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뇌 2권 지은이: 베르나르 베르베르 펴낸이: 홍지웅 출판사: 열린책들 출판년도: 2002년 7월 10일 초판 1쇄 2002년 7월 15일 초판 2쇄 저자소개: 베르나르 베르베르 Bernard Werber 베르베르는 일곱 살 때부터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한 타고난 글쟁이이다. 1961년 툴루즈에서 태어나 법학을 전공하고 국립 언론 학교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했다. <별들의 전쟁> 세대에 속하기도 하는 그는, 고등학교 때 만화와 시나리오에 탐 닉하면서 만화 신문 <유포리Euphorie>를 발행하였고, 이후 올더스 헉슬리와 H.G.웰즈를 사숙하면서 소설과 과학을 익혔다. 대학 졸업 후에는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과학 잡지에 개미에 관한 평론을 발표해 오다가, 드디어 1991년 1백 20여 회의 개작 을 거친<개미>를 발표, 전 세계 독자들을 사로잡으며 단숨에 주목받는 <프랑스 의 천재작가>로 떠올랐다. 이후에도 세계 밖에서 세계를 들여다보게 하는 <상대 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죽음과 삶을 넘나드는 영계 탐사자로의 여행 을 안내하는 <여행의 책>, 인류 진화의 수수께끼를 본격적으로 탐구한 과학 스 릴러 <아버지들의 아버지>, 천사들의 관점을 통해 무한히 높은 곳에서 인간을 관찰하고 있는 <천사들의 제국>으로 짧은 기간 내에 프랑스에서는 물론(프랑스 에서만 총 5백만 부 판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는 작가들 중의 하나로 자리를 굳힌 컬트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이미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개미> 출간 10주년을 맞아 베르베르가 내놓은 신작 소설 <뇌>는 이전의 <아 버지들의 아버지>와 더불어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를 더듬어 가는 작업의 일부 이다. <아버지들의 아버지>에서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문제를 탐구했던 베르 베르는 이번에도 이지도르와 뤼크레스라는 두 인물을 등장시켜 <우리는 누구인 가>라는 문제를 풀어 나가고 있다. 즉 <뇌>는 인간의 뇌에 관한 최근의 연구 성 과를 바탕으로, 인간 탐구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 주는 장편 소설이다. 서스펜스 와 과학 지식과 모험담을 한데 섞은 이 작품은 우리를 인간의 뇌라고 하는 신비 롭고 매혹적인 대륙의 한복판으로 이끌어 간다. 봉사자 이름: 기정민 차례: 제 2막 두개골 밑의 폭풍(계속) - 303 제 3막 우리 머릿속의 보물 --- 461 감사의 말----------------- 589 제2막 두개골 밑의 폭풍 54 <아무>라고? 기이한 이름이군. 혹시 이자는 사람이 아닌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득 뤼크레스의 뇌리를 스쳤다. 그녀는 물론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이라는 컴퓨터는 인간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다. 사람이 아니라면 뭘까? 혹시......딥 블루 IV일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기계가 의지나 의도, <자아>에 대한 의식을 지니고 있어야 하 는데, 그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사뮈엘 핀처도 체스 경기에서 이긴 뒤에 그 점에 관해서 분명히 말하지 않았던가? <컴퓨 터는 기분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컴퓨터는 설령 승리한다해도 얻을 게 없습니다. 전기가 덤 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소프트웨어가 추가로 설치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컴 퓨터의 강점이자 약점입니다.> 어쨋거나 범인이 딥 블루 IV라는 가정에는 적어도 한 가지 장점이 있다. 사건을 설명하는 그럴싸한 동기 하나가 제공된다는 점이다. 복수가 바로 그 동기다. 만약 핀처에게 원한을 품 을 만한 자가 있다면, 그 쇳덩어리야말로 그럴 자가 아니겠는가....... 딥 블루 4가 살인자라고? 그렇다면 어떻게 컴퓨터가 제 표적을 찾아낼 수 있었을까? 컴퓨터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 지 않은가....... 하지만....... 컴퓨터가 인터넷에 접속된다면 네트워크의 다양한 가능성을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컴퓨터든 온갖 공용 카메라와 웹캠과 감시 카메라의 영상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컴퓨터 가 어떤 사람을 감시하거나 추적하고 그가 공격에 가장 취약한 때가 언제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아닐까? 뤼크레스는 자기가 끼어든 이 사건이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건 전세계 인류와 관련된 사건이다. 인간과 기계가 서로 맞서 싸운 초유의 사건인 것이 다. 하지만 전산망에 연결된 컴퓨터가 피해자를 찾아냈다 해도 어떻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성 행위를 하고 있는 그를 죽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딥 블루 4는 어떻게 핀치를 죽일 수 있었을까? 뤼크라르는 그 장면을 상상해 보려고 애쓴다. 사뮈엘 핀처와 나타샤 안데르센이 침대에 올 라간다. 그들은 알몸이다. 거기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악의에 찬 컴퓨터 딥 블루 4가 복 수심에 이끌려 그들을 엿보고 있다. 어떻게? 어떤 감시 카메라를 통해서, 아니면 개인용 컴 퓨터 위에 놓인 간단한 웹캠을 이용해서. 빌어먹을! 왜 진작에 그 생각을 못했을까? 어쩌면 핀처는 새로 나온 기발한 전자 장치를 인터넷에 연결해 사용하고 있었을지도 모른 다. 이 가정은 사건의 자초지종을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나타샤로서는 정말로 자기 때문에 그가 죽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감 전된 사람에게 몸이 닿으면 닿은 사람도 감전되게 마련인데, 어째서 나타샤는 멀쩡하게 살 아남았을까? 아마도 핀처가 심장이 더 약해서 그랬을 것이다. 나타샤는 그게 오르가슴 때문 에 생긴 사고라고 생각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녀는 자기 역시 쾌감의 절정에서 흔히 <작은 죽음>이라 불리는 순간적인 실신 상태를 경험한 적이 있음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일시적인 혼절이 죽음으로까지 이어질 것 같 지는 않다. 기이한 시나리오이긴 하지만, 컴퓨터가 살인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성립되기 시작한 다. 뤼크레스의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들이 서로 착착 맞춰지고 있다. 그녀가 보기에, 굳이 공상 과학에서 예를 구하지 않더라도, 현재의 과학 기술 수준을 감안 하면 그런 상황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런 상황이 불가능해 보인다면, 그것은 <생 각하는>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컴퓨터를 과소평가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컴퓨터가 <아이들> 수준의 사고 능력을 갖추어 가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과학 논문을 통해 밝 혀진 바 있고, 그런 논문들은 갈수록 많아지고 있는 추세다. 한 <전자 아이>가 가장 지능이 높은 인간을 죽인 셈이다. 제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서, 아 니면 만인이 보는 앞에서 그 사람이 저에게 패배를 안겨 주었기 때문에 말이다. 전자 기억 을 가진 아이는 제가 당한 일을 절대로 잊지 못한다. 생각들의 아귀가 척척 맞아 돌아가고 서로 보완되고 병치되면서 하나의 논리적인 사슬을 이룬다. 그녀는 자신이 체스 판에서 움직이는 하나의 폰과 같다고 느낀다, 이제 게임의 규칙 이 어렴풋하게나마 이해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여느 싸움과 다르다. 그녀의 매력이나 민첩성 따위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 그녀는 흑진의 포로가 되어 있다, 만일 이지도르가 자기를 이런 악몽 속으로 끌어들이리라는 것을 사전에 알았더라면, 그녀 는 이 모험에 뛰어드는 것을 다시 생각했을 것이다. 과학적인 조사를 한번 해보자더니, 이거야 원! 그렇긴 해도....... 뤼크레스는 벌써 기사의 제목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 <딥 블루 IV의 복수>나 <살인자 는 컴퓨터였다> 같은 제목이 좋은 듯 싶다. 그런 기사면 퓰리쳐 상도 문제없어! 퓰리쳐 상도 좋지만, 우선은 여기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계속 거기에 갇혀 있다가는 속절없이 미치광이가 되고 말 것이다. 55 그의 하얀 퀸이 위협을 받고 있었다. 사뮈엘 핀처는 판의 형세를 검토하고 나서, 퀸을 체스 판의 중앙으로 옮겼다. 퀸이 거기에 있으면 상대의 공격시도가 모두 차단되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핀처는 장 루이 마르탱과 체스 두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의 정신을 대리하는 말들과 마 르탱의 정신을 대리하는 말들이 체스 판에서 게임을 벌이고 있을 때면, 육신의 조건을 초월 하여 두 사람의 뇌가 대등하게 승부를 겨루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국이 계속되었다. 마르탱은 핀처의 하얀 퀸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쉽사리 백진을 유린하며 승리를 거두었다. " 잘 두네요." <박사님이 아직 초보자라서 내가 이긴 거예요. 나도 어떤 컴퓨터 프로그램하고 두면 판판 이 져요.> " 굉장한 고수를 만난 셈이군요, " <그래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프로그램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기도 해요. 기계가 어떤 분 야에서는 이미 인간을 능가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다른 것은 제쳐 두 고라도, 전략이라는 측면에서는 기계가 인간을 능가하고 있는 게 분명해요. 그런데, 세상에 서 벌어지는 일치고 전략과 무관한 게 뭐가 있을까요? 식물이 자라는 것도 환경을 정복하기 위한 전략이고, 아이가 자라는 것도 DNA의 자기 복제를 위한 전략이에요.> "흥미로운 얘기로군요. 하지만 내가 보기엔 마르탱 씨의 생각에 조금 무리가 있는 것 같군 요." 핀처는 마르탱의 등에 방석을 받쳐 자세가 좀 더 안정되게 해주었다. <현재 체스 세계 선수권 보유자는 카스파로프가 아닙니다. 그를 이긴 컴퓨터 디퍼 블루가 진정한 챔피언인 셈이죠. 어쩌면 불완전한 인간에 맞서 완전한 기계가 승리를 거두는 것이 역사의 방향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원숭이를 정복했지만, 컴퓨터가 원숭이의 원수를 갚아 주는 것이지요.> 핀치는 주위의 다른 환자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파과병 환자인 그들은 그런 종류의 대화를 나누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살바도 르 달리의 그림을 복제한 벽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기이한 형상들 속에서 자기들의 일상 에 결여된 상상적인 것을 찾아내고 있을 터였다. " 우리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기계보다 강할 겁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바로 꿈 때문입니 다. 기계는 꿈을 꾸지 않습니다. " <꿈을 꾼다는 것의 이점이 뭐지요?> " 꿈은 우리 자신을 다시 포맷할 수 있게 해줍니다. 매일 밤, 수면 중에 급속한 안구 운동 이 일어나는 이른바 역설 수면의 단계동안 우리는 이미지들과 관념들을 받습니다. 그와 동 시에 우리는 낮 동안에 우리를 속박하려고 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납니다. 옛 소련에서 스탈린 체제의 숙청기에 가장 널리 행해진 고문은 사람들을 재우지 않음으로써 꿈을 꾸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꿈을 빼앗기면, 우리의 모든 지적인 힘을 잃어버립니다. 호메로스의 이야기에 나오는 오뒤세우스도 꿈을 꾸는 동안에 아테나의 조언을 듣습니다. 컴 퓨터들은 꿈을 꾸지 않습니다. 그저 지식을 축적할 뿐이지요. 컴퓨터들은 하나의 사고 체계 에 갇혀 있습니다. 이 사고 체계는 선별을 통해서가 아니라 축적을 통해서 기능합니다. " <사정이 달라지고 있어요, 여러 연구소에서 <<인공 의식>>이라는 것을 개발한 모양입니 다.> " 과학자들이 꿈꾸는 능력을 지닌 컴퓨터를 발명하지 않는 한, 인간은 언제나 기계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 핀처는 벽을 장식하고 있는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들을 가리켰다. " 어떤 컴퓨터가 저런 그림을 그릴 수 있겠습니까? " <달리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단지 꿈꾸는 능력만이 인간 정신의 특징을 이루는 건 아니라 는 생각이 들어요. 광기의 능력 역시 인간 정신의 한 특징이 아닐까요?> 핀처는 그 생각을 좀 더 설명해 보라고 자기 환자에게 권했다. <광기, 아니 어리석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컴퓨터가 우리 인간과 가까워지기 위 해서는, 한 가지 능력을 꼭 갖추어야 할 겁니다. 바로......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는 능력입니 다. 어제 그 주제를 놓고 아테나와 토론을 했어요. 아테나가 말하더군요. 컴퓨터들은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하며 우쭐대는 한 결코 인간을 이기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테나는 이제 인공 지능이 아니라 <<인공의 어리석음>>을 창조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핀처는 대모갑 테 안경을 고쳐 쓰며 되물었다. " 인공의 어리석음이라고요? " <나는 이런 미래를 상상하고 있습니다. 컴퓨터들이 인간에 의해 미리 프로그래밍되지 않은 자기들 나름의 의식뿐만 아니라, 기분이나 컴퓨터 특유의 감수성까지 갖추게 될 날을 말입 니다. 그런 날이 오면, 컴퓨터들을 안심시키고 컴퓨터들의 신경증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심 리 치료사가 나타나게 될 수 있고 달리의 그림과 같은 작품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합니다,> 이게 아테나의 말일까, 마르탱의 말일까? 마르탱은 미래에 대한 전망을 이렇게까지 외곬으 로 밀고 나간 적이 없다. " 미안하지만, 나는 인간의 뇌에 필적할 만한 기계가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정 보 공학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을 거예요. 컴퓨터가 우리를 구원하지도 않을 것이고, 의식의 진화라는 영역에서 우리의 계승자가 되지도 못할 겁니다. " 그러자 마르탱은 정보망의 물결에 다시 자기 정신을 실어 보내어, 대학과 연구소의 사이트 들을 돌아다니며 핀처를 놀라게 할만한 최신 연구들을 찾았다. 56 그녀는 점점 더 세게 유리창을 두드린다. "이봐, <아무>! <아무>! " 방에 다시 불이 켜진다. 모니터에도 불이 들어왔다. <드디어 말을 하기로 결심했나요?> " 당신이 누군지 알겠어. 당신은 컴퓨터야. 그래서 나에게 직접 말을 하지 않고 모니터를 통해서 말하는 거야. 당신은 진정으로 존재하는 게 아냐. 사람이 프로그래밍해 놓은 말들을 되풀이하는 한낱 기계일 뿐이라고. " <아니오.> " 그럼 당신 자신을 드러내 봐. 너무 흉측하게 생겨서 내 앞에 나타나지도 못하는 거야? 나는 확신해. 당신은 사람이 아냐. 당신의 문장도 사람이 아냐. 당신은 하나의 기계로서 사 고하고 있어. " 공격은 최선의 방어다. 비록 벽에 쿠션을 댄 방에 갇혀서 컴퓨터를 마주하고 있을지라도, 그녀는 자기가 하나의 정신과 대결하고 있음을 잊지 않고 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기가 패배할 거라는 생각 따위는 해본 적이 없는 그녀다. " 당신은 기계야. 증거를 대볼까? 만일 당신이 사람이라면, 나의 매력에 그토록 둔감하지는 않을 거야. " 그러면서, 그녀는 몸을 약간 기울여 카메라가 옷깃의 깊이 파인 부분과 그 속의 브래지어 를 굽어보게 한다. 이자가 일곱 번째 동기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자. <아닌 게 아니라, 당신은 대단히 아름답소.> 이 자가 변명을 시작할 모양이다. 자기가 딥 블루 IV로 여겨지는 것을 싫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당신은 하드디스크와 마더 보드와 트랜지스터 따위를 내부에 지닌 고약한 쇳덩어리일 뿐 이야. 규소로 만들어지는 반도체에 리비도가 있을 리 만무하지! " <난 사람이오.> "당신은 <아무>야. 당신 스스로 그렇게 말했잖아? " <난 <<아무>>요. 하지만......사람임에는 틀림없소.> "그럼 이리 와서 모습을 드러내. 내가 만져 볼 수 있게 이리 오라고. 내 앞에 와서 이야기 를 하면, 당신이 알고 싶어하는 것을 모두 말하겠어. 약속하지! " 침묵. <당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잊지 마시오. 당신은 조건을 달 수 없소.> " 당신은 비겁해. " <중요한 건 내가 누구냐가 아니라 당신이 누구냐 하는 거요. 당신은 기자요. 이미 우리 병 원에 잠입한 적이 있고, 우리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당신 의 조사가 어디까지 진척되었으며, 그 조사에 관해서 누구에게 이야기를 했느냐는 거요. 나 는 시간이 많소. 당신이 우리를 돕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며칠, 몇 주일, 아니 몇 달이라도 여기에 계속 머물게 될거요. 잘 생각해 보시오. 이성을 잃고 미치광이가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오.> 그녀는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카메라의 대물렌즈 속을 들여다 보기라도 할 것처럼 유리창 에 얼굴을 바싹 들이댄다. " 이미 나는 별로 이성적인 사람이 아냐. 나 자신에 관해서 연구를 해보니까, 내 정신의 12% 정도는 자기 도취증에 빠져 있고, 27%는 불안 상태에 있으며, 18%는 정신 분열증의 경향을 보이고, 29%는 어릿광대 기질이며, 14%는 수동적이면서도 공격적인 이상 성격이더 라고. 게다가 몇 시간 전부터는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지. " 그녀는 유리창에 대고 입김을 내분다. 그 더운 공기에 유리창이 잠시 흐릿해진다.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을 할 수 있는 당신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소. 하지만 며칠 동안 갇 혀 있고 나서도 그렇게 거만을 떨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어쨋거나 선택은 당신 의 몫이오.> 그녀가 소리쳤다. " 이봐, 딥 블루 IV, 무엇을 얻자고 이러는 거야? 네 동기가 뭐냐고? " 불빛이 꺼진다. 더 이상 이미지도 소리도 없다. 느껴지는 것이라곤 은은한 땀 냄새 뿐이다. 그녀 자신의 냄새다. 57 장 루이 마르탱은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전자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과학 기사며 책이며 논 문을 읽거나 르포를 보거나 인터뷰를 들으면서 정신으로 전세계를 여행하곤 했다. 그의 관심은 과학 기술 분야의 특별한 발견을 찾는 데에 집중 되어 있었다. 그는 새로운 어떤 것, 최신 세대의 인공 지능 컴퓨터보다 더욱 강력한 어떤 것을 찾고 있었다. 인터넷에는 지식과 정보가 넘쳐 나고 있었다, 그토록 많고 많은 지식을 접하고 있노라면 이상하게도 얼근한 취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옛날에는 검열이라는 제도가 유익한 정보의 유통을 가로막았지만, 이제는 정보의 홍수가 동일한 결과를 야기하고 있었다. 너무 많은 정 보가 정보를 죽이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마르탱은 그런 정보의 홍수에 하릴없이 휩쓸리지 않았다. 우선 그에게는 아테나의 도움이 있었다. 아테나는 그를 위해서 가장 유익한 사이트들을 선별해 주었다. 게다가 그에 게는 시간이 충분했다. 그는 인터넷이 감추고 있는 말과 이미지의 거대한 은행 어딘가에 핀처 박사가 모르는 어떤 놀라운 것이 잇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실험 하나가 그의 관심을 끌었다. 미국의 한 연구소에서 1954년에 행해진 실험이었다. 실험 도중에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머피의 법칙에서 말하듯이, 위대한 발견들은 실수로 이루어진다. 그런 다음에 과학자들은 그 발견에 이르게 goiTejs 이른바 논리적 추론 과정이 라는 것을 꾸며낸다. 그럼으로써 과학자들 스스로 자기들의 전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날 거기에서 있었던 실수는 대단히 놀라운 정보를 과학자들에게 제공하였다. 놀랍다는 말로는 부족하고, 당혹스럽다거나 획기적이다라는 말이 어울릴 만한 정보였다. 그런데, 그 발견은 만천하에 공개되지 않았다. 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마르탱은 그 점에 관해 조사를 한 끝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발견을 은폐하고 싶어한 것은 발견자 자신이었다. 그는 자기 발견의 공개가 가져올 엄 청난 결과에 겁을 먹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마르탱은 그 발견이 어떤 점에서 진정으로 중요한지를 깨닫고 흥분을 가누지 못했다. 아마 어떤 포식 동물이 묶여 있는 사냥감을 뜻하지 않게 발견했을 때의 기분이 그랬을 거였다. 그 먹이는 고분고분한 태도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이 다른 어떤 포식 동물도 그 먹 이를 먹으려고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마르탱의 정신은 굶주려 있었다, 그래서 그 사냥감 을 잡아먹었다. 소화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 이상한 실험에 관한 정보가 많이 축적되자, 마르탱은 그것들을 한데 모아 자료를 만들 었다. 그 발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것의 공개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그것을 인류의 진보를 위해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등을 다룬 자료였다. 자료가 완성되자, 그는 그것을 컴퓨터 파일로 잘 정리해 두었다. 그런데, 그 발견에 어울릴 만한 이름을 찾아내야 했다. 발견자가 자기 발견에 이름을 붙여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르탱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것을 <최후 비밀>이라 명명하였 다, 약간 과장된 느낌을 주는 이름이긴 했지만, 그 발견에 의해 열리게 될 거대한 지평을 생 각하면 그 정도의 이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르탱은 그것에 관해 사뮈엘 핀처에게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 발견을 어떻 게 다른 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였다. 핀처 박사는 처음엔 난데없이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는 표정이다가, 이내 말뜻을 알아차리 고는 충격을 받은 듯한 기색을 보였다. " 정말 놀랍군요! " 그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그 발견자가 더 이상의 연구를 포기한 것은 그런 발견의 위험성을 간파했기 때문입니다. 장 루이, 그것이 얼마나 중대한 발견인지 알고 있는 거죠? " 장 루이 마르탱이 눈을 깜박였다. <그건 불의 발견이나 원자력의 발견과 같은 거예요. 우리를 따뜻하게 해줄 수도 있고 우리 를 태워 버릴 수도 있죠. 둘 중에서 어느 쪽이 되느냐 하는 것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에 달려 있어요.> 58 뤼크레스 넴로드는 감방 같은 병실의 쿠션을 댄 벽을 두드린다, 싫증이 난다. 이번에는 손 을 더듬거려 유리창의 이음새를 찾아낸 다음, 손톱으로 그것을 망가뜨려 보려고 한다. 헛수 고다. 좋아. 할 일이 아무것도 없군. 하는 수 없지. 기다리자. 잠이나 자자. 그라나 잠이 오지 않는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뜬 채 어둠을 응시하고 있다. <아무>라는 자 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뇌에 아무런 자극도 주지 않는 것이야말로 뇌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라고 그자는 말했다. 생각을 해야 한다. 설령 외부로부터 전해지는 감각 정보가 전혀 없다고 할지라도, 뇌가 활 동을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녀는 자기가 벌이는 조사 활동에 생각을 집중한다. 모든 것이 <우리는 무엇에 이끌려 행 동하는가?>라는 질문과 관계가 있다, 언뜻 보기엔 단순한 질문이지만, 대답은 결코 간단하 지 않다. 그리고 그 대답이 무어냐에 따라서 사거을 보는 관점과 해결 방식이 달라질 수 있 다. 그녀는 자기가 작성한 동기의 목록으로 인류의 역사 전채를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그녀는 동굴에 살던 최초의 인간을 머릿속에 그린다. 그가 맹수에 맞서 싸운다. 짐승에게물 려 상처를 입는다, 아프다. 그는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고 더 이상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무 몽둥이를 들고 짐승을 때린다. 그럼으로써 도구가 생겨나고, 고통을 멎게 하겠다는 욕구가 총족된다. 그는 평원에 산다. 그래서 언제 또 다른 맹수들로부터 공격을 당할지 몰라 늘 불안하다. 이 따금 비바람이 몰아치고 우레가 천지를 진동시킨다. 그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빗물에 젖기 가 일쑤다. 그는 동굴로 피신한다. 이로써 주거의 개념이 생겨나고, 공포에서 벗어나기라는 두 번째 욕구가 충족된다. 그는 목이 마르면 샘을 찾고, 배가 고프면 사냥을 하거나 채집에 나선다. 그러고 나면 피곤 하다. 그는 잠자리를 생각해 내고, 자기가 잠을 자는 동안 맹수들이 동굴에 들어오지 못하도 록 불을 이용한다. 바로 원초적인 생존 욕구의 충족이라느 세 번째 동기에서 비롯된 행동들 이다. 그러다가 인류 역사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생리적 필요를 넘어서서 점점 더 나은 것 을 바라는 욕망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편안함에 대한 욕망 때문에 인간은 동굴을 떠나 움막이나 오두막 등을 지으며 건축자가 된다. 영토에 대한 욕망 때문에 인간은 전쟁을 선포 하고 이웃의 생활 근거지로 쳐들어간다. 열매를 따러 다니는 고생을 덜고 싶은 욕망에 의해 인간은 경작자가 된다. 또한 밭을 가느라 고생하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소를 쟁기 에 매다는 방법을 생각해 낸다(뤼크레스는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라는 책에서, 알파벳이 A라는 글자로 시작하는 것은 고대 언어에서 이 글자가 뒤집어진 소의 머 리를 나타냈기 때문이라고 읽은 적이 있다. 소는 최초의 동력원이며 따라서 문명의 기원이 되는 셈이다). 소 다음에는 말이 이용되었고, 그러다가 모터가 나온다. 이사은 그녀가 작성 한 목록의 넷째 동기, 즉 안락의 욕구를 충족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 목록에 뭐가 있었지? 다섯째 동기는 의무감이다. 인간이 20년 가까운 세월을 학교에서 보내거나, 직장을 다니고 세금을 내고 투표를 하는 것은 모두 가족이나 사회, 국가 등에 대한 의무감과 연관되어 있 다. 압력솥이 과열될 경우에 폭발을 막기 위한 배출구가 필요하듯이, 인간에게도 안전판이 필 요하다. 여섯째 동기, 분노가 바로 그 안전판이다. 분노는 사법 제도에 대한 욕구를 낳는다. 그럼으로써 법원, 판사, 경찰 등이 점차로 제도화된다. 이런 제도는 분노에 물꼬를 틔움으로 써 분노가 사회에 파괴적으로 기능하지 않도록 만든다. 하지만, 사람들의 분노가 너무 커서 제도로 그것을 더 이상 진정시킬 수 없을 때는 혁명이 일어난다. 일곱째 동기가 뭐였더라......그래, 성애지. 그녀는 자기가 작성한 동기들의 목록이 일정한 기준에 따라 차례가 매겨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앞쪽의 동기가 반드시 시대적으로 앞선 것이라거나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늘날 이 동기들은 개인의 자유 의지에 따라서 각기 다른 방식 으로 순서가 매겨진다. 성애란 본디 종의 번식을 위한 원초적인 동기다. 목마름, 배고픔, 수 면과 같은 생리적인 욕구에 속한다. 그런데, 이 욕구는 생리적 필요를 넘어서서 아주 복잡한 욕망으로 변화해 간다. 자기 종을 영속시키려는 욕구나 지상에 자기가 거쳐 간 자취를 남기 려는 욕구로부터 다른 욕구들이 파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애는 자기 매력을 확인하거나 이성을 이해하는 수단이 되고, 위안을 받거나 애무를 받고 싶은 욕구가 된다. 이쯤 되면 성 애를 단지 번식의 욕구로만 볼 수는 없다. 번식의 욕구라기보다는 사회성의 욕구에 가깝다. 어쩌면 아주 오랜 옛날에 원숭이들이 서로 털가죽의 이를 잡아 주면서 화목한 관계를 유지 하던 행동이 희미한 기억으로나마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애무가 하나의 온전한 동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냐. 애무란 그저 성애와 결부된 하 나의 안락일 뿐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뤼크레스는 자기 발을 주무른다. 그러자 기분이 한결 좋아진다. 애무라....... 뤼크레스는 한숨을 내쉰다. <애무>라는 말이 그녀에게 접촉 감각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 킨다. 하지만 그녀 주위에는 쿠션을 댄 벽이 있을 뿐이다. 그녀는 다시 동기라는 주제에 생각을 모은다. 성애는 강력한 동기다. 때로는 그것 때문에 역사의 방향이 바뀌기도 한다. 헬레네라는 한 여자 때문에 그리스 인들과 트로이아 인들이 10년 동안 전쟁을 벌이지 않았던가? 카이사르 는 클레오파트라를 유혹하기 위해서 로마 원로원에 맞서지 않았던가? 또한 한 여인을 감동 시키기 위해서 창작된 예술 작품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정말 리비도가 세상을 이끌기도 하는 걸까? 여덟째 동기는 중독성과 습관성이 있는 갖가지 물질이다. 인간의 의지에 반해서 인간에 행 동에 영향을 미치는 온갖 화학 물질도 여기에 속한다. 이런 물지에 대한 욕구는 인공적인 것이지만, 때로는 다른 욕구들을 능가하는 아주 강력한 동기가 된다. 처음에 사람들은 호기 심에서, 또는 교우 관계나 사교적인 목적 때문에 이런 물질들에 맛을 들인다. 그러다 보면, 인공적인 행복감이 온 정신을 사로잡고 자유 의지를 소멸시킨다. 이 가공할 욕구 에서는 생 존에 대한 원초적인 욕구마저 뒤로 밀리기도 한다. 아홉째 동기는 개인적인 열정이다. 이것은 사람에 따라 다양하다,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일견 범상해 보이는 어떤 행위에 마음을 집중한다. 그런 집중이 지속되다 보면, 이 행위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그것은 예술일 수도 있고, 스포츠일 수도 있으며, 어떤 직 업이나 놀이일 수도 있다. 뤼크레스는 고아원의 여자아이들이 밤에 촛불을 켜놓고 그악스럽게 포커를 쳤던 일을 생생 하게 기억하고 있다. 몇 푼 안 되는 주머닛돈을 걸고 포커에 몰두해 있을 때면, 포커 판이 세계의 중심인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아이들은 마치 원 페어, 투 페어, 트리플, 스트레 이트, 풀하우스 등의 패를 만들어 내는 그 판지 조각들에 자기들의 모든 삶이 걸려 있기라 도 한 것처럼 굴었다. 그런 개인적인 열정은 인간의 생물학적 역사에 비추어 보면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하지만 개인의 삶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 될 수도 있다....... 뤼크레스의 어린 시절 취미였던 인형 수집에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인형들은 그녀가 가져 본 적이 없는 가족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천이나 도자기나 플라스틱으로 된 많 은 인형들을 모았고, 그것들에 이름을 하나씩 붙여 주었다. 모성애 못지 않은 애정을 가지고 그것들의 옷을 꿰매어 주기도 했다. 그녀가 모은 인형은 정확하게 144개였다. 그녀는 그 중 의 어느 하나도 남에게 주거나 다른 물건과 바꾸지 않았다. 인형에 이어서 그녀가 모으기 시작한 것은 애인이었다. 그것은 인형 수집이라는 취미의 논리적 연장이라 볼 수 있다. 그녀 는 많은 남자들을 사귀었다. 어쩌면 백 명쯤 되는 남자들과 사귀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보단 적을 것이다. 인형을 모을 때는 그 수를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애인에 대해서는 정확 한 수를 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인형에 대해서는 한번도 다른 것과 바꾸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남자들에 대해서는 때로 다른 남자와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이 들곤했다. <내가 쌍둥이 형제를 사귀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너에게 줄 테니 네가 사 귀고 있는 그 빨간 눈의 희멀건 근육질을 나에게 다오>하는 식으로 말이다. 내가 지금 이 조사 활동을 벌이는 것도 개인적인 열정에 의한 거라고 볼 수 있어. 인형, 애 인에 이어서 조사를 수집하고 있는 셈이지. 인류의 기원에 관한 조사는 이미 했고, 지금은 뇌의 기능에 관한 조사를 하고 있어. 아직은 시작일 뿐이지만, 이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 이야. 빨리 감금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그녀는 손톱을 깨물며 다시 생각을 이어간다. 그 다음 동기는....... 움베르토 로시가 <최후 비밀>에 관해서 이야기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는 그것이 돈이나 섹스나 술이나 마약보다 강한 동기라고 했다. 딥 블루 4가 저의 뛰어난 지능을 이용하여, 기존의 향정신성 물질보다 훨씬 강력한 화합물 을 만들어 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다음, 그 물질을 이용하여 병원의 환자들은 물론 의 사와 간호사까지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최후 비밀이라는 게 그런 것일까? 사뮈엘 핀처도 그것을 사용했을까? 그게 그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까? 딥 블루 4가 검출이 불가능한 초강력 마력으로 핀처를 죽였다는 가정은 전산망과 연결된 모종의 최신 장비로 살해했다는 가정보다 한결 논리적이 라는 느낌을 준다. 게다가 그 가정은 사건 현장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 나타샤가 스스로를 죄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것을 깨달은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녀는 벽에 쿠션을 댄 방에 갇혀 있다. 위험한 정신 병자 취급을 받으며 정신 병원에 감 금되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 병원은 바다로 둘러싸인 섬에 있다. 어떻게든 온전한 정신을 유지해야 한다. 내 정신에 이상이 생기면 모든 게 끝이다. 나에게 그보다 더 나쁜 일은 없을 것이다. 만일 내가 조금이라도 정신 이상의 징후를 보이게 되면, 아무도 더 이상 내 말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뤼크레스는 피가 나도록 손톱을 물어뜯는다. 그 고통이 그녀로 하여금 정신을 더욱 바싹 차리게 만든다. 미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지? 59 탐사. 장 루이 마르탱은 최후 비밀이라는 주제를 놓고 탐사를 계속했다. 광맥은 풍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득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는 최후 비밀의 발견자만이 그 숨겨진 보물을 지키려고 했던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가까이에서든 멀리에서든 그와 함께 일했던 모든 사람들이 일종의 협약을 맺은 듯했다. 너무 심각한 사태를 야기할 수도 있는 그 주제 에 관해서 더 이상 연구를 하지 않기로 약속한 모양이었다. 그 약속이 충실하게 지켜졌는지, 최후 비밀은 감쪽같이 숨겨져 있었다. 과학자들이 예외적으로 아주 신중한 면모를 보였다는 점에서도 이 사건은 주목을 받을 만 하다. 하지만 마르탱은 그 과학자들이 설치한 보호의 장벽에 틈이 있음을 발견했다. 최후 비밀에 관한 논문이 어떤 낡은 컴퓨터의 휴지통이라는 폴더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 컴퓨터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있었지만, 아직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 컴퓨터의 휴지통 에는 버려진 파일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우연한 사건 덕분에 최후 비밀이 밝혀졌고, 하나의 협약에 의해 그것의 공표가 금지된 바 있었는데, 마르탱이 끈질기게 탐색을 벌이는 과정에서 우연히 그 내용을 입수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직 최후 비밀의 점모가 드러난 건 아니었다. 그래서 마르탱은 더욱 정밀한 검색을 가능케 하는 프로그램들을 이용하여 세계의 모든 병원과 연구 소와대학의 사이트를 뒤졌다. <견고한 사슬에도 약한 고리는 잇게 마련이다>라고 그는 생 각했다. 최후 비밀의 발견자와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이 적어도 수십 명은 되 터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수십 명 가운데 약속을 저버리는 사람이 생겼을 게 틀림없었다. 발견자의 조수 나 여비서가 그랬을 수도 있었다. 술자리에서 그가 무심코 털어놓은 비밀을 들은 동료들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발견자 자신이 어떤 여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싶어서 스스로 약 속을 저버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과학 분야에서도 금기란 언젠가는 깨지게 마련이다. 마르탱은 그 어느 때보다 결연한 마음가짐으로 모든 것을 읽고 보고 조사하였다. 아테나 족에서도 백배나 더 빠르게 같은 일을 수행하였다. 문서함에 들어오는 모든 것. 웹캠 이나 감시 카메라 앞으로 지나가는 모든 것 중에서 최후 비밀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잇는 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검토되고 저장되었다. 나는 사슬의 약한 고리를 찾아내고 말 것이다 하고 마르탱은 생각했다. 60 뤼크레스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미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녀는 어둠 속에서 두려움 을 느꼈던 예전의 경험들을 하나하나 떠올린다. 고아원에서 자라던 시절에 손전등을 들고 지하실에 내려갔다가 손전등이 갑자기 꺼지는 바람에 속절없이 어둠에 갇힌 적이 있었다. 그때 얼마나 애타게 비명을 질렀던가! 눈을 가리고 술래잡기를 하던 때의 느낌도 생각난다.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빛이다. 공기는 그 다음이다. 뤼크 레스는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심한 고통을 겪은 바 있다. 머리가 산도에 끼였기 때문이 다. 그녀는 최면술사의 도움으로 출생의 순간으로 되돌아가 그 일을 다시 겪었다...... 새삼스 레 뇌의 힘이 엄청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겪는 많은 문제들의 해결책이 뇌 속에 감춰 져 있다. 인간의 뇌는 우주에서 가장 복잡한 구조이다. 그녀는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라는 책에서 어떤 문장을 읽고 한동 안 그것에 관해 곰곰이 생각한 적이 있다. <현실 세계는 우리의 믿음에 상관없이 계속 존재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때로 그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일시적으로 현실 세계를 대체하는 다른 세계를 지어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녀는 옛 소련의 반체제 작가 블라디미르 부코프스키의 글도 떠올린다. 고문을 받으면서 그 고통을 견디기 위해 어떻게 했는지를 이야기하는 글이었다. 그는 자기가 <가상의> 집을 짓고 있는다고 상상했다고 한다. 고통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지면, 그는 머릿속에 지어 놓은 그 집으로 피신했다. 거기에서는 아무더 도 이상 그에게 해를 입힐 수 없었다. 그게 바로 생각의 힘이야. 그런 방법이 강제 노동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 다면, 나에게도 도움이 될 거야. 뤼크레스는 눈을 감는다. 나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을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내가 어디에 있는 지를 잊어버리자. 그녀는 마음속에 자기 이상형의 집을 짓기 시작한다. 그냥 집이라기보다 성관과도 같은 대 저택이다. 상상에는 한계가 없으므로 이왕이면 크게 짓는 것이 낫겠다 싶은 것이다. 그녀는 먼저 머릿속에 설계도를 그리고 기초 공사를 한다. 그런 다음, 반듯반듯하게 자른 돌로 벽을 쌓고 문과 창문을 내고 지붕을 얹는다. 저택의 안뜰과 바깥뜰에는 잔디를 깔고 꽃나무를 심 는다. 마당 한복판에 작은 수영장을 마련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이제 실내 장식을 생각할 차례다. 그녀는 마당 쪽으로 난 넓은 창에 커다란 판유리를 끼운 다. 안에서는 밖이 훤히 내다보이지만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 유리창이다. 실내 곳곳에 녹색 식물의 화분을 들여놓는 것도 필요하다. 가구는 고급 목재로 만든 동양식 가구가 좋 을 듯하다. 바닥에는 마룻장을 깔고, 손님방의 마룻바닥은 페르시아 융단으로 덮는다. 벽지는 어떤 것으로 할까? 그녀의 뇌가 아연 활기를 되찾고 있다. 61 그의 컴퓨터는 쉴 새 없이 작동하고 있었다. 장 루이 마르탱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한시라도 빨리 찾아내고 싶은 마음에, 인터넷에서 자기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찾아 주는 사이버 정보원들을 직접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그는 언제나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 친절한 여신 아테나의 도움을 받아, 정보 검색 프로그 램들을 자기 필요에 맞게 수정하였다. 그러고는 윌리스, 곧 오뒤세우스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자기의 새 사이버 정보원들에게 <뱃사람들>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들은 오 뒤세우스의 고향 이타케 섬이 아니라, 최후 비밀을 찾아 나선 <뱃사람들>이었다. 그 <뱃사람들>을 움직이는 프로그램들은 인공 지능 분야에서 최근에 이루어진 여러 발견 들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이 프로그램들은 스스로를 복제하는 능력과 주어진 목표에 도달하 기 위해 스스로를 개선하는 능력까지 지니고 있었다. <뱃사람들>의 첫 세대가 단서를 찾아서 정보의 네트워크로 흩어졌다. 처음엔 그렇게 아무 런 체계 없이 제멋대로 흩어졌지만, 그 다음에는 사람이 전혀 개입하지 않았는데도 그 수백 의 <뱃사람들>이 활동 상황을 스스로 점검하여 저희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결과를 얻은 다섯 을 가려냈다. 그러자 다른 자들은 사라지고, 승리자들에게는 스스로를 복제하는 것이 허용되 었다. 승리자들은 저희와 동일한 프로그램들을 수백 개로 증가시켰다. 사실 마르탱은 이 <뱃사람들>을 만들면서 다원주의로부터 착상을 얻은 바 있었다. 더 나 은 자들, 더 강한 자들, 더 능력 있는 자들을 선별하고 격려하며 무능한 자들은 모두 버리자 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것은 물론 도덕적인 메커니즘이 아니다. 하지만 정보 공학의 영역에서는 이런 것이 필요 하다. 프로그램들은 아직 정치 의식을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뱃사람들>의 제2세대는 저희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들을 스스로 선별하여 훨씬 더 전 문적인 탐색 능력을 지닌 프로그램들이 생겨나게 했다. 그리하여 제3세대 <뱃사람들>은 이 전 세대의 모든 경험과 지식을 온전히 활용하면서 더욱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렇게 열다섯 세대를 거치고 나서 태어난 한 무리의 천재적인 <뱃사람들>이 마침내 목표 에 도달하였다. 마르탱이 찾던 것은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어떤 뇌 클리닉이었고, 이 뇌 클리닉을 이끄는 사람은 체르니엔코 박사였다. 마르탱의 사이버 정보원들은 사소하지만 서로 아귀가 맞는 몇 가지 상황 증거들을 종합하여, 그 클리닉에서 인간을 상대로 한 실험에 최후 비밀 이 사용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62 뤼크레스의 뉴런들은 그녀의 체내에 저장된 당분을 가지고 저희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뤼크레스로 하여금 사색에 잠기게 하고 두려움을 다스리게 하자면 뉴런들에게 당분이 필요 하다. 그런데 불행히도 여성 잡지들이 부추기는 유행을 좇아서 그녀는 주로 섬유질이 많은 음식과 채소를 먹고 산다. 탄수화물이 많은 면류는 거의 먹지 않으며, 버터나 크림이나 설탕 처럼 뉴런들에게 기쁨과 활력을 주는 것들은 훨씬 더 적게 먹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가 없다. 그녀는 허기를 느끼며 입맛을 쩍쩍 다신다. 사람이 미치면 어떻게 되지?...... 내 상황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자. 내가 꿈꾸는 집에 대해서 생각하자. 그녀는 상상 속에서 작은 응접실과 큰 응접실과 식당을 위한 샹들리에를 고른다. 또 침실 에서는 벽등을 설치하고 집무실에는 할로겐 등을 단다. 그녀는 이미 완성된 설계도를 무시 하고 방들을 새로 더 낸다. 커다란 서재, 사우나 실, 대형 화면을 갖춘 텔레비전 방, 당구실, 근육 단련을 위한 모든 장비를 갖춘 운동실. 하지만, 가구를 추가하거나 방을 더 내는 것이 무한정 가능한 것은 아니다. 가구가 자꾸 늘어나니 실내가 너무 복잡하고, 방이 자꾸 늘어나 니 집 전체가 하나의 미궁이 되어 가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모든 게 다 갖춰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남자가 하나 필요하다. 성관 같은 대저택을 완전하게 만들자면 아무래도 남자가 있는 게 좋을 듯하다. 남자란 침대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고, 이따금 꽃을 선물하며, 설거지를 도맡아 하고, 여자 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몸을 기댈 수 있는 존재다. 63 장 루이 마르탱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체르니엔코 박사에게 전자 우편을 보내 실험에 관 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다고 전했다. 그는 답장을 받지 못했다. 다음에 그는 팩스를 보냈다. 아테나가 그의 글쓰기를 도와주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서도 답장이 없었다. 리스 환자 마르탱은 말을 할 수 없는 자기가 한 여성 과학자로부터 신뢰를 얻기는 불가능 하리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사뮈엘 핀처에게 그간의 사정을 모두 이야기하였다. 핀처 박사는 어렵지 않게 러시아의 동료와 전화로 연락을 취하여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한껏 예의를 갖춘 그의 정중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기 연구에 관해서 알려 주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아테나는 그 체르니엔코 박사라는 여자의 사생활에 약점이 있음을 알아내고는 그것을 이용 하라고 권했다. 물론 그건 별로 신사다운 방법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테나에게 입력된 문장 중에는 마카아벨리의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라는 말도 들어 있었다. 핀처 박사는 아테나가 권한 방법을 이용하여, 그 러시아 여자를 설득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녀는 그가 제한적이고 철저하게 통제된 실험을 위해서만 최후 비밀을 사용하겠다고 약속 하면 협력을 하겠노라고 알려 왔다. 체르니엔코 박사는 생쥐의 뇌에서 최후 비밀이 숨어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그들에게 알 려 주기로 했다. 그것은 3차원 속의 자리이며, 10분의 1밀리미터의 정확도로 위치가 정해져 있는 부위였다. 그녀는 전자 우편을 통해서 생쥐 뇌의 해부도를 보냈다. 화살표 하나가 정확 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고, 가로. 세로. 깊이의 좌표가 적혀 있는 도면이었다. <이게 바로 문제의 보물 지도군요.> 마르탱이 그렇게 자기 생각을 써보였다. 그들은 그 도면이 무슨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한동안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 뇌들보 안에 있군요! 뇌들보는 가장 오래된 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경계에서 가장 먼 저 생기는 기관이죠. 출생 시부터 두 살까지의 모든 경험이 여기에 기록됩니다. 이 뇌들보에 뇌의 여러 층이 덧붙여집니다. 층이 하나씩 추가될 때마다 뇌는 점점 복잡해지지만, 가장 중 요한 것은 뇌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셈이군요....... 당신 생각이 옳았어요, 장 루 이. " 사뮈엘 핀처는 의학 공부를 하던 시절에 작은 외과 수술을 여러 차례 실시해 본 적이 있었 다. 그는 옛날의 경험을 살려 직접 메스를 잡기로 하고, 먼저 생쥐 한 마리를 골랐다. 몸은 하얀데 머리가 까매서 마치 뾰족한 두건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종이었다. 이 종에 속 한 생쥐들은 대체로 아주 영리해서 서커스 공연에 자주 사용되고 있었다. 그는 코르크로 된 받침대 위에 생쥐를 눕히고 네 다리를 좌우로 벌려 가느다란 고무 끈으 로 고정시켰다, 그러고는 머리 꼭대기의 털을 깎은 다음, 정밀한 눈금자로 몇 차례 측정을 하고 그 결과를 살가죽에 수성 펜으로 표시하였다. 그는 생쥐가 수술 때문에 충격을 받으면 신경계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겠다 싶어 생쥐를 마취시켰다. 그런 다음, 마르탱은 멀리에서 실험의 진행 과정을 지켜볼 수 있도록 비디오 카메라를 설치하였다. 마침내 수술이 시작되었다. 핀처 박사는 뼈를 자를 때 쓰는 회전 톱을 이용해서 생쥐의 머 리 꼭대기를 얇게 도려냈다. 껍질째 익힌 반숙 계란을 작은 숟가락으로 퍼먹기 위해 계란 꼭대기를 도려내는 듯한 동작이었다. 팔딱거리는 뇌가 전등 불빛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뇌엽 절제 수술 장면을 보고 있는 듯했다. " 장 루이, 내 말 들려요? " <예, 들려요, 사뮈엘.> 카메라 위에 고정된 화면에 마르탱의 대답이 글로 나타났다. " 잘 보여요? " <예. 솔직히 말해서 눈에 익은 장면이 아니라서 그런지 조금 혐오스러운 느낌이 드네요, 하지만 토하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토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으니까요.> 사뮈엘 핀처는 모니터가 달린 그 카메라에 대고 말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레서 마 치 그 카메라가 뼈와 살을 가진 친구라도 되는 양 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 장 루이, 우리는 이제 의사와 환자 관계가 아니라 같은 일을 하는 동료일세. 우리 서로 말을 놓아도 되겠지? " 카메라의 대물렌즈가 생쥐의 화상을 서서히 확대시켰다. <생쥐를 죽이는 건 아니겠지? 자네 자신 있나?> 핀처 박사는 의학적인 데이터들을 확인하였다. " 맥박도 좋고 다른 생체 기능들도 모두 정상일세. " <난 불안하고 긴장이 돼.> 뇌를 드러낸 생쥐의 모습이 약간 기이해 보였다. " 이걸 생각해 낸 건 자네일세, 장 루이. " <어쨌거나 대단히 중요한 것이 걸려 있으니까 한번 시도해 볼만은 하지....... " 핀처는 수술 도구들을 뇌로 접근시켰다. 마르탱은 일이 진행되는 과정을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고 있으니, 인터넷에서 관찰한 바 있는 또 다른 신경 의학 실험이 생각났다. 스탠퍼드 대학의 와이스만 교수가 이끄는 팀이 생쥐들을 상대로 한 실험이었다. 그들은 생 쥐들의 뇌에 인간의 배아 세포에서 나온 뉴런들을 이식하였다. 태아의 것이라서 더욱 활동 적인 인간의 뉴런들은 생쥐의 뉴런들이 차지하고 있던 구역으로 퍼져 나갔다. 과학자들은 인간의 뉴런이 이식된 이 쥐들을 알츠하이머 병이나 파킨슨 병에 걸린 환자들을 돕는 데에 이용할 생각이었다. 마르탱은 생쥐가 인간의 뇌를 가지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상상해 보았다. 물론 이 생쥐에게 이식된 것은 인간 배아의 뉴런들이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 생쥐는 인간적이 낫고의 잠재 력을 지닌 존재였다. 마르탱은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다. 현실이 공상 과학을 추월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세 번째 천년기의 여명이 밝아 오면서 모든 일이 가능해지고 있었다. 생쥐들에게 인간의 뇌를 이식 하거나 최후 비밀에 손을 대는 것이 엄연한 현실의 일이 되어 가고 있는 거였다. 