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카이로엔 밤이 없다 원작자 : 아카가와지로 역자서문 이 작품<카이로엔 밤이 없다>은 일본의 저명한 추리작가 아카가 와 지로()의 작품<마리오네트의 함정( )>을 번역작가 이선희()가 우리 실정에 맞게 재구성한 번 안 소설입니다. 아카가와 지로는 일본 문단에 나온 지 10여 년 동안 50여 권의 추리 소설을 발표하면서 단 한 작품도 베스트셀러 기록을 놓쳐 본 적이 없는 일본 추리 문학계의 기린아로,특히 청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을 쓰면서 기발한 아이디어와 넘치는 유모어, 컴퓨터와도 같이 꽉 짜여진 구성과 탁월한 문장으로 최대의 인기를 얻고 있는 젊은 작가입니다. 대표작으로 <카이로엔 밤이 없다><천사는 신이 아니다><한밤의 가면 무도회><얼굴없는 십자가> 등이 있습니다. 제 1 장 저택 1 그날 밤은 전국에 걸쳐 가을비가 짙은 안개비와도 같이 내리고 있었 다. 여기, 서울-속초간 44번 국도도 예외는 아니어서 폭우가 무서운 잿 빛 장막을 드리우며 진종일 내리퍼붓고 있었다. 서울에서 속초로 정기적으로 다니는 대형 화물 트럭이 비에 헤드라이 트를 노랗게 물들이면서 44번 국도를 물방울을 튀기며 달리고 있었다. 운전기사는 마흔 정도의 건장하고 햇볕에 그을린 사내로, 굵직한 손이 커다란 핸들을 꼭잡고 있었다. '당분간 그칠 것 같지가 않군.' 한숨 섞인 혼잣말이었다. 원래 화물 트럭에는 교대할 사람이 따로 타 도록 정해져 있지만, 오늘 밤은 그 사람이 갑자기 복통을 일으키는 바 람에 혼자 먼길을 가는 외로운 여행이 되고 말았다. 체력에는 자신이 있기에 녹초가 될 걱정은 없었다. 그러나 출발할 때 부터 켜둔 채로 놔둔 라디오 이외에 이야기 상대도, 기분전환할 것도 없는 단조로움에는 그만 지쳐 버렸다. 게다가 이렇게 심한 비에, 그는 몸이 생각만큼 그리 개운하지 않았던 것이다. 보통때라도 밤의 주행은 낮의 배 이상 피곤하다. 주위의 경치 가 끊임없이 변화되는 낮과 달라서, 밤에는 시야가 몹시 단조롭고 짧 다. 적어도 시야가 탁 트여 있으면 마을의 불빛을 보고 어디쯤 달리고 있는가를 아는데, 이렇게 비가 오는 밤은 최악이다. 스피드도 늦추지 않으면 안 되고, 그 탓으로 목적지가 다른 때와 달리 멀게 느껴지는 것 이다. 사내는 힐끗 시계를 보며 조금 스피드를 올렸다. 차 안의 작은 시계 가 파란 색으로 <12:35>를 나타내고 있었다. 지금은 거의 인가가 없는 숲 사이를 달리고 있다. 약 15분 정도 그렇게 달려도 지나치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제기랄!' 의미도 없이 욕지거리를 해보았다. 무엇인가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계속 내리는 비는 사내의 기분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사내가 그것을 느꼈던 것은, 그것이 라이트에 반사되어 반짝 빛났던 탓이었다. 그가 깜짝 놀랐을 때에는 벌써 그것은 트럭의 훨씬 뒤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사내는 한순간 주저하고 나서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았 다. 비닐 레인코트였다. 그것도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빨강이었다. 사내는 핸들에 양손을 올리곤, 슬쩍 백미러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빗 속에서 사람 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이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빨간 레인 코트가 되고, 점점 젊은 여자가 되었다. 차 안의 시계는 이미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에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가, 더군다나 혼자서 말이다. 틀림없이 몰고가던 자동차가 고장났을 것이 다. 다음 휴게소까지 가려면 아직 상당히 많은 거리를 남겨 놓고 있는 데. 태워 줄까? 이런 밤, 누군가 옆에 있어 준다면 지루함이 조금은 덜할 것이다. 게다가 상대가 젊은 여자라면 더욱 그러하다. 여자는 빨간 레 인코트를 입고, 머리에 모자를 쓰고 있었다. 우산도 없이 말이다. 사내는 아무튼 갈 데까지 간다는 심정으로 후진 기어를 넣고 능숙하 게 차를 뒤로 몰았다. 마침내 그 여자가 차 앞으로 보였을 때, 그는 클 랙슨을 약하게 한 번 눌렀다. 그러나 여자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사내는 여자가 트럭을 무시하고 그대로 지나쳐 버리는 것을 보곤 아연 해졌다. 그녀는 트럭 따위는 마치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모습으로 물끄 러미 앞쪽을 주시한 채 걸어갔다. '뭐야?' 남자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뭔가 중얼거리다, 차문을 열고 큰 소리로 그 여자를 불렀다. "이봐요, 타지 않겠소?" 여자가 마침내 멈추어 서서 그를 쳐다보았다. "자, 타요. 가장 가까운 휴게소까지 10킬로는 더 걸려요." 여자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천천히 걸어와서는 고맙다고도 하지 않고 트럭에 올랐다. "코트는 옆에 놓아요. 아니, 시트가 조금 젖어도 상관없소." 물이 뚝뚝 떨어지는 코트를 벗고, 여자는 시트에 가볍게 앉아서 등을 뒤쪽으로 크게 기대었다. 회색 스웨터와 연둣빛 바지가 자그마하고 날씬한 몸을 감싸고 있었 다. 사내는 그녀를 스물둘, 또는 셋쯤이라고 짐작했다. 젖어서 추운 것 일까, 얼굴이 몹시 창백했다. "모포라도 빌려 줄까요? 춥죠?" "아뇨, 됐어요. 고마워요." 속삭이는 듯한 낮은 목소리였다. 사내가 힐끔힐끔 훔쳐보는 것을 아 는지 모르는지, 여자는 물방울이 밀려드는 정면 유리창을 물끄러미 쳐 다보기만 했다. 선이 다소 날카로운, 윤곽이 뚜렷한 얼굴이었다. 가늘 고 긴 눈, 얇은 입술, 똑바르고 곧은 콧등, 머리는 윤기 있게 젖어서 길게 어깨로 흘러내려지고 있다. 무엇을 이야기해야 좋을지 사내는 잠시 당황했다. 여자의 백납 같은 무표정한 얼굴이 말을 건네고픈 그의 기세를 거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잠시 후 갑자기 여자가 정면 유리창에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담배 얻을 수 있나요?" 사내는 점퍼 주머니에서 꼬깃해진 담뱃갑을 꺼내서, 여자에게 하나 빼주고 불을 붙여 주었다. 그녀는 연기를 천천히 내뱉으며, 시트에 다 시 기대었다. 겨우 편안해진 모습으로 미소까지 띠고 있는 게 사내의 눈에 들어왔다. "어디까지 가는 거죠?" "글쎄요." "차 고장이오?" "그런 셈이죠." 기운이 없는 대답이었지만, 아까처럼 차갑게 배척하는 듯한 어조는 아니었다. 사내는 그녀를 새롭게 다시 보았다. 여자의 모습에는 젊음에 어울리 지 않는 뭔가 성숙한 여자의 냄새가 흐르고 있었다. 몸에 딱 달라붙은 스웨터가 가느다란 몸과 부푼 가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갑자기 욕망이 타올랐다. 요전에 여자를 안아 보고 나서 벌써 몇 개 월이나 되는 거지? 아내와 사별하고 벌써 4년째였다. 일 때문에 들르는 온천에서 직업적인 여자를 안아 보는 일은 가끔 있지만 이렇게 젊은 여 자와는 도무지 인연이 없었다. 그녀가 쉽게 동의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일단 사내의 가슴에서 타올라 버린 욕망은 꺼지지 않았다. 깊은 밤, 빗속에서, 다른 차의 그 림자도 없이, 남자와 여자 둘뿐이다. 그렇게 되면 뭐가 나쁘지? 사내는 생각했다. 남자와 여자가 둘이 있으면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정해져 있 는 것이다. 이렇게 가냘픈 여자가 나 같은 남자의 힘을 당해낼 리도 없 다. 게다가 이렇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어딘지 농염한 여인 의 모습이 엿보인다. 그렇게 보자 시트에 기대어 있는 모습에도 어딘가 남자를 유혹하는 듯한 모습이 보이고. 애써 정면을 노려보면서도, 사내는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온통 옆자리의 그녀에게 쏟고 있 었다. 라이트에 힐끔 낯익은 표식이 떠올랐다. <용문 4km> 이 표식을 지나 1킬로 정도 더 가면, 밤에 혼자 쨍몰 때 트럭을 세우고 잠시 눈을 붙이던 장소가 있는 것을 사내는 생각해냈다. 국도에서 옆길로 빠져 곧 꺾어져서 숲속으로 들어간다. 나무에 싸여서 한여름이라도 시원하고, 사람 눈에 띄지도 않으며, 국도의 소음이 거짓말같이 거의 들리지 않는 옆자리의 여자를 다시 봤다. 거부할까? 아니면 순순히 말하는 대로 들을 것인가? 핸들을 잡은 손에 땀이 배였다. 그때 옆길이 눈앞에 보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핸들을 꺾었 다. 트럭은 크게 기울어지듯이 옆길로 미끄러져 들어가, 곧 또다시 커 브를 틀어 숲속으로 들어갔다. 트럭이 크게 한번 흔들리고 나서 정지하고 사내가 천천히 엔진을 껐 을 때, 여자는 처음으로 그에게 얼굴을 향했다. 미소는 사라졌지만, 그 표정엔 공포도 놀라움도 없었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사내는 헤드라이트를 끄고 차 안을 밝게 하고는 라디오를 껐다. 빗소리 가 갑자기 높아져서 트럭을 집어 삼킬 듯이 후려치고 있었다. 사내가 위협하듯이 여자를 내려다보았지만, 그녀는 태연하게 그 시선 을 받아들였다. 무거운 침묵은 몇 초로 끝나고, 여자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신중하게 비벼끄곤 가볍게 숨을 쉬었다. "여기에서요?" 여자가 등 뒤 빈자리로 시선을 던지며 말하자, 사내가 애매하게 웃는 얼굴이 되어 얼른 대답하였다. "잠자리로 그다지 나쁘진 않을 거요." 그 빈자리는 색이 바랜 커튼으로 운전석과 가려져 있었다. 여자는 커 튼을 열고, 그 안에 있는 작은 일인용 침대를 보았다. "꽤 좁군요." "충분해요, 겹쳐서 자기에는." 사내는 그 농담이 스스로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제가 먼저 올라갈께요. 됐다고 할 때까지 기다려요." "알았소." 여자는 불편한 듯이 몸을 구부리고서 침대로 올라가서는 커튼을 끝까 지 빈틈없이 쳤다. 사내는 크게 숨을 쉬꽤 익숙한 여자로군. 하 기야 어설픈 여자보다 다루기 쉬울 테니까 나쁠 게 없지. 그는 침을 꿀 꺽 삼켰다. 커튼 안쪽에서 옷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났을 때 사내의 욕망은 더욱 불꽃이 되었고 그의 상상은 벌써 여자의 온몸을 핥듯이 스치고 있었다. "됐어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사내는 커튼을 단숨에 확 제쳤다. 거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가 누워 있었기에 사내는 자기도 모르 게 또한번 침을 꼴깍 삼켰다. 가냘프지만, 빈약하지는 않은 훌륭한 육 체였다. 그녀는 구태여 손으로 자신의 은밀한 부분을 감추지도 않고 오 른손은 몸을 따라 내리고, 왼손은 배 위로 올리고 있었다. 사내는 급하게 여자 몸 위에 올라갔다. 발치 아래에 그녀가 벗은 옷 을 싼 빨간 레인코트가 놓여 있어 거추장스러웠지만, 사내는 그런 것에 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사내가 숨을 헐떡이며 여자 가슴에 얼굴을 묻자, 그녀가 왼손으로 사 내의 목을 어루만지면서 머리를 올려 놓은 작고 평평한 베개 아래로 오 른손을 살짝 집어 넣었다. 숨겨 두고 있던 무엇인가를 잡 오른손이 몸 옆을 스쳐 사내 등으로 돌아갔다. 소리도 없이, 매끄러운 뱀을 생각 하게 하는 동작이었다. 사내가 그녀의 입술을 자신의 입으로 막았다. 여자의 왼손이 사내의 머리를 누르고, 오른손에서 은색의 칼이 쑥 뻗어 나온 것은 그 다음 순 간이었다. 칼을 단단히 움켜쥐고, 그녀는 칼날을 사내의 목줄기를 향해 직각으 로 내렸다. 사내의 무게에 저항하면서 크게 숨을 들이쉬고, 그녀가 칼 날을 사내 목줄기에 갖다대자 자신이 넘치는 외과의사가 메스를 내리긋 는 듯한 강력함으로 사내의 목줄기에는 똑바로 일자가 그어졌다. 갑자기 비가 더욱 격심해졌다. 나뭇가지는 비의 기세에 떨고, 속삭이 는 것 같던 리는 군중의 외침과 같이 높아졌다. 갑자기 클랙슨이 예리하게 비를 뚫고 울리다 그쳤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서, 일말의 표정도 없이 운전석을 내려다보았 다. 굴러떨어지면서 핸들에 부딪쳐 클랙슨을 울린 사내의 몸은 지금 운 전석 시트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었다. 눈을 부릅뜨고 입을 반쯤 벌린 채, 목줄기의 시뻘건 상처를 딱 벌리고 있었다. 여자는 전신을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운전석도, 시트도, 커튼도, 천 장까지도 온통 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정면 유리창 안쪽으로 거품 이 인 피가 천천히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여자는 침대에서 내려오자, 태연히 사내의 시체를 밟고 질퍽한 피웅 덩이에 발을 적시면서 문을 열었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칼을 사내 의 가슴 위에 휘익 던지고 빗속으로 내려섰다. 비는 한층 더 심해져서, 흡사 아스팔트 포장을 부술 것 같은 기세였 다. 여자는 숲속을 빠져 나와 다시 국도로 나와서 멈추어 섰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을 쏟아지는 비에 내맡기고 움직이지 않았다. 쏟아 지는 비가 전신에 묻은 피를 씻어가릎 급속하게 신체의 열을 빼앗아 갔다. 드디어 몸이 완전히 차가워지자 그녀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얼굴은 어떤 도취에 빠진 것과 같은 희 열의 표정으로 바뀌어갔다. 지나가는 차의 그림자도 없는 한밤의 국도 한가운데에서, 여자는 혼 자 알몸인 채 계속해서 비를 맞고 서 있었다. 2 무겁게 내려앉은 납빛 구름 아래로 르망 승용차 한 대가 달리고 있었 다. 비를 머금은 차가운 바람이 조금 연 창을 통해 불어 들어와서, 정관 우()는 몸을 조금 움찔했다. 가을이라고 하는데도 흡사 초겨울 같 은 이 음울한 하늘은 어떻게 된 일일까? 음울하다고 하면 하늘만이 아니었다. 좌우에는 채벌한 잡목림이 벌써 몇 킬로나 계속되어서 그 을씨년스런 풍경이 그의 기분을 더욱 우울하게 했다. 국도로 가는 차도 셀 정도여서 마치 황량한 원시림을 달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렌터카를 선생님 이름으로 빌려 두었으니까, 44번 국도를 타고 용문 방면으로 달리세요. 용문에서 10분쯤 지나면 나오게 되는 첫번째 휴게소 에 들어가서 기다리시면, 제가 맞이하러 가겠어요. 렌터카 회사 전화번호 는.' 전화 속의 그 여자는 조금 차갑고 사무적이기조차 했지만, 그런대로 시 원스럽고 침착한 음성이었다. 정관우는 27세로, S대학 불문과를 졸업하고 나서 대학원 석사 과정으로 진학해 2년 동안 불문학을 공부하다가, 25세 때 프랑스 소르본느로 유학 을 갔었다. 2년간의 유학생활에서 돌아온 것이 3개월 전의 일이다. 아직도 때때로 프랑스말이 무의식적으로 입에 배어 나와서 당황한 적이 그에겐 있다. 바로 조금 전만 해도 어느 가게에 들러 안전면도기를 샀는 데, '세콤비앙?(얼마입니까?)'이라고 해서 잡화점 사람이 수상쩍은 눈길 로 쳐다보았었다. 유학이라고 해도 대단한 일을 하고 온 것은 아니었고, 프랑스문학을 공 부했다는 사실만으로 일류기업 취직의 문이 열리는 것도 아니었다. 박진 호() 교수는 그가 조교, 강사, 조교수, 교수의 코스를 거치려는 계 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믿는지 그의 취업문제 따위엔 아예 관심도 없었 다. 그가 대학의 박 교수 연구실로 귀국 인사를 하러 갔을 때, 박 교수는 느닷없이 이렇게 말했었다. "마침 잘 되었군. 가정교사를 해보지 않겠어?" 3개월간 그 집에서 살아야 한다는 제약은 있었지만, 자매 두 사람에게 프랑스어 회화를 가르치고 3개월에 500만 원이라는 보수는 다른 아르바이 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갬그쪽 부담이어서 500만 원이 완전 히 수중에 남는다는 계산이었다. "그렇게 많이 준다니, 도대체 무엇을 하는 집입니까?" "부자야!" 박 교수는 그것으로 모든 설명을 다했다는 듯이 심한 더위 속에서 손에 들고 있던 라틴어 문헌에 또다시 열중하기 시작했다. 이럴 때 교수와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관우는 상대편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를 물었다. 민가영()이라는 사람으로, 경기도 양평 근처였다. 연구실 전화를 빌려서 재빨리 연락을 하자, 그 침착한 목소리 가 그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국도 반대 차선으로 장거리를 달리는 트럭이 소리를 내면서 스쳐 지나 갔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거인의 질주였다. 그런 생각 을 하니, 이 근처에서 트럭 운전사가 살해당했다는 얼마 전의 뉴스가 떠 올랐다. 벌써 한 달 정도 전의 이야기지만, 그래도 그의 애인 현지수( )는 무척 걱정하는 것 같았다. 지수는 이 가정교사 자리가 지나치게 조건이 좋다고 반대하고 있었지 만, 500만 원이 있으면 결혼자금이 되지 않느냐는 관우의 말에 마지못해 납득했던 것이다. 현지수는 관우의 후배였다. 올해 스물넷으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그 녀는 바로 박 교수의 연구실에서 라틴어 문헌을 연구하고 있다. 관우가 지수와 결혼하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 실제로는 벌써 결혼한 것과 같은 관계까지 이르렀던 것은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니다. 확싹게 말하면 유학에서 돌아와서, 이 가정교사 제의를 받아들인 직후의 일이었 다. 물론 관우도 세미나 등에서 그녀의 얼굴은 알고 있었고, 그녀에 관해 친구들과 이야기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2년간의 유그녀의 이 름이나 얼굴을 특별히 떠올려 본 적은 없었다. 그것은 그날, 전화로 가정교사 제의를 결정한 뒤 변함없이 책에서 얼굴 도 들지 않는 교수를 남겨 놓고 밖으로 나와 오랜만에 대학 구내를 걸어 보았을 때의 일이다. 도서관, 생활관 건물, 강당. 여기는 대학 집회가 있을 적마다 예외 없이 전학년 공동투쟁위원회와 경찰기동대간에 격심한 전투의 무대가 되 었던 곳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문득 웃음을 흘렸다. 그 소동 가운데에서도 박 교수는 언제나 혼자 연구실에 틀어박혀 중세 라틴 역사에 잠겨 있었는데, 어느날 밖으로 나왔다가 기동대의 소방차가 강당의 학생에게 심하게 물을 뿌리고 있는 것을 보곤 옆에 있던 동료에게 '불이 났나요?'라고 물었던 것이다. 지금은 전설화된 그 일화를 생각하고 관우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던 것이다. "뭐가 우스워요?" 바로 그때, 지저분하고 헐렁헐렁한 하얀 옷을 입고, 머리를 더부룩하게 한 젊은 여성이 양손 가득 책을 안고 그를 보고 있었다. "뭐가 우습냐구요?" "아니, 지수잖아?" "돌아오셨어요, 관우 씨?" "뭐야, 그 모습은?" "책장 정리를 했더니 이런 꼴이에요. 제 모습을 보고 웃었나요?" "아니, 교수님의 에피소드를 생각하고 있었지." 지수가 밝게 웃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순간 처음으로 관우는 그녀 를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를 도와서 땀투성이가 되면서 책을 도 서관으로 옮겨 주고, 변함없이 시끄럽고 낡은 학생식당에서 함께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는 그녀가 얼굴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올 때까지 교문 앞에 서 계속 기다려 주었던 것이다. 그때, 그러니까 그녀가 캠퍼스의 푸르른 잔디를 밟고서 교정을 가로질 러 바삐 그에게 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관우는 문득 그녀와 결혼하면 어떨 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연구자로서 대단히 우수한 여자였다. 박 교수도 얻기 어려운 조 교로서 그녀에게 연구의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었다. 작고 가냘픈, 화 장기라곤 거의 없는 그녀지만 작은 얼굴에 커다란 눈이 꽤나 매력적이고 웃으면 보조개가 생겨서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얼굴이 된다.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면 S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이라고는 생각 되지 않았다. 어느 여성주간지가 '올해의 각 대학 수석 졸업자들'을 사진 으로 소개했을 때, 그녀의 어쩐지 수줍은 듯한 얼굴 사진이 맨 먼저 실려 있었던 것을 그는 지금껏 기억하고 있다. 지수는 대학생활을 위해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온 이후, 아파트에서 혼 자 살고 있었다. 그 점은 관우도 마찬가지로, 그의 고향은 대구였다. 단 지 관우는 양친도 형제도 없고, 어마숙부 밑에서 자랐는데 굳이 서울까지 온 것은 진학을 계기로 자유와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 다. 그날 관우는 지수를 프랑스 요릿집에 데리고 갔었다. 프랑스에 있었다 고는 하지만 일류식당에 다닐 수 있는 신분도 아니었고, 핫도그나 햄버거 를 먹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입이 고급이 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그에게 요리의 맛은 더없이 좋았다. 몹시 소박한 회색 원피스를 입은 지수가 관우에게 그런 것을 잊게 했기 때문이었다. 음식을 먹은 후, 커피를 마시면서 그가 느닷없이 말했다. "나와 살 생각 없어?" 지수는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뭐라고도 할 수 없는 얼굴 표정으 로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겨우 생각난 듯이 이야기했다. "놀리고 있는 거죠?" "결혼은 대개가 농담 같은 거야." "프랑스에서는 그렇게 말해서 여자를 얼마나 낚았나요?" "아니, 한국어는 통하지 않아서 못 해봤지."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있군요. 나, 돌아갈래요." "그 전에 대답을 해줘." 지수는 웃어 버렸다. "이상한 사람이네요." "자, 그만 가지." "대답을 안 들어요?" "노(NO)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예스(YES)라는 거야." 그후 관우는 그녀를 신촌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로 데리고 갔다. 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지수는 자 신의 아파트를 나와 관우의 방으로 트렁크 하나를 들고 찾아왔던 것이다. "분명 그 근처에서 트럭 운전사가 죽었어요." 관우로부터 가정교사 이야기를 듣고, 그녀가 이렇게 말했었다. 걱정스 러운, 그리고 뭔가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위험하지 않아요? 범팁잡히지도 않았는데." "뭐가 무섭다는 거지? 내가 트럭을 운전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가르치는 상대는 몇 살 정도예요?" "글쎄, 잘 모르겠어. 뭐야, 질투하는 거야?" "어쨌든 여자에겐 자상하거든요, 관우 씨는." 지수는 조금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가 걱정하는 것도 그렇게 이 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스포티한 타입은 아니지만, 키도 알맞게 크고 쒼뚜렷한 호남형이기 때문이었다. 지수는 매주 주말에 는 반드시 서울로 돌아오겠다는 그의 약속을 받아내고는 겨우 안심하는 것 같았다. ** 앞쪽에 휴게소가 보였다. 국도 주변에서 흔히 보는 휴게소와는 달리 간 판도 없는 작은 찻집이었지만 그런대로 산뜻한 모습이었다. 주차장에 다른 차는 한 대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와이셔츠 차림 의 중년남자가 카운터 안에서 따분한 듯이 신문을 펼쳐들고 있었다. 그는 커피를 주문했다. 여기에서 그 여자를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가 게주인이 천천히 원두를 갈며 물어왔다. "어느 쪽으로 가는 길이십니까?" 그는 억지로 웃으며 대꾸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사람이 오기로 되어 있어요. 민가영 씨댁을 알고 있나요?" 그가 커피잔을 관우에게 내밀며 불쑥 말을 이었다. "요전에 이 근처에서 살인이 있었던 것을 아십니까?" "예? 아, 트럭 운전사였지요, 살해당한 사람은." "그래요, 대단했었지요. 얼마나 처참했던지. 경찰들, 기자들, 거기 다 구경꾼들까지 굉장했었지요." "범인은 잡혔나요?" "아뇨." "강도겠지요." "아무것도 도난당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칼 같은 것으로 목을 그었는 데, 대단한 피였다고 해요." 관우는 잠시 몸을 떨었다. "얼마 동안은 문단속을 열심히 했어요. 이제는 잊어버렸지만요. 그러나 범인이 지금도 어딘가를 태연하게 걸어다니고 있을 테니, 그걸 생각하면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그는 건성으로 대답해 주었다. 마중하러 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는 멍하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가게주인이 컵에 뜨거운 커피를 따르면서 말했다. "조금 전에가영 씨라고 하셨나요?" "예, 그랬어요." "가시기로 했나요?" 주인이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고 했을 때,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그 에게는 문득 그 남자가 문 입구를 막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작은 키에 당당한 체격이지만, 뚱뚱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그렇게 크게 보였던 것 이다. 나이는 50대 중반 정도일까? 그는 처음에 그 남자를 보고 외국인인가 생각했다. 나이에 비해 체격이 나 자세가 젊고, 무척 기민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햇볕에 적당히 그 을린 얼굴은 윤기가 있었고, 선이 굵고 뚜렷한 윤곽에 하얀 머리가 잘 빗 겨져 있는 것도 우리나라 사람 같지 않았다. 첫눈에 보기에도 기품이 넘치는 고급양복을 입었는데, 그것이 조금도 불편함이 없이 몸에 잘 어울리게 보이는 것은 아마 외국에 오래 산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남자는 가게 안쪽의 테이블에 앉아서 주인에게 말을 했다. "커피를 부탁해요. 그리고 오늘 신문이 있으면 좀." 주인이 신문을 남자에게 건네 주고 돌아오며 또 말했다. "조금 전 이야기인데." 그런데 그가 스스로 말을 끊고는, 그 50대 사내를 힐끗 보더니 갑자기 엉뚱한 얘기를 했다. "밖에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가게주인이 밖을 보고 그렇게 말하곤 관우에게 등을 보이고 물을 끓이 기 시작했다. 조금 전 그 이야기를 더이상 하고 싶지 않다는 의도를 분명 히 알 수 있었다. 왜일까? 지금 들어온 남자 때문일까? 관우는 다시 한번 안쪽 테이블을 보았다. 남자는 마치 관우의 존재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이, 열심히 신문을 펼쳐들고 기사를 읽고 있었다. 이상한 남자다. 거물 사업 가라고 해도 통할 것 같은 품격이 있어서 어쩐지 이런 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이 보였다. 밖에는 정말로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나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관우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후 4시를 조금 지나고 있었 다. 남은 커피를 단숨에 다 마시고 숨을 쉬었을 때, 입구의 문이 열렸 우선 여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가늘고 긴 눈, 얇은 입술, 도자기 와 같은 윤기가 있는 창백한 피부, 표정 같은 것은 거기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관우는 그 여자가 전화 속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직감했 다.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건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아 름다움이었다. 30세 정도 되었겠지만, 나이라든가 여자다움이라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여자 같았다. 여자는 옷깃이 큰 검은 에나멜 레인코트 를 걸치고 오른손으론 문을 연 채, 왼손은 주머니에 깊이 넣고 있었다. "정관우 씨죠." 침착한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제가 바로 민가영입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가시죠." 요금을 지불하면서 관우는 힐끔 안쪽 테이블의 남자를 다시 보았다. 동 시에 남자가 신문으로 눈을 돌렸다. 그 사내는 분명히 관우를 보고 있었 다. 아니면 민가영을 보고 있었을까. 비를 피해서 두 사람은 서둘러 여자가 타고 온 차에 올라탔다. "내 차는 어떻게 하지요?" 관우의 물음에 그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을 던졌다. "나중에 집에 있는 사람에게 렌터카 회사에 갖다 주라고 할께요." 차는 천천히 국도를 벗어나서 좁은 숲속 길을 더듬어 갔다. 여자는 잠 자코 앞쪽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빗속이기에 시야가 상당히 나빴지만, 그 녀의 운전은 위험한 기분 없이 반사신경도 아주 예민했다. 자주 운전하는 솜씨가 엿보였다. "훌륭한 운전 솜씨군요." 길이 어느 정도 직선이 되었을 때, 그가 말해 보았으나 그녀는 가볍게 미소지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실상 그녀는 여기 올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밖은 조금씩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관우는 상당히 쓸쓸한 곳이로군 하 고 혼자서 생각했다. 살인사건이 있었다고 하는 곳은 어디쯤일까? 민가영이 앞쪽을 바라보면서 처음으로 말했다. "저 집이에요." 관우는 두껍고 무거운 돌벽으로 둘러싸인, 기와로 지어진 거대한 2층 양옥이 모습을 나타내는 걸 보며 잠시 놀랐다. 검게 누워 있는 그 모습은 어딘가 침울하고 장중해서 이 물보라치는 빗속에서는 환상적이기조차 했 다. 부근에는 인가 같은 것이 거의 없기에 이런 숲속에 이 정도 저택이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않을 것이었다. 문은 열려져 있었다. 차가 문 기둥 사이를 지나 정원으로 들어가자 중 앙에 작은 아프로디테 상이 서 있는 분수가 나타났는데, 그녀는 그곳을 지나 현관 앞으로 곧장 갔다. "들어가세요." 차에서 내리자, 그녀가 현관의 큰 문 쪽으로 손을 들어 보였다. 관우가 차에서 나오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안에서 나타난 사람은 관우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큰, 딱 벌어진 체격 의 남자였다. 머리가 벗겨져 있는 것을 보니 50살은 되었겠지만 가늘고 무표정한 얼굴에는 나이를 느끼게 하는 어떤 특징도 없고, 어울리지 않는 검은 양복을 입은 신체는 한눈에도 대단한 힘을 느끼게 했다. "돌아오셨습니까?" 그가 민가영에게 말했다. "예, 이쪽이 정관우 선생님이에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차가 휴게소에 있으니까 렌터카 회사에 돌려 주세요." 외국영화의 세트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현관을 들어가자 홀이 있고, 그 속에 폭 넓은 계단이 2층으로 느슨한 커브를 그리고 있었다. 홀 의 조금 어두운 조명은 샹들리에 탓이었는데, 옆에는 오래된 유럽식 기둥 시계가 있고 계단 아래로는 그리스식의 청동조각 등이 있어 이 집의 주인 이 해외에서 오래 생활했던 사람일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홀의 왼쪽으로 돌아가서, 민가영은 그를 거실로 안내했다. 두꺼운 융단 을 밟고, 소파에 앉았을 때 그가 놀란 것은 대리석 난로에 진짜 불이 타 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리석 난로는 드문 것인데요." "장작불이 좋아요. 전기 스토브하고는 온기가 달라요. 물론 난방장치를 하면 좋겠지만, 어쨌든 오래된 집이니까요. 개축도 힘이 들고." "아뇨, 좋은 집이에요. 저는 이런 오래된 집을 몹시 좋아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녀가 미소 지었다. "자, 그러면 일 이야기부터 먼저 할까요?" 그녀는 큰 회사의 유능한 사장 비서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솜씨로 사무 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했다. 조건은 우선 관우의 희망대로였다. 수업은 오 전 10시부터 12시, 오후는 1시부터 3시 반. 이 정도의 시간으로 3개월에 프랑스어 회화를 완성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해도, 능률 있게만 하면 상당 한 진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었다. 수업시간은 진행 정도를 보고 연장 하면 되었다. 그 외의 시간에 그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2층에 방 하나가 주어져서, 무엇을 하고 있더라도 자유인 것이다. 더구나 토, 일요일 수업은 쉬기로 했다. "나와 여동생은 주말에는 볼일이 있어 외출해야 되거든요. 선생님 혼자 지내기엔 따분하겠지만요." "저 렌터카를 주말만 빌릴 수 있을까요?" "차가 필요하시다면, 여기 것을 사용하세요. 차고에 또 한 대가 있으니 까요." "그래서는 곤란하지요." "아뇨,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요. 나중에 집사에게 말해서 손질을 시켜 두지요. 언제라도 자유롭게 사용하세요." "고맙습니다. 이렇게 빈틈없이."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이쪽이 무리하게 원해서 와 주신 것이니까 당 연합니다. 이 주위는 드라이브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 있습니다." "아니, 사실은 서울로 가고 싶습니다. 토, 일요일만요. 물론 일요일 밤 에는 돌아오겠지만 ." "매주 말입니까?" 그녀가 깜짝 놀란 듯이 말했다. "예." 그녀가 그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즐거운 듯이 웃으면서 물었다. "좋은 분이 계십니까? 그렇지요? 물론 자유롭게 하셔도 좋습니다." "죄송합니다." 관우는 조금 쓰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문이 열리고 조금 뚱뚱한 젊은 여자가 커피포트와 컵이 있는 쟁반을 가 지고 들어왔다. 집에 어울리게, 외국영화의 하인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시골에서 자란 듯한 혈색이 좋은 얼굴과 튼튼한 몸, 보기에도 순 박한 것 같은 여자였다. 스무 살쯤이나 되었을까. "우리집에 살면서 일을 도와 주는 덕자 양입니다. 자잘한 일이라도 아 무런 거리낌없이 이야기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덕자가 사투리가 있는 어조로 말하곤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관우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가 민가영에게 물었다. "양친은 어디에 계신지?" "어머, 모르셨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어머니는 우리들이 어릴 때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작년에 유럽에 서 비행기 사고를 당해서." "그러셨군요. 정말 실례했습니다. 아무것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아니에요, 상관없어요. 신경쓰지 마세요." "그러면 이 저택에는 지금 어느 분이 살고 계십니까?" "나와 여동생 지영이에요. 아까 현관에서 만나셨던 집사. 그분은 힘이 드는 일이랑 여러가잡일을 해주시죠. 차 운전도 겸하고 있구요. 그분의 이름은 김광수 씨예요." "이런 것을 물어서 실례일지는 모르지만." "뭐죠?" "이 저택도, 차도 대단한 것이어서 드리는 말씀인데. 아버님은 어 떤 일을 하셨습니까?" "아버지는 미술상이셨어요. 유럽, 남미, 중동, 어디라도 나가셨지요. 고미술에 대단한 안목이 있으셨던 분인데. 내가 어릴 때는 서울에서 살았지만 후에 이 저택을 세워서 옮겨왔어요." "그랬군요." "다행히 아버지의 사업은 상당히 잘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현재 이 생 활을 유지해나갈 정도의 재산은 남겨 주셨습니다. 게다가 아버지 사업은 지금도 내가 계속하고 있답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버지보다는 규모를 훨 씬 작게 해서 취미 정도지만요." "부러운 이야기군요." 그가 한숨을 지었다. "프랑스어를 공부하시려고 하는 것은, 프랑스에 가실 계획이 있으시기 때문인가요?" "예, 뭐 그런 셈이죠." 그녀는 애매하게 대답하고는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요." 그녀는 미소 속에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관우가 한 마디 더 하려는데 또다른 어떤 여인이 다가왔다. "아, 내 동생이에요." 그녀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지영아, 정관우 선생님이야." 관우는 일어서서 동생이라고 소개된 여인을 보았다. 그 여자는 언니와 는 거의 대조적인, 회색 스웨터에 검은 치마의 수도원 여자 복장 비슷한 옷을 입고 서 있었다. 27,8세 정도일까. 몸이 작고 조금 통통한 체격이었는데, 둥근 얼굴에 머리는 아무렇게나 뒤로 묶고 있었다. 상당히 도수가 강한 안경을 쓰고 있는 탓도 있지만 무뚝뚝한 표정에 몹시 까다로운 인상을 주었다. 그가 놀란 것은 두 자매의 거의 닮지 않은 얼굴이었다. 외모, 옷차림, 태도 등 등 모든 면에서 두 사람은 달랐다. "프랑스어를 상당히 잘하시겠어요." 지영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갑자기 관우에게 물었다. "2년간 유학하고 왔으니까요." "3개월로 회화를 할 수 있을까 몰라." "일상적인 회화라면 할 수 있습니다." "꼭 그렇게 하고 싶어요." 그때 덕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저녁식사 준비가 되었습니다." 현관에서 보아서 홀을 가로질러 오른쪽이 식당이었다. 거기도 예외가 아니어서 온통 영국식 가구였다. 긴 테이블에 은식기가 놓여 있고, 조각 을 한 등이 높은 나무의자가 3개. 커다란 테이블 중앙에는 화려한 느낌의 도자기가 위엄까지 갖추고서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벽에 한 장의 나체 여인 데생이 걸려져 있는 걸 관우가 바라보자, 지영이 얼른 말했다. "르느와르의 데생이에요, 진품이지요." "지영아!" 그녀가 조금 주의를 주는 어조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프랑스에 계셨던 분에게 그런 말을 하면 오히려 부끄러워져." 관우는 잠자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파리에 2년 있었어도, 루 브르 박물관에 간 적은 없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식사도 훌륭했다. 요리는 자주 다니는 여자 요리사가 있어 며칠분의 음 식을 장만해 주고 있다고 했다. "프랑스 요리로 해보았지만 아무래도 본 고장 맛과는 다를 텐데, 입에 맞을는지요?" "아니에요, 맛있습니다." 식사를 마치자 벌써 9시가 가까웠다. "피곤하실 테니까,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덕자를 따라서, 관우는 긴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다 올라간 곳에서 좌우로 복도가 길게 있고, 호텔처럼 문이 나란히 있었다. "상당히 방이 많군요." "예전에는 손님이 많이 오셨으니까요. 그러나 요즘은 거의 잠겨져 있어 요." 관우는 안쪽의 한 방에 안내되었다. 예상과 다름없이 넓고 클래식한 방 이었다. 정면 창에는 무거운 커튼이 쳐 있고, 왼쪽으로 큰 나무침대, 오 른쪽에 소파와 책상이 있고 안에는 또다른 작은 문이 있었다. "저 문을 열면 욕실이에요." 덕자가 이렇게 말하곤 살짝 웃었다. "용무가 있으시면, 언제라도 부르십시오." 빈틈이 없군. 혼자가 되었을 때 관우는 생각했다. 그는 집사가 갖 다 준 가방을 열고 필요한 것을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그러다 문득 생 각이 나서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조금 열고 밖을 바라보았다. 빗줄기가 어두운 창을 때릴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관우의 이곳 생활이 어둠과 빗속에서 그렇게 시작되었다. 3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 벌써 9시가 되어 있었다. 첫날부터 수업에 지 각해서는 안 될 터이므로,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왔다. 침대의 안락한 쿠 션과 두꺼운 커튼이 햇빛을 완전히 차단해 버린 탓에 너무 잔 것이었다. 그의 아파트라면, 얇은 커튼 너머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과 옆방의 소리로 싫어도 일어나게 되어 있는데 말이다. 커튼을 열자 갑자기 햇살이 밀려 들어와서 잠시 머리가 흔들릴 정도였 다. 어제의 비가 거짓말같이 사라지고 아주 쾌청한 날씨를 보이고 있었 다. 어젯밤은 비와 어둠 때문에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창밖 저쪽에 커다란 연못이 아침 햇살을 반짝반짝 반사하고 있었다. 그 건너편이 숲으로, 어 젯밤 커튼을 열고 밖을 보았을 때 나무 끝만이 훨씬 멀게 보였던 것은 그 탓이었다. 나무 사이를 통해서 이 저택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돌담이 보 이지만, 그 건너편에는 또 깊은 숲이 펼쳐지고 있었다. 서둘러 세수를 하고, 수염을 깎고서 아래로 내려가자 9시 반. 식당에 얼굴을 내밀자, 덕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아가씨들은?" 민가영과 지영 자매를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몰라서 관우는 조금 망설 이고 나서 그렇게 말했다. "예, 거실이나 서재에 계실 거예요." 덕자는 프랑스빵과 네추럴치즈, 오렌지주스를 쟁반에 담아 가지고 왔 다. 차가운 주스가 몸 안을 깨우는 듯해서, 그는 몹시 상쾌함을 느꼈다. 식후에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덕자에게 고맙다고 말하곤 거실로 향했다. "잘 주무셨어요?" 엷은 파란색 니트를 입은 가영이 소파에서 웃음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더 빨리 일어나고 싶었지만, 침대가 놓아 주지 않아서요. 지영 씨는?" "서재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아, 그러면 시작하지요. 교과서는 차차 준비하면 되니까." 서재라고 해도 책으로 파묻힌 어두운 방이 아니고, 책장은 한쪽 벽에만 있고 반대쪽은 뒤쪽 잔디밭으로 나가는 테라스와 마주한 유리문으로 되어 있어서 빛이 넘칠 듯이 비쳐들고 있었다. 방 자체도 거실보다 넓고, 소파 와 긴 의자가 충분한 간격을 두고 놓여 있어 흡사 작은 운동장 같았다. 지영은 어제와 같은 복장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자, 시작할까요?" 가영 자매가 긴 소파에 앉고 관우는 테이블을 마주하고 비스듬하게 앞 쪽으로 앉았다. 지금까지도 몇 번이나 가정교사를 한 경험이 있기에 그에 게는 나름대로의 수업 방식이라는 게 있었다. "우선 처음에 잘 아는 말부터 시작하지요." 관우는 테이블에 준비된 백지에 사인펜으로 'Je vous aime'라고 썼다. "그것은 알아요." 지영이 불쑥 말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라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에는 프랑스어의 특징이 여러가지로 포함 되어 있습니다. 영어의 'I love you'와 비교해 봅시다. 'I'가 'Je'에 해 당하고 'love'는 'aime', 'you'는 'vous'입니다. 우선 어순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어는 주어-술어-목적어로 되어 있는데 프랑스어는 주 어-목적어-술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발음 면에서 보면 vous지만, 마 지막 s는 읽지 않습니다. 프랑스어는 영어와는 달리 마지막 자음을 발음 하지 않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럭저럭 수업이 진행되었고, 오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점심은 서재 테라스에서 먹었다. 바람도 없어 차가운 공기가 오히려 기 분좋은 느낌이었다. 잔디는 2층에서 서 연못과 저택 사이에 길게 이어 져 있어서, 넓지는 않지만 적당한 산책길이 되고 있었다. "어제 저녁 비로 풀이 아직 젖어 있으니까, 지금은 걷지 않는 편이 좋 아요." "대지가 상당히 넓군요." "꽤 돼요. 미아가 될 정도는 아니지만요. 저 숲속에는 작은 정자도 있 습니다. 언제 안내하지요." 관우는 정말 영화 속의 세계와 같다고 생각했다. 오후 수업은 오로지 인사 연습으로 보내고 끝났다. "고맙습니다." 가영이 미소 지으면서 그를 올려다보며 이렇게 인사했을 때, 관우는 그 얼굴에서 우울과 미소, 자신감과 불안감 등의 묘한 복합체를 보았다. 상 류사회 여인다운 표정인가? 거실에서 잠깐 쉬고 있자, 덕자가 시간을 계산해서 홍차를 타가지고 왔 다. 은으로 된 티 포트와 클래식한 컵은 그런 물건과는 인연이 적은 관우 라고 해도 반할 정도로 색조와 디자인이 대단히 우아했다. "훌륭한 맛이군요, 이 홍차는. 게다가 이 컵. 아니, 나는 이런 것 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마음에 드세요? 포트남 & 메이슨의 로열 브랜드예요. 컵은 로열 달튼 제품이구요. 아버지께서 몹시 마음에 들어하셨어요." 지영이 한모금의 홍차를 마시곤 작은 웃음과 함께 말을 했다. "우리들 세 사람 모두 홍차를 좋아하죠. 아버지를 닮았나 봐요." 관우는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영이 관우까지 포함해서 '우리들 세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웬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관우는 홍차보다는 커피를 더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때 덕자가 곤란한 표정으로 입구에 나타났다. "무슨 일이지?" 가영이 힐끗 그녀를 보며 물었다. "손님이 오셨는데요." "누구?" 그때, 집 안에 들어와 덕자 등 뒤에 이미 서 있던 남자가 낮은 목소리 로 대답했다. "실례합니다." 관우의 컵을 든 손이 우뚝 멈추었다. 덕자를 밀치듯이 하고 들어온 사 람은 어제 휴게소에서 마주쳤던 그 초로()의 남자였던 것이다. 가영의 표정이 조금 굳어지는 걸 관우는 놓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에요?" '이번에는'이란 말은 전에도 왔었다는 뜻이다. 관우는 그 사내와 가영 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관우를 신기한 듯이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이쪽 분은 누구시죠? 소개해 주지 않겠어요?" 기억하고 있을 텐데도 그는 마치 처음 보는 것 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가영은 조금 주저하고 나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가정교사로 와 계신 정관우 씨입니다. 이쪽은." "처음 뵙겠습니다." 남자가 가영의 말을 가로막고 말했다. "서울경찰청 수사1과 오태석() 형사라고 합니다." 형사? 정관우는 남자의 머리에서 발끝까지를 재빨리 훑어보았다. "가정교사라고 하셨지요?" "예." "무엇을 가르치고 계십니까?" "프랑스어입니다만." 남자는 과장되게 놀라워했다. "우아하지요, 프랑스어는. 나도 한때는 프랑스 영화에 깊이 빠졌던 사 람입니다." "오 형사님!" 지영이 차가운 어조로 끼어들었다. "무슨 일로 또 오셨는지요?" "이거 실례했습니다. 뭐, 볼 일이라고 해도 특별히 새로운 건 아닙니 다. 전에 말씀드린 것 같이 누군가 낯선 사람을 봤다던가, 뭔가 생각난 것이라도 없을까 해서." "그것은 벌써 옛날에 대답했어요. 아무리 이 저택이 넓다고 해도, 운동 장 정도는 아닙니다. 낯선 사람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것은 불가능해 요." "그렇겠지요,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 댁엔 여자들뿐 이니까요. 운전기사라고 해도 다른 건물에서 생활하고, 역시 어느 정도 주의하시지 않으면." "걱정 마세요, 우리 자신을 지키는 것 정도는 가능합니다." "살해당할 것이라고 예상해서 살해당하는 사람은 없어요. 나만은 괜찮 겠지, 오직 나만은 다르다. 모두 그렇게 믿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것 이 잘못되어 있다고 알아차린 때에는 이미 늦지요." "충고는 고맙게 들었습니다." 가영이 딱 잘라서 말했다. "그밖에 용무가 없다면, 돌아가 주실까요?" "예,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그럼, 무슨 일이 있으시면 곧바로 연락 ." 가영은 그 말을 묵살했다. 오 형사는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이 없이, 정 중히 인사를 하고 거실을 나갔다. "정말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야." 지영이 기분나쁜 듯이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그런 모습 속 에서 관우는 조금 흥미로워하는 표정을 분명히 보았다. "형사가 오다니,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가영이 어이없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요전에, 벌써 한 달 정도 전인데요, 트럭 운전사가 이 근처에서 살해 당한 사건이 있었어요." "아,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대단했었는데." 지영이 끼어들었다. "보러 갔었으면 좋았을 걸."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 여기서 상당히 떨어졌었어." "그 형사는 무엇을 조사하러 온 겁니까?" "이 주위는 인가가 적어요. 한 집씩 방문하는 것 같아요. 물론 그런 일 을 하는 게 경찰의 임무이긴 하지만. 그래서 우리집에도 왔지만, 웬 일인지 그후로도 몇 번이나 찾아와서." "왜죠?" "전혀 짐작이 안 가요. 언제나 묻는 것은 '뭔가 다른 일은?' '누군가 수상한 사람은?' 그 말뿐인 걸요." "이상하군요. 게다가 그 남자, 서울경찰청 소속이라고 말했는데, 여기는 경기도잖아요. 어째서 서울에서." "그래요. 어쩐지 억지를 부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에요." 관우는 가영의 단호한 모습에서 어쩐지 조금 초조한 것 같은 느낌을 받 았다. 거실을 나와서 2층 방으로 올라가던 관우는 저녁식사 때까지 책을 읽어 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음료수라도 한 잔 들고 가려고 식당으로 발길을 향 했다. 그런데 식당으로 들어가서 주방 쪽의 문을 열다가 관우는 흠칫 멈 추어 섰다. 눈앞에 오태석 형사가 서 있는 것이다. "돌아가셨다고 생각했는데요." "야, 굉장히 넓은 저택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 부엌은 내 아파트보다도 넓군요." "가영 씨가 이러시는 걸 보면 기분좋게 생각하지 않으실 텐데." "아니, 이제 갑니다. 볼 것은 다 봤습니다." 오 형사는 관우 옆을 지나쳐서 식당을 빠져 나가려고 했다. 그때 관우 가 그를 불러세웠다. "형사님." 오 형사가 잠자코 뒤돌아봤다. "오 형사님은, 프랑스에 계셨던 적이 있지요?" "내가 말입니까?" 오 형사는 눈을 동그랗게 하고, 우습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경찰관의 월급으로는 프랑스는커녕 괌이라도 몇 년이나 계획을 세워야 됩니다.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셨지요?" "아뇨, 단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그래요?" 오 형사는 잠시 흥미있는 듯한 눈으로 관우를 바라보고 나서 가볍게 손 을 흔들고 돌아섰다. 관우는 오태석이 가 버리자, 어쩐지 무거운 기분이 되어 있는 자신을 느꼈다. 그는 오태석이 프랑스, 그것도 파리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한 말은 단지 프랑스어가 우아하다는 한마디뿐이 었지만 그 말을 할 때의 표정이 웬지 프랑스를 잘 알고 있는 듯한, 그런 얼굴이었던 것이다. 당초부터 상대를 위압하는 듯한 그의 풍채는 보통사람이라고는 생각되 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트럭 운전사 살해와 민가영의 집과는 어떤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관우는 주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커다란 식기 찬장, 널찍한 요리 대, 그러나 지금은 요리사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게 정리되어 있을 뿐이었다. 요리대에 은식기와 접시, 컵 등이 정갈하게 겹쳐져 있는 것 외 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오태석 형사는 무엇을 보고 간 것일 까. ** 관우가 민가영의 집에 온 것이 화요일이었기 때문에, 사흘간 수업을 하 고 나서 첫번째 주말이 찾아왔다. 수업의 진행은 지극히 순조로워서, 이대로라면 3개월 안에도 상당한 부 분까지 진행될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두 자매가 모두 우선은 모범적인 학생이고, 이해도 빠르고, 발음도 능숙하게 익혔다. 원래가 서구취향 속 에서 자라온 탓인지 프랑스어에 상당히 친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첫번째 토요일, 관우는 저택의 옆에 있는 차고에서 집사 김광수 씨가 손질을 해둔 중고차를 탔다. 차고에는 다섯 대 정도의 차를 세울 수 있는 자리가 있었는데, 지금은 관우 차지가 된 중고차 외에도 벤츠와 가영의 그랜져 승용차가 놓여져 있었다. 지영은 차 운전은 하지 않았다. 관우는 점심때가 지나서야 S대학 캠퍼스에 들어갔다. 구내 주차장에다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오자, 어딘가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두리번 두리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예요!" 멀리 떨어진 연구실 창문에서 하얀 옷을 입은 지수가 손을 흔들고 있었 다. 관우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도 손을 흔들어 주자, 지 수가 갑자기 얼굴을 감추었다. 그가 5층짜리 낡은 건물 입구까지 오자, 안에서 계단을 뛰어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고, 지수가 뛰어나와서 그에게 안겨왔다. "정말로 돌아왔군요!" "당연하지 않아? 믿지 않았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 시간 전부터 저 위에서 보고 있었어요. 건강해요? 몸은 안 좋은 데 없구요?" "그만둬, 어머니도 아니고 뭐야. 시시콜콜." "전화도 걸지 않고, 병이라도 난 게 아닌가 걱정하고 있었어요." 