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천사는 신이 아니다 원작자 : 아카가와지로 제 목 : [역자서문] [ 역 자 서 문 ] 이 소설 천사는 신()이 아니다는 일본의 신세대 추리소설 작가인 아카가와 지로()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본사는 이미 그의 대표작인 카이로엔 밤이 없다를 국내 최초로 출 간하여 우리 독자들에게 그의 작품을 선보인 바 있습니다만, 이 소설은 그의 또다른 대표작으로서 독자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할 걸작입니다. <두뇌게임의 소설>이라는 특별한 평판을 받는 아카가와 지로의 추리소 설은 여러분이 카이로엔 밤이 없다에서도 보았듯이 독자의 논리적 사 고를 요구하면서, 또한 독자로 하여금 결말에 대한 예측을 불허한다는 특 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소설 천사는 신이 아니다 역시 그의 이런 작풍()에서 조금 도 빗나가지 않습니다. 뺑소니사고로 인해 죽은 한 젊은 남자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협박장 한 통. 그 유일한 증거에 매달리며 엄청난 사건의 강물 속에 뛰어든 20대 미 모의 여성이 겪는 일주일 간의 격렬한 도전과 모험을 탄력 있고 속도감 넘치는 솜씨로 묘사하고 있는 작가는, 이 소설에서도 예외 없이 놀랍고도 극적인 반전으로 소설을 마무리함으로써 독자의 찬탄을 불러일으키게 합 니다. 추리소설의 참맛을 알게 하면서도, 나름대로 어떤 일정한 기준의 문학 적 품위를 지키려는 작가의 역량이 또한번 빛나는 이 소설을 통해 독서의 재미를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제 목 : [프롤로그] 사건의 발단 -1- [ 프 롤 로 그 ] ** 사건의 발단 ** 기분이 한마디로 최악이었다. 자정을 넘긴 시간이라 졸렸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때문에 창 밖이 거 의 보이지 않았다. 그뿐인가. 자동차의 상태가 처음부터 엉망이었고, 눅눅 한 습기가 차 안에 스며들어 끊임없이 두통을 요구하고 있었다. 더구나 옆자리에 앉은 나미애()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차창 밖으 로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걸 보노라니 기분이 정말 최악에다 최저라고 할 수 있었다. "어디쯤이야, 지금?" "몰라!" 대답하는 것도 귀찮아서 유진규()가 퉁명스럽게 내뱉자, 미애가 발 끈해서 소리쳤다. "왜 화를 내는 거지? 모든 실수는 자기가 다 해놓고서 왜 내게 화풀이를 하지?" 진규는 한마디 되받아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아무튼 운전에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벌써 네 시간 가까이 계속되고 있는 운전이다. 두 시간 정 도는 시내에서 차가 밀리는 바람에 꼼짝도 못하고 갇혀 있었다. 운전을 하 다 보면 다 알겠지만 스무 시간 운전하는 것보다 두 시간 꼼짝달싹 못하고 묶여 있는 게 더 피곤하다. 거기다 비까지 퍼붓는다면 자동차를 포기하고 차라리 걸어가는 게 낫다고 생각될 정도다. 가능하다면 아무 모텔이라도 들어가서 쉬고 싶었다. 지금에 와서, 푹신한 침대에서 미애와 뒹굴고 싶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좀 쉬고 싶을 뿐이 었다. 눈을 붙이고 싶은 것이다. 진규는 22세로, 식료품 판매회사에 다니고 있다. 전문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했으나 그나마 졸업을 한 학기 남겨 놓고 때려치웠다. 한마디로 공부가 싫었고, 뭔가 자유럽게 사는 게 꿈이었기 때문에 아무 미련 없이 학교를 포 기했던 것이다. 그 뒤로 진규는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전집도서 세일즈도 몇 달 해봤고, 싸구려 의약품을 들고 서울 시내 약국을 전전해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 금의 회사에 들어와서는 벌써 8개월째 다니면서 조금 안정을 찾고 있었다. 그가 맡고 있는 일이란, 소형 트럭에 짐을 싣고 대리점을 도는 것으로 특 별히 급료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도중에 자주 게으름을 피울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대리점에 가서 재고 파악을 하고는 부족한 물품을 넣어 주 고 반품을 받거나 수금을 하는 따위의 일을 계속하다 보면 어떤 때는 시간 이 너무 많이 남아 처치 곤란할 때가 있을 지경이어서 진규로선 어찌되었든 최상의 직장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일을 하다가 어느날 잠시 쉬러 간 휴게소의 점원과 눈이 맞았다. 가슴이 유난히 큰데다가 요염하게 웃는 얼굴이 진규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진규가 슬쩍 주말에 드라이브나 하자고 농을 쳤더니 그녀도 진규가 마음에 들었는지 단박에 허락을 했다. 그녀가 바로 나미애로, 오늘이 바로 진규가 말했던 그 '주말'이며 그들의 첫데이트였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미리 예약해 둔 호텔은 어디서 착오 가 생겼는지 이름조차 적혀 있지 않았고, 부근의 대여섯 군데 모텔들도 주 말이라 초만원, 할 수 없이 민박을 찾아보니 한방에 7, 8명이나 들어가는 집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너무 운이 없는 날이었다. 꼬일대로 꼬인 하루 였다. "아직 멀었어?" 미애가 지긋지긋하다는 투로 말했다. "난 너무 피곤하단 말야" "조금만 더 참아. 피곤한 걸루 따지면 내가 더 피곤하다구" 사실 어디쯤 달리고 있는지 진규도 조금 불안했다. 방향도, 위치도 모든 게 다 불분명했다. 오가는 차량도 거의 없었고, 그 흔한 표시판 하나 보이 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든 게 확실했다. 비포장도로였고, 길이 뱀처럼 구불구불해서 까딱 잘못하면 길 아래쪽 논두렁으로 곤두박질할 염려가 있었다. 쓰벌! 진 규는 이렇게 여러 번 중얼거리다가 힐끔 미애쪽을 보았다. 어느 사이엔가 입을 크게 벌리고 잠들어 있었다. "편하군, 쓰벌!" 그 얼굴을 보노라니 매력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내가 왜 이런 계집애에게 반해서 이 고생이지? 눈살을 찌푸리며, 진규는 정면을 응시했다. 저쪽 건너 편으로 포장도로인 듯한 직선의 길이 희미하게 보였다. 겨우 길을 찾았다. 진규는 한숨을 길게 쉬며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라이트 정면에 어떤 사람이 뛰어든 것은 그 포장도로에 막 들어섰을 때였 다. 처음에 진규는 순간적으로 그것이 착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시 간에, 더구나 이런 장소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있다고 하더라도, 정 신병자가 아닌 바에야 유일하게 들리는 자동차의 소리를 못들었을 리가 없 다. 그러나 모든 것은 현실이었다. 그 사람이 회색 레인코트를 입은 남자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차리고, 브레이크를 힘껏 밟기까지 단 1초도 걸리지 않았 을 터이지만 모든 상황은 끝났다는 걸 진규는 깨달았던 것이다. 퉁 하는 둔탁한 마찰음이 빗소리에 섞여 들려온 순간, 남자의 모습이 시 야 밖으로 사라졌다. 자동차가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미끄러졌고, 잠을 자던 미애가 거의 일어설 듯이 몸을 세우곤 눈을 크게 떴다. 진규가 핸들을 꽉 쥔 채 죽어라고 브레이크를 밟자, 자동차는 가로수를 들이받고서 는 심하게 비틀대다가 갑자기 멈추었다. "뭐야? 사람 잡을 셈이야?" 미애가 정신을 차리곤 성난 암코양이처럼 쏘아붙였다. 그녀는 진규가 일 부러 그러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한동안 정신없이 정면만 바라보던 진규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람을 치었어." "뭐라구?" "사람을 치었다구. 어떤 새끼가 갑자기 차에 뛰어들었어." 미애가 입을 다물고 진규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백지장 처럼 하얘진 미애의 얼굴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진규는 아무튼 나가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뺑소니를 쳐도 되지 않을까 순 간적으로 생각을 해봤지만 아무튼 차에 뛰어든 자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 지는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확인이 끝난 다음에 뭘 결정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넌 여기 있어." 비가 마치 양동이로 쏟아붓듯이 내리치고 있었다. 자동차는 거의 50미터 정도는 미끄러져 나가 있었다. 사내는 도로 한가운데에 큰 대자로 쓰러져 있었다. 자동차와 부딪치는 순 간 곧장 위로 튀어올랐다가 그대로 도로에 추락한 것이리라. 진규는 사내가 도저히 살아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 로 그에게 다가갔다. 사내가 훌쩍 일어나서 '이거 미안합니다. 난 괜찮아 요. 당신에겐 잘못이 없소.' 이렇게 말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진규는 조심조 심 걸어가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진규가 몸을 구부리고, 사내의 얼굴을 쳐다보았으나 폭우에다 몹시 어두웠기 때문에 일그러진 얼굴의 윤곽만 희미 하게 보일 뿐 잘 볼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그를 향해 번쩍 불빛을 비추는 바람에 진규는 깜짝 놀랐다. 미애였다. 그녀가 플래시를 든 채, 그에게 물었다. "죽었어?" 진규는 대답 대신 플래시를 빼앗듯이 받아들고는, 사내의 얼굴에 들이댔 다. 그 불빛에 24,5세 정도의 젊은 얼굴이 빨려 들어왔다. 일그러진 형상만 아니라면 흡사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사내의 얼굴을 씻어내고 있어 핏자국 하나 없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은 더했다. "죽었어?" 미애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어왔다. 진규는 사내의 얼굴에서 서서히 시 선을 떼며 온통 암흑뿐인 주변을 둘러보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죽었어." 유진아()는 입을 있는 대로 벌리고 하품을 했다. 벌써 새벽 1시였 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쏟아지는 하품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남자들은 바 로 이런 때 욕설을 내뱉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곧 도착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핸들을 잡고 있는 문우성()은 계속해서 이렇게 '이제 곧', '미안합 니다'를 연발하고 있었다. 그는 유진아 앞에선 늘 이런 식이었다. 그녀 마 음에 들도록 모든 행동을 했고, 생활의 많은 부분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일종의 짝사랑이었다. "괜찮아요. 우성 씨 탓만은 아니니까요." 진아가 아직도 하품이 남아 있는 입을 힘들게 벌리며 한마디 하자, 그가 핸들을 탁 치며 내뱉었다. "정말이지 이 똥차 때문에, 꼭 항의하겠습니다." 진아는 자기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문우성의 말이 진심이고, 그가 반드 시 랜트카회사에 항의할 것임을 알기 때문에 웃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젠 정말 내 차를 가져야겠어요. 월부차를 뽑을 겁니다." 문우성이 계속 이렇게 변명을 하자, 그녀가 또 억지로 한마디 해주었다.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하룻밤 사이에 다섯 번이나 고장이 나다니 참 신 기한 차예요. 그만큼 가치가 있는 차라고 생각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문우성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스물일곱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스물다섯인 진아보다 어딘가 믿음직스럽지 못하게 보이 는 그였다. 전형적인 샐러리맨 타입의 그는 늘 이렇게 진아 앞에서는 지은 죄도 없이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유진아는 이마와 눈썹의 선이 또렷하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미가 입 가에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 충혈되어 있지만 눈은 언제나 분명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고, 입술은 선을 그은 듯이 꼭 닫혀져 있 다. 몸집이 다소 작은 편이지만 작은 체격이 오히려 그녀를 더 단단하게 보 이게 한다. 두 사람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직장 부근의 한 식당에서 초만원을 이룬 점심시간에 합석을 하게 된 게 계기였다. 우연히도 두 사람 다 혼자였고, 안면도 좀 있는지라 식사가 끝난 후에 커피 한잔 하자는 문우성의 제의에 별 생각없이 응했던 것이다. 데이트는 이번으로 두 번째였다. 문우성이 차를 렌트해 드라이브를 계획 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무려 다섯 차례나 고장이 날 적마다 폭우 속에서 본 네트를 여는 등 소동을 피웠고, 그때마다 진아는 우산과 플래시를 들고 문 우성 옆에 서 있어야 했기 때문에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이렇게 시간이 늦어 버린 것이었다. "아, 겨우 도착했군요." 유진아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앞에 당도하자 문우성이 한숨을 크게 내 쉬며 말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진아 앞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듯이 그가 어깨를 힘껏 폈다. "어쨌든 도착했으니 다행이에요. 수고 많으셨어요." "수고라뇨 정말로 미안해서." "이젠 됐어요. 그렇게 몇 번씩이나 사과할 것까지는 없어요. 어머, 그런 데 손에 기름때가 묻어 있군요. 우리 집에 들어가서 씻고 가셔야겠어요." "진아 씨 집에 들어가서요?" "지금 이 시간에 다른 집으로 들어가면 강도로 오해받아요." 문우성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야심한 시간이다. 이 시간 에 여자 집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그는 순간적으로 황당한 상상이 떠오르 는 걸 참으며 다시 한번 물었다. "괜찮겠습니까?" "그 대신, 손만 씻고 즉시 돌아가셔야 해요." "물론이죠. 5분이면 됩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은 5층짜리 서민아파트이다. 대개 독신자들이 사는 아파트로 그녀는 2층에 세를 들어 살고 있었다. 방 하나에 작은 거실이 붙 어 있고 화장실과 욕실을 겸하는 작은 공간이 있는 게 전부였지만, 그곳은 말하자면 그녀의 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자, 들어오세요." 문우성은 쭈뼛대며 그녀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너무 그렇게 두리번거리지 말아요. 아침에 시간이 없어서 청소를 못했어 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퍽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다지 필요없는 물건 은 두지 않는 성격인데다 워낙 작은 공간이라 쌓아둘 데도 없어서 처음부터 가구 같은 건 사지 않았기 때문에 집안이 산뜻할 수밖에 없었다. 문우성이 손을 씻는 사이에 진아는 물을 끓였다. 따끈한 커피 한잔 정도 는 대접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잠시 후, 손수건으로 손과 얼굴을 닦으 면서 문우성이 나왔다. 그의 얼굴엔 이미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앉으세요. 차 한잔 하고 가세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이거 너무 폐를 끼쳐서." 진아는 그의 빈번한 사과에 질리는 기분이었다. 두 사람이 막 커피를 마 시려고 하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두 사람 사이에 가로놓였던 침묵을 깼다. "이런 시간에 누굴까? 잠깐만요." 진아가 수화기를 들면서 벽시계를 보니 벌써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리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누나, 나야 나! 겨우 연결되었군." 수화기 저쪽에서 갑자기 벼락을 치는 듯한 목소리가 튀어 나오는 바람에 그녀는 깜짝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수화기를 멀찌감치 떼었다가 간신히 말 을 했다. 그녀의 목소리엔 아주 조금이지만 짜증이 배어 있었다. "진규니? 너,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큰일났어." 진규는 이 말을 서너 번 더 반복했다. "큰일났다구." "무슨 말이야? 도대체, 뭐가 큰일났다는 거지?" "누나, 내가 사람을 치었어." "뭐라구?" "사람을 치었다구. 죽었어." 진아는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몰라서 동생의 이름만 여러 번 되풀이해서 불렀다. 손이 떨리는 걸 참으려고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온몸이 더욱 격 렬하게 떨려오는 것이었다. "여보세요, 누나! 듣고 있어?"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으나 한마 디도 밖으로 튀어 나오는 단어는 없었다. "누나,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야. 그밖에도 또다른 일이 있어. 정말 이상 한 일이 있다구." 흥분한 진규의 목소리가 계속 뭔가를 말하며 이어지고 있었으나 공포로 떨리고 있는 진아로서는 더이상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제 목 : 제1장 월요일 <죽은 남자의 편지> -2- ** 제 1 장 월 요 일 ** < 죽은 남자의 편지 > 새벽 3시 30분. 비는 이미 그쳐 있었다. 진아는 이 깊은 밤에 문우성에게 빌린 중고차를 타고서 경기도 광주( )를 향해 어둠 속을 질주하고 있었다. 동생이 사람을 치었다. 그리고 그가 죽었다. 그 쇼크는 아직도 유진아 에게 남아서 그녀를 떨게 하였지만 이미 혼란에서는 어느 정도 회복되어 있었다. 이 길이 맞을까? 오히려 불안한 것은 그것이었다. 광주에서도 청평 쪽 을 향하는 외진 길. 그녀로선 한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길이었다. 당황한 진규의 말이기 때문에 그다지 믿을 수는 없지만, 그녀는 일단 길이 한 줄 기여서 틀릴 수는 없을 것이라 믿으며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었 다. 문우성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걱정되어서 몹시 알고 싶어했지만 진아 가 아무 것도 묻지 말고 도와 달라고만 하자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어쨌든 진아에게 반해 있기 때문에 무엇을 부탁해도 싫다고 하지 않을 그 였다. 하지만 아무리 상대가 그런 문우성이라 해도 뺑소니 사고를 도와 달라 고는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이 일은 자신이 혼자서 어떻게든 처리해야만 했다. 그들의 부모는 진아가 대학에 들어가고 얼마 안 되어서 교통사고로 죽 었다. 그때부터 진아는 당장 대학을 그만두고 일을 하면서 동생 뒷바라지 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진아가 너무 야무진 탓인지, 아니면 진규가 너무 무른 탓인지 아무튼 그때부터 진규는 모든 것을 누나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진규가 어렵게 들어간 대학을 중퇴해 버렸을 때 도, 진아가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겨우 들어간 직장을 그가 제멋대로 그만두어 버렸을 때도, 그때는 불끈해서 두번 다시 돌보아 주지 않을 거 라고 생각하면서도 한 달이 지나서 진규가 전화를 걸어오면 결국 돈을 보 내 주거나 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번은, 이번만은 지금까지와는 사정이 다른 것이다. 사람 을 치어서 죽인 것이다. 돈을 주거나 사과해서 될 일이 아니다. 어쨌든 상황을 알아야 했다. 상대방에게 잘못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면 일말의 희망이 있지만, 전화로 한 말에 의하면 아무래도 진규의 잘못 이 더 컸던 것 같다. 게다가 그밖에도 또다른 문제가 있다고 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야, 그밖에도 큰일이." 도대체 무슨 일일까? 사람을 치어서 죽였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데 도대체 무슨 큰일이 있다는 것일까. 커브길이 계속되어 진아는 조금 속도를 떨어뜨렸다. 길이 너무 험하고 미끄러워 자신이 사고라도 일으킬 것 같았다. 차를 운전하는 것이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어깨가 아팠다. 갑자기 피로 가 밀려드는 것을 정신차려야 한다고 자신에게 말하면서 털어 버렸다. 앞쪽에 차가 멈추어 있는 것이 보여 진아는 속도를 떨어뜨렸다. 진규가 길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와서 라이트 속에서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누나! 안 오는 줄 알았어!" 진규가 뛰어와선 창을 통해 안쪽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그녀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느닷없이 진규의 뺨을 때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새벽의 뜻하지 않은 나들이에 대한 분노가 꺼지지 않을 것 같았다. "미안해,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정말이야." 동생의 넋나간 듯한 말에 그녀는 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약해져서 자 신의 마음과는 다른 말을 뱉고 말았다. "알았어, 어쨌든 지금은 그런 말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시체는 어 떻게 했어?" "저기 숲속에." "가 보자." 두 사람은 길을 건넜다. 암흑의 새벽이고 워낙 외진 길이라서 그런지 다른 차가 지나가는 모습은 전혀 없었다. "여자애는?" "지금 저 건너편 모텔에 가 있어. 갑자기 무섭다고 울음을 터뜨려서 . 일단 데려다 놓고 돌아왔어." "그애는 괜찮겠니?" "응, 별로 말할 애는 아니야." 플래시로 시체를 비추자, 젊은 얼굴 하나가 처참히 피에 젖은 채 불빛 안으로 들어왔다. "난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 어째서 이런 곳에 있었는지. 갑자기 길 한 가운데로 뛰어들었어.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비가 내려서 그만 늦어 버렸 어." "어디에서 치었지?" "여기야." 진아는 몸을 일으켜 진규가 가리키는 곳을 둘러보았다. 근처에 인가 같 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은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뿐, 특별한 어느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디에서 나왔을까?" "모르겠어, 전혀." 진아는 한숨과 함께 그 젊은 남자의 시체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동생에게 물었다. "너, 그밖에도 큰일이 있다고 말했지. 무슨 일이지?" 진규가 머뭇거리면서 셔츠 주머니에서 접은 편지 같은 것을 꺼냈다. "그게 뭐지?" "이 남자의 신원을 알아보려고 안쪽 주머니를 뒤졌더니 이게 나왔어." "편지?" "이건 단순한 편지가 아니야."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숲에서 나와서 진규의 차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운전석에 앉아서 차 안의 불을 켰다. 편지를 펼치고 그것을 본 순간, 그녀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녀는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기괴한 문자의 나열을 우두커니 바라보았 다. 신문과 잡지 등에서 일일이 오려내어 문장을 만들어 낸 편지였는데, 그것은 한눈에 봐도 협박장임을 알 수가 있었다. '네 딸은 내가 데리고 있다. 6일 이내에 10억 원을 준비하라. 오늘이 월요일이니까, 일요일까지다. 딸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 두었다. 일 주일까지는 목숨을 보장하지만 이 제의를 무시한다면 다음 월요일에는 확 실하고, 또한 자동적으로 딸의 목숨이 사라질 것이다. 경찰에 연락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진아는 반복해서 그 내용을 읽었다. 10억 원, 일주일. 확실하고 또한 자동적으로. "진규야, 이게 봉투에 들어 있었니?" "응, 이거야." 진규가 내민 것은 아주 흔한 흰색 규격봉투로 겉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 지 않았다. "이것뿐이야? 그밖에는?" "그밖에는 아직 조사하지 않았어." 진아는 편지를 봉투에 넣고는 주머니에 챙겨 넣으며 시체 쪽으로 다가 갔다.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시체 가 입고 있는 양복 호주머니를 하나하나 세심히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가 모든 주머니를 뒤집어서 나온 것은 단지 한 장의 명함뿐 이었다. "경기물산 회장 권기준()." "이 사람의 명함일까?" "이렇게 젊은데 설마 회장일까." "그럼 누구일까." "진짜라고 생각해?" 진아가 차에 기댄 채 계속 잠자코 있었기 때문에 진규가 불안한 듯이 말했다. "그 편지?" "응." "장난으로 했다고 보기엔, 상당히 노력을 많이 했어." "그러면 진짜란 말이야? 그러면 저 사람이 어째서 그걸 가지고 있었 지?" "받은 쪽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봉투엔 수신인조차 쓰여져 있지 않았 으니까." "그러면 저 사람이 유괴범일까?" "그런 것 같다. 문제는 그 다음이야." "무슨 뜻이지?" "도대체 유괴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거지. 편지에도 봉투에도 이름은 없었어." "그러면 조금 전 명함의 그 사람." 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다지 가능성이 없어. 아무리 회장 직함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일주 일 안에 현금을 10억 원이나 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해? 유괴된 사람은 상 당히 부잣집 딸일 거야." "그렇다면 틀림없이 큰 소동이 일어날 텐데."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어떻게 하지? 피해자가 누군지 알았다고 하더 라도 그 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데." "그렇구나." "월요일이라고 되어 있으니까, 오늘 이것을 상대방의 집 우체통에라도 넣을 생각이었을 거야. 그리고 일주일." "일주일 후엔 죽게 될 거라고 썼잖아." "그것도 '확실하고 또한 자동적으로'말이야." "무슨 뜻일까?" 진아는 깊이 숨을 쉬었다. 언제나 말썽만 부리는 동생이다. 이 아이에 게 아무런 뜻도 없이 들어가는 돈이 한 달에 어느 정도인지 헤아려 보는 일조차 이제는 지겨워졌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 니었다. 시체를 치워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날이 밝기 전에. "이제부터 내가 할 테니까 너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 그리고 그 여자애 는 꼭 데리고 가." 진규의 얼굴에 겨우 미소가 되돌아왔다. 누나가, '내가 한다'고 하면 이제 안심이라는 생각이 얼굴에 똑똑히 나타나고 있었다. 진규가 탄 차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서 그녀는 피곤한 모습으로 잠시 그곳에 선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사실 어떻게 하려는 확고한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시체를 어떻게 할까? 그리고 편지를 어떻게 할까?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시체를 도로에 놓아 두면 즉시 발견되어 신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렇게 되면 진규가 저지른 일은 바로 탄로난다. 경찰이 추적하면 부딪힌 차량과 뺑소니 운전사를 알아내는 건 쉬운 일일 테니까. 시체를 숨긴다면? 그때는 이 협박편지가 문제가 된다. 분명히 장난삼아 만든 협박장은 아닌 듯했다.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유진아는 사고 현장을 벗어나 지금 중부고 속도로를 향해서 달리고 있었다. 문우성의 고물자동차는 기적적으로 쾌조로운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자 신의 운전 실력인가, 그렇지 않으면 트렁크에 밀어 넣은 남자의 시체에 차가 떨어서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는 것일까. 여자의 힘으로 시체를 숲에서 끌어내어 트렁크에 넣은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일만이라도 진규에게 시키는 건데 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때 는 늦어 있었다. 진아는 비록 몸집은 작았지만 학생 때는 배구선수로 활약했기 때문에 지금도 서투른 남자보다는 힘이 있었다. 어떻게 해서 길로 끌어냈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시체의 무게 때문에 트렁크에 넣는 것은 그녀의 힘 으로는 도저히 가능성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멀리서 차가 한 대 다가왔기 때문에 진아는 당황했다. 도로에 시 체가 그대로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그녀 자신도 믿기 어려운 힘이 나왔다. 멀리 나무 사이로 보이던 차의 불빛이 다가오는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 이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는 죽을 힘을 다해 시체의 상반신을 끌어 안아 트렁크에 밀어 넣고는 발을 들고 안으로 쑤셔 넣어 뚜껑을 닫았다. 남자가 작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 직후에 큰 트럭이 굉음을 내며 달려와 지나쳤다. 지쳐서 그 다음에는 잠시 움직일 힘도 없었지만 어쨌든 날이 밝기 전에 는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할까? 그러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진규가 체포 당해서 는 안 된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시체를 트렁크에 넣은 채,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대로 어느 만큼 가서, 시체를 호수에 밀 어 넣을 작정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 보면 알맞은 저수지가 나올 것 이었다. 물론 그것이 위법이고 죽은 사람의 가족을 생각하면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뭐라고 해도 진규를 구해야만 했다. 진규가 감옥에 간다면 어떻게 될까? 재기불능, 두번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녀에게 그 밖에 다른 선택의 길은 없었다. 진아는 마치 자기암시라도 하듯이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밖 에 길은 없는 것이다. 동생을 위해서인 것이다. 날이 새고 있었다. 저수지의 수면이 파랗다 못해 시커멓게 보이고 있었 다. 그녀는 꿀꺽 침을 삼키며 트렁크를 열었다. 시체를 꺼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녀는 그것을 해내었다. 살짝 양손으로 밀자, 시체는 작은 바윗덩어리처럼 한 번 빙 돌더니 풀 을 헤치고 미끄러져 아래로 떨어져갔다. 시체가 수면에 닿으면서 퍽 하는 희미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제 목 : 제1장 월요일 <죽은 남자의 편지> -3- ** 완전히 날이 밝아 있었다. 아파트 앞에 차를 세웠을 때는 8시 반이 훨씬 지나서였다. 회사는 이미 지각이지만, 출근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너무나 지쳐서 머리에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은 다만 푹 자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질질 끌며 2층으로 올라가서 현관을 열쇠로 열고 들어 가 보니, 아직 불은 켜진 채로 문우성이 바닥에서 코를 골고 있었다. 몸 도 마음도 지쳐 있었지만 문우성의 잠자는 모습이 상당히 재미있어서 무 심결에 웃어 버렸다. 깨우는 편이 좋을까? 이 사람까지 지각해서는 안 된 다. "우성 씨! 우성 씨! 일어나세요." 한참을 흔들어 깨우자 그가 반쯤 눈을 뜨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니? 여기는, 어디죠?" "내 방이에요." "아, 그랬습니까?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이상한 꿈이라구요?" "진아 씨의 동생이 사고를 일으켜, 진아 씨가 내 차로 달려갔습니다. 이상한 꿈이었죠?" 그것이 꿈이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두는 편이 좋다. 그러다가 우성은 문득 시계를 보고, 펄쩍 뛰어올랐다. "큰일이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문우성은 빼앗듯이 자동차 키를 나꿔채고는 이번에는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그대로 뛰어나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진아는 뭐라고 표현하지 못할 죄책감을 느꼈다. 저렇게 순진한 남자 를 이런 식으로 속이는 것은 또다른 죄악이다. 혼자가 된 그녀는 털썩 방 한가운데에 주저앉았다. 무엇을 할 기운도 없었다. 9시가 되면 회사에 전화를 걸어야 한다. 우선 오늘은 당장 휴가 를 신청해야겠다. 그 다음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전화를 걸어야지."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렸지만 어느 사이엔가 눈을 감고 잠들어 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잠이 깨어서 그녀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어떻 게 된 걸까? 어째서 이런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걸까. 전화가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소리에 잠을 깬 것 같았 다. "누나야?" 동생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녀는 모든 것을 생각해냈다. 그래, 꿈 도 아무것도 아니야. 모든 것이 실제로 일어난 거야. "걱정했어. 회사에 전화하니 아무 연락도 없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 "피곤해서 자고 있었어." 길게 하품을 하고는, 그녀는 조금 또렷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일 잘 하고 있니?" "응, 하지만 안정이 안 돼." "당연하지. 그런데 그 여자아이는 어떻게 했니?" "아파트로 데려다 주었어." "이야기하지 않겠지?" "괜찮아. 그 여자는 내가 잡힌다면 틀림없이 '나는 저런 사람 모릅니 다' 하고 말할 거야. 관련되고 싶지 않을 테니까." "나도 관련되고 싶은 건 아니야."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슬그머니 분노가 치미는 걸 억지로 참았다. "그것, 어떻게 했어?" 진규가 주저하면서 물어왔다. 물론 죽은 남자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맡기라고 했잖아." 그녀는 밀쳐 버리듯이 말하고는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 해. 알았지?" "미안해." 한심한 목소리를 듣자 또다시 화가 치밀었지만, 동시에 자신이 지켜 주 지 않으면 이 아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대로 또 주저앉았 다. 그것이 진아의 약점이다. 동생인 진규도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 다. "누나에게 언제나 뒤치다꺼리를 시켜서 미안해. 두번 다시 실수하지 않 을게." "알았으면 빨리 일이나 해." "지금 점심을 먹고 있는 중이야." "벌써 그런 시간이야?" 진아는 놀라서 시계를 보았다. 한 시를 조금 지나 있었다. "회사로 전화해야겠어. 이만 끊어." 그녀의 회사에서는 규칙상 여성의 생리휴가가 한 달에 이틀 인정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쓰는 사람이 없었다. 휴가원을 내러가면 진단서 를 가져 오라고 하기 때문에 아예 그런 휴가는 없는 것으로 하고 있는 것 이다. 유진아의 상사 박민철()은 그런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그 정도로 쉬어야 한다면 근무할 자격이 없다고 하는 것이 그의 입버릇이었 다. 어떻게 이유를 댈까? 진아가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전화가 연결되었다. "박민철입니다." "저, 유진아예요." "이런 식으로 아무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지?" 그의 얼음같이 차가운 한 마디에 유진아는 불끈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 가 아니기에 자신을 억제했다. "이번 한 주를 쉬고 싶습니다만." 진아가 느닷없이 이렇게 말하자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 라고 말할까 하고 생각하는 것일 게다. 그렇다면 계속 상대를 하고 있어 서는 끝이 없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을 던지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해고당해도 좋다. 일할 곳은 또 있을 것이다. 지금은 당장에 닥친 문제를 우선 생각하지 않 으면 안 되었다. 진아는 아직 안개가 낀 듯한 머리를 산뜻하게 하려고 물을 끓여 진한 커피를 탔다. 블랙으로 한 잔 마시자 조금은 산뜻해진 기분이 되었다. 또 한 잔은 크림과 설탕을 조금 넣어서 테이블에 놓았다. 그녀는 핸드백 속에서 그 편지와 명함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 았다. 그녀는 오려낸 문자를 정성들여 붙인 협박장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아무리 읽고 생각해 보아도 장난이나 재미로 보기에는 구체적인 지정이 너무 많았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유괴된 딸'이 어디의 누구 딸인지 찾을 방법이 없을까? 단서는 일주일 안에 10억 원의 돈을 준비할 수 있는 부자라는 것 정도 였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유진아는 이 것을 그대로 경찰에 보낸다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이런 종이쪽지를 무조건 가져 간다고 해서 경찰 이 과연 어느 정도나 신뢰할 것인가. 마침 행방불명 신고라도 있으면 조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딸이 행방 불명된 집에서 경찰에 신고했다고는 볼 수 없다. 유괴되었을 때의 상황에도 관계가 있지만, 가족이 처음부터 유괴된 것 을 알고 있다면 아마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범인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단서라고 한다면 그 남자가 가지고 있던 한 장의 명함뿐이었다. "'경기물산 회장 권기준.' 이것이 마지막 희망인가?"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다만 그렇게 중얼거렸을 뿐이다. 진아는 지금 예전의 침착함을 상당히 되찾고 있었다. 그녀의 침착함은 보통 남자는 미치지 못할 정도이다. 이 모두가 혼자 떠안은 삶의 짐을 지고 살아오면서 터득한 생존의 논리에서 비롯되었다. 그런 탓인지 미인인데도 어쩐지 남자가 가까이하기를 꺼려했고, 문우성처 럼 어딘지 모르게 멍청한 남자로부터 의지가 되는 여자라고 생각되는 것 이 고작이었다. 시계를 보았다. 1시 15분이다. '시간 제한은 앞으로 일주일이야.' 그 첫째날도 벌써 오후이다. 일주일이 지나면 유괴된 여자는 확실하고 도 자동적으로 죽게 된다. 느긋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우선은 무엇을 할까? 먼저 식사를 하기로 정했다. 생각해 보니 어제 저 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노동을 했으므로 조금 체력 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 돈이 필요했다. 뭔가 행동을 하려고 해도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지 전 혀 예측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현금은 항상 가지고 있을 필 요가 있었다. 그녀는 현금카드를 가지고 아파트를 나왔다. 핸드백에는 여전히 협박장 과 명함이 들어 있었다. 은행 현금자동지급기에는 다행히 사람이 없었다. 잠시 생각하고 나서 30만 원을 찾았다. 그녀는 역 앞의 슈퍼마켓이 있는 빌딩으로 향했다. 이 위의 레스토랑이 이 근처에서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점심식사 시간이 조금 지났기 때문에 레스토랑 안은 한산했다. 양이 많은 식사를 주문하고 그녀는 한숨을 쉬었 다. 핸드백에서 그 편지를 꺼내 보았다. 물론 다른 손님이 본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펴 보지는 않았지만, 이젠 안의 내용도 외울 정도 가 되어 있었다. 이 유괴된 '딸'이라고 하는 사람은 몇 살 정도일까? 10억 원의 몸값을 일주일 안에 준비할 수 있는 사람. 그는 분명히 부자일 것이다. 범인이 10억이라는 목표를 정할 정도로 그는 충분히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협박장에는 '일주일은 목숨을 보장한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다음 월 요일에는 확실하고 또한 자동적으로 딸의 목숨은 없다'고 했다. '확실하고 또한 자동적으로'라는 말이 걸렸다. 뭔가 시한폭탄과 같은 것이라도 장치되어 있는 것일까? 식사를 하면서, 그녀는 유괴된 딸이 제대로 식사나 하고 있을까 생각했 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식사 후 커피를 기다리고 있는 사이에, 진아는 레스토랑 입구에 오늘 신문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재빨리 전부 가져와 한 페이지씩 구석구석 보았다. 누군가가 행방불명 이 되었다는 기사가 나와 있지 않은가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커피를 마시면서 자세히 보았지만, 결국 그런 기사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신문을 원래 장소에 놓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문제의 그 명함 을 꺼내들었다. 경기물산 회장 권기준. 전화 번호도 적혀 있으니까 전화를 거는 것은 쉽 겠지만 문제는 상대가 나오면 뭐라고 말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사실대로 사정을 설명할 수도 없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한다 하더 라도 어떻게 이야기해야 허점이 노출되지 않을 것인가? 게다가 이 권기준 이 피해자의 아버지라든가, 혹은 거꾸로 범인의 한 사람이라면 그때는 어 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어쨌든 이 사람부터 우선 만나야 한다고 그녀는 단단히 결심을 했다. 전화만으로 애매한 이야기를 하면 의심받아 끊어 버릴 것이다. 그 래서는 끝장이다. 만날 수만 있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든 말을 해서 상 대를 옭아맬 자신이 있었다. 갑자기 방문해 볼까. 그것도 역효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 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켜서는 좋지 않을 것이었다. 우선 전화로 약속만 해두자. 마음이 더 흔들리기 전에, 그녀는 공중전화가 있는 곳으로 달려 갔다. "예, 경기물산입니다." "죄송하지만 권기준 회장님을 부탁합니다." 진아는 일부러 지극히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권 기준 회장님 말입니까?" 상대의 음성이 왠지 당황하는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저 잠시 기다려 주세요." 여자가 이렇게 머뭇거리며 그녀를 기다리게 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여자의 음성은 흔쾌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왜 권기준이라는 그 이름 하나만으로 이렇게 당황하는 것일까. 한참을 기다리게 한 후에 마침 내 상대편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1 뜻밖에도 이번에는 굵직한 남자 목소리였다. "권기준 씨입니까?" "아닙니다, 저는 총무과의 전영우()라고 합니다." "예, 저." "권기준 회장께 용건이 있으시죠?"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 회사 사람이 아닙니다." 진아는 당황했다. 이것은 생각지도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명함엔 경기물산 회장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그녀가 이렇게 말을 하자 사내의 대답이 또 의외였다. "그 건에 대해서 잠깐 설명을 드리고 싶은데요." 설명이라구? 무엇을 설명한다는 거지? 경기물산 회장이 아니라면 그뿐 이지. 무슨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일까. "이쪽으로 오실 수 있습니까?" 사내가 겉으로는 정중하지만 속으로는 분명히 당혹해 하는 목소리로 말 하고 있었다. 진아는 이런 경우가 되면 더욱 다부지게 변하는 성격이었 다. 모두 세상이 그녀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그녀는 일부러 더욱 사무적 인 어투가 되어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찾아가도 상관없습니까?" "예. 장소는 아십니까?" "아뇨, 모릅니다. 가르쳐 주시겠어요?" 진아는 상대방의 설명을 재빨리 메모했다. "알겠습니다. 한 시간 정도면 갈 수 있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이상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권기준 이라는 남자는 경기물산의 사람이 아니다. 회장은커녕 사원도 아니다. 그 러면 이 명함은 위조된 것일까?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리고 전화를 받은 남자의 태도는 또 무엇일까. 자리로 돌아와, 그녀는 남은 커피를 단숨에 마셔 버리고 일어섰다. 어 쨌든 행동하는 것뿐이다. 그 다음은 상황에 따라 대처하는 것이다. 제 목 : 제1장 월요일 <죽은 남자의 편지> -4- ** "전영우 씨를 만나고 싶은 데요." 그녀는 경기물산 사무실에 들어서서, 입구 쪽에 있는 젊은 여직원에게 말했다. 10여 명 정도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는 작은 회사였다. "조금 전 전화를 건 사람이에요." 이야기가 되어 있었는지 그녀는 곧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응접세트만으 로도 꽉 찬 좁은 방이였지만 새 건물이기 때문에 실내는 비교적 깨끗했 다. 조금 기다리고 있자 조금 전의 그 여직원이 차를 가지고 왔다. 그녀가 찻잔에 손을 대려고 할 때 문이 열렸다. "많이 기다리셨죠." 조금 전 전화 속의 목소리였다. 35세 정도일까, 빈틈 없는 옷차림이 오 히려 꺼림칙한 느낌을 주는 남자로 특유의 붙임성이 있었다. "제가 바로 전영우입니다." "유진아라고 합니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지만 일부러 웃지는 않았다. "이렇게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전영우는 약간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고는 과장되게 한숨을 쉬었다. "본사에서는 권기준이라는 사람을 전혀 모릅니다." "그러면 명함은 가짜군요." "그렇습니다. 뭐 그런 것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으니까요. 어쨌든, 분명하게 이야기하면 당신은 사기를 당한 것입니다." "사기라고 하셨나요?" "같은 피해자가 많이 있습니다. 벌써 당신까지 열 사람째입니다." "열 사람이나." "모두 권기준이란 사람으로부터 투자를 권유받아 돈을 주었다가 빼앗겼 습니다. 당신은 얼마를 권유받았습니까?" 어떻게 대답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그렇게 큰 금액이 아닌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저, 500만 원 정도예요." "그래요?" 전영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렇게 말하면 뭐하지만, 당신은 가벼운 편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는 5천만 원이나 준 사람도 있지요." "그렇게나 많아요?" "500만 원이라도 큰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정말로 안되었다고 생각하 지만, 본사와는 전혀 관계 없는 일이라서요." 진아는 조금 끈질기게 달라붙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 사람의 태도가 이상했다. 게다가 이 명함 한 장이 유일한 희망인데, 이대로 물러 나서는 실마리가 끊어져 버릴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곤란하군요. 결혼자금으로 저축한 돈을 전부 그 사람에게 ." "사정은 알겠습니다만." 전영우의 눈이 흔들리고 있는 걸 간파하고서, 그녀는 한번 더 단호하게 말을 뱉었다. "제게 다른 피해자를 가르쳐 주세요. 그 사람들과 힘을 합쳐서 반드시 범인을 찾고야 말겠습니다." "그것이, 자세한 주소를 묻지 않았기 때문에." 전영우가 머뭇거렸고 그에 반하여 그녀의 목소리는 더욱 차가워졌다. "주소는 모르더라도 적어도 전화번호 정도는 알겠지요?" "그건, 조사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바로 조금 전까지의 막힘이 없는 구변은 어디로 가고 그는 말을 얼버무 리고 심하게 기침까지 했다. "부탁입니다, 가르쳐 주세요. 적어도 반이라도 되찾지 못하면, 결혼하 는데 큰 지장을 받게 되거든요." 그녀는 손수건으로 눈을 누르고 흐느껴 우는 시늉을 했다. "자, 잠깐. 침착하세요." 그는 당황해서 진아를 달래기 시작했다. 이런 남자일수록 여자가 우는 것에 약하다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실은." 전영우는 뭔가 말하기 어려운 듯이, 심하게 머뭇거리다가 급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이 건에 대해서 위쪽에서 지시가 내려왔거든요." "지시라구요?" "피해자가 연합이라도 해서 우리 회사로 손해배상 청구라도 하러 오면 귀찮게 되니까요. 우리로서는 전혀 책임이 없지만, 어쨌든 기업 이미지라 는 것이 있어서요. 그래서 이번 건에 대해서는 절대 피해자끼리 상호 연 락을 취할 수 없도록 아무것도 가르쳐 주어서는 안 된다고 명령을 받은 거지요." 그가 하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돌 아갈 유진아가 아니었다. "회사에는 절대로 피해를 주지 않겠습니다. 약속하지요, 그러니까 어떻 게든." 그녀는 조금 과장된 행동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 리를 숙였다. 또한번 손수건으로 눈 주위를 눌렀다. "저, 일어나세요." 전영우는 당황해서 그녀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진아는 사 내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분명히 감지할 수 있었다. "가르쳐 주실 때까지 여기 있겠어요." 그는 깊이 숨을 쉬었다. 젊은 여자의 끈질김에 넌더리를 내는 듯한 표 정을 지었다가, 마침내 그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뱉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나에게서 들었다고 아무에게도 말하 지 마세요." 전영우는 테이블 위의 메모지에 어느 곳의 주소와 '김현()'이라는 이름을 썼다. "이 사람은 전재산 2천만 원을 줘 버린 사람입니다. 