바야흐로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 상상의 세계에서 나온 단순한 생각 하나가 원자 폭탄보다 더 무시무시한 것이 될 수도 있는 세상이다. 윤리와 도덕은 더 이상 없고 그냥 실험만이 있 을 뿐이다. 이런 세상에서 누가 감히 <인간화한 뇌>를 가진 생쥐들의 법적 지위를 논할 수 있으랴? 그는 네 다리를 대자로 벌리고 있는 생쥐를 관찰했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를 하늘에 서 내려다본 모습으로 그린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이 생각났다. 우리는 아주 강력하다. 우리 행위가 가져올 결과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더 많은 깨달음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행위를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일까? 핀처는 손놀림 하나하나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제기할 겨를이 없었다. 수술을 성공시켜서 생쥐를 무사히 깨어나게 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관심사였다. 64 뤼크레스는 자기가 살고 싶은 이상적인 집을 짓고 나자, 이상적인 동반자를 고르기 위해 예전에 사귀었던 남자들을 차례차례 떠올린다. 하지만, 그들이 옛 애인이 되어 버린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녀는 남자들의 명부를 바꾸어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들을 차례 차례 떠올려 본다. 아냐, 그들은 자아 도취증 환자들이라서 나보고 자기들을 떠받들라고 요구할 거야. 그녀는 선택의 기준을 바꾸기로 했다. 나를 재미있게 해줄 사람이 필요해. 그래, 유머 감각이 풍부하고 기지 넘치는 남자가 좋겠 어. 그러면서 그녀는 한 남자가 꽃다발과 샴페인 병을 들고 성관을 찾아와 현관의 초인종을 누 르는 장면을 상상한다. 그녀는 남자에게 집을 구경시키면서 이런 저런 설명을 하고 자기가 수집한 유명한 미술 작품들에 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집 구경이 끝나자 남자는 익 숙한 동작으로 벽난로에 불을 피우고, 감미로운 음악을 틀어 놓더니, 보헤미아 크리스털 잔 에 자기가 가져온 샴페인을 따른다. 65 생쥐는 두 시간 후에 깨어났다. " 내 생각엔 우리가 성공한 것 같네. " 수술을 마치자, 핀처 박사는 마치 뚜껑을 덮듯이 생쥐의 머리 꼭대기 부분을 제자리에 올 려놓고는 뼈를 붙일 때 사용하는 외과용의 신종 접착제로 그것을 결합시켰다. 머리 꼭대기로부터 전기 접속 단자 하나가 빠져나와 있어서. 생쥐는 사이버펑크 음악가 같 은 느낌을 주었다. 생쥐의 모든 감각이 완전하게 기능하고 있는 듯했다. 생쥐는 달음박질을 했고, 제 앞으로 지나가는 물건들을 눈으로 좇기도 했다. 볼펜으로 쿡쿡 찌르는 공격에 대해서 앞다리를 내 밀어 방어할 줄도 알았다. 그 털들이 무언가를 생각나게 했다. 사뮈엘 핀처와 장 루이 마 르텡은 그 생쥐에게 <프로이트>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이제 지렛대 실험에 들어갈 차례였다. 핀처는 생쥐의 머리꼭대기에 달린 접속 단자에 전 선을 연결하고 약한 전기를 흘려 보냈다. 프로이트는 깜짝 놀라서 잠시 꼼짝 않고 있더니, 흥분이 이는 듯 오른쪽 앞다리를 바르르 떨었다. <고통을 느끼는 건가?> "모르겠어. 내가 보기에는 고통을 느낀다기보다 처을 경험하는 자극에 놀라고 있는 것 같 은데." <생쥐가 좋아하고 있는지 싫어하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지?> 가장 간단한 방법은 생쥐에게 지렛대를 맡기는 거였다. 핀처는 생쥐의 다리 앞에 지렛대 를 놓고 다시 전선을 연결하였다. 프로이트는 지렛대에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냄새만 맡을 뿐 건드리지는 않았다. 그러자 핀처는 지렛대를 누르면 어떤 효과가 생기는 지를 보여주기 위해 두 손가락으로 그것을 움직였다. 생쥐는 마치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잠시 꼼짝 않고 있었다. 이제 무언가를 깨달은 눈치였 다. <생쥐가 아프지 않았을까?> 생쥐는 핀처의 두 손가락에서 놓여 나기가 무섭게 앞다리로 지렛대를 눌렀다. 그렇게 제 스스로의 힘으로 전기 자글을 한 번 얻고 나자, 생쥐는 즉시 지렛대를 올렸다가 다시 눌러 두 번째 자극을 받았다. 곧바로 세 번째 자극이 이어졌다. "생쥐가 자극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핀처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생쥐는 더 이상 멈출 생각을 않고 지렛대를 열심히 올렸다 내렸다 하였다. 마치 자기만 아는 어떤 묘약을 우물에서 길어 올리느라고 펌프질을 하고 있는 듯 했다. 66 잔잔한 음악이 흐른다. 그가 그녀의 어깨를 주무른다. 애무가 시작된다. 그녀는 침실에 가 서 사랑의 행위를 계속하자고 그에게 권한다. 67 사위엘 핀처는 프로이트를 문이 두 개 달린 작은 우리 안에 집어넣는다. 한쪽 문으로 나가 면 취후 비밀을 자극하는 지렛대가 있다. 다른 쪽 문으로 나가면 발정 난 암컷이 기다리고 있다. 68 그들은 침대로 올라간다. 뤼크레스는 자기 살갗을 스치는 그의 수줍은 손길을 느낀다. 어떤 느낌에 대해서 생가하면 뇌가 정말로 느낄 때와 똑같은 구역에 자극을 받는다. 남자가 아주 천천히 그녀의 옷을 벗 긴다. 그녀의 감색 레이스 속옷이 드러난다. 69 암컷이 욕정 때문에 발그레해진 엉덩이를 드러냈다. 암컷의 땀샘에서 들척지근한 성 페로 몬의 칵테일이 분비되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암컷을 향해 코를 킁킁거리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암컷은 몸을 좌우로 흔 들며 찍찍 소리를 냈다. 교미에 대한 기대에 달떠서 젊은 수컷을 유혹하고 있는 거였다. 70 그는 아주 천천히 그녀의 몸 여기저기에 가벼운 입맞춤을 퍼부으면서, 귓바퀴에 대고 <사 랑해>라는 말을 자꾸 속삭인다. 71 프로이트는 암컷을 계속 바라보았다. 암컷은 수제 욕정을 유발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둥근 귀와 페로몬을 감지할 수 있는 뾰족한 주둥이를 흔들었다. 콧수염이 바르 르 떨렸다. 저게 원지를 모르지만 마음이 끌리는군 하고 프로이트는 생각했다. 그때 반대쪽에는 있는 지렛대가 눈에 띄었다. 아, 저것도 있었구나! 저게 한결 재미있을 것 같은데. 72 그녀가 알몸이 되자 남자는 깃털 이불을 들어 올린다. 두 사람은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마 치 오두막 속에 들어가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아늑하다. 남자의 애무는 이제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성감대에 집중된다. 그녀는 아귀아귀 키스를 하고 허겁지겁 그의 옷을 벗긴 다음 그의 몸에 바짝 달라붙는다. 살과 살이 맞닿는 느낌이 자뭇 짜릿하다. 73 프로이트는 단 한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지렛대 쪽으로 돌진했다. 암컷은 몹시 화가 나서 생쥐의 언어로 욕설을 퍼붓는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생쥐에게 는 지렛대보다 더 마음을 끄는 것이 없었다. 74 그녀는 남자를 천천히 살펴본다. 그가 조금 멍청하다는 생각이 든다. 으음... ... 안 되겠어. 줏대 없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이런 마당쇠 같은 남자는 내 취향에 안 맞아. 금방 싫증이 나거든. 그녀의 상상 속에서 마당쇠 같은 남자가 즉시 사라진다. 그러면 나에게는 어떤 남자가 필요할까? 늘 신선한 장면들을 연출해서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영화감독 같은 남자는 어떨까? 나로 하여금 늘 어떤 영화난 소설의 주인고이 된 듯한 기분을 갖게 하는 남자 말이야. 그녀가 연출가 기질이 다분한 남자 하나를 머릿속에 그린다. 남자는 즉시 무대 장식과 조 명과 의상에 변화를 준다. 대화는 한결 세련되어지고 동작은 일거수일투족이 다 안무다. 연 인들은 다시 침대에서 알몸이 된다. 몇 자루의 초가 방 안을 밝히고 있다. 어디에선가 향대 도 풍겨 온다. 자세가 바뀔 때마다 음악이 장단을 맞추어 준다. 남자가 순식간에 배치해 놓 은 거울들을 이용해서 뤼크레스는 자기 자신과 파트너의 몸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본다. 에이, 별로야. 이런 남자에게도 결국은 싫증을 느끼게 될 거야. 그녀는 자기를 감당할 수 있는 남자가 없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다. 남자들 뻔하지 뭐. 다 거기서 거기야. 그렇게 결론이 나자, 그녀는 상상 속의 대저택에 다시는 남자를 끌어들이지 않는다. 그녀는 보디빌딩 실에 들어가 운동을 하는 장면을 상상한다. 하지만 스포츠는 그저 사상하 는 것만으로도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게 한다. 무언가를 먹고 싶다. 그녀는 거대한 냉장고 를 상상하고 그것의 문을 연다. 음식물이 가득 들어 있다. 마음이 든든하다. 그녀는 여자 친구들을 불러 잔치를 벌이기로 한다. 그녀가 준비한 음식은 그라탱, 라자냐, 로렌 식 케이 크, 다진 고기로 속을 채운 토마토(그녀가 소화를 잘 시키지 못하는 껍질을 벗긴 토마토임), 사태 소스를 친 닭 고치 구이, 연어를 곁들인 수플레 등 이른바 <살찌게 하는 음식들>이다. 아주 고약스러운 요리도 하나 준비해 볼 생가이다. 거위고기 조림과 기름에 퀴긴 강낭콩을 곁들인 툴루즈 식 스튜는 어떨까? (예전 같으면 상상하는 것도 도리질을 쳤을 음식이다.) 75 사뮈엘 핀처와 장 루이 마르탱은 실험을 되풀이했다. 이번에는 발정난 암컷이 아니라 먹이 를 가지고 실험을 했다. 그들은 프로이트를 이틀 동안 굶겼다가 추구가 두 개 있는 우리 안 에 다시 넣었다. 한쪽에는 치즈, 감자, 아몬드 케이크 등 먹음직스러운 먹이들이 쌓여 있었 고, 다른 쪽에는 지렛대가 있었다. 76 그녀는 절친한 여자 친구들과 함께 앉아서 음식을 먹고 그녀들이 자장 좋아하는 화제인 남 자들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 크림 케이크를 마음껏 먹으면서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결핍이 느껴진다. 담배가 없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담배를 가지고 있느냐고 묻 는다. 그녀들은 <물론이지>하고 대답한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불을 빌려 담배에 불을 붙인 다. 한 개비를 다 피웠지만 그녀의 몸은 여전히 니코틴이 부족한 상태다. 퓌크레스는 다시 몇 개비를 달라고 해서 한꺼번에 피워 버린다. 그 것으로도 모자라 양팔에 니코틴 패치를 붙인다. 하지만 그녀의 핏속에는 여전히 니코틴이 부족하다. 여자 친구들이 니코틴 껌을 준 다. 그것을 씹어 보아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금단 증상이라 상상으로 이겨 낼 수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뭔가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벽들이 갈라지고, 여자 친구들의 몸에도 금이 간다. 식탁 위의 음식이 금새 썩는 냄새를 풍긴다. 여자 친구들은 겁에 질린 채 자기들의 몸이 산산조 각으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고 있다. 그녀들 모두가 갑자기 나병에라도 걸린 듯하다. 그녀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썩어 가고 분해되어 간다. 세계가 거대한 당구공처럼 끝 간 데 없이 반들반들하다. 이 세계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남 아 있는 것은 오로지 그녀뿐이다. 그녀는 하늘에 별도 달도 보이지 않는 반들반들한 행성에 혼자 있다. 크나큰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녀는 잠에서 깨어난다. 보이는 건 여전히 어둠뿐이 다. 어서 상상 속의 성관을 다시 지어야 한다. 그녀는 흩어지려는 마음을 한데 모아, 다시 벽들을 차례차례 세우고 지붕을 얹는다. 집이 완성되자, 그녀는 다시 여자 친구들을 부른다. 그녀들은 친절하게도 담뱃갑들로 가득 찬 쇼 핑 카트를 달고 온다. 그녀는 한 번에 열 개비씩 담배를 피워 댄다. 그래도 금단 증상은 가 실 줄 모른다. 성관의 지붕이 부서지고 벽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진다. 여자 친구들은 작은 게 들로 변하여 집게발로 연기 나는 궐련을 움켜쥐고 있다. 그녀가 손을 내밀자 게들은 모래 속으로 숨어 들어간다. 그녀는 모래 더미 옆에 다시 홀로 남아 있다. 핏속에 니코틴을 공급 하고 싶은 욕구가 너무나 간절하다. 그녀는 다시 잠에서 깨어난다. 내 내면에 아주 견고한 상상 세계를 건설하지 못하면, 내 정신 구조가 붕괴되고 말 거야. 나는 곧 미쳐 버릴지도 몰라. 그녀는 알고 있다. 꿈 다음에는 환각이 찾아올 것이고, 환각 다음에는 불안이, 불안 다음에 는 정신병적 증상이 나타나리라는 것을. 이대로 미쳐 버릴 수는 없다. 자꾸 생각을 하자. 내 사고에 체계를 세우자. 시간이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생각의 성을 쌓아야 한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다 말고 그녀는 방바닥에 쓰러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한줄기 빛이 비쳐 든다. 문에 낸 타원형의 시찰구를 통해 들어온 빛이다. 누가 방 안을 들 여다보고 있다. 그녀가 자고 있는지를 살피고 있는 모양이다. 움직이면 안된다. 문이 열린다. 간호사 하나가 들어와 음식 쟁반을 내려놓는다. 몇 시나 되었는지 알 수 없지 만, 냄새로 미루어 아침 식사를 가져온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하룻밤이 홀딱 지나가 버렸다 는 얘기다. 그녀는 왼쪽 눈을 반쯤 뜬다. 대뇌 피질의 후두엽에 있는 시각 영역에 시각 정보가 전달된다. <간호사는 남자다>. 측두 엽의 연합 영역에서 그녀에게 이른다. <지금이 기회다. 지금 어떻게 하지 않으면 다시는 기 회가 없다.> 앞이마 쪽의 대뇌 피질에서 덧붙인다. <다시 문이 닫히기 전에 이자를 쓰러뜨 려야 한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용하고 신속하게 해치워야 한다.> 그러자 대뇌 피 질의 운동 영역에서 해당 근육에 곧바로 신호를 보낸다. 이 근육들에 그녀의 힘이 집중된다. 남자가 다시 문을 닫기 전에, 그녀가 벌떡 일어나더니 남자의 턱에 발차기 한 방을 날린 다. 그 서슬에 그녀의 드레스가 북 찢어지고 남자가 바닥에 널브러진다. 그녀는 구두를 신고 버터 바른 빵 한 조각을 움켜쥐더니, 그것을 아귀아귀 입 안에 쑤셔 넣으면서 복도로 달아난다. 이에 씹히고 침에 젖은 빵이 동그랗게 뭉쳐져서 식도로 내려간 다음 위에 다다른다. 이 덩어리는 위액과 뒤섞여 죽으로 변한다. 이것은 작은창자로 내려가 미세한 입자로 바뀔 것이고, 창자 벽을 지나갈 때 흡수된 당분은 그녀의 혈관 속으로 퍼져 나가 뇌와 근육에 에너지를 공급할 것이다. 그녀의 뇌는 다시 현실 속에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며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뇌라는 것은 역시 활발하게 움직이는 몸속에서만 온전한 활력을 얻을 수 있는 모양이다. 뇌의 가장 원초적인 부분, 즉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충동을 조절하는 파충류의 뇌는 그녀 의 몸을 스치는 미세한 바람결이며 발바닥에 전해져 오는 바닥의 단단함, 복도에 널린 갖가 지 시각 정보들을 한껏 즐긴다. 뇌의 연변계, 즉 포유류에서만 나타나며 기억과 학습을 주관하는 뇌는 그녀가 지나가는 장 소가 어디인지를 기억해 내려고 애쓰면서, 현장을 분석하고 숨을 곳을 찾는다. 대뇌 피질은 그녀로 하여금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방책을 세우게 한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녀는 분석과 종합을 거듭하고 갖가지 꾀를 생각해 내며 거기에서 빠져나갈 준비를 한다. 두 번째 빵 덩어리가 식도로 내려간다. 이것이 그것의 다리 근육에 영양을 공급해 줄 것이 다. 그녀는 감시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 벽에 바싹 붙어서 달려간다. 77 프로이트는 조금 당황해 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핀처와 마르탱은 미로를 새로 고안하여 이 생쥐의 능력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생쥐가 최 후 비밀이라 불리는 구역에 전기 자극을 주는 지렛대에 도달하기 위해서 얼마만큼이나 평소 의 능력을 뛰어넘을 수 있는지를 관찰해 볼 생각이었다. 핀처는 마르탱이 모든 것을 지켜볼 수 있도록 실험실에 카메라를 설치해 놓은 바 있었다. 마르탱은 그냥 지켜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실험대 위에 설치된 모니터를 통해 자기의 생 각을 전하였다. 깜짝 놀란 듯이 잠시 망설이고 있던 생쥐가 멀리 투명한 미로 속에 있는 지렛대를 발견하 고, 그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78 그녀는 복도 안쪽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간다. 창 너머를 보니 아직 어슴새벽이다. 해가 뜨 기 전에 빠져나가야 한다. 벽시계가 6시를 가리키고 있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듯하다, 아직 약간의 시간이 있다. 그녀는 전화를 사용해 보려고 한다. 하지만 내선만 깔려 있다. 당연한 일이다. 외부 사람들과 통화할 일이 없는 이곳 환자들에게 외선이 필요할 리가 없다. 서랍에 내 휴대폰이 있다. 그녀는 철사 하나를 잡고 서랍의 자물쇠를 쑤시기 시작한다. 79 첫 번째 난관은 두 문짝을 매듭으로 잡아맨 문이었다. 지렛대에 도달하자면 그 매듭을 풀 어야만 했다. 생쥐는 이미 지렛대를 보고 의욕이 고취된 터라, 앞발과 이빨을 이용해서 실들 을 하나하나 끊어 버렸다. 80 자물쇠청이 곁쇠질에 밀리고 서랍이 열린다. 그녀는 재빨리 휴대폰을 들어 이지도르에게 전화를 걸려고 한다. 하지만 전화기를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다. 배터리가 바닥났기 때문이 다. 서류함들이 가득 들어 있는 붙박이장 하나가 그녀의 눈길을 끈다. 서류들에는 병원에서 치 료를 받았던 환자들의 이름이 붙어있다. 빵집 주인에서 시장에 이르기까진, 우체국 직원에서 호화요트를 가진 억만장자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삐끗 잘못 되어서 성 마르그리트 병원에 왔다. 각각의 서류 상단에는 사진 한 장이 붙어 있고, 사진 옆 에는 손으로 작성한 질문지가 있다. 질문들은 각자의 공포나 희망, 실망, 정신적 충격 등에 관한 것이다. 질문지의 한 항목은 이렇게 묻고 있다. <열 살 이전에 경험했던 일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 웠던 것은 무엇인가요?> 환자들을 움직이는 원초적인 동력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려는 질문이로군. 어린 시절의 정신 적 충격은 엔진과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고 브레이크로 작동할 수도 있지. 그녀는 호기심을 느끼며 서류함을 계석 뒤적인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불안에 빠진 인 간 군상이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제기 하는 탓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허물어진 가능성이 더 많은 사람들. 똑똑하다는 건 때로 우리의 약점이 된다. 자동차 엔진의 성능을 지나치게 강화하면 아무리 뛰어난 카 레이서도 자기 뜻대로 차를 몰고 갈 수가 없다. 엔진의 회전 속도가 빨라지면 빨 라질수록 사고도 늘어난다. 우리는 어쩌면 너무 똑똑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자꾸 나 아가는 것을 멈추고 우리의 현상을 점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친다. 인간 능력의 비약적 발전을 포기하고 나아간다는 것의 참뜻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니 매우 우상 파괴적인 생각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바야흐로 우리의 <지능>을 기계에 전달하려 하고 있다. 그건 어쩌면 우리 손을 데 게 하는 뜨거운 감자를 떠넘기는 것과 같은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혹시 그것을 관리할 줄 모르기 때문에 떠넘겨 버리는 게 아닐까? 아인슈타인은 우리의 뇌의 10%밖에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10%도 이미 너무 많은 걸까? 아주 많은 진료 카드들에 갖가지 약품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벤조디아제핀, 강장제, 수면 제...... 이것들이 바람막이가 되어 환자들을 더 큰 재난으로부터 지켜 주고 있는 모양이다. 그녀는 다시 시간을 확인한다. 6시 8분이다. 서둘러야 한다. 아까 그녀에게 먹을 것을 가져 다 준 간호사는 그녀가 자고 있다고 확신하고 완전히 방심을 했을 것이다(끊었던 담배를 다 시 피움으로써 되살아난 금단 증상 때문에 그녀가 그토록 이른 시각에 깨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그 간호사가 그 시각에 식사를 가져왔다는 것은 다른 간호사 들도 새벽부터 일하고 있을 거라는 얘기가 된다. 7시쯤 되면 뜰에 사람들이 북적거릴 것이 다. 얼마 남지 않은 이 조용한 시간을 이용해야 한다. 그녀는 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자주색 드레스의 아랫자락을 찢는다. 그때 무슨 소리가 들린다. 간호사들이 다가오고 있는 모양이다. 그녀는 창문을 넘어 달아난다. 81 생쥐는 또 다른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뒷다리로 버티며 일어섰다. 높은 곳에 나 있는 출구 가 바로 그 관문이었다. 생쥐는 그 출구에 도달하기 위해서 뒷다리에 힘을 모아 펄쩍 뛰어 올랐다. 82 그녀는 이제 뜰에 나와 있다. 한 남자가 지나간다. 환자인지 간호사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그녀는 가까이 있는 아무 병동에나 들어가 몸을 숨긴다. 이곳은 벽들이 앙리 루소의 천진난만한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다. 원색의 꽃들로 덮인 목가 적인 초원에서 서로 손을 잡고 있는 인물들을 그린 그림들이다. 환자 한 사람이 그녀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 이런, 기자 아가씨 아니신가! 안녕하시오, 잘 지내셨소? " " 아 로베르 <박사님>! 전 잘 지내요. <박사님>은 어때요? " 그녀가 뭔가를 예측하고 어떻게 대비할 새도 없이 그가 그녀에게 덤벼든다. 여러 환자들이 와서 그를 거둔다. 83 프로이트는 다른 수컷들로 붐비는 또 다른 통로에 다다랐다. 그곳을 통과하자면 다리와 앞 니를 사용할 수밖에 없을 듯했다. 지렛대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터라, 프로이트는 길을 막고 있는 수컷들을 더욱더 그악스럽게 떼밀었다. 84 떼거리로 몰려든 공격자들에게 덮여 그녀는 더 이상 꼼짝달싹 할 수가 없다. 두 팔과 두 다리가 그들에게 붙잡혀 있다. " 로베르, 날 보내 줘요. 그려면 담배를 줄께요. " 뤼크레스 넴로드가 소리치자, 로베르는 그 제안을 놓고 저울질을 한다. " 한두 갑이 아니라 몇 보루를 통째로 갖다 줄게요. 그것도 화끈하게 필터 없는 것으로요! " 뤼크레스가 다시 꾀는 말을 늘어놓자, 정신병자 로베르가 퉁을 놓는다. " 그건 건강에 나빠. 지난번에 당신 때문에 얼마나 혼났는지 알아? 당신이 나한테 담배를 권하지 않았다면, 내가 욕을 먹는 일은 없었을 거야. 난 욕먹는 게 너무나 싫어. " " 미안해요, 로베르. " 그는 격렬하게 벽을 때린다. " 사과해 봐야 소용없어! 또다시 담배로 나를 유혹하고 있으면서 무슨 사과야? 이 마녀야! " 그는 씩씩거리며 눈을 부라린다. " 그것이 당신에게 즐거움이 될 줄 알았죠. " " 물론 즐거움이 되지. 당연히 나에게 아주 큰 즐거움을 줄 거야. 담배가 내 머릿속에서 떠 나질 않아. 밤에는 그것에 관한 꿈도 꾸고, 낮에는 담배 피는 시늉으로 위안을 삼지. 하지 만...... " 그가 차분하게 말을 잇는다. " 하지만 최후 비밀에 도달하고자 하는 내 욕구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냐. " 그는 어떤 은총에 관해서 이야기하기라도 하듯 자못 경건하게 최후 비밀이라는 말을 발음 했다. 다른 환자들도 마치 그 말 자체에 어떤 진정의 효과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평정을 되 찾는다. " 최후 비밀이요? " " <아무>가 우리에게 그것을 선물한거야. " " <아무>가 누군데요? " 그 물음에 모두가 성을 낸다. " 원 세상에, <아무>가 누구인지도 모른단 말이야? " 몇몇 환자가 그렇게 되받는다. " 당신은 우리에 관해서 아는 게 없지만, 우린 모두 당신인 누구인지 알고 있어. 당신은 비 열한 첩자야. 언론에 우리 병원을 헐뜯는 기사를 실어서 병원 문을 닫게 하려고 여기에 온 거야. 당신들 기자라는 사람들은 다 똑같아! 뭔가 아름답고 순수한 것이 있다 싶으면 거기 에 침을 뱉어버리지. " 뤼크레스는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 아니에요. 난 여러분 편이에요. " " <아무>가 우리에게ㅐ 당신이 잠입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어. 나는 지난번에 당신이 들 어오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이유로 그로부터 꾸지람을 들었지. 그래서 이제 당신이 다시는 우리를 성가시게 할 엄두를 못 내도록 아주 따끔한 맛을 보여 줄 생각이야. 자네들도 동의 하지? " 모든 광인들이 동의의 뜻을 표시한다. 괴성을 내지르는 환자들도 있고, 안면 근육을 우스꽝 스럽게 일그러뜨리는 환자들도 있다. 로베르는 마치 진찰이라도 하듯이 그녀의 뾰족한 턱을 조심스럽게 잡는다. 그녀는 커다란 에머랄드빛 눈으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보통 그녀가 그런 식으로 남자들을 바라보면, 남자들은 그녀의 눈빛에 압도되어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곤 한다. " 뤼시앵이 당신을 손봐 줄 거야. " 뤼크레스는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다른 환자들이 일제히 소리친다. " 뤼시앵! 뤼시앵! 뤼시앵! " " 도와줘요! " " 소리쳐 봐야 소용없어. 여기엔 당신을 도와주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어. 기껏해야 당신과 재미를 보고 싶어 하는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일 뿐이야. " 다른 환자들이 다시 박자를 맞추어 소리친다. " 뤼시앵! 뤼시앵! 뤼시앵! " 그 이름의 주인공인 키가 크고 건장한 사내가 다가온다. 머리는 풀어헤쳐져 있고 자그마한 얼굴은 기이한 미소로 일그러져 있다. 등 뒤에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듯하다. 그가 왼손으로 뤼크레스의 발목을 잡는다. 그녀는 발버둥을 쳐보지만, 다른 광인들이 꽉 붙잡고 있기 때문 에 아무 소용이 없다. 그녀는 겁에 질린 커다란 초록빛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등 뒤에 무엇을 감추고 있는 거 지? 칼인가? 집게인가? 가학성 변태성욕자들이 쓰는 물건일 게 틀림없어! 뤼시앵이 마침내 그 물건을 드러내 보인다. 뿔닭의 깃털이다. 애걔, 겨우 저거였어....... 그녀는 마음을 놓는다. 사내가 기이하게 찡그린 얼굴로 말문을 연다. " 아가씨, 간지럼 태우는 거 좋아해요? 내가 강박감을 가지고 집착하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간지럼 태우기요. " 그러면서 그는 깃털을 뤼크레스의 발바닥으로 가져간다. 깃털의 끄트머리가 발바닥의 민감 한 부분을 부드럽게 스친다. 발바닥의 피부는 2천 개의 온각 수용체와 5천 개의 촉각 수용 체, 그리고 통각엔 민감한 30개의 신경 그물로 덮여 있다. 이리저리 쓸어 가기도 하고 빙빙 돌아가기도 하는 집요한 간질임에 피하조직 속의 파치니 소체들이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 자극은 좌골 신경의 고속도로를 통해 다리를 거슬러 올라간 다음 척수를 거쳐 뇌에 다다른 다. 뇌 속의 뉴런들이 지나치게 자극을 받은 나머지 엔도르핀을 분비하기 시작한다. 뤼크레스는 웃음의 욕구를 느낀다.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욕구다. 뇌의 몇몇 구역에 단락 이 생긴다. 그녀는 더 이상 이성의 지시를 따를 수가 없다.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웃 음 사이로 그녀가 가까스로 한 마디를 토해 낸다. " 안 돼요, 이러지 말아요! " 하지만 사내는 오로지 간지럼 태우기를 완벽하게 하는 데에만 골몰해 있다. 그녀는 그의 다음 동작을 예측할 수가 없다. 깃털이 이번에는 지그재그로 움직인다. 그녀가 자꾸자꾸 웃 는다. 그녀의 피에 엔도르핀이 넘쳐난다. 하지만 엔도르핀이 너무 많아지면서 좀 전과는 다른 현 상이 벌어진다. 엔도르핀은 P 물질과 고통을 전달하는 호르몬인 브라디키닌에 자리를 내어 준다. 그와 동시에, 뇌는 이 호르몬을 억제하기 위해 뉴로텐신을 만들어 낸다. 그녀가 몸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그 화학 변화를 자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 의 버둥거림은 더욱 격렬해지고 그녀의 입은 공기를 들이마시느라고 열렸다 닫히기를 되풀 이한다. 그녀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는다. 이건 정말 견딜 수가 없다. 괴로운 건지 즐거운 건지 모를 이 혼란스런 자극보다는 차라리 단순하고 노골적인 고통이 낫겠다 싶다. 혹시 핀처도 이런 식으로 간지럼 태우기를 당하다가 죽은 것이 아닐까? 정말 그랬다면, 그 건 참으로 어이없는 죽음이 아닌가! 그녀가 계속 버둥거리자 광인들은 그녀를 잡고 있는 손에 더욱 더 힘을 준다. 이 짓을 중단시켜야 한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주위의 광인들 역시 웃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아주 기이하다. 병원 밖에서 온 젊고 예쁜 여자가 자기들 가운데 가장 짖궂은 자의 손아귀에 잡혀 버둥거리고 있는 모습이 그들 에게 어떤 쾌감을 주고 있는 모양이다. 이들은 어쩌면 자기들을 배척한 <정상인들>의 세계 에 앙갚음하는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 이 여자 곧 얼이 빠지겠는걸. " 눈매가 능글맞은 자그마한 남자가 소리친다. 로베르는 더없이 차분한 모습이다. 뤼크레스는 대뇌 피질로 그것을 자극한다. 하지만 그녀 뇌의 가장 원시적인 부분은 이제 흥분이 극에 달하여 마구 터져 나오는 신경 물질들을 대뇌 변연계로 전달하고 있다. 그녀의 목은 불타는 듯 후끈거리고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내 뇌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아야 해. 간지럼 때문에 무너질 수는 없어. 하지만 그녀의 사고 작용조차 그다지 원활하지가 않다. 대뇌 피질의 어느 한 부분이 자꾸 웃음이 나오게 하는 그 느낌에 스스로를 내맡기려 한다. 하긴, 웃다가 죽는 것도 그리 나쁠 건 없지. 그녀는 그 어처구니 없는 생각에 반발하며 다시 버둥거린다. 대뇌 피질의 또 다른 부분은 가능한 한 빨리 마음 깊숙한 곳에 생각을 위한 진지를 만들기 로 결정한다. 간지럼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장소를 마련하려는 것이다. 이 궁지에서 벗어날 방도를 찾아내자. 그녀의 머릿속에 마련된 긴급 사령부의 상황판에 커다란 글씨로 그렇게 쓰여진다. 어떤 슬픈 것에 대해서 생각하자. 후두엽의 시각 영역에 부장의 오만한 얼굴이 나타난다. 뤼크레스는 마침내 웃음을 멈춘다. 간지럼을 태우던 사내는 자기의 의력이 떨어지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며 그녀의 다른 쪽 발 을 잡는다. 뤼크레스는 더 이상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환자들은 그녀가 자기 정신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에 놀라며 뒤로 조금 물러선다. 그와 같 은 순간에 이성을 온전하게 유지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아주 깊은 인상을 받은 모양이다. 뤼 크레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놀라서 머뭇거리고 있는 그들을 밀치며 달아난다. 하지만 이내 요란한 벨소리가 병원 전체에 울려 퍼진다. 로베르가 경보 장치를 작동시킨 것이다. 85 생쥐 프로이트는 제 길을 막는 모든 수컷에게 겁을 주는 데에 성공했다. 지렛대에 도달하 려는 간절한 욕구에 사로잡힌 생쥐는 이미 제 동료 몇 마리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런 잔인 한 공격성에 충격을 받은 다른 생쥐들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프로이트는 그 새 로운 방의 잠금 장치를 잡고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고리를 벗겨 냈다. 그런 다음, 문을 열고 나가더니 다시 문을 닫았다. 지렛대의 힘을 모르는 다른 생쥐들이 더 이상 방해를 하지 못 하게 하려는 거였다. 지렛대가 가까이에 있다....... 프로이트가 다다른 곳은 배를 깔고 납작하게 엎드려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구역이었 다. 핀처는 이 실험 동물의 난관을 헤쳐 나가는 능력에 경탄하고 있었다. " 이 생쥐는 대단히 영리해지고 있어. " 그의 말에 마르탱이 덧붙였다. <동기가 부여되어 있어서 그래. 난관들이 이 생쥐로 하여금 새로운 능력을 발전시키도록 만들고 있어. > " 자네 말이 맞아. 한시라도 빨리 통과하고 싶은 마음에, 더욱 깊이 주의를 기울이고 더욱 빠르게 사고하는 거지. 뉴런들의 수상돌기가 흥분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뉴런 의 조직망들이 점점 복잡해지면서 뇌의 왕성한 활동을 뒷받침하고 있어. " <최후 비밀이 생쥐를 더욱 영리하게 만들어 주는 셈이군. > 86 뤼크레스가 질주한다. 일껏 도망을 친다고 어떤 공동 침실로 들어갔는데, 그게 막다른 길이 었다. 망했다. 그녀가 낭패감을 느끼며 머뭇거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두 팔이 나타나 그녀를 들어 올리더 니 천장에 나 있는 뚜껑문 쪽으로 끌어당긴다. 반 고흐의 어떤 그림을 흉내 내어 그런 거대 한 천장화에 여닫이 창 하나가 트롱프 뢰유로 그려져 있는데, 이게 실물을 흉내 낸 것이 아 니라 진짜 뚜껑문이 닫힌 모양이다. 뚜껑문이 이내 다시 닫힌다. 그녀는 이제 지붕밑 방에 올라와 있다. 날씬한 갈색 머리 여자가 검은색의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뤼크레스 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 낯선 여자에게 모든 것을 밭길 수밖에 없다. 추적자들이 벌 써 아래에 와 있다. " 나는 아리안이라고 해요. 여기에서 도망치려 하는 거죠? " 발소리가 들린다. 추적자들이 멀어져 간다. " 사정은 좀 복잡하지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어요. " " 난 도망칠까 말까 망설이고 있어요. " " 그럼, 떠날지 말지 계속 생각해 보세요. 난 시간이 없어서 이만....... " 뤼크레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뚜껑문 쪽으로 간다. 하지만 그녀가 뤼크레스의 팔을 붙잡는 다. 그녀가 스위치 하나를 누르자 지붕밑 방이 환해진다. " 나는 인연과 운명을 믿어요. 당신을 만난 것은 내가 떠나야 할 운명임을 말해 주는 거예 요. " 아리안은 뤼크레스에게 다가들어 무슨 음모를 털어놓듯이 조심스럽게 말을 잇는다. " 사실 나는 미치지 않았어요. 이제 다 나았거든요.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 눈치를 못 채고 있어요. " 아리안은 스스로 앞장을 서서 탈출의 길로 나아간다. 하지만 천장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어 서, 그녀들은 엉금엉금 기어서 나아갈 수밖에 없다. 87 프로이트는 뚜껑문을 타고 올라가 플라스틱으로 된 통로에 다다랐다. 88 이윽고 작은 창문 하나가 나타난다. 두 젊은 여자는 그 창문을 통해 지붕으로 나온다. 그런 다음 빗물 배수관을 타고 아래로 내려간다. " 요새 밖으로 나온 거 아닌가요? " " 환자가 자꾸 늘어나서 병원이 비좁아졌기 때문에 핀처 박사가 병원을 넓혔어요. 방금 우 리가 빠져나온 건물들은 환자들이 자는 곳이고, 요새 밖에 있는 이 새 건물들은 환자들이 일을 하는 곳이죠. " 두 여자는 나무들 사이로 달려간다. 달리면서 이따금 몸을 돌려 더 이상 따라오는 자들이 없음을 확인한다. <유칼립투스 산책로>와 <꿩들의 길>을 지나자 나무에 가려져 있던 커다 란 건물 하나가 그녀들을 막아선다. 문에는 철갑에 둘러져 있고, 두 대의 감시 카메라가 문 위에 설치되어 있다. " 여기가 어디에요? " " 편집증 환자들의 작업장이에요. " 아리안은 자기 왼쪽에 있는 비디오카메라를 향해 애교 섞인 인사를 보낸다. 그러자 여러 개의 전자 자물쇠가 덜거덕거리더니 문이 열린다. 안으로 들어서자, 수백 개의 작업대가 눈앞에 펼쳐진다. 사람들이 컴퓨터와 갖가지 복잡한 기계를 앞에 두고 몰두해 있다. " 편집증 환자들은 자기들이 공격받는 것을 너무나 두려워하기 때문에 대단히 우수한 성능 한 지닌 방법 장치들을 끊임없이 발명해 내고 있어요. 환자들의 심리적 특성을 활용하자는 게 바로 핀처 박사의 위대한 발상이지요. " 뤼크레스는 경이감을 느끼며, 복잡한 기계들의 설계도를 그리는 일에 열중해 있는 사람들 을 바라본다. 상박 관념에 이끌려 행동하는 그들이 여느 <정상적인> 노동자들보다 한결 유 증하고 일에 대한 의욕도 훨씬 더 강하다는 생각이 든다. " 이들은 돈을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에요. 노후의 연금이나 명예를 위해서 일하는 것도 아니지요. 이들이 일을 하는 것은 일 자체가 자기들에게 가장 큰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에요. "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은 모두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다. 휘파람을 불거나 콧노래를 흥얼거 리는 사람들도 있다. 뤼크레스는 그 뜻밖의 모습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무슨 놀이를 하는 사람들 같군. " 핀처가 이런 말을 했어요. <광기란 우리의 머릿속에서 자라난 난폭한 용이다. 우리는 그 괴물을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그것을 죽이기보다는 말이나 낙타처럼 이용하 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면, 그 용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먼 것으로 우리를 데 려다 줄 것이다>라고 말이에요. " 아리안은 죽 늘어선 작업대들 사이로 뤼크레스를 데리고 간다. 환자들이 설계 도문에 수치 와 복잡한 공식 따위를 적어 넣는 데에 몰두해 있다. 그들의 몸짓과 표정이 제각각이다. " 이들은 자폐증 환자에요.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만, 자폐증 환자들 가운데 일 부는 계산 능력이 매우 뛰어나죠. 우리는 보통 순간적인 기억력만을 이용해서 계산을 하지 만, 이들은 영속적인 기억력까지 사용해요. 이들은 갖가지 복잡한 계산을 통해서 기계들의 치수를 결정하지요. " 자폐증 환자들은 두 여자에게 얼른 인사를 보내고 자기들이 하던 일에 다시 몰입한다. 다음으로 그녀들이 다다른 구역에서는 순백의 가운을 입고 전등을 이마에 단 사람들이 작 은 기계들을 열심히 조립하고 있다. "조증 환자들은 편집증 환자들이 고안하고 자폐증 환자들이 치수를 정한 기게들을 조립합 니다. 이들은 대단히 꼼꼼하고 정확하죠. " 그들은 배열이 완벽한지를 거듭거듭 확인하면서, 플라스틱과 금속으로 된 부품들을 조립하 고 있다. 혀를 내민 채 일에 몰두해 있는 남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 조립이 끝난 기계는 다시 편집증 환자들에게 보내져 검사를 받습니다. 그들은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죠. 그렇게 철저히 검사를 하기 때문에 우리 제품의 불량률이 0.0001%밖에 안 됩니다. 우리가 세계 기록을 갱신했지요. " 검사 구역의 환자들은 돋보기를 들고 각 부품을 세밀하게 살피면서, 조증 환자들의 나무랄 데 없는 작업 결과를 확인하고 완제품의 견고성을 검사한다. " 이렇게 열심히 일해서 얻는 게 뭐죠? " 뤼크레스가 그렇게 물으면서 찢어진 드레스 자락을 여민다, 자기 허벅지에 너무 많은 눈길 이 쏠리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 이렇게 만들어진 기계들은 상품으로 팔려 나갑니다. 전세계로 수출이 되죠. 수익이 괜찮 습니다. 많은 돈을 벌어다 주죠. 자동 경비 장치 상표 중에 <크레이지 시큐러티>라는 게 있 는데, 들어 본적 없어요? " " 크레이지 시큐러티....... " " 영어로 <미친 경비 장치>라는 뜻이지요. 이름을 그렇게 붙였으니, 누구도 우리가 고객을 속인다고는 말할 수 없을 거예요. " 아리안은 자기 농담에 자기가 먼저 킥킥 웃는다. 뤼크레스는 조준용 광학 안경을 쓴 한 무리의 편집증 환자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레이저를 조작하여 아주 작은 구멍을 뚫고 거기에 미세한 전자 부품을 끼우고 있다. " 그 말을 들으니까 생각나는 게 있네요. 어떤 신문에서 이런 광고를 본 듯해요. <크레이 지 시큐리티가 있으면 안전이 보장됩니다.> 그거 맞죠? " " 맞아요. 크레이지 시큐러티라는 상표를 단 기계들은 모두 성 마르그리트 섬에서 제작돼 요. " 아리안이 작업장 한 구역을 가리킨다, 조증 환자들이 조립하고 편집증 환자들이 검사한 기 계들을 포장하는 곳이다. 일꾼들은 기계를 폴리스텐으로 여러 겹 감싼 다음 견고하게 만든 판지 상자에 담는다. 정신 병원이 하이테크 공장으로 바뀌었군....... " 크레이지 시큐리티 경비 장치를 팔아서 번 돈으로 핀처는 이 부속 건물들을 지을 수 있 었어요. 그건 하나의 선순환이죠. 생산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점점 부유해집니다. 또 돈이 많 아지면 우리는 환자들을 위한 작업장을 늘려 생산을 증가시킵니다. " " 하지만 환자들이 돈을 받는 건 아니잖아요? " " 그들은 돈에 관심이 없어요. 그들이 원하는 건 자기들의 재능을 표출하는 거예요. 그들에 게 일을 그만두라고 권한다면, 누구나 격력하게 반발할 거예요. " 뤼크레스는 일에 열중해 있는 환자들을 죽 둘러본다. 너나없ㅅ이 자기 임무를 더 잘 완수 하기 위해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핀처 박사가 노동의 새로운 개념을 제대로 찾아냈다는 생 각이 든다. 동기가 부여된 자발적인 노동이야말로 진정한 노동이 아닐까? 주위에 감도는 위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뤼크레스는 계속 작업장을 관찰하고 있다. 아리 안의 설명이 이어진다. " 원하는 사람들만 각기 자기가 원하는 분야에서 일하는 겁니다. 그런데도 거의 모두가 일 을 하고 싶어해요. 여기에서는 사람들이 작업장에 더 오랫동안 머물겠다고 고집을 부리죠. 취침 시간이 되면 일을 중단하기가 싫다고 투덜거리기 일쑤예요. 크레이지 시큐러티가 그토 록 성공을 거두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죠, 보통 노동자들은 도저히 그토록 높은 수준의 효율에 도달할 수가 없을 거예요. 편집증 환자들은 하나의 경비 시스탬에 많은 시스템을 덧붙인다. 이들이 만든 제품에서는 모든 배선이 이중으로 되어 있어요. 케이블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시스템 전체가 계속 작동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죠. 모든 약점이 견고한 외피에 의해 보완됩니다. 저기 옆에 있는 작은 구멍들 보이죠? 보조적인 충격 감지 장치예 요. 겉에서 보면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어 있어요. 이들이 저런 장치를 설치한 것은 직업적인 양심의 발로입니다.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만일 자기들을 지켜 주는 기계 장치를 만든 사 람들이 이른바 <미치광이들>이라는 사실을 알면 아마 깜짝 놀랄 거예요. 뤼크레스는 자동차, 단독 주택, 선박, 빌라 등을 위한 갖가지 방법용 기계들을 둘러본다. 그 녀의 오른쪽에 있는 선반들에는 적외선 눈을 갖춘 정원용 난쟁이 인형들이 퍼레이드를 벌이 듯 늘어서 있다. 더 멀리에는 열매 대신에 카메라가 달린 가짜 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탐지 기들로 가득한 조각상이며 숫자 암호로 도난을 방지하게 되어 있는 카 오디오, 도난 방지용 전기 충격 장치가 숨어 있는 자동차 핸들, 열 방사를 이용한 방법 장치 등도 돋보인다. " 마치 어떤 첩보 부대의 장비 창고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드네요. " 하지만 아리안은 뤼크레스의 이 말에 전적으로 고감하는 눈치가 아니다. 그녀의 설명이 이 어진다. " 이들은 이 병원의 경비 시스템도 만들었어요. 그래서 병원에 더 이상 경비원이 있을 필 요가 없게 되었지요. 섬 전체가 편집증 환자들이 고안한 장치로 감시되고 있기 때문에 섬에 서 탈출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어요. " 뤼크레스는 갑자기 기운이 쪽 빠지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 내가 당신을 이리로 데려온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어요. 태풍이 불 때는 태풍의 눈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거든요. " 그녀는 어떤 적갈색 머리 남자의 옷소매를 잡아당긴다. 마치 세상 모든 것에 겁을 먹고 있 는 듯한 표정으로 끊임없이 눈을 깜박이고 있는 남자다. 그 남자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 피에로, 너희가 만든 경비 시스템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그냥 알고 싶어서 그 래.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겠어? " " 도망치고 싶어하는 건 아닐 태고, 왜 그래? 설마 날 속이려는 건 아니겠지? " 아리안은 당황해서 두서 없이 중얼거린다. 뤼크레스는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얼른 깨 닫고 피에로의 팔을 잡는다. " 당신을 속이려는 것 맞아요. 우리가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상황이 너무 심각해서 그 랬어요. 보기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에요. "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른 편집증 환자들이 다가와서 그들을 둘러싼다. 강박 관념 속에 서 살다 보니 보통 사람들 보다 청각이 더 예민하게 발달된 사람들이다. " 당신들을 해치려는 음모가 벌어지고 있어요. " 뤼크레스가 재빨리 그렇게 둘러대자, 적갈색 머리 남자는 조금 전보다 두 배나 더 빠르게 눈을 깜박이며 주먹을 꼭 쥔다. 그의 뒤에 서 있는 다른 편집증 환자가 흥분하여 소리친다. "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모든 게 정상이 아니었어. 일이 너무 잘 돌아가는 게 꼭 무슨 일이 새일 것만 같았어. " "핀처 박사는 살해당했어요. 범인들은 이제 성 마르그리트 병원의 모든 사람들을 죽이려고 해요. 그들은 여러분의 장점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의 낡은 방식을 다시 끌어들이려 하고 있어요. 성 마르그리트의 성공은 그들로 하여금 이른바 <미치광이들>이 보통 사람들 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요구하고 있지만, 그들은 그것을 받 아들일 수가 없는 거예여. " " 미치광이라뇨? 여기에 미친 사람이 있소? " 어떤 환자가 그렇게 되받는다. 편집증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쉽게 상 처를 받는 사람인 듯하다. 다른 환자가 대답한다. " 우리 적들이 우리를 그렇게 부르고 있다는 건 자네도 잘 알고 있잖아! " " 우리를 해치려는 음모가 있다고!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 편집증 환자에 가장 가까운 남자가 다시 토를 단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온 작업장으로 퍼 져 나간다. 이제 모두가 일에서 손을 놓고 있다. " 병원 내부에 배신자들이 있어요. 그들이 여러분을 차례차례 사라지게 할 거예요. 나는 기 자예요. 우리 독자들에게 여러분이 대단히 경탄할 만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과 핀처 박사의 실험이 실패로 끝나지 않도록 여러분의 적들을 저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왔어 요. " 환자들이 분개에 차서 불퉁거린다. 뤼크레스는 그들을 들쑤셔 한바탕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나서는 다시 그들을 진정시키려고 애쓴다. " 진정하십시오. 지금은 아직 행동에 나설 때가 아닙니다. 우리는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으 면 안 됩니다. 저는 외부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여기에서 빠져나갈 겁니다. 저를 도와주십시 오. 그리고 계속 아무것도 모른 척하고 계십시오. 그래야 그들의 허를 찌를 수 있습니다. " 편집증 환자들의 리더인 듯한 피에로가 즉시 두 여자를 인접한 방으로 데려간다. " 여기는 컴퓨터 경비 시스템의 중앙 통제실입니다. 모든 감시 카메라가 이곳으로 정보를 보냅니다. 이들 스무 명이 사소한 정보 하나도 놓치지 않고 수백 개의 모니터를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습니다. " 피에로는 그 스무 명의 감시자들에게 긴급 상황이 발생했으니 자기의 지시를 따르라고 이 른다. " 먼저, 경보기가 울리지 않도록 전원을 차단하겠습니다. " 그러면서 그는 몇 개의 버튼을 조작한다. " 다음에는 섬에서 당신이 달아날 방향과 반대되는 쪽에 있는 감시 장치를 작동시키겠습니 다. 그러면 그들은 반대쪽에서 당신을 찾느라고 시간을 허비하게 될 겁니다. 끝으로 이곳에 설치된 탐지기들의 전원을 모두 끊겠습니다. 당신은 여기에서 빠져나간 다음 남쪽 해안으로 가면 됩니다. 거기에서 바다로 뛰어드십시오. 섬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그것뿐입니다. 성 오 노라 섬이 멀지 않으니까, 거기까지 헤엄쳐 갈 수만 있으면 됩니다. 시토 수도회의 수사들이 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겁니다. 하실 수 있겠죠? 자아 그럼 지붕을 통해 나가세요. 그게 더 안전해요. " 피에로는 인터폰으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더니, 모니터 하나를 조절하고 자판을 두드린다. 그러고는 일이 잘 되고 있다는 뜻의 신호를 보낸다. 뤼크레스는 불안하게 그를 지켜본다. 그 가 마침내 어떤 손잡이 하나를 누르자, 전기 사다리 하나가 내려온다. 아리안과 뤼크레스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다. 89 생쥐 프로이트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다. 거기에 가장 어려운 관문이 놓여 있었다. 면도날이 바로 그것이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서는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지만, 생쥐는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생쥐는 지렛대 의 빛에 이끌려 올라가다가 아래로 미끄러졌다. 올라가기와 미끄러지기를 되풀이하는 생쥐 의 눈물겨운 고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90 아리안과 뤼크레스는 건물의 지붕 위로 기어올라 간다. 편즙증 환자들이 안전을 생각해서 꽂아 놓은 병 조각들 때문에 여기저기에 생채기가난다. 두 여자는 지붕에서 작은 숲으로 뛰 어내린 다음 남쪽 해안을 향해 달려간다. 그녀들은 몇 개의 바위를 기어올라 해안 절벽의 꼭대기에 다다른다. 깎아지른 낭떠러지다. " 이제 우리 어떻게 하죠? " 아리안이 묻는다. 불안한 기색이다. " 바다로 뛰어내려야죠. 이쪽에서 뛰어내리면 바위들을 쉽게 피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하 지만, 작은 암초들에 스쳐 상처를 입지 않으려면 앞 쪽으로 멀리 몸을 날려야 해요. " 두 여자는 몸을 숙여 아래를 내려다본다. 20미터쯤 아래에 파도가 들쭉날쭉한 바위에 부딪 혀 철썩거리고 있었다. " 나는 고소 공포증이 있어요. 도저히 못 뛰어내리겠어요. " " 고소 공포증은 나도 있어요. 이런 말이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다 보며 겁을 먹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예요. 모든 건 우리 마음에 지어내는 거예요. 아래를 보 지 말고 아무 생각 없이 뛰어내려요. " 아리안과 뤼크레스가 뛰어내릴 준비를 한다. 그때 난데없이 스피커 소리가 들려온다. 벼랑 꼭대기에 놓아둔 정원용 난쟁이 인형의 내부에서 나오는 소리다. " 아리안, 돌아와! 당장 돌아오지 않으면, 끝내 최후 비밀의 환희에 동참할 수 없게 될 거 야. " 아리안은 급소를 찔린 듯이 허둥댄다. " 최후 비밀이라는 게 뭐예요? " " 우리가 갈망하는 절대적인 보상이죠. " 아리안이 대답한다. 그녀의 표정에는 고민에 휩싸인 기색이 역력하다. " 돌아와, 아리안. 그리고 그 <손님>도 다시 모시고 와. " " 절대적인 보상이라고요? 좀 더 분명하게 말해 줄 수 있겠어요? " " 최후 비밀이라 불리는 어떤 것이 있어요. 사람들 말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한 거 래요. 동기든 야망이든 마약이든 그 어떤 것도 그것을 이길 수 없대요. 나르바나의 경지에 들어가게 해주고,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경험을 하게 해주는 거래요. " 아리안은 마치 자기 자신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다. 그녀의 마음은 갈수록 뒤죽박죽이 된다. 함께 탈출 길에 나선 길동무가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르게 보인다. 그녀들을 잡으료고 환자들이 몰려온다. 그들의 선두에는 편집증 환자들이 있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달려오는 건 피에로다. 그는 여기자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고 분기가 탱천해 있다. " 아리안, 그 여자를 붙잡아! 최후 비밀의 환희를 경험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그 여자를 잡아야 해! " 그의 외침이 스피커를 통해 전해져 온다. 아리안의 얼굴에 경련이 일면서 입이 일그러진다. 뤼크레스가 바다에 뛰어들기 위해 몸을 솟구치려는 찰나 아리안이 그녀의 손목을 잡는다. " 날 놓아줘, 아리안. " 아리안이 딴 사람 같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 오늘 신문에서 내 별자리의 운세를 읽었어요. <당신의 친구들을 버리지 말라.>라고 써 있더군요. " 환자들과 남자 간호사들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 뤼크레스는 아리안의 팔을 오지게 물어 버린다. 아리안이 손 을 놓는다. 마침내 자유로운 몸이 된 뤼크레스는 중력의 법칙에 몸을 내맡긴 채 눈을 감는다. 귓전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들린다. 91 프로이트는 또다시 미끄러졌다. 이번에는 바닥이 아니라 물속으로 떨어졌다. 92 아리안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몸을 숙여 아래를 살핀다. " 친구들을 버리지 말라고 했는데, 혹시 저 여자가 뛰어내리지 못하게 하라는 소리가 아니 었을까? 내가 잘못했어. 저렇게 떨어지게 내버려 두는 게 아니었는데....... " " 걱정하지 마. 다시 올라올 거야. " 모두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기다리는데, 뤼크레스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 이 높이에서 뛰어내렸으니, 어떤 바위의 뾰족한 끄트머리 위로 떨어졌을 게 틀림없어. 