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1 지은이:히가시노 게이고, 이선희옮김 출판사:도서출판 창해 믿을 수 없는 현실 1 인간의 예감, 그것만큼 믿을 수 없는 것이 또 어디 있는가. 야간근무를 마친 뒤 피곤한 몸 을 이끌고 아침 여덟 시에 집에 돌아온 헤이스케는 두 평 남짓한 거실로 들어가자마자 텔레 비전 스위치를 켰다. 어제 있었던 스모 시합의 결과를 알고싶었던 것이다. 올해 나이 마흔의 고개를 넘은 헤이스케는 지난 39년이 그랬듯이 오늘도 평범하고 평온한 하루가 될 것이라 믿었다. 아니, 믿고 있었다기보다 그것은 이미 기정 사실이었다. 피라미드 를 움직이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텔레비전 채널을 돌릴 때도 자신이 놀랄 만한 뉴스가 흘러나오리라고는 상상도 하 지 못했고, 가령 세상을 떠들썩하게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도 자신과는 아무 상관 이 없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야간근무가 끝나면 언제나 습관처럼 보는 프로그램에 채널을 고정시켰다. 연예계 소 식이나 스포츠 결과, 간밤에 일어난 사건 사고들을 맛보기처럼 두루두루 알려주는 프로그램 이었다. 사회를 맡고 있는 사람은 주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프리랜서 아나운서 로, 헤이스케도 이웃집 아저씨처럼 푸근하게 생긴 그 사회자가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화면을 가득 메운 것은 평소와 같은 사회자의 미소 띤 얼굴이 아니라 눈이 시리도 록 새하얀 눈발이 뒤덮인 낯선 산이었다. 헬리콥터에서 촬영하고 있는지, 리포터를 맡고 있 는 남자의 목소리에서 프로펠러 소리가 묻어 나왔다. 무슨 사건이 있었나.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무슨 사건인지 알고 싶다는 마음은 일 어나지 않았다. 지금 가장 궁금한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역사가 이겼느냐 졌느냐 하는 것뿐 이었다. 그 역사에게는 이번 시합이 한 등급 승급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는 회사 이름이 새겨진 점퍼를 옷걸이에 걸고, 곱은 손을 비비면서 옆에 있는 부엌으로 갔다. 3월 중순이라고는 하지만 하루 종일 불기운이 없었던 만큼 바닥은 얼음장처럼 싸늘하 게 식어 있었다. 그는 발에 냉기를 느끼고 황급히 슬리퍼를 신었다. 튤립 무늬가 앙증맞게 그려져 있는 슬리퍼였다. 냉장고를 열자마자 가운데 선반에 있는 닭고기 튀김과 감자 샐러드가 눈에 들어왔다. 그 는 두 가지를 모두 꺼내, 닭고기 튀김을 전자 레인지에 넣고 시간을 맞추어 동작 버튼을 눌 렀다. 그리고 물주전자를 가스 불에 올려놓고, 물이 끓는 동안 싱크대 서랍에서 인스턴트 된 장국을 꺼내 그릇에 내용물을 쏟아 부었다. 냉장고 안에는 햄버거와 소고기 스튜도 들어 있 었다. 내일 아침에는 햄버거를 먹어야지. 그렇게 생각하자 벌써부터 입안에 군침이 가득 고 였다. 헤이스케는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의 생산공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재작년에 반장으로 승 진해서 아내에게 기쁨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의 직장은 반별로 이 주일의 주간근무와 일주 일의 야간근무를 번갈아 하도록 일정이 짜여 있었다. 이번 주는 그가 담당하는 반이 야간근 무를 할 차례였다. 생활의 리듬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야간근무는 이제 막 마흔 고개에 접어든 그에게 육체적 으로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즐거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 가지는 특별 수당이 나온 다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올해, 즉 1985년은 세상의 다른 기업과 마찬가지로 그가 다니는 회사의 경영상태도 눈에 띄게 호조를 보였다. 주문에 따른 생산량이 폭주하자, 그에 따라 설비 투자도 활발했다. 따 라서 헤이스케처럼 현장에 있는 사람은 설비 투자에 따라 생산라인을 증설하느라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정해진 업무시간은 다섯 시 반이지만, 한두 시간의 잔업은 당연 하고 때로는 세 시간 이상 잔업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자 잔업 수당으로 주머니가 두둑해져서, 때로는 기본급보다 잔업으로 받은 금액이 더 많은 일도 드물지 않았다. 그럴 때 는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감돌곤 했다. 하지만 회사에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집에 있는 시간이 짧아진다는 것을 의미해서, 아홉 시나 열 시가 지나서야 집에 돌아가는 헤이스케에게, 아내인 나오코와 딸 모 나미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일은 꿈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야간근무를 하는 경우에는, 아침 여덟 시에는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시간은 마침 딸아이가 아침을 먹고 있을 시간이다. 이제 곧 6학년이 되는 외동딸에게 학교 이야기 며 친구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내가 손수 만들어준 음식을 먹는 것은, 굳이 헤이스케가 아니 더라도 평범한 중년 남자에게 있어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세상사는 맛이라고 할 수 있 었다. 딸아이의 해맑은 미소를 보면 야간근무의 피로 따위는 눈 녹듯이 어딘 가로 사라지곤 했다. 그러니 만큼 야간근무를 마치고 혼자 먹는 아침은, 마치 입안에 돌멩이를 넣고 씹는 것 같았다. 이렇게 쓸쓸한 아침을 오늘부터 사흘이나 지내야 하다니. 아내가 딸아이를 데리고 나가노에 있는 친정 집에 갔기 때문이다. 사촌오빠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영결식 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오랫동안 말기 암으로 신음하고 있어서 갈 길이 멀지 않았다는 것 을 이미 알아챈 아내는 영결식에 대비해서 새 상복을 준비해 둘 정도였다. 원래는 아내 혼자만이 가기로 되어 있었지만 출발하기 직전에 딸아이도 같이 가겠다고 졸 라댔다. 그곳에 가서 스키를 타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내의 친정 근처에는 작은 스키장이 몇 개 있는데, 지난겨울에 처음으로 스키를 배우고부터 모나미는 스키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 다. 모처럼 봄방학을 맞았는데도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헤이스케 로서는 무릎을 치며 찬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간의 쓸쓸함은 참기로 하고 모나미도 함께 보내기로 한 것이다. 게다가 생각해 볼 때 아내를 따라가지 않으면 그가 야간근무를 하는 동안 모나미는 혼자서 밤을 지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주전자의 물이 끓자 헤이스케는 인스턴트 된장국을 만들고, 이미 따뜻하게 데워진 닭고기 튀김을 전자 레인지에서 꺼냈다. 그리고 그것들을 쟁반에 올려 거실에 있는 탁자로 가지고 갔다. 닭고기 튀김도 감자 샐러드도, 내일 먹으려고 하는 햄버거도 모레의 메뉴인 소고기 스 튜도 모두 아내가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헤이스케는 음식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하나 도 만들지 못했던 것이다. 밥마저도 아내가 출발하기 전에 많이 지어 놓아서, 그것을 전기밥 통에 넣어 두고 매일 조금씩 먹을 생각이었다. 사흘째에 접어들면 전기밥통 안에 있는 밥은 누렇게 변할 것이 틀림없지만, 그것을 불평할 자격이 그에게는 없었다. 탁자 위에 음식을 늘어놓고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우선 된장국을 한 모금 들이키 고 나서, 잠시 망설이다가 튀김에 젓가락을 옮겼다. 튀김은 아내가 가장 자랑하는 요리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기도 했다. 그는 입에 익숙한 맛을 즐기면서 텔레비전 볼륨을 높였다. 화면 속에서는 조금 전의 사회 자가 무슨 말인가를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에는 언제나 보던 웃음이 사라지고, 표 정이 딱딱하게 굳어져서 몹시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그는 별 다른 관심이 없이 다만 멍하니 시선을 고정하며 어제 있었을 스포츠 경기만을 생각할 뿐이 었다. 평소에는 야간근무 도중의 휴식시간에 텔레비전에서 스모 결과를 알 수 있었지만, 어 젯밤에는 일에 쫓기느라 그것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다시 현장을 불러보겠습니다. 야마모토씨. 상황을 말씀해 주십시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재빨리 화면이 바뀌어, 조금 전의 눈 덮인 산이 눈으로 뛰어들 어 왔다. 스키복을 입은 젊은 남자 리포터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고, 그 뒤에서는 검은 방한복 차림의 남자들이 어수선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네, 여기는 현장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승객들의 수색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발 견된 사람들은 승객 마흔 일곱 명, 운전사 두 명 등 모두 마흔 아홉 명입니다. 버스 회사에 따르면 모두 쉰세명의 승객이 탔다고 하니까, 아직 여섯 명을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화면을 쳐다보는 헤이스케의 눈길이 진지하게 변했다. 버스라는 말이 마 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래도 아직 큰 관심은 없는지, 감자 샐러드를 입으로 가져가는 동작은 멈추지 않았다. "야마모토 씨. 그런데 발견된 분들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조금 전에 들은 이야기로는 많 은 사람들이 사망했다고 하던데요..." 사회자의 질문에 리포터는 메모지를 보면서 대답했다. "현재까지 확인된 바에 따르면, 시신으로 발견된 사람을 포함해서 스물 여섯 명이 사망했 고, 나머지 부상자들은 현지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다만 대부분의 생존자들도 상당 히 심한 중상을 입고 있어서 대단히 위험한 상태라고 합니다. 의사들이 최선을 다해 치료를 하고 있습니다만."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군요." 사회자의 말투에서 안타까움이 배어 나왔다. 그때 화면 아래에 손으로 황급히 휘갈겨 쓴 자막이 떠올랐다. 나가노에서 스키 버스 전복 사고... 순간적으로 헤이스케의 손놀림이 멈추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바 꾸었다. 다른 방송국에서도 비슷비슷한 화면을 내보내고 있어서 그는 마지막으로 국영방송 인 NHK에 채널을 고정시켰다. 마침 여자 아나운서가 사고 소식을 전하고 있는 참이었다. "계속해서 버스 전복사고에 관한 뉴스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아침 여섯 시경, 나가노 현 나가노 시내에 있는 국도에서 시가 고원을 향해 달리고 있던 도쿄 발 스키 버스가 절벽 으로 굴러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 버스는 도쿄에 본사를 둔 오쿠로 교통 소속의 스키 버스로..." 그 말을 듣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가벼운 혼란이 일어났다. 몇몇 단어가 계속해서 귓속 으로 뛰어들어왔기 때문이다. 시가 고원, 스키 버스, 그리고 오쿠로 교통... 이번 친정 방문에 있어서 나오코에게 고민을 안겨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어떤 교통수단 을 이용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친정은 기차로 가기에는 조금 불편한 곳으로, 평소에 는 그가 함께 가기 때문에 10여 년 동안 손에 익은 낡은 자가용을 이용하곤 했다. 그러나 아내는 운전을 할 줄 몰랐다. 불편해도 기차를 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런데 아내는 전혀 다 른 방법을 찾아냈다. 주로 젊은이들이 이용하는 스키 버스를 타는 것으로, 스키 시즌이 되면 도쿄 역 앞에서만 하루에 이 백 대 정도가 출발한다고 했다. 아내는 여행사에 근무하는 친구를 찾아내어 버스 승차권을 부탁했다. 그러자 마침 빈자리 가 있다는 연락이 왔다. 그룹으로 예약한 손님 중에 취소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난 항상 운이 좋다니까. 이제 형부에게 시가 고원까지 데리러 와달라고 하면 돼요. 무거 운 짐을 들고 다닐 필요도 없구요." 빈자리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아내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손뼉을 치 며 좋아했다. 헤이스케는 그때의 기억을 더듬었다. 마치 캄캄한 어둠 속에서 계단을 내려가는 것처럼 멈칫멈칫 거리며... 분명히 오쿠로 교통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도쿄 역에서 열 한 시에 출발해 시가 고원으로 가는 스키 버스라고. 갑자기 온몸이 화끈 달아오르고 식은땀이 촉촉이 배어나왔다.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며 머 릿속에서는 멍멍한 징소리가 울려 퍼졌다. 같은 버스 회사에서 같은 장소로 같은 스키 버스가 하루에 몇 대나 출발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텔레비전 앞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아무리 사소한 정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사망자 가운데 현재까지 신원이 파악된 사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의 이름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그 이름들을 여자 아나운서가 천천히, 무거운 목소 리로 읽어내려 갔다. 그에게는 전혀 낯선 이름, 생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들뿐이었다. 식욕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입안은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불안이 온통 마음을 파고들었지 만, 아직 이 사고가 자신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감은 나지 않았다. 스기타 나오코나 스기타 모나미라는 이름이 나올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마음의 대부분은 설마 그런 일은 있 을 리가 없다고 부정하고 있었다. 나에게 그렇게 끔찍한 비극이 일어날 리가 없다...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신원이 파악된 사망자의 이름을 모두 다 읽은 것이 다. 거기에는 아내의 이름도, 딸아이의 이름도 없었다. 그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래도 아직 안심할 수는 없었다. 신원이 파악되지 않은 사람이 열 명이 넘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와 딸이 신원을 알 수 있는 증명서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 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명쾌한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서랍장 위에 놓여있는 전화기에 손을 뻗쳤다. 아내의 친정에 전화를 걸어 보려고 한 것이다. 어쩌면 이미 도착해서, 자신이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쓸데없는 걱정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누르려 했을 때, 문득 그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아무리 머리 를 짜내어도 전화번호가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처가의 전화번호는 어떤 단어에 맞추면 대단히 외우기 쉽고 실제로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는 데, 머리에 큼지막한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전화번호 수첩을 찾기 위해 옆에 있는 상자 안을 뒤졌다. 전화번호 수 첩은 층층이 쌓여있는 잡지 밑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서둘러 '가' 페이지를 펼쳤다. 결혼하기 전 아내의 성은 가사하라였던 것이다. 손끝이 부르르 떨려서 전화번호를 찾는 데만 시간이 한참 걸렸다. 국번 다음의 마지막 네 자리가 7053이었다. 그 번호를 봐도 어떤 단어에 맞추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누르려고 했을 때였다. 텔레비전 안에서 여자 아나운서가 비통에 젖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막 들어온 소식에 따르면, 조금 전에 나가노 중앙병원으로 실려간 모녀처럼 보이는 여자 두 명은, 소녀가 가지고 있던 손수건에 스기타라는 성이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금 전에 나가노 중앙병원으로 실려간..." 헤이스케의 손에서 수화기가 떨어졌다. 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채 꼼짝도 하지 못했 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그 대신 이상한 소리가 이명처럼 들려왔다. 그것이 자신 의 신음소리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아, 그렇지! 7053은, 아내 이름인 나오코상이라고 외워 두었는데... 한순간 뒤, 그는 무엇엔가 이끌린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2 익숙하지 않은 눈길을 운전하면서 나가노 시내에 있는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여섯 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회사에 연락하고 병원의 위치를 확인하느라 출발이 늦어진 것이다. 3월이라고는 하지만 주차장 한쪽 구석에는 잿빛으로 변한 눈이 녹지 않은 채 거무칙칙하 게 남아 있었다. 헤이스케는 수북하게 쌓여 있는 그 눈더미에 범퍼를 조금 들이밀어 차를 세웠다. "제부!" 병원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처형인 요코가 다급히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청바지에 스웨터 를 걸쳐 입고, 화장은 하지 않은 맨 얼굴이었다. 요코는 남편과 함께 친정의 메밀국숫집을 이어받아 경영하고 있었다. 그는 인사도 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두 사람은 어때요?" 요코에게는 집에서 출발하기 전에 전화를 걸어두었다. 그녀도 사고 소식을 접하고 몇 번 인가 전화를 걸었지만, 그가 귀가하지 않은 바람에 연락이 되지 않은 것이다.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어요. 의사들이 최선을 다해 수술을 하고 있지만요." 여느 때는 목욕탕에서 막 나온 것처럼 혈색이 좋은 요코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가 얼굴을 찡그린 것을, 그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요...?" 길다란 의자가 늘어서 있는 대합실 쪽에서 누군가가 일어섰다. 장인인 사부로와 요코의 남편인 도미오였다. 사부로는 주름진 얼굴을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뜨리면서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에게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물론 인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보게, 미안하네. 정말 미안하이. 내가 장례식에 참석하란 말만 안 했어요 이렇게 되지 는 않았을 텐데. 모두 다 내 책임일세." 원래 체구가 작고 바싹 마른 사부로는 한층 더 위축되어 금방이라도 땅으로 가라앉을 것 처럼 보였다. 갑자기 30년은 더 늙어버린 것 같았다.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즐겁게 메밀 국수를 만드는 모습은 지금의 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시면 저도 할말이 없습니다. 두 사람만 보낸 저에게도 책임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아 직 죽었다는 결말이 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요, 아버지. 지금은 두 사람이 살아나기를 기도해요." 그때, 헤이스케의 시야 끝에 새하얀 것이 들어왔다. 복도 모퉁이에서 의사 옷을 입은 중년 의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아, 선생님! 두 사람은 어때요?" 요코가 종종걸음으로 그 의사에게 뛰어갔다. 아무래도 그 의사가 아내와 딸을 담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말씀이죠..." 입을 뗀 의사의 시선이 헤이스케를 향했다. "남편이신가요?" "그렇습니다만." 긴장 때문인지 목소리가 칼칼하게 쉬어 있었다. "잠시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의 온몸을 바늘 끝처럼 찌르는 날카로운 긴장이 파고들었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의 사의 뒤를 따라갔다. 의사가 안내한 곳은 두 사람이 치료를 받고 있는 병실이 아니라 작은 진찰실로, 뢴트겐 사진이 몇 장 걸려 있었다. 그 가운데 절반은 머리를 찍은 것이었다. 아내의 것인지 딸아이 의 것인지, 두 사람의 것이 섞여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전혀 다른 사람의 것인지, 헤이스케 는 알 도리가 없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대단히 어려운 상황입니다." 의사는 팔짱을 끼고 입을 열었다. 말투에서 깊은 고뇌의 빛이 배어 나왔다. 헤이스케는 의 사에게 똑바로 시선을 고정한 채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어느 쪽이죠? 아내입니까, 딸입니까?" 의사는 그 질문에 즉시 대답하지 않고, 그에게서 눈길을 돌린 상태로 잠시 망설였다. 그는 그때서야 사태를 짐작했다. "두 사람 다...위험한가요?" 의사가 보일 듯 말 듯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의 외상은 아주 심합니다. 등에는 수도 없이 유리 조각이 박혀 있고, 그 가운데 하나 는 심장까지 도달했습니다.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피를 많이 흘려서, 그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지요. 이제 남은 것은, 그 기적적인 체력이 언제까지 유지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회복하기를 바랍니다만." "딸은 어떻습니까?" 의사는 혀로 입술을 핥고 나서 말을 꺼냈다. "따님에게서는 거의 이렇다할 만한 외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온몸에 압박을 받아 호흡을 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뇌가 영향을 받아..." "뇌..." 벽 쪽에 늘어선 두개골의 뢴트겐 사진이 헤이스케의 눈을 파고들었다. "결국 어떻게 되는 겁니까?" "현재 인공호흡기를 부착해 가까스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대로 의식이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의사는 애써 감정을 억제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곧, 식물인간이 된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온몸의 피가 갑자기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헤이스케는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지만, 아교를 뿌린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져서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입술은 바들바들 떨리고 어 금니가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다음 순간,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손발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에게는 일어설 기력조차 없었다. "진정하십시오..." 의사가 어깨에 손을 올려놓자마자 그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선생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그들은 살아야 합니다. 만약 살려만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습니다. 그 두 사람의 목숨과 바꿀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테니까...제발 부탁합니다." 그는 리놀륨 바닥에 이마를 대고 간곡하게 호소했다. "이러지 마시고 고개를 드세요." "선생님! 안자이 선생님!"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헤이스케 옆에 있던 의사가 문 쪽으로 걸어갔다. "왜 그러는가?" "두 사람 가운데, 아주머니 맥박이 갑자기 약해졌어요." 헤이스케는 벌떡 고개를 쳐들었다. 아주머니라는 말은, 아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알았어. 지금 곧 가지." 의사는 그렇게 말한 다음 그를 돌아보았다. "가족들이 있는 곳에 가 계십시오." "제발 부탁합니다. 선생님." 그는 의사의 등을 향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대합실로 돌아가자 요코가 즉시 옆으 로 달려왔다. "제부. 의사 선생님께서 뭐라고 그러세요?" 그는 이럴 때일수록 다부진 면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러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은 도저 히 막을 수가 없었다. "그게... 별로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아아!" 요코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사부로와 도미오도 고개를 떨구었다. "헤이스케씨, 헤이스케씨!" 간호사가 황급히 뛰어오며 소리쳤다. "무슨 일입니까?" "부인께서 찾고 있어요.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아내가요?" "어서요!" 그는 간호사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간호사는 집중치료실 앞에 멈추어 서서 문을 열었다. "남편 되시는 분께서 오셨어요." "어서 들어오시라고 해요." 병실 안의 공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어두운 목소리로 알 수 있었다. 그는 간호사의 재 촉을 받고 병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가장 먼저 시선을 빼앗은 것은 두 개의 침대였다. 오른쪽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사랑 스런 딸 모나미였다. 잠을 자는 듯한 그 아이의 얼굴은 집에서 보았을 때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눈을 뜨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부를 것만 같았다. 그러나 딸아이의 몸에 부착되어 있는 싸늘한 느낌의 의료장비들이 그를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게다가 왼쪽 침대에 누워있는 아내는 첫눈에 절망적인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온몸과 머리에 붕대가 친친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의사들이 그에게 길을 비켜주는 것처럼 살며시 침대에서 떨어졌다. 그는 무엇 가에 이끌리듯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내는 몸과는 달리 눈을 감고 있는 얼 굴에는 뜻밖에도 아무 상처가 없었다. 그것만이 유일한 구원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오코! 이름을 부르려고 입을 연 순간, 아내의 무거운 눈꺼풀이 서서히 들어올려졌다. 그 움직임도 연약하게 느껴졌다. 이어서 입술이 보일락말락 움직였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헤이스케는 아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모나미의 생사를 알고 싶은 것이다. "괜찮아. 모나미는 걱정 말아." 그는 아내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녀의 표정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아내의 입술이 다시 떨리는 것처럼 파르르 움직였다. 보고 싶어요... "그래. 지금 만나게 해줄게." 몸을 숙여 침대 다리에 이동용 바퀴가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침대를 움직이기 시작 했다. 의사 한 사람이 말리려고 하는 간호사를 제지했다. 그는 아내의 침대를 움직여 딸아이 옆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딸의 오른손을 아내의 손에 쥐어 주었다. "여보. 모나미야." 그는 마주 쥐어준 두 사람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아내의 입술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성모 마리아의 따뜻한 미소를 떠올리게 했다. 모나미의 손을 잡고 있는 아내의 손에서 미약하게나마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아내의 손에 남아 있던 마지막 힘이 빠져 스르르 미끄러졌다. 그는 깜짝 놀라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나와 뺨을 타고 떨어졌다. 그런 다음 마지막 일을 끝 낸 사람처럼 천천히 눈을 감았다. 헤이스케는 마치 짐승처럼 처절하게 소리쳤다. "여보! 여보!" 의사가 나오코의 맥박을 확인하고 동공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시계를 쳐다보며 감정이 없 는 목소리로 책을 읽듯이 또박또박 말했다. "임종하셨습니다. 오후 여섯 시 사십오 분입니다." "아...아아아." 그는 다만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다가 갑자기 무거운 것이 어깨를 짓누르기라도 하듯 무릎을 꺾었다. 온몸의 힘이 빠져 서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싸늘하게 식어 가는 아내의 손을 잡은 채,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마치 밑도 끝도 없는 우물 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는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의사나 간호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온몸에 무거운 납덩어리를 매단 듯 축 늘어진 몸을 이끌고 그는 엉거주춤 바닥에서 일어 섰다. 그리고 조용하게 눈을 감고 있는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한탄할 때가 아니다. 그는 스스로를 그렇게 달랬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보다 지금은 살아있는 사람을 생각해야 한다. 헤이스케는 고개를 돌려 딸에게 시선을 향하고, 조금 전까지 아내에게 잡혀 있던 모나미 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모나미를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설사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다 고 해도 살아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여보, 반드시 살려내겠어. 모나미는 내가 지킬 테니까 걱정 말고 편히 잠들어.' 그는 마법의 주문을 외듯이 계속 중얼거렸다. 그렇게 하면 모든 슬픔이 하늘로 날아가 버 리고 딸아이가 깨어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굳은살이 박힌 투박한 손으로 곱디고운 딸아이의 손을 감쌌다. 손에 힘을 주고 싶었 지만, 열 한 살인 딸아이의 손은 부스러질 것처럼 연약하고 가냘펐다. 가만히 눈을 감자 수많은 영상들이 뇌리에 떠올랐다. 모두 즐거운 추억뿐이었다. 기억 속 에서는 아내도 딸아이도 환한 웃음밖에 보여주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몇 방울인가 자신과 딸아이의 손에 도 떨어졌다. 바로 그때! 그는 자신의 손에서 낯선 위화감을 느꼈다. 눈물 때문만은 아니었다. 손안에서 무엇인가 움직인 듯한 느낌이 든 것이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그는 딸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인형처럼 잠들어 있던 모나미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리는 것이 아닌가! 아내인가 딸인가 1 헤이스케의 집은 미타카 역에서 버스를 타고 십여 분 정도 걸리는 곳으로, 비좁은 골목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는 주택단지 북쪽 모퉁이에 있었다. 30평이 채 안돼는 마당이 딸린 낡은 주택을 산 것은 6년 전의 일이었다. 주택을, 더구나 단독주택을 산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했지만, 그것을 끝까지 주장한 사람은 바로 아내였 다. 다달이 집세를 낼 바에야 그 돈으로 대출 할부금을 갚자고 고집을 부린 것이다. "지금이라면 30년에 걸쳐 상황하면 되잖아요. 당신은 30년 후에도 일을 할 테니까요." 대출금도 모두 빚이라고 생각하여 난색을 표하던 헤이스케에게, 아내는 자신의 주장을 굽 히지 않았다. "우리 회사는 60세가 되면 정년퇴직을 해야 한다구." "걱정하지 마세요. 세상을 자꾸자꾸 고령화하고 있어서, 당신이 나이가 들었을 땐 정년이 64세나 70세가 되어 있을 거예요." "과연 그럴까?" "내 말을 믿으세요. 그리고 만약에 60세에 정년퇴직을 한다고 하면. 그 이후에 일을 안 할 생각이세요? 세상을 너무 편하게 살려는 거 아니에요?" 그 말이 역전 만루 홈런이 되어 헤이스케는 대꾸를 할 말이 없었다. "어쨌든 지금 사야 돼요. 지금 사지 않으면 영원히 우리 집을 가질 수 없을 것 같아요. 당 신도 늙어 가지고 셋집에 사는 건 싫잖아요? 우리 집을 갖고 싶죠? 갖고 싶으면 사면 돼요. 지금 당장 사자구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하루 종일 쫑알쫑알 대는 소리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그런 다음 아내의 행동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신속했다. 그 주 토 요일에 부동산 중개인을 따라 몇 군데 집을 보러 다니고, 그 다음 주에는 계약금을 지불했 다. 은행 대출에서부터 이사 준비까지, 아내는 모든 절차를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운 것이 다. 그렇다. 그것은 해치웠다는 말이 꼭 들어맞아, 헤이스케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 써 새로운 집에 살고 있었다. 그가 한 일은 단지, 아내의 말에 따라 몇 가지 서류를 준비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때 집을 산 것은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의 판 단이 옳았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그때 사지 않았다고 해도 저축이 늘어나지는 않았을 것이 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 것은 부동산 가격이 하늘을 모르고 뛰어오른 것이다. 특히 최근에 들어서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앞으로 도 계속 올라갈 것 같다고 한다. 얼마 전에 2백 미터 떨어진 곳에 똑같은 크기의 주택이 매 물로 나왔는데, 그로서는 엄두로 내지 못할 엄청난 가격이 붙어 있었다. "내 말이 맞았죠? 당신에게 맡겨두었다면 평생을 가도 집을 사지 못했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아내의 모습에서 오만함조차 느껴지곤 했다. 자신이 선택했기 때문에 당연하기는 했지만, 아내는 자신의 집을 몹시 사랑했다. 특히 손 바닥만하기는 하지만 마당을 무척 좋아했다. 아내는 자그마한 화단에 꽃을 가꾸면서 자주 콧노래를 부르곤 했다. 귀에 익은 동요가 귀를 간지럽히기도 했다. 모나미와 같이 유아용 프 로그램을 자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현관을 돌아 우편물을 가지러 갈 때에는 염소 우체부 아저씨 노래를 읊조리기도 했다. 버스 사고가 발생한 지 나흘 뒤, 헤이스케는 마당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제단을 만들 어 아내의 유골을 안치했다. 사고 다음날 현지에서 임시 장례식이 있었지만, 오늘 가까운 화 장터에서 다시 정식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사실은 아내가 사랑했던 이 집에서 하고 싶었지 만, 좁은 골목에 밀려들 조문객들을 생각하자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집에서 하기를 포기한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물론 조문객도 많았지만 어디에서 냄새를 맡았는지 기자들이 몰려들어, 장례식장은 순식간에 시장 바닥처럼 시끄러워졌던 것이다. 이 조용한 주택가에서 그런 소동이 일어났다면 그는 일일이 이웃집에 사과하러 돌아다니지 않 으면 안될 뻔했다. 장례를 마친 다음에도 매스컴 관계자들은 그의 곁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디에 가도, 무엇을 해도 카메라는 졸졸 쫓아다녔지만, 그것을 지긋지긋하게 느낄 기력도 최근 이 틀 사이에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많은 유족들 중에서 특히 헤이스케가 카메라 세례를 받게 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그 는 불행과 행운을 동시에 체험했다는 점에서 화제 성이 있었던 것이다. 불행이란 말할 것도 없이 아내의 죽음이었고, 행운이란 딸의 기적적인 소생이었다. "부인의 장례식을 마친 지금, 심정이 어떠십니까?" "오쿠로 교통 사장의 사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국에서 격려 편지가 쇄도하고 있다고 하던데, 그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들의 질문은 이 정도가 고작으로 별로 다양하지 못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비슷비 슷한 대답을 반복하면 무난히 넘어갈 수 있었다. 본래 말재주가 없기도 했지만 그 나름대로 짜낸 지혜이기도 했다. 그러나 '따님에게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실 생각입니까?'라는 질문에 대 해서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난감하기만 했다. 오히려 어떻게 대답했으면 좋겠느냐고 소 리치고 싶을 정도로, 그 자신도 좋은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서 계속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까. 그는 아내의 위패를 원망스런 눈길로 쳐다보았다. 최근 들어 딸아이와 차분하게 대화를 나눈 적이 없는 아버지로서는, 쉽게 상처를 입는 연약 한 소녀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생각만 해도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쉽게 상처를 입는 연 약한 소녀라는 이미지 자체도 그가 체험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쉽게 상처를 입고, 어떤 식으로 연약하느냐에 대해서 는 지금까지 생각해 본 적조차 없었다. 세상을 떠난 사람이 자신이었다면 아내는 틀림없이 딸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고 잘 해 냈을 것이라고, 그렇게 의미 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집안에 제단을 설치하고 나서 그는 상복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벽시계는 오후 다섯 시 삼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곧 저녁식사 시간이겠군. 그렇게 생각하면서 지갑과 자동차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오늘은 조금이라도 식사를 해주기를, 그는 마음속으로 기도 하면서 집을 나섰다. 모나미는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았지만 원래의 그 아이가 완전히 살아 돌아온 것이 아니 라 죽음의 건너편에 몇 가지를 두고 왔다. 그것은 표정이고 말이며, 아직 나이 어린 소녀다 운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흔들어서 의사를 표현하지만 아직 활기 찬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위로를 하고 말을 걸어도, 감정이 없는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쳐다볼 뿐이었다. 의학적으로는 전혀 이상이 없다고 했다. 한때는 식물인간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모나 미의 뇌는 완전히 정상적인 기능을 되찾은 것이다. 역시 정신적인 충격이 원인일 것이다. 의사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애정과 인내 심으로 대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며 최대의 치료법이라고 덧붙였다. 어제 점심시간에는 고가네이에 있는 뇌병원에도 가보았지만, 그곳에서 받은 진단 결과도 비슷했다. 담당의사는 오히려 그 정도 참사에서 거의 상처가 없다는 것에 경탄을 금하지 못 했다. 병원에 도착하자 여섯 시 정각이었다. 그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서 매스컴 관계자들 이 있는 지부터 확인했다. 그들은 어떻게든 죽음의 늪에서 살아 돌아온 모나미의 모습과 육 성을 얻어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도저히 취재에 응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니까 참아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했다. 일단 오늘은 그들도 약속을 지켜준 것 같다. 모나미가 입원해 있는 병실로 들어가자, 담당 아주머니가 막 저녁을 가지고 들어오는 참 이었다. 오늘 저녁은 구운 생선과 야채 조림, 그리고 된장국이 전부였다. 그는 쟁반을 받아 침대 옆에 있는 테이블에 놓고는 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모나미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는 침대 옆에 있는 보조 의자에 앉았다. 최근 며칠 동안 피로가 쌓인 탓인지, 바닥이 없 는 늪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모나미는 거의 숨소리를 내지 않고 죽은 듯이 잠을 잤다. 배와 가슴도 미동조차 하지 않 아서 가끔 호흡이 멈추지 않았는지 확인할 정도였다. 그러나 핑크 빛으로 물든 불그스레한 뺨이 그런 불안을 허공으로 날려보내 주었다. 어제부터는 피부의 혈색도 눈에 띄게 좋아지 고 있었다. 모나미만이라도 살아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에게 있어서는 최대의 구원이었다. 만 약에 딸아이마저 잃어버렸다면 자신은 틀림없이 미쳐 버렸으리라. 그러나 기적적으로 살아난 딸의 옆에 있어도 구원을 받았다는 생각보다 아내를 잃어버린 슬픔이 가슴을 갈기갈기 찢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향해 소리치고 싶을 만큼 분노가 밖으로 터져나왔다. 왜 우리 가족이 이런 불행을 당해야 하는가! 딸이 살았다는 것만으로 내가 행운의 사나이 라구! 말도 안돼는 소리 하지 마라! 나는 불행의 늪에 빠져 있다.! 당치도 않은 불행이 나를 습격한 것이다... 그는 아내를 끔찍이 사랑했다. 요즘 들어 살도 찌고 잔주름도 늘었지만 사람을 끌어당기 는 눈웃음에 부잣집 맏며느리 같은 아내의 동그란 얼굴을 좋아했다. 말이 많고 고집이 세며 남편을 존경하지는 않았지만, 사소한 일에 전전긍긍하지 않고 앞뒤가 분명한 성격은 함께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미소가 배어 나왔다. 또한 머리도 좋고 모나미에게도 좋은 어 머니였다고 생각했다. 딸아이의 잠든 얼굴을 보고 있는 동안 누에가 실을 뽑아내듯이 끊임없이 아내에 대한 추 억이 되살아났다. 처음 만났을 때, 첫 데이트했을 때, 처음으로 혼자 살고 있는 그녀의 아파 트에 갔을 때. 나오코는 그보다 3년 늦게 입사한, 같은 회사 여직원이었다. 교제기간은 2년으로 프로포즈 는 단순하게 '결혼해 줘'라고 했지만, 그녀는 그 말을 듣자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리고 웃음이 가라앉은 다음 너무나 간단하게 '좋아요'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꿈처럼 달콤했던 신혼생활, 임신, 출산, 그리고... 기억은 갑자기 며칠 전에 있었던 임시 장례식 밤으로 날아갔다. 의자에 혼자 앉아 있던 그에게 말을 걸어온 사내가 있었다. 서른 정도 됐을까. 체격이 좋은 그 사내는 소방서 직원 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 끝에 그와 그의 동료가 아내와 딸아이를 절벽 아래에서 끌어올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헤이스케는 깊숙이 고개를 숙여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들이 없었으면 모나 미도 이 세상 공기를 호흡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방서 직원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닙니다. 따님의 목숨을 구한 사람은 우리가 아닙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헤이스케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우리가 발견했을 때, 절별 아래에는 온몸에 상처를 입은 부인이 혼자 쓰러져 있는 것처 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따님이 숨어 있는 것처럼 부인 밑에 깔려 있는 게 아니 겠습니까? 