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 지은이:후지사와 슈/김난주 옮김 출판사:동방미디어 또 전철이 탈선한 모양이다. 대여섯 살 난 남자 아이가 안내소 참문에 매달려 있다. 늘 공룡 만 화 프린트가 찍혀 있는 티셔츠를 입고, 렌즈가 두꺼운 원시 안경 속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 클린 스위프라는 게임에 열중하는 아이다. 건널목 근처 커브 선로에서 탈선한 것이리라. 나는 벽에 걸 려 있는 열쇠 꾸러미와 책상 아래 놓여 있는 도구 상자를 들고 안내소를 나온다. 6인치짜리 조그 만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움직이던 가미가타 희극(교토지방을 무대로 하는 희극-옮긴이) 영상이 머리 속에 남아 아직도 반전하고 있다. "포인트 바로 앞이예요. 내가 발견했어요." 나는 바깥 공기를 깊이 들이마신다. 튀김 기름 냄새가 어렴풋이 섞여 있어 숨을 멈췄다. 건너편 벽에 붙어 이는 커다란 배기구에서 식료품 매장의 반찬가게 안 공기가 뿜어 나오는 까닭이다. "잘 했다. 가르쳐 주어서 고맙구나." 나는 이렇게 말하며 공룡 티셔츠를 입은 소년을 내려다 본다. 올려다보는 안경 렌즈에 빛이 고 여, 무색투명한 점액 덩어리가 테에 끼어 있는 것 같다. 넓다랗게 확대된 눈에 나는 웃음을 던진 다. 건널목 바로 앞의 간이 게이트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손을 잡고 서 있는 젊은 엄마와 세 살 정도 된 여자 아이가 보였다. 나는 가볍게 머리를 숙이고 그쪽으로 향한다. 물 속에서 파이프 오 르간을 치 는 것 같은 기묘한 소리가 커진다. 곡명은 잘 모르겠지만 귀에 못이 박힐 정도다. 아마 도 오리지날일텐데, 너무 많이 틀어서 스피커의 콘 종이가 너덜너덜해진 듯한 소리에 학생 시절 에 살았던 이시가미도의 조그만 찻집이 떠올랐다. 찻집 안은 하얀 베니어 판으로 만든 카운터와 파이프 의자. 코너에는 20년 전에 유행했던 인베이더 게임기가 한 대. 그리고 언제나 한결같이 카 펜터스의 '예스터데이 원스모어'가 흐른다. 하루 종일 엔드리스 테이프로 그 한 곡만 틀어놓는다. 마스터는 그저 카운터 안에 앉아 다 닳아빠진 코믹 잡지를 읽을 뿐. 테이프가 마모되고 음소 자 체가 바뀌어, 마치 발정한 고양이 울음 소리 같은 보컬에 나는 거의 미쳐 버릴 것만 같았었다. "마스터, 어떻게 좀 할 수 없습니까, 이 음악." "자넨, 그럼 왜 이런 곳에 하루 종일 있는거지?"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 찻집의 아무 맛대가리도 없는 업무용 3분 카레를 좋아했던 기 억도 난다. "죄송합니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나는 옅은 물색 운동복을 입은 엄마쪽에 말을 건다. 여자가 어꺠까지 내려오는 윤기없는 머리 칼을 한 쪽 귀로 넘기면서 얼굴을 들고, 아이의 손을 잡아당기며 희미하게 웃어 보인다. 눈 아래 도톰하게 솟은 살이 눈에 띠는 여자다. "크게 다친 데는 없지만... 갑자기, 탈선을 해서, 애가 손잡이에 턱이 약간 부딪힌 모양이예요." "미안하구나, 꼬마 아가씨. 깜짝 놀랐지?" 나는 쭈그리고 앉아 도구 상자의 뚜껑을 열고 여자 아이의 얼굴을 본다. 속눈썹이 재미있을 정 도로 올라가, 끈끈이귀개 같은 식물에 난 수염을 연상시켰다. "툭하며 이상을 일으키곤 해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본부에는 연락을 해 두었습니다만." "내가 발견했어요, 그렇죠? 아줌마." 따라온 소년이 여자 아이의 엄마에게 말을 걸었다. "이거, 고쳐지면, 더 타시겠습닊?" 내가 입을 열자 엄마는 딸아이의 얼굴을 본다. 여자 아이는 눈을 위로 치켜뜨고 얼어붙은 것처 럼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조그만 턱에 스친 듯 하얀 자국이 있다. 쳐다보는 사이 눈이 젖어 오고,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100엔짜리 세 개를 꺼 내며, 상냥하게 말했다. "이걸로, 더 재미있는 거 타도 돼." "미안합니다." 엄마가 또 귀로 머리를 넘기며 비스듬히 고개를 숙인다. "사키, 아저씨한테, 고맙습니다는? 고맙습니다, 안해?" 두 사람의 모습에, 다시 한 번 죄송하다 말하고 도구 상자를 뒤졌다. "그런데, 정말 괜찮니? 사키, 안 아퍼? 안 아퍼..."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대형 스패너를 꺼냈다. 안 아퍼, 안 아퍼... 그 은색 몽키 렌치를 보면 늘 기분이 언짢아진다. 즉, 전철이 탈선할 때마다 그렇다. 크기를 조절하는 나사 부분에만 핑크색이 칠해져 있어 나선형 마카로니를 떠올리게 되기 떄문이다. 금속과 살코기가 합체되어 있 는 듯한, 딱딱한 것과 부드러운 것의 감촉이 머리 속에서 정리되지 않는 기뵤한 기분에 휩싸인다. 4센티미터쯤 벌렸을 때, 아직도 옆에 있는 소년을 느끼고 시선을 돌렸다. 다리를 벌리고, T자형 장난감처럼 한쪽 다리에 번갈아 가며 몸무게를 싣고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다. 내 얼굴을 보고는 슬쩍 외면했다가 다시 힐끔 나를 본다. "아 참, 그렇지, 네가 가르쳐 주었지?" 소년이 입은 티셔츠 속의 공룡이 멈춘다. 난는 작업복 바지 주머니에서 100엔짜리 동전을 하나 꺼냈다. "엣다!" 소년이 웃자 은색 교정 틀니가 드러나 보이고, 그 탓에 한층 신나 보인다. 소년은 100엔짜리 동 전을 받아 들고는 곧장 녹색 티셔츠를 입은 호리한 등을 보이면서 게임 코너로 뛰어간다. 또 클 린 스위프에서 중국제 미니카를 타려고 하는 것이리라. 나는 망치와 몽키 렌치를 들고, 허리를 굽 히고 게이트 밑을 지나갔다. 두개골 안쪽을 부드럽게 두드리는 듯한 음악소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때로 공명하는 소리도 있어, 내 머리 속은 떨리고 뇌수가 부풀어오를 듯한 느낌이었다. 2량 편성의 전철이다. 첫 번째 전철이 기울어 탈선한 채 바퀴가 헛돌고 있다. 운전석에 앉는 기 린도 노란색에 갈색 반점이 섞인 플래스틱 목을 쭉 내밀고 기운 채 웃고 있다. 지난번 탈선했을 때와 똑같은 장소다. 나는 한동안 귀에 거슬리는 음악과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멍하 니 탈선한 키다리 군의 모험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터의 진동으로 기린의 목이 규칙적으로 파 들파들 떨리고 있다. 디즈니의 캐릭터처럼 빨간 입을 벌리고, 핑크색 혀까지 들여다보였다. 흉칙 하다. 뭇,ㄴ 수를 쓰지 않으면, 전원을 끄지 않는 한 이대로 계속 기운 채 헛돌 것이다. 문득 실명 한 복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다리 군과 복서? 그냥 놔두고 싶은 기분도 든다. 불필요한 것은 키다리 군의 모험호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보고 왠지 가엾어 하는 나의 바보스러운 감상 쪽이 리라. 나는 전철의 옆쪽에 붙어 있는 뚜껑을 열고, 17번이란 숫자 실이 붙어 있는 열쇠를 집어넣 고 돌린다. 모터가 멈추자 동시에 음악도 멈춘다. 순간 귓속이 밀폐된 듯한 느낌이 들고, 플레이 랜드에 흐르는 음악이 조금씩 들려왔다. 그러나 또렷하게 들리는 것은 머리 속에서 나는 소리다. 기린의 목을 한 팔로 감고 다른 한 팔로 범퍼 가장자리를 잡고 선로에 일으켜 세운다. "우와!" 초등학생 남자애들이 세 명, 지하 1층에서 팔고 있는 아메리칸 핫도그를 먹으면서 내 쪽을 보 고 있다. 그 아메리칸 핫도그는 한 번 먹어본 적이 있는데 소시지 굵기가 간신히 막대기를 감싸 고 있을 정도다. "그거, 100킬로그램도 더 되죠?" 나는 외구인처럼 과장스럽게 두 팔을 벌리고 고개를 으쓱한다. 어린애들 뒤로 잠시 쉬러 온 점 원이 캔 주스를 들고 걸어와 나는 시선을 돌린다. 2층 부인복 매장에 있는 남자다. 아마 야나기다 인지 야나기하라란 이름일 것이다. 나보다 하나나 둘 위든지, 서른하나나, 둘 정도일 것이라고 짐 작한다. 4시 15분이 되면 반드시 옥상으로 올라와 자동판매기에서 노란색 비타민 C 레몬 캔을 사 마시고, 그늘진 코너의 파란 벤치에 앉아 담배를 한 대 피운다. 그 정확함이 거슬렸다. 그리고는 바지를 무릎까지 내려 와이셔츠의 주름을 피고는 다시 바지를 올리고, 일단 앉았다가 다시 일어 나 허리띠를 조른다. 매일 똑같다. 한 번도 말을 한 적은 없다. "저, 오늘은 미니 카 레이스 안 해요?" "4층에 가서 물어 봐. 4층이잖아, 그건." 나는 키다리 군의 모험호를 뒤에서 밀어 건널목을 통과시켰다. 선로를 확인하니, 역시 너트가 느슨해져 있다. 햄머로 볼트를 두드리고 너트를 넣고 둘린다. 