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아이레스 오전 0시 지은이:후지사와 슈/김난주 옮김 출판사:동방미디어 표면이 둔탁한 납빛으로 변하면 반숙이다. 아직 한 5분은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가자마는 면장 갑을 벗고 방한복 주머니에서 담배를 끄집어냈다. 주로 토목공들이 많이 입는 소탈한 감색 방한 복이다. 학생 시절, 요요기 육교 아래에서 마냥 서 있는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비슷한 타입의 방 한복이 지급됐었다. 지금은 가슴께에 노란색 실로 '미노야 호텔'이라고 수가 놓여져 있는 것만 다 르다. 도깨비 불, 눈의 고향, 미노야 호텔... 가자마는 자기가 이 옷을 입게 된 이후로 점점 더 유 황 냄새를 풍기게 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온천물이 솟는 원천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자욱하여, 담배 연기도 구분이 안 된다. 다른 한 손 을 휘휘 저어 유황 냄새를 떨쳐내는 짓도 이제는 하지 않는다. 온천 달걀이 다 될 때까지, 원천 위에다 비스듬히 세워둔 철판 지붕에 쌓인 눈을 부삽으로 긁어내리고, 담배를 피우며 눈내리는 하늘보다 하얀 나베구라 산을 바라본다. 그게 가자마가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다. "가자마 씨이, 가자마 씨." 내리는 눈을 헤치고 가자마를 부르는 소리가 밑에서 들려와 그가 일어난다. 얼굴 앞에서 유황 연기가 갈라지고, 차가운 눈 냄새가 콧속을 찌른다. 비탈 아래에서 손을 이마에 대고 아침 햇살을 가리며 눈 속에 서 있는 헤토의 모습이 보였다. "빨리 해 줘요." 그녀는 손님들의 식사 시중도 든다. 아침 식사때는 늘 반숙 계란을 식탁에 올리는데, 그날은 이 바라기에서 가족끼리 온 손님뿐이라 네 개면 족했다. 네 개쯤이야 주방에서 삶으면 되지 싶은데, 사장인 다케무라는 미노야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고 한다. 가자마는 아래쪽에 있는 헤토에게 손을 들어 보이고, 가는 숨을 내쉬면서 다시 쭈그리고 앉는 다. 삼나무 가지 아래 부분과 바람이 부는 쪽 줄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눈에 덮여 있다. 이따금 무 게를 견디지 못한 가지가 눈을 떨구며 흔들리고, 가루눈이 얇은 실크 천처럼 나부꼈다. 담배 꽁초 를 눈 속으로 내던지고 망을 올리다. 가자마는 원천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죽은 할아버지의 입에 물려 있었던 인공 호흡기 소리를 떠올렸는데, 그나마 귀에 익고 말았다. 망 속에 있는 달걀에 힘껏 입김을 불어넣자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김이 사라지고 납빛 달걀 스 무개가 나타났다. 그 중 네 개를 자루에 담고 나머지는 다시 원천 속에 담갔다. 뭉글거리는 연기 속으로 짝 벌어진 캐비지 같은 적황색 유황꽃이 잠시 보였다가 다시 연기에 가려진다. 가자마는 늘 자기 몫의 달걀 두 개와 선물용 '장수 천년 달걀'은 표면이 검게 변할 때까지 삶는 다. 20대에 들어서서, 어느 미국 작가의 페이퍼 백을 읽고 난 다음부터는 삶은 달걀과 커피로 아 침을 대신하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별 볼일 없는 삼류 미스터리였다. 탐정과 여자가 등장하고 스 미스와 웬슨이 불을 뿜고, 탈컴 파우더가 날리고, 조그만 뱀눈나비 문신이 꿈틀거리고, 그뿐이다. 가자마는 온천수를 여관으로 보내는 파이프 끝에 끼여 있는 철망을 벗겨 내 눈 속에 처박고 씻 는다. 겨울에는 이곳을 찾는 손님이 거의 없다. 스키를 즐기는 손님들은 자동차 도로를 끼고 10킬 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산록의 여관에 머문다. "셔틀버스를 보내겠다고 하는데도 안 온다니까. 겨우 15분 차이인데, 허 그거 참. 시각표에 있 는 여관 안내란에도 반쪽이나 광고를 쳤고, '루루프'에도 냈는데 말이지. 유황천에서 느긋하게 몸 을 풀고, 홀에서 춤추고, 그 다음엔 술 마시고, 야, 이거 천국이 따로 없군, 이라고 말이야 미노야 는 겨울이나 여름이나 최고로 좋은 곳인데, 원." 다케무라는 간장이 안 좋은지 얼굴색이 거무티티하다. 바짝 마른 데다 키도 가자마의 가슴 정 도밖에 안 되지만, 예순살이 넘었는데도 머리카락만은 검고 반짝반짝 윤이 난다. 게다가 부자연스 러울 만큼 자세가 반듯하다. 가자마는 그렇게 투덜거리는 다케무라에게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한 마디밖에 대꾸하지 않는다. "그렇군요." 시각표에 실린 광고 자체가 별 효과가 없다는 생각은 하지만. 어디에든 광고를 냈다하면 위쪽 한 귀퉁이에 남자와 여자가 춤을 추는 실루엣을 넣는다. 가자마는 그 컷 디자인의 구불구불한 드 레스며 연미복 밖으로 비어져 나온 바지 라인이 싸구려에다 천박한 인상까지 풍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스키를 즐기는 젊은 층이 올 이가 없다. 110평이나 되는 넓은 연회실을 갖추고 있는 여관 은 미노야뿐이라 그게 간판이기는 하지만, 그런 광고 가지고는 손님을 끌어들일 수가 없다. 가자마는 나머지 온천 달걀을 끌어올려 입김을 후 분다. 증기가 갈라지면서 표면이 검게 변한 달걀이 나타났다. 달걀끼리 닿은 부분에 다랑어 눈알 같은 점이 나 있는데, 여주인은 그런 달걀이 야말로 예로부터 내려오는 온천 달걀이라고 한다. 가자마는 면장갑을 낀 손으로 검게 변한 달걀 하나를 깐다. 검은 터틀넥 스웨터 위에 연지색 시루시반텐(옷깃이나 등에 가게 이름을 날염한 윗도리-옮긴 이)을 걸쳤다. 사물함의 거울을 보면서, 털 모자를 푹 덮어써 짜부라진 머리를 양 손으로 빗어 내 린다. 거울 속의 얼굴은 아무리 봐도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인간 같지 않다. 그 자신도 알고 있다. 다케무라는 그런 가자마의 얼굴을 '도라지실의 얼굴'이라고 한다. 15년 전, 구관의 도라지실에서 손목 동맥을 끊고 자살한 은행원의 얼굴을 닮았기 때문이란다. "가자마 군, 자네하고 비슷한 나이에, 그렇지, 들어설 때부터 어째 좀 꺼림찍한 분위기였어. 이 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후쿠이 지방 은행에 다녔던 모양인데, 그 얼굴이야, 자네 얼굴이, 가자마 군. 아니 조금 더 웃는 얼굴인가. 손님을, 이렇게 올려다보면서, 웃어야지." 가자마는 니혼바시에 있는 광고 대리점에 근무하던 시절부터 자신은 이런 얼굴이라고 생각한 다. 영상 담당이었던 가자마는 모니터에 비치는 바닷속 생물을 체크하는게 일이었으므로, 영상을 CM으로 사용해 줄 지방 스폰서나 텔레비전 방송국의 인간들에게 영업용 웃음을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흰동가리와 말미잘 따위의 흔해빠진 영상에 세고비아의 기타를 배경 음악으로 깔 겠다는 과장을 비웃다가 말싸움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 후로 한층 더 다케무라가 소위 꺼림찍하 다고 말하는 얼굴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가자마 군."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헤어 리퀴드를 발라 머리칼이 번쩍이는 다케무라가 종업원실 입구에 서 있었다. "가자마 군, 사와키 군이 식당에 가 있어서 그러는데, 미안하지만 마쓰하라 세탁소에 가서, 내 턱시도 하고 와이프 드레스... 좀 가져와 주겠나? 오늘은 가나가와의, 사루비아 댄스회 분들이 오 시니까, 50명. 한 시즌 머릿수야. 가자마 군도 열심히, 잘 부탁해. 빈틈없이 말이야. 아아 참, 와이 프 드레스, 두 벌이니까 잊지 말고. 핑크와 블루 두 가지야. 수고스럽겠지만." 다케무라가 사투리를 쓰지 않게 된 것은 우에노 산 토지의 일부를 연회실을 만든 후부터라고 가자마의 아버지가 말했었다. "전신이 나간 거 아냐, 부부가 똑같이 말이야. 고향 사람들이 모던 댄스, 그런 지저분한 거 할 턱이 있나.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원 알 수가 없다니까. 산을 팔아서 돈이 들어왔거든. 그 작자, 네 가 도쿄에 있는 동안 선거에도 출마했지 뭐냐. 아무도 찍어 주지 않았지만." 그런 말을 했었다. 아버지는 읍에서 딱 하나뿐인 두부 가게를 45년이나 운영하고 있다. 물론 미 노야에도 두부를 대고 있다. 가자마는 방금 입은 시스루반텐을 벗는다. 또 댄스 투어 손님이야... 우울하다. 사교 댄스는 춤이나 음악이나 구역질이 날 정도로 싫다. 가 자마는 털모자를 쓰고 석유 스토브 가까이 널어 둔, 아직도 물기에 젖어 있는 면장갑을 집어들었 다. 도쿄니 간사이니 하는 그 먼 곳에서 관광 버스를 타고 눈 속을 헤치고 온다. 쉰 살이 넘은 자 들이 일제히 화려한 의상으로 옷을 갈아입고, 110평짜리 연회실에서 모던 댄스를 춘다. 왈츠, 지 르박, 맘보, 탱고, 큐반 룸바, 삼바... 가자마는 의상에서 풀풀 날리는 나프탈린 냄새와 포마드, 화장품 냄새로 가득한 연회실의 공기 를 떠올리고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젊은 자들이나 늙은 자들이나, 마치 짝바꾸기 파티 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코로 허연 숨을 내쉬며 가자마는 미노야의 뒷문을 빠져나온다. 아 니면, 유난스럽게 치장한 개들의 품평회 같다고도 생각한다. 눈발은 가늘어졌는데 밖이 이른 아침보다 더 어둡다.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을 납빛 하늘이 뚜 껑이라도 덮은 듯 짓누르고 있다. 가자마는 털모자를 귀까지 잡아당기고, 눈 속에서 검게 드러난 처마와 나무 그림자로 시선을 옮겼다. 이상하리만큼 또렷하게 보여, 사방 어디를 보아도 초점이 맞을 듯한 느낌이다. 젠뉴 산 중턱에 드문드문 검게 보이는 것은 온천수가 솟는 곳이다. 그곳에만 눈이 쌓이지 않는다. 눈보다 가는 누런 증기 줄기가 꼿꼿하게 피어오르고 있다. 실눈을 뜨고 보 면, 부글부글 격렬하게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움직이고 있다. 가자마는 회색 왜건에 올라타 열쇠를 돌린다. 켜둔 채였던 라디오에서 지방 방송국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갑자기 튀어나와, 당황하여 볼륨을 낮추었다. "정면 현관 앞 노상에 정차해 있던 경비 회사, 도메 가드의 현금 운송차를 향하여, 산탄총을 발 포하여..." 와이퍼와 앞 유리창에 달라붙은 얇은 얼음을 삐익삐익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조금씩 깎아 낸 다. 