자기 혼자의 힘으 로 권기준을 찾겠다고 기세가 등등했으니까요.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 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아는 감격에 겨운 듯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유진아를 엘리 베이터가 있는 곳까지 바래다 주고는 꽤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돈을 되찾을 수 있다면 좋겠군요." "예, 하지만 반은 포기하고 있는 걸요." "그렇군요, 그러는 편이 현명할지도 모르죠." 그녀는 전영우에게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가 막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 문득 어떤 의문이 그녀를 붙들 었다. 그 명함이 위조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전화번호는 틀림없이 경기물 산의 번호였다. 그렇다면 투자를 권유받은 사람들이 실제로 돈을 줄 때까 지 권기준이라는 남자에게 전화를 거는 일이 없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경우, 경기물산에 전화하면 권기준이라는 남자가 없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고 투자 이야기는 엉터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권기준이 열 명이나 되는 사람을 사기칠 정도의 남자라면 왜 그런 바보 스러운 짓을 한 것일까? 그렇게 하면 바로 잡혀 버리는 것을 알 텐데 말 이다. 그에게 특별히 사람을 믿게 만드는 능력이 있지 않는 한 이것은 절 대로 불가능한 것이다. 진아는 생각에 잠기면서 빌딩을 나왔다. 현실적으로 그 사기꾼이 잡히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 까? 회사로는 절대로 전화하지 않도록 손님을 잘 구워삶은 것일까? 하지 만 그렇게 하면 오히려 더 의심받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경기물산에 권기 준과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누군가 전화 를 하면 적당히 얼버무릴 수 있는 사람이. 그녀는 손목시계를 봤다. 벌써 4시가 가까웠다. 주소만으로 그 집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영등포구 신길동 114 번지. 더욱이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겨우 그 근처에 당도했지만 완전히 밤이 되어 버려 좁은 길로 이어지는 주택 밀집지역에서는 어디에서 그 집 을 물으면 되는지 막막하기만 했다. 이렇게 주택이 잡다하게 모여 있는 지역은 번지가 차례대로 돼 있는 것 도 아니고, 또 같은 번지에 수십 채의 집이 있는 곳도 있기 때문에 쉽게 찾기는 힘들 것이었다. 그녀는 한참을 헤매고 다니다가 겨우 문을 닫으려 고 하고 있는 문방구를 발견하곤 주인여자에게 달려갔다. "저 실례합니다." "예?" "실은 어느 집을 찾고 있는데요." 그녀는 전영우가 적어 준 번지와 김현이라는 이름을 댔다. "김현 씨라구요?" 그 여자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더니 기다려 달라고 하고는 총총히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에 그 여자가 나와서는 전혀 뜻밖의 말을 했다. "김현 씨와 아시는 분이세요?" "아뇨, 만난 적은 없는데요." "그래요? 저, 김현 씨 돌아가셨어요." 진아는 한동안 그 여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돌아가셨다구요? 혼자서 살고 계셨나요?" "아뇨, 부인과 아이와요." "그러면 아직 부인은 그곳에 계신가요?" "모두 죽었어요." 너무 분명한 말투였기 때문에 그녀는 몹시 당황했다. "모두, 죽었어요?" "일가가 모두 자살했어요. 몰랐어요? 뉴스에도 나왔었는데. 김현 씨가 부인과 아이의 목을 조르고는 자신도 자살을 했거든요." "왜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거죠?" "뭐라더라, 빌린 돈을 갚지 못했다고 하던가." 그러면 권기준에게 주었다는 그 2천만 원이 빌린 돈이었을까? 그가 범인을 찾기에 필사적이었다는 전영우의 말을 이제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집은 지금 비어 있습니까?" "그럴 거예요." 일단 그 집으로 가는 길을 물어 보았지만, 아무래도 이 조사가 수포로 돌아갈 것 같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문방구 주인여자로부터 들은 대로 길을 가자, 그 집을 곧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집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전가족이 자살을 했다는 데 불이 켜져 있다니, 그렇다면 집 안에 누가 있는 것일까. 잠시 머뭇거 렸지만, 그녀는 지금에 와서 주저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현 관의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여자 목소리가 인터폰을 통해 갑자기 튀어 나왔기 때문에 유진아는 정 말이지 뛰어오를 듯이 깜짝 놀랐다. "죄송합니다, 이 밤중에. 실은 김현 씨의 일로 뭘 묻고 싶은 것이 있어 서 왔는데요." "댁은 누구신데요?" "저, 유진아라고 합니다." 정직하게 말하기로 결정했다. 여자였기 때문에 안심한 것일까. 현관이 덜컹거리면서 열리고 40대 전후의 뼈만 앙상한 여자가 나왔다. "무슨 일이죠?" 경계하는 듯한 눈으로 그 여자가 유진아를 힐끔 쳐다보았다. "저, 실례지만 김현 씨의 친척분이십니까?" "예, 동생입니다만." "그렇습니까? 갑작스럽게 찾아뵈서 죄송합니다." "무슨 일로 찾아왔죠?" 진아가 사정을 설명하자 그 여자는 동정은 해주었지만, 권기준이라는 이름에는 전혀 짐작가는 것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오빠와는 계속 연락이 없었으니까요. 어떠한 사정이 있었는지 전혀 몰 라요." "유서 속에라도 권기준이라는 이름이 없었습니까?" 그녀의 말에도 김현의 동생은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더이상의 대화가 필요없을 정도로 그 여자는 오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결국,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채 그녀는 김현의 집을 나왔다. 모처럼 잡은 단서의 실마리가 빨리도 잘려 버린 것 같았다. 이래서는 유괴사건의 조사 따위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렇게 허탈해 하며 걷고 있을 때 귀에 익은 한 목소리 가 그녀의 등을 때렸다. "어머, 아까 그분이군요." 돌아보니 문방구 여주인이었다. "아까는 고마웠어요." "누군가 있었어요?" "예, 김현 씨의 여동생이 있더군요." "동생이라구요? 부인의 동생이라고 하던가요?" "아뇨, 남자 쪽이라고 하던데요." "어머, 이상하군요." "뭐가 말이에요?" "남편 쪽은 독자()였다고 들었는데요." "정말입니까?" 그녀는 숨을 멈추었다가 길게 내뱉었다. 그 비쩍 마른 여자는 무엇을 감추고 싶었고, 또 무엇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일까. "예, 그 사람이 자기가 독자라서 쓸쓸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아이는 많 을수록 좋겠다고 언젠가 이야기했어요." 진아는 황급히 김현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 여자는 가짜였던 것일까? 이미 김현의 집은 불도 꺼져 있고,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현관의 문을 열려고 했지만, 열쇠가 잠겨져 있었다. 진아는 숨을 헐떡이면서 어두워진 집을 노려보았다. 좀더 냉정해야 했 어. 그 여자가 뭔가를 알고 있다면, 그녀야말로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실 마리일 텐데. 그녀는 역 가까이까지 오자 저녁을 먹으러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적당 히 주문하고 물을 한 모금 마시자 갑자기 피로가 몰려들었다. 그 여자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곳에 들어가 있었던 것일까? 아무래도 이것은 유괴사건만이 아니고 그외에도 뭔가 대단한 범죄가 얽혀 있는 듯 한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거짓말을 할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 그 여자는 무슨 일 때문에 김현의 집에 들어가 있었던 것일까? 뭔가를 찾 으러 와 있었던 것일까? 발견되어서는 곤란한 서류라든가 다른 어떤 물건 을 찾으러 들어갔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진아는 머리를 흔들었다. 좀더 현실적으로 생각을 해야지. 음식이 왔다. 갑자기 배가 고파져서 그녀는 재빨리 먹기 시작했다. 그 런데 그때였다. "감사합니다." 계산대 쪽에서 소리가 났다. 그녀는 처음엔 별 관심 없이 계산대 쪽을 보았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 전개되고 있었다. 아까 그 여 자였던 것이다. 김현의 동생이라고 자처한 그 여자. 그 여자가 돈을 치르 고 나갔다. 유진아는 새우튀김 하나를 집어들고는 입에 우겨 넣었다. 그 리고 요금을 지불하고 황급히 여자 뒤를 쫓아갔다. 여자는 전철로 도심 쪽으로 향하고 있다. 비교적 빈 전철이었기 때문에 감시하는 것은 쉬웠지만, 반대로 그쪽에게 들킬 가능성도 높아서 아주 조 심해야만 되었다. 을지로로 나오자 여자는 바와 카바레가 쭉 늘어선 곳으로 발길을 향했 다.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람, 또는 이제 막 술집으로 들 어가려는 사람 등등으로 해서 여자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미행하기란 쉽 지 않았으나 진아는 집요하게 그녀를 뒤쫓았다. 여자가 마침내 작은 술집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겉모습으로 봐서는 들 어가면 금방 눈에 띌 정도로 규모가 작은 술집이었다. 공중전화를 발견한 그녀는 그곳에 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를 걸고 있는 척하며 기다리노라니, 10분 정도 지나서 여자가 나왔다. 이번엔 혼 자가 아니었다. 둘이었다. 그런데 여자와 함께 나온 것은 다름아닌 경기물산의 전영우였다. 아파트 근처까지 돌아왔을 때는 이미 녹초가 되었다. 그 전영우라는 남자, 아주 엉뚱한 사람이다. 유진아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김현의 집으로 간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여 자에게 그런 연극을 시킨 것이리라.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래야 했을까. 어쨌든 오늘은 이제 틀렸다. 상대가 전영우라면 회사도 알고 있기 때문 에 초조해 할 것은 없다. 아니, 사실은 초조해야 하지만 하루 만에 모든 것을 해치운다는 것은 무리다. 아파트 앞에 본 적이 있는 고물 자동차가 멈춰 서 있었다. "어머, 우성 씨." 문우성이 차에 기대어 서 있었다. "진아 씨!" 그는 크게 숨을 쉬었다. 언제 봐도 어깨가 축 늘어진, 힘빠진 모습이었 다. "뭐하고 있어요?"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머, 하지만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아뇨, 오늘 진아 씨 회사에 전화를 걸었더니 일주일동안 휴가라고 해 서요." "조금 일이 있어서요." "그래서 나는, 분명히 신혼여행이라도 가셨을 거라고 생각했습니 다." "설마요." 진아는 웃어 버렸다. 이런 남자,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바보스 럽다고 해야 하나. "정말로 내 정신이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그런데 나 배고파서 죽을 것 같아요. 그 차로 아무 식당이 라도 데리고 가 줄래요?" 그녀의 제안에 문우성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맹렬한 식욕으로 그녀는 식사를 처리했다. 한꺼번에 닥친 여러가지 사 건의 쇼크에서 겨우 회복되어 본래의 낙천적인 성격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먹으니까 사주는 보람이 있군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어머, 여기는 제가 계산할 거예요. 무리하게 부탁해서 따라온 걸요." "당치 않습니다. 아무리 박봉에 허덕인다 해도 진아 씨에게 음식을 사 줄 수 있을 정도는 됩니다." "그래요? 그러면 고마워요." 그녀가 음식을 다 먹은 후에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갑자기 문우성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진아 씨,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예, 뭐죠?" "실은 어제 내가 진아 씨 아파트에서 잤지요." "예." "그때 동생이 사고를 냈다고 해서. 그것이 꿈인가 하고 생각했지 만, 나중에 차를 보니까 상당히 기름이 줄어 있더군요. 그것이 사실이었 죠?"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가 솔직히 말했다. "예, 그래요, 미안해요." 문우성에게는 어쩐지 거짓말을 한다든지 속일 수가 없었다. "제가 뭔가 힘이 될 수 있는 일은 없습니까?" 그녀는 주저했다. 하지만 시체를 처리해 버린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 다. 문우성이 경찰에 알린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만약 죄를 추궁당하는 일이 있다면 그가 휘말리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피하고 싶 었다. "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고맙지만, 이것은 저와 동생의 문제니까요." "그렇습니까? 무리하게는 묻지 않겠지만." "예, 묻지 말아요, 부탁이에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뭔가 있다면 반드시 말해 주십시오." 첫째날이 끝나 버렸다. 고개를 건성으로 끄덕이면서 유진아는 그런 생 각을 했다. 앞으로 6일, 그 사이에 그 협박장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 까? 만남> -5- ** 제 2 장 화 요 일 ** < 차가운 만남 > 화요일이 밝았다. 유진아는 빨리 일어날 생각이었지만, 일요일 밤부터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린 탓인지 거의 9시까지 잠을 잤다. 그렇다. 오늘은 할 일이 확실히 정해져 있다. 전영우란 녀석을 혼내 줘 야 한다. 여자라고 깔보고 바보로 만든 것을 용서할 수 없다. 오전 중에 전화를 해서 점심시간에 붙잡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녀는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식당에 들러 늦은 아침을 먹고 경기물산으로 향했다. 빌딩 앞에 도착한 것이 오전 11시. 좋은 시간이었다. 가까운 공중전화 로 들어가 경기물산으로 다이얼을 돌리곤 전영우를 부탁했다. "예, 전영우입니다." 특유의 붙임성이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어제 들렀던 유진아라고 합니다." "아, 유진아 씨." 그의 목소리가 꽤나 성실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뭔가 말하기도 전에 그 가 짐짓 부드러운 낮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어땠어요? 뭔가 실마리라도 있었습니까?" "실은 가르쳐 주신 김현이라는 사람은 가족 모두가 자살해 버렸더군 요." "그랬습니까? 그것 참 안됐군요." 여전히 부드러운 음성이었지만 유진아는 그의 목소리만 듣고도 역겨운 나머지 토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녀는 보다 진지해진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일로 잠시 뵙고 싶은데요." "예, 하지만." "지금 회사 앞까지 와 있습니다. 꼭 만나 주세요." "지금은 좀 곤란한데요." "김현 씨 집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났어요." "이상한 사람?" "예, 김현 씨의 여동생이라고 하더군요." "아마 재산 정리라도 하려고 와 있었던 게 아닐까요?" "김현 씨에게는 여동생이 없습니다." "뭐라구요?" "김현 씨는 독자로 형제가 없습니다. 조금 이상해서 조사해 봤어요." 이 정도의 허세는 필요했다. 과연 상대를 움찔하게 하는 효과가 있을 것인가?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그, 그것은 이상하군요." "뭔가 비밀이 있다고 생각해요. 부탁해요, 만나 주세요." "글쎄요, 지금 근무 중이라서 곤란해요." "점심시간이라도 괜찮아요. 기다리겠으니까 어디 적당한 찻집을 가르쳐 주세요." 전영우는 그녀의 집요한 공격에 더이상의 고집을 포기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그가 회사 근처의 어느 레스토랑을 가르쳐 주었다. "알겠어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어요. 아, 그리고." "뭐죠?" "김현 씨는 자살했으니 다른 피해자를 가르쳐 주세요. 부탁해요." 상대방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그녀는 재빨리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것 으로 됐다. 우물쭈물하고 있을 틈이 없는 것이다. 유진아는 그가 가르쳐 준 레스토랑으로 걷기 시작했다. 레스토랑은 아직 점심시간이 아니기 때문인지 거의 손님이 없었다. 아 침을 조금 전에 먹었기 때문에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어차피 전영우가 낼 테니까 가벼운 점심을 주문했다. 12시가 되자 몇 사람의 손님이 들어왔지만 자리는 반도 채워지지 않았 다. 전영우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12시 10분, 15분. 유진아는 다소 초조해지는 기분을 누르며 그에게 전 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공중전화는 레스토랑 구석진 곳에 있었다. 옆에 큰 기둥이 있어 전화를 걸려면 흡사 골방에라도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후미진 곳이 었다. 그녀는 그쪽으로 걸어가 다이얼을 돌렸다. "여보세요, 경기물산입니까? 전영우 씨를 부탁." 그런데 그때였다. 뒤쪽에서 갑자기 어떤 손이 뻗어와서 그녀의 수화기 를 나꿔챘다. 그녀는 놀랐다. 그리고 화가 났다. "뭐하는 거지요?" 눈살을 찌푸리며 뒤돌아본 유진아의 눈앞에 은빛 칼이 빛나고 있었다. 숨을 들이쉰 것과 동시에 칼끝이 그녀의 목에 탁 대어졌다. 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보기에 흉폭하게 생긴 남자라면 몰라도, 아무 리 보아도 보통의 젊은 직장인이라는 인상이 그녀를 오히려 두렵게 했다. "그렇게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게 아니야." 남자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얌전히 있어. 알았지?" 아무리 유진아가 억센 여자라고 해도 목에 칼이 들이대진 것은 처음이 었다. 핏기가 사라지고 다리가 떨렸다. "아직 죽고 싶지는 않겠지." 사내는 그렇게 말하곤 칼끝을 유진아의 블라우스로 살짝 들이댔다. 피 부에 살짝 찔리는 감각이 있어서 움찔 몸이 떨렸다. "아직 젊은데 죽는 것은 아까워." 말하곤 칼날을 위로 슬쩍 향했다. 그 다음 순간, 놀랍게도 블라우스 단추가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무서운 칼 솜씨였다. 아무리 칼날이 날카롭다고 해도 한순간의 칼질로 단추만을 잘라낼 수 있다니, 그녀는 등골이 오싹했다. "알겠지. 집으로 돌아가서 텔레비전이나 봐." 유진아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남자는 칼을 재빨리 주머니에 넣고 유유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녀는 잠시 그곳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 다. 처음으로 맛보는 공포에 몸이 굳어져 버렸던 것이다. 공포가 진정되는 데에는 자리로 돌아오고 나서도 한참이나 걸렸다. 커 피를 주문하고 컵을 잡으니 손이 아직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전영우는 끝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그가 그 무서운 남자 를 보냈다는 것이다. 아니, 사내를 보낸 것이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전영우에게서 연락을 받고 움직인 것은 분명하다.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다. 뒤에 상당히 커다란 것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커다란 그 무엇이. 지금부터 어떻게 하지? 유진아는 혼자 중얼거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인 것이다. 혼자 힘으로 어떻게 밝혀낼 수 있을까? 그 사내의 협박은 결코 단순한 협박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 포기해 버릴까? 그냥 내버려 두면 아무도 모르게 끝나 버린다. 그 협박장조차도 장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이 조사를 그만두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협박장은 장난 따위는 아닐 것이다. 어딘가에 누군가가 갇혀 있어서 일주 일 후엔 확실하고 또 자동적으로 방문하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유진아에게는 불가능했다. 그렇다. 그것이 그 녀의 성격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다. 그녀는 레스토랑을 나오자 좌우를 둘러보았다. 이제 곧 한 시가 되려고 하고 있다. 어디로 간다는 목표도 없이 그녀는 아무튼 거리로 나섰다. 그 런데 그때였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는 것이었다. "저, 미안해요." 놀랍게도 전영우가 바쁜 걸음으로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 정말 미안해요." 그가 숨을 헐떡이면서 덧붙였다. "점심때 회의가 있는 것을 깜빡 잊어버려서요." 그는 유진아를 재촉해서 근처의 찻집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된 일일까? 그녀는 어떻게 돌아가는 판국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김현이라는 사람 정말 안됐군요." 전영우가 자리에 앉자마자 이렇게 말을 던지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안색을 예리하게 살피며 그녀가 물었다. "그 여동생이라는 여자에게 짐작가는 것은 없어요?" "전혀 짐작이 안 돼요." 유진아는 그의 여전한 뻔뻔함에 뒤늦게나마 화가 났다. 전영우가 그 여 자와 만나는 것을 똑똑히 보았는데도 이렇게 나오다니 너무 기가 막혔다. 유진아는 그의 양미간을 똑똑히 응시하며 차갑게 물었다. "전영우 씨, 오늘 나와 만나는 것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셨나요?" "아뇨. 어째서요?" 설령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인정할 리가 없는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하 지만 일부러 그렇게 살벌하게 협박해 두곤, 또 이렇게 친절히 약속장소에 까지 나오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 칼을 든 남자는 제3의 인물로 계속 유진아의 뒤를 미행하고 있었다는 얘기인가. "하나 물어 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진아는 한동안 말을 끊고 그를 조용히 응시하다가 빠른 어조로 말했다. "칼을 사용하는 친구가 있으세요?" "칼이라구요?" 그녀의 말에 전영우는 일순 움찔하는 것 같았다. "방금 전에 누군가로부터 칼로 협박을 당했어요." "저, 무슨 이야기지요?" 전영우가 되물었지만, 그의 태도는 진아의 눈에는 익숙하지 않은 연기 처럼 어색하게 비쳤다. "바로 방금 전이에요. 당신이 가르쳐 준 레스토랑에서 칼을 들이당하고 협박을 받았어요." "누구였습니까, 상대는?" 그의 질문은 좀 우스웠다. 진아가 차갑게 내뱉었다. "칼이 목에 있는데 누구십니까 하고 물을 정도의 배짱은 없어요." "그래도 인상착의 정도라도." "보통 샐러리맨 같은 젊은 사람이었어요." "뭐라고 하던가요?"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고 집에 돌아가서 얌전히 있으라고 하더군요." 전영우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면, 권기준이라는 사람일지도 모르겠군. 아니면 그에게서 부 탁을 받았다든가."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어떻게 내가 그 레스토랑에 있는 것을 알았을까요?" 전영우는 그녀가 말하는 의미를 그제서야 겨우 이해한 것 같았다. "그건, 당치도 않아요! 나는 그런 일에는 관계 없어요." "당신이 알렸다고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은 그 가짜 여동 생은 알고 계시지요?" 전영우의 표정이 일순 어두워졌다. 그가 잠시 머뭇대다가 급히 담배를 피워물고는 불에 데인 듯이 과장되게 큰소리로 내뱉었다. "나는 전혀 모릅니다!" "전영우 씨!" 진아가 의자에 고쳐앉으며, 몸을 앞으로 쑥 내밀자 전영우가 당황해서 뒤로 몸을 제쳤다. 물컵으로 가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고 있을 틈이 없어요. 어쨌든 나는 급해요. 아시 죠? 급해요!" "그, 그건 알고 있지만." "아주 급하게 권기준을 잡아야 해요. 사람의 목숨에 관계되는 일이에 요. 아세요?" "사람의 목숨이라구요." "아무것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요?" 그녀는 전영우를 파고들 듯이 노려보았다. "나는 그 여자 뒤를 미행했어요. 당신과 둘이서 술집을 나오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요." 전영우가 황망히 눈을 내리깔고 헛기침을 했다. "이야기해 주세요. 권기준을 꼭 만나야 합니다." "그렇게 말해도 소용이 없고." "그 여자는 누구죠?" "모릅니다. 틀림없이 당신이 잘못봤을 거예요." 전영우의 얼버무리는 방법은 최저였다. 그녀의 눈을 의심하다니, 이런 사내가 어떤 범죄와 연관이 있다고는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그래요?" 진아가 단호히 일어서서 소리쳤다. "당신의 상사를 만나겠어요." "뭐라구요?" "모든 것을 이야기할 거예요. 물론 당신의 상사는 권기준을 모를지도 몰라요. 하지만 경기물산의 이름을 이용한 사기사건이 공표되면 역시 득 될 것이 없겠지요?" 전영우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협박할 생각이오?" "예, 그래요. 조금 전 말한 것 같이 난 급해요! 당신이 해고당할 걱정 따위는 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만약 그런 짓을 한다면 용서하지 않을 거요." "뭐죠? 칼? 이번에는 권총인가요?" 전영우와 유진아는 잠시 서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원래 남자가 무색할 정도로 다부지고, 게다가 일주일이라는 시간 제한에 쫓기고 있었기 때문 에 그녀의 강인함 앞에 전영우 따위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알겠소." 전영우는 결국 진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야기해 주실 거예요?" "지금은 무리입니다. 저녁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저녁때?" 진아는 주저했지만, 그를 너무 궁지로 몰아서는 오히려 역효과가 되리 라 판단했다. "좋아요. 그러면 몇 시에 어디에서 뵐까요?" 진아는 거리를 어슬렁어슬렁 걷고 있었지만 이렇게 하고 있어도 되는 것인지, 그밖에 할 수 있는 것은 없는지 끊임없이 자신에게 반문하고 있 었다. 화요일도 이제 거의 저녁이 가까웠다. 거의 진전이 없는 채 이틀째가 저물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밟는 것만으로 유괴된 인질을 구해 낼 수 있을까. 그녀는 손목시계를 보면서 자꾸만 초조해지는 기분을 달랬 다. 일찌감치 전영우와 약속한 커피숍에 도착한 그녀는 동생 진규의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저, 유진규 씨 부탁합니다. 누나예요." "예? 유진규?" 남자의 목소리가 의외로 차가웠다. "당신이 누나라구?" "그런데요." "마침 잘되었소. 동생은 해고당했소." 그녀는 일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저, 무슨 실수라도 있었나요?" "트럭을 짐째 도난당했소. 대낮에 여자와 호텔에서 노닥거리고 있는 사 이에!" "그렇습니까?"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진규." 자리로 돌아오자 그녀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 아이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는 언제까지 이어지고, 나는 언제까지 그애의 뒷바라지에 시간을 허 비해야 하나. 유진규는 그 시간에도 나미애의 아파트에 가 있었다. 그녀와 호텔에 있다가 화물차를 도둑맞고,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고서도 그가 갈 곳이라곤 나미애의 집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정말 재수가 없었던 일이다. 거래처로 가는 도중에 잠깐 그녀와 만나 정말 아주 잠시만 호텔에 머물려고 했는데, 어쩌다가 세 시간이나 지나 버렸고 부랴부랴 나와 보니 트럭이 감쪽같이 사라졌던 것이다. 처음엔 하늘이 노랗다 못해 캄캄했지만, 그는 곧 정신을 차리고 이 사 태를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다. 화물차는 보험 에 들어 있을 테니 주인에게 그다지 피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길로 회사에 전화를 하고는 미애의 아파트로 달려갔던 것이다. 될 대로 되라지. 원래 그는 이렇게 낙천적인 성격이었다. 미애가 커피를 끓이면서 불쑥 물어왔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몰라. 뭔가 돈벌이가 될 만한 좋은 일 없을까?" "있으면 내가 그냥 있지 않지." 미애가 커피 찻잔을 가지고 오면서 그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다가 갑 자기 물어왔다. "가르쳐 줘." "무엇을?" "그 사고에 관한 것." "상당히 끈질기군." 그가 고개를 흔들며 힘없이 대꾸하자, 그녀가 그의 품에 뛰어들며 간지 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숨기니까 더 알고 싶은 거야." 진규는 더이상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는 절대로 비밀로 하라고 했지만 미애가 현장에 있었던 이상 끝까지 비밀로 한다는 것은 불 가능한 일이었다. "절대로 비밀이야, 알겠어?" "그 정도는 말하지 않더라도 알고 있어. 자, 말해. 그 시체는 어떻게 했지?" "모르겠어. 누나가 어딘가에 숨겼든가 버렸든가 했을 거야." "어머, 대단하군." "그런데 그 죽은 사람이 호주머니에 당치도 않은 편지를 가지고 있었 어." 그의 말에 미애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편지였다구? 거기 뭐라고 써 있었는데?" "협박장이었어." "협박장? 인질이 있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 말이야?" "그래." 그가 편지의 내용을 이야기해 주자, 미애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눈 빛이 장작불처럼 활활 불타고 있었다. "10억 원!" 미애는 잠시 생각에 잠기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은 이 제까지 그가 보아온 미애의 얼굴이 아니었다. "누나는 지금 그 유괴되어 있다는 여자를 찾고 있는 거야?" "그래, 틀림없이 찾을 거야. 누나는 머리가 좋거든." "우선 누구 딸인지를 조사해야겠군." "조사하는 것은 누나에게 맡겨 둬." "잠깐 생각해 봐." "뭘?" "누나가 그 여자의 부모를 발견하면, 그러고 나서 정말로 그 협박장을 보내면 어떨까?" "뭐라구?" 유진규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10억 원, 그 돈이 손에 들어오는 거야. 놓칠 수는 없어!" "하지만 유괴는 중죄야." "유괴 따위는 하지 않아. 아니, 누군가 이미 유괴를 했을지도 몰라. 우 리는 단지 협박장을 보내는 것뿐이야. 그렇지?" 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10억 원이야! 해볼 가치가 있어." "하지만 괜찮을까?" 그의 뇌리에 누나의 엄한 얼굴이 떠올랐다. 누나와의 약속도 떠올랐다. 얘기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다. 그때 미애가 그의 어깨를 툭 치 며 자신 있게 말을 했다. "내게 맡겨 둬." 돈에 관련된 것이면, 오래 전부터 미애의 얼굴엔 자연스럽게 웃음이 떠 오르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처음부터 얘기가 달랐다. 10억 원이다. 그녀는 함부로 웃을 수가 없었다. 제 목 : 제2장 화요일 <차가운 만남> -6- ** 갑자기 여자가 쓰러져 안겨왔다. 유진아는 전영우와 약속한 커피숍의 구석자리에 멍청하게 앉아 유괴사 건에만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피할 틈도 없이 어떤 여자가 넘어지 면서 그녀의 무릎에 앉게 되었던 것이다. "어머, 미안해요." 여자는 당황해 하며 몸을 일으켰다. "미안해요, 발이 미끄러져서." "아니에요." 그녀는 기계적으로 말했다. 지금의 유진아는 그런 것에 신경쓰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동생이 해고당했다. 그것도 여자와 호텔에 있다가 일하는 트럭을 도난당했다고 하니 해고는 당연한 것이다. 조금은 정신차 렸겠지 하고 생각했었지만, 조금도 변함이 없는 그애를 떠올리노라니 그 녀는 갑자기 피로를 느꼈다. 4시 반이었다. 전영우가 5시 전에 이 커피숍으로 전화를 한다고 말했지 만 정말일까? 만약 안 온다고 해도 그는 회사에 있는 것이니까 도망가지 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갑자기 허무하게 생각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동생이 일으킨 사고 때문에 엄청난 일에 말려들었지만, 막상 당사자인 동생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속 저런 꼴이니 도대체 이 고생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지만 도중에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유괴된 여자의 목숨이 자신에 게 달려 있다. 그녀는 흔들리는 마음을 억지로 다잡았다. 커피숍의 자동문이 열려서 문득 쳐다보니 웬 젊은 여자와 경찰 한 사람 이 들어왔다. 여자는 22, 3세 정도일까? 조금 짙은 화장을 하고 있는 강 한 인상의 미인이었다. 그런 여자가 제복을 입은 경찰과 함께 커피숍에 들어오니 손님들이나 종업원들이 호기심이 가득 찬 시선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그 여자는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이 실내를 한번 둘러보곤 놀랍게도 유 진아 쪽으로 곧장 걸어왔다. 그녀가 느닷없이 진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 며 소리쳤다. "이 여자예요!" 진아는 어이가 없었다. 그녀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경찰이 비장한 표 정으로 말을 했다. "실례합니다. 이 여자분이 지갑을 소매치기 당했다고 해서요." 진아는 미처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죠?" "시치미 떼고 있네!" 젊은 여자가 진아를 노려보며 살기등등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내가 훔쳤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나에게 일부러 부딪혔잖아." "사람 잘못봤어요. 나는 벌써 20분 가까이나 여기에 그냥 앉아 있었어 요." "엉뚱한 소리 작작해! 이봐요, 경찰관 아저씨, 이 여자의 핸드백을 열 어 보세요. 분명히 빨간 가죽지갑이 들어 있을 테니까요." 경관이 진아의 핸드백을 빼앗듯이 잡아채고는 그것을 열었다. 안을 샅 샅이 찾을 것까지도 없이, 경찰이 핸드백 안에서 꺼낸 것은 빨간 가죽지 갑이었다. 진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왜 그것이 여기에 들어 있는 거 지? "이겁니까?" "예, 맞아요. 그거예요!" 여자가 의기양양하게 내뱉었다. "그 안에 현금 10만 원이 들어 있을 거예요." 경찰이 안을 확인했다. 여자의 말은 추호도 빗나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군요. 이봐요, 같이 갈까요?" 그랬군. 진아는 겨우 짐작이 갔다. "조금 전에 이 여자가 일부러 내게 부딪혀왔어요. 그때 여기에 넣은 게 분명해요." "말을 돌리려고 해도 소용없어." 젊은 여자가 조소를 머금으며 소리치고는, 다짜고짜 진아의 손목을 잡 으며 한 마디 더 보탰다. "자, 일어서!" 유진아는 일어섰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너무나도 의외의 사건에 직면해서 그녀는 혼란되었다. 너무 혼란스러워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진아는 절망적인 기분으로 차가운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아무리 변명해도 담당형사는 그녀의 말을 들어 주려고조차 하지 않았 다. "예전에 한 적은? 솔직히 자백해." "이제 털어놔!" "커피라도 마시면서 얘기할까?" 담당형사는 아예 귀는 닫아 두고서 묻고 싶은 말만 계속하고 있었다. 상황이 너무나 묘하게 얽혀 있어서 처음 한동안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 지만 이제는 아니다. 진아는 이제 자신을 되찾고 있었다. 죄가 없다는 자신감이 그녀를 더욱 강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하지 않았어요. 하지도 않은 일을 무조건 말하라니, 뭘 털어놓으 라는 거죠?" 그녀는 오로지 그 말만을 반복했다. 세 시간에 이르는 심문 끝에 그녀 는 유치장에 넣어졌다. 이상한 일이다. 그녀는 차라리 웃고 싶은 심정이 었다. 사실, 자신은 더 중한 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교통사고로 죽은 남 자의 시체를 몰래 처리하고 사고를 얼버무린 것이다. 그 죄로는 잡히지 않고, 엉뚱하게도 소매치기 혐의로 잡혔다는 것이 너무나 얄궂은 운명이 었다. 하지만. 정말로 사람을 잘못 본 것일까? 그러다가 그녀는 불현듯 그때 그 순간을 떠올렸다. 분명히 기억하고 있진 않지만 커피숍에서 그녀 에게 쓰러져 안겨온 사람은 좀 뚱뚱한 중년여인같이 생각되었다. 아무리 정신이 없다고 해도 그 여자와 자신이 혼동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면 그 젊은 여자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 빨간 지갑을 핸드백에 넣은 여자와 유진아가 범인이라고 말한 젊은 여자는 아마 서로 짜고 있었을 것이다. 목적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유진아를 유치장에 넣어 두려는 것이다. 권기준에 관한 것을 탐색당하고 싶지 않은 일당들이 이런 유치한 짓을 꾸몄을 것이다. 칼로 그녀를 협박한 남자도 그 중 한 사람일 테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함정에 그녀가 걸린 것이다. 유진아는 깊이 숨을 쉬었다. 지금부터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 협박장은? 핸드백 속에 있었을까? 아니면 집에 두고 왔나? 그녀는 갑자기 생각이 나질 않았다. 경찰이 그 협박장을 발견하면 어떻게 될까? 이번에 는 유괴범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 위기를 탈출할 방법은 없 을까? 어쨌든 외부에 누구 하나 그녀를 도와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치명적이 었다. 문우성에게는 도저히 거기까지 의지할 수는 없고 진규는 더 안된 다. 말해 주어도 그애가 뭔가 해주리라고는 도저히 기대할 수도 없지만 말이다. 발소리가 나고 열쇠가 열렸다. "나와." 기계적인 목소리가 그녀에게 불쑥 명령했다. 한밤중에 또 취조할 셈인 가? 그녀는 기운을 내어 유치장을 나왔다. 그런데 경찰은 그녀를 취조실이 아닌 극히 일반적인 사무실로 데려갔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머 리가 반 정도는 하얗게 된 50세 정도의 남자였다 낡아빠진 검은 양복에 거의 어울리지 않는 붉은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유진아 씨죠?" "예." 진아는 옆 테이블에 자신의 핸드백과 손목시계 등이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다. "소매치기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더군요." 남자가 무표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세요?" 그녀가 그를 똑똑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자신으로서도 깜짝 놀랄 정도 로 도전하는 듯한 목소리가 되어 있었다. "아, 이거 죄송합니다." 남자가 잠깐 미소지었다. "나는 경찰청 수사 1과의 김승유()반장이라고 합니다." "수사 1과?" 어째서 소매치기 혐의를 수사 1과에서 하는 것일까? 진아도 수사 1과가 살인사건과 같은 강력범죄를 담당하는 부서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김 반장은 웃음을 머금고 의외로 친근한 표정이 되었지만, 오히려 전체 적으론 조금 지친 듯한 어두운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그녀가 또한번 도 전적인 어투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이시죠?" "정말로 소매치기를 했습니까?" "안 했어요." 그녀가 강하게 내뱉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불쑥 말했다.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구요? 뭘 안다는 거죠?" "당신이 소매치기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오. 지문을 채취했습니 다." "." "그 빨간 지갑엔 당신의 지문은 없었습니다." 김 반장이 이 말과 함께 갑자기 일어나더니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자, 나와 함께 가 보실 곳이 있습니다. 함께 가실까요?" 그녀는 김 반장의 명령에 거역하지 못할 무엇이 있다고 느끼며 복도로 걸어 나왔다. 반장이 하얀 천을 들추었다. "아는 사람입니까?" 남자의 시체였다. 진아는 그것을 본 순간 뭔가로 세게 얻어맞은 듯이 휘청거렸다. 김승유 반장이 서둘러 그녀를 잡아 주지 않았으면 그대로 쓰 러졌을 것이다. "괜찮습니까?" "예, 잠깐 놀랐기 때문에." 그녀는 숨을 살짝 내쉬었다. "이 남자를 아십니까?" "예." 진아는 대답을 해놓고도 다시 한번 몸서리를 쳤다. 생명이 사라진 창백 한 육체는 경기물산의 전영우였다. 전영우가 살해되었다. 그녀는 시체를 현실로 눈앞에 보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김승유 반장은 다시 전영우의 시체를 덮었다. "어째서 죽은 거지요?" 그녀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칼에 찔려 죽었어요. 심장까지 도달한 상처였어요." 그녀의 뇌리에 칼을 가지고 자신을 협박했던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사내가 한 짓이다. 진아는 직감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다지 있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군요. 나가죠." 김승유 반장이 그녀에게 말했다. 웃고 있었지만, 여전히 피곤에 지친 무거운 웃음이었다. "범인은 잡혔나요?" "아니, 아직입니다." 김 반장이 문을 열었다. 차가운 모노륨 바닥에 형광등이 희부옇게 비쳐 내리고 있는 복도를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걸어갔다. "저녁식사 어떠세요?" 갑자기 김 반장이 말했다. 그녀는 대답이 궁했다. 전영우의 시체를 이제 막 보고 나서 식사를 생 각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 형사와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 다. 그렇다면 식사를 하면서 하는 쪽이 좋을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 였다. 비교적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뜨거운 스프를 먹자, 시체를 본 쇼크도 조금 진정되어 갑자기 배가 고파왔다. 김 반장은 그녀의 기분을 알아차린 듯이 식사하는 동안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어디에 사는지 또는 가족은 몇인지 그런 간단한 것만을 물어 보았다. 그녀는 침착하게 천천히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식후 디저트가 나오고, 이윽고 김 반장이 전영우의 피살사건 이야기를 꺼냈다. "러시 아워의 혼잡한 지하철 통로에서 찔렸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많았을 텐데요." "하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범인이 사람들에 섞여서 순식간에 모 습을 감추어 버린 것이죠." 그녀는 잠깐 생각하다, 뒤늦게서야 자신이 정말로 물어 보아야 할 질문 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어째서 나를 찾으신 거죠?" "전영우의 수첩에 당신에 관한 것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름과 커피숍 이. 그래서 그곳에 가봤지요. 하지만 유진아라는 사람은 없었어요. 커피 숍 주인에게 여러가지 물어 보고, 그 소매치기 소동을 알았습니다." "다행이군요, 덕분에 제가 풀려나게 되었으니." "그런데 전영우 씨와는 무슨 일로 약속이 있었습니까?" 예상하고 있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아 직 고민하고 있었다. "그건." "개인적인 만남이었습니까?" "아니에요."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권기준에 관한 것은 피해야 된다. 그렇게 되면 응당 진규의 사고며 협박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얘기해야 될 것이므로. "전영우 씨에게 취직을 부탁드리려고 하고 있었어요." "아, 그랬군요." 김 반장은 별로 의심하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경기물산에 취직하고 싶었던 겁니까?" "가능하다면. 어제 경기물산에 가서 전영우 씨를 만났어요. 그래서 오늘 그 커피숍에서 기다리라고 해서." "그렇습니까?" 김 반장은 수첩을 꺼내서 유진아의 말들을 간단히 메모했다. 그녀는 이 런 거짓말이 어디까지 통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거짓말을 하나 하면 그것 을 감추기 위해 또다른 거짓말을 해야 한다. 그것은 눈사람 식으로 부풀 려져서 결국에는 그 모든 거짓말들이 그녀를 억누를 것이다. 이 김승유라는 형사는 이해심이 많은 사람 같다. 그녀는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억누르며 식은 커피를 급히 마셨다. 아직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우연한 범행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렇게 보기엔 상처가 너무 완벽해요." "그렇다면." "아무래도 그런 쪽에 프로의 솜씨 같아요. 살인의 솜씨가 워낙 남달라 요. 단 한번으로 피해자의 몸에 치명상을 입혔다는 것은 보통 솜씨가 아 니지요." 김 반장이 무슨 뜻인지 모르게 조금 미소지을 때, 칼이 블라우스 단추 를 가볍게 날린 그 예리한 감촉을 기억해 내면서 유진아는 작게 몸을 떨 었다. 김 반장이 수첩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녀는 다소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 다. 사건의 이야기가 더이상 나오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레스토랑을 나오자 김 반장이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아, 그렇지! 만약예요, 전영우라는 사람으로부터 당신에게 편지가 도 착하면 연락해 주십시오." "편지요?" "실은 살해당하기 직전에 전영우 씨는 마침 가까운 우체통으로 향하고 있었다고 해요. 매점의 여자아이가 우표를 팔았고, 그가 그쪽으로 가는 것까지 보았답니다." "편지라면." "내용은 물론 모릅니다. 아무것도 아닌, 그저 사소한 편지일지도 모르 지요. 하지만 그것을 보낸 직후에 살해당했다고 하는 것은 뭔가 살해당한 이유와 관계가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제 목 : 제3장 수요일 <새로운 실마리> -7- ** 제 3 장 수 요 일 ** < 새로운 실마리 > 진아는 지금 한 통의 편지를 앞에 놓고 있다. 이것이 어제 김 반장이 말했던, 전영우가 살해당하기 직전에 보냈다는 편지임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처음엔 그 편지를 서둘러 뜯으려고 하다가 문득 손을 멈추고는 창문으로 갔다. 어젯밤부터 이곳을 감시하고 있던 남자는 아직 있을까? 그를 발견한 것 은 우연이었다. 어제 저녁 지친 몸으로 돌아왔을 때, 샤워를 하고 문득 커튼 너머로 창밖을 보니 검은 코트를 입은 어떤 사람이 그녀의 창을 올 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한눈에 그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 실을 알아차렸다. 김 반장 쪽일까, 아니면 권기준 쪽? 그녀가 살짝 내다보니, 남자는 아직도 그곳에 서 있었다. 어젯밤의 그 남자였다. 오늘은 얼굴이 상당히 똑똑히 보였다. 젊고 윤곽이 뚜렷한 모 습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인상이었다. 그 김승유라는 형사반장, 사람은 좋은 것 같지만 유진아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는지 어떤지는 모르는 것이다. 미행하고 감시를 해도 이상할 것 이 없다. 유진아는 테이블로 돌아가서 봉투를 뜯어 보았다. 뜻밖에도 그 안에서 한 장의 티켓이 떨어졌다. 극장의 지정석 티켓이었다. "뭐지?" 전영우가 유진아를 영화에 초대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아무리 봐도 개봉극장의 입장권이었던 것이다. 종로에 있는 삼일극장이었 는데, 시간은 오늘 오후 2시 10분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12시 반이었다. 만약 그곳에 가기로 결심한다면 별로 시 간이 없었다. 여기에 뭔가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옆좌석으로 다가온다든가, 그 자 리에 뭔가가 미리 놓여져 있다든가. 그녀는 당연히 그곳에 가야 한다 고 생각하고 벌떡 일어섰다. 김 반장은 편지가 당도하면 연락을 달라고 했지만 그녀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옷을 차려입고 그녀는 창밖을 보았다. 그 젊은 남자가 아직도 서 있었 다. 어떻게 저 남자에게 들키지 않고 이곳을 빠져 나가지? 한 시를 조금 지 났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시간에 닿지 못한다. 반대 쪽도 길은 있지만 계단이 그의 눈에 띄기 때문에 어떻게 해도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그에게 들키게 된다. 뭔가 좋은 방법은 없을까? 진아는 마침내 결심을 하고, 샌들을 신고는 종이로 된 쓰레기 봉투를 들고 집을 나섰다. 이층에서 일층으로 내려갔을 때, 그 젊은 남자가 조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모습으로 건물 뒤쪽으로 돌았다. 남자 눈에서 안 보이게 되자, 재빨리 봉투를 열고 안에서 구두와 코트, 핸드백을 꺼냈다. 구두를 신고, 코트를 입고, 종이봉투에 샌들을 넣고는 핸드백을 팔에 끼곤 샌들은 봉투째로 그대로 쓰레기장으로 던져 넣었다. 뒤돌아보았지만 아무도 보고 있는 기척이 없었다. 그녀는 좁은 뒷길로 서 둘러 갔다. 넓은 길로 나와서 택시를 잡고서야 겨우 그 남자의 시야로부터 벗어났 다는 사실을 실감하였다. 그녀는 핸드백을 열고 지갑 속에 있는 티켓을 확인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이것밖에 남 겨져 있지 않았다. 기도하는 심정이 되어 그녀는 핸드백을 안았다. 차는 교통체증에 걸려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다. 자칫 잘못하면 2시 10 분 안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았다. 지하철역 입구가 보여 그녀는, 택시에서 내려 달리기로 했다. 사람들의 물결을 헤치면서 종로 2가의 삼일극장으로 서둘러 들어선 것이 2시 5분, 극장 문 앞에서 어떤 청년이 그녀에게 소리치듯이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사랑과 죽음의 편지>, 이제 곧 시작됩니다!" 이미 장내는 어두웠고 화면에 광고영화가 비춰지고 있었다. 장내는 평 일 낮시간으로서는 손님이 많이 들어온 것 같았고, 지정석의 하얀 커버를 씌운 의자도 3분의 1 정도는 채워져 있었다. 