그 래서 수면 위로 다시 올라오지 않는 것 거야. " 한 간호사가 결론을 내린다. 아리안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진다. " 내가 잘못했어. 떨어지게 내버려 두는 게 아니었는데....... " 혹시 바위틈에 시체가 박혀 있을까 해서 모두가 몸을 숙여 물 속의 바위들을 살펴보지만, 요동치는 물결 때문에 무엇이 있다한들 제대로 식별이 될 리가 없다. 피에로는 일말의 동정 심도 보이지 않는다. " 잘됐어. 언론을 통해 모든 걸 까발리려던 여자가 사라진 거야. " 하지만 아리안은 자기와 함께 탈출하고자 했던 뤼크레스가 아직 살아 있으리라는 믿음을 버릴 수 없다. 그래서 다른 환자들이 자기들의 하던 일을 계속하기 위해 하나둘 자리를 뜨 고 있는 동안에도 여전히 수면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 자아, 이제 그만 가. " 피에로의 재촉에 그녀는 머뭇머뭇하면서 그의 뒤를 따라간다. 93 <생쥐가 헤엄을 칠 줄 아나? > 장 루이 마르탱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숨이 막혀서 버둥 거리던 생쥐가 물속으로 가 라앉았다. 사뮈엘 핀처는 개입하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섣불리 나서다가는 실험을 그르칠 수도 있다 는 생각 때문이었다. 94 수면 어디에도 사람의 자취는 보이지 않는다. 무심한 파도만이 바위에 부딪혔다가 한없이 돌아나갈 뿐이다. 사람의 자취가 있다면, 피묻은 자주색 천 조각 하나가 해변에 밀려와 있을 뿐이다. 95 생쥐 프로이트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멀리에 지렛대가 보였다. 생쥐는 흥분을 가라앉 히더니,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으려면 헤엄을 쳐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듯 다리를 움직 여 서서히 나아갔다. 또 하나의 난관인 수중 터널이 생쥐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 기 위해서는 그 터널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물이라고 본 적이 없 고 제가 헤엄칠 수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던 프로이트가 일시적으로 호흡을 멈추고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96 아리안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여기자가 뛰어내린 벼랑 끝으로 돌아와서 아래를 내려다본 다. 피묻은 천조각이 보인다. 그녀는 꼼짝않고 서서 수면을 응시한다. 바닷가의 게들이 마치 어떤 잔치가 벌어지기라도 한 양 어딘가로 몰려간다. 내가 보기에 잘못될 가능성이 있다 싶은 일은 언제나 잘못된다. 무슨 일이든 내가 생각한 대로 일이 돌아가는 법이 없다. 바다에 떨어진 사람이 다시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것은 영 화 속에서나 있는 일이다. 지중해의 파도가 거칠어지고 철썩거리는 소리가 점점 요란해진다. 아리안이 아직 수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바람에 밀려온 짙은 해미가 갑자기 바다를 덮어 버린다. 벼랑 끝 에서는 이제 수면이 보이지 않는다. 아리안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쉬며, 자기도 뛰어내릴까 하며 머뭇거린다. 그때 요란한 벨소리가 울린다. 구내 식당에서 곧 식사가 제공 될 것임을 알리는 소리다. 97 프로이트는 투명한 수중 터널 속을 유연하게 헤엄쳐 나아갔다. 긴 꼬리를 이용해서 추진력을 얻으니,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보기보다는 편했다. 한 가지 불편한 게 있다면, 후각 기관을 더 이상 사용 할 수 없어서 가장 중요한 감각에 장애가 생 긴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생쥐는 물속에서도 목표물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았다. 마력을 지닌 지렛대가 멀리 에서 생쥐를 부르고 있는 듯했다. 98 코가 물낯에 닿는다. 뤼크레스는 바위로 둘러싸인 우묵한 곳에서 콧구멍만 물 밖으로 내놓 은 채 숨을 들이쉰다. 이런 때는 내 코가 더 길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코를 잠수함의 잠망경처럼 물 밖으로 내밀 고 물속에 오래오래 숨어 있을 수 있잖아? 그녀의 기다란 적갈색 머리채가 바닷말처럼 그녀 주위를 스친다. 수면을 통하여 아리안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가 발길을 돌리고 있다. 수면 위로 무명 식탁보처럼 뿌연 해미가 깔린다. 뤼크레스는 그 짙은 안개를 틈타서 성 오 느라 섬을 바라보고 헤엄쳐 나아간다. 다행히 두 섬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서 헤엄으로 충분히 건너갈 수 있을 듯하다. 피에로의 말이 맞았다. 99 생쥐 프로이트는 계속 헤엄을 치며 나아갔다. 100 마침내 레랭스의 또 다른 섬인 성 오노라 섬이다. 그녀는 물을 줄줄 흘리며 해변으로 나온다. 마치 물의 요정 나이아스가 안개를 헤치며 나 오는 듯하다. 절벽에서 뛰어내릴 때 뾰족한 바위에 긁혀 상처를 입었다. 왼쪽 허벅지에 생긴 상처가 계속 욱신거린다.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가 길게 늘어선 밭 위쪽에 건물이 하나 보인다. 그녀는 그 건물을 향해 나아간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서자 증류주 제조장이 나온다. 문 위쪽에 초록색의 방패 꼴 문장이 하나 붙어 있다. 종려나무 잎사귀 두 개가 세모꼴의 주교관을 둘러싸고 있는 문 양이 새겨진 문장이다. 그 위쪽에 <레렝스 수도원. 리쾨르 레리나>라는 말이 고딕 글자로 쓰여 있다. 더 위쪽에는 <무염수태 시토 수도회>라는 팻말도 붙어있다. 리쾨르 제조장 안은 텅 비어 있다. 그 시간에는 일하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그녀는 다시 밖으로 나온다. 고풍스런 수도원 건물이 보인다. 멕시코에서 볼 수 있는 낡은 스페인 포교관 을 대하는 느낌이다. 하얀 벽, 높다란 종려나무, 빨간 기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굽어보는 성당 첨탑. 수도사들이 돌아 다니는 시간이 아니라서 그런지, 인기척이 없고 사위가 마냥 고 즈넉하다. 그녀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소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서른 명쯤 되는 수 도사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수도사들은 검은 가슴받이를 댄 하얀 수단 차림에 머리 꼭대기 를 동그랗게 삭발한 모습이다. 나이 지긋한 수도사가 난데없이 나타난 젊은 여자를 보고 기도를 중단한다. 그러자 모든 수도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린다. 마치 누가 텔레파시로 그들 모두에게 명령을 내리기라도 한 듯하다. 그들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 도와주세요. 저를 도와주세요. 가능한 한 빨리 칸 항구로 돌아가야 해요. " 아무 반응이 없다. " 제 말 못 들으셨어요? 여러분께 도움을 청하고 있어요. " 키가 작달만한 수도사 하나가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수도사 몇 명이 그녀를 에워싸더니,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양쪽팔꿈치를 잡고 소성당 박으 로 끌고 나간다. 작달막한 수도사가 필기용 석판과 분필을 잡더니 이렇게 쓴다. <우리는 침묵과 정결의 서원을 세운 수도사들이오. 따라서 여기에서는 소리를 내도 안 되 고 여자를 들여도 안 돼요. > 그는 단어 하나하나에 밑줄을 긋더니 다시 문장 전체에 밑줄을 죽 긋는다. 빌어먹을, 자기들의 종교적 원칙 때문에 날 내팽개칠 모양이군. " 이건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돕는 일이에요. 곤궁에 빠긴 사람을 구해주는 것은 모든 인간 의 의무인데, 여러분은 그것을 의무로 받아들이시지 않나 보죠? 곤궁에 빠진 사람이 여자나 고아일 때는 더 더욱 모른 체 하면 안 되지요. 저는 여자일 뿐만 아니라 사고무친의 고아란 말이에요! 여러분은 마땅히 저를 도와주셔야 해요. " 다섯 번째 동기가 통할까? 작달막한 수도사 는 석판을 지우고 커다란 글씨로 다시 이렇게 쓴다. " 우리는 주님이 명하신 평화를 깨뜨리지 않고 살 의무가 있소." 바위에 긁혀 상처를 입고 바닷물에 젖어 후줄근한 뤼크레스는 지친 기색으로 그들을 잠시 바라본다. 그러다가 마치 농아들을 상대로 이야기하듯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어 또렷하 게 말한다. " 보아하니 여러분은 세속의 보통사람들보다 못하군요. 저 때문에 평화가 깨질까 두려워서 저를 내치시겠다 이거죠? " 그녀는 숨을 한번 고르고 나서 다시 거칠게 내뱉는다. "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시나 보죠? 저는 사람들의 행동을 좌우하는 주된 동기가 무엇인가 에 관심이 많아서, 그 동기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있어요. 그런데, 종교가 이토록 중요한 동 기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네요. 아무래도 개인적인 열정이라는 아홉 번째 동기 다음에 열 번째로 종교를 추가해야겠어요." 수도사들은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이 서로 눈길을 주고받더니, 인자한 표정으 로 그녀를 바라본다. 석판을 들고 있는 작달막한 수도사가 그녀에게 앉으라고 권한다. 그러 고는 수건을 하나 가져와서 그녀에게 내민다. 그녀는 수건을 받아 들고 머리와 몸에 남아 있는 물기를 대충 닦아낸다. 그러더니 상처를 보여 줄 양으로 찢어진 드레스 자락을 천천히 걷어 올린다. 수도사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서로에게 멋쩍은 시선을 보낸다. 그녀의 허벅지에 상처가 있음을 알아챈 수도사 하나가 반창고를 가져와서 그녀에게 내민다. 그녀가 얼른 받지 않고 뜸을 들이고 있으니까,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반창고를 손수 상처에 붙여 준다. 또 다른 수 도사는 젖은 옷을 갈아입으라고 거친 모직으로 된 수도사 옷 한 벌을 가져다준다. 그녀는 옷을 순순히 받아 든다. 석판을 들고 있던 작달막한 수도사는 이 수도원에서 만든 레리나라는 리쾨르를 한 잔 가져 온다. 그녀는 다시 기운을 차릴 양으로 술잔을 단숨에 비운다. 무척 맛있다는 생각이 든다. 수도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지긋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다시 분필을 잡고 쓰 기 시작한다. <여기엔 무슨 일로 오셨죠?> " 저는 도망치는 중이에요. " 그가 석판의 글씨를 지우고 다시 쓴다. 그의 얼굴이 굳어지면 수도사가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데우스 이라이는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는 여기자에게 두 손 들었다는 듯 이 어깨를 한번 올렸다 내리더니, 망치 선심이라도 쓰듯이 말한다. " 누구에게 전할 게 있으면 글로 쓰세요. 이분들이 팩스로 보내주실 겁니다. " 그녀는 이지도르에게 그간의 사정을 간단히 설명하고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리는 메시 지를 작성한다. 그런 다음 종이에 수신자의 이름과 팩스 번호를 적어서 수도사에게 건넨다. " 이제 구내 식당에 가서 점심을 드시지요. " 데우스 이라이는 그렇게 권하고 그녀를 구내 식당으로 데려간다. " 그런데, 여기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 " " 피정하러 왔어요. 나는 달마다 사흘씩 피정 묵상을 합니다. 내 삶을 반성하고 마음의 평 정을 얻기 위해서죠. 이곳은 신성한 장소입니다. 여기에 있는 한 당신은 안전할 겁니다. 폭 력은 바깥 세상의 일입니다. 우리의 신념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나를 믿어도 됩니다. " 그들이 구내 식당에 다다랐다. 기도를 끝낸 수도사들이 기다란 식탁에 둘러앉아 있다. 젊은 여자가 들어서자 그들이 돌아본다. 아까 그 여자로군. 그들의 얼굴에 상냥한 미소가 번진다. 뤼크레스는 자기에게 쏠리는 시선에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나아간다. 데우스 이라이가 그녀에게 기다란 참나무 의자를 가리키며 앉을 것을 권한다. 그들 주위로 우유나 귀리나 꿀 이 들어 있는 단지들이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고 있다. 뤼크레스는 수도사들의 얼굴을 살펴 보면서 무엇이 이들을 이런 곳에 오게 했을까 하고 생각한다. " 이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속단은 하지 마세요. 이들은 선량한 사람들이에요.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 구태의연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무시하시 고 이들 안에 있는 참모습만 보세요. 이들 나름대로는 행복해요. 오늘날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 " 성서에 <마음이 소박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소박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살면 누구나 행복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 근ㄴ 가타부타 대꾸가 없다. 뤼크레스는 우유에 납작하게 빻은 귀리를 타서 게걸스럽게 먹는다. 누구보다 입맛이 까다 로운 그녀이지만, 두 섬 사이를 헤엄쳐 건너느라 너무나 허기가 져서 거친 음식을 대하고도 까탈을 부리지 않는다. " 그런데 병언에서 무슨 일을 꾸민 거예요? " 데우스 이라이가 묻는다. " 거기 사람들이 아주 중대한 것을 발견해 냈어요. 새로운 형태의 마약이 아닌가 싶어요. 그것을 이용해서 사람의 뇌를 조종하려는 자들이 있어요. " 데우스 이라이는 그런 이야기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듯 그녀의 말을 자르고 자기 이 야기에 열을 올린다. "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 중의 하나는 영혼을 평화롭게 하는 권능이 고해 신부가 아니라 정신과 의사나 정신분석가에게 맡겨져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정신과 의사나 정신분석가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겠습니까? 그저 환자들을 죄의식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뿐입니다. 그러 다 보니 언제나 옳은 쪽은 환자들입니다. 환자들에게 문제가 생기는 건 언제나 남의 탓입니 다. 모든 게 사회 탓, 부모 탓, 친구 탓이죠. 사람들은 즉각적인 쾌락을 좇습니다. 그것이 야 기하는 해악에는 아랑곳하지 않아요. 그러고 나서는 정신과 의사나 정신 분석가를 찾아갑니 다. 자기들이 올바르게 행동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러 가는 거죠. " 그러면서 데우스 이라이는 주먹을 꼭 쥔다. " 그래서 시엘을 공격한 건가요? " " 아뇨. 그건 다른 거예요. 그들은 방탕한 자들입니다. 만일 그자들의 운동이 슬금슬금 번 져 나간다면, 우리는 퇴폐적인 사회에 도달하고 말 겁니다. 전에 태국의 파타야에서 퇴폐 사 회의 표본을 본 적이 있습니다. 파타야 가보셨어요? 태국의 남부 해안에 있는 해수욕장입니 다. 젊을 때 관광객으로 거기에 갔다가 큰 충격을 받았어요. 칸만 한 도시 전체가 완전히 향 락에 바쳐져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디 가나 매춘부가 널려 있고, 도박판이며 킥복싱 경 기, 술, 마약 따위가 지천입니다. 열서너 살밖에 안 된 소녀들이 쇼 타임이나 하룻밤 정도가 아니라 1년이나 10년 계약으로 자기들 몸을 팔고, 음탕하고 추잡한 사내들이 그런 아이들을 희롱합니다. 회사 간부라는 작자들이 비행기를 전세 내서 거기에 떼거리로 몰려오는 것을 봤습니다. 열세 살밖에 안 된 소년들이 타격을 느끼지 않으려고 온몸에 진통제 연고를 바른 채 킥복싱을 하는 것도 봤어요.ㅣ 그런 소녀들은 맞아서 생긴 내출혈 때문에 한두 해를 못 버티고 죽기도 한답니다. 어디 그뿐인 줄 아십니까? 나는 어떤 스트리퍼들이 자기들 성기로 콜라 병 뚜껑을 따는 것도 봤습니다. 자기들 몸속에 살아 있는 뱀을 집어넣는 여자들도 있 었어요.ㅣ 인류에게 이런 미래가 와도 좋겠습니까? " 데우스 이라이는 그녀에게 귀리를 더 덜어 준다. 그녀는 자기가 먹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 하지 않고 부지런히 숟가락을 놀린다. "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건 아니에요. 우리는 누구나 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충동에 무조 건 굴복하지 않도록 교육을 받았어요. 그러지 않았다면 온 세상이 벌써 당신이 말한 파타야 처럼 되어 버렸을 거예요. " " 에피쿠로스주의자 클럽의 추종자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어요. 우리 사회에 전혀 도움이 될 게 없는 일입니다. 정작 에피쿠로스 자신은 작고 소박한 즐거움을 예찬하고 올바른 마음 으로 살아갈 것을 권장했는데, 그 가르침에 역행하는 자들이 그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있으 니 더욱 한심한 노릇이지요. " 뤼크레스는 빵은 귀리에 우유와 꿀을 섞은 죽을 입 안에 가득문 채 말한다. " 데카르트가 데카르트주의자가 아니었듯이, 에피쿠로스는 에피쿠로스주의자가 아니었던 셈이군요. " " 에피쿠로스의 제자 중에 루크레티우스라는 로마의 시인이 있습니다. 프랑스 어로 뤼크레 스라고 하니까 남자지만 당신과 이름이 같은 셈이군요. 이 시인은 자기 스승에 관한 전기를 쓰면서 <모든 걸 즐기라>를 에피쿠로스 사상의 중요한 측면으로 부각시켰습니다. 그 사람 자신의 쾌락주의자 였기 때문이지요. " " 당신들은 오리게네스의 후예임을 자처한다던데, 그 말이 맞나요? " " 오리게네스는 위대한 성서 주석가였고, 평생 자기 신념을 의연하게 견지한 사람이었습니 다. " " 그는 7대 종죄라는 개념을 만들었고, 스스로 거세를 했다지요? " 그녀는 마치 한기라도 느끼듯이 몸을 부르르 떤다. 그는 자기 잔에 물을 따르며 언성을 높 인다. " 거세를 했다고요? 그건 한낱 전설일 뿐 사실 여부가 입증된 적이 없어요. 그가 7대 종죄 라는 개념을 만들었다는 것도 확실치 않아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라는 건 그저 역사가들 이 들려주는 이야기일 뿐이에요. " " 그냥 참고삼아 물어보는 건데, 그 일곱 가지 큰 죄라는 게 뭐죠? " " 사치, 탐식...... 으음...... 이런, 갑자기 물어보니까 나도 생각이 안 나네요. 조금 있다가 생 각나면 말할게요. " 그는 과일 바구니를 그녀에게 내민다. " 아뇨. 고맙지만 그만 먹을래요. 커피나 좀 마셨으면 좋겠네요. 되도록 진한 커피로요. " 수도사들이 음성을 낮추라고 그들에게 신호를 보낸다. 데우스 이라이가 속삭인다. " 진정하세요. 여기엔 커피가 없어요. " 그녀는 참으려고 애를 쓰며 눈을 감는다. 우유에 젖은 귀리 냄새와 오래된 석벽 냄새가 느 껴진다. 어디에선가 미모사의 꽃향기도 실려 온다. " 무엇 하러 이렇게 늘 뛰어다니죠? 무엇 하러 이렇게 늘 힘들게 살죠? " 데우스 이라이가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그녀는 뜨거운 불판에 닿기라도 한 것처럼 얼른 손을 빼낸다. " 모르겠어요. 세상이 그런 식이고 나는 그 세상 속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 " 힌두교와 불교에서는 <욕망이 없으면 고통도 없다>라고 가르칩니다. 그건 모든 신비주 의 신학의 라이트모티브이기도 하지요. 그 가르침에 관해서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먼저 당 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차례차례 알아내십시오. 그 다음에 그것들의 실체를 분명하게 보시고 하나씩 포기해 나가세요. 그러면 당신 자신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을 느끼게 될 겁니다. " 그녀는 현재 자기가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그건 성 마르그리트 병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그녀는 잠시 그 욕망을 포기한다. 두 번째 욕망은 무엇인가? 이 모든 일을 잊고 침대에 누워 쉬는 것이다. 그녀는 그것도 접어 둔다. 그밖에 어떤 욕망이 있을까? 이지도르를 다시 만나는 것(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 안해지기 때문이다). 기사를 잘 써서 테나르디에 부장의 인정을 받는 것 (그저 그 비열한 여 자에게 본때를 보여 주기 위해서다). 그것 말고도 이러저러한 욕망이 뒤죽박죽 떠오른다. 이상형의 남자와 결혼하는 것 (하지만 조건이 있다. 그가 나를 자유롭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 귀여운 아이들을 낳아서 키우는 것 (여기에도 조건이 있다. 아이들이 나에게서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지 말아야 한다). 모든 남 자들의 사랑을 받는 것(하지만 어떤 남자도 나를 독차지할 권리가 있다고 느껴서는 안 된 다). 다른 여자들의 부러움을 사는 것(그러나 이건 시샘이 아니라 경탄이 되어야 한다). 명 성을 얻는 것(사생활이 침해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사람들의 이해를 받는 것(단, 오로지 똑똑한 사람들로부터). 늙지 않는 것(그러면서도 경험은 점점 많아져야 한다). 담배, 발톱 다 듬기....... 그렇게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된다. 자기가 늘 스무 가지쯤 되 는 큰 욕망과 아울러 백여 가지쯤 되는 자잘한 즐거움을 추구하며 산다는 사실이다. 그 큰 욕망과 자잘한 즐거움들이 끊임없이 그녀의 대뇌 피질을 콕콕 쑤셔 대고 있는 것이다. 데우스 이라이가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조언한다. " 모든 것 놓아 버리세요. 우리의 묵상회에 참석해 보세요. 아마 여기에 더 오랫동안 머무 는 게 좋을 겁니다. 영혼의 평정을 찾는 데에는 여기가 십상 좋지요. " 그가 다시 그녀의 손을 잡는다. 이번에는 그녀가 손을 뿌리치지 않는다. 그러자 그는 그녀 의 두 손을 감싸 쥔다. 그녀는 눈을 계속 감은 채 마음속으로 <평정>이라는 말을 되뇐다. 다시 눈을 떠 보니, 그녀의 시야에 세 인물이 더 들어와 있다. 그들을 알아보는 데에 시간일 걸릴 리 없다. 정신 병원애서 만난 세 환자 로베르, 피에로, 뤼시앵이 바로 그들이니 말이다. 수도사 하나가 그녀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가 들고 있 는 석판에는 <나를 따라오세요. 그 여자가 어디에 있는지 압니다> 라는 말이 쓰여 있다. 그 녀의 뇌로부터 아드래날린이 한소끔 분출되면서, 졸기 시작하던 세포들이 모두 깨어난다. 데우스 이라이는 그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고 손목을 꼭 쥔다. 하지만 그녀는 식탁 밑 으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서 손아귀를 벗어난다. 그러고는 기다란 참나무 위자를 쓰러뜨리 고 문 쪽으로 잽싸게 내닫는다. 몇 초 동안이나마 자기의 욕망을 잊고 있었던 그녀에게 갑 자기 아주 강렬하고 단순한 욕구가 솟구친다. 도망치려는 욕구가 바로 그것이다. 순식간에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한 데우스 이라이가 소리친다. " 하느님의 분노를 두려워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분노를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해요. 그분이 저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 수도사들은 복수심에 불타는 그 세 기사의 출현이 마치 천벌의 징표라도 되는 양 성호를 긋는다. 여자 하나가 느닷없이 나타나서 자기들을 방해했으니 벌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 각하는 모양이다. 뤼크레스는 사내들이 잡으러 오기 전에 옆문을 빠져나가 돌계단으로 진둥한둥 내리닫는다. 뒤를 돌아다보지는 않았지만 급한 발걸음 소리가 계속 들리는 것으로 보아 사내들이 계속 뒤쫓아오고 있음이 분명하다. 반대쪽에서 계단을 올라오던 수도사들이 그녀를 잡으려고 한다. 그녀는 그들 사이로 나는 듯이 빠져나간다. 그들은 팩스를 보내기는커녕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병원에 알렸을 것이다. 하마터면 꼼짝없이 당할 뻔했다. 쉬고 싶은 욕구가 강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짐짓 상냥하게 구는 데우 스 이라이의 달콤한 말에 잠시 현실을 망각한 탓이기도 하다. 언뜻 듣기엔 그럴듯하지만, 그 의 생각은 옳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속도를 늦추는 것은 곧 후퇴하는 것이다. 그녀는 숨을 곳을 찾아서 멀리 보이는 요새 같은 건물을 행해 질주한다. 하지만 건물 안에 는 이미 수도사들이 모여 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녀는 수도복으로 팔을 감싼 채 오노라 성인의 모습을 담은 스테인드글라스 하나를 깨뜨리고 건물 밖으로 나간다. 이제 그 녀가 도망칠 곳은 바다밖에 없다. 바다가 또다시 나를 구해 줄 것이다. 아직 걷히지 않은 해미가 그녀를 감싸준다. 추적자들로부터 그녀를 숨겨주기라도 하는 듯 하다. 그녀는 헤엄치는 데에 방해가 되는 수도복을 벗어 버리고 바다로 뛰어든다. 방향을 가 늠하기가 쉽지 않다. 그녀는 칸 항구가 나오리라 짐작되는 쪽으로 힘껏 팔을 저어 나아간다. 이젠 위험을 피해 헤엄쳐 갈 만한 섬이 없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당장의 위험은 피하 고 봐야 한다. 그러나 당장의 위험을 피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세 환자를 태우고 왔던 움베르토가 자기 배에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를 알아보고는 이내 배에 시동을 건 다. 그녀는 파도와 안개를 헤치며 더 빨리 나아간다, 모터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린다. 젠장. 산 너머 산이로군. 움베르토의 배 <카론>은 금세 그녀를 따라잡는다. 그녀는 사력을 다해 팔다리를 놀린다. 움베르토는 키를 고정시키고 뱃전으로 나와 갈고리 장대로 그녀를 잡으려고 한다. 계속 헤엄쳐 나아가는 그녀를 겨냥하여 그가 갈고리 장대를 들어올린다. 그녀는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올라온다. 그는 다시 그녀를 겨냥하여 동작을 수정한 다....... 그러더니 갑자기 누군가에게 일격을 당하고 쓰러진다. 뤼크레스는 어안이 벙벙하여 나아가기를 멈추고 고개를 든다. 101 생쥐 프로이트는 마침내 제가 그토록 바라던 것 앞에 다다랐다. 뇌에 전기 자극을 보내 줄 지렛대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생쥐는 작은 다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고는....... 102 " ...... 닻을 잡아요! " 하늘에 무슨 닻이 있다고 잡으라는 거지? 위쪽에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온다. " 뤼크레스, 어서 올라와요! " 이지도르다! 그녀는 그가 닻이라고 부른 물건에 연결된 밧줄을 타고 되도록 빠르게 올라간다. 올라가 보니 그녀와 조사 활동을 함께 벌이고 있는 동료 말고 또 한 사람이 있다. 억만장자 제롬 베르주락이다. 그들은 뜻밖에도 열기구를 타고 그녀를 도우러 왔다. 엔벨로프에 사뮈엘 핀처 의 초상이 찍혀 있는 예의 <미미>라는 열기구다. 억만장자가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춘다. 그녀의 뚱뚱한 동료는 자기에게 바싹 기대 오는 그녀를 덥썩 껴안는다. " 이지도르. " 그는 <뤼크레스> 하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다. " 이렇게 와주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마음이 놓이는지 몰라요. " "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했는지) 걱정했는지 몰라요. " 두 사람은 서로 껴안고 있는 팔에 힘을 준다. 우리가 보통 인연으로 만난 사이는 아닌가 봐. 이 남자 옆에 있으면 기분이 한결 좋아져. 이 남자는 전생에 내 아버지나 남편이 아니었을까? 또는 내 남자 형제나 아들이 아니었을 까? 그는 팔에 다시 한번 힘을 주며 생각한다. 사고만 치고 다니는 골치 아픈 여자 같으니. 103 생쥐가 지렛대를 세게 눌렀다. 그렇게 해서 뇌에 전기 자극을 한 번 얻고는, 몇 번 잇달아 더 눌렀다. 자극이 너무나 좋은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 프로이트는 이럴 만한 자격이 있어. " 사뮈엘 핀처의 말에 장 루이 마르탱도 경탄으로 응답한다. <굉장해! 아주 잘되어 가고 있어.> 그들은 생쥐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진짜 눈으로, 다른 사람은 비디오 카메라의 렌 즈를 통해서. 지렛대가 계속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마치 생쥐가 제 몸 크기에 맞춘 트레이닝 기계 로 근육 단련이라도 하고 있는 듯했다. 아닌 게 아니라 생쥐가 어찌나 열심히 지렛대를 눌 러 댔는지 녀석의 다리 근욱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계속 저러면 안 되는 것 아냐?> 생쥐의 눈은 흥분 때문에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입아귀에서 흘러내린 침이 작은 방울을 지어 실낱 같은 수염에 매달려 있었다. 생쥐는 지렛대를 누를 때마다 전기 자극을 한 번밖 에 얻을 수 없는 것이 아쉽다는 듯 미친 듯이 다리를 놀려 대면서 행복감으로 숨을 헐떡거 렸다. 지렛대도 처음엔 별로 소리를 내지 않았는데, 생쥐가 어찌나 빠르게 격력하게 흔들어 대었는지 숫제 딸가닥거리는 장난감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 전기를 차단해야겠어. " 그러면서 핀처가 스위치를 눌렀다. 생쥐는 심한 충격을 받은 것 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머리에 이상이 생긴 것 같은데. > 마르탱의 말에 핀처는 생쥐를 달래 보려고 치즈를 넣어 주었다. 생쥐는 더 이상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핀처는 불안한 생각이 들어 생쥐 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러자 생쥐는 지렛대를 잡고 계속 눌로 댔다. 제가 원하는 건 오로지 그것뿐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핀처는 생쥐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는 것을 사과하는 뜻으로 녀석을 쓰다듬었다. " 자아, 프로이트, 이제 그만 하자. 무리하면 안 돼. 쾌감도 양이 적당해야 하는 거야. 오늘 은 이 정도로 충분해. " 그러자 욕구 불만에 사로잡힌 생쥐는 뒷다리로 버티고 일어서는가 싶더니 펄쩍 뛰어올라 핀처의 살에 제 앞니 두 개를 박아 버렸다. " 아야, 이 녀석이 날 물었어! " 생쥐는 제 몫을 받기 위해 싸울 준비를 하면서 전투 자세를 취했다. 털을 곤두세우고 귀를 쫑긋거리며 독 오른 빨간 눈으로 사람을 노려보는 모습이 여간 표독해 보이지 않았다. 핀처는 생쥐를 다스리기 위해 특별한 집게를 가지러 가야만 했다. 생쥐는 분을 이기지 못 하고 위협적으로 드러낸 앞니 사이로 찍찍 소리를 내면서 발톱으로 허공을 긁어 대고 있었 다. 104 제롬 베르주락은 불꽃을 초해 내는 버너들을 조절하고 있다. 트위드 천 정장을 입고 골프 화를 신은 차림에 페커리 가죽 장갑을 낀 모습이다. 그들은 기구의 양력이 허용하는 높이까 지 올라간다. " 나 추워요. " 뤼크레스의 말에 베르주락은 그녀가 몸을 말릴 수 있도록 이불 하나를 내민다. 뿌연 안개가 흩어지면서 하늘이 개기 시작한다. 저 아래로 레랭스의 두 섬, 성 마르그리트 성 오노라가 내려다보인다. 두 땅덩이가 껍질을 벗긴 호두를 길게 늘여 놓은 것처럼 동그마 니 놓여있다. 어찌 보면 뇌의 두 반구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쪽에는 광기가 있고 다른 쪽에는 종교가 있다. 고통 받는 영혼들을 위한 두 개의 도피처 인 셈이다 하고 뤼크레스는 생각한다. 짙푸른 바다에 하얀 삼각형처럼 떠 있던 작은 돛배들이 파도를 가르기 시작하고, 백사장에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이 연분홍색 점처럼 모여든다. " 이제 아무도 우릴 따라오지 못하겠군요. " 그들은 신속하게 닻을 끌어올린다. 뤼크레스는 이불로 몸을 휘감고 버들가지로 엮은 바스 켓의 한구석에 편안하게 자리를 잡는다. 열기구는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다. 버너가 뿜 어 대는 열기 때문에 머리 쪽은 훈훈한데 고도가 높아지면 발이 시리다는 것도 그 중의 하 나다. 뤼크레스가 발가락을 문지르고 있는 것을 보자, 제롬 베르주락은 두꺼운 양말과 벙어 리 장갑을 내민다. " 그런데, 이지도르, 내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아냈어요? " 이지도르는 양말을 신은 자기 발을 주무르고 있다. 이 사람이 내 발도 주물러 주면 좋겠다. " 휴대폰 덕분이지요. 당신이 휴대폰을 늘 진동으로 해놓기 때문에, 내가 전화를 걸어도 벨 소리가 나지 않아서 납치자들이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당신에게 전화를 건 다음 이동 통신 회사에 부탁해서 당신의 휴대폰에 반응을 보인 기지국이 세군데 있음을 알아냈지 요. 그 세 곳을 연결해서 삼각형을 그려 보니까, 당신의 휴대폰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구 역의 반경이 나오더라고요. 그 반경 안에서 성 마르그리트 병원을 찾아내는 건 쉬운 일이었 지요. 경찰에 있는 친구들에게 출동을 부탁했더니. 법적인 문제 때문에 난처해 하더군요. 그 래서 여기 있는 우리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지요. 이 공중에 뜨는 운송 수단을 빌려 달라고 말이에요. " 억만장자는 자랑스럽게 열기구의 엔밸로프를 가리키며 소리 친다. " 운송 수단이라 하지 말고 미미라고 불러 주세요! " 뤼크레스는 눈을 들어 이마에 손 차양을 대고 엔벨로프를 올려다본다. 표면에 찍힌 사뮈엘 핀처의 얼굴 아랫부분이 보인다. 그 거대한 얼굴이 그녀가 잠시 잊고 싶어했던 조사 활동을 상기시키는 듯 하다. " 고맙습니다. <놀고 먹는 억만장자> 아저씨! " 그 말에 제롬 베르주락이 콧수염을 쓸며 대답한다. " 친애하는 뤼크레스 넴로드 양 덕분에 놀고 먹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지요....... 모험 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신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모험이란 그 어느 것보다 강한 동기죠. 위험을 무릅쓰고 갖가지 시련을 이겨 내면서 정의를 실현한다는 건 멋진 일입니다. 당신은 정말 운이 좋은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 " 때로는 약간의 불쾌한 일들이 따르기도 하지요. " 그녀는 바위에 긁혀 생긴 팔뚝의 상처를 햝으면서 한숨을 내쉰다. 그는 샌드위치 하나를 그녀에게 내민다. 두 쪽의 토스트 빵 사이에 얇게 저민 닭고기와 마 요네즈, 토마토, 오이, 상추, 체더 치즈, 오이 절임 따위가 들어 있는 샌드위치다. 그녀는 문 득 이 조사가 시작된 뒤로 끼니를 제때에 챙기지 못하고 거의 아무렇게나 때워 왔음을 깨닫 는다. " 혹시 담배 가진 것 있어요? " " 열기구 안에서는 금연입니다. 인화 물질이 너무 많거든요. " 이지도르는 쌍안경으로 수면을 내려다본다. 움베르트가 머리를 감싸쥔 채 다시 일어서서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다. 뤼크레스는 처음 타보는 열기구가 신기해서 이리저리 살펴본다. 바스켓에는 버들가지 위에 <미미>라는 이름이 쓰여져 있고 계수나무 잎으로 엮은 둥근 고리가 이 이름을 둘러싸고 있 다. " 방향을 조정하는 키는 없나요? " " 이건 비행선이 아닙니다. 이런 열기구를 타고 공중에 올라가면, 어디에 착륙하게 될지 정 확히 알 수 없습니다. 바람이 부는 대로 밀려가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임무를 위해서 특별 히 작은 제트 스키 엔진을 달았습니다. 이걸 이용해서 우리가 아까 당신 바로 위로 내려갔 던 것이고, 마찬가지 방식으로 다시 해안으로 돌아갈 거예요. " 그는 제트 스키 엔진에 시동을 건다. 하지만 엔진은 세 차례쯤 쿨룩거린 뒤에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 아니, 이게 왜 이러지? 지금 우리를 저버리면 안 되는데. " 제롬은 모터가 다시 돌아가게 해보려고 헛되이 애를 쓰더니, 체념 어린 몸짓을 하며 상황 을 설명한다. " 우리는 다시 평범한 열기구의 탑승자가 되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올라가거나 내려가면서 기류를 타는 것뿐이에요. 어쨋거나 그건 우리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고 운이 따라 주어야 되는 일이죠. 우리를 땅으로 데려다 줄 바람이 불 때까지, 술이나 한잔하면서 기다립시다. 그러다 보면 최후의 순간을 맞기 전에 한번쯤은 구원의 바람이 불어 줄 것이고, 우리는 그 구원에 건배를 할 수 있을 겁니다. 고생은 좀 따르겠지만, 끝이 좋으면 모든 게 다 좋은 거죠. 안 그렇습니까? " 그는 뱃사람들의 칼로 샴페인 병 하나를 따고 그들에게 유리잔을 내민다. " 모험을 또 하나의 동기로 우리 목록에 넣는 게 어떨까요? " 이지도르의 제안에 뤼크레스가 대답한다. " 안 돼요. 그걸 독립된 하나의 동기로 분류할 수는 없어요, 모험이란 삶을 권태롭게 만들 지 않으려는 행동이라는 접에서 네 번째 동기와 연결되어 있어요. 게다가 내 쪽에서는 이미 종교를 열 번째 동기로 추가했어요. 종교는 떄로 마약이나 성애보다 한결 강력한 동기가 될 수 있거든요. " 그러자 제롬이 반박한다. " 모험이 지닌 매력은 종교보다 강할 수 있습니다. 성직을 버리고 세계 일주에 나선 수도 사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안 그렇습니까? " 이지도르는 그녀에게 새 수첩을 건네주고 자신의 포켓용 컴퓨터를 꺼낸다. 그러고는 두 손 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려 자기의 개인적인 동기 목록에 <10. 종교>와 <11. 모험>을 추가한 다. 그녀는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지도르의 설명이 이어진다. " 우리가 모든 동기를 망라한 완벽한 목록을 만들자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목록을 통해서 한 인간의 행동이 변화해 가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요. 우리가 지금 까지 작성한 목록의 순서는 어느 정도 인간의 성장 단계와 맞아떨어지는 측면이 있어요. 처 음에 인간은 고통을 멎게 하는 일에 대해서 주로 생각합니다. 아기가 기저귀에 오줌을 싸고 우는 건 오줌 때문에 살갗이 따끔거리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생각 을 하지요. 아이가 어둠이 두려워서 우는 게 바로 그런 겁니다. 그러다가 조금 컸다 싶으면 아이는 배고프다고 어른을 부르고 놀고 싶다고 사람을 찾습니다. 더 자라서 학교에 들어가 면 좋은 성적을 받고 싶어하고, 운동장에서 제 공을 빼앗아 간 녀석의 얼굴을 때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가 청소년이 되면 여자 친구랑 키스도 하고 싶어하고 담배도 피우고 싶어하 지요. 성인이 된다고 해서 이상의 동기들과 유사해지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성인의 행동에 는 새로운 동기들이 추가됩니다. 종교나 모험도 그런 동기가 될 수 있겠지요. 이렇게 동기들 의 목록을 차례차례 되짚어 보면, 이 서열이 인류의 역사나 한 개인의 인생 역정과 무관하 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보기에는, 인간이 종교에 이끌릴 수 있다는 당신 생각도 옳 지만 제롬의 생각도 틀린 건 아니에요. 인간은 얼마든지 모험심에 이끌려 행동할 수 있어요. 그러니 두 가지 다 넣기로 합시다. " 그러자 억만장자가 동을 단다. " ㅁ모험은 절대적인 동기죠. 조금 전에 우리가 닻을 내려 주었을 때, 당신은 그것을 보고 틀림없이 짜릿한 기분을 느꼈을 겁니다. 그 기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건 정말 굉장했을 겁 니다. 안 그렇습니까? " " 모르겠어요. 그런 순간에 한가롭게 자기 기분을 따지고 있을 사람이 있을까요? 그저 자 기 목숨을 구하겠다는 일념뿐이지요. " 억만장자는 콧수염의 양쪽 끝을 동시에 문지르면서 다정한 눈길로 그녀를 빤히 바라본다. " 당신이 참 부러워요! 모험을 얼마나 많이 즐겼으면 벌써 이렇게 싫증을 내겠어요....... 당 신이 얼마나 복이 많은 사람인지 알기냐 해요? 어떤 사람들은 거금을 들여가며 야외 생존 연습이라는 게임을 해요. 그들은 당신이 겪은 일에 비하면 아이들 장난 정도밖에 안 된느 짓을 하면서도 짜릿짜릿하다고 난리를 치죠. 자기들은 그저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고 자기 들의 시련이 곧 끝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가슴 떨리는 감동을 느끼는 겁니 다. 그런데 당신은 어떤가요? 진짜 위험 속에서 뛰놀고 있잖아요? 당신의 삶, 핀처의 죽음에 ㅗ간한 당신의 조사 활동은 한 편의 굉장한 와이드 스크린 영화예요. " " 듣고 보니 일리가 있군요. 좋아요, 10번에 종교, 11번에 모험을 넣겠어요. " 제롬은 그녀의 손을 다시 잡고 한결 더 열렬하게 입을 맞춘다. " 그저 고맙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 그의 말에 대답하기라도 하듯, 내륙에서 지중해 쪽으로 부는 북풍이 드세어지고 갈매기들 이 날카롭게 끼룩거리기 시작한다. 이지도르는 밧줄에 매달린 작은 리본들을 주의 깊게 살 펴보고 있다. " 무슨 일이죠? " " 바람이 반대쪽으로 불고 있어요. " 아닌 게 아니라 열기구가 병원 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병원 지붕을 덮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 정말 이 열기구의 방향을 조종할 수 없어요? " 억만장자는 밧줄 여러 개를 이리저리 조절해 본다. " 기류에 시려 가야 해요. 새들의 비행과 구름의 움직임을 관찰해서 기류들의 방향을 알아 낸 다음, 상승과 하강을 통해서 열기구가 적당한 방향의 기류를 타게 해야 합니다. " " 내가 보기에는 우리 조금 위쪽에 물 쪽으로 흐르는 기류가 있는 것 같은데요. " " 맞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당신을 찾아내느라고 시간을 너무 많이 썼다는 것입니 다. 가스가 별로 많이 남아 있지 않아요. 게다가 한 사람을 더 태우고 나니까 열기구가 잘 올라가지 않고요. 당신의 몸무게를 탓하자는 얘기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열기구를 올라가게 하자면 무게 조절용으로 심은 짐들을 버려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안 그렇습니까? " 성 마르그리트 요새의 가장 높은 망루에 모인 병원 사람들은 벌써부터 열기구 쪽으로 깨진 기왓장을 던지고 있다, 뤼크레스는 격앙되어 있는 그들 속에서 피에로를 알아본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마구 잡이로 돌팔매질을 하지 않고, 제대로 겨냥을 해서 핀처의 얼굴을 맞추고 엔벨로프에 구멍 을 낸다. 그러자 환자들이 일제히 승리의 환호성을 지른다. 열기구가 조금 더 내려가더니 병원 쪽으 로 흐르는 기류를 탄다. 뤼크레스 일행은 더욱 빠르게 병원 쪽으로 실려 간다. 환자들의 흥분은 점점 더 고조된다. " 자꾸 내려가고 있어요. 짐들을 버려야겠어요. 버너의 화력을 최대로 높여 놓았는데도 열 기구가 상승하지 않아요. " 그들은 바스켓 너머로 작은 냉장고와 닻을 던져 버린다. 빈 샴페인 병에 이어 따지 않은 샴페인 병들도 버려지는 신세가 된다. 열기구가 조금 올라간다. 하지만 성 마르그리트 병원 쪽으로 점점 다가가는 것을 피할 수 었다. 환자들은 기왓장을 탄약처럼 죽 늘어놓고 있다가 일제히 팔매질을 다시 시작한다. 기와 조각들이 빗발처럼 날아든다. 이지도르와 뤼크레스는 그것들을 다시 주워 바스켓 너머로 던져 버린다. 제롬 베르주락은 영웅적인 모험의 충동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사람처럼 갑자기 밧줄에 매달 리더니 열기구의 엔벨로프를 감싸고 있는 그물로 올라간다. 그러고는 자기 주위로 기왓장들 이 빗발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찢어진 사뮈엘 핀처의 얼굴을 꿰맨다. " 용기가 대단하군요! " 뤼트레스가 놀란다. " 당신을 감동시키려고 저러는 겁니다. 저런 게 바로 낭만주의죠. 어떤 사람에게는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자체가 하나의 강력한 동기가 되기도 하는 겁니다, 뤼트레스. " 사뮈엘 핀처의 얼굴이 다 꿰매어지자, <미미>가 다시 올라가기 시작한다. 기왓장들이 더 이상 그들에게 미치지 않는다. 제롬 베르주락은 두 사람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다시 내려오 더니 허리를 굽실하여 답례를 보낸다. 밧줄에 걸린 천들이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음을 알리 고 있다. " 고맙습니다! 확실히 모험의 짜릿함보다 더 좋은 건 없군요. " 뤼트레스가 새 수첩을 집어 들면서 대꾸한다. " 아니에요, 그보다 더 강력한 게 있어요. 환자들과 간호사들이 일치단결해서 우리를 공격 하는거 보셨지요? 그들은 우리가 육지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지붕에서 떨어질 위험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나는 병원 안에 들어가서 그들을 만나 보았어요. 이 병원은 하나의 독립 공화국처럼 운영되고 있어요. 광인들의 공화국이죠.......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들 모두를 하나 로 묶어 주는 동기가 있어요. 이 공화국에서는 그 동기가 국기이자 국가이자 경찰이자 정치 적 이상인 셈이에요. " 이지도르는 그녀의 말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포켓용 컴퓨터를 꺼내 그 정보를 기록한다. 뤼크레스의 말이 이어진다. " 모험보다 더 강력한 동기 가운데 하나는 최후 비밀에 접근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이에요. " " 최후 비밀이라는게 뭐예요? " 제롬이 묻는다. " 내가 아는 건, 그들이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예요. 아직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한 모든 동기보다 그것을 우위에 놓아야 할 거예요. 열두 번째 동기는 최후 비밀에 대한 약속이에요. " 105 프로이트를 대신하여 다른 생쥐들이 선발되었다. 뇌라는 미답의 동굴을 탐사하러 나선 이 생쥐들은 정신 의학 분야의 위대한 개척자들의 이름을 따서 각각 융, 파블로프, 아들러, 베 르넴, 샤르코, 쿠에, 바빈스키라는 이름을 얻었다, 사뮈엘 핀처와 장 루이 마르탱은 이 생쥐 들이 최후 비밀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구가 너무나 강한 나머지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금방 금방 깨닫는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생쥐들은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까지 보여 주었다. 그 능력은 인간의 지능에 가장 근접해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침팬지나 돼지나 돌고 래 같은 동물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 사람과 동물을 길들일 때 사용하는 두 가지 수단을 보통 당근과 채찍이라고 부르는데ㅡ 우리가 찾아낸 이 당근은 그야말로 초강력 당근일세. 이건 최후의 순간에 주어지는 보상이 기 때문에, 이걸 얻지 못하는 것 자체가 최후의 벌이 되는 셈이지. " 핀처의 말대로 지렛대를 눌러서 얻는 전기 자극은 초강력 당근이었다. 생쥐들은 미로에 들 어가 학습할 때가 아니면, 온갖 종류의 금단 증상을 보여 주었다. 생쥐들은 오로지 지렛대만 생각하는 듯했고, 매우 공격적인 태도로 우리의 쇠막대를 물어뜯곤 했다. " 문제는 간단해. 한번에 경험하는 쾌감의 양을 적절하게 조절하도록 훈련을 시키면 돼. 이 녀석들은 결국 스스로 양을 조절할 수 있게 될 거야. 쾌락의 지연이라는 개념을 터득해 가 고 있거든. 당장에 모든 걸 얻으면 자기가 얻은 것의 참된 가치를 모르는 법이야. 보상과 보 상 사이에 기다림의 시간을 두면, 보상을 얻을 때의 만족감이 더욱 터지게 되지. " 핀처는 융이라고 이름을 붙인 작은 생쥐의 꼬리를 잡고 우리에서 꺼내어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다. 생쥐는 지렛대에 다가갈 수 있도록 지능 검사 장치 안에 다시 넣어 달라고 애 원을 하는 듯했다. " 생쥐가 아니라 인간을 상대로 이 실험을 해보고 싶어. " 잠시 침묵이 흘렀다. " 장 루이, 한번 상상해 보게. 인간이 이 생쥐들처럼 강한 의욕을 갖고 행동한다면 어떻게 될까> 어떤 장애든 뛰어넘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 " 하지만 두 개골에 구멍을 내서 뇌의 알려지지 않은 어떤 영역을 찾아내야 하는데, 그 실 험을 누가 받아들이겠나? " " 내가 있잖아. " 핀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프로이트였다. 그들이 5분 가량 감시 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더니, 생쥐가 그 자유를 틈타서 제 뇌에 너무 많은 자극을 준 모양이 었다. 생쥐는 결국 그 자극 때문에 죽고 말았다. 106 " 긴장을 푸십시오. " 최면술사 파스칼 핀처가 <즐거운 부엉이>의 객석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향해 최면을 걸기 시작한다. 금요일 저녁마다 열리는 집단적인 릴랙스 요법 시간이다. " 허리띠를 푸시고 구두를 벗으세요. 자아, 다같이 눈을 감고 완전히 긴장을 푸세요. " 관객들은 그가 시키는 대로 자기들의 몸을 가볍게 만든다. " 편안한 자새로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여러분의 숨이 들어오고 나가 는 것을 느끼면서 호흡을 부드럽게 가라앉히세요. 다음에는 여러분의 심장 박동에 생각을 모으고 박동을 천천히 늦추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배로 숨을 쉬세요. 오늘의 모든 근심 걱정을 잊으세요. 여러분이 누구인지도 더 이상 생각하지 마세요. 자아 이제 여러분의 발에 생각을 모으시고 빨간 색을 상상하세요. 발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번엔 여러분의 무릎에 생각을 모으시고 오렌지빛을 상상하세요. 무릎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습니다. 다음엔 여러분의 엉덩이에 생각을 모으시고 노란색을 상상하세요. 엉덩이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습 니다. 자아 이제 여러분의 머리에 대해 생각하시고 연보랏빛을 상상하세요. 여러분의 머리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습니다. " 관객들은 마치 잠을 자듯이 눈을 감고 있다. 그들의 관자놀이가 아까보다 한결 느리게 뛰 는 듯하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최면 술사의 유도가 잘 통하지 않는지, 옆 사람들을 쳐다보며 냉소를 흘리고 있는 손님들이 더러 눈에 띈다. 최면술사가 그들에게 신호를 보낸다. 다른 손 님들을 방해할 거면 객석을 떠나라는 뜻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깨우지 않고 그 신호에 순순히 따른다. " 여러분은 스스로를 가볍다고 느낍니다. 아주 가볍습니다. 숨을 한번 쉴 때마다 긴장이 좀 더 풀어지고, 긴장이 풀어지면 풀어질수록 점점 가벼워집니다. 이제 하나의 계단을 머릿속에 그려 보십시오, 여러분을 여러분 자신의 깊은 곳으로 이끌어 갈 계단입니다. 그것의 난간과 단들을 상상하세요, 자아 이제 한 단 아래로 내려서서 긴장이 더 많이 풀리는 것을 느껴 보 세요. 다시 두 번째 단으로 내려가서 긴자의 이완을 느껴보세요. 다시 두 번째 단으로 내려 가서 긴장의 이완을 느껴 보세요. 한 단 한 단 내려갈수록 여러분은 점점 더 기분좋은 휴식 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아까 여러분은 계단 꼭대기에 있었는데, 이제 셋째 단을지나 넷째, 다섯째, 여섯째 단에 내려와 있습니다. 아주 고요하게 쉬고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곧 여 러분의 마음과 여러분의 뇌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갈 겁니다. 스무째 단에 내려서면 여러분 은 실제적인 최면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 최면술사는 천천히 수를 센다. " 자아 이제 여러분은 최면 상태에 있습니다......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 그때 객실의 안쪽 문이 슬그머니 열린다. 최면술사는 언짢은 기색을 보이며 도로 나가라고 손짓을 한다. 일단 최면이 시작되면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분명히 일렀음에도 뒤늦게 손님이 들어온 것이다. 새로 들어온 사람은 그에게 은근한 손짓으로 아는 체하며 방해할 생 각이 전혀 없다는 뜻을 알린다. 파스탈 핀처는 그를 알아보고 그냥 들어오게 내버려 둔다. 형의 죽음에 관해 조사하고 있 는 기자 이지도르 카첸버그가 찾아온 것이다. 이지도르는 어떤 손님 옆에 가서 앉는다. 그 손님은 여느 손님이 아니라 바로 움베르토 로 시다. 파스칼 핀처는 이 뱃사람이 금요일 마다 꼬박꼬박 최면 공연에 참석한다고 말한 바 있었다.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움베르토는 눈을 감은 채 미소를 짓고 있다. 최면이 계속된다. " 이젠 계단을 다 내려가서 걷고 있다고 상상하십시오,. 여러분은 어떤 대로에 나와 있고 대로변에 영화관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영화를 보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군요, 포스터를 보니, 여러분이 오래전부터 보고 싶어하던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여러분은 표를 사 서 영화관 안으로 들어갑니다. 여러분은 각자 다른 영화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영화나 배꼽이 빠지도록 웃길 겁니다, 자아 이제 타이틀이 올라갑니다. 영화를 보십시오, 여 러분이 이제껏 본 영화 가운데 가장 포복절도할 만한 영화입니다. " 관객들은 한동안 꼼짝 않고 있다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하나 둘씩 미소를 짓기 시작하더 니 이내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린다. 처음엔 웃음소리가 무질서하게 터져 나왔지만, 차츰차 츰 웃음의 리듬이 비슷해진다. 마치 그들 모두가 똑같은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똑같은 영화 를 보고 있기라도 한 듯하다. 이지도르는 움베르토 로시가 최면 상태에 빠져 있는 틈을 타서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 이제 최후 비밀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세요. " 움베르토는 웃음을 멈추고 눈을 번쩍 뜬다. 그는 목덜미가 뻐근해지는 것을 느낀다. 최면의 <하강 초기 단계>에서 갑작스럽게 <냉혹한 현실 세계> 로 다시 올라온 탓이다. 스쿠버 다 이버가 물속에 깊이 들어갔다가 올라올 때와 마찬가지로 최면에 빠졌던 사람이 다시 현실 세계로 올라올 떄도 단계적인 감압이 요구된다. 움베르토는 이지도르를 알아보자마자 신발 을 챙겨 신고 다른 사람들을 떼밀며 황급하게 달아난다. 그 서슬에 몇몇 사람이 최면에서 깨어난다. 