관우는 지수의 조금 토라진 얼굴을 보고, 다음부터는 매일 밤 전화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은 끝났어?" "어제 저녁 12시까지 해서 오늘 것까지 모조리 해치워 버렸어요." "열심히 했구나." "오늘 느긋할 수 있도록!" "어쨌든 옷 갈아입고 와. 명동에 가자." "어머, 사치스럽게!" "선불로 300만 원을 받았거든." "그러나 그것은 모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괜찮아, 처음 정도는." "안 돼요. 그렇게 해서는 모아지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수의 목소리는 들뜨고 있었다. "그러면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차는 저 곳에 놓고 가요." 밝은 핑크빛 스웨터에 하늘색 치마를 입은 지수는 다른 어떤 여자보다 도 화려하게 빛나 보였다. 두 사람은 다른 연인들처럼 팔짱을 끼고 사람 들 속에 섞여 걷고, 이야기하고, 웃었다. 그들은 또 영화를 보고 식사도 했다. 공부 이외에는 흥미가 없는 듯이 보였던 지수가 열렬한 영화 팬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관우는 놀랐다. 늦은 밤, 아파트까지 천천히 걸으면서 관우는 말했다. "근무할 곳을 찾아야겠어." "학교에 안 남아요?" "아직 정하지 않았어. 지수와 결혼하는데, 대학에 남아 있으면 언제 교 수가 될지도 모르고, 생활은 장담할 수 없을 테고." 지수가 눈을 아래로 내려깐 채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탓으로 연구생활을 그만둔다면. 내."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관우가 웃으면서 말을 끊었다. "내가 연구생활에 맞는지, 원래 자신이 없었어." 지수가 갑자기 관우의 팔을 잡고, 그의 어깨에 볼을 대면서 말을 했다. "지금은 그만둬요, 그런 이야기." 관우가 한쪽 손으로 지수의 머리를 빗어 주자, 그녀가 깊이 숨을 내쉬 며 나지막이 말했다. "빨리 아파트로 돌아가요." 2층짜리 싸구려 아파트. 관우의, 아니 두 사람의 보금자리는 2층 맨 첫 번째 방이다. 안에 들어가서 불을 켜자 관우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몰라 볼 정도로 모든 것이 깨끗하게 정리되었고, 커튼도 새것으로 바뀌고 벽까 지 새로이 도배되어 있어서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 답답했던 방이 이 정 도로 바뀌어 버리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한동안 그는 어안이 벙벙 했다. "마음에 들어요?" 지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아, 물론이지. 이거 완전히 마술사구나." 지수는 기쁜 듯이 미소지었다. 관우는 꼼짝하지 않고 지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지수는 방구석으로 가서 스웨터와 치마를 벗고 슬립 차림이 되자, 관우 쪽을 보았다. 관우가 미소짓자, 그녀는 그에게 등을 향하고 남은 것을 모두 벗고는 한쪽에 잘 정리해 놓았다. 그리고 알몸인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얼굴을 숙이고 서서 는 잦아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있잖아요. 어떻게 해요? 나." 말이 끝나지도 않은 사이에 지수의 몸은 관우의 무게를 타고 자리에 펼 쳐지고 있었다. 그러고서 한 시간은, 지수에게 있어서는 처음으로 경험하 는 아득한 도취의 시간이었다. 그에게 몸을 맡기면서 느꼈던 타는 듯한 쾌감이 그녀의 몸에 오랜 여운으로 남았다. "불이 켜져 있었군요." 지수가 천장을 눈부신 듯이 올려다보며 말했다. "몰랐었어요. "커튼이 닫혀 있어, 괜찮아." 지수는 어깨로 크게 숨을 쉬었다. 충분한 미소가 그 뺨에 보조개를 만 들었다. 그것은 이제 단순히 천진난만한 것이 아니라, 요염한 매력을 가 진 보조개로 변해 있었다. "커튼 끝이 조금 열려 있어요." "보이지 않아." "하지만 싫어요." 지수가 일어서서 커튼을 치려고 하다가 밖의 뭔가를 보았는지 깜짝 놀 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 "뭐야?" 지수의 벗은 몸을 바라보고 있던 관우가 물었다. "밖에 누군가 서 있었는데, 어쩐지 이쪽을 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아직 있어?" "아니, 가 버렸어요." "어떤 사람이었지?" "어두워서 알 수 없어요. 이 근방은 밤에 너무 어두워요. 가로등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지수가 관우에게 다가오며 혼잣말처럼 다시 중얼거렸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었겠지요." 두 사람은 옷을 입고 커피를 마셨다. 지수는 언제나처럼 재빠른 동작을 되찾고 있었다. 연구실에서 서류를 정리하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침착하 고, 그러면서도 재빠른. "배가 고픈데." "밥 먹을래요?" "좋아, 부탁해. 프랑스 요리에는 질렸거든." "밥릇도 새것으로 사왔어요." 지수는 부엌으로 가서 찬장에서 밥그릇을 꺼내 보였다. "좋죠, 이것?" 고개를 끄떡이면서 관우는 문득 그 오태석이라는 형사를 생각했다. 그 남자는 민가영의 저택 주방에서 무엇을 보고 간 것왜 하필이면 주 방을 기웃거렸을까. 거기서 무엇을 찾고자 했을까. 두 사람은 늦은 저녁식사를 들면서 지난 사흘간의 일을 서로 이야기했 다. 그렇지만 관우는 오태석 형사에 관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얽 힌 어떤 은밀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걱정을 시켜서는 안 된 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어쩐지 꺼내고 싶지 않았다. "손님은 자주 와요?" 지수가 물었다. "그 집 말이야? 좀처럼 안 와. 나를 찾아서 파리에서 여자들이 찾아올 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때려서 쫓을 거예요." 창 밖에서 이쪽을 보고 있던 남자는 어쩌면 오 형사쪽 사람일지도 모른 다. 설마? 관우는 스스로 부정했다. 나와 어떤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일 까? 내가? 그 살인사건과? 지수가 말했다. "슈퍼에서 접시, 찻잔, 물그릇 이런 것들을 사야겠어요. 나중에 일람표 를 만들겠어요." 접시일까? 관우는 문득 그 집의 은식기를 생각했다. 하얗고 화려한 광 택을 가진 그 은식기의 훌륭한 모양을 떠올리다가 관우는 문득 젓가락을 멈추었다. "뭐예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주방에서 그가 본 것은 큰 접시, 작은 접시, 컵, 스프 접시. 모두 가 제각기 4개씩 겹쳐져 있었다. 분명히 그랬다. 분명하다. 커피잔도 4개 였다. 각이 진 쟁반에 올려져 있던 것을 그는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결같이 네 사람 몫의 분량이었던 것이다. 관우, 가영, 지영, 그리고? 집사 김광수도, 가정부 덕자도 아니다. 요 리사 여자일 리도 없다. 그러면 또하나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단순한 여 분일까? "맛있었어." 관우는 빈 밥공기와 젓가락을 놓았다. 지수도 다 먹고는 자기 밥공기를 그것에 겹쳐놓고 부엌으로 가지고 가서 재빨리 씻었다. 관우는 신문을 꺼 내어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이미 가정의 질서가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일요일, 서울을 떠나는 것이 생각보다 늦어져서 관우가 그 휴게소에 도 착한 것은 벌써 한밤중 가까이였다. 휴게소의 불빛이 보였을 때, 문득 잠 시 쉬고 갈까 하고 생각했던 것은 운전에 지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가 휴게소에 들어섰을 때 의외의 인물이 거기 앉아 있는 것이었다. 형사 오태석이었다. "야, 이거 반갑군요." 오 형사가 먼저 말했다. "앉지 않겠소?" 관우는 오 형사와 나란히 앉으며 커피를 주문했다. 가게주인이 두 사람 에게 힐끔 흥미있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곤 원두를 갈기 시작했다. "외출했었습니까?" "토요일과 일요일은 쉬기 때문에." 관우는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대답했다. "서울에 갔다 왔습니다." "아, 그래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오 형사가 머리를 끄덕였 다. 관우는 갑자기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어서 불쑥 입을 열었다. "도대체 오 형사님은 무엇을 조사하는 겁니까? 이런 곳에 앉아서 무엇 을 하는 겁니까?" 오 형사는 조금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고 관우를 바라보았지만, 뻔뻔 스러운 미소는 입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밤에만 한정된 질문이라면, 바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관우는 아연해졌다. "왜 나를?" "당신이 현지수와 함께 신촌의 아파트에 있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게주인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사이펀을 알코올 램프의 불에 걸었다. 뜨거운 물이 보글보글 소리를 내면서 위쪽 분말을 밀어 올려갈 때까지, 관우는 오랫동안 오 형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놀랄 정도의 일은 아닙니다." 오 형사가 설명조가 되어서 말했다. "나는 형사입니다. 당신을 감시하도록 부하에게 명령하는 것은 전화 한 통 걸면 되는 일이죠." 관우는 화내는 것도 잊고 오 형사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민가영 씨의 저택에 흥미가 있습니다." 오 형사는 희미하게 웃으며 한동안 관우를 응시하다가 계속 말을 이었 다. "따라서 그곳에 새로운 사람이 오면 조사하고 싶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 아니겠소? 당신이 수상하다든가, 의심하고 있다든가 그런 차원이 아닙니 다.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기쁘군요." 관우는 오 형사의 얼굴을 노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한 마디 말했다. "그러나 조금 불쾌하군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었다니." 오 형사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면서 대꾸하였다. " 관우는 갑자기 이 남자의 웃음에 동조해서 함께 웃고 싶어졌다. 괘씸함 이 갑자기 사라지고 웃음이 목까지 차올라왔던 것이다. "미안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 형사가 말했다. "처음부터 당신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요." 가게주인이 알코올 램프의 불을 껐다. 커피가 아래쪽으로 거품을 내면 서 내려왔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관우가 물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모르겠습니다, 오 형사님이 무엇을 조사하고 있는 지. 그 집에 무엇이 있다는 겁니까?" "이야기해도 좋습니까? 어때요, 테이블로 자리를 옮기지 않겠습니까?" 막 만들어낸 커피가 진한 향기를 내는 컵을 들고서, 관우는 오 형사를 따라서 안쪽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사건에 대해서는 당신도 어느 정도 아시겠지요? 요컨대 트럭 운전사가 경동맥이 잘려서 살해당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고, 다른 곳에도 여러 개의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 이외에 실마리는 아무것도 남겨져 있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것은 트럭이 국도를 벗어나 옆길로 들어가서, 또다시 숲속 공터로 들어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강도였나요?" "아무것도 도난당하지는 않았습니다. 현금이 몇 만 원 있었지만,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위한 살인이었는지 그것도 알 수 없습니다." "지나간 차도 없었습니까?" "그날 밤은 비가 심하게 내렸습니다. 한밤중이었고, 차의 왕래도 거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가령 차가 통과했다고 해도 그 장소는 국도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완전히 어찌할 도리가 없었겠군요." "그런 상태입니다. 발견이 늦어서, 다음날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경찰 이 겨우 알았을 정도였지요." "그래서 수사가 벽에 부딪쳤군요." "막다른 골목이죠." "그런데 도대체 민가영 씨의 저택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 집은 지푸라기입니다." "뭐라구요?" "물에 빠진 사람이 잡는 지푸라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지푸라기라고 하더라도 무엇인가가 있겠지요?" "있다고 확실히 단정지을 수 있을 정도의 단서는 아닙니다." 오태석 형사가 좀 자조적으로 웃었다. "현장에서 몇 킬로 앞에, 그러니까 국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민가가 있습니다. 그 집은 조금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국도의 한쪽을 창에서 볼 수 있지요. 그 집 아이가 중학생입니다만 그날 밤, 어느 차가 국도에 갔 다가 되돌아오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 겁니다." "갔다가 되돌아서?" "빗속, 더구나 한밤중입니다. 자동차의 라이트가 얼핏 비쳤다는 것이지 만, 어느 정도 보였는가는 당연히 의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 이라면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그 차는 사건이 있었던 쪽을 달려갔다가 약 30분 후에 되돌아왔다고 하니까요. 그만큼의 시간으로는 가장 가까운 주 유소에도 갈 수 없지요. 물론 주유소도 전부 조사해 보았지만, 그날 밤 그런 차를 보았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되돌아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같은 차였는가를 어떻게 해서 알 수 있지요? 다른 차가 반대방향에서 달려왔을지도 모르잖아요." "정확한 지적입니다." 오 형사는 관우의 의문에 일단 수긍했다. "말씀드렸지요, 이것은 지푸라기라구요. 물에 빠진 사람을 지푸라기로 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주 조금 안심은 되지요." "그래서 지금부터 어떻게 할 셈입니까?" 오 형사는 그것에는 대답하지 않고, 가지고 있던 파이프를 꺼내어 물끄 러미 바라보았다. 훌륭한 광택이 나는, 멋진 파이프였다. "훌륭한 디자인이지요?" 오 형사는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덴마크의 한센 작품입니다. 손으로 만든 물건이지요. 나는 담배는 전 혀 안 피우지만 파이프를 모으는 것은 무척 좋아한답니다." 오 형사는 파이프를 안쪽 주머니에 넣으면서, 뭔가 만족스런 웃음과 함 께 부드럽게 말했다. "당분간 그 집에 머무르시겠죠?" "3개월 정도는." "그러면 한두 번은 더 뵐 수 있을 것 같군요." 관우는 커피를 다 마시고, 휴게소를 나왔다. 그가 출구에서 뒤돌아보 자, 오 형사가 테이블에서 이쪽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줄곧 관우의 등을 쫓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선생님은 아직 안 돌아왔어?" 거실에서, 물끄러미 서류를 보고 있던 가영이 지영의 목소리에 얼굴을 들었다. "아직." "벌써 자정이 가까워 오는데." "틀림없이 애인과의 이별을 참을 수 없었을 거야." 민가영이 서류에 눈을 되돌리면서 말했다. 지영은 따분한 듯이 하품을 하고는 난로 앞을 하릴없이 왔다갔다 했다. 가영이 동생의 그런 모습을 보곤 조금 초조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좀 앉지 않을래?" 지영은 어쩔 수 없이 소파에 앉아 언니를 탐색하듯이 보면서 농담조로 말했다. "언니, 그 선생에게 마음이 있지?" 가영이 못 들은 척 대답하지 않자, 지영이 계속해서 말했다. "난 알아. 그 사람 앞에서 언니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구." "그러면 어때서? 어느 쪽이 먼저인가 제비뽑기로 정하자는 거야?" "나는 흥미없어. 그런 남자는 내 취향이 아니야. 단지 언니가 좋아하는 타입이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야." "나도 그다지 관심없어." 가영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넘기며 가볍게 받아넘겼다. "내겐 그밖에 걱정할 것도 산처럼 많으니까." "그렇지! 틀림없이 그가 좋아하는 타입은, 나나 언니보다는 오히려 ." "함부로 말하지 마!" 가영이 갑자기 엄한 어조로 말했다. "신경을 써. 요전에도 네가 '우리 세 사람'이라고 해서 섬뜩했어." "그 정도로야 알 수 없었을 거야." "어쨌든 신중하게 행동해." 지영은 조금 불쾌한 듯이 입을 다물고 가영을 바라보다가 화제를 바꾸 었다.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어?" "그런대로." "그런데 좀 우울한 얼굴이네." "편한 장사라는 것은 없잖니?" 가영이 테이블의 브랜디를 유리잔에 따라서 손바닥으로 따뜻하게 하곤, 은은한 냄새를 맡았다. "걱정거리가 있어?"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어." "여행간 것이 아닐까?" "그렇게는 생각하지만." 가영은 말과는 달리 표정엔 조금도 불안을 나타내지 않고 유리잔을 기 울이며 가볍게 덧붙였다. "이제 잘까? 덕자를 불러서 난롯불을 부탁해 줄래?" 지영이 벽의 벨을 눌렀다. 관우는 거실문 입구에서 잠시 떨어져 서 있 다가 덕자가 모습을 나타내기 전에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본의는 아니 지만 자매의 대화를 엿들었던 것이다.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어, 여행 간 것이 아닐까. 4 평온한 오후였다. 금요일이다. 관우가 이 저택에 온 지 벌써 열흘이 지 났다. 수업 후, 언제나처럼 차를 마시고 나서 관우는 가영에게 괜찮다면 숲속 에 있는 정자를 보여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예, 괜찮고 말고요." 두 사람은 서재에서 정원으로 나왔다. 공기는 적당하게 습기가 있고 다 소 차가웠지만, 그건 맑고 기분좋은 차가움이었다. 그들은 잔디를 가로질러 연못 주위를 돌아갔다. 2층 방에서 보면 연못 주위에는 풀이 많이 자라 있는 것같이 보였지만, 실제로는 벽돌을 깐 작 은 길이 가장자리를 따라 계속되고 있었다. 작은 길을 구불구불 걸어가는 동안에, 가영은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조용하군요." 관우가 일부러 분위기를 바꿀 요량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서울의 복잡한 거리에 익숙해져 있어서인지 오히려 안정되지 않을 때 가 있더군요." 작은 길에서 나무 사이로 들어서자, 정자가 나무 사이의 빈터에 세워져 있었다. 정자 자체는 원통형 건물로, 중간 부분까지 벽돌 벽으로 되어 있 고 그 위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몇 개의 돌기둥이, 중앙이 약간 솟 아오른 지붕을 받치고 있었다. "들어오시죠." 가영이 앞서서 정자의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다. 원통형의 방 중앙에 둥 근 테이블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벤치가 놓여져 있었는데 적당한 넓이 의 안락한 분위기가 꽤 쾌적한 느낌을 주었다. "어릴 때, 자주 여기에서 식사를 했지요." 가영이 창문을 차례차례 열었다. "잠시동안은 소풍온 기분이었지요." 관우가 벤치에 앉았다. "무척 평화로웠어요." "좋은 아버지였습니까?" "아버지는 절대적이었어요. 이 저택의 모든 것이었지요. 그리고 나에게 도, 동생에게도 전부였습니다." 그녀의 진지한 어조가 관우를 놀라게 했다. 추억이 그녀를 본래의 그녀 답지 않게 감상적인 여인이 되게 한 것일까. 여리디여린 10대 소녀 같은 . 그러나 그녀는 곧 언제나처럼 차갑지만 붙임성 있는 태도를 되찾고 다시 말했다. "정 선생님의 부모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죠?" "나는 양친이 없습니다. 형제도요." 가영은 꼼짝 않고 관우를 쳐다보았다. "돌아가셨습니까?" "모르겠습니다." 관우는 쓰게 웃었다. "이상하지요? 아무래도 나는 정상적으로 태어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철이 들었을 때는 벌써 작은아버지 집에 있었습니다. 양친에 관한 일은, 작은아버지도 말해 주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어요." "그래서요?" "동네 아이들은 나를 '부모가 없는 아이'라고 놀리거나, 괴롭히곤 했습 니다. 나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외롭고도 피나는 싸움을 한 것 입니다." 관우가 잠시 말을 끊고,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내가 어린 마음에 알았던 것은 싸움을 하면 이겨야 한다는 것과,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힘에 의지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작 은아버지는 어디까지나 타인에 지나지 않았고 나를 감싸 주지도 않았습니 다. 내가 서울에 올라올 때도 잡기는커녕 노골적으로 안심하는 표정이었 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타인이니까요." 가영이 관우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다가, 천천히 일어서서 창문에 몸을 기대며 말문을 열었다. "그래도 정 선생님은 좋아하는 분이 계시잖아요?" "글쎄요." "사랑하고 있지 않나요?"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도 타인일까요?" "어느 정도 가까운 타인이겠지요." "냉정한 말이군요."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녀가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도, 여기 있는 나도, 당신에게 있어서는 별로 차 이가 없다는 것이군요." "글쎄,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나와 조금은 가까워질 생각이 없나요?" 관우는 눈썹을 조금 치켜올리며 그녀를 조용히 응시하다가 가볍게 내뱉 었다. "섣불리 실수해서 500만 원을 헛되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주 솔직하군요." 가영이 웃었다. 관우는 그때 또 보았다. 웃을 때마다 나타나는 표정, 우울과 미소, 오만함과 불안의 복합을 말이다. "돌아갈까요?"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택으로 돌아왔다. 평온한 나날들이 흘러갔다. 가을이 겨울로 한장씩 껍질을 벗어가는 이 외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 나지 않는 나날이었다. 1개월이 지났다. 그날 아침은, 여러 날 계속되던 잿빛 하늘이 돌변해서 멋진 파란 하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멀리 있는 헐벗은 나무의 가느다란 가지 끝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맑 은 날이었다. 구름 한 점, 바람 한줄기 없는 날씨였다. 방안 가득히 햇살 이 비춰서, 마치 봄의 따뜻함과 같은 포근한 기분을 만끽하게 해주었다. 관우는 9시 반쯤 천천히 잠에서 깨어 커튼을 열고, 침대로 되돌아가서 30분 정도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토요일이었지만, 지수가 박진호 교수와 함께 라틴어 학자 국제 심포지 엄에 갔기 때문에 이번 주말에는 서울에 가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이 저 택에서 보내는 첫휴일이었다. 두 자매가 아침에 일찍 외출한다고 했기 때 문에, 느긋하게 있어도 좋을 것이다. 10시가 지나자 겨우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계단 아래로 내려가자, 덕자 가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늦어서 미안하군." "아침식사는 달걀과 함께 드실래요?" "부탁해요." "햄 에그로 하겠습니다." 기다릴 틈도 없이, 차가운 주스와 햄 에그, 프랑스빵에 치즈가 나왔다. 내추럴치즈의 독특한 향기가 슬그머니 식욕을 자극해왔다. "선생님은 오늘 집에 계실 건가요?" 덕자가 뜨거운 커피를 따르면서 말했다. "왜요?" "괜찮으시다면, 오후에 시장에 갔다 왔으면 해서요." "좋아요. 집을 봐 줄 테니까 다녀와요." "죄송합니다. 김씨 아저씨에게 차 운전을 부탁해서 같이 다녀오겠습니 다." "수고스럽겠군요." "이 근처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한꺼번에 다 사 두어야 해요. 저 쪽 것은 배달해 주니까 좋지만요." '저쪽 것'이라고 한 것은 수입품인 홍차, 치즈, 비누, 화장품 등으로 매달 한 번씩 서울의 백화점에서 한꺼번에 모아서 보내 주는 것이었다. "민가영 씨는 벌써 외출했나요?" "예, 일찌감치 나가셨습니다." "언제나 토, 일요일은 외출하는데 어디에 가는 거죠? 알고 있나요?" "글쎄요. 자선단체의 일 때문에 나가신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자세 히는 잘 몰라요." 자선단체? 가영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영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고 관우는 생각했다. 언젠가 가영에게 이것을 물어 보았을 때에도 대답 은 그것뿐이었다. 그녀는 자세한 것을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아침식사 후, 관우는 서재로 가서 책장의 장서를 바라보았다. 가죽표지 를 한 호화스러운 책이 많았다. 셰익스피어, 괴테, 프로이트까지 원서로 갖추어져 있었는데, 놀랍게도 누군가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관우는 책장 한구석에 놓여져 있는 미술품, 작은 브론즈 상, 보헤미안 글라스 같은 유리인형, 손잡이에 조각을 한 칼 등을 잠시 바라보다가 끝 없이 비춰지는 햇살의 따뜻함에 유혹 당해, 테라스를 거쳐 잔디로 나갔 다. 심호흡을 하자 가슴에 침잠해 있던 온기가 금세 빠져 나가는 것 같았 다. 이 저택 부근에 산보할 수 있는 곳은 없다. 국도에서 들어오는 도로 이외에는 길이 없고, 이 저택의 몇 킬로 주위에는 집도 없다. 고립된 세 계인 것이다. 저 정자에 가 볼까? 그는 문득 생각했다. 손목시계를 보니 11시 반이 지나고 있었다. 덕자가 오후에 나간다고 했으니까, 아직 시간이 충분했 다. 그는 연못가를 돌아서 정응막발길을 향했다. 마른 숲속엔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가득 흩어져, 환상적인 유채색 풍경화를 그려내 고 있었다. 나무 사이를 마음내키는 대로 돌아서 그는 정자에 가까이 다가갔다. 창 문은 전부 닫혀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가 정자의 입구 쪽으로 돌아가 려고 했을 때, 안에서 갑자기 사람 소리가 나서 우뚝 멈추어 섰다. 그는 뜻밖의 인기척에 다소 놀랐지만, 이윽고 정신을 가다듬고 창문 하 를 향해서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갔다. 창은 나무로 만든 것으로, 양쪽 에서 닫혀지는 곳에 작은 틈이 생겨 있었다. 그는 그 틈에 눈을 대고 안 을 들여다보았다. 창은 닫혀 있어도, 입구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안은 충 분히 밝았다. 중앙 원형 테이블 위에 알몸의 남녀가 얽혀 있는 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새어 나오는 신음소리와 거친 숨소리로 벌써 둘 다 최후의 정점으로 오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위에는 두 남녀가 벗어 놓은 옷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서 서로에게 강하게 달려들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남자는 집사 김광수, 여자는 가정부 덕자였다. 천진스러운 소녀로 보이 던 덕자가 희열의 소리를 지르면서 애욕에 탐닉되어 있는 광경을 관우는 믿기 어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모습은 강요된 것 도, 이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도 첫눈에 알 수 있게 하였다. 두 자매가 없는 토, 일요일에 언제나 두 사람은 저렇게 쾌락에 빠져 있었던 것일까? 덕자가 한층 높게 소리를 지를 때, 집사의 격렬하던 움직임이 우뚝 멈 추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격렬한 숨소리 가 관우의 귀에 똑똑히 들려왔다. 그 다음 순간, 그는 창에서 슬쩍 떨어 졌다.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 두 사람이 하필 밀회장소로 이 정자를 골랐 는가 하는 점이다. 집 안에는 수많은 방이 있는데, 게다가 집사는 별채에 살고 있는데 말이다. 누군가에게 들킬 염려도 없는데 하필이면 왜 이 정 자를 골랐을까? 이 저택 그 자체가 어딘가 일그러져 있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인간도, 집안의 모든 것도 어딘가 기묘하게 상식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관우는 숲을 나와 다시 서재로 돌아가려고 발을 내딛었다. 그런데 그 때, 무엇인가가 그의 눈에 불현듯 찾아 들어왔다. 저택의 외벽을 따라서 곳곳에 작은 화단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지금 관 우는 눈을 크게 뜨고 그 화단의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꽃이 시든 화단 의 부드러운 흙 속에서, 뜻밖에도 인간의 손이 나오고 있었다. 하얀 작은 손이 땅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멍하니 지켜보는 관우를 향해서 그 손이 부르듯이 움직였다. 전율이 온 몸을 뚫고 지나갔다. 손이 살아서 그를 부르고 있다. 손짓하고 있다. 등 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주르르 흐르는 것 같았다. 관우는 비틀거리듯 조금씩 옆으로 움직이다가, 악몽에서 달아나듯이 서 재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 "다녀올께요." 덕자가 거실에서 쉬고 있는 관우에게 말했다. "다녀와요, 집은 걱정 말고." "부탁합니다." 관우는 덕자가 나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음 란한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고 있던 모습은 조금도 없었다. 관우가 일어 서서 홀로 나가 현관문을 열었을 때, 덕자와 집사가 탄 벤츠가 분수 저쪽 으로 돌아가는 게 보였다. '이것으로 이 넓은 저택에는 나 한 사람뿐이군.' 관우는 이렇게 생각하다가 곧 생각을 바꾸었다. '아니, 두 사람인가?' 오후 3시가 되려고 하고 있었다. 침착을 되찾고 보니, 그만큼 공포에 휩싸였던 자신이 못마땅해졌다. 괴담 같은 것을 믿기에는 관우는 지나치 게 합리주의자였다. 손이 있고 그것이 움직이면, 반드시 그것에 몸이 붙어 있을 것이다. 15 분 정도 지나서 그 화단을 보러 갔더니, 손은 사라졌지만 그 주위의 흙은 헤쳐져 있고 작게 움푹 들어간 장소가 있었다. 이 아래에 지하실과 같은 것이 있으리라. 누가? 물론, 네 개씩 있는 식 기의 또 한사람의 주인일 것이다. 식사를 하는 이상 유령일 리는 없고, 고급식기를 사용한다면 난폭한 야수도 아닐 것이다. 관우는 화단에서부터 뒷걸음쳐서 연못 주위까지 가, 저택을 한번 둘러 보고는 그 화단이 저택 안쪽의 어디쯤에 해당된다는 것을 눈짐작했다. 잠 시 후 그가 현관에서 보니 홀 반대편은 계단을 올라가는 곳이지만, 그 반 대편에는 작은 복도가 안쪽으로 나 있었다. 관우는 그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계단 아래가 되기 때문에 어둠침침했 지만 좌우에 몇 개인가 문이 있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 하나가 덕 자가 묵고 있는 방이라는 것은 관우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외의 문에는 문패가 달려 있는데 세면장, 청소용구 넣는 곳, 창고, 잡화 넣는 곳이라 고 되어 있었다. 정면은 뒤뜰로 빠져 나가는 문이지만, 언제나 열쇠로 잠 가 두고 있는 것 같았다. 가장 안쪽에 있는 왼쪽 문은 '창고'라고 되어 있지만, 아마도 지하실은 그 밑일 것이라고 관우는 생각했다. 창고문에 손을 대고, 한순간 그는 주 저했다. 가영 자매의 허락도 없이 이곳에 들어가도 좋은가. 그녀들의 허 락도 없이 지하실의 누군가를 만나도 좋은가. 감추고 싶어하는 부분을 이 렇게 마구 파헤쳐내도 괜찮을까. 그러나 이미 관우의 손은 문 손잡이를 돌리고 있었다. 이미 호기심이 억누를 수도 없이 고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포기할 수는 없 다. 그러는 관우를 부추기듯이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손으로 더듬어 스위치를 누르자, 갓 없는 작은 전구의 빛에 넓이 세 평 정도의 방이 비추어졌다. 아무 특별한 것이 없는 그냥 그대로의 창고였 다. 정원손질용 도구들, 목공 도구들, 그밖에도 묶여진 잡지나 책까지 빽 빽하게 쌓여져 있다. 어딘가에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을 것이다. 더 안으로 들어가자 상 자가 몇 개 쌓여 있었는데 그 옆으로 작은 입구가 딱 입을 벌리고 있었 다. 입구는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는 낮은 높이였지만, 폭은 충분히 넓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고, 그것이 나선을 그리고 있 었기 때문에 입구에서는 아래가 보이지 않지만 머리 위에는 몇 개인가 작 은 전구가 켜져 있어 발 밑은 충분히 밝았다. 관우는 조용하게 발을 내딛 었다. 기분 탓인지, 공기가 좀 차가운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발 소리를 죽이고 있는데도 그 작은 터널에서는 힘차게 행진이라도 하는 듯이 들렸다. 계단 에서 내려선 곳은 세 평 정도 넓이의 장소였다. 날라온 식사의 쟁반이라 도 두는 곳인지 입구 쪽에 긴 테이블이 놓여져 있었다. "덕자냐?" 느닷없이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깊은 어둠 속에서 울려왔기 때문에 관 우는 뛰어오를 듯이 놀랐다. 정면의 어둠에서 갑자기 작은 사각 창문이 열렸다. 정면에 작은 창이 있었던 것이다. 철책이 처진 창에서 젊은 여자 가 관우를 보고 있다는 걸 안 것은 그 직후였다. "누구예요, 당신은?" 그녀의 질문에, 관우는 잠시 호흡을 조절해야 했다. "정관우라고, 새로 온 가정교사입니다." "아!" 그녀가 낮은 탄성을 지르곤 곧 덧붙였다. "덕자에게 들었어요,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는 분이지요?" "그렇습니다." 관우는 그녀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그와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23,4세 의 작은 여자였다. 창백한 얼굴빛이었고, 머리는 어깨에 흘러내리는 대로 길게 놔 두고 있었다. 관우와 그 여자는 상당한 시간 아무 말 없이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여자는 비교적 윤곽이 뚜렷한 얼굴로, 가늘고 긴 눈썹과 얇은 입술이 인 상적이었다. 미인이었다. 그러나 지하실 어둠 속에 유폐된 미인이기에 너 무도 창백한 여인이었다. "당신은 누구죠?" 관우가 물었다. "전 민하영이에요." "그러면, 가영 씨의." "여동생이에요." 자신을 민하영이라고 이름을 댄 그 여자는, 한참 동안 관우 쳐다보고 만 있었다. 그가 그 시선에 부담을 느껴, 억지로 말을 끌어내듯이 물었 다. "여기는 도대체 뭐죠? 마치 감옥같이 보이는데." "감옥이에요, 정말로!" 민하영은 양손으로 창의 철책을 꽉 잡고 있었다. 스스로 그 말을 증명 이라도 하듯이 힘을 주며. "도대체 왜 이런 곳에 있죠?" 하영은 가볍게 웃음을 머금곤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언니들이 말하기를, 내가 나쁜 여자래요." "설령 그렇다고 해도." "하지만, 살기엔 그다지 불편하지 않아요." 하영은 희미하게 웃으며 관우를 응시하다가 문득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생활하는데 별로 부족한 것도 없고." 하영은 창문에서 손을 뗐다. 관우는 비로소 그 감옥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상당한 넓이로, 계단 위에 있는 방과 규모나 꾸밈에 있어 거의 다른 것이 없었다. 융단이 깔려 있고 몇 개인가 그림이 걸려 있으며 책장 에는 책도 꽂혀 있었다. "멋진 방이죠? 별로 부족한 것도 없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요. 단 지 놀면서 살면 돼요." 그녀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관우는 그 웃음에서 일종의 히스테릭한 울 림을 들었다. 스스로 경련 같은 떨림을 만들어내는 웃음소리. 그것은 보통사람의 웃음과는 사뭇 달랐다. 그러다가 그녀가 갑자기 심각한 얼굴 이 되더니 창문으로 달려왔다. "도와 주실래요? 네?" 관우는 그 여자의 눈에 잡아 끌리듯이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아예 뿌리를 내린 듯이 그렇게 우뚝.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나가고 싶은 거예요! 아, 미칠 것 같아요!" 거의 절규하듯이 말하는 그녀의 하얀 작은 손이 철책을 꽉 움켜쥐고 떨 렸다. 관우는 자신도 모르게 그 손을 감싸고 간신히 할 말을 떠올렸다. "침착해요." 그녀가 자신의 손을 감싼 관우의 따뜻한 손에다 갑자기 입술을 댔다. 관우는 잠시 당황하면서도 또다른 한쪽 손으로 살짝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리며 볼을 가볍게 만져 주었다. "죽고 싶어요, 정말로! 앞으로 며칠을 더 견딜 수 있을까?" 그녀는 눈물로 볼을 적시면서도 애써 웃었다. "책장 뒤의 판자를 벗겨서 벽을 파려고 했지만, 기와 틈으로 겨우 한쪽 손끝이 나갔을 뿐이었어요." "그것을 보고 찾아온 겁니다." "어머, 헛수고가 아니었군요." 그녀의 얼굴이 빛났다. "하느님! 고맙습니다." 그러다가 그녀가 문득 정신을 차리곤 목소리를 낮추어서 말을 했다. "덕자는요?" "시장에 갔어요. 잠시 동안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그 남자, 집사는요?" "함께 갔어요." "언니들은 외출했겠지요." "맞아요." 겨우 안심한 것일까, 그녀가 철책에 얼굴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어째서 언니들이 당신을 이런 곳에 가둔 거죠?" 그녀는 눈을 감고 오랫동안 잠자코 있었다. 관우는 그녀가 소박한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보았다. 그 청초한 모습은 순수 한 한송이 꽃을 생각나게 했다. "저는 나쁜 여자예요. 정말로 그래요. 그래서 이런 일을 당해도 언니들 을 원망할 마음은 추호도 없어요." 그녀가 크게 한번 숨을 쉬고 나서 또 말했다. "저는 사람을 죽였어요." "뭐라구요? 언제." "5년 전, 열여덟 살 때였어요." "누구를 죽였죠?" "전에 있던 하인이에요. 이름도 벌써 잊어버렸지만요." "왜 죽였죠?" "처음부터 죽이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정신이 없었어요. 모두 외출하 고, 나 혼자 방에 있었는데 그 남자가 들어왔어요. 갑자기 나를, 옷 이 찢기고, 소리를 지르려고 하자 목을 조르려고 했어요. 옆 테이블 에 재봉가위가 있었어요. 그것을 잡고 힘껏 찔렀어요. 몇 번이나, 몇 번 이나. 그랬더니 갑자기 그 남자가 축 처졌어요. 죽은 거예요." "그렇다면 정당방위예요.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나요?" "예." "왜?" "언니들은 아무도 내 이야기를 믿지 않을 것이라고 했어요. 내가 잡혀 서 차가운 감옥에 들어가 버린다고 했어요." "바보같이! 경찰이 믿지 않을 리가 없잖소?"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언니들은 언제나 맞아요. 나는 여기서 나가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해서 는 안 돼요." 그녀가 갑자기 두려운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소리를 질렀다. "자, 이제 가요! 집사가 돌아와요. 만약 발견된다면. 가요, 빨리 가요!" "그러나." "내버려 둬요, 나 같은 건 잊어버려요!" 그렇게 외치고 그녀는 문에서 물러나 창을 닫아 버렸다. "이봐요! 이것 봐요!" 관우가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으나 그녀로부터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 지 않았다. 그가 문 손잡이를 잡고 힘껏 흔들었지만, 문은 마치 철벽의 쇠기둥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더이상의 행동을 포기하고 지하실을 나왔고, 그로부터 1시간 정도 지나 자 덕자와 집사가 돌앝다. 과연 그것은 현실의 체험이었을까? 그날밤 침대에 들어가서 관우는 온 통 민하영에 관해서만 생각을 모으고 있었다. 지하에 유폐된 여인, 살인 자, 아름다운 얼굴, 히스테릭한 웃음소리, 모든 것이 믿을 수 없는 이야 기였다. ** 민하영이라는 여자는 이제부터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일생을 저렇게 지 하에서 사는 것일까? 민가영은 어떤 생각으로 자신의 여동생을 그렇게 암 담한 밀폐 공간에 가두어 버린 것일까? 가영이 어떠한 일이라도 해치울 수 있는 여자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런 처사가 정말로 동생에게 가능한 것 일까? 어떻게 해야 할까? 관우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쓸데없는 일에 참견 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대로 방관한다면 하영은 결국 언젠가 는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내일, 또 하루 기회는 있다. 집사와 덕자의 눈을 교묘하게 속이고 다시 한번 하영을 만나보자고 관우는 결심했다. 다음날, 관우는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집사와 덕자에게 주의를 기 울였다. 가영 자매는 저녁에 돌아온다. 그때까지 어떻게 해서든지 지하로 갈 기회를 잡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관우가 그렇게 안절부절할 것까지도 없었다. 점심식사 전에 덕 자가 커피를 가지고 와서 불쑥 말을 했던 것이다. "잠시 정원을 손질하고 있겠어요." "집사 아저씨에게 도와 달라고 하지?" 관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예, 그럴 생각이에요." 양쪽 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관우는 그러는 덕자도, 그리고 그 자신도 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분 후, 커다란 꽃가위를 손에 들고 두 사람이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 을 관우는 서재에서 보았다. 이것으로 잠시동안은 염려 없을 것이다. 서둘러 창고로 가서 계단을 내려가니, 아래에서 하영의 목소리가 울려 왔다. "선생님이세요? 맞죠?" "그래요!" 관우는 짧고 낮게 대답을 하곤 지하에 내려섰다. 그때 철책 사이에서 하영이 양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저는 이제 안 오시리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렇게도 좋은가?" "예, 물론이에요! 어제는 미안했어요. 제가 너무 무서워서." "알고 있어요." 관우는 하영의 손을 잡아 주었다. "어젯밤은 몹시 무서웠어요." "왜?" "선생님을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정말로 여기에 선생님이 왔던 것일 까, 내 상상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유령이 아니고, 여기에 있소." "예, 그래요." 그녀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는데, 그는 그 웃는 얼굴 속에서 문득 짙은 그늘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 열쇠는?" "큰언니만 가지고 있어요." "하나밖에 없소?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두 개 있었어요, 그러나 하나는 나를 이곳에 넣을 때 내버렸어요." "하지만 덕자가 식사를 가지고 오거나 할 때는 어떻게 열지?" "저기." 관우는 그녀의 손가락 끝을 따라가서, 문 옆에 작은 입구가 열려 있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다. 식사를 그 작은 구멍으로 넣는 것이었다. "이건 죄수 취급이잖소? 언니에게 말해서 반드시 당신을 꺼내어 주도록 하겠소." "안 돼, 안 돼요!" 하영이 철책 사이로 손을 내밀고 관우의 팔을 잡았다. "언니에게 말하면 당신은 틀림없이 이 집에서 쫓겨날 거예요."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요." "집사가 있. 그 무서운 남자." 집사? 경호원으로 그 남자보다 더 확실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년이 넘은 나이에도 딱 벌어진 체격하며 강인한 인상을 주는 얼굴 등등 관우 따위는 도저히 대적할 상대가 아니다. "알았소." 관우가 팔목을 잡은 하영의 손을 가볍게 두드리며 나지막이 말을 했다. "기회를 봐서, 반드시 가영 씨에게서 열쇠를 훔쳐내겠소." "조심해요, 언니는 머리가 좋아요." "열쇠를 어디에 놓아 두지? 짐작은 하고 있소?" "언니가 언제나 가지고 다녀요." 하영이 힘없이 대꾸했지만 관우의 말은 의외로 시원스러웠다. "염려 없소!" 관우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고 나서, 그녀의 기운을 북돋아 주듯이 미소 까지 지어 보였다. "반드시 내 손에 넣을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요." 하영이 미소를 되찾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에 관한 이야기를 해줘요. 알고 싶소." "이야기하라구요, 뭘요?" "아무 일이라도 좋소. 옛날 일이라도, 지금 일이라도, 아니면 매일 무 엇을 하고 지내는지 따위라도." 잠시 지나고 나서, 하영은 자신에 대해 띄엄띄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한 시간 정도나 계속되었는데, 관우는 집사가 돌아오기 전에 서 재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녀의 이야기를 서둘러 가로막았다. "또 와 주실 거예요?" "오구 말구! 반드시 올 거요!" "반드시예요!" 하영의 목소리가 호소하듯이 계단을 올라가는 관우를 쫓아왔다. 서재로 돌아오자마자, 두 남녀가 숲에서 나왔다. 위험한 순간이었다. 가영 자매가 있을 때 지하로 몰래 가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다 른 방법이 있다. 이미 그의 가슴에는 어떤 계획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덕자 씨, 잠깐만." 그가 복도를 지나가는 덕자를 불렀다. "예?" "잠시 들어오지 않을래?" "무슨 일이신지." 금요일 밤이다. 내일은 2주 만에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오늘밤 사이에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부탁할 것이 있어서." 관우는 문을 꼭 잠그고,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뭐, 대단한 일은 아니야." "뭔데요?" "가영 씨가 목욕하는 게 몇 시쯤이지?" 덕자는 눈을 동그랗게 하고, 한동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관우를 응 시하다가 어렵게 말했다. "10시 정도입니다만." "덕자 씨가 목욕 준비를 해주지?" "예." "가영 씨가 목욕하러 들어가면 내게 알려 주지 않겠소?" "저, 도대체 왜." "그리고 말이야." 관우는 계속해서 덕자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덕자라면 알고 있을 테지? 가영 씨가 목욕할 때나 잠잘 때 열쇠꾸러미 를 어디에 두는지?" "열쇠라면, 어떤 열쇠를 말씀하시는지요?" "있잖아, 지하실 열쇠 말이야." 덕자가 몹시 놀랐다. "그것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그런 건 묻지 말고, 내겐 단지 열쇠가 필요할 뿐이야." "안 됩니다! 저도 막내 아가씨와는 너무 말을 많이 해서는 안 된다고 들었고, 막내 아가씨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단단히." "덕자에게 들은 건 비밀로 하지. 걱정 마." "그러나 역시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만약 알려진다면 전 쫓겨납니 다." "그래? 그러면 정자에서 매일같이 집사와 놀아나고 있는 게 알려져도 괜찮은 거지?" 덕자는 입을 딱 벌리고 관우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이미 수치심과 분노 로 뺨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보고 있었군요!" "그 정자는 가옛날 추억을 그리는 소중한 장소야. 하필이면 정 자 테이블 위에서 그런 짓을 하다니." "그만해요!" "열쇠는 어디 있지?" 덕자의 고개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밑으로 향했다. 한참 그렇게 서 있 던 덕자가 잦아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침대 옆 테이블의 제일 작은 서랍입니다." "좋아, 그렇다면 가영 씨가 목욕하면, 내 방의 문을 세 번 노탕" 관우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흘렀고, 거의 동시에 덕자의 입가엔 분노 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관우는 그녀에게 한 마디 더 덧붙이는 걸 잊지 않 았다. "물론 김씨 아저씨에겐 말하지 않겠지? 그렇게 되면 가영 씨가 모든 걸 알게 될 테니까 말이야." 덕자가 나가자, 그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교재용 진흙을 주머니에 넣으 며 덕자의 신호를 기다렸다. 이 진흙으로 열쇠 형태를 만들려는 것이다. 10시가 조금 지났을 때, 노크 소리가 세 번 울렸다. 관우는 덕자의 표 정을 기억하곤 쓰게 웃으며 잠시 기다렸다가 복도로 나갔다. 가영의 방은 복도 반대편 안쪽에 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그녀의 방 에 도착했다. 문에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살짝 문을 열 었다. 방의 구조는 관우의 방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안 쪽의 욕실문 쪽에서 물을 끼얹는 소리가 들려왔다. 관우는 서둘러 침대 옆 테이블로 다가가서 작은 서랍을 열어 보았다. 쇠사슬이 달린 열쇠가 노트 위에 놓여져 있다. 오직 그것 하나뿐이기에 금세 지하실의 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가지고 온 진흙에 열쇠를 맞추었다. 앞쪽과 뒤쪽의 양쪽 모양을 뜨고는 그것을 서둘러 윗옷 주머니 에 넣고, 이번에는 열쇠를 정성스럽게 손수건으로 닦았다. 진흙이 남아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는데, 이것이 의외로 시간이 걸렸다. 그가 열쇠를 원래대로 되돌려 놓고 막 서랍을 닫았을 때였다.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황망히 돌아보자, 욕실문이 열리고, 목욕가운을 입은 가영이 거기 서 있었다. "무슨 용건이 있으세요?" 그녀가 거듭 물었다. 이상하다는 표정이었지만, 힐문하는 듯한 어조는 아니었다. 관우는 어떻게 말 것인가,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이 침대 옆 에 서 있다는 걸 깨닫고는 얼른 얼버무렸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를요?" "그렇습니다." "그래요?" 가영은 유쾌하게 미소지으면서 산책이라도 하는 듯한 걸음걸이로 그에 게 다가왔다. "조금 가까운 타인이 되어 볼까 생각했나요?" "손해나 이익이 없다면요." "그렇다고 해도." 가영은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그의 얼굴을 똑똑히 응시하면서 말했다. "방에 살며시 들어와서 기다리는 것은 탐탁치 않군요." "탐탁한가, 탐탁치 않은가는 나중에 결정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가영은 테이블 위의 담뱃갑을 집어들곤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그리스 조각을 한 탁상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들어오는 것이 안 된다는 것이 아니에요." 가영이 목욕가운의 허리끈을 풀면서 부드럽게 덧붙였다. "어차피 들어왔다면,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말이에요." 훌륭한 몸이었다. 30대 초반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탄력 있는 몸이었다. 피곤함이나 느슨함이 없는 가영 육체적 매력은 그녀의 외모 가 풍기는 냉정함과는 사뭇 달랐다. 두 사람은 침대로 엉클어졌다. 관우는 열쇠의 양쪽 형태를 뜬 진흙이 뭉개지지 않도록 살짝 윗옷을 벗어서 바닥에 놓고는 가영의 육체의 유혹 속으로 단숨에 침몰되어갔다. 뭔가 있었던 것이다. 지수는 관우를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그건 사랑하는 사람의 직감이다. 그의 눈이 자을 똑바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무언가 생각하고 있고, 지 수의 이야기에도 어딘가 기운이 없는 모습으로 끄덕일 뿐이다. 지수는 막연한 불안에 휩싸이면서 관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관우는 그러한 그녀의 모습에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관우는 토요일 낮에, 지수와의 약속장소로 가기 전에 철물점을 하고 있 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를 방문해서 점토 형태대로 열쇠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철물점을 하는 친구인 고배영()은 관우가 가지고 온 형 태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기부터 하였다. "이것은 쉽지 않은데. 같모양의 원형이 있으면 간단하지만, 이것은 다른 조잡한 것과는 틀려. 아주 정교한 열쇠라구." "어떻게든 부탁해. 꼭 필요한 거야." "언제까지?" "언제까지 되는데?" "2주일은 걸리겠어." "좀더 빨리 안 돼?" "찾으러 다녀야 해. 이것을 깎을 수 있는 원형을 말이야." "알았어. 돈은 충분히 줄 테니까 잘 부탁해." "어쩌려고 하는 짓이야? 여윽몰래 들어가려는 거야?" "그 비슷한 일이지." 관우는 배영의 어깨를 두드리고 가게를 나왔다. 