가자마는 천천히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왼쪽 어깨를 맞아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중태라고 합니다. 범인은 현금 2억 300만 엔이 든 주 머니 세 자루를 강탈하여..." 스노 타이어가 눈 위를 매끄럽게 미끄러지면서 여관 앞의 완만한 언덕길을 내려간다. 가끔 후 미가 흔들렸지만 49호선 융설 도로로 들어서자 비 내린 노면을 달리는 듯한 소리를 냈다. "경비원 세 명이 운송차를 지점의 남쪽 길에 세워 두고, 현금 주머니를 수레에 실어 운반하려 던 차에..." 앞 유리창에 부딪치는 눈이 방사상으로 삼단뛰기를 하듯 호를 그리며 날아왔다가는 사라졌다. 그 움직임만 좇고 있자니 눈 앞으로 길쭉이 뻗은 검게 젖은 아스팔트 도로가 천천히 옆으로 움직 여, 옆에 있는 눈의 벽에 차가 스칠 것처럼 느껴진다. 발버둥쳐 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 가자마는 창문을 열고 담배 꽁초를 내던지고 라디오 채널 스 위치로 손을 뻗는다. 몇 가지 버튼을 눌러 보았지만 잡음만 심하고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산골짜기 마을까지 미치는 전파를 보낼 수 있는 방송국은 아까 뉴스를 들려주었던 곳뿐이다. 드 문드문 눈의 벽 위로 거뭇거뭇한 인가의 지붕이 드러나 보인다. 벽을 깎아 내어 도로와 연결되는 눈길을 만들어 놓은 곳은 몇 군데 안되는 여관이나 민박뿐이지만, 그나마 가구라 그랜드 호텔을 제외하면 거의 손님도 없을 것이다. 강가에 위치한 일본식 객실이 30실, 양식 객실이 5실인 여관 인데, 겨울에는 종업원의 절반이 스키장이 있는 조에쓰로 일하러 간다는 말을 도쿠한테 들었다. 도쿠란 가게 이름이다. 원래 성은 와카스기인데, 마을 사람들은 옛날부터 농사를 짓는 와카스기네 도쿠라고 부른다. 도쿠는 가자마보다 두 살 아래로, 10년 전부터 미노야 호텔에서 일하고 있다. 거대한 석회암을 옆에서 깎아 낸 듯한 눈의 벽과 양철 여관 안내판, 이따금씩 공중에 매달려 있는 커다란 도로 표지판, 눈 덮인 논 가운데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농가들, 겹치듯 다가오는 능 선... "난 이런 동네, 싫었어. 겨울이나 여름이나 비수기 같은 데다, 아무것도 없고, 요즘 같은 세상에 농사지어서 밥벌어 먹기도 힘들 것이고. 미노야밖에 없어서. 가자마, 넌, 어떠냐? 오사카에서 돌아 오니까, 늙어빠진 삼나무 있지, 울퉁불퉁 옹이 투성이에다 땅 위로 툭 비어져 나온 그 뿌리 사이 에 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미칠 것만 같았어. 숨도 못 쉬겠더라구." 가자마가 산골짜기 마을로 돌아왔을 때, 도쿠가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너, 언젠가는 두부 가게 이을 거지. 너희 아버지, 네가 돌아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 겠다고, 블루 레이크에서 술 마시면서 눈물까지 흘리던데." "천만에, 안 이을 거야. 지금은 충전 기간이라구. 사는 곳도 다르고." 가자마는 도쿠에게 그렇게 대답했다. 실제로 옆 동네에 있는 집을 놔두고, 거품이 걷혀 싸게 나 와 있던 리조트 아파트를 월 2만 엔에 빌려 살고 있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돌아와 준 것에 대해 서는 고마워했지만 가게를 이으란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마 결국은 잇게 되리라고 생각 하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지낸 지 벌써 1년이다. "...와이프 드레스, 핑크하고 블루, 알겠지..." 가자마는 산비탈에 설치된 눈사태 방지용 울타리로 눈길을 돌린다. 철망 위로 쌓인 눈이 불거 져 나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다. 소규모 상가로 들어서기 전, 터널 앞에서 차를 세우고, 다시 담배를 물고 밖으로 나왔다. 천천히 구부러지는 길이 오른쪽은 비탈이고 그 아래는 좁다란 강이 흐르고 있다. 가자마는 건너편 낮은 산을 바라보며 눈 속에다 방뇨를 했다. 가드레일까지 덮 은 눈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자신의 오줌을 빨아들인다. 눈 속으로 가늘고 깊고 예리한 구멍이 생긴다. 터널 속에서 둔탁한 엔진 소리가 울려, 돌아보니 지붕에 눈이 엷게 쌓인 관광 버스가 느 릿느릿 나타났다. 가자마는 방뇨를 하면서, 스노 체인 소리를 무겁게 울리며 옆을 지나가는 버스 를 바라본다. 김 서린 버스 창으로 단체 손님의 얼굴이 뿌옇게 보이고, 제일 뒤 유리창으로 선글 라스를 낀 젊은 여자의 얼굴이 스쳤다. "사장님 옷?" 기념품과 차를 담당하고 있는 요시무라라는 여자가 코로 작은 숨을 흘리며 웃었다. 가자마는 오른손 손가락에 건 행거를 왼손으로 옮겨 쥐고 드레스는 등에 멨다. 여주인의 드레스 두 벌은 끔찍할 만큼 부피가 커서 옷자락을 장식하고 있는 깃털은 비닐 주머니 안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다리에 걸려 거추장스러웠다. "마유미도, 오늘 나올 거지?" 얇은 입술을 비틀어 보이는 요시무라의 얼굴이 아직 어린애 같다. 그녀는 이 동네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상고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미노야에 들어왔다. 왼쪽 귓불에 조그만 구멍이 나 있는 데, 영업 시간에는 귀걸이를 하면 안 되는 모양이다. 가자마는 오렌지색 유니폼 안에 입은 블라우 스가 커서 늘 가슴께가 들여다보이고, 한 가닥으로 묶은 머리 밑 보송보송한 솜털 때문에 한층 소녀처럼 보이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 가자마 씨도?" 가자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일이니까 할 수 없죠 뭐." 요시무라는 기념품인 복떡 상자를 가지런히 놓으며 대꾸한다. "그렇지만 맨날 노인네들뿐이잖아요. 스키 손님은 안오나..." "오늘 손님 중에는 젊은 사람도 있었잖아, 여자." "그랬던가... 다들, 할아버지, 할머니들뿐이었던 것 같은데..." 여주인인 치에코가 복도를 걸어오자, 요시무라는 눈길을 돌리고 기념품을 점검하는 척한다. 가 자마도 어깨에 멘 행거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가자마 군... 어머, 내 드레스, 찾아왔어. 아, 다행이다." 여주인은 비닐에 덮인 분홍과 파란색 드레스를 받아들고 위아래로 시선을 옮긴다. 오늘은 손님 에 맞춘 것인가 엷은 회색 기모노를 입고 있는데도 화장한 얼굴이 양장을 했을 때 같은 분위기를 띠고 있어 가자마는 그로테스크하다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아아, 그리고 가자마 군. 오늘은, 있지, 가나가와의 사루비아 회 분들, 50명이니까, 잘 부탁해요, 레스토랑하고 홀. 온천은 와카스기 군하고 하루 씨. 객실은 사와키 군이 점검하고 있으니까. ...음, 그리고 이 드레스는 사물함 말고 내 방문 기둥에 걸어 놔 줘요." 여주인은 용건을 끝내자 프런트로 향한다. 하얀 버선발 뒷꿈치에서 오르내리는 기모노 자락을 보면서 가자마는 왠지 마쓰하라 세탁소까지 다녀온 피로감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을 느낀다. 헤 토가 프런트에서 숙박표를 점검하는 모습이며 이중으로 되어 있는 현관문 중에 안쪽만 아직도 열 려 있는 것을 보자 온 여관이 먼지 투성이처럼 여겨진다. 단체 손님이 들어오면 늘 그렇다. 현관 앞 눈 위에 찍힌 거대한 타이어 자국을 볼 때마다, 연회실 서쪽 벽에 걸려 있는 벽걸이가 떠오른 다. 조건 반사다. 로트렉의 그림을 모티브로 삼아 짠 것인데 센스가 영 엉망이다. 사키바나 온천 에 있는 스트립 극장의 장막이 그나마 낫다 싶다. 차 모임을 흉내낸 의자의 빨간 모피 깔개와 커다란 일본식 우산이 히터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힐끔 보고 나서 가자마는 요시무라한테 말한다. "그럼 이따 봐." 단체 손님이리라, 로비 구석 소파에 앉아 있는 초로의 두 남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종업원실로 향했다. "야, 이거 수고가 많았군. 수고했어." 다케무라는 비닐에 덮인 턱시도를 보면서 조그만 눈을 번뜩인다. 거무죽죽한 안색과 그 눈빛이 쥐새끼를 연산시켰다. "좀 이르지만, 사루비아 회 분들, 벌써 오셨어. 음, 그 분들, 꽤 수준이 높은 것 같아. 모드들 홀 드하는 자세가 좋더군. 그, 회장님인 후카노 씨는 걷는 게 그대로 워크도라니까. 토우부터 미끄러 지듯이 나가서, 발이 닿을 때 그 토우가 사뿐 올라가는 거야. 가나가와 그랜드 시니어전에서 우승 한 적도 있을 정도니." 다케무라가 인단을 입에 물고 있는 탓에 방안 공기 전체에서 까끌까끌한 한약방 냄새가 난다. 가자마는 숨을 얕게 내쉬면서 흥분해서 주절대는 다케무라의 얼굴을 쳐다본다. 암적색 입술 끝으 로 허연 거품까지 물고 있다. "음악을 선택하는 데 꽤 신경 써야 하겠어. 물론 사루비아 회 분들도 준비는 해 왔겠지만, 루비 머레이하고 탱고 에르초쿠로, 그리고 그랑 프레미오 4하고, 아아, 이건 기본이지, 아참, 마사 그레 이스풀 댄싱. 최소한 이런 정도는 준비해 둬야겠지..." 가자마는 감색 방한복을 벗으면서 세 세대밖에 살지 않는 아파트의 자기 방에 대해 생각했다. 그 베란다에 쌓인 눈으로 장난삼아 만든 눈사람. 위스키에 얼음 대신 눈을 넣어 따랐을 때 만들 었다. 의미는 전혀 없다. 베란다 난간 위에 눈을 털어내고 올려놓았는데, 내리는 눈을 맞아 형태 가 바뀌었다. 왜 그런 생각이 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또 베란다에 반년이나 걸려 있는 한 짝뿐인 검정 양말이 머리 속을 스치고, 가자마는 사물함 문을 닫았다. "이거, 사모님 방에 놔두라던데요..." 가늘게 뜬 눈을 깜박거리며 손가락을 입에 대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다케무라한테 말을 걸 었다. "으응? 아아... 가자마 군, 지금 이거라고 했지? 드레스, 어, 드레스, 으음, 미안하지만 방에다 갖 다 놔 주겠나" 복도에서 사와키를 만났지만, 그는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을 쫙 펼치고 왼손으로 동그라미를 그 리며 얼굴을 찡그렸을 뿐이다. 쉰 명이나 몰려와 죽겠다, 는 뜻인지, 쉰살이 넘은 자들뿐이라 잔 소리가 많아 골치가 아프다는 뜻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미노야 호텔은 한 달에 최소 한 두 번 정도 댄스 투어 손님이 들어오지 않으면 망한다. 가자마는 눈썹을 찡그린 사와키의 얼굴에 가볍 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신관 객실 방 몇 군데서 문을 열어 둔 모양이다. 