진아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옆자리도, 전후좌우도 아 무도 없었다. 그녀는 실망했다. 이 시간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은 역 시 이 티켓에 특별한 의미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화면엔 이미 <사랑과 죽음의 편지>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영화 따위를 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너무 화가 나서 스크린에 뭐가 비춰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늦게라 도 누가 올지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을 버릴 수 없어 유진아는 10분 정도 더 앉아 있었다. 그때였다. 유진아는 등 뒤 좌석에 누군가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 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 아무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녀는 돌아보고 싶은 욕망을 필사적으로 억제하며 혹시 뒷좌석의 사람이 문제의 메신저가 아닐 까 생각하며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이었다. 뭔가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것은 거의 동물적인 직감과도 같이 그녀의 의식을 사로잡았다. 그 순간, 그녀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황망히 돌아보니, 시트 등을 뚫 고 불쑥 칼이 나와 있었다. 암흑의 공간 안에서 그 칼은 예리한 빛을 발 하며 무언의 시위라도 하는 양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역시 뒷좌석에 어느 사이엔가 누군가가 와 있었고 그가 그녀의 등을 향 해 예리한 칼끝을 들이밀었던 것이다. 재빨리 일어서서 통로를 향해 가는 한 사내의 뒷모습이 보인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그녀는 곧바로 그의 뒤를 쫓았다. 남자가 뛰어서 무거 운 문을 열고 나갔고, 그녀도 멈추지 않고 그를 뒤따랐다. 그러나 로비에 당도한 그녀의 시야에 사내의 모습은 이미 들어오고 있 지 않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내는 바람과도 같이 사라지고 말았 던 것이다. 매표구에 있는 여자에게도 그 사내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를 물 어 보았지만, 그녀는 단지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녀는 추적을 포기하고 영화관을 나가려고 하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안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 칼이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 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곧 생각을 고쳤다. 관람객들이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안에서는 소동이 났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또 경찰이 온다. 차라리 포기 하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한 그녀는 밖으로 나와 역 쪽으로 걷기 시작했 다. 아직 한낮이었다. 그녀는 죽음 직전까지 갔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보다 그를 놓치고 말았다는 분함에 발걸음이 더 무거웠다. 그를 잡았더라도 자 기 힘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없었을 텐데도 말이다. 그런데 잠시 후였다. 누군가 그녀 옆으로 바짝 다가섰다. 마치 그녀의 그림자처럼.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칼로 그녀를 위협했던 사내 가 갑자기 그녀 옆에 붙어 있었던 것이다. 진아는 몸이 굳어졌다. 냉기가 그녀의 등줄기를 후려치고 지나갔다. "운이 좋군." 사내가 냉소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감히 입을 열 수 없을 만큼 얼어 버렸다. "난 좀처럼 실패하는 일은 없는데. 그대로 걸어." 그녀는 묵묵히 따르기로 했다. 아직 대낮이다. 사내가 설령 그녀를 해 할 작정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간단히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거기서 돌아가." 한낮의 대로를 10분 정도 걷다가 그가 뒷골목의 어느 좁은 길로 들어가 라고 명령했다. 술집이 즐비한 골목이었는데 아직 열려 있지 않은 채였 다. 주로 오후에 문을 여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이런 종로의 길가 골목길 에 이렇게나 많은 술집들이 있었다니, 유진아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공포가 차츰 사라지고 있었다. 백주의 번화가였다. 아무리 골목길이라 해도 오가는 사람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피살당하리라는 느 낌? 그런 감정은 조금도 현실감이 없는 것이었다. "오른쪽으로 돌아가." 남자가 말했다. 그 골목 안쪽에 차가 한 대 서 있었다. 검은 색의 고급 승용차였다. 사내가 짧게 명령했다. "타!" 여기서 도망치지 않으면 죽는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으나 몸이 의식 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공포가 또다시 가슴까지 기어 올라왔다. 뒷좌석의 문이 열렸다. 안에서 머리가 벗겨진 뚱뚱한 중년남자가 얼굴 을 내밀었다. "실패했나?" "운이 좋은 여자인 것 같습니다." 뚱뚱한 남자가 냉소를 머금은 채 나지막이 내뱉었다. "운도 실력에 포함되지." 진아는 어쩔 수 없이 차에 탔다.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그녀의 뇌리에 아주 살벌한 여운을 남기고 멀어져갔다. 그녀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사내는 앞의 운전석에 앉았다. 그의 뒷모습이 위압적으로 꼿꼿이 정면 을 향하고 있었다. "달려." 뚱뚱한 남자가 말했다. 여송연을 피우는 것일까, 냄새가 차 안에 가득 차 있었다. 뚱뚱한 남자는 뭐랄까. 상당히 차가운 인상을 풍기고는 있었 지만 체구가 비교적 작은 것이 어딘지 모르게 중소기업의 사장 같은 풍채 로 보였다. "내가 권기준이오." 그 남자가 담담히 말했다. 진아는 권기준이라고 스스로 이름을 댄 그 중년의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가씨가 나에 대해 조사하고 있나?" 권기준은 여송연을 물고 천천히 불을 붙였다. "목적이 뭐지?" "그건." 그녀가 미처 대답을 하지 못하자 그가 아주 차갑게 내뱉었다. "나에게 돈을 사기 당했다고 했다던데, 그런 엉터리는 통하지 않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진아는 무엇인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공포감을 죽을 힘을 다 해 억누르고 있었다. 무엇이 가장 적절한 대답인가. 그녀는 필사적으로 거기에 매달렸다. 그가 말하는 대로 분명히 돈을 사기 당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쉽게 통 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뒤를 쫓는 진짜 이유를 말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녀로서는 그 결과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죽은 남자가 가지고 있던 협박장. 그 사건에 과연 권기준이 어떻게 얽 혀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만약 이 사내가 유괴의 공범이라면 그것을 냄 새맡은 유진아를 틀림없이 없앨 것이다. 하지만 정반대의 가능성은? 권기준에게 사기를 당한 피해자의 한 사람 이 원한을 풀려고 권기준의 딸을 유괴했다고 생각하면 이야기는 통하는 것이다. "왜지?" 권기준이 담배 연기를 훅 뱉으며 그녀의 대답을 재촉했다. "실은." 그녀는 무엇이든 대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그녀는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하여 마음을 안정시킨 다음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남자를 치어 죽였어요." 그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거짓말을 계속할 배짱이 그녀에겐 없었다. 이렇게 된 마당에 어느 정도 사실을 이야기하는 수밖에는 없다고 판단했 던 것이다. "그래?" 권기준이 조금 의외인 듯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그녀를 한동안 노려보다 가 다시 물었다. "차로 사람을 치었다구?" "예." "재미있군." 그는 색다른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했지?" "두려워서, 경찰에는 신고하지 못했어요." "시체는 어떻게 했지?" "버렸어요, 어떤 장소에." "그래서?"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사람의 가족과 친구가 얼마나 걱 정하고 있을까 염려가 되어서." "그 사고와 내가 어떤 연관이 있다는 거지?" "그 사람은 신분을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다 만 주머니에 회장님의 명함뿐이었어요. 그래서."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를 찾았나?" "그렇습니다." 운전하고 있던 칼잡이 남자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적당히 이야기를 지어내면 후회하게 될 거야." "아니, 거짓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칼잡이의 엄포에 권기준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의 이런 말은 그녀 를 다소 놀라게 했다. 이 사람이 나의 무엇을 믿고 단번에 모든 걸 신뢰 할 수 있다는 걸까? "자신이 불리한 입장을 밝히는 거짓말은 누구도 하지 않는 법이니까. 틀리나?" 잠시 침묵이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문득 생각이 난 표정으로 다시 입 을 열었다. "그 남자를 친 장소를 기억하고 있나?" "예." "좋아. 그러면 그곳으로 가 보지 않겠나?" 그는 느긋하게 시트에 기댔다. 그가 앞쪽의 칼잡이에게 히죽 웃으며 말 했다. "마침 드라이브하기에는 좋은 날씨군." 지금부터 어떻게 될 것인지 그녀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살해 당해 자신이 시체를 버린 것처럼 저수지에 던져질지도 모르는 것이 었다. 그렇게 되면 동생 진규는 제대로 살아 나갈 것인가? 십중팔구 자포 자기해서 몸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아직 죽을 수는 없었다. "어디쯤이지?" 두 시간쯤 후, 권기준은 유진아가 말한 경기도 광주의 사고 현장에 거 의 당도하자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 더 앞이었다고 생각되는데요."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의 공포가 끝없이 출렁거리고 있었으나 이제는 두려워하고 있어도 어쩔 수 없었다. 여기까지 와 버린 것이다. 그녀는 차 라리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어 버렸다. 그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잠깐만요, 차를 세워요." 차가 길 옆에 붙여지자 칼잡이가 여전히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여기야?" "아마도, 내려 봐야 알겠지만." "좋아, 밖으로 나가지. 도망치려고 해도 소용없어." 사내가 먼저 차에서 내려 문을 열었다. 그녀는 차에서 내린 순간, 쏟아 지는 햇빛에 그만 눈이 부셔서 잠시 휘청했다. 장소는 틀림없는 것 같았 다. 자세히 살펴보자 진규의 차가 미끄러진 흔적이 아직 남아 있었다. "여기에요, 틀림없어요." 권기준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모습엔 여전히 차 가운 느낌의 미소가 흐르고 있었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그녀는 겨우 보았 다. 그의 눈초리가 보통사람들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매섭다는 것을. "시체는 어디에 버렸지?" 진아는 그의 비수 같은 눈길을 피하며 한동안 주저하다가 짧게 대꾸했 다.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순간, 칼잡이 사내가 그녀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그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져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도사리며 뒷걸음질쳤다. "잠깐!" 권기준이 칼잡이를 제지했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하겠지. 오히려 바로 이야기하는 것이 이 상하지." 칼잡이는 불만인 듯이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그대로 섰다. 권기준이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젊은 남자였다고 했지?" "예." "차는? 그 남자의 차는 없었나?" 유진아는 잠시 말이 막혔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다. 지금까 지 그런 것을 생각해 보지는 않았지만, 그 남자는 도대체 어떻게 이곳까 지 온 것일까? 그 새벽에 이곳까지 걸어왔을 리는 없고, 부근에 민가도 없기 때문에 동네사람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또 설령 동네사람이라고 해도 그가 실종되었다면 경찰에 금세 신고가 들어갔을 것이다. 그녀는 문득 진규가 이미 버려진 시체를 치었거나 누군 가로부터 쫓기는 사내를 들이받은 게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이상하군. 게다가 이런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녀는 잠자코 권기준을 쳐다보았다. 이미 그의 얼굴에선 그나마 남아 있던 차가운 미소마저도 사라져 버렸다. "내 명함을 가지고 있었다구? 하지만. 명함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 으니까 그것만으로론 내가 아는 남자라고 단정할 수가 없겠군." 진아는 그제서야 자신의 조사가 바로 이곳 사고 현장에서부터 시작했어 야 했음을 겨우 깨달았다. 바로 저 아래 숲속을 먼저 뒤졌어야 했던 것이 다. 제 목 : 제3장 수요일 <새로운 실마리> -8- ** 아파트로 돌아오자 벌써 밤이었다. 유진아는 서둘러 준비를 했다. 플래시, 칼, 그외에도 조사에 필요한 몇 가지 도구들. 렌터카를 빌려 그 장소로 돌아가 볼 생각이었던 것이 다. 권기준 일행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오늘 벌어진 숱한 불행 가 운데서 유일하게 그녀를 살린 행운이었다. 그들이 잠시 더 그 사고현장에 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경찰차가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유진아는 재빨리 손을 들어 경찰차를 세웠고, 길을 묻고 있었던 것처럼 행동하면서 서울로 가는 길목까지 태워다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경찰 이 그녀의 요청을 거절할 리가 없었고, 권기준과 칼잡이는 머쓱한 표정으 로 경찰차에 오르는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던 것이다. 경찰은 떠나기 전에 그들의 신분증과 면허증을 요구하여 간단히 살펴보 고 되돌려 주었다. 그들의 신분증만으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는지, 경찰은 순순히 그것을 돌려 주었지만 한 마디 물어 보는 것은 잊지 않았 다.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권기준은 경찰의 질문에 매우 냉랭한 태도로 대꾸하였다. "운전을 하다가 기사가 피곤하다고 하길래 잠시 쉬라고 한 겁니다. 그 때 이 아가씨가 와서 길을 물었던 거죠. 뭐 잘못된 거 있습니까?" 사태는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현장을 조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기자 진아는 힘이 넘치고 있었다. 그 주변을 조사하다 보면 혹시 인질도 그 근처에 있을지 모른다. 아직 '일주일'이라는 말과 피살을 장담한 대목에 의문이 풀리지 않았지만, 어 쨌든 그 모든 의문의 실마리는 바로 거기 숲속에서부터 풀려질 것 같아서 그녀는 이미 비밀의 반절은 알아 버린 듯이 혼자 중얼거렸다. '틀림없이 뭔가가 발견될 거야.' 그녀가 막 아파트를 나가려고 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동생 진규였다. "계속 전화했었어." "무슨 일이지?" "회사로 걸었더니 그만두었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 정말이야?" "그만두었다구? 회사에서 그렇게 말했다구?"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대답이 한결같더라구." 소매치기 용의로 잡혔었다는 것이 회사에 전해졌음에 틀림없었다. 그녀 는 정신이 아득했지만 아직은 버틸 만했다. "여러가지 일이 있었어." 설명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나가야 하니까 나중에 연락해." "기다려, 누나!" 그녀가 전화를 끊으려 할 때, 진규가 황급히 말했다. "나에게도 뭔가 시켜 줘. 전부 내 탓이니까. 나도 무슨 일이든 하고 싶 어. 나에게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겠지?" 동생이 다른 때와는 달리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일에 대해 정말로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그런 외진 장소에서 한밤중에 뭔가를 조사하 는 데는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구나 동 생도 이젠 성인이다.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훌륭한 조력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금세 결론을 내렸다. "알겠어, 그러면 같이 가지!" 그녀는 동생에게 시간과 장소를 말하고는 전화를 끊고, 창밖을 보았다. 감시하고 있던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돌아왔을 때도 보이지 않았던 것 같았다. 이제 포기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어딘가에 숨어서 계속 면밀하게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일까? 20분 후, 진규는 렌터카를 빌려 타고 와 진아의 아파트 입구에 세웠다. 그러나 그는 혼자 온 게 아니었다. "저 아파트 3층이야. 알겠지?" "그러면 나는 여기에서 내릴게. 열쇠를 줘." "나중에 누나가 모르도록 해야 돼." "맡겨 두라고 했잖아." 미애가 내리자 진규는 차를 몰고 가 아파트 현관에 세웠다. 밖으로 나 오자, 차가 오는 것을 보고 있었는지 진아가 계단에서 내려왔다. 이제 완 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밤길을 차로 달리면서, 진아가 동생에게 오늘 할 일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오늘밤 사고 현장 주위를 찾는 거야. 내일 아침까지 걸려도 괜찮아." 진아는 천천히 시트에 기대었다. 피곤하지만 분명한 목표가 있다고 생 각하자 새로운 힘이 솟는 것 같았다. "오늘은 사고를 내지 않도록 해." 진규는 누나의 명령에 순종하겠다는 듯이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 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어둠이 짙게 깔린 아스팔트 길을 직선으로 비치고 있었다. 한편, 미애는 진규가 운전하는 차가 멀어지자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는 곧바로 진아의 아파트로 들어갔다. 미애가 이렇게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진규를 설득하는데 다소 애를 먹었다. 그녀의 머리 속엔 10억 원이라는 거액이 이미 구체적인 형상이 되어 꽉 차 있었다. 그렇게 되자, 무엇보다 진아가 뭔가 단서를 얻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을 빼앗으 려면 그녀가 없는 사이에 아파트로 잠입해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그녀의 이런 설득에 진규는 끝내 고개를 끄덕이면서 진아의 아파트 열쇠를 주기 에 이르렀던 것이다. 커튼은 닫혀져 있었지만 빛은 조금 새어 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유진아 의 아파트 창을 올려다보던 남자가 저 아래 전화박스에서 어딘가로 급히 다이얼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지금 유진아는 누군가와 차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어떤 여자가 그 빈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알겠습니다." 남자가 불빛이 새는 창을 올려다보았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젊은 남자가 수화기를 놓고 있을 때, 미애는 느긋하게 옷장을 열어보고 있었다. 옷장뿐만 아니라 서랍과 침대 밑, 신발장 등등 뭔가 숨겨 두었을 듯싶은 곳은 모조리 뒤적거렸다. 아무리 뒤져도 색다른 것을 발견할 수 없었던 미애는 옷장 서랍 안에 있는 가죽지갑에서 10만 원을 꺼내 자기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만 원짜 리 지폐 10장의 감촉이 그녀를 갑자기 따뜻하게 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다시 한번 집 안 구석구석을 뒤져 볼 결심을 했다. 만 원짜리 10장의 감촉보다 10억의 감촉이 훨씬 더 따뜻할 것이므로 그녀 는 어떤 수고를 하더라도 여기서 무슨 단서라도 얻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거실의 조사를 다 끝내고 부엌으로 들어갈 때,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그 소리는 적막하던 집 안에 너무도 크게 울려와 그녀 를 한순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들이 벌써 돌아온 것일까.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현관문을 노려보았다. 현관 초인종이 계속 울려대고 있었다. '끈질기군.' 미애는 초조해서 중얼거렸다. 벌써 10분째다. 적당히 포기하고 돌아가 면 좋겠는데 벨을 누르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손가락에 힘을 주고 있는 것이었다. 초인종이 그쳤다. 후 하고 숨을 쉬려는데 이번에는 탕탕 두드리는 소리 가 들려왔다. "진아 씨, 문우성이에요. 안 계십니까?" 사내는 이렇게 몇 번 외치다가 다시 벨을 누르고, 그러다가 또 소리를 질렀다. 정말 끈질긴 사림이었다. 그는 또 이렇게 10여 분동안 공허한 행 동을 계속하다가 할 수 없다는 듯이 포기하고는 돌아갔다. 미애는 그가 가 버리자 또 서랍을 열어서 구석구석 조사하기 시작했으 나 결국 아무런 대단한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제 가야 한다, 그녀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조금 전 그 남자가 밖에 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10분 정도 더 기다렸다가 미애는 불을 끄고 방을 나왔다. 복도에 사람은 없었다. 미애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데 그녀가 밖으로 막 나왔을 때였다. "이봐, 잠시 기다려!" 그 느닷없는 소리에 미애는 깜짝 놀라 멈추어 섰다. "그 죽은 남자는 어느 쪽에서 나왔지?" "숲속에서 나왔어." "그래?" 진규가 뭔가를 더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진아는 이미 플래시를 들고 숲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어쨌든 그 남자도 여기까지 차로 온 것 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직 어딘가에 차가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녀는 30여 분 동안 숲속을 헤매이다가 다시 도로로 올라왔다. 낮에 왔을 때 얼핏 본 숲속 건너편의 샛길로 들어갈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물론 숲속의 조사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나 버린 탓이기도 했지만 원래는 그 샛길 어딘가에 뭔가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 다. "이것 봐, 여기야!" 얼핏 보아서는 나무들 사이에 조금 넓은 틈이 생겨 있다고 할 정도로밖 엔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샛길로 통하는 하나의 관문이었던 것 이다. "숲속을 빙 돌아서 결국 이 도로로 나오게 되는 거야." 차가 크게 커브를 틀어서 그 좁은 길로 들어갈 때 진아가 말했다. 덜컹 덜컹 흔들리고, 타이어 밑에서 툭툭 나뭇가지가 꺾이는 소리가 나고 있었 다. 진아가 창문을 내리고 어두운 숲속을 유심히 살피며 진규에게 말했다. "넌 반대편 쪽을 신경써서 봐." 차는 숲속 길을 계속해서 천천히 달려갔다. 그러나 그것은 달린다기보 다는 슬슬 기어가는 것 같은 속도였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군." 진규가 잔뜩 기대를 걸었다가 고생만 하게 되자 맥이 탁 풀린 소리로 말했다. "마지막까지 찾아보지도 않고,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진아는 엄한 말투로 이렇게 꾸중을 하곤 한 마디 더 보탰다. "너는 모든 것을 쉽게 포기해 버리는 나쁜 버릇이 있어." 누나의 비난에 머쓱해져서 진규는 아예 입을 다물었다. 누나는 모든 것 에 너무 집착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구, 알아? 그는 이렇게 뱉고 싶은 것 을 억지로 삼켰다. 그런데 그들이 한동안 말없이 어둠 속을 뚫고 앞으로 나아갈 때였다. 한줄기 헤드라이트 불빛이 예민하게 숲 저편을 밝히고 있던 그때, 진규가 느닷없이 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진아는 그만 앞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 칠 뻔했다. "누나, 저것 봐!" 눈앞에 거짓말처럼 하얀 소형승용차가 멈춰 서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숲속의 샛길 끝쪽 나무 사이에 반쯤은 옆으로 기울어진 채 서 있었다. "어머." 그녀는 단지 그렇게 말했을 뿐, 멍하니 그 차를 바라보기만 했다. 너무 쉽게 목표물을 발견한 까닭에 오히려 눈앞의 상황이 믿기지 않았던 것이 다. 두 사람은 즉시 차에서 내려서 자동차 안을 들여다보았으나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진규가 플래시를 가져와서 안을 비추자, 자동차 안의 작은 공간이 금세 눈에 들어왔다. 자동차 안에는 짐 같은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진아가 문에 손을 대자, 스르르 문이 열렸다. "잠겨져 있지도 않아." "키도 꽂아둔 채야." "틀림없이 그 죽은 사람이 타고 있던 차야. 그 사람의 호주머니에 자동 차 키 같은 건 없었으니까." "하지만 잠그지도 않고 왜 길로 나왔을까?" "곧 돌아갈 생각이었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든 지. 아니면 누구하고 거기서 만나기로 돼 있었든지." "그렇다면 이 부근에 또 누군가 있었다는 거야?" 그녀는 자동차 안을 계속해서 세심히 살펴보았다. 카세트 테이프 몇 개 와 지도 따위가 나오기는 했으나 자동차 검사증이나 면허증은 없었다. "이상하군. 그 사람은 분명히 면허증을 가지고 있지 않았어." "여기에도 없다는 것은. 무면허였든가, 그렇지 않으면 그밖에 누군 가가 또 있었다는 거야." "어느 쪽일까?" "분명히 누군가가 있었다고 생각해." "어째서?" "유괴범이 무면허운전과 같은 당치 않은 짓을 할 리가 없어. 그 사람은 틀림없이 면허를 가지고 있었을 거야. 그런데 누군가가 면허증을 가지고 모습을 감춘 거야." 진아는 이렇게 단언하고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이라도 하듯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남은 누군가가 운전하고 돌아갔을 테니까. 다 시 말하면 동행이 있었다면, 그는 필경 운전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을 거라는 얘기지." 진아의 아파트를 나오다 누군가에게 불리워진 미애는 한동안 놀라기는 했으나 얼른 당혹감을 감추고는 태연히 뒤돌아보며 말했다. "나 말이에요?" "당신이 지금 나온 데가 유진아 씨의 집이지?" 조금 전 찾아와서 끈질기게 초인종을 눌렀던 남자임을 미애는 금세 알 아차렸다. 보기에 그다지 야무진 사람 같지는 않아서 나미애는 일단 안심 했다. "예, 그래요." "무엇을 하고 있었지?" "상관없잖아요? 그것보다 당신은 누구세요? 내게 뭘 묻기 전에 자신이 누군가 먼저 말하세요." "나? 나는 문우성이라고 하오." "그래서요?" "유진아 씨와는 알고 지내는 사이에요.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나는 나미애라고 해요. 유진아 씨 동생의 약혼자예요." 어느 사이엔가 약혼자가 되어 버렸지만 그녀의 낯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동생의 약혼자라구?" "예, 그래서 이렇게 열쇠도 가지고 있어요. 언니가 언제든 들어와도 좋 다고 허락을 했거든요." 미애가 열쇠를 흔들어 보이며 자신에 찬 웃음을 짓자, 기세등등하던 문 우성이 움찔했다. 동생이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지만 약혼자라니 그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그는 그녀를 한동안 노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 전 그렇게 벨을 눌렀는데 어째서 나오지 않았죠?" "어머, 그럼 방문객이 바로 당신이었어요? 미안해요. 모르는 사람이 오 면 문을 열어주어서는 안 된다고 했기에." 오히려 할 말이 짧아진 문우성이 심하게 머뭇대다 간신히 할 얘기를 찾 았다. "그런데 유진아 씨는 어디 갔죠?" "동생과 함께 외출했어요.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구요." 문우성은 더이상 추궁할 말이 없었고, 그럴 의욕도 잃어버렸다. 가도 돼요? 나미애가 차갑게 웃으며 묻자, 그는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 만 끄덕거렸다. 나미애가 휘파람이라도 불듯이 경쾌한 발걸음으로 걸어가 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공연히 요란을 떤 자신만을 탓하고 있었다. 제 목 : 제3장 수요일 <새로운 실마리> -9- **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완전히 지 쳐 버렸다. 다만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얼마나 바쁜 하루였나? 정말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날의 일과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계단을 막 오르려고 할 때였다. "실례합니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한 목소리가 들려와 그녀는 깜짝 놀라 뒤돌아봤다. 그녀는 곧 그를 알아보았다. 그 사내는 자신을 감시하고 있던 젊은 남자 였다. "뭐죠?" "저는 장은식() 형사라고 합니다. 김승유 반장님의 부하지요." "아, 그래요?" 역시 형사였다. 경찰이 그동안 그녀를 계속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김 반장이 나를 감시하는 걸까? "무슨 일이죠?" 그녀의 질문에 장은식 형사라는 사람이 전혀 생각지도 않은 말을 하였 다. "집을 비운 사이에 손님이 있었습니다." "손님? 제 집에 말이에요?" "예. 잠시 있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돌아갔지만." "집안에 들어갔었다구요?" "예,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이상한 일이다. 그녀는 동생에게밖에 열쇠를 주지 않았던 점을 떠올리 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잠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장 형사가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이렇게 말했다. 진아는 주저했 다. 지금 어디에 갔다 오는 길이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지? 그러면서 도 이미 그녀는 대답을 하고 있었다. 경찰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좋아요." "그렇다면, 우선 집안을 한번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형사라고는 하지만 젊은 남자를 집안에 들이는 것은 주저되었 다. 이 한밤중에 말이다. 하지만 자기가 없을 때 정말로 누군가가 집안에 들어갔었다고 한다면 도난당한 것이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 함께 들어가죠." 계단을 오르는 그녀의 머리는 뒤죽박죽이었다. 여러가지 일이 한꺼번에 너무 많이 일어났다. 죽은 사람이 탔었던 차를 발견한 것, 그리고 집에 없을 때 아파트에 누군가가 들어갔었다는 형사의 이야기. "형사님." 계단을 오르면서 진아가 말했다. "제가 없을 때 이곳에 왔다는 사람이 어떤 남자였나요?" "아니, 여자였소." "여자라구요?" "그렇소. 젊은 여자였소. 남자는 나중에 왔습니다만." "그렇다면." "여자는 한 시간 가까이 집안에 들어가 있었소. 남자가 나중에 와서 문 을 두드렸지만, 들여보내 주지 않았는지 아래로 내려오더군요. 조금 지나 서 여자가 나오자, 숨어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말을 걸었지만 곧 헤어 졌소." "그 남자는." "아주 평범한 샐러리맨 같았소." 남자는 문우성일지 모른다. 하지만 여자는 누구일까? 그녀는 아무리 생 각해 보아도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이 집이죠?" 아파트 입구 앞에서 장 형사가 말했다. "그래요." "잠시 기다려요." 장은식 형사는 주머니에서 조그만 전등을 꺼내어 열쇠구멍 주위를 비추 면서 뭔가를 신중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흠은 없군. 억지로 열지는 않은 것 같소." "그렇다면."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오. 하지만 몰래 만든 것일지도 모르지." 그녀는 열쇠를 꺼내서 아파트 문을 마치 남의 집을 열듯 조심스럽게 열 었다. 불을 켜자, 별로 어지럽혀 있지 않은 아파트 거실이 한눈에 들어왔 다. "잘 조사해 봐요. 본래 베테랑 도둑은 함부로 실내를 어지럽히지 않으 니까." 진아는 제일 먼저 현금을 조사하고는 장은식 형사의 말이 맞다는 걸 확 인했다. "돈을 가져갔군요." "얼마 정도요?" "10만 원이에요." "이곳 열쇠를 따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굽니까?" "나 이외엔 동생뿐입니다." "동생, 어떻습니까? 가끔 용돈을 얻으러 오는 일은 없습니까?" "하지만." 말을 하려다 진아는 입을 다물었다. 물론 침입자는 동생이 아니다. 지 금까지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할 리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형사에게 말하면 이런 밤중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그 여자는 진규의 애인이었을까? 그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아이도 해고 당해 용돈이 부족할 것이다. 두 사람 이 외출한 사이에 여자에게 열쇠를 맡겨서 집안을 뒤져 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진규에게 있었을까. "신고를 하시겠습니까? 절도사건이니까요, 이것은." "잠시 기다리세요." 그녀는 황급히 말했다. "틀림없이 동생의 짓일 거예요. 애인에게 말해서 돈을 가져오라고 보낸 거예요. 칠칠치 못한 아이라서 정말 힘들어요." "하지만 그것이 확실한지 어떤지는 아직 모르잖소?" "아뇨, 확실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신고는 하지 않겠다, 이런 얘기입니까?" "예. 나중에 귀찮게 되면 곤란하니까요." "그렇다면 좋습니다." 장 형사가 잠시 집안을 둘러보고는 형사다운 침착함으로 다시 말했다. "그러면 이제 제 용건을 말하죠." "우선 앉으세요." "아니, 밖으로 나갑시다. 밤중에 여자방에 들어오는 것은 경찰의 직무 상 조금 문제가 있으니까요." 그가 미소지었다. 뜻밖에도 따뜻한 미소라서 그녀는 놀랐다. 그녀 자신 도 어느 사이엔가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완전히 당했었어요." 장 형사가 찻집으로 옮긴 후,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지금 아까 낮에 감시 도중에 그녀를 놓쳐 버린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중이었다. "미안해요." "아니, 놓친 내 쪽이 나빴어요. 하지만 왜 피했지요?" "형사님인지, 아니면 나쁜 사람 쪽인지 몰랐으니까요." "그건 그렇군요. 내 인상이 그렇게 나쁜가요?" "얼굴이 보이진 않았어요. 저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에만 신경을 썼을 뿐이구요." "그건 그렇고, 당신은 살인사건에 휘말려 있어요." 장 형사는 그녀의 안전이 걱정된다는 듯 매우 진지한 말투가 되어 있었 다. "정말 조심해야 돼요. 우리는 또다른 사건에 개입되지 않았으면 해요." 장 형사는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경찰관다운 매우 사무적 인 말투로 바뀌었다. "어때요, 내게 모든 것을 숨기지 말고 이야기해 주지 않겠소?" 요?" "아실 텐데요." 갑자기 두 사람 사이에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아무리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라도 형사는 형사다. 모든 사실을 얘기하라구? 그녀는 아직은 그의 요구를 들어 줄 수가 없었다. "모르겠는데요." "당신은 뭔가 숨기고 있소." "숨기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럼, 오늘밤은 어디에 갔었습니까?" "그것을 이야기해야 할 필요가 있나요?"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까?"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는 잠시 있다가 체념한 듯이 숨을 쉬었다. 눈살을 찌푸리는 그의 얼 굴에 김 반장의 안색에도 비추었던 피곤함이 살짝 엿보였다. 경찰의 얼굴 엔 누구나 늘 이렇게 피곤함이 깔려 있나 보다. 그가 천천히 일어서며 말 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런 것으로 하죠. 하지만 호위는 계속하겠습니 다." "호위가 아니라 감시겠지요." "호위입니다, 표면적으로는." 그의 말에 진아는 어쩔 수 없이 웃어 버렸다. 아파트 앞에 오자 장 형 사가 친절하게 꾸벅 인사를 하며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부터는 다른 사람과 교대합니다." "수고하셨어요." "아마 그 형사는 같은 수법으로는 당하지 않을 겁니다." 유진아는 그에게 가볍게 웃어 주고는 계단을 올라갔다. 어떻게 된 일인 지 장은식이라는 형사가 그녀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었다. 시체를 유기 한 명백한 범죄자가 형사로 인해 위안을 받다니, 그녀는 이런 아이러니컬 한 사실에 실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집 앞에 도착해서 아래를 내 려다보자 장 형사가 변함없이 따분하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열쇠로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푹 자고 싶다. 그래야 내일 또 힘차게 뛸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때였다. 정말로 그날의 악몽 같은 일과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불을 켠 유진아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소리 지르지 마." 칼잡이 사내가 눈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작은 칼을 꺼내들고서. 칼날 이 눈빛보다 더 차갑고 예리해서 그녀는 한순간 심장이 멈추는 것만 같았 다. "무슨 일이죠?" 유진아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억지로 숨기며 말했다. "당신과 천천히 이야기하고 싶어서." 남자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싱긋 웃었다. "문을 잠그고 안으로 들어 와. 그런 열쇠로는 나를 따돌리지 못해." 그녀는 그가 말하는 대로 했다. 장 형사가 밑에 있지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는 것이다. 유진아는 문을 잠그고 소파로 돌아와 앉아서는 그의 처분을 기다리겠다는 듯이 물끄러미 칼잡이를 바라보았다. 칼잡이도 식당 의자를 하나 가지고 와서는 그녀 앞에 앉았다. "이야기가 있으면 빨리 말하세요." 진아는 남자를 쏘아보았다. "그 배짱만은 대단하군." 사내는 가볍게 웃었다. 그가 잠시 칼을 만지작거리다가, 혼자 싱긋 웃 으면서 뭔가를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말을 했다. "이봐요, 유진아 씨. 난 돌려서 이야기하는 것은 질색이야. 단도직입적 으로 말을 해서. '딸'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지?" 딸이라구? 처음에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얼른 이해하지 못했 다. 누구의 딸을 말하는 거지? "권기준의 딸 말이야. 난 다 알고 있어. 당신이 그의 딸을 알고 있다는 걸. 내 짐작이 틀리나?" 유진아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와 '딸'을 연관시키는 그의 짐작도 이상했지만, 권기준의 딸이라고 말하는 그의 단언 또한 수상하게 보였다. 그렇다면 이 칼잡이 사내는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뜻 일까. 그러면서도 내게 권기준의 딸이 어디 있는지 묻는 것은 또 무슨 뜻 이지? "권기준의 딸은 분명히 유괴되었어. 하지만 유진아 당신은 딸을." 그가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한동안 그녀를 노려보다가 다시 칼을 만 지작거리며 놀라운 말을 하였다. "보스 딸을 낚아채는 정도는 드문 일도 아니지." "당신이 유괴했군요!" 뜻하지 않은 상황에 그녀는 아연해졌다. "그 녀석에게 고용되긴 했지만, 의리를 지킬 아무것도 없으니까." 사내가 야비하게 웃었다. "게다가 권기준 그 녀석, 사람 다루는 것은 거친데도 돈을 쓰는 것은 인색하지. 그 정도는 해도 괜찮아." 유진아는 재빨리 계산을 해보았다. 유괴된 사람은 권기준의 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 사내도 딸의 소재를 모른다고 한다. 애초에 자신이 그의 딸을 '낚아챘다'고 하면서도 말이다. 이 말은 결국 유괴한 사람과 지금 그녀를 보호하고 있는 사람이 다르다 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닌가. 진아는 더욱 알 수 없는 수렁에 빠지는 기분 이었다. "당신이 친 사람은 내 부하였던 녀석임에 틀림없어. 내가 권기준의 딸 을 꾀어내어 녀석이 낚아채는 순서였으니까. 하지만 그 단계에 이르렀을 때, 난 권기준에게 급한 일을 명령받았지. 거절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녀석에게 모든 걸 맡겼는데 말이야." 진아는 왜 그가 이토록 상세하게 사건의 전말을 얘기해 주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왜 그토록 단정적으로 진아가 그 유괴사건과 연관이 있다고 믿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면 당신의 부하라는 사람이 혼자서 그 짓을 한 거군요." "그것은 모르지." 사내는 화가 치미는 듯이, 허공을 향해 주먹질을 몇 번 하더니 또 말을 이었다. "누군가와 같이 한다고 했지만 그것이 누군지 듣지 못했어. 그리고 이 미 상황은 끝났고, 녀석이 그만 죽어 버린 거야." 남자는 유진아 쪽으로 몸을 구부렸다. "그런데 당신은 시체의 주머니에서 권기준의 명함이 나왔다고 했지." "예, 그래요." "그것뿐인가?" "그것뿐이에요." 유진아가 짧게 이렇게 대답하자, 갑자기 사내가 그녀의 뺨을 때렸다. 그녀는 짧은 비명을 지르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왼쪽 뺨이 타는 듯이 아 파서 현기증이 났다. 살짝 손을 갖다 대자 뺨에 상처가 나서 피가 나오고 있었다. 반지를 낀 왼손이 그녀의 뺨을 가른 것 같았다. "나를 얕보지 마."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칼로 그 얼굴에 사인해 줄까?" 진아는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의 주먹질과 냉 정한 눈빛,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화내고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오 히려 즐기고 있다고 하는 편이 옳은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가슴에다 문신이라도 새겨 줄까? 어느 쪽을 원하지?" 칼이 그의 손 안에서 흡사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어 그녀는 모골이 송연하였다. 유진아는 심하게 더듬거리는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무엇을 말하라는 거지요?" "죽은 남자의 주머니에서 또 무엇을 발견했지?" 그녀는 저항을 포기했다. 그의 칼이 무엇보다 무서웠다. "협박장이에요." "줘." 진아는 일어서서 책상 서랍을 열었다. 백에 넣어 둘까 생각하고 있었지 만, 이렇게 서랍에 넣어 둔 편이 잘되었다. 유치장에 들어갔을 때 백을 조사당했기 때문에 차라리 집안에 두기로 했던 것이다. 서랍 밑에 깔아 둔 천을 뒤집고 그 밑에서 편지를 꺼내어 그에게 건네 주었다. 남자가 잡아채듯이 편지를 빼앗고는 재빨리 읽었다. 그의 눈썹이 뱀처 럼 꿈틀대고 있었기에 진아는 두려움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협박장을 다 읽고 나서 유진아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갑자기 웃음을 머금었다. "당신도 대단한 여자군." 그녀는 그가 말하는 의미를 몰라서 잠자코 있었다. "녀석을 죽이고 이것을 발견했지. 그리곤 이 몸값을 가로채려고 생각한 거군, 그렇지?" 당치도 않다고 말하려다가 진아는 생각을 고쳤다. 순간적으로 이 사내 에게 맞장구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왜 그래야 하 는지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서는 안 되나요?" "그밖에 또다른 건 발견하지 못했나?" "아무것도 없어요." "딸은 지금 어디에 있지?" "내가 어떻게 알죠?" "그렇겠지. 알고 있다면 권기준의 딸이라는 것은 알았을 테니까." "당신은 모르나요?" "알고 있으면 당신에게 묻지도 않았을 거야." "계획했는데 모른다는 거예요?" "그 녀석은 상당히 머리가 좋았지. 난 솔직히 얘기해서 머리가 나쁘고 . 그래서 상세한 것은 전부 그 녀석에게 맡겨 두었었지." "그럼 또 한 사람의 동료가 알고 있겠군요." "그래. 하지만 그 녀석이 권기준을 협박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에요?" "권기준이 자기 딸이 유괴당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렇게 침착하게 있 을 수는 없을 거야. 그것은 아직도 그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증거도 되는 것이구." 남자가 가볍게 웃었다. "외동딸이고, 상당히 귀여워했으니까." "몇 살이에요?" "글쎄, 이제 스무 살은 되었을 거야. 아버지와 닮지 않아 미인이지." "딸이 행방불명되었는데 어째서 모르고 있죠?" 남자는 조금 편안한 모습으로 다리를 길게 뻗었다. "그애는 남자관계가 복잡하지. 항상 훌쩍 여행을 떠나 버리곤 하지. 부 자인데다 제멋대로인 아이야." "그러면 일주일 정도 없어도 모른다는 얘기군요." 진아는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안정시켰다. 차츰 공포도 사라지고 있었 다. "그 일주일이라는 기한은 무슨 의미죠?" "모르겠어."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대로 딸이 있는 곳도 모른 채, 그에게 협박장을 보낸다 하더라도 권 기준 녀석은 넘어가지 않을 거야." "어째서죠?" "녀석은 그런 점에선 빈틈이 없어. 정말로 이쪽에서 딸을 데리고 있다 는 증거를 보이지 않으면 결코 믿지 않을 거야." "그러면 어떻게든 그 딸이 있는 곳을 알아내야겠군요." 남자는 문득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뜻밖에도 진지해서 유진 아는 또한번 흠칫 놀랐다. 짧은 시간에 그렇게도 많은 변화를 나타내는 눈빛, 하지만 일관된 한 가지는 그의 안색이 유난히 창백하고 냉담한 인 상이라는 것이었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뱉어졌다. "당신, 젊은 여자치곤 상당히 배짱이 좋아. 어때, 나와 함께 해볼 건 가?" 유진아는 순간적으로 결심했다. 지금은 이 남자와 손을 잡는 편이 좋겠 다고 말이다. 그것이 자신의 생명을 보호받을 수 있을 뿐더러, 그 딸을 발견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좋아요!" "좋아. 그밖에 뭔가 아는 것이 있나?" "자동차를 발견했어요." "차?" "아마 딸을 운반한 차일 거예요." 그녀는 숲속 길에서 발견한 차에 관한 것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좋은 단서가 되겠군." "하지만 다른 어떤 단서도 발견하진 못했어요." "그 차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대로 놓고 왔어요." "번호는 기억하고 있나?" "예." "네게 적어 줘." 진아는 시키는 대로 그에게 차량번호를 적어 주었다. "내일은 뭘 할 거지? 또 찾으러 갈 건가?" "그럴 생각이에요." "좋아. 점심 전에 이쪽으로 들르지. 나도 함께 가 봐야겠어." 고맙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동업자가 되었 으니까. "그러면, 오늘밤은 이만 돌아가지." "예. 그렇게 해주세요." "냉정하군. 우린 같은 편이잖아." 남자가 미미하게 웃으며 유진아에게 다가왔기 때문에 놀란 그녀가 황망 히 뒷걸음질쳤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빨리 그의 칼이 진아의 목덜미에 딱 대어졌다. "움직이지 마. 이것은 잘 드는 칼이니까." 남자가 진아의 입술에 키스를 했을 때, 그녀는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고 몸을 떨기만 했다. "또 오지." 남자가 나가려고 하다가 뒤돌아보았다. 그가 여전히 씨익 웃고 있었다. "내 이름은 오현석()이야. 기억해 둬." 현관 문이 닫히자, 그녀는 그 자리에 그대로 허물어지듯 주저앉아 버렸 다. 제 목 : 제4장 목요일 <어둠 속으로의 초대> -10- ** 제 4 장 목 요 일 ** < 어둠 속으로의 초대 > 멀리서 벨이 울리고 있었다. 자명종 시계일까? 그렇지 않으면 학교의 벨일까? 교회의 벨일까? '조금만 더 자게 해줘.' 이렇게 중얼거린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 때문에 문득 잠이 깨었다. 전화 가 울리고 있었다. 진아는 베갯맡의 시계를 보았다. 10시 반이었다. 자명 종 시계를 9시에 맞추어 두었지만, 잠결에 끄고 또 잠들어 버린 것 같았 다. 간신히 집어올린 수화기 속에서 진규의 음성이 튀어나왔다. "아, 누나!" 그녀는 길게 하품을 하면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직 잠이 깬 것이 아 니어서 시야가 몽롱하기만 했다. "오늘은 어떻게 하지?" 그녀는 주저했다. 칼잡이 오현석이 그녀와 함께 간다고 말하지 않았던 가. 그런 남자와 동생을 가능한 한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가 그 러한 세계에 빠지기 쉬운 성격인 아이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오현석 과 같은 남자를 동경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얼버무렸다. "오늘은 달리 조사할 것이 있어." "그러면 나는?"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 지금 어디야?" "친구 집이야." "여자 친구?" "뭐. 그래." "전화번호를 가르쳐 줘. 어쨌든 연락할 테니까." 진아의 집에 몰래 들어와 돈을 갖고 간 것이 그녀인가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런 일로 옥신각신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화를 끊자, 재 빨리 몸을 일으켜 세수를 했다. 