몽키 렌치로 조여, 이제 완전히 조 여졌다 싶을 때면 너트가 한 번 헛돌면서 제자리로 돌아와 버린다. 볼트와 너트를 새것으로 교환 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불그죽죽한 녹이 거친 줄로 갈아낸 것처럼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일어 났다. 또 금방 녹이 슬 것이다. 도구 상자에 망치와 몽키 렌치를 던져 넣고 다시 열쇠로 모터에 시동을 걸었다. 물 속의 파이프 오르간. 키다리 군의 모험호가 둘레 25미터 정도의 심플한 타원형 을 돌기 시작한다. 선로를 에워싸고 있는 하얗고 키 낮은 울타리 너머에는 100엔으로 탈 수 있는 경찰차와 택시. 그리고 커다란 팬더와 곰 인형은 버려진 아이들처럼 서로 다른 데를 향하고 있다. 옥상을 죽 두르고 있는 철망 너머로 눈길을 돌리자 검게 그을린 도시 풍경이 펼쳐져 있다. 나는 이 백화점의 옥상 플레이랜드로 파견되어 한 가지 알게 된 것이 있다. 중앙선의 아사가야 역과 고엔지역에 관해서. 그 두역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이들이 유난히 많은 이유를 요즘 들어 알게 된 듯한 기분이다. 아마도, 폼에서 지평선이 보이기 때문이리라. "저기다가는 눈가리개용 벽을 만들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언젠가 단골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자한테 물어 보았었다. "아니, 오히려 멋진 풍경 아닌가요?" "멋지기는 하지만, 멋지지 않을 때도 있잖아?" "그거야, 딱히 지평선이 아니더라도..." 하긴 그도 그렇네, 라고 대답하고 나는 가슴속으로 지평선병이란 말을 만들어냈었다. 키다리 군 의 모험호는 커브를 돌며 탈선했던 곳을 별 탈없이 통과한다. 다만 몇 십분의 일 정도 너트가 느 슨해진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또 탈선할 것이다. 이 옥상에서 가장 기분 좋고, 가장 기분 좋지 않은 것... 아마도 저것이리라,고 생각하며 나는 돌아본다. 너무 귀엽다. 그러나 또한 너 무 그로테스크하다. 옥상에는 백화점 1층에서 영업하고 있는 페트 숍 코이케야의 동물들이 사육되고 있는 코너가 있다. 그 널널한 울타리 안에 딱 한 마리가 있다. 포니. 살아 있는 진짜 포니다. 짙은 갈색 갈기가 유난히 긴 포니가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방향을 향하고 얌전하게 꼼짝도 않고 있다. 고개를 앞 으로 약간 수그리고, 검은 속눈썹으로 덮인 검은 눈을 내리깔고, 그저 덩어리져 있다. 말을 걸거 나 사람이 다가가지 않는 한, 내내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가끔씩 고개를 흔들거나 치켜올리기 도 하지만 그것도 아주 드문 일인 듯하다. 갈색 덩어리 하나가 꼼짝 않고 있는 느낌이다. 여러 마 리가 있다면 훨씬 더 기묘한 풍경이 될 테지만, 백화점 옥상에 딱 한 마리의 진짜 포니가 있다는 것 역시 기이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퍼쉐론 종인지 뭔지 하는 피가 섞여 있는 모양인데, 나 는 그 퍼쉐론 종이 뭔지 잘 모른다. 이름은 포니요라고, 코이케야에서 일하는 시나라는 젊은 점원 이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거면 차라리 포니란 이름이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도 구 상자를 들고, 두더지 게임과 해적 위기 일발, 악어 패닉 게임기 앞을 걷는다. 각 게임기의 전 자음이 뒤섞여 아주 가끔씩이지만 소리의 파장이 일치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은 정적이다. 그 때 어디선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 또 하나의 자신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몹시 우 울해 진다. 코로 숨을 내쉬어 웃어 버리는 자신이 한층 부끄러웠다. 기계들 사이로 포니의 모습이 보였다가 사라진다. 아까와 변함없는 모습이다. 고개 숙이고 꼼짝 않은 채, 인공 잔디를 씻을 때 사용하는 파란 호스를 쳐다보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한 평도 안 되는 안내소로 들어가 텔레비전 볼륨을 줄이고 회사로 전화를 건다. 그 전화도 백화점 내선용과는 다른, 다이얼식 검정 전화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째서인가 그 전화기에는 여고생 둘과 초등학생 남자 아이가 혼자 찍 혀 있는 스티커 사진이 두 장 붙어 있다. 얼마 전까지 여기에서 근무하였던 마루야마란 초로의 남자가 붙여 놓은 것일까. 마루야마는 출하부에서 파견되었다가 석달 전에 정년이 되어 그만두었 다. "키다리 군의 모험호 선로, 빨리 좀 고쳐 줬으면 좋겠는데." 전화를 받은 영업 2과의 에가와란 여자한테 말한다. 늘 수화기에서입을 멀리 떨어뜨리고 말하 는 탓인가, 소리가 아주 멀다. 나는 그 수화기와 그녀의 입 사이의 공기가 자아내는 먼 소리에, 에가와는 지금 회사가 아니라 사하라나 고비 사막에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번번이 생각한다. "그, 드라이브 랜드의 커트는 아직도 두 대던가요?" "아아, 그보다, 키다리 군의 모험호 선로가 급하다니까." 나는 수화기 저편에 있는, 얇은 은회색 사파리를 입은 에가와한테 대답한다. "선로? 선로의 뭐가요?" "볼트하고 너트라고 벌써 몇 번이나 말했는데. 다카시마를 바꿔 줘. 그 작자가 갖고 오기로 되 어 있으니까." "플레이 랜드에, 하늘색 앞치마를 하고 강아지와 고양이를 담은 플라스틱 바구니를 껴안고 걸 어오는 코이케야의 점원이 보였다. "볼트하고 너트라니, 크기 같은 것도 알아요?" 바구니 틈새로 하얀 몰티즈의 까만 코끝이 들여다보인다. "그런거는, 어디 기록되어 있을 거 아니야?" "아 참, 그 포니. 당신이 옥상 위의 포니라고 했던 포니, 잘 있어요?" 난, 지금 옥상에 있다구. 나는 사파리를 입은 에가와를 상상하고, 그쪽은 사무실에서 전화를 걸 고 있는 나를 상상하고 있으리라. "잘 있어." 나는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창문 너머로 울타리 안의 포니를 보았다. "지금도 여전히,얌전하게 고개 숙이고 있어." "아아, 서글퍼지잖아." 그때만 유달리 목소리가 가까이 들려, 나는 자기도 모르게 수화기를 멀리 떨어뜨린다. 간신히 에가와는 지금 회사의 유니폼인 오렌지색 조끼와 치마를 입고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가." "내가 다음에, 다카시마 씨 대신 들고 갈까요? 그 ㅍ포니가 보고 싶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아무튼, 빨리. 그냥 놔뒀다가는 손님들한테서 시끄러운 말이 나올거야. 고토 과장한테 전해. 혹 누가 다치기라도 하면 보상 문제가 발생한다고. 그리고 나 언제 본사로 돌아갈 수 있는지도." 빌딩과 주택의 검은 지평선 위 하늘이 물들기 시작한다. 엷은 오렌지색에 핑크를 섞은 듯한 하 늘에 보라색 구름이 옆으로 길게 뻗어 있다. 마치 가는 선으로 그린 그림 같다. 그 그림을 너무 닮아 저녁 노을 진 하늘을 보면 기분이 묘해진다. 구름의 끝 부분만 칼날처럼 금색 윤곽이 또렷 하다.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플레이 랜드를 내다보았다. 이제 곧 다석시다. 트윙클 트윙클 게임을 하고 있는 여자아이 두 명. 허리를 굽히고 클린 스위프대에 안경을 바짝 갖다대고 어느 미니카가 잡아먹기 쉬운지 노리고 있는 아까 그 소년. 그리고 노래방 경찰차를 타고 있는 두 살 정도의 남 자 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 멍하니, 경찰차를 타고 있는 아이를 본다. 저 차도 핸들의 너트가 맞지 않아 아마 헐렁헐렁할 것이다. 차체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면 그냥 타고만 있을 뿐일텐데, 아이는 심각한 표정 으로 핸들을 좌우로 크게 돌리고 있다. 여기서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 게 오히려 우스꽝스러웠다. 차가 서 있어도 핸들을 돌리면 세계가 제멋대로 돌아준다. 그런 느낌 이다. 엄마와 아이가 노래방 경찰차에서 내리면 뒷정리를 하려고 안내소 밖으로 나온다. 낮과는 무게가 다르다고 느껴질 만큼 바람이 싸늘하다. 나는 철망 밖, 멀리를 바라본다. 거리에 그리 큰 광고탑은 없다. 