힘들지 않았을까. "왠지 이상해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중학생이 되고, 그 중학교도 졸업해서 고등학생이 되어 있다니!" " 엄마는 두 번이나 입시를 치렀단다." "그러게 적혀 있어요. 무슨 마음으로 입시를 두 번이나 치렀 을까요?" "모나미로서 살아가는 이상, 후회하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거지." "흐 음... .이젠 잠이 쏟아져요." 갑자기 눈동자가 절반쯤 감기더니 머리가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졸립 니?" "예. 무지무지 졸려요. 내가 잠이 들면 또 엄마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 "그러면 엄마에게 말씀드려 주세요. 고맙다구요... ." 모나미는 그대로 누워서 눈을 감더니 곧장 새근거리는 숨소리 를 내기 시작했다. 감기에 걸릴 것을 우려하여 이층으로 데려가기 위해 껴안으려고 한 순간, 그녀 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잠시 당황한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나서 그를 올려다보았 다. "모나미가 나타났어요?" "그래, 지금 막 잠이 들었어. 그리고 나서 나오코가 나온거야." "아, 미안해요. 내가 괜히 나왔나 봐요." "무슨 소리야? 어쨌든 그 노트를 읽었다고 하더군." 그는 그녀 에게서 조금 떨어져 앉았다. "뭐라고 했는데요?" "깜짝 놀라더군. 그리고 고마워하고 있어." "고 맙다구요?" "그래." 그는 모나미와 나눈 대화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들려주었다. 그녀는 눈을 깜 빡이면서 신기한 듯이 듣고 있었다. "빨리 그 다음 이야기를 써 놓아야겠어요. 아직 그 아이가 모 르는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까요." "이상한 내용은 쓰지마." 무슨 말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씁쓸하게 웃었다. "걱정 마세요. 쓰지 않을게요." "그러면 고맙겠어." "저, 아빠. 모나미가 돌아와서 기쁘지요?" "물론 기쁘지. 정말 꿈만 같아." "그렇겠죠. 저도 무척이나 기뻐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눈길을 정원으로 이동시켰다. 또 고양이라도 있 는 것일까. 그는 그녀의 눈길을 쫓아 바라보았지만 그곳에는 부쩍 키가 자란 잡초만이 바람에 흔 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얻는 것과 잃는 것 기묘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아무런 변화도 찾아내지 못 할 것이 틀림없다. 누가 보든지 사고로 아내를 잃은 중년 남자와 딸이, 그들 나름대로 원만하게 생활하고 있다고 생 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집의 가족은 세 사람이다. 그들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생활을 보 내고 있었다. 어느덧 3월에 접어들었다. 모나미가 헤이스케 곁으로 돌아온 지 정확히 한 달이 흐 른 것이다. "아마 내일 아침 모나미가 나올 거예요." 저녁식사를 하는 도중에 나오코가 입을 열 었다. 얼굴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분명해?" 그는 젓가락질을 멈추고 물어보았다. "그러니 까 아마라고 했잖아요." 이런 식으로 말할 때는 반드시 모나미가 나타나곤 했다. 나오코에 따르 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예감 같은 것이 문득 머리에 떠오른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되지?" "그대로 학교에 보내세요. 만약에 평일날 아침에 눈을 뜬다면 학교에 가라고 말해 두었으니까, 모 나미도 당황하지는 않을 거예요." 나오코와 모나미는 노트를 이용해서 교환 일기 같은 것을 쓰고 있었다. 그것에 따라 모나미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학교에 가는 길이라든지 교실 위치, 반 친구들의 이름 같은 것도 모두 괜찮을까?" 그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재차 확인했다. "일단은 전부 가르쳐 주고, 본인도 다 외웠다고 했어요." "그러면 이 제 남은 것은 공부로군." "그것도 걱정 할 필요는 없을 거예요." "맞아. 얼마 전에 모나미가 고등 학교 1학년 수학을 풀지 뭐야? 참으로 신기한 일도 다 있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푸는 방 법을 정확히 알고 있고, 고등학교에서밖에 가르쳐 주지 않는 기호의 의미도 모두 알고 있었어." "정말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에요." 당연한 일이지만, 모나미는 사고 가 일어난 이후 5년 동안 일어난 일들을 전혀 모르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공부를 통해 배운 지식은 나오코와 똑같이 가지고 있었다. 바로 얼마전까지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문제도 단숨에 풀어 버리는 것이다. 영어는 알파벳도 모르는 것이 당연한데,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알고 있어 요' 하고 영어 문제를 술술 풀기도 한다. 그것에 대해서는 그들 나름대로 해답을 만들어 냈다. 나오코와 모나미의 의식은 각각 뇌의 다른 부분이 담당하고 있다. 따라서 서로를 다른 사람처럼 느낄 수 있고, 의식에 공통적인 부분에 저장되어 있어서, 나오코가 얻은 지식을 모나미가 꺼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서 그러한 가설을 들은 모나미는 손뼉을 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앞으로 공부는 엄마에게 맡기고, 나는 노는 것만 담당해야지." 그것에 대해서 나오코가 어떤 식으로 모나미를 타일렀는지는 알 수 없다. "학교에서 바뀌게 되면 어떡하지?" "글쎄요, 요 즘 모나미가 깨어 있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으니까 적어도 하교시간까지는 버티지 않을까 요? 하지만 만일을 생각해서 졸리면 점심시간에 자라고 말해 두겠어요, 그때까지 일어난 일에 대 해서는 잠들기 전에 노트에 기록 하라고 하고요, 갑자기 학교에서 눈을 뜨면 당황할 게 뼌하니까 요." "그러니까 그 교환 노트가 나오코와 모나미의 또하나의 뇌가 되겠군." 나오코는 진지한 표정 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래요.코르사코프 증후군이나 마찬가지에요." "뭐라구?" "코르사코 프 증후군이요. 기억력이 극단적으로 저하되는 증상으로, 바로 직전의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거예 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든 생활을 지속하려면 메모에 의지하는 수 밖에 없죠. 자신이 행동한 것이 나 보고 들은 것, 그 하나하나를 빼놓지 않고 메모해서, 어떤 행동으로 옮길 때는 반드시 그 메모 를 보는 거예요. 예를 들면 목욕탕에서 나온다음 메모를 보고, 자신이 제대로 목욕을 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시 목욕하는 일도 있다고 하더군 요. 나와 모나미는 그런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에요. 그러나 어느 한 사람으로 있는 동안은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우리들이 훨씬 더 편한한죠."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 며 덧붙였다. "게다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도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을거예요." "어째서?" "음, 뭐 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요." 그녀는 식기를 쟁반에 올려놓고 부엌으로 갔다. 설거지를 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그는 형용한 수 없는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그도 짐작은 되었다. 조금전에 불쓱 내뱉은 말과 관계가 있다. 모나미가 깨어 있는 시간이 짧아진다는 것을 의미한 다. 요즘 들어 모나미는 한 번 눈을 뜨면 몇 시간은 확실히 맑은 정신상태로 있곤한다. 