아직도 몸이 나른하다. 나이 탓일까? 피 로가 아직 머물러 있는 느낌이었다. "이상하군." 미애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뭐가?" "너에게 이곳에 그냥 있으라고 말한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해."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동생이 여자 아파트에 있다고 하는데도 어떤 여자인지 물어 보지 않은 것은 이상해." "그럴까?" "게다가 어제는 함께 데리고 갔는데, 오늘은 안 된다는 것이 이상하다 고 생각 안 해?" "그러면 어떻다는 거지?" 진규는 여전히 태평스러웠고 여전히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의 이런 태도는 생각이 다른 데로 흐르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그 의 생각은 그녀의 볼륨 있는 몸을 핥고 있다는 뜻인 것이다. "그건 너를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거야." "어째서?" "믿지 않겠다는 게 아닐까?" "동생인데?" "관계없어. 어제 내가 돈을 가지고 온 것을 알고, 범인이 우리였다고 희미하게 느끼고 있는지도 몰라." "그러면 어떻게 하지?" "안 된다고 해도 따라가는 거야!" 미애가 그의 등을 탁 두드렸다. "하지만." "괜찮아. 그리고 잘 기억해 둬. 10억을 손에 넣으려고 생각하면 그 정 도의 고생쯤은 각오해야지." 그는 투덜투덜거리면서 나갈 준비를 했다. 될 대로 되라지. 그는 원래 부터 10억이니 뭐니 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미애가 아니면 마 땅히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에 그녀가 하자는 대로 따르고 있는 것뿐이었 다. 될 대로 되라지. 이런 말을 계속 되풀이하면서 그는 옷을 입었다. 샤워를 하고 있는 사이에 진아는 겨우 잠에서 깨어났다. 머리만 잠을 깨고 몸이 따라오지 않을 때는 어딘지 멍청한 느낌이 드는 법인데 샤워를 하고 나니 겨우 양쪽의 균형이 취해져 산뜻해졌다. 샤워를 마치고 목욕타올로 젖은 머리와 몸을 닦으면서 욕실을 나오다 가 그녀는 짧은 비명을 질렀다. "좋은 구경거리군." 오현석이 싱글거리면서 거기 서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목욕타올을 서 둘러 몸에 감았다." "뭐하고 있어요?" "약속대로 찾아온 거야." 오현석은 태연했다. "아, 현관은 열쇠가 잘 걸려져 있었어. 하지만 저 정도로 문단속했다고 생각하면 목숨이 몇 개 있어도 부족하지." "나가요!" "그러지 마. 우린 동료잖아!" 오현석이 또 다가왔기 때문에 진아는 뒷걸음질쳤다. "다가오지 말아요!" "뭐야. 어제는 키스해 주었잖아. 일하러 가기 전에 잠시 준비운동 쯤 어때?" "비켜요!" 그녀는 필사적으로 오현석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런 응시만으로 그의 접근을 막아 내기란 불가능했다. 이미 오현석의 손이 칼을 잡고 있었다. 정말 마술과도 같이 빠른 손동작이었다. "뺨의 상처 정도로는 끝나지 않아." 그녀는 벽에 등을 댔다. "더이상 가까이 오지 말아요" 그녀가 절망상태에 빠진 연약한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낮은 목소리로 말 했다. 그러나 오현석의 음성은 여전히 경쾌했다. "가까이 가면 어떻게 하지? 비명을 지를 건가?" "칼에 몸을 부딪쳐 죽을 거예요." 오현석은 잠시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입가에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 다. "농담하지 마." "농담인지 어떤지 해볼까요?" 진아는 온몸이 딱딱히 굳어져 있었지만 눈만은 죽일 듯이 오현석을 바 라보고 있었다. 오현석은 잠시 진아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윽고 문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좋아." 칼이 윗옷 아래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말이지 눈깜짝할 사이에 칼이 사라진 것이었다. "앞으로 마음이 바뀌길 바래. 좋아, 밖에 나가 있지. 10분 지나고 들어 오지." 오현석이 나가자, 유진아는 벽에 기대어 몇 번이나 크게 숨을 쉬었다.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전신에 땀이 솟았다. 딱 10분 후에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오현석이 말했다. "이번에는 예의바르게 왔지? 나가지." "밖에 날 감시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요?" "없어." "없어요?" 그럴 리가 없다. 장은식 형사가 다른 사람과 교대한다고 분명히 말했던 것이다. "이상하군요." "괜찮아, 확인했어. 마음이 바뀌었을 거야." "설마." "나는 두 시간 전에 와서 보고 있었어. 주위도 면밀히 조사했지. 여기 를 감시하는 녀석은 없어." 어떻게 된 것일까? 뭔가 다른 급한 사건이라도 있어서 불려간 것일까? 유진아는 경찰의 감시없이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자 안심은 되었지만, 거꾸로 이 오현석에게서 자신을 지켜 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니 불안한 기분도 들었다. 그녀는 아파트를 나오자 오현석의 뒤를 따라서 아파트 뒤쪽으로 돌아갔 다. 작고 낡은 승용차가 아파트 그늘에 세워져 있었다. "이러한 직업은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제일이니까." 오현석은 곧 차를 출발시키면서 말했다. "차는 고물이라도 운전은 모범적이야." 차가 교외로 나올 때까지 굳게 입을 다물고 한 마디도 없던 오현석이 한적한 길로 접어들자 문득 말했다. "당신, 회사에서 해고당했더군."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10억 원이 들어오면 회사 따위는 갈 일도 없겠지." "성급하군요." 그런데 잠시 후, 오현석이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며 내뱉는 것이었다. "미행당하고 있군." "예?" 진아가 뒤돌아보려고 하자 오현석이 소리질렀다. "돌아보지 마!" 그가 얼마 동안 운전을 계속하다가 갑자기 차의 속도를 떨어뜨리곤 좁 은 옆길로 차를 들이밀었다. 그는 잘 알고 있는 길인 것같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좁은 길을 교묘하 게 빠져 나갔다. 그러다가 그가 커브를 휙 돌며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 았다. "머리를 낮춰." 그는 이렇게 소리치곤 재빨리 차에서 내려 모습을 감추었다. 도대체 무 엇이 시작되는 걸까? 진아는 좌석에 엎드린 채 제정신이 아니었다. 차소 리가 가까이 오고 있었다. 미행자의 자동차인 듯싶었다. 커브를 돌아 온 곳에서 끽 하고 브레이크 소리가 났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급한 발소리 가 이어졌다. "나와!" 오현석의 소리가 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미행자의 다급한 목소리는 진 아를 놀라게 만들었다. "기다려 줘요! 저는." 저 목소리는. 진아는 당황해서 얼굴을 들었다. 차에서 끌려 나와 오현석에 의해 칼로 위협받고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동생 진규였다. "기다려요!" 그녀가 차에서 뛰어 나왔다. "건드리지 말아요! 제 동생이에요!" 오현석은 어이없는 얼굴을 진규에게 향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 동생이라구?" 진아는 진규에게 달려와 마구 화를 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 다. "아파트에 있으라고 했잖아!" 진규가 머리를 긁으며 자기가 타고 온 차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저 애가." 미애가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게 보였다. 진아로선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어쩐지 첫인상이 대단히 안 좋았다. 간교하게 생긴 눈매와 얄 팍한 입술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현석은 팔짱을 낀 채 싱글거리면서 진아와 유진규, 그리고 나미애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아는 아주 못마땅한 표정으로 동생을 노려보았다. 모 처럼 자신이 목숨을 걸고 진상을 캐려고 하고 있는데, 이런 여자에게 부 추김을 받아 끼어들다니. 진규는 거북한 듯이 눈을 아래로 뜨고 누나 쪽을 훔쳐보고 있었지만, 미애라는 여자는 전혀 당황하지도 않고 오히려 당당히 말하는 것이었다.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까 우리도 끼워 줘요. 원래 이 일은 저희가 해 야잖아요? 우리 책임이니까요." 진아는 오현석이 없다면 진규와 미애를 때려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 녀는 한눈에 이 두 사람이 단순히 책임 때문에 이렇게 달려온 것은 아니 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제야 뭔가 알 것 같군. 차로 내 부하를 치어서 죽인 것이 너희들이 지?" 오현석이 말했다. 그가 연신 진아와 진규를 쳐다보면서 웃고 있었다. "그렇군. 아무래도 네 누나가 사람을 치고 그것을 숨기려고 한다는 것 이 이상했지. 이제야 겨우 이해할 수 있군." 오현석은 그렇게 말하고 유진아 쪽을 향했다. "당신이 유괴된 딸을 찾고 있는 것은 돈 때문이 아니고, 동생 때문이었 군?" "그렇다면 안 되나요?" "아니, 그러는 편이 당신다워." 오현석이 유쾌한 듯이 말했다. "하지만 딸을 발견해도 내가 하는 대로 따르는 거야. 그렇게 하지 않으 면 그냥 놔 두지 않을 거야." 진아는 이제 포기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어서는 손쓸 도리가 없다는 생 각이 들었다. 오현석이 말하는 대로 따르는 수밖에는. 제 목 : 제4장 목요일 <어둠 속으로의 초대> -11- ** 두 대의 차가 좁은 샛길로 들어가자, 곧 어젯밤 발견했던 하얀 승용차 가 보였다. 오현석이 급히 내려서는 차안과 트렁크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 근처에 있겠군." 나미애가 10억 원의 거금을 금세라도 손에 쥘 수 있다는 듯이 아무도 모르게 벌써 눈을 반짝이고 있다. 진규가 누나의 눈치를 살피며 오현석에 게 말했다. "어젯밤에 여기저기 숲속을 뒤졌지만 아무것도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 다." "좋아, 같은 곳을 찾으면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 자구." 오현석이 이렇게 말을 하고는 주변을 세심히 살펴보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차는 틀림없이 유괴에 사용된 차야. 그렇게 되면 그 여자는 이 근 처에 있다는 거지." "벌써 살해당한 것은 아닐까요?" 미애가 묻자, 오현석이 차갑게 대꾸했다. "그만큼 바보가 아니야. 죽이더라도 돈을 받고 나서 해치우겠지. 살아 있다는 증거를 틀림없이 요구할 테니까." 오현석은 다른 세 사람을 재촉해서 나무 사이를 빠져나가 걷기 시작했 다. "가능한 한 넓게 퍼져. 뭔가 보이면 소리를 질러." 네 사람의 간격은 조금씩 벌어져서 이윽고 서로 나무에 가로막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진아는 한숨 돌리고 발길을 멈추어 주위를 둘러보았 다. 조용했다. "누나!" 발소리가 나고, 진규가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일이지? 뭔가 발견했어?" "아니야. 다만, 저." 진규가 뭔가 사과를 하려고 하자, 그녀가 눈치를 채고는 그가 말을 하 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여자와 손을 끊어. 내 방에서 돈을 훔친 것도 저 여자였지?"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저런 여자는 위험한 것은 모두 너에게 시키고, 자기는 이익 만 보려고 하는 거야. 이번에도 만약 몸값이 들어오면 너 따위는 상대하 지도 않을거야." "그럴까." "이제 정신을 차려. 저런 여자와 사귀는 것은 너 자신의 파멸이야." 그런데 그때였다. 한 목소리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잘도 말하는군요." 당사자인 미애가 언제 왔는지 나무에 기대어 서서는 두 사람을 바라보 고 있었다. "상당히 훌륭한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 "듣고 있었다니 알겠군. 동생에게 손을 내밀지 마." "쓸데없는 소리 말아요. 우린 사랑하는 사이예요!" "사랑이라구?" 두 사람의 시선이 불꽃이 튀듯이 서로 부딪쳤다. 유진아의 눈매도 매서 웠지만 나미애 역시 기세가 등등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진규가 소리치는 것이다. "잠깐, 저기 좀 봐!" 진규는 그들이 서 있는 아래쪽으로 나무숲 사이의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기 집이 한 채 있어!" 정말 나무숲 사이로 집이 보이고 있었다. 진아는 숲을 헤치고 몇 걸음 달려나가 우뚝 멈추어 섰다. 언덕 밑으로 갑자기 숲이 끊어지고 조금 넓 게 움푹 패인 곳이 있는데 그곳에 오래된 목조건물이 서 있었던 것이다. 별장식 구조로 2층짜리였는데 겉으로는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야, 틀림없이." 진아가 중얼거렸다. 사람을 숨겨 두기에 이곳보다 더 좋은 장소가 없을 듯싶었다. 오현석이 곧 달려왔다. 그가 별장을 올려다보곤 싱긋 웃었다. "여기 로군." 오현석은 두려워하는 기색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훌쩍 언덕을 뛰어내려서는 뚜벅뚜벅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열쇠가 잠겨져 있지 않군." 현관문은 조용하게 열렸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기름칠 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살고 있다는 것일까. 안은 텅 비 어서 조용했다. "누구 안에 없소?" 오현석이 안쪽에다 소리를 질렀다. "누가 있는 거야?" 목소리는 텅 빈 어두운 공간으로 울려퍼지며 메아리를 만들었다. "대답이 없어요." 진아가 말하자 미애가 얼른 끼어들었다. "대답할 수 없는지도 몰라." 오현석은 안쪽을 한 바퀴 둘러보곤 큰 결심이라도 한 듯이 내뱉었다. "좋아, 안을 이잡듯이 뒤지는 거야!" 얼마쯤 지난 후 오현석이 돌아와서는, 허리에 손을 얹고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젠장!" 결국 이 별장 내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들 모두는 그 집의 밖에 있는 조그마한 마당에 둘러서서 허탈한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커서 누구 한 사람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틀림없이 이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미애가 포기할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것은 오현석도 마 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는 계속 눈살을 찌푸리며 안팎을 살피다가 화가 난 듯이 말을 뱉었다. "좋아! 다시 한번 뒤져 보자구!" 그런데 오현석이 그렇게 말을 했을 때였다. "쉿!" 진아가 그의 말을 황급히 제지했다. "누군가 와요!" 숲속 어딘가에서 사람 목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고 있었다. "빨리 숲속으로 숨어." 오현석이 이렇게 낮게 내뱉고는 목소리가 난 쪽과는 반대 숲속으로 서 둘러 달렸다. 그의 뒤를 따라 세 사람이 각각 몸을 숨겼다. 도대체 누구일까? 진아는 살짝 풀을 헤치고 그들을 보았다. 얼핏 보아 도 보통사람들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는 양복차림의 건장한 사내들이 그 집으로 들어갔다. 모두 족히 5, 6명은 되었다. 도대체 누구일까? 진아는 숲 사이로 낡은 별장을 살짝 들여다보면서 고 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때였다. "이것 재미있군." 바로 옆에서 오현석의 목소리가 나서 진아는 깜짝 놀랐다. 그가 그렇게 바로 옆에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저 사람들을 알고 있나요?" "권기준과 사업적으로 경쟁 상대에 있는 사람들이지." "그런데 어째서 이런 곳에 온 걸까요?" "글쎄, 그것은 모르겠군." 오현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동안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여기에 있으면 발견될지도 몰라요." "그렇군. 어쩔 수 없지. 이대로 철수하기로 하지." 오현석은 그 말과 함께 재빨리 모습을 감추었다. 실제로 이상할 정도로 소리를 내지 않아 그녀에게 그의 모습은 마치 뱀과도 같다는 인상을 주었 다. 오현석은 유진아를 일단 그녀의 아파트에 내려 주었다. "나중에 전화하지. 집에 있어야 해." 이 말을 남기고 오현석은 간단히 눈인사만 하고는 재빨리 사라졌다. 오 는 길에도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권기준과 경쟁상대에 있는 자들 이 사건 현장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암시하는 비밀의 의미에 대해 생각을 계속하는 것이리라고 진아는 어렴풋이나마 짐작을 해보았지 만 그녀 역시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그는 그렇게 급하게 어디로 가는 것일까. 유진아는 한숨을 쉬었다. 마 치 매일매일이 별세계 사이를 왕복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주위를 조심 스레 둘러보았지만, 장은식 형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다른 사람과 교대한다고 말했지만 그밖에도 형사 같은 사람은 없었다. 2층까지 상당히 먼 느낌이었다. 다리가 무거웠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조금도 진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권기준의 딸이 유괴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어디에 있는 걸까? 그리고 살아 있는 걸까? 오현석의 페이스에 정신없이 끌려가고 있는 자신도 두려웠다. 모르는 사이에 자신도 유괴의 진짜 공범자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못 두렵기 만 했다. 방에 들어가서 휙 옆으로 누웠다. 무력감이랄까, 어쩔 수 없는 공허함이 전신에 휘감아왔다. 애당초 동생의 사고를 숨기려고 결심했을 때부터 끝없는 수렁 속으로 발을 넣은 것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뒤늦은 후회로 발등을 찧고 싶은 기 분이었으나 자신이 위기와 모험의 반환점을 훨씬 멀리 지나쳐 와 버렸음 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전화가 울렸다. "겨우 있군." 굵은 남자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때렸다. "누구시죠?" "나 권기준이오." 진아는 숨을 들이마셨다. "저, 무슨 일이죠?" "어제는 실례했소." "아니에요." "실은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 내 집으로 와 주지 않겠소?" "댁으로 말이에요?" 진아는 주저했다. 오현석은 알고 있는 것일까. 더구나 권기준의 집으로 이 한밤에 함부로 들어간다는 것은 안전을 보장받지 못할 더 큰 위험의 수렁 속으로 가는 것과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주저하고 있는 그녀에게 권기준이 거의 사정하듯이 말했다. "거절하지 말아 주시오. 이미 차가 그쪽으로 가고 있소. 30분 안에 도 착할 거요. 그러면 나중에 만나지."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수화기를 놓는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권기준의 말투는 지극히 평범해서, 흠잡을 곳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 일까? 만약 그가 자기 딸이 유괴된 것을 알아차렸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앞으로의 일을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피할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 유진아는 반쯤 자포자기하며 창밖을 바라보고 한 숨을 쉬었다. 차는 20분 정도 지나서 도착했다. 어제 오현석이 운전하고 있던 것과 같은 차였지만, 물론 운전은 다른 사내였다. 차는 30분 정도 달려서 강남의 어떤 한적한 주택가로 들어갔다. 주변의 집들로 보아 꽤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 같았다. 하기야 이 동네는 서 울에서도 손꼽히는 부유층들이 사는 곳이니까. "다 왔습니다." 그때까지 말을 하지 않았던 운전사가 갑자기 내뱉었기 때문에 유진아는 깜짝 놀랐다. 차는 서서히 속도를 떨어뜨리곤 빙글 커브를 틀어 문안으로 들어갔다. 훌륭한 저택이지만 그렇게 넓지는 않았다. 비교적 낭만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서양식 건물이었다. 차가 멈추고, 운전사가 바로 내려 뒷문을 열 었을 때 현관문이 열리고 권기준이 나왔다. "잘 와 주었소." 그의 말투는 정중하면서도 조용했다. "들어오지." 안내된 곳은 정원을 마주한 고전적 취미의 거실 같은 방이었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그들은 서로의 안색을 조용히 탐색했다. 권기준의 얼굴에 뭔 가 그늘이 있다고 생각되는 건 그녀의 일방적인 편견이었을까. 그가 오랫 동안의 침묵을 깨고 나지막이 말할 때, 뜻밖에도 그의 시선은 그녀를 외 면하고 있었다. "내 딸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연락이 들어왔소." 그가 천천히 유진아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곤 짧고도 단호하게 물었다. "그애는 어디에 있지?" 진아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몰라요." "대답하지 않을 셈인가?" "대답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요. 모르기 때문이에요." 권기준이 일어서더니 천천히 유진아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뺐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딸이야. 돈은 얼마든지 주지." "내가 유괴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라고 말할 셈인가?" 진아는 공포의 빛을 조금이라도 보이지 않으려고 등을 똑바로 폈다. 그 때, 그녀는 더 정신을 차리고 권기준이 어떻게 그녀가 '딸'에 관련되었다 는 사실을 알았는지를 물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겁에 질려 있어서 그런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유괴 같은 그런 악랄한 짓은 하지 않아요." "하지만." "몸값의 청구라도 있었나요?" "아니, 아직이야." "그러면 어째서 유괴라고 생각하는 거죠?" 권기준이 소파로 돌아갔다. "당신은 머리가 좋군. 말을 돌려서 하는 버릇이 있는 건 아주 나쁘지만 말이야." 그는 야비한 웃음을 머금으며 그녀를 노려보다가 갑자기 빠른 어조로 말했다. "알고 있는 것이 있으면 빨리 말하는 편이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 야." 유진아는 그의 차가운 말투에 등골이 오싹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가정 부가 커피 쟁반을 가지고 들어와서는 그에게 말했다. "회장님, 전화입니다." "나에게?" "예, 복도의 전화입니다." "알았어. 잠깐 실례하오." 권기준이 그녀에게 짧게 눈인사를 하곤 밖으로 나갔다.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 놓은 가정부도 따라 나가자, 유진아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하곤 있었지만, 어떻게 간신히 정원까 지는 나갈 수 있다고 해도 그곳에서 어디로 가면 좋을지는 의문이었다. 괜히 우왕좌왕하다가는 어차피 곧 발견되어 더 큰 곤경에 빠지게 될 것이 다. 유진아는 문득 찻잔으로 눈을 돌렸다. 황급히 자신의 컵과 권기준의 컵 을 바꾸었을 때, 문이 열리고 그가 돌아왔다. "생각은 정해졌소?" 그가 컵을 들었다. 유진아도 컵을 들고 입술을 적셨다. "모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즉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인정하는 거 지." "저는." 말을 하려다가 진아는 갑자기 현기증에 휩싸였다. 순식간에 방이 흔들 렸다. "컵을 바꾸리라는 것 정도를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권기준의 목소리가 훨씬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유진아는 미끄러 지듯이 바닥으로 무너졌다. 천길 낭떠러지로 한없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기분이었고, 그 다음은 기억이 없었다. 열에 들떠 있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머리가 멍하니 마비되고, 온몸 이 나른한 감각에 의해 한정없이 떠다니고 있다. 4월 12일 12회가 연재됩니다. 번호:13/22 등록일시:95/04/12 18:53 길이:150줄 제 목 : 제4장 목요일 <어둠 속으로의 초대> -12- ** '병원일까?' 병원이라는 인상을 받았던 것은 우선 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 이었다. 백열등의 하얀 빛이 눈을 찌르는 것 같았다. 천천히 머리를 돌려 보니 병원은 아니었다. 하얀 작은 방이었다. 마치 실험실인 것같이 평면 적인 벽, 거의 사람이 산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살풍경한 방이었다. 진아는 조금 몸을 움직여 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렇다. 여기는 권기준의 집이다. 아니, 여기가 여지껏 그 집인 것은 잘 모르지만 어쨌든 권기준의 집에서 의식을 잃은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방으로 옮겨진 것이리라. 머리가 무거운 것은 커피에 넣어져 있던 약 때문임에 틀림없다. 어느 정도 잠들었을까? 기분은 최악이었지만, 일단은 침대에 눕혀져 있 었고 손발도 묶여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갇혀 버린 것은 분명한 것 같 다. 네모난 방으로 문은 하나뿐이었다. 침대에서 내려서자 조금 현기증이 났지만 걸을 수는 있었다. 문까지 가서 손잡이를 돌려 보았으나 역시 열 쇠가 채워져 있었다. 진아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이런 곳에 넣고 어떻게 할 셈일까?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침대에 앉아 머리를 식히려고 했다. 여기에는 오현석도 올 것이다. 아니,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올 가능성은 충분히 있 다. 권기준의 이야기에서 짐작컨데, 오현석이 한 일을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오현석은 진아가 여기에 갇힌 것을 알고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권기준에게 진실을 털어놓아 도 좋지만 그것을 과연 믿어 줄 것인가? 게다가 오현석에 관한 것을 말해 야 할 것인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발 소리가 났다. 문밖에서 이쪽으로 다가 오는 것 같았다. 한 사람이 아니었다. 발 소리가 크게 반향되는 것으로 보아 아마 콘크리트 통로일 것 같았다. 발 소리가 문앞에서 멈추었다. 문이 열리고, 권기준이 서 있었고 그 뒤 에 오현석의 모습도 보였다. 유진아가 놀란 것은 권기준보다 오현석이 더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눈을 떴나?" 권기준이 여전히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여기는 어디죠?" "내 집에 있는 지하실이지. 아무리 소리질러도 밖에는 들리지 않아." 권기준이 천천히 걸어왔다. 아주 알아보기 힘든 희미한 미소가 그의 입 가에 머물고 있어, 그녀는 무엇보다 그 표정이 두려웠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진아가 그의 접근을 피하려 뒷걸음질을 치며 선언하듯이 말했다. 그러 나 권기준은 그녀의 그런 선언에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어. 뭔가 알고 있을 거야." 권기준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목소리엔 살인적인 위협이 있 었다. 그녀는 또 뒷걸음질쳤다. "오현석의 칼은 외과의사의 메스와 같은 것이지. 귀 하나 정도 자르는 것은 아주 쉽지."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이봐, 미스터 오! 안 그런가?" 권기준이 턱으로 그녀를 가리키자, 오현석이 칼을 들고 다가왔다. 여전 히 표정이 없었다. "싫어요! 안 돼요!" 오현석의 동작은 재빨랐다. 그녀가 피하려고 몸을 움직이기 전에 벌써 오현석의 손이 진아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침대에 엎드 려져 그에 의해 꽉 눌려졌다. 은빛의 칼날이 눈앞에서 빛나고 있어 그녀 는 거의 숨을 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떻게 할 건가? 이야기할 건가?" 권기준이 말했으나 유진아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고집이 센 여자군, 정말." 권기준이 이렇게 중얼거리자, 오현석이 권기준에게 물었다. 그의 무게 와 그의 음성이 동시에 그녀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회장님, 어떻게 할까요?" 권기준은 조용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다가 아주 느릿느릿 말을 이었 다. "어쩔 수 없지, 따끔한 맛을 보지 않으면 이야기하지 않을 것 같군." 진아의 이마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유괴범은 내가 아니라 오히려 당신 의 부하인 이 사람 오현석이라구요. 그녀는 이렇게 한 번만 소리치기만 하면 자신의 목숨이 보장되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오현석에 관 한 것을 이야기하면 동생은 죽을 것이다. 이 남자라면 틀림없이 해치울 것이다. 그녀는 차가운 칼날이 마치 타는 듯이 뜨겁게 뺨에 닿는 것을 느 끼고 소리가 되지 않는 비명을 질렀다. 그때 권기준의 목소리가 또 들려 왔다. "어서 귀를 잘라." 진아는 거의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기다려요, 말할게요. 말할 테니까 기다려요." "이야기할 거야? 이봐, 놓아 줘." 자유롭게 되고서도 몸이 여전히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내가. 친 남자가 협박장을 가지고 있었어요. 당신의 명함과 함 께." "내용은?" 권기준이 무표정하게 물었다. 진아는 외우고 있던 협박장의 내용을 이 야기하곤, 권기준을 돌아보며 울부짖듯이 말했다. "그것뿐이에요. 나는 단지." "거짓은 없겠지?" 그녀는 힘껏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문가에서 어떤 사내의 음성이 들려 왔다. "회장님, 실례하겠습니다." "뭐지?" 권기준이 힐끗 뒤를 돌아보자, 그 사내가 또 말했다. "잠깐만." 권기준이 방밖으로 나가자, 오현석이 그녀에게 살짝 얼굴을 가까이했 다. "나쁘게 생각하지 마. 잘되면 놓아 줄 테니까." 진아는 조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봐, 미스터 오! 급한 일이다!" 권기준이 급히 방으로 뛰어들어와 오현석에게 말했다. "나는 가야겠다. 자네는 이 여자를 잘 감시해." "예." 권기준이 또 한 사람의 남자와 함께 나가고, 발 소리가 멀어지자 오현 석이 숨을 내쉬었다. "당신의 귀를 잘라도 나는 아무 재미가 없어." "정말로 자를 생각이었나요?" "권기준이 한번 더 명령을 하면 어쩔 수 없었겠지." 오현석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는 유진아가 이 사건에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권기준에게 털어놓지 않은 사실에 대해 고맙다는 생각조차 갖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속삭이듯이 그녀에게 말했다. "권기준에게 말해서 당신을 놓아 주고 미행하는 편이 빠른 길이라고 납 득시키겠어. 그리고 당신을 풀어 주는 거야. 당연히 미행은 내가 하지." "잘 될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오현석이 뒤돌아보았다. 발소리가 가까이 오고 있었다. "또 온 것 같군. 심하게 비명을 질러." "예?" "조금은 상처를 내둬야지." 눈에 보이지도 않게 빠르게 칼이 지나갔다. 그 다음 순간, 블라우스를 입은 가슴이 일직선으로 가로질러 찢기고, 예리한 아픔이 가슴을 찌르며 휙 지나갔다. "악!" 그녀의 짧은 비명과 함께 블라우스에 피가 배어 나왔다. "걱정하지 마, 심하게 보이지만 아주 작은 상처니까. 괴로운 듯이 침대 로 쓰러져." 유진아는 침대로 굴러서 억지로 신음을 짜냈다. 권기준이 얼굴을 내밀 었다. "무슨 일이지?" "건방지게 말을 해서요." 오현석은 칼을 주머니에 넣곤 권기준에게 말했다. "잠깐 의논할 일이 있습니다." 오현석이 권기준을 데리고 나가자, 진아는 가만히 상처난 가슴을 누르 곤 흠칫거리며 손을 떼며 보았다. 젖가슴 아래로 선을 그린 듯이 상처가 나 있었는데 분명히 오현석이 말한 대로 큰 상처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 픔도 미미한 작은 상처였다. 무서운 솜씨였다. "알겠어, 그럼 자네 말대로 하지." 권기준이 이렇게 말을 하고 오현석과 함께 멀어져 가는 소리가 들려왔 다. 문은 닫혀져 있지만 열쇠는 채워져 있지 않았다. 도망가라는 뜻일까? 20분 정도, 진아는 잠자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 다가 서서히 일어나서는 문 쪽으로 발소리를 죽이고 걸어가서 문을 열었 다. 똑바로 복도가 나 있고 막다른 곳에 계단이 보였다. 그녀는 마침내 결 심을 하고 걷기 시작했다. 계단은 2층 정도의 높이였다. 거기를 올라가자 또 복도가 있고 그 앞에 문이 있었다. 무거운 나무로 된 문을 천천히 밀 어서 열자 눈앞은 깊은 숲속이었다. 암흑이 내려앉은 정원이었던 것이다. 나무 사이를 통해서 권기준 저택의 불이 보였다. 뒤뜰에 지하실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유진아는 나무를 헤치며 어둠 사이로 걸어가 담에 도착하자, 이번엔 담 을 따라 걸어갔다. 그렇게 한참 걸어가자 겨우 뒷문 같은 문이 나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4월 15일 13회가 연재됩니다. 번호:14/22 등록일시:95/04/15 13:21 길이:175줄 제 목 : 제4장 목요일 <어둠 속으로의 초대> -13- ** 아직도 어둠 속이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분간할 수가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막 권기준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이었 다. 그녀는 다소나마 안도가 되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이었다. 갑자기 플래시의 불빛이 맹렬하게 그녀를 휘감아 버렸다. 급히 눈을 돌렸으나 불빛 때문에 눈이 부셔서 상대가 누 구인지 알아볼 수도 없었고, 심지어는 주변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발소리가 재빨리 그녀를 쫓아온 것은 물론이었다. 진아의 발은 비교적 빠른 편이었지만 어쨌든 잠시 갇혀 있었고 가슴에 상처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뛸 수가 없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았다. 대단한 힘이었다. 진아는 그의 완 력에 의해 담으로 밀어붙여졌다. 플래시의 빛이 정면으로 비춰져서 상대 의 모습은 여전히 전혀 알 수 없었다. "누구지, 당신은?" 진아는 깜짝 놀랐다. 굵은 목소리이기는 하지만 상대가 여자였던 것이 다. "나는 도망쳤어요. 저기에서." 그녀는 손가락으로 어둠 속 저편을 가리키며 토막토막 말했다. 플래시 의 빛이 이번에는 진아의 가슴 근처를 비추었다. "어떻게 된 거죠?" "예? 저. 이것은 칼로." 진아는 당황해서 가슴을 양손으로 덮었다. "괜찮아요?" "예, 작은 상처예요." 그 상처를 보고 나서야 상대는 경계심을 푼 것 같았다. "그러면 빨리 도망쳐야겠군, 따라와요." 그 여자가 진아의 손을 잡고 앞서 걸으며 재촉했다. 한참 걸어나와 길 가로 나왔을 때, 가로등의 불빛이 겨우 그 여자를 비추었다. 키가 무척 컸다. 키가 큰 것뿐만 아니고 체격이 장대해서 여자다운 곡선이라곤 거의 볼 수 없는 느낌이 진아를 놀라게 했다. 체중도 상당히 될 것 같지만, 전 체적인 느낌은 뚱뚱한 것이 아니라 늠름한 인상이었다. 가죽 점퍼, 청바지, 게다가 머리는 짧게 자르고 있어서 말을 하지 않으 면 여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여자는 유진아의 팔을 힘차게 잡아 당기면서 걸었다. 백 미터 정도 앞에 큰 오토바이가 놓여져 있었다. "뒤에 타요." "하지만." "빨리! 권기준의 부하에게 잡혀도 좋아요?" 아마도 권기준 쪽에서는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걸 설명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도대체 이 여자는 누구일까? 그러나 진아는 그런 생각을 멈추고, 여기 에서는 우선 이 여자가 말하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더 꽉 잡아요! 떨어지면 목뼈가 부러져 단번에 끝장이니까!" 여자가 진아를 향해 소리쳤을 때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가 밤의 적막을 깨뜨렸다. 몸을 딱 붙이고 있었기 때문에 여자의 목소리의 울림이 곧 전 달되어 왔다. 오토바이가 달리기 시작했다. 양쪽 상황을 보고 있을 틈도 없이 오토바 이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여자의 오토바이 운전 솜씨는 전혀 위험스럽지 않게 안정되어 있었다. 3,40분 정도 달리고 나서, 갑자기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가 낮아졌다. "자, 내려요." 여자의 목소리에 진아가 눈을 뜨자 상당히 지저분한 아파트가 늘어선 좁은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불이 켜진 창도 있지만, 너무나 조용해서 흡 사 폐허를 연상시킬 만큼 황량했다. "따라와요." 여자가 앞장서서 걸었다. 거의 쓰러질 듯한 오래된 아파트가 몇 채인가 서로 떠받치면서 서 있는 사이를 지나, 마침내 그녀는 아파트 뒤편에 있 는 한 허름한 판잣집 안으로 들어섰다. "열쇠 따위는 채우지 않아요. 도둑이 들어오더라도 아무것도 가지고 갈 게 없으니까. 자, 올라와요." 갓 없는 전구에 불이 켜지자, 색이 변해서 다 갈라진 바닥에 희미한 불 빛이 떨어졌다. 아주 조그만 방이었다. "우선 상처를 치료해야겠어요." 여자는 진아의 대답 같은 것은 기다리지도 않고 안쪽으로 가서 뭔가 바 스락거리다가, 이윽고 세숫대야에 물을 넣어 가지고 돌아왔다. "이것으로 상처를 씻고 약을 발라요. 상처에 바를 약은 있어요. 자주 다치니까." "고마워요." 여자가 약상자를 가지고 왔고, 그 다음엔 티셔츠를 하나 꺼내 진아에게 던지면서 명랑하게 말했다. "그 블라우스는 입을 수 없겠어요. 내 것을 빌려 줄게요." 진아는 조금 놀랐다. 그녀가 이렇게 신경을 써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 았던 것이다. "아가씨는 몇 살이죠?" 진아가 가슴 부근에 약을 바르면서 물었다. "스물한 살이에요. 덩치가 커서 아줌마로 보이지만." 이상한 여자다.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진아는 쏟아지는 의문이 너무 많았으나 어쨌든 우선 상처부터 치료하기로 했다. 아무리 오현석이 뛰어 난 기술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칼로 베였기 때문에 아팠다. 윗옷을 벗고 가슴 아래의 상처를 살짝 물로 씻었다. 조금 뜨끔뜨끔 아 팠지만 참을 만했다. 그렇게 블라우스를 벗고 약을 바르고 있는데, 갑자 기 문이 탁 열리고 어떤 남자가 들어왔다. "어머나!" 진아는 깜짝 놀라 가슴을 가리고 뛰어올랐다. "아니, 실례." 얼굴이 빨간 30세 정도의 남자가 그녀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여자가 그를 반갑게 맞이하며 입을 열었다. "뭐야, 아저씨잖아?" "승미야. 오빠에 관해 뭔가 알아냈을까 해서." "전혀 없었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또 어딘가를 싸돌아 다니고 있을 테죠." "하지만 벌써 나흘째잖아." "어떻게든 찾을 거예요."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겠니. 그러면 또 오지." 그 남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 진아를 보고 있다가 돌아 가면서도 문을 닫을 때까지 줄곧 야릇한 시선으로 돌아보고 있었다.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승미라고 불린 그 여자가 싱긋 웃었다. "보는 것만이라면 괜찮잖아요? 나 따위는 가슴을 내놓아도 아무도 보지 않던데." 진아는 브래지어를 하고 그 위에 티셔츠를 입었다. 승미의 덩치에나 맞 는 셔츠라 헐렁헐렁했다. "나는 유진아예요. 아가씨는?" "하승미()예요. 일단은 여자 이름이죠." 잠시 후, 두 사람은 하승미가 사 온 컵라면을 먹고 겨우 숨을 돌렸다. 컵라면의 국물까지 죄다 들이마시고 나서 그 여자가 물었다. "그런데 언니, 어째서 그런 꼴을 당했죠?" "여러가지 사정이 있어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좋을지 몰랐다. 특히 이 여자가 어떤 입장에 있는 사람인지 모르니까 더욱 그랬다. "권기준의 집안에 갇혀 있었나요?" "지하실에." "그곳에 누군가 없었어요?" "누구?" "젊은 남자가 없었어요?" 어떤 젊은 남자를 말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하승미와 닮 은 남자를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진아는 우두커니 그 여자를 보며 머리 를 가로저었다. "오빠가 벌써 나흘째나 돌아오지 않아 걱정이에요." "하지만 어째서 권기준의 집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곳에 오현석이라는 남자가 있어요." 진아가 깜짝 놀라자 승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고 있어요?" "이 상처는 바로 그가 낸 거예요." "그래요?" 하승미가 눈빛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정말 한심한 녀석이군." "오현석과 오빠가 어떤 관계인지." "오빠는 자주 오현석에게 부탁을 받고 일을 했어요." 하승미는 얼굴을 찌푸렸다. "변변한 일이 못 되니까 그만두라고 말했는데, 하지만 오빠는 오현석을 동경하고 있었어요." 마치 진규 같은 남자겠군. 유진아는 순간적으로 동생 진규의 어리숙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서 이번에도 오빠가 오현석의 일을 하고 있다가 없어진 건가요?" "그래요. 나에게도 도와 달라며 불러내고는." 문득 유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오현석의 부하? 그가 사라진 지 4일 째? 어쩌면. "정확히 언제 오빠가 없어졌지요?" "일요일에 나가서 월요일에는 돌아올 예정이었는데. 그랬는데 일요 일 밤에 전화가 왔었어요, 좀 도와 달라고. 부랴부랴 가 봤지만, 아 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어요. 그것으로 오빠는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 그래, 틀림없구나. 하승미의 오빠라는 사람은 동생 진규가 친 남자임에 틀림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유진아는 말할 수 없었다. 오빠의 시체를 자 신이 저수지로 던져 버렸다고는. "걱정이겠군요." 그녀는 겨우 이렇게만 말해 주었을 뿐이다. "뭐, 원래 정상적인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오빠는 줄 곧 제대로 된 일은 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내게 있어 오빠는 오빠니까." 그녀는 주머니 속에서 꼬깃꼬깃해진 담뱃갑을 꺼내 꽁초 하나를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희부연 담배 연기가 불빛을 타고 넘실넘실 춤을 추 었다. "그곳에서 오현석을 기다렸다가 잡을까 생각하고 밖을 어슬렁거리고 있 었던 거예요." "무리야! 죽일 거예요." 진아가 서둘러 말을 가로막았다. "그 남자를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을 거예요." "그럴까요?" 하승미는 싱긋 웃으며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아무렇게나 비벼껐다. 그러 고는 뒤로 벌렁 드러누우며 지나는 말투로 진아에게 말을 하였다. "권기준의 집안 약도를 그려 줘요. 한번 몰래 들어가 볼까 해요." 진아는 잠들 수 없었다. 옆에서 승미가 거친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 다. 문에 열쇠도 채우지 않았는데 그녀는 참으로 태평이었다. 얼핏 보기엔 거칠고 무서웠지만, 하승미는 참으로 마음이 착한 여자 같 았다. 그런만큼 진아는 괴로웠다. 승미가 진심으로 권기준 집으로 들어가 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살해당할지도 모른다. 그렇게는 할 수 없다. 게다가 승미의 오빠가 진규가 친 남자라면 권기준의 딸을 찾아낼 수 있 는 실마리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잠시 이 여자와 행동을 같이해 보자. 유 진아가 그렇게 결심하고 있을 때, 금요일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금, 토, 일. 남겨진 시간은 짧았다. 단지 삼 일뿐. 4월 19일 14회가 연재됩니다. 번호:15/22 등록일시:95/04/19 18:43 길이:227줄 제 목 : 제5장 금요일 <검은 빌딩의 그림자 > -14- ** 제 5 장 금 요 일 ** < 검은 빌딩의 그림자 > 잠에서 깨어났어도 잠시 동안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쓰러질 듯한 낡은 집. 아, 그렇지, 여기는 하승미의 집이지. 그녀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월요일이라는 협박장의 시간제한까지는 이제 사흘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렇게 알고는 있어도 역시 긴장한 뒤의 피로가 쌓인 것일까, 그녀는 몸 을 일으키는데 상당히 힘이 들었다. "일어났어요?" 현관문이 열리고 하승미가 들어왔다. "지금 몇 시지?" "11시 정도일 거예요." 하승미가 들고 온 봉지를 내려 놓으며 밝게 웃었다. "우유와 빵을 사왔어요, 아침식사 하려고." 그녀는 지저분한 바닥에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고는 빵 하나를 유진아 에게 건네 주었다. "오늘은 어떻게 할 거예요?" "나보다 승미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오현석이라는 녀석과 어떻게든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 남자는 위험해." 진아가 우유를 마시고 나서 단언하듯 말을 뱉었다. 찬 우유가 뱃속을 축축이 적셔 주는 것 같았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오빠가 걱정이 되어서." 아무리 삐뚤어져도 형제는 형제인 것이다. 아무리 뜯어봐도 악인의 기 질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으나 하승미가 정상적으로 태어나지는 않아 보 였다. 진아는 가슴이 아팠다. 승미의 오빠를 동생이 차로 죽이고, 진아가 그 시체를 버린 것이다. 그런 사실을 승미가 알면 어떻게 나올까. 그러면서 도 진아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을 했던 것이다. "승미, 오빠를 찾는데 도와 주고 싶어." "언니가?" 승미는 눈이 동그래져서, 정색을 하며 말했다. "어째서죠? 일부러 위험한 일에 끼어들지 않아도 될 텐데." "도움을 받았고. 게다가 내가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해." 물론 찾아도 헛고생이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승미에게 협조하겠다 고 말하는 것은 권기준의 딸을 찾아내는 실마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진 아는 결국 또 승미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니 괴로웠다. "하지만 오빠를 찾으려고 해도, 우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오현석과 권기준이 말하는 것을 들었어. 권기준의 딸이 행방불명된 것 같았어. 상당히 떠들썩했어." "권기준의 딸이?" "응. 내가 뭔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이런 꼴을 당한 거 야." 그녀는 헐렁헐렁한 셔츠 위로 손을 가져가며 가슴 근처를 가리켰다. "권기준은 자기 딸이 유괴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어." "유괴?" "내가 알기로는 오현석이 거기 깊이 연관돼 있어. 물론 이런 사실을 권 기준은 모르고 있고." "오현석이라면, 우리 오빠도 그와 함께 행동했을 텐데." "그래. 어쩌면 오빠는 그것에 관련되어 있는 게 아닐까?" "오빠가 유괴?" 하승미는 어이없다는 듯이 크게 웃어 버렸다. "우리 오빠, 그런 큰일은 못해요." "하지만 거들 수는 있잖아?" "하지만 오현석은 권기준의 부하잖아요. 보스의 딸을 왜 유괴할까요?" "그들은 원래 그런 사람들이니까 능히 할 수 있어. 오빠가 승미를 불러 낸 장소는 어디지?" "광주() 쪽이에요." 틀림없었다. 한 가지 의문은 하승미가 그날 밤 언제 그 장소에 갔었느 냐는 것이었다. 진규와 진아가 상당히 오랫동안 그 현장에 머물러 있었는 데 왜 만나지 못했던 것일까. 혹시 사건현장과 그들 남매가 만나기로 한 장소는 얼마간의 거리가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이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좋아. 우선 거기부터 가 보자구. 하지만 먼저 내 아파트까지 데려다 주겠어? 옷부터 갈아입어야 하겠어." 하승미는 아무런 이의도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좋아요, 출발해요." 진아는 아파트 조금 앞에서 승미의 오토바이에서 내려 혼자서 뒷문 쪽 을 통해 아파트로 들어갔다. 계단을 오르면서 바깥을 살펴보았지만, 장은 식 형사나 다른 형사의 모습은 없었다. 이제 이런 데 쫓아다니는 것은 그만둔 것일까? 진아는 한편으로는 안심 되는 듯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은 걱정스러운 듯한 묘한 기분이 었다. 그녀가 문을 열었을 때, 오현석이 훌쩍 뛰어 나왔다. 예상하지는 않았지만 진아는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기다리고 있었어. 정말로 도망쳤나 하고 섬뜩했지. 어떻게 된 거지?"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까 나가 있어요." "그 엄청나게 큰 티셔츠는 뭐야?" "비싼 블라우스를 누군가가 찢었으니까요." 오현석이 소리없이 웃기만 했다. "당신은 정말 배짱이 좋아." 오현석이 나가자, 진아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청바지 차림이 되어 서 신발도 스포츠용으로 신었다. 그리고 그녀는 만일을 위해 돈을 얼마 꺼내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진아는 오현석이 다시 들어오자 승미에 관한 것을 설명했다. 이야기하 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은 오현석에게 충실하게 보여 야 했다. "하승미의 오빠인 하승준()이라는 사람이었죠? 당신이 유괴를 맡 긴 것은." "그래. 그러면 녀석이 자신을 도울 사람이 있다는 것이 여동생이었나?"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에 오빠가 죽은 거예요. 그러면 나는 갈께요. 늦어지면 승미가 이상하게 생각하니까요." "곧 연락해." "예, 알겠어요." 진아는 문 앞에서 오현석과 헤어지곤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미안해." 진아가 뛰어가자 승미는 피우고 있던 담배를 길가에 던져 버렸다. "괜찮아요. 별일 없었어요?" "응." 진아는 오토바이 뒤에 타고 승미 몸에 팔을 감았다. 오토바이는 몸을 떨면서 그녀에게 다시금 승미에 대한 죄책감을 일깨워 주곤 쏜살같이 달 리기 시작했다. 20분 정도 달렸을 때, 하승미는 조금 속도를 늦추고 슬쩍 말했다. "미행당하고 있어요." "뭐라구?" "차가 한 대 쫓아오고 있어요. 돌아보지 말아요." "어떻게 하지?" "좀 빨리 달리면 돼요." 엔진 소리가 한층 커지고 갑자기 맹렬한 속도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진 아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몸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기울어질 때 마다 오싹했지만 승미의 솜씨는 확실했다. 급커브를 틀어도, 언덕을 뛰어 내려도 결코 휘청거리는 일이 없었다. 눈을 뜨자 잿빛 아스팔트가 급류와 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오토바이가 좁은 길로 뛰어 들어갔다. 