파친코 광장 로빈과 전자 회사 닛신, 기모노 가게 시마야, 역 빌딩의 불빛만 강렬 하고, 나머지는 가로등과 주택의 불빛이 아크라이트처럼 퍼져 보인다. "오늘, 여섯 대." 티셔츠 밖으로 나와 있는 팔에 닭살이 돋아 있다. 소년의 두 선 안에서 미니카가 해체 공장에 버려진 차더미처럼 보였다. "너, 이걸로 밥벌이도 해도 되겠다. 전문가야." 나는 소년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바닥에 달라붙어 따라 올라온다. "오늘은 끝났으니까. 또 보자." 나는 아랫입술을 툭 내밀고 천천히 손 안의 미니카를 움직이는 소년을 보고, 카키색 시트를 안 쪽 선반에서 끌어내린다. 코이케야의 강아지가 울타리 안에서 개집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려온 다. 비글과 그레이트 피레니즈, 레트리버. 그리고 딱 한 마리뿐인 달마시안 새끼. 개 이름이라고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밖에 몰랐던 나인데, 이 플레이 랜드에 와서 열 종류나 알았다. 고 양이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친칠라 실버. 히말라얀. 시베리안 포레스트 캣. 소마리. 러시아 블루. 아메리칸 쇼트 헤어. 메인 퀸. 애비시니언... 최근에는 알고 있어서 나쁠건 없다고 생각한다. 노래 방 경찰차에 타고 있던 모자도, 트윙클 게임을 하고 있던 여자 아이들도 어느 사인가 내린 모양 이다. 안내소 안으로 들어가 게임기 전체 전원을 내린다. 한꺼번에 물이 배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떠올린다. 텔레비전 게임 관계는 동시에 심전도의 파도 같은 빛을 브라운관에 보냈 다가 사라지고, 다른 게임은 순식간에 불이 꺼진다. UFO 캐처의 손만 홀로 흔들리고, 플레이 랜 드의 조명을 반사하며 명멸하고 있다. 바람의 각도로 또 벽에 붙은 배기구에서 튀김 기름 냄새가 나 나는 페트 숍 전용 개집으로 간다. 점원 세 며이 제각각 난방이 들어와 있는 개집의 문이며 바구니를 확인하고, 접시에 먹이를 나눠 담고 있었다. 그쪽은 그쪽대로 개들 특유의 냄새와 배설 물 냄새가 나지만 그나마 견딜 수가 있다. 그러나 튀김 기름 냄새만은 몸 안에서 점점 축적되는 것 같아, 무슨 사소한 계기만 있으면 구역질이 올라오는 경우도 있었다. 게임기의 배선이 뒤엉켜 있다든가 걷는 동물 인형의 털이 하나같이 낡아빠진 담요처럼 보였다든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 로. 포니는 아직도 울타리 안 같은 장소에 있다. 내가 다가가자, 눈만 움직여 내 쪽의 움직임을 살핀다. 나는 여느때처럼 말을 건다. "포니." 그렇게 부를 때마다 자신의 얼빠진 목소리의 울림에 소름이 끼치지만, 포니요보다는 낫다고 생 각한다. 깔때기 모양으로 생긴 귀가 반사적으로 바깥쪽을 향한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비튼다. 긴 갈기가 파도 춤추고, 그 순간 그 움직임 안에 거리와 옥상의 불빛이 담긴다. 내가 다시 한 번 가볍게 휘파람을 불자 후퇴하듯 앞다리를 두 세 걸음 움직이며 머리를 내 쪽으로 향했다. 이마에 서 코로 하얀 띠 모양의 줄이 들어 있다. 몇번이나 네 다리를 각각 움직여 인공 잔디를 밟더니, 머리를 오르내리며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코이케야의 개집 쪽을 본다. 포니가 물이 뿌려진 인공 잔디 위를 터벅터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물에 푹 젖은 뚱뚱한 여자가 양팔을 벌 리고 걸어오는 모습을 상상하였다. 풀무 소리같은 숨소리도 들린다. 포니가 울타리께까지 다가와 뭉툭한 입을 쑥 내밀고는 내 가슴 언저리에 숨을 훅 내뱉는다. 그리고 머리를 비벼 대려는지, 또 고개를 숙인다. 내가 보기에, 오늘 하루 중에서 제일 많은 거리를 걸은 게 아닌가 싶다. 늘 그러 듯, 손을 조용히 머리 위에 얹어 놓고 코를 쓰다듬고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두꺼운 판자에 빌로 드라도 깐 듯한 감촉이다. "수고했다." 그저 가만히 똑같은 자세로 서 있을 뿐이었으니, 제일 피곤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까지 안내소에 근무한 마루야마라는 초로의 남자도 이 포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을까. "어째서, 네가 8층에, 그것도 옥상에 있지 않으면 안되는 건지." 이 포니가 반입된 때를 생각하면 서글퍼진다. 물론 내가 이곳에 오기 전의 일이니, 사실이 어땠 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좁은 엘리베이터에 갖혀, 지하라면 몰라도 옥상으로 운반되었다. 동물이란 중력과 고도에 대해 아무런 느낌도 없는 것일까. 포니는 지금과 똑같은 눈빛으로 얌전히 따라왔 을 것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 밖이 벼랑이었다 해도 똑같은 눈빛으로 떨어진다. 인간처 럼 도중에 정신을 잃는 일은 없으리라. 멍한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등 뒤에서 코이케 야의 점원 목소리가 났다. "시원하다 못해 추울 정도로군요." 포니요라고 이름을 가르쳐 준 시나란 여자다. 설거지용 고무 장갑을 끼고, 하얀 장화를 신고 있 다. "그렇군요." 내가 대답한다. 그렇군요... 요즘들어 나의 대화는 대충 이 말로 끝나 버린다. 여자의 시선이 포 니의 얼굴과 목, 다리를 훒는다. 그 눈길이 버릇인지 아니면 의식적인 것인지 그야말로 페트 숍의 점원다워, 나는 포니한테서 슬그머니 손을 떼었다. "이 녀석은..., 이 포니는, 항상 꼼짝도 않고 있는데, 머리가 이상해지지 않나?" 시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얼굴을 올려다본다. 한쪽 눈에서 콘텍트렌즈 특유의 빛의 고리 가 빛난다. "벌써 이상해졌을지도 모르죠." 그녀가 그렇게 대답하고 목을 가늘게 떨며 웃는다. "괜찮아요, 말은. 인내심이 많으니까. 골치 아픈 건 토끼예요. 토끼는 그냥 내버려두면 죽어 버 리죠. 돌봐 주지 않으면 외로워서 죽어요." "설마 그럴리가. 거짓말이겠지?" "정말이예요. 페트 세계에서는 상식이예요." 시나는 하얀 장화를 신은 다리를 울타리 중간쯤에 걸치고 몸을 굽혀 빠져 나온다. "자, 포니요, 들어가자. 포니요, 어서, 이리 와." 나는 울타리에 턱을 괴고, 롤 빵처럼 윤기 나는 포니의 엉덩이와 시나의 엉덩이를 쳐다보았다. 포니가 열심히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며 자기 집 쪽을 향한다. 그 포니용 집은 가로 세로 2미터 정도밖에 돼 보이지 않는다. 내가 사용하는 안내소와 별 차이가 없는데, 그런 데서 가는 다리를 접고 잘 것이라 생각하니 내가 오히려 숨이 막혔다. 나는 포니가 보고 있는 방의 바닥과 벽 모퉁 이와, 때로 거기를 기어 다닐 바퀴벌레와 꼽등이 같은 벌레의 촉각의 움직임을 상상하면서 안내 소로 돌아온다. 그리고 검정 다이얼식 전화기를 들고 또 회사에 전화를 건다. 이번에는 다카시마 가 받았다. "죄송합니다. 볼트하고 너트 말이죠? 이번에 선로 자체를 새것으로 교체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에가와, 있나?" "에가와는 아까 퇴근을 했는데요, 무슨..." "다카시마, 자네, 토끼가 외로워서 죽는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나?" 잠시 수화기 속에 침묵이 찾아온다. 손으로 덮었는지, 거친 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선배님, 그거, 무슨 소립니가?" "아아, 다카시마, 됐어. 볼트하고 너트 말이지." "토끼라면, 앙고라..." "아니, 됐어." 나는 다카시마가 말하는 도중인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텔레비전을 켜자, 가토 간사장의 얼굴 이 등장한다. 그대로 스위치를 끄고 안내소를 나왔다. 시트는 바람이 세지기 전이라야 덮기가 편 하다. 7층 계단에 '폐관'이란 팻말이 매달린 플라스틱 체인을 걸러 가자, 전자제품 매장의 나카지마라 는 점원이 계산대 쪽을 가리키며 얼굴을 찡그린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 주임의 뒷모습이 보인다. 나카지마는 손가락을 머리 옆에 대고 원을 그려 보인다. 나는 그저 손을 들고 웃음으로 그에게 답한다. 그리고 다시 옥상으로 올라간다. 각 게임기 옆에 놓아 둔 납 판자 같은 시트 뭉치를 펼치 고, 덮고, 가느다란 로프로 묶는다. 100엔짜리 동전을 회수하는 작업은 내일 아침에 해서 회사에 보고하면 된다. "이상으로 끝내겠습니다." 