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혁명 2권 지은이: 베르나르베르베르 출판사: 열린책들 71. 과거를 일소하자 공연 전날의 이른 아침이었다. 쥘리는 또 꿈을 꾸고 있었다. 마이크를 앞에 놓 고 서 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마이크조차 그녀를 놀리고 있는 듯하다. 마이크에 다가가 소리를 지르려다 그녀는 자기 얼굴에 더 이상 입이 없음을 깨 닫고 자지러지게 놀란다. 입이 있던 자리는 밋밋한 턱이 있을 뿐이다. 이젠 말을 할 수도 없고, 소리치거나 노래를 할 수도 없다. 그저 눈썹을 꿈틀거리거나 눈을 휘둥그렇게 떠서 자기 뜻을 전달할 수 있을 따름이다. 마이크가 자꾸 웃는다. 그 녀는 잃어버린 입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린다. 화장대 위에 면도날이 하나 있다. 그녀는 살을 째서 새 입을 만들고 싶다. 그러나 살에 칼을 대기가 무섭다. 그녀 는 수술을 쉽게 하기 위해 루주로 입 모양을 그린다. 그 그림 한가운데로 칼날 을 가져가는데... 쥘리의 어머니가 요란하게 방문을 열었다. “쥘리, 아홉 시다. 얘가 아직도 자고 있네. 일어나. 우리 얘기 좀 하자.” 쥘리는 팔꿈치로 버티며 몸을 일으키고 눈을 비볐다. 그런 다음, 그녀는 무의 식적으로 입을 문질렀다. 입의 위아래 둘레를 이룬 도툼하고 촉촉한 살이 만져 졌다. 휴! 그녀는 혀와 이가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려고 손으로 더듬었다. 어머니는 문턱에 꼼짝 않고 서서, 아무래도 정신과 의사에게 연락을 해야 하 는 게 아닐까 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자, 어서 일어나.” “아이 싫어요, 엄마. 조금 더 있다가요.” “너에게 싫은 소리 좀 해야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 왔어. 넌 인정머리도 없는 애냐? 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어쩌면 그럴 수가 있니?” 쥘리는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베개 밑에 머리를 묻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놀라기도 하고 학교 친구들하고 작당해서 돌 아다니고 간밤에는 외박까지 했어. 어디, 네 얘기 좀 들어보자.” 쥘리는 베개 한 귀퉁이를 들어올리고 어머니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어머니는 전보다 한결 날씬해져 있었다. 꼭 아버지의 죽음이 그녀의 젊음을 되찾아 준 것 같았다. 어머니는 새로운 식이 요법으로 만족하지 않고 정신분석 까지 받기 시작했다. 몸을 젊게 만드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서 정신적으로 까지 퇴행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쥘리는 어머니가 그즈음의 유행을 좇아 이른바 ‘재생’ 정신분석요법 의사에 게서 진료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의사들은 환자들을 유아기로 거 슬러 올라가게 해서 그들 마음에 상처를 남긴 충격적인 사건들을 밝혀 내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환자들을 더 멀리 태아기까지 되돌아가게 했다. 쥘리는 어머니가 걱정스러웠다. 정신 연령과 의복 연령을 조화시키는 데 늘 신경을 쓰는 어머니가 유아기를 거쳐 태아기로 퇴행한 나머지, 양말과 기저 귀 커버까지 달린 내리닫이를 입거나 플라스틱 탯줄로 몸을 감고 다니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나마 어머니가 ‘환생’ 정신분석 요법 의사를 선택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 다. 그 의사들은 태아나 수정란보다 더 멀리 전생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어머니 가 그들을 찾아갔더라면, 쥘리는 전생이었던 사람의 옛날 옷을 입고 다니는 어 머니를 보게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쥘리, 어서 일어나! 어린애처럼 굴지 말고.” 쥘리는 공처럼 동그래지도록 몸을 잔뜩 웅크리고 손가락으로 귀를 막았다. 더 이상 보고 듣고 느끼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현실의 손이 다가와 시트를 들어올렸고, 그녀가 꼭꼭 숨고 싶어하는 곳에 어머니의 얼굴이 나타났다. “쥘리, 엄마 지금 심각해. 우리 터놓고 얘기 한번 해야겠다.” “좀더 자게 내버려두세요, 엄마.” 어머니는 잠시 망설였다. 그때, 침대 머리맡 탁자에 펼쳐 놓은 책이 그녀의 눈 길을 끌었다. 에드몽 웰즈라는 사람이 지은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 3 권이었다. 쥘리를 진찰한 심리 요법 의사가 혐의를 둔 문제의 그 책이었다. 딸아이가 여 전히 시트를 뒤집어쓰고 있는 틈을 타서 어머니는 살그머니 그 책을 집어 들었 다. “그래, 그럼 한 시간만 더 자라. 그러고 나선 엄마하고 얘기하는 거다, 응?” 어머니는 책을 부엌으로 가져가서 대강 훑어보았다. 혁명, 개미, 현대 사회에 대한 문제 제기, 병법, 대중 조작 기술 따위를 다루고 있는 책이었다. 모로토프 칵테일을 만드는 법까지 나와 있었다. 의사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의사가 전화를 해서 무슨 백과 사전인가 하는 것 이 딸아이를 비뚤어지게 만들고 있으니 그 책을 보지 못하게 하라고 했을 때만 해도 기연가미연가했는데, 막상 책을 대하고 보니 의사의 충고가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제 전복의 교본이 딸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붙박이장 맨 위의 선반에 책을 감추었다. “내 책 어디 있어요?” 쥘리에게서 이내 반응이 왔다. 어머니는 문제 해결의 열쇠를 찾았다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마약을 없애 버리면 중독자가 금단 증세를 보이듯이 쥘리는 책 이 없어지기가 무섭게 찾고 있었다. 그 책이 딸아이에겐 스승이나 아버지 같은 존재일 거였다. 예전엔 성악 선생이 하던 역할을 이젠 책이 대신하고 있는 셈이 었다. 어머니는 딸의 마음을 빼앗아 가는 온갖 허깨비들을 깡그리 몰아내고 딸 아이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의지할 사람은 오로지 제 어미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야 말리라고 다짐했다. “내가 감춰 버렸다. 다 너 잘되라고 이러는 거야. 언젠가는 나한테 감사할 날 이 있을 게다.” “제 책 돌려주세요.” “아무리 떼를 써도 소용 없다.” 쥘리는 붙박이장 쪽으로 다가갔다. 어머니는 집 안에 뭔가 거치적거리는 게 있을 때면 으레 거기에다 치워 두곤 했다. 쥘리는 또박또박 되풀이했다. “어서 제 책 돌려주세요.” “책이라고 해서 다 유익한 건 아니야. 책이 때로는 위험할 수도 있어. ‘자본 론’ 때문에 70년간의 공산주의 사회를 경험한 것처럼 말이야.” “그래요?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신약 성서 때문에 5백 년간에 걸쳐 종교 재 판이 행해진 거로군요. 엄마는 바로 그 종교 재판의 전통을 잇고 있는 거고요.” 쥘리는 붙박이장을 열고 금방 ‘백과 사전’을 찾아냈다. 마치 책이 자기가 거기에 갖혀 있다고 그녀를 부르기라도 한 듯했다. 어머니는 책을 가슴에 꼭 껴안는 딸아이의 모습을 하릴없이 지켜 보았다. 쥘 리는 발길을 돌려 복도의 옷걸이에서 검은색 바바리 코트를 벗겨 냈다. 발목께 까지 내려오는 그 긴 코트를 잠옷 위에 걸쳐 입고 작은 배낭을 들어 그 안에 책 을 집어넣은 다음, 그녀는 밖으로 달려나갔다. 아킬레스가 그녀를 따라갔다. 개는 아침에 주인과 함께 산보를 나가서 이리저 리 뜀박질하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했다. 젊은 주인이 마침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알아준 것에 기뻐하면서 개는 멍멍 짖으며 깡총거렸다. “쥘리, 당장 돌아오지 못하겠니!” 어머니가 현관에서 소리쳤다. 쥘리는 손님을 찾아 돌아다니는 빈 택시를 소리쳐 불렀다. “우리 귀여운 숙녀분을 어디로 모실까요?” 쥘리는 택시 운전사에게 학교의 주소를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되도록 빨리 일곱 난쟁이들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72.벨로캉으로 가는 길 돈. 돈은 손가락들이 지어낸 독특한 추상 개념이다. 손가락들은 물건들을 교환하는 번거로움을 없애기 위해 그런 기발한 개념을 생각해 냈다. 그들은 부피가 큰 먹이를 들고 다니기보다 그림이 그려진 종이 쪽지를 가지고 다닌다. 그 종이 쪽지는 먹이와 똑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들 모두가 동의하고 있기 때문에, 그 종이 쪽지는 언제라도 다시 먹이와 교 환될 수 있다. 손가락들과 돈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눠 보면, 그들의 말은 한결같다. 자기들은 돈을 좋아하지 않지만, 유감스럽게도 돈이 없으면 자기들의 사회가 유지되지 않 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사회에 처음부터 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의 역사 기록 에 따르면, 재화를 유통시키는 수단으로는 돈보다 앞서 약탈이 있었다. 즉, 사나 운 손가락들이 덜 사나운 손가락들이 사는 곳에 쳐들어가서 수컷들을 죽이고 암 컷들을 겁탈하면서 모든 재산을 빼앗곤 했다는 것이다. 기온이 너무 내려가서 행군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어떤 동굴 속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10호는 그 시간을 이용해 103호에게 질문을 던진 다. 손가락들의 삶과 풍속에 관한 소중한 정보들을 받아 자기의 동물학 기억 페 로몬을 채우려는 것이다. 암개미 103호는 그이 요구에 기꺼이 응한다. 다른 개미들도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다가든다. 103호는 손가락들의 생식 에 관한 이야기로 허두를 뗀다. ‘그들의 텔레비젼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것이 나온다. 이른바 포르노 영화라 는 것이다.’ 열두 개미는 손가락들의 풍속과 관련된 그 새로운 표현의 냄새를 더 잘 맡아 보려고 바싹 다가든다. ‘포르노 영화라는 게 무엇인가?’ ‘손가락들은 교미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교미를 서툴게 하는 자 들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려고 가장 뛰어난 교미꾼들의 교접 광경을 찍는 것이 다.’ ‘포르노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적지 않지만, 대개는 손가락 암컷이 먼저 수컷의 생식 기를 서로 끼워 맞추는 광경이 나온다. 때로는 빈대들이 그러듯이 몇이 모여서 교접하는 장면도 볼 수 있다.’ ‘날개를 활짝 펴고 활공하면서 교미를 하는 게 아니란 말인가?’ ‘아니다. 손가락들은 민달팽이들처럼 바닥에 뒹굴면서 교미를 한다. 게다가 대개는 끈끈물을 내뿜는다. 그것 역시 민달팽이들과 비슷하다.’ 열두 개미에게는 손가락들의 원시적인 교미 방식이 자못 흥미롭게 느껴진다. 그렇게 땅바닥에서 비비적거리며 생식기를 끼워 맞추는 성행위는 바로 개미들의 조상이 1억 2천만 년 전에 행하던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손가락들 이 교미라는 분야에서만큼은 자기들에게 한참 뒤져 있다고 생각한다. 3차원의 공간을 활공하는 결혼비행은 땅바닥에 붙어서 하는 2차원적인 성행위보다 한결 더 고상하고도 자극적이다. 암개미와 열두 개미는 이야기는 거기에서 그치고 다시 길을 떠나기로 한다. 하얀 게시판이 예고하는 끔찍한 위험이 닥치기 전에 겨레를 구하려면 한시라도 빨리 도시로 돌아가야 한다. 103호가 앞장을 선다. 그는 아직도 성을 얻은 행복감에 취해 있다. 지구의 자 기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존스톤 기관마저도 기능이 더욱 활발해진 느낌이다. 삶이 아름답고 세상이 멋지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더해 간다. 존스톤 기관이 예민해진 덕분에 땅속의 파동이 아주 분명하게 지각된다. 땅 거죽을 타고 진동성의 파동이 지나간다. 땅 껍질에는 자기 에너지가 흐르는 맥 이 있다. 중성 개미였을 적에는 그것을 겨우 느꼈는데, 이젠 기다란 뿌리처럼 뻗 어 나간 에너지의 맥을 거의 눈으로 보듯 감지할 수 있다. 암개미는 다른 개미들에게 그 맥을 따라 계속 나아가라고 이른다. ‘땅의 보이지 않는 맥을 따라가면서 땅에 순종하면 땅이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다.’ 암개미는 다시 손가락들을 생각한다. 손가락들은 자기장을 지각하지 못한다. 그들은 아무데나 도로를 건설하며 예전부터 동물들이 이동하기 위해 이용하던 길을 장벽으로 막아 버리곤 한다. 그들은 해로운 자기가 흐르는 지역에 둥지를 세워 놓고는 까닭 모를 편두통으로 고생을 하기가 일쑤다. 그래도 옛날에는 지구 자기맥의 비밀을 아는 손가락들이 있었던 듯하다. 암개 미는 텔레비전에서 그와 관련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중세까지만 해도 그들 은 사원과 같은 중요한 건물을 지을 때면 반드시 사제들이 양성의 자기 매듭을 검색해 낼 때까지 기다렸다. 그것은 개미들이 도시를 건설하기 전에 자기 매듭 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뒤로 손가락들은 자기들의 이성만으로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고, 무슨 일을 하든 사전에 자연의 의 견을 물어 볼 필요를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었다. ‘손가락들은 이제 땅에 적응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땅이 자기 들에게 적응하기를 바라고 있다.’ 73. 백과 사전 사람을 다루는 기술 사람은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시각적인 언어를 표현의 준거로 삼아 말하는 사람이고, 둘째는 주로 청각적인 언어를 빌어서 말하는 사람이며, 셋째는 육감적인 언어를 많이 구사하는 사람이다. 시각파들은 ‘이것 봐요’라는 말을 자주 한다.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이미지를 빌어서 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여 주고 관찰하며 색깔 을 통해 묘사한다. 또, 설명을 할 때는 ‘명백하다, 불분명하다, 투명하다’라는 식으로 말하고, ‘장밋빛 인생’이라든가 ‘불을 보듯 뻔하다’, ‘새파랗게 질 리다’와 같은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청각파들은 ‘들어 봐요’라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한다. 그들은 ‘쇠귀에 경읽기’나 ‘경종을 울리다’,‘나발 불다’처럼 어떤 소리를 상기시키는 표현 을 사용해서 말하고,‘가락이 맞는다’라든가 ‘불협화음’, ‘귀가 솔깃하다’, ‘세상이 떠들썩하다’ 같은 말들을 자주 쓴다. 육감파들은 ‘나는 그렇게 느껴. 너도 그렇게 느끼니?’하는 식의 말을 아주 쉽게 한다. 그들은 느낌으로 말한다. ‘지긋지긋해’, ‘너무 이뻐서 깨물어 주 고 싶어’, ‘썰렁하다’, ‘화끈하다’, ‘열에 받치다’, ‘열이 식다’ 같은 것이 그들이 애용하는 말들이다. 자기와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이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는 그 사람이 눈을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일에 대해 기억을 더듬어 보라고 요구했을 때, 눈을 들어 위쪽을 보는 사람은 시각파이고, 눈길을 옆으로 돌리는 사람은 청각파이며, 자기 내부의 느낌 에 호소하려는 듯 고개를 숙여 시선을 낮추는 사람은 육감파다. 대화의 상대방이 어떤 유형에 속하는 사람이든 각 유형의 언어적 특성을 알고 그 점을 참작해서 이야기를 한다면, 상대를 다루기가 한결 용이해 진다. 한편, 상대방의 언어적 특성을 활용하는 방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상대의 신체 부위 가운데 한곳을 골라 그를 조종하는 맥점으로 이용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자네가 이 일을 잘 해내리라고 믿네’와 같은 중 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순간에, 상대방의 아래팔을 눌러 자극을 주는 것이다. 그러면, 매번 그의 아래팔을 다시 눌러 줄 때마다 그는 되풀이해서 자극을 받게 된다. 말하자면 감각의 기억을 활용하는 것이다. 한 가지 조심할 것은 그 방법을 뒤죽박죽으로 사용하면 전혀 효과를 볼 수 없 다는 점이다. 예컨대, 어떤 심리 요법 의사가 자기 환자를 맞아들일 때, ‘이런, 가련한 친구 같으니, 보아하니 상태가 별로 나아지지 않은 게로군’하고 그를 측은해 하면서 어깨를 툭툭 친다고 하자. 만일 그 의사가 환자와 헤어지는 순간 에도 똑같은 동작을 되풀이한다면, 그가 아무리 훌륭한 치료를 행했다 한들 환 자는 한 순간에 다시 불안에 빠지고 말 것이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 제 3권 74. 돼지와 철학자 택시 운전사는 끊임없이 지껄여서 손님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자기의 소명이 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린 승객을 상대로 쉴새없이 이야기를 해대는 품 으로 보아,손님이 없이 혼자 택시 안에 있었으면 그는 아마도 심심해서 미치고 말았을 거였다. 그는 별로 흥미로울 구석도 없는 자기의 인생 역정을 5분만에 들려주었다. 쥘리가 계속 잠자코 있자, 그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겠다며 화제를 돌렸다. “개미 세 마리가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를 산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개미들 앞에 롤스 로이스 승용차 한 대가 와서 멈추는 거야. 차 안에는 밍크 코 트를 입고 귀금속 장신구를 치렁치렁하게 단 매미가 타고 있었어. 매미가 차창 을 내리며 ‘얘들아, 안녕!’하고 인사를 했지. 개미들이 가만히 살펴보니까, 놀 랍게도 매미는 샴페인을 마시면서 캐비아를 먹고 있었어. 개미들이 대답했지. ‘ 안녕! 야, 너 아주 크게 성공했구나.’ 그러자 매미가 말했어. ‘응, 그래. 사실은 나 연예계에 진출했어. 딴따라가 밥 빌어먹는다는 건 옛날 얘기야. 요즘엔 딴따 라도 벌이가 괜찮아. 게다가 난 스타야. 캐비아 좀 먹을래?’ 개미들은 먹고는 싶었지만 ‘아니야, 됐어’하면서 사양을 했지. 매미는 차창을 다시 올리고 자기 운전사에게 출발하라고 명령을 했어. 롤스 로이스가 떠나고 난 뒤에 개미들은 얼떨떨해 하면서 서로를 바라 보았지. 그들은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 한 개미가 그들의 생각을 이렇게 표현했대. ‘개미와 매미라는 우화를 쓴 그 라 퐁텐이라는 작자 말이야. 그 자식 완전히 얼간이야!’ 운전사는 자기 혼자서 낄낄거렸다. 쥘리는 그 정도 가지고는 못 웃겠으니 더 잘해 보라는 뜻으로 입술을 조금 내밀어 보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문명의 정신 적 위기가 다가올수록 사람들이 농담을 점점 더 많이 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진 정한 대화가 점점 사라져 간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야기 한 토막 더 해줄까?” 운전사는 줄곧 자기만이 안다는 샛길들을 골라 가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퐁텐블로 시를 관통하는 간선 도로는 농민들의 시위 때문에 막혀 있었다. 농 민들이 요구하는 것은 정부 보조금의 증액과 휴경 면적의 축소 및 외국 고기의 수입 중단이었다. ‘프랑스의 농업을 살리자’, ‘수입 돼지에게 죽음을, 우리 양돈업에 생명을’이라는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가 눈에 띄었다. 시위대는 헝가리에서 돼지를 운송해 오던 트럭을 탈취해서 돼지우리에 석유를 붓고 성냥불을 던졌다. 산 채로 불에 타고 있는 돼지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아비 규환의 참상이었다. 쥘리는 돼지가 그렇게 울부짖을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 소리는 거의 사람의 절규에 가까웠다. 거리에 살 타는 냄새가 진동했 다. 단말마의 순간에 돼지들은 인간과의 유연 관계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듯했다. “제발이지, 여기서 빨리 벗어나 주세요.” 돼지들은 여전히 울부짖고 있었다. 쥘리는 생물 시간에 선생님이 했던 얘기를 떠올렸다. 동물 중에서 그 기관을 사람의 몸에 이식할 수 있는 것은 돼지뿐이라 고 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인간과 유연 관계가 깊은 짐승들이 죽어 가는 광경을 도저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돼지들이 애원하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 다. 그들의 살가죽은 사람의 살빛이었고 그들의 눈도 사람 눈처럼 파랗게 보였 다. 쥘리는 그 아비규환에서 어서 멀리 벗어나고 싶었다. 쥘리는 운전사에게 지폐 한 장을 던져 주고 택시에서 내려 도망치듯 달려갔 다. 숨을 헐떡이면서 마침내 학교에 다다르자, 그녀는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기를 바라면서 곧바로 연습실 쪽으로 갔다. “쥘리! 자네 여기서 뭐 하나? 자네 반은 오늘 아침 수업이 없을텐데.” 철학 선생이었다. 그는 쥘리의 검은 바바리 코트 깃 사이로 분홍색 잠옷을 언 뜻 보았다. “이러다가 감기 들겠다.” 그는 카페테리아에 가서 따끈한 음료를 마시자고 권했다. 쥘리는 일곱 난쟁이 들이 아직 오지 않았으리라 생각하고 그를 따랐갔다. “선생님은 참 좋으신 분 같아요. 여느 선생님들 같지 않으세요. 다른 선생님 들은 저를 형편없는 애로 취급하시지요. 특히 수학 선생님이요.” “자네도 알겠지만, 선생님들이라고 해서 보통 사람들과 별로 다를 게 없어. 착하고 친절하고 똑똑한 분들이 계신가 하면 덜 착하고 덜 친절하고 덜 똑똑한 분들도 계시게 마련이야. 문제는 책임감이야. 선생님들은 적어도 수십 명의 학생 들에게 일상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 학생들은 아직 어리고 가단성이 풍 부하기 때문에 선생님들의 책임이 막중하지. 우리는 미래 사회를 가꾸는 정원사 라고 할 수 있지. 너도 이해하지?” 그는 갑자기 부름말을 ‘자네’에서 ‘너’로 바꾸어 버렸다. “제가 선생님이 된다고 생각하면 두려움이 앞서요. 게다가 독일어 선생님처 럼 학생들에게 야유를 당한다고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요.” “그래, 네 말이 맞아. 자기 과목만 잘 안다고 좋은 선생이 되는 건 아니지.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려면 반은 심리학자가 되어야 해.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선생님들은 누구나 한 학급의 학생들을 마주한다는 생각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거야. 그래서 권위의 가면을 쓰거나 학자 흉내를 내는 이들도 있고, 나처럼 친구 행세를 하는 축도 있는 거지.” 철학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플라스틱 의자를 밀어 넣고는 쥘리에게 열쇠 꾸 러미 하나를 내밀었다. “난 지금 수업이 있어서 들어가야 해. 혹시 쉬고 싶다든가 뭘 좀 먹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이 열쇠를 받아. 나는 저기 광장 모퉁이에 있는 건물에 살고 있 어. 4층 왼쪽이야. 원하면 거기로 가도 돼. 한바탕의 방황이 끝난 뒤엔 작고 고 요한 항구가 필요한 법이야.” 쥘리는 그 고마운 호의를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록 그룹의 친구들이 곧 도착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철학 선생은 담백하고 진심 어린 눈길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의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그에게 주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 다. 그녀가 줄 것은 정보밖에 없었다. 그녀의 뇌가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입 에서 불쑥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쓰레기장에 불을 지른 건 바로 저예요.” 그 자백에 철학 선생은 별로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음...네가 적을 잘못 생각하고 있구나. 긴 안목으로 내다보고 행동을 해야지. 학교는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야. 학교 때문에 고통을 받지 말고 학교를 이용해 야지. 어쨌거나 학교 제도는 너희를 돕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야. 학교 교육은 학 생들을 더욱 강하고 더욱 똑똑하고 더욱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거라 고. 이 학교에 다니는 걸 행운이라고 생각해 봐. 이 학교가 너에게 나쁜 느낌을 주고 있는 모양이지만, 오히려 너에게 많은 것을 줄 수도 있어. 제대로 이용할 생각은 안 하고 파괴할 생각을 먼저 한 것은 큰 실수야.” 75. 은빛 강물 쪽으로 열세 개미는 잔가지 하나를 이용해서 어지럼증을 일으키는 협곡을 건넜다. 그 런 다음, 민들레 서리를 가로질러 고사리가 자라는 가풀막을 내리닫는다. 비탈길 아랫자락에 이르니 나무에서 떨어진 뒤에 속이 쩍 벌어진 무화과 하나 가 보인다. 단물을 뿜어 대는 그 당분의 활화산이 벌써 성미 급한 눈에놀이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보라, 초록, 분홍, 하양이 어우러진 때깔 고운 열매다. 개미들 은 잠시 쉬면서 식사를 하기로 한다. 이렇게 맛있는 먹이를 두고 어찌 그냥 갈 수 있으랴! 암개미 103호가 손가락들 세계에서 들은 바로는, 자연에 대한 손가락들의 관 심이 갈수록 얕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이제 예컨대, ‘열매는 왜 맛이 좋을 까?’, ‘꽃들은 왜 아름다울까?’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는다. 개미들은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 손가락들은 개미 문명에서 배워 야 한다. 10호가 손가락들에 관한 기억 페로몬을 만들 듯이, 언젠가는 어떤 손 가락 하나가 수고를 자청하면서 개미 문명에 관한 동물학 페로몬을 만들 날이 오리라고 103호는 생각한다. 그날이 오면, 열매가 왜 맛있는지, 꽃은 왜 아름다 운지를 그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으리라. 개미 세계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그런 손가락을 만난다면, 103호는 이런 얘기 를 해줄 것이다. 꽃이 아름답고 향기로운 까닭은 곤충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 이다. 곤충들은 꽃에서 꿀을 얻는 대신 꽃가루를 퍼뜨려 생식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열매가 달콤한 까닭은 동물들에게 먹히고 싶은 바람 때문이다. 동물들은 열매를 먹은 다음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그 단단한 씨앗을 똥과 함께 다시 배출한다. 참으로 교묘한 생존 전략이 아닐 수 없다. 열매나무들은 그 전략을 통 해서 씨앗을 퍼뜨릴 뿐만 아니라, 그 씨앗이 싹트고 자라는 데 필요한 거름까지 마련해 주는 것이다. 열매들은 동물들의 먹이가 됨으로써 세상에 씨를 퍼뜨리려 고 서로 경쟁을 벌인다. 열매들의 처지에서 보면, 진화란 곧 자기들의 맛과 빛깔 과 향기를 개선하는 것이다. 동물들의 식욕을 자극하지 못하는 열매나무는 어쩔 수 없이 사라지고 만다. 103호는 텔레비젼에서 손가락들이 씨 없는 열매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는 소 식을 접한 적이 있다. 그들은 씨 없는 참외며 수박이며 포도를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 단지 씨를 뱉어 내거나 삼키는 것이 귀찮고 성가시다는 이유 하나로 그들 은 식물의 몇몇 종들로 하여금 생식을 못 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다음에 손 가락들을 만날 기회가 생기면, 103호는 그들에게 씨앗을 뱉어 내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한다는 건 안 된 일이지만 열매에 씨를 그대로 남겨 두라고 충고할 생 각이다. 어쨌거나 열세 개미가 먹고 있는 그 신선한 무화과는 맛으로 보나 빛깔로 보 나 동물의 먹이가 되어 씨를 퍼뜨리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듯하다. 열세 개미는 연한 과육에 머리를 쑤셔 넣기도 하고 서로의 얼굴에 씨앗을 뱉어 내기 도 하면서 끈적거리는 단물에서 신나게 멱을 감고 있다. 멀떠구니와 갈무리주머니를 과당으로 그득하게 채우고, 개미들은 다시 길을 떠난다. 치커리와 찔레나무로 둘러싸인 길을 거쳐가는데, 16호가 재채기를 한다. 찔레나무 꽃가루 때문에 생기는 과민증이다. 조금 더 나아가자, 멀리에 은빛 띠가 나타난다. 강이다. 암개미 103호는 더듬이 를 세워 보고는 자기들이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를 이내 알아낸다. 현재 그들은 벨로캉의 북동쪽에 있다. 다행히도 강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다. 그들은 강가의 거무스름한 모래밭에 다다른다.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본 무당 벌레들이 반쯤 찢어 놓은 진딧물들을 내팽개치고 줄행랑을 놓는다. 103호는 손가락들이 왜 무당벌레를 ‘이론벌레’로 여기는지를 끝내 이해하지 못한 채 그들 세계를 떠나 왔다. 무당벌레는 개미들의 가축인 진딧물을 잡아먹 는 야수 같은 자들인데, 그자들이 어떻게 이로울 수 있단 말인가. 토끼풀을 좋은 풀로 생각한다는 것도 손가락들의 이상한 점 가운데 하나다. 토끼풀의 즙에 독 이 있다는 것쯤은 어떤 개미라도 다 아는 상식이 아닌가 말이다. 열세 탐험개미는 모래밭 위를 나아간다. 주위의 호리호리한 갈대들 속에 두꺼비들이 숨어 있다. 그들의 음산한 울음소 리가 공기를 휘젓는다. 암개미 103호는 배를 타고 강을 내려가자고 제안한다. 열두 개미는 배가 무엇 인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것 역시 손가락들의 발명품이려니 지레 짐작을 한 다. 암개미 103호는 나뭇잎을 이용해 물위를 미끄러져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다. 옛날에 그는 물망초 잎을 타고 강을 건넌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있는 곳에는 물망초가 없다. 그들은 눈과 더듬이로 주위를 뒤져서 배로 사용하 기에 아주 적합한 잎을 찾아낸다. 바로 수련이다. 수련은 태곳적부터 물 위에 떠 서 살아온 식물이다. 물에 잠기지 않는 잎으로는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생각할 수 없다. 열세 개미는 강 둑에 살짝 닿아 있는 수련 위로 기어 올라간다. 흰색과 분홍 색이 섞인 작은 수련이다. 그 잎들은 잎자루가 길고 말굽꼴인데, 잎의 윗면이 니 스를 칠해 놓은 것처럼 반들반들해서 물이 쉽게 흘러내리도록 되어 있다. 물에 떠 있는 커다란 잎 아래에는 아직 물 속에 잠겨 있는 작은 잎들이 작은 나팔 모 양으로 돌돌 말려 있다. 잎자루는 유연하고 공기로 가득 찬 관다발이 안에 많이 들어 있어서 잎이 더욱 잘 떠 있게 해준다. 개미들이 승선을 끝내고 출항을 하려고 하는데, 수련이 꼼짝을 하지 않는다. 어찌된 일인가 하고 잎의 주위를 살펴보니, 물 속으로 길게 뻗어 들어간 뿌리줄 기가 닻처럼 수련을 꼼짝못하게 하고 있다. 그 뿌리줄기는 매우 단단하고 두께 가 5센티미터가 넘으며 물 속으로 1미터 가까이나 들어가서 수련을 강바닥에 붙 들어매고 있다. 암개미 103호는 뿌리줄기를 자르려고 물 속으로 머리를 기울이 고 위턱으로 가위질을 해댄다. 그러면서 이따금씩 숨을 돌리기 위해 머리를 들 어 올린다. 다른 개미들이 103호를 거든다. 닻줄을 끊어 버릴 수 있는 마지막 일격을 남 겨 놓고, 암개미 103호는 물방개들을 잡아 오라고 이른다. 그 수생 곤충들을 수 련잎 배의 추진기로 삼자는 것이다. 개미들은 수면에서 잡은 먹이를 미끼로 삼 아 물방개들을 유인한다. 물방개들이 다가오자, 103호는 동료들과 더듬이를 맞대 고 적절한 페로몬을 찾아낸 다음, 자기들이 강을 건널 수 있게 도와 달라고 물 방개들을 설득한다. 103호는 한결 좋아진 생식개미 특유의 시력을 이용해서 강폭과 물살을 가늠해 본다. 맞은편 강 둑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게다가 물에 떠 있는 낙엽들이 맴 돌이치고 있다는 것은 강물에 소용돌이가 있다는 뜻이다. 어떤 배로도 이곳을 건너갈 수는 없을 것 같다. 더 아래로 내려가다가 강폭이 좁아지는 곳을 찾아 건너가는 편이 나을 듯하다. 벨로캉 개미들은 험난한 물길 여행에 필요한 먹이들을 배에 싣기 시작한다. 그 비상 식량은 주로 제때에 달아나지 못한 무당벌레들과 협력을 거부한 물방개 들의 고기로 이루어져 있다. 벌써 어둠이 밀려오고 있다. 밤에는 항행을 할 수 없으므로 지금 떠나는 것은 무리다. 암개미 103호는 출발을 내일 아침으로 미루자고 권한다. 삶이란 낮과 밤 의 연속이다. 이젠 하루 밤낮쯤 늦어진다 해도 그리 대수로울 것이 없다. 그들은 바위 밑에 야영지를 마련하고 힘을 얻기 위해 무당벌레 고기를 먹는 다. 이 밤이 새고 나면 험난한 여행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76. 백과 사전 달나라 여행 아무리 터무니없는 꿈이라도 과감하게 시도하면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처럼 보 이는 때가 있다. 13세기에 중국 송나라에서는 달을 찬미하는 문화적 행위가 크게 유행하였다. 내노라하는 문호와 가객들은 너나할것없이 하늘에 떠 있는 그 위성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 무렵의 송나라 임금 중에는 달에 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한 이가 있었다. 손수 시를 짓고 글을 쓰기도 했던 그는 달을 너무나 찬미 했던 나머지 달에 발을 디디는 최초의 인간이 되고 싶어했다. 그는 신하들에게 명을 내려서 로켓을 만들게 했다. 당시의 중국인들은 이미 화약의 사용법을 아주 잘 알고 있던 터였다. 그들은 임금이 탄 작은 가마 밑에 커다란 폭약을 설치했다. 폭약이 터질 때의 추진력으로 가마를 달까지 쏘아 올 리려고 생각했던 거였다. 그 중국인들은 닐 암스트롱이나 쥘 베른의 시대에 훨 씬 앞서서 달 로켓을 만든 셈이었다. 그러나 사전 연구가 너무 부실했던 탓에, 폭약의 심지에 불을 붙이자마자, 불꽃놀이를 방불케 하는 광경이 벌어졌다. 송나라 임금은 휘황하게 작열하는 그 꽃불 속에서 가마와 함께 산산이 부서졌 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제 3권 77. 최초의 비행 그들은 밤새도록 곡을 다듬고 연습을 되풀이했다. 콘서트가 열리는 날 오전까 지도 그들은 작업에 몰두하였다. 노래말은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에 나오는 글을 토대로 해서 만들었지만, 선율과 리듬은 그들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 밤 여덟 시가 되자, 그들은 문화원에 모여 악기의 음을 맞추고 현장의 음향 효과를 시험했다. 무대에 오르기 10분 전, 그들이 무대 뒤에서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 쓰고 있을 때, 지방 신문의 기자 하나가 인터뷰를 하러 왔다. “안녕하세요.‘퐁텐블로 나팔수’에서 나온 마르셀 보지라르입니다.” 그들은 그 작고 땅딸막한 남자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두 뺨과 코에 도는 불그 죽죽한 기운이 식사를 하면서 술깨나 마시는 사람임을 짐작케 했다. “노래를 취입해서 음반을 만들 생각이 있습니까?” 쥘리는 별로 말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지웅이 그룹의 대변자로 나섰다. “네, 그렇습니다.” 기자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철학 선생님 말씀이 옳았다. ‘네’라고 말하는 것은 듣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고 대화를 원활하게 하는 이점이 있었다. “음반의 표제는 무어라고 할 겁니까?” 지웅은 머뭇거리지 않고 아무거나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대답했다. “‘그대 잠에서 깨어나라’입니다.” “노래말은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나요?” “글쎄요...모든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나 할까요.” 조에가 그렇게 대답하자, 그 말의 모호함 때문인지 기자는 그다지 만족해 하 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의 질문이 이어졌다. “여러분의 리듬은 어떤 장르에서 영향을 받았나요?” “우리는 우리만의 리듬을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린 독창적인 음악을 만 들고 싶습니다.” 이번엔 다윗이 대답했다. 시장 볼 품목을 꼼꼼하게 적고 있는 가정주부처럼 기자는 그들의 말을 받아 적었다. 문화원 측에서 첫줄의 좋은 자리를 내드렸으면 좋겠네요. 프랑신이 그렇게 말하자, 기자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아니오. 시간이 없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시간이 없다니요? 마르셀 보지라르는 수첩을 챙겨 넣고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간이 없어요. 오늘 밤에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았어요. 한 시간 동안이나 꼼 짝 않고 앉아서 여러분의 연주를 들을 처지가 못 돼요. 듣고 싶은 마음은 정말 굴뚝 같지만, 미안해요. 그럴 수가 없어요. 쥘리가 놀라서 물었다. 그런데, 왜 기사를 쓰세요? 기자는 은밀한 얘기를 털어놓기라도 하듯 쥘리에게 다가와 귀엣말을 했다. 중요한 비밀 하나 가르쳐 줄까? <잘 몰라야 말을 잘한다.> 그게 바로 우리 직업의 비결이야. 쥘리는 그 역설에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일하는 것을 기자가 아주 만족스럽게 여기는 듯해서, 굳이 토를 달거나 그를 붙들어 두려고 하지 않았다. 문화원장이 부리나케 들어왔다. 그는 쌍둥이 형제라고 해도 믿을 만큼 생김새 가 교장 선생님과 아주 비슷했다. 준비들 해. 곧 시작할 거야. 쥘리는 막을 살짝 들추고 객석을 보았다. 객석은 5백 명 가량을 수용할 수 있 는 규모였는데, 4분의 3이 비어 있었다. 쥘리는 곧 대중 앞에 선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건 일곱 난쟁이 들도 마찬가지였다. 폴은 힘을 얻기 위해 뭔가를 야금거렸고 프랑신은 마리화나 담배를 피웠다. 레오폴은 명상을 하듯 눈을 감고 있었고, 나르시스는 기타의 코 드를 다시 한번 짚어 보는 중이었다. 조에는 혼자서 중얼중얼하는 것처럼 보였 지만, 사실은 혹시라도 도중에 노래말이 생각나지 않는 불상사가 생길까 봐 거 듭거듭 되뇌고 있는 거였다. 쥘리는 더 이상 물어뜯을 수 없게 닳아 버린 약손가락 끝을 잘근거리다가 생 채기가 나자 그것을 입으로 빨았다. 무대에서 원장이 그들을 소개했다. 우리 퐁텐블로 시민의 문화 생활을 더욱 풍성하게 해줄 새로운 문화원의 개관 을 축하해 주시기 위해 이렇게 많이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 직 공사가 완전히 끈난 것은 아니지만, 미흡하나마 이렇게 여러분을 모시게 되 어서 대단히 기쁩니다. 좀더 일찍 문을 열지 못한 것에 대해 깊은 사과의 말씀 을 드리면서 여러분의 너그러운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어쨌든, 오늘 여러분께서 는 새 객석에서 새로운 음악을 감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객석 맨 앞줄에는 보청기를 낀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그저 바깥 나들 이를 하기 위해서라도 문화원에서 마련하는 모든 공연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참 석하게 될 회원들이었다. 원장이 목청을 높였다. 여러분께서 이제부터 들으실 것은 우리 고장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비교적 리 듬이 강한 음악입니다. 록 음악을 좋아하는 분도 계시고 좋아하지 않는 분도 계 실 터이지만, 오늘 공연할 젊은이들의 음악은 그 나름대로 들을 가치가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원장은 쥘리와 일곱 난쟁이들을 처량한 신세로 몰아갔다. 그는 그들을 마치 지방의 민속 음악 그룹처럼 소개하고 있었다. 원장은 쥘리와 일곱 난쟁이들을 처량한 신세로 몰아갔다. 그는 그들을 마치 지방의 민속 음악 그룹처럼 소개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서 마뜩찮은 기색을 읽었는지, 원장이 말투를 바꾸었다. 자, 멋진 음악을 들려줄 록 그룹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를 소개하겠습니 다. 아주 예쁜 아가씨가 노래를 맡고 있습니다. 객석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자, 가수 쥘리 팽송과 일곱 난쟁이들입니다. 이것이 이들의 첫 무대입니다. 아 낌없는 박수 갈채로 이들을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대 앞의 몇 줄에서 빈약한 박수 소리가 일었다. 원장은 쥘리의 손을 잡고 투광기의 불빛이 쏟아지는 무대 한가운데로 데리고 갔다. 쥘리는 마이크 앞에 섰다. 그녀 뒤로 일곱 난쟁이들이 각자 자기악기를 마주 하고 자리를 잡았다. 쥘리는 어두운 객석을 바라보았다. 앞의 몇 줄은 퇴직 연금을 받은 노인들의 차지였다. 그 뒤로는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리다가 우연히 공연장에 들어온 것으 로 보이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앉아 있었다. 뒤쪽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꺼져라!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얼굴을 분간할 수는 없었지 만, 쥘리는 야유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공자그 뒤페롱이었 다. 그는 아마도 자기 패거리를 다 데리고 공연을 방해하러 왔을 거였다. 꺼져라! 물러가라! 그들이 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프랑신은 뜻하지 않은 야유를 가라앉히기 위해 어서 시작하자고 신호를 보냈 다. 무대 바닥에는 작품의 제목을 연주할 순서대로 적어 놓은 종이가 붙어 있었 다. 1.인사말 쥘리 뒤에서 지웅이 리듬을 예고했다. 폴은 전위차계를 조절하고 투광기로 꽤 나 통속적인 느낌을 주는 무지갯빛 분광을 배경막에 내쏘았다. 쥘리가 노래를 시작했다. 여러분, 미지의 관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의 음악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쓰일 무기입니다. 아니, 우스개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건 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사람에게는 그 일이 일어납니다.... 그녀가 첫 곡을 끝내자, 몇 사람이 열의 없는 박수를 보냈다. 객석의 몇몇 의 자에서 삐걱 하는 소리가 일었다. 벌써 실망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관객 이 있는 모양이었다. 뒷자리의 공자그 패거리가 다시 야유를 보냈다. 꺼져라! 물러가라! 다른 관객들은 그저 덤덤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첫 무대란 다 이런 것일까? 제너시스와 핑크 플로이드와 예스도 첫 공연을 이런 식으로 치렀을까? 쥘리는 관객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다음 곡을 시작했다. 2.지각 우리는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각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만 지각한다. 어떤 생리학 실험을 위해 갓 태어난 고양이들을 수직 무늬로 내벽을 장식한 방에 집어 넣었다. 공자그 패거리가 있는 곳에서 계란 하나가 날아와 쥘리의 몸에 맞고 박살이 났다. 어때, 그건 지각이 잘 되었냐? 몇몇 관객이 웃음을 터뜨렸다. 쥘리는 이제 적대적인 청중 앞에서 겪는 독일 어 선생의 고난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프랑신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자기의 예정된 독주로 들어가기 전에 야유 소리를 덮어 버리기 위해 신시사이저의 소리를 키웠다. 그런 다음, 그들은 바로 세 번째 곡으로 넘어갔다. 3.역설 수면 우리 내면 깊은 곳에는 아기가 잠자고 있다. 밤마다 우리에겐 역설 수면이 찾아 온다. 그때 우리는 가장 갚은 잠에 빠져서 격렬한 꿈을 꾼다. 객석 뒤쪽에서는 지참자들이 들어오고 실망한 사람들이 나가느라고 문이 계속 열리고 닫혔다. 그 때문에 쥘리는 노래에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 내 자기가 기계적으로 노래를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벽을 울리는 문 소리에 너 무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꺼져라, 쥘리! 물러가라! 쥘리는 일곱 난쟁이들을 돌아보았다. 정말이지 이건 대실패였다. 마음이 너무 산란해서 서로 호흡조차 잘 맞지 않았다. 나르시스가 코드를 잘못 짚었다. 손이 떨리는 바람에 그의 기타가 불협화음을 내었다. 쥘리는 객석의 소란에 마음을 쓰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후렴을 다시 불었다. 그들은 그 대목에 이르면 청중이 손뼉을 치면서 다 같이 노래를 따라 부를 거라 고 예상했다. 그러나 쥘리는 그런 식으로 몰고 갈 엄두조차 못 내고 있었다. 우리 내면 깊은 곳에는 아기가 잠자고 있다. 밤마다 우리에겐 역설 수면이 찾아온다. 노래말에 맞추기라도 하듯, 앞줄에 앉은 노인들이 잠에 빠져 들고 있었다. 쥘리는 그들을 깨울 양으로, 목청을 높여서 <역 - 설 - 수 - 면> 하고 또박 또박 외쳤다. 이제 레오폴의 플루트 독주가 이어질 차례였다. 그는 몇 차례 음을 틀리고 나 더니 아예 독주 부분을 줄여 버렸다. 아까 그 기자가 객석에 남아 있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쥘리는 완전히 의가가 꺾여 있었다. 다윗은 턱짓으로 그녀를 격려하면서 객석에 신경 쓰지 말고 노래 를 계속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우리는 모두 승리자다. 우리는 모두 3억의 경쟁자를 물리친 챔피언 정자에서 나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공자그 패거리는 맥주 깡통을 들고 무대 앞으로 나와서 쥘리에게 맥주를 끼얹 었다. 지웅이 팔을 휘두르며 말했다. 계속해, 계속해! 어쩌면 그런 순간들을 경험함으로써 진정한 프로페셔널이 되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훼방꾼들은 숫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었다. 그들은 달걀과 깡통을 던지 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농무 경적을 울리고 온갖 종류의 인공 연무를 뿌려 대면 서 계속 소리를 질렀다. 꺼져라, 쥘리! 물러가라! 그러나 그들은 너무 심하게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조용히 좀 합시다. 이렇게 소란스러워서야 어디 이 사람들이 연주를 할 수 있 겠어요? 덩치 좋은 여자 하나가 고함을 쳤다. 그녀의 티셔츠에는 <합기도 클럽>이라 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물러가라! 하도 소리를 질러서 목이 쉬어 버린 공자그는 그렇게 소리를 치더니 객석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도 아셨다시피, 이들의 음악은 들을 가치가 없습니다. 음악이 당신 맘에 안 들면 나가면 될 거 아니오. 누가 당신에게 남아 있으라 고 강요합디까? 티셔츠를 입은 그 처녀가 맞받았다. 공연을 방해하는 무뢰배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고 그녀가 자못 위협적인 태도 를 보이며 혼자서 앞으로 나왔다. 상대편의 수가 많아서 그녀 혼자서는 대적하 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이자, 똑같은 티셔츠를 입은 여 관객들이 그녀를 도우러 나왔다. 다른 사람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편을 골라 가세했다. 그 서슬에 잠에서 깨어난 노인들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여러분, 진정하십시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발, 진정하십시오. 쥘리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청중에게 애원했다. 다윗이 그녀에게 말했다. 노래를 계속해. 쥘리는 아연 실색하여 서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도 그들의 음악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풍속을 순화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어서 무슨 수를 내야 했다. 쥘리는 일곱 난쟁이들에게 연주를 중단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음악이 멎고, 이젠 난투를 벌이는 사람들의 악다구니 와 떠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람들이 내는 의자 소리밖 에 들리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첫 공연을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쥘리는 자기 앞에서 벌어 지고 있는 일을 잊고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고 귀를 꼭 막았다. 그녀는 스스로를 외부와 단절시키고 마음을 한곳에 모은 다음, 얀켈레비치 선생님의 가 르침을 떠올렸다. <노래를 함에 있어, 사실 성대는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성대를 울리며 나는 그 소리 자체만 놓고 보면, 뭔가를 긁는 듯한 불쾌 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 거친 소리를 다듬어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입이다. 허파가 풀무라면, 성대는 진동하는 막이고, 볼은 공명상자이며, 혀는 변조기다. 자, 이제 네 입술로 과녁을 겨냥하고 쏘아라.> 쥘리는 과녁을 겨냥하고 쏘았다. 단 하나의 음이 튀어나왔다. <시> 플랫이었다. 넉넉하고도 단단한 그 소리가 새 문화원의 객석을 휘어잡기 시작했다. 벽에 닿았던 소리가 되튀어나와 장내는 온통 쥘리가 내는 <시> 플랫의 파동으로 가득 찼다. 백파이프의 가죽 부대가 수축하듯이 쥘리의 배가 성량을 늘리기 위해 오므라 들었다. 그 음은 하나의 구체처럼 커다랗게, 쥘리의 몸보다 훨씬 더 크게 부풀어올랐 다. 쥘리는 그 <시> 플랫의 커다란 구체 안에서 자기가 보호를 받고 있다고 느 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그녀는 그 음을 길게 길게 늘였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이 온전히 깨어났다. <시> 플랫은 더욱 맑고 순수한 소리로 청중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입천장과 이까지도 떨렸다. 팽팽하게 긴장된 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객석이 조용해 졌다. 공자그 패거리와 합기도 클럽의 여학생들은 싸움을 중단 했고, 보청기를 만지작거리던 앞줄의 노인들도 손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쥘리는 허파의 풀무로 공기를 한껏 밀어 올렸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다른 음을 내기 시작했다. <레>였다. 이미 <시> 플랫이 온 입을 덥혀 놓은 터라, 그 소리는 한결 더 부드 럽게 나왔다. <레>가 모든 사람들의 뇌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쥘리는 그 음을 통해서 자기의 온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 단일한 진동 속에 그녀의 어린 시 절, 그녀의 고뇌, 얀켈레비치와의 만남, 어머니와의 갈등 등 모든 것이 담겨 있 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공자그 패거리가 자리를 뜨고 있었다. 청중의 박수가 쥘리를 위한 갈채인지, 떠나는 훼방꾼들을 향한 야유인지는 알 수 없었다. <레> 음이 한참 동안 이어지다가 멎었다. 쥘리는 자기의 활력을 온전히 되찾았다. 일곱 난쟁이들이 다음 곡을 준비하는 동안 그녀는 마이크를 쥐고 잠시 기다렸다. 폴은 투광기의 조명을 끄고 쥘리를 후광으로 감싸는 하얀 광추 조명만 남겨 놓았다. 그 역시 단순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쥘리는 또박또박한 음성으로 천천히 말했다. 예술은 혁명을 이루는 데 이바지합니다. 다음 곡의 제목은 <개미 혁명>입니 다. 쥘리는 숨을 가다듬고 다시 눈을 감았다. 하늘 아래에 새것이 없다. 이젠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 없다. 이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없다. 우리는 새로운 선견자다. 우리는 새로운 발명자다. 객석 여기저기에서 <옳소>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웅은 신들린 사람처럼 드럼을 휘몰아 갔다. 조에가 베이스로 그를 받쳐 주 고, 나르시스가 기타로 그 뒤를 따랐다. 프랑신은 아르페지오로 연주했다. 친구 들이 곧 비행기를 이륙시키려 한다는 것을 알고, 폴은 앰프를 최고로 높였다. 장 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날아오르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거였다. 쥘리는 입술을 마이크에 바싹 붙이고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때가 되었다. 이젠 끝내야 한다. 우리의 오감을 활짝 열자. 신새벽의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다. 그 무엇도 미친 듯이 춤추는 이 바람을 재울 수 없다. 잠들어 있는 이 세상에 무수한 탈바꿈이 일어나리라. 하지만 경직된 가치들을 부수는 데에 폭력은 필요치 않다. 뜻밖이겠지만 우리가 이루려는 건 그저 <개미 혁명>일 뿐. 활주로를 달리는 비행기처럼 소리가 서서히 높아졌다. 쥘리는 눈을 감고 주먹 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더욱 힘차게 솟구쳤다. 이젠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 없다. 우리가 바로 새로운 선견자다. 이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없다. 우리가 바로 새로운 발명자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악기들은 저마다 정확한 소리를 내었고, 폴의 앰프 조 절은 완벽했다. 쥘리의 뜨겁게 달아오른 목소리는 모든 음을 더할 나위 없이 훌 륭하게 다스리고 있었다. 진동 하나하나, 노래말 한마디 한마디가 분명하게 울렸 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잡고 그녀의 발성 기관에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쥘리는 자기 목소리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확하게 사람 들의 지라나 간에 영향을 주는 소리를 내라고 해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1천 와트의 앰프들이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터뜨리고 있었다. 청중은 진동을 느끼는 게 아니라 숫제 떨고 있었다. 마치크로 증폭된 쥘리의 목소리가 청중의 고실과 뇌 속까지 가득 채웠다. 그 순간에는 그녀의 목소리말고는 다른 것을 생 각할 수가 없었다. 쥘리는 이제껏 자신이 그렇게 활활 타오르는 듯한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없었 다. 어머니도 대학 입시도 그녀의 마음을 억누르지 않았다. 그녀의 노래는 모두에게 기쁨을 주었다. 앞줄의 노인들은 보청기를 빼고 손발 로 장단을 치고 있었다. 객석 뒤쪽의 문은 더 이상 삐걱거리지 않았다. 온 청중 이 박자에 맞추어 몸을 흔들고 있었다. 마침내 비행기가 이륙한 거였다. 이젠 고도를 유지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쥘리는 폴에게 음악을 한 음조 낮추라고 신호를 보낸 다음, 객석에 다가가 노 래를 계속했다. 하늘 아래에 새것이 없다. 우리는 똑같은 세계를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바라본다. 우리는 등대의 나선 계단에 갇혀 있다. 우리는 더높은 곳으로 올라가면서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다. 세계를 변화시킬 때가 되었다. 세상을 바꿀 때가 되었다. 이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뿐. 폴은 <시작을 뿐>이라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에 맞추어 앰프의 <불꽃놀이> 기능을 작동시키고 청중의 머리 위로 섬광을 쏘아 보냈다. 청중이 박수 갈채를 보냈다. 다윗과 레오폴은 쥘리에게 그 곡을 되풀이하라고 귀띔했다. 쥘리의 목소리른 갈수록 힘이 넘쳤다. 그녀는 이제 조금도 떨고 있지 않았다. 그 가냘픈 몸에서 어쩌면 그렇게 힘있는 노래가 나올 수 있는지 누구나 감탄하 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젠 새로눈 것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없다. 우리가 바로 새로운 발명자다. 이젠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 없다. 그 대목에서 청중이 폭발적인 호응을 보였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이렇게 화 답했다. 우리가 바로 새로운 선견자다! 쥘리와 일곱 난쟁이들은 자기네와 청중이 그렇게까지 하나로 어우러지리라고 는 예상하지 못했다. 쥘리가 즉흥적으로 한마디를 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지 않으면, 세상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됩니 다. 다시 박수 갈채가 일었다.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에 담긴 생 각은 호소력이 있었다. 쥘리는 방금 한 말을 되풀이 했다.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지 않으면, 세상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됩니다. 다른 세상 을 생각하십시오. 다르게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의 상상력을 억누르고 있는 굴레 를 벗어 던지십시오. 발명가들이 필요합니다. 선견자들이 필요합니다. 쥘리는 눈을 감았다. 처음 맛보는 어떤 기이한 느낌이 마음속에 사무쳐 왔다. 불가에서 말하는 견성이라는 것이 어쩌면 그와 비슷한 느낌일지도 몰랐다. 의식 과 무의식이 일체를 이루는 법열의 순간이었다. 청중은 자기들의 심장 박동에 박자를 맞추어 손뼉을 치고 있었다. 콘서트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모두들 그 행복과 일치의 시간이 길게 이어 지기를 바랐다. 그들은 콘서트가 끝나고 일상의 단조로운 삶으로 돌아가야 하는 순간을 벌써부터 걱정하고 있었다. 쥘리는 더 이상 백과 사전에만 집착하지 않고 스스로 노래말을 지어냈다. 그 녀 자신도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말들이 입에서 즉흥적으로 흘 러 나왔다. 그녀가 말을 한다기보다 말들이 그녀의 입을 빌어 저절로 튀어나오 는 것 같았다. 78.백과 사전 정신권 우리는 완전히 독립된 두 개의 뇌를 가지고 있다. 대뇌의 좌우 반구가 그것이 다. 그것들은 저마다 다른 역할을 맡고 있다. 왼쪽 뇌는 모든 것을 숫자로 분석 하면서 활동하고, 오른쪽 뇌는 모든 것을 형태로 분석하면서 활동하는 것으로 보인다(말하자면, 전자는 디지털 방식으로 기능하고, 후자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기능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일한 정보를 놓고, 좌우 반구는 서로 다르게 분석하며 때에 따라서 정반대의 결론에 이를 수도 있다. 하지만 둘은 서로 의견의 일치를 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심각한 정신 장애에 빠질 염려가 있다. 무의식의 담당자이자 조언자인 우반구가 꿈을 매개로 삼아 의식 담당자이자 실행자인 좌반구에게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때는 오로지 우리가 잠잘 때 뿐 일 것이다. 그것은 부부 사이에서 뛰어난 직감을 가진 아내가 아주 현실주의적 인 남편에게 자기 의견을 넌지시 비치는 것에 비유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권>이라는 말을 지어낸 러시아 학자 블라디미르 베리나드스키와 프랑스 의 철학자 테야르 드 샤르댕에 따르면, 여성적인 뇌인 우반구는 또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정신권에 선을 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 능력이다. 정신 권이란 대기권이나 전리층처럼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일종의 거대한 구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비물질적인 구름은 인간의 오른쪽 뇌가 발산한 모든 무의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베르그송이 신이라고 부른 총체적 인간 정신, 위대 한 내재적 정신 같은 것도 어쩌면 그것의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우리 오른쪽 뇌는 밤에 우리가 잠을 자는 동안 정신권의 마그마에 들어가서 인류의 오른쪽 뇌가 발산한 것의 총합인 총체적인 정신에서 정보를 퍼오는 능력 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무의식을 담당하는 우리 뇌의 우반구는 원 초적인 진짜 정보들이 모여 있는 파장에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상상하거나 발명한다고 믿고 있지만, 그건 따지고 보면 우 리의 오른쪽 뇌가 정신권에서 퍼온 것이다. 그런 뒤에 오른쪽 뇌가 왼쪽 뇌에 정보를 전달하면, 정보가 하나의 생각으로 틀이 잡히고 구체적인 행위로 이어지 는 것이다. 그런 가정에 따르자면, 화가나 음악가나 소설가는 결국 성능 좋은 전파 수신 기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기들의 오른쪽 뇌로 집단적인 무의식에 서 정보를 퍼올리고, 그것을 왼쪽 뇌로 자유롭게 전달할 수 있는 사람들이어서, 정신권에 떠오르는 개념들을 구체적인 작품으로 형상화해 내는 것이 아닐까. 