진아가 불현듯 소리쳤다. "일방통행 길이야!" 오토바이는 그래도 상관없이 내달렸다. 맞은편에서 자동차가 덮쳐 버릴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오토바이는 차 옆의 좁은 틈을 바람처럼 빠져나갔 다. "이젠 됐어." 속도를 낮추고 승미가 뒤를 돌아보았다. 진아도 돌아보자, 쫓아오던 차 가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굉장한 충돌음이 허공에 퍼 졌다. "꼴 좋군." 승미가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지만 유진아는 살아 있지 않은 기분이었 다. 그 다음은 극히 순조로워서 오토바이는 이제 어느 한적한 숲속 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곳은 광주 쪽으로 접어드는 산업도로에서 조금 벗어난 지역으로, 진아는 여기서 10분 정도 더 가면 사건현장과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하승준은 여기서 동생을 만나 뭔가 얘기를 나누고 현장까지 가려고 한 것일까. "저 빈 빌딩이에요, 오빠가 나를 불러낸 곳은." 숲 사이에 무슨 공장과 같은 낡은 2층짜리 건물이 보였다. 진아는 가슴 이 크게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 건물 주변에는 듬성듬성 주택도 보이고 역시 공장으로 보이는 건물도 몇 개 서 있었다. 그 2층 건물은 그중에서 도 가장 크고 또 가장 낡아서 그 부근에서는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이 건물 속에 권기준의 딸이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진아가 승미의 손을 잡으며 낮게 소리쳤다. "입구 쪽으로 돌아가 보자." 그러나 건물 앞으로 와서 진아는 아연해졌다. 건물 주위에는 철망이 쳐 져 있고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노려보며 승 미가 말했다. "어머, 이런 것 전에 왔을 때는 없었는데." 을 하던 중년의 사 내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오?" 그 말에는 대답도 않고 진아가 물었다. "이 건물, 보수하는 거예요?" "아니오. 새로 짓는 거라오." "그러면 이 건물은 어떻게 하구요?" "이번 월요일에 부수기로 되어 있소." 진아는 그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이것을 월요일에 부순다는 것이다. 이 것이다! 그녀는 생각했다. 월요일을 기한으로 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권기준의 딸이 이 안에 있기 때문일 터였다. 이 건물의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부수어 버리면 안에 감금되어 있는 딸은 꼼짝없이 죽는 다. 확실하고도 자동적으로 말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오?" 남자가 이상한 듯이 물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진아는 당황해서 고개를 흔들었다. 남자가 가 버리자, 그녀가 승미에게 말했다. "이 건물이 수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여기에? 이렇게 주택이 많은 곳인데요?" 분명히 그건 그렇다. 아무리 주변에 나무가 많다고는 하지만, 건물을 지으려고 할 정도이기 때문에 주위에 주택도 많이 있는 것이다. 이런 곳 에 감히 여자를 감금해 둘 것인가? "어쨌든 안을 조사해 보지 않겠어?"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두 사람은 철망 틈 사이를 뚫고 안으 로 들어갔다. 건물은 너무 낡아서 원래가 무슨 색이었는지 잘 모를 정도 였다. 진아는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가서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라이터 를 꺼내서 불을 붙였다. 작은 빛이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만약 있다면 지하에 있겠지?" "저 안쪽에 계단이 있는 것 같아요." 과연 복도를 돌아가니 아래로 내려가는 작은 계단이 있었다. "발 밑을 조심해!" 두 사람은 서서히 계단을 내려갔다. 축축하게 곰팡이 낀 공기가 떠돌고 있어 냄새가 고약했다. 내려간 곳은 잡동사니를 넣어 두는 창고였다. 라 이터로 비춰 보니 골판지, 책장, 부서진 의자, 책상, 칠판과 같은 것이 빽빽하게 쌓여져 있었다. "아무도 없는 것 같군." 승미의 말을 들으면서도 진아는 포기할 수 없었다. 월요일에 부순다. 월요일, 그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그녀는 잡동사니 사이를 헤치듯이 해서 안으로 더 들어가 보았다. 어딘 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렇게나 쌓아올려진 것같이 보이지만 그 사 이를 빠져나가려고 생각하니 비교적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었다. 일 부러 얼핏보아 지저분하게 보여 주려고 한 것은 아닐까? "이것 봐!" 진아가 뭔가를 발견하고 낮게 소리쳤다. "뭐가 있어요?" 승미가 다가왔다. 어쨌든 몸이 크기 때문에 진아처럼 잘 빠져나올 수는 없었다. 방해가 되는 의자 따위를 걷어차고 오기 때문에 그 소리가 반향 되었다. 누군가 듣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아는 섬뜩썸뜩했다. "이것 봐, 저기에 문이." 산처럼 쌓여 있는 골판지 뒤를 보자, 그곳에 쏙 감춰진 듯한 철문이 있 었다. "기계실 같군." "열 수 있을까요?" "몰라. 어쨌든 손이 들어가지 않아. 이 골판지를 치워야겠어." "내게 맡겨 둬요." 승미가 골판지를 건드려 보다가 문득 소리쳤다. "이것 봐요, 가벼워요." 과연 하나 들어 보니 가벼웠다. 아무래도 안이 빈 것 같았다. 문을 감 추기 위해 누군가에 의해 일부러 쌓여져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힘이 솟았다. 문 앞을 치우자 먼지투성이가 되어 버렸지만 상관하 지 않았다. 그러나 문은 진아가 힘껏 손잡이를 잡고 당겨 보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 았다. "안 돼. 문이 잠겨져 있어." 승미가 주먹으로 탕탕 두들겼다. "누군가 있으면 뭐라고 말하겠지." 승미는 더 세게 두들겼다. "누가 있어? 대답해!"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왜 이런 식으로 문을 감추어 둔 것일까?" 그들은 잠시 더 실내를 살펴보다가 이대로는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하리 라는 걸 깨닫고 원래대로 골판지를 쌓고는, 계단을 올라서 나왔다. 건물 출구에서 승미가 살짝 밖을 봤다. "괜찮아. 아무도 없어." 두 사람은 철망의 틈 사이로 밖으로 나왔다. 4월 22일 15회가 연재됩니다. 번호:16/22 등록일시:95/04/24 16:50 길이:153줄 제 목 : 제5장 금요일 <검은 빌딩의 그림자> -15- ** 진아는 일단 아파트로 돌아가기로 했다. 옷이 먼지투성이가 되었고, 뭔 가 생각되는 점이 따로 있기 때문이었다. 승미와는 밤에 또 만나기로 하 고 그녀는 아파트로 들어갔다. 열쇠는 잠겨져 있었지만 어디에 또 오현석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욕 실을 들여다보고 없다는 걸 알고 나서 그녀는 옷을 갈아입었다. 그때, 현관의 초인종이 울렸다. 오현석일까? "문우성입니다." 귀에 익숙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우성 씨." 진아는 서둘러 문을 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문우성은 들어오자마자 진아의 손을 잡고는, 아주 긴장한 채로 말을 했 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나에게는 왜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 겁니 까?" "아니에요." 그녀는 일단 우성을 앉게 했다. "차를 끓일게요. 당신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하지만." "나는 우성 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그것뿐이에요." "난 진아 씨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구요. 그런 것은 전혀." "하지만, 이것은 내 개인적인 문제예요." "진아 씨, 당신은 여자예요. 위험한 일은 역시 남자에게 더 어울립니 다." 우성의 말에 진아는 웃었다. "고마워요. 당신의 힘을 빌리고 싶어지면 그때는 반드시 부탁할게요." 아무도 없고, 아무도 의지할 수 없다는 불안감 속에서 문우성과 같은 조금 미덥지 못한 남자라도 그렇게 말해 주는 것은 기뻤다. 극히 자연스럽게 진아는 그에게 키스했고 우성은 숨을 헐떡이면서 그 키스를 받았다. 그대로 두 사람은 방바닥에 누웠다. 뭔가 이상했다. 지금까지 키스 한번 해본 적 없지만 그를 아주 당연한 느낌으로 안고 있을 수가 있었다. 긴장의 연속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이젠 죽는가 하고 생각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극히 평범한 여자였 는데, 그때의 생활에 비하면 현실은 정말 악몽과 같았다. 우성은 마음이 착한 남자이다. 이대로 안겨 있으면 기분좋은 편안함에 젖을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희망은 애초부터 헛된 꿈이었다. 머리 위에서 나지 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이봐, 좋은 구경 보여 주는군." 진아는 튕기듯 일어났다. 언제 들어왔는지 오현석이 빙글거리며 거실 입구에 서 있었다. 문우성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진아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순식간 에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악몽과 같은 것이 바로 현실이고, 그 현실은 삶의 먼 저쪽으로 그녀를 끌고 가는 것만 같았다. "우성 씨, 죄송하지만 돌아가 주세요." "이 남자는 누구입니까?" "부탁이에요, 돌아가 줘요. 전화할 테니까." "알겠어요." 마지못해 문우성이 일어섰다. "무슨 일이 있으면 곧 달려오겠습니다." "고마워요." 진아는 현관까지 우성을 배웅했다. 문을 닫고 발소리로 우성이 가는 것 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소파로 돌아왔다. "방해한 것 같군." 오현석이 거실로 들어와서 소파에 털썩 앉았다. "예, 정말 그래요." 그녀는 조금 떨어져서 앉았다. "무슨 일이죠?" "뭔가 알았나?" 그녀는 월요일에 부수기로 되어 있다는 건물 이야기를 그에게 했다. "월요일에 부순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군." 오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그가 갑자기 정색을 했다. "그것보다." 현석이 조금 앞으로 다가왔고, 그녀는 곧바로 뒷걸음질쳤다. "지금 그 사람, 애인인가?" "단순한 친구예요." "그렇게 보이진 않았어." "당신과는 상관없잖아요?" "아니! 내게 상관이 있지!" "어째서요?" "나는 당신에게 반했거든." 진아는 아연해졌다. 갑자기 오현석이 덮쳐왔다. 피할 사이도 없었다. 그녀는 오현석에게 눌려져서 바닥으로 넘어졌다. "저런 녀석에게 당신을 주지는 않을 거야." 오현석의 목소리에는 진아의 몸을 얼어붙게 할 정도의 진지함이 있었 다. 오현석은 잠시 진아 위에서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손을 떼고 일어섰다. 그녀는 급하게 일어서서 부엌으로 내달려 갔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아, 괜찮아." 오현석이 피식 웃으며 얼른 말했다. 진아는 부엌의 싱크대에 기대고 서 서 그 사내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이상한 남자다. 진아는 그의 진지한 웃 음을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그에게 등을 돌리며 말 했다. "뭔가 마실래요?" "커피가 좋아. 술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무슨 이유가 있어요?" "손끝이 무뎌지니까." 그녀는 커피를 타서 오현석에게 주었다. 위험한 남자라고는 알고 있지 만,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그는 그녀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점이 있었 다. "그 빈 건물을 탐색해 볼 가치가 있을 것 같군." 그가 말을 바꾸었다. "아무것도 아닐지도 몰라요." 정말 처음부터가 아무것도 아닌, 엉터리 같은 이야기이다. 진규가 사람 을 치었다. 그 남자는 권기준의 딸을 유괴해서 어딘가에 감금해 두고 있 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오현석의 지시를 받아 이 사건을 일으켰지만 중 도에 연락이 끊기는 바람에 모든 것이 미궁 속에 빠져 버렸다. 확실한 것 은 하나뿐, 그 딸이 월요일에는 죽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이 확실한 것 같으면서도,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진규가 친 것은 하승미의 오빠인 하승준인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가 권기준의 딸을 유괴한 것 같지만, 그것도 오현석의 이야기를 믿는다는 가정 하에서다. 그렇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있는 그대 로의 사실만을 정리해 보는 것이다. 상상이나 추측은 모두 배제하고, 정 말로 믿을 수 있는 사실만을 말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오현석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리고 당신에 관한 것이 아니에요. 그것만 은 분명해요." 오현석은 웃었다. 그의 웃음에서 오늘은 어쩐지 천진함을 발견할 수 있 었다. 그건 타고난 칼잡이에게서 느껴지는 모순된 표정이었다. 야비함과 냉담함이 그것과 교묘히 교차되는 기이한 표정. 진아가 머리 속의 생각을 털어 버리듯이 다시 화제를 그 문제의 건물 쪽으로 바꾸었다. "그 건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보고 싶어요." "밤이 되기를 기다리는 편이 좋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철문을 열어야 해요." "좋아, 내가 가 주지." "당신이 함께 가서 어떻게 하죠?" "철문 정도라면 내가 열어 주지." "도둑질도 해요?" "살인에는 필요한 기술이지." "어디에서 배웠어요?" "경험이야. 게다가 손재주는 타고 났으니까." 어느 사이엔가 오현석의 손에는 10원짜리 동전이 하나 올려져 있었다. 그것은 곧 마치 살아 있는 것같이 손등을 미끄러지고, 손가락 사이를 빠 져 돌아다녔다. 깜짝 놀랄 만한 속도에 깨끗한 솜씨였고 게다가 마술과도 같이 현란한 기술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일을 하고 있어요?" 조금 시간을 두고 그녀가 물었다. "아주 옛날부터. 언제부터였는지는 잊었어."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오현석은 얼른 이야기를 바꾸었다. "오늘밤은 어떻게 할 거지?" "승미가 올 거니까 당신이 있으면 안 돼요. 그녀는 당신을 노리고 있으 니까." "조금 떨어져 있지. 오지 않으면 둘이서 들어가면 되고." 오현석은 건물 장소를 그녀에게 적게 하곤 그것을 잠시 보고 있다가 곧 라이터를 켜서 종이를 태웠다. "발견되면 안 좋으니까. 머리 속이라면 누구도 모르겠지." 그가 일어섰다. "건물 앞으로 12시에 가지." 오현석이 나갔다. 그제서야 그녀는 온몸으로 숨을 쉬었다. 그가 가고 나자,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4월 26일 16회가 연재됩니다. 번호:17/22 등록일시:95/04/26 16:18 길이:182줄 제 목 : 제5장 금요일 <검은 빌딩의 그림자> -16- ** '완전히 심야족이 되었군.' 진아는 그 건물 앞에 와서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11시 45분이었다. 완전히 늦어 버렸다. 하승미와는 11시 반에 여기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 데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12시에는 오현석이 온다. 어떻게 하지?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먼저 들어가 있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승미가 안에 있을지도 모르고, 오현석이 뒤에 온다고 해도 그녀와 함께 있는 걸 알면 적당한 거리를 둘 것이다. 그녀는 우선 건물 안을 들여다보겠다는 생각으로 플래시를 손에 들고, 낮에 왔을 때처럼 철책 틈 사이를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은 조용했다. 진아는 지하로 내려가자, 귀를 기울였으나 소리 같은 것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안쪽으로 플래시의 빛을 비춰보던 그 녀는 놀랐다. 철문 앞에 쌓여 있던 골판지 상자가 옆으로 깨끗이 치워져 있었던 것이다. 승미가 먼저 온 것일까? 저 문은 . 진아는 문 손잡이를 잡고 살짝 당겨 보았다. 뜻밖에도 문이 열렸다! "승미." 이렇게 말하면서 안으로 들어가다 그녀는 우뚝 멈추어 섰다. 가죽점퍼를 입은 젊은이 네 사람이 보일러 앞바닥에 앉아 있었다. 이상 한 냄새가 나는 파란 연기가 퍼지고 있다. 히로뽕인가. 그들은 아무튼 마 약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뭐야?" 한 사람이 싱글거리면서 일어났다. "함께 피울래?" 자세히 보니 상당히 어렸다. 20대 초반일 것 같았다. "너희들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지?" 그녀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들에게 일부러 위압적인 말투로 물 었다. "열려 있으니까 들어왔지." 열려 있었다구? 그러면 누군가가 여기를 연 것이다.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어?" "글쎄, 1년인가 2년인가. 그렇지 않으면 2,3분일까?" 다른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곤 소리내어 웃었다. "누가 오지 않았어? 내 앞에." "글쎄. 그이와 약속했어? 우리들이 대신해 주지." 진아는 그들과의 대화를 포기하고 그만 나가려고 뒤로 돌아섰다. 그런 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붙잡는 바람에 그녀가 들고 있던 플래시 가 떨어져서 바닥으로 굴렀다. "뭐하는 거야?" "좋잖아, 도망가지 마!" 네 사람이 달려들어 그녀를 붙잡았기 때문에 그녀는 곧 손발이 눌려진 채로 바닥에 뉘여졌다. 손발을 바둥거리려고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 다. "좋을 때 와 주었잖아. 여자 없는 파티는 정말 재미없지." 한 사람이 그녀 위로 올라갔다. 그가 험하게 그녀의 옷을 벗기려고 손 을 내밀었고 다른 한 손은 이미 그녀의 하체를 더듬고 있었다. 그 순간이 었다. 탁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나고 그녀의 위에 올라탄 사내가 튕기듯이 일어섰다. "뭐야?" 누운 채로, 그리고 눈을 꽉 감은 채로 그녀는 귀에 익은 그 목소리를 들었다. 입구에 오현석이 서 있었다. 사내들 중 한 사람이 바닥을 기고 신음하고 있었다. 그의 입에선 검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남자 세 사람이 일어섰다. 진아는 재빨리 보일러 기계 뒤로 피했다. 한 사람이 들고 있던 무슨 병인가를 치켜든 채 오현석 쪽으로 달려갔다. 그 러나 그보다 먼저 남자의 목으로 오현석의 칼이 날아갔다. 남자는 목을 잡고 헐떡이다가 뒤로 넘어졌다. 오현석의 손에 칼이 빛나고 있었던 것이 다. 남은 두 사람이 뒷걸음질쳤다. "나가." 오현석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두 사람을 데리고 어서 꺼져." 그들은 이미 저항할 기력을 잃은 것 같았다. 남은 두 사람은 각각 쓰러 져 있는 동료를 한 사람씩 안고는 황급히 나갔다. "괜찮아?" 오현석이 물었다. 진아는 떨리는 몸을 자신의 양팔로 안았다. 그 모습 을 보며 그가 쓰게 웃었다. 위험할 때에 오현석이 구해 줬다고 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화가 났다. 하지만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경멸하고 싶은 인간 에게 은혜를 입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고맙다고 하든지 말든지는 그쪽 마음대로야." 오현석은 이렇게 말하고 서둘러 방 안을 둘러보았다. "문이 열려 있었어요. 지금 있던 애들은 열 수 없었을 텐데." "기다려." 보일러실은 갓 없는 전등 하나에 불이 켜져 있었다. 오현석은 주머니에 서 라이터를 꺼내서 문 열쇠구멍을 보았다. "억지로 연 게 아니야. 제대로 열쇠를 사용해서 열었어." "그래요? 그러면 역시 누군가가 여기에 왔었다는 거군요. 그리고. 승미가 안 왔어요. 걱정이에요."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걱정해." 오현석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 그리고 내 플래시." 조금 전 사내들에게 습격당했을 때 어딘가로 굴러간 것이다. 진아는 보 일러 주위를 빙글 돌아보았다. "없어요. 아래로 떨어진 것 같아요." 그녀는 보일러 아래를 들여다보았다. 기계 아래로 1미터 정도 비어 하 나의 공간이 형성돼 있었다. 그녀는 그 틈으로 손을 넣었다. 위쪽의 전구 빛으로는 약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에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한참 손 으로 휘저으니 마침 플래시에 손이 닿는 것 같았다. "아, 여기 있어요." 손가락 끝으로 그것을 굴려서 겨우 손에 잡았다. 그녀는 그것을 손에 들고 일어섰지만 그 다음 순간 또 떨어뜨려 버렸다. 그 순간, 그녀의 얼 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이봐, 뭐하는 거지?" "이것 봐요." 진아는 플래시를 들고 있던 왼손을 오현석 쪽으로 펴 보았다. 손바닥에 피가 번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플래시에. 피가 묻어 있었어요." 오현석이 다가와서 허리를 구부렸다. "그렇군." 오현석의 라이터가 보일러 아래를 비추었다. "뭐가. 있어요?" "들여다 봐."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서 손에 묻은 피를 닦고 바닥으로 구부렸다. 무릎 이 떨렸다. 하지만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승미는 누군가에 의해서 억지로 무리하게 그곳에 밀어 넣어진 것 같았 다. 커다란 몸이 이상하게 구부려진 채로 크게 딱 뜬 눈이 초점을 잃은 채 진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 오현석이 물었다. 벽에 기대서, 진아는 아직 떨림이 멈추지 않은 가슴 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저 사람이 승미라는 여잔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의 그 남자들일까요?" "아니야." 오현석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녀석들은 사람을 죽일 배짱이 없어. 다른 녀석이야." "그러면 혼자서 먼저 들어왔군요." "그리고 누군가에게 당했겠지. 이 보일러실에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군." 진아는 머리를 흔들었다. "가슴을 한 번 찔렸어. 죽는데 그다지 괴롭지는 않았을 거야." 그런 말을 들어도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았다. "자, 내 말을 잘 들어. 지문을 남기면 곤란해. 손이 닿은 곳은 모두 닦 아. 나중에 하지도 않은 살인으로 잡히면 안 되니까." 진아는 도저히 그런 것까지 생각할 기운이 없었다. "플래시를 잘 가지고 가." "피가 묻어 있어요." "남겨 두면 범인 것이라고 생각할 거야." 진아는 흠칫거리면서 손수건으로 플래시를 들어올렸다. 그러는 중에 오 현석이 문득 눈썹을 찡그리며 전등을 쳐다보았다. "이것 봐. 이것은 좀 이상하군." "뭐가요?" "어째서 이런 빈 건물에 전기가 들어오지? 월요일에 없어질 건물에 말 이야." 진아도 그런 말을 듣고 보니 비로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된 걸까요?" "지금까지 누군가 이 방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거야." "역시 이곳에 권기준의 딸이." "그것은 잘 모르지만." 두 사람이 전구를 쳐다보며 그런 말을 나눌 때, 갑자기 탕하고 무거운 소리가 났다. 그들이 깜짝 놀라며 그쪽을 돌아보자, 빠르게 철문이 닫히 고 있었다. "이봐!" 오현석이 문으로 잽싸게 뛰어갔으나 이미 닫혀 버린 후였다. "누군가가 있었어, 제기랄!"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열리지 않아요?" "열쇠를 채웠어." 화가 치미는 듯이 오현석이 문을 발로 찼다. "누굴까요?" "몰라. 하지만 하승미를 죽인 범인이 지금까지 이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던 것 같군." "하지만." 진아가 뭔가 말하려 할 때, 전구가 갑자기 꺼져서 보일러실이 깜깜해졌 다. "어떻게 된 거죠?" "침착해." 오현석의 목소리가 어둠 사이로 들려왔는데, 그가 바로 지척에 있는데 도 불구하고 아주 멀리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전기를 끊은 거야. 플래시를 가지고 있지?" "예." "켜 봐." 진아는 떨리는 손으로 플래시의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나 그녀의 필사 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플래시는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다. "안 켜져요." 오현석이 혀를 찼다. "열 수 있어요?" "몰라." "열 수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거죠?" "여기에서 쓰러져 죽겠지. 마침 월요일에 건물이 부서진다고 하니까." 오현석의 목소리만이 암흑의 빈 공간에 이상한 반향을 일으키며 퍼지고 있었다. 진아는 이 절망적인 어둠 속에서 시체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몸이 덜덜 떨렸다. "어떤 녀석인지 모르지만, 밖에 나가면 살려 두지 않을 거야!" 오현석의 말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과연 살아나갈 수 있을까. 죽음 같은 건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오현석이 옆에 있어도 진 아에겐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4월 29일 17회가 연재됩니다. 번호:18/22 등록일시:95/04/29 12:02 길이:316줄 제 목 : 제6장 토요일 <지명수배> -17- ** 제 6 장 토 요 일 ** < 지명 수배 > 진아는 숲속을 달리고 있었다.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로 나무 사이를 바람과 같이 빠져나갔다. 몇 미터 앞을 가는 사람이 있었다. 회색 코트, 긴 머리. 그것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하지만 진아는 그 여자에게 전혀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 다. 걷고 있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지만 진아가 아무리 달려도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엇일까? 환상일까?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것일까? 진아는 손 을 뻗었다. "기다려요! 부탁이에요! 피하지 말아요!" 손이 이제 닿을 것 같다. 조금 더 조금 더. 그때서야 비로소 여자 가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얼굴이 없었다. 입만 커다랗게 찢어져서 씽긋 웃었다. 진아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꿈인가?" 진아는 피부에 모포가 닿아 있는 것을 느꼈다.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갑자기 똑똑히 눈이 떠졌다. 그녀는 비로소 알몸으로 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침대에 일어나 앉아, 모포가 미끄러져 떨어지고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 다. 그녀는 당황해서 황망히 모포를 끌어올려 가슴에 갖다대었다. 여기는 어디일까? 어두컴컴한 방안이 조금씩 밝아져왔다. 눈이 익숙해 져서 그렇게 느낀 것이리라. 호텔? 그렇군. 진아는 중얼거렸다. 호텔이었다. 오현석과 함께 숙박했 던 것이다. 진아는 손으로 더듬어 머리 위의 불을 켰다. 더블침대 안에 오현석의 모습은 없었다. 침대 옆에 있는 시계를 보았다. 8시 조금 전이었다. 벌써 아침인가? 토요일 아침이다. 모든 것이 기억났다. 그 빌딩 지하실 에서 사내들에게 당할 뻔했던 것, 오현석과 둘이서 갇혔던 것, 암흑의 공 간 속에서 허둥댄 것, 그러나 오현석의 손기술로 문이 열리고 가까스로 도망친 것. 완전히 녹초가 되어 이 호텔로 들어왔었다. 오현석이 프런트에 더블침 대가 있는 방을 부탁하는 것을 저지할 기력도 없었다. 그렇다, 하승미가 살해당한 것을 잊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잊었 다니, 늦게서야 그녀는 하승미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이 방에 들어오고 나서의 일은 제대로 기억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다 만 침대로 쓰러져서 잠들었던 것이다. 오현석이 옷을 벗겼음에 틀림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오현석에게 당했다는 감각은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 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욕실 문이 열렸다. "어, 일어났어?" 현석이 목욕타올을 허리에 감고 나와선 아무렇지도 않게 커튼을 열었 다. 빛이 방안에 넘쳐서 진아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샤워를 하고 와. 몸이 가뿐해질 테니까." "내 옷은 어디 있죠?" "소파 위에." 친절하게도 속옷까지 잘 개켜져 거기 놓여 있었다. 오현석다운 꼼꼼함 이었다. "뭐 가운 같은 거 없어요?" "그대로 괜찮잖아? 우린 어차피 친해진 사이인데." 그가 그렇게 말하고 가볍게 웃었다. 그 다음 순간, 진아의 얼굴에서 핏 기가 사라졌다. "내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이 다음에는 깨어 있을 때 하지." 진아는 모포를 힘껏 끌어당겨, 그것을 오현석에게 집어던졌다. 모포가 그의 얼굴을 푹 덮어 씌우자 진아는 알몸인 채로 욕실로 뛰어 들어가 큰 소리를 내고 문을 닫았다. 뜨거운 물이었으나 그녀는 피할 생각도 없이 쏟아지는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뭐라고 마구 소리를 지르고 있었으 나 쏟아지는 물의 거센 소리에 곧바로 묻혀 버리고 있었다. 몸에 타올을 감고 욕실을 나왔을 때, 그는 벌써 양복차림이 되어 있었 다. "그런 스타일은 요염해서 좋군." 그의 말을 무시하고, 그가 보고 있는 것도 무시하고 그녀는 소파 위로 손을 뻗어 옷을 집어들었다. "곧 아침식사가 와." 룸서비스라고는 하지만 일류호텔의 그것과는 상당히 틀렸다. 하지만 어 쨌든 커피와 토스트와 계란이 갖추어져 있었으므로 허기진 배를 채우기엔 그다지 부족함이 없었다. "TV를 켤게요." "볼 게 있어?" "뉴스요. 하승미의 시체가 발견되었나 싶어서요." "내가 어제 저녁에 호텔로 와서 경찰에 신고했어. 곧 발견했을 거야." "확인하고 싶어요." 진아는 TV스위치를 켰다. 시간대가 안 맞았는지 뉴스는 아무 곳도 하고 있지 않았다. "이봐, 그냥 그곳에다 놔 둬." 그가 갑자기 말했다. 뭔가 드라마를 하고 있는 채널을 가리키고 있었 다. "그 다음이 뉴스야." 커피를 마시면서 그가 친절히 말했다. "잘도 알고 있군요." "매일 아침 보고 있으니까." "뉴스를?" "아니, 그 연속극을." 진아는 어이가 없어 그냥 웃어 버렸다. "그렇게 웃지 마." 그가 쓰게 웃었다. "샐러리맨도 하루 종일 일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잖아. 직업 살인자도 마찬가지야. 언제나 살인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야." 진아는 겨우 웃음을 참고 먹기 시작했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TV를 쳐 다보고 있었다. 그 뻔한 연속극을 말이다. 그의 말대로 연속극이 끝나자 곧바로 뉴스가 시작되었다. "이봐, 저거야!" 그가 다소 굳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화면이 그 빌딩을 비추기 시작하고, 카메라가 경찰에 의해 운반되어지 는 하승미의 천이 덮인 시체를 비추고 있었다. "발견되었군." 진아는 어느 정도 안심했다. 그대로 방치되면 어쩌나 하고 마음이 조마 조마했던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정말 너무 미안한 일이다. 그들 남 매의 죽음과 그런 식으로 연결된 것이 말이다. "아니, 저것 봐!" 오현석의 목소리가 창백하게 바뀌었다. 화면을 향하던 진아는 아연해졌 다. 브라운관에 비추어지는 것은 오현석과 유진아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아나운서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경찰에서는 이 두 사람이 어떠한 형태로든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행방을 찾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거죠? 어째서 우리들이." 진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하자 그가 중얼거렸다. "나가지." 그는 커피를 단숨에 마시고 일어나서 TV를 껐다. "기다려요! 어떻게 된 거죠?" 진아는 벌떡 일어나서 그의 팔을 잡았다. "밀고야. 권기준 그 녀석이겠지." "권기준이?" "내가 배신한 것을 알아차렸을 거야. 그 빌딩까지 미행했는지도 몰라." "그래서 경찰에 우리가 죽였다고 하구요?" "어쨌든 이곳을 나가야 돼. 빨리 해." 아직 머리가 젖어 있었지만 그런 걱정까지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진아는 서둘러 준비를 했다. "프런트에 있는 사람이 TV를 보고 있었다면 위험해. 언제라도 뛸 수 있 도록 해둬." 이번에는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돼 버린 것이다. 진아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 자신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수없이 많이 변화하는 자기 얼굴에, 진아는 정말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요행히 프런트의 종업원은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국도로 나와서, 오 현석은 조금 망설이더니 차를 서울 쪽으로 돌렸다. "어디로 가는 거죠?" "아마 여기저기에 손이 뻗쳐 있을 거야." 그것은 그렇다. 경찰은 살인 용의자를 찾기 위해 도시 전체에 거미줄 같은 경계망을 펼쳐 놓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벌써 토요일이다. 무언가 를 하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남은 날은 내일 하루뿐. "경찰로 가겠어요." 진아가 별안간 이렇게 말했다. "정신이라도 이상해진 거야?" "당신은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난 더이상 그럴 수 없어요. 정말 지쳤 어요. 나는 경찰로 가서 모든 것을 솔직히 이야기할래요. 믿어 줄지 어떨 지는 모르지만." "안 돼." "어째서요?" "동생은?" 진아는 잠시 말이 막혔다. "그것은. 나만 잠자코 있으면 몰라요. 당신에 관한 것도 이야기하 지 않을 테니까 당신도 동생에 관한 것은 말하지 말아요." "생각이 깊지 못하군. 경찰에 걸리면 거짓말은 곧 들통이 나." "하지만 경찰에서 찾으면 권기준의 딸이 쉽게 발견될지도 몰라요." 오현석이 조금 쓰게 웃었다. "경찰이 당신 이야기를 믿어 줄 때면, 이미 권기준의 딸은 백골이 되어 있을 거야." 진아는 창밖으로 눈길을 던졌다. 분명히 오현석이 말하는 대로일지도 모른다. 그가 차를 길옆에 세웠다. "왜요?" "전화를 걸고 오지. 여자가 있는 곳이야. 우선 당장은 그곳에 숨기로 하지." "나를 그곳에 데리고 가는 거예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고는 차를 내렸다. 진아는 체념상태였다. 이제 자신의 힘으로는 너무 벅차다는 걸 알았다. 살인, 지명수배. 권기준의 딸을 찾기는커녕 자신이 오히려 쫓기는 신 세가 되었다. 이제부터 정말이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유괴사건의 한가운 데에 뛰어든 것부터가 잘못이라는 후회를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 버렸 다. "많이 기다리게 했군." 오현석은 일이 잘 되었는지 곧바로 돌아와 차를 출발시켰다. 잠시 지나 서 진아가 물었다. "어떤 여자예요?" "뭐 그렇고 그런 사이지." "애인이에요?" "예전에 그런 관계인 적이 있었지." "나를 데리고 가면 들여보내 주지 않을 거예요." "괜찮아." 오현석은 싱긋 웃었다. "그런 것은 잘 봐 주는 여자니까." 어쨌든 지금은 그에게 맡기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차는 호화 로운 맨션이 늘어선 동네로 들어갔다. 오현석은 골목 깊숙이 차를 몰고 들어가 꽤 사치스런 분위기의 어떤 주택 앞에 세웠다. 초인종을 울리자 곧 문이 열렸다. "잘 왔어. 들어와, 현석 씨." 조금 허스키한 그 여자의 목소리가 진아에겐 여느 여자 같지는 않다는 느낌을 먼저 주었다. "어서 들어와요." 그 소리를 듣고 진아는 어쩔 수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넓은 맨 션을 아니었다. 게다가 밖의 사치스러움과는 달리 안은 조금 낡아 있었 다. 여자는 30세 정도일까, 직업여성같이 지나치게 화려한 화장을 하고 있 었다. "이렇게 빨리 일어난 건 오랜만이야." 크게 하품을 하곤 뒤늦게 생각난 듯이 진아에게 물었다. "난 윤상미()라고 해요. 당신은?" "유진아예요." "이 사람 어때요? 친절하게 해줘요? 언제나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인 데." 현석이 잔뜩 찌푸린 얼굴이 되어 윤상미의 말은 잘랐다. "이제 그만해,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어떻게 된 거지? 살인으로 쫓기다니, 당신답지 않군." "함정에 걸린 거야. 정말 요즘은 운이 없다니까." "두 사람이 손에 손을 잡고 사랑의 도피라도 한다면 즐거울 텐데." 윤상미가 크게 웃었다. 소위 여장부형의 시원스런 여자인 것 같았다. 유진아는 그녀의 외모를 보고 살해당한 하승미를 문득 연상했다. 하승미 도 살아서 10년 뒤가 되면 이 여자만큼 호탕할 텐데. "잠시 있게 해주지 않을래? 길지는 않아. 2, 3일 있을 생각이야." 2, 3일. 오늘이 벌써 토요일이다. 월요일까지는 모든 것이 끝나 버린 다. 진아는 절망적인 기분이 되었다. "뭐, 있고 싶으면 있어." 윤상미는 아무런 표정없이 그저 편안하게 말했다. "대단한 대접은 할 수 없지만 쉬고 싶은 대로 쉬어." 윤상미는 여전히 부드러운 웃음을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미소에 익숙 한, 오랜 직업의 소산인 것 같은 그런 웃음이었다. "오늘이 토요일이니까 돈벌이가 되는 날이야. 난 내일 아침에야 돌아올 거니까 푹 쉬어." 이 말을 남기고, 그녀는 간단한 눈인사를 진아에게 보내고는 나가 버렸 다. 왜 쫓기는지, 어쩌다가 그런 일에 연루되었는지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아주 선선히 그들을 받아들인 것이다. 유진아는 그녀의 시원스러움 에 모처럼 안도를 느꼈다. "지금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진아가 소파에 푹 꺼지듯 앉으며 말했다. "뭐, 천천히 생각하지." 현석은 바닥 카펫에 벌렁 드러누워서 천장을 무표정하게 올려다보고 있 었다. "앞으로 이틀밖에 없어요. 도저히 권기준의 딸을 발견할 수 없을 것 같 군요." "그렇게 포기할 것도 없어." "뭔가 손쓸 방법이 있어요?" "전혀 없는 것도 아니지." 그가 그렇게 중얼거리곤 일어서서 갑자기 집을 나설 채비를 하며 말했 다. "기다려. 잠시 나갔다 올 데가 있어." 혼자가 된 진아는 모처럼 혼자 있게 된 틈을 타서 냉정하게 사태를 파 악하려고 다시 한번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지금은 어쨌든 경찰에게 잡 힐 수는 없는 것이다. 유괴 이야기를 해도 믿어 주지는 않고 오히려 살인 사건으로 추궁당할 뿐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경찰에 잡히지 않고 이렇게 계속해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지. 그제서야 진아는 진규를 생각했다. TV로 누이가 살인혐의로 지 명수배되었다는 사실을 보았을 것이다. 얼마나 걱정할 것인가. 그녀는 진규에게 전화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화 쪽으로 가서 수 화기를 들려고 하다가, 문득 경찰이 진규가 있는 곳에 함께 있을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안 된다. 오히려 사태를 더욱 좋지 않게 만들 것이다. 진아는 전화기 옆에서 떨어지려다가 문득 메모용지에 눈길이 멈추었다. 볼펜으로 꾹꾹 눌러썼던 글씨 자국이 종이 위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전화번호였다. 그 한 장을 찢어 햇볕이 드는 창에 비추어 보니 글자를 읽어낼 수가 있었다.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전화번호인 것 같은 기분 이 들었다. 어디서 보았더라? 진아는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그대로 돌려 보았다. 조금 지나서 상대 방이 나왔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그녀를 놀라게 했다. "권기준 회장 댁입니다." 그렇다. 그건 권기준의 집 전화번호였다. 진아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 다. 윤상미라는 여자의 메모지에 권기준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그 메모를 윤상미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권 기준에게 두 사람이 이곳에 있음을 알려 준 것이다! 그것은 또한 권기준 의 손길이 이미 윤상미에게 뻗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진아는 부르르 몸을 떨며 일어섰다. 이 위급한 시간에 오현석은 어디에 간 것일까? 그토록 예민한 오현석도 윤상미 같은 여자에게 완전히 속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씁쓸히 웃었다. '이렇게 태평스럽게 있을 수는 없어.' 진아는 오현석이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창으로 다가가서 밖을 보았다. 그때 집앞에 한 대의 차가 정지하는 것이 보였다. 그 차에서 남 자 두 사람이 내렸을 때, 진아의 얼굴색이 변했다. 권기준의 집에서 본 남자가 그중에 있었다. 진아는 망설였다. 도망치려고 해도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면 어디에 숨 을 것인가? 발소리가 문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욕실 쪽으로 뛰 었다. 사내들이 들어왔다. 그들이 방안을 둘러보고, 버럭 소리쳤다. "없나?" "아니야, 구두를 봐. 여자는 있을 거야." "좋아, 찾아!" 두 사람은 부엌, 화장실, 욕실을 차례차례 들여다보았다. "없는데?" "이상한데." 두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때 한 사람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봐, 발소리야." 복도를 걸어오는 구두 소리가 가까워지고, 또 한 사내가 말했다. "오현석일까?" "그럴지도 몰라. 이봐, 목욕탕에 숨어. 나는 부엌에 숨을게." 한 사람은 욕실 안으로, 한 사람은 부엌의 커튼 뒤로 몸을 숨겼다. 문 이 열리고 오현석이 들어온 것은 그 직후였다. 그가 방안을 둘러보며 태평하게 말했다. "이봐, 어디 있어?" 욕실에 숨어 있던 남자가 살짝 칼을 꺼냈다. 욕조의 물이 무슨 약을 넣 었는지 하얀 거품이 섞인 초록색으로 욕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물 이 조금 흔들리고 있는 게 좀 이상했다. "여기야?" 오현석의 목소리가 나고 욕실문이 열렸다. 사내가 그 순간에 칼을 쥐고 현석을 찌르려고 하며 손을 들었다. 그런데 거의 같은 순간에 갑자기 욕 조에서 진아가 일어섰고 뜻밖의 물소리에 사내가 깜짝 놀라 뒤돌아봤다. 오현석이 뛰어들어 와서 잽싼 동작으로 그 사내의 손에서 칼을 떨어뜨 리곤 거의 동시에 아랫배를 무릎으로 걷어찼다. 사내가 신음을 뱉어내면 서 그대로 쓰러졌다. 진아는 완전히 젖은 채 격심하게 어깨로 숨을 쉬고 있었다. 욕조에 물 이 차 있는 걸 보곤 다급한 김에 그 속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욕조 속 의 초록색 물은 마사지용 크림이 섞여 있었던 모양이었다. "또 한 사람이 있어요." "알고 있어. 처치했어." 오현석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욕조 안에 잠겨 있었나?" "그곳밖에 숨을 곳이 없어서." 진아는 욕조에서 나왔다. "옷을 갈아입어. 상미의 옷을 입을 수 있겠지?" "예. 하지만 그 여자는." "알고 있어. 우리들을 권기준에게 팔아넘겼어. 얼굴을 봤을 때 단박에 알았어." "어떻게요?" "내 눈을 똑바로 보지 않았으니까." 그는 조금 쓸쓸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빚이 많아. 날 밀고하고 나서도 편안하지는 않았을 거야." 생각지도 않은 그의 부드러운 말을 듣고 진아는 깜짝 놀랐다. 언제나 차갑기만 한 그의 얼굴 뒤편 어디에 이런 온유함이 숨어 있었던 것일까. "자, 빨리 옷을 입어. 여기서 빨리 나가야 해." 진아는 윤상미와 거의 사이즈가 비슷했다. 진아는 그대로 재빨리 옷을 벗고 윤상미의 옷을 속옷부터 입었다. 오현석은 아까처럼 그녀의 벗은 몸 을 보고 웃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쳐다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5월 3일 18회가 연재됩니다. 번호:19/22 등록일시:95/05/03 16:00 길이:175줄 제 목 : 제6장 토요일 <지명수배> -18- ** "미스 윤, 상당히 일찍부터 술을 마시는군." 동료에게 그런 말을 듣고 윤상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여러가지 사정이 있어서." "남자?" "글쎄." 그녀는 술잔을 들고, 자포자기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상황이 안 좋아." 그녀는 또다른 잔을 거푸 비웠다. 짙은 화장을 한 얼굴에 그보다 더 짙 은 그늘이 깔려 더욱 안색이 안 좋았다. "미스 윤, 전화야." 동료가 전해 주는 전화기를 받아들고, 그녀는 조금도 혀가 돌아가지 않 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 전화바꿨습니다." "나야, 오현석." 그녀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지금 어디야?" "가게 근처야. 5분 후에 뒷문 쪽으로 나와 주겠어?" "알았어."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돈 때문에 권기준에게 그를 팔았지만 마음이 꺼림칙해서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무사한 것이 오히려 기 뻤다. 죄책감을 달래기 위해 일찍부터 술을 마셨는데 그를 만나 사죄를 할 수 있게 되니 더할 수 없이 반가웠다. 5분 정도 지나서, 그녀가 가게 뒤로 나왔다. "상미." 그녀 뒤쪽에서 그의 목소리가 나고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미안해. 궁했기 때문에." "알고 있어. 신경쓰지 마." 현석이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그 다음 순간에, 그의 오른손 소매에서 칼이 하나 소리없이 미끄러져 나왔다. 칼이 윤상미의 등을 파고들어 가슴 을 관통한 것은 그 직후였다. 진아는 길가에 서서 그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뇌리를 스치 는 숱한 상념의 편린들. 지금이라도 도망칠 수 있는데 왜 도망치지 못하는 것일까? 경찰서로 뛰 어 들어가서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을 힘을 다해 설명 하면 믿어 줄지도 모른다. 이대로 오현석과 함께 있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 사람은 살인범이 다. 더구나 정상적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이른바 직업 살인자. 인간의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도 못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왜 그런 남자를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그때 갑자기 순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진아는 긴장했다. 그가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일까? 여기에서 기다리라고만 말하고 어딘가로 가 버 렸는데. 사이렌 소리가 그녀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진아는 황망히 주위를 둘 러보았다. 사이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몸을 숨길 장소도 없 었다. 진아는 사이렌 소리를 뒤로 하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사이렌 울림이 바로 뒤로 다가왔다. 잡히는 것일까? 그녀는 뛰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만약 경찰차가 우연히 이 길로 들어온 것뿐이 라면 도망치는 게 오히려 눈에 띌 것이다. 그녀는 가급적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순찰차가 좁은 도로를 타고 계속 달려왔다. 진아는 옆으로 피했다. 순찰차가 속도를 떨어뜨린 순간, 진아 의 얼굴에선 핏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순찰차는 그녀 옆을 지나쳐 속도를 올려서 가 버렸다. 진아는 어깨로 숨을 쉬었다. 길을 걷고 있어도 모두가 TV로 지명수배된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숙이고 걷게 되었다. TV에 살짝 비친 것뿐인 얼굴 따위를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리도 없는 데 이렇게 초조하고 불안한 것은 그것이 쫓기는 사람의 심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살인죄로 쫓겨야 하는 것일까. 이것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오는 걸 참기가 어려웠다. 모든 것이 오현석과 행동을 같이 하고 있는 탓이다. 어차피 그는 막상 자신이 위험한 순간이 되면 그녀를 인질로 사용할 생각일 것이다. "이봐." 오현석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도 서둘지 않는 태평스 런 모습이었다. "볼일은 끝났어요?" "응." "지금부터 어떻게 하죠?" "갈 곳이 있어." "형무소?" 오현석이 희미하게 웃으며 발을 멈추었다. 조금 길이 넓어진 곳에 차가 몇 대 주차되어 있었다. "저 차가 좋을 것 같군." "무슨 이야기죠?" "잠깐 빌리는 거야." "훔치는 거예요?" "도망갈 때에는 계속 차를 바꾸는 편이 좋아." 그는 주차되어 있는 차 가운데 파란색 소형 승용차 쪽으로 걸어갔다. 진아는 당황해서 뒤를 쫓았다. "기다려요! 난 싫어요!" 그러나 그는 여전히 태연했다. 그가 싱긋 웃으면서 진아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살인 용의가 씌워져 있을 때, 차 한 대 슬쩍하는 정도는 아주 사소한 거야." "하지만 살인은 하지 않았어요! 더구나 여기서 차를 훔치면 정말로." "이봐, 잔소리 그만하고 그곳에 서 있어." "뭐라구요?" "그 모퉁이에 서서 망을 보라구. 사람이 오면 알려 줘." 이렇게 말하고 오현석은 자동차 문 쪽에 엎드려 주머니에서 작은 쇳조 각을 꺼내서는 문을 열기 시작했다.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벌써 열었어요?" "이런 것쯤 쉽게 할 수 없으면 이런 직업은 할 수 없지." 엔진 키도 그의 손에 의해 곧 풀렸다. 놀라운 기술이었다. 자동차 키 같은 것은 필요도 없이 차는 천천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어쨌든 우선 몸을 숨길 장소가 필요하다구. 모든 것은 그후의 문제 야." "이번에는 몇 번째 애인이 있는 곳으로 가죠?" 오현석이 웃지도 않고 말했다. "권기준에게 별장이 있어. 그곳으로 가지." "미쳤어요?" 진아의 눈이 커졌으나 그는 여전히 침착했다. "지금은 사용하고 있지 않아. 빈집과 같지. 권기준 그 녀석, 설마 우리 들이 자기 별장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뭐하고 있어?" 미애가 말했다. "응? 무슨 말했어?" 멍청하게 누워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진규가 조금 사이를 두고 되물었 다. "뭐야, 정신 차려. 그렇게 누나가 걱정돼?" "당연하잖아?" "하지만 어떻게 할 수도 없잖아, 경찰에게 쫓기고 있을 거야." "누나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어!" "네가 그렇게 소리쳐도 아무 소용이 없어." 진규는 재떨이에 담배를 힘껏 눌러 껐다. 