초로의 남자들 목소리와 여자들의 높은 웃음 소리가 울려 가자마가 있는 보일러실까지 들려온다. 유산염으로 뻘겋게 변한 낡은 온도계를 확인 할 때마다 가자마는 옛날 집에 있었던 간이 혈압계의 둥그런 미터기를 생각한다. 흡착 시트가 붙 어 있는 벨트를 팔에 둘둘 말아 감고, 럭비 공 같은고무 펌프를 꽉꽉 눌러 팔을 조인다. 아버지가 나가오카 시내에 있는 스낵 바에 들렀을 때, 필요할 때가 있을까 싶어 거기서 술을 마시고 있던 의료용품 세일즈 맨한테서 사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청진기 고무가 비비꼬여 쉭쉭거리는 잡음과,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가 귓속에서 들리는게 재미있어 몇 번이나 하릴없이 혈압을 쟀다. 그때 가 자마는 어린 마음에 인간의 몸뿐만이 아니라 지구나 우주도 혈압을 재면 숫자가 나오지 않을까 하고, 툭하면 그 혈압계를 꺼내 와서 나무나 막 설치한 가드레일, 산에서 잡은 토끼 등에 벨트를 갖다대고 펌프질을 했었다. 가자마는 둥그런 온도계에 서린 김을 방한복 소매로 닦아 낸다. 또 객 실 쪽에서 커다란 웃음 소리가 일어, 손님들이 벌써 연회실 쪽으로 이동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 한다. 가자마는 대리점 별관에 있는 스튜디오, 영상실의 음향 레벨 미터. 그 바삐 움직이는 빨강과 초 록 빛의 기둥이 언뜻 머리 속에 되살아났지만, 머리 속 깊은 곳에 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구분 할 수가 없어졌다. 꼭지를 비튼다.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르고 원천이 뿜어 나왔다. 물줄기를 가늘 게 줄이고 컵에 받아 물색을 확인한다. 가도카미의 물보다 엷은 적청색. 엄청 지쳤을 때 나오는 오줌색 같다고 생각한다. 눈앞에 있는 거울이 뿌예져 가자마는 손바닥으로 닦는다. 그러자 젖어 비틀린 자신의 얼굴 뒤에서 무슨 그림자 같은 것이 움직인 듯하였다. 착시 현상인가 싶어 초점을 거울 속에 맞추자, 선글라스를 낀 여자의 얼굴이 천천히 지나간다. 마쓰하라 세탁소에 가는 도중 에 본, 버스 안의 여자다. 가자마는 수도 꼭지를 잠그고 돌아보았다. 보일러실 입구 너머에는 이미 아무도 있지 않았다. 입구까지 가서 복도를 기웃거린다. 엷은 보라색 니트 슈트를 입고 벽에 기대듯 걷는 여자의 뒷모 습이 보였다. 그런데 가자마는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낀다. 복도의 공기가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색으로 변한 듯이 생각된다. 아니, 복도를 걷는 선글라스 낀 젊은 여자라는 자신의 상상의 꼬리가 어딘가에 뚫린 작은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진 느낌이다. 뒷모습이 가냘픈 여자는 왼손 을 벽에 대고, 그리고 오른손은 허공에 내밀어 허둥거리며 걷고 있다. 공중에서 헤매는 오른손의 손가락이 복도의 백열등 빛을 모아 빛나고 있는데, 그 손이 유난히 불거지고 야위어 보인다. 그대 로 놔둘까 하면서 잠시 뒷모습을 지켜보았지만, 너무도 부자연스러운 걸음거리에 가자마는 조용 히 말을 걸었다. "손님, 어디로 가시나요?" 그러나 여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손님, 어디로 가십니까? 그쪽은 비상구인데요." 여자가 걸음을 멈춘다. 가자마가 여자에게 다가가려 보일러실에서 나오자 뒤로 묶은 머리칼이 움직이며 선글라스를 낀 얼굴이 돌아다보았다. 젊은여자의 얼굴이 아니다. 김 서린 버스 창이나 보일러실 거울이나 선글라스만 강하게 비춰, 자신의 시선이 얼굴까지 미치지 못했을 뿐이다. 예순 다섯, 아니, 일흔일지도 모를 늙은 여자가 입술 끝에 미소를 머금고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을 보고 가자마는 다시 한 번 말을 건다. "사루비아 회 손님이시죠? 어디로 가시려고요?" 다가가자 약간 얼굴을 쳐든 여자의 선글라스에 백열등 빛이 뒤틀린다. 그리고 주름 가득한 조 그만 입술 사이로 이가 드러나 보였다. "...어머, 여기 분이시죠? 잡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음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동시에 향수 냄새가 가자마의 코를 간지럽혔다. 가자마는 별로 맡아 본 적이 없는 향이라고 생각한다. "미안해요... 난, 눈이 안 보여서. 눈이, 뭐라더라... 그, 망막증이라서, 안 보여요." "네에." 가자마는 그렇게만 대답한다. 여자가 장님이라는 것을 알았는데도 빛에 드러난 선글라스 속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직업상 손님의 얼굴은 미간보다 약간 아래쪽을 봐야 한다. 여자는 치열이 가 지런한 입을 더 활짝 열어 보인다. 틀니일지도 모른다. "손님,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가자마는 벌어진 터틀 옷깃 사이로 빛나는 금 목걸이와 가슴 위에서 달랑거리는 동물상 금 펜 던트로 시선을 번갈아 옮겼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라마라고 하는 말 종 류였던가. "정말 굉장한 눈이네요..." 여자가 또 얼굴을 살며시 움직이며 말했다. 비상구 바로 앞에 있는 유리창에 부딪치는 눈의 마 른 소리를 포착한 것이리라. 난방 때문에 발그스름해진 귀를 그쪽으로 향하려 하고 있다. 가자마 는 그 귓불에서 요시무라와 똑같은 조그만 구멍의 흔적을 발견하고 가슴속으로 은밀히 웃는다. 메스 끝을 집어넣은 것처럼 균열이 훨씬 더 길고 세월이 녹아 있다. "아아, 미안해요. ...프런트, 프런트에 가고 싶은데. ...나, 선 니콜라스에 전보를 쳐야 돼요." "네?" "전보... 말입니까?" "전보. 선 니콜라스에, 치고 싶어..." 가자마는 그런 지명이나 이름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아니 그보다 먼저 이렇게 생각했다. 이 할머니는 분명 정상이 아니다. 치매가 시작되었다고. "그럼 일단 프런트로 가시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손을." 가자마는 공중에 떠 있는 여자의 야윈 오른손을 잡는다. 그 순간 오른쪽 반신에 소름이 좍 돋 는 것을 느꼈다. 그런 식으로 여자의 손을 잡기는 댄스 파티 요원으로 춤출 때를 제외하면 처음 이다. 마른 피부 감촉, 그러나 여자는 벽 쪽으로 몸을 뺀다. "그건 무서워... 벼랑 끝에서 발을 내미는... 기분이야. 내가 당신 팔을 잡을 테니까, 천천히 걸어 요. 정말 미안해요." 복도 저쪽에서 예순 살이 좀 넘었을 여자가 슬리퍼를 끌 듯이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기, 저기 있다." "어머, 요시코네." 여자가 가자마 뒤에서 조그맣게 소리질렀다. "언니, 언니. 아유 정말, 어디 있는가 했더니." 요시코란 여자는 숨을 헐떡이며 가자마와 늙은 여자가 있는 곳까지 달려온다. 그리고 허리를 꺾고 숨을 가다듬는다. "죄송해요. 언니가 앞이 안 보여서. 폐를 끼쳤습니다." "나, 선 니콜라스에 전보 쳐야 돼." 여자가 그렇게 말하자 요시코는 가자마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가볍게 눈짓한다. 가자마도 눈을 살짝 치켜 뜨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미쓰코 언니, 프런트에 가서 전보 칠 거야?" "그래, 블래거트한테, 송금이 늦는다고, 연락 안 하면 안 돼." 가자마는 미쓰코라는 여자의 선글라스가 반사하는 액체같은 빛을 본다. 가늘게 떨리고 있어. 잘 닦인 오닉스에 반사하는 빛이라는 생각도 한다. 늙은 얼굴에 흑요석이라, 의외로 구색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자마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부끄러워 선글라스 낀 얼굴에서 눈길을 돌린 다. "그럼 일단, 프런트로 가지 뭐." 요시코가 그렇게 말하며 가자마를 올려다보고, 한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안내 하지요." 가자마는 다시 팔굽을 펴 여자가 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 여자의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는 생각 했던 것보다 힘이 잔뜩 들어가 있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미지의 장소를 걷는 두려움을 절감케 한다. 조금 내려가야 됩니다, 오른쪽으로 돕니다. 한 계단 올라가야 돼요...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천천히 걸으면서 미쓰코가 들릴락말락 웃음 소리를 낸다. "언니 왜 그래?" "이분..." 말을 꺼내면서 가지런한 치열이 드러난 입가를 가리려, 야위고 굽은 손을 갖다댄다. "있지... 이분, 온천 달걀 냄새가 나... 참 좋다." "어머, 언니는. 실례잖아. 언니도 참." 요시코가 여자의 팔을 가볍게 톡톡 때리고, 그 손을 미쓰코가 그런 것처럼 입가에 대고 웃었다. "아니, 괜찮습니다." 가자마는 얼굴에서 불리 뿜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마 가장자리에 흠뻑 배이는 식은땀 을 느꼈다. 원천 달걀이라. 눈이 3미터나 쌓이는 깊은 산속 호텔에서, 매일 아침 원천에서 온천 달걀을 만들어 두 개씩 먹고 있는 낙향한 남자. 광고 대리점에 근무하던 시절에는 디오르의 오 소바쥬라는 향수를 뿌렸는데, 고향에 내려와서는 맨 처음 일주일만 뿌리다 그만두었다. "그게 아니고. 아주 좋아. 좋은 냄새야... 유황 냄새지. ...우리 남편은 벌써 15년 전에 폐암으로 죽었는데... 굉장한 애연가였어요 불을 붙일 때는, 항상 성냥. 젊은 시절, 성냥을 그어서..." 미쓰코는 또 굽은 손가락을 코 밑으로 가져가며 살며시 웃는다. "지구, 저 깊은 곳의 냄새가 나지 않느냐고, 그랬어요. ...당신, 이름은?" "가자마라고 합니다." "가자마 씨...라고요." 프런트에서 미쓰코는 헤토한테 전보를 치고 싶다고 말했다. 가자마는 그저 가만히 입을 반쯤 벌리고 있는 헤토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데, 요시코가 또 말없이 손을 좌우로 흔들고, 그리고 절 이라도 하듯 손을 올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이름은...네스토르...네스토르 블래가트라고 해요. 호텔...어머, 잊어버렸네. 호텔... 호텔... 여기가 어디였더라?" "미노야 호텔입니다." "아아, 그렇지. 미노야 호텔이지. 미노야 호텔... 코르도바 거리의, 640에 있어요. ...