애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 제3권 79. 불면 밤이 이슥하다. 그럼에도 103호는 잠을 못 이루고 있다. 소리 하나 빛 한 줄기 에도 자꾸 잠을 깨기 때문이다. 열두 탐험개미는 한번도 깨지 않고 잘 자고 있 다. 예전엔 밤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지 못했다. 잠이 들고 나면 몸이 차 가워지면서 모든 활동이 정지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생식개미가 되고부터는 비몽사몽의 상태로 잠을 잔다. 그래서 조금 이상한 기미만 있어도 잠이 깨어 버 린다. 그것은 더욱 예민한 감각을 갖게 됨으로써 생긴 불편한 점 가운데 하나다. 날씨는 쌀쌀하지만 어제 든든하게 먹어 두었기 때문에 깨어 있는데 필요한 열 량은 충분하다. 103호는 동굴입구로 나가서 밖을 내다본다. 두꺼비들의 꼬악꼬악 하는 울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구름에 반쯤 가리인 달이 어두운 하늘에 떠 있다. 달빛이 강물에 반사되어 작은 마름모꼴 무 늬들이 어른거린다. 한 줄기 빛이 하늘을 가른다. 천둥 비가 쏟아지려는 모양이다. 번개는 가지들 이 길게 뻗은 나무와 흡사하다. 하늘에서 자란 그 나무가 땅을 어루만지려는 듯 아래로 쭉쭉 내리뻗는다. 그러나 번개의 삶은 너무 짧아서 금세 자취가 보이지 않는다. 우레가 지나가고 나자 훨씬 더 무거운 정적이 서린다. 하늘도 한결 더 어둡다. 존스톤 기관에 공중의 전자기가 감지된다. 그런 뒤에 하늘에서 폭탄 하나가 떨어졌다. 커다란 물방울 하나가 땅에서 부 서지며 103호에게 물을 튀긴다. 빗방울이다, 잘못 맞으면 죽음을 불러올 수도 있 는 그 구체들이 이제 떼를 지어 떨어진다. 누리떼에 비해 위험은 덜하지만, 그래 도 피하는 게 상책이다. 103호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우두둑 듣는 빗방울을 바라본다. 고독, 추위, 어둠. 103호는 이제껏 그런 개념들을 개미 사회의 정신과 상충하 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어둠은 이토록 아름답고, 추위마저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지 아니한가. 세 번째의 벼락이 친다. 구름 속에서 자라난 커다란 빛의 나무가 따에 닿자마 자 죽음을 맞는다. 번개는 아까보다 더 가까운 곳에 떨어졌다. 섬광이 동굴 안을 비추자, 열두 탐험개미들이 한 순간 색소 결핍증에 걸린 것처럼 창백해 보인다. 하늘의 흰 나무가 땅의 검은 나무 한 그루를 덮쳤다. 땅의 나무에 불이 붙었 다. 불. 103호는 나무를 조금씩 먹어 치우는 불을 바라본다. 저 위쪽 세상의 손가락들은 불을 다스림으로써 자기들의 기술 문명을 이루어 냈다. 그들은 불을 이용해서 돌을 녹이고 먹이를 굽고 전쟁을 한다. 곤충들의 세계에서 불은 금기로 되어 있다. 곤충들은 모두 알고 있다. 옛날, 지금으로부터 수천만 년 전의 아주 먼 옛날 에, 개미들이 불을 다스릴 줄 알았고, 그래서 이따금 숲 전체를 태우는 전쟁을 벌이곤 했다는 것을. 그런 일들이 있고 나서, 곤충들은 죽음을 부르는 그 원소의 사용을 금지하기로 합의하였다. 곤충들이 금속이나 폭발물과 관련된 기술을 전 혀 발전시키지 못한 까닭이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불. 진화하기 위해서 개미들 역시 그 금기를 넘어서야 되는 것이 아닐까? 103호는 더듬이를 접고 땅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다시 잠이 든다. 꿈속에서 그는 일렁이는 불꼿을 보고 있다. 80. 콘서트의 열기 장내의 분위기가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쥘리는 그 분위기에 흠씬 젖어들었다. 참으로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프랑신은 금발 머리를 흔들었고, 조에는 배춤을 췄다. 다윗은 레오플의 독주에 화답하여 하프를 뜯었고, 지운은 눈을 허공으로 들어 올린 채 모든 북들을 동시 에 두드렸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그들은 여덟이 아니라 하나였다. 쥘리는 그 소중한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랐다. 콘서트는 밤 11시 반에 끝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쥘리는 하나된 느낌이 너무나 강렬하고 아직 임이 넘치고 있었기에 그 어마어마한 교감의 시간을 연장 하고 싶었다. 그녀는 날고 있는 듯한 그 기분이 사라질까 봐 착륙하기를 거부하 고 있었다. 지웅은 그녀에게 <개미 혁명>을 되풀이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통로에 나와 춤을 추고 있던 합기도 클럽의 여학생들이 박자에 맞추어 소리쳤다. 새로운 선견자는 누구인가? 새로운 발명자는 누구인가? 박수소리가 다시 터져 나왔다. 우리가 바로 새로운 선견자다. 우리가 바로 새로운 발명자다. 쥘리의 눈에 새로운 빛이 감돌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어떤 기계장치 같은 것들이 작동하면서 문이 열리고 철책이 치워졌다. 신경 하나가 뇌에서 메시지를 받아 신속하게 입으로 전달했다. 턱뼈가 벌어지고 혀가 움직이면서 말이 튀어나 왔다. 여러분은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지금, 이곳에서부터 혁명을 시작하시겠습니 까? 모두가 돌연 잠잠해졌다. 청중의 귀에 들어간 메시지가 청신경을 타고 뇌로 전달되었다. 뇌에서 각 음절의 의미와 무게가 분석되자, 마침내 대답이 터져 나 왔다. 네에에! 신경은 일단 열이 오르자 더 빨리 움직였다. 여러분은 지금 이곳에서부터 세상을 바꿔 나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청중은 더욱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에에! 쥘리의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그녀는 망설였다. 그것은 자기들의 승리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정복자들의 방설임 같은 것이었다. 카르타 고의 한니발 장군이 로마 입성을 눈앞에 두고 느꼈던 것과 같은 불안이 그녀를 엄습했다. <아무래도 일이 너무 쉽게 이루어지는 것 같다. 그리로 가지 않는 게 좋겠다.> 일곱 난쟁이들은 쥘리에게서 한마디 말이 더 나오기를 기다렸다. 말이 아니면 그냥 손짓만이라고 좋을것 같았다. 그녀의 신경은 뇌의 신호를 아주 신속하게 전달할 대세가 되어 있었다. 다들 그녀의 입을 살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백 과 사전에서 말하는 그 혁명이 시작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청중의 눈길이 온 통 그녀에게 쏠려 있었다. 쥘리의 소임은 그저 <나갑시다!>라는 말 한마디를 던 지는 것이었다. 잠시 시간의 흐름이 정지한 듯했다. 그때, 원당이 앰프를 끄고 무대 조명을 줄인 다음 객석에 다시 불을 켰다. 그가 무대로 나와 말했다. 자, 이제 콘서트가 끝났습니다. 이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 주십시오. 감사 합니다,<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 일치와 교감의 시간이 지나갔다. 마법이 풀렸다. 사람들이 손뼉을 쳤지만, 그 박수에는 좀 전과 같은 신명이 담겨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다시 제 흐름을 되 찾고 있었다. 물론 성공적이긴 했지만, 그건 그냥 하나의 콘서트일 뿐이었다. 박 수 갈채를 보내던 사람들은 객석을 떠나 뿔뿔이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자 버리면 그만이었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감사합니다. 쥘리는 왁자지껄하게 객석을 떠나는 사람들을 향해 그렇게 중얼 거렸다. 의자 들이 삐걱이고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계속 열렸다 닫혔다. 분장실에서 화장을 지우며 그들은 쓸쓸함과 허전함을 느꼈다. 쥘리는 파운데이션을 지우고 난 베이지색 솜 뭉치를 아쉬운 마음으로 바라보 았다. 한바탕의 전투를 치르고 나서남은 거라곤 그 솜 뭉치뿐이었다. 원장이 미 간을 찌푸리며 분장실로 들어왔다. 죄송해요. 초입에 벌어진 그 난투 때문에 피해가 많이 났겠어요. 그건 물론 저 희가 갚아 드릴게요. 쥘리가 그렇게 말하자 그의 막대 같은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죄송하다니, 뭐가? 개관 공연을 멋지게 해준 게 미안하단 말이야? 그는 껄껄 웃으며 쥘리를 껴안고 그녀의 두 볼에 입을 맞추었다. 정말 아주 훌륭했어! 하지만.... 이 작은 지방 도시에서 오랜만에 아주 신명나는 일이 벌어진 거야.... 나는 아 코디언 반주에 맞추어 춤을 추는 무도회 정도만 되었어도 감지덕지했을텐데, 자 네들이 일대 사건을 만들었어. 아마 다른 문화원 원장들이 샘이 나서 죽을 지경 이 될 거야. 청중이 그렇게 열광하는 모습은 몽생미셸 문화원의 <나무 십자가 소년 합창단> 공연 이후로는 본 적이 없어. 자네들이 우리 문화원에서 다시 콘 서트를 가졌으면 좋겠어. 그것도 빠른 시일내에. 진심이세요? 원장은 수표책을 꺼내고, 잠시 생각하더니 5천 프랑이라고 썼다. 오늘 콘서트의 출연료야. 얼마 안 되는 금액이자만 다음 공연을 준비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 무대 의상에 더 관심을 가져야 겠어. 또, 포스터도 붙 이고, 발연 기재며 무대 장식에도 신경을 써야 할 것 같고. 오늘 밤의 이 작은 성취로 만족하면 안 돼. 다음 번엔 그야말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아주 멋진 콘서트를 해보라고. 81. 신문기사 퐁텐블로 나팔수 문화면 새 문화원 개관 신명 올린 첫 공연 젊은 록 그룹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아주 순조로운 첫 개가를 올렸다. 어젯밤 퐁텐블로 문화원의 개관을 기념하여 열린 콘서트에서 그들은 새로운 연 주회장에 작은 폭풍을 일으키며 한껏 신명을 올렸다. 그룹의 리더 격인 가수 쥘 리 팽송 양은 여신 같은 몸에 성인이라도 지옥에 떨어뜨릴 법한 연회색 눈, 재 즈 분위기가 물씬 나는 목소리등 연예계에서 성공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다. 리듬이 약하고 가사가 무미건조하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쥘리의 열창으로 그 작은 미비점은 충분히 보완되었다. 일각에서는 그녀가 인기 가수 알렉상드린의 강력한 경쟁자가 될 수 있으리라 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섣부른 감이 없지 않다. 특유의 글래 머 목으로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는 알렉상드린은 이미 지방 문화원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미래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법이다. 어쨌거나, <백 설공주와 일곱난장이>는 <그대 잠에서 깨어나라>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앨범을 준비하고 있다. 그 앨범이 이미 인기곡 순위 1위에 올라 있는 알렉상드린의 <내 사랑하는 그대>와 경쟁을 벌일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마르셀 보지라르 82. 백과 사전 검열 엣날에는 정보를 대중으로부터 차단하기 위해 단순하고 노골적인 검열 방법을 사용했다. 체제에 도전하는 서적들을 간행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검열의 양상이 사뭇 달라졌다. 이제는 정보를 차단하지 않 고 정보를 범람시킴으로써 검열을 한다. 그러나 이 방법이 오히려 한층 효과적 이다.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무의미한 정보들 속에서 사람들은 정작 중요한 정보 가 어떤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텔레비전 채널이 늘어나고, 프랑스에서만도 한 달에 수천 종의 소설의 쏟아져 나오며, 온갖 종류의 비슷한 음악들이 어느 곳에나 퍼져 나가는 상황에서 혁신적인 움직임이란 나타날 수 없다. 설령 새로 운 움직임이 출현한다 해도 대량 생산되는 정보들 속에 묻혀 버리고 만다. 결국 이 거대한 진창 속에서는 대중 매체가 만들어 낸 상품들만이 살아 남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상품들이 가장 인기가 있다는 점 때문에 마음 놓고 소비한 다. 텔레비전에서는 게임과 쇼, 문학에서는 자전적인 사랑 이야기, 음악에서는 <수려한 육체를 지닌> 사람들이 단순한 선율에 담아 제시하는 사랑 노래들이 판친다. 과잉은 창조를 익사시키고 비평은 마땅히 이 예술적 범람을 걸러 낼 책 임을 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보의 홍수 앞에 주눅이 들어 버린다. 이 모든 것 이 빚어 내는 결과는 자명하다. 기성 체제에 도전하는 새로운 것이 전혀 나타나 지 않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토록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음에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3권 83. 강을 내려가면서 은빛 강물이 남쪽으로 흘러간다. 탐험개미들은 아침 일찍 거친 물결위에 수련 잎 배를 띄웠다. 거울처럼 반짝이는 물살을 가르며 배가 남으로 남으로 내려간 다. 물에 떠서 배 뒤를 따라오는 물방개들이 우아한 동작으로 잔물결을 일으키 고 있다. 물방개들의 초록색 등딱지에는 오렌지빛 테두리가 있고, 이마에는 V자 꼴로 된 기호가 새겨져 있다. 자연은 동물들을 약간의 치렛거리로 꾸며 주기를 좋아한다.그래서 나비들의 날개에는 복잡한 무늬를 그려 놓았고 물방개들의 등 딱지에는 단순한 무늬를 넣어 주었다. 물방개들은 털이 많이 난 기다란 종아리마디를 접었다 폈다 하면서 개미들의 배를 밀어준다. 암개미 103호와 열두 탐험개미들은 수련의 가장 높은 잎에 앉아 서 주위의 풍광을 완상하고 있다. 수련은 차가운 강물이 수며들지 않는 정말 훌륭한 배다. 게다가 강물에 사는 그 어떤 동물도 그것을 눈여겨볼 생각을 하지 않아서 십상 좋다. 수련잎이 물위 에 미끄러져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개미들은 자기들의 배 를 요모조모 살펴본다. 수련잎은 크고 단단하고 평평한 초록색 뗏목과도 같다. 수련꽃은 꽤난 복잡하다. 꽃받침 네 개에 나선을 이루며 차곡차곡 맞물린 꽃잎 이 여럿인데, 그 꽃잎들이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작아지다가 꽃 한가운데에 이르러서는 수술로 바뀌고 만다. 개미들은 커다란 분홍빛 꽃잎위를 오르내리면서 장난을 친다. 수련이 돛배라 면 그 꽃잎들은 아랫돛, 가운데돛, 꼭대기돛이 되는 셈이다. 수련의 꼭대기에 오 르면 멀리에 있는 장애물까지 식별해 낼 수 있다. 언제나 새롭게 느껴 볼 것이 없나 하고 주위를 살피던 암개미 103호가 수련 뿌리줄기의 즙을 빨아 보더니 뜻밖에도 기분이 아주 느긋하고 편안해짐을 느끼 며 놀라워한다. 사실, 수련의 뿌리줄기에는 성욕을 억제시키는 물질이 들어 있어 서 그것이 진정제와 같은 구실을 하는 것이다. 그 물질을 먹으면 모든 것이 더 욱 평화롭고 차분하고 부드럽게 보인다. 아침에 보는 강은 참으로 아름답다. 주홍빛 태양이 뿌려 주는 빛살을 맏아 벨 로캉 개미들이 루비처럼 빛난다. 강물에 둥둥 떠다니는 수생 식물 위에서 이슬 방울이 반짝인다. 배는 갖가지 식물들을 스치고 지나간다. 능수버들은 가지를 축 늘어뜨려 길고 연한 잎을 주고, 마름은 측면에 커다란 가시가 붙어 있고 껍질이 단단한 마름모 꼴 열매를 선물한다. 천성이 쾌활한 향긋한 황수선은 노란 별처럼 반짝인다. 왼쪽으로 바위 하나를 살짝 스치며 지나다 보니, 바위 표면이 은은한 냄새를 풍기는 사포네르로 덮여 있다. 사포네르의 열매들이 물에 떨어지자, 열매에서 나 온 사포닌이라는 물질 때문에 거품이 일고 물방울이 생긴다. 수면에 벌어진 그 거품 난리가 물방개들을 성가시게 한다. 그들은 물 위로 머리를 들고 작은 물줄 기를 내뿜는다. 그럼으로써 기관에 장애를 일으키는 거품을 없애 버리려는 것이 다. 수련의 꼭대기가 우산꽃차례로 핀 독미나리꼿을 스치자, 샐러리 냄새가 풍겨 나오고 노르스름한 즙이 흘러 바람에 흩날린다. 개미들은 그 즙이 달지만 코니 친이라는 강한 알칼로이드가 들어 있어서 뇌를 마비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독미나리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정보가 개미들의 집단 기억 속에 들어오기까지 는 많은 탐험개미들의 희생이 있었다. 그들 위에서 잠자리들이 맴을 돌고 있다. 젊은 개미들은 그 유서 깊고 품격 있는 곤충들을 올려다보며 경탄의 페로몬을 발한다. 잠자리들은 짝짓기 춤에 여 념이 없다. 잠자리 수컷들은 사위를 경계하면서 다른 수컷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자기 영 역을 지킨다. 그렇게 수컷들이 자기 공간을 넓히기 위해 서로 싸우는 까닭은, 가 장 넓은 공간을 마련하는 자가 암컷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암컷은 교미 춤을 추고 나중에 알을 낳기 위한 공간이 넓을수록 좋아한다. 그러나, 수컷이 갖은 애를 쓴 끝에 암컷을 유인하는 데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것으로 경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암컷은 수컷의 정액을 며칠 동안이나 배에 신선하게 보존할 수 있다. 그래서 만일 암컷이 여러 수컷과 몇 차례에 걸쳐 교 미를 한다면, 암컷은 한 배에서 여러 수컷의 알을 낳을 수 있게 된다. 질투심 많 은 수컷들은 그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교미를 하기 전에 경쟁자들의 정자가 들 어 있는 암컷의 배를 비워 낸다. 그렇다고 암컷이 또 다른 수컷을 찾아내지 못 하라는 법이 없다. 결국 영광은 맨 마지막에 만나는 수컷의 정자에게 돌아간다. 103호는 생식개미 특유의 새로운 시각으로 물 속을 들여다본다. 수면 아래에 배를 위로 하여 송장헤엄을 치는 물살이 벌레가 보인다. 그 벌레가 유리를 통해 보듯이 103호를 살피고 있다. 바로 송장헤엄치개라는 곤충이다. 긴 뒷다리를 놀 려 나아가는 품이 유리 같은 수면 저편에서 뜀박질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다. 송장헤엄치개는 옆구리에 방울 모양의 공기 저장소를 지니고 있어서, 여기에 산 소를 모았다가 숨구멍을 통해 조금씩 빨아들임으로써 물 속에서도 호흡을 하게 된다. 갑자기 머리 하나가 튀어나온다. 학배기, 즉 잠자리의 애벌레다. 학배기의 머 리가 벌어지면서 윗부분이 물 위로 튀어 오르더니 하루살이 한 마리를 낚아챈 다. 암개미 103호는 그것이 어찌 된 일인지를 이내 깨닫는다. 학배기 머리의 앞 부분은 마치 탈을 쓰고 있는 것처럼 되어 있고 그 탈은 턱 구실을 하는 관절에 연결되어 있다. 학배기가 사냥감들에 다가가면, 그들은 아직 도망치기에 충분한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달아나지를 않는다. 그러면, 그 탈은 캐터펄트가 띄워 올린 로켓처럼 퉁겨 나가서 먹이를 낚아챈 다음 턱이 달려 있는 머리의 나머지 부분으로 되돌아온다. 수련잎 배가 암초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면서 미끄러져 내려간다. 배의 한가운데에 앉아서 103호는 개미들의 위대한 역사를 되새기고 있다. 요 행히도 그는 옛날부터 더듬이에서 더듬이로 전해져 내려온 전설들을 거의 다 알 고 있다. 공룡들의 창자를 뚫고 들어가 그들을 쓰러뜨린 개미들의 이야기도 알 고, 수천만 년 동안 흰개미와 싸웠던 조상들의 이야기도 안다. 개미들의 그런 역사를 손가락들은 모른다. 개미들이 태곳적부터 완두콩이나 양파나 당근 같은 식물의 씨앗들을 한 고장에서 다른 고장으로 옮김으로써 새로 운 식물상을 만들어 내곤 했다는 사실을 손가락들은 모른다. 도도한 장강을 바라보면서, 103호는 자기 종에 대한 자부심이 사무쳐 옴을 느 낀다. 손가락들은 강의 이런 모습을 결코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크 고 너무나 강해서 저 황수선과 능수버들을 개미가 보는 것처럼 보지는 못할 것 이다. 그들은 색깔도 개미와 다른 방식으로 지각한다. 그들은 분명하게 아주 멀 리까지 볼 수 있지만, 그들의 시야는 아주 좁다. 개미들은 180도 범위 안에 들어 오는 사물을 모두 볼수 있지만, 손가락들이 볼 수 있는 범위는 90도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이 시선을 고정해서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범위는 15도에 불 과하다. 103호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게 된 바로는, 손가락들이 지구 가 둥글고 따라서 끝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들은 모든 숲과 초원 의 지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제<나는 미지의 곳을 향해 간다>라든가 <나 는 낯선 땅으로 멀리 떠난다>라는 식으로 말할 수가 없다. 지구상의 어떤 나라 든 날아다니는 기계를 타고 하루만 가면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암개미 103호는 언젠가는 손가락들에게 벨로캉의 기술을 보여 줄 날이 오리라 고 기대하고 있다. 손가락들은 진딧물의 분비물을 조리하는 방법, 열매들을 상하 지 않게 저장하는 방법, 동물들끼리 서로를 이해하는 방법 등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태양이 주홍빛에서 오렌지빛으로 변하자, 여기저기에서 노랫소리가 들려 온다. 귀뚜라미는 물론이고 두꺼비, 개구리, 새들이 저마다의 울음소리를 내고 있다. 아침을 먹을 시간이다. 103호는 손가락들의 세계에서 매일 세 차례씩 정해진 시간에 식사하는 습관을 들였다. 개미들은 몸을 기울여 물에 떠다니는 먹이를 찾는다. 머리를 아래로 하 고 꼬리 수관을 위로 들어올린 장구벌레들이 보이낟, 다들 배고프던 차에 때맞 추어 그 벌레들이 나타나 준 것이다. 84. 노래의 열쇠 닭이냐, 물고기냐? 그 월요일, 학교 카페테리아의 메뉴는 이러하였다. 전채:초기름 소스를 친 순무 주 요리:빵가루를 입혀 튀긴 생선 또는 감자 튀김을 곁들인 닭고기 후식:사과파이 조에는 사과 파이의 잼에 늘어붙은 작은 날벌레를 가장 긴 손톱으로 걷어 냈 다. 어때, 손톱 긴 것도 때로는 쓸모가 있지? 그녀가 쥘리에게 말했다. 날벌레는 그녀의 손톱에서 이내 날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것 을 먹어 버릴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조에는 접시 가장자리에 날벌레를 내려놓았 다. 학생들이 쟁반을 들고 급식대를 따라서 죽 늘어서 있었다. 급식대 건너에서 학생들의 쟁반에 음식을 담아주는 아주머니는 커다란 국자를 손에 들고 학생들 하나하나를 상대로 똑같은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만큼이나 형이상학적인 느낌을 주는 물음이었다. <닭고 기야, 생선이야?> 그래도 그런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게 단순한 학교 식당과 현대적인 카페테리 아의 차이였다. 쥘리는 위에 올려 놓은 기다란 물병이 쓰러지지 않도록 쟁반을 반듯하게 받쳐 들고 자기들 그룹 전체가 앉을 수 있는 큰 식탁을 찾아 식탁에 쟁반을 내려놓으 려는데, 누군가 말했다. 안 돼. 거긴 선생님들 자리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큰 식탁은 카페테리아 직원들을 위해 따로 잡아 둔 거 였고, 다른 곳에 있는 또 다른 식탁은 학교의 사무직원을 위한 자리였다. 어느 시회, 어느 집단에나 그 나름의 카스트들이 있고 각각의 카스트는 제 영역과 특 권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침내 빈 자리가 났다. 점심 시간이 20분 밖에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여느 때처럼 채 씹을 겨를도 없이 음식을 우겨 넣었다. 그들의 위는 이제 그런 상황에 이골이 난 나머지, 산성이 더욱 강한 위산을 분비해서 어금니의 게으름 에 대처하고 있었다. 한 남학생이 그들의 식탁으로 다가왔다. 토요일에 있었던 선배들 콘서트가 굉장했던 모양인데, 나와 내 친구들은 참석 을 못 했어요. 다음 주에 또 한다면서요? 무료 좌석권 좀 얻을 수 없을까요? 와, 우리도 줘요. 우리도요 스무 명쯤 되는 학생들이 공짜표를 얻을 욕심으로 그들을 에워쌌다. 지웅이 친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의 작은 월계수 위에서 잠이 들면 안 돼. 일이 잘 돌아갈 때 일수록 더 박차를 가해야 하는 거야. 역사 시간 끝나고 바로 연습에 들어가자. 다음 주 토 요일의 콘서트를 위해서 새 곡도 만들어야 하고 새로운 무대 효과도 준비해야 해. 나르시스는 의상을 만들고, 폴은 무대 장식을 맡아. 쥘리는 훨씬 더 <섹스 심벌>로 보일 필요가 있어. 너에겐 카리스마가 있어. 그런데 넌 그걸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아. 더 자유 분방해질 필요가 있다고.“ “설마 나보고 스트립 쇼를 하라는 건 아니겠지?” “스트립 쇼를 하라는게 아니라, 몸을 너무 감추지 말고 드러내는게 어떠냐는 거야. 때에 따라서는 이렇게 어깨를 노출 시킬수도 있잖아. 별것 아닌 것 같아도 그게 효과가 있다고.” 쥘리는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는 듯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교장 선생님이 나타났다. 그는 쥘리와 일곱 난쟁이들의 성공을 축하하 고, 자기 아우가 그들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으니 다음 토요일에는 더 잘해 보라고 격려했다. 그러고는, 자기도 젊은 시절에 그 비슷한 기회가 있었는데, 그 것을 놓쳐 버리고는 아직까지도 후회하고 있다면서 그들에게 열쇠 하나를 내밀 었다. 학교 후문의 열쇠라고 했다. 수위가 커다란 철책 정문을 닫은 뒤에도 그들 이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연습을 할 수 있게 하려고 특별히 배려한 것이었다. “이번엔, 세상이 시끌벅적하게 만들어 보라고!” 교장 선생님은 지웅의 어깨를 툭 치면서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쥘리는 콘서트의 면모를 일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폴이 투사하는 무지갯빛 조 명만으로는 무대 효과를 내기가 충분치 않다는 거였다. 그러자 레오폴이 제안했다. “커다란 책을 하나 만들어 배경에 놓고 거기에 ‘백과사전’에서 발췌한 합 성 사진 슬라이드와 여러 색깔의 빛을 비추면 어떨까?” “좋은 생각이야. 그리고 커다란 개미를 만들어서 리듬에 맞추어 다리를 움직 이게 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어.” “아예 우리 콘서트 제목을 ‘개미혁명’이라고 하는게 어때? 결국 우리의 첫 콘서트를 살려준 게 그 곡이었잖아.” 저마다 앞다투어 자기 의견을 내놓았다. 의상이며 무대장치, 연출에 관한 이야 기들이 더 나왔다. 록 음악 사이사이에 바흐의 푸가와 같은 고전 음악을 끼워 넣자는 주장도 있었다. 85. 백과사전 푸가기법 푸가는 카논에 비해 한층 발전된 기법이다. 카논에서 하나의 주제를 놓고, 그 것이 스스로와 대면할 때 어떤 양상이 빚어지는지를 알기 위해 갖가지 방식으로 ‘고문’을 하지만, 푸가에서는 하나가 아니라 몇 개의 주제가 나타난다. 그런점 에서 푸가는 반복보다는 진전의 양상을 띤다. 제1성부가 시작되면서 기본 주제가 나타난다. 그러면 그 주제를 보완하기 위 해 제2성부가 4도 높게 또는 3도 낮게 그 뒤를 따른다. 제1성부는 자기의 제1주 제를 끝내고 대위주제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때 제3성부가 나타날 수 있다. 제3성부는 제1성부나 제2성부의 주제, 또는 제1성부의 대위 주제를 연주한다. 성부와 주제의 조합이 카논의 경우보다 더욱 복잡하다. 마침내 각 성부가 자지 구역을 다 탐색하고 다른 구역과의 교류도 끝내고 나 면, 모두가 출발점에 모여 제1주제를 다시 불러낸다. 푸가중에서 구성이 아름답기로는 바흐의 작품 ‘음악의 헌정’을 빼놓을 수 없다. 많은 푸가가 그렇듯이, 이 작품도 다 단조로 시작된다. 그런데 마치 요술 쟁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술수를 부리기라도 한 것처럼 어느 틈에 조가 바뀌어 라 단조로 끝을 맺는다. 듣는 사람의 귀가 조바뀜의 순간을 감지하지 못하는 사 이에 그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처럼 조성을 ‘도약’시키는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음악의 헌 정’을 음계의 모든 음에서 무한히 반복할 수 있을 것이다. ‘제왕의 영광도 이 와 마찬가지로 조바꿈을 통해서 끝없이 상승한다.’고 바흐는 설명했다. 그의 이 름 바흐는 엉뚱하게도 독일어로 ‘개울’을 뜻한다. 푸가 중에서 가장 빼어난 작품은 바흐의 ‘푸가의 기법’이다. 바흐는 죽음을 맞기 전에 그 작품을 통해서 단순한 것에서 출발하여 더할 나위 없이 복잡한 것 으로 나아가는 점진 기법을 인반 대중에게 설명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는 바람에 (그는 시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다.),한창 열정적으로 하 던 작업을 그만두어야 했다. 결국 이 푸가는 미완성인 채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바흐가 그 작품을 자기 이름의 네글자 B,A,C,H,를 새겨 넣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바흐는 그 푸가의 마지막 주제 가운데 하나를 자기 이름을 가 지고 만들었다. 독일어로 B는 시, A는 라,C는 도에 해당한다. H는 B와 마찬가지 로 시를 뜻하지만 B가 시 플랫임에 반해서 H는 그냥 시를 나타낸다. 결국 BACH를 음으로 나타내면, 시플랫,라,도, 시가 된다. 바흐는 마침내 자기 음악의 내부로 들어간 셈이다. 그는 제왕들처럼 무한을 향해 상승하기 위해서 자기 음악에 의지했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제3권 86.물위를 미끄러져 달리는 자들의 공격 장밋빛 돛을 단 수련잎 배가 강물 위를 천천히 미끄러져 가는 동안, 개미들은 물위를 걷는 한 무리의 곤충들을 발견한다. 소금쟁이들과, 꾸정모기와 비슷하게 생긴 실소금쟁이들이다. 그들은 머리가 아주 길고 둥근 눈이 두 개의 진주처럼 좌우에 박혀있어서 아 프리카의 갸름한 가면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배의 아래쪽은 물에 젖지 않는 은빛 잔털로 덮여 있는데, 이 잔털 덕분에 그들은 물에 빠질 염려가 없이 마음 놓고 떠다닐 수 있다. 물벼룩이나 모기의 시체나 장구애비의 애벌레 같은 먹이를 찾고 있던 소금쟁 이들은 개미들의 배가 일으키는 파동을 감지하자, 뜻밖에도 대오를 지어 개미들 을 공격해 온다. 그들은 돛을 이용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빠르게 물 위를 미끄러져 달린다. 그 들이 발목마디로 수면을 디디면 강물이 팽팽한 막처럼 버티면서 아주 훌륭한 발 판이 되어준다. 개미들은 위험을 직감하고 수련잎의 가장자리에 늘어서서, 마치 옛날 바이킹 들이 창과 방패를 들어올리듯이 꽁무니를 들어올리고 개미산 사격을 준비한다. 발사. 개미들의 배에서 일제히 개미산 포가 날아간다. 소금쟁이 여러 마리가 개미산을 맞고 고꾸라져 물 위에서 표류한다. 그래도 배가 방수가 되기 때문에 그들은 가라앉지 않고 계속 수면에 떠 있다. 처음 몇 차례의 사격에 많은 소금쟁이들이 쓰러졌다. 하지만 몇몇 소금쟁이들 은 용케 사격을 피하고 수련잎 배로 접근했다. 그들이 그저 긴 다리로 수련잎을 디뎠을 뿐인데도 잎이 물에 잠겨 버린다. 개미들은 모두 물 위로 떨어졌다. 몇몇 개미들은 소금쟁이들을 흉내내어 물 위를 걸어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 하자면 힘을 완벽하게 조절해서 각 다리에 골고루 실리도록 해야 하는데, 그것 이 도무지 여의치 않아서 그들 다리 중의 한둘은 자꾸 물 속으로 빠져 든다. 결 국 개미들은 턱과 배를 차가운 물에 대고 하릴없이 허우적거린다. 턱이 물에 잠기지 않는 한 익사할 염려는 없지만, 어떤 동물에 잡아먹힐지 모 르는 위태로운 상황이므로 빨리 곤경에서 벗어날 방도를 찾아야 한다. 열세 개 미는 물결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서로 의지해보려고 하지만 도움이 되기 보다 는 서로에게 물을 끼얹는 꼴이 되고만다. 그들이 간신히 수련잎 가장자리에 매 달리자 소금쟁이들은 그들을 떼밀고 머리를 밟아서 물 속에 빠뜨리려고 한다. 그래도 갖은 애를 쓴 보람이 있어서, 개미들은 가까스로 서로를 떠받쳐 물에 뜬 승강대를 만들어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수련에 기어오른다. 먼저 올라간 개미들은 다른 개미들을 끌어 올리고, 계속 덤벼드는 소금쟁이들 을 사로잡는다. 포로가 된 소금쟁이들을 잡아먹기 전에 103호는 자기가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 것을 그들에게 묻는다. 소금쟁이는 따로따로 떨어져 살아가는 곤충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찌하여 무리를 지어 공격해 왔는가 하고. 한 소금쟁이가 말하기를, 그 것은 ‘개조’라 불리는 어떤 소금쟁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야기인 즉슨 이러 하다. ‘개조’는 물살이 아주 센 여울목에 살던 소금쟁이였다. 그곳은 소금쟁이들 이 마음놓고 돌아다닐 수 없는 곳이었다. 소금쟁이들은 짧은 거리를 미끄러져 가다가 재빨리 물풀에 매달리곤 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물살에 휩쓸려 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물살에 실려가면 어디로 가게 되는지 아는 소금쟁이는 하나도 없었다. ‘개조’는 그 물살에 맞서 싸우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평생 물풀에 의존하며 살기를 거부하고 물살에 휩쓸 려 가기로 결심했다. 이웃의 소금쟁이들은 모두 바위에 부딪혀 죽게 될거라면서 그를 만류하였다. 그러나 ‘개조’는 뜻을 굽히지 않고 물길을 떠났다. 동료들이 예상한 대로 그는 물살에 휩쓸려 이리저리 흔들리고 떴다 잠겼다 물자맥질을 하 고 여기저기 부딪히며 찢기고 긁히고 멍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고 살아 남았다. 그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본 강 하류의 소금쟁이들은 그런 용감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소금쟁이는 모두의 귀감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를 우두머리 로 세우고 함께 모여 살기로 결정했다. 그 얘기를 듣고, 암개미 103호는 개체 하나의 힘으로도 종 전체의 행동을 변 화시키는 일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 용감한 소금쟁이가 이룩한 것은 무 엇인가? 물살을 두려워하며 물풀에 매달리기를 거부하고, 온갖 고난을 무릅쓰며 스스로 물살에 휩쓸려 간 끝에,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온 겨례의 생존 조건을 개선하지 않았는가? 소금쟁이의 이야기가 암개미에게 용기를 새로이 붇돋운다. 15호가 다가와 그 소금쟁이를 잡아먹으려고 하자, 103호가 말린다. 최근에 모 듬살이를 이룬 제 겨례에게 돌아가도록 그를 풀어 주자는 것이다. 15호는 포로 를 놓아주라는 까닭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건 소금쟁이다. 맛도 좋다. 그런데, 왜 이 자를 돌려보낸단 말인가? 할 수 만 있다면 그 ‘개조’라는 자도 찾아서 죽여야 할 판인데.” 다른 개미들도 그와 생각이 같다. 소금쟁이들이 무리를 지어 싸움을 걸어오기 시작한 상황에서, 당장에 그들을 제지하지 않으면, 몇 년 후에는 그들이 수상 도 시를 건설하고 강을 지배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103호라고 그런 걸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결국 어느 종에나 진화의 기회 는 오게 마련이다. 자기 종의 우위를 유지하는 길은 경쟁자들을 없애 버리는 것 이 아니라 그들보다 더 빨리 나아가는 것이다. 암개미는 자기에게 다른 종에 대한 연민이 싹트고 있음을 깨닫고 스스로 놀란 다. 이것 역시 생식개미 특유의 새로운 감각 탓일 것이다. 아니면, 손가락들과 오랫동안 접촉한 데서 기인한 퇴행의 한 증거일지도 모른다. 암개미 103호는 자기 머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전에도 그는 자아를 생각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는데, 성을 갖게 되고 감각이 열 배나 더 민감해 지면서 그런 성향이 부쩍 심해졌다. 보통의 경우, 개미는 항상적으로 집 단적인 정신에 접속되어 있고, 개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단적인 정신에 서 떨어져 나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그런데 103호는 집단적인 정신에서 벗어나 있는 때가 너무나 많다. 그는 개체의 입장에서 사고하며 자아의 감옥에 갇힌 채, 더 이상 집단적으로 사고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얼마 안 가서 그는 오로지 자아만을 생각하게 될 것이고, 손 가락들처럼 자기 중심적인 개체가 되고 말 것이다. 5호 역시 그것을 느끼고 있다. 더듬이를 맞대고 완전 소통을 할 때, 암개미는 자기 뇌의 구석구석을 온전히 보여 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집단의 규칙 에 따라 행동하려고 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지금은 그런 생각에 매달리고 있을 계제가 아니다. 암개미 103호는 수련잎 배의 꽃잎 돛이 씨익씨익 소리를 내고 있음을 깨닫는 다. 불길한 조짐이다.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배에 속력이 붙고 있는 것일까? “모두 꼭대기로 올라가자.” 개미들은 망을 보러 꽃잎의 가장 높은 끄트머리로 올라간다. 그곳에 오르니 배의 속도를 한결 잘 느낄 수 있다. 머리의 모든 털과 더듬이가 가는 풀처럼 뒤 로 젖혀진다. 암개미의 불안은 공연한 것이 아니었다. 멀리에 뽀얀 물보라의 장벽이 보인다. 이 속도대로 간다면 그 장벽을 피하기가 어려울 듯하다. “제발 폭포가 아니어야 할텐데.” 87.두 번째 콘서트를 위한 준비 작업 쥘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많은 공을 들여 두번째 콘서트를 준비했다. 그들은 매일 방과 후에 연습실에 모였다. “아직 창작곡이 충분하지 않아. 공연 시간을 채우려고 똑같은 노래를 두 번 부르는 건 용렬한 짓이야.” 쥘리가 책상에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백과 사전’을 펼쳐 놓으면서 말했다. 다들 책 위로 몸을 기울였다. 쥘리는 책장을 넘기면서, ‘황금비’,‘알’,‘검열 ’,‘정신권’,‘푸가 기법’,‘달나라 여행’등 노래말이 될 만한 글들을 모두 표시해 두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곡을 붙이기 쉽게 원문을 고쳐 썼다. 쥘리가 말했다. “우리 그룹 이름을 바꾸는게 좋겠어.” 다른 구성원들이 고개를 들었다.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는 좀 유치하지 않니? 게다가, 나는 그 ‘와’라 는 말로 백설공주를 일곱 난쟁이와 떼어 놓는 게 싫어. 그보다는 차라리 ‘여덟 난쟁이’가 낫지.” 다들 쥘리의 진의를 알아차렸다. “‘개미혁명’은 지난번 콘서트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야. 다윗은 다음 콘서트 제목을 그것으로 정하자고 제안했는데, 이번 기회에 우리 그룹 이 름도 다시 짓는게 어떨까?” “‘개미들’이라고 하잔 말이니?” 조에가 이렇게 말하며 입술을 내밀었다. 레오폴은 ‘개미들’하고 되뇌었다. “느낌은 괜찮지 않니? 비틀즈보다 낫잖아. 철자는 조금 다르지만 투구벌레라 는 뜻의 비틀즈와 발음이 같아. 게다가 앞에 블랙을 붙이면 바퀴벌레라는 뜻이 돼. 혐오감을 주기 십상인 그런 곤충의 이름도, 그 4인조 록 그룹이 세계적인 성 공을 거두는 데는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았어.” 지웅이 숙고 끝에 입을 열었다. “그룹 이름을 ‘개미들’로 하고 , 콘서트 제목을 ‘개미 혁명’으로 하면 어떤 일관성이 있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굳이 개미를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왜 어때서 그래?” “개미는 사람들이 발로 밟고 손으로 눌러 죽이는 하찮은 곤충이야. 게다가 전혀 재미가 없는 곤충이잖아.” “그러면 멋있는 곤충으로 하자. ‘나비들’이나 ‘꿀벌들’이라는 이름은 어 때?” 나르시스가 제안하자 폴도 한마디 했다. “‘버마재비들’이라고 하면 어떨까? 버마재비는 머리가 재미있게 생겨서 음 반 재킷에 넣어도 괜찮을 거야.” 저마다 자기가 가장 호감을 느끼는 곤충의 이름을 들먹였다. “눈에놀이도 괜찮을 거 같은데. 그러면 우리에게 이런 슬로건이 생길 거야. ‘눈에놀이들의 음악을 듣고 눈에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는 눈에놀이들의 친구가 된다!’ 그러고 나면, 손수건을 꺼내 흔드는 것이 우리 팬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상징이 될 거야.” “아, 그래? 그렇게 말의 재미를 노릴 양이면 차라리 ‘땅taons’으로 하는게 어때? 그러면 ‘땅temps’과 소리가 같아서 재미있는 뜻겹치기가 가능할 거야. ‘오 땅이여, 그대의 비상을 멈출지라’라든가 ‘레땅 모데른’, 혹은 ‘당신의 주말을 위한 보 땅’하는 식으로 말이야.” “‘무당벌레들’이라고 하자. 그러면 무당벌레를 흔히 ‘하느님의 벌레’라 고 부르니까, 말의 다의적인 효과를 살릴 수 있을 꺼야.” “‘뒝벌들’은 어떨까?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진동시키는 그룹, ‘뒝벌들’ 하고 말이야.” 쥘리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야! 내 얘기는 그런 게 아니야. 개미는 물론 아주 보잘것 없는 곤충이 야.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가장 훌륭한 상징이 될 수 있어. 흔히들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곤충을 흥미로운 존재로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할 일이야.” 다른 사람들은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에는 개미에 관한 시와 산문들이 아주 많이 나와 있어.” 이번엔 그녀의 주장이 먹혀 들었다. 빠른 시일 내에 새로운 곡들을 만들자면, ‘백과 사전’에 가장 많이 나오는 주제를 선택한는 편이 나을 것이기 때문이었 다. 다윗이 선선히 말했다. “좋아 ‘개미들’로 하자.” 조에도 쥘리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어쨌거나 개미라는 말은 균형이 잘 잡힌 두 음절로 되어 있어서 어감이 괜 찮아.” 조에는 음의 고저와 장단을 여러 가지로 달리 하면서 되뇌어 보았다. ‘개-미 ’,‘개미’,‘우리는 개미다’,‘우리는 개-미다’. “자, 이제 포스터 건으로 넘어가자.” 다윗은 연습실의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는 그래픽 프로그램을 열어서 양피지 고문서 같은 느낌을 주는 글바탕을 찾아낸 다음, 글꼴을 선택했다. 각 행의 첫머 리에 쓰일 글자들을 위해서는 빨간색의 굵고 꼬불꼬불한 대문자를, 나머지 글자 들을 위해서는 흰색 음영이 들어간 검은색 소문자들을 골랐다. 그들은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의 표지에 나와 있는 그림 을 포스터에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원 안에 삼각형이 있고, 그 삼각형 안에 개미 세마리가 뒤집어진 Y자 모양을 이루고 있는 그 그림을 그래픽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재구성하면 그들 그룹의 상징으로 쓰기에 충분할 것 같았다. 그들은 다같이 컴퓨터를 들여다 보면서 포스터를 만들어 나갔다. 맨 위에 ‘ 개미들’이라고 쓰고, 조금 아래에 괄호를 열고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의 새 이름’이라는 말을 넣었다. 첫 콘서트의 청중을 다시 오게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그 아래에, ‘4월 1일 토요일, 퐁텐블로 문화원’하고 시간과 장소를 명시한 다음, 크고 굵은 글씨로 ‘개미 혁명’이라고 썼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결과를 컴토했다. 양피지 고문서를 닮은 포스터의 견본이 화면에 나타났다. 조에는 교장실의 컬러 복사기를 이용해서 그것을 2천부 복사했다. 지웅은 자 기 누이동생을 불러 급우들과 함께 포스터를 시내에 붙여 달라고 부탁했다. 지 웅의 누이는 무료 좌석권을 얻는 조건으로 그 부탁을 받아들이고, 친구들을 모 아 거리로 나섰다. 그들이 상점들의 문이나 공사장 담벼락 같은 곳에 포스터를 붙이면, 사람들은 앞으로 사흘에 걸쳐서 표를 사라 수 있게 될 거였다. “포스터는 됐고, 그럼 이제부터 공연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 을 점검해 보자.” 프랑신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저마다 자기 생각을 내놓았다. “나는 발연 기재와 스포트라이트로 특수 효과를 낼 생각이야.” “대도구를 만들어서 무대를 꾸미는 방법도 생각해 봄직해.” “나는 슈티롤 수지고 1미터 높이의 책을 만들겠어.” “펼쳐 놓은 모형의 책을 만들고 거기에 움직이는 종이 한 장을 붙여 놓는 거 야. 그러고 나서, 슬라이드를 비추면 마치 책장을 넘기는 듯한 느낌을 줄수 있 어.” “그거 멋진 생각이야! 그럼, 나는 2미터가 넘는 거대한 개미를 책임지고 만들 겠어.” 지웅이 약속했다. 폴은 각 노래의 특별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향기를 발산시키자는 안을 내놓았 다. 그는 자기에게 초보적인 형태로나마 냄새 오르간을 만들 만한 화학적인 재 능이 있노라고 스스로를 평가했다. 그는 라벤더 향에서 흙 냄새에 이르기까지, 요오드 냄새에서 커피향에 이르기 까지, 말 그대로 후각적인 무대 장치를 마련 해서 각각의 작품에 맞는 분위기를 연출하라 생각이었다. 나르시스는 기발한 의상을 만들고 각 노래의 주제를 부각시킬 만한 가면과 분 장을 고안하기로 했다. 그들은 다시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갔다. 다윗이 ‘개미혁명’의 솔로 부분을 연주하다 말고 투절거리는 소리를 냈다. 분명히 그의 연주가 정상이 아니었다. 그들이 웬일인가 하고 의아해 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찌찌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처음에 그들은 그것이 전기 장치에서 나오는 잡음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 러나, 엠프를 조정하려고 다가가 보니, 그 안에 귀뚜라미 한 마리가 들어 있었 다. 변압기의 온기에 끌려 숨어 들어온 가련한 귀뚜라미였다. 다윗은 그 귀뚜라미를 보고 한 가지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하프줄에 다는 작 은 마이크를 귀뚜라미의 딱지날개에 부착시키자는 거였다. 그의 말대로 마이크 를 달아주고 폴이 엠프를 조정했더니, 효과가 아주 특이한 마찰음이 나왔다. “우리가 마침내 ‘개미 혁명’을 위한 완벽한 솔로 연주자를 찾아낸 것 같은 데.” 88.백과 사전 미래는 배우들의 것이다. 미래는 배우들의 것이다. 배우들은 불의에 맞서 분노하는 시늉을 할 줄 알기 에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사랑하는 시늉을 해서 사람들이 굄을 받으며, 행복한 모습을 연기할 줄 알기에 사람들의 부러움을 산다. 배우들은 이제 모든 직업에 침투하고 있다. 1980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된 것은 배우들이 지배 하는 세상이 도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고명한 사상이라 든가 통치 능력 따위는 쓸모가 없어지고, 연설문을 작성하기 위한 전문가들을 거느리고 카메라 앞에서 멋진 연기를 하는것이 더 중요한 세상이 온것이다. 사실, 현대의 대다수 민주주의 국가에서 유권자들은 더 이상 정강정책에 따라 서 후보를 선택하지 않는다(누구나 선거 공약이 종당엔 공약이 되고 말리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다. 현대 국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정당과 정파 의 지혜를 다 합쳐도 모자란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유권자 들은 생김새와 미소, 음성, 옷맵시, 인터뷰할 때의 격식 차리지 않는 태도, 재치 있는 언변 따위로 후보자를 선택한다. 직업의 모든 분야에서 배우 같은 사람들이 불가항력적으로 우위를 점해가고 있다. 연기 잘하는 화가느 ㄴ단색의 화폭을 갖도 놓고도 예술 작품이라고 설득 할 수 있고, 연기력 좋은 가수는 시원찮은 목소리를 가지고도 그럴 듯한 뮤직 비디오를 만들어 낸다. 한마디로, 배우들이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배우들이 우위를 차지하다 보니, 내용보다는 형식이 더 중요해 지고 겉 치레가 실속을 압도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데에 있다. 사람들은 이제 무엇을 말하는가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어떻게 말하는지, 말할 때 눈길을 어디에 두는지, 넥타이와 웃옷 호주머니에 꽂힌 장식 손수건이 잘 어울 리는지 따위를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리하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제시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토론에서 점차로 배제되어 가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바로 거기에 있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제3권 89.험난한 뱃길 급류다! 어마지두에 개미들은 더듬이를 곧추세운다. 이제껏 느릿느릿한 물살에 실려 강둑을 따라 가만가만 흔들리며 내려왔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어느새 배가 여울머리에 들어온 것이다. 여울돌들의 기복 때문에 하얀 물보라가 들쭉날쑥한 선을 그리고 있다. 요란한 물소리가 사위에 진동한다. 수련잎 배의 분홍빛 돛들이 속도를 견디지 못해 시 끄럽게 부들거린다. 암개미 103호는 더듬이가 머리에 엉겨붙는 바람에 몸짓으로, 물살이 덜 센 왼 쪽으로 지나가는게 좋겠다는 뜻을 알린다. 배 뒤를 따라오던 물방개들은 개미들의 부탁을 받고 훨씬 더 빠르게 물을 휘 젓는다. 개미들은 물에 떠가는 기다란 잔가지를 붙들어 그것을 위턱으로 잡고 상앗대로 삼아 배를 이끌고 간다. 13호가 물에 빠졌으나, 동료들이 재빨리 그를 건져 올린다. 올챙이들이 배가 난파되기를 기다리며 수면을 배회하고 있다. 남의 불행을 호 기로 삼으려는 그 민물의 하이에나들은 크기로 보자면 물론 엄청난 차이가 있지 만 탐욕스럽기로는 상어보다 더한 자들이다. 속도가 붙은 수렴잎 배는 커다란 돌 세 개가 솟아 있는 쪽으로 내닫는다. 물 방개들은 온 배에 물을 튀기며 미친 듯이 물을 휘젓고 있다. 수련잎 배의 이물 쪽 뾰적한 끝이 방향을 잃고 갈팡질팡한다. 그바람에 돌 하 나가 뱃전에 정통으로 부딪는다. 무른 잎으로 된 배라서 부서지지 않고 그 충격 을 흡수한 것이 다행이다. 수련잎이 바르르 떨면서 방향을 틀려는 찰나, 소용돌 이가 일면서 잎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버린다. 꽃잎 하나가 개미들을 강타하면서 떨어지더니 물 속으로 사라져 간다. 개미들은 첫번째 급류를 통과했다. 그러나, 벌써 두번째 물보라장벽이 나타났 다. 벨로캉 개미들이 물에 빠지기를 기다리는 자들은 올챙이 말고도 더 있다. 검 고 야드르르한 물매미, 배 끝에 긴 호흡관이 달린 장구애비, 다리가 가늘고 긴 물거미 같은 물살이 벌레가 그들이다. 먹이가 생길 것을 기대하며 헤엄쳐 온 축 도 있다. 그저 남의 재난을 구경하러 온 축도 있다. 5호는 물방개들에게 페로몬 을 보내어 배를 좁은 수로쪽으로 이끌게 한다. 그곳의 물살이 덜 사나워 보이기 때문이다. 눈에놀이들은 개미들이 아무런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 자청해서 그곳에 날아 갔다 오더니 비관적인 소식을 전해준다. “그쪽으로 가면 안 된다.” 수로 안은 물살이 훨씬 더 세다는 것이다. 개미들은 어찌해야 좋을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배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할 위험을 무릅쓰고 방향을 틀 것인가, 아니면 최선을 다해서 두 번째 급류를 통과할 것인가? 너무 늦었다. 미래는 우유부단한 자들을 두남두지 않는다. 수련잎 배가 급류에 휩쓸려 간다. 앞에 돌이 있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피할 겨를이 없다. 짐승의 이빨처럼 여기저기 솟아 있는 돌부리에 배가 부딪힐 때마 다 개미 서넛이 균형을 잃고 금방이라도 뱃전너머로 떨어질 것처럼 위태위태한 모습을 보인다. 개미들은 모두 수련꽃 한가운데의 노란 수술 사이로 들어가 위 턱을 앙다문 채 옹송그린다. 배가 또 한차례 돌을 들이받고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균형 을 되찾는다. 어떤 작전에서든 성공의 첫번째 요인은 뭐니뭐니 해도 행운이야,하 고 103호는 생각한다. 세모꼴 바윗돌이 배 밑을 긁어 줄무늬의 흠집을 내고 배 한가운데에 덩어리 모양의 자국을 남겼다. 그 서슬에 배가 아주 심하게 요동을 쳤다. 균형을 잃었던 개미들이 원래의 자세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수련잎이 세 번째 급류에 휘말려 다시 속도를 낸다. 강 양편의 온 숲에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마치 숲전체가 하 나의 동물처럼 살아 있는 듯하고, 강물은 숲의 축축한 혀인 듯하다. 암개미 103호는 미친 듯이 출렁대는 물결을 바라본다. 위의 하늘은 저리도 맑 고 아름다운데, 아래의 이 수평선 어름에는 오로지 광란만이 있을 뿐이다. 우뚝 솟은 커다란 바윗돌 하나가 그들 앞에 그늘을 드리운다. 물을 휘저으며 배를 따라오던 물방개들은 겁에 질린 채 배를 놓아 버리고 하 릴없이 배와 함께 물결에 휩쓸린다. 이제 모든 걸 운명에 맡길 도리밖에 없다. 수련잎 배는 추진 장치를 잃고 팽이처럼 뱅글뱅글 돈다. 안에 있는 개미들은 원심력에 이끌려 이제 몸을 가누고 서 있을 수조차 없다. 바깥쪽으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저 위, 수련의 분홍빛 꽃잎 위에 하늘이 있고, 그 아래 에서는 모든 것이 돌고 있다. 103호와 5호는 서로 꼭 달라붙어 있다. 배가 돈다. 자꾸자꾸 돈다. 다시 커다 란 돌을 들이받는다. 개미들은 마구 까불리고 튀어 오른다. 배가 또 다시 돌에 부딪힌다. 돛대가 기울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아직 배가 뒤집어지지는 않았다. 103호는 조심스럽게 머리를 들고 앞을 내다본다. 배는 어지럼증이 일 만큼 어마 어마한 폭포 쪽으로 곧장 나아가고 있다. 물보라 너머로 강물이 더 이상 보이 지 않는 걸 보면 물이 무척이나 가파른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이젠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배가 점점 더 빨라진다. 급류의 굉음에 천지가 진동한다. 개미들의 더듬이는 머리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이번엔 한바탕 크게 날아서 다이빙을 할 도리밖에 없다. 그들은 분홍빛 수련 꽃의 노란 수술 사이에서 몸을 잔뜩 웅크린다. 배가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아래쪽에 은빛 띠같은 강물이 아스라히 보인다. 90.무대 뒤에서 "어이, 여보게들, 마음껏 해보라고! 지난번 콘서트가 다이빙 대 위에서 준비 운동을 한 거라면, 이번엔 확실하게 물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거야." 문화원 원장은 그렇게 군말에 지나지 않는 충고를 했다. 그들은 시간을 허비할 겨를이 없었다. 두 번째 공연이 세 시간 앞으로 다가와 있는데, 무대 장치를 아직 끝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커다란 책을 세우 랴, 개미을 설치하랴, 냄새뿜는 기계를 시험해 보랴 여념이 없었다. 폴은 동료들을 상대로 냄새 뿜는 기계를 실제로 가동시켜 보이며 말했다. "이 기계를 사용하면, 쇠고기 스튜 냄새에서 땀내, 피비린내, 커피향, 통닭구이 냄새, 박하향, 자스민 향에 이르기까지 모든 냄새를 합성할 수 있어." 프랑신은 옷핀을 잎에 물고 분장실의 쥘리에게 와서, 오늘 밤은 특별히 중요 하니까 첫 콘서트 때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너에게 반하지 않는 관객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안 돼." 프랑신은 분장 도구 일습을 가져와 쥘리의 분장사 노릇을 해주었다. 그녀는 눈 주위에 새 모양의 무늬를 그리는 것으로 화장을 마무리한 다음, 길고 검은 머리에 왕관 모양의 머리 장식을 씌우고 핀으로 고정시켰다. "오늘 밤, 너는 여왕이 되는 거야." 그때, 나르시스가 분장실로 불쑥 들어왔다. "우리의 여왕을 위해서, 나는 여제의 드레스를 지었지. 너는 그 어떤 여군주나 왕후보다도 매혹적으로 보일 거야. 조제핀보다도 시바의 여왕보다도, 러시아의 까쩨리나 여제나 클레오파트라보다도 말이야." "<백과 사전>을 뒤져 보면 새로운 미학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어. 네가 입게 될 옷의 색깔은 율리시스 나비, 라틴어로 하면 파필리오 울리세스의 날개 빛깔이야. 잘은 모르지만, 그 나비는 뉴기니아, 오스트레일리아의 퀸즐랜드주 북부, 솔로몬 제도 등지에 사는데, 그 나비가 공중 을 날 때면 열대의 숲에 푸른 형광이 번쩍거린다는 거야." "그런데, 그건 뭐니?" 쥘리는 드레스에 두 가닥으로 가늘고 길게 덧댄 검은색 벨벳 두루마리를 가리 키며 물었다. "이건 그 나비의 꼬리 부속 기관이야. 이렇게 검고 긴 꼬리가 있어서 그 나비 가 날아가는 모습이 놀랍도록 우아해 보인대." "어서 입어 봐." 쥘리는 풀오버와 치마를 벗고 팬티와 브래지어 차림이 되었다. 나르시스가 그 녀의 몸맵시를 살피며 덤덤하게 말했다. "아, 걱정하지 마. 난 그저 옷이 네 몸에 잘 맞는가를 보고 있는 거니까. 나로 말하자면, 여자들의 벗은 몸을 보아도 아무런 유혹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야. 사 실, 나는 내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다면, 여자가 되기를 바랐을 거야." "정말로 여자로 태어나는 편이 나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쥘리가 얼른 옷을 입으면서 물었다. "그리스의 한 전설에 따르자면, 여자들은 오르가즘의 순간에 남자들보다 아홉 배나 더한 즐거움을 느낀다는 거야. 그런 점에서 남자들은 손해를 보고 있는 셈 이지. 물론 단지 그것 때문에 여자가 되고 싶다는 얘기는 아니야. 여자는 생명을 잉태할 수 있잖아? 나도 그런 걸 느껴 보고 싶어. 사람이 한 생애를 살면서 이 루어 낼 수 있는 것 중에 진실로 중요한 성취는 결국 생명을 전하는 것밖에 없 지 싶어. 남자들은 그런 것을 느끼고 경험할 수 없지." 하지만, 쥘리의 몸을 톺아보고 있는 나르시스의 눈길이 마냥 덤덤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 맑은 살결, 검고 윤기 흐르는 머리, 커다란 연회색 눈, 눈가에 문신처럼 그려 놓은 새의 날개. 그의 시선이 그녀의 가슴에 가서 멎었다. 쥘리는 목욕을 끝내고 나오는 사람처럼 옷으로 몸을 휘감았다. 살갗에 닿은 천의 느낌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입으니까 아주 기분이 좋은데." "당연하지. 이 옷감은 율리시스 나비의 애벌레가 토한 실로 짠 것이거든. 말하 자면, 애벌레가 고치를 지으려고 토한 실을 사람들이 훔쳐 낸 것이지. 하지만, 너에게 이 옷을 선사하려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괜찮아. 캐나다의 휴런족 인디언인 웬타트 부족 사람들은 사냥을 할 때, 동물을 죽이는 이유가 식구들을 먹이기 위한 것이든 옷을 만들기 위한 것이든, 활을 쏘기 전에 짐승에게 그 이 유를 설명한다는 거야. 내가 나중에 부자가 되어서 누에실 공장을 차리게 된다 면, 나는 모든 누에들에게 그들이 비단을 제공하게 될 고객들의 명단을 알려 줄 거야." 쥘리는 분장실 문에 걸린 커다란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춰 보았다. "이 옷 훌륭한데. 아주 독특해. 이런 옷은 정말 처음봐. 넌 디자이너 해도 되겠 다." "내가 옷을 잘 만들었다기보다 매혹적인 사이렌에 율리시스 나비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것뿐이야. 나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뱃사람들이 왜 그렇게 사이렌들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홀리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어." 쥘리가 옷을 매만지며 대꾸했다. "그거 말 되네." 나르시스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 넌 아름다워. 그리고 네 목소리는 한마디로 굉장해. 네 노래를 들으면 등골 이 짜릿짜릿하지. 라 칼라스도 네 앞에선 기를 못 폈을 거야." 쥘리는 피식 웃었다. "너 여자들에게 아무런 유혹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 거 정말이니?" 나르시스가 쥘리의 어깨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사랑의 방법은 여러 가지야. 사랑 그러면 모의 생식 행동인 성행위를 떠올리 기가 십상이지만, 그런 것을 원치 않아도 사랑을 할 수 있을 거야. 나는 내 방식 대로 너를 사랑해. 내 사랑은 외쪽사랑이야. 그래서 오히려 완전하지. 나는 아무 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아. 그저 너를 바라보고 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다른 친구들도 쥘리를 보러 왔다. 조에는 분장실에 들어서자마자 탄성을 지르 며 쥘리를 껴안았다. "와, 우리의 애벌레가 나비로 변했네." "율리시스 나비의 날개를 그대로 모방한 거야." 나르시스는 새로 온 사람들을 위해 같은 설명을 되풀이했다. "눈이 부시구먼!" 지웅은 그렇게 말하고 쥘리의 손을 잡았다. 쥘리는 얼마 전부터 그룹의 남학 생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를 대면서 자기 몸에 손을 대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깨달 았다. 그녀는 그것이 싫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늘 하는 말이 있었다. 사람과 사 람 사이가 너무 가까워지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므로, 자동차들이 도로에서 안 전 거리를 유지하듯이, 서로 간에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다윗은 그녀의 목과 빗장뼈를 꾹꾹 눌러 주기 시작했다. "너의 긴장을 풀어 주려는 거야." 그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아니게아니라, 등의 뻣뻣함이 조금씩 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긴 했다. 그러나 다윗의 손가락은 훨씬 팽팽한 새로운 긴장을 불러일 으켰다. 쥘리는 몸을 빼냈다. 문화원 원장이 다시 나타났다. "여보게들, 서두르라고, 곧 무대로 나가야 해. 벌써 객석이 꽉 찼어." 원장은 쥘리 쪽으로 몸을 숙였다. "이런, 살갗에 소름이 돋았네. 추운 게로구나." "아니에요. 괜찮아요." 쥘리는 조에가 내미는 가죽신을 받아 신었다. 그들은 각자 자기 의상을 입고, 무대로 나가서 악기와 무대 장치들을 마지막 으로 점검했다. 원장이 준 출연료 덕에 그들은 무대 장치며 앰프를 개선할 수 있었다. 원장은 첫 콘서트 때 훼방꾼들이 소란을 피운 일도 있고 해서, 이번에는 만약 의 사태에 대비하는 뜻으로 장정 여섯 명의 도움을 빌기로 했다는 사실을 귀띔 해 주었다. 