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명탐정 김전일 2. 유령선 살인사건 지은이:아마기 세이마루 옮긴이:임은경 펴낸곳:(주)서울문화사 차례 프롤로그 제1장 류오마루 항해일지 제2장 출항 제3장 유령선 마리 세레스트호 제4장 악몽의 밤 제5장 대신 죽은 자 제6장 진상 에필로그 후기 프롤로그 짙은 안개 사이로 떠오른 그 배는 분명히 범선이었다. 그러나 선원들에게는 전설에서 들은 유령선이나 신기루처럼 보였다. 1872년 12월의 일이다. 첫 번째 기항지인 지브롤터를 향해서 대서양 위를 항해하던 범선 데이 그라테이호는 자욱한 안개 속에서 기묘한 모양의 배와 맞부딪쳤다. 그 범선은 돛의 대부분이 걸레처럼 너덜너덜하게 찢어져 있었고, 술에 취한 듯 좌우로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라테아호의 모아하우스 선장은 조타수에게 명령했다. "속도를 올려. 저 배에 바싹 다가가 봐." 그라테아호가 뒤쫓기 시작하자 그 기묘한 범선은 기다렸다는 듯 속도를 늦추었다. 그러나 그라테아호가 신호탄을 쏘아 올렸는데도 아무 응답이 없었다. 가까이 가서 본 쌍안경에도 선원의 모습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아니, 선원은커녕 조타 핸들을 잡는 사람조차 없는 것 같았다. "선장님, 무슨 일이 생겨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가 보겠습니다." 1등 항해사인 올리버가 그렇게 말하고 그 배를 수색하겠다고 자원했다. "좋아. 보트를 타고 가 봐." 선장이 명령하자 올리버는 두 명의 선원을 데리고 안개 낀 차가운 바다 위로 나갔다. 세 사람은 가까이 접근해. 고개를 들어 그 배에 쓰여 있는 이름을 보았다. '마리 세레스트호' 파도와 안개에 흠뻑 젖은 목제 선체에 영어로 그렇게 쓰여 있었다. "올라가 보자." 선원 한 명이 꺼림칙해하며 반대하자 올리버는 그를 보트에 남기고 다른 한 명과 세레스트호의 갑판으로 기어올라 갔다. "아, 아니...?" 두 사람은 배 위의 너무나도 기괴한 상황에 말을 잃었다. 조타 핸들은 조작하는 사람도 없이 부서진 풍차처럼 제멋대로 돌고 있었다. 늘어진 돛이 날아오르는 새처럼 파닥파닥 소리를 내고 있는데도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갑판원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배 안을 뒤지자 더 이상한 광경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부엌도, 식당도, 승무원의 방도 모두 잘 정돈되어 있었고, 소동이 일어났던 흔적 같은 것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런데 선원은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선원들의 옷은 깨끗이 세탁된 채로 깨어져 있었고, 부엌에는 만들던 아침 식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식탁 위에는 빵과 고기를 담은 접시가 놓여 있고 냅킨과 포크, 수저까지 갖춰져 있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햇볕에 그을린 선원들이 문을 열고 우르르 몰려와 아침 식사를 할 것 같았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풍경이었다. "도, 돌아갑시다, 올리버 항해사!" 미신을 깊게 믿는 선원이 가슴에 십자가를 그리며 다급하게 말했다. "아직 선장실에 가 보지 않았어. 누군가 있을지도 몰라. 아니, 분명히 있을 거야. 없다는 건 말이 안돼." 공포심을 마음속에서 몰아내자, 올리버는 용감해졌다. 그는 학질에 걸린 것처럼 떠는 선원을 따라오라고 명령해서는 선장실 문을 열게 했다. "...!" 그곳에도 선장의 모습은 없었다. 단지 아침 식사를 위해 준비된 듯한 접시와 식기, 그리고 빵과 달걀 프라이만이 주인 없는 식탁에 어떤 메시지처럼 놓여 있었다. "분명히 태풍 때문에 모두가 탈출한 거야. 틀림없어!" 정색을 하며 주장하는 선원에게 올리버는 식탁 위의 컵을 가리켰다. "아냐, 그렇지 않아. 그렇다면 이 컵에 남아 있는 커피는 당연히 쏟아져야 정상이고, 게다가 약병도 넘어져 있어야 하잖아. 태풍 따위는 없었어. 이 배에서 사라지기 직전까지 선장은 여기서 우아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을 거야." 침대 옆에 놓인 책상을 바라보던 올리버의 눈에 얼핏 책같은 것이 띄었다. 그것은 선장이 남긴 마리 세레스트호의 항해일지였다. 일지에는 이렇다 할 이변에 대해서는 전혀 쓰여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항해가 평탄하게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항해일지는 10일 전인 11월 25일 아침으로 끝나있었다. "믿을 수 없어...." 이 사람이 없는 배가 10일 동안 마치 고도의 항해 기술을 가진 베테랑 선장이 키를 잡고 있던 것처럼 정확하게 항해를 해 온 것이다. "유령이 배를 몰기라도 했단 말인가?" 올리버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너무 놀라 계속 신을 부르면 중얼거리는 선원과 함께 올리버는 서둘러 갑판 위로 올라갔다. 바로 옆에 데이 그라테아호가 보이자 대범한 올리버도 자신도 모르게 휴우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보트에서 기다리던 선원에게 신호를 보냈다. 보트로 내려가려던 순간 올리버는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의 기척이 느껴진 것 같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역시 '눈에 보이는 인간의 모습'은 없었다. 짙은 안개가 서린, 아무도 없는 배의 갑판을 쳐다보며 올리버는 중얼거렸다. '유령 선장....' 제1장 류오마루 항해일지 1 "아저씨, 대충 그렇게 정해요." 식은 커피를 소리내며 홀짝홀짝 마시면서 김전일이 말했다. "하지만, 김전일. 아침 식사밖에 주지 않는데 이 정도 가격이면 비싸. 적어도 만 엔 정도는...." '아저씨'는 그렇게 말하고 듬성듬성해진 머리를 긁었다. "그러면 이건 어떨까요? 보세요, 세끼 식사 포함해서 십이만 엔이면 적당하잖아요." 미유끼가 핑크색 형광펜으로 팜플렛에 선을 그었다. "시, 십이만!? 아무리 세끼 식사를 준다지만 그건 너무 비싸." "쩨쩨하게 그러지 마세요, 아저씨." "...커피 더 드릴까요?" 커피를 가져온 웨이트리스가 웃음을 띄웠다. 점심 시간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40대 중반의 중년 남자와 고등학생 정도의 남녀 두 명이 이렇게 떠들고 있었다. 여름 휴가 계획을 짜는 친구들처럼 여행 팜플렛을 펼친 채 떠들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점원들과 점심을 먹는 샐러리맨들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아버지에게 여름 휴가 여행을 가자고 보채는 아들과 딸? 아니면 학교 선생이 반장과 함께 학급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 그러나 사실은 이 '아저씨'라고 불리는 중년 남자는 밑바닥부터 갖은 고생을 다하며 출세한 경찰청 조사 1과의 경감 겐모치였다. 경찰청 '살인과'의 경감이 긴 머리를 뒤로 묶은 전형적인 '요즘 젊은이'인 김전일에게 아저씨라고 불리게 된 의도는 '오페라 극장 호텔 살인 사건'으로 신문 지상을 시끄럽게 만든 기괴한 연쇄 살인 사건 때문이었다. 외딴 섬의 오래된 호텔에서 일어난 이 이상한 살인 사건을 해결로 이끈 사람이 다름 아닌 전일이었다. 김전일은 자신이 다니는 후도 고등학교의 연극부 부원이며 소꿉친구인 미유끼의 권유로 함께 연극부 합숙을 가게 되어 살인 사건에 말려든 것이었다. 비번이라 휴가중이던 겐모치 경감이 미침 그곳에 있다가 김전일의 경이적인 추리력에 크게 감탄했다. 그 이후로 옛날 명탐정으로 유명했던 고우스케의 손자라는 김전일과 공적, 사적으로 계속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그럼 이것으로 정하죠. 9만 8천 엔 오키나와 문 비치, 4박 5일!" 김전일은 귀찮다는 듯이 팜플렛 더미를 정리하고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이제 학교로 돌아가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오후 수업을 못 듣게 된단 말예요." 김전일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처음부터 오후 수업은 빼먹으려고 작정하고 있었다. 오늘은 수업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여름 휴가가 근사한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가 아닌가는 분명히 그것에 달려 있었다. "잠깐만 앉아 봐, 김전일." 겐모치가 김전일을 보고 말했다. "보너스 받은 돈은 차와 맨션 임대료로 거의 다 써 버렸어. 게다가 아이 녀석 입학도 있고, 그러니 너무 무리할 필요가...." 그러자 옆에 있던 미유끼가 말을 가로챘다. "어머! 겐모치 경감님, 무리라니요. 너무 심하지 않아요? 열다섯 번째 결혼 기념일이잖아요. 큰맘 먹고 쓰세요. 아주머니도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아, 이거 정말 멋져! 오키나와 이시가키 섬 리조트 호텔에서의 7일 간, 16만 8천 엔. 봐요, 프라이비트 비치에서 마린 스포츠까지 할 수 있다구요. 꺄오! 너무 멋져, 나도 한번 가 봤으면." 미유끼는 자신의 일처럼 신나 하며 형광펜으로 팜플렛 여기저기에 표시를 해댔다. "됐어! 적당히 해 둬." 겐모치가 미유끼를 말렸다. "뭐 때문에 너희들에게 팜플렛 수집을 부탁했는지 모르겠다. 바빠서 내 대신 값싸고 화려한 투어를 찾아 달라고 부탁했더니. 게다가 근무중에 빠져나와 이런 곳에서 점심까지 사주고...." "알았어요, 알았어. 그럼 좀더 싼 것으로 보여 드릴게요." 김전일은 종이 봉투에서 인쇄 상태가 좋지 않은 얇은 팜플렛 한 장을 꺼내서 겐모치에게 보여 주었다. "이거예요. '대자연에 둘러싸인, 사시사철 여름인 섬들, 오가사와라 섬을 향해서, 고급 여객선으로 8일 간의 꿈의 향해, 딱2만 9천8백 엔!' 어때요!" "이야, 이거 아주 싼데!" 겐모치의 눈이 동그래졌다. "같은 오가사와라 여행이라도 미유끼가 찾아 준 건 12만엔이나 하지만 이것은 그 4분의 1도 안 돼요. 어때요? 점심값은 했죠, 아저씨?" "흠... 그런데 뭐야, 동태평양 범선? 들어 본 적도 없는 선박 회사군. 괜찮을까, 김전일?" "무슨 소리예요? 배 따위는 어느 회사 배건 상관없잖아요." "하지만 이 팜플렛도 어쩐지 인쇄 상태가 좋지 않은 데다가 지저분하고, 게다가 이 '딱!'이라는 낱말도 걸리지 않아? 마치 그 배를 타면 돛대가 딱 하고 부러질 것 같은...." "어휴, 참! 모처럼 고생해서 찾아 드렸더니, 그러면 쩨쩨하게 그러지 마시고 미유끼가 보여 드린 고급 리조트에 팍 돈을 내고 가시면 되잖아요. 공무원은 불경기와는 상관없잖아요!" "재가 지금 쩨쩨하게 그러는 게 아냐. 난 그저 비슷한 일정이라면 싼 것으로 하려고...." "자, 자, 겐모치 경감님." 미유끼가 끼여들었다. "이런 건 기분 문제잖아요. 내가 아주머니 입장이라면 결혼 15주년 여행이 2만 9천 8백 엔짜리라는 걸 알면 아무리 일정이 좋다고 해도 기분이 좀 상할 것 같아요." "그럴까?" "여자에게 기념일이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거라구요." "좋아, 알았어! 미유끼가 권해 준 투어로 하지. 이 오키나와 이시가키 섬, 16만 8천 엔으로!" "와아, 멋진 경감님! 대담한 배포!" "하하하! 나란 사람은 쓸 때는 쓰는 사람이야." "칫! 허영을 부리시긴. 나중에 울지나 마세요, 아저씨." "이 녀석, 남자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아." 겐모치는 킁 하고 콧소리를 내면서 식사 전표를 힘있게 움켜쥐었다. 2 "김전일, 정말로 오후 수업 안 들을 거야?" "으응. 좀 볼 일이 있어서. 요코다에게 대신 대답해 달라고 부탁 좀 해줘, 미유끼." "또? 언제나 그러는구나. 그러다가 출석 일수 모자라도 난 몰라." "괜찮아. 그럼, 부탁해!" 학교 근처까지 바래다 준 겐모치의 차에서 내린 김전일은 미유끼와 헤어져 번화가까지 급히 자전거를 타고 갔다. 그가 가는 곳은 휴가철을 맞아 상점 전체가 세일을 하는 상가의 한 경품 추첨 코너였다. "어이, 명탐정. 또 땡땡인가? 할아버지가 아시면 울겠군." 경품 추첨 직원인 빠칭코 주인이 담배를 찌들어 누렇게 된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시끄러워요, 담배에 찌들어 가지고. 이 좀 닦아요!" '히히히. 그래, 경품권을 가져왔나, 명탐정?" "봐요, 여기 있잖아요.' 납작 찌부러진 가방에서 김전일은 두툼한 경품권 다발을 세 개나 꺼내 보였다. "1등 여행 초대권이 탁! 붙는 걸 보여 줄 테니까 가만 계세요." "이야, 대단한데? 어떻게 모았지. 그렇게 많이?" "인맥이에요, 인맥. 이웃 사람들 일을 도와 주는 대신에 이 경품권을 받았거든요." "캬아, 대단하군! 그렇게까지 할 정성이 있으면 차라리 착실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당당히 돈을 내고 가는 게 나을텐데?" "알았어요, 알았어. 아무튼 나한테는 지금 '경품권이 당첨되는 게' 중요하다구요." 경품권이 맞았어. 두 명 여행 초대권이. 어렵게 맞았는데 그냥 버리면 아깝잖아. 어차피 공짜니까 미유끼, 시간 있으면 함께 가지 않을래? 지극히 자연스러운 유혹일 것이다. 라이브 초대권이 맞았어. 그냥 두면 아까우니까 시간 있으면 함께 가지 않을래? 영화 시사회 초대권이 들어왔어. 모처럼 생긴 거니까 이번 금요일날 만나서 보러 갈래? 초대권을 주는 잡지에 열심히 응모하는 남자 고등학생 중에, 맘에 드는 여학생을 유혹하는 것이 목적인 음흉한 학생은 과연 몇 퍼센트나 될까. 어렸을 때부터 이웃에 살았고, 게다가 고등학교까지 계속 함께 다녔는데도 아직 키스 한 번도 못했다. 소꿉친구로 친하게 지낸 지 십수 년인 미유끼와 자신 사이에 아직도 넘지 못한 마음의 벽을 이번 여름에 단번에 넘으려는 것이 김전일의 목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황금색으로 빛나는 1등상 구슬이 나와야만 한다! "이얏--!" 김전일의 기합 소리는 예사롭지 않았다. "뭔지 모르지만 기합은 넣지 마." 경품 추첨 직원인 빠칭코 아저씨는 경품권 매수를 세고 나서, "이것을 넣고 딱 백 번 돌리는 거다." 라며 여전히 누런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오케이!" 김전일은 팔을 한 번 휘두르고 나서 경품기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금구슬, 금구슬, 금구슬, 금...." 힘차게 휙휙 돌리기 시작했다. "--금구슬!" 그러나 쪼르륵 굴러 나온 것은 빨간 구슬이었다. "여기 유감상, 티슈." "에잇, 다음!" "여기, 티슈." "다음!" "이런, 또 티슈네. 어쩌지, 명탐정?" "에잇, 에잇, 에잇!" 땀을 흘리면서 김전일은 손잡이를 더욱 세게 돌렸다. 그러나 나오는 것은 빨간 구슬뿐이었다. 껌, 초코볼, 티슈 같은 것들만 계속 당첨될 뿐이었다. "엉터리! 아저씨, 이거 진짜로 맞는 거 아니죠!" "맞아, 실제로 맞았잖아? 껌 두 개하고 초코볼 세 개에다 티슈까지." "그게 아니라 1등 말예요, 1등!" "아직 맞은 사람이 없었으니까 당연히 그 안에 들어 있겠지. 아, 이제 마지막이군, 마지막 한 번 남았어!" "버, 벌써? 에잇, 내 노력은 다 어떻게 된 거야!" 화가 난 김전일은 마지막으로 힘차게 돌렸다. 접시에 또르륵 하고 구슬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으으...." 신음 소리를 내고 나서 김전일은 접시를 쳐다보았다. 금색이었다. 직경 2센티미터의 플라스틱 구슬이 막 태어난 달걀처럼 보였다. "맞았다.!" 경품 추첨 직원인 아저씨가 땡땡땡 기세 좋게 종을 울렸다. "김전일! 오가사와라 행 호화 여객선 초대권, 당첨!" 3 "김전일, 정말로 이런 곳에 부두가 있을까?" 미유끼가 불안한 듯이 물었다. 택시는 인적이 끊기고 창고들만 즐비한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괜찮아, 약도대로 가고 있으니까." 김전일도 그렇게 말은 했지만 차츰 불안해졌다. 이즈 시치 도로 향하는 페리호의 출항 장소인 다케시바 부두를 지나 이럭저럭 10분 가까이 달리고 있었다. 앞으로 1, 2분만 더 가면 운전사에게 다시 한번 물어 보리라 생각했을 때 운전사가 먼저 말했다. "손님, 저겁니까?" 운전사가 가리키는 곳을 보자 창고 사이로 커다랗고 흰 배가 있었다. "마, 맞아요! 분명히 저거예요. 서둘러 주세요. 집합 시간이 다 됐거든요." 부두 입구에 택시를 세우고 트렁크에서 물건을 내리는 순간 기적이 울었다. "어떡해, 배가 떠날려나 봐!" 미유끼가 보스턴 백을 안고 모자를 누르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어. 출항 시간까진 아직 20분이나 남았는데." 김전일도 가방을 어깨에 메고 미유끼 뒤를 따라 달려갔다. "김전일, 어서 와, 어서!" 부두의 콘크리트를 디딜 때마다 미유끼의 하늘색 미니스커트가 팔랑팔랑 춤추고, 내리쬐는 태양이 희고 큰 그녀의 모자를 눈부시게 비추었다. 그 뒷모습에 김전일은 넋을 빼앗겼다. 미유끼는 초등학교 때부터 인기가 좋았고 예뻤다. 평판이 좋지 않은 '말썽꾸러기'인 김전일과 고등학생이 된 지금도 늘 함께 다니는 것은 전적으로 미유끼의 마음이 좋아서라고 주위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맘대로 말하라지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수군거림에 미유끼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걱정되어 김전일은 내심 몹시 불안했다. 미유끼는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아 언제 소꿉친구라는 특권이 효력을 잃어버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전일, 아직 괜찮은 것 같아!" 배의 계단을 두서너 개 올라간 지점에서 미유끼가 뒤로 돌아 손을 흔들었다. 눈이 부신지 눈을 가늘게 뜨고 하얀이를 보이면서. 그것은 김전일의 불안감을 깨끗이 날려 버리는 미소였다. 4 배에 올라탄 김전일은 크게 실망했다. 호화 여객선이라고 해서 크기도 엄청나며, 반짝반짝하는 휜 갑판에 수영장이 딸려 있고, 새하얀 옷을 입은 선원들이 일제히 경례를 하며 맞아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히 반대였다. 먼저 환영이 없었다. 입구에서 무뚝뚝한 표정의 젊은 남자가 쿠폰을 확인할 뿐이었다. 게다가 엄청나게 크기는 커녕 아주 낡은 데가 지저분하기까지 했다. 멀리서 볼 때는 하얗게 보였던 선체와 갑판도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거의가 거무튀튀했다. 또 문과 손잡이 같은 것도 몹시 낡아 있었다. 무엇보다 이상한 건 출항 시간이 임박해 있는데 다른 승객들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상하네... 보통 이런 배라면 사람들이 무척 많이 타잖아? 괜찮을까, 김전일? 뭔가 잘못된 건 아닐까?" 미유끼가 불안해서 김전일의 티셔츠 소매를 잡아당겼다. "입구에서 쿠폰을 체크했잖아. 호화 여객선은 이런 걸 말하는 거야." 큰소리치면서도 김전일은 다른 손님들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려댔다. "하지만... 호화 여객선이라고 해서 온통 새하얀 데가 멋진 사람들이 가득 타고 시끌시끌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 배는 모두 다 지저분하고.... 어머! 하얗게 칠해져 있는 곳도 자세히 보니 거무튀튀하잖아!" "바보같이. 이건 원래 이런 색이야. 자연 소재를 살린 '순수한 멋'이라는 말도 못 들어 봤니?" "들어 본 적은 있지만... 하지만 이건...." "자, 자, 일단 객실로 가 보자. 객실은 분명히 근사할 거야." 김전일은 그렇게 말하고 '선실 2'라고 쓰인 표시를 따라서 계단을 내려가려 했다.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손님?" 불러 세운 사람은 선원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 어깨에 장식용 금색 끈이 붙은 흰 제복과 선원 모자가 잘 어울리는 아주 잘생긴 청년이었다. "아닙니다, 객실이 어딘가 하고...." "죄송합니다만 여기서부터 앞쪽은 출입 금지입니다. " "하지만 선실이라고 써 있는데요?" "아닙니다. 그 계단 아래는 지금은 화물실로 쓰고 있습니다." "화물실이라니, 이 배는 여객선 아닌가요?" 김전일이 묻자 남자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네, 반은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반이라뇨?" "개인 선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화물실로 개조해서 쌀과 술 등을 운반하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말도 안 돼요. 우리는 호화 여객선인 줄 알고 탔는데요? 그런데 어째서 화물실이 함께 딸려 있는 거죠?" "호화 여객선이라구요? 실례지만 손님, 어느 회사를 이용하셨죠?" "경품 추첨이요. 집 근처에 있는 상가의 경품 추첨에 당첨되었어요." "경품이라.... 정말 말씀드리기 죄송합니다만 호화 여객선이라는 것은 지나친 과대 광고입니다. 저희 회사에서는 2만 9천8백 엔의 값싼 오가사와라 여행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2만 9천8백 엔의 오가사와라 여행!? 어디선가 들어 본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래, 혹시 겐모치 경감님 부탁을 받고 김전일, 네가 찾아온 팜플렛 아냐?" "아, 그 '딱!'이라고 써 있던 것이구나! 이런, 속았어! 이게 뭐가 호화 여객선이야. 세상에, 이렇게 지저분한 배를 가지고." "김전일, 너무 지나쳐." 미유끼가 김전일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아!" 선원이 쓴웃음을 짓고 있는 것을 본 김전일은 자신도 억지 웃음을 지었다. "하, 하지만 공짜지. 하하하! 게다가 나쁜 사람들은 그 상점 사람이야.' "아닙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선원은 깊숙이 머리를 조아렸다. "아, 말씀드리는 게 늦었는데, 저는 이 배의 2등 항해사인 미즈사키라고 합니다. 실례입니다만 손님의 성함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네, 전 미유끼입니다." "아, 전 김전일입니다." 두 사람은 지나치게 정중한 미즈사키의 인사에 자신도 모르게 대답을 했다. "김전일 씨, 미유끼 씨. 출항 시간이 약간 늦어지고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그때까지 배 안을 조금 둘러보시겠습니까?" "네, 저는 좋습니다만." "저, 저도...." "그럼 가시지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미즈사키는 흰 이를 보이며 환하게 웃고서 김전일과 미유끼의 짐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5 "이쪽이 거실, 그리고 저 안쪽이 오락실입니다. 오락실에는 당구대가 놓여 있습니다. 오래된 것이지만 수시로 수리를 하기 때문에 즐기시는 데 불편은 없을 겁니다." 미즈사키는 재빠른 동작으로 김전일과 미유끼를 데리고 배 안을 돌아다녔다. 그 세련된 동작은 반은 화물인 누더기 여객선의 선원이 아닌, 그야말로 진짜 호화 여객선의 승무원 같은 인상을 주었다. 미즈사키의 안내로 배 안의 이곳 저곳을 하나하나 둘러보고 나자 첫인상으로 생겼던 실망이 다소 누그러졌다. 구식이며 낡기는 했지만 나무를 많이 사용한 품격 있는 실내 장식은 이 배가 예전에 제1선에서 활약하던 때의 대단했던 모습을 상상케 했다. "둘러보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미즈사키가 자신에 차서 웃는 얼굴로 물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멋져요. 의자라든가 테이블도 오래 되긴 했지만 고급스럽고." 미유끼는 이제 완전히 기분이 바뀌어 있었다. "그렇지요?" 라고 미즈사키가 말했다. "원래는 4천 톤급 중형선 중에서는 가장 고급 여객선이었습니다. 20년이나 된 배지만 객실에 미니 부엌까지 있을 정도로 설비도 잘 갖추었고, 사용된 장식들도 모두 좋은 것들입니다." "헤헤헤. 그럼 호화 여객선이 맞는 거군요." "어휴! 김전일, 너는 너무 단순해." "하하하! 그 말이 맞는 것 같군요." 미즈사키는 악의 없이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미즈사키 씨." 김전일이 말을 걸었다. "아까부터 내내 거의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는데, 우리 이외에 손님은 몇 명 정도 있지요?" "네, 두 분을 빼고 일곱 명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전부 해서 아홉 명!? 그것으로 채산이 맞습니까?" "아니오, 전혀 채산은.... 뭐, 화물로 다소 메우고는 있습니다만." "그럼, 적자란 말입니까?' "네. 사정이 있어서.... 그리고 이 배는 이번이 마지막 항해가 된답니다." 미즈사키는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습니까?" "네, 김전일 씨. 그래서 저희들은 이 배의 마지막 손님이 될 여러분을 조금이라도 더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서비스를 제공할 겁니다. 예를 들어 오늘밤 저녁식사는 배의 스태프들과 모두 함께 뷔페식 파티를 열 예정입니다." "어머, 정말이에요? 야호, 멋져라!" 미유끼가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그리고 무리해서 솜씨가 뛰어난 요리사를 동승시켰으니까 음식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겁니다." "근사해, 김전일!" "어때, 미유끼. 오길 잘 했지?" 의기양양하게 말했지만 김전일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처음에 녹슨 손잡이를 잡고 갑판 위에 올라설 때는 이 여행을 기회로 미유끼와의 마음의 울타리를 넘으려던 게 오히려 단단한 벽처럼 될 것 같아 몹시 불안했다. "그럼, 이제 곧 출항 시간이니까 객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미즈사키가 걸음을 내딛자 바로 전에 보고 나온 거실에서 호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와하하하!, 어때, 카즈에. 대단한 배지?" 어디서 들어 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서, 설마!" 김전일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아, 아니, 아저씨!"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겐모치 경감이었다. "기, 김전일! 네가 어떻게 여기에!?" 겐모치는 어울리지 않는 젊은 풍의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건 제가 할 말이에요, 아저씨. 분명히 딜럭스 투어로 간다고 하시구선...." "쉬, 쉿!" 당황한 겐모치가 얼른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겐모치 경감의 뒤를 보자 나이에 맞지 않게 희고 꽉 끼는 원피스를 입은 중년 여성이 서 있었다. "어머, 김전일과 미유끼네? 언제나 남편이 신세를 지고 있다지요? 호호호!" 기분 좋아하고 있는 중년 여성은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겐모치의 부인이었다. 6 항해일지, 7월 23일. 날씨, 쾌청. 파도, 조금 높음. 출항 시간, 15분 늦음. 딸아, 나는 또 여행을 떠나려 하고 있다. 가장 사랑하는 딸아, 이제 네 앞으로 보내는 편지 같은 이 항해일지를 쓰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나는 뱃사람이다. 언제 어디서나 그것만이 나의 긍지였다. 그러나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 깊고 푸른 바다가 너와 나를 건너지 못하게 갈라 놓은 것을 나는 지금 후회하고 있단다. 딸아, 이제 나는 언제까지나 네 옆에 있으려 한단다, 이 항해가 끝나는 대로. 불안하진 않다. 반드시 모든 예정을 마치고 이 항구로 돌아오마. 사랑하는 딸아, 항구의 어디에서도 너의 모습은 찾을 수 가 없구나. 언제나 출항할 때면 늘 와주더니.... 출항을 눈 앞에 둔 나를 부두에서 늘 배웅해 주더니. 그래, 이유를 알고 있다. 그만두자. 이제 그만두자, 이런 것을 쓰는 것은. 배야, 나의 마지막 항해를 장식할 배야. 너의 이름은 '류오마루' 나는 지금 '선장'으로서 너의 '키'를 잡는다-- 나는 '일지'를 덮어 가방 속에 넣은 다음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유리병 속에는 갈색 액체가 들어 있다. 플라스틱 뚜껑을 꽉 닫아 놓았는데도 코를 대면 곰팡내 같은 냄새가 난다. 이 액체를 이만큼 모으기까지는 매우 힘이 들었다. 처음엔 담배를 끓여 뽑아 내려고 했지만 아무리해도 불순물이 섞였고, 쥐를 쓴 실험에도 생각만큼의 효과가 없었다. 여러 가지 조사를 해 보면서 살충제 중에 '그 성분'이 많이 포함된 것이 있음을 알았다. 즉시 입수해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이 갈색 농축액을 뽑아 내는 데 성공했다. 쥐를 써 시험해 보자 예상을 뛰어넘는 효과가 났다. 바늘 끝에 몇백 배나 묽게 만든 것을 조금 발라 살짝 찌르기만 했는데 쥐는 흰 배를 보이며 경련하더니 1분도 채 안 되어 호흡이 멎었다. 그후 들쥐를 사용한 실험에서도 같은 효과를 얻었다. 나는 확신을 가졌다. 이것이라면 됐다. 이것이라면 충분할 것이다. 바늘 끝에 제일 진한 액체를 듬뿍 살짝 찌르기만 해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설령 '인간'이라 해도-- 드디어 기적이 울렸다. 출항이다. 이제 뒤로는 갈 수 없다. 어떤 광폭한 파도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어도 절대로 되돌릴 수 없다. 이 배에 탄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을 지옥으로 보내야만 한다. 그것이 나의 역할이다. 지금 나는 복수를 위한 '항해'의 키를 잡는다. 바로 지금부터, 나의 이름은 '유령 선장'.... 제2장 출항 1 출항을 알리는 기적 소리가 울렸다. 경종처럼 조그마한 엔진 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는가 싶더니 배는 약간 흔들리며 천천히 육지에서 멀어졌다. "김전일, 배가 떠나고 있어! 갑판에 올라가 보자." 미유끼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김전일은 겐모치가 이 투어에 참가해 자신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기분이 언짢았다. 미유끼와 자신 두 사람만의 로맨틱한 여행을 만들려고 했는데 겐모치가 끼여 무드가 깨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미유끼에게 '좋은 느낌' 따위는 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이 배를 타다니." 겐모치가 혼자 있는 것을 보고 김전일은 가까이 다가가서 말했다. "내가 있어서 안 좋아? 나도 이런 초라한 투어에 참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구. 여행비만 도둑맞지 않았어도 근사한...." "예! 도둑요? 경찰이 도둑을 맞았다구요?" "쉿! 목소리가 너무 커. 마누라가 들으면 어떡하라구." "뭐라구요? 그럼 말 안 했어요, 아저씨? 이 투어가 아주 값싼 거라고?" "물론이지. 마누라는 몰라. 큰맘 먹고 돈을 썼다고 말해버렸거든. 나중에 도저히 아니라고 할 수 없었어." "에헤?" "그러니, 알았지? 절대 비밀이야. 미유끼한테도 분명히 말해 둬." "김전일, 드디어 출항이야! 경감님도 거기 계시지 말고 어서 이리로 오세요!" 미유끼가 모자와 스커트를 누르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기적과 엔진 소리가 미유끼의 목소리를 삼키며 메아리쳤다. "그래요, 여보. 어서 와요! 동경만이 한눈에 보여요." 겐모치 부인도 지지 않고 젊고 앳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쳇, 여자들이란 그야말로 기분파야." 겐모치의 투덜거림에 김전일도 마음속으로 수긍했다. "야호! 저것 봐! 너무 멋져!" 갑자기 기적 소리 사이로 또 다른 앳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나는 쪽을 보니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두 소녀였다. 그들은 미유끼와 겐모치 부인처럼 바다 바람에 휘날리는 스커트를 잡고서 갑판 손잡이에 몸을 기대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들은 이 배를 탄 이래 어쩌면 처음 보는 손님인 것 같았다. 9명의 승객 중 4명은 아는 사람. 그러니까 그녀들은 남은 5명 중 2명이 되는 것인가. "이봐, 예쁜 아가씨들. 너무 몸을 앞으로 내밀지 않는 게 좋아. 이 손잡이는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 같잖아." 두 소녀에게 친숙하게 말을 걸면서 다른 남자 손님이 나타났다. 이것으로 전체 승객 9명 중 7명까지 알게 된 것이다. "예? 괜찮아요. 우리는 그렇게 무겁지 않거든요." 머리가 긴 쪽 소녀가 달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하하! 미안, 미안. 그런데, 아가씨들은 여대생인가?" "웬걸요, 우리는 아직 고등학생이에요." 머리가 짧은 쪽이 대답했다. "에헤? 그래? 너무 예뻐서 처녀인 줄 알았지." "거짓말!" "하하하하!" 김전일은 겐모치와 마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대화가 그냥 듣고 있기에는 속이 메스꺼웠다. "쳇! 기가 막혀서. 아무리 보아도 내 눈엔 고등학생으로 밖에 안 보이는데...." "말할 필요도 없어. 요즘 젊은 것들이란...." 겐모치의 말투에 김전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에 만났을 때 겐모치는 김전일을 그야말로 '요즘 젊은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살인 사건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가는 동안 생각이 바뀌었다. 김전일의 뛰어난 추리력을 알게 된 겐모치는 그 동안 가졌던 젊은이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그에게 묘한 공감초자 갖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 좀 부럽죠, 아저씨?" 김전일은 속마음을 떠보듯이 겐모치의 옆구리를 툭 쳤다. "뭐야? 너는 그렇겠지만 난 안그래! 나는 어린애들한테는 흥미 없어." 퉁명스럽게 부정하는 겐모치의 솔직함이 김전일은 마음에 들었다. "아가씨들 둘이서 왔어?" 밤색 머리의 껄렁한 남자가 어느새 두 여고생 옆에 바싹 다가가 있었다. 여자아이들의 반응이 좋자 그 틈을 타 잽싸게 접근한 것이었다. "아, 나는 다카시라고 해. 대학생이지. 오가사와라 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지." "어머, 그래요?" 웃는 얼굴이었지만 머리가 긴 쪽 아이는 약간 경계하는 듯 했다. 그녀와 달리 머리가 짧은 쪽은 이 껄렁한 남자가 마음에 들었는지 적극적으로 상대하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라면 어떤 거예요? 혹시 다이빙 같은...." 그녀는 배의 엔진 소리에 묻히지 않으려고 목소릴 높였다. "맞았어. 난 다이빙 강사야. 참! 예쁜 아가씨들, 나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을래?" "나는 미사토 아케미." 머리가 짧은 쪽이 대답했다. "그리고 얘는 이지마 유우." "안녕하세요, 유우예요." 머리가 긴 쪽은 조금 무뚝뚝한 말투였다. "아케미와 유우라. 그런데 어디서 왔지?" 계속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전일이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이봐, 미유끼. 이제 안으로 들어가자. 커피나 마시자구." "그래." 미유끼는 기분이 좋아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네 명이 배 안으로 들어가려 했을 때 다카시가 다가왔다. "저, 죄송하지만 사진 좀 찍어 주시겠습니까?" 다카시는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에 흰 이를 반짝거리며 미유끼를 향해서 휴대용 카메라를 건넸다. "네? 저 말인가요?" 미유끼가 물었다. "참! 그러지 말고 아가씨도 함께 찍는 게 어때요?" 이번에는 미유끼에게 마음이 있는지 다카시는 친숙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 배에는 손님이 아홉 명 밖에 타고 있지 않대요. 오가사와라까지는 50시간이나 걸리니 그 동안 사이좋게 지내면 더욱 즐거운 여행이 될 거예요. 자, 함께 찍어요!" "하, 하지만...." "괜찮아요, 어서요. 아, 아버님과 어머님도 함께 찍으시지요." 다카시는 겐모치 부부가 미유끼의 부모인 줄 잘못 알고 이렇게 말했다. "그럼.... 아! 꼬마 소년, 셔터 좀 눌러 줄래?" 다카시는 김전일에게 카메라를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김전일은 '꼬마 소년'이라는 말에 완전히 질려 버렸다. "이봐, 당신! 미리 말해 두겠는데 우리 '아버지'는 경찰이야. 경찰청 조사 1과 경감이니까 '언니들'을 꼬시려면 각오해 두시라구!" "엣, 경찰?" 다카시는 얼굴색이 변했다. 몹시 놀란 그는 카메라를 다시 낚아챘다. "괜찮다면 제가 찍어 드릴까요?" 그때 뒤에서 또 다른 승객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났다. 그러고는 마음대로 다카시 손에서 카메라를 빼앗았다. "여러분, 함께 찍는 게 어때요? 자, 즐거운 여행입니다, 사이 좋게 지냅시다!" 50대 정도로 보이는 키가 큰 그 남자는 은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어깨에서 커다란 카메라 가방 같은 것을 내려놓자 백의 가죽 손잡이에 달린 '아카이 요시카즈'라고 쓰인 명찰이 흔들렸다. 그것이 그의 이름인 것 같았다. 김전일과 다카시 사이가 더욱 험악하게 될 것 같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자 자, 어서 모여 서세요. 어디를 배경으로 할까요? 역시 바다가 좋겠죠?" 아카이라는 남자가 수선을 떨다 보니 김전일도 어느새 카메라 앞에 서게 되었다. "좀더 가까이 서요. 그렇게 서면 다 나오지가 않아요." 카메라를 들여다보면서 남자가 지시를 했다. "손님." 언제 나타났는지 파란 제복에 에이프런을 두른, 종업원인 듯한 젊은 여자가 카메라를 조작하는 그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손님도 함께 찍으세요. 제가 찍어 드릴게요.' 조금 전 2등 항해사인 미즈사키에 비하면 말투는 그다지 깍듯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소박하고 접하기 쉬운 느낌이 드는 여자였다. 여자로서는 큰 키로 165센티미터 이상은 될 것 같았다. 체격도 전반적으로 근육질이어서 마치 수영 선수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햇볕에 그을린 작은 얼굴에 아직 솜털이 남아 있어 앳돼 보였는데, 그래선지 짧은 머리가 잘 어울렸다. 꼭 다문 도톰한 입술에 큰 눈동자가 잘 어울리는 그녀는 미인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나름대로 건강한 매력을 뿜어냈다. "당신은 이곳의 종업원입니까?" 아카이가 조작하고 있던 카메라를 아래로 내리며 물었다. "아, 죄송합니다. 저는 가토리 요우코라고 합니다. 이 배의 잡일이나, 레스토랑과 커피숍 웨이트리스, 매점의 판매원, 또 룸 서비스 등등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진 찍는 것도 당연히 제가 할 일입니다." "그래요? 그럼, 부탁할까요? 내가 찍으면 '기묘한 것'이 함께 찍힐 것 같거든요. 하기야 나는 '그걸 찍기 위해' 이 배에 타긴 했지만, 하하하!" 영문 모를 말을 하고 혼자 웃으면서 아카이는 카메라를 건네준 후 승객의 대열에 끼었다. "자, 찍습니다....치즈." 카메라의 자동 플래시가 터졌다. 어느새 해질 시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요우코는 다카시에게 카메라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손목 시계를 쳐다보더니 자세를 고치고 말했다. "여러분, 지금부터 2시간 후인 7시 정각에 친목회를 겸한 디너 파티를 개최합니다. 그때까지 천천히 즐기시기 바랍니다." 깊게 고개를 속이고 그녀는 그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서인지 총총걸음으로 배 안으로 돌아갔다. "김전일, 손님이라곤 여기 있는 사람이 다인가 봐." 미유끼가 삼삼오오 흩어져 가는 승객들을 옆눈으로 보면서 물었다. "아냐, 당연히 또 한 사람 있어. 아까 미즈사키란 사람이 손님은 우리까지 합쳐서 아홉 명이라고 말했잖아." 그 '아홉 번째' 사람은 지금까지의 일들을 숨어서 계속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겐모치에게 못박혀 있었다. 