인사부의 히라다한테 전화로 연락을 하고, 업무 종료. 그 다음은 청소를 하는 나카하라란 예순 넘은 할머니가 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나는 안내소 구석에 놓아둔 5킬로그램짜리 아령을 두 개 꺼내, TV 게임기의 의자를 나란히 놓고 그 위에 가로로 놓는다. 벤치 프레스를 하는 요령 으로 천천히 아령을 든다. 가슴 근육과 삼각근, 윗팔의 이두근, 어깨 근육, 각 근육이 수축했다가 펴지고, 힘이 모여지는 것을 상상하면서 되풀이한다. 천장의 하양과 파란 줄무늬 범포가 바람에 흔들리며 파도 치고 있다. 문득, 시골 논에서 벼이삭이 불어오는 바람에 파도처럼 흔들리던 광경 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지평선뿐인 시골에서, 그리스 기행 사진집에서 본 에게해를 실눈을 뜨고 상상하였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논과 에게해. 나는 아령을 올린다. 저 멀리로 쓰레기 소각장의 하얀 굴뚝이 보인다. 그것이 에게해의 전망대로 착각되기도 한다. 하얗게 칠한 벽의 자잔한 기복 이며, 모서리가 둥글둥글해진 정원 돌, 언덕 아래서 움틀거리는 바다를 상상하고, 망막한 논을 바 라보며 멍해지곤 했었다. 거리의 백화점 옥상에서 그런 옛날 일을 추억하고 있는 나는 더욱 우스 꽝스럽다. 양팔을 벌렸다가 좌우에서 그대로 똑바로 닫듯이 올린다. 숨을 토하며 열 번. 일어나 팔굽을 구부리고 윗팔 이두근을 단련하는 운동을 각 쉰 번 씩. 허리를 구부리고 가슴 앞으로 아 령을 갖고 오는 운동을 각 서른 번씩. 내가 이런 운동을 시작한 것은 옥상에 와서부터다. 고개를 약간만 들어도 그저 하늘만 보이고, 시선을 옆으로 돌리면 거리의 지평선, 그리고 게임기와 어린 아이들과 페트와 저 포니가 보인다. 철망 아래를 내려다보면, 사람이 뒤얽힌 개미들의 행렬처럼 보인다. 머리 속에서 실이 잡아당겨지고, 그렇다고 다리가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히 눈꺼 풀이 풀리고, 몸 구석구석이 중력에 무너지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아마도, 머리 속에 문제가 있는 거이리라. 옥사에 있는 동안 줄곧 무언가가 떨어지고 있다. 무의식 중에서도 나는 그 모래처럼 떨 어지는 것의 소리를 듣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술을 마셔도 사라지지 않는 소리의 정체를, 처 음에는 게임기의 전자음이 들러붙어 두개골과 공명하는 음정만 남아 있는 탓이라고 생각했었다. 원룸 아파트로 돌아가, 헤드폰을 끼고 벌써 몇 년이나 듣지 듣지 않은 롤링 스톤즈를 틀어 놓아 도 소용이 없었다. 단골 술집의 술친구들과 노래방에 가서 스즈키 마사유키의 노래를 불러도 허 사였다. "아아,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그거 단순한 운동부족이라구요. 옥상에서 근무하니까, 잘 됐지 뭐. 무슨 운동이든 해서 몸을 움직이고, 지쳐서 술 마시고, 그리고 자버려요." 에가와가 고비 사막에서 전화로 그렇게 말했다. 킥복싱으로 몸을 단련한 고등학생이 플레이 랜 드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시너를 들이킬지도 모른다. 주의를 주다가 시비가 붙을 때 혹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시작했다. 과연 잠을 잘 수 있게 되었지만, 소리는 여전히 들 린다. "가을이 되면, 또 치요짱이 서 있을 테니, 성가셔서 원." 나는 팔을 정지시키고, 얼굴을 든다. 나카하라 할머니가 파란 청소복으 입고 나타났다. 나카하 라 할머니는 옥상만 담당하는 청소부로 일한 지 벌써 20년이나 된다고 한다. "추워지면 틀림없다니까." 왼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빈 양철 양동이와 잿빛으로 더러워진 장대걸레를 걸어온다. 내가 말 을 건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마루야마 씨도 수고가 많으셨우." 마루야마는 이전에 있었던 남자고 나는 마루야마가 아니라고 열 번쯤은 말했는데, 할머니는 마 루야마 말고도 가모니 미즈하라니 하는 이름으로 나를 부르곤 한다. "저기 봐요, 저기 계단 구석에 또 치요짜이 서 있잖우." 나는 아령을 가만가만 콘크리트 위에 놓는다. 툭, 하고 두꺼운 콘크리트의 중량이 되받아치는 소리가 난다. 나는 그러나 여긴 8층이지, 하고 가슴속으로 중얼거린다. 나는 포환던지기의 공을 얹은 얇은 스티롤 판지를 연상하면서 일어났다. "치요짱이라니, 누구죠?" 나카하라 할머니는 언제 보아도 오른쪽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데, 이전에 하루 종일 똑같은 각 도에서 선풍기 바람을 쐬다가 안면이 마비되었고, 그 후로는 눈물이 멈추지 않게 되어서 그렇다 는 모양이다. "치요짱을 몰라. 치요짱. 아, 그래. 그 있잖우, 7층하고 8층 사이 계단의 층계참에 서 있는 빨간 치마 입은 여자, 이름이 치요코라고 하는데, 역 앞 삼거리에서 제일 왼쪽 모퉁이에 있는 가타노 찻집의 아가씨라우. 할머니,할머니하면서 나를 잘 따라. 귀염성 있는 아이야. 나한테 자기가 먹던 아이스크림도 주고, 친절하기도 하지. 그런데 말이지, 가을이 되면 저렇게 층계참 구석에 등을 보 이고 착 달라붙어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니까. 치요짱, 치요짱하고 불러도, 벽 모서리에다 이마하 고 코를 딱 갖다대고, 대답도 하지 않는 걸. 그래도 저 빨간 치마는, 틀림없는 치요짱이라우." 나는 나카하라 할머니의 양철 양동이를 들고 페트 숍의 개집 옆에 있는 수도로 향한다. "미안하우, 늘." 너무 기세등등하게 쏟아져 나와 양동이에서 밖으로 튀어나오는 물이 더 많았다. 서둘러 꼭지를 잠갔다. 대형 주전자가 끓어오르는 듯한 소리를 내며 양동이는 금방 차올랐다. 나는 그것을 기요 하라 군이라는 야구 게임기 옆에 두었다. 구슬이 튕길 때마다 재채기를 하는 개 비슷한 소리를 내는 게임기다. 할머니는 항상 그곳에서부터 청소를 시작한다. "어머나, 달이 좋네." 할머니는 무릎을 내밀면서 허리를 펴고 말하고 나서, 자동차 교습소 쪽을 본다. 연기에 살짝 그 으른 듯한 구름에 상현달이 걸려있다. 나도 그렇군요, 라고 대꾸한다. 달 옆으로 빨갛게 점멸하는 라이트가 비스듬하게 올라오는 것도 보인다. 잠시 하늘 전체를 울리며 제트기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한 쪽 다리를 끌면서 청소를 시작하는 나카하라 할머니를 보고서, 기둥에 부착되어 있는 사 다리로 간다. 지붕의 범포를 벗기거나 조절하기 위하여 설치된 사다리다. 나는 머리보다 한 단 위 를 잡고 오른다. 허리를 구부리고 발부리를 팔과 몸 사이로 집어넣고 한 단 위에다 발목을 걸었 다. 그리고 단숨에 거꾸로 매달린다. 조명을 받은 하얀 콘크리트가 위가 되고, 그 아래로 넓다란 검은 하늘이 떨어졌다. 아까 본 달이 검은 유리창에 뚫린 조그만 구멍처럼 보인다. 시야의 왼쪽 끝으로, 몸을 구부리고 콘크리트에 매달려 있는 나카하라 할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박쥐 같다고 생각한다. 머리 위로 양손을 깍지끼고, 복근과 대퇴근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편다. 이 복근 운동을 시작했을 때, 검고 거대한 하늘이 아래에 있는 것을 보고 몇 번이나 공포에 사로잡혀 놀라 몸을 비틀고 사다리를 붙잡았었다. 평형 감각도 어긋날 테지만, 지상에서 하는 것과는 다른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8층이란 플로어를 잃어버릴 듯한 기분이었다. 고도 몇 십 미터에 매달려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또 송장메뚜기가 시작됐네..." 피가 아래쪽으로 내려와 귀와 머리에 충만하다. 할머니가 뭐라든지 잘 들리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런 말이리라고 생각한다. 무사히 열 번을 세고 사다리에서 내려온다. 가슴과 배와 팔, 다리에 혈액이 집중되어 팽팽한 느낌이 좋았다. 후지미초에 있는 S 백화점의 플레이 랜드에 파견된 레저 산업 회사의 영업사원, 서른 살 독신이 옥상에서 근육 덩어리가 되어 상현달을 보고 있다. 나는 그렇게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려 본다. 빠른 고동이 귓속을 압박했지만 오른쪽 귀에서만 또 모레 가 흐르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할머니, 그럼 내일 뵈요. 