돌아오면서도 그는 온 통 하영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일주일 전의 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지 하의 감옥에서 그 이상한 여자와 만난 것이 바로 몇 시간 전과 같은 기분 이 들었다. 하영은 어릴 때부터 예민하고 꿈을 잘 꾸는 소녀였던 것 같다. 학교는 안 가기 일쑤였고, 고등학교마저도 중도에서 자퇴했다고 한다. 그 후로는 가정교사에게 영어와 음악을 배웠다. 그렇게 매사에 연약한 소녀였던 탓인지, 아버지는 하영을 특별히 사랑 하고 있었다. 물론 언사람에게는 이것이 늘 불만이었던 것 같다. 세 자매 사이에서 하영이 따돌림을 당한 것은, 그러니까 아주 어린 시절 부터였다. 하영이 일으킨 살인사건은 아버지가 잘 얼버무렸지만 언니들은 모두 하영을 이상한 아이라고 단정짓고 병원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하영을 자기 곁에서 떼어 놓고 싶지 않아서, 지하실을 개조해서 그애가 혼자 낼 방으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비행기 사고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하영도 집사를 따라 밖으 로 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방도 보통 문으로 했고, 밤에만 열쇠를 채웠 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안 계시자, 언니 두 사람은 하영에게 밖으로 나가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게 되었다. 더 튼튼한 문을 만들고, 하영을 완전히 유폐시켜 버렸던 것이다. 세상 에서 아주 영원히. 5 2주일은 달팽이 걸음처럼 천천히 지나갔다. 관우는 매일 수업과 독서에 만 전념했다. 가끔 한밤중에라도 지하실로 살며시 내려가서 하영과 만나 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만일 발견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기에 애써 자제했다. 가영과의 관계는 그때 그것뿐이고, 물론 관우 쪽에서도 말을 걸거나 접 근하지 않았다. 더구나 가영 쪽에서도 그저 스치는 장난 정도로밖엔 생각 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를 마음 편하게 했다. 12월로 들어서자 그 2주일 사이에 두 번 눈이 내렸다. 서울보다 한층 심한 추위가 찾아와서, 모두 방에 틀어박히는 일이 많아졌다. 덕자와 집사는 어디에서 밀회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 정자에서는 아무 리 격렬하게 서로 사랑해도 얼어 버릴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스토브라 도 가지고 들어가서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약속대로, 2주일 후에 열쇠가 완성되었다. 싸지는 않았지만 관우는 이 미 가영으로부터 많은 돈을 선불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부담이 되지 는 않았다. 준비는 완료되었다. 그 다음은 토요일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날은 비구름이 흩날리는 침울한 날씨였다. 토요일 아침, 관우는 7시에 침대를 벗어났다. 어제 저녁에 거의 잠들지 못했음에도 그렇게 빨리 일어난 것은 가영 자매가 집을 나가는 것을 확인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일요일 밤이기 때문에 충 분히 시간이 있다. 물론 덕자와 집사가 있지만, 언제나처럼 두 사람은 어 딘가에서 밀회를 즐기며 시간을 잊고 있을 것이다. 옷을 입으며 그는 안쪽 주머니를 더듬어 열쇠와 작은 줄칼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열쇠라는 것이 그렇게 딱 한번에 맞는 게 아니야.' 고배영이 이 열쇠를 건네 줄 때 그렇게 말했다. '알았어? 구멍에 끼워넣고 이 줄칼로 조금씩 깎아서 맞추는 거라구. 너 무 깎지 마, 조금씩 하는 거야.' 그 친구는 '아주 조금'이라는 말을 몇 번 더 반복하고는 한 마디 덧붙 였었다. '열쇠를 사용해서라도 그렇게 만나고 싶은 여자와 나도 한번 만나게 해 줘.' 지금, 열쇠와 줄칼이 준비되어 있다. 그 다음 할 일은 기회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관우가 식당으로 내려갔을 때, 식사를 하고 있던 두 자매가 놀라서 얼굴을 들었다. "어머! 신기하군요." 가영이 놀리듯이 말을 던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시간을 더이상 기다릴 수가 없는 거죠?" "그런 셈이죠." 관우가 자리에 앉았다. 지영은 빵 접시에 눈길을 주고, 잠자코 먹고 있 었다. 관우는 덕자가 날라온 바구니에서 프랑스빵을 집었다. 덕자의 시선 이 재빠르게 관우를 훑었지만 가영이 눈치챌 정도는 아니었다. "곧 나가세요?" 가영이 물었다. "아니, 오후에 나갈 겁니다. 볼일이 좀 있어서요." "그러면 좀더 주무셔도 될 텐데." "가끔은 빨리 일어나야죠." "그러면 우리들은 먼저 실례해요. 지영아, 서둘러!" "언니, 그렇게 재촉하지 마. 머리가 몹시 아파." "과음입니까?" 관우가 웃으며 물었지만 지영은 단지 눈살을 찌푸리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식당에서 나갔다. 조금 지나서, 관우가 식후의 커피를 마시 고 있자 자동차의 엔진 소리가 창문을 통해 들려왔다. 가영의 승용차 엔 진 소리였다. 식당 벽에 걸린 둥그런 벽시계가 8시 15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관우는 그후 계속 거실과 서재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번에는 덕자와 집 사가 모습을 감추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안 보이면 곧바로 착 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열쇠를 맞추는 일에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될지 짐작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고배영의 솜씨를 믿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 친구는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비상했으니까. 그러나 일은 좀처럼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덕자는 여느 때와 달 리 세탁과 설거지로 바쁜 것 같았고, 집사는 10시경 자동차로 외출해서 정오가 지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초조한 기분을 애써 누르면서 점심식사를 했다. 스파게티였는데 그런대로 맛이 있어서 관우가 식사를 마치면서 덕자에게 말했다. "맛있었어." 덕자가 설거지하던 손을 문득 멈추고, 대답 대신 물었다. "그 열쇠는 어떻게 했어요?" "실패했어." 관우는 거짓말을 했다. "가영 씨에게 발견되어 버렸거든." "큰 아가씨는 목욕을 빨리 끝내니까요." 덕자가 미미하게 웃음을 흘리며 말하곤, 아주 냉정하게 내뱉었다. "잘도 쫓겨나지 않았군요, 여기를." "그렇게는 안 되지." "그때 선생님이 좀처럼 나오지 않아서, 어떻게 된 걸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보고 있었나?" "방을 정리하러 계속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요." 덕자가 쿡 하고 웃으면서 접시를 씻으러 갔다. 그때 관우는 집사가 힐 끔 식당을 들여다보고 가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의 밀회가 곧 시작될 것임 을 직감했다. 거실로 가서, 관우는 홀의 문을 조금 열어 놓았다. 2시 10 분이었다. 15분도 지나지 않아서, 홀에 발소리가 울렸다. 덕자와 집사가 빠른 걸 음으로 안쪽 복도로 사라져 가는 게 보였다. 두 사람은 덕자의 방에서 밀 회하는 것일까? 관우는 혀를 찼다. 지하실의 입구가 있는 창고문은 덕자 의 방과 같은 복도에 있는 것이다. 열쇠를 맞추는 소리에 덕자가 눈치채지 않는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복 도 쪽에서 문을 열고, 그리고 닫는 소리가 났다. 이상하게 둔탁하고, 먼 곳에서 나는 것처럼 들렸다. 관우는 재빨리 문에서 떠나 서재로 들어갔 다. 테라스로 나오는 유리문 너머로 두 사람이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또 그 정자를 사용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복도 끝의, 언제나 열쇠가 채 워져 있는 그 문을 통해 뒤로 나간 것이다. 아무리 화창하다고는 해도, 이 추위에 고생이구나 하고 생각하며 관우는 혼자 웃었다. 관우는 더이상 기다릴 틈도 없이 곧바로 2층 방에서 작은 가방을 꺼내 들고는 창고로 들어가 지하로 뛰어 내려갔다. "선생님이세요?" 철책 창을 통해 하영의 얼굴을 보였다. "나요, 지금 구해 줄께." "정말로 와 주었군요! 두번 다시 안 오시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좀 기다려, 열쇠로 열 테니까!" "열쇠를 구했나요?" "따로 열쇠를 만들었지. 설명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여는 데 조금 시 간이 걸리니까 나갈 준비를 미리 서둘러." "어디로 가는 거죠?" "나중에 가르쳐 줄께. 자, 빨리!" "예!" 기뻐서 소리를 지르다 말고 하영이 갑자기 깜짝 놀라 소리쳤다. "집사 아저씨는?" "덕자와 숲속 정자에 있어." "왜 그런 곳에?" "자, 서둘러." 하영이 창에서 사라졌다. 관우는 열쇠와 줄칼을 꺼내곤 문의 열쇠구멍 앞에서 허리를 구부렸다. 어느 정도로 열릴까? 솔직히 말해서 자신이 없 었다. 만약 맞지 않으면 어디를 어떻게 깎으면 되는 거지? 배영이는 이렇 게 말했었다. '이쪽저쪽 적당히 깎으면, 그러는 사이에 열려.' 그러나 말처럼 그렇게 잘될까? 손에 스미는 땀을 윗옷으로 닦고, 관우 는 슬슬 열쇠를 구멍에 끼웠다. 그런데 뜻밖에도 열쇠가 걸리지도 않고 속까지 쑥 들어갔다. 관우는 긴장했다. 열쇠가 헛돈다면 끝이다. 쓸데없 이 나온 것은 깎으면 되지만, 필요한 부분이 빠져 있으면 어쩔 도리가 없 다. 기도하는 듯한 마음으로 열쇠를 돌렸다. 손에 어떤 느낌이 있었다. 힘을 넣어 돌렸다. 자물쇠가 열렸다. 관우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이렇게 간단하게 열리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고배영 이 자식, 단단히 한잔 사야 되겠군! 무거운 쇠 손잡이를 돌려서 잡아당기자, 문이 조금씩 열렸다. 하영은 작은 천으로 만든 가방에 옷을 넣고 있다가, 문이 열리고 관우가 서 있는 것을 보고는 환상을 본 것같이 아연해졌다. 그러다가 한걸음에 달려와 관 우를 꼭 끌어안고 키스했다. 관우는 부드럽게 그녀를 떼고는 가방을 내려 다보며 말했다. "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다 됐어요." 관우는 자신이 들고 온 가방을 그녀에게 보이며 말을 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모두 넣어져 있어, 잘 들어." 관우는 가방을 열고, 안에 있는 것을 짧게 설명했다. "내가 먼저 나가서 차를 현관으로 빼올 테니까, 빨리 와야 해." "알았어요!" 관우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거기에서 창고를 빠져 나가, 복도에서 홀로 현관문으로 뛰어갔다. 관우는 다시 차고로 뛰어갔다. 차고 옆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가자 어두 운 가운데 두 대의 차가 나란히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중의 하나에 올라 잠시 엔진을 회전시켰다. 이 차는 관우가 이따금 빌려 타는 것이기 에 자동차 키가 그에게 있었다. 엔진이 차가워져 있기 때문인지 조금 시 간이 걸렸다. 히터를 넣고 싶었지만, 배터리가 소모되기 때문에 참았다. 겨우 시동이 걸렸다. 차를 현관 앞으로 대고서 관우는 집안으로 뛰어들 었다. "이봐, 빨리 해!" 이렇게 소리치면서, 그는 서둘러 창고로 내려가는 복도 끝 쪽으로 달려 갔다. "뭐하고 있어, 빨리!" 복도 위에서 이렇게 소리쳤지만 저 아래에선 아무 대답도 없었다. 어떻 게 된 거지. 관우는 황망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나 지하실엔 이미 그녀 의 모습은 없었다. 어디로 간 것일까? 관우는 당황했다. 이 여자가 어디로 간 걸까. 급히 계단을 올라 홀로 나오며 그가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외쳤다. "이봐! 민하영! 어디에 있는 거야." 그때였다. 2층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그 순간 그는 얼어붙은 듯이 멈추어 섰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아무것도 실수는 없었다. 모두 가 계획대로 되었다. 그때, 그는 문득 느꼈던 것이다. 지금의 저 비명은 지영의 목소리가 아닌가. 두통이 난다. 가영의 차가 밖으로 나가는 소리는 분명히 들었다. 그러나 가영과 지영, 두 사람이 다 타고 있는 것은 미처 확인하지 못했 다. 그렇다. 지영은 가영과 함께 가지 않았던 것이다. 방에서 자고 있었던 것이리라. 덕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관우도 그런 것을 묻지 않았 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 목소리는? 비명은 뭐지? 관우는 계단을 단숨에 뛰어 올라갔다. 그러다 그는 계단을 거의 다 올 라간 곳에서, 지영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달려 나오는 것을 보고 경악했 다. 그녀의 파란 네글리제 옷깃에서 가슴 부근까지가 빨갛게 물들어 있어 너무나 처참하고 무시무시했다. 공포로 눈을 크게 치켜뜨고, 그녀는 똑바로 관우 쪽으로 달려왔다. 안 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거라고 그 가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그녀가 그에게 정면으로 부딪쳤고, 관 우는 그것을 급히 피하려고 발을 뻗다가 계단을 잘못 밟았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은 서로 엉키면서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굴러떨어 지는 그 힘으로 관우는 첫번째 계단에서 몇 미터나 밀려났다. 격심한 통 증이 엄습했고, 그 다음 순간 그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몸이 타는 듯이 뜨거웠다. 하반신이 저리고, 아무 감각도 없었다. 겨우 의식이 돌아오고 시야가 분명히 초점을 맞추자, 우선 눈앞에 서서 누워 있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가영의 엄숙한 얼굴이 보였다. "정신이 든 것 같군요." "여기는?" 그는 쉰 듯한 목소리를 겨우 짜내었다. "지하실이에요, 하영이가 있던 방." 그는 천천히 머리를 돌려 넓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래요? 나는." "움직이지 말아요!" 가영은 날카롭게 말했다. "양쪽 다리가 골절되었어요." "뭐라구요?" "지금은 마취가 되어 있어요. 움직이면 안 돼요." 그는 잠시 필사적으로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다. "아, 그랬었지. 내가 하영이를 도망가게 해주었었지." "대단한 일을 해주셨군요." 가영은 차갑게 말했다. "나도, 알았어야 하는 건데." "지영 씨! 그렇지, 지영 씨는?" 가영은 뿌리치는 듯한 어조로 내뱉었다. "죽었어요." "설마." "하영이에게 살해당했어요. 몇 번이나 칼에 찔려서요." "친언니를? 그런 바보같이!" 가영의 얼굴은 가면과 같이 무표정했고 백지처럼 창백했다.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하영이는 당신에게 여러가지로 슬픈 이야기 를 들려 주었겠지요? 냉정한 언니들에게 괴로움을 당하는 가련한 동생 이 야기를. 하지만 하영이는 정말로 사람을 죽였어요." "하인을 죽였다던가." "폭행을 당할 것 같아서라고 말했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달라요. 우리 들이 발견했을 때, 하영이의 옷은 흐트러져 있지도 않았고, 단추 하나 떨 어져 있지 않았어요. 하영이는 옛날부터 공상과 현실의 구별이 안 되는 일이 있었어요. '만약에 폭행당하면'이라는 상상을 하고 있는 사이에 실 제로 폭행당하고 있는 것같이 생각되어서, 마침 방에 들어온 하인을 죽여 버렸던 거예요. 그 사건은 강도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위장해서 신고 를 하고, 그후 그럭저럭 흐지부지 되어 버렸어요. 그러나 우리들은 하영 이를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어요. 나도 그 아이를 이런 곳에 넣고 싶 지 는 않았어요. 그러나 정신병원에 들어가 의사들의 질문공세를 받기라 도 했다면 그 아이는 자살해 버렸겠지요. 여리디여린 아이니까요, 그애는 정말로." 가영은 잠시 말을 끊고 나서 한동안 탄식어린 한숨을 내쉬다가 또 이야 기를 계속했다. "실은 2개월 전에 하영이를 지하실에서 하루 꺼내 주었어요. 지영이가 반대했지만 상당히 좋아진 것 같아서였지요. 그런데 그애가 한밤중에 도 망쳤어요. 뒤를 쫓으려고 해도 비가 몹시 오는 밤이었기에 쉬운 일이 아 니었어요. 나는 차로 국도를 달리면서 찾아다녔어요. 반드시 마을로 나가 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상당히 달리고 나서야, 나는 국도 한가운데에 그 아이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아무것도 입고 있 지 않았어요. 알몸으로 비를 맞고 서 있었다는 얘기예요. 무슨 일이 있었 는가 물어도 다만 취한 듯한 얼굴로 웃을 뿐, 입고 있던 옷을 어떻게 했 느냐고 물으니 겨우 길 옆쪽을 가리켰어요. 그 왼쪽에 커다란 트럭이 멈 추어 있더군요. 운전석에는 남자가 목덜미가 잘린 채 죽어 있었구요. 안 은 피의 바다였고, 남자 가슴엔 칼이 놓여져 있었어요. 그것이 아버지가 예전에 사용하던 것임은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어요. 나는 그 칼과 하영 이의 옷을 꺼내고, 그애를 차에 태우고 돌아왔어요." "지금 그녀는 어디에 있죠?" 그가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행방을 알 수 없어요. 당신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데리고 갈 생각이었으니까." 관우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서 다시 물었다. "얼마나 지났지요?" "오늘은 일요일 밤이에요. 어제 나는 잃어버린 것이 있어서 되돌아왔었 어요. 당신과 지영이가 쓰러져 있었고 하영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어요. 나는 곧 사정을 알 수 있었죠." "당치도 않은 일을, 나는." "지금은 생각하지 말아요.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요. 열이 높으니 까 쉬어야 해요." "경찰은?" "내가 불렀어요. 오늘 아침까지는 많이 왔었지만, 이젠 다 돌아갔어요. 어쨌든 이제 쉬세요." "내가 경찰에 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안 돼요. 나에게 맡겨 두세요. 내가 설명할께요. 당신은 여기에 있는 거예요. 아는 의사에게 진료를 받게 할 테니까 염려 말아요. 될 수 있는 대로 주무세요. 또 올께요." 그녀가 방을 나가려고 했다. "미안하지만." "뭐죠?" "물을 마시고 싶은데요." "갖다 드릴께요." "덕자는?" 그녀는 잠시 눈을 내리깔더니, 아주 힘들여 말했다. 마치 고통을 억누 르기라도 하는 듯이. "덕자도 집사 아저씨도, 두 사람 모두 살해당했어요. 정자에서 자고 있 었던 모양이에요." 그 이튿날 조간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실려 있었다. 지난 20일, 경기도 양평군 양평면 소재 민가영(30) 씨 집에서 여동생 지영(26) 등 세 사람이 살해당한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하였다. 경찰 은 사건 직후 갑자기 행방을 감추고 있는 이 집 가정교사 정관우(27)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전국에 지명수배했다. 여동생을 살해당한 민가영 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막내동생 하영이가 요양 중이어서 집에 없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 습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치고 무서운 사건입니다. 빨리 범인 이 잡혔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또한 수배된 정관우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 사람이 범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유는 짐작되지 않습니다.] 제 2 장 거리 1 멀리 눈 아래로 밤이 펼쳐져 있었다. 진회색 비로드에 잘게 부순 다이 아몬드를 박은 듯한 야경이었다. 김일수()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가 조금 지났다. 확인하듯 이 돌아보고, 벽에 있는 디지털 시계의 숫자를 읽었다. <9:04>를 보는 사 이에 <9:05>로 바뀌었다. 김일수는 또 걸으려고 하다가, 벌써 이것으로 세 번이나 전망대 안을 돌아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곤 발을 멈추었다. 여의도에 있는 남성 호텔 37층에 위치한 전망대 안은 야경이 잘 보이도 록 어두운 조명으로 되어 있었다. 이곳은 여의도에 처음으로 세워진 초고 층 빌딩으로, 이 빌딩에 대해 전국적으로 떠들썩했던 것이 벌써 10년도 더 지난 옛일이 되었다. 처음에는 전망대로 올라가는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는 곳에 긴 행렬이 생겼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주위에 여러 개의 초고층 빌딩이 들어서 있다. 이 전 망대는 지금은 아베크족의 드문 그림자만 간혹 보일 뿐이어서 예전의 그 번잡함이 거짓말 같다. 아무리 새로운 것이라도 언젠가는 이렇게 낡은 것 이 되어 가는 것일까. 그런 시대의 흐름이 김일수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아 이가 어른이 되고, 또 그 어른의 아이가 또 어른이 된다. 그런 당연 한 반복이 오늘밤은 왜 이리 새삼스럽게 크나큰 감회를 일으키는 것일까? 60을 넘은 몸으로, 시간 때우기로 언제까지나 걷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전망대 한구석의 찻집에 들러 창 옆 소파에 앉았다. 칵테일을 주문하려고 하다가 술집이 아닌 것을 알고는, 커피를 주문하고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할까? 아까 전화를 걸고 아직 20분도 지나지 않았다. 적어도 30 분이 지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좋겠지. 그러나 만약 그 사이에. 그 렇게 생각하자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공중전화 로 향했다. 다이얼을 돌리고, 연결될 때까지의 공백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길 다는 느낌이었다. 호출음이 두 번도 울리지 않아서 상대가 수화기를 들었 다. "중부 병원입니다." "저, 저." "김일수 씨죠?" 간호사의 목소리가 웃고 있다. "그렇습니다." 그는 안심하고 대답했다. 귀찮은 듯한 목소리를 들었다면, 당황해서 전 화를 끊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드님을 바꾸겠습니다." 곧 그의 외아들인 태주가 받았다. "아버지세요?" "그래, 나다. 어때?" "아직이에요." "아직 더 걸릴 것 같니?" "글쎄요. 의사 말이 이제 금방이라고 하지만, 어쨌든 잘 모르겠어요." "괜찮을 테지?" "괜찮아요,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계속 옆에 있는 것도 힘들겠구나." "괜찮아요, 내 아이니까요. 아버지는 지금 어디세요?" "호텔 전망대야." "아직 거기 계세요? 방에 계시면 이쪽에서 연락할께요." "태평스럽게 방에 있을 순 없구나." 아들이 웃었다. "아직 좀더 걸릴지도 몰라요. 이제 쉬세요." "알았어, 알았다구." 전화를 끊고, 김일수는 얼굴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공중전화에서 돌아와 보니, 그의 맞은편 자리에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 다. 20대 초반의 작고 세련된 여자였다. 보랏빛 코트를 입고 에나멜 핸드 백을 무릎에 올려 놓은 그녀는 양손을 코트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은 채, 가만히 밖의 야경을 보고 있었다. 그가 가까이 가자, 여자가 얼굴을 들었다. "아, 죄송합니다." 그녀가 이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다른 곳엔 창가의 자리가 비어 있지 않아서.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괜찮아." 그 여자를 손으로 제지하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앉으세요. 아무래도 상관 없으니까." "방해되지 않습니까?" "아니, 조금도! 앉아요." 여자가 순수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생각해 보면 그러했다. 야경을 바라보는 창 옆자리를 나 같은 노인이 점령하고 있어서는 안 되지. "약속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가 이렇게 묻고는 한 마디 더했다. "그렇다면 내가 옮기지요." "아닙니다." 여자가 당황해서 머리를 흔들었다. "신경쓰지 마시고 앉으세요." 또박또박 말하는 그녀에게서 코트를 입은 것, 앉아 있는 모습 하나에도 자라온 환경이나 교양이 엿보였다. 물론 그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생활을 하더라도, 인간으로서의 기품을 잃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이 다. 그의 며느리도 그렇다. 그런데 그애는 정말 괜찮을까? 출산이 쉬웠으 면 좋으련만. "저." 여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뭐죠?"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 왜죠?" "자주 시간에 신경을 쓰고 계시니까 여쭙는 거예요." "아, 그랬던가?" 그가 웃었다. 무의식적으로 몇 번이나 시계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조금 일이 있어서." 그가 조금 시간을 두고 나서, 슬쩍 덧붙였다. "뭐 기다린다고 하면 기다리고 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여자가 궁금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자, 그가 웃으며 말을 했다. "손자가 태어나는 것을 기다리고 있지요." "어머 기쁘시겠어요." 그녀는 정말이지 부럽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 다가 뒤늦게야 물었다. "선생님은 무엇을 하는 분이세요?" "변호사예요. 내일 아침 일찍이 여기에서 외국인과 만나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숙박하고 있습니다." "며느님 곁엔 누군가 계시겠지요." "아들이 함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안심이군요." "그래요. 이런 곳에서 마음을 졸이고 있어도 어쩔 수 없지만, 그렇다고 방에 있어도 안정되지 않아서요." 웨이터가 커피 두 잔을 가지고 와서 전표를 한 장 놓고 갔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서, 김일수는 이상한 친밀함을 이 여자에게서 느 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에게 딸이 없는 탓일지도 모른다. "첫손자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그간의 세월 속에 여러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었지요." 여자는 웃음을 띤 눈길로 조용히 그를 보고 있었다. 이상하다, 그는 혼 자 생각했다. 왜 이런 일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모르는 여자에게. 김일수에게는 늦게까지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마흔 가까이 되어서 태 어난 것이 태주였다. 아내는 그애를 낳고 곧 세상을 떠났다. 상당히 나이 가 들어서 출산을 했기 때문에 무리였던 것이다. 김일수는 아들 교육에 전력을 쏟으려고 했다. 그러나 뜻대로 그렇게 잘 되지 않았다. 태주는 어떤 일에도 제멋대로였고, 매사에 무관심했으며, 언제나 자기 좋은 대로만 하였다. 머리는 좋았지만 공부는 싫어했고, 자 주 집을 비우는 일도 많았다. 애를 많이 썩이는 아들로, 아버지가 하는 말은 좀처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 4년 전, 고등학교 3학년일 때 아들은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태 주를 변호사로 만들어 자신의 뒤를 잇게 하려고 결심하고 있던 그에게 아 들의 말은 커다란 쇼크였다. 그는 화가가 되고 싶다고 하는 아들을 때려 주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들을 때렸다. 그만큼 분노가 격심했던 것이 다. 그후 어떻게 해서 억지로 아들을 사립대 법학과에 넣었지만, 그애는 거 의 학교에 가지 않고 놀러 다니기만 하다가 3학년일 때 그가 모르는 사이 에 자퇴서를 냈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그것을 힐문당하자 그대로 집을 나가 버렸다. 3개월이 지났을 때, 아들의 친구에게 물어서 겨우 그애가 작은 아파트 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아들이 어느 주유소에서 일을 하 고 있는 것도 그때서야 알았다. 김일수가 주유소로 찾아가자, 아들은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밤 10시, 일이 끝나는 것을 기다려서 그가 아들에게 이야기를 하려 고 했지만 그애는 이번에는 아파트로 와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마지못해 아들과 함께 아파트까지 갔습니다. 아들이 문을 열자, 여자가 있었고 아들은 그 여자 어깨를 안고는 '아버지, 내 아 내입니다.'라고 말하는 거였어요." 그가 길게 탄식했다. "적어도 25, 26세는 되었을 여자로, 아무리 보아도 술집여자로밖엔 생 각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내 아들은 겨우 스물셋이었다오. 쇼크였지요. 나는 불끈해서, 뭐라고 말했는지 확실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들을 꾀 어서 돈을 뜯어낼 셈인지 모르지만 절대로 그렇게는 안 된다, 그런 식으 로 큰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고 돌아왔습니다. 너무나도 천박하고 상스러 운 여자, 그때 내 눈에는 그 여자가 그렇게밖에 비치지 않았지요." 그때 그는 이제 아들에 관한 것은 생각하지 말기로 했다. 없었던 것으 로 체념하자고 생각했다.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잠시동안은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런 어느날, 사무실에 젊은 여자가 찾아왔습니다. 처음엔 누구인지 몰랐지만, 자세히 보니 그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태주와 헤어지고 싶다고 말했어요. 원래 두 사람이 결혼한 것도, 술에 취한 태주가 술집 호스티스 였던 그녀와 하룻밤 보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 여자도 다만 즐길 셈이 었는데, 태주가 잠에서 깨어나서는 자기가 여자와 하룻밤 보냈음을 알자 책임을 지겠다, 결혼하자, 이렇게 말했던 것 같아요." 그녀에게 있어서 결혼이라는 낱말은 정녕 측량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 고 있었다. 자기 처지에 정말 결혼이란 걸 할 수 있을까 절망스러워했던 그녀였기에 태주의 제안이 있자, 어떻게 될지 생각도 하지 않고 매달려 버렸다. "그러나." 그녀가 긴 한숨과 함께 김일수에게 했던 말은 뜻밖이었다. "그 사람은 요즘 매일 밤 어려운 법률책만 읽고 있고, 제게는 거의 말 도 하지 않아요." 태주가 법률책을? 그는 놀랐다. 눈을 크게 뜨고서, 한동안 그녀를 멍하 니 쳐다보기만 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놀랐지요. 그녀석이 법률에 흥미를? 그렇게 생각한 것 만으로도 눈앞이 밝아지는 것 같았지요. 그녀는 아들과 헤어질 테니까, 지금 당장 돈을 조금 얻을 수 없겠는가 묻더군요. 나는 곧 수표를 쓰려고 생각했습니다. 원하는 대로 다 주려고 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나요?" "나는 변호사입니다. 사람과 만나고 이얄를 하는 것이 직업이죠. 나 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포자기인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이야 기를 하고 있는 그녀를 잘 보고는, 이 여자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신경을 써서 보니, 그녀의 눈에는 눈 물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돈을 준비할 테니까 내일 와 달라고 말 해서 그녀를 일단 돌려 보내곤 곧 주유소로 태주를 찾아갔습니다. 그애는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듣자 깊이 빪하면서, 법률서적을 읽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밖의 것은 거짓말이다, 결코 헤어질 수는 없다고 딱 잘라 말하는 것이었소. 더구나 그녀가 임신하고 있다고도 말을 했어요." 그는 아들의 말에 심하게 가슴을 찔린 느낌이었다. 점잔빼는 엘리트보 다도, 이들이 얼마나 인간적인가를 생각했다. 허위도 위선도 없는 진실을 그들에게서 보았으며, 사랑만으로 모든 것을 풍요로이 여기는 가장 인간 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하자, 태주는 그녀를 남겨 두고서는 갈 수 없다고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해 주었습니다. 그녀를 데리 고 오지 않으면, 너를 받아들이지 않겠노라구요." 여자가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좋은 일을 하셨군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후로는 모든 것이 잘 되었겠군요." "모든 것이 다는 아닙니다. 뭐라고 해도 그녀와 우리들과는 자라온 환 경이 너무나 달랐지요. 그러나 나는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의 나의 생활 은 말하자면 흑백사진과 같은 것이었다구요. 그녀는 그것에 색깔을 주고 있지요. 그렇게 생각하자 그녀의 화려한 옷, 화장, 그 어느 것도 흠잡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되었지요. 그래서 지금은 별로 불만도 없습니다." "태주 씨는 대학으로?" "예, 돌아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만면에 가득 웃음을 머금었다. "내 뒤를 이어서 변호사가 되어 주겠지요. 하지만 난 별로 강요한 것도 없습니다. 본인이 그림에 일생을 걸 정도의 재능이 없다고 판단했던 거겠 지요. 그림은 취미로서만 계속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래서요?" 그가 유쾌한 듯이 웃으며 말을 했다. "집으로 돌아온 태주가 기념으로 나의 초상화를 그렸다며 보여 주었는 데, 글쎄 육법전서에 양복을 입고 돋보기를 쓰고 있는 그림이었지요. 이 애비를 얼마나 빈정거리던지!" 여자도 함께 웃었다. "멋진 가족입니다." 여자가 덧붙였다. "나도 그런 집으로 시집가고 싶어요." 그가 여자를 새삼스럽게 뚫어지게 보며 물었다. "몇 살이죠?" "스물셋이에요." "좋은 나이군요. 정말 한창 때입니다. 모든 것이 다 아름답지요. 좋아 하는 분은 있나요?" "예." 여자가 시선을 조금 아래로 했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물 었다. "이제 태어났을까요?" "아, 그렇군!" 그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아기가 멋진 날에 태어나는군요." "예?" "오늘이 크리스마스잖아요." "그래요?" 그가 허리를 뒤로 꺾듯이 제치며 웃었다. "크리스마스? 아니, 정말입니까? 완전히 잊고 있었어요." "틀림없이 훌륭한 손자일 겁니다." 그는 뭔가 뜨거염가슴을 채우는 것을 느꼈다. "태어났다면, 곧 병원으로 갈 거예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전망대 밖의 복도 구석자리에 놓여진 전화 쪽으 로 급히 갔다. 그 자리는 구석자리인데다 전깃불마저 꺼져 있어 좀 어두 웠다. 그래서 그는 전화기에 바짝 얼굴을 들이대고 하나하나의 다이얼을 확인하면서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중부 병원입니다." 같은 간호사의 목소리였다. "저, 김일수입니다만." "아, 김일수 씨!" 그는 갑자기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간호사의 말투가 아 까와는 뭔가 달랐다. "태어났습니다." "그래요? 양쪽 모두 건강하구요?" "예, 건강해요, 아드님을 바꿔 드리지요." 그는 등 뒤에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돌아보자, 그 보랏빛 코 트를 입은 여자가 언제 왔는지 거기 서 있었다.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가 그 여자에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녀가 웃었다. 상대편 전화에서 소리가 났 아들이 받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김일수 는 여자에게 등을 돌리고, 조금 크게 외쳤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때였다. 김일수의 등을 바라보고 있던 여자가 코트 주머니에서 장갑 을 꺼내서 끼고는, 손에 들고 있던열고 예리하게 빛나는 작 은 칼을 꺼냈다. 그는 등 한가운데에 희미한 아픔을 느꼈지만, 돌아볼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대로 전화 쪽을 향해서 아들이 받는 것을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수화기가 점점 무거워서 한 손으로 들 수 없게 되었 다. 너무 무거웠다. 뭐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양손으로 황급히 수화기를 들려고 했지만, 도저히 지탱할 수가 없어서 수화기를 놓 치고 말았다. 주워야 하는데, 주워야 하는데. 그는 허리를 구부리려고 하다가 그 대로 일어설 수 없게 되었다. 몸이 무겁고 모든 것이 무거워졌다. 겨우 머리를 들고 뒤를 보자, 거기 태주가 서서 웃고 있는 것 같았다. 팔에 갓난아기를 안고 있다. 눈이 오는데, 춥잖아. 태주야, 아기가 감 기에 걸려! 빨리 따뜻한 곳으로, 빨리. 어두워졌다. 정전인가?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어둠 속으로 잠겼다. 보랏빛 코트를 입은 여자는 발 아래에 웅크리고 있는 노인을 무표정하 게 내려다보았다. 김일수 변호사의 등에는 칼이 꼿꼿이 세워져 있었다. 좌측 견갑골 바로 옆이었다. 여자는 그것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냉정히 되 돌리고는 재빨리 발길을 돌려서 엘리베이터곳으로 걸어갔다. 흔들리고 있는 수화기에서 흥분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아버지! 태어났어요! 남자아이예요. 아주 건강해요. 아버 지! 태어났다니까요! 듣고 계세요?' 2. 켜둔 채로 둔 텔레비전에선 합창이 흐르고 있었다. 화면에서는 마이크 를 손에 든 사회자와 최근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탤런트가 감동을 북돋 으려고 열심히 큰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여러분! 이제 10초 전입니다! 구, 팔, 칠." 마치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것 같았다. ". 삼, 이, 일! 여러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지수는 물끄러미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사 회자가 몇 사람에게 금년의 포부가 무언지 묻자 한결같이 우렁차게 대답 하고 있었다.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올해는. 아니, 작년은 어떠한 해였을까? 지수는 생각했다. 일생을 통틀어 단 한번뿐이었던 사랑, 그 남자와 함께 꿈 같은 나날을 보낸 몇 개월. 그러나 그때 그녀는 이렇게 또 외톨이로 해를 넘기리라고는 상 상도 하지 않았었다. 지수는 관우가 없자, 이 방이 상당히 넓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 은 키가 크니까. 이 설날, 지수는 시골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가능하다면 관우와 함께 가서 부모님을 만날 생각이었다. 급한 일이 생겨서 올해는 돌아갈 수 없 다고 부모님에게 편지를 쓰면서, 지수는 그가 그때까지라도 돌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바램도 사라졌다. 부모님에게 관우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양친이 양평의 민가영 집에서 일어난 참극의 뉴스는 알고 있어도, 용의자 로 지목되고 있는 사라진 청년이 딸의 연인이라는 사실은 알 리가 없었 다. 지수도 경찰에 불리워갔었지만, 신문에 'H양'이라고 썼기 때문에 친구 들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어느 여성주간지가, <내 연인은 살인범이 아니다! 눈물로 호소하는 '숲속 저택 살인사건' 용의자의 약혼녀>라는 타 이틀 기사를 게재하고는 지수를 숨어서 찍은 것 같은 흐릿한 사진을 실었 지만, 다행히 아는 사람 눈에는 띄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주간지도, 지수가 흥미 본위의 기사에 화를 내고 편집부에 뛰어 들 어갔기 때문에 이후로는 침묵해 버렸다. 그는 정말 어디로 가 버렸을까? 경찰은 끈질긴 추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방이 '오리무중'이라고만 대답할 뿐이었다. 대학이 겨울방학에 들어가서 시간은 생겼지만, 지수는 단지 이렇게 방 에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바뀌기까지는 불쑥 돌아오는 것이 아닐까, 이유도 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뭔가 해야 하는데, 지수는 생각했다. 뭔가, 정말 뭐라도 좋다. 뭔가 하 지 않고서는 어떻게 되어 버릴 것 같았다. 지수는 일어나서 텔레비전을 껐다. 아무리 경찰이 수사의 전문가라도, 나만큼은 관우 씨에 대해서 모른다. 나밖에 모르는 것이 반드시 있다. 관우 씨가 이미 살아 있지 않다면. 지수는 오직 그것만을 두려워하 고 있었다. 그가 사람을 죽였다고 믿은 적은 물론 없지만, 만일 살인자라 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살아서 무사하게 있어 주기만 한다면. 민가영이라는 여자와 만나고 싶어 전화를 걸었지만, 이미 그 저택은 아 무도 살지 않는지 전화도 사용되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수는 만일 자신에게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우선 그 저택이라고 생각했다 구석에서 구석까지 빠짐없이 조사하는 것 이다. 거기서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생각처럼 쉽게 그 집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러나 그녀는 끝내 결심했다. 우선 가 보는 것이다. 집 상황을 탐색해 보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것부터다. 그런 결심을 하자, 지수는 재빨리 작은 보스턴백에 소지품을 채우기 시작했다. 전인화()는 프로그램을 펼쳤다. 벌써 몇 십 번이나 보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때마다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올라오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것은 흔하디흔한 파란색의 네 페이지짜리 팜플렛으로, 1페이지 에는 <제65회 서울 시립 관현악단 정기 연주회>라고 고딕체로 인쇄돼 있 었다. 2페이지에는 오늘밤 연주곡목, 그리고 3,4페이지엔 곡목과 작곡가, 연주자 소개 등으로 되어 있었다. 그 속에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가 작곡한 <해빙의 계절>이 옆에 나란히 써 있었다. 다른 많은 저명한 작곡가들 이에 그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은 거의 무명에 가까운 그로서는 행운 중의 행운이었지만, 그로서 는 이 모든 게 왠지 모르게 부끄럽기만 했던 것이다. 전인화는 45세로 약간 뚱뚱하고 얼굴이 조금 검은, 그래서 작곡가로는 거의 이미지가 먼 용모였다. 도수가 센 안경과 길게 기른 머리가 조금 예 술적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곤 있지만 얼굴의 크기에 비해 작 은 눈, 코, 벗겨진 이마가 오히려 익살맞은 인상을 풍기는 편이었던 것이 다. 전인화는 시립 문화회관의 큰 홀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연주 개시까 지 앞으로 20분밖에 안 남았는데도, 객석은 반도 채우고 있지 않았다. 1 월 15일이다. 이런 날에 연주회를 들으러 오는 한가한 사람은 그다지 없 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이래도 한국이 문화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 인가? 정기연주회를 만석으로 채우는 것은 C석 정도이고, 다른 곳은 어디 나 드문드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적막했다. 적자가 되어도 국가나 시의 보조가 있는 유럽의 오케스트라와 달리 한국의 오케스트라는 이렇게 고립 무원에 가깝다. 이번에 그의 작품이 연주되도록 된 것은 결코 작곡가로서의 지명도나 역량 때문이 아니고, 단지 음악대학 시절의 친구인 지휘자를 통해서 계속 몇 년 전부터 부탁해 두었던 것이 겨우 실현된 것뿐이었다. 전인화 자신은 고등학교의 음악교사로, 팝송이나 랩송 따위밖에 모르는 고등학생들을 상로 음악의 역사라든지, 바하나 헨델의 이야기라든지를 하품을 섞어 반복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작곡가라고는 하더 라도 그의 작품이 인쇄되고 연주되는 것은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하 고, 대부분은 악보 위에 휘갈겨 쓰는 습작 정도였다. 물론 이것이 전인화에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의뢰를 받고 작곡하 는 경우는 극히 일부의 저명한 가뿐이고, 그 이외의 대다수는 무명인 채 소리도 되지 않는 작품을 계속 책상에 쌓아갈 뿐이었다. 겨우 좌석이 채워지기 시작해서 전인화는 안심했다. 친구들에게도 연락 해 두었지만, 몇 사람 정도 와 줄 것인가? 자기도 모르게 슬쩍 주위를 둘 러보는 그의 마음은, 내 아이의 피아노 발표회를 보는 부모의 심정 그것 이었다. 오케스트라 멤버가 스테이지에 슬슬 보이기 시작하고, 각자가 악기를 적당히 울리기 시작했다. 전인화는 이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현악기, 관 악기, 타악기가 각각 멋대로 소리를 맞추거나, 지금부터 연주할 자기 파 트의 어려운 부분을 연습하는 소리가 교차되고 서로 섞여서 홀에 울린다. 그것이야말로 무엇보다도 멋진 음악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공연 개시에 이르러 갑자기 객석이 오늘은 80% 정도의 객석이 채워졌다. 정기연주회로서는 드문 경우였다. 물론 자신의 작품 탓 이 아닌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지만 평론가나 대학교수 등의 귀에 들어 가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고, 적어도 많은 사람에게 들려 주는 것이어서 작곡가로서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지휘자가 등장하고, 오케스트라가 침묵했다. 잠시 후에 오보에가 A음을 내일제히 모든 악기가 거기에 음을 맞췄다. 오보에에 맞추는 것은 이 악기가 기온이나, 습도에서 오는 음정의 이상이 가장 적기 때문이다. 자, 사작된다. 그는 자리에 느긋하게 앉았다. "저 지휘자는 카라얀에 심취했어요." "그래요, 마치 카라얀 같아요." "모차르트가 저렇다면 너무 무거워요." "테크닉은 나쁘지 않은데." "최근의 피아니스트는 단지 테크닉뿐이야." 휴식시간의 로비는 늘 그렇듯이 일일 평론가의 대집합 장소이다. 그는 로비 안쪽에 빈자리를 발견하곤 앉아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라이 터로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마음껏 빨자, 긴장이 약간 풀리는 것 같았다. 휴식 다음이 그의 작품이었의 작품을 이끌 지휘자는 아직 젊지만 영국의 지휘자 콩쿠르에서 입상해서 이미 유럽의 오케스트라를 몇 번인가 지휘한 사람이었다. 전인화도 유럽에 갔을 때 한번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는 이 젊은 지휘자가 자신의 작품을 맡는 데에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지휘 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새로운 작품은 역시 젊음을 요구하고 있다. "전 선생님 아답?" 갑자기 젊은 여자 목소리가 나서, 그는 뛸 듯이 놀랐다. 파란색 원피스 를 입은 22, 3세의 여자가 앉은 자리 바로 옆에 우뚝 서 있었다. 진주목걸이를 하고 손에는 하얀 가죽백을 들었는데, 잘 다듬어진 얼굴 속의 가늘고 긴 눈이 매력적인 미소를 띠며 그를 보고 있었다. 아무리 생 각해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어서 그는 잠시 멍청해졌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갑자기 실례합니다. 선생님은 절 처음 보실 거예요." "아, 예." "실은 이전에 선생님 작품을 들은 적이 있어서." "제 작품을 말입니까? 아니, 잘못 생각하신 것 아닙니까?" 전인화는 자조적인 마음이 아니고, 정그렇게 말했다. "제 작품은 거의." "어머, 하지만 분명해요. 저." 젊은 여자는 잠시 공중으로 눈을 돌리고, 뭔가 생각하는 모습이다가 불 쑥 말했다. "분명 소프라노 독창회였다고 생각해요. '소프라노 합창을 위한 축제', 그것은 선생님의." 전인화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며 그녀를 보았다. "아, 놀랐어요. 그것을 기억헥 계시리라고는. 그것은 그때 이후 한번도 연주하지 않았어요." "어머, 아까워요. 그런 곡을!" 그는 그녀에게 옆에 앉도록 권했다. 자기 작품을 알고 있는 사람과 만 난다고 하는 드문 체험과, 게다가 상대가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되면 이 경우 기분이 좋아지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음악대학에 다니십니까?" "아뇨, 그냥 단순히 음악을 좋아할 뿐이에요." "그렇다면 음악회에 자주 가셨겠군요." "솔직하게 말하면, 그다지 자주는 아니에요.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억지로 끌려갔던 거예요." "그때 청중은 반도 없었어요. 잘 기억하고 있군요." "예, 우리들은 뒤쪽의 자리에 있었어요. 그러다 친구가 '저기 있는 사 람이 작곡가 전인화 선생님이가르쳐 주었어요." "작품을 들어 보고 어땠어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지만. 너무 감동했었어요. 정말이에 요. 다른 작품은 뭔가 실험적인 흥미만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같이 생각되 었는데, 선생님의 작품은 정말로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었다는 느낌이었 거든요. 보수적이라거나 권위적이라거나 하는 그런 것에 전혀 관계 없이 요." 전인화는 감격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기쁩니다, 그런 말을 해주시다니." 이 여자는 정말로 내 음악을 이해해 주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전인 화는 정말로 마음으로부터 기뻤다. 연주 개시 5분 전 차임이 로비에 울려 퍼지고, 사람들이 소란스럽게 홀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시작됩니다." "그렇군요." 그는 그녀와의 이 순간이 끝나는 것이 못내 유감스러웠다. "들어가지요." 두 사람은 홀 입구로 걷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에게 연주회가 끝난 후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나이와, 용모, 그리고 아내와 아이가 있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목까지 말을 억지로 삼켰다. 그런데 그때였다. "괜찮으시다면." 그녀가 홀 입구에 멈추어 서서, 그에게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끝난 뒤에 또 이야기를 들려 주시겠습니까?" 그가 마다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좋구 말구요!" "그러면 연주회가 끝난 뒤에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출구 쪽에서요?" "아뇨. 밖의 공원 쪽에서요 사람이 많으면 서로 발견할 수 없으니까요." 꿈을 꾸는 기분으로 전인화는 자리에 앉았다. 뺨이 상기되고 가슴이 고 동치고 있는 것은 자신의 곡이 연주되는 탓이지, 그 여자 탓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연주회는 예정대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로 끝났다. 그의 작품은 청 중의 간헐적인 박수를 받으며 끝났지만 전혀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 와의 데이트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홀을 나오는 인파에 섞이 면서 지금까지 맛본 적이 없는 빛나는 행복에 싸여 있는 자신을 느꼈다. 그 여자는 내 작품을 어디에서 들었을까? 그는 사람의 물결 속에서 그 녀의 얼굴을 찾았다. 그뺐생각했을까, 빨리 물어 보고 싶었다. 적어도 이 순간에는 어떤 비평가보다도 그녀의 감상이 그에게는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홀을 나와서 로비로 밀려나온 인파는 눈앞의 전철역을 향해서 흘러갔 다. 그는 밖으로 나오자, 홀로 사람의 흐름을 벗어나서 회관 건물 뒤편의 인적이 없는 자갈길을 걸어갔다.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이 코트 깃에 불벌써 10시 정도가 되었 다. 몸 속까지 차가워질 정도의 추위였지만, 그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등 뒤에 자갈을 밟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그녀가 검은 코트를 입고 서 있었다. 파란색 원피스 모습보다도 훨씬 성숙하고 여성스러워 보였다. "아!" 그가 웃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해요." 그녀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어딘가 이야기할 수 있는 곳으로 갈까요?" "그래요, 어쨌든 역 쪽으로 갑시다." 그가 앞서 걸으려고 하자, 그녀가 '잠깐'이라고 말했다. "뭐죠?" "죄송합니다. 