부인은 따님을 살려내려고 온몸으로 유리 파편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유 리조각에 찔러 부인은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따님에게는 상처가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말을 꼭 해드리고 싶어서 일부러 말을 걸었습니다." 그 순간, 헤이스케의 가슴속에서 무엇인가가 소리를 내며 툭 끊어졌다. 그와 동시에 뺨을 타고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내어 대 성통곡했다. 그때를 떠올리자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매일 어둠이 깊어지면 혼자 눈물을 흘리곤 하는데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빨리 눈물샘이 자극을 받은 것이다. 그는 주머니에서 꼬깃꼬 깃해진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콧물가지 닦은 손수건은 촉촉이 젖어버렸다. "여보, 여보, 여보..." 자신도 모르게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그는 의자에 앉은 채 몸을 구부리고 머리를 싸안았 다.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보" 그는 흠칫 놀라 문을 쳐다보았다. 누가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문은 그대 로 닫혀 있고, 문밖의 복도에도 누군가가 있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잘못 들었다고 생각한 순간, 또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여기에요." 2 헤이스케는 펄쩍 뛰어오를 것처럼 깜짝 놀랐다. 그를 부르는 사람은 다름 아닌 모나미였 던 것이다. 바로 조금 전까지 인형처럼 잠들어 있던 딸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것 이 아닌가! 게다가 어제 보았던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이 아니라 검은 눈동자에는 무엇인가를 강렬하게 호소하는 빛이 깃들여 있었다. "모나미...아, 모나미. 정신이 돌아왔구나! 아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서 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물로 뒤범벅된 얼굴이 더욱 일그러 졌다. 한시라도 빨리 의사를 불러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황급히 문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 였다. 모나미의 연약한 목소리가 귓가에 와 닿았다. "잠깐만요..." 그는 손잡이에 손을 올려놓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니? 어디 아프니?" 모나미는 애절한 눈빛으로 힘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 온몸의 힘을 짜내어 띄엄 띄엄 말을 이었다. "이쪽으로...오세요. 내 이야기를...들어줘요." "물론 듣고 말고. 하지만 그 전에 의사 선생님을 불러와야지." 그러자 모나미는 힘을 주어 세차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사람을 부르면 안돼요. 어쨌든, 이쪽으로 와줘요... 부탁해요."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딸아이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오랜만에 깨어나서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것이리라. 그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는 여기 있어. 왜 그러니? 뭐든지 말해 보렴." 모나미는 곧장 입술을 열지 않고,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과 마주친 순 간, 헤이스케는 문득 이상한 느낌에 휩싸였다. 참으로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눈길이었다. 모나미답지 않은, 아니 어린애답지 않은 시선이었다. 하지만 가슴속에 잠들어 있던 아련한 추억을 깨어나게 했다. 누군가가 이런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여보..., 내가 하는 말을 믿어줄래요?" "아아, 믿고말고. 네 말이라면 무슨 말이든지 믿어줄게." 그는 딸을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직후, 온몸에 싸늘한 소름이 휘감고 지 나갔다. 지금 여보 라고 했나? 모나미는 그의 얼굴에 시선을 똑바로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나는, 모나미가 아니에요." "뭐야?" 그의 얼굴을 어정쩡한 미소를 띤 상태로 차갑게 굳어졌다. "모나미가 아니라구요. 모르겠어요?" 헤이스케의 얼굴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래도 어떻게든 미소를 유지하려고 했다. "말도 안돼는 소리! 아하하하. 깨어나자마자 이 아빠를 놀리는 거냐? 하하하. 하하하." 허공을 가르는 공허한 웃음이 병실 안을 가득 메웠다. "지금 농담하는 게 아니에요. 정말로 나는 모나미가 아니라구요. 당신도 모르겠어요? 나예 요. 당신의 아내, 나오코라구요." "나오코?" "그래요, 나오코예요." 모나미의 얼굴은 가까스로 울음을 참고 있는 듯이 애처롭게 일그러졌다. 그는 딸의 얼굴 을 들여다보며 지금 한 말을 반추해 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았다. 그러나 무엇을 뜻 하는지 파악하려고 하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거부감이 일었던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은 결국 어색한 웃음을 짓는 일밖에 없었다. "이런 때에 장난을 하다니. 그런 장난에는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잠시 후, 웃음을 집어삼킬 수밖에 없었다. 모나미의 표정이 너무나 슬퍼 보여 가슴 을 쥐어뜯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일어나서 엉거주춤한 상태로 문으로 향했다. 의사를 부르려는 것이었다. 딸의 머리가 이상해졌다. 만약에 딸의 머리가 이상해지지 않았다면 자신의 머리가 이상해진 것이 리라. "가지 말아요. 사람을 부르지 말고 내 얘기를 들어줘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헤이스케를 향해, 그녀는 애원하듯이 호소 했다. 터져나오는 울음을 삼키려고 하는지 목소리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나는 정말 나오코예요.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해요.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모나미는 마침내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흐느껴 울었다. 아니, 모나미의 모습을 한 소녀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울고 있었다. '말도 안돼!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그의 마음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방향을 잃어버렸다.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 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아내의 말투와 완벽하게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살펴보자, 모나미 주위를 감돌고 있는 것은 초등학생의 분위기가 아니라 차분한 여인의 분위기였다. 더구나 오랫동안 헤이스케를 사랑에 들뜨게 했던 바로 그 분위기였다. "하지만...말도 안돼...어떻게 이런 일이..."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모나미의 모습을 보기조차 두려워진 것이다. 그 녀는 아무 말 없이 계속 흐느껴 울기만 했다. 서러울 정도로 슬픈 울음소리가 그의 귓가를 아프게 파고들었다. 그는 힐끔 침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왼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오른손을 왼손에 가볍게 겹쳐 놓았다. 그러면서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으로 왼손에 반지가 끼어 있던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갑자기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것은 바로 아내의 버릇이 아닌가! 부부싸움을 하고 나 면 그녀는 자주 그런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때 아내가 만지작거리는 것은 왼손에 끼어진 결혼반지였던 것이다. 그는 어떤 유혹을 받은 것처럼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내가 처음으로 데이트하자고 했을 때를 기억하고 있어?" 그녀는 울음을 머금은 목소리고 대답했다. "그것을 어떻게 잊겠어요? 잠수함이 침몰하는 영화를 보러 갔잖아요." "잠수함이 아니야, 호화 여객선이지." '포세이돈 어드벤쳐'는 그 뒤에도 몇 번이나 보았지만, 아내는 언제나 포세이돈을 잠수함 이라고 말하곤 했다. "영화가 끝난 다음, 우리 둘은 야마시타 공원에 갔었죠." 그것도 틀림없다.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서 바다 위에 한가롭게 떠다니는 배들을 바라보 았다. "내가 처음 당신 집에 갔을 때는 생각나?" "물론 생각나고 말고요. 바람이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몹시 추운 날이었잖아요." "그래, 온몸이 얼어붙는 혹독한 날씨였지." "당신은 바지 속에 잠옷을 입고 있었어요." "그건 아침에 황급히 옷을 갈아입어서 그래." "거짓말. 내복 대신에 입었으면서." 그렇게 말하더니 그녀는 불쑥 쿡쿡 거리며 웃었다. "정말이라니까. 지금도 내복 따위는 안 입잖아?" "그때도, 그런 식으로 발끈하면서 아니라고 잡아뗐어요." "여자들은 쓸데없는 것은 꼭 기억한다니까." 그는 침대로 다가가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모나미 모습을 한 소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 다. 그리고 그녀의 뺨을 살며시 손을 감쌌다. 그의 손안에서 그녀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날 밤에도 이런 식으로 나를 감싸주었어요." "그랬었지." 그대는 이대로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아내가 아니라 딸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그 대신 그는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당신, 정말 내 아내야?"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고개를 깊숙이 끄덕였다. 3 나오코가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고를 깨달은 것은 병실로 옮겨진 직후였다고 한다. 그 이 전에는 정신이 몽롱해서 사고를 당한 것도, 생사의 경계를 방황했던 것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의식이 또렷해진 이후에도, 왜 사람들이 자신을 모나미라고 부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잠시 그대로 있기로 했다. '아니에요! 나는 모나미가 아니라 나오코예요!'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그녀를 말리고 있었 다. 그렇게 하면 사태가 더욱 복잡해진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입을 다무는 것밖에 없었다. 이윽고 자신과 딸의 육체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래도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면 머리가 이상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시라도 빨리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러나 오늘 남편의 우는 모습을 보고, 이것이 끔찍한 악몽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깨 달았다고 한다. 헤이스케는 그녀의 이야기를 끝가지 들은 다음 물어보았다. "그렇다면...죽은 사람은 모나미라는 뜻인가?"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헤이스케의 고개가 앞으로 푹 꺾였다. "그래? 그렇군. 모나미는 죽은 거군." 그녀, 즉 모나미의 모습을 한 나오코는 몸에 덮고 있던 담요를 끌어올려 얼굴을 가렸다. 담요 아래에서 숨을 죽인 오열이 새어나왔다. "미안해요...미안해요. 나 같은 것보다 사랑스런 모나미가 살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나 같 은 것이 살아서 무엇을 하려고..." "무슨 말하는 거야? 지금 그런 뜻이 아니잖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알아? 당 신만이라도 살아남은 게 천만다행이라구. 당신만이라도..." 눈물이 앞을 가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딸의 모습을 보면서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 은, 죽음을 눈앞에서 직접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슬픔으로 자리했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리를 죽여 흐느껴 울었다. "그런데, 아직도 믿을 수가 없어. 어떻게 이런 일을 믿을 수 있겠어?" 슬픔의 썰물이 어느 정도 빠져나간 다음, 그는 딸아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 니, 아내의 얼굴이라고 해야 할까? "나도 믿을 수가 없어요." 그녀는 손등으로 얼굴에 흐르고 있는 눈물을 닦았다. "그러니까 결국, 이제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군." "어찌할 수 없다뇨?" "그러니까, 앞으로 낫지 않을 거라는 뜻이야." "낫다니... 병에 걸린 건가요?" "글세, 그게..." "만약에 약을 먹거나 수술을 해서 모나미의 의식이 돌아온다면, 난 망설이지 않고 치료를 받겠어요." 그녀의 의지는 무엇으로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단호했다. "하지만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당신의 의식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이번에는 당신의 의식 이 사라져 버리잖아?" "그래도 상관없어요. 모나미가 돌아올 수 있다면 나는 어딘가로 사라져 버려도 좋아요." 커다란 눈에 진지한 빛을 가득 담고, 그녀는 헤이스케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예전의 딸아 이의 표정을 떠올렸다. 반드시 성적을 올릴 테니까 학원에는 가고 싶지 않다고 고집을 부리 던 모나미. 지금 그때와 똑같은 눈빛을 하고 있는 아내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딸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나오코. 바보 같은 소리하지마." "하지만 그것이 정상이에요. 사실 내가 죽어야 마땅한 거잖아요." "지금 그런 말을 해서 무슨 소용이 있어?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 모나미는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야." 잠시 동안 무거운 침묵이 방안 공기를 휘감으며 두 사람을 내리눌렀다. 정적을 먼저 깨뜨 린 사람은 그녀였다. "여보,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글세,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다른 사람은 도저히 믿어주지 않을 테고, 의사들도 어쩔 수 없을 거야." "정신병원에 넣으려고 하겠죠." "그렇겠지." 나지막하게 신음소리를 내뱉는 그의 얼굴을, 그녀는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무엇인가 알 아차린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늘이 장례식이었나요?" "응? 그래. 어떻게 알았지?" "그런 때가 아니면 당신이 와이셔츠를 입을 일이 있겠어요?" "아, 그런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와이셔츠 옷깃을 만져보았다. 상복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고 생 각했지만 와이셔츠 위에 카디건을 걸쳐 입었을 뿐이었다. "내 것이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어두운 늪 속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응?!" "내 장례식이었냐구요?" "음, 그래 나오코의 장례식이었지." 그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살아 있어. 나오코는 살아있다구." "그러면 모나미의 장례식이었군요. 내가 그 아이의 몸을 뺏은 거예요. 그 아이의 영혼을 내쫓았어요..." 그녀의 눈에서 또다시 굵은 눈물방울이 넘쳐흘렸다. "당신은 모나미의 몸을 구한 거야." 그는 아내의 가냘픈 손을 잡고 힘주어 말했다. 두 사람만의 비밀 1 건물은 생각보다 훨씬 훌륭했다. 더구나 지은 지 얼마 되지않아 바닥은 파리가 앉다가 미 끄러질 정도로 반짝거렸다. 그렇군. 우리가 납부하는 세금이 이런 곳에 사용되는 거로군. 헤 이스케는 새삼스럽게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이 정도로 훌륭하게 지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적어도 아무도 관심 있게 보지 않는 정원이나 가치가 없는지 알 수 없는, 전위예술 품 같은 조각들은 필요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공도서관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고등학생 학생복을 입은 이후 처음이었다. 더구나 그때 도 책을 빌리러 온 것이 아니라, 시원한 에어컨이 돌아가는 곳에서 입시 공부를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도서관을 찾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는 카운터가 있는 곳으로 똑바로 걸어갔다. 카운터에는 두 명의 직원이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중년 남자이고, 또 한 사람은 젊은 여자였다. 중년 남자는 전화기를 붙잡고 수화기 건너편에 있는 누군가와 시시콜콜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있 는 것 같았다. 그는 우선 여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저...뇌에 관한 책은 어디 있나요?" "뇌요?" 그는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를 가리켰다. "아, 뇌요? 이쪽으로 따라 오세요." 여직원은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카운터에서 나왔다. 아무래도 직접 안내해 주려 는 것 같았다. 친절한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그는 여직원의 뒤를 따라갔다. 안쪽에는 중후한 느낌을 주는 책장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어느 책장에는 베고 자기에 적당할 만큼의 두꺼운 책들이 빼곡이 꽂혀 있었다. 그러나 그 책장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것이 책을 대하는 사람들의 참모습이구나. 그는 새삼스럽게 깨달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직원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쪽에 그런 책들이 많을 거예요." "예에..." 그곳은 아무래도 의학서 코너인지 소화기와 피부, 비뇨기 등의 관련서적이 잘 분류되어 꽂혀 있었다. 여직원이 '이쪽'이라고 하며 가리킨 것은 뇌의학에 관한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책장이었다. 다른 코너에서는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이곳에서만은 책을 찾 고 있는 사람들을 제법 볼 수 있었다. 보습은 제각기 달라도, 모두 무섭도록 머리가 좋아 보 이는 남자들이었다. 그는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의 책등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뇌변연계와 학습에 대해서", "뇌 호르몬", "뇌와 행동학". 어느 책을 보아도 어렴풋한 내용조차 파악할 수 없는 책들이었다. 그래도 "뇌로 보는 정신과 행동"이라는 책을 빼들었다. "특별한 기능을 부여받지 못한 광대한 피질영야는,연합성피질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전 통적인 뇌과학은 여기서 특이화된 피질영야간의 연합을 형성하고, 그 영야에서 보내는 데이 터가 통합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연합성 피질에서 현재의 정보가 행동이나 기억과 통합되어, 인간은 그곳으로 인해 사고하고 결단하고 계획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두정엽의 연합야는 체성감각피질에서 보내는 정보, 즉 신체의 위치나 움직임에 대한 피부, 근육, 무릎, 관절에서 보내는 메시지를..." 그는 목까지 숨이 차 올라와 자신도 모르게 책을 덮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 골 치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다시 카운터로 돌아가자 조금 전의 여직원이 이상한 눈길로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머리 를 긁적이면서 앞으로 다가갔다. "신비한 이야기만 모아놓은 코너가 있습니까?" "예?!" "사람들이 별로 경험하지 못한 신비한 이야기만 모아놓은 책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책을 보고 싶은데요." "뇌의학에 관한 책을 찾는 것이 아니었나요?" "예. 그것은 이미 다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신비한 이야기들을 읽고 싶어서요." 여직원은 미심쩍은 눈길로 그를 쳐다보면서 귀찮은 듯이 대꾸했다. "그런 책이라면, 아마 오락용 코너 안쪽에 있을 거예요." "오락용 코너?" "저쪽이에요. 저 안쪽에 미스터리 코너가 있는데, UFO라든지 그런 종류의 책들이 꽂혀 있어요." 여직원은 자리에 앉은 채 손가락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이번에는 직접 안내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요? 감사합니다." 그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나서 그 장소로 향했다. 미스터리 코너에는 과연 그런 종류 의 책들이 많이 꽂혀 있었다. 미스터리와 기괴한 현상, 뮤대륙 같은, 텔레비전 방송의 특별 프로그램에서 자주 듣는 말들이 눈으로 뛰어들어 왔다. 책장에서 일단 한 권을 빼들었다. "미스터리 사전"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린 피크네트라 는 저자 이름을, 그는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차례를 살펴보았지만 그가 찾고 있는 '인격의 전이'나 '영혼의 교체'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 았다. 그 대신 눈에 띈 것은 '빙의'라는 단어였다. 빙의가 실려 있는 페이지를 펼쳐보니, 첫 머리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인류 발달의 초기단계에 부족사회가 나타나기 시작할 무렵, 망아상태에 빠져서 가치 있 는 정보를 얻어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들은 그 상태에서 평소와는 다른 목 소리로 말했다. 주위 사람들은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그들에게서 다른 영혼을 느꼈다고 한다. 이것이 '빙의'의 시작이다." 말 자체는 거창하게 쓰여 있었지만, 이것은 모나미의 몸에서 일어난 현상과 비슷했다. 이 야기를 나누다보면 분명히 아내의 영혼이 딸의 육체 속으로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 이다. 그러나 일시적이라는 말은 맞지 않는다. 딸아이가, 아니 아내가 믿을 수 없는 고백을 한 지 벌써 이틀이 지났지만, 기묘한 상황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나오 코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읽어내려 갔다. 지역이나 문화의 차이에 따라 빙의를 포착하는 방법이 각 각 다른 것 같았다. 초기 문명에서는 빙의를 '신의 개입'이라고 간주했지만, 기원전 5세기에 이르자 포클라테스라는 사람이 '다른 육체적 질환과 마찬가지이며 신의 행동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빙의는 영혼을 빼앗긴 상태로, 그 영혼은 나쁜 악령인 경우 도 있다'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다. 초기 기독교에서도 '성령이 달라붙는 현상은 매우 바 림직하다'고 포착하면서도, 빙의를 악령의 소행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일반화되어 악마를 쫓아버리는 행위가 행해지게 된다." 그곳까지 읽었을 때, 헤이스케는 예전에 본 영화 '엑소시스트'를 떠올렸다. 그러나 지금 모 나미의 몸에 깃들여 있는 아내를, 도저히 악마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가 누구보 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랑하는 아내가 틀림없었다. 역사적 기록에서 가장 유명한 빙의 사건은, 1630년대 프랑스 루단에서 일어난 '수도사 집 단빙의'이다. 빙의된 수도사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추악한 말이나 신을 조롱하는 말을 입에 담으면서도, 그것을 바라보고 귀를 기울이고 있 는 또 하나의 내가 있었다. 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참으로 기괴한 체험이었다.' 그 이후, 빙의를 이중인격 또는 다중인격의 표출로 포착하는 사고방식이 일반화되었다. 그는 일단 책에서 고개를 들고, 뻐근해진 목을 좌우로 비틀었다. 이중인격이라... 일단 이중인격으로 생각하면 과학적으로 처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는 딸의 상태가 이 중인격에 해당되는지 생각해 보았다. 즉 아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딸의 다른 인격이 밖으 로 나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점이 있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깨 달은 것과 똑같은 내용이 지금 들고 있는 책에도 씌어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것만으로는 빙의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바로 영매행위이다. 영매는 현실의 상태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모나미의 입에서 나온 몇 가지 사실들은, 도저히 그녀가 알고 있을 리 없 는 것들이었다. 자신과 아내의 첫 번째 데이트처럼... 역시 딸의 인격이 아내처럼 바뀌었다고 생각하기보다, 아내의 인격 자체가 몸밖으로 나왔 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 그는 계속해서 책을 넘겨보았다. 그러자 빙의의 다음 항목에 다중인격에 관한 내용이 나 왔다. 그곳에는 심리학적 접근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빙의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사례들 이 씌어 있었다. "다중인격에서 가장 드라마 같은 사건은 '와트시카의 불가사의'이다. 1877년, 미국 일리노 이주 와트시카에서 루랜시 베남이라는 13세 소녀가 간질 발작을 일으키고, 그것을 계기로 루랜시는 무의식 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망아상태에 빠지자 루랜시에게는 온갖 영혼들이 달라붙었다. '지배'영혼은 메어리로, 12년 전에 세상을 떠난 소녀였다. 루랜시는 거의 일년 동안 메어리로 바뀌어 생활했다. 그녀는 생전의 메어리처럼 행동하면서 자신의 가족이나 집 안의 관습에 대해서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일년이 지나서 메어리가 천국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더니, 그 순간 루랜시가 다시 돌아왔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그 부분을 몇 번이고 읽어보았다. 이것은 모나미의 육체에 일어난 일과 너무나도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가! 책에는 또 한 가지, 그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사례가 있었다. 그 사건은 1954년 제스빌 랄 제트라는 소년의 몸에서 일어났다. 그는 천연두에 걸려 사망 판정을 받았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러나 그의 인격은 완전히 다른 사람의 것이 되어 있었다. 거의 같은 시점에 사 망했던 소년, 그것도 힌두 사회의 최고 계급인 바라문 계급의 소년에 대해서 구체적인 사실 을 열거하곤 했는데, 그 상태가 2년 동안 계속된 다음 그의 진짜 인격이 돌아왔다고 한다. 헤이스케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새어나왔다. 이것이 바로 자신이 알고 싶었던 것이 다! 모나미의 경우와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신비한 일이기는 하지만 이런 사례는 과거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상태가 얼마 동안 계속된 다음, 아내의 인격이 사라지고 딸이 소생할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아내의 죽음이고, 딸의 소생인 것이다. 그는 피로해진 눈을 지그시 누르고 책을 덮었다. 머릿속에서는 복잡한 생각이 소용돌이치 고 있었다. 딸의 영혼이 살아나서 진정한 그 아이로 돌아간다. 물론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기 는 했다. 그러나 그때는 나오코와 헤어지지 않으면 안돼는 것이다. 그것도 영원히... 그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제 제발 좀 그만 하라! 처음에는 아내를 잃어버렸다고 한탄하고, 다음에는 딸을 잃어버 렸다고 슬퍼했다. 그런데 언젠가는 그것이 또 뒤바뀐다는 것이다. 내가 잃어버리는 사람은 아내인가 딸인가! 그 어느 쪽이든 분명히 해달라!' 그것을 모르는 이상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슬픔과, 그것을 승화할 수 없는 허무함에 끊 임없이 희롱 당할 것이다. 그는 책을 원래의 자리에 꽂아놓고 주먹으로 책장을 쳤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숨을 들 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조금 겁먹은 표정으로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낯이 익은 얼굴에, 그는 황급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 다에코 선생님... 그런데, 언제부터 거기에 서 계셨나요?" "세상에는 비슷한 사람도 다 있구나 생각해서, 지금 와본 참이에요. 뭔가 열심히 조사하고 계시는 것 같더군요." "아, 아닙니다. 조사는요... 그렇게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특이한 책이 있기에 잠시 뒤적거 렸을 뿐입니다." 그는 굳어진 얼굴에 미소를 떠올리며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러세요?" 그녀는 힐끔 책장을 쳐다보았다. "미스터리 사전"을 비롯해 빼곡이 늘어선 수상쩍은 책제 목을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모습이었다. 그녀...하시모토 다에코는 모나미의 담임 선생이다. 나이는 이십대 중반 쯤 됐을까. 아내의 장례식이 있었던 날, 그는 처음으로 한 송이 수선화 같이 청초한 다에코를 만났다. 그 이전 에는 전화로밖에 이야기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선생님께서 어떻게 여길?" "저... 잠시 조사할 게 있어서요." "그렇군! 선생님께서 도서관에 오시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내가 질문을 잘못 했군요. 아 하하하." 어색함을 감추려는 공허한 웃음에, 주위에 있던 몇 사람이 차가운 시선으로 힐끔힐끔 쳐 다보았다. 그는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며 입구를 가리켰다. "잠시 저쪽으로 가시겠어요? 저쪽에는 의자가 많이 있으니까요." "저기에는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아요. 일단 밖으로 나가죠." 다에코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 그러죠." 도서관을 나서자마자 그는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어깨의 근육을 풀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말했다. "자주 안 오는 곳이라서 그런지, 왠지 긴장이 되어 어깨에 힘이 들어갔나 봐요. 그런데 생 각보다는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이 많던데요." "낮시간에는 회사원처럼 보이는, 양복을 입은 남자 분들이 오셔서 낮잠을 자곤 하세요." "그래요? 밖을 돌아다니며 영업하시는 분들은 그런 이점이 있군요." "헤이스케씨는 공장에서 근무하시죠?" "그렇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대답을 하고 나서 그는 다에코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계시죠?" "모나미의 작문에 씌어 있었거든요. 우리 아버지는 공장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삼 주일 가 운데 일주일은 야간근무를 합니다, 모두가 잠들어 있을 때 일을 해야하다니 참으로 불쌍합 니다. 분명히 그런 내용이었을 거예요." "아! 그래요? 모나미가 그런 작문을 하다니." 막 사춘기에 들어섰기 때문인지 요즘 들어 딸아이는 이야기를 하려들지 않았다. 아빠의 일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제대로 돈을 벌고 용돈만 준다면 집에 없어도 상관없는 듯한 태도까지 보였다. 그러나 아빠의 일하는 모습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 었다. 불현듯 명치끝이 아려오고, 뜨거운 것이 울컥 솟구쳤다. 그런 모나미가, 지금은 없는 것이다. 도서관 앞쪽은 자그마한 공원으로 되어 있어서 장난감처럼 앙증맞은 분수도 놓여 있었다. 그 분수를 둘러싸듯이 놓여 있는 벤치에 헤이스케와 다에코는 나란히 걸터앉았다. 그는 손 수건을 깔아줄까 잠시 망설였지만 도저히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이후, 모나미의 상태는 어때요?" 의자에 앉은 다음 다에코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예. 덕분에 그럭저럭 기운을 회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심려를 끼쳐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모나미가 정신을 차려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다에코에게도 전화로 알려주었 다. 그러나 인격이 아내의 것이라는 말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다음주 정도면 퇴원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요." "예. 앞으로 정밀검사가 한 번 남아 있지만, 그 이후 별다른 이상이 없으면 퇴원해도 좋다 고 합니다." "그러면 새학기에는 등교할 수 있겠군요." "친구들과 함께 6학년이 될 수 있다고, 본인도 좋아하던데요." "그 전에 한 번 병문안을 가도 괜찮을까요? 반 아이들도 몹시 걱정하고 있으니까, 몇 명 을 데리고 가고 싶은데요." "물론 언제든지 괜찮습니다. 나오코도 틀림없이 좋아할 겁니다." 다에코는 한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자 신의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말을 정정했다. "아, 이런! 나오코가 아니라 모나미지요. 모나미도 틀림없이 좋아할 겁니다." 다에코는 굳어진 얼굴을 그에게로 향하고, 등줄기를 똑바로 폈다. 얼굴에는 비장할 정도의 긴장감마저 감돌고 있었다. "헤이스케씨.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부인을 잃은 슬픔에서는 쉽게 벗어날 수 없겠지요. 아직 어려서 대단한 일은 할 수 없지만 의논 상대라도 되어드리 고 싶어요. 만약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다면 부디 주저하지 마시고 언제든지 말씀해 주 세요." 그녀의 말에서는 거짓 없는 진심이 배어 나와, 아직 때묻지 않은 교사의 신선함과 풋풋함 이 느껴졌다. 무심코 나오코란 이름을 입밖에 낸 것에 대해, 아내를 잃은 슬픔이 길게 꼬리 를 끌고 있는 탓이라고 해석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그는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 며 냉정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모나미의 인격은 당신보다 열 살이나 위랍니다.' 2 도서관에서 만난 이틀 뒤, 다에코는 다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 병문안을 왔다. 여자아이 세 명, 남자아이 두 명으로 모나미와 특별히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라고 한다. "텔레비전을 보는데 갑자기 네 이름이 나오지 뭐야? 너무 놀라서 간이 콩알만해졌어. 처 음에는 이름만 똑같은 사람인가 생각했지만, 모나미라는 이름은 그렇게 흔하지 않고 나이도 똑같잖아. 그 다음에는 어떡해야 좋을지 몰라서 엉엉 소리내서 울기만 했어." 고집이 세고 야무져 보이는 기와카미 구니코라는 소녀가 말했다.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 지만 눈이 새빨갛게 충혈 되어 있었다. 사고를 접했을 당시의 충격이 되살아났을지도 모른 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모나미, 즉 나오쿠의 눈도 촉촉이 젖어들기 시작했 다. "그래...그랬겠지. 깜짝 놀랐을 거야. 구니코와 모나미는 언제나 함께 다녔으니까. 크리스마 스 때도 너희 집에서 놀았잖니? 게다가 모나미는 뻔뻔스럽게 커다란 케이크까지 선물로 받 아오고..." 그녀는 콧물을 훌쩍이며, 배어 나온 눈물을 닦느라 눈언저리를 누르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그 애는, 구니코와 친구들에게 무슨 선물을 사갈까 하며 들떠 있었단다. 그런데 이렇게 되고 말다니..." 그녀의 말투는 딸을 잃어버린 어머니의 애틋한 말투로 변해 있었다. 헤이스케는 한순간 목이 메이고 눈가가 뜨거워졌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들과 다에코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모나미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 그, 그게 말이지, 모나미. 네가 출발하기 전부터 무슨 선물을 사올지 고민하지 않았 니? 그것은 이 아빠도 기억하고 있단다. 안 그러니, 모나미?" 모나미의 모습을 빌린 나오코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즉시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처럼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참, 그렇지. 얘들아, 걱정을 끼쳐서 정말 미안해." 그녀는 친구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쓰러움과 애틋함을 담은 눈길의 다에코가 모나미의 손을 잡으면서 물었다. "이제 몸은 완전히 괜찮은 거니?" "예, 선생님 덕분이에요. 특별히 아픈 데는 없어요." "머리가 아프지는 않니? 교통사고라는 건 원래 시간이 지나야 여러 가지 증상이 나온다고 하더구나." "예. 아직은 괜찮은 것 같아요. 물론 나중에 증상이 나타날지도 모르지만요. 교통사고 후 유증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던데요. 어쨌든 이제 스키 버스라는 말만 들어도 진절 머리가 나요." 본인은 조심해서 말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모나미의 말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소녀답지 않 았다. 다에코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즉시 맑은 미소로 되돌아왔 다. "새학기부터 나올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단다.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 는 말렴. 공부도 중요하지만 건강이 최고니까. 아플 때는 학교에 오지 않아도 된단다."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해주시면 정말 고맙겠어요." 모나미가 다시 고개를 숙였을 때, 옆에 있던 남자아이가 꽃다발을 들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저...이거, 선물로 가져왔는데." "어머나!" 나오코의 얼굴이 아침 햇살처럼 갑자기 환하게 빛났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눈은 꽃 이 아니라 소년을 향했다. "어머! 넌 이마오카잖아?" "응!"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깜짝 놀란 듯이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모나미의 입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어머! 정말 많이 컸구나! 지난번에 만난 것은 분명히 2학년 때..." "꽃이 정말 예쁘구나" 헤이스케가 꽃다발을 받으면서 황급히 끼여들었다. 그냥 두었다가는 그녀의 입에서 얼토 당토않은 말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꽃은 퇴원한 다음에도 집에 꽂아 두자꾸나. 흠, 정말 예쁜데. 안 그러니, 모나미?" "예? 아, 너무 예뻐요. 꽃병을 사야겠군요." 그 뒤에도 잠시 대화가 계속되었지만, 모나미의 기묘한 말투는 별로 고쳐지지 않았다. 본 인은 어떻게든 어린애처럼 말하려고 신경 쓰는 것 같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움을 가중시켜 헤이스케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많은 분들이 위로의 선물이나 격려 편지를 보내주셨어요. 제대로 인사를 하려면 역시 답 례품을 보내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해야 할지..." 초등학생 꼬마가 과연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해야 할지'라는 말을 사용할까 생각하면서, 그 는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어색한 순간이 끝나고 드디어 다에코와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병실에서 나 가자마자 그는 몰래 뒤를 쫓아갔다.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다. 가장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구니코였다. "모나미, 조금 이상하지 않니?" "그래. 우리 엄마처럼 말하던데." 다른 여자아이가 맞장구를 치자 다에코가 아이들을 설득했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서 긴장해서 그래. 그리고 얼마전까지 말을 하지 못해서,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 거야." "아아, 그렇구나. 모나미, 정말 불쌍하다." 울먹이는 구니코의 말에 다른 아이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럭저럭 아이들 나름대로 납득한 것 같아서, 그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병실로 돌아갔다. 앞으로는 아이들처럼 말하라고 모나미에게, 아니 나오코에게 일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병실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을 때였다. 안에서 소리를 죽여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 려왔다. 그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아 황급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모나미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서글프게 울고 있었다. 작은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그는 가 까이 다가가서 살며시 그녀의 등을 껴안고, 떨리는 목소리로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나오코" "미안해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밀물처럼 슬픔이 밀려왔어요. 그 아이들은 이 세 상에 모나미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잖아요. 갑자기 그 아이들도 모나미고 가엾다는 생 각이 들어서..." 그는 잠자코 아내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이런 때는 어떤 말로 위로를 해야 할까. 머릿 속은 텅 빈 공백이 되어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3 짐을 모두 가방에 채워넣고 지퍼를 잠그려고 하자 마지막으로 쑤셔 넣은 사과가 비어져나 와 도저히 잠글 수가 없었다. 병문안을 온 친척이 가지고 온 사과였다. 헤이스케는 하는 수 없이 사과를 꺼내 옷소매에 가볍게 닦고 나서 그대로 한입 베어 물었다. 사과즙 몇 방울이 그의 뺨으로 날아들었다. 옆에는 환자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나오코가 서있었다. "뭐 잊은 것은 없어?" "예. 아마 없을 거예요." 그녀는 침대 주변을 찬찬히 둘려보며 말했다. "더 꼼꼼히 확인해 봐. 작년 여름 학교에 갔을 때 체육복을 잊어버리고 왔잖아." "그것은 모나미 얘기잖아요. 나는 모나미처럼 덜렁거리지 않는다구요." 그는 딸의 얼굴을 빤히 보고 나서 손바닥으로 이마를 한 번 쳤다. "아참, 그렇지!" "당신도 빨리 익숙해지세요. 나는 이제 거울에 비친 모나미의 얼굴을 보아도 그렇게 거북 하지 않으니까요." "알고 있어. 