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개미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제 2 부 개미의 날 카트린에게, 다음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제라르 앙잘라그와 다니엘 앙잘라그, 다비드 보샤르, 파브리스 코 제, 에르베 드젱쥬, 미셸 드제랄드 박사, 파트릭 필리피니, 뤼크 고 멜, 조엘 에르상, 이리나 앙리, 크리스틴 조세, 프레데릭 르노르만, 마리 라그, 에릭 나타프, 파스라 교수, 올리비에 랑송, 질 라포포 르, 렌 실베르, 이리 슬롱카와 도탕 슬롱카. 그리고, 펄프를 제공해서 소설 '개미'와 '개미의 날'을 제작할 수 있게 해준 모든 나무들을 생각한다. 그것들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이 루어지지 않았으리라. 차례 첫 번째 비밀 새벽의 주인들 두 번째 비밀 지하의 신들 세 번째 비밀 세계의 끝으로 네 번째 비밀 대결의 시대 다섯번째 비밀 개미들의 주인 여섯번째 비밀 손가락들의 나라 모든 것은 하나 안에 있다(아브라함). 모든 것은 사랑이다(예수 그리스도). 모든 것은 경제적이다(칼 마르크스). 모든 것은 성적이다(지그문트 프로이트).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알버트 아인슈타인). 그리고 그 다음엔 ?...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부 개미의 날 첫 번째 비밀 새벽의 주인들 1. 전경 어둠. 1년이 지났다. 8월의 어둑새벽, 달 없는 하늘에 별들이 가물거린 다. 이윽고 어둠살이 설핏해지면서 빛살이 스며든다. 안개가 너울처 럼 퐁텐블로 숲을 휘감고 있다. 붉은 햇덩이가 솟아오르자 안개가 스러지고 모든 것에 이슬이 반짝인다. 거미 그물은 오렌지빛 구슬을 꿴 천연의 레이스로 변한다. 햇살의 열기가 서서히 대지를 덥히고 있다. 나뭇가지 아래, 풀잎 위, 풀과 풀 사이 어디에서건 미물들이 꼼지 락거린다. 종류도 갖가지이고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맑은 이슬 을 받아 말쑥하게 당장한 대지 위에서 곧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려 한다. 더 할 나위 없이 기이한 사건이.... 2. 도시 한가운데로 잠입한 세 첩자 <빨리 나아가자.> 페로몬에 담긴 명령이 단호하다. 한가롭게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 을 겨를이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거뭇한 형체가 비밀 통로를 따라 서둘러 나아간다. 그중 하나는 천장에 붙어서 더듬이를 바닥 쪽으로 축 늘어뜨린 채 가고 있다. 동료들이 내려오라고 이르건만 그는 그 렇게 머리를 아래로 두는 것이 더 좋다고 고집을 부린다. 그는 사물 의 모습을 거꾸로 보고 싶어한다. 두 동료는 더 이상 말리지 않고 따지고 보면 세상을 거꾸로 본다 고 해서 나쁠 것도 없다. 갈림목에서 세 개미는 더 좁은 통로 쪽으 로 들어간다. 통로의 구석구석을 살피고 나서야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긴다. 지금까지는 모든 게 너무 순조로워서 오히려 불안한 느낌을 준다. 세 개미가 도시 한가운데로 다다랐다. 필시 경계가 아주 삼엄한 지역일 것이다. 그들의 걸음걸이가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나아갈수 록 통로의 벽이 점점 더 반드르해진다. 낙엽 조각들이 깔려 있는 곳 을 지난다. 붉은 갈색 몸뚱이의 핏줄 속으로 어렴풋한 불안감이 밀려든다. 마침내 그들이 찾던 방이 나타난다. 나뭇진 냄새, 고수풀 냄새, 숯 냄새가 끼쳐온다. 이 방은 아주 최근에 고안된 것이다. 다른 개 미 도시에도 이런 은밀한 방이 있지만 그것은 먹이나 알을 저장하는 데만 쓰인다. 그런데 여기 이 방의 온도는 특별하다. 작년 겨울잠에 들어가기 직전에 어떤 개미가 다음과 같은 제안을 내놓았다. <겨레의 지력이 너무 빠르게 발전하고 있어서, 우리의 지식이 후 대에까지 이어지지 않고 소실될 염려가 있다. 선조들의 지혜를 우리 후손들이 활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개미 세계에서 지식을 축적하자는 제안은 완전히 생소한 것이었 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벨로캉 개미들이 그 제안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지식을 축적하기 위한 그릇이 고안되었고 모든 개미들이 와 서 저마다 자기 지식이 담긴 페로몬을 그 그릇에 쏟아부었다. 그런 다음, 그 그릇들을 주제별로 배열하였다. 그때부터 겨레의 모든 지식을 이 커다란 방에 모아둘 수 있게 되 었고, 이 방을 '화학 정보실'이라 명명하였다. 세 개미는 바짝 긴장해 있는 경황에도 찬탄을 느끼며 방 안으로 들어선다. 조마조마한 마음에 더듬이가 떨리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다. 주위를 둘러보니 형광을 발하는 알들이 여섯 줄로 배열되어 있고, 그 둘레에 암모니아 증기가 서려 알들을 덥혀주고 있다. 그러나 흙 으로 싸인 채 고정되어 있는 그 투명한 껍질 속에는 생명의 씨앗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수백 가지 주제로 정리된 후각 정 보들이 들어 있다. 즉, '니'왕조 여왕개미들의 역사, 일반 생물학, 동물학(동물학 관련 정보가 특히 많다), 유기 화학, 지상 지리학, 지하 지층 지질학, 아주 유명한 대규모 전투에서 사용된 전략, 최근 1만 년간의 영토 정책 등에 관한 정보들이 담겨 있고, 심지어는 요 리법이나 도시 내의 비위생 구역에 관한 정보도 들어 있다. 더듬이들이 움직인다. <자 빨리 해치우자.> 세 개미는 앞다리에 난 털을 솔로 삼아 재빨리 더듬이를 닦고 기 억 페로몬이 담겨 있는 캡슐들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더듬이의 예민 한 끄트머리로 알들을 문질러 내용물을 가려낸다. 세 개미 가운데 하나가 갑자기 동작을 멈춘다. 무슨 소리를 들은 듯하다. 무슨 소리일까? 세 개미는 들킨 것이 아닐까 하고 가슴을 졸이며 기다린다. 누굴까? 3. 살타 형제의 집 "가서 문 열어. 노가르 양일거야." 세바스티앵 살타가 훤칠한 허우대를 구부려 손잡이를 비틀었다. "안녕하세요!" 그가 인사말을 건넸다. "그래요, 다 됐어요." 살타 삼 형제는 일제히 안으로 들어가서 슈티를 수지로 된 커다란 통을 가지고 나오더니, 거기에서 윗부분이 열려 있는 공 모양의 유 리 그릇을 꺼냈다. 유리 그릇 안에는 갈색의 작은 알약들이 가득 들 어 있었다. 네 사람은 모두 그 유리 그릇 위로 몸을 구부렸다.카롤린 노가르 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유리 그릇 안에 오른손을 집어넣었다. 노가르의 손가락 사이로 익은 흙빛의 알갱이들이 흘러내렸다. 노 가르는 향기 좋은 커피 알갱이의 냄새를 즐기듯 그것들의 냄새를 맡았다. "이거 만드느라고 고생 많으셨죠?" "말도 마십시요." 살타 삼 형제가 이구 동성으로 대답했다. 그중 하나가 덧붙였다. "그래도 보람있는 일이었습니다." 살타 삼 형제, 즉 세바스티행, 피에르, 앙투안은 모두 신장이 2미 터 가까이나 되는 거구들이었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앉아 노가르가 한것처럼 자기들의 기다란 손가락을 유리 그릇 안에 집어넣었다. 높은 촛대에 꽂힌 세 개가 주황색 불빛으로 그 기이한 무대를 비 추고 있었다. 카롤린 노가르는 유리 그릇을 여러 겹의 나일론 망사로 감싼 다음 여행 가방 안에 넣었다. 노가르는 세 거인을 올려다보며 미소로 작 별인사를 대신했다. 피에르 살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다 한거야." 4. 도주와 추격 공연히 겁을 먹었다. 낙엽이 바스락거린 것뿐이다. 세 개미는 탐 색작업을 계속한다. 액체 상태의 정보가 가득 들어 있는 캡슐들의 냄새를 하나하나 맡 아 나가던 세 개미가 마침내 원하던 것을 찾아낸다. 다행히 별로 힘들이지 않고 찾아낼 수 있었다. 세 개미는 그 보물 을 들어내어 다리에서 다리로 건네가며 살펴본다. 페로몬이 가득 담 겨 있는 그 알은 송진 방울로 단단히 봉해져 있다. 개미들이 마개를 떼어내자 더듬이의 열한 마디로 첫번째 냄새가 훅 끼쳐온다. <해독 금지.> 옳거니, 특급 비밀 정보임을 알리는 표시로는 그보다 나은 것이 없다. 세 개미는 알을 내려놓고 걸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그 속에 더 듬이를 허겁지겁 집어넣는다. 정보를 담은 냄새가 뇌 속의 구불구불 한 신경계로 전해진다. <해독 금지 기억 페로몬 번호 : 81 주제 : 자서전 내 이름은 클리푸니. 벨로키우키우니의 딸이며, '니'왕조의 333번 째 여왕으로서 불개미 도시 벨로캉의 유일한 산란자이다. 여왕이 되기 전에는 암개미 56호라 불렸다. 계급이 암개미이고 산 란 번호가 춘계 56번이기에 그렇게 불린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우리 도시 벨로캉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었으며, 우리 개미들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문명을 이룬 생물이라고 믿었다. 흰개미와 꿀벌과 말벌은 무지 몽매한 탓에 우리의 관습을 받아들이 지 않는 미개한 족속이라고 생각했다. 또 우리 불개미와 종이 다른 개미들은 퇴화한 자들로 여겼고 난쟁 이 개미들은 너무 작아서 우리의 근심거리가 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에 나는 줄곧 궁궐 안 암개미들의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나 의 유일한 소망은 어머니 같은 여왕이 되어, 어머니가 하신 것처럼 말 그대로 영원히 존재하게 될 강력한 연방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수개미 327호가 상처를 입고 내 방으로 뛰어 들어와 이상한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내 생각에 커다란 변화가 일 어났다. 그는 사냥을 나갔던 원정대가 새로운 살상 무기 때문에 전 멸당했다고 단언했다. 처음에 우리는 난쟁이개미들의 소행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이 우리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들이었기에 그 의심은 자연스런 것이었다. 그러던 중 그들과 대규모 전투를 치렀다. 그것이 이른바 '개양귀비' 전투이다. 수백만의 병정개미들이 목숨을 잃긴 했지만 우리는 그 전 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 승리를 통해서 난쟁이개미들에 대한 우리 의 의심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난쟁이개미들은 고성능 비 밀 무기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다음에 우리가 혐의를 둔 쪽은 대대로 내려오는 적인 흰개미들 이었다. 그것 역시 오판이었다. 동쪽의 거대한 흰개미 도시가 유령 도시로 변해 있었다. 그 도시의 모든 거주자들이 염소 가스에 독살 되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결국 우리는 우리 도시 내부를 조사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한 비밀 군대와 대결하게 되었다. 그 비밀 군대의 임무는 사회에 지나 친 불안감을 조성하는 정보들을 차단함으로써 공공의 안녕을 유지하 는 것이었다. 비밀 군대에 속한 암살자들은 바위 냄새를 풍기고 다 녔으며 자기들이 세균을 잡아먹는 백혈구와 같은 구실을 한다고 주 장했다. 그들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알 권리를 억압했다. 하나의 유기체와도 같은 우리 공동체 안에 독소가 스며드는 것을 막는다는 구실 아래 그들은 위험한 정보를 차단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 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비생식 병정개미 103683호의 기상 천외한 모험담을 듣고 나서 우리는 마침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세계의 동쪽 끝에 어마어마하게 큰....> 세 개미 가운데 하나가 읽기를 중단한다. 누군가가 있는 것 같다. 세 첩보 개미가 몸을 숨기고 주위를 살핀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 는다. 더듬이 하나가 은신처 위로 쭈뼛거리며 올라오더니 이내 나머 지 다섯 더듬이가 그 뒤를 따른다. 여섯 개의 감각기가 레이더로 바뀌어 초당 진동수 1만 8천으로 떨 린다. 주위에 떠도는 모든 냄새가 즉시 감지된다. 이번에도 공연히 겁을 먹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세 개미는 다시 페로몬을 해독하기 시작한다. <세계의 동쪽 끝에 어마어마하게 큰 동물들이 떼지어 살고 있다. 개미 세계의 전설에 그 동물들을 시적인 언어로 묘사한 대목이 있 기는 하다. 그러나 그 동물들은 어떠한 시로도 형상화해 낼 수 없는 것들이다. 유모 개미들은 무서운 얘기로 우리를 오싹하게 만들고 싶을 때 그 동물들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시무시한 옛날 이야 기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이 아니었다. 전에 나는 다섯 마리씩 떼를 지어 다니면서 세계의 끝을 지키고 있다는 거대한 괴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그다지 믿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순진한 암개미들을 놀리려는 객쩍은 이야기로만 여겼다. 이제 나는 '그들'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냥을 나간 첫 원정대를 몰살한 것이 '그들' 짓이었다. 벨로캉을 유린하고 어머니를 죽인 불의 재앙도 '그들' 짓이었다. '그들', 바로 '손가락들'이었다. 나는 그들에 대해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젠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숲속 어디에서나 그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첩보 개미들의 보고를 접하고 판단하건대, 분명히 그들은 나날이 우리 세계 가까이로 다가오고 있으며 우리의 생존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사정이 그러하기에 나는 이제 우리 벨로캉 개미들을 설득하여 '손 가락들'을 상대로 성전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더 늦기 전에 이 세계 에서 '손가락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할 생각이다.> 페로몬에 담긴 정보가 너무나 황당해서 세 개미는 잠시 어리둥절 해 있다가 늦게서야 그 내용을 이해한다. 비로소 세 첩보 개미는 알 고 싶어하던 것을 알게 되었다. 손가락들을 응징하기 위한 원정군! 이 사실을 어떠한 일이 있어도 다른 동료들에게 알려야 한다. 그 러기 전에 이 정보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세 개미 는 일제히 더듬이를 캡슐에 다시 담근다. <이 괴물들을 없애버리자면 예상컨대 원정군의 규모가 23개의 돌 격 보병 군단, 14개의 경포병 군단, 45개의 백병전 군단, 29개 의....> 다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누군가가 아른 흙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세 잠입자는 극비 정보가 묻은 더듬 이를 다시 빼낸다. 어쩐지 모든 게 너무 쉽게 이루어진다. 싶더니 함정에 빠진 것이다. 경비 개미들은 그들이 침투한 것을 알면서도 정체를 더 잘 알기 위해서 화학 정보실에 잠입하도록 내버려 두었던 것이리라. 세 개미는 다리를 오그리며 뛰어오를 채비를 한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병정개미들이 벌써 와 있다. 반체제 진영에 속한 세 개미는 가까스로 소중한 기억 페로몬이 들어 있는 알을 챙겨서 옆 쪽으로 나 있는 작은 통로로 달아난다. 벨로캉 특유의 냄새 언어로 된 경보가 울린다. 화학식으로 나타내 면 'C8-H18-O'가 되는 경보 페로몬이다. 즉각 반응이 나타난다. 벌 써 병정개미 다시 수백 개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세 잠입자가 전속력으로 달아난다. 반체제 개미 가운데 화학 정보 실에 잠입해서 클리푸니 여왕의 가장 중요한 기억 페로몬을 해독하 는 데 성공한 것은 자기들뿐인데 여기서 허망하게 죽는다는 건 안될 말이다. 벨로캉의 통로들을 오가며 숨막히는 추격전이 벌어진다. 개미들은 아주 빨리 내닫기 때문에 통로의 굽이를 돌 때는 봅슬레이 경주에서 처럼 바닥과 수직을 이룬 벽면을 타고 유연하게 돈다. 때로는 바닥으로 다시 내려가지 않고 천장에 붙어서 계속 나아간 다. 사실 개미는 도시에서는 위와 아래라는 개념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발톱이 있기에 개미들은 어디에서나 걷고 달릴 수가 있다. 여섯 개의 다리가 달린 봅슬레이들이 현기증이 일 정도로 빠르게 달아나고 있다. 벽들이 와락와락 덤벼드는 느낌이 든다. 올라가고 내려가고 이리저리 돌아간다. 벼랑이 나타나자 도망자와 추격자가 모두 아슬아슬하게 뛰어넘는데 잠입자 하나가 벼랑에 떨어 진다. 그 개미 앞에 번들거리는 딱지를 가진 병정개미 하나가 나타 나더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깨달을 사이도 없이 개미산이 가득 들 어 있는 배 끝을 들어올린다. 뜨거운 개미산을 맞은 첩보 개미가 금 세 물렁물렁한 반죽이 되어버린다. 겁에 질린 두 번째 첩보 개미는 몸을 돌려 옆의 통로로 재빨리 달아난다. <흩어지자!> 그가 냄새 언어로 부르짖고 다리 여섯 개로 땅바닥을 깊이 판다. 기력이 빠진다. 병정개미 하나가 그의 왼쪽에 나타난다. 너무 빨리 달려온 탓에 그 병정개미는 희생물을 바로 앞에 두고도 위턱으로 잡 지 못하고 개미산 포를 겨누지도 못한다. 그 틈을 놓칠세라 첩보 개 미는 그 병정개미가 벽에 부닥히게 하려고 힘껏 떼민다. 딱지들이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서로 부딪친다. 벨로캉의 비좁은 통로에서 두 개미는 시속 0.1킬로미터 이상으로 움직이며 강타를 주 고받는다. 상대의 딴죽을 걸어보기도 하고 위턱의 뾰족한 끝으로 상 대를 찌르기도 한다. 두 개미는 너무 빨리 움직이느라고 통로가 점점 좁아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다가 급기야는 깔때기 모양의 통로 속으로 빨려들어가 서로 충돌하고 만다. 봅슬레이처럼 질주하던 두 개미의 몸뚱이가 터 지면서 키틴질 조각이 주위에 널리 흩어진다. 세 번째 반체제 개미는 다리를 천장에 대고 머리를 아래로 둔 채 재빨리 달아난다. 포수 개미 하나가 그를 겨누더니 정확한 사격으로 오른쪽 뒷다리를 으깨어버린다. 그것에 충격을 받은 첩보 개미가 여 왕의 기억 페로몬이 담긴 알을 놓친다. 경비 개미가 그 보물을 회수해 간다. 다른 포수 개미가 개미산 열 방울을 연달아 쏘아 마지막으로 살아 남은 첩보 개미의 더듬이 하나를 녹여버린다. 빗나간 개미산 방울들 이 천장에 구멍을 내면서 그 파편들이 쌓여 일시적으로 추격자들의 앞길을 막는다. 첩보 개미가 잠시 한숨 돌린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멀리 나아갈 수가 없다. 더듬이 하나와 다리가 없어진 데다 길목마다 경비 개미 들이 지키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벌써 병정개미들이 뒤에 와 있다. 개미산이 분출한다. 다시 다리 하나가 잘린다. 이번에는 앞쪽이다. 그래도 첩보 개미는 남아 있는 네 다리로 힘껏 달아나 통로의 어떤 우묵한 곳에 들어가 웅크린다. 경비 개미 하나가 그에게 개미산 포를 겨눈다. 그러나 그에게도 개미산은 있다. 그는 배를 흔들어 재빨리 사격 자세를 취한 다음 경 비 개미를 겨눈다. 명중이다. 경비 개미는 그만큼 노련하지 못해서 겨우 왼쪽 가운뎃다리를 잘랐을 뿐이다. 이제 다리가 세 개뿐이다. 첩보 개미는 가쁜 숨을 쉬면서 절뚝절뚝 나아간다. 어떠한 일이 있 어도 이 함정에서 빠져나가 다른 반체제 개미들에게 '손가락들'을 상대로 한 원정이 준비되고 있음을 알려야 한다. <그 자가 저쪽으로 갔다. 저쪽이다!> 첩보 개미의 개미산에 타 죽은 시체를 발견한 한 병정개미가 페로몬을 발한다.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지? 살아남은 첩보 개미는 있는 힘을 다하 여 천장을 파고들어간다. 천장 속에 들어가면 추격자들이 눈치를 못 챌 것이다. 천장은 확실히 임시 변통의 은신처로 이상적인 곳이다. 경비 개미들은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다가, 두 번째 지나갈 때 한 경비 개미가 위에서 액체 한 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첩보 개미 가 숨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첩보 개미의 투명한 핏방울이 떨어진 것이다. 중력 법칙은 어디에서나 가차없이 작용한다. 빌어먹을 중력! 반체제 개미는 천장에서 뛰어내리더니 남아 있는 다리와 더듬이를 마구 휘두르기 시작한다. 병정개미 하나가 그의 다리를 낚아채어 부 러질 때까지 비튼다. 다른 병정개미가 뾰족한 위턱으로 그의 가슴을 꿰뚫는다. 그 상황에서도 그는 달아난다. 남은 두 다리로 절뚝거리 며 기어간다. 그러나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기다란 위턱 하나가 벽을 뚫고 나오더니 그의 머리를 싹둑 잘라버린다. 머리가 바닥에서 되튀어 비탈진 통로를 따라 데구르르 굴러간다. 남은 몸뚱이는 열 걸음 정도를 더 가다가 차츰 움직임이 둔해지더 니 마침내 움직임을 멈추고 풀썩 무너진다. 경비 개미들은 토막난 몸뚱이들을 모아 다른 두 첩보 개미의 시체와 함께 도시의 쓰레기터 에 버린다. 너무 호기심이 많은 자들의 최후는 이러한 것이다. 5. 수사착수 '일요 메아리'의 기사 프장드리 가에서 의문의 삼중 살인 지난 목요일 퐁텐블로 시 프랑드리 가에 있는 어떤 집에서 세 형 제가 변시체로 발견되었다. 같은 집에 있던 세바스티앵, 피에르, 앙 투안 살타 삼 형제가 변을 당한 것인데, 사망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 구역은 범죄가 없기로 이름난 곳이다. 돈이나 귀중품은 그대로 있었고, 가택 침입의 흔적은 물론 범행에 사용되었을 법한 어떠한 흉기도 현장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까다로운 점이 많을 것으로 보이는 이 사건의 수사는 퐁텐블로 형 사대 소속의 유명한 자크 멜리에르 경정에게 맡겨졌다. 이 기이한 사건은 추리 소설의 수수께끼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여름의 더위를 잊게 하는 납량 스릴러가 되어줄 것이다. 이제 살인범이 잡히는 건 시간 문제다. L.W. 6. 백과 사전 또 당신인가? 그렇다면 당신이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라는 내책의 두 번째 권을 발견했다는 얘기가 된다. 첫번째 권은 지하 사원의 보면대 위에 눈에 잘 띄게 놓여 있었을 테지만, 이 두 번째 권을 발견하기는 그보다 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어쨌든 경하할 일이다. 당신은 정확히 누구인가? 내 조카 조나탕인가? 내 딸인가?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가? 미지의 독자인 그대에게 먼저 인사를 보낸다. 나는 당신을 더 알고 싶다. 이 책장들을 넘기기에 앞서 당신의 이 름과 나이, 직업, 국적을 말해주기 바란다. 당신이 살아가면서 가장 흥미를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의 강점은 무엇이고 약점은 무엇인가? 이런, 그런 게 무슨 소용인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나는 당신 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다. 나는 내 책장에 닿는 당신의 손길을 느끼고 있다. 그것도 기분 좋 은 손길을 말이다. 당신 손가락 끝의 지문에서 나는 당신의 가장 내 밀한 특성을 알아낸다. 지문은 당신 몸이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모든 정보가 들어 있다. 거기에서 나는 당신 조상들의 유전자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너무 어린 나이에 죽어버렸더라면 당신이 태 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짝짓기를 한 끝에 당 신이 태어난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당신이 내 앞에 보이는 듯하다. 하나, 웃지 말 고 그냥 그대로 있어주기 바란다. 당신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싶다. 당신은 스스로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존재다. 당신에겐 하나의 사회사가 담긴 성과 이름이 있지만 그게 당신의 전부일 수 없다. 당신은 71%의 물과 18%의 탄소, 4%의 질소, 2%의 칼슘, 2%의 인, 1%의 칼륨, 0.5%의 황, 0.5%의 나트륨, 0.4%의 염소로 이루어져 있 다. 거기에다 큰 숟가락 한 술 분량의 여러 가지 희유 원소, 즉 마 그네슘, 아연, 망간, 구리, 요드, 니켈, 브롬, 불소, 규소를 함유하 고 있다. 또 소량의 코발트, 알루미늄, 몰리브덴, 바나듐, 납, 주 석, 티탄, 붕소도 가지고 있다. 이상이 당신의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들이다. 이 모든 물질들은 별들이 연소하면서 생겨나는 것으로 당신 몸 안 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당신의 물은 흔하디흔한 바닷물과 다를 바 없고, 당신의 인은 성냥개비의 인과 한가지이며, 당신의 염소는 수영장 물을 소독하는 데 쓰이는 염소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단순히 그런 물질들을 합쳐놓은 존재가 아니다. 당신은 하나의 화학적 구조물이며 훌륭한 건축물이다. 구성 물질 들이 적절히 배합되고 안정되게 평형을 이루면서 완벽하게 기능하고 있다. 그 복잡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당신을 이루는 분자들은 다시 원자, 미립자, 쿼크, 진공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모든 것들은 전자기적인 힘과 인력과 전자의 힘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 그 절묘 함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각설하고, 당신이 이 두 번째 권을 찾아냈다는 것은 당신이 꾀바 른 사람임을 말해주는 것이고 당신이 벌써 나의 세계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첫번째 권에서 당신이 얻은 지 식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궁금하다. 혁명이 일어났는가? 개혁이 일어 났는가? 물론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이 책을 더 잘 읽기 위해서 편안한 자세를 취하기 바 란다. 등을 곧게 펴고 호흡을 잔잔하게 고른 다음 입의 긴장을 풀고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기 바란다.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시공간의 모든 것 중에서 쓸모없는 것이라 고는 아무것도 없다. 당신도 물론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다. 하루살 이 같은 당신의 삶에도 어떤 의미가 있다. 당신의 삶은 막다른 골목 으로 통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저마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당신이 내 글을 읽고 있을 때쯤이면, 이 말을 하고 있는 나는 구 더기들의 밥이 되어 있을 것이다. 아니, 풀의 새싹을 무성하게 키워 줄 비료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세대의 사람은 내가 이루고 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에겐 시간이 너무 부족하고 내가 남길 수 있는 것은 보잘것없는 자취인 이 책뿐이다. 나에겐 시간이 너무 부족하지만 당신에겐 시간이 있다. 편하게 자 리를 잡았으면 근육의 긴장을 풀고 오로지 우주만 생각하라. 그 속 에서 당신은 그저 하나의 티끌일 뿐이다. 시간이 아주 빠르게 흘러간다고 상상해 보라. 응애, 하고 당신이 태어난다. 흔해빠진 하나의 버찌 씨처럼 어머니 몸에서 빠져나온 것 이다. 쩝쩝거리면서 당신은 수천 끼의 갖가지 음식을 먹어치운다. 수천 톤의 식물과 동물이 이내 똥으로 변한다. 억, 하고 당신이 죽는다. 당신의 삶이 그런 것이라면 그 삶은 얼마나 덧없는 것이랴. 물론 당신은 그런 삶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행동하라! 무엇인가를 행하라! 하찮은 것이라도 상관없다.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당신의 생명을 의미있는 뭔가로 만들라. 당신은 쓸데 없이 태어난 것이 아니다. 당신이 무엇을 위하여 태어났는지를 발견 하라. 당신의 최소한의 임무는 무엇인가? 당신은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니다. 명심하라.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7. 탈바꿈 그 애벌레는 누가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개미들을 조심하라는 잠자리의 충고를 아랑곳하지 않고 통통한 나 비 애벌레가 잠자리 곁을 떠나 물푸레나무 가지 끝으로 간다. 풀빛 과 검정과 하양이 어우러져 있고 털이 나 있는 애벌레다. 그 애벌레는 물결이 구비치듯 기어간다. 먼저 앞다리 여섯 개를 앞으로 내민다. 그 다음 몸을 고리처럼 둥글게 만들면서 뒷다리 열 개를 앞다리가 있는 자리로 옮긴다. 나뭇가지 끝에 다다르자 애벌레는 끈끈한 침을 뱉어 꽁무니를 붙 인 다음 머리를 아래쪽으로 두고 대롱대롱 매달린다. 애벌레는 아주 지쳐 있다. 애벌레의 삶이 끝나간다. 허물벗기의 고통을 마감하고 이제 고치를 지으려는 것이다. 그것은 탈바꿈이기 도 하고 하나의 죽음이기도 하다. 침묵이 흐른다. 애벌레는 수정같이 맑고 단단한 실로 된 고치로 몸을 싼다. 애벌 레의 몸뚱이가 마법의 냄비로 변한다. 애벌레는 이 날을 오래오래 기다려왔다. 너무나도 오랜 기다림이었다. 고치가 단단해지고 뽀얘진다. 산들바람이 그 이상하게 생긴 하얀 열매를 가만가만 흔든다. 며칠 후 고치는 크게 부풀어오른다. 금방이라도 긴 숨을 한바탕 내쉴 기세다. 호흡이 점점 고르게 되어간다. 고치가 바르르 떤다. 고치 안에서 바야흐로 연금술처럼 신비로운 일이 벌어진다. 여러 가 지 색과 희유 원소, 옅고 진한 갖가지 냄새, 체액과 호르몬, 래커 같은 진, 지방, 산, 살과 껍질이 뒤섞인다. 하나의 새로운 생명을 만들기 위하여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하게 모 든 것이 조절되고 배합된다. 그러고 나자 고치 꼭대기가 갈라지면서 나선모양으로 감겨 있던 더듬이 하나가 풀어지며 은색 껍질을 뚫고 쭈뼛쭈뼛 나온다. 요람이기도 하고 관이기도 한 고치를 뚫고 나오는 그 곤충의 모습 은 예전의 애벌레와 전혀 닮은 구석이 없다. 근처를 지나던 개미 한 마리가 그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그 황 홀한 탈바꿈 장면에 매료되어 있던 개미는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그 게 하나의 사냥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개미는 그 곤충이 도망가기 전에 죽이려고 가지 위로 달려 올라간다. 박각시나방이 촉촉한 몸뚱이를 완전히 고치에서 빼내고, 날개를 편다. 화려한 빛깔이다. 가볍고, 연약하고 뾰족한 날개가 아롱아롱 반짝인다. 톱니 모양을 한 날개 가장자리의 거뭇한 색조에 대비되어 번쩍이는 노란색, 광택 없는 검정색, 광택 있는 오렌지색, 진홍색, 주홍색, 자개빛이 도는 석탄색이 뒤섞인 묘한 색조가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병정개미가 배를 가슴 아래로 움직이면서 사격 자세를 취한다. 시 각과 후각을 사용하는 그의 조준점 안에 박각시나방이 들어온다. 박가시나방이 개미를 발견한다. 자기를 겨누고 있는 개미의 뾰족 한 배 끝에 잠시 넋을 읽고 있던 나방이 그 배 끝에서 치명적인 무 기가 발사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나방은 죽음을 맞을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지금은 안 된다. 지금 죽 는 건 너무나 허망한 노릇이다. 두 곤충이 서로를 응시한다. 개미는 나방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정 말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애벌레들에게 싱싱한 살코기를 먹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개미들은 풀만 먹고는 살 수가 없다. 개미는 나방이 곧 날아오르리라는 것을 알아채고 나방의 움직임을 감안하면서 배 끝을 들어올린다. 나방은 그 순간을 놓칠세라 얼른 날아오른다. 발사된 개미산이 나방의 몸뚱이를 맞추지 못하고 빗나 가면서 날개를 뚫고나간다. 날개에 아주 동그란 작은 구멍이 생겻다. 나방이 조금 가라앉는다. 오른쪽 날개에 뚫린 구멍으로 바람이 빠 져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노련한 사수인 그 개미는 나방이 자기가 쏜 개미산에 맞았다고 확신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방은 날갯짓을 계속하고 있다. 날갯짓 한 번 할 때마다 축축하던 날개가 점점 건조해진다. 나방은 다시 고도를 높이면서 아래에 있는 자기 고치를 바라본다. 서운한 감회가 한 가닥 스치고 지나간다. 병정개미는 여전히 나방의 목숨을 노리면서 개미산을 다시 쏜다. 하늘이 돕느라고 그러는지 산들바람에 밀린 나뭇잎 하나가 그 치명 적인 발산물을 막아준다. 나방은 방향을 틀어 경쾌하게 날개를 저으 며 멀어져간다. 벨로캉의 병정개미 103683호가 사냥감을 놓친 것이다. 그의 사냥 감은 이제 사정권 밖에 있다. 103683호는 날아가는 나방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 순간 나방을 부러워한다. 어디로 가는걸까? 동쪽으로 사라지는 것으로 보아 세계의 끝을 향해 가는 듯하다. 박각시나방은 몇 시간 동안을 내쳐 날아가다가, 하늘이 어둑어둑 해질 무렵 멀리에 불빛이 있음을 발견하자 그쪽으로 서둘러 날아간다. 불빛에 홀린 박각시나방은 그 황홀한 빛에 다가가야겠다는 일념으 로 힘껏 나아간다. 불빛이 가까워지자 나방은 한시라도 빨리 황홀경 을 맛보려고 더욱 속도를 낸다. 이제 불빛이 바로 눈앞에 있다. 날개 끝에 불이 붙으려는 순간이 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방은 불 속으로 뛰어들어 그 뜨거운 힘을 즐 기려 한다. 태양과도 같은 그 불 속에서 녹아버리고 싶은 것이다. 