부에노스아이 레스, 아르헨티나. 그리고 말이죠 어쩌나, 부끄럽네, 송금이 늦어져서 미안하다고...그렇게 쳐주세 요." 미쓰코는 뼈가 불거진 손을 꼭 쥐고, 프런트 안의 헤토한테 말한다. 때로 마주잡은 손의 집게 손가락을 들어, 머리 속으로 쓰고 있는 스펠을 더듬어 확인하듯 움직였다. 도쿠가 종업원의 의자에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다. 풀린 나비 넥타이가 가슴께에 매달려 있 다. 입가를 축 내리고, 이 사이로 입 모양 그대로 담배 연기를 쥐어 짜 내듯 토해 내면서 혼자 투 덜거린다. "골치 아퍼." "사루비아 회인지 뭔지, 골치 아퍼서 원, 연회실에서, 바르, 그 뭐라더라, 바르도... 난 잘 모르겠 는데, 포도주, 가져 오라는 거야." "바르도리노 말이야?" "아아, 그거 그거. 다다밋방에서 포도주를 마시다니, 안 그래. 그러더니 이번에는 또 화이트 보 드를 가져 오라는 거야. 어디에다 쓸 거냐고 했더니, 회장이 생각한 어맬거네이션을 그릴 거라나, 나 참. 뭐 퀵 오픈 리버스 프로그레시브 샤세라나. 그게 다 뭔지." 다케무라한테 댄스 강의를 받을 때 스텝을 그림으로 설명한 어맬거네이션을 본 적이 있다. 바 보 짓 같아 아파트로 돌아가는 도중 그 종이를 찢어서 가드레일 아래 비탈로 던져 버렸다. 엄청 난 수의 발자국을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런 생각만 해도 온몸에 악취가 풀풀 풍기는 앙금이 고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 할머니 없었어? 선글라스 끼고, 약간 노망이 든 것 같던데." "선글라스? 그런 할망구, 있었던가, 글쎄, 시끌법석한데다 난 주문받느라고 정신이 없었으니까." 가자마는 쥐색 바지를 벗고 팬티 차림으로 사물함에서 턱시도 바지를 꺼낸다. 고이즈미 시에 있는 신사복점 아오키에서 산 턱시도다. "아까 전보친다고 하면서, 프런트에서 말이야. 아르헨티나에." "아르헨티나?" 도쿠가 눈을 번쩍 뜬다.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들고 있던 담배의 재가 떨어져, 당황하여 턱시도 무릎 위를 손가락으로 턴다. "으응, 물론 노망이 들었지만. 좀 놀랐어." "탱고 추자고, 흥분은 안 하던가?" 도쿠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어금니를 씌운 은색 크라운이 빛났다. 가자마는 와이셔츠를 입고 카우스 보턴을 채우고 나서 하얀색 호크식 나비 넥타이를 맸다. 선반에서 헤어 젤 튜브를 꺼내 왼손 바닥에 비틀어 짜고, 그것을 양손으로 비벼 바른다. 등에다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한 불쾌감 을 느끼면서 머리칼을 쓰다듬어 뒤로 바짝 넘겼다. 형광등 빛에 반사된 머리가 바퀴벌레의 등 같 다고 생각한다. "하루 씨는 벌써 집에 갔어?" "아니, 오늘 당직이잖아. 온천 점검하고 있지 않을까? 다나카도 이제 곧 올 모양이고." 다나카는 다케노쿠라에 있는 주유소의 차남이다. 6년전 우익수로 고시엔 구장에 출전한 적이 있다. 가자마는 도쿄에서 첫 게임을 텔레비전을 통해 분명히 봤을 텐데 다나카의 플레이에 대해 서는 전혀 기억이 없었다. 스물세살에, 항상 무언가를 몸 속에 접어두고 있는 듯한 남자다. 하지 만 미노야에서 오직 한 사람 라틴을, 그것도 폭발적으로 출 수 있는 사람이다. 가자마는 안쪽에 있는 개수대에 손에 묻은 젤을 씻어내린다. 유리창에 타원형으로 어둠이 어려 있다. 새 눈이 창틀 에 모여 유리를 에워싸듯 쌓여가고 있었다. 유리를 손으로 비비자, 허여스름한 밤이 젖어 보였다. 실외등 불빛 속으로 눈이 펄펄 내리고, 그 빛이 나무와 여관의 간판과 현관 앞 바위에 하염없이 쌓이는 눈에 특이한 양감을 부여하고 있다. 허옇게 짓무른 상처, 라고 가자마는 생각한다. "그럼 난 슬슬 가 봐야겠어." 도쿠가 의자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컵에 담긴 차를 입에 머금고 헹구다가 그대로 삼켜 버린다. 가자마는 내선으로 주방에 전화를 걸어 포도주와 샴페인 등을 확인하고 종업원실의 전등을 끈다. 유리창 너머 희뿌연 어둠이 눈의 격렬함을 알리고, 미노야는 점점 더 묻혀 간다. 겨울 내내 켜져 있는 석유 팬 히터의 불꽃이 만드는 책상과 선반의 그림자가 천장에서 검게 떨고 있다. 그림자는 이따금 경련을 일으키며 엷어졌다가 다시 짙어져, 유리창이 바깥의 눈을 배경으로 하얗게 떠올랐 다. 연회실 가까이에 있는 화장실 양변기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운다. 멀고 희미하게 조니 마티스가 노래하는 문 리버가 들려오고, 가자마는 천천히 연기를 토했다. 다음은 갓 파더 왈츠다. 그 다음 은 메이 이치 데이, 골든 탱고, 엘르 포리트, 어 원더풀 가이, 오 댓 필링, 마이 카인드 오브 걸... 귀에 목이 박히도록 들었다. 벽에 부착되어 있는 간이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클로렛 검은 세 알 한꺼번에 입 안에 던져 넣었다. 그때 화장실 문이 열렸는지 홀에 흐르는 음악 소리에 섞여 초로의 남자 목소리도 들려왔다. "야, 이거 좀더 분발해야겠습니다." "러닝 피니시에서 아무래도 자세가 흐트러져서." "똑같이..." 가자마는 화장실에서 나갈 타이밍을 놓치고 마냥 변기 뚜껑에 걸터 앉아 있다. 소변을 보고 있 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지는가 싶더니 뭐라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말 하기는 좀 뭣하지만, 쓰지이케 씨, 어떻게 하려고 언니를 데리고 왔는지. 자네, 그거 알고 있지?" "사와타리 씨 말하는 건가?" "난 사루비아 회도, 사람을 좀 선별해야 한다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그 사람, 혼마키 항구 에서 전속 콜걸이었다고 하던데. 부회장의 언니가 아마 같은 학교 출신이라던가, 그래서 잘 아는 모양이던데." "외국인만 상대하는 방석집이지, 아마." "그 눈 말이야, 매독에 걸려서 그렇게 됐다잖아, 어? 노망이 든 것도 그 탓 아니겠어? 자네, 그 런 여자하고 누가 춤을 추겠는가." "남편이야 알고 있었겠지." "글쎄, 그건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커먼 안경을 끼고, 께름칙하잖나." "뭐, 어떤가, 이시카와초에 사는 이에나가 씨의 부인 몸이라도 안마하게 하면." "이에나가? 그 사람, 자네, 얼마나 미인인데..." 찢어지는 금속성 소리 같았는데, 실은 웃고 있는 두 사람의 기관에서 쥐어짜 내진 소리였다. 개 가 속에 있는 것을 토해 내려고 하는 신음 같은 소리다. 두 사람이 나가자 가자마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문 너머 복도에서 요시무라가 누구한테인가 대답하는 얼빠진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 엔 이걸 한다. 그 다음은 이거... 스케줄을 생각하면 항상 우울해진다. 마치 기시감을 섞어 짠, 그 주름으로 이어진 표면을 기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될거란 기분이 든다. 그래봐야 별다른 변화도 없 을 눈 속의 생활이지만. 다케무라가 환영 인사를 하는 동안 가자마는 은쟁반에 놓인 잔에 샴페인을 따랐다. 엷은 금색 으로 빛나는 잔들에 때로 원근감이 상실된다. 다나카가 조 금 늦게 연회실 홀로 들어와 옆에서 잔이 채워지기를 기다렸다. "안경..." 눈 때문에 뿌예진 안경 알을 가르키자, 다나카는 재빨리 뒤로 돌아 손수건으로 닦고서 다시 가 자마 쪽을 본다. "그럼 부탁해." 홀 안은 포마드와 화장품 냄새로 숨이 콱콱 막힐 지경이었다. 그리고 드레스에 배어 있는 나프 탈린 냄새. 천장에 드문드문 매달려 있는 악취미적인 샹들리에 아래서, 하양, 핑크, 노랑, 보라, 황 록, 빨강, 파랑 드레스가 부풀어 빛나고 있다. 드레스 끝자락에 붙어 있는 깃털이 이 모임을 댄스 파티라기보다는 가장무도회 같은 미치광이 짓으로 보이게 한다. 다케무라는 에나멜 댄스 슈즈 뒷 굽을 들먹들먹하면서 득의양양하게 연설하고 있다. 대충 그 정도로 해 두시지. 가자마는 가슴속으 로 중얼거린다. 옆 자리에 바른 자세로 서 있는 여주인은 결국 핑크색 드레스를 선택한 모양이다. 뒤로 바싹 잡아당긴 머리칼에 금실 가루를 뿌리고 소름이 끼칠 만큼 짙은 분홍색 아이섀도를 발 랐다. 거의 라틴을 출 때 같은 화장이다. "그럼, 사루비아 댄스회 회장님이신 후카노 씨." 다케무라가 간신히 파티를 사루비아 회에 인계하였다. 사와키와 도쿠한테 나머지 샴페인을 돌 리라고 지시하였다. 두 사람은 똑바른 자세로 쟁반을 들고 홀을 미끄러지듯 걷는다. 벽 앞에 준비 된 테이블에서 오르되브르를 체크하고, 곡의 순서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면 다음은 댄스뿐이다. " 1986년에 발족하여 이듬해 요코하마 시 중구 체육협회에 가입, 이후 11년 동안 활동을 지속 해 왔습니다. 작년 말에는 연맹배보다 수준이 높은 랭킹전에서, 그랜드 시니어 부문에 입상하여 영광스럽게 한 해의 마감을 장식..." 가자마는 다케무라의 지시를 받고 샴페인 잔이 모두에게 돌아갔는지 확인한다. 신속하게 시선 을 홀에 모여 있는 사람들 모드의 손으로 날렸다. 그러자 선글라스를 낀 미쓰코가 사람들 뒤에 숨어 있는 것이 보였다. 짙은 파란색에 왼쪽 어깨서부터 끝자락으로 비스듬하게 은색이 들어가 있는 드레스를 입고 은색 댄스 슈즈를 신고 있다. 멀어서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가느다란 목줄기 와 가슴의 음영으로 한층 더 야위어 보였다. "무엇보다 댄스는 젊음을 유지하는 최적의 스포츠이고, 제가 신세를 지고 있는 박사께서도, 운 동 생리학적으로..." 따분한 인사말에 눈의 초점이 흐려지자, 가자마의 머리 속으로 어째서인가 신바시 역의 밤 풍 경이 되살아났다. 거기서 긴자 방면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보인다. 곧잘 걷던 길이다. 길이 막혀 늘어서 있는 택시들의 빨간 꼬리등의 행렬과 쇼윈도의 조명으로 휘황한 길을 걸어 오른쪽 골목으 로 들어간다. 긴자치고는 너무 어두운 골목이다. 닥지닥지 붙은 술집들의 낡은 간판을 보고 있는 자신이 있다. 거기 있는 내가, 고향으로 돌아와 눈 속에 잠긴 여관의 종업원으로 댄스 홀에 서 있 는 장면을 상상하고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어느 틈엔가 건배 소리가 터지고, 가자마 는 얼굴을 든다. 각기 높낮이가 다른 샴페인 잔에 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바로 오디오 세트 쪽 으로 향했다. 박수 소리가 이는 홀에 조용히 음악이 흐르는 시작한다. 센트루이스 블루스. 늘 첫 곡으로 트는 곡이다. 혹 샴페인을 흘리지는 않았는지 드레스 자락을 들치며 확인하는 여자들도 있지만 대부분 천천히 몸을 좌우로 비틀고 폈다 오무렸다 하면서 운동을 시작한다. 벌써 블루스 를 추기 시작한 커플도 세 쌍이나 있다. 