시선을 느낀 겐모치가 되를 돌아보자 그 남자는 잽싸게 몸을 돌려 도망치듯 모습을 감추었다. 2 김전일은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의 갈색 얼룩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에 은테 안경을 낀 아카이라는 중년 남자가 한 말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그가 카메라로 찍으려 한다는 '묘한 것'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는 "그것을 찍기 위해서 이 배에 탔다"고 했다. 전부터 이런 작은 의문이 신경 쓰여 어쩔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언제나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김전인은 또 이 작은 의문의 답을 찾으려고 하다가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그것은 이 배를 감싸고 있는 기묘한 위화감이었다. 예를 들어 이 배가 베풀고 있는 대우가 그렇다. 김전일이 있는 개인 객실은 전기 풍로가 딸린 미니 부엌과 냉장고, 게다가 소형 전자 레인지까지 갖춰져 있다. 오락실과 거실의 실내 장식품이 고급인 것으로 보아 이 배는 전에는 작긴 하지만 상당히 고급 선박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 배가 오래되어 낡았다 해서 승객 수도 많지 않은 오가사와라 항로를 항해하고 있으며, 더구나 반은 화물선으로 사용되는 최저의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은 너무 부자연스럽다. 오래된 것으로 친다면 그 유명한 퀸 엘리자베스 2세 호도 있는데 그 배는 여전히 제1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호화 여객선이다. 그리고 배의 승무원 수도 적은 것 같았다. 이 정도로 큰배인데 손님 이외에 배에 올라타고 만난 사람은 미즈사키라는 흰 제복을 입은 선언과 잡일을 한다는 요우코라는 젊은 여자, 그리고 갑판에서 작업을 하던 젊은 남자 한 명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 미즈사키라는 남자도 위화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손님을 대하는 완벽한 태도와 자신감으로 보아 그에게는 엘리트 냄새가 났다. 2등 항해사라고 했지만 30세 전후로 생각되는 연령으로 보아 이런 폐기 직전의 배에 탈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김전일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앞으로 10분 정도 지나면 7시다. 7시부터는 선원과 함께 선상 파티가 시작된다. 그때가 되면 뭔가 알 수 있을까? 김전일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3 파티가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파도가 조금 높은 듯해 약간 불안한 느낌이 있었지만 나는 별들로 가득한 밤하늘 아래서의 파티란 너무나 근사했다. 미유끼는 물론이고 뚜렷한 이유 없이 두근거렸던 것 따위는 싹 잊어버린 김전일까지 날라져 오는 요리를 집어먹기도 하고, 기념 사진을 찍기도 하면서 예상치 못했던 호화로운 저녁을 즐기고 있었다. "어머, 김전일! 넥타이에 소스가 묻었어! 그렇게 마구 집어먹으니까 그렇잖아." "아, 이런! 하지만 괜찮아, 핥으면 되니까." 김전일의 말에 미유끼가 얼굴을 찡그렸다. 미유끼는 어깨가 드러나는 핑크색 칵테일 드레스로 잔뜩 멋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김전일은 미유끼가 강제로 가져가라고 한 재킷과 넥타이로 그런 대로 모양만 내고 있었다. "이봐, 김전일! 선장의 인사가 있대." 점잖지 못하게 수선을 떠는 김전일을 나무라듯이 겐모치가 말했다. 그제야 앞쪽을 보니 흰 선원복을 깔끔하게 입은 50대 중반의 남자가 마이크 앞에 서 있었다. 그가 바로 선장인 것 같았다. 턱수염이 긴 것이 선장이라는 직책의 이미지 그 자체였다. "마치 야마토 함장 같애." 미유끼가 김전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미유끼가 말하는 야마토 함장이 탄 전함은 태평양전쟁으로 바다 밑에 가라앉아 버린 전함이 아니라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 이스캉달을 항해 날아오른 우주 전함을 말한다. 이야기가 좀 빗나갔나? 아무튼 그 남자 뒤에는 비슷한 모습의 선원들이 일렬로서 있었다. 조금 전 김전일과 미유끼를 안내해준 미즈사키라는 2등 항해사도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여전히 파란 제복에 에이프런을 두른 요우코가 흰색 일색의 선원복 사이에 꽃처럼 끼여 있었다. 사람 수를 세어 보자, 주방에서 일하는 요리사를 포함해 이 배의 승무원은 12명이었다. 승객 9명 승무원 12명이라면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정도 크기의 배를 움직이기엔 아무래도 충분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에, 여러분. 제가 이 배의 선장을 맡고 있는 다카모리 고조입니다. 이번...." 다카모리 선장의 인사는 무기력한 데다 건성이었다. 벌써 술을 많이 마신 듯 다리가 떨렸다. 하는 말에도 '이따위 배'라든가 '고물 여객선'이라는 말이 많아 자신이 이 배의 선장이라는 걸 결코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음이 한눈에 보였다. 선장이 대충대충 지루하게 인사말을 하는 중에 미유끼가 또 귀속말을 했다. "야마토 함장과 비슷한 건 겉모습뿐인 것 같아." 4 "그럼 항해의 무사고를 빌면서, 건배!" 다카모리 선장의 건배 선창과 함께 파티가 시작되었다. "역시." 주위를 둘러보며 김전일이 중얼거렸다. "응? 뭐가?" 미유끼가 반문했다. "이 파티 말야. 어째서 이 저녁 식사가 뷔페 파티가 되었는지 아니, 미유끼?" "? 그건 이 배의 마지막 항해라서 특별히 그렇게 했다고 미즈사키 씨가 말했잖아. 아냐?" "물론 그런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큰 이유는 사람 수가 부족하기 때문이야." "사람 수가 부족하다고?" "그래, 봐. 이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라곤 아까 사진을 찍어 준 요우코라는 여자 단 한 명밖에 없잖아. 보통 방법으로 식사를 하면 한 사람으론 제대로 서빙을 할 수 없잖아. 하지만 뷔페식으로 하면 일단 요리를 한꺼번에 차려 놓기만 하면 되잖아. 게다가 분위기도 낼 수 있고 ." "아하, 그랬구나...." "대단한 꼬마군." 중얼거리는 듯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나는 쪽을 보니 옆에 키가 작고 머리가 벗겨진 노인이 한쪽 손에 컵을 들고 서 있었다. 축 하고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냄새로 보아 컵에 든 것은 술인 듯했다. "여ㅣ날에는 레스토랑에 위이트리스와 웨이터가 열 명 가까이나 있었어. 선원만 해도 지금의 배 이상은 되었다구. 그런데 지금은 아무리 적자라지만 잡일부와 요리사까지 합쳐 겨우 열두 명밖에 태우지 않았어. 항해사는 단 세 명이고 기관사는 한 명 뿐이야. 게다가 전문 무선사는 한 사람도 없어. 1등 항해사가 무선사를 겸하고 있긴 하지만. 항해사가 되기 전에 무선사를 한 경험만으로 말야.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어디 있겠나! 규정 위반도 어느 정도지." 노인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저... 할아버지는 누구시죠?" 김전일이 물었다. "나? 나 말인가? 어때, 선장처럼 보이지 않나?" "아니에요!" 밝은 목소리가 끼여들었다. 에이프런 차림의 웨이트리스 요우코였다. "손님, 아니에요. 이 할아버지는 기관사입니다. 엔진 같은 걸 고치는." "바보 같으니! 그것만이 아냐. 요우코, 너는 배에 타고 있으면서도 배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라!" "그래요, 난 그저 잡일부니까요!" "아, 저..." 두 사람이 언성을 높이는 모습에 김전일과 미유끼가 당황스러워하자 요우코가 얼른 말을 돌렸다. "미, 미안합니다. 이분은 오오츠키라고 하는 기관사입니다. 그죠?" "기관'장'인 오오츠키 겐타로야. 그렇지만 2등 기관사도 3등 기관사도 없어. 기관실에는 기관사가 아닌 보통 직원과 나 단 둘밖에 없어." "아, 안녕하세요...." 김전일과 미유끼가 인사를 했다. "그러면 안 되잖아요, 오오츠키 씨. 손님에게 함부로 대하고." "아니, 그보다 저... 당신이 아까 사진을 찍어 준 분이지요?" 김전일이 묻자, "아, 미안합니다. 제 소개도 하지 않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파티니까 즐겁게 보내라고 미즈사키가, 아니 미즈사키 항해사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만.... 저는 이 배의 잡일부 겸, 매점원 겸, 웨이트리스인 요우코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요우코는 어린애처럼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하하하, 그 얘긴 아까도 들었습니다." "아, 그래요? 어휴, 이런!" 하하하. 재미있군요, 요우코 양. 그런데 결례지만, 나이는 어떻게 되죠?" "열아홉 살인데요." 요우코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수수한 파란색 제복에 에이프런을 두른 탓에 열아홉 살이라는 나이에 비해 촌스럽게 보이지만 키도 크고 스타일도 좋아 옷만 잘 입으면 사람들 눈길을 끌 용모였다. "헤에? 그래요? 그럼, 우리가 열일곱 살이니까 두 살 위군요. 대단해요, 이렇게 남자만 있는 곳에서 일을 하다니--." "벌써 반 년이나 되어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졌어요. 그리고 나는 바다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아주 잘 맞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는 요우코는 정말로 즐거운 것 같아 보였다. "역시 사람은 자신에게 맞는 일을 하는 게 제일입니다. 나는 학교라는 데가 도저히 맞질 않아서..." 김전일이 팔짱을 끼며 말하자 미유끼가 옆눈으로 째려보며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학교에서 일하지도 않으면서." "바보. 일이 아니라 공부 말야. 일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애. 싫어도 꾹 참고 계속하면 돈도 벌 수 있고 ." "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 2학년이 돼 그런 소릴 하면 조금 봐주기라도 하지." 두 사람이 주고받는 얘기를 들으면서 요우코는 쿡쿡 웃고 있었다. 그것을 깨닫고 미유끼는 얼굴이 빨개져서 김전일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김전일, 창피해, 그만해...' "응? 그, 그래. 참, 그런데 요우코 양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김전일이 화제를 바꾸었다. "요우코 양, 이 배에 탄 손님은 모두 아홉 명이잖아요?" "네, 그런데요?" 여고생인 아케미와 유우는 여전히 껄렁한 다카시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소, 은테 안경의 중년 남자인 아카이는 어느새 선장과 의기투합해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와인을 마셔 얼굴이 빨개진 겐모치 부부는 신혼 시절로 돌아가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김전일과 미유끼를 포함하여 모두 8명. "한 사람, 오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어째서죠?" 김전일이 진지한 표정으로 묻자 요우코도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네, 그 손님은 방에 틀어박혀 있어요." "방에 틀어박혀요?" "그래요. 기분이 나쁘다면서 파티에 참석하고 싶지 않대요. 그러면서 자기 방으로 음식을 갖다 달라고 했어요. 게다가 알레르기가 생겼다고 매점에서 마스크와 선글라스까지 사다 달라고요?" "사다 달라고요?" "네. 음식과 함께 갖다 달라고요. 그러면 나올 수도 있다고...." "나올 수도?" "아주 인상이 나쁜 남자예요." "음, 그 남자는 어딘가 이상해...." "그러면 안 돼, 김전일.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아냐, 미유끼. 얼굴은 그 사람을 말해 준다는 말 몰라? 그런데 요우코 양, 그 손님 이름은 뭐죠?" "분명히 나카무라 이치로라고 승객 명단에 쓰여 있긴 해요." "나카무라 이치로? 아주 평범한 이름이군. 왠지 냄새가 나는 것 같아. 그 이름은 가명일지도 몰라." "그럼, 혹시 범인이라도...." 요우코가 눈을 크게 뜨며 김전일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요, 비행기를 납치하듯이 배를 타서 차지하고 협박하는...." "어머, 그럼 어떡해요...." "하하하! 괜찮아요. 이 배에는 현역 형사가 타고 있으니까요." "네? 그게 누구죠?" "봐요, 저기서 아까부터 먹기만 하고 있는 덩치 큰 아저씨 보이죠? 그 사람이 경찰청 조사 1과 겐모치 경감입니다. " "네에?' "후후후, 놀랐습니까?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저 경감님도 인정하는 명탐정 고우스케의 손자입니다." "호호호! 그래요 ? 재미있네요, 김전일 씨." 요우코가 전혀 믿지 않는 것 같자 김전일은 정색을 하고 힘 주어 말했다. "사실입니다. 아, 사실이라니까요." 미유끼는 옆에서 쿡쿡 웃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김전일도 왠지 계면쩍은 듯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기분 좋은 온화한 공기가 세 사람을 감싸소 있는 바로 그때였다. "아주 즐거운 것 같군, 요우코 양." 갑자기 말을 걸어온 사람은 흰 선원복 차림의 깡마른 남자였다. 그는 요우코의 어깨에 손을 얹고 뒤로 떡 젖히고 서서 거만한 태도로 내려다보았다. 다른 선원이 햇볕에 그을려 새까만 데 비해 이 남자의 얼굴색은 김전일보다도 더 흴 정도였다. 한창 파티중인데도 전혀 술을 마신 것 같지 않았다. 손에는 와인 글라스 대신에 우유 같은 흰 액체가 든 컵을 들고 있었습니다. "와카오지 항해사..." 요우코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 "와카오지 1등 항해사겠지." " 죄, 죄송합니다." "말해 두겠는데, 이 파티는 선원들과 손님들 간의 친목을 위한 파티야. 잡일부는 선원이 아니지. 너는 접시 정리나 음식 운반 등 할 일이 많을 텐데." "죄, 죄송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요우코는 빠른 걸음으로 가 버렸다. 그러자 그 남자는 멍하니 서 있는 김전일과 미유끼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 흥! 하고 콧소리를 내더니 돌아서려고 했다. 그때 김전일이 와카오지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손님, 무슨 볼일이라도?" 뒤로 돌아본 와카오지의 눈을 쳐다보며 김전일이 말했다. "당신이 1등 항해사라고 했나요?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모르지만 나와 미유끼는 저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멋대로 사람을 쫓아 버려도 되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 김전일은 어안이 벙벙해서 말을 잃었다. 갑자기 와카오지가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히고 큰 소리로 사과를 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이같은 일이 없도록 종업원들을 잘 가르칠 테니 이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김전일을 향해서 머리를 깊게 수그린 채 와카오지가 말했다. "아, 알았습니다...." 김전일도 더 이상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이만 가 봐도 될까요?" 와카오지가 물었다. 그는 아직도 고개를 수그린 채였다 "아, 네,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가 버린 와카오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김전일은 미유끼와 마주 보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뭐야, 저 사람." "대단한 사람이야, 저 인간은." 그렇게 말한 사람은 조금 전에 얘기를 나누던 늙은 기관사인 오오츠키였다. 와카오지가 있는 동안은 못 본 척하고 술만 들이키더니 그가 가 버리자 잽싸게 다가와 김전일과 미유끼에게 또다시 푸념을 해댔다. "요우코도 불쌍해. 와카오지가 싫어하는 미즈사키와 좋아지낸다는 이유만으로 저렇게 언제나 당하기만 하니...." "예? 요우코 양이 그 미즈사키라는 남자와 사귀고 있단 말인가요?" 미유끼가 몸을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미유끼에게 이런 이야기는 가장 흥미 있는 분야이다. "이, 이런! 항상 요, 요 입이 말썽이라니까, 나도 모르게 그만...." 오오츠키는 후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엉겁결에 입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일부러 말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오츠키 씨, 저 와카오지라는 남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김전일이 묻자 오오츠키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원래는 동아 오리엔트 해운의 엘리트 선원이었던 남자야. 저 남자만이 아냐. 3등 항해사인 카노우도 모두 거기에서 왔어." "동아 오리엔트 해운이라고요? 그 유명한 해운 회사요?" "그렇지. 우리 나라의 몇 안 되는 큰 해운 회사지. 우리 동태평양 기선도 어쨌거나 그 계열 기업이야. 지금은 그 회사에서 떨어져 나간 화물 회사이긴 하지만." 김전일은 이 말을 듣고 그제야 납득이 간 눈치였다. 미즈사키에게는 엘리트라는 이미지가 완벽했고, 아카오지 역시 일그러진 엘리트 의식 같은 것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 바 있다. "하지만 그런 엘리트가 왜...." 이런 누더기 배에 타고 있습니까라고 물으려다 김전일은 말을 삼켰다. 그러나 오오츠키는 그가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이미 눈치를 채고 쉽게 대답했다. "선장인 다카모리와 와카오지가 그 회사에서 쫓겨난 이유는 분명해. 그건, " 오오츠키는 컵에 남아 있던 술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 두 사람은 오리엔탈호 선원이었어." "오리엔탈호!?" 김전일은 자신도 모르게 미유끼와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 배는 3년 전 수없이 많은 사상자를 낸 대형 해양 사고로 신문 지상을 한동안 시끄럽게 했다. 아니, 그것말고도 김전일과 미유끼에겐 예전에 두 사람이 말려든 어느 연쇄 살인을 기억나게 하는 배였다. 나가노 지방에 있는 아카네 산 속의 조용한 호수인 '히렌코'를 피바다의 지옥으로 만든 처참하고 슬픈 사건을. 오오츠키 노인은 계속했다. "너희들도 기억하지? 그 불쾌하고 꺼림칙한 배를. 미세키 해안에서 유조선과 충돌해 침몰된 호화 여객선이야. 그러니 바보가 아니면 그 배의 선원들이 다 쓰러져 가는 자회사로 밀려난 이유도 상상이 되겠지?" 김전일은 깜짝 놀라 다카모리와 와카오지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그들은 김전일의 그런 시선을 깨닫지 못하고 지루한 표정으로 손님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왠지 불길하게 가슴ㅇ심지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 오리엔탈호 사고의 당사자였던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다. 이 믿기 어려운 우연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오오츠키 노인은 계속해서 말하려 했다. "그것만이 아냐. 이 배에는 그 외에도...." "할아버지! 왜 쓸데없이 손님에게 그런 얘기를 하는 겁니까!" 가시 돋친 목소리로 누군가 갑자기 끼여들었다. "카노우로군. 흥! 안 그래도 지금 자네에 대해서 말하려던 참이야." 그는 3등 항해사인 카노우였다. 이 배의 키를 잡고 있는 선원 중에서 유일하게 동아 오리엔트 해운과 관계가 없었다. 눈이 신경질적으로 움푹 들어가 있고 덩치가 작은 남자였다. 그는 이를 악물고 오오츠키에게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았다. "영감!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했다간 바다에 던져 버리겠어!" 그러더니 곧 미유끼를 쳐다보고 희죽 웃으며 얼굴을 가까이 댔다. "이 영감의 말은 전부 엉터리입니다. 자, 너무 심각하게 듣지 마시고 재미있게 즐기십시오. 밤은 아직 기니까요." "네, 네. 그럴게요...." 미유끼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배에 탔다. 김전일도 미유끼도 동시에 그런 생각을 했다. 5 류오마루 항해일지. 7월 24일, 밤. 날씨, 쾌청. 파도, 높음. 항해, 순조로움. 딸아, 지금 나는 방의 전등을 끄고 달빛에 의지해 이기를 쓰고 있다. 창 밖으로 밤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별들은 나를 행복한 추억에 잠기게 해 주는구나. 따라, 언젠가 옛날 나와 둘이서 지금처럼 선창에 앉아 하늘의 별을 바라본 것을 기억하니. 너를 낳자마자 네 엄마는 곧 죽었지. 혼자서 너를 키워야만 된 나는 얼마 동안 너를 배에 태우고 바다로 나와 있었지. 배에 요람을 가지고 온 나는 다른 선원들에게 자주 놀림을 받았단다. 너는 조타 핸들을 조종하는 나의 모습을 제일 좋아했지. 그때 나는 작은 화물선 항해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새 나는 너와의 대화를 잊고 선원으로서의 지위를 쌓는 데만 몰두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너의 나를 바라보던 눈동자가 사라졌다. 지금 나는 후회로 가득하다. 좀더 네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더라면. 선원 이전에 아버지로서 오늘날 너의 슬픔을 이해해 주었더라면.... 류오마루여. 조용히 밤바다를 헤쳐 가는 나의 배여. 너는 나의 이런 감상을 비웃고 있느냐-- 나는 일지를 테이블 위로 놓고 창가로 갔다. 불을 끈 채 눈을 감았다. 머릿속엔 지금까지 보고 있던 밤하늘을 뒤덮은 별들의 진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저 밤바다 같은 어둠만이 온통 채워져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집어삼킨 칠흑 같은 바다와 똑같은 끝모를 어둠만이. 파티에서 마신 술에 취해 그 놈은 지금쯤 한창 꿈 속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네가 이 세상에서 꿀 수 있는 마지막 꿈이 될 것이다. 나는 작은 가죽 상자를 열어 그 안에서 '도구'를 꺼냈다. 5밀리미터 정도 두께로 자른 코르크판에 여러 개의 짧은 바늘을 꽂아 만든, 손 안에 딱 들어오는 작은 '도구'. 이것에 그 갈색 액체를 바른다. 그러고서 이것을 손바닥에 숨기고 가까이 다가가 목이건 팔이건 아무 데나 찌르면 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면 바늘에 묻은 니코틴 독이 상처를 통해 혈관 안으로 들어가 온 몸으로 퍼져 그 놈에게 죽음을 선사할 것이다. 확실한 죽음. 고통에 가득 찬 죽음. 그 비열한 놈에게 잘 어울리는 죽음. 그 놈에게 선장을 자칭할 자격 따위는 없다. 밤이 밝으면 그때부터 이 배의 선장은 나, 유령 선장이 모든 것을 대신한다.... 제3장 유령선 마리 세레스트호 1 "도, 도와...줘...." "--!?" 졸린 눈을 비비면서 인터폰을 들자, 김전일의 쥐어짜는 듯 한 신음 소리가 났다. 미유끼는 인터폰을 팽개치고 단숨에 김전일의 방으로 뛰어갔다. "미유끼, 제발 나 좀...." "김전일!? 왜,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배가...." "? '배가'가 뭐야? 똑바로 말해, 김전일!" "배가 아파..." "....?" "어, 어제 너무 많이 먹었나 봐.... 미유끼, 소화제 좀 갖다...줘..." "..." 미유끼는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혔다. "내 참... 알았어. 일단 의무실에 전화부터 해 보고" 전화를 하고 온 잠옷 차림의 미유끼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김전일에게 소리쳤다.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아침 5시 반에 그런 목소리로 전화를 하니..." "으으...! 정말이야, 정말로 죽을 것처럼 아프단 말야" 새하얘진 얼굴로 김전일이 계속 쥐어짜는 소리를 하자 미유끼도 다시 걱정이 되었다. "어, 어떡하지? 나는 위장약 같은 건 가져오지 않았어. 의무실에 전화를 해도 아무도 없고..." "아이고! 죽을 것 같애...." "어휴, 참! 아무라도 불러올 테니까 잠깐만 참고 있어." 미유끼가 나가려고 하자 김전일이 모기만한 소리를 냈다. "나, 나를 혼자 내버려 두면 어떡해..." 미유끼가 아무 대답도 없이 나가자 김전일은 배를 문지르면서 엉금엉금 쫓아나갔다. 2 배 안은 원래 2등 선실이었던 화물실과 기관실이 있는 배 바닥 부분, 식당과 리빙 홀 등이 있는 1층 갑판부, 그리고 객실이 있는 2층부, 조타실과 무전실, 선장실 등 승무원실이 있는 3층 선교부, 이렇게 4층으로 나뉘어 있다. 김전일과 미유끼는 승무원실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가 보기로 했다. 3층은 제일 뒷부분 계단에서 똑바로 마주 보이는 막다른 곳의 조타실까지 복도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승무원실은 그 복도 양쪽으로 나란히 있었다. 그러나 팻말이 한 칸씩 건너서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나머지 반은 빈 방인 것 같았다. 사용하고 있는 방의 바로 옆방이 모두 비어 있는 것은 선원들의 근무 시간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자고 있는 시간에 샤워도 하소 식사도 해야 하므로 소음 때문에 방해받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일 것이다. 배의 뒷부분에 있는 계단을 올라간 김전일과 미유끼는 복도 왼쪽의 승무원실에서 나온 한 선원과 맞닥뜨렸다. "무슨 일입니까, 김전일 씨, 미유끼 양?" 2등 항해사인 미즈사키였다. "죄송합니다만 이 계단은 선원과 종업원 이외에는 사용이 금지되어 있는데요...." "아! 미즈사키 씨세요. 죄, 죄송, 배가 아파서요. 제가 아니고요, 이 친구가, 저렇게 아프대요. 저기, 혹시 위장약이나 소화제 없으신가요?" 미유끼는 못된 장난을 치다 들킨 어린애처럼 갈팡질팡 두서없이 말했다. "위장약이라... 글쎄요, 저한테는 없구요. 그럼, 선의를 얼른 깨웁시다." 미즈사키가 그렇게 말하고 선의의 방을 노크하려 했을 때 복도 구석에서 문이 열렸다. 졸린 눈을 비비며 문을 나서는 요우코였다. 일어나자마자 옷만 갈아입고 나오던 중인지 아직도 잠이 덜 깬 모습으로 계속 걸어왔다. 미즈사키와 김전일과 미유끼가 있는 것을 본 요우코는 눈을 비비다 말고 크게 고개를 숙였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이야. ...그렇지! 요우코, 지금부터 식사 준비를 할 건가?" "네, 그런데요?" 요우코는 김전일과 미유끼를 바라보았다. "식사 준비는 조금 늦어져도 상관없을 거야. 이 손님이 배가 아프다는데 혹시 약 가지고 있는 것 없나?" "위장약 말인가요? 위장약은 글쎄..." "맞아! 요우코, 네 방의 냉장고에 우유가 있잖아. 와카오지에게 들었는데 언제나 따뜻하게 해서 마신다고 하더군." "네, 그래요." 요우코가 대답하자 미즈사키는 김전일과 미유끼를 향해서, "우유를 따뜻하게 해서 마시면 웬만한 위장약보다 훨씬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이 배의 1등 항해사도 위궤양을 앓고 있는데 언제나 약 대신 그렇게 마시고 있습니다. 어때요, 김전일 씨, 드릴까요?" "네, 네. 낫기만 한다면 아무거나 좋아요." 김전일은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두 분은 제 방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요우코, 네가 조금 늦어진다고 요리사에게 연락할 테니까 가서 우유를 데워다 주겠어?" "알겠어요. 하지만 요리사가 무서우니까 잘 말해 줘야 되요, 미즈사키." "알았어. 그런데 요우코, 손님 앞에서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라고...." "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미유끼가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 사이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어요. 기관장 할아버지가 말했거든요." "네? 오오츠키 씨가요? 참, 그 양반 곤란한 사람이군." 미즈사키는 계면쩍은 듯이 머리를 긁었다.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군요. 부러워요." 미유끼가 이렇게 말하자 요우코는 미소를 띄우고 부끄러운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이... 자, 김전일 씨, 미유끼 양, 조금만 기다려요." 그러고는 고개를 꾸벅 하고 복도 구석 왼쪽에 있는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다. "하하하, 이거 원... 아무튼 두 분 이쪽으로 오세요." 미즈사키도 웃으며 두 사람을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들어오세요." 종업원실의 미니 부엌과 전자 레인지, 냉장고 등의 설비는 김전일과 미유끼가 있는 객실과 거의 같았다. 단, 침대는 아주 수수했으며, 방 한가운데에는 객실보다는 조금 큰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실례합니다." 미유끼는 배를 움켜쥐고 있는 김전일을 끌어 의자에 앉혔다. "휴우... 휴우..." 김전일은 의자에 앉아 여러 번 크게 숨을 쉬었다. 계속해서 심호흡을 하자 그때마다 조금씩 통증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조금 나아지는 것 같은데..." 그때 갑자기 악취가 코를 찔렀다. --이, 이 냄새는 ...!? 어젯밤 마늘이 듬뿍 든 파스타를 너무 많이 먹고는 갑자기 배가 아파져서 이를 닦을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배 아프면 입냄새도 심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으으으...! 차, 참을 수가 없어.... 이게 내, 내 입냄새라니.... 김전일이 입을 일그러뜨리면서 숨을 훅 하고 들이마시자 김전일의 모습을 본 미유끼가 더욱 걱정스러운 듯이 얼굴을 가까이 대왔다. "괜찮아, 김전일? 그 정도로 아픈 줄은..." 괜찮아라고 하려고 김전일은 입을 우물거렸다. --안돼! 날아가는 파리도 떨어뜨릴 악취를 미유끼에게 맡게 할 순 없어! 경찰청 경감조차 한 수 쳐 주는 대단한 명탐정도 여자에게는 보통 남자일 수밖에 없었다. 이 투어에 참가하기 전에 읽은 '핫도그 프레스' 기사가 머리를 스쳤다. 그 기사는 이런 것이었다. "...여자 고등학생 100명이 대답했습니다. 입냄새 나는 남자만은 절대 사절! 그런 사람은 분명히 위가 몹시 나쁜 사람일 것이다. 게다가 그런 사람과 키스하다간 당장이라도 그 사람 충치가 뭉턱 삐질 것 같다!..." 안 돼, 미유끼! 가까이 오지 마! 어젯밤에 아무 생각 없이 마구 먹고 마신 탓에 그만 이런 엄청난 일이.... --어, 어떡하면 좋지.... 그렇지! 배가 아픈 것도 잊고 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고 김전일이 일어섰다. "? 왜 그래, 김전일?" 의아스러운 표정의 미유끼에게 김전일은 억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 아냐. 난 뜨거운 음식은 못먹거든. 그냥 따뜻할 정도로만 해 달라고 부탁하려고... 호호호." 제대로 입도 못 벌리고 김전일은 잽싸게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 나와 보니 마침 요우코가 우유를 담은 머그컵을 가지고 계단을 내려가려 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요우코 양!" 김전일이 뒤에서 손을 흔들어 불러 세우자 요우코는 어깨를 잠깐 움찔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김전일 씨, 왜 그러죠?" "아, 다행이다! 혹시 우유를 데우러 부엌으로 가는 겁니까?" "제대로, 그런데 왜요?" "아니, 실은 저... 가는 김에 껌이라든가..." "네?" "왜 있잖아요, '클로레츠'나 '후라보노' 같은 껌 있으면 부탁해도 될까 해서요." 입을 가린 채 말하는 김전일의 '의도'를 대충 짐작했는지 요우코는 쿡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떡였다. "네, 있어요. 올 때 함께 가져올게요." "미안합니다...." 겸연쩍어 하는 김전일에게 요우코는 살짝 웃고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3 미즈사키 방으로 다시 들어온 김전일은 미유끼로부터 제일 멀리 떨어진 의자에 앉았다. 대신 미즈사키와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미즈사키는 그것을 몹시 기다렸다는 듯 김전일이 앉자마자 물었다. "김전일 씨와 미유끼 양, 두 사람은 겐모치 부부와 서로 아는 사이입니까?" "네, 잘 아는 분들입니다. 그리고 미즈사키 씨, 그 '씨'자는 빼고 불러 주셨으면 좋겠어요. 좀 거북해서...." "네, 그래요. 그렇게 해 주세요." 걱정스러운 눈으로 김전일을 보고 있던 미유끼가 김전일의 말에 동의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두 분은 엄연히 저희 손님인걸요." 미즈사키는 정중하게 거절하더니 갑자기 깨달았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아 참! 김전일 씨, 어떻습니까? 아직도 아픕니까?" "아니오, 아까보다는 훨씬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실은 미즈사키 씨에게 여러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이 기회에 물어 봐도 될까요? "저에게 말입니까?" "네, 오리엔탈호에 대해서입니다만." "--!" 그 이름이 나온 순간 늘 상냥한 표정을 잃지 않던 미즈사키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김전일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와 미유끼는 전에 그 사고에 관계된 어떤 사건에 말려든 적이 있습니다. 기관사인 오오츠키 씨에게 들었는데, 이 배의 선장과 1등 항해사인 와카오지라는 사람이 전에 오리엔탈호의 선원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물어 보는 겁니다만...." "저는 오리엔탈호에 탄 적이 없기 때문에 상세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만, " 미즈사키는 이렇게 전제를 하고 나서 말하기 시작했다. "대단한 사고였다고 합니다. 3만 톤급 호화 여객선이 단 한 시간 내에 완전히 바닷속으로 침몰해 버렸으니까요." "물론 죽은 사람도 많았지요. '일본의 타이타닉호 사건'이라고 말들 하니까요.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도대체?" 그렇게 말하고 김전일은 배가 아픈 것도 잊고 몸을 앞으로 바싹 내밀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속에서 생긴 사고였다고 합니다. 상대방인 유조선 선장이 몹시 술에 취해 있던 것이 원인이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아무튼 100명 이상이나 되는 사상자가 생긴 엄청난 사고였습니다. 최종적으로 과실 책임이 없다고 판단된 오리엔탈호 측에서는 다카모리 선장과 와카오지 항해사 두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 동아 오리엔트 해운을 그만두게 했습니다." 미즈사키는 단번에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이야기를 멈추었다. 짧은 순간에 생긴 차가운 공기가 그들을 감쌌다. 바로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저예요. 들어가겠습니다." 말과 동시에 문이 열리고 요우코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컵과 '클로레츠' 껌을 가지고 들어왔다. "? 뭔가 심각한 얘기를 하시던 중인가 보죠?" 요우코가 당황한 표정으로 묻자 미즈사키는 평소 때의 상냥한 얼굴로 돌아갔다. "자, 6시부터 조타실 근무가 있어서 저는 그만. 두 분은 천천히 나오십시오. 그리고 요우코는 너무 늦어서 요리사에게 야단맞지 말고 어서 가 보도록 해." "네, 그래요." "김전일 씨, 미유끼 씨. 아침 식사는 7시 반부터입니다. 그 때 선장님의 인사가 있으니까 늦지 말고 집합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고 미즈사키는 방을 나갔다. 김전일은 요우코한테 받은 우유를 목 안으로 부으면서 미즈사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또다시 원인 모를 두근거림이 시작되었다. 어젯밤에도 몇 번인가 이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뭔가 무서운 일이 어느샌가 시작되고 있는 것 같은 수 없는 불안감. --쳇, 바보같이. 기분 때문이야, 기분. 김전일은 가슴에 이는 알 수 없는 오한을 우유와 함께 소리 내어 마셔 버렸다. 4 결국 김전일과 미유끼는 조금 늦은 7시 40분에 식당에 얼굴을 내밀어ㅕ 벌써 다카모리 선장의 인사가 시작된 것 같아 살그머니 식당 문을 열었다. 그러나 선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미리 온 사람들이 시끌시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이, 김전일, 이쪽이야."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겐모치가 손을 흔들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아저씨. 선장님이 인사를 한다고 했는데?" 김전일이 다가가서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글쎄, 늦잠을 자고 있나...." 겐모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뭐라고! 선장님이 아무 데도 없다고?" 갑자기 김전일의 귀에 와카오지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네. 인터폰으로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셔서 방으로 가서 노크를 했지만 역시...." 선원은 당혹스런 얼굴로 말했다. "방송은 해 보았나?" "네, 해 보았습니다. 역시 대답이 없습니다." "이런! 손님들은 모두 다 모이셨는데." 와카오지는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기관실은? 무전실과 의무실도 보았나?" "네, 하지만...." "없다는 말인가? 이상하군, 그럼 도대체 어디서...." "방 안에 있지 않을까요?" "그럴 리가. 그럼 어째서 인터폰으로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지?" '무, 무슨 일이 있어서 방 안에 쓰러져 있을지도...." 선원은 우물쭈물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선원이 나섰다. "실은 제가 6ㅅ심지어 반부터 조금 아까까지 1등 항해사님이 시키는 대로 계단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선장님이 내려오시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뭐라고? 그러면 방에 있다는 건가?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더니...." 와카오지는 그다지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와카오지와 선원들이 서서 뭔가 심각하게 얘기하는 것을 보고 있던 김전일은 또다시 불쾌하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김전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김전일은 와카오지에게 다가갔다. "아닙니다. 기다리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직 선장님이 오시지 않아서...." "선장님이오? 이런 일이 종종 있습니까, 늦게 오시는 일이?" 