그 박각시나방은 그렇게 불 속에서 자기 몸을 불사르고 말게 될 것인가? 8. 멜리에스 경정, 살타형제 살인사건의 수수께끼를 풀다. "안 되겠지요?" 그는 주머니에서 껌을 꺼내어 깨물면서 대답했다. "안돼, 몇 번 말해야 알아듣겠나. 기자들은 들여보내지 말게. 내 가 시체를 차분하게 조사하고 난 다음에 보자고, 그리고 저 촛대에 꽃힌 촛불들 좀 꺼주게. 그런데 촛불은 왜 켜놓은 거지? 아, 이 집 전기가 나갔었군. 하지만 이제 전기가 다시 들어왔지 않은가, 안 그 래? 그러니 촛불을 끄게. 화재가 발생할 염려도 있고 하니 말일세." 누군가가 촛불을 불어 껐다. 날개 끝에 이미 불이 붙어 있던 나비 한 마리가 아슬아슬하게 불에 타 죽는 것을 모면했다. 멜리에스 경정은 껌을 요란하게 씹으면서 프랑드리 가의 그 집을 조사하고 있었다. 21세기 초가 되었는데도 지난 세기에 비해 별로 달라진 게 없었 다. 그래도 범죄 수사 기술에는 약간의 진보가 있었다. 살해당한 시 체를 처리하는 방법이 개선된 것도 그 중의 하나였다. 이제는 시체 를 사망하던 순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보존하기 위하여 포르말린과 투명한 밀랍을 입힐 수 있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경찰은 여유를 갖 고 마음껏 범죄현장을 조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방법은 옛날에 분 필로 시체가 있던 자리를 표시하는 방식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었다. 시체의 끔찍한 모습을 생생하게 보게 된다는 점이 약간 곤혹스럽 기는 했지만 수사관들은 이내 그런 것에 익숙해져서, 죽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 눈을 뜬 채 살갗이며 의복에 온통 투명한 밀랍을 뒤집 어 쓰고 있는 피살자들을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가장 먼저 온 사람이 누구지?" "카위자크 형사입니다." "에밀 카위자크 말인가? 에밀 형사 어디 있지? 아, 아래에 있지. 좋아, 에밀 형사 좀 오라고 하게." 한 젊은 경관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 경관님.... '일요 메아리'의 여기자가 와서 이런 얘기를.. .." "누가 뭔 얘기를 한다는 거야? 안돼! 나중엔 몰라도 지금 기자들 은 사절이야. 가서 에밀 형사나 데려오라고." 멜리에스는 거실 안을 이리저리 거닐다가 세바스티앵 살타의 시체 위로 몸을 구부렸다. 멜리에스는 자기 얼굴을 일그러진 시체의 안면 에 거의 닿을 정도로 바싹 갖다대고, 휘둥그래진 눈이며 치켜올라간 눈썹, 벌름하게 벌어진 콧구멍, 쩍 벌려진 입과 늘어진 혀를 살펴보 았다. 그는 피살자의 이가 틀니라는 것과 마지막 간식으로 먹은 것 이 무엇인지를 알아냈다. 피살자는 땅콩과 건포도를 먹었음에 틀림없었다. 멜리에스가 이번엔 다른 두 형제의 시체 쪽으로 몸을 돌렸다. 피 에르 역시 눈을 휘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투명 밀랍이 그의 살갗에 돋은 닭살을 그대로 보존해 주고 있었다. 앙투안의 얼 굴 역시 공포에 짓눌린 듯 험상궂게 일그러져 있었다. 경정은 주머니에서 조명 돋보기를 꺼내 세바스티앵 살타의 살갗을 살펴보았다. 털이 빳빳하게 일어서 있고 그에게도 역시 닭살이 돋아 있었다. 눈에 익은 윤곽이 멜리에스 앞에 나타났다. 에밀 카위자크 형사 다. 퐁텐블로 형사대에서 40년 동안 충실하게 봉직해 온 사람이다. 살쩍이 희끗희끗하고 콧수염을 뾰족하게 길렀으며 배가 두두룩하다. 카위자크는 분수를 지키며 사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의 유일한 소 망은 퇴직할 때까지 별다른 풍파 없이 평온하게 지내는 것이었다. "여기에 가장 먼저 온 사람이 에밀 형사요?" "그렇습니다." "뭐 본 거 있어요?" "경정이 본 것과 똑같은 걸 보았습니다. 오자마자 시체에 밀랍을 입히라고 지시했습니다." "잘 했어요.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상처도 없고, 지문도 없고, 흉기도 없고, 들어오고 나간 흔적도 없고.... 한마디로 골치 아픈 사건 같은데요." "의견 잘 들었어요. 고마워요." 자크 멜리에스 경정은 젊은 사람이었다. 이제 겨우 서른 두 살이 었다. 그러나 벌써 명민한 수사관이라는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는 틀에 박힌 수사 방법을 경멸하면서 아주 복잡한 사건도 독창적인 방 법으로 해결해 내곤 했다. 자크 멜리에스는 자연 과학 공부에 충실했던 사람인데, 그 공부를 마치고 나서는 과학자로서 남부럽지 않게 사는 길을 포기하고 자기 가 줄곧 관심을 가져왔던 범죄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맨 처음 멜 리에스가 의문 부호 투성이의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소 설을 통해서였다. 그는 티 판사에서 메그레, 에르퀼 푸아로, 뒤팽 릭 테커드를 거쳐, 셜록 홈즈 등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명탐정이 등 장하는 추리소설을 탐독했다. 그리고 3천 년에 걸친 범죄 수사 기록을 섭렵했다. 그가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완전 범죄였다. 언제나 이루어질 뻔하다가 한 번도 실현된 적은 없는 것이 그 완전 범죄였다. 그는 범죄학에 대한 조예를 더 깊이 하기 위하여 파리 범죄학 연구소에 등록했다. 거기에서 그는 난생 처음 시체 해부를 경험했다(그 과정 에서 처음으로 졸도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는 또 거기에서 머리 핀 으로 자물쇠 따는 법과 사제 폭탄을 만들거나 그 뇌관을 제거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인간 고유의 사망 원인을 탐구했다. 그러나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그를 실망시키는 것이 있었다. 1차 적인 연구 소재가 적절치 않다는 점이었다. 거기에서는 체포된 범인 들만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바보들만 연구하고 있는 셈이었다. 다른자들, 즉 영리한 자들은 잡힌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서 는 전혀 아는 게 없었다. 벌받지 않은 자들 가운데 어떤 자들은 완 전 범죄를 실행하는 방법을 찾아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경찰에 투신해서 스스로 범인들을 추적해 보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멜리에스는 경찰에 몸을 담았 다. 그는 순조롭게 승진을 거듭했다. 그가 처음으로 개가를 올린 것 은, 테러집단의 두목임을 감쪽같이 속이고 범죄학 연구소에서 폭발 물 제거법을 가르치던 자기 교수를 체포하게 된 일이었다. 멜리에스 경정은 거실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이윽 고 그의 눈길이 천장에 머물렀다. "이봐요, 에밀 형사. 당신이 여기 왔을 때 파리가 있던가요?" 에밀 형사는 거기까지는 신경을 못 썼다고 대답했다. 그가 와서 닫혀 있던 문이며 창문을 열었으니까, 파리들이 있었더라도 그 동안 에 열린 창문으로 날아가버렸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게 중요한가요?" 에밀 형사가 걱정스러워하며 물었다. "중요하지요. 하지만 이제 와선 별 의미가 없게 되었어요. 그건 그렇고 피살자들에 관한 서류 가지고 있지요?" 카위자크는 어깨에 둘러매고 있는 가방에서 판지로 된 서류철을 꺼냈다. 경정은 서류철에 담긴 서류 몇 장을 들여다보았다. "이거 어떻게 생각해요?" "뭔가 흥미로운 구석이 있습니다.... 형제가 모두 화학자인데, 셋 중의 한 사람 세바스티앵은 언뜻 생각하기와는 달리 좀 특이한 인물 입니다. 그는 이중적인 삶을 살았더군요." "아 그래요....?" "이 세바스티앵이라는 친구, 도박에 홀딱 빠져 있었어요. 특히 포 커를 잘 해서 '포커의 거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어요. 키가 크기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돈을 어마어마하게 걸기 때문에 생긴 별명입니다. 최근에 그는 큰 돈을 잃고 빚에 쪼들리고 있었어 요. 그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점점 더 많은 돈을 걸 수밖에 없 게 되었던 거구요." "그런 사실을 다 어떻게 아셨어요?" "조금 전에 도박장에서 조사를 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 친구 빚더 미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었어요. 빨리 돈을 갚지 않으면 죽여버리 겠다고 누군가가 위협한 적도 있었던 모양이오." 멜리에스는 껌 씹기를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세바스티앵에게는 죽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군...." 카위자크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 친구 지레 겁먹고 자살해 버린걸까요?" 경정은 그 질문을 못 들은 체하고 다시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여기에 처음 왔을 때 문이 안쪽에서 잠겨 있었지요. 안 그래요?" "맞습니다." "창문도요?" "창문도 전부 다요." 멜리에스는 다시 껌을 요란하게 씹기 시작했다. "뭔가 집히는 게 있으신가요?" "자살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어요. 물론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자살이라고 가정하면 모든 것이 아귀가 맞아요. 밖에서 침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부인의 자취가 없는거지 요. 모든 게 내부에서 이루어졌어요. 세바스티앵이 두 형제를 죽이 고 자기도 죽은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흉기를 사용했을까요?" 멜리에스는 영감을 더욱 잘 떠올리려고 눈을 감고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독입니다. 효과가 늦게 나타나는 강력한 독이지요. 캐러멜을 입 힌 시안화물 같은 것입니다. 위 속에서 캐러맬이 녹으면 내용물이 흘러나오면서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지요. 화학적인 시한 폭탄이라고 나 할가요. 그 친구가 화학자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맞습니다. 종합 화학 회사 즉, CCG에서 일했습니다." "그렇다면 세바스티앵 살타가 자기 무기를 만들기는 식은 죽 먹기였겠군요." 카위자크는 아직 미심쩍어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피살자들의 얼굴이 왜 저렇게 공포에 짓눌려 있는걸까요?" "고통 때문이지요. 시안화물이 위벽을 뚫으면 고통이 엄청나지요. 위궤양 정도는 새발의 피라고요." "세바스티앵 살타가 자살했다는 건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그가 왜 애먼 형제들을 죽였을까요?" 여전히 의혹을 떨치지 못한 카위자크가 물었다. "형제들이 알거지로 전락하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었던 것이겠지 요. 죽으면서 자기 가족들을 함께 죽음에 끌어들이는 인간의 반사적 행위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어요. 고대 이집트에서는 파라오가 죽 으면 아내와 시종, 동물, 가구들을 매장하지 않았습니까! 혼자 저승 으로 가기가 무서워 가까운 사람들을 데려가는거지요...." 에밀 형사는 그제서야 경정의 확신에 동조하는 빛을 보였다. 살타 형제들이 자살했을 거라는 가정은 너무 단순하고 천박해 보이는 점 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전혀 없다는 사실 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가설이었다. 멜리에스가 말을 이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문이며 창문이 왜 모두 잠겨 있었는가! 모 든 일이 안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누가 죽였는가? 세바스티앵 살 타가 죽였다. 사용된 무기는 무엇인가? 그가 만든 시한 독약이다. 동기는 무엇인가? 바로 도박 때문에 걸머진 거대한 부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에밀 카위자크는 수수께기가 너무 쉽게 풀려나가는 바람에 어리둥 절했다. 이렇게 간단히 해결될 걸 가지고 신문에서는 '납량 스릴러' 운운하며 호들갑을 떨었던 것이다. 물론 가설을 입증하고 증인을 찾 고 증거를 수집하는 일이 남아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한 마디로 직업상의 자질구레한 절차에 불과한 것이었다. 멜리에스 경 정의 명성이 거저 생긴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의 추리가 논리적 으로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정부 경찰관 하나가 다가와서 말했다. "'일요 메아리'의 그 여기자가 또 왔습니다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데요. 한 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사코...." "그 여자 예뻐?" 경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그냥 예쁜 게 아니라 아주 예쁩니다. 유럽 인과 아시아 인의 혼혈인 것 같습니다." "그래? 이름이 뭐야? 충 리? 망 시낭?" "아닙니다. 레티샤 웰인가 뭔가 하는 이름입니다." 자크 멜리에스는 어쩔까 망설이다가 손목 시계를 흘끗 들여다보고 나서 결정을 내렸다. "그 아가씨한테 시간이 없어서 미안하게 됐다고 전해 주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텔리비젼 프로, '알송달쏭 함정 퀴즈'가 나올 시간이 야. 에밀 형사, 그 프로 알아요?" "얘기는 들었지만 한 번도 본 적은 없습니다." "저런, 그런 걸 안 보다니요! 두뇌 훈련을 위해서 형사들은 꼭 봐 야되는 건데." "이 나이에 뭐 새삼스럽게." 경관이 헛기침을 하며 끼여들었다. "'일요 메아리'의 여기자에게 더 하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통신사를 통해 수사 결과를 발표할 거라고 해. 그 여자는 그걸 받아서 그대로 기사를 쓰면 될거야." 경관은 의아한 생각이 들어서 한 가지 더 물었다. "그럼 벌써 이 사건을 종결하시는 건가요?" 자크 멜리에스가 피식 웃었다. 너무 쉬운 수수께끼에 실망한 전문 가의 웃음이었다. "둘은 타살이고 하나는 자살이야. 모든 독극물 때문에 죽은거지. 세바스티앵 살타가 빚더미에 깔려 미쳐버렸어 그래서 모두를 위해 일거에 끝내버린거지." 말을 마치고 경정은 모두 현장에서 나가라고 지시한 다음 전등을 끄고 문을 닫았다. 범죄 현장은 다시 텅 비었다. 거리의 빨갛고 파란 네온 불빛이 밀랍을 입혀 번들거리는 시체에 반사되고 있었다. 멜리에스 경정의 뛰어난 활약으로 시체들이 풍기 던 비극적인 분위기가 사라져버렸다. 그저 독극물 때문에 죽은 세 구의 시체일 뿐이었다. 멜리에스가 가는 곳에 불가사의란 없었다. 그저 하나의 사건이 있 을 뿐이었다. 오색 불빛에 번쩍이는 시체들은 하이퍼 리얼리즘 기법으로 그린 형상 같았다. 폼페이 대재난의 희생자들처럼 미라가 되어 버린 세 형상. 그러나 어머어마한 공포로 일그러진 그 얼굴들은 베수비오 화 산 폭발보다 더 무시무시한 어떤 것을 보았음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 다. 9. 쓰래기터에 버려진 개미 머리 사냥감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잠복하고 있던 103683호가 긴장 을 푼다. 아름다운 박각시나방은 돌아오지 않았다. 103683호는 털 달린 다리로 배 끝을 닦고 가지 끝으로 나아간다. 나방이 버리고간 고치라도 주우려는 것이다. 그런 것도 개미 둥지에서는 쓸모가 있 다. 꿀단지 개미처럼 분비꿀을 담는 단지로 활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103683호는 더듬이를 닦고 주위에 뭐 쓸 만한 다른 것이 없는지 알아보려고 더듬이를 초당 진동수 1만 2천 회로 떤다. 사냥감이 움 직이는 낌새가 없다. 하는 수 없다. 103683호는 벨로캉의 불개미로서 나이는 한 살 반인데, 그 나이는 인간 세계의 나이로는 마흔 살에 해당한다. 그의 계급은 비생식 병 정개미 중에서도 탐험 개미이다. 새의 도가머리 같은 더듬이가 높이 솟아 있고 목과 가슴의 생김새가 갈수록 늠름해지고 있다. 솔처럼 털이 나 있고 박차 같은 톱니가 달려 있는 종아리 마디 가운데 하나 가 부러지기는 했지만 몸 전체가 아직 하나의 완벽한 기계처럼 작동 하고 있다. 여러 전투를 겪으면서 생겨난 딱지의 줄무늬도 흠이 되지 않는다. 103683호는 다리 끝에 달린 부착반을 사용해서 관목에서 내려온 다. 작은 섬유질 덩어리인 그 부착반에서 끈끈한 물질이 나오기 때 문에 아주 미끈미끈한 표면도 수직으로 오르내릴 수 있다. 103683호는 자취 페로몬이 뿌려진 길을 따라 자기 도시 쪽으로 간 다. 주위에 풀들이 울창하게 솟아 있다. 똑같은 냄새길을 따라 달려 오는 많은 벨로캉 일개미들과 마주친다. 길 닦는 일개미들이 곳곳에 서 땅 속으로 길을 내고 있다. 길을 이용하는 개미들이 햇빛에 방해 를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민달팽이 한 마리가 경솔하게 개미들이 다니는 길로 지나간다. 병 정개미들의 위턱의 뾰족한 끝으로 민달팽이를 찔러 곧바로 잡아버린 다. 그런 다음 길에 남아 있는 민달팽이의 끈끈물을 닦아낸다. 103683호가 이상하게 생긴 곤충과 마주 쳤다. 날개가 하나뿐이고 땅바닥에 닿을 듯이 기어가고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다름이 아니 라 개미 하나가 잠자리를 옮기고 있는 것이다. 두 개미가 인사를 나 눈다. 그 사냥 개미는 103683호보다 운이 좋았다. 사실 나방 고치 하나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은 허탕치고 들어가는 것이나 크게 다를게 없다. 도시의 그늘이 펼쳐지더니 하늘이 사라지고 나뭇가지로 이은 지붕 만이 보인다. 벨로캉이다. 길 잃은 여왕개미가 세웠다고 해서 벨로캉이라 이름지어진 도시 다. 개미들끼리의 전쟁과 회오리바람, 흰개미, 말벌, 새들의 위협을 받으면서 벨로캉은 5천 년 이상을 꿋굿하게 버텨왔다. 벨로캉, 퐁텐블로 불개미들의 중심 도시로서 이 지역에서 가장 강 력한 정치력을 가진 도시. 벨로캉, 개미들의 혁신적인 운동이 꽃핀 도시. 위협이 있을 때마다 벨로캉은 더욱 공고해 진다. 전쟁을 겪을 때 마다. 벨로캉은 더욱 사기가 높아진다. 패배할 때마다 벨로캉은 더 욱 슬기로워진다. 벨로캉. 3천 6백만 개의 눈과 1억 8백만 개의 다리와 1천 8백만 개의 뇌를 가진 도시, 활기가 넘치고 찬란히 빛나는 도시. 103683호는 벨로캉의 모든 교차로와 모든 다리를 알고 있다. 그는 어렸을 때 하얀 팡이들을 재배하는 방들과 진딧물 떼를 사육하는 방 들, 꿀단지 개미들이 천장에 붙어서 꼼짝 않고 있는 방들을 둘러보 았다. 옛날에 흰개미들이 소나무 그루터기 속에 파놓았다는 금단 구 역의 통로들을 달려보기도 했다. 그는 새 여왕 클리푸니와 모험을 함게 했던 옛 동료로서 클리푸니가 행한 모든 개혁의 증인이었다. '혁신 운동'을 일으킨 것이 바로 클리푸니다. 클리푸니는 자신의 왕조를 세우기 위해 신 벨로키우키우니라는 호칭을 버렸다. 클리푸 니는 공간을 재는 단위를 머리(3밀리미터)에 걸음(1센티미터)으로 바꾸었다. 벨로캉 개미들의 활동 영역이 넓어짐에 따라 더 큰 단위 가 필요했던 것이다 혁신 운동의 일환으로 클리푸니는 '화학 정보실'을 만들었고 특히 동물학 정보를 풍부하게 하기 위하여 개미와 공생하는 갖가지 동물 들을 모아 연구하였다. 날아다니는 곤충과 수영하는 곤충을 길들이 려는 시도가 특히 주목할 만하다. 풍뎅이와 물방개 등이 그 예이다. 103683호와 클리푸니가 서로 만나지 못한 지도 오래되었다. 알 낳 고 도시 개혁하느라고 너무나 바쁜 젊은 여왕에게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병정개미는 도시 지하에서 그들이 함께 했던 모험, 즉 비밀 무기를 찾으려고 함께 조사했던 일, 그들을 마약으로 중독 시키려고 했던 로메슈제, 바위 냄새를 풍기는 병정개미들과의 싸움 등을 잊지 않았다. 103683호는 동쪽으로 대탐험을 떠났던 일이며, 세계의 끝에 다다 랐던 일,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여버리는 손가락들의 나라도 잊지 않고 있다. 병정개미는 새로운 탐험대를 구성하고 몇 차례 제안을 했으나 그 때마다 다른 개미들은 여기에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자살 행위나 다 름없이 탐험대를 세계의 끝으로 보낼 수 없다고 대답했다. 모든 게 과거지사가 되어버렸다. 개미는 대개 과거를 생각하는 일이 없다. 미래도 생각하지 않는 다. 개미는 개체로서의 자기 존재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라는 개 념도 '내 것' '녜 것'이라는 개념도 없이, 공동체를 통해서만 그리 고 공동체를 위해서만 자아를 실현한다. 자아에 대한 의식이 없기에 자기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개미는 실존적인 고뇌를 모른다. 그런데 103683호에게 한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세계의 끝을 다녀 오고 난 뒤에 그의 내부에 희미하나마 '나'에 대한 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물론 아직 맹아에 불과하지만 수용하기에 너무나 고통스러 운 의식이다. 자아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추상적인' 문제가 생겨난 다. 개미세계에서는 그것을 '마음의 병'이라고 부른다. 그 병은 대 개 생식 개미들에게 생긴다. '내가 마음의 병에 걸린 게 아닐까?'라 고 자문하는 것 자체가 벌써 심각한 병에 걸렸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고 개미 사회의 격언은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103683호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으려고 애쓴 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다.... 그의 주위에 있는 길들이 이제 넓어졌다. 교통이 상당히 번잡하 다. 그는 군중 속에서 부대끼며 자기가 커다란 집단 속의 자그마한 티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려고 노력한다. 다른 개미들이 있 다는 것, 다른 개미들과 더불어 산다는 것,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개미들 때문에 자기 발걸음이 느려지고 있음을 깨닫는 것, 그 런 것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는 개미들이 북적거리는 넓은 길로 경쾌하게 나아간다. 도시의 네번째 문이 나타난다. 여느 때처럼 개미들이 혼잡을 이루고 있다. 개미들이 너무 많아서 해쳐나갈 수가 없다. 4번 출입구를 넓히고 통 행 규칙을 만들어야 할 듯하다. 예를 들면 부피가 작은 사냥감을 운 반하는 자가 길을 비켜야 한다든가, 들어가는 자가 나오는 자보다 통행에 우선권이 있다라는 식의 규칙 말이다. 그런 게 없으니까 모 든 대도시들이 교통 체증으로 골치를 앓는 것이 아닌가? 초라하게 텅 빈 고치 하나를 운반하고 있는 103683호로서는 그렇 게 서둘 계체가 아니다. 통행이 원활해 지기를 기다리다가 그는 쓰 레기터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작정한다. 그는 어렸을 때 쓰레기 속 에서 놀기를 아주 좋아했다. 같은 병정개미 계급의 동료들과 함께 그는 쓰레기터에 있는 개미 머리를 공중에 던져서 개미산을 쏘아 맞 추는 놀이를 하곤 했다. 그것을 하려면 개미산 주머니에 압력을 넣 는 속도가 빨라야 했다. 103683호가 명사수가 된 것도 어쩌면 그 덕 분인지도 모른다. 쓰레기터에서 그는 위턱 다루는 법도 배웠다. 아, 쓰레기터다.... 개미들은 언제나 도시 앞에 쓰레기터를 만든 다. 한번은 다른 도시에서 처음으로 벨로캉에 온 어떤 용병 개미가 '쓰레기터는 보이는데 도시는 안 보이니 이거 어떻게 된거요?'라고 페로몬을 발한 적이 있었다. 시체와 곡물 껍질과 갖가지 배설물이 쌓여 높은 둔덕을 이루고 있는 바람에 도시 입구가 가려져버렸던 것 이다. 몇몇 입구는 완전히 쓰레기에 막혀버려 그것을 치우느니 차라 리 새 통로를 하나 파는 게 나을 정도가 되었다. (살려줘요!) 103683호가 몸을 돌린다. 방금 누군가가 어떤 냄새를 토해낸 듯했다. <살려줘요!> 틀림없다. 오물 더미에서 분명히 대화 페로몬이 날아오고 있다. 뭔가를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냄새다. 103683호는 냄새가 날아온 쪽 으로 다가가 더듬이 끝으로 시체 더미를 뒤진다. <살려줘요!> 세 개의 머리 중에서 하나가 페로몬을 발하고 있다. 무당벌레 머 리, 메뚜기 머리, 불개미 머리가 나란히 놓여 있다. 103683호는 세 마리를 더듬어보다가 불개미 더듬이에 미미한 생명의 냄새가 있음을 감지한다. 그러자 103683호는 앞의 두 다리 사이에 그 머리통을 끼 우고 자기 머리 정면으로 들어올린다. <꼭 알아야 할 게 있소.> 하나 남은 왼쪽 더듬이로 때가 덕지덕지한 불개미 머리가 페로몬을 발한다. 별 해괴한 일이 다 있다! 몸뚱이에서 잘려나온 머리가 아직도 페 로몬을 발하고 싶어하다니! 그렇다면 이 개미는 구차스럽게 죽음의 휴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03683호 한 순간 옛날에 즐겨하던 것처럼 그 머리를 공중에 던져서 개미산으로 박살내고 싶 은 충동이 일었으나 그것을 억누른다. 단지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페로몬을 발하고 싶어하는 자들의 메시지를 거부해선 안된다'는 것 이 개미 사회의 오랜 가르침이기 때문이었다. 103683호는 더듬이을 움직여 그 가르침에 따라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불개미 머리가 발하고 싶어하는 페로몬을 모두 수용하겠다는 뜻을 나타낸다. 머리뿐인 그 개미는 생각하는 데 점점 더 어려움을 느끼면서 자기 가 알아낸 중요한 정보를 기억해 내려고 한다. 몸뚱이가 붙어 있는 한 개미로서의 자기 삶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남은 더듬이에 자기의 생각을 모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몸뚱이가 붙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머리에는 이제 혈액이 공급되지 않아 뇌의 주름이 약간 건조해져 있다. 그래도 전기 작용 은 여전히 일어날 수가 있다. 뇌수 속에 아직 신경 전달 물질이 남 아 있다. 그 미미한 습기를 이용해서 신경 세포들이 서로 연결되고 소량의 전기가 흐른다. 두 개미의 생각이 교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대화가 시작된다. 우리는 셋이었다. 어떤 종의 개미인가? 불개미. 반체제 불개미. 어느 도시에서 왔는가? 벨로캉. 우리는 '화학 정보실'에 잠입했었 다. 거기에서 아주 놀라운 기억 페로몬을 해독했다. 무엇에 관한 페 로몬인가?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경비 개미들이 우리를 잡으 려고 쫓아왔다. 나의 두 동료는 병정개미들에게 죽음을 당했다. 머 리의 습기가 말라가고 있다. 기억이 소실되면 세 개미의 죽음이 부 질없게 된다. 정보를 다시 모아야 하는데, 다시 모아야 하는데.... 103683호는 전달하려는 게 뭐냐고 여러 번 되묻는다. 머리만 남은 개미의 뇌 속에 다시 피가 조금 모인다. 그걸 사용해 서 좀더 생각을 계속해야 한다. 뇌 속의 기억 장치와 더듬이의 송수신 체계가 전기적으로 화학적 으로 결합된다. 전두엽을 이루고 있는 단백질과 당분으로 에너지를 공급받은 뇌가 마침내 정보를 전달한다. <클리푸니가 그들을 모두 죽이기 위해 원정군을 보내고 싶어한다. 한시라도 빨리 다른 반체제 개미들에게 알려야 한다.> 103683호는 그 개미, 아니 개미 머리가 발하는 페로몬을 이해하지 못한다. '원정군'은 무엇이고 '반체제 개미들'은 또 무엇인가? 도시 내에 반체제 개미들이 있단 말인가? 그런 건 금시 초문이다. 그러나 한가로운 질문으로 냄새 분자를 허비해서는 안된다. 그 개미 머리는 오랫동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형편이 못 된다. 그렇게 황당한 페 로몬 정보를 접하고 보니 뭘 물어보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 다. 103683호의 더듬이에서 저절로 페로몬이 튀어나간다. <그 반체제 개미들에게 알려주려면 어디로 가야 그들을 만날 수 있는가?> 개미 머리가 다시 힘을 내어 바르르 떤다. <새로 지은 뿔풍뎅이 축사 위에 천장처럼 교묘하게 위장해 놓은 곳이 있다....> 103683호가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그 원정군은 누구를 상대로 싸우려는 것인가?> 개미 머리가 진저리를 치고 103683호도 더듬이를 떤다. 개미 머리 가 마지막 페로몬을 발할 듯 말 듯 하며 조바심을 갖게 한다. 더듬이로 겨우 감지할 만한 옅은 냄새가 풍긴다. 거기에는 단 하 나의 페로몬 단어만 담겨 있다. 103683호가 더듬이의 끝 마디로 그 것을 받아 냄새를 맡는다. 그가 알고 있는 단어다. 그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단어다. <손가락들.> 머리만 남은 개미의 더듬이는 이제 완전히 말라버렸다. 머리가 경련을 일으킨다. 이제 그 검은 머리 안에는 정보 페로몬 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103683호는 그저 놀라울 뿐이다. 손가락 들을 전멸시키기 위한 원정대라니. 10. 돌아온 박각시나방 왜 갑자기 불빛이 꺼진걸까? 나방은 불길이 자기 날개를 갉아먹고 있음을 분명히 느꼈다. 그럼에도 나방은 빛의 황홀경을 맛보기 위해 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각오가 되었다. 그 뜨거운 기운이 막 몸에 스 며들려던 찰나였는데.... 실망한 박각시나방은 퐁텐블로 숲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하늘 높이 올라간다. 한참을 날아서 자기가 탈바꿈을 끝냈던 장소에 다다른다. 수천 개의 낱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방은 공중에서 그 지역의 지리를 훤히 분별할 수 있다. 가운데 있는 것이 개미 도시 벨로캉이 다. 그 주위에 불개미 여왕들이 분가해서 작은 도시와 마을들이 있 다. 그 전체를 개미들은 '벨로캉 연방'이라고 부른다. 연방은 하나 의 제국이라고 할 만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숲에서 누가 감히 불개미들의 헤게모니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으랴. 불개미들은 가장 영리하고 가장 잘 조직되어 있다. 그들은 도구를 사용할 줄 알며 흰개미들과 난쟁이개미들을 정복한 바 있고, 자기들 보다 100배나 더 큰 동물과도 싸웠다. 이 숲속에서는 그들만이 세계 의 주인임을 부정할 자는 아무도 없다. 벨로캉 서쪽에는 거미와 사마귀가 우글거리는 위험한 영토들이 펼 쳐져 있다. 나방들이 몸조심을 해야 할 지역이다. 남서쪽은 다리가 넷이나 여섯 또는 여덟 개이고 그만한 수의 입과 이빨과 독침을 가진 갖가지 괴물들이 독을 뿜고, 으깨고, 부수고, 녹여버린다. 북동쪽에는 갓 건설된 꿀벌 도시 아스콜레인이 있다. 사나운 꿀벌 들이 거기에 살고 있는데, 꿀과 꽃가루를 채집하는 지역을 넓힌다는 구실 아래 벌써 말벌 둥지 여러 개를 파괴한 바 있다. 훨씬 더 동쪽에는 '아귀'라 불리는 강이 있다. 그 수면에 닿는 족 족 뭔든지 먹어치우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어 있다. 조심해야 할 곳이다. 그 강둑에 새로운 도시 하나가 생겨났다. 박가시나방이 그 도시로 접근한다. 흰개미들이 아주 최근에 그 도시를 세운 모양이다. 아주 높이 솟 은 망루 위에 자리잡은 포수 흰개미들이 침입자인 박각시나방을 공 격하려고 한다. 그러나 나방이 너무 높이 날아가고 있어서 흰개미들 의 공격은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박각시나방은 방향을 틀어 커다란 떡갈나무를 에워싸고 있는 북쪽 의 가파른 둔덕 위를 날아 남쪽으로 내려온다. 대벌레와 빨간 버섯 이 많은 지역이다. 문득 그 높이까지 강렬한 성 페로몬을 발하는 암나방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박각시나방은 암나방을 더 가까이에서 보려고 다가간다. 암나방의 빛깔은 그의 것보다 훨씬 더 현란하다. 아름다운지고! 그 런데 이상하게도 암나방이 꼼짝을 안 하고 있다. 기이하다. 분명히 냄새며 생김새는 암나방과 비슷한데.... 이런 낭패가 있나! 이건 나 방이 아니라 꽃이다. 꽃이 아닌 것처럼 보이려고 짐짓 나방을 흉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나비난초의 꽃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모든 게 거짓이다. 냄새도 빛깔도. 식물의 감쪽같은 속임수다. 애석하게도 박가시나방은 너무 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다리가 끈끈물에 붙어버렸다. 이제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박각시나방은 너무 세게 날갯짓을 하는 바람에 근처에 있던 민들레 꽃에서 꽃씨가 떨어 져나온다. 박각시나방이 대야처럼 생긴 꽃부리 가장자리로 미끄러진 다. 그 꽃부리는 하나의 위가 쩍 벌어져 있는 거나 다름이 없다. 그 밑바닥에 소화 작용을 하는 산이 감추어져 있어서 꽃이 나방을 잡아 먹을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인가? 아니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 집게처 럼 휘어진 손가락 두 개가 나타나서 박각시나방의 날개를 잡고 위험 에서 구출하여 투명한 단지 안에 던져넣는다. 단지가 먼 거리를 이동하여 노란 박각시나방을 불빛이 환한 지역 으로 데려간다. 손가락들은 단지에서 나방을 꺼내더니 냄새가 아죽 독한 노란 물질을 발라 나방의날개를 단단하게 만든다. 날아오르기 가 더 수월할 것 같다. 그런데 손가락들이 크롬을 입힌 거대한 말뚝 을 잡더니 빨간 공으로 위를 깜싸고 심장에 잽싸게 짤러넣는다. 그 러더니 묘비명 대신에 '파필로누스 불가리스'라는 학명이 적힌 꼬리 표를 나방의 머리 위쪽에 붙인다. 11. 백과 사전 문명의 충돌 두 문명이 만나는 순간은 언제나 미묘하다. 중앙 아메리카에 유럽 인들이 처음 왔을 때 아즈텍 인들은 유럽 인들을 아주 엉뚱하게 오 해 했다. 당시 아즈텍 인들은 깃털 달린 뱀의 형상을 가졌다는 케칼 코아틀이라는 신을 숭배하고 있었는데, 아즈텍 신앙은 장차 그 신의 사자들이 지상에 도래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 사자들은 살 갗은 깨끗할 것이고, 네 발 달린 커다란 동물들을 타고 올 것이며 우레를 통하여 경건하지 못한 자들을 벌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1519년 스페인의 기병대가 멕시코 해안에 상륙했다는 소식 이 전해졌을 때 아즈텍 인들은 '툴'(중미 인디언들의 언어인 나우아 틀 말로 신을 뜻함)이 재림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기 몇 년 전인 1511년에, 그런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일깨워 준 사람이 있었다. 