자세는 아주 좋은데 어맬거네이션의 발자국을 한 발 한 발 밟고 있는 듯한 스텝이었다. "가자마. 바로 출거야? 할망구들, 프로포즈 가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도쿠가 가자마 옆에 서서 웃는 얼굴로 말한다. 얼굴이 홀의 손님 쪽을 향하고 있어서, 마치 복 화술을 하는 인형 같다. " 제일 마지막에 할래. 추고 싶은 마음도 없고." "나도 마찬가지야." "저, 여기 좀." 한 손님이 부르자 도쿠가 가볍게 머리를 숙이고 그쪽으로 간다. 예순이 넘은 남자가 홀 바닥을 댄스 슈즈 끝으로 두드리며 뭐라 잔소리를 해대고 있다. 도쿠는 무릎을 꿇어 손가락으로 확인하 고, 가자마한테 테이프, 라고 소리 안 나게 입만 우물거리며 손으로 테이프를 끊는 시늉을 한다. 바닥 마루에서 까끌까끌한 것이 튀어올라와 걸리는 모양이다. 테이프를 가지고 가서 보니, 석기 시대의 화살촉처럼 조그맣게 나무 끝이 비어져 나와 있었다. 가자마가 제자리로 돌아가자 다케무 라가 도쿠와는 전혀 다른 웃음을 띠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이거 이러면 안 되지, 안 돼." 거무티티한 입술로 인단 냄새 나는 숨이 뿜어 나왔다. "가자마 군. 아나, 소위 보상 문제가 될 수도 있다구. 다들 나이 많으신 분들이니까, 혹시 넘어 져서 뼈라도 부러지면 큰일이라구. 식물인간이라도 되면 그야말로 끝장이고." 다케무라는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눈을 치켜뜨고 가자마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리고 홀로 돌아가자 핑크색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자기 부인과 춤을 추기 시작한다. 홀 안의 공기가 사람들 의 움직임으로 뒤섞여 포마드와 화장품 냄새가 점점 심해진다. 먼지 냄새까지 섞여,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 같으면 발작적으로 재채기나 기침을 할 것 같다. 여자들이 턴을 할 때마다 깃털 달린 드레스 자락이 뒤늦게 몸에 휘감긴다. 남자와 여자가 시선도 마주하지 않고 묵묵히 춤추는 모습 은 언제 보아도 우스꽝스럽다. 뒤로 몸을 제친 여자들의 목에 불거진 근육과, 포마드로 밀어부친 남자들의 후두부. 바닥을 스치는 에나멜 구두와 금은색 힐이 격렬하게 빛났다가 돌아간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벽 앞 의자에 앉아 있는 예순대여섯 여자한테 사와키가 손을 내밀고 있다. 이어 도쿠도 보라색과 노란색이 섞인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한테 춤을 신청한다. 가자마는 순서를 입력시켜 놓은 곡의 숫자를 확인하고서, 천천히 벽을 따라 홀 안을 돈다. 곡이 왈츠로 변하자 거 의 모두가 춤을 추기 시작하여 홀 전체가 꿈틀거리는 듯 보였다. 다양한 색상의 물감을 물에 떨 어뜨려 휘휘 젓는 듯한 느낌이다. 걷고 있자니 가끔씩 여자들의 드레스 자락이 발에 닿아, 그때마 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모퉁이에서 남자 셋이 포도주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다. "다른 음료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가려는데 귀갑 테 안경을 쓴 남자가 말을 걸었다. "아아, 자네. 여기 온천은 적탕이 아니지?" "아니오, 적탕입니다만. 나트륨, 칼슘, 유산염천에 유황천이 다소 섞여 있습니다." "옛날에 말이지, 이 근처에 온 적이 있는데 온천물에 수건이 새빨개졌거든. 아아, 참 오랜만이 다 싶었는데 벌써 30년 전이야. 난 말이지, 그 건설부에..." 볼에서 목으로 늘어진 남자의 살 윤곽 너머로 혼자 앉아 있는 미쓰코의 모습이 보였다. "459호선의 그 말이야. 기타에서 이쪽으로, 산쪽 비탈을 콘크리트로 덮는 그 계획 있잖나..." 미쓰코는 파랑과 은색이 섞인 드레스 자락을 바닥에 부채 모양으로 펼쳐 놓고, 의자 위에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 선글라스를 약간 아래로 내리고, 주름진 조그만 입술에 미소를 띠고 있다. 주위의 기척을 살피면서 남자들의 프로포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이렇게 멋진 홀이 생기다니, 거 참 광장하군. 자네, 자네는 라틴 같은 것도 찰 추겠지?" 귀갑 테 안경을 낀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가자마의 팔을 옆에서 툭툭 치며 웃는다. 금을 두른 앞니에 담뱃진이 검게 절어 붙어 있다. 두툼한 손을 얼굴 앞에서 휘두르더니 다시 둘이서 얘기하 기 시작했다. 가자마는 그대로 미쓰코한테로 향한다. 옷깃이 넓게 파인 가슴선 위로 가슴뼈의 굴 곡이 알알이 드러나 있고 쇄골 위도 움푹 패여 있다. 알이 굵은 라인스톤 목걸이. 염색을 했으리 라. 검은 머리칼에도 라인스톤 장식이 번쩍이고 있다. "어떠십니까?" 그렇게 말을 걸자 선글라스가 올라가고 가늘고 옅은 눈썹이 열린다. 자기가 직접 화장을 했는 지 립스틱이 입술 윤곽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어머, 젊은 분이로군요. 하지만 난 괜찮아요. 난 괜찮아." "모처럼 오셨는데." "난 이렇게 그냥 앉아 있는 게 좋아요. 저 드레스 소리하고, 구두 소리... 분 냄새하고, 그리고... 나프탈린 냄새가 좋아요. 이상하죠? 드레스에 배어 있는 나프탈린 냄새를 좋아하다니..." 가자마는 허리를 굽히고 있기가 힘들어 미쓰코가 앉은 의자 옆에 무릎을 꿇는다. "더구나...댄스는, 벌써 50년 전 얘기... 오늘은 요코하마 천주회의... 호세 코리엘 신부의 말씀에... 여동생이 함께라서, 난 부끄러워서. 난, 혼자서 말씀을 듣는 편이 더 마음이 편안해요..." 선글라스 안으로 천장의 스포트 라이트 불빛이 들어가 가늘게 뜨인 미쓰코의 눈이 들여다보였 다. 약간 열려 있는 왼쪽 눈이 젖어 있다 싶은데, 그 눈가에 뱀꼬리 같은 깊은 주름이 모여 있고, 목 속에서 웃는 조그만 소리가 들린다. 야윈 목덜미가 경련하고, 가자마는 피부가 벗겨진 해부용 시신을 떠올린다. "당신한테서... 온천 달걀 냄새가 나네. 여기 호텔 분이죠?" "그렇습니다." 가자마는 미쓰코의 왼손 가운데 손가락에 끼여 있는 반지에 시선을 떨구었다. 복도에서 봤을 때 오른손에도 반지를 끼고 있었는데, 큼지막한 사파이어가 자잘한 사변형 빛을 뿌리며 주름진 손에 끼여 있다. 손등에는 엷은 먹물을 종이에 떨어뜨린 것 같은 반점이 몇 개나 있었지만, 매니 큐어를 칠하지 않은 손톱만큼은 아름다웠다. "우리 남편은... 폐암으로 죽었는데, 담배를 피울 때..." 가자마는 홀에 있는 사람들로 시선을 옮겼다가 그 중에서도 제일 신나게 춤을 추고 있는 다케 무라 부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다시 미쓰코의 손을 보았다. "지구 깊은 곳의 냄새가 난다고 그랬어요..." "유황 말이군요?" "그래요, 유황. 아아... 댁의 이름은, 뭐라고 하나요?" "가자마라고 합니다." 전혀 기억에 없다는 표정이었다. 가자마는 자기 엄마보다 불과 대여섯 살 위인데,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물론 가업인 두부 가게 외에 밭일도 하였던 가자마의 할머니는 예순에 이미 노망이 들어 죽고 말았지만. 눈 내리는 날 맛있다, 맛있다며 눈을 열심히 집어먹던 할머니의 모습이 무척이나 무서웠던 것을 가자마는 기억하고 있다. "가자마 씨...라고요... 나, 그...온천 달걀이 먹고 싶어지네." "내일 아침 식사 때 제가 만든 온천 달걀을 가지고 가죠. 아니면 지금 드시겠습니까?" "댁이 만들어요? 그래요. ...하지만 난, 지금 먹고 싶은데. 소금을 뿌려서, 한 개씩 천천히 먹어 요." 한 개씩?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가자마는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 다. 홀로 돌아가자, 라쿰파르시타가 흐르고 있고, 각 커플의 움직임이 한층 격렬해져 있었다. 왜건 을 밀면서 홀 옆을 지나갔다. 미쓰코는 여전히 의자에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멀리서 보니, 미친 인형 작가가 제작한 늙은 서양 인형처럼 보였다. 두꺼운 스타킹을 신은 발목을 좌우로 교차시키 고, 마주잡은 손가락을 탱고 리듬에 맞춰 살짝살짝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많이 기다리셨죠?" 미쓰코가 고개를 든다. "온천 달걀을 가지고 왔습니다." "...온천 달걀? 무슨 소리죠?" "아까 드시고 싶다고..." 립스틱을 바른 미쓰코의 입술 끝이 경련하듯 약간 위로 올라가며 순간 침묵하였다가, 다시 선 글라스 표면에 비친 스포트 라이트 빛을 비틀며 웃는다. "내가 그랬단 말이죠? 그랬을지도 모르겠군요. ...있죠, 나이를 먹으면, 정말 너무하지, 전부 잊 어버린다니까. ...머리 속에 정말 아무것도 없어서, 사람한테 속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요. 동생은 그런 나를 무에르테 데르 앤젤이라고 해요. 어어? 여동생이 아닌지도 모르지. 남자일지도 몰라. ...나 좀 봐, 이렇다니까. 남자일거예요. ...한적한 데서 살해당하는 천사 이야기예요. 이름모 를 어딘가에서... 댁한테 이런 얘기 해봐야 따분하겠죠. 미안하군요. ...아 참 그렇지, 온천 달걀? 좋아해요. 하코네에 있는 온천에 가면, 꼭 먹죠. 사실은 몸에 나쁘지만." 가자마는 미노야 온천 달걀의 이름이 '장수 천년 달걀'이라고 말하려다 잠자코 있었다. "드시기 쉽게, 슬라이스...얇게 자를까요?" "괜찮아요, 괜찮아. 그런데 드레스에 묻으면 안되니까...냅킨을 좀...이 드레스, 나한테는 너무 화 려한 것 같아. 빨강이랄까, 카멜리아는 어렸을 때부터 어울리지 않았어." "가자마는 미쓰코가 입고 있는 파랑과 은색이 섞인 드레스의 가슴선을 본다. 야윈 가슴뼈에 메 마르고 주름진 하얀 피부가 얹혀 있는 느낌이다. 그저 유방의 잔재라고나 해야 할 가슴 살이 있 고, 그것이 유난히 빈곤하게 보여 슬며시 외면했다. 이여자의 시간은 착란 상태다. 요코하마 혼마 키 부두에 하선하는 남자들을 상대하던 창부... 화장실에서 들은 소문 비슷한 이야기가 정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지금 있는 곳도 제대로 모르지 않을까 하고 생각 하면서 가자마는 달걀 껍질을 벗긴다. 그러나 미쓰코한테 한적한 변두리에서 살해당하는 천사라 고 한 것은, 틀림없이 남자다. "자." 가자마는 미쓰코의 손을 잡아 물수건을 건네고 무릎 위에는 냅킨을 깔았다. 손을 잡는 순간, 엉 덩이를 들려한 미쓰코의 반응에 가자마는 목구멍에 무언가가 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할 머니, 춤추고 싶은거 아닙니까. 춤추세요. 