그것은 진 정한 아버지와 딸로서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해서. 그로서도 기쁘지 않을 리가 없다. 그 에 비례해서 확실히 잃어버리는 것이 있다. 바로 나오코이다. 그 어느 쪽도 잃어버리고 싶지 않 다. 그것이 너무 뻔뻔스러운 욕심이라고 누가 욕할 수 있으랴. 노나미의 첫 등교는 아무런 문제도 없이 지나갔다. 헤이스케가 퇴근하자 나오코는 저녁 준비를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말 에 따르면 모나미는 수업 도중에 잠을 자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집에 와서는 아무래 도 피곤했는지 침대에 누워서 잠이 들고, 그 이후에 나오코로 바뀌었다고 한다. "수업도 별 문제 없이 따라 갈 수 있었고, 친구와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다고 해요. 노트에 너무너무 즐거웠 다고 적혀 있었어요. 그로부터 3, 4일에 한 번은 모나미가 등교하게 되고, 이윽고 그 간격은 이틀 에 한 번으로 짧아졌다. 그리고 봄방학을 코앞에 둔 무렵에는 거의 매일 모나미가 학교에 가게 되었다. 다만 정신적인 부담 때문인지 집에 오면 반드시 잠이 들어 버리기 때문에 퇴근한 이후 그를 기다리는 사람은 언제나 나오코로, 그가 모나미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아침의 짧은 시간과 토요일 저녁, 그리고 일요일 뿐이었다. "이래서는 모나미가 없었을 때와 별로 다르지 않군." 그의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오코가 화가 난 듯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당신은 나보다 나은 편이에요. 나는 눈을 뜨면 준비를 해야죠, 그것이 끝나면 모나미의 숙제를 해야 되요. 그러다 잠 들고 일어나면 또 저녁 준비와 숙제, 매일매일 그것만 반복된다구요. 애당초 숙제는 그 애가 해야 할 몫인데, 모나미는 도와줄 생각도 안 해요." 물론 모나미에게도 나름대로의 변명은 있다. "그래 도 엄마는 텔레비전을 보잖아요. 나도 텔레비전을 보고 싶은데 시간이 없으니까 참고 있는 거예 요. 눈을 뜨면 학교에 가야 한다구요. 내 생활은 결국 학교뿐이잖아요. 왔다갔다 하기 귀찮아서 차라리 학교에 이불을 깔고 잠자고 싶을 정도예요. 물론 숙제에 대해서는 미안하지만, 엄마가 그 렇게 고생하는 건 아닐 걸요? 왜냐하면 나는 한시도 딴청 피우지 않고 선생님 말씀을 들어서 머 리에 쏙쏙 박아넣으니까, 엄마는 내가 외운 것을 해답용지에 쓰기만 하면 되잖아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에게는 두 사람의 불평을 듣는 것조차 즐거운 일이 었다. 비록 육체는 하나밖에 없지만 그는 아내와 딸을 가진 행복을 충분히 맛볼 수 있었다. 봄방 학에 들어가자마자 그녀들, 즉 나오코와 모나미는 하나의 모험에 나서기로 했다. 스키 여행에 참 가한 것이다. 일정은 3박 4일. 출발하는 날은 기이하게도 사고가 있던 날이었지만, 그것에 대해서 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적적함과 쓸쓸함 속에서 나흘 동안을 혼자 보냈다. 그러나 그들 의 특수한 상황이 다른 사람에게 들통날 것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완벽한 팀워크에 대해서는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모나미 혼자가 아니라 나오코가 보호자로서 따 라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나미가 엄마 때문에 멋대로 행동하지 못했다고 불만을 터트릴 생각을 하고는, 그는 혼자 싱글벙글 웃기도 했다. 스키장에서는 매일밤 반드시 전화가 걸려왔지만, 전화 를 거는 사람은 항상 나오코였다. "그 아이는 스키를 너무 함부로 타서, 저녁마다 뼈 마디마디가 안 아픈데가 없어요. 그리고 돈을 너무 함부로 써요. 분명히 아침에 돈을 넣어 놓았는데, 저녁이 되면 갑자기 지갑이 텅텅 비어 있는 거예요. 오늘은 혼쭐을 내줘야겠어요." 지금쯤 틀림없이 모나 미도 불만을 터트릴 것이라고, 그는 마음속으로 히죽거렸다. 하청회사와 회의를 하기 위해 지바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헤이스케는 문득 생각이 나서 몬젠나카초 역에서 내렸다. 여기에 맛있는 메밀국숫집이 있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벌써 달콤 한 꽃향기가 코를 간지럽히는 5월에 접어들었다. 그는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고 크게 심호흡을 했 다. 상점이 늘어선 길을 걷고 있을 때 건너편에서 낯익은 남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얼굴에 기름기가 번들번들한 오십대 중반의 남자로, 새하얀 재킷이 어울리지 않아 오히려 얼굴을 찌푸리 게 만들었다. 나오코와 모나미라면 틀림없이 '우아! 소름끼쳐!'라고 소리 질렀으리라. 남자도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낯이 익다고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상대방이 누군 지 알아차렸다. "아아, 당신은...!" 먼저 말을 건 사람은 헤이스케였다. 그러자 상대방은 악수를 창 하듯이 오른손을 내밀면서 가까이 다가왔다. "야! 이게 누구요? 오랜만이군요. 그 동안 잘 있었 소?" "예. 그럭저럭이요." 그는 자신의 얼굴에 반갑지 않은 표정이 떠오른 것을 황급히 지우려고 했다. 상대방은 피해자 모임에서 만났던 후지사키라는 남자로, 쌍둥이 딸을 모두 잃어버린 그와는 몇 번인가 옆자리에 앉기도 했다. "여기에는 자주 오시나요?"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약4년 전이지만, 그때보다 몸집은 두 배로 불어나 있었다. "아니, 퇴근길에 잠시 들렀을 뿐입니다." "잠 시 내 사무실에 들렀다 가지 않겠소? 이 근처에 우리 회사가 있는데." "아아, 그러세요? 하지만... ." 후지사키가 손을 흔들며 재촉하는 바람에 그는 하는 수 없이 따라가기로 했다. 메밀국수는 포 기하는 수 밖에 없었다. 회사가 근처라고 했으면서, 후지사키는 그를 자기 자동차에 태웠다. 검은 차체에 먼지 하나도 앉지 않은 최신형 벤츠였다. 아직 새 차 냄새가 가시지 않은 차 안에는 작은 인형이 매달려 있었다. "회사는 가야바초에 있 지요. 오 분 정도면 도착할 거요." "분명히 예전에는 고토 구에 있었던 것 같은데요?" "지금도 거 기에 사무실이 있지만 본사는 3년 전에 옮겼지요." 벤츠는 지하철 가야바초 역 옆에 있는 건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갔다. 후지사키는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등은 자 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는 것 같았다. 건물 일층이 후지사키의 사무실로, 회사명이 '세이프풋'이었 다. 밝고 세련된 분위기의 사무실 안에는 컴퓨터와 관련 기기가 깔끔하게 놓여 있고, 주위에서 왔 다갔다 하는 사원도 몇 명은 되는 것 같았다. 그는 헤이스케에게 가죽 소파에 앉으라고 권했다. "지금은 주로 컴퓨터를 사용해서 디자인에 관한 일을 하고 있지요. 출력 서비스도 하고 있구 요. 후지사키는 몸을 뒤로 젖히고 발을 꼬며 말했다. "출력 서비스요?" "예를 들어 컴퓨터의 화면 을 프린트하려는 경우, 보통 프린터를 사용하면 색이 깨끗하지 않고 세밀한 부분이 번지는 등, 좀 처럼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때 우리 회사 제품을 가지고 가면 완벽하게 프린 트를 해드릴 수 있는데, 그런 것이 바로 출력 서비스지요. 출력을 영어로는 아웃풋이라고 하는데, 아웃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세이프라고 고쳤습니다." "아아, 그래서 세이프풋이군요." "하 이스케 씨는 어디서 근무하고 계시죠?" 후지사키는 소파 등받이에 한 손을 올려놓은 거만한 자세 로 물었다. 하이스케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 그는 잠시 시간이 걸렸다. 이름을 정정 해 줄까 생각하다가 귀찮아서 그만두었다. "보통의 제조업체입니다." "그래요? 앞으로는 제조업체 도 힘들어질 거요." 후지사키는 사업가 특유의 자신감이 넘치는 말투로 앞으로의 경제 상황을 늘 어놓았다. 그런 다음에도 입이 닳도록 자신의 성공담을 늘어놓는 것을, 헤이스케는 커피를 마시면 서 들어줄 뿐이었다. 그리고 적당한 때를 노려 이만 실례하겠다고 하며 일어섰다. "앞으로 열심히 삽시다. 계곡을 향해 소리친 그날의 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돼요." 입구까지 배웅나온 후지사키 는 악수를 하는 손에 힘을 주면서 절실한 마음으로 말했다. 