김전일이 묻자 와카오지는 귀찮다는 듯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지급까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선장님은 언제나 방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한 후 정확한 시간에 이곳으로 오십니다." "와카오지 씨." 졸린 얼굴로 서 있던 3등 항해사 카노우가 아양을 떨듯이 가까이 왔다. "무슨 일인지 제가 가 볼까요?" 그러지. 나는 여기서 선장님 대신 간단한 인사를 하고 손님들께 식사를 하시도록 할 테니까, 자네는 누구를 데리고 선장실에 가 보게나. 만의 하나 무슨 일이 있으면 둘 중 하나는 그곳에 남고 나머지 한 사람은 곧 와서 알려 주게." 와카오지는 1등 항해사답게 짧고 확실하게 명령했다. 카노우는 가까이에 서 있던 선원에게, "이봐, 함께 가자구."라고 꼬이듯이 말하고는 식당을 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김전일은 가슴이 더욱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저들을 따라가야 한다! 직감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잠깐만요!" 김전일은 큰 소리로 카노우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와카오지를 향해서, "저도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네?...왜." 와카오지가 의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아니, 그저... 호기심 때문에요." 김전일은 그렇게만 대답하고 와카오지의 대답도 듣기 전에 카노우 뒤를 따라 식당을 나갔다. 김전일은 이 여객선을 계속 짓누르고 있는 기묘한 낌새를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직감 능력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예전부터 김전일의 이러한 예감은 대부분 적중했다. "이봐, 왜 그래, 김전일? 나도 같이 가자구!" "아, 나두요!" 겐모치와 미유끼도 서둘러 김전일의 뒤를 따랐다. 뭔가 긴장감이 도는 상황이 되자 다른 손님들과 승무원들은 불안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멍하니 선장실로 향하는 다섯 사람을 바라보았다. "서두릅시다!" 김전일은 앞서가는 선원들을 재촉했다. 카노우는 김전일과 겐모치, 미유끼가 왜 자신들을 따라오는지, 왜 그렇게 조급해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나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고래를 갸우뚱거리면서도 걸음을 빨리 했다. 5 선장실은 3층의 조타실 바로 옆으로, 배의 진행 방향의 오른쪽, 그러니까 우현에 위치하고 있었다. "선장님, 다카모리 선장님! 주무십니까?" 카노우는 문을 두드리면서 소리쳤다. 안에서는 대답이 없다. "선장님, 문을 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카노우는 손잡이를 돌렸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아서 쉽게 열렸다. 커튼이 열려 있는 것 같은데도 방은 여전히 어두웠다. 남쪽으로 향하는 배의 우현, 즉 서쪽에 있는 데다 창문이 작은 탓도 있어서 아침 7시 반에는 아직 해가 들어오지 않았다. 카노우 항해사가 전등을 켜면서 다시 한번 불렀다. "선장님?" 역시 대답이 없다. 그러나 실내에서는 기묘하게 '사람의 낌새'가 느껴졌다. 방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김전일은 그것이 '사람의 낌새'가 아닌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정확히 말하면 '사람이 있었던 낌새'였다. 오래된 오크 제 테이블 위에는 깨끗한 접시와 포크, 나이프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쿡 하고 코를 찌르는 계란 타는 냄새에 섞여서 향기로운 빵 굽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냄새나는 쪽을 보자 전기 풍로 위에 프라이펜에서 달걀 프라이가 치직치직 소리를 내며 타고 있었다. 김전일은 토스터 속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두껍게 자른 빵이 적당한 갈색으로 구워져 있었다. 토스터는 아직 따뜻했다. 토스터 안에 있는 빵도 아직 따뜻한 채였다. 커피 메이커에서는 커피가 수증기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고, 그 옆에 커피잔까지 정확히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이 지극히 평범한 아침 광경이었다. 단, 준비된 아침 식사를 해야 할 인간의 보습만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선장님...?" 카노우는 다시 한번 부르면서 목욕탕 문을 열었다. 그러나 거기에도 사람의 모습은 없었다. 환기 팬 도는 소리만이 마치 배의 엔진 소리의 일부인 것처럼 있지도 않은 듯 울리고 있을 분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카노우가 목소리를 약간 떨면서 중얼거렸다. "선장님이 없어...." 지금까지 이 방에는 틀림없이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다카모리 선장이라 생각되는 그 인물은 모든 흔적을 고스란히 남겨 둔 채 돌연히 사라졌다. 입을 쩍 벌린 시공의 틈새로 빨려 들어간 듯 아무런 예고도 없이 모습을 감춘 것이다. "마리 세레스트호다...." 갑자기 입구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김전일은 뒤돌아보다 카메라 플래시 불빛에 눈에 찡그렸다. "당신은?" 은테 안경의 한 중년 남자가 오토 포커스의 일안 레프를 들고 있었다. 그는 눈에 잘 뛰는 명찰이 붙은 큰 카메라 백을 내려놓았다. 9명의 승객 중 한 사람인 아카이였다. "마리 세레스트호야. 이것은." 아카이는 계속 셔터를 누르면서 말했다. "마리 세레스트호?" 카노우가 되물었다. 아카이는 흥분한 얼굴이었다. "그래요. 당신도 선원이라면 들어 본 적이 있겠지요? 1872년 대서양 위에서 발견된, 사람이 없는 유령선 이야기." "...!" 카노우는 물론 김전일과 미유끼, 게다가 겐모치까지 동시에 생각이 떠올랐다. "여러분도 다 아는 것 같군요. 그래요, 어린이 대상의 괴담 책 같은 데 자주 나오는 그 유명한 유령선이오. 아침 식사 준비를 모두 갖춘 범선 안에서 선원만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린 바로 그 배입니다." "도대체...?" 김전일이 말하려 하자 아카이는 카메라를 아래로 내렸다. "아, 실례! 저는 아카이라고 합니다. 괴기 사진작가라고나 할까요? 이런 괴현상을 사진에 담는다거나 기사로 쓰는 일을 하고 있지요. 이번에는 이 배를 둘러싼 '소문'을 깨기 위해 왔습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그런데 어째서 이게 마리 세레스트호라는 거요? 우리들은 사라지지 않았어. 여기 이렇게 있지 않소!" 카노우가 흥분해서 떠들었다. 뭔가 잔뜩 겁을 먹은 듯이 입술이 떨렸다. "아, 당신은 모릅니까? 마리 세레스트호의 선장실 상황이 어땠는지? 먹던 계란, 마시던 커피와 놓여진 식기, 그리고 실종된 날 아침으로 끝나 있는 항해일지...." 그렇게 말하고 아카이는 테이블에 펼쳐져 있는 일기를 들어 보였다. "1994년 7월 23일. 오늘 날짜입니다. 어떻습니까, 마리 세레스트호와 똑같지 않습니까?" 무서운 공포감에 할 말을 잃고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아카이는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현대판 마리 세레스트호 사건입니다." 6 아침 식사를 마친 배 안은 암울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선장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아카이의 입에서 다른 승객들에게로 퍼져 있었다. 그러나 사라진 이유도 행방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승객들도 불안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선원들을 붙잡고 "배는 괜찮습니까?"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까요?" 등의 질문을 반복할 뿐이었다. 10시가 지나자 이윽고 리빙 홀에 승객들을 모아 사태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1등 항해사인 와카오지와 3등 항해사인 카노우가 불안한 승객들 앞에 섰다. 먼저 와카오지가 선장인 다카모리가 행방 불명되었기 때문에 앞으로는 자신이 선장 대행을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고서 앞으로의 대처 방법에 대해서 담담한 어조로 설명했다. 다카모리 선장은 치밀한 수색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행방불명 상태이며 배의 현재 위치로 보아 돌아가기보다는 오가사와라를 향해 가는 것이 낫기 때문에 이대로 항해를 계속할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승객들의 불안감이 노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배 위에서 행방 불명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승객 중 한 사람인 다카시가 선생에게 질문하는 학생처럼 손을 들었다. 보기 흉하게 다리를 떠는 것으로 보아 매우 불안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주 가까워진 여고생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어선지 애써 품을 쟀다. "선장님이 없어도 정말 괜찮을까요? 표류한다거나 하지 않을까요?" 여고생 중 한 명인 아케미의 목소리는 반쯤 울음이 섞여 있었다. 머리가 긴 유우도 한마디 했다. "구조는 받을 수 있겠죠? 정말로 괜찮은 거죠?" 그녀는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와카오지에게 물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와카오지는 단호하게 말하고 침착한 태도로 계속 말을 이었다. "먼저, 앞으로 달라질 상황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선장이 있을 때도 우리 세 항해사끼리만 교대로 핸들을 잡았기 때문에 배의 항해에는 사실상 거의 지장이 없습니다. 그리고 구조가 필요한 상황도 현재는 없으므로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승객들은 와카오지의 설명을 듣고 그제야 안심하는 표정이 되었다. 이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1등 항해사는 보통 사람ㅇ심지어 아닌 것 같다. 기관사인 오오츠키 말대로 '대단한 남자'라는 인상을 풍긴다. 선장이 행방 불명된 비상 사태에도 불구하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간단한 설명으로 승객들을 안정시킨 것이다. 그야말로 그 대단한 오리엔탈호 사고의 경험자답다. 그러나 오오츠키의 말대로 선원 수가 규정보다 크게 모자란다면 선장이 없어도 항해에 지장이 없다는 말은 맞질 않는다. "다음, 다카모리 선장의 행방 불명에 대한 것입니다. 제 추측으로는 잘못 실수하는 바람에 배 밖으로 떨어진 게 아닐까 합니다." 와카오지가 그렇게 말한 순간 아카이가 일어섰다. "이의 있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어제 나는 다카모리 선장과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그야말로 베테랑 선원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그렇게 간단히 배 밖으로 떨어진다는 게 말이 됩니까? 와카오지 씨. 사실을 말해 주시오. 우리는 앞으로 스스로 자신의 몸을 지켜야만 하니까요." "무, 무슨 말이에요, 그게...?" 아케미가 거의 울 지경이 되어 물었다. "아카이 씨, 그 이야기는 나중에--." 표정도 바꾸지 않고 와카오지가 말하자 이번에는 유우가 일어섰다. "뭔가 숨기는 것 아니에요? 어서, 사실을 말해 줘요!" 날카롭게 외치는 순간 긴장감이 돌았다. 모든 승객의 시선이 와카오지에게 집중되었다. 승객뿐 아니라 이미 사정을 알로 있는 종업원인 요우코와 기관사인 오오츠키도 새파래진 얼굴로 와카오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와카오지는 역시 그 표정 그대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숨기는 것은 없습니다. 손님들께서 다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다." "살해됐나요?" 다카시가 물었다. 꿀꺽 하고 사람들의 침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럴지도 몰라, 선장은 누군가에게--." 아카이가 뭔가 말하려 하자 와카오지는 단호하게 그 말을 끊었다. "아닙니다. 그런 사실을 없습니다." "살해됐다면 차라리 괜찮소." 아카이가 갑자기 일어서며 이렇게 말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선장은 사라진 것입니다. 한창 아침 식사 준비를 하다 갑자기 다른 창원으로 빨려들어간 겁니다." 아카이는 잠시 말을 멈추고, 놀라 입을 벌리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을 즐긴 다음, 더욱 힘을 주었다. "이 배는 저주받고 있습니다, 그것도 유령 선장으로부터." 7 "유령 선장!?" 그때까지 묵묵히 있던 3등 항해사 카노우가 아카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리쳤다. "유령 선장이라구요? 고스트 캡틴이란 말이군요. 그럼, 모르는 사람을 위해 마리 세레스트호 얘기를 좀 해 주십시오." 아카이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유령선의 전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먼저 말해 두는데,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1872년에 일어난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다큐멘터리입니다. 시작은 대서양 위를 항해중이던 범선인 데이 그라테아호가 앞에 가는 이상한 모습의 범선을 발견한 것에서 출발합니다. 도ㅍ이 누더기처럼 늘어져 있던, 그야말로 전설에나 나옴직한 유령선 같은 모습으로 항해를 계속하던 그 배가, 항해사상 최대의 수수께끼가 된 바로 그 마리 세레스트호였습니다." 이제 와카오지도 아카이의 말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와카오지 역시 선원이다. 그도 이 괴기 사진작가라는 중년 남자가 말하는 기묘한 '사건'에 대해 언젠가 듣고서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호탄에도 대답하지 않는 그 이상한 범선에 선장의 명령을 받은 데이 그라테아호의 선원 두 명이 보트를 타고 가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야말로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습니다. 그 배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갑판 작업원과 항해사, 선장조차도 타고 있지 않았습니다. 탐색에 나선 두 명의 선원들도 처음에는 태풍 같은 것 때문에 선원 모두가 배에서 도망쳤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곧 잘못된 생각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배 안은 평소 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선원들의 옷과 짐도 모두 그대로였고, 게다가 식당에는 아침 식사까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선장의 아내가 사용하던 재봉틀도, 아이들 장난감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선장실이었습니다. 달걀 프라이와 접시에 담긴 빵, 커피까지 있었습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뚜껑이 열린 약병이 내용물이 쏟아지지도 않은 채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배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태풍에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면 약병도 커피잔도 당연히 쓰러져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배 안에는 당연히 혼란한 상태를 말해 주는 흔적이 남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선장실의 항해일지에는 10일 전 아침의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즉, 발견되기 10일 전 아침에 마리 세레스트호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돌연히 증발해 버린 것입니다. 발견자들을 무엇보다도 떨게 만든 것은, 사람이 없는 이 범선이 10일 동안이나 항로를 벗어나지 않고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선원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고 합니다. 분명 유령 선장--고스트 캡틴이 키를 몰고 있었을 것이라고." "아주 똑같지 않습니까, 이 배와?" 갑자기 카노우가 끼여들었다. "맞아, 지금 얘기와 너무 똑같아. 이 배는 분명히 저주받고 있는 거야." "잠자코 있어, 카노우!" 와카오지가 굳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카노우는 멈추지 않았다. "와카오지 씨, 당신은 분명히 알고 있잖아요. 이 배가 유령선이라고 불리는 것을. 1년 전 당시 선장이 항해중에 사고로 죽고.... 그리고 그후 정박해 놓았는데도 조타실에 사람 그림자가 보인다거나, 아무도 타고 있는 사람이 보는데 한밤중에 멋대로 항구를 돌아다닌 적까지 있었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이 배에는 죽은 선장의 유령이 붙어 있다는 소문이 나서 아무도 접근하지 않았고.... 이제 당신들 차례가 온 게 아닌가요? 당신은 그 오리엔탈호의--." "그만해!" 와카오지가 갑자기 화를 냈다. 그 서슬에 숨쉴 틈 없이 지껄여대던 카노우도 그만 말을 멈췄다. "다카모리 선장이 없어진 것은 사고다. 그렇지 않으면 자살일 것이다. 선장은 근래 몇 년 동안 여러 가지 일로 고민이 많았어. 갑자기 자살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어. 그렇지 않은가, 카노우?" 와카오지는 흥분을 억누르고 눈에 핏발을 세웠다. 그러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카이가 반론을 폈다. "그래요? 그럼, 와카오지 씨, 당신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까? 선장은 아침 식사로 빵을 토스터에 넣고, 커피 메이커로 커피를 뽑고, 달걀 프라이를 하다가 갑자기 죽고 싶어져서 방을 뛰쳐나갔다는 겁니까? 세상에,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선장은 사라진 것입니다. 이것은 괴기 현상 그 자체입니다." "나는 둘 다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랜 침묵을 깨고 김전일이 말문을 열었다. "뭐라고?" 아카이가 눈을 크게 떴다. 김전일은 일어서서 말을 이었다. "자살도 아니고, 괴기 현상도 아닙니다." "아, 자네는 조금 전에 선장실에 함께 갔던 친구군, 이름이...." "김전일입니다." "김전일 군, 자네는 무얼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거지?" "일지입니다." "--?" "테이블 위에 항해일지가 펼쳐져 있지 않았습니까. 거기엔 아무 내용 없이 오늘 날짜만이 써 있었습니다. 아카이 씨, 당신은 그것이 언제 쓰여졌다고 생각합니까?" "다카모리 선장이 사라지기 직전이 되겠지. 선장은 일지를 쓰다가 갑자기 저주를 증발한 것이고." "그럼, 그것들은 뭐죠?" "뭐가?" "우리가 선장실에 갔을 때 풍로에 불이 켜 있고 프라이 팬 위에서 계란이 타고 있었어요. 그럼, 선장은 한창 요리를 하다가 없어진 거겠죠? 달걀 프라이를 하면서 일지를 쓰기 시작하다가 사라졌다는 건 아무래도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그럼 이건 어떨까? 선장은 아침에 일어나 일지를 쓰려고 날짜를 썼는데 도중에 그만두고 아침 식사준비를--." "그것도 이상합니다." "왜지?" "방에 전등이 켜 있지 않았으니까요." "뭐...?' "우리가 선장실에 간 것은 7시 45분경이었습니다. 그때 이미 달걀 프라이는 타고 있었고, 토스터의 타이머도 막 꺼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선원에게 들은 얘기로는 처음에 선장실에 인터폰을 한 시간은 7시 35분경이었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7시 반까지 선장은 방에 있었던 겁니다." "그것이 어쨌다는 거지?" "그 정도의 아침 식사 준비를 하려면 보통 15분 정도는 걸릴 겁니다. 그러면 선장이 일지를 쓰려고 생각한 것은 그보다 전인 7시 15분경이 됩니다. 그 시간이라 해도 태양은 동쪽 아주 낮은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남쪽으로 향하는 이 배의 우현, 즉 서쪽에 있는 선장실엔 채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당연히 어둡습니다. 따라서 선장이 일지를 쓰려고 하면 제일 먼저 할 일은 방의 전등을 켜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선장실에 들어갔을 때 전등은 켜 있지 않았습니다. 이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으음...."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어 버린 아카이 대신에 와카오지가 말했다. "그러니까 손님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군요. 선장은 돌연히 증발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도중에 포기하고 스스로 방을 나간 것이라고. 전등이 꺼져 있는 것이 그 증거이고, 나갈 때 선장이 끈 거라고." "그것은 더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뭐라고요?" "방의 전등을 끄고 갈 여유가 있는 사람이 달걀 프라이하는 불을 켜 놓고 가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선장실의 그 상태는 아침 식사 준비도, 막 쓰기 시작한 일지도 모두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선장 이외의 누군가에 의해서 말입니다." "이봐, 김전일, 그건 무슨 말이지?" 겐모치가 안색을 바꾸며 이야기에 끼여들었다. 김전일의 말투에서 '사건'의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즉, 이런 거예요, 아저씨. 선장은 그보다 훨씬 전에 그 방에 없었어요. 그리고 '누군가'가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아침에 식사 준비를 해 놓고, 또 일지에 날짜도 써 넣은 거죠." "음... 역시. 숫자 정도라면 필적 흉내도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김전일,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글쎄요,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떠면 선장의 실종을 아카이 씨 말대로 '마리 세레스트호 사건'을 흉내낸 건지도...." "흉내라...." 리빙 홀에 있던 모든 사람이 묵묵히 김전일과 겐모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100년 이상이나 지난 옛날의 괴사건을 모방해 선장을 '사라지게 한' 인간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로는 유령에 의해 사라졌다는 것보다도 더 무서운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김전일, 그 '누군가'란 어디의 누구라는 거지?" 겐모치가 물었다. "그걸 알면 고민할 필요가 없잖아요, 아저씨. 뭐, 정체 불명의 '유령 선장'이라고나 할까요?" "자, 잠깐. 그, 그러하다면 그 사람이 선장을 데려갔다는 건가...?" 카노우가 묻자 김전일은 대답했다. "어쩌면요. 그러나 데려갔다 해도 이곳은 태평양 한가운데인데 구명 보트도 남아 있으니 선장이 이 배에서 없어졌다면 살아 있을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즉--." 김전일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한번 둘러보았다. "선장은 그 '유령 선장'의 손에 의해서 살해된 게 되는 겁니다." 순간 승객도 선원도 일제히 뻣뻣하게 표정이 굳어졌다. 그 변화를 놓치지 않고 김전일은 즉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 정도로 해 두세요!" 와카오지가 단호하게 소리쳤다. "손님은 너무 지나칩니다. 터무니없이 불안감을 조성하는 발언은 삼가해 주십시오." "하지만 이 일은...." 겐모치가 나서려 하자 와카오지가 얼른 말문을 막았다. "선장이 없어진 이상 제가 선장 대행입니다. 이 배의 책임자입니다. 배에 타고 있는 이상, 저의 지시에 따라 주세요. 그럼, 우리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와카오지는 이렇게 말하고 카노우에게 눈짓하고는 함께 리빙 홀에서 나가 버렸다. 와카오지가 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요우코가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저 사람들 정말 기분 나쁜 사람들이에요. 정말 죄송합니다." 요우코는 양손을 앞으로 모으고 머리를 숙였다. 머리를 숙일 때마다 향긋한 샴푸 냄새가 풍겨 왔다. "아닙니다, 요우코 양. 어쩔 수 없겠죠. 확실한 증거도 없는데 살인 사건이니 뭐니 하는 건 선원들로 봐서는 당혹한 이야기일 테니까요." 와카오지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달리 겐모치는 아주 우쭐한 태도였다. 젊은 여자가 난처해하는 모습에 경찰도 약하긴 마찬가지안가 보다. "저, 잠깐만요." 갑자기 멍청한 남자인 다카시가 끼여들었다. "당신은 경찰이십니까?" 겐모치를 향해서 물었다. "그렇소." "그럼 지금 하신 말씀이 틀림없겠네요. 선장이 누군가에게 살해되었다는 말 말입니다." "난 몰라! 어떡하면 좋아...!" "몰라, 몰라, 집에 가고 싶어...!" 다카시 뒤에 숨듯이 붙어 있던 아케미와 유우가 서로 얼굴을 마주 대고 울먹였다. "지금 한 얘기가 사실이면 이 배에 살인자가 타고 있는 거잖아..." 머리가 짧은 아케미가 예쁘고 가는 눈썹을 파를 떨었다. 자세히 보니까 이 소녀는 고등학생으로서는 화장이 너무 짙었다. 눈썹도 밀어서 모양을 정돈한 것 같았다. 또 한 명인 유우도 아케미만큼 두꺼운 화장은 아니지만 요즘 유행하는 연한 색 펄이 든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의 모습을 찾고 있는 듯 커다란 눈동자를 움직이며 열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김전일이 그것을 의심스런 표정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유우는 멈칫하고, 즉시 시선을 겐모치에게 향했다. "그럼, 범인은 누구죠? ...어쩌면 선원들 중의 주군가...." "글쎄...." 겐모치가 김전일에게 시선을 보냈다. 김전일이 그것을 받다 "분명히 너희들이 아닐까 생각해." 김전일은 일부러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농담을 했다. "하하하하! 역시,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겐모치는 큰 소리로 웃으며 일어섰다. "자, 그만 우리는 방으로 돌아갈까?" 8 겐모치 방에 네 사람이 모이게 되었다. 부인이 차를 끓이는 동안 겐모치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김전일? 그 1등 항해사인 와카오지, 내 느낌으론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아." "그런 느낌이 들어요." "그렇지? 역시 모든 그 놈이 선장을..." "그런 말 하기엔 너무 일러요, 아저씨, 숨기는 게 있으면 뭔가 노리는 것도 있겠죠." "그렇지...." 둘의 대화를 듣고 겐모치 부인 카즈에가 끼여들었다. "어느 쪽이 형사인지 모르겠네요, 정말." "시, 시끄러. 당신은 잠자코 차나 주면 돼." "어머! 왜 그래요, 당신? 김전일 군과 미유끼 양 앞이라고 그렇게 으스대지 말아요!" 카즈에가 무서운 눈으로 째려보자 겐모치는, "아, 아니. 당신 말투가...."라고 우물쭈물하며 기가 죽었다. "그만하세요, 두 분. 열다섯 번째 결혼 기념 여행인데 사이좋게 지내셔야죠." 미유끼가 웃으면서 두 사람을 말렸다. 겐모치는 갑자기 창피했는지 얼굴이 벌개져서 다시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김전일. 내가 아무리 형사라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선원들을 심문한다는 게...." "역시 그렇겠죠?" "응. 살인이 있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어. 뭔가 물증이 있으면 강력하게 권한을 행사해도 나중에 할말이 있지만." "물증이라... 이곳은 바다 한가운데고 시체는 지금쯤 끝을 알 수 없는 바다 위에 있고... 아!" "왜 그러지, 김전일?" "무선은 어떻게 되었죠? 배엔 반드시 무선이 있잖아요. 그걸로 해안 보안청에 연락해 헬리콥터 같은 걸 보내 달라면 아직은 시체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아, 잠깐! 선장이 행방 불명되었다면 당연히 누군가 무선으로 연락을 취하지 않았을까요? 아저씨, 선원 아무한테나 물어 봐 주실래요?" "그, 그러지." 겐모치는 곧 인터폰으로 물어 보았다. 그러나 겐모치의 표정이 차츰 일그러졌다. 수화기를 놓고 겐모치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일이 힘들게 됐어, 김전일. 무선은 사용 불능이 된 것 같아." "뭐라고요! 그게 사실이에요?" "아침 7시쯤까지는 됐던 것 같은데, 10시쯤 와카오지가 선장이 행방 불명이 된 것을 연락하려 했더니 기계가 물에 젖어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대." "그것을 고칠 수 없을까요?" "고치긴 어려워." "겨, 경감님, 그럼...." 미유끼가 얼굴이 하얘지며 말을 더듬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 데도 연락을 못 하는 건가요?" "그렇게 되나...." "안 돼요! 어떡해요, 이대로 표류해 버리면..." 미유끼가 소리쳤다. "괜찮아, 미유끼. 이 정도 배가 무선 하나 망가졌다고 그렇게 간단히 표류할 것 같아?" "하, 하지만...." "그러나, 김전일." 겐모치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네 말대로 이건 '사건'일지도 몰라." "그렇다니까요." 김전일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단호하게 말했다. "무전기를 망가뜨린 것도 다카모리 선장의 실종과 마찬가지로 '유령 선장'의 짓일지도 몰라요." "어떻게 해야 하지, 김전일?" "아무튼 빨리 이것이 '사건'이라는 걸 증명할 단서를 찾아야겠어요. 자칫하다간 너무 늦어 버릴 것 같아요." "그럼, 선장실에 가 보자는 말인가?" "네. 다시 가서 조사해 봐요." 김전일과 겐모치는 카즈에가 준 차엔 손도 대지 않고 방을 나왔다. 9 두 사람은 카즈에와 미유끼를 방에 남겨 둔 채 선장실로 향했다. 선장실은 잠겨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아저씨?" "어떻게 억지로라도 열어 볼 수밖에." 둘이 잠시 선장실 앞에서 망설이고 있을 때 복도 끝에 있는 조타실 문이 열렸다. "김전일 씨, 겐모치 씨?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조타실에서 나온 사람은 미즈사키였다. "아, 미즈사키 씨. --그렇지! 지금 바쁘십니까?" "아니오, 조타실 근무는 오후 10시부터라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만, 왜 그러시죠?" "그럼 잘 됐군. 미즈사키 씨, 부탁이 있습니다." 김전일은 선장실 문을 열어 달라고 부탁했다. "글쎄요...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와카오지 항해사가 뭐라 할지... 이곳 열쇠는 당연히 그가 갖고 있을 테니까요." "한번 부탁해 주겠습니까?" "음... 그러나 1등 항해사는 2시에 조타실 근무를 마치고 지금은 방에서 잘 겁니다. 지금 깨우면 밤 근무에 영향이..." "그러면 이 문을 어떻게..." 김전일은 두 손을 비비며 말끝을 흐렸다. "할 수 없군요, 마스터 키를 사용합시다." 미즈사키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마스터 키?" 그런 것이 있었습니까?" "네. 배 아랫부분에 있는 기관실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시켜 가져오게 하겠습니다." "아, 잠깐만요. 그 열쇠는 그렇게 아무나 가져올 수 있나요? 예를 들어 일반 종업원이라든가." "종업원이라면 좀..." "손님은 어떻습니까?" "글쎄요, 하지만 손님들은 열쇠를 어디서 관리하고 있는지 모를 테니까..." "그렇군요..." 김전일은 턱에 손을 대고 생각에 잠겼다. 그것을 옆눈으로 보면서 미즈사키는 복도의 인터폰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한참이 지나 선원 한 명이 마스터 키를 자지고 나타났다. "그럼, 열겠습니다." 미즈사키가 선장실 문에 열쇠를 꽂았다. 방 안의 상태는 커피 메이커와 전기 풍로, 토스터 스위치가 꺼져 있는 것을 빼고는 아침에 보았을 때 그대로였다. 그러나 오후 3시를 지나는 때여서 서쪽으로 햇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어두워서 전등을 켜야 했던 아침보다는 매우 밝은 인상이었다. 겐모치가 앞장서서 전등을 켜지 않고 실내에 발을 들여 놓았다. 뒤따라 김전일이 들어가려 했을 때였다. "--?" 갑자기 벽을 쳐다본 김전일이 발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가까이 다가가서 한 군데를 응시했다. "아저씨, 이것 좀 보세요!" 김전일은 소리치면서 입구에 있는 큰 구식 전등 스위치 옆을 가리켰다. "왜 그러지? 뭐가 있나?" 겐모치는 가까이 다가와 가리키는 부분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직경 1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작고 검붉은 '얼룩'이었다. 그러나 벽이 새하얀 비닐 벽지로 발라져 있어 확실하게 눈에 들어왔다. "아니! 김전일, 이것은...!" 겐모치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 "핏자국이야. 틀림없어." "핏자국...?" 미즈사키도 깜짝 놀라며 더욱 자세히 보았다. "어떻게 된 거지? 아침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는데." 겐모치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무리도 아니에요. 아침에는 이 방에 햇빛이 없어 어두웠잖아요. 그래서 방에 들어오면서 바로 이 전등 스위치를 켰어요. 이런 식으로." 김전일은 폭 3센티미터, 길이 4센티미터 정도인 구식 스위치를 올렸다. 껌뻑껌뻑하며 작은 소리가 나더니 형광등이 켜졌다. "아, 그랬군... 역시, 보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군." 겐모치가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확실하게 보였던 핏자국이 전등을 켜자 큰 스위치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범인'도 이런 이유로 여기 묻은 핏자국을 못 보았을 거야." 김전일이 이렇게 중얼거리자 미즈사키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네? 범인이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다카모리 선장을 죽인 범인 말이에요." 김전일이 대답했다. "주, 죽었다고요!? 설마 그럴 리가..." "아닙니다, 틀림없습니다. 다카모리 선장은 바로 이 방에서 칼이나 단단한 흉기 같은 것으로 살해당한 것입니다." 김전일이 스위치를 껐다. 그러자 핏자국이 다시 선명하게 나타났다. "이 핏자국이 그 증거입니다. 스위치 뒤에 핏자국이 있는 것으로 봐서, 범행은 선장이 자고 있는 깊은 밤에 행해졌을 겁니다. 어쩌면 범인은 한밤중에 이곳에 들어와 선장을 살해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 그때 선장이 눈을 뜬 거죠. 그러자 범인은 도망치려는 선장을 뒤쫓아서 이렇게--." 김전일은 하나하나 몸동작을 해 보였다. 침대 쪽에서 누군가를 쫓는 것처럼 방문을 향해 걷더니, 뭔가를 잡듯이 주먹을 쥐었다. "들고 있던 흉기로 선장을 죽인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김전일은 쳐들고 있는 손으로 찌르는 시늉을 했다. 미즈사키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서, 김전일의 몸동작을 쳐다보고 있었다. 겐모치는 그런 몸동작엔 익숙해져 있다는 표정으로 묵묵히 팔짱을 끼고 김전일의 추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김전일은 계속 말을 이었다. "사건 당시 이 흰 벽에는 분명히 다카모리 선장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튀었을 것입니다." 물론 바닥에는 더 많은 피가 묻었을 테구요. 범인은 전등을 켜고 그 참상을 보자 몹시 당황해서 핏자국을 닦았을 겁니다. 그러나 전등을 켤 때 스위치 뒤에 묻어 버린 이 작은 핏자국만은 전혀 보지 못한 거지요. ...그런 게 아닐까요?" 여기까지 추리를 하던 김전일은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다. "--잠깐! 그런데 아저씨, 어째서 범인은 그런 '서투른 살인 방법'을 택했을까요?" "응? 그건 무슨 뜻이지?" 묻는 겐모치 쪽은 보려고도 하지 않고 김전일은 부엌 주위를 뒤지기 시작했다. 식기장을 열어 보고, 개수대 밑의 수납장과 냉장고까지 다 보고 나서 김전일이 말했다. "역시 그랬군요, 알았어요, 아저씨." "뭐를 알았다는 거야?" 겐모치가 애매하게 묻자, "왜 범인이 벽에 피가 튀는 서투른 살인 방법을 택했는지를요." "으응?" "이런 게 아닐까요? 범인은 필사적으로 피를 닦았어요. 한밤중에 잠자는 시간을 틈타 방에 침입했다는 것은 처음부터 살인할 생각이었다고 밖에 할 수 없어요. 그러면 목을 졸라 죽인다거나, 독을 사용하는, 현장에 흔적이 남지 않는 살해 수단을 준비하는 것이 자연스런 심리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그래서 뭔가 그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이 없을까 찾아보았어요." "뭐가 있었나?" "아니오, 있었다기보다는 '없었다'입니다." "뭐가?" "과일 깎는 칼이오." "칼?" "봐요." 김전일은 냉장고를 열어 보였다. "우유며 계란 외에 과일이 많이 들어 있잖아요. 키위와 사과, 망고까지 있어요. 그런데 이 방에는 과도도 없고 큰칼도 역시 없어요. 식사용 칼로는 과일을 깎기 힘들어요.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자연스러워요." "음.... 그럼, 그 없어진 칼이 흉기라는 건가?"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범인이 그것을 치웠습니다. 물로 씻어 원래 장소에 놓아 두어도 됐을 텐데 왠지 둘 수 없었나 봅니다." "흠. 흉기를 현장에 남겨 둔다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까. 심리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지. 게다가 최근의 검사 방법은 아무리 깨끗이 씻은 것이라도 혈액을 검출할 수가 있거든." 겐모치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생각이 난 듯이 김전일이 다시 목청을 높였다. "아! 범인은 분명히 어떤 '흔적이 남지 않는 살해 수단'을 준비해서 이 방에 들어왔을 겁니다. 그런데 침대에 가까이 가서 '이때다!' 한 순간 다카모리 선장이 눈을 뜬 겁니다. 그래서 선장과 맞붙게 된 범인은 준비해 온 살해 수단인 흉기를 떨어뜨린 게 아닐까요?" 김전일은 바닥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범인은 무척 당황했을 겁니다. 실내가 완전히 캄캄한 건 아니지만 부엌 쪽의 작은 불빛과, 창문의 달빛만으로 바닥에 떨어뜨린 흉기를 찾기는 매우 어려울 테니까. 그러니 입구 바로 옆에 있는 전등 스위치를 켜고 다시 흉기를 찾을 만한 여유는 더욱 없었겠죠. 아무튼 선장이 밖으로 도망치면 모든 게 끝장이니까요. 