스타킹이. 잠시 저쪽을 보고 계실래요? 선생님 앞에 서 흘러내린 올린다는 게." "예, 알았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등을 보이고, 하릴없이 구두 끝으로 자갈을 휘저었다. 찬바람이 휭 하니 뺨을 스치고 있었다. 그때 그는 갑자기 등에 통증을 느끼고 문득 뒤돌아보았다. 그는 무엇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여자가 갑자기 굳은 표정이 되어서, 그를 바라보다가 휙 등을 보이고 걸어가고 있는 것을 붑었다. 어떻게 된 거지? 왜 가 버리는 거지? 그는 아픈 등으로 손을 돌려 보았다. 좌측 견갑골 옆에 무엇인가 꽂혀 있는 것을 알았다. 도대체 여기에 무엇이.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지 는 바람에, 그는 자갈에 무릎을 꿇었다. 시야가 희미해졌다. 그제서야 그 는 겨우 자기가 그 여자의 칼에 찔렸다는 것을 알았다. 왜지? 왜? 그렇지만 대답을 발견하기 전에 그의 생명은 이미 동작을 멈추고 있었 다. ** 전화가 끈질기게 울렸다. 박점도()는 본드로 붙인 듯한 눈꺼풀을 억지로 떼고 혀를 찼다. 중얼중얼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화를 내면서, 잠 자리에서 일어나서 전화로 손을 뻗었다. 추위에 몸이 졸아드는 것 같았 다. "예, 박점도입니다." "반장님이십니까?" 전화선을 타고 강력계 윤상수() 형사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 다. 힐끔 벽시계를 보니 1시 40분이었다. "뭐야, 이런 시간에?" "살인사건입니다. 오셨으면 하는데요." "어디야?" "광화문입니다. 문화회관 옆입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칼입니다." 박 반장은 수화기를 다시 힘주어 잡았다. 갑자기 잠이 사라졌다. 윤 형 사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수화기를 때리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날의 남성 호텔 건과 동일한 칼인 것 같습니다." "곧 가지." 전화를 끊고, 박 반장은 세면대로 가서 세수를 했다. 머리는 아직 무겁 지만 눈은 확실했다. 침실로 돌아오자 불이 켜져 있고, 아내가 이부자리 위에 일어나 있었다. "나가세요?" "응." 박 반장은 파자마를 벗고, 옷장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이런 한밤중에." 아내는 이불 위에 앉은 채, 불만스럽게 말했다. "당신이 가지 않아도, 젊은 형사들이 있잖아요?" 박 반장은 잠자코 바지를 입고 긴소매 셔츠를 입고는 양말을 신었다. "이젠 나이를 좀 생각하세요." 아내는 앉은 채 계속했다. 박 반장은 와이셔츠를 찾고 있었다. 언제나 옷장 두 번째 서랍인지, 세 번째인지 잊어버리는 것이다. 아내가 한숨을 쉬고 일어서며 여전히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런 얇은 양말은 추워요. 두꺼운 것을 내줄께요." 박 반장은 아내가 양말과 와이셔츠, 넥타이, 손수건 등을 마치 마술처 럼 자신의 눈앞에 늘어놓는 것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몇 년, 몇 십 년이 나 반복되어 온 습관과 같은 것이었다. 박 반장은 54세로 경찰청 강력계의 베테랑 형사이다. 반장이 된 지 벌 써 10년이 지났다. 공적과 실력으로 말하면 과장에 올랐어도 당연하지만, 세상살이에 서툴러서 계속 반장인 채 끝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자신은 결코 그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오 히려 귀찮은 책임을 지고, 책상에서 골치를 썩는 것보다는 현장을 조사하 고, 걸어다니고, 찾아다니는 쪽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이런 겨울의 차가운 바람 속으로 나가자, 아내의 말이 그의 가슴에 사무쳐왔던 것이다. 분명히 이제 젊지는 않다. 어느 해 던가 봄에 그가 신출내기 형사였을 때, 빗속에서 혼자 사흘 밤 사흘 낮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감시를 계속한 적이 있었다. 정열과 젊음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열만으로 나이를 지 울 수는 없다. 정열은 신경통도 류머티즘도 고쳐 주지 않는다. 그러나 가야 한다고 박 반장은 생각했다. 무릎이 아팠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무리해서 조사에 지장이 있어서는 안 된 다. 박 반장은 택시를 잡았다. 솔직히 남성 호텔 전망대에서의 살인사건은 박 반장을 곤혹시키고 있었 다. 티끌 하나라도 단서를 잡을 것이 없는 사건이었다. 왜 범인은 일부러 사람이 많은 장소를 골랐을까? 전화가 있는 곳은 복도 구석자리라 그늘이 졌다고는 하나 언제 사람이 찾아올지 모르는 곳이다. 게다가 동기가 무엇인가? 아무리 조사해도, 노인은 살해당할 사람으로 는 생각되지 않았다. 변호사라는 직업상, 원한을 사는 일이 있을지도 모 른다. 그러나 살해당한 노인은 주로 민사사건을 취급하는 변호사였다. 게 다가 원한에 의한 살인으로서는 살해 방법이 교묘했다. 단지 한 번 찌른 것으로 노인의 생명을 빼앗았던 것이다. 등의 급소를 정확히 찾아 단 한 번으로 심장을 관통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다니, 프로 살인자를 생각하게 하는 솜씨였다. 목격자도 없다. 노인이 젊은 여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던 것은 알고 있 었지만, 그 보랏빛 코트의 아가씨는 경찰의 수색에도 불구하고 모습을 나 타내지 않았다. 설마 그 여자가 범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예리하게 날이 선 칼은 여자라도 쉽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엔 칼 그 자체에서 뭔가가 잡힐 것같이 생각되었다. 장갑을 끼고 있던 것일까, 지문은 없었지만 진 귀한 형태의 칼로 극히 소형이고 가늘면서 몹시 예리하고 뾰족했다. 손잡이에 고미술 장식이 있어 전문가에게 보이자 곧 독일제라고 하였 다. 급히 독일의 제조회사에 조회해 보았지만, 대답이 아직 없었다. 만약 칼 쪽에 기대를 걸 수 없다면 수사는 벽에 부딪힐지도 몰랐다. 그러나 오늘밤 사건이 만약 같은 범인의 범행이라면 이야기는 바뀐다. 두 개의 사건에 공통된 동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틀 림없이 용의자도 떠오를 것이다. 박 반장은 낙천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잠들어 있었다. "손님, 도착했습니다." 운전기사의 목소리에 눈을 뜨고, 요금을 지불하고 차에서 내렸다. 문화 회관이 눈앞에 무겁게 펼쳐져 있었다. 그 앞에 순찰차와 신문사 차가 몇 대 서 있었다. 촬영용 TV라이트가 문화회관 건물 주변을 대낮처럼 밝게 비추고, 20여 명의 사람이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택시에서 따뜻해진 몸이 또 차가 워져서 그는 잠시 몸을 떨었다. 뉴스 카메라맨과 부딪칠 듯 하면서 현장에 가까이 가자, 윤상수 형사가 뛰어왔다. 그는 조금 뚱뚱하고 둥글둥글한 느낌의 남자로, 좀 우스운 표 현지만 전당포 주인 같은 인상이다. "반장님, 밤중에 죄송합니다." "아니, 상관없어. 어디지?" "이쪽입니다." 남자는 자갈길에 엎드려 쓰러져 있었다. 박 반장은 여전한 추위에 어깨 를 움츠리며 시체 옆에 구부렸다. "남성 호텔과 같군. 누가 발견했지?" "문화회관 경비원입니다." 경비원은 35,6세 가량의 건장한 남자였다. "돌아가기 전에 관 밖을 한바퀴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물론 보통때는 이런 곳까지는 오지 않습니다만, 멀리서라도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틀림없이 부랑자일 거라고 생각했지요. 이 근처에 는 그런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여느때 같으면 내버려 두겠지만, 이 추위에 얼어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보러 왔습니다. 깨워 셌데리고 가려구요. 그런데 와 보니." 경비원은 창백한 얼굴로 발 아래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몇 시 정도였지요?" "11시 반 정도였다고 생각합니다." 박 반장은 윤 형사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사망 추정 시간은?" "10시 정도라고 합니다." "10시라." 박 반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번엔 경비원에게 다. "오늘은 무엇이 있었지요?" "서울시립관현악단의 정기연주회였습니다." "콘서트였군요." "예." "이 남자는 손님인 것 같아요." 윤 형사가 말했다. "이것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윤 형사가 내민 것은 피로 얼룩진 팜플렛 프로그램이었다. "오늘밤 연주회의 팜플렛입니다." 경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 반장은 프로그램을 살며시 보았다. "감식반으로 보내." 프로그램을 윤 형사에게 건네 주고, 또다시 경비원 쪽으로 향하며 말했 다. "연주회가 끝난 것은 몇 시입니까?" "9시 40분 정도였지요." "그러면 관객이 대체로 없어지는 것은 10시 정도겠군요." "조금 지나서입니다." "그러면 이 남자는 연주회가 끝나고 나오다가 살해당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군." 게 말을 하곤 몇 걸음 걸으며 주위를 살피더니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경비원에게 말했다. "돌아가는 손님은 모두 전철역 쪽으로 가지요? 그런데 왜 이 남자는 이 쪽으로 온 것일까?" "범인과 함께였겠지요." 윤 형사가 대답했다. "잠깐 할 이야기가 있다고 말해서 끌어냈겠지요." "그렇다면 범인은 피해자와 아는 사람이거나, 또는 조금도 위험을 느끼 게 하지 않는 사람이었겠군. 가까이 오면 자갈을 밟는 소리로 곧 알 테니 까. 더구나 그가 오는데도 태평하게 등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자, 고맙습 니다." 박 반장은 경비원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누곤 한 마디 말을 덧붙였 다. "내일이라도 조서를 만들겠습니다. 그때 도움을 좀 주십시오. 오늘은 돌아가십시오." "반장님." 경비원이 가자 윤 형사가 반장을 불렀다. "남성 호텔에 있었다는 그 젊은 여자를 생각하고 있습니까?" "남자가 위험을 느끼지 않고 마음을 놓은 상대라면 젊은 여자 이외에는 없지." "그러나 젊은 여자가 칼로 남자를 찔러 죽이다니, 믿을 수 없군요. 더 구나 단 한 번으로 말입니다." "알고 있어." 박 반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몹시 춥군. 그런데 남자의 신원은?" 윱 감식반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증명서를 가지고 돌아왔 다. "전인화, 45세. 교사로 되어 있습니다." 박 반장은 잠시 눈썹을 모으고 생각하고 있다가 빠르게 말했다. "전인화라?" "이봐, 아까 그 프로그램을 줘 봐." 윤 형사가 프로그램을 펼치고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이 남자, 작곡가군요." "변호사 다음은 작곡가인가?" "별로 관계 없을." "지금으로선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꼭 뭔가 있을 거야. 좀 춥군. 어 디 뜨거운 커피라도 마실 수 있는 곳 없을까?" 박 반장은 피곤에 지친 몸을 질질 끌다시피 하면서 건물 뒤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몸의 마디마디가 굳어 버렸다. "범인이 오늘의 관객이라면 대강 윤곽이 잡힐 것 같은데요." 박 반장은 설마 하는 얼굴로 윤 형사를 보았다. "콘서트를 보러 오는 관객의 주소, 이름을 일일이 적어 두는 건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은 정기연주회이니까 회비를 지불하고 있는 정 기회원이 반 수 이상은 있을 겁니다. 그 사람들이라면 악단 측에 명부가 있을 테니까 알 수 있지요." "그러면 손님이 천 맸라면?" "반 이상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계산입니다." "좋아! 피해자를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보았다면, 피살자가 누구 와 함께 있었는지 기억하고 있겠지. 아침 일찍 신속히 착수해 줘." 아무리 '신속히'라고 해도 쉬운 작업은 아니다. 우선 계속 전화를 걸 고,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며칠이나 걸릴 것이다.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 상대를 막가는 것도 큰일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이 수사라는 것이기에. 몸 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밤이었다. 깊은 숲에 둘러싸인 저택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지수는 문 옆에 자전거를 세우고, 주위를 세심히 둘러보 았다. 달이 밝은 밤이어서, 창백한 월광이 마치 설경인 양 주위를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오늘밤이야말로, 어떻게 해서라도 이 집에 들어가야 한다고 그녀는 결 심하고 있었다. 지난 1월 5일에 처음으로 여기에 찾아왔었지만, 그때는 신문사 카메라맨이나 기자들이 교대로 나타나서 설치는 바람에 낮 동안은 도저히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더구나 현장을 건드려선 홱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민가영이 이 지역의 명사인 탓인지, 매일 경찰관이 저녁 6시까지 문 앞을 지키고 있어 그녀의 접근은 도저히 불가능했던 것이다. 대담한 현지수도 한밤중에 이 집에 숨어 들어갈 결심을 하는데는 상당 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고 느끼자, 재빨리 커다란 회중전등과 접는 뺨것이다. 사다 리는 끝까지 늘이면 5미터 정도는 되었다. 사다리를 자전거의 짐 싣는 곳에 묶고서 저녁에 여관을 출발했고 도중 에 휴게소에 들러 저녁을 먹었다. 그곳은 처음 민가영의 집이 어디인지를 물었던 곳이다. 휴게소 주인은 정중히 가르쳐 주었지만, 속으로는 호기심 많은 여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오늘은 이런 추운 밤에 점퍼에 청바지 스타일로 자전거를 타다니 틀림없이 머리가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 했으리라. 지수는 자전거에서 사다리를 내려 땅에 놓고 끝까지 늘였다. 주위가 조 용한 탓인지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놀랄 정도로 크게 들렸다. 지 수는 사다리를 들어올리고 철문에 세우려고 문 앞까지 힘들게 들고 갔다. 그러다 지수는 잠시 자기 눈을 의심했다. 문이 열려 있다! 가까이 다가 갈 때까지 느끼지 못했지만 철문이 조금 열려 있었던 것이다. 믿을 수 없 는 기분으로 힘을 주어 밀어 보니 거의 소리도 나지 않고 문이 안쪽으로 크게 열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의한 것은 누군가가 집 안에 있다는 것이었 다. 민가영이라는 여자일까? 뭔가 볼일이 있어 돌아온 것일까? 그렇지 않 으면. 주저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지수는 자신을 격려하며 문 안으 로 발을 집어 넣었다. 분수가 보였다. 이것은 관우에게 들었다. 현관으로 찾아가서 벨을 누를 까 어쩔까 하고 망설였지만, 결국 잠자코 문 손잡이를 돌려 보았다. 조용 하게 문이 열리고, 그녀는 불이 켜진 홀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누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녀는 가슴이 심하게 고동치는 것을 들으면 서 안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좌우에 문이 있었다. 식당과 거실의 문인 것 왼쪽 문으로 걸어 가서, 그녀는 살짝 손잡이에 손을 대려고 했다. 그때, 문득 계단 올라가 는 곳과는 반대편의 안쪽으로 나 있는 복도를 보자 문 하나가 열려진 채 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일까? 열린 채로 있는 것이 이상했다. 누군가 저기에 있는 것일까? 그녀는 발 소리를 죽이고, 그 문으로 가까이 갔다. 테니스 신발을 신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리는 나지 않았다. 열려 있는 곳은 <창고>라고 써 있었다. 안을 들여다본 현지수는 안쪽 벽에 구멍이 뚫어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하로 내려가는 나선형의 계단이 보이고 불도 켜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잠시 계단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마침내 결심하고 내려가기 시작 했다. 여기까지 와서 주저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바닥에 내려서자, 안에 방 같은 것이 있고, 문이 반쯤 열린 채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곳은 비밀의 방이었음에 틀림없을 것 같았다. 다리가 떨리고 공포가 갑자기 엄습해왔다. 그러나 여기야말로 틀림없이 관우를 찾는 실마리가 잿 생각되었다. 돌아갈 수는 없다. 지수는 조심스레 문에 가까이 가서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상당히 넓고 품위 있는 장식이 있는 방이었다. 불이 켜져 있지만, 사람 의 기척은 없었다. 지수는 안으로 들어갔다. 잘 정리된 침대가 눈에 들어 왔다. 그 옆 작은 테이블에 뭔가 놓여 있었다. 손목시계! 지수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관우 씨 거야!" 그낭 다가가서, 그것을 손에 들어 보았다. 틀림없이 관우의 손목시계였다. 그는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 지하실에! 그러나 도대체 여기는 어디일까? 그때 그녀는 갑자기 온몸이 얼어붙었다. 바람에 스치듯 문이 삐걱이는 소리가 난 것이다. 사람의 기척을 등 뒤로 확실히 느꼈다. 문 뒤에 누군 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왜 느끼지 못했을까? 누구일까? 민가영일까? 나도 여기에서 살해당하는 것일까? 목까지 끓어오르는 공포의 외침을 억누르면서 지수는 살며시 뒤를 돌아 보았다. 4. 그는 이미 죽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언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 었고, 죽음 그 자체에 두려움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그로서는 지금 어떤 특별한 느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셀 수 없을 정도의 죽음을, 그 리고 죽음이 정해진 사람을 보아왔다. 그에게 있어서는 자기 자신의 죽음도 그 수많은 죽음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냉정한 죽음의 관찰자로서, 그는 죽음 직전의 생명이 마지막으로 한번 아름답게 타오른다는 문학적 표현 따위를 믿지 않았다. 죽음은 그저 언제나 죽음일 뿐이며, 거기엔 아름다움도 추함도 없는 것이다. 조명식()은 밤 8시가 지나서 안산 전철역에서 내려, 무거운 가방 을 손에 들고 어두운 길을 걷기 시작했다. 1월도 끝이다. 속까지 얼게 하 는 추위가 두꺼운 코트를 무시하고 몸으로 스며 들어왔다. 이곳에 처음 집을 지었을 때, 조명식은 어느 사립 종합병원의 뇌() 외과부장이었다. 그때 그는 35세의 젊은 나였지만 누구 한사람 그것을 이 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조명식이 이미 유럽에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우수한 뇌 외과의 사이고, 파리 등에서 개최되는 심포지엄에 여비와 체재비를 모두 그쪽 부 담으로 초대받는 외과의는 그 병원에 그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외과 중에서도 가장 섬세한 솜씨와 강인한 체력, 날카로운 감각이 요구 되는 곳이 뇌 외과이다. 거기서는 메스 끝이 1mm만 빗나가도 하나의 생명 을 좌우하는 것이다. 뇌 수술은 흔히 5,6시간이 걸리고, 가장 긴 것으로 는 10시간 남짓 걸리는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장시간의 수술이라도 언제나 그는 시작할 때와 똑같이 냉 정하고 정확하게 기술을 구사했다. 사망률이 높은 뇌종양도 그가 없으면 사망률이 더 높아질 것이라고 누구나가 인정하는 바였다. 조명식 박사가 그 징후를 처음 발견한 것은 3개월 전이었다. 위에 희미 한 통증을 느꼈고, 식욕이 감소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암에 대한 무서움, 긴급한 처치가 필요한 것을 알고 있었다. 즉시 그는 검사를 받았고 결과 는 명료했다. 악마는 그의 육체 속에 몰래 그 야비한 영역을 펼치고 있었 던 것이다. 수술 불가능. 조 박사는 자신에게 그렇게 진단을 내렸다. 그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목숨이 몇 개월 단위로 셀 수 있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조 박사는 즉시 뇌 외과부장 자리에서 물러나 메스에서 떨어졌다. 수술 중에 만일 통증이 엄습하면 환자의 생명이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외 과병원을 나와서, 자료실 안에 새로 마련된 사무실로 옮겨갈 때에는 많은 젊은 의사와 간호원들이 전송했다. 울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이미 그의 병이 온 병원에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조 박사는 자료실에서 자신이 취급한 많은 수술과 임상의 예를 하나라도 많이 정리해서 기록으로 남기 려고 하였다. 그러고서 2개월이 지났다. 그는 점점 자신이 무기력 속으로 떨어져 가 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죽음으로의 공포가 아니었다. 그 는 너무나 죽음에 친숙해 있었기에 그것을 무서워한다든지 증오할 수가 없었다. 그를 정으로 무기력하게 만들고 나날을 허무하게 만드는 것은 메스의 감촉, 수술의 긴장을 잃어버린 그 상실감이었다. 그는 타고난 의사였고, 타고난 외과의였다. 자기 자신도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한 그 가 외과의인 것을 포기한 것이다. 그것은 죽음의 선고보다도 더 가혹한 시련이었다. 길이 구불구불 꺾어지고, 그는 기계적으로 그것을 더듬어갔다. 차가운 바람이 양쪽 나무와 숲을 빠져 나가는데, 큰 키에 마른 조 박사는 조금 등을 구부리듯이 하면서 걷고 있었다. 집에서 누가 기다리는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양친은 그가 대학에 다닐 때 역시 암으로 죽었고, 그는 독자였다. 약혼자가 있어서 원래 지금쯤은 결혼했어야 하지만, 병을 발견하자마자 약혼을 취소했다. 같이 죽을 만큼 진한 사랑의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별로 괴롭지는 않았다. 이렇게 해서 그는 막 구입한 새집에서 혼자 자고 일어나는 생활에 들어 간 것이다. 이제 곧 육교다. 길이 커다란 커브를 그리고, 자신이 타고 온 전철 선 로와 육교가 거기서 교차된다. 선로는 제방 사이 아래에 있고, 육교가 길 이 되어서 그 위를 걸치고 있다. 그것을 건너면, 이제 5분 정도면 집이다. 그는 따뜻한 중앙집중식 난방 과 뜨겁고 향기나는 커피를 떠올렸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에어컨을 달았지만 사용하지 못하겠구나. 그때까지 살아 있지 못할 테니까. 그가 육교 위 손잡이에 한 소녀가 양쪽 손을 올리고 가만히 눈 아래의 철로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 때는 육교에 거의 당도했을 무렵이 었다. 이 주위에서는 본 적이 없는 소녀였다. 그는 상당히 멀리서 소녀를 바라보며 관찰하고 있었다. 소녀는 열여덟쯤이나 되었을까. 작고 검은 반 코트에 회색 치마, 굽이 낮은 검은 구두를 신고 있는 것이 그렇게 젊다는 인상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촉촉한 느낌의 머리가 길게 어깨를 감싸고 내 려져 있었다. 육교로 가까이 감에 따라 그는 발걸음을 늦추었다. 소녀는 그가 가까이 오는 것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모습으로 잠자코 아래 선로에 눈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는 육교 몇 미터 앞에 멈추어 섰다. 추위 탓이라고도 생각되지 않는 창백하게 굳은 소녀의 옆얼굴이 가로등에 비추어지고 있었다. 예삿일이 아닌 무언가가 팽창하고 있었고,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꺼려졌다. 이 소 녀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는 이상했다. 소녀가 머리를 들었다. 그가 있는 쪽으로가 아니고, 선로가 계속 어둠 속으로맘있는 그 깊은 곳으로 눈길을 향했던 것이다. 덩달아 그 방향 을 향한 그의 시야 한쪽 구석에 작은 빨간 점이 떠올랐다. 그래? 그는 생 각했다. 그런 것인가? 빨간 점은 점차로 커다랗게 되어 드디어 미미하게 정적을 흔들면서 열 차의 굉음으로 변해 가까이 왔다. 그는 그 열차를 알고 있었다. 그가 타 고 온 열차에 이어지는 순환열차였다. 그만둬. 열차에 뛰어드는 것만큼 처참한 죽음도 없을 것이다. 몸은 산 산조각으로 부서지고, 살덩이가 차바퀴, 모터, 톱니바퀴에 얽힌다. 처치 하는 쪽도 기분나쁘고, 유족쪽에서 봐도 거의 원래 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은 시체를 보는 것은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열차 윤곽이 보였다. 소녀는 전혀 움직일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잘못 걸까? 열차는 점점 가까이 다가와서 땅울림이 발 밑으로 전달되어 왔다. 갑자기 소녀가 육교 건너편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간을 건너, 마른 풀이 붙은 흙을 밟고서 선로를 향해 뛰어내렸다. 열차가 육교 아래 로 박혀서, 소녀 모습은 그 열차에 가려 보이지 쓴 열차는 발 아래 땅을 흔들면서 무거운 듯이 육교 아래로 빨려 들어가고 반대편에서 또 밤의 여행을 계속해갔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소녀가 남았 다. 소녀는 제방 아래에서 선로 옆에 쭈그리듯 앉아 있었다. 접촉이라도 했 던 것일까? 그는 육교를 건너, 난간을 돌아서 제방 위로 가 소녀내려 다보았다. 소녀가 비틀비틀 일어섰다. 저 정도라면 괜찮다. 조금이라도 접촉했다면 일어설 수 없었을 것이다. 소녀는 잠시 양손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윽고 제방 을 고생하면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는 손이 닿는 곳까지 올라온 소녀에 게 손을 내밀었다. "잡아." 소녀는 깜짝 놀라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잠자코 그의 손을 잡고 제방 위로 한걸음에 올라왔다. "실패했군." 옷에 묻은 흙이랑 먼지를 털고 있는 소녀에게 그는 담담히 말했다. 소 녀는 조금 화난 듯한 눈초리로 그를 보았지만 곧 눈길을 돌리고, 체념한 듯이 말했다. "예." "또 해볼 생각이야?" "그렇다면요?" 소녀가 도전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다음 급행은 1시간이 지나야 통과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군." "고맙 그는 이 소녀에게 흥미를 느꼈다. 생각해 보면 사람에게 흥미를 가진 것이 상당히 오래된 듯한 기분이 든다. 특히 병을 알고 나서는 모든 것에 의 흥미가 없어져 버린 것 같았다. 죽음에 실패한 이 소녀의 어디에 흥미 를 느낀 것일까, 그 자신도 잘 몰랐다. 그러나 재미있지 않은가? 죽으려 고 하다가 실패한 소녀와, 몇 개월 후 확실한 죽음을 선고받은 남자. "한 시간을 어떻게 할 거지?" "글쎄요." 소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불쑥 말을 했다. "기다릴래요." "그 사이에 어때, 차라도 마시지 않을래?" 소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조 박사를 보았다. "괜찮아, 잘난 체하는 설교 따위는 하지 않아." "정말요?" "정말이구 말구." "그만두게 하지 않는다고 약속해요?" "하구 말구." "그럼 좋아요." 이 기묘한 아베크는 길을 조금 걸어서 몇 채 정도 주택이 모여 있는 곳 으로 왔다. 거기 작은 찻집이 있었다. <북풍>이라는, 지금 계절에는 더할 수 없이 적절한 이름이다. 가게 안은 썰렁했고, 두세 명의 학생차림 남자들이 히히덕거리며 이야 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다지 커피가 맛이 있는 건 아니지만, 여기밖에 없어." 자리에 앉자, 여자 종업원이 물을 가지고 왔다. 새로 온 종업원인가? 벌써 세 사람째다. 앞으로 집들이 자꾸 들어설 것이라고 예상하며 가게를 열었지만, 예상과 다른데도 가게 주인이 잘도 버틴다며 감탄할 정도였다. 때문에 당연히 여종업원을 고용하는 데도 좋은 급료를 지불할 수 없을 것 이다. 그러니 오래 있을 수 없는 것도 당연하리라. 커피를 두 잔 주문했다. 소녀가 컵의 물을 한 모금 꿀꺽 마시고, 컵을 조금 얼굴 쪽으로 들어 보이며 말했다. "건배!" "무엇에 건배하는 거지?" "죽음에요." "죽음에 뭔가 좋은 점이 있나?" "예, 이제 나이를 먹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렇군. 그러나 그 때문에 자살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안 돼요?"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기어이 죽고 다고 생각하고 있 을 만큼 심각한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악성 뇌종양의 진단을 내린 환자 가운데에는 확고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듯이 보이 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완전히 지쳐 버린 사이 여럿 있었던 것을 기억하 고 있었다. 어쩌면 이 소녀의 강인함은 절망에 대한 반발일 것이다. "내가 뛰어들려고 하는 것을 보고 있었어요?" "응." "잡지 않았군요." "죽는 것은 자유니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아니 "그러면 본 마음은 어때요?" "인간은 가능한 한 살아야 한다고 의과대학에서 배웠으니까, 그렇게 생 각하도록 습관이 되어 있어." 소녀는 반신반의하는 모습으로 그를 보았다. "의사세요?" "응." "별나군요. 의사인데도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을 잡지도 않다니." "솔직히 말하면, 다른 사람의 목숨 따위는 지금 아무래도 상관없어." "왜요?" "나는 앞으로 3개월 이내에 죽을 몸이니까." 커피가 왔다. 그는 자의 컵을 들고 블랙인 채로 한 모금 마셨다. 몹 시 썼다. "크림과 설탕을 넣어. 나는 아무것도 넣지 않을 테니까." "농담이지요?" 소녀가 겨우 제정신이 든 것 같은 모습으로 말했다. "정말이야, 암이야. 구석구석까지 퍼져 있어서 손을 쓸 수가 없어." "위암인가요?" "아주 널리 퍼져 있지." "그러면 커피는 마시지 않는 게 좋지 않나요?" "커피 한 잔으로 목숨이 바뀌진 않아. 마셔서 아프다면 몰라도, 별로 그 정도로 아픈 것도 아니니까." "통증이 있나요?" "진통제를 내가 처방해섟다니지." 소녀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이, 크림과 설탕을 넣은 커피를 천천히 계속 해서 저었다.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보다, 오히려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 나요?" "글쎄." 그는 생각했다. 그런 적이 있었던가. 그는 대답했다.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았지. 죽는 약은 언제라도 손에 넣을 수 있으니 까. 하지만 앞으로 한 달이 지나면 또 모르지만." "어째서요?" "고통이 약으로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져 가고 있어. 그렇게 되면 죽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몰라. 그때가 되고 나서도 늦지 않아." 소녀가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말을 했다. "의사들은 모두 죽는 것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나요?" "왜?" "조금도 무섭지 않은 것 같아요." 그는 웃었다. 공포는 공포 그 자체를 모르는 사람의 감정인 것이다. 그 는 죽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때? 죽는 것이 무섭지 않나?" "무서워요. 그러나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무서워요." "비교의 문제인가?" "그래요. 편안한 쪽을 선택하는 것은 인간의 권리라고 생각해요." 변명 같은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죽는데도 변명이 필요한 것이 요즘 젊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죽음이 부조리한 것이라고 정해져 있던 것은 벌 써 옛날이야기이다. 그는 남은 커피를 단숨에 마셨다. 그때 갑자기 심한 통증이 엄습해와서 몸을 구부렸다. 지금까지 없었던 느닷없는, 불에 데인 듯한 통증이었다. "왜 그래요?" 소녀가 반쯤 일어났다. "괜찮아요?" "괜찮아, 괜찮아." 그는 고통을 참으며, 옆에 있는 가방을 열고 진통제 캡슐을 꺼냈다. 물 없이 먹었다. 캡슐이기 때문에 흡수는 빠를 것이다. 파도와 같이 습격해 오는 고통에 몸을 맡기며, 조 박사는 시트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2,3분 지나도 고통은 아주 조금 가벼워졌을 뿐이었다. 안 되겠다. 머리에 땀이 솟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생각했다. 이제 그 진통제로는 억제할 수 없어진 것이다. 암으로 죽는 환자라도 거의 고통을 느끼지 않고 끝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괴로워 몸부림칠 정도로 고통에 빠져서 죽는 사람도 있다. 불공평 한 세상이다. 그는 무신론자였지만, 만약 신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면 그 솜씨는 서툰 외과의사보다도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통증이 사라졌어요?" 가만히 그를 지켜보고 있던 소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더이상 안 되는 것 같군." 소녀가 공포로 얼굴이 굳어지면서 소리쳤다. "안 돼요! 죽지 말아요!" 그는 고통 속에서도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아니, 지금 죽는다고 하는 것이 아니야. 그 약이 듣는 단계가 아니라 는 거야." 소녀는 숨을 돌렸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집으로 돌아가야 해. 주사가 있으니까, 그거라면 괜찮아." 그는 조금 몸을 세우며 녀에게 말했다. "다음 열차까지 같이 있지 못해서 안 됐군." "괜찮아요." 또다시 격심한 고통이 엄습해 올 것은 시간 문제였다. 어느 정도라도 괜찮을 때에 돌아가야 했다. 그는 지갑을 꺼내서 커피값을 탁자 위에 놓 았다. "나는 이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여기에 있어." "나도 함께 가 줄께요. 가깝지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그는 웃으면서 소녀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집까지 가는 사이에 또다시 아까와 같은 통증에 휩싸이면 피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 <북풍>을 나오자 소녀는 그의 몸을 손으로 잡고, 떠받치듯이 걷기 시작 했다. 실제로 그는 거의 그 자신의 노력으로 걷고 있었지만, 소녀의 팔의 감촉으로 몸이 가벼워져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커피숍에서 300미터 정도 언덕을 오르자, 마침내 그의 집이 보였다. 그 가 키를 주자, 소녀가 현관문을 열었다. 그는 작은 마루방 안쪽 거실로 들어가서 소파에 몸을 던졌다. 또 조금 고통이 심해지고 있었다. 서둘러 야 했다. "미안하지만, 저 책장 위의 가방에서 상자를 꺼내 주겠어?" 소녀가 서둘러 가방을 열고 주사기와 주사액이 담긴 병이 들어 있는 상 자를 꺼냈다. "이것 말인가요?" 그때 조금 전보다 몇 배나 되는 고통이 불시에 습격해왔다. 그는 자기 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소녀가 뛰어오는 것을 희미하게 느꼈지만 이미 시야가 흐려지고 있었 다. 기절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빨리 기절하는 편이 좋다. 이대로 죽어 버린다면, 그렇다, 오히려 이대로 죽어 버린다면 차라리 좋을 것이다. 바닥에 무너지듯이 쓰러져서 위벽을 파헤치는 듯한 고통에 몸을 떨면 서, 그는 점차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얼마 후, 고통이 파도칠 때마다 통증이 멀어져갔다. 이상하다. 이렇게 갑자기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주사로 억제했을 때뿐이다. 내가 놓지 않았 다는 것을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데, 이상하다. 초점이 맞추어지고, 낯익은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서 그는 자신 이 바닥 카펫 위에 누워 있는 것을 알았다. 그 소녀가 무릎을 구부리고 걱정하는 모습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소녀가 손에 들고 있는 주사기를 보았다. 안에 진통제가 들어 있던 유리병이 텅 비어서 굴러다니 고 있었다. 그는 소매가 걷어져 있는 것을 보고 겨우 납득했다. "효과 있었어요? 이제 괜찮아요?" 그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소녀를 보았다. "간호사 공부라도 했었나?" "아뇨." 그는 일어나서 소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의사의 눈으로 소녀의 눈동자를 관찰한 것이다. 그렇구나. 어두워서 밖에서는 알아차리지 못했 지만 그랬었구나. "소매를 걷어 봐." 소녀는 잠자코 왼쪽 소매를 걷어올렸다. 정맥이 있는 주위에 주삿바늘 자국이 수없이 나 있었고, 그나마 이제는 검푸르게 변색되어 있었다. "무엇을 맞았지?" "헤로인." 그는 눈을 감고 탄식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나, 경멸하세요?" "아니야, 그런 것이 아니야." 그는 대학에 다닐 때 리포트를 쓰기 위해 마약중독 환자에 대해서 조사 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때 이후로 마약에 중독된 환자를 추궁할 마음이 없어졌다. 그들은 추궁이나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돈이 필요하다면 가지고 가도 돼. 죽을 사람에게는 필요 없으니까." "나에게도 필요 없어요. 나의 미래가 선생님보다 훨씬 짧으니까요." 그는 소녀의 표정을 살피듯이 보았다. "정말로 죽을 마음이군." "예." "왜 죽으려고 하지?" "싫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나 자신도, 다른 사람도, 이 세상 모두가 ." 소녀는 무엇인가를 털어 버리려고 하는 듯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는 이 소녀를 아직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혐오를 느끼면서 마약을 맞고 있는 것이다. 중독이 더욱 진행되면 혐오를 느끼는 것만큼 기력도 없어진다. "약속을 깨도 괜찮겠지?" 소녀가 그에게 얼굴을 돌린 채,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는 것은 그만둬. 아직 회복할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한 적도 몇 번인가 있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결국, 져 버렸어요. 혼자서 싸우는 것은 너무 괴로워요 "부모님은?" 소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형제는? 친구는?" "없어요, 약을 같이 맞는 친구는 있지만. 열여섯 살 때, 이것에 발 을 들여 놓고 나서는 친구가 생기지 않았어요." "지금은 한 사람 있어. 내가 있잖아." 소녀가 놀라서 그를 보았다. "선생님이요?" "나이를 너무 먹었나?"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러나 의사 선생님이잖아요?" "그것도 앞으로 몇 개월이야. 어때, 그 사이만이라도. 아니, 입원 하기 전까지 한 달 정도, 친구가 되지 않을래?" 소녀는 잠자코 카펫 위의 한곳을 응시하기만 했다. 그는 소녀가 삶이냐 죽음이냐로 한걸음을 내딛으려고 하면서 망설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어 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그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그러면서 문득 생각 했다. 이러한 긴장은 수술을 시작하기 전의 순간과 비슷하다. 정신의 수 술인가? 의과대학에 이런 강의는 없었다. 소녀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그는 당황해서 눈을 이쪽저쪽으로 굴렸 다. 여자가 우는 것은 딱 질색이다. 약혼자와 헤어질 때도 그녀가 그의 죽음의 병을 알고는 울기 시작해서 곤혹스러웠던 것이다. 갑자기 소녀가 그의 가슴으로 뛰어 들어왔다. "마약을 끊는 데 어느 정도 걸릴까요?" "사람에 따라서지." "한 달?" "어렵지." "해볼 거예요. 다 나아서 선생님을 만나러 올 거예요. 그때까지, 살아 있어야 해요." 그는 소녀의 머리에 살짝 손을 얹었다. 이튿날 아침, 7시 반이 되어서 두 사람은 다시 거실에서 만났다. 소녀 는 건강체질인 것처럼 젊고 발랄했다. 조 박사는 자기까지 완전히 건강하 게 돌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침밥은요?" "아무것도 없어. <북풍>에서 8시부터 모닝 서비스가 돼." "그러면 커피라도 끓이겠어요." 마치 신혼가정과 같아서 조명식은 그 생각만으로 혼자 웃었다. 8시가 되어서 두 사람은 <북풍>에 가서 햄버거를 먹었다. "출근은 몇 시예요?" "중역이기 때문에 아무 때라도 상관없어." "어머, 그런데도 자동차가 데리러 오지 않나요?" "오지 않는 게 더 편해. 그런데 네 이름을 묻지 않았구나." "정말이네요." 소녀가 웃었다. 조명식도 웃었다. "저는 김현주예요." "나는 조명식이야." "잘 부탁드려요." 두 사람은 마시고 있던 커피잔을 들어올려서 건배했다. "저, 오늘 병에 갈께요." "그러는 것이 좋아. 잘 생각했어." 그는 윗옷에서 수첩을 꺼내 백지 한 장을 찢어서 메모를 하고는 현주에 게 건네 주었다. "여기에 가 봐, 내가 아는 사람이 있어. 이것을 보이면 잘해 줄 거야." "고마워요." 현주가 받아든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불쑥 말했다. "선생님은 유명한 의사 선생님이시군요." 이것은 그가 받은 최후의 칭찬이 될 것이다. 그의 장례식의 조사() 를 제외하면 말이다. 돈을 지불하고 밖으로 나오자, 바람은 차가웠지만 오히려 뜨거운 뺨에는 기분좋을 정도였다. "그럼 잘 가." 소녀는 물끄러미 그를 보고, 확인하듯 다시 말했다. "돌아올 때까지, 정말로 건강하게 계셔야 해요." "가능한 한." 녀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다가 웃는 얼굴이 되어서 말했다. "안녕, 선생님!" "안녕." "또 만나요!" 소녀는 힘찬 걸음걸이로 전철역 쪽으로 걸어갔다. 어제 저녁 죽음을 선 택하려고 했었던 육교를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갈 것이다. 물론 두번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마약중독에서 회복되는 데는 반 년이나 1년이 걸린다. 게다가 일단 완치되어 퇴원하더라도 또다시 사 용하는 일이 많다. 그갱 반복하고 괴로워하면서 고통스러워하다가 마약 에서 겨우 탈출할 수 있는 것이다. 소녀의 모습이 나무 그늘로 들어가 보이지 않자, 그는 집 쪽으로 돌아 갔다. 집으로 돌아가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런데 그가 조금 걸었을 때, 뒤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손님!" <북풍>의 여자 종업원이었다. 그녀가 숨을 헐떡이면서 쫓아오고 있었 다. "잔돈을 잊고 가셨어요. 여기요." "아, 일부러 여기까지 오시다니 미안하군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혼자서 웃고 싶어졌다. 정확하고 침착 하기로 알려진 명 외과의사가 잔돈을 잊다니! "고마워요." 주머니에 잔돈을 집어 넣고 그는 또 걷기 시작했다. 그 다음 순간이었 다. 여자는 앞치마에 숨겨 두고 있던 날카로운 칼을 꺼내고는, 손수건으 로 손잡이를 감싸고서 조 박사의 등을 정확히 찔렀다. 왼쪽 견갑골 옆을 통해 심장을 예리하게 관통한 것이다. 그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조금 걷다가 갑자기 통증을 느끼고 등 에 손을 대었다. 그가 돌아보았을 때, 이미 그 여자의 모습은 없었다. 그 는 칼이 정확히 심장까지 다달은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갑자기 의식 이 흐려져서, 그는 거의 속수무책으로 길 위로 구르고 말았다. 그때 문득 그답지 않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 일까? 어디로 가는 것일까? 잠들 뿐일까? 이렇게 허무하게? 5. 박점도 반장은 피곤한 눈을 지그시 감고 손가락으로 눈꺼풀 위를 꼭 눌 렀다. 아직 아침 10시였다. 이제 막 출근했는데 이렇게 피곤해서 어떻게 하지? 스스로에게 말을 해보아도, 밀물처럼 밀려오는 피곤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 피로를 치료하는 최고의 명약은 그도 잘 알고 있다. 실마리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좋다. 단지 하나의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계기라도 있으면 이 늙은 육신에 힘이 넘칠 텐데. 노() 변호사와 작곡가. 이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떤 연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람도 아 니고 공통된 면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출신지, 학력, 경력, 어느 것을 조 사해도 두 사람의 공통인자는 발견할 수 없었다. 작곡가인 전인화가 어떤 건으로 김일수 변호사와 관련된 적이 있었는가 조사했지만, 전인화는 거의 소송사건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연령도 다르고 인품도, 생활환경도 달랐다. 흉기의 출처가 같지 않다 면, 도저히 동일 범인의 범행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다. 흉기인 칼도 벽에 부딪치고 있었다. 그런 형태의 칼은 이미 몇 년 전부 터 생산을 중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입업자를 통해서 산 것일까. 관광 객이 현지에서 사온 것일까? 범인은 미친 사람일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일시적인 기분으로 고른 상대를 무자비하게 죽이는 것일까? 소위 불특정 대상을 상대로 하는 광란의 살인? 그러나 범행의 대담성과 침착한 수법을 보면 도저히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았다. 실마리는 전혀 없었다. 전혀 없어? 아니, 전혀 없는 것과 같다고 해야 되겠지. 연주회 밤, 전인화를 봤다는 신고가 여러 사람으로부터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같은 작곡가로, 어느 음악대학의 강사로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전인화가 그날 밤 휴식시간 중에 로비에서, 젊은 여자와 함께 있 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너무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걸 지는 않았지만 꽤 예쁜 여자였다고 그 남자는 말했다. 함께 있었던 그 여 자는 23, 4세 가량의 작고 얼굴이 하얀 미인이었다고 증인은 말했다. 파 란 옷을 입고, 품위가 있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남자로부터 그 이상의 것은 들을 수 없었다. 두 개의 사건에 공통된 단 하나는 피해자가 살해당하기 전에 젊은 여자 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남성호텔의 웨이터 증언 과 이번 음악대학 강사의 증언은 모두 그 여성이 작고 얼굴이 하얀 미인 이라는 점에서 공통되고 있었다. 그러나 박 반장은 이 두 사람의 증언을 과연 어느 정도 신뢰해도 좋은 가 의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작다든가 미인이라든가 하는 건 보는 사람 의 주관에 따라 크게 바뀐다. 얼굴이 하얗다고 해도 짙은 화장을 하고 있 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어두운 호텔의 커피숍, 콘서트홀의 로비에서 그것 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었다. 그렇지만 박 반장은 그 두 개의 증언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점이 있기 는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 여성이 '품위가 있는' 인상을 주었 다고 말하는 점이었다. 품위가 있다는 인상은 단지 복장이나 외양으로 만 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몸짓이나 태도, 앉는 법, 손 동작, 그리고 몸 전 체에서 풍기는 인상인 것이다. 그것은 결코 흔한 느낌이 아니다. 그러나 겨우 20대의 여자가 칼로 사람을 차례차례 죽인다는 일이 쉽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건 한 마디로 거의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전혀 믿기 어려운 사건이 현실로 일어나고 있는 것 이었다.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에 있을 리가 없다고 하는 것은, 이미 현실적인 견해가 아니다. 게다가 여자의 나이는 얼굴의 꾸밈 여부에 따라 쉽게 변 한다. 실제로는 나이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더 어리거나. 박점도 반장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반장님입니까?" 윤 형사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일어났습니다!" "무슨 이야기야?" "칼입니다. 같은 칼로 찔렸습니다!" 박 반장은 무의식중에 숨을 삼켰다. "곧 가지, 어디야?" 한 시간 후, 박 반장은 길 위에 함부로 누워 있는 조명식 박사의 사체 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것으로 세 사람째인가? 세 사람이나 죽을 동안 경찰이 팔짱을 끼고 앉아 방치하고 있었다는 것은 매스컴의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이 미 신문과 방송은 경찰의 무능과 구멍 뚫린 치안을 맹렬히 비난하고 있었 다. 박 반장은 머리를 흔들었다. 도대체 범인은 몇 사람이나 죽일 작정인 가? "칼은 몇 개나 있는 것일까?" 박 반장이 중얼거렸다. "지쳐 버리는군요." 윤 형사가 화를 내듯이 고개를 흔들며 투덜댔다. "세 사람인가? 여기에서 멈추어 주었으면 좋겠는데요." "발견자는?" "이 근처에 살고 있는 회사원입니다. 출근하는 도중이었답니다." "그렇다면 사망 시간이 아침이란 말인가?" "발견자는 피해자를 알고 있었어요, 이웃이니까요. 의사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의사인가?" "조명식 박사라는 유명한 뇌 외과의라고 합니다." "상당히 젊지 않은가?" 윤 형사가 길 앞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조금 올라간 언덕 너머에 혼자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혼자? 뭔가 사정이 있었던가?" "글쎄요. 아직 못 들었는데요." 박 반장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흔히 보는 신흥주택지였다. 택지의 조성 은 진행되고 있지만, 집은 아직 셀 수 있을 정도로밖에 지어지지 않았다. 그 이외의 장소는 숲이다. 이래서는 목격자는 바랄 수 없을 것이다. 박 반장은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길가에 있는 <북풍>이라는 찻집 에 눈을 멈추었다. 주변의 을씨년스러운 풍경과 대비되어 그 집은 지나치 게 큰 간판을 걸어 두고 있었다. "저 가게는?" "글쎄요, 이 주위에서는 가게다운 가게라곤 저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 "뭔가 물어 보지. 뭐라도 알고 있을지 몰라." 박 반장은 이렇게 말을 하다가 갑자기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싶다는 생 각이 들었다. "덕분에 뜨거운 것이라도 한 잔하기로 할까?" "알코올은 빼고 말이지요." "홍차에 위스키를 떨어뜨리는 정도라면 괜찮겠지." 찻집 안으로 들어가자, 접시를 닦고 있던 나비 넥타이를 한 남자가 얼 굴을 들었다. "경찰입니다." 박 반장은 말했다. "커피를 주세요. 그리고 잠시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예." "당신이 주인입니까?" "예, 조명식 씨가 죽었다면서요." "피해자를 알고 있소?" "거의 매일 아침 오셨으니까요." "매일 아침이라구요?" "우리 가게는 아침 8시부터 11시까지 모닝 서비스를 합니다." "그러면 오늘 아침도 왔었나요?" "글쎄요. 대개 9시 지나서지만, 가끔 8시 정도에 오시는 일도 있었지 요. 나는 아침에는 바빠서 9시까지는 가게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가게에는 누가?" "여종업원이 있는데요. 지금 안에서 쉬고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불러 줄 수 있겠소?" 주인은 안쪽 카운터를 나와서는 구석에 있는 문을 통해 뒤로 갔다. 곧 문이 열리고, 무늬가 큰 화려한 앞치마를 입은 여자가 뭐를 먹고 있었는 지 입을 우물거리며 나왔다. "이거 미안합니다, 쉬는 시간에." "아니에요." 파마를 한 구불구불한 머리가 어깨에 내려오고, 큰 잠자리안경을 쓰고 있었다. 상당히 귀여운 얼굴이라고 박 반장은 생각했다. "조명식이라는 의사가 바로 저기에서 살해되었어요. 들었겠지요?' "예." 여자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주 오시는 분입니다." "오늘 아침엔 어땠어요?" "오셨습니다." 박 반장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분명히요?" "바로 두세 시간 전의 일인데요." "정확히 몇 시경이었지요?" "여덟 시 정각입니다. 가게를 열자 바로요." 사망 추정시각이 8시 반경이라고 박 반장은 듣고 있었다. 사체 발견이 8시 45분이다. "조명식 씨 혼자였나요?" "젊은 여자와 함께였습니다." "자세하게 이야기해 줘요." 박 반장은 내심 흥분을 억제하면서 말했다. 그 여자 종업원은 어제 저 녁 조명식과 그 여자가 함께 온 것부터 두 사람이 뭔가 이야기를 나누다 조명식이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 것 같았으며, 그녀에게 안기듯이 해서 나 간 모습을 소상히 이야기했다. "그녀가 오늘 아침에도 함께 왔다는 것이가요." "그렇습니다. 