사고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그 때 뿐이었다. 그는 문득 일주기 위령제에 갔을 때, 계곡을 향해 이 남자가 '이 바보야!' 라고 소리친 것을 떠올렸다. 건물을 뒤로 하고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자 한 남자가 옆으로 다가 왔다. 작은 체구에 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진 남자였다. 분명히 후지사키의 사무실에서 왔다갔다 하 던 남자였다. "상당히 오랫동안 교분이 있었나 보군요." 남자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걸었다. " 예... ." 그는 쓰디쓴 웃음으로 대꾸했다. "사장님은 언제나 말이 길어져서, 때로는 짜증이 날 정도 지요. 피해자 모임에서 만났던 분인가 보죠?" "예에." 헤어질 때 하던 후지사키의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그 사고로 사장님의 운명도 크게 바뀌었지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았다. "그래요?"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고, 인쇄소는 주문이 끊겨 망하기 일보직전이 었죠. 그런 때 사고가 일어난 겁니다. 두 아이를 모두 저 세상으로 보냈기 때문에 보상금은 1억 이상이 들어왔지요. 그래서 단숨에 되살아나더니, 기세를 타고 지금은 보다시피 저렇게 잘 나가고 있습니다." "예에... ." 신호가 푸른색으로 바뀌어 헤이스케는 횡당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남자도 헤이스케에게 보조를 맞추었다. "술이 한 잔 들어가면 이런 말을 하곤 하지요. 꽤나 골치를 썩이 던 딸들이었지만 최후의 순간 효도를 했다고요.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 고생은 했지만, 그 나이 까지 키우길 정말 잘했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는 우리들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지요." 지하철 입 구가 나타났지만 남자는 그냥 지나치는 것 같았다. "저는 여기에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헤이스 케는 그렇게 말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슬 픔이 아니다! 지금 그 남자에게 그렇게 소리쳐 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 의 밑바닥까지 알려지는 것을 후지사키가 바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망막에, 벤츠 안에서 흔들리고 있던 인형이 새겨져 떠나지 않았다.귀여운 여자 인형이었다. 더구나 똑같이 생긴 인형 두 개가 흔들거리며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현관문을 열자 구수하고 매콤한 카레 냄새가 퍼져 나왔다. 그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나오코 는 좀처럼 카레를 만들지 않는다. 사고가 난 이후에는 더더욱 그랬다. 헤이스케는 거실을 지나 부 엌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가스 레인지 앞에 서서, 커다란 냄비 안을 휘젓고 있는 참이었다. 새 하얀 앞치마가 눈이 부셔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 이제 오세요?" 그는 코를 킁킁거리며 대답 했다. "정말 오랜만인데! 지금 만들어 두면 내일 아침에 모나미도 먹을 수 있겠지. 틀림없이 좋아 할 거야." 그러자 그녀는 토라진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는 금방 알 아차리지 못했다. 눈치를 차린 것은 그녀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 때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아! 모나미였구나!" "예. 죄송해요. 엄마가 아니라서요." "오늘은 아직 잠들지 않 았니?" "예. 왠지 잠이 안 와요... . 그래서 가만히 있기도 뭐해서 슈퍼마켓에 가서 카레 재료를 사 왔어요." "그랬니? 그러고 보니 카레는 네 특기였지." "카레가 싫으세요?" "아니, 그렇지 않아. 이 아빠도 카레를 좋아한단다." 그는 이층으로 올라가서 여느 때처럼 간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었다. 가슴속에서는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뭔가가 있었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 나 그것을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무거워질 것 같아서, 의식에서 내쫓아 버리려고 노력했다. 텔레 비전의 노래 프로그램을 보면서 그는 모나미가 만든 카레라이스를 먹었다. 제법 그럴 듯한 솜씨 로, 나오코가 만든 카레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렇게 말해 주자 모나미는 기분 좋은 듯이 환하게 웃었다. "이래봬도 요리는 제법 잘한 다구요. 엄마가 메모해 준 것이 있으니까 앞으로도 염려 마세요!" 모나미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 두 개를 펼쳐 V자를 만들었다. "그런데 곰곰히 생 각해보니, 아빠와 저녁을 같이 먹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에요. 왠지 기분이 이상해요." "다른 때라 면 너는 잠들어 있을 시간이니까 그렇지." 모나미는 잠시 숟가락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빠는 역시 엄마가 나오는 것이 좋겠죠?" "그렇지 않아. 하지만 너무 그렇게 강조하면 이번에는 엄마가 토라질지도 모르겠구나." "그래요. 지금 그 말은 듣지 않았던 걸로 칠게요." 카레라이스를 먹은 뒤 에도 모나미는 텔레비전 앞에서 최근에 인기 있는 드라마를 보았다. "엄마가 이 드라마가 재미있 다고 자랑했거든요." 그러는 동안에 그는 싱크대를 마주하며 카레 접시와 숟가락을 씻었다. 그것 을 보고도 모나미는 텔레비전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말했다. "고마워요, 아빠!"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로 들어가자 모나미는 탁자에 엎드린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드라마의 주제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는 눈을 뜨 더니, 얼마 동안 멍하니 시선을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두 눈의 눈꺼 풀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지금 몇 시죠?" "아홉 시." "그래요? 꽤 오래 잤네요." "집에 왔을 때 모나미가 있어서 조금 놀랐어. 솔직히 말해서 걱정도 됐지." "내가 나타나지 않을까 봐요?" "그 래." 나오코는 그에게서 눈길을 돌려 시선을 내리깔았다. "잠들어 있는 상태와 깨어 있는 상태, 그 중간 같은 어중간한 상태가 있는데, 평소에는 그 상태에서 재빨리 일어나지만 오늘은 어찌 된 일 인지 도저히 일어날 수 가 없었어요. 또다시 잠의 세계로 끌려들어간 거예요." "그래?" 그는 애매 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저, 어쩌면 당신을 만날 수 없을지도 몰라요." "무슨 뜻이지?" "아마 이렇게 조금씩 사라져갈 거예요." "그만해.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 "하지만 이상하게도 별로 슬프지 않아요.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아무 리 생각해도 지금 이 상태는 이상하니까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나는 지금 이 생활이 아주 마 음에 들어. 모나미도 꽤 즐거워하는 것 같던데.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생활하자구." "할 수만 있다 면 그렇게 하고 싶어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오늘 저녁은 카레였 나 보군요." "모나미가 만들어 주었어." "그래요? 그 애가 가장 자신있어 하는 요리니까요. 하지만 다른 요리도 제법 잘 만들어요. 어릴 때부터 부엌일을 좋아했잖아요." "본인도 그렇게 말했지. 엄 마가 요리 방법에 대해서 메모해 준 것이 있다고." 