소리를 지르면서 다른 방문을 두드린다면 아무리 한밤중이라도 사람들이 나올 것 아닙니까? 아니, 무엇보다도 바로 옆의 조타실에서는 맑은 정신으로 핸들을 잡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그렇지요, 미즈사키 씨?" "네. 오전 2시까지는 제가 있었고, 그 이후엔 오전 8시까지 와카오지 1등 항해사가 있었습니다." 미즈사키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묻어 났다. 김전일은 자랑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겐모치를 쳐다보고 추리를 계속했다. "그래서, 당황한 범인은.... 음, 당황한 범인은 다른 흉기를... 으음?" 김전일은 말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지, 김전일?" 겐모치가 의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아서... 아무리 방이 어둡다지만 다른 사람의 부엌에서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칼을 찾는다는 게... 그보다는 바닥에 떨어진 흉기를 줍는 게... 음... 아, 그렇지! 그렇다면 말이 되지." "뭘 혼자서 중얼중얼하는 거야?" "아니에요, 이니에요. 잠깐 헷갈렸어요. 범인보다 먼저 다카모리 선장이 부엌에서 칼을 집어든 거예요. 선장이라면 칼이 어디 있는지 당연히 알 테니까요. 그때 범인은 선장이 밖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즉시 입구를 막은 겁니다." "맞아. 그 뒤는 알겠다, 김전일." 겐모치는 부엌에서 뭔가 집는 시늉을 하더니 입구 앞에 선 김전일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선장은 이런 식으로 범인을 향해 칼을 쳐들었다. '저리 비켜!'라고 하며. 그러나 범인은 즉ㅅ심지어 선장에게 덤벼들어 칼을 빼앗아...." 겐모치가 여기까지 말하자 김전일이 겐모치의 손에서 칼을 빼앗는 시늉을 했다. "거꾸로 선장을 푹 찔러 버렸다. 뭐, 이런 것이겠죠?" "응. 만약 이 추리가 맞는다면 용의자는 상당히 좁혀지는 거야, 긴전일." 겐모치는 힘주어 말했다. 그러고는 움켜잡은 김전일의 팔을 틀어쥐고서, "어쨌든 피해자는 50대의 강인한 바다의 남자다. 범인이 너처럼 연약한 놈이었다면...." 라면서 김전일의 팔을 비틀었다. 김전일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 아파요! 무슨 짓이에요, 아저씨!" "하하하하! 이런 식으로 간단히 잡혀 버렸을 거야." "그렇다고 진짜로 하기예요!" 김전일이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쳤지만 겐모치는 잘못했다는 기색도 없이 계속 말을 이었다. "즉, 칼을 뺏아 찌르는 행동은 보통 힘 가지곤 어렵다는 얘기지. 그러니까 범인은 미 배에 타고 있는 스물한 명 중에서 연약한 여자와 노인을 뺀 '누군가'가 되는 거다. 어때, 김전일?" "아직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그럴 거예요. 똑똑하시네요, 아저씨." 김전일은 손목을 문지르면서 비아냥거렸다. "아무튼 이제 경찰이 나서야 할 때에요. 아저씨." "좋아! 심문은 나에게 맡겨!" 겐모치는 손가락을 두두둑 두두둑 소리나게 꺾었다. "동기가 될 만한 사실을 철저히 캐낸 다음, 그 다음은 알리바이다. --아니, 잠깐! 시체가 나오지 않았으니 범행 시각을 모르는데...." "무슨 소리예요, 아저씨! 범행 시간은 몰라도 위장 공작을 한 시간은 대충 알잖아요." "그렇지! 그럼 오늘 아침의 알리바이가 필요한 거군." "범인은 한밤중에 다카모리 선장을 칼로 찔러 죽인 후 서둘러 핏자국을 닦고 흉기를 정리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선장이 아침 인사에 나오는 시간에 임박해 다시 선장실로 들어가 현재 상태대로 만들었다. 선장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여러 가지 흔적을 남긴 것이다. 이 추리가 맞는다면 위장 공작을 했다고 생각되는 아침 시간의 알리바이를 조사하면 당연히 범인을 알게 되잖아요. 참! 그런데 항해일지에 날짜를 쓰고, 테이블에 식기를 놓고, 그리고 커피를 끓이고, 토스터에 빵을 넣고, 달걀 프라이를 한다. 이런 작업을 서둘러 한다면 대충 어느 정도 걸릴까요?" "음.... 아무리 발라도 한 10분은 걸릴 거야." 그러자 김전일은 과장된 몸짓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어이쿠, 가엾으셔라! 매일 아침 직접 식사를 차려 드시는군요, 아저씨." "못된 녀석! 어른을 놀리면 못써. 급한 사건 때문에 아침 일찍 나올 때만 그래. 아주 가끔 그럴 분이야." "알았어요, 알았어요. 아무튼 10분 정도라면 위장 공작은 가능하다는 거죠? 그럼, 다음은 범인이 아침 몇 시 몇 분에 위장을 했는가를 추정해 볼까요?" "선원의 증언에 의하면 아침 7시 35분에 인터폰으로 불렀을 때는 이미 선장실에 아무도 없었다고 했어. 그러니까 그보다 전이 아닐까?" "아니, 그렇지 않아요. 범인이 그때 방에 있었다 해도 대답할 리가 없잖아요. 확실한 건 우리들이 선장실에 간 '7시 45분'이라는 시간뿐이에요. 선장실의 토스터와 커피 메이커가 따뜻했던 것과, 계란 타는 냄새로 보아 10분에서 15분 정도는 지났을 거예요. 반대로 말하면 30분은 지나지 않았던 거고. 그러니까 오늘 아침 7시 15분부터 7시 35분까지의 20분 중에서 10분, 아니 7, 8분 정도 알리바이가 없는 사람이 범인일 가능성이 높게 되는 거죠." "좋았어! 가자, 김전일! 거기까지 나왔으면 범인은 거의 잡은 거나 다름없어!" 겐모치는 호탕하게 말하며 손뼉을 쳤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대답했지만 김전일은 약간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기세 좋게 단번에 풀어 버린 추리에 조금 꺼림칙한, 그러나 치명적인 허점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납득이 안 가는 표정인 김전일을 보고 겐모치도 기세가 누그러졌다. 겐모치는 얼른 미즈사키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미즈사키 씨. 당신은 와카오지 씨를 깨우십시오. 그리고 모두 다 모이게 해 주십시오. 도저히 자리를 뜰 수 없는 사람만 제외하고, 손님이건 선원이건 모두 다 식당으로 모이라고 하세요" "뭘 하실려고요?" "알고 있잖습니까? 사정 얘기를 들어 보려는 겁니다. 이번에는 분명히 협조하게 할 겁니다. 핏자국이 발견된 이상 살인 사건의 의혹이 매우 짙습니다." 미즈사키는 얼굴을 찡그리며, "어쩔 수 없군요." 라고만 말하고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겐모치에게 마스터키를 건네주고 선장실을 나갔다. 제4장 악몽의 밤 1 해는 어느새 지고 배는 또 별이 빛나는 밤하늘 하래 있었다. 항해 자체는 순조로웠다. 그러나 그 순조로운 평온이 오히려 선장의 실종 사건을 새하얀 옷에 묻은 얼룩처럼 두드러지게 했다. 승무원과 손님 대부분이 식당에 모였다. 저녁 식사를 마쳤지만 겐모치 경감의 요청에 따라 조사에 협력하기 위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타실에서 키를 잡아야 하는 3등 항해사 카노우와, 기관사인 오오츠키 대신에 기관실 근무를 하고 있는 선원 한 명은 식당에 오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겐모치를 피하듯이 방에 틀어박혀 있는 승객 '나카무라 이치로'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요우코에게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사다 달라고 했던 그 이상한 남자는 식사 때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겐모치의 요청에도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여전히 방문을 잠그고 틀어박혀 있었다. 겐모치도 정식 절차를 밟은 조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강제로 데려올 수 없었다. 그래서 협조에 응한 사람들부터 취조하기로 하였다. 겐모치는 김전일과 함께 취조하고 싶었지만 경관도 아무것도 아닌 김전일이 함께 있으면 상대방이 거북해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그 대신 한 사람씩 리빙 홀로 오게 해서 겐모치가 취조하는 동안 김전일이 바로 옆방인 오락실에서 그들의 얘기를 듣게 했다. 맨 먼저 들어온 사람은 기관사인 오오츠키였다. 말하고 싶은 것이 많다고 스스로 제일 먼저 할 것을 희망했던 것이다. 올해 67세가 된다는 이 기관사는 앞에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나는 범인을 알아요." "뭐요!? 누굽니까, 그게?" 겐모치가 묻자 오오츠키는 히죽 이를 내보였다. "와카오지라면, 그 1등 항해사 말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그 남자가 뭔가 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아니오, 보지 못했소. 하지만 그 놈은 전부터 다카모리 선장을 미워했으니까." "미워했다구요?" "그래요. 그 놈은 원래 동아 오리엔트 해운의 엘리트였소. 그 놈은 이런 폐선 직전의 배에 타게 된 것이 순전히 다카모리 선장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 음.... 그럼 실제는 어떻습니까? 정말로 피해자인 다카모리 선장은 와카오지 씨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일을 했습니까?" "글쎄, 그건 모릅니다. 그저 나는 그런 소문을 들었을 뿐이니까." "소문이라.... 그렇지만 소문만 듣고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 아닙니까?" 겐모치가 조금 실망한 듯이 말하자 오오츠키는 강력하게 주장했다. "틀림없소. 그라면 했을 거요. 뱀처럼 교활하고 집념이 강한 인간이니까. 그 오리엔탈호 사건 때도 그 놈이 약삭빠르게 처신해서 사고 책임을...." 갑자기 오오츠키가 우물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즉시 겐모치가 다그쳤다. "뭡니까, 그 얘기는? 자세히 말해 보세요." 겐모치가 다그치자 오오츠키는 마지못해 말문을 열었다. 전에 김전일과 미유끼에게 했던 다카모리 선장과 와카오지의 관계, 그리고 오리엔탈호 사건에 대해 짧게 말했다. "다카모리와 와카오지 두 사람이 결탁해서 그 사건의 책임을 잘 피했다는 소문도 있어요. 어디까지나 소문이지만...." "저런... 치사하군. 아무튼 그것은 대단한 사건이었으니까. 승객이 무척 많이 죽었다고 들었는데, 그러니 그중에서 누군가 선장이었던 다카모리 씨에게 원한을 가질 가능성이 높아...." "하, 하지만 난 어디까지나 소문이라고 말했소. 그 사건의 책임은 오리엔탈호와 충돌한 유조선 쪽에게 있어요. 그러니 원한을 산다면 그쪽이오. 동아 오리엔트 해운에는 책임이 없소. 형사님, 지금 말한 것은 절대로 회사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이 나이에 어렵게 일자리를 구했는데 회사를 험담한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오오츠키는 얼굴색이 하얘지며 말했다. 그러자 겐모치가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경찰에겐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증언자에게 불이익이 될 만한 것은 입이 찢어져도 말하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데 그 부딪쳐 온 유조선 쪽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만약 아신다면...." "모릅니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모릅니다. 상대임 유조선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카노우에게 물어 보시오." "카노우?" "3등 항해사인 카노우 말이오. 지금 조타실에 있는 남자요." "아, 그 신경질적인 남자 말입니까? 그 사람이라면 상세하게 알고 있습니까?" "당연하죠. 그는 그 유조선에 타고 있었으니까." "뭐, 뭐라고요!?" 겐모치는 저절로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 그런 사람이 어째서 오리엔탈호의 선원이던 사람들과 함께 이 배에 탄 거죠?" 겐모치가 갑자기 달려들듯 묻자 오오츠키는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모, 몹니다. 정말로 몰라요. ...나는 그가 지병 때문에 정식으로 배에 탈 수 없어 이 배에 왔다고만 들었을 뿐...." "지병이라구요? 도대체 그 병에 뭐죠?" "뭐라더라... 어려운 이름의 병인데. 나르코라든가 니르카라든가, 아무튼 일단 잠들면 일어나지 못하는 병이라던데.... 이 배에 타고도 종종 그 병 때문에 근무 시간을 완전히 빼먹은 일이 있어요." "다카모리 선장과 와카오지의 입장에서는 그 카노우라는 남자가 자신들의 배를 침몰시킨 사람 중의 한 명일 텐데 잘도 그런 남자와 함께 일을 하고 있군요." "카노우를 이 배에 타게 한 사람이 와카오지라는 소문도 있어요." "캬아! 또 소문입니까? 이 배에는 이유도 알 수 없는 소문이 도대체 몇 가지나 돌고 있는 겁니까?" 겐모치가 한숨을 쉬었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묻겠는데 당신이 오늘 아침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말해 주십시오." "나는 기관사니까 기관실에 있었어요. 기관부 직원도 함께 있었소." "그렇습니까? 그럼 이제 됐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겐모치는 수첩을 덮었다. 2 오오츠키 다음에 취조를 받음 사람은 승객인 아카이였다. 괴기 사진작가를 자칭하는 이 중년 남자는 카세트를 가지고 들어와 겐모치 앞에 앉았다. "그것은 왜 가져왔습니까?" 불쾌한 얼굴로 겐모치가 묻자 아카이가 즉시 대답했다. "취재를 하려고 합니다. 안 됩니까?" "당신은 기본적인 상식도 없습니까!" 겐모치의 혈관이 불거졌다. "하하하하! 미안합니다." 아카이는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었다. "안 된다면 좋습니다. 자, 그럼 시작하시지요, 경관님." "내 참.... 그럼, 먼저 묻겠는데,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 배에 탔습니까?" "일 때문입니다. 취재하기 위해서죠." "취재라구요? 무엇을 취재하려는 거죠? 설마 선장의 실종 사건에 대해서는 아니겠지요. 배에 타기 전부터 이런 일이 일어날 걸 안 사람은 범인밖에 없을 테니까요." "아니, 나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뭐라구요?" 겐모치가 눈을 크게 뜨고 언성을 높이자 아카이는 또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하하하하! 아니, 그렇다고 내가 범인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실은 이 배에 사고로 죽은 선장의 귀신이 씌어 있을지 모른다는 정보를 입수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영적 현상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을까 하고 탄 것입니다." "쳇! 말도 안 돼. 배에 귀신이 씌어 있다니. 그런데 당신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합니까?" "아, 물론이죠. 이 정보는 매우 신뢰성이 높은 겁니다. 2개월쯤 전에 오가사와라 섬에서 한밤중에 아무도 타지 않은 이 배가 제멋대로 항구 안을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엄청난 이야기지요." "정말 엄청난 이야기군요. 그런데 그것을 믿는 당신은 더 엄청나군요." 겐모치가 비아냥거려도 아카이는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이 배는 원래 1년쯤 전에 당시의 선장이 사고로 죽었습니다. 그때 그런 소문이 나서 그 뒤론 아무도 타지 않게 되었지요. 자세히 조사를 해 보니까 떠돌던 그 소문은 단순히 소문에 불과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재가 입수한 정보는 숙직하던 경비원조차 분명히 목격한, 그야말로 확실한 괴현상입니다. 게다가 얼마 후면 이 배는 폐선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번에 타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오호라, 그럼 당신은 유령 사진을 찍기 위해서 이 배에 탔다, 그거군요?" 겐모치는 턱을 고이고서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그렇습니다. 실체화된 유령은 아직 찍지 못했지만, 하지만 유령이 일으킨 괴현상은 확실하게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선장실을 확실하게 찍어 두었으니까요. 그것만으로도 이 배를 탄 보람은 있습니다." 아주 만족스런 표정인 아카이에게 겐모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가 나 소리쳤다. "당신 마음대로 해! 하지만 이건 유령이 한 짓도 아니고, 게다가 4차원으로 빨려들어간 것도 아냐. 분명한 살인 사건이야. 이제 됐어. 당신 방으로 돌아가. 더 얘기를 듣다간 나까지 미쳐 버리겠어!" "하하하!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아카이는 여유 있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빙 홀을 나가려다 말고 그는 갑자기 뒤돌아 섰다. 그러고는 조급하게 수첩에 메모를 하던 겐모치에게 말했다. "참, 경관님. 중요한 걸 빠뜨릴 뻔했습니다." "뭡니까. 아직도 뭐가 남았소?" 겐모치가 화를 참느라 이를 악물었다. "요리사에게 물어 보면 알겠지만, 나는 오늘 아침엔 6시부터 계속 식당 창가에서 아침해를 찍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선장을 데려간다거나 죽이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겠지요?" 아카이는 그렇게 느물거리면서 리빙 홀을 나갔다. 3 아카이 다음으로 여고생인 아케미와 유우가 겐모치 앞에 앉았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긴장해 손을 떨고 있었다. "저... 우리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몰라요...." 머리가 짧은 아케미가 말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그것을 본 겐모치는 가엾은 생각이 들어 조심조심 말했다. "괜찮아. 그렇게 겁먹지 마. 내가 잡아먹지는 ㅎ을 테니까. 그저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하면 돼." "네...." 두 사람은 힘없이 대답했다. "자, 그럼 아케미 쪽부터 묻겠는데, 자네는 고등학생인가?" "네, 2학년입니다." 겐모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첩에 적어 넣었다. "그럼, 또 한 명인 유우 양. 자네도 고등학생이겠지?" 그러나 유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두껍고 작은 입술을 앞으로 내민 채 아래를 쳐다보고 있다. "왜 그러지? 아닌가?" 겐모치가 조금 의외라는 듯이 다시 물었다. 그러자 유우는 검고 큰 눈을 떨면서 친구인 아케미를 힐끗 쳐다보았다. "저는 학교에 다니지 않습니다." "유우는 사정이 있어서..." 아케미가 거들어 주듯이 말했다. "무슨 이유일까? 가능하면 말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겐모치가 부드럽게 묻자 유우는 단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굳어지는 그녀의 표정에 밀려 겐모치는 더 이상 묻는 것을 포기했다. "알았어. 알았어. 묻지 않지. 그럼, 마지막으로 오늘 아침 너희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알고 싶은데." "우리들은 7시경부터 계속 다카시 씨와 함께 있었습니다." 아케미가 대답했다. "다카시라면 그...." 겐모치는 '경박한 놈'이라고 말하려다가 얼른 다음 말을 삼켰다. "네, 맞아요." 두 사람이 자신에 차 함께 대답했다. "어이에 있었지?" 이번에는 유우가 대답했다. "셋이서 객실층 복도 맨 끝 베란다에 있었습니다." "계단 옆에 있는 베란다?" "...그렇습니다." '7시경부터 몇 시까지 있었지?" 겐모치의 목소리가 점점 진지해졌다. 유우는 그것을 느끼고 아케미와 서로 마주 보았다. "...아침 식사 안내가 방송될 때까지니까 7시 반이었을 거예요." "그럼, 그 사이에 계단을 지나간 사람은 보지 못했나?" "선원들이 계속 청소를 했지만, 그것말고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너는, 아케미?" 유우가 묻자 아케미가 대답했다. "청소하고 있던 선원들 외에는.... 아! 경관님과 중년 여자분이 아래로 내려오는 걸 봤습니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우리들도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그래...." 라고만 말하고 겐모치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오락실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곳에서는 김전일이 모든 얘기를 듣고 있었다. 4 다카시는 입을 헤 벌리고 겐모치 앞에 앉자마자 말했다. "나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심문을 받아야 하는 거죠?"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판단할 일이야. 자네는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면 돼." 겐모치가 말했다. 차츰 피곤이 몰려와 말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 기세에 주춤해졌는지 다카시는 어깨를 움찔하며 힘없이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알았으면 됐어. 우선 나이와 이름, 그리고... 분명히 대학생이라고 했지? 어느 대학이지?" "오오사와 다카시, 26세? 대학생치고는 너무 나이가 많군." "아니오, 그게... 실은 대학생이 아닙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뭐? 그럼 여고생들에게 한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단 말야?" "...네." "세상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야? 너 같은 사람 때문에 요즘 젊은이들이.... 에잇, 그래 좋아, 좋아.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니지. 아무튼 너에게 묻고 싶은 건 여고생 둘과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함께 있었느냐는 거야. 얼른 대답하고 돌아가." "...아, 그것만이면 됩니까?" "그것만이면 돼. 그것으로 일단 알리바이가 성립돼." 다카시는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분명히 7시부터.... 음, 아침 식사 방송이 있을 때까지니까 7시 반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셋이 계속 같이 있었나?" "네, 거의 함께 바다를 보고 있었습니다." "거의? 중간에 누군가 빠졌다는 말인가?" "유우 양이 방에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곧 돌아왔습니다." "그게 몇 시경이지?"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마지막으로 묻는데 그 유우 양의 방은 어딘가?" "음, 복도 맨 끝 오른쪽에 있는 201호실이었나...?" 다카시는 그렇게 말하고는 겐모치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제가 말했다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알았어!" 겐모치는 고함을 치며 탁 소리가 나게 수첩을 덮었다. 5 "경관님, 정말로 선장님은 살해된 건가요?" 겐모치 앞에 앉자마자 요우코가 물었다. 그녀는 식사 뒷정리를 막 끝내고 왔는지 아직 물기가 남은 손을 에이프런에 문지르고 있었다. "응. 거의 틀림없을 거야." 겐모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까 얘기했듯이 선장실 벽에서 핏자국이 발견되었어. 시체를 찾지 못해 단정할 순 없지만 바닥이나 벽을 검시해 보면 대량의 피를 닦은 흔적이 당연히 발견될 거야. 그렇게 되면 살인 사건으로 본격적인 수사가 이루어지게 되지." "설마, 살인이라니.... 난 그저 아카이 씨 말처럼 유령이 한 짓으로밖에...." 요우코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얼버무렸다. "어리석긴! 뭐가 '유령 선장'의 짓이야! 쓸데없는 말 말아!" 자신도 모르게 말투가 거칠어진 겐모치에게 요우코는 얼른 고개를 숙여 용서를 빌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 아냐, 미안하군." 겐모치는 황망히 사과를 했다. "너는 잘못이 없어. 나쁜 사람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다니는 그 아카이인가 뭔가 하는 남자야. 그런데 요우코 양, 김전일에게 들었는데 그 2등 항해사인 미즈사키와 그...." "네, 사귀고 있습니다." "음, 그랬나? 하하하!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야. 미남 미녀끼리." 겐모치는 소리친 것이 미안했는지 일부러 큰 소리로 웃었다. "아니에요, 제가 무슨...." 요우코는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미즈사키 씬 아주 멋져요. 나 따위와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말하고 요우코는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떨구었다. "하하하! 이런! 애인 자랑하느라고 정신이 없구만." 오우코는 얼굴이 빨개져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죄, 죄송합니다...." "아냐, 그렇게 사이좋은 걸 보니 아주 부러운데? 그런데 자네가 보기엔 미즈사키 씨와 선장과의 인간 관계라고나 할까, 두 사람 사이에 트러블 같은 건 없었나?" 겐모치는 돌연 본론으로 돌아가 진지하게 물었다. "아니오, 미즈사키는 동아 오리엔트 해운 시절부터 다카모리 선장에게 신세를 많이 진 것 같아요. 그 사람보다는 와카오지 쪽이 선장과 사이가 나빠요." "그래? 와카오지와 선장은 사이가 몹시 나빴나?" "네. 아주 많아요. 게다가 미즈사키 씨한테는 언제나 못되게 굴었습니다. 와카오지 씨는 선장과 미즈사키 씨 둘이서 자신을 모함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요. 얼마나 대단한 엘리트였는진 모르지만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나는 배게 대해선 전혀 모르지만 모두들 미즈사키 씨가 훨씬 우수하다고 말해요. 와카오지 그 사람은 늘 화만 내고, 제 고집만 피우고... 분명히 그 남자일 거예요, 선장을 죽인 사람은." 요우코는 토라진 듯이 입을 삐죽대며 말했다. 겐모치는 그런 그녀를 달래듯이 물었다. "자, 자, 알았어. 그럼 3등 항해사인 카노우 씨와 다카모리 선장 사이는 트러블 같은 게 없었나? 알고 있으면 말해줘." "뭐, 특별한 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카노우 씨는 마치 와카오지 씨의 부하 같은 느낌을 주거든요. 그래서 다카모리 선장이나 미즈사키 씨와는 가깝게 지내지 않은 것 같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적대한 것도 아니었던 것 같구요." "음. 그럼 마지막으로 오늘 아침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그것만 말하고 끝내지." "저는 6시 10분경에 김전일 씨에게 따뜻한 우유를 가져다 주고 그후로 는 계속 주방과 식당에서 아침 식사 준비를 했습니다. 식당 창가에서 사진을 찍는 아카이 씨에게 커피를 갖다 주기도 하고요. 그리고 식사 준비를 끝내고 방송으로 아침 식사를 알리고...." "방송? 그럼 그 방송을 몇 시에 했는지 정확히 알겠군?" "네. 정확히 말하면 7시 27분입니다. 언제나 아침 식사시간 3분 전이 되면 방송하라고 요리사가 말하니까요." "7시 27분이라...." 겐모치는 확인하듯 한 번 복창을 하고 그것을 검은 수첩에 적었다. 6 2등 항해사인 미즈사키는 문을 노크하고 나서 리빙 홀로 들어와 예의바르게 인사하고 앉았다. "어이, 미즈사키 씨! 아까는 고마웠습니다. 당신과 사이가 안 좋다는 와카오지 씨를 깨워 주셔서. 앞으로 두 사람 사이가 더욱 험악해질지도 모르겠는데, 어쩌죠? 뭐, 아무튼 용서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라고만 대답하고 미즈사키는 다시 한번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시작할까요? 당신도 바쁠 테니까 간단히 요점만 묻겠습니다. 먼저 당신은 피해자라고 생각되는 다카모리 선장과 함께 동아 오리엔트 해운에서 옮겨왔다고 하던데, 그것은 어떤 이유 때문입니까?" "저는 동아 오리엔트 해운 시절부터 다카모리 선장님께 신세를 많이 졌기 때문에 선장님의 권유에 따라 동태평양 기선에 오게 되었습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으흠... 의리 있는 일이군. 당신을 보니까 역시 의리가 있는 사람처럼 생각됩니다. 그럼, 오늘 아침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말해 주겠습니까?" "네. 5시 반쯤 일어나서 방에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막 나오다가 김전일 씨와 미유끼 양을 만났습니다. 김전일 씨가 위통이 매우 심해 제 방에서 약 대신 따뜻한 우유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우코가 우유를 데워 올 동안 잠시 김전일 씨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흠. 그 얘기는 김전일에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후는?" "네. 6시부터 10시5ㅏ지는 조타실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7시부터 8시 정도까지 조타실에 있던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7시부터 7시 반경까지는 무전실에 있던 와카오지 항해사와 인터폰으로 연락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8시경까지는 무선 정보를 근거로 기관실과 항해 계획에 대해 협의하고 있었습니다." "음, 역시." 겐모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첩에 뭐라고 적고는, "이제 됐습니다. 또 협조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고 미즈사키에게 가볍게 인사를 했다. 7 1등 항해사인 와카오지는 잠을 자야 한다고 일단 자신의 방에 돌아갔다 9시가 지나자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내려왔다. 그때 겐모치는 무리하게 그를 데리고 가서 취조를 시작했다. "빨리 끝내 주십시오. 새벽 2시부터 조타실 근무입니다. 그때 가지 조금 더 자 두지 않으면 근무중에 수면 부족으로 위궤양이 재발하게 됩니다." 와카오지가 불쾌감을 드러내며 퉁명스럽게 말하자 겐모치가 소리쳤다. "나야말로 녹초가 됐소! 선장 대리라면 당연히 이 배의 책임자잖아! 그러니 자신만 생각하지 말고 협력을 해 줘야 하잖소!" "알겠습니다. 그럼 시작하시죠." 겐모치는 그래도 기분이 풀리지 않는지 마구 비꼬았다. "흥! 자, 그럼,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사라진 다카모리 선장과 당신은 사이가 매우 나빴다 하던데, 어떠셨는지요? 그리고, 선장과 미즈사키 씨 때문에 이런 누더기 여객선에 타게 되었다고 당신께서 억측을 부렸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와카오지는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정보 제공자는 밝힐 수 없소!" "그렇다면 저도 노코멘트입니다." "뭐라고? 당신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습니다." "내 참.... 그래, 아무튼 좋아. 하지만 오늘 아침 당신이 어디서 무얼 했는지는 확실히 대답해 줄 수 있겠지?" "새벽 2시부터 아침 6시까지 계속 조타실에서 키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나?" "배가 항로를 지켜 향해하소 있던 것이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겠지요." "잠깐 동안이라면 키를 그냥 두어도 배가 항로를 벗어난다곤 생각하지 않는데." "그건 무슨 뜻입니까?" "선장이 살해된 것은 어제 한밤중이었다는 것을 난 알고 있어." "그럼 경관님은 나를 의심하는가 보군요." "그렇게는 말 안 했어. 그건 그렇고, 6시 이후에는 뭘 했지?" "아침 식사가 시작되는 7시 반까지 계속 무전실에 있었습니다. 나는 이 배의 무선사도 겸하고 있으니까요." "그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있나?" 와카오지가 하는 말은 미즈사키의 증언과 일치했지만 겐모치는 시치미를 뗐다. "또 증명입니까? 6시 반부터 7시까지는 계속 하치죠 섬과 무선으로 통신하고 있었으니까 조사해 보면 알 겁니다. 그 이후는 7시 반경까지 조타실에 있던 미즈사키와 인터폰으로 협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협의? 무엇에 대해서?" "하차죠 섬에서 오가사와라까지의 기상 상태와 다른 선박의 운행 상황에 대해서입니다. 그후 7시 반에 내가 식당에 간 것은 경관님도 아시지요?" "쳇!" 겐모치가 혀를 차자 와카오지는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이제 의심이 씻어졌습니까?" "그런 건 지금 말할 수 없어." "그렇습니까...." 와카오지는 말끝을 흐리면서 선원복 안주머니에서 금장식이 된 볼펜을 꺼냈다. 그러고는 그것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탁, 타닥, 타닥, 타다다닥, 탁.... 어떤 리듬을 타고 있는 듯이 두드렸다. "? 뭐하는 거지?" 겐모치가 물었다. 와카오지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두들겼다. "당신! 뭘 하냐고 묻고 있잖아!" 겐모치가 흥분해서 소리치자 와카오지는 눈을 치켜뜨고는 히죽 웃었다. "모르스 신호입니다. 모르십니까?" "모르스? 그 비상 신호인가 뭔가 보내는 것?" "그렇습니다. 나는 전에 무선사를 했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 때 배운 거죠. 지금도 가끔 이렇게 사용합니다. 재미있지요?" 뭐가 재미있어. 그런 게!" "재미있습니다. 우리말을 모르는 외국인에게 마음껏 우리말로 말하는 것과 같은 쾌감이 있습니다." "뭐?" 겐모치가 몹시 화가 나 벌떡 일어섰다. "이봐! 당신 나에게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엉!"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와카오지는 펜으로 테이블을 두들기면서 마음속으로 웃고 있었다. "뭘 말하고 있다는 거야!" "글쎄... 뭘까요?" 그렇게 말하고 와카오지는 펜을 다시 넣고 일어섰다. "자, 그럼 이것으로 저의 '심문'은 끝난 거군요, 겐모치 경감님." 마음대로 나가는 와카오지를 그 대단한 겐모치도 그저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8 시간은 이미 밤 10시를 넘고 있었다. 방에 틀어박힌 '나카무라 이치로'를 빼고 선의와 기관부 직원, 요리사와 잡일을 하는 선원까지 거의 모든 사람의 취조가 끝나 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겐모치 앞에 앉은 사람은 10시까지 조타실 근무를 하고 있던 3등 항해사인 카노우였다. "저는 지금까지 키를 잡고 있었습니다. 피곤하니 빨리 끝내 주시기 바랍니다." 카노우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겐모치는 두말도 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당신, 오리엔탈호와 부딪친 유조선의 선원이었다면서?" 그러자 카노우의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자, 그것보다 어째서 그런 자네가 오리엔탈호의 선원이었던 두 사람과 함께 이 배를 타게 되었는지 말해 보게." 겐모치의 질문은 더 이상 카노우의 귀에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카노우는 갑자기 벌떡 일어서 소리쳤다. "오오츠키 영감이야! 그 영감탱이가 나불나불 지껄인 거야!" "이봐, 진정해!" "개자식! 죽여 버리겠어!" "카노우!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 겐모치는 당황해 잽싸게 카노우의 겨드랑이 밑으로 팔을 넣고는 힘을 주었다. 건장한 겐모치의 팔에 눌려 움직일 수 없게 된 카노우는 차츰 진정을 되찾았다. "아,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놔 줘요! 아야야야! 팔이 부러지겠어요!" "그러니까 날뛰지 마." 겐모치가 팔을 풀어 주자 카노우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나는 선장을 죽이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경감님. 믿어주세요." "믿게 하고 싶으면 질문에 똑바로 대답해, 알았나?" "아, 알았어요." "자, 먼저 어째서 자네가 이 배에 타게 되었는지부터 말해 봐. 어떤 지병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는 들었는데, 그렇다 해서 끔찍한 인연이 있는 사람들과 같은 배를 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그건...." 카노우가 우물쭈물하자 겐모치는 더욱 다그쳤다. "처음 자네를 이 배에 끌어들인 사람이 오리엔탈호의 선원이었던 와카오지 맞나? 그리고 그 이유는 뭐지? 당신이 타고 있던 유조선 때문에 오리엔탈호가 침몰했을 텐데." "그것은 내 탓이 아닙니다. 나는 그저 견습 선원이었기 때문에.... 내가 나르코렙시(NARCOLEPSIE)의 일종인,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힘들ㅇ오늘날 하자, 도와 준 겁니다." "나르코렙시? 그게 네가 잠들면 깨지 못한다는 병인가?" "아니에요. 나르코렙시는 대낮에 갑자기 잠이 와 자기 시작해 버리는 병인데 내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의사는 그 병의 일종이 아닐까 하던데. 1년에 두세 번이지만 밤에 잠든 채 만 하루 정도 잠에서 깨지 못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래서 전에 회사에 다닐 때도 몇 번 근무를 빼먹어서.... 잠깐만요, 그런데 내 병이 이 사건과 무슨 관계사 있죠?" "글쎄, 아직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지... 아무튼 그 병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당신을 와카오지가 구해 주었다는 얘기지?" "그래요, 그것뿐이에요." "흠... 좋아. 당신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배에서 내리는 대로 자세히 조사해 보기로 하고, 그럼 마지막으로 당신이 오늘 아침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말해 봐." "늘 그랬듯이 6시에 일어나 방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그러고서... 그렇지, 7시부터 7시 반경까지 리빙 홀에서 뉴스를 보았어요. 맞아요, 경감님도 그때 왔었잖아요. 뉴스가 한 15분 정도 했나? 경감님이 식당으로 가고 곧바로 선장이 없어졌다고 선원이 말하자 그 말을 듣고 나도 식당으로 갔어요. 그 다음은 아시죠?" 카노우가 침을 튀기며 쉬자 않고 말했다. 그러자 겐모치는, "알았어, 알았어. 이제 방으로 돌아가." 귀찮다는 듯이 말하고 겐모치는 카노우를 보내 주었다. 9 김전일 일행 네 명은 또 겐모치 방에 모여 있었다. 김전일은 팔짱을 끼고 의자 등에 몸을 기대고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겐모치는 초조하게 경찰 수첩을 뒤적이고 있었고, 미유끼와 카즈에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곁눈으로 쳐다보면서 차 준비를 했다. "이봐, 김전일." 겐모치가 심각한 표정으로 김전일을 불렀다. "어떻게 된 걸까?" "글쎄요, 어떻게 된 걸까요." 김전일은 천장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중얼거렸다. "일단 알게 된 것은 이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오늘 아침 7시 15분부터 7시 35분까지 알리바이를 갖고 있다는 점이야. 