수고하세요." 수건을 쓴 옆얼굴로 눈만 움직이고 내 쪽을 보려고는 하지 않는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무슨 소린지 모르는 것이리라. 내가 안내소의 전기를 끄고 천천히 계단 쪽으로 걸어가자 나카하라 할 머니가 간신히 말을 건다. "수고했수. 치요짱 있거들랑, 미안하지만 가타노 씨네로 좀 데리고 가 주우." 몸을 굽혀 노래방 경찰차 안으로 들어가 헐렁헐렁한 핸들에 양 팔굽을 대고 아침의 옥상을 본 다. 백화점 개점 시간이 되려면 아직 한 시간 반이나 남았다. 나는 늘, 인사부의 하라다가 혹 지 각을 하지는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 거는 전화를 받고 나면 안내소에서 나온다. 그리고 조그만 탈 것에 몸을 비집고 올라타 자동판매기에서 산 달콤한 밀크 커피를 마신다. 그러면 아이를 데리고 엄마들이 들어오고, 나는 게임기나 탈것에 고장이 없는지 확인하고, 안내소에서 6인치짜리 텔레비 전을 보면서 점심시간이 되기를 기다린다. 지하 도시락집에서 연어나 가자미 커틀릿, 이런 저런 반찬이 들어 있는 도시락과 된장국을 사고, 원시 안경을 낀 소년이 클린 스위프를 하러 오고, 2층 부인복 매장의 남자가 비타민 C를 마시고, 포니는 고개를 숙인 채 꼼짝하지 않고, 게임기를 시트 로 덮고, 아령을 들어올리면 나카하라 할머니가 3년 전에 발을 헛디뎌 죽은 여자애 이야기를 하 고, 나는 손을 들어 대꾸한다. 그 반복이다. 본사의 일이나 별다를 것도 없다. 늘 똑같은 일이기에 말이다. 나는 이명이 울리는 오른쪽 귀에 집게 손가락을 집어 넣고, 노래방 경찰차의 지붕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얀 층운이 빗자루나 뭐 그런 것으로 쓴것처럼 가늘게 뻗어 있다. 역시 교과서인지 미술 교과서에서 본 조각을 연상한다. 사모트라케 섬에서 발견된 니케의 날개. 왜 그런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에어 슈즈 메이커의 상표 디자인 때문일까. 군데군데 빛나고 있는 콘크리트 위로 시선을 돌린다. 어젯밤, 갑자기 내린 비가 고여 있다. 아무도 없는 옥 상은 손님한테는 쾌적한 장소일 것이다. "나, 바꿨으면 좋겠어요. 개점 시간까지 수영복 입고 태우는 거예요, 피부를. 아침 햇살이 마침 적당하거든요, 예쁘게 태우려면요." 에가와가 먼 사막에서 그렇게 말했었다. "좋잖아요. 아이들이 있고, 동물이 있고, 포니, 포니짱도 있고." 옥상에 오래 있다 보면, 세계로부터 도려내진 장소로 여겨지고, 높이마저 더 높아진 듯한 기분 이 든다. 몸을 조금만 구부려도 주위는 온통 하늘이고, 세계가 이 네모난 콘크리트에 불과하지 않 은가 싶어진다. 폐소 공포증과 광소 공포증과 고소 공포증... 나는 핸들에 기대어 입술 끝을 비죽 올리고 혼자 웃는다. 반사적으로 주변을 돌아본다. 아무도 없다. 몸을 옆으로 비켜 노래방 경찰차 에서 나와 빈 커피 캔을 버린다. 그리고 콘크리트를 빛내고 있는 물 고인 자리로 가 본다. 거기에 도 하늘이 비쳐 있고,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구름을 휘젖고 있다. 나는 신고 있던 테니스화를 벗 고 양말을 벗었다. 물에 발을 넣는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따뜻하여 기분이 찜찜하다. 그냥 물 이 아니라 따뜻한 물이다. 그러다 몸 속이 나른해지고, 어릴 적 오줌을 쌌을 때의 달큼함과 비슷 한 감촉도 떠올린다. 나는 작업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쑤셔넣고 발바닥으로 파도를 만든다. "해일!" 혼자 중얼거리다, 수치심에 물을 찼다. 마른 콘크리트 위에 검게 젖은 얼룩이 보고 있는 사이에 마른다. 파도가 잔잔해지자 이번에는 폴짝 점프를 해본다. 물이 허벅지까지 튀어올랐다. 콘크리트 에 찍힌 발자국이 사라질 무렵, 페트 숍 코이케야의 점원들이 플라스틱 바구니를 두 손에 들고 옥상에 올랐다. 그냥 걸기만 하는 간단한 자물쇠를 손가락으로 돌려 벗기자, 개들이 짖으며 달려 나온다. 달마시안 새끼가 홀쭉한 몸을 꿈틀거리며 뛰어올라 여자 점원의 등을 긁고 있는 것이 보 인다. 비글 세 마리. 딱딱한 개 먹이가 담긴 접시에 머리를 처박는다. 위로 바짝 세워진 가느다란 꼬리가, 그것만이 심장을 지니고 있는 독립된 생물처럼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다. 솜으로 만든 커 다란 공이 굴러 나오는가 싶었는데, 두 마리 피레이즈가 뒤엉켜 까불고 있다. 움직임이 딱 멈추었 다 싶으면 아래쪽에서 몸을 꿈틀거리고 있던 개가 다시 반격에 나서며 뒤엉켜 나뒹굴었다. 나는 동물들이 다 나온 뒤 게임기의 전원 레버를 올린다. 끔찍하도록 긴 통 바닥에 물이 고여 있고, 거 기에 돌멩이 하나를 던져 넣으면 그런 소리가 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추형을 상상케하는 소리 가 들리고 각 게임기의 음악이 일제히 뒤섞였다. 이 순간의 전자파를 쐬는 것만으로도 몸이 이상 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포니요, 자, 나와!" 점원의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포니가 다리를 약간 휘청거리며 밖으로 나와 발을 몇 번 동동 구르고는 머리를 좌우로 크게 턴다. 검은 갈기가 춤추자 동시에 여자 점원이 몸을 젖히며 트레이 닝 셔츠 소매로 얼굴을 누른다. 포니의 침이 튄 것이리라. 나는 목구멍으로 조그맣게 웃는다. 포 니는 여자의 손에 갈기를 조심스럽게 잡힌 채 울타리 안으로 들어간다. 풀과 사료와 약이 섞여 있는 파란 양동이에 천천히 입을 들이밀고, 꼬리를 한 번 흔든다. 역시, 언제 봐도 이상하다. 어째 서 옥상에 풀을 먹는 포니가 있는 것인가. 게임기 한 대 한 대를 점검하면서 제대로 작동하는지 를 확인한다. 콘크리트, 더구나 지상 8층 높이에, 머리가 좀 크다싶은 포니가 갈색 몸으로 태양빛 을 반사하고 있다. 이는 혹 플레이 랜드로서는 당연한 일인가. 파라오의 예언이라는, 컴퓨터 점 소프트를 내장하고 있는 금색 투탕카멘의 허리에 열쇠를 꽂고 데이터를 셔플한다. 악어나 코끼리 나 호랑이가 있다면 그나마 납득이 간다. 그런데 포니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단순히 나의 감각이 이상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포니라는 동물이 옥상에 있다는게 어중간하게 여겨진 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안녕하세요." 점장을 보좌하는 남자가 옥상으로 아침 인사차 올라왔다. 매일 착실하게 찾아와 정중하게 머리 를 숙이며, 오늘도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다시 내려간다. 그 단순함은, 만약 탈것이나 게임기에 무슨 사고나 문제가 생기면 일이 골치 아파집니다,란 의사표시다. 본사에 있었다면 가장 혐오스런 타입의 인간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나는 아래층과 연결되어 있는 버팀목처럼 여기고 있다. 뭣하면 그 남자가 입고 있는 식품 매장의 빨강과 검정 윗도리를 입고 게임기 수비수를 해도 상관없다. "아아, 오츠보 씨." 나는 그의 등을 향해 말을 건다. 쉰 살이 넘었는데도 자세 바른 뒷모습이 돌아본다. 다만, 퍼머 한 머리카락을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검게 염색했다는 점이 이 남자의 신용도를 떨어뜨리고 있지 않은가 하고도 생각한다. "아니, 됐습니다. 바쁘실 테니까." "무슨 일입니까. 무슨 불편한 일이라도?" 얼굴은 웃고 있지만, 오츠보의 눈에 예리한 빛이 지나가고 퍼머한 머리가 뒤로 축 처진다. "저, 포니 말인데요... 누구 아이디어인지요? 여기서 기른다는 아이디어? 기획팀?" 퍼머 머리가 돌아오고 눈꼬리에 뱀의 뱃가죽 같은 주름이 모인다. "글쎄요,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귀여우니까. 그런데 왜 그러죠?" "아니오, 그저 귀여워서." "귀엽죠, 물론." 오츠보는 시선을 내 목 언저리에 던졌다가 한마디 말을 뱉고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등을 돌 렸다. "자, 그럼 부탁합니다." 머리에 뿌린 스프레이 냄새이리라. 백합꽃처럼 짙은 냄새에 나는 숨을 죽였다. 포니는 벌써 여 느 때의 장소에서 고개를 숙이고 꼼짝 않은 채, 호스를 쳐다보고 있다. "들었어요. 어제는 2만 4650엔이었다면서요? 굉장하네요." 