나갈 때도 함께였습니다." "어떤 여자였지요?" "스물두세 살 정도로 몸집이 작고 상당한 미인이었습니다. 얼굴이 창백 하고, 검은 반코트를 입고 있었어요." 같은 여자다! 박 반장은 확신했다. 우연이란 것이 세 번이나 반복될 리 가 없다. 몽타주 사진을 만들어야겠다. 신문에 내서 수배하는 것이다. "가능하면 그 여자의 몽타주를 만들고 싶습니다. 내일이라도 경찰서에 와 줄 수 있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잘 생각해 두세요." 박 반장은 이 여자야 말로 다른 증인과 비교해서 가장 믿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가 눈을 순진하게 치켜뜨며 물어왔다. "조명식 씨는 자살이 아니었나요?" "등에 칼이 찔러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왜죠? 짐작되는 거라도 있소?" "아뇨, 그러나 결국 그런 쪽이 편안했을지도 몰라서요." "무슨 말이지 쉽게 해봐요." "조명식 씨는 암으로, 앞으로 2,3개월밖에 살지 못하는 분이었습니다." 박 반장은 자기도 모르게 윤 형사와 얼굴을 마주 보았다. "정말이에요?" "예, 자주 이야기하셨습니다." 범인은 그것을 알고 있었을까. 박 반장은 이렇게 생각하며 혼자 몸서리 를 쳤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조금만 더 기다리면 죽을 상대였던 것 을. "고마워요. 내일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해줄래요?" "예." "당신의 이름과 주소를 가르쳐 줄래요?" 여자 종업원은 윤 형사의 수첩에 자신의 이름과 주소를 써서 박 반장에 게 주었다. "최진아 양. 그럼 내일 기다리고 있을 께요. 박점도 반장을 찾는다고 말하세요. 10시 정도가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박 반장과 윤 형사가 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나서 그 여자는 살짝 웃었 다. 그것은 차가운 승리의 미소, 득의에 찬 비웃음이었다. 이틀 뒤 조간신문에는 용의자의 몽타주가 크게 게재되었다. <미모의 살 인마!>라는 커다란 제목이 그 몽타주 밑에 붙어 있었다. 그러나 그 사진은 김현주와도 민하영과도, 또 문화회관의 그 여자와도 전혀 닮지 않았다. 남성 호텔의 웨이터도, 문화회관에서 전인화와 함께 있던 젊은 여자를 보았다는 대학강사도 문제의 여자를 자세히 기억하고 있지 않아서 오로지 <북풍>의 여자 종업원 최진아의 이야기에 따라서 작 업을 진행했던 것이다. 그녀는 교묘하게 다른 두 사람의 말을 근거로 인상을 바꾸어 버렸다. 그 두 사람은 설마 자기들이 목격한 여자가 바로 자기 앞에 있는 <북풍> 의 여종업원 최진아라고는 생가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 이만 가겠습니다." 민하영은 주인에게 말을 하고 <북풍>을 나왔다. 민하영은 언제까지나 최진아기 되어 있을 생각이 없었다. 1주일 정도 지나면 이곳을 그만둘 생각이었다. '가까이에서 살인사건이 있어서, 무서 워서' 라고 말하면 누구라도 납득하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더 이상 경찰과 관계를 갖는 것도 좋지 않을 것이다. 10시 반이었다. 한층 더 추운 밤으로, 바람은 없지만 교외인 이 근처는 도심보다 3도 정도는 기온이 낮은 듯하다. <북풍>을 나와서 역 쪽으로 걷기 시작한 민하영은 육교가 보이는 곳까 지 와서 우뚝 발을 멈추었다. 한 소녀가 보였다. 육교의 난간에 팔을 올 리고, 가만히 선로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 소녀는 조 박사와 함께 <북풍> 에 왔던 그 여자였다. 잠깐 동안 여러가지 계산이 민하영의 머리에 소용돌이쳤으나 그것도 곧 끝났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검은 반코트를 입은 소녀에게 다가 갔다. "저." 소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누군인지 알 수 없는 것 같았지만, 이윽고 생각해내고 반갑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은 저 가게의." "조명식 씨와 함께 왔던 분이 아가씨 맞지요?" "예, 그래요." "경찰에서 찾고 있더군요." "신문에서 보았어요. 사진이 나와 별로 닮지 않았지만요." "그래요?" 민하영이 미소지었다. 검은 반코트 소녀의 눈에 눈물이 넘쳐 흐르고 있 는 게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잠시 후 저 멀리에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 는 열차가 소녀의 어깨 너머로 보였다. 소녀는 이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 을까. 자신이 용의자로 쫓기고 있는 게 두려워서? 그러나 민하영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검은 반코트 소녀가 눈에 손수건을 대는 것을 보고, 하영은 재빨리 몸 을 낮추어, 소녀의 양쪽 발목을 껴안고는 힘을 넣어 들어올렸다. 코트를 입은 소녀의 몸은 난간을 축으로 휘익 한 번 회전하고는, 눈 아래의 철도 로 떨어졌다. 열차가 굉음과 함께 돌진해왔다. 6 박 반장은 괴로워하고 있었다. 제3의 살인현장 부근에서 열차에 뛰어들 어 자살한 소녀 김현주는 몽타주 사진과는 닮지도 않았다. 김현주는 경찰에 마약중독으로 기록이 남아 있었다. 그 사진을 보이자, <북풍>의 여종업원 최진아는 이 여자임에 틀림없다고 증언했다. 몽타주 작성에 참가한 다른 두 사람의 증인도 대체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진술했 다. 호텔의 전망대에서 본 여자나 연주회의 로비에서 본 여자나, 김현주 와 비슷하다고 말하는 증인들. 연속 살인사건은 이렇게 해서 범인의 자살로 막을 내리는 것같이 보였 다. 박점도 반장은 경찰청의 자기 방에서 혼자 생각에 빠지면서, 책상 위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것은 자살한 김현주의 기록서류였다. 열여덟 살된 소녀가 세 명의 남자를 죽이고 스스로 열차에 몸을 던졌다? 신문과 방송은 무슨 연예인의 스캔들이라도 들춰내듯이 김현주의 과거와 현재를 깡그리 들춰내고 있었지만, 박점도는 그 모든 걸 순순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박 반장에게 있어서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너무나 의문이 많았다. 김 현주는 마약중독으로 무절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아로 어릴 때부터 삐뚤어져서 몇 번이나 보호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아는 소년계 형사 한 사람은 김현주가 결코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고 그에게 말했던 것이다. 그 아이가 살인 따위를 할 리 는 절대로 없다고 단언한 것이다. 중독환자는 약 살 돈을 손에 넣기 위해서 돈을 훔치기는 한다. 그러나 살인이라면 전혀 이야기가 다른 것이다. 구체적인 의문도 있었다. 세 번 째인 조명식 박사의 살해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첫번째, 두 번째의 살인은 어떻게 된 것일까? 김현주가 품위 있는 복장을 하고 독일제 고급 칼로 사 람을 찔렀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만약 그녀가 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누 군가가 시킨 것이 아닐까? 수사가 중단되지는 않았지만, 인원은 축소되고 형사들의 사기도 떨어지 고 있었다. 새로운 사실이 나올 희망도 거의 없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아직까지 박 반장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피해자들 사이에서 아 무런 연결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마약중독의 소녀가 범인이라 고 해도, 죽일 동기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 점이 분 명해질 때까지 수사를 중단할 수는 없다고 박 반장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 될까? 당장 피해자들의 주변을 새롭게 조사해 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무언가 공통인자를 끌어낼 때 까지는 말이다. 그때, 책상의 인터폰이 울렸다. "뭐지?" "손님입니다만, 저 기다리세요, 저." 여직원이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그녀의 만류를 뿌리치고 들어온 누군 가의 손에 의해 문이 열렸다. 박 반장은 그 남자가 누구인지, 처음 잠시 동안은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멍하니 그를 보다가 늦게서야 그가 소리쳤 다. "황일청() 씨! 오랜만이군요." 박 반장은 상대의 손을 꽉 잡았다. 황일청이라고 불리운 남자가 웃으면 서 말했다. "5년 만인가요?" "벌써 그렇게 되었습니까? 상당히 오랫동안 서로 소식이 없었군요. 무 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어쨌든 앉으세요." 황일청이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아직도 이 의자를 바꾸지 않았군요." "바꿔 주지 않으니까요." "바쁜가요?" "변함없어요. 사건은 산적해 있고, 인원은 부족하니까요." "나약한 소리를 하다니, 박 반장답지 않군요." "이젠 저도 늙었나 봅니다." 여직원이 차를 가지고 왔다. 황일청은 한 모금 마시고, 잠깐 사이를 두 었다가 슬쩍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지금은 무슨 사건이죠?" "그 유명한, 칼에 의한 연속 살인사건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했소." 황일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오늘 여기에 온 것도 그 사건과 좀 관계가 있다오." "뭔가 있습니까?" 박 반장의 목소리가 팽팽해졌다. 황일청이 대답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파이프를 꺼냈다. 우아한 곡선에 윤기가 흐르는 훌륭한 파이프였다. "이거, 괜찮은 겁니다!" 황일청이 황홀한 듯이 그 파이프를 어루만졌다. "프랑스에서 구한 거라오. 겨우 손에 넣을 수 있었지." 박 반장은 무언가 중요한 것을 말하기 전에 다른 화제를 앞에 두는 황 일청의 방법에 이젠 익숙해져 있었다. 황일청은 잠시 파이프를 더 바라보 고 나서, 그것을 주머니에 천천히 집어 넣고는 말했다. "그 전에 내가 요즘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을 이야기하는 편이 좋 겠군. 그런데 어때요, 이런 곳 말고 조금 인간적인 기분이 드는 곳으로 가지 않겠소?" "좋습니다." 두 사람은 경찰청을 나와서 택시를 탔다. 봄과 같은 오후였다. 박 반장이 황일청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어느 외국대사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담당한 박 반장이 외교관의 면책특권 의 벽에 부딪쳐서 고민하고 있을 때, 상관이 그를 황일청에게 소개했던 것이다. 그때 그는 자신과는 거의 다른 세계에 사는 이 남자에게 뭔가 이상한 친근감을 느꼈었다. 그는 황일청이 어느 수사기관의 간부라는 것밖에 몰랐다. 그때나 지금 이나 이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어쨌든 그때 부딪치고 있던 외교관과 의 미묘한 문제에 대해서 솔직히 그에게 사정을 설명했던 것이다. 수사상 외교관 개인에 관한 자세한 조사가 필요해서 그러니 어떻게 해서라도 직 접 그 외교관을 심문하고 싶다고 설명했었다. 그때 황일청은 잠자코 듣고 있었지만, 이윽고 자리를 벗어나서 30분 정도 지나서 돌아오더니 어떻게 될 것 같군요,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말했던 것이다. 다음날 박 반장은 외무부로부터 그 대사관 내에서 자유롭게 조사하고 심문해도 좋다는 허가를 얻었다. 이후 박 반장은 가끔 자기를 만나러 경찰청에 모습을 보이는 황일청과 만나 수사에 관한 얘기를 자유로이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황일청이 어떠 한 입장이고 어떠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박 반장은 지금도 정확히는 모른다. 단지 소문으로 들은 바로는, 황일청이 개인적으로 대단한 부자이 고, 한국은 물론 구미에도 정계, 재계에 많은 친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었다. 차는 남산 호텔을 향하고 있었다. "거기에 방을 하나 빌려서 사무실로 쓰고 있지." 황일청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용산의 남산 호텔. 넓은 정원이 훤히 내다보이는 유리창이 거대한 모습 으로 손님들을 맞아들이는 라운지에 따뜻한 햇살이 완만한 경사로 비추고 있었다. 두 사람은 햇볕이 드는 곳을 피해서 안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 다. "4년 전, 나는 유럽에 갔었소."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황일청이 말을 했다. "몰랐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무슨 일로 가셨었는지요?" "물론 목적이 있었죠. 전에 본 로아르 고성을 천천히 보고 싶었고, 하 이리겐슈타트에도 가고 싶었고, 레만 호수에서 여름을 보내려고도 생각하 고 있었지요. 그러나 최대의 목적은 나의 '적'과 만나는 일이었지." "적이라구요?" "그래요. 그때 나는 별다른 일도 하지 않고 빈둥빈둥 놀고 있었는데, 어느날 경찰청장이 나를 찾아왔었소." "청장이 말입니까?" "당시는 김일부() 씨였지. 그는 나에게 어떤 것을 조사해달라고 의뢰하러 온 것이었소. 마약의 밀수입 루트를 조사해달라고 하는 것이었 지." "마약이라면." 박 반장은 그런 이야기가 이번 연속 살인사건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 까 생각했지만, 잠자코 듣고 있었다. "마약 밀수 루트에는 크게 두 가지의 통로가 있어요." 황일청이 계속했다. "아편, 헤로인, 마리화나 같은 종류는 동남아시아, 홍콩, 타이, 인도 루트로 오는 것이 많소. 재작년엔 도합 18개국에서 밀수입되고 있었지. 또하나 LSD를 중심으로 한 환각제는 일본의 미군기지가 있는 도시가 루트 의 중심이 되어 있소. 그런데 그때 새로운 루트가 생기고 있는 것 같다는 정보가 당국의 귀에 들어갔던 것이오." "유럽입니까?" "그렇소. 환각제라 해도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 그것 도 상류층의 부인들이 자극을 찾아 손에 넣고 싶어하는 것이 유럽에서 어 떠한 루트로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보여졌던 것이오. 이것이 실제로 유럽의 상류사회에는 상당히 번져 있다는 이야기였지." "유별나군요." "청장의 이야기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루트를 발견해서 한국으로의 유 입을 막아 달라는 것이었소." "왜 마약과가 취급하지 않았죠?" "그것은 일이 극비를 요하기 때문이었소." "극비? 왜죠?" "이미 한국에도 거금을 지불하고 그 약을 손에 넣은 사람이 있었고, 그 중에는 사회지도층 인사의 부인들과 자녀들이 적지않게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오." 박 반장은 황일청이 예로 든 두세 사람의 이름을 듣고 말도 나오지 않 았다. "약을 보내고 있는 사람의 목적은 돈이 있는 사용자를 증가시키는 것이 지. 이것은 폭력단 등을 사용해서 도시의 부유층 젊은이에게 마약을 팔아 치우는 것과는 달라요. 첫번째로 돈의 지불이 좋아. 두 번째로 분쟁이 일 어나도 산 사람은 입장상 고소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쉬쉬 하려고 하겠죠. 세 번째는 대량으로 팔아치울 필요가 없고, 비밀결사와 같은 조직으로 인 해 정보가 샐 염려가 전혀 없다는 것이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약 사는 사람이 손을 빼려고 한다면 사건을 폭로한다고 협박해서 단념하게 하고, 또 돈을 빼앗을 수도 있다는 것이오." "정말 오싹한 이야기군요." "그렇기 때문에 유럽을 잘 아는 나에게 은밀히 탐색을 해달라고 한 것 이었소." "그러나 위험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위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황일청이 웃었다. "박 반장도 익히 알고 있는 대로 말이오." 박점도 반장은 웃으면서 끄덕였다. 그렇다, 황일청이라면 기꺼이 받아 들였겠지. 청장도 그러한 그의 성격을 익히 알고 의뢰하러 갔음에 틀림없 을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미묘한 작업이었소. 유럽에 가서 루트를 탐지하는 데는 그쪽 상류사회의 사람과 가까이 해야 된다는 문제가 가로놓이기 때문에, 몇 사람 아는 사람은 있지만 내가 그러한 조사를 위해서 와 있다고 알려 지면 즉시 쫓겨나 버렸을 것이오. 나는 공적인 권한을 가지고 가는 것도 아니어서 현지 경찰에게 협력을 구할 수도 없었소. 완전히 독불장군으로 행동해야 했지." "어려운 일이었겠군요." "뭐 그렇지. 청장도 자신에게 가능한 것은 비용을 부담하는 것 정 도라고 솔직하게 말했었소. 물론 비용도 무시할 수 없었소. 거의 무기한 으로 유럽에 체재하면서 상류사회와 사귀려고 하는 것이었으니까. 영수증 도 없이, 청장은 그만큼의 돈을 잘도 빼냈던 거야." 황일청은 잠시 쉬고, 커피를 다 마시곤 천천히 이야기를 계속 했다. "아무튼 내가 혼자서 유럽으로 건너간 것이 4년 전의 일이었오. 나는 즉시 마약이 침투하고 있다고 알려진 파리의 사교계로 들어갔었지. 아는 사람 연줄로 얼굴을 내밀고, 거의 매일 밤을 파티, 만찬회, 오페라 구경, 음악회의 연속이었소." 박 반장은 머리를 흔들었다. 이렇게 매일 바쁘게 일하고 있으면 그런 세계가 이 세상에 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날들이 반 년 이상 계속되어서 겨우 내가 실마리의 한쪽 끝을 잡 았던 거요. 새로운 약을 맛보는 파티에 초대된 것이었소. 물론 아는 사람 의 동반자라는 자격으로 구경하러 간 것뿐이지만, 나는 그것이 내가 찾고 있던 바로 그것이라고 확신했소." 황일청은 그때를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너무 자세한 이야기는 그만두죠. 어쨌든 그것을 실마리로 나는 은밀하 게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소. 서두를 수는 없었지. 실패하면 필경 죽음 이 기다리고 있고, 아무도 도와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잘도 살아서 돌아오셨군요." "정말이오. 그러고서 1년 정도 걸려서 나는 유럽에서 한국으로 여 러 종류의 마약을 보내고 있는 조직의 우두머리라고 생각되는 남자를 찾 아냈던 거요." "누구였습니까?" "본업은 미술상이오. 고미술품을 판매하고 있는 사람으로, 그쪽에서는 상당히 알려진 인물이었소. 민태호()라는 사람이오." 박 반장에게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기야 강력계 형사인 그가 그런 인물을 알 리도 없지만. "다행히 나도 어느 정도는 미술품에 감식안이 있다오. 나는 중세의 검 을 갖고 싶다고 하면서 민태호란 사람에게 접근했었소. 처음 만났을 때부 터 우리는 서로 상대가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느끼고 있었지. 거물이었소, 그런데다 그 사람은 정말 신사였지. 한치의 빈틈도 없는 신사로 매너도 동작도 영국귀족이라고 해도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었소. 우리들은 몇 번 인가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그의 저택에 초대되어서 만났던 것이오. 그 는 내가 무얼 하는 사람인가를 곧 알아내었던 것 같소. 물론 그것은 어려 운 일이 아니니까. 그러나 그는 부하를 시켜서 나를 없애려고는 하지 않 았소, 웬지 아시오? 나는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민태호는 나를 자기 와 동격의 적이라고 생각했었던 게 아닐까. 게다가 그와 나 사이에는 많 은 공통점이 있었소. 정반대의 입장에 있기는 하지만, 같은 종류의 인간 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지." 황일청은 마치 그때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듯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가 비행기 사고로 죽은 것은 우리가 만난 지 두 달 뒤였소." 박 반장은 그의 얘기를 듣고 있다가 불현듯 민태호라는 이름을 생각해 냈다. 신문에서 이 이름을 본 적이 있었다. 양평 부근에서 트럭 운전사 살해사건이 있었고, 그 후 가까이에 있는 저택에서 세 사람이 살해된 사 건이 있었다. 행방을 감춘 가정교사 청년이 용의자로 지명수배되어 있을 것이다. 그 집은 원래 유명한 미술상 민태호의 집으로 그의 장녀 민가영 이 살고 있었다고 했다. "스페인 마드리드로 가는 여객기가 추락하고, 민태호의 이름이 여객 명 부에도 있었지." 황일청이 담담히 덧붙였다. "그러나 비행기는 지중해에 떨어져, 시체도 건질 수 없었소." "죽지 않았다고 보시는군요." "솔직히 얘기해서 그것은 잘 모르겠소. 중요한 것은, 그가 죽은 후에도 조직 자체가 붕괴되지 않았다는 거요. 귀국해서 알았지만 그 약의 유입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소. 민태호가 살아 있어서 어딘가에서 뒤를 조종 하고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가 그의 뒤를 이어서 운영하고 있는 것인지 어쨌든 이제 유럽에서의 조사는 불가능해졌소. 이미 내 얼굴 이 너무 알려져 있기 때문이오. 그래서 나는 이번에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조사를 시작해야 했소." "민태호라는 이름을 생각해냈습니다. 양평의 그 엽기적 살인사건." "그대로요. 우연히 근처에서 트럭 운전사가 살해당해서, 그 조사를 빌 미로 난 형사로 위장해서 그 집을 방문했었다오. 나는 그가 몰래 귀국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소. 그 집에 자매 두 사람 외에 또 한사 람 누군가가 살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 황일청은 자신을 오태석 형사라고 하면서 민가영의 집을 몇 번인가 방 문해서 한 청년과 만난 것을 이야기했다. 그 청년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 정교사 정관우였다. "또 한사람 살고 있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민하영이라고 하는 막내 여동생이오. 언니인 가영은 하영을 다른 요양 소에 보냈다고 진술하고 있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지. 하영은 그 집의 지하실에 갇혀 있었던 것이오." "지하실이라구요?" "나는 요전에 빈 집이 된 그 저택으로 잠입했다가 지하실을 발견했었 소. 거기엔 분명히 여자가 오랜 기간 살았던 흔적이 있었지." "도대체 왜 그런 곳에?" "단언은 할 수 없지만 아마도." 황일청은 잠깐 말을 끊고 나서, 박점도를 예리하게 응시하다가 단언하 듯 힘주어 말을 했다. "그녀는 끔찍한 살인광인 것 같았소." "살인광?" 박 반장은 물끄러미 황일청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집을 조사하다가 벌써 몇 년 전이지만, 하인이 살해당한 사건 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소. 강도에게 살해당했다는 이야기였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고 미궁으로 빠졌소. 그 사건을 담당한 당시의 형사를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무래도 의문점이 많았던 것 같소. 그 의문점의 하 나는 막내딸을 형사와 절대로 만나지 않게 했던 것이오. 신경이 과민한 소녀로, 도저히 경찰 조사에 견딜 수 없다고 하는 주치의의 말을 방패로 완강히 거부했다는 거요. 그리고 또하나, 형사가 내부 범행이 아닌가 생 각해서 수사를 계속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상부에서 수사 중지를 명령했 다는 것이오." "압력이군요." "당시, 마침 아버지 민태호가 한국에 돌아와 있었지. 그가 여러 곳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음에 틀림없소. 그는 요로에 많은 친구를 두고 있 었으니까. 어쨌든 민하영이라는 소녀는 그때부터 그 지하실에 넣어진 것 이 아닌가 생각돼요. 나도 여러가지로 조사해 보았지만, 민하영이 그때부 터 현재까지 학교나 병원에 다녔다는 기록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소. 이 상한 얘기 아닙니까?" 황일청은 일단 말을 끊고, 미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잠시 사방을 둘러 보다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그 저택에서의 살인은 하영이라는 여자의 범행이라고 생각해요. 지하실에서 탈출해서 세 사람을 죽이고 행방을 감춘 것이지. 그 정관우라 는 청년은 민가영이 어딘가로 데리고 가서 그의 범행으로 보이게 하려고 한 것일 거요." "민가영이라는 여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한국에서의 밀수 루트의 우두머리격이지." "여자가 말입니까?" "민가영은 보통여자가 아니오. 만나면 곧 알겠지만, 아버지의 지도자로 서의 소질을 그대로 이어받은 여자요. 비록 악인의 소질이기는 하지만 . 그러면 이제는 박 반장이 흥미가 있는 문제로 이야기를 옮길까요?" "연속살인 말입니까?" 박 반장이 흠칫 놀라서 소리쳤다. "그 도망간 민하영이라는 여자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틀림없다고 생각해요. 나로서는 그 연속살인의 동기는 아직 알 수 없 소. 하지만 흉기인 칼은 본 기억이 있지." "보셨다구요?" "민태호와 만났을 때, 그가 나에게 보여 준 적이 있소. 훌륭한 제품으 로 6개가 한 쌍으로 되어 있고, 그것을 한국에 보낼 것이라고 말했었소." "그것을 그녀가 가지고 나와서." "이미 3개는 발견되었으나, 아직 3개가 남아 있지." "이젠 싫습니다." 박 반장이 한숨을 쉬었다. "아직 세 사람이나 살해당할 사람이 더 남아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 전에 어떻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실마리를 잡으셨습니까?" "민가영이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출자해서 운영하고 있는 요양원에 있 소. 나는 그곳이 한국에서의 마약 루트의 본부라고 보고 있는 거요. 물론 구체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바로 손을 쓸 수 없지만." "언니 쪽에서 그 살인마 동생의 행방도 알고 있을까요?" "알지도 모르지." "그 요양원의 장소를 아십니까?" "알고 있소." 황일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박 반장의 힘을 빌리고 싶소. 미리 말해 두지만, 나는 박 반장 의 수사를 도와 주려는 게 아니오. 박 반장은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잖소. 나는 민태호가 남긴 밀수 루트를 찾고 싶을 뿐이오. 이 두 건의 중요한 열쇠가 실은 하나라고 할 수 있겠지만." 박 반장은 황일청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주저할 것이 없었 다. "좋구 말구요, 기꺼이 도와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동안 귀중한 협력자를 찾아냈소." "그래요?" "그 저택에서 우연히 만났지만." 황일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 반장이 돌아보자, 젊은 여자 하나가 그들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소개하죠. 경찰청의 박점도 반장이오. 이쪽은 정관우 씨의 약혼녀인 현지수 양." 현지수가 미소지으며 가볍게 인사를 하자 황일청이 즉시 입을 열었다. "자, 앉지. 지금부터 우리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짜 봅시 다." 7. 교사라는 직업은 불쌍하다. 교직에 몸담고 벌써 5년이 되는 심규철( )은 전철 창을 통해 스쳐 지나가는 야경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생각했 다. 충무로역에서 내려서, 지하의 광장에서 밖으로 나오는 계단을 올랐다. 즉시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얼게 할 듯이 불어와서 심규철은 코트깃을 세 웠다. 뼛속까지 추운 늦겨울이긴 했다. 사방은 벌써 어둡고 사람들도 그다지 없었다. 그녀는 빌딩 1층에 있는 작은 찻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심규철은 약 속시간에 한 시간 가까이나 늦었다. 교직원회의가 생각지도 않게 길어졌 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불쾌한 것 같지 않았고, 그가 들어오 는 것을 보고 미소지으면서 손까지 흔들었다. "미안해, 늦어서. 회의가 있었어." "괜찮아요, 책을 읽고 있었으니까." "무엇을 읽고 있었지?" 그녀는 문고본을 덮어 보였다. <적과 흑>이었다. "재미있어?" "예, 스탕달을 좋아하거든요." 그녀는 백인숙()이라고 했다. 21세, 광화문의 어느 서점에서 심 규철이 신간 서적을 둘러보고 있을 때, 우연히 같은 책을 사려고 했던 것 이 서로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한 달전의 일이었다. 심규철은 하얀 스웨터에 짧 게 묶은 머리, 깊숙이 베레모를 쓴 이 밝고 사랑스러운 여인의 매력에 한 순간 사로잡혀 버렸다. 그녀는 사려고 했던 책을 심규철에게 양보하고 대 신에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했다. 심규철은 기꺼이 승낙했다. "댁에는 뭐라고 이야기했어요?" 인숙이 물었다. "회의 후 동료와 술 마시러 간다고 전화해 두었어." "술 냄새를 풍기지 않고 돌아가면 이상하지 않을까요." "괜찮아, 이런 추위에는 술이 금방 깨니까." "정말로 부인이 이상하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말해요." "알았어." "나는 곧 사라질 테니까, 부인을 슬프게 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심규철은 인숙의 친절함에 감동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불안했다. 이미 아내는 뭔가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매일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을 속이 는 것은 쉽지 않다. 심규철은 남달리 정직해서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남 자였다. 그러나 그렇게는 인숙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말하면 그것으로 끝장 이다. 인숙은 말한 대로 할 것이다. 그 앞에서 모습을 감추고, 두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심규철로서는 그녀를 찾을 방법이 없다. 그녀의 집도, 전화번호도, 무엇 하나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언제 나 헤어질 때엔 다음에 만날 날과 장소를 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규철은 지금의 생활과 지위를 버리고서까지 백인숙과 함께 살려고 하 는 의지가 자기에게 없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것은 백일몽과 같 은 것이고, 아주 짧은 시간 속의 만남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좋았다. 두 사람 사이엔 아무것도 없었다. 문자 그대 로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가 외도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함 께 시간을 보내고, 이야기를 하고, 손을 잡고 걷는 그것뿐이었다. 물론 심규철도 남자였다. 이 여인을 안고,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다는 욕망이 물론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가 령 힘으로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두 사람 사이의 마지막을 의미할 것이고, 그 때문에 두 사람에게 아직 남겨져 있는 몇 시간을 희생할 마음 이 그에겐 없었다. 심규철은 오늘밤 그녀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때와 같이 명 랑하게 행동하고는 있지만, 뭔가 다른 것에 신경을 빼앗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있잖아요, 어딘가 가고 싶지 않으세요?" 스탕달에 대한 이야기를 끊어 버리고 갑자기 그녀가 말했다. "아니, 별로." "가까운 홀에서 피아노 연주회가 있어요. 가지 않을래요?" "좋지만, 벌써 여덟 시야." "도중에 휴식시간에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그럼 가지." 지하도를 걸어서 10분도 못 미처, 명동의 빌딩숲 속에 자그마한 규모의 연주홀이 있었다. 마침 휴식시간이 끝나는 때에 두 사람은 연주홀로 들어 갔다.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피아니스트로, 객석은 군데군데 빈 좌석이 보였다. 곡목은 전부 쇼팽으로 전혀 클래식에 어두운 심규철도 때때로 들어 본 적이 있는 선율이 흘렀다. 폴로네즈를 몇 곡인가 연주하고 일단 안쪽으로 피아니스트가 모습을 감추었다. "클래식 팬이라는 것은 몰랐었어." "어머, 그래요? 조금은 연주도 할 수 있어요." "멋지군, 쇼팽의 곡은 나도 조금 알지. 몇 해 전에 프랑스에 갔을 때 어느 연주회에 가 본 적이 있는데." 인숙이 놀라서 그를 보았다. "유럽에 간 적이 있어요?" "그렇게 깜짝 놀라지 않아도 되잖아. 교사가 되고 2년째 되던 여름휴가 때 단체여행으로 갔었어. 그쪽에서는 거의 자유시간이었기 때문에 마음대 로 돌아다녔지." 그녀가 애매하게 웃고는 스테이지에 다시 나타난 피아니스트에게 박수 를 보냈다. 그는 마음에 걸렸다. 아무래도 다른 때와 모습이 다르다. 어 떻게 된 것일까? 연주 동안에도 그녀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어서 피아노 연주는 조금도 듣고 있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지?" 그가 물었다. "글쎄요." "뭔가 분명히 있었던 거지?" 두 사람은 홀을 나와 번잡한 명동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인숙은 눈썹을 찡그리고 뭔가를 생각하면서 점점 말수가 적어졌다. 그는 견딜 수 없는 기분으로 그런 그녀를 곁눈질로 지켜보았다. 뭔가 마음을 전환하려고 농 담을 하려고 해도,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그녀가 그를 보고 말했다. "있잖아요, 이것으로 헤어져요." "이것으로?" "그래요, 여기에서." "인숙이가 그렇게 말하면 할 수 없지."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다음은 언제지?" 인숙은 조용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게 아니에요. 이것으로 이제 만나지 않겠다는 거예요." 심규철은 아연해졌다. "하지만, 왜지? 내가 무엇을 잘못했지?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 "아니에요, 아니에요." 인숙은 갑자기 얼굴을 숙이고 울음 섞인 목소리가 되었다. 그는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걷지." 거리의 사람들 속에서 마냥 서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인숙의 어깨를 안고 광교 쪽을 향해서 지하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서워요,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곳까지 가 버릴 것 같아서." "무슨 뜻이지?" "나, 언제든 당신과 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지금 은 달라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당신에게는 부인도 있고, 아이도 있고. 내가 없어져야 해요. 지금이라면 아직 그럴 수 있지만, 더이상은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지금 헤어지지 않으면."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말한 대로였다. 지금의 처자식과 헤어지고 그녀와 결혼한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정직한 그로서는 이중 생활을 계속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헤어지는 수 밖엔 없 다. 모든 걸 잘 알고 있어도, 그는 그녀의 어깨를 안은 손을 떼고 싶지는 않았다. 찬바람 속에서 두 사람은 광교를 걸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 시선도 맞추지 않았다. 다만 무한히 계속되는 미로를 방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 동안 걸었을까? 그녀가 멈추어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뺨에 눈 물의 흔적이 있었지만, 뭔가 맑게 개인 듯한 표정으로 미소짓고 있었다. "둘이서만 있고 싶어요." "뭐라구?" "난 아이가 아니에요. 경험은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안 돼. 결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당신은 솔직하군요. 여자 쪽에서 말하면 남자는 거부하지 않는다고 들 었는데." "진심이야?" "진심이에요." "알았어, 하지만 어디에서?" "이 근처에 여관이 있겠지요." "그런 곳에 인숙이를 데리고 갈 수는 없어." "괜찮아요. 서로 사랑하고 있으면, 어떤 식으로 생각되어도 상관없어 요." 그녀의 말 속에 억누르는 듯한 격한 것이 있다고 느껴졌다. "알았어." 그가 힘들여 말했다. "가지." 보통집에, 단지 여관이라는 간판만을 걸은 듯한 곳이었다. 현관문을 열 자, 중년의 뚱뚱한 여주인이 천천히 나왔다. "어서 오세요, 숙박하실 건가요?" "예, 두 사람입니다." 그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는 것 같았다. "들어오세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모습으로, 여주인은 그들에게 슬리퍼를 나 란히 놓았다. 인숙은 그의 등에 숨는 것처럼 해서 들어오고는 마치 동굴 에서 헤매고 있는 것같이 이쪽저쪽을 둘러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좁은 계단을 올라서 2층으로 안내되었다. 가장 안쪽의 문을 열고 여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세 평 정도의 방으로, 일단 여관방 같 은 구조로 되어 있기는 했다. 그는 인숙을 보았다. 어색하게 방석에 앉은 그녀는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겠다는 듯이 잠자코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그는 그녀를 걱정스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막상 그 순간이 되면 싫다고 울어 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저쪽이 욕실입니다. 뜨거운 물이 나옵니다." 여주인이 벽 한쪽을 건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고마워요." 그는 여주인의 손에 5천 원짜리 한 장을 팁으로 쥐어 주었다. 여주인이 나가려고 하자, 갑자기 인숙이 얼굴을 들었다. "저, 미안하지만." "예?" "맥주를 주세요." 깜짝 놀라고 있는 그에게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고민해도 어쩔 수가 없어요. 마음을 편안히 해야 하니까요. 처음이자 마지막이니까." 심규철도 무심결에 웃었다. 욕탕에 뜨거운 물을 받는 사이에, 두 사람 은 맥주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순간만큼은 처음 만났을 때의 아무런 불안도 그림자도 없었던 날이 다시 온 것처럼 그에게는 생각되었 다. 그녀도 컵으로 조금 맥주를 마셨고, 그러고는 괜한 농담을 해 두 사 람은 소리높여 웃었다. 인숙은 적당히 시간을 보고 욕실로 가서 물을 잠그고 나왔다. 두 사람 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어색하게 바라보다가, 먼저 심규철이 좁은 욕실로 들어가서 옷을 벗어서 바구니에 넣고는 뜨거운 물을 몸에 끼얹고, 욕조로 들어갔다. 김이 금세 욕실 안을 짙은 안개와 같이 채워 버렸다. 욕실문이 열렸다. 짙은 김을 통해서 희미하게 여인의 나체가 보였다. 그녀가 따라 들어온 것이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와." 그녀가 가까이 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 젊은 육체를 바 라보았다. "너무 보지 말아요." "미안해." 그는 눈을 돌렸다. 그녀가 타올을 든 손을 욕조 가장자리에 올리며 물 었다. "안으로 들어가도 좋아요?" 그녀는 이렇게 묻고는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더운 김에 조금 현기증이 나는지 욕실문을 열었다. 시간이 좀 지났다. 그러나 그다지 오랜 시간은 아니었다. 그녀에겐 이 제 익숙한 일이 되었으므로 한순간도 실수는 없었다. 이제 괜찮을까?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손을 씻고 욕실 안을 꼼꼼 하게 돌아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치우겠습니다." 갑자기 등 뒤에서 소리가 났다. 여주인이 맥주와 컵을 치우러 온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멈추어 섰다. 여주인이 흘끔 얼굴을 내밀고, 욕실 안쪽을 쳐다보다가 얼어붙은 듯이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여주인이 본 것은 피에 물든 욕조에서 눈을 부릅뜬 채 얼굴의 반을 내밀고 있는 남자와 그 앞에 칼을 들고 서 있는 알몸의 여자였다. 여주인은 손에서 쟁반을 떨어뜨리고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여자는 나 체인 채로 욕실에서 나와서 여주인에게 다가갔다. 손에 든 칼을 단단히 움켜쥔 채. 피를 닦고 몸을 씻고는, 여기저기 지문을 닦는데도 반 시간이나 걸렸 다. 생각지도 않은 사건에 그녀는 평소와 달리 혼란되어 있는 자신을 느 끼고 있었다. 침착해야 해. 침착해! 아무것도 걱정할 것은 없어. 옷을 입고 방에 흩어진 피를 밟지 않도록 조심해서 방을 나왔다. 선로 에 떨어뜨려 자살로 만든 그 마약중독자 소녀에게 살인혐의가 씌워져 있 기 때문에 이번에는 칼을 남겨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여관을 나와서 걷기 시작했다. 갑자기 피로가 엄습해왔다. 끝났다. 이것으로 겨우 끝난 것이다. 여인은 찬바람 속을 휘청거리며 걸어갔다. 제 3 장 정 원 1 평화요양원. 그곳의 문 옆에는 '이 문은 평화로만 통한다'라고 쓰인 커 다란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어딘가에서 인용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평화원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다지 멋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30년 전 이 요양원을 설립한 어느 정신과 의사가 이 이름을 크게 마음에 들어 했었기 때문에 그가 죽은 후에도 아무도 이것을 개명하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경기도 가평의 청평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 화곡리() 부 근에는 여러 휴양소가 모여 있어서, 언뜻 보기에는 고급별장지대라는 분 위기조차 띠고 있다. 평화원의 대지는 그 중에서도 유난히 넓었다. 이곳에 요양원을 지을 당 시에는 아직 땅값이 이야기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싸서, 건축주가 꽤 넓은 토지를 점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요양원은 서울 근교에서도 손꼽히는 청평이라는 유원지 지대에 자리 하고 있음에도 이 근방에 온 손님들의 눈에 띄는 일은 거의 없었다. 요양 원의 문이 도로에서 안으로 상당히 들어간 곳에 있고, 길에는 작은 화살 표시의 표식이 하나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양원 대지 전체는 별로 음산하지 않지만, 단호하게 가로막아선 높은 벽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2월에 들어서고 얼마 되지 않은 날, 눈이 온 전날과는 반대로 맑게 개 인 탓에 푸른 하늘이 눈을 아주 맑게 해주는 것 같은 기분좋은 날씨였다. 한 대의 외제차가 요란스레 체인 소리를 내면서 여기까지 올라왔다. 양 쪽에 쌓여 있는 눈이 1미터 정도의 높이가 되어서 평화원으로의 화살 표 시를 감추어 버렸기 때문에 운전사는 한 번 차를 멈추고 가까운 인가로 가서 여기를 물어 보아야만 했다. 낮은 관목 울타리로 둘러싸인 길로 들어가서 완만하게 커브를 돌자, 뜻 하지 않게 엄중한 철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옆에 간판이 없었다면 군사기 지의 입구인가 생각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철문이었다. 운전사가 차에서 내려서 문 기둥의 인터폰을 눌렀다. "누구십니까?" 백화점 안내양과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인터폰 저쪽에서 들려왔다. "서기수()라고 합니다. 원장 선생님과 약속이 있는데요." "기다리세요." 목소리가 끊겼다. 조용했다. 마치 사람이 없는 산속에 들어온 것 같다. 깊은 나무숲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고, 문 안쪽도 나무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무가 헐벗은 까닭에 무수한 작은 가지가 부시시한 머리 처럼 서로 얽혀져 있었다. 운전사는 문 기둥 위에 비디오 카메라가 있고, 그것이 지금 천천히 머리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들어오세요." 철문이 윙 하는 희미한 모터 소리를 내고 천천히 안쪽으로 열렸다. 운 전사가 황급히 문 안으로 커다란 차를 밀어 넣자,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문이 닫혔다. 헐벗은 나무를 통해서 현대적인 건물이 살짝 보였지만 길은 크게 원을 그리며 숲속을 돌아가야 했다. 차에는 초로의 신사와 20대 초반의 젊은 여자가 타고 있었다. 회색 양 복을 입은 신사는 조금 안정되지 않은 모습으로 창 밖을 보고 있었지만, 여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이 좌석에 기댄 채 얼음과 같이 무표정한 얼굴을 물끄러미 앞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자는 크림색의 코 트를 입고, 목이 긴 스웨터를 걸쳤다. 차는 2층 건물 현관 옆으로 갔다. 넓은 유리창이 있는 현관에서 경비원 제복을 입은 남자가 차를 보고 있었다. 운전사가 문을 열자, 여자는 처음 으로 얼굴을 밖으로 향했다. "도착했습니다, 사장님." 여자는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자, 내려라." 노신사가 곁에 앉아 있는 여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여자가 겨우 몸을 움직이며 느릿느릿 밖으로 내려섰고, 뒤이어 노신사가 내려서 주위를 둘 러봤다. 현관에서 여자 한 사람이 나왔다. 감색 옷을 입은 키가 큰 여자로, 나 이는 30대 중반으로 보였다. 꽤 미인이었지만, 비서 같은 타입으로 그 웃 는 얼굴은 아무래도 사무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시원스런 걸음 걸이로 가까이 오며 말했다. "서기수 씨죠? 원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늦어서 미안해요." 서기수라고 불리운 신사가 변명스럽게 말했다. "폭설로 입간판이 숨어 버렸기 때문에 찾는데 시간이 좀 걸려서." "그러셨군요. 죄송합니다." 여자는 차에서 내린 젊은 여인을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웃는 얼굴이 되 었다. "저는 이곳에서 사무를 담당하고 있는 장명주()라고 합니다." "아, 그래요, 잘 부탁합니다." "이쪽이 말씀하신 아가씨군요." "예, 제 딸인 다혜입니다. 다혜야." 아버지가 불렀는데도, 딸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단지 서서, 멍청하게 발 아래 작은 돌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혜야, 인사해야지."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장명주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춥지요, 자, 안으로 들어가세요." 서기수는 딸의 어깨를 감싸고 안으로 들어가기를 재촉했다. 두 사람은 장명주의 뒤를 따라서 유리문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넓고 청결한 복도, 간소한 장식, 군데군데 걸려 있는 몇 장의 안정된 풍경화, 부드러운 조명, 난방도 적당하게 조정되어 있어서 대단히 쾌적했 다. 장명주는 두 사람을 복도에서 꺾어진 안쪽 문으로 안내했다. "이쪽에서 기다리세요." 장명주는 그렇게 말하고 모습을 감추었다. 서기수는 코트를 벗고 소파 에 앉았지만, 딸 다혜는 넓은 창을 통해 물끄러미 밖을 내다보고만 있었 다. 우울한 시선 속에는 뭔가 이해하기 힘든 비밀을 감추고 있는 듯했다. 밖은 햇빛을 받은 넓은 잔디로, 10여 명 정도의 여자가 코트로 몸을 감 싸고 제각기 산책하거나 벤치에 앉아 있었다. 평화로운 광경이었지만, 유 리 한 장 사이를 두고 있자니 완전히 별세계의 환영처럼 생각되었다. 응접실 안쪽의 문이 열리고, 건장한 남자가 들어왔다. 50세 전후일까? 머리가 벗겨지고, 조금 남은 머리마저도 하얗게 되어 있었지만, 햇볕에 그을린 얼굴의 윤기는 마치 20대 후반의 청년과 같았다. "서기수 씨군요." 뜻밖에 친절한 목소리였다. "예." 서기수가 급히 소파에서 일어섰다. "아니에요, 그대로 앉으세요. 제가 원장인 강석호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번에 전화를 받았을 때, 대강 필요한 것은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시 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강석호가 다혜를 보고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 "다혜 씨군요." 다혜는 아직도 밖을 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팔에 손을 대자, 천천히 방 향을 바꾸어 강석호를 보았다. "안녕하세요." 강석호가 미소지었다. 그러나 다혜는 아무 말 없이 눈을 아래로 했다. "언제나 이런 식이죠." 서기수가 낙담어린 표정을 지으며 한숨섞인 말투로 내뱉었다. "걱정 마세요. 다혜 씨, 밖을 보고 있었나요?" 다혜가 약간 눈을 위로 뜨고 원장을 보며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 다. "예." "밖에 나가 보지 않을래요? 조금 걸어도 좋은데." 다혜가 잠시 주저하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장이 문을 열고 장명 주를 부르곤 다혜를 밖으로 안내하라고 했다. 다혜가 장명주를 따라서 나 가자, 강석호 원장이 소파에 앉았다. "요전에도 말한 것같이." 원장은 조금 사무적인 말투가 되어 있었다. "이곳의 치료는 다른 정신병원의 치료와는 다릅니다. 약을 사용하는 일 은 거의 없습니다. 환자가 과도한 불면으로 체력이 소모되어 있을 때에, 수면제를 주는 정도입니다. 이곳의 약은 깨끗한 공기이고, 이곳의 치료는 혜택받은 환경입니다. 신경이나 정신의 병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치유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들 은 그것을 도와 줄 뿐입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를 위해서 우리들은 최대한 환자들에게 자유를 허락하고 있습니다. 환자는 이 안에서는 어디라도 갈 수 있고, 무엇을 하건 자유입니다. 식당 은 24시간 개방하고 있고 밤중에 일어나고 낮에 잘 수도 있습니다. 환자 를 무리하게 정해진 시간에 재우거나 깨우는 것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위험합니다. 수면 부족이 계속되어서 히스테리 증상을 일으켜 다른 환자 에게 폭행을 하는 일도 있으니까요." 여기에서 강석호 원장은 약간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러한 우리들의 방침을 비판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환자를 자유롭게 해두면 감시가 소홀해지니 사고를 일으 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실 이 병원이 개관하고 30년 사이에 다섯 사람 의 자살자가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다른 정신병원처럼 엄격한 환자 관리 를 하고 있었다면 어쩌면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마다 요양원 내에서는 세찬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론으로는 우리들은 언제나 종래의 방침을 지키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 사건 때문에 대다수 환자의 회복 기회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서 기수 선생께서 불안을 느끼신다면, 따님을 데리고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예, 그 방침은 잘 알고 있습니다. 대단히 좋다고 생각합니다." "찬성해 주셔서 기쁘군요." 강석호 원장이 미소지었다. "질문이 있습니까?" "글쎄요. 아니, 아무것도." 서기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 분명하게 따님을 맡겠습니다." 강석호 원장이 일어서자 서기수도 당황해서 일어섰다. "저, 면회를 와도 괜찮을까요?" "물론이고 말고요, 언제라도 좋습니다. 면회일, 면회시간이라는 것이 여기에는 없습니다. 형무소가 아니니까요." 마침 그때 문이 열리고 장명주와 다혜가 들어왔다. "밖이 조금 추워서, 주위만 돌아보았습니다." "장명주 씨, 그 아가씨의 입원수속을 밟으세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서기수 씨, 장명주 양이 사무적인 수속을 모두 할 테니까 이젠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돌아가기 전에 잠시 이 아이와 정원을 산책하고 싶은데요." "예, 그러세요. 천천히 안을 둘러보셔도 좋습니다." 서기수는 코트를 입고, 다혜에게도 코트를 입혀서 장명주에게 안내되어 잔디밭으로 나갔다. 응접실 창에서 강석호 원장은 그들 부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쌍하군. 한 번 입원하면 그렇게 간단히 나가게 해줄 수는 없지. 상당히 좋은 돈줄이 될 것 같군. 저 사람은 기업체의 사장이니까.' 강석호는 득의만면한 미소를 지었다. 유창하게 둘러대는 그의 말에 납 득하지 않는 부모는 거의 없었고, 그것에는 자신이 있었다. 30년 동안에 다섯 명의 자살자가 있다고 했으나 누구든 이 정도는 큰 수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또 이런 것까지 설명하는 것은 이 요양원이 양심적이라는 증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누가 실제로 죽은 수 따위를 조사하고 있을 것인가? 조사했다고 하더라 도 알지도 못할 것이다. 가족으로서도 성가심을 덜었다며 안심하는 경우 가 적지 않은 것이다. 