선장실에 들어가 15분 가까이나 걸려서 아침 식사 준비를 했을 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거야." "음... 그렇게 되나요...." "먼저, 기관사인 오오츠키는 그 시간에 계속 기관실에 기관실 직원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어. 자칭 괴기 사진 작가라는 아카이는 식당 창가에서 아침해를 찍고 있었고, 여고생 두 명과 가짜 대학생인 다카시는 2층 계단 끝에 있는 베란다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던 것 같아. 불러내는 데 응하지 않은 그 '나카무라 이치로'도 이 시간에 계단을 내려오지 않았던 것은 베란다에 있던 사람들이 증명했고, 아침 식사 직전에 인터폰으로 불렀을 때 분명히 방에 있었다는 선원의 증언도 있어. 잡일부인 요우코도 요리사와 함께 부엌이나 식당에 있었어. 2등 항해사인 미즈사키는 6시부터 계속 조타실에 있으면서 7시부터 7시 반까지는 무전실의 와카오지와, 그 이후 8시까지는 기관실과 각각 연락을 취했다는 것이 확인됐어. 그리고 가장 동기가 있을 듯한 1등 항해사인 와카오지도 7시부터 7시 반까지 무전실에서 미즈사키와 인터폰으로 협의를 했고, 그러고서 곧 식당에 모습을 나타냈어. 인터폰을 끊고 나서 식당에 올 때까지 2, 3분의 시간이 있었지만 그 짧은 시간에 선장실에 되어 있던 아침 식사 준비를 한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해. 그리고 기관실에 있던 직원과 계단에서 청소하던 사람을 빼고 남은 세 사람의 선원과 요리사, 그리고 선의까지 모두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어. 마지막으로 3등 항해사인 카노우인데, 그는 그 시간에 식당에 있는 것을 내가 직접 보았어." "그렇게 되면 모두--." "알리바이가 성립되는 거야." "말도 안 돼요. 이곳은 태평양 한가운데잖아요.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이 모두 결백하다면 선장은 자살이나 사고사로 죽은 게 돼요. 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지. 핏자국을 닦은 흔적까지 있으니까. 이것이 살인 사건이라는 것만은 분명한데 말야." 그때 김전일이 갑자기 일어나며 자신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어딘가에 있어. 불가능을 가능케 한 트릭이 분명히 있어!' 10 미즈사키는 배의 키를 잡은 채 창 밖에 가득히 퍼져 있는 밤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검은 바다 위로 가끔 어른거리는 '잔상'을 그는 계속 두려워했다. 그 때문ㅇ제대로 키를 잡지 못하게 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은 이윽고 망각이라는 우수한 수단으로 그를 계속 괴롭히던 '잔상'을 깊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앞에는 다시 그 무서운 광경이 떠오르고 있었다. 잔상이라기보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진보다도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때마다 순간이긴 하지만 심한 두려움으로 심장이 터질 듯한 놀라움과 공포가 미즈사키의 가슴을 꿰뚫었다. 바다에 고인 잿물처럼 짙은 안개를 헤치고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검은 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차츰 가깝게 들려오는 경적. 그 뒤에 다가온 충격. 최악의 우연과, 보잘것없는 인간의 어리석은 행동이 빚어낸 참상. 모든 것이 바로 지금 일어난 것 같다.... 아, 이제 곧 끝난다. 이 항해는. 그러면 정말로 다시는 배를 타지 않을 것이다. 다시 머릿속에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날 밤의 지옥이 재현된다. 비명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바다에 가득 차고 그 모두를 집어삼키는 칼 같은 파도가 목전에 다가온다.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이 악몽은. 빨리 끝나라. 제발 한순간이라도 빨리.... 미즈사키는 마음속 깊이 간절히 빌었다. 11 류오마루 항해일지. 7월 26일, 밤. 날씨, 쾌청. 파도, 평온. 항해, 약간의 차질 발생. 딸아, 나는 지금 많이 지쳐 있다. 왠지 몹시 불안하다. 기상도에 의하면 앞으로 3일 동안 계속 날씨가 좋아서 어제까지의 높은 파도도 완전히 가라앉을 것이라고 했건만. 어째서일까.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분명히 곧 '힘든 상황'에 접어들려 하고 있다. 다소의 계획 변경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불안을 느끼게 만드는 요소는 아직 발견할 수 없다.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딸아, 사랑하는 나의 딸아. 너를 위해서 나는 바다 위를 간다. 다시 한번 말하마. 이것은 선장으로서의 나의 마지막 항해다. 실패는 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사랑하는 딸, 너를 위해서.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 류오마루여. 나의 최후의 배여. 나는 항해를 계속할 것이다. '선장'인 나 자신의 힘을 믿고서--. 나는 일지를 덮었다. 항해 계획이란 당연히 변경될 수 있는 것이다. 무서울 일은 아니다. 이렇게 스스로 말하면서도 나는 가슴을 쥐어뜯고 싶을 정도로 후회하고 있다. 그야말로 후회해도 후회해도 끝이 없는 실수였다. 그 놈을, 다카모리를 잠에서 깨게 해 버리다니. 다카모리와 몸싸움을 하다 둑을 묻힌 '흉기'를 떨어뜨렸을 때는 정말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제 끝인가라는 생각까지 스쳤다. 부엌으로 달려간 것은 순간의 착상에 지나지 않는다. 칼이 거기에 있던 것은 불행중 다행이었다. 순간의 차이였다. 다카모리는 밖으로 도망치려고 바로 문 앞까지 가 있었다. 나는 잽싸게 그 놈을 덮쳐 목에 힘껏 칼을 찔러 넣었다. 그것이 최선이었다. 나중 일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찔린 곳은 정확하게 다카모리의 목 뒤에 있는 숨골이었다. 단번에 깊게 찔려 그 비열한 놈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숨을 죽이며 떨이는 몸을 가라앉히고 전등을 켰을 때 나는 아주 놀랐다. 흰 벽에 붉은 반점처럼 피가 튀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닥에도, 내 옷에도 묻어 있었다. 다카모리의 피, 다카모리에게서 뿜어져 나온 피였다. 나는 즉시 피묻은 옷을 벗어 던지고 그 옷으로 바닥과 벽을 닦았다. 부엌의 개수대에서 물에 적셔 꼼꼼하게 핏자국을 닦았다. 다행히 피는 바닥엔 직경 10센티미터 정도로 괴어 있었고, 벽의 서너 군데에만 튀어 있을 뿐이었다. 숨골을 찌른 것과 그것을 찌르자마자 빼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이 다행이었다. 경동맥을 자르기라도 했다면 주위가 온통 피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핏자국을 다 훔치고 시체를 밖으로 끌어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천천히. 다카모리의 시체는 무거웠다. 그다지 덩치가 큰 놈은 아니었지만 시체라는 것은 정말로 무겁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피 묻은 나의 옷과 함께 다카모리의 시체를 바다에 던져 버릴 때 그 놈 목에 꽂힌 칼을 그대로 둔 것은 큰 실수였다. 칼을 잘 닦아서 제자리에 두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그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계속 버러지는 바람에 도저히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보다 더 큰 실수는 핏자국을 닦을 때 전등을 켜고 작업을 했기 때문에 스위치 뒤에 가려진 핏자국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다카모리가 살해되었음이 발각 됐음을 알았을 때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후로는 나의 그런 모습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승객 중에 형사가 있던 것도 예상 밖이었지만 무엇보다 그 김전일인가 하는 소년이 마음에 걸렸다. 아직 두 명이나 더 죽여야 한다. 여기서 의심을 받는다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그 세 명이 죽고, 그것이 살인 사건으로 경찰에 의해 상세하게 조사된다면 나는 혐의를 쓸 가능성이 높다. 내가 그 세 명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는 것은 나와 그 놈들의 관계를 조사하면 곧 알아 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세 명 모두 살인된 것이라는 증거를 남기지 말고, 마리 세레스트호 사건처럼 '수수께끼의 실종 사건'으로 끝내 버리고 싶었다. 그러기에는 이 형편없는 배가 최고의 무대였다. 그런데 그렇게 작은 실수를 하는 바람에.... 하지만 초조할 건 없다. 괜찮다. 이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가능성도 충분히 예상했으니까. 조금이라도 살인 혐의를 받게 되는 경우에는 그 협의를 없애기 위해 만든 또 하나의 '항해 계획'으로 즉시 바꿀 예정이었으니까. 두려워 할 일은 없다. 아무것도.... 나는 가방 안에 일지를 넣고 대신에 그 '흉기'를 꺼냈다. 나머지 두 명. 이번이야말로 이 도구를 확실해 써 보자. 이것을 살짝 들어올리자 바늘 끝에 묻은 갈색 액체의 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복수는 오늘밤 끝난다. 그리고 '유령 선장'의 항해도.... 12 시간은 새벽 3시를 지나고 있었지만 벌써 동쪽 하늘은 희미하게 푸른빛을 띠기 시작했다. 익숙한 항해사라면 계기에 의지하지 않고도 방각을 정확히 읽어 항해를 할 수 있을 정도다. 조타실 키는 1등 항해사인 와카오지가 잡고 있었다. 새벽 2시부터 아침 6시까지는 그의 근무 시간이다. 이 배 자체는 구식이지만 인원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 인공위성을 사용한 최신 네비게이션 시스템이 장치되어 있다. 따라서 지도나 컴퍼스와 씨름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무전기가 망가져 다른 배의 무선을 받을 수 없어 레이더에서 절대 눈을 떼면 안 된다.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몇만 해리를 향해한 경험이 있는 와카오지에게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었다. 와카오지는 키를 잡은 채 3년 전의 악몽 같은 밤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그날 밤 오리엔탈호는 깊은 안개 속에 싸여 있었다. 동아 오리엔트 해운이 자랑하는 이 최신 호화 여객선은 거의 모든 최첨단 장비를 빠짐없이 갖추었다. 그래서 바다 위의 리조트 호텔이라고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배에 승선한 종업원은 5백여 승객의 10분의 1밖에 안 되는 60여 명이었다. 하이테크 장비를 갖춰 소수 인원으로도 충분한 신형 배라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선원들을 최대한 줄인 것이다. 그래서 60여 명의 스텝 거의 대부분이 배를 조종하는 일과는 무관한 일반 종업원들이었다. 와카오지는 이 배에 선장 다음의 중요 직책인 1등 항해사로서 승선했다. 선박업계의 명사들과 부유한 실업가들이 많이 참가하는 이 처녀 항해에 몇 명 안 되는 선원으로 뽑힌 것은 업계에서의 지위가 확고해짐을 뜻했다. 와카오지는 당시 동아 오리엔트 해운의 간판이 될 오리엔탈호의 차기 선장이 약속된 엘리트이며, 초대 선장인 다카모리는 이미 차기 중역으로 불려지고 있는 실력자였다. 그러나 30세로 무선사에서 항해사로, 그후 또 순식간에 40대에 오리엔탈호의 1등 항해사로 출세한 와카오지가 다카모리에겐 거북한 존재였다. 따라서 다카모리와 와카오지의 관계는 결코 좋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런 알력 때문에 오리엔탈호 승무원들의 3분의 2는 선장인 다카모리 파벌에서, 나머지 3분의 1은 와카오지 파벌에서 선발되었다. 사고의 발단은 배 안에서의 이 파벌 싸움이었다. 오리엔탈호가 출항한 지 3일대 되는 밤에 처녀 항해를 축하하는 파티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 파티에는 일반 승객과 함께 선박업계의 명사들이 많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유대 관계가 중요한 선박업계에서, 명사들 얼굴을 이 파티에서 익히면 앞으로의 출세에 큰 의미가 있었다. 바로 그 파티가 있는 날 저녁, 문제가 발생했다. 선장이 근무 계획 변경을 일방적으로 통고해 왔다. 그 계획에 따르면 와카오지에겐 파티가 열리는 시간에 조타실 근무가 배다되어 있었다. 게다가 와카오지의 파벌인 선원들 대부분이 파티 동안 모두 근무를 해야 했다. 와카오지는 당장 다카모리 선장을 만나 항의했다. 그러나 다카모리는 전혀 그 계획을 수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너무 화가 난 와카오지는 근무 보이콧이라는 강경 수단을 쓰기로 했다. 최신 장비인 위성 자동 조타 시스템을 작동시켜 두고 보조 근무를 하는 4등 항해사와 함께 조타실에서 나와 버렸다. 독단적으로 그 축하 파티에 참가하려 한 것이다. 바고 그 강경 수단이 그 악몽의 대형 사고를 초래한 것이다. 사고엔 몇 가지 불행한 우연이 겹쳤다. 하나는, 이때 오리엔탈호가 미세키가우라라는 암초가 많은 위험 해역에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짙은 안개였다. 전날까지 밝았던 하늘이 거짓말처럼 완전히 흐려지더니, 미세키가우라 해역에 짙은 안개가 끼여 있었다. 그래서 불빛 심지어 환한 배 안에서는 암초를 피하려 계속 접근해 오는 유조선의 경고 불빛을 볼 수 없었다. 이런 최악의 조건이 겹쳤을 때 사고는 일어났다. 와카오지가 옷 매무새를 고치고 파티장으로 가려 할 때였다. 갑자기 콘크리트 블록을 부술 때와 같은 소리가 나고 배가 조금 흔들렸다. 배에 탄 사람들은 대부분 충돌 사고 경험이 없었고, 와카오지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 작은 충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순간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파티장으로 가는 복도 창으로 밖을 내다보자, 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객선의 호화로운 조명에 검고 거대한 배의 그림자가 비춰지고 있었다. 거대한 유조선이 오리엔탈호의 중간 해리 부분을 치고 들어온 것이다. 유조선은 충돌 직전에 피하려고 뱃머리를 튼 상태로 오리엔탈호의 허리 부분을 후빈 채 멈춰 있었다. 그러나 오리엔탈호는 충돌 후에도 유조선의 진로를 방해하듯이 계속 왼쪽으로 꺾으려 하고 있었다. 해상 충돌 예방법에 의하면 근접해 있는 배는 각자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려 충돌을 피해야 했다. 따라서 사고의 책임은 명백히 왼쪽으로 핸들을 돌리고 있는 오리엔탈호에 있었다. 와카오지의 머릿속으로 사고에 이르기까지의 상황이 빠르게 스쳤다. 자동 조타 시스템이 암초를 피해 키를 왼쪽으로 꺾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왼쪽에 가까이 있는 유조선과 정면으로 부딪친 것이다. 컴퓨터에는 이미 오른쪽에 암초가 있다고 입력되어 있어서 오리엔탈호는 저절로 그것을 피하려고 계속 왼쪽으로 핸들을 꺾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유조선은 법규에 따라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아무튼 그 결과 두 대의 배가 충돌했다. 와카오지는 순간적으로 이 사고의 대부분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았다. 컴퓨터가 아니라 사람이 핸들을 잡고 있었다면 유조선이 법규에 따라 오른쪽으로 피하리라 판단하고 당연히 배를 정면으로 직진시켰을 것이다. 그랬으면 아무 일 없이 두 대의 배는 스쳐 지나갈 수 있었다. 이것은 분명히 사람에 의한 재난이다. 무전실에 있던 무선사는 당연히 유조선으로부터 위험 신호를 받고 필사적으로 알리려 했다. 그러나 조타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와카오지는 후회와 두려움에 떨며 인터폰으로 즉시 방송실에 사태를 알렸다. 방송실에서는 이미 사고를 알고 있다가 와카오지의 지시가 있자 긴급 방송을 했다. 큰 사고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침몰할 걱정은 없지만 단지 만약을 위해 대피해 주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와카오지는 그렇게 간단한 사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부딪친 곳이 가장 약한 부분인 배의 중간 허리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유명한 타이타닉호 침몰과 아주 비슷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충돌 상대가 유조선이었다. 원유를 싣고 있을 것이므로 큰 화재가 날 가능성이 있었다. 구명 보트에 타야 해! 와카오지는 구명 보트가 있는 갑판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달리면서 생각했다. 왜 이렇게 될 때까지 아무도 깨닫지 못했을까? 뱃머리에 있는 감시대에는 당연히 항해사가 있다. 환한 조명이 켜진 배 안에서는 가까이 있는 유조선의 경고등이 안 보일 수도 있지만, 캄캄한 바다만 보이는 감시대에서조차 안 보였을 리가 없다. 더 빨리 유조선을 발견했다면 이런 이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잘못은 나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갑판 위로 튀어 나가자, 이미 눈앞에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유조선에서 벌써 연기가 피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일 초의 여유도 없었다. 바다 위로 원유가 흘러나와 불이 옮겨 붙으면 모든 게 끝이다. 그때는 보트도 아무 소용이 없다. 서둘러야 해! 와카오지는 구명 보트를 내리고 눈에 띄는 선원복인 흰 상의를 벗고 오렌지색 구명 조끼를 입었다. 그로부터 조금 지나 승객들이 갑판에 넘쳐 있을 땐 벌써 오리엔탈호는 눈에 보일 만큼 기울기 시작했다. 와카오지는 울부짖는 승객들 틈에 섞여 맨 먼저 구명 보트에 올라타, 이미 오리엔탈호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완전히 기울어진 오리엔탈호의 갑판에서 가끔 팔랑팔랑 뭔가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보트에 타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오리텐탈호 측의 사상자와 행방 불명자는 87명을 헤아렸다. 유조선의 승무원은 화재에 휩싸여 거의 살아남지 못했다. 오리엔탈호의 감시대에 있어야 했을 6등 항해사도, 와카오지와 함께 조타실 근무를 보이콧한 4등 항해사도, 유조선의 긴급 무선을 받았을 무선사도 모두 죽었다. 상대방 유조선의 승무원이 거의 죽거나 행방 불명이 된 건 오리엔탈호 측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재판은 아주 짧게 끝났다. 사고의 모든 책임은 일방적으로 유조선 측에 있게 되었다. 서로 싸우던 선장과 와카오지는 법정에서 일시적으로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서로 화를 내고 상대의 잘못을 따지는 과정에서 각각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와카오지의 실수는 조타실을 떠난 것. 그리고 다카모리 선장의 실수는 감시대에 있던 항해사를 강제로 파티에 끌어들인 것이었다. 짙은 안개 속이었다 하나 뱃머리에 있는 감시대에서는 당연히 접근하는 유조선을 빨리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곳에 아무도 없었던 것은 명백히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그 사실은 감시대에 있던 것으로 된 항해사가 '사망했기' 때문에 재판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런데 와카오지는 다카모리의 입을 통해 모르고 있던 사실을 알게 됐다. 감시대에 있었어야 할 항해사가 살아 있는 것이다. 죽었다고 보고된 항해사는 사실을 다른 장소에서 근무하던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사고의 진상을 숨기려 선원 등록도 하지 않고 승선시킨 전혀 다른 사람을 그 항해사로 속인 것이다. 컴퓨터에 의해 움직이는 하이테크 여객선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고 다카모리 선장은 무리하게 선원 수를 줄였다. 그러나 결국 출항 직전에야 선원 수가 터무니없이 부족한 것을 깨닫고 등록도 시키지 않고 젊은 선원들로 인원을 채운 것이다. 그 인물은 살아 있고, 게다가 지금 바로 이 배에 타고 있다. 3년 전을 생각하면서 와카오지는 핸들을 잡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수없이 생각나는 것은 충돌했던 그 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조타실에서 나가는 광경이었다. 그때 단념했더라면, 아니, 적어도 보조인 4등 항해사만이라도 남게 했더라면. 지금쯤 나는.... "...?" 갑자기 등뒤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와카오지가 돌아본다. "네." 대답을 하자 상대도 말을 해 왔다. 와카오지는 눈썹을 찌푸리더니 깊게 생각하지 않고 문으로 다가간다. 와카오지가 잠금 장치를 풀고 손잡이를 돌리는 동안에도 문 밖에 서 있는 '그 인물'은 조금도 이상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문이 열린다. '그 인물'은 와카오지에게 용건을 말한다. 와카오지는 여전히 아무것도 수상해하지 않았다. 그것은 시체도 발견되지 않은 다카모리 선장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은 탓이기도 했다. 와카오지가 한밤중의 방문객에게 의심을 품은 것은 '그 인물'에게 손이 잡혔을 때였다. 쿠욱! 하고 바늘로 찔리는 듯한 통증을 느껴 손을 뺀 순간 비로소 왜 이런 때 '그 인물'이 조타실에 찾아왔지 하는 생각이 났다. 그러나 순간 몸 속 깊은 곳에서 격심한 고통이 끓어올라와 그 생각을 날려 버렸다. "으... 으윽!" 쥐어짜는 목소리와 함께 숨을 뱉었지만 숨은 두 번 다시 들이켜지지 않았다. 호흡이 경련으로 바뀌더니 순식간에 몸이 제멋대로 돌아갔다. 몸을 끊어내는 고통이 덮치면서 와카오지는 리놀륨 바닥위로 나뒹굴었다. 와카오지는 생각했다. 무얼까, 이건? 어째서 이렇게 괴롭지. 이봐, 거기 서서 쳐다보지만 말고 나 좀 도와 줘. 왜 그래. 왜 웃는 거야. 나는 괴로워. 분명히 이건 심장이다. 심근 경색인가 뭔가 하는 발작이다. 웃지 말고 의사를 불러 줘. 이봐, 왜 가만히.... ...설마, 네놈이? 그래, 아까의 통증, 그 바늘로 찔린 듯한 통증이.... 그제야 와카오지는 한밤중의 방문객이 다카모리를 살해한 '유령 선장'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와카오지의 호흡은 점점 멈춰 갔다. 이윽고 희미한 숨소리를 내며 누워 버린 와카오지에게 '유령 선장'은 왜 자신이 그를 죽였는지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크게 열려진 와카오지의 눈이 순간 공포로 일그러지고 그리고 곧 빛을 잃었다.... 제5장 대신 죽은 자 1 김전일은 6시 반에 잠에서 깼다. 이번에는 배가 아파서가 아니다. 악몽을 꾸었기 때문이다. 무서운 꿈이었다. 눈을 떠 보니 이 유람선에서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미유끼도 겐모치도 다른 손님도, 그리고 선원들조차 한 명도 남지 않은 여객선에 김전일은 혼자 남아 있었다. 미유끼와 겐모치의 이름을 부르면서 배 안을 걸어다녔다. 리빙 홀, 오락실, 그리고 식당까지.... 식당에는 접시와 식기가 테이블에 정확히 차려져 있다. 접시엔 아침 식사인 빵이 놓여 있고, 구석의 카운터에서 유리 용기에 담긴 커피가 수증기를 내고 있다. 아침 식사가 시작되기 직전의 지극히 평범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는 사람이 없었다. 김전일은 갑자기 형언할 수 없는 공포에 휩싸였다. 식당을 뛰어나와 다시 배 안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모든 방이란 방을 난폭하게 열며 미유끼와 겐모치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물론 없었다. 필사적으로 달렸다. 철계단을 오르내리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아무도 없는 배에 울려 퍼졌다. 김전일은 어느샌가 선장실 앞에 있었다. 천천히 문을 열고 발을 들여놓았다. 그곳은 첫날 본 광경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대로가 아니었다. 접시와 컵은 역시 테이블 위에 있었지만 커피는 식었는지 수증기를 내지 않았고, 계란 타는 냄새도 없었다. 토스터 안에 빵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토스터는 따뜻하지 않았다. 김전일이 다가가 커피 메이커를 만지려 한 순간 갑자기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커피 메이커에 불이 켜졌다. --!? 당황하는 김전일의 눈앞에서 토스터와 전기 풍로의 스위치가 동시에 켜졌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김전일은 비명을 지르며 선장실을 뛰쳐나왔다. 김전일이 복도에 나오자마자 바로 옆 조타실 문이 딸그닥 소리를 내고 닫혔다. 누가 있는 건가...? 김전일은 조타실로 가까이 가서 문을 열었다. --? 그러나 그곳에서도 사람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아무도 없는 조타실. 그 한가운테 잡은 사람이 없는 조타 핸들이 천천히 천천히 돌고 있었다.... 여기서 김전일은 잠을 깼다. 몸과 머리, 잠옷 대신 입은 티셔츠까지도 땀으로 흠뻑 젖었다. 김전일은 흔들리는 머리를 두 손으로 잡으며 천천히 일어나 샤워를 하러 갔다. 샤워기를 틀면서 김전일은 조금 흥분되어 가슴이 뛰었다. 그것은 자신의 추리에서 큰 '구멍'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까지 꾸었던 악몽 덕분이었다. 뜨거운 물을 머리 위에서부터 뿌리면서 김전일은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래, 간단하잖아. 아침 식사 준비를 모두 아침에 할 필요는 전혀 없어. 꿈에 나타난 선장실 상황처럼 미리 다해 놓고 아침에 스위치만 넣으면 되잖아! 접시를 꺼내거나 빵을 토스터에 넣거나,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러 계란을 떨어뜨리려면 적어도 10분 정도는 걸린다. 하지만 그걸 모두 한밤중에 해 놓았으면 어떤가. 그렇게 해 놓고 아침 식사 직전에 선장실에 들어가 커피 메이커와 토스터의 스위치를 켜고 전기 풍로에 달걀 프라이를 하기 시작하면 된다. 이 방법을 쓰면 '10분'을 1, 2분'으로 단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알리바이가 없는 사람이 몇 명인가 나올 것이다! 김전일은 그 '몇 명인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윽고 그들의 얼굴이 한 사람의 '그 인물'로 좁혀져 왔다. --그런데 잠깐! 만약 '유령 선장'이 '그 놈'이었다면 왜 다른 인간에게 완전한 알리바이가 생겨 버리게 했을까?... 에잇, 모르겠어! 김전일은 샤워를 침착하게 할 수 없게 되자, 욕조에서 뛰어나와 허리에 타월을 둘렀다. "아아... 또 배가 아파지네." 중얼거리면서 김전일은 객실에 구비된 드라이어 콘센트를 뽑고, 대신 자신의 2와트짜리 드라이어를 꽂아 스위치를 켰다. 순간 소리도 없이 전등이 꺼졌다. "으악, 뭐, 뭐야!?" 캄캄해진 목욕탕에서 타월 한 장만 걸친 채 뛰어나오자 미유끼 방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미, 미유끼!" 최악의 상황이 머리를 스쳤다. 머릿속이 순간 하얘지는 것 같았다. 타월만 두르고 방에서 뛰어나갔다. "미유끼! 괜찮아!?" 미유끼의 방문을 힘껏 두들겼다. 문은 잠겨 있어 열리지 않았다. "미유끼!" "김전일?" 미유끼의 목소리다. 조금 안심이 되었다. "미유끼, 괜찮아?" "응, 고마워, 괜찮아. 단순한 정전 같아. 샤워를 하고 드라이어를 쓰려는데 갑자기...." "그, 그래, 난 또... 어휴, 다행이다...." 김전일이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꺄악!" "살려 줘!" 미유끼와 김전일의 방과 통로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두 개의 방문이 열리고 사람이 뛰어나왔다. 여고생들이었다. 역시 정전 때문에 놀라 뛰어나온 것 같았다. 아직 시간은 아침 7시 전이다. 그래서 햇빛이 들지 않는 서쪽은 당연히 어둡다. 게다가 살인 사건이 발생한 상황이니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어...?" 김전일은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곤란해져 엉겁결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아니, 사실은 가린 척만 했을 뿐이다. 두 사람 다 샤워중이었는지 몸에 타월 한 장만 달랑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머리가 짧은 아케미는 풍성한 가슴이 반쯤 나와 있었다. "꺄악!" 김전일을 본 두 사람은 아까보다 더 크게 비명을 지르고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뭐야, 무슨 일이야!?" 비명 소리에 겐모치도 뛰어나왔다. 그리고 문 밖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미유끼가 얼굴을 내밀었다. "지금 그 비명 소리는 뭐야? 뭐하고 있어, 김전일!?" 김전일의 허리에 감은 타월이 어느새 떨어져 있었다. "꺄아아악!' 이번에는 미유끼의 비명 소리이다. "꺄아악, 꺄아악!" 건너편의 두 사람으로부터도 이어서 또 비명 소리가 터졌다. "김전일!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너, 설마 사건 때문에 어수선한 틈을 타서 미유끼를...!" 겐모치가 험상궂은 얼굴로 다그치자 김전일이 당황해서 손을 휘휘 저었다. "아, 아니에요! 설마 내가 그런 짓을 할 리 있어요!" 그 말은 거의 설득력이 없었다. 김전일은 '앞'을 가린 채 자신의 방으로 쏜살같이 뛰어 들어갔다. 비명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으으...! 엉망진창인 아침이다. 2 김전일과 미유끼는 겐모치 방에 와 있었다. 겐모치의 방은 전기 차단기가 따로 되어 있는지 정전이 되지 않았다. "김전일, 정전된 걸 핑계로 소란을 피워대다니 한심하다. 이 녀석아." 겐모치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소란을 피운 건 제가 아니에요." 김전일이 침울하게 대꾸했다. "네 개의 방에서 동시에 전력이 센 드라이어를 사용해서 차단기가 내려간 거예요, 아저씨." 미유끼가 쿡쿡 웃으면서 대신 설명했다. 카즈에도 웃으면서 차를 끓이고 있었다. "네가 소리지르는 바람에 그 모양으로 튀어나왔단 말야." 김전일은 미유끼를 향해 투덜거렸다. "하지만 정말 깜짝 놀랐어. 목욕탕에 있는데 갑자기 캄캄해져서..." "으이구...." "김전일, 넌 지금 화난 척하지만 사실 너는...." 미유끼가 옆눈으로 김전일을 힐끔 쳐다보고는, "거의 나체나 다름없는 그 아이들의 몸매를 봐서 행운이라고 생각하지?" 날카로운 미유끼의 관찰력. "무, 무슨 소리야...." 김전일은 어물거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보다 차단기는 어떻게 되었지?" "그렇게 큰 소란을 피웠으니 선원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모두 나올 수밖에요. 지금쯤은 이미 고쳤을 것 같은데, 제가 보고 올게요." 미유끼가 그렇게 말하고 막 방에서 나가자 잚은 선원 한 사람이 얼굴색이 하얘져 달려왔다. "아, 미유끼 양! 겐모치 경감님은 어디 계십니까!?" 선원이 미유끼를 보자 다급하게 물었다. "네? 안에 계십니다만...." 미유끼가 영문을 몰라 말끝을 흐렸다. "뭐야? 또 무슨 일이 생겼나?" 선원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겐모치가 얼굴을 내밀었다. 김전일도 진지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사실은... 또...." "? 또라니?" "네, 또 사라졌습니다." "뭐, 뭐야!? 누가?" "3등 항해사인 카노우 씨입니다." "그 화를 잘 내는 젊은 사람 말인가?" "방은 어떻습니까!?" 김전일이 끼여들었다. "그, 그게... 똑같습니다." 선원은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선장님 경우와 똑같습니다." 3 카노우의 방은 배의 진행 방향의 오른쪽, 즉 우현에 있었다. 창문 커튼이 열려 있어 매우 밝았는데도 전등이 켜진 상태였다. 방은 선장실과 마찬가지로 서양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싱글 침대와, 그 옆으로 작은 테이블이 있었다. 테이블에는 큰 자명종 시계 외에 포트와 인스턴트 커피병, 그리고 커피가 담겨진 머그컵 등이 놓여 있었다. 김전일은 머그컵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머그컵은 약간 따뜻했다. 뜨거운 것을 붓고 나서 1시간 정도 지난 것 같았다. 침대 위엔 홑이불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고, 잠옷 대신 입었던 것으로 보이는 티셔츠가 그 위에 구겨져 있었다. 양복장은 열려진 채였으며, 서랍도 닫혀 있긴 했지만 완전히 닫히지 못한 채 하의가 끼여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방의 주인이 아주 급히 뛰어나가야 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제가 이 앞을 지나가는데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을 닫으려다가 그냥 한번 불러 보았더니 대답이 없었습니다.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어 문을 열어 보았더니 이런 상태였습니다. 카노우 씨가 있을 만한 장소는 다 찾아보았지만 아무 데도 없습니다. 어제 선장님 일도 있고 해서 먼저 경감님께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젊은 선원은 그렇게 말하고 애원하듯이 겐모치를 바라보았다. "그럼 자네가 이 방을 들여다본 것은 불과 얼마 전이란 말이군." "네, 10분 정도 전입니다. 카노우 씨 근무 시간은 오후 2시부터라 늘 이 시간에는 아래 리빙 홀에서 뉴스를 보는데...." "음... 어떻게 생각하나, 김전일?" 겐모치가 묻자 김전일은 선원을 쳐다보았다. "다른 종업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압니까?" "네, 대충은요. 그러나 와카오지 1등 항해사는 원래 무전실에 있을 시간이지만 무전기가 망가져 버렸으니, 글쎄요.... 아마 방에 있을 것 같습니다." "미즈사키 씨는 아침 6시부터 조타실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기관사인 오오츠키 씨는 조금 전까지 기관실에 있었습니다. 요우코는 부엌에서 요리사를 도와 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시간이고--." 선원의 증언에 따르면 다른 선원들이나 선의의 소재도 확실했다. 단, 김전일과 겐모치 이외의 다섯 명의 승객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그 역시 알지 못했다. "아무튼, 일단 선장 대리인 와카오지 씨에게 알리는 게 좋겠어." 겐모치가 그렇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서 '325호실, 와카오지'라고 쓰인 방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다. "와카오지 씨, 자고 있으면 일어나십시오! 카노우 씨가 없어졌습니다.!"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겐모치가 크게 소리쳤다. 그러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겐모치가 손잡이를 돌렸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열겠습니다.!" 겐모치는 다급하게 문을 열었다. 거기에 와카오지의 모습은 없었다. "이, 이런! 설마 이 사람까지...?" 겐모치는 끌려들어가듯 휘익 방으로 들어갔다. 김전일도 뒤를 따랐다. 목욕탕을 들여다본 김전일이 겐모치를 보고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이봐, 김전일.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뭐라고 말 좀 해봐!" 그 대단한 겐모치도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김전일은 묵묵히 방의 상황을 관찰했다. 커튼은 완전히 열려 있고 방 안은 밝았다. 침대 위는 잘 정돈되어 있다. 카노우의 방처럼 어수선한 것은 전혀 없었다. "...?" 김전일은 갑자기 테이블 위에 펼쳐진 노트 같은 것에 눈길을 주었다. "이것은...." 손수건을 꺼내서 조심스럽게 그 '노트'를 집었다. 표지를 보자 '항해일지, 마린사'라고 되었다. "뭐야, 김전일?" "항해일지예요. 그런데 이건 뭐지? 무슨 기호 같기도 하고...." 항해일지의 펼쳐져 있는 페이지에는 점과 선을 어수선하게 나열한 듯한 기묘한 기호가 쓰여 있었다. "경관님!' 갑자기 문에서 조금 전의 젊은 선원이 아까보다도 얼굴이 더 새하얘져 뛰어들어왔다. "겨, 경관님, 어떡해요! 시, 시체가... 큰일났어요... 도와주세요. 그, 그 조타실..." 선원은 곧 기절할 듯이 온 몸을 떨면서 두서없이 소리치다 입구의 턱에 걸려서 넘어져 버렸다. 겐모치가 그의 가슴팍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소리쳤다. "진정해! 무슨 일이 있다고? 조타실이 어떻다고!?" "조, 조, 조타실에 죽어 있어요!" "뭐!? 누가, 미즈사키가!?" "카, 카노우 씨..." "뭐, 카노우가!?" 4 김전일 일행이 뛰어가자 조타실 입구에 다른 젊은 선원이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비켜!" 겐모치가 그를 밀어제치고 김전일과 둘이서 미끄러지듯이 조타실로 들어갔다. "--!" 그것은 조타실에서 당연히 근무사고 있어야 할 미즈사키가 아니라 전혀 엉뚱한 카노우의 시체였다. 카노우는 천장을 향해 바닥에 누운 채 죽음의 공포와 고통으로 입가를 흉하게 일그러뜨린 모습이었다. 두 손은 가슴을 쥐어뜯는 자세로 놓여진 채 숨이 끊겨 있었다. 허공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에는 생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피부는 핏기가 없어 마치 바싹 마른 붉은 흙 같았다. 선원의 긍지인 하얀 선원복이 묘하게도 수의처럼 그의 참혹한 송장을 감쌌다. "목이 찔린 흔적은 없어. 외상도 보이지 않고, 음... 도대체 이건...." 시체를 검색하던 겐모치가 혼잣말을 하며 머리를 긁었다. "이제 어떡하면 좋아....!" 털썩 주저앉은 젊은 선원이 중얼거렸다. "선장님도, 와카오지 씨도, 이곳에 있어야 할 미즈사키 씨도 모두 사라져 버렸어. 게다가 카노우까지 죽어 버렸어. 도대체 이제 누가 배를 몰지? 난 이런 큰 배를 모는 방법을... 아, 도저히 자신 없어!" 김전일도 겐모치도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뭐라고? 설마 정말로...." 김전일은 아침에 꾼 악몽이 떠올랐다. 정말일지도 몰라. 이 배는 정말로 그 '마리 세레스트호'처럼 될지도 몰라. 이렇게 해서 한 사람 한 사람씩 사라지고, 결국 모두 사라진 후 배는 혼자서 항해를 계속한다. 형체 없는 '유령 선장'의 손에 맡겨져 언제까지나 바다 위를 떠돈다.... "제가 한 말이 맞죠?" 갑자기 등뒤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빛났다. 돌아보니 역시 아카이였다. "제가 말한 대로 아닙니까? 선장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 사람 한 사람 사라져 가다 결국 마지막엔 정말로 아무도 남지 않게 되어...." "그만해!" 겐모치가 소리쳤다. "아카이 씨! 당신 이렇게 계속 조사를 방해한다면 나도 더 이상 참지 못해!" "네 네, 나갑니다. 어휴! 무서워, 무서워...." 아카이는 플래시 없이 사진을 몇 장 더 찍고 조타실을 나갔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실로 일어날 리 없어! 