나는 볼륨을 낮춘 텔레비전을 보면서 먼 곳에서 얘기하고 있는 에가와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에가와는 지금, 타림 분지에 있는 찻집에서 무지무지하게 단 차를 마시면서 얘기하고 있다고 생 각한다. "이 평수 가지고 그런 숫자라니, 아마 일본에서 여기뿐일 거야. 자본주의가 아니야." "무슨 상관이예요. 백화점 측에서 아이들을 모아 들이려고 하는 일인데." "이런 게임 코너 없으면 어때, 포니가 있는데."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포니가 있는 울타리에 어린 아이들이 모여드는 광경은 석 달 동안 한 번 도 본 적이 없다. "아아, 포니. 오늘도 건강하게 잘 있나요?" "여전해." 나는 6인치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충돌한 차를 보고 말한다. "너의 목소리, 싫어하지만, 포니라고 말할 때만은 마음에 들어." 포니 쪽을 보았다. 마침 배설을 하는 참이었다. 자기 항문에서 나오고 있다는 자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목의 각도에도 변함이 없고, 몸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그저 중력을 못이기고, 지저분하 게 대변이 떨어지고 있다. 불쑥, 사다리에 매달려 복근 운동을 할 때 봤다면 어떤 식으로 보였을 까 하고 생각한다. 나는 역시, 몸을 비틀어 올리고 서둘러 사다리를 잡지 않았을까. "이 플레이 랜드는 정말 도움이 안 된다고, 과장한테 말해 줘. 나, 또 이상한 소리가 들려." 에가와가 누군가와 얘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그녀가 되묻는다. "네? 소리? 소리라니, 무슨 말이예요. 있죠, 지금 좀 바빠요. 간사이 지방의 비디오 렌털 집계를 내야 하거든요." 거기서 전화는 끊어졌는데, 전화를 먼저 건 것은 에가와 쪽이었다. 텔레비전 볼륨을 올리자 꿈 의 섬인가 싶을 정도로 꽃이 만발한 산의 영상과 엘튼 존의 맥없는 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포 니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다. 두꺼운 렌즈에 퍼진 소년의 눈이 가는 활 모양이 된다. 바로 코 앞에서 보는 여자의 눈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소년이 뭐라 소리를 지르고 팔을 번갈아 떨면서 하늘을 향해 내민다. "투툭툭툭툭!" "뭐야, 그거?" "똥 누는 흉내." 우연히 포니의 두 번째 배설을 목격하고 조잘대는 것이다. 나는 바람의 방향을 고려하여 개집 에 가까운 쪽 울타리에 턱을 괴고 포니를 보았다. 눈의 윤곽 가득 칠흑같은 눈동자가 둥그렇게 팽창하여, 물에 젖은 유리 구슬을 연상케 한다. "포니요. 포니요." 소년이 손뼉을 치며 부르는데, 포니는 울타리 구석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나는 하릴없이 게임 코너와 드라이브 랜드를 돌아보고 다시 눈길을 돌린다. 포니 뒤에 있는 철망 너머가 빛나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옆으로 세 번째 빌딩에 있는 국수집 옥상에서 한 되짜리 양철 깡통을 죽 늘어 놓고 말리는 중이었다. 떄로 빛이 반사되는 각도에 따라 내 얼굴에 포니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말의 윤곽을 따라 금환식 비슷한 눈부신 곡선이 생겨났다. 나는 눈을 감는다. 포니의 윤곽이 망막 에 또렷하게 남아, 몇 번이나 눈을 깜박이자, 퍼즐의 파편 같은 모양이 비스듬이 위로 올라간다. :운동회에 나가야 돼. 아아 짜증 나." 또 양철 깡통이 빛나고, 포니의 오른쪽 반신에 빛이 닿는다. 검은 유리 구슬 같은 왼쪽 눈의 움 직임에 이끌린 것이리라. 함께 깜박이며 길고 억센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점점 사라져 가는 눈 꺼풀 속의 잔상에 새로운 포니의 주형이 어긋나게 겹쳐진다. 특히 머리에서 목에 걸친 실루엣이 또렷하다. 나는 눈을 꼭 감았다 떴다 하면서 포니의 그림자를 눈 속에서 확대시키려 하였다. 마치 어린애들 놀이 같다. "여기 있는 편이 그나마 재미있지." 망막 위로 몇 마리나 되는 포니가 격렬하게 목을 가누는 영상이 비치고, 나는 그 눈을 깜박거 리면서 드라이브 랜드 쪽을 본다. 배전실에 가린 그늘로 금환식 같은 포니가 몇 마리나 겹쳐 보 인다. 콘크리트 위에 앞다리와 뒷다리로 서 있는 포니의 실루엣이 명멸하고, 나는 피카소가 펜라 이트의 빛으로 그린 그림을 떠올린다. 아마 단순에 소를 그린 그림이었다고 생각한다. 포니 쪽이 훨씬 멋지다. 한 구석에 커트가 놓여 있을 뿐 아무것도 없는 드라이브 랜드 안에서 금색 윤곽뿐 인 포니가 난무하고 있다. 좀더 빨리 눈을 깜박이고 있는데, 아이의 손을 잡은 엄마가 나타나 방 해하였다. "그래 그래, 포니, 이쪽이야 이쪽." 천천히 머리를 움직이며 소년 쪽으로 다가가는 포니가 잔상과 겹쳐 보였다. 나는 기묘한 광경 이라고 생각한다. 메밀 국수집 양철통은 아직도 시야의 왼쪽에서 반짝이고 있는데, 나는 그 어느 쪽이 지금 실재하는 것인지 알수 없는 감각에 휩싸였다. 휩싸였다는 자체가 무언가 감미로운 선 물이라고 가슴속으로 중얼거리고, 지구의 끝에서 전화를 거는 것 같은 에가와의 성의 없는 목소 리에 에이, 하고 생각했다. 정말 스크린을 찢듯 눈앞의 광경도 파괴해 버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금색의 포니도 콘크리트도 왼쪽에서 빛나는 양철통의 반사도 소년의 티셔츠도, 편평하 고,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그런데 짙은 갈색 포니 덩어리는 거기에서 튀어나와 천천히 걷고 있 다. 여기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복근 운동을 했을 때 본 밤하늘 같다. 평형감각이 뒤틀리고, 마무 튼 일단 어디엔가 매달려 보자고 생각하는데, 잔상인 포니에 섞여 갈색 포니가 내 쪽을 향하여 머리를 좌우로 가누며 다가오고 있다. 포니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포니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당연한 일을 생각했다. 둔중하고 부 드러운 얼굴인줄 알았는데, 그게 칼 끝처럼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시야의 한 쪽 끝에서 부터 엄청난 수의 날벌레 떼가 생겨나 침식해 들어온다. 아무것도 비쳐 있지 않은 텔레비전 화면 의 노이즈 입자를 닮았다. 금환식의 포니도 소년의 모습도 날벌레가 모여든 것으로 보여, 나는 눈 을 꾹 감았다가 다시 떴다. 어딘가 중력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내 배 언저리를 포니가 그 부 드러운 코로 가볍게 쿡쿡 누르고, 아저씨! 라고 외치는 소년을 목소리가 들리고, 오른쪽 무릎에 통증이 느껴지고, 후두부를 살며시 안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백화점 5층 한 구석 에 있는 수유실 바닥에 담요가 깔려 있고, 그 위에 누워 있었다. 아동 상담실에 근무하는 늙수그 레한 보건원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말한다. "아, 다행이다, 눈을 떴네. 당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빈혈이예요. 쓰러질 때 머리를 약간 부딪쳤는데, 걱정스러우면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도 록 하세요." 나는 상반신을 일으키고 벽에 걸려 있는 분유 광고 포스터를 본다. "잠이 부족하다든가, 식사를 잘 안 한다든가, 무리를 하고 있는 거 아니예요?" "아니, 별일 아닙니다." 아니다, 나는 빈혈로 쓰러진 것이 아니다. 신이란 놈이다, 라고 생각한다. "당신, 몸이 굉장한데, 보디 빌딩 같은 거 하고 있어요? 자기한테 적당하게 해야지, 그거 위험 하다구요." 신이란 언어가 부적당하다면, 진리란 말이라도 상관없다고 허풍스런 생각을 한다. 나는 자신과 세계 사이를 제거한 풍경을 보았다. 아니, 풍경 그 자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늘 이상하 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포니는, 신의 사자이기에 기묘하게 보이지 않았던가 하고. "지금, 몇 시입니까?" "네 시가 넘었는데... 그렇지만, 당신 오늘은 조퇴하고 집에 들어가 쉬는 편이 좋겠어요." 나는 천천히 일어나 바닥 위에 깔린 담요를 갠다. 오른쪽 무릎 바깥쪽이 아팠다. 