지금 잠시 딴 생각을 했을 뿐이야." 그때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담당의사 야마기시를 보고 헤이스케는 고개를 깊숙이 숙여 인사했다. "아, 선생님! 여기까지 오시다니." "퇴원하는 날, 날씨가 좋아서 다행입니다." "예. 하긴 날씨라도 좋아야지요." 야마기시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호리호리한 체격의 중년 남자로, 테가 둥근 안경을 쓰고있는 탓인지 어딘지 모르게 가벼운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완전히 회복한 모나미의 퇴원을 늦추면서까지, 끈질길 정도로 정밀검사를 반복하는 신중함 과 책임감에 헤이스케는 깊은 경의를 품고 있었다. "선생님, 정말 여러 가지 신세를 많이 졌어요. 안정이 되고나면 반드시 다시 인사하러 오 겠습니다." 나오코도 점퍼를 걸쳐 입은 채, 허리를 숙여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러자 야마기시가 쓴웃 음을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따님이 정말 대단하군요. 마치 어른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저, 말투만 어른스럽지요."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요. 아버님께서도 아주 자랑스러우시겠어요." "자랑스럽긴요. 나이만 먹었지 의외로 애들 같은 데가 있어서 곤란할 때가 한두 번이 아 닌데요. 아하하하." 그는 안경 속에 있는 야마기시의 눈에 당황함이 깃드는 것을 보고 자신의 말이 이상했다 는 것을 깨달았다. "아아, 그게 저... 내년에는 중학교에 가니까 이제 어린애처럼 행동하면 곤란하다는 말이 죠." "아버님께서 꽤 엄격하시군요. 하긴 겸손하게 말씀하시는 것이겠지만요." 야마기시는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넘기고, 모나미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버지 말씀 잘 듣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아픈 데가 있으면 즉시 여 기로 와야해. 알았지?" "예. 알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나오코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신세를 진 간호사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그는 짐을 들고 나오코와 함께 병원을 나섰다. 밖 으로 걸음을 내딛자마자 주차장 쪽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남자가 있는가 하면 여 자도 있었다. 그 가운데 몇 사람은 마이크를 들고 있고, 또한 몇 사람은 방송용 카메라를 어 깨에 메고 있었다. 가장 먼저 말을 건 사람은 여자 리포터였다. "헤이스케씨. 따님의 퇴원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심정을 한 말씀 해주시죠." "일단은 정신적인 부담을 덜어 마음이 가볍습니다." "모나미 양. 잠시 이쪽을 쳐다보겠어요?" 카메라맨의 말에 이어 다시 여자 리포터가 질문했다. "부인의 묘소에는 언제 가실 겁니까?" "조금 안정이 되고 나면 가려고 합니다." 여자 리포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고 있던 마이크를 나오코에게 내밀었다. "모나미 양. 병원생활은 어땠지?" "특별히 말씀드릴 만한 것이 없는데요." 나오코는 아무런 표정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힘든 것은 없었어?" "별로 힘든 것은 없었어요. 남편... 아빠가 잘 해주었으니까요."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게 뭐지?"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놓고 목욕을 하고 싶어요." "죄송합니다만 딸에게는 그 정도로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여자 리포터는 마이크를 또다시 그에게 향하더니, 질문의 방향을 버스 회사와의 교섭으로 바꾸었다. 그는 나오코의 손을 잡고 주차장으로 향하면서 적당히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그들 이 지켜보는 가운데 10년 동안 애지중지하던 자동차를 타고 병원을 떠났다.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려고 하자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모나미구나! 오늘 퇴원하는 줄 몰랐는데." 옆집에 사는 요시모토 가즈코가 슈퍼마켓 봉투를 들고 낮은 울타리 너머로 가까이 다가오 는 참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혀를 끌끌 찼다. 대학생과 고등학생 아들을 둔 중년의 이 여인은 동 네 소식통이었다. 사람은 나쁘지 않지만 워낙 남의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하고 수다스러웠다. 나오코는 가즈코의 말에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아, 안녕하세요? 장례식 때도 그렇고, 신세를 많이 졌다고 하더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어린애답지 않은 말투에 가즈코는 한순간 허를 찔린 듯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즉시 참견하기 좋아하는 평소의 말투로 돌아갔다. "무슨 말이야? 그렇게 남처럼 말하면 섭섭하지. 그보다 이제 몸은 괜찮은 거니?" "예, 덕분에요." "그래? 정말 다행이구나. 이 아줌마, 걱정 많이 했단다." "감사합니다. 아직 정리할 게 좀 남아 있어서, 나중에 정식으로 인사하러 가겠습니다." "아아, 그래그래. 몸조심하렴." 나오코는 현관문을 열고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헤이스케는 그때 문득 예전에 나오코가 투덜거리던 말이 생각났다. '그 아줌마는 얘기를 꺼내면 한 시간은 놓아주지 않고, 자칫 잘못하면 집에까지 쳐들어온 다구요.' "그러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도 나오코의 뒤를 따라 서둘러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가즈코가 가까이 다가 오더니 비밀을 말하듯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잠시 못 보는 사이에 모나미가 어른이 된 것 같아요. 역시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나니까, 자신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나 보죠?" "글세요." 그는 적당히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도망치듯이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에서는 나오코가 불 단을 향해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리고 있는 참이었다. 불단에는 나오코 자신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물론 옆에서 보면 딸인 모나미가 어머니의 영전에 합장하고 있는 것으로밖에 여겨 지지 않았다. 잠시 후 고개를 들어올린 그녀의 얼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서글픈 미소가 배어 있 었다. "왠지 기분이 이상해요. 내 사진이 걸려있는 불단 앞에 서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는 데..." "모나미 사진을 둘 수는 없으니까." "그렇겠죠. 사람들이 찾아오는 일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야." 그는 아내의 사진이 들어있는 액자에서 또 다른 사진을 꺼냈다. 사진은 이중으로 되어 있 어서, 아내의 사진 뒤에 딸아이의 사진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작년에 소풍 갔을 때 찍은 사진으로, 모나미는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승리의 브이 사인을 그 리고 있었다. "이 사진 좀 봐." 나오코는 잠시 눈을 깜빡인 뒤, 웃는지 우는지 모를 기묘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진짜 모나미의 얼굴을 본 것 같아요." "당신이 가짜라는 뜻은 아니야." 두 사람은 헤이스케가 끓인 라면으로 간단히 점심을 때웠다. 그는 요리라는 이름이 붙을 만한 것을 하나도 하지 못해서, 라면만으로도 나오코는 몹시 감격했다. "가끔은 남편을 혼자 두는 것도 나쁘지 않군요." "무슨 소리야? 마음만 먹으면 프랑스 요리도 만들 수 있다구." "허풍도 이만저만해야 믿죠. 그러면 한 번 만들어 보세요." "마음이 내키지 않을 뿐이지." 그들은 식사를 할 때 텔레비전을 켜지 않기로 되어 있었다. 모나미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나오코가 정한 규칙이었다. 그래서 집에만 들어오면 텔레비전을 껴안고 사는 헤이스케도, 라 면을 먹는 동안에는 리모콘에 손을 뻗으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나오코가 라면을 다 먹고 나서야 바닥에 굴러다니는 리모콘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아아! 그렇다! 이제 모나미는 없다! 텔레비전을 켜자 눈에 익은 건물이 나타났다. 나오코가 입원해 있던 병원이었다. "아! 당신이 나오고 있어요." 나오코가 반가운 듯이 손으로 가리켰다. 바로 조금 전, 자신과 나오코가 리포터들에게 둘 러싸였을 때의 상황이었다. 바로 한 두 시간 전의 일이 이렇게 방송되다니, 참으로 신기하기 만 했다. 화면에서는 헤이스케가 모나미, 즉 나오코의 손을 잡고 종종걸음으로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고, 마치 오리 떼처럼 리포터들이 그들의 뒤를 쫓아가면서 질문을 퍼부었다. "배상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변호사에게 맡겨두었습니다." "변호사에게 기본적인 희망을 말씀하셨나요? 가령 배상금액이라든지." "돈은 아무런 문제가 안되니까, 어쨌든 성의를 보여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모나미의 목숨 을 빼앗은 데다가 나오코도 깊은 상처를 받았으니까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나오코를 차에 태우고 자신도 운전석에 올라탔다. 카메라는 그들이 탄 차가 멀어져 가는 장면도 놓치지 않았다. 그런 다음 다시 여자 리포터가 나타났다. "헤이스케씨는 모나미양이 무사히 퇴원하자 일단은 한숨 돌리는 것 같습니다. 다만 버스 회사의 책임 문제에 이르자 아내의 딸의 이름도 반대로 말하는 등, 침착한 것처럼 보여도 아직 마음속에는 커다란 아픔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현장에 서 전해드렸습니다." "앗! 내가 바꿔서 말했구나." 지금에서야 자신이 잘못 말한 것을 깨닫고 혀를 끌끌 찼다. 화면은 즉시 바람을 피우다 들통난 남자 탤런트의 인터뷰 장면으로 바뀌었다. 그는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돌려보았다. 그러나 그들을 비추는 화면은 보이지 않고, 특별히 보고 싶은 프로그램도 없어서 텔레비전 을 껐다. 나오코가 주저하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보. 앞으로 어떡하죠?" "어떡하다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음..." 그는 생각에 잠기면서 가볍게 팔짱을 꼈다. 그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현재의 기 묘한 상황에서는 그럭저럭 익숙해지고 있었다. 나오코도, 표면적으로는 포기한 것처럼 보인 다. 다만 이 상황을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은, 꿈에서조차 불가능하다. 그녀는 틀림없이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을 것이고, 자칫 잘못하면 그마저도 그러한 시선에 시달릴 것이다. 가 령 빙의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고 해도, 호기심으로 똘똘뭉친 매스컴을 비롯해 수많은 구경 꾼들에 의해 생활이 파괴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한 가지 생각한 것은 있었지만 그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나오코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 말을 들어보겠어요? 나름대로 생각한 것이 있는데요." "그래. 말해봐." 나오코는 똑바로 앉아 있는 남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모나미로서 살아가려고 해요." "그래..." 그는 어정쩡하게 입을 벌린 채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 다음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나오코의 삶이라든지 생활을 잃어버리는 것은 견딜 수 없지만, 지금은 그것밖에 다른 방 법이 없는 것 같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나오코로서 살아가기는 어려우니까요. 그 누가 당신 처럼 나를 받아들여 주겠어요?" "그건 그렇겠지..."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나도 그 방법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아. 사실 그 말을 하고 싶었는데 당신 입장 을 생각해보니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더군." "나오코라는 사람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에요?" "뭐 그런 이유지." 그녀는 잠시 고개를 떨구고 있다가 입술에 침을 묻혔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지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살아 있는 사람이잖아요." "나에게 있어서 나오코는 그 누구도 아닌 나오코일 뿐이야." 그렇게 말한 다음 문득 생각했다. 나오코는 나오코라고 말하기보다 모나미는 나오코라고 말하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그러나 모처럼 무르익은 가슴 저미는 분위기를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구태여 다시 고치지는 않았다. 그녀는 바닥이 꺼질 듯이 깊은숨을 토해내더니, 두 손을 치켜들고 맑은 얼굴로 기분 좋은 듯이 기지개를 켰다. "가슴에 담았던 말을 하고 나니까 시원해요. 결심을 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요."\ "물론 당신도 고민이 많았겠지.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야." "적극적으로 생각하기로 했어요. 인생을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요. 물론 몸 은 모나미 거지만요." "생판 모르는 남의 몸이 아닌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아야지." "그래요. 모나미는 내가 어렸을 때와 꼭 닮았으니까요." "우리 딸치고는 꽤 성공작이라는 말을 들었지." "그래요. 하지만 코가 당신을 닮았어요. 조금 하늘을 향하고 있는 이 코요." "그 코가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서 그래?" "아하! 그런가요?" 얼굴은 찡그렸지만 나오코의 눈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도 덩달아서 미소를 지었다. 사 고가 난 이후 아무 거리낌없이 웃은 것은 아마 처음이리라. "차를 가지고 올게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엌으로 가더니 식기 선반에서 주전자를 꺼내 차 잎을 넣었 다. 그 몸놀림을 보자 나오코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쟁반에 찻잔 두 개를 올려놓고 거실로 돌아온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모나미도 이제 6학년이군요. 열심히 공부해야겠는데요. 성적이 떨어지면 그 아이에게 부 끄럽잖아요." "모나미는 꽤 열심히 공부했다구. 당신은 자주 야단을 쳤지만 말이야." "여자애치곤 산수와 자연 과목을 꽤 잘했지요. 국어와 사회는 조금 떨어졌지만요. 아마 당 신을 닮았나봐요." "산수와 자연. 당신 잘 해내겠어?" 그의 웃음에는 장난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걱정은 되지만 어떻게든 해내야죠." 나오코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그의 앞에 찻잔을 놓으면서 말을 이었다. "여보. 모나미의 장래 꿈이 뭐였는지 알아요?" "꿈이라..." "가능하면 이루어 주고 싶어요. 그러한 목표가 있으면 나도 더 열심히 할 수 있구요." 그는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신중하게 입을 열었 다. "분명히... 평범한 어머니가 되고 싶다고 한 것 같은데." "보통 어머니요?" "그래. 엄마처럼 평범한 어머니가 되고 싶다고 했어." "뭐예요? 그럼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거잖아요?" 그는 찻잔을 손에 든 채 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니지. 그것은 조금 이상하지 않아?" "왜요?" 그렇게 묻고나서 그녀는 흠칫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살펴보고, 다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눈길을 내리깔았다. "바보 같은 소리 마세요. 나는 계속 당신 곁에 있을 테니까요." 그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묵묵히 차를 마셨다. "아참, 그렇지! 여보. 내 반지 어디 있어요?" "반지?" "결혼반지 말이에요. 버스 안에서 분명히 끼고 있었는데." "아아, 그 반지? 불단 서랍에 들어있지 않아?" 그녀는 서랍을 열고 안에서 작은 비닐 봉투를 꺼냈다. 거기에는 자신이 끼고 있던 반지가 들어있었다. 가느다란 백금 반지였다. 똑같은 모양의 반지가 지금 헤이스케의 손가락에도 끼 여져 있었다. 그녀는 비닐 봉투에서 반지를 꺼내 자신의 손가락에 끼어 보았다. 그러나 약지에는 너무 크고 가운뎃손가락에도 헐렁헐렁했다. 마지막으로 엄지손가락에 끼어보니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엄지에 끼고 다닐 수는 없어요." 나오코는 손을 들여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애당초 어린애가 반지를 끼고 다니면 이사하잖아. 더구나 금반지를 말이야." "하지만 이 반지만은 언제나 곁에 두고 싶어서 그래요." "그 마음은 고맙지만서도..." "그렇지!" 그녀는 손뼉을 치고 일어나더니, 이층에 올라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자리에 앉은 그녀의 오른손에는 곰인형이, 왼손에는 반짇고리가 들려 있었다. "뭐하려는 거야?" "당신은 잠자코 보고만 계세요." 그녀는 바느질용 가위를 꺼내어 곰인형의 머리 부분을 뜯고 이음새를 벌렸다. 그 곰인형 은 원래 모나미를 위해 만든 것으로, 그녀의 바느질 솜씨는 이웃에도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 다. 나오코는 결혼반지를 곰인형 머리에 넣고 다시 천을 맞추어 꼼꼼하게 꿰맸다. 참으로 신 기에 가까운 솜씨로, 곰인형은 다시 원래의 말끔한 모습을 되찾았다. "완성!" "그 곰인형을 어떻게 하려구?" "모나미는 이 곰인형을 무척 좋아했어요. 잠을 잘 때도 언제나 이불 속에서 껴안고 잤거 든요. 그러니까 나도 늘 곁에 두려구요. 그러면 당신의 아내라는 것도 자각할 수 있으니까 요." 그는 순간적으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그런 생각뿐이었다. "이 곰인형은 우리 두 사람만의 소중한 비밀이에요." 그녀는, 마치 곰인형이 두 사람을 이어주는 마지막 끈이기라도 한 듯이 꼭 껴안았다. 풀리지 않는 의문 1 나오코가 처음으로 학교에 가는 날은 공교롭게도 아침부터 보슬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그 녀는 현관에서 장화를 신을지 운동화를 신을지 몹시 망설였다. "운동화를 신고 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직 장화를 신을 정도로 내리지는 않았어." 헤이스케는 현관 앞에서 등을 구부리고 있는 나오코를 향해 말했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오후부터 빗발이 굵어진다고 하던데요. 그러면 운동화가 흙탕으로 뒤 범벅이 될 거예요. 이 운동화는 지단 달에 새로 샀는데, 모나미가 6학년이 되면 신겠다면서 일부러 신지 않았는데..." 아직 한 번도 신지 않은 새 운동화를 들고 안타까운 듯이 말하는 그녀가 보기 딱해서, 그 는 현관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장화를 신어야 할 정도로 많이 오지는 않을 것 같아." "비가 많이 내린 다음에는 이미 늦어요. 역시 장화를 신어야겠어요!" 나오코는 그렇게 말하더니 신발장 안에서 장화를 꺼냈다. 가운데 새하얀 선이 들어가 있 는 빨간 비닐 장화로, 언젠가 슈퍼마켓 경품 추첨에 당첨되어 선물로 받은 것이었다. "장화 타령을 하더니, 겨우 그거였어?" "이것 말고 다른 장화가 어디 있어요?" "그 장화를 신고 가는 것은 조금 곤란하지 않을까?" "왜요?" "모나미는 그 장화를 질색했거든. 촌스럽다고 하면서."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아무리 촌스러워도 새 것을 어떻게 버려요? 아깝게요." 그는 일단 현관문을 닫고 진지한 표정으로 나오코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당신 생각이잖아.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당신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고, 입고 있는 옷도 신고 있는 신발도 모두 모나미가 자기 판단으로 선택했다고 생각할 게 아 냐? 그러면 모나미가 자진해서 그 촌스러운 장화를 신고 가는 것은 조금 이상하지 않을까?" 모나미의 모습을 한 나오코는 입을 벌리고 남편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아...그것도 그렇군요." "내 말을 이해하겠어?" "알았어요." 나오코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장화에 반쯤 집어넣었던 발을 빼내었다. "운동화를 신으면 되는 거죠" "그러는 편이 무난할 거야." "그런데 신자마자 흙탕으로 뒤범벅이 될텐데 어떡하지?" 나오코는 운동화를 신으면서도 계속 비맞은 스님처럼 투덜거렸다. 그 동안 걱정을 끼친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인사를 할 겸, 오늘은 헤이스케도 함께 학교에 가기로 했다. 그녀의 학 교는 2년에 한 번 반을 바꾸기로 되어 있어서, 6학년도 다에코가 담임을 맡기로 했다. "일부러 같이 갈 필요는 없는데. 나 혼자 가도 괜찮아요." 운동화를 신은 다음, 나오코는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다른 때도 아니고, 한 마디쯤 인사를 해두는 것이 좋잖아?" "그래요? 다른 목적은 없는 거죠?" 나오코는 수상쩍다는 듯이 남편을 흘깃 쳐다보았다. "다른 목적이라니, 무슨 뜻이야?" "다에코 선생, 당신 취향이잖아요. 젊고 예쁜 데다, 한 손에 들어오는 가냘픈 몸매도요." "말도 안돼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서둘러. 더 이상 꾸물대면 첫날부터 지각한다구." 그는 화끈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나오코의 등을 떠밀었다. 외모는 달라도 역시 아내라는 존재는 날카롭구나! 그는 마음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다에코를 만날 수 있다는 기 대감에 마음이 들떠있었던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가자 옆집에 사는 가즈코가 쓰레기를 내놓는 참이었다. "어머, 모나미. 오늘부터 학교에 가니?" "안녕하세요? 덕분에 새학기부터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어요." 가즈코는 헤이스케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오늘은 모나미 학교에 같이 가시나 보죠?" "예. 그냥 인사하러요." "저는 괜찮다고 했는데, 이 사람이 자꾸 같이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뭐예요?" "으응? 아아, 그래..." 입가에는 미소를 담아도 가즈코의 눈길은 의아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나오코와 헤이스케 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집에서 멀찌감치 떨어지고 나서 그는 주의를 주었다. "남들 앞에서 이 사람이라고 부르면 어떡해?" "예?! 내가 이 사람이라고 했어요?" "그래. 그러니까 옆집 아주머니도 이상하게 쳐다보았지. 앞으로는 신경을 좀 써." "미안해도. 아직 익숙해지지 않아서요." "하긴 나도 마찬가지지만. 오늘도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긴장되 는데." "아참. 오늘 모임이 있는 날이지요?" "그래. 신주쿠에서. 몇 시에 끝날지 모르지만 그렇게 늦지는 않을 거야." "알았어요. 모나미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세요." "모나미와 당신을 위해 서지." 오늘 오후 피해자들끼리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벌써 시내에서 여러번 만나 앞으로 어떻 게 할 것인지 대강 방침을 정해 놓았다. 기본적으로는 휴일에 만나기로 했지만 오늘은 변호 사가 시간이 나지 않아 평일로 정해진 것이다. 회사에 사정을 말하고 유급휴가를 얻은 덕분 에 이렇게 나오코와 함께 학교에도 갈 수 있게 되었다. 아무 말 없이 걸어가던 그들은 커다란 교차로 앞에서 멈추어 섰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반대편에서 태양처럼 환한 표정을 지으면서 손을 흔드는 소년이 보였다. 처음에는 별다 른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나오코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요즘 아이들답지 않게 바싹 마르기는 했지만, 시원하게 깎은 머리와 말끔한 얼굴이 상큼하게 보였다. "이봐. 저 소년이 모나미를 알고 있는 것 같아." 속삭이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나오코는 더욱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그런 것 같아요." "누군지 알아?" "글쎄요." "당신도 모르는 거야...?" 나오코는 몸을 돌려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그것은 지난해 소풍을 갔을 때, 반 친구들과 찍은 단체사진이었다. 나오코가 그 사진을 보면서 친구들의 이름과 얼굴을 외우려 고 한 것은 익히 알고 있었던 터였다. 마침 사진 뒤에는 모나미가 직접 친구들의 이름을 써 놓았던 것이다. "어떡하지? 신호가 푸른색으로 바뀌었어. 건너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할거야." "아...예." 한 발짝 걸음을 내딛으면서 나오코는 그에게 사진을 내밀었다. "여보. 이 사진은 당신이 가지고 있어요." "나에게 사진을 주면 어떡해?" "저 아이 이름을 찾아서, 알아내면 넌지시 가르쳐줘요." "뭐라구?" 소년은 두 사람이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것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새하얀 치아를 드러낸 해맑은 웃음이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 와중에도 헤이스케는, 소년 잡지에 나오는 듯한 맑은 표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나미, 오늘부터 학교에 가는 거야?" 소년의 목소리에 반가움과 설렘을 느낀 것은 헤이스케만이 아니었다. "응. 친구들이 걱정해준 덕분이야." 나오코는 소년에게서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우리 아빠야." "안녕하세요?" 소년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그래, 안녕." 그는 소년의 천진난만한 웃음에 비해 자신의 표정이 너무 어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 년이 걸음을 내딛기 시작하자 나오코도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는 소년에게 들키지 않도 록 조심하면서 나오코가 건네준 사진을 훔쳐보았다. 소풍을 간 곳은 아름다운 수목으로 유 명한 다카오 산이었다. 푸르른 나무들이 마음껏 위용을 뽐내는 것으로 보아 여름의 문턱에 막 들어섰을 때일까. "병문안을 가고 싶었지만 네가 어떨지 몰라서 가지 못했어. 그런데 구니코에게 들으니까 건강하다고 해서 마음이 놓였어." "그래...고마워." "그런데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보여?" "괜찮아. 보다시피 이젠 아무렇지도 않은데뭐." 나오코는 얼굴을 찡그리며 힐끔 뒤쪽을 쳐다보았다. 빨리 이름을 알아봐 달라는 신호일 것이다. 그는 그때서야 소년처럼 보이는 사람을 발견해냈다. 분위기가 조금 달라 보이는 것 은 머리 모양이 달라졌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사진 뒤에는 모나미의 글씨로 다지마 쓰요시 라고 씌어 있었다. "모나미. 잠깐 나좀 볼래?" "왜요?" 나오코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아마 이 아이인 것 같애." 그는 우산으로 소년의 눈길을 막고나서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 어 말하고는 다지마 쓰요시라는 이름을 가리켰다. 나오코는 우산 밑에서 잠시 고개를 갸우 뚱거리고는 긴장했던 얼굴의 표정을 느슨하게 풀었다. "알았어요. 아빠." 그녀는 소년에게 들리도록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말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뛰어갔다. "많이 기다렸지?"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 저었다. 아직 초등학생이 그런 인사까지 할 줄 알까. "무슨 일이야?" "아무 것도 아니야." 나오코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우리 아빠가 다지마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하셔." "왜?" 그는 나오코의 엉뚱한 말과 소년의 당황한 표정에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리 고 즉시 그녀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모나미에게 살갑게 대하는 소년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 이다. "무엇 때문이죠?" 소년이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물어보았다. "그냥. 모나미의 친구들에 대해서 알아두고 싶어서 그런 단다." 그의 미소가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예에..." 소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해가 안돼는 것은 당연하리 라. "아버님은 뭘 하시니? 회사에 다니시니?" "누구 아버지요?" "그러니까 다지마의 아버지 말이다." "생선가게를 하시는데요." "흐음. 생선가게라. 그거 좋겠구나." 그의 입에선 아무런 의미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생선가게가 왜 좋은지 자신도 알 수 없 었다. "봄방학에는 어디 갔었어?" 나오코의 질문에 소년은 반가운 듯이 대답했다. "미우라 반도에 갔었어. 친척 아저씨께서 배를 가지고 있어서 바다에 나가 낚시를 했거든. 엄청나게 큰 물고기를 많이 잡았어. 도미도 잡고 벤자리도 잡아서 낚시용 박스가 넘칠 뻔했 거든." "그래?" 나오코는 걸음을 내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서 늘 생선을 보았을 텐데 지긋지긋하지 도 않나? 바다에까지 가서 낚시를 하다니. 그렇지 않으면 평소에 생선과 친숙해서 낚시를 좋아하는 것일까. "특히 벤자리를 많이 잡아서 이웃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주었지. 물고기가 크니까 사람들이 깜짝 놀라던걸!" "우와! 공짜로 나눠줬어?" "물론이지." "흐음. 꽤 비싸게 받을 텐데. 이웃 사람들을 상대로 그렇게 악착스럽게 돈을 벌어 뭐해?" 나오코의 말에 소년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생선가게에서 왜 벤자리를 그냥 나누어주었을까. 헤이스케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크 고 싱싱한 벤자리라면 제법 돈을 많이 받을 것이다. 그는 잠시 생각할 끝에 말을 걸었다. "다지마는 공부를 잘하니? 무슨 과목을 제일 잘하지?" 소년은 순식간에 심각한 표정으로 변하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산수...정도일까?" "우와, 굉장하구나! 산수를 잘하다니." "그렇지만 다른 것도 잘해요. 국어와 자연, 사회두요."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조금 얄밉기도 했지만 요즘 아이들답게 분명하다는 생각 도 들었다. "흐음. 수재구나." 소년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선선히 대답했다. "예. 하지만 체육은 잘 못해요." "아 그러니? 그는 소년의 쭉 뻗은 다리를 보고 왜 체육을 못하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학교 근처에 이르자 같은 방향을 향해 걷는 아이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아이들은 걸어 가면서 웃고 떠들고 장난을 쳤다. 이것이 곧 아이들의 세계다. "모나미!" 구니코가 반갑게 손을 흔들면서 뛰어오고 있었다. 체크 무늬의 치마가 팔락팔락 가볍게 춤을 추었다. "뭐야? 벌써 둘이서 나란히 걸어가잖아? 나만 빼돌리다니. 섭섭한데." 구니코는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다가서자마자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고 소년과 나오코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하고는, 헤이스케에게 시선을 돌리고 약간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잘 있었니?"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구니코는 나오코를 향하더니, 어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대해서 재 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나오코는 아무런 대꾸 없이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는 구니코가 한 말을 머릿속으로 곱씹어 보았다. '뭐야? 벌써 둘이서 나란히 걸어가잖 아?' 무슨 뜻이지? 말투로 봐서는 두 사람을 놀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은 공공연한 사이라는 것인가? 말도 안돼! 설마 아직 어린애들이! 시야 끝에 학교 건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색 바랜 콘크리트 건물 세 채. 물론 그는 모나 미의 교실이 어디인지 모르고 있었다. 나오코는 알고 있을까. 그때 나오코가 수업을 참관하 기 위해 몇 번인가 학교에 갔던 사실이 떠올랐다. 옆에서 뚱뚱하게 살이 찐 남자아이가 다가왔다. 봄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기는 하지만 아 직 피부를 스치는 바람이 쌀쌀한데도 관자놀이 부근에 땀이 번들번들 배어 있었다. 거부감 이 들 정도로 살이 찐 아이를 보고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안녕! 잘 지냈어?" 뚱보 소년은 나오코 일행에게 말을 걸었다. "곰돌아. 오늘은 더 뚱뚱해 보이는데." 나오코 옆에 있는 소년이 놀리듯이 말했다. "뭐야? 그렇지 않아. 몸무게는 하나도 안 늘었다구." 뚱보 소년은 불퉁한 표정으로 입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를 힐끔 쳐다보고는 주눅이 든 것 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정문을 통과하고 헤어질 때, 나오코는 그를 한 번 돌아보고 재빨리 한쪽 눈을 찡그렸다. '걱정 마세요. 잘 해낼 테니까요' 라고 말하는 것이리라. 혼자 남겨진 다음, 그 자리에 서서 학교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생각해 보니 교직원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뚱보 소년이 뒤뚱뒤뚱 뛰어오더니 눈을 치켜 뜨고 헤이스케를 쳐다보았다. "저..." "왜 그러니?" "제가 뭐 잘못이라도 했나요?" 그는 무슨 뜻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잘못이라니? 무슨 말이지?" 뚱보 소년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모나미 아빠께서, 저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물었다고 해서요..." "으응?" 그때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전후사정을 알아차렸다. "네 이름이 다지마니?" 뚱보 소년은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구나. 네가 다지마로구나. 집에서 생선가게를 하고 있는 다지마?" "예." "그렇구나. 하하하. 그랬어. 아니란다. 특별히 너 한 사람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은 아니었 어. 나오코... 아니, 모나미의 반 친구들에 대해서 알아두고 싶어서 그랬단다." "그럼 이제 된 거예요?" "그래. 아, 잠시만 기다리렴. 그런데 아까 같이 갔던 애의 이름은 뭐니? 모나미와 같이 걸 어가던 남자애 말이다." "엔도 말씀이세요?" "아. 엔도라고 하니? 고맙구나. 그럼 공부 열심히 하렴." 다지마는 여전히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을 지으며, 짧은 다리로 어정어정 뛰어갔다. 그 뒷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자신도 모르게 살포시 미소가 배어나왔다. '저래선 체육을 못하는 것이 당연하군.' 그는 사진을 다시 꺼내 이름과 맞추어 보았다. 조금 전에 찾아낸 소년은 분명히 지금의 뚱보 소년과 동일인물인 것 같기는 했다. 다만 몰라볼 정도로 몸이 불어나서, 사진보다 적어 도 두 배는 되는 것 같았다. 헤이스케는 사진을 뒤로 돌려, 빼곡이 적혀 있는 이름 가운데 엔도 나오토라는 글자를 찾 아냈다. 그리고 위치를 잘 확인하고 나서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엔도 소년은 담임인 다 에코 앞에 앉아 있었는데,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데다 몸도 가냘퍼서 두 사람은 마치 어머 니와 자식처럼 보였다. 그 애는 다지마와 대조적으로, 최근 몇 달 사이에 훌쩍 자란 키와 의 젓함을 획득한 것 같았다. 그는 나오코가 들어간 학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나오코. 그곳은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세계가 될 것같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큰일나겠어. 힘을 내라구! 그는 마음속으로 아내에게 응원을 보냈다. 2 오후에 들어서자 장대비가 쏟아지고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쌀쌀한 기운이 감돌았다. 헤이스케는 레인 코트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오늘 아침 나오코와 걸은 길에 여기저기 물웅 덩이가 생겨 있었다. 장화를 신고 갈 것을 그랬다고 억울해할 나오코를 상상하니 자기도 모 르게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피해자 모임 장소는 신주쿠역 서쪽 출구에서 걸어서 십 분 정도 걸리는 시티호텔이었다. 그는 입구에 있는 작은 책상 앞에서 서명을 하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실내에는 책상과 의자 가 잘 정돈되어 놓여 있었다. 백 명 정도는 충분히 앉을 수 있는 자리에 이미 절반 정도 사 람이 앉아 있었다. 버스사고로 희생된 사람은 스물 아홉 명, 중상을 입어 지금도 입원중인 사람이 열 명이 넘는다고 하니, 이 정도 회의실을 준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리고 이 회의만은 비가 내린다든지 평일이라는 이유로 참석률이 저하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고를 일으킨 것이 스키 버스였기 때문에 피해자는 거의 젊은 사람들이었다. 더구나 대 부분이 대학생이었다. 따라서 참석한 면면들을 둘러보면 그들의 부모처럼 보이는 연대의 사 람들로, 그는 상당히 젊은 편에 속했다. 처음에는 여자가 많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남자가 절 반 이상이나 차지하고 있었다. 동네의 반상회에는 나가지 않는 사람들도 오늘만은 일을 제 쳐두고라도 참석했을 것이다. 그의 앞줄에 앉아 있는 사람은 부부처럼 보였다. 남자가 오십대 초반, 여자는 사십대 후반 쯤 될까. 이발소에서 막 나온 듯한 남자의 반듯한 머리는, 거의 흰 머리칼이 점령하고 있다. 남자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을 걸자 그것에 대꾸하듯이 여자가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는 크림색 손수건이 쥐어져 있었는데, 그녀는 가끔 그 손수건으로 눈덩이를 누르곤 했 다. 먼저 보낸 사람은 아들일까 딸일까. 그 어느 쪽이든 한창 청춘의 아름다운 꽃을 피울 나 이이고, 부모도 장래의 꿈에 부풀어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는 모나미를 잃어버린 슬픔을 빗대어 그들의 마음을 느껴보려고 했지만,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슬픔도,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으리라. "헤이스케씨...인가요?" 말소리가 들려 쳐다보자 나이는 쉰쯤 되었을까, 햇살에 그을렸는지 탄력 있는 피부의 남 자가 일그러진 미소를 짓고 서있었다. "그렇습니다만." 남자는 조금 안도한 것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렇군요. 텔레비전을 통해 몇 번 보았거든요." "아아, 그러세요." 텔레비전을 본 사람들이 아는 척하는 것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방송국 사람들은 아무 것이나 마구 찍으니까요." "그 사람들의 무례함에는 나도 두손 두발 다 들었지요. 이제 따님은 괜찮으신 가요?" "예. 다들 걱정해 주신 덕분이죠." "그거 잘됐군요. 따님만이라도 살아난 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남자는 몇 번이고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지만 댁은...?" 남자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어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인쇄소를 경영하고 있는 남자는 후지사키 가즈로로, 회사는 고토 구에 있다고 했다. "이번 사고로 부인을 잃으셨지요?" 남자는 예의 상으로 건네준 그의 명함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했다. "나는 3년 전에 병으로 아내를 잃었지요. 그런데 이번 사고로 딸을 잃어버려서, 이 넓은 하늘땅 아래 완전히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무슨 일을 해도 힘이 나지 않는군 요." 남자의 심정이 이해가 되어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는 지금의 우리 집과 똑같았겠군요. 그러니까 아버지와 딸, 두 사람만 사는..." 남자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세 사람이 살았지요." "예? 그러면..." 남자는 손가락을 두 개 펼쳐 보였다. "딸이 둘이었지요. 쌍둥이였는데, 똑같은 스키복을 입고 함께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무리 쌍둥이라고 해도 죽는 날까지 똑같을 필요는 없었는데 말입니다. 세상을 떠날 때의 얼굴까 지 똑같았답니다." 마지막에는 남자의 목소리에 눈물이 섞여 있었다. 무거운 돌덩이로 얻어맞은 것처럼 가슴 이 덜컹 내려앉았다. "하나라도 살았다면 다른 애도 함께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을 텐데, 한꺼번에 다 데 려가시다니 하느님도 참으로 잔혹하시지요." 남자의 웃는 모습은 이미 보기 흉할 정도로 참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예리한 비수처럼 가슴에 박혔다. 나오코와 모나미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 만약에 그 쌍둥이에게 일어났다면 아마 누구도, 어쩌면 본인도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갔을 지도 모 른다. 문득 정신을 차리자 회의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사고는 아직 끝 나지 않은 것이다. 피해자 모임에는 네 명의 간사가 있었다. 첫모임을 가졌을 때 입후보한 네 명이었다. 일류 기업의 엘리트 부장인 듯 중후한 느낌을 주는 사람, 상점 주인처럼 소박한 이미지의 남자, 이미 일선에서 은퇴하고 뒤로 물러나 있는 것 같은 노인, 그리고 평범한 주부. 나이나 외모 는 모두 달랐지만, 네 명의 표정에서는 공통적으로 강인한 의지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이 사 람들에게 맡겨두면 걱정할 것이 없다. 처음에 보았을 때부터 그는 그렇게 확신했다. 우선 엘리트 부장처럼 중후한 느낌을 주는 하야시다라는 남자가 현재까지의 경위를 자세 하게 설명해 주었다. 버스 회사에서는 운전기사의 실수를 인정하면서 배상에 대해서는 최대 한의 성의를 보일 자세로 있지만, 과로 운전의 의심도 있어서 그 방면에서도 회사측의 책임 을 추궁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나가노현 경찰에서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로 안길이로 교통 을 수사했다는 이야기는 헤이스케도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다. 다음에 변호사인 무카이가 앞으로 나왔다. 머리 한가운데 가르마를 탄 그는 마치 유도선 수처럼 체격이 건장했는데, 그 체격에 걸맞게 실내는 가득 메우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보 상금액에 대해서는 나이나 남녀 성별에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될 것이고, 만약 피해자 모임 에서 획득하는 금액에 불만이 있는 경우에는 개인적으로 교섭해 달라는 말을 전했다. 그때 얼마를 요구할 것이냐는 질문이 나오고, 무카이 변호사는 아무런 주저 없이 대답했 다. "기본선으로 8천만 엔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금 딱딱한 말투에서, 아마 상한선이 그 정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8천만 엔. 