어떻게 그런 일이...." 겐모치는 숨을 거칠게 쉬었다. "미즈사키 씨의 방은 보았습니까!?" 김전일이 애써 두려움을 떨쳐 버리듯 젊은 선원에게 물었다. "아, 아니오, 아직..." "여기서 핸들을 잡고 있던 것 같지 않으니까 미즈사키 씨는 사라진 게 아닐 겁니다. 한번 오시겠습니까?" "네, 네. 곧...!" 선원은 깜짝 상자의 인형처럼 조타실에서 튕겨 나갔다. 김전일은 시체 옆에 앉아 조사를 계속하고 있는 겐모치에게 다가갔다. "어때요, 아저씨. 뭔가 알아 냈습니까?" "이걸 봐, 김전일." 겐모치는 아무 망설임도 없이 시체의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이것은...." 시체의 손바닥에는 붉은 점들이 여러 개 찍혀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들은 상처 같았다.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에서 희미하게 피가 배어 나온 것이다. "외상은 이것 뿐이야. 어쩌면 죽은 원인은...." "독살...." 김전일이 앞서서 말했다. "그럴지도 몰라. 시체를 해부해 보기 전에는 확실해 말할 수 없지만..." "이런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만으로 죽일 수 있는 독이 있을까요?" "몇 가지 있어." 겐모치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거 놀라운 사실인데요. 아무튼, 이 상처로 카노우 씨가 죽었다면 흉기는 독 묻은 여러 개의 바늘이 달린, 예를 들어 밤송이나 생화를 꽂는 침봉 같은 것이 돼요." 그렇게 말하고 김전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저씨, 저것...?" 김전일은 배의 핸들 손잡이 아래를 가리켰다. "응...?" 성냥곽보다 조금 작은 정도인 침봉처럼 생긴 것이 거기 있었다. 그것은 바늘이 솟아 있는 쪽을 위로 한 채 떨어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사각형 모양으로 자른 코르크판에 바늘을 꽂아 만든 것 같았다. 겐모치가 바늘에 닿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코르크판 옆을 살짝 잡아서 들어올렸다. 손바닥에 놓고 자세히 관찰하자 바늘 끝에 갈색 액체가 묻어 있었다. 겐모치가 냄새를 맡았다. "니코틴인 것 같은데." "네? 니코틴이라면 담배에 들어 있는 것 말예요?" 김전일은 전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그래. 니코틴은 아주 미세한 양이라도 혈액 속에 직접 들어가면 호흡 정지와 심부전을 일으켜 사망하게 만드는 강한 독이야." "네에? 그래요? 어휴... 앞으로는 절대 담배 안 필래!" 김전일이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치자 겐모치는 놀라 입을 벌렸다. "이 녀석! 당연하지. 넌 아직 고등학생이잖아. 앞으로 담배만 펴 봐, 혼날 줄 알아!" "아저씨,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지요, 네?" 배시시 웃으면서 김전일은 '흉기'가 떨어져 있던 핸들 주위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어휴! 정말 못 말리는 녀석이야." 겐모치가 중얼거렸다. "아저씨!" 쭈그리고 앉아 핸들을 자세히 쳐다보던 김전일이 뒤를 돌아보며 큰 소리로 겐모치를 불렀다. 그의 표정은 이미 진지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뭐야? 뭐가 있어?" 겐모치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네! 살인 방법을 알았어요!" "뭐?" "보세요. 이 배의 키를 잡는 핸들을요. 테이프가 감겨 있잖아요." 가까이 보니까 조타 핸들의 손잡이 부분에 3센티 정도 끊겨진 테이프가 벗겨진 상태로 늘어져 있었다. "음, 그래.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됐다는 거지?" "즉, 이런 거예요. 범인은 그 바늘을 사용한 흉기를 이 핸들에 붙여 둔 거예요. 그걸 모르고 카노우가 키를 잡는 순간 독침에 찔린 거구요." "음, 정말 무서운 흉기야.... 이젠 이 배에 타고 있는 동안은 그야말로 방문 손잡이 하나 마음 놓고 잡을 수 없겠군." 겐모치는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그런데요, 아저씨. 또 한 가지 개운치 않은 게 있어요." "뭐라고?" "범인인 '유령 선장'은 한밤중에 다카모리 선장의 방에 들어가 그를 죽이려다가 맞붙어 싸우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흉기를 떨어뜨렸구요. 여기까지는 이해가 가요. 그런데 왜 범인은 선장을 죽이는데 떨어뜨린 흉기를 안 줍고 부엌에 있었다고 생각되는 칼 따위를 썼을까요? 나는 계속 이 점이 마음에 걸렸어요." "? 그것은 다카모리 손에 든 칼을 범인이 뺏았다고 네가--." "그 추리 말인데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왠지 어색한 데가 있더라구요." "어색하다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다급한 상황인데 다카모리 선장이 상대를 죽이려고 흉기를 가지러 가기보다는 즉시 밖으로 도망치는 게 자연스럽잖아요." "음... 그렇게 말하니까 또 그런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럼 왜 범인은 발밑에 떨어뜨린 흉기를 줍지 않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게다가 처리하기도 곤란한 칼 따위를 썼을까?" "떨어뜨린 흉기는 줍고 싶어도 주울 수가 없었을 거예요." "왜?" "그렇지 않겠어요?" 김전일은 겐모치의 손에 있는 니코틴을 바른 독침을 가리켰다. "다카모리 선장을 죽일려고 했을 때 범인이 쓰려던 흉기는 어쩌면 그 독침을 거예요. 어둠 속에서 주우려고 하다가 손에 찔리면 자신의 생명이 위험하잖아요." "그렇지" "아저씨, 어차피 이 사건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겐모치 경감님, 김전일 씨." 갑자기 문 앞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보니까 티셔츠 차림의 미즈사키였다. "미즈사키 씨, 무사했습니까!?" 김전일이 뛰어가며 소리쳤다. 미즈사키는 졸음을 떨치려는 듯 머리를 흔들고, "미안합니다. 자명종이 고장나 울리지 않는 바람에.... 그래도 저는 잠을 깹니다만 오늘 아침은 어쩐 일인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보다 저것을--." 김전일은 바닥에 누워 있는 카노우를 가리켰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김전일 씨, 겐모치 경감님? 카노우가 왜 저렇게 바닥에.... 서, 설마...?" 주춤주춤 다가가는 미즈사키를 향해 겐모치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죽었...습니까? 죽, 죽었단 말입니까...?" 미즈사키는 걸음을 멈췄다. "카노우는 살해되었습니다. 어쩌면 다카모리 선장을 죽인 인물인 '유령 선장'에게 살해된 것 같습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닙니다. 와카오지 씨도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어떠면 그도..." 김전일이 말끝을 흐리자 미즈사키는 멍한 눈으로 한숨을 쉬었다. "왜, 어때서... 차례차례 이런 일이.... 도대체 누구죠? 이런 일을...."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이 미즈사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것을 보고 김전일이 물었다. "왜 그러죠, 미즈사키 씨? 뭔가 생각난 게 있습니까?" 미즈사키는 김전일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지 아무대답도 없이 조타 핸들로 다가갔다. "큰일났다! 이 배는 오가사와라로 가고 있지 않아!" 미즈사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네에!?" 미즈사키는 조타 핸들을 힘주어 돌리면서, "아무튼 배를 남쪽으로 향하게 해야 해. 이대론 점 점 항로를 벗어나게 돼. 어휴! 일찍 발견해서 다행이다." 김전일과 겐모치는 갑작스런 그의 행동을 멍한 눈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5 약 1시간 정도 간단히 취조를 끝내고 김전일과 겐모치는 조타실로 되돌아왔다. 미즈사키는 자신이 이 배에 남은 유일한 조타수라는 긴장 때문인지, 그야말로 귀신에게 씌인 듯한 모습으로 오로지 핸들만 잡고 있었다. 그런 미즈사키에게 헛기침을 하면서 겐모치가 가까이 다가갔다. "어떻습니까, 미즈사키 씨? 이제 이 배의 항해사는 당신 혼자인데 오가사와라까지 무사히 갈 수 있겠습니까?" "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항로에서 많이 벗어나서 다시 돌아가고 있습니다만, 앞으로 10시간 정도만 가면 오가사와라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겐모치는 얼른 말을 꺼내기가 거북했는지 다시 한번 헛기침을 했다. "다른 게 아니라, 미즈사키 씨. 원래 살해하려고 했던 사람은 카노우 씨가 아니라 당신 쪽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 뭐라고요? 무슨 말씀이죠, 그건?" 핸들을 잡은 채 미즈사키가 휙 뒤를 돌아보았다. "실은 범인은 지금 당신이 잡고 있는 그 조타 핸들에 독침을 붙여 두었습니다. 그런데 당신 대신 카노우 씨가 먼저 그것을 만져 죽어 버린 것입니다." 겐모치가 담담하게 설명했다. "세상에....!" 미즈사키는 순간적으로 핸들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걱정 마세요. 그 흉기는 카노우 씨가 잡았을 때 곧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테이프로 간단히 붙여 좋아서 금방 떨어진 것 같습니다. 죽이고 싶은 상대를 위한 덫이었으니까 그 사람이 만지면 곧 떨어지도록 붙여 두었던가 봅니다." "그, 그런데... 어때서 저를 노렸는데 카노우가 죽은 거죠?" "당신은 원래대로라면 아침 6시부터 여기서 근무하게 돼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늦잠을 자는 바람에 늦게 오게 되었죠. 그렇죠?" "네...." "카노우 씨 방의 자명종 시계가 아침 6시로 맞춰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았을 때 시계 바늘을 7시가 조금 지난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고, 자명종 벨은 멈춰 있었습니다. 즉, 그는 자명종 소리를 듣고 보통 때처럼 6시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어4ㅓ면 조금 전 당신과 마찬가지로 이 배가 오가사와라로 향하고 있지 않은 것을 깨달았을 겁니다. 그래서 이 조타실로 달려오 서둘러 방향을 바꾸려고 했겠지요. 그래서 불행히도 늦잠을 잔 당신 대신 덫에 걸려든 것입니다.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늦잠을 자게 되고, 그래서 당신 대신 오후 2시부터 저녁 6시까지 근무하는 카노우 씨가 핸들을 잡으러 조타실에 들어오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러니 처음 부터 노린 사람은 당신이었던 게 되는 겁니다." "어떻게 그런.... 분명히 나를 죽이려고 했단 말이죠? 그렇다면 도, 도대체 누가...." 미즈사키는 핸들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떨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와카오지 1등 항해사입니다." 겐모치는 자신에 차서 말했다. "와카오지 씨가...?" "그래요. 와카오지는 다카모리 선장과 당신이 엘리트였던 자신을 모함해 이런 누더기 배, 아니 미안합니다. 아무튼 결코 화려하다곤 할 수 없는 이 배로 끌어들였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게 사실이든 근거 없는 의심이든, 아무튼 그것이 그를 살인으로 몰아세웠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즉, 그에게는 다카모리 선장과 당신을 죽일 동기가 충분히 있었던 겁니다." "그, 그러나 그런 일로... 사람을 죽인 일고 잡히게 되면 자신 역시 파멸입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하리라고는 저도 도저히..." "와카오지에게 더 이상 미래가 없었다면 어떻습니까?' "예? 그건 무슨 뜻입니까?" "그는 위궤양을 앓고 있었잖습니까? 그것이 사실은 암이었다고 한다면 아니,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 그건... 뭔가 근거가 있는 얘기입니까?" "이것을 보십시오." 겐모치는 옆에 끼고 있던 노트 같은 것을 미즈사키 앞에 펼쳐 보여 주었다. "...뭡니까, 이것은?" "와카오지 방에 있던 항해일지입니다. 자, 이 기호 같은 게 뭔지 당신이라면 알겠지요?" 일지의 한가운데에 점과 선을 섞은 묘한 기호 같은 것이 볼펜으로 그려져 있었다. "아니, 이건!" 미즈사키는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모르스 신호입니다!" "역시 항해사이이군요. 정답입니다." 겐모치는 저만치 뒤에 서 있는 김전일을 옆눈으로 힐끗 보고서, "여기 있는 김전일이 그러더군요. 항해사인 와카오지가 쓴 것이니까 다른 선원에게 한번 보이라고요. 그래서 먼저 기관사인 오오츠키 씨에게 보였습니다. 그랬더니 과연 전쟁 때부터 배에 타겠던 베테랑답게 곧 모르스 신호임을 알고 읽어 주었습니다. 그는 모르스 신호라는 것은 짧은 신호음고 긴 신호음을 섞어서 알파벳이나 50음도를 나타내는 통신용 암호의 일종이라고 말하더군요. 회중 전등과 깃발로도 멀리 있는 배에 의사를 전달할 수 있어 선원들에겐 아주 중요시되는 것 같더군요. 그러니 당신이라면 더욱 쉽게 읽을 수 있지 않습니까, 미즈사키 씨?" 미즈사키는 잠시 그 일기를 들여다보고 깊이 한숨을 쉬었다. "유서입니다, 이것은...." "그렇습니다. 이것은 와카오지가 남긴 유서입니다. 그 남자는 원래 무선사였지 않습니까? 그것을 자랑하듯이 내 앞에서도 모르스 신호를 보여 준 적이 있습니다. 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요우코 양과 요리사, 그리고 모르스 신호에 대한 지식이 없는 젊은 선원들 앞에서도 가끔 같은 짓을 했다고 하더군요. 정말 불쾌한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유서까지 이런 것을 사용해서 남길 줄은 몰랐습니다." 겐모치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며 수첩을 펼쳤다. "아무튼 유서의 내용과 사건의 상황은 완전히 일치합니다. 희생자가 대신 죽었고, 그리고 마지막에 범인이 자살한다는 최악의 결말까지 나와 있습니다. 이제 이것으로 사건은 대충 해결됐다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겐모치는 수첩에 써 놓은 '유서'의 내용을 대충 읽더니 싱거운 몸짓으로 그것을 덮었다. 6 와카오지 1등 항해사의 유서 나는 알게 됐다. 내 자신이 암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죽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했다. 그러나 나의 가슴은 복수를 하라고 나를 몰아세웠다. 다카모리와 미즈사키 두 사람의 모함에 의해서 나는 이 누더기 같은 마리 세레스트호에 타게 되었다. 다카모리는 김전일의 추리대로 밤에 죽였다. 그리고 밤 동안 그 방에 아침 식사를 준비해 두고 나머지는 아침에 했다. 무전실 근무를 마치고 아침 식사를 하러 가던 중에 커피 메이커와 토스터의 스위치를 켜고 풍로에 불을 켰다. 그래서 알리바이를 가진 나는 그후 두 번째의 살인 계획에 착수했다. 나는 그 계획에 따라 독을 묻힌 바늘을 장치해 두었다. 아침 6시가 되면 미즈사키가 그 함정에 걸려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목수는 끝이다. 나는 아무 걱정 없이 죽을 수 있다. 와카오지 7 김전일은 갑판 손잡이에 몸을 기대고, 혼자서 바다를 보고 있었다. 바다는 파도도 없이 조용했다. 배도 흔들리지 않고 바람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는, 움직이는 배 위에서 바람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배의 진행 방향을 따라 약간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배가 흔들리지 않는 것도 물의 흐름에 따라 배가 나아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김전일은 생각했다. 이 사건도 어쩌면 그와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어이없이 맞이한 결만. 그리고 맥빠질 만큼 간단하게 모든 진상을 밝힌 와카오지의 '유서'--. 그러나 만약 이 모든 사실이 와카오지 이외의 누군가에 의한 것이라면.... 진짜 범인인 '유령 선장'의 기묘한 항해 계획에 따라 착실하게 항로를 따라가는 배와 같은 것이라면.... 김전일이 그렇게 생각한 근거는 몇 가지가 있었다. 그중에 하나는 와카오지를 범인으로 가정할 경우에 생기는 '모순'이다. 몇 명의 용의자들의 알리바이 근거가 되는, 선장실의 아침 식사 준비에 필요한 10분이라는 시간이 그것이다. 시간이 걸리는 작업을 밤 동안 끝마쳐 두면 이 10분을 1분이나 2분으로 단축할 수 있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 실은 김전일도 먼저 와카오지를 의심했다. 그는 문제의 시각에 무전실에 있었고, 아침 식사 직전까지 조타실의 미즈사키와 인터폰으로 협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3층에 있는 무전실에서라면 사람이 네 명이나 있는 계단을 통하지 않아도 선장실로 갈 수 있다. 문제의 아침 식사 준비에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면 그의 알리바이는 무너진다. 그러나 여기서도 또 한 가지 모순이 생긴다. 문제의 시각, 즉 모든 사람의 알리바이가 성립된 가장 큰 이유는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사람이 네 명이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계단이 보이는 장소에 있던 선원은 분명히 와카오지의 명령에 따라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 선원의 말에 의하면 보통 때 같으면 아침 그 시간에는 1층 복도를 청소하게 되어 있다고 했다. 리빙 홀과 식당이 있는 1층 복도가 아무래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지나다니므로 더러운 것은 쉽게 눈에 띄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약 평소대로 그렇게 했으면 2층 객실에 있는 승객 누군가가 알리바이를 갖지 못할 가능성도 있어 자신이 의심받지 않을 수 있는데도 일부러 그 계단 청소를 시켰다는 것은 범인의 심리로는 좀 부자연스럽다. 부자연스러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계단 청소를 하게 되면 청소를 하다가 3층을 올려다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3층 계단을 올라가는 지점에서는 복도 끝 오른쪽에 있는 선장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와카오지가 선장실에 출입하는 것을 청소하던 선원이 볼 가능성은 너무 많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선원에게 계단 청소를 시켰으리라는 와카오지의 행위는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아아! 뭔가 실마리가 잡히지 않아. 아저씨는 완전히 사건을 해결한 것처럼 저러고...." 크게 하품을 하다 말고 김전일은 갑자기 배를 잡고 비명을 질렀다. "아야야야! 어휴... 너무 생각을 많이 했더니 또 배가 아파.... 혹시 나도 와카오지처럼 암에 걸린 건 아닐까? 이 나이에 그럴 리는 없겠지?" 김전일은 비틀거리며 배 안으로 들어가 가까이 있는 인터폰을 들고 요우코의 방 번호를 돌렸다. "네, 요우코입니다." "아, 요우코 양? 나 김전일입니다. 다른 게 아니라, 또 배가 아파서... 어제 주신 그 뜨거운 우유를 좀 주셨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네, 그럴게요. 제가 방으로 갖다 드릴게요." "죄송합니다, 자꾸 귀찮게 해서요." 헤헤 하고 힘없이 웃고는, 김전일은 인터폰을 끊었다. 8 "으앗, 큰일났다! 위험하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김전일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목욕탕에서 드라이어가 윙윙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런! 정전 때문에 소동을 피우느라 스위치 끄는 걸 잊어버렸어. 계속 켜져 있었을 거 아냐?" 김전일은 잽싸게 목욕탕으로 뛰어가 드라이어 코드를 잡아 뽑았다. "휴우... 큰일날 뻔했네. 그런데 이상하네. 완전히 나체로 방에 뛰어들었을 때는 이런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 아, 그렇게. 그때는 아직 정전이어서..." 말을 하다 만 김전일의 시선이 갑자기 허공을 맴돌았다. 눈에 초점이 풀리고 대신 머릿속에 떠오른 '발상의 혼'이 차례로 형상을 드러냈다. 김전일의 두뇌는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해 그 발상이 추리로 승화되었다. 이윽고 김전일은 마구 엉킨 실꾸러미 속에서 교활한 악마의 지혜로 이르는 검게 물든 실 한 가닥을 선택했다. "그래! 또 한 가지 가능성이 있잖아!" 김전일은 몸으로 문을 열어 젖히며 목도로 뛰어나갔다. 바다의 넘실거림에 맞춰 약간씩 흔들리는 복도를 힘차게 달려갔다. "꺄악!" "어어어어...!" 3층에서 내려온 요우코와 딱 마주쳐 김전일은 계단을 구를듯이 휘청거렸다. "왜 나왔어요, 김전일씨!? 지금 우유를 방으로 갖다 드리려고..." 요우코는 랩으로 뚜껑을 떠ㅍ은 머그컵을 보였다. "주세요! 가지고 갈 테니까. --아! 그리고--." 김전일은 '어떤 설비'가 되어 있는 장소를 물었다. "네? 그것은 계단을 내려가서 배 뒤쪽을 향해 복도를 따라가면 돼요. 그러면 수도실과 방송실이 있고 그 안에..." "죄송합니다!' 김전일은 마지막까지 듣지도 않고 뜨거운 머그컵을 들고는 급히 가려고 했다. "어머! 그것을 마시고 가는 게... 여기서 좀 먼데..." "아니, 괜찮습니다." 김전일은 상관하지 않고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그 방'은 요우코의 말대로 매우 멀리 있었다. 머그컵 위를 랩으로 덮었기 때문에 조금은 달릴 수 있었다. 약 3, 4분 정도는 달렸을 것이다. 그곳은 다행히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바로 이때다 싶을 때 이곳이 잠겨 있었다면 너무 답답했을 것이다. 김전일은 문을 박차고 들어가 벽에 붙어 있는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음... 역시 네 개의 방에 하나씩이야. 그럼, 선장실은..." 김전일은 반대쪽 벽에 걸려 있는 배치도와 비교하면서 '그것'을 하나하나 체크했다. "있다! 이것이 그거야. 흠..." 김전일은 그제야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앗! 아직도 뜨겁네. 이런, 입술에 우유막이... 괜찮겠군, 위에만 뜨거운 것 같아."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면서 김전일은 다시 배치도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느 방과 함께... 어!? 뭐야, 이건!?" 김전일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이상하네! 그렇다면 어때서 그때...?" 김전일의 눈에 투지의 빛이 고이기 시작했다. "...맞아, 그렇게 된 거야. 이제 이것으로 이 살인 사건의 수수께끼는 다 풀렸어. 결국 범인도 찾아냈어! 봐라, '유령 선장!' 지금까진 모든 게 너에게 유리했다고 생각했겠지!" 김전일은 단숨에 우유를 들이켰다. "이번엔 내 차례다!" 9 "뭐라고!? 와카오지가 범인이 아니라고!?" 겐모치는 마시던 차를 거의 뿜어 낼 뻔했다. 겐모치 부인과 함께 그들의 방에서 차를 마시던 미유끼도 몰라 목이 콱 메었다. "뭐, 뭐라고... 사실이야, 김전일?" "틀림없어. 진짜 범인인 '유령 선장'은 따로 있어. 이 배의 멤버 중에." "어떻게 된 거지, 김전일?" 겐모치가 조금 냉정해졌다. "와카오지의 유서에도 써 있고, 게다가 앞뒤가 다 맞는데 달리 범인이 있을 리가..." "그것은 범인이 모두 맞춰 놓은 겁니다. 면밀한 '항해 계획'에 따라서요." "하지만 김전일, 그러면 모르스 신호로 쓴 유서는 어떻게 되는 거지?" 미유끼가 물었다. "그건 누가 썼는지 몰라. 그런 점과 선뿐인 유서라면 필체 감정도 못할 테지. 와카오지가 원래 무선사고 모르스부호를 써 타인을 놀리는 버릇이 있던 걸 이용해 필적 감전이 불가능한 유서를 위조한 거야." "...정말인가, 김전일?" 이윽고 겐모치도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물론입니다. 이제 다카모리 선장을 죽인 트릭은 밝혀졌어요. 와카오지는 그 독침으로 한밤중에 죽였을 겁니다. 나머지는 카노우를 죽인 트릭을 알아내면 돼요." "잠깐, 김전일. 난 뭐가 뭔지..." "설명은 나중에 해 줄 테니 일단 가자. 분담해서 탐문하자고, 미유끼!" "아, 알았어!" "자, 함께 가자. 내 대신 메모를 해 줘." "어이, 김전일. 다시 탐문하는 건 좋은데, 그 진짜 범인을 체포할 수 있는 계획은 세워 놓았나?" 겐모치가 물었다. "아니오, 아직이오. 하지만 확실한 근거가 있어요. 그걸 가지고 한 발 먼저 공격하면 단번에 해결될 거예요. 어쨌든 승부는 배가 오가사와라에 도착할 때까지 앞으로 몇 시간 안에 결정될 테니까요." 김전일은 자신감에 차 대답했다. 그러고는 겐모치를 쳐다보며 힘차게 선언했다. "절대 지지 않겠어요! 명탐정으로 불린 할아버지 이름을 걸고!" 겐모치와 분담해서 탐문하기로 한 김전일과 미유끼는 먼저 조타실의 미즈사키에게 갔다. 카노우의 시체를 본 직후에 취한 그의 행동이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타실 문을 노크하자 미즈사키의 대답이 들리고 잠시후 문이 열렸다. "김전일 씨, 미유끼 양? 무슨 일입니까?" 미즈사키는 긴장과 피곤에 지친 모습이었다. 눈은 충혈됐고 얼굴색도 좋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피곤하신데." 김전일 뒤에서 미유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런 배려는 김전일에겐 없다. 미유끼를 데려오길 잘했다고 김전일은 생각했다. 자기 혼자였으면 조급하게 굴어 상대방이 경계심을 갖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얘기를 끌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괜찮습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이제 겨우 항로를 원래대로 돌렸습니다. 오가사와라 도착은 많이 늦어질 것 같습니다. 잠깐 동안은 진로를 고정시켜 항해할 수 있으니 괜찮으시면 커피라도 드릴까요?" 웃는 얼굴로 대하는 미즈사키를 김전일이 황망히 말렸다. "아, 아닙니다. 그렇게 하실 것 없습니다. 혼자서 계속 핸들을 잡느라 몹시 피곤하실 텐데. 게다가 미즈사키 씨에게 묻고 싶은 건 한 가지뿐이니까요." "저에게 말입니까?" 미즈사키가 표정이 어두워지며 되물었다. "네. 역시 사건과 관련된 것입니다만... 아니, 사실 사소한 겁니다." "그게 뭐지요?" "실은 아까 카노우 씨의 시체를 봤을 때 말인데요. 미즈사키 씨가 잠에서 막 깨 이곳에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고는 곧 '이 배는 오가사와라로 향하고 ㅇㅅ지 않아.'라고 말했습니다. 옆에서 보기에는 저쪽에 있는 계기들을 쳐다본 것 같지도 않던데 어떻게 그걸 알았습니까?" "아, 그것 말입니까?" 미즈사키는 조금 안심한 표정이었다. "태양의 위치입니다." "네? 태양의 위치요?" "네. 오가사와라는 동경항에서 거의 직선 방향인 남쪽에 있습니다. 그래서 배는 똑바로 남쪽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침 그 시간이라면 태양은 배의 왼쪽 90도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확한 위치에 있는 거지요. 태양을 보고 배가 잘못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하... 역시, 항해사시군요. 그럼 그때 배는 어디로 가고 있었습니까?" "큰 원 궤도를 그리고 있던 것 같습니다. 키가 왼쪽으로 꺾인 상황이었으니까 어쩌면 카노우가 독에 찔리기 전에 잠깐 핸들을 돌렸다던가, 아니면 넘어질 때 핸들을 건드려 돌려졌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맞아, 어쩌면." 김전일은 갑자기 딴 곳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네?" "아, 아닙니다!"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고 김전일은 휙 밖으로 나갔다. "어머! 갑자기 왜 그래, 김전일? 미, 미안합니다, 미즈사키 씨. 저 친구는 뭔가 머리에 떠오르면 다른 건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한답니다." 당황한 미유끼가 꾸벅꾸벅 머리를 조아리며 대신 변명했다. "아니, 뭐..." 미즈사키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럼 제게 물어 볼 말은 이제 끝난 겁니까?" "네, 대단히 고맙습니다!" 서둘러 말하고 미유끼는 김전일 뒤를 따라나갔다. "오늘 아침 6시요? 음... 일어나 있었던 것 같은데..." 아케미는 소년처럼 짧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잘 생각나지 않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는 김전일 뒤에 서 있는 미유끼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때 상황을 자세히 말해 주겠습니까?" "그런데 당신들은 그 경감님과 무슨 관계죠?" 아케미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반대로 물어 왔다. 김전일이 당혹스러워하며 대답하자 아케미가 말했다. "그러면요, 나는 상관없지만 유우한테는 이것 저것 묻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 아이는 좀 사정이 있어서 집을 나왔거든요. 그래서 경찰이라든가, 뭐 그런 것에 조금 예민해져 있어요." 느릿느릿한 말투가 다카시와 대화할 때나 겐모치의 심문을 받을 때하고는 많이 달라져서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그럼, 이제 대답해 줄 거죠? 조금 전에 했던 질문입니다만, " "뭐죠?" "아침 6시의 상황 말입니다." "음... 맞아요! 커튼을 닫지 않고 잤거든요. 그래서 눈이 부셔서 깼어요." "그게 사실입니까?' "그럼요." "잠깐! 당신들은 그때 정전이 되었다고 방에서 뛰어나왔잖아요? 그건 어떻게 된 거죠?" "아, 그건... 그때 샤워를 하고 드라이어를 쓰려고 하는데 갑자기 정전이 된 거예요. 너무 캄캄했기 때문에 무서워서..." "...고마워요, 됐어요." "...?"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아케미를 김전일은 더 이상 쳐다보지 않았다. 묵묵히 걸어서 복도로 나갔다. 미유끼가 김전일 대신 사과를 하고 뒤따라 나왔다. "김전일! 말하다 말고 갑자기 나오면 어떡해!" "미유끼, 다음은 아카이 씨야." 김전일은 미유끼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대꾸도 하지 않고 진지하게 말했다. "응? 그 기분 나쁜 사람? 싫은데..." "괜찮으니까 따라와!" 10 아카이는 식당에서 고개를 들어 불빛에 필름을 비춰 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아카이 씨, 어제 찍은 사진 좀 보여 주시겠습니까?" "응? 내 사진이 보고 싶다고?' 갑작스런 김전일의 부탁에 아키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그러면...." "아키이 씨는 프로잖아요. 현상 도구 같은 건 당연히 갖고 있으실 테죠?' 김전일이 비꼬듯 말했다. "아니, 그런 것까지는 아직.... 아참! 시험 촬영으로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이라면 있는데, 그건 안 되나?" 아카이는 그렇게 말하고 늘 메고 다니는 큰 가방을 열어 사진을 몇 장 꺼냈다. 어제 아침 선장실 상황을 찍은 것 한 장과 배 안의 이곳 저곳을 띠ㄱ은 사진 3장, 그리고 일출을 찍은 사진 2장이 있었다. "이거다! 아카이 씨, 이걸 빌려 주십시오!" 김전일은 일출을 찍은 사진을 집어들었다. "응? 좋을 대로...." "됐어!' 김전일은 그 사진을 주머니에 놓고 마침 커피를 가지고 온 요우코에게 물었다. "요우코 양,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네? 뭐죠?" 요우코는 멍한 얼굴로 두 손으로 쟁반을 든 채 김전일을 쳐다보았다. "죽은 두 사람을 포함해 조타실에서 근무하는 세 사람의 근무 시간을 알로 싶거든요." "아, 네... 먼저, 와카오지 씨가 새벽 2시부터 아침 6시까지, 그리고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두 번이에요. 다음에 미즈사키 씨는 아침 6시부터 10시까지, 그리고 오후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두 번일 거예요. 또 카노우 씨는... 분명히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그리고 계속해서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로 알고 있습니다." 김전일은 요우코의 말을 미유끼에게 메모시키면서 말했다. "땡큐! 그리고 또 하나 알고 싶은 게 있는데." "이번엔 뭐죠?" "배의 속도 같은 건 어떻게 늦출 수 있죠? 자동차처럼 브레이크가 있는 것 같진 않은데. 그것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저는 배에 대해서는 전혀... 미즈사키 씨나 오오츠키 씨에게 물어 보면 잘 알 거예요." "음... 그럼, 오오츠키 씨한테 물어 볼까? 그 할아버지가 어디에 계신ㅈ심지어 압니까?" "기관실... 참! 조금 전에 갑판에 나가는 걸 봤어요." "갑판이라.... 좋아, 미유끼, 가자!" 김전일은 힘차게 말하고 달려갔다. 오오츠키는 갑판의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다. 오후가 되자 아침까지 맑았던 하늘이 완전히 바뀌어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오오츠키는 희미하게 안개가 낀 바다를 보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왜소한 뒷모습은 평소의 거친 인상과는 달리 너무 쓸쓸해 보여 말을 걸기가 망설여졌다. 김전일은 비로 옆에까지 다가가서 조금 서 있다가 이윽고 그를 불렀다. "오오츠키 씨." "...어이, 꼬마 탐정과 걸 프랜드." 오오츠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김전일은 미유끼와 마주 보고 입을 삐죽거리며 대꾸했다. "쳇! 꼬마라니요. 이래봬도 저희는 엄연한 손님이라고요." "하하하하! 내가 신경 쓰는 건 엔진밖에 없어. 그 때문에 천애고아가 되어 버렸지만." "하지만 자식들은 있으실 것 아녜요? 아, 그 나이라면 벌써 손자가--." "...딸이 있었어." "있었다는 말은 지금은 없다는 뜻인가요? 죽었나요?" "어휴, 김전일!" 미유끼가 김전일의 어깨를 툭 쳤다. "하하하! 아니, 내 딸을 아직 40 안짝이니까 아직 살아 있을 거야. 그 반대로 죽은 건 나야." "네? 할아버지라뇨?" "딸에게 나는 완전히 죽어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야. 그 애가 철이 들 때부터 나는 거의 바다 위에 있었으니까. 지금 딸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몰라. 20년 가까이나 소식 불통이야." 천천히 스쳐 지나가는 바다에 시선을 둔 채 오오츠키는 중얼거렸다. 그 옆얼굴을 보고 미유끼가, "그럼, 쓸쓸하시진 않으세요?' 라고 물었다. "멍청하긴. 나는 뱃사람이야. 배에 타고 있는 한 쓸쓸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김전일은 생각했다. 분명 이 오오츠키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배에 타고 있는 한, 그리고 바다 위에 있는 한 그는 고독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잠깐이라고.... "그보다, 꼬마야. 뭔가 나에게 볼일이 있어 왔겠지? 쓸데없는 말 지껄이지 말고 어서 물어 보기나 해!" 오오츠키는 보통 때처럼 말투가 험악한 고집불통 영감으로 돌아갔다. "아 참! 맞아요. 할아버지께 이걸 보여 드리려고 했어요." 그렇게 말하고 김전일은 아카이로부터 빌린 사진을 보여 주었다. "이건 어제 저녁에 찍은 사진인데요, 오오츠키 씨. 이 사진이 몇 시에 찍은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 어디 보자...." 오오츠키는 노안 탓인지 사진을 멀리 내밀고 눈을 가늘게 떴다. "...글쎄, 대충 6시, 아니 5시 반 정도인 것 같은데?" "우와! 정말 놀라워요. 한눈에 보고 안다니, 그야말로 울트라 초 베테랑이시군요." "바보 녀석. 나만큼 배를 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거야." 오오츠키는 그렇게 말하고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럼 전 가 볼게요." "뭐야, 그것뿐이야?" "네." 김전일은 짧게 대답하고 멍하니 서 있는 미유끼의 팔을 끌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뒤돌아 서서 큰 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우면 몸에 해로워요. 담배에 들어 있는 니코틴은 아주 강한 독이거든요." "...?" "자, 진짜 갑니다.!" 오오츠키는 불쾌한 표정으로 김전일의 뒷모습을 바라본 후 막 피우기 시작한 담배를 벤치 옆의 재떨이에 던져 넣었다. 손에 든 두 장의 사진을 트럼프 카드처럼 가지고 놀면서 김전일이 중얼거렸다. "미유끼, 틀림없는 것 같아. 아제 카노우 살인의 트릭도 알게 되었어." "응? 정말?" "그건...." "어이, 김전일, 미유끼!" 다른 선원들과 요리사를 탐문하고 있던 겐모치가 김전일과 미유끼를 보고 다가왔다. "아저씨, 어떻게 됐어요? 뭔가 새로운 것을 알아냈어요?" 김전일이 묻자 겐모치는 화가 난 얼굴로 대답했다. "탐문은 성과가 없었는데, 사건과는 관계가 없는 일에게 뜻밖의 사실을 알았어." "네? 뭐예요, 그게?" "아주 화가 나는 사실이야." 그렇게 전제를 하고 겐모치는 그 '화가 나는 이야기'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라는 거야. 아무튼 일단 항구에 닿으면 당장--." "맞아요, 아저씨!" 김전일은 갑자기 흥분해서 짝 하고 손뼉을 쳤다. "응? "그것을 이용해서 범인을 잡는 거예요." "뭐? 범인을 잡는다고? 그럼 너, 또 뭔가를 알아 낸 거야?" "그럼요! 이제 마지막 단계예요, 아저씨!" "어!? 그럼, 바로--." "그래요, 바로 그 자예요!" 김전일은 자신에 찬 표정으로 겐모치와 미유끼를 향해 소리 쳤다.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다!" 11 류오마루 항해일지. 7월 27일, 오후 4시. 날씨, 흐림. 옅은 안개 발생. 파도, 고요함. 항해 계획, 순조로움. 딸아, 항해는 계획대로 되러 가는데도 왠지 나는 불안감이 가득하구나. 불길한 예감이 떨쳐지질 않는다. 오늘 아침까지는 피로가 쌓여 그럴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기상 예보와는 달리 싫어하는 안개까지 끼가 시작했다. 비릿한 안개가 낀 속에서 항해는 또 밤으로 접어들고 있다. 류오마루여. 너는 알고 있는가, 이 항해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나의 마지막 항해의 끝을-- 나는 일지를 덮고 안개가 낀 바다에 눈길을 돌렸다. 나의 항해 계획은 순조롭게 끝나고 있다. 마지막 한 명이 죽은 것을 확인한 후 독약이 든 작은 병도 바다에 던져 버렸다. 다카모리 선장의 피가 묻은 옷도 구두도 모두 처분했고, 샤워도 수십 번 했다. 완벽하다. 불안해할 요소는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완전 범죄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 배가 항구에 들어가면 나의 항해는 끝난다. 그것으로 '유령 선장'은 어느 번 다시 나타나지 않게 될 것이다--. 12 배는 오가사와라 해역까지 앞으로 1시간 반 걸리는 거리에 임박해 있었다. 멀리 오가사와라 섬들이 보이는 거리였다. 그러나 바다는 짙은 안개에 둘러싸여 지금은 섬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짙은 우윳빛 안개 속으로 표류하듯이 나아가는 이 배는 정확하게 항구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어느새 무한한 환상 세계에 빠져든 건 아닐까. 