분통이 터지고 있어도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너무 답답했다. 그를 가만히 쳐다보며 미애가 차갑게 말했다. "나는 10억 원 쪽이 더 걱정이야." "이것 봐." "기다려, 그렇게 화내지 말고. 가령 누나가 잡혀서 죄가 없다고 해도, 돈이 없으면 변호사에게 부탁할 수도 없어. 게다가 살인 혐의가 걸려 있 는 사건도 틀림없이 유괴와 관련되어 있을 거야. 딸을 발견하면 모든 게 해결되리라고 생각해." 진규는 미애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워 잠시 잠자코 있었다. "게다가 권기준은 악당이야. 그런 녀석에게서 10억 원 정도 빼앗아도 조금도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잖아?" 진규는 고개를 흔들며 일어섰다. "어디에 가?" "누나 아파트에." "바보로군. 돌아올 리가 없잖아. 어차피 경찰이 지키고 있어." "어쨌든 안심이 되지 않아. 가 보겠어." 진규는 미애의 집을 나갔다. 그때까지도 나미애는 발목에 붕대를 감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틀 전 아침에, 미애는 아파트 계단을 내려가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발목을 삐고 말았다. 병원에 가자는 진규의 말을 한사코 거절하며 그녀는 그동안 꼬박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덕분에 진규는 미애를 위해 밥도 짓고 커피도 끓이고, 심지어 빨래까지 하는 한심한 신 세가 돼 버렸지만 그녀가 쓸데없이 어딜 가자고 보채지 않아 오히려 마음 은 편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진규가 나가자 그녀는 훌쩍 몸을 일으켜 앉아 가볍게 웃 으면서 일어섰다. 현관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은 완전히 건강한 모습 그대 로였다. 미애는 문을 걸고 돌아와서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그녀는 어딘가로 전 화를 걸어 두세 마디 이야기하고 나선 곧 수화기를 놓고 재빨리 외출 준 비를 시작했다. 진규는 미애가 외출한 것도 모르고, 비참한 심정으로 누나 아파트의 창 을 길에서 올려다보고 있었다. 커튼이 닫혀진 채였다. 잠시 그것을 멍하 니 바라보고 있다가, 그는 허망하게 어깨를 축 늘어뜨리곤 걷기 시작했 다. 그런데 그가 몇 발자국 걸었을 때였다. 누군가 그를 불렀던 것이다. "잠깐." 진규는 깜짝 놀랐다. 돌아보자, 코트를 입은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경찰인데." "무슨 일이죠?" "자네가 유진규지?" "그래서요?" "나는 장은식 형사라고 하지. 자네 누나 일로 잠깐 묻고 싶은 것이 있 어." "내가 말할 것 같아요? 누나를 붙잡으려는 것은 얼빠진 생각이라구요." "경찰인 나도 자네 누나가 살인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런데 왜 지명수배를 했죠?" "지명수배는 오히려 자네 누나를 보호하자는 것이 목적이야." "보호라구요? 그것 참 좋은 말이군요." 장은식 형사가 갑자기 진규의 멱살을 잡았다. "알아? 자네 누나는 살인사건에 휘말려 있는 거야. 늄형사의 말이 너무도 엄했기진규는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번호:20/22 등록일시:95/05/06 11:30 길이:220줄 제 목 : 제6장 토요일 <지명수배> -19- ** "날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죠?" 진규가 멱살을 잡고 있는 장 형사의 손을 뿌리치면서 말했다. "협조해 줘." "그렇게 말해도 누나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협조할 수가 없어요." "짐작되는 곳도 없어?" "있으면 이런 곳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지도 않겠죠." 장 형사는 한숨을 쉬었다. 잠시 눈살을 찌푸리면서 뭔가를 생각하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자네 애인이 있지?" 진규는 흠칫했다. "그게 뭐 어때서요?" "누나가 없을 때 그 집에 몰래 들어가다니, 어이없는 애인이더군. 그녀 는 자네보다 상당히 만만치 않은 것 같더군. 지금 어디에 있지?" "자기 아파트에 있겠죠." "자네도 그곳에 있었나? 그래서 찾아도 잡히지 않았군. 그러면 갈까?" 장은식 형사가 진규의 팔을 잡았다. 대단한 완력이어서 진규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어딜 가자는 거죠?" "그녀의 아파트. 그 여자의 이름은?" "미애라고 해요." "좋아,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군. 자, 가지." 장은식 형사에게 팔을 잡혀 있기 때문에 진규는 도저히 도망칠 수가 없 었다. 장 형사가 미애의 집으로 가지 않고 곧장 경찰서로 끌고 가는 건 아닐까. 사람을 치어 죽인 사실을 이미 알아 버린 것은 아닐까. 조금 걸어간 길옆에 장 형사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차는 곧 출발했 다. 그는 진규에게 길을 물어서 미애의 집까지 숨차게 달려갔다. "저 앞이에요." 장 형사가 차를 정지시키자, 진규가 앞서 달려가서 미애의 집 문을 두 드렸다. 그러나 이미 집을 나선 미애가 대답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발이 몹시 아픈데요." 진규는 문을 더 세게 쾅쾅 두드렸다. 여전한 침묵. 사태가 심상치 않음 을 알고 장 형사가 아파트 관리인에게 가서 미애의 집 문을 열게 했다. 진규로선 약간 불만이었지만 미애 역시 남의 집을 무단 침입했었으므로 형사의 행동을 제지할 수가 없었다. "상당히 좋은 집이군." 장 형사가 집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상하군. 발이 불편할 텐데 어디에 갔을까? 병원일까?" 장 형사가 세심히 집안을 둘러보고 나서는 뭔가 짐작되는 점이 있는 듯 싱긋 웃으며 말을 하였다. "어쩌면 발이 아프다는 것은 그녀가 단지 입으로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뿐일지도 모르겠군." 장 형사는 잠시 방안을 더 둘러보고 있다가, 마침내 부엌 찬장 서랍부 터 열어서 안을 샅샅이 조사하기 시작했다. "살기는 좋을 것 같군요." 진아가 거실 안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커튼은 그냥 둬. 설마 누가 들여다보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남의 눈에 띌 수도 있으니까." 진아는 그가 시키는 대로 커튼을 쳤다. 두껍고 무거운 커튼이어서 그 정도라면 불빛이 밖으로 새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부터 어떻게 하죠?" 진아가 오현석 옆에 앉으며 걱정스럽게 말하자 그가 짧게 한숨을 뱉으 며 좀 우습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글쎄, 나도 이런 것은 처음이라서." 그가 이렇게 나약한 말을 하는 것은 처음 들었다. 그가 갑자기 진아 몸 에 팔을 감았을 때,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가슴에 안겨 입술이 타는 듯한 키스에 몸을 맡겼다. "화나지 않아?" 얼굴을 떼고 그가 말했다. "나 스스로도 이상해요. 당신 같은 사람에게." "나는 오늘도 사람을 죽였어, 아주 간단하게. 내가 무섭지 않아?" 진아는 그가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어쩌면 그에게 그것을 묻는다는 게 실례가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실례라구? 유진아는 스 스로 자신의 생각에 웃었다. "어떤 사람이라도 속은 단순하고 순결하다는 것이 내 신념이에요." 그가 가볍게 웃으며 다시 그녀를 안고선 아주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봐, 진실을 말해 줄까?" "뭔데요?" "진아가 자고 있을 때, 뭔가를 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어." 진아는 잠시 시간을 두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 남자의 눈이 의외 로 참 맑은 것을 이제야 알았다. "어째서죠?" "자고 있을 때는 흥미없으니까. 그것뿐이야." 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째서 나에게 그것을 말하죠? 그렇게 생각하게 해둘 셈이었잖아요?" "그래. 하지만 그것으로 자포자기가 되어 날 따라오면 재미가 없으니 까." 진아는 웃었다. 이 이상한 남자의 이면에는 깜짝 놀랄 정도의 진실함이 숨어 있는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벌써 토요일이에요. 월요일까지는 이틀밖에 남지 않았어요. 출구가 보 이기는커녕 자꾸만 미로 속에 빠져들 뿐이군요." "이제 권기준의 딸에 관한 것은 내버려 둬. 우리들이 더 위험해." "그렇게는 안 돼요. 그것 때문에 이 지경에 빠졌으니까요." 진아의 말이 하도 단호해서 그는 더이상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다. 그 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좋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한번 정리해 볼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권기준의 딸이 유괴되어 월요일에는 죽는다는 것, 그것뿐이에요. 하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녀를 유괴하는 데 사용한 차는 엉뚱한 데서 발견되었는데 유괴 장소는. 그리고 그 건물에 남아 있던 사람의 흔적." "꼭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 "무슨 뜻이죠?" "밀수품을 숨겨 두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야." "밀수품이라고 했나요? 권기준이?" "물론! 나쁜 일에는 대개 다 손을 내밀고 있으니까. 빌딩 지하는 마약 을 숨겨 두기에 안성맞춤이지." "마약이라고 했나요?" "그래, 마약. 그는 우리나라에서 몇 째 안 가는 마약 밀수업자야." "하지만 어차피 월요일에는 그 빌딩을 부순다고 했어요!" "바로 그거야. 하승미라는 여자, 밤중에 그곳에 갔다가 마약을 건물 다 른 곳으로 운반하는 걸 봤을지도 몰라." "그것을 발견하고." "발견되면 당연히 없애지." 진아는 입술을 떨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운 얘기다. 이 하늘 아래 그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사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 더 무서웠다. "그러면 그곳에 사람이 있었던 것은 아니군요." 진아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 가지 의문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하필 하승미의 오빠는 왜 그 건물 앞에서 동생과 만나자고 약 속한 것일까요?" "그건 결코 우연이 아니야." 오현석의 눈이 빛났다. "이것은 아무래도 내 원래 계획보다 훨씬 복잡하게 되어 있는 것 같 군." "무슨 뜻이죠?" "그 녀석은 분명히 내 명령대로 권기준의 딸을 유괴했어. 하지만 녀석 의 목적은 그것뿐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 "마약이야, 마약!" 그가 크게 숨을 쉬었다. 그리곤 그가 갑자기 무릎을 치며 내뱉었다. "그렇군, 권기준의 딸이었군!" "뭐가요?" "권기준의 딸이 마약을 운반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예?" "이상할 것도 없지. 어쨌든 그 여자는 언제나 해외에 가 있어. 게다가 권기준으로서는 딸을 가장 신뢰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만약 잡히면." "안전한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그는 여기저기에 발이 넓은 상당한 명 사지. 겉으로는 말이야. 그런 권기준의 딸이니까 세관에 잡히지 않도록 들고 오는 것은 간단할지도 모르지." "그러면 하승미의 오빠가 그것을 알고." "권기준은 딸이 유괴되었을 때, 그것이 자신의 부하 소행이 아니라 자 기와 대항하고 있는 조직의 짓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분명히 부하의 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겠죠." "누군가 권기준의 딸과 마약을 교환 조건으로 제시한 쪽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나말고 또다른 누군가가 죽은 하승준에게 권기준의 딸 을 유괴하자고 유혹했을지도 모르겠어. 딸이든 마약이든 어느 한쪽을 미 리 가로채고서 다른 하나와 교환 조건으로 하면, 그것은 양쪽 다 10억 이 상의 가치가 있겠지." "그것에 하승준이 넘어가서 양다리를 걸치고." "그 녀석도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만큼 어리석은 녀석은 아니었던 것 같군." "그렇다면 그에게 배신당한 거예요?" "세상에는 나보다 더 나쁜 녀석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 순간 오현석의 몸이 굳어졌다. "이봐! 불을 꺼! 차소리야!" 차가 별장 앞에서 멈추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진아의 심장도 멈추는 것 같았다. 진아는 황급히 거실의 불을 껐다. "어떻게 하죠?" "숨어!" "어디에요?"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소파 아래로 들어가! 빨리!" 커다란 소파였기 때문에 안쪽으로 들어가면 발견되지는 않을 것 같았 다. 거의 동시에 오현석도 다른 소파 아래로 들어간 것 같았다. 곧 불이 켜졌다. "커튼을 열어 둬." 이것은 분명히 권기준의 목소리다! 진아는 식은땀이 솟아나는 것을 느 꼈다. 집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적어도 4,5명은 된 것 같았다. "여기에서 하는 겁니까?" "그래. 여기가 가장 좋아." "다른 방에서." "아니야, 여기가 좋아." "알겠습니다." "아직 시간이 있지만 준비만은 해둬." "예." "열렬히 환영해 주지." 권기준은 그렇게 말하고 짧게 웃었다. 진아는 한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딸이 유괴되었다고 하는데도 이런 식으로 웃을 수 있다니! 소파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진아가 엎드려 있는 곳 바로 윗자리 같았다. 누군가의 발이 검은 구두로 보이고 있었다. 꿀꺽 침을 삼켰는데, 그 소 리만으로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아서 그녀는 제풀에 깜짝 놀랐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아니, 누군가 있다! 어서 나와!" 진규는 장은식 형사가 미애의 속옷을 넣는 서랍까지 조사하는 것을 보 곤, 더이상 참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참견을 했다. "이봐요, 그런 곳까지 조사하는 거예요?" 장 형사는 태연했다. "뭘 숨기려면, 뒤져서는 안 되는 곳에 숨기지." "무엇을 찾고 있어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 무엇일까. 그걸 찾고 있는 거야." 장 형사는 힐끗 진규를 돌아보더니 서랍 안에 깔아 놓은 종이 아래로 손을 밀어넣었다. "뭔가 있어." 장 형사는 손으로 더듬어 봉투를 꺼냈다. "뭐죠?" 진규가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에 그저 평범한 흰 봉투가 들어왔다. 봉 투 안을 흘끔 본 장 형사가 싱긋 웃으면서 그것을 진규에게 건네 주었다. "자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진규는 두꺼운 봉투를 들고, 안에 있는 것을 꺼내다가 그만 눈이 휘둥 그래졌다. 만 원짜리 돈다발이었다. 이것이 얼마일까. 전부 새돈이었다. "알고 있었나?" "전혀. 그앤 늘 돈이 없다고만 말하고 있었으니까." "완전히 새돈이야. 100장 정도는 될 것 같군." "어떻게 된 거죠?" "그건 나도 모르지." 장 형사는 가볍게 웃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미애가 정체를 모르는 돈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게다가 발을 삐었다는 거짓말까지 보태면서." "왜 나에게 그런 거짓말을 하죠?" 장 형사는 아무 대꾸도 없이 봉투를 진규에게서 빼앗아 서랍 안에 원래 대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조사당한 것을 모르게 서랍 안을 익숙한 손놀림 으로 정리했다. "자, 그럼 이만 나가지." 그가 굳은 얼굴로 진규를 재촉했다. "어서 나가자구. 미애가 돌아오면 곤란하잖아." 장 형사는 관리인에게 가서 열쇠를 돌려 주고 만 원짜리 석 장으로 입 막음을 하곤 진규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5월 10일 20회가 연재됩니다. 번호:21/22 등록일시:95/05/10 15:59 길이:244줄 제 목 : 제6장 토요일 <지명수배> -20- ** "나와!" 권기준의 부하 하나가 버럭 소리를 치는 바람에 진아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발견되었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아무도 진아 쪽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 다. 그러면 오현석이 발견된 것일까? 그러나 분위기가 아무래도 다른 것 같았다. "이거 일찍 오셨군." 권기준이 유쾌한 듯한 목소리로 어딘가를 향해 말했다. "곤란하게 되는 것은 싫으니까." 굵은 남자 목소리가 집안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이 집 어딘가에 제3자 가 또 있었다는 것일까. 진아는 아무것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쪽도 그럴 생각이 아니었나?" 권기준이 여전히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려고 생각했다면 할 수 있었지." "그런데 왜 하지 않았지." "경찰이 귀찮으니까." "좋아, 자 그러면 어떻게 하지?" "자리를 옮기지. 여기는 당신의 본거지니까." "좋아." 권기준이 간단히 말했다. "야! 모두 나와. 나가지." 진아는 살짝 숨을 쉬었다. 사람의 기척이 없어질 때까지 잠시 걸렸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마저도 그녀에게는 너무나 길고 긴 시간같이 생각되 었다. "이제 괜찮아." 오현석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므로 그녀는 소파 아래에서 나왔다.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어요." "나는 진아가 발견되었다고 생각했어." "어떻게 할 생각이었어요, 만약 내가 발견됐다면?" "그냥 가만히 있었겠지." 안심한 탓인지, 그녀는 그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웃고 있을 때가 아닌데도 말이다. "그 사람들은 또 누구예요?" "권기준과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이지. 박일수()라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악당이야." "그 두 사람이 무슨 일로 만나는 걸까요." "악당끼리는 가끔씩 서로의 필요에 따라 경쟁자에서 곧바로 협력자가 되기도 하지. 뭔가 있기는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알 수는 없고. 하지 만 지금은 다른 것이 걱정되는군." "뭐죠?" "박일수가 우리보다 앞에 와서 여기 어딘가에 숨어 있었던 거야. 아마 부하도 데리고 와 있었겠지." "그러면 우리들이 왔을 땐 이미 여기에 있었던 거군요?" "그렇지. 녀석은 우리들을 알고 있었을 거야. 그런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것이 아무래도 이상해." "일부러 잠자코 있었을까요?" "그래. 뭔가 꿍꿍이속이 있었던 거야." 그런데 그때였다. 그들 사이로 한 사내의 거친 음성이 끼어들었다. 오 현석의 이름을 낮게 불렀던 것이다. 권기준의 부하였다. 언제 들어온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여기 계속 남아 있었던 걸까? 그의 눈은 예민하게 오현석을 훑으면서, 입으로는 싱긋 웃었다. 그 차 가운 미소가 어찌나 두렵게 느껴지던지 하마터면 그녀는 그 자리에 주저 앉을 뻔하였다. 그가 잠시 오현석을 더 바라보다가 갑자기 허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가 권총을 뽑아든 순간, 오현석의 칼이 그보다 더 빨랐다. 작은 칼이 남자 손을 가르고, 권총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두 사람 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하나가 되어 마룻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진아가 권총을 집어든 것은 그 직후였다. 바닥을 구르며 서로 엉켜 있 는 두 남자. 진아는 그들을 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어머, 왔어?" 미애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응" 진규는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나타내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원래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있는 진규가 아니었다. "누나에 관한 것, 뭔가 알았어?" 미애가 물었다. "아니, 별로." "걱정이네." "응." "틀림없이 뭔가 잘못된 걸 거야." "그럴 거야." 미애가 자기 발을 가리며 웃어보였다. "이제 상당히 좋아졌어. 조금만 있으면 괜찮을 거야." 진규는 반쯤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란 정말 무서운 동물이군. 진규는 생각했다. 하지만 진규 때문이라 고 생각하고, 미애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가면을 벗길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진규에게는 그러는 편이 더 좋았다. "괜찮아?" 진아가 현석의 물음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얼굴이 백지처 럼 창백해지고 몸이 떨리고 있었다. 남자는 죽어 있었다. 진아가 쏜 총알 이 그의 허리를 관통했던 것이다. "고마워." "그만둬요!" 진아는 외치듯이 말하고 거실 소파에 무너지듯이 앉았다. 진아의 눈에 서 눈물이 떨어졌다. 사람을 쏘아 버린 것이다. 총 때문에 죽은 것이 아 니고 오현석의 칼이 치명상이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도운 것이다. 그 쇼크는 컸다. "위에 방이 있어. 침대에서 조금 자면 괜찮을 거야." 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2층으로 올라가자, 현석은 문을 조금 열었다. 하얀 시트가 덮여 있는, 넉넉히 더블 정도는 될 것 같은 넓은 침대가 있 었다. "자, 누워."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진아는 침대에 누웠다. "자지 않아도 돼. 다만 눈을 감고 있어." "당신은?" "시체를 처리해야지." "지금요?" "또 누군가 올지 모르잖아?" "그렇군요." 진아가 방을 나가려고 하는 그에게 급한 듯 말했다. "저, 잠깐만요. 이쪽으로 와요." "무슨 일이야?" "나를 안아 줘요." 진아는 가만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침대에 누운 진아를 머리에 서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진심이야?" "그런 농담을 할 기분이 아니에요." 진아가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부드러운, 마치 여자의 손 같은 섬세한 느낌을 주었다. 여태 행동을 같이 해왔지만 이같은 순간 의 그런 부드러운 느낌은 그녀에게 새로운 당혹감을 안겨 주었다. "왜요?" 우뚝 선 채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오현석에게 진아가 말했다. "일이 있어." 그는 진아의 손을 놓았다. 그녀는 뺨을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 다. 자기가 안아 달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거절당한 것이다. 나를 안 아줘요. 자신의 말이 산울림과 같이 돌아왔다. 진아는 그에게 재빨리 등을 향하고 몸을 움츠렸다. 온몸이 뜨거워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극히 평범한 여자였던 자신이 끊임없이 변해가 는, 그러한 무서움에 몸이 떨렸다. 몽유병자가 잠자면서 방황하다가 문득 눈을 뜨면 깎아지른 절벽 끝에 와 있는 것을 깨닫는, 그런 절망적인 기분 이었다. 그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진아는 똑바로 누워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았 다. 그것은 자신을 삼키려고 하고 있는, 끝없는 수렁과 같이 보였다. 일 어나서 진아는 머리를 흔들었다. 온몸이 뜨겁게 생각되는 것은 아마 지금 격앙된 기분의 열기 탓일 것이 다. 창문의 커튼을 열었다. 창은 뒤쪽 숲을 마주하고 있었다. 벌써 황혼 이 질 무렵인지 어두워지기 시작해서 숲속은 이미 밤과 같이 어두웠다. 문득 진규를 생각했다. 미애라는 여자 집에 있는 것일까? 자신은 이미 빠져 나갈 수 없을 정도의 수렁 속에 잠겨 버렸지만 적어도. 진규만 은 이런 곳으로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갑자기 또 눈물이 솟아올랐다. "이제 괜찮아?" 오현석이 물었다. 진아는 몸을 추스르기 어려울 만큼 무력감에 빠져 있 어 그의 물음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찌된 일인지 아직 목소리만 은 또렷했다. "예, 아무렇지도 않아요." 두 사람은 권기준의 별장 이층에서 현석이 사온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조금 전에는 상당히 지쳐 있었지?" "미안해요." 진아가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당신도 상당히 좋은 배짱이야. 이런 지경에 처해 히스테리도 부리지 않고." "앞으로 부릴지도 몰라요." 진아는 한숨을 쉬었다. "있잖아요, 왜죠?" "무슨 이야기지?" "조금 전에 왜 나를 안아 주지 않았죠?" 진아의 질문에 그가 소리없이 웃기만 했다. 왜죠? 다시 한번 묻자, 그 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시선은 그녀를 벗어나 창밖의 어둠을 향하고 있었 다. "당신은 나에게 빠지면 안 돼. 내가 힘으로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당 신 스스로 몸을 맡기는 것은 원하지 않아." "꽤나 도덕적이군요." "비웃을 생각이야? 뭐, 그럴지도 몰라.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면 얼마 든지 할 수 있지만." "당신도 손을 씻으면 좋을 텐데." "너무 늦었어. 사람을 몇이나 죽였을까? 살인은 중독 같은 것이야. 그 만둘 수가 없어." "조금도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그러니까 더 무서운 거야." 그가 갑자기 일어서서 머리를 몇 번 흔들곤 화제를 바꾸었다. "앞으로의 일을 정해야겠어." "앞으로?" "이제 그만 각각 헤어지지." 진아는 당황했다. 이 시간, 이런 경우에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 유를 알 수 없었다. "나와 함께 있으면 제대로 되지 않아. 나는 자업자득이지만, 당신은 말 려들어서 손해만 볼 뿐이야."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뭐예요?" 진아는 쓰디쓴 웃음을 머금었다. "더 일찍이라면 몰라도 지금에 와서 각각 헤어지자고 말하면 내가 갈 곳은 어디죠?" "그러면 따라올 건가?" "어쩔 수 없어요!" 오현석이 이상한 웃음을 지으며 한참 그녀를 쳐다보다가 몸을 구부려서 진아에게 키스했다. 그때였다. "이봐, 오현석!" 별장 밖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오현석은 재빨리 불 을 껐다. "권기준일까요?" "아니야. 저 목소리는." "오현석! 나와! 안에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조금 전 권기준과 이야기했던 사내군요. 박일수라는." "맞아. 무슨 일이지, 젠장." 박일수의 음성이 다시 한번 암흑의 허공에 퍼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 며 낮게 내뱉었다. "좋아, 그러면 가지. 어차피 상대도 알고 있으니까." "괜찮을까요?" 진아가 그의 팔을 잡고 말했다. "여기에 있어도 어쩔 수 없어." 진아는 공포에 질려 손을 떨고 있는데, 그는 어느새 가벼운 표정이 되 어 있었다. "당신은 여기에 있어. 우선 내가 이야기를 해보지." "싫어요. 어차피 마찬가지잖아요. 함께 갈래요." 두 사람이 나갔을 때, 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어디에 있는 것일 까? 그렇게 생각했을 때 눈부신 불빛이 두 사람의 정면에서 비추었다. 눈 이 부셔서 진아는 얼른 얼굴을 돌렸다. "오현석, 무기를 버리지." 박일수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공기를 헤집고 나왔고, 그가 그의 말대 로 순순히 권총과 칼을 땅바닥에 던졌다. "거기에 있는 건 함께 수배되고 있는 여잔가?" "맞습니다." "무기는?" "이 여자는 다만 말려들었을 뿐이오." 불이 꺼졌다. 별장문에서 새는 불빛을 받아 진아의 눈에 남자 한 사람이 희미하게 보 였다. 권기준과는 상당히 다른 날씬한 체격의 초로의 사내였다. 환한 표 정, 단정하게 차려입은 양복. 악당치고는 꽤 인텔리 같았다. "오랜만이군, 오현석." 그 남자는 이렇게 말하곤 진아 쪽으로 얼굴을 향했다. "당신이 유진아인가?" 진아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박일수라고 하지. 오현석 군과 함께 내 집에 초대할까 하는데." "초대받는 것도 모처럼이군. 좋아요, 초대에 응하죠." 오현석은 농담을 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유진아는 직감적으로 그가 상당 히 긴장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남자가 권기준의 적인가? 도대체 우리들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 것일까? 두 사람은 차 한 대에 올라탔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적어도 다섯 대의 차가 별장 앞에 세워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현석과 진아가 올라탄 차는 세 번째로 출발해서 이 미 완전히 어둠에 갇힌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각각 한 사람씩, 뒷좌석에는 현석과 진아 두 사람뿐 이었다. 진아는 살짝 오현석 쪽으로 눈을 향했다. 그는 무표정하게 창밖을 보고 있었지만 진아의 시선을 느꼈는지 얼굴을 돌리고 조용히 미소지었다. 진아는 무의식중에 그의 손을 더듬었다. 지금부터 어떻게 되는 것인지 진아로서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의 부드럽고도 따뜻한 손이 닿았다. 진아가 꼭 잡자, 뭔가가 그의 손에서 진아의 손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 다. 진아는 깜짝 놀랐다. 만진 것만으로 그것이 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작게 접힌 칼이었다. 도대체 어디에 숨겼던 것일까? 진아의 손안에 칼을 넘기고 그의 손이 소리없이 떨어졌다. 진아는 살짝 앞에 앉은 두 사람의 모습을 살폈다. 눈치채지는 않은 것 같았다. 진아는 손으로 소리없이 그 칼을 감쌌다. 5월 12일 21회가 연재됩니다. 번호:22/22 등록일시:95/05/12 16:07 길이:234줄 제 목 : 제6장 토요일 <지명수배> -21- ** "제기랄, 언제쯤 나올 거지?" 진규는 화가 나서 무턱대고 중얼거렸다. 몰래 들은 전화로는 12시에 누 군가를 만나기로 하는 것 같았는데 벌써 11시 반을 지난 것이다. 미애의 집안에 들어간 진규는 샤워를 하는 척하고 살짝 문을 연 채로 미애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미애는 진규가 욕실로 들어가 자마자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누군가와 만나기로 약속을 하는 것이었다. 오늘밤 12시에. 그래서 진규는 밖에 볼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는 서둘러 집을 나와서 이렇게 그녀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를 미행할 작정 이었던 것이다. 예정이 바뀐 것일까? 어쨌든 그는 밤을 새우더라도 아파트 앞에 계속 서 있을 예정이었다. 다리가 무겁고 나른하다. 어딘가에 앉아 있고 싶었 다. 시간이 거의 되어 가는데도 미애는 아직 외출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 었다. 그렇게 15분 정도 지났을 때, 마침내 미애의 방에 불이 커졌다. 진규는 긴장을 하며 잽싸게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잠시 후에 그녀가 활달한 걸음걸이로 밖으로 나와 길거리 어느 쪽을 쏘아보았다. 택시라도 잡고 있는 것일까? 그때가 되어서야 진규는 자신에게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미애를 어떻게 미행하면 좋을까? 그녀는 전화 로 콜택시를 부른 것 같았다. 얼마 있자니, 빈 차가 아파트 앞에 멈추었 다. 진규는 이를 갈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진규 앞에 한 대의 차가 와서 거짓말처럼 우뚝 멈추었다. "타." 얼굴을 내민 것은 장 형사였다. "잘 됐어요." 진규는 서둘러 그 차에 올라탔다. "저 택시인가?" "그래요. 12시에 누군가와 만날 예정이에요." "좋아, 미행하지." 장 형사는 미애가 탄 택시를 잽싸게 뒤쫓아가기 시작했다. "어째서 내게 알리지 않았지?" 장 형사가 좀 넓은 거리로 나오자 진규에게 힐난하듯 물었다. "저. 동전이 없어서요." 궁색하고도 괴로운 변명이었다. 사실 진규는 혼자서 이 일을 해결하고 싶었던 것이다. 장 형사는 그의 유치한 변명에 잠깐 웃고는 말 상대가 되 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더이상 추궁하지는 않았다. "어디로 가는 걸까요?" "모르지,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멀지는 않을 거야. 따라가면 알 수 있 어." 진아는 좁은 방안을 빙 돌아보았다. 여기는 박일수의 집이다. 진아는 혼자 여기에 갇혀 있었다. 함께 온 오현석은 박일수와 벌써 두 시간이 넘 도록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진아는 짐작 도 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오현석이 살해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반쯤 죽음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진아는 가슴이 조여드는 듯한 기분이었 다. 진아는 초조하게 좁은 방안을 걸어다녔다. 열쇠가 잠겨진 형무소의 독 방이 이럴까. 그녀는 살풍경한 방을 초조하게 쳐다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 겼다. 얼마나 더 지났을까. 갑자기 열쇠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현 석이 들어오고 있었다. "괜찮아요?" 진아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걱정해 줬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그가 태연히 미소를 지었다. 뒤에서 문이 닫히고 잠겼다. "어떻게 되었어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어." "지금부터 어떻게 되는 거죠?" "뭐, 어떻게 되겠지." 그가 이렇게 말을 하곤 진아를 갑자기 안았다. 진아는 깜짝 놀랐으나 그래도 거부하지 않고 그에게 안겨 있었다. 그가 진아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이기 시작한 것은 그 직후였다. "어딘가에 도청 마이크가 있을 거야. 찾을 테니까, 그 사이에 놈들이 들어도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 진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일에 말려들어 성가시겠지?" 그가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에요. 이제부터 난 어떻게 되는 거죠?" "글쎄. 나도 자유롭게 되지는 않을 테니까." 그는 방안을 세심하게 조사하기 시작했다. 스탠드, 의자, 테이블, 침대 . 재빠르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구석구석 뒤지고 살폈다. "나도 직장이 있고 동생도 있어요. 이렇게 되어서는." "애인도 있겠지?" "그래요. 틀림없이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 그는 침대 밑으로 들어갔다. "당신은 내 애인에 비하면 훨씬 떨어져요. 그 사람은 다정하고 언제나 나를 따뜻이 생각해 주니까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진아는 비로소 알았 다. 자연스럽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어색하게 되는 것이다. 마침내 그가 침대 밑으로 기어 나왔다. 손에 성냥갑과도 같은 작은 상 자를 쥐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침대 모포로 빙빙 싸 손아귀로 꽉 쥐고는 후 하고 숨을 쉬었다. "이것으로 됐어." "그것이 도청 마이크예요?" "이건 구식이야. 박일수 녀석은 구두쇠라서 아직도 이따위 고물을 쓰는 거라구. 신형은 아주 작아." "어떻게 하죠?" "도망쳐야 해." "여기에서요?" "녀석은 뭔가 오해를 하고 있어." "무슨 오해를?" "내가 권기준의 물건을 훔쳤기 때문에 쫓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물건. 그 밀수품? 마약을요?" "그래. 우리가 어딘가에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하는 거죠?" "장소를 가르쳐 주지 않으면 당신을 죽이겠다더군." 진아는 몸을 떨었다. 그가 진아의 어깨를 안고는 소리없이 웃으며 말했 다. "걱정하지 마. 어떻게 해서든 빠져 나갈 거야." "여기는 어디죠?" 차가 정지하자, 진규는 특이하게 생긴 그 건물을 바라보고 당황한 듯이 말했다. 미애가 탄 택시를 미행하기를 약 30분. 미애가 도착한 곳은 진규에게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강남의 어느 주택가로 한눈에 보기에도 굉장한 사 람들이 살고 있을 듯싶은 동네였다. 하지만 주변에 우뚝 솟은 주택들은 그다지 큰 건물들이 아니었다. 거의가 1층, 2층 정도의 높이였는데 진규 를 당혹시킨 것은 건물들보다 오히려 그 집들을 에워싸고 있는 우람하고 도 높고 긴 담이었다. "돈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야." 장 형사가 엔진을 끄며 말했다. 미애는 택시에서 내리자 이미 어떤 집으로 바람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미행하느라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사라진 그녀가 어느 집 으로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느 집으로 갔을까?" 장 형사는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이봐, 자네는 여기에서 기다려. 만약 엇갈려서 미애가 나오는 일이 있 으면 안 되니까." 진규도 그러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너무 늦으면 행동을 취해 줘." 장 형사는 이렇게 말을 하고는 어느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진규는 차 안에서 장 형사가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나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하고 다리를 쭉 뻗었다. 미애가 틀림없이 나를 비웃고 있겠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줄 거야. 진규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골목 안으로 들어간 장 형사가 나오지 않으면서 그의 각오는 차 츰 흔들리기 시작했다. 차안의 시계가 가리키는 바 그대로 30분 가까이 지나도 그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너무 늦으면 행동을 취하라구?" 그렇게 막연하게 말하는 것이 진규에게는 가장 질색이었다. 20분이라든 가 30분이라든가 확실히 말해 주면 좋은데 말이다. 시간은 또 지나가서 이미 장 형사가 사라진 지 한 시간 가까이 되어 버리고 있었다. 이 정도의 골목은 한 바퀴 빙 도는데 10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투덜 거리면서 진규는 차에서 나왔다. 그는 어슬렁어슬렁 골목 입구로 들어갔 다.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멀리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이런 곳은 언제나 저런 평화스런 물소리가 나는 법인가. 진규는 약간 겁에 질리긴 했으나 아예 될 대로 되라는 식이 되어 장 형 사가 들어간 골목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었다. 골목 안쪽 첫째 집이 활짝 문이 열린 채로 안채가 훤히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장 형사가 어느 집으로 들어갔다면 틀림없이 이곳이다, 그는 그렇게 굳 게 믿었다.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틈도 없이 그가 그 집의 현관으로 들어서니, 빨간 카펫이 깔린 복도가 똑바로 뻗어 있었다. 마치 호텔 같다고 진규는 생각했다. 안으로 들어와 보니 집이 생각보다 훨씬 컸던 것이다. 푹신한 카펫 덕분에 발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다행이 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복도를 천천히 걸어갔다. 조용했지만, 그 조용함 때문에 어떤 문앞에 다가서자 희미하게 말소리와 음악 등이 새어나오고 있었는데 말소리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형사,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복도가 끝나는 위치까지 왔을 때 마침 문이 하나 열렸다. 진규는 당황 해서 몸을 옆으로 피했다. 그런데 거기서 나온 것은 뜻밖에도 미애와 어 떤 낯선 남자였다. "그러면 뒤를 부탁하지." 남자가 말을 하자, 미애가 그의 품에 안길 듯이 다가서며 말을 했다. "혼자는 쓸쓸하니까 빨리 돌아와야 해요." 남자가 가볍게 손을 흔들곤, 반대편 계단 쪽으로 걸어가자 미애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고 문을 닫았다. "잘됐어." 진규가 중얼거렸다. 미애 혼자인가? 그 남자가 뭔가 잊어버려서 다시 돌아오면 안 된다. 진규는 조금 기다리고 나서 복도로 나갔다. 미애 혼자라면 무섭지도 않다. 모든 것을 자백하게 해줄 테다! 단단히 벼르고 진규는 문앞에 섰다. 그는 누가 듣거나 말거나 주먹으로 문을 탕 탕 두드리기 시작했다. "누구예요?" 미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하면 열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진규는 잠자코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예, 잠깐 기다려요." 문이 열리자마자, 진규는 문을 확 당기며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갑자기 후두부에 엄청나게 무거운 충격이 가해져 진규는 그대로 무너지듯이 쓰러지고 말았다. "어떻게 해서 빠져 나갈 생각이에요?" 진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이크를 모포로 싸두었다고는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작아지는 것이었다. "박일수 그 녀석만 옆에 와 준다면 일은 간단한데. 그 칼은 어떻게 했 지?" "여기 있어요." 진아가 치마에 손을 대었다. "나에게 줘." 진아는 치마를 걷고 팬티스타킹 안에 끼워 두었던 칼을 꺼냈다. "괜찮아요?" "잘되겠지." 오현석이 칼을 윗옷 소매 속으로 쑥 밀어넣었는데 이상하게 밑으로 떨 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이거? 소매 안쪽에 작은 주머니가 있어. 그곳에 넣어 둔 거야." 진아는 기가 막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옷, 직접 만들어요?" "그 정도는 내가 만든 거야." "바늘과 실로?" "내겐 손재주가 있어. 언제 단추 떨어지면 달아 줄게." 진아는 오현석이 바느질을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 마이크를 원래대로 해둘까?" 오현석이 모포에 싸여 있던 마이크를 꺼내곤 다시 침대 밑으로 들어갔 다. "나, 어떻게 돼죠? 아무것도 모르는데 살해당하는 것은 싫어요." 진아가 또다시 의도적으로 엉뚱한 말을 했을 때, 갑자기 그의 손가락이 진아 입술에 닿았다. 잠자코 있으라는 것이다. 발소리가 다가오고 있었 다. 문이 열리고 박일수의 부하 두 사람이 들어왔다. "보스가 여자를 데리고 오라고 했어." "나도 가지." 그가 일어서자, 한 사람이 그의 팔을 잡았다. 상대의 팔을 잡는다고 하 는 것은 자신도 그 팔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오른손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움직인 것은 거의 같은 순간이었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나고, 사내는 턱에 일격을 맞고 그대로 쓰러졌 다. 다른 한 사람이 양복 안으로 손을 넣었다. 진아가 무의식적으로 뒤에 서 달려들어 그의 팔을 후려쳤다. 남자가 움찔했을 때는, 이미 현석의 칼 이 그의 목에 대어져 있었다. 그가 창백한 얼굴로 내뱉었다. "알겠어. 죽이지 마." "나는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취미야. 내 취미생활을 방해하지 마, 알겠어?" 남자의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얌전히 있어." 현석은 남자의 권총을 빼앗고는 느닷없이 그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사내는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몸을 웅크렸다. 그의 구두가 사내 의 턱을 걷어찬 순간 그는 뒤로 벌렁 나자빠지곤 다시는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이것으로 두 사람 모두 잠시 동안은 얌전히 있겠지." 진아는 몸이 떨리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오현석은 칼을 소매 속으 로 집어 넣고 권총을 손에 들면서 떨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 녀석의 권총을 집어." 5월 17일 22회가 연재됩니다. 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컴5 번호:23/23 등록일시:95/05/17 18:46 길이:200줄 제 목 : 제6장 토요일 <지명수배> -22- ** 진규는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손으로 방향을 더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눈이 보이지 않는 걸까? 그렇지 않 으면 한밤중일까? 그러다 조금씩 어둠은 회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어머, 정신이 들었어?" 미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애는 마치 귀족 부인이라도 된 듯이 소파에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 진규는 바닥에 쓰러진 채, 처참히 미애를 올려다 보았다. "야! 너." 진규는 치를 떨며 그녀에게 달려들기 위해 일어서려고 했다. 거의 동시 에 남자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가만히 있어." 튼튼하고 키가 큰 어떤 남자가 무표정하게 진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요, 당신은?" "입 닥치고 있어!" 남자의 목소리는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기분이 더 나빴다. 도저히 이 남자에게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진규는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진규 는 머리가 깨어지는 듯한 고통에 신음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일어났다. 미 애가 웃으면서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하도 누나 걱정을 하길래, 그래서 오게 한거야." "오게 한 거라구?" "네가 전화를 엿듣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러면. 여기에 오게 하기 위해서?" 그때 문이 열리고 머리가 벗겨지고 뚱뚱한 중년사내가 들어왔다. 눈매 가 차갑고 날카로운 것이 몹시 기분나쁜 인상이었다. "내가 바로 권기준이다." "권기준?" 어딘가에서 들은 이름이라고 진규는 생각했다. 누구지? 간신히 그 이름 의 존재를 떠올리고 진규가 소리쳤다. "그렇군, 그 오현석이라는 녀석의 두목이군." 권기준은 싱긋 웃으며 한동안 진규를 바라보다가 아주 느린 동작으로 소파에 앉았다. "나를 어떻게 하려는 거요?" "전당포에 가본 적이 있나?" "뭐라구요?" "너는 그 전당포의 전당물이야." "뭐라구요?" "오현석은 나를 배신했지." 권기준이 천천히 여송연을 물고, 눈살을 심하게 찌푸리면서 말을 뱉었 다. "그리고 네 누나도 한패야." "아니오! 누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 "그런 여자가 아니라구? 이미 네 누나는 엄청난 죄를 지었어. 네가 차 로 치어 죽인 남자를 호수에 버렸지. 그리고 자기가 그 죄를 대신 맡았 고." 진규는 입을 다물었다. 뺑소니사고. 그것만으로도 이미 진규는 감옥에 가고도 남을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 훌륭한 일이야." 권기준이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손수 돌보아 기른 부하가 배반하는 요즘으로서는, 정말로 보기드문 형 제애야." "나를 어떻게 할 셈이오? 아니, 우리 누나를 어떻게 할 셈이죠?" "자네는 전당물이라고 했지?" 권기준이 빙긋 웃었다. 그 순간, 평범하게 뵈는 중년남자가 갑자기 야 수와 같은 잔혹감을 띤 얼굴로 변해서 진규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 다. "자네 누나에게 볼일이 있어. 자네는 그것을 위한 미끼 같은 것이지." "누나를. 죽이지 말아요." "난 사람을 죽이진 않아." 권기준이 천천히 일어섰다. "소중하게 대접해 주지. 그 다음은 모르지만." 권기준이 경호원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끌려서 일어선 진규는 저항할 힘도 잃어버리고 있었다.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미애를 노려보는 것이 기껏해야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날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 나는 돈이 더 좋은 것뿐이야." 미애가 진규에게 슬쩍 윙크를 보내며 말했다. "세상에는 돈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고 믿는 바보도 있지." 권기준이 그렇게 미애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는 유쾌한 듯이 웃었다. 권기준과 미애가 가 버리자, 경호원 하나가 진규를 침실로 데려가 침대 부근에 앉히곤 주머니에서 수갑을 꺼내서 침대다리와 진규의 오른손을 묶 었다. "도망치려면 침대를 안고 가." 경호원이 싱긋 웃으며 나가 버렸다. "제기랄!" 진규는 허공에다 대고 이렇게 허무하게 내뱉었다. 이러한 건물에서는 큰 소리를 내도 밖에서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들린다고 해도 또 얻어맞는 것이 고작이고 도움을 기대할 수도 없을 것이다. 진규는 수갑을 바라보다, 문득 장 형사를 생각했다. 도대체 그 녀석은 어떻게 된 것일까? 원인은 그 녀석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집으로 들어온 데 있다. "그가 정말 형사라면 구하러 올 텐데." 진규는 중얼중얼하면서 수갑을 흔들었다 누나에게 무엇을 시킬 생각일 까? 그제서야 진규는 오직 누나만이 걱정이 되었다. "출구는 알고 있어요?" 진아는 오현석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복도는 조용하고 사람의 기척도 없어서 오히려 더 무서웠다. 그가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고는 좀 미덥 지 않게 말했다. "현관으로 나갈 수는 없겠지." "뒷문이 있어요?" "어쩌면 부엌으로 나갈 수 있을 거야." 권기준의 저택도 상당히 넓지만 이곳은 한층 더 넓었다. 복도 한모퉁이 에 서서 잠시 이렇게 갈 길을 의논하고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사람 목 소리가 나서 그들은 흠칫 뒤돌아보았다. 복도 모퉁이 저쪽에서 말소리가 났던 것이다. "박일수가 보낸 녀석들이 늦으니까 가보고 오라고 했겠지. 자, 서둘 러!" 아무래도 오현석의 예감은 적중한 것 같았다. 막다른 문을 살짝 열자 넓은 부엌이었다. 물론 불은 꺼져 있었다. 창을 통해 희미한 불빛이 들어 와서 주방기구들이 밤하늘의 은빛 별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조심해." 오현석의 뒤에 붙어서, 그녀는 조심스럽게 선반 사이를 빠져나갔다. 