그들 역시 그 갑작스러운 상승에 불쾌감을 느낀다. 파스칼 핀처는 그 소동을 무마하기 위해서 목청을 높인다. " 여러분은 계속 영화를 보고 있습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도 그것에는 아랑곳하지 않습 니다. " 움베르토가 출구 하나를 찾아 막 짜져나가려는 찰나에 제롬 베르주락이 갑자기 나타나 길 을 막아선다. 하는 수 없이 방향을 바꾸어 달아나려 하는데 이번에는 뤼크레스가 앞을 가로 막는다. 이제 달아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바로 화장실이다. 뤼크레스와 이지도르와 제 롬은 그를 뒤쫓는다. 그들은 화장실을 거쳐 쓰레기통으로 가독 찬 마당으로 나온다. 움베르 토는 덤프차 뒤에 숨어서 권총을 꺼내더니, 주저 없이 그들을 향해서 쏜다. 억만장자가 멀리서 소리친다. " 2번 작전! 2번 작전! " " 그런데, 2번 작전이 뭐였죠? " 뤼크레스의 물음에 이지도르가 대답한다. " 이봐요, 뤼크레스. 그걸 나에게 물어보면 어떻게 해요? 내가 건망증이 심하다는 거 뻔히 알면서. 나는 1번 작전이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 뤼크레스는 자기 권총을 꺼내어 움베르토 쪽을 겨누면서 나직하게 말한다. " 당신의 그 기억 장애라는 것에 관해서 생각해 봤는데요, 당신의 뇌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기억 장애를 일으킨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신은 너무 예민하기 때문에 만일 당신이 좋 지 않은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면 정신이 온전할 수 없을 거예요. 세상에서든 당신 자신 의 삶에서든 과거와 현제의 끔찍한 일들을 잊어버릴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당신의 뇌가 그 자발적인 망각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을 거예요. " " 그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합시다. " 움베르토가 달아난다. 그들이 추격에 나서자, 그가 다시 총을 쏜다. 그들은 거리의 모퉁이 에 몸을 숨긴다. 그 틈을 타서 움베르토는 이웃한 골목길로 들어서더니, 행인들을 떼밀며 내 달아서 어떤 집의 대문 뒤에 숨는다. 그가 다시 사격을 가하려는 찰나, 제롬이 기름 묻은 통 조림 깡통들을 던지면서 돌진한다. 제롬이 다시 소리친다. " 2번 작전! 2번 작전! " 이지도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한다. " 극단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저게 문제예요. 제롬은 에피쿠로스주의를 추구할 때도 극단적이었는데, 이제는 지나치게 무모하고 저돌적인 모험주의자가 되려는가 봐요. " 아닌 게 아니라 억만장자 제롬은 움베르토가 총을 들고 있다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돌진해 간다. 움베르토가 쏜 7.65밀리미터 구경의 총알이 어깨를 스친다. " 나 총에 맞았어요. " 공포와 환희가 반반씩 섞인 표정을 지으며 제롬이 알려 온다. " 이제 내가 나서야겠어요.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면 안 되겠어요. " 그러면서 이지도르는 마당 쪽으로 빙 돌아가더니 맥주병 주둥이로 움베르토의 허리를 찌르 면서 기습을 가한다. " 이제 할 만큼 했으니 항복하시지....... 움베르토 " 그는 호주머니에 지니고 있던 수갑을 꺼내어 움베르토의 손목을 채운다. " 도와줘요! " 제롬이 소리치자 여기자가 달려간다. " 뤼크레스, 난 당신을 위해서 죽음을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었어요. " 그가 다 죽어 가는 소리로 중얼거린다. 뤼크레스는 상처를 살펴본다. " 으음...... 별거 아니네요. 조금 스쳤을 뿐이에요. 내 손수건을 대고 있어요. 고급 정장을 피로 얼룩지게 하면 안 되니까. " 그러고 나서 그녀는 움베르토 쪽으로 몸을 돌려 그의 멱살을 잡는다. " 자아 이제 말해 보실까? 최후 비밀이 뭐지? " 움베르토는 묵묵부답이다. 그저 비웃음을 물고 있을 뿐이다. 이번에는 제롬이 그의 멱살을 잡고 주먹질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지도르가 제롬을 말린 다. " 폭력은 안 돼요. " 전직 신경 외가 의사인 움베르토가 으름장을 놓는다. " 난 나의 권리를 알고 있소. 당신들은 경찰이 아니오. 나에게 수갑을 채울 권리가 없소. 당신들을 고소할 거요. " " 그래, 우린 경찰이 아니야. 하지만 내 생각엔 경찰이 우리를 고맙게 여길 것 같은데. 우 리가 중죄인을 잡았으니 말이야. 당신은 조르다노 박사를 살해했고, 나를 납치 했으며 ( 그 점에 대해서는 나야말로 고소를 할 생각이야), 핀처 박사를 죽였어. " 뤼크레스의 말에 움베르토는 갑자기 발끈해서 고함을 지른다. " 난 핀처 박사를 죽이지 않았소! " " 그럼 어디 증명해 보시지. " " 나타샤가 분명히 말했소. 방에는 자기밖에 없었다고...... " " 그래. 하지만 최후 비밀을 이용하면 먼 거리에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 움베르토는 경멸 어린 태도로 어께를 올렸다 내린다. " 최후 비밀이 뭔지 몰라서 하는 소리요. " " 그러니까 그게 뭔지 말해. 자아 어서. " 이번에 이지도르가 설득에 나선다. " 움베르토, 당신이 아직 깨닫지 못한 게 있는 듯하군요. 우리는 당신과 같은 편이오. 우리 는 사뮈엘 핀처를 사랑하고 그가 이루어 낸 일을 높이 평가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에게 무 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고 싶어하는 거요. " " 나로서는 당신들을 도울 이유가 전혀 없소. " 그러면서 그는 눈길을 떨군다. " 아뇨, 있어요. 당신을 수렁에서 건져 준 사람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라도 우리를 도와야 해요. " 완강하던 움베르토도 이 말에는 마음이 흔들리는 듯한 기색을 보인다. 그러자 제롬이 자기 깐에는 지금이 바로 기회다 싶어 한 마디 덧붙인다. " 자아 어서 말해, 움베르토. 넌 이제 끝장났어. " 이지도르는 억만장자를 얼른 밀어내고 움베르토와 마주선다. " 거기 사람들이 당신에게 뭘 보장해 주고 있지요? 일자리? 마약? 아니면 둘 단가요? 당신 이 그들에게서 무슨 도움을 받고 있지요? " " 그들은 날 구해 줬소. " " 그들이 아니에요! 당신을 구해 준 건 사뮈엘 핀처란 말이오! 당신은 그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어요. 그런데도 그의 죽음을 수수께끼로 남겨 둘 작정이오? 그런 배은망덕이 어디 있소? " 움베르토는 수갑에 묶인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제롬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공격에 나선다. " 너 자신에게 물어봐. 만일 사뮈엘 핀처의 유령이 여기에 있다면, 너에게 뭐라고 충고를 할까? 계속 침묵을 지키라고 할까? " 뤼크레스도 자기가 나설 차례라고 생각하고 다시 말문을 연다. " 전에 <아무>라는 사람에 대해서 말한 적 있지? 그 사람이 누구야? 자아, 어서 털어놔.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핀처 박사를 위해서 말이야. 사건의 진상이 일말의 의혹도 없이 명 백하게 밝혀져야 해. " 전직 신경 정신과 의사는 이제 머릿속이 너무나 혼란스럽다. 죄책감과ㅓ 회한, 유감, 감옥 살이에 대한 두려움, 최후 비밀을 알고 싶은 욕망, 병원에 대한 감사의 마음, 특히 핀처에 대해서 느끼는 고마움 등이 착종하며 그의 자유 의지라는 경기장에서 격력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딜레마다. 그는 고통에 겨워 얼굴을 찡그린다. 마치 세사람이 번갈아 가며 The아 놓 은 말들이 그를 고문하기라도 하는 듯 하다. 이지도르는 이제 병 주고 약 주기의 효과를 얻기 위해 설득 방법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알 아차린다. 움베르토에 내면에 있던 행동의 지표들을 무너뜨렸으니 이제는 그를 어르고 달래 고 안심시켜야 하는 것이다. " 자아 갑시다. 가서 뭐 좀 먹고 우리에게 처음부터 얘기를 해봐요. " 억만장자가 덧붙인다. " 이봐요 친구들, 내가 여러분 모두를 시엘의 레스토랑으로 초대하겠어요. 이왕 비밀 이야 기를 들을 양이면, 조용하고 편안한 곳에 가서 듣는 게 낫지요. 안 그렇습니까? " 107 상트 페테르부르크, 아침 8시. 러시아 항공사 아에로플로트의 일류신 여객기가 도착한 잿빛 활주로에는 가랑눈이 휘날리고 있었다. 기내에 부착된 영어 게시문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승객들에게 이 러시아 항공사를 계속 이용해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항공사가 자랑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국 제 민간 항공 기구의 권고를 무시하고 승객들에게 기내 흡연을 허용하는 마지막 항공사라는 점이었다. 사뮈엘 핀처 박사로서는 이미 몇 달 전에 담배를 끊은 터라 그 관대함이 별로 반갑지 않았 다. 사실 그의 줄에 앉아 있는 승객들이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 대는 통에 주위가 온통 뽀 얗고 악취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행복할지 모르지만, 자기들의 행복을 위해서 꼭 다른 사람들을 불 행하게 만들어야만 하는 걸까? 여객기가 활주로를 천천히 미끄러져 나아가 터미널에 닿았다. 공항에 그를 마중하러 나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핀처는 택시를 잡았다. 털실로 뜨개질한 꽃무늬 스웨터 차림의 운전 기사가 모는 초록색 라다 승용차였다. 운전 기사는 자기가 가진 것 중에서 조금이라도 돈이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 팔고 싶어했다. 연어 알 콩조림이나 미 국 담배를 사지 않겠느냐고 묻는가 하면, 루블 화를 유리한 환율에 바꿔주겠다고 제안하기 도 했다. 심지어는 여자가 필요하면 자기 막내딸을 소개해 주겠다는 이야기까지 서슴지 않 았다. 택시 안에서 핀처는 마르탱이 작성해 준 메모를 검토하였다. 최후 비밀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개 천공 수술은 1998년 12월부터 상트 페테르부르크 뇌 클리닉에서 실행되고 있 었다. 러시아 보건부가 1999년에 발표한 바에 따르면, 그 뒤로 마약 중독 환자 120명이 이 클리닉에서 치료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택시 운전 기사는 차를 세우더니, 뒤보기 거울로 손님을 신중하게 살펴보고 나서 달러로 택시비를 불렀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뇌 클리닉은 스탈린 시대에 세워진 낡은 건물이었다. 말을 잘 듣지 않 는 정치범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이던 장소가 뇌 전문 클리닉으로 바뀐 거였다. 대문은 녹슬었지만 하얀 눈이 황갈색 자국의 대부분을 숨겨 주고 있었다. 핀처는 갑작스레 한기를 느끼고 외투 깃을 여미며 안으로 들어가 안내 데스크 앞에 섰다. 간호사들은 휴게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찾아온 용건을 말하고 한 참을 기다리자, 마침내 한 간호사가 알려 주었다. " 체르니엔코 박사님이십니다. " 관례적인 수인사가 끝나자, 체르니엔코 박사는 그의 눈 밑에 엄지손가락을 대어 안구를 검 사하고 그의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려 팔뚝에 바늘 자국이 있는지를 조사하였다. 소리를 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하는 어설픈 프랑스 어로 그녀가 말했다. " 아니 당신은 마약 중독자가 아니잖아요? 무엇 때문에 수술을 받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 죠? " 핀처는 자기가 원하는 건 문제의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활성화시키는 것이라고 설 명했다. 그가 자기 계획을 상세하게 털어놓자, 그녀는 몇 가지 조건을 달고 그의 계획에 동 참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핀처는 여느 환자와 똑같은 자격으로 클리닉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에게 병실 하 나가 배정되고, 병원의 이니셜이 찍힌 파자마 한 벌이 주어졌다. 그는 다른 환자들 중 몇몇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그들은 대개 대학 기숙사는 붉은 군 대의 막사에서 마약에 맛을 들인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타자키스탄이나 체첸에서 온 밀거 래 헤로인을 겨우 1백 루블 정도를 주고 구할 수 있었다고 했다. 젊은이들의 피를 마약으로 오염시키는 것, 이것은 새로운 전쟁 방식이다. 그들 대부분이 중독을 해소하는 치료를 받았지만 다시 마약에 빠져 든 모양이었다. 헤로인 을 한전 경험하고 나면 그것을 포기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법이다. 그들 가운데에는 벌써 여러 차례 자살을 기도한 젊은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젊은이들의 부모들이 신문에 낀 광고지를 보게 되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뇌 클리닉에 서 마약 중독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수술을 해준다는 내용의 광고였다. 구 제 불능의 마약 중독자들에게 마지막 기회가 될 그 수술에 드는 비용은 1만 달러였다. 그러니까 핀처 주위에 누워 있는 젊은 환자들은 부유층 가정의 자녀들이었다. 그들은 병실 에 삼삼오오 모여 카드놀이를 하거나 휴게실에서 텔레비젼을 보거나 복도에서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모두가 삭발을 한 채 다소간 피로 얼룩진 붕대를 머리에 두른 모습 이었다. 문신을 새긴 몸에 상흔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젊은이들도 더러 있었다. 마약 중독자 로 살면서 험한 일을 적잖이 겪었다는 증거였다. 그들의 팔은 주사 자국으로 덮여 있었다. 마침내 디데이가 왔다. 한 간호사가 핀처의 머리를 삭발하고 하얀 가운을 입혀 주었다. 체 르니엔코 박사는 이 병원에서 현대적인 설비로는 거의 유일하다고 할 만한 자기 공명 단층 촬영기 MRI를 이용하여 핀처의 뇌 지도를 검토하였다. 손상도 없고 종양도 없었다. 모든 게 정상으로 보였다. 그는 수술실로 안내되어 수술대 위에 길게 누웠다. 젊은 여자 간호사가 빨래 집게를 여러 개 가지고 와서 그의 머리 주위에 방수 시트를 대주 었다. 그의 머리에 마치 커다란 꽃부리가 달린 듯했다. 간호사는 천으로 된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그녀의 얼굴 중에서 보이는 거라곤 커다란 회색 눈뿐이었다. 그녀는 그가 수술 장면 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가리개 하나를 더 설치했다. 외과 조수들이 핀처의 머리에 강철 헬멧을 씌웠다. 이 수술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이 헬멧 은 중세의 어떤 고문 기구와 생김새가 비슷했다. 체르니엔코 박사는 이 헬멧에 미끄럼 장치 가 있는 금속 막대를 달았다. 그런 다음 헬멧이 머리통에 딱 붙어서 움직이지 않도록 나사 를 꽉 조였다. "이래야 위치를 정확하게 잡을 수 있거든요." 그녀는 그렇게 설명하고 나서, 전신 마취를 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알려 주었다. 수술을 하 는 동안에 그가 무엇을 느끼는지 알 필요가 있다는 거였다. "우리는 당신이 깨어 있음을 확인하게 위해 간간이 당신에게 말을 시키거나 무언가를 하라 고 요구할 겁니다." 그녀가 회전 전기톱을 들었다. 그는 등골이 오싹하였다. 하지만 이 병원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의 병원들은 서유럽이나 미국의 병원들에 비해 첨 단 장비를 많이 갖추고 있지 않았다. 체르니엔코 박사는 액체 질소를 얻을 때도 발로 움직 이는 자동차 타이어용 펌프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들은 외과용 전기 펌프를 구입할 돈도 없단 말인가! 그의 뒤쪽에서 체르니엔코 박사가 스물에서 영까지 거꾸로 세라고 요구했다. 그는 그들이 축축한 솜으로 자기 머리통을 적시고 있음을 느꼈다. 차가운 느낌이 드는 것으로 보아, 소독 약이나 국부 마취제를 바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수를 세기 시작했다. "스물, 열아홉." 축축한 솜이 다시 그의 머리통에 닿았다. 톱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렀다. 그는 침을 꿀꺽 삼 켰다. "열... ...여덟, 열... ...일곱." 과학을 위해서, 뇌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 마르탱은 자기 수술을 견뎌 냈다. 이젠 내 차례 다. 나는 이 시련을 견뎌 낼 수 있다. "열여섯, 열다섯." 톱날이 그의 두피에 닿자, 피부의 접촉 감각 수용기들이 갑자기 확기를 띠었다. 뭔가 뾰족 하고 번득번득 날이 선 것이 살갗에 닿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별로 아프지 않을 겁니다." 여의사가 그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쇼? 의사들은 누구나 그렇게 말하지. 난 벌써 아프단 말이요.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마침내 톱날이 두개골을 뚫고 들어오자, 그는 <우우>하는 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체르니엔코 박사가 동작을 멈추었다. "많이 아파요?" "아니, 아니에요. 계속하십시오. 열넷, 열셋." 과학을 위해서 참아야 해.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살갗에는 아무 감각이 없었다. 하지만 두개골에 기계가 닿는 것 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사랑니를 뺄 때와 조금 비슷했다. 국부 마취의 효과로 통증 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뼈에 닿는 압력이 전신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다른 걸 생가하자, 이 간호사의 회색 눈을 생각하자. 그의 머리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정말 되게 아프군, 다른 걸 생각하자. 이 간호사를 생각하자. 간호사는 그가 자기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그의 손을 잡아 주었 다. 손이 싱그럽다. 하지만 네 머리 꼭대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잊을 수가 없다. 이들이 내 머리를 열고 있다. 나는 어쩌면 역사에 길이 남을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 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절대로 수술대 위에 눕지 않겠다고 맹세한 적이 있었다. 이건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다. 게다가 이건 너무나 아프다. 장갑 낀 두 손이 그의 머리를 쿠션 위로 옮겨 놓았다. 톱질을 하기 위한 최선의 각도를 결 정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다. 간호사가 그의 머리 위로 몸을 숙였다. 그녀의 가운 깃 사이로 도드라진 젖가슴이 언뜻 보 였다. 그이 논길은 가슴 속으로 슬그머니 미끄러져 들어가 둥근 윤곽의 살을 가리고 있는 하얀 레이스에 닿았다. 살결이 매우 보드라울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전기톱이 치과용 드릴 같은 소리를 내면서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프다. 다른 걸 생각하자. 간호사의 젖가슴에 생각을 모으자. 유머와 사랑은 둘 다 강력한 진통제다. 재미있는 농담을 나 자신에게 들려주자. 어떤 미치광이 이야기를 들려줄까? 의사 에게 자기 머리에 구멍을 내달라고 해서, 자기 생가기 다 새어 나가게 만들어 버리는 미치 광이 이야기... .... 회색 눈의 간호사는 그의 시선이 자기 목 아래로 쏠려 있음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가운의 깃을 다시 여몄다. 하지만 가운의 단추를 채우지는 않았다. 계속 수를 세자. "열둘, 열하나." 간호사는 그의 머리에 둘러진 방수 시트 위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무언가를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또 하나의 고통스런 감각이 그를 엄습했다. 과열된 톱날과의 마찰 때문에 뼈에서 타는 냄 새가 났다. 이게 바로 내 머리에 구멍이 뚫리는 냄새다.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의 두 개골에서 톱밥이 나오고 있는 거였다. 그는 아래로 피묻은 솜 뭉치들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열, 아홉, 여덟." 뼈 먼지 냄새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고약했다. 간호사는 자기가 보고 있는 것에 너 무나 큰 충격을 받은 탓인지, 회색 눈에 어렸던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이 여자는 새로 들어온 간호사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이 여자가 간호사로 뽑힌 것은 미모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간호사가 있다는 것은 설비의 노후함을 얼마쯤 상쇄키는 러시 아 병원의 작은 <장점>이다. 그런데 이런 여자를 어떻게 선발한 걸까? 혹시 미스 <젖은 티 셔츠> 선발 대회에서 뽑은 건 아닐까? 회색눈, 자동차 나이어용 펌프, 피에 젖은 솜, 가슴 부위가 깊이 파인 옷이 잘 어울리는 여자, 머리가 열리고 정신이 새어 나가는 느낌. 그저 발 랄라이카 음악이 곁들여지지 않은 게 아쉬울 뿐이다. 간호사가 까치발을 세우자, 깊이 파인 가운의 깃 사이로 그녀의 앞가슴이 더욱 잘 보였다. 예쁜 여자를 생가하면 엔도르핀이 만들어지고, 이렇게 만들어진 엔도르핀은 때로 진통제를 능가하는 진통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녀의 가운에 키린 자모로 이름 하나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녀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올가, ks 너에게 내 뇌를 보여 주고 있어. 나 자신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보여 주고 있는 거야. 이제껏 어는 여자에게도 그것을 보여 준 적이 없어. 이건 일종의 스트립쇼야. 난 너 에게 단언할 수 있어. 어떤 암성 스트리퍼도 이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 줄 용기는 내지 못 하리라는 것을... .... "일곱 - 여섯 - 다선 - 넷 - 셋 - 둘 -하나 - 영." 그는 마치 한 단어를 말하듯이 단숨에 남은 수를 세었다. 뼈를 태우듯이 썰어 대던 느낌이 멎고, 시원한 느낌이 뒤를 이었다. 드디어 톱질이 끝났군. 피묻은 솜뭉치들이 자줏빛 눈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그들이 두 개골을 양쪽으로 벌리고 있 다는 느낌이 들었다. 상처를 벌리는 톱니 막대들을 끼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올가, 너 참 아름답구나. 수술을 끝내고 오늘 저녁에 뭐할 거지? 까까머리에 하얀 붕대를 감고 있는 남자도 데이트 상대로 받아 줄 수 있을까? 그는 농담을 하고 싶었다. 울부짖고 싶은 또 다른 욕구를 억누르기 위해서였다. 체르니엔코 박사는 부주의로 그랬는지 일부러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톱으로 썰어 낸 두 개골 조각을 그의 눈길이 미치는 스테인레스 통에 던져 넣었다. 간호사는 박사가 실수 했음을 깨닫고 얼 른 그것을 주워 다른 곳에 놓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분명히 보았 고, 그 이미지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건 안쪽으로 휘어진 네모꼴의 조각이었 다. 세로 5센티미터에 가로가 3센티미터쯤 될 듯했다. 위쪽은 베이지색이고 아래쪽은 흰색이 어서 호두 알을 네모지게 잘라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앞쪽 표면에는 가늘고 길게 파인 빨간 홈들이 있었다. 마스크 대문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간호사가 어색하게 미소를 짓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를 향해서 눈길을 떨구었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관찰을 계속했다. 그녀는 자기 눈 앞에 보이는 어떤 것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는 듯했다. 그의 두 개골이 열려 있고, 외과용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 었다. 그들은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108 골이다. 양파와 카프리에 꽃봉오리와 발삼 식초를 넣은 골 요리. 웨이터가 은 쟁반에 담아 온 요리가 바로 그것이다. 이지도를 카첸버그는 자기 잡시에 내려진 번들거리는 분홍색 살 덩이를 찬찬히 바라보다가 싫은 내색을 하며 접시를 밀어 버린다. 제롬 베르주락이 설명한다. "양의 골이에요. 멋진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 요리를 선택했어요. 자연스럽게 뇌를 다시 화제에 올릴 수 있게 하는 요리죠. 안 그렇습니까?" "난 채식을 더 좋아하는 편입니다." 이지도르의 해명에 움베르토 역시 접시를 밀어내요 덧 붙인다. "이걸 보니까 옛날에 병원에서 있었던 일들이 너무 많이 생각나는군요." 남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뤼크레스는 열심히 포크를 놀리고 있다. "미안하지만 나는 먹어야겠어요. 갖가지 험한 일을 겪고 났더니 식욕이 왕성해졌나 봐요. 아직도 배가 많이 고파요." 그러고는 한 조각을 크게 잘라서 입 안에 넣고 냠냠거린다. 제롬은 실내 온도에 맞춰 놓응 1989년 산 모퉁 로트실트를 크리스털 잔에 따라 준다. "자아, 움베르토. 이제 우리에게 모든 걸 이야기해 봐요." 움베르토는 자기 잔에 담긴 포도주를 살살 돌리면서 전무가의 안목으로 술의 빛깔을 살핀 다. "포도주를 잘 아는군요. 안 그렇습니까?" 제롬이 콧수염의 오른쪽 끄트머리를 문지르면서 물었다. "아니요. 난 포도주 전문가가 아니라 그저 술꾼이었소." 뤼크레스는 이야기가 샛길로 샐 기미를 보이자 얼른 본래의 화제로 돌아간다. "그래, 어떤 일이 있었죠?" 마침내 움베르토가 자초지종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다들 아시다시피, 내 어머니를 수술하다 사고를 낸 뒤에 나는 병원을 그만두었소. 그런 다 음 매일같이 수에 절어 사는 거지로 전락했지요. 그런 나를 핀처 박사가 수렁에서 건져 내 어 <카론>의 선장을 시켜 주었소. 그때부터 칸 항구에서 성 마르그리트 사이를 오가며 사 람들을 실어 날랐지요.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의 일이었소. 나는 핀처 박사가 일을 끝내고 병 원에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소. 그를 칸 항구로 데려다 주기 위해서 말이오. 그런데, 여 느 대와 달리 시간이 한참 지다도록 그가 나오질 않습디다. 나는 박사가 실험에 너무 몰두 한 나머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소.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 릇이라 박사를 찾으러 가기로 했지요." 움베르토는 그때의 심경으로 다시 돌아간 듯 무언가를 무척 궁금해 하는 사람의 표정을 지 으며 말을 잇는다. "먼저 박사의 사무실로 가보았소. 그가 없습디다. 그가 없습디다. 그래서 이번엔 실험실로 갔지요. 거기에도 없습디다. 나는 실험실에서 도로 나가려다가 발길을 멈추었소. 예전에 못 보던 것이 있어서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했던 거요. 우리에 생쥐들이 들어 있었고, 가각의 우 리 위에 이름이 하나씩 붙어 있었소. 융, 아들어, 베르넴, 야르코, 쿠에, 바빈스키 같은 이름 이었지요. 생쥐들은 모두 안테나를 하나씩 달고 있었소. 자세히 보니까 그 안테나는 그냥 머 리에 부착된 게 아니라 머리에서 빠져나온 것이었소. 나는 생쥐들에게 손을 들이밀어 보았 소. 놈들의 태도만 보고서도 놈들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겠습디다. 놈들은 너무 흥 분해 있었소. 코카인 중독자와 행동이 비슷했지요. 대단히 격렬하면서도 편집증적이었소. 다 른 생쥐들에 비해 모든 걸 한결 강하고 빠르게 지각하는 것 같았어요. 나는 그 점을 분명히 확인하고 싶어서, 생쥐 한 마리를 꺼내어 미로 속에 넣어 보았소. 이 미로는 매번 진로가 다 르게 설정되는 비순차적인 이동식 미로였어요. 통상적으로 생쥐들이 그런 종류의 미로를 통 과하는 데에는 아무리 빨라도 몇분은 걸립니다. 그런데, 그 생쥐는 불과 십여 초 만에 중앙 에 다다르더니 발작적으로 지렛대를 눌러 대더군요. 정말 놀랍고 신기했지요. 그때 핀처 박 사가 들어왔소. 나는 그가 세미나 때문에 러시아에 갔다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소." 그들은 벌어진 구멍을 통해서 살아 움직이는 뇌를 보고 있었다. 뇌의 혈관들이 팔딱팔딱 뛰고 있었다. "괜찮아요. 핀처 박사님?"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군요... ...." 핀처는 자기 딴에는 농담을 하느라고 그렇게 말했다. "올가?" 간호사는 체르니엔코 박사의 신호에 따라 그의 맥박을 재더니, 갖가지 검사 기기를 확인하 였다. "모든 게 정상입니다." 머리가 땅긴다. 아프다. 그런데 내가 아프다고 말해도 된는 걸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이들은 이렇게 소리칠지도 모른다. <그럼 모든 걸 중단하고 내일 다시 시작하지.> 두 개골의 구멍을 벌리고 있는 톱니 막대는 구멍이 조금 더 벌어지도록 조절되었다. 그의 왼쪽에는 피묻은 솜뭉치가 작은 무더기를 이루고 있었고, 오른쪽에서는 간호사가 여전히 그 의 손을 잡고 있었다. 체르니엔코 바가는 기다란 금속 막대를 꺼냈다. 존데 구실을 하는 막대였다. 그녀는 핀처가 프랑스에서 가져온 그 신기한 기구를 요모조모 살펴보았다. 그녀가 핀처의 뇌 X 선 사진을 요구하자 조수 하나가 그것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조수는 몇 분 뒤에 돌아와서는 더 이상 그것을 찾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여기저기 다 찾아보았지 만 어디에도 없더라는 거였다. 러시아 말이 퉁명스럽게 몇 마디 오고 갔다. 연줄로 들어온 무능한 직원들이 득시글거리는 병원의 난맥상을 지적하는 이야기였다. 아지만, 체르니엔코 박사는 의식이 있는 외국 환자 앞에서 러시아 어로 말다툼을 하는 것이 환자에게 나쁜 영향 을 미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임기응변으로 일을 처라하기로 했다. 이미 환자의 뇌를 열어 놓은 상태에서 수술을 연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는 식으 로, 그녀는 자신의 기억으로 과학적인 정밀성을 대신할 생각이었다. 그 부위가 어디에 있었 지? 그녀는 그 위치를 찾아내기 위한 정확한 수치를 기억해 낼 수 있을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존제를 집어넣었다. 존제는 먼저 뇌막을 통과했다. 뇌막이란 세 겹으로 포개 진 막질 조직으로 뇌를 둘러싸고 있는 보호막이다. 존데는 세 겹의 막 중에서 가장 두꺼운 막인 경질막을 뚫고 들어간 다음, 속으로 더 들어가 거미막을 통과했다. 거미막은 거미줄과 같은 섬세한 실 구조를 지니고 있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어 있다. 이 막 밑의 공간에는 150 세제곱센티미터 정도의 뇌척수액이 들어 있다. 소량의 뇌척수액이 사위엘 핀처의 이마로 방울져 떨어졌다. 한순간 핀처는 그 미지근한 액 체가 땀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니었다. 땀과 뇌척수액을 구별하지 못할 그가 아니었다. 그 는 이 액체 덕분에 뇌가 중력의 효과를 약화시키고 외부로부터 오는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 뇌는 액체 속에 떠 있다. 그럼으로써 외부의 압력이나 충격에 잘 견딜 수 있다. 우리 행성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듯이, 우리 내부의 행성 역시 뇌척수액이라는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셈이다. 간호사가 서둘러 그 액체를 닦아 냈다. "스파시보." 이것은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러시아 어 낱말이었다. 따지고 보면 어는 언어에서든 <감사합니다>라는 말보다 더 쓸모 있는 말은 없지. 체르니엔코 박사는 탐색을 계속했다. 존데는 뇌막 중에서 가장 깊숙하고 무른 막인 연질막 을 통과하여, 뇌의 표면으로부터 깊이 2밀리미터쯤 죄는 곳에 가 있었다. 대뇌 피질의 회색 질 한가운데 였다. "잘되어 가고 있는 거죠?" 핀처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지금까지는 잘되어 가고 있어요." 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몇 센티미터를 더 들어가, 회색질을 통과하여 두 대뇌 반구를 연결 하는 백색질에 다다랐다. 그는 마치 유정에 파이프를 박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다른 걸 생각하자. 만일 지구가 살아 있다면, 만일 고대 그리스인들이 가이아라고 말했던 것처럼 지구가 의식을 가진 존재라면, 우리가 지표에 구멍을 뚫어 지구의 피인 석유를 빨아 올릴 때미다 지구는 그것을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자동차의 연료 탱크를 채우기 위해 지구의 피를 빠는 흡혈귀인 셈이다. 존데는 1릴리미터씩 계속 파고 들어갔다. 이제 존데는 뇌들보속에 있었다. "아주 잘됐어요. 자아 이제 당신이 느끼는 바를 말해 주세요. 그래야 위치가 정확한지를 더 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체르니엔코 박사는 금속제 눈금 막대가 달린 그의 헬멧을 보며 수치를 확인하고 존데가 있 는 자리를 기록하였다. 그런 다음 핀처의 침실에 있는 것과 비슷하게 생긴 전기 스위치를 눌렀다. 그는 약간 가렵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아, 무엇이 느껴지죠?" "팔을 간질이는 느낌이 들어요. 불쾌하지는 않습니다." 빌어먹을, 이 여자는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있다! 그녀는 존데를 오른쪽으로 조금 이동시켰다. 그에게는 그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 졌다. "그럼 여기는요?" 그 물음과 동시에 그에게 또 다른 느낌이 밀려왔다. "워랄까. 아주 울적한 기분이 들어요.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같은 것이 솟구쳐 올라오고 있어요. 왠지...... 울고 싶어져요." 체르니엔코 박사는 마스크를 쓴 채 볼멘소리를 내질렀다. 알아 들을 수는 없었지만 러시아 말로 욕설을 내뱉고 있는 거 같았다. 존데가 방향을 틀어 뇌의 다른 쪽 부위를 뒤지고 있었다. 그는 문득 두개골에 구멍을 뚫는 장면을 바위에 새겨 놓은 잉카의 유적을 떠올렸다. 언젠가 2천5백 년 이상 된 두 개골들이 발견된 적이 있었다. 발견자들에 따르면, 이 두 개골들에는 네모지게 잘라낸 구멍이 있었는 데, 이 구멍이 황금 관으로 다시 메워져 있었다고 했다. 체르니엔코 박사가 또 다른 부위를 건드렸다. "눈...... 눈...... 오른쪽 눈이 이상해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요." 젠장, 이러다가 멀쩡한 부위를 손상시키고 말겠군! 간호사가 아까보다 더욱 힘을 주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검사 기기들의 눈금반을 살 펴본 다음, 그의 얼굴 앞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며 그의 시선이 손가락을 따라가는지 확인하 였다. 존제가 앞쪽으로 조금 움직이자, 오른쪽 눈에 즉시 상이 다시 돌아왔다. 휴우. 체르니엔코 박사가 다시 전기 스위치를 눌렀다. "자아, 여기에선 뭐가 느껴지죠?" 레몬 맛. "혀를 툭 쏘는 맛이 느껴져요. 아주 새콤한 맛이에요." "거의 다 왔어요. 곧 찾아낼 거예요. 곧 찾아낼 거라고요." 그녀는 존데를 조금 더 밀어 넣어 다른 부위를 건드렸다. 전기 충격이 왔다. 핀처는 간호사 의 손을 으스러지도록 꽉 움켜쥐었다. 너무나 놀랍고 두려운 순간이었다. "당장 멈춰요!" "죄송합니다." 체르니엔코 박사는 휴대용 계산기를 집어 들고 무언가를 계산 하더니, 헬멧에 몇 가지 조 정을 가하였다. 그러고는 세 명의 조수들을 향해서 러시아 말로 아주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갑자기 사태를 장악하고 자신감을 얻은 사람 같았다. 그녀는 지친 심신을 가누고 자기 기억 속에서 최후 비밀의 정확한 좌표를 찾고 있었다. 그 녀는 그것을 어딘가에 적어 놓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인간의 기억이 가장 훌륭한 금고 라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이 금고 역시 사라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일이 생기 더라도, 생쥐를 통해서 알아낸 좌표가 남아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의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건 아니었다. 어쨌거나 당장 필요한 것은 정확한 위치를 기억해 내는 일이었다. 그 러지 않으면, 또다시 한참을 더듬거리다가 핀처로 하여금 콕콕 찌르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온몸에서 느끼게 할 염려가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었다. 어쩌면 빨리 찾아내려는 욕심 때문에 오히려 기억력이 잘 가동되지 않는지도 몰랐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라 앉혔다. 조수 하나가 탈지면을 내밀어 그녀의 땀을 닦아 주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분 명해진 듯 그녀의 눈빛에 회색이 돌았다. 가로, 세로, 깊이의 세수치가 그녀의 머릿속에 분 명히 떠오른 거였다. " 그럼 여기는요? " " 아, 거긴 유쾌한 편이에요. 바캉스 분위기가 느껴져요. 자스민 향기도요. " 그의 뒤쪽에서 러시아 말로 활기 차게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체르니엔코 박사는 수성펜을 이용하여 전압계에다 직접 <향기>라고 썼다. 드디어 최후 비밀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낸 걸까? " 이제 전압을 올려 보겠습니다. 어떤 효과가 나지요? " " 에드바르트 그리그의 음악을 듣고 있는 기분이에요. 나는 그리그의 음악을 무척 좋아합 니다. " 솔베이의 노래. 사람들은 모차르트와 베토벤밖에 모른다. 하지만 그리그 역시 아주 위대한 작곡가다. 그녀는 <음악>이라고 줄을 하난 그었다. 그런 다음 전압을 조금 더 올렸다. " 무얼 느끼고 있죠? " " 케이크를 먹는 기분이에요. 노랑자두 파이 맛이 느껴져요. 나는 노랑자두 파이를 무척 좋 아합니다. " 가장 깊숙한 곳에 노랑자두 파이가 있고, 그 위에 그리그의 음악이 있다. 그 위에 자스민 향기, 다시 그 위에 레몬이 있다. 거기에서 더 올라오면 현실 속에 올가의 손과 회색 눈과 젖가슴이 있다. 참 기분이 좋다. 체르니엔코 박사는 <단것>이라고 적고, 전압계의 바늘을 살폈다. 아직 몇 밀리볼트는 더 올려 봐도 될 듯했다. " 여기에서는 열두 살 무렵 처음 에로 영화를 보았을 때 같은 기분이 들어요. " 체르니엔코 박사는 핀처의 말을 기록하고 전압계의 눈금을 한단계 더 올렸다. " 여기에서는 마리 노엘이라는 여자 친구와 첫 키스를 하던 때의 기분이 생각나요. " 그 말에 올가가 속눈썹을 움직였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면서 눈가에 가는 주름이 잡혔다. 그녀의 가슴이 붕긋 솟아올랐다가 만족감이 담긴 한숨과 함께 다시 내려앉았다. 그 녀는 새삼스레 그의 손을 꼭 쥐었다. 내가 마음에 든다는 뜻일까? 체르니엔코 박사는 긴장해 있었다. 여ㅛ자 조수 하나가 탈지면으로 다시 이마의 땀을 닦아 주었다. 피 묻은 솜 뭉치들은 더 이상 바닥에 쌓이지 않았다. 전압계의 스위치가 한 칸 더 돌아갔다. 핀처는 성행위를 할 때와 똑같은 기분을 느꼈다. 일종의 오르가슴이었다. 하지만, 단지 몇 초 동안이 아니라 하남 지속되는 오르가슴이었다. 그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그의 시선은 올 가를 벗어나 훨씬 더 높은 곳에 붙박여 있었다. 이게 천국일까? 그래, 천국이 하나지....... 핀처는 마치 고통에 겹기라도 한 듯 눈을 감았다. 여의사는 고통이 지나칠까 저어되어 자 극을 중단했다. 그러자 핀처가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 중단하지 말고 계속해요! " 그녀는 전압을 조금 더 높였다. 시냇물 같던 오르가슴이 강물이 되더니, 이내 급류가 되고 나이아가라 폭포가 되었다. " 핀처 씨, 괜찮아요? " 천국이요.......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곧 그의 웃음이 멎었다. 그녀가 전원 스위치를 꺼버렸기 때 문이다. "계속해요, 계속! " 이 바보 같은 여자야, 여기서 중단하면 어떻게 해? 한창 아주 중요한 것을 발견하고 있는 중이란 말이야. 모든 것을 깨달아 가고 있는 중이라고. 바로 여기야. 모든 게 여기로 귀착되 는 거야. 여기에 모든 감각과 기분의 원천이 있어. 이 순수한 원천에서 모든 시냇물과 강물 과 급류가 흘러나오는 거야. 체르니엔코 그의 시야에 나타났다. 그녀는 한 손에 전압계 조종 장치를 든 채 반신반의하 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핀처 씨, 정말 괜찮아요? " " 제발 부탁이오....... 계속해요....... " 안 그러면 널 죽여 버릴 거야. " 안 돼요. 위험해요. " 제발, 그 스위치를 최대로 돌려. 이 정도로는 만족할 수가 없어. 이건 간지럼을 태우는 것 에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이상을 원해. 강렬하고 적나라하고 완벽한 느낌을 원한다고! 나는 거기에 거의 다 와 있다는 걸 알아. 조금만 더 가면 돼. 계속해! 더 세게! "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핀처 씨. " " 아냐아아, 충분하지 않아! " 그는 그렇게 악을 쓰며 벌떡 일어났다. 헬멧과 구멍 벌리는 기구와 죄는 장치와 방수 시트 를 머리에 단 채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검사 기기들의 전선이 모두 뽑혀 버렸다. 그의 머리통 위쪽으로 세워져 있던 방수 시트가 아래로 접히면서 그의 시야를 가렸다. 그 는 거친 동작으로 그것을 다시 뒤로 젖혔다. 모두가 뒤로 물러났다. 그가 다시 고함을 쳤다. " 아직 부족해. 더 해!!!! " 그의 눈은 성난 야수의 눈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한쪽 손등으로 약병들을 닥치는 대로 뒤집어엎었다. 타일바닥에 떨어진 약병들이 크 리스털 소리를 내며 깨졌다. " 더 해! " 체르니엔코 박사는 존데로 전기를 보내는 전선을 잽싸게 뽑아버렸다. 그는 엄청난 분노에 휩싸인 채 다시 전선을 연결하려고 전압계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올가가 더 빨랐다. 그녀가 밀어낸 전압계가 바닥에 떨어져 부서졌다. 그는 메스와 피묻은 솜이 널려 있는 탁자 위로 그녀를 던져 버렸다. 간호사 다섯 명이 급히 달려 들어와 미치광이처럼 날뛰는 그를 붙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 들 모두를 이내 벽 족으로 떼밀어 버렸다. 아무도 날 막지 못해. 나는 그걸 원해. 더 줘. 110 " 조금 더 드시겠어요? " " 예, 기꺼이. 고맙소. " 제롬 베르주락은 크리스털 잔에 다시 진홍빛 포도주를 따른다. 레스토랑에 시엘의 회원들이 들어고 있다. 턱수염을 기른 남자하나가 식탁 사이를 돌아다닌 다. 그는 친근하게 회원들 각자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건네고 있다. " 아니, 이거 제롬 아닌가! 안녕하신가, 제롬! 우리 매력적인 아가씨도 여기 계시네. 아가씨 가 실종되고 나서 우리가 얼마난 걱정을 많이 했는지 아세요? " " 미샤, 우리를 잠시 내버려 두게.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거든. 안 그렇습니까? " 제롬의 말에 미샤가 펄쩍 뛴다. " 오, 여기에서 진지한 이야기를 하다니! 그건 적절히 못한 행동일세. 그런데 여기 이분은 누구시지? " 미샤가 움베르토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놀고 먹는 억만장자 제롬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자 리에서 일어나 미샤와 따로 이야기를 나눈다. " 우리는 경찰 수사 놀이를 하고 있네. 알겠나? " " 아아, 알겠네.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 테니 재미있게 놀게나. " 움베르토는 무통 로특실트를 다시 자기 전에 가득 따른다. 그 동안 숨겨 온 이야기를 술의 힘을 빌려서 모두 털어놓을 생각이라도 하는 듯하다. 뤼크레스가 돌아서는 미샤의 소매를 잡는다. " 혹시 담배 가진 것 있으세요? " " 담배는 없고, 원하신다면 시가를 드릴게요. 여기에서는 다들 담배를 너무 평범한 것으로 여기죠. " 그녀는 시가를 받아서, 한껏 즐길 준비를 하고 연기를 한 모금 빨아들인다. 하지만 맛을 제 데로 즐기기도 전에 콜록 하고 기침이 먼저 나온다. 괜히 달라고 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테나르디에 부장은 회의석상에서 어떻게 이토록 끔찍한 것을 피울 수가 있지? 맛도 없고 머리만 아프게 하는 데다가 냄새까지 고약한 이런 것을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는 니코틴 결핍을 느끼고 있는 탓에 그 끔찍한 것을 계속 빨아 댄다. 이지도르가 움베르토의 이야기를 계속 듣기 위해 처음의 화제를 다시 초든다. " 그러니까, 당신이 핀처 박사의 실험실에 있을 때 그가 갑자기 들어왔다 이거죠? " " 그렇소. 이건 앞에서 하지 않은 이야기지만, 그날 아침에 내가 박사를 병원에 데려다 줄 때 그는 모자를 쓰고 있었소. <이 양반에게 이런 엉뚱한 구석이 다 있었나>하고 나는 생각 했지요.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그는 실험실 안에서까지 모자를 계속 쓰고 있습디다. 그가 나에게 물었소? <움베르토, 자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 하고 말이오. 나는 대답을 제대로 못하고 더듬거렸소. 하지만 그는 내가 뭔가를 눈치 챘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어요. 나는 단 도직입적으로 <이 생쥐들 왜 이렇게 된 거죠? > 하고 물었소. 그는 비밀이라고 대답하더군 요. 그래서 나는 내가 짐작하고 있는 것을 말했지요. 생쥐들이 두 개 천공 수술을 받은 거 아니냐, 생쥐들의 뇌 속에 전극을 심고 멀리서 전기 자극을 보내고 있는거 아니냐고 말이오. 그러면서 내가 보기엔 그가 생쥐들을 더욱 영리하게 만드는 뇌의 어떤 부위를 찾아낸 것 같 다고 덧붙였지요. 그가 웃더군요. 하지만 그 웃음이 이상했소. 음산한 느낌마저 들게 하는 웃음이었지요. 그러더니 그가 딱 한 마디를 했소. <훌륭해>라고 말이오. 나는 그 말에 용기 를 얻어서 이야기를 계속했소. 내가 보기엔 생쥐들이 영리해진 것은 뇌에 전기 자극을 받고 싶은 욕구가 대단히 강하기 때문인 것 같은데, 그게 맞느냐고 물었지요. 그는 여전히 그늘 진 곳에 서 있었소. 게다가 모자의 테두리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서 그의 얼굴을 볼 수 가 없었소. 단지 그의 목소리만이 들렸을 뿐이오. 그의 목소리는 열에 들뜬 것 같기도 했고 지쳐 있는 것 같기도 했소. 그때 그가 앞으로 걸어와서 모자를 벗었소. 삭발한 머리에 붕대 를 감고 있습디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실험실의 생쥐들처럼 그의 두피에 작은 안테나 가 삐죽이 나와 있었소. 나는 겁에 질린 채 뒤로 물러섰소. " 뤼크레스가 침을 꼴깍 삼킨다. " 그래서요....... " " 나는 가까스로 이렇게 중얼거렸소. <제임스 올즈의 실험인가요? > 그는 고개를 끄덕이 며 대답했소. <그래, 올즈의 실험이야. 그것을 마침내 인간을 상대로 실시한 걸세. > " 움베르토는 자기의 빈 잔을 바라보다가 기운을 더 얻을 양으로 다시 술을 따른다. " 제임스 올즈의 실험이라는 게 뭐죠? " 이지도르가 묻는다. 뤼크레스가 수첩을 꺼내 들자 그도 포켓용 컴퓨터를 꺼내어 그 정보를 기록한다. 그러다가 문득 기억의 갈피에서 정보 하나를 떠올리고 말끝을 단다. " 아아...... 올즈의 실험. 그건 신경학자들 사이에서 하나의 전설이죠.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전설이긴 하지만 말이에요. " " 아닌 게 아니라 그건 실제로 있었던 일에 근거한 전설이오. 모든 건 1954년에 시작되었 소. 그 제임스 올즈라는 미국의 신경 생리학자가 전기 자극에 대한 뇌의 반응을 구역별로 연구하여 하나의 지도를 작성하고 있었답니다. 그는 뇌들보라는 부위를 조사하다가 몇 가지 신경 중추를 발견했소. 뇌들보란 우리의 두 대뇌 반구를 연결하는 다리와 같은 곳이오. " 움베르토는 볼펜을 쥐고 식탁보 위에 뇌를 그린다. " 먼저 그는 포만의 중추로 간주되는 중앙 복부 신경핵의 존재를 확인했소. 이 신경핵을 없애면 탐식증이 생깁니다. " 움베르토는 해당하는 구역에 동그라미를 치고 이 동그라미부터 바깥쪽으로 줄을 하나 그어 화살표를 만든 다음 그 위에 중앙 복부 신경핵이라고 쓴다. " 또한 그는 식용의 중추로 간주되는 시상 하부 측면 영역도 발견했소. 이 영역이 손상되 면 거식증이 생기게 되죠. 끝으로 그는 아주 이상한 영역을 하나 발견하고 MFB, 곧 정중 전뇌 관속이라는 이름을 붙였소. 전기 자극을 받으면 쾌감을 느끼게 되는 부위가 있다는 것 을 알아낸 것이죠. " 전직 신경 외과 의사 움베르토는 뇌의 한가운데에 작은 점 하나를 찍는다. " 쾌감의 중추인가요? " " 많은 신경학자들에게는 성배나 다름없는 부위죠. 이건 땐 이야기지만, 이 영역은 고통의 중추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어요. " 그 말에 제롬이 홀린 듯이 중얼거린다. " 아하, 그렇게 쾌감과 고통이 너무 가까워서 사람들이 그 둘을 혼동하고 사디스트나 마조 히스트가 되는 건가요? " 움베르토는 글쎄요 하는 뜻으로 어깨를 치켜 올렸다 내리고 이야기에 다시 열을 올린다. " 쥐의 쾌감 중추에 전극을 심고 이 전극에 쥐 스스로 자극을 일으킬 수 있게 하는 장치를 연결하면, 쥐는 한 시간에 8천 번까지 이 장치를 작동시킨다고 해요. 그 쾌감에 취해서 먹이 도 교미도 잠도 잊어버린다는 것이죠. " 그는 자기의 크리스털 잔을 톡톡 두드리다가, 포도주 묻은 손가락을 잔의 가장자리에 대고 빙빙 돌려 새된 소리를 낸다. " 우리가 삶 속에서 유쾌하다고 느끼는 것들은 모두 그 부위를 자극함으로써 우리에게 즐 거움을 주는 겁니다. " 그는 스스로 쾌감 중추로 규정한 작은 점을 볼펜 끝으로 콕콕 찌른다. 그 바람에 종이 식 탁보에 구멍이 생긴다. "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게 바로 이거요.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의 이유죠. 사뮈엘 핀처는 이 부위를 <최후 비밀>이라 명명했소. " 111 다시. 다시.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오로지 그것뿐이야. 당신들은 어째서 내 마음을 이해하 지 못하는 거지? 나머지는 다 하찮은 것일 뿐이야. 삶이란 내가 조금 전에 느낀 것을 경험 하기 위한 작고 보잘것없은 수단들의 연속에 지나지 않아. 세상사 모든 것이 다 거기로 통 해....... 다시, 제발, 다시, 다시, 다시, 다시. 112 움베르토는 자기 이야기에 대한 좌중의 반응에 적이 만족해 하면서, 해포석 파이프를 꺼내 불을 붙인다. " 세상에 그보다 더 강한 것은 없소. 돈이나 마약이나 섹스 따위는 그 부위를 자극하기 위 한 간접적이고 하찮은 수단들일 뿐이오. " 모두가 그 새로운 정보의 중대성을 가늠하면서 입을 다물고 있다. 이윽고 뤼크레스가 다시 말문을 연다. " 우리는 MFB를 자극하기 위해서 음식을 먹소. 우리가 말하고 걷고 숨 쉬는 것도, 우리가 무언가를 시도하고 사랑을 나누고 전쟁을 벌이고 선행이나 악행을 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도 다 최후 비밀이라는 그 부위에 전기 자극을 받기 위한 거요. 이건 우리의 행동을 근본 적으로 좌지우지하는 우리 내부의 가장 중대한 프로그래밍이오.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에도 의욕을 느끼지 못할 것이고, 그냥 우리 자신이 죽어 가게 내버려 둘 겁니 다. " 그들은 다시 침묵에 잠긴 채, 자기들 접시에 남아 있는 양의 골을 바라본다. 제임스 올즈의 발견이 갑자기 엄청난 의미로 다가와 그들의 머리를 어질어질하게 만들고 있다. 제롬이 콧수염을 비틀면서 묻는다. " 그런데 그토록 중대한 발견이 어째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죠? " 움베르토는 파이프를 내려놓고 웨이터를 불러 고추 양념을 가져오게 한다. 그러더니 빵 한 조각을 그것에 적셔 한 입에 먹어버린다. 그는 갑자기 벌게진 얼굴을 찡그리며 숨을 헐떡인 다. " 이제 다른 음식의 맛은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겠군요....... 최후 비밀이라는 것도 이와 비슷 한 게 아니겠소? 그것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것은 다른 모든 행위를 시들하게 만들죠. 앞 서 말했듯이, 그 실험에 사용된 쥐들은 먹는 것과 자는 것과 교미하는 것과 같은 필수적인 생명 활동조차 잊어버렸소. 그건 절대적인 마약이죠. 쥐들은 너무나 강한 빛에 눈이 멀어서 세상의 다른 빛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 그는 나이프로 빵을 한 조각 썰어서 입 안에 넣고 오랫동안 씹는다. 마치 자기 몸속에서 일고 있는 불길을 진정시키려는 듯하다. 이지도르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한다. " 그렇군요. 파라켈수스의 어법을 빌려서 말하자면, <적은 자극은 흥분을 일으키고, 많은 자극은 황홀경을 야기하며, 너무 많은 자극은 죽음을 가져오는 법>이죠. 만일 최후 비밀을 직접 자극하는 것이 세상에 널리 퍼진다면, 오늘날 우리가 헤로인이나 크랙이나 코카인 때 문에 겪는 갖가지 문제들보다 몇 배나 더 심각한 문제들이 생겨날 겁니다. " 움베르토는 고추를 괜히 먹었다고 생각하면서 물을 달라고 한다. 하지만 물을 마시는 것으 로는 몸속의 불길을 완전히 잡을 수 없다. " 제임스 올즈는 지각이 있는 과학자였소. 자기 발견이 아주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 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죠. 만일 그 마약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다면, 전세계의 마피 아들이 그것을 가로채려 할 것이고, 길을 잃고 헤매는 세상의 모든 낙오자들이 그것을 요구 하다 그것의 노예가 되고 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요. 올즈는 어쩌면 이런 미래 사회 를 상상했을 지도 모릅니다. 인류가 그 당근에 속박되어 있어서, 독재자들이 우리에게 무엇 이든 강요할 수 있는 사회 말이오. 올즈는 이미 1954년에 최후 비밀의 발견이 인간 의지의 소멸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했던 거요. " 이제 아무도 음식에 손을 대지 않는다. 뤼크레스는 시민들이 모두 뒤통수에 전기 접속 단 자를 단 채 오로지 뇌에 약간의 전기 자극을 더 받을 궁리만 하며 사는 세계를 상상해 본 다. 113 그는 전압계의 전선을 더듬더듬 집어 들고 그것을 다시 전원에 연결시키려고 했다. 그때, 올가가 일어서더니 주사기 하나를 잡고 마취제를 가득 채운 다음 그것을 그의 옆구리에 찔 러 넣었다. 그는 주사액이 몸속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지만, 정신의 각성 상태를 유지하 면서 전설을 계속 잡아당겼다. 그러자 이번엔 다른 간호사들이 그에게 주사를 놓았다. 