모두가 이런 생각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그래서 조타실에 모두 집합해 달라는 겐모치 경감의 요청이 있었을 때는 오히려 안심한 표정들이었다. 여럿이 모여 있으면 불안한 생각을 조금은 덜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10분 후에, 사라진 세 사람과 기관실에 남아 있는 오오츠키를 뺀 전원이 조타실에 모였다. 그중에는 승선한 이래 한 번도 보습을 볼 수 없었던 그 '나카무라 이치로'라는 남자도 섞여 있었다. 방에서 나오길 완강히 거부했던 이 남자는 여전히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자, 그럼 시작합시다." 모두 모인 것을 확인한 겐모치가 거드름을 피우는 말투로 선언했다. "시작한다고요, 무엇을요? 이제 사건은 다 해결된 것 아닙니까?" 아카이가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아카이만은 사건이 해결된 것을 기뻐하지 않는 것 같다. 취재 대상이 예상을 빗나가 매우 실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이 사건의 범인은 와카오지 씨가 아닙니다. 오히려 와카오지 씨도 진짜 범인에게 당한 희생자의 한 사람입니다." 겐모치가 이렇게 말하자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무, 무슨 말이에요!? 진짜 범인이라니...." 다카시가 겐모치에게 다가오자 겐모치가 소리쳤다. "움직이지 마!" 겐모치는 김전일과 시선을 맞추고 나서 가볍게 헛기침을 한 뒤 위엄을 섞어 말했다. "다카모리 선장과 와카오지, 카노우를 살해한 냉혹한 살인귀는 지금 이 안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또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살인귀, 즉 '유령 선장'이란...." 겐모치는 말끝을 흐리며 한 사람 한 사람의 표정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그 시선이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나카무라 이치로'에게 멎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뭐야!" 마스크를 낀 남자가 갑자기 소리치며 홱 하고 몸을 돌렸다. "--!?" 남자는 다른 사람들이 놀라 멍해 있는 틈을 타서 눈 깜짝할 사이에 핸들을 잡고 있는 미즈사키를 덮쳤다. "미, 미즈사키 씨!" 김전일이 소리치고 겐모치와 함께 달려들려고 했다. 그러나 늦었다. 남자는 양복 속에 감추고 있던 '물건'을 꺼내어 미즈사키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 일시에 긴장감이 돌았다. 남자가 꺼낸 것은 검게 빛나는 권총이었던 것이다. 남자는 아무리 보아도 장난감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중량감 있는 리볼버를 꺼낸 것이다. 그는 너무도 뜻밖의 일에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미즈사키의 머리에 그것을 갖다댔다. "움직이지 마!" 성난 목소리로 소리치며 남자는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벗어버렸다. "아, 아니!? 너... 넌, 긴토!" 겐모치가 흥분해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소리쳤다. "어이, 경감님! 오래간만이군요." 남자는 움푹 패인 흉악한 눈으로 겐모치를 응시하며 기분 나쁜 미소를 띄웠다. "아, 아저씨, 저 사람은 누구죠?"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김전일이 물었다. 겐모치는 긴토로부터 눈을 떼지 않고 준비 자세를 갖춘 채 대답했다. "연속 살인으로 지명 수배를 받고 있는 놈이야. 피도 눈물도 없는, 그야말로 살인귀야!" "뭐, 뭐라구요!?" "2년 전에 내가 한 번 잡았는데 호송 도중에 경관을 살해하소 총을 뺏아 달아나 버렸어. 그 뒤로도 이유 없이 20여 명이나 되는 죄도 없는 사람들을 죽였어. --그런데 어째서 또 이런 배에 탄 거지!" "뭐라고 나불대는 거야! 이젠 나도 모르는 살인죄까지 덮어씌우는 거야! 이젠 나도 모르는 살인죄까지 덮어씌우려는 건가, 경찰 양반? 좋아! 너도 함께 죽여 줄까, 엉!" 긴토는 눈에 핏기를 띠면서 소리쳤다. "이, 이봐. 무슨 짓이야! 우린 네가 그 세 사람을 죽였다곤 전혀 생각하지 않아. 진정해!" 겐모치는 양손을 벌려 긴토에게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시늉을 하고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 오지 마! 가까이 오면 이 놈을 죽일 테다! 아무튼 나는 여기서 빠져 나갈 테니까 쫓아오지 마. 오면 모두 다 죽여 버리겠어! 너희들 때문이야. 너희들이 나를 속이려고 했기 때문이야. 나는 잘못한 게 없어. 단지 배가 고팠단 말야. 모두 다 너 때문이야, 이 나뿐 자식아!" 긴토는 흥분해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여댔다. "진정해, 긴토!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 겐모치는 필사적으로 설득했다. 그러나 긴토는 입에 거품을 물면서 아무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긴토는 미즈사키를 인질로 잡은 채 조타실 문 쪽으로 옆걸음질을 쳤다. "이, 이봐. 어딜 가는 거야? 긴토!" "시끄러! 나는 이 배에서 내릴 테니까 따라오지 마. 이봐, 너! 보트를 내려, 어서!" 긴토는 젊은 선원에게 턱으로 명령했다. 선원들은 벌벌 떨면서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고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것을 본 긴토는 만족한 듯이 흉칙하게 웃으면서 미즈사키에게 말했다. "너는 인질이야. 아니, 너뿐만이 아니라 따라오지 못하게 여기 있는 선원들은 전부 데리고 간다. 그리고, 너!' 긴토가 권총으로 바로 옆에 있는 선원의 어깨를 쿡쿡 찌르자 젊은 선원은 거의 울 지경이 되었다. "네? 네, 네." "또 한 명, 영감이 있지! 그 놈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그 영감도 데리고 간다. 그러면 더 이상 배를 움직일 수 있는 놈이 없겠지?" "그건 안 돼요!" 미즈사키가 하얗게 질렸다. "이 배는 이미 암초가 많은 해역에 들어왔습니다! 핸들을 조종할 줄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남지 않으면 10분도 못 돼서 난파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런 안개 속에선 한 사람도 구조 받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 바로 내가 원하는 거야, 하하하" 긴토는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웃어댔다. "이봐, 너희들! 구멍 보트를 다 내려, 어서!' "하, 하지만..." 선원 한 명이 뭔가 말하려다가 긴토가 마구 권총을 휘두르자 그만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입을 다물었다. "경찰 나리. 자, 그럼 이만." 마지막으로 긴토는 겐모치를 쳐다보며 침을 탁 뱉고는 조타실 밖으로 나갔다. "꺄악!" "으아악!" 일시에 승객들의 비명 소리와 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저씨! 저 놈을 쫓아가요!" 김전일이 사람들의 비명 소리를 진정시키려는 듯 콘 소리로 외쳤다. "알았어! 여기는 네가 맡아. 나는 미즈사키를 구할 테니까." 겐모치는 심호흡을 하고 긴토의 뒤를 쫓아 조타실에서 튀어 나갔다. "여, 여보!" 겐모치 부인도 뒤를 쫓아나갔다. "멍청이! 그 말은 왜 한 거야! 이제 배를 어떻게 움직인단 말야. 이 일을 어쩌면 좋아!" 김전일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계기판과 스위치들을 둘러 보았다. "어떡한담! 언제 암초에 부딪힐지도 모르는데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김전일은 어쩔 줄을 몰라 우왕좌왕하면서 중얼거렸다. "...레이더라든가 탐지기 같은 걸 사용하면.... 아냐, 안돼.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해!" "아, 아무것도 모른다구요!? 어떡해... 난 죽고 싶지 않아, 하느님 살려 주세요! 아케미는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유우는 너무 놀라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듯 그저 울부짖는 친구와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그 옆에 있던 다카시도 놀림을 받은 어린애처럼 엉엉거리며 울고 있었다. 요우코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멍하니 눈을 뜬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어떻게 이런 일이...." 아카이는 커다란 창 밖에 펼쳐진, 다른 세계의 입구 같은 새하얀 공간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에 사람들은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김전일, 어서 해 봐. 힘을 내.... 제발..." 미유끼는 애원하는 눈으로 김전일을 쳐다보았다. "어휴! 하다 못해 배를 멈추는 방법만이라도 알면.... 이, 이건가! 이건가!?" 김전일은 자포자기한 듯 계기의 스위치를 끝에서부터 하나씩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배의 속도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에잇!" 게다가 계기를 함부로 만지자 이번에는 경고음까지 울리기 시작했다. "안 돼, 도저히 안 돼. 어쩔 수가 없어!" 김전일은 단념해 버리고 뒤로 돌아섰다. "누구, 누구 없습니까! 조금이라도 배에 대해서 아는 사람!" 승객들은 모두 학질에 걸린 듯이 고개를 옆으로 흔들고 그저 기도하는 듯한 소리만 웅얼대고 있었다. "틀렸어, 이젠...!" 김전일은 갑자기 인형극에 나오는 인형의 매달린 끈이 끊어진 것처럼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독자에게 보내는 도전장 자, 독자 여러분! 기다리고 기다리던 도전장입니다. 진상을 해병할 거라고 생각했던 김전일 소년에게 갑자기 덮친 예측 불허의 긴급 사태. 이것을 그는 어떻게 헤쳐 나갈까요? 그가 명탐정인 이상 당연히 이대로 그냥 바다에 빠져 죽지는 않을 텐데.... 그리고 무엇보다 김전일 소년이 풀었다고 하는 이 연쇄 살인의 진상이란 무엇일까요? 무수하게 흩어져 있는 '복선'을 하나씩 풀면서 당신은 그 진상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진짜 범인 '유령 선장'이란 누구일까요? 그리고 기묘하게 만들어진 '트릭'이란...? 김전일 소년이 범인을 알아내는 데 근거가 된 '단서'를 당신이 먼저 알아 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건투를 빌겠습니다--. 제6장 진상 1 "이제 틀렸어..." 그때였다. 힘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김전일 옆을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 인물'은 김전일을 밀어제치고 조타 핸들 앞에 서자 김전일이 함부로 만진 장치들을 익숙한 손놀림으로 고치기 시작했다. 그 익숙한 동작에 승객들도 소란을 멈추고 기대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먼저 삐삐삐 소리를 내던 경고음이 멈췄다. 그리고 옆에 있던 텔레비전 화면 같은 것이 녹색 영상을 비추어 냈다. 그 바로 옆에 있는 디스플레이에도 지직지직 소리가 나며 화면이 떴다. 그 인물은 동시에 손을 잡은 레버를 힘껏 눌렀다. 그것이 감속 조작이었던 것 같았다. 엔진 소리의 울림이 바뀌어 곧 배는 천천히 멈추었다. "...아니! 암초도 바위도 전혀 없는데...?" 조타 핸들을 쥔 채 두 개의 디스플레이 화면을 보던 '그 인물'은 당혹한 표정으로 말했다. 짝짝짝! 등뒤에서 손뼉 치는 소리가 났다. "--!?" '그 인물'은 깜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당신이 바로 '유령 선장'이었군." 김전일이 박수를 치면서 대담한 미소를 띠었다. "뭐...!? 서, 설마, 그렇다면 이건 당신이 꾸민 연극...?" 거기까지 말하고 당황해서 '그 인물'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 내가 꾸민 연극이야. 이곳은 암초도 바위도 아무것도 없는 해역이야. 당신이 배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당신 자신이 증명하게 만들려고 꾸민 연극이야. 물론 미즈사키 씨에게도 협조를 구했지. 물론 미즈사키 씨는 당신이 범인인 줄 몰랐겠지만--." 김전일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요우코 양, 아니, '유령 선장'!' "--!" 요우코는 가면을 벗어던진 듯 굳어진 표정으로 김전일을 쳐다보았다. 거기에 서 있는 사람은 이미 평범한 시골 아가씨인 요우코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바위같이 강인한 의지와 냉철한 실행력을 가진 천재적인 범죄자였다. 김전일은 그녀의 찌르는 듯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물어 봤을 땐 배를 정지시키는 방법을 모른다고 했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진짜 선장처럼 솜씨가 좋은 거지? 왜 거짓말을 한 거지, 요우코 양?" "..." 요우코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눈동자는 분노로 이글거렸다. 김전일은 계속했다. "대답할 수 없다면 내가 대신 말해 주지. 당신은 지금 보여 주었듯이 배를 움직이는 지식과 기술을 이용해서 기묘한 살인 트릭을 꾸몄어. 그리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자신이 배를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도 숨긴 거고, 틀렸나!?" "..." 요우코는 입술을 깨물고 김전일과 마주 보았다. 그 자세에서는 조금 전까지의 촌스러운 분위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열아홉 살이라는 나이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강인함이 느껴졌다. 반격의 기회를 노리는 짐승 같은 의연함조차 풍겼다. "자, 잠깐만요!" 아카이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설명해 주십시오. 저 요우코 양이 범인입니까? 그리고 그 연속 살인범이라는 남자는 도대체..." 아카이와 함께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잠깐! 그것에 대해서는 내가 설명하겠소." 문 입구에서 겐모치가 크게 소리쳤다. "어...!?" 모든 사람들이 겐모치를 향해 돌아섰다. 거기에는 겐모치와 사이좋게 어깨를 나란히 해서, 조금 전 도망간 긴토가 있었다. 그들 뒤에는 긴토에게 끌려간 미즈사키와 다른 젊은 선원들, 그리고 기관실에 있어야 할 오오츠키의 모습도 있었다.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실은 이 사람이 살인범인 긴토라는 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나카무라 이치로라는 평범한 이름을 가진 내 부하 직원입니다." "어!? 그럼 경찰관!?" 유우가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다. 그렇게 흉악해 보이는 사람이 어떻게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도망친 아내를 찾으려고 직장에는 병 때문에 입원하게 됐다고 거짓말하고 이 배에 탄 겁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상사인 내가 나타나자 밖에도 나오지 못하고 몰래 숨어 있었던 겁니다. 원래 엄벌해야 하지만 이 중요한 연극을 잘해 주면 보고하지 않겠다고 했더니 조금 전의 명연기를 보여준 것입니다.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참! 너도 어서 용서를 빌어!" 겐모치가 무서운 기세로 다그치자 나카무라 형사가 고개를 숙였다. "걱정을 끼쳐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 그럼 아까의 권총은?" 다카시가 묻자 겐모치가 품안에서 권총을 꺼냈다. "이것은 제 것입니다. 최근 들어 이상하게 비번일 때마다 사건에 휘말려 이렇게 가지고 다니게 됐습니다." 이윽고 그곳을 가득 메웠던 긴장감이 해소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김전일이 투지에 찬 시선으로 요우코를 쳐다보았다. "그럼 이제 시작할까요, 요우코 양? 아니, '유령 선장'? 드디어 당신이 성공적으로 빠져나갈지, 아니면 내가 그것을 따라잡을지 결판이 날 클라이맥스입니다.!" 김전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방금 전에 벌어진 '고발극'에 모든 사람들이 다시 집중했다. 2 "요우코! 거짓말이지? 네가 사람을 죽이다니... 어떻게 그런..." 미즈사키가 너무도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요우코는 순간 미즈사키로부터 시선을 떼었다가 다시 쳐다보며 호소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아니에요, 미즈사키 씨.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그저 필사적으로 배를 멈추려고 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나를 살인범이라고..." "이제 연극은 그만 하는 게 어때, 요우코 양." 즉시 김전일이 끼여들었다. "당신이 조작한 트릭은 모두 밝혀졌잖아!" "농담 그만해요, 김전일 씨." 요우코는 김전일에게 눈길을 돌렸다. "다카무라 선장도, 카노우 씨도 와카오지 씨가 죽였다고 경관님도 말하지 않았나요? 유서도 발견되었으니 모든 게 다 해결..." "그 유서는 당신이 쓴 거야. 필적 감정으로 밝힐 수 없게 와카오지의 경력을 이용해서 모르스 신호를 사용한 거야. 대단하군, 요우코 양. 하지만 그런 점과 선 따위론 필적 감정으로 하려고도 하지 않으니까 잘못 생각한 거야." "말도 안 돼요. 나는 모르스 신호 따윈 전혀 몰라요. 어째서 내가 그 사람들을 죽여야 했지요? 미즈사키,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요우코는 미즈사키에게 애원하듯이 시선을 보냈다. 거기에 응하듯이 미즈사키가 말했다. "김전일 씨, 뭔가 잘못된 게 아닙니까? 나는 요우코를 믿습니다. 우선, 그녀에게는 동기가 없습니다. 다카모리 선장을 죽일 동기도, 와카오지 씨를 살해할 동기도. --맞아요! 겐모치 경감님이 말했잖습니까? 카노우는 내 대신 잘못 죽었다고. 원래 노린 사람은 나였다고요. 그렇다면 요우코가 나를 죽이려고 한 것이 됩니다. 나와 그녀는 연인 사이입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런 요우코가 나를 죽이려 할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요, 김전일 씨!" 미즈사키는 차츰 감정이 들어가 힘주어 말했다. 반대로 김전일은 침착했다. "네. 분명히 요우코에게는 미즈사키 씨를 죽일 이유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카모리 선장과 와카오지, 그리고 카노우 세 사람은 어떨까요?" "네...? 그게 무슨 뜻이죠?" "그 세 사람은 오리엔탈호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다카모리 선장과 와카오지는 오리엔탈호의 승무원이었고, 카노우는 오리엔탈호와 충돌한 유조선의 선원이었습니다. 만약 요우코 양이 그 사고 희생자의 유족이나 또는 연인이었다면 그녀에게는 그들을 살해할 동기가 충분하게 됩니다." "요우코가 오리엔탈호의...?" 미즈사키의 얼굴색이 변했다. "--아, 아닙니다! 무, 무엇보다도 그 사고의 유족에게는 사고 책임이 있던 유조선 측에서 충분한 보상을..." 요우코와 김전일을 번갈아 보면서 변명을 하는 미즈사키를 멈추게 하고 김전일이 요우코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요우코 양? 당신과 오리엔탈호 사고는 관계가 없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까?" 요우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김전일은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묵비권을 행사하는 겁니까? 하기야,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리한 당신이 서툴게 거짓말을 해서 추궁 당할 만한 근거는 만들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경찰이 자세히 조사를 해 보면 당신과 그 사고와의 관계 정도는 아주 쉽게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잠깐, 김전일!" 겐모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김전일과 요우코의 대결에 끼여들었다. "그 점에 관해서 유용할지도 모르는 것을 찾았어.' 겐모치는 눈짓을 해 부인으로부터 가죽 표지로 된 일기장 같은 것을 받아쥐었다. "그, 그건...!" 요우코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조금 전에 조타실에서 나갔을 때, 물론 옳은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일단 요우코의 방을 조사해 봤어. 흉기에 묻어 있던 니코틴 독을 찾아내서 결정적인 증거로 삼으려고. 그런데 니코틴은 없었지만 대신에 이 항해일지가 나왔어." "항해일지라고요, 이 배의?" 미유끼가 다가오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지저분하고 낡은 표지의 글자를 읽었다. "류... 류오마루 항해일지...? 미즈사키 씨, 이 배의 이름이 뭐였죠?" 미유끼가 미즈사키에게 물었다. "이 배의 이름은 '코발트 마린호'입니다. 그것은 틀립니다. ...류오마루는--." 말하던 미즈사키의 얼굴색이 갑자기 바뀌었다. "그것은 오리엔탈호와 충돌한 유조선의 이름입니다....!" "역시 그랬군." 겐모치가 낮게 중얼거렸다. "나도 텔레비전이나 신문지상에서 그 사고에 대해 떠들어 댈 때, 이 류오마루라는 이름을 본 기억이 있어. 그래서 이 항해일지를 잠깐 보았더니 그 사고에 대한 기록이 마지막 페이지에 써 있더군.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일지를 쓴 사람은 물론 그 류오마루라는 유조선의 선장이겠죠? 그럼 요우코 양은 그 선장의--." 김전일이 묻자 겐모치는 마지막 페이지를 펴서 김전일에게 보여 주었다. "어떠면 딸일지도 몰라." 옆이 너덜너덜해진 그 페이지에는 휘갈겨져 이렇게 쓰여 있었다. '가장 사랑하는 딸, 요우코에게' "돌려 줘!" 요우코는 비통하게 소리지르며 겐모치에게 덤벼들었다. 그러고는 일지를 빼앗더니 분노에 끓는 눈으로 김전일과 겐모치를 번갈아 보면서 소리쳤다. "그래! 나는 류오마루의 선장이었던 카시마의 딸이야! 그래서 어떻다는 거야!" 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승객과 선원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요우코에게 쏟아졌다. "요우코... 네가 정말...?" 미즈사키가 입술을 떨었다. "아냐!" 요우코가 소리쳤다. "나는 사람 따위를 죽이지 않아! 내가 카시마의 딸이라고 해서 어떻다는 거야!?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게 싫었기 때문에 숨겼을 뿐이야!" "깨끗이 단념하지 못하는군. 죽은 세 사람은 모두 오리엔탈호 사고와 관계가 있던 인물이야.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지나치지 않나?" 다그치는 겐모치를 물리치듯이 요우코가 침착하게 말했다. "잠깐만요. 카노우 씨가 죽은 것은 미즈사키 씨를 노리고 핸들에 붙여 놓았던 독침 때문이라고 했죠? 늦잠을 잔 미즈사키 대신에 핸들을 잡은 카노우 대신 죽었다고 나는 들은 것 같은데요?" "아, 그때는 일단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어. 그때는...." 겐모치가 곤란한 표정으로 얼버무렸다. "그래요? 그럼 죽은 세 사람이 모두 오리엔탈호와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억지가 아닌가요? 그중 한 사람은 잘못해서 대신 죽었을 뿐이잖아요. 말해 두겠는데, 나에게는 미즈사키를 죽일 동기 따위는 없어요. 나와 미즈사키는 연인 사이예요. 서로 사랑하고 있어요. 누구에게 물어 봐도 알겠지만 내가 미즈사키를 살해 할 이유 따위는 절대로 없다구요!" "흠... 그 말은 마치 '카노우를 죽일 이유라면 있을 수 있지만'이라고도 들리는데." 김전일이 침착하게 말했다. 요우코는 당황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 그런 뜻이 아냐! 물론 나는 카노우 씨도 죽이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다카모리 선장도, 와카오지 씨도, 카노우 씨도 모두 3년 전 오리엔탈호 침몰 사고의 당사자야. 이 세 사람을 당신이 죽일 만큼 미워한 이유가 분명히 그 사고 뒤에 숨겨져 있는 거야. 어쩌면 당신의 아버지가 남긴 그 항해일지에 그것이 써 있지 않을까, 요우코 양?" 김전일이 요우코의 손에 있는 일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요우코는 일지를 가슴에 품으면서 고개를 가로 저였다. "아냐! 살해될 뻔했던 사람은 미즈사키야. 내가 사랑하는 미즈사키!" 미즈사키는 요우코의 말에 순간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곧 그것을 떨쳐내려는 듯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경감님! 우리들은, 나와 요우코가 범인일 리가 없습니다!" 김전일은 미즈사키가 힘주어 하는 말에 약간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나 겐모치는 변함없이 김전일을 쳐다보며 도움을 청했다. "으음... 어떤가, 김전일? 분명히 그 독침은 아침 6시부터 조타실 근무를 하게 되어 있는 미즈사키 씨를 노리고 만들어진 게 틀림없어. 그렇게 되면 미즈사키 씨를 미워하던 와카오지를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쪽이 자연스러운데... 네 추리로는 어떤가?" "그 독침은 처음부터 카노우를 노린 것이었습니다." 김전일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경찰이 이 연쇄 살인 사건과 오리엔탈호 사고에 주목하면 조사에 의해 오리엔탈호에 충돌한 류오마루 유조선 선장의 딸인 당신이 의심받는 것을 피할 수 없겠죠. 그래서 당신은 카노우가 아닌 미즈사키 씨가 살해 대상이었던 것처럼 꾸며서 경찰의 눈을 벗어나려고 한 겁니다!" 3 "뭐라고? 하지만 카노우는 오후 2시까지 조타실 근무가 없어. 미즈 사키 씨가 늦잠을 자지 않았다면 그 시간에는--" 겐모치가 당혹스러운 듯이 말하자 김전일이 설명을 덧붙였다. "미즈사키 씨가 늦잠을 자도록 요우코 양이 꾸몄다면 어떻게 되죠? 자명종 시계의 벨이 울리지 않게 하거나, 수면제 같은 것을 마시게 해 그가 늦잠을 자도록 만들었다면? 어떻습니까, 미즈사키 씨? 그 가능성은 있습니까?" "그, 그것은..." 미즈사키가 우물쭈물하자 즉시 요우코가 나섰다. "잠깐, 미즈사키. 내가 말할게요. 그것은 가능할 거예요. 바로 그날 우린 같은 방에서 지냈으니까요." "이, 이봐. 요우코. 그런 말을..." "괜찮아요. 가만히 있어서 의심받는 것보다는 나아요. 하지만 놀랄 일은 아니잖아요? 우리는 연인 사이니까요. 나는 그날 밤잠을 자다가 새벽 3시가 지났을 때 갑자기 다카모리 선장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새삼 무서워져서 미즈사키의 방으로 갔어요. 덕분에 함께 늦잠을 자서 요리사에게 몹시 야단을 맞았죠." 미즈사키는 입을 다물 생각도 못 하고 요우코의 대범한 발언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요우코는 그런 미즈사키를 상관하지 않고 계속했다. "하지만 만약 내가 미즈사키 씨가 늦잠을 자도록 조작했다 해도, 그렇다고 해서 카노우 씨가 늦잠을 잔 미즈사키 대신에 핸들을 잡을지 어떨지를 어떻게 알았겠어요? 카노우 씨의 근무는 오후 2시부터예요. 그렇게 긴 시간 동안이라면 미즈사키가 먼저 깰 가능성이 훨씬 높아요. 카노우 씨는 언제나 일어나면 방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아래층 리빙 홀에서 텔레비전 뉴스를 봤어요. 그런데 그날 아침에만 조타실에 간다는 건 우연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잖아요." "아니, 우연이 아냐. 카노우 씨가 언제나 그랬듯이 6시에 잠을 깨면 곧 조타실에 올 것이라는 것을 당신은 분명히 알고 있었어." 김전일이 말했다. "뭐, 뭐라고요?" "카노우는 당신이 조작한 '자동 살인 트릭'에 조종되어 조타실로 유인된 거야." "흥! 그 트릭, 트릭 하는데, 아무리 탐정이라지만 제발 그만 좀 해 둬요. 사람을 조종해서 끌어낸다니요. 그럼 제가 카노우 씨에게 텔레파시라도 보내 조타실로 가게 만들었다는 말인가요?" 요우코가 도전적으로 말하자 김전일은, "가능해." 라고 즉시 대답했다. "당신은 카노우의 항해사로서의 습관과, 그의 지병에서 나온 생각을 이용해서 아침 6시로 잘못 알게 만든 거야." "...!" 요우코는 숨을 삼켰다. 그것은 김전일이 자신에게 치명타를 날린 순간이었다. 김전일은 댐에 고인 물을 일시에 내보내는 것처럼 한꺼번에 말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카노우 씨에게는 이상한 지병이 있어서 일단 잠을 자면 깨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그 때문에 가끔 근무를 빼먹은 적이 있다고 전에 겐모치 아저씨에게 말했지, 이 사실은 이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아. 요우코 양, 당신도 당연히 알겠지?" 김전일이 물었다. 요우코는 김전일을 바라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어쩌면 새벽 2시가 지난 시간이었을 거야. 요우코 양, 당신은 조타실에서 핸들을 잡고 있던 와카오지를 살해하고 다카모리 선장과 마찬가지로 시체를 바다에 던져 넣었어. 그리고 조금 전에 보여 준 배를 조작하는 지식과 기술로 배의 방향을 정반대 즉, 북쪽으로 돌려서 고정시킨 다음 조타 핸들에 독침을 붙여 놓았어. 그러고서 미즈사키 씨의 방으로 갔지. 미즈사키 씨의 방에 간 것은 그를 늦잠 자게 만들기 위해서였지. 만일의 하나 그가 6시 전에 잠에서 깨면 꾀병을 부린다거나, 아무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가 카노우보다 먼저 조타실에 가는 것을 막을 생각이었을 거야. 틀린가, 요우코 양?" 요우코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전일도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자, 이번에는 카노우 씨의 행동인데, 그는 늘 해오던 것처럼 당연히 6시에 잠을 깼어. 그것은 자명종이 6시에 맞춰져 있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었지. 그러나 침대에서 일어나 커피를 마시려는 순 간 카노우는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어. 창 밖으로 보이는 수평선 가까이에 태양이 있었으니까. 카노우 씨는 항해사니까 태양의 위치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배가 남쪽을 향해 가고 있으니까 오른쪽에 있는 카노우의 방은 서쪽에 있게 되고, 그러니까 아침에는 햇빛이 들지 않는 게 당연해. 그러나 카노우 씨는 그 태양의 위치를 보고 '배가 오가사와라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 카노우 씨는 이렇게 생각한 거야. '큰일났다, 늦잠을 잤어. 벌써 저녁 6시야!'라고. 나는 아까 아침 6시의 태양이 과연 저녁 6시의 태양으로 보일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이 배에서 가장 베테랑 선원인 오오츠키 기관사에게 아카이 씨가 아침 6시 반쯤 찍은 '일출' 사진을 보여 주었어. 저녁에 찍은 사진이라고 거짓말하고. 그랬더니 오오츠키 씨는 그걸 보고 저녁 5시나 5시 반경의 '일몰' 이라고 말했지." "뭐라고?...못된 놈! 나를 속였어!" 오오츠키가 화가 나 소리쳤다. "그러나 김전일, 왜 카노우는 '배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 미즈사키 씨는 조타실에 와서 카노우의 시체를 보았을 때 이미 배가 항로를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는데?" 겐모치는, 말없이 요우코를 응시하는 미즈사키를 힐끔 쳐다보았다. "미즈사키 씨는 그때 아무도 배의 핸들을 잡지 않은 것을 눈앞에서 본 덕분에 배가 항로를 벗어났으리란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카노우 씨에겐 또 하나 이러한 오해로 연결되는 큰 원인이 있습니다." "원인? 그게 뭐지?" "일단 잠을 자면 일어날 수 없게 되는 카노우 씨의 지병이요." "아, 과면증. 나르코렙시의 일종이라는 병 말인가?" "네. 카노우 씨는 전에도 그 지병 때문에 똑같이 근무 시간에 늦은 적이 몇 번 있습니다. 그 경험으로 카노우 씨는 시계 바늘이 가리키는 '6시'라는 시간과, '배의 좌측에 있는 해'를 보고 아침 6시가 지나서 이미 저녁 6시가 된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범인의 계획대로요." "음. 역시..." 겐모치는 팔짱을 끼고 감동한 듯이 중얼거렸다. 김전일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카노우 씨는 당황했을 겁니다. 카노우 씨의 조타실 근무는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그리고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입니다. 그러니 오후 6시까지 잠을 잤다면 이미 2시부터의 근무를 완전히 빼먹은 게 됩니다. 카노우 씨는 아침도 먹지 않고 마시려던 커피도 그대로 둔 채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적어도 6시부터의 근무에 맞추기 위해 조타실로 뛰어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조타실을 보고 좀 의아했지만 아무튼 핸들을 잡은 겁니다. 그래서 그 독침에 찔린 것입니다." 김전일이 낱낱이 고발하고 있는 것을 요우코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듣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김전일에게 곧장 향해져 있었다. 나는 아직 지지 않았어라고 말하듯이. 김전일도 요우코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오늘 아침 6시에 이 배가 북쪽으로 가고 있던 것은 오른쪽에 있는 방에서 자는 아케미 양의 '햇빛에 눈이 부셔서 잠이 깨었다'라는 증언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후 7시 전에, 그녀는 정전이 돼 '캄캄해진 방'에서 뛰어나왔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카노우 씨가 핸들을 잡은 채 쓰러지는 바람에 배의 방향이 바뀌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핸들이 움직인 탓에 배가 빙빙 돌기 시작해 카노우 씨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배를 북쪽으로 향하게 했던 사실은 이미 모르게 되어 버린 거죠. 물론 이 점도 범인의 계획 속에는 당연히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나, 요우코 양?" "흥! 대단해. 상상만 가지고도 잘도 말하는군." 요우코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생각이 난 것처럼 겐모치를 향해 물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한테는 다카모리 선장이 사라진 날 아침의 알리바이가 있었잖아요, 경감님? --맞아요, 경감님. 그날 아침 선장실에는 아침 식사가 준비돼 있었다고 했어요. 커피를 끓이고 빵을 굽고, 달걀 프라이까지 되고 있었다고 들었어요. 7시부터 아침 식사 사이에 선장실에 갈 수 없다면 알리바이가 있다는 거라고 경감님이 말했지요?" "음, 분명히 말했지..." 겐모치의 확실한 대답을 듣자 요우코는 기뻐하며 더욱 자신 있게 말했다. "봐, 어때? 김전일. 그러니 나에게는 당연히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어. 나는 계속 주방에서 요리사와 함께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요, 경감님?" "그것은 틀림없어." 겐모치는 수첩을 펴고 메모를 보았다. "와카오지의 유서에는 한밤중에 식사 준비를 해 두고 아침 식사 직전에 커피 메이커와 토스트 스위치를 넣는 트릭을 썼다고 쓰여 있었어. 즉, 오카오지처럼 1, 2분이라도 선장실에 갈 수 있었던 사람이라면 커피를 끓이고 빵을 굽고, 달걀 프라이를 만들 수 있게 돼. 그러나 요우코는 계속 주방에 있었고 7시 반 조금 전에, 정확히는 7시 27분에 방송을 하러 주방을 나갔다가 곧 돌아왔어. 그러니까 3층의 선장실까지 갈 시간은 당연히 없었지. 게다가 하나밖에 없는 계단에는 4명이나 되는 사람이 있었어. 요우코가 그 계단으로 오르내리지 않은 것은 그 사람들이 증명했지. --자, 이런데 어떤가, 김전일?" 겐모치는 이렇게 말하고 김전일을 보았다. 김전일은 그 시선에 대답하듯이 요우코의 눈을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아저씨. 그 알리바이 트릭이라면 벌써 깨버렸어요." 요우코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4 "뭐라고요? 그렇다면 말해 봐요. 내가 도대체 어떻게 선장실에 갈 수 있는지--." 이렇게 말하는 요우코의 입가가 떨리고 있었다. 눈앞에 선 소년의 '지혜'가 보통 사람 같지 않다는 것에 그녀는 무척 신경이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 경이적인 관찰력과 추리력이 자신의 지혜를 웃돌고 있다는 것에. "선장실에 갈 필요 따위는 없어. 배 밑바닥에 있는 전원실로 가면 충분하니까." "뭐...!?" 요우코의 표정이 눈에 띄게 변했다. 판결을 기다리는 피고인처럼 점점 파래져 갔다. "전원실? 무슨 뜻이지, 김전일?" 미유끼가 물었다. "간단해, 미유끼. 스위치를 켜기 위해 일부러 선장실까지 가지 않아도 돼. 전원실에 있는 차단기를 올려 전기를 통하게 하면 되는 거야?" "앗!" 미유끼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알겠어? 즉, 그날 밤 선장을 살해해 시체를 처리한 범인은 아침 식사 준비를 해 놓고 전원실로 내려가 선장실로 통하는 차단기를 내린 거야, 그리고 다시 선장실로 가서 커피 메이커와 토스터와 프라이팬을 얹어 놓은 전기 풍로 스위치를 모두 켠 거야. 이렇게 해 놓고 아침에 방송을 하러 방송실에 가는 사이에 그 옆에 있는 전원실로 가 차단기를 올린 거지. 이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3층 선장실에서는 커피가 끓고, 빵이 구워지고, 달걀 프라이까지 될 수 있었던 거야." "으음..." 겐모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내가 그런 짓을 했다는 증거가 어디 있죠! 추측만으로 사람을 범인 취급하지 말아요!" 요우코는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마지막 저항이었다. "증거라면 있지. 상황 증거이긴 하지만 당신이 범인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말해 주는 증거가." "그, 그런 것이 있을 리가...!" "미유끼, 미즈사키 씨. 그날 아침의 일을 기억합니까? 내가 배가 아파서 미즈사키 씨 방에서 뜨거운 우유를 마신 일 말입니다." "으, 으응... 그게 왜?" 미즈사키와 시선을 맞춘 미유끼가 대답했다. "그때 요우코가 '우유를 따뜻하게 해 올게요.'라고 말하고 우유를 담은 머그컵을 가지고 부엌으로 갔지?" "그래, 내가 그랬어.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지?" 요우코가 대답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김전일은 그 표정 그대로였다. "잘 생각해 보니까 그것은 이상해. 방에 전자 레인지가 있으니까 거기에 데우면 되는데 일부러 식당 옆에 있는 부엌까지 갈 필요가 없거든." "아! 그렇게 말하니까 그러네. 하지만 김전일. 어쩌면 전자 레인지가 망가졌을지도 모르잖아." "아냐, 미유끼. 그건 틀려. 요우코 방의 전자 레인지는 망가지지 않았어. 그 증거로 오늘 아침 내가 또 뜨거운 우유를 부탁했을 때 요우코는 자신의 방에서 전자 레인지에 우유를 데워 주었으니까." "뭐, 뭐라고!? 어떻게 그걸...?" 요우코는 말하다가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김전일이 요우코의 말을 받았다. "어떻게 그런 일을 아느냐는 거지? 그때 당신은 부엌이 있는 1층이 아니라 당신 방이 있는 3층에서 따뜻한 우유를 가지고 내려오지 않았나?" "아!" 