나오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될 수 있으면 많이 적어 주어야겠어요." "왜 자꾸 그런 말을 해? 어쨌든 지금은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잖아." 그는 조금 짜증을 부리듯이 말했다. "미안해요." 그날 헤이스케는 밤을 꼬 박 새워 나오코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더 오랫동안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두 시가 가까워지자 일 분이 멀다하고 하품을 쏟아내는 바람에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잠이 쏟아져서 정신을 잃을 것 같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자기 방으로 사라졌다. 그 리고 내일 아침에는 나오코가 아니라 모나미가 되어 있을 것이다. 약 세 시간. 최근 들어 나오코 가 나타난 시간이다. 그는 욕조에 물을 받아 느긋하게 목욕을 한 다음에 거실에서 위스키를 마셨 다.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불이 붙는 것처럼 목과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러면서 그는 터져나오는 눈물을 안으로 삼켰다. 이별의식 뜻밖의 인물이 헤이스케의 직장을 방문한 것은, 7월에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규 슈 지방에서는 장마가 그쳤다는 소식이 날아들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도쿄에도 맑은 날씨 가 계속되고 있었다. 후끈거리는 더위가 무색할 정도로 그 사람은 짙은 감색 양복을 입고 손님용 대기실에 나타난 것이다. '이런! 가엾게도 몹시 덥겠군!' 언뜻 보았을 때 우선 그 생각부터 들었다. 대기실에는 4인용 사각 테이블이 쭉 늘어서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마주앉았다. "지난 겨울에는 어머니께서 실례를 했다고 하더군요. 바쁘신데 갑자기 찾아가서 죄송 하다는 말씀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짙은 감색 양복에, 똑바르게 가르마를 탄 머리가 상큼할 정 도로 잘 어울렸다. "실례라니, 귀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나도 좋았다네. 머릿속에 드리워 져 있던 먹구름이 싹 걷힌 것 같았으니까." 후미야는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몇 년 전에는, 제가 무례한 행동을 했습니다. 철이 없어서 그랬다고 생각하시고 용서해 주십시 오. 다시 한 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닐세.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자네로서는 당연하겠지. 이제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세." 후미야는 겨우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았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전해 드리라고 했는데요. 이쓰미와 연락이 됐습니다. "그 래? 이쓰미는 지금 뭘하고 있나?" 이쓰미의 연락처를 가르쳐 준 다음에는 통화를 하지 못해서, 그도 궁금하게 생각하던 차였다. "초보 미용사로서 실습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혼자서 살고 있는 데 생활이 별로 넉넉하지 않은 것 같아서 어머니께서 매달 조금씩 도와주기로 했답니다." "좋은 일이군." "예전의 보답이지요." 그는 예전에 이쓰미의 아버지로부터 은밀하게 도움을 받았던 청년 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자네가 우리회사를 지원한다니, 정말 놀랐네." "원래 자동차 관련기업에 가고 싶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대학에서 자동차 관련 동아리 활동을 했다 고 했지?" "예." 헤이스케의 회사에서도 이미 신입사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이과계 학생은 대부분 대학의 추천으로 선발하기 때문에,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거의 확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대학원의 석사과정을 마치는 후미야라면 떨어지는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단순한 우 연인가?" 후미야는 넥타이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물론 자동차 관련 기업의 추천이 별로 없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헤이스케 씨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 회사 를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헤이스케는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렇다 면 내 책임이 크군. 나중에 이렇게 이상한 회사인지 몰랐다고 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후미야는 오늘 신주쿠에 있는 호텔에서 숙박하고 내일 아침 삿포로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 은 헤이스케는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집에서 저녁이라도 먹지 않겠나?" "괜 찮으시겠어요?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실례가 된다고 생각하면 애당초 초대도 하지 않을 걸세." "예. 그렇다면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후미야는 등줄기를 쭉 펴고 대답했다. 퇴근시간에 다시 후미야가 전화하기로 약속하고 그들은 일단 헤어졌다. 헤이스케는 다섯 시가 넘기를 기다렸다가 집에 전화를 걸었다. 모나미는 벌써 집에 돌아와 있었다. 손님을 데려 간다고 하자 전화 건너편에 서 당황하는 기척이 역력했다. "갑자기 손님을 데리고 오면 어떡해요? 음식을 어떻게 하라구요." "장어 요리가 어때? '야지로'에 전화해서 제일 맛있는 부분으로 배달해 달라고 해." "정말 그것이 면 되겠어요?" "그래. 그 대신, 집 청소는 제대로 해둬야 한다." 그는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했다. 우리 집에 손님이 오는 것이 몇 년 만일까. 퇴근시간 차임벨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후미야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들은 역 앞에 있는 서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서점 앞에서는 그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땡볕이 내리쬐는 7월에 짙은 감색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말이다. 그는 도쿄 지도를 사고 있는 참이었다. "무사히 입사만 하면 내년 봄부터는 도쿄에서 생 활해야 하니까, 지금부터 지리를 알아두어야지요." 후미야는 그렇게 말하며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 며 시원하게 웃었다. "잠시 동안은 독신자를 위한 기숙사 생활을 하겠군. 불편한 일이 있으면 언 제든지 말하게."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영양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우리 집으로 달려오게. 그러려면 지금부터 가는 길을 잘 기억해 두어야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헤이스케는 후미야 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호의적인 자신을 느꼈다. 무슨 이유인지, 그에게는 특별히 애틋한 감정 이 드는 것이었다. 마치 콩나물 시루 같은 지하철에 전쟁을 하듯이 몰려드는 사람들은 보고, 후미 야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냉방 시설은 가동되고 있었지만 관자놀이에서는 연신 굵은 땀방울이 흘러 내리고, 지하철에서 내렸을 때는 어깨를 굽히며 깊은 숨을 토해냈다. "도쿄 사람들이 삿포로 사람들보다 체력이 좋은 것만은 분명해요." 