원장의 말대로라면, 이번엔 달걀이나 맥주 깡통에 맞는 불상사 없이 편하게 공연을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들은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각자 자기가 맡은 일을 수행했다. 레오폴은 커다란 개미 상을, 폴은 냄새 오르간을, 조에는 백과 사전의 모형을 점검했고, 나르시스는 가면들을 이리저리 매만져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또, 프랑신은 신시사이저를, 폴은 조명을, 다윗은 귀뚜라미에게 달아 준 마이크의 음 향 강도를 조정했고, 쥘리는 노래와 노래 사이에 들어갈 짤막한 대사들을 되풀 이해서 외웠다. 나르시스가 준비한 무대 의상은 모두 곤충의 모습을 본뜬 것들이었다. 그리하 여 레오폴은 오렌지빛 개미처럼 보이는 옷을 입었고, 프랑신은 초록색 버마재비, 조에는 딱지날개에 빨간색과 검은색이 섞인 무당벌레, 지웅은 풍뎅이, 폴은 꿀 벌, 다윗은 귀뚜라미 형상으로 차려 입었다. 그런가 하면, 진짜 귀뚜라미는 종이 로 만든 작은 나비 넥타이를 목에 두르고 있었다. 나르시스가 자기 자신을 위해 마련한 것은 버마재비 모습을 흉내낸 알록달록한 옷이었다. "퐁텐블로 나팔수"의 마르셀 보지라르 기자가 다시 인터뷰를 하러 나타났다. 그는 신속하게 몇 가지를 물어 보고는, <오늘도 나는 여러분의 공연을 지켜볼 수가 없어요. 그래도 지난 번 기사가 정확했다는건 여러분도 인정하지요?>라고 말했다. 쥘리는 만일 기자들이 다 그런 식으로 일을 한다면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전하 는 소식은 사실의 작은 부분밖에 반영하지 못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쥘리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그의 비위를 맞추었다. "정말 그랬어요." 그러나 조에는 기자의 주장을 수긍하지 않았다. "잠깐만요. 설명 좀 해주세요. 저는 이해를 못 하겠어요." "잘 몰라야 말을 잘 한다는 게 언뜻 듣기엔 어불성설 같지만, 잘 생각해 보라 고. 일리가 있어. 사람은 어떤 것에 대해 조금 알게 되면 객관성을 잃기가 쉽고 그것과 적당한 거리를 둘 수 없게 되지. 중국 사람들은 이런 얘기를 해. 중국에 하룻동안 머문 사람은 책 한권을 쓰고, 한 주일 동안 머문 사람은 기사 한 편을 쓰는데, 거기서 한 해를 보낸 사람은 아무것도 쓰지 못한다고 말이야. 그럴 듯하 지? 안 그래? 세상일이라는 게 다 그런 식이야. 내가 어렸을 때 얘긴데 말이야." 쥘리는 문득 그 기자가 오로지 인터뷰 받기만을 꿈꾸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마르셀 보지라르는 쥘리네 그룹이나 그들의 음악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 었다. 같은 일을 오랬동안 되풀이해 온 탓에 그에겐 이제 호기심도 다른 사람에 대한 흥미도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남에게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서 질문을 받는 거였다. 쥘리가 만일 어떻게 그런 저널리즘의 비결을 터득하게 되었느냐, 그 비결을 어떻게 적용하느냐, 신문사 내에서 그의 지위는 무엇이고 기자의 삶은 어떠한 것이냐 따위를 물어 보았다면 그는 무척이나 좋아했을 거였 다. 쥘리는 그의 이야기를 귓등으로 흘리면서 너불거리는 입술만 바라보고 있었 다. 그 기자는 얼마 전애 만난 택시 운전사처럼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은 대단히 강한데 남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마음은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쓰 는 모든 기사에는 아마도 자기 자신의 삶에 관한 이야기가 조금씩은 담겨 있을 거였다. 그래서 그가 쓴 기사를 모두 모아 놓으면, 현대 언론의 대기자 마르셀 보지라르의 완전한 전기가 만들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원장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그가 전해 준 바 에 따르면, 좌석표가 매진되어 객석이 만원일 뿐만 아니라 입석 관객까지 들어 왔다는 거였다. "저 소리를 들어봐." 아닌게아니라 막 뒤에서 청중이 박자에 맞추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쥘리! 쥘리! 쥘리!" 쥘리는 귀가 번쩍 뜨였다. 그건 꿈이 아니었다. 온 청중이 그녀를, 오로지 그 녀만을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앞으로 다가가 막을 살짝 들추고 객석을 보았다. 자기 이름을 외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쥘리, 잘할 수 있지?" 다윗이 물었다. 쥘리는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갑자기 목이 이상해 지면서 말이 나오지 않았 다. 그녀는 마른 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어렵사리 이렇게 중얼거렸다. "목... 소리가... 안... 나와." <개미들>은 질겁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쥘리의 목소리가 안 나오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마는 거였다. 꿈속에서 본, 입 없는 얼굴의 영상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쥘리는 손짓으로 도저히 안 되겠다는 뜻을 표시했다.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너무 긴장해서 그럴 거야." 프랑신이 스스로를 안심시키느라고 그렇게 말했다. 원장도 거들었다. "그래. 이건 무대에 서기 전에 찾아오는 불안 증세야. 흔히 있는 일이지. 중요 한 공연을 앞둔 사람들은 무대에 나가기 전에 으레 이런 불안을 겪게 마련이야,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 내게 처방이 있으니까." 원장은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숨을 헐떡이며 작은 단지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단지 안에 든 것은 꿀이었다. 쥘리는 꿀 몇 숟가락을 삼킨 다음,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 다. "아아아."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장은 득의에 차서 목청을 높였다. "다행히도 곤충들이 이렇게 훌륭한 약을 만들어 놓았어. 내 아내는 로열 젤리 로 독감까지 낫게 해." 폴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꿀단지를 들여다보았다. 정말 놀라운 효험을 지닌 식품이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쥘리는 모든 음역에 걸쳐 갖가지 소리를 내보면 서 되찾은 목소리를 계속 시험하였다. "자, 이제 준비 됐지?" 91. 백과사전 두 개의 입 <탈무드>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에게는 두 개의 입, 곧 윗입과 아래입이 있다 고 한다. 윗입은 말을 통해서 사람의 육신이 공간 속에서 겪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해준다. 말은 단지 정보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병을 치료하는 역할도 한다. 사람 은 윗입으로 말을 함으로써 공간 속에 자기 자리를 잡고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된다. <탈무드>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먹더라도 너무 많이 먹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약은 말의 자연스런 흐름을 막아 병을 악화시키 기 때문이다. 두 번째 입은 생식기다. 생식기는 사람의 육신이 시간 속에서 겪는 문제를 해 결해 준다. 사람은 생식기를 통해, 즉 쾌락과 생식을 통해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 나며, 부모와 자녀라는 관계로 자기 존재를 규정하게 된다. 생식기, 곧 아랫입은 가계를 풍성하게 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 나갈 수 있게 해준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녀를 통해 부모의 가치와는 다른 가치를 구현하는 권능을 향유하고 있 다. 윗입은 아앳입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사람은 말로써 남의 마음을 끌고, 말 로써 성을 움직일 수 있다. 아랫입 역시 윗입에 영향을 미친다. 사람은 성을 통 해 자기의 정체와 자기의 언어를 발견할 수 있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 3권 92. 첫번째 폭파 시도 "준비됐습니다." 막시밀리앵은 피라미드의 벽에 설치해 놓은 폭발물을 점검했다. 그 건물에 언제까지나 조롱만 당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마침내 그는 폭파를 결심했다. 폭파 담당자들이 폭발물을 기폭 장치에 연결한 전선을 풀어 놓고 피라미드에 서 멀찍이 물러섰다. 경정이 신호를 보냈다. 폭파 책임자가 기폭 장치를 들어올리고 초읽기에 들어 갔다. “다섯... 넷... 셋... 둘... .” 브즈즈즈즈... . 돌연 폭파 책임자가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기절을 해버렸다. 그의 목에 무엇엔 가 물린 자국이 있었다. 피라미드를 지키는 말벌이 다시 나타난 거였다. 막시밀리앵은 살갗의 노출된 부위를 물리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이르고, 그 자 신도 옷깃으로 목을 가리고 양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다음 팔꿈치로 기폭 장치를 눌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전선을 따라가 보고 나서 곤충의 위턱 같은 것에 전선이 잘려 있음을 확 인했다. 93. 물 수련잎이 잠시 허공을 난다. 시간이 멎어 버린 느낌이다. 그렇게 높이 떠 있으 니, 이제껏 볼 기회가 거의 없었던 동물들이 보인다. 벌새도 있고, 밤빛 쇠등에, 공중의 한자리에 떠서 물을 살피고 있는 물총새도 있다. 바람이 그들의 머리와 수련잎 배의 분홍빛 돛을 휙휙 스치며 지나간다. 암개미 103호는 이것이 자기가 보게 될 마지막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동료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모두 겁에 질린 채 더듬이를 세우고 있다. 그들 앞의 몽실몽실한 구름 속에서 밤꾀꼬리 한 쌍이 희롱거리고 있다. <오호라! 이것으로 내 여행이 끝나는 것인가?> 허공에 머물러 있던 수련잎이 다시 중력 법칙의 지배를 받고 빠른 속도로 내 려간다. 마치 엘리베이터가 아래층으로 뚝 떨어지고 있는 것 같다. 개미들은 그 엘리베이터에 발톱을 박고 몸을 도사린다. 수련에서 꽃잎 두 개가 또 떨어져 나 간다. 개미들이 우글거리는 배에 붙어 있기보다는 자기 나름의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꽃잎들이다. 낙하가 점점 빨라진다. 12호의 뒷다리가 속도를 견디지 못하고 수련잎에서 떨 어진다. 그는 뒷다리를 위로 하고 머리를 아래로 해서 물구나무를 선 채, 발톱 하나로 겨우 잎을 붙들고 있다. 암개미 103호는 날아가지 않으려고 위턱을 수련 잎에 박아 넣는다. 7호가 날아간다. 그를 14호가 가까스로 붙들고, 15호까지 날 아가려는 것을 다시 11호가 붙든다. 수련잎의 가장자리가 위로 말리면서 사발 모양을 이룬다. 공기와의 마찰 때문 에 수련잎이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우주 비행사들이 우주선을 타고 지구에 착륙 할 때도 아마 그와 비숫한 현상을 경험하리라. 암개미 103호는 발톱의 잡음새가 자꾸자꾸 느슨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이러다 간 곧 수련잎에서 떨어져 나갈 것만 같다. 그때, 수련잎 배의 밑바닥 전체가 착 하고 수면에 닿는다. 배가 조금 물 속으 로 들어갔지만, 그것이 아주 순식간의 일이어서 개미들은 물에 빠지지 않았다. 수련잎이 떨어지면서 수면이 살짝 패이던 그 짧은 순간 암개미 103호는 물 속에 사는 동물들과 거의 닿을 듯이 마주보는 아주 진기한 경험을 했다. 눈이 아주 동그란 모래무지 한 마리와 등마루가 톱니처럼 들쭉날쭉한 도룡뇽 두 마리를 보았다 싶었을 때, 탄력을 받은 배가 다시 올라간다. 물결이 한바탕 밀려와 개미들의 더듬이를 적신다. 그 바람에 그들의 모든 지각이 잠시 중단된 다. 지각이 돌아왔다. 그들은 급류를 통과했다. 은빛 강물은 그들을 괴롭히는 데에 싫증이 났는지 이젠 고요하게 흐르고 있다. 그들은 모두 무사하고, 급류가 또 나 타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개미들은 아직 공포의 페르몬과 물이 묻어 있는 더듬이를 흔들고, 서로 달라 붙어 갈무리주머니의 달콤한 영양물을 교환한다. 모든 것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 온다. 수련잎 배는 남쪽으로 흘러가는 은빛 강물 위를 다시 미끄러져 내려간다. 벌 써 해가 설핏하다. 해가 천천히 땅속의 제 둥지로 들어가고 땅거미가 밀려온다. 안개가 뿌옇게 서려 들면서 시야가 점점 줄어든다. 안개의 물 알갱이 때문에 개 미들은 후각 레이더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 레이더 탐지에서라면 누구에게 도 뒤지지 않는 누에나방들조차도 숨을 곳을 찾아간다. 어둠에 밀려 숨어드는 태양의 무기력한 모습을 감춰 주려는 듯, 안개 장막이 사위를 휘감는다. 등에를 닮은 나비들이 개미들 위를 날고 있다. 암개미 103호는 그들의 힘찬 날개짓을 관찰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나비들도 저토록 아 름답지 아니한가! 94. 백과사전 나비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엘리자벳 커블러 로스 박사는 나치의 수용소에서 살아 남은 유태인 소년들을 보살피는 일로 부름을 받았다. 아직 수용소 막사에 누워 있던 아이들을 보러 들어갔다가, 박사는 나무 침대 에 새겨진 어떤 그림을 보게 되었다. 나중에 다른 수용소들을 돌아다니면서도 박사는 똑같은 그림을 다시 보았다. 아이들의 그림에는 단 하나의 모티프가 있 었다. 그건 바로 나비였다. 박사는 처음에 그것이 매맞고 굶주리던 아이들끼리 일종의 형제애를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옛날 초기 기독교 신자들이 물고기를 공동체적 유대의 상징 으로 삼았듯이, 그 아이들도 나비를 통해 자기들이 한 집단에 속해 있음을 표현 했을 거라고 박사는 믿었다. 박사는 여러 아이들에게 그나비들이 무엇을 뜻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아이들 은 대답을 거부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아이가 그 의미를 밝혀 주었다. <그 나비들은 미래의 우리예요. 우리는 모두 이 고통 받는 이 육신은 한의 매개체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지금의 우리는 애벌래와 같아요. 어느 날 우리 영혼은 이 모든 더러움과 고통에서 벗어나 날아오를 거예요. 나비를 그리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이렇게 일깨우곤 했어요. 우리는 나비다. 우리는 곧 날아오를 것이다라고 말이예요>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 제3권 95.배를갈아타다 그들 앞에 갑자기 돌덩이 하나가 나타났다. 개미들이 그것을 빙 둘러서 가려 고 하는데, 돌에 달린 두 눈이 뜨이고 커다란 입이 벌어진다. <조심해라. 돌이 살아 있다!> 10호가 자극적인 페로몬이 발했다. 돌덩이가 뱃전으로 성큼성큼 다가든다. 개미들은 수련잎 귀퉁이로 뒷걸음을 친다. 15호는 벌써 배의 꽁무니를 들어올리고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다. 숨돌릴 겨를도 없이 그들은 또 하나의 적과 마주친 것이다. 그들은 아우성치듯 페로몬을 발하며 대책을 논의한다. 암개미 103호는 수련잎 가장자리로 다가간다. 돌이 헤엄을 친다거나 입을 벌 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을 찬찬히 살펴보니 돌이라고 보기엔 너 무나 규칙적인 무늬가 있다. 이건 돌이 아니라 거북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여느 거북과는 다르다. 그들은 헤엄치는 거북을 본적이 없다. 사실, 거기에는 개미들이 모르는 곡절이 있다. 그 물살이 거북은 미국 플로리 다 주에서 온 것이다. 인간 세계에서는 그런 거북을 가지고 노는 것이 아이들에 게 크게 유행하고 있다. 그 거북들은 생김새가 특이하고 위로 들린 코가 귀염성 이 있어서 쉽게 아이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아이들은 투명한 플라스틱 통 속 의 가짜 무인도에 거북을 집어 넣고 집 안에서 기른다. 그러다가 아니들은 그 작은 동물 작난감에 실증이 나면, 차마 집 안의 쓰레기통에 버리지 못하고 가장 가까운 호수나 연못이나 개울에 내다 버린다. 그 거북들이 거기에서 번식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자기들의 본고장인 플로리다에서보다 오히려 쉽게 번식한 다. 플로리다에는 그들의 천적이 있다. 그들의 등딱지를 깨뜨릴 수 있는 특별한 부리를 가진 새들이 바로 그 천적이다. 물론 애완용 거북을 수입하면서 그 천적 까지 들여올 생각을 한 수입업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 결과, 플로리다 거북들 은 유럽의 호수와 개울에 공포의 회오리를 몰고 왔다. 그들은 지렁이와 물고기 와 본바닥의 거북을 학살했다. 지금 103호와 그의 동료들이 마주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가공할 괴물 가운데 하나다. 그 괴물이 턱을 맞부닥치면서 다가오고 있다. 수련잎 배를 따라 잡은 물방개 들은 그 턱을 벗어나려고 전속력으로 물을 휘젖는다. 수련잎 배와 노란 눈의 괴물 사이에 경주가 시작된다. 그러나 더 무겁고 더 빠르고 수역학을 더 잘 응용하는 쪽은 괴물 쪽이기 때문에 그는 너무나 수비게 수련잎 배를 따라잡는다. 거북은 배의 추진 장치 노릇을 하는 물방개들을 한 마 리씩 우적우적 먹어 치우고는 , 개미들을 향해 입을 쩍 벌린다. 쓸데없이 저항하 지 말고 고분고분 잡아먹히라고 종용하는 듯하다. 암개미 103호는 오디세우스의 모험에 관한 연속극을 떠올리고, 침착하게 다른 개미들을 모아 싸울 준비를 시킨다. <강물에 떠내려가는 나무가지가 있으면 그것을 끌어올리고, 가장 큰 위턱을 가진 자가 그끝을 깍아서 창을 만들어라.> 거북은 벌써 배의 고물을 물어뜯고 있다. 배가 금방이라도 침몰할 것만 같다. 몇몇 개미들은 거북이 더 다가오지 못하게 하려고 수련꽃 꼭대기에서 그의 콧구 멍을 겨누고 개미산을 발사한다. 아무 효과가 없다. 이물 쪽에서는 나뭇가지를 깎아 창을 만들고 있다. 103호가 그만하면 되었다고 판단을 내리자, 그들은 다같 이 창을 들고 수련잎 위를 달려 괴물에게 달려든다. 암개미 103호는 오디세우스와 외눈 거인 키클로페스의 일화를 떠올리고 거북 의 눈을 겨냥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그들이 있는 힘을 다해 거북의 눈을 찔렀지만, 창은 얼굴에 박히기는 커녕 두 동강이 나고 만다. 거북의 쩍 벌어진 입이 고물 쪽을 삼킬 채비를 하고 있다. 103호는 비교적 최근에 나온 더 효과적인 방법을 쓰기로 한다. 오디세우스를 흉 내낸 것은 말짱 허탕이었다. 병법은 뭐니뭐니해도 텍스 에이버리의 것이 최고다. 103호는 동강난 창을 수직으로 세워들고 거북의 입을 향헤 돌진한다. 거북이 닙 을 다시 다물려는 찰라에, 103호는 동강난 창을 들이밀어 위아래로 버텨 놓는다. 거북들이 흔히 그러듯이, 이자도 머리를 등딱지 속으로 끌어 들이려고 한다. 그러나 입이 쩍 벌어져 있는 상태에서는 그게 뜻대로 될리가 없다. 거북이 머리 를 끌어 들이려고 애면글면할수록 창은 입천장에 더욱 깊이 박힌다. 15호는 그 틈을 타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동료들에게 거북의 입 안으로 들어가자고 신호를 보낸다. 거북이 달아나기 전에, 개미들은 있는 힘 껏 달리다가 배에서 뛰어내려 침이 질벅거리는 혀에 다다른다. 거북은 입 안에 들어온 개미들을 익사시키려고 머리를 물속으로 들이민다. 15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동료들에게 식도로 들어가라고 이른다. 목구멍으 로 들어간 개미들을 위로 내려 보내기 위해 식도의 입구가 닫힌다. 그 덕분에 개미들은 물에 휩쓸리지 않았다. 개미들이 물에 빠지지 않고 식도 안으로 들어갔음을 깨달은 거북은 강물을 한 모금 들이킨다. 물이 식도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15호는 커다란 동물들의 신체 규조에 대해 본능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는 산성이 강한 삭임물이 가득들 어 있는 위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아래로 곧장 내려가면 안 된다고 알린다. 그들 은 위턱으로 옆길을 내서 식도와 나란한 숨통으로 들어간다. 휴! 물은 그들을 휩 쓸지 않고 지나간다. 숨통의 벽은 점액이 없고 매끈하다. 그래도 상피에 공기를 거르는 섬모가 있어서 개미들이 너무 빨리 추락하는 것을 막아 준다. 그들은 페 낭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전투 경험이 맣은 사냥개미 15호는 자기들 주위 로 독성 물질이 방출되는 것을 피하고, 거북에게 더욱 심한 고통을 주기 위해 동료들을 심장 쪽으로 이끌어 간다. 거북의 심장이 개미들의 위턱에 잘려 나간 다. 거북은 몇 차례 경련을 일으키더니 모든 움직임을 멈춘다. 플로리다 거북은 몸 속을 난도질 당한 채 물 위로 다시 떠오른다. 암개미 103 호는 거북을 그냥 버리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거북은 수련잎보다 더 훌류한 배 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활용해서 쓸모 있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 이 개미들의 위대한 재능이 아니던가. 열세 개미는 등딱지 꼭대기에 조타실을 마련하기 위해 끈기 있게 구멍을 판 다. 그들은 등딱지 속의 하얀 살을 먹으며 힘을 얻고 일을 계속한다. 마침내 둥 그런 구멍이 만들어지자 그들은 그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고기 냄새가 나는 것이 흠이지만 그런 것을 따질 계재는 아니다. 그들은 추진기 노릇을 할 새로운 물방개들을 불러모은다. 물방개들에게 많은 먹이를 대가로 주겠다고 약속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항행중에 물방개들은 연방 다른 동물들에게 잡아 먹힐 것이기 때문이다. 물방개들은 죽은 거북을 나 아가게 하려고 물을 휘젖기 시작한다. 거북은 수련잎보다 한결 무거워서 밀기가 쉽지 않다. 암개미 103호는 마뜩찮아 하는 물방개들에게 잘게 부순 먹이를 조금 더 주고 추진력을 보강하기 위해 다른 물방개들을 더 불러 모은다. 개미들의 배는 이제 유람선이 아니라 철갑선이다. 무겁고 단단하고 다루기가 어렵다. 그러나 열세 개미는 자기들이 훨씬 더 안전해 졌음을 느낀다. 그들은 남 하를 계속하여 새로운 안개지대로 들어선다. 부릅뜬 채 굳어 버린 눈과 쩍 벌린 입을 이물로 삼은 배가 안개를 뚫고 떠오 는 것을 보고 수생 곤충들이 기겁을 한다. 시체가 썩기 시작하면서 고약한 냄새 를 풍기자 유령선의 위협 효과가 더욱 고조된다. 16호는 이물 쪽, 이무기돌 같은 거북 머리의 꼭대기에 자리를 잡고, 전방을 주 시한다. 장애물이 나타나면 즉시 동료들에게 알려 주려는 것이다. 개미들의 군함이 미끄러져 간다. 구멍난 등딱지 위로 몇 쌍의 작은 더듬이들 만이 다소 비틀린 채로 비죽이 올라와 있을 뿐이지만, 그 위용이 자못 무시무시 하다. 96.두 번째 콘서트 “이들은 젊고 패기에 차 있습니다. 이들은 오늘 밤 또다시 우리를 매혹시킬 것입니다. 여러분, 신명 나는 리듬과 멋진 선율을 들려줄 젊은 친구들을 박수로 맞아 주십시오. 자, 백설공주와 일곱... .” 원장은 등 뒤가 술렁대는 느낌을 받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개미들>이 라고 입엣말을 하고 있었다. "아 참, 죄송합니다. 우리 친구들이 자기들 그룹의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자, 그러면 <개미들>을 모시겠습니다. 에... <개미들> 앞으로 나오세요.」 무대 뒤에서 다윗이 친구들을 붙들었다. "아니야. 바로 나가지 말고 잠깐 기다려. 때로는 뜸을 들일 줄도 알아야 해.“ 그러면서 그는 즉흥적으로 한 장면을 연출해 냈다. 무대에는 아직 조명이 들 어오지 않았고, 객석은 어듬과 정적에 잠겨 있었다. 1분은 족히 흘렀다. 어둠 속 에서 갑자기 쥘리의 목소리가 솟아올랐다. 그녀는 혼자서 아 카펠라로 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즉흥적으로 지어낸 가사없는 노래였다. 깊고 힘차고 고저의 굴곡이 심 한 음성이 모두의 귀를 파고들었다. 아 카펠라 독창이 끝나자 청중은 콘서트장이 떠나가도록 박수 갈채를 보냈다. 지웅은 두 박자의 리듬으로 청중의 심장 박동에 드럼 장단을 맞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당 덩, 당당 덩, 당 덩, 당당 덩. 그 한국인 학생은 마치 갤리 선 사공 들을 모아 놓고 노 젓는 훈련을 시키려는 사람 같았다. 신명이 오른 그의 손이 장단에 맞춰 오르 내렸다. 당 덩, 당당 덩. 조명이 들어았다. 지웅은 분당 90박에서 100박으로 장단을 약간 빠르게 했다. 그것에 맞추어 조에가 빠르게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드럼은 청중 의 심장에 작용하고 베이스 기타는 배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만일 관객 중에 아이를 가진 여자가 있다면, 양수가 차있는 모래집까지 들썩거리고 있기가 십상 이었다. 투광기 하나가 빨간 불빛으로 지웅과 그의 드럼을 비추고, 다른 투광기가 파 란 불빛으로 조에를 비추었다. 신시사이저 앞에 앉아 있는 프랑신의 머리 둘레로는 녹색 불빛이 후광처럼 비 쳐 들었다. 프랑신이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을 연주하기 시작하자, 즉시 비말 냄새와 풀 냄새가 객석에 퍼져 나갔다. 고전 음악 작품으로 연주를 시작하자는 것은 다윗의 생각이었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선인들의 음악을 자기들 나름대로 소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자는 거 였다. 처음에 그들은 바흐의 푸가를 염두에 두었으나 막판에 <신세계 교향곡> 으로 결정했다. 콘서트의 주제로 볼 때, 그쪽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서였다. 이번엔 레오폴의 차례였다. 그는 노란 조명을 받으며 팬플루트를 불기 시작했 다. 이제 무대 전체에 조명이 들어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전체는 아이었다. 무대 한가운데에 아직 어둠이 둥그렇게 남아있었다. 어둠 속이지만 어렴풋하게 어떤 형체를 보였다. 쥘리는 효과를 노리면서 뜸을 들이는 중이었다. 그녀가 마이크에 닿을락말락 하게 입을 바싹 갖다 대자,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신세계 교향곡>의 도입부가 끝나갈 즈음, 다윗은 한껏 달뜬 전기 하프로 레 오폴의 팬플루트 독주를 이어 나갔다. 그것은 새로운 <신세계 교향곡>이었다. 타악기의 장단이 빨라졌다. 드보르작의 선율은 아주 현대적이고 금속성이 대 단히 강한 어떤 것으로 조금씩 변해 가고 있었다. 그것에 대해 청중은 박수 갈 채로 만족을 표시했다. 다윗은 전기하프 하나로 청중을 휘어잡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하프의 현들을 어루만질 때마다, 자기가 마주하고 있는 청중사이로 한가닥 전율이 흘러 가고 있음을 느꼈다. 팬플루트가 다시 나와서 하프를 거들었다. 피리와 하프, 그 둘은 가장 오래되고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악기들이다. 피리가 그렇게 된 까닭은 태곳적에 누구나 대숲에 부는 바람소리를 들었기 때문이고, 하프가 그런 악기가 된 까닭은 태곳적에 누구나 활줄 튕기는 소리를 들었기 때 문이다. 결국 그 두 악기가 내는 소리는 인간의 세포에 각인된 태고의 소리들이 다. 레오플과 다윗은 그렇게 목신의 피리와 하프를 함께 연주하면서 인류의 아주 오랜 역사를 청중에게 들려주고 있는 셈이었다. 폴이 앰프의 음량을 줄이자, 그것을 신호로 삼아, 쥘리는 여전히 어둠에 묻힌 채, <어떤 협곡의 깊속한 곳에서, 저는 책 한 권을 발견 해습니다>라는 말로 대 사를 시작했다. 배경에 있는 커다란 책에 투광기의 불빛이 비쳤다. 폴은 전기 단속 장치를 이 용해 책장이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책의 저자는 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면서 하나의 혁명을 제안하고 있 습니다. 그 혁명은 가장 보잘것없는 자들의 혁명, 곧<개미 혁명>입니다.” 다른 투광기가 슈티롤 수지로 만든 커다란 개미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었다. 여섯다리를 움직이고 머리르 까댁이는 데다가 눈 구실을 하는 전등에 불이 들어 오자 개미의 모형은 진짜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보였다. “그것은 예전의 것들과는 다른 새로운 혁명이 될 것입니다. 그혁명에는 폭력 도 없고 우두머리나 순교자도 없습니다. 그저 경화증에 걸린 낡은 체제로부터,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고 새로운 생각들을 함께 응용하는 새로운 사회로 옮겨 가 는 것뿐임니다. 그 책에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글들이 많이 있습니다.” 쥘리는 여전히 조명이 들어오지 않는 무대 한가운데에서 한 발짝 앞으로 나갔 다. “그 첫번째 글의 제목은 <인사말>입니다.“ 지웅의 드럼을 신호로 모두가 연주에 들어가고 쥘리는 노래를 시작했다. 여러분, 미지의 관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의 음악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쓰일 무기입니다. 아니, 우스개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건 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눈부신 백색 조명이 쥘리를 환히 드러냈다. 화려한 나비로 분장한 그녀가 팔 을 들어 올려 소매를 나비 날개처럼 펼쳤다. 폴은 송풍기로 바람을 내보내서 그녀의 날개와 머리카락이 너풀거리게하고, 그와 동시에 자스민 항을 퍼뜨렸다. 첫번째 노래가 끝났을 뿐인데도 청중은 벌써 그녀에게 홀려 버린 듯 했다. 폴은 조명을 더욱 밝게 하였다. 곤충을 연상시키는 그들의 의상이 더욱 분명 하게 드러났다. 다음 곡으로 넘어가기 전에, 그들은 <에그레고르>를 시도했다. 쥘리가 눈을 감고 선창을 하자,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음으로 합세했다. 그들 여덟 사람은 악 기를 잠시 놓아 두고 무대 한가운데에 둥그렇게 모여, 마치 더듬이가 달린 것처 럼 두 팔을 쭉 뻗어 머리 위로 올리고 눈을 감은 채, 마음을 합하여 힘차게 소 리를 내질렀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들의 소리가 하나의 진동으로 합쳐져서 풍선처럼 둥실 떠 올랐다. 그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들은 자기들이 마치 단 하나의 음성을 가진 것처럼 느꼈다. 그 음성은 그들과 청중 위로 떠올라서 커다란 융단처럼 이리저 리 날아다녔다. 그들은 번갈아 그 융단을 조종하면서, 자기들의 목소리가 이루어 내는 그 경이로운 조화를 만끽했다. 청중은 숨을 죽여 가며 듣고 있었다. <에그레고르>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조차 음성의 그러한 조화에 매혹되었다. 청중이 박수를 보냈다. 그들은 노래를 멈추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쥘리는 노래를 시작하기 전이나 노래를 끝내고 난 뒤에 찾아오는 침묵도 노래 만큼이나 중요하고 관리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노래가 신곡, <미래는 배우들의 것이다>, <푸가 기법>, <검열>, <정 신권>등으로 이어졌다. 지웅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리듬을 조절하고 있었다. 그가 아는 바로는, 분당 120박이 넘는 리듬은 청중을 흥분시키고 120박 미만의 리듬은 청중을 차분하게 만들었다.그는 청중이 지루함을 느끼지 않도록 양쪽을 번갈아 가며 오르내렸다. 다윗이 신호를 보냈다. 다시 고전음악을 그들 나름의 현대적 방식으로 연주하 는 시간이었다. 다윗은 전기 하프를 가지고 바흐의<토카타>를 하드록 식으로 연주했다. 그나름의 매력이 있는 연주였다. 객석에서 박수를 보내 왔다. 마침내 <개미 혁명>을 노래할 차례가 되었다. 폴은 축축한 흙 냄새를 발산시켰다. 광대나물과 월계수와 샐비어 따위의 풀나 무 냄새도 간간히 섞여 들었다. 쥘리는 자신감에 찬 음성으로 가사를 분명하게 전달하며 노래를 불렀다. 3절 이 끝났을때, 새로운 악기 소리가 들렸다. 끼익끼익하는 것이 첼로소리 같기도 하고,전기 기타 소리와 숟가락으로 치즈채칼을 문질러 대는 소리를 섞어 놓은 것과도 같은 이상야릇한 소리였다. 한 줄기 가느다란 빛이 무대 왼쪽의 빨간 새틴 방석을 비추었다. 청중의 눈에 는 거의 보이지 않았겠지만, 그 방석 위에는 왕 귀뚜라미 한 마리가 놓였고, 그 날개에는 아주 작은 마이크가 달려 있었다. 작은 나비 넥타이를 목에 단 귀뚜라미가 독주를 시작했다. 미친 듯이 연주하 는 귀뚜라미의 지그가 분당 150박에서 160, 170을 지나 180박에 이르렀다. 조에 의 베이스 기타와 지용의 드럼이 어렵게 어렵게 귀뚜라미의 템포를 따라가고 있 었다. 귀뚜라미는 앞다리의 울음통이 터져 나갈 듯이 기세를 올리는 중이었다. 그 뀌뚜라미의 연주를 따라가려면, 록음악을 하는 기타리스트들은 모두 음악 학교에 가서 더 배우고 와야 할 판이었다. 귀뚜라미는 상상을 초월한 만큼 어려 운 리플을 아주 자연스럽게 연주해내고 있었다. 최신의 음성합성 장치를 거쳐 증폭되어 나오는 그 <곤충음악>은 이제껏 그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소 리였다. 처음엔 얼떨떨해 하면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청중사이로 찬사의 속삼임이 빠 르게 번져 나갔다. 다윗은 귀뚜라미의 연주가 신통치 않게 받아들여지면 어쩌나 하고 조금은 불 안해하고 있었는데,청중의 반응이 흔쾌한 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그 순간은 전기 귀뚜라미라는 새로운 악기를 선 보였다는 것만으로도 오래 두고 기억될 만 하다고 생각했다. 폴은 귀뚜라미가 연주하는 모습을 객석에서 더 잘 볼 수 있도록 비디오 카메 라를 투광기를 사용하여 배경의 커다란 책 위에 귀뚜라미의 영상을 투사하였다. 쥘리는 귀뚜라미의 비브라토를 따라가면서 이중창을 하였다. 그러자 나르시스 도 기타로 귀뚜라미의 열창에 화답하였다. 그룹의 성원 모두가 그 작은 소프라 노 가수와 기량을 겨뤄 보고 싶어하는 듯했다. 그 바람에 귀뚜라미의 울음통은 점점 뜨거워 지고 있었다. 객석에 환희의 물결이 너울거렸다. 폴은 송진 냄새와 백단 냄새를 객석에 흘려 보냈다. 두 냄새는 서로 방해가 되기 보다는 서로를 도와 더욱 좋은 효과를 내었다. 앞좌석, 뒷자석, 통로 등 모 든 곳에서 사람들이 귀뚜라미의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그토록 빠르 고 역광적인 노래를 가만히 앉아서 감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청중은 극도로 신명이 올라있었다. 맨 앞줄에서는 합기도 클럽의 여학생들이 노인들과 어우려져 춤을 추고 있었 다. 그녀들은 첫 콘서트 때 입었던 합기도 클럽의 티셔츠를 다른 것으로 바꾸어 입고 왔다. <개미 혁명>이라는 콘서트 제목이 들어가 있는 티셔츠였다. 그것은 물론 시중에서 구한 것이 아니라, 보통의 티셔츠에매직펜으로 그녀들이 직접 글 자를 써넣어 만든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개미들>은 이미 그녀들의 우상이 된 모양이었다. 귀뚜라미는 금세 지친 기색을 보였다. 대중 앞에서 하는 첫 연주인데다가, 투 광기의 불빛 때문에 딱지 날개가 번쩍거리고 점막이 말라버려서 쉬 피로를 느끼 고 있는 거였다. 햇빛 아래에서라면 오랜 시간이라도 마음껏 노래를 하겠지만, 조명 불빛은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다. 귀뚜라미는 기진맥진이 되어 높은 도 음 을 마지막으로 내고 노래를 멈추었다. 이제 쥘리가 나설 차례였다. 그녀는 마치 귀뚜라미의 절과 절 사이를 이어 주 는 간주였던 양 아주 자연스럽게 다음 절로 넘어갔다. 그녀는 한 음을 낮추라고 부탁한 다음, 객석 가까이의 무대 가장자리로 나아가서 조를 바꾸어 이렇게 노 래했다. 하늘 아래에 새것이 없다. 우리는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이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없다. 이젠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 없다. 객석에서 즉시 반응이 왔다. 첫 콘서트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그녀에게 노래로 화답했다. “우리가 바로 새로운 선견자다!” 쥘리는 청중과 그렇게까지 호흡이 잘 맞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첫 콘서 트 때 너무나 일찍 끝나 버린 그 일치와 교감의 시간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쥘리는 가슴으로부터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름을 느겼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새로운 발명가다!” 그녀가 신호를 보낼 새도 없이, 청중은 <개미 혁명>을 다시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 번밖에 듣지 않은 노래말을 외워 버린 모양이었다. 쥘리는 너무 놀라 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지웅은 고삐를 늦추지 말고 청중을 계속 휘어잡 으라는 뜻의 신호를 보내 왔다. 그녀는 주먹 쥔 손을 들어 올렸다. “여러분, 이 낡은 세계의 경화증을 끝장내고 싶으싶니까?” 쥘리는 더 나아가면 돌아오기가 불가능한 지점에 도달해 있음을 깨달았다. 여 기저기서 의자 삐꺽이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주먹을 치켜 들며 일어서고 있었다. “여러분, 지금 여기에서부터 혁명이 시작되기를 바라십니까?” 다량의 아드레날린이 그녀의 뇌로 흘러들었다. 두려움과 흥분과 열망과 호기 심이 그녀의 마음에 착종하였다. 요모조모 따지고말고 할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소리쳤다. “나갑시다!” 봇물이 터져 나왔다. 즉시 우레와 같은 환호가 터져 나왔다. 한 소끔의 격렬한 <에그레고르>였다. 한 줄기 뜨거운 바람이 객석을 휩쓸고 지나갔다.모두가 일어섰다. 원장이 무대 뒤에서 뛰어나와 마이트를 잡고 사람들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여러분,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밖으로 나가시면 안됩니다. 9시 15분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아직 시간이 많습니다. 콘서트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겁니다” 장내 질서를 맡은 장정 여섯은 군중을 저지하려고 헛되이 애를 쓰고 있었다. 조에가 쥘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제 어떻게 하지?” “해보는 거지 뭐. 유토피아 하나를 건설해 보는 거야.” 쥘리는 검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97.백과사전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유토피아라는 말은 1516년 영국인 토마스 모어가 만든 것이다. 그리스 말의 부정 접두사 <우>와 장소를 뜻하는 <토포스>를 엉구어 만든 이 말은 말 그대 로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이 <좋 음>을 뜻하는 접두사 <에우>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그런 경우라면, 유토피아 라는 말은 <좋은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외교관이자 대법관이었던 토마스 모어는 에라스무스와 친한 인문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유토피아’라는 제목의 한 저서에서 어떤 경이로운 섬나라를 묘사 했다. 그 섬의 이름이 바로 유토피아다. 목가적인 사회가 문명의 꽃을 피우고 있 는 그 섬에는 세금도 가난도 범죄도 없다고 했다.모어는 유토피아적인 사회의 으뜸 가는 특징은 (자유)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의 이상향을 이렇게 묘사했다. 10만 명의 사람들이 한 섬에 살고 있다. 주민들은 가족 단위로 편성되어있다. 50가구가 모여 하나의 집단을 이루 고 우두머리인 시포그란트를 산출한다. 그 시포그란트들이 모여 평의회를 이루 고 네 후보 가운데 하나를 임금으로 선출한다. 일단 임금으로 선출되면 평생 자리를 지킬 수 있지만,만일 전제 군주가 되면 퇴위를 당할 수도 있다. 전쟁에 대비해서 그 섬나라는 자폴렛이라는 용병을 두고 있다. 그 병사들은 전투중에 적들과 함께 죽게 되어 있다. 그렇게 도구가 사용중에 저절로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군사 독재가 생겨날 염려는 없다. 유토피아 섬에는 화폐가 없다. 주민들은 각자 시장에 가서 자기가 필요로 하 는 만큼 물건을 가져다 쓰면 된주민들은 누구나 타성에 젖지 않도록 10년마다 이사를 하도록 되어있다. 무위도식도 금지된다. 사제도 귀족도 한인도 거지도 없다. 누구나 일을 하기 때문에 일일 노동시간을 여섯 시간으로 줄일 수 있다. 무료 시장에 농산물을 공급하기 위해 누구에게나 2년 동안 농사를 지을 의무가 있다. 간통을 하거나 섬에서 탈출하려고 기도한 자는 자유인의 권리를 잃고 노예가 된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기와 동등했던 옛 주민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복종 을하여야 한다. 1532년,헨리 8세의 이혼을 인정하지 않은 것 때문에 왕의 노여움을 산 토마스 모어는 1535년 참수를 당하였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3권 98.황폐해진 섬 늦은 시각이지만,아직 환하고 따사로운 기운이 남아 있다. 암개미 103호와 열 두 개미는 은빛 강물을 따라 계속 내려간다. 어떤 물고기도 감히 그들의 거북선에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한다. 겁없는 잠자리들만이 이따금 배 위로 다가왔다가 개미산 을 맞고 그들의 먹이가 되곤한다. 그들은 교대로 거북의 머리 위로 올라가 망을 본다. 암개미 103호는 머리를 기울여 수면을 관찰하고 있다. 물거미 한 마리가 둥근 줄뭉치에 기포를 담더니 그것을 잠수 기구로 삼아 물 속으로 들어간다. 자연은 그저 관찰한는 것만으로 도 경탄을 자아낸다. 물매미 한 마리가 나타났다. 물 위에 떠서 사는 이 딱정벌레목의 곤충은 겹 눈이 등과 베에두 쌍씩 있어서 물 속과 공중을 함께 본다. 그래서 물매미는 개 미들이 거북의 등 위에 오라가 있고 물방개들이 거북을 따라가고 있는 기이한 곡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 개미들쪽으로 가까이 가기를 포기하고 물벼룩 몇 마리 를 잡아 먹는다. 조금 더 나아가니 기다란 물풀이 성가시게 뱃길을 가로막는다. 개미들은 발 톱으로 물들을 치워내고 가시 항행을 계속한다. 안개가 차츰 엷어지고 있다. 뭍이 보인다. 망을 보고 있던 12호가 알려왔다 정말 멀리,감실감실 피어 오르는 안개 사이 로 아카시아 나무가 보인다. 암개미 103호는 그것이 코르니게라 아카시아임을 이내 알아차린다. 그렇다면,결국 강물은 그를 24호가 있는 곳으로 이끌고 온 셈이다. 24호. 암개미 103호는 그 수줍움 많고 진중했던 24호를 잘 기억하고 있다. 손가락들 을 무찌르러 떠났던 옛날의 그 원정 기간 동안,그는 혼자 뒤로 쳐저서 길을 잃 고 헤메기가 일쑤였다. 그 때문에 원정군의 일정에 차질이 빚어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중성 의 병정개미에게는 길을 잃는 것이 제2의 찬성이었다. 원정군이 코르니게라 섬 을 발견했을 때,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평생 길을 잃고 헤매며 살았다. 이젠 그런 삶에 종지부를 찍고 싶다. 이 섬은 선의를 가진 개체들끼리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며 살기에 딱 알맞은 장소인 것 같다. 24호의 생각에는 일리가 있었다. 그섬에는 커다란 코르니게라 아카시아가 한 그루 있다. 그 나무는 개미들과의 완전한 공생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아카시아는 자기의 잎을 갉아먹고 수액을 빨 아먹는 여러 애벌래들과 진딧물 및 노린재 따위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 하기 위해 개미들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그나무는 개미들을 유인하기 위해,껍질 안에 구멍과 통로들을 만들어 놓고 몇몇 구멍으로 영양액까지 흘려 준다. 어떻 게 식물이 개미들과의 공생에 유기적으로 적응할 수 있게 되었는지 참으로 신기 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개미와 아카시아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개미와 손가락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보다 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개미들은 그 나무들과의 협력을 이루어 냈다. 그렇다면,손가락들과 협력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아닐까? 24호가 보기에 그 섬은 천국이었다. 그는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의 보호를 받 으며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해 보려고 했다. 그 사회의 토대거 되는 유일한 공통 분모는 이야기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 섬에 남은 개미들은 더듬이를 즐겁게 하 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내는 새로운 퇴폐적인 경향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먹이를 구하기 위해 사냥을 하는 시간을 빼고는 주로 허구적인 이야기들을 지어내고 그 것을 서로 주고받으며 세월을 보냈다. 암개미 103호는 옛 친구를 다시 만날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그들이 서로 헤 어진 뒤로, 그 이상주의적인 공동체가 어떻게 발전했을지 궁금하다. 섬 한 가운 데의 아카시아 나무는 옛모습 그대로 평화와 안식의 상징물처럼 떡 버티고 있 다. 그런데,안개가 흩어지고 배가 섬 가까이로 다가가면 갈수록,어떤 사위스런 예 감이 암개미를 자꾸 조여 온다. 배의 이물이 거무스름한 빛깔의 작고 둥글둥글한 것들에 부딪혔다. 자디잔 구 멍이 송송 뚫여 있는 개미들의 시체다. 그 구명들은 개미산에 녹아 생긴 것들이 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 것임에 틀림없다. 모두가 죽었다. 개미들이 사라진 아카시아 나무에는 진딧물이 잔뜩 꾀었다. 예 전에 이곳에 많이 살았던 도롱뇽들조차 보이지 않는다. 여섯 다리와 배가 잘려 나간 개미 하나가 보일 뿐인다. 그 가련한 개미는 새끼 지렁이처럼 꿈틀거리고 있다. 암개미는 배를 섬에 대라고 물방개들에게 지시한다. 개미들은 배를 물가에 끌 어올린 다음,일의 자초지종을 알고다 유일한 생존자에게 달려간다. 그 개미가 힘 겹게 페로몬을 발한다. 난쟁이개미들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난쟁이개미 군대가 동방 원정에 나섰다. 새 여왕의 뜻에 따라 그들은 동쪽 나라들을 정복하려 하고 있다. 그러자,5호가 자기들이 앞서 겪은 일을 동료들에게 상기시켰다. 우리가 여기로 오는 깅애 만난 난쟁이개미들은 바로 그들의 척후대였을 것이 다. 103호는 재촉을 받고 그 개미가 이야기를 계속한다. 일군의 난쟁이개미들이 섬을 발견하고 상륙했다. 24호와 그의 친구들은 아카시아나무가 보호해 주는 닫 힌 세계에서 상상의 이야기로 세월을 보낸 탓에 현실 세계의 냉혹한 힘의 논리 를 망각하고 전투능력을 상실해 버렸다.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지는 적 앞에서 도망을 치거나 속절없이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대학살이 벌어졌다. 24호와 몇몇 동료들만이 가까스로 도망쳐서 서쪽 강가의 갈대숲에 숨었다. 그러 나 난쟁이개미들이 포위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도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다리와 배가 잘려 나간 개미는 그 이야기를 끝으로 마지막 숨을 거둔다. 이야 기를 주고받는 줄거움을 바탕으로 결속된 이 공동체의 개미에게는,그렇게 이야 기를 하다가 죽는 것이 어쩌면 멋진 죽음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암개미 103호는 아카시아의 우듬지로 올라가서 더듬이을 세우고 멀리서 오는 정보들을 탐색했다. 생식개미로서의 새로운 감각을 이용하여 그는 갈대숲에 숨 어 들어갔다가 코르니게라 자유 공동체의 생존자들을 찾는다. 아까 그 개미가 죽어 가면서 일러준 그곳에사 그들의 존재가 느껴진다. 그러 나 그들은 꼼짝딸싹을 못 하는 궁색한 처지에 있다. 그들이 갈대 구멍에서 더듬 이의 끝만 내밀어도 수련 위에 올라간 난쟁이개미들이 개미산을 쏘아 대기 때문 이다. 암개미 103호는 난쟁이개미들이 낙후 상태에서 벗어나 불개미들을 따라잡 았음을 깨닫는다. 엣날에 난쟁이개미들이 개미산을 무기로 사용할 즐 몰랐다. 난쟁이개미들은 숲 불개미들에 비해 번식력이 강하고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속도가 빠르다. 아주 먼 고장에서 왔음에도(손가락들은 그들을 아르헨티나 개미 라고 부른다. 손가락들의 주장에 따르면,그들은 프랑스 지중해 연안의 도로를 꾸 미기 위하여 협죽도 나무를 들여올때,우연히 묘목분에 함께 실려 왔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숲에서 잘 적응하는 것을 보면 꽤 영리한 종임에 분명하다,까망개미 들이나 수확개미들 같은 본바닥 개미들은 타지에서 온 그자들에게 텃세를 부리 려고 덤벼들었다가 오히려 괴멸을 당하고 말았다. 103호는 난쟁이개미들이 언젠가는 이 숲의 지배자가 되리라고 줄곧 생각해 왔 다. 결국 중요한 건,끊임없는 혁신과 탐험과 응용을 통해서 그런 날이 하루라고 더 늦게 오도록 만드는 것이다. 난쟁이개미들에게 조그마한 허점이라도 보이는 날에는 불개미들 역시 그들에 게 정복당한 다른 종처럼 쓰레기터로 쫓겨가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지금 24호와 그의 동료들은 냉혹한 현실들 망각한 안일한 삶의 쓰라린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어째거나 적에게 포위된 채 갈대 꼭대기에 숨어 있는 불쌍 한 그들을 구하러 가야 한다. 암개미 103호와 열두 개미는 거북선을 다시 물에 띄운 다음,개미산 주머니를 가득 채우고 포격전을 준비한다. 물방개들은 배 뒤에 자리를 잡고 곧 수상 전투 가 벌어질 갈대와 수련 쪽으로 배를 몰고 갈 태세를 갖춘다. 암개미 103호가 더듬이를 세운다. 이제 적들의 상황이 분명하게 지각된다. 그 들은 갈대 주위에 있는 커다란 수련꽃잎 위에 진을 치고 있다. 적의 병력을 헤 아려 보니 백은 족히 될 듯하다. 하나가 열을 당해 내야 하므로 결코 녹록치 않은 싸움이다. 물방개가 최고 속 도로 거북선을 밀며 돌진한다. 그들이 수련들 근처로 다가가기가 무섭게 꽃잎들 위에 적들이 배를 니밀며 사격 자세를 취한다. 확실히 적의 수효는 백이 넘는다. 적들의 매미산이 비 오듯 쏟아진다. 열세 개미는 그 사격을 피하기 위해 거북선 바닥에 잔뜩 웅크린다. 103호가 거북선 위로 과감히 몸을 드러내고 반격을 가한다. 난쟁이개미 한마 리를 죽이긴 했지만,50 마리의 적들이 일제히 사격을 해오는 바람에 그는 다시 거북선 안으로 몸을 숨긴다. 103호는 거북선으로 돌진해 들어가서 수련잎 위로 산개한 다음 위턱으로 백병 전을 벌이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하면,자기들의 몸집이 더 크다는 이점을 황용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5호가 더듬이를 세우며 이의를 제기한다. 곧 비가 올 것이다. 어느 누구도 비에 맞서 싸울 수는 없다. 일단 돌아갔다가 다시 오는 게 좋겠다. 모두가 그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그들은 배를 돌려 섬으로 돌아온 다음,하룻방의 은신처가 되어 줄 코르니게라 아카시아 나무 속으로 들어간다. 나무는 물온 개미들처럼 페로모능ㄹ 발하지는 못하지만,수액의 냄새를 변화시킴으로써 불개미들을 다시 마난 기쁨을 표시한다. 나무의 환대에 보답하는 뜻으로 열세 개미는 나무 속에 뚫린 구멍과 통로를 바삐 돌아다니며 나무에 기생하는 벌레들을 잡아 죽인다. 벌레들이 많기 때문에 일을 끝내자면 시간이 꽤 걸릴 듯하다. 지렁이 처럼 생긴 애벌레며 진딧물도 있 고,딱정벌레목에 딸린 벌레들,예컨대 나무껍질을 갉아먹으며 똑딱거리는 소리를 낸다 해서(죽음의 시계)라는 별명을 가진 살짝수염벌레 따위도 있다. 열세 개미 들은 그 벌레들을 하나하나 추격해서 죽이고 일부는 잡아 먹는다. 아카시아의 숨결이 정상을 되찾는다. 나무는 수액을 삼출시켜서 자기 나름대로 고마움을 표 시한다. 개미들은 수액을 소스로 삼아 고기에 곁들여 먹는다. 살짝수염벌레에 아카시아 수액을 발라 먹는 것,그것은 전형적인 개미식 요리 가 될 법하다. 열세 개미는 모두 새로운 풍미를 즐기며 양껏 배를 불린다. 어쩌 면 개미 역사상 최초의 미식법이 바로 그 순간에 댕겨난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밖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까 5호가 끄무러진 하늘을 보며 예견한 대 로다. 3월에 이따금 볼 수 있는 우박을 동반한 소나기가 때늦은 4월에 내릴 모 양이다. 개미들은 아카시아 나무가지의 가장 깊숙한 구멍에 들어가 옹송거린다. 나무에 뚫린 구멍을 통해 번갯불이 번쩍번쩍 비쳐들고 우레가 우르렁거린다. 암개미 103호는 땅의 목숨붙이들을 제압하는 성난 하늘의 장관을 구경하기 좋은 곳에 자리를 잡는다. 바람에 나무들이 휘어지고,잘못 맞으면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는 빗방울들이 미처 피신한 생각을 못한 곤충들 위에 후두둑 떨어진다. 비록 적에 포위되어 있는 신세일 망정,24호와 그의 친구들은 갈대속에서 비를 피하며 한숨을 돌리고 있으리라. 또 벼락이 친다. 번떡 하는 빛이 눈이 부시다. 우레 소리는 지붕처럼 드리운 구름 너머에서 들여오는 듯하다. 벼락의 힘에는 손가락들 조차 꼼짝을 못 할 것 이다. 나란히 세 가닥 흰즐이 어두운 하늘을 가르며 사위를 온통 하얗게 만든다. 꽃과 나무와 잎과 강물이 잠시 반짝거리다가 어둠 속에 다시 묻힌다. 이제 모든 게 잠잠해지고 고요가 깃들이느가 했더니,또 다시 번개가 검은 하늘에 줄무늬를 만들고 굉음이 천지를 뒤흔든다. 하얀 섬광 속에서 거미줄처럼 하얀 동그라미로 변하고,그 주인들은 질겁을 하며 사방으로 달아난다. 짧고 깊은 정적이 흐른 뒤에,하늘이 더욱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다시 갈라진다. 벼락이 점점 더 가까은 곳에서 치고 있다. 천둥 소리가 점점 더 빠르게 번개를 뒤따른다. 열세 개미는 더듬이을 서로 엇걸고 잔뜩 웅크린다. 아카시아 나무가 갑자기 부르르 떤다. 마치 감전이라도 당한 것 같다. 5호가 기겁을 하며 펄쩍 뛰어 오른다. 불이다! 아카시아 나무에 벼락이 떨어져 불길이 일고 있다. 우듬지에서 불꽃이 일렁인 다. 나무 껍질 여기저기에서 수액이 스며 나온다. 나무는 그렇게 고통을 호소 하 고 있는데,개미들은 나무를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통로안 의 공기에 유독가스가 섞여 든다. 열기를 견디지 못한 개미들은 밑둥 쪽으로 달아나 뿌리를 타고 내려간 다음,위 턱으로 땅을 파서 불과 물을 동시에 피할 수 있는 피신처를 마련한다. 머리에 적은 흙이 잔뜩 달라붙어서 그들은 꼭 흉칙한 머리가 달린 괴물처럼 보인다. 개미들은 땅속에 웅크려 불과 비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아카시아가 불타면서 독한 냄새가 풍겨 나온다. 그 냄새는 죽어 가는 나무의 고통에 찬 비명인 셈이다. 나뭇가지들이 오그라든다. 마치 나무가 자기의 고통을 보여 주기 위해 춤을 추려는 것 같다. 기온이 올라간다. 밖의 불길이 어찌나 거 센지 개미들은 천장 구실을 하는 흙너머로는 그것을 볼 수 있다. 나무는 금방 타버렸다. 열기가 사라지고 냉기가 밀려온다. 개미들의 천장은 열을 받고 녹았다가 다시 굳어진 탓에 위턱으로 뚫고 나갈 수가 없다. 그들은 피신처에서 나가기 위해 긴 에움길을 파야만 했다. 비는 처음 내릴 때만큼이나 갑작스럽게 그쳤다. 비와 불이 남긴 건 폐허뿐이 다. 이 작은 섬의 유일한 재산이었던 코르니게라 아카시아가 이제 한 무더기의 재 로 변했다. 6호가 무언가를 보여 주겠다며 동료들을 부른다. 동료들은 그가 가리키고 있는 땅속의 구명을 향해 달려간다. 그 안에는 빨간 돔울 한 마리가 들어 있다. 빨간 빛이 환해졌다 어두워졌다 하는 폼이 꼭 천천 히 숨을 쉬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그것은 동물이 아니다. 식물도 아니고 광물 도 아니다. 103호는 그것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본다. 그것은 아직 타고 있는 잉 걸불이다. 구멍 속에 떨어져 다른 불덩이들이 가려준 덕분에 비를 피한 불덩이 다. 6호가 한 다리를 불덩이 쪽으로 가져간다. 다리가 그 빨간 물질에 닿았다 싶 었을 때,올라운 일이 벌어졌다. 다리가 녹아서 액체처럼 흘러내린 것이다. 다리 하나와 발톱 두 개가 달려있던 그 자리엔 불에 타서 뭉개져 버린 조막다리가 남 았을 뿐이다. 6호는 자기의 동강 다리에 소독제 구실을 하는 침을 바른다. 암개미가 페로몬 을 발한다. 이것이 난쟁이개미들을 정복하는 수단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머지 열두 개미는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몸을 바들바들 떤다. 불을 사용한단 말인가? 103호는 동료들을 설득하려 한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생긴다. 우리는 불을 사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그것을 만질 수 없지 않은가? 6호가 이미 쓰라린 경험을 했다. 5호가 그렇게 반박하자,103호가 설명한다. 모든 일에는 절차가 있는 법이다. 이 불덩이를 주워 담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다리나 위턱을 직접 갖다 대면 안 되고 도구를 사용해서 오목한 돌 같은 데에 올려 놓아야 한다. 그런 돌은 이 섬에 얼마든지 있다. 열세 개미는 기다란 막대기를 지렛대로 사 용해서 불덩이를 들어올린 다음,그것을 오목한 차돌 조각 안에 담는 데 성공한 다. 오목한 돌 안에 담고 보니,이제 불덩이가 보석 상자 안에 든 루비처럼 보인 다. 암개미 103호의 설명이 이어진다. 불은 강하면서도 약하다. 그것이 불의 역설이다. 불은 나무 한 그루는 물론이 고 숲 전체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지만,때로는 눈에놀이의 날개짓 한 번에도 꺼져 버릴 수 있다. 불 때문에 다리가 녹아 내리는 시련을 겪음에도 6호는 불덩이가 거뭇해지는 것을 보면서 뜻밖의 이야기를 한다. 이 불은 심하게 앓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빛이 검게 변하는 것은 불이 아프 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을 살려야 할 것 같다. 불을 어떻게 살리는가? 번식을 시키면 된다. 불은 접촉을 통해 번식한다. 예전에 마른 나무잎을 통해 불이 퍼져 나가는 것을 본적이 있다. 주위에 마른 나뭇잎이 별로 없다. 그래도 그들은 흙 속을 뒤져서 나뭇잎 몇장 을 찾아 낸다. 잎을 불덩이 위로 넣었더니 노란 불꽃이 일어난다. 새끼불은 제 어미보다 한결 밝고 힘차다. 개미들은 대부분은 그런 불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선다. 암개미 103호는 뒤로 물러서지 말라면서 더듬이를 높이 세워 옛부터 내려오는 페로몬 문장 하나를 발한다. 우리의 진정한 적은 오직 두려움뿐이다. 그들은 모두 그 문장의 역사와 의미를 알고 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8천 년 전에 불개미(니) 왕조의 234대 여왕 벨로키우키우니가 절명사러 남긴 문장이 다. 그 불행한 여왕은 여름철 산란기에 강으로 올라온 송어들을 길들이려고 애쓰다가 물에 빠져 죽으 면서 그 문장을 남겼다고 한다. 그 여왕은 개미들과 송어들 사이에 동맹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그 사건 이후로 개미들은 은빛 강의 물고기 족속과 접촉 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였다. 그래도 여왕의 절명사만은 개미들의 무한한 가능 성을 향한 희망의 외침으로 남아 있다. 우리의 진정한 적은 오직 두려움뿐이다. 그들을 안심시키기라고도 하려는 듯,아주 높이 솟아올랐던 새끼 불꽃의 기세 가 수그러 들었다. 이 불꽃을 더 드껍고 단단한 물건에 옮겨야 한다. 불에 혼쭐이 났던 일을 금세 잊고 6호가 제안한다. 개미들은 마른 잎에서 마 른 잔가지로,마른 잔가지에서 나무 조각으로 불을 옮겨 붙인 끝에,대야처럼 우묵 한 돌 밑바닥에 작은 화로를 만들어 내는 데에 성공한다. 그런 다음,암개미 103 호의 조언에 따라 화로에 잔가지 부스러기들을 던진다. 던지기가 무섭게 불은 그 부스러기들을 덥석덥석 물어 버린다. 개미들은 그렇게 살려 낸 불을 역시 당속에서 찾아낸 작고 오목한 돌들에다 조심스럽게 옮겨 담는다. 다리 하나가 불에 타버렸음에도,6호가 불을 가장 잘 다루는 기술자 임이 밝혀진다. 그는 불에 데어 보았기 때문에 불을 조심할 줄 아는 것이다. 그 의 제안에 따라,개미들은 불의 창고를 짓는다. 암개미 103호의 더듬이에서 자극적인 페로몬이 터져 나온다. 자,이것으로 난쟁이개미들을 공격하자.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은 불을 만드는 재미에 취하여 밤이 오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은 벌건 불덩이가 즐어 있는 오목한 돌멩 이 여덟 개를 거북선에 싣는다. 암개미 103호는 더듬이를 세우소 이런 뜻이 담 긴 독한 페로몬을 터뜨린다. 공격! 99.백과 사전 소년들의 십자군 원정 소년들이 주축이 된 최초의 십자군 원정이 1212년에 있었다. (어른들과 귀족을 은 에루살렘을 해방시키는 데 실패했다. 그것은 그들의 정신이 순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리고,그래서 순수하다)라는 논리를 펴면서 할 일 없이 빈둥 거리던 젊은이들이 십자군 원정을 조직하겠다고 나섰다. 그 충동적인 움직임을 주로 신성 로마 제국에서 일어났다. 그리하여 일군의 소년들이 신성로마제국을 떠나 성지를 향해 출발했다. 그러 나,그들은 지도 하나도 변변히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남쪽을 향해 가고 있 으면서도 자기들이 동쪽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론 강유역을 따라 내려갔다. 그들 무리는 수천을 헤아릴 만큼 수가 점점 불어났다. 그들은 도중에 마을에 나타나면 농부들의 식량을 약탈하였다. 어느 마을에서 주민들에게길을 물었더니 곧 바다에 당도하게 될거라고 했다. 소년들은 바다를 어떻게 건널 것인가를 걱정하지 않았다. 모세에게 기적이 일어났듯이,자기들이 에루살렘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바다가 자기들에게 길을 열어 주리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들이 다다른 항구는 마르세이유였다. 바다는 그들에게 길을 열어 주지 않았 다. 며칠을 항구에서 기다렸지만 헛일이었다. 그러던 차에.시칠리아 사람 둘이 나 타나서 에루살렘까지 배로 데려다 주겠다고 그들에게 제안했다. 소년들은 기적 이 일어난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적이 아니었다. 그 두 시칠리아 사 람은 튀니지의 어떤 해적단과 짜고 소년들을 에루살렘이 아니라 튀니지로 데려 갔다. 