장님이라고 춤을 출 수 없는 것은 아니잖아요? 춤춰요, 춤춰, 춤추라고요, 춤. "껍질을 다 벗겼습니다. 온천 달걀이예요." 가자마가 그렇게 말하자, 미쓰코는 오른손 손가락을 모아 위쪽으로 내민다. 목 졸린 닭의 다리 같다. "정말 미안하지만, 달걀... 나, 당뇨병인 데다, 망막증까지 겹쳐서, 보이지가 않아요." 미쓰코는 달걀을 신중하게 받아들고는 또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약간 비스듬하게 숙였다. 그 리고 달걀에 손 끝을 대어 소금이 뿌려져 있는지 확인하고는 한 입 베었다. 코로 숨을 흘리며 웃 는다. 그 웃음이 왠지 건전한 사람의 웃음 같기도 하고, 나이 어린 백치가 두 주먹만큼이나 되는 김밥을 한 입에 넣고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맛있어요. 소금을, 좀더 뿌려 줘요..." 가자마는 베어 먹고 난 자리의 노른자위에다 소금을 뿌린다. 참으로 기묘한 한 쌍이라고 생각 한다. 댄스 홀에서 장님 여자가 들고 있는 삶은 달걀에 소금을 뿌리고 있는 호텔 종업원. 도쿄에 있는 친구들은 아무도 상상조차 못 할 것이다. "어멋!" "미쓰코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가 싶더니, 손에서 달걀이 미끄러져 떨어진다. 가자마도 반사적 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먹던 달걀은 무릎 위 냅킨에 부딪쳐 노른자위 부수러기를 사방으로 뿌 리며 바닥으로 굴렀다. 미쓰코의 귀가 휙 뒤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가자마의 시야 끝에 보이고, 그 때 그 달걀 위를 춤추고 있던 금색 힐이 난폭하게 짓밟았다. 높은 비명 소리가 터진다. "뭐야, 이거! 이거 뭐냐구!" 뭉개진 달걀이 힐에 달라붙고 깃털 장식에도 묻어 드레스를 더럽힌다. 춤의 흐름이 거기서만 정지되고, 그 주위에서도 무슨 일인가 싶어 움직임이 느릿해진다. "아이 참! 뭐야, 이게! 왜 이런 데, 뭐야, 도데체!" 여자가 드레스 자락을 무릎 언저리까지 끌어올리고, 힐을 벗는다. 스타킹 속으로 비쳐 보이는 거뭇거뭇한 발꿈치와 검정 페디큐어가 추악해서, 그것을 보는 순간 가자마는 자기도 모르게 여자 가 아니라 도리어 미쓰코한테 말했다. "괜찮습니다." 밤 사이에 눈이 한꺼번에 80센티미터나 내려, 반에쓰 자동차 도로는 제설차가 눈을 다 치울 때 까지 교통이 통제된 모양이다. 가자마도 장화에 동철을 붙이고 원천으로 올라가야 했다. 아침 식 사용 온천 달걀이 많이 필요해 상자에 넣은 채 눈 내리는 비탈을 밀면서 올라갔다. 아직 밤이 그 여운을 남기고 있지만, 밝아 오는 오쿠라 산의 능선이 보인다. 원천에 비스듬히 씌운 지붕 아래도 완전히 눈에 쌓여 있고, 녹아 뚫려 있는 구멍에서는 짙은 김이 뿜어 나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유산염 때문에 그 구멍의 눈은 빨갛게 물들어 있다. 가자마는 젊은 여자의 질을 연상하고, 그 실 없음에 혼자 웃었다. 선글라스를 낀 그 할머니는 오늘 과연 연회실에 나타날까, 하고 가자마는 생 각한다. 도쿠는 올 거라고 했지만, 요시무라와 헤토, 사와키, 다나카는 한결같이 오지 않을 것이라 고 했다. 가자마는 오는 쪽에 3천엔을 걸었다. "참 내, 모두한테 그렇게 심하게 당했는데 올 리가 있겠어. 있잖아, 그 여동생이던가, 처음에는 자기 여동생도 누군지 못 알아봤다구. 난, 할머니가 그렇게 당하고, 입을 헤 벌리고 멍하고 있는 거, 처음 봤어. 왠지 가엾기까지 하더라. 한마디도 하지 않고 말이야. 하지만 늙으면 어쩔 수가 없 나 봐. 알고 있었어? 나, 내 입으로 이런 말 하는 거 싫지만, 누군가 매춘부라고 하는 소리, 들리 던데. 암만 그래도 너무하잖아. 매춘부라니. 대체 무슨 소린지. 너무 하다 싶더라구. 이런 말하기 는 좀 뭣하지만, 그사람, 눈이 안 보이니까, 청각은 좋을 거 아니야. 잘은 모르겠지만 말이지. 틀 림없이 들었을 거야." 요시무라의 목소리를 생각하면, 파티에서 남은 포도주를 벌컥거리며 마신 것까지 떠올라 위가 메슥거린다. 다케무라가 달려와 파랗게 질린 얼굴을 부들부들 떨면서 연신 미안하다, 죄송하다고 사과하던 목소리도 가자마의 귀에 남아 있어, 어제 저녁 포마드와 나프탈린과 화장품 냄새로 그 득했던 홀의 공기까지 되살아난다. 가자마는 쌓여 있는 부드러운 눈을 손으로 떠서 입에 넣었다. 콧속을 찌르는 짜릿함과 함께, 몇 천 미터 상공의 공기 냄새가 느껴졌다. 눈발이 뜸해진 허공으로 호텔 아래 도로를 달리는 제설차의 체인 소리가 들려온다. 뻥 뚫린 구멍 속에서 기세등등하게 뜨 거운 김이 피어 오르고, 가자마는 한껏 입김을 불었다. 부글거리는 거품이 공중제비를 한다. 눈에 파묻혀 있는 바구니를 찾아 그 안에다 푹 집어넣었다. 미쓰코의 주름진 얼굴과 손과 선글라스가 뇌리를 스치고, 그 너머는 내리는 눈으로 뿌연 홀의 유리창이어야 할텐데, 이상하게도 거기에 보이는 풍경은 밤부두의 불빛이었다. 게다가 어느 나라 인지 외국의 선박도 보인다. 포도주나 위스키 광고 포스터에 흔히 등장하는 도구밖에 생각지 못 하는 자신에, 한숨이 나왔다. 가자마는 이제 이고장을 떠날 수 없을 만큼 머리가 둔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딱히 안 될 건 없지만. 요코하마에서 창부 노릇을 하던 할머니란 말이지, 라 고 혼자말을 중얼거리면서 가자마는 달걀을 바구니 안에 살며시 집어넣는다. 금이 가지 않도록 원천의 뜨거운 김 속에 잠시 매달아 두어야 한다. 그 다음은 뜨거운 온천물에 담가 두기만 하면 된다. 미쓰코한테 자식이 있는지 어쩐지는 모른다. 사루비아회의 할망구들 같으면, 중절 수술을 하도 해서 자궁이 없어졌다고 숙덕거릴 것이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앉았다. 여남은 명의 남자들 이 여관 앞, 을 천천히 걷고 있다. 눈사태를 막기 위하여 미리미리 쌓인 눈을 제거하러 가는 마 을의 소방대원과 건설 관계자들이리라. 앞에서 세 번째 남자가 피어 오르는 담배 연기를 보았는 지, 쓰고 있는 모자를 한 손으로 밀어올리고 다른 한 손을 높이 들었다. 뒤따라 목소리가 들린다. 누군지는 모르겠다. 가자마는 눈 위에서 담배를 피우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마 못 본 모 양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도 다시 한 번 눈 사이를 헤치고 목소리가 들려, 그제서야 가자마 는 팔을 슬쩍 들어 보였다. "내 몸에서 온천 달걀 냄새가...난단 말이지." 가자마는 담배를 눈에 내던지고 아침 식사용으로 쓸 개수만큼 달걀을 바구니에서 건져 내었다. 여관으로 돌아가자 어젯밤 당직이었던 다나카가 그답지 않게 일찍 일어나, 가자마의 얼굴을 보 자마자 파랗게 질린 얼굴로 뛰어온다. 프런트 앞에도 다케무라와 하루씨가 있고, 그리고 요시코 씨의 모습도 보였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할머니가 죽은 건가? "가자마 씨, 큰일났어. 어제..." 다나카가 그렇게 말을 꺼냈다가 프런트를 돌아보고 요시코한테 이름을 확인한다. "그렇지, 사와타리 씨. 그, 달걀...할머니가, 없어져 버렸어." 가자마는 프런트에 있는 다케무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고개를 숙인 채 미간을 찌푸리고 집 게 손가락을 입에 대고 있다. 가자마의 얼굴을 보자 요시코가 창백한 얼굴로 달려왔다. 화장을 지 운 얼굴이 미쓰코와 비슷한 나이로 보인다. "가자마, 씨라고 했죠? 큰일났어요, 큰일. 언니가 없어졌어요. 일어나 보니까. 아, 어쩌면 좋아. 어떻게 해." 유카다(무명 홑옷으로 목욕 후 실내복으로 입는다.-옮긴이) 차림으로, 가슴을 연신 쓸어내리며 핏기 가신 입술을 가늘게 떨고 있다. "나, 아무래도 데리고 오지 않는 건데 그랬어요." 가자마는 다나카한테 밖에 나가 눈에 난 발자국을 확인하라고 말했다. 하루 씨한테는 보일러실 주변을 부탁하였다. "난 목욕탕 쪽을 보고 올 테니까, 가자마 군, 자네는 구관 쪽을 부탁하네." 다케무라는 그렇게 말하고 슬리퍼 소리를 내며 뛰어갔다. "젊을 때 품을 굉장히 좋아했기 때문에, 난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아, 그런데 ...큰일이에요, 큰일... 어쩌죠, 가자마 씨. 물론 언니는 노망이 들기는 했지만 , 달라요. 정신을 차리고 있을 때와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는 때가 마구 뒤섞여 있어서. 무슨 말인지 알겠죠? 난, 아아, 알고 있었어 요. 그, 어제 달걀 소동이 일어났을 때 언니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고개 푹 숙이고 있었잖아요? 그런때의 얼굴, 그 얼굴은 언니가 정상일 때의 얼굴이예요. 소름끼치도록 명석할 때라구요. 남들 이 웃어도 상관없는 얼굴일 때는 대개 오락가락하지만, 50년도 더 먼 옛날로 돌아가기도 하고... 이제, 내 책임이예요!" 요시코는 그나마 미쓰코보다는 살집이 있는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다나카가 머리칼에 빛나는 눈을 얹고 돌아와 손을 저었다. 가자마는 그에게 요시코를 부탁하고 구관으로 가기 전에 연회실 로 뛰어갔다. 달걀 소동이 있었던 홀에서, 어제 앉았던 의자에 어제처럼 얌전하게 앉아 있지는 않 을까 싶은 기분이 들었다. 어머, 댁은, 온천 달걀 냄새가 나는데, 그렇죠? 홀로 뛰어 들어가자 가자마는 바로 구석의 벽쪽으로 시선을 날렸다. 그러나 아무도 없다. 다나 카나 사와키가 치웠는지 의자도 말끔히 모퉁이에 정리되어 있었다. 난방이 꺼진 텅 빈 공간은 싸 늘한 공기가 그대로 자 모양으로 굳어 버린 듯하다. 바닥이 창으로 비쳐 드는 외광을 반사하며 무수한 상처를 드러내고 있다. 가자마가 다시 로비로 들어가자, 목욕탕 쪽에서 돌아온 다케무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없어, 없어." "방에 무슨 메모 같은 것, 없었나요?" 다케무라가 허리를 굽히고, 소파에 꺼질 듯 맥없이 앉아 있는 요시코한테 묻는다. "내가 눈을 뜨고 보니 없어서,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그런 거, 더구나 언니는 보이지가 않으 니 메모 같은 걸 어떻게...그래도...혹...있을까, 아아." 방은 다케무라와 나머지 사람들한테 맡기고 가자마는 구관으로 통하는 복도로 뛰어갔다. "언니!" 그때, 짜랑짜랑한 요시코의 목소리가 로비 가득 울려 퍼졌다. 돌라보자, 반대쪽 복도의 어슴프 레한 어둠 속에 유카다에 누비옷을 걸친 조그만 모습이 있다. 미쓰코가 벽에 손을 대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언니! 언니!" 가자마도 요시코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쪽으로 향했다. 어제처럼 선글라스를 낀 미쓰코가 사 람들 소리와 슬리퍼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약간 얼굴을 들고 있다. 