그의 진심 어린 말을 듣고 헤이스케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집에 도착하자 그는 현관문을 열고 안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모나미! 아빠 왔다." 종종 걸음으로 달려나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나미가 슬리퍼도 신지 않고 나왔다. 검은 티셔츠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이제 오세요?" "전화로 이야기한 후미야 군이야. 후미야 군. 내 딸 모나 미일세." "네기시 후미야입니다." 그는 거의 90도로 몸을 꺾어 정중히 인사했다. "모나미에요. 안 녕하세요?" 모나미도 조용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뒤얽혔다. 그것은 헤이스케가 한쪽 신발을 벗는 이삼 초 동안의 일로, 다른 쪽 신발을 벗었을 때 이미 두 사람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거실로 들어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탁자위에 요리가 한 가득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샐러드, 튀김, 회, 장어요리 등 등. "네가 만들었니?" "예. 오랜만 에 손님이 오시는 거잖아요." 모나미는 그렇게 말하고 후미야를 힐끔 쳐다보았다. "굉장하군요. 아 직 어린 고등학생이 이런 요리를 만들다니, 정말 감동했습니다." "너무 자세히 들여다보지 마세요. 자세히 보면 엉성한 것이 들통나니까요." "좋아. 그럼 배가 고픈데 어서 가서 먹자꾸나. 모나미, 우선 맥주를 가져오렴." "알았어요." 모나미가 부엌으로 달려간 다음, 후미야가 주저하듯이 입을 열었다. "실례의 말씀인 줄은 알지만, 여기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되어 있나요? 열려 있는 일은 없나요?" 그가 가리키는 것을 보고 헤이스케는 한 순간 대답이 막혔다. 불단이었다. 최근에 들어 서는 불단을 열어 놓지 않았다. 공양해야 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헤이스케에게 있어서는... . 그는 당황함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조금 숙이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아아, 그것 말 인가? 전에는 세상을 떠난 아내의 사진을 올려 놓았지만, 지금은 너무 귀찮아서 말일세." "향이라 도 올리고 싶은데, 안될까요?" 후미야는 헤이스케와 모나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니, 안된다기보다... ." 헤이스케가 우물쭈물거리고 있자 모나미가 맥주병을 든 채 옆에서 거들었다. "향을 올리는 게 뭐 어때서 그래요? 상관없잖아요." "으, 으응. 그렇지. 상관없네. 그래. 그렇다면 향을 피워 주겠나?" "꼭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오랜만에 문을 연 불단 앞에서 후미야는 꽤 오랫 동안 두 손을 맞대고 기도를 올렸다. 가느다란 실연기가 피어오르면서 은은한 향냄새가 주위의 공기를 차분하게 가라 앉혔다. 후미야는 고개를 들고 액자 안에 있는 나오코의 사진을 보고 나서, 다시 헤이스케를 향했다. "무리한 부탁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네, 그보다 상당히 오랫동안 합장하고 있더군." "예. 사죄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요." 후미야의 얼굴에서 긴장이 조금 사라진 것 같았다. "그러면 건배하죠. 후미야 씨 취직을 축하하면서요." 모나미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이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그렇게 하지." 헤이스케는 탁자 위에 있는 컵을 들어 후미야 앞에 놓았다. "예에? 의과대학이요? 그거 굉장한데요!" 후미야가 계속해서 감탄사를 연발했다. "별로 굉장하지 않아요. 단순한 희망이죠. 들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고." "목표로 한다는 것만으로 도 굉장해요. 모나미 씨는 여자잖아요. 아, 이렇게 말하면 성차별이 되나요? 어쨌든 정말 굉장합 니다." 후미야의 발음이 조금 흐트러졌다. 온몸에 술기운이 퍼져가는 것이리라. "하지만 후미야 씨 는 호쿠세이 공과대학 대학원을 졸업했잖아요. 그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하나도 대단 하지 않아요. 가고 싶으면 누구라도 갈 수 있으니까요." "설마요. 후미야 씨는 공학을 전공했으니 까 당연히 수학을 잘하시겠죠? 잘 모르는 문제가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지금 말입니까? 글 쎄요. 제법 술을 마셔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을 텐데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모나미가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미안하군. 아직 어린 고등학생을 상대하느라 힘들지?" 헤이스케는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져서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아닙니다. 너무너무 즐겁습니다. 그나저나 모나미 씨는 정말 대단한데요. 의과대학을 목표로 공부하다니." "어머니의 유지이지." "돌아가신 부인 말씀이세 요?" 후미야는 재빨리 불단으로 눈길을 돌려 나오코의 사진을 쳐다보았다. "특별히 의학부가 아 니라도 상관없지만, 어쨌든 자기 딸만은 후회가 남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랬지." "예에... ." 후미야는 나오코의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때 모나미가 내려와서 후미야 앞에 프린트물 을 놓았다. "이 문제인데요." "음, 적분을 증명하는 문제로군." 후미야는 알코올로 새빨개진 얼굴 을 뒤로 젖혔다. "으흠! 이것은 꽤 어려운 문제인데. 일단은 x의 제곱을 t로 놓고, t를 x에 대해서 미분해 주면 되지." 퀭하니 충혈된 눈으로 그는 볼펜을 꺼내 답을 풀기 시작했다. 그런 청년의 얼 굴을 모나미는 믿음직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후미야는 열한 시가 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 났다. 걸음걸이는 조금 불안정했지만 정신은 또렷한 것 같았다. 모나미가 내민 수학 문제 세 개를 그 자리에서 푼 것을 봐도, 그것은 분명했다. "굉장히 똑바로 자란 사람이군요. 조금도 왜곡되거 나 비뚤어진 데가 없는 것 같아요." 그 말을 할 때 모나미의 반짝이는 눈에서 어떤 예감을 느꼈 지만, 헤이스케는 그것을 입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식기를 씻었다. 대강 정리를 마쳤을 때에는 시계바늘이 열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아직 샤워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욕실로 들어가지 않고 거실에 마주앉았다. "피곤하지?" "조금요." "내일이 토요일이라서 다행이군. 하지만 모나미는 학교에 가야 하잖아?" "예. 하지만 오 전이면 끝나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모나미는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빠. 오늘밤에는 엄마가 나오지 않을 거예요." "... 그러니?" "예. 오늘밤에는 오지 않아요." 그는 힐끔 불단을 쳐다 보았다. 사진 속에 있는 나오코는 그를 향해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빠. 부탁이 있는데요." "뭐지?" "내일 수업이 끝나면, 데려가 주셨으면 하는 곳이 있어요. 차를 타고요." "드라이브? 좋 아, 어디지?" 모나미가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은 처음이라서 그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조금 주저했지만 말투는 분명했다. "야마시타 공원이요." "야마시타 공원... 요코하마에 있는?" "예." 차 갑게 얼어붙은 바람이 그의 마음을 파고들더니, 날카로운 비수가 심장에 내리꽂히는 것 같았다. " 내일... 말이냐?" "예, 내일이요." "알았다. 데려다 주지." 그런 다음 그녀는 터져나오는 하품을 손 으로 막으며 일어섰다. 커다란 눈도 이미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녀는 거실을 나가 그대로 계단 을 뛰어올라 갔다. 