멀 리서 누군가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동료 두 명이 처참히 당한 걸 발견한 모양이었다. "발견되었군." 그는 조금도 당황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진아는 등 뒤를 신경쓰면서 걸 어갔다. 누군가 그녀를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실수였다. 자꾸만 손에 뭔가가 닿는 것 같아서 당황해서 손을 빼자, 냄비가 굉장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던 것이다. 그것뿐이 아 니었다. 뜻밖의 소리에 너무 놀라, 갑자기 물러선 탓으로 그녀는 뒤쪽 선 반에 완전히 부딪쳐 버리고 말았다. 더욱 큰 소리가 빈 공간에 맹렬한 메 아리를 퍼뜨리며 그들이 여기에 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빨리 와!" 오현석이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괜찮으니까 빨리 와." 무너지는 식기, 죽은 사람이라도 눈을 뜰 것 같은 엄청난 소리가 계속 되고 있었다. 뒷문을 열자, 좁은 길이 높은 담 안쪽으로 빙 둘러 계속되고 있었다. 담은 너무 높아 도저히 기어오를 수가 없었다. 좁은 길을 빠져 나가자 차 고 같은 건물 뒤쪽으로 나오게 되었다. "차가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는데." 그 건물의 문을 열고 두 사람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거기, 자동차가 두 대나 나란히 있었다. "잘됐군!" 현석은 주머니에서 쇠꼬챙이를 꺼내서는 잽싼 동작으로 차문을 열기 시 작했다. 그때 진아가 낮게 소리쳤다. "누가 와요!" 좁은 길을 뛰어오는 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한두 명의 발 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진규는 집안이 이상하게 조용해졌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없는 것일까? 그럴 리는 없을 텐데도 집안이 너무 조용했다. "이봐!" 소리를 질러 봐도 대답이 없었다. 아무래도 경호원도 어딘가로 간 것 같았다. 감히 도망치지는 못할 것이라고 안심하고 있는 것이리라. 분명히 진규는 수갑을 스스로 벗길 수 있을 정도로 재주가 좋지는 않 다. 그렇다고 해서 이 침대를 가지고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괴력도 없 다. 그래서 권기준은 부하들조차 배치하지 않고 안심하고 있는 것이리라. 침대는 바닥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었다. 나사도 꽉 조여져 있어 천하장 사가 와도 들어올릴 수가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문득 진규의 눈에 들어 오는 것이 있었다. 화물운송회사의 운전기사로 일하면서 트럭으로 짐을 운반할 때, 바로 이러한 모양과 똑같은 침대를 옮겼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운임밖에 받지 않았는데, 상대가 여자 혼자로 도저히 조립할 수 없다고 사정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조립해 준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이것 을 분명히, 정확히 다루었었다. 보기에는 마치 하나로 된 것 같지만, 이 침대는 모든 것이 각각 떨어지도록 되어 있어서 처음에는 어느 것을 어떻 게 연결하는 것인지 고개를 갸우뚱했던 것이다. "조립." 이것도 그럴까? 진규는 일어나서 침대 다리 위쪽을 힘껏 비틀어 보았 다. 조금씩 움직이는 반응이 있다가 빙글 돌았다. "됐어." 진규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권기준도 설마 이 다리가 세 조각으 로 나뉘어지는 것인 줄은 몰랐을 것이다. 진규는 재빨리 침대다리를 빼기 시작했다. 차문이 열렸다. "누가 와요." "걱정 말고 타." 오현석이 진아를 재촉했다. "우리에게 권총이 있는 것을 상대도 알고 있어. 갑자기 밀어닥치지는 않을 거야." 발 소리가 문밖에서 멈추었다. 그는 운전석에 앉자 엔진 키를 교묘하게 만지기 시작했다. 진아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차고의 문 손잡이가 천천히 도는 것이 보였다. 차체가 가볍게 흔들렸다. 엔진이 걸린 것이다. 거의 동시에 문이 조금 더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슬슬 출발해 볼까?" 그는 이렇게 태연하게 말하곤 액셀러레이터를 슬쩍 밟아 보았다. 엔진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 순간 문이 열리고 남자가 한 사람 차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차가 갑자기 앞으로 전진하자 남자가 놀라서 뒤로 물 러서다 벽에 부딪쳤다. 차는 그대로 힘차게 돌진했다. 차고의 문에 닿는 충격으로 진아는 앞 유리에 머리를 부딪칠 뻔했으나 아무튼 차는 무사히 차고를 빠져나왔다. 속도를 높여서 앞 정원을 가로지르자 현석은 문을 향해서 똑바로 돌진 해갔다. 철문이었다. 경황이 없는 가운데 보아도 꽤 튼튼하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부딪쳐요!" "엎드려 있어." 오현석이 말한 순간, 갑자기 눈앞에 다른 차가 뛰어들었다. 그들이 탄 차를 그런 식으로 제지하려고 생각한 박일수의 어리석음을 탓할 시간이 없었다. 피할 틈도 없었다. 그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는지 굉장히 날카 로운 소리가 났다. 진아는 웅크린 채로 충격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것은 간단한 충격이 아 니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에 얻어맞은 것같이 진아는 좁은 차안의 공간으로 튀어오르다가 머리부터 바닥으로 박히듯이 떨어졌다. 격심하게 전신이 무엇인가에 닿았다. 어두워져 가는 의식 속에서 빨간 빛이 비추었다. 뭘까? 뜨거움을 느꼈다. 불이다. 불타고 있는 것이다. 도망가지 않으면 불에 타 죽는다. 빨리, 빨리. 진아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5월 20일 23회가 연재됩니다. 번호:24/25 등록일시:95/05/20 15:15 길이:166줄 제 목 : 제6장 토요일 <지명수배> -23- ** "됐다!" 진규는 어깨로 숨을 쉬었다. 생각하고 있던 것만큼 간단하지는 않았지 만, 침대 다리를 세 개로 분해하자 수갑이 쉽게 빠졌다. 진규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손목에 수갑이 채워져 있지만 그래도 침 대 다리와 연결되어 있지 않으니 도망갈 수는 있는 것이다. 진규는 방문을 살짝 열었다. 철침대를 분해하느라 철컥거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는데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다니, 그건 분명히 주변에 놈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불은 켜져 있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함정이 아닐까.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진규는 어쨌든 나가겠다고 결심했 다. 여기에서 우물쭈물하고 있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 그는 서둘러 방을 나와 복도를 내달렸다. 그때까지도 복도엔 사람의 그림자는커녕 개미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현관까지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당도할 수가 있었다. 그 는 현관문을 살짝 열고 밖의 동정을 살폈다. 여전히 조용하기만 해서 이 대로 달려나가기만 하면 될 듯싶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등뒤에서 한 목소리가 그의 등을 쿡 찔러, 그는 뛸듯이 놀랐다. "잘도 나왔군." 경호원 하나가 싱글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도 진규는 발이 얼어붙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얌전히 있으면 괜찮을 텐데 왜 사서 고생을 하지?" 경호원이 또 빙긋 웃었다. 그때였다. 상대의 등뒤로 보이는 어떤 문이 슬그머니 열리는 것이 진규의 눈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거기서 장은식 형 사가 나오고 있었다. 경호원은 전혀 등뒤의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진규가 장 형사 쪽으로 시선을 향하자, 그가 잠자코 있으라는 듯이 손 가락을 입에 대었다. 장 형사가 경호원에게 뛰어들었고, 두 사람이 바닥 으로 쾅 쓰러져 난투를 벌이기 시작한 것은 그 직후였다. 장 형사의 팔이 경호원의 목을 감고 있었다. 힘을 넣어 꽉꽉 조이자 발 버둥치고 있던 경호원이 이윽고 축 늘어졌고 장 형사가 팔을 빼자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장 형사가 숨을 헐떡이면서 일어서더니 진규에게 말 했다. "괜찮아?" "예. 조금 고생했을 뿐이에요." 두 사람은 그 집을 나오자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차가 달리기 시작하 고서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유진규는 이제 좀 안심이 되었다. "이 수갑 어떻게 안 돼요?" "그것은 내가 갖고 있던 수갑일 거야. 그 녀석들한테 빼앗겼거든. 그렇 다면 이것으로 벗길 수 있지." 차를 운전하면서 장 형사가 주머니를 더듬어 열쇠를 꺼냈다. 진규는 서 둘러 수갑을 벗겼다. "아, 살 것 같군." "나도 옆방에 잡혀 있었어. 겨우 도망쳤지만. 그런데 그 녀석들, 뭐라고 말했지?" "내가 전당물이라고 하더군요." "전당물?" "누나에게 일이 있다고 했어요." "그렇게 말한 자가 권기준이었지?" "그래요." 진규는 잠깐 망설였지만 이제 어차피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모 든 걸 체념했다. "내가 사람을 친 것이 애당초 시작이에요." 진규는 차로 남자를 치어 죽인 것부터 시작해서 누나가 그 죄를 덮어쓰 고 처리해 준 것, 그 남자가 협박장을 가지고 있던 것 등을 장은식 형사 에게 소상히 설명했다. "좋은 누나군." 장 형사가 머리를 끄덕이며 누나를 칭찬하자, 좀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 로 진규가 말했다. "예. 다시는 걱정을 끼치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그 유괴된 딸은 발견했나?" "나는 몰라요. 누나는 오현석이라는 녀석과 어쩔 수 없이 함께 행동하 며 그 딸을 찾고 있었어요." 장은식 형사는 가만히 앞을 바라보며 핸들을 잡은 채 잠시 입을 닫고 있었다. "누나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어요. 모든 것이 다 내가 나빴던 거예요. 누나. 죄가 되나요?" "시체를 어딘가로 감춘 것은 죄가 되겠지. 게다가 살인범인 오현석과 행동을 같이하고 있어. 그에게 협박당했다는 사실이 입증이 되면 문제없 지만." 장 형사가 커브길을 돌며 다시 말을 이었다.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그 유괴된 딸에 관해 누나가 뭔가 알고 있지 않았나?" 진규는 고개를 흔들었다. "누나는 내가 그 사건에 말려드는 걸 원치 않았어요. 그래서 나에게는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요." "그랬군." 장 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뜨거워." 진아가 중얼거렸다. "빨리. 도망가. 빨리." 누군가가 흔들었기 때문에 그녀는 억지로 눈을 떴다. 희미한 시야에 그 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그는 박일수였다. "정신이 들었나? 겨우 찰과상만으로 살아났군." 거실 소파 위였다. 억지로 일어나려고 하다가 진아는 문득 현기증을 느 꼈다. 이마에 아픔이 스쳤다. "무리하지 마." 박일수는 술잔을 내밀었다. "술은 괜찮겠지? 마셔." 진아는 거절하지 않았다. 위스키를 반 잔 정도 마시고 숨을 쉬었다. "그 정도로 끝난 게 기적이었어." "그 사람은 어찌 되었나요?" "오현석? 죽지는 않았어." "중상이야. 오른팔은 부러졌고 화상도 심해." 진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박일수가 조금은 웃으며, 그리고 조금은 빈 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당신도 특별하군. 어째서 오현석 따위에게 반한 거지?" 반하지 않았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진아는 주저했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에게 끌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에요. 그보다는. 우리들을 어떻게 할 생 각이죠?" "충분히 시간을 두고 여러가지를 물으려고 생각하고 있지."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박일수는 소파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 앉았다. "당신은 배짱이 좋은 여자야. 이용가치도 있고. 고문해서 죽여 버리기 에는 너무 아깝지." 진아가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것을 애써 무시하며 박 일수가 유쾌한 듯이 말을 보탰다. "오현석의 목숨은 당신 대답에 따라서야, 알겠어?" "대답?" "내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그 친구는 죽어. 당신 눈앞에서 죽여 주지." "그만둬요!" 진아는 울부짖고 있는 자신을 잊고 있었다. "그러면 내 요구를 맡는 거로군." "무엇을?" "대답이 먼저야." "." "선택의 여지는 없어. 오현석을 죽이는가, 살리는가. 어떻게 할까?" 진아는 눈을 감았다. "알겠어요. 어떻게 하면 되는 거죠?" 박일수가 천천히 일어서면서 말했다. "권기준의 얼굴을 알고 있지?" "예." "녀석을 죽이고 와." 진아는 박일수를 꿰뚫어 버릴 듯이 올려다보았다. "그런 일을.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아니, 유진아라면 가능해. 녀석도 당신을 찾고 있어. 당신이 만나고 싶다고 말하면 반드시 올 거야." "나에게. 살인을." "당신은 이미 맡았어." 빅일수의 말투가 갑자기 엄해졌다. "이제 뒤로 물러날 수는 없어. 알고 있겠지?" 진아는 차라리 자동차 사고로 죽어 버렸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 다. 사람을 죽인다. 이 손으로? 내가 그럴 수가 있을까? 이상하다. 진규는 입술을 깨물며 앞을 노려보았다. 진규도 운전사다. 방향에 대한 감각은 가지고 있었다. 장 형사는 주택가를 계속 달리고 있 지만 지금 방향으로 가면 처음 그 동네 그 골목 쪽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었다. 미애에게 배신당하고, 진규는 이제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장은 식 형사가 만약 진짜 형사가 아니라면? 경찰 행세를 하고 있는 권기준의 부하라면? 일부러 나를 구하고서, 알고 있는 것을 캐내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경 호원을 해치운 것도 연극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모든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나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지만 이 녀석은 어떻지? 수갑의 흔적도, 줄로 묶인 흔적도 손목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이상하게 유괴된 딸에 관한 것만 묻고 싶어한다. 경찰서로 바로 가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역시 차는 그 골목 쪽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아마 그 저택 뒤쪽에라도 도착할 것이겠지. "저 잠깐 세워 줘요." "뭐지?" "잠깐 소변을 보고 싶어요. 급해요. 이곳에서. 잠깐 부탁해요." "알았어." 장은식이 차를 세웠다.진규는 차에서 나오자 옆길로 조금 들어갔다. "빨리 해." 장은식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진규는 골목 안의 어둠 속으로 재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5월 24일 24회가 연재됩니다. 번호:25/25 등록일시:95/05/24 18:16 길이:215줄 제 목 : 제7장 일요일 <종말을 향해 달리다> -24- ** 제 7 장 일요일 ** <종말을 향해 달리다> 밤이 걷히고 어둠이 다가오고 있었다. 창문을 가린 커튼을 통해 들어오 는 햇빛이 현란한 오렌지빛으로 느껴졌다. 일요일이 된 것이다. 진아는 박일수의 외제 승용차 뒷좌석에 두 사람의 튼튼한 사내 사이에 끼워져 앉아 있었다. 눈이 가려지고 손목은 가죽끈으로 묶여 있었다. 어 디로 가는 것일까? 그녀로선 분명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제 괜찮겠지." 앞좌석에 앉아 있던 박일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풀어 줘." 진아는 갑작스럽게 햇빛을 보자 너뭬사이엔가 한적한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두세 번 눈을 감았다가는 떴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겨우 익숙해져서 눈의 아픔이 가라앉았다. "여기는 어디죠?" "미아리 근처야. 전철역 가까이에 내려 주지." "어떻게 할 셈이죠?" "그 다음은 당신이 알아서 해. 경찰에 가서 자수해도 좋아. 날 고발해 도 좋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오현석은 상당히 괴롭게 죽게 될 거야." 진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권기준을 어떠한 방법으로 죽이든지, 그건 당신 자유야." 박일수는 그렇게 말하곤 가볍게 웃었다. "당신은 해낼 수 있어." "돈을 조금 주세요. 전철도 탈 수 없어서는 권기준이 있는 곳까지 걸어 가야 되니까요." "깜박했군." 그는 진아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야, 너희들 중 아무나 여자에게 돈을 줘." 진아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사내가 지갑째 진아의 코트에 찔러 넣어 주 었다. "좋아, 저 근처에서 세워. 손목을 자유롭게 해줘." 가죽끈이 풀렸다. 진아는 양손의 손가락을 구부렸다 폈다 해서 손의 긴 장을 풀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오랜 부자연스러움이 손을 뻣뻣하게 했 던 것이다. "자, 내려." 박일수가 친절을 가장한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어." 한 사람이 내려서 문을 잡고 있었다. 진아는 길로 내려서 박일수에게 말했다. "실패하면 어떻게 하죠?" 그는 즉각적이고도 짧게 대꾸했다. "오현석이 죽겠지." "만약 잡히면?"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 말하지 않더라도 결과는 어차피 마찬가지 니까." 앞좌석의 창문이 스르르 올라갈 때, 그의 야비한 엷은 웃음은 진아의 가슴을 바늘과 같이 찔렀다. "성공을 기원하겠어, 당신을 위해서도." 차가 달리기 시작했고 진아는 거기 혼자 남겨졌다. 이상한 일이다. 정말이라면 해방되었다고 생각해야 되었다. 이제 혼자 인 것이다. 어디라도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가슴에 가득한 불안감 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거리는 조용하고 행인은 그다지 없었다. "그렇군, 오늘이 일요일이지." 진아가 중얼거렸다. 문득 생각이 나서 진아는 코트 주머니에 넣어진 지 갑을 꺼내 보았다. 7,8만 원 정도 들어 있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자기 피로를 느꼈다. 눈도 조금 피곤하 다. 눈에 띄는 찻집은 몇 개 있었지만 이른 아침인지라 열려 있지는 않았 다. 거리의 시계가 7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진아는 거리를 좀 방황하다, 마침내 문을 연 작은 식당 하나를 발견하 였다. 가게로 들어가니 일요일 아침치고는 손님들로 비교적 북적대고 있 었다. 안쪽 자리에 앉자 갑자기 배가 고파와서 그녀는 쓰게 웃었다. 태평 하군. 하지만 진아는 언제나 이랬다. 학생 때, 시험 전날이 되면 갑자기 영화가 보고 싶어져서 견딜 수가 없 었다. 남들은 이해가 잘 가지 않겠지만, 진아는 정말로 그것을 실행해 버 리곤 했다. 진아는 식사를 주문하고 그것이 오자 기운차게 먹었다. 어쨌든 무엇인 가 하고 있으면 불안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오현석은 어떻게 될까? 살아 있다는 것은 오직 박일수의 말뿐이고, 정 말은 벌써 죽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권기준을 죽인다? 그것이 가능할까? 만일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을 결 행하고 나면 그녀 목숨 역시 없을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역시 죽는 것에 변함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경찰서로 가서 모든 것을 털어 놓아 버릴까? 그러나 경찰이 살 인혐의로 지명수배된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줄 것인가? 그러는 사 이에 오현석은 죽게 될 것이다. 차라리 아마존 정글 한가운데라도 내버려지는 편이 더 좋겠다고 진아는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자기 혼자서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니까. 식사 후에, 커피에 설탕도 크림도 넣지 않고 몇 모금 마시자 머리가 조 금 산뜻해졌다. 아마존. 그런 이야기를 누군가와 했더라? 그것도 극히 최근이다. '아, 그렇지.' 생각이 났다. 문우성과 함께였다. 남미 정글을 헤매다 구조되었다는 어 느 소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문우성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기 때문에 웃어 버렸던 기억이 있다. "진아 씨라면 틀림없이 큰 뱀을 구워 먹고 살아 남을 수 있었을 거예 요." 문우성.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문우성도 틀림없이 진아를 걱정하고 있을 것이었다. 진아는 조금이나마 안정된 기분으로, 지금의 절박한 상황 속에서 어딘 가에 돌파구가 없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오현석이 죽었을 가능성은 있는 것이지만 지금은 어쨌든 살아 있는 쪽 에 승부를 거는 수밖에는 없었다. 박일수가 있는 곳으로 가서 오현석을 구출해 내는 것은 그녀의 힘으론 불가능했다. 그러면 권기준을 죽일 수밖 에는 없는 것일까? 그것 역시 진아의 능력으론 어림도 없었다. 그러나 거꾸로 권기준을 잘 이용할 수는 없을까? 박일수가 그녀에게 살 인 명령을 내리더라는 사실을 권기준에게 가르쳐 준다면, 그는 화를 내며 박일수를 쓰러뜨리러 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현석은 권기준을 배신한 것이다. 어떻게 되더라도 그는 살해 당한다. 박일수의 지시대로 권기준을 죽이는 수밖에는 오현석을 구해 낼 다른 길이 없는 것 같다. 그 엄청난 일밖에는. 원래가 박일수나 권기준 둘 다 믿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얼마든 지 자기가 한 말을 뒤집어 놓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인간이다. 그 런 남자를 위해 한 사람을 죽여야 하다니. 하지만 오현석에게는 똑같은 악인이라 해도 이상한 진지함이 있었다. 그는 적어도 교활하게 행동하지는 않는 남자다. 그러다가 문득 진아는 사건의 애당초 발단이 되었던 유괴된 딸을 생각 했다. 그렇다. 딸의 목숨은 월요일까지다. 아니 월요일에는 목숨이 없다 고 했기 때문에 오늘 하루뿐인 목숨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른다. 오늘밤 0시가 지나면 이제 '월요일'인 것이니까. 만약. 만약 권기준의 딸을 발견해서 그 딸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 는 대신에 권기준에게 현석을 구출해 내도록 요구할 수는 없을까? 아마 권기준은 승낙할 것이다. 그렇다,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그렇 다면 딸이 있는 장소를 아는 것이 선결과제이다. 하지만 오늘 하루만에 그것이 가능할까? 그것도 수배되어 있는 몸으로 언제 경찰에게 잡힐지 모 르는데 말이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진규는 안 된다. 미애라는 여자는 전혀 믿 을 수 없고, 진규가 가능하다 해도 위험에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다. 그렇 게 되면. 그녀는 일어서서 공중전화 박스 쪽으로 걸었다. 문우성의 아파트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극히 외우기 쉬운 번호였기 때문이다. 행운이라고 해야 할까? 일요일인데도 다행히 문우성 은 집에 있었다. "예. 문우성입니다." 아직 반쯤 잠에 취해 있는 목소리였다. "저, 유진아예요." "진아 씨!" 문우성은 전화 저쪽에서 깜짝 놀란 것같이 목소리를 한 옥타브 올렸다. "지금 어디입니까?" "부탁이에요, 도와 줘요." 진아는 조금 가련한 목소리를 내었다. 일부러 그랬다기보다는 사면초가 에 처해 있는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목소리였다. "당신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 너무 곤란한 처지예요."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문우성이 화를 내듯이 말하곤, 그녀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급히 한 마디를 더 보탰다. "뭐라도 좋으니 말해 주세요." "고마워요. 지금 미아리 부근이에요. 종로까지 갈게요. 그곳으로 와 줄 래요?" "예, 어디라도." "종로 3가에 있는 '뉴스페이퍼'라는 커피숍, 알고 있나요?" 문제는 무엇보다 권기준이었다. 과연 그가 유진아의 말에 걸려들 것인 가. 적당하게 둘러댈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는 교활하기가 늙은 여우 같 은 사람이니까. 하지만 어쨌든 어떤 형태로든 연락을 해둘 필요가 있다고 그녀는 믿었다. 권기준의 집 전화 번호는 박일수가 잘 가르쳐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 역시 머리 속에 남아 있었다. "유진아예요." 그는 그녀의 음성을 듣고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아주 친절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이것이 텔레파시라는 건가?" "무슨 이야기죠?" "나도 당신에게 연락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건강한가?" 몹시 침착한 태도, 이것이 딸이 유괴당한 아버지의 태도일까? 진아는 여지껏 그가 딸이 유괴당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 스러울 지경이었다. "당신에게 알려 주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 있어." "뭐죠?" "혹시 경찰서의 전화로 걸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에요." "좋아. 내가 동생을 보호하고 있어." 진아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 "동생을 어떻게 한 거죠?" 권기준이 낮게 웃을 때, 수화기를 잡은 진아의 손이 그 웃음의 파장에 떠밀려 멈칫멈칫 떨리고 있었다. "침착해." 권기준은 오히려 즐거운 목소리였다. "동생은 아직 잘 있어." "어디에 있어요?" "내가 있는 곳이야. 그렇다고 해도 내 집은 아니지.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장소의 하나지." "진규는 무사한가요?" "물론이지." "어째서 진규를." "아니, 그것은 거꾸로야. 동생 쪽에서 내가 있는 곳으로 손을 뻗었지. 그것도 경찰과 함께 말이야. 내가 잠자코 있을 수 없지." "진규를 어떻게 할 셈이죠?" "그것은 차차 생각할 예정이야." 권기준은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일부러 느긋하게 말하고 있었다. 진아는 그것을 알면서도 불안과 초조의 꼭대기를 헤매는 마음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동생을 살리고 싶다면, 내가 원하는 사람 하나를 처리해 줘. 그게 누 구냐 하면. 바로 오현석이야." 진아는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그녀를 향해 거듭되는 살인 명령, 악 몽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그녀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그 녀석은 배신자야. 배신자를 처리하는 것은 적과 싸우는 것보다도 중요한 일이지." 진아는 아직도 눈을 감은 채 마른 입술에 침을 적셨다. "오현석과는 벌써 헤어졌어요.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요." 권기준이 가볍게 웃었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은 내겐 안 통해. 만약 그것이 정말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야. 오현석을 찾아서 데리고 와." "할 수 없다면요?" "안됐지만 동생은 젊은 나이에 죽게 되지." 권기준이 온화하게 그렇게 말하고 나서, 매서운 한 마디로 다시 한번 다짐을 하였다. "알았지?" 오현석이 박일수에게 잡혀 있다고 말하면 진규를 되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진아는 생각 끝에 간신히 도피처를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을 줘요." "오늘 중에 이 번호로 전화해. 내게 넘길 형편이 안 된다면, 최소한 오 현석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줘. 오현석을 처리하고 그 다음에 동생을 돌려 보내지. 알겠지? 전화를 기다리고 있겠어." 유진아는 권기준 쪽에서 전화를 끊었는데도 오랫동안 수화기를 손에 든 채 서 있었다. 전화박스 안은 조금 더웠다. 잠시 가만히 서 있자 관자놀 이에 땀이 흘렀다. 5월 27일 25회가 연재됩니다. `end` ~^~ 14 ---- -------- ------- -------- --------------------------------------------- 번호:26/27 등록일시:95/05/27 11:20 길이:282줄 제 목 : 제7장 일요일 <종말을 향해 달리다> -25- ** 역에서 전철을 탔다. 점심 때였기 때문에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유진 아는 시트에 앉아서 깊은 숨을 쉬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오현석은 박일수에게 잡혀 있다. 권기준을 죽이지 않으면 오현석이 죽 는다. 하지만 권기준은 동생인 진규를 인질로 잡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오현석을 자기에게 넘기지 않으면 진규의 목숨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정 말 출구 없는 극한상황이었다. "진아 씨!" 카페 안에서 우성이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을 때 진아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누군가 아는 사람과 만난다는 것만으로 벌써 구원받는 듯한 기분이었던 것이다. "문우성 씨. 미안해요. 모처럼 휴일인데." 너무 감격하면 오히려 이상하게 예의바르게 되어 버리는 법일까. 진아 가 그랬다. "아니에요, 당치도 않아요. 저야말로." 우성도 예의가 바르기로는 진아와 마찬가지였다. 잠시 진아는 주문하는 것도 잊고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피곤한 것 같군요." 우성이 멍하니 진아를 응시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딘가에서. 조금 쉬면 어때요?" "고마워요. 하지만 지금은 쉬고 있을 수가 없어요." 진아가 미소짓자, 우성이 주저하면서 물었다. "함께 행동한다는.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나요?" "오현석 씨요? 글쎄요, 어떻게 되었을까?" "함께 안 있었어요?" "함께 수배된 것뿐이에요. 처음에는 함께였지만 곧 헤어졌어요." "그래요?" 문우성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번졌다. 진아로서는 우성에게 어디까지 진실을 이야기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에게 사실을 털어 놓 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동생이 위험해요." 진아가 얼굴을 그에게 바짝 들이대며 나지막이 말했다. "진규. 말이군요." "예. 지금 잡혀 있어요. 나에게 살인죄를 씌운 권기준이라는 남자에 게."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힘이 되어 줄래요?" "그것 때문에 왔습니다." 진아는 사건의 발단이었던, 진규가 어떤 남자를 차로 치었고 그 남자가 협박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나에게 의논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당신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면 내가 지금부터 어떻게 하면 돼지요? 말씀해 주세요." 우성의 말은 곧바로 진아의 마음에 닿았다. 진아로서는 권기준의 딸을 발견한다는 것에 승부를 거는 수밖에 없었다. 이곳으로 오는 사이에 그렇 게 결심했던 것이다. "어딘가에 유괴되어 있을 거예요. 권기준의 딸을 발견해서, 그것과 교 환 조건으로 진규를 되찾는 수밖엔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군요." 실은 진아는 더 위험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권기준의 딸이 발견되면 그것을 권기준과 박일수 양쪽과 거래재료로 쓸 셈이었던 것이다. 권기준 에게서는 진규를, 박일수에게선 오현석을 되찾는 것이다. 박일수로 봐서 는 오현석보다는 권기준의 딸을 손에 넣는 것이 훨씬 더 이익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오늘 안에 권기준의 딸을 발견할 수 있는가였다. 그것은 오히려 문우성과 같이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보는 사람이 좋지 않 을까? 문우성은 진아의 이야기를 다 듣고는, 뭔가를 잠시 생각하다가 사 뭇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 딸을 발견하는 것이 선결문제군요." "예, 하지만 지금으로선 아무런 실마리도 없어요." "잠깐만요." 문우성이 말을 잘랐다. "유괴범은 죽어 버렸지만 이쪽이 유괴범이 되어 보면 어떨까요?" "예?" "그 빈 건물 지하실 얘기입니다만, 그곳에 권기준의 딸이 숨겨 있었다 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빈 건물이라도. 아니, 빈 거물이기 때문에 언제 사람이 올지 모릅니다." "그러면 그곳에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건가요?" "젊은 여자 하나를 묶어서 재워 버렸다고 해도, 범인 한 사람이 그녀를 운반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것도 그렇군요." "빈 건물이라고 해도 근처에는 사람이 다니는 거예요. 그런 곳에서 묶 인 여자를 섣불리 옮길 수는 없어요." 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듣고 보니 그렇다. "저는 오히려 그 차가 발견된 곳 근처에 딸이 있었다고 생각되는데요. 물론 범인은 처음엔 문제의 그 빈 건물을 은닉장소로 생각했을지도 모릅 니다. 그래서 자기 동생과 거기서 만나자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최종적 으로 그곳이 적당치 않다고 생각하고서 사고 현장 부근 어딘가로 옮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누군가를 유괴하는 사람은 인질의 은닉장소를 여러 곳 떠올리며 계산을 해볼 테니까 그가 쉽게 제2의 장소 를 떠올린 것도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진아는 당황했다. 다른 때의 문우성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자신에 찬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막다른 곳에 막혔을 때는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 제일입니다." "하지만 그 근처는 이미 샅샅이 조사해 봤어요." "다시 한번 조사해 보죠." 문우성이 재빨리 일어섰다. 그의 뒷모습이 예전의 축 늘어진 모습이 아 니어서 그녀는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이 차는?" 진아가 처음 보는 승용차에 오르며 이렇게 묻자 핸들을 잡은 문우성이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상당히 좋은 차죠? 친구에게서 빌려 왔습니다. 행동하는데 필요할 것 같아서." 믿음직한 문우성의 모습에서 진아는 아직은 희미하지만 뭔가 빛이 비치 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 근처에 가면 깨워 드리지요. 푹 자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예. 고마워요." 분명히 유진아는 졸렸다. 지쳐 있었다. 안심한 탓인지 졸음이 금세 덮 쳐왔다. 어느 사이엔가 완전히 잠들어 있던 진아는 문득 눈을 떴다. 차는 정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성의 모습이 없었다. "문우성 씨!" 진아는 차에서 내렸다가 숨이 멎을 듯이 놀랐다. 놀랍게도 그곳은 진규 가 차로 남자를 친 그 장소였다. 문우성이 이곳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단순한 우연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혀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 문우성이 숲속에서 나왔다. "일어났습니까?" "어디 갔다 오세요?" "죄송합니다. 너무 달게 자고 있어 깨울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이곳을 알고 있었군요." "대강 짐작으로요. 그 하얀 차, 아직 있었습니다." "뭔가 단서라도 있던가요?" "아니, 아직입니다." 문우성이 심호흡을 한번했다. "월요일에는 딸이 죽는다. 그것은 어떠한 의미일까? 빈 건물이 파 괴된다, 그것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래서요?" "하지만 실제로 건물을 부술 때에 안을 조사하지 않을까요? 부랑자 한 사람 정도는 잠자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문우성의 말은 당연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상처를 입든지 그렇지 않으면 굶어 죽든지, 질식하 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월요일에 자동적으로 상처를 입힌다는 것은 시한 폭탄이라도 없으면 무리예요." "일주일 후에 폭발하도록 해두었을까요?" "하지만 폭발이 일어나면 누군가가 알겠지요. 조사하면 여자가 죽었다 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신원도 알 수 있구요. 그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그렇다면 굶어 죽는 걸까요?" "하지만 인간은 물만으로도 일주일은 견딥니다. 도저히 그런 엄밀한 계 산을 할 수 없지요." "그러면." "다음은 질식입니다. 이것이라면 대강 산소량을 계산할 수 있어요. 조 금 오차는 있어도 하루 이내에서 계산할 수 있지요. 예전에 미국에서 있 었던 범죄입니다만, 큰 상자를 땅속에 묻고 그 안에 유괴한 인질을 넣어 두었던 겁니다. 일주일 분의 물, 음식물, 그리고 공기를 주어서요." 진아는 아연해져서 문우성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 남자의 어디에서 이 런 놀라운 추리와 분석이 나오는 것일까. "물론 내 예측이 전적으로 맞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문우성이 조금 수줍은 듯이 머리를 긁었다. "다만 하나의 생각이라는 거죠." "하지만. 그런 건 생각도 못했어요. 그러면 이 근처에 그런 장소가 있다는 걸까요?" "만약 내 생각이 맞는다면 유괴 장소로는 이 근처 숲속이 제일이지요." "그러면 당장 찾아보지요." "이렇게 넓어서 쉽지는 않을 겁니다만." "땅을 보면, 파낸 흔적이 있지 않을까요?" "아마 위장했을 테지만, 주의 깊게 보면 알 수 있겠지요." 진아는 숲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직도 아주 가느다란 상태이긴 하지 만 문우성의 한 마디 말에 희망이 끓어올랐다. 그것은 정말 가늘디가는 실 같은 희망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는 해도, 그래도 해야 할 일이 분 명히 있다는 것은 진아에게 있어서는 구원이었다. 진규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간신히 잠에서 깨었다. "뭐야, 이제 일어났어?" 느리고 묵직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몇 시죠?" 진규는 눈을 비비면서 시계를 보았다. "벌써 이렇게 시간이 됐어요? 아, 아무리 자도 졸립군요." 얼핏 보기에도 남자가 혼자 사는 집같이 여기저기 어지럽혀진 아파트였 다. "형, 오늘은 일이 없어요?" 진규가 물었다. "오후부터야. 오늘밤은 안 돌아올 거야." 화물운송회사에서 같이 일하던 진규의 동료였다. 진규보다 10살이 더 많지만 아직도 총각이어서 언제나 형이라고 불렀다. "미안해요, 폐를 끼쳐서." 진규가 하품을 참으면서 말하자 그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혼자 사는 거니까 상관없어." 이 사람 정한식()은 진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건장한 체격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직할 정도로 일밖에 모르 는 사람으로 회사에서도 대단히 신임을 받고 있었다. "진규, 너 오늘밤도 이렇게 여기에 있을 거야? 그렇다면 열쇠를 놓고 가지." "미안해서요. 형에게 이렇게 신세지다니." "상관없어. 집을 봐 주니까 오히려 안심돼." 진규는 애매하게 웃었다. 정한식에게는 여자와 싸워서 함께 있을 수 없 다고 말했다. 도저히 그에게 진실을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나는 이제 나가지. 열쇠를 두고 갈게. 뭐, 훔쳐갈 것도 없지만 도둑이라도 들어오면 곤란하니까 나갈 때는 잠그고 나가." 그가 나가자 진규는 한숨을 쉬었다. 느긋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누나 가 걱정이었던 것이다. 권기준과 장은식에게서는 어떻게 도망쳤지만 문제는 무엇 하나 해결되 지 않았다. 누나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자신도 안전하다고 할 수 없었 다. 권기준은 누나를 잡았을까? 어떻게 해서라도 누나를 지켜야 한다는 마 음은 그에게 있었지만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냉정하게 생 각하는 것은 진규에게는 아주 질색이었다. 아파트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게다가 누나의 아파트도 감시당하고 있 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는 초조함으로 진규는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문득 미애를 생각했다. 미애를 붙잡을 수 없을까? 그애는 교활하지만 여자이기 때문에 힘이라면 진규가 강하다. 그다지 자랑할 정도는 아니지 만 말이다. 그애라면 누나에 관한 것을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고, 어쨌든 한번 마음껏 때려 주지 않고서는 분이 풀리지 않는 것이었다. 미애는 지금쯤 아파트에 돌아와 있을까? 그애 따위에게 특별히 경호원 이 붙어 있지는 않을 것이고, 설마 도망친 진규가 그곳으로 나타나리라고 는 그쪽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충분히 주의해서 가면 괜찮을 거다. 진규는 아무튼 밖으로 나 왔다. 수염을 깎지 않아서 턱이랑 코 아래가 까칠까칠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문제는 권기준의 부하들이 미애의 아파트를 감시하고 있는가 어떤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미애가 과연 집에 있을 것인 가? 없을 때 아무리 지켜 봐도 소용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좋아. 전화를 하자. 그는 먼저 그녀의 소재를 파악하기로 하고 공중전 화 박스로 달려갔다. 호출음이 계속 울려도 받지 않기에 수화기를 놓으려고 했을 때, 갑자기 그녀가 받았다. "예, 여보세요." 미애다! 진규는 재빨리 수화기를 놓았다. "이봐, 녀석은?" 방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자고 있어." "그래? 뭐 죽어 버렸다고 해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보스가 찾을지 모르 니까 도망치지 않도록 신경을 써." "괜찮아. 그렇게 다쳤는데 제가 감히 어딜 움직여." "방심하지 마. 어쨌든 강한 녀석이니까." 말소리는 조용해졌다. 오현석은 벌써 의식을 찾고 있었다. 가슴을 납으로 만든 판으로 압박받 는 것과도 같은 괴로움이 계속 엄습해 오고 있었지만 계속 소리를 내지 않고 참고 있었다. 그것이 크게 고통은 되지 않았다. 그것은 의지가 강하다는 것과는 또다 른 것이다. 지금 고통을 견디고 있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영웅주의, 또 는 자기만족일지도 몰랐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가늠해 보았다. 왼팔이 부러져 있는 것은 마비된 듯한 감각으로 알 수 있다. 아마 늑골도 부러져 있을 것이다. 행운이었던 것은 화상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전신의 화상으로 죽어 가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내가 그 정도라면 차라리 머리에 총을 맞고 싶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지금은 싸울 만큼의 힘이 없다. 게다가 무기도 없다. 이런 몸으론 살아 남기 위해 그 무엇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방심하고 있다는 점은 유리했다. 오현석은 문득 아픈 얼 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이런 몸이 되어서도 아직 싸우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마치 본능인 것처럼. 유진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살아 있고, 거의 상처가 없다는 것은 박일 수에게서 들었다. 그것을 오현석은 믿었다. 박일수가 그런 거짓말을 해서 득이 될 것은 없기 때문이다. 마음은 조금 편안했다. 다만 박일수가 그녀를 어떻게 할 셈인지 그것만 이 걱정이 되었다. 문이 열렸다. 오현석은 일부러 호흡을 약하고 천천히 했다. "형님."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현석 형님." 오현석은 가늘게 눈을 떴다. "명수냐?" "역시 정신이 들었군요." 김명수()는 예전에 권기준의 부하로 오현석이 데리고 있던 사내 다. 그후, 아버지가 박일수와 모종의 관계가 있어 권기준에게서 박일수로 붙었지만 그후에도 여전히 현석을 형님으로 따르고 있었다. "괜찮아요? 필요한 것은 없어요?" "나에게 상관하지 마. 네가 안 좋게 돼." "하지만. 형님에게는 정말 미안하게 됐습니다." "가르쳐 줘, 여자는 어떻게 되었지?" "아, 형님과 함께 있었던 그 여자 말이에요?" "무사한가?" "예. 보스가 권기준을 죽이라 명령하고 내보낸 것 같아요." 현석이 머리를 움직였다. "권기준을?" "형님 목숨을 구하고 싶으면 권기준을 죽이고 오라고." 현석의 눈이 노여움으로 이글거렸다. "나쁜 자식! 아무런 관계도 없는 여자에게." "여자도 승낙했어요." 진아가 권기준을 죽일 수 있을 리가 없다. 만일 죽였다고 해도 살아서 돌아올 리가 없다. "명수야." "형님! 일어나면 안 돼요. 무리예요." "아니, 가야 해." 오현석은 김명수의 말을 애써 무시하며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나오려고 했다. "형님, 안 된다니까요! 무리예요!" 김명수가 밀어붙이듯이 오현석을 침대에 눕혔다. "미안하군. 물을 주지 않을래?" 오현석이 헐떡이면서 말했다. "예, 기다려요." 명수가 나갔다. 현석은 오른손 안에 숨기고 있던 칼을 천천히 꺼냈다. 서로 뒤엉켜 있을 때 그의 주머니에서 쏜살같이 빼낸 것이다. 자유로운 오른손 손가락 끝이 칼날을 살짝 만지고 있었다. 5월 31일 26회가 연재됩니다. 번호:27/27 등록일시:95/05/31 14:32 길이:241줄 제 목 : 제7장 일요일 <종말을 향해 달리다> -26- ** 문을 두드리자, 미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늦었군요." 문이 열리자, 미애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지?" 진규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미애는 즉시 문을 닫으려고 했으나 진규도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았다. 진규는 즉시 문을 낚아채고는 주먹으로 미애 의 어깨를 후려쳤다. 그 바람에 그녀는 방 안으로 벌렁 나자빠져선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진규는 잠깐 기분이 좋았다. 문을 닫고 열쇠로 잠그자, 그가 독이 오른 얼굴로 노려보다가 기절하고 있는 그녀를 질질 끌고 욕실로 데리고 갔다. 물이 가득 채워져 있는 욕조 앞에서 미애의 몸을 들어올리고 그녀를 거리 낌없이 그 안으로 던져 넣었다. "으악!" 정신이 든 미애가 바둥거리는 것을 진규는 머리를 눌러서 물 속으로 꾹 집어 넣었다. "뭐, 뭐하는 거야?" 겨우 머리를 내민 미애가 기침을 하면서 달려들 것 같은 얼굴로 말했 다. "너도 조금은 심한 꼴을 당해야 해." 말하자마자 그가 미애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미애의 비명과 철썩거리는 물 소리가 욕실 안에 울려퍼졌다. 그후에 미애는 방 한가운데로 던져졌지 만 2,3분은 꼼짝도 할 수 없이 물을 내뱉거나 기침을 하거나 했다. "당분간은 식당에 가도 물은 필요없을 걸?" "이런 짓을 하고. 괜찮으리라고 생각해? 이제 곧. 회장님의 부 하들이 올 거야!" "그래? 하지만 현관문은 잘 잠겨져 있지. 게다가 너는 나에게 맞아서 뻗어 있으니까 대답도 할 수 없어. 대답이 없으면 집에 없을 거라고 생각 하고 돌아갈 거야." "이 비겁자!" "비겁자라구?" 진규가 느닷없이 미애의 뺨을 후려치자 그녀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쓰 러졌다. 그대로 기절해 버린 것 같았다. 진규는 옷장을 헤치고 잠옷 끈을 꺼내어 미애의 손발을 묶곤 내친김에 입에 자갈까지 물려 주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잠시 주저했지만 전화를 거는 것은 상대가 가까 이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임을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상대를 알고 나서 어떻게 할까 결정해도 괜찮을 것이다. "미애인가? 나, 권 회장이야." 그 목소리만으로도 진규는 속이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여보세요? 미애가 아닌가?" "이봐, 권기준 씨." 진규가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어 내뱉었다. "내 목소리를 알겠지?" 조금 시간이 지났다. "자넨가? 유진규 군." "그래. 유감스럽게도 너희들에게 속지 않았지. 지금 미애는 과로로 자 고 있어." "위세가 좋군. 아니, 잘되었어. 나도 자네에게 연락을 하고 싶었지." "무슨 일이지?" "자네 누나는 내가 데리고 있지. 그것을 미애에게 가르쳐 주려고 전화 한 거야." "형님." 문이 열리고 명수가 들어왔다. "물을 가지고." 그 순간, 현석의 손이 잽싸게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컵이 발아래에 떨 어졌다. 바닥에 튕겼지만 깨지지는 않았다. 물이 명수의 구두를 적시고 흩어졌다. "그만둬요, 형님." 명수의 목에 차가운 칼날이 대어져 있었다. "뒷문으로 안내해." "형님! 안 돼요, 그 몸으로." "칼을 쓸 정도는 돼." 현석의 목소리는 얼음 같았다. "빨리 해." 명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움직이지 마. 칼날이 파고 들어가." 오현석은 붕대를 감은 알몸 상반신에 옷을 걸쳐 입었다. "걸을 수 있어요?" "발은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면. 이쪽이에요." 명수는 마지못해 걷기 시작했다. 현석은 재빨리 복도를 둘러보았다. 사 람의 모습은 없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복도를 걸어갔다. 현석은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찌르는 듯한 고통이 왼팔과 가슴을 스치는 것을 이를 악물 고 참았다. 보통 때라면 도저히 걸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지만 진아를 죽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현석을 지탱하고 있었다. 왜 그녀를 보호해야 하는가.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냥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녀에 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형님, 괜찮아요?" "돌아보지 마." "알겠어요." 