거기에서 소년들은 모두 헐값에 노예로 팔려 나갔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3편 100.대축제 더 망설이지 말고 나갑시다. 객석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줄리는 이 충동적인 움직임이 빚어 낼 결과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호기심이 무엇보다 강하였다. 나갑시다! 원장는 모두 자기 자리에 그대로 있어 달라고 사정을 했다. 진정하십시오,여러분,이건 그저 콘서트일 뿐입니다. 관객 하나가 달려 나와서 마이크의 전원을 꺼버렸다. 쥘리네가 소리쳤다. 퐁텐블로 고등 학교로 갑시다. 거기 가서 축제를 벌입시다. 퐁텐블로 고등학교로!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말을 되받았다. 쥘리의 혈관에 아드렐날린 치가 계속 높아지고 있었다. 술이건 마리화나나 담 배건 마약이건 그어떤 것으로도 그런 효과를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젠 그녀와 청중이 무대와 객석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쥘리는 비로소 청중의 얼굴을 구별할 수 있었다.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5백 명 정도는 족히 될 즛한 사람들이 그녀 주위로 몰려들어 긴 행렬을 지었다. 쥘리가 개미혁명을 선창하자,군중은 춤을 추면서 노래를 따라불렀다. 퐁텐블로 간선도로는 일거에 떠들썩한 춤판으로 변해 버렸다. 우리는 새로운 발명가다. 우리는 새로운 선견자다. 합기도 클럽의 여학생들은 즉석에서 자경반을 편성하여 측제에 뱅해가 되지 않도록 자동차들의 통행을 막았다. 군중은 계속 불어났다. 퐁텐블에서 밤에 그런 구경거리를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리를 거닐던 사람들이 그들 무리에 끼여들어 무슨 일인가 하 고 묻곤 했다. 플래카드도 없고 깃발도 없었다. 하프와 플루트 연주에 맞추어 몸을 흔드는 젊은이들이 행렬의 선두에 있을 뿐이었다. 쥘리가 뜨겁고 힘찬 음성으로 또박또박 외쳤다. 우리는 새로운 발명가다. 우리는 새로운 선견자다. 쥘리는 그들의 여왕이자 우상이었고 그들의 사이렌지자 파시오나리아였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그들에게 신명을 불어넣는 무당이었다. 쥘리는 자기를 둘러싼 채 앞으로 밀어 대는 군중의 뜨거운 성원에 도취해 있 었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을 그토록 사무치게 느껴 본 적이 없었 다. 그들 앞에 갑자기 경찰의 첫 저지선이 나타났다. 행렬의 선두에 있던 여자들 은 기발한 작전을 생각해 냈다. 경찰관들의 볼에 입을 맞추어 주는 것이 그것이 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곤봉을 휘두를 수 있으랴? 질서 수호자들의 저지선은 저절로 무너졌다. 조금 더 나아가자, 경찰 버스 한 대가 다가왔다. 그러나 사건 의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고 판단했는지 경찰은 개입을 자제하고 버스를 돌렸다. 쥘리는 도로변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이건 축제입니다. 여러분, 거리로 나오십시오. 여러분의 근심과 슬픔을 잊고 우리와 함께하십시오.”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어중이떠중이가 다 모인 행렬을 내려다 보았다. 어떤 나이 지긋한 부인이 물었다. “요구사항이 뭐예요?” 합기도 클럽의 여장부 하나가 대답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이건 혁명이 아니지.” “왜요. 바로 그것이 우리 혁명의 독특한 점이예요. 우리는 요구 사항이 없는 최초의 혁명을 시도하고 있어요.” 관객들은 한 좌석에 100프랑씩 내고 참석한 두 시간짜리 콘서트로 축제가 끝 나는 것을 원치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을 모두 축제가 연장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이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새로운 선견자다.” “우리는 새로운 발명가다.” 행렬에 새로이 합류하는 사람들 중에는 흥을 돋우는 데 한몫을 하려고 자기들 집에 있는 악기를 들고 나오는 축도 있었고, 북과 북채를 대신 주방 기구를 가 지고 나오는 축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축제 때 쓰는 색종이 테이프며 색 종이 조각들을 가지고 나왔다. 쥘리는 예전에 성악 선생이 가르쳐 준 대로, 성량을 최대한 풍부하게 만들었 다. 모두가 그녀를 따라서 합창을 했다. 5백 명이 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하나 로 어우려졌다. 온 도시에 그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는 새로운 선견자다.” “우리는 새로운 발명가다.” “우리는 경화증에 걸린 이 낡은 세상을 조금씩 갉아먹는 작은 개미들이다.” 101. 백과 사전 청두의 소년 혁명 중국 쓰촨성의 성도인 청두는 1967년까지만 해도 조용한 도시였다. 히말라야 산맥 기슭, 해발 1천 미터 되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이 유서 깊은 성곽 도시는 인구가 3백만이었는 데, 그 주민의 대다수가 베이징이나 상하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모르고 살았다. 당시에 중국의 대도시엔 인구가 넘치기 시작 했고, 그에 따라 중국 정부는 대도시의 인구를 지방으로 분산시키는 정책을 추 진했다. 그 과정에서 부모와 자식이 서로 헤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부모는 농촌 으로 가고, 자식은 훌륭한 공산당원이 되기 위해 홍위병 양성소로 가야 했기 때 문이다. 그 홍위병 양성소는 강제 노동 수용소나 다름없을 만큼 생활조건이 몹 시 열악했다. 소년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심지어는 아이들을 상대로 톱밥을 주원료로 한 섬유소 식품에 관한 실험이 행해지기도 했 다. 아이들은 파리처럼 죽어 나갔다. 그 무렵, 권력 투쟁이 한창이던 베이징에선, 마오의 공식적인 후계자이자 홍위 병의 책임자로서 문화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던 린 피아오가 마오의 총 애를 잃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자 공산당 간부들은 홍위병들에게 폭동을 부 추겼다. 그것은 그 당시 중국의 특수한 사정에 기인한 아주 미묘한 사건이었다. 모택동주의의 병영을 탈출하고 교관들을 구타하는 것이 바로 모택동주의의 명분 아래 행해졌으니 말이다. 병영을 뛰쳐 나온 소년 홍의병들은 부패한 권력에 맞서 모택동주의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전국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 중의 대다 수는 중국에서 도망쳐 나갈 길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기차역으로 몰려가서 서 쪽으로 떠났다. 거기로 가면 몰래 국경을 넘어 인도 땅으로 들어갈 수 있는 비 밀 루트가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쪽으로 가는 모든 기차들의 종착역은 청두였다. 그리하여 그 산악 도시에 열서너 살 난 소년병 수천 명이 갑자기 들이닥치게 되었다. 처음엔 소년들과 주민들 사이에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소년들은 병영에서 겪은 고초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이 야기했고, 청두의 시민들은 그들을 측은히 여겨 먹을 것도 주고 잠자리도 마련 해 주었다. 그러나 소년병들의 물결은 계속 청두 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처 음에 수천에 지나지 않던 그들의 수가 무려 20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때부터 소년들은 주민들의 호의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게 되었다. 좀도둑질이 다반사로 행해졌고, 도둑맞기를 거부한 상인들은 몰매를 맞기 일쑤였다. 상인들 은 참다못하여 청두 시장을 찾아가 시급히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러나 시장은 어떤 대책을 마련할 겨를도 없이, 소년병들에게 끌려 나가 자아 비 판을 해야 했다. 자아 비판이 끝난 뒤에 시장은 뭇매를 맞고 쫓겨났다. 소년병 들은 새 시장을 뽑기 위한 선거를 계획하고 자기들의 후보를 내세웠다. 그들의 후보는 볼에 살이 통통한 열세 살짜리 소년이었다. 그 소년은 실제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고 다른 홍위병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어떤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 었다. 온 도시의 벽과 담에 그에 대한 지지를 선동하는 벽보가 나붙었다. 그 소년이 그다지 훌륭한 웅변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대자보를 통해 자기들 의 정책을 알렸다. 소년 후보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당선되어 소년들의 시 정 부를 구성하였다. 열다섯 살 난 시의원이 그들 중의 최연장자였다. 이제 좀도둑질은 더 이상 범죄가 아니었다. 상인들은 새 시장이 부과하는 새 로운 세금을 내야 했고, 홍위병들에게 거처를 제공하는 것은 시민들의 의무가 되었다. 그 도시는 대단히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홍위병들이 선거에서 승리 를 거두었다는 소식이 외부에 알려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청두의 상인들은 그 사태에 불안을 느끼고 그 지방의 지사에게 대표를 보냈다. 지사는 사태가 대단히 심각하다고 판단하고 군대를 보내 폭도를 진압해 달라고 중앙 정부에 요 청했다. 20만의 홍위병들에 맞서 중앙 정부는 수백 대의 전차와 수천 명의 중 무장한 군인들을 보냈다. 그들이 받은 명령은 열다섯 미만의 소년들을 모두 죽 이라는 거였다. 소년들은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 안에서 저항하려고 했다. 그 러나 청두 시민들은 그들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들은 무엇보다 자기 자식들이 애먼 죽음을 당할까 걱정하면서 자식들을 산 속으로 피신시키는 일에 골몰하였 다. 이틀 동안 어른과 아이들이 맞붙어 전투를 벌였다. 홍군은 공중 폭격으로 소년들의 마지막 남은 저항의 보루를 날려 버리고 전투를 마무리하였다. 소년 병들은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그 사건은 한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마침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중국 방문을 앞두고 있던 터라 중국을 비판하기가 곤란하였기 때문이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 제3권 102. 또 한 차례의 폭파 시도 이번엔 터지겠지! 막시밀리앵은 경찰관들을 데리고 다시 와서 피라미드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는 작전 시간을 야간으로 바꾸었다. 건물 안에 있는 자, 또는 자들이 잠들 어 있는 틈을 타서 기습을 하는 편이 더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한 거였다. 그들은 난바다에 나간 뱃사람들처럼 방수천으로 된 보호복을 입고 있었다. 그 리고 지난 번처럼 곤충의 위턱에 잘려 나가는 일이 없도록 전선에도 단단히 피 복을 씌웠다. 막시밀리앵이 막 폭파 명령을 내리려는 찰나에, 또다시 곤충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곤충은 또 다른 경찰관을 공격한 다음, 허공을 휘젖는 손들을 피해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경찰관들은 말벌의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바짝 기울이며 허공 을 노려보았다.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곤충이 갑자기 다시 나타나더니 세 번째 경찰관에 게 덤벼들었다. 곤충은 그의 오른쪽 귀를 빙 돌아 내려가서 목 동맥에 침을 꽂 았다. 경찰관이 쓰러졌다. 막시밀리앵은 구두 한 짝을 벗어 들고 흔들어 대다가, 전에도 한번 그랬던 것 처럼 잽싸게 곤충을 후려치는 데 성공했다. 적은 땅바닥에 떨어져 꼼짝을 하지 않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권총보다 구두 뒤축이 더 쓸모가 있었다. “2대0” 그는 적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말벌이라기보다는 날개 달린 개미처럼 보였다. 그는 짜릿한 쾌감을 느끼며 구두 뒤축으로 적을 짓뭉갰다. 경찰관들은 쓰러진 동료들에게로 가서 그들이 잠들지 못하도록 흔들어 깨웠 다. 막시밀리앵은 또 다른 적이 나타나기 전에 폭파를 서두르기로 했다. “폭발물은 다 준비됐지?” 폭파 책임 기폭 장치의 접속 상태를 확인하고 경정의 명령을 기다렸다. “준비됐습니다.” 경정이 초읽기에 들어가려는데, 느닷없이 휴대용 전화기가 울렸다. 전화를 걸 어 온 사람은 뒤페롱 지사였다. 시내에 불상사가 생겼으니 급히 달려오라는 명 령이었다. “시위대가 퐁텐블로의 간선 도로를 점거하고 있네. 그들은 폭도로 변할 수 도 있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당장 중단하고 시내로 돌아가서 그 정신나간 자 들을 해산시키라고” 103.갈대밭의 열기 속에서 빛살이 어둠살과 싸우고 있다. 천둥 비 뒤끝에 땅에서 올라오는 훈김 때문에 공기가 후덥지근하다. 개미들의 거북선이 갈대밭을 향해 돌진한다. 난쟁이개미들은 수련잎들 꼭대기에서 배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다가, 불덩 이의 빛과 열기에 경계심을 느끼며 사격 준비를 한다. 멀리, 개미산에 구멍이 뚫린 갈대에서 24호의 구조 요청 페로몬이 날아오고 있다. 포위된 불개미들은 적들에 비해 수가 턱없이 부족해서 오래 버티기가 어려울 것이다. 갈대 아래에 떠 있는 무수한 시체들이 이전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 지를 말해 주고 있다. 시체들은 어느 진영에 속하는지 더 이상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물에 퉁퉁 불어 있다. 코르니게라 섬의 불개미들은 이야기를 짓고 서로에게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듣는 것만 으로는 부족하다.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들을 실제로 겪어 보는 것이다. 거북선의 조타실에서 103호와 열두 개미는 불덩이 때문에 애를 먹고 있다. 불은 멀리 떨어진 적에게 사용하기에는 그다지 실용적인 무기가 아니다. 난쟁 이개미들이 포진하고 있는 수련들 쪽으로 그것을 쏘아 보내야겠는데, 그 방도가 마땅치 않다. 그러나 끝없는 모색을 통해 이치를 따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개미들의 특 성 아닌던가. 열세 개미는 저마다 자기 의견을 내놓는다. 6호는 물에 떠 있는 잎에 불덩이를 싣고 물방개들로 하여금 그 잎을 적들이 있는 쪽으로 밀고 가게 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물방개들은 불을 너무 무서워한다. 그들에겐 아직 불 이 금기의 무기로 남아 있다. 그들은 불에 다가오기를 거부한다. 암개미 103호는 불을 아주 멀리 쏘아 보내는 손가락들의 기계 장치에 관해 기 억을 더듬는다. 그들은 그것을 캐터필트라고 부른다. 103호는 더듬이 끝으로 그 장치의 형태를 그려 보인다. 그러나 형태만 알아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 런 장치에 놓아둔 불이 어떤 원리로 날아가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결국 그 장 치는 단념할 수밖에 없다. 5호는 기다란 가지 끝에 불을 붙인 다음 그것을 창처럼 사용해서 수련에 닿게 하자는 방안을 내놓는다. 그 생각이 모두에게 받아들여졌다. 개미들은 물방개 추진기의 작동을 중단시키고, 되도록 긴 가지를 찾기 위해 주위를 살핀다. 마침 축 처져 물에 닿아 있는 잔가지들 중에 알맞은 것이 하나 있다. 그들은 그 잔가지를 배 위로 끌어올린다. 거북선이 적의 사정 거리 안으로 들어가자 개미산이 비오듯 쏟아진다. 열세 불개미는 위턱으로 잡고 있는 잔가지를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바싹 엎드린 다. 이제 때가 되었다. 그들은 잔가지 끝에 불을 붙여 번쩍 들어올린다. 물방개들은 배 뒤로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더욱 빠르게 배를 밀어 댄다. 그 속도 때문에 배 위로 솟은 가지 끝의 불꽃이 기다란 깃발처럼 늘어난다. 14호는 더듬이를 잠망경처럼 내밀고 적의 위치를 정확히 포착한 다음, 불붙은 가지를 던져 보낼 방향을 동료들에게 알려 준다. 불꽃창이 날아가 수련의 꽃잎에 닿았다. 수련에 물기가 많아서 금방 불이 붙 지는 않았지만, 창이 닿을 때의 충격만으로도 꽃잎위의 난쟁이개미들은 모두 몸 의 균형을 잃고 물에 떨어졌다. 그 경우만 놓고 보자면, 불은 금기의 무기까지 사용할 태세가 되어있는 불개미들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 것 말고는 전혀 쓸모 가 없었던 셈이다. 어쨌거나 그 공격이 성공하자, 적에게 포위된 불개미들도 사기를 되찾고 최후 의 공격을 위해 남겨 두었던 개미산을 쏘아 난쟁이개미들의 진영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암개미 103호는 불꽃창을 제대로 다루는 방법을 터득해서 수 련들에 차례차례 불을 지른다. 여기저기에서 연기가 피어 오른다. 난쟁이개미들 은 수련이 타는 냄새에 겁을 먹고 뭍 쪽으로 줄행랑을 놓는다. 다행스러운 일 이다. 불꽃창 역시 더 이상 다루기가 어려울 만큼 타들어간 상황이기 때문이다. 불을 사용해서 적을 공격할 때는 그런 문제가 있다. 불은 공격을 받는 쪽은 물 론이고 그것을 사용하는 쪽에도 마찬가지의 피해를 입힐 수 있다. 벨로캉 개미들은 백병전을 벌일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그 동안 닦아온 위턱 검술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기회였는데 말이다. 열세 개미 중에서 가장 호전 적인 13호는 단지 한두 마리라도 그 오만 불손한 난쟁이개미들을 베어 보지 못 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암개미 103호는 불붙는 잔가지를 되도록 멀리 물에 던져 버리라고 신호를 보 낸다. 그들은 적이 포위하고 있던 갈대 쪽으로 배를 몰고 간다. 24호가 제발 살아 있어야 할텐데, 하고 103호는 생각한다. 104.학교 앞 광장에서의 대치 문화원을 떠날 때 5백 명이었던 군중이 학교 앞 광장에 이르러서는 8백 명으 로 불어났다. 그들의 행진은 어떤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 시위가 아니라 하나의 카니발이 었다. 그것도 본래 의미 그대로의 진정한 카니발이었다. 중세 때만 해도 카니발은 분명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카니발이 열리는 날 은 미치광이들의 날이었고, 백성들이 모두 억압에서 풀려나는 날이었다. 그날만 큼은 모든 규율이 무시되어도 좋았다. 서슬 푸른 기병대장의 콧수염을 잡아당 기거나 고을 관리들을 도랑에 밀어버리는 것도 허용되었고, 남의 집 문을 두드 려 누구든 나오면 그의 얼굴에 밀가루를 뿌릴 수도 있었다. 그날, 사람들은 짚으 로 만든 커다란 인형을 태웠다. 그 카니발 인형은 바로 모든 권위의 상징이었다. 백성들이 그렇게 억눌린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필요 불가결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카니발은 그 참된 의미가 잊혀진 채, 그저 상인들을 위한 날 이 되어 버렸다. 크리스마스나 발렌타인 축일, 어머니날, 아버지날, 할머니날 따 위가 그렇듯이 카니발은 이제 소비를 조장하기 위한 축제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 모인 젊은이들에게는 물론이고 노인들에게도 축제에 대한 욕망과 반항 심과 욕구 불만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이제껏 자기 표현의 욕망을 억누르기만 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고삐에서 풀려나 한바탕의 흐드러진 춤판을 벌이고 있는 거였다. 록 음악의 애호가들과 구경꾼들은 시끌벅적한 긴 행렬을 이루며 계속 나아갔 다. 그들이 학교 앞 광장에 다다르자, 경찰 기동대의 버스 여섯 대가 나타나서 도로를 봉쇄했다. 시위대와 경찰은 다같이 멈춰 서서 서로를 톺아보았다. 경찰의 선두에는 위팔에 완장을 찬 막시밀리앵 리나르 경정이 있었다. 그가 확성기에 대고 소리쳤다. “여러분, 해산하십시오.” “우리는 남에게 해가 될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쥘리는 확성기도 없이 그렇게 맞받았다. “여러분은 공공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밤 열 시가 넘었습니다. 여러 분은 야간에 소음을 내서 주민들의 안면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단지 학교에서 축제를 벌이는 것입니다.” “야간에는 학교를 개방하지 않습니다. 사전 허가 없이는 학교 안으로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소란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습니다. 당장 해산에서 각자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시민들의 잠잘 권리를 침 해하지 마십시오.” 쥘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마음을 다잡고 자기가 맡은 파시오나리아의 역할을 계속 밀고 나갔다. “우리는 사람들이 잠자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기를 바랍니다.” “너, 쥘리 팽송이구나?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 어머니 걱정하시겠다.” “저는 자유롭습니다. 우리 모두가 자유롭습니다. 그 무엇도 우리를 막지 못 합니다. 자, 나아갑시다, 우리의 혁...” 뒷말이 나오지 않았다. 처음엔 약하게, 그러다 한결 자신감 있게 그녀가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자, 나아갑시다. 우리의 혁명을 위해.” 군중 속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축제를 벌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비록 경찰이 나타나서 위험해질 염려가 있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것은 하나의 축제일 뿐이었다. 쥘리가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군중은 주먹을 치켜 들고 그들 의 찬가가 된 콘서트의 주제곡을 불렀다. “때가 되었다. 이젠 끝내야 한다.” “우리의 오감을 활짝 열자.” “신새벽의 새로운 바람이 불어 온다.” 군중은 팔을 벌려 손에 손을 잡고 자기들의 수를 과시하며 광장을 가득 채우 고는 학교 정문 쪽으로 서서히 나아갔다. 막시밀리앵은 부하 경찰관들과 대책을 논의했다. 더 이상 협상의 여지가 없 었다. 지사의 명령은 분명했다. 그는 순대 전술을 사용하자고 제의했다. 순대 전술이란, 순대의 한가운데를 잡고 누르면 양끝으로 순대의 소가 빠져 나가듯이, 중앙을 치고 들어가서 시위대를 양쪽으로 흩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한편, 시위대 쪽에서도 쥘리와 일곱 난쟁이들이 모여 이후의 대책에 관하여 토론을 벌였다. 그들의 여덟개의 자치적인 조를 편성하고, 그들 여덟 명이 각 조의 조장을 맡기로 했다. “우리끼리 서로 연락을 할 수 있어야 해.” 다윗의 말에 따라, 그들은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휴대용 전화기가 있 으면 자기들에게 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여덟대였는 데, 사람들은 그보다 많은 것을 모아 주었다. 콘서트에 오면서도 전화기를 떼어 놓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꽤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꽃양배추 전법을 사용하자.” 쥘리는 그렇게 말하고 주위를 둘러보며 자기가 즉흥적으로 지어낸 그 전술을 설명했다. 시위대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경찰관들은 순대 전술을 실행에 옮기려고 그들 정면으로 다가서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시위대가 아무런 저항을 보이 지 않고, 꽃양배추가 갈라지듯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쥘리 가 생각해 낸 전술이었다. 밀집 대형을 이루고 있던 경찰들 역시 시위대를 따라가느라고 이리저리 분산 되었다. 막시밀리앵이 확성기에 대고 명령했다. “흩어지지 말고 대오를 유지해! 학교를 지키라고.” 기동대원들은 위험을 알아차리고 광장 한가운데에서 다시 대열을 정비했다. 그 동안에 시위대는 자기들의 작전을 계속 밀고 나갔다. 쥘리와 합기도 클럽의 여학생들은 기동대원들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 다. 그녀들은 그들에게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들의 볼에 도발적인 입맞춤 을 선사했다. “저 주동자를 붙잡아!” 경정이 쥘리를 가리키며 명령했다. 한 무리의 기동대원들이 즉시 쥘리와 그 녀를 호위하고 있는 아마존들 쪽으로 달려갔다. 그것은 바로 쥘리가 바라던 바 였다. 쥘리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무리를 지어 달아나라고 이른 다음 전화기로 알렸다. “됐어. 고양이들이 새앙쥐들을 쫓아오고 있어.” 경찰관들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기 위해, 아마존들은 자기들의 티셔츠를 찢 고 요염한 매력을 조금 보여 주었다. 전운과 여성의 향취가 함께 감도는 기이 한 분위기였다. 105.백과 사전 알린스키 병법 히피 선동가이자 미국 최대 노동 조합의 창립자인 솔 알린스키는 한때는 고고 학을 전공하던 학생이었고, 알 카포네 밑에서 갱 노릇을 하기도 했던 다채로운 이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가 1970년에 어떤 지침서 한 권을 출판했는데, 그 책 에는 생존 경쟁에서 살아 남는 데 필요한 열 가지 전술 법칙이 다음과 같이 기 술되어 있다. 1) 힘이란 당신이 지닌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지니고 있다고 주위 사람들이 믿 고 있는 것이다. 2) 당신의 적이 자기 경험을 발휘할 수 있는 싸움터를 벗어나, 적이 어떻게 행 동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새로운 전장을 창안하라. 3) 적의 무기로 적을 쳐부수고, 적의 전술 지침에 나오는 요소들을 이용하여 적을 공격하라. 4) 말로 대적할 때는 익살이 가장 효율적인 무기다. 상대를 우스꽝스럽게 만 들거나, 더 나아가서 상대방 혼자 우스꽝스런 짓을 하도록 이끌수 있으면, 상대 가 당신에게 다시 도전하기는 어려워진다. 5) 어떤 전술을 상투적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특히 잘 통하는 전술일수록 자주 사용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어떤 전술을 반복 사용해서 그 효과와 한계 를 알게 되었으면, 하다못해 정반대의 전술을 채택해서라도 그것을 계속 사용하 지 말아야 한다. 6) 적이 수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적으로 하여금 마음놓고 휴식 을 취하면서 전력을 재정비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 시의 적절한 외적 요소들을 모두 사용하여 적에게 계속 압박을 가하여야 한다. 7) 실행에 옮길 수 없으면, 허세를 부리지 말아야 한다. 허장성세는 적에 대 한 억제력을 모두 상실하게 만든다. 8) 겉으로 보이는 단점은 가장 훌륭한 장점이 될 수 있다. 자기의 특성 하나하 나를 약점이 아니라 강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9) 목표를 하나로 집중시켜야 하고 전투중에는 그것을 바꾸지 말아야 한다. 목표는 가능한 한 가장 작고, 가장 뚜렷하고, 가장 상징적이어야 한다. 10) 승리를 거두었을 때는 그 승리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승자의 몫을 차 지할 수있어야 한다. 새로 선출된 지도자는 낡은 정책을 대체할 새로운 정책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권력을 장악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 제3권 106.재회 불과 개미산 사격의 피해를 모면한 수련 위에서 두 무리가 합류한다. 해방된 개미들과 해방시킨 개미들이 입에 입을 맞대고 영양 교환에 들어간다. 어둠과 추위 때문에 몸에 마비가 오기 시작하자, 그들은 남아 있는 불씨로 몸을 덥히고 어둠을 밝힌다. 24호는 무사하다. 암개미 103호는 옛 원정의 동반자였던 그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그들은 수련의 노란 꽃술 한가운데에 있다. 그들 뒤로 오렌지빛 불씨의 빛과 온기가 반투명한 꽃잎을 통해 은은히 스며들고 있다. 암개미 103호는 단물을 더 나누어 주려고 옛 친구를 껴안고 입을 맞춘다. 24 호는 영양 교환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수줍게 더듬이를 뒤로 젖힌 다음, 갈 무리주머니 속에 반쯤 삭은 채 저장되어 있던 먹이를 달게 받아 먹는다. 24호는 많이 변했다. 단지 최근의 전투 때문에 지쳐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모습 자체가 달라져 있다. 자태로 보나 냄새로 보나 옛날의 그가 아니다. 작은 이상주의적 공동체 속에서의 삶이 그를 그렇게 다른 개미로 만들어 버린 모양이다. 24호는 그 변화의 곡절을 설명하려다가, 굳이 그럴 것 없이 더듬이를 맞대고 완전 소통을 하자고 제의한다. 하긴, 서로의 정보를 교환함에 있어 그보다 더 간단한 방법은 없다. 암개미 103호로서는 반대할 까닭이 없다. 서로의 뇌를 접속하면 둘의 대화가 비길 데 없는 밀도와 심도와 속도를 지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두 개미는 더 듬이를 천천히 접근 시키고 마치 완전 소통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잊 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잠시 서로를 더듬으며 뜸을 들인다. 드디어 그들의 네 더듬이가 둘씩 달라붙었다. 한쪽의 생각이 직접 다른 쪽의 생각과 연결되기 시작한다. 암개미 103호는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24호가 훨씬 많이 변했음을 깨닫는 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도 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24호가 설명하기를, 재미있는 이야기에 대한 열정이 너무나 강했던 나머지 더욱 예민한 감수성을 향 유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벌 둥지를 찾아 나섰고, 마침내 어떤 리스 말벌의 둥지 안에 들어가 로열 젤리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왜 암컷이 아니고 수컷의 성을 갖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것은 온 도 때문일 수도 있고, 그 호르몬 칵테일을 동화하는 방식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24호는 이제 수컷이다. "나만 변한 게 아니라 너 역시 변했다. 네 더듬이가 예전과는 다른 냄새를 발 산하고 있다. 혹시……." 암개미는 그의 물음이 나오기도 전에 지레 설명을 해 준다. "나 역시 말벌의 로열 젤리 덕분에 성을 갖게 되었다. 나는 이제 암컷이다." 두 개미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더듬이의 움직임을 멈춘다.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다. 헤어질 때만 해도 둘 다 수명이 3년밖에 안 되는 평범한 중성의 병정 개미였는데, 말벌들의 신비한 물질 덕에 이제 개미 사회의 왕자와 공주로 격이 높아져 자기들의 유전 인자를 후세에 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두 개미는 다시 입을 맞추고 영양 교환에 들어간 다. 아까보다 더욱더 깊고 살가운 입맞춤이다. 수개미 24호는 암개미 103호가 준 영양물을 반대쪽으로 되보내고 암개미는 그 것을 되올려 다시 건네 준다. 어떤 영양물을 벌써 세 차례나 한족 갈무리주머니에서 다른 쪽으로 왔다갔다 했다. 그러나 갈무리주머니의 내용물을 교환하는 것이 너무나 좋아서 그들의 입 맞춤은 한동안 계속된다. 그만큼 영양 교환은 서로를 안심시키고 서로에게 힘을 준다. 동료들은 각자의 모험담을 주고받느라고 여념이 없는데, 암컷과 수컷으로 변 신한 두 개미는 수련꽃의 수술 사이에 따로 떨어져 있다. 암개미 103호는 자기가 손가락들에 대해 알게 된 것을 서둘러 전해 준다. 암 개미는 텔레비전이며 손가락들고가 대화하는 기계, 그들의 갖가지 발명, 그들의 불안 등 모든 것에 대해 설명한다. 두 생식개미의 생각이 서로 교접하는 문제에 미쳤다. 암수가 만나 짝짓기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103호가 멈칫거리며 뒤로 물러선다. “나를 수컷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다. 둘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곤충의 사회에서 수컷은 사랑의 행위가 끝나고 나면 죽는다는 것을. 손가락들의 로맨티시즘에 물들어 타 락한 탓인지는 모르지만, 103호는 자기 친구 24호가 죽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 가 보기에는 친구의 생존이 교미보다 더 중요하다. 103호의 생각을 받아들여, 그들은 서로 교접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어둠이 짙어지고 있다. 코르니게라 공동체의 개미들과 거북선의 개미들은 비 어 있는 뱀굴에 들어가 잠을 잔다. 날이 밝으면 다시 먼길을 떠나야 한다. 107.백과사전 아담 파의 유토피아 1420년에 보헤미아에서 교회의 개혁과 독일 영주들이 퇴진을 요구하는 후스 파 신자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들은 신교의 선구자였다. 그들 중에서 급진적인 한 집단이 떨어져 나왔다. 아담 파 신자들이었다. 그들 은 그들의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이 보기에, 신에게 다가가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원죄를 짓기 전의 아담과 똑같은 조건에서 사는 것이었다. 그들은 프라하에서 멀지 않은 불타바 강 한복판의 섬에 자리를 잡고, 나체 공 동체를 만들었다. 그들은 모든 재산을 공유화하고 아담이 죄를 짓기 전에 살았 던 지상 낙원의 삶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모든 사회 제도가 철폐되었다. 화폐, 귀족 계급, 정부, 군인, 자산 계급, 유산 상속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경작을 삼가고 야생 열매와 채소만을 먹는 채식 생활을 했다. 교회도 성직자도 필요치 않았다. 그들은 신에게 직접 예배를 드리며 살았다. 그러한 급진주의를 탐탁치 않게 여기던 후스 파 신자들은 그들의 지나친 행동 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다. 신에 대한 예배를 간소하게 하는 건 있을 수 있 는 일이지만, 아담 파의 경우는 정도가 너무 심하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후스 파 신자들은 불타바 강에 있는 섬을 포위하고, 때를 잘못 만난 그 히피들을 마지막 한 사람까지 학살하였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적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 제3권 108.물과 전화기를 무기로 기동대원들이 쥘리와 아마존들을 뒤쫓고 있는 동안에, 시위대의 다른 조들은 각각 한 난쟁이의 인솔을 받아 가며 샛길로 빙 둘러가서 학교 후문 앞에 다시 모였다. 그곳엔 경찰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후문을 여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교장이 연습의 편의를 위해 지웅 에게 맡긴 열쇠가 있기 때문이었다. 지웅은 열쇠를 꺼내어, 화재를 막기 위해 거 죽에 새로 쇠를 씌운 문을 열었다. 군중은 되도록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하 면서 학교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막시밀리앵이 전술을 숙고하고 있는데, 학교 정문의 철책 사이로 재미 있어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들이 나타났다. 아뿔사, 너 무 늦었다. 그가 확성기에 대고 소리쳤다. “그자들이 뒷문으로 들어간다!” 기동대원들은 쥘리와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을 그대로 두고 갑자기 방향을 틀 어 후문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7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어느새 학교 안으로 들어가고 지웅이 문의 견고한 자물쇠를 다시 잠가 버린 뒤였다. 그 두터운 철갑 문을 상대로는 무엇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2단계 완료.” 다윗이 전화기로 연락을 보내 왔다. 그러자 쥘리네 조는 경찰이 방치한 정문 앞으로 다시 모였다. 다윗이 나와서 문을 열어 주자, 쥘리가 이끄는 백여 명의 새로운〈동지들〉이 먼저 들어온 사 람들과 합류하였다. “그자들이 앞문으로 들어간다. 다들 돌아와!” 막시밀리앵이 기동대원들에게 명령했다. 기동대원들은 헬멧을 쓰고 방탄조끼를 입고 무거운 군화를 신은채, 방패며 척 탄통 따위의 장비까지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달리고 한 탓에 완전히 지쳐 있었 다. 게다가 학교가 제법 넓어서 정문까지 제때에 달려올 수가 없었다. 그들이 정문 앞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문은 다시 닫혀 있었고, 문 뒤에서는 아마존들이 여전히 장난기 어린 추파를 던지며 그들은 놀리고 있었다. “대장님, 그들이 모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게다가 바리케이드까지 치고 있 습니다.” 그렇게 해서 8백여 명의 사람들이 학교를 점거하게 되었다. 쥘리는 그 결과가 만족스러웠다. 양동 작전으로 상대편을 지치게 만들었을 뿐 아무런 충돌도 없이 그 쾌거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더욱 만족스러웠다. 막시밀리앵은 시위대가 그런 게릴라 전술을 구사하는 것은 일찍이 경험한 바 가 없었다. 그가 접해 본 군중은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을 능사로 아는 오합지졸이었다. 그런데, 시위자들이 어떤 정당이나 노동 조합의 지휘를 받는 것 도 아니면서 그렇게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막시밀리앵은 놀라움 과 불안을 느꼈다. 어느 편에든 부상자가 생기지 않은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그 사실조차 통상 적인 경우와는 달라서 이래저래 그의 마음은 영 개운치가 않았다. 그런 식으로 경찰과 시위대가 맞닥뜨리면 이쪽 저쪽 해서 적어도 서너 명의 부상자는 생기는 게 보통이었다. 하다못해 뛰어가다 넘어진다든가 발목을 접질리는 자들이라도 있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시위대 8백 명과 기동대원 3백 명이 대치한 상황에서 아무런 불상사도 생기지 않았다는 것은 뭔가 정상이 아니었다. 막시밀리앵은 기동대 병력의 반은 정문 쪽에 나머지 반은 후문쪽에 배치한 다 음, 뒤페롱 지사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하였다. 지사는 물의를 일으키지 말고 농성자들을 학교에서 쫓아내라고 지시했다. 지사는 현장에 혹시 기자들이 와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했다. 막시밀리앵은 아직 언론에서 나온 사람은 아무 도 없다고 알려 주었다. 뒤페롱 지사는 그제서야 마음을 놓으면서,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되 될 수 있 으면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대통령 선거가 몇 달 앞으로 다가와 있 는 데다가 시위자들 가운데는 틀림없이 퐁텐블로 시 유지들의 자녀도 있을 것이 기 때문에 사건이 커지면 곤란하다는 거였다. 막시밀리앵은 참모들을 불러모으고, 진작에 그 일부터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후회하면서 먼저 학교의 도면을 구해 오라고 지시했다. “철책문 사이로 최루탄을 밀어 넣어. 굴 속의 여우를 몰아내듯이 연기를 피 워 대면 제깟것들이 안 나오고는 못 배길 게야.” 아닌게아니라 농성자들은 눈물을 질질 흘리고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서 금세 기세가 꺾였다. 레오폴이 의견을 내놓았다. “철책문에 우리의 약점이 있어. 그곳을 통해 저들이 공격해 오는 것을 막으 면 돼. 토요일이라 기숙사에 학생들이 없으니까 공동 침실에 있는 담요를 가져 다가 차폐물로 사용하면 될 거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이 실행에 옮겨졌다. 합기도 클럽의 여학생들은 가 스를 맡지 않기 위해 젖은 손수건을 코에 대고, 최루탄이 머리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둥그런 쓰레기통 뚜껑을 방패로 삼은 채, 수위실에서 찾아낸 철사를 이용해서 담요들을 철책문에 붙들어맸다. 그러고 나자, 경찰관들은 더 이상 학교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볼 수 없게 되었다. 막시밀리앵은 다시 확성기를 들고 소리쳤다. “여러분은 그 건물을 점거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곳은 공공 장소입니다. 그곳 에서 당장 나가 주십시오.” 쥘리가 되받았다. “우리는 여기에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완전히 불법적인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 우리를 쫓아내 보세요.” 광장에서 막시밀리앵과 참모들 사이에 밀담이 오고가더니, 기동대 버스들이 후진하고 기동대원들이 광장에 이웃해 있는 거리로 물러났다. “경찰이 그냥 철수하는 것 같은데.” 경찰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던 프랑신이 말했다. 나르시스는 후문쪽에서도 경 찰이 철수하고 있다고 알려 왔다. “아마도 우리가 이긴 것 같애.” 말은 그렇게 했으나, 쥘리의 얼굴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레오폴이 말했다. “승리를 외치기엔 아직 일러. 조금 더 두고 보자고. 양동 작전인지도 모르니 까 말이야.” 그들은 가로등 불빛에 환히 드러난 텅 빈 광장을 살피며 기다렸다. 나바로 족의 후예답게 눈이 밝은 레오폴이 마침내 경찰의 움직임을 알아챘다. 곧 한 무리의 기동대원들이 철책문으로 단호하게 걸어오고 있는 광경이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경찰이 공격해 오고 있다. 정문으로 치고 들어올 모양이야!” 대책이 필요했다. 어서 무슨 수를 써야 했다. 경찰이 철책문에 아주 가까이 왔 을 때, 조에가 해결책을 생각해 냈다. 그녀는 자기 생각을 친구들과 몇몇 아마존 에게 알렸다. 기동대원들이 몰려와서 철책문의 금속 자물쇠를 부수려고 할 때, 화재에 대비 해 최근에 새로 설치한 소방 호스로 물을 뿜자는 것이 조에의 생각이었다. “발사!” 쥘리의 구령이 떨어지자 아마존들이 소방 호스를 작동시켰따. 압력이 너무 세 어서 그 물대포 하나를 들고 방향을 가누기 위해 서너명의 아마존들이 달라붙어 야 했다. 기동대원들과 경찰견들이 광장에 널브러졌다. “정지!” 그러나 기동대원들은 멀찌감치 물러서서 대오를 정비한 다음, 새롭게 공격할 채비를 했다. 이번의 공격은 막아내기가 그리 녹록치 않을 것 같았다. “신호를 기다려.” 쥘리가 말했다. 기동대원들은 소방 호스의 물이 닿을 수 없는 사각 지대를 따라서 구보로 돌 진해 왔다. 그들이 곤봉을 치켜들고 철책문에 다다랐다. “됐어, 지금이야.” 소방 호스는 이번에도 한몫을 톡톡히 했다. 아마존들 사이에서 승리의 환호가 일었다. 막시밀리앵은 다시 뒤페롱 지사의 전화를 받았다. 지사는 상황이 어떻게 진전 되었는지를 물었다. 경정은 시위대가 여전히 학교를 점거한 채 공권력에 저항하 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럼, 더 이상 공격은 하지 말고 학교를 잘 포위하게. 그 소요가 학교 밖으 로 번지지만 않으면, 별로 문제될 게 없으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사태가 확산되 는 건 막아야 해.” 경찰의 공격이 중단되었다. 쥘리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행동 지침을 주지시켰다. <폭력은 일체 사용 하지 말 것. 기물을 파손하지 말 것. 여론의 비난을 살 만한 행동을 삼갈 것.> 역사 선생의 말에 반박하기 위해서라도 쥘리는 폭력 없는 혁명이 정말로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109.백과 사전 라블레의 유토피아 1534년 프랑수아 라블레는 가르강튀아에 묘사한 텔렘 수도원을 통해 자기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를 제시했다. 거기에는 통치 기구가 없다.<자기 자신도 다스릴 줄 모르거늘, 어찌 남을 다 스릴 수 있으리오>하는 것이 라블레의 생각이다. 통치하는 자가 없으므로 수도 원의 공동 생활자들은 <자기가 바라는 바에 따라>행동한다. 텔렘 수도원이 효 율적으로 운영되는 까닭은 거주자들을 선별해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혈통 좋 고 정신이 자유롭고 교양 있고 고결하고 아름다운 선남선녀들만이 그 곳에 들어 갈 수 있다. 여자들은 열 살, 남자들은 열두 살 때 들어 간다. 각자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일할 마음이 나면 일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쉬고, 마시고, 놀고, 사랑을 나눈다. 시계가 없으므로 시간의 흐름 은 잊고 산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먹고 싶을 때 먹는다. 다만 소요, 폭력, 분쟁 따위는 허용되지 않는다. 힘겨운 일은 수도원 밖에 사 는 종복들과 장인들이 맡는다. 수도원은 루아르 강 근처의 포르위오 숲에 있다. 방은 9천 3백 32개이며 성벽 은 없다. <성벽은 음모의 온상이기 때문이다.> 수도원의 전체적인 모습은 하나 의 성과 같다. 지름이 60보쯤 되는 둥근 망루도 여섯 채가 있다. 각 망루의 높이 는 6층 건물에 해당한다. 하수도는 강으로 연결되어 있다. 도서관이 여러 곳에 있고, 중앙에는 연못이 있으며, 미로 모양의 포도(鋪道)를 갖춘 공원도 있다. 그러나 라블레는 어리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이상향이 언젠가는 하 찮은 것을 얻기 위한 터무니없는 주장과 선동과 불화 때문에 붕괴되고 말 것임 을 내다보고 있었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적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 제3권 110.아름다운 밤 103호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생식개미가 된 뒤로 시작된 불면증이 또 찾아오고 있다. 평범한 중성개미 시 절에는 다른 건 몰라도 잠자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암개미는 더듬이를 세운다. 붉은 빛이 느껴진다. 그의 잠을 깨운 것이 바로 그 빛이다. 그것은 아침놀이 아니라, 그들이 은신처로 삼고 있는 뱀굴 안에서 나오 는 빛이다. 암개미는 빛이 비쳐 오는 쪽으로 다가간다. 몇몇 개미들이 불덩이를 둘러싸고 있다. 그들에게 승리를 가져온 바로 그 불 덩이다. 불을 처음으로 경험해 본 그들인지라 잠자는 걸 잊을 만큼 불에 매료되 는 건 당연하다. 불을 꺼버리는 게 좋겠다고 주장하는 개미가 하나 있다. 암개미 103호는 그들 의 대화에 끼어들어 점잖게 타이른다. “불을 꺼버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좋든 싫든 간에,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위험이 따르더라도 기술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무지 속에서 마음 편하게 살 것인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7호가 다가온다. 그의 흥미를 끄는 것은 불이 아니라 불꽃이 굴의 벽에 만들 어 내는 개미들의 그림자다. 그는 그림자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려고 하다가, 그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103호에게 그 까닭을 묻는다. 103호는 이렇 게 대답한다. “그 현상도 불이 지닌 마력의 하나다. 불은 우리에게 검은 빛깔의 분신을 만 들어 준다. 그 분신들은 저렇게 벽에 달라붙어 있을 수 있다.” “그럼 저 검은 분신들은 무얼 먹고 사는가?” “저들은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냄새도 발하지 않고 우리의 몸짓을 그대로 흉내낼 뿐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시간을 내어 이야기하기로 하고 우선 잠을 자기로 하자. 내일 다시 먼 길을 떠나자면 기운을 보충해 놓아야 한다.” 그러나 수개미 24호는 졸음을 느끼지 않는다. 추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휴면 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밤을 처음으로 맞고 있는 그로서는 그 시간을 더 즐기 고 싶은 것이다. 그는 사위지 않고 여전히 숨을 쉬고 있는 불그스름한 불덩이를 물끄러미 바라 보다가, 손가락들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해달라고 103호에게 부탁한다. 111.가동되는 혁명 손가락들이 화톳불을 피우기 위해 땔나무를 찾고 있었다. 그들은 학교 정원사가 쓰는 낡은 창고에서 나무를 찾아내어 잔디밭 한가운데 로 날랐다. 거기에 불을 피우고 그 주위에서 춤을 추려는 것이었다. 장작이 다 쌓이자 몇몇 젊은이들이 종이를 가져왔다. 그러나 나무에 불을 붙 이기는 쉽지 않았다. 종이가 너무 빨리 타버리는 데다, 겨우 생긴 불씨마저 바람 이 꺼버리기 때문이었다. 경찰 기동대를 물리칠 만큼 용감한 그들이었지만 불을 피우는 데는 다들 손방이었다. 쥘리는 혹시 불을 어떻게 피우는가에 관한 설명이 없을까 하고 백과 사전을 뒤적였다. 그 책엔 목차도 색인도 없었기 때문에, 쥘리는 어디쯤에 그것이 나올 지 알 수가 없었다.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은 독자가 던지는 질 문에 반드시 대답해 주는 사전이 아니었다. 마침내 레오폴이 그녀를 도우러 왔다. “밑불이 꺼지지 않게 바람을 막아 주고, 밑으로 공기가 통하게끔 돌 세 개를 놓아서 장작을 받쳐 주어야 해. ” 그러나 불은 한사코 옮겨 붙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쥘리는 이번엔 어떻게든 결판을 짓고 말리라는 심정이 되어 화학실로 갔다. 몰로토프 칵테일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쥘리는 다시 잔디밭으로 돌아와 자기가 급조한 몰로토프 칵테일을 장작 더미 위에 던졌다. 비로소 불이 제대로 옮겨 붙 었다. <확실히 세상에 쉬운 일은 없어>하면서 쥘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화톳불이 교정 안을 오렌지빛으로 물들이자 일제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시위자들은 중앙의 깃대에서 <이성은 지성에서 태어난다>라는 교훈이 새겨진 깃발을 끌어내린 다음, 그 깃발의 양면에 콘서트의 상징인 개미 세 마리가 들어 있는 원을 붙여서 다시 게양하였다. 한마디 연설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2층 교장실의 발코니가 연단으로 아주 제격이었다. 쥘리는 거기로 올라가서 교정에 모인 군중을 향해 말했다. “이제부터 이 학교는 오로지 기쁨과 음악과 축제를 열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될 것임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우리는 시간이 허락할 때까지 이곳에서 어떤 유토피아적인 공동체의 삶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공동체의 목표는 우리 자신을 비롯하여 사람들을 더욱 행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찬동의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 “이제부터 여러분이 좋아하는 일을 하시되, 아무것도 파괴하지는 마십시오. 우리는 여기에 오랜 시간 머물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경우를 생각하면, 시설 들을 훼손하지 말고 온전하게 활용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용변을 보실 분은 교정 안쪽의 우측에 있는 화장실을 사용하십시오. 혹시 쉬고 싶은 분이 계시면, B동의 4, 5, 6층에 기숙사의 공동 침실로 가시기 바랍니다. 다른 분들은 곧바로 축제에 들어가시기를 제안합니다. 우리 모두 아주 흐드러진 노래판과 춤판을 벌 여 봅시다.” 쥘리오 일곱 연주자들은 피곤하기도 하고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할 필요도 있 고 해서, 연습실에 있는 자기들의 악기를 네 명의 젊은이에게 맡겼다. 그들은 아 주 기뻐하며 악기를 맡았다. 그들의 음악은 록보다는 살사에 가까웠지만 그런 대로 상황에 아주 잘 어울렸다. <개미들>은 시원한 것을 마시러 음료 자판기가 있는 카페테리아 근처로 갔 다. 쥘리가 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됐구나, 얘들아.” “이제 어떻게 하지?” 조에가 물었다. 그녀의 볼은 아직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뭘, 그리 오래갈 것도 아닌데. 내일이면 끝날 거야.” 폴은 그렇게 쉽게 생각했지만, 프랑신은 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내일 안 끝나고 오래 지속되면 어쩌지?” 그들은 저마다 약간의 불안감이 담긴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쥘리는 불안한 마음을 떨치려고 애쓰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오래 지속되도록 최선을 다해야지. 내일 아침부터 다시 입시 준비에 들어가 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 지금 여기에서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온 거야.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돼.” 다윗이 물었다. 그럼,네가 생각하고 있는 건 정확하게 뭐니? 축제를 영원히 계속할 수는 없어. 봉쇄된 장소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 당장 해산할 게 아니라면,유 토피아적인 공동체 생활을 시도해 볼 수도 있지 않겠어? 유토피아적인 공동체? 그래,사람과 사람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창출해 보자는 거야. 실험을 한번 해 보자고. 사람들이 함께 있음으로써 더욱 행복해 지는 공동체가 현실적으로 가능 한지를 알아보기 위한 사회적 실험 말이야. 쥘리의 말을 놓고 모두들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밖에서는 살사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사람들의 노랫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나르시스가 입을 열었다. 물론 그건 멋진 일이 될수도 있어.하지만,군중을 다룬다는 게 쉽지는 않아.전 에 청소년 캠프에서 보조교사 노릇을 한 적이 있어.그때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건데,집단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을 통제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야. 혼자서 하면 그렇지.그러나 우리는 여덟 명이야..우리가 굳게 단결하면 우리의 개인적인 능력을 합친 것보다 몇배나 더 강한 힘을 발휘하게 될거야.나는 우리 가 굳게 단결한다면 산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8백명의 사람들이 이미 우리를 따라 우리의 음악세계로 들어왔어.그렇다면,그들이 우리의 유토피아 안으로 따라 들어오지 말란 법도 없잖아? 프랑신은 더 깊이 생각해 보려는 듯 자리에 앉았다. 지웅은 이마를 긁적이며 되물었다. 유토피아라고? 그래,유토피아.“백과사전”에는 그것에 관해 애기가 도처에 나와 있어.그 책 에서 제안하고 있는 사회는 더욱... 그녀가 머뭇거리자 나르시스가 비꼬아 말했다. 더욱 뭐?더욱 상냥한 사회? 더욱 따뜻한 사회? 아니면,더욱 재미 있는 사회? 아니,한마디로 말해서,더욱 인간적인 사회야. 나르시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애들아,아무래도 우리가 잘못 말려든 것 같다. 쥘리는 인도주의적 야심을 감 추고 있었던 거야. 다윗은 쥘리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럼,더욱 인간적인 사회란 어떤 사회를 말하는 거지? 나도 아직 몰라.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쥘리,너 기동대원들하고 싸우다가 어디 다친 거 아니니? 조에가 물었다. 아니.왜? 여기 네 옷에 빨간 얼룩이 있어. 쥘리는 드레스를 돌려 보고 깜짝 놀랐다. 조에 말대로 핏자국이 보였다. 다쳤 다는 느낌도 없었는데,어디에 상처가 난 모양이었다. 이건 상처에서 나온 피가 아니야.그거하곤 달라. 그러면서 프랑신은 쥘리를 복도로 데려갔다. 조에도 두 사람을 따라갔다. 다친게 아니라 너 몸엣것이 나온 것 같은데. 뭐? 뭐가 나왔다고? 너 월경한다고.너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니? 쥘리는 머리를 된통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자기의 육체가 자기를 배반하고 살해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 피는 소녀기의 종말을 알리는 피였다. 그 녀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군중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그녀의 기관이 그녀를 배신했다.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무엇보다 저주스럽게 여겼는데,그 녀의 몸이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만 거였다. 쥘리는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거칠게 쉬었다. 그녀의 가슴이 힘겹게 오르내 리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프랑신이 다른 친구들을 소리쳐 불렀다. 빨리 와 봐.쥘리에게 천식 발작이 일어났어.쥘리의 방톨린을 찾아다 줘. 쥘리의 배낭은 다행히 연습실의 드럼 아래에 있었다. 그들은 배낭을 뒤져 방 톨린의 안개뿜이를 찾아냈다. 그러나 그것을 쥘리의 입에넣고 아무리 눌러도 방 톨린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안개뿜이는 비어 있었다. 방..톨..린 좀. 주위의 공기가 희박해 지고 있기라도 하듯 그녀의 숨이 점점 가빠졌다. 공기는 우리가 가장 먼저 익숙해 지고 먼저 무감각해지는 생명의 요소다. 세 상에 나오면서 허파꽈리들을 부풀려 고고의 소리를 지르고 나면,우리는 평생토 록 그것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하루 24시간 내내 우리에겐 공기가,그것도 되도록이면 깨끗한 공기가 필요하 다. 바로 그 공기가 쥘리에겐 충분치 않은 거였다. 그녀는 한 모금의 공기를 얻 기 위해 엄청난 힘을 쏟아야만 했다. 조에는 교정으로 나가서 누구든 방톨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다윗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24시간 왕진하는 SOS 의사들과 SOS 응급조치반 에 전화를 걸었지만,모든 회선이 포화 상태였다. 밤에는 약국들이 번갈아 문을 여니까 이 구역에도 당번 약국이 있을 거야. 프랑신이 조바심을 내며 말하자,다윗이 지웅에게 권했다. 네가 쥘리를 데려가라.네가 우리 중에서 가장 힘이 좋으니까,쥘리가 못 걸으면 어깨에 메고 갈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여길 어떻게 빠져 나가지? 앞뒤를 다 경찰이 막고 있으니 말이야. 아직 문이 하나 남아 있어.날 따라와. 다윗은 지웅과 쥘리를 자기들의 연습실로 데리고 갔다. 그가 가구 하나를 밀어내자 출구가 하나 나타났다. 내가 우연히 찾아낸 거야.이 통로를 따라가면 틀림없이 이웃 건물의 지하실이 나올거야. 쥘리는 가냘픈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지웅은 그녀를 어깨에 메고 지하 통 로로 들어갔다. 갈림길이 나왔다. 왼쪽에서는 수챗물 냄새가 올라왔고,오른쪽에 서는 지하실의 곰팡내가 났다. 그들은 오른쪽을 선택했다. 112.불가에서 잉걸불의 불그레한 빛 속에서 그들은 손가락들에 관한 정보를 나누며 이야기 꽃을 피운다. 암개미 103호가 손가락들의 관습이며 기술에 대해 이야기한다. 5호는 죽음을 예고하는 하얀 게시판을 다시 들먹이면서 개미 세계에 닥쳐올 재앙을 환기시킨다. 코르니게라 섬의 불개미들은 자기들이 태어난 도시가 파괴될 위험에 처해 있 음을 알고 두려움에 젖어 든다. 103호는 그런 위협만을 생각하지 말고 손가락들에게 얻을 수 있는 이익도 염 두해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손가락들은 우리 문명의 발전에 기여할 만한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불 을 사용한 덕분에 우리 열셋이서 많은 난쟁이개미들을 물리치지 않았던가.그것 역시 손가락들의 기술에서 도움을 받은 것이다. 물론 지렛대를 사용한다든가 캐터펄트 장치를 모방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한 대로다. 하지만 예술과 해학과 사랑이 그렇듯이 그런 기술 을 배우는 것도 시간 문제라고 생각한다. 손가락들이 우리와 공정하게 경쟁하는 것을 받아들인다면,결국은 그 모든 것들을 배우고 이해하게 될것이다. >> <<손가락들에게 접근하는 데는 위험이 따르지 않는가?>> 6호가 불에 타서 끝이 무지러진 다리를 문지르며 묻는다. 103호는 꼭 그렇지는 않다면서,개미들이 영리하기 때문에 종당에는 손가락들 을 길들일 수 있을 거라고 대답한다. 그때,24호가 더듬이 하나를 들어올리며 묻는다. <<그들과 신에 대해서 이야기해 본 적이 있는가?>> 신이라니? 다른 개미들은 모두 그게 무엇인지 궁금해 한다. 어떤 기계의 이름 인가? 아니면,어떤 장소나 식물의 이름인가? 수개미 24호가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 준다. <<옛날에 베로캉 개미들이 어떤 손가락들과 접촉한 적이 있었다. 개미들과 의사 소통을 할 줄 알았던 그 손가락들은 자기들이 개미들의 지배자 이며 창조주임을 믿게 했다. 