그는 고개를 돌려 불단에 있는 사진을 바라보았다. 야마시타 공원. 그곳은 나 오코와 처음으로 데이트한 장소였다. 토요일은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우선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가득 채우고, 겸사겸사 세차도 부탁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 흠집이 있는 낡은 자동차도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그 다음에는 레 코드 가게에 가서 CD를 몇 장 샀다. 여자 점원이 쿡쿡거리며 웃음을 참으려고 한 것은, 중년 남 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CD이기 때문일 것이다. 레코드 가게를 나온 다음에는 가까운 전자제품 가게에 들러 CD겸용 카세트를 사고 마지막으로 이발소에 들렀다. "이제 막 이발소에 다녀온 표시 가 나지 않도록 해주게.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말이야." "오늘 무슨 일이 있나요? 선이라도 보시 는 거예요?" 오랫동안 단골로 이용한 이발소 주인은 그를 음흉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선을 보 는게 아니라 데이트를 한다네." "예? 정말이세요?" 어차피 거짓말일 것이라는 표정으로 주인은 히 죽거렸다. "거짓말은 아니네. 딸과 데이트하는 것이니까." "그거 대단하군요. 아버지에게 있어서 딸과 데이트하는 일이 그렇게 흔할 줄 아세요? 인생을 통틀어 몇 번 없는 일이니까 잘하셔야 돼 요." 주인은 마치 자신이 경험하기라도 한 듯이 절실하게 말했다. 이발소를 나왔을 때는 마침 적 당한 시간이 되어 있었다. 그는 차를 운전해서 모나미의 학교로 향했다. 그녀의 학교에 가는 것은 축제 때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문득 눈꺼풀 안쪽에서 캠프파이어의 불꽃이 되살아났다. 아직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머나먼 옛날의 기억인 듯한 생각이 들었다. 벌써 수업이 끝났는지 학생들 이 삼삼오오 떼지어 몰려나왔다. 그는 도로 옆에 차를 세우고 여학생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이 윽고 모나미가 두 명의 친구와 나란히 나왔다. 클랙슨을 울리려고 한 순간 그녀도 알아차렸는지, 친구들에게 무슨 말인가 하고 나서 혼자 뛰어왔다. "차가 새것이 됐네요." 조수석에 타자마자 모 나미가 감탄한 듯이 탄성을 질렀다. "그렇지?" "그리고 이발도 하셨나 봐요?" "이발을 하고 나 니, 나도 제법 봐줄 만하지?" "보기 좋은데요. 아빠라고 하기보다 애인 같은 느낌이 들어요." "애 인이라. 그거 나쁘지 않은데." 그는 다시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차에 올라탈 때는 가벼운 농담을 하더니, 모나미는 이내 입을 다물고 창 밖을 내다볼 뿐이었다. 헤이스케도 구태여 말을 붙 이지 않았다. 그들은 도중에 휴게소에 있는 햄버거 가게에 들러 햄버거와 콜라를 샀다. 모나미는 아무 말 없이 치즈 버거와 콜라를 먹고, 그도 운전을 하면서 한 손에 든 햄버거를 베어먹었다. 야 마시타 공원으로 들어가서 그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짐을 챙겨 걷기 시작했다. "아빠. 그것 좀 촌스럽지 않아요?" 모나미가 묵직해 보이는 CD겸용 카세트를 가리키며 얼굴을 찡그렸다. "왜? 이 거 최신 제품인데?" "그것 자체는 괜찮지만, 그것을 들고 야마시타 공원을 돌아 다니는 것 자체가 구세대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아요... ." "그러면 차에 놓고 올까?" "됐어요. 어차피 필요한 거잖 아요?" "그래... ." "그렇다면 하는 수 없잖아요." 토요일 오후라서 그런지, 공원에는 가족을 동반 한 사람이나 연인처럼 보이는 커플이 많았다. 마침 비어 있는 벤치가 눈에 띄었다. "조금 더 부두 쪽에 가까웠는데." "뭐가요?" "엄마와 처음으로 데이트했을 때 앉은 벤치 말이다. 저 안쪽이었어." "하지만 거기엔 사람이 앉아 있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모나미와 헤이스케는 나란히 벤치에 걸 터앉았다. 학생복을 입은 여고생과 카세트 라디오를 들고 있는 중년 남자,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 게 비칠지 조금 마음에 걸렸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 지 않아서 그런지 평온한 수면에 몇 척의 배가 떠 있는 부두는, 말 그대로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었니?" "예." "언제?" "어제 아침, 노트에 적혀 있었어요." "토요일에 말하 라고 써 있었니?" 그의 시야에 모나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들어왔다. "토요일에 아빠에게 부 탁해서, 야마시타 공원에 데리고 가달라고 하렴. 그러면... 그곳에서." "그곳에서... 뭐지?" 모나미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그의 입에서는 기나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빠. 내가 돌아온 게 잘된 건가요?" 그는 아무 말 없이 모나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이지. 엄마도 기뻐하고 있 어." 모나미는 안심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을 절반쯤 감더니, 그대로 벤치에 드을 기댔다. 그녀는 마치 인형처럼 조용하게 잠이 들었다. 그는 CD겸용 카세트를 돌아보고 전원 스위 치를 켰다. 나오코가 좋아하는 마쓰토야 유미의 CD를 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곡이 흘러나오는 것과 동시에 그녀는 눈을 떴다. 그러나 그는 말을 걸지 않고 모나미와 있었을 때처럼 바다를 바 라보았다. 그녀도 똑같은 방향을 쳐다보았다. "당신 같은 양반이 어떻게 유미의 CD를 사셨어요?" 나오코가 입을 열었다.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침착한 목소리였다. "얼굴에서 물이 솟구치는 줄 알았어." "하지만 그래도 사셨군요." "당신이 좋아했으니까." 두 사람은 또다시 아무 말 없이 바다 를 바라보았다. 바다의 표면은 눈이 부실 정도로 새파래서, 바라보는 눈이 따끔따끔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여기에 데려와 주어서 고마워요." 그는 그녀에게 몸을 돌렸다. "역시... 마지막인가?" 그녀는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어요. 사실 그 사고가 있었던 날 끝났어야 했는데, 오늘까지 질질 끌어왔을 뿐이죠. 그것을 연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당신 덕분이에요." "조금만 더, 어떻게 안될까?" 그 녀의 미소가 쓸쓸하게 느껴졌다. "더 이상은 안돼요.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 일이니까 알 수 있어요. 이제 오늘로서 나오코는 끝이에요." "나오코... ." 그가 손을 잡자 그녀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여보, 그 동안 고마웠어요. 나를 잊지 마세요." 나오코. 그는 다시 한 번 부르려고 했 다.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눈과 입술에 어렴풋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그대 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목이 천천히 앞으로 꺾였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푹 떨구었 다. 그러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울어서는 안된다. 누군가가 귓가에서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 다. 어깨에 손이 놓여지는 느낌에 고개를 들자, 나오코와 똑같이 생긴 모나미의 눈이 그를 쳐다보 고 있었다. "이제 가셨어요?" 그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 지더니,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큰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그는 딸의 등을 다정하게 어루만지 면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멀리에서 새하얀 배가 가까이 다가오고, 유미는 '그늘지는 방'이라는 노 래를 부르고 있었다. 