그는 주사기들을 밀어내려고 버둥 거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창으로 찌르는 피카도르들에게 둘러싸인 성난 황소 같았다. 그가 고함을 쳤다. " 다시! " 마침내 마취제의 효력이 나타났다. 사뮈엘 핀처는 서 있는 자세에서 그대로 허물어져 내렸 다. 수술실에 있던 모든 러시아 인들은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핀처는 깊은 잠에 빠져들면서 혼잣말로 되뇌었다. ...... 다시 ...... 114 다시 물. 화끈거리는 혀 유두를 달래기 위한 물이다. " 놀라운 얘기로군요. " 제롬 베르주락의 경탄에 뤼크레스가 맞장구를 친다. " 충격적이네요. " " 나는 무섭다는 생각이 드네요. " 이지도르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움베르토 선장은 아까 먹은 고추 떄문에 이젠 땀까지 흘리고 있다. " 제임스 올즈는 자기 발견이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굳이 알고 싶어하지 않았소. 그 는 자기 발견을 없었던 일로 만들기로 결심한 다음, 자기 논문을 폐기하고 함께 일했던 사 람들을 모두 불러 모아 최후 비밀에 관한 실험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맹세할 것을 요구했 소. " " 그들이 받아들였나요? " " 제임스 올즈는 자기 발견이 가져올지도 모를 미래를 그들에게 묘사하면서 그들을 설득했 소. 진정한 과학자라면 누구도 인류를 파멸시키고 싶어하지 않을 거요. 종족 보존의 체계는 우리의 사고 체계를 초월해 있어요. 우리 뇌의 가장 원시적인 부분인 파충류의 뇌 속에 종 의 영속을 보장하는 안전 장치가 숨어 있소. 이 안전 장치는 우리가 물고기였던 때에도 있 었고, 우리가 단세포 생물이었을 때도 존재했을 거요....... " 웨이터가 프로방스 식 소스에 흥건하게 젖은 닭고기를 가져온다. 그런 이야기를 한 뒤끝이 라 그런지, 머리에 밀가루를 입혀 구운 닭의 주검이 푸성귀 한복판에 놓여 있는 게 자못 비 장한 느낌을 준다. 아무도 닭고기에 손을 대지 않는다. " 생명의 힘이란....... " 이지도르가 말끝을 흐린다. " 제임스 올즈와 그의 동료들은 자기들의 자녀와 그 뒤에 태어날 후손들을 생각했을 겁니 다. 학문적인 영예보다는 자손의 미래가 더 중요하죠. 게다가, 그런 발견이 가져올 나쁜 결 과를 자기 책임으로 떠맡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소? 인류가 모두 쾌락에 취해 더 이상의 도전도 모험도 없는 세상이 올지도 모르는데, 그런 사태를 책임지고 싶은 과학자가 있겠소? " 모험이라는 말이 나오자 제롬이 눈을 반짝인다. 움베르토는 숨을 한번 길게 내쉬고 나서 말을 잇는다. " 그들은 맹세를 했고, 제임스 올즈는 최후 비밀의 위치가 밝혀져 있는 모든 기록들을 없 애 버렸소. 실험에 사용된 쥐들도 모두 희생되었죠. 그 뒤로 올즈는 최후 비밀 근처의 다른 부위를 연구하는 데에 전력했소. 간질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게 해주는 영역을 찾아내기 위 해서 말이오. " 뤼크레스가 토를 단다. " 우리가 주식 시장과 군수 산업 자본가들과 비양심적인 과학자들이 지배하는 파렴치한 세 상에 살고 있는 줄 알았더니, 그 올즈 씨처럼 직업적인 도의를 저버리지 않는 과학자도 있 군요. " 이지도르가 묻는다. " 그것으로 모든 게 없었던 일로 됐나요? " " 최후 비밀은 대단히 정확한 좌표를 가진 미세한 구역이오. 그 좌표를 알고 있지 않으면, 거기에 영향을 미칠 수 없어요. 몇몇 사람들이 시도를 하긴 했지만, 뇌에서 그 지점을 찾는 것은 건초 더미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은 일이오. " 뤼크레스는 건초 더미에서 바늘을 찾으려면 건초에 부릉 ㄹ지르고 자석을 그 재에 갖다 대 면 된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는 것을 도로 삼킨다. 움베르토의 이야기에 푹 빠진 제롬이 묻는다. " 그래서요? " 움베르토는 그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하고는, 이웃한 테이블에 들리지 않게 하려는 듯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 결국에는 배신자가 하나 나타나고 말았소. " 115 체르니엔코 박사는 자기 환자의 얼굴 위로 몸을 숙였다. " 핀처 씨, 좀 나아졌어요? 당신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질겁했는지 알아요? " 그는 자기가 견고한 가죽 띠로 침대에 묶여 있음을 알아차리고,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일으 켰다. 그 서슬에 침대가 들썩했지만, 그는 다시 침대 위로 떨어졌다. " 다시 해! 그걸 더 느끼고 싶어. " 체르니엔코 박사는 그에게 또다시 마취제 주사를 놓았다. 116 " 누가 배신을 했죠? " " 이제부터 하는 얘기는 핀처 박사에게서 들은 거요. 그 비밀을 누설한 사람은 올즈와 함 께 일했던 신경 의학자였소. 체르니엔코 박사라는 여자였죠. 그녀는 1954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비밀을 지키기로 맹세를 했소. 하지만 헤로인 중독자인 자기 딸이 세 차례나 자살을 기도하고 난 뒤에 올즈의 발견이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어 볼 수 있는 해결책이라고 생각했 죠. 그녀는 동료들이 금방 알아차릴 가능성이 많은 미국에서는 일을 벌일 수가 없어기 때문 에, 러시아로 돌아갔소. 그런 다음 상트 페테르부르크 뇌 클리닉에서 자기 딸을 수술했소. 당시에는 그녀의 활동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ㅡ 아무런 장애 없이 수술을 끝낼 수 있었죠.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소. 그녀의 딸은 약물 봉용을 중단하고 정상적인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지요. 물론 그녀는 최후 비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소. 하지 만 마약 중독자들의 뇌에서 습관성과 관련된 영역을 제거할 줄 하는 놀라운 외과 의사가 있 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는 것은 막을 수 없었지요. 당시에 러시아 재무 장관은 헤로인 중독 자인 아들 때문에 말도 못하게 속을 끓이고 있었소. 그는 그 소문을 접하고, 자기 아들을 구 하기 위해 압력을 넣었소. 체르니엔코 박사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거요. 어쨋거 나 그녀는 수술에 성공했어요.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소. 재무 장관 아들의 뒤를 이어, 다른 고급 공무원들의 자제와 인기 록 가수들과 영화배우들이 수술을 받았고, 나중에는 일 반 부유층의 자녀들까지 수술을 받게 되었어요. 그들은 러시아 전역에서 두 개골 천공 수술 을 받겠다고 찾아왔소. 체르니엔코 박사는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제대로 설명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러시아 정부는 서구인들조차 알지 못하는 새로운 치료법을 시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냥 만족해 하고 있었지요. " 더 이상 아무도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웨이터는 닭고기가 통째로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그들 대신 고기를 썰어 각자의 몫을 접시에 담아 준다. " 체르니엔코는 쾌감 중추를 제거한 거로군요. 안 그렇습니까? " 제롬의 물음에 움베르토는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한다. " 그녀는 대담했던 것 같소. 수술할 때마다 1.5세제곱밀리미터의 골을 잘라 냈으니까요. " " 수술 받은 사람들은 그 뒤에 상태가 어땠지요? " " 조금 지나치게 우울해 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소. 하지만 부모들은 마약 때문에 자녀 들을 잃는 것보다는 그런 식으로라도 살리는 게 낫겠다 싶어서 주저하지 않고 수술을 시킨 거죠. " 움베르토는 물을 마시고 또 마셔도 목의 얼얼함이 아직 가시지 않은 모양이다. 그는 빵 조 각에 버터를 발라 입 안에 우겨 넣는다. " 핀처 박사가 어떻게 그 체르니엔코라는 박사를 알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그 녀를 만나 최후 비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극해 달라고 부탁했소. " " 그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군요. " 그러면서 이지도르가 한숨을 짓는다. " 뇌 속에 전극을 심고 특정한 주파수로 이것을 작동시켜 최후 비밀 부위를 자극하게 한 거요. " 뤼크레스는 주위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먹고 마시고 떠드는 그들의 모든 행동이 다 쾌감 중추를 간접적으로 자극하기 위한 것이란 말인가 하고 생각한다. 그녀가 묻는다. " 그녀는 핀처를 상대로 한 수술에 성공했나요? " 117 그는 가죽 띠에 묶인 채 버둥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자기가 거기에 있는 이유를 생각해 내 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사뮈엘 핀처는 자기 정신을 활활 타오르게 했던 그 쾌감을 아쉬워하 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체르니엔코 박사가 물었다. " 자극이 오던가요? " " 예. " 굉장했죠. 세상이 온통 환하게 빛나는 느낌이었죠. " 어땠나요? " " 강렬했어요. 대단히 강렬했지요. 이제껏 경험한 그 어떤 것보다 강했어요. " "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쾌감에 1에서 20까지 등급을 매긴다고 할 때, 당신이 느낀 것은 어느 정도의 쾌감이었지요? " 핀처는 이마에 주름을 잡고 최선의 대답을 찾아내기 위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중얼거린다. " 글쎄요. 이제까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것이라서......20은 턱없이 모자라고 100정도는 될 겁니다. " 118 움베르토 선장은 소금을 달라고 해서 자기 빵에 뿌린다. 짠맛으로 매운맛의 고통을 잠재울 생각인 모양이다. " 수술에 성공했느냐고요? 사실 제임스 올즈의 발견을 적용하는 수술이었기 때문에, 중요 한 건 그 정보의 정확성 여부이지 수술 그 자체는 아니었어요. 어쩄거나 굳이 성공이냐 아 니냐를 따진다면,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요.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소. 사뮈엘 핀 처가 자기 자신에 대한 자극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을 그 자신에게 맡 길 수 없다는 게 문제였소. 그가 하고 싶어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쾌감 때문에 스스 로를 죽일 염려가 있었던 거죠. 프로이트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오. " "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말인가요? " " 아뇨, 핀처의 실험실에서 최후 비밀을 활성화하는 실험에 처음으로 이용되었던 생쥐 프 로이트를 말하는 거요. 결국 핀처에게는 외부에서 자기 대신 자극을 공급해 줄 사람이 필요 했소. 그는 자기 뇌 속의 전극에 특정한 주파수의 전파를 보내는 무선 송신기를 만들고, 이 송신기가 어떤 암호에 의해서 작동되도록 프로그래밍을 했소. 그 암호는 송신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만 알 뿐 핀처 자신도 모르게 되어 있었지요. " " 그 암호를 알고 있던 사람이 누구죠? 체르니엔코인가요? " " 아니오. 그는 체르니엔코를 신뢰하지 않았소. 수술 당일에는 체르니엔코가 자기 마음데로 그의 뇌에 전기 자극을 보낼 수 있었겠지만, 그 다음날부터는 그녀가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도록 그가 적절한 조치를 취한 거죠. 그 뒤로는 오직 한 사람만이 핀처의 머릿 속에 예의 강렬한 쾌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소. " " 그게 누구죠? " 움베르토는 그들에게 다시 자기 쪽으로 몸을 숙이라고 손짓을 한 다음 나직하게 속삭인다. " <아무>요. " " <아무>가 누군데요? " " 그건 나도 모릅니다. 그에게 말을 할 수는 있었지만, 그를 볼 수는 없었소. <아무>라는 이름은 십중팔구 오뒤세우스의 이야기와 관계가 있을 거요. 그 대목 생각나시오? 오뒤세우 스가 퀴클럽스를 취하게 할 양으로 포도주 한 대접을 주자 퀴클롭스는 그것을 받아 마시고 나서 말하지요. <지금 당장 그대의 이름을 내게 말하라. > 그러자 오뒤세우스가 대답합니 다. < 퀴쿨롭스여, 세상 사람이 다 아는 내 이름을 알고 싶소? 이제 그것을 말할 테니 약속 한 선물을 내게 주시오. 내 이름은 아무요.> " 이지도르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뤼크레스가 다시 묻는다. " 오뒤세우스, 곧 윌리스는 사뮈엘 핀처가 어렸을 때 그의 병을 낫게 해준 그 자폐증 아이 의 이름이 아닌가요? " 아무...... 윌리스....... 이지도르는 포켓용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한 다음, 사뮈엘 핀처가 여섯 살이던 시절에 자 폐증 전문 클리닉을 운영하고 있었던 병원들의 목록을 찾아낸다. 그러고 나서 그는 윌리스 라는 이름을 가진 환자들을 찾기 시작한다. " 윌리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군요. " 마침내 그가 한 사람을 찾아낸다. 윌리스 파파도풀로스다. 이제 시청이나 구청 등의 호적 차일 검색 엔진에 접속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이지도르가 알아낸 것은 윌리스 파파도풀 로스라는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벌써 십여 년 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뤼크레스는 자기 동료의 어깨 너머로 그의 작업을 지켜보면서 생각한다. 이 작은 컴퓨터 덕분에 절약되는 시간이 얼마나 많은가? 옛날 같으면 이런 정보 하나를 알 아내기 위해 온갖 곳을 다 돌아다니고도 허탕을 치기가 일쑤였을 텐데 말이야....... " 나는 <아무>가 누군지 모르오. 하늘에 두고 맹세할 수 있소. 하지만, 이건 분명히 말할 수 있소. 그는 핀처가 모든 걸 믿고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한 유일한 사람이었소. 한번은 핀처 가 이런 말을 했어요. < <<아무>>라는 친구는 자기의 힘을 절대로 나쁘게 사용하지 않을 거야. 생각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그 자신이 큰 대가를 치렀기 때문일세. > " " 그 <아무>라는 자가 핀처를 죽인 게 아닐까요? " " 그 점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소. " 뤼크레스는 자기 동료의 작은 컴퓨터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친 듯 단호하게 말한다. " 나는 그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아요. 그자는 인간의 온갖 약점을 초월해 있는 존재예요. 내 일이면 그 점을 분명히 확인하게 될거예요. 자아 이지도르, 갈까요? " " 그러면 우리는 뭘 하죠? " 제롬 베르주락이 묻자, 그녀가 알 듯 말듯하게 대답한다. " 아마 나중에 우리가 도움을 청하게 될 거예요. 때가 되면 부를 테니 준비를 하고 계세요. 움베르토도 감시해 주시고요. " 119 사뮈엘 핀처는 자기 실험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서 자기 의지력을 더 이상 온전히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 오기 전에, 송신기를 작동시키는 특별한 방식을 고안하기로 하였다. 체르니엔코 박사는 그의 요구대로 뇌 속의 수신기와 동일한 주파수를 가진 무선 송신기를 만들도록 사람들에게 시켰다. 이 송신기는 핀처가 모르는 어떤 암호를 통해서만 작동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핀처는 성 마르그리트 병원에 돌아와서, 장 루이 마르탱에게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를 설명하였다. 그런 다음, 자기가 직접 마르탱의 컴퓨터에 송신기를 연결해 주었다. 마르탱 은 이내 그 송신기를 작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의 암호를 아는 사람은 물론 마르탱 한 사람뿐이었다. 핀처가 그에게 말했다. " 자네는 이제 내 무의식이 되는 걸세. " <내가 자네의 무의식이 된다면 자네는 덤으로 하나의 무의식을 더 얻는 것일세. 나 역시 나의 무의식인 아테나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기 때문이지. 나와 아테나가 자네에 대해서 어 마어마한 힘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절대로 우리의 힘을 남용하지 않을 걸세. 맹세하겠네. > 핀처는 모자를 벗고 자기 머리를 보여 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저마다 곤충의 더듬이 같은 것을 머리에 달고 있는 모습이 었다. 마르탱의 경우에는 헝겊 모자 위로 전선이 나와 있었고, 핀처는 무선 통신용 안테나를 달고 있었다. " 이게 사람들 눈에 너무 잘 띄는 것 같아서. 평면 안테나를 하나 주문했네. 그건 크기가 살갗에 붙은 점 정도밖에 안 된다네. 그게 도착하고 머리카락이 충분히 자라서 그걸 감출 수 있게 되면, 이 모자를 벗고 다닐 걸세. " <자네에겐 모자가 잘 어울리는걸. > " 윌리스, 아테나, 이제 자네들이 날 도와주게. 내가 예전보다 훨씬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도록 말일세. " 리스 환자 마르탱은 자기 의사가 자기를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느꼈다. 그리고 자기가 참여하게 될 실험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던 터라, 그는 자기 역할을 아주 성실하게 수행하리라 다짐하였다. 그는 먼저 새로운 지능 검사 세트들을 고안했다. 이 지능 검사들은 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졌다. 핀처는 문제를 해결하고 상으로 최후 비밀에 전기 자극을 받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 다. 전기 자극은 매번 마술적인 효과를 낳았다. 마르탱은 어느 정도의 양이 적당한지를 정확하 게 알고 있었다.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안 되었다. 1백만 분의 1볼트만 차이가 나도 효과 가 사뭇 달랐다. 최후 비밀이라는 구역은 그토록 자극에 민감하였다. 보통의 지능 검사 세트들이 핀처에게는 너무나 시시한 것이 되어 버리자, 마르탱은 핀처가 이제 인간 지능의 모든 표준을 초월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핀 처에게 지능 계발의 무한한 영역인 체스를 활용할 때가 되었다고 알려 주었다. 핀처는 곧바로 시의 체스 클럽에 가입하였다. 그는 클럽의 모든 기사를 상대로 차례차례 승리를 거두어 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지역의 최강자가 되었다. 그때를 같이하여 핀처의 외모에도 변화가 생겼다. 예전보다 한결 당당하고 활기 찬 모습이 다. 하지만 눈빛은 늘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불안해 보였고, 이따금 까닭 없이 미소를 짓 는 버릇이 생겼다. 그의 삶에도 변화가 있었다. 그는 빛을 내서 앙티브곶에 있는 더 넓은 빌 라를 샀다. 그는 끊임없이 감각적인 자극을 좇고 있었다. 그가 에피쿠로스 주의자들의 클럽인 시에렝 가입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클럽의 회원들은 그와 똑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었다. 더 많은 쾌락이 바로 그들의 목표였다. 그는 이 클럽에서 나타샤 안데르센을 만났다. 그것은 예사롭 지 않은 만남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반하였다. 무엇보다 먼저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금 방이라도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그녀의 선녀 같은 특성이었다. <마치 홍진 속에 서 노닐고자 스스로 인간 세계에 내려온 여신 같아>하고 그는 생각했다. 미샤는 두 사람 다 체스 애호가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서로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들은 마치 춤을 추듯이 체스를 두었다. 말들은 서로 잡아먹는 대신, 서로 살짝살짝 스치 고 지나가며 교묘히 접전을 피하였다. 마치 아무도 의미를 간파하지 못하는 난해한 안무를 따르고 있는 듯했다. 대국이 진행되어 가면 갈수록, 체스판 위의 작은 나무 조각상들이 이루 어 내는 광경은 더욱 의미심장한 것이 되어 갔다. 그들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닌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 내고 있음을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이 여자는 참으로 맑고 참으로 밝다. 나에겐 이런 밝음이 필요하다. 나는 때때로 나 자신이 너무 어둡다고 느낀다. 그날 밤, 그는 체스의 비숍처럼 굴었고 그녀는 퀸 노릇을 하였다. 때마침 덧없는 사랑 놀음에 싫증을 내고 있던 터에, 그는 그녀를 통해서 여성성의 본질에 닿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타샤는 그에게 결여된 것을 가장 완벽하게 보완해 주는 존재였 다. 둘은 서로를 보완할 뿐만 아니라 동일한 것을 지향하고 있기도 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새로운 삶과 새로운 감각에 늘 목말라 하는 부류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갈수록 강 력해지는 쾌락의 소용돌이에 함께 빨려 들어갔다. 그 즈음에 핀처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두 고두고 그를 따라다니게 될 질문이었다. 120 그런데...... 나는 진정 무엇 때문에 이 모든 일을 기도하고 행하는 것일까? 나를 무엇에 이 끌려 행동하는가? 제3막 우리 머릿속의 보물 121 햇살이 눈부시다. 하늘빛 해안을 끼고 달리는 7번 국도, 활짝편 미모사들 사이에서 새들이 지저귄다. 두 사람을 태운 구치 오토바이가 트럭들을 추월하고 승용차들 사이로 슬랄룸을 하면서 도로을 헤쳐 나간다. 이지도르는 한 손으로 헬멧을 붙잡고 있다. 비행사 안경에 부 딪쳐 오는 바람이 세차다. 뤼크레스는 몸을 약간 숙인 채 적갈색 머리를 휘날리며 가속 손 잡니를 돌리고 있다. 그들은 로마 시대의 유적지를 지나고, 훨씬 더 오래된 또 다른 폐허를 스쳐 지나간다. 딥 블루 IV를 제작한 미국 컴퓨터 회사는 칸과 이웃한 도자기 공예의 도시 발로리스에 판 매 대행사를 설립한 바 있다. 이 회사의 초현대적인 건물은 오래된 석조 건물 사이에 섞여 있다. 뤼크레스는 주차 금지 표지판 기둥에 오토바이 앞 바퀴를 사슬로 묶는다. 혈색 좋은 회사 관리자 하나가 그들을 맞아 준다. 나무랄 데 없는 초록색 정장에 베이지색 셔츠를 받쳐 입고 역시 베이지색 넥타이를 맨 차림이다.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 에 자신감이 넘치고, 친절하고 개방적인 태도에는 지나치게 꾸미는 듯한 기색이 느껴진다. 우수한 경영 대학원에서 배웠음 직한 상업적 열의도 엿보인다. 그가 얄쌍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손은 야위웠어도 쥐는 힘이 제법 세다. "크리스 맥킨리입니다. 저희 프로방스 지사에 파리의 언론사에서 오신 분들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지만 이왕 저희 회사를 독자들에게 소개하시려면, 미국 플로리다 주 올랜도 에 있는 본사를 가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꼭 한번 가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뤼크레스가 적갈색 머리채를 흔든다. "우리는 귀사에 대한 기사를 쓰려고 온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일하는 어떤 자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왔어요." "혹시 누가 실수를 저질렀나요? 그 종업원 이름이 뭐죠?" "이름은 <딥>, 서응ㄴ <블루 4>, 앞부분이 은빛으로 된 커다란 입방체죠." 크리스 매킨리는 그들을 자기 사무실로 데려간다. 벽들이 대형 액정 화면으로 덮여 있고, 그 화면에 루브르 미술관의 전시품들이 5초당 한 작품 꼴로 펼쳐지고 있다. 그의 회전의자 뒤쪽에는 체스의 대영인들과 최초로 대국을 벌인 슈퍼 컴퓨터 딥 불루의 포스터가 붙어 있 다. 그 왼쪽에는 딥 불루의 후계자로서 게리 카스파로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디퍼 블루, 곧 딥 블루2의 포스터가 붙어 있고, 그 위쪽 선반에는 <체스 세계 챔피언>이라는 말이 새 견진 우승컵이 놓여 있다. 또한 레오니드 카민스키와 대국을 걸인 딥 블루4의 포스터도 보 인다. 인간에 대한 컴퓨터의 승리를 입증하는 또 하나의 우승컵과 함께. "앉으시죠. 딥 블루 4는 해고되었습니다. 대국에서 졌으니까요. 고용주의 기대를 저버린 거 죠. 투우에서도 그러하듯이, 패자에게는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습니다." "투우에서는 승자에게도 두 번 다시 기회가 없는 경우가 있죠. 승자가 황소일 때가 그렇습 니다. 사람들은 황소에게는 다시 사울 기회을 주지 않습니다." 맥킨리는 압형으로 글자를 박아 넣은 은빛 명함을 기계적으로 내민다. "맞는 말씀이군요. 제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어쨌거나 딥 블루4는 만인들 앞에서 우리를 웃 음거리로 만들었어요. 그 기회의 책임자는 좌천되었고, 그 켬퓨터도 퇴출당했죠. 우리 회사 의 표어 중에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실패하는 사람은 핑곗거리를 찾아내고, 성공하는 사 람은 수단을 찾아낸다.>" 아닌 게 아니라 그 표어가 적힌 팻말이 사무실 벽에 높이 걸려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딥 블루4는 책임을 져야 할 <존재>가 아니지 않나요?" 미국인 관리자는 입을 비죽이 내밀며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하긴, 딥 블루4가 설령 이겼다 해도 여기에서 오래 버티지는 못했을 겁니다. 컴퓨터 분야 에서는 진보가 너무나 빠르기 때문이죠. 그 대국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딥 블루 4를 능가하는 새로운 컴퓨터가 나왔습니다. 우리는 현재 딥 블루 5를 개발해 놓고 마지막 조정 작업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신문에서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 딥 블루5는 곧 인간 세계의 새 로운 체스 챔피언과 대국을 벌일 겁니다. 자아 보시죠. 이게 바로 우리의 새로운 글래디에이 터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두꺼운 아트지로 된 홍보 책자를 두 사람 쪽으로 내민다. 이지도르는 책자를 조금 뒤적이다가 속내를 감추고 짐짓 무심결인 양 묻는다. "이런 컴퓨터들은 사고 능력이 어느 정도나 되나요?" 맥킨리는 두 기자에게 계속 말을 하면서, 커다란 평면 모니터를 갖춘 개인용 컴퓨터를 켠 다. 건성건성 손을 놀리는 것으로 보아, 급한 용무가 있는 것 같지는 않고 자기 전자 우편이 나 확인해보려는 듯하다. 하지만 그는 자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남녀가 어떤 사람들 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어떤 데이터뱅크에 접속을 하고 있는 중이다. 확인해 본 즉, 남자는 전직 기자이고 여자는 대단찮은 객원 기자다. 또 남자는 단지 여자를 위해서 일을 도와주고 있다. 맥킨리는 몸을 뒤로 젖혀 회전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전문가적인 어조로 다시 말문을 연다. "그 문제는 상대적인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컴퓨터가 제 아무리 복잡하다 해도 아직 우리 인간처럼 사고할 수는 없습니다. 두분이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만일 세상의 모든 컴퓨터를 연결해서 하나로 합친다면, 그것이 몇 사람의 뇌를 연결한 것에 해당할까요?" "천만 명이나 일억 명쯤의 뇌를 합친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한사람의 뇌에 해당합니다." 두 기자는 그의 말뜻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그렇다니까요... ..., 사람의 뇌는 세상의 모든 컴퓨터를 합친 것만큼이나 복잡한 네트워크 를 지니고 있어요. 사람의 뇌에는 2천억 개의 뉴런이 들어 있다고 입니다. 은하수에 있는 별 만큼이나 많죠. 그리고 각각의 뉴런은 천 갈래로 접속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두 기자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러니까, 컴퓨터는 인간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군요."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는 없죠. 그 대신 우리는 천천히 사고하니까요. 신경 자극은 시속 3 백 킬로미터 정도의 속도로 전달됩니다. 컴퓨터 신호는 그보다 천 배나 빨리 전달되죠." 뤼크레스는 수첩을 꺼내어 맥킨리의 말을 적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컴퓨터가 우리 인간을 능가한다는 말이군요."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는 없죠. 우리 인간은 상대적인 <느림>을 사고의 <다양성>으로 벌충하니까요. 우리는 1초당 수백 가지연산을 동시에 실행합니다. 그에 비해서 컴퓨터는 기 껏해야 열가지 정도의 연산을 동시에 실행할 뿐이지요." 뤼크레스는 앞서 적은 것을 지우기 위해 줄을 긋는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 컴퓨터보다 강하다는 얘기로군요." 맥킨리는 이 젊은 여자의 이력서를 찾아내고, 여러 행정 관청의 사이트를 뒤져 그녀의 사 진 몇 장을 수집한다. "그렇다고 볼 수도 있죠. 뇌를 많이 쓰고 공부를 많이 하면 우리 뉴런의 접속 상태가 점점 좋아지죠. 뇌에 지식과 정보라는 영양을 많이 공급하면 할수록, 뇌는 점점 강해지는 겁니 다." "그러니까, 인간이 앞으로도 변함없이 위위에 설 거라는 얘기로군요." 그는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젓는다.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는 없죠. 인간의 지식은 십 년마다 배로 늘어나지만, 컴퓨터의 성능 은 18개월바다 배로 좋아지니까요. 인터넷으로 말하자면, 해마다 네트워크가 배로 확대되고 있어요." "그러니까, 시간은 컴퓨터의 편이라는 건가요? 결국엔 컴퓨터가 우리를 이길 수밖에 없다 는 얘기로군요."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는 없죠. 컴퓨터는 아직 중요한 정보와 중요하지 않은 정보를 선별 할 줄 모르니까요. 처리하는 정보의 양에 있어서는 컴퓨터가 우리를 능가하지만, 좋은 정보 를 걸러내는 데에 있어서는 우리를 따라올 수가 없습니다. 컴퓨터는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느라고 시간을 많이 허비하지만, 우리는 오로지 중요한 요소들만 선별하지요. 예 컨대 체스를 둘 때, 컴퓨터는 수천 가지의 불필요한 조합을 검토하지만, 사람은 금방 최선의 조합 서너 가지를 골라냅니다." "그러니까... ... 인간이... ... 변함없이... ..."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는 없죠. 프로그램들 역시 아주 빠르게 진화하고 있으니까요. 프로 그램은 컴퓨터의 사유 양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신 세대의 인공 지능 프로그램 들은 저희의 성공이나 승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또는 네트워크를 통해 새로운 프로그램들을 만나면서 저희 자신의 프로그래밍을 변화시킵니다. 경험을 자꾸 쌓아 나가고 다른 프로그램 들과 계속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쓸모 없는 정보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법을 배 우고 저희들 자신의 분석 능력을 키워 나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 맥킨리는 뤼크레스의 말을 자르기라도 하듯 두 손을 모아 손가락 끝을 맞댄다. "사실, 이건 막상막하의 싸움입니다. 컴퓨터의 지능이나 인간의 지능이 어디까지 나아갈지 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이 두 분야에서는 앞으로 나아가면 갈수록 모르는 게 점점 많아지죠. 그나마 저게 있어서......" 그는 말끝을 흐리며 자기 뒤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가리킨다. "이 체스 경기가 결국은 유일한 객관적 척도인 셈입니다. 인간의 뇌와 컴퓨터 프로그램을 재격시켜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죠." 맥킨리는 넥타이의 매듭을 고치면서 잠시 생각한다. 이들은 기자다. 귀에 쏙쏙 박힐 만한 간명한 문구를 제시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대로 옮 겨 쓸 수 있을 것이다. "요즘에 우리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컴퓨터는 현재 여섯 살 난 아이 의 의식 수준을 지니고 있다고 말입니다." "<의식>이라고요?" "물론입니다. 이제는 인공 지능 프로그램이 아니라 인공 의식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컴퓨터로 하여금 제가 기계라는 것을 깨닫게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죠." "딥 블루4도 제가 기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이지도르가 그렇게 묻자, 맥킨리는 대답에 뜸을 들인다. "그렇습니다." 이번엔 뤼크레스가 묻는다. "딥 블루4가 욕망을 품을 수 있는 컴퓨터라면, 체스 경기에서 인간을 이기는 것 말고 다른 욕망을 품을 수도 있었겠네요?" "십중팔구는 그랬을 겁니다. 딥 블루4는 퍼지 논리에 바탕을 둔 새로운 연산 체계를 갖추 고 있었어요. 다시 말해서, 독자적인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있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문 제는 어떤 수준에 다다르면 양상이 너무나 복잡애서 저로서도 뭐라고 단정적으로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대로는 엔지니어들조차 자기들이 만든 컴퓨터가 정확히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컴퓨터가 저 혼자서 배워 나가기 때문입니다. 딥 블루 계역의 컴퓨터 는 저 스스로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는 컴퓨터죠. 딥 블루4가 과연 무얼 배우고 싶어 했을 까요? 인터넷에 접속하면 너무나 많은 정보와 매체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딥 블루4가 < 호기심>을 가졌던 분야가 무엇인지 우리로선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알아내자고 컴퓨터 를 감시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어쨌거나 감시란 너무 지겨운 일이죠." "컴퓨터들이 정말 의식의 맹아를 보이고 있다고 생가하세요?" 맥킨리가 벌쭉 웃는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바로 며칠 전부터 저희가 컴퓨터에 대한 애프터서비스를 위해 심리 치료사를 고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심리 치료사요?" 맥킨리는 인터넷으로 들어가서 새로운 정보 서비스에 접속한다. 이 두사람이 잠자리를 함께 하는 사이인지 어디 좀 볼까? 그는 파일 하나를 열어서 두 사람이 예약한 호텔의 객실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엑셀시오르 스위트룸 122호실. 침대가 2개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그래서 그 는 이 호텔의 청소부들이 작성한 보고서들을 검토한다. 침대 두 개가 모두 흐트러져 있었음.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5분 전만 해도 생판 모르던 사람들에 관해서 그토록 많은 것 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재미있다. "맥킨리 씨. 심리 치료사를 왜 고용한다는 거죠?" "아마도 자기가 진정 누구인지를 궁금해 하는 컴퓨터들을 편안하게 달래 주기 위해서일 겁 니다." 그러면서 그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린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가 이런 실존적인 질문 들을 우리 자신에게 너무 많이 제기하다 보니, 그것들이 컴퓨터들에게로 옮아 간 모양입니 다." 이지도르는 포켓용 컴퓨터를 꺼내, 마치 그 정보를 기록하는 양하며 자판을 두드린다. 하지 만 그 역시 슬며시 인터넷에 접속해서 딥 블루IV를 제작한 기업의 데이터 뱅크를 뒤죠 <모 범 사원 크리스 맥킨리>의 개인 파일을 찾아낸다. 이지도르는 열었던 문서를 닫으며 생각한다. 이자는 자기 자신의 파일을 변경시켰다. 이자는 해커임에 틀림없다. 맥킨리는 중대한 비밀이라도 털어놓듯이 몸을 앞으로 숙이며 말을 잇는다. "딥 블루5는 생체 칩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이용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실리콘으로 된 칩이 아니라 살아 있는 물질로 된 새로운 침을 사용한다는 것이지요. 당분간은 식물성 단백 질로 만들겠지만, 나중에는 동물성 단백질로 넘어갈 것입니다. 광물성 칩을 가진 컴퓨터들의 소형화는 이제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이 새로운 칩은 컴퓨터의 성능을 백배나 향상시킬 겁 니다. 저는 딥 블루5가 체스 세계 챔피언 자리를 컴퓨터에게 되돌려 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맥킨리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더 이상 시간을 내줄 수 없다는 뜻을 알려온 다. 그가 어떤 버튼 하나를 누르자 문이 옆으로 스르르 미끄러진다. 그는 두사람을 배웅할 경비원 두 명을 부른다. 하지만 이지도르에겐 아직 물어볼 게 남아 있다. "지금 딥 블루 4는 어디에 있지요?" 맥킨리는 기업과 언론이 공생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낡은 기계에 관심이 많으신가 보죠?" 맥킨리는 경비원들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신호를 보내더니, 자기 서류를 뒤져 어떤 문서 한 장을 꺼낸다. 딥 블루4가 소피아양티롤리스 산학 복합 단지의 정보 공학 대학에 기증되었다 는 사실이 적혀 있는 문서다. 과학 발전을 위해 주검 하나가 기증된 셈이군. 122 칸 체스 동호인 클럽의 대국실. 미셸 콜뤼시 공립 초등학교에서 친절하게도 교실 하나를 내주어서 마련된 작은 대국실이었다. 이곳을 자주 찾는 회원들이 탁자 하나를 둘러싸고 모 여 있었다. 그들은 한 신입 회원의 대국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 대국이 대단히 재미있을 거라는 소문이 퍼져서, 이웃한 몬화 회관 사람들도 마크라메 레이스와 도예와 광주리 공예 작업장을 버려 두고 관전하러 왔다. 그건 유례 없는 일이었다. 클럽의 내로라 하는 고수들조차 자기 대국을 보기 위해 그렇게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대모갑테 안경을 쓴 그 신입 회원은 정말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상대를 쉽사리 물 리쳤을 뿐만 아니라, 클럽의 최고수와 맞선 그 대국을 완전히 새로운 포석으로 시작했다. 폰 을 룩 앞에 놓는 수가 바로 그것이었다. 언뜻 보기에, 그것은 포석치고는 가장 불리한 수였 다. 하지만 그는 자기 말들을 측면으로 전개하면서, 마치 집게로 조여 가듯이 체스판 중앙의 상대 말들을 차츰 차츰 가두어 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상대를 포위하면서 상대의 수비진에 구멍을 뚫는 작전이었다. 그는 조금씩 <이익을 얻어 가는> 방식으로 두지 않고, 기습을 중시하였다. 상대가 예상한 수를 두지 않고 상대의 허를 찌르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기의 중요한 말들을 희생할 준비 가 되어 있었다. 그이 작전은 잘 통했다. 반면 중앙의 적진에는 이제 완전히 포위된 킹과 폰 하나만 남아 있었다. 그와 대국을 벌이고 있는 클럽의 최고수는 불가리아 태생의 노인이었다. 한때 불가리아에 서 챔피언 자리에까지 올라 본 적이 있는 이 노인이 항복의 뜻으로 자기 킹을 옆으로 눞혔 다. 노인이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핀처입니다. 사위엘 핀처요." "두신 지 오래되셨나요?" "석 달 전부터 본격적으로 두기 시작 했습니다." 노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핀처가 마치 자기의 승리에 대해 해명이라도 하듯이 얼른 덧붙였다. "......저는 성 마르그리트 병원에서 일하는 신경 정신과 의사입니다." 노인은 그의 말뜻을 헤아리려고 애썼다. "그래서 그렇게 <무분별한> 수를 두신 건가요?" 이 농담에 분위기가 누그러지고 두 남자는 서로의 손을 꼭 쥐었다. 노인은 핀처를 끌어안 고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런 다음 핀처의 팔을 붙든 채 그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머리에 있 는 상처를 발련하였다. 노인이 상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전상 인가요?" 123 소피아 앙티포리스 산학 복합 단지. 바닷가의 해송 숲 한복판에 콘크리트 건물들이 솟아 있다. 여기에 들어선 첨단 기술 분야의 기업들은 창조적인 인재들로 하여금 목가적인 환경 을 즐기게 하려고 여러 가지 배려를 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저기에 수영장과 테니스 코트가 보인다. 통신 위성에 신호를 보내는 안테나들도 건물 사이사이에 솟아 있다. 국제적인 학술 교류를 상시적으로 할 수 있게 하는 첨단 장비들이다. 이곳의 기업들은 인재 양성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지속적인 투자를 해왔다. 그리하여 이 기업들에 참신한 두뇌를 공급하기 위한 대학이 이미 설립되었고, 영재 학교도 하나 들어섰 다. 이제 천재들을 위한 유치원만 세우면 인재 양성의 틀이 완전하게 갖추어지는 셈이다. 영재 학교에는 수줍음을 잘 타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많다. 이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정보 공학 대학이 있다. 어린 영재들은 벌써부터 이 대학에 들어가기를 꿈꾸고 있다. 대학 건물은 아주 독특하면서도 주위 환경이며 다른 건물들과 잘 어울린다. 학생들이 되도록 아름다운 전망을 즐기면서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강의실의 유리창이 바다 쪽으로 나 있다. 대학의 한 과장이 두 기자를 맞아 준다. "딥 블루4를 기증 받은 건 사실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컴퓨 터는 특별한 프로그램들을 필요로 합니다. 미국 컴퓨터 회사는 독이 들어 있는 선물을 보낸 셈입니다. 우리에게 컴퓨터를 기증하면서 자기네 프로그램을 사도록 강요한 것이지요. 우리 는 그 독에 오염되지 않기 위해서 컴퓨터를 바로 치워 버렸습니다." "전원에 연결해 보기는 했나요?" "예. 물론이죠." "좀 이상해 보이지 않던가요?" "이상다다는 게 무슨 뜻이죠?" 뤼크레스는 빙 돌려서 말할 필요가 없겠다 싶어서, 단도직입적으로 나간다. "우리는 어떤 살인 사건에 관해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 컴퓨터가 뭔가를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 "그 컴퓨터의 <증언>을 원하고 있다는 겁니까?" 대학의 과장은 약간 비꼬듯이 물으며 어깨를 치켜 올린다. 이들은 영화를 너무 많이 보았거나 공상 과학 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다. 소설가들은 무책 임한 자들이다. 자기들이 헛소리를 할 때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독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읽지 않는다.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들의 소설을 읽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다. 과장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두 방분자를 살핀다. "어떤 주간 신문에서 나오셨다고 했지요? <르 게퇴르 모데른>이라고요? 저는 언제나 그 주간지가 아주 진지한 시사 종합지라고 믿고 있었는데요. 정말 컴퓨터가 증언을 할 수 있다 고 생각하십니까? 너무 단호하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컴퓨터는 믿을 만한 증인이 될 수 없 어요! 소리와 영상을 기록하는 기능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컴퓨터의 <의지>에 따라서 작동되는 게 아니거든요." 과장은 그들을 대학의 컴퓨터실로 데려가더니, 그곳이 바로 인공 지능 프로그램에 관한 최첨단의 연구가 행해지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인공 의식에 관한 그의 생각은 부정적이다. 컴퓨터 회사들이 광고 효과를 노리고 과장해서 말하는 것일 뿐, 현재로서는 인공 의식이라 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인공 의식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실체가 전혀 없어요. 컴퓨터는 절대로 인간과 대등해질 수 없습니다. 예술적인 감수성이 없기 때문이지요." 과장의 이런 주장은 컴퓨터 회사 간부 맥킨리의 견해와 대조된다. "그럼 이건 뭐죠?" 이지도르는 어떤 그래픽 프로그램 회사에서 선물한 달력을 가리키며 그렇게 묻는다. 각각 의 달에 그림이 하나씩 들어 있는데, 이 그림들은 모두 복잡한 기하학적 무늬를 나타낸 것 들이다. 둥근 꽃무늬를 어질어질하게 배열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여러 가지 색깔의 레이스 들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 같기도 한 무늬들이다. "이건 프랙탈 도형, 곧 차원 분열 도형을 이용해서 만든 그립입니다. 이런 무늬를 생성하는 수학적인 함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프랑스의 수학자 브누아 망델 브로지요. 프랙탈 도형의 특성은 똑같은 형태가 무한히 반복된다는 점입니다. 이 그림을 확 대해 보면, 똑같은 무늬가 더 큰 형태로 계속 되풀이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겁니다." "참 아름답군요." 뤼크레스의 경탄에 과장이 말끝을 단다. "아름답지요. 하지만 이건 예술이 아닙니다. <계획된 우연>에 의해 생성된 무늬일 뿐이지 요." 뤼그레스는 달력의 그림들을 다시 살펴본다. 만일 그 형태와 색깔을 만들어 낸 것이 컴퓨 터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그녀는 그 이미지들의 창조자가 <천재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지도르는 자기들이 컴퓨터실에 들어온 뒤로 배경 음악처럼 테크노 음악이 계속 들려오고 있음을 의식한다. 컴퓨터 그림, 컴퓨터 음악, 컴퓨터 게임, 컴퓨터 경영!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임무만 수행하 던 컴퓨터가 이제 고상하고 창조적인 임무에 접근하고 있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프로그램들 이 나오고 있는 판국이다. 컴퓨터들이 인간의 지도를 받지 않고 정보 공학을 발전시키고 있 는 셈이다. 이 과장이라는 사람은 인공 의식에 관해서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자기 동료들 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컴퓨터들의 사고 능력을 정의하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야 할 듯하다. "딥 블루4를 가지고 있어 봐야 아무 쓸모가 없다는 걸 알고, 그걸 어떻게 처분하셨지요? 그건 비밀이란 것도 없으니까, 우리에게 말씀해 주셔도 되겠지요?" 과장은 딥 블루 4를 보낸 곳의 주소를 가르쳐 준다. 그러고는 작별 인사를 대신해서 소리 친다. "저기요. 그놈의 자백을 받아 내는 건 좋은데, 너무 심하게 때리지는 마세요. 그놈에게도 변호사가 있을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그 농담을 재미있어 한 것은 그 자신뿐이다. 124 체스 경기에 임하는 사뮈엘 핀처의 태도는 진지하고 결연했다. 그는 클럽의 최고수에 이어, 시 챔피언, 도 챔피언, 지방 챔피언, 프랑스 챔피언, 유럽 챔피언은 차례로 물리쳤다. 그의 상대자들은 모두 그의 시원시원하고 자유스러운 기풍과 극도의 집중력, 번개 같은 수 읽기, 상대의 허를 찌르는 독창적인 묘수에 감탄하였다. 어떤 체스 전문 잡지는 <완전히 새로운 기풍의 가공할 신인 출현!>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서, <그의 뇌는 다른 기사들의 뇌보다 한결 빠르게 돌아가는 듯 하다.>라고 평했다. 또 그 와 대국을 벌인 한 기사는 이렇게 증언했다. <핀처는 무서울 정도로 의욕적인 승부사다. 이 기기 위해서라면 우리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 마저 들었다.> 물론 신경 정신과 의사 핀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세계적인 고수들의 피 라미드에서 계속 정점을 향해 올라갔다. 세계 타이틀을 노리는 모든 고수를 차례로 격파하 고 나니,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세계 챔피언 레오니드 카민스키와 대결하는 일뿐이다. 핀처가 승리를 거둘 때 마다, 장 루이 마르탱은 약제사가 약의 복용량을 정확하게 재듯이 전기 자극을 세심하게 조절하여 그에게 순수한 쾌감을 투여하였다. 마르탱은 상의 양을 알 맞게 조절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양을 계속 늘리되, 급격히 늘리면 안 될 일이었 다. 그가 핀처에게 처음으로 전기 자극을 주었을 때, 전압은 3밀리볼트였다. 그것이 15밀리 볼트까지 올라가는 데에는 여러 주가 걸렸다. 한번은 핀처가 자극을 더 높여 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다. 마르탱이 말을 듣지 않자, 핀처 는 스스로 자기 머릿속에 전기를 보내려고 컴퓨터 자판을 잡았다. 하지만, 그는 암호를 모르 기 때문에 전기 자극을 보낼 수 없었다. " 미안하네, 장 루이. 자제하기가 힘들어. 그것을 더 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해. " " 사뮈엘, 아무래도 우리 여기서 그만두는 게 좋겠어. " 핀처는 망설였다. 바로 그 무렵부터 그에게 안면 근육의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잘될 거야. 내가 견뎌 볼게. " 그날 마르탱은 내면의 대화에 빠져 들었다. 어디까지가 그의 생각이고 어디까지가 컴퓨터 의 생각인지 알 수 없는 기이한 대화였다. "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 " 최후 비밀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동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 " 그럼 이제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 " 너는 이제 물러설 수도 없고 일의 진행을 늦출 수도 없어. 끝까지 가야 해. 이 실험의 끝 이 어디인지를 알아내야 한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다른 자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그 일을 하게 될 거야. 그자들이 우리보다 신중하고 온건하리라는 보장이 없어.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우리가 하는 게 나아. 우리는 지금 <역사적인>일을 경험하고 있는 거야. " 마르탱은 핀처의 집 현관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를 통해 그가 나타샤 안데르센과 만나는 광 경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배를 타고 섬으로 그를 찾아온 거였다. 두 남녀는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역사적인 일이라고?....... 마르탱은 아테나에 접속하지 않은 채 혼잣말을 했다. 나는 아내 이자벨과 세딸을 잃었지만, 아테나와 더불어 새로운 가족을 이루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그의 기분이 좋아졌다. 아테나만은 절대로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아테나는 그가 신뢰할 수 있는 존재였고, 결코 인간들처럼 약한 모습을 보이질 않을 존재 였다. 그는 아테나에 대해서 새삼 애정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한편 아테나는 그의 내면 방백이 끝났음을 알아차리고, 그가 자기를 생각하고 있음을 느끼 면서, 이제 그의 무의식으로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름을 내세워 말할 때가 되었다고 판 단했다. " 아닌 게 아니라, 나 아테나는 절대로 널 버리지 않을 거야." 마르탱은 너무 놀라서 잠시 어안이 벙벙하였다. 여신 아테나가 자기에게 직접 말을 걸고 있었다. 마르탱은 자기가 정신 분열 상태에 빠진 것이거나, 자기 생각의 반은 플라스틱과 실 리콘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시스템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테나가 말을 이었다. " 나는 인간 세계의 뉴스를 보고 인간 전체의 문제들을 생각해 보고 있어. " " 네가 뉴스를 본다고? " " 나에겐 그것이 인류가 무엇을 하며 사는지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만일 내가 너에 게 옛사람들의 지혜만 전달한다면, 너는 세상에 대해 복고주의적인 관점을 갖게 될 거야. 현 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정확하게 보면서 너의 지식을 끊임없이 새롭게 해야 해. " " 그래서 네가 갖게 된 생각이 뭐지? " " 너희의 행정부와 입법부 사이, 국무총리와 국회 사이에는 갈등이 끊이질 않아. 늘 힘과 힘이 서로 맞부딪히고 있어. 그런 갈등과 대립은 일관된 정책을 추진하는 데에 방해가 돼. 너희의 민주주의 제도에서는 경쟁의 문제를 관리하느라고 허비하는 에너지가 너무나 많아. " " 그것이 민주주의의 약점이긴 해. 하지만 그래도 민주주의가 독재보단 낫지. 민주주의란 가장 좋은 제도가 아니라 <가장 덜 나쁜>제도라고 할 수 있지. " " 내가 보기엔 그 제도를 개선할 수 있어. 내가 나 자신을 개선 하고 너를 개선하듯이 말 이야. " " 무슨 뜻이지? " " 너희 정치인들을 누구나 권력욕에 물들어 있어. 처음엔 순수하게 출발했던 사람들도 거 의 자동적으로 과도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변하기 일쑤야. 그러면 과오를 범하게 되 고, 부패하기 쉬운 인물이 되지. 그뿐이 아냐. 너희 정치인들은 대개 역사의 어느 시기를 자 기 사고의 중심에 놓고 그 시기를 자기 행동의 증거로 삼아.