자기들이 거대하고 전능하다는 이유로,그들은 개미 들에게 맹목적인 순종을 강요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개미들의 신이라고 주장했 다. >> 개미들은 더욱 호기심을 느끼며 바싹 다가든다. <<신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암개미 103호가 설명한다. <<그것은 손가락들 특유의 개념이다. 그들은 자기들 위에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존재하며 그 힘이 자기들의 삶을 지배한다고 믿는다. 그 힘을 그들은 신이라고 부른다. 어떤 전지전능한 존재에 대한 그 믿음은 그 들 문명의 중요한 토대를 이루고 있다. >> 개미들은 신이라는 게 어떤 것일까를 상상해 보려고 애쓰지만,그것이 실제로 어떤 이익을 가져다 주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들 위에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도대체 어떤 점에서 도움이 되는 걸까? 암개미 103호는 어설프게나마 자기 깜냥대로 대답을 제시한다. <<그런 생각은 아마도 손가락들의 이기주의가 낳은 결과일 것이다. 손가락들은 본디 이기적인 동물이다. 그 이기주의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해 지자,그들은 겸손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그래서 자기들을 창조한 전능한 존재를 상정하게 되었을 것이다. >> <<문제는 손가락들 중에는 그와 똑같은 개념을 우리에게 주입해서,우리의 신 임을 자처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 수개미 24호의 그 지적에,103호는 손가락들이 다른 종들을 지배하려는 생각을 아직 버리고 있지 않음을 인정하면서,개미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손가락들 중 에는 독한 자와 순한 자,어리석은 자와 영리한 자가 있고,남에게 너그럽게 베푸 는 자가 있는가 하면 남을 이용해서 제 이익을 챙기는 자도 있는데,24호가 이야 기한 손가락들은 바로 그 착취자들일 거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들 중의 몇몇이 개미들의 신으로 자처했다는 사실만으로 손가락 들을 부정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 행동의 다양성은 오히려 그들의 정신 이 풍부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일 수도 있다. >> 다른 개미들도 이제 어렴풋하게나마 신의 개념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 들은 순진하게도 손가락들이 정말로 자기들의 신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암개미 103호가 설명을 덧붙인다. <<개미와 손가락 두 종은 평행하게 진화의 길을 걸어왔다. 따라서 손가락들 이 우리를 창조했을 가능성은 없다. 우리가 손가락들보다 지구상에 훨씬 더 먼 저 나타났다는 점만 놓고 보더라도 그들은 우리의 신이 될 수 없다. >> 암개미가 그렇게 설명했음에도 좌중의 의혹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신을 믿는 것의 이점은 불가해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몇 몇 개미들은 벌써 번개나 불 같은 것을 발현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암개미 103호는 손가락들이 약 3백만 년 전에 출현한 종임에 비해 개미들은 이미 1억 년 전부터 존속해 왔다는 사실을 되풀이해서 강조한다. <<어떻게 창조주보다 피조물이 먼저 출현할수 있단 말인가? >> 다른 개미들은 103호의 주장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그런 것을 어떻게 알았느 냐고 묻는다. 103호는 손가락들의 텔레비젼에 나온 다큐멘터리를 보았다고 해명 한다. 어쨌거나 불 가에 모인 개미들의 마음은 착잡하다. 손가락들이 자기들의 창조 주라고까지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그 <풋내기>종이 아주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고 개미들이 모르는 것을 많이 알고 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개미 24호만은 생각이 다르다. <<내가 보기에 우리가 손가락들을 부러워할 까닭은 전혀 없다. 만일 두 종이 만난다면,손가락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줄 것보다는 우리가 그들에게 가르쳐 줄 것이 더 많다. 그들의 세 가지 불가사의라는 예술과 해학과 사랑도 그리 대단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들이 무어라는 것만 알아내면 우리는 즉시 그것들 을 모방하고 개선 할수 있을 것이다. >> 동굴 한쪽에서는 코르니게라 섬의 개미들이 불씨를 나뭇잎 위로 끌어올리고 있다. 갈대밭 전투 때 불꽃 창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그들은 여러 재료에 불 을 붙여 보면서 불의 성능을 시험하는 중이다. 그들은 6호의 가르침을 받아 가며 나뭇잎과 꽃,흙,뿌리를 차례로 태우고,푸르 스름한 연기와 독한 냄새를 피워 낸다. 어쩌면 그들은 손가락들 세계에서 최초 의 발명가들이 했던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손가락들은 복잡한 동물임에 틀림없어.>> 코르니게라 개미 하나는 위쪽 세상에 대한 그 모든 이야기에 싫증을 느끼고 그렇게 맥없이 페로몬을 발하더니,다른 개미들이야 이야기를 하건 불장난을 하 건 자기는 잠이나 자야겠다며 몸을 웅크린다. 113.백과사전 생일케익 생일 때마다 촛불울 밝히고 불어 끄는 것은 인간의 특성을 아주 잘 드러내는 의식 가운데 하나다. 그 의식을 통해서 인간은 자기가 불을 일으킬 수도 있고, 입김을 불어 끌 수도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주기적으로 환기시킨다. 불을 제 어하는 아기가 책임있는 존재로 발전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통과 의례중의 하나 다. 반대로 노인이 되어 촛불을 불어 끄기가 어려운 만큼 숨이 딸리는 것은 이 제 활동하는 인구에서 사회적으로 배제될 때가 되었음을 뜻한다. 에몽드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 제3권 114.공기가 부족하다 지웅은 쥘리의 어깨를 걸쳐 메고 지하실을 빠져 나왔다. 빠져 나온곳은 다행 히도 기동대의 버스들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는 새벽 세 시가 다 된 그 시각에도 문을 열고 있을 약국을 찾아 바삐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가도 문을 연 약국이 눈에 띄지 않자,지웅은 이판사판에 이른 심정이 되어 닫혀 있는 한 약국 문을 마구 두드렸다. 위층 창문이 열리면서 파자마 차 림의 한 남자가 몸을 내밀었다. 그러다 이웃 사람들 다 깨우겠소.소란을 피운다고 될 일이 아니오.이 시간에 문을 연 약국은 나이트클럽 안에 있는 약국밖에 없소. ..정말 나이트클럽 안에 약국이 있어요? 그렇다니까요.그건 새로운 의료 서비스요. 단지 콤돔을 팔기 위해서라도 거기 에 약국이 있으면 편하겠다고 생각해서 만들어진 거요. 그럼,그 나이트클럽이 어디 있나요?」 오른쪽 길 끝에 가면 막다른 골목이 하나 나올거요.바로 거기요. 헤매고 자시 고 할 것도 없이 금방 찾을 거요.나이트클럽 이름은 <지옥>이요. 아닌게아니라,그 남자가 일러준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서자,박쥐날개를 단 작은 악마들 이 <지옥>이라는 글자를 들러싸고 있는 네온사인이 금방 눈에 띄었다. 쥘리는 고통에 겨워 신음하고 있었다. 공기를 줘! 제발,공기 좀! 지구에 넘쳐 나는 공기가 어찌하여 쥘리에겐 이토록 부족하단 말인가? 지웅은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고 마치 춤추러 온 한 쌍의 연인처럼 두 사람의 입장료를 지불했다. 귀와 코에 구멍을 뚫어 고리를 달고 얼굴에 문신을 새겨 넣은 문지기는 쥘리의 비참한 몰골을 보고도 전혀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 다. 아마도 <지옥>을 자주 드나드는 손님들은 술이나 마약 때문에 반쯤은 인사 불성이 되어 입장하기가 일쑤인 모양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난 널 사아-랑해->하는 가수 알렉상드린의 속삭이는 듯한 음성이 흐르고, 발연기에서 나온 연기를 후광처럼 휘감아 도는 속에서 젊은 남 녀들이 쌍쌍이 껴안고 춤을 추고 있었다. 디스크 자키는 사람들끼리의 대화가 불가능할 만큼 음량을 높이고,조명을 낮추어 자그마한 홍등들만 깜박이게 해놓 았다.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어둠과 소음 속에서는,할 애기가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과 상대를 유혹하기에 그다지 유리한 조건을 타고 나지 않은 사람들도 블루스를 이용해 상대를 유혹할 수 있는 기회 를 갖게 되는 것이었다. <내 사랑,난 널 사아-라앙해애-,마이 러어-브>하고 알렉상드린이 음절을 토막 치며 간드러지게 소리를 끌고 있었다. 새롭게 인기를 얻고 있는 <열애>였다. 디스크 자키는 자기 임무에 충실 하고자, 아직 두 눈금의 여유가 있는 음량 조절 버튼을 마저 돌리고, 조명의 세기를 더욱 낮추어 유리 모자이크로 덮인 둥 그런 전등만이 희미한 빛을 발하게 해놓았다. <안아 줘요, 그래요, 꼭 안아줘요, 내 영원한 사랑, 내 평생의 사랑. 이렇게 뜨 거운 사랑이 나에겐 필요했어요>라고 알렉상드린이 절규하고 있었다. 그 음성 은 그녀의 진짜 목소리가 아니라 음성 합성 장치로 변조해서 가창력 있는 가수 처림 느껴지게 만든 가짜 소리였다. 쥘리는 자기가 나이트클럽에 와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문득 지웅의 품에 안기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쥘리는 그 한국인을 가만히 바라보았 다. 지웅은 잘생긴 남자였다. 어떤 야성미 같은 것이 느껴지는 호랑이 상호였다. 평소에 만나던 곳과는 전혀 다른 장소에서, 게다가 그처럼 특별한 상황에서 그 를 바라보고 있으니 매력이 더욱 돋보였다. 쥘리의 마음에는 복잡한 감정이 착종하였다. 왠지 부끄럽기도 하고 뒤늦게 여자가 되였다는 것이 두렵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지웅을 힘의 원천으로 <소 모하고 싶다>는 욕구도 생겨났다. 그것은 처음으로 느껴 보는 거의 동물적인 욕구였다. 지웅이 말했다. 알아.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어떤 사람하고 살갗을 맞대든 간에, 네가 피부 접촉 자체를 견디지 못한다는 거 알아, 겁내지 마. 너한테 춤추자고는 안 할 테 니까. 그녀가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려는 찰나에, 경찰관 두 명이 갑자기 나타났다. 약사는 두 습격자의 인상 착의를 일러 주고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를 알려 주었 다. 지웅은 플로어 한가운데의 가장 어두컴컴한 곳으로 쥘리를 데리고 가서 다짜 고짜 껴안았다. 경찰의 눈을 속이자니, 예의고 범절이고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디스크 자키는 플로어의 모든 조명을 다시밝혔다. <지옥>의 인간 군상이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성도착자, 사디즘에 마조 히즘이 겹친 동성 연애자, 이성 연애자, 양성 연애자, 남장 여자, 여장 남자, 남장 은 하고 있지만 스스로를 여자라고 생각하는 남자, 여장은 하고 있지만 스스로 를 남자라고 생갓하는 여자 등 모두가 땀을 흘리며 몸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경찰관들은 이제 춤추는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두 <개미들>이 그들의 눈길을 끌게 되면, 체포를 피할 수 없게 될 것은 물론이고 이제까지의 일이 단숨에 와해될 가능성이 많았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쥘리는 평소의 그 녀와는 전혀 다른 여자로 돌변하였다. 그녀는 그 한국인 남학생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그의 입술에 와락 입을 맞추었다. 지웅은 그녀의 갑작스런 행동 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경찰관들은 그들의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입맞춤은 계속되었 다. 쥘리는 개미들도 사람의 입맞춤과 같은 행동, 곧 영양교환을 한다는 것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개미들은 입과 입을 맞대고 영양물을 게워 올려 서 로에게 넘겨준다고 했다. 사람들이 입을 맞출 때도 그와 비슷하게 무언가를 주 고받는지는 모르지만, 쥘리는 아직 그런 수준의 입맞춤까지는 할 수 없을 것 같 았다. 경찰관 하나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그들을 살폈다. 두 사람은 눈을 감았다. 마치 위험이 닥치면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땅속에 머리를 박아 버리는 타조들 같았다. 알렉상드린의 노랫소리도 더 이상 귀에 들 어오지 않았다. 쥘리는 지웅이 자기를 꼭 껴안아주기를, 우람한 팔로 더욱 힘껏 껴안아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경찰관들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그들은 우연히 서로 너무 가까이 갔다가 찰싹 달라붙어 버린 두 자석이었던 양, 어색하게 서로 떨어졌다. 지웅은 플로어의 소음을 뚫고 자기 말을 전하기 위해 그녀의 귀에 대고 소리 쳤다. 미안해. 뭘, 상황이 그러했기 때문에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지웅은 그녀의 손을 잡고 <지옥>을 떠나, 학교를 빠져 나올 때 이용했던 그 지하실을 통해 다시 <혁명>에 합류하였다. 굽으로 쳐서 한쪽 칸에서 다른 쪽으로 넘길 수 있는 공,끈에 매달아 놓은 알록 달록한 기하학적 형태의 물건 따위였다. 그는 말들이 서로 친해지고 상대를 바꿔 가 놀 수 있게 하려고 말들의 자리 를 규칙적으로 바꿔 주었다. 한 달이 지나자, 네 마리말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말들은 함께 마차를 끄는 일을 직수굿하게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 라, 놀이를 하듯 일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 실험은 전쟁이나 적대 관계가 놀이의 원초적인 형태일 뿐임을 입증 하는 것일 수도 있다.우리는 다른 놀이들을 고안해냄으로써 그 원초적인 단계를 쉽게 넘어설 수 있을직도 모른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정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3권 116. 흥분의 도가니 불 가에 앉은 개미들이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 그림자를 줄곧 바 라보고 있던 7호는 그와 똑같은 것을 동굴 벽에 만들어 볼양으로 불 가에서 식 은 숯조각 하나 를 집어 든다. 작업이 끝나자, 그는 자기 작품을 동료들에게 보 여 다.동료들은 진짜 곤충이 벽에 달라붙어 있는 줄 알고, 그것과 더듬이 대화 를 하려고 한다. 7호눈 그게 무엇인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설명은 결코 쉽지가 않다. <이건 진짜 곤충이 아니라, 내가 그림자를 본떠서 만들어 낸 움직이지 않는 형상일 뿐이다.> 사물을 형상화하는 행위가 개미 세계에서 태동하고 있는 순간이다. 지금은 처 음이라 라스코 동굴의 벽화와 비슷한 수 이지만, 나중에 가 그들도 그들 나름 의 독특한 표현양식을 찾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7호는 방금 숯 조각을 세 번 놀려 개미 회화를 창시한 셈이다. 그는 자기 작품 을 오랫동안 관찰하다가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한다. 검정색만으로는 사물을 표현하기에 충분치 않다. 색깔을 첨가해야 할 듯하다. 그렇다면 색깔을 어떻게 넣을 것인가? 그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방안은 곤충의 피림프 짜내는 것이다. 마침 잿빛 개미 한 마리가 그의 그림을 감상하러 왔다. 그는 그에 칠하자, 그 부분이 한결 도드 라져 보인다.꽤 성공적이다. 잿빛 개미로서는 별로 원통하게 여길 것이 없다. 예 술을 위해 자기 몸을 바친 최초의 개미가 되었으니 말이다. 7호의 성과는 다른 개미들에게도 자극을 주었다. 창조적인 열의가 모두에게 용솟음치고,불을 시험하는 축과 그림을 그리는 축과 지렛대를 연구하는 축 사이 에 선의의 경쟁이 벌어진다. 모든 일이 가능해 보이고,정치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최고 수 에 도달해 있다 고 믿었던 그들의 사회가 갑자기 아주 낙후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열두 탐험개미는 각자 자기가 특별히 좋아하는 일을 찾아내었다. 암개미 103호는 그들을 격려하는 한편 자기가 경험한 바를 전수하기에 바쁘 다.5호는 으뜸가는 조수가 되었다. 6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발군의 불 기술 자다. 7호는 그림에 남다른 열정을 보이고 있다.8호는 지렛대를 연구하고 9호는 바퀴에 관해 탐구한다. 10호는 손가락들에 관한 동물학 기럭 페로몬을 만드는 데 관심이 많고, 11호는 둥지를 짓는 여러 가지 방식에 많은 흥미를 느끼고 있 다. 12호는 항행술에 매력을 느끼고 있는 터라 자기들이 타본 여러 가지 배에 관해 기록을 남길 생각이고, 13호는 끄트머리에 불을 붙인 잔가지와 거북을 이 용한 군함 같은 신무기에 대해서 더 깊이 연구할 작정이다. 14호는 다른 종들과 의 대화에 의욕을 보이고,15호는 여행중에 맛본 새로운 음식들에 관한 면밀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16호는 이곳까지 오는 동안 자기들이 이용했던 냄새길의 화학적인 지도를 만글려고 애쓰는 중이다. 암개미 103호는 손가락들에 관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계속 이야기한다. 10호는 자기의 동물학 기억 페로몬에 103호가 전해 주는 새로운 정보를 담는다. 소설 손가락들은 때로 사실이 아닌 이야기들을 지어내기도 한다. 그들은 그것을 소 설 또는 시나리오라고 부른다. 그들은 인물과 배경을 지어내고, 허구적인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을 만들어 낸 다. 소설 속에 나오는 것들은 어디에도 재하지 않는 것들이기가 십상이다. 그렇 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 이익이 되는 것일까?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그것도 예술의 한 형태 이다. 소설이나 시나리오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103호가 영화라는 것들을 보고 알아낸 바에 따르면, 그것들은 농담, 즉 손가락 들에게 경련을 이르키는 짤막한 이야기들과 똑같은 법칙에 따라 구성되는 걱 같 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시작과 중간과 뜻밖의 결말이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수개미 24호는 암개미 103호가 전해 주는 정보에 주의 깊게 더듬이를 기울이 고 있다.그가 손가락 세계에 대해 103호와 똑같은 열정을 지니고 있는 건 아니 지만, 103호가 가르쳐 주는 것을 바탕으로 허구적인 이야기, 곧<소설>을 꾸며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그런 생각이 들고 나자, 개미 세계 최초의 페로몬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친다, 구것의 윤곽이 벌써 분명하게 떠오른다. 그 소설은 더듬이에서 더듬이로 전해 내려온 개미 사회의 위대한 전설의 형식으로 구성된 손가락들의 모험담이다.손가락들에 관한 정보도 있고, 생식개미 특유의 감수성도 지니고 있 기 때문에, 손가락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험을 얼마든지 상상해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벌싸 그 소설의 제목까지 생각해 냈다. 그는 그냥 간단하게 <손가락>이 라는 제목을 붙일 생각이다. 암개미 103호눈 7호의 그림을 보러 간다. 그 개미 화가는 여러 색깔의 물감을 필요로 하면서도 그것을 구하지 못해 애 를 먹고 있다, 103호는 물감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꽃가루를 노랑 물감으로, 풀잎을 초록색 물감으로 사용하고, 개양귀비꽃을 짓이겨서 빨갈 물감으로 쓰면 될 것이다> 7호는 그 물감들에 침과 분비물을 섞어 끈끈하게 만든 다음, 자기를 돕도록 설득한 두동료와 함께 플라타너스 잎새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 그림 의 제목은 <반전대장정>이다. 7호는 먼저 개미 세마리를 그리고, 개양귑 꽃잎에 백악을 섞어 손가락을 상징하 는 분홍빛 공을 그린다. 그런 다음, 꽃가루를 이용해서 개미들괴 손가락 사이에 노란 줄 을 긋는다. <이건 불이다. 불은 우리와 손가락들을 이어 주는 끈이다.> 7호의 작품을 요모조오 살펴보다가, 암개미 103호는 한가지 생각을 떠올린다. <이것을 <반전 대장정>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손가락 혁명>이라고 하는 편 이 나을 듯하 다. 손가락들에 관한 지식은 결국 우리 사회에 격변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기 때 문이다.> 그들은 불 가에 모여 다기 불에 관한 토론을 벌인다. 그들의 일부는 아직도 불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불을 꺼버리고 사용을 금지하자며 격렬한 페로몬을 발한다. 그 바람에 친화파와 반화파 사이에서 난투가 벌어졌다. 암개미 103호로서는 맞붙어 싸우는 개미들을 떼어놓을 재간이 없다. 결국 개 미 세마리가 희생되고 나서야, 난투가 중단되고 좀더 차분한 토론이 계속될 수 있었다. 한쪽에서는 불이 금기라는 주장을 고집스럽게 되풀이하고, 다른쪽에서는 불의 사용은 현대적인 진보가 걸린 중여한 문제라면서 손가락들이 두려움 없이 불을 사용하고 있다면 개미들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대꾸한다. 친화파는 예날에 불을 금기로 선언한 탓에 기술적인 진보가 거기어졌다면서, 만일 1억 년 전에 개미들이 불을 객관적으로 연구하고 그것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진지 하게 검토했더라면 개미들 역시 손가락들이 자랑하는 예술과 해학과 사랑을 향 유하게 되었리라고 주장한다. 그에 대해, 반화파는 불을 잘못 사용하면 숲을 일거에 태워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과거의 사건들이 증명하고 있다면서, 개미들은 경험이 충분치 않아서 불을 슬기롭게 사용할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러자, 친화파는 자기들이 불을 다운 뒤로는 아무런 피해 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맞받는다. 오히려 불 덕분에 난쟁이개미들을 물리쳤고, 여 러 가지 새로운 물건도 만들 수 있게 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불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되 안전에 더욱 만전을 기하자는 건에서 의견의 일치 보았다. 그들은 땅바닥에 흩어져 있는 솔잎에 불이 붙는 것을 막 기 위해 불덩리 주위레 도랑을 파기로 했다. 한 친화파 개미는 고기를 구워 먹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내고,여치 고기 한 토막을불덩이 쪽으로 가져가서는 고기가 아주 잘익있다고 알려 온다. 그러나 고기 맛이 어떠한지를 동료들에게 알려 줄 겨를도 없이, 불덩리에 너무 다가가 있던 그의 다리 하나에 불이 붙는 바람에 그 개미는 위 속에 고기를 담은 채 몇 초만에 녹아 보린다. 암개미 103호는 그 소동을 신중하게 지켜보며 생각에 잠긴다. 손가락들의 관 습과 기술에 대한 발견은 103호 자신도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모를 만큼 엄청 난 격변을 일으키고 있다. 어찌 보면, 그들은 갈증에 허덕이고 있다가 물 웅덩이를 발견하고 서둘러 달려가는 곤충들과 비슷하다. 물을 너무 급히 마시다 보면 그 자리에서 죽어 버릴 염려가 있다. 기관이 물에 다시 익숙해 지도록 천천히 마셔야 한다. 손가락 혁명의 일꾼들 이 그런 점에 유의하지 않으면, 오히려 모든 것이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 어째거나 분명란 것은, 진보를 향한 뜨거운 열기 속에서 그가 한무리의 동료 들과 함께온전히 밤을 지새우고 있다는 것이다. 동굴 안은 해가 난 것처럼 환한 데, 울퉁불퉁한 바닥 너머로 보리는 밖에는 어둠만이 있을 뿐이다. 117. 개미 혁명 제2일 어둠이 스러지고 동녘 하늘에 해가 천천히 솟아 올랐다. 아침 7시, 퐁템블로 고등학교에서의 농성이 이틀째를 맞고 있었다. 쥘리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꿈속에서 그녀는 지웅과 함께 있었다. 지 웅은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하나 끄르고 젖가슴을 압박하는 브래지어의 흑을 풀더니,천천히 알몸으로 만들고 자기 입술을 그녀의 입술 가까이로 가져온 다. 안돼.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몸을 비틀면서 여리게 반항한다. 그가 덤덤하게 되받는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결국 이건 꿈이고 결정은 네가 하는 거니까. 그 말이 어찌나 생경하게 들리던지, 쥘리는 즉시 자기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 을 깨달았다. 쥘리가 깨어 있는데. 어서들 와 봐. 누군가 그렇게 소리치 서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쥘리는 잔디밭에 판지와 신문지를 깔아 놓고 그 위에서 한뎃잠을 잤다는 사실 에 세삼스럽게 놀라면서,(여기 어디지? 이게 어떻게 된거지?)하고 물었다.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마치 그녀를 지켜주려는 듯 그녀 주위에 몸을 웅크리고 누 워 있었다. 비로소 간밤의 일들이 모두 떠오르면서 편두통이 엄습해 왔다. 아, 이 두통! 집으로 돌아가서 방에 틀어박히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끌신을 신고 거품을 많 아 낸 크림 커피를 큰 사발에 담아 홀짝러리면서 작은 초콜릿 빵을 먹고 라디오 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듣고 싶었다. 그녀는 달아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버스를 타고, 세상에 무슨 일이 일 어났는지 알기 위해 신문을 사고, 여느 때의 아침처럼 빵집 아주머니랑 수다를 떨고 싶었다. 쥘리는 간밤에 자기가 분장고 지우지 않은 채 잠이 들었던 것을 깨닫고, 개운 치 않은 기분을 느꼈다. 그 때문에 얼굴이 종기 같은 것이 돋아난 듯했다. 그녀 는 먼저 클레징 크림을 달라고 한 다음, 아침 식사를 부탁했다. 사람들은 그녀에 게 고양이 세수를 하라고 냉수 한 컵을 갖다 주고, 아침을 에우라고 플라스틱 컵에 가득 담긴 커피 그것도 물이 미지근해서 잘 녹지도 않은 냉동 건조 커피를 자겨왔다. 그녀는 <하긴, 지금 찬밥 더운밥 가 처지가 아니지>하면서 한숨을 푹 쉬고 커피를 삼켰다. 아직 잠기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교정을 둘러보니, 그곳의 술렁거리는 분위기 가 차츰 차츰 다기 느껴졌다. 깃대에서 펄럭이고 있는 것은 원과 삼각형과 개미 세마리가 들어있는 바로 개미 혁명의 깃발이었다. 그 깃발을 보면서 쥘리는 한 순간 자기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일곱<개미들>이 구녀가 있는 곳으로 왔다, 밖을 살피러 가자. 레오폴이 철책문의 담요 자락을 들추었다. 쥘리는 경찰관들을 보았다. 그들이 공격해 오고 있었다.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쪽에세 요란스럽게 아침 잠을 깨우러 온다면, 이쪽에서도 저들의 정신이 번쩍나게 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합기도 클럽위 여학생들은 소방 호스에 다시 물을 장전한 다음, 사정 거리에 들어온 경찰관들을 향해 물을 뿜어 댔다, 경찰관들은 곧바오 퇴각했다. 간밤부터 되풀이된 싱거운 일진일퇴였다. 승리는 다시 농성자들 쪽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쥘리를 번쩍 들어서 2층 발코니에 올려 주었다, 아침의 첫 숭리에 그녀가 짤막한 연설을 보탤 차례였다. 아침부터 경찰은 우리를 이곳에서 쫓아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시 올 것이고, 우리는 다시 그들을 물리칠 것입니다. 저들에게 우리는 아주 성가신 존재입니다. 우리가 기성 질서에서 벗어난 자유의 공간을 만들어 냈기 때문입니 다. 우리는 이제 함께 생활하면서 무언가 이루어 보기 위한 멋진 실험실 하나 를 갖게 된 셈입니다. 쥘리는 발코니 가장자리로 나아갔다. 우리는 이제껏 아무도 해보지 않은 실험을 할 것입니다. 대중을 상대로 말하는 것은 대중 앞에서 노래하는 것과는 다른 행위였다. 그 러나 그것역시 그 행위 자체에 도취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여러분, 새로운 형태의 혁명을 창출합시다. 그것은 폭력이 없는 혁명, 짭새들 에게 신물이 난 젊은이들의 혁명이기도 합니다. 다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닙니다. 이것은 환경 오염과 핵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운동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목청을 높였다. 이것은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혁명입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대자본가들에게 맞서는 계급 혁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학교를 점거한 것은 학교가 민중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착취를 상징하기 때문 입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어수선헤졌다. 서로 모순되기 까지 하는 이러저러한 명분을 위해 그 농성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벌써 증오심이 번득이고 있었다. 프랑신이 쥘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들은 목자도 없고 목표도 없는 양떼와 같아. 이들은 무슨 일이든 할 비가 되어 있어 조심해! 사태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 다윗이 덧붙였다. 이들에게 어떤 상, 어떤 통합적인 테마, 어떤 명분을 마련해 주는 것은 바로 우리 몫이야. 빨 해야 돼. 사태가 악화되기 전에. 그래. 우리의 뜻이 왜곡되지 않도록 우리 혁명이 의미를 이젠 분명히 규정해 야 해. 지웅이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쥘리는 자신이 궁지에 빠져 있는 것처러 느겼다. 그들은 그녀가 목표를 정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경찰과 싸우기를 바라는 어떤 사람의 칼을 세운 눈길이 그녀를 찔러왔다. 그 녀가 아는사람이었다. 약점이 많은 선생님들을 괴롭히는 데에 앞장서는 바로 그 비열한 학생들 중의 하나였다. 용기도 없고 신념도 없는 주제에, 하급생들을 을 러메어 돈이나 갈취하는 좁쌀뱅이 깡패였다. 더 멀리에서 환경 운동가와 계급투 쟁의 전사가 보내오는 빈정거림 섞인 눈길도 그리 곱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 혁명을 깡패들이나 정략가들에게 넘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군중을 그들 마음대로 이끌고 가도록 방치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성서에 이르되, 테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하지 않던가. 모든 일에는 먼저 이름 이 있어야 한다. 이름을 짓자. 그렇다면, 이 혁명을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기는 했다. <개미 혁명>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콘서트의 제목이었고, 포스터와 아마 들의 셔츠에 적힌 이름이었다. 그것은 모두 를 하나로 묶어 주는 단결의 노래였고, 깃발의 모티프였다. 쥘리는 손을 들어 술렁대는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아닙니다, 여러분. 그런 낡은 명분들을 내새워 우리의 힘을 분산 시키지 맙시 다. 그런 명분들은 이미 아무 열매를 맺지 목하는 헛된것임이 드러났습니다.새로 운 혁명에는 새로운 혁명에는 새로운 목료가 필요합니다. 군중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개미들과 같습니다. 우리는 작고 약하지만, 단결하면 강합 니다.우리는 형식주의와 기성의 권위보다는 창조와 소통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 다. 우리는 개미들은 우리에게 하나의 길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길은 우리에 게 우익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길은 이제껏 한번도 시험해 보 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쥘리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개미들은 작지만, 함께 모이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냅니다. 개미들은 우리 에게 다른 가치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조직, 다른 소통방식, 개체간의 관계를 유지하는 다른 방식을 보여 줍니다. 그녀의 말은 추상적이고 막연했다.그 허점을 노리고 선동가들이 앞다투어 목 청을 높였다. 그럼, 환경 오염문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인종 차별 문제는요? 계급 투쟁을 상정하지 않는 혁명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도시 변두리 빈민 지역의 문제를 방치하면 안 됩니다. 옳소! 쥘리는 문득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에서 읽은 한 구절을 떠올 렸다. <군중을 조심하라. 군중은 각각의 사람들이 지닌 자질을 넘어서기보다는 그 자질들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군중의 지능 지수는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 의 지능 지수를 합친 것보다 못하다. 개인이 모여 군중을 이루면, 1 + 1 = 3이 아니라 1 + 1 = 0.5이다.> 날아다니는 개미 하나가 쥘리 옆으로 지나갔다. 그녀는 그 개미가 온 것을 자 기를 둘러싸고 있는 잔연이 자기에게 지지를 보내는 것으로 생각했다. 여기서 우리가 하려는 것은 개미 혁명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아니고 오로지 개미 혁명입니다. 군중이 다시 술렁거렸다. 이제 모든 게 판가 나려는 참이었다. 쥘리는 만일 판 세가 뜻대로 돌아가지 아노을 경우에는 모든 것을 작파하리라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쥘리는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렸다.그녀의 주위를 돌던 개미가 손가락 위에 내 려앉았다.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개미 같은 미물들 조차 그녀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 지 아니한가. 아마 들의 리더인 엘리자벳이 소리쳤다. 쥐리가 옳습니다. 개미 혁명 만세!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쥘리는 낙하산을 펴기 위해 손잡이를 당기는 기분으 로 외쳤디. 선견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군중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다시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우리가 바로 선견자다! 발명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바로 발명자다! 쥘리는 노래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새로운 선견자다. 우리는 새로운 발명자다. 우리는 경화증에 걸린 이 낡은 세상을 조금씩 갉아먹는 작은 개미들이다. 노래가 다시 시작되고 보니, 쥘리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우두머 리가 될 수 도 있을 볍한 사람들은 그녀와 경쟁할 처지가 못되었다.진작에 음악 수업이라도 받아 두었더라면, 구녀와 주도권을 다퉈 볼 수도 있었으련만. 간밤의 열광적인 분위기가 일거에 되살아났다. 가까이에 있던 귀뚜라미마저 뭔가 흥미 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끼는 듯 찌르륵 찌르륵 울기 시작했다. 군중은 다같이 개미 혁명의 찬가 합창하기 시작했다. 쥘리는 주먹을 치켜 들었다. 거대한 트럭을 몰아가는 듯한 위태위태한 기분이 들었다. 조작 하나한에 엄청난 힘과 주의를 기울여야하고,무엇보다 길을 잘못 드는 일이 없어야 한다. 군중을 이끄는 법을 가 쳐 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으련만, 대형 트럭이라면 교습소에 가서 운전을 배우고 면허를 딸 수 있지만,<혁명>면허는 어디 가서 딴 단 말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역사 수업을 더 열심히 들을 걸 그랬다, 그랬으면, 예전의 혁명가들이 이와 똑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알게 되었을지도 모르 는데 말이다. 트로츠카나 레닌,체 게바라, 또는 마오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했을까? 환경 운동,도사 빈민은동 따위를 외치던 선동가들은 얼굴을 찡그렸다, 어떤 사 람들은 땅바닥에 침을 뱉거나 상스러운 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소수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자기들의 중장을 계속하지 못하고 있었다. 새로운 발명자는 누구인가? 쥘리는 구명부레에 매달린 심정으로 그 말을 되풀이했다. 군중을 분산시키지 않고 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 그들의 에너지를 머아 정수를 얻어낸 다음 그것으로 무언가 건설해야 한다. 그 순간 쥘리는 그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그녀가 건설해야 할 것아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거였다. 갑자기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녀에게 말했다. 경찰들이 학교를 완전히 봉쇄했어요. 조금 더 있으면 더 이상 밖으로 나갈 길 이 없게 될 거예요. 군중 사이로 웅성거림이 번져 갔다. 쥘리는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방금 경찰이 학교 주위를 완전히 봉쇄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우리는 도 시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이제 무인도에 갇혀 있는 거나 다름이 없게 됩니다. 떠 나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지금 당장 결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있으면 떠나기가 불가능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3백 명 가량의 사람들이 철책 문 쪽으로 갔다. 식구들이 불안해 하고 있을 것 을 걱정하는 나이 지긋한 이들, 축제는 하룻밤으로 족하다면서 그것보다는 자기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분이었다. 기중에는 예고도 없이 밖에 서 밤능 보낸 것 때문에 부모의 꾸지람을 걱정하는 젊은이들과 록 음악은 무척 좋아하면서도 개미 혁명이라는 것이 영 찜찜해서 내심 불안해 하고 있던 젊은이 들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환경 운동과 도시 빈민 운동과 계급 투쟁의 지도자들이 그들 무리 에 합류 하였다 그 농성을 자기들 목적을 위해 이용해보려던 그들은 빈정되는 말을 중얼대면서 자리를 떴다. 철책문이 열렸다. 밖의 기동 대원들은 학교를 떠나는 사람들을 태연스럽게 바 라보았다. 쥘리가 외쳤다. 이제 선의를 지닌 사람들만 남았습니다. 진짜 축제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118 백과 사전 아메리카 인디언의 유토피아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쑤 싸이엔 아파치 크로, 나바호, 코만치등 어느 부족을 막론하고 똑같은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그들은 스스로를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자연을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 생각했다.그들 부족은 한 지역의 사냥감이 떨어졌다 싶으면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간다.사냥감이 다시 깃들일 때까지 기다리려는 것이다. 그런식으로 그들은 자연에서 먹을것을 취하되,자연을 고갈시키지 않았다. 그들의 가치 체계에서 개인주의는 자랑거리라기보다는 웃음거리였다. 자기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남우세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고 아무것에 대해서도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한 인디언이 자동차를 사면 누구든 그것을 빌려 달라고 요구할 수 있고,산사람도 으레 누구에게든 빌려 주 어야 하는것으로 알고 있다. 인디언의 자녀들은 강제나 속박없이 어른들이 하는것을 보고 배우며 자연스럽 게 부족의 어엿한 일원으로 성장해 갔다. 인디언들은 접목 교잡법을 터득하여 옥수수 같은 작물의 잡종을 만드는데 이 용하였고,파라고무나무의 수액을 이용해 방수포를 만들었으며,유럽의 면직물과 는 비교도 안될 만큼 결이 고운 무명옷을 지을 줄 알았고,아스피린이며 키니네 등의 효험을 익히 알고 있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 사회에는 세습 권력도 항구적인 권력도 존재 하지 않았다. 어떤결정이 이루어질 때마다,각자 파우와우(부족회의)에서 자기의견을 개진하 였다.파우와우는 유럽의 공화제 혁명보도 훨씬 앞서서 이루어진 의회제도였다.만 일 부족 구성원의 다수가 추장을 신뢰하지 않으면,추장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 나곤 했다. 북미 인디언 사회는 평등한 사회였다.물론 추장은 있었지만,사람들이 자발적으 로 그를 따라야만 추장이 될수 있었다.지도자가 되는것은 신뢰의 문제였다.또,파 우와우에서 어떤결정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것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건 아니었 다.자기가 그결정에 찬성투표를 했을때에만 그것을 따를 의무가 있었다. 말하자 면,부족회의는 남에게 자기의견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려는 행 동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한 장치였던 셈이다. 북미 인디언들은 한창 번영을 누리고 있던 시절에도 직업적인 군대를 보유한 적이 없었다.필요할 경우에는 모두가 전투에 참가하였지만,그들은 전사이기전에 먼저 사냥꾼이자 경작자,그리고 한 가정의 아버지 였다. 그들은 생명이란 그형태가 어떠하든 마땅히 존중해야 하는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적의 목숨도 함부로 해치지 않았다. (남이 너에게 행하기를 원하 지 않는일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는 역지사지의 태도를 늘 견지했던 것이다.그들 이 생각하는 전쟁은 자기의 용기를 보여주는 하나의 경기였지,적을 다치게 하거 나 죽이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래서 전투는 막대의 둥글린 끝을 적의 몸에 대는 것만으로 승부가 판가름 나는 경우가 많았다.그것은 적을 죽이는것보다 더 명예 로운 일이었다.말하자면, 그들의 전투는 오늘날의 펜싱 경기와 비슷한 것이었다. 어느편에서든 피를 흘리는 사람이 생기면 전투는 즉각 중단되었고,사망자가 생 기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그런 문화속에 살던 그들이 유럽 인들의 전쟁 방식을 이해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노인과 부녀자와 아이까지 죽이는 백인들을 보고 그들은 경악하 지 않을수 없었다.그것은 단지 무서운 정도가 아니라,몰상식하고 비논리적이어서 도무지 이해를 할수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북미 인디언들은 남미의 인디오들보다 비교적 오랫동안 백인들의 침략 에 저항했다.백인들의 입장에서는 남미쪽이 공격하기가 더 용이하였다 남미 인 디오 사회는 우두머리의 목만 자르면 사회전체가 붕괴되어 버렸다 그것은 위계질서가 엄격하고 행정이 중앙에 집중된 사회체제의 큰약점이다. 그런 사회는 군주 하나에 사회전체의 운명이 좌우되기 십상이다. 북미 인디언 사회는 남미 쪽보다는 더 분산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백인 카 우보이들이 이리저리 이동하는 수백의 부족을 상대해야했다.그들의 목표는 한곳 에 붙박혀 있는 왕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수백의 우두머리였다.1백50명 으로 이루어진 한 부족을 겨우 굴복시키거나 몰살시키고 나면, 1백50명으로 이 루어진 또다른 부족을 공격해야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결국 인디언들은 유럽인들의 대학살을 피할수 없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했던 1492년 무렵에 아메리카 인디언의 수는 천만이었다.그로부터 4백년이 지난 1890년에 인디언 인구는 15만으로 줄었고,그 듣중의 다수는 유럽인들이 옮겨온 병 때문에 죽어가고 있었다. 1876년6월25일의 리틀 빅 혼 전투는 전례없이 많은 인디언들이 집결해서 싸운 드문 경우였다.1만에서 1만2천에 달하는 인디언들이 함께 모였고 그 중에는 전 사는 3천에서 4천을 헤아렸다.인디언들은 커스터 장군이 이끄는 군대를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다.그러나 좁은 땅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는 쉽지 않았다.그래서 인디언들은 승리를 거둔뒤에 다시 흩어졌다.그들은 백인들이 그런 모욕을 당했으니 다시는 자기들을 깔보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디언 부족들은 백인들에게 차례차례 정복되었다.1900년에 이르기까 지 미국 정부는 그들이 몰살하려고 했다.1900년이 지나면서 미국 정부는 인디언 들이 흑인이나 치카노(멕시코계미국인),아일랜드인,이탈리아 인들처럼 미국이라 는에 통합되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견의 소치였다.인디언들은 자기들이 서양의 정치 사회 체제 에서 무언가를 배울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의 체제가 백인들의 것보다 더 진보되었다고 믿었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 제3편 119.무르익어가는 개혁의기운 바같의 햇빛이 안의 불빛보다 더 강해지자마자 개미들은 강 둑에 다시 모여 서쪽의 길게 이어진 땅을 향해 출발 했다. 그들의 수는 1백 정도밖에 안 되지만,그들은 자기들이 힘을 합치면 세상을 변 화시킬수 있을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다. 암개미 103호는 자기가 손가락들의 불가사의한 세계를 탐험하기위해 서쪽에서 동쪽으로 원정을 갔다가 이제 그 세 계에 대해 겨레에게 설명하고 개미문명을 진보시키기 위해 반대쪽으로 가고 있 음을 세삼스럽게 깨닫고 있다. (한 방향으로 떠난것은 반드시 반대쪽으로 돌아온다)라는 개미 세계의 옛 속 담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손가락들은 아마 그런 종류의 속담을 이해하지 못할것이다.거기에는 개미 사 회의 문화적 특수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푸레나무와 느릅나무의 날개열매들이 비 오듯 쏟아지는 평지를 건너 간다.그런 곳을 지나가는 것은 참으로 고약스럽다.나무 열매들이 그들에겐 하늘 에서 떨어지는 바윗돌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곳을 빠져나오자,이번엔 갈색 고사리가 잔뜩 우거진 수풀이 막아선다. 우두 둑 떨어지는 이슬을 맞아 그들의 더듬이가 자꾸 머리에 달라붙는다 모두들 나 무잎으로 불씨를 감싸서 그것을 보호하려고 애를 쓰는데,오로지 수개미 24호만 은 다른 개미들처럼 손가락 셰계를 숭배하는 행위에 빠져들기를 거부하고 외따 로 떨어져서 가고있다 해가 높아지면서 숨막힐 듯한 열기를 뿜어 댄다.그들은 속이 빈 그루터기에 들어가 더위를 피하기로 한다. 불 기술자들은 사방에 역한 냄새를 진동시키는 곤충 하나를 발견하고 불에 태 운다.무당벌레 하나가 다가와 그게 무어냐고 묻자,그들은 따정벌레의 고기라고 대답한다.무당벌레는 자기 역시 딱정벌레목에딸린 곤충인지라, 군말없이 그 자리 를 떠나 근처의 진딧물들을 잡아먹으러간다. 한편, 7호는 커다란 잎새 위에 실물 크기의 프레스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거기에(손가락혁명)을 향한 장정을 형상화해 볼 생각이다. 각 개미의 형태를 정 확하게 재현하기 위해서,그는 동료들에게 그들의 그림자가 잎새에 드리워지도록 불 앞에서는 포즈를 취해 달라고 부탁한다.그의 문제는 물감을 제대로 착색시키 는 일이다.시간이 지나면 형상이 자꾸 지워지기 때문이다.침을 사용하기는 하지 만 그건 그다지 도움이 안되고 그저 색조를 흐릿하게 만들 뿐이다.다른것을 찾 아야 한다. 7호는 민달팽이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예술의 이름으로 그것을 거리낌없이 죽 인다.민달팽이의 끈끈물은 침보다 효과가 좋다.그것은 채료를 흐석시키지 않고 물기가 마르면 단단해진다.아주 훌륭한 래커다. 암개미 103호는 7호의 작품을 보러 와서(그래,이런게 바로 예술이야)하면서 힘 을 붇돋운다. 그가 기억 하기로는 손가락 셰계의 예술도 그러했다 그가 아는한, 예술이란 현실적으로 별로 쓸모는 없지만 이미 존재하는것과 똑같은 그림이나 물건을 만드는 행위이다.(예술이란 자연을 재현하려는 시도이다) 갈수록 새로운 영감을 얻어 가고 있는 7호가 그렇게 요약했다.이로써 개미들 은 손가락 셰계의 첫번째 불가사의를 해결했다.그러나 아직도 해학과 사랑이 탐 구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7호는 사기가 한껏 고양되어 자기 일에 더욱 매진하리라고 각오를 새로이 한 다.예술의 매력은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질 때마다 새롭고 흥미로운 문제가 나타 난다는 점에있다. 7호의 궁금중은 끝이없다.우리가 여행한 고장들을 재현하고자 한다면 그 입체효과를 어떻게 살릴수 있을까? 우리 주위의 풀나무들을 어떻게 그림의 배경에 넣을 수 있을 까? 수개미 24호와 10호는 손가락에들에 관한 103호의 이야기에 줄곧 더듬이를 기 룰이고 있다. 눈썹 손가락들의 눈 어름에는 눈썹이라는 아주 편리한 것이 있다.그것은 눈 위에 줄 모양으로 도도록하게 솟아 있는 털인데 빗물이 눈에 들어가는것을 막아 준다.그 러나 그것만으로는 빗물을 완전하게 막을 수가 없기 때문인지 그들에겐 다른것 이 또 있다.즉,그들의 눈구멍은 안면에 비해 조금 안으로 들어가 있다. 그래서 빗물이 눈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눈 주위로 흘러내리게 된다. 10호는 그 정보 역시 기억 페로몬에 담는다 103호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눈물과눈꺼풀 손가락들의 눈에는 눈물샘이라는 것이 있다.그것은 눈알에 물을 내보내는 기 관이다.그 물은 눈알을 씻어주고 그 움직임을 매끄럽게 해준다 손가락들의 눈에는 눈꺼풀이라는 것도 있다.그것은 눈알을 위아래로 덮고 있 는 일종의 움직이는 껍질이다.그것은 5초마다 한번씩 오르내리면서 눈알에 물을 묻혀주기 때문에,그들 눈에는 언제나 얇고 투명한 윤활액의 막으로 덮여 있게된 다.그 눈물막이 먼지며 바람,비,추위로부터 눈알을 보호해준다.그런 것들이 있어 서 손가락들은 개미들처럼 눈을 비비거나 씻지 않아도 언제나 깨끗한 상태를 유 지 할수 있다. 개미들은 손가락들의 눈을 상상해 보려고 애쓴다.그러나 그들로서는 그렇게 복잡한 기관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120.제풀에 와해되도록 푹 썩이자 신티아 리나르와 그녀의 딸 마르그리트는 텔리비젼을 보고 있었다. 그날 저녁 에 원격 조종기를 차지한 사람은 신타아였다.끊이없이 채널을 바꾸어 대는 딸아 이에 비하면 그녀는 조금 더 진득한 편이었다. 그건 아마도 그녀가 딸보다는 더 많은 관심를 가지고 있다는 뜻일 터였다. 45번 채널.보도 프로그램.어떤쌍동이 형제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공식적인 언어 를 거부하고 그들 자신의 언어를 만들어 냈다.행정 당국은 그들이 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둘을 떼어놓기로 결정 했다.소아과 의사 협회는 그 쌍동이 형제로 하여금 사물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게 해주는 그 자생적인 언어를 연구 하면 흥미로운 결과를 얻게 될지도 모르는데,교육부가 그럴 시간을 주지 않았다 며 유감의 뜻을 표시 했다. 673번 채널.광고.<요구르트를드세요! 요구르트를드세요! 요구르트를드세요!> 345번채널.오늘의 농담.늪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나온 어떤 코끼리의 이야깁니 다. 678번 채널.뉴스.국내뉴스:정부는 실업을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대사로 선포하 고 실업과의 전쟁을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정했다. 국외소식:티벳에서 중국의 점령에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다.중국 군인들은 평화 적인 시위자들을 구타하고 라마승들의 카르마를 더럽히기 위하여 그들에게 동물 을 죽이라고 강요했다.엠네스티 인터내셔널,곧 국제 사면위원회는 북경정부가 티 벳 사람들을 학살함으로써 이제 티벳에는 티벳 사람들보다 중국인들이 더 많아 지게 되었음을 환기시키면서,티벳 문제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채널 622번.퀴즈쇼.알쏭달쏭 함정퀴즈.<성냥개비 여섯개로 정삼각형 여덟 개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도움말을 상기 시켜 드리겠습니다. 답을 찾아 내려면 무엇에 비추어 생각하면 됩니다.> 그렇게 갖가지 불완전하고 단편적인 정보들을 모은 뒤에,막시밀리엥 가족은 저녁 식사를 하러 건너갔다.그날 저녁 메뉴에는 냉동피자와 파를 넣은 대구찜과 후식으로 요구르트가 있었다. 막시밀리엥은 후식을 앞에 둔 채 늑장을 부리고 있는 아내와 딸을 식탁에 남 겨두고,할일이 있다면서 자기 서재에 틀어박혔다. 마키아벨은 진화 게임을 다시 한판 벌이자고 제안했다.막시밀리엥은 손이 닿 는 곳에 시원한 맥주를 갖다 놓고 슬라브 풍의 문명을 건설했다. 그는 별다른 어려움없이 그 문명을 1800년까지 이끌었다. 그래는데,1870년에 그리스 군대의 공격을 받고 패배했다.성곽도시를 건설하는 일에 너무 늑장을 부린 데다가,정부의 부패에 신물이 난 국민들의 사기가 떨어 질 대로 떨어진 탓이었다. 마키아벨은 그에게 폭동이 일어날 염려가 있다고 알려 주었다.대책은 둘중의 하나 였다.경찰을 보내어 폭도들을 진압하는 방법도 있었고,희곡 공연을 많이 열 어서 국민들의 마음을 느긋하게 해주는길도 있었다.막시밀리엥은 자기의 게임 수첩에 희극 배우들이 위기에 처한 문명을 구하는데 도움을 줄수 있다고 썼다. 그런 이런 말도 덧붙혔다. <해학과 농담은 단기적인 치료 효과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문명 전체를 구할수도 있다.> 그러면서,그는 수영복 입은 코끼리가 등장한 오늘의 농담을 적어 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마키아벨은 희극이 의기 소침한 국민들의 사기를 높혀 줄수도 있지만,그와 동 시에 지도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존경심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국민들은 희극이 현정권을 조롱할때 가장 즐거워한다는 것이 었다.막시밀리엥은 그말도 적어 두었다. 그 판의 중간 결산을 하면서,마키아벨은 적의 요새를 포위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캐터펄트나 장갑차를 마련하지 않은채 요새를 공격하느라고 막 시밀리엥은 너무나 많은 병사들을 희생시키고 있었다. 당신은 딴 데에 정신을 팔고 있는것 같군요.아직도 숲속의 피라미드 때문에 고 민하고 있나요? 막시밀리엥은 컴퓨터의 성능에 다시 한번 놀랐다.컴퓨터는 그저 문장과 문장 사이에 관계를 맺어 주는 것만으로도 진짜 대화의 상대자인 양 행세하고 있었 다. 아니,이번엔 어떤 고등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동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 어. 그는 상대가 기계라는 것을 거의 의식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것에 대해서 저에게 말씀해 주실수 있어요? 마키아벨의 눈이 커지면서 화면 전체를 차지했다.그건 아주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막시밀리엥은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현실 속에서 그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게임속의 문 제와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 재미 있었다. 그는 자기의 고민거리를 설명했다.마키아벨은 중세에 있었던 요새 공략의 역 사를 함께 연구해 보자면서,모뎀을 이용해 컴퓨터를 역사백과 정보망에 접속하 고 여러가지 그림과 글을 받아 냈다. 막시밀리엥은 그 정보를 통해서 아주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요새를 공략하 는 데는 전쟁 영화나 무협 영화를 보면서 상상했던 것보다 휠씬 복잡한 전술이 필요했다.고대 로마 시대 이래로,많은 장수들이 성곽과 요새를 공략하기 위한 방 안들을 궁구한바 있었다.옛장수들의 전술을 통해 그가 새롭게 배운것 중의 하나 는 캐터펄트가 단지포탄을 쏘아 보내기 위해서만 사용된것이 아니라 주로 농성 자들의 사기를 꺽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었다. 포위자들은 성을 지 키는 자들에게 토사물과 분뇨가 담긴 통을 쏘아 보내기도 하고,살아 있는 포로 를 날려 보내기도 했으며,성의 수원지에 페스트로 죽은 동물들의 시체를 보내서 세균전을 벌이기도 했다. 포위자들은 이런 방법을 쓰기도 했다.성벽 밑에 땅굴을 파고 나무 기둥으로 떠받친 다음,거기에 나뭇단을 채워 넣는다.알맞은 때를 골라 거기에 불을 지르면 땅굴이 무너지면서 그 충격으로 성벽이 내려 앉는다.그러고 나면 그 기습 효과 를 이용해 성 안으로 쳐들어가는 일만 남는다. 그뿐만 아니라,포위자들은 불에 벌겋게 달군 무쇠 덩어리를 성 안으로 쏘아 보내기도 했다.프랑스어에서 적을 아주 혹독하게 공격하는 것을 일컬어 < 벌건 포탄을쏘다 > 라고 표현하는 곡절이 거기에 있다. 그 무쇠 덩어리의 실제적인 피해는 그리 크지 않을지 모르지만,하늘에서 날아오는 뜨거운 포탄이 언제 자기 머리에 떨어질지 몰라서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 다. 막시밀리엥은 사뭇 놀라워하며 컴퓨터 화면에 펼쳐지는 그림들을 보고 있었 다.성을 공략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았다.그가 할일은 오늘날의 새로운 농성 방 식,즉 네모 반듯한 콘크리트 건물을 점거한 경우에 맞는 공략 방식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전화가 왔다.지사는 난동이 어떠한 상태에 와 있는지를 알고 싶어했다. 막시밀 리엥은 시위자들이 경찰에 포위된 채 학교안에 완전히 갇혀 있으며 아무도 들어 가거나 나올수 없다고 알려 주었다. 지사는 리나르 경정의 노고를 치하했다.지사의 걱정은 단 하나,장난처럼 시작 된 그 일이 일대 사건으로 번져가는 것이었다.그에게는 난동이 확대되는 것을 막는게 무엇보다 중요했다.리나르 경정이 학교를 탈환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보 겠다는 뜻을 밝히자,지사는 기겁을 하였다. 다른건 몰라도 학교로 쳐들어가는 건 안돼.별것도 아닌 말썽꾼들을 순교자로 만들 셈이야? 하지만,그들은 세상을 뒤집어엎고 혁명을 하자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학교 주변의 주민들을 모두 그들의 파시오나리아가 하는 연설을 듣고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불만을 제기해 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게다가 밤낮 으로 울려대는 음악소리 때문에 모두들 잠도 제대로 못자고... 지사는 자기의 <썩게 내버려두기> 이론을 고집하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썩게 내버려두는것,그 방법을 적용하면 어떤 문제도 결국은 저절로 해결되는 법 일세 지사의 주장에 따르면,프랑스 문화의 정수라고 할 만한 것들은 모두 썩게 내버려두기라는 한마디 말로 집약될수 있다는 것였다. 포도즙을 썩게 내버려둠으로써 가장 감미로운 포도주를 얻고,우유를 썩여서 가장 맛좋은 치즈를 생산해 내고,심지어는 빵마저도 밀가루에 뜸팡이를 섞어서 만들지 않느냐는 얘기였다. 썩게 내버려둬.푹 썩이라고.두고보면 알겠지만 그 녀석들 제풀에 지쳐서 나가 떨어지고 말걸세.따지고 보면,혁명이나 반란은 모두 스스로 썩어 문드러지게 되 어 있어.혁명의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시간이야.시간은 모든것을 발효시키는 뜸 씨와 같은걸세 지사는 농성자들을 몰아내려고 경찰관들을 보낼때마다 농성자들의 대오는 단 단해지고 단결력이 갈수록 높아질 테지만,그들을 가만히 내버려두면 상자안에 갇힌 쥐떼처럼 서로 물어뜯게 될거라고 장담했다. 자네도 아다시피,함께 모여 산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야.한 아파트에 여럿 이 같이 산다고 생각해 보게.그건 이미 도박이나 진배 없어.사랑하는 남녀가 만 나 살을 섞어며 살다가도 서로 마음이 안 맞아서 남남으로 돌아서는 경우가 적 지 않은데,봉쇄된 학교에 7백명이 모여 있으니 그 상황이 오죽하겠어? 말썽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 물이 새는 수도꼭지나 도둑맞은 소지품,고장난 텔레비젼,담 배 연기를 싫어하는 사람 옆에서 줄담배를 피워 대는 사람들등 갖가지 이유로 그들은 벌싸부터 서로 싸움을 벌이고 있을거야.두 고보라고,얼마 안가서 학교안은 지옥이 되고 말테니까 121.지금은 강경하게 밀고 나갈때다 쥘리는 생물실로 가서 플라스크를 모두 부숴 버리고,실험용 흰쥐와 개구리와 지렁이까지 풀어 주었다. 유리 파편 하나가 그녀의 아래팔에 상처를 내었다.그녀는 살갗에 송글송글 맺 히는 피를 입으로 빨았다.그런 다음,그녀는 달아나듯 자기 반 교실로 뛰어갔다.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세상을 변화 시킬수 있느냐 없느냐를 놓고 역사 선생과 논쟁을 벌였던 바로 그 교실이었다. 