쓰러지면서 삐 끗한 모양이다. 머리 속이 다소 아픈 것은 별 대수롭지 않다. 누근가가 콘크리트와 내 머리 사이 에 손을 밀어넣어 주었다. "아저씨, 깜짝 놀랐어요." 소년이 수유실로 들어와 교정 틀니를 드러내보이며 말한다. 손에 조그만 인형이 매달려 있다. 드림 찬스에서 딴 포케몬이다. "미안하다. 네가 알려 주겠니?" "네, 내가 알렸어요. 내가." "그래, 나중에 보자." 소년은 클린 스위프의 군자금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런데, 아저씨, 머리, 괜찮아요? 쓰러질 때, 무지무지하게 큰소리 났었는데. 머리, 깨졌는 줄 알았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또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져 후두부에 손을 갖다대 보니 경악스 러울 만큼 큰 혹이 나 있었다. 골프 공을 절반으로 자른 정도나 된다. "포니요는 어쩌고 있는데? 그 녀석도 깜짝 놀랐을 텐데." "포니요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렇겠지." 나는 캬멜 담요를 유아 침대 위에 놓고 보건원한테 고개를 숙인다. "그 일, 쉬운 듯 보여도 제법 힘든 일이니까, 조심하세요. 얘, 너도 슬슬 엄마 돌아오실 시간 아 니니?" 쉬운 듯 보여도... 보건원의 말을 되풀이하면서 좁고 짧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7층까지 간다. 나카하라 할머니가 치요짱이라는 가타노 찻집의 아가씨 유령을 본다는 층계참을 지나, 플레이 랜 드로 나갔다. 나는 F1 그랑프리의 코크 피트에 모여 있는 사복 입은 중학생들을 보고, 키다리 군 의 모험호를 선로를 확인하러 간다. 그리고 두더지 게임, 해적 위기일발, 악어 패닉 게임기 옆을 지나, 금환식 포니를 보러 갔다. 아직도 몇 마리나 되는 금색 실루엣이 흔들리며 공증에 떠 있는 것이 또렷하게 보인다. 왠지 눈앞의 공기가 비장상적으로 투명해져, 트윙클 게임기에 들어있는 사 탕산과 기요하라 군이 던지는 공의 궤적과 철망 사이로 보이는 거리의 풍경이 하나하나 찌를 듯 선명했다. 쓰러지기 전에 본 모래알이 완전히 사라진 탓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소리는 들리지 않 아도, 포니의 검은 눈을 쳐다보면서 그것을 트랜스로 삼아, 내 안의 전혀 알 수 없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포니를 본다. 파란 호스가 있는 여느 때의 그 장소가 아니다. 포니 로 채워져야 할 공백의 윤곽으로 바람이 불어오고, 뒤에 있는 콘크리트와 철망 너머 풍경을 붙 잡아 돌아온다. 그런 느낌이었다. 분명 있었다는 느낌 덩어리만 거기에 있다. "포니? 포니요?" 사방으로 시선을 돌리자, 변함없는 짙은 갈색 포니가 내가 쓰러진 울타리 근처에서 목을 늘어 뜨리고 있다. 검고 긴 갈기가 목에 들러붙어 있어, 나는 인디언 여자들의 검은 머리칼을 상상한 다. 고개를 숙이고, 내 배를 툭툭 건드렸던 코를 인공 잔디에 대고 가만히 있다. 아직도 왼쪽 가 슴 아래, 거친 숨소리와, 여자의 유방보다 부드럽고 복잡한 코끝의 감촉이 남아 있다. "나한테 무얼 가르치려고 한 거지?" 다가가자, 포니는 찌그러진 원반 같은 똥 덩어리에 코 끝을 처박고 냄새를 맡고 있다. 6인치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유사협력 계획의 가이드 라인에 관한 뉴스가 흐르고 있고, 서쪽 하 늘은 빨갛게 물들어 있다. 어린 시절에 읽은 옛날 이야기 책의 그림과 저녁 노을 그림이 똑같다 고 생각한다. 오랜지색에 빨강을 섞어, 거기에 묽은 검정색을 옆으로 쓰윽 칠한 느낌이다. 나는 손수건으로 싼 우롱차 캔을 돌려 또 후두부에 갖다댄다. 창문 구석으로 검은 포니의 조그만 그림 자가, 검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짙게 덩어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어린아이들한테 버림받은 팬더와 곰인형 같은 탈것과 큰 차이가 없다. 우롱차 캔을 책상 위에 놓고 회색 사무용 의자에 몸을 묻고 다리를 철제 책상 위로 올린다. 20억 엔 세금 탈취. 나는 캔을 따고 미지근해진 우롱차를 한 모금 마신다. 슬슬 게임기의 전원을 끄고 시트를 덮어야겠다고 생각할 즈음, 책상 위의 검정 전화기가 울렸다. 에가와이겠지 싶어 수화기를 들었더니 역시 에가와의 먼 목소리가 들렸다. 창문으로 보이 는 플레이 랜드의 풍경에 현실감이 돌아오고, 자신이 있는 곳이 후지미초 S 백화점의 8층 옥상임 을 안다. 그런데 에가와의 목소리는 포니가 있는 옥상과는 다른 공기를 날라 온다. 정말 먼 목소 리다. "좀 들어봐요. 내가 미치겠다니까." 두터운 공기층이 수화기와 입 사이에 까여 있는 것 같은 에가와의 목소리가 위성이나 바닷속 케이블을 타고 간신히 도달한다. "아아, 또야." "또라니, 무슨 소리예요. 내가 준비한 크레돌의 비디오 시리즈, 기억하고 있죠?" 컴퓨터를 켰는지, 수화기 속에서 그런 소리가 났다. 그런데 나는 그 소리에서 유별난 모양의 주 전자에 소시지나 햄 덩어리가 부딪치는 소리를 연상하였다. "그 유통 과정을, 조사해 보았더니..." 바람 소리와는 다른 잡음이 들려 나는 비가 내리나 하고 생각한다. 수화기 속으로, 폐차 직전인 본네트 버스의 타이어가 물방울을 튀기는 소리를 기대하고 나는 귀기울였다. 저쪽에서는 비가 내 리고 있다. 세찬 비다. 카자흐스탄이나 어디 그런 조그만 도시의 어둡고 초라한 가게에서 에가와 가 전화를 걸고 있다. 사흘이나 오지 않는 본네트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손으로 닦은 끈적끈적한 카운터는 신주로 도금되어 있고, 그 위에 상처 투성이로 뿌예진 술잔이 쌓여 있다. "타이타닉 호 같은 배가 그려져 있는 간판의..." 터키석을 박은 로사리오가 시장 어귀에 떨어져 있었다. 그것을 쥐고, 몇 달 동안이나 내리지 않 은 비로 젖어드는 유리창을 긁자, 거기에 머리칼이 푸석푸석한 에가와의 비참한 얼굴이 보인다. 아니, 유리창을 긁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에가와라고 생각하고, 나는 눈을 더 꼭 감고 카자흐 스탄의 가게에서 거는 전화 소리를 들었다. "듣고 있어요? 듣고 있냐구요?" "아아, 들려." "들려, 가 아니고, 듣고 있느냔 말이예요? 당신, 정말 어떻게 돤 거 아니예요? 아아, 소리가 들 린다니요?" 나는 숨을 가늘게 토하면서 눈을 감았다. 안내소 유리창 너머로 유원지를 모방하여 다닥다닥 배치한 게임기와, 검게 가라앉은 콘크리트가 펼쳐져 있다. 목을 뻗어, 포니가 있는 곳을 보자, 어 느 틈엔가 코이케야의 점원이 나타나, 강아지들은 개집에 넣고 있다. 눈을 감고 수화기를 쥐고 있 는 자기 얼굴을 보았을까 하고 생각하자, 귀가 뜨거워졌다. "있지, 에가와... 넌, 신비적인... 체험이란 거, 해 본적 있나? 믿어?" 순간 침묵. "뭐라구요?" 잠시후 그런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 말이지, 오늘 굉장한 거 봤거든." "뭐라구요, 섬뜩하게." 에가와의 목소리가 갑자기 크고 가까워져, 귓속에다 숨을 토해 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야마 노테 선과 도요코선의 가드를 등지고 육교 아래 언덕을 올라가면 오른쪽에 있는 오팔색 타일 빌 딩, 그 4층의 퍼스컴 투성이 풍경이 한꺼번에 보인다. 종이 상자 특유의 바닐라향 비슷한 냄새와 눈가리개를 대신하고 있는 벤자민 화분까지 떠올랐다. "잠깐, 잠깐, 기다려요. 마음의 준비를 할 테니까... 영혼인지 뭔지 그런 거? 초능력 같은 거?" "글세, 분류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지... 포니가 말이야..." "포니? 그래서요?" "뭐라 말은 잘 못하겠는데.. 포니가, 그... 포니, 그 자체로 보였어." "뭐라구요?" "내가 늘 얘기하는 옥상의 포니가 말이야, 진짜 포니로 보였다니까.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하 겠지, 너는. 이 옥상에는 신이 있다구, 알겠어? 제기랄." 내가 먼저 수화기를 끊으려고 했는데, 그 전에 에가와가 먼저 수화기를 놓았다. 나는 뭔가를 지 그시 인내하듯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무엇을 인내하는지는 나 자신도 잘 모른다. 단순히 타이밍의 패배라고 생각한다. 검정 전화기에 붙어 있는 스티커 사진을 손톱으로 몇 번인가 긁었 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신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이 없다는 절대적인 증거를 잡은 작자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 포니요? 