많은지 적은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물론 아무리 많은 돈을 받아도 사랑하는 가 족을 잃은 슬픔이 희석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나 유족들 가운데는 실리적으로 생 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1억 엔을 받을 수 없느냐는 질문이 나온 것이다. 옆에 앉은 후지사키 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면, 자기 나름대로 보상금액을 예상한 사람이 많 을지도 모른다. "물론 가능한 한 더 많은 금액을 목표로 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교섭인 이상 양쪽 의 양보가 필요할 겁니다. 게다가 질질 끄는 것은 여러분이 원하지 않을 테니까요." 말이 끝나자마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헤이스케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 다. 정말 오래 끌고 싶지 않다. 될 수 있으면 빨리 끝을 맺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다만, 잊어버릴 수는 없다. 세상 사람들도 잊어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그 가슴 저미는 사 고를 바람에 휩쓸려가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간사인 하야시다가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의 방침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또한 여기에서 협 의한 내용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입밖에 내지 말라는 당부가 덧붙여졌다. 특히 매스컴에는 입조심하라는 말을 거듭거듭 강조했다. "이야기가 돈 문제에 이르면, 그들은 흥미 위주로 떠들어댈 테니까요." 그 말을 하는 하야시다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그도 또한 매스컴의 무신경한 취 재에 깊은 상처를 받았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하야시다의 말투가 미묘하게 변하더니 표정도 조금 굳어졌다. "실은 여러분을 만나고 싶어하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오가와씨 부인인데요." 하기 어려운 말은 단숨에 토해내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서둘러 얘기를 꺼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오가와 씨라고 하면..." 앞쪽에서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중년 여자의 목소리였다. "예. 이번 사고를 낸 운전사입니다. 지금 그의 부인이 여기에 와서 우리 이야기가 끝나기 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꼭 만나 뵙고 사죄를 드리고 싶다고 합니다만." 잠시 흐트러졌던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와 반대로 사람들의 몸속에서 는 뜨거운 피가 달아올랐다. 헤이스케도 그랬다. 얼굴은 화끈거렸지만 손발은 마비된 듯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갑자기 앞에 앉아 있던 남자가 버럭 화를 내며 일어섰다.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신의 아내에게 돌아가자고 했다. 그 날카롭고 짧은 말에 표현할 길 없는 원한이 담겨 있 는 것 같았다. 옆에 앉아 있던 아내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자리에서 무거운 몸을 이끌 듯 서서히 일어났다.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은 뒤쪽에 있는 문을 향해 느 릿느릿 걸음을 내딛었다. 하야시다를 비롯해 그들의 행동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 었다. 몇 사람이 그들에게 동조하여 그 뒤를 따라갔다.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은 모두 무서운 가면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남은 사람들을 빙 둘러보고 나서 하야시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오가와씨 부인이 들어와도 괜찮습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하야시다의 표정은 곤혹스럽게 일그러졌다. 헤이스케는 마음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하야시다를 동정했다. 그로서도 사고를 일으킨 운전사의 아내를 기꺼이 맞 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카리씨, 오가와씨 부인에게 들어오라고 하세요." 간사 가운데 유일한 홍일점인 유카리가 고개를 끄덕이고 앞문으로 걸어갔다. 회의실 안은 얼어붙은 듯이 싸늘해졌다. 잠시후 다시 문이 열리고 유카리가 고개를 내밀었다. "오셨어요." "그럼 들어오시라고 해요." 유카리의 뒤에서, 뺨이 움푹 패고 체구가 작은 여인이 들어왔다. 형광등 불빛을 받은 그녀 는 가여울 정도로 바싹 야위고 안색도 좋지 않았다. 초라하게 보이는 여인의 어깨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빗속을 걸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오가와의 아내입니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고 입을 열었다. 체구와 마찬가지로 목소리도 바싹 말라 있었다. "이번에 남편의 실수로 여러분의 소중한 가족을 빼앗게 되어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합니 다." 고개를 깊숙이 숙인 그녀의 가냘픈 어깨가 파리하게 떨리는 것이, 헤이스케의 눈에 아프 게 파고들었다. 침전되어 있는 무거운 공기가 모두 그녀의 야윈 어깨를 내리눌러, 지금이라 도 바닥으로 꺼져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남편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남편을 대신해 속죄를 하고 싶습니다. 어쨌듯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어서 오늘 여기에 오게 되었습니다." 말하는 도중에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들고 있던 손수건으로 눈가를 살짝 눌렀 다. 그때 한 남자가 벌떡 일어서면서 소리쳤다. 양복을 입은 남자였다. "하야시다씨, 어째서 이런 사람을 부른 것입니까?" "그것은 말이죠..." 하야시다가 입을 열려고 하자 오가와의 아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제가 부탁했습니다. 제가 억지로 부탁을 해서..." 양복을 입은 남자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당신은 입을 다물고 계세요! 나는 지금 하야시다씨에게 묻고 있는 겁니다." 한순간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싸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오가와의 아내가 흠칫거리며 입을 다물자 하야시다가 거북한 듯이 말을 꺼냈다.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죄하고 싶다는 부인의 희망이었고, 또 하나는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과로운전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부인의 증언이 귀중하기 때문에 일찌감치 서로 얼굴을 아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설명이 이치에 어긋나지 않자 양복을 입은 남자도 납득을 한 것 같았다. 그러나 자리에 앉을 때 혼자 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고 우리와 얼굴을 알아둘 필요가 있을까?" "당신은 사죄하지 않아도 돼요." 그때 어딘가에서 가느다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이스케는 고개를 길게 빼고 소리 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가장 앞줄에 앉아 있는 초로의 여인이 오가와의 아내를 향해 소리 치고 있었다. "운전을 한 사람은 당신이 아니니까요. 당신도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나 세상에 대한 체면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남들이 뭐라고 할지 모르니까 사과하러 온 것이 아닌가요? 그렇게 형식적인 사과하면 하나도 반갑지 않아요." "아니에요. 저는 그런..." 오가와의 아내가 반론을 제기하려고 했을 때였다. "됐어요. 이제 그만하세요. 그렇게 있으니까 마치 우리가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 같잖아 요." 그렇게 말하더니 초로의 여인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해냈다. 그 한숨이 똑똑히 들릴 정 도로 실내는 쥐죽은듯이 조용했다. 그녀의 말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맞다'는 중얼거림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실은 헤이스케도 그 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오가와의 아내도 남편을 잃고 괴롭겠지만, 도저히 같은 슬픔을 겪은 동지라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러면 부인, 이 정도면 되겠지요?"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며 하야시다가 말을 걸었다. 이 장면에서는 어 울리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말투였다. 오가와의 아내가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이자 하야시다는 유카리에게 눈짓을 했다. 유카리 가 다시 그녀를 데리고 앞문을 통해 나가려고 발걸음을 내딛을 때였다. 헤이스케의 옆에 앉 아 있던 후지사키가 벌떡 일어서더니 소리쳤다. "당신 남편은 살인자야!" 그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메아리치더니, 갑자기 회의실 전체가 정지 화면처럼 움직이지 않 았다. 그리고 한 순간 뒤, 한 장면씩 천천히 흘러갔다. 지금이라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릴 것처럼 서 있는 오가와의 아내를, 유카리가 어깨를 껴안으면서 데리고 나갔다. 유족들 가운 데 어떤 사람은 후지사키를 쳐다보고, 또 어떤 사람은 일부러 그에게서 눈길을 돌렸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후지사키의 말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그가 입에 담은 말은 역 시 해서는 안돼는 금구였다. 실내의 공기는 초겨울 삭풍이라도 몰아친 것처럼 싸늘하게 얼 어붙었다. 조금 전에 말한 가장 앞줄에 앉아 있던 초로의 부인은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아무도 후지사키를 책망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하는 것뿐이었다. 하야시다도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사람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것이 있는 분은 질문하십시오." 3 호텔을 나설 무렵에는 다시 빗발이 굵어져 있었다. 헤이스케는 우산을 쓰고 신주쿠역으로 향했다. 그는 곧바로 전철을 타지 않고 케이크라도 사주려고 신주쿠역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나오코가 그의 아내로 있을 때는 선물을 사 가지고 돌아가는 일은 좀처럼 없었던 것이다. 적당한 가게가 보이지 않아서 오다큐 백화점으로 들어가려고 생각했을 때였다. 신주쿠역 기둥 뒤에 한 여자가 웅크리고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오가와의 아내였다. 어디 아픈 것이 아닐까. 헤이스케는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아픈 것 같지는 않았다. 가끔 옆에 있는 재떨이에 손을 뻗어 재를 터는 것을 보고 헤이스케는 그녀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옷매무새는 흐트러지지 않았지만 공공장소에서 웅크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 는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마 그 정도로 지쳐있을 것이다. 마흔이 조금 넘었을까. 하지만 웅크리고 앉아있는 뒷모습은 머지 않아 세상을 등지려는 늙은 노파 같았 다. 그는 모르는 척하고 지나치려했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녀의 눈이 그를 포착했는 지, 휑한 눈이 크게 떠졌다. 자그맣게 비명을 질렀는지 입도 벌어져 있었다. 텔레비전을 통 해 그의 얼굴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약간 고개를 숙였다. 그녀도 황급히 일어서서 깊숙이 고개를 숙이더니, 어딘 가로 사라지려는 듯이 서둘러 몸 을 돌렸다.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은 춤을 추듯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그리고 허공을 움켜잡으 면서 콘크리트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새어나온 것은 바로 그 다음이었다. 그는 우산을 든 채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았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는 않았다. 그는 오른손을 내밀면서 물었다. "괜찮으세요?" "예, 괜찮아요." "현기증이 나셨나 보지요." "예, 갑자기 일어섰더니 눈앞이 캄캄해서요."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일어섰기 때문에 현기증이 난 것이리라. 게다가 손을 대면 부스러질 것처럼 몸도 약해 보였다. "저를 잡고 일어나세요." 그가 다시 오른손을 내밀자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손을 잡고 일어서려고 하다 가 얼굴을 찡그리고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의 손이 오른쪽 발목을 누르고 있었다. "발을 삐었나요?" "아니,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그녀는 어떻게든 자기 힘으로 일어서려고 했지만 발목이 상당히 아픈지 작은 신음소리를 냈다. 혼자서는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것 같았다. "댁이 어디 신가요?"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혼자 갈 수 있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얼굴에는 견딜 수 없이 아프다고 씌어 있었다. "데리러 와줄 사람은 없습니까?" "예. 혼자 갈 수 있어요." 오가와의 아내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의 신세를 지지 않으려고 결심한 것 같았다. 그로서 도 그대로 돌아서고 싶었지만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댁이 어딥니까? 댁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데려다 드릴 수 없지 않습니까?" 화가 난 것처럼 말투가 딱딱해지자 그녀는 깜짝 놀란 것 같았다. "저, 조후예요." "조후라. 그렇다면 같은 방향이군요. 택시를 타지요." "아니, 괜찮아요. 걸어서 갈 수 있어요." "지금 이 상태로 어떻게 혼자 간다는 겁니까? 사람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힐끔힐끔 쳐다보 니까 지금은 제 말대로 하십시오." 그녀의 소지품은 검은 핸드백과 백화점 종이가방, 그리고 박쥐우산 뿐이었다. 그는 그것들 을 오른손에 들고, 그녀가 지탱할 수 있도록 왼손을 내밀었다. 택시 안에서는 거의 대화다운 대화는 없었다.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고, 그 때마다 그는 괜찮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택시는 이층 짜리 건물 앞에 멈추었다. 나무판자를 엉성하게 조립한 듯한 초라한 건물이었다. 그가 택시 요금을 내려고 하자 그녀는 자신이 내 겠다고 고집을 부려 결국 절반씩 내기로 했다. "이제 정말 괜찮으니까 이대로 택시를 타고 가세요." 그러나 헤이스케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택시에서 따라 내렸다. 집이 이층이라는 소리 를 들었기 때문이다. 한 손으로는 짐을 껴안고 다른 한 손은 그녀를 부축하며 이층으로 올 라가자, 그대로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차라도 마시고 가라고 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집에 들어가시는 것을 보고 그냥 가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셨는데...차 정도는 대접하게 할게요." 마지막 말이 그의 마음에 걸렸다. 대접하게 한다? 문에 걸린 문패에는 오가와 유키히로, 세이코, 이쓰미의 이름이 나란히 씌어 있었다. 세이 코가 이 여인의 이름이고, 이쓰미는 딸일 것이다. 문을 열고 세이코는 안을 향해 소리쳤다. "이쓰미, 이쓰미!" 곧바로 대답이 들리고 머리를 짧게 자른 중학생 정도의 소녀가 나왔다. 청바지에 간단한 티셔츠 차림이었다.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남자가 함께 있었던 탓인지 조금 놀란 표정을 지 었다. 세이코가 딸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이쓰미란 소녀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멍청하긴!" "어쨌든 이 분께 차를 대접해 주렴. 그리고 방석을 준비해 줄래?" 헤이스케는 어쩐지 그 자리에 있기가 거북스러웠다. "괜찮습니다. 그만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자 세이코가 애절한 눈빛으로 애원하듯이 말했다. "차라도 드리고 가세요. 제발 부탁해요." 피곤에 지친 그녀의 표정을 보니 완고하게 뿌리치는 것이 오히려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러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오른쪽에는 널찍한 주방이 있고, 왼 쪽에는 방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방 하나에는 불단이 놓여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옅은 향냄새가 집안을 감돌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세이코가 바닥에 주저 앉았다. 또 현기증을 일으킨 것일까. 그러나 이번에는 그를 향해 무릎을 꿇은 것이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뭐라고 사죄를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목소리에는 눈물기가 잔뜩 배어 있었다. "그만두십시오. 자꾸 이러시면 오히려 제가 곤란합니다. 부탁합니다." 그는 그녀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우면서, 이렇게 무릎을 꿇기 위해서 집으로 들어오라고 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아아!" 발목에 무리가 갔는지 그녀가 얼굴을 찡그렸다. "괜찮습니까?" 그는 천천히 그녀를 일으키고 그대로 의자에 앉게 했다. 그녀는 끝없는 늪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제대로 사죄하지도 못하고..." "이제 그런 말씀은 그만하십시오." 불편한 침묵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주전자의 물이 끓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쓰미가 가스 레인지의 불을 끄고 차를 타기 시작했다. 그의 앞에 조잡한 찻잔이 놓여졌다. 그것은 경품으 로 받은 것 같았다. "고맙구나. 중학생이니?" "중학교 2학년이에요." "그래? 그러면 우리 딸보다 두 살 위로구나." 별다른 의미 없이 한 말이지만 세이코는 그냥 흘려들을 수 없었던 것 같았다. "이번에 따님도 큰일을 당하셨죠... 실은 직접 만나보고 사죄하는 게 원칙이지만요." 딸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습니다. 헤이스케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살아있는 것은 육체뿐이죠. 그리고 내 아내는 육체를 잃어버렸습니다. 모두 당신 남편 때문이지요. 이쓰미가 일어선 채로 불쑥 입을 열었다. "우리 아빠는 몹시 지쳐 있었어요." "그랬니?" 이쓰미는 보일 듯 말 듯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말부터 휴가도 없었고, 설날에도 잠을 자기 위해 잠깐 들어왔을 뿐이에요. 완전히 물에 젖은 종잇장처럼 녹초가 되어 스키 버스를 운전할 때는 눈을 붙일 시간도 없어서 힘들 다고 했어요." "분명히 초과근무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는 세이코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 눈길에는 위로의 빛이 담겨 있었다. "1월과 2월은 특히 힘들었을 거예요. 일단 스키장에 있는 호텔에 방을 잡는데, 손님이 많 을 때는 그것도 객실로 빼앗겨 식당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다시 운전을 했던 모양이에요. 교대로 운전하는 사람은 있지만 버스 안에서 어떻게 깊은 잠을 자겠어요? 버스가 휴게소에 설 때마다 체인을 달거나 차를 정비해야 하니까 잠시도 쉴 틈이 없었나 봐요." "보통 힘든 일이 아니겠군요." 맞장구를 치기는 했지만 완전히 동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변명해도 사고를 일으킨 구실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는 조금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해 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몸을 관리하는 것도 업무가 아닌가요?" 세이코는 뺨이라도 얻어맞은 듯이 그대로 표정이 굳어지더니 눈을 깜빡이고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러자 옆에서 이쓰미가 끼여들었다. "우리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아빠는 조금이라도 돈을 많이 벌려고 무리를 한 거예요." "정말로 가난하다면 이런 집에서도 살 수 없었을 게다." "그건 아빠가 일을 열심히 해서..." 이쓰미는 분함을 참지 못했는지 갑자기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죄송해요. 애가 아직 철이 없어서요." 그는 괜찮다고 하면서 차를 마셨다. 연한 맛의 현미차였다.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전화벨이 사납게 울어댔다. 벽 쪽에 있는 조립식 선반 위에 놓여 있는 전화기였다. 그녀가 팔을 뻗어 수화기를 들려고 했을 때, 갑자기 문이 열리고 이쓰미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또 장난전화야!" 그 말 때문인지 세이코는 잠시 주저하다가 그대로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여보세요." 말을 하자마자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고 수화기를 귀에서 조금 떼어내더니, 잠시후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역시 장난전화인가요?" "요즘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이따금 생각난 것처럼 걸려오지요." 오늘도 이미 몇 번이나 걸려왔고, 이쓰미가 전화를 받은 것이 틀림없다. 떨쳐버리기 힘든 꺼림칙함이 마음에 똬리를 틀었다. 그 불쾌감을 뿌리치기 위해 그는 벌떡 일어섰다. "그러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오늘은 정말 고마웠습니다." 신발을 신으려 할 때 전화벨이 또다시 정적을 가로질렀다. 세이코는 그를 쳐다보고 슬픈 표정을 지은 다음,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전화기에 손을 뻗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가볍게 제지하고,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다음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살인자!" 깊은 우물 바닥에서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뻔뻔스럽군. 언제까지 살아 있으려는 거지? 빨리 뒈져버리라구! 너희가 보상하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잖아? 내일 새벽 두 시까지 목이라도 매달아 죽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제 그만 좀 하시지!" 그는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남자가 받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상대방은 흠칫 놀 라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뚜뚜 하는 발신음이 여운처럼 귓가에 남았다. 그는 수화기를 원래 대로 돌려놓았다. "경찰에는 신고하셨나요?" "안했어요. 장난전화에는 별로 신경 써주지 않는다고 해서요." 그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장난전화의 이유가 명백한 만큼, 경찰에 호소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때 전화기 옆에 놓인 작은 카드가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회사의 사원증으로 세이코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준'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는 것은 정식사 원이 아니라 파트타임이나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준사원이라는 뜻이리라. "다바타 제작소...금속 가공 회사로군요." "예. 어떻게 아세요?" "우리 회사 하청회사라서 몇 번 가 본 적이 있습니다." "아, 그러세요? 그러면 빅우드에 근무하세요?" "그렇습니다." 주식회사 빅우드라는 것이 그가 근무하는 회사의 이름이다. 창시자의 성이 오키(대목)라 서, 그것을 영문으로 표기하여 빅우드라고 했다고 한다. "다바타에는 언제부터 근무하셨습니까?" "작년 여름부터예요." "그래요?" 뜻밖이었다. 집안의 기둥이 사라진 다음 어쩔 수 없이 일을 시작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 문이다. 그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듯이 세이코가 말을 덧붙였다.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것은 좀 이상하지만, 우리 집은 정말 돈이 없었어요. 남편은 하루 도 쉬지 않고 일을 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주머니에는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돈이란 건 원래 쓰면 없어지는 법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낭비하고 산 기억은 없어요." "그 정도로 초과근무를 했다면 수당도 적지 않았을 텐데요." "하지만 정말 월급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언제나 적자가 되지 않도록 아둥바둥 사는 것 이 고작이었으니까요." "월급을 얼마나 받았는데요?" 그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것도 잘 몰라요. 남편은 한 번도 월급 명세서를 보여주지 않았으니까요. 얼마씩 주는 생활비 가지고는 부족해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해서 일하기 시작한 거예요." "남편이 구두쇠였을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은행에 돈이 많이 들어 있지 않을까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젓는 그녀의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돈이 있으면 이렇게 살겠어요? 제가 일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요?" 그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스키 버스 운전기사가 그렇게 월급이 적다면 누가 일을 하겠는가. 그러나 세이코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버스 회사의 근로 조건에 대해서는 앞으로 협상하는 동안 분명히 밝혀지겠지요." 그는 갑자기 방관자적인 자세로 말하고 신발을 신기 시작했다.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녀와 연대의식을 가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에 얼굴을 맞댄 피해자 모 임 사람들을 배반하는 듯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몸조리 잘 하십시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섰다. 그녀가 뭐라고 한 것 같았지만 이미 그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4 저녁식사 메뉴는 죽순밥과 계란찜, 연어 생선구이였다. 모두 다 헤이스케가 좋아하는 음식 들이었다. "죽순밥이 조금 짠가?" 나오코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염분 섭취에 민 감한 그녀는 조금 짜다고 중얼거리는 것이 입버릇이었다. "오늘 아침 사건 말이야. 그 이후에 어떻게 됐지?" "오늘 아침 사건이라뇨?" "다지마와 엔도 말이야. 내가 착각했었잖아." 그녀는 순수한 어린 소녀처럼 환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그랬었죠. 조금 위험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신경 쓰 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나저나 정말 어린애들은 대단해. 일년만에 그렇게 변하다니 말이 야." "그것 때문에 오늘 하루는 정신이 없었어요. 특히 6학년쯤 되면 체격뿐만 아니라 얼굴 생 김생김도 갑자기 어른스러워지는 아이가 있잖아요. 결국 얼굴과 이름을 다시 외워야 했거든 요." "다 외울 수 있겠어?" "내 머리로는 어려워요. 당분간 대강 얼버무리면서 천천히 외우면 되요." 그녀의 손에는 자신의 밥공기가 들려 있었다. 모나미의 밥공기가 아니라 나오코의 밥공기 가. 그것을 보자 조금 이상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그나저나 그 엔도라는 꼬마는 뭐하는 녀석이야? 어째서 당신에게...아니, 모나미에게 그렇 게 친하게 구는 거야?" "신경이 쓰여요?" 나오코가 모두 이해한다는 듯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왜 기분 나쁘게 그렇게 웃어?" "아니에요. 신경이 쓰이는 게 당연하죠. 나도 신경이 쓰였거든요." "너무 거드름피우지 말라구. 어차피 알아봤겠지?" "그 엔도라는 애는 말이죠. 모나미의 첫째 남자친구예요." "첫째? 그게 무슨 뜻이야?" "왜 아람의 국왕은 첫째 부인, 둘째 부인하지 않아요? 그것과 똑같아요." "말도 안돼는 소리. 그러면 둘째, 셋째 남자친구도 있단 말이야?" "누가 둘째이고 셋째인지 확실히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지금 첫째 남자친구는 엔 도예요. 지난겨울부터 사이가 급진전됐나 봐요." "기가 막히군. 아직 어린애들이 건방지게!" 그는 토해내듯이 말하고 밥을 입에 넣었다. 가다랭이를 우려낸 물로 지은 죽순밥은 입에 척척 달라붙어 그야말로 씹지도 않고 술술 넘어갔다. 바로 나오코의 맛이었다. 갑자기 그녀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기분 나쁠지도 모르지만 모나미는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복도를 걸 어다니다 보면 다른 반의 남자애들도 이런저런 수작을 걸어오거든요." "그것은 놀리는 것뿐이다. 남자들은 다 그래." "원래 초등학생 정도의 남자애들은 좋아하는 여자 애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 아이가 싫 어하는 짓을 하는 법이에요. 당신도 그런 기억이 있죠?" "그런 걸 어떻게 기억하고 있어?" 식사를 마치고 나서 그는 설거지를 도와주었다. 마른행주로 그녀가 씻은 그릇의 물기를 닦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한번도 도와준 적이 없다고, 그녀는 볼멘소리를 했다. "물론 당신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모나미의 연약한 손을 도저히 그냥 내버려둘 수 없 어서 그래. 접시를 깨뜨리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말이야." "하지만 키도 그렇고 손도 그렇고, 나나 모나미나 별로 다르지 않다구요. 모나미가 조금 가냘프다는 것뿐이죠." "조금이 아니라 상당히 가냘프지." 그는 죽기 전의 나오코의 모습을 떠올렸다. 키 158cm, 체중 50kg 플러스 알파. 조금 통통 하고 애교가 넘치는 귀여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당신은 모르겠지만 모나미도 요즘 들어서는 집안 일을 많이 도와주었어요. 오늘 내가 만든 음식도 다 만들 수 있을걸요?" "그게 정말이야?" "바느질도 아주 잘 한다구요. 당신의 회색 양복 윗도리 단추가 떨어졌을 때 누가 달았는 지 아세요? 바로 모나미가 달았다구요.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죠?" "전혀 눈치도 못 챘는데. 흐음. 모나미가 달았단 말이지." 그는 사랑이 가득 담긴 눈길로 나오코 아니 모나미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 고 그 단추가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 쓰리라고 다짐했다. "다만 아직은 힘이 없는지 설거지를 하고 나면 팔이 아프다고 투덜거리곤 했어요." '그래, 손은 그럭저럭 아내와 비슷해도, 팔목은 절반이었지.' 그는 나오코의 팔을 쳐다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모임은 어땠어요?" "그렇게 큰 진전은 없었어." 그는 보상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8천만 엔이라는 엄청난 금액이 그녀의 가슴에도 와닿 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목표가 8천만 엔이니까 아마 더 내려가지 않을까?" "그렇겠죠." 설거지를 마친 나오코는 손에 묻은 세제를 물로 씻어냈다. "그보다 모임이 끝난 다음에 조금 찜찜한 일이 있었어." "찜찜한 일이요?" "그래." 그는 오가와 세이코가 사죄하러 들른 것과 돌아오는 길에 그녀의 집에 들르게 된 전후사 정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면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큰일을 하셨군요. 수고 많으셨어요." "뭐 자그마한 해프닝이라고 할 수 있지." 두 사람은 부엌을 떠나 거실로 들어갔다. 그가 텔레비전 스위치를 켜려고 할 때 나오코가 문득 생각난 듯이 입을 열었다. "지금 당신 말을 들으니까 생각났어요." "뭔데?" "버스 안에서 일어난 일이에요." "무슨 일이 있었어?" "운전기사들의 말소리가 들렸거든요. 아마 어느 휴게소에 도착했을 때였을 거예요. 다른 승객들은 화장실에 가느라 버스에서 내렸지만, 나와 모나미는 남아 있었어요. 모나미가 너무 나 달콤한 표정으로 꿈나라에 빠져 있어서 깨우기가 안쓰러웠거든요. 어떻게 할까 생각하던 차에 앞에서 말소리가 들려왔어요. 우리 바로 앞에 교대하는 운전기사가 앉아있고 그 앞쪽 에서 오가와씨가 운전하고 있었거든요."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데?" "특별히 이상한 말은 아니었지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어요. 피로를 없애도록 드링크제 를 마실까, 그보다 카페인이 잠을 쫓으니까 커피라도 마시는 게 어때, 하는 말들이었어요. 누가 누구에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흐음." 그는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말만으로도 그들이 지쳐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경찰에 말해주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실은 사고가 일어난 직후 나가노현 경찰서에서 모나미에게 이야기를 들어볼 수 없겠느냐 는 제안이 있었다. 경찰서에서는 살아난 사람들의 증언을 수집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는, 딸이 아직 충격으로 인해 말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서 똑같은 부탁이 있었다. 모나미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뉴스를 들었기 때문일 것이 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거절했다. 아직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이며, 사고 당시 잠에 빠져 있어서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는 설명을 덧붙이면서. 사실은 모나미를 함부로 다른 사람들 앞에 내놓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특 수한 상황 때문이었다. "그 정도 일이라면 특별히 말 안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런가?" 그는 스스로를 납득시키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오코를 증언대에 세우고 싶지 않다는 마 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보다 그 뒤의 이야기가 더 마음에 걸려요." "무슨 이야긴데?" "누군지 모르지만 이렇게 말했거든요. '자네도 정말 악착같이 일하는군. 오늘 정도는 쉬는 것이 좋을 텐데. 그렇게 아둥바둥 돈을 벌어서 뭐하려고 그러나?'라고요." "역시 과로를 걱정해 준거로군." "그게 아니라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그렇게 아둥바둥 돈을 벌어서 뭐 하려고 그러나' 하 는 말 말이에요. 왜냐하면 부인 이야기로는, 아무리 일을 해도 집안에 돈이 없다고 했잖아 요." "그 사람은 그렇게 말했지." "아무리 잔업을 해도 수당이 대단하지 않은 경우에 '그렇게 아둥바둥 돈을 벌어서 뭐하려 고 그러나?'라고 말해요? 그 말은 꽤 많은 돈을 벌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하지만 돈에 대한 감각은 개인에 따라서 다르잖아?" "당신이 직접 봤잖아요? 오가와씨 부인이 사치를 사는 것 같았어요?" "천만에!" 나무 판자를 엉성하게 엮어놓은 듯한 초라한 아파트. 싸구려 조립가구. 경품으로 받은 것 같은 조잡한 찻잔. "그러면 어떻게 된 거지? 벌기는 많이 버는데 집에는 돈이 없다는 뜻인가?" "바로 그거예요." "그렇다면 집에는 돈을 주지 않고 다른 곳에 사용했다는 거로군." "아마 그렇겠죠." "도박을 했나?" "아니면 여자겠죠." "으음." 그렇군. 여자가 있겠군. 가능성을 보면 오히려 그쪽이 더 높지 않을까. "부인은 그런 말은 한 마디도 안 하던데." "모르고 있든지 아니면 시치미를 떼고 있든지, 어느 한쪽이겠지요." "그렇겠군." 불현듯 세이코의 움푹 팬 뺨과 바싹 야윈 몸이 떠올랐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 이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탤런트 뺨치게 연기력이 뛰어난 것일까. 갑자기 나오코가 쿡쿡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는 깜짝 놀라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 았다. 정말로 우스워서 웃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모나미의 특징인 조금 치켜 올라간 커다란 눈이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왜그래?" "문득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녀의 입가에는 아직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달라붙어 있었다. "한심하다구? 무엇이?" 공허한 눈길이 천천히 그에게로 옮겨졌다. "안 그래요? 사고 원인을 생각해 보세요. 여자에게 바칠 생각이었는지 경마나 도박에 쏟 아부울 생각이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러한 돈을 벌기 위해 운전사는 하루도 쉬지 않고 악착스럽게 일했어요. 그 결과 사고가 일어나고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죽 고, 나와 모나미는 이런 꼴이 되어버렸지요. 참으로 어리석고 가치 없는 죽음이 아닌가요?" 차가운 얼음 조각이 온몸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말이었다. "내가 한번 알아볼게. 그가 벌어들인 돈을 어디에 썼는지 반드시 알아내고야 말겠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요. 미안해요. 그냥 어디엔가 항의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어디엔 가요. 가슴속에 쌓인 것을 이렇게 라도 토해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요." 그녀가 다시 살포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부자연스러운 미소가 아니었다. "이대로는 나도 납득할 수가 없어서 그래." 그렇게 말하고 그는 불단에 놓여 있는 나오코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어색한 부부 1 큰소리는 쳤지만 오가와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아보지 못한 채 이 주일이 흘러갔다. 초조 함은 마음이 터질 듯이 끓어올랐지만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최근 들어 경제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끝없이 내달리더니 헤이스케의 회사도 잔업과 휴일근무가 늘어났다. 현재 그의 직장에서는 전자식 연료분사장치라는 것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것은 엔진에 보내는 휘발유의 양을 컴퓨터로 조절하는 것으로, 종래의 카뷰레터가 고급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날도 점심식사를 마치고 평소와 다름없이 몇몇 동료들과 트럼프에 열중해 있었다. 장소 는 공장 입구에 있는 휴게실로, 회의용 책상을 둘러싸고 등이 없는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었 다. 트럼프를 함께 즐기는 동료들은 같은 생산라인에 있는 사람들로, 현장에서만 30년 외길 을 걸어온 베테랑도 있고 스물이 채 안된 젊은이도 있었다. 물론 재미뿐만 아니라 돈을 걸 고 하는 것이다. 월말에 집계하여 정산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헤이스케가 돈을 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 또야?" 한 번만 더 돌아가면 자신이 날 차례인데, 바로 옆에 있는 다쿠로가 선수를 쳤다. 입사한 지 2년째에 접어드는 그는 아직 젊은 나이였다. 헤이스케는 억울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카드를 내동댕이쳤다. "좀 살살 봐주면서 해. 당분간 야간근무가 없어서 다음달엔 쪼들리니까 말이야." "예?! 우리 라인은 다음주에 야간근무인데요?" 무스로 고정시킨 머리 모양이 망가질까봐 항상 작업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있는 다쿠로가 과장스럽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간근무를 하지 않는 사람은 나 혼자야. 자네들은 야간근무를 하니까 열심히 하라구." "어째서 반장님만 다른 거죠?" "어째 서긴, 야간근무를 할 수 없기 때문이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는 듯이 다쿠로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 던 나카오가 그의 팔을 탁탁 쳤다. 왜 이렇게 둔해, 하는 것처럼. "과장님한테는 승인을 받았나?" 나카오는 헤이스케보다 두 살이 많았지만 서로 흉금없이 마음을 터놓는 사이였다. 초밥 견습생 경력을 가진, 조금 독특한 사람이었다. "그래. 야간근무 대신에 B반을 도와주기로 했어." "그래? B반은 사람이 부족하다고 늘 투덜댔으니까 자네가 가면 많은 도움이 되겠지." 이제야 다쿠로도 사정을 이해했는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헤이스케는 사고가 일어나고 첫 출근한 날에 야간근무에서 제외해 달라고 과장인 고사카 에게 말해두었다. 그가 야간근무를 하면 일주일 동안 나오코는 혼자 밤을 보내야 한다. 여자 혼자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데 그녀의 외모는 아직 열 한 살짜리 어린애다. 고사카 과장은 한번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는데, 그 해답이 나온 것은 바로 며칠 전이었다. 야간근무 수당이 없어지는 것은 섭섭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혹시라도 집에 무슨 사고가 일 어나면 그때는 이미 늦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양반은 못된다니까." 휴게실 입구에서 고사카가 다가오고 있는 참이었다. "또 시작했군. 누가 땄지?" 고사카는 득점표를 보면서 물었다. 작은 키에 가분수처럼 큼지막한 얼굴이 얹혀 있는 데 다, 목이 짧아 머리가 몸통에 파묻힌 것처럼 보였다. "오! 오늘도 다쿠로의 성적이 좋은데. 헤이스케는 어떤가?" "뭐 항상 그렇죠." 그 말에 사람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매일 잃기만 한다는 뜻이었다. "게임은 지금부터니까 어디 두고 보자고." 헤이스케가 모자의 챙을 뒤로 젖히고 앞에 있는 카드에 손을 뻗칠 때, 고사카가 그의 얼 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분발하려고 하는 참에 미안하지만 부탁이 있어서 그러는데 잠시 얘기좀 나눌 수 있겠나?" 그는 혀를 끌끌차며 뻗은 손을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예요? 모처럼 패가 좋을 만하니까 그러시네." "화가 나는 사람은 저라구요. 한창 끗발이 오르는데 봉이 가시면 어떡해요?" 다쿠로의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해 보인 그는 '도박판'을 떠나, 조금 떨어진 의자에 앉 았다. "실은 오늘 오후에 다바타에 좀 다녀와 주었으면 하네. 지금 그쪽에서 D형 인젝터 시작품 을 만들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노즐 구멍을 뚫을 때 위치가 좋지 않은지 계속 불량품이 난 다고 하더군. 생산기술 쪽 사람들이 상황을 보러 간다고 하니까 자네도 같이 가서 봐주면 고맙겠네만." "당연히 가봐야죠. 