구에레로라는 스페인 선원이 그 사 람이었다. 그는 코르테스의 군대가 아직 산토 도밍고 섬과 쿠바섬에 주둔하고 있던 때에 유카탄 해안에서 난파를 당하여 멕시코에 상륙하게 되었다. 구에레로는 멕시코 원주민들과 쉽게 친해졌고 원주민 여자와 혼인 하였다. 그는 스페인의 정복자들이 곧 상륙할 것임을 알리는 한편 그들은 신이 아니고 신의 사자들도 아님을 역설하면서 원주민들에게 그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일러주었다. 또 원주민들이 스스로를 방 어할 수 있도록 쇠뇌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그때까지 인디언들은 화살과 흑요석 날이 달린 손도끼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코르 테스 군대의 갑옷을 뚫을 수 있는 무기는 쇠뇌밖에 없었다). 구에레로는 스페인 사람들이 타고 올 말들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고 신신 당부했고 특히 불을 뿜는 무기에 겁먹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것은 마법의 무기도 아니고 우레도 아니라고 일깨웠다. 그는 '스 페인 사람들도 당신들과 똑같이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거듭 거듭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그는 스 스로 자기 몸에 상처를 내어 모든 원주민들과 똑같은 빨간 피가 흐 르는 것을 보여주었다. 구에레로가 자기 마을의 인디언들을 지성으 로 가르친 덕분에 코르테스 군대의 정복자들이 그 마을을 공격했을 때 정복자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처음으로 군대다운 인디언 군대와 맞닥뜨리고 크게 놀랐다. 마을 원주민들은 몇 주 동안 스페인 군대에 저항했다. 그러나 구에레로의 가르침이 그 마을 이외의 곳까지 널리 퍼져 있 는 상황은 아니었다. 1519년 9월 아즈텍 왕 목테수마는 공물로 보석 을 가득 실은 수레들을 이끌고 스페인 군대를 맞으러 떠났다. 바로 그날 저녁에 왕은 스페인 사람들에게 살해당했다. 1년 후에 코르테 스는 대포로 아즈텍의 수도 테노크니틀란을 파괴했다. 3개월 동안 그 도시를 포위하여 주민들을 기아 상태에 빠뜨린 다음의 일이었다. 구에레로는 스페인의 어떤 요새에 대한 야간 공격을 준비 하던 중에 죽었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12. 레티샤는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살타 형제 사건을 신속하게 해결하고 나서 자크 멜리에스 경정은 샤를 뒤페롱 경찰 국장의 호출을 받았다. 경찰 책임자는 친히 그를 치하하고 싶어했다. 화려하게 장식된 거실 안에 들어서자 국장은 대뜸 그 '살타 형제 사건'이 '윗분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고 털어놓았다. 저 명한 정치인들 가운데 몇몇은 그의 수사를 '프랑스 식의 신속성과 효율성의 전형'으로 평가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국장은 멜리에스에게 결혼했느냐고 물었다. 멜리에스 는 어리둥절해 하면서 독신이라고 대답했다가, 국장이 계속 물어오 는 바람에, 자기도 보통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성병에 걸리지 않도 록 조심하면서 상대를 계속 바꾸어가는 성생활을 즐기고 있다고 실토했다. 샤를 뒤페롱은 장가들 생각을 하라고 권하면서 이야기를 늘어놓았 다. 사회적인 이미지를 잘 가꾸어놓아야 정계에 입문할 수 있으며, 정계에 들어갈 생각이 있으면 먼저 의원이나 시장부터 시작해 보라 는 얘기였다. 국장은 어떤 나라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사 람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역설하면서, 폐쇄된 공기에서 세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아낼 수 있는 자크 멜리에스 같은 사람이라면, 다른 까다로운 문제들도 잘 해결해 낼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예컨 대, 실업을 해소하고, 변두리의 우범 지대를 다스리며, 사회 보장 예산의 적자를 줄이고, 정부 예산의 수지를 맞추는 문제, 즉 한 나 라의 지도자들이 매일 맞닥뜨리는 갖가지 문제들을 쉽게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거였다. "우리에겐 두뇌를 잘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해. 요즈음엔 그 런 사람들이 점점 드물어져가고 있어." 국장은 한탄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자네가 정치라고 하는 이 새로운 모험에 뛰어든다면, 내가 제일 먼저 자네를 지지하겠네." 자크 멜리에스는 자기가 수수께기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그것이 추상적이고 보상이 없기 때문이라면서, 권력의 획득을 목적으로 하 는 세계에 뛰어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대답했다. 멜리에스는 남을 지배하는 일은 너무나 피곤하며, 국장이 문제삼 고 있는 자기의 애정 생활이 그렇게 나쁜 편도 아니고, 애정 생활을 사생활의 영역 밖으로 끌어내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덧붙였다. 뒤페롱 국장은 기꺼운 마음으로 웃고 나서, 멜리에스의 어깨 위에 손을 엊고 자기도 멜리에스만한 나이 때는 그와 똑같은 생각을 가졌 었는데,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남을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에 게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서 권력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돈을 경멸하려면 부자가 되어야 하고, 권력을 경멸하려면 권력을 쥐어야 하는걸세." 그런 생각에 뒤페롱은 젊은 시절 기꺼이 위계의 사다리를 한 단계 한 단계 밟아 올라왔다. 그리하여 이제 그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기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는 이제 미래가 잘못될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두 자녀를 그 도시에서 가장 학비가 비 싼 사립 학교에 입학시켰고, 고급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여 가를 충분히 즐기고 있었고, 자기를 떠받드는 수백 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이상 뭘 더 바라겠는가? '추리 소설에 푹 빠질 수 있는 어린아이로 남아 있기를 바라지요' 라는 말을 머리 속에 떠올리면서 멜리에스는 자기 생각을 지켜나가리라 다짐했다. 면담을 끝내고 경찰국을 떠나려다가 경정은 철책문 가까이에 있는 커다란 게시판에 선거 포스터가 잔뜩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선거 구호가 가지 각색이었다. '참된 가치에 뿌리박은 민주주의를 위해 사회 민주주의자에게 한 표를!', '위기 타파! 헛약속은 이제 그만! 급진 공화파 운동과 함께 하십시요!', '범국민 녹색 혁신당을 지지하여 지구를 살립시다!', '불의에 맞서 일어서십시오! 독립 인민 전선에 동참하십시요!' 운 운. 어디를 보나 그 얼굴이 그 얼굴이고, 한결같이 기름기가 번드르르 하고 정부를 비서로 두고 스스로를 거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런 얼굴들이었다. 멜리에스는 명예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정치가의 삶보다는 자유 로운 자기의 애정 생활과 텔레비젼과 범죄 수사가 더 나아보였다. '근심을 갖고 싶지 않거든 야망을 버려라.'라고 그의 아버지가 충고 하곤 했었다. 욕망이 없으면 고통도 없다. 오늘 같은 날이면 아버지 는 아마 이렇게 덧붙일 것이다. '그런 바보들과 똑같은 야망을 갖지 말아라.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너만의 어떤 것을 찾아내어 진부 한 삶을 뛰어 넘으라.' 자크 멜리에스는 벌써 두 번 결혼했고 두 번 이혼했다. 그는 환희 를 맛보며 50여 건의 어려운 사건을 해결했고, 아파트 한 채와 서재 와 한 무리의 친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런 것에 만족해 하고 있었고 누가 뭐래도 자기 자신을 흡족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는 푸아들뤼일 광장과 라트르 르 타시니 원수 대로와 라뷔토카 이으 가를 거쳐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주위의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이 사방으로 달리고 있었고 자동차들 은 지나치게 경적을 울리고 있었으며, 여자들은 창가에서 융단을 요 란하게 털어대고 있었다. 사내아이들이 물총을 서로 쫓고 쫓기는 장 난을 하고 있었다. '빵, 빵, 빵, 너희 셋 다 죽었어!' 그중의 한 아 이가 소리쳤다. 도둑 잡기 놀이를 하는 그 사내아이들이 자크 멜리 에스의 신경을 끌었다. 아파트 건물 앞에 이르렀다. 높이 150미터에 너비 150미터로 거대 한 사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는 건물이었다. 텔레비젼 안테나 주위로 까마귀들이 선회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출입을 살피고 있던 경비 아 주머니가 경비실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멜리에스 씨! 신문에서 멜리에스 씨에 대해 써놓은 걸 봤어요. 그 사람들 멜리에스 씨를 시기하느라고 그러는 거니까 너무 언짢아하지 말아요." 멜리에스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어쨌든 멜리에스 씨가 옳다고 확신하고 있어요." 멜리에스는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집에는 여느때처럼 마리 샤를로트가 신문을 찾아다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리 샤를로 트는 그를 아주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다. 그가 아파트 문을 열었을 때도 마리 샤를로트는 여전히 이빨 사이에 신물을 물고 있었다. 그 가 명령을 내렸다. "이거 놔! 마리 샤를로트." 마리 샤를로트는 다소곳이 그의 말에 따랐다. 멜리에스는 조바심 을 내며 신문을 펼쳐들었다. 그는 이내 자기의 사진과 그를 압도해 오는 커다란 기사 제목을 찾아냈다. 경찰 수사, 갈피를 못 잡고 있다. - 레티샤 웰즈의 논평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많은 권리를 부여하고 있다. 그 권리 중에 는 죽은 자의 권리도 포함되어 있다. 어떤 사람이 시체 상태로 전락 했을 때조차도 우리는 그의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 그런데 고 살타 형제에게는 그 권리가 부정되고 있다. 그 삼 형제는 죽음에 얽힌 의 혹이 풀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술 더 떠서 고 세바스티앵 살타 씨는 이제 자기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상황에서 두 형제를 살해하 고 자기의 죄과 때문에 자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시체라서 죄를 뒤집어씌우기는 쉽 겠지만, 그게 과연 온당한 일인가! 라 프장드리 가의 살인 사건이 그나마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자크 멜리에스 경정의 사람 됨됨이 여실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그 사건을 통해서 명성에 들뜬 어떤 사람이 파렴치한 졸속 수사를 감행하는 모습을 보았다. 멜리에스 경정은 중앙 통신사를 통해 살타 형제가 모두 독극물 때문 에 죽었다고 발표했는데, 그것은 보기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건에 대해 섣부른 판단을 한 것일 뿐만 아니라 망자들을 모욕한 것이기도 하다. 자살이라니! 세바스티앵 살타의 시신을 얼핏 본 것만으로도 필자 는 그가 엄청난 공포를 느끼게 하는 어떤 것에 희생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의 얼굴은 무시무시한 공포에 짓눌려 있었다. 두 형제를 살해하고 난 뒤 너무나 심한 회한을 느낀 나머지 그런 표정이 생긴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심 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멜리에스 씨의 주장에 동조하기 가 어려울 것이다. 자기 형제들과 함께 나누어 먹을 음식에 독을 넣 은 사람이라면 이미 회한 따위는 초월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런 사람의 얼굴에는 공포가 아니라 마침내 되찾은 차분한 표정만이 어 려 있을 것이다. 그럼 고통 때문인가? 독극물이 일으키는 고통은 그토록 격심한 것 이 아니다. 그리고 독극물에 의한 사망이라는 것을 입증하려면 그 독극물이 어떤 종류의 건인지 알아야 한다. 필자는 경찰이 살인 현 장에 대한 조사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의학 센터를 찾아가서 법의학자에게 살타 삼 형제의 시체를 부검한 사실이 있는지를 물어 보았다. 그 법의학자는 시체를 부검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 따라서 살타 형제 사건은 정확한 사망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결 말이 지어진 것이다. 그토록 훌륭한 명성을 지닌 범죄학자 멜리에스 경정이 아주 중대한 실수를 범한 것이다. 살타 형제 사건을 그렇게 서둘러 매듭짓는 것이 과연 온당한지 곰 곰이 따져보아야 한다. 우리는 경찰의 졸속한 처사에 불안감마저 느 끼고 있다. 우리는 날로 교묘해져 가는 신종 범죄에 대응할 수 있을 만한 연구 수준을 우리 국립 경찰 간부들이 갖추고 있는지 묻지 않 을 수 없다.> 멜리에스는 신문지를 구겨 돌돌 뭉치면서 상소리를 내뱉었다. 13. 103683호가 고민에 빠진다. <손가락들을 상대로 한 원정이라니!> 손가락들! 막연한 두려움이 103683호를 엄습한다. 개미들은 두려움을 모르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여전히 '정상적 인' 103683호에게 찾아온 이 두려움은 무엇인가? 쓰레기터의 개미 머리가 '손가락'이라는 단어를 발함으로써 103683호의 뇌 한 부분이 잠에서 깨어났다. 아주 오랜 조상 때부터 사용하지 않은 탓에 잠들 어 있던 부분, 즉 공포를 지각하는 부분이다. 이제껏 103683호는 세계의 끝에 다시 생각이 미칠 때마다 옛날의 경험을 되새기는 것을 억제해 왔다. 그는 손가락들과 만났던 일을 되새기지 않았다. 손가락들과 그들의 어마어마한 힘, 파악할 수 없 는 그들의 형체, 그들의 맹목적인 살생 충동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 머리, 아니 몸뚱이가 잘려나간 시체 조각이 공포를 지 각하는 부분을 자극한 것이다. 103683호는 예전에는 불요 불굴의 기 상을 지닌 병정개미였다. 그는 난쟁이개미들과 대전투를 벌이던 시 절 언제나 대열의 선두에 서곤 했다. 그는 자발적으로 나서서 위험 한 서쪽으로 탐험을 떠나기도 했고 바위 냄새를 풍기는 개미들과 싸 우기도 했다. 머리가 너무 높아서 쳐다볼 수도 없는 동물들을 사냥 한 적도 있다. 그런 그가 손가락들을 만나고 나서는 완전히 기가 꺾여버렸다. 103683호는 그 대재앙의 괴물들을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다. 엄 청나게 빠른 검은 구름 같은 것에 풀잎처럼 깔려 죽은 늙은 병정개 미 4000호의 모습도 떠오른다. 어떤 개미들은 손가락들을 '세계의 끝을 지키는 자들', '무한대의 동물', '무자비한 유령', '나뭇개비에 불을 붙이는 자', '죽음의 냄 새를 풍기는 자' 등으로도 불렀다. 그러나 얼마 전에 일대의 모든 개미 도시들은 그 괴물들을 가르키 는 이름을 통일하기로 합의하였다. 그것이 바로 '손가락들'이었다. 손가락들, 그들은 어디에서나 동물이고, 독물을 뿌려 숲을 오염시 키고 생명을 독살하는 유령들이다. 생각만 해도 혐오감이 치민다. 103683호는 두려움과 호기심이라는 두 가지 감정 사이에서 동요하 고 있다. 두려움은 개미들에게 낯선 감정이긴 하지만 호기심은 개미 의 주요한 특성을 이루는 감정이다. 1억 년 전부터 개미들은 줄기차게 진보해 왔다. 클리푸니가 일으 킨 혁신 운동도 따지고 보면 끊임없이 더 멀리, 더 높이, 더 강하게 를 지향하는 개미 사회의 전형적인 욕구가 표출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103683호는 손가락들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호기 심이 두려움을 누른 것이다. 어쨌든 반체제 개미들이 있다는 것이며 손가락들을 상대로 한 원정군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103683호가 더듬이를 닦는다. 이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를 분명히 하고 싶다는 표시이다. 103683호는 더듬이를 미심쩍은 하 늘 쪽으로 세운다. 공기가 무겁다. 어딘가에 적이 숨어서 도시로 쳐 들어오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만 같다. 홀연 한 줄기 미풍이 불 오와 주위의 나뭇가지들을 흔든다. 나무들이 그에게 조심하라고 이 르는 듯하다. 그러나 나무들의 흔들림에 뜻이 담겨 있을 리가 없다. 103683호는 될대로 되라면서 움직일 줄 모르는 나무들의 기질을 별 로 좋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을 정복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나무들도 폭풍에 쓰러지고 부러지며, 번개에 타버리거나 흰개미들에게 파먹히는 일이 있다. 나무들이 그렇게 무너질 때면 개미들은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난쟁이개미들의 격언에 나무들이 무너지는 그런 현상을 잘 설명한 것이 있다. 즉 '커다란 것은 작은 것보다 더 부서지기 쉽다'는 격언 이 그것이다. 손가락들은 어쩌면 움직이는 나무와 같은 자들일지도 모른다. 103683호는 그 문제로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쓰레기터의 개미 머리가 전해 준 정보를 확인하러 떠난다. 그는 쓰레기터 옆의 좁은 통로로 들어가 외곽 순환 도로에 들어선다. 금단 지역으로 통 하는 대로들이 거기에서 시작된다. 103683호가 가려는 길은 서쪽이 아니다. 그는 아주 가파른 통풍구로 들어간다. 거기에서는 발톱을 사용해서 내려가야 한다. 가파른 통로를 미끄러져 내려오자 얼키설 키한 통로들이 나온다. 여느 때와는 달리 그리 혼잡한 편은 아니었다. 먹이와 나뭇가지를 운반하던 일개미들이 103683호에게 인사를 건 넨다. 개미 세계에 개인적인 영예가 따로 있을 리 없겠지만 벨로캉 에서는 많은 개미들이 103683호가 손가락들의 나라에 가서 세계의 끝을 보고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103683호는 더듬이를 세워 뿔풍뎅이 축사가 있는 곳을 탐문한다. 어떤 일개미가 지하 20층, 남남서쪽 구역 왼쪽, 흑버섯 재배실 뒤에 있다고 일러준다. 103683호가 빠른 걸음으로 나아간다. 지난해 화재가 있은 뒤에 많은 공사가 이루어졌다. 옛날의 벨로캉 은 지상 50층 지하 50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클리푸니가 새로 설계 한 신도시는 지상 80층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지하의 바닥에는 화강암이 버티고 있어서 더 밑으로 파내려갈 수가 없다. 내려가는 길에 도시를 둘러보면서 103683호는 나날이 새로워지는 도시의 모습에 감탄한다. 지상 75층. 여기에는 알을 모아 둔 방과 번데기를 모아둔 방이 있 다. 전자는 부식토의 열기로 따뜻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고, 후자는 습기를 빨아들이는 고운 모래를 깔아 건조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완만한 비탈을 이룬 운송용 활주로가 설치되어 있어서 알들을 유모 개미들이 있는 아래층으로 쉽게 내려보낼 수 있다. 거기에서는 배가 묵직한 유모 개미들이 쉬지 않고 알들을 핥아주고 있다. 그럼으로써 알들이 완전하게 성숙하는 데 필요한 단백질과 항생 물질을 투명한 막을 통해 전해주는 것이다. 지상 20층. 여기에는 마른 고기와 열매 조각과 버섯 가루를 모아 둔 방들이 있다. 부패를 막기 위해서는 모든 식량에 개미산을 적절 하게 뿌려놓았다. 지상 18층. 두툼한 나뭇잎으로 만든 커다란 통에 군사적인 목적에 사용되는 실험용 산이 들어 있는데, 거기에서 김이 모락거린다. 화 학 개미들이 기다란 위턱 끝으로 산들이 가지고 있는 용해력을 시험 하고 있다. 사과산처럼 열매에서 추출한 산도 있지만, 좀 희귀한 것 에서 추출한 산도 있다. 즉, 참소리쟁이에서 뽑은 옥살산과 노란 돌 에서 뽑은 황산이 그것이다. 사냥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것은 최근에 개발된 농도 60%의 개미산이다. 그것을 개미산 주머니에 담고 있으 면 좀 뜨겁기는 하지만, 그것의 파괴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03683호는 이미 그것을 사용해 본 적이 있다. 지하 15층. 전투 연습실이 증축되었다. 여기에서는 병정개미들이 몸과 몸을 맞부딪치며 전투 훈련을 한다. 새로 개발된 전투 기술은 기억 페로몬에 꼼꼼하게 저장되어 화학 정보실에 보내진다. 경향은 예전처럼 적의 머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하나하나 잘라 서 적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한쪽에서는 포수 개미들이 열 걸음 떨어진 곳에 씨앗들을 놓고 개미산을 정확하게 쏘 아 녹여버리는 연습을 하고 있다. 지하 9층. 여기에는 진딧물 축사가 있다. 클리푸니 여왕은 사나운 무당벌레들이 진딧물 때를 공격해 오지 못하도록 진딧물 축사를 모 두 도시 안에 세우도록 고집했다. 일개미들이 진딧물에게 호랑가시 나무 조각을 던져주고 분비꿀을 짜낸다. 진딧물의 번식률이 증가되었다. 이제는 초당 10마리의 비율로 태 어난다. 지나가는 길에 103683호는 보기 드문 광경을 목격했다. 진 딧물 한 마리가 새끼를 낳자 이번에는 작은 진딧물이 새끼 칠 준비 를 하더니, 그보다 더 작은 진딧물을 낳았다. 그런 식으로 진딧물들 은 순식간에 어미가 되고 할미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지하 14층. 버섯 재배장이 끝이 가물거릴 만큼 펼쳐져 있다. 개미 들이 와서 쏟아놓고 간 배설물이 버섯의 양분이 된다. 버섯재배 개 미들은 웃자란 팡이실을 자르기도 하고 기생 팡이를 막아주는 마르 미카신을 뿌리기도 한다. 그때 돌연 풀빛 곤충 한 마리가 103683호 앞으로 튀어오른다. 그 곤충을 또 다른 풀빛 곤충이 추격하고 있다. 둘이서 싸움을 하고 있 는 듯하다. 103683호는 주위의 개미들에게 그 이상한 곤충들이 뭐냐 고 물어본다. 어떤 개미가 설명하기를, 굴 속에 살기를 즐기며 냄새 가 고약한 풀노린재들이란다. 그 곤충들은 끊임없이 교미를 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 중에서 가장 경이로운 성적 능력을 타고난 곤충 임에 틀림없다. 클리푸니는 특별한 관심을 갖고 그 곤충들을 연구하고 있다. 예로부터 모든 개미 둥지에는 공생 생물들이 번창해 왔다. 개미들 의 묵인 아래 개미 둥지 안에 눌러 살고 있는 곤충과 다족류와 거미 류의 종이 2천 이상을 헤아린다. 어떤 종들은 탈바꿈을 하는 곳으로 개미집을 이용하고 어떤 종들은 쓰레기를 먹어치움으로써 방들을 청 소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동물들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도시는 벨로캉이 처음 이었다. 클리푸니 여왕은 어떤 곤충이든 길들일 수 있고 강력한 군 대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개체와 의사 소통을 이루기만 하면 그 쓸모가 현실로 나타난다는 것이 여왕의 생각이다. 그 다음 에는 그것을 잘 감시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현재 여왕은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 딱정벌레 속에 딸 린 몇몇 곤충들에게, 진딧물에게 하는 것처럼, 먹이를 주고 쉴 곳을 마련해 주고 병을 치료해 줌으로써 그들을 길들이기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뿔풍뎅이를 길들이는 데 성공한 것이 단연 돋보인다. 지하 20층. 남남서쪽 구역 왼쪽, 흑버섯 재배장 뒤, 일러준 데로 가보니 과연 통로 안쪽에 풍뎅이들이 있었다. 14. 백과 사전 두려움 개미에게 두려움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려면 개미집 전체가 하나 의 유기체처럼 살아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각각의 개미는 인 체의 세포와 똑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손톱을 깎을 때 우리의 손톱 끝이 그것을 두려워할까? 면도를 할 때 우리의 턱수염이 면도기가 접근해 오는 것에 전율할까? 뜨거운 욕탕물의 온도를 가늠하려고 발을 집어넣을 때 우리의 엄지발가락이 두려움에 떨까? 그것들은 자율적인 단위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왼손이 오른손을 꼬집어도 오른손은 왼 손에 대해 아무런 원한을 품지 않는다. 오른손에 왼손보다 더 많은 반지가 끼어져 있다고 해서 시샘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자기를 잊고 유기체와도 같은 공동체 전체만을 생각한다면 번뇌가 사라진다. 그 것이 어쩌면 개미 세계의 모듬살이가 성공한 비결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15. 레티샤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는다. 분노를 삭히고 나서 자크 멜리에스는 작은 트렁크를 열고 살타 형 제에 관한 서류를 꺼냈다. 그런 다음 모든 서류와 사진들을 꼼꼼하 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는 입을 벌리고 있는 세바스티앵 살타의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세바스티앵의 입술에서 어떤 비명이 새 어나오는 듯했다. 공포의 비명일까? 불가항력적인 죽음을 앞둔 저항 의 절규일까? 살인범은 어떤 자일까? 사진을 보면 볼수록 그는 수치 심 때문에 낯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마침내 벌떡 일어나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벽을 쳤다. '일요 메아리'의 여기자가 옳았다. 그가 멍청한 짓을 했던 것이다. 그는 사건을 과소 평가했다. 매사에 겸손해야 한다는 뼈아픈 교훈 을 얻은 셈이었다. 상황이나 사람을 과소 평가하는 것보다 더한 잘 못은 없다. 고맙소, 웰즈 부인 아닌 웰즈 양! 그런데 어쩌다가 이 사건에서 그렇게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일까? 타성 때문이다. 실패를 모르고 일을 해온 탓에 터무니없는 자만심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날림 수사를 했던 것 이다. 그런 짓은 어떤 경찰관도 하지 않는다. 경찰에 갓 들어온 풋 내기도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명성이 워낙 쟁쟁하다 보니 그 여기자를 빼고 아무도 그가 잘못을 저질렀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한다. 고통스럽지만 수사를 다시 해야 한 다. 그래도 계속 잘못된 채로 놔두지 않고 이제서나마 실수를 깨달 은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그가 맞닥뜨린 사건은 자살 같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아주 까다로 운 것이었다. 범인은 어떻게 흔적을 남기지 않고 닫힌 공간을 드나 들었을까? 어떻게 상처도 내지 않고 흉기도 사용하지 않고 사람들을 죽일 수 있었을까? 그런 수수께끼는 멜리에스가 이제껏 읽은 어떤 추리소설에도 나와 있지 않았던 것이다. 새로운 흥분이 그를 사로잡았다. 혹시 '그토록 만나고 싶어하던' 완전 범죄라는 것과 맞닥뜨린 것이 아닐까? 멜리에스는 에드가 앨런 포우의 소설에 나오는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에 대해서 생각했다. 실제의 사건을 토대로 쓰여진 그 소설에서 는 한 모녀가 폐쇄된 집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여인은 면도칼에 찔 렸고, 딸은 구타를 당했다. 도난당한 흔적은 없었다. 심하게 맞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수사 결과 범인이 드러났는데, 그것은 곡마단 에서 도망친 오랑우탕이었다. 오랑우탕은 지붕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고, 그 짐승을 보자마자 모녀가 비명을 질러댐으로써 오랑우탕이 미쳐버린 것이다. 오랑우탕은 소리를 못 지르게 하려고 모녀를 죽인 다음 들어왔던 길 로 도망쳤다. 그때 오랑우탕의 등이 내리닫이 창문의 창틀에 부딪히 면서 창문이 닫혀버렸다. 창문을 안에서 잠가놓은 것처럼 보였던 것은 그 때문이었 다. 살타 형제 사건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차이가 있다면 창문이 내 리닫이가 아니라서 등으로 쳐서는 닫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확인할 수는 없다. 멜리에스는 사건 현장을 조사하 려고 다시 집을 나섰다. 전기는 끊겨 있었지만 조명 돋보기를 가져왔기 때문에 조사에는 지장이 없었다. 멜리에스는 거실을 조사했다. 거리의 번쩍이는 네온 불빛이 간간이 방 안을 비추었다. 살타 형제는 거기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아수라장 같은 도시에서 튀어들어온 어떤 끔찍한 것을 목격 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멜리에스 경정은 문과 창문을 살펴보았다. 빗장을 질러놓은 문으 로 범인이 드나들었을 가능성은 없었다. 창문에는 에스파냐 자물쇠 가 설치되어 있어서, 창문으로 빠져나간 뒤 밖에서 다시 잠글 수는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런 일은 우연하게라도 일어날 수 없었다. 멜리에스는 어떤 비밀 통로라도 있을까 싶어 밤색 장식 융단이 걸 려 있는 칸막이 벽들을 두드려 보았다. 또 벽에 걸린 그림 밑에 금 고 같은 것이 감추어져 있지 않을까 해서 액자들을 들춰보기도 했 다. 거실 안에는 값진 물건들이 여러 가지 있었다. 즉, 금 촛대, 은 조상, 하이파이 컴팩트 음향 기기 등이 그것들이었다. 도둑이 들었 다면 그런 것들을 챙겨가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의자 위에 옷들이 놓여 있었다. 멜리에스는 반사적으로 그것들을 뒤적거렸다. 손 끝에 뭔가 이상한 것이 느껴졌다. 웃옷에 작은 구멍 이 나 있었다. 좀이 쏠아놓은 구멍인 듯도 했지만 테두리가 네모 반 듯했다. 멜리에스는 옷을 내려놓고 구멍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 지 않았다. 그는 늘 가지고 다니는 껌 통에서 껌을 하나 꺼냈다. 그 바람에 주머니에 있던 신문 쪼가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가 '일요 메아리'에서 오려낸 기사였다. 그는 레티샤 웰즈의 기사를 다시 읽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웰즈 기자는 공포에 짓눌린 표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건 사실이었다. 살타 형제는 공포 때문에 죽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 면 겁에 질려 죽게 할 만큼 무서운 게 도대체 무엇일까? 멜리에스는 자기가 겪었던 공포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어렸을 때 딸꾹질이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늑대 가면을 쓰고 불쑥 나타나서 딸꾹질을 멎게 했다. 그때 그는 비 명을 질렀고 한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을 가졌다. 어머니는 이 내 가면을 벚고 딸꾹질이 멎은 것을 기뻐하면서 키스를 퍼부었다. 한마디로 자크 멜리에스는 끊임없는 공포 속에서 자라왔다고 할 수 있었다. 병에 대한 두려움, 교통 사고에 대한 두려움, 사탕을 주 며 자기를 납치하려는 남자에 대한 두려움, 경찰에 대한 두려움 등 과 같은 사소한 것들이 있었는가 하면, 낙제에 대한 두려움, 하교할 때 공갈범들에게 돈을 갈취당할 일에 대한 두려움, 개에 대한 두려 움 등 심각한 것들도 있었다. 그것 말고도 어린 시절의 공포의 경험은 많이 있었다. 자크 멜리 에스는 그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웠던 두려움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건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두려움이었다. 그가 아주 어렸을 적의 일이었다. 어느 날 밤 그는 침대 속에 뭔 가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가장 안전하다고 믿고 있던 침대 속 에 괴물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동안 이불 밑으로 발을 들이 밀 엄두를 못내고 있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조금씩조금씩 이불 속으 로 다리를 디밀었다. 그때 갑자기 발가락에 미지근한 입김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침대 발치에 괴물이 있음에 틀림없었다! 괴물은 그 의 발가락을 떼어 먹으려고 아가리를 벌린 채 발가락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발가락이 침대 발치까지 이르지 않았다. 아직 그럴 만큼 키가 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매일 자라기 때문에 그의 발은 발가락을 잡아먹는 그 괴물이 숨어 있는 시트 자 락 쪽으로 점점 다가갈 게 분명했다. 