장명주가 돌아왔다.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손쉬운 것이지." 강석호가 윙크해 보였다. "상당히 귀여운 여자애지?" "재빨리도 파악하셨군요." 장명주가 강석호를 노려보았다. "저 사람은 돈이 상당히 있는 것 같군." "지금 신원을 조사시키고 있어요. 재산도요." "그러면 우리들로서는 손님을 가능한 한 오랜 기간 체재하도록 힘껏 노 력만 하면 되는군." 강석호 원장이 목소리를 높여 웃었다. 정원으로 나간 두 사람은 마른 잔디를 밟으면서 천천히 넓은 정원의 바 깥쪽을 돌고 있었다. "지수 양, 정말 대단한 여자야." 박점도 반장이 말했다. "쉿! 창에서 보고 있어요." 지수는 전혀 표정을 바꾸지 않고, 입을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 이야기 를 했는데 그나마도 다른 환자가 가까이에 있을 때에는 입을 다물었다. "배우가 될 공부라도 하고 있었소?" "아뇨, 반장님도 상당하시던데요." "황일청 씨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어떨까 생각했었지만 지수 양이라 면 안심이오, 할 수 있을 것 같소." "해보겠어요. 관우 씨를 찾고 말겠어요." "그러나 아무쪼록 무리는 하지 말아요. 초조해 하면 위험하니까."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 원장, 어땠어요?" "가짜예요. 입만 번드레하고, 속은 텅 비었소. 저런 사람은 자주 본다 오. 한마디로 사기꾼 타입이지." "무섭군요." "토요일에 면회하러 올 테니까 뭔가 문제가 있으면 그때 얘기해 줘요." "예, 염려 마세요. 황일청 씨에게 안부를 전해 주세요." 두 사람은 천천히 건물로 돌아왔다. 지수는 박 반장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마음속에 긴장과 투지가 동시 에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황일청 씨의 추리가 맞는다면, 이 곳 어딘가 에 관우가 감금되어 있는 것이다. 지수는 황일청 씨의 말을 믿고 있었다. 관우가 이 곳 어딘가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 자, 그것만으로 가슴이 벅차 올랐다. 하지만 초조는 금물이다. 충분히 주 의하고, 그러나 대담하게 행동하는 거다. 지수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했 다. "서다혜 씨." 장명주가 지수의 어깨를 부드럽게 안았다. "자, 당신은 오늘부터 여기에서 사는 거예요. 당신 방으로 안내하지 요." 지수는 완전히 무표정인 채, 잠자코 걷기 시작했다. 이 무표정의 가면 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정말로 어렵겠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서다혜, 이 이름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순식간에 이 이름이 나오도록 잊지 말아야 한다. 서다혜! 나는 서다혜다, 서다혜다.' 긴 복도를 지나 다음 건물로 들어갔다. 2층짜리 건물로 복도에 계속 방 문이 달려 있었다. 장명주는 지수를 2층의 방 하나로 데리고 갔다. 208호실. 방이 넓지는 않지만, 초록색 카펫이 깔려 있어서 그런대로 정 갈한 느낌이었고 침대와 책상, 책장도 있어서 상당히 멋있는 인상이었다. 지수는 자신의 물건을 넣은 트렁크가 침대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기가 다혜 씨의 방이에요. 이 문 저쪽이 화장실과 욕실, 정면의 창 은 열리지 않도록 되어 있어요. 문은 열쇠가 바깥쪽에서만 잠글 수 있도 록 되어 있습니다." 조금 전과는 딴판으로 매우 사무적인 말투였다. "이것이 짐이지요." 장명주는 지수의 트렁크를 열고, 내용물을 하나하나 조사하면서 침대 위로 꺼냈다. 세면도구, 화장품, 스웨터, 속옷 등등 하나씩 꺼내서 펼쳐 보았다. 지수는 화가 났지만, 가만히 무관심으로 가장하고 있었다. "좋아요." 장명주는 트렁크 뚜껑을 닫았다. "저기에 옷장이 붙박이식으로 되어 있으니까 정리하세요. 알았죠?" 지수는 잠자코 끄덕였다. "잠시 몸검사를 하겠어요." "예?" "만일을 위해서예요. 만약 면도칼이라도 숨기고 있어서 자살하면 곤란 하기 때문에. 손을 조금 올려요." 장명주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지수의 몸을 조사했다. "예, 좋아요. 저녁식사는 6시부터 8시 사이에 좋은 시간에 먹어도 좋아 요. 식당은 이 아래에 있으니 곧 알 수 있을 거예요. 식사 때, 쟁반에 알 약이 따라 나와요. 가벼운 신경안정제니까 반드시 먹어요. 식사 후는 자 유입니다. 도서실은 9시까지 열려 있고 책을 방으로 가지고 와서 읽어도 괜찮습니다. 묻고 싶은 것은?" 지수는 잠자코 고개를 흔들었다. "볼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오세요. 나는 아까 그 사무실에 늘 있으니까. 아, 그리고 매일 아침 10시에 선생님의 회진이 있으니까, 그 시간에는 여 기에 있어요." 장명주가 나가자 지수는 숨을 쉬었다. 무표정을 지키고 있는 것도 피곤 한 일이었다. 지수는 옷을 옷장에 정리하고, 침대에 걸터앉아 방 안을 둘러보았다. 마치 호텔같이 상당히 쾌적한 방이었다. 정신병원 가운데에는 겉모양은 근대적이라도, 환자에게 짐승과 같은 대우를 강요하고 있는 곳이 적지 않 다고 들었다. 황일청 씨가 조사한 바로는 <평화원>에서는 그런 심한 일은 없지만, 선 전 문구 그대로는 아닐 것이니 지수에게 단단히 각오를 해두도록 당부했 었다. 여기엔 호텔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두 가지 있다고 지수는 생각했 다. 창에 끼워진 철책과 열쇠를 안에서 잠글 수 없게 만들어진 문이다. 자유와 프라이버시, 이 두 가지가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지수는 민가영의 집 지하실에서의 황일청과의 만남을 생각했다. 그때 그녀는 정말로 심장이 멈추는 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놀랐었다. 그러나 황일청 씨가 위험한 인물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 편이라고 납득 하는 데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여자의 본능적인 직감으로, 지수는 그를 보는 순간 그것을 믿었던 것이다. 게다 가 황일청 씨는 지극히 명료하고 순서있게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그 직 후 황일청 씨라는 사람의 이상한 매력에 지수는 강하게 끌렸다. 황일청 씨로부터 이 위험한 임무를 들었을 때, 지수는 주저 않고 받아 들였다. 황일청 씨는 그 위험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했지만, 지수의 결 심은 동요되지 않았다. 황일청은 이 요양원이 민태호가 조직한 마약 루트의 한국 거점이라고 보고 있었다. 가영 자매는 매주 토, 일요일에 이 요양원에 갔다 온 것이 다. 지수의 임무는 물론 우선 관우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밀수 루트 에 대해서 어떤 작은 사실이라도 탐지해내는 것이었다. 만일 이것이 가영 에게 알려진다면 살아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수는 해내겠 다고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두꺼운 회색 스웨터와 곤색 치마 등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시계를 보 니 아직 4시였다. 저녁식사 때까지 시간이 너무 많다. 도서실이라고 했 지? 환자들과 이야기해 볼까? 그렇지 않으면 방에 혼자 있는 편이 정말로 신경쇠약자답게 보일까? 느긋하게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수는 방을 나와서 계단을 내려갔다. 아래 복도를 조금 지나자 곧 식당이었다. 넓은 유리창을 통해 안의 모습 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마치 대학의 학생식당처럼 넓은 테이블이 정연하 게 늘어서 있었다. 이 넓이라면 7,80명은 한 번에 식사가 가능할 것이다. 밝고 깨끗한 느 낌으로 모노륨 바닥도 잘 닦여져 있었다. 안쪽의 주방에서는 중년부인들 이 식사 준비로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지수는 복도를 걸어갔다. <간호원 휴게실><세탁실>이라는 패찰을 붙 인 문이 있고, 그 건너편이 도서실이었다. 입구는 넓은데 문은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기 때문에 그녀는 내심 놀랐다. 기껏해야 책장이 하나둘 있을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실 2개 정도의 넓이에 벽 한쪽에 책이 있고, 정면은 잔디밭과 마주해 서 유리창으로 되어 있었다. 소파와 긴 의자가 여기저기에 놓여 있고, 그 옆에 잡지와 신문이 있었다. 지금은 노부인들만 10여 명 소파에 앉아 있 었지만, 자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으로 실내는 조용했다. 지수는 흥미를 느끼고 책장의 책을 바라보면서 슬슬 걸어갔다. 문학서 류는 적고, 실용서, 역사물, 자서전 등의 비교적 가벼운 책들이 많은 것 은 당연한 일일 터였다. 제대로 분류되고, 정리되어 있는 것은 아마 누군 가 정성들여 도서실을 관리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어쨌든 뭔가 읽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지 생각하며 지수는 잡지 선반에 서 읽기에 비교적 무난한 패션잡지를 꺼내어 들곤 빈 소파에 앉았다. 사 진이 실려 있는 페이지를 소리나게 넘기고 있는데 누군가의 그림자가 비 키니 수영복 모델 위에 걸리고, 약하고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군요, 아가씨." 큰 털실 숄을 어깨에 두른 60세 전후의 노파가 부인잡지를 손에 들고 작은 눈을 자주 깜박거리면서 지수를 보고 있었다. 누구지? 어디에서 만났을까? 그녀는 필사적으로 생각해내려고 했다. 만 약 이 노파가 자신을 현지수라고 알고 있다면 큰일이다. 나는 모르는 듯 한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한다. "저, 누구시죠?" 지수는 애써 태연한 모습을 가장하고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노파는 곤란한 얼굴로 지수를 바라보고 있다. 됐어, 이 사람에게도 확 신은 없어.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신 것은 아니에요?" "그래, 그럴까. 그러나 분명히 전에 어딘가에서." "저는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만." 노파는 상당히 자신을 잃은 모습으로 꺼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요?" 노파는 가만히 눈썹을 찡그리고서, 지수의 얼굴을 구멍이 날 정도로 바 라보았다. 어디서 본 것일까 생각해내려고 하는 것이리라. 지수는 이 노파가 전혀 기억에 없었다. 노파가 뭔가 생각해내기 전에 방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했 을 때였다. "어머, 할머니 또 아는 사람이 있어요?" 밝은 목소리가 나고, 약간 통통한 스물두세 살 정도의 여자가 두 사람 쪽으로 왔다. 노파는 방해받아서 기분이 나빠진 것같이, 뭔가 중얼중얼거 리면서 조금 불안정한 걸음걸이로 출구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새로 왔군요." "예." "저 할머니는 신경쓰지 않아도 돼요. 새로 들어온 사람은 누구라도 아 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 같아요." "그래요?" 지수는 내심 숨을 내쉬었다. "나는 남한나예요." "서다혜입니다." "잘 부탁해요." "제가 할 말인데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대를 발견해서 지수는 안심했다. 두 사람은 구 석의 소파에 앉았다. "지금 막 왔어요?" "예, 바로 조금 전에." "그래요? 뭐, 이곳이 그렇게 살기에 나쁘지는 않아요. 나가고 싶다고 생각만 하지 않는다면요." 남한나라는 여자는 쾌활하게 이 요양원에 관한 것을 이것저것 이야기했 다. 환자는 현재 74명으로 모두 여자뿐으고, 3분의 2는 60세 이상의 노인 이라고 했다. "반쯤은 고급양로원이지요. 젊은 여자가 적어, 그동안 이야기할 상대가 없어서 곤란했어요. 우리 사이좋게 지내요." "예."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이곳으로 왔어요?" 지수는 조금 맥없이 털어놓았다. 아직 이 여자를 완전히 믿어서는 안 되었다. "신경증이라고, 의사선생님이 말을 해서." "신경증? 여기에 와서 노인들과 함께 빈둥빈둥 게으름을 피우면 좋아질 까 몰라." "그런데 한나 씨는 왜 여기에." "나? 나요?" 한나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놀라면 안 돼요." "예." 지수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고 몸을 내밀었다. "보름달이 뜨는 밤엔 늑대가 돼요." 두 사람은 크게 웃었다. ** 방에서 잡지를 보고 있는 사이에 10시가 지났다. 지수는 잠옷으로 갈아 입고 불을 끄고 침대로 들어갔다. 졸린 것은 아니었지만, 다음날 아침을 7시에 함께 먹자고 남한나와 약속한 것이다. 지수는 들어온 지 하루만에 한나와 같이 마음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 는 상대를 발견해서 잘됐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정상으로 보이는 한나가 어째서 이런 곳에 들어와 있는 것일까? 한나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 사연 은 이러했다. "요컨대, 귀찮은 것을 치운 거예요." 남한나는 어느 지방의 기업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아 버지가 국회의원에 입후보하게 되자 상대 후보의 진영이 한나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되었기 때문에 스캔들을 두려워한 아버지가 선거가 끝나기까 지라는 약속으로 그녀를 이 요양원에 넣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도 전혀 내보내 주지 않았다. 편지를 보내도 답장이 오지 않고, 전화를 걸어도 연결해 주지 않았다. 남한나는 아버지의 의도 를 알고 여기에서 탈출하려고 생각했지만 자유롭다고는 해도 출입이 엄격 하게 체크되고, 벽은 높아서 도저히 뛰어넘는 것이 불가능했고, 원장의 허가가 없으면 퇴원도 시켜 주지 않았다. 게다가 치료비를 넉넉히 보내 주는데 원장이 퇴원을 허락할 리도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벌써 3년이 지난 것이었다. 불쌍한 이야기였다. 아무리 대우가 좋아도 스물세 살의 여자가 이런 한 정된 장소에 갇혀 있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일까. 내일은 한나에게 요양원을 안내받기로 되어 있었다. 관우 씨의 실마리 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첫째 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순조로워서 어쩐지 낙관적인 기분이 되었다. 저녁식사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함께 받은 알약은 한나의 충고에 따라 먹는 척을 하고 혀 뒤쪽에 넣어 두었다가 나중에 세면장에서 가서 버렸 다. 환자를 얌전하게 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안정제를 먹이는 병원이 있다는 것을 지수는 황일청에게서도 들었다. 가능한 한 약은 먹지 말라고 주의를 받았던 것이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지수는 5,6명의 의사를 보았지만, 모두 아무리 보아 도 70세는 넘었을 노인뿐인 것에 놀랐다. 한나의 설명으로는 어차피 치료 다운 치료는 하지 않기 때문에 의사 수만 맞추기 위해 정년퇴직한 의사를 데리고 오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과 대조적이었지만, 짧은 하얀 옷을 입은 20대의 건장한 남자들이 간호사였다. 아무리 보아도 간호사라고 하기보다 경호원이라는 쪽이 더 어울리는 사람들로 식당과 복도에서 본 것만으로도 10여 명은 족히 될 것 이었다. 지수는 이곳이 마약의 밀수 아지트라면 저 간호사들은 실제론 조 직의 호위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흥분 탓인지 좀처럼 잠들 수 없었지만, 한 시간 정도 지나자 겨우 잠이 와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잠이 들려고 하던 지수는 뭔가 미세한 소리가 나서 눈을 떴다. 처음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가만히 누운 채 귀를 기울이고 있자 복 도를 끄는 듯한 발 소리가 들려왔다. 보통의 발 소리라면 밤의 순찰 정도 로 생각했겠지만, 분명히 그것은 발 소리를 죽인 조심스런 걸음이었다. 바닥을 스치는 소리로만 듣기엔 고무가 달린 구두나 슬리퍼 같았다. 뭔 가 말할 수 없는 불안에 휩싸여서 지수는 침대에서 일어나서 스탠드를 켰 다. 방이 밝아지자, 조금 불안이 진정되었다. 그녀는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 와서 살짝 맨발로 문 근처로 가서는 귀를 기울였다. 발 소리는 계단에서 복도로 이어지고 있었다. 발 소리가 천천히 이쪽으로 와서 지수의 방 앞에서 멎었다. 지수는 문 열쇠를 안쪽에서 잠그지 못하는 것을 생각해내고,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 고 힘껏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발 소리는 또 움직여서 지수의 방 앞을 통과했다. 지수는 겨우 숨을 쉬었다. 동시에 그 발 소리를 생각해냈다. 식당에서 식 사를 하고 있던 간호사들의 하얀 고무가 달린 구두 소리였다. 도대체 무 엇을 하는 것일까? 순찰을 한다고 생각하기엔 발걸음을 죽인 걸음걸이가 아무래도 이상했다.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지수는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르려 고 했다. 그러나 곧 옆방인 것을 알고는 안심했다. 조용했기 때문에 한순 간 자신의 문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옆방 문이 살그머니 열리는 소리가 나고 이어서 속삭이는 여자의 목소 리가 들렸다. "빨리, 빨리." 발 소리가 사라지고 문이 탁 하고 닫혔다. 지수는 아연해서 서 있었다. 설마 간호사가 환자가 있는 곳으로? 아니, 생각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아무튼 여자뿐인 요양소가 아닌가, 게다가 건장한 남자 간호사이다. 지수 는 혐오를 느끼면서 불을 끄고 침대로 들어갔다. 그 소리는 곧 들려왔다. 너무나 조용했기 때문에 듣지 않으려고 해도 저절로 귀에 들려왔다. 침대가 삐걱이는 소리, 여자의 헐떡이는 소리, 때로는 외치는 듯한 날 카로운 괴성이 지수의 귀를 파고 들었다. 지수는 참을 수가 없어서, 침대 에서 일어나서 방의 불을 켜고 책을 읽었다. 소리는 지치지 않고 계속되어서, 진절머리가 난 지수는 창으로 갔다. 커튼을 손으로 열고는 하얗게 서리낀 창문을 닦고 밖을 보았다. 넓은 잔 디가 전등에 하얗게 드러났다. 문에 손을 대자 얼어붙듯이 차가웠다. 밖 은 혹독한 추위일 것이다. 그러다 지수는 잔디 위로 무언가 검은 것이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 무 엇일까. 그것은 분주하게 잔디 위를 돌아다녔다. 개였다. 지수는 섬뜩해 서 몸서리를 쳤다. 그 민첩한 동작엔 과도한 용맹스러움이 보였다. 아무도 도망가지 못하 도록 밤 사이에 저 개를 풀어 놓은 것일 게다. 아무리 쾌적하더라도 그것은 겉으로만일 것이라고 지수는 생각했다. 이 엄중한 경비는 역시 단순한 것이 아니다. 불을 끄고 지수는 또 침대로 들 어갔다. 옆방의 소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아직 대부분의 환자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지수가 갔 을 때 식당은 텅 비어 있었다. 한나는 곧 나타났다. "잘 잤어?" "그저 그래." 지수는 쓰게 웃었다.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한나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무엇을 안다는 것일까. 한나가 어젯밤의 일들을 모두 안다면 이곳에서는 그런 일들이 광범위하게 자행되고 있음을 뜻하고 있는 것일까. 햄버거, 토스트, 홍차로 아침을 마치고 정원으로 나가기로 했다. 두 사 람은 방에서 코트를 가지고 와서 입고, 복도를 통해서 정원으로 나왔다. 어제에 이어진 멋진 날씨였다. 잔디에 아직 환자의 모습은 없었다. 이 추 위라면 당연한 것이리라. 지수는 어젯밤 옆방에 간호사 같은 남자가 숨어 들어간 것을 이야기했다. "흔한 일이야." 한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 간호사들은 건강한 종마 같은 사람들이니까. 이 요양원에서 치료다 운 치료가 행해지는 건 환자에게 생긴 아이를 밖에서 불러온 의사가 지울 때 정도일 거야." 조금 짜증나는 마음이 들어서 지수는 화제를 바꾸었다. "나 이외에 최근에 들어온 사람이 있어?" "글쎄, 최근에는 비교적 적어. 3개월 전에 스님이 들어오고 나서 아무 도 없어." "스님?" "실제로 스님은 아니고, 하루 종일 뭔가 알 수 없는 것을 중얼거리고 있어. 염불 같은 거라서 그렇게 부르는 거야." 한나는 지수의 팔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평화원의 땅은 색다른 구획으 로 되어 있었다. 건물은 모두 일렬로 길게 나란히 연결되어 있었다. 건물 두 개로 양쪽으로 나뉜 한쪽은 반 가까운 넓이를 소나무 숲이 차지하고 있고, 그 한가운데로는 화단으로 둘러싸인 길이 펼쳐져 있었다. 건물 반대쪽은 땅 전체를 둘러싸는 높은 기와벽과의 사이에 폭 10미터 정도의 긴 땅으로 환자는 그쪽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었다. "저기엔 뭐가 있어?" 지수가 물었다. "감옥이야. 모두가 그렇게 부르고 있어. 정식으로는 보호소라고 하지 만." "요컨대, 위험한 사람을 가두는 곳이군." 지수는 문득 생각했다. 사람을 가둬 둘 수 있는 곳이라면, 그리고 관우 씨가 이곳의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면 틀림없이 저 보호소의 한곳이 가장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어떻게든 저 보호소로 가봐야겠다고 지수는 생각했다. "서다혜 양." 방에서 원장의 회진을 기다리면서 잡지를 보고 있던 지수는 장명주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예." "따라오세요." 장명주는 앞장서서 복도를 걸어갔다. 어제 처음에 들어간 건물로 따라 간 지수에게, 그녀가 어두컴컴한 창이 없는 방으로 들어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원장 선생님이 진찰하니까요." 장명주가 그렇게 말하고 나갔다. 지수는 불안한 기분으로 방을 둘러보 았다. 천장도 벽도 카펫도 모두 같은 짙은 붉은 색으로 통일되었고, 조명 은 동그란 형광등뿐이었다. 방 안에 검은 가죽으로 된 의자와 긴 소파, 작은 테이블, 그밖에 가구 다운 것은 방구석에 전화기를 놓은 것뿐이었다. 도대체 이곳이 진찰실일 까? 게다가 회진이라면 의사가 방으로 와서 하는 것인데. 하는 수 없이 소파에 앉아 있자, 문이 열리고 하얀 옷을 입은 원장이 나타났다. "자, 어때요?" "예." "조금 익숙해졌나요?" 원장은 특별히 가벼운 말투로 이곳의 인상 등을 지수에게 물었다. 지수 가 환자답게 애매하게 대답하자, 원장은 일일이 웃음을 지으며 끄덕였다. 문이 열리고 장명주가 커피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자, 커피라도 마시며 천천히 이야기를 할까요?" 지수는 장명주가 나갈 때, 밖에서 문을 잠그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해봤나요?" "남한나 씨하고." 원장이 힐끔 눈썹을 찡그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웃는 얼굴로 돌아갔다. "그 아이는 밝은 성격의 좋은 아이지. 단지 너무 지나쳐서 조울증이 있 지만." 원장은 조금 불안했다. 아무런 이상도 없는 남한나가, 새로 들어온 환 자에게 이상한 생각을 주입시키지나 않았는지 걱정하고 있었다. 지수는 강석호 원장의 태도를 보고 속으로 우스워졌다. 하지만 웃음을 참고 커피를 마셨다. 웬지 맛이 없었다. 싸구려 커피를 탄 것일까? "물론 친구가 생기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에요. 알겠어요?" "예." "오늘 서다혜 양을 부른 것은, 일단 새로 들어온 사람에 대해서 마음 상태를 잘 알아 두고 싶기 때문이에요. 우리들은 결코 강제적인 치료를 하는 일은 없고, 환자측의 자발적인 회복을 기다린다는 방침을 취하고 있 어요. 이것은 시간이 많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에 요. 노이로제라든가, 신경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 원인은 대부분 이 몇 년, 몇 십년에 걸친 경험의 축적이에요. 몇 년이나 걸려서 병이 든 사람은 원래대로 돌아가는데도 같은 세월이 필요해요. 내과나 외과와 같 이 수술이나 약으로 단기간에 장애를 제거하는 것은 이 분야에서는 할 수 없어요, 알겠어요?" "예." 지수는 어쩐지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하품을 참는 것이 고 역이었다. "마음의 병에 대한 치료는 무엇보다도 끈기가 중요해요. 하루 하루를 해이해짐 없이 쌓아가야 해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신의학의 역사는 극히 최근의." 원장의 이야기가 지수의 의식 밖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졸립다. 졸 아선 안 된다! 단정하게 앉아야지. 눈을 뜨자. 그러나 이야기가 단조롭게 계속되고, 그것이 그녀를 더욱 잠 속으로 유혹해 갔다. "현재로서는, 큰 병원에 있어서." 원장은 말을 멈추고 지수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서다혜 양, 서다혜 양." 원장은 살짝 손으로 지수의 어깨를 흔들었다. 지수는 완전히 잠들어 있 었다. 원장은 빙긋 웃었다. 적정량의 수면제에 더해진 따분하고 단조로운 이 야기,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최면술이다. 원장은 지수의 몸을 소파에 눕히고 한동안 자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귀 여운 여자다. 조금 고집이 센 듯한 곳도 있지만 경험이 얘기해 주는 바 그대로 이런 여자는 한번 자기 것으로 해버리면 한없이 연약한 것이다. 원장은 소파 옆에 무릎을 대고 살짝 지수의 얼굴을 손으로 올리곤 그녀 의 자는 얼굴을 보고 있다가, 천천히 지수의 스웨터를 올리고 그 아래로 손을 넣었다. 팽팽히 부푼 가슴이 손에 기분좋은 탄력을 느끼게 했다. 그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원장은 더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성급한 손놀림으로 치마의 호크를 풀고 지퍼를 내리곤 벗겨진 치마를 바닥으로 던졌다. 젊은 여자의 잘 뻗은 다리가 그의 충혈된 눈에 들어왔고, 그는 급히 여자의 몸 을 덮쳤다. 어렴풋하게 의식이 돌아왔다. 보통때 잠에서 깨는 것과는 웬지 다르다 고 지수는 생각했다.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고, 눈꺼풀이 떠 지지 않는 그런 느낌이었다. 겨우 시야가 초점을 맞추자, 낯선 방이었다. 낯설다구? 아니, 여기는 내 방이다. 서다혜, 나는 서다혜야. 여기는 내 방이다. 아직 방은 밝은데 왜 침대에서 자고 있는 것일까? 언제, 어디서 잠들어 버렸을까? 조금씩 생각이 난다. 진찰, 진찰실. 그렇다. 아무것도 없는 진찰실에서 나는 원 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잠들어 버린 것 같다. 정말로 그런 것 같다. 그 래, 졸렸었다. 그때까지는 기억하고 있다. 누군가가 이곳으로 데리고 와 준 것이다. 그리고 침대에 눕혀서 모포를 덮어 주었다. 모포 아래로 손을 움직이다가 지수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 다. 스웨터도 입고 치마도 입고 있는데 속옷이 흩어져 있는 것이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그간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원장은 처음부터 나를 잠들게 할 셈이었다. 커피에 뭔가 넣었던 것이다. 무엇 때문에? 물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대답은 확실했다. 아, 나는 어떻 게 되어 버린 것일까! 그때 머리 위에서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떴군요." 그녀는 놀라서 침대에서 일어섰다. 창가에 하얀 옷을 입은 30대 초반의 여자가 담담히 서 있었다. "내가 여기로 데리고 오게 했어요." 아름다운 여자였다. 조각같이 매끄러운 피부. 너무나 정돈이 잘된 얼굴 이었다. 그러나 너무 뚜렷한 윤곽을 가진 얼굴이기에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은 얼굴이었다. "당신은 누구세요." 지수가 물었다. "나는 이곳 사람이에요." 그 여자는 지수에게 얼핏 웃음을 보였다. "지금, 11시 반이에요. 점심식사 전에 샤워라도 하면 머리가 산뜻해질 거예요." 지수는 모포 아래에 놓인 자신의 몸을 마치 타인의 몸을 바라보는 것 같이 흠칫거리며 쳐다보았다. "또 만나요." 하얀 옷을 입은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지수의 방을 나가려고 하다가 입구에서 다시 뒤돌아보았다. "서다혜 씨,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예?" "아무 일도 없었어요, 괜찮아요." 그녀는 나갔다. 멍청해진 지수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서 창의 커튼 을 치고 문을 조금 열어서 근처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선 재빨 리 속옷을 바꾸어 입었다. 그 여자의 말로 어쩐지 기분이 안정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도대체 누굴 까? 그러다 지수는 흠칫했다. 그만큼 황일청 씨에게서 들었는데도 왜 곧 알지 못했을까. 그 여자는 틀림없이 민가영일 것이다. 거의 같은 시간에, 민가영은 하얀 옷의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보호 소로 연결된 복도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좁은 복도를 건너서 보호소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녀는 주변이 좀 어둡다고 생각했다. 창이 작은 만큼 조명을 밝게 해놓았지만, 그래도 계속 닫혀진 문이 늘 어서 있을 뿐, 이 건물 안에는 조용한 어둠이 떠돌고 있었다. 형무소의 독방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복도를 걸으면서 생각 했다. 그녀는 지하실에서 청춘의 몇 년 간을 보낸 막내 하영이를 생각했 다. 그애가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가영은 가장 구석진 방 앞에 당도하자,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곧 창문 이 열리고, 간호사의 얼굴이 보였다. "나예요." 가영이가 말하자 곧 문이 열렸다. 가영은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서 잡지를 읽고 있던 관우가 가영을 보고 허리를 세우며 입을 열었다. "얼마 동안 못 봤군요." "외출했었어요. 상태는 어때요?" "몸이 근질근질해서 미칠 것 같아요." "좋아지고 있는 증거예요. 조금만 더 참으세요. 양쪽다리 골절은 그렇 게 간단하게 치료되지 않아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 하루가 길군요." 가영은 간호사에게 손짓을 해서 방에서 나가게 하고는 침대 옆에 의자 를 가지고 와서 앉았다. "오늘이 며칠입니까?" 관우의 물음에 가영이 간단히 대답했다. "2월 5일이에요." "이제 시간 감각이 완전히 없어져서." 관우는 조금 말랐지만 혈색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이젠 가르쳐 주어도 되겠지요?" "무엇을?" "여기가 어디인지, 나를 어떻게 할 셈인지." "그것은 아직 말할 수 없어요. 당신이 완전히 좋아지면 가르쳐 줄께 요." "병원이나 그와 비슷한 곳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내가 경영하고 있는 요양원이에요." 가영은 아주 가벼운 말투였다. "어디 갔다 왔습니까?" "서울에요. 볼일이 있어서." "하영 씨는 발견되었습니까?" 가영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찾으려고 해도 단서 하나 없어요." "왜 서울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가영은 잠시 아무 말 않고 있다가, 이윽고 탄식하면서 말했다. "좋아요, 가르쳐 드리지요. 하영이는 서울에서 최근 두 달이 채 안 되 는 사이에 세 사람을 죽였어요." 관우는 눈을 크게 떴다. "누구를 말입니까?" "변호사, 음악가, 의사." "알고 있는 사람입니까?" "아뇨, 나는 전혀 몰라요." "그러면 왜." "나로서는 알 수 없어요." 관우는 조금 생각하고 나서, 눈썹을 모으며 물었다. "왜 하영 씨가 했다고 단정짓는 거지요?" "지영이를 찌른 것과 같은 칼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칼을 남기고 있는 겁니까?" "예, 그 칼은 아버지가 독일에서 산 6개가 한 쌍인 희귀한 제품입니다. 그애는 저택에서 탈출할 때 지영이를 찌른 한 개 이외에 다섯 개를 가지 고 갔어요." 관우는 힐끔 탐색하는 눈길로 가영을 보았다. 가영이 탄식과 함께 말을 계속했다. "칼은 아직 두 개나 더 남아 있어요. 하영이가 어째서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어떻게 할 수도 없어요, 손은 쓰고 있지만 경찰보다 빨리 하영이를 발 견할 수 있을지, 나로서는 자신이 없어요." 가영은 뭔가 필요한 것은 없는가 묻고, 관우가 고개를 흔들자 조금 미 소를 지어 보이곤 방을 나갔다. 관우는 혼자가 되자, 잠자코 허공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관우는 열흘 정도 양평의 민가영의 집 지하실에 있으면서 깊은 밤, 민가영이 데 려온 의사의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어느날 밤, 하얀 옷을 입은 크고 강 인한 남자들이 몇 사람 들어와서 그에게 마취를 하곤 들것으로 이곳에 옮 겨왔던 것이다. 모포에 싸여 큰 승용차 뒷좌석에 태워진 것은 기억하고 있지만 그 후로 는 잠들어 버렸고, 정신이 들고 나서야 이 방에 누워 있는 걸 알았다. 민가영은 도대체 무엇을 생각해서 그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일까? 관 우로서는 대강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나는 하영의 일을 경찰이 알지 못 하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아무리 살인광이라도, 동생은 동생이다. 가 능하면 자신의 힘으로 발견해서 또 은밀하게 감금해 둘 셈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여기로 옮겨지고 난후 잠시 동안은 신문 도 잡지도 볼 수 없었고, 라디오도 들을 수 없었다. 아마 민지영의 살해 용의자로 내가 수배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외에도 덕자와 집사도 죽인 . 하지만 관우가 완전히 나았을 때, 그녀는 어떻게 할 생각일까? 그녀는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여자라고 관우는 생각했다. 아무도 모르게 죽일 셈이라면 일부러 치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관우를 자유롭게 해준다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하지만 지금은 걱정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 기 때문에 회복하는 것을 가만히 기다리는 것밖에는. 지수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걱정하고 있겠지만, 어떻게 해줄 수도 없 다. 지수는 가만히 아파트에서 자기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다. 관우는 그녀의 따뜻한 미소를 떠올리며 저며오는 기분을 달랬다. 3 요양원에 온 지 3일째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 이틀간 계속 내렸다. 따분한 시간을 지수는 대부분 도서실에서 보냈다. 다행히 책은 많이 읽기 때문에 시간을 보내는 것은 쉬웠다. 때때로 한나와도 이야기를 했지만, 밖에 있을 때처럼 마음대로는 이야기할 수 없었다. 한나 이외에도 몇 사람의 환자와 사귀었다. 가벼운 증상의 사람이 많아 서 이야기를 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여기 사람들은 다만 보통사람과 약간 다를 뿐이었다. 어느 부인은 털실 로 같은 것을 계속 짜고 있었다. 무엇을 짜고 있는가를 묻자, 그만 울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곧 웃는 얼굴이 되어서, 벌써 3미터나 되는 것 을 발 아래에서 들어올렸다가 계속 뜨는 것이었다. 어느 초로의 부인은 지수가 자신의 딸과 닮았다고 했다. 딸의 어릴 적 추억에서 시집갈 때까지의 고생스러운 이야기, 지금은 손자가 세 명이나 있다고 싱글벙글하면서 이야기를 했다. 나중에 한나가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그 귀여운 딸이 결혼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하면서 어머니를 이곳에 넣 어 버렸어." 지수는 또 문학을 좋아하는 소녀와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열일곱 살 로, 상당히 귀여운 소녀였다. 벌써 이곳에 온 지 2년이 지났다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눈물을 흘려서 지수를 곤란하게 했지만, 이야기 가 문학에 관한 것이 되면 사람이 바뀐 듯이 웅변을 했다. 어디에나 있는 감상적인 소녀였지만, 다만 때때로 아무것에나 불을 붙 여 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그녀의 가까이에는 성냥이나 라이터류는 절대 로 두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제외하면 무엇 하나 문제가 없는 평범한 소녀였다. 지수는 정신병 환자에 대해서 그때까지 품고 있었던 막연한 개념을 크 게 수정했다. 그들은 보통사람과 전혀 다른 것이 없었다. 아니, 보통사람 이기 때문에 병에 시달림받는 것이었다. 단지 하나, 상식을 벗어나 있을 뿐이고 그것이 그들을 이곳에 수용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식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지수는 가끔 생각했다. 아무런 해도 없는 이곳의 사람들보다 훨씬 불쾌한 사람들이 세상에는 넘치고 있지 않 은가? 도대체 누가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에 선을 긋는 것일까. 중요한 탐색은 전혀 진척이 없었다. 눈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 고, 환자들과의 이야기에서 얻을 것도 없었다. 강석호 원장은 그 이후 지 수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 회진도 건성이었 다. 지수는 매일 밤 잠들 때에는 문의 손잡이와 침대 다리를 수건을 찢어서 만든 끈으로 단단히 묶어서 문이 열리지 않도록 해놓았다. 눈이 그치고 멋진 날씨가 되었다. 지수는 혼자서 아직 눈이 남아 있는 잔디로 오후의 산책을 나왔다. 다른 환자의 모습은 없었다. 공기는 얼어 붙을 것처럼 차가웠지만, 그 투명함은 도시 사람에게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뒤쪽 하늘에 우뚝 산들이 솟아 있는데 이렇게 먼 곳에 서도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잔디에서 정원길로 들어갔다. 그러다 문득 지수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저 보호소로 들어갈까를 생각했다. 위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험은 이미 익히 알고 있는 것이고, 이대 로는 언제까지나 사태가 진척되지 않을 것이다. 결심을 하자 지수는 정원 을 나와서 자기가 있는 건물의 보일러실과 기계실이 있는 곳을 연결하는 복도로 걸어갔다. 복도는 지면에서 1미터 정도 높게 되어 있어서 아래를 통과할 수가 있 었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지수는 허리를 숙여 복도 아래를 통과했다. 뒤쪽으로 나와서 허리를 펴고, 그녀는 건물 모서리에서 저쪽 안쪽을 살 짝 들여다봤다. 벽돌담과 건물가에 있는 긴 땅이 계속 도로처럼 보이고, 소형 트럭과 석 대 정도의 승용차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보호소는 지수가 있는 생활관의 반 정도 크기의 단층건물이었다. 그 뒤 쪽으로 돌아가 보니 밋밋한 벽에 작은 창이 달려 있었다. 창에는 철장이 끼워져 있고 모두 커튼이 처져 있었다. 지수는 눈이 쌓인 발 아래에 주의하면서 가까운 창가로 다가갔다. 눈을 밟으면 발 소리가 거의 나지 않기 때문에 쉽게 창가로 도착할 수 있었다. 커튼 틈이라도 없을까 하고 찾아보았지만 발견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안을 들여다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창의 위치가 너 무 높고 가까이에 발을 디딜 만한 것도 없었다. 지수는 관우의 이름을 부 르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제했다. 지수는 창 아래에서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에 뭔가 소리라 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지수는 야수 의 낮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돌아보자, 검은 개가 겨우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지수는 슬슬 일어섰다. 이렇게 눈앞에서 보자, 며칠 전 밤에 창문을 통 해 보았던 것보다 그 크기가 훨씬 커 보였다. 보기에도 민첩하고, 용맹스 러운 개였다. 가슴이 나오고 다리는 가늘고 길었으며 짧은 귀를 쫑긋 세 우고 입을 반쯤 벌리고 있는 모습은 흔히 보는 개의 모습이 아니라 먹이 를 앞에 둔 하이에나와도 같았다. 더구나 계속해서 으르렁대는 그 낮은 소리는 지수의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날카롭게 뻗은 이가 빨간 입 속으 로 보였다. 달려들까? 지수는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덤벼들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개는 언제라도 달려들 것같이 자 세를 낮게 하고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 이빨로 목을 물린다면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개는 짖지 않았다. 그러나 단지 낮게 으르렁거리고 있을 뿐이어서, 그것이 한층 더 두려웠다. 이대로는 있을 수 없었다. 지수는 잘 훈련된 개는 주인이 '덤벼라'라는 명령이 없으면 결코 덤비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개가 그렇게 잘 훈련되어 있다고는 단정지을 수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들어오면 공격하도록 무조건 훈련받았다면? 그러나 때로는 환자가 모르고 들어오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공격 적으로 훈련되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어쨌든 해보는 수밖엔 길이 없었다. 언제까지나 못박힌 듯이 서 있다가는 그러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발각되어 버릴 것이다. 지수는 신중하게 한 발 내딛으려고 했다. 그러자, 개가 부드럽게 몸을 낮추고 공격자세를 취했다. 지수는 또 걸음을 멈추었다. 땀이 흘러내렸 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마르고 코트 주머니에 넣은 손이 축축히 젖어왔다. 개는 움직이지 않았다. 지수는 결심하고 개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빠져 나온 복도를 향해서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돌아가려고 하는 의지 를 명확히 하려고, 특히 한 걸음 한 걸음을 과장되게 내딛었다. 개가 가 만히 자기의 움직임을 쫓아서 방향을 바꾸고 있는 것을 그녀는 등 뒤로 느낄 수 있었다. 개는 덤비지 않았다. 지수는 개에게 등을 보이고 조금 걸음을 빨리 했 다. 그러나 달리면 오히려 위험할 듯한 기분이 들어서 단지 걷는 속도를 빨리 했을 뿐이다. 먼 거리도 아닌데, 마냥 길게만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당장 등에 개의 무게가 덮쳐 누르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어 그녀 는 오금이 저렸다. 겨우 복도에 도착하자, 발이 엉켜서 구를 뻔하면서도 그녀는 전속력으 로 달리기 시작했다. 정원의 화단을 넘고, 잔디로 뛰어들어서야 겨우 발 을 멈추었다. 숨이 끊어질 것 같았고, 차가운 공기에 목이 아팠다. 벤치에 앉아, 어깨로 심하게 숨을 쉬고 있는데 어느 틈엔가 남한나가 앞에 서서 기막힌 얼굴로 지수를 보고 있었다. "뭐하고 있어? 이런 곳에서 백미터 달리기 연습이라도 하고 있는 거 야?" 그날밤 12시를 지나서, 원장실에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원 장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강석호가 아니고, 민가영이었다. 소파와 내빈용 의자에는 강석호 원장과 장명주, 그밖에 세 사람의 의사 와 간호사 옷을 입은 사내가 한 사람 앉아 있었다. 민가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 모이게 한 것은 새로운 계약에 관해서 알려 주려고 생각했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잠시 말을 끊고 그녀는 좌중을 한번 훑어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먼저 여러분이 보고할 것이 있으면 듣겠습니다. 장명주 씨, 당신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강석호 원장이 장명주의 뒤를 이어 약간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뭐, 다 순조롭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다만." "뭐예요?" "최근 경비가 특히 많이 들어 수지가 겨우 맞고 있습니다. 조금 절감하 지 않으면." "필요 없어요. 요양원에서 이익을 올리는 것은 오히려 세무서 등의 관 심을 끌어서 위험해요. 적자가 되면 값을 올리면 돼요. 대우를 떨어뜨리 는 것은 그만둬요. 평화원은 어디까지나 나무랄 데가 없는 시설이어야 해 요." "알겠습니다." "당신은 어때요?" 민가영은 세 사람의 의사 중 한 사람에게 물었다. "이쪽도 문제 없습니다." "나이든 의사들은 아무것도 모르지요?" "염려 없습니다. 모두들 적당히 흐리멍텅한 사람들뿐이니까요. 환자가 오히려 야무질 정도니까요." "그러면 됐어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알아내지 못하게 일부러 그러한 의사를 골랐으니까요." 가영의 물음은 계속되었다. "간호사들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간호사의 책임자 같은 사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요?" 민가영은 한숨 돌리고 원장을 한동안 응시하면서 뭔가 생각을 하더니, 아주 단호한 음성으로 말을 했다. "내가 한 마디 해둘 말이 있어요." 원장이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저번에, 나는 어떤 사람이 새로 들어온 젊은 여자 환자를 약으로 잠들 게 하고는 폭행하려고 하는 것을 발견해서 아슬아슬하게 중단시켰습니 다." 원장은 얼굴이 빨개져서 물끄러미 아래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그 여자가 부모에게 호소해서, 경찰이 개입한다면 이 조직 자체가 위험에 빠지는 겁니다. 모두 명심해 두도록 하세요. 그리고 간호사 가운데에는 환자를 밤중에 방문하는 색다른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 같더군요." "아니, 그것은." "뭐, 상대가 바라는 일이라면 조금은 눈감아 줄 수 있어요. 그러나 폭 행사건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것은 충분히 주의하고 있습니다." 간호사가 얼굴의 땀을 닦았다. "그러면 일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가영은 사무적인 어투로 자신의 말을 계속했다. "전번에 서울에 가서 어느 부인들의 모임과 접촉했습니다. 중개인을 통 해 교섭했는데, 단 한번의 계약만으로 약 3억 원이 될 전망입니다." 일제히 탄성을 터뜨렸다. "훌륭합니다!" 강석호 원장이 고개를 크게 끄덕거리며 말했다. "기존의 루트로의 약 공급이 조금 정체되고 있습니다. 경기실업 사모님 으로부터 심하게 독촉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약의 수입이 늦어지고 있는 탓입니다." 의사 한 사람이 끼어들었다. "게다가 새로운 종류가 필요합니다. 고객은 새로운 자극을 요구하고 있 습니다." 민가영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장명주가 서류를 보면서 말했다. "어제, 새로운 약이 도착했습니다." 일동이 잠시 술렁거렸다. "약의 이름은 '갈채'입니다. 상당히 강렬한 효과가 있을 것 같아요." 가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곤란한 것은 이번 약에는 주사의 적량이 쓰여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농도를 말입니까? 그러면 곤란한데요." 강석호가 말했다. "그러면 팔 수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뭔가 실수였겠지요." "어떻게 합니까?" "실험해 보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가영의 대답은 이렇게 태연했다.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환자 가운데에서 가족이 면회하러 오지 않고, 증상이 어떻게 되어도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환자가 있으면 그 환자에게 새로운 약을 시험해 봅시다. 적당한 환자가 있나요?" 강석호 원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남한나가 좋겠군요." ** "대우는 어때요?" "예, 견딜 만해요. 경계는 엄중하지만, 얌전하게만 있으면요." "그렇다면 잘됐군요." 박 반장은 안심한 모습이었다. 아버지와 딸은 눈이 남아 있는 정원을 한가롭게 걷고 있었다. 지수는 민가영을 본 것과 관우가 보호소에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미안해요, 대단한 것을 알아내지 못해서." "무슨 말을 하는 거요? 겨우 일주일이잖소. 초조해 해서는 안 돼요." "예." "편지와 전화는 어떻게 되어 있지요?" "편지는 우체통에 넣어 두면 보내 주기로 되어 있지만, 내용을 검열하 지 않는다고 할 수 없어요. 전화도 사무실의 것을 사용할 수 있지만, 거 기선 직원에게 모두 들리니까 위험하지요." "안하는 편이 좋겠군." 박 반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일청 씨로부터의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선물요?" 박 반장은 코트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어 안에서 꽃무늬의 도기 ()로 된 브로치를 꺼냈다. "예뻐요!" 지수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멋있죠? 황일청 씨의 취미가 워낙 고급이니까." "멋진 색이군요." "감탄하지만 말고 뒤쪽을 만져 봐요. 작게 튀어 나온 것이 있죠?" "예." "위험이 닥쳤을 때는 그것을 눌러요. 그 브로치는 소형 발신기예요." "어머, 마치 스파이 영화 같군요." "예산이 그다지 없어서 초소형 고성능 마이크는 부착하지 못했소. 단지 짧은 신호를 계속 발진할 뿐이오. 유효 범위는 600미터." "겨우?" 지수는 실망한 듯한 목소리로 '겨우'라는 말을 한 번 더 반복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는 지금 이 요양원과 길을 마주한 어느 회사의 휴양소에 있어요." "황일청 씨도요?" "물론이오. 그 휴양소와 여기는 가장 먼 끝과 끝이라도 500미터 정도의 거리이기 때문에 그 발신기로 충분히 도달해요." "모두 거기에서 대기하고 있나요?" "사흘 전부터. 다른 휴양소나 여관에도 손님을 가장해서 형사가 묵고 있소. 전부 30명 정도는 될 거요. 모두가 지수 양의 신호만 기다리고 있 어요." 지수는 새로운 흥분으로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반드시 해낼 거예요!" "하지만 아무쪼록 초조해 해서는 안 돼요. 신호가 있으면 몇 분내에 이 곳으로 올 수 있지만, 그때까지는 지수 양 자신이 스스로를 지키지 않으 면 안 되니까." 지수는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일청은 현대적인 철근 2층 건물의 휴양소 방에서, 방금 도착한 한 통 의 전보를 읽고 있었다. 얼굴에 굵은 주름이 질 정도로 깊이 생각하면서 벌써 몇 번이나 읽은 그 전문을 다시 읽었다. "황일청 씨!" 박 반장이 들어왔다. "어떻게 되었소? 지수 양은." "대단합니다. 우리 과로 와 주었으면 좋을 정도입니다. 지금까지는 별 문제 없습니다." "발신기는 전해 주었겠지요?" "예." "그 아가씨는 다부진 만큼 위험한 일도 태연하게 할 수 있을 거요." "주의하라고 충분히 말했습니다." 박 반장이 소파에 앉아서 기지개를 켰다. 최근 사흘간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반장님." 문이 열리고 박점도의 부하인 젊은 형사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 최 형사. 무슨 일이지?" "부탁한 사다리, 저녁에는 준비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좋아, 알았어." 형사가 나가자 박 반장이 황일청에게 말했다. "저 친구, 젊지만 사격솜씨가 대단한 사람입니다." 황일청은 반장의 말엔 대답도 않고 잠자코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모 습이었다. "뭔가 걱정이라도 있습니까?" "조금." "지수 양의 일이라면 염려 없습니다. 당찬 아가씨예요. 아, 그렇지, 요 양원에서 나의 신원과 재산을 조사하러 왔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없었겠죠?" "황일청 씨가 준비를 다 해 놓으셨으니까요, 문제가 있을 리가 없습니 다." "주간지 체크는?" "눈에 띌 것 같은 것은 전부 조사했습니다." 지수의 사진이 만약 민가영의 집에서의 살인에 관련되어 어딘가에 게재 되어 있어서 가영의 눈에라도 띈다면, 지수의 신원은 밝혀지게 된다. 그 렇게 되면 모든 것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결국 지수 양이 말했던 여성주간지 하나뿐입니다. 그러나 그 사진으로 는 도저히 지수 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됐군." 황일청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박 반장은 그가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전보입니까?" "그래요, 이것이 두통의 원인이라오." "뭐죠?" "파리 경시청의 노와레 형사반장으로부터 온 전보요. 그와는 개인적으 로 친하지. 상당히 우수한 사람이오." "뭐라고 쓰여져 있습니까?" "세느강에서 한 남자의 시체가 떠올랐소. 