그래야 나중에 생산할 때 도움이 되니까요." D형 인젝터라는 것은 내년에 본격적으로 생산될 제품으로 지금은 다바타 제작소에서 시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그 시작품을 이용해 빅우드 연구원들이 시험을 반복하고 최종적으로 승인해서 정식으로 생산이 시작되면 그가 생산라인을 담당하기로 되어있었다. 따라서 시작 품을 만드는 단계에서 생기는 문제도 파악해 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바타 제작소라는 말을 듣는 순간, 오가와 세이코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래? 그렇게 해준다면 좋겠네. 그러면 생산기술부 사람들에게 말해 두겠네." "알겠습니다." 그런 다음 고사카는 비밀이라도 말하는 듯이 조금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나저나 딸은 어떤가? 이제 좀 안정되었나?" "예. 그럭저럭요." 딸의 이야기가 나오면 자기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거 다행이군. 아무리 슬퍼해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으니까." 고사카는 숨을 길게 뽑고 나서 다시 덧붙였다. "하지만 남자 혼자서 자식을 키우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지. 특히 딸인 경우에는 말이야."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일단 그렇게 대답했지만 실은 딸은 키우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없고, 다만 아내와 둘이서 생활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을 뿐이다. "하긴 지금은 어렵겠지만 언젠가는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때는 얼마든 지 의논상대가 되어줄 테니까 사양치 말고 말해주게." 그는 자신의 무릎을 툭툭 치면서 이야기하는 고사카의 큼지막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과장님. 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 겁니까?" "무슨 말이라니? 재혼 말일세. 재혼. 자네 딸의 새 엄마 말이야."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크게 벌리고 고사카의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예에? 재혼이라뇨? 저는 재혼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물론 지금은 재혼을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을 거야. 아무튼 머리 한쪽 구석에 생각해 두었다가 재혼할 마음이 생기면 주저하지 말고 나에게 오게. 알겠지?" 고사카가 어깨를 두두리는 바람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다바타 건을 잘 부탁하네." 밖으로 나가는 고사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는 한꺼번에 두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 다. 한 가지는 고사카가 남의 일을 자기 일처럼 앞장서서 처리해 준다는 것, 그리고 또 한가 지는 나오코와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서 주었다는 것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헤이스케는 두 명의 생산기술 담당자와 함께 회사 차를 타고 다바타 제작소로 향했다. 두 사람 모두 스스럼없이 농담을 할 정도로 서로의 마음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들이었다. 기시마는 그보다 몇 살 아래였고 가와베는 아직 20대 중반으로, 생산라인을 가동시킬 때에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얼굴을 마주치게 될 것이다. 다바타 제작소는 후추에 있었다. 밭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들어선 느낌의 건물은 사회 교 과서에 흔히 등장하는 공장 표시처럼 지붕이 지그재그로 되어 있었다. 생산라인이 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빅우드의 공장과는 달리, 여기에는 갖가지 공작기계들 이 잡다하게 놓여 있었다. 물론 아무렇게나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모기업의 무리한 요구에 언제라도 따를 수 있는 시스템으로 되어있을 것이다. 그는 기시마와 가와베와 함께 D형 인 젝터의 노즐 구멍 뚫기 공정을 시찰하면서 책임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모기업에서 보러 왔 다는 것만으로 그들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반장이 바싹 굳어 있었다. 그는 안쓰러운 마음 이 들어 우리는 그렇게 높은 사람이 아니니까 긴장을 풀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문제에 관한 대화는 한 시간 반만에 끝이 났다. 현장의 반장인 그에게는 참고가 되는 이 야기가 많아서 몹시 유익한 방문이었다. 문제는 아직도 남아 있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생산기술 담당자의 몫이다. 기시마와 가와베는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이마를 맛대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아는 사람에게 인사하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공장 안을 둘러보았다. 천 명 정도 되는 근로자의 대부분은 남자들로, 여자들은 보통 사무원으로 일하겠지만 이 회사도 빅우드와 마찬가지로 사무원을 파트타임으로 쓰지는 않을 것이다. 현장 근로자 중에 여자를 많이 쓰는 부문은 코일은 감는 곳인데... 그는 대강 짐작을 하고 걸음을 내딛었다. 모터 속에는 전자석이 들어있지만, 코일을 감는 작업은 대부분 여자들이 하고 있었다. 공장의 한쪽 구석에 있는 코일반에서는 열 명 정도의 여자들이 기계를 향해 작업하고 있었다. 그러나 푹 눌러쓴 모자와 보안경 탓으로 얼굴을 알 아볼 수 없었다. 그는 작업하는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서 한 사람 씩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 때 한 여자가 작업하는 손길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응시하더니, 눈길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모자와 안경이 몹시 크게 보이는 것은 가죽이 뼈에 달라붙은 것처럼 야윈 얼굴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임자로 보이는 남자에게 가서 무슨 말인가 했다. 남자가 그를 힐끗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안경을 벗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여자는 분명히 오가와 세이코였다. "지난번에는 여러모로 고마웠습니다." 그녀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발은 어떠십니까?" "예. 이제 완전히 다 낳았어요. 여러 가지로 폐를 끼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보다 자리를 떠나도 괜찮습니까?" "주임님에게 사정을 말씀드렸어요." "예에..." 자신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 그는 조금 마음에 걸렸다. 사람들의 힐끔거리는 시선을 피 해 그들은 고주파 전원장치의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커다란 옷장 만한 그 사각 장치는 금속 샤프트를 고주파수에 넣는데 사용되고 있었다. "일 때문에 왔다가 겸사겸사 들른 겁니다." "그러세요?" 세이코는 긴장 때문인지 어색함 때문인지 바닥에 고정된 시선을 들지 않았다. "실은 그 이후에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지만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서요." 그 말에 세이코가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상처받은 표정이 역력했다. "일에 비해 남편의 수입이 적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른 데서도 확인해 보았는데, 적어도 당신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는 아니었을 겁니다." 한순간 그녀의 눈빛에 처량할 정도로 깊은 슬픔이 감돌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정말로 돈이 없었어요." "남편이 다른 데에 사용하지는 않았나요?" 잔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눈을 크게 치켜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깜짝 놀란 커다란 눈이 얼굴에서 쏟아질 것 같았다. "바람을 피웠다는 말씀이세요?" "도박일지도 모르죠. 또는 당신이 모르는 빚이 있었을지도 모르고요."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 일은 생각할 수 없어요. 내가 알고 있는 한,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요." 그러나 아내가 모르는 사이에 많은 빚을 지는 일은 흔히 있을 수 있다. 또는 친구의 빚보 증을 서주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까지 참견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 같았다. "월급 명세서를 본 적이 없다고 하셨지요?" "예." "한번도 없나요? 월급이 얼마인지 궁금한 적도 없었습니까?" "죄송해요." 세이코는 마치 선생님에게 야단맞는 학생처럼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믿어지지 않는군요." 헤이스케의 입에서 탄식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 한숨은 그의 속마음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만약에 나오코였다면 이번 월급이 얼마인지 즉시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문득 생각난 듯이 그녀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별로 말해주지 않았어요." "하지만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지 않습니까?"" "6년이에요." "예?" "결혼한지 6년 됐어요." 그 순간, 그의 머리에 왠지 이쓰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요? 그렇다면 따님은요?" "제가 데리고 온 아이 에요." "그러면 전남편과는 이혼하신 겁니까?" "아니에요. 이쓰미의 아버지는 10년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래요?" 갑자기 명치끝이 아려왔다. 눈앞에 있는 여자와 함께 이쓰미라는 소녀도 가여워진 것이다. 6년만에 새로운 아버지에게 익숙해질 수 있었을까. "남편은 초혼이셨나요?" "오래 전에 결혼한 적이 있었다는 말은 들었어요. 하지만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를 해주지 않아서 저도 잘 몰라요." "그래요?" 그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여기에서 그녀의 가슴아픈 이야기 를 들어서 어쩌려는 것인가. "어쨌든 남편이 바람을 피우거나 도박을 하는 낌새는 없었다는 거지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요!" 그녀는 작지만 단호하게, 목소리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게 할 수는 없어서 그는 손목시계를 보면서 말했다. "이제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일하시는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저,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금방 돌아올 테니까요." "무슨 일인데요? "예, 그냥 저..."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어딘 가로 뛰어갔다. 코일 작업장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잠시 후에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새하얀 포장지로 싼 작은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이것을 따님에게 전해 주세요. 선물로 받은 것을 드려서 미안하기는 하지만." 비디오테이프 정도 크기의 물건은 포장지에 인쇄되어 있는 글자에서 내용물을 짐작할 수 있었다. 홋카이도 명물, 화이트 초콜릿이었다. 아마 홋카이도에 다녀온 사람에게서 받은 선 물일 것이다. "아닙니다. 댁의 따님에게 가져다주십시오. 선물을 준 사람도 그럴 생각으로 주었을테니까 요." "괜찮아요. 두 개나 받았는걸요. 게다가 우리 딸아이는 별로 단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녀는 보기와는 달리 단호한 면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옆으로 지나가던 젊은 작업자가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정 그러시다면 고맙게 받겠습니다." 끝까지 거절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아서 그는 하는 수 없이 초콜릿을 받았다. "그러면 그만 가볼게요." 중요한 목적을 완수한 사람처럼 돌아서는 세이코의 안색이 조금 밝아져 있었다. 그러나 그 뒷모습에서 알 수 없는 서글픔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가와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회사로 향하면서 차안에서 포장지를 뜯어 두 사람에게 초콜릿을 권했다. 여기에서 다 먹지 못하면 직장 동료들에게 나눠줄 생각이었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렇듯이 나오코도 초콜릿만 보면 정신을 못 차렸지만, 세이코에게서 받은 선물이 라고 하면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헤이스케씨는 안 드세요?" 기시마가 초콜릿 상자를 들고 물었다. "응? 그러면 하나 먹어볼까?" 그는 바둑알보다 조금 큰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달콤한 맛과 함께 아련한 향기가 싸목싸 목 입안으로 퍼져나갔다. 초콜릿을 먹는 것은 몇 년 만일까. 그때 불현듯 생각이 떠올랐다. 충치가 생길 것을 걱정하여 나오코는 모나미에게 초콜릿을 먹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2 헤이스케는 거의 아홉 시가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가능한 빨리 오려고 했지만, 두 시간 의 잔업만은 어떤 핑계를 대어도 빠질 수가 없었다. 나오코는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 다가 그가 들어서자 벌떡 일어섰다. "이제 오세요? 금방 식사 준비를 할게요." 그는 이층 침실로 올라가서 운동복 바지와 스웨터로 갈아입고,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그 때 이미 부엌에서는 식욕을 자극하는 구수한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코를 킁킁거 리며 말했다. "오늘은 닭고기 계란 덮밥인가?" "정답! 그리고 모시조개 된장국!" "벌써 침이 넘어가는데." 닭고기 계란 덮밥과 모시조개 된장국은 그가 무엇보다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신문을 보려고 하다가 한쪽 구석에 놓여있는 책과 공책에 시선이 쏠렸다. 산수 교과서와 공책으로 교과서에 끼어있는 종이는 문제를 인쇄한 프린트물이었다. 그는 부엌에 대고 소리 쳤다. "공부하고 있었어?" "아! 그거 숙제예요. 내일까지 해가야 되요." "환풍기 소리에 지지 않으려는 듯 나오코의 목소리가 여느 때보다 커졌다. "대단한데! 보통 고생이 아니겠어." "고생 정도가 아니에요. 나중에 좀 도와주세요." 그녀는 쟁반에 밥공기를 두 개 얹어서 거실로 돌아왔다. 쟁반을 들고 있는 팔이 애처로울 정도로 가늘었다. "나중에 숙제를 도와달라구?" "당연하잖아요! 당신 말고 누가 있어요?" 그녀는 밥그릇을 탁자 위에 얹고는 다시 부엌으로 돌아갔다. 된장국을 가져오기 위해서였 다. "숙제를 도와주면 안 된다고 한 사람은 당신이 아니었던가?" 그녀는 된장국을 들고 오면서 그를 흘겨보았다. "나는 지금 모나미가 아니잖아요! 게다가 좀 보세요. 생각보다 문제가 너무 어렵다구요." "어려운 것보다 이런 문제는 오랜만에 보는데. 이것은 면적을 구하는 공식이야." 그는 신기한 듯이 프린트물을 들여다보았다. "과연 이과 출신은 다르군요." "하지만 6학년 산수쯤은 당신도 할 수 있잖아." "단순한 계산 문제는 풀 수 있지만 도형이 나오고 공식에 대입해서 풀어야 하는 것은 빵 점이에요. 옛날부터 꽝이었다니까요." "그래? 어쨌든 밥이나 먹고 얘기하자구." 닭고기 계란 덮밥도 된장국도 씹기도 전에 목으로 넘어갔다. 역시 나오코의 음식 솜씨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음식을 이렇게 잘하는데 산수를 못한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으랴. 문득 그런 생각은 들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모나미라면 이 숙제를 어떻게 했을까? 잘 모르겠다고 징징거리며 나에게 매달렸을까?" "그렇지 않았을 거예요. 당신을 닮아서 산수를 잘했거든요. 사실. 그래서 조금 힘들어요." 그녀는 얼굴을 약간 찡그리며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초등학생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 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 "일이라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을 느끼거든요. 다른 애들은 나를 산수를 잘하는 애라고 생각하는데 현실은 전혀 아니잖아요. 사실은 내가 배우고 싶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못하게 됐다고 할 수도 없고, 게다가 선생님까지 나라면 이 정도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바라보지 뭐예요? 억지로 미소는 짓고 있지만, 언젠가 들통이 날 것이라 고 생각하니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니까요." 그는 나지막한 신음소리를 내뱉고는 된장국을 들이켰다. "초등학교 산수인데?" "그렇게 가볍게 말하지 마세요." "하지만 서른 여섯이나 돼서..." 그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현재의 나오코는 몇 살로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기 때문이었 다. 하지만 서른 여섯이라는 말에 별다른 저항감은 없는 것 같았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거예요. 초등학교때 풀지 못했던 문제를, 나이 를 먹었다고 해서 풀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하긴 그렇지." 그는 접시에 있는 장아찌에 젓가락을 뻗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두 시간 짜리 미스터리물이 시작되었다. 출연자만 보아도 누가 범인인지 대강 짐작이 갔다. "그러면 밥을 먹고 한숨 돌리고 나서, 산수 특별 훈련이라도 시작해볼까?" "마음은 무겁지만 하는 수 없죠 뭐." 그녀도 장아찌에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의 입안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식사를 마친 다 음에는 텔레비전을 끄고 탁자를 책상으로 삼아 특별 훈련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 시간도 지나기 전에 뜻밖의 결과에 나오코는 호들갑을 떨었다. "뭐야? 정말 간단하네요!" 숙제를 전부 마친 그녀의 눈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충만감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산수문제를 술술 푼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과연 당신이에요. 가르치는 방법 이 탁월한데요." "아니야. 내가 잘 가르쳤다고 생각하진 않아." "예? 그런데 너무 알아듣기 쉬워요. 어째서 지금까지 산수를 못했는지 이상할 정도예요." 그는 기쁨에 들떠 있는 나오코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시선을 허공으로 옮겼다. "그것은 혹시 뇌가 바뀌었기 때문이 아닐까?" "예?"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머리에 손을 댔다. "의식은 당신의 것이지만 뇌는 모나미의 것이잖아. 재능이라든지 잘하는 과목은 뇌에 따 라서 정해지는 것이니까, 지금의 당신은 당연히 모나미의 똑같은 소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되나요?" 그녀도 이해할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육체가 바뀐 이상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왜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을까. "하지만 모나미처럼 산수라든지 자연 과목을 좋아할 수 없어요." "과연 그럴까? 산수 공부를 하기 전과 하고 난 지금은 어때? 조금 달라지지 않았어? 지금 도 역시 싫어?"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뚫어지게 보더니 이윽고 긴 속눈썹을 들어올려 그에 게 시선을 고정했다. "잘은 모르지만 내일 산수 시간이 있다는 것만으로 배가 아프지는 않은 것 같아요." "전에는 아팠어?" "아주 많이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녀는 어린 소녀답게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커피라도 마실까요?" "그거 좋지." 한쪽 무릎을 세우고 일어서려고 했을 때였다. 그때 갑자기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그녀는 이마에 주름을 잡고 고개를 비틀었다. "어머, 이상하네." "왜 그래?" "이상해요." "그러니까 뭐가 이상하냐구?" "그냥..." 그녀는 헤이스케를 내려다보고 몇 번 눈을 깜빡이고 나서 재빨리 화장실로 들어갔다. 역 시 산수시간을 생각하기만 해도 배가 아픈 것일까. 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리모컨의 전원버 튼을 눌렀다. 뉴스가 시작되고 오늘의 프로야구 결과가 나오고 있는 참이었다. 그는 그쪽으 로 의식을 집중시켰다. 자신이 좋아하는 자이언츠 팀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오코는 스포츠 코너가 끝나고 광고를 시작해도 나오지 않더니, 일기예보를 시작할 무렵 이 되어서야 겨우 배를 잡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녀의 표정은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신기한 발견을 한 것 같기도 했다. 그 어느 쪽이든 그렇게 심각하게는 보이지 않아서 그도 가볍게 물어보았다. "무슨 일이야?" "음..." 그녀의 입에서는 우선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아니에요. 아픈 것은 아니에요." 나오코는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그러나 왠지 안절부절못한 표 정으로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더니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빨간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뭐야?" 한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도 그렇게 둔하지는 않았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몸을 뒤로 젖히면서 말했다. "아 그거?" "그래요. 그러고 보니 모나미, 아직 이었어요. 빠른 아이는 5학년 때 시작한다고 하던데." "흐음 그런데 어때?"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는 애매모호하게 물어보았다. 남자는 모두 그렇게 아둔한 동물인지도 모른다. "어떻다니요?"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그러니까 그거 말이야..." 그의 당황한 말투와는 달리 그녀의 얼굴에서는 서서히 긴장감이 사라졌다. "특별히 다르지는 않아요. 생리에는 익숙해져 있으니까요. 어쨌든 20년 이상 익숙해져 왔 고, 게다가 처음이니까 양도 많지 않고요." "지금은 어떻게 했어?" "지금이요? 임시로 휴지를 대어 놓았어요. 조금 크긴 하지만 내 것이 있으니까 그걸 쓰면 되요." "흐음." 그렇게 애매한 말밖에 나오지 않아서 그는 쑥스러운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에 진짜 모나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더라도 이렇게 얼빠진 반응밖에 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일단은 축하해." "고마워요." 그녀는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는 듯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모나미의 몸도 조금씩 여자가 되어가는군요. 나처럼 생리통이 심하지 않았으면 좋 겠는데요. 하지만 이것만은 당신일 닮을 수는 없잖아요." "그렇겠지." 그녀의 가벼운 농담에도 그는 순수하게 웃을 수 없었다. '여자가 되어간다.'는 말이 언제까 지나 머릿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이미 정신적으로 완전히 성인이 된 나오코가 다음에는 성인 여자의 몸을 손에 넣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3 헤이스케가 사는 집의 욕실은 건물 크기에 비하면 상당히 넓었다. 욕조는 발을 뻗어도 느 긋하게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고, 욕조 밖에서 몸을 씻는 곳도 넉넉하게 여유가 있었다. 아 마 전에 살던 사람이 목욕을 좋아했던 모양이었다. 그가 이 집을 마음에 들어한 첫 번째 이 유도 바로 이 넓은 욕실 때문이었다. 욕조에 발을 담근 채 그는 욕실 안을 둘러보았다. 벽에 있는 작은 못에 샤워캡이 걸려있 었다. 나오코는 저 샤워캡을 최근에 사용한 적이 있을까. 샴푸나 비누를 올려놓는 선반에는 핑크빛 무늬가 있는 작은 면도기가 놓여 있었다. 그가 사용하는 면도기는 아니다. 면도만 하면 붉은 피를 보고야 마는 그는 매일 아침 전기 면도 기를 사용하고 있고, 그 핑크빛 면도기는 나오코가 겨드랑이 털을 깎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 나 모나미의 몸으로 변한 지금은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의 집에서는 모두 매일 목욕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오늘 생리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나 오코는 들어오지 않았다. 혼자 목욕하는 것은 그녀가 병원에 입원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 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도 야간근무를 하는 날 이외에는 언제나 나오코나 모나미 중에 어 느 한 사람과 함께 들어가서 넓은 욕실을 최대한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나오코와 같이 목욕할 수는 없지 않는가. 물론 보통 부부라면 늙어 목숨이 다할 때가지 같 이 목욕한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나오코이면서 나 오코가 아니고, 모나미이면서 모나미가 아닌 것이다. 그의 친구 중에서도 모나미와 똑같은 나이의 딸을 둔 사람이 있는데, 최근에는 함께 목욕 하지 않는다고 한탄하고 있었다. 모나미도 이제 슬슬 그렇게 할 때가 되었다. 그렇다면 누가 보지 않는다고 해도 딸과 함께 목욕하는 것은 이상할 지 모른다. 생각하면 할수록 골치가 지끈거리고 머리가 멍해졌다. 그는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욕조에서 나왔다. 거실에서는 나오코가 학교에 갈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시간표가 적힌 종이를 탁자 위에 놓고, 그것을 보면서 교과서와 노트를 가방에 넣었다. "조금 전에도 생각했는데, 왜 그런 것을 여기에서 하지?" 그는 냉장고에서 차가운 캔맥주를 꺼내면서 물었다. "여기에서 하면 안되나요?" "안되지는 않지만 모나미의 방이 있는데 왜 구태여 여기에서 하는지 궁금해서." 모나미의 방은 이층에 있는 그의 침실 바로 앞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요." 그녀는 무슨 이유라도 있다는 듯이 말꼬리를 길게 끓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특별히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방을 사용하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어째서?" 그녀의 시선이 헤이스케를 똑바로 포착했다. 그 시선에는 왜 그런 것도 이해하지 못하느 냐는 원망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이유 같지는 않겠지만 그 방은 모나미가 살아 있을 때와 너무나 똑같아요." "뭐야?" "책상 위도, 침대 커버도, 모든 것을 모나미가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해놓았거든요. 책이 나 노트처럼 반드시 필요한 것을 꺼내야 할 때는 손을 대지만, 나머지 것들은 될 수 있으면 움직이지 않으려고 해요." 그렇게 말하더니 그녀는 자신의 손끝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는 캔맥주를 따려고 하던 손을 멈추었다. 왜 지금까지 그것을 깨닫지 못한 것일까. 오늘날까지 모나미의 방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지 않은 자신의 무신경함에 화가 치밀었다. 나오코는 모나미인 척하 고 학교에 가면서도 집안 청소를 하기 때문에 딸아이의 방을 어떻게 하느냐에 대해서 매일 고민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렇군." "미안해요. 나 스스로도 바보 같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잠깐 둘러봐도 될까?" "모나미 방에 가시게요?" "그래." "물론 괜찮아요." 그가 허리를 들어올리자 나오코도 따라서 일어섰다. 이층에는 방이 두 개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면 마주보고 문이 두 개 있는데, 오른쪽이 모 나미의 방, 왼쪽이 부부의 침실이었다. 오른쪽에 있는 문을 천천히 열자 어렴풋이 샴푸 냄새 같은 향기가 떠다녔다. 방안에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불켜는 스위치를 찾기 위해 벽을 더듬자 옆에서 나오코가 먼저 손을 뻗었다. 탈칵. 한순간 형광등이 깜빡이더니 눈부신 새하 얀 빛이 방안 가득 뿌려졌다. "아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소리가 그의 입을 뚫고 새어나왔다. 그곳은 틀림없이 모나미의 방이었다. 창가에 있는 책상에는 한창 인기가 치솟고 있는 남자 그룹을 표지모델로 한 잡지 가 놓여 있고, 똑같은 그룹의 포스터가 벽면을 가득 장식하고 있었다. 소년대라는 이름을 그 는 바로 얼마 전에 모나미에게 듣고서야 알았다. 책장에는 소녀들이 좋아할 만한 순정만화 가 빼곡이 꽂혀 있고 작은 침대에는 체크 무늬 침대 커버가, 베갯맡에는 곰인형, 바로 그 곰 인형이 앉아 있었다. 침대 표면이 움푹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 것은 그곳에서라도 모나 미의 흔적을 찾으려는 무의식이 작용했기 때문이 아닐까. 만지면 따뜻한 체온이 전해질 것 만 같은 모나미의 침대... "청소는?" "청소기로 바닥만 하고 있어요. "그래서는 먼지가 수북히 쌓이잖아?" 추억을 잃어버린 소녀의 눈길로 나오코가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언제까지나 이렇게 놓아둘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겠지." 그는 한숨을 내쉬며 모나미가 평소 앉아 있던 의자로 시선을 옮겼다. 의자에는 딸기 무늬 를 옹기종기 수놓은 작은 방석이 깔려 있었다. 모나미가 지금보다 더 어렸던 시절 나오코가 만들어준 것으로 제법 자라고 나서도 사용하고 있었다. "나오코. 잠시 저 의자에 앉아봐 주지 않겠어?" "의자예요?" "그래." 그녀는다른 곳에 손을 대지 않으려는지 조심스럽게 의자를 빼서 천천히 걸터앉았다. 그리 고 뒤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됐어요?" 그는 허리에 손을 대고 앉아 있는 나오코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모나미는 그의 세계로 돌아와 있었다. 마치 추억 속의 사진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딸의 이름이 새어나왔다. "모나미..." 남편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10넌이 넘게 살을 부딪치고 산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부탁이 있는데요. 거울을 가져와 주지 않겠어요?" 그도 즉시 나오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거울이라. 거울이 어디 있더라?" "될 수 있으면 큰 것이 좋겠어요." "알고 있어. 잠시만 기다려. 금방 가져올 테니까." 그는 모나미의 방을 나서서 건너편에 있는 침실로 뛰어들어갔다. 벽에는 서랍장 두 개와 나오코의 옷장이 있었다. 그것은 모두 결혼할 때 그녀가 가져온 것이다. 그는 옷장으로 다가 서서, 두 손으로 거울을 잡고 힘을 주어 들어올렸다. 거울이 빠진다는 것은 이사할 때 보아 서 알고 있었다. 그는 거울을 빼내어 모나미의 방으로 돌아갔다. "굉장해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녀는 손뼉을 치며 과장스럽게 감탄했다. 그는 거울을 바닥에 세우고 그녀를 향했다. "어때?" "조금만 더 위로 향해줘요. 그 다음엔 왼쪽으로요. 예, 이제 됐어요." 그녀는 거울에 비친 딸의 모습에 눈길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촉촉이 젖은 눈을 헤이스케 에게 향했다. "사진을 찍어두고 싶어요." "카메라를 가져올까?" "아니, 필요 없어요." 사진을 찍어봤자 의미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다시 거울 속에 있는 딸의 모습을 바라 보면서 가끔 얼굴의 각도를 바꾸거나 손발을 움직이기도 했다. "앞으로 이 방을 사용해. 청소도 잘하고 말이야...응?" 그녀는 야단맞는 아이처럼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러나 다시 들었을 때는 살포시 미소가 배어나 있었다. "그래요." 이층으로 올라간 김에 두 사람은 그대로 잠을 자기로 했다. 결혼한 이후 그들은 한 번도 떨어져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깜박 잠이 들려고 했을 때 헤이스케는 어깨를 두드리는 느 낌에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 나오코가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잠에 취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그녀는 말을 꺼내기 어려운 듯이 우물쭈물거렸다. 무슨 일이든 대쪽처럼 확실하게 결정 내리는 그녀로서는 이상한 일이었다. "그거 말인데요. 어떡하죠?" "그거라니? 그게 뭐야?" "그러니까 그거 말이에요. 그, 거!" "그거?"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자마자 그렇 게 쏟아지던 잠은 어딘 가로 달아났다. "그거 말이야?" "예.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겠어?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하는 건 안되겠죠?" "당연하지. 바보 같은 소리하지마...자기 딸 하구, 더구나 초등학생 딸하고." "하지만 여보, 참을 수 있겠어요? 전혀 하지 않고도? 쌓이지 않아요?" "아무리 참을 수 없어도, 그리고 당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모나미의 모습을 한 당신 에게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는 변태가 아니야." "그러면 다른 여자와 할 거예요?" 그는 몸을 벌떡 일으켜 이불 위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음. 그것은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그보다 당신은 어때? 그러한 욕구가 있어?" 예전에는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잠을 자다가 옆구리를 찌르고는, '여보, 우리 가져요'하고 수줍은 듯이 속삭이던 일도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그런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아요. 상상을 해도 가슴으로 느낌이 전해지지 않아요. 몸이 반응하지 않는다고 할까요?" "참으로 이상하군. 하지만 그것은 당연할지도 모르지." 초등학생이 섹스를 생각하기만 해도 몸이 반응한다면 오히려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그것에 대해서는 하는 수 없지. 포기하는 수밖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석연치 않은 것 같았다. "손이라든지 입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역시 안되겠죠?" "말도 안돼는 소리 그만해. 제발 부탁이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말아줘. 당신은 그냥 하는 말 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모나미의 입에서 듣는 것 같으니까." "아참, 그렇죠? 미안해요. 그러면 그것에 대해서는 없었던 걸로 할게요." "그래." 그는 다시 이불에 발을 집어넣다가, 이불을 덮기 전에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한 가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뭔데요?" "우리 호칭에 대해서 말인데, 집안이라고 해서 나는 당신이라고 부르고 당신은 여보 라고 부르고 있잖아. 이것은 고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밖에 있을 때와 똑같이 부르자는 거예요?" "그래. 그렇게 습관화할 필요가 있을 거야. 앞으로 살아갈 세월이 만만치 않으니까." "그렇군요..." 나오코는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잠시 생각에 잠겼고, 그 동안 그는 그녀의 잠옷 무늬 를 보고 있었다. 고양이 그림이 그려져 있는 잠옷이었다. 화가 난 고양이와 울고 있는 고양 이, 웃고 있는 고양이, 뾰로통하게 삐진 고양이 등, 갖가지 고양이들이 앙증맞게 그려져 있 었다. 생각이 정리된 것인지,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그러는 편이 좋겠어요." "그래?" "그러면 오늘밤부터 여보가 아니라 아빠로군요." "그렇게 되겠지." "그러면 편히 주무세요. 아빠." "잘자...모나미." 그는 이불 밑으로 들어갔지만 잠은 어딘 가로 달아났고, 시간이 지날수록 눈은 더욱 말똥 말똥해졌다. 몸을 뒤척이고 있자니 그녀에게서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어릴 때는 자리에 눕기만 하면 잠이 드는 법이다. 그는 맑게 가라앉은 머리로 어둠의 건너편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나는 딸과 아내 가운데, 과연 어느 쪽을 잃어버린 것일까. 미래를 위한 선택 1 일어서 있는 남자의 뺨 주위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얼굴에 기름기가 번지르르한 것을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숱이 적은 머리칼도 구운 김을 발라놓은 것처럼 끈끈하게 달라붙었고, 골프에 빠져 있는지 넓은 이마까지 햇볕에 그을려 거무칙칙하 게 반들거렸다. 그러나 얼굴 전체에서는 살아 있다는 증거인 핏기를 느낄 수 없었다. 남자는 4천만에서 4천백만이라고 했다. 숨막히는 정적을 찢은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 다. 드디어 양쪽의 공방이 시작되었다는 신호였다. 이런 자리에는 있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 다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을 보상하려고 합니다. 남녀나 나이에 따라서 다소 증감할 필요가 있겠지만요." 말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오쿠로 교통 총무부장인 도미이라는 사람이었다. 참으로 떠맡 기 싫은 역할이군. 아무리 적이지만 헤이스케는 동정을 금할 수 없었다. 사고를 일으킨 사람 은 그 사람이 아닌 것이다. 사고 유족회와 오쿠로 교통과의 보상 교섭은, 언제나 모임을 갖던 호텔 회의실에서 행해 지고 있었다. 사고가 일어난 지 벌써 3개월이 지났다.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유족들은 거의 전원이 참석하고, 회사측에서는 도미이 이외에 다섯 명의 대표자와 고문변호사가 와있었다. 회의실 가장 앞자리에 회사쪽 사람이 앉고 그들과 마주하는 것처럼 유족용 자리가 놓여 있 어서 마치 기자회견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금액은 어떤 근거에서 나온 것입니까?" 유족들의 변호사인 무카이가 감정이 담기지 않은 평탄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러자 일단 자리에 앉았던 도미이가 다시 일어섰다. "과거의 사고에 비추어 볼 때 당사로서 지불할 수 있는 최고의 금액입니다. 정부에서도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라고 했으니까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표간사인 하야시다가 손을 들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귀사에 실수가 없고, 불행하게도 예측할 수 없는 사고가 일어난 경우 의 상한선이 아닙니까? 가령 날씨가 갑자기 악화되었다든지 다른 차가 주행을 방해했다든지 말입니다. 하지만 이번 사고는 그렇게 예측할 수 없는 사고가 아니잖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이번 사건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인재였다고 생각합니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 하자면 과실치사나 마찬가지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휴가도 없이 일해 서 기진맥진해 있는 운전사에게 위험한 스키버스를 운전시키다니, 이것은 사고가 일어나라 고 부채질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렇게 위험한 버스에 돈을 받고 승객을 태우는 것은 곧 범죄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손님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살인에 가 까운 일을 해놓고 과거의 사고에 비쳐본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뻔뻔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습 니까?" 하야시다는 흥분에 들떠서 하고 싶은 말을 단숨에 토해내더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몇 사람이 그에 동조하듯이 자그맣게 박수를 쳤다. 회사측 사람들의 얼굴은 당연히 떫은 감을 씹은 듯이 일그러졌다. 과실치사나 살인이라는 말이 가슴을 찌른 것도 있겠지만, 그 말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며칠 전에 노동청에서 오쿠로 교통의 간부사원 두 명을 노동기준법 위반 혐의로 도쿄 지 방검찰청에 송치했다고 발표했다. 그에 앞서서 특별보안감사를 하고 있던 관동지방 운수국 에서는 과로 운전 방지위반으로 안전확보에 과실이 있다고 해서, 관광버스 여덟 대에 대해 서 14일간 운행금지 명령을 내렸다. 감사결과에 따르면 한달 가까이 하루도 쉬지 않고 운전 하던 운전사가 네 명이나 있었고, 이것은 자동차운송사업 운수규칙에 정해진 운전자의 과로 방지 위반에 해당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나가노현 경찰에서도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오쿠로 교통을 수사하고 있어서, 그 결과 에 따라서 새로운 처분이 내려질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한 '지원 사격'이 있었기 때문에 하야시다로서도 강력하게 발언할 수 있었던 것이 틀 림없다. "애당초 너무 치사하잖아요? 자신들의 죄를 순순히 인정하지 않다니 말이요!" 헤이스케 옆에 있던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쌍둥이 딸을 한꺼번에 잃은 후지사키다. "그저께 신문에서 봤는데, 과로 운전을 한 본인이 나쁘다는 식으로 말하던데요!" "아니 그건 말이죠." 회사측 자리에서 다른 남자가 일어섰다. 운행관리부장인 가사마쓰라는 사람으로, 헤이스케 는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회사에서 초과근무를 해달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고 강요한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특 히 오가와 운전사의 경우에는 배치를 담당하는 담당자에게 자신의 근무를 늘려 달라고 부탁 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후지사키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회의실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돼는 소리! 아무리 돈이 필요하다고 해도 그렇지,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소!" "정말입니다. 내부 조사를 통해서 알아낸 사실이지요." 가사마쓰는 입에 침을 튀기며 회사를 변호했다. 그 말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나오코는 분 명히 한 운전사가 '그렇게 아둥바둥 돈을 벌어서 뭐하려고 그러나?'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분명히 운전사가 자진해서 정해진 시간 이외에 초과근무를 했다는 것을 의미 한다. 역시 오가와는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돈을 어디에 쓴 것일까. 그 때 무카이 변호사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렇다고 해도 회사측 책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노동기준법에는 과로 근무 강요뿐만 아니라 본인이 희망하는 경우에도 그것을 금지하고 있으니까요." 