어린 멜리에스는 며칠 밤을 방바닥이나 이불 위에서 잤는데, 몸이 저려서 계속 그럴 수가 없었다. 그건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이불 속으로 들어가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 대신 몸이 침대 발 치에 닿지 않도록 자기의 근육과 뼈에게 너무 많이 자라지 말라고 부탁했다. 멜리에스가 그의 부모들 만큼 키가 크지 않은 것도 어쩌 면 그것 때문일 것이다. 매일 밤이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그가 하나의 해결책을 찾아 냈다. 그는 플러시 천으로 된 장난감 곰을 꼭 껴안고 잤다. 장난감 곰을 품고 있으면 침대 발치에 숨어 있는 괴물과 당당히 맞설 수 있 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장난감 곰을 껴안고 이불 속에 들어가서 그는 팔이나 머리카락이나 귀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이불잇을 단단히 여몄다. 밤이 이슥해져서 괴물이 집 주위를 한 바퀴 돌려고 밖으로 나갈 때 그의 머리를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침마다 침대 위에 이불과 시트가 둘둘 뭉쳐져 있 고 그 안에 멜리에스와 장난감 곰이 파묻혀 있는 것을 발견하곤 했 다. 그의 어머니는 그 이상한 짓을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자 크는 자기와 장난감 곰이 힘을 합쳐 한 괴물을 상대로 밤새도록 어 떻게 싸우고 있는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괴물과의 싸움은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가 이긴 적도 없었고 괴 물이 이긴 적도 없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두려움뿐이었다. 성장하 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눈이 빨갛고 입술이 치켜올라가고 송곳니에 침이 끈적거리는 무시무시한 어떤 것과 맞서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경정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은 다음, 조명 돋보기를 들고 처음 할 때 보다 더 진지하게 범죄 현장을 조사했다. 상하 좌우 가리지 않고 구석구석을 다 뒤졌다. 융단 위에는 흙 묻은 신발 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고, 살타 형제 것과 다른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으며 유리창에는 단 하나의 지 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유리 잔에도 외부인의 지문은 전형 없었다. 멜리에스는 부엌으로 가서 손전등으로 붓질을 하듯 비추어보았다. 멜리에스는 흩어져 있는 음식들의 냄새를 맡고 맛을 보았다. 에밀 형사가 이미 음식을 보존하기 위해 투명한 피막을 씌워놓았다. 거기 에까지 신경을 써준 에밀 형사가 미덥게 느껴졌다. 멜리에스는 물병 에 코를 들이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독극물의 냄새는 전혀 느껴지 지 않았다. 과일 주스와 소다수에서도 전혀 이상한 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살타 형제의 얼굴에는 공포의 빛이 서려 있었다. 그들이 느낀 공 포는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에 나오는 두 여자가 거실 창문으로 뒤 뚱거리며 들어오는 오랑우탕을 보았을 때의 두려움과 비슷한 것이었 을지도 모른다. 멜리에스는 다시 그 사건을 생각했다. 겁을 먹기는 오랑우탕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오랑우탕이 두 여자를 죽인 것은 그 여자들의 울부짖음을 멈추게 하려는 이유에서였다. 오랑우탕은 그 여자들의 비명을 무서워했다. 그 사건 역시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빚어진 비극이다. 누구나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커튼 뒤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 다는 느낌이 들었다.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살인범이 돌아왔다! 경정이 조명 돋보기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불빛이 꺼져버렸다. 거리 에서 흘러들어오는 네온 불빛만이 방을 비추고 있었다. <무진장 바> 라는 술집의 네온사인이 점멸하면서 무-진-장-바라는 글자들이 차례 로 번쩍거렸다. 자크 멜리에스는 몸을 감추고 꼼짝 않고 있으려다가, 용기를 내어 조명 돋보기를 집어들고 수상쩍은 커튼 쪽을 비춰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투명 인간 같은 것이 있었던 걸까? "거기 누구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 줄기 바람이었나 보다. 그는 그곳 에 더 이상 머물 필요가 없겠다 싶어 이웃 사람들을 만나러 가기로했다. "실례합니다." 기품있게 생긴 한 남자가 문을 열어주었다. "경찰입니다. 들어갈 것까지는 없고 여기서 한두 가지만 여쭤보고 가겠습니다." 자크 멜리에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수첩을 꺼냈다. "살인 사건이 있던 날 밤 댁에 계셨습니까?" "예." "무슨 소리 못 들으셨습니까?" "다른 소리는 못 들었고 그 사람들이 느닷없이 비명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비명을 질렀다고요?" "예, 아주 새된 비명이었습니다. 소름이 오싹 끼쳤어요. 30초 정 도 계속되더니 그 다음에는 잠잠하더군요." "세 사람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습니까? 아니면 차례차 례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습니까?" "동시에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람 소리 같지가 않고 무슨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았어요. 무척 고통스러웠던 모양입니다. 내 생각엔 세 사람이 동시에 살해당한 것 같습니다. 끔찍한 일이지요. 그 사건 이 있은 다음부터 잠이 잘 안 와요. 그래서 이사갈 생각까지 하고 있습니다." "뭣 때문에 그들이 비명을 질렀다고 생각하세요?" "벌써 다른 형사들이 다녀갔어요. 아마 어떤 경찰 간부는 자살이 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 사람들은 어떤 아주 무시무시한 것을 보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 게 뭔지는 알 수 없지요. 어쨌든 범인의 기척은 전혀 없었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어떤 고정 관념이 멜리에스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미친 늑대 같은 것이 아주 조용히 나타나서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살인을 저 지른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 었다. 그런게 아니라면, 지붕을 통해 들어와 면도칼을 휘두른 오랑 우탕보다 더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머리가 좋은 어떤 광인이 완전 범죄의 방법을 찾아낸 것이 아닐까? 16. 백과 사전 광기 우리 모두는 매일 조금씩 미쳐가고 있다. 무엇에 미치느냐는 사람 마다 다르다. 우리가 서로서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 자신도 편집증과 정신분열에 사로잡혀 있다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나는 너무나 민감하게 현실을 잘못 이해할 때가 많다. 나는 그 점을 알고 있기에 그 광기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 기보다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내가 하는 모든 일의 동력으 로 삼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나는 미치면 미칠수록 내가 설정한 목표를 더 잘 달성하게 된다. 광기는 각자의 머리 속에 숨어 있는 사나운 사자이다. 그 사자를 죽이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것의 정체 를 알고 그것을 길들이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순치된 당신의 사자 는 어떤 선생, 어떤 학교, 어떤 마약, 어떤 종교보다도 당신의 삶을 훨씬 더 높이 끌어올릴 것이다. 그러나 광기가 힘의 원천이 된다고 해서 그것을 과도하게 사용하면 위험하다. 때때로 사자는 극도로 흥 분하여 자기를 길들이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덤벼드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17. 발자국 103683호는 뿔풍뎅이 축사를 발견했다. 거대한 체구의 뿔풍뎅이들 이 커다란 방에 모여 있다. 도톰하고 오톨도톨한 검은 딱지들이 서 로 맞물린 채 그들의 몸을 덮고 있다. 몸의 뒷부분은 둥글고 매끈매 끈하며, 앞부분은 키틴질로 된 두건을 쓴 모습인데 거기에 기다랗고 뾰족한 뿔이 달려 있다. 그 뿔은 장미 가시보다 열 배 정도나 크다. 103683호가 아는 바로는, 그 비행 곤충은 길이가 여섯 걸음에 너 비가 세 걸음이다. 그들은 어슴푸레한 곳에 살기를 좋아하는데 엉뚱 하게도 빛이라면 사죽을 못 쓰고 쫓아가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곤 충의 세계에서 빛은 커다란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에 이끌리지 않을 수 있는 곤충은 그리 많지 않다. 뿔풍뎅이들은 나무를 가루로 만들어 먹거나 썩은 싹을 뜯어먹는 다. 그들은 아무데서나 배설을 한다. 축사의 천장이 너무 낮고 그들 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그리 넓지 않은 탓에 배설물의 고약한 냄 새가 진동을 한다. 축사를 청소하는 개미들이 있는데, 그들이 다녀 간 지가 꽤 오래된 모양이다. 뿔풍뎅이 같은 딱정벌레목의 곤충들을 길들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클리푸니 여왕은 딱정벌레 덕분 에 거미 그물에서 구출된 뒤에 그들과 동맹을 맺을 생각을 했다. 여 왕이 되자마자 클fl푸니는 뿔풍뎅이들을 모아서 비행 군단을 만들었 다. 그러나 아직 그들을 전투에 투입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아직 개미산 세례를 받아본 적이 없으며, 전투 상황에서 성 난 병정개미들이 몰려올 때 전쟁을 모르고 살아온 그 초식 동물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103683호는 날개 달린 그 거구들의 다리 사이로 헤치고 들어간다. 방 한가운데에 그들에게 물통 구실을 하는 나뭇잎이 하나 놓여 있는 데, 그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다. 뿔풍뎅이가 갈증을 풀러 오면 나뭇 잎 위에 놓여 있던 커다란 불방울이 옆으로 길게 늘어난다. 클리푸니는 뿔풍뎅이들을 냄새 언어로 설득하여 벨로캉에 머물게 했다. 클리푸니는 곤충들을 설득하는 자기의 능력에 긍지를 갖고 있 다. '의사 소통의 방법을 찾아내기만 하면 서로 다른 두 개의 사고 체계를 결합시킬 수 있다.' 클리푸니는 혁신 운동의 일환으로 그렇 게 가르치고 있다. 의사 소통을 이루어내기 위해서 클리푸니는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다 했다. 먹이를 주고 통행 허가 페로몬을 주 었으며, 설득력있는 페로몬으로 그들에게 믿음을 주었다. 클리푸니 의 주장에 따르면 의사 소통을 이룬 두 동물은 서로를 죽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벨로캉 연방 여왕개미들의 최근에 모임에서, 몇몇 참석자들은 클 리푸니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했다. 자기 종과 다른 것들은 무조건 제거하는 것이 모든 종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행동 양식이라는 것 이다. 즉, 한 쪽은 대화를 하고 싶어하고 다른 쪽은 죽이고 싶어한 다면, 전자가 언제나 패배하게 되리라는 거였다. 그것에 대해 클리 푸니는 대화 중에서 가장 초보적인 형태이기는 하지만 죽이는 것도 따지고 보면 대화의 한 형태라고 교묘하게 반박했다. 즉,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는, 상대를 향해 나아가고 상대를 바라 보고 연구하고 상대의 반응을 예견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상대에 대한 관심이고 대화의 출발이라는 것이다. 클리푸니의 혁신 운동은 역설이 아주 풍부하다. 103683호는 뿔풍뎅이 구경을 중단하고 반체제 개미들에게로 갈 수 있는 비밀 통 로를 찾기 시작한다. 축사 천장에 발자국들이 어지러히 찍혀 있다. 발자국의 방향을 흐 트러뜨리려 한 듯 사방 팔방으로 발자국이 나 있다. 그러나 병정개 미 103683호는 뛰어난 척후 개미이기도 하다. 그는 가장 나중에 찍 힌 발자국들을 식별하여 그것들을 따라간다. 발자국들이 이끄는 데로 따라가 보니 작은 돌기 하나가 나타난다. 알고보니 그것은 입구를 감추기 위한 위장물이다. 저기가 틀림없다. 그는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는 나방 고치를 팽개치고 비밀 통로 안으 로 머리를 디밀고 들어간 다음 약간의 불안을 느끼며 앞으로 나아간다. 개미들의 냄새가 풍겨온다. 반체제 개미들이다.... 벨로캉 같은 동질적인 도시에 어떻게 반체 제 개미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 어찌 보면 그것은 내장의 한 귀퉁이 에서 세포들이 몸 전체의 기능에 동조하지 않겠다고 반기를 드는 것 과 같다. 말하자면 맹장염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103683호는 지 금 살아 있는 도시에 맹장염의 위기를 불러일으키려는 집단을 만나 러 가고 있는 셈이다. 그 집단에 속해 있는 개미가 얼마나 될까? 그들의 동기는 무엇일 까?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들의 진의를 알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 다. 반체제 운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된 터라 그들의 정체를 알고 그들의 활동 방식과 목적을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절실해 지는 것이다. 103683호는 좁은 통로를 계속 나아간다. 방금 지나간 개미들의 냄 새가 끼쳐온다. 그때 돌연 네 개의 발톱이 달린 다리 두 개가 그의 앞가슴을 그러쥐더니 앞으로 사정없이 잡아당긴다. 그는 빨려가듯 통로 속으로 끌려가 어떤 방에 다다른다. 위턱 두 개가 집게처럼 그 의 목을 잡고 조르기 시작한다. 103683호는 발버둥을 치면서 자기 몸에 부딪혀오는 등딱지 너머로 방 안을 살핀다. 그 방은 천장이 아주 낮고 널찍한 편이다. 더듬이 의 어림짐작으로 길이가 30걸음에 너비가 20걸음은 될 듯하다. 그러 니까 이 방은 천장으로 위장된 채 뿔풍뎅이의 축사를 덮고 있는 것 이다. 100마리쯤 되는 개미가 그를 둘러싸고 있다. 몇몇 개미들이 의혹을 가득 품고 잠입자의 정체를 탐색한다. 18. 백과 사전 개미를 제거하는 방법 부엌에 출몰하는 개미를 몰아내는 방법이 없느냐고 나에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당신은 무슨 권리로 당 신의 부엌이 개미 것이 아니고 당신 것이라고 주장하는가? 당신이 그것을 샀기 때문인가? 좋다. 당신은 시멘트로 부엌을 만든 사람에 게서 그것을 샀고 거기에 자연에서 나온 음식물을 채워놓았기 때문 에 부엌이 당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당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어 떤 약속이 맺어졌기 때문에 가공된 자연의 일부가 당신 소유물이 되 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끼리의 약속일 뿐이다. 당신 천장 속에 있는 토마토 소스가 개미 것이 아니고 꼭 당신 것이 라고 말할 수 있는가? 토마토는 땅에서 난 것이고 시멘트도 땅에서 난 것이다. 당신 포크의 재료가 된 금속도, 당신 잼의 원료가 된 과 일도, 당신의 벽을 이루고 있는 벽돌도 모두 땅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은 그저 그것들에 이름과 상표와 가격을 붙였을 뿐이다. 그것만 으로 인간이 '소유주'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지구와 지구의 자원은 세입자 모두에게 무료로 제공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너무 생경해서 당신을 설득하기가 어려울 것 이다. 당신이 기어코 그 미미한 경쟁자들을 제거하기로 마음을 먹었 다면, 내가 추천할 수 있는 '가장 덜 나쁜' 방법은 박하를 이용하는 것이다. 개미의 출몰을 막고 싶은 곳에 박하 한 포기를 키우면 된 다. 개미는 박하 냄새를 싫어하기 때문에 십중 팔구는 당신의 이웃 집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19. 반체제 개미들 103683호는 더듬이를 빠르게 움직여 반체제 개미들에게 자기를 소개한다. <나는 병정개미다. 쓰레기터에서 어떤 개미의 머리를 발견했는데, 그 개미 머리가 부탁하기를 당신들에게 가서 손가락들과 싸우기 위 한 원정군이 곧 파견될 것임을 알려주라고 했다.> 그 정보가 전해지자 금방 효과가 나타난다. 개미들은 거짓 냄새를 발할 줄 모른다. 거짓의 유용성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목을 조르고 있던 위턱이 느슨해진다. 둘러선 개미들이 더듬 이를 떨면서 저희들끼리 의견을 나눈다. <화학 정보실에 특공대가 파견되었는데, 오랫동안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 특공대원 가운데 하나와 저 병정개미가 대화를 나누었을 가능 성이 있다.> 겨우 몇 마디의 대화를 들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103683호 는 자기가 진짜 비밀 운동 조직과 만나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이들 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반체제 개미들은 103683호가 전해준 정보를 놓고 토론을 계속한 다. '손가락들과 싸우기 위한 원정군'이라는 표현이 특히 그들을 괴 롭히는 모양이다. 그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하다. 그런데 그 때 몇몇 개미들이 달갑지 않은 외래자를 어떻게 처분할 것이냐고 묻 는다. 반체제 개미도 아닌 자가 자기들의 본거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냥 놔두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103683호는 자기를 규정하는 모든 특성들을 밝힌다. 산란 번호 출 생 도시.... 그러자 반체제 개미들은 깜짝 놀란다. 자기들 앞에 있 는 개미가 바로 세계의 끝에 갔다가 살아 돌아온 그 병정개미 103683호인 것이다. 개미들은 103683호를 풀어주고 뒤로 물러선다. 다시 대화가 시작된다. 개미 세계에서는 냄새를 이용해서 대화한다. 더듬이를 이루는 열 한개의 마디에서 페로몬을 발하여 의사 소통을 하는 것이다. 페로몬 이란 몸 밖으로 나가서 공중을 떠돌다가 몸으로 들어가는 일종의 호 르몬이다. 한 개미가 어떤 감정을 느껴 그것을 몸 밖으로 발산하면 주위의 다른 모든 개미들이 그 개미와 동시에 그 감정을 느낀다. 어 떤 고통스런 자극을 받은 개미는 즉시 자기 고통을 주위에 전달한 다. 그러면 주위의 개미들은 그 개미를 도울 방법을 찾기에 골몰한다. 더듬이의 열한 마디는 각각 다른 냄새를 발한다. 그것은 마치 저 마다. 고유의 파장을 지니고 열한 개의 입이 동시에 말하는 것과 같 다. 어떤 마디는 저음으로 중요한 정보들을 발하고 어떤 마디는 고 음으로 사소한 정보를 보낸다. 더듬이의 열한 마디는 또 귀의 구실도 한다. 그러니까 개미들이 대화할 때는 양 쪽이 열 한개의 입으로 말하고 열한 개의 귀로 듣고 있는 셈이다. 그것도 동시에 말이다. 그래서 개미들의 대화는 뉘앙 스가 아주 풍부하다. 개미들의 대화는 사람들의 대화보다 열한 배나 내용이 풍부하고 열한 배나 속도가 빠르다고 볼 수 있다. 두 개미가 만나는 장면을 관찰할 때 더듬이의 끝을 맞대기가 무섭게 각자 자기 의 일을 찾아 다시 떠나는 것을 보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 미 1미한 접촉을 통해서도 모든 게 다 전해지는 것이다. 병정개미 하나가 다리를 절룩거리면서(그는 다리가 다섯 개뿐이 다) 103683호 앞으로 다가와 묻는다. 옛날에 수개미 327호, 암개미 56호와 함께 활동했던 그 병정개미가 맞느냐고.... 103683호는 맞다고 대답한다. 절름발이 개미는 그를 죽이려고 오랫동안 찾아다녔던 일이 있음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절름발이 개미가 씁쓸 한 느낌이 섞인 냄새를 발한다. <이젠 우리가 비정상이고 당신이 정상이다. 세월이 바뀐 것이다.> 절름발이 개미가 영양 교환을 제안한다. 103683호가 그 제안을 받 아들여 두 개미는 입과 입을 맞대고 더듬이로 서로를 어루만진다. 마침내 영양 제공자의 갈무리 주머니에 들어 있던 먹이가 103683호 위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영양 교환은 연통관 속의 액체가 흘러 통 >하는 것과 같다. 한마디로 소화 기관끼리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절름발이 개미는 자기 몸에서 에너지를 빼내고 103683호는 그것을 자기 몸에 채운다. 103683호는 마흔제 번째 천년기의 개미 격언을 떠올린다. <남에게 줌으로써 풍요로워지고 받음으로써 가난해진다.> 그러나 어찌 주는 것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반체제 개미들은 103683호에게 자기들의 본거지를 구경시킨다. 씨 앗과 꿀들이 저장되어 있고 기억 페로몬으로 가득 찬 알들이 보관되어 있다. 까닭은 알 수 없지만, 비밀 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그 모든 병정개 미들이 103683호에게는 별로 무섭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은 정치 권력에 굶주린 반역자들이라기보다는 어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전 전긍긍하는 자들로 보인다. . 절름발이 개미가 다가와서 솔직히 털어놓는다. <반체제 개미들은 예전엔 다른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현 여왕 클리푸니의 어머니인 벨로키우키우니의 명령에 따라 조직된 일종의 비밀 경찰로서, '바위 냄새를 풍기는 병정개미들'이라 불렸다. 당시 우리는 아주 강력했다. 벨로캉의 화강암 바닥 아래에 비밀 도시, 즉 "제2의 벨로캉을 마련하기까지 했다. 수개미 327호와 암개미 56호와 당신을 제거하려고 갖은 짓을 다한 것도 바로 바위 냄새를 풍기는 병정개미들이었다. 당시에는 손가락 들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른 개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벨로키우키우니 여왕은 하나의 강박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즉, 거 대한 동물들이 불개미들과 거의 대등한 지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을 알게 되면 벨로캉 개미들이 엄청난 불안에 휩싸이게 될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벨로키우키우니는 손가락들의 사절과 협정을 맺었다. 벨로 키우키우니는 손가락들의 존재에 관한 모든 정보를 차단하기로 했 고, 그 손가락들도 개미의 지능에 대해서 이미 안 것과 장차 알게 될 것을 다른 손가락들에게 알리지 않기로 했다. 양쪽이 만나고 있 다는 사실을 각자 자기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비밀로 하기로 했던 것이다. 벨로키우키우니 여왕은 두 문명이 서로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 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바위 냄새를 풍기는 병정개미들에게 손 가락들의 존재를 알게 된 개미들은 모두 제거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 지령이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절름발이 개미는 손가락들의 존재를 알게 된 수천의 다른 개미들 을 죽인 것처럼 자기들이 수개미 327호를 죽였다고 실토했다. 103683호가 잔뜩 호기심을 느끼며 묻는다. <불개미들과 손가락들 사이에 대화가 있었단 말인가?> <도시 밑의 동굴에 몇몇 손가락들이 머물고 있다. 그들은 어떤 기 계와 개미 사절 하나를 만들었다. 그것을 통해서 그들도 페로몬을 발산하고 감지할 수 있다. 그 기계는 '로제타 석'이라 하고 그 사절 을 '리빙스턴 박사'라 한다. 손가락들이 지은 이름이다. 그들을 매 개로 해서 손가락들과 개미들이 중요한 정보를 주고받았다. 크기가 다르고 종이 다르지만 이 지구 위에 각자의 문명을 건설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첫번째 접촉을 통해 얻은 게 그것이었고 이후에도 많은 접촉이 있 었다. 그 손가락들은 벨로캉 밑의 동굴에 갇혀 있다. 그래서 벨로키 우키우니는 그들에게 먹이를 제공하고 그들이 살아남도록 보살펴주 었다. 한철 내내 대화가 정기적으로 계속되었다. 손가락들 덕분에 벨로키우키우니는 바퀴의 원리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써먹 을 새도 없이 도시의 화재 때문에 죽었다. 새로 여왕에 즉위한 클리푸니는 더 이상 손가락들에 대한 이야기 를 꺼내지 못하게 했다. 여왕은 그들에게 식량 공급하는 일을 중단 하게 하고, 제2의 벨로캉으로 내려가는 통로를 진흙으로 막어버리라 고 명령했다. 그 통로가 막히면 손가락들의 동굴로 가는 길도 막히 는 것이므로 결국 클리푸니는 그들에게 굶어 죽는 형벌을 내린 셈이다. 때를 같이하여 클리푸니 새 여왕의 경비대가 바위 냄새를 풍기는 병정개미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새 여왕은 개미들이 손가락들과 협력했던 수치스런 사건의 흔적을 일체 남기지 않으려 했다. 종과 종 사이의 접촉에 그 누구보다도 관심이 많은 클리푸니가 손가락들 에 대해서는 이상하게도 무자비한 일면을 드러냈다. 단 하루 만에 제2 벨로캉 병정개미들의 거의 반이 죽음을 당했다. 목숨을 부지한 병정개미들은 벽 속으로 천장 속으로 몸을 숨겼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를 식별해 주는 냄새를 버리기로 결정 하고 새로운 이름으로 결집했다. 즉 우리는 '손가락들을 지지하는 반체제 개미들'이 되었다.> 103683호는 반체제 개미임을 자처하는 그들을 바라본다. 대부분이 절름발이다. 여왕의 경비대에 쫓기는 피곤한 삶의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나 생기가 넘치는 젊은 개미들도 있다. 그 병정개미들은 손가락 문명과의 접촉에 매료된 순진한 자들일 것이다. 그런데 모든 벨로캉 개미들을 동족 상잔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미친 짓이 아닌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러는 것인가? 손가락들 을 위해서인가? 결국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아는 것도 별로 없지 않 은가? 절름발이 개미는 반체제 개미들이 이제 일사 불란하게 자기들 의 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면서 뿔풍뎅이 축사 위의 천장으로 위장 되어 있는 그곳을 본거지로 삼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벨 로캉의 다른 개미들이 아직 식별할 수 없는 자기들만의 냄새를 발산 할 수 잇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나 이 비밀 운동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절름발이 개미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며 긴장감이 감돌게 한다. 그러더니 단도 직입적으로 바위 밑에 있는 손가락들은 아직 죽지 않 았고, 반체제 개미들이 화강암 속의 통로를 다시 열었으며 식량 공 급도 다시 시작되었다고 알려준다. <당신도 우리 일에 동참할 생각이 없는가?> 103683호는 주저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호기심이 모든 걸 눌러버린다. 103683호는 동의의 뜻으로 더듬이를 뒤로 젖힌다. 모든 개미들이 환호한다. 비밀 운동은 이제부터 세계의 끝을 다녀온 한 병정개미를 포함하게 된 것이다. 많은 개미들이 한꺼번에 영양 교환을 제안해 오는 바람에, 103683 호는 자기 입을 어디에 갖다대야 할지 모른다. 영양을 공급하는 그 모든 입맞춤이 그의 몸에 열기를 더해준다. 절름발이 개미는 손가락들에게 먹이를 제공하기 위하여 자기들이 곧 꿀단지 개미들을 훔쳐서 바위 밑으로 데려갈 특공대를 파견할 것 이라고 귀띔한다. 103683호가 리빙스턴 박사를 만나고 싶다면 이번 이 좋은 기회가 되리라는 것이다. 103683호는 대뜸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는 도시 밑에 숨겨진 손가락들의 둥지를 보게 된다는 기대에 부푼다. 한시라도 빨리 그들 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것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그는 손가락들에 대한 강박 관념을 지니고 살아왔다. 이제 자기의 호기심을 만족시키 면서 그 '마음의 병'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이다. 30마리의 용감한 반체제 병정개미들이 모여 특공대를 이룬다. 그 들은 힘을 얻기 위하여 분비꿀을 한껏 먹고 꿀단지 개미들의 방으로 향한다. 103683호도 그 속에 끼어 있다. 순찰 개미들에게 발각되지 말아야 할텐데. 20. 텔레비젼 경비 아주머니는 반쯤 열린 창문 뒤의 자기 자리를 충실히 지키면 서 드나드는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다. 멜리에스 경정이 그 여자 곁으로 다가갔다. "저 말이예요. 아주머니, 뭐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여자는 엘리베이터 거울이 너무 지저분하다 어떻다 하면서 핀잔이 라도 한마디 하려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이제껏 살아오시면서 가장 무서웠던 게 뭐예요?" 엉뚱한 질문이었다. 여인은 바보 같은 소리나 지껄이지 않을까 두 려워하면서, 또 가장 이름이 나 있는 세입자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고심하면서 대답했다. "외국인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요, 외국인들이 제일 무서워요. 이제 어디에서나 그들이 활기를 치고 다녀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일거리를 가로채고 저녁마다 길모퉁이에서 사람들을 습격하잖아요. 그들은 우리하고 달라요. 그들의 머리 속엔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어요." 멜리에스는 턱을 주억거리며 여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벌 써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데,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던 여인이 뒤늦게 소리쳤다. "좋은 밤 되세요. 멜리에스 씨." 집에 들어오자 멜리에스는 신발을 벗고 텔리비젼 앞에 앉았다. 수 사를 하고 온 날 저녁에 그의 머리 속에서 돌아가고 있는 기계장치 를 멈추게 하는 것으로는 텔레비젼보다 더 효과적인 게 없었다. 잠 자고 꿈꾸는 시간에도 머리 속 기계는 여지없이 돌아간다. 그러나 텔레비젼은 머리를 비워준다. 신경 세포가 휴식에 들어가고 뇌 속의 모든 불빛들이 깜박거림을 멈춘다. 황홀경이다! 그는 텔레비젼의 리모컨을 손에 들었다. 채널 1675번, 미국 텔레비젼 영화. -그러니까 빌, 너는 별 볼 일 없는거야. 안 그래? 너는 네가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이제 남들과 다름없는 가난뱅이라 는 걸 알아야 돼.... 877번 채널, 광고. -'크락크락'으로 한 번에 모든.... 그는 다시 채널을 바꾸었다. 그가 시청할 수 있는 채널은 모두 1825개였지만 저녁 8시 정각에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알쏭달쏭 함 정 퀴즈'가 나오는 622번 채널뿐이었다. 타이틀 백과 음악이 나온 다음 사회자가 나타나고 박수소리가 터 진다.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은 사회자가 입을 연다. -우리 622번 채널을 사랑해 주시는 시청자 여러분, 그리고 방청객 여러분, 다시 뵙게 되어 대단히 반갑습니다. 백네 전째 우리 프로그 램에 참여하신 것을 환영하면서, 자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알쏭달쏭.... ....함정퀴즈>! 방청객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른다. 마리 샤를로트가 다가와서 그의 무릎에 기대어 웅크리며 쓰다듬어 달라고 졸랐다. 멜리에스는 마리 샤를로트에게 참치 파이를 조금 떼 어주었다. 마리 샤를로트는 애무보다 참치 파이를 더 좋아했다. -우리 프로그램에 처음 참여하신 분들을 위하여 먼저 규칙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 한심한 사람들을 격려라도 하려는 듯 방청석에서 함성이 터진다. -감사합니다. 규칙은 간단합니다. 저희가 수수께기를 하나 제시하 면, 출연하신 도전자가 그 해답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알쏭달쏭.... ....함정퀴즈>! 방청객들이 신나게 소리친다. 여전히 웃음을 가득 머금고 사회자가 말을 잇는다. -정답을 찾아낼 때마다 1만 프랑짜리 수표 한 장과 조커 하나를 드립니다. 조커를 사용하시면 한 번의 실수가 허용되어 다음 1만 프 랑에 계속 도전하실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도전자는 벌써 몇 달 전부터 계속 도전자 자리를 고 수하고 계신 쥘리에트....라미레 여사이십니다. 