비밀속으로 "울 거야. 내기해도 좋아. 틀림없이 운다니까." 도미오의 자신만만한 단언에 헤이스케는 손을 흔 들며 반론을 펼쳤다. "울지 않아요. 요즘 세상에 딸이 결혼한다고 우는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일수록 목을 놓아 운다니까. 아버지는 딸을 보내는 게 아니라 사위를 맞 아들이는 것인데 왜 우는지 모르겠다니까. 장인 어른도 그러셨죠?" "그랬던가?" 사부로는 뺨을 긁 적거리며 시치미를 뗐다. 그는 언제든지 나갈 수 있도록 이미 전통 의상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도 미오도 예복 차림이었지만, 헤이스케는 조금 전에 세수를 했을 뿐 아직 잠옷을 입고 있었다. 쿵쿵 쿵쿵. 계단을 올라오는 힘찬 발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예복을 입고 있는 처형 요코였다. "제부도 참. 아직 옷도 안 갈아입고 뭐 하시는 거예요? 빨리 옷을 갈아입으세요. 모나미는 벌써 나갔다구 요." "모나미가 지금 나갔다면 아직 여유가 있잖아요. 신부가 준비하는 데만 두 시간이 걸린다고 하잖습니까?" "신부 아버지는 할 일이 없는 줄 아세요? 앞에 서서 손님을 맞아야 하잖아요." 도미 오가 다시 손을 흔들며 짓궂게 놀려댔다. "신부 아버지가 무슨 할 일이 있어? 한쪽 구석에 처박 혀서 훌쩍훌쩍 울기만 하면 된다구." "울지 않는다니까, 참 끈질기시군요." "틀림없이 울 거야.안 그래, 여보? 당신도 이 사람이 운다고 생각하지?" "제부 말이에요?" 요코는 헤이스케의 얼굴을 말 똥말똥 쳐다보고 나서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한 말을 뭐 하러 하세요? 제부가 안 울면 누가 울 겠어요?" "무슨 말씀이세요? 처형까지 날 놀리시기에요?" "바보 같은 소리는 이제 그만하고, 우리 도 어서 나가요. 늦어도 앞으로 삼십 분 이내에는 나가야 돼요. 신부 아버지가 지각하면 그야말로 꼴불견이잖아요. 그러면 아버지, 여보. 우리부터 어서 가요." 어제부터 이 집에 머무르면서 여러 가지로 지시를 내리던 요코는, 오늘도 모든 것을 관장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녀는 남편과 아버지 를 모시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모든 소리가 완벽하게 끊어진 방에 혼자 남은 그는, 잠시 동안 멍 하니 앉아 있다가 꾸물꾸물 일어나서 어제 옷걸이에 걸어 놓은 예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결 혼식 날짜가 정해지고 나서 오늘까지 시간은 쏜살 같이 지나갔다. 딸을 보내는 아버지의 슬픔에 젖어 있을 시간도 없었다. 원래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때는, 언제나 눈 깜 짝할 사이인 것이다. 어느덧 모나미는 스물다섯 살이 되어서, 대학원에 조교로 있으면서 뇌의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너무 연구에만 몰두하다가 혼기를 놓치지나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것은 완전한 기우로 끝나고 말았다. 이제 나오코에 대해서는 모나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거의 없어 졌다. 그녀는 그 신비한 체험에 대해서 당시와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대학생 시절 에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결국, 일종의 이중인격이 아니었을까요? 사고의 충격으 로 인해 내 안에 또 하나의 인격이 태어났고, 그 인격은 자신을 어머니라고 생각한 거예요. 옛날 부터 있었던 빙의는 대부분 그런식으로 설명할 수 있죠. 본인이 아니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든 지,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든지 하는 이야기는 모두 주관적인 것이라서 별로 믿을 수가 없어요. 어 린 시절부터 나는 언제나 엄마와 함께 지냈으니까, 엄마처럼 행동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 을 거예요. 그러나 세월이 흘러 정신이 어른이 되어가면서 원래의 인격이 얼굴을 내밀게 되고 나 머지 한쪽은 사라져 버린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깨끗하게 정리되잖아요." 그는 구태 여 그녀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 그렇게 납득하는 편 이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결단코 이중인격이 아니었다고 단정할 수 있다. 10여년을 부부로 생활하고, 그런 이후에도 5년간을 함께 생활했다. 진짜 나오코인지 그렇지 않은 지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결국 그때의 나오코는, 그의 마음 속에서만 살 고 있는 것이다. 예복의 바지가 꽉 끼었다. 나도 살이 쪘나 보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배를 어루만졌다. 넥타이를 매고 나서 그는 서랍장을 열고 낡은 회중시계를 꺼냈다. 오가와 유키히로의 유품이다. 그는 오늘 이 시계를 가지고 가기로 예전부터 결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태엽 을 감아도 시계바늘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귀에 가까이 대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는 혀를 끌끌찼다. 하필이면 이럴 때 고장이 날 게 뭐람. 그는 힐끔 자명종을 쳐다보고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했다. 좋아. 안돼도 하는 수 없지. 한 번 가보는 수밖에. 그는 고장난 시계를 들고 서 둘러 집을 나섰다. 결혼식이 치러지는 장소는 길상사 근처에 있는 호텔로, 오쿠보 역에서 그리 멀 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는 결혼식장에 가기 전에 오쿠보에 있는 마쓰노 시계방에 들르기로 했 다. 마쓰노는 예전에 회중시계 뚜껑을 수리해 준 나오코의 친척이었다. 시계방 주인 마쓰노는 그 의 옷차림을 보고 깜짝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오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모나미의 결혼식이 지?" "아니? 어떻게 알고 계세요?" "결혼반지를 우리 가게에서 했거든." "아, 그랬어요?" 처음 듣 는 이야기였다. 그는 이번 결혼에 있어서 아무것도 참견하지 않았고, 의논을 받은 적도 없었다. 모두 모나미가 혼자 정한 것이다. 그는 낡은 회중시계를 마쓰노에게 보여주었다. 최고의 장인(匠人)이라고 할 수 있는 그도, 그 시계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것은 조금 힘들겠는데. 오늘 중에는 어렵겠어." "그래요? 고장 난 것을 빨리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결혼식에 이 시계를 들고 가야 하나?" "예. 실은 이 시계 주인의 아들이 모나미의 신랑이거든요. 그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나서, 대신 유품인 이 시계를 가 지고 가려고 했지만 하는 수 없지요. 고장난 상태로 참석하게 하는 수밖에요." "결혼식이 끝나면 가지고 오게. 완벽하게 고쳐 줄 테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장난 시계를 주머니에 넣고 발길 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마쓰노가 무심결에 한 마디를 흘렸다. "그러면 양쪽 다 유품이 참석하는 거로군." 헤이스케는 무슨 뜻인지 몰라 다시 물어보았다. "양쪽 다 유품이 참석하다니, 무슨 뜻입 니까?" "모나미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안 할 수가 없군. 너무 감동적인 이야기라서 말일세." "무슨 얘긴데 그렇게 뜸을 들이세요?" "아까 반지 이야기를 했지? 결혼 반지 이야기." "예." "모나 미가 우리 가게에서 결혼반지를 주문한 것은 사실이네만, 그때 어떤 반지를 함께 가지고 왔지." "어떤 반지라뇨?" "자네가 지금 끼고 있는 반지와 똑같은 반지 말일세." 그는 자기 손으로 눈길을 떨구었다. 그의 손에는 나오코와 결혼할 때 맞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반지도 여기에서 만든 것이다. "나오코의 반지를요?" "그래. 