가사마쓰가 허를 찔린 듯한 표정으로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물론 그렇습니다. 저희 회사에서도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그저께 나온 신문 보도에 대해서 조금 오해하시는 분이 있길래 일단 정정하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우리 회사에서 오가와 운전사에게 초과근무를 강요한 것이 아니라..." 하야시다가 그의 말을 가로막고 벌떡 일어섰다. 손에는 메모지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강요와 똑같을지도 모르죠. 여기에 재작년 자료가 있는데, 버스 기사의 한달 근무 시간은 다른 산업의 평균 근무시간보다 60시간이나 많습니다. 시간외 근무는 월 평균 50시 간으로, 다른 산업 평균의 약 3.5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냐 하면 결국 다른 산업에 비해 서 기본급이 낮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잔업수당으로 보충하는 수밖에 없는데, 특히 교육비가 많이 드는 삼십대, 사십대에서 이러한 경향이 눈에 띄는 것 같더군요. 오쿠로 교통도 마찬가 지 아닐까요?" 오쿠로 교통의 간부들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지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조 차 있었다.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빗나가자, 한쪽 구석에서 아무 말없이 앉아 있던 총무부 장 도미이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유족회 여러분은 어느 정도의 금액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하야시다를 비롯한 네 명의 간사와 무카이 변호사가 이마를 맞 대고 의논하기 시작했다. 유족회의 다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모든 교섭을 그들에게 맡겨 놓은 상태였다. 이윽고 의논이 끝났는지 무카이 변호사가 입을 열었다. "보상에 대해서는 남녀나 나이에 관계없이 일률적으로 해달라는 것이 유족 여러분들의 일 치된 의견입니다. 그리고 금액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몇 번 협의를 했는데, 일단은 더 이상 양보하고 싶지 않다는 금액이 있습니다. 바로 8천만 엔입니다." 그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온 말은, 오쿠로 교통 사람들에게는 엄청나게 강한 충 격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한꺼번에 고개를 떨구었다. 그 자리의 최고책임자인 전무라는 사람은 하얗게 센머리를 감싸쥐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 다. 그는 얼마 전에 물러난 사장을 대신하여 이번에 취임하기로 되어 있는데, 아무리 봐도 즐거운 표정을 지을 처지는 아니었다. 협상이 타결되려면 아직도 멀었군. 길게 꼬리를 끌겠어. 그렇게 생각하자 헤이스케의 마음 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날 교섭에서는, 오쿠로 교통 측이 이번에 받은 숙제를 검토하겠다는 대답에 머물렀다. 유족들에게 있어서 유리한지 불리한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간사들이나 무카이 변 호사의 밝은 표정을 보고 있으면 일단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해도 좋을 듯싶다. 회의실에서 나가자 복도에서는 오쿠로 교통 사람들이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 진 곳에서 운행관리부장인 가사마쓰가 파일에 무엇인가를 써넣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가사마쓰에게 말을 걸었다. "저,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 유족이 말을 걸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지 가사마쓰의 얼굴에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머리꼭대기에서 발끝까지 헤이스케를 훑어보고 나서 대답했다. "아,네!" "조금 전에 듣기론 오가와 운전사가 자진해서 초과근무를 지원했다고 하던데요." "예에." "어디에 돈이 필요해서 그렇게 무리를 했던 것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들으신 바가 없으신가요?" "글쎄요. 그렇게 자세한 얘기까지는 듣지 못했는데요." 가사마쓰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들어냈다. 유족이 왜 그런 문제에까지 신 경을 쓰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리라. 그때 뒤쪽에서 하야시다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헤이스케는 가사마쓰에게 무례함을 사 과하듯이 고개를 숙인 후 하야시다가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그쪽 사람들과는 개인적으로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는 대표간사답게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사고 원인에 관한 것이라고 덧붙이고 싶었다. 그는 보상금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물론 받지 않을 생각은 아니고 금액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더 많이 받기 위해 시간이나 노 력을 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보다 사고 원인이 여전히 안개에 쌓여있는 것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누적된 과로로 인해 운전기사가 실수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왜 그런 과로상 태에서 일을 했느냐 하는 점이 애매모호했다.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왜 돈이 필 요했던 것일까. 사치스럽게 살고 싶었든지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든지 여자가 있었는지 도 박에 빠져 있었다든지. 그는 그것까지 알고 싶었다. 그것을 모르는 채 현재의 상태를 어떻게 받아들인단 말인가. 무카이 변호사에게 항의하는 후지사키의 말소리가 단편적으로 귀를 파고들었다. 최소한 1 억이라고 말해도 되지 않는가. 대강 그런 말인 것 같았다. 무카이는 조금 곤혹스러운 표정으 로, 8천만 엔도 다른 선례에 비춰보면 상당히 많은 금액이라는 것을 설득하고 있었다. 2 집에 가는 전철 표를 사려고 매표기 앞에 섰을 때, 그때서야 잔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 았다. 그는 매점을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갔다. 주간지라도 사서 전철에 흔들리며 가는 동 안 시간을 보내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사던 주간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눈으 로 뛰어든 것은 남자들이 자주 보는 주간지 표지였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의 시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은 관능적인 자세로 쳐다보고 있는 여자의 사진이었다. "쾌락성단" 이라는 이름의 그 잡지는 어떠한 존재가치가 있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흔히 말하는 포르노 잡지라는 것을 사본 적이 없었다. 회사 탈의실에 굴러 다니는 것을 본 적은 있지만 페이지를 넘겨본 적은 없었다.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매점 주인은 뚱뚱하게 살이 찐 오십대 중반의 여자로, 혹시 이상하게 생각하지나 않을지 걱정이 앞섰다. 그 앞에서 망설이고 있으려니 더욱 "쾌락성단"에 손이 나가지 않았다. 그는 결국 그다지 읽 고 싶지 않은 평범한 주간지를 들고 지갑을 펼쳤다. 그때 양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그의 옆에 섰다. 남자는 잡지 가판대를 대강 훑어본 다음, 아무런 망설임 없이 "쾌락성단"을 고르고 나서 천 엔 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매점의 여자는 별로 관심이 없는 표정으로 무뚝뚝하게 잔돈을 건네주었다. 그렇군. 당당하게 사면되는 것이군. 그는 처음으로 그 잡지를 발견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과감하게 "쾌락성단"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먼저 뽑아든 주간지와 함께 보여주고 만 엔 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지만 주인 여자는 몇 번이나 다시 세고나서 잔돈을 거슬러 주었다. 물론 그가 어떤 잡지를 샀느냐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집에 가는 전철 안에서 그는 먼저 보통 잡지를 펼쳤다. "쾌락성단"은 보상 교섭 자료와 함께 가방 안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갖고 싶던 장난감을 사서 집에 가는 어린애처 럼 그의 가슴은 쿵쾅쿵쾅 방망이질 쳤다. 전철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에, 앞에서 다에코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짙은 초콜릿 빛 의 기다란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그녀도 즉시 헤이스케를 알아보았는지, 입을 작게 벌리고 멈추어 섰다. 입가에는 자연스러운 미소가 흘러 넘쳤다. "아, 선생님. 이런 데서 만나다니. 그 동안 별고 없으신 지요?" "실은 지금 댁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그런데 안 계시는 것 같아서 다음에 들르기로 하고 돌아가던 참이었어요." "그러세요? 그러면 지금 들렀다 가시죠?" "이제 오시는 길인가 본데 피곤하지 않으세요?" "그렇게 피곤하지 않습니다. 직장에서 일하고 오는 길이 아니니까요. 자, 어서 가시지요." "그러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다에코는 몸의 방향을 바꾸어 헤이스케와 나란히 그의 집을 향해 걸어갔다. "모나미는 집에 없는 것 같던데 어디 놀러갔나요?" 그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계 바늘은 오후 다섯 시를 향해 힘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글쎄요. 아마 저녁 찬거리를 사러 갔을 겁니다. 마침 그런 시간이니까요." 다에코는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모나미는 이제 완전히 부인 역할을 대신하고 있군요." "예. 그럭저럭 잘 해주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해요. 저는 아직 엄마가 만들어주는 밥을 먹고 있는데요." "부모님과 함께 살고 계십니까?" "예. 보기 싫으니까 빨리 시집가라고 성화 세요." "마음만 먹으면 상대는 얼마든지 있잖아요." "그렇지도 않아요. 학교라는 곳은 생각보다 세계가 좁으니까요." 아니라고 할 때, 다에코는 향기가 묻어날 듯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하늘하늘 흔들었다. 마 치 허공에 새하얀 목련 꽃잎이 휘날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제가 입후보해도 될까요. 문득 그런 농담이 떠올랐지만 입에 담지는 않았다. 도 저히 웃고 넘길 수 없는 농담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너무 초라 해 보일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현관의 차임벨을 눌러 보았다. 그러나 인터폰 스피커를 통해 나오코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역시 집에 없는 모양이군요. 모나미가 있는 편이 좋으십니까?" 교사라고는 하지만 아직 젊은 여자가 아내가 없는 남자 집에 들어가기는 곤란할지도 모른 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에요. 차라리 아버님만 계시는 편이 좋겠어요." "그러면 누추하지만 좀 들어가시지요." 그는 열쇠로 문을 열고 다에코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녀는 조금도 어색해 하지 않고 스스 럼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옆을 지나칠 때, 희미한 샴푸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는 일층에 있는 거실로 안내했다. 이런 때를 대비해 주스 정도는 사두었으면 좋았을 것 을. 그는 냉장고 안을 둘러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냉장고에 들어있는 것은 맥주와 보리차뿐 이었던 것이다. 나오코는 치아에 좋지 않다고 하며 옛날부터 주스를 사지 않았는데, 그 습관 은 그녀 자신이 어린애가 된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너무 신경 쓰시지 마세요." 차가운 보리차를 들고 거실로 들어서자, 그녀는 텔레비전 바로 앞에서 조신하게 방석을 깔고 앉아 있었다. 나오코가 결혼할 때 가지고 온 접대용 방석이었다. 지금까지 별로 사용하 지 않았지만 버스 사고가 일어난 직후에는 조문객이 자주 찾아와서 옷장 안에서 꺼내둔 것 이다. 만약에 그렇지 않았다면 다에코를 기다리게 하고 방석을 찾느라 땀을 뻘뻘 흘리며 헤 매 다녔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모나미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다에코는 머리와 함께 손까지 흔들었다. "아니에요. 그렇게 거창한 일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다만 아버님의 의견을 듣고 싶은 것 이 있어서요." "무슨 일인데요?" 그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다에코의 말투에서 조금 어색함을 느꼈기 때문이 다. "어제 모나미가 사립 중학교에 가고 싶다고 하던데요." "예? 사립 중학교라니, 그러니까 아자부나 가이세이 같은 학교 말인가요?" 너무나 갑작스러운 말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젖혀서 자칫 손에 들고 있던 보리 차를 엎지를 뻔했다. "예. 남자학교로 말하자면 비슷한 중학교가 되겠지요. 물론 그보다 들어가기 쉬운 중학교 도 있지만요." 아자부나 가이세이가 들어가기 힘든 중학교라는 것을, 그는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런 방면에 지식이 전혀 없었고, 아자부나 가이세이의 이름은 예전에 나오코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을 뿐이다. "여자 중학교도 사립이 있나요?" "물론 있지요. 사쿠라에도 있고 시라유리도 있구요." 그는 관자놀이를 긁적이던 손을 머리로 옮겼다. "뭐라고 할까, 듣기만 해도 수준이 높은 학교들 같군요." "예. 그 학교들은 아주 수준이 높아요. 반에서 상위권 학생들만 갈 수 있지요." "그렇겠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슴으로 실감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의 성적을 얻어야 갈 수 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은 것이다. 그는 갑자기 망치로 얻어맞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모나미가 그런 학교에 가고 싶다고 한 겁니까?" "구체적인 학교까지는 아직 정하지 않은 것 같았어요. 전혀 모르고 계셨나 보죠? 저는 아 버님과 의논해서 정했을 줄 알았는데." "처음 듣는 이야깁니다." "그러셨어요? 그러면 모나미가 혼자 정한 거군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보리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다에코의 유리잔을 똑바로 응시했다. 유리잔 끝에 립스틱이 묻지 않을까 하는 상상이, 한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그러나 테이블 위에 놓인 유리잔에는 립스틱이 묻어 있지 않았다. 그는 유리잔에서 눈길을 떼고 팔짱을 꼈다. "모나미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미래에 대해서 생각한 결과라고 하던데요." "예?" 나오코의 모습과 미래라는 말을 이어서 생각하자 한순간 기묘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이것은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초등학교 6학년인 모나미라는 모습으로 존재 하는 이상, 모나미의 미래는 확실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나오코의 미래는 아니었 다. 헤이스케의 미래와 이어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을 알면서 오늘날까지 모른 척한 것 은, 구태여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고개를 돌리고 뒤로 미루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나오코는 그렇지 않았다. 자기 문제이기 때문에 당연할지도 모른다. "미래에 대해서 생각했더니 사립 중학교에 가는 편이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겁니까?" "예, 그래요." 다에코의 거침없는 눈길이 그를 사로잡았다. 담임교사의 눈길이었다. "모나미의 주장은, 여러모로 생각해 봤더니 지금 열심히 공부해서 사립 중학교에 가는 편 이 미래의 선택길이 많아진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거예요." "선택길이라..." "예. 모나미는 선택길이라고 했어요. 요즘 그 애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마치 어른을 대하 는 것 같아서, 가끔 어린애라는 것을 잊어버리곤 해요." 그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시치미를 떼지 않으면 안 된다. "요즘 애들은 다 조숙하지 않습니까?" "아니에요. 모나미의 경우에는 조숙한 것과는 다른 것 같아요. 어른 흉내를 내는 것이 아 니라 정말로 내면에서 배어나오는 성숙함이 있어요. 요전에는 청소하는 도중에 떠드는 남자 애들을 혼내준 적이 있는데, 그 말투가 어느 경지에 도달한 느낌이 들 정도였어요." 그녀는 문득 말을 끊더니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볍게 눌렀다. "죄송해요. 이야기가 옆길로 샜네요." "아닙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사립 중학교에 간다고 해서 반드시 선택길이 넓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공 립은 공립 나름대로 좋은 점이 있으니까요. 이 지역에는 제삼 중학교가 있는데, 그곳은 풍기 도 문란하지 않고 비교적 학력 수준도 높은 편이에요. 하지만 모나미가 이미 결정을 내렸다 면 그 결정을 존중해 주고 싶어요. 그래서 일단 아버님의 의견을 물어보려고 이렇게 찾아온 거예요." "의견이 있을 리가 없지요. 오늘 처음 듣는 이야기니까요." "그러셨군요. 저도 처음에는 깜짝 놀랐어요." "사립 중학교에 가려면 특별히 해야 하는 것이 있나요?" "물론 여러 가지가 필요하지요. 일단 자료를 모아서 학교를 선택해야 하고 당연히 입시 준비도 해야하고, 공개 모의시험도 치르는 편이 좋구요." 그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잠깐만요. 입시라니...? 중학교에 들어가는데 시험을 봐야 합니까?" "물론 시험을 봐야 하지요." 그녀의 눈에 한순간 당혹 감이 깃들였다. 그런 것도 몰랐냐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뭐라고 할까. 간단한 지능테스트 정도가 아닙니까?"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 저었다. "아니에요. 개중에는 작문만 보는 학교도 있지만 그런 학교는 몇몇 되지 않아요. 대부분의 학교는 국어와 산수 시험을 보고, 그것에 작문이 추가되는 것이 일반적이죠. 그리고 요리와 사회 시험을 보는 학교도 있구요." "그렇다면 고등학교 시험과 똑같지 않습니까?" "예. 그래서 흔히 중학교 입시를 예비 고등학교 입시하고 하잖아요? 미리 경쟁을 해둔다 는 점에서요. 모나미가 말하는 선택길 중에는 고등학교 입시를 치르지 않는 것도 포함되어 있을 거예요. 고등학교 부속인 중학교에 가면 시험을 보지 않고 고등학교에 갈 수 있으니까 요." "아아, 그렇군요." 나오코는 언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대답은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의 머릿속이 일로 가득차있을 때 나오코의 머리는 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다만 너무 어릴 때 입시 경쟁에 휘말리는 것은 저로서는 별로 찬성하지 않아요. 그래서 모나미에게 조금 더 생각해 보라고 말했어요." "알겠습니다. 잘 이야기해 보지요." "부탁해요. 제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모나미가 저희 반을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 어요. 지금은 더할 수 없이 좋은 리더거든요. 본격적으로 입시 준비를 하면 아마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도 불가능할 건데, 그것이 유감스러워서 견딜 수 없어요. 그러면 이만 실례할게 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나오코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 다. "다녀왔어요." 다에코가 흠칫 숨을 들이마시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 직후 다시 나오코의 목소리가 이어 졌다. "아니? 이 신발이 왜 나와 있지? 있잖아요. 슈퍼마켓에서 신기한 것을 발견했어요. 토란 줄기 에요. 10년 전에 오사카에 사는 이모 집에서 먹었잖아요. 그 토란 줄기가 있지 뭐예요? 도쿄에 그런 것이 있다니, 정말 신기하지 않아요?" 말을 하면서 거실로 들어온 나오코는 발길을 멈추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마치 건전지 가 떨어진 인형 같았다. "어머, 선생님! 여긴 어떻게?" 나오코는 담임 교사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음, 아버지께 잠시 의논드릴 얘기가 있어서 들렀어." 그렇게 말하고 나서 다에코는 나오코가 들고 있는 슈퍼마켓 비닐 봉투로 시선을 옮겼다. 직경 2센티미터 정도 되는 불그스름한 토란 줄기가 비어져 나와 있었다. "그게 토란 줄기라는 거니?" "예." "그래?" 다에코는 어쩐지 석연치 않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게 저...1년 전, 1년 전이었지요. 오사카에 사는 친척집에서 맛있게 먹었거든요. 모나미, 너 말을 실수했어. 지금 10년 전이라고 했거든." 그는 서둘러 그 자리를 수습하려고 했다. "아, 그랬어요? 죄송해요. 1년 전이에요. 1년 전." "아아, 작년이구나. 그런데, 그건 어떻게 해서 먹는 거니? 샐러드를 만들어 먹니?" "삶는 거예요. 떫은 물이 나오긴 하지만 그렇게 어렵지는 않아요." "그것을 네가 할 수 있어? 정말 대단해." "10년...아니 1년 전에 친척 분이 삶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거든요. 그때 메모한 것이 남아 있을 거예요." "정말 대단하구나. 다음에 가르쳐 줄래?" "언제든지 괜찮아요. 요즘 젊은 사람들...저를 포함해서 말씀인데, 요즘 사람들은 별로 이 런 것을 만들어 먹지 않거든요. 화제가 요리라서 그런지 갑자기 말투가 어른스러워졌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면서 어떻게든 빨리 그 자리를 마무리 짓고 싶었다. "모나미, 선생님께서는 그만 집에 가셔야 하니까 너무 오래 붙잡으면 죄송하지?" "아참, 그렇지요?" 나오코는 봉투를 든 채 현관으로 돌아갔다. 신발을 신고 나서 다에코가 물었다. "그런데 아까 신발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이상하다고 그러지 않았니?" "그 신발, 엄마 신발과 똑같아요. 그래서 엄마 신발이 나와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내 신발이 엄마 신발과 똑같애? 아아, 그랬구나." "정말이니?" 그가 신기해하면서 묻자 나오코는 고개를 까닥거렸다. "엄마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던 신발이에요. 하지만 선생님이 신으니까 훨씬 잘 어울러요. 엄마에게는 조금 화려했는데, 선생님처럼 발이 작아야 예쁘거든요." "그렇게 뚫어지게 보면 거북하잖니." 다에코는 뒤로 물러서면서 헤이스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예. 안녕히 가십시오." 다에코가 돌아간 다음, 헤이스케는 문을 잠그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코는 이미 부엌에 서서 슈퍼마켓 봉투에서 야채를 꺼내고 있는 참이었다. 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입을 열 었다. "사립 중학교에 간다는 말은 한 번도 안 했잖아?" "언젠가 하려고 했어요." 나오코는 싱크대를 등지고 돌아섰다. "어째서 그런 것을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혼자 결정한 거지?" "아직 결정하지 않았어요. 앞으로 의논할 생각이었구요."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이유를 말해주겠어?" "첫째, 아주 오래 전부터 막연히 생각했던 것이에요." "아주 오래 전부터?" 그녀는 두 손을 펼치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이렇게 되기 전부터, 모나미가 살아있었을 때부터라는 뜻이에요. 모나미는 사립 중학교에 보내고 싶었어요. 그것도 대학까지 곧바로 갈 수 있는 중학교로요. 고등학교나 대학 입시로 인해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당신 자신이 앞으로 고생하고 싶지 않으니까 지금부터 편안한 길을 선택해 두 려고 한 것이군." 그의 차가운 말에는 빈정거림이 역력했다. "끝가지 들어보세요. 내년에 중학교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사립 중학교를 떠올린 계 기는 분명히 옛날부터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그 다음은 전혀 달라요. 실제로 중학교에 가는 사람은 나니까요. 나는 다른 이유에서 역시 사립 중학교에 가야겠다고 생각 했어요." "다른 이유라니? 그 이유는 또 뭐야?" 그녀는 싱크대에 기대어 한 쪽 발을 돌려 발을 꼬았다. "간단해요. 공부를 하고 싶을 뿐이에요." "뭐야?" 그는 눈을 크게 치켜 떴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봐, 진심이야? 초등학교 산수 문제를 풀었다고 해서 도쿄 대학에라도 갈 수 있다고 생 각한 거야?" "난 지금 진지하게 말하고 있어요." 그녀의 표정은 담담하게 가라앉았고 목소리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 말이 어린애 입 에서 나오자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차가움이 느껴졌다. 그의 입가에는 순식간에 웃음이 사 라졌다. "내가 이렇게 된지도 벌써 석 달이 지나가고 있어요. 그 동안 어떤 생각을 했을 것 같아 요? 골머리를 감싸고 끙끙거리면서, 왜 이렇게 되었는지 한탄만 했을 것 같아요?" 그도 역시 아무런 표정이 없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야 물론 슬픔에 젖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지만 나 름대로 열심히 살아왔으니까요. 할 수 만 있다면 내 인생을 계속 살아가고 싶어요. 당신과 모나미와 셋이서 살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구요. 하지만 내 마음대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잫아요? 그래서 생각을 해봤어요. 결국 돌아갈 수 없다면 이 두 번째 인생을 어떻게 살 아가야 할 지 말이에요. 당신이 밤늦게 들어오는 동안, 나는 매일매일 그 생각만 하며 지냈 어요. 그 결과 나온 대답은 한가지, 예전처럼 후회하는 삶은 살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후회라니?" 나오코의 입가가 처음으로 느슨해지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도 가끔 하는 말이 있잖아요. 젊었을 때 더 열심히 공부할 것을 그랬다고요. 나도 한 번쯤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어요?" "그것 뿐이야?" "자식에게 자기 꿈을 맡기는 일도 있잖아요. 당신은 어떨 지 모르지만 나는 모나미에게 내가 못 이룬 꿈을 맡겼었어요. 피아니스트라든지 스튜어디스라든지 그런 구체적인 것이 아 니에요. 나는 모나미가 자기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랬어요. 정신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남자에게 의지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확실한 여자요. 더구나 할 수만 있다 면 최고가 되기를요." 그녀의 말투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바싹 마른 입술에 침을 묻히고 더듬거리 며 말했다. "당신은 나와 결혼한 것이 불만이었어? 후회하는 건가?" "그렇지 않아요. 물론 당신의 아내였다는 것에는 만족하고 있어요. 지금 내 말은 주부라는 직업을 때려치우고 악착스럽게 일을 하고 싶었다는 뜻이 아니에요." "하지만 모나미에게는 당신과 똑같은 삶을 걸어가게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잖아?"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집안 일을 하는 주부라고 해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잖 아요? 내가 싫었던 것은 말이죠,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는 여자가 하는 수 없이 주부란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 남편과 함께 살기 싫어도...오해하지 마세요. 예를 들어 하는 말이니까요. 만약에 남편과 함께 살기 싫어도 앞날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밖으로 뛰쳐나가지 못하는 여자가 많잖아요. 나는 모나미가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싫었을 뿐이에요. 남자에게 매달려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니 너무 비참하지 않아요? 나는 운이 좋았을 뿐이에 요. 상대가 당신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이 아니라 도저히 구제할 수 없는 한심한 사람이 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국 여자의 행복은 모두 남자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 되겠죠." "나와의 결혼생활에서 비참하게 생각한 적이 있나?" 나오코는 숨을 깊이 토해내고 남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믿지 않을 테니까 분명히 말하겠어요. 비참하다고 생각한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그렇군." 그의 얼굴이 보기 민망할 정도로 처참히 일그러졌다. "미안해요. 당신을 기분 나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에요. 당신은 나쁘지 않아요. 오히려 나쁜 사람은 나예요. 지금까지 느긋하고 편안하게 살아와 놓고 이제 와서 비참하다고 말하 다니." "당신은 보통이야. 평범하게 살았다고 생각해." "물론 나만 특별히 비참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요. 평범했을 거예요. 그것을 비참하 게 생각하느냐 행복하게 생각하느냐는 본인에게 달려 있지요." 그는 손가락 끝을 탁자를 톡톡 두르렸다. 머릿속에는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백만이 자 리해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막막했다. "나는 모나미를 대신해서 자립 할 수 있는 여자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이런 식으로 다시 인생을 살아갈 기회는 그 누구도 얻을 수 없을 테니까요. 이 기적 같은 기회를 헛되이 낭비 하고 싶지 않아요." 주먹까지 불끈 쥐며 뜨겁게 자기 주장을 펼치는 그녀를 보고, 그는 예전에도 그런 여자가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그녀는 3학년에 학생회장으로 선 출되었다. "물론 그것은 이해하지만." 그는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화가 났다. "고마워요. 그래서 내린 결론이 진지하게 공부하기 위해서는 그에 어울리는 장소로 가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게 사립 중학교라는 건가?" "일단은 그래요. 하지만 사립이라고 해서 아무 데나 다 좋다는 뜻은 아니에요. 역시 그에 걸맞는 수준의 학교가 아니면 안되죠. 그리고 가령 그것이 어느 고등학교나 대학의 부속이 라고 해도 그대로 올라갈 생각은 없어요. 그 시점에서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최고 수준의 학 교를 목표로 할 생각이에요." "흐음. 엄청난 의지로 똘똘 뭉쳐있군. 그런데 어쩌나? 나는 왠지 버림받은 듯한 생각이 드 는데." 그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억지로 웃음을 만들어 냈다. 말은 농담처럼 했지만 실은 마음 깊 은 곳에서 솟구치는 본심이었다. 그 자신도 본심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당연히 의지가 강해야죠. 입시는 전쟁이니까." 자신의 말에 납득한 것으로 알았는지 나오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중학교부터 입시를 치러야 하는 거야? 일단 이 근처에 있는 중학교에 가고 나 서, 좋은 고등학교를 목표로 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방법도 있잖아? 다에코 선생은 재삼 중 학교도 나쁘지 않다고 하던데." "안돼요!" 나오코는 즉시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다에코 선생은 아직 어려서 잘 몰라요." "어리다니, 교사가 된지 벌써 몇 년이나 지났는데?" "안돼요. 사람은 좋지만 곱게 자라서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요. 그래서 세상을 좋게만 보 는 거예요." 모습은 초등학생이지만 정신은 서른 여섯 살인 것이다. 젊은 여교사를 비난하는 말에는 가차없는 날카로움이 배어 있었다. "너무 흉은 보지 말라구. 그래도 걱정이 돼서 일부러 찾아 왔으니까." 그녀는 잠시 고개를 조금 갸우뚱거리더니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감싸고돌아요?" "뭐야?" "일단은 사립 중학교에 진학하도록 허락해 줘요. 공립에 비해서 수업료도 비싸니까 아빠 의 이해와 협조가 필요해요." 바로 조금 전까지 '당신'이라고 부르다가 갑자기 '아빠'로 바뀌었다. 자기 사정에 따라서 금세 당신이었다가 금세 아빠가 되는 것인가? 하지만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을 할 수는 없었 다. "하고 싶은 대로 해." 그 이외의 대답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오코는 손뼉을 치며 당연하다는 듯이 기뻐 했다. "고마워요. 열심히 할게요. 그러면 일단 토란 줄기를 삶기로 할까?" 그녀는 싱크대를 향하더니 도마에 손을 뻗었다. 저녁 반찬은 토란 줄기 이외에 삼치 소금구이와 강낭콩 조림이 있었다. 그것들 모두 감탄 이 나올 정도로 꿀맛이었다. 특히 다시마 국물을 넣고 끓인 토란 줄기 조림은 입에서 살살 녹는다는 표현밖에 쓸 수 없을 정도로 각별한 맛이었다. 10년 전에 먹은 요리를 훌륭히 재 현해 내는 솜씨에 그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요리 솜씨가 좋은데 왜 악착스럽게 공부해서 좋은 학교에 가려고 하는가. 저녁식사가 끝나자 나오코는 곧장 설거지를 시작했다. 야구 중계방송을 보던 헤이스케는 설거지하는 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왜 그렇게 서둘러 하는 거야? 조금 쉬었다 해도 되잖아." "시간이 아깝잖아요." 그녀는 설거지하는 손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시간이 아깝다는 의미를 알게 된 것은 설 거지를 끝낸 다음이었다. 그녀는 손을 씻더니 텔레비전 앞에 앉지도 않고 그대로 이층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어디 가는 거야?" "방에요. 오늘부터는 매일 적어도 두 시간씩은 공부하기로 결심했거든요." "오늘부터? 오늘부터 벌써 공부하는 거야?" "시작이 반이라고 하잖아요" 열 한 살의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어른 같은 말을 하고 그녀는 계단을 올라갔다. 그는 하는 수 없이 텔레비전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자이언츠 팀이 히로시마 팀을 상대 로 고전하고 있었다. 원 아웃에 주자는 2, 3루. 타자는 야마모토, 투수는 에가와. 평소 같으 면 직접 야구장에 있는 것처럼 시합에 정신없이 빠져들었을 테지만 지금은 아나운서의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눈이 방구석에 놓여있는 가방에 멈추었다. 그는 가방을 열고 조금 전에 산 "쾌락성 단"을 살그머니 꺼냈다. 표지를 넘기자 갑자기 여자의 가슴이 눈 속으로 뛰어들어 왔다. 밥공기를 두 개 엎어놓은 듯한 보기 좋은 가슴으로, 젖꼭지는 엷은 핑크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가냘픈 몸, 쭉 뻗은 다리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이는 한 스물이나 되었을까. 그 모델의 사진은 여섯 페이지에 걸쳐 실려 있었다. 모두 남자의 욕망을 자극하는 포즈로, 무아지경에 빠진 황홀한 듯한 표정은 성행위를 연상시켰다. 갑자기 그것이 꿈틀거리더니 자기도 모르게 손이 사타구니로 향했다. 벌써 오랫동안 참아왔다. 마지막으로 잠자리를 한 것은 분명히 사고 전날 밤으로 기억한 다. 자기가 없는 동안 바람을 피우지 말라고 하면서, 그녀가 먼저 그의 옆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갑자기 잡지를 들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화장 실로 들어갔다. 허리가 한 손에 들어올 것 같은 가냘픈 몸매의 모델을 바라보면서, 그는 자위행위를 했다. 모델의 얼굴에 다에코의 얼굴을 겹쳐놓고... 흔들리는 마음 1 7월에 접어들자 꾸물꾸물한 날씨에 지겨울 정도로 계속 비가 내렸지만, 오늘은 아침부터 새파란 하늘이 고개를 내밀었다. "오늘은 꽤 더울 것 같은데, 틀림없이 모두 좋아할 거예요." 나오코는 젓가락질을 멈추고 밖으로 시선을 던지면서 말했다. 반찬은 어젯밤에 먹다 남은 튀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평소 같으면 아침마다 된장국이 올라오지만 오늘은 된장국도 보이지 않았다. 나오코가 늦잠을 잤기 때문으로, 늦게까지 공부하는 것을 알고 있는 헤이스 케로서는 불평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더운데 왜 좋아하지?" "왜냐하면 오늘은 이걸 하거든요." 그녀는 젓가락을 든 채 수영하는 모습을 취했다. "좋겠군. 수영장에 가는 거야?" "수영하는 게 몇 년 만이죠? 잊어버리지 않았을까?" "수영이든 자전거든, 몸으로 익힌 것은 잘 잊어버리지 않아." 밥에 젓가락을 가져가던 그는 문득 생각난 듯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모나미는 수영을 잘했잖아?" "잘했어요. 수영 학원에 다닌 적도 있으니까요. 평영도 버터플라이도, 뭐든지 다 잘했..." 말을 하는 도중에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바뀌었다. "앗! 평영..." "할 수 있어?" 그녀는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 저었다. "평영은 꽝이에요. 아아, 어떡하지?" 그는 나오코가 자유형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혼하기 전에 함께 바다에 갔을 때 처음에는 물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투덜거렸는데, 막상 바다로 들어가자 쏜살같 이 헤엄을 쳤다. 그때, 나오코의 몸은 물을 박차고 올라온 인어처럼 젊고 싱그러웠다. 지금 과는 다른 의미에서. "모나미는 작년 여름에 교내 수영대회에 나갈 정도였다구. 그것도 평영으로." "어떡하죠? 올해 들어 갑자기 평영을 못 한다고 할 수도 없구요. 하는 수 없죠 뭐. 생리가 있는 걸로 해두는 수밖에. 하필이면 날씨가 이렇게 좋을 게 뭐람?" 풀이 죽은 나오코의 모습은 진짜 열 한 살 짜리 어린애 같았다. 집을 먼저 나서는 사람은 늘 헤이스케였다. 신발을 신고 있을 때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 는지 나오코가 손뼉을 쳤다. "아참! 깜빡 잊은 것이 있어요. 어제 저녁, 아빠를 찾는 전화가 왔었어요." "누구에게서?" "세이코씨. 그 운전기사의 아내 아니에요?" "그렇겠지. 뭐라고 했는데?" "용건은 말하지 않았어요. 또 전화하겠다고 하던데요." "흐음." 그는 갑자기 호기심이 솟구쳤다. 전에 다바타 제작소에서 이야기를 나눈 이후 얼굴을 마 주친 적조차 없었던 것이다. "밤에 집에 와서 전화해 보세요." "전화번호는 물어봤어?" "물어보지 않았어요. 아빠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내가 어떻게 알아? 정히 할 말이 있다면 다시 전화를 하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그녀가 전화를 건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출근하자 고사카 과장이 다바타 제작소에 다녀 와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D형 인젝터 시작품에서 발생한 그 위치 결정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는데, 잠시 다녀와 주게. 어떤 특수한 도구를 사용한다고 하니까 그 도면을 받아오기 바라네. 자네가 바쁘다면 다른 사람을 보내도 좋네만." "아닙니다. 제가 직접 다녀오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도 듣고 싶구요." "그래? 그렇게 해준다면 고맙겠네. 그쪽에는 미리 연락해 두지." 고사카는 안도의 한숨과 동시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싱글벙글 미소를 지었다. 순식간에 상사의 얼굴에서 이웃집 아저씨의 얼굴로 바뀌었다. "아주 좋은 이야기가 있네만." "좋은 이야기요?" "서른 다섯이라고 하던데. 그러니까 세상을 떠난 자네 부인보다 조금 아래지? 더구나 초 혼이라더군. 사진을 봤는데 꽤 느낌이 좋았어." 무슨 이야기인지 감이 잡히자 그는 손과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은 재혼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알고 있네. 당사자는 원래 그러는 법이니까 이런 일은 옆에 있는 사람이 서두르지 않으 면 안되지. 아무튼 한 번 만나보지 않겠나?"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빠릅니다." "그래?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억지로 권하지는 않겠네. 하지만..." 고사카는 갑자기 그의 귓가에 입을 바싹 들이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쪽은 어떤가? 이제 슬슬 쌓일 때가 되지 않았나?" 그쪽. 그 말의 의미는 아무리 둔한 헤이스케라도 짐작이 되었다. "예? 아닙니다. 정말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고사카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약간 고개를 비틀었다. "흐음, 그래? 믿을 수 없는데." "어쨌든 다바타에 다녀오겠습니다." 헤이스케는 고사카 앞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와서 회사 서비스용 차량을 빌려 직접 운전해 서 다바타 제작소로 향했다. 그는 다른 공장이나 하청회사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솔직히 말 하면 이동하는 시간이 좋았던 것이다. 똑같은 직장에서 똑같은 동료들과 똑같은 일을 계속 하다보면, 가끔 세상에 뒤쳐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일이 있다. 그런 때 짧은 시간 동안이라 도 회사 밖으로 나가면 자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다바타 제작소에서의 회의는 한 시간 남짓으로 끝이 났다. 문제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해 결한 것이니까 이처럼 마음 편한 일도 없었다. 다바타의 젊은 담당자도 스스로 만족했는지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회의가 끝난 뒤 그는 코일 반으로 발길을 옮겼다. 세이코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는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쭉 늘어서 있는 여자들 중에 세이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는 책상에 앉아 있는 책임자로 보이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앞에는 주임이라고 씌어 있는 명 패가 놓여있었는데, 얼굴은 각이 져서 엄격하게 보였지만 눈길은 따뜻하고 다정하게 느껴졌 다. 아마 여성 근로자에게 세심하게 배려하는 사람이리라. 그렇지 않으면 이곳의 책임자로 일할 수 없을 것이다. 세이코에 대해서 묻자 주임은 곧장 대답했다. "아아, 그분 말입니까? 요즘 들어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면서 계속 쉬고 있는데요. 우리도 걱정하고 있던 참입니다." "입원이라도 한 겁니까?" "아니, 그런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세이코씨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좀 아는 사람이라 서요." 그는 이상하게 쳐다보는 주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재빨리 그 자리를 떠났다. 세이코의 야윈 몸과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약한 몸에 무리를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세상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견뎌내지 않으면 안된다. 집으로 걸려온 장난 전화의 음습한 목소리가 고막에 되살아났다. 그런 상태에서 왜 나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무거운 돌 덩이가 매달린 듯이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그는 공장을 나서서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고 기어를 1단으로 넣으려 할 때, 차문 옆에 꽂혀 있는 교통 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지도를 펼쳐 조후에 있는 세이코의 집을 눈으 로 쫓았다. 