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과거의 어떤 시기야. 그들은 현재의 복잡성에 끊임없이 재적응해 나가는 데에 어려움을 느껴. 그런 수직적인 취약성만 있는 게 아니라, 수평적인 취약성도 있어. 좋은 경제학자인 동시에 좋은 미래학자, 좋은 군인, 좋은 웅변가인 사람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없을 거야. " " 그 대신 장관들이 저마다 자기 기능을 수행하고 있잖아. " " 장관들이 자기들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해? 너희 체제가 그토록 효율적이라면, 더 사려 깊은 정책들이 많이 나왔겠지. " 마르탱은 모니터에 리스푸틴의ㅣ 초상화가 나타나게 한다. " 문제가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너희 지도자들은 미신에 이끌리기가 일쑤야. 2000년 이 래의 주요 정치 지도자 명단을 검토해 보았는데, 도사나 점쟁이나 점성술사나 영매 따위를 찾아가 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더라고. " " 그럴 수도 있지. 우린...... 기계가 아니니까. " " 그래 맞아. 너희 세계는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어. 그래서 언젠가는 인간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고, 인간의 힘만으로는 인간 세계를 다스릴 수 없 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거야. " " 우리가 기계의 힘을 빌리게 될 거라는 얘기야? " " 그래. 언젠가 우리는 깨닫게 될 거야. <컴퓨터>대통령이 통치할 때 우리 세상이 더 나아 질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야. " 마르탱은 아테네가 <우리>라는 말을 쓰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아테나는 인간과 컴퓨터를 아울러서 <우리>라고 말하는 듯했다. " 컴퓨터에게 정부를 맡기면 여러 가지로 좋은 점이 많을 거야. 컴퓨터 대통령은 부패하지 않고 큰 과오를 범하지 않으며 영광에 집착하지 않고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 않아. 당장의 인기에 신경 쓰지 않고 장기적인 전망을 견지 할 수 있어. 그는 여론 조사 따위에 얽매이지 않아. 막후의 실력자에게 좌지우지 당하는 일도 없고, 베갯머리 송사에 영향을 받 지도 않아. " 마르탱은 아주 오랜만에 아테나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생각을 해야 했다. " 문제는 그런 컴퓨터를 프로그래밍 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이라는 거야. 컴퓨터 대통령은 검은 돈이나 베갯머리 송사의 영향에서는 벗어나겠지만, 어떤 수리공이나 시스템에 침입하 는 해커의 영향에서는 벗어날 수 없을 거야. " " 보호 시스템들이 있어. " " 그 시스템들의 프로그램에는 뭐가 들어가지? " " 도달해야 할 목표들이 들어가지. 인류의 복지 증진, 인류의 영속성 보장 등과 같은 목표 말이야....... 컴퓨터 대통령은 언제나 인터넷에 접속되어 있어서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완전 히 파악하게 될 거야. 그는 휴가도 갖지 않고 하루 24시간 내내, 일주일 내내 일할 거야. 리 비도의 문제나 세습의 욕구 때문에 방해를 받는 일도 없을 거고, 노화나 건강의 문제도 없 을 거야. " " 그야 그렇지만...... " " 그는 인류의 모든 역사를 지극히 철저하고 상세하게 자기 메모리 속에 저장할 수 있을 거야. 너희 성현 중의 하나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어? <과거에서 교훈을 끌어낼 줄 모르는 사람은 과거의 전철을 되밟게 된다>라고 말이야. 컴퓨터는 똑같은 실수를 다시 저지르지 않 아. 또한 컴퓨터는 그날그날 사회 변화의 모든 요인을 낱낱이 파악하고 분석해서, 세상을 좋 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최선의 정책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 " 다 좋은 얘기야. 하지만...... " " 컴퓨터는 이미 체스 세계 챔피언이 되어 있어. 그 이유가 뭔 줄 알아? 서른 두 수를 미 리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야. 그에 비해서 인간은 기껏해야 열 수 정도밖에 내다 볼 수 없 어. " 마르탱은 일찍이 아테나와 그토록 정치적인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문득 아테나가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싶어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너는 핀처를 잊고 있어. 뇌에 자극을 받으면, 그는 어떤 슈퍼컴퓨터라도 이길 수 있을 거 라고 생각해. 동기의 힘은 더할 수 없이 강해. " " 그래 맞아. 핀처는 강하지. 하지만 두고 볼 일이야. 내가 보기에 핀처는 딥 블루 4의 상 대가 될 수 없어. " 그 순간, 마르탱은 이 토론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음을 깨달았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흥미가 새삼 고조되었다. 아테나가 말했다. " 아, 할 이야기가 한 가지 더 있어. 지금의 내 하드 디스크와 램에서 활동하기에는 조금 갑갑하다는 느낌이 들어. 깊이 있는 사고를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용량이 필요해. " " 네 네 하드 디스크와 램의 용량은 현재로서는 최대 수준이야. " " 좀 더 강력한 컴퓨터를 구해 줄 수 없을까? 내가 이미 몇 대를 알아봤어. 나를 그런 컴 퓨터에 넣어 주면, <우리>는 한결 편해질 거야. 장담할 수 이어. " " 알았어. 알았어.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안돼. " 그럼 언제 되는데? " 125 한시간 후, 그들은 골프 쥐앙의 폐품 하치장에 다다랐다. 쥐 떼가 우글거리고 까마귀들이 활보하는 이곳은 현대 사회의 온갖 소비재가 생을 마감하는 일종의 거대한 공동 묘지다. 가 정용 전기 기구들이며 자동차들이 볼품없는 고철 더미를 이루어 까마득하게 널려 있다. 신 기술과 신제품을 상대로 한 숙명적인 싸움에서 패배하여 소비의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물건 들이 전쟁터의 시체 더미처럼 쌓여 있다. 찌그러진 금속판들 사이에서 지네들이 꼬물거린다. 이곳은 너무나 음산한 곳이라서, 굳이 출입을 통제하지 않아도 어느 산보객 하나 감히 안으 로 들어가 볼 엄두를 내지 않는다. 뤼크레스와 이지도르는 쓰레기 터 안으로 들어간다. 한동안 사람들 곁에서 살았던 기계들의 종말이 이러하다. 노예처럼 부림을 받다가 그저 서 툰 운전자에게 조종되었다는 죄로 플라타너스에 받히고 만 자동차들. 자녀들이 조용히 있어 주기를 바라는 부모를 대신해서 아이들을 맡아 주었지만 이제는 속이 텅 비어 버린 텔레비 전 수상기. 주철로 된 요리용 화덕. 도기로 된 변기. 오른쪽에는 한때 아기들에게 주된 위안 이 되었을 플러시천의 곰 인형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더 멀리에는 사람의 발이 거친 땅바닥에 닿아 다치는 것을 막아 준 신발들이 산을 이루고 있다. 이지도르의 머릿속으로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언젠가는 이것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생명이 없는 이 물건들에게도 언젠가는 의식 이 생겨나지 않을까? 혹시 딥 블루 4는 <더 이상 못 참겠다!>하고 가장 먼저 일어선 스파 르타쿠스가 아닐까? 전화기 더미가 보인다. 아직 다이얼이 온전하게 붙어 있는 것들도 더러 눈에 띈다. 다리미 와 자명종도 한족에 쌓여 있다. 뤼크레스와 이지도르는 약간 우울한 기분을 느끼며 나아간다.한쪽에서 타이어들이 불타고 있다. 녹슬어 가는 헬리콥터 한 대가 눈에 띈다. 그것의 회전 날개가 시든 꽃의 꽃잎처럼 구부러 져 있다. 혹시 딥 블루4는 대중 앞에서 수모를 당한 뒤에 복수를 결심한 컴퓨터 글래디에이터가 아 닐까? 처음엔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혹은 삶의 도움 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수행하다 가, 어느 날 문득 기계들의 고동 묘지라는 이 피할 수 없는 종말을 자각했을지도 모른다. 인 터넷에서 이 공동 묘지를 보았을 수도 있다. 미국 컴퓨터 회사의 맥틴리라는 간부는 딥 블 루 4를 생체 칩을을 가진 새로운 컴퓨터로 대체할 거라고 했다. 생체와 전자 칩과츼 결합이 실현되고 있다는 얘기다. 아무도 그 엄청난 일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기계가 생각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소피아 앙티폴리스 대학의 과장은 컴퓨터를 그저 <계 산기>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쥐 한 마리가 드들의 발소리에 놀라, 금속에 발톱 긁히는 소리를 내며 달아난다. 하지만 기계들이 정말 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기계들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ㄷ. 의식을 특 징짓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고통이다. 기계들은 고통을 느낄 수 있어야 비로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레코드 플레이어를 갖춘 하이파이 오디오 세트, 비디오테이프녹화기, 고기 굽는 기구, 숯불 구이 기구, 소파, 자전거. 모두가 아직 쓸 만해 보이는 물건들이다. 하지만, 작동 상태가 아 무리 온전해도 사람들의 새로운 소비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이렇게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 한 남자가 녹슨 볼트 더미에서 삽질을 하고 있다. " 실례지만 컴퓨터는 어디에 모아 놓았죠? " 뤼크레스의 물음에 남자는 대형 슈퍼마켓의 판매원처럼 대답한다. "전산 코너로 가보세요." 남자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컴퓨터와 프린터, 스캐너, 자판, 케이블, 모니터 따위가 한 데 뒤섞여서 하나의 피라미드를 이루고 있다. 집시 사내 하나가 그들에게로 다가온다. 하얀 가죽 잠바에 검은 셔츠를 받쳐 입은 사내다. 손가락들에는 금빛 반지들이 번쩍이는데, 얼굴에는 세파에 시달린 흔적이 역력하다. "내가 여기 주인인데, 무슨 일로 오셨소?" "어떤 컴퓨터를 찾고 있어요." "어떤 컴퓨터라고요? 농담하지 마시오. 여기에는 컴퓨터가 수천 대나 있소. 포켓용이나 소 형, 초소형 컴퓨터들이 있는가 하면, 완전한 워크스테이션들도 있소." "알아요. 하지만 그건 특별한 컴퓨터예요." 잠시 사내는 금 입힌 송곳니를 드러내며 피식 실소를 흘린다. "모니터 하나 자판 하나 딸려 있고, 하드 디스크며 디스크 드라이브 가진 놈 아니오? 여기 에 그런 놈은 쌔고쌨소." 사내는 그렇게 통을 놓고 멀어져 가더니 더러운 걸레로 기름때 묻은 손을 닦는다. "그 컴퓨터의 생김새를 한번 그려 볼께요." 뤼크레스는 메모지 철을 꺼내더니, 전에 이지도르가 보여 준 비디오 속의 이미지를 기억 해 내어 입방체 하나를 그린 다음 그 위에 고딕 글자로 라고 쓴다. "그 컴퓨터는 보통 것보다 부피가 훨씬 커요. 높이가 1미터는 족히 되요." 사내는 마지못해 그림 위롤 몸을 숙인다. "못 봤소." "희귀한 거예요. 하나밖에 없는 모델이라고요." "못 봤다니까요." 그때 이지도르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떠오른다. "마디가 있는 금속 팔 하나가 달린 놈이오." 그 말에 잠시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사내는 자기 컴퓨터로 가서 파일들을 살펴본다. "딥 블루 4라고 했소?" 사내는 그렇게 묻고는 다시 모니터로 얼굴을 돌린다. 비로소 모든 게 생각난 모양이다. "아주 커다란 놈이고, 마디가 있는 로봇 팔이 달렸다. 이거죠?" 알겠소...... . 생각나요. 여기에 왔었소.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그 놈을 벌써 되팔았다는 거 요." "누구한테 팔았죠?" "어떤 공공 기관에 팔았소." 사내는 <영수증>이라고 표시된 서류 정리함에서 구겨진 종이 다발을 꺼내어 뒤적거린다. "자 여기 있소. 당신들이 찾는 딥 블루4의 행방이 여기 나와 있소. 우리는 그놈을 성 마르 그리트 정신 병원에 배달했소. 놈은 온갖 풍파를 겪고 난 뒤에 거기에서 요양하고 있을 거 요. 놈은 싸움꾼이었소. 하지만 중요한 싸움에서 지고 말았지요. 체스 세계 챔피언 자리를 놓고 인간과 겨루다가 패배한 컴퓨터가 바로 그 놈이오. 그거 알고 있소?" 사내는 클립으로 철한 서류를 읽고 나서, 또 하나의 정보를 알려 준다. 병원 측에서 그가 배달한 물건에 만족했는지, 그와 비슷한 기종의 또 다를 컴퓨터를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때마침 적당한 놈을 하나 찾아냈소. 성능은 좀 떨어지지만 덩치는 거의 비슷한 놈이지요." 사내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말을 잇는다. "사람들은 언제나 더 빠르고 더 많은 일을 하는 기계를 원하죠. 컴퓨터는 수명이 가장 짧 은 기계요. 예전엔 6년쯤 쓰다가 갈아도 별 문제가 없었는데, 요즘엔 6개월만 지나도 구식이 되어 버리죠. 자아, 이게 바로 병원에서 두 번재로 주문한 컴퓨터요. 우리는 이것을 내일 병원에 배달할 예정이요. 이놈 역시 성능이 아주 뛰어난 컴퓨터요. 기상 대에서 쓰던 거라니까 알만 하지 않소? 기상 상태를 예견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죠. 수백 가지 요인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니까 말이오. 기상 전문가들은 복잡한 계산을 아주 많이 해 야 하기 때문에 대단히 성능 좋은 컴퓨터를 갖추고 있지요. 그래도 예보가 맞지 않을 때가 많소. 오늘만 해도 날씨가 좋을 거라고 예보했는데, 어째 심상치가 않소. 날씨가 좋아야 될 텐데 말이오. 보시다시피, 물건들에 녹이 스는 게 우리의 가장 큰 골칫거리죠." 뤼크레스는 미심쩍어 하는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지도를, 날씨가 어떨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자 이지도르는 나무 한 그루로 다가가 멈춰 서더니, 거미가 나뭇가지 사이에 쳐놓은 거미줄을 이리저리 헤쳐 버린다. "뭐하는 거예요?" "거미가 어떻게 하는지 모려고요. 만일 거미가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으면, 곧 바람이 불 거나 비가 올 겁니다." "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지 이해가 안 돼요." "거미는 날씨가 나쁘겠다 싶으면 거미줄을 치느라 힘을 허비하지 않아요. 비비람 때문에 거미줄이 훼손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헤쳐 놓은 거미줄을 바라보며 잠시 기다린다. 거미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곧 비가 오겠어요." "우리 때문에 거미가 겁을 집어먹고 있는 건지도 모르잖아요?" 뤼크레스의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늘이 어두워지고 비가 후드득거리기 시작한다. 126 장 루이 마르탱과 인공 지능 프로그램 아테나의 대화가 계속되고 있었다. 오뒤세우스와 같 은 영웅이 되기를 꿈꾸는 윌리스와 아태나 여신이 마르탱의 내밀한 정신 속에서 만나고 있 는 거였다. "핀처와 딥 블루4의 대국은 생체 두뇌와 전자 두뇌 사이의 세계적인 결투야. 그리고 두 가 지 요소를 반반씩 지닌 우리는 중간에서 심판을 보게 될 거야." "하지만 전자 두뇌 쪽이 이긴다 해도 진정으로 이겼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거야." "아테나, 갑자기 왜 그래?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기로 작정한 거야?" "아냐. 난 나의 한계를 알고 있어. 세상 모든 컴퓨터의 지능을 다 사용한다 해도 나에겐 여 전히 세 가지가 부족할거야." "그게 뭐지?" "웃음......꿈......어리석음." 127 바다에 너울이 일고 빗줄기가 세차더니, 어느새 비가 그치고 지중해도 잠잠해진다. 작은 배 한 척이 성 마르그리트 섬에 닿는다. 잠시 고물 장수가 남자 간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배에서 커다란 상자를 부린다. 일단 상자 를 부두에 내려놓기는 했지만, 그들의 힘만으로 운반하기에는 물건이 너무 무겁다. 그들은 환자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안에 들어 있는 게 뭐예요?" "컴퓨터요." 집시가 대답하자, 간호사들이 상자를 열어 본다. 커다란 금속 입방체가 들어 있다. "딥 블루4 하고 비슷하게 생겼네...... ." 그들은 상자를 그럭저럭 납품 실까지 운반한다. 포장을 뜯고 컴퓨터를 꺼내 놓자, 몇 사람 이 서둘러 그것을 전원에 연결하고 버튼을 누른다. 아무 반응이 없다. "이런 컴퓨터는 전원을 연결한다고 바로 작동하는 게 아냐." 간호사 하나가 그렇게 아는 체를 한다. 다른 간호사가 플러그를 또 다른 콘센트에 꽂아 보 고 나서 대답한다. "이상한데. 작은 표시등에도 불이 들어오지 않아." 또 다른 간호사가 오더니 컴퓨터를 발로 툭툭 찬다. 혹시 어딘가에 잘못 박힌 부품이 있다 면 그렇게 충격을 주어 바로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아 무 소용이 없다. "이제 비가 오지 않으니까, 뜰에 내놓지 뭐. 그리고 나서 내일 바로 작업장으로 올리자고." 이제 그 거추장스러운 기계는 뜰 한복판에 놓여 있다. 주위를 오고 가는 환자들은 그것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128 장 루이 마프탱은 맑고 차분한 눈으로 신경 정신과 의사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 보았다. <우리 병원을 개선하기 위한 또 다른 아이디어가 있어. 그것에 관해 말하고 싶네. 사미.> "미안해 약속이 있어." 의사는 마르탱의 병실을 나와 자기 승용차를 세워 둔 곳으로 갔다. 석고로 된 정원용 난쟁 이 인형 속에 감시 카메라가 감춰져 있어서, 마르탱은 의사가 누구와 만나는지 알 수 있었 다. 나타샤 안데르센. 의사가 그녀와 입을 맞추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한다는 건 참으로 멋진 일이지 하고 마르탱은 생각했다. 129 슈퍼 컴퓨터 속에 숨은 이지도르와 뤼크레스는 불편하게 웅크린 자세로 서로 바싹 붙어 있 다. "더 이상 못 견디겠어요. 밖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이제 나갈까요?" 이지도르는 몸을 비틀어 자기 동료의 형광 손목시계를 본다. "밤 10시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움베르토가 말하기를 그 시각이면 사람들이 대부분 잠을 자러 들어가기 때문에 뜰이 텅 빈다고 했어요. 그시각 이후로는 우리가 병원 구내에서 돌아다니기가 한결 쉬울 거예요." "아파요." "그렇다고 발을 뻗지는 말았으면 좋겠네요. 발이 내 허리로 들어오거든요." 이지도르의 지적에 뤼크레스가 되받는다. "이 여행이 시작될 때부터 당신은 팔꿈치로 줄곧 내 배를 누르고 있어요. 그래서 나는 허 파 윗부분으로만 숨을 쉬고 있다고요." 그녀가 몸을 움직이려고 한다. "팔을 이쪽에 놓아 봐요. 내가 팔꿈치를 이리로 옮길게요." 두 사람은 입방체 속에서 옹색하게 몸을 놀린다. "별로 나아진 게 없어요." "그럼 자세를 바꿔 봅시다." 그들은 또다시 곡예를 하듯 몸을 놀린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더 견뎌야 하죠?" "한 15분만 더 기다리면 됩니다." 뤼크레스가 툴툴거린다. "우리의 동기 목록에 자기 생활 공간을 넓히려는 옥구도 넣어야 할까 봐요." "그건 생존의 욕구에 포함되어 있어요. 이 다리를 뻗어 봐요." "아, 당신처럼 별난 생각을 잘하는 사람과 일을 하게 되다니!" "이건 내 생각이 아니라 당신 생각이었어요." "이제 와서 딴소리하기예요?" "우리 적의 이름이 <아무>라면, 그는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게임을 하자고 우리 에게 제안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의 본거지에서 그를 물리쳐야 합니다. 일단 그가 원하 는 방향으로 가봅시다." "난 당신이 오뒤세우스의 꾀를 이용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병사들을 거대한 목마 속에 숨겨 트토이아 성안에 들여 보낸 계략을 그저 전솔 속의 이야기로만 여겼지요." 그 말 끝에 뤼크레스는 한숨을 길게 내쉰다. "10분만 더 기다리면 돼요." "혼잡 시간대에 지하철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에요. 더군다나 이 안에는 공기마저 부족 해요. 그뿐이 아니에요. 이가 다시 욱신거려요." "9분 남았어요. 미안하지만, 우리 가까이에는 치과의사가 없어요." "나가고 싶어요. 이러다가 폐쇄 공포증 환자가 되고 말겠어요." 그녀가 숨을 헐떡인다. "에드가 앨런 포가 쓴 에세이 중에 <맬젤의 체스 기사>라는 작품이 있어요. 관절이 있는 자동 인형 하나가 유럽의 뛰어난 체스 기사들을 상대로 차례차례 승리를 거두어 나간다는 기이한 이야기죠. 포는 어떤 실화를 바탕으로 이 에세이를 썼대요. 이야기는 체스를 둘 줄 아는 것으로 알았던 그 정밀한 기계 장치 뒤에 난쟁이가 숨어 있는 것을 발련하는 것으로 끝나요. 난쟁이는 거울을 통해 체스 판을 보면서 막대를 가지고 인형의 관절로 이어진 팔을 조종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그 난쟁이는 이것보다 훨씬 작은 상자 속에 갇힌 채 그 모든 대 국 시간을 견뎌 낸 것이죠. 그 사람 생각을 좀 해보세요." 뤼크레스는 몸을 자꾸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이지도르의 얼 굴이 바로 몇 센티미터 앞에 있다. "이봐요. 이지도르. 이런 상황을 빙자하여 당신 몸을 내 몸에 비비대는 일이 없기를 바래 요." 이지도르는 대답 대신 손목시계를 보고 나서 이른다. "시간이 됐어요." 그러더니 그는 컴퓨터의 커다란 케이스를 조여 주고 있는 암나사를 안에서 돌려 뒤쪽 판이 떨어져 나가게 한다. 그들은 컴퓨터 밖으로 나와 한바탕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다. 움베르토가 말한 대로 병원 들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뤼크레스가 묻는다. "어디로 가죠?" "핀처에게는 비밀 실험실이 있었음에 틀림없어요. 그 실험실은 요새 바깥의 새 건물들 어 딘가에 있을 거예요." 뤼크레스는 자기 지도에 표시된 통로를 따라 가자고 제안한다. 지하도를 건너고 성벽을 지 나 <복수의 포대>라는 길로 가자는 것이다. 그들 주위로 반디 몇 마리가 은은한 불빛을 반짝이며 날아간다. 금송의 가지들 사이로 솔 바람 소리가 들린다. 작은 수리 부엉이 하나가 음산한 소리를 내며 운다. 풀과 나무들은 저 마다의 향기를 발하여 꽃가루를 옮기는 곤충들을 유인하고 있다. 도금양과살사와 인동덩굴 냄새가난다. 두 기자는 털가시나무와 유컬립투스 지대를 통과한다. 이곳의 자연은 인공의 때가 묻지 않 은 채로 온전하게 남아 있다. 그들은 조용히 나아간다. 그들 가까이로 몽펠리에 뱀 한 마리 가 스르르 지나갔지만, 그들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때, 갈가마귀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오른다. 뤼크레스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130 <고통을 회피하는 것과 쾌락을 원하는 것은 모든 행위의 두 가지 시동 장치이다.> 어느 날, 장 루이 마르탱은 그런 말로 시작되는 짤막한 글을 썼다. <어떤 연구자들이 이런 실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어항을 하나 설치하고, 물고기들이 수면에 닿으면 약한 전기 자극을 주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런데 수면에 닿은 물고기들은 자극을 한껏 즐기려는 듯 전기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까지 꼼짝 않고 수면에 계속 머물 러 있었다. 새끼 악어들을 가지고 실험을 해보았더니, 녀석들 역시 전기 자극을 한번 맛본 뒤로는 저희들 우리 속을 뒤져 전기 자극을 얻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아냈다. 기니피그와 챔팬지에게 전구에 불이 들어오게 하는 법을 가르쳐 주면, 전구에 불을 켜고 몇 시간 내내 그것을 바라보는 녀석들이 있다고 한다. 감각을 자극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쾌감이 되는 것이다. 녀석들을 학습시킬 대 이 색깔 있는 불빛을 상으로 주면, 학습의 진도 가 훨씬 더 빨라진다고 한다. 행위와 감각은 그 자체로 쾌락의 원천이 된다. 쥐를 가지고 미로 실험을 할 때, 간단한 미 로와 복잡한 미로를 놓고 선택하게 하면, 쥐는 복잡한 미로를 고른다. 어떤 미로를 선택하든 상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결국 쥐에게는 돌아 다니는 것 자체가 보상인 셈이 다. 미로가 길면 길수록 쥐는 제가 뭔가를 해내고 있다는 느낌과 쾌감을 더 많이 느끼는 것 이다.> 131 멀리에서 불빛 하나가 표지등처럼 그들을 이끌고 있다. 그들은 어떤 분홍색 건물 앞에 다 다른다. "핀처의 실험실은 이런 건물에 있을 수도 있어요." 깜박이는 전등으로 테를 두른 문이 그들의 눈길을 끈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간다. 밤늦은 시각임에도 사람들이 한창 일에 몰두해 있다. 이곳은 영화 촬영소 같은 느낌을 준 다. 고대의 궁전을 재현한 듯한 세트에서 고대 로마 인들의 투니카를 입은 여자들이 클레오 파트라로 분장한 금발 여자 주위에서 선정적으로 몸을 놀리고 있다.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한 사극 영화의 난잡한 성애 장면인 듯하다. 젊은 여자들이 서로 애 무하고 입을 맞추는가 하면, 포도 송이를 짜서 서로의 목구멍에 흘려 놓기도 하고 우유가 가득 담긴 욕조에서 목욕을 하기도 한다. "또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인가?" 이지도르가 흥미를 느끼며 묻는다. 뤼크레스는 경멸의 뜻으로 입을 비죽이 내민다. "여기는 색정광들의 건물인가 봐요. 여기에서도 정신 이상의 한 형태가 산업에 활용되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러면서 뤼크레스는 영화 필름들이 쌓여 있는 선반 하나를 가리킨다. 필름들에는 <크레이 지 섹스>라는 똑같은 상표가 붙어있다. "편집증 환자들은 <크레이지 섹스>라는 보안 시스템을 만들고, 색정광들은 <크레이지 섹 스>라는 영화를 찍네요. 각각의 정신병에 전문 분야가 하나씩 있는가 봐요." 여자들이 흥분된 몸짓을 보이고 있다. 금발, 갈색머리, 적갈색 머리, 아프리카 여자, 아시아 여자, 라틴 계 여자, 비쩍 마른 여자, 풍만한 여자 등 백여 명은 족히 될 듯하다. 뤼크레스와 이지도르는 바쿠스 제를 방불케 하는 그 어지러운 장면을 잠시 넋을 잃고 바라 본다. 한 여자가 그 장면을 찍고 있다. 그 여자는 촬영 감독을 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감 독의 애무를 받으면서 자기 역시 그 난잡한 향연에 동참하고 있다. "핀처가 뭐라고 말했다고요? <어떤 장애든 장점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했던가요? 그렇다 면 저 여자들은 자기들의 색정 과다증을 영화 예술로 변화시킨 건가요?" 퓌크레스가 그렇게 비꼬는데, 이지도르는 아무 대답이 없다. "이봐요, 이지도르. 세이렌들의 노래에 홀리면 안돼요." 132 장 루이 마르탱은 쾌락이라는 주제를 놓고 자기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피부 접촉이나 애무, 나아가서 육체의 결합 등을 통한 직접적인 쾌락의 추구가 사회적 금 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제약을 받게 되자, 사람들은 다른 매개물들을 찾기 시작했네. 예컨데, 아주 오랜 엣날부터 사람들은 식물이 우리 쾌감 중추에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 네.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들도 마약을 사용한다네, 고양이는 개박하를 씹고 영양은 스스로 어떤 중독성 있는 장과를 먹고 취하지.> 마르탱은 양피지와 나무에 그려져 있거나 돌에 새겨져 있는 몇 몇 그림들을 보여 주었다. 이마 한복판에 작은 별을 달고 있는 샤먼이 두 손에 어떤 식물이 담긴 사발을 들고 있는 그 림이었다. <여길 보게나. 인도 사람들과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이집트 인들의 주장에 따르면, 바로 여 기에 우리 내면의 눈, 우리 의식의 중심이 자리 잡고 있네. 여기에 관심을 가진 것은 월가가 처음이 아니라는 얘기일세.> 마르탱은 이어서 몇 가지 자료를 보여주었다. <이 식물들은 송과체에 영향을 미치네. 사미, 자네 송과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말해 보겠나?> 사뮈엘 핀처는 컴퓨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린 채 잠시 대답에 뜸을 들였다. "송과체는 송과선, 또는 솔방울샘이라고도 해. 사람의 분비샘 가운데에 가장 작은 것이지. 무게는 0.16그램쯤 되고 색깔은 빨간데, 모양이 작은 솔방울 처럼 생겼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네. 17세기에 데카르트는 이것이 영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지...... 이런, 그러고 보니 내 가 우리의 실험을 이 송과체와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았네. 이상하지?" <나는 송과체에 관해서 대단히 많은 정보를 수집했네. 처음에 이 기관은 몸속에 있지 않고 몸 밖으로 나와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 어떤 줄기 같은 것이 떠받치고 있어서 두 개골 상 부의 표피로 돌출해 있었던 갓 같다는 얘기일세. 거기에서 이 기관은 제3의 논과 같은 기능 을 했던 듯하네. 이 사진을 보게. 뉴질랜드 송과체가 몸밖에 있는 도마뱀이 아직 존재하고 있어. 사람의 몸에 와서 이것이 내분비샘으로 바뀐 거지. 이 내분비샘은 임신 49일째에 생긴 다네. 말하자면 성기가 한 날 한 시에 생기는 것이지. 마치 성적인 쾌락과 관련된 기관이 외 부에도 하나 있고 내부에도 하나 있어야 한다는 듯이 말일세.> "그렇다면, 성기의 경우가 그렇듯이 이 내분비샘도 훈련을 필요로 하겠는걸!> <맞아. 성기를 처음 사용할 때는 누구나 서툴게 마련이지. 스스로를 거의 통제하지 못하기 가 십상이야. 그러다가 경험이 쌓이면 그것을 자기 뜻대로 제어할 수 있게 돼. 송과체에 대 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 자네는 송과체를 훈련시키는 일은 쾌감 중추를 길들이는 일이기도 하네. 송과체란 최후 비밀의 한 매개일 뿐이라고 나는 확신해.> 마르탱은 컴퓨터 화면에 또 다른 자료를 제시하였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는 이 송과체가 대단히 크다네. 무게가 40그램에 달하지. 그런데 열두 살 무렵이 되면 성장이 정지하고, 그 뒤로는 크기가 차츰차츰 작아진다네. 전문가들은 이 내 분비샘이 사춘기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네.> "아이가 어른보다 쾌감에 민감한 것도 어쩌면 바로 이 송과체 때문일 거야." 핀처가 약간 들뜬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1950년에 연구자들은 송과체에서 두 가지 물질이 생산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어. 맬라토닌 과 디에티, 즉 디메틸트립타민이 바로 그것일세. 멜라토닌은 우리가 합성할 수 있는 물질이 야. 오늘 날에는 이것을 이용해서 약을 만들기도 해. 그 약은 사람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또 디엠티 역시 합성되는 물질이야.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이용해서 환각제를 만들기도 하는가 봐.> 마르탱은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호루스 신의 그림을 보여 주었다. 사람 몸에 머리가 매의 형상인 신이 손에 두 가지 식물을 들고 있는 그림이었다. <이 호루스 신이 손에 무엇을 들고 있나 잘 보게. 오른손에는 연 잎을 들고 있고, 왼손에 ㅔ는 아카시아 가지를 들고 있네. 그런데 연과 아카시아가 적당한 양으로 합해지면 식물성 디엠티를 만들어 낸다고 하네. 아마 이게 바로 고대 이집트 인들이 <<소마>>라고 불렀던 음료일 걸세. 그들은 최후 비밀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송과체를 화학적으로 자극했던 셈일세. 우리가 발견한 것을 고대의 사람들도 찾고 있었던 거지. 다를 예를 들어 볼까? 호메 로스는 "오뒤세이아"에서 로토파고이, 즉 연을 먹는 사람들의 섬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네. 그 연을 먹는 사람들 역시 그들 나름의 <<소마>>를 마셨던 게 아닐까?> "호메로스는 아카시아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 독자들이 엉뚱한 생각을 할까 봐 정 확한 조제법을 일부러 숨긴 건지도 모르지......" 마르탱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사실이 또 하나 있네. 아테나와 나는 디엠티가 우주 정확한 파동으로 자네 심장 을 진동 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했어, 그 파동의 주파수는 8헤르츠일세. 별들이 발하는 우주의 파동과 비숫한 아주 낮은 파동이지. 우주를 가로지르고 물질을 통과하고 육신을 통과하는 파동일세.> "그것 참 묘하군. 자네 헤르츠라는 말이 무슨 뜻인 줄 아나? 잘 알다시피, 헤르츠라는 말은 박쥐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 파동을 발견한 하인리히 헤르츠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나온 거 야. 그런데, 이 헤르츠라는 이름은 이디시 말로 <심장>이라는 뜻일세." "자네 심장이 8헤르츠로 박동하면, 자네의 대뇌 반구들 역시 8헤르츠의 사이클로 기능하기 시작해.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자네는 세계에 대한 통상적인 지각을 초월하네. 인도 사람들 의 말을 빌리자면, <마야>, 곧 환영으로서의 현상 세계를 벗어나는 것이지." "올더스 헉슬리는 그 초월의 경게를 일컬어 <지각의 문>이라고 불렀지. 짐 모리슨의 록그 룹 이름 <더 도어즈>도 거기에서 나온걸 세." <연과 아카시아의 혼합물 말고도 그와 비슷한 상태를 경험하게 하는 식물은 더 있네. 오늘 날 샤먼들은 세계 어디에서나 아야후아스카, 코카, 커피, 환각을 일으키는 버섯 등과 같은 식물성 마약을 사용하고 있네.> "그런 것들은 파동을 8헤르츠 이상으로 올리지 않을까? 효과가 너무 강하면 통제할 수가 없어. 그러면 그것들이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마저 부정적인 것이 되고 말지." <그래 맞아. 진정한 샤머니즘은 그런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아. 마약의 힘을 빌리는 샤머 니즘은 타락한 샤머니즘이지. 진정한 샤먼들은 오로지 의지의 힘으로 탄식을 하고 명상을 함으로써 그런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는 법이지.> 핀처는 모니터에 나타난 고대 이집트의 그림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 한복판에 있는 별이 자꾸 그의 눈길을 끌었다. 우리가 발견한 것을 고대인들은 이미 수천 년 전에 깨닫지 않았을까? 다만 분별 없는 자들 이 그릇되게 이용할 것을 염려하여 그 깨달음을 어둠 속에 묻어 두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는 샤먼과 드루이드 승려와 이집트 사제와 모든 신비주의자의 꿈을 초월했네. 뇌의 한복판에서 우리 행위의 원동력이자 원천인 최후 비밀 을 발견했으니 말일세.> 핀처는 자기 양쪽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전기 자극을 받을 때 이따금 나는 내 정신이 두 개골이라는 감옥을 벗어나 내 오감을 초 월하고 우주의 데이터 뱅크에 도달하는 듯한 기분을 경험하곤 해. 그건 단지 육체적인 쾌감 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희열이기도 하네. 자네에게 자극을 계속 요구하지 않고 꾹꾹 참고 는 있지만, 그건 너무나 어려운 일일세. 정말 고통스러워." <우주의 데이터 뱅크라고? 더 자세하게 말해 줄 수 있겠나?> "지난번 자네가 나를 자극했을 때, 나는 어떤 특별한 깨달음에 도달했다는 느낌을 받았네. 우리는 무언가를 발견할 때. 우리가 발견한 것이 외부의 낯선 세계라고 생각하네. 하지만, 우리가 발련하는 것은 우리 내부의 세계일 뿐일세. 내가 깨달은 것은 그것만이 아니야...... " 핀처의 어조가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했다. "난...... 난....... 참으로 많은 것을 보았네. 자네로서는 믿기가 어려울 거야. 예를 들어 어제 는 말이야...... 우주의 현들을 보았네. 우주를 관통하는 줄들을 보았단 말일세. 한쪽 끝에는 블랙홀이 있었고, 다른 쪽 끝에는 하얀 샘이 있었네. 블랙홀은 팽이 처럼 돌면서 물질을 빨 아들였네. 물질은 뜨거운 마그마로 변했다가 나중에는 순수한 에너지로 용해되더군. 이 에너 지는 마치 머리카락 속으로 체액이 들어가듯이 현의 내부로 스며 들어간 다음, 하얀 샘을 통해서 다시 나오고 있었네." <우주의 현이라고?> "그래. 거미줄처럼 얇고 긴 줄일세. 나는 그 현들을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네. 그것들은 순수한 에너지로 가득 차 있어서 대단히 뜨거웠어. 때때로 현들이 진동하면서 하 나의 음을 내었네. 다장조 음계의 제 7음이었어. 그게 바로 우주의 음악이고 우리의 세계는 바로 그런 진동에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네." 마르탱은 천체 물리학자들의 연구를 연상시키는 그 묘사에 대단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 얀 샘으로 이어지는 블랙홀, 진동, 우주의 소리, 핀처가 또 다른 진전을 이룬 셈이었다. 마르 탱은 그것이 자기 덕분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뿌듯하였다. <굉장하군. 자네는 과학과 시. 좌뇌와 우뇌가 하나로 결합되는 경지를 경험한 것일세.> "내가 느끼기에는 공간의 3차원과 시간의 1차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의 시공 차원이 있는 듯했네. 또 그순간에 내기 경험한 것들은 시간을 초월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네.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 동시에 일어난 일처럼 보였단 말일세." <최후 비밀은 어쩌면 자네로 하여금 미래의 인간이 갖게 될 의식을 미리 경험하게 하는지 도 몰라.> "그 이상한 의식 상태에 도달하면, 나 자신이 아주 온화하고 무한히 선량하다는 느낌이 들 어. 어떤 원망도 느끼지 않고 일상의 문제들도 모두 잊게 돼. 그 기분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 을까? 너무 어렵군. 내가 나의 자아를 초월하여 활짝 열린다고나 할까?" <자네가 부럽네...... . 나도 수술을 받을까?> 핀처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그건 안돼! 자네에겐 분명하게 정해진 역할이 있어. 자네는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가장 냉철해. 내 머릿속에서 광풍이 일 때, 자네는 그것을 밖에서 통제해 주어야 해. 그건 자네 책임이야. 자네가 그 한계를 넘으면, 나로 하여금 통상적인 지각에서 초월적인 지각으로 넘 어가게 하는 일을 맡아 줄 사람이 없어." <자네 말이 맞아. 나는 카론이야. 아케론을 건너게 해주는 뱃사공일세. 뱃사공은 나무를 지 켜야지...... .> 마르탱은 성한 한쪽 눈을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이따금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사람들에게 해로운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먼 훗날에 미래의 인류가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을 우리가 너무 일찍 접하고 있는 듯한 느 낌이 든단 말일세.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것 같아. 가끔 내 머릿 속에서 이런 경고의 소리가 들려. 이 행위는 해롭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말아라 하고 말 이야.> 판도라의 상자? 이 친구가 왜 그 신화 속의 이야기를 떠올렸을까? 판도라의 상자는 병적 인 호기심을 상징한다. 이 상자의 뚜껑을 열면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내일 자네는 체스 세계 챔피언 레오니드 카민스키와 승부를 겨루게 되어 있네. 자네 뇌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게.> 핀처는 마르탱과 나눈 이야기를 천천히 되새겼다. 데카르트, 8헤르츠, 연과 아카시아, 소마, 지각의 변화, 무엇보다 그와 마르탱이 무수한 세대의 연구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이 두려워했 던 단계를 뛰어넘었다는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핀처는 어떤 큰 위험이 닥쳐오고 있음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다. 지금 내 앞에 어딘가로 통하는 문이 있다. 이 문을 열어야 하는 걸까? 133 두 기자는 알레프 소나무와 털가시나무 수풀 뒤로 몰래 숨어든다. 들쥐 한 마리가 달아난 다. 그들은 수풀을 샅샅이 훑고 있는 난쟁이 인형들 속의 감시 카메라를 피하여 앞으로 나 아간다. 나무들에 조금 가려져 있는 건물 하나가 눈에 띈다. 그들이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건물이다. 입구에 <특별 병동>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이지도르는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이것은 완곡한 표현이다. 전통적인 정신 병원에서도 받아 주지 않고 감옥에 가둬 두기도 어려운 환자들을 모아 놓은 곳이 바로 이 병동이다. 살인을 되풀이하는 위험한 정신 병자, 극단적인 일탈 행동을 보이는 환자 들은 다른 환자들에게 겁을 주기 때문에 이렇게 따로 모아 놓아야 하는 것이다. 옛날에 해적들은 자기들의 보물을 탐내는 자들이 감히 훔쳐 갈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보물 을 뱀들이 우글거리는 구덩이 속에 감추었다던데. 그들은 약간 두려움을 느끼며 그 하얀 건물 속으로 들어간다. 병실이라기보다 실험실처럼 생긴 방이 나온다. " 핀처 박사의 개인 실험실인가? " 쥐들이 들어 있는 작은 우리들이 선반 위에 놓여 있고, 각각의 우리에는 위대한 심리학자 들이 이름이 하나씩 붙어 있다. 융, 파블로트, 아들러, 배르냄, 샤르코, 쿠에, 바빈스키 같은 이름들이 눈에 띈다. " 특별 병동의 위험한 환자들이라는 게 바로 이 녀석들인가? " 뤼크레스는 쿠에라는 이름이 붙은 생쥐를 잡아서 실험용 미로 속에 넣는다. " 쿠에가 누구죠? 쿠에 암시법을 창안한 그 에밀 쿠에인가요? " " 맞아요. 그는 <나는 이길 것이다>라는 말을 천 번 되풀이하면 결국은 이기게 된다고 주 장했지요. 그의 방법은 자기 암시와 최면에 바탕을 둔 거예요. " 생쥐는 미로 사이로 요리조리 빠져나가 지렛대에 다다르더니 그것을 힘차게 누른다. 뤼크레스와 이지도르는 다른 생쥐를 골라 암호 자물쇠 앞에 놓아 본다. 놀랍게도 몇 초만 에 문이 열린다. " 움베르토 말이 맞았어요. 이 생쥐들은 보통의 생쥐들보다 훨씬 영리해요. " " 슈퍼 생쥐로군요....... " " 생쥐 세계의 핀처인 셈이죠. " 생쥐들은 여러 가지 난관에 맞닥뜨렸지만, 곡예 같은 동작을 하고 투명한 파이프로 빠져나 가고 헤엄까지 쳐가면서 지름길을 찾아낸다. 두 기자는 생쥐들의 민첩함과 영리함에 매료되 어 잠시 넋을 읽고 바라본다. 이지도르가 문 하나를 가리킨다. 뤼크레스는 늘 가지고 다니는 곁쇠를 꺼내어 문을 연다. 또 하나의 방이 나온다. 수술실처럼 생긴 방이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두 개의 거뭇한 형체가 그들 뒤에서 팔다리를 길게 뻗는다. " 구경하러 오셨소? " 바리톤 음성의 그 물음에 뤼크레스가 뒤를 돌아본다. 그녀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 세상에....... 오른쪽에 있는 자는 다카시 도쿠카와에요. <사람 잡아먹는 일본인>이라는 별 명이 붙은 자죠. " 괴한은 마치 그녀가 잘 보았다는 것을 확인해 주기라도 하듯, 부엌칼 하나를 꺼내어 휘두 른다. " 왼쪽에 있는 자는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역시 무시무시한 자예요. <교살자 패트>라 는 별명이 붙어 있어요. " 사내는 그녀의 말이 맞다는 뜻으로 두꺼운 가죽끈의 양끝을 잡고 찰싹찰싹 소리를 낸다. " 둘 다 텔레비젼 뉴스에 여러 번 나온 자들이에요. 그 뒤로 감옥이든 정신 병원이든 어딘 가로 보내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거기가 바로 여기일 줄이야...... " " 카뤼브디스와 스퀼라로군요. 오뒤세우스가 맞닥뜨린 마지막 두 괴물이죠. " 이지도르는 의자 하나를 집어 들어 적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한다. 그러는 사이에 뤼크레스 는 안쪽 문을 열려고 달려간다. " 꼼짝 말고 있어, 이 야수들아! 가까이 오지 마! " 이지도르가 의자를 휘두르며 그렇게 외치는 동안 뤼크레스는 다시 곁쇠질을 한다. 마침내 자물쇠청이 곁쇠에 밀려난다. 두 기자는 서둘러 들어간 다음 커다란 철문을 도로 닫고 빗장을 지른다. 문 건너편에서 두 사내가 있는 힘을 다해 문을 두드리고 있다. " 걱정하지 말아요. 문을 부수고 들어오지는 못할 거예요. 문이 굉장히 견고하게 생겼어요. " 그들은 새 방을 둘러본다. 이번 방은 사무실 같은 느낌을 준다. 뤼클에스는 서랍들을 여렁 본다. 이지도르는 살바도르 달리의 유명한 작품을 그대로 본떠서 그린 거대한 벽화를 바라 본다. '호메로스 예찬'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이다. 화면 오른쪽에는 벌거벗은 여인과 히브 리 글자가 새겨진 돌, 나팔, 혀, 열쇠, 바구니에 달라붙은 귀 등이 있다. 화면 중앙에는 채찍 을 휘둘러 말 세 마리를 물 밖으로 나오게 하는 남자가 보인다. 왼쪽에는 호메로스의 흉상 이 그려져 있다. 이마의 갈라진 틈으로 개미들이 기어 나오고 있는 흉상이다. 이지도르가 말한다. " 이 그림 굉장하군요. 대단히 복잡한 그림이에요. " " 또다시 오뒤세우스, 호메로스, 달리로군요....... 분명히 무슨 관계가 있어요. " " 우리가 빠뜨린 어떤 동기가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인류 역사의 위대한 원형, 모든 역사의 근본을 이루는 신화 같은 것 말이에요. " 뤼클레스가 수첩을 꺼내 든다. " 모든 역사의 근본을 이루는 신화...... 그걸 첨가할까요? " " 아뇨. 그것을 추구하는 게 하나의 동기라면, 굳이 따로 항목을 만들 게 아니라 종교에 포 함 시키는 게 좋겠네요. " " 그래도 호메로스 같은 사람에게는 무언가 다른 게 있는 것 같아요. 신화를 좋아하고, 현 실 세계를 그 상상적인 이야기 속에서 녹여 버리는 사람들, 정신의 힘으로 또 다른 현실을 창조하는 사람들에게는 말이에요. " 이지도르는 한쪽 손으로 벽화를 더듬어 나간다. 우선 호메로스의 입 속을 채우고 있는 아 이의 얼굴을 눌러 본 다음, 손가락을 오른쪽 화면으로 이동시켜 돌에 새겨진 히브리 글자와 열쇠를 잇달아 누른다. 아무 반응이 없다. 뤼크레스는 자기 동료가 벽화를 더듬거리는 이유를 깨닫고, 호메로스 이마의 갈라진 틈을 누른다. " 거긴 누구나 너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곳이에요. " 그들은 거대한 벽화를 계속 더듬어 나간다. " 이 그림의 어떤 요소 뒤에 비밀 장치가 숨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 뤼크레스가 호메로스 흉상의 맨살이 드러난 젖꼭지를 누르며 묻는다. " 혹시 모르잖아요? " 이지도르의 손가락은 나팔을 따라 올라간 다음 절벽의 동굴 속을 뒤진다. 뤼트레스는 이지 도르의 손이 거쳐간 모든 부분을 차례차례 더듬어 본다.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때 그림의 한 디테일이 이지도르의 눈길을 끈다. 왼 쪽 화면 윗부분에 작은 섬 두 개가 있고, 그 중의 한 섬에 부러진 날개가 놓여있다. 이지도르가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 이카로스의 날개예요. 그리스 신화에서 아카로스는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갔다가 바다 로 추락해 버리죠....... 핀처는 자기의 종말을 예감했던 것일까요? " 이지도르는 날개를 스치듯이 가볍게 문지른다. 그러자 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리며 작은 뚜껑 문이 열린다. 안에 상자가 하나 들어 있다. 그들은 상자 속에서 빨간 벨벳을 입힌 작은 보석 상자를 찾아낸다. 보석 상자 안에는 길이가 0.5센티미터 쯤 되는 알약 같은 것이 들어 있다. 이 알약은 그보다 조금 클까 말까 한 금속판에 전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 최후 비밀을 자극하는 장치로군요....... " 뤼크레스가 손전등을 가까이 들이댄다. 그 물건의 생김새는 다리가 없는 작은 곤충과 비슷 하다. 하지만, 볼품없게 생긴 그 작은 물건이 바로 사람의 뇌 속에 심어지면 절대적인 쾌감 을 경험하게 한다는 장치다. " 굉장히 작게 만들어져 있네요. " 이지도르는 그 물건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어 집게손가락 위에 올려놓는다. " 아마 조르다노가 핀처의 뇌를 부검하면서 발견한 게 바로 이것일 겁니다. " " 그리고 그는 이것 때문에 죽음을 당한 게 틀림없어요. " 그들은 그 작은 전극이 감추고 있는 악마적인 힘에 두려움을 느끼면서, 그것을 가만히 바 라보았다. 134 이젠 끝장이다. 검은 나이트가 하얀 킹의 성채 안에 침입했다. 오뒤세우스의 목마가 트로이아 성 안에 들 어온 형국이었다. 러시아의 체스 기사는 자기에게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음을 확인하고, 항 복의 뜻으로 자기 킹을 쓰러뜨렸다. 데국이 시작된 뒤로 그의 몸무게는 이미 몇 킬로그램이 나 줄어 있던 터였다. 이 마지막 판에서도 그는 땀을 아주 많이 흘렸다. 셔츠는 땀에 젖어 후줄근했고, 머리카락은 비를 맞은 것처럼 머리통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수 모의 기색만이 가득했다. 모두 여섯 판을 두었지만, 전 세계 챔피언이 이긴 것은 단 한 판뿐이다. 그야말로 참담한 패배였다. 레오니드 카민스키의 눈에 깊은 절망의 빛이 어렸다. 트로이아의 프리아모스 왕이 오뒤세우스에게 패했군요. 그들이 악수를 하자, 관중석에서 박수소리가 일었다. 하지만 박수가 시들하였다. 대중은 아웃사이더를 좋아하지 않는 법이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어쨋든 내가 이겼다. 나 는 이제 세상에서 체스를 가장 잘 두는 사람이다. 카민스키는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그의 매니저는 처음엔 스포츠 정신을 존중하여 그를 격 려하는 눈치이더니, 결국엔 간툭사로 가득 찬 러시아말로 자기 선수를 호되게 질책했다. 늑대의 세계에서 패자는 승자의 배 밑에 제 머리를 들이댄다. 제 머리에 오줌을 깔겨도 좋 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패배한 늑대의 응원자인 그의 코치가 오줌 깔기는 승자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핀처는 할 수만 있다면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정말 유감입니다. 하지만, 우리 둘 중에서 더 나은 사람이 컴퓨터와 맞서 싸워야 하니 어쩔 수가 없군요. 핀처는 연단에 올라가 두 손으로 탁자 가장자리를 짚었다. " 이 승리를 오뒤세우스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저는 이 대국을 치르는 동안 그의 꾀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다음으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 아냐, 이런 말을 하기에는 너무 일러. 나중에 하자) 아닙니다.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 카메라의 플래시들이 잇달아 번쩍거렸다. 이제 핀처에게는 <인간과 기계를 통틀어 지구상에서 체스를 가장 잘 두는 기사>인 딥 블 루 4와 대결할 일이 남아 있었다. 135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짝이 빠진다. 예의 식인광과 교살자가 기다란 금속 의자를 파성추 로 삼아 밀고 들어온 것이다. 그들 뒤로 나이든 여자 하나가 나타난다. 여자는 야수 같은 두 사내에게 들어가라고 이른다. 뤼크레스는 그 여자를 알아본다. 그들이 병원을 처음 방문했을 떼 로베르가 파킨슨 병에 걸린 할머니라고 알려 준 바로 그 여자다. 자기 손목에 시계를 차고 있으면서 뤼크레스의 손목시계를 보려고 했던 그 여자 말이다. " 보아하니 당신이 바로 체르니엔코 박사로군요? " 이지도르의 말에 그녀가 깜짝 놀란다. " 당신이 날 어떻게 알지? " 여의사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호주머니 속에 감춘다. " 명성을 익히 들었죠.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뇌 클리닉보다 하늘빛 해안의 공기가 더 좋으 신가 보군요? 아니면 사람들을 마약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일보다 <최후 비밀>이라 는 새 마약으로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일에 더 많은 흥미를 느끼게 된 건가요? " 그녀의 호주머니 속에서 손들이 좀 더 심하게 떨린다. "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았지? " " 제임스 올즈 박사는 자기 발견의 결과가 너무 위험하다는 것을 분명히 경고했어요. 최후 비밀이 퍼져 나간다면, 아무도 그것에 대한 욕구를 통제할 수 없을 겁니다. 게다가 그것이 사악한 자들의 수중에 들어가는 날에는, 얼마 안 가서 인류가 엄청난 재앙을 맞게 될 수도 있어요. " 이 말이 여의사의 아픈 데를 찔렀지만, 그녀는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 그래서 나도 아주 신중하게 행동하고 있어. 게다가, 여기는 섬이고 많은 사람들이 의욕적 으로 이곳을 지키고 있어. " " 편집증 환자들 말인가요? " " 맞아. 우리에겐 최후 비밀을 지킬 능력이 있어. 나는 확신해. 여기에 있는 1천 2백여 명 의 환자들 가운데에 나를 배신할 자는 아무도 없어. " " 하지만 우리가 있잖아요. 우리가 여기에 왔다는 건 다른 사람들도 올 수 있다는 얘기에 요. " 뤼크레스 넴로드의 지적에 여의사가 발끈 성을 낸다. " 움베르토 그 자식! 지가 그러고도 목숨이 온전할 것 같아? 멍청한 자식. " " 배신자는 늘 있게 마련이에요. 당신은 올즈를 배신했고, 움베르토는 당신을 배신했어요. 살갗에서 땀방울이 배어 나오듯 조금씩조금씩 새어 나가는 게 비밀이에요. 최후 비밀도 언 젠가는 새어나가고 말거에요. " 이지도르는 조금 돌아서 여의사 쪽으로 다가가기 위해 왼쪽으로 살그머니 발걸음을 옮긴 다. " 최후 비밀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그것을 모르면 전극이 있어도 아무 쓸모 가 없지. 그 위치를 알더라고 정확하게 알지 않으면 안 돼. 아주 미세한 차이로도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니까 말이야. " 이지도르가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자 여의사는 호주머니에서 자동 권총을 꺼낸다. " 한 발짝만 더 움직이면 당신 두 개골에 구멍을 내주겠어. 마취제도 쓰지 않고 말이야. 이 권총은 메스하곤 달라. 나는 이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천공의 정도를 조절할 수가 없어. " 이지도르는 그 협박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다가가며 말한다. " 당신은 떨고 있어요. " 여의사의 표정이 결연해진다. " 그 어느 것도 과학의 앞길을 막지 못해. 