현석이 조금 지나서 말했다. "너에게 나쁘게 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그 여자를 죽게 할 수는 없 어. 그 여자는 건실한 사람이야. 그런 사람을 살인에 이용하려는 것은 이 세계의 법도에서 벗어나 있어. 그래서 구해 주고 싶은 거야. 그것뿐이 야." "하지만 그 몸으로." 명수가 뭔가 말을 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눈앞의 문이 열리고 박일수 의 부하 하나가 들어왔다. 사내는 순간 아연해졌다. 그가 잽싸게 윗옷 아래로 손을 넣었다. 그러 나 그보다 더 빨리 오현석의 손에서 칼이 날아갔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실로 당기듯이 정확히 사내의 가슴에 꽂혔다. 사내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동시에 현석도 가슴을 도려내 는 듯한 고통 때문에 비틀거리며 벽에 기대었다. "형님!" 명수가 뛰어와서 현석을 끌어안자, 그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미소 를 입가에 씨익 드리웠다. "어쩔 수 없군요. 함께 가요. 차 뒷좌석에 모포를 덮으면 모를 거예 요." "괜찮겠어?" 명수가 쓰게 웃으면서 내뱉었다. "형님이 반한 여자를 위한 거예요." "반하지 않았다니까. 알겠어?" "알겠어요. 어쨌든 빨리!" 두 사람은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전에 진아와 나왔을 때와는 다 른 곳으로, 부엌문 같은 낮은 문을 통해서 담 밖으로 나왔다. "차는 있어?" "주차장에 고물차가 한 대 있어요. 하지만 달릴 수는 있어요." "좋아, 가지." 오현석의 몸에 이상하게 새로운 체력이 넘치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지 진아를 제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이 그에게 활력을 주고 있는 것이었다. "소용없군요." 진아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진아와 우성 두 사람 모두 크게 숨을 쉬었 다. 권기준의 딸이 땅 속 어딘가에 갇혔으리라는 가정하에 사고 현장 부 근 숲 속을 온통 찾아다녔지만 발견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내멋대로 생각해서 시간만 보내서." "아니에요, 당신 탓이 아니에요." 진아는 문우성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해낸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예요." "그런 말을 들으니 더 괴롭습니다." 문우성이 머리를 긁었다. "이렇게 넓은 숲인 걸요. 더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찾으면 분명히 무슨 실마리를."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솔직히 우성의 제안이 허탕이 되어 버리면 진아 로서는 아예 손쓸 방도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잠깐 앉아서 한숨 돌리죠." "예. 그 그루터기가 있는 곳에서." 그루터기가 공원 벤치와도 같이 마침 높이도 알맞게 놓여 있었다. 문우 성이 손수건을 그루터기 위에 깔았다. "고마워요. 문우성 씨도 앉아요." 진아가 조금 옆으로 가서 자리를 비워 주었다. 그런데 거의 동시에 탁 하는 소리가 나고 그루터기가 마치 한쪽 다리가 부러진 벤치처럼 한쪽으 로 기울었다. "위험해요!" 문우성이 즉시 손을 내밀었지만 진아는 완전히 뒤로 넘어져 버렸다. "괜찮습니까?" "예. 하지만 어떻게 된 거예요?" 어렵사리 일어나서 진아가 투덜거렸다. "이상하군요." 문우성은 한 바퀴 빙글 구른 그루터기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 기 소리를 질렀다. "유진아 씨! 여기를 보세요!" 그루터기가 있었던 자리에 구멍이 있고, 그 바닥에 금속의 표면이 보였 다. 그리고 흔히 고풍스런 집의 대문에 붙어 있는 고리 같은 동그란 쇠붙 이가 그 금속 표면에 붙어 있었다. "그것이. 어쩌면." 진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문우성은 얼른 엎드려 흙을 양손으로 파기 시 작했다. 진아도 옷이랑 손이 더러워지는 것을 신경쓰고 있을 수가 없었 다. 흙 아래에서 서서히 둔탁한 금속의 빛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잠시 후였다. 이것이다! 진아의 심장은 아예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다. "그것을 잡아당겨요." 문우성이 고리를 잡고 힘껏 잡아당겼다. "안 돼요?" "꼼짝도 하지 않아요. 좋아, 차에서 공구를 가져오겠어요." 문우성이 갑자기 10살이나 젊어진 것 같은 기세로 차 쪽으로 뛰어갔다 가 공구통을 들고 곧 돌아왔다. 그는 그 중에 쇠뭉치 하나를 꺼내선 죽을 힘을 다해 뚜껑을 열려고 했다. "괜찮아요?" 진아는 문우성의 손끝을 쳐다보았다. 끽끽 소리가 나면서 뚜껑이 움직 이기 시작했다. "움직였어요!" 진아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 다음은 쉬웠다. 뚜껑은 그 전 체에 비하면 작았기 때문에 쑥 열린 것이다. "안에 누군가 있나요?" "기다려요. 사람이." 문우성이 열려진 문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한참 동안 라이터로 비추 어 보았다. 그의 어디에서 이런 용기가 생긴 것일까. 진아는 갑자기 그의 뒷모습에 마음이 든든해짐을 느꼈다. 그가 일어서서 말했다. "있어요, 젊은 여자가." "안에요?" "예. 하지만 죽었습니다." "죽었어요?" 진아는 문우성의 말을 반복했다. "죽었어요. 어쨌든 안으로 들어가 보겠어요." "괜찮아요?" 문우성은 겨우 빠져 들어갈 정도의 구멍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진아 는 갑자기 전신의 힘이 빠지는 것 같아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버렸다. 지 금까지 필사적으로 유괴된 딸을 쫓아왔다. 그리고 그것이 동생과 오현석 을 동시에 구할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지금은 그것마저도 끊어져 버린 것 이다. 잠시 지나서 문우성이 얼굴을 내밀었다. "벌써 죽어 상당히 지난 것 같습니다. 냄새가 코를 찔러요. 무리도 아 닙니다. 이렇게 밀폐된 곳에서. 경찰에 신고해야겠어요." 그러나 그 순간, 진아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신고하면 안 돼요!" "어째서요?" "그 여자 물건을. 어쨌든 소지품이라도 권기준에게 보여 주는 거예 요. 아직 그녀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게 말이에요." 대단히 잔혹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 이미 딸은 죽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살아 있는 진규와 현석을 구할 수 있는 빌미가 되는 것이다. 진아의 머리 속엔 이미 구체적인 설계도가 완성돼 있었다. "그렇군요, 그 수밖엔 다른 방법이 없군요." 문우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아는 문우성이 이렇게도 결단력이 있는 남자로 변한 것을 보고 놀랐 다. 시체가 있는 맨홀 안으로 태연히 들어가는 그 배짱은 보통 때의 문우 성에게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문우성은 손목시계, 스카프, 브로치 등 여자의 유품 몇 개를 가지고 안 에서 나왔다. "안을 보고 싶어요." 진아가 말하자, 그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보지 않는 편이 좋아요. 시체가 심하게 부패되었어요." 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다 하더라도 어차피 권기준의 딸의 얼굴을 모르니까 확인 할 수도 없을 것이었다. 두 사람은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진아는 지쳐 버렸다. 문우성이 라는 협력자가 있는 것이 오히려 그녀의 긴장을 풀어 놓은 것 같았다. 하 지만 지금 숨을 돌릴 수는 없었다. 문제는 오히려 지금부터인 것이다. "어쨌든 권기준에게 연락을 해야죠?" 진아는 등을 똑바로 펴고 깊이 숨을 쉬었다. 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진아는 어둠 속에서 죽어간 권기준의 딸을 생각 했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우성 씨." "왜요?" "그 안에서. 어떻게 해서 일주일이나 살려둘 생각이었을까요?" "여러가지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 산소, 음식물, 물. 하지만 공포 에 지쳐 버리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범인 쪽에서 계산착오로 산소가 빨 리 없어졌다든가." "하지만. 이상해요." 진아가 이마를 찡그렸다. "그렇게 대단하고 복잡한 준비를 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렸겠지요. 게다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었을까요?" "그것도 그렇군요." 문우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결론처럼 내뱉었다. "이것은 상당히 조직적인 패거리들의 유괴입니다." 그러면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오현석의 이야기와 다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오현석이 하승미의 오빠에게 유괴를 시켰다고 하더라도 하승준이란 사람이 이렇게 번거롭게 할 것인가? 더구나 하승준이란 사람은 승미의 말에 의하면 그다지 변변한 청년은 아니었던 듯한데 이렇게 조직적인 범죄를 꾸밀 수 있었을까. 이상했다. 진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유괴사건에 더욱 깊은 비밀이 사건 속에 숨 겨 있을지도 모른다. ---- -------- ------- -------- --------------------------------------------- 번호:28/30 등록일시:95/06/03 12:47 길이:233줄 제 목 : 제7장 일요일 <종말을 향해 달리다> -27- ** 문우성은 교외 레스토랑에 차를 세웠다. 식욕 따위는 있을 리도 없지만 어쨌든 진아도 문우성과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다. "전화를 걸께요." 샌드위치가 오는 것을 기다리는 사이에 진아는 권기준에게 전화를 하려 고 생각했다. "함께 갈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혼자가 아닌 것을 상대가 알아차리면 안 돼요." 진아는 안쪽 전화 박스로 걸어갔다. 이상하게도 침착해져 있었다. 다이 얼을 돌리는 손끝이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아, 당신인가? 빠르군. 더 늦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지." 권기준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침착했다. "오현석이 있는 곳을 가르쳐 줄 생각이 들었나?" "동생을 돌려 줘요." "조건을 만족시켜 주면 언제라도 돌려 주지." "나는 당신 딸을 데리고 있어요." "뭐라구?" 권기준의 목소리에서 차가운 웃음이 사라졌다. 그가 잠시 침묵을 지키 다가 낮게 말을 뱉었다. "지금 뭐라고 했지?" "당신 딸을 발견했어요. 동생을 돌려 준다면 장소를 가르쳐 드리죠." "그것은 거짓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증거를 가지고 있어요." "보고 싶군." "보고 싶으면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장소로 오세요." 잠시 권기준은 침묵하다가 짧게 그녀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좋아." 권기준의 목소리는 침착함을 잃고 있는 듯했다. 분명히 그렇다고 진아 는 믿고 있었다. 진아는 계속해서 박일수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다이얼을 돌리는 사이에 살짝 문우성 쪽을 돌아봤다. 그는 밖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 기다리고 있었지. 일은 끝났나?" "의논할 것이 있어요. 제가 권기준의 딸을 데리고 있어요." "뭐라구?" 전화 저쪽에서 일순 숨을 죽이는 기척이 있었다. "유괴되어 있던 것을 발견했어요. 당신에게 쓸모 있지 않나요?" "거짓말 아닌가?" "믿든지 말든지 그건 자유예요. 권기준에게 가르쳐 주면 무척 기뻐하겠 지요." "그런 짓을 하면 오현석은 죽어!" 진아는 가슴의 고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현석 씨와 교환할 장소를 가르쳐 드리죠." 박일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계산하고 있는 것일까? "어디로 가면 되지?" "형님 괜찮아요?" 차가 신호로 정지하자, 명수가 뒷좌석을 향해 말했다. "응. 지금, 어디쯤이지?" 뒷좌석에 누운 채 현석이 물었다. "이제 곧 권기준의 집이에요. 이제라도 제발 그만둬요, 형님. 그 몸으 로." "잠자코 달려." 현석이 말했다. "도중에 칼을 사 줘." "알겠어요. 철물점을 발견하면 사지요." 명수는 더이상의 설득을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호가 초록으로 변했다. 현석은 배의 상처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조금 전 박일수의 집에서 칼을 던졌을 때 상처가 다시 터진 것이다. 이번만은 정말 죽는 것일까. 현석은 생각했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지만 진아가 죽는 것만은 어떻게 해서라도 막고 싶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간단 한 방법이 있다. 경찰에게 알려 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는 할 수 없 었다. 현석은 어디까지나 범죄자였고, 원래부터 경찰이라는 걸 아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궁지에 몰려도 경찰에게만은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 아니다,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를 내 손으로 직접 살리고 싶은 것이다. 목숨이 붙어 있는 마지막 순간의 힘까지 모아서라도 꼭 그녀를 살리고 싶은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조금 더 살아 있어야 했다. 가는 도중에 김명수는 철물점에 들러 두 자루의 칼을 샀다. 또 차가 달 리기 시작했다. 손 안에 칼이 있으면 현석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는 이제와 생각해 보니 자신이 착실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착실하지 않은 것만은 일관하다 죽고 싶었다. 그것이 프로 살인자 오현석다운 삶인 것이다. 잠시 달라다 차가 속도를 떨어뜨렸다. "형님, 바로 저기예요." 현석이 일어섰다. 고통이 가슴과 배에 격랑처럼 스쳤다. "괜찮아요?" "천천히 달려, 담을 따라서." 현석은 머리를 낮추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권기준의 집을 둘러싼 벽 을 따라 차는 그렇게 천천히 나아갔다. "누군가 있어요." 명수가 말했다. 현석이 앞을 보자, 거기 눈에 익은 젊은 남자가 담 부 근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진규였다. "저 녀석 옆에 세워." 차는 조금 속도를 올리고 그 남자 옆을 빠져나가는 것같이 보이다가 급 브레이크를 밟았다. "이봐! 타!" 현석이 말했다. 진규는 오현석의 얼굴을 즉시 알아보고 차에 올라탔다. 진규가 엉망이 된 현석의 몸을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떻게 되어 가는 사태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뭔가 일이 꼬이고 있다는 사실만큼 은 진규도 잘 알 수 있었다. "누나가 정말로 권기준에게 잡혀 있을까요?" "누가 그랬지?" 현석은 진규의 말을 듣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거짓말이야." "어떻게 알죠?" "권기준에게 그런 취미는 없어. 너를 낚을 미끼야." "그러면 누나는." "오히려 권기준을 죽이려고 하고 있어." "누나가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진규는 겨우 현석에게 그의 상처에 대해 물었다. "어떻게 된 거죠?" "나는 내버려 둬. 어차피 길지는 않아. 하지만 네 누나는 죽으면 안 돼. 그렇지?" "물론이에요." "그러면 나를 도와 줘. 우선." 그때 명수가 버럭 소리쳤다. "형님! 권기준의 차예요." 권기준이 탄 승용차가 현석의 차를 스쳐서 지나갔다. 그가 뒷좌석에 누 울 듯이 기댄 채 여송연을 물고 있는 게 현석의 눈에 들어왔다. "권기준이 타고 있어요." "좋아. 저 차를 쫓아가 줘." 현석이 말했다. 빨리 처리를 하고 싶다, 살아 있는 동안에 말이다. 그는 숨이 차는 걸 억지로 참았다. "시민공원이라구요? 광화문에 있는?" 문우성이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예, 그래요." "하지만. 아직 밝은데요. 사람들의 이목도 있고." "그러니까 안심이에요." 문우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만난다면 그야말로 붙잡혀서 모든 수단으로 고문 당할 것이 뻔해요." 진아는 커피를 다 마셨다. 드디어 마지막 결전의 순간이 왔다. 물론 지 금 당장 진규와 현석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서 권기준 과 박일수를 잘 조종할 수만 있다면 실마리가 풀릴지도 모르는 것이다. 물론 권기준, 박일수와 유진아는 힘이나 술수 등에서 어른과 아이, 아 니 거인과 아기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유진아라는 아기는 단 하나 거인 이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만이 그녀가 가지고 있는 유일 한 희망이자 무기였다. 권기준과 4시, 박일수와는 5시에 만나기로 했다. "사람이 아주 많이 있을 거예요. 게다가 그 공원은 경찰이 자주 순찰하 고 있지요." "잘 알고 있군요." "아베크의 명소잖아요." "어머, 누구와 갔었죠?"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언제나 혼자 지나갔지요." 두 사람은 웃었다. 또 웃을 때가 있을 것인가. 진아는 생각했다. 오늘 밤에 모든 것이 정리되어야 하는데, 내일 또 한번 웃을 수 있을 것인가? "벌써 나갑니까?" 문우성이 말했다. "지금 나가면. 20분 전에는 도착해요."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아니에요. 이쪽이 좋은 장소를 선택해야 되니까요, 가지요." 두 사람은 자리를 떴다.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아." 박일수가 말했다. "어째서요?" 부하 한 사람이 박일수의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그 여자, 오현석이 도망친 것을 알고 있는지도 몰라." "그러면." "오현석 이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죽일 생각인지도 몰라." "녀석에겐 그럴 힘이 없습니다." 박일수는 힐끔 부하를 노려보았다. 뱀과 같이 차가운, 무표정한 눈이었 다. "한 사람을 죽이고 도망갈 힘은 남아 있어." "예." "겉보기와 달리 오현석의 상처는 심하지 않은지도 몰라." "그러면 안 가시는 편이." "만약 그 여자의 이야기가 정말이라면 놓치는 것이 너무 아깝지 않나?" 박일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그는 담 배를 질겅질겅 씹는 버릇이 있는데 그는 지금 담배를 껌처럼 씹어 대고 있었다. "그러면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지정한 시간까지 상당히 남았으니 까 빨리 몇 사람을 보내서 그쪽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겁니다. 그 다음에 오시면, 오현석이 어디에 있어도 절대로 안전합니다." 박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준비하지." 박일수는 그래도 초조한지 연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방 안을 두 리번거렸다. "하지만 그곳에서 눈에 띄게 소동을 피우면 곤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좋아, 만약 오현석이 온다면 죽이지 말고 차에 태워서 끌고 와. 그 여 자는 그 후에 생각하지. 바로 나가." "알겠습니다. " 부하가 나가려 하자, 박일수가 벌떡 일어섰다. 그 사이에 또 생각이 바 뀐 것이다. "안 되겠어. 나도 가지. 차 안에서 기다리기로 하지. 무슨 일이 있으면 일일이 전화를 하고 있을 틈이 없겠지." "알겠습니다." 박일수는 술잔의 위스키를 단숨에 마시곤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다 섯 시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그는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 었다. "따라오는 차가 있습니다." 운전사가 말했다. 권기준이 운전사에게 날카롭게 말했다. "고물차입니다. 떼어 버릴까요?" "아니, 따라오게 놔 둬." 권기준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타고 있는 녀석은 보이는가?" "안 보입니다. 저쪽도 상당히 능숙한 것 같습니다. 보일 정도로 가까이 오지는 않습니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권기준은 팔짱을 꼈다. "오현석의 미행 감각은 늘 뛰어났었어." "그렇습니다. 하지만 오현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째서지?" "오현석이라면 이쪽이 알아차리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권기준은 턱을 만지며 잠시 생각하다가 카폰을 집어들었다. "급히 젊은 애들을 몇 사람 보내 줘. 그래, 다른 길을 통해서 먼저 공 원으로 보내. 적어도 15분 전에는 도착하도록. 알겠지?" 권기준은 수화가를 놓고 천천히 시트에 기대었다. 잠시 밖의 경치를 바 라보고 있다가 운전사에게 말했다. "몇 시에 도착하지?" "4시 5분 전까지 틀림없이 도착합니다. 만약 더 일찍 간다면 10분 전까 지는 도착할 수 있습니다." "서두를 필요없어. 5분 전으로 충분해." 차는 빨간 신호에서 정지했다. 운전사가 물었다. "따님은 미국에서 돌아오셨습니까?" 권기준이 조금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이야. 다음 주에 돌아올 거야." "알아차린 걸까?" 진규는 초조한 모습으로 앞에 가는 권기준의 차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머리를 움직이지 마. 눈에 띄어." 현석이 말했다. 명수가 숨을 크게 쉬면서 물었다. "알아차렸다고 생각해요?" "권기준은 빈틈이 없는 녀석이니까." 오현석이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복부에서 계속 피가 흘러나와 이미 옷이 완전히 붉게 젖어 있었다. "알아차렸다고 해도 상관없어." 오현석은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은 어쨌든 힘을 비축해 두어야 했다. 중요한 때가 되어서 힘이 탈진해 버리지 않도록 말이다. 차가 계속 달리기 시작했다. 6월 7일 28회가 연재됩니다. 번호:29/30 등록일시:95/06/07 15:06 길이:233줄 제 목 : 제7장 일요일 <종말을 향해 달리다> -28- ** "저, 잠깐 실례할께요." 문우성이 갑자기 길가에 차를 대고 세웠다. "왜요?" "예, 잠깐. 저. 긴장하고 있는 탓인지 자꾸만 화장실에." 진아는 웃었다. 이런 모습이 본래 문우성의 얼굴인지도 모른다고 생각 하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갔다와요." "죄송합니다. 시간은 충분해요. 이제 10분 정도면 도착하니까요." "예, 기다리고 있을께요." 문우성은 차에서 내리자 작은 빌딩 사이로 뛰어 들어갔다. 진아는 미소지으면서 멍하니 밖의 빌딩을 바라보았다. 조금 앞에 높은 빌딩이 있는데 창문이 크게 경사진 각도로 열려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지금 문우성이 들어간 빌딩이 비치고 있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니, 거기 뜻밖에도 문우성의 모습이 보였다. 창문이 마치 거울 처럼 건너편의 광경들을 얼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문우성은 공중전화를 사용하고 있었다. 전화? 어디에? 진아는 어느 사이엔가 차에서 내렸다. 빌딩 쪽으로 걸어가선 모퉁이에서 살짝 안을 들여다보았다. 조금 안쪽 이기 때문에 목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뭔가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진아는 비틀거리듯이 그 자리를 떠났다. 문우성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어디로 전화하는 것일까? 누구에게? 왜 나 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진아는 차로 돌아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단 한 사람 내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문우성이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쇼크였다. 그러고 보니 그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갑자기 유괴된 딸이 땅 속에 갇 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그것을 쉽게 발견하고, 그 속으로 태연하 게 들어가기도 했다. 보통 때의 문우성과 전혀 다르게 보인 것은, 문우성 이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던 탓이 아닐까? 도대체 문우성은 누구를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문우성이 일을 끝내고, 종종걸음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를 차갑게 외 면하며 진아는 차를 출발시켰다. "진아 씨!" 문우성이 달려왔으나, 진아는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고 속도를 올렸 다. 문우성의 모습이 자꾸 멀어져갔다. 이제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는다! 나 혼자 하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진아는 핸들을 꽉 잡고 있었다. 유진아는 시민공원 뒤쪽에 차를 세웠다. 밖으로 나와서 좌우를 둘러보 았다. 그러나 별로 수상한 사람은 없었다. 물론 아직 밝기 때문에 사람은 적지 않았다. 손목시계를 보니 4시 10분 전이었다. 먼저 어딘가 좋은 장소를 발견해 두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광장 주변에는 산책나온 커플들이 제법 많이 눈에 띄었다. 벤치는 연인들에 의해 전부 점령당해 있었다. 이 주위가 사람이 많아 안전할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판단하며 어슬렁어슬렁 광장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많은 인파다. 권기준으로서도, 박일수로서도 섣불리 손을 쓰지는 못할 것이었다. 진아는 이상하게 침착한 기분이었다. 아마 동생과 현석을 위해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리라. 이것이 자기를 위해서라면 이만큼 조용한 기 분으로 있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마침 광장 한쪽의 벤치 하나에서 아베크가 일어서서 팔짱을 끼고 걸어 나갔다. 진아는 얼른 그 빈 벤치에 앉았다. 아베크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면서, 저 두 사람은 지금부터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호텔이라도 가는 것일까? 예전의 진아라면 그런 것에 얼굴을 찡그렸겠 지만 지금은 그런 걸 책망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살 아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만약 여기에 오현석이 있다면 그에게 대담하게 안겨도 좋겠다고 진아는 생각했다. 살아서 또다시 오현석과 진규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 해도 공포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막연한 쓸쓸함이 가슴을 채워올 뿐이 었다. 이제 시간이 되었다. 권기준은 정말로 올 것인가? 그리고 박일수는? 진 아는 살짝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에서도 권기준이 다가오는 기척은 없 었다. 만약 오지 않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이 계획은 그대로 진행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4시. 공원 정면 계단을 올라가는 곳에 있는 시계탑의 짧은 바늘이 <4> 를 가리키고 있었다. "유진아 씨!"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 진아는 튕기듯이 일어섰다. 벤치 뒤에 권기준이 서 있었다. "놀랐나?" 권기준이 웃었다. "나는 발 소리를 내지 않고 걷는 것이 특기라서." "유령 같군요." 진아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되찾았다. 적어도 권기준에게 지고 싶지 않 았다. "할 말이 있겠지. 차로 가서 이야기하지 않겠나?" "여기에서 말하지요. 여기가 아니면 이야기할 수 없어요." "좋아." 권기준이 벤치에 앉았다. 진아는 권기준과 조금 거리를 두고 자세를 고 쳐 앉았다. "그렇게 떨어지면 사랑을 속삭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내 동생은 어떤가요?" "건강해. 앞으로도 건강할지 어떨지는 당신에게 달렸지만." "당신의 딸을 데리고 있어요." "증거품은?" 진아는 주머니에서 문우성이 준 손목시계, 스카프, 브로치를 꺼내서 권 기준과의 사이에 차례차례 놓았다. "자, 이것이 당신 딸의 것이지요?" 진아는 숨을 죽이고 권기준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반응 하나에 진규의 목숨이 걸려 있는 것이었다. 권기준은 우선 손목시계를, 그리고 스카프 를, 그러고 나서는 브로치를 하나하나 들어올렸다. 권기준의 표정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권기준이 웃기 시작했다. 아주 유쾌한 듯이 커다랗게 소리를 내어 웃었던 것이다. 진아는 그의 너무나도 뜻밖의 반응에 아연해 있을 뿐이었다. 박일수는 차 안에서 초조해 하고 있었다. 기다리게 하는 것은 몰라도, 기다리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권기준보다 거물이 되기 위해서는 뭔가가 부족하다고 늘 생각해온 그로서는 유진아의 제안은 절호의 기회였지만, 시간은 한곳에 묶여 있는지 흐를 생각을 않는 것이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거야?" 차창에 얼굴을 내밀고, 그가 또한번 부하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제 곧 돌아오리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굼벵이 같은 녀석들이군!" 공원 뒤쪽 길가에 댄 차에서 박일수는 공원의 상황을 보러간 부하가 돌 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초조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자, 이 윽고 한 사람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되었지?" "여자가 있습니다." "오현석은?"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공원 안을 뒤지고 있습니다." "알았어. 잘 찾아." "예. 그리고." "뭐가 남았어?" "지금 그 여자가 권기준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뭐라구?" 박일수가 창으로 얼굴을 내밀고 그의 뺨을 후려칠 듯이 주먹을 휘두르 곤 냅다 소리쳤다. "그것을 먼저 말해야지!" "죄송합니다." "그밖에는?" "지금 현재로서는 눈에 띄지 않습니다." "권기준 혼자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박일수는 생각에 잠겼다. 권기준과 유진아가 만나고 있다구? 이것은 또 어떻게 된 것일까? "두 사람은 어떤 모습이지?" "예, 저. 권기준이 크게 웃고 있었습니다." "웃어?" 뭔가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간다고 그는 생각했다. 권기준을 죽이라고 명령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크게 웃으며 담소하고 있다니. 예상이 틀렸던 것일까. 그 여자에게 있어서 오현석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는 존 재일까? 하지만 그때 여자의 눈길의 진지함은 분명히 연기가 아니었는데. "권기준과 여자의 모습을 잘 감시해, 알았지?" 부하가 또 달려갔다. "이봐." 그는 밖에 서 있는 또다른 부하에게 말을 했다. "공원 안에 권기준의 부하가 반드시 또 있을 거야. 잘 찾아!" "알겠습니다." 부하가 달려가자 그는 차에서 밖으로 나왔다. 운전하고 있던 부하가 말 렸지만 그의 초조한 눈과 마주치자 당황해서 더이상 말을 못하고 입을 다 물었다. 그는 권기준이 혼자 와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겁쟁이는 아 니지만 신중한 녀석인 것이다. 그는 그렇게 잠시 서성이다가 차 안으로 돌아와선 밖의 동정을 직접 살 피려고 창을 열고서 얼굴을 내밀었다. 그때 누군가가 걸어왔다. 차 뒤쪽 에서 오고 있었기 때문에 박일수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갑자기 눈앞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알아차리곤 얼굴을 들었다. 놀랍게도 거기 오현석이 서 있었다. 소리를 지를 사이도 없었다. 은빛 칼 이 박일수의 목줄기를 수평으로 갈랐다.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는 차 안에서 힘없이 쓰러졌다. 피가 순간적으로 분수처럼 솟아올라 차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운전석의 남자가 권총을 빼려고 하면서 돌아보았다. 그러나 두 개의 동작을 동시에 하려고 한 것이 잘못이었다. 오히려 총을 뽑는 것이 늦었다. 칼이 가슴을 관통하는 것이 훨씬 빨랐던 것이다. 사내는 짧은 소리를 지르고 자신의 가슴에 꽂힌 칼을 내려다보면서 그 대로 천천히 쓰러졌다. 현석이 비틀거렸다. "괜찮아요?" 현석을 지탱한 것은 진규였다. "공원 안으로 데리고 가 줘." "무리예요! 틀림없이 놈들이 많이 있을 거예요." "괜찮으니까 빨리 도와 줘!" 진규는 현석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그를 껴안듯이 해서 공원 안으로 걷 기 시작했다. "뭐가 재미있지요?" 진아가 외치듯이 물었다. "아니, 이거 미안하군." 권기준은 겨우 웃음을 억누르며 턱을 어루만졌다. "배짱이 대단하다고 진작부터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아무것도 몰 랐나?" "뭘요?" "내 딸은 다음 주 미국에서 돌아올 예정이야." 진아가 권기준이 말하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한참 시간이 걸 렸다. "즉. 내 딸은 유괴되지 않았다는 거지." "하지만." 진아는 땅이 발밑에서 무너져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일까?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그렇다면. 왜 여기에 온 거죠?" "'딸'이라는 말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었지." "의미?" "그래, 즉." 권기준이 뭔가 말을 하려고 했을 때였다. "누나!" 진규의 목소리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진규야!" 진아가 일어섰다. 진규가 똑바로 달려왔다. 권기준이 급히 일어섰지만 이보다 먼저 진규가 그의 얼굴을 향해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무런 방비도 없이 태연히 앉아 있던 권기준은 낮게 신음하면서 벤치의 뒤로 넘어가서 한번 굴러 떨어졌다. 권기준과 좀 떨어져서 대기하고 있던 그의 부하들도 이 의외의 사태에 미처 손을 쓸 시간이 없었다. "이 새끼!" 진규가 벤치를 뛰어 넘어가 권기준을 잡아 일으켜선 꽉 쥔 주먹으로 턱 을 힘껏 후려쳤다. 권기준이 또한번 고목처럼 넘어졌다. 권기준이 피를 흘리면서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는 주변의 어딘가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 렀다. "이봐! 누가 이 새끼를 없애 버려, 어서!" 진아가 진규의 팔을 잡았다. "진규야! 잡힌 게 아니었어?" "뭐? 이 녀석이 그렇게 말했어? 나에게는 누나를 잡았다고 했어." 진아의 눈이 분노로 불타올랐다. 권기준이 뛰기 시작했다. 마치 목표물 을 찾는 야수처럼 그가 내달렸기에 진규도, 진아도 뛰어가는 그의 뒷모습 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나 웬일일까. 달려가던 권기준이 뭔가와 부딪쳐 갑자기 우뚝 서 버 렸다. 그가 허리를 조금 굽히고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진아는 숨을 들이마셨다. 권기준의 가슴에 칼이 끝까지 꽂혀져 있는 걸 진아가 발견한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권기준이 진아 쪽으로 비틀대며 두세 걸음 다가왔다. 아베크를 가장하 고 있던 형사들도 뛰어왔다. 권기준은 유진아 쪽으로 손을 뻗으며 눈을 크게 뜨곤 뭔가 말을 하려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여기야!" 권기준이 도망가려고 했던 정면의 나무 뒤편에서 형사 한 사람이 경찰 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칼은 거기서 날아온 것이었다. 진아는 광장 을 날듯이 가로질러 그곳으로 뛰어갔다. 그녀가 미친듯이 한 사람의 이름 을 부르고 있었으나 너무도 날카롭게 울부짖는 소리라 누구도 그것을 알 아듣기 어려웠다. 현석이 거기 엎드려 쓰러져 있었다. "죽었어요." 형사가 말했다. "마지막 힘으로 그 칼을 던진 것 같군요." 진아는 오현석의 옆에 무릎을 꿇고는 그의 머리를 살짝 들어올려 손으 로 눈을 감겨 주었다. 많은 발 소리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6월 10일 마지막회가 연재됩니다. 번호:30/30 등록일시:95/06/10 14:32 길이:218줄 제 목 : [에필로그] 사건의 결말 -마지막회- ** 에필로그 ** < 사건의 결말 > 김승유 반장의 웃는 얼굴은 일주일 전에 봤을 때와 조금도 변함이 없었 다. 피곤에 지친 허탈한 미소라고나 할까. "여러가지로 성가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진아가 그의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숙였다. 경찰의 취조실이 조금 어둡 고 싸늘했기 때문에 그의 미소는 더욱 쓸쓸해 보였다. "잘 잤어요? 유치장에 넣은 것은 안 됐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매스 컴이 따라붙어서요." "고맙습니다, 잘 잤어요." 진아가 미소지었을 때, 문이 열리고 커피가 들어왔다. 실제로 진아는 거의 한잠도 자지 못했다. 오현석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얼굴과 진규의 풀죽은 얼굴이 끊임없이 눈앞에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진 규는 어제 오후에, 뺑소니사고의 범인으로 체포되어 즉각 구속되었다. 진 아는? 그녀는 도심 한가운데에서 벌어진 살인사건과 그 뒤에 얽힌 마약밀 매 등의 사건에 대한 증인으로서 모든 조사를 다 받고 나서 시체 유기 등 에 관한 죄로 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었다. 오현석의 마지막 모습은 그녀의 뇌리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한 장 의 참담한 인물화일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하느라 험하게 일그러진 얼 굴, 초점은 잃었으나 분명히 어느 한곳을 향하고 있던 눈, 그리고 얇은 입술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뜻모를 미소, 차마 눈뜨고 못 볼 그 형상은 진아에게 큰 충격을 주었는데, 전신을 흠뻑 적시고 있는 검붉은 피로 인 해 그 충격은 더욱 짙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김 반장이 말했다. "하지만 일단 당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내게 모두 말해 줘요." 진아는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된 진규의 뺑소니사고부터 시작해서 그간의 상황을 소상히, 그리고 솔직히 다 이야기했다. 이야기하면서, 그녀는 그 모든 게 스스로도 황당무계한 이야기와 같이 생각되었다. 길고 긴 악몽을 꾸었던 것처럼 말이다. 몇 시간이나 걸려서 겨우 이야기를 마쳤을 때는 목이 바싹 말라 있었 다. 김 반장이 차가운 물이 가득 채워진 컵을 권하곤 그녀를 물끄러미 바 라보았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진아가 그의 그런 시선과 침묵이 싫어 화제를 돌리자, 김 반장이 미소 를 지으며 먼저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유괴된 딸에 관한 거지요?" "그래요. '월요일까지'라는 시간제한이 협박장에 있었어요. 하지만 권 기준의 딸은 미국에 있다고 했어요." "설명하지요." 김 반장 자신도 물을 한 잔 마시며 말을 시작했다. "애당초 사기사건에 발단이 있었습니다." "사기사건? 경기물산에서 들은 이야기요?" "그렇습니다. 그 사기사건은 사실이었어요. 그리고 피해자들의 자살도 한두 건으로 그치지 않았구요." "그것은 권기준이." "아니, 권기준은 처음부터 관계 없습니다." 김 반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명함이 있었는데요." "만약 권기준이 정말로 그 사기사건과 얽혀 있다면 그런 명함은 사용하 지 않았을 겁니다. 권기준의 사업 경쟁자 중 누군가가 일부러 그를 곤경 에 빠뜨리려고 권기준이란 이름을 사용해서 사기를 친 것입니다. 경기물 산은 사실상 권기준의 마약밀매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전영우는 권기준을 배신하고 그 사이에서 한몫 잡고 있었죠. 다시 말하면 권기준의 라이벌에 게 붙어서 사기사건의 공범자가 되었던 것이지요. 전화 문의가 오면 적당 히 대답해서 그를 안심시키는. 그러면서도 권기준의 하수인이 되어 마약밀매의 전면에서 활동하는. 그래서 전영우는 살해당한 것입니 다." "전영우 씨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할 생각이었을까요?" "글쎄요. 아마 당신을 한패에 넣어 어떤 일을 꾸미려고 했을 거라고 생 각합니다." "어떤 일을요?" "권기준의 딸을 유괴할 계획이었겠죠." "하지만 그 계획은 이미 오현석 씨가." "유괴는, 원래는 사기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처음 계획한 거지요. 권기 준과 경쟁 상대에 있는 녀석들은 처음부터 권기준의 명함을 이용해 투자 운운하며 사람들을 끌어모았습니다. 그래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완전히 권기준에게 돈을 사기당했다고 생각하고, 그만큼을 도로 찾아야 한다며 권기준의 딸을 유괴하려고 했던 겁니다. 이때 전영우는 또 한번 양다리를 걸치며 따로이 권기준의 딸을 유괴하여 한몫 잡으려 했던 것이지요. 딸이 사라지더라도 일단 사기 피해자들이 의심받을 테니 그로선 해볼 만한 도 전이었겠지요." "그러나 전영우를 죽인 것은 오현석 씨잖아요?" "확실히는 모릅니다. 아마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왜 죽였을까요?" "전영우는 오현석이 전부터 권기준의 밑에서 일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 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를 행동대원으로 쓰려고 은밀히 오현석에게 유괴 계획을 털어 놓은 거예요. 전영우는 혼자서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으니까요. 오현석은 전영우의 감언이설에 넘어갔지만, 사기 피해 자를 위해 일한다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죠. 그래서 자기 부하를 시 켜서, 자신이 직접 권기준의 딸을 유괴하려 한다고 말했던 거죠. 전영우 나 사기 피해자들을 배제한 채로요. 그래서 어차피 전영우는 사라져야 했 지요. 오현석이 전영우를 해하기 전에, 뜻밖에도 전영우를 죽이라고 명령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가 바로 권기준이죠. 전영우가 배신한 것을 권 기준도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유괴 계획은 어떻게 되었죠?" "오현석은 하승준에게 유괴 계획의 준비를 맡겨둔 것 같아요. 그러자 하승준은 용의주도하게 예전의 범죄 실화 등을 읽고 그 안에서 사용한 수 법, 즉 커다란 상자를 땅 속에 묻고 그곳에 인질을 가둔다는 방법으로 하 려고 우선 미리 그 숲속에 상자를 묻어 두었던 거지요." "그러면 그것은 문우성 씨가 생각한 것이 아니군요." 진아는 겨우 사정을 알았다. "당신이 수배되고 나서, 문우성 씨와는 자주 이야기를 했지요. 그리고 그로부터 당신의 동생이 사고를 일으킨 것도 들었어요." "그럼 그 땅 속 밀폐공간 안에 있던 인질은 누구인가요?" "안에 사람은 없었습니다. 당신은 안을 보지 않았죠? 안에는 우리들이 여자가 흔히 가지고 다니는 물건을 넣어 두었던 겁니다." "그럼 제가 문우성 씨에게 속은 거군요." "문우성 씨를 원망하지 마세요. 전부 내 요청으로 한 것이니까." "하지만 경찰이 어떻게 유괴 계획과 사고 현장을 알았죠?" "협박장입니다." "협박장?" "당신 방의 서랍 속에 있었지요. 허락없이 조사했지요, 당신이 소매치 기 혐의로 잡힌 사이에. 사고 현장은, 우리나라 경찰이 그 정도도 찾아내 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되지요." "그 소매치기 소동은 어떻게 된 거죠?" "권기준의 농간이었지요. 사실 오래 전부터 우리들은 경기물산과 전영 우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전영우가 살해당하고, 당신이 그와 약속한 상태였기 때문에 조사한 것이지요." "그 밀폐공간 안은 비었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면 도대체 유괴된 사람 은 어디에 있었던 거예요?" "딸이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구요?" "그것이 오현석의 실수의 근원이었죠. 오현석이 권기준의 경호원으로서 상당히 중요한 존재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는 칼을 사용하는 것 은 천재였지만, 그는 단순히 권기준의 경호원으로 소위 마약의 거래와 상 대와의 전화에 마약을 '딸'이라는 암호로 부르고 있었던 것을 전혀 몰랐 던 겁니다." "암호라구요?" "도청당하는 것을 우려해서 권기준은 거래자들과 그런 암호를 정하고 있었지요. 그러니까 권기준의 딸이란 그가 분실한 마약을 의미하는 것이 었어요." 진아는 혼란되었다. 그러면 그렇게도 죽을 힘을 다해서 찾았던 권기준 의 딸이 마약이었단 말인가? "그리고 하승준은 정말 훌륭하게 딸을 뺏은 거지요. 그는 나중에서야 그 용어가 마약을 의미한다는 걸 알고, 급히 방향을 바꿔 실제로 권기준 의 마약을 탈취했던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의 생각인데, 하승준은 아마도 이것을 권기준과 박일수 두 사람과 동시에 거래를 할 생각이었던 것 같아 요." "그 협박장의 내용은. 정말 딸처럼 되어 있었는데." "그건 하승준이 오현석의 지령을 받고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만들어 둔 편지였어요. 그러나 딸의 의미를 안 다음에 바꿀 여유가 없었지요. 내 생 각엔, 오현석에게 알리기엔 시간이 촉박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면 그것을 오현석 씨에게 알리지 못하고 하승준이 죽어 버린 것이 군요." "그렇습니다. 하승준은 인질 대신에 마약을, 진아 씨도 보았던 사고 현 장 부근의 그 상자 속에 넣어서 감추어 두었죠. 그것도 상품으로써의 가 치는 막대하기 때문에 권기준은 물론이고 박일수까지도 협박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겠지요. 물론 상자 속에 들어 있던 주인을 잃어버린 마약은 모두 경찰이 수거했지요." 진아는 긴 한숨을 쉬었다. 일주일 간의 목숨을 건 싸움이 갑자기 수포 로 돌아간 것 같아서 너무도 씁쓸하고 허무했다.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많은 부분들이 있었고,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이 너무 많았으나 고개를 흔들며 더이상의 궁금증을 털어 버렸다. "당신은 내 삶의 천사입니다." 언젠가 문우성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 유치한 표현 을 너무도 진지하고 솔직하게 털어 놓는 바람에, 진아는 차마 웃을 용기 도 없었다. "내 인생에 있어, 유일하게 내게 진심으로 대해 준 한 사람이 있어. 거 짓이나 위선이 아닌, 진실된 마음으로 나를 걱정하고 생각해 준 사람, 그 사람은 바로 유진아 당신이야." 권기준의 별장에 숨어 들어갔던 날 달리는 차 속에서 오현석이 사뭇 비 장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었다. 진실? 과연 내가 그를 진실을 가지고 대 했던가 하고 진아는 자신의 생각을 되짚어 보았었다. 짧은 기간 동안의 먼 도피여행, 악연의 그 여행은 어찌 보면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될 길이었다. 그 과정 속에서, 그에게 보인 그녀의 마음은 솔직히 동반자로서의 관심 이었지 시랑이나 애정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 빈 껍데기뿐인 관심 에 감격해 하고 가슴속 깊이 그녀의 마음을 새겨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 래도 그녀는 그에게 아주 잠깐 동안 반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사랑의 감정이었을까. "천사 같은 애인을 하나쯤 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 착하고, 똑똑하고, 그러면서도 배짱 좋은 그런 여자. 내겐 그런 여자가 천사 라구. 얼굴이 예쁜 건 필요치 않아. 천사라고 해서 전부 다 예쁘지는 않 을 테니까 말이야. 당신은, 그런데 너무 예뻐." 권기준의 별장에 당도했을 때, 그가 이 말을 하고는 자신도 그 말에 쑥 스러운 듯 씨익 한번 웃고 훌쩍 차에서 뛰어내렸었다. 문우성에게나, 그리고 오현석에게나 '천사'라는 말로 표현되어져 대접 받는 것이 그녀로선 우스웠고 부끄러웠고, 그리고 조금은 슬펐다. 오현석. 30년도 안 되는 짧은 인생을 온통 범죄로 얼룩진 인생을 살다 간 남자. 그것도 아무 때 어느 곳에서라도 주저없이 살인을 일삼던 프로 살인자. 그가 생의 마지막 닷새동안을 그녀와 함께 동반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 는 것일까. 그의 마음 밑바닥에 흐르던 아주 작은 씨알의 천진함과 나약 한 인간성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가 용서받지 못할 악인이었으나, 웬지 모르게 그녀에게는 그렇게 악 랄하고 치졸한 인간으로 비쳐지지 않았던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 까. 그가 꾸몄던 음모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잃지 않았던 진지함은? 그것 은 혹시 사회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반항아적 시선에서 비롯되는 진지함 이 아니었을까. 잘못 태어나 잘못 길들여진 세상에 대한 분노의 시선 같 은 것. 그녀는 지금 경찰서 유치장에 있다. 동생의 뺑소니사고로 인한 피해자 를 유기한 죄를 심판받기 위해, 어쩌면 내일부터 일주일간의 과정들을 다 시 조사받아야 될 것이다. 그녀는 지금 마음이 차라리 편해지는 걸 느끼고 있다. 문우성이 아까 낮에 면회를 왔으나, 진실로 그의 호의를 거절하고 끝내 면회에 응하지 않았었다. 그래도 마음은 참 편했고, 이것은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았다. 단지 하나, 오현석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얼굴이 그녀의 뇌리에서 사라 지지 않고 있는 것은 편안한 마음 한가운데에 남아 있는 우울한 편린 같 은 것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감히 천사라고 말했었다. 좋다, 그에게 있어 그녀가 천 사였다고 치자.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죽어 버린 오현석을 되살려 내고서 그가 가진 진지함과 천진함으로 새 삶을 살아 보라고 권하 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현실화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슴아팠다. 그에게 있어 유진아는 천사이기는 했으나 신()은 아니었기에. 아니 다, 천사는 신이 아니기에 그를 살려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를 다시 살 려낸다한들 뭘 어쩌겠다는 생각도 없이 그녀는 부질없이 그런 생각에 젖 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잠을 자둬야지. 그래야 맑은 정신으로 내일 다시 조사에 응하지. 그녀는 애써 잠을 청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