여기에서는 엎드리면 코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이었다. 손목시계의 바늘은 오전 열 한 시를 막 지나가고 있었다. 서둘러 회사에 간다고 해도 어 차피 점심시간이다. 그는 기어를 넣고 천천히 출발했다. 예전에 택시로 간 적이 있어서 눈에 익은 아파트를 찾아가는 데는 그렇게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조급한 마음으로 계단을 뛰어올라 가서 오가와 라는 문패가 걸려있는 집의 차임벨을 눌렀다. 인터폰은 붙어 있지 않 았다. 대답이 없어서 다시 누르려고 한 순간 문 안쪽에서 힘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 딸의 목소리였다. 이름이 이쓰미라고 했던가.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한데 헤이스케라고 한단다." 체인을 그대로 걸어 놓은 채 문이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조금 열렸다. 문 건너편에 는 겁먹는 토끼 같은 이쓰미의 얼굴이 보였다. "안녕? 어머니 계시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쓰미는 일단 문을 닫았다. 그러나 곧바로 문을 열어준 것이 아니라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 쩔럭쩔럭하는 금속음이 들려왔다. 아마 어머니에게 그가 왔다는 것을 전한 다음에 문 을 연 것이리라. "들어오세요." 어린 소녀의 밝은 구석을 찾아볼 수 없는 굳은 표정으로 이쓰미는 그를 안내했다. "잠시 실례하마." 현관에 들어선 것과 안쪽의 문이 열리는 것이 그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파리하게 여원 세 이코가 놀라는 표정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타났다. 타월 천으로 만든 긴 원피스가 바 싹 마른 몸을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 "여기에는 어떻게?" "다바타 제작소에 있던 김에 잠시 들려본 겁니다. 어젯밤에 전화를 주셨다고 하던데 공교 롭게도 여기 전화번호를 몰라서 갑자기 실례를 하게 됐습니다. "아아, 그러세요? 예전에 피해자 모임에 갔을 때 명단을 받아서, 댁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 었는데요." 그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런데 회사를 안 나오신다고 하던데요." "예. 몸이 좋지 않아서요. 일단 들어오세요. 시원한 음료수라도 준비할 테니까요." "아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전화하신 용건은...?" 그는 즉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여기에 오기 전에 결코 집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스 스로에게 맹세한 것이다. 그에게서 편안히 이야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세이코는 더 이상 들 어오라고 권하지 않았다. 다만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파리한 얼굴은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때까지 싱크대 앞에서 그릇을 씻고 있던 이쓰미가 보리차가 담긴 컵을 들고 나왔다. "드세요." "아, 고맙구나. 어머니는 어디가 아프시니?" 그는 컵을 받아들고 목소리를 낮추어 물어보았다. 이쓰미는 잠시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갑상선...이래요." "그래?"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라서, 그는 다만 고개를 끄덕이면서 보리차를 마실 뿐이었다. 갑상선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을 봐서는 아마 병원에서 그런 진단을 받았으리라. 그 러나 갑상선이 나쁘면 어떻게 되는지 구체적인 병명은 무엇인지, 그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 다. 애당초 갑상선이 신체의 어디에 있는 기관인지도 몰랐다. "잘 마셨다. 그런데 오늘은 학교에 안 가도 되니?" "오늘은 평소보다 더 안 좋은 것 같아서..." "안 간거니?" 이쓰미의 고개가 자그맣게 끄덕여졌다. 자신도 모르게 명치끝이 아려오며 한숨이 새어나 왔다. 세상에 이렇게 운이 없는 집이 또 있을까. 이들 모녀는 지금, 누구보다도 불운하다는 점에서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집안의 중심인 기둥을 읽고 어머니도 또한 병으 로 쓰러진다면, 이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자 꼬끝이 찡해졌 다. 그때 안쪽에서 세이코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는 두툼한 종이다발이 들려 있었다. "남편의 짐 속에 이런 것이 있었어요." 그것은 무통장 입금 영수증으로, 수취인은 모두 네기시 노리코라고 되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보낸 날짜는 대강 월초나 월말로, 금액은 10만 엔에서 20만 엔 사이였다. 가끔은 20만 엔이 넘는 금액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날짜가 가장 오래된 것은 작년 1월이었고, 종 이다발 안에는 삿포로의 주소가 씌어 있는 메모지도 들어 있었다. "이것은...?" 그의 시선을 받고 세이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에게서 네기시 노리코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있어요. 분명히 예전에 이혼했던 여자 의 이름일 거예요." "그렇다면 이 사람이 예전의 부인?" "아마 그럴 거예요." "남편께서 예전의 부인에게 돈을 보냈다는 건가요?" "그렇게 되겠지요." 세이코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입술에 달라붙은 쓸쓸한 웃음의 의미 를 어쩐지 이해할 것만 같았다. 남편의 마음이 자기 모녀에게만 향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고독과 허무에 휩싸인 것이 분명했다. "남편이 전부인과 이혼한 것은 언제쯤인가요?"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10년쯤 됐을 거예요." "그러면 그 동안 계속해서 돈을 보내고 있었던 건가요?" 그렇다면 그 누구보다 성실한 남자가 아닌가. 그는 어떤 선입관도 갖지 않은 순수한 마음 으로 감탄했다. 이혼할 때 생활비나 양육비를 다달이 지불하겠다고 약속해도, 그것을 1년이 상 지키는 남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잘 모르겠어요. 제 느낌으로는 최근 1, 2년 같은 생각이 들지만요." 최근 1, 2년 사이에 갑자기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남편은 지금까지 이런 말을 한 마디도 하신 적이 없었군요." "전혀 들은 적이 없어요. 전혀요." 자칫 부러질 것 같은 세이코의 야윈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아니 그보다, 그녀의 몸 자 체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질 것만 같았다. "우리보다, 예전의 집이 더 소중했던 거야!" 뒤에서 이쓰미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비바람을 머금은 무거운 먹구름처럼 어두운 목소리 였다. "그런 말을 하면 못써." 이쓰미는 거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서서 안쪽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무겁 게 가라앉은 공기를 가르고, 차가운 문소리가 그의 고막을 때렸다. "죄송해요. 애가 버릇이 없어서. 어쨌든 이제 남편이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일한 이유를 알 게 되었어요. 일단 헤이스케씨에게 알려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편이 무엇 때문에 기를 쓰고 돈을 벌려고 했는지에 대해서 가장 궁금해하시던 분이니까요." "그것도 모르고 도박이라든지 여자라든지, 이상한 말만 해서 죄송합니다."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에요. 차라리 그러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몰라요." 마음 깊은 곳에서 짜내는 듯한 그 말은 그녀의 진심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말문이 막혀 다만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입에 담았다고 후회하는 것인지, 입술을 깨물었다. "저, 그 부인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까?" "없어요. 갑자기 돈이 끊겨서 그쪽도 곤란할 텐데요." "사고 당한 것을 알고 있을까요?" "워낙 신문이나 방송에서 떠들어댔으니까 알고 있을 거예요." "만약에 알고 있다면 장례식에는 참석해야 도리가 아닐까요? 이렇게까지 신세를 졌으면서 모른 척 하다니!" "알았다고 해도 오기 힘들지 않았을까요? 남편이 재혼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을 테니까 요." "아무리 그렇지만." 마음속에 잠재한 분노가 터질 것 같아서 그는 억지로 말을 삼켰다. 게다가 자신이 분노하 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무거운 납덩이가 매달린 것처럼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들고 있던 무통장 입금 영수증 다발에 눈길을 떨구었다. "저, 이 영수증을 한 장 얻을 수 없을까요?" "물론 괜찮지만 어디다 쓰시려구요?" "딸아이에게도 보여주고 싶습니다. 버스 사고가 일어난 원인에 대해서 줄곧 알고 싶어했 으니까요." "예. 가져가세요." 그는 메모지에 있는 주소를 옮겨 쓰고 나서 영수증 한 장은 갖고 나머지를 세이코에게 돌 려주었다. "이제 몸은 괜찮으십니까? 따님이 학교까지 쉬면서 간호하는 것 같은데요." "별로 대단한 병도 아닌데 그 아이가 너무 요란을 떠는 거예요." 그녀는 얼굴 앞에서 손을 저었지만 그 손에서는 조금의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저녁 찬거리를 사야 한다면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그의 말이 부담스러웠는지 그녀는 두 손을 함께 저었다. "괜찮아요. 정말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진심으로 곤혹스러워 하는 표정에서 그는 자신들의 입장 차이를 떠올렸다. 그녀에게는 이 렇게 피해자 유족과 마주하는 것 자체가 고통일지도 모른다. "그러세요? 그러면 몸조리 잘하시기 바랍니다. 따님에게는 그냥 갔다고 전해 주세요." "일부러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그녀도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웃는 듯 우는 듯한 표정이 헤이스케의 망막에 새겨져 떠나지 않았다. 차로 돌아가 시동을 걸고나서 그녀의 전화번호를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차를 출발시켰다. 이제 저들 모녀와 만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라 생각 하면서. 그날 저녁, 식사를 하는 도중에 헤이스케는 그 이야기를 꺼냈다. 나오코는 무통장 입금 영 수증을 들고 뚫어질 듯이 들여다보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오가와씨가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일하던 이유는 도박도 여자도 아니었어." 그는 젓가락을 놓고 나서 팔짱을 꼈다. "흐음. 그랬군요." 그녀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이 무통장 입금 영수증을 탁자 위에 놓았다. 생각했던 것과 는 달리 전혀 반응이 없었다.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까. "이 노리코란 사람으로부터 아무 연락이 없는 것은 이상하지 않아? 사고가 있었다는 사실 을 알았다면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글쎄요." 그녀는 고개를 잠깐 갸우뚱거릴 뿐, 그 다음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 여자에게 편지를 보내려고 해. 사실은 그것 때문에 주소를 적어온 거야." 나오코가 젓가락을 멈추더니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어떤 편지요?" "일단은 오가와씨가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거야. 어쩌면 모르고 있을지도 모 르잖아? 그리고 무덤에라도 한 번 찾아가 보면 어떻겠냐구. 이대로 넘어가는 것이 왠지 마 음에 걸려서." "아빠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하죠?" "왜라니? 왠지 꿈자리가 사납지 않아? 어차피 이 일에 발을 들여놓았으니까 말이야." 그녀는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나도 그 세이코라는 사람이 가엾다는 생각을 하 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남편을 잃은 데다가 병까지 얻었다면 차라리 죽고 싶은 생각이 들 겠지요. 그러나 미안하지만 동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도 지금, 누구에겐 가 동정을 받을 정도로 충분히 불행하니까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럭저럭 헤쳐나갈 수 있지 않아?" "쉽게 말하지 마세요. 내가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지 안다면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없을 거예요." 헤이스케는 보이지 않는 손에 따귀를 얻어맞은 것처럼 한순간 어이가 없었다. 그는 할말 을 잃고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미안해요. 그것은 아빠 성격이니까요. 힘들어하는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 말이에요." "나는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니야." "아니에요. 아빠는 균형 감각이 있어서 사람을 함부로 원망하지 않아요. 나처럼 엉뚱한 사 람에게 화를 내지 않아요. 솔직히 말하면 아까 그 이야기를 듣고 조금 실망했거든요." 그녀는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내뱉었다. "실망?" "예. 사실 그 오가와라는 사람이 도박이나 여자 때문에 무리하게 운전하다가 사고를 냈다 는 스토리를 기대했거든요. 기대라는 말은 조금 이상할 지도 모르지만, 그러는게 더 나았을 뻔했다는 것이 진심이에요." "왜지? 예전에는 그런 것이 사고의 원인이면 용서할 수 없다고 했잖아." 그녀는 알 듯 모를 듯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그런 거예요. 그렇다면 거리낌없이 운전사를 욕하고 원망할 수 있잖아요. 슬픔이 밀려올 때마다 분노를 쏟아부을 수도 있구요. 자신이 놓여 있는 처지에 견딜 수 없을 때는 원망이나 증오를 퍼부을 수 있는 상대가 필요한 법이에요. 이해하시겠어요?" "그것은...이해할 수 있어." "그러나 이혼한 전처에게 돈을 보내려고 뼈빠지게 일한 사람을 어떻게 원망할 수 있겠어 요? 분노를 쏟아낼 곳이 없어지잖아요. 그래서 무턱대고 아빠에게 화를 낸 거예요."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은 상관없어." "편지를 쓰세요. 아빠가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하면 되는 거예요. 어쩌면 그 사람은 오가와 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아니, 이제 됐어. 곰곰히 생각해 보니까 지나친 참견인 것 같아." 그는 그렇게 말하고 영수증을 손으로 덥석 잡아 꼬깃꼬깃 구겼다. 2 학교가 가까워질수록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가끔 스피커를 통해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다에코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런 다음 '천국과 지옥'이라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운동회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군. 헤이스케의 입에서는 저절로 흐믓 한 미소가 배어나왔다. 학교에 도착한 것은 시계바늘이 열두 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을 때였다. 몇 학년인 지는 모르지만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영차, 영차...응원소리도 옛날과 똑같다. 보호자석은 이미 수많은 학부모들에 의해 점령당해 있었다.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카메라 를 들고 있고, 개중에는 캠코더를 들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헤이스케 는 비디오를 찍을 수 있는 캠코더보다 카메라를 더 좋아했다. 그는 나오코의 모습을 찾아 느긋하게 운동장을 걸어다녔다. 구름이 약간 낀 맑은 날씨는 운동을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당했다. 그러나 나오코는 아침에 집을 나설 때까지 운동 회에 참석하지 않을 구실만을 찾았다. 아무튼 피곤한 일은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운동회는 하고 싶은 아이들만 하면 되잖아요. 강제로 참가하게 하다니, 이렇게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어요?" 나오코가 쉬고 싶어하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가 갔다. 계속되는 입시 공부로 인해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 것은 틀림없이 고통이리라. 6학년 학생들이 모여있는 장소가 눈에 띄었다. 그러나 나오코를 찾기 전에 다에코의 모습 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상자 안에 들어있는 공을 살펴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다에코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단번에 그를 알아보고 풋풋한 향 기가 날 듯한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다른 여교사들은 긴 운동복으로 다리 를 감추고 있는데, 그녀는 흰 반바지 아래 새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있었다. "오늘은 출근을 안 해도 괜찮으셨나 보군요. 휴일에도 자주 출근을 하시니까 오지 못할지 도 모른다고 모나미가 걱정을 하던데요." "예. 오늘은 안 나갔습니다." 요즘 자위행위를 할 때면 언제나 다에코의 얼굴을 떠올렸다. 상상속의 그녀는 직업적인 창녀처럼 요염한 몸짓으로 그를 유혹했다. 그 때문인지 이렇게 마주하자 그녀의 얼굴을 똑 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제 곧 줄다리기가 끝날 거예요. 그러면 점심시간이에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녀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 았다. "저, 도시락은요?" "그것 때문인데요. 준비를 해오지 않아서 밖으로 데려가고 싶습니다만." 보호자가 함께 있는 경우에는 밖에 나가서 먹어도 된다는 규칙이 있었다. "그것은 상관없지만요." 다에코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때 마침 운동장에서 줄다리기가 끝나 고 오후 한 시까지 점심시간이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모나미를 찾으면 잠시 여기에 계세요. 아시겠지요?" "아? 예." 그가 건성으로 대답하는 사이에 다에코는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하는 수 없이 그 자리 에 우뚝 서 있자 '아빠!'하고 부르는 맑은 소리가 귀를 때렸다. 빨간 머리띠를 한 나오코가 손을 흔들면서 뛰어오는 참이었다. "왜 여기서 멍청하게 서 있어요?" "그게 저..." 다에코와 나눈 이야기를 해주자 나오코는 흐음 하고 콧소리를 낼뿐이었다. 이윽고 돌아오 는 다에코의 손에는 편의점의 하얀 봉투가 들려 있었다. "괜찮으시다면 이것을 드세요. 제가 만든 것이라 맛은 보장하지 못하지만요." 그녀는 봉투를 내밀었다. 아무래도 도시락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예? 안됩니다. 그것은 선생님 도시락이잖습니까?" "제 것은 따로 있어요. 이런 일이 있을까봐 조금 많이 만들어 왔어요. 그러니까 걱정 마시 고 맛있게 드세요." "그러세요? 모나미, 어떡할래?" 그는 난처한 듯이 나오코를 살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아무 관심 없다는 듯 대답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그럼 맛있게 먹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안에 물도 들어 있어요." 다에코는 그렇게 말하고 활기찬 걸음걸이로 교사석으로 걸어갔다. "선생이라는 직업도 쉬운 일은 아니구나. 이런 일에까지 신경을 써야 하다니." 감탄을 금치 못하는 그의 말에 나오코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빠, 바보 아니에요? 그렇게 많이 만들 리가 없잖아요."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잖아?"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받을 것 같아요? 선생님은 아마 직원용 빵이라도 먹고 있을 거예 요." "그게 정말이야? 그렇다면 미안한데. 가서 돌려주고 올까?" "너무 늦었어요. 지금 돌려주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그는 나오코를 따라 교사 뒤쪽으로 돌아가서 작은 계단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운동장과 반대쪽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서는 운동회라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데. 보호자석으로 갈까? "괜찮아요. 먼지가 나지 않아서 오히려 좋아요. 그보다 물좀 주세요. 목이 말라죽는 줄 알 았어요." 그는 봉투에서 캔 녹차를 꺼내 나오코에게 주었다. 그리고 함께 들어있는 플라스틱 용기 를 열자 작은 주먹밥과 반찬들이 옹기종기 들어 있었다. "맛이 기가 막힌데!" 주먹밥을 입에 넣은 헤이스케가 감탄사를 연발했다. 명란젓이 들어있는 주먹밥은 색다른 맛이 있었다. "보기에는 그저 그런데요." "왜 자기 도시락을 주었을까?" 나오코는 차를 꿀꺽 마시고 나서 무덤덤하게 말했다. "글쎄요. 아빠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요?"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듣고 목이 막혀 컥컥거렸다. "어른을 놀리는 게 아니야. 해도 되는 농담과 안돼는 농담이 있어." "농담이 아니에요. 다에코 선생, 아빠에게 꽤 신경을 쓰거든요. 오늘도 오는지 안 오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어요." "나는 결혼한 사람이야." "어쨌든 지금은 혼자잖아요. 나이 차이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구요. 문제는 외모인데..." 그녀는 물건을 평가하듯이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선생님이 좋아하는 것도 그렇게 이상할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당신도 좀 먹어봐." 그는 들떠 있는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 도시락을 내밀었다. "오늘은 당신이라고 하지 말고 모나미라고 부르세요." 그녀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본 다음 책망하듯이 말했다. "아, 미안해. 모나미..."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나오코를 딸의 이름으로 부르는데 익숙하지 못했다. 그녀는 맨손으로 계란부침을 집어 한 입에 넣고는 고개를 약간 비틀며 중얼거렸다. "조금 짠 것 같은데. 별로 솜씨 좋은 집안은 아닌가 봐요." 그러나 다에코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그에게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런가. 나에게 관 심이 있는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래서는 안된다는 서글픈 생각도 밀려들었다. 나에게는 나 오코가 있다. 그녀에게는 결코 들떠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운동회가 끝난 다음에는 어떡할래? 같이 가겠어?" 그는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갔다. "조인식...말이에요?" "그래. 언제나 모이는 호텔이 있어." 보상금 교섭이 거의 타결되어, 오늘 협정서에 조인을 하게 되어 있었다. 마지막 정도는 유 족으로 참석하는 것이 어떻느냐교, 어젯밤에 그가 제안한 것이다. "전 됐어요." 그녀는 마시던 녹차를 그에게 내밀면서 마치 화가 난 사람처럼 야멸차게 말했다. "그래?" "자신의 목숨 값이 정해지는 자리에는 있고 싶지 않아요. 아무리 많이 받는다고 해도요." "알았어. 그러면 혼자 다녀오지." 그는 나오코가 내민 캔을 받아들고 차가운 녹차를 한꺼번에 들이켰다. 점심시간이 끝났다는 방송이 흘러나오자 그녀는 서둘러 친구들의 곁으로 돌아가고, 그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다에코를 찾았다. 그녀는 학생들과 함께 교문 옆에 서 있다가 그를 발견하자 반가운 표정으로 뛰어왔다. "도시락, 어떠셨어요?" "맛있게 먹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는 몇 번이나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빈 도시락은 그냥 주세요." "아닙니다. 씻어서 돌려 드리겠습니다. 모나미가 그렇게 하는 것이 예의라고 하더군요." "모나미가요? 모나미는 정말 요즘 애들 같지가 않아요." 눈이 부시도록 상큼한 그녀의 미소를 바라보면서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계속 무슨 말 이라도 하는 편이 좋을까. 그녀는 그것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당한 화제가 떠 오르지 않아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다른 여교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 그만 가볼게요." 그는 점점 멀어져 가는 다에코의 새하얀 허벅지를 바라보았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세 번째에 있는 경기가 6학년의 달리기 였다. 그는 보호자석 가장 앞 자리로 걸어갔다. 권총소리와 함께 다섯 명의 선수가 차례차례로 출발했다. 5백미터의 거리를 보호자석 앞 으로 달리도록 되어 있었다. 부모들은 한결같이 열을 올리며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그는 골인지점에 테이프를 들고 있는 사람이 다에코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물론 그를 보지 않고 죽을힘을 다해 달려오는 아이들을 따뜻한 미소로 맞이하고 있었다. 나오코는 키가 큰 편이라서 그런지 금방 눈에 띄었다. 그러나 긴장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 고 오히려 달리는 것 자체가 귀찮은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이윽고 출발을 알리는 권총소리가 터지고, 다섯 명의 선수가 한꺼번에 달렸다. 두 사람이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나 오고, 나오코는 결국 세 번째로 골인했다. 그 동안 헤이스케는 카메라의 셔터를 두 번 눌렀 다. 생각해 보니 모나미도 달리기에서는 언제나 중간정도였다. 정신은 어른이라도 육체는 변 함없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타당할 것이다. 나오코는 골인한 다음에 그를 발견하고 씁쓸 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도 그것에 대답해 주듯이 똑같이 손을 흔들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그러나 렌즈 너머에 있는 사람은 나오코가 아니라 골인 테이프를 들고 있는 다에코였다. 살랑거리는 초가을 바람이 윤기있는 초콜릿색 머리칼 을 앞으로 흩날리더니, 그녀는 테이프를 들고 있는 손으로 머리칼을 살짝 쓸어 올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는 셔텨를 눌렀다. 5천 2백만 엔. 협정서에 적힌 금액만 보아도, 그 금액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5와 2라는 숫자 뒤에 0이 여섯 개 늘어서 있었다. 다만 그것 뿐으로, 그 숫자가 의미하는 것을 아무리 해도 실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승리의 숫자라고 한다. 애초에 과거의 사례나 신호프만방식 을 통해 오쿠로 교통측이 제시한 금액은 그에 훨씬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승리했다는 기분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결국 그 돈을 받고 사랑하는 사람의 목 숨이 사라진 것을 포기하라는 뜻일 것이다. "불만은 없으시죠?" 건너편에 앉아 있는 오쿠로 교통측의 남자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옆에 있는 남자도 그랬다. 헤이스케가 이 별실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두 사람은 일어서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사죄의 마음을 표시한 것이겠지만, 어느 정도로 마음이 담긴 행동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고가 난 지 몇 달이 지난 지금, 오쿠로 교통은 사 장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바뀌었다. 지금 눈 앞에 있는 남자들도 그 회사의 직원이라는 것뿐이지, 사고에 대해서는 전혀 책임이 없는 사람들이다. 아마 시간과 함께 이렇게 서서히 풍화되는 것이리라. 문득 허무함과 함께 쓸쓸함이 밀려 들었다. 다만 지금 눈앞에 있는 종이조각만이 비극의 기록으로 남는 것일까. 그는 정해진 위치에 이름을 써놓고 무카이 변호사가 지시하는 대로 도장을 찍었다. 그런 다음 보상금이 들어온 은행계좌를 써넣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끝났습니다." 무카이 변호사의 입가에는 보기 드물게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커다란 일을 치루어 냈다 는 만족감 때문인지, 표정에 여유가 생겨 있었다. "그 동안 여러모로 감사했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무카이에게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건너편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의 직원이 함께 일어나서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입을 하나로 모아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당신들이 사과할 것은 없습니다. 당신들은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고 별실을 나섰다. 유족회 전원의 조인식이 끝나자 사람들은 일단 회의실에 모여 무카이 변호사로부터 앞으 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우선 매스컴에 어느 정도 이야기해도 좋은지에 대해서 말 을 꺼냈다. "구체적으로는 보상금액인데, 매스컴이 가장 알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니까요." "그 금액을 말해야 합니까?" "앞으로 비슷한 사고가 일어난 경우에 선례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금액은 아마 재 판을 통해서는 받을 수 없는 금액일 테니까요."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별다른 이점이 없군요." "그렇습니다." 결국 다수결 방식을 통해, 금액에 대해서는 공표하지 않기로 전원이 희망했다. "그 밖에 다른 질문이 있습니까?" 그는 웃음기가 사라진 표정으로 사람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헤이스케는 알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여기에서 질문을 해도 좋은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그 질문을 할 수 있는 장소 는 여기밖에 없었다. "질문이 없다면 이것으로..." 해산 분위기로 이어지기 직전, 헤이스케가 손을 번쩍 들었다. 무카이는 뜻밖이라는 표정으 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질문이죠?" "오가와씨의 집에는 얼마나 지불되었나요?" "오가와씨?" 그 사람이 누구인지 무카이는 순간적으로 떠오르지 않는 것 같았다. "버스 운전기사입니다만." "아아!" 그의 주위에도 무카이와 똑같은 소리를 낸 사람이 몇몇 있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그 사람은 유족회와는 상관이 없으니까요." "그렇습니까?" "아마 어느 정도 위로금이 나왔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아니, 그냥요. 그는 자리에 앉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유족들이 의아한 눈초리로 지켜보는 가운데 누군 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자는 사고를 일으킨 장본인이잖아!" 7개월에 걸친 보상 교섭은 이렇게 종결되었다. 유족들은 무카이와 간사들에게 인사를 하 고, 그 동안 얼굴을 알게 된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는 삼삼오오 흩어졌다. 그 누구의 얼굴 에서도 만족감은 찾아볼 수 없었고, 이제 분노의 화살을 거두어야 한다는 허무감만이 떠다 니는 것 같았다. 갑자기 나오코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의 놓여있는 처지에 견딜 수 없을 때 는 원망이나 증오를 쏟아부을 상대가 필요한 법이에요... 밖으로 나서자 주위에는 온통 검은 장막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갑자기 술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나오코가 혼자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술로 허무함을 달랠 수도 없 었다. 슈크림이라도 사갈까. 그는 쓸쓸한 마음으로 역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육체의 장벽 1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내뿜는 숨결이 새하얗다. 그는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쑤셔놓고 그 자리에서 발을 동동거렸다. 춥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빨리 경험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헤이스케는 누구라도 붙잡고 불만을 토로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렇게 결과를 기다리기는 아무리 빨라도 모나미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일 것 이라고 여유있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은 거의 부자지간처럼 보였다. 부모는 유복한데다 지식 수준이 높은 것 같았고 아이들도 머리 가 좋아 보였다. 자신들만이 물에 둥둥 떠있는 기름 같아서 불안감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때 눈앞으로 불쑥 티슈가 들어왔다. 나오코가 새빨간 장갑을 낀 손으로 내민 것이다. "칠칠치 못하게 콧물이 나왔잖아요." 그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휴지를 한 장 빼서 코를 풀었다. 그러나 휴지통이 보이지 않 아 그대로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꽤 침착하군." 그는 무표정하게 서 있는 나오코를 바라보았다. "지금에 와서는 발버둥을 쳐도 하는 수 없잖아요. 이미 결과는 나왔을 테니까요." "하긴 그렇지만." 그녀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나서 덧붙였다. "그리고 아마 괜찮을 거예요." "자신만만하군." "내가 떨어지면 누가 붙겠어요? 안 그래요?" "만약에 떨어지면 모두 내 탓이 되겠군. 면접할 때 실수를 했으니까 말이야." 지망 동기를 묻는 질문에 미리 생각해 둔 대답을 거침없이 말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마지 막 마무리 단계에서 '그런 이유로 딸과 의논해서 이 학교로 정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할 것 을 '아내와 의논해서'라고 대답해 버린 것이다. 면접관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갸우뚱거렸다. 모나미에게 어머니가 없다는 것은 이미 서류를 통해 그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그런가?" "어쩌면 플러스로 작용할지도 몰라요. 이 학교, 꽤 통속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통속적?" "유명인에게 약하거든요. 작가라든지 예술가 말이에요."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어?" "아빠의 실수는, 우리가 그 유명한 사고의 피해자라는 것을 연상시키는 효과가 있었을 거 예요. 그렇다면 왠지 떨어뜨리기 어렵지 않을까요? 매스컴의 눈길도 신경이 쓰일 거구요." "그렇게 뜻대로 될까?" "어쨌든 마이너스는 되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마세요." 그녀는 안심하라는 듯이 그의 팔을 툭 쳤다. 오늘은 중학교의 합격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시험은 이미 끝났다. 시험을 보기 전에도 보 고 난 뒤에도, 그녀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다만 지나가는 말처럼 입학금을 준비 해 두라고만 했을 뿐이었다. 이윽고 게시판에 새하얀 종이가 나붙었다. 검은 펜으로 숫자를 빼곡이 쓴 종이였다. 주변 에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게시판 앞으로 몰려들었다. 헤이스케는 게시판을 위아래로 훑으며 나오코의 수험번호를 찾았다. 236이 나오코의 번호 로, 2곱하기 3은 6이라는 식으로 외워두었다. "저기 있어요." 그녀가 먼저 발견하고 알려주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일처럼 무덤덤한 말투였다. "응? 어디 있는데?" "어디를 보고 계세요? 왼쪽이에요." 그는 나오코의 손가락을 따라 눈길을 돌렸다. 그곳에는 분명히 236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 었는데, 유독 그 숫자만이 크게 보였다. "아, 정말이잖아! 있어! 정말 대단한데!" 그는 마치 재팬 시리즈 야구 경기에서 자이언츠 팀이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환호성을 질 렀다. 그와 동시에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러니까 걱정 말라고 했잖아요. 빨리 입학 수속이나 하고 집에 가요." 그녀는 등을 돌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갑자기 맥이 빠지고 쓰디쓴 웃음이 배어 나왔다. 만약에 합격한 사람이 모나미이고 나오코가 어머니로서 이 자리에 있었다면, 너무나 기쁜 나머지 눈물보를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나오코. 많이 변했군. 입학 수속을 마친 다음에는 잠시 길상사에 들러 마음을 정갈히 했다. 이번에 시험을 치른 중학교가 길상사에서 가까웠던 것이다. 두 사람은 잠시 쇼핑을 하고, 그런 다음에 식사를 하 게 되었다. "우리 둘이서 프랑스 레스토랑에 들어온 것이 몇 년 만이죠?" 테이블 건너편에서 나오코가 기분 좋은 듯이 말했다. 오랜만에 보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러고 보니, 모나미가 태어난 뒤에는 패밀리 레스토랑에만 간 것 같군." "그 아이는 햄버거를 좋아했으니까요" 헤이스케가 붉은 와인을 마시자 나오코도 마시고 싶다고 졸랐다. "술은 마시지 않았잖아?" "예. 하지만 지금은 어쩐지 마시고 싶어요. 예전과는 몸이 다르잖아요? 우리 집안은 알코 올과는 담을 쌓았지만, 아빠의 유전자가 들어 있으니까 마실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아직 초등학생 주제에." "이젠 중학생이에요. 조금만 따라줘요." 그녀는 장난기 어린 눈으로 와인 글라스를 내밀었다. "취해도 난 몰라." 그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면서 커다란 글라스 밑바닥에 가라앉을 정도로만 와 인을 따라주었다. 와인은 조명등에 비쳐 붉은 빛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어디에서 배운 것 인지 그녀는 술잔을 코에 대고 향기를 맡는 척하더니, 붉은 액체를 목으로 흘려보냈다. 그리 고는 즉시 떫은감이라도 씹은 듯이 얼굴을 찡그리고 몸을 가늘게 떨었다. "어때?" "이렇게 쓴 것을 왜들 마시는지 모르겠어요." "그야 그렇겠지. 주스가 아니니까." "그치만 마실 수는 있겠는데요?" "그래?" 나오코는 다시 한 모금 입에 넣고는 맛을 음미하더니 혀를 조금 움직였다. 결국 조금만 조금만 하더니 3분의 1이상을 혼자서 마셨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그녀는 택시 안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와인의 술기 운이 온몸에 퍼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알코올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았다. 평화로운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이상한 느낌 이 들었다. 정신은 나오코지만 그 몸에는 틀림없이 자신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집에 도착하자 밤이 꽤 깊어 있었다. 그는 나오코를 껴안고 이층으로 올라가서 어렵사리 잠옷으로 갈아 입혀 그대로 침대에 눕혔다. 나오코는 잠에 취한 것인지 술에 취한 것인지 연신 '여보, 미안해요. 여보 ,미안해요.'하고 사과를 했지만, 자리에 눕자마자 곧바로 새근새 근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욕조에 들어가서 오랜 시간을 들여 차갑게 식은 몸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욕 조에서 나와 스포츠 뉴스를 보면서 캔맥주 하나를 비웠다. 텔레비전에서는 자이언츠 팀의 겨울캠프 상황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 들기 전에 나오코의 방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이불을 껴안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그는 어깨에까지 이불을 덮어준 다음 불을 끄고 방을 나섰다. 헤이스케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이 어딘 가로 달아났는지 눈은 말 똥말똥하고 정신은 맑게 개었다. 그는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스위치를 켜고, 옆에 놓여 있는 문고판 책을 잡으려고 하다가 다시 손을 거두었다. 그 추리소설은 이미 다 읽은 것이다. 바 로 옆에 책장이 있었지만 지금 당장 읽고 싶은 책은 없었다. 그는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가 베개에 턱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멍하니 바닥의 빗살무늬 를 바라보았다. 처음 이사왔을 때는 푸른빛이 선명하던 바닥도, 몇 년이 흐른 지금은 갈색으 로 퇴색되어 있었다. 세월은 무심하게도 자신과 상관없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그리고 앞으로 도 계속 흘러가서, 이 집은 더욱 퇴색하고 자신은 더욱 늙어갈 것이다. 갑자기 어쩔 수 없는 고독감이 엄습해 왔다. 바깥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우물 속에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손을 마주잡고 함께 걸어온 나오코의 모습은 어디에 도 없고, 다만 희미한 목소리만이 귓가에 맴돌 뿐이다. 그녀는 이미 다른 세계를 걸어가고 있고, 어두운 우물 안에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갑자기 어찌할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자신이 말도 안돼는 사건의 희생물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든 것이다. 내 인생은 무엇인가. 내 인생은 어디에 있나.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는 오른팔을 내밀어 책장 가장 아래쪽에 꽂혀 있는 "품질관리"라는 책을 빼들었다. 물 론 그 책을 읽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뒤표지를 펼치자 사진 한 장이 끼어 있었다. 사진에는 골인 지점의 테이프를 잡고 가을 하늘보다 더 맑게 웃고 있는 다에코의 모습이 있었다. 운 동회 날에 몰래 찍은 사진이었다. 헤이스케는 사타구니로 손을 뻗었다. 그것이 서서히 팽창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사랑을 해 도 좋지 않은가. 나에게도 사랑을 할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으니까. 나에게는 아내가 없다. 섹스의 기쁨을 공유할 상대도 없이, 기묘하게 일그러진 숙명만이 남 아 있을 뿐이다. 그는 다에코의 얼굴과 음란한 장면을 떠올리면서 자위행위를 하려고 했다. 지금까지도 그 사진을 보면서 몇 번인가 그렇게 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오늘밤은 잘 되지 않았다. 그의 손안에서, 그것은 눈깜짝할 사이에 기운을 잃고 시들어 갔다. 그는 그만 포기하고 사진을 책에 끼우고는, 그대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한순간 차가운 공기를 느끼고 눈을 떴다.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눈앞에 모나미의 얼굴이 있었다. 스탠드 불빛을 받고 있는 얼굴에는 싱그러운 미소가 배어 있었다. "미안해요. 내가 깨웠나요?" 그녀는 이불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지금 몇 시지?" "새벽 세 시예요." "어쩐 일이야?" "왠지 모르게 눈이 떠졌어요. 