라미레 여사께서 계 속 도전에 성공하기를 바라면서 이제 다시 라미레 여사를 모시겠습 니다. 어서 오십시오. 늘 하던 질문이지만 또 하겠습니다. 직업이 무엇인가요? -우체부입니다. -결혼하셨습니까? -예, 남편이 틀림없이 집에서 지켜보고 있을거예요. -그러면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안녕하세요. 라미레 씨! 그럼 아이 는 있으신가요? -없습니다. -취미는 무엇인가요? -음.... 십자 말 풀이.... 요리.... 박수소리. -더 힘차게, 훨씬 더 힘차게 박수를 쳐주십시오. 라미레 여사는 "마땅히 박수를 받을 만한 분입니다. 더 힘찬 박수소리. -자, 이제, 라미레 여사, 새로운 수수께끼를 맞을 준비가 되셨습니까? -예, 준비됐어요. -그럼, 문제가 담긴 봉투를 열고 수수께끼를 읽어드리겠습니다. 빠른 속도로 둥둥거리는 북소리. -자 문제를 읽겠습니다. 다음에 지시된 여섯 줄의 수는 어떤 규칙 에 따라 배열된 것입니다. 그 규칙에 따라 만들어질 일곱 번째 줄의 수는 무엇일까요? 하얀 판 위에 사회자가 매직 펜으로 숫자를 적는다. 1 11 12 1121 122111 112213 의아해 하는 표정이 담긴 도전자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음.... 쉽지 않은데요! -천천히 생각하십시요. 라미레 여사. 내일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요. 그리고 여기 해답을 찾는 데 길잡이가 되어줄 힌트가 있습니다. 자, 들으세요. <영리한 사람일수록 답을 찾기가 더 어렵다.> 무슨 뜻인지 이해도 못하면서 방청석에서 박수가 터진다. 사회자가 인사를 한다. -시청자 여러분, 여러분께서도 펜을 들고 함께 풀어보십시오. 그 럼 내일 뵙겠습니다. 내일도 변함없이 저희와 함께하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자크 멜리에스는 지역 뉴스 방송으로 채널을 바꾸었다. 머리 모양 은 나무랄 데가 없는데 화장을 너무 진하게 한 여자 아나운서가 프 롬프터에 스쳐가는 기사 원고를 앵무새처럼 지껄여대고 있었다. -뒤페롱 경찰국장은 오늘 살타 형제 사건에서 빛나는 개가를 올린 바 있는 자크 멜리에스 경정을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훈자로 추천 했습니다.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레지옹 드뇌르 사무국에서는 그 추천을 호의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크 멜리에스는 분통을 참지 못하고 텔레비젼을 꺼버렸다. 이제 어쩐다지? 그 사건을 묻어버리고 스타 행세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 면 실패를 모르는 수사관이라는 명성에 흠집이 나더라도 진실을 밝 혀낼 것인가? 결국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완전 범 죄라는 미끼를 당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법의학 센터죠? 부검 의사 좀 바꿔주세요.... (귀에 거슬리는 짧은 음악) ....여보세요, 박사님? 살타 형제의 시체를 세 심하게 부검해 보아야겠는데요.... 예, 급해요!" 그는 전화를 끊고 다른 전화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에밀 형사? '일요 메아리' 여기자에 관한 서류 좀 챙 겨다 주겠어요? 그래요, 그 레티샤 뭐라는 여자 말이에요. 한 시간 후에 법의학 센터에서 만납시다. 아참 그리고 에밀 형사, 질문이 하 나 있는데요, 이제껏 살아오면서 가장 무서웠던 게 뭐에요?.... 아, 그래요? 그것 참 유별나군요. 그런 게 사람들에게 겁을 줄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군요. 자, 법의학 센터에서 만납시다." 21. 백과 사전 인디언의 덫 캐나다의 인디언들은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곰 덫을 사용한다. 그 것은 커다란 돌덩이에 꿀을 바르고 나뭇가지에 밧줄로 매달아놓는 것이다. 그것을 발견한 곰은 먹음직스러운 먹이로 생각하고 다가와 발길질을 하면서 돌덩이를 잡으려고 한다. 그러면 돌덩이가 진자 운 동을 시작한다. 앞으로 밀려갔던 돌덩이가 뒤로 되돌아올 때마다 곰 을 때린다. 곰은 화가 나서 점점 더 세계 돌덩이를 때린다. 곰이 돌 덩이를 더 세게 치면 칠수록 돌덩이는 더 큰 반동으로 곰을 후려친 다. 마침내 곰은 나가떨어진다. 곰은 '이 폭력의 악순환을 중단시킬 방법이 없을까?'라는 생각을 할 줄 모른다. 그저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해 더욱 안달을 할 뿐이 다. '저 놈이 나를 때렸겠다. 그렇다면 본때를 보여줘야지!'라고 곰 은 생각한다. 그러면서 곰의 분노는 점점 증폭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곰이 돌덩이 때리기를 중단하면 돌덩이도 움직임을 멈출 것이다. 곰은 돌덩이가 일단 멈추고 나면 그게 밧줄에 걸려 있 을 뿐 움직이지 않는 물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이빨로 밧줄을 잘라서 돌덩이를 떨어뜨린 다음 거기에 묻은 꿀을 핥 는 일만이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22. 꿀단지 개미 방에 파견된 특공대 지하 40층. 많은 개미들이 움직이고 있다. 8월의 더위가 한창 기 승을 부리고 있는 탓에 모든 개미들이 짜증을 내고 있다. 밤중까지 땅속 깊은 곳에서도 열기가 가시지 않는다. 벨로캉의 흥분한 병정개미들이 아무 이유 없이 지나가는 개미들을 물어뜯는다. 일개미들과 알들을 보살피는 유모 개미들의 방과 분비 꿀을 저장해 둔 방 사이로 달려간다. 개미 둥지 벨로캉이 더위에 시 달리고 있다. 한 무리의 개미들이 미지근한 림프처럼 개미 둥지 안 을 흐르고 있다. 서른 마리의 반체제 개미들이 조심스럽게 꿀단지 개미들의 방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경탄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당분 저장고를 바라본다. 꿀단 지 개미들의 모습은 일종의 열매와 같다. 살이 많고 금빛으로 반짝 거리며 불투명한 빨간 띠를 두르고 있는 과일이다. 꿀단지 개미들이 열매처럼 보이는 것은 배를 늘어뜨리고 천장에 매달려 있느라고 키 틴질이 지나치게 늘어나버렸기 때문이다. 일개미들이 비어 있는 갈무리 주머니에 꿀을 채우려고 분주히 움직인다. 클리푸니 여왕도 가끔 몸소 꿀단지 개미들의 방에 와서 꿀을 먹는 다. 여왕이 와도 꿀단지 개미들은 데면데면하게 대한다. 오랜 세월 동안 움직이지 않고 살아오면서 그들은 관성의 철학을 터득했다. 어 떤 개미들은 그들의 뇌가 아주 작아졌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능은 기관을 낳고 기능이 사라지면 기관이 쇠퇴한다는 것이다. 꿀단지 개 미들은 채우고 비우는 일만을 하기 때문에 조금씩조금씩 두 가지 동 작만하는 기계로 변형되어왔다. 이 방을 벗어나면 그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해 하지 못한다. 그들은 꿀단지 개미 아계급으로 태어났고 꿀단지 개미 로 죽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이 살아 있을 때 그들을 천장에서 떼어내는 일은 가능 하다. '이동'이라는 뜻이 담긴 페로몬을 발하기만 하면 그들을 떼어 낼 수가 있다. 꿀단지 개미들이 저장고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래도 이동이 필요할 때 자기가 운반되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살아 있는 저장고이다. 반체제 개미들은 덩치가 좋은 꿀단지 개미들을 몇 마리 고른 다 음, 그들의 더듬이로 다가가 '이동'이라는 뜻이 담긴 틀에 박힌 페 로몬을 발한다. 그러자 거대한 꿀단지 개미가 서서히 움직이면서 천 장에서 다리를 하나씩 떼고 아래로 내려온다. 몇몇 개미들이 달려들 어 꿀단지 개미가 바닥에 부딪혀 깨지지 않도록 붙잡아준다. <어디로 가는가?> 꿀단지 개미들 가운데 하나가 묻는다. <남쪽으로 간다.> 꿀단지 개미들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반체제 개미들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긴다. 꿀단지 개미 한 마리를 옮기는 데 개미 여섯 마리가 달라붙어야 한다. 그 만큼 그들은 무겁다. 손가락들을 위해 이토록 반체제 개미들이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들이 이런 사실을 알기나 할까?> 103683호가 묻는다. <그들은 우리가 너무 적게 가져온다고 불평을 한다네.> 어떤 반체제 개미가 대답한다.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다! 특공대는 신중하게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이윽고 화강암 바닥에 뚫린 작은 구멍이 나타난다. 저 구멍을 지나면 리빙스턴 박사가 있 는 방이 있고 거기에서 그들은 리빙스턴 박사와 대화를 나누게 될 것이다. 103683호는 전율을 느낀다. 그 무시무시한 손가락들과 대화를 나 누게 되다니, 그게 이처럼 쉬운 일이었더란 말인가? 그러나 그들의 대화는 당분간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다. 그 구역 에서 순찰을 돌던 경비 개미들이 돌연 반체제 개미들을 추격하기 시 작했던 것이다. 빨리! 반체제 개미들은 좀더 빨리 도망가려고 일껏 확보한 꿀단지 개미들을 포기한다. <반역자들이다!> 다른 개미들이 아직 식별하지 못할 거라고 믿고 있던 반체제 개미 들만의 냄새를 어떤 병정개미가 맡았다. 경보 페로몬이 사방으로 퍼 저나가고 추격전이 펼쳐진다. 경비 개미들도 빠르긴 하지만 반체제 개미들을 따라잡지는 못한 다. 그러자 그들은 바리케이트를 쳐서 몇몇 통로를 차단한다. 마치 반체제 개미들을 모두 어떤 곳으로 몰아가려는 느낌이 든다. 병정개미들은 특공대원들이 아주 빠른 속도로 위층을 향해 올라가 도록 압박한다. 지하 40층, 30층, 16층, 14층. 병정개미들은 틀림없 이 사냥감들을 미리 정해 둔 어떤 곳으로 몰아가고 있다. 103683호 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함정으로 내몰리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 나 이제 다른 출구가 없다. 병정개미들이 그들을 잡지 않고 내버려 둔 데는 필시 곡절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꼼짝없이 그들이 내 모는 대로 갈수밖에 없다. 반체제 개미들은 풀노린재들이 가득한 끔찍한 방으로 들어간다. 무시무시한 광경 앞에서 그들의 더듬이가 곤두선다. 등딱지에 작은 구멍들이 송송 뚫린 풀노린재 암컷들이 사방으로 뛰어다니고 수컷들은 송곳처럼 뾰족한 생식기를 흔들면서 암컷들을 쫓아다닌다. 좀 떨어진 곳에서는 동성 교미하는 수컷들이 서로 껴안 고 있는데, 그 모습이 기다란 풀빛 송이들 같다. 풀노린재가 지천으 로 우글거린다. 수컷들은 송곳 같은 생식기를 바짝 세우고 딱지를 뚫으려고 벼른다. 반체제 개미들이 미처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그 끔찍한 곤충들 이 덤벼들기 시작한다. 발정난 풀노린재들의 넓적하고 두툼한 몸뚱 이에 눌린 개미 하나가 풀썩 무너진다. 아무도 개미산을 쏘아 그들 을 막아낼 겨를이 없다. 수컷들의 송곳 생식기가 반체제 개미들의 등딱지를 뚫는다. 103683호는 미친 듯이 저항한다. 23. 백과 사전 빈대 동물들이 교미를 하는 방식은 천태 만상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빈대(학명은 시멘스 렉투랄리우스)의 교미 방식이다. 빈대들의 교미 방식은 인간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난잡함의 극치 를 보이고 있다. 첫번째 특성 : 음경 강직증. 빈대는 끊임없이 교미를 한다. 어떤 빈대는 하루에 200번 이상 교미를 한다. 두 번째 특성 : 동성애와 수간. 빈대는 자기의 교미 상대를 잘 구 별하지 못한다. 게다가 제 무리들 속에서 암컷과 수컷을 구별하는 데는 더 더욱 어려움을 느낀다. 빈대 수컷들이 행하는 교미중에서 50%는 동성 교미이고 20%는 다른 곤충들과의 교미이며 나머지 30%만 이 암컷과 이루어진다. 세 번째 특성 : 송곳 음경. 빈대는 뾰족한 기다란 생식기를 갖고 있다. 아 주사기 같은 생식기를 이용해서 수컷들은 딱지를 뚫고 아 무데나 정액을 사출한다. 머리, 배, 다리, 등 심지어 암컷의 심장에 까지 정액을 쏟아넣는다. 그 방식이 암컷의 건강에는 별로 영향을 끼치지 않겠지만 그런 상태에서 어는 세월에 수정이 이루어지겠는 가? 그런 이유로 네 번째 특성이 나타난다. 네 번째 특성 : 질 접촉이 없는 처녀 수정. 겉으로 보기에 빈대 암컷의 질은 수컷의 생식기가 닿지 않은 채 그대로 있고 등에만 구 멍이 뚫렸을 뿐인데, 정받이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정자들이 혈액 속에서 살아남는다는 이야기인가? 사실 대부분의 정 자는 면역 체계 때문에 외부에서 들어온 다른 미생물들처럼 파괴되 어버린다. 수컷들의 정자가 정받이에 성공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서 사출되는 정액의 양은 엄청나다. 알기 쉽게 비교하기 위해서 빈 대 수컷들의 크기가 사람만하다고 가정한다면, 수컷들은 한 번 사정 할 때마다 30리터의 정액을 쏟아내는 셈이다. 그 어마어마한 양에 비해서 살아남는 정자는 아주 적다. 정자들은 동맥 귀퉁이에 숨어서 또는 정맥에 붙어서 자기들의 때가 오기를 기다린다. 그 불법 입주 자들을 몸 안에 간직한 채 암컷들은 겨울을 보낸다. 마침내 봄이 되 면 머리, 다리, 배, 등에 숨어 있던 정자들의 본능에 이끌려 난소 주위로 모여들고 곧 이어, 난소의 막을 뚫고 안으로 들어간다. 그 다음부터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 다섯 번째 특성 : 복수 생식기를 가진 암컷. 칠칠치 못한 수컷들 이 생식기를 아무데나 마구 찔러대는 바람에 빈대 암컷들의 몸뚱이 는 상처 자국으로 뒤덮인다. 밝은 색 바탕에 갈색 구멍들이 과녁처 럼 도드라져 보인다. 그럼으로써 암컷이 교미를 몇 번이나 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된다. 자연의 섭리는 빈대들에게 기이한 적응력을 부여하여 난잡한 교미 질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몇 세대를 거치는 동안 여러 차례의 돌연 변이가 이루어진 끝에 믿을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빈대 암컷들이 아예 등 위에 갈색 반점을 지닌 채 태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밝은 색 바탕에 아주 도드라져 보이는 갈색 반점 하나하나가 '보조적인 생식기'에 해당한다. 그것들은 주 생식기에 직접 연결되어 있다. 암 컷들이 복수 생식기를 가지고 있다는 특성은 실제로 진화의 모든 단 계에 존재해 왔다. 반점이 없던 단계, 몇 개의 반점 겸 생식기를 갖 추고 태어나던 단계, 등에 진짜 보조 생식기를 갖춘 단계를 거치면 서 그 특성이 강화되었을 뿐이다. 여섯 번째 특성 : 자동으로 오쟁이지기. 한 수컷들이 다른 수컷의 몸에 구멍을 뚫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살아남은 정자들은 본능에 따라 난소가 있는 부위로 움직인다. 난소를 찾아내지 못한 정자들은 체내의 여러 가지 관으로 흘러들어가 원래 그 몸에 있던 정자들과 섞인다. 그 결과 다른 수컷에게 당했던 그 수컷이 어떤 암컷의 딱지 를 뚫게 되면, 그 수컷은 자기의 정자들뿐만 아니라 동성교미로 관 계를 맺었던 수컷의 정자까지도 주입하게 된다. 일곱 번째 특성 : 암수 한 몸. 빈대라는 실험 동물을 상대로 한 자연의 교미 실험은 계속되었다. 빈대의 수컷들 역시 돌연 변이를 일으켰다. 아프리카에서는 아프로시멕스 콘스트릭투스라는 빈대가 있는데, 그 수컷은 등에 보조적인 작은 질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 나 거기에서 정받이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 질들은 장식으로 등 에 붙어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동성 교미를 고무하기 위해 있는 것일 게다. 여덟 번째 특성 : 원거리에서 정액을 사출하는 대포 생식기. 열대 지방의 어떤 빈대들 즉, 앙토코리드 스콜로페리앵은 원거리 대포 생 식기를 갖고 있다. 커다랗고 도톰한 대롱 모양으로 생긴 정관이 둘 둘 감겨 있는데 그 안에 정액이 압축되어 있다. 정액을 몸 밖으로 분출하는 특별한 근육이 붙어 있어서 빠른 속도로 정액을 쏘아 보낼 수 있다. 몇 센티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암컷을 발견하면, 수컷은 암 컷의 등에 있는 질을 과녁으로 삼아 음경을 겨눈다. 발사물이 공기 를 가른다. 쏘는 힘이 아주 강하기 때문에 정액은 질 부위의 가장 얇은 딱지를 뚫고들어간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24. 땅 속에서의 추격전 죽음을 눈앞에 둔 한 반체제 개미가 강렬한 냄새로 외친다. 날카 로고 이해하기 어려운 페로몬이다. <손가락들은 우리의 신이다.> 그 페로몬을 발하고 나서 그 개미는 다리를 쭉 뻗는다. 그의 쭉 뻗은 몸이 마치 여섯 개의 가지가 달린 십자가 같다. 다른 동료들도 하나씩하나씩 쓰러지며 103683호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문장들을 똑같이 되풀이한다. <손가락들은 우리의 신이다.> 흥분한 노린재들은 반체제 개미들을 사정없이 찔러댄다. 뒤쫓아 온 병정개미들은 더 이상 반체제 개미들에게 형벌을 내릴 필요가 없어 졌다는 듯 덤덤하게 바라본다. 103683호는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죽을 때 죽더라도 '신'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격렬한 분노에 휩싸인 그는 더듬이를 휘둘러 가슴에 달라붙는 열 마리쯤 되는 노린재를 후려치고 머리를 낮춘 다음 병정 개미들의 무리 속으로 돌진한다. 급습의 효과는 성공적이었다. 유혈 이 낭자한 그 장면에 넋을 잃고 있던 병정개미들은 돌진하는 103683 호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제정신을 차리고 그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03683호는 추격전이라면 이골이 난 개미다. 그는 천장으 로 달려올라가 더듬이 끝을 넓게 벌리고 천장을 끌기 시작한다. 천 장에서 흙덩이가 뿌옇게 쏟아진다. 103683호는 그 흙을 이용해서 자 기와 추격자들 사이에 하나의 흙벽을 만든다. 그는 사격 자세를 취 하고 기어이 그 벽을 넘어오는 경비 개미들에게 개미산을 쏘아 쓰러 뜨린다. 그러나 여러 경비 개미들이 함께 장애물을 넘어오자 103683 호는 한꺼번에 그들을 쏘아댈 수 없음을 깨닫는다. 게다가 개미산 주머니도 이제 거의 비어 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달아난다. <반역자다! 저놈을 붙잡아라!> 103683호는 통로를 진동한동 내닫다가 문득 발씨가 익은 통로임을 알아차린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는 아까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려온 것이다. 이제 그는 다시 꿀단지 개미의 방에 들어와 있다. 반대 방향으로 방금 거쳐갔던 길이라 기억이 그만큼 잘 되어 있었던 것이고, 그의 다리들은 자연스럽게 그 길을 따라 그를 이끌고 온 것이다. 다리에서 피가 흐른다. 어디로든 숨어야 한다. 천장이 안전할 것 이다. 그는 천장으로 올라가 꿀단지 개미의 다리 사이로 비집고 들 어간다. 꿀단지 개미는 덩치가 크기 때문에 몸을 완전히 숨길 수 있 다. 경비 개미들이 방 안으로 밀려들어온다. 그들은 더듬이로 구석구석을 살핀다. 103683호는 꿀단지 개미의 다리 하나를 천장에서 떼어 자기 몸을 가린다. <무슨 일인가?> 꿀단지 개미가 힘없이 묻는다. <이동이야.> 103683호가 짐짓 위엄을 부리며 대답하고 두 번째, 세 번째 다리 를 떼어낸다. 그러나 이번엔 꿀단지 개미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다. <이거 왜 이래.... 당장 그만두라고!> 아래에 있던 경비 개미들이 한 곳에 투명한 피가 고여 있음을 발 견하고 두리번거린다. 한 경비 개미의 머리 위에 피 한 방울이 떨어 진다. 그는 더듬이를 닦고 소리친다. <옳지, 그 자를 찾았다!> 당황한 103683호는 꿀단지 개미의 다리 두 개를 또 떼어낸다. 꿀 단지 개미는 이제 다리 하나에 달린 발톱 두 개로 천장에 붙어 있 다. 그가 겁에 질려 소리친다. <나를 당장 제 자리로 돌려놔!> 103683호를 처음 발견한 경비 개미가 몸을 뒤집고 배의 자세를 조 절하여 천장을 겨눈다. 103683호는 꿀단지 개미의 마지막 다리를 위턱으로 쳐서 떼어낸 다. 경비 개미가 사격을 하려는 찰나 오렌지색 꿀단지 개미가 그의 위로 떨어진다. 꿀단지 개미와 경비 개미의 배가 터지면서 파편이 온 방에 튀어오른다. 다른 병정개미들이 나타난다. 103683호는 머뭇거리면서 개미산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한다. 세 차례 쏠 수 있는 양이 남아 있다. 그 는 그것을 꿀단지 개미를 천장에서 떨어뜨리는 데 사용하기로 한다. 천장에 꼼짝 않고 붙어 있던 꿀단지 개미 세 마리가 느닷없는 개미 산 공격을 받고 떨어지면서 추격자들의 몸뚱이 위에서 터져버린다. 그 와중에서도 경비 개미 한 마리가 분비꿀을 뒤집어쓴 채 빠져나온다. 103683호의 개미산 주머니는 이제 텅 비어 있다. 그래도 그는 상 대를 겁줄 생각으로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자기 삶을 마감해 줄 뜨거 운 개미산이 날아오기를 의연하게 기다린다. 아무것도 날아오지 않는다. 저 자도 개미산이 다 말라버린 것일 까? 몸과 몸이 맞부딪는다. 위턱들이 뒤엉키고 서로 상대의 몸뚱이 를 자르려고 안간힘을 쓴다. 세계의 끝을 다녀온 백전 노장이 아무래도 한 수 위다. 그는 상대 의 몸을 뒤집고 머리를 뒤로 당긴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 일격을 가 하려는데, 다리 하나가 마치 그에게 영양 교환을 청하기라도 하듯 그를 툭툭 건드린다. <자네, 왜 그 자를 죽이려 하는가?> 이미 알고 있는 친근한 냄새가 풍긴다. 103683호는 냄새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확인하려고 더듬이를 회전시킨다. 여왕이 몸소 그곳에 왕림했다. 그의 옛 전우이며 그의 첫 모임을 권유했던 그 여왕이.... 주위의 병정개미들이 싸울 태세를 하고 덤벼든다. 그러나 여왕은 옅은 냄새를 발하여 그 개미가 자기의 보호 아래 있음을 알린다. <따라오게.> 클리푸니 여왕이 권한다. 25. 일이 복잡해진다. 목소리가 완강해진다. "따라오게." 강렬한 네온 불꽃 아래 시체들이 두 줄로 늘어서 있었다. 시체들 은 각자 엄지발가락에 꼬리표를 하나씩 매달고 있었다. 에테르 냄새 와 영원과도 같은 죽음의 냄새가 방 안에 가득했다. 퐁텐블로 법의학 센터. "경정. 이쪽으로 오게." 부검의가 말했다. 그들은 시체들 사이로 나아갔다. 플라스틱 덮개를 씌워놓은 시체 도 있고 하얀 시트를 덮어놓은 시체도 있다. 각각의 꼬리표에는 성 명과 사망 날짜와 사망시의 정황을 알려주는 주석이 달려 있었다: 3 월 15일, 노상에서 칼에 찔려 사망: 4월 3일, 버스에 깔려 사망: 5 월 5일, 창문에서 투신 자살.... 그들은 꼬리표가 걸려 있는 세 개의 엄지발가락 앞에 멈추었다. 꼬리표는 그 엄지발가락들이 각각 세바스티앵, 피에르, 앙투안 살타 의 것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멜리에스는 조바심이 나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사망 원인이 뭔지 알아냈어요?" "어느 정도는.... 강한 정신적 충격이 원인이 된 것 같아. 그것도 아주 강력한 충격말일세." "공포인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아니면 뭔가에 크게 놀란 것일 수도 있지. 어 쨌든 심장이 멎을 만큼 강렬한 자극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어. 여기에 적힌 소견을 보게. 세 사람 다 아드레날린의 혈중 농도가 정상치의 열배야." 멜리에스는 그 여기자가 옳았다고 생각했다. "결국 공포 때문에 죽은 거군요...." "꼭 그런 건 아니야. 정신적인 충격이 유일한 사망 원인은 아닐 이리 와 보게." 부검의는 불이 들어와 있는 판독기 위에 엑스 선 하나를 올려 놓고 말했다. "그들의 몸에 헐어서 난 작은 상처가 가득해." "그런 상처가 어떻게 생긴 거죠?" "독극물 때문이지. 틀림없이 독일거야. 그러나 아주 새로운 형태 의 독일세. 시안화물 같은 독극물이라면 커다란 상처 하나만 생겼을 텐데, 보다시피 여기엔 상처가 아주 많거든." "그렇다면 사망 원인을 어떻게 진단하고 계신겁니까?" "좀 이상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먼저 정신적인 충격 을 받아 죽고 난 다음 위와 장의 손상이 일어난 것 같네. 물론 위와 장의 손상도 치명적인 것이긴 하지." 하얀 가운을 걸친 부검의는 서류를 정돈한 다음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질문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박사님은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십니까?" 의사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난 말일세, 끔찍한 걸 하도 많이 보고 살아서 그런지, 이제 어떤 걸 봐도 꿈쩍 안 한다네." 멜리에스 경정은 작별 인사를 하고 껌을 씹으며 법의학 센터를 떠 났다. 들어올 때보다 그의 마음은 훨씬 더 복잡해져 있었다. 그는 이제야 말로 자기가 강적을 만났음을 깨닫고 있었다. 26. 백과 사전 개미의 성공 지구를 대표하는 모든 생물들 가운데 가장 성공한 것이 개미이다. 개미들은 아주 기록적인 생태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도 처에서 개미들을 발견할 수 있다. 열대의 밀림이나 극권의 사막성 초원에서도 개미를 발견할 수 있고, 유럽의 숲이나 대서양 해변, 화 산 주변, 수렁, 심지어 인간의 주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개미의 적응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보여주는 예가 하나 있다. 사하라 사막 에 사는 카타글리피스라는 개미는 섭씨 60도까지 올라가는 사막의 폭염에 적응하기 위해서 독특한 생존 방법을 개발해 냈다. 그 개미 는 뜨거운 모래에 데지 않으려고 여섯 다리 중에서 두 다리만을 사 용하여 앙감질하듯 걷는다. 그리고 습기가 빠져나가 탈수 상태에 빠 져드는 것을 막으려고 호흡을 억제한다. 1킬로미터 거리의 육지를 걸어가다 보면 반드시 개미를 만나게 된 다. 개미는 지구의 표면 위에 가장 많은 도시와 촌락을 건설한 생물 종이다. 개미는 모든 포식자을 이겨냈고, 비, 눈 더위, 추위, 가뭄, 장마, 등 모든 기후 조건에 적응해 왔다. 최근의 어떤 연구에 따르 면 아마존 살림의 총 동물의 3분의 1이 개미와 흰개미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 개미와 흰개미의 비율은 8대 1이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27. 여왕과의 재회 머리가 납작한 문지기 개미들은 그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비 켜 준다. 그들은 금단 구역의 나무 통로 속을 나란히 걸어가고 있 다. 병정개미 103683호와 클리푸니 여왕은 아주 오랫만에 만났다. 클리푸니는 분가해 있던 시절 벨로캉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었다. 처 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그 공격에 103683호가 참가했던 것은 물론이 다. 그 일이 있은 지도 1년이 넘었다. 그 후로 여왕과 103683호 사 이에 연락이 두절되었다. 여왕은 그들이 옛날에 함께했던 일들을 잊 은 것일까? 그들은 여왕의 산란실로 들어간다. 클리푸니는 자기의 방 안에 어 머니의 처소를 따로 마련하고 껍데기뿐인 시신을 밤의 보늬로 덮어 놓고 있다. 103683호는 방 한가운데에 자기의 어머니이기도 한 벨로 키우키우니의 시신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해 한다. 개미 역사에서 여왕이 자기를 낳아준 선대 여왕의 시신을 곁에 두 고 사는 일은 유래가 없었다. 더군다나 클리푸니는 여왕을 상대로 전쟁을 도발하고 정복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클리푸니와 103683호는 알을 꼭 닮은 둥그런 방 한가운데에 자리 를 잡고 더듬이를 접근시킨다. <우리가 만난 건 우연이 아닐세. 백전 노장인 자네를 오랫동안 찾 았네. 자네가 필요해. 손가락들을 상대로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하여 세계의 동쪽 끝에 세워 놓은 그들의 모든 둥지를 파괴할 생각이라 네. 자네가 원정군을 이끌 적임자일세.> 반체제 개미들의 말이 사실이었다. 클리푸니는 실제로 손가락들과 전쟁을 벌이려 하고 있다. 103683호는 머뭇거린다. 동쪽으로 다시 떠나고 싶은 마음은 간절 하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도 만만치 않다. 손가락들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이다. 세계의 끝을 다녀온 뒤 겨울잠을 자는 동안 103683호는 줄곧 손가 락들과 거대한 빨간 공들의 꿈만 꾸었다. 그들은 자그마한 먹이들을 해치우듯이 개미 도시들을 유린하고 있었다. 겨울잠에서 가까스로 깨어났을 때 103683호는 더듬이가 젖어 있음을 알았다. <왜 그러는가?> 여왕이 묻는다. <세계의 끝 너머에 사는 손가락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두려움이라는 게 뭐지?> <자기가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러자 클리푸니는 어머니의 말씀이 담긴 기억 페로몬을 읽으면서 어머니가 그 '두려움'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어떤 페로몬을 남겼는지 들려준다. <말씀에 따르면, 개체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때 서로에 대해 서 두려움을 갖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두려움을 극복하고 나면 불 가능하다고 믿었던 많은 일들을 완벽하게 이루어낼 수 있다고 한다.> 103683호는 선대의 여왕이 남긴 그 가르침이 값진 것임을 인정한 다. 오른쪽 더듬이를 살며시 떨면서 클리푸니가 묻는다. <두려움 때문에 원정군을 이끌 수 없단 말인가?> <아닙니다.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겨냈습니다.> 클리푸니는 마음을 놓는다. 옛 전우 103683호의 도움 없이는 자기 의 원정군을 안심하고 파견할 수 없을 것 같아 걱정했던 터이다. <지구에 있는 손가락들을 모두 죽이려면 병력이 얼마나 필요할까?> <지구의 손가락들을 모두 죽이고 싶으십니까?> <그러고 싶다. 손가락들은 이 세계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들은 어 리석은 기생충 같은 자들이다.> 클리푸니는 분을 참지 못하고 더듬이를 접었다 폈다 한다. <손가락들은 개미들에게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동물들, 모든 식물 들, 모든 광물들에게도 위험한 존재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고 그걸 느끼고 있다. 나는 내가 일으키는 전쟁의 정당성을 확신하고 있다.> 클리푸니의 어조가 사뭇 비장하다. 103683호는 필요한 병력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여왕의 질문에 답하 려고 재빨리 계산을 한다. 손가락 하나를 없애는 데는 적어도 잘 훈 련된 5백만의 병정개미가 필요하다. 그리고 지구 위에는 적어도 네 개의 무리, 즉 20개의 손가락들이 존재할 것이다. <병정개미 1억 마리는 있어야겠는데요.> 103683호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거대한 검은 띠를 다시 떠올린 다. 그리고 원정에 나선 모든 병정개미들이 어마어마한 소음과 탄화 수소의 연기 속에서 단 한 번에 아주 얇은 나뭇잎처럼 납작해지는 광경을 상상한다. 세계의 동쪽 끝은 그런 곳이다. 클리푸니 여왕은 가타부타 대답이 없다. 여왕은 산란실 안을 이리 저리 오가며 위턱의 끝으로 밀 알갱이들을 툭툭 건드린다. 그러더니 이윽고 더듬이를 낮추고 몸을 돌린다. <그 원정에 필요한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많은 개미들과 토론을 벌였네. 알다시피 나는 내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네. 나는 제안만 하고 결정은 공동체 전체가 하는거지. 그런데 내가 이야기를 나눈 다른 여왕이나 벨로캉 백성들 중에는 나와 생각 을 달리하는 자들이 있어. 그들은 난쟁이개미들과 흰개미들이 다시 쳐들어올 것을 염려하고 있다네. 그들은 원정군이 파견되면서 벨로 캉이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아. 나는 원정을 지지하고 다른 개미들은 반대하는 많은 개미들과 이 야기를 나누었네. 그들은 애를 많이 썼고 나도 노력을 많이 했다네. 결국 우리가 확보한 병력은 모두 합해서 8만이라네.> <8만 군단요?> <아니, 8만 마리. 자네가 참가한다면 그 병력으로도 해볼 수 있을 거야. 자네가 너무 적다고 생각한다면 추가로 모아보겠네. 그러면 100에서 200마리의 병정개미를 더 차출할 수 있을거야. 그러나 그게 내가 확보할 수 있는 최대치라네.> 103683호는 깊은 생각에 잠긴다. 여왕은 그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지구의 모든 손가락들과 맞서는데 8 만의 병력을 이끌고 간다는 건 말도 안된다! 그러나 변함없는 호기심이 그를 설레게 한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흘려보낼 수는 없다. 그는 기운을 내려고 애쓴다. 어쩔 수 없이 8만 병력으로 능력껏 해보는 수밖에 없다. 좀 무모한 일이긴 하지만 그 래도 얻을 것은 있다. 물론 모든 손가락들을 죽이지는 못하겠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좋습니다. 8만 병력으로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만 물어보 고 싶습니다. 원정군을 파견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그리고 어머니 벨로키우키우니는 손가락들에게 호의적이셨는데, 왜 그렇게 손가락들을 미워하십니까?> 여왕은 방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통로로 향한다. <따라 오게. 화학 정보실을 구경시켜 주겠네.> 28. 레티샤가 나타난다. 사무실은 시끌시끌했고 담배 연기가 자욱했으며 책상과 의자와 커 피 자동 판매기 따위가 들어차 있었다. 전화 벨이 울리고 있었고, 긴 의자 위에 엎드린 부랑자들은 지청구 를 늘어놓고 있었으며, 유치장 철책에 매달린 자들은 이러면 재미없 다는 둥 변호사와 전화를 하고 싶다는 둥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다. 게시판에는 흉악범들의 사건이 붙어 있었다. 범인들마다 현상금이 붙어 있는데, 금액은 1천 프랑에서 5천 프랑 사이로 다양했다. 