머리칼은 풀어 내린 듯하다. "언니! 대체 어디 갔던 거야!" 요시코가 울음 섞인 소리를 지르며 미쓰코한테 다가간다. 미쓰코의 주름진 입술이 몇 번인가 희미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서 가자마는 다케무라의 얼굴을 힐끔 쳐다 보았다. "아니, 어디라니... 목욕탕이지, 목욕탕. 온천은... 밤보다 아침이 훨씬 더 상쾌하잖아." 등까지 내려오는 머리칼은 아직 물기가 젖어 빛이 파도치고 있다. 화장도 하지 않은 야윈 얼굴 과 젖은 머리칼이 처참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데 발갛게 상기한 볼은 빛나고, 참 묘한 얼굴이라 고 가자마는 생각한다. "목욕탕에 가셨더랬습니까?" 다케무라가 어색하게 물었다. "온천에 갔었어요..." "그 남탕 말입니까...?" 다케무라가 그렇게 물으며 혀를 끌끌찬다. "언니, 혼자서 잘 찾아갔어?" "말이지, 내 머리 안에는, 지도가 많이 들어 있어... 세키우치, 사쿠라기초, 오곤초... 그리고 ...부 에노스아이레스의 산테르모하고 보가도, 다 알아... 아르헨티나야..." 가자마는 지금은 정상적인 때일까, 아니면 노망든 떄일까, 하고 미쓰코의 숱 적은 눈썹과 코와 입가를 주시하였다. 웃고 있지도 않고, 어젯밤처럼 입술선 밖으로 립스틱이 비어져 나온 입술을 비틀고 있지도 않다. "아아, 아무튼, 다행이야. 정말 천만다행이야, 언니. 이제 어디 갈 때는 꼭 말하고 가. 알겠어, 언 니?" "...혼자서, 하고 싶은 일도... 있는 법이야, 요시코. 혼자서 말이야. 성당 모임에도... 나 혼자 가 서, 호세 신부님한테 드릴 말씀이 있어. ...돈은 괜찮아. 넌 아직 너무 어리니까..." 요시코가 사람들을 돌아보며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살 젓는다.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는데 입술은 미소 짓고 있었다. "오늘은 말이지 ...블래가트가 데뷔 하는 날이니까, 예쁘게 하고 있어야지, 응. 이제, 그런 달걀 소동은 넌더리가 나..." 미쓰코는 말을 마치고 처음으로 입술을 비틀었다. 마녀를 연상시키는 얼굴과 머리칼과 선글라 스 탓에 그 표정이 어디 다른 나라 사람 같다. 가자마는 벽을 집고 있는 미쓰코의 왼손을 본다. 주름과 반점에 섞여 복잡한 정맥이 자기 엄마만큼이나 도드라져 있다. "언니... 여기는, 미, 노, 야, 호텔. 니가타와 후쿠시마 현 경계에 있는 온, 천." "알고 있어. 온, 천, 이잖아. 그 정도는 알고 있어..." 미쓰코는 요시코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치열 고른 입을 열었다. 다케무라도 다른 사람들도 프 런트 쪽으로 물러났지만, 가자마는 미쓰코의 발개진 귓불에 뚫린 구멍을 보고 있었다. "오늘은, 춤추시렵니까?" 가자마가 미쓰코한테 말을 걸자, 요시코가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크게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가자마도 그런 걸 물을 의도는 전혀 없었다. 다만, 늙은 미쓰코의 구멍 뚫린 귓불에 무슨 말이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춤? 어디서?" ...요시코가 팔을 부축하여 객실로 돌아갈 때도 미쓰코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남국인데, 눈이 아주 많이 내리고... 그런 곳을, 오래오래 버스 타고 가는 거야." 현관 앞의 눈은 다나카와 사와키한테 치우라고 하고 가자마는 연회실 바닥에 왁스 칠을 하였 다. 그나마 눈을 치우는 편이 낫다. 여관의 정원을 넓히기 위하여 같은 동네 농가에서 빌려 온 소 형 불도저로 단숨에 해치우면 그만이다. 왁스 머신이 있기는 하지만 댄스 슈즈의 힐 때문에 상처 난 표면에서 뾰족뾰족 튀어나온 나무 조각을 찾아내어 사포질을 하고서 닦아야 한다. 어제 미쓰 코가 앉아 있던 구석 쪽에서부터 차례차례 점검하면서, 꿇어앉아 사포질을 한다. 어제 임시로 테 이프를 붙인 곳은 목공 본드로 고정시키고 사포질을 하였다. 코너에 있는 테이블 아래, 삶은 달걀 부스러기가 떨어져 있다. 가자마는 그것을 주워 신문지 위에 놓는다. 보기좋게 힐에 찔려 짓뭉개 진 달걀의 모양과 슈즈를 벗은 쉰 살 여자의 페디큐어가 떠올라 혀를 찼다. 신경질을 부리던 그 여자는 남편과 같이 왔을까? 아니면 혼자서? 가자마는 예순도 일흔도 넘은 남자의 혀가 여자의 검은 발톱 끝을 햝는 상상을 한다. 뒤쪽에는 보라색 굵직한 혈관이 튀어나온 혀가, 여자의 엄지 발가락과 그 옆 발가락 사이를 왕복하고, 여자는 그런 남자를 내리깐 눈으로 본다. 일년에 한 번 이나 두 번쯤은 온천 댄스 패키지 투어. ...시답지않다. 대중 잡지의 광고에나 등장하는 어른들의 사교장이나 만남의 광장 같은 것이다. "가자마 군. 가자마 군." 다케무라의 목소리가 들려 돌아본다. 홀 입구의 기둥을 잡고 상반신을 기우뚱하고 입을 벌리고 있다. "오늘은, 다닥, 특히 신경 좀 많이 써요. 그리고 달걀도 좀 참아 주고. 뭐, 하긴, 오늘 그 자매는 참가하지 않을 모양이지만. 아침에도 혼을 쏙 뺏으니. 수고 수고. 아아 그리고 기요다 씨의 댄스 슈즈 말인데, 2만이라고 하니까, 잘 부탁하네. 안됐지만." 그렇게 말하고 끝나는가 싶었는데, 기우뚱하고 있던 몸을 구부리고 눈썹을 찡그리며 쥐처럼 까만 눈을 조아린다. "아아, 거기, 거기 말이야. 그 벽걸이 앞, 2미터 정도 거기, 뭐지, 이렇게 커다란 호처럼 생긴 자 국이 있는데, 찬찬히 사포질 좀 해야겠어." 다케무라는 가자마가 있는 곳까지 인단 냄새를 뿌리고 사라졌다. "알았습니다." 가자마는 바닥에다 목소리를 쏟아 놓으며 다시 사포질을 한다. 미쓰코와 요시코가 댄스에 참가 하지 않는 것은, 요시코가 거절한 까닭이리라. 애당초 사루비아 회에는 요시코만 소속돼 있을 뿐, 더구나 요시코는 노망든 언니한테 자극을 주려고 데리고 온 것에 불가하다. 그 언니가 끔찍한 추 태를 보여 파티의 흐름을 망치고 말았다. 안 그래도 나쁜 소문을 달고 다니는 미쓰코다. 하지만 파티에서 있었던 사건은 가자마가 온천 달걀을 홀에 갖고 가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가자마 씨." 이번에는 요시무라였다. "아침에 큰일 치렀다면서요? 그런데 약속한 3천 엔. 지갑이 좀 얇아지겠어요." 다케무라가 그랬던 것처럼 홀 입구에 서서, 뒷짐을 지고 웃고 있다. 금방 칠한 모양이다. 립스 틱이 유난히 짙게 빛나 꿀이라도 바른 것 같다. 콘텍트 렌즈 때문에 요시무라의 눈이 빨간 톤으 로 찍힌 팸플릿 사진을 연상시킨다. 그 위에 있는 사진 속 '오늘 밤은 당신이 히로인-110평의 호 화로운 연회실'이란 광고 문안이 가자마의 머리 속을 지나가고, 성가셔진 그가 손을 흔들어 보인 다. 사와키, 다나카, 헤토, 요시무라, 네 명 분에 1만 2천엔 더하기 검정 페디큐어 여자의 슈즈 값 2만 엔. 주방에서 포도주를 나르기 시작할 무렵, 또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 저녁나절의 어둠과 눈의 밝음이 내내 균형을 유지하듯, 언제까지고 어두워지지 않는다. 방안의 조명을 켰을 때가 밤이다. 가자마는 왜건을 복도로 밀어내면서 창 밖으로 내리는 눈을 보고 모레는 쉬는 날이라고 생각한 다. 오랜만에 두부 가게를 하는 집으로 돌아가 내 방이 있었던 광의 2층에서 하루 온종일 자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은 그런데 불과 5킬로미터를 운전하기가 귀찮아 가지 않곤 했다. 가자 마는 복도 왼쪽 모퉁이에서 나타난 사루비아 회 남자들 네 명에게 고개를 숙인다. 턱시도를 입고, 어설픈 머리칼에 포마드를 눅진하게 발라 머리 속까지 번쩍거린다. "참, 잘도 내리는군." 한 명이 가자마한테 말을 걸었다가 천천히 안경 속의 눈을 되돌린다. 달콤하고 짙은 바닐라 향 기가 나기에 뭔가 싶었더니, 남자의 손에 파이프가 쥐어져 있다. 검은 흡입구가 허옇게 얼룩져 있 고, 거기에서 연기가 띠 모양으로 가만히 피어 오르고 있다. 가끔씩 노천탕 안에서 흔들리는 정액 같다. 홀에는 이미 사루비아 회 사람들이 모여 있고, 카치토가 흐르고 있다. 차차차다. 둘째 날의 저녁 식사는 8시까지면 식당에서 언제든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홀에는 오드볼과 포도주, 맥주 등 마실 것을 준비해 둔다. 공기가 벌써 숨이 답답할 정도로 탁하다. 샹들리에와 점재하는 스포트 라 이트 빛 아래서 몇 쌍이 춤추고 있고, 가자마는 그 발치에서 빛을 반사하는 바닥을 확인하였다. 얼굴을 들자 오디오 세트 옆에 서 있는 도쿠가 입을 좌우로 좍 벌리고 옆눈으로 그를 보고 있다. 뭐야? 사람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는 홀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 미쓰코가 있었다. 파랑과 은색이 섞인 드레스를 입고, 검은 머리칼 위에는 라인스턴이 반짝이고 있다. 도쿠와 절반으로 나누면 6천 엔, 수입. 앉아 있는 미쓰코의 모습이 춤추는 인형들에 가렸다가 다시 나타난다. 검은 선글라스 아래 입가가 웃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노망든 때의 표정이다. 바로 옆에 서 있는 요시코는 주위 사람들에게 열심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 곡이 슬로 왈츠인 에 델바이스로 바뀌자 홀 중앙에 있는 무리가 춤을 추면서 퍼져 나간다. 그 움직임을 볼 때마다 가 자마는 초등학생들이 아침 조회 때 하는 앞으로 나란히를 연상한다. 갑자기 여주인이 내추럴 스 핀 턴으로 드레스 자락을 화려하게 돌렸다. 물론 상대는 다케무라다. 어제와 다른 파란색에 금색 스팽글이 달려 있는 드레스를 입고 있다. 다케무라의 거무티티한 얼굴이 내내 웃고 있어, 꼬챙이 에 찔린 살아 있는 목 같다. 여주인이 그걸 잡고 춤추고 있다. 가자마는 왜건을 벽 옆으로 밀어붙이고, 와인쿨러와 잔을 진열했다. 그의 등뒤에서 음악과 옷 스치는 소리와 구두 소리가 팽창한다. 아무도 미쓰코한테 춤을 청하지 않을 것이다. 가자마 자신 도 싫었다. 가자마는 이따금씩 허벅지에 스치는 여자들의 드레스 자락을 느끼며 테이블 위를 정 돈한다. 머리 속으로 선글라스를 낀 장님 노파와 춤추는 그림이 그려지고, 허리께에 닭살이 돋았 다. 그러나 아마 나는 출 것이다. 여관의 종업원이라서도 아니고, 일흔이 넘은 할머니가 가엾어서 도 아니다. 요코하마에서 창부 노릇을 했다는 늙은 여인의 여윈 손을 잡고, 또 온천 달걀 냄새가 나네라는 말을 들으며, 폐암으로 죽은 남편 얘기와 자기는 변두리 카바레의 천사였다는 노망과 그리고 나는 살해당했어. 눈은 백내장도 녹내장도 매독도 아니고, 당뇨병의 합병증, 온천에서 깨 끗하게 몸을 씻고, 호세 신부를 만나러 가야만 해. 블래가트한테 돈을 보내기 위해서 몸을 판 나 를 참회해야지... 