벌써 반 년 전의 시체라고 하 는데, 쇠사슬로 콘크리트 블록에 묶여져 있었던 것이 풀려져 떠올랐던 것 같아요." "살인이군요." "그가 동양인 같아서 노와레 반장은 내가 부탁했던 것을 생각해서 조사 해 봤다고 하는 것이오." "어떤 조사인지." "신원불명의 한국인 같은 시체를 발견하면, 그것이 민태호인가 조사해 달라고 말해 두었었소." "비행기 사고로 죽은 게 아닙니까?"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사해 달라고 말해 두었소. 그러나 이제 의 문의 여지가 없소. 세느강에 떠오른 것은 바로 민태호였으니까." "그러면 역시 비행기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었군요." "그렇지. 적어도 반 년 이상 전에 총살당해 세느강에 가라앉아 있었던 것 같소. 치과의가 민태호라고 최종확인을 했다고 해요." "그렇게 되면 약의 밀수 루트는 어떻게 되는 거지요?" "나로서는 그것을 알 수가 없소. 국내에서의 보스는 민가영임에 틀림없 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녀가 가까운 시일 내에 유럽에 갈 생각이었던 것 은 알 수 있소.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어 가정교사를 고용할 정도였으니 까." "아버지의 후계자가 될 생각일까요?" "그것이 이상해. 아버지가 죽었다든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걸 안다면 곧 유럽으로 갔을 터인데, 나간 흔적은 전혀 없고. 지금도 저 요양원 안에 그녀가 있는 것으로 봐서는 유럽 쪽을 맡길 수 있는 누군가 상당히 견실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지." "누가 민태호를 죽였을까요?" "조직의 붕괴나 세력다툼이겠지. 그러나 나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신용 할 수 있는 사람을 통해 저 요양원을 감시해 왔었다오. 그러나 움직임은 아무것도 없었어. 보스를 잃은 조직이 당황하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 는데." 황일청도 민태호가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그는 확실하게 죽은 것이다. 황일청은 호적수를 잃은 쓸쓸함을 느꼈다. 두 사람은 같은 종류의 사람 이었던 것이다. 추구하는 것은 정반대라도, 두 사람은 닮았다. 같은 것에 웃고, 같은 것에 화를 냈다. 그러한 상대는 좀처럼 있는 것이 아니다. 황일청은 민태호를 죽인 자에 대해 분노를 느꼈다. 그러면서 황일청은 적어도 그가 제발 고통받지 않고 죽었기를 빌고 있었다. "연속 살인사건의 수사는 어떻게 되고 있소?" "전혀 진척이 없습니다. 급행에 뛰어든 여자가 우연히 범인과 닮았다고 하는데." "그 가게의 여자 종업원은 범인을 봤나요?" "그녀는 기억력이 좋습니다. 젊은 탓이겠지요. 그 자살한 여자와 그녀 가 제시한 얼굴의 몽타주가 비슷해요." "두 차례나 직접 얼굴을 맞대고 있었으니까." 박 반장이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그 여종업원에게 얼마 전에 전화를 했는데, 벌써 가게를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그래요?" "무리도 아닙니다. 근무하는 곳 바로 앞에서 살인이 있었으니까요." 황일청은 조금 웃었다. 머리는 아직 손에 들고 있는 전보로 가득차 있 었다. 민태호가 죽었다. 그의 뒤를 도대체 누가 이었다는 것일까? 11시가 되었기 때문에, 지수는 잠옷 위에 따뜻한 나이트가운을 입고 한 나의 방으로 갈 준비를 했다. 요즘 지수와 한나는 매일 밤 서로 상대의 방을 방문해서 밤 늦게까지 이것저것 이야기하고 있었다. 밤에는 회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12시가 되면 옆방에서 언제나 괴 성이 들려오기 때문에 방에 있기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복도의 추위를 생각해서 두꺼운 양말에다 슬리퍼를 신고 문에 손을 대 었을 때, 계단을 올라오는 발 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이 아니었다. 세 사 람 정도일까. 살며시 오는 발 소리가 아니고 뚜벅뚜벅 걷는 사무적인 발 소리 같았 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자 발 소리가 복도 저 안쪽에서 멈추었다. 사 람의 목소리가 잠시 들리는 것 같았지만, 곧 사라지고 2,3분 지나서 또 발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일까? 호기심에 휩싸여서 지수는 발 소리가 지나가는 것을 기다려서 문을 살 짝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간호사의 모습이 조금 보인 순간 지수는 그만 소리를 지를 뻔했다. 간호사의 건장한 어깨에 축 늘어진 한나가 올려져 있는 것 이었다. 한나의 나이트가운 모양과 색깔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약으로 잠을 재웠는지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지수는 아무 생각도 없이 방을 나와 그들의 뒤를 쫓았다. 틀림없이 강 석호 원장의 지시일 터였다. 한나를 폭행하려는 것이겠지. 내버려 둘 수 는 없어. 어떻게 해서라도 도와 줘야 해. 이렇게 단단히 마음을 정하고 지수는 계단을 내려갔다. 발 소리가 나기 때문에 슬리퍼를 벗고 양말만으로 걸었다. 흰옷의 두 사람과 한나를 멘 간호사가 사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밖으로 데리고 가는 것일까? 세 사람은 도중에 옆 복도로 꺾어졌다. 서둘러 뒤쫓아가서 본 지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거기엔 분명 음료수 자동판매기가 놓여 있었는데, 그것이 마치 문처럼 열리고 뒤쪽 벽으로 통하는 입구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곳으로 세 사람은 한나를 운반해 가는 참이었다. 비밀통로였다. 도대 체 무엇이 그곳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일까? 무모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 수는 그곳으로 다가가 살짝 안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모두 내려가 버린 것 같았다. 계단이 도중에 왼쪽으로 꺾 여져 있기 때문에 아래쪽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잠시 망설이고 있는데 갑자기 음료수 자판기가 움직이고 입구가 닫히려고 했다. 누군가 자동으로 조작하는 것이리라. 앞으로의 일을 생각 해 보지도 않고 반사적으로 지수가 안으로 뛰어들었을 때, 등 뒤에서 입 구가 딱 닫혔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 그녀에게 퇴로는 없어진 것이다. 지수는 다시 각오를 하고, 살며시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자 좁은 통로가 좌우로 있는데, 왼쪽으로 돌자 튼튼한 철 문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돌자 보통문이 있고, 그대로 열린 채여서 안에서 이야기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벽에 몸을 딱 붙이 곤, 숨을 죽이고 살짝 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조그만 교실 정도나 되는 넓은 방에 천장도 벽도 콘크리트였지만, 바닥 만은 식당과 같은 모노륨이 깔려 있었다. 그 바닥 중앙에 큰 테이블이 있고 그 위에 한면이 2,3미터 정도인 카펫 이 깔려 있는데, 바로 거기에 나이트가운을 입은 한나가 누워 있었다. 한 나를 둘러싸고 서 있는 사람들은 강석호 원장, 장명주, 간호사 세 명이었 다. "3%부터 시작하지요." 장명주가 말했다. "아니, 괜찮아. 7%로 가지." 강석호가 대답했다. "당치 않아요." 장명주가 외쳤다. "아니, 아무렇지도 않아. 얘는 튼튼하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조금씩 양을 늘려갈 시간이 없어. 그렇지?" "예." 장명주가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가씨가 오시고 나서 하지요." "뭘 걱정하고 있는 거야! 그 여자가 뭘 안다는 거야? 건방진 말만 하 고, 우리가 그 여자에게 뭐 그렇게 굽실댈 필요가 있어?" 원장은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장명주가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요전에 서다혜를 건드리려다 실패했기 때문에 화내고 있는 거죠?" "제기랄! 조금만 있었으면 됐는데. 그 건방진 여자가 와 가지고 ." 자신의 이야기라고 지수는 생각했다. 그리고 '아가씨'라고 하는 사람은 민가영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나에게 맡겨, 괜찮아. 자, 준비하자." 원장은 방 한쪽에 있는 유리상자더미 쪽으로 가서 상자를 열고, 주사기 를 꺼냈다. 다른 두 사람도 따라가서 발 아래의 골판지 상자에서 종이 포 장이 된 것을 꺼내서 종이를 찢기 시작했다. 지수는 곧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인체실험이었다. 밀수입한 약의 효과 를 조사하기 위해 이렇게 환자들 가운데에서 누군가를 선택해서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심한 분노가 끓어 올라왔다. 그러나 지금은 나갈 수가 없 다. 어떻게 한나를 구해낼 방법이 없을까? 그녀는 부르르 주먹을 떨며 주 변을 살펴보았다. 그 브로치! 지금이라면 현장을 잡을 수 있는데. 그러나 그녀는 브 로치를 방에 놓고 온 것을 깨달았다. 지수는 세 사람이 모두 이쪽으로 등 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보며 필사적으로 방법을 찾았다. 어쨌든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야 했다. 입구에서 가까운 벽 한쪽 구석에 빈 골판지가 쌓여 있었다. 가만히 보니 벽과의 사이에 조금 틈이 있었다. 지수는 바람처럼 그쪽으로 들어가서 골판지 뒤로 몸을 숨겼다. "정말로 괜찮겠어요?" "내게 맡겨 둬." 원장은 작은 접시에 쏟은 용액을 주사기로 빨아들이고는, 바늘을 위로 향해서 거품을 밀어냈다. "효과가 어떨까?" 즐기는 듯한 말투였다. 지수는 뭔가 방법이 없을까 계속 생각했지만, 상대가 세 사람이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간호사가 한나의 나이트가운을 벗기자, 원장이 몸을 구부려서 잠옷의 소매를 걷어올리곤 아무렇게나 바늘을 꽂았다. 지수는 자기도 모르게 눈 을 돌렸다. "자, 그러면 천천히 구경하지." 원장이 일어섰다. 그때 발자국 소리가 나고, 열려진 문으로 민가영이 들어왔다. 그녀는 지수가 숨은 골판지더미 앞을 지나 그들에게로 곧바로 걸어갔는데, 발자국 소리를 듣고 지수가 재빨리 몸을 숨겼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가영은 변함없이 흰 옷차림이었다. "지금 막 주사를 놓았습니다." "왜 기다리지 않았지?" 가영이 날카롭게 힐문하자, 강 원장이 간사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도 이제 익숙해졌으니까요. 날 믿으셔도 좋습니다." "농도는?" "7%입니다." "뭐라구요?" "괜찮습니다. 언제나 그 정도까지는 시험하고 있으니까." "이 약물은 이번이 처음이고, 더구나 적량도 알 수 없잖아요?" "조금 많이 주입했다고 해서 죽지는 않아요, 괜찮아요." "전에 한 번 죽였지 않아요?" 원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하였다. "그것은 , 특이체질인 탓이었어요." "더구나 저것은 농축액이에요!" 순간적으로, 장명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몰랐습니다." "뭐라구! 포장에 빨간 마크가 있었던 것을 못 봤다구?" 장명주가 유리상자 앞으로 뛰어가서 종이를 뒤집어보았다. "어떻게 하죠? 상자를 거꾸로 뜯었기 때문에 그만." "이 약물은 10배의 농축액이야!" 민가영이 날카롭게 외쳤다. "우선 10배를 묽게 하고서 그것을 가지고 용액을 만들어야 하는데 ." 원장도 그제서야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면, 70%액으로 주사를 놓은 것이 되는데." "잠깐만요!" 장명주가 히스테릭하게 외쳤다. 모두 일제히 침대 위를 노려보며 침묵 했다. 한나가 신음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몸을 격렬하게 떨면서, 얼굴은 피를 둘러쓴 것 같이 새빨갛게 되었고 눈은 있는 대로 크게 뜨고 있었다. "어떻게 안 돼?" 민가영이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늦었어요!" 원장이 중얼거렸을 때 갑자기 한나가 벌떡 일어나서 큰 소리로 뭔가를 외쳤다. 그것은 인간의 소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처절한 목소리였다. 마 치 도끼로 정수리를 찍힌 황소의 마지막 괴성 같은 소리였다. 그 직후에 지수는 악몽과 같은 광경을 보았다. 갑자기 일어선 한나는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도저히 현실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한나가 덮어놓고 정면으로 돌진해서 콘크리트벽에 몸을 부딪쳤다. 순간적으로 비 틀거린 한나는 또 큰 소리로 으르렁대면서 다른 방향으로 달려 벽에 몸을 던졌다. "멈추게 해!" 원장이 외쳤다. 건장한 간호사가 한나를 정지시키려고 앞을 막았다. 그 러나 어떻게 된 일일까? 한나는 간호사를 인형처럼 밀어제쳐 버리고는 또 벽으로 돌격했다. 지수는 소리지르고 싶은 생각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세 번, 네 번 한나는 벽에 부딪치고, 또 무엇인가에게서 도망가려고 하는 듯이 계속 달 렸다. 얼굴이 깨지고 선혈이 얼굴에 무수한 선을 그었으나 그 처참한 광 경에 누구 한 사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만 둬!" 장명주가 외쳤다. "그것은 안 돼! 그것은." 원장이 팔을 휘저으며 큰 소리를 질렀을 때, 한나가 유리상자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한쪽에 유리상자를 채곡채곡 쌓아 놓은 곳이 있는데 한 나가 그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간호사가 발을 잡으려고 뛰어들 었으나 한순간의 차로 그 손은 허공을 잡고 말았다. 한나는 일직선으로 그 상자더미를 향해서 달렸다. 무서운 속도로, 일직 선으로. 지수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사각의 콘크리트 방 안에 메아리를 남기고 있었다. 한나의 외침소리는 낮은 신음소리로 바뀌 고 이윽고 천천히 사라졌다. 무서운 정적이 찾아왔다. 지수는 눈을 뜨는 것이 무서웠다. "이제 어쩔 수 없어." 민가영이 말했다. "죽었습니다." 원장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때서야 지수는 살며시 눈을 떴다. 한나 는 유리상자에 거의 어깨까지 박혀져 있었다. 날카로운 유리파편이 목을 잘랐던 것이다. 피가 벽의 한면 가득 흩어지고, 바닥엔 커다란 피웅덩이 가 생겨 있었다. 하얀 옷감에 동물의 만화를 그린 잠옷이 지금은 피를 흡수해 새빨갛게 되었다. "뒤는 당신에게 맡기지. 나는 지금 서울에 가야 하니까." 원장은 창백해져서 가만히 서 있었다. 가영이 나가자, 장명주도 황급히 뒤를 쫓았다. 원장은 잠시 아연해 있었지만, 천천히 정신을 차리곤 간호 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빨리 다른 사람들을 불러오지." 원장과 간호사가 도망가듯이 나가자, 지수는 한나의 시체와 함께 그 방 에 남겨졌다. 피해야 한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기회가 없다. 여기를 정 리하러 오면 발견되어 버릴 것이다. 정신차려야 한다. 떨리는 발을 옮기면서 지수는 골판지 뒤에서 나와 이제 움직이지 않는 한나 쪽으로 잠시 시선을 던졌다. 더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헉헉 숨을 몰아쉬며 복도로 나와 단숨에 계단을 뛰어올랐다. 입구는 아직 열린 채로 있었다. 어디를 어떻게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자기 방으로 뛰어든 지수는 이제 무엇을 할 기력도 없이 침대에 쓰러졌다. 격심한 오열이 어깨를 흔들고, 그 동작은 언제까지나 계속되었다. 4 이미 해는 높아서, 도서관에는 책을 읽기보다도 햇살에 기대어 낮잠을 자는 노인들이 많아졌다. 지수는 소파에 깊숙이 앉아서 기계적으로 잡지를 넘기고 있었다. 아무 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잠도 자지 않고 울었기 때문에 눈이 퉁 퉁 부었다. 아침밥이 거의 목으로 들어가지 않았지만, 의심받아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격려하며 필사적으로 먹었다. 지수는 옆의 빈 소파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나는 이제 없는 것이 다. 환자들 사이에 한나의 병이 나빠져서 보호소로 옮겨졌다는 소문이 흐르 고 있었다. 장명주가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 한나는 죽은 거야, 살해당한 거야. 이렇게 큰소리로 외치 고 싶었지만, 그녀는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자신에게 말했다. 어제 저녁 안정을 되찾고 나서 지수는 브로치로 신호를 보낼까 하고 생 각했다. 지하실의 존재와 혈흔이 있으면 훌륭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그녀는 곧 생각을 고쳤다. 민가영이 서울에 간다고 말했기 때문 이다. 자기가 없는 사이에 이곳이 수색을 당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민가영 은 모습을 감추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만들 수는 없다고 지수는 생 각했다. 눈앞에서 민가영이 체포되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것이 한나의 죽음에 대한 아주 작은 보상인 것이다. "서다혜 씨."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다혜? 누구를 부르고 있는 것일까? "서다혜 씨, 안 들려요?" 목소리가 다가왔다. 도대체 어째서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걸까? "예!" 잊고 있었다. 어젯밤의 쇼크로 완전히 주의력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 이다. "무슨 일 있었어요?" 장명주가 이상한 표정으로 지수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생각할 일이 있어서." "그래요? 얼굴색이 조금 나쁘군요. 방에서 쉬어요."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아뇨, 서류 때문에 뭘 좀 물으려구요. 급하지 않으니까 괜찮아요. 정 말로 조금 쉬는 편이 좋겠어요." "예." 지수는 말을 듣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쉬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해요." 장명주는 지수가 도서관을 나가는 것을 보았다. 일말의 불안이 장명주 의 가슴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모습이 이상하다. 어제 저녁, 그 녀와 사이가 좋았던 남한나가 그렇게 죽고 나서 오늘 서다혜의 모습이 이 상하다. 더구나 서다혜는 남한나가 어떻게 되었는지, 어디로 갔는지, 어 떤 상태인지 물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밖에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또 있었다. 이삼 일 전에 환자 중 누군가 가 보호소에 가까이 간 것 같다고 간호사 한 사람이 보고했던 것이다. 눈에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누구일까? 대부분의 환자는 얌전해 서 이상한 호기심을 일으키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다. 간호사로부터 그런 보고를 들었을 때, 어쩐지 장명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서다혜 가 아닐까. "저 아가씨는." 장명주에게 던져진 목소리가 있어, 뒤를 돌아보니 오래된 주간지를 손 에 든 노파가 서 있었다. "누구를 찾고 있나요?" "아뇨. 바로 지금, 여기에 앉아 있던." "서다혜 씨라면 기분이 안 좋아서 방으로 갔어요." "그래요? 있잖아요, 역시 그랬었어요!" "무슨 이야기예요?" 장명주는 붙임성 있게 되물었다. "저 아가씨, 어딘가에서 만났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노파는 열심히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역시, 이것 보세요! 여기에 나와 있어요. 나, 기억력이 좋지 요? 분명히 어딘가에서 봤다고 생각했어요!" 노파가 자랑스럽게 내민 것은 벌써 3년 이상이나 지난 여성 주간지였 다. 지면이 너덜거릴 정도로 완전히 낡은 것이었다. <올해의 각 대학 수 석졸업자들>이라는 타이틀에 사진이 실려 있었고, 과연 그녀의 사진도 거 기에 있었다. 머리형이 바뀌어 있었지만,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장명주는 아직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이름이 틀리기 때문이었다. 서다혜가 아니라 현지수로 되어 있었다. 서다혜와 현지수. 현지수?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이름이다. 어디에서 들었을까? 장 명주는 직업상 이름을 잘 기억하는 편이었다. 최근이다. 그것도 민가영 씨와 뭔가 관계가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신문인가, 주간지인가 . 그러다 그녀는 마침내 기억의 창고 속에서 그 이름을 건져올렸다. 그렇 다! 주간지에 나온 기사. <숲속 저택 살인사건 용의자의 약혼자>- 그녀가 보호소에 있는 남자의 약혼자인 것이다. 현지수! 틀림없다! 장명주는 노파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도서실에서 뛰어 나가 사무실 로 서둘러 달렸다. 민가영 씨에게 전화를 하지 않으면 큰일이다. 그녀는 자기 방에 들어가자 서둘러 수화기를 들고 떨리는 손으로 다이얼을 돌렸 다. 그때 민가영은 요양원으로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 있었다. 민가영은 자신의 손도 이제는 상당히 피에 물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솔 직히 얘기해서 일 자체는 별로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다. 모든 게 아버지 를 위해서라고 생각하며 무엇이든지 태연하게 해치워 왔었다. 지금 가영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버지가 완전히 소식을 끊고 있는 것 이었다. 물론 비행기 사고로 죽은 것으로 되어 있기에 몸을 숨기지 않으 면 안 된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더라도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일 까? 그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불안에 휩싸였다. 가까운 시일 내에 프랑스에 가려고 했다. 그러나 하영의 일도 있어서 지금 당장 떠날 수는 없었다. 하영이를 생각하니, 정관우의 일도 빠른 시일 내에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관우를 어떻게 할까? 지금은 일어설 수 없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발이 나았을 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자기가 살인범으 로 수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는 어떻게 나올까? 적어도 자유롭게 해줄 수는 없다. 가영은 가능하면 관우를 자신의 조직 에 참여시키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죽이지 않아도 된다. 죽여? 처음 부터 죽일 생각이라면 치료하거나 보살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관우를 살려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유 따위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냥 마음이 그렇게 쏠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 차 안의 전화가 울 렸다. 운전사로부터 수화기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장명주의 흥분된 목소리가 민가영의 귀에 들려왔고, 그녀의 얼굴이 금 세 잿빛이 되었다. "어떻게 하죠?" 원장의 질문에 민가영은 묵묵히 생각에 잠긴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 았다. 강석호 원장과 장명주는 창백한 얼굴로 떨고 있었다. 어젯밤에 남 한나를 죽인 쇼크에 이어서, 생각지도 않은 위기가 생긴 것이다. 언제나 함부로 이야기하던 원장도 지금은 가영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만약 저 여자가 다만 약혼자인 정관우를 찾으러 온 것뿐이라면." 원장의 말에 가영이 쐐기를 박듯 말을 끊었다. "그것은 생각할 수 없어! 아버지 신원도, 재산도, 우리들은 제대로 다 조사했잖아요. 그만큼 준비를 하는데는 어느 정도의 조직력이 필요해." "경찰." 강 원장이 중얼거렸다. "달리 생각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장명주는 금세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여기는 이미 경찰에 의심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민가영이 대단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내일 중으로 수색을 받을 일은 없겠지만, 그러나 준비는 해두어 야 해. 강 원장, 지하실의 재고를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겨요." "예." "여기는 감시받고 있을 거야. 그것을 잊지 말아요. 창고는 아무런 흔적 도 남지 않도록 청소해서 다른 물건을 넣어 둘 것, 입구의 음료수 자판기 도 치우고 입구가 보이도록 해둬. 비밀통로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껴지 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장명주는 조금 안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염려 없어, 아가씨가 지휘하 는 한 절대로 안심이야. "강 원장은 지하실을 정리하고, 기구도 모두 처분해요. 혈흔도 물로 씻 었을 뿐이니까, 검출되지 않도록 한번 더 약품으로 처리해요." "예." "요양소 내에 약 한 방울, 가루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우리들은 끝장이 에요. 당신 책임으로 완전히 처리해요." "예." 강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덧붙여 물었다. "저, 실험실은 어떻게 할까요?" "창고에 체조용 매트와 기구가 있죠? 그것을 꺼내서 운동실로 만들어 요. 그리고 빨리 거기에 <체육실>이라고 써서 입구 옆에 붙여놔요." 원장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대단한 여자다. 이 어린 여자의 어디서 이 런 배짱이 나오는 것일까. "서다혜, 아니, 현지수라는 여자는 어떻게 하지요?" 장명주가 물었다. "어느 정도 알고 있을까?" "아무래도 오늘 행동이 이상합니다." 장명주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민가영을 쳐다보았다. "남한나가 없어졌는데도 찾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마치 없는 것을 알 고 있는 것 같았어요." 강 원장이 말했다. "약으로 멍청하게 만들까요?" "검사해서 약이 검출되면 어떻게 하지?" 강 원장이 입을 다물었다. "하는 수 없지." 그때 민가영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오늘밤, 방에서 스스로 죽은 것으로 하지." ** 피로 탓인지 초저녁부터 잠들어서, 지수가 눈을 떴을 때는 벌써 저녁식 사 시간이 지나 있었다. 민가영은 돌아왔을까? 돌아온 것이 확인되면 박 반장에게 신호를 보내 야 한다. 이곳도 오늘로 마지막이다. 관우 씨도 틀림없이 이곳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지수는 힘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브로치를 옷깃에서 떼어내 테이블에 놓고, 세면장으로 가서 얼굴을 씻 었다. 몇 번이나 차가운 물을 얼굴에 대자, 조금씩 머리가 산뜻해졌다. 크게 숨을 쉬고 손으로 더듬어서 타올을 꺼내어 얼굴을 닦고 거울을 보았 다. 그때 그녀는 등 뒤에 간호사 두 사람이 무표정하게 서 있는 것을 보 았다. 지수는 그 순간 문득 이제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그리고 일말의 표정도 없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간호사 한 사람이 지수의 팔을 비틀고 입에 천을 밀어 넣고는 침대로 밀어서 쓰러뜨렸다. "안 됐지만, 너는 죽어야겠어!" 지수는 테이블 위의 브로치를 보았다. 또 한 사람의 간호사가 목욕탕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너는 욕조 속에서 발이 미끄러져 머리를 부딪치고서 기절하고 익사한 다. 자주 있는 사고지." 뭔가 방법이 없을까? 지수는 발버둥을 치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런 곳에서 이렇게 죽는 것일까? 관우 씨와는 결국 만나지도 못하고 . 지수는 마지막 가능성에 운명을 걸어 보자고 생각했다. 온 힘을 다해서 발버둥치며 소리를 내려고 하자, 간호사가 거칠게 그녀의 입을 막았다. 언제 들어왔는지 강 원장이 문가에서 야비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뭘 말하고 싶어? 좋아, 이야기하게 해줘. 소리치더라도 아무도 신경쓰 지 않아." "괜찮습니까?" "괜찮아." 간호사가 입 안에 넣은 천을 꺼내자, 지수는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애원 했다. "부탁해요! 죽고 싶지 않아요, 도와 줘요! 죽이지 말아요! 안 돼요! 싫 어요!" "안 됐지만 그렇게는 할 수 없어." "뭐든지 하겠어요! 마음대로 해도 좋아요. 그러니까 제발 살려줘요!" 원장의 얼굴에 교활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그렇게 살고 싶은가?" "예!" "뭐든지 한다, 시키는 대로 하겠어?" "예, 뭐든지!" "그렇다면 생각해 보지." "원장님!" 간호사 한 명이 비난하듯이 말했다. "괜찮아." 원장은 음흉하게 윙크를 해보였다. "이 아가씨는 우리들 세 사람에게 몸을 바치고 싶다는 것이니까. 그렇 지?" 지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장과 간호사 두 사람이 서로 음흉하 게 눈짓을 나눴다. 물론 즐기고 나서 죽일 셈인 것이다. "좋아, 풀어 주겠어. 날뛰지 마." 간호사가 손을 떼자, 지수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세 사람의 시선을 받으면서 지수는 방 중앙에 섰다. 용기를 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지수는 스웨터를 벗어 옆 테이블의 브로치 위로 덮듯이 놓는 순간 손으 로 브로치를 더듬어 박 반장이 말한 부분을 힘껏 눌렀다. 크게 숨을 쉬었 다. 기도하는 듯한 기분으로. "빨리 해." 지수는 강 원장의 독촉을 받으면서 천천히 옷을 벗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을 오래 끌어도, 긴 시간은 아니었다. 이윽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전부 다 벗고는, 지수는 떨면서 그들 앞에 섰다. 사내들의 눈이 자 신의 몸을 핥듯이 향하고 있다. 지수가 간호사의 거친 손에 잡혀서, 침대로 던져졌다. 손발이 두 사람 의 간호사에 의해 잡혀 있는 상태에서 원장이 그녀의 몸을 덮쳤다. 저항 을 해보려고 발버둥을 쳐보았으나 원장의 육중한 몸이 바위처럼 그녀를 내리누르고 있어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젠 끝인가. 이렇게? 원장의 혀가 그녀의 몸을 핥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장명주가 뛰어 들어왔다. "원장님! 경찰이!" 원장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세웠다. 이렇게 빨리? 아직 지하실 쪽엔 손 도 쓰지 않았는데? 간호사 두 사람의 손이 느슨해졌다. 지수는 그 틈을 타고 거세게 손을 뿌리치면서 침대에서 뛰어내리고는 원장과 장명주를 밀어 제치고 알몸인 채 방을 뛰쳐 나갔다. "잡아라!" 지수는 이 음성을 뒤로 하며 계단을 나는 듯이 뛰어내렸다. 복도를 거 쳐 현관 쪽으로 달리려고 할 때, 저쪽에서 간호사 한 명이 오는 것이 보 였다. 그는 지수를 보고 한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지수는 식당으로 뛰어들어가 주방 뒷문을 통해 정원으로 나왔다. 얼어 붙는 듯한 추위도 느끼지 못했다. 숲을 빠져 나가면 문이 있는 곳까지 갈 수 있다. 그들은 쫓아오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도망갈 수 있다! 죽을 힘을 다해 잔디 위를 달리면서,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였다. 2층에서 원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덤벼! 덤벼!"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어둠을 뚫고 엄청난 크기의 개가 굉장한 속 도로 그녀를 쫓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오로지 지수는 달렸다. 그러나 개의 속력과 어찌 비교가 될 것인가. 금방 차이를 좁힌 개가 지수를 향해서 공중으로 날랐다. 날카로운 이빨 이 지수의 하얀 목덜미를 정확히 조준하고 있었다. 그때 뭔가 날카롭게 허공을 찢는 소리가 어둠을 가르고, 이어서 지수는 어깨에 격심한 충격을 받고 땅바닥으로 굴렀다. 이제 끝이다. 목을 잘릴 것이다. 지수는 눈을 감고 무의식중에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문득 손을 움직이는 것을 멈추고 눈을 떴다. 개는 지수 위에서 축 늘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가 반쯤 없어져 있었다. 몇 사람이 벽에 서 뛰어내려, 잔디로 달려왔다. 맨 앞에 오는 사람이 손에 권총을 들고 뛰어왔다. "괜찮습니까? 현지수 씨죠." "." "전 윤 형사라고 합니다. 박점도 반장님의 부하입니다." 윤 형사는 웃옷을 벗어서 지수에게 입혀 주었다. "자, 안으로 갑시다. 춥지요?" "당신이 쏘았어요? 이 개를?" "그렇습니다. 위험할 뻔했습니다." "황일청 씨는요? 박 반장님은요?" "경찰들과 함께 정문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나, 알고 있어요! 약이 어디에 있는지. 지하에 비밀의 방이 있어요. 창고도 있어요. 여자 한 사람이 살해당했어요. 내 눈앞에서 살해당했어 요!" 윤 형사와 함께 방으로 들어오면서 무의식중에 떠들듯이 지수는 이야기 를 계속했다. 계단을 올라가자, 형사들이 요양원 안으로 계속 뛰어 들어 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아직도 벗은 채 그대로였다. "오랜만이군요." 황일청이 희미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렇군요." 민가영이 담담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지금 요양원 원 장실에 마주 앉았다. 옆에 박 반장과 그의 부하가 서 있었다. "오태석은 진짜 이름이 아니지요?" "황일청이라고 합니다." "역시 경찰이세요?" 황일청은 다만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미 한밤중이 지나고 있 었지만, 경찰은 감식반을 포함해서 점점 인원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황일 청은 주머니에서 파이프를 꺼내어 그 감촉을 즐기듯이 만지고 있었다. "민가영 씨, 우리에게 얘기해 줄 게 많이 있습니다. 아시죠?" "알고 있습니다." "동생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영이 말입니까? 나는 모릅니다. 도망쳤을 때에 상당히 많은 돈을 가 지고 갔으니까, 어딘가 몸을 숨기고 있겠지요." "민지영을 죽인 것은 하영이지요? 게다가 서울에서 일어난 세 건의 살 인사건도."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것 같군요. 그대로입니다. 정관우 씨는 이곳 보호소에 있습니다." 민가영의 태도는 마치 순하디순한 양과 같았다. 묻는 말에 변명하거나 회피하지 않았다. 황일청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박 반장의 부하가 서둘러 나갔다. 민 가영은 하영이가 수년 전 하인을 죽이고 난 후 지하실에 갇혀 있었던 것, 정관우가 그녀를 놓아 주려고 하다가 이런 사태가 발생한 사정을 세세히 설명했다. "잘 알겠습니다." 황일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서울에서 하영에게 살해당한 세 사람은, 이유를 아십니 까?" "저로서는 모르겠습니다." "짐작가는 데도 없습니까?"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동생에 관한 것은 나중에 묻지요. 다음은 중요한 마약의 밀수 루트에 관해서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조사하고 있었나요?" "그렇습니다. 그 트럭 운전사 살해사건은 단순한 구실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그 범인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은 정말로 굉장한 우연이었지요." "그렇군요." 민가영은 무슨 뜻인지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황일청을 쳐다보 며 담담히 덧붙였다. "아버지가 편지에 이렇게 쓴 적이 있습니다. '대단한 사람과 만났다. 나와 아주 비슷한 사람이고 거물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작은 차이가 있다. 그 남자는 나의 적이다'라고.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군요." "그렇습니다." 황일청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아버님은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거물이었죠. 아까운 사람을 잃 었다고 솔직히 생각합니다." 민가영은 미소지었다. "아버지는 죽지 않았어요. 당신도 그 정도는 아시리라고 생각하는데 요?" "비행기 사고로서는 그렇겠지요." "예, 그것은 우연이었어요. 예약했다가 우연히 취소한 비행기가 추락해 서." 그러다 가영은 문득 말을 끊었다. "가만, 지금 '비행기 사고로서는'이라고 말씀하셨나요?" "예." "뭔가 아시는군요." 순간적으로 민가영의 눈가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아버님은 반 년 전에 누군가에게 피살당했습니다. 시체는 세느강에 떠 올랐고, 치과의가 민태호 씨임을 최종 확인했습니다." "분명합니까?" "파리 경시청에서 알려 온 겁니다." "그럴 리가! 계속 연락이 있었습니다!" "직접 전화 통화를 했습니까?" 가영은 대답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아버지 행세를 하고 있는 겁니다." 가영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문이 열 리고 형사 한 사람이 얼굴을 내밀었다. "박 반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알았어." 박점도가 서둘러 나갔다. 황일청과 둘만 남자, 민가영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경찰서로 가겠습니다. 그 전에 잠시 화장을 고치고 싶은데요." 황일청이 고개를 끄덕이곤 파이프에 눈을 떨어뜨렸다. 민가영은 옆에 있는 핸드백에서 콤팩트와 루즈를 꺼냈다. 그녀가 가볍게 말했다. "정관우 씨의 혐의는 이것으로 풀렸지요?" "예, 당신의 증언도 있으니까요." "잘됐어요. 그 약혼자분 정말 멋진 여자더군요." "그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래요. 사랑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가영은 루즈 뚜껑을 빼고 무엇인가를 마시듯이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 고 두세 번 숨을 헐떡이다가 그대로 소파에 쓰러졌다. 황일청이 달려왔을 때 그녀의 몸에서는 청산가리의 냄새가 풍겼다. 루 즈에 넣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황일청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어쩐지 자기가 이런 것을 바라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민태호도 이런 결과를 바라지 않았을까. 이것이야말로 거물의 딸다운 죽음이니까. 박 반장에게는 미안하지만 말이 다. 황일청은 문 옆의 옷걸이에 걸려져 있는 누군가의 코트를 가지고 와서 살며시 그녀의 시체를 덮어 주었다. 제 4 장 연 회 1 3월 26일 오전 7시 15분. 지수는 시계 벨 소리에 눈을 떴다. 결혼식 전날 밤에는 틀림없이 한숨 도 자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도 편안히 여덟 시간이나 자 버렸 다. 침대에서 일어나자 어쩐지 주위의 모습이 다르게 보였다. 그렇다. 지난 주부터는 성북동에 있는 숙모집에서 묵고 있었다. 부모님도 대전에서 올 라와서 여기에 머무르고 있다. 관우는 시골에서 상경한 작은아버지 부부와 함께 선배의 집에서 머무르 고 있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있던 아파트를 처분하고, 신혼여행에서 돌 아오면 이번에는 그 근처의 조금 넓은 아파트에 신방을 꾸미기로 되어 있 다. 얼마나 바쁜 나날들이었나? 결혼식장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신혼 여행 준비도 마침 결혼 시즌이었기 때문에 어려웠다. 그래도 가장 좋은 코스로 예약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황일청 씨 덕분이었다. 도대체 그 사 람은 어떤 사람일까? '이렇게 한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지수는 벌떡 일어나서 날씨를 보려고 커튼을 열었다. 햇살의 눈부심에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멋진 날씨였다. 지수는 창문을 열었다. 지난 주까지는 겨울바람이었는 데 달콤하게 향기나는 바람은 봄의 숨결, 그 자체였다. 지수는 몸 속의 피가 일제히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제 평화원이란 이름도 매스컴에서 잊혀지고 있다. 잠시 동안 지수는 신문, 잡지에서 대단한 스타처럼 취급되었다. 휠체어를 탄 관우와 두 사 람의 사진이 여기저기에 실렸다. 지수는 소란스러운 것이 싫었지만, 덕분에 관우가 어느 사립대학에 강 사 자리를 얻게 되어 근무하도록 되어 있었고, 지수는 박 교수 밑에서 강 사로 근무하기로 되었다. 모험의 나날이 끝난 것이다. 이젠 질색이야, 지수는 생각했다. 평화원 은 국가가 운영하는 사업단체에서 인수하여 변함없이 운영될 예정이었다. 뭐니뭐니 해도, 지금 매스컴의 최대 관심사는 연속살인 사건의 범인, 민하영이 당국의 필사적인 수사에도 불구하고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이었 다. 지금도 광기의 살인자가 어딘가를 걸어다니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지수는 문득 불안해지는 때가 있었지만, 결혼식을 앞둔 지금은 그런 생각도 자연히 잊혀져갔다. 지수는 2층의 침실을 나와 아래로 내려갔다. 거실에서는 부모님이 숙모 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잘 잤니?" 엄마가 눈썹을 찡그렸다. 지수가 아직 잠옷 차림이었던 것이다. 숙모가 웃으며 말했다. "뭐, 괜찮잖아요? 오늘은 상당히 답답한 옷을 입어야 하니까요. 몇 시 에 나갈 거지?" "글쎄요, 한 시쯤에나." "식은 세 시지? 그럼 빨리 해야지." 오전 7시 20분. 정관우는 눈을 뜨고 천천히 이불 속에서 기지개를 켰다. 긴 입원생활로 아직 몸의 마디마디가 아픈 것 같았다. 다리의 깁스도 아직 얼마간은 계 속해야만 했다. 그는 처음 민가영의 집을 방문한 그날부터 5개월 동안의 모든 일이 아 직도 믿기 어려운 악몽과 같았다. 때때로 관우는 생각했다. 민가영은 정녕 자신을 어떻게 할 셈이었을까?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고 그를 처치하는 것은 그녀로서는 상당히 쉬 운 일이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일까? 지금으로선 대답을 얻을 방법도 없어졌지만 어쩐지 관우는 가영이 불쌍 하게 생각되었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고통받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집에서 세 명, 서울에서 다섯 명을 죽이 고, 그외 트럭 운전사 등등을 포함하면 이미 아홉 사람이나 죽였다. 2월말에 서울 종로의 한 여관에서 학교 교사와 여관의 여주인이 피살되 었다. 흉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범행 수법으로 보아서 하영의 범행이 틀림없다고 경찰은 단정짓고 있었다. 그녀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이만큼 전국적으로 수배되고 경찰이 기를 쓰고 찾고 있는데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 까, 죽은 것일까. 도피할 수 없다고 체념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도 모른다. 평화원 사건 이후 모든 것이 끝났는데도 하영에 대한 생각은 그 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관우는 일어나서 세수를 했다. 이 집 주인은 그의 대학 선배로, 어느 회사의 중역이다. 집도 그것에 어울리게 약간 화려한 구조였다. 식당으로 가자 작은아버지가 신문의 주식란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편히 주무셨어요?" "상당히 늦게까지 잤군." 작은아버지 정종명()은 지방에서 여관을 경영하고 있기에 직업상 아침이 빠를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나로서는 드물게 일찍 일어난 겁니다." 아침 식탁에 앉으면서 관우가 말했다. "해뜨는 것을 보지 못했으면 일찍 일어났다고는 할 수 없지." 관우는 작은아버지와 더이상 시시콜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서 히 죽 웃으며 수저를 집어들었다. 오전 7시 30분. 강남에 있는 에버그린 호텔의 한 방에서, 민하영은 침대에서 일어나자 곧 창을 통해 밖을 보았다. 멀리 아래쪽 지상으로 사람 모습이 드문드문 보였다. 아직 출근시간으로는 빠르고, 게다가 오늘은 토요일이었다. 3월 26일, 토요일. 이 날을 알아내는데 상당히 고생했다. 현지수라는 정관우의 약혼자를 계속 미행해서 식장을 알아내고, 식장에 전화를 해서 초대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가르쳐 달라고 사정했다. 결혼식의 날짜와 시간만 알면 그 다음은 그때까지 경찰의 눈을 피해 있 으면 되었다. 하영은 타자기를 사서 호텔에 갖다 놓고는 일부러 각진 안 경을 썼다. 어느 회사의 경리비서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낮에는 거의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식사도 룸서비스로 먹고 식사를 가 져올 때는 등을 입구로 향한 채 바쁘게 타자를 치고 있는 척했다. 자기 자신도 놀랄 만큼 하영은 지쳐 있었다. 쫓기는 공포와 압박은 느 껴지지 않았지만, 요즘 며칠 심한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어디에 서 오는 피로일까.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부자연스러운 생활 그 자체가 모르는 사이에 피로로 쌓여가는 것이리라. 그것도 오늘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기뻤다. 게다가 돈도 슬슬 떨어 져가고 있었다. 마침 좋은 시기다. 모든 것이 잘 준비되고 있다. 결혼식 은 세 시부터이기 때문에 오늘은 천천히 준비를 마치면 될 것이다. 어차 피 이 호텔은 내일까지 빌려 놓았다. 샤워를 했다. 그리고 확실하게 하기 위해 옷가방 아래쪽을 더듬어 칼 2 개를 꺼내어 침대 위에 늘어놓아 보았다. 잘 연마된 칼이 아름다운 은빛 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매혹당한 듯이 가만히 그 윤기나는 칼날을 보다 가 이윽고 칼을 손수건으로 싸서 핸드백 속에 넣었다. 오전 9시 15분. 도심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로망스 호텔 커피숍에서 황일청은 빵과 커피로 늦은 아침을 때우고 있었다. 전화로 박점도 반장을 불렀는데, 공 연한 일로 그를 걱정시킨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조금 후회하고 있는 중이 었다. 이 호텔로 식장이 정해졌을 때 황일청은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그러나 어제 서울에서도 가장 훌륭한 호텔로 꼽히는 이 19층짜리 호텔에 찾아와 서, 로비를 오가는 많은 사람의 흐름과 종업원들의 거의 구분이 되지 않 는 제복 등을 보고 있는 사이에 문득 이 안에 살인자가 숨어들어 있으면 어떻게 발견하는지를 생각했던 것이다. 어젯밤 그 불안은 계속 그의 머리 속에서 서서히 커져갔다. 그리고 그 결과로 박 반장에게 전화했던 것이다. 모습을 감춘 민하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이 그에게는 못내 걱 정이었다. 황일청이 그 여자에게 신경을 쓰는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 나는 그녀가 죽인 사람들이 그녀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아직 모른다 는 점이었다. 동기가 없는 살인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서울에서만 세 사람이다. 아니 여관에서의 살인을 넣으면 다섯 사람이 된다. 우발적이라고 생각되는 하나를 제외하면 다른 네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그녀와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그 관계를 알 수 없는 이상, 그 눈 에 보이지 않는 실이 남은 관계자인 정관우와 현지수로 연결되지 않는다 고 단언할 수가 없지 않은가. 결국 두 사람이 위험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칼이었다. 그 미술공예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름다 운 6개 한쌍의 칼 중 세 개는 피해자의 몸에 남아 있었다. 또 하나는 민 지영이 살해당했을 때 가영이 처분해 버렸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아직 4개다. 그렇다면 남은 두 개는 어떻게 된 것일까? 두 잔째의 커피를 마시면서 황일청은 마약의 밀수 루트 수사로 생각을 돌려 보았다. 국내 루트는 확실히 궤멸시켰다. 그러나 유럽에서 약을 보 내는 사람이 발견되지 않는 한, 그들은 또 새롭게 루트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사는 사람도 또 끊이지 않을 것임에 틀림없다. 고미술상으로 그만큼 성공을 거두고 있던 민태호가 왜 마약 밀수에 손 을 내민 것인지 황일청에게 분명한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딸인 하영 의 그 이상한 광기와 잔인성을 생각하면 역시 아버지인 민태호도 선천적 으로 도덕관념이 상실돼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민태호에 관한 황일청 자신의 기억에 비쳐서도 그것은 수긍할 수 있는 일이었다. 민태호는 철저하게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에 게 있어서 범죄는 스포츠와 같은 일종의 오락이었을 것이다. 약의 밀수도 큰 돈을 낳기 때문이기보다는 그것이 위험이 넘치는 위법이기 때문에 일 부러 해본 것이 아닐까? 그는 죽었다. 파리에서의 보고로는 누군가가 뒤에서 머리를 쏘았다는 것이었다. 죽인 사람이 누구일지라도 지금은 다른 사람이 민태호의 자리 에 앉아서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그 남자는 물론 민태호만큼의 '초범죄자'는 아닐 것이다. 이익을 많이 늘리기 위해서라면 어떤 지저분한 일에라도 손을 쓸 것이다. 흔히 있는 갱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황일청은 또 유럽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역할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 오전 9시 30분. 펜이 움직이는 소리만 들려오고 있었다. 하영은 손목시계를 보고 벌써 9시가 넘었나 하고 한숨을 쉬며 손을 멈추었다. 글을 쓴다고 하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고, 무엇보다 머리를 지치게 한다. 등이 아파서 의자에서 일어나 창 밖을 보았다. 이제 별로 시간이 없다. 또 써야 한다. 뭔가 마시고 싶어서 전화로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가 왔을 때, 그녀는 열심히 타자기를 두드리는 척했다. 나는 몽상과 현실 사이에서 미묘한 평행을 유지하면서 살아왔다. 아버지는 내 가 어릴 때부터 그러한 내 성질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결코 나에 게 무리하게 바깥세계와 친숙해지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그것을 아버지에게 감사하고 있다. 보통아이와 같이 당연히 학교 에 보내져, 더러운 아이들과 함께 생활했다면 나는 틀림없이 노이로제에 걸려 병 원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유리인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연약하고 투명한 유리인형이 라고 말이다. 그대로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자신을 불쌍하게도, 자랑으로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태어나면서 짊어진 숙명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면, 유리에 손을 대려고 하지 않고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 멈춰 주었다면, 지금 내가 이런 것을 쓸 필요는 없었을 것이 다. 열여덟 살의 여름이었다. 아버지와 우리 세 자매는 제주도로 놀러 가서 어느 콘도에 숙박했다. 여름도 거의 끝나갈 무렵, 그때는 아름답고 쾌청한 날이 계속 되어 실내에 틀어박혀 있기 일쑤였던 나도 여느 때와 달리 문 밖의 신선한 공기 와, 초록의 향기, 노래하며 나는 새소리를 마음으로 즐겼다. 나는 언제나처럼 혼자였지만 때로는 아빠와 둘이서 멀리 숲속을 산책했다. 지 영 언니와 달라서 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떠들고 있는 것을 보면 혐오감이 느껴졌다. 가영 언니 쪽이 나에게 있어선 보다 가까운 존재였다. 그러나 나로서는 가영 언니도, 일종의 잘난 체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가영 언니는 독서의 취미를 단순히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일로 보이기 위해 즐기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문학의 세계는 인생 그 자체였다.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더럽 고, 추하고, 소름끼치는 수렁이고, 그것에는 문학처럼 꿈도, 로망의 향기도 없었 다. 내게 있어 문학은 이집트의 카이로 같은 존재였다. 