나는 이제 안내소에서 나가 게임기에 시트를 덮고, 아령 운동을 하 고, 사다리에서 복근 운동을 할 것이다. 소리가 사라진 텔레비전에서는 연예인 수영대회를 재방송 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막 한 쪽 유방을 드러내보인 성인 비디오 여배우가 들어왔다. 아침 옥상의 눈부심에 나는 눈을 감는다. 캔 밀크 커피를 타서, 키다리 군의 모험호 두 번째 차 량에 걸터앉았다. 두통은 완전히 없어졌는데, 혹은 머리카락만 닿아도 찌르는 것처럼 아프다. 나 카하라 할머니가 청소를 하다 깜박 잊었는지, 바람에 쓸려 게임기 밑에서 나왔는지, 초코바 그림 이 있는 주머니가 콘크리트 바닥에서 마른 소리를 내며 돌아다닌다. 끝에 투명한 끈이라도 달려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가는 멈추고, 다시 움직였다가 멈춘다. 마치 쥐의 움직임 같다고 생각하고 있자니, 한 번 돌고, 두 번 돌고, 드라이브 랜드의 경계를 표시하는 턱에서 커다란 소용돌이의 궤 적을 남기고 있다. 나는 캔 커피에 입을 댄다. 철망 너머로 도시의 빌딩과 집집의 지붕과 공원의 나무들이, 초점을 맞춘 것처럼 선명하게 보인다. 공기가 투명해지기 시작한 탓이다. 그대로 눈을 옆으로 돌려 코이케야의 개집을 쳐다본다. 투명한 강화 플라스틱 문 안에서, 하얗고 노르스름한 강아지의 배와 꼬리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보인다. 숨을 깊이 쉬고 눈을 감는다. 우선 게임기의 시트를 벗겨 내고 반듯하게 접어 선반에 넣는다. 그리고 지폐와 동전을 회수한다. 히라다한테서 전화가 오면 보고를 하고, 전원을 켜고, 기계를 점 검한다. 개점 시간까지는 한참 여유가 있다. 나는 단숨에 캔 커피를 마시고, 그 바닥을 태양빛에 반사시켜 개집쪽으로 굴절시킨다. 점멸시키듯 말이다. 그리고 천천히 모험호에서 일어나, 캔을 버 리고 코이케야의 개집을 향하여 걷는다. 2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데, 내가 다가가는 기척을 느꼈 는지, 개들이 짖기 시작한다. 개들이 앞다리로 일제히 문을 긁고 있다. 나는 걸으며 몸을 한바퀴 돌려 옥상을 돌아본다. 아무도 없는, 여느 때와 똑같은 풍경이다. 이지역 초등학교에 나는 소리이 리라. 멀리서 반음 처진 차임 소리가 울린다. 나는 낮은 울타리를 넘어 개집으로 다가간다. 개들 이 미친 듯이 문을 긁어대며 소동을 피우고 있다. 나는 투명한 플라스틱 문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고, 쭈그리고 앉았다. 레트리버와 시바다 견이 오르락내리락, 몸부림친다. 투명한 플라스틱 이 발바닥 자국으로 점점 투명도를 잃어 갔다. 나는 가볍게 휘파람을 분다. 그리고 또 옥상을 돌 아본다. 잠시 생각하고서 나는 소리내어 말한다. "안되죠, 이러시면, 나카하라 씨... 청소 후에 이런 장난을 하면..." 그렇게 말하며 나는 자물쇠로 손가락을 뻗었다. 또다시 주위로 눈길을 돌린다. 그리고 자물쇠를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벗겨 냈다. "아무리 동물을 좋ㅇ한다지만, 할머니..." 햄스터와 다람쥐, 메추라기까지 있다. 스핑크스라는 눈빛이 섬뜩한 고양이와 눈이 마주쳐, 나는 침을 뱉었다. 털도 없고, 주름 투성이에, 쪼그라든 귀는 뾰족한 우주인의 페트 같다. 나는 그 자물 쇠도 벗긴다. 자물쇠를 차례차례 벗기자 동물들이 일제히 튀어나와 울타리 안을 마구 돌아다닌다. 늘 먹이가 놓여 있는 장소로 향했더니 먹이 접시가 없어, 고개를 갸우뚱하고 다른 개들과 장난을 치는 놈도 있었다. 나는 개들 울타리로 달려가 그곳 문도 열어 버린다. 그리고 콘크리트 위를 일 부러 타닥타닥 뛰어다니며 손뼉을 쳐, 개들을 놀래켰다. 비글, 시프 독, 몰티즈, 닥스훈트, 사바다 견, 그레이트 피레니즈, 달마시안... 발톱 소리를 울리며 흩어진다. 옥상에 이만한 숫자의 개가 돌 아다니고, 게임 코너 구석과 기둥 주변에서 조그만 동물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자니, 동물들 이 건물 자체를 점거한 듯하다. 옥상이 단번에 고도를 높이는 상상을 한다. 빌딩과 집들의 지평선 을 쳐다보고, 거기에서 거대하고 짙푸른 해일의 벽이 솟아오르는 광경을 상상하였다. 천천히, 그 러나 확실하게 고도가 올라간다. 나는 포니의 집 앞으로 가서 안을 들여다 보았다. 칠흑같은 눈이 내 쪽을 보고 있다. 어슴프레한 아침에 보는 포니의 눈은 햇빛 아래서보다 강렬한 야성을 느끼게 한다. 깔짝깔짝 콘크리트를 갉아대는 소리가 나나 싶었는데, 달마시안이 달려와 내 등까지 뛰어올 랐다. 그리고 바짝 엎드린 몸을 끌면서 내 테니스화 냄새를 맡고, 두세번 좌우로 뛰어올랐다가 다 시 몸을 뒤틀어 게임기 쪽으로 달려갔다. 지평선을 덮은 짙은 파랑이 눈높이 정도가 되고, 그 능 선이 하얗게 벗겨지고 있다. 땅울림 같은 소리가 배를 흔들기 시작했다. 나는 포니의 집 자물쇠를 손가락 세 개로 벗기고 문을 열었다. "포니, 됐어." 한 걸음 물러서서 포니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포니는 목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콘크리트에 코를 붙이고 천천히 입을 움직인다. 나는 조심조심 코이케야의 여점원이 그랬던 것처럼 갈기로 손을 뻗어 부드럽게 잡는다. 생각보다 가칠가칠하고 손바닥에 휘감기기도 하였지만, 조심스럽게 밖으로 유도하였다. 파란 벽의 능선이 하얗게 부서지고, 그 거대한 벽으로 무지막지한 속도로 물이 올라 오고 있다. "포니, 네가 나오지 않으면 옥상의 고도가 올라가지 않는단 말이야." 나는 겁이 좀 나기도 했지만, 억지로 갈기를 잡아당겨 포니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포니의 오 줌 냄새가 나서 들이쉰 숨을 그대로 멈추고 울타리 밖으로 걷는다. 인공 잔디를 밟는 발굽의 허 망한 소리가 겨우 또각또각하는 말발굽 소리로 바뀌었다. 콘크리트 위로 나오자, 나는 손바닥으로 포니의 엉덩이를 힘껏 쳐 밀어냈다. 포니가 두세 번 고개를 크게 흔들고 크게 흔들고, 다리를 허 둥거린다. 발바닥에서 등뼈까지 콘크리트의 딱딱한 울림이 수직으로 올라와, 그 소리의 화려함에 나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추렸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단밤처럼 윤기 나는 엉덩이를 때린다. "달려, 달려!" 그러나 포니는 또 내 배 언저리를 부드러운 코끝으로 비벼대고는 발을 몇 번 구르다가 조용히 목을 돌리고 인공 잔디 쪽으로 돌아가려 한다. 내 머리 속에서는 금환식 포니의 실루엣이 난무하 고, 세계의 바닥이 누락되는 듯한 달콤한 순간이 퍼져 나간다. "포니! 포니요! 돌아와." 나는 다시 한 번 포니의 갈기를 잡고 억지로 옥상 한 가운데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포니는 또 짙은 속눈썹이 드리운 눈을 깜박이며 코끝을 내 배에 비벼대고는 목을 돌리고 천천히 또각또각 걸어간다. 인공 잔디까지 가자 두세 번 발을 구르고, 고개를 숙여 파란 호스를 내려다 보았다. 늘 똑같은 자세다. 나는 지평선으로 눈길을 돌린다. 거리를 삼키려 했던 해일이 순식간에 얼어붙고, 그 힘을 유지하려 애쓰는 듯이 보인다. 나는 숨을 멈추고 그것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포니의 둔중 한 그림자가 바로 그 아래서 뿌예지고, 해일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뚜껑을 뽑아낸 듯 단번에 쪼그 라든다. 그리고 지평선 아래로 푹 잠겨 버리고 말았다. 마치 장막이 내려질 때처럼. 나는 한동안 숨을 죽이고 지평선 위 공백을 응시하였다. 콘크리트 위를 달리는 개들의 발소리와 숨소리가 내 머리 주위를 빙빙 돈다. 나는 그대로 천천히 앉아 엉덩방아를 찧고 옆으로 눕는다. 후두부에 생긴 혹의 통증이 옆으로 퍼져 나가고, 귀가 콘크리트에 닿자, 바로 그 뒤에 곤충 몇 십 마리가 꼬여 들어 긁고 있는 듯한, 개들의 마른 발톱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는다. 가끔 개들이 내 옆구리롸 엉덩이 냄새를 맡고는 다시 달려간다. 안내소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아마 에가와가 건 것이 리라. 이번에는 어디에서 걸고 있을까. 멀고 먼 콘크리트 지평선에, 검게 확대된 포니의 실루엣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