여기 눈에 갇힌 농촌에 있는 온천 여관에서 그런 망상에 흔들리는 선글라스를 낀 노파와 나는 춤을 출 것이다,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가자마는 이미 미쓰코 옆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함께 추실까요?" 선글라스를 낀 미쓰코의 얼굴이 들려지고, 등줄기가 약간 펴졌다. 왼손에 끼고 있는 반지와 똑 같은 사파이어 귀고리가 귓불에 매달려 흔들린다. 구멍이 한층 아래로 늘어나 귀고리의 무게로 찢어질 것만 같았다. "어머나, 댁은...으음, 알아요, 알고 있어요. ...어디에선가 만난 적이 있을 거예요." "이 호텔 종업원인 가자마입니다." "가자마 씨? ...그래요?" 옆에 있는 요시코가 눈썹을 찡긋하며 두 손을 모으고 가자마한테 머리를 숙였다. 파티에는 참 가하지 않을 작정이었는데, 미쓰코가 홀의 소리가 듣고 싶다는 둥, 나프탈린 냄새가 맡고 싶다는 둥 떼를 쓰며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함께 추시렵니까?" "난...탱고는... 이제 무리예요. 스텝도, 워크도, 다 잊어버렸는 걸..." 가지런한 치열이 보일 만큼 입을 열고 있다가 다시 다물자, 갑자기 입술 끝이 아래로 축 늘어 지며 부루퉁한 표정으로 변했다. 오늘도 어둠 속에서 혼자 화장을 한 것일까, 입술 윤곽 위로 립 스틱 자국이 살짝 비어져 나와 있었다. 가자마는 무릎 위에 놓인 미쓰코의 손을 잡고 의자에서 일으켜 세운다. 쥐가 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오른쪽 반신으로 한기가 퍼져 나갔지만, 그것은 미쓰코 탓이 아니다. "안 되겠어... 탱고는, 이제." "록 턴... 조차 제대로 될까 모르겠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미쓰코는 처음으로 선글라스에 손가락을 대었다. 그리고 천천히 벗는다. 움푹 들어간 눈가에 엷은 파란색 아이섀도가 칠해져 있고, 주름진 눈꺼풀 속에서 안구가 좌우로 움직 이고 있다. 왼쪽 눈이 어렴풋하게 열려 있고, 눈꼬리가 젖어 있다. 요시코가 선글라스를 받아 들 자 가자마는 미쓰코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당겨 자리를 뜨게 하였다. 미쓰코가 느슨하게 주먹 쥔 오른손을 코 끝에 대고 또 조그맣게 웃는다. "부끄럽네요... 하지만... 하지만, 사실은 탱고를, 제일 좋아해요..." 가자마는 미쓰코를 홀드하였다. 오른팔을 미쓰코의 등으로 완전히 돌려 몸을 밀착시켰다. 상상 했던 것 이상으로 야위어, 오른손이 미쓰코의 어깨를 다 감싸고도 남을 것 같았다. 주저하던 미쓰 코도 턱시도를 입은 가자마의 등으로 부드럽게 왼팔을 돌린다. 또 맡아 본 적이 없는 향수 냄새 가 풍기고, 머리 속 심지가 아른아른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스토브의 지진 감지장치에 붙어 있는 쇠덩어리가 머리 속으로 언뜻 나타나는가 싶었는데, 미쓰코가 뭐라 중얼거린다. "겁이 나... 첫 워크부터, 겁이 나." 갈비뼈 언저리가 말랑말랑하게 느껴지는 것은 미쓰코의 유방이 거기 있어서일까, 드레스의 풍 성함 때문일까. "괜찮습니다." 가자마가 천천히 한 발을 앞으로 내밀자 미쓰코도 그에 맞춰 한 발 뒤로 물러난다. 다시 한 발. 가자마의 등을 껴안고 있는 미쓰코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또다시 한 발. 프로그레시브 링크. 옆으로 이동한다. 미쓰코도 옆으로 다리를 벌리고, 클로즈드 프롬나드. 가자마가 뒤로 물러나면서 백 콜테로 미쓰코의 몸을 매끄럽게 회전시켰다. 움직임이 거의 음악의 템포와 맞지 않았지만 미 쓰코는 탱고의 피거를 아직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부딪치지 않을까?" 미쓰코가 가자마의 가슴에 고개를 숙이고 속삭이며 워크에서 오픈 리버스 턴으로 들어갔다. "난, 머리 속이 물... 물처럼 돼.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춤을 추면..." 워크. 록 턴. 워크. "움직임이... 흐르는 물줄기처럼 여겨지는 거야." 귓불에 매달린 사파이어 귀고리가 흔들리며 빛난다. "하지만 어둠은 아니야...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새카만 어둠인 것은 아니야. 파랑... 파랗게 보 여요." 턴을 하며 미쓰코가 얼굴을 들었을 때, 왼쪽 눈 속이 어렴풋하게 들여다 보였다. 백록색으로 변 색한 눈동자가 보이고, 가자마는 페퍼민트나 머스컷 열매 같다고 생각하였다. "짙은 파랑이야... 나만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조그만 더 천천히. 부탁해요..." 원래 리듬에서 한층 더 늦게, 가자마는 워크와 턴만으로 춤을 이끌어 간다. "파란색은... 나의 착각인지도 모르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여관 분한테 이런 말을 다 하고..." 가자마는 그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미쓰코의 얼굴에 시선을 떨구었다. 처음으로 자기를 여관 사람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미쓰코의 왼팔에 힘이 들어가면서 가자마의 가슴에 가냘픈 몸을 바짝 기댄다. 발목에 드레스 자락이 휘감겼다가 다시 풀린다. "괜찮아요... 알고 있어. 미노야 호텔의... 가자마 씨...죠? 온천 달걀, 냄새가 나는..." 코뼈로 기복이 심한 주름을 지으며 미쓰코가 웃는다. 가자마는 팔 안의 가냘픈 윤곽에서, 여름 에 흔히 모으곤 했던 매미 유충의 허물을 생각하였다. 손가락 힘에 간단히 부서진다. 늙은 여인의 몸은 외견뿐만 아니라, 안이 텅 비어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가볍고 가녀렸다. "...미드나이트 블루라고 하나... 꽤 옛날인데, 나, 친하게 지내는 포르테뇨가 있었어요... 저, 부에 노스아이레스라고 알려나... 거기 사람들을 포르테뇨라고 하죠." "...네스토르 ...블래가트?" 미쓰코가 얼굴을 들고, 이번에는 오른쪽 눈도 떴다. 오른쪽 눈은 하얗고 눈동자의 윤곽도 더 희 미했다. 가자마는 유리의 단면 같다고 생각했다. "아아... 내가... 또 말한 모양이지? 큰일이야. 가끔씩 내가 무었을 하고,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러니까 그건 나의 인생이 아닌지도 모르죠. ...으응, 아니야, 그런 얘기를 할 때의 내 자신이 말이야." 미쓰코 쪽에서 먼저 프로그레시브 링크를 하고, 옆으로 이동하였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지?" "미드나이트 블루... 세계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요... 친한 포르테뇨가 있었는데...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을 그렇게 말해요. 아르헨티나 의... 그 사람이... 혼마키의 카페에서 부두의 불빛을 보면 늘... 늘, 로차의 밤 이야기를 하는데, 아 무튼 짙은 파란색이에요... 한 밤의 어둠의 색. 나는 잘 모르겠다고 했어. 그랬더니..." 미쓰코는 올리고 있던 입술 끝 그대로, 잠자코 웃음을 깨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랬더니... 뭐죠?" 가자마는 용감하게 프롬나드 턴으로 회전시켜 본다. 미쓰코는 몇 번이나 슈즈 끝으로 바닥을 콕콕거렸지만, 돌고 나서는 목덜미를 옆으로 젖혀 포즈를 취하고 숨을 토했다. 가자마는 춤 경력 이 상당하다고 생각한다. "어머,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댁도, 바보스럽기는." "그런 말이라니, 뭐죠?" "당신, 놀리지 말아요." "놀리는 게 아닙니다." 가자마는 또다시 자신의 등을 휘감은 미쓰코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주름과 반점 투성이인데도 손톱만 젊은 여자 같은 색이다. 왠지 거기에서 자신의 몸속으로 검은 액체가 흘러 들어오는 듯한 기분도 든다. 익숙하지 않은 향수 냄새와 드레스의 기복 때문에 느껴지는 부드러 운 유방, 그리고 이 늙음 탓이라고 가자마는 생각한다. 자신의 오른쪽 반신에 밀착해 있는 미쓰코 의 야윈 몸으로 훈훈함이 피어 오를 듯한, 불쾌하지만 몸 속 어딘가에서 미열이 잉태될 듯한 그 런 느낌이다. 본 적 없는 공기의 틈바구니로 파고 들어간 듯한. 그리하여 공기의 벽이 찰칵 소리 를 내며 자신을 낚아채고, 앞을 보니 자기가 알지 못하는 싸구려 호텔의 침실 문이 열려져 있는. "놀리는 게 아니야." 지저분한 시트로 덮인 침대에 젊은 외국인 여자가 알몸으로 누워 있다. 뒷솔기가 있는 검정 가 터 스타킹만 걸치고서. "당신은 웃지 않는군요." "여자는 가슴을 보이고 누운 채, 오른팔을 창틀로 뻗어 겨드랑이의 털을 보인다. 얇은 유리창 너머는 어둠이고, 그렇다, 미드나이트 블루다, 라고 가자마는 생각한다. 점점이 켜져 있는 가로등 불빛이 보인다. 얼굴은 예쁜데, 아마 성병에 걸려 있겠지. 그러나 나 역시 죽을 것이다. 이 전혀 미지의 고장에서, 라고 가슴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남자는... 웃지 않아요." "나는 웃어." "웃지 않아..." "웃어." 낡은 선반 위에 있는 파란 유리병 속에는 약이 들어 있다. 짙은 보라색 약이다. 탈지면을 조그 맣게 돌돌 말아 발가락 사이에 끼고 거기에 약을 묻힌다. 여자는 항상 10센티미터나 되는 하이 힐을 신고 있어서, 무좀이 낫지 않는다. 그렇지? "당신은... 무슨 일을 하죠?" "온천 달걀을 만들어." "어디서 만드는데?" "당신은 몰라. 일본의..." 미쓰코의 이마에 돋은 땀방울에 초점이 맞춰지고, 가자마는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굉장히... 신이 나네요. 이렇게, 그렇죠, 이렇게 추는 거예요. 아, 몇 십 년만이려나..." 이미 곡은 바뀌어 탱고가 아닌 블루스인데도 가자마와 미쓰코만 여전히 탱고의 스텝과 피거를 밟고 있다. 다케무라가 검은 눈을 부릅뜨고 이쪽을 쏘아보며 춤이 다르다고 알리고 있다. "하지만 부끄럽네... 모드들 우릴 보고 있을 거예요, 틀림없이..." 가자마는 홀에서 춤추는 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도쿠가 눈을 크게 뜨고 휘파람을 불 듯 입 술을 오므리고 있다. 턴을 할 때마다 가자마와 미쓰코한테로 각 커플들의 눈길이 멈추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쪽에서 술을 마시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자들도 기묘한 눈길로 시선을 쏟아 붓고 있다. 마치 다른 나라 사람을 보고 있는 것처럼. "괜찮습니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아요." 부에노스아이레스 눈이 한층 더 격렬하게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