쥘리는 빈교실에 홀로 않아서 상대적이며,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을 뒤지 며 혁명과 관련된 대목들을 찾았다.역사시간에 들은 말 한마디가 그녀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과거의 잘못이 왜 생겼는지를 이해하지 못한 자는 같은 잘 못을 되풀이 하게 된다.쥘리는 자기에게 도움이 될만한 과거의 경험들을 낱낱이 찾아 읽기로 했다.다른 사람들은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갔는지,또는 어째서 해쳐 서 나가지 못했는지를 알 필요가 있었다 과거에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했던 모든사람들이 후세에 아무것도 끼치지 않 고 죽지는 않았을터였다.그들의 실패와 좌절마져도 그녀에게 타사지석이 될 수 있었다.쥘리는 혁명들에 관한 이야기를 탐독 하였다.익히 알려진 혁명이 줄을 이 루고 있었지만,기중에는 청두의 반란이나, 소년 십자군, 독일 라인란트 지방의 아만 파 혁명,칠레 서쪽 파크 섬에서 있었던 큰 귀들의 혁명처럼 에드몽웰즈가 짖긋은 재미를 느끼며 끼워넣은것으로 보이는 잘알려지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혁명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하나의 교과목처럼 공부를 통해서 배워 나갈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대학입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혁명은 아주 흥미진진한 과목이었다 쥘리는 자기가 깨우친 바를 적어 두고 싶었다. 책 끝에는 백지가 몇장 붙어 있고,그 첫머리에 독자 여러분이 스스로 깨우친바를 여기에 적어 두십시오 라고 씌어 있었다.에드몽 웰즈는 이것저것에 고루 마음을 써 놓았다. 그는 그야말로 저자와 독자가 상호 작용을 할수 있는 책을 만들고 했던 모양 이다. 책을 읽은뒤엔 스스로 자기 얘기를 써보아라는것이 아닌가. 쥘리는 이제껏 그 책을 너무 소중하게 여긴 나머지 감히 거기에 주석을 달겠 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저자의 말에 용기를 얻고 자기의 생각을 적어 보기로 했 다. <쥘리 팽송의주석.혁명을 실제적으로 성공시키는 방법. 단장1: 퐁텐블로 고등 학교의 경험에서 얻은것.> 그렇게 허두를 뗀다음 쥘리는 자기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과 장래의 일에 대한 의견을 기록하였다. 혁명병법 제1조 : 록 콘서트는 청중의 폭 넓은 공감을 얻어 냄으로써 혁명적 인 형태의 대중 운동을 촉발하기에 충분한 에너지를 만들어 낼수 있다. 혁명병법 제2조 : 군중을 다루는 데는 한두 사람의 능력으로는 충분치 않다. 혁명 운동의 선두에는 적어도 칠팔 명의 전위가 있었야한다.단지 생각할 시간을 갖거나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라도 그정도의 수는 불가피하다. 혁명방법 제3조 : 교전중인 군중을 통솔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군중을 기동 성 있는 몇개의 집단으로 나누것이다.그 경우 각 집단마다 선도자가 있어야하고 그 선도자는 다른 선도자들과 신속하게 연락을 취할수 있는 수단을 지니고 있어 야 한다. 혁명병법 제4조 : 혁명이 성공하면 반드시 그성공을 시기하는 자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어떠한일이 있어도 혁명이 그것을 주도한 사람들의 선의에서 벗어나 게 해서는 안된다.자기들이 의도하는 혁명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모른다 하더라 도 무엇이 자기들의 혁명이 아닌지는 반드시 알아야한다. 우리의 혁명은 폭력적이지 않다.우리의 혁명은 교조적이지 않다.우리의 혁명은 예전의 그 어느 혁명하고도 유사 하지않다. 정말 그렇게 단언할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반문하면서, 쥘리는 그 마지 막 문장을 지워 버렸다. 엣날의 혁명중에서 호감이 가는것을 찾아 낸다면 그것 을 귀감으로 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문제는 과거의 역사에서 호감이가는 혁명 을 찾아 낼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쥘리는 백과사전을 처음부터 다시 뒤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일찍이 공부를 그 렇게 열심히 해 본적이 없었다.그녀는 거의 외워 버릴만큼 읽은것을 또 읽었다. 독일 사회주의 단체 스파르타쿠스의저항,파리코뮌,멕시코의 사파타 혁명,1789년 의 프랑스 혁명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인도에서 있은 세포이들의 반란... 모든 혁명의 역사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다.혁명운동의 초기에는 오로지 선의만이 충만해 있지만 운동이 폭발하여 전반적인 혼란이 야기되면 그틈을 타 서 영악한 자들이 나타나서 모두의 열정을 왜곡하고 전제 정치의 길을 열곤 했 다는 것이다.유토피아를 건설 하려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상을 실천에 옮기던 중에 죽음을 당하고, 결국엔 꾀바른 자들이 그들을 희생양 으로 삼아 권력을 장 악한 경우가 흔했다. 체레게바라는 암살을 당했고 피댈 카스트로는 권력을 장악했다. 붉은군대의 창시자 트로츠키는 살해 당했고 스타린은 지배자로 군림했다.당통은 기요틴으로 처형 되었고,로베스피에르는 권력을 향유했다. 세상일이 다 그렇듯이 혁명도 냉혹한 양육강식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 다.쥘리는 몇 대목을 더 읽다가 만일 신이 존재 한다면 신은 인간에게 그토록 많은 자유의지를 허락하고 그토록 많은 불의를 용납하였으니 인간을 대단히 존 중하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쥘리와 그녀의 친구들이 이루려는 혁명은 아직 손이 타지 않은 예쁜보석이었 다.쥘리는 이미 그보석을 가로채려는 자들을 한 차례 쫓아 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다른 자들이 또 나타날 가능성이 그런 경우를 생각하면 두루춘풍은 결코 능사가 아니었다. 온화함의 사치를 부리기에 앞서 강경한 태도 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쥘리가 여러 혁명의 예를 놓고 이리저리 따져 본 끝에 내린 고통스러운 결론은, 혁명 정부는 완벽한 민주주의를 실행하는 기쁨을 스스 로에게 허용할 수 없다는 거였다. 나중에 가서야 공동체가 자율적으로 운영되어 가는 양상에 맞추어 고삐를 늦추더라도, 당장엔 강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했다. 조에가 청바지와 파란 셔츠와 파란 풀오버를 들고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너 입으라고 가져온 거야. 계속 그 나비 드레스를 입고 돌아다닐 수는 없지 않니? 고마워. 쥘리는 책을 덮고 옷가지를 챙긴 다음 공동 침실의 샤워실로 달려갔다. 그녀 는 뜨거운 물을 틀어 놓고 마치 낡은 살가죽을 벗겨 내려는 것처럼 딱딱한 비누 로 살갗을 문질렀다. 122. 이야기의 한 중간 쥘리는 말쑥해진 몸으로 거울 앞에 서서, 조에가 가져다 준 옷을 입었다. 바지 도 파란색, 셔츠도 파란색이었다. 이제 그녀의 옷은 검은색이 아니었다.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녀는 세면대의 거울에 서린 김을 손바닥으로 닦아 냈다. 자기 자신이 아름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 역시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까만 머리에는 고 운 윤기가 흘렀고,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커다란 연회색 눈은 웃옷의 파란 색과 한결 잘 어울렸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는,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의 한가운데를 펴들고 거울 앞으로 가져가서 비춰 보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새로운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백과 사전에는 가운데 페이지를 중심으로 장과 장들이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울에 비추어 반대쪽으로 읽어야만 비로소 뜻이 통하는 문장들도 들어 있었다. 세번째 게임 다이아몬드 123. 백과사전 만사에는 때가 있다. 무슨 일을 하든간에 때를 잘 맞추어야 한다. 때가 설익거나 물크러지면 일의 보람이 온전히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남새를 심고 가꾸는 경우에도 때를 잘 선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채소농사를 망치지 않으려면 심고 거두기에 알맞은 때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아스파라거스는 3월에 심고 5월에 거둔다. 가지는 3월에 심고(볕바른 곳에), 9 월에 거둔다. 순무는 3월에 심고 10월에 거둔다. 당근은 3월에 심고 7월에 거둔 다. 오이는 4월에 심고 9월에 거둔다. 양파는 9월에 심고 5월에 거둔다. 파는 9 월에 심고 6월에 거둔다. 감자는 4월에 심고 7월에 거둔다. 토마토는 3월에 심고 9월에 거둔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 제3권. 124. 우리도 그들처럼 두 다리로 달려 보자 손가락 혁명의 일꾼들이 줄을 지어 나아가다가 한마리 뱀처럼 수풀 속으로 숨 어 들어간다. 행렬의 선두에는 암개미 103호가 있다. 해가 기울고 바람이 서늘해 지자, 개미들은 커다란 소나무로 올라가서 예전에 어떤 다람쥐가 살다가 버리고 간 것으로 보이는 빈 둥지를 찾아 들어간다. 그 쉼터에서 암개미 103호는 손가락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그의 이야기는 갈수록 흥미를 더해 간다. 10호는 오늘의 주제에 관한 기억 페로몬을 꼼꼼하게 작성해 간다. 손가락 생리학 우리는 그들을 손가락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손가락이란 그들 다리의 끝에 달 린 기관일 뿐이다. 우리의 여섯 다리에는 각각의 끄트머리에 두 개의 발톱이 달 려 있지만, 그들의 네 다리 끝은 다섯 개의 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락은 각각 세 개의 도막이 뼈마디로 연결된 것이어서, 다양한 형태를 취 할 수 있고 다른 가락들과 함께 움직이며 여러가지 기능을 할 수 있다. 가락 두 개가 함께 사용되면 집게 구실을 한다. 다섯가락을 오그리어 쥐면 망치로 사용할 수 있다. 가락을 붙여서 오목하게 만들면 액체를 받을 수 있는 작은 그릇이 된다. 가락 하나를 곧게 뻗으며 끝이 둥근 꼬챙이가 된다. 그것은 우리들 중의 누구 라도 으깨어 죽일 수 있는 강력한 흉기다. 가락을 붙여서 쭉 뻗으면 장칼이 된다. 한마디로 그들의 다리 끝에 달린 가락들은 굉장한 도구다. 그것들을 사용하면 실을 묶는다든가 잎을 자르는 것과 같은 아주 어려운 일도 쉽게 할 수 있다. 게다가 그 가락의 끝에는 납작한 각질의 조각이 붙어 있어서, 그것으로 무엇 을 긁거나 정확하게 자를 수 있다. 그들에게는 그것 못지않게 경탄할 만한 것이 또 있다. 그들이 <발>이라고 부 르는 기관이 바로 그것이다. 발이 있기에 그들은 두 뒤다리로 곧추 서서 다닐 수 있다. 발이 언제나 최상 의 평형을 고려하기 때문에 그들은 쓰러지지 않고 수직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 그 자리에 모인 개미들은 모두 어떻게 두 다리로 곧추 서서 걸을 수 있는지를 상상해 보려고 애쓴다. 물론 다람쥐나 도마뱀 따위가 뒷다리로 버티고 앉아 있 는 모습은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두 다리만으로 걷는 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5호가 손가락들처럼 두 뒤다리로 걸어 보겠다고 나선다. 다른 개미들의 주목을 받으며, 그는 가운뎃다리로 벽을 짚고 앞다리로 평형을 유지하면서 2초 가까이 거의 곧추 선 자세로 버티어 낸다. <곧추 서니까,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고 시야에 들어오는 사물이 조금 더 많 다.> 5호가 알려온 그 정보를 놓고, 103호는 깊은 생각에 잠긴다. 그는 오래 전부터 손가락들의 독특한 사고방식과 기발한 발명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지를 궁금하 게 여겨 왔다. 한때는 그들이 키가 크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가능했을 것이라 고 단수낳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키가 크기로 말하면 손가락들보다 더 한 것들이 많다. 예컨대 나무들도 키가 아주 크지만, 그들에게 텔레비젼이나 자 동차가 있는 건 아니다. 키 다음으로 암개미가 생각한 것은 그들의 손이었다. 구 조가 특이한 손으로 복잡한 물건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오늘날과 같 은 문명을 이루어 냈을 거라고 추론한 것이다. 그러나 가락이 많이 달린 손은 그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다람쥐들에게도 비슷한 손이 있지만, 그들은 쓸만한 것을 전혀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손가락들의 기이한 사고 방식은 직립 자세에서 유래한 것인지도 모 른다. 그렇게 곧추서면 시야가 넓어지기 때문에, 눈이며 뇌가 변화되었을 것이고 자기들 영역을 관리하는 방식이나 세계관까지도 달라졌을 것이다. 103호가 아는 한, 손가락들은 두 뒷다리로 걸어다닐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도마뱀들이 이따금 곧추 선 자세를 취하기는 하지만 몇초 이상은 버티지 못한 다. 103호는 자기도 한번 뒷다리로 일어서 보겠다며 동료들 앞으로 나선다. 그것 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몸의 압력이 뒤다리로 쏠리면서 발목마디가 뒤틀 리고 빛깔이 하얘진다. 103호는 고통을 이겨내고 걷기를 시도한다. 하지만, 이내 다리가 휘어지면서 몸이 균형을 잃고 앞으로 쏠린다. 균형을 되찾으려고 네 다 리를 흔들어 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103호는 앞다리로 간신히 충격을 완화시 키면서 벽으로 쓰러진다. <이거 다시는 하지 말아야겠구먼> 하고 그는 생각한다. 5호는 나무줄기에 기대어 조금 더 오랫동안 버티어 낸다. <두 다리로 서니까 아주 삼삼한데.> 그렇게 자기 기분을 전해 주고는 5호 역시 털썩 무너져 내린다. 125. 궁하면 통한다. 이런 식으로 가면 안 돼. 너무 불안정해. 모두의 생각이 같았다. 목표를 정하고 규율을 만들고 조직을 편성해서 장기전 에 대비해야 했다. 지웅은 학교 안에 있는 모든 물품의 목록을 작성하자고 제안했다. 시트와 담 요는 몇 장이나 있는지, 식량은 얼마나 비축되어 있는지 등을 알아 두는 것이 긴요하다는 거였다. 그들은 학교 안에 남은 사람이 모두 몇 명인지도 헤아렸다. 기숙사의 공동 침 실은 2백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는데, 그들은 모두 5백 21명이었다. 쥘리는 시트와 대걸레 자루를 이용해서 잔디밭 한가운데에 천막을 세우자는 의 견을 내놓았다. 다행히 그 두가지 물품은 학교 안에 풍족하게 있었다. 쥘리의 제 안에 따라, 각자 시트와 대걸레를 가져다가 천막을 치기 시작했다. 천말 치는 법 에 대해서는 나바호 인디언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레오풀이 가장 잘 알고 있었 다. 그는 인디언들의 티피를 닮은 워추형 천막을 세우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방법을 일러주었다. 그런 천막은 천장이 제법 높고 손잡이 하나만으로도 통풍을 조절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레오폴은집을 둥그런 형태로 짓는 것이 어떤 점에서 유익한지를 설명했다. 우리의 주거 형태를 지구처럼 둥글게 만들면 지구와 삼투할 수가 있어요 사람들은 저마다 꿰매고 붙이고 묶는 일을 해보면서, 까맣게 잊고 있던 손재 주를 되찾고 있었다. 모든 것이 간편하기만 한 <누름단추의 세계>에서는 꼼꼼 하게 손을 놀리면서 뭔가를 해볼 기회가 없기 때문에 손재주를 타고 났음에도 스스로를 손방으로 여기기가 십상이었다. 젊은이들이 여느 야영장에서 하는 것처럼 천막들을 배치하려고 하자, 레오폴 은 동심원꼴로 천막들은 배치하자고 권했다. 전체적으로는 소용돌이 꼴이 되게 하고, 한가운데에는 화톳불과 깃대와 슈티롤 수지로 만든 개미 모형을 두자는 거였다. 그렇게 하면, 우리마을에 중심이 생기고 천막들의 자리를 정하기가 더 용이해 질 겁니다. 태양계의 중심에 태양이 있듯이, 우리마을의 한 가운데에는 불이 있 게 되지요. 사람들은 레오폴의 의견을 받아들여 저마다 그가 일러준 방식대로 티피 형 천 막을 세워 나갔다. 대걸레 자루를 자르기도 하고 묶기도 하면서 다들 분주하게 손을 놀렸다. 천막을 바닥에 고정시키는 말뚝으로 포크가 사용되었다. 레오폴은 매듭을 짓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 교정 중앙의 잔디밭이 제법 넓어서 다행이었 다.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들은 불에서 가까운 쪽을, 나머지 사람들은 변두리 쪽 을 택해서 자리를 잡았다. 교정 오른쪽에는 단이 하난 마련되었다. 연단으로도 쓰고 콘서트 무대로도 쓸 양으로 선생님들의 책상을 모아 만든 것이었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고 나자, 사람들의 관심은 다시 음악에 쏠렸다. 거리엔 수준 높은 아마추어 음악가들이 많았고, 그들의 전공으로 삼고 있는 장르도 다 양했다. 그들은 번갈아 가며 가설 무대로 올라갔다. 합기도 클럽의 여학생들은 스스로 자경대를 편성하여 개미 혁명의 원만한 진 행에 기여하고 있었다. 기동대원들에 맞서 승리를 거둔 뒤로, 그녀들은 더욱 아 름다워 보였다. 예술적으로 찢은 티셔츠와 전투에 알맞은 머리 모양, 암호랑이처 럼 사납고 날랜 자태, 뛰어난 접전 능력 등으로 해서, 그녀들은 갈수록 진짜 아 마존을 닮아 가고 있었다. 폴은 학교 식당에 먹을 것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조사해 보고 나서, 몇 개 의 냉동고에 갖가지 음식이 잔뜩 쌓여 있기 때문에 당분간 농성자들이 배를 곯 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점심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되었다. 그 점심을 모두가 함께 먹는 최초의 <공 식적인> 식사가 될 터였다. 폴은 그것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메뉴에 각별히 신 경을 쓰기로 했다. 토마토에 모자렐라 치즈와 박하잎과 롤리브 기름을 섞어 전 채 요리를 마들고, 가리비와 생선의 꼬치 구이에 사프란 가루로 물들인 쌀밥을 곁들여 주요리로 삼으며, 과일 샐러드나 초콜릿 샬럿을 후식으로 내놓겠다는 것 이 그의 생각이었다. 훌륭해! 우리는 요리 부문에서도 혁명을 이룩하겠는걸. 쥘리의 칭찬을 받고 폴은 겸손하게 되받았다. 옛날 사람들도 냉동고만 있었으면 얼마든지 다양한 요리를 할 수 있었을텐데 뭐. 몰은 올림푸스의 신들과 개미들의 음료인 꿀술을 칵테일로 삼자고 제안했다. 물과 꿀과 누룩을 섞는 것이 그 술의 주조법이었다. 폴은 꿀술 한 통을 만들었 다. 겨우 20분밖에 안결렸기 때문에 좋은 술이 되기에는 숙성 시간이 너무 짧다 싶었지만, 그런대로 맛은 괘찮았다. 자, 건배! 조에는 건배의 유래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잔은 맞부딪치며 건배를 하는 관습은 중세 때부터 시작되었대. 잔을 세게 맞 부딪치면 각자 상대방의 잔에 흘러 넘친 술 방울을 받게 되지. 그럼으로써 상대 방은 자기 술에 독이 들어 있지 않다는 을 확인하는 거야, 잔을 세게 부딪칠수 록 술이 넘칠 가능성이 많아지므로, 서로간의 신뢰가 더욱 돈독해지는 거지. 그들은 다 같이 카페테리아에서 식사를 했다. 학교는 농성을 하기에 아주 편 리한 장소였다. 전기와 전화가 있음은 물론이고, 식당과 기숙사까지 있어서 먹고 자는 데에 불편함이 없었고, 천막을 치는데 필요한 시트와 무엇을 만들거나 고 치는 데 필요한 갖가지 연장들도 있었다. 그냥 노천에 모여 있었다면, 결코 그렇 게 많은 것들을 얻어 내지는 못했을 거였다. 강낭콩 통조림과 딱딱한 비스켓 정도로 만족했을 예전의 혁명가들에 비하면 그들은 진수 성찬을 먹는 셈이었다. 그 점을 생각하면서 그들은 아주 맛있게 먹 었다. 쥐리도 평소의 식욕 부진을 잊고 양껏 먹었다. 그녀가 말했다. 단지 이 식사만으로도 우리는 개혁을 이루고 있는 거야. 그들은 노래를 보르면서 함께 설거지를 했다. <엄마가 내 모습을 보면 깜짝 놀라시겠지>하고 쥘리는 생각했다. 집에서는 하라고 등을 떠밀어도 안 하던 설 거지를그렇게 즐겁게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점심 식사가 끝나자, 한 청년이 가설 무대에 올라가 기타를 뜯기 시작했다. 그 는 속삭이는 듯한 음성으로 슬픈 곡조의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은 쌍쌍이 어우 러져 잔디밭에서 느릿느릿 춤을 추었다. 폴은 엘리자벳에게 춤을 청했다. 합기도 클럽의 아마존들이 자발적으로 자기들의 리더로 삼은 그 육덕 좋은 여학생이었 다. 레오폴은 조에 앞에서 몸을 숙이며 춤을 청했다. 그들 역시 서로 껴안고 춤을 추었다. 저 청년에게 무대를 내준 게 잘한 일이지 모르겠어. 노래가 너무 나긋나긋하 고 애틋해서 말이아. 쥘리가 그 매혹적인 가수를 응시하며 성가셔 하는 기색을 보이자, 다윗은 그 들의 원칙을 상기시켰다. 이곳에선 어떤 장르의 음악을 하는 사람이든 스스로를 표현할 권리가 있어. 나르시스는 어떤 근육형의 거한과 농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그 근육형의 남자 는 보디 빌딩을 통해 몸을 관리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었다. 나르시스는 전채 에 들어간 올리브 기름의 뒷맛이 아직 입안에 남아 있었는지, 몸에 올리브 기름 을 바르면 울툭불툭 불거져 나온 근육이 더욱 돋보일텐데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이 없느냐고 물었다. 지웅은 프랑신에게 춤을 청했다. 다윗은 금발의 한 아마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지팡이 없이도 춤을 아주 잘 추었다. 혁명의 그의 만성적인 관절 류머티즘을 잊게 해준 게 하니라면, 자기 의 예쁜 파트너에게 몸을 잔뜩 기대고 있기 때문일 거였다. 다들 그런 시간이 오래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느끼고, 그 순간을 마음껏 즐기려는 둣했다. 서로 껴안고 입을 맞추는 남녀들고 있었다. 쥘리는 황홀함과 시새움이 반반씩 섞인 기분으로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렇게 적었다. 혁명 병법 제 5조 : 혁명은 사랑의 연신과 동맹 관계에 있다. 폴은 엘리자벳과 게걸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는 입과 혀로 느끼는 즐거움이 오감의 쾌락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믿고 있는 시람이었다. 쥘리, 우리 춤출까? 쥘리는 깜짝 놀랐다. 그녀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상업 선생님이었다. 어머, 선생님도 여기에 계셨어요? 그가 콘서트에 참석한 것은 물론이고, 그 뒤로도 자기들과 행동을 같이해 왔 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쥐리는 더욱 놀랐다. <확실히 선생님들도 친구가 될수 있어>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그가 내민 손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그의 권유가 격에 맞지 않는 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과 제자 사이에는 넘기 어려운 장벽이 있었다. 그는 그 장벽을 껑충 뛰어넘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아직 그렇지 못했다. 저는 춤에 흥미가 없어요 나도 춤을 좋아하지는 않아. 그러면서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쥘리는 마지못해 그가 이끄는 대로 몇 박자를 따라가다가 이내 빠져 나왔다. 죄송해요. 정말 마음이 내키질 않아요. 그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러자 쥘리는 한 아마존의 손을 잡아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이 친구가 저보다 천 배는 나을 거예요.」 겨우 그들에게서 벗어났다 싶었는데, 이번엔 웬 바짝 마른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제 소개를 해도 될까요? 괜찮겠지요? 안 될까요? 어쨌든 제 소개를 하겠습니 다. 저는 이방 보뒬레르라고 합니다. 광고 세일즈를 하는 사람입니다. 우연히 여 러분의 축제에 휩쓸려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러분께 제안할 것이 하나 있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쥘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걸음을 조금 늦추었을 뿐인데, 그 남자는 쥘리 가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는 그녀의 관심을 놓칠세라 어조를 빨리 하여 이야기를 쏟아 냈다. 「여러분의 축제는 정말 훌륭해요. 괜찮 은 장소도 확보했고,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있어요. 게다가 장래가 유망한 음악 가들로 이루어진 록 그룹이 있고요.이 정도면 매스 미디어의 관심을 끌기에 충 분해요. 내 생각엔, 축제를 계속하려면 스폰서들을 구해야 할 것 같아요. 여러분 이 원하신다면, 내가 여러분을 대신해서 몇 건의 계약을 따낼 수 있어요. 청량음 료 회사나 의류 업체는 물론이고, 어쩌면 라디오 방송까지 끌어들일 수 있을 거 예요. 쥘리는 걸음을 더 늦추었다. 그 남자는 그것을 동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매스 미디어에 나간다고 해서 잘 보이려고 일부러 꾸밀 필요는 없을 거예요. 그저 여기저기에 깃발만 내걸면 돼요. 그러고 나면 돈이 생길 거고, 여러분의 축 제가 더욱 안락해질 거예요. 쥘리는 편치 않은 기색으로 그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우리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요. 왜 관심이 없다는 거죠? 이건 축제가 아니라... 혁명이예요. 쥘리는 그걸 굳이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 성가셨다. 희생자가 생기지 않는 한 그들의 모임은 단순한 축제로만 여겨질 거였다. 그렇다고, 그 축제를 광고 잔치 로 변질시킨다는 건 더욱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쥘리는 속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왜 사람들은 꼭 피를 흘려야만 혁명을 진지 하게 받아들이는 걸까? 이방 보뒤레르는 미련을 버리지 않고 매달렸다. 지금은 관심이 없다지만 앞일은 알 수 없는 거예요.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거 든 내게 알려 줘요. 광고주들과 접촉하는 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쥘리는 그를 춤추는 사람들 속에 떼어놓고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서, 혁 명을 광고에 이용하면 어떤 식이 될지를 상상해 보았다. 피로 얼룩진 삼색기들 이 펄럭이는 속에, <마시자, 상퀼로트! 호프의 참맛과 시원함에 매료된 진정한 혁명가들의 맥주!>라고 적힌 깃발을 내걸고 있는 프랑스 혁명을, 그리고 보드카 광고가 등장하는 러시아 혁명과 시가 광고를 내건 쿠바 혁명을. 쥘리는 지리 교실로 들어갔다. 광고 세일즈맨 때문에 헝클어졌던 마음이 다시 차분해 졌다. 혁명의 전문가가 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녀는 과거의 혁명 경혐들을 더 연구하기 위해 백과 사전을 펼쳤다. 책을 거울에 비추어 거꾸로 읽어보니, 글 속에 숨겨진 새로운 글이 나타났다. 그녀는 각각의 경험에 대해서 책의 여백에 주석을 달고, 그것들의 잘못된 점 과 혁신적인 요소에 밑줄을 그었다. 혁명의 법칙을 끌어내고, 자기들의 모범이 될 만한 이상 사회를 찾아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녀는 꼼끔하고 끈기 있게 책을 읽어 나갔다. 126. 백과사전 푸리에의 유토피아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는 1772년 브장송에서 나사 제조업자 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랑스 대혁명을 계기로 그는 인류를 위해 사회를 변화시 키고 싶다는 어마어마한 야망을 드러냈다. 1793년에 그는 자기의 계획을 도의회 의원들에게 설명했지만, 그들의 비웃음만 사고 말았다. 그것에 낙담한 푸리에는 얌전히 살기로 결심하고 회계원이 되었다. 하지만 이 상적인 사회에 대한 집념은 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연구를 계속하여 자기가 꿈꾸는 사회를 사랑 가득한 신세계와 같은 여러 저서를 통해 아주 면밀하게 묘사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1천 6백에서 1천 8백명으로 구성된 작은 공동체 를 이루고 살아야 한다. 공동체(팔랑주)가 가족을 대체하며, 혈족 관계나 지배.피 지배 관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공동체에 필요한 것을 조달하기 위해 각 자 약간의 세금을 내지만, 통지 기구의 권한은 최소한으로 업격하게 제한된다. 중요한 결정은 마을의 중앙 광장에 구성원이 함께 모인 가운데 이루어진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하나의 주택 단지에 모여 산다. 푸리에는 그것을 팔앙스 테르라고 불렀다. 푸리에는 자기가 생각한 이상적인 팔랑스테르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3층에서 5층 건물로 이루어진 성같은 곳인데, 여름에는 분수 때문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볕이 잘 드는 길들이 나 있고, 중앙에는 극장, 휴게실, 도서 관, 기상대, 교회당, 전신국이 있다. 그 후 푸리에의 후예들은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미국 등지에서까지 팔 앙스테르를 건설하였다. 프랑스에서는 1859년에 난로의 발명자인 앙드레 고댕이 푸리에의 팔앙스테르 를 본받아 생산자 공동체를 건서랗였다. 1천 2백명이 합께 살면서 난로를 만들 고 이익을 나누어 가졌다. 그러나 그 협동 조합은 오로지 고댕 가문의 가부장제 적인 권위 덕분에 유지될 수 있었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적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 제3권. 127. 손가락 혁명 제2일 경보 페로몬. 모두가 갑작스럽게 잠에서 깨어난다. 간밤에 손가락들의 기술과 그것의 무한 한 응용을 꿈꾸면서 잠자리에 들었던 혁명가들의 야영장에 오늘 아침 난데없이 독한 페로몬이 넘쳐 나고 있다. <빨리 피해라. 위험이 닥치고 있다.> 암개미 103호는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더듬이를 세운다. 날이 밝은 줄 알았더 니 그게 아니다. 이 빛고 열기는 동녘 하늘에 돋아 오른 해에서 오는 것이 아니 다. 개미들이 하룻밤의 쉼터로 삼은 소나무 구멍 안에도 작은 해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다. 간밤에 불 기술자 개미들은 마른 잎 근처에 불덩이를 놓아둔 채 잠이 들었다. 그 때문에 마른 잎에 불이 붙었고 순식간에 다른 잎들로 불이 번져 간 것이다. 누구도 미처 어떻게 해볼 겨를이 없었다. 노랑과 빨강으로 예쁘게 빛나던작은 불덩이가 이젠 사나운 괴물로 변해 버렸다. <달아나자!> 공포가 엄습한다. 모두가 한 순간이라도 빨리 나무 구멍에서 빠져 나가려고 안달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새로운 문제가 터져 나온다. 그들이 처음 생각했 던 대로 그 나무 구멍은 물론 다람쥐 둥지다. 하지만, 구멍 깊숙한 곳에 있던 것 은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이끼가 아니라, 바로 다람쥐였다. 불 때문에 잠에서 깨어난 다람쥐는 한 번 펄쩍 뛰어서 구멍 밖으로 빠져 나 간다. 그 서슬에 다람쥐가 지나간 길에 있던 개미들이 모두 쓰러지면서 나무 구 멍 깊숙한 곳으로 떨어져 버린다. 개미들은 허방다리에 빠진 신세가 되었다. 다람쥐가 빠져 나가고 개미들이 추 락하면서 생긴 바람 때문에 불길이 더욱 세어지고 독한 연기가 그들은 휘감는 다. 암개미 103호는 호울 페로몬을 계속 발하여 24를 찾는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날아오지 않는다. 가련한 24호는 첫 원정 때도 걸핏하면 길을 잃고 헤매곤 했다. 불길이 번져 오고 있다. 저마다 깜냥껏 살길을 찾아야 한다. 위턱이 튼튼한 개미들은 나무구멍의 안벽 을 파들어 가지 시작한다. 불길이 점점 커지더니, 이제 안벽을 타고 널름거린다. 불의 사용을 반대하던 개미들은 진작에 자기들 의견을 따랐으면 이런 재난은 생기지 않았을 거라며 불 평을 터뜨린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다. 누가 옳고 그 르냐는 중요하지 않다. 우선 목숨을 보전해 놓고 볼 일이다. 개미들은 애면글면하며 안벽을 기어오른다. 그러나 불붙은 마른잎 속에 되떨 어져 곧바로 불길에 휩싸이는 자들이 허다하다. 불길이 닿기가 무섭게 그들의 딱지가 녹아 버린다. 그래도 불에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개미들의 활력은 온도에 따라 달라 지는데, 불의 열기는 개미들에게 힘을 주고 그들의 움직임을 민첩하게 해준다. <24호!> 암개미 103호가 다시 페로몬을 발한다. 수개미 24호가 종적을 감추었다. 불길이 무섭게 일렁인다. 그 불길을 보고 있으니, 손가락들의 영화 바람과 합 께 사라지다에 나온 애틀랜타의 화재 장면이 떠오른다. 그러나 지금은 손가락들 의 세계를 동경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들의 기술을 너무 급하게 모방하려다 가 동료를 결국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것이 아닌가. <우리는 24호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 빨리 빠져 나가도록 하자.> 5호가 허둥대며 페로몬을 발한다. 암개미 103호가 수개미를 더 찾아보고 싶어하는 기미를 보이자, 5호는 암개미 를 떼밀며 안벽에 뚫린 구멍 하나를 가리킨다. 그 구멍을 판 개미가 밖으로 빠 져 나가기가 무섭게 덩치 큰 딱정벌레 하나가 덩달아 따라 나가려고 달려들었다 가 애써 파놓은 구멍을 다시 막아 버렸다. 개미들은 딱정벌레를 치워 내려고 다 리로 밀고 머리로 들이박는다. 그러나 힘이 딸린다. 103호는 무슨 수가 없을까 하고 궁리를 하다가, 손가락들의 기술을 잘못 사용 해서 생긴 문제는 손가락들의 다른 기술을 잘 사용해서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다른 개미들에게 잔가지 하나를 주워 오라고 일렀다. 그럿을 구멍 속 에 넣어서 지렛대로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다른 개미들은 이미 지지스의 알을 들어올릴 때 지렛대가 별로 효과가 없다는 것을 경험한 터라, 103호가 이번에 잘될 거라고 주장하는 데도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방도를 궁리할 겨를도 없기 때문에, 그들은 잔가지 하나를 구멍에 밀어 넣고 그 끝에 매달린다. 8호는 한껏 힘을 써볼 양으로 아예 다리까지 걸고 허공에 대롱거린다. 이번엔, 일이 제대로 되어간다. 지레의 힘점에 가해진 무게가 일점에 작용하여 구멍을 막고 있던 딱정벌레가 제거되고 불구덩이 속을 빠져 나갈수 있는 길이 트인다. 평소와는 정반대로 빛과 열기를 버리고 어둠과 추위가 있는 바깥으로 나가야 하는 기이한 상황이다. 하지만 어둠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나무 전체가 일거에 횃불로 변해 버렸 기 때문이다. 불은 정말이지 나무들의 적이다. 개미들은 모두 더듬이를 뒤로 젖 힌 채 전속력으로 달아난다. 뜨거운 바람이 훅 끼쳐와 그들을 앞으로 밀어낸다. 그들 주위로 온갖 곤충들이 겁에 질린 채 내닫는다. 깜박깜박하던 불씨 때의 수줍은 자태는 오간 데가 없고, 거대한 괴물로 변해 버린 불은 자꾸 커지고 넓어지면서, 다리가 없음에도 그들을 끈질기게 쫓아온다. 5호의 꽁무니에 불이 붙었다. 그는 얼른 꽁무니를 풀에 비벼서 불을 끈다. 만물이 부들부들 떨면서 주홍빛을 띠어 간다. 풀도 나무도 땅도 온통 불그스 름하다. 함개미 103호는 빨간 불의 추격을 피해 계속 달려 간다. 128. 파우와우 농성 이틀째 되던 날 저녁에는 록 그룹들이 자발적으로 결성되어 가설 무대를 갈마들며 연주를 했다. 여덟 <개미들>은 더이상 연주를 하지 않고, 파우와우를 열기 위해 그들의 연습실에 모였다. 쥘리의 어조는 점점 더 단호해지고 있었다. 우리의 개미 혁명을 높은 단계로 발전시켜야 해. 지금 뭔가를 하지 않으면 모 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 거야. 여기엔 5백 21명이 모여 있어. 모두의 생각과 상상력을 철저하게 활용해야 돼. 우리모두의 힘을 합하여 새로운 차원의 능력을 끌어내야 한다고.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 1 + 1 = 3 >이 개미 혁명의 슬로건이 될 수도 있을 거야. 그것은 이미 깃 대 꼭대기에서 펄럭이는 우리 깃발에 적혀 있어.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재발견하는 것뿐이야. 그래. <자유, 평등, 박애>보다는 그것이 우리에게 더 잘 어울려. < 1 + 1 = 3 >에는 두 재능을 결합하면 그것들의 단순한 합을 능가한다는 뜻이 담겨 있어. 프랑신이 맞장구를 치자, 폴도 거들었다. 한 사회 체제가 최상의 상태로 가동되면 그런 상황이 가능해질 거야. 그런 사 회는 정말 아름다운 유토피아지. 그들의 슬로건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쥘리의 제안이 이어졌다. 지금은 사람들이 따라오도록 추동하는게 우리가 할 일이야. 그래서 제안하는 건데, 각자 밤새도록 좋은 사업 계획을 만들어서 내일 아침에 다시 모이기로 해, 각자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사업계획을 짜보자는 거야. 지웅이 덧붙였다. 사업 계획이 확정되면 저마다 혁명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도록 실용적 으로 운용될 거야. 다윗은 학교 안에 컴퓨터가 있으니까. 인터넷에 접속해서 개미 혁명의 이념을 널리 알리자고 제안했다. 또, 인터넷을 이용해서 회사를 설립할 수도 있으므로 학교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돈을 버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프랑신도 의견을 보탰다. 정보 통신 서비스를 활용하면, 거리에 상관없이 사람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 어. 사람들은 우리에게 기부금도 보내주고 사업 계획도 제안할 수 있을 거야. 한 마디로 정보 통신망을 통해 혁명을 수출하자는 거야. 그 제안에 모두가 찬성하였다. 매스 미디어 대신에 그들은 컴퓨터 통신을 이 용해 자기들의 이념을 전파하고 외부 지원 조직을 편성하기로 했다. 밖에서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전날 밤보다 더욱 열광적인 축제였다. 넘치도록 많은 꿀술을 마시며 화톳불 주위에서 남녀가 어울려 춤을 추고 있었다. 품질 좋 은 마리화나 담배가 지천이어서 교정에 아편 냄새가 가득 찼다. 탐탐 소리마저 도 광기 어린 분위기를 만드는데 한몫을 하고 있었다. 쥘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그 춤판에 끼여들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 교실 하나 를 차지하고 들어가 자기들의 사업 계획을 구상하였다. 새벽 세 시쯤 되자, 쥘리는 체력이 한계에 왔음을 느끼면서 모두가 잠을 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카페테리아 아래에 있는 연습실에 다시 모였다. 연습실이 달라져 있었 다. 나르시스가 상황에 맞게 방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찾 아낸 장식물은 시트와 담요가 고작이었지만, 그는 그것만 가지고도 방을 그럴듯 하게 꾸며 놓았다. 그는 그것으로바닥과 벽은 물론이고 천장까지도 덮어 버렸고, 의자와 탁자도 만들었다. 연주를 할 수 있는 자리는 별로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 대신 안락하고 포근한 둥지가 만들어진 셈이었다. 건축에 관심이 많은 레이 폴은 직선도 없고 각진곳도 없으며 바닥이 푹신푹신한 그런 방이 아파트마다 하 나쯤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쥘리는 방을 그렇게 바꾸어 놓은 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공연한 수 줍음을 버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나란히 누웠다. 다른 사람들이 데굴데굴 굴러와 쥘리에게 바싹 다가와도 그녀는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모든 일이 다 잘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쥘리는 고대 이집트의 미라처럼 담요로 몸을 감쌌다. 그녀는 양 옆으로 다윗과 폴의 몸이 닿아 있음을 느꼈다. 지웅은 매트의 반대쪽 끝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꿈에서 만난 것은 바로 그였다. 129. 백과사전 열린 공간 현재의 사회 체제는 비능률적이다. 재능 있는 젊은이들에게 두각을 나타낼 길 을 열어 주지 않거나, 길을 열어 주더라도 온갖 종류의 체를 거쳐가게 함으로써 그들의 참신한 맛을 다 없애 버린 뒤에야 두각을 나타낼 수 있도록 허용하기 때 문이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열린 공간>들의 망을 조직해서, 학위가 없고 특별한 추천장이 없어도 누구나 대중을 상대로 자기 작품을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 공간들이 확보되면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진다. 예컨대, 열린 극장이 있다 면, 누구나 사전 선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기의 흥행물이나 연기 장면을 보여 줄 수 있게 된다. 참가자들이 꼭 지켜야 할 사항이 있다면, 적어도 공연 시작 한 시간 전에는 등록을 해야 한다는 것(서류를 제출할 필요는 없고 이름을 알려 주 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6분을 초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뿐이다. 그런 제도가 마련되면, 청중이 이따금 모욕을 당하는 일이 생길 염려는 있지만 나쁜 흥행물들은 야유를 받게 될 것이고 좋은 것들만 살아 남게 될 것이다. 그 런 형태의 극장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존속할 수 있기 위해서는 관객들 이 정상적인 가격으로 좌석권을 사주어야 할 것이다. 관객들은 기꺼이 돈을 낼 것이다. 두 시간 동안 아주 다양한 공연을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면 관 객들은 기꺼이 돈을 낼 것이다. 관객들의 흥미를 지속시키고, 두 시간의 공연이 서툰 초보자들의 행진으로 일관하는 최악의 경우를 피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프 로페셔널들이 규칙적인 간격으로 나와서 지원자들을 도와 줄 필요가 있다. 그 열린 극장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 데 성공한 지원자들 중에는 <이 연극의 후 속편을 보고 싶으신 분은 모일 모시에 모처로 오십시오>라고 예고할 수 있는 사람들도 생겨나게 될 것이다. 그런 유형의 열린 공간은 다음과 같이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 다. -열린 영화관 : 신인 감독들의 10분짜리 단편 영화 상영 -열린 음악회장 : 새내기 가수와 연주자들을 위한 무대 -열린 화랑 : 아직 알려지지 않은 화가와 조각가들에게 각각 2 제곱미터의 전시 공간 제공 -열린 발명품 전시관 : 열린 화랑과 똑같은 규모로 발명가들에게 전시 공간 제공 그런 자유 발표 제도는 건축가나 작가, 컴퓨터 프로그래머, 광고 제작자 등에 까지 확대해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제도는 행정적인 부담을 경감시킬 것 이고, 전문가들은 신인들을 체로 쳐서 골라내려는 기존의 대행업체를 통하지 아 ㅎ고도 그런 장소에 직접 나가서 새로운 인재들을 모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돈이 있든 없든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상관없이 모두가 똑같은 기회를 갖게 될 것이고, 오직 재능과 작품의 독창성이라는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서만 평가받게 될 것이 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 제3권. 130. 물이 부족하다 불이 번져 나가기 위해서는 바람이 불어야 하고 가까이에 연료가 있어야 한 다. 그 두가지를 구할 수 없게 되자, 불은 더 이상 퍼져 나가지 않고 나무를 먹 어 치우는 것으로 그쳤다. 막판에 뜻밖의 이슬비가 내려 불을 완전히 꺼버렸다. 비가 더 일찍 내리지 않은 것이 유감이다. 개미들은 자기들의 수를 헤아려 본다. 많은 개미들이 죽어서 대오가 성깃하다. 살아 남은 자들에게는 참으로 두렵고 조마조마한 시간이었다. 조상 대대로 내려 온 둥지로 돌아가서 사나운 불길 때문에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는 일 없이 편하 게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사냥 전문가인 15호는 불 때문에 사냥감들이 사방으로 수백 미터까지 달아났 으,니, 먹이를 찾으러 가자고 제안한다. 암개미 103호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면서 손가락들처럼 불에 탄 고기를 먹 자고 주장한다. <손가락들은 불에 구운 고기가 날고기보다 더 맛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우리와 손가락들은 둘 다 잡식 동물이다. 손가락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면 우리도 먹 을 수 있다.> 주위의 개미들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아 머뭇거린다. 15호는 불에 그을린 여 치의 시체를 용감하게 집어 들고, 위턱으로 넓적다리를 뜯어 입술 끝으로 가져 간다. 그러나 고기 한 조각을 떼어 먹어 볼 새도 없이 그는 고통 때문에 펄쩍 뛰어오른다. 고기가 너무 뜨겁다. 이로써 15호는 미식법의 기본 법칙 하나를 발 견한 셈이다. 구운 먹이를 먹을 때는 그것이 조금 식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 법칙이다. 그 교훈의 대가로 그는 입술 끝의 감각을 잃게 되었다. 따라서 그 감각을 되찾을 때까지는 오로지 더듬이를 갖다 대는 방법을 통해서만 음식의 맛을 알아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어쨌거나 암개미 103호의 의견은 받아들여 졌다. 개미들은 저마다 불에 익은 곤충들을 먹어 본다. 아닌게 아니라 날고기보다 맛이 더 좋은 편이다. 구워진 딱 정벌레는 더 바삭바삭할 뿐만 아니라 등깍지가 잘 부스러저셔 씹는 시간도 더 적게 걸린다. 익은 민달팽이는 색깔이 달라지고 잘라 먹기가 더 쉽다. 불에 그을 린 꿀벌은 캐러멜을 입힌 것처럼 감칠 맛이 난다. 개미들은 불에 타 죽은 동료들까지 먹어 치우려고 달려든다. 공포에 질려 떨 고 있는 동안 그들의 멀떠구니와 갈무리주머니가 텅 비어 버렸기 때문에, 그들 의 식욕은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하다. 암개미 103호는 여전히 근심에 싸인채, 머리를 숙이고 더듬이를 눈께로 축 늘 어뜨리고 있다. <수개미 24호는 어디로 갔을까? > 모든 곳을 다 찾아보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24호는 어디로 가을까?> 암개미는 그렇게 되뇌면서 이쪽저쪽으로 내닫는다. <103호가 아무래도 24호에게 홀딱 반한 모양이다.> 어떤 젊은 벨로캉 개미가 그렇게 지적하자, 다른 개미가 토를 단다. <24호는 수개미잖아.> 24호가 수개미이고 103호가 암개미라는 것은 이제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게 개미들이 다른 개미들을 놓고 쑥덕거리는 것은 개미사회에 새롭게 나타난 행동 이다. 다만 그들에겐 아직 언론 매체가 없기 때문에, 그 현상은 그다지 널리 파급되 지 않는다. <수개미 24호, 너어디에 있니?> 암개미가 다시 페로몬을 발한다. 그는 점점 불안감에 빠져 들며, 길 잃은 친구를 찾아 시체들 사이를 돌아다닌 다. 그러면서 이따금 혹시 수개미 24호의 시체가 아닌지 확인하느라고 다른 개 미들이 먹고 있는 먹이를 내려놓으라고 하기도 하고, 잘려 나간 머리와 가슴을 모아 다시 맞춰 보기도 한다. 그러다 결국엔 지칠 대로 지쳐서, 그대로 멈춰 선 채 낙담한 기색으로 멍하니 앞을 바라본다. 다른 개미들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는 불 기술자들이 보인다. 재난이 발생했을 때, 그 현장에서 가장 잘 빠져 나오는 자들은 언제나 그 재난의 책임자들이다. 친화파와 반화파 사이에 다시 난투가 벌어졌지만, 개미들은 아직 죄의식이라는 것도 모르고 죄를 심판하는 것도 모르기 때문에 싸움은 이내 중단되고, 불 기술 자들은 불에 구워진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먹이를 아주 맛있게 먹는다. 암개미 103호가 24호를 찾는 데 골몰해 있음을 알고, 5호가 암개미를 대신하 여 무리의 선두에 선다. 5호는 동료들을 다시 모으고, 그 죽음의 장소를 떠나 푸른 풀밭들이 다시 나 타나게 될 서쪽으로 계속 가자고 제안한다. <하얀 게시판은 여전히 벨로킹을 위협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불을 통해서 손 가락들의 기술이 얼마나 큰 피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를 경험하였다. 손가락 들이 불을 다스릴 줄 아는 자들이라면, 우리 도시와 그 주변을 파괴하는 것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불 기술자 개미 하난가 작은 불씨 하나를 찾아서 오목한 돌 속에 담아 가자고 고집을 부린다. 처음엔 다들 그를 만류하려고 했으나, 5호는 어쩌면 그것이 자기 들이 둥지까지 살아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최후의 무기가 될지도 모른다면 그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불씨가 든 조약돌을 세 개미가 운반하기 시 작한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불을 계속 끌고 가는 것을 보고 화가 난 개미 두 마리는 더 이상 못 참겠다며 대오를 이탈해 버린다. 결국 그들은 이제 103호와 열두 탐험개미, 그리고 코으니게라 섬의 생존자들 을 다 합쳐 서른셋 밖에 되지 않는다. 그들은 태양의 운행을 좇아 서쪽으로 계속 나아간다. 131. 여덟 자루의 초 셋째 날이 밝았다. 그들 여덟 사람은 새벽같이 일어나 각자 자기의 사업 계 획을 다듬었다. 「이렇게 매일 아침 아홉 시쯤에 컴퓨터 실에 모여서 상황을 점검하는게 좋겠 어.」 쥘리가 제안했다. 모두가 둥그렇게 둘러앉은 다음 차례로 자기의 사업 계획을 발표하기로 했다. 원의 한 가운데로 가장 먼저 나선 사람은 지웅이었다. 그는 이터넷에 <개미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웹 사이트를 올렸다면서, 아침 여섯 시부터 연결이 되었는데, 벌써 몇 사람이 접속해 왔다고 알렸다. 그는 컴퓨터를 켜서 자기가 만든 사이트를 보여 주었다. 홈 페이지를 열자, 개 미 세마리가 뒤집어진 Y자 꼴로 들어간 상징과 < 1 + 1 = 3 >이라는 슬로건 및 <개미 혁명>이라는 커다란 표제가 나타났다. 지웅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는 사이트의 각 부분을 차례로 열어 보였다. 광 장이라는 뜻의 <아고라>는 공개 토론을 위한 자리였고, <정보 마당>은 그들의 일상적인 활동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으며, <지원 마당>은 접속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사업 계획에 동참할 수 있게 하는 연대의 공간이었다. 모든 게 잘 돌아가고 있어. 접속자들은 우리의 운동에 외 <개미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우리의 운동이 개미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특히 궁금해 하 고 있어. 바로 그런 점 때문에라도 우리의 독창성을 심화시켜야 하는 거야. 사람들이 보기에 혁명 운동과 개미와의 연계는 뜻밖의 주제일 거야. 우리가 그 주제를 천 착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있는 셈이지. 쥘리의 주장에 일곱 난쟁이들도 동의하였다. 지웅은 학교 밖으로 나갈 필요도 없이 역시 컴퓨터를 통해 <개미 혁명>이라 는 상호를 등록하고 사업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해 나갈 유한 책임 회사를 세 웠다고 알려 주었다. 그가 키보드를 두드리자 회사의 정관과 앞으로 사용하게 될 회계 장부가 나타났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록 그룹일 뿐만 아니라 자보주의의 경제에 온전하게 편입 된 한 회사의 설립자들이기도 해.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 낡은 세계의 무기인 회사를 가지고 이 세계와 싸우게 될 거야. 모두의 준길이 화면에 쏠렸다. 쥘리가 말했다. 좋아. 우리의 회사를 통해 개미 혁명의 견고한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는 거야. 우리가 그저 축제를 벌이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이 운동은 꽃도 피워 보지 못하 고 시들어 버릴 거야. 각자 우리의 회사를 잘 돌아가게 할 만한 사업 계획들은 구상했겠지? 나르시스가 친구들의 눈길을 한몸에 받으며 자기 계획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내 생각을 곤충을 본딴 의상들의 컬렉션을 만들겠다는 거야. 상표는 물론 <개 미 혁명>으로 하고, 소재는 주로 <곤충나라 제>를 쓸 거야. 누에 실은 물로닝고 거미가 뽑아낸 실도 사용할 수 있어. 거미줄은 튼튼하고 가볍고 유연해서 미군 에서는 그것으로 방탄 조끼를 만든다는 거야. 나는 옷감에 나비 부늬를 찍고 풍 뎅이 딱지를 활용한 장신구도 만들 생각이야. 그는 자기가 밤을 새워 가며 만든 몇 가지 스케치와 견본을 친구들 앞에 내놓 았다. 모두가 그의 계획에 찬성하였다. 그렇게 해서 유한 책임 회사 <개미 혁 명>은 의상 및 패션과 관련된 최초의 자회사를 곧 바로 설립하게 되었다. 지웅 은 나르시스의 상품을 관리하기 위한 모듈을 개설하였다. 그 암호명은 <나비 회 사>였다. 지웅은 또 나르시스 가 창안한 견본들을 접속자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가상의 진열창도 마련해 주었다. 다음은 레이폴이 자기 계획을 소개할 차례였다. 내 생각은 건출 대행사를 세워서 언덕의 흙 속에 집을 짓겠다는 거야. 언덕 속에 집을 지으면 어떤 이점이 있지? 흙은 추위와 더위로부터 우리를 지며 주고 방사선과 자기장과 면재료지. 또 언덕은 비바람과 눈보라가 아무리 심해도 끄떡없이 견디어 내는 천혜의 건축 공 간이야. 이야기인즉슨, 현거 형태의 집을 짓겠다는 거구나. 그런 집은 실내가 좀 어둡 지 않을까? 쥘리가 물었다. 전혀 그렇지 않아. 남쪽으로 커다란 유리창을 내면 일광욕실처럼 볕이 잘 들 거고, 꼭대기에 천장을 달면 낮과 밤의 운행을 언제나 볼수 있어. 말하자면, 그 런 짐에 사는 사람들은 완전히 자연의 한가운데에서 사는 셈이야. 낮에는 햇빛 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어. 창가에서 일광욕을 즐길 수도 있지. 그리고 밤에는 달과 별을 보면서 잠이 들게 될 거야. 그럼 바깥엔 뭐가 있지? 프랑신이 물었다. 집의 바깥벽에는 잔디밭과 꽃과 나무들이 있고, 주위의 공기에는 초목의 싱그 러운 냄새가 가득 차게 될 거야. 그것은 콘크리트로 만든 집들과는 달리 생명에 토대를 둔 집이야. 벽들이 숨을 쉬고, 광합성을 해. 갖가지 동물과 식물들이 벽 들 덮고 있어. 괜찮은 생각이야. 게다가 그 집들은 주위의 경관을 해치지도 않을 거야. 다윗이 가장 먼저 찬성의 뜻을 밝혔다. 그런데, 에너지 원은 어떻게 되지? 조에가 물었다. 언덕 꼭대기에 설치된 태양열 집적기로 전력을 공급하면 돼. 집이 언덕 속에 들어 있어도 현대적인 편의 시설을 포기하지 않고 살수 있어. 레오폴은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집의 설계도를 친구들에게 제시했다. 돔 형태로 된 그 집은 제법 안락하고 널찍해 보였다. 레오폴이 이상적인 주거 형태를 설계하기 시작한 뒤로 줄곧 구상해 온 것이 바로 그런 집이었다. 인디언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그도 네모진 집의 개념에서 벗어나 둥근 형태를 골간으로 삼는 집을 짓고 싶어했다. 사실 언덕 속의 집은 벽이 더 두껍다는 점만 제외하면 커다란 티피나 다름이 없었다. 그의 계획에 모두가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지웅은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려 건축 부문의 자회사를 얼른 추가하고, 레오폴에게 사람들이 그의 이상적인 집을 보고 그 장점을 평가할 수 있도록 그것을 그려 넣고 이미지 합성을 통해 입체감 을 주라고 부탁했다. 그 두 번째 자회사는 <개미집 회사>로 명명되었다. 폴이 발표할 차례였다. 내 계획은 곤충의 생산물, 즉 꿀과 분비물과 버섯은 물론이고 밀랍과 로열 젤 리 등을 원료로 해서 여러가지 식품을 만들어 내겠다는 거야. 곤충의 세계를 더 깊이 연구해 보면, 우리가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풍미를 발견할 수 있 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개미들은 진딧물의 분비꿀로 술을 만들어. 우리가 마시 는 꿀술과 아주 비슷한 거야. 거리에서 착안한 건데, 꿀술을 다양하게 변화시키 면 미묘한 맛의 차이가 나는 새로운 음료들을 개발할 수 있을 것 같아. 폴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더니, 그 안에 든 음료를 조금씩 맛보라고 했다. 다들 그것이 맥주나 사고주보다 맛있다고 했다. 이것은 진딧물의 분비꿀로 향을 낸 거야. 교정의 장미에서 분비끌을 찾아내어, 간밤에 화확샐의 실험 기구를 사용해서 효모를 넣고 발효시킨 거야. 먼저 꿀술의 상표를 등록해 놓자. 그런 다음 통신으로 그것을 파는 거야. 지웅이 컴퓨터를 작동시키면서 말했다. 그 회사의 식품의 이름은 <꿀술>로 지어졌다. 다음은 조에의 차례였다. 에드몽 웰즈는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서 개미들이 이른 바 완전 소통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어. 더듬이와 더듬이를 맞대 어 서로의 뇌를 직접 연결할 수 있다는 것이지. 그 이야기가 내 상상력을 자극 했어. 개미들이 그런 완전 소통을 할 수 있다면, 사람들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 을까? 에드몽 웰즈는 사람의 후각 기관에 맞는 보철기구를 만들자고 제안하고 있어. 사람들끼리도 페로몬 대화를 할 수 있게 하는 기구를 만들겠다는거니? 그래. 그런 기계를 만들겠다는 것이 바로 내 생각이야. 더듬이가 있으면 사람 들도 서로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될 거야. 조에는 쥘리에게 백과 사전을 달라고 해서 에드몽 웰즈가 그린 설계도를 모 두에게 보여 주었다. 두 개의 원추가 접합되어 있고, 각 원추에서 가늘고 구부슴 한 더듬이가 나와 있는 이상한 기계였다. 취업반의 실습실에 가면 이런 기계를 만드는데 필요한 것들이 다 있어. 거푸 집도 있고, 합성 수지며 전자 부품 따위도 있어. 우리 학교에 취업반이 있어서 다행이야. 덕분에 정밀 기계를 갖춘 실습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으니 말이 야. 지웅은 조에의 계획에 희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단기적으로 모변, 그녀의 계획 을 가지고는 어떠한 경제 활동도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이 조에의 계획을 마음에 들어했기 때문에, 그는 그녀가 <사람의 더듬이>를 만드 는 작업에 착수할 수 있도록 <소통에 관한 이론적 연구>의 명목으로 예산을 할 당하기로 결정했다. 쥘리가 둥그렇게 둘러않은 원의 한가운데로 나서며 말했다. 내 계획도 조에의 것처럼 수익성이 별로 없는 거야. 그리고 역시 「백과사전 」에 묘사된 기발한 발명과 관계가 있어. 쥘리는 책장을 넘겨 화살표 지시가 여기저기 들어간 도면 하나를 보여 주었 다. 에드몽 웰즈는 이 기계를 로제타 돌이라고 부르고 있어. 언어의 천재 샹폴리 옹이 고대 이집트의 신성 문자를 해독할 때 그 실마리가 되었던 것이 바로 나일 강 어귀의 로제타에서 발견된 비석이야. 에드몽 웰즈는 아마도 샹폴리옹을 기리 는 뜻에서 그런 이름을 붙였을 거야. 에드몽 웰즈의 로제타돈은 개미들이 발산 하는 페로몬의 냄새 분자를 분석해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바꾸어 주는 기계야. 거꾸로 우리의 말을 분석해서 개미의 페로몬으로 번역해 주기도 해. 내 계획은 바로 그 기계를 만들어 보겠다는 거야. 진심으로 하는 소리니? 그럼! 개미의 페로몬을 분해하고 재합성하는 일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진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야. 다만, 아무도 그런일에 관심을 두지 않아서 이렇다 할 성과 가 나오지 않은 거야. 문제는 개미와 관련된 연구들이 언제나 개미들을 우리의 부엌에서 없애 버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는 데에 있어. 그것은 마치 외계인 과의 대화에 관한 연구를 가축 도살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에 맡기는 것과 같아. 그 기계를 만들려면 무엇이 필요하지? 지웅이 물었다. 질량 분관기와 크로마토그래프와 컴퓨터가 필요하고, 물론 개미 집도 있어야 지, 앞의 두 가지는 이미 향수 제조업자 자격증 준비생들의 실습실에서 찾아냈 고, 개미 집은 학교 잔디밭에서 하나를 발견했어. 친구들은 그녀의 계획에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쥘리가 동을 달았다. 우리 운동이 개미 혁명이니까 개미에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이야 지웅은 쥘리가 그런 이상한 연구에 뛰어들어 정신을 분산시키기보다는 그들 그룹의 가수로서 선수상 역할을 계속 수행하는 편이 낫겠다고 평가했다. 쥘리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논거를 더 제시해 보기로 했다. 개미들을 관찰하고 개미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우리 혁명을 더욱 잘 이끌어 가도록 도움을 줄 거야. 그 주장에는 아무도 이견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웅은 <이론적인 연 구>의 명목으로 두 번째 예산을 할당하였다. 그 다음은 다윗의 차례였다. 그가 허두를 떼기 전에 지웅이 말했다. 네 계획은 조에나 쥘리의 것보다는 더 수익성이 있는 것이었으면해. 내 계획은 지금까지 제시된 개미 미학, 개미 미각, 개미 건축, 더듬이 대화, 개 미들과의 직접적인 만남 등의 연장선 위에 있어. 내가 생각하는 것은 바로 개미 집에서 벌어지는 커뮤니케이션과 비슷한 활발한 정보 소통 구조를 만들겠다는 거야. 무슨 얘긴지 더 설명해 봐. 어떤 영역이냐에 상관없이 모든 정보들이 한데 모여 어우러지는 광장 같은 거 라고 생각하면 돼. 일단은 그것을 <물음 마당>이라고 이름지었어. 따지고 보면 그리 거창한 건 아닐지도 몰라. 인터넷에 사이트 하나를 만들자는 거니까 말이 야. 하지만 그 목표는 예사로운 게 아니야. 