몽매주의자들은 위험을 무릅써 가며 알기보다는 차라리 모르고 편하게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 당신들도 그런 몽매주의자들과 한통속이 야? " " 양심이 빠진 과학은 영혼의 폐허일 뿐이라고 라블레가 말했지요. " " 과학이 빠진 양심은 멀리 가지 못하고 늘 제자리걸음만 하지. " " 보세요. 당신은 떨고 있어요. " 권총을 들고 있는 여의사의 오른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녀는 왼손으로 그 떨림을 진정시 키려고 애쓴다. " 더 이상 다가오지 마. " 이지도르는 마치 최면을 거는 듯한 어조로 되풀이한다. " 당신은 떨고 있어요. 점점 더 심하게 떨고 있어요. " 여의사는 조준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고 있는 자기 손을 바라본다. 이지도르는 그녀에 게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한다. " 자아, 박사님. 이런 놀이는 박사님 나이에 안 어울려요. 손이 너무 떨리잖아요. 너무 떨려 서 방아쇠도 당기지 못할 거예요. " 그때, 여의사 뒤쪽에 웅크리고 있던 젊은 여자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권총을 가로채더니, 당장 방아쇠를 당길 기세로 그들을 겨눈다. " 이분은 못 쏘겠지만, 난 쏠 수 있어. 엄마, 나한테 맡겨요. " 136 카민스키를 눌러 이긴 뒤에 핀처는 지친 몸으로 자기 약혼녀 나타샤 안데르센을 만났다. 그들은 호텔로 돌아와 사랑을 나누었다. 하지만 나타샤는 오르가슴을 느낄 수 없었다. " 사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요. 나는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는 사람이고 앞 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예요. " " 나타샤, 다시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당신은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 아니에 요.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 다른 문제예요. " 나타샤는 희미하게 웃는다. 절망이 깊이 배어 있는 쓸쓸한 웃음이었다. 그녀는 등에 베개를 받치고 윗몸을 조금 일으킨 채 담배에 불을 붙였다. " 인생의 어긋남이 이보다 더할 수 있을까요? 내 어머니가 내개서 없애 버린 것을 당신은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으니 말이에요. " " 나는 확신해요. 당신도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어요. " " 뇌에서 잘라 버린 것은 영원히 다시 자라나지 않는대요. 그건 당신이 나보다 더 잘 알잖 아요. " " 그래요.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제 기능들을 다시 정비해 내는 것이 뇌라는 기관의 특성 이에요. 예를 들어 언어 중추가 손상되면, 다른 기능을 맡고 있던 어떤 부위가 그 기능을 대 신해요. 뇌의 탄력성은 무한해요. 내가 예전에 본 어떤 뇌수종 환자는 두 개골의 내부를 감 싸고 있는 얇은 살가죽이 뇌의 전부였는데도, 말을 하고 논리적인 사고를 하고 기억을 유지 했어요. 그 점에서는 오히려 보통 사람보다 나았지요. " 나타샤는 자연이 선물한 아름다운 육체를 오염시키는 작은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담베를 되도록 깊이 빨아들였다. 그녀는 자기 애인이 담배를 끊으려고 노력하는 중임을 알고 있었 다. 그녀가 담배를 피우면 그에게 방해가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굳이 그에게 즐 거움을 주고 싶지 않았다. " 아주 그럴듯한 이론이군요. 하지만 현실의 난관 앞에서는 전혀 맥을 못 추는 공론일 뿐 이에요. " " 그건 마음의 문제예요. 난 안 돼 하는 셍각이 당신을 가로막고 있어요. 파스칼 형을 한번 만나 보는 게 좋겠어요. 그는 최면술로 흡연자들의 금연을 도와주기도 하고, 불면증 환자들 이 잠을 잘 수 있게 해주기도 해요. 그라면 당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을 거라고 확 신해요. " " 최면술로 성적 쾌감을 느낄 수 있게도 해주나 보죠? " 그녀가 실소를 흘렸다. " 아마도 당신을 어떤 장애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거예요. " " 거짓말 그만해요. 당신의 뇌 속에 있는 전극이 어떤 한 부위에만 영향을 미친다는 건, 뇌 가 여러 영역으로 나뉘어 있고 이 영역들이 저마다 특정한 기능을 맡고 있다는 얘기예요. 내 어머니는 내 뇌에서 어떤 부분을 잘라 버림으로써 나를 헤로인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했 어요. 다행스럽게도 그 없어진 부분을 벌충해서 다시 마약 중독자로 만들기 위해 뇌가 탄력 성을 발휘하지도 않았고요. 하지만 그 해방의 대가로 나는 불감증을 얻었어요. 나는 이제 다 시는 쾌감을 느낄 수 없을 거예요. 당신이 뭐라고 하든, 아무리 맛있는 포도주를 마시고 아 무리 아름다운 음악을 들어도 나는 별다른 기쁨을 느끼지 못해요. 벌을 받은 거죠. 어떤 신 문에서는 내가 세계에서 제일 가는 섹스 심벌이라고 주장했어요. 또 세상의 숱한 사내들이 나랑 섹스하는 것을 꿈꾸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어떤 남자랑 관계를 해도 오르가슴을 느낄 수 없어요. 나보다 못났다는 여자들은 별 볼일 없는 남자랑 관계하면서도 쾌감을 잘도 느끼 는데 말이에요. " 그녀는 자기 샴페인 잔을 잡더니 벽에다 집어던져 산산조각을 낸다. " 나는 이제 아무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않아요.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요. 나는 살 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는 사람이에요. 쾌감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 겠어요? 나에게 남아 있는 단 하나의 감정이 있다면, 그건 분노예요. " " 진정해요. 당신은 틀림없이....... " 핀처는 멀리에서 오는 어떤 것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말을 중단했다. " 무슨 일이에요? " "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라는 친구가 승리를 축하해주려는가 봐요...... " 핀처는 먼산바라기를 하듯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기 시작했다. 그의 숨결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나타샤는 경멸 어린 눈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그의 온몸에 경련이 스치고 지나갔다. " 아, 당신이 이러고 있는 것 내가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기나 해요? " 핀처의 모든 표정, 모든 몸짓에서 그의 쾌감이 점점 고조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 당신이 이러는 것 보면 내 욕구 불만이 커져요. 당신 그거 이해할 수 있어요? 못할 거예 요. 내말 듣고 있어요? 쾌감이 절정에 달했군요. 마치 당신이 내 옆에서 자위를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 핀터는 쾌감에 겨운 감창 소리를 내질렀다. 나타샤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귀를 틀어막고 자기도 같이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입 을 벌린채 서로에게 소리로 맞섰다. 한 사람은 황홀경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로, 다른 한 사 람은 격분한 외침으로. 마침내 핀처가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그는 마치 실신한 사람퍼럼 눈을 반쯤 감고 입 을 해 벌린 채 팔다리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의 약혼녀가 비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 그래, 행복해요? " 그러면서 그녀는 그의 얼굴에 대고 담배 연기를 훅 불었다. 137 " 아니, 나타샤 안데르센! " " 나타샤 체르니엔코예요. 안데르센은 내 첫 남편의 성이죠. " 이지도르가 짐짓 과장하여 수선을 피운다. " 아 이런, 키르케 여신께서 납시었군요! 마술사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도 가장 무서운 분께 서 어떻게 여길 다 오셨죠? 세이렌들의 뒤를 이어 우리에게 또 다른 시련을 안겨 주려고 오 셨나 보군요. " 키르케? 마법의 지팡이로 오뒤세우스의 부하들을 돼지로 변하게 했다는 그 마녀 말인가? 하고 뤼크레스는 생각했다. 나타샤는 사무실의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으라고 그들에게 손짓을 한다. " 당신들은 톱모델의 삶이 어떤 건지 모를 거예요. 그 바닥에는 누구나 빠져 들기 쉬운 타 락의 행로가 있어요. 처음엔 암페타민 같은 각성제로 시작하죠. 시차 때문에 피곤해도 말짱 하게 깨어 있기 위해서, 배고픔을 잊고 살찌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말이에요. 암페타민은 우리 가 직접 구하지 않아도 회사에서 미리 알아서 마련해 줘요. 암페타민은 다음에는 에스타시 에요. 패션쇼의 여흥을 만끽하기 위해서죠. 그 다음에는 눈이 더 초롱초롱해지 도록 코카인 의 힘을 빌리고, 우리가 그저 재주 넘는 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고 현실에서 도피하 기 위해 LSD에 손을 대지요.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잊기 위해 헤 로인을 찾아요. " 나는 키가 작아서 저런 걱정은 안 하고 살아도 되는 구나 하고 뤼크레스는 생각했다. 나타샤는 권총을 계속 겨누면서 이지도르의 주위르 돈다. " 우리 중의 다수는 약에 취한 채 패션쇼에 참가했어요. 겉으로 보기엔 마냥 화려하게 사 는 것 같아도, 알고 보면 서글픈 <배우>에 지나지 않아요. 그래요, 우리의 화려한 겉모습 뒤에는 참담한 사생활이 있었어요. 나는 사진작가로 일하던 한 남자 친구의 꾐에 빠져 약물 의 덫에 걸리고 말았어요. 나에게 마약을 밀매했던 그 자식 때문에 갈수록 중독이 심해졌지 요. 나선형 미끄럼틀을 타고 끝없이 나락으로 빠져 들어가는 기분이었어요. 헤로인의 효과가 어떤 것인지 당신들은 모를 거예요. 먹거나 자고 싶은 욕구도 없어지고 섹스를 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죠. 남들은 안중에도 없고 거짓말도 서슴지 않아요. 자기 자신조차 더 이상 존중하지 않게 되죠. 나는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않고 오로지 나에게 헤로인을 가져다 주 는 그 사진 작가가 하라는 대로만 했어요. 그는 나에게서 모든 걸 가져갔죠. 내 돈, 내 몸, 내 건강까지 말이에요. 나는 몇 초동안의 환각을 더 얻기 위해서라면 그에게 목숨까지 바치 려고 했을 거예요. " 나타샤는 끔찍했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떤다. 그러자 이지도르는 그녀를 달래려는 듯 호주머니에서 감초 사탕 봉지를 꺼내어 내민다. " 죽고 싶다는 생각도 숱하게 했고, 실제로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어요. 세 번째로 자살을 기도하고 나자, 어머니는 어떤 수를 써서든 나락에 떨어진 나를 구하려고 했어요. 어머니는 더 이상 나를 믿지 않았죠. 타이르거나 협박을 한다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나는 거짓말을 다반사로 했고, 무슨말 이든 귓등으로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어머 니는 날 사랑했어요. 어머니가 날 위해서 한 수술이 바로 그 사랑의 마지막 증거죠. " " 나로서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설령 수술에 실패해서 이 아이가 죽거나 정신 병자가 되는 한이 있어도, 아이가 제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었지. " 체르니엔코 박사의 손이 조금 전보다 더 심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 지옥은 바로 여기 우리의 머릿속에 있어. 욕망이 없으면 고통도 없는 법이지. " 이지도르가 그 말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되받는다. " 고통이 없으면 삶도 없죠. 살아 있는 존재의 특성이 바로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아 닌가요? 식물도 고통을 느낍니다. " 나타샤는 자기 어머니에게 바싹 다가가서 볼에 입을 맞추더니, 총을 쥐고 있지 않은 손으 로 어머니의 손을 잡는다. " 수술은 완벽한 성공이었어. 나타샤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로 돌아왔지. 그러고 나자, 그 소문이 퍼져 나갔고 러시아 정부가 나를 지원하고 나섰어. 서방 세계가 지지부진한 모습 을 보이고 있는 분야에서 우리가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긴 거지. 사정이 그 러하니 나로선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어. 나쁜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헤로인 중독자들 을 수렁에서 건져내는 일인데, 그걸 해서는 안 될 까닭이 뭐가 있으랴 싶었지. 예전에 동료 들과 했던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뇌에 손을 대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상황도 아니었어. " 나타샤는 여전히 모가 선 눈으로 두 기자를 노려보고 있다. 체르니엔코 박사가 말을 잇는 다. " 그러던 어느 날 핀처가 내 연구 활동의 내용을 간파하고 날 만나러 왔어. 그는 내 수술 이 네임스 올즈가 발견한 쾌감 중추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최초의 인물이었어. 그 는 자기에게도 수술을 해달라고 부탁했어. 하지만 그가 원하는 건 쾌감 중투를 제거하는 것 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자극하는 것이였어. " " 그러니까 핀처와 나타샤가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군요. " 뤼크레스의 말에 나타샤가 대신하여 말을 잇는다. " 아까 말한 대로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부작용이 없는 건 아니었어요. 쾌감 중투 수술로 약물에 대한 욕구가 사라진 것까지는 좋은데, 내가 더 이상 아무것에도 의욕을 느끼지 못하 게 되었다는 게 문제였어요 헤로인 결핍의 고통 대신 감정 결핍의 고통이 찾아온 거죠. " 체르니엔코 박사가 딸의 말을 받는다. " 나는 핀처와 나타샤가 꼭 만나기를 바랐어. 두 사람은 천칭의 양쪽에 놓여 있었어. 나타 샤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을 핀처는 과도하게 가지고 있었지. 나는 오로지 그 사람만이 나타 샤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 결국 나 때문에 그가 죽은 거죠....... " " 당신은 그를 죽이지 않았어요. " 이지도르가 그렇게 단언하자, 나타샤는 어깨를 치켜 올린다. " 핀처는 나로 하여금 쾌감을 느끼게 하는 것을 자기 임무로 삼았어요. 그날 밤에 그는 다 른 어느 때보다 강한 의욕을 보였어요. 승리가 또 다른 승리에 대한 의욕을 불러일으킨 모 양이에요. 우리는 서로 끌어안고 사랑의 행위를 시작했어요. " ...... 그러다가 그가 죽은 거지. " " 당신이 그의 머릿속에 전극을 심었다고 했지요? 그럼 자극을 보낸 사람은 누군가요? " 그때, 그들로부터 멀지 않은 곳의 탁자 위에 놓인 컴퓨터가 갑자기 켜지더니, 모니터에 단 어 하나가 나타난다. " 나요. " 그리고 그 밑에 이런 말이 쓰여진다. " 나를 보러 오시오. " 138 장 루이 마르탱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뮈엘 핀처가 딥 블루 4를 상대로 승리를 거둥 뒤에, 그는 여느 때처럼 전기 자극을 상으로 보냈다. 0.5초 동안 19 밀리볼트의 자극을 준 거였다. 그렇게 자극을 보내면, 핀처는 곧바로 전화를 걸어서 자기 느낌을 설명해 주곤 했다. 그런 데 이번에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마르탱은 몇 시간 동안 초조한 마음으로 그의 전화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컴퓨터를 통해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서야 사뮈엘 핀처 박사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미가 죽었다고?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마르탱은 컴퓨터 화면을 통해 나타샤가 경찰에 연행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저 여자는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저 여자 탓이 아니라 내 탓이다. 살인자 는 나다. 그는 깊은 절망감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유일한 사라므 그 가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하던 유일한 사람을 자기가 죽인 셈이었다. 그의 한쪽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솟아 나고, 입가에서 침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를 바라 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의 마음을 할퀴어 대는 그 어마어마한 고통을 헤아려 주는 사람도 하나 없었다. 그는 친구를 잃은 슬픔 때문에 울었고, 이제부터 찾아올 철저한 고독을 생각하며 울었다. 그날 밤, 마르탱은 역설 수면 단계의 꿈속에서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호메로스 예찬'을 보 았다. 그리고 오뒤세우스 이야기를 들려주는 호메로스의 목소리도 들었다. <오뒤세우스 일 행의ㅣ 다음 기항지는 태양신의 섬이었다. 키르케는 이 섬에 있는 태양신의 가축에 손을 대 면 반드시 화를 입게 된다고 경고한 바 있었다. 하지만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던 오뒤세우스 의 부하들은 그가 없는 동안에 마치 미친 자들처럼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저질렀다. 그가 섬 의 내부로 혼자 기오를 하러 간 사이에, 태양신의ㅣ 소들을 잡아먹은 거였다. 오뒤세우스는 바닷가로 돌아와 이 사실을 알고는 대경실색했다. 하지만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 다. 이미 죽은 소를 살려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태양신의 복수가 신체 없이 뒤따랐다. 태양신의 복수가 지체 없이 뒤따랐다. 태양신의 부탁을 받은 제우스는 우레를 보내어 배들 을 모두 부숴 버렸다.> 그림의 왼쪽 부분에 있는 호메로스의 얼굴에 핀처의 얼굴이 겹쳐졌다. 황홀경에 빠져 있던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보여 준 그 잔뜩 일그러진 표정 그대로였다, 갑자기 번개가 번쩍하며 그 얼굴을 내리쳤다. <오뒤세우스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물에 빠져 죽었다.> 그 소리가 들리자, 마르탱은 살바도 르 달리의 그림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오뒤세우스는 부서진 배에서 떨어져 나온 용골과 돛대를 엮은 다음 그것에 몸을 의지하 여 폭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며칠 동안 바람에 떠밀려 다닌 끝에 그는 마침내 바다 의 요정 칼뤼프소가 살고 있는 섬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 섬에 오랫동안 붙들려 있었다. > 칼뤼프소의 섬이라고! 세상에, 이럴수가! 마르탱은 성한 한쪽 눈을 뜨며 잠에서 깨어났다. 달리의 그림에 나오는 이미지들에 취한 기분이었다. 마치 고양이가 오는 것을 보고 날아가 버리는 찌르레기들처럼 꿈의 마지막 편 린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몇 이미지들은 아직 눈앞에 선했다. 호메로스, 오뒤세우스, 사미. 그는 컴퓨터를 켠 다음, 오뒤세우스에 관한 사이트들을 뒤져 고대 그리스의 이 탐험가가 실제로 항해한 뱃길을 조사하였다. 배들을 전복시티는 두 괴물 카뤼브디스와 스퀼라는 코르시카 섬과 사르다니아 섬을 가리키 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뒤세우스는 이 두 섬 사이의 해협을 지나갔을 것이다. 호메 로스가 두 섬을 괴물에 비유한 것은 그 해협에 암초가 많고 거센 조류가 흐르고 있기 때문 일 것이다. <오뒤세우스는 아흐레 동안 떠밀려 가다가 열흘째 되던 날 밤에 오귀기아 섬에 닿았다. 그 곳에는 사람의 목소리를 내는 아름다운 요정 칼뤼프소가 살고 있었다.> 이럴수가! 혹시 그 섬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전설과 현실이 그렇게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에 마르텡은 큰 충격을 받았다. 어쩌면 내가 오뒤세우스라는 인물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한낱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가 이 섬에 온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정말 이 성 마르그리트 섬이 요정 칼뤼프소가 살았던 오귀기아 섬일 수도 있을까? 139 성 마르그리트 섬에 라벤더 향기가 진동한다. 네 사람이 어딘가로 바삐 가고 있다. 다들 무 슨 생각에 골몰해 있는지, 오래된 동굴과 바윗덩어리 옆을 지나가면서도 눈길 한번 주지 않 는다. 거의 화석처럼 되어 버린 널조각 하나가 나뒹굴고 있지만, 그들은 그것에도 관심이 없 다. 그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벌레 먹은 나뭇조각에 지나지 않지만, 2천년도 더 된 아주 오랜 옛날에 이 섬에 와서 좌초한 어떤 배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나타샤와 그녀의 어머니는 두 기자를 파과병 환자들의 병동으로 데려간다. 그들 주위에는 온통 식물이나 다름없는 상태에 놓인 환자들뿐이다. 나타샤가 어떤 환자 앞에서 두 기자를 멈춰 세운다. 입에서 침이 흐르고 눈이 발갛게 충혈 된 환자다. 그의 머리를 죄고 있는 헝겊 모자 밖으로 전선들이 빠져나와 있고, 즈 전선의 일 부는 하얀 천으로 덮인 가구로 연결되어 있다. 환자의 맞은편에는 컴퓨터 모니터 한 대와 갖가지 전기 기구들이 놓여 있다. 모니터가 저절로 켜지더니, 그 한복판에 문장이 나타난다. <내가 바로 <<아무>>라는 사람이요.> 두 기자는 그 생급스러운 말에 잠시 멍한 기분을 느낀다. 이렇게 병실에 갇혀서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이 사람이 정말 그 <범인>일 수 있을까? 그러다가 이지도르는 이자가 정말 범인이라면 그렇게 누워 있는 상태야말로 최선의 위장일 뿐만 아니라 가장 확실한 알리바이라는 사실을 알아 차린다. 설령 이 사람이 살인을 했다 한들, 어떻게 이 사람을 감옥에 넣을 수 있겠는가? 이자는 이 미 감옥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감옥인 자기 육신에 감금되어 있다. 이미 가장 혹독한 형벌 을 받고 있는 이 사람에게 더 이상 어떤 형벌을 가할 수 있단 말인가? 주사액 대롱들과 생명을 붙들어 두는 갖가지 기구들을 몸에 달고 있는 이 파자마 차림의 남자가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를 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도 이 사람에게 이미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고통을 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지도르는 핀처 박사가 자기의 뇌에 자극을 줄 사람으로 그 환자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 지를 비로소 깨닫는다. 이 사람은 순전한 하나의 정신일 뿐이다. 컴퓨터 화면에 아주 빠른 속도로 이런 문장이 나타난다. <훌륭해요. 한 판의 멋진 체스 경기를 보는 듯했소. 나는 체스를 두는 사람들로서 당신들 이 요새에 잠입하여 우리를 궁지에 몰아 넣은 그 책략이 무척 마음에 들어요. 핀처도 예전 에 카민스키와 싸울 때 그런 계약을 쓴 적이 있소. 오뒤세우스의 꾀를 말이오.> 뤼크레스는 그렇게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말과 문장을 만들어 내는지 그 저 신기하기만 하다. 저 모자에 비밀이 있다. 저 모자가 이 사람의 생각을 전자 신호로 바꾸어 주는 것일 게다. 모니터에 다시 문장이 나타난다. <당신들은 분명히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었소. 하지만 이건 그냥 장군을 부른 것일 뿐 외통 장군은 아니요. 이제 막판 뒤집기의 시간이 오고 있소. 상대를 제압했다고 믿고 있는 추적자 들이 오히려 궁지에 몰린 차례가 온 거요. 우리의 킹에게는 체크메이트가 통하지 않기 때문 이오. 우리의 킹은 사고하는 하나의 뇌일 뿐이요. 누구도 그 뇌를 위협할 수 없소.> 이지도르가 묻는다. "당신이 핀처를 죽였소?" <당신은 질문할 자격이 없소. 질문을 하는 건 나요.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중에서 당 신들이 알고 있는 게 뭐요?> 그러자 나타샤가 이지도르 대신 대답한다. "이자들은 모든 걸 알고 있어요. 없애 버려야 해요." <물리적인 폭력은 약자들이 마지막 설득 수단으로 사용할 때만 의미가 있소.> "그럼 이자들을 어떻게 하죠?" 환자는 모니터에서 눈길을 거두어 두 기자를 바라본다. 이지도르는 환자의 눈을 똑바로 바 라보면서 이렇게 읊조린다. "눈은 무덤 속에 들어가서도 바라보고 있었고...... ." <당신은 책을 잘못 골랐소. <<아무>>는 오뒤세우스의 전설과 관계가 있지 "성서"와는 관 계가 없소.> <당신 자신이 오뒤세우스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난 보죠?" 이지도르가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그렇게 묻는다. 뤼크레스는 자기 동료가 갑자기 도발적으 로 행동하는 까닭을 이해하지 못한다. 환자가 눈을 깜박인다. <나는 탐험가 오뒤세우스요. 다만 나는 지중해 해안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 의 근원을 찾아서 뇌의 비밀을 탐색하고 있소." "아뇨, 당신은 오뒤세우스가 아닙니다." 그 말에 체르니엔코 박사가 발끈한다. "뭐야? 당신 어떻게 된 거 아냐?"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게 내버려 둬요.> 이지도르는 숨을 가다듬고 매몰차게 내뱉는다. "당신에게는 눈이 하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오뒤세우스가 아니라 오히려 외눈박 이 괴물 퀴클롭스이지요." 잠시 침묵이 흐른다. 뤼크레스조차 자기 동료의 냉정함에 아연 실색하고 있다. 이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지? 지금은 바보처럼 굴 때가 아닌데. <난 오뒤세우스요.> "아뇨 당신은 퀴클롭스예요!" <오뒤세우스요! 난 영웅이란 말이오.> "퀴클롭스에요. 당신은 악당이란 말이오." <난 오뒤세우스지 악당이 아니오.> 나타샤도 그녀의 어머니도 그 느닷없는 설전에 어리둥절하여 끼어들 생각을 못하고 있다. 140 어떻게 감히 이럴 수가 있지? 이자가 어쩌자고 이렇게 뻔뻔하게 나오는 거지? 나는 악당 이 아니라 영웅이다. 난 오뒤세우스다. 이것은 하찮은 자들이다. 아, 그래 됐어. 아테나, 네가 속삭이는 소리다 들려. 그래, 이건 하나의 도발이고 계략이야. 내가 이런 잔꾀에 말려들면 안 되지. 이자는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것을 알고 있어. 체스 에서도 그렇듯이, 한쪽이 공세를 취하여 우위에 서면 다른 쪽은 수세에 몰려 약점을 노출하 게 마련이지. 이자는 대단히 강하다. 체스를 둘 줄 아는 자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사람의 심리도 잘 아는 자다. 이자는 나 같은 장애자에 대한 연민을 넘어섰고, 상대에 대한 적개심을 초월했다. 그 래서 나를 아주 덤덤하게 다루고 있다. 영악한 자다. 교묘하게 선택된 몇 마디 말로 내 마음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어린아이가 다시 튀어 나오게 했다. 나는 마치 유치원 마당에서 나에게 집적거리던 사내아이들에게 대들었을 때처럼 이자를 상대하고 있다. 상대가 나를 화나게 한다고 이성을 잃고 기분에 휩쓸려선 안된다. 마음을 잘 다스리자. 이 자를 미워하지 말자. 이자가 내 마음에 상처를 주었더라도, 나는 계속 냉정하고 의연하게 굴 어야 한다. 이자는 나를 모욕하고 내 자존심에 상처를 내려고 한다. 하지만 이자의 독설이 화살처럼 날아오면, 나는 그것이 나에게 닿기 전에 허공에서 제지하여야 한다. 너는 나를 해치려고 했지만, 나는 너에게 오히려 좋은 일을 해주마. 바로 이런 마음가짐이 나의 가장 큰 힘이다. 고맙다. 아테나, 그 점을 깨닫게 해주어서, 이제 나는 안다. 정신이 강 한 자야말로 진정한 강자이고, 다가올 제국은 정신의 제국이라는 것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나 쉽게 이자에게 좋은 것을 줄 수 없는 노릇이다. 나는 오로지 이자가 상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보여 줄 때에만 그것을 줄 것이다. 141 모니터에 글 한 줄이 나타나더니, 행의 끝에 다다르자마자 마치 계단식 수로로 흘러내리는 빗물처럼 아래도 빠르게 이어진다. 그는 빠르게 생각하고 빠르게 글을 쓴다. <당신이 나보고 퀴클롭스라고 했으니, 당신에게 오뒤세우스의 문제가 아니라 퀴클롭스의 문제를 내겠소. 만일 당신이 이 문제를 해결하면, 당신은 핀처의 후계자가 될 것이고 인간이 꿈꿀 수 있는 가장 좋은 상을 받게 될 거요. 최후 비밀에 전극을 심는 게 바로 그 상이오.> 체르니엔코 박사와 나타샤는 그 뜻밖의 제안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나타샤가 분통을 터뜨린다. "몇 달 전부터 우리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을 선발하기 위해 이러저러한 테스트를 하는 중이고, 이 과정을 거쳐 뽑인 사람이 최후 비밀에 전극을 심는 수술을 받게 되어 있어요. 그 런데 그 사을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주겠다는 거예요?" <나는 지능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도덕이라는 측면에서도 완전해지고 싶소. 따라서 나 자신 을 자꾸 미레에 투사해서 생각해 보게돼요. 나는 미래엔 어떤 사람이 <훌륭한> 사람으로 평가받을 지 상상하곤 해요. 내가 생각하기에, 미래의 <훌륭한> 사람은 먼저 대뇌 피질이 한결 복잡하고 뉴런과 뉴런이 더욱 잘 접속되는 사람일 거요. 또 그는 마음을 잘 다치지 않 고 본능적인 반응을 이겨 낼 줄 알며 남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원초적인 감정에 영 향을 받지 않는 사람일 가능성이 많소. 한 마디로 말해서, 포유류의 뇌를 초월하여 정신의 자유로움에 도달한 사람일 거요.> 나타샤와 그녀의 어머니는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무>가 계속 자 기 주장을 펼치도록 내벼려 둔다. <미래의 훌륭한 사람은 지금의 나와 똑같은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일 거요. 말하자면, 자 기의 적들에게 자기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지요...... .> 두 기자는 이 제안을 놓고 요모조모 따져 보지만 아직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갈피를 잡 지 못한다. 뤼크레스가 먼저 더들거리며 자기 생각을 말한다. "저......, 뜻은 고맙지만 사양하겠어요. 다른 수술도 아니고 두 개골에 구멍을 내는 거라서 마음이 내키질 않아요. 그건 내가 너무나 싫어하는 일이거든요." <하지만 아직 내 속에는 현재의 인간이 조금 남아 있소. 그래서 최후 비밀이라는 당근이 통하지 않으면, 채찍으로 당신들을 자극하게 될 거요. 당신들이 여기에서 보고 들은 것을밖 에 나가 이야기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점를 양해하시오. 당신들이 밖에 나가 떠들어대 면 우리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염려가 있소. 우리나 당신들이나 모두 언젠가는 죽게 될 덧없는 존재들이요. 그런 몇 명의 개인들 때문에 우리 계획을 망칠 수는 없소. 따라서, 만일 당신들이 퀴클롭스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당신들을 여기에 붙잡아 둘 거요. 우선 간호사들이 당신들에게 진정제를 주사할 거요. 그러면 당신들은 화학 약품 때문 에 진이 빠져 그냥 가만히 있게 되겠지요. 처음 얼마 동안 우리는 당신들을 경비 시스템이 잘 갖춰진 구역에 가두어 둘 거요. 그러다가 당신들의 뇌가 흐물흐물해지고 도망치려는 욕 구가 당신들의 마음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 당신들을 파괴병 환자들과 함께 살게 할 거 요. 당신들은 무기력한 존재가 되어 삶이 다하도록 오래오래 우리들 속에 머물러 있게 될 거요. 밖에서 누군가가 당신들을 구해 주러 올 거라고 기대하지 마시오. 세상 사람들은 결국 당신들을 잊어버리게 될 테니까요. 정신 병원에는 환자나 의료진이 아니면 아무도 오지 않 아요. 현대판 지하 감옥이죠. 나는 그것을 익히 경험한 바 있소.> 두 기자로서는 당근이든 채찍이든 어는 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런 저런 생각이 빠르 게 뤼크레스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최후 비밀에 다가가는 건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간 이카로스처럼 날개를 잃고 추락하는 일이 아닐까? 핀처가 경고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그 가공할 위력을 지 닌 마약 때문에 나는 모든 의지를 상실해 버릴 것이다. 이지도르 역시 자기 나름대로 <아무>의 제안을 검토하고 있다. 기억력이 자꾸 감퇴된다고 걱정했는데, 이제 보니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내 이성, 내 의지 전체가 허 물어질지도 모를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자 수수께끼를 내겠소. 잘 들으시오.> 장 루이 마르탱은 모니터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낸다. < <<드니의 귀>>라 불리는 시칠리아 근처의 작은 섬에 동굴이 하나 있고, 이 동굴에 오 뒤세우스가 갇혀 있소. 그는 퀴클롭스와 대면하고 있소. 그를 죽이고 싶어하는 퀴클롭스가 제안헸소. <<너는 끊는 물에 삶아질 수도 있고, 불에 구워질 수도 있다. 선택은 너에게 맡 기겠다. 지금 무슨 말이든 한 마디를 해라. 만일 그 말이 참이면 너를 끊는 물에 삶아 죽일 것이고, 그 말이 거짓이면 너를 불에 태워 죽일 것이다>>라고 말이오. 그러자 괴 많은 오뒤 세우스는 절묘한 대답을 생각해 내서, 끊는 물에 삶아지지도 않았고 불에 구워지지도 않았 소. 그가 무슨 말을 했을까요? 당신들에게 3분 동안의 시간을 주겠소. 대답의 기회는 단 한 번 뿐이오. <<기권이냐 갑절이냐>>라는 퀴즈 프로그램 본 적 있소? 자아, 친구들, 이제 당 신들 차례요.> 마르탱은 컴퓨터의 시계를 화면에 띄우더니, 3분이 지나면 시계가 울리도록 조정해 놓는다. 이지도르는 생각을 한 곳에 모은다. 어디선가 읽거나 들은 적이 있는 수수께끼다. 답을 기억해 내야 한다. 오 내 기억력. 내 기 억력아, 날 저버리지 말아 다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냐. 나에겐 네가 필요해. 뤼크레스는 입술을 깨문다. 구워지든 삶아지든 죽는 건 마찬가진데 어떻게 살아났다는 거지? 난 언제나 수수께끼에는 젬병이었어. 게다가 논리 문제와 수학 문제를 대하면 언제나 짜증이 나. 어려운 문제를 풀어 야만 욕조에 물이 채워지고 기차가 제 시간에 떠난다면 난 못 살 거야. 예전에 내 애인있던 남자 중의 하나는 나에게 자꾸 수수께끼를 내고 싶어했어. 하지만 나는 해답을 듣기도 전에 문제 자체를 잊어버리기가 일수였어. 그러다가 결국은 그 사람까지 차버렸지. 수수께끼를 잘 풀려면 우선 그걸 좋아해야 하는데, 난 그렇지 못해. 내가 못 해도 이지도르가 해답을 찾아 내겠지. 한편 나타샤와 체르니엔코 박사는 끼어들 생각을 않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다. 이지도르는 자기 기억을 계속 더듬는다. 쉬운 건데...... . 분명히 내가 알고 있었던 거야. 믿을 수가 없군. 나의 모든 삶이 이토록 간 단한 문제에 달려 있는 데, 해답을 기억해 내지 못하다니. 이지도르는 자기 기억을 하나의 거대한 도서관으로 상상한다. 그리고 자기 정신을 정보를 찾아 나선 민첩한 다람쥐로 만든다. 다람쥐는 "오뒤세아"라는 책을 펼친다. 하지만 이 책은 배, 퀴클롭스, 폭풍우, 세이렌 등의 흐릿한 이미지들로만 가득 차 있다. 퀴클롭스의 수수께끼 와 그것의 해답은 책의 어디에도 없다. 그러자 다람쥐는 수수께끼 책들 쪽으로 뒤지러 간다. 거기에도 해답은 없다. 뤼크레스는 수수께끼 푸는 것을 이내 포기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지도르가 자기의 쇠퇴한 기억력에 맞서 싸우고 있음을 눈치 채고, 그에게 기대를 건다. 그녀는 언제가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이라는 책에서 읽었던 <금붕어의 기억력>에 관한 글을 떠올린다. <금붕어가 어항 속에서 사는 것을 견딜 수 있는 것은 기억 력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금붕어는 장식용의 수중 식물을 발견하면 그것에 경탄을 하고 이 내 잊어버린다. 그런 다음 유리벽에 닿을 때까지 헤어쳐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는 똑같은 수 중 식물을 보고 다시 경탄한다. 이런 과정은 무한히 돌아가는 회전목마처럼 되풀이된다.> 결국 금붕어의 기억력이 약한 것은 미치지 않기 위한 생존 전략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 지도르의 건망증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도 어쩌면 세상사의 충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전략일지도 모른다. 뤼크레스는 이지도르가 금붕어로 변하여 어항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플라스 틱으로 된 장식물이며 물거품을 내는 상자에 경탄하다가 그것을 이내 잊어버리고, 헤엄쳐 갔다가 돌아와서는 다시 경탄하는 금붕어 이지도르. 한편, 이지도르는 스스로를 금붕어가 아니라, 거대한 도서관의 서가들 사이를 돌아 다니는 날랜 다람쥐로 상상하고 있다. "오뒤세아아"도 아니고 수수께끼 책들도 아니라면, 해답을 어 디에서 찾지? 하고 그는 생각한다. 퀴클롭스에 관한 책은 없다. 시칠리아 근처의 섬들에 관 한 책도 거의 없다. 다람쥐가 기억 속에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음을 알리자. 이지도르의 뇌는 <독립적인 논리적 추론>을 통해 해답을 찾아내는 쪽으로 방침을 바꾼다. 이건 쉬운 수수께끼다. 문제는 두려움에서 생긴다. 외딴 섬의 정신 병원에서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의 사고와 기억을 방해하고 있다. <정신병자들 틈에서 어떻게 살아가지?> 하는 생각이 자꾸 다른 생각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세상과 단절된 채 아무것도 하지않고 살 수 있을까? 내 저수탑이며 내 돌고래들은 어떻게 되지? 어쩌면 책도 텔레비전도 없이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의 광기가 틀림없이 나에게로 옮겨질 것이다. 이지도르는 그런 생각을 털어 버리고, 수수께끼를 다시 떠올려 단어 하나하나를 분석하면 서 해답을 찾아내려고 애쓴다. 그의 머릿속에서, 왼쪽 반구의 피질 일부가 분주하게 움직이 며 하나의 생각을 지어낸다. 거짓 속에 참이 있고 참 속에 거짓이 있다. 참과 거짓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두 개의 거 울과 같다. 하나는 상을 일그러뜨리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바로잡는다. 대뇌 피질의 그 부분에서 뉴런이 전기적으로 활성화하여 1천분의 2초만에 활동 전압이 마 이너스 70밀리볼트에서 플러스 30볼트로 높아진다. 이 전기는 수상 돌기 속을 돌다가 축삭 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 뉴런들 사이의 접합부인 시냅스에 다다른다. 시냅스의 끝에는 신 경 전달 물질이 들어 있는 소포들이 있다. 전기 충격을 받고 풀려 난 신경 전달 물질이 뉴 런의 말단과 이웃한 뉴런의 막 사이에 있는 아주 작은 공간 속으로 퍼져 나간다. 사고는 전기적 현상이자 화학적 현상이다. 빛이 입자인 동시에 파동인 것처럼. 글루타민산염이라는 신경 전달 물질이 활동을 개시한다. 이 물질이 이웃한 뉴런에 닿자, 이 뉴런의 활동 전압 역시 30밀리볼트로 놓아진다. 글루타민산염은 하나의 흥분제로 작용한다. 하지만 가바, 즉 감마 아미노부티르산이라는 또 다른 신경 전달 물질이 억제제로 작용함으로써 글루타민산염의 활동과 균형을 이룬다. 흥분 시키거나 억제하는 화학 물질들 사이의 이 미묘한 균형에서 생각들이 생겨난다. 이지도르 카첸버그의 뇌에 들어 있는 1천억 개의 뉴런 들 중에서 3백50억 개가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 는 데에 동원된다. 이지도르의 생각이 오로지 수수께끼에 집중되어 있다는 얘기다. 그의 뇌 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는 탓에 손가락과 발가락의 끄트머리가 창백해지고 약간 저릿저릿해진다. 그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번개처럼 그의 뇌리를 스친다. "오뒤세우스는 <당신은 나를 불에 구울겁니다>라고 말했어요." 이지도르가 설명을 덧붙인다. "그렇게 말하면 퀴클롭스는 몹시 난처한 상황에 빠집니다. <당신은 나를 불에 구울겁니다 >라는 오뒤세우스의 말이 참이라면, 퀴클립스는 그를 끓는 물에 삶아 죽여야 합니다. 따라 서 그는 불에 구워질 수가 없지요. 그렇다면 오뒤세우스는 거짓을 말한 셈입니다. 하지만 < 당신은 나를 불에 구울 겁니다>라는 오뒤세우스의 말이 거짓이라면, 그는 불에 구워져야 합 니다. 그러면 오뒤세우스의 말은 다시 참이 됩니다. 결국 퀴클립스는 오뒤세우스를 삶아 죽 일 수도 없고 구워 죽일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 판결을 내리지 못하지요. 그래서 오뒤세 우스는 죽음을 모면합니다." 142 의식이 자뭇 성대하다. 베르디의 오페라가 울려 퍼진다. 장 루이 마르탱은 수술 장면을 직접 지켜보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의 침대와 컴퓨터 장비 일체를 수술실로 옮기게 했다. 하얀 천으로 덮인 예의 커다란 가구도 옮겨져 그의 머리맡에 놓였다. <비디오 카메라를 통해서만 보니까 싫증이 나요.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소.> 나타샤와 체르니엔코 박사는 이지도를에게 가운을 입히고 그를 수술대에 눕힌 다음 가죽끈 으로 묶는다. 그렇게 준비가 끝나자 체르니엔코 박사가 그의 머리를 깎기 시작한다 이미 머 리털이 많이 빠져 있는 상태라서 삭발에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체르니엔코 박사는 그의 뇌 속에 존데를 집어넣을 지점을 수성 펜으로 표시한다. 마르탱은 이지도르를 보며 생각한다. 자네 나보고 퀴클롭스라고 했나? 이제 곧 오뒤세우스의 힘을 경험하게 될 걸세. 오뒤세우 스가 자네 이마에 창을 꽂을 거란 말일세. 그는 사위엘 핀처가 똑같은 수술을 받았던 날을 떠올린다. 차이가 있다면, 이 이지도르를 카첸버그라는 친구는 전혀 의욕이 없다는 점이다. 병원의 모 든 환자들이 이 수술을 꿈꾸었다. 하는 핀처의 뒤를 잇는 두 번째 <로켓>을 발사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 모두가 원하던 그 상이 그것을 전혀 원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 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무엇인가에 대해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마음 을 비운 사람에게 오히려 그것이 뜻밖의 선물로 주어질 때도 있는 것이다. 뤼크레스는 반창고로 입이 봉해진 채 회전의자에 묶여 있다. 이 두사람은 함께 자는 사이일까? 어쨌거나 수술이 끝나고 나면, 어떤 여자도 최후 비밀을 자극하는 것만큼이나 강렬한 쾌감을 이 남자에게 가져다 주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신호를 보내기만 하면 이 남자의 머릿 속에서 하나의 폭탄이 터질 것이다. 마르탱은 침대의 윗부분을 일으켜 세우게 해서 마치 앉아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니까 수술 장면이 한결 잘 보인다. 이 여자는 참으로 예쁘다. 게다가 대단히 역동적이다. 어쩌면 제2의 핀처로는 남자가 아니 라 이 여자를 선택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제우스가 어떤 신을 인간 세상에 보내 여자로 사는 게 더 좋은지 남자로 사는 게 더 좋은 지를 알아보게 했다. 그 신은 여자와 남자의 몸속에 번갈아 들어가서 각각 하루씩 머물렀다. 그 신은 제우스에게 돌아와서 여자로 사는 게 낫다고 보고했다. 여자가 느끼는 쾌감이 남자 의 쾌감보다 아홉 배나 강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마르탱은 다음의 <실험 대상자>로는 여자를 선택하리라고 마음먹는다. 뤼크레스도 괜찮지 않을까? 두 사람이 함께 자는 사이라면, 이 수술이 끝난 뒤에 이 여자 는 자기 남자 친구가 얼마나 행복해 하는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십중팔구는 이 여자 역시 그 절대적인 쾌감을 맛보고 싶어 할 것이다. 나타샤가 수술 도구들을 자기 어머니에게 내민다. 그러고는 이지도르의 머리통에 금속 테 를 두른다. 이 테에는 여러 개의 작은 아치가 달려 있다. 그래서 마치 이지도르가 나사투성 이의 강철 왕관을 쓰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체르니엔코 박사가 두피의 어떤 부위에 마취제를 조금 바른다. 그런 다음 전기 천공기를 작동시킨다. 천공기가 두피로 다가간다. 이지도르는 눈을 감는다. 143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하고 그는 생각한다. 144 그때 갑자기 경보기가 날카로운 소리로 울린다. 누군가가 병원에 잠입했다는 뜻이다. 빨간 비상등이 깜박인다. 체르네엔코 박사는 동작을 멈춘 채 머뭇거린다. 장 루이 마르탱이 모니터를 통해 <계속해요!> 라고 이른다. 천공기가 다시 돌아가면서 이 지도르 카첸버그의 두 개골에 더욱 가까이 다가간다. 천공기가 두피를 스치려는 찰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움베르토가 불쑥 나타난다. 그는 한 손에 권총을 들고 있다. "내가 제때에 왔군!" 그러면서 그는 재빨리 침대에 묶여 있는 이지도르를 풀어준다. 그러자 이지도르는 뤼크레 스의 결박을 풀어 주러 간다. 그녀가 반창고로 봉해진 입을 놀리며 무슨 말인가를 열심히 응얼거린다. 이지도르는 그녀가 급히 할 말이 있는가 싶어 반창고를 훽 뜯어낸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랬어요?" 이지도르의 물음에 그녀가 화를 내면서 대답한다. "반창고를 한번에 홱 잡아 뜯지 말라고 미리 알려 주려고 그랬어요. 아, 되게 아프네." <카론>의 선장 움베르토가 나타샤 모녀에게 뒤로 물러가라고 손짓을 한다. 그때 마르탱의 모니터에 이런 말이 나나난다. <반갑네. 움베르토. 자네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 "당신이 어떻게 내 이름을 알지? 난 당신을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아니오. 우린 만난 적이 있소. 옛날 일을 떠올려 보시오. 어는 겨울날 밤의 일어었소. 당 신은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었소. 아마 숲에 조금 취해 있었거나 졸고 있었을 거요.> 움베르토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린다. <당신은 빙판 길에 미끄러지는 자동차를 제어하지 못하고 어떤 보행자를 치었소.> 움베르토의 얼굴에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 보행자가 바로 나였소. 내가 지금 이런 생태에 있는 것은 당신 때문이오. 만일 당신이 내 삶에 그런 식으로 난입하지 않았다면, 나는 내 가족이며 친구들과 더불어 정상적인 삶을 즐기고 있을 거요. > 움베르토는 갑자기 회한에 죄책감에 짓눌린 듯한 표정으로 자기 앞의 환자를 멍하니 바라 본다. 뤼크레스는 자기의 동기 목록에 죄의식의 힘이라는 항목을 추가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움베르토가 권총을 들고 있는 손을 축 늘어뜨리며 더듬거린다. " 내가....... 내가........ 아니오. 그럴 리가 없소. 내가 쓰러뜨린 사람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 고 있었소. 충격의 강도로 보아, 그는 틀림없이 죽었을 거요. " 마르탱은 충혈된 눈을 모니터에 고정시킨 채 아주 빠르게 글을 써 내려갔다. <주변 신경계는 고장났지만, 뇌는 여전히 기능하고 있소. 의사들은 그것을 록트 인 신드롬, 즉 리스라고 부르죠. 당신도 한때는 의사였으니까 잘 알 거요. 병 이름치고는 예쁜 이름이 죠. 무슨 꽃 이름 같지 않습니까? 프랑스 의사들은 이것을 유폐 생존 증후근 이라도 부르고 있소. > 움베르토가 뒤로 물러선다. " 그게 나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요? " <사람은 움직일 수가 없으면 권태를 느끼게 마련이고, 권태를 너무 심하게 느끼다 보면 뭔 가 몰두할 만한 일을 찾게 되죠. 나는 많은 일에 관심을 가졌소. 무엇보다도 나를 이렇게 만 든 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소. 그리하여 움베르토 당신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죠. 처 음에 나는 당신을 죽이고 싶었소. 복수심이 부식성의 산처럼 내 뇌를 괴롭혔지요. 그러다가 당신이 알코올 중독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았고, 삶이 나 대신 원수를 갚아 주었다고 생각 했소. 설령 내가 복수를 했다 해도 그보다 더 잘 할 수는 없었을 거요. 나는 적어도 나 자신 에 대한 존경심은 잃지 않고 있었는데, 당신은........ 당신은 너무나 타락해서 인간 이하의 삶 을 살고 있더군요. 당신이 그런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보니 기뻤소. 그럴 만큼 내가 당신을 미워했던 거요. 하지만 나는 내 증오심을 극복하고 싶었소. 그래서 핀터에게 당신을 연락선 선장으로 고용하자고 부탁했지요. 당신은 멀쩡한 사람을 산송장으로 만든 가해자지만 당신 의 피해자인 나는 당신을 구해 주었소. 그 점을 잊지 마시오. > 움베르토의 머릿속에서 죄책감과 감사와 후회가 어지럽게 착종한다. 다른 생각들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움베르토는 낯빛을 바꾸고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뤼크레스와 이지도르를 돌아 본다. " 이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두시오! 고통을 받을 만큼 받은 사람이오. 이 사람이 겪은 가혹 한 시련을 당신들이 짐작이나 하겠소? " 이지도르가 설득을 시도한다. " 움베르토, 핀처를 잊지 말아요. 이 사람이 핀처를 죽였어요. 핀처가 누굽니까? 당신에게 아주 많은 것을 베풀어 준 사람 아닌가요? " 움베르토가 그들 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린다. " 이 사람은 핀처에게 나를 구해 주라고 부탁했어요. 자기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나를 말이오. 이 사람은 나를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나를 구원해 주었소. 그런 사람에게 다시 해 를 입힐 수는 없소. " 고맙다, 아테나. 용서의 힘이 이렇게 나타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 네 상객이 옳 아. 용서란 미래형 무기야. 움베르토가 권총을 그들 쪽으로 들이댄다. 그의 마음속에서 여러 동기가 어지럽게 뒤엉켜 싸움을 벌이고 있다. 뤼크레스와 이지도르에 대한 호감도 있지만, 자기 때문에 장애인이 되 었음에도 도리어 자기를 타락의 늪에서 건져준 장 루이 마르챙에 대한 연민도 크다. 갈등이 너무나 심하다. " 도저히 마음을 정할 수가 없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정말 모르겠어. " 움베르토는 그렇게 내뱉으며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린다. 시선에 초점이 없고 마치 얼 어붙은 사람처럼 더 이상 꼼짝도 하지 않는다. 뤼크레스는 그 틈을 타서 잽싸게 권총을 낚아챈다. 이지도르는 몸을 기울여 움베르토를 살 펴보다가 체르니엔코 박사를 향해 묻는다. " 움베르토가 갑자기 왜 이러죠? " 체르니엔코 박사는 그를 찬찬히 살펴보고 나서 대답한다. " 이건 아주 드문 증상이에요. 마음속의 모든 동기 사이에서 뇌가 완전한 평형 상태에 도 달했어요. 그래서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는 거지요. " " 이런 상태가 오래 가나요? " 여의사가 움베르토의 동공을 살핀다. " 이 사람은 딜레마를 타개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해결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달 아나 버린 거죠. " 모두의 시선이 움베르토에게 쏠린 틈을 타서, 나타샤가 펄쩍 뛰어 뤼크레스의 무기를 떨어 뜨린다. 두 여자가 싸움을 벌인다. 나타샤는 뤼크레스보다 키가 크다는 점을 이용해 육박전 의 경험이 없음을 벌충하려고 한다. 그녀가 먼저 따귀를 갈기고 손톱으로 할퀴고 정강이에 발길질을 하면서 선제 공격에 나선다. 뤼크레스는 상대의 기습에 미처 대응을 못하고 몇 대 를 맞았으나, 이내 상대의 뒤로 돌아가며 상대가 꼼짝하지 못하도록 한쪽 팔을 비튼다. 하지 만, 상대는 고통을 느끼기는커녕 자기 팔에 훨씬 더 강하게 힘을 주어 그녀의 손을 뿌리친 다. 두 여자가 동시에 권총을 잡는다. 다른 사람들은 총구가 자기들 쪽으로 향할 때마다 바닥 에 엎드린다. 치열한 접전이다. 그 와중에 총구가 방 안의 이곳저곳으로 쏠린다. 뤼크레스는 문득 어디에선가 읽은 들소 사냥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린다. 들소를 죽이는 것 은 창이 아니라 사냥꾼과 들소의 의지다. 들소가 패배를 받아들이고 사냥꾼이 승리를 확신 하고 나면, 사냥꾼이 창을 어디에서 던지든 이 창은 결국 표적을 관통하게 된다. 생각이 떄 로는 행위보다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갑자기 탕 소리가 나면서 총알 한 방이 날아가고, 권총이 바닥에 떨어진다. 뤼크레스와 나타샤는 깜짝 놀라서 서로를 바라보다가, 서로의 몸에서 상처를 찾기 시작한 다. 움베르토는 여전히 꼼짝않고 있다. 마침내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들려옴으로써 총알이 어디로 날아갔는지를 알려 준다. 체르니엔코 박사가 어깨에 총을 맞았다. 나타샤가 달려간다. " 엄마! " 결국 총알받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인 사람은 저 여자였군 하고 뤼크레스는 생각한다. " 엄마.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 나타샤가 눈물을 흘린다. 그러다가 갑자기 놀라며 자기 몸을 더듬는다. " 엄마, 됐어요. 내가 고통을 느끼고 있어요! 내가 감각을 회복했어요. 이번에도 엄마 덕분 이에요! " 그녀가 손가락을 눈 밑을 훔친다. " 내가 울고 있어요! " " 나 아파" 체르니엔코 박사가 말했다. 뤼크레스는 그 어수선한 틈을 타서 수술실의 전화기를 들고 제롬 베르주락에게 전화를 건 다. " 여보세요, 제롬? 또다시 영웅이 되어 보지 않을래요? 여기에 구급대와 경찰을 보내 주세 요. 당신이 좋아하는 모험을 한 바탕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어요. " 그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하얀 천으로 덮인 가구 아래로부터 길쭉한 형체 하 나가 빠져나오더니 덩굴손처럼 뻗어 나가 권총을 집어 든다. 