요우코는 작게 신음 소리를 냈다. 김전일은 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때 데워 준 우유를 마시다가 위쪽이 뜨거워서 뗄 뻔했어. 하지만 아래쪽은 그렇게 뜨겁지 않았지. 그런 것이 전자 레인지로 데웠을 때의 특징이잖아. 그래서 알게 되었지. 당신 방 전자 레인지는 망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그런데 어째서 그날 아침에는 전자 레인지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지. 그 대답은 전원실에 있었어." "..." 아무 말 없이 김전일을 노려보는 요우코에게 절망의 빛이 떠올랐다. 김전일은 더욱 힘주어 말했다. "당신은 그날 아침 전자 레인지를 사용하고 싶어도 사용 할 수 없었어! 왜냐하면 당신 방과 선장실은 같은 차단기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야!" "...!" "이 차단기를 이용한 '원격 조작 트릭'을 알게 된 건 아침에 있었던 정전 소동 때문이었지. 나와 미유끼, 그리고 우리 방과 통로를 사이에 둔 건너편 방의 두 사람까지 모두 네 사람이 동시에 드라이어를 사용하는 바람에 차단기가 내려가 버렸지. 소동이 있은 후 방에 들어와 보니 스위치를 켜 놓았던 드라이어가 그대로 윙윙 소리를 내고 있었어. 이것을 보고 어쩌면 같은 방법으로 빵을 굽기 시작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이 배의 전원은 방 네 개씩 따로 연결되어 있더군. 먼저 객실이 그렇다는 것은 오늘 아침 정전 소동이 났을 때, 나와 미유끼 방과 건너편의 2방이 동시에 정전된 것을 보고 알았어. 그것을 보고 나는 객실뿐만 아니라 분명 종업원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어. 역시 생각대로였지. 선장실은 3층 제일 끝 오른편이고, 요우코, 당신 방은 그 건너편이야. 두 방에 붙은 옆방은 모두 비어 있었어. 즉, 선장실로 연결된 차단기가 내려가 있던 그날 아침 그 시간에는 빈방 두 개와 함께 당신 방의 전기도 사용할 수 없었던 거야. 당신 방은 동쪽에 있으니까 아침해가 많이 들어와서 전등을 켤 필요가 없었어. 하지만 냉장고와 전자 레인지와 전기 풍로를 사용할 수는 없었지. 미즈사키 씨가 우유를 데워 오라고 했을 때 당신 방에 가서 전자 레인지를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을 알았을 때는 매우 초조했겠지. 하지만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 그래서 당신은 할 수 없이 1층 주방까지 일부러 우유를 데우러 가는 부자연스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어. 어때, 요우코?" "아냐... 아냐, 나는... 죽이지 않았어. 나는..." 요우코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김전일과 미즈사키를 번갈아 보았다. "요우코... 용서해 줘!" 그때 갑자기 미즈사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소리 쳤다. "나는 지금까지 속이고... 아, 몰랐었어, 네가 그... 류오마루의 카시마 선장 딸이었다니..." "...? 미즈사키..." 요우코는 갑작스런 미즈사키의 행동에 당황하고 있었다. "요우코, 들어 봐." 결심한 듯이 미즈사키가 말했다. "나도 그 배에 타고 있었어. 그 오리엔탈호에!" "뭐...!?" 미즈사키의 고백에 요우코는 너무 놀라 숨을 삼켰다. 5 "무슨 말이야, 그게...? 미즈사키가 오리엔탈호에 타고 있었다니.... 나, 나는 몰랐..." 요우코는 입술을 떨었다. "용서해 줘, 요우코! 그 사고는 내 탓이야. 내가 감시대를 이탈해서 그런 일이...!" 미즈사키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모, 모르겠어, 미즈사키! 무슨 말이지!? 하지만 오리엔탈호 선원 명부에는 미즈사키의 이름이 없었잖아!" 요우코는 자신이 살인자로 고발되고 있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선원 등록은 돼 있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분명히 타고 있었어. 보충 인원으로. 그리고 사고 원인을 만들어..." 미즈사키는 입술을 깨물었다. "거, 거짓말...?" "거짓말이 아냐. 그날 나는 몹시 들떠 있었어. 보충 인원이긴 하지만 동경하던 오리엔탈호에 탈 수 있었기 때문이야. 그 명예에 취해... 그래서 다카모리 선장이 감시대에서 내려와 파티에 참가하라 했을 때도 선장이 그렇게 말해준 게 너무 감격스러워... 설마, 그런 일이 생길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 그 최신 하이테크 여객선이 충돌 사고를 일으키리라고는, 설마..." 미즈사키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 그럼, 당신도 그 세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요우코는 이미 김전일과 겐모치는 엄청난 사실에 온 정신이 흔들리고 있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게 되는 말조차 이제 억제할 수 없었다. 그것은 미즈사키에 대한 요우코의 마음이 이 배에서의 살인을 위한 거짓 애정 따위는 결코 아니었다는 증거였다. 미즈사키도 당연히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 고백했다. 애정과는 상반된 행위지만 자신의 생각 또한 진실이라는 걸 증명하듯이--. "나는 비열한 남자야. 그 다카모리 선장과 와카오지 같은,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들어 주세요, 겐모치 경감님, 김전일 씨. 그리고 여기 계신 모든 분들." 미즈사키는 숙였던 고개를 들며 비장하게 말했다. "그 3년 전의 사고 책임은 모두 오리엔탈호에 있었습니다. 류오마루호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리엔탈호에 타고 있던 우리들의 어리석은 허영과 쓸데없는 권력투쟁이 초래한 사고였습니다. 다카모리 선장과 와카오지 씨는 그것을 숨기기 위해 사고의 원인을 모두 알고 있는 나의 입을 봉했습니다. 내가 그 배에 타지 않은 것으로 꾸몄습니다. 그래서 사고 원인을 알고 있는 감시대 요원은 사망한 6등 항해사로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선원 배치는 선장과 1등 항해사였던 와카오지 씨가 정하기 때문에 누가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선원 대부분이 사고의 희생자가 돼 버린 데다가, 이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 해도 일부러 자신의 배에 불리한 발언을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카모리 선장과 와카오지 씨는 이런 점을 이용한 것입니다. 재판은 눈 깜짝할 사이에 오리엔탈호 쪽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사고의 규모로 보아 이례적으로 빨랐습니다. 그것은 류오마루호 측의 승무원의 거의 재난으로 사망해 버렸기 때문에 오리엔탈호 쪽의 증언만이 받아들여진 것도 그 한 이유였지만, 결정적인 것은 류오마루의 단 한 사람 생존자였던 인물이 류오마루호에 불리한 증언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살해된 카노우였던 거군요?" 김전일이 묻자 미즈사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고백을 계속했다. "카노우는 오리엔탈호의 선장인 다카모리와 1등 항해사인 와카오지 씨의 거짓 증언을 모두 인정한 데다 류오마루호의 카시마 선장이 근무 중에 술을 많이 마셨다고 증언했습니다." "거짓말, 그렇지 않아! 아버지는 보통 때는 술을 잘 마셨지만 배에 타고 있는 동안만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어! 내가 어렸을 때 배에 자주 함께 탔을 때부터 그랬어!" 요우코는 미즈사키를 보고 소리쳤다. 끓어오르는 증오심과 떨쳐 버릴 수 없는 애정이 뒤섞여 안타까운 눈빛이었다. "물론 그래. 요우코의 말이 맞아. 모두 날조된 거야." 미즈사키가 요우코를 향해 말했다. 그의 눈은 요우코의 눈과 똑같이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카모리 선장과 와카오지는 카노우를 매수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증언하도록 한 겁니다!" 미즈사키의 말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또다시 웅성대기 시작했다. 미즈사키의 고백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너무도 비열한 행위이다. 설령 그것에 미즈사키가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 해도 그들의 소행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면 그 역시 똑같은 죄를 진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이때는. 침묵 속에서 미즈사키의 고백을 계속되었다. "나는 3개월의 항해를 마치고 귀국한 뒤 신문을 토해 사고에 대한 기사를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사고로부터 겨우 5개월이 지나는데 이미 재판은 끝나고, 책임은 모두 류오마루호가 진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재판 내용을 보고 직감적으로 다카모리 선장과 와카오지 씨가 카노우를 매수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두 사람을 만나 그에 대해 다그치자 그들은 사실을 모두 인정하더니 나에게 다짐을 해 두었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해 이미 끝난 일을 다시 들추지 마, 너도 이제 공범자야.'라고요." "하지만 믿을 수 없어, 미즈사키 씨 같은... 그렇게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 그런 비열한 일에 동참했다니..." 미유끼가 중얼거렸다. 그것은 김전일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느낀 의문이기도 했다. 미즈사키는 힘없이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그저 비겁하고 소심한 인간일 뿐입니다. 다카모리 선장과 와카오지 씨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네가 사실을 증언해도 이득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라고요. 거짓 증언을 하는 대신에 거액의 뒷돈을 받아 챙긴 카노우 외에 류오마루호의 선장과 선원들은 이제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죽어 버린 승객과 선원들에 대한 보상은 어차피 보험 회사가 할 일이다. 그러니 류오마루호를 가지고 있던 해운 회사도 손해는 없다. 여기서 사건의 진상을 뒤집으면 오리엔탈호의 살아남은 선원은 물론, 동아 오리엔트 해운도 다시 일어서러 수 없을 정도로 큰 타격을 받는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며 나를 설득했습니다. 이것이 결국 나의 속에 있던 마음을 끌어냈습니다. 사실 나는 두려웠습니다. 두 번 다시 배에 탈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두려웠습니다. 아무리 내가 살인자로 몰린다 해도 그것만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배는 내게 삶의 의미였습니다. 그것을 방해받지 않는다면 비겁자건 뭐건 무엇이든 되겠다, 이렇게 생각한 나는 입을 열지 않은 것입니다." 미즈사키의 고백을 방심한 듯이 듣고 있던 요우코는 갑자기 창 밖을 쳐다보며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김전일은 요우코가 뭐라고 중얼거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그저 노래 같았다. 그녀는 립스틱도 바르지 않은 입술로 뭔가 노래하고 있었다. 안개가 낀 창 밖을 무표정하게 응시하면서, 그러는 동안에도 미즈사키의 고백은 계속되었다. "다카모리 씨는 동아 오리엔트 해운에서 쫓겨날 때 내게 자신을 따라 오라 명령했습니다. 그것은 사고의 진상을 알고 있는 나를 옆에 두고 싶었던 탓도 있었을 것이고, 나만이 아무 일도 없는 듯 동아 오리텐트 해운에 남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겁니다. 나는 묵묵히 다카모리 씨를 따라가기로 했습니다. 정말로 나는 배에 탈 수만 있다면 회사 따위는 어디라도 좋았으니까요. 그러나 나와 다카모리 선장과 와카오지 씨가 이 코발트 마린호에 타는 것으로 정해지고, 그리고 주식에 실패해서 가지고 있던 뒷돈을 모두 날린 카노우가 굴러 들어와 이 배에 오리엔탈호 사건의 비밀을 공유하는 네 사람이 다 모였을 때 나는 깨달았습니다. 이 배는 귀양선이며, 우리들은 죄값을 치르기 위해 보이지 않는 신의 손에 의해 이 배에 태워진 것을요." 미즈사키는 요우코에게 눈길을 주었다. 요우코는 여전히 조타실의 넓은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안개는 조금 걷히기 시작해 그 사이로 살며시 바다가 보였다. 김전일에겐 그것이, 이 사건이 종말에 가까워짐을 나타내는 거처럼 생각되었다. 6 요우코는 힘없이 한숨을 쉬고 김전일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긴 침묵을 깨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고백했다. "내가 졌어요, 김전일 씨." "요, 요우코...." 미즈사키가 뭐라고 말하려 하자 그것을 제지하며 요우코는, "김전일 씨,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지 물어 봐요. 모두 다 솔직하게 말할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김전일 쪽으로 다가갔다. "이 코발트 마린호가 한밤중에 항구를 돌아다녔다는 소문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도 역시 당신이 한 겁니까?" 김전일은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되는 복잡한 마음을 억눌렀다. "네, 그래요." 요우코도 김전일과 비슷한 어조로 차분히 대답했다. "배에 관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한테서 배웠습니다. 그래서 늘 보고 배운 덕에 대부분의 배는 조종할 수 있습니다. 한때는 여자이면서도 선원이 되려고 생각한 적도 있었죠. 그러나 이런 큰 배는 처음이어서 미즈사키가 조작하는 것을 보며 공부했어요, 그리고 '진짜' 해 본 것은 조금전이 처음이었어요. 이 배에는 원래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서 설마 내가 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아요. 나는 이 배에서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처녀로 통했으니까요." 일단 결심하자 요우코는 거리낌없이 털어놓았다. "그 세 사람이 입을 맞춰 사고의 책임을 당신 아버지에게 덮어씌웠는지는 어떻게 알았습니까?" 김전일은 기계적으로 다음 질문으로 옮겼다. 요우코는 또 무감동하게 대답했다. "이 항해일지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 아버지의 유품이겠죠. 당연히 재판 할 때도 조사되었을 텐데요?" 김전일이 묻자 요우코가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이것이 나왔을 때는 사고가 난 후 7개월이나 지나서였어요." "네? 그건 어떻게 된 거죠?" "...내가 아버지의 사고를 안 것은 사고로부터 1개월 가까이나 지났을 때였어요." 요우코는 먼 과거를 회상하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머니는 나를 낳고 곧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아버지 혼자서 나를 키웠죠. 그랬기 때문에 어렸을 때는 자주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탔어요. 나는 아버지의 마스코트 같은 존재였어요. 정말 즐거웠어요. 그때가 가장... 아버진 나에게 배를 조종하는 법을 열심히 가르쳐 주셨어요. 정말로 뱃사람을 만들 생각이었는지도 몰라요." 요우코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중학교에 올라가자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탈 수 없게 됐어요. 그때부터 나는 계속 외톨이였어요. 그래서 나의 생활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죠. 고등학교에 들어가 조금 지났을 때 난 드디어 가출하고 말았어요. 그리고 떠돌이 남자와 함께 살게 되었어요. 형편없는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나는 뉴스도 보지 않고 신문도 읽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런 큰 사고가 있었는데도 정말로 한 달이 지나도록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 역시. 나는 집으로 급히 돌아왔어요. 하지만 집 안에 한 걸음도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기자들이 우글우글해서 너무 무서웠으니까요. 신문이나 잡지에서는 무조건 아버지가 모두 나쁘다고 쓰여 있어서 딸인 내게도 세상의 차가운 시선이 온통 쏠리고 있다 생각되자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때부터 나는 이름을 바꿨습니다. 옛날 이름으론 제대로 바깥에 나갈 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너무나 아버지가 미웠어요. 나를 내팽개쳐 두고 바다에만 나가더니 결국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역시 자식이라 어쩔 수 없더군요. 아버지 장례식도 치를 수 없었던 게 너무나 슬펐어요. 그래서 겨우 꽃만 사 들고 사고가 난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미세키 해운으로 갔어요. 사고로부터 7개월이나 지났는데도 해안에는 아버지의 유조선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끼여 있었어요. 기름에 지든 고기들도 많이 죽어 있었고. 전부 내 아버지 탓이라 생각하니 정말로 죽고 싶어졌어요. 그때였어요. 내가 파도에 떠 있는 가방을 발견한 것은. 그것은 기름에 찌든 여행 가방이었어요. 아버지가 아끼던 가방이어서 금방 알아볼 수 있었죠. 그 가방은 배 여행이 많았던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 해난 사고가 났을 때도 물에 뜨도록 만들어진 것이라고 아버지는 말했었어요. 자신은 뱃사람이니까 그 가방을 사용해야 한다고 했거든요. 나는 옷이 젖는 것도 아랑고하지 않고 물 속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그것을 건져내 열어 보았죠. 안에는 스며든 바닷물 이외에 거의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어요. 있는 건 이 항해일지뿐이었어요.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페이지를 넘겼죠. 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나요. 그때 가슴에 벅차 오르던... 슬픔을..." 요우코의 눈에서 굵은 눈물 방울이 떨어졌다. 7 요우코는 사랑스런 아기처럼 일지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리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려고도 하지 않은 채 계속 말을 이었다. "일지는 비닐 봉투에 넣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7개월 동안 바닷물 위에 떠 있어서 거의 젖어있었어요. 하지만 유성펜으로 쓰여진 글씨는 대부분 또렷하게 남아 있었죠. 나와 함께 옛날에 배에 탔을 때의 추억이라든가... 즐거웠던 때에 대해서 한가득 적어 놓았어요. 아버지가 그 항해를 마지막으로, 나를 위해서 배에서 내릴 결심을 한 것도...." 요우코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입술을 깨물고 몇 번인가 흐느껴 운 다음 요우코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나를 내버려 둔 게 아니었어요! 나와 둘이서 다시 한번.... 이번엔 정말 함게 살아 줄 생각이었던 거예요! 자신의 꿈도, 삶의 보람도 모두 버리고 나를 위해서.... 오로지 나를 위해서... 아버지는...." 요우코는 또 말이 막혔다. 다시 조용해진 조타실에 스며든 조그만 엔진 소리와 파도 소리가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그런 마음을 전혀 몰랐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가출해서.... 그때는 출항 전송도 하지 않고.... 일지를 한장한장 넘길 때마다... 즐거웠던 추억이... 앨범을 넘기듯이 솟아나서.... 나는 알게 되었죠. 내가 아버지를... 아버지를 정말 사랑했다는 것을...." 요우코는 떠오르는 추억에 더욱 목이 메어 거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모두가 가슴에 뜨거운 것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미유끼도 김전일도, 승객들도, 그리고 비극에 익숙해진 겐모치조차도.... 어떤 사람은 눈물을 닦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참으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내가 전송하러 갔다면 하고 생각했어요. 그랬다면 아버지는 나를 보고 분명 출항을 늦췄을 거예요. 나에게... 이 항해가 끝나면 계속 함께 지내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그랬다면 그런 사고를 피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자 너무나 후회스러워서... 너무도... 후회스러워서... 그런데--" 갑자기 눈물에 젖어 있던 요우코의 눈동자가 빛났다. 차가운 증오의 눈빛이었다. "그런데 일지를 마지막 날짜까지 넘겼을 때 나의 슬픔은 증오로 바뀌었습니다. 마지막 페이지의 아버지 글씨는 거의 아이들 낙서처럼 혼란스러웠어요. 그것은 사고 상황을 설명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전기에 감전된 듯이 전신에 오한이 뚫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손이 떨려서 일지를 떨어뜨릴 뻔했죠. 아버지의 일지에 쓰여 있는 사고 상황은 신문이나 잡지에서 읽은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였습니다. 배에 대해 아버지에게서 배운 나는 곧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진실을 알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어렵게 어렵게 재판 기록도 손에 넣었습니다. 그 속에서 아버지가 술에 취한 채 키를 잡고 있었다는 카노우의 증언을 봤을 때 나는 거의 확신을 갖게 됐죠. 아버지의 일지는 거짓이 아님을. 아버지는 평소에 애주가였지만 배를 타는 동안은 한 방울의 술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왜 그 일지를 매스컴에 발표하지 않았죠?" 김전일이 묻자 요우코의 목소리는 더욱 거칠어졌다. "그렇게 하려고도 생각한 적이 있었죠. 하지만 이미 재판까지 다 끝나 버린 상태였습니다. 아버지 배에 탔던 카노우까지 다카모리, 와카오지의 한패가 되어 그쪽에 유리한 증언을 한 채로요. 나 혼자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일지를 가지고 가면 오히려 의심을 받을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가 거짓으로 썼다는 말을 한다면 그렇지 않다고 증명할 수 있는 증거 따위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의 성격만이 유일한 증거일 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고, 아버지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죽어 버렸으니까요." 김전일은 더 이상 반박할 말도 없었다. 요우코는 계속했다. "그래서 나는 복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배에 대해서도 더 많이 공부했고, 어떻게든 그 사건과 관계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재판에서 아버지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운 다카모리와 와카오지 두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일지가 진실이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됐습니다. 그들이 타는 배에 카노우도 동승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카노우를 취직시켜 준 사람이 와카오지였으니까요. 이들이 뒤로 손을 잡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죽인' 데다가 사고의 책임을 모두 아버지에게 덮어씌우고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 다카모리와 와카오지. 그 놈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매수되었는지 모르지만 사고의 원인이 아버지에게 있었다는 증언을 해 아버지의 인생 모두를 더럽힌 카노우. 아니,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나의 인생까지도 그 놈들 때문에 엉망이 된 것입니다. 1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대형 사고의 원흉으로 몰린 선장의 딸로서 나는 세상 사람들의 악의에 찬 시선을 피해 숨어서 평생을 살아가야 할 테니까요. 너무나 미웠습니다.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그 놈들이 미웠습니다! 몇백 번 죽여도 풀리지 않을 정도로!" 요우코는 김전일을 보고 토해 내듯이 말했다. "아버지의 사고 뉴스를 처음 알고 집으로 달려갔을 때 나의 집에는 '살인마!', '지옥으로 떨어져라!'등등의 무서운 낙서가 써 있었고, 사람들이 던진 돌로 집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습니다. 너무 무섭고, 너무 슬퍼서...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도망쳤습니다. 알겠어? 그때 내 마음을! 어렸을 때부터 자란 자신의 집이... 아버지와 둘이서 살았던 그 집이 쓰레기장처럼 변하고 저주를 받고 있었어! 그런 집을 보았을 때 내 마음이 어땠는지, 김전일, 당신은 상상할 수 있을까? 절대 할 수 없을 거야! 몇백 명이나 되는 유족들의 증오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고 큰 소리로 외쳤어. 하지만 내 외침 소리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어! 나는 이름을 바꾸고 경력을 위장해 그 놈들이 있는 동태평양 기선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들은 내 얼굴을 몰랐기 때문에 들킬 염려는 없었습니다. 그러고서 이 코발트 마린호에 타기 위해 미즈사키에게 다가갔습니다. 그의 연인이 되면 같은 배에 타고 싶다는 나의 희망도 더 쉽게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우코는 미즈사키를 보지 않았다. "요, 요우코... 나는... 네, 네가..." 뭔가를 말하려던 미즈사키를 요우코가 가로막았다. "미즈사키 씨, 나는 당신을 이용하려 했을 뿐이에요. 이 배에 타기 위해 당신의 연인이 돼 당신에게 안겼어요. 그 뿐이에요." 목소리는 너무도 차가웠다. 그러나 김전일은 그 억제된 말 속에 결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담겨 있음을 느꼈다. 증오와 배반과 불신으로, 폭풍 한가운데 서 있는 마른 나무처럼 흔들리면서도, 안간힘을 써 뽑히지 않으려는 격렬한 '사랑'... 요우코는 아무에게도 시선을 두지 않은 채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의 가방이 7개월 동안 어디를 어떻게 지나서 그렇게 흘러왔는지 나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아버지가 나에게 복수를 허락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 대신에 복수를 해 달라고 아버지는 그 일지를 통해 나에게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요우코는 다시 창 밖으로 눈을 주었다. 안개가 걷히는 사이로 멀리 섬이 보였다. 잠겨 가는 태양이 바다를 붉게 물들였다. "이제 복수는 끝났으니까 더 이상 남은 것은 없습니다. 경감님, 체포해야죠?... 자, 여기 있습니다." 요우코는 항해일지를 겐모치에게 건넸다. "이제 더 이상 '유령 선장'이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요우코는 담담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미즈사키는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더니 어깨를 떨며 울부짖었다. "내 탓이야! 모두 내 탓이야, 나 때문에... 바보..." 미즈사키는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 눈물이 자신이 범한 커다란 죄 때문인지, 아니면 요우코와의 갑작스런 이변 때문인지 김전일은 알 수 없었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저 배만이 우는 아이를 달래는 요람처럼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기괴한 유령선의 전설에 얽힌 비참한 사건은 잠겨 가는 저녁해와 함께 조용히 그 막을 내렸다. 8 오오츠키는 기관실에 있었다. 땀투성이가 되어 항구에 들어가기 전의 마지막 엔진 조정을 하고 잇는 오오츠키에게 김전일이 살짝 다가가 불렀다. "오오츠키 씨, 바쁘세요?" "당연하지. 보면 몰라!" 김전일을 보려고도 하지 않고 오오츠키는 대답했다. "하하하! 아직도 화가 안 풀리셨군요, 할아버지." 김전일이 농담하듯 말하자 오오츠키는 기분이 몹시 나쁜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무슨 일이야, 볼일 없으면 저리 가!" "그렇게 윽박지르지 마세 요. ...아, 그래, 이 사건의 결말을 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찌 되었건 모두 다 바보 같은 놈들이야!" 오오츠키는 토해 내듯이 말했다. "죽은 놈들도, 요우코의 아버지도, 미즈사키도, 이 사건에 관계된 놈들은 모두 멍청한 놈들이야. 배밖에 모르는, 다른 사람은 생각할 줄도 모르는 이기주의자들!" "흠... 하지만 그건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잖아요?" 김전일이 비꼬듯 말했다. "뭐, 뭐라고?" 오오츠키는 작업을 멈추고 김전일을 쳐다보았다. "아, 화내지 마세요! 난 말을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왔을 뿐이니까요. 말만 전하고 곧 사라질 거예요." "말을 전해 달라고..." "손님 중에 머리가 긴 아주 귀여운 여자아이가 있죠? 그 아이는 부모와 사이가 좋지 못해서 가출한 것 같더라구요. 그런데 그 아이가 왜 일부러 이런 누더기 같은 배에 탔는지 아세요?" "...?" "모르죠, 할아버지?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래요." "나, 나를...?" "그 아이 이름은 유우예요. 그 아이가 바로 할아버지와 소식불통인 딸의 아이, 즉 할아버지의 손녀예요." "뭐, 뭐라고!? 그 아이가 세이코의 딸이라고!?" 오오츠키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자, 나는 다 전해 드렸어요. 참! 그 아이는 지금 여러 가지로 괴로워하고 있어요, 만나면 차분히 얘기를 들어 주세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죠? 아무리 막무가내 할아버지라도. 자, 그럼 저는 갑니다!" 김전일은 오오츠키가 부르는 것도 모른 체하고 잽싸게 그곳을 떠났다. 9 요우코 대신 여행에서의 마지막이 될 저녁 식사 뒷정리를 도우면서 미유끼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모르겠어,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옆에 있던 겐모치 부인이, "뭘 모르겠다는 거지, 미유끼?" 하고 반문했다. "아, 죄송해요. 그냥 혼자 말한 거예요. 그런데 사모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미즈사키 씨도, 요우코 양의 아버지도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면서 배에 타려고 했을까요? 딸을 내버려 둔다거나, 비겁한 줄 알면서도 그런 짓을 하면서까지...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어요." "그래. 하지만 남자에게 일이란 그런 것 같아. 우리 남편도 사건이 생기면 집안일 따위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아. 잠복을 해야 한다는 둥 하면서 사흘씩 나흘씩 들어오지 않는 날도 자주 있어. 지난번에는 아이 입학식에도 오지 않고 일주일 동안이나 집에 안 들어오더라구.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이혼이라도 해 버리겠다고 마음먹고 그이가 잠복해 있는 호텔로 쳐들어 갔지. 그랬더니 텁수룩한 수염에 잠을 못자 초췌한 얼굴로 나와서는 '웬일이야?'라고 한마디 하는 거야. 그런데 그 순간 왠지 그이가 멋지게 보이더라구. 집에서 빈둥빈둥대던 모습과는 너무 달랐거든. 당장이라도 쓰러질듯이 피곤해 보였는데 눈만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어. 그래서 결국 나는 '수고하세요'라고만 말하고 돌아와 버렸어." 겐모치 부인은 그렇게 말하고 작게 웃었다. "역시 경감님이시군요..." 감동했다는 듯이 대꾸하면서 미유끼는 김전일을 생각했다. 그는 앞으로 어떤 인생을 걸을까. 분명 5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이렇게 사건을 쫓아다니고 있을 거야. 그때도 변함없이 그의 옆에 있을 수 있다면... 분명 잘 지켜 줄 거야. 그만이 할 수 있는 그 '일'을 방황하지 말고 힘차게 해나가기를--. 미유끼는 그렇게 생각했다. 에필로그 오리엔탈호 선원이었던 미즈사키의 고백은 오가사와라행 여객선의 연쇄 살인 사건 이상으로 센세이셔널한 화제가 되어 매스컴을 뒤흔들었다. 매스컴 주도로 류오마루호의 선장이 남긴 항해일지 내용과 미즈사키의 증언을 토대로 3년 전에 일어난 대형 사고의 재검증이 행해졌다. 사건은 이미 죽고 없는 다카모리 선장 외에 두 명의 관계자, 그리고 미즈사키뿐만 아니라 대기업인 동아 오리엔탈 해운의 간부들까지 말려든 일대 스캔들로 발전할 것 같은 기세였다. 동시에 류오마루 선장의 딸의 해상 복수극도 큰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배에 타고 있던 경찰청 조사 1과의 현역 경찰 겐모치가 이 사건을 해결했다 해서 이 사건은 서스펜스 드라마처럼 다루어졌다. 또한 범인인 요우코는 비극의 히로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사건 해결 뒤에 아주 평범한 고등학생의 활약이 있었다는 것은 본인의 희망도 있고 해서 매스컴에서 다뤄지지 않았다. "어이, 요우코 양, 오랜만입니다!" 김전일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기차역 대합실에서 옛친구를 만난 것처럼 구치소 면회실에서 큰 소리로 떠들자, 김전일의 옆에 서 있던 직원이 얼굴을 찡그리고 헛기침을 했다. "오랜만이네요, 김전일 씨." 요우코는 웃지 않았다. "기분은 어때요? 저런! 가까이서 보니까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데요." "체! 지독하게 비꼬는군요." 김전일은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었다. "그럴 생각으로 한 말이 아녜요. 김전일 씨한테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요. 덕분에 미즈사키 씨가 모든 사실을 말해주었으니까요. 천국에 계신 아버지도 분명히 기뻐하실 거예요." 요우코가 힘없이 미소를 짓자 김전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라며 요우코에게 진지한 시선을 보냈다. "아니라고요? 무슨 뜻이죠?" 요우코가 물었다. "당신의 아버지는 기뻐하시지 않을 거라는 겁니다. 이 말만은 당신에게 분명히 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남들이 뭐라고 해도 후회는 없어요. 이것은 운명이에요. 아버지가 나에게 진실을 밝혀 달라고 말하고 싶어서 그날 그 해안으로 나를 이끄신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7개월이나 지나서 아버지 일기가 발견되는 우연이 일어날 리가 없어요."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뭐가요?" "나도 그 항해일지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곳을 읽어 봐도 당신에게 향한 메시지로 가득하더군요. 자신의 생의 보람을 버리고라도 당신과 함께 할 것이라던 아버지인데 당신이 이런 상황으로 몰리는 것을 원하셨을 리가 있을까요?" "...." "아버지는 그저 알게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자신이 당신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알고 있었어요. 이미." "그런 말을 하러 왔나요!?" 요우코는 김전일을 보지 않았다. "아니, 실은 이것을 당신에게 건네 달라고 부탁 받아서." 김전일은 가방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 "미즈사키 씨가 부탁해서 가져온 겁니다. 당신이 자신을 용서한다면 그때 봉투를 열라고 하더군요." "미즈사키가요?" 김전일은 옆에 있는 직원의 허가를 받고 요우코에게 봉투를 건네주었다. 요우코는 희고 두꺼운 봉투를 받아서 뒷면에 써 있는 '미즈사키'라는 글씨를 거칠어진 손가락 끝으로 살짝 만져보았다.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전일은 직원이 시계를 본 것을 깨닫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참! 요우코 양한테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이제 시간이 다 된 것 같으니 물어 봐야겠어요." "네? ...뭐에요?" 요우코는 그렇게 말하고 봉투 위에 손을 가지런히 놓았다. "그 배의 조타실에서 미즈사키 씨가 3년 전의 사고에 대해 말하는 동안 요우코 양은 뭔가 중얼거리고 있었죠? 노래를 부른 게 아닌가요?" 김전일이 묻자 요우코는 엷게 미소를 지었다. "네, 그래요." "역시 그렇군요. 나도 자주 그래요. 선생님께 꾸중을 들을 때라든가, 듣고 싶지 않은 설교를 들을 때요. 머릿속으로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면 상대가 말하는 것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되지요?" "...." "요우코 양, 듣고 싶지 않았지요? 미즈사키 씨를 정말로 좋아했으니까." "...." "그 사람, 요우코 양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어요. 그렇게 전해 달라고 나에게 애원하듯이 부탁했어요." "미즈사키가...?" "요우코 양이 용서해 주기만을 기다리겠대요. 그 봉투 만져 봐요. 뭔가 단단한 것이 들어 있으니까." 요우코는 김전일 말대로 봉투를 만져 보았다. "...반지?" 요우코가 눈을 크게 떴다. "나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의미를 알겠죠?" "...." 요우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말없이 그저 무릎 위에 놓인 흰 봉투를 바라보았다. "자, 이제 면회 시간 끝입니다." 옆에 서 있던 직원이 시계를 보면서 알려 주었다. "그럼 나는 가겠습니다." 일어서는 김전일을 요우코가 불렀다. "김전일 씨, 잠깐만요." "왜요?" "바다는 넓다, 넓다...라는 노래 있지요?" "아, 그 노래요?" "김전일 씨, 그 노래 1절과 2절 어느 쪽이 좋아요?" "예? 2절이라면 바다에 띄우고...이죠? 음, 어느 쪽인가, 1절 쪽이라고 할까?" "나도 어렸을 때는 그랬어요. 아버지는 2절이 좋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요우코는 김전일을 보고 미소지었다. "--지금은 나도 2절이 좋아요." "...분명 미즈사키 씨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