인간이 제기할 수 있는 모든 질문에 답하겠다는 것이거든. 한 시대의 지식을 총망라하여 모두가 활용할 수 있도록 재분배하겠다는 거야. 에드몽 웰즈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을 썼을 거라고 생각해. 라블레나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18세 기의 백과전서파가 이루어 내고자 했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을 거야. 엇있는 일이기는 한데, 그것 역시 실속을 없어 보이는걸. 지웅이 이렇게 말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전혀 그렇지 않아! 좀더 들어 봐. 질문에 공짜로 대답을 해주는게 아니야. 질 문의 난이도에 따라서 우리 대답의 값을 매기는 거야.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오늘날에는 지식이 재산이야. 예전에는 토지와 상품 생산과 서비스가 차례로 부의 주된 원천이 되었지만, 이젠 정보가 부의 원천이야. 지식은 그 자체만 놓고 보면 가공하지 않은 원자재와 같아. 그러나 그 원자재를 가공할 줄 아는 사람에 게는 그것이 돈이 돼. 다음해의 날씨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 만큼 기상학에 도통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봐. 그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면 곡식이나 채소를 언제 어디에 심어야 최대의 수확을 올릴 수 있는지를 알게 될 거야. 마찬가지로, 입지 조건이 어떠할 때 생산성을 최대로 높일 수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이 공장을 세운다든가 야채 수프의 조리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식당을 열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당연히 더 많은 돈을 벌게 될 거야. 내가 제안하는 것은 완벽한 정 보 은행, 되풀이하자면, 인간이 제기할 수 있는 모든 질문에 대답해 주는 정보은 행을 만들자는 거야. 그런 다음에 야채 수프를 어떻게 만드는지, 채소를 언제 심는지 따위를 가르 쳐 주자는 거야? 나르시스가 놀리듯이 물었다. 그래. 질문은 끝이 없어. <지금 시각이 정확히 어떻게 되나요?>처럼 거의 돈 을 받지 않고 대답해 줄 수 있는 것도 있을 테고, <보통의 금속을 금으로 바뀌 게 한다는 연금술의 돌에는 어떤 비결이 있나요?>처럼 훨씬 더 비싼 것도 있을 거야. 그 어떤 질문에 대해서도 답을 제시해 주겠다는 것이 바로 <물음 마당> 의 목표야. 폭로해서는 안 되는 비밀을 전해 주게 되는 경우는 없을까? 폴이 물었다. 질문을 해온 사람이 대답을 듣거나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는 대답 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어. 내가 지금 당장 너에게 연금술의 비결이나 예수 가 최후의 만찬 때 사용했다는 성배의 비밀을 가르쳐 준다 해도, 너는 그 정보 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를 거야. 그 대답은 폴을 설들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그 모든 물음에 대한 답을 어떻게 찾아낼 생각이니? 체계적인 방법을 바련해야지. 과학, 역사, 경제 등 모든 분야에 걸친 기존의 정보 은행들에 접속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화를 이용해서 여론 조사 기관이나 전문가들에게 담을 의뢰할 수도 있지. 경우에 따라서는 정보들을 대조해서 진위 를 가려야 할 때도 있을 거고, 사립탐정이나 전 세계의 도서관에 도움을 청해야 할 때도 있을 거야. 결국, 내 제안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정보망과 정보 은행을 지혜롭게 활용해서 지식의 관장을 만들자는 거야. 좋아. <물음 마당>이라는 자회사를 두고, 거기에 가장 용량이 큰 하드 디스크 와 가장 빠른 모뎀을 배당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프랑신이 원의 한가운데로 나섰다. 다들 기발한 사업계획들을 제 시한 터라, 그보다 더한 것을 내놓기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프랑신 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역력했다. 마치 가장 멋진 계획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 지막을 멋지게 장식하기 위해 참을성 있게 기다려 온 사람 같았다. 내 계획 역시 개미와 관련이 있어. 우리에게 개미들은 무엇이지? 개미들의 세 계는 인간 사회와 평행한 다른 차원의 세계야. 그러나 아주 작은 세계이기 때문 에 우리는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우리는 그것들의 죽음을 슬퍼하지도 않고, 그것들의 우두머리와 법률과 전쟁과 발견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어. 그 러나, 우리가 천성적으로 개미들에게 흥미를 느끼지 않은 건 아니야. 우리의 어 린 시절을 생각해 봐. 우리는 그때부터 개미들을 관찰하면 우리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니? 지웅이 물었다. 그의 관심을 그녀의 계획이 하나의 자회사를 만들만한 것인가 아닌가에 쏠려 있었다. 프랑신은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계속 뜸을 들였다. 「우리처럼 개미들은 냄새길과 통로가 이리저리 뻗어 있는 도시에서 살고 있 어. 개미들도 농업을 알고, 대규모 전쟁을 벌이고, 여러 계급으로 나뉘어 있어. 개미들의 세계는 크기는 작지만 우리 세계와 비슷한 점이 아주 많아. 맞아. 그런데 네 사업 계획이 그것하고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니? 내 생각은 개미 세계처럼 작은 세계를 만들어서 그것을 관찰하고 실용적인 교 훈을 끌어내겠다는 거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컴퓨터에 가상의 세계를 창조한 다음, 거기에 가상의 인간과 동물이 살게하고 가상의 자연 환경과 기후 조건 등 을 설정해 줌으로써 거기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우리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과 비슷하게 만들겠다는 것이 내 계획이다. <진화>라는 게임을 할 때처럼 말이지? 쥘리는 프랑신이 하고자 하는 얘기가 무엇인지를 짐작하고 그렇게 물었다. 그래. 다만, <진화>에서처럼 주민들이 해야 할 일을 우리가 명령하는 것은 아 니야. 나는 우리 세계와 더욱 유사한 가상 세계를 만들어 볼 생각이야. 그 세계 에 나는 <인프라 월드>라는 이름을 붙였어. 그 세계의 주민들은 완전히 자유롭 고 자율적이야. 쥘리, 너 생각나니? 우리가 자유 의지에 관해서 이야기 했던 거 말이야. 그럼. 자유 의지는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을 입증하는 가장 위대한 증거라고 얘기 했지. 신은 우리가 어리석은 짓을 해도 간섭하지 않는다면서 말이야. 그리고 너는 이런 얘기도 했어. 자유 의지는 우리가 어떤 행동을 진정으로 하 고 싶어하는지, 또 우리 스스로 좋은 길을 찾아낼 수 있는지를 알게 해주기 때 문에 신이 모든 것을 일일이 지시하는 것보다 한결 좋다고.」 바로 그거야. 신이 우리 세계에 간섭하지 않고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 은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이야. 나는 인프라 월드의 거주자들에게도 똑같은 것을 줄 생각이야. 자유 의지를 말이야.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자기들 이 나아갈 길을 그들 스스로 결정하게 할 거야. 그렇다면, 그들은 정말로 우리처 럼 되는 거야. 그리고 나는 자유 의지라는 그 중요한 개념을 모든 동물과 식물 과 광물에까지 확대해서 적용하려고 해. 인프라 월드는 독립된 하나의 세계야. 그런 점에서 인프라월드는 우리 세계와 유사하고, 그 세계를 관찰하는 것은 우 리에게 정말로 소중한 정보들을 가져다 주리라고 생각해. <진화> 게임을 할 때와는 달리, 가상의 백성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얘기니? 그래, 아무도 없어. 우리는 그저 그들을 관찰하면서, 어쩔 수 없는 경우에 한 해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요소들을 넣어줄 뿐이야. 가상의 나무들은 저절로 자랄 것이고, 가상의 사람들은 스스로 알아서 그 열매를 딸 것 이며, 가상의 공장에선 아주 자연스럽게 그 열매로 잼을 만들게 될거야. 그 다음엔, 가상의 소비자들이 그 잼을 먹게 될 것이고. 조에가 깊은 관심을 보이며 프랑신의 말을 대신 이었다. 그러면 우리 세계와 어떤 차이가 있지? 시간의 흐름에 차이가 있어. 인프라 월드에서는 우리 세계에서 보다 시간이 열 배는 더 빨리 흘러. 그래서 우리는 그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거시적으로 관찰할 수 있어. 우리세계를 빨리 돌아가게 해서 관찰하는 것과 비슷해. 그런데, 그것이 어떤 점에서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지? 여전히 수익성을 염두에 두면서 지웅이 물었다. 다윗은 프랑신의 계획이 가져 올 모든 결과를 간파하고 이렇게 대답했다. 경제적인 이익이 막대하지. 우리는 인프라 월드에서 모든 것을 실험해 볼 수 있어. 가상의 거주자들이 사전에 입력된 대로 행동하는게 아니라 자유롭게 자기 들의 의지에 따라서 행동하는 가상의 세계를 상상해 보라고. 그래도 이해가 안 가는데. 예를 들어, 어떤 세제의 상표가 소비자들에게 호감을 주는지 어떤지를 알고 싶으면, 그 상표를 인프라 월드에 도입해서 거주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즌지를 관찰하면 되는 거야. 가상의 거주자들은 자유롭게 그 상품을 선택하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하겠지, 그럼으로써 우리는 여론 조사 기관에 의뢰해서 얻는 것보다 한결 충실하고 빠른 응답을 얻을 수 있어. 백 사람으로 이루어진 현실의 표본을 상대로 시험하는 것이기 때문이야. 지웅은 미간에 주름살을 잡고 그런 계획이 자져올 결과를 헤아려 보았다. 그런데, 시험할 세제를 어떻게 인프라 월드 안에 넣지? 인프라 월드 안에는 우리 세계와의 교량 역할을 하는 거주자들이 있어. 인프 라 월드의 기술자, 의사, 연구자들이지. 생김새는 다른 거주자들과 똑같아. 우리 는 시험하고자 하는 상품을 그들에게 전달하는 거야. 그들만은 자기들의 세계가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 세계의 궁극적인 목적은 상위 차원의 다른 세계를 위해 실험을 행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다윗이 <물음 마당>을 제안했을 때만 해도 그보다 더 야심만만한 계획은 나 오기 어렵겠다 싶었는데, 프랑신의 야심을 그것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그녀의 구상이 얼마나 웅대한 것인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인프라 월드를 통해서 모든 정책을 시험할 수도 있어. 자유주의, 사회주의, 무 정부주의, 환경 보호주의 등의 정책이 단기적으로 또는 중장기적으로 어떤 결과 를 낳을 수 있는지를 검토할 수 있다는 거야. 법률을 입안하는 사람들은 어떤 법률이 가져올 효과를 미리 알 수 있게 돼. 한마디로 우리는 실험용의 축소판 인류를 갖게 되는 거야. 우리는 그 인류를 관찰함으로써 그릇된 길로 가지 않고 시간을 벌 수 있어. 모두의 흥분이 고조되었다. 다윗이 소리쳤다. 환상적이야! 인프라 월드는 나의 <물음 마당>에도 정보를 공급할 수 있겠어. 그 가상 세계를 관찰하다 보면,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는 해결하지 못할 갖가지 문제들에 대해 답을 찾아낼 수 있게 될 거야. 프랑신은 꿈을 꾸듯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다윗이 그녀의 등을 탁 치며 덧붙였다. 어찌 보면, 너는 신이 되는 거나 다름없어. 온갖 요소들을 모아 작고 완전한 세계를 만든 다음, 제우스와 올림푸스의 여러 신들이 인간 세상을 살피듯이 그 세계를 관찰할 테니 말이야. 거꾸로 생각하면, 우리가 생하는 모든 일은 더 우월한 차원의 다른 세계를 위 한 실험인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세제 같은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험되고 있 는 거고 말이야. 나르시스가 냉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하자,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웃음 뒤끝이 그리 개운하지는 않았다.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프랑신이 깊은 생각에 잠기며 중얼거렸다. 132. 백과 사전 엘레우시스 게임 고개 드리스의 도시 이름을 딴 이 게임은 어떤 법칙을 찾아내는 것으로 승부 를 겨룬다. 이 놀이에는 적어도 네 사람이 필요하다. 먼저 놀이꾼 가운데 하나가 <신>으로 결정된다. 그는 어떤 법칙을 만들어 내어 종이 조각에 적는다. 그 법칙은 하나의 문장으로 되어 있고 <우주의 섭리>로 명명된다. 그런 다음, 52장으로 된 카드 두 벌이 놀이꾼들에게 골고루 배분된다. 한 놀이꾼이 선을 잡고 카드 한 장을 내놓으면서 <세계가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선언한다. 신으로 명명된 사람은 <이 카드는 합격이야> 혹은 <이 카드는 불합격이야> 하고 알려 준다. 퇴짜맞은 카드들은 한쪽으로 치워 놓고, 합격된 카드들은 한 줄로 나란히 늘어놓는다. 놀 이꾼들은 신이 받아들인 일련의 카드들을 관찰하면서 그 선별에 어떤 규칙이 있 는지를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누구든 그 법칙을 찾아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 으면 손을 들고 스스로를 <예언자>로 선언한다. 그때부터는 그가 신을 대신해 서 카드의 합격 여부를 다른 놀이꾼들에게 알려 준다. 신은 예언자를 감독하고 있다가 예언자의 말이 틀리면 그를 파면한다. 예언자가 열장의 카드에 대해 연 속으로 맞는 대답을 제시하면, 그는 자기가 추론한 법칙을 진술하고 다른 사람 들은 그의 진술이 종이에 써놓은 문장과 일치하는지를 비교한다. 두 가기가 맞 아 떨어지면 예언자는 승리자가 된다. 그러나 두 진술이 어긋나면, 그는 파면된 다. 만일 104장의 카드를 다 내놓았는데도, 예언자가 되겠다고 나선 사람이 아무 도 없거나 예언자로 자처한 사람들이 모두 틀린 진술을 하면, 승리는 신에게로 돌아간다. 그렇다고, 우주의 섭리를 너무 복잡하게 만들면 안된다. 간단하면서도 찾아내 기 어려운 규칙을 생각해 내야 게임이 재미있다. 예컨대, <9보다 놓은 카드와 9 이하의 카드를 번갈아 가며 받아 준다>는 규칙은 밝혀 재개가 아주 어렵다. 당 연한 얘기지만 놀이꾼들이 킹이나 퀸 같은 그림패와 빨간색과 검은색의 교체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또, <오로지 빨간색 카드로만 이루어진 세상을 만들되, 열 번째, 서른 번째로 나온 카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라든가, <하트 7 을 제외한 모든 카드를 수용한다>와 같은 규칙은 금지된다. 밝현 내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에 가서 우주의 섭리가 도저히 밝혀 낼 수 없을 만큼 어 려웠던 것으로 판명되면, 그 규칙을 만든 신은 승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놀이 에 참가할 자격을 잃게 된다. 따라서 신은 <쉽게 떠올릴 수 없는 단순성>을 겨 냥해야 한다. 이 놀이에서 승리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전략은 무엇일까? 설령 파면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되도록 빨리 예언자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유 리하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 제3권. 133. 가동되는 혁명 암개미 103호는 머리를 숙이고 진드기떼를 내려다본다. 진드기들은 그의 앞다 리 발톱사이를 지나 전나무 구루터기의 구멍을 향해 이동하고 있다. <우리가 손가락들에 비해 작은 것만큼이나 이 진드기들은 우리에 비해 작 다.> 103호는 호기심을 느끼며 진드기들은 관찰하고 있다. 전나무 그루터기의 껍질 은 작고 좁다란 판자들을 이어 놓은 것처럼 세로로 갈라져 있고, 그 틈새마다 진드기들로 가득 차 있다. 좀더 가까이에서 보니 진드기떼가 두편으로 나뉘어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한쪽은 병력이 5천쯤 된는 털진드기 무리다. 그에 맞서 싸 우는 쪽은 3백 남짓한 병력을 가진 물고기 진드기들이다. 당연히 물에 있어야 할 물고기 진드기들이 어쩌다 나무로 올라갔는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암개미 103호는 한동안 그들의 전투를 구경한다. 털진드기들은 다리 관절, 어 깨, 머리 할 것 없이 도처에 발톱처럼 짧은 털이 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인상 적이다. 물고기 진드기는 이름과는 달리 진드기목에 딸린 벌레가 아니라 갑각류 에 딸린 벌레다. 그들은 갑옷 같은 딱지로 몸을 감싸고. 복잡하고 뾰족한 주둥이 와 털을 갈고리나 톱이나 단검 같은 무기로 삼아 용맹스럽게 싸우고 있다. 시간이 없어서 그 전투를 계속 구경할 수 없는 게 유감이다. 진드기 무리가 어떻게 침략과 전쟁을 벌이는지, 그들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전나무 그루터기의 서른 번째 틈새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전투에서 털진드기떼와 물고기 진드기떼 중 어느 쪽이 승리할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아마도 다른 틈새에서는 다른 진드기류, 예컨대 옴진드기라든가 티로글 리프, 진드기, 소진드기, 새진드기 따위가 더욱 중요한 것을 걸고 더욱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 싸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개미 들도 103호도. 103호로서는 거대한 손가락들과 자기 겨레에, 그리고 자기 자신에 관심을 두 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103호는 다시 길을 떠난다. 그의 주위로 손가락 혁명의 행력이 계속 불어나고 있다. 화재를 겪고 난 뒤에 그들의 수는 서른 셋으로 줄었지만, 그들과 마주친 다른 개미들이 행렬에 속속 합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호기심 많은 자들은 그들이 운반하고 있는 불에 겁을 먹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보려고 더욱 가까이 다가든다. 암개미 103호는 새로운 개미들을 만날 때마다 24호라는 수개미를 본 적이 없 느냐고 묻곤 한다. 그러나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자는 하나도 없다. 개미들뿐만 아니라 다른 곤충등도 불을 보겠다고 다가든다. <그러니까 저게 바로 그 무시무시한 불이란 말이지.> 그 괴물은 돌 속에 갇혀서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어미 딱 정벌레들은 새끼들에게 위험하니까 다가가지 말라고 이른다. 불씨를 담은 돌이 너무 무겁다는 생각이 들자, 다른 종과의 접촉을 전문으로 하는 14호는 달팽이를 시켜서 그것을 운반하게 하자고 제안한다. 한 달팽이와의 접촉에 성공한 그는 등이 따뜻하면 건강에 아주 좋다는 식으로 달팽이를 설득한 다. 달팽이는 다른 이슈보다도 개미떼가 무서워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5호는 14 호의 성공에 만족해 하면서, 같은 방식으로 다른 달팽이들에게도 먹이와 화로를 지고 가게 하자고 제안한다. 달팽이는 동작이 굼뜨긴 하지만 어떤 곳이라도 갈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달팽이가 기어가는 방식은 아주 특이하다. 바닥에 끈끈물을 발라 자기 앞 에 스케이트 장을 만들어 놓고 그 위로 미끄러져 가니 말이다. 개미들은 이제껏 달팽이들을 잡아먹기만 했지, 그들을 관찰해 본적이 없다. 그래서 끈끈물을 끝 없이 뱉어 내는 그들의 모습이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물론 그 끈끈물은 개미들에게 문제를 일으킨다. 뒤따르는 개미들이 끈끈물에 질퍽질퍽 다리가 빠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미들은 끈끈물의 양편으로 갈라서 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불그스름한 돌덩이를 지고 가는 달팽이들을 사이에 두고, 개미들이 두 줄로 늘어서 있는 그 행렬은 여간 인상적인 것이 아니다. 많은 곤충들이 의문에 찬 더듬이를 내밀며 덤불에서 튀어 나온다. 그들의 대부분은 개미들이다. 땅바닥에 붙어사는 그들의 삶에는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다. 그런데 손가락 혁명을 하 겠다는 이 개미들은 세계의 수수께끼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나아가자고 한다.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던 탐험개미들과 젊고 대담한 병정개미들이 그 생각에 고 무되어 행렬에 동참한다. 그들의 수는 이제 1백에서 5백으로 불어났다. 손가락 혁명의 대오가 제법 틀 이 잡혀 간다. 다만 한 가지 이상한 일은 암개미 103호가 별로 열의를 보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개미들은 그것이 수개미 24호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개체를 특별히 소중하게 여기는 암개미의 태도를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 다. 손가락 세계에 관한 정보를 관리하고 있는 10호는 특정한 개체에 집착하는 것 역시 손가락들 특유의 병이라고 설명한다. 134. 멋진 하루 쥘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자기들의 작은 혁명을 건설하는 일에 몰두하면서, 어 떤 놀라운 비밀이 갑자기 드러났들 때와 같은 시원한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그 건 자기들의 개인적인 정신이 집단적인 정신으로 확장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들의 정신은 육체의 감옥에 갇혀 있지 않았고, 그들의 지력은 뇌의 동굴 속에 억눌려 있지 않았다. 쥘리가 원하기만 하면 그녀의 정신이 두개골 밖으로 나와 거대한 빛의 레이스로 변한 다음 그녀의 주위로 끝없이 퍼져 나가곤 했다. 그녀의 정신은 세계를 감쌀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자기가 단지 원자 들의 거대한 집합체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긴 했지만, 그렇 다고 자기 정신이 그렇게 전능하다는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이야... 그런 기분과 함께 또 하나의 강한 느낌이 찾아왔다. <나는 중요하지 않다>는 느낌이 그것이었다. 개미 혁명의 동아리로 자아를 확대하고 자기 정신을 세계로 확장할 수 있게 되자, 자기의 개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스스 로를 남처럼 느꼈고, 마치 쥘리 팽송이 자기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인 양 그 사람의 행동을 지켜볼 수 있었다. 나와 남의 경계가 무너지고, 인간의 모든 운명이 담고 있는 기구하고 비극적인 측면이 사라진 듯한 기분이었다. 쥘리는 스스로가 솜털처럼 가볍다고 느꼈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그저 아름답고 덧없고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중요 한 건 정신이 공간과 시간을 가로질러 거대한 빛의 레이스로 날아오를 수 있다 는 거였다. 그건 불멸의 진리였다. <나의 정신아, 안녕? >하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녀도 자기 뇌가 지닌 능력의 10%밖에 활용하지 못하는 터라 그런 기분을 온전하게 관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정신은 두개의 작고 좁은 공간으로 되돌아갔다. 빛의 레이스는 티 슈페이퍼처럼 잔뜩 구겨진채 두개 깊숙한 곳에 얌전하게 틀어박혔다. 쥘리는 각자의 일에 몰두해 있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탁자를 모으거나 의자를 나르기도 하고, 천막의 밧줄을 묶거나 말뚝을 박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 이 치고 있는 천막이 쓰러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기도 하는 등 그녀가 거들 일이 많았다. 그녀는 일을 하면서 줄곧 노래를 불렀고, 술을 조금씩 마시면서 힘을 얻 곤 했다. 그녀의 이마와 코밑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땀방울이 입아귀로 흘러내 리자, 그녀는 그것을 훅 들이마셨다. 개미 혁명의 일꾼들은 자기들의 계획을 소개하기 위한 전시 공간을 만들면서 셋째 날을 보냈다. 처음에는 그 공간을 교실에 마련할 생각이었으나, 조에가 다 른 의견을 내놓았다. 천막들과 가설 무대가 가까이 있는 잔디밭 중앙에 전시장 을 마련해야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흥겨운 잔치가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 그녀 의 생각이었다. 하나의 전시 공간을 만드는 데는 많은 것이 필요치 않았다. 인디언들의 티피 를 닮은 원추형 천막 하나와 컴퓨터 한대, 거기에 전선과 전화선만 있으면 충분 했다. 컴퓨터 덕분에 불과 몇 시간만에, 여덟 개의 사업 계획 대부분이 가동될 준비 가 되었다. 공산주의 혁명에 소비에트와 전기가 있었다면, 그들의 혁명에는 개미 와 컴퓨터가 있었다. 건축 전시장은 레오폴의 이상적인 주거가 소개되는 자리였다. 그는 점토 반죽 으로 된 입체 모형을 보여 주면서, 개미집 안의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듯이, 흙 과 벽 사이로 찬 공기와 더운 공기가 순환하면서 실내 온도가 조절되는 원리를 설명하였다. 다윗의 <물음 마당> 전시장에서는 기억 용량이 큰 하드 디스크와 대형 모니 터를 갖춘 컴퓨터가 전시되었다. 하드 디스크가 웅웅거리며 돌아가는 가운데, 다 윗을 자기가 구상한 정보 교환망의 사용법을 실연해 보였다. 사람들은 다윗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돕겠다고 자청했다. <유한 책임 회사 개미 혁명>의 전시장에서, 지웅은 인터넷을 통해 자기들의 활동에 관한 정보를 전파하고 혁명의 열의를 조직하고 있었다. 벌써 세계 도처 의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물론이고 병영에서까지 비슷한 실험을 준비하는 움직임 이 자발적으로 일고 있었다. 지웅은 그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축제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해서 유한 책임 회사를 설립하고 자회사를 만드는 것으로 나아간 사흘간의 경험을 전해 주었다. 지웅은 개미 혁명이 지리적으로 확대되면 새로운 모범 사례들이 쏟아져 나오 리라 기대하면서, 먼저 자기들의 사례를 외국의 모든 개미 혁명 동아리에 제시 하였다. 그는 가설 무대와 원추형 천막들과 화톳불의 배치 도면을 제공하고, 깃발과 <1+1=3>이라는 슬로건, 꿀술, 엘레시우스 게임 같은 혁명의 상징물들을 소개하 였다. 나르시스의 패션 전시장에는 아마존들이 모여서 그의 모델이나 조수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일부는 곤충의 모티프가 찍힌 옷을 선보였고, 일부는 디자이너의 지시에 따라 하얀 시트 위에 모티프를 그려 넣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조에는 이렇다 하게 보여 줄 만한 것은 없었지만, 사람들 사이의 완전 소통에 관한 야심적인 계획과 사람의 코을 곤충의 더듬이와 같은 의사 소통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방안에 관해 설명하였다. 처음엔 그 이야 기가 사람들의 실소를 자아냈다. 그러나 그저 꿈에서라도 좋으니 그런 완벽한 의사 소통을 이루어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사람들은 이내 그녀의 말을 여겨듣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너나할 것없이 진정한 대화에 굶주려 있 는 사람들이었다. 쥘리는 <로제타 돌> 전시장에 개미집을 들여 않혔다. 사람들의 자발적인 도 움을 받아 가며, 그녀는 잔디밭을 깊이 파고 여왕개미를 포함해서 모든 개체들 이 다 들어 있는 개미집을 통째로 들어냈다. 쥘리는 생물실에서 가져온 어항에 그 개미집을 담았다. 잔치에는 오락이 빠질 수 없었다. 탁구대들을 다른 용도로 쓰지 않고 제자리 에 둔 덕분에 잇따라 시합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학 실습실은 거기에 비치되어 있던 비디오 자료 덕분에 영화관 구실을 하고 있었다. 또, 한쪽에서는 상대적이 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에서 소개한 에레우시스 게임이 한창이었다. 감추 어진 규칙을 찾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그 게임은 상상력을 발전시키는 데 아 주 적합해서, 금세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게임이 되어 버렸다. 폴은 점심 식사로 아주 맛있는 식사를 준비하겠다고 장담했다. 음식이 맛있을 수록 혁명가들의 의욕도 더 왕성해 진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개미 혁 명의 음식을 맛의 명소를 소개하는 여행 안내서에 올려 놓겠다는 야심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주방에서 조리과정을 직접 감독하는 한편, 꿀을 이용하여 새로운 맛을 내보겠다고 꿀튀김, 꿀잼, 꿀가루,꿀소스 등 모든 결합을 다 시도하였다. 밖으로 빵을 사러 나가기가 불가능한 형편이었으므로, 폴은 빵을 직접 굽자고 제안했다. 다행히 밀가루는 아직 충분히 남아 있었다. 몇몇 장정들이 교정의 나 지막한 벽돌담 하나를 해체하여 그 벽돌로 빵 굽는 가마를 반들었다. <미식법> 전시장에서, 폴은 후각이 잘 발달한 사람은 먹어 보지 않고도 음식 의 맛이 좋은지 나쁜지를 가려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음식의 냄새를 맡는 폴의 모습을 보면서, 아주 맛있는 점심을 먹게 되리라고 짐 작했다. 아마존 하나가 쥘리에게 와서, 마르셀 보지라르라는 가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고 알려 주었다. 그가 <혁명의 지도자>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해서, 지도자는 없지만 쥘리를 대변인으로 생각할 수는 있다고 했더니, 쥘리와의 인터뷰를 요청 하고 있다는 거였다. 쥘리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전화를 다 주시다니 놀랍군요. 사건을 잘 몰라야 더 훌륭한 기사 를 쓰시는 분으로 알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쥘리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그가 해명했다. 사실은 농성자 수를 알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경찰측의 얘기로는 1백여 명의 불법 점거자들이 학교의 정상적인 기능을 마비시키고 있다고 하는데, 여러분은 어느 정도로 추산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요. 경찰측에서 주장하는 수와 제가 곧 알려 드릴 수의 평균을 내실 생각이시지 요? 그럴 필요 없어요. 우리는 정확히 5백 21명이니까요. 한 가지만 더 물어 불게요. 여러분의 정치적 입장은 어떤 것입니까? 스스로를 좌파, 또는 극좌파라고 생각하십니까?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 자유주의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다, 그럼 뭐지요? 쥘리는 짜증이 났다. 좌우 두 방향으로밖에 생각을 못하시는 분 같군요. 사람은 왼쪽이나 오른쪽으 로만 가는 게 아니에요.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뒷걸음질을 칠 수도 있어요. 앞으로 나아가자는 것이 바로 우리의 정치적 입장이에요. 마르셀 보지라르는 이미 생각해 둔 기사 내용과 대답이 일치하지 않는 것에 실망하면서, 그 대답의 속뜻을 한참 따져 보았다. 쥘리 곁에서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조에가 전화기를 빼앗았다. 우리를 굳이 어떤 정당과 연결시키려면, <진화>당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정당 을 만들어야 할 거예요. 우리의 운동은 인류를 더 빨리 진화시키기 위한 것이니 까요. 아, 그래요? 바로 내가 생각했던 대로군요. 여러분은 극좌파예요. 마르셀 보지라르 기자는 안도하면서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는 자기의 지레짐작이 또다시 들어맞은 것을 흐믓하게 여기면서 전화를 끊 었다. 그는 십자말 풀이를 대단히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보기에, 기사를 쓴 다는 건 뻔히 드러나 있는 답을 십자말 풀이판의 네모칸에 채워 넣듯이, 이미 준비되어 있는 틀에 거의 변화가 없는 요소들을 집어 넣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그는 모든 취재 영역을 망라할 수 있는 일련의 틀을 가지고 있었 다. 정치기사를 위한 틀이 있었고, 문화면에서 사회면을 위한 틀이 있었으며, 시 위 사건을 위한 별도의 틀이 또 있었다. 그는 미리 생각해 둔 대로 <삼엄한 경 계망 안에 들어간 학교>라는 제목의 기사를 타자하기 시작했다. 그 대화 때문에 열이 올라 있는 쥘리에게 이상하게도 무언가 먹고 싶은 욕구 가 엄습했다. 쥘리는 폴의 전시장으로 갔다. 그는 가설 무대의 소음에 방해를 받 지 않으려고 동쪽의 한갓진 곳으로 자리를 옮긴 터였다. 폴과 쥘리는 사람의 다섯 가지 감각에 대해 이야기 했다. 폴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시각에 너무 의존한다고 했다. 뇌가 받아들이는 정보의 80%가 시각을 통해 전해진다는 거였다. 거기엔 문제가 있어. 시각에 너무 의존하다 보니까 시각은 저제적인 감각으로 변하고 다른 감각들의 몫은 형편없이 적어지는 거야. 그러면서, 폴은 쥘리의 이해를 돕겠다며 그녀의 눈을 스카프로 가린 다음, 자 기의 냄새 오르간에서 발산되는 것이 무슨 냄새인지 알아 맞혀 보라고 했다. 쥘리는 백리향이나 라벤더와 같은 냄새는 쉽게 구별했고, 쇠고기스튜나 헌 신 발이나 낡은 가죽의 냄새도 콧구명을 발름거리면서 알아냈다. 쥘리의 코가 깨어 나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가린 채, 자스민과 박하와 쇠풀을 가려냈고, 냄새만으로는 식별하기가 쉽지 않은 토마토까지 알아맞혔다. 내 코야, 안녕? 쥘리가 말했다. 냄새도 소리나 빛처럼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어. 폴은 그렇게 말한 다음, 이번에는 여전히 눈을 가린 채 맛을 알아 맞혀 보라 고 했다. 쥘리는 맛을 식별하기가 어려운 몇 가지 음식을 가지고 시험을 했다. 그녀는 혀가 깨어나는 것을 느끼며 맛에 이름을 붙여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사실 맛에 는 쓴맛, 단맛, 신맛, 짠맛 네가지 밖에 없었고, 어떤 음식 특유의 냄새는 모두 코를 통해서 지각되는 거였다. 쥘리는 목구멍으로 넘어간 음식의 행로를 느껴 보려고 주의를 기울였다. 관벽의 신축 운동에 밀려 식도를 미끄러져 내려간 음 식이 위에 다다르자, 그것을 기다리고 있던 갖가지 위액이 소화 작용을 시작했 다. 쥘리는 그 모든 것을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랍고도 기뻤다. 내 위야, 안녕? 그녀의 몸은 먹는 것을 행복해 했고, 그녀의 소화기관은 스스로의 존재를 생 생하게 알려 왔다. 쥘리는 강한 식욕을 느꼈다. 그녀의 거식증을 너무나 잘 기억 하고 있는 몸은 다시 영양 부족 상태가 올 것을 걱정하기라도 하듯 작은 음식 조각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착하였다. 그녀의 몸은 특히 당분과 지방이 많은 음식을 섭취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폴은 여전희 눈을 가리고 있는 그녀에게 초콜릿이나 건포도, 사고, 오렌지 따위 가 들어간 케이크들을 조금씩 떼어서 내밀었다. 그녀는 그때마다 혀의 유두에다 신경을 집중하고 자기가 먹고있는 케이크의 종류를 말하였다. 우리가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으면 기관은 잠이 들어 버리는 거야. 그러면서, 폴은 여전히 눈에 스카프를 두르고 있는 그녀의 입에 자기 입을 갖 다 댔다. 쥘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시 주저하다가 그를 밀어냈다. 폴이 한숨 을 쉬며 말했다. 미안해. 쥘리는 스카프를 풀었다. 정작 난처한 것은 그녀였다. 괜찮아.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뭐.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 사실 나는 그런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쥘리는 전시장을 나갔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조에가 그녀를 따라왔다. 넌 남자들을 좋아하지 않니? 나는 살갗을 맞대는 건 딱 질색이야. 할 수만 있다면, 커다란 범퍼 같은 것을 달고 몸에 부착하고 다니면서, 공연히 남의 손을 잡거나 남의 어깨를 감싸는 사 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나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싶어. 인사를 나루려면 으레 서로 뺨을 부벼야 하는 걸로 아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조에는 쥘리의 성 경험에 대해서 몇 가지를 더물어보다가, 그토록 예쁜 쥘리 가 스무 살이 다 되도록 아직 숫처녀라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쥘리의 설명은 이러했다. 나는 성관계를 갖고 싶지 않아. 나의 부모님을 닮고 싶지 않아서 그래. 내가 보기에, 성은 남녀가 짝을 짓고 결혼을 하고 고리타분한 부르조아의 삶으로 나 아가기 위한 첫 발자국이야. 개미 사회에는 생식을 하지 않는 중성의 개체들이 있어. 그 개미들은 생식을 하지 않아도 편안하게 잘 살아. 노처녀로 혼자 산다고 허구한 날 잔소리를 들을 일도 없지. 조에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우리는 곤충이 아니야. 우리는 달라. 생식을 할 수 없는 중성의 사람은 없어. 물론 아직은 없지. 문제는 네가 중요한 개념 하나를 빠뜨리고 있다는 거야. 성은 단지 생식을 뿐 만 아니라 쾌락이기도 하다는 거야. 성행위를 하면서 사람들은 쾌락을 서로 주 고받아. 쥘리는 못 믿겠다는 듯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아직 짝을 이루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누구하고든 살을 맞댈 생각은 추 호도 없었다. 135. 백과 사전 독신을 막는 방법 피레네 지방의 몇몇 마을에서는 1920년까지 청춘 남녀가 짝을 짓는 문제를 직 접적인 방식으로 해결하였다. 그 마을들에는 <온인의 밤>이라는 연례 행사가 있었다. 그날 밤이 되면, 열여섯 살이 된 모든 처녀와 총각들이 한 자리에 모였 다. 마을 어른들은 참가하는 처녀 총각이 동수가 되도록 사전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였다. 행사는 먼저 산기슭의 야외에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흐드러지게 먹고 마시는 성대한 잔치로 시작된다. 그러다 정해진 시각이 되면, 처녀들이 먼저 산속으로 들어간다. 처녀들이 달려가 덤불 속에 숨으면, 마치 숨바꼭질을 하듯 총각들이 그녀들을 찾으러 간다. 어떤 처녀든 그녀를 가장 먼저 찾아낸 총각이 차지하게 되어 있다. 예쁜 처녀일수록 그녀를 찾는 총각들이 많게 마련이지만, 아무리 콧 대가 높은 처녀라도 자기를 가장 먼저 찾아낸 총각에게 퇴짜를 놓을 권리는 없 다. 그러다 보니, 예쁜 여자들을 가장 먼저 찾아내는 것은 꼭 잘생긴 총각들이 아 니라 날래고 눈치 빠르고 꾀바른 총각들이기 십상이다. 다른 총각들은 덜 매력 적인 처녀들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어떤 총각도 처녀를 동반하지 않고 혼자서 마을로 돌아오는 것은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동작이 굼뜨고 두름손 없 는 어떤 총각이 못생긴 처녀가 성에 차지 않는다고 혼자서 돌아오면, 그는 마을 에서 쫓겨나고 만다. 못난 처녀들로서는 그 행사가 밤에 이루어지는 것이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어둠이 짙을 수록 유리한 건 그녀들 쪽이다. 이튿날에는 결혼식이 거행된다. 그 마을들에 노총각과 노처녀가 거의 없었음 은 더말할 나위도 없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 제3권. 136. 불과 위턱으로 손가락과의 협력이라는 기치를 내건 혁명적인 개미들의 긴 행렬은 이제 3만의 대중으로 불어났다. 그들 앞에 예디베이나캉이라는 도시가 나타난다. 혁명군이 도시 안으로 들어 가려 하자 도시의 개미들이 반발한다. 혁명군은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그 도 시에 불을 지르려고 하지만, 도시의 둥근 지붕이 푸른 나뭇잎으로 덮여 있어서 불이 붙지 않는다. 그래서 암개미 103호는주위의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도시를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커다란 돌덩이를 이고 있는 절벽이 그 도시를 굽어보고 있다. 그렇다면, 지렛대를 이용해서 커다란 돌덩이를 도시위로 떨어뜨리기만 하 면 된다. 한동안 끔쩍을 안 하던 돌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앞뒤로 흔들거리다 가 연한 잎으로 덮인 둥근 지붕 위에 정통으로 떨어진다. 10만의 거주자를 거느 린 도시 위에 더할 나위 없이 크고 무거운 폭탄이 떨어진 셈이다. 이제 그 둥지의 항복을 받아 내는 일만 남았다. 그 안에 살아 남은자가 있을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밤이 들자, 혁명군은 납작하게 내려않은 그 둥지 안에 들어가 먹이를 먹으며 휴식을 취한다. 그 동안 암개미103호는 다시 손가락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10 호는 후각 기록을 만든다. 형태론 손가락들의 형태는 더 이상 진화하지 않는다. 개구리들의 경우에는, 백만 년에 걸친 수중 생활의 결과 물에 더 잘 적응하기 위해 물갈퀴가 생겼지만, 손가락들의 경우에는 모든 것이 보철 기구로 해결된다. 물에 적응하기 위해, 손가락들은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는 물갈퀴를 만든다. 그래서 그들은 물에 형태학적으로 적응할 이유도 없고, 자연적인 물갈퀴가 생기 도록 백만 년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공기에 적응하기 위해, 그들은 새들을 흉내 낸 비행기까지 만든다. 더위나 추위에 적응하기 위해, 그들은 털가죽 대신 옷을 만든다. 예전에 어떤 종이 수백만 년에 걸쳐 몸을 변화시켜 만들어 낸 것을 그들은 주 위에 있는 재료를 이용해서 며칠 만에 만들어 낸다. 결국 그런 능력이 형태학적 진화를 대신하는 것이다. 우리 개미들도 형태학적으로 진화하지 않게 된 지가 오래되었다. 우리는 형태 학적 진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우리의 겉모습은 1억 년 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성 공한 종임을 보여 주는 증거다. 우리는 성공한 동물이다. 현재의 살아 있는 종들은 모두 천적, 기후, 질병 등에 의한 자연도태의 법칙에 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로지 손가락과 개미 두 종만이 그런 속박에서 벗어 나 있다. 우리 두 종이 성공한 것은 우리의 사회 제도 덕분이다. 새로 태어난 우리의 개체들은 거의 전부가 성년에 도달하며, 우리의 평균 수 명은 점점 길어지고 있다. 하지만 손가락과 개미 두 종은 똑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환경에 적응하기 를 중단했기 때문에, 이젠 환경이 우리에게 적응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우리 두 종은 우리에게 가장 안락한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를 생각해 내야 한 다는 점이 그것이다. 우리 두 종은 우리에게 가장 안락한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를 생각해 내야 한 다. 그것은 생물학적인 문제라기보다는 문화적인 문제이다. 한쪽에서 불 기술자들이 그들의 실험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 5호는 갈래진 잔가지를 목발처럼 사용해서 두 다리로 걷기를 시도한다. 7호는 103호의 모험과 손가락 세계의 발견을 형상화한 프레스코를 계속 그리 고 있고, 8호는 잔가지의 끝에 나뭇잎을 엮은 저울판을 달고 거기에 자갈을 올 려 놓는 지렛대를 만들어 보겠다고 의욕을 불태운다. 암개미 103호는 손가락들에 관해 너무 오랫동안 이야기를 한 탓에 싫증을 느 끼면서, 24호가 쓰고 싶어했던 소설 손가락을 다시 생각한다. 이제 24호가 화재 속에서 사라져 버렸으니, 개미 세계의 그 첫 소설이 빛을 볼 가능성도 사라진 셈이다. 5호는 두 다리로 걸어 보려다가 또다시 땅바닥에 쓰러지고 나서 103호에게 온 다. 103호가 24호의 소설에 대해 생각하고 있음을 알고, 그는 예술의 문제는 너 무 쉽게 망가져서 운반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면서, 24호가 자기의 페로몬 소 설을 어떤 알에 담으려고 했지만 그 알을 원거리까지 가지고 다니기는 쉽지 않 았을 거라고 주장한다. 103호가 그것이 완성되었더라면 달팽이를 시켜서 운반했을 거라고 하자. 5호 는 달팽이들이 개미들의 알을 먹을 때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5호의 주장 대로라면, 쉽게 운반할 수 있을 만큼 가볍고 무엇보다 달팽이들이 먹을 수 없는 개미식의 소설 예술을 만들어 내야 한다. 7호는 나뭇잎 하나를 잡고 자기 프레스코의 새로운 요소를 그리기 시작한다. 5호는 예술이 야기하는 문제점을 다시 일깨운다. <그것 역시 운반할 수 없을 것이다.> 두 개미가 서로 의견을 나눈 끝에, 7호가 한 가지 방안을 생각해 낸다. 예술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희생시키자는 것이다. 개미들의 딱지에 위턱 끝으로 직접 그 림을 그려 넣으면 어떨까? 103호는 그 방안을 괜찮게 여긴다. 손가락들에게도 <문신>이라 불리는 그런 종류의 예술이 있다. 손가락들은 살가죽이 무르기 때문에 그 속에 물감을 넣어 야 한다. 하지만 개미들은 위턱 끝으로 키틴 질의 딱지에 줄을 긋기만 하면 되 기 때문에 그 보다 더 간단한 일이 없다. 7호는 103호의 딱지에 당장 무늬를 새겨 넣고 싶어한다. 그러나 왕년엔 백전 노장의 병정개미였던 103호의 딱지는 온통 줄무늬의 상처투성이여서, 거기에 무 엇을 그려 넣은들 식별하기가 용이치 않을 듯하다. 그래서 그들이 혁명군 내에서 가장 어린 16호를 부르기로 결정한다. 딱지가 완벽하기로는 그를 당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7호는 오른쪽 위턱을 단검처럼 놀 리면서 자기 머리에 떠오르는 모티프를 꼼꼼하게 새겨 넣는다. 그의 뇌리에 가 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불길에 휩싸인 개미집을 표현하자는 것이다. 7호는 그것 을 어린 벨로캉 개미의 배 위에 그린다. 아라베스크 같기도 하고 소용돌이 무늬 같기도 한 줄들이 실처럼 엉켜든다. 개미들은 사물의 형태보다는 움직임을 주로 지각하기 때문에, 불꽃의 세밀한 생김새 보다는 그 활기찬 일렁거림에 더 관심 이 많다. 137. 막시밀리앵의 집 막시밀리앵은 어항의 수면에 떠오른 죽은 열대어들을 걷어 냈다. 지난 이틀 동안 제대로 돌보아 주지 않았다고, 물고기들은 죽음이라는 가장 못된 방식으로 그를 힐난하고 있었다. 그저 예쁘다는 이유 하나로 선택된 그 잡종 열대어들은 너무 연약한 게 탈이었다. 차라리 생긴 건 조금 밉더라도 환경에 잘 적응하고 저항력이 강한 물고기들을 선택하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고 말시밀리앵은 생각했다. 그는 그날의 시체들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거실로 가서 저녘 식사를 기다렸다. 소파 위에 신문 한 부가 놓여 있었다. <퐁텐블로 나팔수>라는 지방 신문이었 다. 마지막 면에 마르셀 보지라르 기자가 쓴 <삼엄한 경계망 안에 들어간 학 교>라는 제목의 짤막한 기사가 나와 있었다. 막시밀리앵은 한 순간 그 기자가 거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사실 그대로 시민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걱정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 보지라르라는 친구는 일을 참 잘하는 기자 였다. 그는 극좌 모험주의자들과 깡패들과 심야의 소란에 대해 언급했다. 기사에 는 작은 사진이 함께 들어가 있었다. <쥘리 팽송, 반항아 가수>라는 사진 설명 이 붙은 주동자의 사진이었다. <반항아 가수라고? 그보다는 미녀가수라고 하는 편이 낫겠군> 하고 경정은 생각했다.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가스통 팽송의 딸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그의 가족은 모두 식탁으로 건너갔다. 그날 저녁 메뉴의 시작 요리는 파슬리 가루와 버터로 양념을 한달 팽이였고, 주요리는 쌀밥을 곁들인 개구리 뒷다리였다. 막시밀리앵은 아내를 흘깃거리다가 문득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다 눈에 거 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새끼손가락을 편 채 밥을 먹고 있었고, 끝임없 이 생글거리면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르그리트는 텔레비전을 켜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냈다. 423번 채널. 일기예보. 대도시의 공기 오엽 수준이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 호 흡기 장애와 안질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잇다. 정부는 그 문제에 관한 국회에서의 토론을 예정해 놓고, 우선 사계의 전문가들로 해결책을 제시할 위원 회를 구성하였다. 67번 채널. 광고. <요구르트를 드세요. 요구르트를 드세요. 요구르트를 드세 요.> 622번 채널. 퀴즈쇼. <알쏭달쏭 함정 퀴즈>. 성냥개비 여섯 개로 정삼각형 어 덟 개를 만드는 방법은? 막시밀리앵은 딸아이의 손에서 원격 조종기를 빼앗아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아, 안 돼요, 아빠. 라미레 여사가 수수께끼를 풀었는지 알고 싶어요. 막시밀리앵은 양보하지 않았다. 이제 원격 조종기는 그가 쥐고 있었다. 어느 가정에서든 그 홀을 쥐는 자가 왕 노릇을 하게 마련이었다. 막시밀리앵은 딸아이에게 소금통 가지고 장난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이르고, 아내에게는 음식을 그렇게 크게 한입씩 먹는 것을 삼가달라고 부탁했다. 모든 것이 그의 화를 돋구고 있었다. 피라미드라면 이가 부드득 갈리는 그에게 아내가 피라미드 모양으로 만든 새 로운 후식을 내오겠다고 하자, 그는 더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식탁에서 일어나 서재로 달아났다. 막시밀리앵은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문에 빗장을 걸었다. 컴퓨터를 늘 켜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키 하나만 누르고 곧 바로 <진화> 게임으로 들어가 이미 건설해 놓은 몽고 풍의 문명을 계속 이끌었다. 문명이 한 창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데, 이민족들의 위협이 닥쳐왔다. 이번 판에서, 그는 군사 부문에 모든 것을 투자하였다. 농업이나 과학, 교육, 레저 등에는 더 이상 투자를 하지 않았다. 오로지 막강한 군대와 전제적인 정부 에 모든 것이 걸려 있는 문명이었다. 그런데 아주 놀랍게도, 그 선택은 유리한 효과를 가져왔다. 그의 몽고군은 이탈리아의 알프스에서 중국 쪽으로 나아가면 서, 지나는 길에 있는 모든 도시들을 침략하였다. 그들은 농사를 짓는 대신 식량 을 약탈했고, 과학 연구에 투자하는 대신 정복된 도시의 실험실들을 가로챘다. 교육도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군사 독재를 통해서 모든 것이 빨리빨리 잘 돌 아갔기 때문이었다. 1750년이 되자, 막시밀리앵은 전차와 캐터펄트로 거의 전세 계를 평정했다. 그런데, 전제주의 단계에서 개화된 군주제 단계로 막 넘어가려던 참에, 유감스럽게도 한 주요 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정치 체제의 교체는 순 조롭지 않았다. 그는 통제력을 되찾지 못했고, 폭동은 다른 도시들로 번져 갔다. 그때부터 이웃의 아주 작지만 민주적인 나라가 그의 문명을 얕보며 침입해 오 기 시작했다. 화면에 갑자기 이런 문장이 나타났다. 게임에 관심이 없군요. 무슨 걱정거리가 있나요? 어떻게 알았지? 컴퓨터가 스피커를 통해 대답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게 벌써 다른 걸요. 손가락이 자꾸 미끄러지고 두 키를 동 시에 두드리기도 하시고요. 제가 도울 수 있을까요? 고등학생들의 폭동을 진압하는 일에 컴퓨터가 무슨 도움을 주겠어? 그렇다면 할 수 없고요. 막시밀리앵은 키 하나를 누르며 말했다. 판을 다시 벌이기로 하자. 그게 나를 도울 수 있는 최선의 길이야. 게임을 하 면 할 수록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더욱 잘 알게 되고, 우리 조상들이 과거 에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거든. 막시밀리앵은 수레르 풍의 문명을 새로 선택하고 1980년까지 그것을 이끌었 다. 이번에는 전제 정치에서 군주 정치를 거쳐 공화정과 민주정의 단계를 차근 차근 밟아 가며, 기술적으로 앞선 강대국을 건설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더니 21 세기 중엽에 이르러 느닷없이 페스트가 창궐하여 국민들이 떼죽음을 당하였다. 원인은 공중 위생에 충분히 신경을 쓰지 않은 데에 있었다. 특히 대도시를 건설 하면서 하수구를 만들어 놓지 않은게 화근이었다. 그 결과, 배수가 제대로 이루 어지지 않고 곳곳에 쌓인 쓰레기에 쥐와 세균이 득실 거리게 된 거였다. 마키아 벨은 컴퓨터라면 절대로 그런 일이 생기도록 방치하지 않았을 거라고 번정거렸 다. 그 얘기를 듣고 나자, 막시밀리앵은 문득 미래에는 컴퓨터를 정부의 수반에 앉히는 것이 유익할지도 모르겟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시시콜콜한 것 하나도 잊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컴퓨터뿐이었다. 컴퓨터는 잠을 자는 일도 없고, 건강 문제로 임무에 차질을 빚지도 않는다. 또 컴퓨터에게는 성기능 장애 따위 도 생기지 않고, 가족도 친구도 없다. 마키아벨의 지적이 옳았다. 컴퓨터라면 하 수구를 설치하는 일을 소홀히 할 리가 만무했다. 막시밀리앵은 프랑스 풍의 문명으로 새로운 판을 시작했다. 게임을 하면 할수 록 인간의 천성에는 허점이 많다는 생각이 더해 갔다. 타락하기 쉽고, 장기적인 이익을 분간 할 줄 모르며, 그저 당장의 쾌락만을 열심히 좇는 게 인간의 본성 이지 싶었다. 바로 그때, 컴퓨터 화면에서 학생들의 혁명이 한창이었다. 시대는 1635년으로 되어 있었다. 너무 떠받들어서 버르장머리가 없어진 아이들처럼, 학생들은 자기 들이 원하는 것을 당장에 내놓으라고 떼를 쓰고 있었다. 그는 진압군을 파견하여 학생들을 학살하였다. 그러자 마키아벨은 뜻밖에도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나 보죠? 막시밀리앵은 서재에 있는 작은 냉장고에서 맥주 깡통을 하나 꺼내 마셨다. 모의 문명을 느긋하게 이끌면서 맥주로 목을 축이는 것은 아주 큰 즐거움이었 다. 그는 마지막 저항의 보루를 무너뜨리기 위해 커서를 움직였다. 마침내 혁명이 진압되자, 그는 경찰의 감시 체제를 강화하고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통 제하기 위해 곳곳에 비디오 카메라를 설치하였다. 막시밀리앵은 마치 곤충들을 관찰하듯이, 자기 백성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바 라보았다. 이윽고 그가 마키아벨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뭐래도 나는 사람들을 사랑해. 138. 잔치 혁명은 점점 성대한 발명 잔치로 바뀌어 갔다. 잔치의 규모가 커지면서 여덟 명의 선도자들은 그것을 감당하기가 조금 버겁 다고 느끼고 있었다. 가설 무대와 그들이 마련한 여덟 군데의 전시 공간말고도 탁자들을 모아 만든 갖가지 진열대가 교정 여기 저기에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그렇게 생겨난 <회화>, <조각>, <발명>, <시>, <무용>, <컴퓨터 게임> 등 의 진열대에 젊은 혁명가들은 자기들의 작품을 자발적으로 제시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학교는 모두가 친구처럼 너나들이를 하며 자유롭게 교류하는 하나의 공동체 마을로 변해 갔다. 그곳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건설하고 실험하고 맛보고 관찰하는 공간이자 즐겁게 놀거나 편안히 쉬기도 하는 공간이었다. 가설 무대에서는 프랑신의 신시사이저로 온갖 장르에 걸쳐 수많은 음악들이 연주되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연주 경험이 있는 음악가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 고 그 공간을 활용하였다. 게다가, 첨단 기술 덕분에 첫날부터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세계의 모든 음악을 융합하려는 시도가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인도 악기 씨따르의 연주자가 실내악단과 협연을 하고, 재즈 가수가 인도네시아 발리 섬의 타악기에 맞추어 노래를 하는 광경이 벌어졌다. 음악이 흐르면 곧바로 춤이 뒤따랐다. 아프리카의 탐탐 리듬에 맞추어 일본의 전통적인 민중극 가부키의 무용수가 나비춤을 추었으며, 티벳 음악을 배경으로 아르헨티 나 탱고 무용수가 춤솜씨를 자랑했고, 뉴에이지 음악에 맞추어 네 명의 발레리 나가 공중에 뛰어 올라 발을 맞부딪는 앙트르샤를 추어 보이기도 했다. 신시사 이저로 충분치 않다 싶을 때는 악기를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가장 잘된 창작곡은 그 자리에서 녹음되어 컴퓨터 정보 통신망을 통해 전파되 었다. 퐁텐플로의 혁명가들은 자기들의 음악을 보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서울 이나 샌프란시스코, 바르셀로나, 암스테르담, 버클리, 시드니 등지의 다른 개미 혁명 동아리들이 창작한 음악을 받기도 했다. 지웅은 국제적인 정보 통신망에 접속된 컴퓨터에 디지털 카메라와 마이크를 연결해서 외국의 몇몇 개미 혁명 동아리에 속한 음악가들과 동시에 연주를 하는 데에 성공했다. 풍텐블로에서는 드럼을 맡았고, 샌프란시스코에는 리듬 기타와 리드 기타를, 바르셀로나에서는 성악을, 암스테르담에서는 클아비에를, 시드니에 서는 콘트라베이스를, 서울에서는 바이올린을 맡았다. 국경을 초월하여 모든 동아리들이 정보 고속 도로 위에서 만났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등 세계 도처에서 실험적으로 융합적 인 지구촌 음악이 퍼져 나왔다. 비록 퐁텐블로 고등 학교라는 네모진 공간에 갇혀 있긴 했지만, 그들에겐 공 간적으로든 시간적으로든 아무런 경계가 없었다. 그들은 학교 복사기를 쉴새없이 돌려서 그날의 차림표, 즉 그날 하기로 예정 된 주요 행사의 목록을 찍어 냈다. 차림표 안에는 음악 연주와 연극 발표와 발 명품 전시는 물론이고, 시와 단편 소설, 논쟁 기사, 테제, 산하 조직의 정관을 발 표하는 행사가 들어 있었다. 심지어는 두 번째 콘서트 때 찍은 쥘리의 사진들을 전시하는 행사도 있었고, 폴의 요리 메뉴도 물론 실렸다. 농성자들은 도서관에 있는 역사책과 각종 자료들을 뒤져 자기들 마음에 드는 위대한 혁명가들이나 유명한 록 음악가들의 사진을 찾아낸 다음, 그것들을 복사 해서 건물 안의 복도 곳곳에 붙였다. 그들이 특히 좋아하는 인물들은 노자, 간 디, 영국의 가수 겸 작곡가 피터 가브리엘, 알버트 아인슈타인, 달라이라마, 비틀 즈, 필립 킨드리드 딕, 프랭크 하버트, 조나산 스위프트 등이었다. 쥘리는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 말미의 여백에 다음과 같이 썼 다. 혁명 병법 제54조 : 무정부주의는 창조의 원천이다. 사회적인 압박에서 해방되 면, 사람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무언가를 발명하고 창작하며, 미와 진리를 추구하 고, 최선을 다하여 서로 소통하기 시작한다. 좋은 토양에서는 아주 작은 씨앗조 차도 터다란 나무로 성장하여 탐스런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법이다. 여러 교실에서는 토론 그룹들이 자발적으로 형성되었다. 밤이 되자, 몇몇 사람들이 나서서 담요를 나누어 주었다. 한뎃잠을 자기로 한 젊은이들은 담요 하나를 둘 또는 셋이 함께 덮고 체온을 보존하기 위해 서로 바 싹 붙었다. 잔디밭에서 한 아마존이 태극권의 시범을 보이며, 그 군대 체조는 동물들의 동작을 흉내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동물들을 흉내 내다 보면 동물들의 정신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무용수들은 그 설명에서 영감을 얻 어, 개미들의 움직임을 춤으로 표현해 보았다. 그들은 개미들의 몸짓이 아주 유 연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개미들의 동작에는 고양이과나 개과의 동물에서는 찾 아보기 어려운 특별한 우아함이 있었다. 무용수들은 팔을 더듬이처럼 들어올려 맞부비면서 새로운 스템을 창안했다. 마리화나 담배 한 대 줄까? 어떤 젊은 관객이 쥘리에게 담배를 내밀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어. 이미 다른 사람들이 뱉어 낸 연기를 마실만큼 마셨는걸. 개미 식으로 말하자면 가스 영양 고환을 충분히 한 셈이야. 담배는 성대에 좋지 않아. 게다가 나는 이 멋진 축제를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저절로 붕 뜬 기분이 되는데 뭐. 넌 참 좋겠다. 별것도 아닌 걸로 자극을 받을 수 있으니 말이야. 별도 아니라니, 무슨 소리야? 난 이제껏 이처럼 동화 같은 광경을 본 적이 없 어. 쥘리는 이 축제에 어떤 질서를 부여하지 않으면 혁명이 스스로 붕괴되고 말리 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 모든 것에 어떤 방향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쥘리는 페로몬 대화의 실험을 위해 어항에 들여 앉힌 개미집을 관찰하면서 한 시간을 보냈다. 에드몽 웰즈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사람은 개미들 의 행동을 관찰하면 많은 도움을 얻게 될 거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항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녀의 눈에는 검은색의 작은 벌레들이 보 일 뿐이었다. 하찮은 일에 턱없이 몰두해 있는 그 벌레들은 꽤나 혐오스러운 느 낌을 주었다. 