저 거대한 고대문화의 유적 을 아직도 순결하게 지키고 있는 카이로, 한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거기는 내 꿈 의 고향이요, 최후의 정착지였다. 나는 카이로와 같은 도시가 되고 싶었던 것이 다. 천년이 흘러도 만년이 흘러도 오로지 순백의 정신을 고고히 지키고 있는 내 영혼 속의 카이로. 그곳엔 어둠이 없을 것이다. 결국 밤도 없을 것이다. 오직 따뜻한 태양과 선열 한 문화와 순결한 육신만이 존재하는 곳. 나는 스무 살이 되면 꼭 카이로로 가서 살고 싶었다. 그것만이 내가 가진 유일하고도 가장 큰 소망이었다. 그러나 현실과 관련되는 것은 가능한 한 거부하면서 살고 있는 내 안으로, 그 현실은 가장 잔혹한 형태로 이빨을 드러내며 다가와 내 순수한 꿈을 일시에 깨뜨 리고 말았던 것이다. 어느날 나는 밖을 너무 많이 걸었던 탓인지, 열이 나서 콘도의 방에 누워 있었 다. 그날 밤은 콘도 가까이에 있는 한 호텔에서 서울에서 온 오케스트라의 콘서 트가 7시부터 개최되도록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들으러 가려고 아침부터 몹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혼자 있고 싶었다. 아버지는 조금 걱정스러워했지만, 나는 괜찮다며 아버 지를 안심시켰다. 실제로 대단한 열은 아니었던 것이다. 언니들은 물론 아버지와 함께였다. 지영 언니는 클래식에 취미가 없었지만, 단지 남자친구들이 가기 때문 에 그들을 따라갔다. 방에 남겨진 나는 깜빡 졸고 있었다. 몇 시경이었을까? 취해서 큰소리를 내는 남자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와서 불현듯 눈을 떴다. 나는 초조해서 귀를 막고 싶어졌다. 술에 취한 사람은 불결하고, 더러워서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아버지는 와인과 브랜드를 마셔도 기분좋게 취할 정도였다. 취해서 떠들거나, 난폭해지는 사람을 보면 나는 그만 오한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내 방의 문이 탁 소리를 내며 열렸던 것이다. 방엔 불이 꺼 져 있었고, 복도의 불빛만이 역광으로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내 방으로 발을 디민 사람이 남자라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처음엔 아버지가 돌아온 것일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그는 뭔가를 중얼중얼거리고 있었고, 심하게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나는 놀랍기도 했지만 우선 화가 났다. 취해서 방을 잘못 찾았음에 틀림없었다. 밖에서 떠들고 있었던 남자라고 생각했다. 아까 지영 언니가 마지막으로 방을 나 갈 때 문 자물쇠를 거는 것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남자는 휘청휘청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가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소리가 나오 지 않았다. 상대편이 알아차리고 나가겠지 생각하고 나는 잠자코 있었다. 입구로 들어오는 복도의 불빛에 침대가 어느 정도 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 안을 둘러본 남자는 겨우 나를 본 모양으로 '뭐야'하고 짧게 소리를 지르고 는 머리를 긁으면서 문 쪽으로 돌아갔다. 나는 안심하고 모포를 얼굴 눈 주위까 지 끌어올려 남자가 나가는 것을 기다렸다. 그런데 남자는 잠시 문이 있는 곳에서 멈추어 섰다. 긴 시간 남자는 뭔가 생각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초조했다. 무엇을 우물쭈 물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남자가 이쪽을 가만히 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남자 얼굴이 어둡게 그늘 져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 한층 기분이 나빴다. 남자가 갑자기 문을 닫았다. 방 안이 가라앉은 듯이 어두워졌다. 남자는 여전 히 그곳에 서 있었다. 나는 공포를 느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도망가! 목소리가 머리 속에서 크게 메아리치고 있었으나 전신이 마비된 듯이 전혀 움직 일 수가 없었다. 남자가 거친 숨소리로 침대로 다가왔다. 술 냄새가 나를 감싸서 나는 무심코 양손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그것이 실수였다. 모포에서 손을 떼어 버린 것이었 다. 남자의 손이 재빨리 모포를 걷어 버렸다. 나는 침대 위에서 몸을 오그리고 떨고 있을 뿐이었다. 목은 굳어져서 도저히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남자의 손이 나의 양팔을 잡고 벌렸다. 나는 바둥댔다. 발버둥쳤다. 손발을 마구 움직였다. 그러나 남자의 힘을 당해 낼 방법은 없었다. 무거운 몸이 내 위에 갑자기 덮쳐서 납작하게 되는 것은 아닌 가 하고 생각했다. 숨이 막히고 기절할 것 같았다.. 그러고서 몇 십 분인가는 지금도 내 얼굴에 피가 오르고 펜을 든 손조차 떨리 게 하기에 충분한, 치욕으로 얼룩진 시간이었다. 더 자세하게는 쓸 수 없다. 너무나도 생생한 기억을 도저히 문자로 엮을 수가 없다. 그날 밤, 유리인형은 산산히 부서지고 진흙구두에 짓밟혔다. 내 일생의 꿈인 카이로는 그날 밤에 순식간에 폐허가 돼 버렸고, 나는 그 폐허더미 위에 함부로 버려졌다. 실이 끊긴 마리오네트 인형과도 같이 침대에 축 늘어져 누워 있는 나를 남기고 남자는 옷을 입고 방을 나갔다. 그때 마침 콘도의 종업원이 복도를 지나가고 있 었던 것 같다. 그의 말이 문이 닫히기 직전에 문틈으로 확실히 들렸다. "어, 선생님. 방을 잘못 찾으셨습니다." 남자가 뭐라고 대답했는가는 문이 닫혀 버려서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남자를 분명히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것만은 강하게 나의 뇌리에 새겨져 있 었다. 나는 왜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아버지를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사실을 알면 아버지는 나를 혼자 남기고 간 것 으로 자신을 책망했을 것이다. 상대를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아버지를 그 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날 밤 일어난 일은 나라는 인간 그 자체를 바꾸어 버렸다. 그것을 확실히 안 것은 하인을 가위로 찔러 죽였을 때였다. 언니들은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하인은 나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옷이 찢겨지고, 몸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그가 야수와 같이 덤벼드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언니들 말대로 하나의 환각이었을까? 나로서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오전 11시. 그녀는 펜을 멈추었다. 시계를 보고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손가락 이 아프다. 이제, 쓸 것도 별로 없다. 조금 쉬자. 식사를 할까, 이제 먹을 기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식사라면 이런 곳에서 먹고 싶지 않다. 모든 것이 최고급인 로망스 호텔로 가서 하 자. 이제 쓸 것도 별로 없다. 하인을 죽인 나를 아버지와 언니들은 경찰에 인도하 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들 모르게 지하실에 넣고 상황을 보려고 했던 것이었다. 지하실은 원래 아버지가 서가로 사용하고 있던 방으로 서재로 들어가지 않는 책 이 놓여져 있었던 곳이다. 지하실에 갇힌 몇 년의 세월 속에서 나는 복수의 결의를 양성해갔다. 그 유폐 된 공간 속에서 나는 살의가 발효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기회가 올 날만을 하루하루 기다렸다. 트럭 운전사를 죽인 사건은 주 저도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을 나에게 심어 주었다. 다시 끌려온 나에 게 새로운 기회는 놀라울 정도로 빨리 찾아왔다. 가정교사에 의해서 그것은 실현 되었다. 나의 복수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제주도의 콘도에서 나를 유린한 남자에 대 한 보복이다. 내가 죽인 네 명의 남자들 중에서 경찰은 아무런 연관도 발견하지 못한 것 같 다. 나를 살인광이라고 부르고, 이상성격이라고 부르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 다. 그러나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네 사람은 모두 그날 그 산장에 숙박하고 있었던 사람들이고, 또 그들 중에 나를 범한 '선생님'이 있는 것이다. 변호사, 작곡가, 의사, 교사. 이 가운데에 나를 추행하고 나를 깨부순 남자가 있는 것이다. 물론 다른 세 사 람은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것을 알고도 나는 네 사람 모두를 죽일 결 심을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복수는 달성할 수 없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을 이상이라고 부른다면 그럴지도 모른다. 네 사람의 등에 칼을 꽂는 순간 나는 무한한 안식을 느꼈다. 면밀히 네 사람 주변을 조사하고 사전 준비를 하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이었던가. 그리고 나 자신, 그 성공적인 마무리에 만족하고 있다. 단지 일시적으로 혐의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죽인 마약중독자 소녀, 그리 고 현장을 목격당해서 어쩔 수 없이 죽인 여관의 여주인, 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한다. 복수는 이루어졌다. 그 뒤는? 그렇다, 뒤는 나 자신의 편안함을 찾는 것뿐이 다. 칼은 아직 두 개 더 남아 있다. 그 한 개는 내 가슴을 칼집으로 사용할 것이 다. 결국 왜 이런 것을 남기는 것일까, 나 스스로도 알 수 없다. 이 이상 쓸 것은 없다. 나는 이것을 경찰청 앞으로 보낼 생각이다. 이것이 사 람 눈에 띌 때 나는 확실하게 죽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칼은 내가 세상 에 태어나서 사랑한 단 한 사람의 남자, 정관우의 가슴에 박혀 있을 것이다. 나는 죽어서라도 카이로에 닿을 것이다. 악몽도, 비극도 없는 그 순백의 고향 으로 갈 것이다. 영원히 밤이 없는, 그래서 순결의 대지가 영원히 더럽혀지지 않 는 그곳으로. 나는 비록 죽지만, 행복할 것이다. 카이로엔 밤이 없을 것이므 로, 오직 찬란한 태양만이 존재할 것이므로. 2 오후 2시 20분. 소박한 양복을 입은 황일청이 로비로 내려왔다. 박 반장은 어색한 양복 에 완전히 지쳐 있는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윤상수 형사가 두 사람의 형사를 데리고 로비로 들어왔다. 박 반장은 찡그린 얼굴로 그들을 보았다. "뭐야! 저것은, '경찰입니다'라고 간판이라도 내걸고 걷는 것 같잖아." 윤상수 형사가 황급히 다가왔다. "박 반장님, 무엇을 하면 되지요?" "조금도 눈에 띄지 않도록 신경을 써. 자네 복장을 보면 한눈에 형사라 는 사실을 알 수 있잖아. 황일청 씨, 호텔에 이야기해서 턱시도라도 빌릴 수 있을까요? 황일청은 웃었다. "자네들이라면 뭘 입고 있어도 곧 형사라는 걸 알 수 있어. 그대로 좋 아." 그가 다시 한번 호텔 로비를 휘둘러보고는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들 두 사람은 식장에서 어쨌든 신랑 신부와 떨어지지 않도록 해 줘. 눈에 띄어도 상관없어." "알겠습니다." "또 한사람은 식장으로 먼저 가서 안에서 경계해 줘. 말할 필요도 없 이, 내가 염려하고 있는 것은 민하영이야. 그녀에 대해서는 몽타주밖에 단서가 없어. 조금이라도 닮은 여자를 보면 즉시 알려 줘. 다행히 그녀가 품위 있는 미인이라고 하는 점에는 모든 사람의 증언이 일치되고 있어. 미인은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지." 엽기적인 연쇄 살인범을 상대로 하는 것이라서 그들의 표정이 몹시 굳 어져 있었다. "그것으로 됐지?" 황일청이 박 반장에게 물었다. "상대방은 칼을 사용하는데 있어서는 일류야. 아름다운 여자라고 해서 방심하지 마." 세 사람의 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하영이 입구의 회전문을 통과해 호텔로 들어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황일청은 그때 입구 쪽으로 반쯤 등을 돌리고 있었다. 잠깐만 봤더라면 그가 눈을 멈추었겠지만, 하영은 곧 오른쪽으로 돌아서 엘리베이터 타는 곳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오후 2시 30분. 지수는 신부 대기실에서 혼자 앉아 있었다. 두 평 정도의 작은 방이었 다. 거기서 그녀는 이미 웨딩드레스를 입고 손에 부케를 든 채 식을 기다 리고 있었다. 지수는 작은 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신혼여행의 꿈을 쫓고 있었다. 관우 의 다리가 아직 완쾌되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 멀리는 갈 수 없다. 의논한 결과 제주도로 가기로 했다. 이런 날씨라면 제주도는 벌써 상당히 더울 것이다. 더 얇은 옷을 준비하는 편이 좋았을 걸 그랬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자, 턱시도 옷깃에 하얀 장미 를 꽂은 관우의 얼굴이 보였다. "어머, 뭐예요? 이런 곳에 오면 안 돼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서." 관우는 지수의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황홀한 듯이 바라보다가 신음처 럼 뱉었다. "훌륭하군, 너무 예뻐!" "웬지 내가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남자로는 보이지 않아." 지수가 관우를 예쁘게 노려보았다. "그런데 조금 걱정이 있는데." "뭐예요?" "박 교수님이 오늘 일을 알고 있겠지?" 듣고 보니 지수도 정말로 걱정이 되었다. 그분의 건망증은 유명하다. 그분이 오늘 주례를 봐 주시기로 했는데 그것마저 잊어버리면 낭패다. "전화해 봐요." "그렇게 할까? 그럼 이따 봐." 관우는 지수에게 윙크를 해보이고 나갔다. 하영은 관우가 바로 몇 미터 앞의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곤 걸음을 딱 멈추었다. 턱시도가 큰 키에 잘 어울렸다. 갑자기 가슴이 조여서 숨쉬 기가 괴로웠다. 관우는 그녀를 보지 못하고 바쁜 걸음으로 전화박스를 향 해서 걸어갔다. 그녀는 지금까지 그와 함께 있었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혼자 남겨진 듯 한 적막함에 가슴이 미어졌다. 달려가서 그에게 매달리고 싶은 충동에 휩 싸였다. 관우가 점점 앞으로 가 버린다. 하영은 설레이는 마음을 억제하며 보통 의 걸음걸이로 그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관우가 나온 방을 보자, <신부 대기실>이라고 쓰여 있었다. 저기에 현지수가 있는 것이다. 현지수라는 여자의 인품을 알게 된 것은 이 식장을 알아내기 위해 그녀 의 뒤를 미행할 때의 일이었다. 하영이라도 호감을 갖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여자였다. 그만큼 자기 삶을 정열적으로 사는 여자임을 잘 알 수 있었다. 관우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슬프게 만 들고 싶지 않지만, 그러나 이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아직 그녀는 젊고, 아름답다. 행복해지기 위한 충분한 미래가 있는 것이다. 복도를 걸어가자, 에스컬레이터 옆에 있는 구석진 로비에서 관우가 전 화를 걸고 있는 게 보였다. 관우는 그녀에게 등을 보이고 공중전화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 가 하영의 귀에 선명히 들려왔다. "여보세요, 박진호 교수님을. 그래요, 저는 정관우입니다." 하영은 문득 지금 해치울까 하고 생각했다. 주위에는 사람의 모습이 없 고 방해받을 염려도 없었다. 연회석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의심받지는 않더라도 실수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라면 관우를 찌르고 자신도 찌를 여유가 충분히 있다. 더구 나 관우는 그녀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지? 지금인가, 나중인가. 하영은 잠깐 망설이다 빠른 편이 좋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빠른 손놀 림으로 핸드백을 열고 칼을 찾았다. "교수님이 벌써 나가셨다구요?" 관우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예? 곤란하군요. 식은 세 시부터입니다. 급히 오시도록 전해 주세요. 선생님이 주례를 봐 주시기로 되어 있으니까요." 하영은 핸드백 속에서 칼 한 자루를 손에 잡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 의 등으로 다가갔다. "그렇습니다. 장소는 로망스 호텔." 관우는 전화를 향하고 있어서 그녀가 접근해 오는지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영은 그의 등으로 가만히 시선을 향했다. 그런 후, 그녀가 천 천히 손을 들었다. 그때였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사람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재빨리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옆에 물건을 진열한 대형 유리상자를 들여 다보는 척했다. 올라온 사람은 정장을 한 5,6명의 중년 남자였다. 결혼식에 온 모양이 었다. 그들은 공중전화 박스 옆의 소파에 걸터앉아 이것저것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예, 세 시부터예요. 그럼 잘 부탁합니다." 그의 전화가 끝났다. 하영은 서둘러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지 금 그와 마주치면 안 된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좋은 기회를 놓친 분함보다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과 같았다. 생각하고 있던 대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자. 최후의 식사를 말이다. 그녀가 에스컬레이터로 올라가는 것과는 반대로 윤 형사가 또 한 사람의 형사와 함께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으나 그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 하고 그녀의 어깨와 스치고 있었다. 3 오후 3시 5분. "여러분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사회자의 조금 흥분한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서 식장에 흘렀다. 시끌 시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손님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지금 신랑 신부가 입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큰 박수로 맞이해 주십 시요!" 터지는 박수로 인해 상기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결혼행진곡이 흐르는 가운데 정관우와 현지수가 팔짱을 끼고 조용히 입장했다. 턱시도 의 정관우, 웨딩드레스의 현지수, 두 사람 모두 몹시 얌전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볼이 상기되어 가만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식장은 완전히 서양식이었다. 10개의 둥근 테이블에 각각 10여 명의 손 님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식이 끝나면 하객들은 그 자리에 앉아 맛있는 요리를 즐기게 될 것이다. 황일청은 식장을 둘러보았다. 하객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었다. 접수를 한 양쪽의 친구, 친척에게 전부 이 점을 세심히 확인시켰다. 종업원에 대 해서도, 책임자에게 이야기하여 전부 신원을 알고 있는 사람만으로 써 달 라고 요청했기에 달리 걱정이 없었다. 위험이 있다면 식장보다도 복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식이 끝나고 신 랑 신부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리를 뜰 때, 복도에 숨어서 도중에 습격 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오늘만도 이 호텔에서는 10여 쌍의 결혼식이 거행된다고 한다. 하객의 한 사람으로 가장해서 로비를 걷고 있어도 아무도 수상히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 윤 형사와 또 한 사람의 형사가 복도에 대기하고 있다. 식장 안에 도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쪽에 또 한 사람의 형사가 지키고 있다. 그러나 황일청은 이것으로 완벽하게 안전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 다. 민하영은 살인을 거듭하면서도 아직 한 번도 경찰의 손에 잡혀 본 적 이 없는 것이다. 그만큼 용의주도해서, 그녀는 경찰의 머리 위에 앉아 있 는 것이었다. 오후 3시 20분. 민하영은 화장실에서 복도로 나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이 호텔의 종업원 제복을 입고, 자신의 옷과 핸드백을 넣은 종이 백을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일단 1층으로 내려가 짐 보관소에 들 렀다. "손님께서 맡겨 달라고 하셨어요." 짐 보관소 직원은 호텔에 근무하는 종업원의 얼굴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사무적인 표정으로 그 물건을 받고 번호표를 건네 주 었다. 그녀는 앞치마 주머니에 번호표를 넣고, 함께 들어 있는 두 자루의 칼 에 손을 대어 보았다. 차가운 감촉이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또 하나 조그만 종이쪽지가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아주 작은 종이쪽지, 소중하게 접혀진 아주 작은. 오후 3시 50분. 음악이 흐르고, 하객들끼리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 시간이 계속되 고 있었다. 도중에 사회자가 몇 통인가 축하전보를 읽고 있었지만, 손님 들의 귀에는 별로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았다. 황일청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두 사람이 옷을 갈아입고 돌아올 시간인 것이다. 이 사이가 한 번의 위험한 고비가 된다. 특별히 세심한 손놀림으 로 그는 식사를 계속했다. 그 시간, 레이스 꽃무늬의 엷은 핑크빛 칵테일드레스를 입은 지수와 순 백의 턱시도 차림인 관우가 대기실을 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고 그냥 웃어 버렸다. 두 사람은 그렇게 멋적게 웃으면서 호텔 예식장 안내책임자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식이 시작될 때부터, 계속 두 사람이 복도로 나올 때마다 따라다니면서 경호하고 있는 두 명의 형사가 소파에서 일어서서 신랑 신부 옆으로 갔 다. "수고하십니다." 관우가 윤 형사에게 말을 했다. "정말로 위험한 것일까요?" 지수가 조금 불안한 듯이 주위를 돌아봤다. "만일을 위해서입니다." 윤 형사가 가볍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괜찮아." 관우가 지수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순간에도 하영은 그들과 충 분한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앞치마 주머니에 들어 있는 두 자루의 칼이 다소 무겁게 느껴졌다. 그녀의 손엔 로비의 자동판매기에서 사온 담배가 한 상자 들려 있었다. 언뜻 보기에 형사임을 알 수 있는 두 명의 남자가 그들 곁에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지금은 도저히 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고, 종업원 제복을 훔친 것이 알려져서 조사당할지도 몰 랐다. 신랑과 신부가 나란히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도 하영은 이상하게 질투 를 느끼지 않았다. 아름답고 화려한 두 사람에게 정말 감동했다고 해도 좋았다. 저대로 내버려 두고 싶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러면 너 무나 쓸쓸하다. 혼자 죽는 것은 싫다! 혼자서는. 문득 주머니의 종이쪽지를 생각해냈다. 아직도 손 안에 작게 접혀져 있 다. 식장 입구까지 와서 관우와 지수는 식장 안내자에게서 1미터 정도 되 는, 끝에 양초를 연결한 금색 막대기를 받았다. 각 테이블 중앙에는 불이 켜 있지 않은 굵은 초가 있는데 이제 그것에다 두 사람이 손에 든 촛불로 점화하면서 도는 순서가 이어질 것이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장내에서는 사회자가 또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황일청은 살짝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 무사히 끝나는 것이다. 식장이 어두워지고, 스포트라이트가 입구를 비추고 있었다. 두 사람의 손에 든 작은 초에 불이 옮겨 붙고 문이 열렸다. 로맨틱한 음악이 흐르 고, 하얀 턱시도의 관우와 칵테일드레스의 지수가 금색 막대기를 들고 들 어오자,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라이트가 두 사람을 잡고, 천천히 이동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10개의 테이블을 일일이 돌며 양초에 불을 붙일 것이다. 복도에서는 두 사람의 형사가 크게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잠시 쉴까?" 두 사람은 가까운 소파로 가서 앉았다. 그때 종업원 한 명이 두 사람 옆을 빠져 나가서 피로연회장 문을 살짝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윤 형사가 소파에 자리잡고 복도를 바라보았을 때, 벌써 그 종업원의 모습은 문 안으로 사라졌다. 입구에 서 있던 호텔 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 오는 여종업원을 보았다. "뭐지?" 그 여자는 그에게 담배를 보이며 작게 말했다. "손님이 사오라고 했기 때문에." "방해가 안 되도록 해." "예." 그 여자는 실내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지수와 관우는 세 번째 테이블의 초에 점화할 참이었다. 하나에 불이 붙을 때마다 박수와 환성이 일었다. 하영은 벽을 따라서 조금씩 정면 테 이블 쪽으로 다가갔다. 모두 두 사람에게 정신을 빼앗겨, 그녀의 움직임 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게다가 방이 어두워서 눈에 띄지도 않았다. 네 번째 초에 불이 붙었다. 하영은 정면의 중앙 테이블이 조금 옆에서 보이는 위치까지 오자, 벽에 몸을 딱 붙였다. 주머니에서 두 자루의 칼을 꺼내서 양손에 하나씩 들고 앞치마 밑으로 넣었다. 다섯 번째 초가 불이 잘 붙지 않는 바람에 조금 시간이 걸려서 겨우 점 화되었다.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여덟 번째, 그리고 아홉 번째. 마 지막 열 번째 테이블의 초에 점화하게 되면 두 사람은 그녀에게 등을 향 하고 테이블을 다시 한 바퀴 돌게 된다. 그 순서가 끝나면 마침내 방의 불도 모두 켜질 것이다. 그 직전이 바로 결행의 순간이다. 그녀는 칼을 쥐고 잠시 숨을 죽였다. 열 번째 테이블로 두 사람이 갔다. 두 사람의 학교 친구들이 모인 테이 블이기 때문에 상당히 시끄러웠다. 촛불 점화 순서가 모두 끝났다. 이제 두 사람은 스포트라이트의 안내를 받으며 테이블 주위를 한 바퀴 돌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은 금색 막대기를 식장 안내원에게 건네 주고는 테이블을 돌기 위해 걸음을 내딛었다. 반경 1미터 내외의 희미한 스포트라이트가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드디어 두 사람이 그녀가 있는 자리 쪽으로 접근해왔다. 스포트라이트 의 희미한 둥근 빛 안에 민하영의 얼굴이 반쯤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 순 간이었다. 황일청은 그때 마침 그녀를 정면으로 보는 위치에 앉아 있었다. 왜 저 런 곳에 여종업원이 서 있지? 그는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때 하영이 손에 들고 있는 칼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반짝 빛났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황일청이 날카롭게 외쳤다. "박 반장!" 박 반장은 눈앞에 뛰어가는 여자를 보았다. 그 손에 칼이 있는 게 보였 다. 그 여자의 손이 허공을 가르고 있는 게 보인 순간 굉장한 총성이 홀 안의 공기를 산산조각내 버렸다. 두 자루의 칼이 총성의 메아리를 따라 바닥의 카펫 위로 떨어져 나뒹굴 었다. 식장 안은 순식간에 비명과 공포의 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관우와 지 수는 우뚝 멈춰서서 눈앞에 쓰러진 민하영을 보았다. 하영은 몸을 조금 일으켰다. 몸이 무거웠다. 등이 젖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죽는 것인가. 방이 이상하게 조용했다. 그녀는 힘을 짜내어 관우 쪽으로 조금 기어갔지만 더이상 갈 힘이 없다 는 사실을 알자 오른손을 관우를 향해서 내밀었다. 역시 혼자서 죽지 않 으면 안 되는 것일까? 오래 전부터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관우 손에 닿아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내 손을 잡아 주면 좋으련만, 좋으련만. 그렇지만, 손을 들고 있는 것도 괴로워졌다. 관우의 얼굴이 점차로 희 미해지고, 흐려졌다. 4. 4월 5일. "황 선생님!" 관우가 무의식중에 소리를 질렀다. 열린 문 밖에 황일청이 만면에 웃음 을 띠며 서 있었던 것이다. "들어가도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아직 정리하진 못했습니다만." 새로운 아파트 구조는 너무나 청결해서, 보는 사람을 상쾌하게 했다. 부엌살림이나 가구의 배치가 예술적이라고 할 만큼 산뜻한 것이 역시 지 수답다고 황일청은 생각했다. "지수는 물건 사러 갔어요." "응, 알고 있어." "만나셨습니까?" "아니, 나오는 것을 봤지." "그렇습니까? 지금 차를 끓이겠어요." "아니, 괜찮아." 황일청은 작은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여러가지로 고생하셨지요." 관우가 주전자에 물을 넣으면서 말했다. 민하영의 죽음과 그녀의 마지 막 수기가 발표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은 아 직 진정되지 않았다. 황일청은 호텔에서의 참극이 있은 후 자신과 박 반장이 모든 것을 처리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예정대로 신랑 신부를 신혼여행지로 출발시 켰다. 일생에 한번뿐인 신혼여행마저 희생된다면 무엇보다도 지수가 너무 가엾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민하영이 그 수기를 남기고 간 것은 행운이었지요. 연속살인의 동기도 알았구요." "그 일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왔다네." "어떤 일이신지?" "그 수기를 읽고 자네는 어떻게 생각했나?" "글쎄요. 뭐, 이런 말이 좋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불쌍한 여자구나 하고." "정말이야,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운명의 실에 조종당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녀 자신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 "예?" "수기 가운데에서 '선생님'이라는 사내에게 폭행당한 얘기 말이야." "아! 생각났습니다. 자신이 마치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 인형과 같이 ." "그렇지." 황일청이 관우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잠시 후에 그의 입에서는 다소 엉뚱한 말이 튀어 나왔다. "그러나 그녀는 진정한 의미를 몰랐어." "진정한 의미라니요?" "민하영이라는 마리오네트 인형을 조종한 것은 운명도 신도 아니었어." "무슨 뜻이죠?" "그녀를 조종한 것은, 인간이었다는 말이야." "그러면 누군가, 배후에 있었다는 얘기입니까?" "그래." "놀랍군요, 황 선생님. 어떻게 해서 그것을 알아냈습니까?" "왜냐하면 그 수기는 모두 엉터리이기 때문이지." 관우는 황일청의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그의 안색이 잿빛이 되어가고 있었다. 너무도 무서운 얘기이기 때문이다. "말씀하시는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만." "보통사람들은 모두 그 수기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나는 좀더 냉정하게 자세히 분석해 보았네. 그 결과 여러가지의 모순이 있는 걸 발 견 할 수 있었지." "예를 들면요?" "우선 살해당한 네 사람이 그 콘도에 묵고 있었다고 그녀는 얘기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6년 전의 사건이야. 그런데 마지막으로 살해당한 남자가 교사가 된 것은 5년 전, 그러니까 콘도에서의 사건 뒤지.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그는 지목한 '선생님'이라고 불리울 수는 없어. 둘째로 처음에 살 해당한 변호사인데, 그는 그해 여름은 담석수술로 입원하고 있어서 제주 도에 갈 수가 없었어." "그러면, 그녀가 사람을 착각하고 있었다는 얘기인가요?" "두 사람이나 착각할 수가 있을까?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야. 더욱 큰 모순이 있어." 황일청은 잠시 시간을 두고 나서 담담한 목소리로 얘기를 계속했다. "그녀의 검시에 나도 입회했지. 그런데 그녀는 완전한 처녀였어." "뭐라구요?" "그녀는 자기 자신이 쓴 수기에서 인정하고 있듯이 몽상과 현실의 경계 를 때때로 잃어버리는 여자였지. 폭행 그 자체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 던 거야. 그것은 단순한 그녀의 몽상세계에서의 사건이었지." 관우는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황일청의 이야기를 듣고 있 었다. "그녀는 열이 나서 자고 있었지. 아마 그곳에 취한 남자가 정말로 방을 잘못 찾아서 들어왔을지도 모르지. 나갈 때에 콘도 종업원이 '선생님'이 라고 부른 것도 어쩌면 사실일 거야. 그러나, 그 사이의 사건은 모두 그 녀가 열에 들떠 있는 동안에 그려낸 몽상의 산물이었던 거야. 아마도 이 상할 정도로 결백했던 그녀의 내부에는 어떤 억압된 욕망이 있었음에 틀 림없어. 그것이 몽상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자기 자신이 그것을 사실이 라고 생각하도록 믿게 되어 버린 거야." 관우는 머리를 흔들었다. "다음에 의문이 되는 것은, 그러면 왜 그녀는 그 네 사람을 죽였는가 하는 점이지. 그녀는 분명히 그 네 사람이 어느날 실제로 콘도에 머물렀 다고 생각했던 거야. 어떻게 그렇게 생각했을까, 조사했던 것일까? 어떻 게? 조사했다면 그럴 리가 없는 사람을 두 사람이나 죽인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군요." "이러한 가설을 세워 보면 어떨까? 여기에 어느 인물이 있어서 하영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어떤 사람을 죽일 결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 다고 치자, 동시에 그 인물 역시 비슷한 시기에 몇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신이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상 대가 우연히 전부 '선생님'이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입장의 사람들뿐 이었다면. 그래서 그 인물은 자기가 죽이고 싶은 사람의 리스트를 그 녀에게 주고, 그 안에 그녀가 죽일 상대가 있다고 말했던 거야. 어떤가, 이런 가설이." "그야말로 실에 의해 조종당하는 마리오네트 인형을 닮았군요." 관우가 중얼거렸다. "그렇지, 그녀는 실에 조종되어서 그 인물을 위해 사람을 계속 죽인 거 야." "그러나, 그러나 그 실을 잡고 있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 까?" 황일청이 물끄러미 관우의 눈을 바라보다가 미미한 웃음을 머금은 입을 조금 열었다. "바로 자네!" 관우가 웃었다. "황 선생님! 놀래키지 마세요." "유감스럽지만, 나는 진심이야." "무슨 말씀이세요?" 관우가 화난 듯이 말했다. 아니, 그는 실제로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럴까? 그러나 자네 이외에 누가 그것을 할 수 있을까? 그녀는 지하 실에 유폐되어 누구와도 접촉이 없었어. 그녀는 누구도 믿고 있지 않았 지. 그런 그녀에게 리스트를 건네 주고 믿게 할 수 있었던 사람은 이 세 상에 오직 자네밖에 없어. 그녀를 감옥에서 탈출시켜 준 것도 자네야. 그 녀는 자네만을 믿고 있었던 거지. 그것만이 아니야. 여섯 개 한 쌍인 칼 과 상당한 금액을 그녀에게 미리 준비해 준 것도 자네뿐이야. 그녀가 지 하실을 나가서 민지영을 비롯해 세 사람을 죽이고 도망갈 때까지의 짧은 순간에 그만큼의 돈과 칼을 제대로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지." "증거라도 있습니까?" 관우의 힐문에, 황일청은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고는 안에서 한 장의 사진을 꺼냈다. "이것은 자네가 쓴 리스트야. 자네의 필적인가는 감정받으면 금방 알 수 있어, 어때?" 관우는 사진을 받고 뚫어지게 그 종이를 쳐다보았다. 네 사람의 이름과 주소가 거기에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사진의 종이는 꼬깃꼬깃하고, 문자도 희미해져 있었지만 필적은 읽어낼 수 있었다. 그 다음 순간, 관우가 어깨를 떨어뜨리고 깊이 숨을 쉬었다. "버리라고 말했는데." 조금도 표정의 변화 없이, 황일청이 조용하게 말을 이었다. "그녀는 자네를 사랑하고 있었네. 여자들은 애인의 물건을 뭔가 하나는 가지고 있고 싶은 거야, 하지만 그녀는 마지막엔 자네가 말한 대로 했지. 자네를 습격하기 전에 그 종이쪽지를 입에 넣은 거야. 이것은 그녀의 위 속에서 발견된 것이지." "대단하시군요." 관우가 잠자코 황일청을 바라보다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 수기만 보고, 모든 걸 전부 추리한 겁니까?" "그렇지는 않아. 자네를 의심하게 된 계기를 준 사람은 실은 박진호 교 수였지." "박 교수님요?" "피로연이 그런 식으로 끝나고, 자네들을 보낸 후에 나는 민하영의 시 체 옆에 남아 있었지. 그런데 그때 박 교수님이 천천히 걸어와서 이렇게 물었어. '지금 잠시 들었는데, 이 아이가 민하영입니까'라고 말이야. 내 가 그렇다고 하자 박 교수가 말하더군. '이 아이의 아버지가 혹시 민태호 씨 맞나요?' 그런데 뜻밖에도 박 교수가 여자의 시체를 내려다보고는 머 리를 흔들며 이렇게 말했지. '나는 이 애를 어릴 때에 한 번 본 적이 있 소. 귀여운 여자아이였는데, 불쌍하게도!' 민하영을 아느냐고 내가 묻자, 박 교수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더군. '이 아이의 아버지는 나와 대학 동창으로 머리가 무척 좋은 사람이었소.' 그것은 정말 우연이었네. 설마하니 박 교수로부터 그런 대답을 듣게 될 줄이야. 박 교수가 슬픈 목 소리로 또 이렇게 중얼거렸지. '민 회장이 딸이 죽었다는 것을 알면 틀림 없이 상심할 거요.' 교수님은 신문 따위는 전혀 읽지 않기 때문에 민태호 가 죽은 것도, 마약 밀수를 하고 있던 것도 전혀 몰랐던 거야. 그가 죽었 다고 하자 교수님은 또 이렇게 말했지. '이거 곤란하군. 나는 학생들이 프랑스로 갈 때마다 계속 민 회장 앞으로 소개장을 가져가게 했는데. 그 사람이 파리에서는 상당히 발이 넓다고 알려졌으니까.' 그래서 내가 물었 지. 그러면 교수님은 정관우 군에게도 민태호 씨 앞으로 소개장을 가져 가게 했습니까. 교수님은 고개를 끄덕였지." 관우는 무표정하게 황일청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 덤덤한 얼굴 위로 황일청의 낮은 음성이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자네를 의심하기 시작했지. 자네가 이미 오래 전 에 민태호라는 이름을 알고 있으면서 왜 잠자코 있었을까, 자네가 왜 우 연히 민가영의 집에 가정교사로 간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경 찰청에 민하영의 수기가 도착했다고 하더군. 그 다음에 우리는 그녀의 수 기를 상세히 검토하고 검시를 새로 했지." 관우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자네가 이야기를 하지. 처음부터 순서대로, 부탁하네." 황일청이 말하자, 관우가 희미한 웃음과 함께 간단히 내뱉었다. "좋습니다." ** 나는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소개장을 가지고 민태호 회장댁으로 갔 습니다. 그런데 문 앞에서 갑자기 남자 한 사람이 나를 덮치는 겁니다. 젊은 프랑스인이었습니다. 그가 갑자기 내 가방을 빼앗으려고 했기 때문에 나는 그 녀석과 격투하 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내게 밀리자 갑자기 칼을 꺼냈습니다. 싸우 고 있는 사이에, 나는 그 칼을 빼앗아 오히려 그 녀석의 옆구리를 찔러 버렸습니다. 남자는 피투성이가 되어 괴로워하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친 척도, 아는 사람도 없는 파리에서 갑자기 사람을 찔렀으니까요. 어쨌든 나는 급히 민태호 회장댁으로 뛰어들었습니다만, 저택에 있는 사람은 관 리인으로 민 회장이 이미 죽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점점 곤란해져서 사정을 설명하자, 관리인은 내게 방으로 들어가서 기 다리라고 말했습니다. 상당히 오랜 시간 기다렸습니다. 참 막막한 상태였 지요. 한참 후에 관리인이라는 사람이 나를 차에 태워 교외로 데리고 갔습니 다. 사람이 없는 숲속 오두막집에 도착하자 밤이 되었습니다. 오두막집 안에 몸집이 큰 한국인 한 사람이 경호원 같은 많은 프랑스 사람들을 거 느리고 앉아 있었는데,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사람이 바로 민태호였습 니다. 그곳에서 나는 겨우 설명을 들었습니다. 내가 칼로 찌른 남자는 민 회 장 조직과 적대관계에 있는 마약 조직의 부하로, 그 저택을 계속 감시하 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곳에 내가 가방을 들고 찾아갔기 때문 에, 틀림없이 한국에서 온 민태호 조직의 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가방을 빼앗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민태호 회장은 말했습니다. '자네가 그 프랑스인을 죽인 것은 곧 상대 에게 알려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네의 목숨은 사흘도 가지 않을 것이 다. 녀석들은 자네를 상당히 고통스럽게 하고 나서, 천천히 죽일 것이 다.' 농담이라고도 진담이라고도 할 수 없는 말투로 이렇게 말하고 그는 크게 웃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말끝에 또 이런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내가 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알게 되었으니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널 죽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프랑스에 죽으러 온 것은 아니겠지만 누구 손에 죽 는가는 네 마음에 맡기겠다.' 나는 궁지에 서면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는 성격이어서, 민 회장에게 대뜸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민 회장은 몹시 유쾌한 듯이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 후에 그는 뜻밖에도 내게 자기 일을 도와 줄 마음이 없는가 물었던 것입 니다. 정말, 민태호라는 사람은 상대를 잡고 또 놓아 주지 않는 마력과도 같 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게 귀족적인 분위기라는 걸까요? 모든 것에 초연한 것 같은. 겪어 보지도 않은 나를 당장에 채용하려고 한 것은 그런 귀족다운 변덕의 하나였겠지요. 어쨌든 나로서는 승락하지 않으면 누구에 의해서든 살해당할 것이니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생각지도 않게, 적지 않은 돈도 들어오니 . 나는 결코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편이 아닙니다. 고아로 자란 나 는 어릴 때부터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진리를 믿으며 살아왔습니다. 도덕이나 법률 따위는 아무런 가치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점에서는 민 회장과 나는 닮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의 그런 점을 한눈에 간파하 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예정대로 소르본느로 가서 연구생활을 하며 한편으로는 민 회장의 부하로 일했습니다. 내가 찌른 상대가 어떻게 되었는가는 잘 모르겠습니 다. 민 회장이 시체를 처리해 버렸겠지요. 그는 한국인 부하를 몇 사람 부리고 있었지만, 특히 나에게 많은 관심 을 두고 있었습니다. 내게 뛰어난 범죄자의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지요. 하지만 그가 간파할 수 없었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내가 배반자 가 될 정도의 악인이었다는 점입니다. 관우를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바라보는 황일청의 얼굴에 잔잔한 분노 가 깔리고 있었다. 그가 애써 그 분노를 삭이며 나지막이 물었다. "자네가 민태호를 죽였지?" "그렇습니다. 그 적대관계에 있던 조직패가 나의 존재를 알고 어느날 밤 내 방으로 쳐들어왔습니다. 자기들에게 죽을지, 아니면 민태호를 죽이 고 목숨을 건질지 어느 쪽인가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더군요. 오래 전부터 나는 그들이 밀수 루트를 움직이는데 적합한 한국인을 찾고 있다는 사실 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민태호의 조직을 맡겨 준다면 해치우겠다고 거꾸 로 제안했습니다. 그들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엔 승락하더군요. 실제로 그때에는 나도 욕심이 생겨서, 조직을 한번 움직여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나는 다음에 민태호와 만났을 때, 그를 뒤에서 쏘았습니다 ." 황일청은 잠자코 정관우를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간의 사정은 잘 알았네. 모든 걸 솔직히 얘기해 주니 고맙군. 이번에는 민하영이 죽인 네 사람쪽인데, 우리들에게도 어느 정도 아는 것 이 있지. 네 사람의 최근 수 년간의 행적을 조회해 보았더니 거의 같은 시기에 네 사람 모두 유럽으로 여행을 갔더군. 변호사는 벌써 몇 번이나 갔었고, 의사도 마찬가지야. 다른 두 사람, 즉 음악가와 교사는 그때가 처음 가는 유럽여행이었어. 그런데 묘한 것은 그 시기가 마침 민 회장이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고 가장한 때의 일이었어. 거기에 열쇠가 있다고 보 고 있는데." "아셨습니까? 그 사람들은 민 회장이 탈 예정이었던 여객기가 추락했을 때, 우연히 민 회장과 같은 호텔에 숙박했었고 그날 함께 파리 근교의 유 적을 돌아보았었지요. 민 회장이 특히 그런 방면을 자세히 알고 있어서 가이드 역할을 맡았던 것 같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지, 민 회장은." "그런데 그 항공회사의 여객 명부가 좀 엉터리였는지 예약자 명단만 보 고는 그 사고로 민 회장도 죽었다고 발표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그 기회 를 잡아 감쪽같이 모습을 감추었지만, 그가 그 비행기를 타지 않았던 것 을 알고 있던 사람이 바로 그 네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네 사람 모두 여행 중의 일이고, 더구나 각각 다른 루트로 여행을 계속하고 있었 기 때문에 그런 것을 알지 못했겠지만 민 회장은 자신이 살아 있다고 알 려지는 것을 막고 싶어했습니다. 가장 걱정하고 있던 것은, 네 사람이 함 께 찍은 사진 속에 자기가 찍혔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 에게 한국으로 돌아가면 이 네 사람을 처리해 달라고 했던 것이지만, 그 전에 내가 민태호 회장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렇게 되자 이번에는 나에게 있어서 이 네 사람이 귀찮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민태호가 사고로 죽지 않은 것이 언젠가 알려지면, 시체가 발견될 경우엔 신원이 알려지고, 당 연히 맨 먼저 사업상 경쟁자가 의심받게 됩니다. 내가 의심받을 일은 우 선 없겠지만, 만일 조금이라도 혐의가 걸리면 조직 상층부에 있는 사람은 조직의 안전을 위해 재빨리 나를 처치해 버릴 것이기 때문에, 그 네 사람 을 죽이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도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네 사람 을 죽이는데 실수를 해서 단서가 잡히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되기 때문에 신중히 할 필요가 있었고, 한국에서의 민태호의 조직에 대해서도 자세히 조사해야 했습니다. 한국 조직에서는 아직 민태호가 살아 있다고 믿고 있 었으니까요. 나는 내가 없어도 밀수 루트가 잠시 괜찮도록 손을 써놓고서 한국으로 돌아와 우선 루트의 중심인 민가영을 보러 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솜씨 좋게 가정교사로 고용되었지?" "간단합니다. 그쪽에서 출발하기 전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가까운 시일 내에 프랑스에 오도록 할 테니까 프랑스어 회화를 배워 둬라. 친구인 S대 학의 박진호 교수에게 부탁하면 좋은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편지를 보내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맞춰 교수님에게 얼굴을 내민 것입니 다." "그렇군. 돌아오고 나서 조직과의 연락은 어떻게 했지?" "거의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우선 민가영을 잘 알아 둘 필요가 있 었습니다. 국내 루트는 그녀 혼자서 정리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때까지는 함부로 해외전화를 해서 의심받아서는 곤란했거든요. 부상당한 발이 낫고 나서 몇 번인가 연락했지만, 어쨌든 가까운 시일 내에 한번 프랑스로 돌 아갈 생각이었습니다." "알았네. 그러면 민가영의 집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이야기해 주겠나?" "아시는 대로입니다. 지하실의 하영에 관한 것은 전혀 듣지 못했기 때 문에 놀랐습니다. 여러가지로 이야기를 해보고는, 나는 그녀가 '선생님' 이라는 남자를 죽이고 싶어하는 절박한 사정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래서 생각이 난 거죠. 내가 죽여야 할 남자도 모두 '선생님'뿐이라구요. 그래서 그녀를 풀어 주기 직전에 이것이 네가 죽여야 할 상대라고 리스트 를 건네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설마 언니와 일하는 사람까지 죽이리 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나까지 뼈가 부러져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버렸지요. 내가 그 요양원 침대에서 얼마나 애를 태우고 있었 는지, 그런 불상사는 상상도 못했지요." "그렇지만, 그녀는 자네의 지시를 충실히 지켰어." "그렇습니다. 그녀가 혼자서 그만큼 완벽하게 해치우리라고는 생각하지 도 못했습니다. 하영은 천재적인 살인자였어요." "자네는 그녀를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었지?" "죽여서 자살로 가장했겠지요." "그런데 위험하게도 자네가 살해당할 뻔했군." "얄궂은 운명이지요. 그런데 그녀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고 있었을까 요?" "불쌍하게도, 자신이 마리오네트 인형이라는 것도 모르고." "마리오네트 인형." 그가 이렇게 몇 번 중얼거리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지수에게는 황 선생님이 말해 주십시오." "좋아, 전할 말이 있는가?" "아무것도. 다만 만나러 오지 말아 달라고 말해 주십시오." "그것뿐인가?" "그것뿐이면 안 됩니까?" 도전하듯이 관우가 내뱉었다. "원래 지수와의 결혼도 일종의 위장이었으니까요. 별로 사랑하고 있었 던 것도 아닙니다." "진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건가?" "진정입니다." 경련이 일어난 듯한 웃음이 관우의 얼굴에 떠올랐고 거의 동시에 황일 청의 눈가에도 뭔가를 참는 듯한 극도의 고통스런 그늘이 지나갔다. "자, 빨리 가야겠지요? 지수가 없을 때 가겠어요. 그녀가 눈물을 흘리 고 슬퍼하는 것은 질색입니다." 그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배어나고 있다. 황일청은 물끄러미 관우를 바 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형사 들이 들어왔다. 그때 정관우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했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마리오네트가 될 차례라구요. 교수 대의 로프에 매달려 발버둥치겠지요." 관우가 연행되어 간 후, 황일청은 계속 의자에 앉아서 지수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다. 지수는 관우가 사라진 것에 대한 충격에서 회복될 수 있 을 것인가? 틀림없이 괜찮을 거다. 황일청은 그렇게 바라고 있었다. 활기 있는 발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리자, 지수가 뛰어 들어왔다. "관우 씨 다녀왔어요! 어머, 황 선생님! 언제 오셨어요?" "좀 전에." "잘됐어요. 오늘 저녁에 쇠고기전골을 하려고 고기를 많이 사왔거든요. 드시고 가세요." 그러다가 지수가 방을 둘러보고 이상한 듯이 물었다. "관우 씨는 어디 있지요?"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