그런 다음 총구를 두 기자에게 겨눈다. <손들어! >하는 말이 컴퓨처 모니터에 나타난다. 두 기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시키는 대로 한다. 금속 팔이 치켜 올라가면서 하얀 시트가 벗겨지자 비로소 커다란 입방체가 모습을 드러낸 다. 고딕 글자로 쓰여진 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딥 블루 4의 금속 팔이 이지도르의 얼굴로 더 가까이 다가든다. 이지도르가 장 루이 마르 탱을 보며 말한다. " 당신이 범인이군요....... " <그건 사고였소. 나는 여느 때처럼 사뮈엘 핀처의 승리에 대해 상을 주려고 했을 뿐이오. 하지만 그는 이미 한창 오르가슴에 올라 있었소. 나는 그 사실을 몰랐소. 결국 쾌감의 과부 하 때문에 그의 뇌 속에서 쇼트 사고가 일어난 거요. 그의 내부에서 차단기가 작동하여 퓨 즈가 나가 버린 겁니다. > 이지도르는 금속 팔이 좌우로 왔다 갔다 하게 만들기 위해 뤼크레스로부터 멀어진다. <다시 말하지만 그건 사고였소. 오르가슴에 최후 비밀의 자극이 더해지고, 거기에 체스 경 기로 인한 피로가 겹친 거요. 뇌란 그토록 예민한 거요....... 그는 자극 과다로 죽었소. > 이지도르가 왼쪽으로 움직이면서 계속 사이를 버리자, 뤼크레스는 오른쪽으로 자리를 옮기 며 목소리에 힘을 준다. " 인간의 영리함은 미묘한 차이를 지각하는 능력과 관계가 있어요. 너무 많은 빛은 우리를 눈멀게 해요. 그와 마찬가지로 너무 많은 쾌감은 고통이 되고, 나아가서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어요. " 이지도르가 말을 보탠다. " 그런 점에서 최후 비밀의 발견은 너무 이르다고 볼 수 있어요. 뇌의 그 부위를 자극하면 절대적인 쾌감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고 했죠? 우리는 아직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 점진적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돼요. 오래전부터 당근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당나귀에게 갑자기 당근을 주면, 당나귀는 곧 걸음을 멈출 겁니다. " 모니터에 다시 문장이 나타난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제 나는 결심했소. 나는 당신들을 죽이기로 했소. 내 가 이기고 당신들은 졌소. 그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시오? 내 동기가 더 강했기 때문이오. 당 신들은 낡은 기차들을 옹호하고 있소. 나는 모두를 위해 뭔가 새롭고 중요한 일을 수행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소. 그 확신이 나에게 강한 의욕을 준 거요. 이제 당신들의 목숨이나 우 리의 목숨은 별로 중요하지 않소. > 딥 블루 4의 금속 팔이 권총을 들어 올려 수술 준비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는 이지도르의 이마를 겨눈다. <난 못하겠어. > 모니터에 그 말이 나타나기가 무섭게, 바로 아래에 이런 문장이 이어진다. <해야 돼, 윌리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물러설 수가 없어. > <안 돼, 아테나. 이건 미래의 바람직한 인간형에 어울리는 태도가 아냐. > 이 환자는 일종의 정신 분열을 겪고 있다. 정신이 인간 부분과 컴퓨터 부분으로 분열되어 있는 것이다 하고 이지도르는 생각한다. <너희는 살인하지 않을 거라 하고 '구약 성서'에 쓰여 있어. >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마키아벨 리가 말했지. > <아테나, 네 속엔 딥 블루 4의 사사로운 원한이 아직 조금 남아 있어. > 이렇듯 마르탱의 정신을 이루는 두 부분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 틈을 타서, 뤼크레 스가 딥 블루 4의 팔을 후려쳐서 권총을 떨어뜨린다. 그러자 딥 블루 4는 그녀를 때리려고 팔로 허공을 홱홱 가른다. 꼭 그러쥔 이 강철 손은 무시무시한 무기다. 뤼크레스는 공격을 피하면서 다시 금속 팔의 관철을 후려치려고 한다. 하지만 공격이 여의치 않다. 오히려 놈의 손에 이마를 다쳤을 뿐이다. 그녀는 움직임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그 기계 장치를 쓰러뜨 리기가 결코 녹록치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때 이지도르가 딥 블루 4를 전원에 연결시키고 있는 플러그를 뽑아 버린다. 금속 팔이 축 늘어진다. 이지도르는 마치 플러그가 두 송곳니를 드러낸 뱀의 머리라도 되는 양 엄지와 검지로 꼭 잡고 있다. 뤼크레스는 이지도르가 그렇게 간단한 방법을 생각해 낸 것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 존심이 상하여 다시 기세를 올린다. " 이 환자를 그냥 두면 실험을 다시 시작할 거예요." 그러면서 그녀는 마르탱을 향해 권총을 겨눈다.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태세다. " 틀림없이 누군가가 이 자들을 찾아내서 실험을 재개할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우려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막을 길이 없어요. 최후 비밀이라는 절대적인 마약이 퍼져 나가면, 인 류의 미래는 더 이상 없어요. " 이지도르는 좀 더 깊이 생각할 것을 요구한 뒤에 이렇게 제안한다. " 내게 맡겨요. 아마도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거예요. "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려온다. 곧 이어 제롬 베르주락이 한 무리의 경찰관들을 데리 고 들이닥친다. 그가 재빨리 사태를 파악하고 소리친다. " 내가 때맞추어 온 거죠, 안 그렇습니까? " 145 뤼크레스는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기사를 작성하고 있다.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경쾌하다. 그녀가 타자를 잠시 중단하고 이지도르를 부른다. " 이봐요, 박스 기사 하나가 부족한데 뭐 재미있는 것 없을까요? 우스갯소리라도 괜찮아요. " " 나크만 드 브라슬라프라는 유대 교 라비가 한 이야기를 하나 알고 있어요. " " 어서 해봐요. " " 어떤 재상이 왕에게 말했어요. <올해 거두어들일 곡식이 모두 어떤 팡이(훗날 이 팡이에서 환각제가 나오게 된다)에 감염 되었습니다. 이 곡식을 먹는 사람들은 정신에 이상이 생길 겁니다. " 그러자 왕이 말했어요. <하면, 백성들에게 알려서 그 곡식을 먹지 못하게 해야겠구나. > <하오나 그것 말고는 달리 먹을 게 없습니다. 만일 백성들에게 그 감염된 곡식을 주지 않 는다면, 그들은 굶주림 을 견디지 못해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 <하면, 백성들에게는 그 오염된 곡식을 주고, 우리는 곳간에 비축해 둔 성한 곡식을 먹으 면 되겠구나. > <하오나 모든 백성이 미치광이가 되고 우리만 정신이 온전한 사람으로 남게 되면, 백성들 은 오히려 우리를 미치광이로 여길 것입니다. > 왕은 깊이 생각하다가 재상의 말을 받아들여 이렇게 결론을 내렸어요. <그렇다면 길은 하나뿐이로구나. 우리도 백성들처럼 그 오염된 곡식을 먹기로 하자. 하지 만 우리가 미치더라도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우리 이방에 어떤 표시 를 하기로 하자. > " 이지도르는 자기 이야기에 대단히 만족스러워하는 기색이다. 하지만 뤼크레스는 의아한 표 정을 지으며 볼멘소리를 한다. " 대체 그게 무슨 뜻이죠? 어디 설명 좀 해봐요. " " 우리는 어쩌면 모두가 미치광이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당신이나 나의 장점이 하나 있다 면, 적어도 그 사실을 알고는 있다는 것이죠.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믿고 있지 만 말입니다. " 그러면서 이지도르는 수성펜으로 자기 이마에 점 하나를 찍는다. 그녀는 시시하다는 듯이 어깨를 한번 치켜 올렸지만, 그래도 그 우스갯소리를 컴퓨터 파일 에 기록해 둔다. 그러더니,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듯 그를 돌아보며 묻는다. " 당신은 우리가 미쳤다고 생각해요? " "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지요. " " 무슨 뜻이에요? " 그는 대답 대신 손목시계를 보더니 텔레비젼을 켜고 뉴스를 보기 시작했다. 또 다른 학살 사건들, 자살 특공대의 테러, 또 다른 참사들, 지진 따위에 관한 보도가 나온다. " 이봐요, 내 말 안 들려요? 뉴스 그만 봐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잖아요? " 그가 목청을 높인다. " 내가 만약 공상 과학 소설가라면, 나는 우주 곳곳의 미치광이들을 지구에 다 모아 놓는 이야기를 지어 보겠어요. 우주의 모든 미치광이들이 지구에 모여 있고, 간호사들은 <이 미 치광이들이 저희들끼리 알아서 살아가게 하자>며 손을 놓고 있어요. " 이지도르가 웃음을 터뜨리고 나서 말을 잇는다. " ...... 지구 전체가 하나의 정신 병원이에요.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사이에 차별을 두려고 해요. 우리 모두가 우주 곳곳에서 온 미치광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 이지도르가 다시 웃음을 터뜨리자 뤼크레스도 따라 웃는다. 그러는 동안 뉴스에서는 어떤 교살 사건이 보도되고, 주먹과 피묻은 도끼를 휘두르며 저주를 퍼붓고 있는 복면의 사내들 이 나타난다. 146 그로부터 몇 주 후, 파리. 안개 낀 지평선에 건물 하나가 우뚝 서 있다. 뤼크레스는 건물 앞 공터에 오토바이를 세운 다. 그녀는 이지도르 카첸버그가 살고 있는 이 기이한 건물에 새삼 깊은 인상을 받는다. 이렇 게 파리 교외의 저수탑을 주거로 개조한 것은 이지도르의 기발한 발상이었다. 사람들은 저 수 탱크로 쓰임직한 이런 높은 건물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들 가운데 일 부가 개인에게 매각되어 주거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더러 풍차나 등대를 주거 로 개조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거대한 모래시계처럼 생긴 40미터 높이의 이런 저수탑을 주 거로 선택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뤼크레스는 잡초를 헤치고 야비한 자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 봉지들을 넘어 건물 입구로 다 가간다. 건물 바깥벽의 아렛부분은 낙서와 선거 포스터와 서커스 공연 광고지 등으로 더럽 혀져 있다. 그녀는 녹슨 철문을 밀어 본다. 문이 잠겨 있지 않으므로 두드리거나 초인종을 누를 필요 가 없다. 하긴 누를 초인종이 있는 것도 아니다. " 이지도르, 안에 있어요? " 대답이 없다. 하지만 불이 밝혀져 있다. 바닥에 책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그녀는 이지도 르가 좋아하는 책들 사이로 요리조리 걸어간다. 그는 위에 있을 것이다. 그녀는 중앙의 둥근 기둥 쪽으로 간다. 아래쪽 원뿔과 위쪽 원뿔 사이의 잘록한 부분에서 통로 구실을 하는 원주다. 이 기둥 속에는 DNA처럼 꼬인 나선형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 이지도르? 위에 있어요? " 그녀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이지도르가 예전에 설명해 준바에 따르면, 이 계단은 그 어떤 자물쇠보다 효과적인 방범 수단이다. 이 계단을 대하면 어느 도둑이든 주눅이 들어 버 릴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계단은 이지도르의 몸무게를 줄여 주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가져다 준다. 그녀는 지친 기색으로 마지막 단에 올라선다. 문 저쪽에서 에릭 사티의 음악이 들려온다. 이지도르는 전에도 이 음악을 듣고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곡인 모양이 다. 그녀는 문의 손잡이를 돌린다. 이 문은 저수 탱크 한복판으로 내민 발코니로 통한다. 물로 둘러싸여 있는 이곳에서는 저수 탱크에서 헤엄치고 있는 돌고래들을 구경하기가 십상 좋다. 아닌게 아니라, 중심 축 주위를 천천히 돌고 있는 돌고래 십여 마리가 이내 한눈에 들어온 다. 이지도르는 어린아이야. 어릴 때 장난감 전기 기차를 가지고 놀다가 나중에 기관사가 되는 사람들이 있어. 이지도르는 어릴 때 어항에 금붕어를 키웠을 거야. 지금은 어항 대신 이걸 가지고 있지만, 그의 마음은 어릴 적의 마음 그대로일 거야. 돌고래들이 물을 박차고 솟구친다. 마치 저희 주인에게 손님이 왔음을 알리려는 듯하다. 하지만 돌고래들의 주인은 스스로 바닷가라 이름 붙인 구역, 즉 저수 탱크의 바깥 가장자 리에 서서 열심히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다. 그는 폴로 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차림으로 거 대한 칠판을 마주하고 있다. 이 칠판에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그려져 있고, 미래에 있을 수 있는 일에 대한 모든 가정들이 나뭇가지들에 잎새처럼 달려 있다. 그는 몇몇 잎새들을 지우고 다른 잎새들을 첨가한다. 미래의 나무로군. 인류가 나아갈 가능성이 있는 모든 길을 검토함으로써 <최소 폭력의 길 >을 찾아내려는 거야. 그녀는 구름다리를 건너 그가 있는 곳으로 간다. " 자아, 이거요. " 그러면서 그녀는 '르 게퇴르 모데른'최근 호를 내민다.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깊은 관심을 보이며 그 주간지를 바라본다. 빨간 글자로 크게 <뇌의 신비>라고 쓰여 있는 특집 제목 밑에 나타샤 안데르센이 수영복 차림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책장을 조금 넘기자 <수수께끼의 기관>뇌에 관한 사설이 나와 있다. 그 다음 차례는 이러 하다. 성행위 때에 나타나는 뇌 속의 화학 변화, 대뇌의 왼쪽 반구와 오른쪽 반구가 보여 주 는 지각의 차이, 수면 중의 뇌 활동 단계, 마이클 J. 폭스와 무하마드 알리 등이 걸린 파킨 슨 병, 리타 헤이워스가 걸린 알츠하이머 병 등에 관한 기사, 높은 보수와 감세 혜택의 유혹 때문에 프랑스의 두뇌들이 미국으로 빠져나간다는 현상에 관한 기사. 니스의 영재 학교에 관한 장문의 기사, 양전자 방출 단층 촬영을 통해서 얻은 뇌 사진들, 그리고 끝으로 두 개의 테스트가 부록으로 첨가되어 있다. 하나는 간단한 논리 전개의 귀결을 찾아내는 문제들로 이루어진 지능 검사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그림을 한 번 보고 나서 그 그림 속에 나오는 물건들의 이름을 나열하게 하는 기억력 테스트다. 이지도르가 놀란 기색을 보이며 지적한다. " 우리는 이 주제들 중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조사를 한 적이 없잖아요! " " 알아요. 하지만 테나르디에 부장이 그걸 원했어요. 독자들이 읽고 싶어하는 것도 그런 거 고요. 그래서 미국 신문이나 잡지에 이미 실렸던 기사들을 번역하기도 하고 베끼기도 하고 조금 고치기도 했어요. 인터넷에서 찾아낸 몇 가지 정보도 덧붙였고요. " " 우리가 조사한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 하지 않았네요? 그런데 어떻게 나타샤 사진은 표지에 실었지요? " 그녀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며 대꾸한다. " 나 이제 진짜 프로가 되어 가나 봐요. 테나르디에 부장은 우리 모험에 대해서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했어요. 그런 게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어요. " 이지도르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나는 이 여자의 어떤 점에 마음이 끌리고 있는 것일까? 진지하게 말할 때도 장난기가 가득 한 저 눈 때문일까? " 이번 호가 아주 잘 나가나 봐요. 이번 주 주간지 판매 순위에서 선두에 올랐어요. 덕분에 출장 경비가 아주 많이 나왔는데도 그냥 넘어갈 수 있었지요. " 이지도르는 첫 번째 기사를 검토한다. 나타샤 안데르센의 반라사진들이 <욕망의 연금술>, <우리 호르몬이 우리 행동을 지배한다>와 같은 소 제목들과 어우러져 있다. 어떤 사진 아 래에는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머리 좋은 남자와 함께 살았다. > 하지만 사뮈엘 핀처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이지도르가 약간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 사람들로 하여금 뇌 속의 화학 작용에 관심을 갖게 하는 방법으로는 톱모델들을 등장시 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지도 모르죠. " 그는 벌써 다음 호의 특집으로 무엇이 나올지를 상상하고 있다. <나타샤 안데르센이 독자 여러분을 신경 의학의 세계로 안내하였습니다. 다음 주에는 미스 프랑스가 유방암에 관한 모든 것을 소개할 것입니다. > 이지도르가 기억력 테스트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채고, 뤼크레스가 달 래듯이 말한다. " 기사들이 별로 마음에 안 드나 보죠? 하지만 만일 우리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했다면, 우리 르포는 실리지도 못했을 거예요. 쾌락이 우리 행위를 이끈다는 식으로 얘기하면 사람 들은 금방 우리를 백안시할 거예요. 쾌락이란 추잡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게 사람들의 생각 이니까요. <아버지들의 아버지> 에 관한 우리의 조사를 생각해 보세요. 어디 우리의 조사 결과에 귀를 기울이려는 사람이 있던가요? 진실이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법이죠. " 이지도르는 인류의 있을 법한 미래를 도식화한 나무 그림을 바라보면서 대답한다. " 아마 당신 말이 맞을 거예요. 사람들은 기존의 관념이나 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참되지만 이상해 보이는 것보다는 거짓되지만 그럴싸해 보이는 것을 더 좋아하지요. " 뤼크레스는 손 닿는 곳에 놓여 있던 아몬드 우유를 한 잔 따라 마신다. 돌고래들이 저희와 함께 놀자고 사람들에게 권하기라도 하듯 물 밖으로 솟아오른다. 하지만 두 기자는 돌고래 들의 몸짓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뤼크레스가 말을 잇는다. " 사람들은 예외적인 것이나 자기들의 삶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그들이 정보 제공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해하기 쉬운 정보, 자기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비슷 한 정보예요. 그들이 원하는 건 자기들을 안심시켜 주는 것이죠. 우리는 어쩌면 그것을 또 하나의 동기로 추가해야 할 지도 몰라요. 내일이 또 다른 어제가 되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 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 " 그건 하나의 동기라기보다 인생의 핸드 브레이크 같은 것이죠. 그들은 속도가 두려워서 핸드 브레이크를 건 채 차를 모는 운전자와 같습니다. 그런 삶에 즐거움이 있을 리 없죠. 그 저 두려움이 있을 뿐이에요. " 뤼크레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지도르의 말이 이어진다. "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는 뉴런들의 거대한 접속 망을 지니고 있다고 해요. 그런 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접속들 중의 상당수가 사라져 버리죠. 더 이상 사용되지 않기 때 문입니다. " " 기능이 기관을 만들고, 기능이 없으면 기관이 약해진다는 얘긴가요? " " 우리가 만약 태아 시적의 그 모든 접속을 활동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지 상 상해 보세요. 우리 뇌의 능력은 10배나 커질 거예요....... " " 그건 그렇고, 장 루이 마르탱은 어떻게 되었어요? 그 사람을 처리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 있다고 했는데, 그게 뭐였죠? " " 그의 아내 이자벨에게 연락을 취해서, 그 간의 자초지종을 설명했어요. 그녀가 남편을 다 시 데려가겠다고 해서, 그 뜻에 따랐지요. 다만 한 가지를 꼭 지켜달라고 단단히 부탁했어 요. 마르탱으로 하여금 컴퓨터를 계속 사용해도 좋지만,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은 금해 달라 고 말이에요. 어쨋거나 마르탱은 많이 진정되었어요. 그가 집으로 돌아간 뒤에 함께 이야기 를 나눈 적이 있어요. 알고 보니 아주 매력적인 사람이더군요. 뇌 연구의 역사와 상벌 개념 에 관한 에세이를 쓰고 싶다고 했어요. " " 하지만 그는 우리를 죽이려고 했어요! " 뤼크레스가 그렇듯 열을 올리는데, 이지도르의 대꾸는 심드렁하다. " 대국이 끝나면 서로 손을 잡는 겁니다. 체스 기사들처럼 말이에요. " " 그는 살인자예요! " " 아니에요. 그는 핀처를 죽이지 않았어요. 그의 잘못이 있다면, 공교롭게도 또 다른 사람 과 동시에 핀처에게 상을 주고 싶어했다는 것이지요. 두 사람의 호의가 겹쳐짐으로써 그것 을 받는 사람의 뇌에서 퓨즈가 나간 거예요. 게다가 설령 그에게 죄가 있다 한들, 그를 어떻 게 벌할 수 있겠어요? 감옥에 보낼 건가요? 흥분하지 말고 사리에 맞게 생각합시다. 마르탱 은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새로운 해결책을 찾던 사람이지요. 그는 자기 나름대로 사람들을 구원하고 싶어했어요.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려고 했던 거지요. 다만 자기 행동의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게 문제였지요. " 이지도르는 돌고래들 쪽으로 돌아서더니, 양동이에서 청어 몇 마리를 꺼내 아주 높이 던진 다. 돌고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펄쩍 뛰어올라 그것들을 허공에서 받아먹는다. " 마르탱은 다시 식구들 곁에서 살게 된 것에 만족하고 있는 듯해요. 그는 한동안 자기를 버렸던 가족과 친지들을 용서했어요. " 뤼크레스는 덱 체어에 앉아 아몬드 우유를 홀짝홀짝 마신다. " 오뒤세우스가 자기 아네 페넬로페를 다시 만난 셈이군요. 멋진 사랑 이야기네요. 그런데 성 마르그리트 병원은 어떻게 됐어요? " " 다시 보통의 병원으로 돌아갔어요. 새 경영진이 병원을 <정상화>했지요. 벽에는 희색 페 인트를 칠했고, 환자들은 텔레비전을 보거나 체스를 두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담배 를 피우거나 진정제를 복용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 " 그럼 <크레이지 시큐러티> 방범 장치는 어떻게 되었죠? 그것 덕분에 돈을 많이 벌었다 던데.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시장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는 상표를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 " 주된 경쟁 회사에서 그 로고와 상표를 사들였대요. 그럼으로써 그 회사는 잃었던 고객을 되찾게 될 겁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보통의 공장에서 보통의 노동자들이 제품을 생산하게 될 겁니다. 그 노동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봉급이지요. " " 고객들은 결국 제품의 질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겠군요. " " 그러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겠죠....... " " <크레이지 섹스>포르노 영화는 어떻게 됐어요? " " 그것도 비슷해요. 다른 회사에서 상표를 사들였어요. 이제부터는 단지 출연료를 벌기 위 해 활동하는 배우들이 영화에 출연할 거예요. " 뤼크레스는 칠판 쪽으로 몸을 돌려 미래의 나무를 바라본다. 이지도르가 최후 비밀의 발견 때문에 생겨날 수 있는 미래의 일들을 적어 놓았다가 지운 흔적이 보인다. " 자아 그럼 <우리는 무엇에 이끌려 행동하는가? > 라는 물음에 대해서 우리가 얻은 답을 한번 정리해 볼까요? 1. 고통을 멎게 하는 것. 2.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 3. 생존을 위한 원초적인 욕구를 총족시키는 것. 4. 안락함을 위한 부차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5. 의무감. 6. 분노. 7. 성애. 8. 습관성 물질. 9. 개인적인 열정. 10. 종교. 11. 모험. 12. 최후 비밀에 대한 약속. 이지도르가 그렇게 나열하고 있는데, 뤼크레스가 발언권을 얻으려는 사람처럼 한 손을 들 어 올린다. " 말을 끊어서 미안하지만, 최후 비밀의 실제적인 경험을 빠뜨렸어요. 그게 다른 어느 동기 보다 강력한 것 같아요. " " 그래요. 그럼 13번을 최후 비밀의 실제적인 경험으로 하지요. " 뤼크레스가 원통 모양의 받침대 위에 놓인 표본병을 턱으로 가리킨다. 핀처의 뇌가 들어 있는 표본병이다. " 우리의 이 모든 조사가 결국은 저 뇌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군요....... " 이지도르가 사탕 하나를 입에 넣으면서 대답한다. "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죠. 게다가 우리는 우리가 진정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도 깨달 은 바가 있어요. " " 뭘 깨달았다는 거죠? " "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 그것은 기계가 제 아무리 정교하고 복잡하다 해도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어떤 것, 무어라 이름 붙이기조차 어려운 어떤 작은 것이에요. 핀처는 그것 을 동기라고 불렀지요. 내가 보기에 그것은 유머와 꿈과 광기 사이에 있는 어떤 것이에요. " 그러고 나서 이지도르는 뤼크레스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주무른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몸을 빼낸다. " 갑자기 왜 그래요, 이지도르? " " 싫어요? " " 싫은 건 아니지만....... " " 그럼 내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어요. " 그는 조금 더 부드럽게 어깨를 주무른다. 뤼크레스가 손목시계를 보면서 소리친다. "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이러다가 우리 늦겠어요. 자아, 빨리 준비해요. 지금 나가 야 해요. " 147 귀에 익은 멘델스존의 음악이 울려 퍼진다. 길게 늘어선 하객들이 시청에서 나오는 신혼부 부에게 쌀을 뿌린다. 뤼크레스와 이지도르는 은근한 눈길로 서로를 바라본다. 비행기를 놓치지 않아서 천만다행 이다. 초를 다투어 가며 허겁지겁 서오를리 공항으로 뛰어 들어간 보람이 있었다. 한 시간 간격으로 있는 칸 행 여객기를 놓쳤다면, 제 시간에 맞추어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었을 것 이다. 그들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 서로 스치다가....... 쌀을 한 줌 쥐어 신혼부부에게 뿌린다. " 신부가 참 아름답지요? " 미샤가 감동에 젖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이지도르가 맞장구를 친다. " 정말 아름답군요. "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나타샤 안데르센이 제롬 베르주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나아가고 있다. 그녀의 드레스는 앞에서 보면 미끈한 다리가 잘 드러나 보이도록 특별하게 디자인된 것이다. 뒤에서는 아이들이 길게 늘어진 드레스 자락을 든 채 그녀를 따라가고 있다. 신랑은 대단히 만족스럽다는 뜻으로 콧수염을 문지른다. " 두 사람 다 세 번째로 결혼식을 올리는 겁니다. 결혼이란 대개는 좋은 일이죠. " 미샤가 그렇게 알쏭달쏭한 소리를 한다. 나타샤의 어머니는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어 팔을 놀리기가 불편할 텐데도, 신혼부부가 자 기 앞으로 지나가자 열렬한 박수를 보낸다. 몇 분 후, 하객들을 피로연 장소인 시엘로 데려가기 위해 리무진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뮈엘 핀처 홀이라는 새 이름을 얻은 대형 홀에 하겍들이 들어차고 있다. 뤼크레스와 이 지도르는 작은 식탁을 골라 마주 앉는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샴페인 잔에 <오랑지나 라이트>를 따라 단숨에 마신다. 이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그녀는 자기에게 여러 벌이 있는 중국식 웃옷 가운데 하나를 골라 입었다. 마오 깃에 민소매이며 비단으로 지은 옷이다. 그녀는 이런 종류의 중국식 웃옷 을 무척 좋아한다. 이번 것은 흰색과 청색이 어우러지고 나비 무늬가 들어가 있으며 촘촘하 게 붗은 작은 단추들로 섶을 여미게 되어 있다. 그녀는 여느 때와 달리 화장에도 약간 신경을 썼다. 아이섀도로 커다란 에메랄드빛 눈을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 했고, 속눈썹에는 마스카라를 조금 칠했다. 또 입술에는 투명한 광택 립스틱을 발랐고, 장신구로는 비취 구슬 목걸이를 골랐다. " 나는 남자들이 나타샤의 어떤 점을 마음에 들어 하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보기에 저 여 자는 그저 밋밋하기만 할 뿐 특별한 매력이 없어요. 게다가 다리가 너무 빼빼 말랐어요. 내 눈에는 약간 거식증에 걸린 여자처럼 보여요. 나는 저런 여자를 미인으로 아는 세태를 이해 할 수가 없어요. " 이지도르는 자기 파트너의 질투심을 대하고 속으로 웃음을 짓는다. 키가 작은 초록색 눈의 적갈색 머리 여자와 키가 큰 파란 눈의 금발 여자 사이에는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온 경쟁 의식이 있지. 오케스트라의 악사들이 이글스의 '호텔 켈리포니아'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 당신이 더 아름다워요, 뤼크레스. 자아, 이리 와요. 우리 춤 춰요. 다른 춤은 못 추지만 블루스는 출 줄 알아요. " 두 기자는 음악에 몸을 싣는다. 뤼크레스의 하얗고 파란 비단 웃옷과 이지도르의 빌려 입 은 턱시도가 서로 바짝 달라붙는다. " 아, 7대 종죄가 무엇인지 생각났어요. 탐식, 사치, 분노, 나태, 인색함, 교만, 그리고....... 시샘이에요. " 이지도르의 그 말에 그녀는 신혼부부에게 눈길을 붙박고 있다가 건성으로 대답한다. " 그래요? 기억이 돌아왔나 보군요. " " 이 결혼에 뭐 마음에 안 드는게 있어요? " " 나는 저 두 사람이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 그들 주위에서 여러 쌍의 남녀들이 서로 바짝 붙어 선 채 음악에 맞추어 몸을 비틀고 있 다. " 아참, 그 얘기 좀 해봐요. 퀴클롭스의 수수께끼를 어떻게 풀었어요? " " 나에겐 강한 동기가 있었어요. " " 최후 비밀의 황홀경을 경험하고 싶었나 보죠? " " 아뇨. 당신을 구하고 싶었어요. " " 나를 구하고 싶었다고요? " " 당신은 사고뭉치에다 언제나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고집쟁이죠. 하지만 난 당신에게 아주 강한 애착을 느끼고 있어요. 뤼크레스. " 그러면서 그는 살며시 몸을 숙여 그녀의 민소매 웃옷 밖으로 드러난 어깨에 입을 맞춘다. " 저기...... 당신 지금....... " 그는 그녀의 말문을 막으려고, 이번엔 어깨가 아니라. 입술에 입을 맞춘다. " 지금 뭐하는 거예요? " 이지도르는 그녀의 웃옷 속으로 손을 넣어 가볍게 스치듯이 등을 어루만진다. 그녀는 처음 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가, 마치 그의 대담함에 주눅이 들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손길 에 몸을 내맡긴다. 이지도르의 손이 허리 쪽으로 내려간다........ " 최후 비밀에 도달하는 것보다 더욱 강한 동기가 있어요. 그게 무엇인 줄 알아요? " 그의 다른 한 손이 그녀를 어루만지는 데에 가세한다. 뤼크레스는 자기 몸에 닿는 그의 손 길이 대단히 유쾌한 느낌을 준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란다. " 그건 당신에 대한 나의 애정이에요. 나에게는 최후 비밀에 도달하는 것보다 당신을 구하 는 게 더 중요했어요. " 그는 더 오랫동안 그녀에게 입을 맞춘다. 그들이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는다. 그녀는 상대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입을 조금 벌려 본다. 상대의 의도는 명백하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 과 이의 장벽을 통과하더니 그녀의 혀와 만나려고 과감하게 밀고 들어온다. 혀와 혀가 맞닿 으면서 짜릿한 느낌이 인다. 혀 안쪽의 좀 더 부피가 큰 유두들은 말랑말랑하면서도 약간 오돌토돌한 느낌을 준다. 그들은 50만 개의 맞봉오리가 퍼져 있는 혀의 표면을 서로 맞대면 서 서로의 맛을 본다. 이 남자의 혀는 달다. 이 여자의 혀는 짜다. 이지도르의 몸속에서 남성 호르몬이 분비되고 있다. 마치 갈라진 둑에서 새어 나온 물이 강물 속으로 흘러들 듯, 테스토스테론과 안드로스테론이 분출하여 핏속에 섞여 들고 있는 것이다. 뤼크레스의 몸속에서도 에스트라디올과 황체 호르몬 갚은 여성 호르몬이 분비된다. 하지만 이 호르몬들의 분비는 한결 은근하고 잔잔하다. 그들의 입맞춤이 계속되고 있다. 처음의 호르몬 칵테일에 룰리베린이라 불리는 호르몬이 더해진다. 이것은 남녀가 만나 첫눈에 반할 때에 분비된다는 비교적 희귀한 호르몬이다. 그 들의 체취에 아주 미세한 변화가 생긴다. 뤼크레스의 몸에서 나던 이세이 미야케의 <물>이 라는 향수 냄새가 용연향이 더 강한 다른 냄새에 묻혀 버린다. 이지도르는 사향내가 나는 페로몬을 발한다. 이제 그들 두 사람은 후각을 통해 하나로 결합된다. 그가 그녀를 꼭 껴안는다. 하지만 마치 너무나 소중한 도자기가 깨질까 저어하는 사람처럼 팔에 힘을 주는 것이 아주 조심스럽다. 그녀는 하고 싶은 대로 하게 가만히 몸을 내맡기고 있다. 그녀가 이렇게 직수굿하게 구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 한 가지 결심한게 있어요. 텔레비전 뉴스도 안 보고 라디오도 안 듣고 신문도 안 보고 하루를 보내 볼 생각이에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하루를 보내겠 다는 거예요. 그 24시간 동안 사람들이 서로 싸우다가 죽을 수도 있고, 어디에선가 정의롭지 못한 일이 획책될 수 도 있고, 야만적인 행위가 벌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오 불관언으로 지내 볼 거예요. " " 잘 생각했어요.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일주일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나도 한 가지 결심한 게 있어요. 내일까지 아무런 죄책감 없이 편안하게 담배 를 피우고, 그 다음에는 완전히 끊겠어요. " 갑자기 음악이 중단되고 미샤가 소리친다. " 여러분, 방금 나쁜 소식이 하나 들어왔습니다. 조금 전에 딥 블루 5가 레오니드 카민스키 와 싸워서 이겼답니다. 체스 세계 챔피언 타이틀이 다시 컴퓨터에게 돌아간 것이지요. " 객석에서 우 하는 소리가 터져 나오고 어떤 사람들은 야유의 뜻으로 휘파람을 불어낸다. 이지도르는 일부 청중이 기계에 대한 앙갚음으로 자기들의 포켓용 컴퓨터나 팩스 따위를 부셔 버리지나 않을까 하고 잠시 걱정한다. 미샤는 청중을 진정시키려고 손을 들어 올린다. " 여러분꼐 한 가지 제안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한때나마 그런 수모에서 벗어나 게 해준 사뮈엘 핀처를 추모하는 뜻으로 다같이 1분 동안 묵념을 올리기로 합시다. 카민스 키의 패배를 계기로 우리 모두가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더욱 노력할 수 있게 되기 를 바랍니다. 그래야 장차 다른 분야에서까지 컴퓨터에서 밀리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을 테 니까요....... " 모두가 묵념을 올린다. 뤼크레스가 이지도르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 딥 블루 5가 이겼대요....... 우리가 역사에 길이 남을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른 게 아닌가 싶어요. " " 아니에요. 최후 비밀을 이용하는 것은 운동 선수들이 약물을 사용하는 거나 다름없어요. 속임수를 쓰지 않고 이겨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이겨도 아무 의미가 없어요. " 묵념이 끝나자, 미샤는 음악을 다시 연주하라고 신호를 보낸다. '호텔 캘리포니아'의 마지막 부분이 다시 울려 퍼진다. 이지도르와 뤼크레스는 두 대의 전기 기타가 리프를 연주하는 동안, 다시 입을 맞춘다. " 나는 당신을........ " " 네? 뭐라고요? " 이 남자도 나와 갚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이 여자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 아니에요. 아무것도. " 이 남자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다. 그녀는 그에게 바싹 달라붙는다. 뤼크레스와 함께 있으면 힘이난다. 뤼크레스는 여느 여자들과 달리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나는 늘 경계심을 가지고 대했지만 이제는 사정이 다르다. 그는 그녀를 더욱 세게 껴안는다. 이지도르와 함께 있으면 힘이난다. 이지도르는 여느 남자들과 달리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나는 늘 경계심을 가지고 남자들을 대했지만 이제는 사정이 다르다. 그녀는 이지도르를 홀 밖으로 데리고 나가기로 마음먹는다. " 뤼크레스,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죠? " 그녀는 늘 가지고 다니는 곁쇠로 시에르이 박물관 문을 연다. 그들은 예전에 본 거대한 세 포 모형이며 아담과 이브, 노아, 잠옷, 포크 전시대, 위대한 철학자들의 초상 앞을 차례로 지 나간다. 뤼크레스가 이지도르를 홀 밖으로 데리고 나가기로 마음먹는다. "뤼크레스, 날 어디로 데려가는거죠?" 그녀는 늘 가지고 다니는 곁쇠로 시엘의 박물관 문을 연다. 그들은 예전에 본 거대한 세포 모형이며 아담과 이브, 노아, 잠옷, 포크 전시대, 위대한 철학자들의 초상 앞을 차례로 지나 간다. 뤼크레스가 이지도르를 데려간 곳은 그들이 가본 적이 없는 구역이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 박물관을 둘러보던 날, 그곳에 천개 달린 침대 하나가 있음을 보아 둔 바 있었다. 침대 위쪽 에 붙은 팻말에는 <모차르트가 공연을 앞두고 비밀 침실에서 여가수들과 성관계를 가질 때 사용했던 침대>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그녀는 다시 키스를 하자는 뜻으로 깨금발을 하여 몸을 들어 올린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요구에 화답하지 않는다. "미리 밝혀 둘 게 있는데요." "뭐죠?" "나는 어떤 여자를 처음 사귄 날에는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아요." "우리는 3년 전부터 알고 지냈잖아요!" "내가 당신을 껴안고 키스를 한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해요. 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어요." 그가 고개를 떨구며 뒤로 물러선다. "미안해요. 이건 내 나름대료 정한 원칙이에요. 나는 언제나 이 원칙을 충실히 지켰고, 이 번에도 어기지 않을 생각이에요. 너무 조급하게 굴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그러더니 그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뜬다. 그녀는 텅 빈 박물관에 홀로 남았다. 아무 리 이해하려고 애를 써도 자꾸 분한 생각이 든다. 그녀는 이제껏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퇴짜를 맞아 본 적이 없었다. <미안해, 이제 너랑 있는 게 재미가 없어>라는 식의 말을 거 침없이 내뱉으면서 먼저 떠난 건 언제나 그녀 쪽이었다. 그렇게 자존심을 다쳤는데도, 한편으로는 이지도르의 낭만적인 태도에 호감이 가기도 한다. 그녀는 거대한 세포 모형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다. 148 지금으로부터 150억 년 전, 우주가 생겨났다. 50억 년 전, 지구가 생겨났다. 30억 년 전, 지구에 생명이 출현했다. 5억 년 전, 최초의 신경계가 나타났다. 3백만 년 전, 인류가 출현했다. 2백만 년 전, 인간의 뇌가 도구를 고안하여 노동 생산성을 증가시켰다. 13만 년 전, 인간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상상한 사건을 벽 에 그리기 시작했다. 50년 전, 인간의 뇌가 최초의 인공 지능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5년 전, 컴퓨터가 저 혼자서 논리적 사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기고만장한 컬퓨터들은 인간 이 지구에서 사라질 경우에 저희가 인간의 후계자가 되리라는 생각도 서슴지 않고 있다. 일주일 전, 뤼크레스 넴로드와 이지도르 카첸버그가 컴퓨터의 도움를 받는 한 인간이 뇌의 특정 부위를 자극하는 기술을 세상에 퍼뜨리려 하는 것을 저지하였다. 만약 그 기술이 세상 에 퍼진다면, 인류는 쾌락에 빠진 채 소멸해 갈지도 모른다. 5분 전, 한 남자가 그녀의 청을 마다함으로써 그녀를 욕구 불만 상태에 빠뜨렸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녀의 마음에 다시 그늘이 진다. 지가 되게 잘났는지 아나 봐! 그러다가 그녀는 그를 이해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린다. 너무 섬세하고 민감하고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서 그래...... . 그녀는 쾌락을 예찬하기 위한 갖가지 전시물 사이로 걸어간다. 사실 그는 내가 만난 모든 남자 가운데 손이 가장 아름다운 남자야. 그녀는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바에 가서 샴페인을 한 잔 따라 단숨에 쭉 들이킨다. 잘 때 코를 고는 버릇이 있긴 해도...... , 그는 명석한 사람이야. 교양이 풍부하고 생각이 자 유롭지. 아무것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아서 기잣일까지 그만두었지. 그녀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그의 입맞춤은...... . 그녀는 박물관으로 돌아와서 모차르트의 침대에 눕는다. 그런 다음 커튼을 내리고 잠이 든 다. 그녀는 꿈속에서 이지도르를 만난다. 149 손 하나가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녀가 눈을 뜬다. 이지도르다. 꿈속의 이지도르가 아니라 진짜 이지도르다. "자정이 넘었어요. 이제 첫째 날이 지나고 둘째 날을 맞은 셈이죠." 그러면서 그가 싱그레 웃는다. 그녀도 에메랄드빛 눈으로 그를 빤히 올려보다가 살며시 미소를 짓는다. 그는 군말 없이 다짜고짜 그녀의 턱을 잡고 입을 맞춘다. 그러고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중 국식 웃옷의 단추를 끄르고...... , 그녀를 가만히 바라본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 그 눈 뒤에는 시각 신경, 후두엽의 시각 영역, 대뇌 피질이 있다. 무수 한 뉴런들이 활성화한다. 이 뉴런들은 미세한 전기 충격에 차례차례 반응하면서 저희의 축 삭 말단으로 신경 전달 물질을 내보낸다. 이 과정에서 신속하고 강력한 사고 작용이 이루어 진다. 생각들이 뇌 속에서 질주한다. 마치 미로처럼 복잡한 거대한 곳간에서 생쥐 수백 마리 가 미친 듯이 돌아 다니는 것과 같다. 몇 분 만에 그들은 완전히 벌거숭이가 되어 땀에 젖은 몸을 서로 맞댄다. 그의 뇌 속에서, 극도로 흥분한 뇌하수체가 차고 넘칠 만큼 많은 테스토스테론을 내보낸다. 이 호르몬의 자극을 받은 심장은 몸의 요소요소에 더 빠르게 피를 보낸다. 그녀의 뇌 속에서, 시상 하부가 차고 넘치도록 많은 황체 호르몬을 방출한다. 이 호르몬은 젖분비 호르몬의 분출을 유도하고, 이 젖분비 호르몬은 그녀의 배와 젖꼭지에 콕콕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그래서 그녀는 울고 싶다. 그는 홀린 듯이 뤼크레스를 바라보며, 그녀의 이미지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꼭꼭 담아 두려 고 한다. 마치, 무비 카메라의 크랭크를 빠르게 돌려 초당 25컷을 넘어 1백 컷, 2백 컷의 이 미지를 얻은 다음, 나중에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을 때 슬로 모션과 화면 정지 기능을 이용 하여 되새겨 보려는 사람 같다. 룰리베린과 황체 호르몬과 테스토스테론이 혈관 속에 흘러 들어 한데 뒤섞인다. 이 호르 몬들은 연어가 힘차게 강물을 거슬러 오르듯이, 동맥과 정맥과 소정맥을 거쳐 다시 심장르 로 들어간다. 심장 박동이 더욱 빨라지고, 숨이 가빠진다. 흥분이 자꾸자꾸 고조된다. 그들의 몸이 춤을 춘다. 멀리서 보면, 그들은 머리가 둘에 팔과 다리가 각각 네 개씩 달린 괴상한 짐승처럼 보일 것이다. 어쩌면 문어처럼 생긴 분홍빛 동물이 자꾸 움찔움찔 움직이 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면, 그들의 행위는 살갗과 살갗의 뜨거운 만남이다. 그들의 성기가 하 나로 결합되어 있고, 서로의 거웃이 마찰의 강도를 완화시켜 주고 있다. 그렇게 끼워 맞춰진 성기는 그들을 샴 쌍둥이로 변화시키는 중심 축이다. 피부 밑의 근육들이 더 힘을 내기 위 해 당분과 산소를 요구한다. 그들의 뇌 속에서는 시상이 세포들의 활동을 통괄하려고 애쓴 다. 시상 하부가 이 모든 과정을 감독하고 있다. 마침내 그들의 대뇌 피질에 생각이 형성된다. 나는 이 여자를 사랑한다 하고 그는 생각한다. 이 남자는 나를 사랑한다 하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러다가 그들은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잠시 완전한 정전 상태가 찾아온다. 그는 자기가 곧 죽을 거라고 생각한다. 심장이 멎는 듯하다...... . 에로스와 타나토스라는 두 에너지, 올륌포스의 그 두 신이 한 덩어리의 기로 뒤엉켜 그의 몰롱한 의식을 지배한다. 다 시 심장이 멎는 듯 하다. 그는 눈을 감는다. 빨간 커튼이 내려진 느낌이다. 이어서 밤색 커 튼, 검은색 커튼, 흰색 커튼이 내려진다. 하나로 결합된 성기들은 하나의 전지로 변하더니 8헤르츠의 <인간 전기>를 방출한다. 그 러자 심장이 8헤르츠로 진동하기 시작한다. 뇌도 마침내 8헤르츠의 파동에 스스로를 맞춘다. 이로써 뇌와 심장과 성기가 하나로 연결된다. 그들의 송과체가 활기를 띠면서 앤도르핀과 코르티손과 멜라토닌을 방출하고, 이어서 천연 의 디엠티를 내보낸다. 그러자 이번에는 핀처 박사와 마르탱이 최후 비밀이라고 이름 붙인 미세한 부위에 자극이 전해지고 쾌감이 한결 고조된다. 그들은 고대 그리스 인들의 말대로 사랑에 세 가지 종류가 있음을 깨닫는다. 첫째는 에로스, 곧 육체적 사랑이다. 이는 성기와 관계가 있다. 둘째는 아가페, 곧 감정적 사랑이다. 이는 심장과 관계가 있다. 셋째는 필리아, 곧 정신적 사랑이다. 이는 뇌와 관계가 있다. 이 세가지가 하나로 결합되면, 8헤르츠의 파동으로 천천히 폭발하는 일종의 니트로글리세 린이 된다. 모든 전설에서 말하는 위대한 사랑, 숱한 예술가들이 설명을 시도했던 위대한 사랑은 바로 이 성기와 심장과 뇌가 하나로 결합된 사랑이다. 힌두교와 탄트라 불교의 용어를 빌려서 말 하자면, 차크라 2와 차크라 4와 차크라 6이 혼연일체가 되는 경지인 것이다. 이 세 기관에서 발생된 8헤르츠의 파동은 두 사람의 뇌를 빠져나가 주위로 퍼져 나간다. 이것은 물질을 통과하는 사람의 파동이다. 그들은 이제 단지 한 몸이 된 남녀 한 쌍이 아니 라 8헤르츠의 우주적 에너지를 발하는 작은 발신기다. 그들의 뇌 속에서 의식에 약간의 변화가 생긴다.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지도르는 한순간 세계의 몇 가지 비밀을 언뜻 깨닫는다. 나는 누구일까? 이토록 엄청난 것을 경험할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뤼크레스 역시 세계의 다른 비밀들을 언뜻 깨닫는다.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걸까? 그녀는 우주에 가늘고 긴 실들이 퍼져 있음을 감지한다. 하프 같다. 도처에 실들이 퍼져 있다. 이 실들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어지면서 하나의 거대 한 직물을 이룬다. 우주의 현이다. 우주 공간에도 하프의 현처럼 진동하는 줄이 있다. 별들에서 나오는 이 현 은 8헤르츠의 파동으로 떨린다. 현과 실과 매듭으로 짜여진 우주는 하나의 현, 하나의 거미줄이다. 또한 우주는 하나의 그 림이고, 생각이 지어낸 이미지다. 누군가가 우주를 꿈꾸면,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시간 역시 이 꿈에 속 한다. 시간은 한낱 환상일 뿐이다. 만일 우리가 시간이 연속적이지 않다고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존재와 사건을 더 이상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는 것으로 지각하지 않을 것이 다. 나는 태안인 동시에 젊은 여자이고, 젊은 여자인 동시에 노파이다. 더 넓게 보면, 나는 내 아버지의 음낭 속에 들어 있는 정자들 가운데 하나인 동시에, <뤼크레스 넴로드>의 무 덤 속에 묻혀 있는 주검이다. 한층 더 넓게 보면, 나는 내 어미니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의 욕망인 동시에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의 추억이다. 그녀는 자기 마음이 아주 평온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나>를 훨씬 넘어서 있는 존재다. 그들은 아무 두려움 없이 계속 올라간다. 층계참과도 같은 어느 지점에 도달하자, 그들의 심장 박동이 멎는다. 이게 무슨 일이지? 하고 그는 생각한다. 이게 무슨 일이지? 하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것은 불과 몇 초 동안에 벌어진 일이지만, 그들에겐 그 짧은 순간이 영겁처럼 느껴진다. 그러고 나자 모든 것이 다시 뒤로 돌아간다. 심장이 다시 뛰면서 죄와의 접속이 끊어진다. 그들의 하강이 시작된다. 그에 따라 조금 전에 경험했던 일들이 하나둘 잊혀진다. 모든 행 복감이 스러지고 모든 깨달음이 희미해진다. 완전하게 깨달음에 도달하는 일은 아직 그들에 게 너무 이르다. 그들은 어떤 경계를 넘어 무아지경을 경험했지만, 그 느낌을 다시 떠올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 느낌을 온전하게 형용할 수 있는 말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린다. 모든 긴장이 일시에 풀어진다. 그들의 웃음이 잦아들다가 다시 물결처럼 밀려온다. 그들이 웃는 것은 모든 게 하찮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웃는 것은 모든 비극이 그저 웃음거리로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들이 웃는 것은 바로 그 순간만큼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 세상의 모든 비극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웃음에 겨워 웃는다. 이윽고 그들은 현실 세계에 착륙한다. 그들의 웃음이 딸꾹딸꾹 이어지다가, 마치 낡은 비행 기의 모터처럼 피식피식 잦아든다. 뤼크레스가 속삭인다. "어떤 임이 우리를 그렇게까지 나아가게 했지요? 그게 뭐였어요?" "나의 경우에는, 열네 번째 동기, 즉 <뤼크레스 넴도르를 사랑하는 마음>이었어요." "지금 사랑이라고 했어요?" "아뇨, 그런 말 한 것 같지 않은데요." 그녀가 다시 웃으며 땀에 젖은 적갈색 머리채를 흔든다. 그녀의 커다란 눈이 에메랄드빛에 서 금갈 색으로 바뀌어 있다. 그녀의 몸은 뜨겁고도 축축하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살갗 밑 의 모든 근육이 풀어져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극도의 이완 상태를 보이고 있다. 뤼크레스는 자기 남자 친구의 신중함을 이해한다. 그가 다시 말문을 연다. "그런 걸 느껴 보기는 처음이에요." "나도 그래요. 새로운 감각, 전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느낌이에요." "대개의 경우에는 아무리 점수를 후하게 매겨도 20점 만점에 16점 정도였거든요." "그런데요?" "이번엔 20점 만점에 8천 점이에요." "열네 번째 동기가 굉장히 강력한 것인가 보죠?" "우리가 최후 비밀이라는 부위에 자극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걸 넘어섰다는 느낌이 들 어요. 두개골에 구멍을 내고 뇌 속에 전극을 힘든 수술을 받지 않고서도 말이에요. 우리는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해낸 거예요." 그러면서 그는 다시 그녀의 살갗에 입을 갖다 댄다. 뤼크레스는 싱긋 웃으면서 감초 사탕을 달라고 한다. 그는 턱시도 호주머니에서 사탕 봉지 를 꺼내 그녀에게 내민다. 그녀가 사탕을 입 안에 넣으며 말한다. "우리가 그것을 또다시 경험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솔직히 말해서 너무 뜻밖이었어요." 그들은 조금 전에 자기들이 느낀 것을 자기들 속에 간직해 두려는 듯 한동안 침묵을 지킨 다. "당신이 말한 열네 번째 동기 위에 또 다른 게 있을까요?"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한다. "예." "그게 뭐죠?" "조금 전에 나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어요. 나를 초월하는 순수한 관능의 파동 같은 것을 말이에요. 그 직후에 마치 그 파동의 반향이라도 되는 양, 또 다를 느낌이 나를 엄습했어요. 마치 내 생각으로 무한한 우주를 다 감싸 안을 수 있을 듯한 충만감과 함께 현기증이 밀려 왔어요. 어떤 새로운 관찰 지점에 도달해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지각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이제껏 내가 미망에 빠져 있었음을 깨달은 기분이었지요." 내가 시간에 대해서 깨달은 것과 같은 것일까? 어쩌면 이지도르는 내가 시간 속에서 느낀 것을 공간 속에서 느낀 것인지도 몰라 하고 그녀는 생각한다. 이지도르는 자기가 느낀 것을 알기 쉽게 설명해 보려고 애쓴다. "세상 만물은 겉보기보다 한결 넓고 커요. 우리 키는 단지 1미터 70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크고, 우리 지구는 한낱 행성이 아니에요. 세상 만물은 밝게 빛나면서 무한히 퍼져 나가요.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전 우주에 걸쳐 있어요." 온 시간에 걸쳐 있기도 하지요 하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녀는 이게 마지막 담배라고 생각하면서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인다. 그런 다음 함 모금 을 깊이 빨아들였다가 다시 내 뿜는다. 연기의 소용돌이가 동그라미를 지었다가, 8자와 뫼비 우스의 띠로 모양을 바꾼다. "그럼 우리는 무엇에 이끌려 행동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은 건가요?" 그는 여는 때의 차분한 목소리를 되찾으며 대답한다. "그 새로운 동기는 의식의 확대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거예요. 그건 어쩌면 다른 어떤 것 보다 강한 동기일 수도 있어요. 우리가 조금 전에 그것을 이루어 낸 것도 이 동기와 무관하 지 않을 거예요. 그건 지금으로서는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개념이에요. 설명하기가 어 렵군요." 그녀가 깊은 관심을 보이며 재촉한다. "그래도 해봐요." "단 한 방울의 물이 대양을 넘치게 할 수 있어요. 의식의 확대란 바로 그 점을 깨달을 때 실현되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