에드몽 웰즈는 개미를 하나의 상징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 다. 개미는 개미고 인간은 인간이다. 인간보다 천 배나 작은 개미들의 삶을 지배 하는 법칙을 인간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쥘리는 역사 교실로 올라가 선생님 책상에 앉은 다음, 백과 사전을 펴고 자기 들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다른 혁명의 예를 연구했다. 미래파의 운동에 관한 역사가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1900년에서 1920년에 걸 쳐 예술가들의 운동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스위스에는 다다이스트들이 있었고, 독일에는 표현주의자들, 프랑스에는 초현실주의자들, 이탈리아와 러시아에는 미 래파 예술가들이 있었다. 미래파는 기계와 속도, 더 일반적으로는 모든 선진 기 술에 대한 숭배를 공통점으로 삼는 화가와 시인과 철학자들이었다.그들은 인간 이 장차 기계 덕분에 구원을 받게 되리라고 확신했다. 그들 중의 일부는 로봇으 로 분장한 배우들이 인간을 구원하러 오는 장면이 들어 있는 연극 작품을 무대 에 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임박해 오던 무렵, 시인 마리네티 가 이끌던 이탈리아의 미래파는 기계 문명의 주요 대변자인 독재자 베니토 무솔 리니가 설교하는 이데올로기에 찬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솔리니가 한 일은 결 국 전쟁에 쓰일 공격용 전차와 다른 무기들을 생산한 것밖에 없었다. 러시아에 서는 똑같은 이유로 몇몇 미래파 예술가들이 스탈린의 공산당에 참가하였다. 이 탈리아에서도 러시아에서도 미래파 예술가들은 정치적 선전 선동에 이용당한 셈 이었다. 스팔린은 그들을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거나 처형하였다. 쥘리가 그 다음으로 흥미를 느낀 것은 초현실주의 운동이었다. 영화 감독 루 이스 부뉴엘, 화가 막스 에른스트와 살바도로 달리와 르네마그리트, 작가 앙드레 브르통, 그들은 모두 예술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쥘리네의 여덟 사람과 조금 비슷했다. 하지만 초현실주의자들은 너무나 개인주의적이어서 이내 내부 알력에 휘말리고 말았다. 쥘리는 1960년대의 상황주의자들에게서 흥미로운 사례를 찾아 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농담과 장난을 통한 혁명을 주장했고, <스펙터클 사회>를 거 부하면서 대중 매체의 온갖 놀음으로부터 철저하게 거리를 두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1968년 5월 혁명에 참가한 몇몇 운동가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지지 않게 되었다. 훗날 그 운동의 지도자였던 기 드보르는 자기의 첫 텔레비전 인터 뷰에 응하고 나서 자살하였다. 쥘리는 엄밀한 의미로 혁명이라 부를 수 있는 사례로 넘어갔다. 최근의 예로는 1994년 1월 1일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 주에서 인디언들이 일으 킨 반란이 있었다. 그 사파티스트 운동의 선두에는 부사령관 마르코스가 있었다. 그는 투쟁에 해학적인 분위기를 가미하면서 영웅적인 전과를 올리는 혁명가 었 다. 그 점에서는 쥘리네의 혁명과 조금 비슷한 구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 운동은 멕시코 농민들의 궁핍과 아메리카 인디언 문명의 파괴라고 하는 아주 현실적인 사회 문제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에 비해 개미 혁명은 사회 문제에 대한 진정한 분노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라면 아마도 그것을 <프티 부르주아의 혁명>으로 규정할 가능성이 많았다. 결국 개미 혁명을 움직이는 유 일한 동기는 낡은 사회에 대한 염증이었다.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했다. 다른 것을 찾아야 했다. 쥘리는 다시 백과 사전을 넘겨 군사 혁명에서 문화적인 혁명으로 넘어갔다. 전세계에 레게 음악을 퍼뜨린 자메이카의 밥 멀레이가 그녀의 관심을 끌었다. 그 래스터패리 혁명과 개미 혁명을 음악에서 출발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 다. 게다가 평화주의를 내걸고, 음악을 심장 박동과 연결시키며, 마리화나 담배 를 널리 애용하고, 옛 문화에서 혁명의 기원과 상징을 끌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도 닮은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밥 멀레이는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애쓰지 않았 다. 그는 단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공격성과 근심을 잊게 되기를 바랐다. 미국에서는 몇몇 케이커 공동체나 아만 파 공동체들이 흥미로운 공동 생활 양 식을 확립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발적으로 세상과 단절했고 삶의 원리를 오로지 신앙에서만 찾았다. 그러고 보면, 결국 세속적인 공동체로서 상당 기간 원만하게 운영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키부츠 밖에 없는 셈이다. 쥘리는 키부츠가 마 음에 들었다. 키부츠들은 화폐도 통용하지 않고 문에 자물쇠도 없으며 모두가 상부상조하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키부츠는 구성원 각자 에게 농사를 지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쥘리네 학교에는 경작할 땅도 젖소도 포도밭도 없었다. 쥘리는 손톱을 물어뜯기도 하고 순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면서 곰곰히 생 각했다. 문득 섬광 처럼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해결책을 찾아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녀 가까이에 있던 해결책이었 다. 왜 좀더 일찍 그 생각을 못했을까? 쥘리네가 따라야 할 본보기는 바로... 139. 백과 사전 유기체 우리 몸의 각 부분은 서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움직인다. 우리의 세포는 모 두 평등하다. 오른쪽 눈은 왼쪽 눈을 시샘하지 않고, 오른쪽 허파는 왼쪽 허파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우리몸을 이루는 모든 세포, 모든 기관, 모든 부분은 유기체 전체가 최상의 상태 로 기능할 수 있도록 기여한다는 단 하나의 동일한 목적 을 지니고 있다. 우리 몸의 세포들은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를 알고 있으며, 그런체제를 성공 적으로 실현하고 있다. 모든 세포가 평등하고 자유롭지만, 최상의 상태로 함께 살아간다는 공통의 목표를 지니고 있다. 정보는 호르몬과 신경을 통하여 몸 전 체에 유통되지만, 그것을 필요로 하는 부분에만 전달된다. 우리 몸에는 우두머리도 행정부도 화폐도 없다. 당분과 산소가 유일한 재산이 고, 그 재산을 어떤 기관에 가장 많이 할당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유기체 전체의 일이다. 예를 들어, 날씨가 추우면, 인체는 팔다리 끝에서 피를 빼앗아 생명 유지에 가장 긴요한 부분으로 보낸다. 날씨가 추울 때 손가락과 발가락이 가장 먼저 푸릇해지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우리몸 안에서 소우주 규모로 행해지고 있는 것을 거시적으로 확대하면, 이미 오래 전부터 역량을 발휘해 온 어떤 사회 체제와 유사하게 될 것이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 제3권. 140. 벨로캉 전투 손가락 혁명은 하나의 덩굴 식물처럼 자꾸 뻗어 나간다. 그들의 수는 이제 5 만을 넘어섰다. 달팽이들이 지고 가야 할 식량도 점점 많아 진다. 서로의 가슴에 불의 형상을 그려 주는 것이 개미들 사이에 대대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개미들은 자기들이 숲으로 싸목싸목 번져가는 불과 같다고 느낀다. 물론 숲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들의 삶에 관한 지식을 퍼뜨리려 한다는 점에서 그 들은 불과는 다르다. 혁명군은 노간주나무가 늘어선 평원에 다다른다. 수천의 진 딧물들이 느긋하게 나무의 즙을 빨고 있다. 개미들은 진딧물들을 추적하고 개미 산을 쏘아 대기 시작한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일이 있다. 사위가 너무나 고요 하다. 개미 세계의 주된 의사소통 방식이 후각이라 해도 그들이 그런 정적에 민감하 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개미들은 걸음을 늦춘다. 풀 너머로 그들의 도시 벨로캉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벨로캉, 어머니의 도시. 벨로캉, 숲에서 가장 큰 개미 둥지, 벨로캉, 개미들의 가장 위대한 전설이 생겨나고 스러진 곳. 그들이 태어난 도시가 한결 넓어지고 한결 높아진 듯 하다. 마치 도시가 늙으 면서 더욱 살이찌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 살아있는 장소에서 수 많은 후각 정보 가 날아온다. 103호 조차도 자기 도시를 다시 보게 된 감동을 감출 수가 없다. 결국 그가 겪은 모든 일은 처음 떠나 왔던 곳으로 이렇게 돌아오기 위한 것이었다. 바람에 실려 오는 온갖 냄새들이 다 그의 더듬이에 익숙한 것들이다. 그가 젊 은 탐험개미였던 시절에 뛰어 놀던 풀밭이 보인다. 그가 봄철 사냥을 떠나기 위 해 이용했던 길이 바로 저기에 있다. 짜릿한 전율이 업습한다. 이 정적말고도 놀 라운 일이 또 하나 있다. 도시 주변에서 개미들의 움직임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예전에 사냥개미들이 자기들의 사냥물을 자랑스럽게 흔들면서 쉴새없이 드나 들고 하던 그 커다란 길에 개미 한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도시는 죽은 둣이 고 요하다. 새롭게 성을 얻은 뻘때추니 같은 딸과 한 무리의 혁명가들이 달팽이 등 에 연기 나는 불씨를 싣고 왔음에도 어머니의 도시는 그들을 반기지 않는 것 같 다. <내가 자초지종을 다 설명하겠다.> 103호는 거대한 도시 쪽으로 그러게 페로몬을 발한다. 하지만 설명하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다. 이미 피라미드 모양의 둥지 뒤에서 병정개미들이 양쪽으로 튀어나와 긴 행렬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둥지가 한 마 리의 개미라면 도시 양편으로 늘어선 그 병정개미들의 행렬은 위턱이 되는 셈이 다. 그 병정 개미들은 혁명군을 환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지하기 위해서 달려 오고 있는 것이다. 사실 손가락과의 협력을 주장하면서 불을 사용하는 혁명가들 이 벨로캉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숲 전체에 퍼져 나가는 데는 오랜 시간 이 걸리지 않았다. 병정개미들의 움직임이 사뭇 위협적이다. 그들은 103호가 어린 시절부터 숱하 게 경험한 진법에 따라 전투 대형을 짓고 있다. 앞에는 개미산 사격을 퍼부을 포병개미들이 자리를 잡고, 우익에는 걸음이 빠른 기병개미들이, 조좌익에는 길 고 날카로운 위턱을 가진 개미들이, 뒤에는 짧은 위턱으로 부상자들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할 개미들이 포진한다. 103호와 5호는 더듬이를 초당 1만 2천회로 진동시켜 상대의 전력을 가늠해 본 다. 대적하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여러 종이 뒤섞인 5만의 혁명군이 전투에 능한 12만의 벨로캉 병정개미들을 상대해야 한다. 암개미 103호는 마지막으로 타협을 시도한다. <우리는 같은 겨레다. 우리 역시 벨로캉의 개체들이다. 우리는 도시에 커다란 위험이 닥치고 있음을 알리러 돌아온 것이다. 손가락들이 곧 숲에 침입해 올 것 이다.> 그러나 아무 반응이 없다. 암개미 103호는 이게 바로 위험의 징후라면서 하얀 게시판을 더듬이로 그려 보인다. <우리는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러자, 벨로캉의 병정개미들은 마른 나무가 부석거리는 둣한 소리를 내면서 위턱을 쇠스랑처럼 들어올린다. 공격하겠다는 뜻이 완강하다. 그렇다면 이제 협 상을 생각할 계제가 아니다. 어서 방어전술을 생각해 내야 한다. 6호는 턱이 큰 병정개미들이 모여 있는 오른쪽을 집중 공략하자고 제안한다. 덩치가 크고 우둔한 그 개미들에게 불로 겁을 주면 그들이 미쳐 날뛰면서 자기 편에게 덤벼들게 되리라는 것이 그의 계산이다.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암개미 103호가 보기에는 오히려 기병개미들 쪽으로 불덩이를 사용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다. 작전 회의가 신속하게 열린다. 혁명군의 문제는 여러 종으로 이루어진 잡색 군대라는 데에 있다. 그 때문에 대규모 전투의 와중에서 병사들이 어떤 행동을 보일지 예상할 수 가없다. 아직 전투용 위턱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는 어린 개미들이 과연 어떤 행동을 보일 것인가? 또, 느릿느릿 움직이며 불덩이를 나를 고 있는 달팽이들은 어떤가... 적대적인 개미들로 뒤덮이게 되면 정작 겁에 질릴 쪽은 달팽이들이다. 연방군이 가차없이 다가오고 있다. 그들의 부대는 계급과 위 턱의 크기에 따라서 그리고 더듬이의 예민한 정도에 따라서 배치되어 있다. 그 들의 새로운 원군이 나타난다. 도대체 저들의 수는 얼마나 되는 걸까? 아마 수 십만의 수백 배는 될 듯하다. 적이 접근해 옴에 따라 혁명군은 전투는 이미 패배한 것이나 다름 없음을 지 레 깨닫는다. 관광 삼아 따라온 어린 개미들 중의 다수는 전투를 포기하고 줄행 랑을 놓는다. 연방군이 점점 다가든다. 달팽이들은 비로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깨 닫고 커다란 입을 벌린다. 그것은 자기들의 두려움을 표시하는 소리없는 울부짖 음이다. 달팽이들에게는 2만 5천 6백 개의 작고 뾰족한 이가 있어서 그것으로 나뭇잎 을 갉아 먹을 수 있다. 달팽이들에게도 왼손잡이가 있다. 껍데기가 오른쪽으로 감겨 있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신경이 더 날카로운 편이기 때문에 더 듬이를 곧추세우고 그 끝에 달린 눈알을 뒤룩거리고 있다. 어떤 달팽이들은 껍 데기에서 윗몸을 꺼내어 머리로 자리 껍데기를 들이받아 개미들과 쓸데없는 짐 을 떨어뜨린다음 싸움터에서 도망친다. 적진의 맨 앞줄에 있는 포병개미들이 벌써 사격 자세에 들어갔다. 그들은 거 의 완벽한 밀집 대형을 이루고 있다. 배들이 치켜 올라가고 노란 개미산 방울이 미사일처럼 날아와 혁명군 진영의 앞줄에 떨어진다. 포격을 맞은 개미들이 고통 에 겨워 몸을 뒤튼다. 또한 줄의 포병 개미들이 나서서 제1진 못지않은 피해를 일으킨다. 혁명군 진영의 사상자가 즐비하다. 싸움을 포기하고 대열의 꽁무니로 달아나는 자들의 수가 점점 늘어난다. 손가락들에 대한 관심 때문에 따라온 그 들이지만 그 관심이 불개미 연방군에 맞서 싸울 용기를 주는 것은 아니다. 개미산에 맞은 달팽이들은 공포에 질린 채 작은 이빨들과 툭 불거진 눈을 드 러내며 목을 휘두르고 있다. 공포가 그 정도로 달하면 그들은 끈끈물을 두 배로 뱉어 낸다. 아마도 더 빨리 달아나기 위한 반사 행동일 것이다. 달팽이들 근처에 있던 혁명군 진영의 개미들은 끈끈물에 미끄러져 허우적댄다. 두 진영의 군대는 마치 거대한 두 짐승이 서로 으르렁대고 있는 것 처럼 맞서 있다. 그래도 아직은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곧 치열한 백 병전이 벌어질 것이다. 연방군 진영의 개미 하나가 더듬이를 세우고 페로몬을 발한다. <돌격> 곧추세운 수천의 더듬이 위로 전의에 찬 페로몬이 솟아오른다. 혁명군은 충돌의 순간에 쓰러지거나 뒤로 밀리지 않을 양으로 땅바닥에 발톱 을 깊이 박는다. 연방군 수백 부대가 정면으로 돌진한다. 기병개미들은 겅중겅중, 포병개미들은 허겁지겁 나아가고, 가위개미들은 긴 위턱 때문에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머리를 치켜들고 달려온다. 작은 보병개미들은 더 빨리 가려고 커다란 보병개미 들의 몸이 컨베이어라도 되는 양 그들을 타고 달린다. 그들의 발자욱 소리에 땅 이 진동한다. 두 군대가 서로 맞붙었다. 양진영의 맨 앞줄에 선 개미들끼리 위턱 공격을 주 고받는다. 그 적의에 찬 첫 키스가 끝나자, 얼굴에 음험한 미소가 번져 가듯 양진영의 병력이 좌우로 산개한다. 서슬 푸른 위턱들이 다리 사이로 휘젓고 들어온다. 연 방군 부대가 혁명군의 방어선 하나를 무너뜨리며 소용돌이 같은 기세로 몰려든 다. 혁명군 중에서 가장 힘이 좋은 축에 드는 개미 스무 마리는 불붙은 잔가지를 흔들어 연방군 기병 부대의 접근을 막아 낸다. 그 작전이 가까이 있는 적에게 두려움을 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수적인 열세를 만회할 수 없 다. 게다가 연방군 기병들은 혁명군이 운반해 온 불이 전투 중에 나타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던 터라, 이내 침착성을 되찾고 기다란 불꽃창을 빙 둘러간다. 대혼전이다. 쏘고 치고 물고, 위협적인 냄새로 악을 쓰며, 적의 딱지를 으스러 뜨리려고 위턱 집게에 힘을 준다. 부서져 나간 키틴질 덩어리에 물컹러리는 살 점이 묻어 난다. 서로 한데 뒤엉켜서 찌르고 때리고 딴죽 걸고 목 자르고 위턱 꺾고 눈을 짓이기고 입술을 잡아당긴다. 욕지거리로 가득찬 페르몬 냄새가 사방 에 진동한다. 살생의 광기가 절정에 달하자 죽이는 것에 도취한 자들은 아군과 적군을 가리 지 않고 죽여 댄다. 머리 없는 몸뚱이가 싸움터를 계속 다리며 혼란을 부채질하고, 몸뚱이 없는 머리가 그제서야 그런 전쟁이 미친 짓임을 깨닫고 통통 튀어가지만, 그들의 비 명이나 한탄에 더듬이를 기울이는 자는 아무도 없다. 15호는 배에 개미산을 가득 장전하고 작은 언덕 위로 올라가 연속 사격을 가 한다. 꽁무니에서 연기가 날 만큼 맹렬한 사격이다. 개미산이 바닥나자 그는 뾰 족한 머리통으로 들이받으면서 적을 공격한다. 5호는 네 다리로 버티며 윗몸을 일으키고 두 앞다리를 갈고리 달린 채찍처럼 사용해서 적들을 후려친다. 8호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적의 시체 하나를 잡더니 머리위로 들고 빙글빙글 돌리다가 있는 힘을 다해서 적의 기병 부대 쪽으로 날려 버린다. 그는 캐터펄트가 있으면 이런 것쯤은 아주 쉽게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묘기를 다시 한번 부려 보려고 하지만 벌써 적군의 몇 마리 병정개미들이 그에게 덤벼들어 등딱지 에 줄무늬를 만들고 있다. 혁명군은 땅바닥의 작은 구멍 속에 숨어 있다가 기습 을 가하기도 하고, 적을 지치게 만들려고 풀줄기 주위를 빙빙 돌기도 한다. 다른 종과의 대화를 전문으로 하는 14호는 적을 설득해서 대화를 해보려고 하지만 아 무 성과도 없다. 16호가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존스톤 기관이 누구보다도 잘 발달된 그이지만 싸움터에서 자기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아는 데는 그 기관도 소용이 없다. 9호는 몸을 잔뜩 웅크려 둥글게 만든 다음 적들이 모여 있 는 곳으로 굴러 가서 그들을 쓰러뜨린다. 그러고 나면 적들이 다시 정신을 추스 리기 전에 그들의 더듬이를 잘라내는 일만 남아 있다. 굳이 적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 더듬이가 없으면 개미들은 더 이상 싸움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암개미 103호는 그런 동족 상잔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벌써 겨레의 많은 구 성원들이 죽거나 다쳤다. 혁명군이든 연방군이든 결국은 다 자매가 아닌가. 그럼에도 그들은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103호는 열두 동료를 불러모아 자기가 생각한 전술을 설명한다. 그들은 즉시 혁명군 병력이 가장 많이 집결해 있는 곳으로 가서 다른 개미들이 몸으로 벽을 만들어 지켜 주는 가운데 땅굴을 판다. 그들중의 세 개미가 불씨가 들어 있는 돌을 땅굴 안으로 운반한다. 싸움터를 벗어나기 위해서 열세 개미는 한참 동안 앞으로 파들어간다. 불의 뜨거운 기운이 그들에게 힘을 준다. 지구 자기장에 민 감한 존스톤 기관을 사용해서 그들은 벨로캉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격력한 전투 때문에 그들 위의 땅이 흔들린다. 그들은 위턱의 힘을 있는 대로 다 써가며 땅속으로 나아간다. 한 순간 불씨가 약해지자, 그들은 나아가기를 멈 추고 불씨 위에서 더듬이를 빠르게 움직인다. 그러자 미미한 바람이 일면서 불 씨가 다시 살아난다. 그들은 마침내 모래흙 지대에 다다랐다. 수식토를 밀어내자 통로가 나타난다. 그들은 이제 벨로캉 안에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재빨리 위층으로 올라간다. 지 나는 길에 마주친 몇몇 일개미들은 그들이 무슨 일로 도시안에 들어왔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도시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을 일개미 들의 역할이 아니다. 그들은 굳이 틈입자들을 저지하려고 하지 않는다. 벨로캉의 건축은 그동안 많이 변했다. 벨로캉은 이제 수많은 개체들이 북적대 는 거대한 도시다. 103호는 자기 계획을 실행하기 앞서 잠시 머뭇거린다.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가 103호는 밖에서 죽어가고 있는 손가락 혁명의 동지들을 생각해 내고 달리 선택의 여기가 없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그는 마른 마눗잎 하나를 주워 불씨로 가져간다. 이윽고 나뭇잎에 불이 붙는 다. 열세 개미는 자가지들을 모아 다발을 짓고 거기에 불꽃을 갖다 댄다. 곧 힘 찬 불길이 솟는다. 화재는 금세 잔가지들로 이루어진 둥근 지붕으로 번져 간다. 공포가 도시 전체를 휩쓴다. 일개미들은 알더미를 구하려고 영아실로 달려간다. 불길 속에서 오도가도 못하기 전에 어서 달아나야 한다. 열세 개미는 출구를 찾아냈지만 그곳은 벌써 일개미 때문에 막혀 있다. 그래서 그들은 아래층으로 서둘러 내려가 그들이 파놓은 터널을 이용해 반대쪽으로 돌아온다. 위에서는 발 자욱 소리가 요란한다. 암개미 103호는 땅굴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적들의 다리 사이로 벨로캉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살핀다. 연방군들은 싸움터를 버 리고 불을 끄기 위해 달려가고 있다. 화재가 도시 꼭대기로 번져 간다. 나무 타는 냄새와 개미산 냄새, 키틴질 녹는 냄새 등이 섞인 매캐한 연기가 사방으로 번져 나간다. 일개미들은 벌써 비상구 들을 통해 알들을 피난시키고 있다. 벨로캉 개미들은 침을 뱉거나 묽은 개미산 을 쏘아서 불을 꺼보려고 애면글면한다. 103호는 땅굴에서 나와 전투에서 살아 남은 혁명군에게 불이 자기들 대신 싸워 주고 있으니 기다리라고 이른다. 암개미 103호는 불타는 벨로캉을 바라본다. 친손가락 혁명은 이제부터 시작이 다. 위턱의 힘과 불꽃의 기세로 벨로캉이 이 혁명을 받아들이게 해야 한다. 141. 새로운 생각의 열기 속에서 닷새째 되던 날 아침, 퐁텐블로 고등학교의 하늘에서는 여전히 개미 혁명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점거자들은 시간마다 울리는 전자종의 전원 코드를 빼 버리고, 각자의 손목시계도 점차 벗어 버렸다. 그것은 그들 혁명의 예상치 못한 측면 가운데 하나였다. 시간 속에서의 위치를 정확히 규정하는 것은 이제 꼭 필 요한 일이 아니었다. 가설 무대 위에서 연주자들이 갈마드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가고 있다는 것을 깨 닫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시간의 흐름에 대한 느낌도 예전과 달랐다. 하루를 한 달처럼 길게 느 끼는 사람들이 많았고, 누구나 밤이 짧다고 생각했다. 백과 사전에서 읽은 심수 통제법 덕분에 그들은 자기들 수면의 각 단계가 어떻게 순환하는지를 정확히 알 아냈고, 그럼으로써 예전처럼 여덟시간이 아니라 세시간만 자고서도 피로를 말 끔히 씻을 수 있게 되었다. 잠을 적게 잤다고 해서 피곤해 보이는 사람은 아무 도 없었다. 혁명은 사람들 각자의 일상적인 습관까지 바꾸어 버렸다. 그들은 단지 손목시 계만 벗어 버린 것이 아니라, 아파트의 자동차, 차고, 붙박이장, 책상 서랍 따위 의 열쇠를 한데 묶어 놓은 무거운 열쇠 뭉치도 치워 버렸다. 그곳엔 훔쳐 갈 것 이 없기에 도둑질도 없었다. 그들에겐 돈지갑도 더 이상 쓸모가 없었다. 그곳에선 돈 한푼 없이 돌아다녀 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 그들은 자기들의 신분증을 서랍 하나에 모두 담았다. 얼굴로든 이름으로든 모두가 서로를 아는 처지였으므로, 자기의 성을 대서 혈통적으로 자기의 위치를 규정할 필요도 없었고, 자기의 주소를 대서 지리적으로 자기 위치를 규정할 필 요도 없었다. 그들이 비운 것은 단지 옷에 달린 호주머니뿐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신의 호 주머니까지 비웠다. 혁명의 품에 들어온 사람들은 이제 현관이나 신용 카드의 비밀번호, 그리고 잊어버리면 바보가 된다면서 꼭 외우라고 요구 받은 온갖 수 치와 너댓 자리의 번호들을 기억하는 일로 성가심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은 일에서든 놀이에서든 손위 아래와 빈부를 떠나 모두가 평등했다. 어떤 사람에 대한 특별한 호감은 주로 어떤 일에 대한 공통의 관심에서 생겨 났다. 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오로지 그의 능력과 성취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혁명은 누구에게도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기들 일에 열성을 보였다. 사람들의 뇌는 생각이나 영상, 음악, 새로운 개념들로부터 끊임없이 자극을 받 고 있었다. 그들에겐 해결해야 할 실제적인 문제들이 아주 많았다. 9시가 되자, 쥘리는 혁명의 방향을 새롭게 제시하기 위해 연단에 올라갔다. 저는 마침내 우리 혁명이 모범으로 삼을 만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살아 있는 유기체입니다. 하나의 생명체 안에는 경쟁도 없고 갈등 도 없습니다. 모든 세포들의 완벽한 공존은 우리 안에 이미 조화로운 사회가 존 재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부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을 밖에서 재현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할 일 입니다. 청중은 그녀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개미집은 하나의 조화로운 유기체처럼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곤충들이 자연 에 그토록 잘 동화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생명은 생명을 받아들입니다. 자연은 자기와 닮은 것을 사랑합니다. 쥘리는 교정 한가운데에 있는 슈티롤 수지 개미 모형을 가리키며 동을 달았 다. 저것이 바로 우리의 본보기이며 <1+1=3>의 비밀입니다. 우리가 연대하면 할 수록, 우리의 의식은 더욱 고양될 것이고, 우리는 자연과 더욱 조화를 이루며 살 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목표는 이 학교를 살아 있는 완전한 유기 체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갑자기 모든 것이 간단해 보였다. 그녀의 몸이 작은 유기체라면, 점거된 학교 는 더 큰 유기체였고, 정보 통신망을 통해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는 혁명은 더욱 더 큰 유기체였다. 쥘리는 살아 있는 유기체라는 개념에 맞추어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의 이름을 다시 지어 보자고 제안했다. 학교의 담이 살갗이라면, 학교의 문은 숨구멍, 합기 도 클럽의 아마존들은 림프톨, 케페테리아는 창자였다. 유한 책임 회사 <개미 혁명>의 돈으로 말하자면 에너지를 얻는 데에 꼭 필요한 포도당이었고, 그 회사 의 회계가 잘 돌아가도록 도와주는 상업 선생님은 체내의 포도당을 조절하는 당 뇨였다. 또 컴퓨터의 정보 통신망은 자극을 전달하는 신경 조직이었다. 그러면 뇌 구실을 하는 것은 무얼까? 쥘리는 그 문제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뇌의 두 반구에 해당하는 모임을 만들자는 생각이 들었다. 직관적인 뇌 인 우뇌에 해당하는 모임은 그들이 참신한 착상을 찾기 위해 아침마다 여는 모 임 즉 파우와우였다. 그렇다면 조직적인 뇌인 좌뇌에 해당하는 모임, 즉 우뇌의 생각을 선별해서 실천에 옮기는 실행 모임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누가 어느 모임에 참석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누구죠? 누군가 물었다. 살아 있는 유기체는 위계 질서를 가진 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각자 그날의 기 분에 따라서 모임을 선택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하면 될거예요. 그럼, 우리 여덟 명은? 지웅이 물었다. 우리는 좌우 두 반구의 기원이 되는 원초적인 뇌, 즉 대뇌 피질이야. 우리는 카페테리아 아래의 연습실에 따로 모여서 계속 토론을 하자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나의 살아 있는 혁명아, 안녕?> 하고 그녀는 혼잣말을 했다. 잔디밭에서 모두가 그 개념에 대해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쥘리가 알렸다. 지금부터 운동장 가의 회랑에서 착상 모임을 가지려고 해요. 올 사람은 오세 요. 가장 좋은 착상은 실행 모임에 넘겨져 자회사로 발전하게 될 거예요. 군중이 모였다. 간식과 음료를 나누어 주는 동안 사람들은 웅성거리면서 땅바 닥에 앉았다. 지웅이 새로운 착상들을 적을 커다란 칠판을 갖다 놓고 물었다. 누가 먼저 시작할래요? 여러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 한 젊은이가 발언권을 얻었다. 프랑신의 인프라 월드를 보면서 한 가지 착상을 하게 되었어요. 인프라 월드 와 거의 비슷하지만 시간의 흐름을 가속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주 먼 미래까지 내다보면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 진화하 게 될지를 알게 될 것이고, 우리가 저질러서는 안되는 실수들이 무엇인지를 깨 닫게 될 거예요. 쥘리도 토론에 참가했다. 에드몽 웰즈는 백과 사전에서 그와 비슷한 것을 언급하고 있어요. 그는 그것 을 <최소 폭력의 길에 관한 연구>라고 부르고 있어요. 그 젊은이가 칠판 앞으로 나갔다. 최소 폭력의 길, 그것도 괜찮은데요. 그 길을 구체화하려면, 미래에 인류가 나 아갈 가능성이 있는 모든 행로를 포함하는 커다란 아이어그램을 그리고, 단기적 이고 중장기적이고 초장기적인 결과를 연구해야 할 거예요. 현재 우리는 대통령 임기에 해당하는 5년 또는 7년을 내다보며 문제를 평가하는 것이 고작이에요. 하지만 다가올 2백년 또는 5백 년동안에 후에 그런 문제들이 어떻게 변화해 갈 지를 연구해야 할 거예요. 그래야 우리 후손들에게 가능한 한 가장 훌륭한 미래, 적어도 야만적인 요소가 되도록 적은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시험하는 확률 프로그램을 만들자는 거지요? 지웅이 요약했다. 그래요. 최소 폭력의 길을 탐구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자는 거예요. 세금을 올리 는 경우, 고속 도로에서 시속 1백 킬로미터 이상 달리는 것을 금지하는 경우, 마 약의 사용을 허용하는 경우, 불완전 고용이 발전하도록 방치하는 경우, 독재 체 제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경우, 동업 조합의 특권을 폐지하는 경우 등 시험해 볼 것은 무궁무진해요.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약효과나 뜻밖의 결과를 연구하자 는 거지요. 가능하겠어, 프랑신? 지웅이 물었다. 인프라 월드로는 안 돼. 시간이 너무 더디게 흐르기 때문에 그런 실험을 할 수가 없어. 게다가 내 프로그램은 시간 경과 계수를 조정할 수 없게 되어 있어. 하지만 인프라 월드의 노하우를 이용하면 다른 모의 세계 프로그램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야. 그런 다음 그 프로그램을 <최소 폭력의 길에 대한 탐구>라고 부 르면 되지. 어떤 대머리 남자가 발언에 나섰다. 우리가 이상적인 정책을 생각해 낸다 해도 그것을 실행할 수단이 없으면 그게 무슨 쓸모가 있겠어요? 우리의 생각을 실천에 옮겨 세상을 변호시키고자 한다면 합법적으로 권력을 획득해야 해요. 몇 달 후에 대통령 선거가 있어요. 우리도 <진화>당의 후보를 내세우고 선거운동에 들어가야 해요. 최소 폭력의 길 프로 그램으로 우리 당의 강령을 보강하면, 우리 당은 미래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를 토대로 논리적인 정책을 제시하는 최초의 정당이 될 거예요. 정치 참여에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소란한 갑론을박이 오고 갔다. 다윗은 반대하는 쪽이었다. 정치는 안 돼요. 개미 혁명에 좋은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상투적인 정치적 야심이 개입되지 않은 자발적인 운동이라는 거예요. 우리에겐 우두머리도 없고 따라서 대통령 후보도 없어요. 개미들에게 여왕이 있듯이 우리에게도 물론 여왕 은 있어요. 쥘리가 바로 여왕이에요. 하지만 쥘리는 우리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상징일 뿐이에요. 우리는 기존의 어떤 정치 단체에서도 동질성을 발견할 수 없 어요. 우리는 자유로워요.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타성적인 책략에 휘말려서 이 모든 것을 망쳐 버릴 수 없어요. 현실 정치에 참여하면 우리는 혼을 잃게 될 거 예요.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대머리 남자가 예민한 문제를 건드린 것이 분명했다. 쥘리가 덧붙였다. 다윗의 말이 옳아요. 우리의 힘은 독창적인 생각을 세상에 내놓는 거예요. 세 상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에요. 세상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누구일까요? 국가인가요? 아니에요. 대개는 새로운 생각을 가진 개인들이에요. 정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않고도 위험에 처 해 있는 사람들을 구조하러 스스로 세계 도처로 달려가는 <세계의 의사들>, 추 운겨울에 가난한 사람들과 집 없는 사람들은 도와 주고 먹여 주는 자원 봉사자 들, 그밖에도 아주 많은 자발적인 실천들이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나왔 어요.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은 무엇일까요? 정치적인 슬로건일까요? 아니에요. 그들은 그런 것을 믿지 않아요. 정치적인 슬로건을 기억하기보다는 노 래가사를 외우고 있어요. 개미 혁명도 그렇게 시작되었어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새로운 생각과 음악이지 권력 장악을 위한 이데올로기가 아니에요. 권력은 우리를 망가뜨려요. 그렇다면 우리는 최소 폭력의 길이라는 프로그램을 절대로 활용할 수가 없을 거예요. 대머리 남자가 화를 냈다. 그래도 최소 폭력의 길은 존재할 것이고, 그것을 참고하고 싶어하는 정치가는 누구나 그것을 이용하게 될 거예요. 지웅이 물었다. 그는 여기저기에서 낄낄 토론을 벌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한 아마존이 일어섰다. 우리 집엔 할아버지가 계셔요. 그리고 언니한테는 아기가 하나 있는데, 언니는 아기를 돌볼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 언니는 할아버지께 아이들 돌봐 달라고 부 탁했어요. 할아버지는 아이를 돌보게 되면서 아주 행복해 하고 있고, 아이도 마 찬가지에요. 할아버지는 당신도 쓸모가 있다고 느끼게 되었고, 사회에 짐이 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게 되셨어요. 그런데요? 지웅은 그녀가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거들었다. 나는 유모, 유아원의 자리, 탁아소 등의 문제를 겪고 있는 엄마들이 아주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와 동시에 할일이 없어서 늘 혼자 텔레비전만 보며 절망하 고 있는 노인들도 많아요. 그 양쪽을 결합하면 우리 할아버지와 내 조카의 행복 한 만남과 같은 경우를 대규모로 실현할 수 있을 거예요. 청중은 가족이 해체되면서 많은 노인들이 양로원으로 보내지고 아이들은 유아 원에 맡겨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자녀가 부모를 양로원에 보내는 것은 부모가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이고, 부모가 자식을 유아원에 맡기는 것은 우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였다. 결국 인간은 인생의 종착점에서와 마찬가지 로 출발점에서도 소외당하고 있는 거였다. 그것 참 훌륭한 생각이야. 우리가 최초로 유아원 겸 양로원을 만들기로 하자. 조에가 말했다. 그 첫번째 착상모임에서만 여든세 가지의 계획이 제출되었고, 그 중에서 열다섯 가지가 곧바로 유한 책임 회사 <개미 혁명>의 자회사로 발전 했다. 142. 백과 사전 아홉 달 고등 포유류의 경우, 임신 기간은 보통 18개월이다. 특히 말의 경우가 그러해 서, 망아지는 태어나자마자 걸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장해서 나온다. 그런데 인간의 태아는 머리통이 아주 빨리 자라기 때문에 아홉달이 되면 어머 니 몸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더 이상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될 것 이다. 결국 아기는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채 자립할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난다. 태아가 밖에서 보내는 첫 아홉 달은 어머니 뱃속에서 보낸 아홉 달을 똑같이 되 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액체 속에 있다가 공기중으로 옮 겨 가는 것뿐이다. 아기가 공기 중에서 첫 아홉 달을 보내기 위해서는 태아 때 처럼 아기를 보호해 줄 또 다른 배가 필요하다. 그것은 심리적인 배이다. 아기는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는 순간 갑자기 달라진 환경 속에 놓이게 된다. 아기는 마 치 산소 텐트 속에 들어가야 하는 중화상자와 다름없다. 어머니와 접촉, 어머니 의 젖, 어머니의 촉감, 아버지의 입맞춤 등이 아기를 보호해 주는 산소 텐트인 셈이다. 생후 9개월 동안 아기가 자기를 감싸서 보호해 줄 견고한 고치를 필요로 하듯 이, 노인도 임종을 맞기 전의 9개월 동안 자기를 감싸줄 심리적 고치를 필요로 한다. 그 9개월은 노인이 초읽기가 시작되었음을 본능적으로 깨닫는 아주 중요 한 기간이다. 노인은 자기 생애의 마지막 아홉 달을 보내면서 마치 스스로를 출 발점으로 되돌리듯이 자기의 지식과 늙은 살가죽에서 벗어나 생후 얼마동안의 성장 과정을 역으로 되밟는다. 인생의 막바지에 다다른 노인은 아기나 다름 없 다. 죽을 먹고 기저귀를 차는가 하면, 이라 빠지고 머리숱이 적어지며,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중얼거리기도 한다. 다만, 사람들은 아기들을 생후 9개월 동안 보살 펴 주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기면서도, 노인을 생애의 마지막 9개월 동안 돌보 아야 한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기들에게만 어머니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노인들에게도 어머니와 같은 사람, <심리적인 배>의 역할을 하는 유모나 간호원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은 죽음이라는 최 후의 탈바꿈을 준비하는 노인에게 그 탈바꿈에 꼭 필요한 고치를 마련해 줄 수 있도록 깊은 배려를 보여야 한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 제3권. 143. 포위된 베로캉 불에 익은 고치 냄새가 난다. 벨로캉에서는 이제 연기가 나지 않는다. 벨로캉 의 병정개미들은 화재를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친순가락 혁명군은 벨로캉 연방 의 수도 주위에 진을 치고 있다. 그들 위로 벨로캉의 그림자가 거대한 삼각형처 럼 드리워져 있다. 암개미 103호는 더 놓이 더 멀리 보기 위하여 네 다리로 버티며 윗몸을 일으 킨다. 5호도 그를 딸 목발처럼 갈래진 잔가지에 기대어 일어선다. 그렇게 하면 도시가 더 작아 보이고 더 다가서기 쉽게 느껴진다. 그들은 도시 내부에 엄청난 피해가 있었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밖에서는 그 피해를 헤아릴 방도가 없 다. <이제 최후의 공격을 가해야 한다> 15호가 그렇게 페로몬을 발했다. 암개미 103호는 그다지 열의가 없어 보인다. 또 전쟁이란 말인가! 적을 죽이는 것은 적에게 자기를 이해시키는 가장 복잡하고 가장 피곤한 수단이다. 하지만 현재로선 전쟁이 역사를 가장 빠르게 발전시키는 수단임을 암개미는 알고 있다. 7호는 공격을 서두르지 말고 베로캉을 포위한 다음 상처를 치료하고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갖자고 제안한다. 암개미 103호는 포위 전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한없이 기다리면서 도시 로 통하는 보급로를 차단하고 취약 지대 주위에 보초를 배치하는 것 따위는 병 정개미들에겐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다. 지칠대로 지친 개미 하나가 다가온다. 암개미 103호는 생각을 중단하고 그를 바라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온통 먼지투성이가 된 그는 바로 수개미 24호다. 두 개미는 수없이 영양교환을 되풀이 한다. <난 네가 죽은 줄 알았어.> 수개미 24호가 자초지종을 이야기 한다. <사실은 소나무 구명에 불길이 솟자마자 거기에서 빠져 나왔어. 다람쥐가 입 구 쪽으로 펄쩍 뛰어오를 때 나도 모르게 다람쥐 털에 매달렸지, 그 다람쥐가 이 가지 저가지로 뛰어다니면서 나를 아주 먼 곳으로 데려갔던 거야.> 수개미 24호는 혼자서 오랫동안 걷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자기 에게 길을 잃게 하는 다람쥐가 있다면 다시 길을 찾게 해 주는 다람쥐도 있을 거라고. 그런 생각으로 이 다람쥐 저다람쥐를 타고 다니다 보니, 그 동물을 교 통 수단으로 이용하는데에는 이골이 났다. 문제는 다람쥐들과 대화를 할 수 없 다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그가 가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를 그들에게 일러줄 수 없었음은 물론이고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다람쥐마 다 그를 낯선 곳으로 데리고 갔고, 그러다 보니 이렇게 늦게서야 뒤따라오게 되 었던 것이다. 암개미 103호도 그 동안의 일을 그에게 이야기 한다. 벨로캉 전투와 화재 특 공대의 공격, 그리고 포위 전술에 대해서. <그 이야기를 가지고 소설을 써도 되겠는걸.> 그러면서 수개미 24호는 기억 페로몬을 꺼내어 새로운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 작했다. <우리가 네 소설을 읽을 수 있을까?> <다 끝나면 읽을 수 있을 거야.> 수개미 24호는 나중에 자기의 페로몬 소설이 개미들의 흥미를 끈다는 것이 확 인되면 그것의 속편을 쓸 생각이라고 귀띔한다. 그는 벌써 그것의 제목을 손가 락들의 밤이라고 정해 놓았고, 그것도 반응이 좋으면 손가락 혁명으로 3부작을 완성할 거라고 한다. <왜 3부작을 생각했지?> 암개미 103호가 묻자, 24호가 대답한다. <첫 소설에서는 개미와 손가락 두 문명 사이의 만남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것 이고, 두 번째 소설은 두 문명의 대결을 다루게 될 거야. 그리고 마지막 소설은 두 종간의 협력에 관한 이야기가 될 거야. 사고 방식이 다른 두 문명은 만남, 대 결, 협력이라는 세 단계를 차례로 거치면서 발전해 간다는 것이 내 생각이야.> 24호는 벌써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까지 아주 구체적으로 생각해 두고 있다. 그는 세 개의 플롯을 병행시키면서 이야기를 엮어 나갈 생각이다. 세 개의 플롯 은 각각 다른 관점을 구현한다. 하나는 개미들의 관점이고, 또 하나는 손가락들 의 관점이며, 나머지 하나는 103호처럼 두 세계를 다 경험한 자의 관점이다. 암개미 103호에게는 그 모든 것이 왠지막연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그는 주 의 깊게 더듬이를 기울이고 있다. 긴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24호의 의욕이 너무 나 진지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열망은 하루 이틀에 생긴 것이 아니다. 이미 코르니게라에 살던 시절부터 24호는 그런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세 개의 플롯은 결말에 이르러 하나로 수렴될 거야.> 수개미가 어려운 말로 설명을 덧붙인다. 그때, 14호가 갑자기 나타난다. 급히 달려온 탓인지 그의 더듬이가 헝클어져 있다. 그는 벨로캉 근처를 염탐하다가 통로 하나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리고 특공대를 보내 다시 지하 공격을 시도할 수 있을 듯하다.> 암개미 103호는 그 제안에 따르기로 결정한다. 24호도 찬성한다. 단지 자기 소 설의 액션 장면을 위한 착상을 얻기 위해서라도 그 공격은 필요하다는 것이 그 의 생각이다. 개미 백여마리가 통로 속으로 숨어 들어가, 벨로캉을 향해 조심스럽게 나아간 다. 144. 실행 그들의 혁명 사업은 순조롭게 발전해 가고 있었다. 가장 빛나는 성과를 올리 고 있는 것은 가상 세계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프랑신의 사업이었다. 인프라 월드는 수익성이 가장 좋은 활동이기도 했다. 정보 통신망을 통해서 인프라 월드의 도움을 요청하는 광고 대행사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광고 대행사들은 세제나 기저귀 커버, 냉동 식품, 약품, 자동차 등의 광고 효과를 높 이기 위한 조사를 의뢰해 왔다. 다윗의 <물음 마당>도 성공작이었다. 인터넷에 올리기가 무섭게 그 사이트는 모두가 쉽게 참조할 수 있는 하나의 백과 사전 같은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거 기에 접속해 오는 사람들의 질문은 가지각색이었다. <중산모자와 가죽 장화>라 는 텔레비전 추리극이 정확하게 몇 회분이나 만들어졌는지를 물어 오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열차 시간표나 어떤 도시의 대기 오염 수준, 증권 시장에서 가장 유리한 투자 종목 따위를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행히 사적인 일로 질문을 해오는 사람들은 아주 드물었기 때문에, 다윗이 사립 탐정들에게 도움을 청할 필요는 없었다. 한편, 레오폴에겐 그가 설계한 대로 집을 지어달라는 주문이 왔다. 그러나 집 을 짓기 위해 학교 밖으로 나갈 수는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그는 팩스를 통해 주문자의 신용카드 번호를 받고 설계도를 보내 주었다. 폴은 찻잎과 학교의 주방이나 정원에서 찾아낸 갖가지 식물에 꿀을 섞어 새로 운 향이 나는 음료를 개발했다. 효모의 양을 줄인 다음부터 그의 꿀술은 넥타 같은 음료가 되었다. 폴은 바닐라와 캐러멜로 향을 내서 품질이 아주 좋은 특주 를 만들어 냈다. 미술 대학에 다니는 한 여학생이 그 특주의 병에 붙일 화려한 상표를 그려 주었다. 상표에는 <개미 혁명 주조 특급 꿀술>이라는 상품명과 함 께 품질 보증의 검인이 들어가 있었다. 모두가 그 술을 좋아했다. 폴은 자기 주위에 모여서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올림푸스의 신들도 꿀술을 마셨고, 개미들도 진딧물의 분비꿀을 발효시켜 일 조의 술을 만든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예요. 하지만 꿀술과 관련된 흥미로 운 이야기들은 그것말고도 많아요. 다윗의 <물음 마당>을 통해서 새롭게 알아 낸 건데, 마야의 샤먼들은 꿀술과 메꽃 씨앗으로 만든 환각 물질을 항문을 통하 여 창자 속에 넣곤 했대요. 복용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관장을 하면, 구토도 생 기지 않고 영매의 상태도 훨씬 빠르고 강력하게 찾아온다는 거예요. 꿀술은 어떻게 만들죠? 재 주조법은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에서 찾아 낸 거예요. 폴은 자기가 책을 보고 적어 둔 것을 읽었다. <벌꿀 6킬로그램을 끓인 다음, 거품을 걷어 낸다. 끓인 벌꿀에 물 15리터, 새 앙 가루 25그램, 사인 15그램, 계피 15그램을 넣는다. 전체 양의 4분의 1이 줄어 들 때까지 혼합물을 졸인 다음, 불에서 꺼내 식힌다. 혼합물이 미지근해지면, 뜸 팡이 두 숟가락을 넣고 열두 시간 동안 그대로 두면서 부유물을 가라앉힌다. 그 런 다음, 액체를 작은 나무통에 따르면서 찌꺼기를 걸러 낸다. 나무통을 단단히 봉하고 숙성시킨다.> 우리 꿀술은 물론 속성이 덜 된 거라서, 술맛이 제대로 나 게 하려면 더 기다려야 할 거예요. 고대 이집트 인들은 상처를 소독하고 화상을 다스리는 데에 꿀을 사용했다던 데, 그런 거 알고 있었니? 한 아마존이 물었다. 폴에게는 새로운 정보였다. 그는 이제 식품뿐만 아니라 약품도 개발할 수 있 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나르시스의 의상 발표가 한창이었다. 많은 관객이 지켜 보는 가운데 몇몇 아마존들이 모델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 장면은 비디오 카메 라로 촬영되어 국제 정보 통신망을 통해 전세계로 중계되고 있었다.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쥘리와 조에의 사업뿐이었다. 그녀 들이 만들고 싶어하는 복잡한 두 기계는 실망스런 결과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쥘리는 개미들과 대화할 수 있게 하는 기계를 만들려다가 벌써 실험용 개미 30 여 마리를 죽이고 말았다. 조에의 후각 보철 기구는 콧구멍을 너무 아프게 하는 통에 누구도 그것을 몇초 이상 끼고 있을 수가 없었다. 쥘리는 교장실 앞의 발코니에 올라가,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교정을 죽 둘러 보았다. 깃대에선 혁명의 깃발이 펄럭이고, 교정 한가운데엔 혁명의 토템인 거대 한 개미가 떡 버티고 있었다. 가설 무대에선 마리환 담배의 뽀얀 연기속에서 레 게 음악가들의 연주가 한창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곳곳에 설치된 진열대를 중심 으로 다들 저마다의 일에 몰두해 있었다. 어쨌든 우리가 뭔가 좋은 일을 이루어 낸 것 같아. 조에가 쥘리를 딸 발코니에 올라와서 말했다. 집단적인 수준에선 확실히 그래. 이젠 개인적인 수준에서 뭔가를 이루어 내야 할 거야. 그래. 무슨 뜻이니? 내가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나 자신을 변화시킬수 없어서 그 러는지도 몰라. 웬 뚱딴지 같은 소리야? 쥘리, 너 아무래도 신경 과민인 것 같애. 모든 게 잘 돌아가고 있잖아.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고. 쥘리는 조에 쪽으로 몸을 돌리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전에 백과 사전의 한 대목을 읽었는데, 내용이 아주 이상했어. <나는 영 화나 소설의 한 인물일 뿐이다>라는 제목의 그 글에는 이런 얘기가 나와. 나는 어쩌면 오로지 나를 위해서만 전개되는 어떤 영화 속의 세상에 혼자 있는 건지 도 모른다 하고 말이야. 그걸 읽고 났더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 나는 혹시 살 아 있는 유일한 사람이 아닐까? 혹은 온 우주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존재는 나뿐이 아닐까? 그녀를 바라보는 조에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어리기 시작했다. 쥘리가 말을 이었다. 혹시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일은 결국 나를 위해서만 벌어지고 있는 대 규모 공연이 아닐까? 여기 있는 이 사람들과 너는 모두 배우이고, 저 물건들과 집들과 나무와 자연은 나를 안심시키고 어떤 현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 이게 하려고 정교하게 흉내낸 무대 장치일지도 몰라. 아니, 어쩌면 나는 인프라 월드 같은 세상에 들어 있는지도 몰라. 아니면 소설 속에 있는 건지도 모르고. 이런, 갈수록 태산이로구먼. 너 정말 왜 이러니?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는데, 우리 주위에서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이 상하게 생각한 적 없니? 어쩌면 누군가 우리를 관찰하고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시험하고 있는지도 몰라. 누군가 어떤 공격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저항하는지를 시험하고 있는 거야. 이 혁명, 이 삶은 그저 나를 시험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대한 서커스일 뿐이라고. 지금 이 순간 어떤 존재가 멀리에서 나를 관찰하고, 책 속에서 나의 삶을 읽고, 나를 심판하고 있는 것만 같아. 그렇다면, 호히려 잘된 거지 뭐. 여기에 있는 이 모든 것은 다 너를 위한 거 야. 이 모든 사람들, 네 말마따나 이 배우들은 다 너를 만족시키고 너의 욕망과 몸짓고 행위에 합치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야. 이들은 미래를 거정하고 있어. 이 들의 미래가 너에게 달렸다고.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게 바로 그겨야. 나는 내 인물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 하고 있어. 조에마저도 개운치 않은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쥘리는 그것을 알아채고 그 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미안해. 내가 한 얘기는 다 잊어버려. 그냥 다 흘려 버리라고. 쥘리는 조에를 학교 식다의 주방으로 데리고 가서, 냉장고를 열고 컵 두개에 꿀술을 따랐다. 덜 닫힌 냉장고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받으며 그녀들은 개미들 과 신들의 음료를 조그씩 홀짝였다. 145. 동물학 기억 페로몬 기록자 : 10호 냉장고 손가락들에겐 사회위가 없다. 하지만, 그들은 음식을 오래 저장해도 상하지 않 게 할 수 있다. 우리의 두 번째 위인 사회위를 대체하기 위하여 그들은 냉장고라 부르는 기계 를 발명하였다. 그것은 내부가 아주 서늘한 상자이다. 그들은 거기에 먹이를 가 득 쌓아 놓는다. 힘있는 손가락일수록 더 큰 냉장고를 가지고 있다. 146. 벨로캉에서 숯 냄새가 더듬이를 찌른다. 불에 탄 잔가지들이 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 타 죽은 병정개미들의 시체가 도처에 널려 있다. 제때에 대피시키지 못해 산채로 익어 버린 알고 애벌레들의 모습이 참혹하다. 화재 때문에 정말 벨로캉의 모든 거주자들과 불을 끄러 달려온 병정개미들까 지 몰살 당한 것일까? 개미들은 통로 속을 나아간다. 벽이 놀아서 유리처럼 반들반들해 진 통로들도 있다. 혹독한 열기 속에서 벨로캉의 개미들은 일을 하다말고 줄어 버렸다. 그들 은 자기들이 있던 자리에 그대로 녹아서 붙박혔다. 그 시체들은 더듬이를 갖다 대기만 해도 이내 부서지고 만다. 혁명군은 불이 그렇게나 강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불은 너무 많은 피해를 불러일으키는 무 기다.> 5호가 중얼거리듯 그렇게 페로몬을 발한다. 개미 세계에서 불이 그토록 오래 전부터 금기로 되어온 까닭은 그들은 비로소 깨닫고 있다. 그러나 어쩌랴, 어떤 세대나 몇 가지 바보 같은 짓은 저지르게 마 련이 아닌가. 불은 너무나 파괴적인 무기다. 불길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벽에 개미들의 그림 자를 생기게 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것을 벽에찍어 버렸다. 암개미 103호는 공동 묘지로 변해 버린 도시 속을 나아간다. 그가 태어난 도 시가 시체 안치소로 변했다. 버섯 재배장엔 검은 잿더미가 쌓였고, 축사에는 바 싹 구워진 진딧물들이 지천이다. 꿀단지 개미들 마저 모두 폭사해 버렸다. 15호는 꿀단지개미의 시체를 조금 먹어 보더니 대단히 맛있다는 사실을 확인 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캐러멜의 맛을 발견한 셈이다. 하지만 개미들은 그 새로 운 음식 앞에서 경탄을 할 겨를도 없고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들이 태어 난 도시가 너무나 참혹하게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103호는 더듬이를 낮추며 후회를 곱씹는다. 불은 패배를 앞둔 자가 굴복하지 않기 위해 마지막으로 사용하는 무기다. 그는 전세가 불리했기 때문에 그것을 사용했다. 결국 그는 속임수를 써서 약점을 감춘 셈이다. 손가락들에게 홀려 그들의 기술을 모방한 결과가 고작 이거란 말인가. 패배를 감내할 수 없어서 여왕을 죽이고 알을 파괴하고 자기가 태어난 도시까지 내워 버렸단 말인가! 그들이 이 대장정을 시작한 것은 바로 벨로캉이 손가락들 때문에 불길에 휩싸 일 염려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역사란 그토록 역설적인 것인가. 그들은 아직 연기가 자욱한 통로 속을 걸어간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그 동안 벨로캉에서 뭔가 아주 기이한 일들이 벌어졌다는 느낌이 새록새록 더해 간다. 벽에 그려진 동그라미 하나가 보인다. 벨로캉에도 미술이 나타났단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벨로캉 예술은 미니멀 아트였음이 틀림없다. 단순하게 동그라미들만 그려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미술은 미술이다. 암개미 103호에게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다. 10호와 24호는 혹시 함정에 빠진 것이 아닐까 저어하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그들은 여왕이 거주하는 금단 구역으로 올라간다. 금단 구역을 보호하고 있는 소나무 그루터기에는 불길이 거의 미치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금단 구역 입구를 지키던 문지기 개미들이 열기와 독가스를 견디 지 못하고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103호가 이끄는 특공대는 여왕의 거처로 들어 간다. 베로키우키우니 여왕이 거기에 있다. 그러나 여왕은 세 동강이 나 있다. 여왕은 불에 탄 것도 아니고 질식한 것도 아니다. 타격의 흔적은 최근의 것이다. 여왕은 살해되었고 그것은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여왕의 주위데도 위턱으로 새긴 동그라미들이 보인다. 103호는 앞으로 다가가서 여왕의 잘려 나간 머리의 더듬이에 자기 더듬이를 갖다댄다. 개미들은 몸이 동강나도 계속 페로몬을 발할 수 있다. 죽은 여왕은 자기의 더듬이 끝에 하나의 페로몬 정보를 간직했다. <신을 믿는 개미들.> 147. 백과 사전 파울 카메러 박사 헝거리 태생의 영국 작가 아더 케슬러는 어느 날 과학계의 사기 행위에 대한 작품을 쓰기로 했다. 그 문제에 관해서 그에게 질문을 받은 연구자들은 과학계 의 사기 사건 가운데 가장 구차한 것은 아마도 파울 카메러 박사와 관련된 사건 일 거라고 주장했다. 카메러는 오스트리아의 생물학자였다. 그의 생물학적인 발 견들은 주로 1922년에서 1929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는 언변이 뛰어나고 매력 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자기가 살고 있는 환경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고 그 적응의 결과를 후세에 전할 수 있다>고 주장 했다. 그 이론은 다윈의 주장과는 정반대였다. 카메러 박사는 자기 주장이 옳다 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흥미로운 실험을 생각해 냈다. 그는 살가죽이 우툴두툴하고 땅에서 생식을 하는 두꺼비의 알을 물 속에 넣었 다. 그런데 그 알에서 나온 두꺼비들은 수생 두꺼비들의 특성을 보이면서 물에 적응하였다. 즉, 그 두꺼비들의 발가락에는 검은 돌기가 있었다. 그 돌기는 수생 두꺼비 수컷으로 하여금 암컷의 미끈미끈한 살가죽에 매달려서 물 속에서 교미 를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수중 환경에 대한 그 적응은 후세에 전해져, 그 새끼들은 발가락에 검은 돌기를 가지고 태어났다. 결국 수중의 삶이 두꺼비 들의 유전자 정보를 변화시키고 그들을 수중 환경에 적응시킨 것이다. 카메러는 그 실험을 통해서 자기 이론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옹호하였다. 그러 던 어느 날 과학자들과 대학 교수들이 그의 실험을 <객관적>으로 검토하고 싶 어했다. 대형 강의실에 많은 기자와 청중이 모인 가운데, 카메러 박사는 자기가 사기꾼이 아님을 멋지게 증명해 보이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실험 전 날, 그의 연구실에 화재가 발생하여 두꺼비들이 다 죽고 한 마리만 남았다. 그래 서 카메러는 그 살아 남은 두꺼비를 가지고 나와 발가락의 검은 돌기를 보여 주 었다. 과학자들은 돋보기를 들고 그 두꺼비를 살펴보다가 폭소를 터뜨렸다. 두꺼 비 발가락에 난 돌기의 검은 반점은 살가죽 속에 먹물을 주입해서 인위적으로 만든 것임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사기가 폭로되자 강의실은 웃음 바다가 되었다. 카메러는 일거에 신용을 잃고 자기 연구 업적을 인정받을 기회를 한 순 간에 놓치고 말았다. 그는 모드에게 배척을 받고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결국 다 윈주의자들은 승리하였고, 살아 있는 존재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없다는 그들의 이론이 다시 인정되었다. 카메러는 야유를 받으며 강의실을 떠난 뒤, 절 망의 나날을 보내다가 마침내 숲으로 달아나 입에 권총을 물고 자살하였다. 그 와중에서도 그는 절명의 글을 남겨 자기 실험의 진실성을 재차 주장하고 사람들 속에서보다는 자연 속에서 죽고 싶다고 밝혔다. 그렇게 자살함으로써 그는 실추 된 신용을 회복할 기회마저 스스로 버리고 말았다. 이쯤되면 누구나 그것을 과학계의 가장 형편없는 사기 사건으로 생각할 법하 다. 그러나 아더 케슬러는 <두꺼비의 압박>이라는 책을 위한 조사를 하던 중에 카메러의 조교였다는 사람을 만났다. 그 남자는 자기가 바로 그 사건의 장본인 이라고 실토했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다윈주의 학자들 그룹의 지시에 따 라 실험실에 불을 질렀고, 마지막 남은 변종 두꺼비를 살가죽 속에 미리 먹물을 주입해 놓은 다른 두꺼비로 바꿔치기 했다는 것이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적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 제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