그들 의 몸속에 있는 장기와 체액을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으로 생각한다 면 그 현상금은 싼 편이었다. 콩팥, 호르몬, 혈관, 그 밖의 체액을 상품으로 한다면 모두 합해 7만 프랑에 육박할 것이었다. 레티샤 웰즈가 경찰서에 나타나자 그녀에게 많은 눈길이 쏠렸다. 그런 일은 그녀가 사람들 사이를 지날 때마다 늘 있는 일이었다. "실례합니다. 멜리에스 경정이 계신 사무실이 어딘가요?" 정복 차림의 말단 경관 하나가 방문증을 확인하고 손가락으로 가 리키며 말했다. "저쪽 안으로 들어가서, 화장실 앞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녀가 문을 밀고 들어서자 경정은 가슴이 옥죄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멜리에스 경정을 뵈러 왔는데요." 그녀가 말했다. "접니다." 그는 말 대신 몸짓으로 그녀가 의자에 앉도록 권했다. 그는 마음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그토록 아름다운 여자를 본 적이 없는 탓이었다. 최근에 또는 옛날 에 그와 사랑을 나눈 여자들 가운데 레티샤를 따라갈 만한 여자는 하나도 없었다. 가장 먼저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녀의 연보라빛 눈이었다. 그 다음에 성모상 같이 고운 얼굴과 가냘픈 몸매와 은은하게 풍기는 체취가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화학자라면 아마 그녀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베르가모트향, 베티베르 향, 귤 향, 갈록시드 향, 백단향에 피레네 야생 염소의 사향이 살짝 곁들어진 것이라고 분석했을 것이 다. 그러나 자크 멜리에스는 그저 황홀한 기분으로 그 향기를 맡을 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목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잠시 뜸을 들인 후에야 말뜻 을 이해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했지? 그는 마음을 추스리려고 애를 썼다. 그녀가 던져주는 시각적이고 후각정이며 청각적인 정보들이 너무 많아서 그의 뇌는 포화 상태가 될 정도였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윽고 그가 우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오히려 제가 감사를 드려야죠. 인터뷰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는 줄 알고 있는데 이렇게 응해주셔서 말이에요." "아닙니다. 제가 오히려 빚을 졌습니다. 내가 이 사건을 제대로 보게 된 건 웰즈 기자 덕분입니다. 그런 분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되지요." "감사합니다. 제가 좋은 분을 알게 된 것 같군요. 우리의 대화를 녹음해도 되겠습니까?" "좋으실 대로 하십시요." 그는 몇 가지 의례적인 인사말을 주고받으면서도 최면에 걸린 사 람처럼 여전히 그 젊은 여인의 하얀 얼굴과, 앞머리를 늘어뜨리고 루이즈 브룩스 스타일로 깎은 아주 짙은 빛깔의 검은 머리와, 오똑 하게 볼가진 광대뼈 위로 길게 늘어진 연보라빛 눈에 넋을 잃고 있 었다. 레티샤 웰즈는 도툼한 입술에 핑크빛 연지를 연하게 바르고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자주빛 앙상블은 멋이 무엇인 줄 아는 디 자이너의 작품처럼 보였고 그녀의 보석에서도 몸가짐에서도 일류의 향취가 물씬했다. "담배 피워도 되겠습니까?" 그가 동의를 표시하며 재떨이를 내밀자 레티샤는 작은 궐련용 파 이프를 꺼냈다. 레티샤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아편 냄새가 섞인 푸 르스름한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내뿜었다. 그런 다음 가방에서 수첩 을 꺼내고 그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결국 멜리에스 씨는 부검을 요청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검 결과 무엇을 알아내셨나요?" "공포 그리고 독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둘 다 옳았다고 할 수 있겠군요. 그러나 부검이 모든 걸 다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검으로도 밝힐 수 없는 게 많이 있지요." "혈액에서도 독이 검출되었나요?" "아닙니다. 그러나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검출이 불가능 한 독도 있으니까요." "범죄 현장에서 증거가 될 만한 것을 찾으셨습니까?" "아니오. 전혀." "침입한 흔적은요?" "전혀 없습니다." "살타 형제를 살인할 만한 동기를 가진 사람이 있었나요?" "보도 자료를 통해 이미 발표한 것처럼 세바스티앵 살타는 도박을 하다가 많은 돈을 잃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 내심으로 확신하고 계신 게 있습니까?" "전엔 있었지만 이젠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내 쪽에서 물어 보고 싶은 게 있는데.... 당신은 정신과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조사 를 한것 같더군요. 그렇지요?" 연보라빛 눈동자에 놀라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대단하군요. 어떻게 아셨죠?" "그게 내 직업인걸요. 그래 뭘 좀 찾아내셨습니까? 세 사람에게 겁을 주어 죽음으로 몰아간 게 무엇인가요?" 레티샤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기자예요. 제 직업은 경찰에게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지 정보를 제공하는게 아니예요." "좋습니다. 그럼 간단한 거래를 하나 하기로 합시다. 그러나 꼭 응하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레티샤는 포개고 있던, 실크 스타킹에 싸인 가느다란 다리를 풀었다. "멜리에스 씨에게 두려움을 주는 게 있다면 뭐가 있지요?" 레티샤는 재떨이에 재를 떨려고 몸을 구부리면서 멜리에스를 올려다보았다. "아니예요. 대답하지 마세요. 그건 너무 사사로운 질문이군요. 제 질문이 좀 엉뚱했죠? 공포는 상당히 복잡한 감정이에요. 동굴 속의 원시인들이 가졌던 최초의 정서가 아마 공포였을 거예요. 두려움이 란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아주 강력한 어떤 것이지요. 두려 움은 우리의 상상력에 뿌리를 두고 있어요. 그래서 그것을 통제할 수가 없을거예요." 레티샤는 담배를 몇 모금 세게 빨고 재떨이에 비벼댔다. 그러고는 다시 머리를 들고 멜리에스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멜리에스 씨. 우리는 어떤 수수께끼에 맞닥뜨려 있어요. 그 수수께 기는 우리가 감당해 낼 만한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멜리에스 씨가 그 수수께끼를 회피할까봐 걱정이 돼서 그 기사를 썼어요." 레티샤는 녹음기를 껐다. "멜리에스 씨는 제가 이미 알고 있는 것 말고는 아무 얘기도 안 했어요. 그렇지만 저는 멜리에스 씨에게 알려드릴 게 하나 있어요." 레티샤는 벌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 살타 형제 사건은 멜리에스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흥 미 진진해요. 이 사건은 곧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될거예요." 멜리에스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 뭐 아시는 거 있습니까?" "다 아는 수가 있지요...." 매력적인 입술을 늘여 뜻 모를 미소를 머금고 연보라빛 눈의 가장 자리에 주름을 잡으면서 그녀가 말했다. 29. 불을 찾아서 103683호가 화학 정보실에 들어와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말 인상적인 곳이다. 액체 상태의 생생한 정보가 담긴 알들이 까마득히 늘어서 있다. 알 하나하나에 증언과 서술과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담 겨 있다. 알이 늘어선 줄 사이로 나아가는 동안에 클리푸니가 그 간 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클리푸니는 벨로캉의 금단 지역을 차 지하고나서 어머니 벨로키우키우니가 지하 동굴의 손가락들과 교류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머니는 손가락들 때문에 완전히 정 신이 혼미해져 있었다. 어머니는 그들이 완전하게 하나의 문명을 건 설했다고 믿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들에게 먹이를 공급했고, 그 대 신에 그들은 어머니에게 신기한 것들을 가르쳐주었다. 바퀴도 그런 것 가운데 하나다. 벨로키우키우니 여왕은 손가락들이 유익한 동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었다. 클리푸니는 그런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 모은 증언들이 일치하고 있다. 즉 '손 가락들이 벨로캉에 불을 질러서 그들을 이해하려고 했던 유일한 여 왕 개미인 벨로키우키우니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손가락들의 문명이 불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은 서글픈 사실이 다. 바로 그것 때문에 클리푸니는 그들과 더 이상 대화하지 않으려 했고 식량 공급을 중단했다. 바로 그것 때문에 클리푸니는 화강암 바닥에 뚫린 통로를 봉쇄했고 지구상에서 그들을 제거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똑같은 정보를 강조하는 첩보 개미들의 정보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즉 '손가락들은 불을 켜고 불을 가지고 놀며 불을 이용하여 물건 을 만든다.'는 것이다. 개미들은 이 무분별한 동물들이 계속 그런 짓을 하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다. 그것은 세계를 멸망으로 이끌어가 는 지름길이다. 벨로캉이 겪은 시련이 그것을 웅변으로 입증하고 있다. 불!.... 103683호가 진저리를 친다. 그는 이제 클리푸니가 왜 손 가락들을 혐오하는지 더 잘 알게 되었다. 개미들은 모두 불이 무엇 인지를 알고 있다. 그들 역시 옛날에 그 원소를 발견한 바 있다. 사 람들처럼 우연히 말이다. 번개가 어떤 관목을 후려치고 나서 불붙은 잔가지 하나가 풀 사이에 떨어졌다. 개미 하나가 거기로 다가가 자 세히 살펴보니 그 불덩어리는 주위에 모든 것을 시커멓게 만들고 있었다. 개미들은 신기한 것이 있으면 뭐든지 둥지 안으로 가져가려고 한 다. 불을 처음 발견했던 그때는 그것을 옮기는 데 실패했다. 그 뒤 로 몇 차례의 시도가 있었지만 역시 실패했다. 그런 뒤에 주도 면밀 한 척후 개미 하나가 마침내 불붙은 나뭇가지 하나를 그의 개미 둥 지 근처까지 옮겨오는 데 성공했다. 그는 처음에는 짧은 나뭇가지를 가지고 시도하다가 점점 긴 나뭇가지를 잡고 끌고 온 끝에 성공한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그는 태양의 조각들을 운반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동료들이 그의 노고를 치하하며 환대했다. 불이란 정말 신기한 것이다. 불은 열과 빛과 힘을 가져다주었다. 게다가 그 빛깔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빨강, 노랑, 하양, 파랑.... 불을 발견한 것은 겨우 5천만 년 전으로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었 다. 모듬살이 곤충들의 세계에서는 여전히 그 일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불꽃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다시 번개가 칠 때를 기다려야 했는데 유감스럽게 도 번개에 뒤이어 비가 내리는 경우가 많아서 그 비가 불을 꺼뜨리 고는 했다. 어떤 개미가 불붙은 보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잔가지로 지어진 도 시 안으로 그 불을 끌고 들어가자고 제안했다. 그 제안이 끔찍한 재 난을 초래했다. 불이 더 오래 지속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즉시 잔 가지 지붕을 태워버리고 수천 개의 알과 일개미와 병정개미의 목숨 을 앗아갔다. 혁신적인 제안을 내놓았던 그 개미는 칭찬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 나 그 때문에 불에 대한 탐구를 중단할 수는 없었다. 개미들은 무슨 일에서든 쉽게 물러서는 법이 없다.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그들은 언제나 가장 나쁜 해결책으로 시작을 하지만, 몇 차례의 수정과 재 수정을 거쳐 마침내는 가장 좋은 해결책을 찾아내고는 만다. 개미들은 오랫동안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골몰했다. 클리푸니는 그러한 그들의 노력을 기록한 기억 페로몬을 꺼낸다. 선조 개미들은 우선 불이 아주 파급력이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 자신에게 불을 붙이고 싶으면 그저 불 가까이에 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불은 부서지기도 아주 잘 부서졌다. 나 방이 날개를 퍼득거리기만 해도 까만 연기로 바뀐 뒤 공중으로 사라 져버렸다. 불을 끄고 싶을 때 개미들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편리한 방법은 불 위에 농도가 아주 낮은 개미산을 발사하는 것이었다. 실 험 정신이 강한 어떤 개미들은 잉걸불에 너무 강렬한 개미산을 쏘다 가 살아 있는 횃불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그로부터 75만 년이 지나서 개미들은 닥치는 대로 모든 것을 시도 하던 중에(개미 과학은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번개칠 때를 기 다리지 않고도 불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일개 미가 바싹 마른 나뭇잎 두 개를 서로 비비던 중 나뭇잎들이 연기를 일으키고 불이 붙는 것을 보았다. 다시 실험이 이루어지고 연구가 계속되었다. 그때부터 개미들은 불을 마음대로 피울 수 있게 되었다. 대발견의 뒤를 이어 환희의 시대가 도래했다. 둥지마다 거의 매일 같이 새로운 응용 기술이 개발되었다. 불은 너무 거추장스러운 나무 들을 없애버렸고, 아무리 단단한 물질이라도 부숴뜨렸으며, 겨울잠 에서 깨어난 개미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주었고, 병든 개미들에게 온 기를 주었으며, 대체로 사물의 빛깔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불은 군사용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불에 대한 열광이 시들 해지기 시작했다. 개미 네 마리가 불붙은 기다란 나뭇가지를 가지고 적의 도시로 뛰어들면 백만의 개미를 가진 도시가 30분도 안되어 사라져 버렸다. 산불이 일어나기도 했다. 개미들은 번져나가는 불길을 제대로 다 스리지 못했다. 어떤 것에 일단 불이 나면 바람만 한 줄기 불어도 크게 번졌다. 소방 개미들이 저농축 개미산을 쏘아 불길을 잡으려고 했지만 산불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관목 덤불에 불이 붙으면 금방 나무에서 나무로 번졌고, 단 하루 만에 30만 개미 정도가 아니라 3만 개의 보금자리가 시커먼 잿더미로 변했다. 화재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아무리 커다란 나무나 곤충도 불길 속에서 살아남지 못했고, 새들마저도 온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불에 대한 열광이 저주로 바뀌었다. 불을 폐기하자는 제안에 개미들은 만 장 일치로 동의했다. 예전의 환희는 완전히 사라졌다. 불은 너무나 위험했다. 모듬살이 곤충들은 모두 불을 저주하면서 다시는 사용하 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 후로 아무도 불에 접근하지 않았다. 나무에 번개가 떨어지면 거기에서 멀리 달아나게 되었고, 마른 나무가지에 불이 붙었을 때는 누구나 불을 끄기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었다. 그 가 르침은 대양을 건너 다른 대륙에도 전해졌다. 지구의 모든 개미와 모든 곤충들은 곧 불을 피해야 한다는 것과 특히 불을 다스리려고 해선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불길 속으로 달려드는 몇몇 종의 날파리와 나방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는 것은 불빛이라는 마약에 중독되어 있 기 때문이었다. 다른 곤충들은 불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엄격하게 지켰다. 만일 어떤 둥지나 어떤 개체가 전쟁에 이기기 위해 불을 사용하려고 들면, 크고 작은 다른 모든 곤충들이 즉시 동맹을 맺고 그 자를 응징했다. 클리푸니는 기억 페로몬을 제자리에 올려놓았다. <손가락들은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에서 금지된 무기를 사용했고 지금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손가락들의 문명은 불의 문명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숲 전체에 불을 놓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들의 문 명을 파괴해야 한다.> 여왕은 강렬한 확신이 밴 냄새를 발한다. 103683호에게는 의아하게 생각되는 것이 하나 있다. 클리푸니 자 신의 주장에 따르면 손가락들의 존재는 지엽적인 문제이다. 즉, 손 가락들은 지표면에 일시적으로 거주하는 세입자들이다.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거주할 세입자들이다. 그들이 지구상에 거주하게 된 지는 겨우 3백만 면 밖에 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보다 더 오랫 동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에 대해서 관여할 것 없이 땅거죽 위에서 대를 이어가며 살 다가 죽게 내버려두면 그만 아닙니까? 굳이 원정군을 보낼 이유가 있습니까?> 103683호가 더듬이를 닦고 묻는다. 그에 대한 클리푸니의 대답이 완강하다. <그들은 너무 위험해. 그들이 스스로 사라질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 103683호는 여전히 궁금증이 가시지 않는다. <도시 밑에 손가락들이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손가락들을 제 거하고 싶다면 그들을 없애버리는 것이 순서일텐데요.> 여왕은 103683호가 그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설명을 계속한다. <도시 밑에 있는 손가락들은 위협이 되지 않아. 그들은 그 동굴에 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 갇혀 있는 거지. 굶어 죽게 내버려두면 모 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 지금쯤이면 아마 그들은 시체가 되어 있을거야.> <안됐군요.> 여왕이 더듬이를 곧추세운다. <뭐라고? 자네 손가락들을 좋아하나? 세계의 끝을 탐험하면서 그 들과 대화라도 해본 적이 있다는 건가?> 병정개미도 더듬이를 마주 세운다. <아닙니다. 하지만 굴 속에 갇힌 손가락들이 죽는 것은 동물학의 발전을 위해 별로 바람직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 거대 한 동물의 관습이며 생김새를 제대로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원정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적이 어떤 자 들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세계의 끝으로 떠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치에 닿는 병정개미의 말이 여왕을 당황하게 만든다. <도시 밑에 있는 손가락들은 아주 커다란 횡재나 다름없어요. 우 리는 손가락들의 둥지 하나를 완전히 우리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겁 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이용하려 하지 않습니까?> 클리푸니는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다. 103683호가 옳다. 사실 속 가락들은 포로나 다름이 없다. 동물학 연구실에서 자기가 연구하는 진드기 류와 똑같은 신세인 것이다. 개암 껍질 안에 갇혀 있는 진드 기 류가 무한소의 실험 대상이라면 동굴 속에 갇혀 있는 손가락들은 무한대의 실험 대상이다.... 여왕은 한 순간 병정개미의 주장에 마음이 끌렸다. 그의 주장대로 손가락들의 둥지를 관리하고 아직 살아 있는 손가락들을 살려 대화 를 재개하는 것도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 나쁠 건 없을 것 같다. 그들을 길들여 거대한 탈것으로 바꾸어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먹 이를 주겠다는데 그들이 굴복하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다. 갑자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어디선가 특공대 개미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클리푸니에게 달려들 어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103683호는 뿔풍뎅이 축사에서 온 반체제 개미 하나가 여왕을 시해하려고 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103683호는 그 무모한 개미에게 달려들어 그가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위턱으로 쓰러뜨린다. 여왕은 시종 태연함을 유지한다. <이게 손가락들이 시킨 짓이라네. 손가락들은 바위 냄새 풍기는 병정개미들을 제 여왕도 기꺼이 죽이려는 광신자들로 만들어버렸지. 보게 103683호. 우리는 그들과 대화를 해선 안돼. 손가락들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라. 그들은 너무 위험해. 그들은 말 한 마디로도 우리 를 죽일 수 있는 자들이야.> 클리푸니는 도시 내에 반역 운동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여왕은 그 운동에 참가하고 있는 자들이 도시 바닥 밑 에서 고통받고 있는 손가락들과 계속 연락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 다. 게다가 여왕은 그들을 통해서 나름대로 손가락들을 연구하고 있 다. 여왕에게 헌신하는 첩보 개미들이 반체제 운동에 잠입하여 손가 락들이 둥지 내에 송신하는 모든 정보들을 알려주고 있다. 클리푸니 는 103683호가 반체제 개미들과 접촉한 사실도 알고 있다. 여왕은 그것을 오히려 잘된 일로 생각하고 있다. 103683호가 반체제 개미들 과 접촉하면서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바닥에 쓰러진 반체제 개미가 마지막 냄새를 발산하려고 힘을 모은다. <손가락들은 우리의 신이다.> 그 다음엔 아무 냄새가 없었다. 그는 죽었다. 여왕이 시체의 냄새를 맡는다. <'신'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이지?> 103683호 자신도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던진다. 여왕은 산란실을 오락가락하면서 한시바삐 손가락들을 죽여야 한다고 되뇐다. '그들 을 쓸어버려야 돼. 한 마리도 남기지 말고.' 여왕은 많은 그 병정개 미가 그 중차대한 과업을 실현하리라고 믿고 있다. 103683호는 여왕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군대를 모으기 위해 이틀의 말미를 달라고 한다. 이제 이틀 후면 진군이 시작된다. 세계에서 모든 손가락들을 몰아 내기 위한 대장정이.... 30. 신의 계시 <공물의 양을 늘리라. 목숨을 아끼지 말고 헌신하라. . 손가락들은 여왕이나 알 모다기보다 중요하다. 명심할지어다. 손가락들은 무소부재하고 무소불위하다. 손가락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신이기 때문이다. 손가락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위대하기 때문이다. 손가락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강하기 때문이다. 이는 진리의 말씀이니라.> 누군가가 그런 계시를 만들어 보내고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기 전 에 얼른 기계 앞을 떠났다. 31. 두 번째 도전 카롤린 노가르는 가족과 한자리에 모여 식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카롤린은 조용히 자기의 '입'을 다시 시작하려고 식사를 서둘렀다. 그녀 주위에서 식구들은 요란한 몸짓을 섞어가며 떠들어대고 있었 다. 음식을 서로 건네주기도 하고 우적우적 씹기도 하면서 갖가지 화제를 도마 위에 올리고 있었다. 한결같이 그녀가 경멸해 마지 않 는 화제들이었다. "어째 이렇게 덥냐!" 어머니가 말했다. "텔레비젼에서 기상 통보관은 삼복 더위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고 하던걸. 이게 다 지난 20세기 말의 환경 오염 때문이다." 아버지가 거들었다. "잘못은 할아버지들에게 있어요. 할아버지들은 지난 90년대에 마 구 지구를 오염시켰어요. 할아버지 세대 전부를 법정 앞으로 끌어내야 할 판이에요." 손아래 누이가 되바라진 소리를 했다.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은 카롤린 노가르 말고 세 명이 더 있을 뿐 이었지만, 카롤린은 그 나머지 세 사람과 어울리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우린 곧 영화관에 갈건데, 너도 같이 가겠니? 카롤린?" 어머니가 제안했다. "아뇨, 됐어요, 엄마. 집에서 할 일이 있어요." "밤 여덟신데?" "예, 중요한 일이예요." "싫으면 그만두려므나, 우리하고 놀러가는 것보다 남들 다 노는 시간에 혼자 집에서 일하는 게 더 좋다 이거지. 하여튼 못 말린다니까...." 카롤린 노가르는 마침내 자기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단단히 잠 갔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카롤린은 가방이 있는 곳으로 달려 갔다. 그녀는 거기에서 작은 알약들이 가득 든 둥그런 유리 그릇을 꺼내더니, 안에 든 것을 넓적한 금속 그릇 안에 쏟아넣고, 그 금속 그릇을 분젠 버너 위에 올려놓고 열을 가했다. 그러자 갈색의 죽 같은 물질이 생겼다. 거기에서 한 줄기 기체가 피어오르더니, 이어 잿빛 연기가 솟아오르고 불꽃이 피어올랐다. 불 꽃은 처음엔 연기에 가려 안 보이더니 이윽고 밝고 투명한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일을 하는 방식이 좀 구식이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카롤린은 자기 작품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여니 거의 붉은색에 가까운 적갈색 턱수염을 기른 남자가 나 타났다. 막시밀리앵 매커리어스는 은빛 줄에 메어 데리고 온 두 마 리의 그레이하운드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명령을 내리고는, 인사도 하기 전에 대뜸 물었다. "다 됐어요?" "예, 집에서 마지막 실험을 끝냈어요. 하지만 주된 작업은 실험실 에서 했어요." "좋습니다. 별 문제 없었지요?" "예, 전혀요." "아무도 알고 있는 사람 없지요?" "예, 아무도요." 카롤린 노가르는 황토색으로 변한 뜨거운 물질을 두툼한 병에 쏟 아붓고 병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제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 노가르 양은 쉬세요." 그가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자기들끼리 통하는 신호로 두 마리의 그레이하운드를 부른 다음, 그는 그 개들과 함게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다. 다시 혼자가 된 카를린 노가르는 무거운 짐에서 벗어난 느낌이 들 었다. 이제 그들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없을 것 같았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실패했던 일을 그들이 해내게 된 것이다. 카롤린은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마셨다. 그런 다음 작업복을 벗고 핑크빛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카롤린은 가운의 한쪽 소매에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실과 바늘을 챙겨 텔레비젼 앞에 앉았다. <알쏭달쏭 함정 퀴즈>가 나올 시간이었다. 카롤린 노가르는 수상 기를 전원에 연결했다. 텔레비젼. 도전자는 여전히 라미레 부인이었다. 생김새는 프랑스 보통 여자 들 모습 그대로이고, 해답이나 그 해답을 이끌어내게 된 논리적 과 정을 이야기할 때는 꾸밈없이 소심한 모습을 드러내는 여자였다. 사회자가 늘상 소리를 되풀이했다. -자, 어떠십니까, 답을 찾으셨습니까? 이 백색 판을 잘 보시고 시 청자들께 답을 말씀해 주십시오. 다음 줄에 나올 숫자는 무엇일까요? -뭐랄까, 문제가 정말 특이해요. 간단한 단위에서 출발하여 훨씬 더 복잡한 어떤 것을 향해 나아가는 삼각형 모양의 수열과 관계가 있어요. -훌륭하십니다! 라미레 부인. 그 길로 계속 가십시오. 그러면 답 을 찾아내실 겁니다. -첫머리에 '하나'를 가리키는 숫자가 있습니다. 그건 마치.... 마 치.... -시청자들께서 듣고 계십니다. 라미레 부인. 방청객들께서 부인을 격려해 주실 것입니다. 우뢰와 같은 박수 갈채. -자, 라미레 부인, 말씀을 계속하시죠. -어떤 경전의 한 구절 같습니다. 1이 나뉘어 두 개의 숫자가 됩니 다. 다시 그것은 네 개의 숫자가 됩니다. 그것은 어쩌면.... -어쩌면? -어떤 탄생의 전조 같은 것입니다. 원래의 알이 처음엔 둘로 나뉘 었다가 다음엔 넷으로 나뉘고, 그 다음엔 점점 더 복잡해집니다. 직 감적으로 저는 저 삼각형 모형의 수열에서 하나의 탄생을 떠올립니 다. 즉 하나의 존재가 출현하고 전개되는 모습으로 보여요. 이건 상 당히 형이상학적인 문제인 것 같아요. -맞습니다. 라미레 부인. 바로 그거예요. 저희가 아주 훌륭한 수 수께끼를 드렸죠? 부인의 통찰력과 방청객 여러분의 갈채에 걸맞는 수수께기입니다. 박수 갈채. 사회자가 긴장을 고조시켰다. -이 수열에 관통하는 규칙은 무엇일까요? 라미레 부인께서 말씀하 신 그 탄생의 역학은 무엇이지요? 도전자의 안타까워하는 표정. ' -모르겠어요.... 조커를 사용하겠어요. 방청석에서 실망한 듯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라미레 부인이 실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말이십니까, 라미레 여사? 조커 하나를 쓰시겠습니까? -달리 방법이 없잖아요? -유감이군요, 라미레 부인. 지금까지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멋지게 해오셨는데.... -이 수수께끼는 상당히 독특해요. 더 시간을 갖고 생각할 만한 가 치가 있어요. 그래서 도움을 받기 위해 조커를 쓴거예요. -좋습니다. 이미 첫번째 힌트는 드렸습니다. 생각나시죠? '영리한 사람일수록 답을 찾기가 더 어렵다.' 아시겠어요? 두 번째 힌트는 이렇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은 다 잊어버려야 한다.' 도전자의 실망한 표정.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건 부인께서 찾아내셔야죠. 제가 정신 분석학자는 아니지만, 부인을 돕기 위해서 정신의 내면으로 되돌아가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을 비우십시오. 논리와 선입견이라는 고정된 틀을 버 리고 그 자리에 공허를 채우십시요. -쉽지 않은데요. 생각으로 생각을 없애라는 말이 아닌가요? -당연히 어렵지요. 그래서 우리 프로그램의 이름이 바로 <알쏭달쏭.... -....함정퀴즈>! 방청석에서 일제히 말을 받았다. 방청객들의 얼굴에 만족스러워하 는 빛이 어려 있었다. 라미레 부인은 미간을 찡그리며 한숨을 쉬었다. 사회자는 기꺼이 돕고 싶다는 뜻의 몸짓을 했다. -조커를 쓰셨으니까 이 수열의 다음 줄 하나를 추가로 보실 권리가 있습니다. 그는 매직 펜을 들고, 1 11 12 1121 122111 112213 이라고 쓴 다음, 다음의 수를 덧붙였다. 12221131 라미레 부인의 낙담한 표정이 클로즈업되었다. 부인은 눈을 깜박 이며 '1', '2', '3'이라는 말들을 중얼거렸다. 그 수열은 마치 마른 자두가 든 카트르 카르과자의 제과법 같은 것을 부호로 나타낸 것 같았다. '3'의 비율에 특히 신경 쓸 것. '1'의 비율도 소홀히 하지 말것. -어떻습니까? 라미레 부인. 이제 감이 잡히십니까? 생각에 몰두하느라고 라미레 부인은 대답 대신에 '음-' 소리를 냈 다. 그 소리에는 '이번엔 답을 찾아낼 것 같아요'라는 뜻이 담겨 있 는 듯했다. 사회자는 라미레 부인의 숙고할 권리를 존중해 주면서 마무리 인사를 했다. -시청자 여러분. 오늘 보여드린 일곱 번째 줄에 주목해 주십시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변함없는 사랑 부탁드립니다. 박수 갈채, 종료 타이틀 백. 음악. 환호성. 카롤린 노가르는 텔레비젼을 껐다. 무슨 희미한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카롤린은 바느질을 끝냈다. 작은 구멍이 흔적이 감쪽같이 사 라졌다. 카롤린은 바느질 도구를 제자리에 갖다놓았다. 종이를 구길 때 나는 것 같은 소리가 다시 들렸다. 욕실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새앙쥐 소리 같지는 않았다. 새앙쥐 가 타일 바닥을 달리면서 그런 소리를 낼 리가 없었다. 그러면 도둑 일까? 욕실에서 볼일이 뭐가 있을까? 혹시나 해서 카롤린은 서랍장으로 가서 구경 6밀리미터 리볼버를 꺼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런 사태에 대비해서 숨겨둔 권총이었다. 침입자들에 대한 기습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카롤린은 텔레비젼을 다시 켜고 소리를 높인 다음, 발소리를 죽이고 욕실 쪽으로 다가갔다. 