어느 정도 잤지요?" "집으로 오는 택시 안에서부터 잤으니까, 여섯 시간 넘게 잤을 거야." 그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랜만에 마음 편히 잔 것 같아요. 언제나 여섯 시간 정도는 잤지만요." "시험이 끝나서 긴장이 풀려서 그럴 거야." "그럴지도 모르죠." 나오코는 몸을 딱 붙이고 그의 가슴에 볼을 비볐다. 치켜 뜬 두 눈에는 장난기 어린 음모 가 가득 숨어 있었다. "저, 손으로 해줄까요?" 순간적으로 가슴이 뜨끔했다. 조금 전에 자위하려는 것을 들킨 것이 아닐까. "그런 농담은 하지 말라고 했잖아?" "농담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내 얼굴을 보는 게 싫다면 얼굴을 가리고 하면 어때요?" "안돼. 그렇게는 할 수 없어." "정말이요?" "그래." "흐음. 그럴지도 모르죠." 그녀는 더욱 몸을 바싹 붙여왔다. 눈에 익은 모나미의 얼굴이 그의 코앞으로 바싹 다가왔 다. 딸의 얼굴이다. 오랫동안 딸로서 사랑해온 사람의 얼굴이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무엇인가 굳게 결심한 표정이었다. 무슨 중대한 고백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순간적으로 그의 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그때 그녀의 눈이 문득 위쪽을 향하더니 손을 길게 뻗었다. "이게 뭐예요? 자기 전에 이렇게 딱딱한 책을 읽어요?" "품질관리"책이었다. 책장에 꽂아두는 것을 깜빡한 것이다. 아차 하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했다. 그녀는 그의 머리 위에서 책장을 파락파락 넘겼다. 어느 페이지를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숫자만 써 있잖아요." "그래. 재미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책이야."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그녀는 갑자기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표정이 고정된 채, 입술을 어중간하게 벌리고 시선은 한 점을 응시했다. 그 눈이 눈 깜짝할 사이에 충혈 되는 것을 그 는 놓치지 않았다. 다에코의 사진을 발견한 것이 틀림없다. 헤이스케는 순간적으로 갖가지 변명거리를 떠올 렸다. 언제 찍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본인에게 전해 줄 생각이었지만 깜빡 했다. 책을 읽 다가 책갈피 대용으로 사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머리를 짜내어 생각한 변명거리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 고 책을 덮더니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 동안 그렇게 있다가 살금살금 이불에서 기어나갔다. 그 얼굴에는 다시 미소가 돌아와 있었다. "달콤한 잠을 방해해서 미안해요." "갈 거야?" "예. 편히 주무세요." "잘 자." 그녀가 나간 다음 그는 머리맡에 있는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덮여 있는 "품질관리"책에 는 다에코의 사진이 약간 비어져 나와 있었다. 그는 책을 책장에 꽂고 스탠드를 껐다. 2 운전사의 운전은 신중에 신중을 더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결코 마음을 놓지 않으려는 생각이 사이드 브레이크를 잡아당기는 동작에조차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이러한 신중함이 그때의 오가와에게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런 생각이 무슨 소용 이 있으랴. 사고가 일어난 지 정확히 1년이 지났다. 모두 함께 모여 1주기를 치르자고 제안한 사람은 유족회 간사들이었다. 그들은 오쿠로 교통과 교섭해서 유족회 전원이 버스를 타고 사고현장 으로 갈 수 있도록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오쿠로 교통은 아무런 불평 없이 숙박비까지 지 불해 주기로 약속했다. 문이 열리자 안내를 받은 오쿠로 교통의 직원이 일단 버스에서 내렸다. 그는 즉시 돌아와 서 마이크를 잡았다. "그러면 앞쪽부터 순서대로 내려주십시오. 결코 서둘지 말기를 부탁드립니다. 계곡에는 아 직 눈이 많이 쌓여 있어서 미끄러질 우려가 있습니다. 반드시 난간을 잡고 계단을 한 칸씩 내려가시기 바랍니다." 그의 지시에 따라 가장 앞줄에 있는 승객들부터 순서대로 내려갔다. 헤이스케의 차례가 되자 그는 창가에 앉아 있는 나오코에게 말을 걸었다. "내려야지." 검은 코트를 입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밖에는 사나운 겨울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버스 난방 때문에 머리가 띵했던 탓인지 그는 뺨을 스치는 차가운 기 운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그러나 역시 겨울 바람은 만만치 않아서 금새 뺨이 얼얼하게 아 파 왔다. "역시 추운데. 귓볼이 떨어질 것 같아." "겨우 이 정도로요?" 그 말을 듣고서야 나오코에게 있어서는 여기가 고향과 마찬가지라는 것이 생각났다. 사고현장은 완전히 수리가 끝나 있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자주 보던 부서진 가드레 일이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새로 만든 가드레일 앞에서 버스가 굴러 떨어진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경사면의 각도는 30도나 40도 정도 될까. 그러나 위에서 내려다보아서 그런지 눈앞이 아 찔할 정도로 거의 직각으로 보였다. 죽음에 이르는 미끄럼틀은 수십 미터나 계속 이어져서, 그 끝에는 작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발이 빠질 정도로 쌓여있는 눈에 햇살이 반사되어 눈을 아프게 찔렀다. 얼음처럼 투명한 겨울 햇살을 받고 강의 수면이 반짝반짝 빛났다. 사고가 일어난 때는 아직 햇살이 고개를 내밀기 전이었다. 주위의 숲이 빛을 완전히 차단해서 이 계곡은 아마 지옥의 장막처럼 깊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으리라. 그는 어둠을 뚫고 버스가 굴러 떨어지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것만으로도 등골에 싸늘한 기운이 달리고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 거대한 관속에 타고 있었던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 했을까.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계곡 바닥을 향해 합장하고 있는 사 람도 있었지만, 나오코는 꼼짝도 하지 않고 오로지 계곡과 눈싸움을 할뿐이었다. 도쿄에서 동행한 젊은 승려가 나지막이 불경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유족들은 눈길을 내리 깔고 저마다 깊은 상념에 잠겼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도 흐느낌은 가라앉지 않고 그의 옆에 있던 노부인도 오열을 그치지 않았다. 승려의 독경이 끝나자 사람들은 계곡을 향해 가지고 온 꽃다발을 던졌다. 꽃이 아니라 고 인이 좋아했던 것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가 럭비공을 던졌을 때는 깊은 한탄의 소 리가 계곡에 메아리쳤다. 고인은 아마 대학의 럭비 선수였을 것이다. 그때까지 계곡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나오코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내 말을 믿어줄래요?" "뭔데?" "그때 나는 이대로 죽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순간적으로 어떤 식으로 죽 는지 머리에 떠올랐어요. 온몸에 유리파편이 박히고, 머리가 수박처럼 깨진 모습으로 말이에 요." "그만해." "하지만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모나미와 같이 죽음으로 가는 것이에요. 그때 문득 떠오른 것이 당신의 얼굴이었어요. 당신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이상하죠?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이 그런 걱정을 하다니. 어쨌든 그 애만은 살려 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나를 희생해서라도." 그 말을 토해내듯 단숨에 마친 그녀는 다시 물었다. "믿을 수 있어요?" "믿을 수 있어. 당신 말대로 모나미는 살았어." "어중간한 상태지만 말이에요." 헤이스케는 생각했다. 앞으로는 나의 몫이다. 모나미의 몸과 나오코의 마음을 지키는 것 이, 나에게 부여된 사명이다. "이 바보야!"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목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 았다. 쌍둥이 딸을 잃어버린 후지사키라는 남자였다. 그는 두 손을 메가폰처럼 입에 대고 다 시 한 번 소리쳤다. "이 바보야!" 그에게 자극 받은 것인지, 몇몇 사람들이 잇달아 소리를 질렀다. 소리치는 내용은 제각기 달랐다. '안녕!'이라고 소리치는 사람도 있었고, '잘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헤이스케도 가슴에 응어리진 무엇인가를 담아 소리치고 싶었다. 문득 '편히 자라'라는 말 이 떠올랐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소리를 지르기 위해 계곡을 향해 숨을 들이마셨을 때였다. 나오코가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러지 마세요. 촌스러워요." "그래?" "그래요. 그만 가요." 그는 황급히 버스를 향해 걸음을 내딛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위령여행에서 돌아온 다음날은 초등학교 졸업식으로, 역사가 느껴지는 낡은 강당에서 거 행되었다. 헤이스케는 뒤쪽에 있는 보호자석 중간쯤에 앉아 차례대로 졸업장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스기타 모나미." "네!" 이름이 불려지자 힘찬 대답과 함께 나오코가 일어섰다. 그녀는 다른 졸업생들과 똑같이 단상으로 올라가서 졸업장을 받고 교장 선생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머 리에 새겨두려는 듯이 그녀의 뒤를 쫓아 시선을 움직였다. 졸업식이 끝나자 운동장은 이별의 자리로 변했다. 나오코는 특히 더 많은 친구들에게 둘 러싸였다. 혼자 사립 중학교로 진학하는 만큼 친구들과 만나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 이다. 그는 친구들과 손을 마주잡거나 편지를 주고받는 나오코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 켜보았다. 갑자기 한 여자아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그녀는 그 아이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위 로의 말을 건넸다. 그 모습에서는 동급생이 아니라 나이가 많은 이모나 어머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오코보다 더 많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사람은 바로 담임 선생인 다에코였다. 그녀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님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창백할 정도로 새햐얗던 뺨이 오늘따라 발그스름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몇 번을 경험해서인지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이별의 말들이 허공을 날아다닌 다음 졸업생과 부모들은 학교 정문을 통해 총총히 사라지 기 시작했다. 커다란 일을 끝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교사들 가운데는 한숨을 내쉬는 사람 도 있었다. 그제서야 친구들과 헤어진 나오코가 그의 옆으로 뛰어왔다. 손에는 졸업장이 들어있는, 커 다란 붓통처럼 생긴 갈색 통이 들려 있었다. "많이 기다리셨죠?" 사람들에게 시달린 탓인지 그녀의 얼굴에는 피로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악수 세례를 많이 받더군." "손이 아플 정도였어요. 그보다 인사는 했어요?" 그녀는 아직 친구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누구에게?" "그녀 말이에요. 그녀 말고 인사할 사람이 또 있어요?" 나오코는 왜 시치미를 떼느냐는 듯이 이마를 약간 찡그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그녀의 턱 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이슬처럼 맑은 미소를 머금은 다에코가 서 있었다. 그는 겸연쩍은 마 음을 숨기기 위해 목덜미를 문질렀다. "인사를 해두어야 하니?" 나오코는 한숨을 토해내더니 눈길을 돌려 유리처럼 투명한 허공을 쳐다보았다. "다녀오세요. 난 여기 있을 테니까." "뭐야? 나 혼자 가라구?" "그래요." 그녀는 다시 시선을 아래로 떨구더니 운동장의 바싹 마른 흙을 툭툭 찼다. "할말이 많을 거 아니에요? 아무런 거리낌없이 말을 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예요."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의 이불 속으로 파고들던 밤, 그녀는 역시 책에 끼워둔 다에 코의 사진을 본 것이다.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줄곧 고민과 함께 서글픔까지 곱씹고 있었을 게 틀림없다. 그의 사랑을 인정해야 할지 말지... "알았어. 그러면 함께 가지." "예?" "함께 인사하러 가자구." "그래도 괜찮겠어요?" "물론이야. 나 혼자 인사하러 가면 이상하잖아?" 그는 쭈뼛거리는 나오코의 손을 잡고 다에코가 있는 곳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신세를 졌습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그는 다른 학부모들도 하는 평범한 말을 늘어놓았다. "저야말로 신세를 많이 졌지요. 아버님께서요 건강하세요." 다에코의 웃음은 학부모에 대한 교사의 표정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집까지 걸어가면서 나오코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손을 잡고 걷는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닌가.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는 언제나 손을 잡 고 다녔는데 말이다. 나오코는 집에 가는 길에 입에 지퍼를 채운 것처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 우체부가 자전거에서 내리는 참이었다. 그는 우체부에게 말을 걸어 우편물 을 받아들었다. 속달이었다. 보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뜻밖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서 온 거예요?" "오가와 이쓰미" "오가와라면...?" "오가와 운전사의 딸이야." 우편물을 펼쳐본 순간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면서 자잘한 소름이 돋아났다. "왜 그래요?" 한 순간 나오코의 얼굴에 불안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그는 들고 있던 우편물을 그녀에게 건네주면서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오가와 세이코씨가 세상을 떠났다는군." 3 세이코의 장례식은 그녀가 살던 마을의 회관에서 치러졌다. 손을 대면 허물어질 것 같은 낡아빠진 건물에 입구도 비좁았다. 마을회관 앞에는 말 그대로 형식적일 정도의 초라한 꽃 다발이 늘어서 있었다. 이쓰미에게서 속달을 받은 것은 어제로, 몇 시에 어디에서 장례식이 치러지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다만 어머니의 부고 소식만 간단히 적혀 있을 뿐이었다. '오늘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장례식은 일요일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로 감 사했습니다.' 그는 어제 곧바로 차를 몰아 그녀의 아파트를 찾아가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문을 두드려 도 사람의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이웃집의 문을 두드려서야 이 마을 회관에서 장례식이 치 러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인을 물어보자 이웃집 여자는 귀찮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 렸다. "심장마비라고 하던데요. 아침에 일하러 가려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 그 자리에서 쓰러졌 대요." "일을 하러 가다뇨? 무슨 일을 했는데요?" "빌딩 청소일을 한다고 들었어요." 다바타 제작소를 그만둔 것인가. 아니 그만둔 것이 아니라 해고당한 것이리라. 그는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나오코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내일 장례식에 참석해도 되겠느냐 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두말도 하지 않고 흔쾌히 찬성했다. "왜 그런 것을 일일이 물어보세요? 아빠가 가고 싶으면 가는 거죠." 마을회관은 큰길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우두커니 자리잡고 있었는데, 입구 왼쪽 에는 일흔은 넘었음직한 체구가 작은 작은 노인과 이쓰미가 나란히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 었다. 노인이 누구인지는 짐작도 되지 않았다. 나이를 보면 세이코의 아버지뻘이 되겠지만 생김생김은 전혀 닮지 않았던 것이다. 분향을 할 차례는 금방 돌아왔다. 조문객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땅속으로 파고들 듯이 아래만 보고 있는 이쓰미의 손에는 꼬깃꼬깃하게 구겨진 새하얀 손수건이 쥐어져 있었 다. 그 손수건으로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닦는다고 생각하니 코끝이 시큰거리고 명치끝이 아려왔다. 앞을 지나치려고 할 때 그때가지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던 이쓰미가 문득 고개를 치켜들었 다. 기척을 느낀 것이다. 이쓰미는 깜짝 놀란 듯이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떴다. 그는 자신 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추어 설 뻔했다. 그녀는 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새하얀 목덜미가 왠지 서글프게 느껴졌다. 그는 발길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썰렁한 마을회관 안에는 짙은 향냄새가 무겁게 내려앉아 있 었다. 이쓰미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장례식을 치른 날로부터 다음주 토요일이었다.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가자 저녁 일곱 시가 지나 있었다. 마치 그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여덟 시 쯤에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어쩌면 당시 일을 하던 어머니를 통해 토요일에도 잔업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장례식에 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짙은 그늘을 드리운 이쓰미의 표정이 불쑥 떠올랐다. "그 동안 많이 힘들었겠구나." 그는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장례식에는 참석했지만 이쓰미와는 얘기도 나누지 못해 아 무 것도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저,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지만...받은 부의금을 돌려드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요..." "부의금을 돌려주다니, 무슨 말이니?" "부의금을 돌려드리고 싶어요." 그녀의 말에서는 분노를 엿볼 수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치미는 것이라고 헤이스케는 생각했다.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단다. 이 아저씨가 낸 돈은 별로 대단한 금액이 아니니까." "다들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수화기를 조금 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기어들어 갔다. 다들이라는 것 은 장례식을 관장하던 어른들을 가리키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친척들이 와 있었을지도 모른 다." "마음만 고맙게 받으마." "하지만 반드시 돌려드리고 싶어요. 그것 말고도 드리고 싶은 것도 있고요." "주고 싶은 것이라니? 나에게 말이니?" "예." 단호한 대답을 보면 그녀 나름대로 결심을 한 것 같았다. 무엇이냐고 물으려다가 그 말을 삼켜 버렸다. 그것을 알면 받는다고 할 수도 받지 않는다 고 할 수도 없게 된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사양하지 말고 받아두기로 할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집으로 가지러 가면 되니?" 잠시 침묵이 이어지자 그는 갑자기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이제는 집이 없어요." "아니, 왜?" "어제 그 아파트에서 나와서 지금은 친척집에 있어요." "친척집이 어디에 있는데?" "시키라는 곳이에요." "시키? 사이타마현에 있는 시키?" "예." 시키라는 지명을 들어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시키라는 곳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 만 자신과는 관련이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수화기를 들지 않은 한 손으로 교통지도를 펼쳤다. "시키의 어디쯤이지? 근처에 큰 건물이라도 있니?" "잘 모르겠어요. 여기에 온 지 얼마 안돼서요." 이쓰미의 목소리에는 불행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가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은 지금까지 자주 왕래하던 친척이 아닌 듯했다. 지금까지 고생만 했는데 앞길도 그다 지 밝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가슴에 먹구름이 낀 것처럼 우울해졌다. 결국 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점심식사를 마치자마자 그는 나오코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시키역으로 갔다. 처음 에는 혼자 살 생각이었지만 나오코가 같이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제대로 대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쓰미는 개찰구 바로 옆에 서서 발끝으로 아스팔트를 차고 있었다. 소매 부분이 새하얀, 붉은 색 점퍼가 투명한 햇살아래 초라하게 보였다. 그녀는 헤이스케를 보고 꾸벅 인사를 하 고는 금방 나오코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눈이 부신 듯이 한순간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디로 들어갈까? 배는 고프지 않니?" 이쓰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다만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다. 그러자 옆에서 나오코 가 끼여들었다. "이 시간에 배가 안 고프면 이상하죠. 우리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요." "그래? 그러면 적당한 가게를 찾아볼까?" 시키역 주변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잘 개발되어 있었다. 똑바로 뻗어있는 널따란 길 양쪽 에는 대형 슈퍼마켓을 비롯해 산뜻한 디자인의 건물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역 바로 옆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부담 갖지 말고 많이 먹어. 우리 아빠, 어제 경마에서 돈을 많이 땄거든. 그죠 아빠?" "응?" 그는 한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서 나오코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경마를 해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오코가 재빨리 한쪽 눈을 찡긋 감는 것을 보고 그 의도를 눈 치챘다. "그래. 장난으로 마권을 샀는데 그 말이 우승했지 뭐니? 그렇게 요행으로 번 돈은 한꺼번 에 마구 써야지." 인형처럼 굳어져 있던 이쓰미의 얼굴에 배시시 미소가 돌고, 겨우 메뉴에 시선을 돌릴 여 유가 생긴 것 같았다. 그래도 주문한 것은 카레라이스뿐이었다. 아마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 에서 비교적 저렴한 것을 찾았을 것이다. 나오코가 옆에서 햄버거와 프라이드 치킨 등 아이 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몇 가지 주문하고 마지막으로 이쓰미를 향해 물었다. "언니. 파르페나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을래?" "난 아무거나 좋아." 이쓰미가 조심스럽게 대답하자 나오코는 망설이지 않고 초콜릿 파르페를 두 개 추가했다. 그제서야 그는 나오코가 같이 가겠다고 한 이유를 이해할 것 같았다. 그가 혼자 왔다면 이런 레스토랑에 들어와도 극구 사양만 하는 이쓰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했을 것이 다. "엄마 일은 정말 안됐구나. 이제 조금 안정됐니?" "조금 놀라긴 했지만 이제 괜찮아요." "심장마비라고 들었다만." "예. 의사들이 어려운 말로 뭐라고 하긴 했는데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어요. 어쨌든 쉽 게 말하면 심장마비였다고 하던데요." 이쓰미는 서서히 어린 소녀다운 표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래?" 그는 물을 한 모금 들이켜 바싹 마른 입안을 적셨다. 심장마비라는 병명이 없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아침에 설거지를 하다가 현관에서 소리가 나서 나갔더니 엄마가 쓰러져 있었어요. 한쪽 은 신발을 신고 다른 한쪽은 맨발로요..." "구급차는 금방 왔니?" "부르긴 했는데 이미 늦었어요. 전화를 할 때부터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그러나 마치 잠을 자는 듯한 편안한 모습이었어요." 이쓰미는 어깨에 비스듬히 메고 있던 작은 가방을 열고, 휴지에 싸여 있는 것을 꺼내 탁 자 위에 놀려놓았다. "이것을 드리려구요." "아버지 유품이니?" 휴지를 펼치자 안에서 나온 것은 낡은 회중시계였다. "아! 회중시계구나." 크기는 직경 5cm정도로, 위쪽에 용머리가 달려 있는 고급스러운 은빛 제품이었다. 뚜껑을 열려고 하자 잠금 장치가 되어 있는지 아무리 힘을 주어도 열리지 않았다. "뚜껑이 부서진 것 같아요." "그런 모양이구나." "아버지...아빠는 언제나 그것을 가지고 다녔어요. 사고가 날 때도 가지고 있었는데, 그래 서 뚜껑이 망가진 것 같아요." "그렇구나." 그는 시계를 만지작거리면서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빠는 늘 입버릇처럼 말했어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것 이라구요." "그렇게 귀중한 것이라면 네가 가지고 있는 편이 낫지 않겠니?" 이쓰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만약 아빠 것이라는 것을 알면, 친척들이 버려 버릴 거예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니?" "정말이에요." 그 말이 과장이 아닌지, 이쓰미의 말에는 깊은 슬픔이 배어있었다. 갑자기 돌덩이가 떨어 진 것처럼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 친척에게 있어서 오가와는 생각하기도 싫은 골치 아 픈 존재이리라. 이쓰미는 고개를 들고 수줍은 듯이 얼굴을 붉히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저씨에게 뭔가를 주고 싶었어요. 장례식에 와주셔서 정말 기뻤거든요." "뭐 그렇게까지..." 그때 나오코가 테이블 밑에서 그의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아무말 말고 받아두라는 뜻 이었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낡은 회중시계를 살펴보았다. "이 아저씨가 가져도 정말 괜찮겠니?" 이쓰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받아두겠다. 다시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렴." 그는 다시 시계를 조심스럽게 싸서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마치 그러기를 기다리고 있었 다는 듯 때맞춰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다. 식사를 마치고 이쓰미는 헤이스케와 나오코를 역의 개찰구까지 배웅해 주었다. 그는 헤어 지기 전에 무슨 말인가 해주고 싶었지만 자칫 상처를 건드리기라도 할까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건강하면서 말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평범한 말이었다.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는 이쓰미의 입술이 일 직선으로 꼭 다물어져 있었다. 개찰구 안으로 막 들어선 그는 나오코에게 물어보았다. "그 애가 허기저 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나오코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는 지금 남의 집에 얹혀 살잖아요. 남의 집 밥은 아무리 먹어도 배고프다는 말도 몰라요? 아마 배가 고파도 밥을 달라는 소리는 못할 거예요." "아아...그래?" 뒤를 돌아보자 이쓰미는 아직 개찰구 건너편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탓인지 그녀의 눈빛이 촉촉이 젖어 있는 것 같았다. 헤이스케가 손을 흔들자 나오코도 따라서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그는 이쓰미의 얼굴이 울상이 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4 나오코의 중학교 생활은 돛을 높이 올리고 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배처럼 순조로웠다. 이 제는 육체와 마음의 균열도 어느 정도 조절하는 듯했고, 그토록 어색했던 말투도 유명 사립 중학교 다니는 조금 성숙한 여학생의 입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니 그다지 이상하지 않았다. 특히 학교 성적에 관해서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첫 중간시험에서 전교 7등을 차지하더 니 그 이후에도 상위10위권에서 떨어지지 않고, 학년말 시험에서는 드디어 3위안에 들어갔 다. "어느 학원에 보내고 계세요?" 학부모 간담회에서 헤이스케는 남자 담임 교사로부터 그런 질문을 받았다. 담임 교사는 스기타 모나미라는 언뜻 보기에 평범한 소녀의 성적에 경탄을 금할 수 없는 것 같았다. 학원에는 보내지 않는다고 대답하자 담임 교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귀 찮을 정도로 공부방법이나 교육방법에 대해서 끈질기게 질문했다. 나중에는 집안에 학자의 피가 흐르고 있느냐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 "워낙 혼자서 알아서 하니까 저는 별로 관여하지 않습니다. 공부하라고 말한 적도 없고요. 게다가 성적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런 말은 아무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모나미 뒤에 족집게 과외 선생이 있다고 생각하 는 것 같았다. 그는 학부모 간담회에 나갈 때마다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어머니들로부터 끊 임없는 질문공세에 시달려야만 했다. 실제로 나오코는 과외 같은 것은 전혀 받지 않았다. 단, 평소의 공부량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는 우선 게으름이라는 단어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집안 일을 하는 틈틈 이 공부를 했고, 공부가 일단락 되면 남는 시간을 가사에 충당했다. 물론 텔레비전을 보거나 친구와 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숨을 돌리는 정도로, 공부에서 쌓인 스트레스 를 풀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도 한시간 반으로 정해 놓고, 아무리 보 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어요 그 규칙을 깨뜨리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악착스럽게 공부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자 나오코는 사과를 깎으면서 담담히 대답했다. "하나를 깨뜨리면 두 개를 깨뜨리게 되고 그 다음에는 세 개를 깨뜨리게 돼요. 결국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죠. 예전의 내 인생이 바로 그랬어요. 그 결과 초등학교에서 전문 대학까지 학교라는 이름이 붙은 곳에 14년이나 다니면서도 살아가기 위한 기술을 하나도 배 우지 못했어요. 그와 똑같은 일을 두 번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에요. 앞으로 뼈에 사무치는 후회같은 것은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작정이에요." 그녀는 예쁘게 깎은 사과를 네 조각을 잘라 포크에 찍어 내밀었다. 그는 사과를 먹으면서, 예전의 인생에는 그렇게 후회만이 남아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나오코는 공부만이 모든 것이 아니라 공부 이외의 것에도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예전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많은 책을 읽고,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던 오디오도 청소를 해서 음악을 듣게 되었다. "이 세상은 정말 멋지지 않아요? 많은 돈을 들이지 않아도 행복해질 수 있고, 생각을 어 떻게 하느냐에 따라 세계관까지 바뀔 수 있어요. 왜 지금까지 그것을 깨닫지 못했는지 너무 억울해요." 감동을 주는 책이나 음악을 만날 때마다 눈을 반짝거리며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녀는 친구들도 소중히 생각해서, 자기보다 훨씬 정신연령이 낮은 친구들을 적극적인 성 격으로 만들었다. 성적도 뛰어난 데다가 어른스러운 그녀는 친구들에게도 제법 인기가 있는 것 같았다. 일요일이면 몇몇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기도 했다. 그런 때에는 직접 음식을 만들어 대접 했는데, 그 음식 솜씨에 누구라 할 것 없이 탄성을 질렀다. "모나미! 굉장하다! 어떻게 이런 요리를 만들 수 있어?" "별로 대단하지 않아. 너희들도 하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요즘은 요리 기구가 많이 편리해졌잖아. 옛날에는 전자 레인지도 없어서 찜통에 음식을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다 구. 요점 젊은 엄마들은 복 받은 거야." "모나미도 참. 마치 우리 할머니처럼 말하네." "그래? 그러니까 나도 고마워해야 한다는 뜻이지." 어색한 분위기에서 재빨리 말을 돌리는 것도 주특기처럼 되어 있었다. 어린 친구들이 돌 아간 뒤, 나오코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애들은 내 선생님이에요. 단지 중학생답게 행동하기 위해서 같이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 애들과 함께 있으면 내 마음속에 있던 구태의연하고 낡은 가치관이 바뀌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그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몰랐던 정신의 꽃봉오리가 하나둘씩 피어나는 것 같아요. 그 애들과 얘기를 나누고 나면 갑자기 세상이 온통 환한 장미꽃밭으로 보여요." 말은 이해하지만 어느 사이엔가 보이지 않는 장벽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격은 나오코으 것이지만 학습능력과 마찬가지로 감성까지 모나미의 젊은 두뇌가 지배하 고 있는지도 모른다. 십대에게만 보이는 것, 나이를 먹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지금의 그녀 에게는 보이는 것이리라. 가장 골치 아픈 것은, 그러한 감성의 변화를 나오코 자신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헤이 스케는 그 변화의 끝자락도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외모가 모나미로 변했다 하 더라도 헤이스케는 그녀의 인격을 여전히 자신의 아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헤이스케는 여느 때보다 귀가시간이 늦어졌다. 새로 입사한 동료 두 명을 환영하는 술자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2차로 들른 술집에서 적당히 눈치를 보며 일어섰지 만 집에 도착했을 때는 열 한 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때문인지,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나 왔어." 신발을 벗으면서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우선 욕실로 달려가자 불이 켜져 있고 안쪽에서 샤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나오코의 작은 등이 보였다. 샤워를 마친 그녀는 머리를 감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들고 있던 샤워 기가 떨어지고 물이 여기저기로 흩어져서 욕실 벽을 적셨다. 그녀는 재빨리 물을 잠그면서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랐잖아요. 노크도 안하고 갑자기 문을 열면 어떡해요?" 목소리에 불쾌감이 진하게 묻어 나왔다. "아아, 미안해." 그는 사과를 하면서도 왜 부부사이에 노크를 하고 문을 열어야 하는가 라는 생각이 머리 를 스쳤다. "지금 곧 나갈게요." "빨리 샤워하고 싶어서 그래. 몸에 담배 냄새가 달라붙어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찜찜하거 든."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옷부터 벗기 시작했다. 그녀와 함께 목욕하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 이었다. 그녀는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에 정신이 팔려있기 때문이다. 그는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욕실에 들어갔다. 그녀는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는 몸에 물을 끼얹고 욕조에 들어앉았다. 그러자 자기도 모르게 뱃속 에서 짜내는 듯한 중년 남자의 특유의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는 다리를 쭉 뻗고 편안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오늘 과장이 토라져서 아주 힘들었어. 술자리에 가자는 말을 아무도 하지 않았거든. 그러 자 그렇게 훼방꾼 취급할 것까지 없지 않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 뭐야? 기분을 풀어 주느라고 꽤 고생했다구." "흐음. 그거 힘들었겠네요." 어딘지 모르게 건성으로 대답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등을 돌려 마른 수건으로 머리 와 얼굴을 닦았다. "왜 욕조에 들어오지 않는 거지? 언제나 머리를 감고 나서 다시 한 번 들어오잖아?" "오늘은 됐어요." 여전히 등을 보인 채 차갑게 대답하면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을 때였다. 순간적으로 언뜻 그것이 보였다. "이봐!" 그녀는 귀찮다는 듯이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만 돌렸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아랫도리를 가리키며 신기한 듯이 소리쳤다. "거기에 털이 났잖아? 좀 보여주지 않겠어?" 그는 욕조 안에서 일어서려고 허리를 들었다. "뭐 그런 것에까지 신경쓰고 그래요?" "왜 그래? 좀 보여주면 어때서?" 그녀의 허리에 손을 감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려고 했을 때였다. "손대지 마세요!" 그녀가 손을 뿌리친 순간, 그는 균형을 잃고 욕조 안에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순간적으로 코까지 물에 잠겨 욕조의 물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욕실에서 나가더니 문을 콰당 닫고는, 옷 도 입지 않고 그대로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잠시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욕조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 그때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저러지? 나는 남편인데. 남편이 아내의 몸을 본다고 해서 뭐가 잘못된 거지? 몸이 모 나미의 것이라서 그런가. 아무리 그렇더라도 모나미는 내 딸이다. 기저귀도 내가 갈아주었 다.! 어느 사이엔가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듯한 분노가 몸 안에서 뛰어다녔다. 그러나 잠시 시 간이 흐르자 그토록 소용돌이치던 분노는 눈 녹듯이 사라지고, 어쩐지 그 상황을 이해할 것 만 같았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아무래도 나오코의 마음을 지탱하고 있는 가느다란 실 을 건드린 것 같았다. 그는 변변히 몸도 씻지 않은 채 욕조에서 나왔다. 그때 비로소 갈아입을 속옷도, 목욕을 하고 나서 입는 잠옷도 준비해 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나오코에게 옷을 준비해 달 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조금 전에 벗었던 속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일층 거실에서는 나오 코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층으로 올라가서 속옷을 갈아입고 나서 그녀의 방문을 살그머니 열어보았다. 나오코는 문을 등진 채 방 한가운데에 앉아 무릎을 껴안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손때 묻은 곰인형이 들려 있었다. 문이 열린 것을 모를 리가 없지만 그녀의 어깨는 돌로 만든 조 각처럼 약간의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저...뭐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미안했어. 술이 조금 과했나봐. 요즘 들어 술이 많이 약해 져서 말이야." 그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공허한 웃음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그러 나 나오코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돌아서는 순간, 그녀의 어두운 목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죠?"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생각하고 있자 다시 한번 똑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죠? 겨우 그만한 일로 화를 내다니." "아니야." 일단 그렇게 대답했지만 그 다음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 나 시선은 반대편에 고정되어 있어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미안해요. 어쩐지 싫었어요." "만지는 것이?" "만지는 것도 그렇지만..." "보는 것도 말이야?" "예." 그녀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뒷모습은 미안해하기보다 몹시 당당해 보였다. "그래?" 그의 입에서는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는 관자놀이를 긁적이다가 문득 그 손가락 끝 을 살펴보았다. 손톱 끈이 기름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목욕은 했지만 제대로 세수도 하지 못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지저분한 중년 남자의 표본이로군. 그의 입에서는 자조에 찬 쓴웃 음이 배어 나와. "미안해요.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결코 아빠가 싫어진 것은 아닌데요." 그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아내인지 딸인지, 그것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앞에 있는 사람이 아내이든 딸이든, 자신이 취할 태도는 하나밖에 없었 다. "괜찮아. 신경쓰지 마. 앞으로는 목욕을 따로따로 하지. 욕실 문도 함부로 열지 않을게." 그녀의 흐느낌에 맞추어 작은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밝은 목소리로 말하려고 노력했다. "별건 아닌 일에 울긴 왜 울어? 괜찮아. 아마 그것이 정상일 거야." 나오코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새빨갛게 충혈 되어 있었다. "이렇게 무너져 가는 건가요?" "무너지긴 뭐가 무너져?!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구!" 그의 말에는 평소에 찾아볼 수 없는 깊은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는 갑자기 가슴이 막막해져 왔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2권을 읽으면 비밀이 풀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