그 반지를 가지고 와서, 이번에 새로 맞추는 신부 반지를, 그 반지를 재료로 해서 만들어 달라고 하더군. 어머니의 유품이라고 하면서 말이 야." "그 반지를... ."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손발이 떨려서 그대로 서 있을 수 없을 정도였 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 "물론 나는 부탁하는 대로 만들어 주었지. 참으로 감동스러 웠다네. 돌아가신 어머니의 반지로 자신의 결혼반지를 만들다니!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사실을 자네에게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것이었네. 물론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 더군. 다만 아버지에게는 절대로 말해서는 안된다고 몇 번이고 못을 박더군. 말하면 평생을 원망 하겠다고까지 하면서 말일세. 하지만 뭐 상관없지 않나? 자네도 마음이 상하거나 불쾌하지는 않 겠지?"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문득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가게 밖으로 나온 이 후였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 그는 걸음을 옮기면서 계속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반지 는 곰인형 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 나오코가 직접 넣어두었다. 그런 반지를 모나미는 왜 꺼낸 것 일까. 아니, 애당초 어떻게 꺼낼 수 있었는가. 곰인형 안에 반지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모나미가 알 리 없다. 그것은 나오코와 둘만의 비밀로 하지 않았는가. 나오코가 노트를 통해서 모나미에게 알려준 것일까. 그렇다 치더라도, 왜 반지를 다시 만들 필요가 있는가. 그리고 그 사실을 왜 숨겨 야 하는가. 일단 택시를 잡아탄 그는 결혼식을 올리기로 되어 있는 호텔 이름을 운전기사에게 말 했다. 그는 자신이 끼고 있는 반지를 만져보았다. 갑자기 속에서 불끈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었 다. 나오코... . 당신은 사라지지 않았는가. 다만 사라진 것처럼 행동했을 뿐인가. 헤이스케는 처음 으로 모나미가 나타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 전날, 그는 한 가지 결심을 했다. 그녀를 모나미로서 대하고 자신은 진정한 아버지가 되기로. 그녀의 이름을 '모나미'라고 부름으로써 그런 의사표시 를 한 것이다. 나오코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남편의 결심을 알고 자신도 결단을 내린 것을 아닐까. 모나미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행동하면서, 자신이 모나미가 되겠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 지만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한 가지 방법을 선탰했다. 나오코가 조금씩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9년. 그녀가 연기를 해온 세월들이다. 앞으로도 계속 평생을 연기할 생각이었을까. 문득 야마시타 공원에서 일어난 일이 떠올랐다. 그날은 나오코가 사라진 날이 아니 라, 나오코로 살아가기를 완전히 포기한 날이 아니었을까. 모나미가 눈을 뜬 직후, 소리를 내어 울음을 터트린 것은 자기를 포기해 버린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던가. 나오코. 당신은 아직도 살아 있는가.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내동댕이치듯이 돈을 지불하고 황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옆을 지나가는 호텔 종업원에게 결혼식 장소를 물었다. 나이가 많은 호텔 종업원은 일부러 조바 심나게 하려는 것처럼 느긋하게 대답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식장이 있는 층에서 내리자 사부로 와 요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 이제야 오는군요. 어디서 이렇게 꾸물거리고 있었어요?" "모나미는?" "안내해 줄게요." 그는 숨을 헐떡이면서 요코를 따라 신부 대기실로 갔다. 요코는 노 크를 하고 안을 들여다보고 나서 말했다. "들어와도 좋대요." 그리고 일부러 신경을 써주는 것인 지, 자신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나서 문을 열었다. 한순간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나미의 모습이 눈 속으로 뛰어들어 왔다. 그것은 커다란 거울에 비친 모습 이었다. 그녀는 거울을 통해 헤이스케를 보며 천천히 되돌아섰다. 달콤한 꽃 향기가 주위에 떠 다 니는 것 같았다. "아아, 정말... ." 그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30년 전의 광경을 떠올렸다. 웨딩드레 스를 입은 나오코의 모습도 참으로 아름다웠던 것이다. 옆에서 도와주던 여자가 밖으로 나가고 모나미와 둘만 남게 되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오코...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여기에서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 그녀는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나오코 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 스스로 말하지 않는 한 그녀는 모나미일 수밖에 없고, 그에게 있어서는 딸일 수밖에 없다. "아빠. 오랫동안... 정말 오랫동안 고마웠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촉촉한 눈물 이 스며 있었다. "그래." 그는 두세 번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한 비밀로 인정하겠다는 끄덕임이기 도 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네기시 후미야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신부의 모습을 보더니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반짝거렸다. "우아! 아름답군! 아름답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어. 안 그래 요, 아버님?" "그것은 이미 30년 전부터 알고 있었네. 그보다 이보게, 잠깐 따라오게." "하실 말씀 이 있으신가요?" "그는 후미야를 다른 대기실로 데려갔다. 그 대기실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이제 곧 모나미와 결혼식을 올릴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것 이 있네." "예, 뭐든지 말씀하십시오." "그렇게 어려운 부탁은 아니네. 왜 다들 말하지 않는가? 신 부의 아버지가 신랑에게 어떻게 하고 싶은지. 그렇게 하게 해주겠나?" "그게 뭔데요?" 그는 후미 야의 얼굴 앞으로 꽉 쥔 주먹을 내밀었다. "이거네. 한 대 때리게 해주게." 후미야는 뒤로 조금 물 러서면서 과장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예? 지금 여기에서 말입니까?" "안되나?" "그게 아니라, 이 거 큰일인데요. 지금부터 사진도 찍어야 하는데." 후미야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눈동자를 이리 저리 굴리더니, 드디어 결심이 선 듯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저토록 아름다운 따님을 주시 는데 그 정도는 참아야겠죠. 한 대 얻어맞기로 하죠." "아니, 두 대네." "두 대요?" "한 대는 딸을 빼앗긴 몫이고, 또 한 대는... 또 한 사람의 몫이네." "또 한 사람이요?" "그것은 아무래도 좋으니 까 눈을 감게." 그는 있는 힘들 다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그 주먹을 휘두르기도 전에 눈 물이 넘쳐흘러 앞을 가렸다. 그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목이 쉴 정도로 소리를 내어 울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