텔레비젼에서는 랩송을 부르는 어떤 그룹이 나와서 반항을 부추기 는 노래를 악을 쓰고 부르고 있었다. -당신들의 집, 당신들의 가게, 모두, 모두, 불태울거야. 모두, 모두, 모두, 카롤린 노가르는 두 손으로 권총을 꽉 잡고 문에 착 달라붙었다. 미국 영화에서 본 그대로를 흉내낸 것이었다. 잠시 뜸을 들였다가 카롤린은 문을 확 열어젖혔다.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소리는 분명히 거기에서 나고 있었다. 샤 워장 커튼 뒤에서 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리고 있었다. 카롤린은 날 랜 동작으로 커튼을 젖혔다. 카롤린은 눈앞에 벌어진 일을 더 잘 이해하려고 앞으로 나섰다가,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결국은 탄창의 탄알을 다 허비했다. 그녀 는 숨을 헐떡거리며 뒤걸음질쳤다. 방으로 돌아온 카롤린은 문을 단 단히 걸어 잠그고 기다렸다. 신경이 극도로 흥분되어 발작이 일어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래도 '그것들'이 문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문을 통과했다. 카롤린은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녔다. 그러면서 방 안의 자질구레 한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했다. 그 러나 그녀에게는 그런 적과 맞서 싸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32. 그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 103683호는 종아리 마디에 있는 털로 머리를 닦는다. 그는 자기가 지금 어느 편에 들어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 그는 손가락들을 무서워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을 모두 죽이라 는 사명을 띠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반체제 개미들의 명분에도 일 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을 배신해야 한다. 그는 스무 마리의 탐험 개미들을 이끌고 세계의 끝에 간 적이 있었 다. 그런데 이제 8만의 병력을 이끌고 가라고 하는데도, 그 수가 터 무니없이 적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음에 걸리는 것은 바로 그 반체제 운동이다. 그는 처음에 그들이 사려 깊은 모험가들일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그가 만난 자들은 반쯤 미친 자들이었고, 걸 핏하면 '신'이라는 뜻 모를 단어를 발산하는 자들이었다. 여왕의 태도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여왕은 너무 개미의 입장 만을 생각하고 있다. 그것도 정상은 아니다. 여왕은 모든 손가락들 을 죽이고 싶어하면서도 도시 밑에 사는 손가락들을 연구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른 생물 종들을 연구해야 밝은 미래가 보장된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도시 밑의 손가락 둥지를 활용할 생각은 안한다. 그들을 통해서 가장 진기하고 가장 놀라운 실험을 할 수 있을 텐데도 말이다. 클리푸니는 그에게 모든 것을 다 털어놓지 않았다. 반체제 개미들 도 마찬가지다. 다들 그를 무시하는 것이거나 그를 이용하려는 것이 다. 그는 자기가 여왕이나 반체제 개미들의 꼭두각시라고 느낀다. 어쩌면 동시에 양쪽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득 벨로캉 전체에 어떤 심각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 까하는 생각이 든다. 지구 위에 있는 어떤 개미 둥지에서도 일어난 적이 없는 일 말이다. 그렇다. 분명히 어떤 변화가 일고 있다. 벨로 캉에 있는 모든 개미들이 상식을 잃고 혼자만의 생각을 가지면서 마 음의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전보다 더 못난 개미들이 되어가고 있다. 벨로캉 개미들에게 돌연 변이가 일어난 것임에 틀리없다. 반체제 개미들은 돌연 변이체다. 클리푸니도 돌연 변이체다. 103683호 자신 도 하나의 독립된 단위로 자신을 생각하기 일쑤이므로 이제 정상적 인 개미가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벨로캉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 지고 있는 것일까?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묘한 이 표현을 구사하고 있 는 그 반체제 개미들을 움직이는 힘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신'이란 무엇인가? 103683호는 뿔풍뎅이 축사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33. 백과 사전 사자의 숭배 어떤 문명이 지혜로운 문명인가 아닌가를 가름하는 첫번째 요소는 '죽음의 의식'이다. 인간들의 시신을 쓰레기와 함께 버렸던 시절은 짐승이나 다름없었 다. 인간들이 시신을 매장하거나 화장하기 시작한 것은 문명사의 획 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사자를 돌보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계 위에 놓인 눈에 보이지 않는 피안의 세계를 상정하는 것이다. 또 사 자를 돌본다는 것은 인생을 이승에서 저승으로 옮겨가는 과정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종교적인 행동은 거기에서 유래한다. 지금까지 조사된 바에 따르면, 사자 숭배가 가장 먼저 행해진 것 은 지금으로부터 7만 년 전인 구석기 시대 중기의 일이었다. 당시에 몇몇 부족들은 시신을 길이 1.04미터, 너비 1미터, 높이 0.3미터인 묘혈에 매장하기 시작했다. 부족의 구성원들은 시신 옆에 고기 덩어 리와 부싯돌로 만든 무기들과 고인이 사냥한 동물의 머리를 놓아두 었다. 장례를 치르면서 부족 전체가 함께 모여서 식사를 했다. 개미 세계에서도, 그와 비슷한 일을 발견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 있는 어떤 개미들은 여왕개미가 죽은 뒤 며칠이 지나도록 계속 먹이를 갖 다준다. 개미들의 시체에서는 올레인산이 발산되기 때문에 여왕개미 가 죽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텐데도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놀라 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34. 투명 인간 자크 멜리에스 경정은 카롤린 노가르의 시체 앞에 무릎을 꿇고 있 었다. 시체의 얼굴을 살펴보니 눈은 뒤집혀 있고 입은 공포로 일그 러져 있었다. 이미 본 적이 있는, 공포로 짓눌린 그런 표정이었다. 그는 카위자크 형사에게로 몸을 돌렸다. "물론, 지문은 없겠지요. 에밀 형사?" "유감스럽게도 없습니다. 똑같은 일이 또 벌어졌습니다. 상처도 흉기도 없고, 침입한 흔적이나 단서도 없습니다. 완전히 오리 무중입니다." 경정은 껌을 꺼냈다. "문도 물론 잠겨 있었겠지요?" 그가 물었다. "자물쇠 세 개는 잠겨 있었는데, 두 개는 따져 있었습니다. 죽는 순간에 그 여자는 빗장을 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잠그려고 했던 건지 풀려고 했던 건지는 아직 모르잖아요?" 멜리에스는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몸을 기울여 손의 위치를 조사하 고 나서 소리쳤다. "열려고 했던 거군요! 범인은 내부에 있었고 여자는 도망을 치려 고 했군요. 여기에 가장 먼저 온 사람이 에밀 형사요?" "그렇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파리는 없던가요?" "파리요?" "그래요, 파리, 초파리도 상관없고요." "살타 형제네 집에서도 파리에 신경을 쓰시던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겁니까?" "아주 중요하지요. 파리는 탐정에게 아주 훌륭한 정보를 제공해 주지요. 내 교수 가운데 한 분은 파리를 제대로 조사하기만 하면 많 은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시곤 했어요." 에밀 형사는 도무지 못 믿겠다는 듯 입을 비죽거렸다. 현대적인 경찰 학교에서 겨우 그렇게 시시껄렁한 수사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니! 카위자크는 여전히 전통적인 수사 방법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래 도 그는 경정이 조사하는 수사 방법에 차질이 없도록 조치를 취해 두었었다. "살타 형제 사건이 생각나서 이번에는 창문을 닫힌 채로 그냥 두 었습니다. 만일 파리가 있었다면 지금도 여전히 여기에 있을 겁니 다. 그런데 파리에 집착하는 무슨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파리는 중요한 겁니다. 파리가 있으면 어딘가에 통로가 있는 것 이고 그게 없으면 이 집이 밀폐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방을 둘러보다가 경정은 마침내 하얀 천장의 한 모서리에서 파 리 한 마리를 발견했다. "저거 봐요. 에밀 형사. 저 위에 붙어 있는 거 보여요?" 사람들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게 거북살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 파리는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파리가 있으면 공중 어딘가에 파리 통로가 있기 마련이지요. 저 거보세요. 에밀 형사. 창문 위쪽에 작은 틈새가 있지요? 아마 파리 는 저기로 들어왔을거예요." < 파리는 잠시 공중을 선회하다가 안락 의자 위에 내려 앉았다. "여기서 보기에 저놈은 금파리인 것 같군요. 그러니까 제2군 파리지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멜리에스가 설명했다. "사람이 죽으면 파리들이 몰려듭니다. 그러나 아무 파리나 오는 것은 아니고 아무 때나 오는 것도 아닙니다. 날아오는 순서가 정해 져 있어요. 대개 청파리calyphra가 제일 먼저 도착합니다. 그래서 제1군 파리라고 부르죠. 청파리들은 사람이 죽은 지 5분이 지나면 날아옵니다. 청파리들은 더운 피를 좋아하지요. 땅이 쉬를 슬기에 좋지 않다 싶으면 그놈들은 살 속에 쉬를 깔기고 시체에서 역한 냄 새가 나자마자 날아가버립니다. 청파리의 뒤를 이어 날아오는 것이 제2군 파리인 금파리muscina입니다. 금파리들은 조금 썩은 고기를 좋아합니다. 그놈들이 고기를 먹고 쉬를 슬고 나면 다음엔 쉬파리 sarcophaga가 찾아오지요. 제3군 파리입니다. 쉬파리들은 더 많이 썩은 고기를 먹습니다. 마지막으로 치즈 파리piophila와 침 파리 ophira가 옵니다. 그런 식으로 다섯 무리의 파리가 우리의 시체를 차례차례 거쳐가는 겁니다. 각자 자기 몫에 만족하고 다른 파리들 은 건드리지 않아요." "사람도 별거 아니군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에밀 형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관점에 따라 다르지요. 시체 하나면 파리 수백 마리가 포식을 하지요." "그건 그렇다 치고, 그게 우리 수사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겁니까?" 자크 멜리에스는 돋보기를 들고 카롤린 노가르의 귀를 조사했다. "귓바퀴 안에 피가 있고 금파리의 쉬가 있어요. 아주 흥미로운데 요. 정상적인 경우라면 청파리의 쉬도 발견할 수 있을텐데 그게 보 이질 않아요. 그렇다면 제1군 파리들이 오지 않았다는 얘기예요. 이 건 아주 대단한 정보예요." 에밀 형사는 그제서야 파리의 관찰이 얼마나 훌륭한 정보를 제공 하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그럼 왜 청파리들이 오지 않았을까요?" "이 여자가 죽은 후 5분 동안 뭔가가 아니면 누군가가 시체 곁에 서 꾸물거리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요. 십중 팔구는 살인범이 그랬겠 지요. 그래서 청파리들이 감히 접근을 못했을거예요. 그런 다음 시 체가 썩기 시작하니까 청파리들은 시체에 더 이상 관심이 없었겠지 요. 그때 금파리들이 날아왔고, 그놈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시체 에 달려들 수가 있었지요. 그러니까 범인은 5분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 이상은 아닙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떠난겁니다." 에밀 형사는 그 추리에 경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멜리에스 자신은 그다지 만족스러워하는 낯빛이 아니었다. 그는 청파리가 접 근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마치 투명인간하고 대결하고 있는 느낌이...." 에밀 형사는 말을 중단했다. 맬리에스처럼 그도 욕실 쪽에서 나오는0 무슨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그곳으로 달려갔다. 샤워장의 커튼을 열어젖혔다.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투명 인간과 대결하는 느낌입니다. 그가 방 안에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 에밀 형사는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멜리에스는 생각에 잠긴 채 껌을 질겅거렸다. "투명 인간이 아니더라도 문이나 창문을 열지 않고 드나들 수는 있어요. 투명 인간만 상상하지 말고 이왕이면 벽을 뚫고 다니는 사 람도 상상해 보지 그래요!" 멜리에스는 투명한 밀랍을 씌운 피살자에게 몸을 돌렸다. 시체의 얼굴도 살타 형제의 시체와 마찬가지로 두려움 때문에 경직 경련이 일어나 있었다. 흉측한 모습이었다. "카롤린 노가르라는 이 여자 직업이 뭐예요? 서류에 뭐 특별한 거 있어요.?" 카위자크는 고인의 이름이 적힌 서류철에서 서류 몇 장을 들여다 보았다. "애인은 없고요. 사생활이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죽음을 당할 만 큼 원한을 사지도 않았습니다. 화학자로 일을 했습니다." "이 여자도요? 어디에서요?" 멜리에스가 놀라며 물었다. "CCG요." 두 사람은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CCG. 종합 화학 회사. 세바 스티앵 살타가 일했던 회사! 마침내 그들은 단지 우연의 산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똑같은 두 사건의 공통점을 찾아냈다. 드디어 실마리 하나가 잡힌 것이었다. # 35. 신이란 하나의 특별한 냄새다. 저 냄새가 그들이 있는 곳의 냄새다. 103683호는 냄새를 따라 반체제 개미들의 방으로 다시 들어간다. <당신들의 설명을 듣고 싶은 게 하나 있다.> 한 무리의 반체제 개미들이 103683호를 둘러싼다. 그들은 103683 호를 쉽게 죽일 수도 있을 터인데 그를 공격하지 않는다. <'신'이라는 게 무엇인가?> 절름발이 개미가 다시 대변인 구실을 자처한다. 절름발이 개미는 자기가 103683호에게 모든 걸 말해 준 것은 아니 지만, 손가락들을 지지하는 반체제 운동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 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에 전폭적인 신뢰의 증거가 된다고 역 설한다. 비밀 조직은 겨레의 경비 개미들에게 쫓기는 처지이기 때문 에 누구에게도 그렇게 쉽게 털어놓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절름발이 개미는 솔직함을 나타내려고 더듬이를 꼿꼿이 세우며 설명한다. <지금 벨로캉 안에서 뭔가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은 우 리 도시뿐만 아니라 연방의 도시, 나아가 모든 개미 종에게도 중요 한 일이다. 반체제 운동의 성공 여부에 따라서 수천 년 전의 진보를 앞당길 수도 있고 수천 년 뒤로 퇴보할 수도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 하나의 목숨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절대적인 비밀 유지와 아울러 각자의 희생이 필요하다. 그 점에서 103683호 자네의 역할이 중요하 다. 자네에게 모든 걸 털어놓지 않은 건 미안하다. 하지만 이제 모 든 걸 다 알려줄 생각이다.> 두 개미는 방의 한가운데서 더듬이를 결합하고 완전 소통의 의식 에 들어간다. 완전 소통 덕분에 개미는 상대방의 정신에 담긴 모든 것을 즉각 보고 느끼고 이해한다. 그것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라 기보다는 두 개미가 똑같은 순간을 함께 사는 것이다. 103683호와 절름발이 개미는 자기들의 더듬이 마디를 서로 결합한 다. 그럼으로써 열한 개의 입과 열한 개의 눈이 직접 결합되는 것이 다.머리가 둘 달린 단 하나의 곤충이 되는 셈이다. 절름발이 개미가 자기 이야기를 쏟아낸다. 작년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벨로캉이 잿더미가 되고 벨로키우키우 니 여왕이 죽고 나자, 바위 냄새를 풍기는 개미들은 존재할 이유가 사라졌다. 그들은 새 여왕 클리푸니가 일으킨 대대적인 소탕 작전에 맞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바위 냄새를 풍기는 개미들은 반체 제 개미들이 되어 이 은신처로 숨어들었다. 그 후 그들은 화강암 바 닥 속으로 난 통로를 다시 열고 식량을 훔쳐서 손가락들에게 공급했 다. 그들은 손가락들의 사절인 리빙스턴 박사와 대화를 계속했다. 처음에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리빙스턴 박사는 '우리 는 배고프다', '왜 여왕은 우리와 대화하기를 거부하는가?'와 같은 간단한 메세지를 전했다. 손가락들은 반체제 개미들의 활동에 관한 소식을 계속 전해 듣고 있었다. 그들은 반체제 개미들을 설득하여 되도록 은밀하게 식량을 훔치기 위하여 특공 작전을 감행하게 했다. 손가락들이 요구하는 먹이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다른 개미들에게 들키지 않고 그들에게 먹이를 공급하는 것이 반드시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그래도 모든 일이 정상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이루어졌다. 그러던 어느날, 손가락들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표현이 담긴 메세지를 보내 왔다. 페로몬의 냄새가 이상했다. 손가락들은 훈신조의 냄새로 개미 들이 손가락들을 과소 평가하고 있으며, 이제껏 그런 사실을 감추어 왔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개미들의 '신'이라고 주장했다. 개미들은 신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손가락들은 신이 무엇인지를 설명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신 은 세계를 건설한 동물들이며 개미들은 모두 그들을 '섬겨야 한다' 는 것이었다. 다른 개미 하나가 와서 103683호화 절름발이 개미 사이의 완전 소 통을 방해한다. 그 개미가 열렬하게 자기 주장을 펼치기 시작한다. <신들은 모든 것을 만들었다. 신들은 무소불위하며 무소부재하다. 그들은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현 실은 그들이 우리를 실험하기 위해 꾸며놓은 무대에 불과하다. 비가 내리는 것은 신들이 물을 뿌리기 때문이고, 날씨가 더운 것 은 신들이 태양의 열기를 높이기 때문이며, 날씨가 추운 것은 그들 이 태양의 열기를 낮추기 때문이다. 손가락들은 신이다.> 절름발이 개미는 그날 손가락들이 리빙스턴 박사를 통해 전해 온 놀라운 이야기를 103683호에게 옮겨준다. <손가락 신들이 없다면 이 세계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 다. 개미들은 그들의 창조물이다. 개미들은 손가락들이 그저 즐기기 위해서 꾸며놓은 가공의 세계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103683호는 당혹감에 빠진다. 그러한 능력을 가진 손가락들이 어 째서 도시 바닥 밑에서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그들 은 지하에 갇혀 있는 것일까? 어째서 그들은 개미 한 마리가 자기들 을 상대로 원정군을 파견하려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일까? 절름발이 개미는 설명을 덧붙인다. <물론 리빙스턴 박사의 주장에 몇 가지 헛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 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세계가 어떻게 지금 과 같은 모습이 되었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누구 인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신'이라는 개념이 그 모든 질 문에 답하고 있다.> 어쨌든 씨앗은 이미 뿌려졌다. 리빙스턴 박사가 전해 준 그 최초 의 신의 가르침은 한 무리의 반체제 개미들을 사로잡았고 다른 많은 개미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 뒤로 며칠간은 '신'에 대한 언급이 빠진 정상적인 메시지만 이어졌다. 그러나 반체제 개미들은 그런 정 상적인 메시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때 리빙스턴 박사의 더듬이에 서 마음을 사로잡는 그 '신의' 계시가 다시 울렸다. 그 계시는 손가 락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음을 다시 일깨우면서, 이 세상에 우연은 없으며 개미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기록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신들'은 자신들을 떠받들지 않거나 공양하지 않는 자들은 온전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103683호는 놀라움에 더듬이를 곧추세운다. 거대한 동물들이 세계 의 거주자들을 하나하나 감시하면서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은 너무나 터무니없어 보인다. 그도 곧잘 개미의 표준을 벗어난 상상을 하긴 하지만 그런 생각은 꿈에서도 떠올린 적이 없었다. 모든 거주 자 들을 감시하다니, 그렇게 손가락들은 할 일이 없단 말인가. 그래도 103683호는 절름발이 개미의 이야기에 계속 더듬이를 기울인다. 반체제 개미들은 곧 리빙스턴 박사가 완전히 다른 정신이 담긴 두 종류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자 리빙스턴 박사가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신을 믿는 개미들만 더듬이를 기울이고 다른 개미들은 뒤로 물러섰다. 또 리빙스턴 박사가 '정상적인' 화제 를 들고 나올 때는 신을 믿는 개미들이 자리를 떴다. 그 결과 손가 락들을 지지하는 반체제 개미들 내부에 조금씩 분열이 나타났다. 신 을 믿는 자들이 있었고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신을 믿지 않는 개미들이 생각하기에, 신을 믿는 자들은 개미 문화에 낯선, 완 전히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두 개미들 사이에 불화 가 생기지는 않았다. 103683호는 절름발이 개미와 결합하고 있던 더듬이를 풀고, 그것 을 닦은 뒤에 딱히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주위의 개미들에게 묻는다. <당신들 중에 신을 믿는 개미가 누구인가?> 한 개미가 앞으로 나선다. <나는 23호라고 한다. 나는 전능한 신의 존재를 믿는다.> 절름발이 개미가 방백을 하듯 103683호에게 넌지시 일러준다. <신을 믿는 자들은 저렇게 틀에 박힌 문구들을 되풀이한다. 대개 는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저러지. 하지만 알고 모르고가 저 들에게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다. 리빙스턴 박사가 전해주는 메 시지가 이해하기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저들은 더 열심히 그것을 되풀이한다.> 103683호는 리빙스턴 박사라는 손가락들의 사절이 어떻게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지닐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 다. 그러자 절름발이 개미가 대답한다. <그게 손가락들의 위대한 신비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중 성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단순한 것이 복잡한 것과 나 란히 있으며, 일상적인 페로몬이 추상적인 메시지와 나란히 있다.> 그러면서 절름발이 개미는 지금은 신을 믿는 자들이 소수이지만 그들 편이 점점 많아질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때 한 젊은 개미가 나방 고치 하나를 끌면서 다가온다. 103683 호가 축사 입구에 묻어놓았던 고치이다. <이건 당신 겁니까?> 103683호는 그렇다는 뜻의 페로몬을 발하고 그 개미 쪽으로 더듬 이를 내밀며 묻는다. <그런데 자네는 어느 쪽인가? 신을 믿는 쪽인가? 안 믿는 쪽인가?> 젊은 개미는 머뭇거리며 머리를 숙인다. 그는 자기에게 페로몬을 발하고 있는 그 개미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다. 산전 수전을 다 겪은 그 유명한 병정개미가 아닌가. 젊은 개미는 신중하게 대답해야겠다 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뇌 깊은 곳으로부터 느닷없이 말들이 튀어나온다. <나는 24호라고 합니다. 나는 전능한 신의 존재를 믿고 있습니다.> 36. 백과 사전 사고 인간의 사고는 무슨 일이든 이루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1950년 대에 있었던 일이다. 영국의 컨테이너 운반선 한 척이 화 물을 양륙하기 위하여 스코틀랜드의 한 항구에 닻을 내렸다. 포르투 갈 산 마디라 포도주를 운반하는 배였다. 한 선원이 모든 짐이 다 부려졌는지를 확인하려고 어떤 냉동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다. 그 때 그가 안에 있는 것을 모르는 다른 선원이 밖에서 냉동실 문을 닫 아버렸다. 안에 갇힌 선원은 있는 힘을 다해서 벽을 두드렸지만 아 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고 배는 포루투갈을 향해 다시 떠났다. 냉동실 안에 식량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선원은 자기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힘을 내서 쇳조각 하 나를 들고 냉동실 벽 위에 자기가 겪은 고난의 이야기를 시간별로 날짜별로 새겨나갔다. 그는 죽음의 고통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냉기 가 코와 손가락과 발가락을 꽁꽁 얼리고 몸을 마비시키는 과정을 적 었고, 찬 공기에 언 부위가 견딜 수 없이 따끔거리는 상처로 변해가 는 과정을 묘사했으며, 자기의 온몸이 조금씩 굳어지면서 하나의 얼 음덩어리가 되어가는 과정을 기록했다. 배가 리스본에 닻을 내렸을 때, 냉동 컨테이너의 문을 연 선장은 죽어 있는 선원을 발견했다. 선장은 벽에 꼼꼼하게 새겨놓은 고통의 일기를 읽었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것은 그게 아니었다. 선장은 컨 테이너 안의 온도를 재 보았다. 온도계는 섭씨 19도를 가리키고 있 었다. 그곳은 화물이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에서 돌아 오는 항해 동안 냉동장치가 내내 작동하고 있지 않았다. 그 선원은 단지 자기가 춥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었다. 그는 자기 혼자만의 상상 때문에 죽은 것이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37. 메르쿠리우스 임무 <리빙스턴 박사를 만나고 싶다.> 그러나 반체제 개미들은 103683호의 소원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들은 일제히 더듬이를 세우고 103683호의 의도를 탐색한다. <우리가 자네를 필요로 하는 것은 다른 일 때문이다.> 절름발이 개미가 설명한다. 어제 103683호가 여왕 개미를 만나고 있는 동안에 한 무리의 반체제 개미들이 화강암 속으로 내려가서 리 빙스턴 박사를 만났다. 그들은 리빙스턴 박사에게 손가락들을 치기 (위한 원정이 준비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어느 쪽 말을 전하는 리빙스턴 박사였는가? 신과 관계된 쪽인가, 신과 관계가 없는 쪽인가?> <신과 관계가 없는 쪽이다. 합리적이고 구체적이며, 모든 더듬이 가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하고 직접적인 메세지를 전하는 리빙스턴 박 사였다. 어쨌든, 리빙스턴 박사와 그를 통해서 자기들 의사를 표시 하는 손가락들은, 모든 손가락들을 없애기 위해 세계의 끝으로 원정 대가 파견된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그것을 아주 좋은 소식으로 받아들였다. 심지어 놓칠 수 없 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손가락들은 오랫동안 숙고하고 난 뒤에, 리빙스턴 박사를 통해서 어떤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지시 사항들을 전달했다. 그 임무 를 그들은 '메르쿠리우스 임무'라고 불렀다(메르쿠리우스는 로마 신 화에 나오는 신의 이름으로 다른 신들의 심부름꾼 노릇을 한다). 그 임무는 동방 원정과 연결되어 있다. 그 원정을 수행함과 동시에 이 룰수 있는 일이다. 벨로캉 군대를 이끌고 가는 것이 자네이므로, 그 임무의 적임자도 자네일세.> 절름발이 개미는 103683호에게 그의 새로운 임무가 무엇인지를 설 명하고 한마디를 덧붙인다. <명심하게. 대단히 중요한 일이니 꼭 성사시켜야 하네. 메르쿠리 우스 임무는 세계의 판도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네.> 38. 바위 밑 동굴에서 "그 개미가 메르쿠리우스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까요?" 오귀스타 할머니는 이제 막 개미들에게 자기의 계획을 제시하고 난 뒤였다. 할머니는 류머티즘 때문에 보기 흉해진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제발, 그 작은 불개미가 해내야 할텐데!" 모두들 입을 다물고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빙그레 미소를 짓는 사 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이제 그 반체제 개미들을 믿어야만 했다. 달 리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메르쿠리우스 임무를 맡은 개미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지만, 그 개미가 죽음을 당하지 않기를 빌었다. 오귀스타 할머니는 눈을 감았다. 지하 수 미터의 이 동굴에 내려 온 지도 벌써 1년이 되었다. 백 살이 시작될 때 들어와서 이제 백 하고도 한 살이 되었다. 할머니는 그간의 모든 일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맨 먼저 아들 에드몽이 퐁텐블로 숲 기슭의 시바리트 가 3번지에 자리를 잡았다. 며느리가 죽은 뒤의 일이었다. 몇 년 후에 아들도 세상을 떠났다. 에드몽은 상속자인 조카 조나탕에게 편지 한 통을 남겼다. '특히 당부하건대, 지하실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내려가지 말 것!'이라는 당한 문장의 충고가 적힌 이상한 편지였다. 나중에야 오귀스타 할머니는 그것이 가장 효과적인 부추김이었다 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그것은 감자의 소비를 권장하기 위해 파 르망티에 썼던 방법과 같은 것이었다. 파르망티에는 울타리를 친 밭 에 감자를 심은 다음, 울타리에 '절대로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게시 판들을 빙 둘러가며 설치해 놓고, 사람들이 앞으로 감자를 많이 먹 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게시판이 설치된 첫날 밤부터 서리꾼들이 그 귀한 덩이줄기들을 훔쳐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세기가 흐른 뒤에 감자는 세계인의 주요한 식량의 하나가 되었다. 조나탕 웰즈는 결국 금단의 지하실로 내려왔고 다시는 올라가지 않았다. 그의 아내 뤼시가 용감하게도 그를 찾으러 내려왔고 이어 그의 아들 니콜라도 내려왔다. 그 뒤를 이어 갈랭 형사의 지휘를 받 으며 소방대원들이 내로왔고 빌솅 경정이 이끄는 치안 대원들이 내 려왔다. 마지막으로 오귀스타 할머니 자신이 자종 브라젤과 다니엘 로젠펠트를 데리고 내려왔다. 다 합해서 스물한 사람이 끝없이 이어진 나선 계단을 달려 내려왔 다. 모두가 쥐들과 마주쳤고, 성냥개비 여섯 개로 네 개의 정삼각형 을 만드는 수수께끼를 풀었다. 또 어머니 자궁을 빠져나올 때처럼 몸을 압축시키는 통발을 지나왔다. 그 다음에는 다시 나선 계단을 올라갔고 허방다리에 빠졌다. 사람들은 모두 소아적인 공포증과 무 의식의 함정을 이겨냈으며 탈진할 만큼 힘겨움과 시체들에 대한 두 려움을 극복했다. 멀고 험한 미래를 헤쳐나와서 그들은 지하 사원을 발견했다. 그 사원은 거대한 화강암 밑에 만들어진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물이었고 바로 위에는 개미 왕국이 하나 있었다. 조나탕은 그들에게 에드몽 웰즈의 비밀 실험실과 에드몽 웰즈의 천재성을 입증하는 발명품을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 '로제타 석'이라고 명명된 기계가 있었다. 개미들의 냄새 언어를 이해하고 개미들과 대화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기계였다. 그 기계에서 대롱 하나가 나와 탐지기에 연결되어 있었 다. 그 탐지기는 아주 정확하게 만들어진 플라스틱 개미로서 마이크 와 스피커 구실을 겸하고 있었다. 그 개미 로봇이 개미 세계로 파견 된 그들의 사절, 리빙스턴 박사였다. 그 통역자를 매개로 삼아 에드몽 웰즈는 여왕개미 벨로키우키우니 와 대화를 나누었다. 에드몽과 벨로키우키우니는 많은 이야기를 나 눌 시간을 갖지는 못했지만, 대등한 수준을 가진 두 개의 대문명이 만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판단에 도달했다. 조나탕은 삼촌이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계승했고 지하에 내려온 모든 사람들을 자기의 열정에 끌어들였다. 그는 곧잘 그들이 외계인 과 대화하려고 애쓰는 우주선 속의 우주 비행사들과 같다고 말하곤 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실험은 우리 세대의 경험 중에서 가장 매 혹적인 것이 될지 몰라요. 개미와 대화하는 일에 도달하지 못한다 면, 우리는 지구상에 있는 것이든 외계에 있는 것인든 지능을 가진 어떠한 생명체와도 대화할 수가 없을 거예요.' 그는 단언했다. 조나탕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생각도 너무 이른 때에 나타나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이다. 그들의 이상주 의적인 공동체는 얼마 안 가서 삐끗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주 미묘한 문제들에 봉착했고, 아주 사소한 문제들 때문에 방해를 받았다. 어느 날 소방대원 한 사람이 조나탕에게 불쑥 지껄였다. "우리가 우주선 속의 우주 비행사들과 같다는 자네 얘기에 어는 정도는 동감일세, 그러나 우주 비행사들이 우주선에 들어갈 때는 남 자와 여자가 동수가 되도록 배려를 하지. 그런데 우리는 이게 뭔가. 한창 나이의 남자가 열여덟 명인데 여자는 하나뿐이니, 할머니하고 어린애는 빼고 말이야." 그 말에 조나탕은 대뜸 이렇게 대답했다. "개미 세계에서도 수개미 열여덟 마리에 암개미는 한 마리 뿐이라네!" 그들은 웃음으로 그 문제를 넘겨버렸다. 그들은 벨로키우키우니 여왕이 죽었다는 것과 그 뒤를 계승한 여 왕 개미가 그들과 대화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위 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별로 아는 게 없었다. 새 여왕개미 는 급기야 식량 공급을 단절했다. 대화가 끊기고 식량 공급이 중단되자 그들이 실험하고 있던 공동 체는 하나의 지옥이 되어버렸다. 스물한 사람이 땅 속에 갇혀서 기 아에 허덕이고 있었다. 결코 헤쳐나가기 쉬운 상황이 아니었다. 어느 날 알랭 빌솅 경정은 개미들이 날라다 주는 식량 통이 완전 히 바닥난 것을 발견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식량은 버섯뿐이었 다. 개미들에게서 재배하는 법을 배워 수확한 버섯이었다. 그들은 그것만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지하수가 있어서 신선한 물 은 부족하지 않았고, 통풍 구멍이 있어서 공기도 충분했다. 그러나 물과 공기와 버섯만으로 버티기는 너무나 힘겨웠다. 절식 도 이만저만한 절식이 아니었다. 참다 참다 못한 치안 대원 하나가 기어이 이성을 잃고 말았다. 고 기! 그는 살코기를 달라고 때를 썼다. 그는 제비를 뽑아서 다른 사 람들에게 싱싱한 고기가 되어줄 사람을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농담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오귀스타 할머니는 그날 그 참담한 장면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 하게 기억하고 있다. "난 먹고 싶어!" 그 치안 대원이 악을 썼다. "하지만 먹을 게 없잖아." "왜 없다고 그래. 우리가 있잖아! 우리들 서로가 서로에게 먹거리 가 될 수 있어. 제비로 몇 사람을 뽑아서 다른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희생시켜야 돼." 조나탕 웰즈가 벌떡 일어났다. "우리는 짐승이 아니야 짐승들이나 서로 잡아먹는거야. 우린 인간 이야. 인간이란 말이야!" "자네보고 사람 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조 나탕. 먹고 안 먹고는 자네 마음이야.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고기 를 제공할 사람이 자네가 될 수도 있어."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 치안 대원은 자기 동료 한 사람에게 몸짓 으로 신호를 보냈다. 미리 짠 듯한 몸짓이었다. 그들은 함께 달려들 어 조나탕을 껴안고 때리려고 했다. 조나탕은 주먹으로 후려치면서 그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니콜라 웰즈가 난투극에 끼여들었다. 난투극이 확대되었다. 사람 고기를 먹는 것에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로 편이 갈렸다. 곧 모든 사람들이 뒤엉켜 싸웠고,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주먹질과 발길질에는 상대를 죽여야 겠다는 의지가 실려 있었다. 사람 고기를 먹겠다는 사람들은 자기들 의 뜻을 효과적으로 이루려고, 깨진 병 조각과 칼과 나무 막대기를 움켜쥐었다. 오귀스타 할머니와 뤼시와 어린 니콜라까지도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손톱으로 할퀴고 발로 차고 주먹을 휘둘렀다. 할머니는 입이 닿을 만한 거리로 지나가는 어떤 팔뚝을 물기도 했다. 그러나 할머 니의 틀니만 뚝 부러졌을 뿐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사람 근육이 이 렇게 단단한데…A, 그걸 먹으려 하다니. 지하 수 미터 되는 곳에 고립된 사람들이 갇힌 짐승들처럼 으르렁 거리며 싸웠다. 고양이 스물한 마리를 바닥 면적이 한 평 밖에 안 되는 상자 안에 한 달 동안 가두어두면, 저희들끼리 맹렬하게 싸우 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날, 인간 사회를 진보시키겠다던 이상주 의자 집단이 벌였던 난투극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경찰도 없고 증인도 없는 상태에서 그들은 자제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사망자가 하나 생겼다. 소방대원 하나가 칼에 찔려 죽었던 것이 다. 싸우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즉시 싸움을 중단하고 시체를 바 라보았다. 죽은 사람을 먹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영혼에 고요가 찾아들었다. 다니엘 로젠펠트 교수가 싸움 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타락했어! 동굴 속에 살던 원시인의 속성이 여전히 우리 내부에 도사리고 있어. 교양과 예의의 너울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그 게 너무 얇아서 별로 깊이 긁지 않아도 그 원시인의 속성이 튀어나 오는거야. 5천 년 문명의 무게가 이것밖에 안되는걸세. (그는 한숨 을 쉬었다.) 먹을 것 때문에 지금 우리가 서로 죽이는 광경을 개미 들이 본다면 우리를 얼마나 비웃겠는가!" "하지만...." 치안 대원 하나가 끼여들려고 했다. "입 다물게, 인간 버러지 같으니라구!" 교수는 버럭 고함을 지르고 말을 이었다. "모듬살이 곤충이라면, 하다못해 바퀴벌레도 방금 우리가 한 것 같은 그런 행동은 절대로 안 한다네. 우리는 스스로를 하느님이 지 으신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런데 이게 뭔가, 코웃음이 절로 나오지 않나 말일세. 미래 인간의 선구적인 모 습을 보일 책임이 있는 집단이 마치 쥐 떼들처럼 행동하고 있어. 보 게, 우리의 인간성으로 우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 보란 말일세." 아무도 대꾸가 없었다. 모두가 소방대원의 시체에게로 다시 눈길 을 떨구었다. 다른 말이 없었는데도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사원 한 귀퉁이에 그를 위한 무덤을 팠다. 그들은 간단한 기도문을 옰조리면 서 그를 묻었다. 극단적인 폭력만이 일거에 중단시킬 수 있었다. 그 들은 자기들의 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고 자기들의 상처를 핥았다. "선생님의 도덕 군자 같은 말씀에 토를 달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 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가 장차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어요." 제라르 갈랭 형사가 말했다. 서로를 잡아먹겠다는 생각은 확실히 사라졌지만, 그러나 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무엇이 있는 가? 그가 제안을 했다. "우리 모두 동시에 자살을 해버리면 어떨까요? 그러면 우리는 고 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새 여왕개미 클리푸니가 안겨준 모 욕도 씻을 수 있을거예요." 사람들은 그 제안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갈랭 형사는 분 통을 터뜨렸다. "에이 빌어먹을. 개미들이 왜 우리에게 그리 못되게 구는거지? 우 리는 그들에게 대화를 시도한 유일한 인간들이 아닌가. 그것도 자네 들의 언어로 말이야. 그것에 대한 보답이 겨우 이렇게 우리를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이라니. 이거야 원." "그런 거라면 별로 놀라운 것도 없네. 인간 세계에서도 그런 일은 종종 있었지. 인질극이 성행하던 시대에 레바논에서 납치자들은 아 랍어 할 줄 아는 사람들을 먼저 죽였다네. 그들이 자기네들 말을 알 아듣는게 두려웠던거지. 아마 클리푸니도 우리가 자기들 언어를 이 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서워하는 것일걸세." "우리가 서로 잡아먹거나 자살하는 일 없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꼭 찾아야 돼요." 조나탕이 소리쳤다. 그들은 침묵에 잠겨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뱃속이 비어 있어서 인지 그들의 정신은 더욱 활발하게 움직였다. 이윽고 자종 브라젤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네...." 오귀스타 할머니는 그의 말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는다. 자종 브라 젤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 제2부 개미의 날 두 번째 비밀 지하의 신들 39. 원정 준비 <자네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나?> 질문을 받은 개미는 대답을 못 하고 있다가 되묻는다. <자네는 손가락을 죽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나?> <전혀 모르겠어.> 도시 곳곳에서 병정개미들이 무리를 지어 손가락들을 치러 가는 대원정을 준비하고 있다. 보병 개미들은 위턱을 갈고 포수 개미들은 주머니에 개미산을 채운다. 기병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발 이 빠른 보병 개미들은 다리의 털을 자르고 있다. 적들에게 죽음과 페허를 뿌리러 돌진해 갈 때 공기의 저항을 조금이라도 덜 받으려는 것이다. 모두가 손가락들과 세계의 끝과 그 괴물들을 박멸할 수 있게 해줄 새로운 전투 기술에 대한 이야기들만 하고 있었다. 개미들은 이 원정을 위험하긴 하지만 아주 흥미 있는 사냥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포수 개미 하나가 60도짜리 개미산을 채우고 있다. 독의 농도가 너무 진해서 그의 배끝에서 김이 피어오른다. <우리는 이것으로 손가락들을 해치울 것이다.> 그가 의기양양하게 페로몬을 발한다. 옛날에 뱀 한 마리를 죽인 적이 있다고 주장하는 한 병정개미가 더듬이를 닦으면서 자기 의견을 밝힌다. <손가락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사납지는 않을거야.> 사실 손가락들을 상대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아는 개미는 하 나도 없다. 클리푸니가 원정군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대부분의 벨 로캉 개미들은 손가락들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전설로만 여기고 손 가락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몇몇 병정개미들은 세계의 끝을 다녀온 탐험 개미 103683호가 자 기들을 이끌 것이라고 알려준다. 그 경험 많은 개미가 함께 참가한 다는 사실에 모든 병정개미들은 즐거워한다. 병정개미들이 작은 무리를 지어 꿀단지 개미들의 방으로 간다. 당 분을 가득 채워 힘을 얻으려는 것이다. 병정개미들은 언제 출발 신 호가 내려질지 모르지만 모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반체제 개 미 열 마리가 무장한 병정개미들의 무리 속에 조심스럽게 스며든다. 그들은 아무 페로몬도 발산하지 않으면서, 방 안에 떠도는 페로몬들 을 주의깊게 끌어모으고 있다. 그들의 더듬이가 계속해서 바르르 떨린다. 40. 통째로 들려간 개미 도시 페로몬: 탐험 보고 정보 출처: 비생식 병정개미 계급의 사냥 개미 주제: 중대한 사고 정보 제공자: 척후 개미 230호 그 재난은 오늘 아침 이른 시간에 일어났다. 하늘이 갑자기 컴컴 해졌다. 손가락들이 연방의 한 도시인 지울리캉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정예 군단들이 중무장한 포수 개미들의 부대와 함께 즉시 싸우러 나갔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지만 허사였다. 손가락들이 나타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어마어마하게 큰 판판하고 단단한 물건이 땅을 가르 더니 도시 바로 옆으로 쳐들어와 방들을 토막내고 알들을 으깨고 통 로를 잘라버렸다. 그러고 나서 그 판판한 물건은 온 도시를 흔들어 대다가 위로 들어올렸다. 놀랍게도 도시 전체를 들어올렸다. 그것도 단 한번에!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우리는 투명하고 질긴 커다란 껍 질 같은 것 안으로 부어졌다. 우리 도시는 위아래가 거꾸로 뒤집혔 다. 산란실들이 전복되었고 곡물 창고가 무너졌다. 우리 알들은 사 방으로 흩어졌다. 우리 여왕이 포로가 되었고 상처를 입었다. 나는 그 커다랗고 투명한 껍질이 몇 차례 심하게 들썩거리는 바람에 때맞 추어 밖으로 도망칠 수가 있었다. 도처에 손가락들의 냄새가 진동했다. 41. 에드몽폴리스 레티샤 웰즈는 퐁텐블로 숲에서 방금 파온 개미집을 커다란 어항 안에 집어넣었다. 레티샤는 얼굴을 미지근한 유리에 바짝 붙이고 안 을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관찰하고 있는 개미들에게는 그녀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 다. 새로 파온 그 불개미떼는 활기가 있어 보인다. 레티샤는 전에도 몇 차례 개미들을 집에 옮겨다놓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별로 활기가 없는 개미였다. 빨강개미나 까망개미들은 웬지 모 르게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 개미들은 먹이를 주어도 먹이가 낯선 탓인지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레티샤가 손을 내밀기가 무섭게 그 개미들은 달아나버렸다. 그렇게 일 주일이 지나고 나면 그 개미들은 쇠약해져 버렸다. 개미들이 모두 영리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기 는 커녕 조금 우둔한 종도 적지 않았다. 보잘것 없는 일상의 삶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그 개미들은 터무니없는 절망에 빠져버렸다. 그러나 그 불개미들은 그녀에게 대단한 만족감을 느끼게 해주었 다. 그 개미들은 끊임없이 일에 몰두했고, 잔가지들을 끌고 다녔으 며, 서로 더듬이를 비비기도 하고 밀고 당기며 싸우기도 했다. 그 개미들은 그때까지 본 어떤 개미들보다도 훨씬 생기에 차 있었다. 레티샤가 새로운 먹이를 주자 그 개미들은 손가락을 물려고 하거나 손가락 위로 기어올라왔다. 레티샤는 습기를 보존하기 위해서 개미 상자의 바닥에 석고를 넣 어두었다. 개미들은 석고 위에 통로를 마련했다. 왼쪽에는 잔가지로 된 작은 지붕이 있었다. 가운데에는 모래밭이 있었으며 오른쪽에는 굴곡이 심한 이끼 숲이 정원 구실을 하고 있었다. 레티샤는 설탕물 이 담긴 플라스틱 병을, 개미들이 거기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솜 마개로 막아서 넣어두었다. 모래밭 한가운데에는 원형 경 기장처럼 생긴 재떨이를 놓고 그 안에 얇게 썬 사과 조각과 타라마 (훈제한 대구 알, 식용유, 생 크림, 레몬 등으로 만드는 그리스 식 요리의 하나)를 담아놓았다. 개미들은 타라마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개미들이 집 안에 들어오는 걸 싫어하는데, 레티샤 웰즈는 개미들이 자기 집에 살게 하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 었다. 거실의 개미집이 안겨주는 가장 큰 문제는 개미 상자 안의 흙 이 썩는다는 것이었다. 금붕어의 물을 정기적으로 갈아주어야 하듯 이, 개미들의 흙도 2주에 한 번씩 갈아주어야 했다. 그러나 금붕어 의 물을 갈려면 물수위를 조작하는 것으로 족하지만 개미들의 흙을 갈아주는 일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 일을 하자면 어항 이 두개 필요했다. 하나는 개미들이 살고 있는 어항으로 습기가 말 라버린 흙이 들어 있고, 다른 하나는 습기가 있는 흙이 들어 있는 새 어항이었다. 레티샤는 두 어항 사이에 대롱을 설치했다. 그러면 개미들은 습기가 많은 쪽으로 옮겨갔다. 개미들이 이동하는 데 하루 낮이 꼬박 걸리는 때도 있었다. 레티샤는 이미 자기 개미집들 덕분에 여러 차례 속을 끓였다. 어 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어항-정확히 말하면 의항-에 있는 모든 개미 들이 배 마디가 잘린 채 죽어 있었다. 유리를 통해 들여다보니 개미 들의 시체가 을씨년스럽게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그 개미들은 마치 노예 상태에 있기보다는 죽기를 바란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강제로 입주된 개미들 가운데 어떤 개미들은 도망가기 위해서 갖 은 짓을 다 했다. 그녀는 얼굴에 기어오르는 개미 때문에 잠이 깬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개미 한 마리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은 백 마리쯤되는 개미가 아파트 안에서 활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 는 것이었다. 그래서 레티샤는 개미 사냥에 나서야만 했고, 개미들 을 작은 숟가락과 시험관으로 사로잡아 유리 감옥 안에 다시 집어넣었다. 개미들의 억류 상태를 개선하고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싶어서 레티샤는 어항 안에 분재 식물로 된 작은 정원을 만들어주었다. 개 미들이 보다 다채로운 풍경을 즐기며 산책할 수 있도록 레티샤는 자 갈이 있는 구역과 잔가지가 있는 구역, 조약돌이 깔린 구역 등을 마 련해 주었다. 또 그들이 사냥가는 기분을 다시 느낄 수 있도록, 자 기가 '에드몽폴리스'라고 명명한 개미 상자 안에 살아 있는 작은 귀 뚜라미를 넣어주기도 했다. 병정개미들은 분재 식물 사이로 귀뚜라 미들을 쫓아다니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불개미들은 그녀에게 아주 놀라운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그 개미 상자 뚜껑을 열었을 때, 모든 개미들이 그녀 쪽으 로 배을 들어대고 일제히 개미산을 쏘았다. 레티샤는 어쩌다가 노란 구름처럼 한바탕 뿜어지는 그 개미산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시야가 흐릿해지면서 붉고 푸른 것이 보이는 환각 증세가 일어났다. 놀라운 발견이었다! 개미들이 뿜어대는 증기가 마약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다니! 레티샤는 즉시 그 현상을 연구 수첩에 기록해 두었다. 레티샤는 이미 개미집과 관련된 희귀한 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병에 걸린 사람들은 마치 자석에 끌리듯이 개미집을 정신없이 찾아 다닌다고 했다. 몇 시간 걸려서 개미집을 찾아내고는 그 사람들은 개미들을 게걸스럽게 먹었다. 사람들은 피 속에 개미산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레티샤는 이제 그 사람들이 사실은 개미산이 일으키는 환각 효과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레티샤는 제정신으로 돌아오자, 개미집을 돌보는 데 필요한 도구 들(작은 대롱, 족집게, 시험관 등)을 정돈해 놓고 자기의 취미 활동 을 일시 중단했다. 이제부터는 신문 기자로서 자기 일에만 몰두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먼젓번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다음 기사도 그 수수 께끼 투성이의 살타 형제 사건에 대한 것이었다. 레티샤는 그 사건 의 베일을 한시라도 빨리 벗기고 싶었다. 42. 백과 사전 말의 힘 말의 힘은 아주 대단하다. 당신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는 죽은 지 오래 되었지만, 한 권 의 책을 구성하고 있는 이 글자들의 집합 덕분에 여전히 힘이 있다. 나는 언제까지라도 이 책을 떠나지 않으며, 그 대신 이 책은 나의 힘을 빌린다. 당신은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 면 시체인 내가, 송장인 내가, 해골인 내가 살아있는 당신에게 당신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사실이다. 완전히 죽어 있는 내가 당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어떤 대륙에 살고 있든, 어떤 시대에 살고 있든, 나는 당신이 내 말 을 따르도록 만들 수 있다. 바로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을 매기로 해서 말이다. 그럼 내가 곧 당신에게 그것을 증명해 보이겠다. 자, 당신에게 나는 이렇게 명령한다. 페이지를 넘기시오! 어떤가? 보았다시피, 당신은 나의 명령에 순종했다. 나는 죽은 사 람이다. 그럼에도 당신은 내 말에 따랐다. 나는 이 책 속에 있다. 나는 이 책 속에 살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자기 단어들의 힘을 남용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 책은 당신의 손아귀에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거듭거듭 질문을 하기 바란다. 당신은 이 책을 언제나 마 음대로 활용할 수 있다. 당신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언제나 이 책의 행 속 또는 행 사이 어디엔가 적혀 있을 것이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43. 꼭 알아야 할 페로몬 클리푸니는 경비 개미들에게 103683호를 데려오라고 일렀다. 경비 개미들이 그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닌 끝에 마침내 뿔풍뎅이 축사 가 있는 곳에서 그를 찾아냈다. 경비 개미들은 그를 화학 정보실로 데리고 간다. 여왕개미가 거의 앉은 자세로 그를 기다리고 있다. 여왕은 기억 페로몬에 더듬이를 담가보았던 모양이다. 아직 더듬이 끝이 젖어 있 다는 것이 그걸 말해 준다. <우리가 나눈 대화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았네.> 클리푸니는 먼저 지구의 손가락들을 모두 죽이기에는 8만의 병력 으로 불충분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나서 아주 놀라운 사건을 전해 준다. <방금 사고가 하나 생겼다. 아주 끔찍한 재난이다. 그 소식을 접 하고 보니 그 괴물들의 힘과 관련해서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든다. 손 가락들이 연방 도시 지울리캉을 빼앗아갔다. 그들은 도시 전체를 거 대하고 투명한 껍질에 담아 갔다.> 103683호는 그런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났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며, 또 왜 그런 일이 일어나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여왕도 모른다. 사건은 아주 빠르게 전개되었고 유일한 생 존자는 아직 그 대재난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지울리캉 사건만을 떼어놓고 생각해선 안 된다. 매일 손가락들과 관 련된 새로운 사건들이 터지고 있다. 이 모든 사건들이 일어나는 양상을 보면 손가락들이 빠른 속도로 번식하고 있고 숲을 침범하기로 작정한 것처럼 느껴진다. 날이 갈수 록 그들의 존재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목격자들의 진술이 엇갈리고 있다. 어떤 자들은 시커멓고 판판한 동물들을 보았다고 했고, 어떤 자들은 둥글고 불그스름한 동물들을 보았다고 했다. <우리는 자연이 낳은 하나의 이변이라고 할 만한 이상한 동물을 상대하고 있는 것 같다.> 103683호가 잠깐 동안 공상에 빠진다. <그들이 우리의 신이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곧 우리의 신에게 정 면으로 맞서게 되는 것이 아닌가?> 클리푸니는 103683호에게 따라오라고 한다. 여왕이 그를 지붕 꼭 대기로 데려간다. 그곳에 다다르니 몇몇 병정개미들이 그들에게 인 사를 하고 여왕을 에워싼다. 유일한 산란 개미가 도시 밖으로 나가 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벨로캉의 화신으로서 없어서는 안 되는 생 식 개미를 새가 나타나 낚아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포수 개미들은 이미 사격 자세를 취하고 무엇이든 시야에 들어오 는 대로 겨냥할 준비를 하고 있다. 클리푸니는 지붕 꼭대기를 돌아 시야가 탁 트인 장소에 다다른다. 결혼 비행할 때 이륙용 활주로 같은 구실을 하는 곳이다. 뿔풍뎅이 몇 마리가 평화로이 싹을 뜯어먹으면서 거기에 머물고 있었다. 구리빛을 살짝 띠고 있는 그들의 등딱지가 반짝거린다. 여왕도 103683호에게 뿔풍뎅이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 올라타보라고 권한다. <자, 이건 우리의 혁신 운동이 이룬 기적의 하나일세. 이 녀석들 을 우리는 커다란 비행 곤충으로 길들이는 데 성공했네. 한 마리를 골라 시험해 보게.> 103683호는 뿔풍뎅이 조종하는 법을 모른다. 클리푸니는 그에게 몇 가지 페로몬을 발하여 조언한다. <자네 더듬이를 언제나 뿔풍뎅이의 더듬이 가까이에 두고, 그에게 가고 싶은 곳을 지시하게. 자네 생각을 아주 분명하게 그의 더듬이 에 전달해서 그를 이끌고 가는 것일세. 그 지시에 따라 뿔풍뎅이는 아주 신속하게 움직일걸세. 이제 자네가 직접 그것을 확인해 보게. 회전할 때는 균형을 잡겠다고 반대 방향으로 몸을 기울이는 일은 없 도록 하게. 뿔풍뎅이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야 하네.> 44. CCG에서 알아낸 것 CCGd의 상징은 머리가 셋 달린 흰 독수리였다. 세 머리 가운데 두 개는 위태롭게 축 늘어진 형상인데, 마지막 하 나는 당당하게 곧추서서 은색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굴뚝의 수와 거기에서 뿜어내는 연기가 엄청나서, 마치 이 나라에 서 사용하는 물건은 모두 그 공장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 회사는 하나의 작은 도시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회사안에는 전기 자동차가 운행되고 있었다. 멜리에스 경정과 카위자크 형사가 Y동을 향해 차를 타고 가는 동 안, 영업부 간부 하나가 그 회사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CCG는 화공 약품과 가정용품, 플라스틱 제품, 식료품 등의 주성분이 되는 화학 물질을 주로 생산하고 있었다. 시장에서 서로 각축전을 벌이는 225개의 세탁제와 세척제가 CCG에 서 생산한 똑같은 세제용 분말을 원료로 삼고 있었다. 치즈를 원료 로 만든 365개의 상품이 슈퍼마켓의 고객을 확보하려고 경쟁하고 있 었다. 또 CCG의 합성 수지가 장난감과 가구 등의 원료가 되고 있었다. CCG는 스위스에 본부를 둔 다국적 기업으로서, 치약, 왁스, 식료 품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분야에서 세계 제일의 생산량을 자랑하고 있었다. Y동에 다다라, 두 경찰관은 살타 형제와 카롤린 노가르의 연구실 까지 안내를 받았다. 살타 형제와 카롤린 노가르의 작업실이 서로 이웃해 있는 것을 알아내고 두 경찰관은 깜짝 놀랐다. 멜리에스가 물었다. "그들은 서로 아는 사이였군요?" 하얀 작업복 차림으로 그들을 맞이한 여드름투성이의 화학자가 소리쳤다. "가끔 같이 일했어요." "최근에 어떤 연구 프로젝트에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었나요?" "예, 하지만 당분간 그것을 비밀에 부치기로 했었어요. 그들은 동 료들에게 그 프로젝트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너무 이르다고 그들은 주장했지요." "그들의 전문 분야가 뭐였지요?" "이것저것 다 했어요. 그들은 우리의 많은 연구 개발 분야에 관계 했습니다. 왁스, 연마용 분말, 접착제 등 화학이 응용되는 모든 분 야에 관심을 가졌어요. 그들은 종종 자기들의 재능을 결합해서 좋은 성과를 거두곤 했어요. 하지만 최근의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생각을 쫓고 있던 카위자크가 끼여들었다. "그 사람들 혹시 사람을 투명하게 만들 수 있는 물질에 대해서 연 구하지 않았나요?" 그 화학자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투명 인간을 만들 수 있는 물질이라뇨? 농담이시겠죠?" "천만에요. 오히려 아주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 화학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설명을 드리지요. 우리 몸은 절대로 투명해 질 수 없 습니다. 우리 몸은 너무 복잡한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 서 아무리 전채적인 과학자라도 그 세포들을 한꺼번에 물처럼 투명 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카위자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과학은 그의 전문 분야가 아 니었다. 그래서 뭔가 미흡하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멜리에스는 웬 헛소리들이냐는 듯 어깨를 으쓱 들어올려 보이고 는, 아주 직업적인 어투로 물었다. "그들이 연구하고 있던 물질이 플라스크 같은 데 담겨 있지 않을 까요? 그런게 있으면 좀 보여주시겠어요?" "그게 저...."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예, 벌써 누군가가 와서 그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멜리에스가 선반 위에서 머리카락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 사람은 여자군요." 그가 말했다. 화학자는 깜짝 놀랐다. "맞습니다.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경정은 아주 자신 만만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여자 나이는 스물다섯에서 서른 사이이고 건강 상태는 완벽하 며, 유럽 인과 아시아 인의 혼혈이고 혈관계는 아주 양호하군요." "지금 저한테 물어보고 계신 겁니까?" "아니오. 깨끗한 선반 위에 떨어진 이 머리카락을 보고 그런 걸 알아냈다는 겁니다. 제가 알아낸 게 틀립니까?" 그 화학자는 무척 놀라워하는 눈치였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런게 어떻게 그런 세세한 것까지 알아내 셨습니까?" 멜리에스는 내친 김에 그 화학자를 더 놀려주기로 했다. "머리카락이 매끈매끈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감은 지 얼마 안 되는 머리카락입니다. 냄새를 맡아보세요. 아직은 향기가 남아 있습 니다. 터럭의 심이 두껍습니다. 이건 젊은 사람 것입니다. 심을 둘 러싸고 있는 막의 지름이 넓습니다. 그것은 동양인들의 특성이지요. 또 피막안에 든 심의 빛깔이 아주 좋습니다. 그러므로 혈관계가 완 벽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여자가 '일요 메아리'에 근 무한다는 것도 알 수 있겠군요." "에이, 절 놀리시는군요. 머리카락 하나에서 그 모든 걸 알아냈다 는 말입니까?" 멜리에스는 레티샤 웰즈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을 흉내냈다. "다 아는 수가 있습니다." 카위자크 형사는 자기 역시 직관력이 부족하지 않다는 걸 입증하 고 싶어했다. "그 여자가 여기서 뭘 훔쳐갔지요?" "아무것도 훔쳐가지 않았는데요. 그 여자는 우리에게 그 플라스크 들을 가져가도 되는냐고 물었습니다. 집에 가져가서 시간 날 때 조 사해 보겠다는 거였지요. 우리는 뭐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어요." 경정의 성난 얼굴을 보고 화학자가 변명을 덧붙였다. "우리는 경찰이 오리라는 것도, 경찰이 그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 는 것도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물론 경찰에서 원하는 대로 그것들을 보관해 두었겠지요." 멜리에스가 카위자크를 이끌고 발길을 돌렸다. "레티샤 웰즈가 우리에게 많은 걸 가르쳐줄거예요." 45. 뿔풍뎅이 시험 비행 103683호는 뿔풍뎅이의 앞가슴 등판에 올라탔다. 그 비행기는 길이 네 걸음에 너비가 두 걸음은ㅇ 족히 된다. 조종 석에서 바라보니 뿔풍뎅이 이마의 휘어진 뿔이 마치 뱃머리가 돌출 한 것처럼 똑바로 솟아 있다. 그 뿔의 구실은 여러 가지다. 적의 배 를 가르는 창인가 하면 개미산 사격을 위한 조준기이고, 군함으로 치면 충각이요 염소로 치면 뿔이기도 하다. 이제 103683호에게 닥친 문제는 뿔풍뎅이를 조종하는 것이다. '생 각을 뿔풍뎅이의 더듬이에 전달해서 조종하는 것'이라고 클리푸니가 조금 전에 일러주었다. 당장 해보는 게 좋겠다. 103683호는 자기 더듬이를 뿔풍뎅이의 더듬이에 연결하고 이륙에 대해 생각을 모은다. 그런데 이 시커먼 딱정벌레목 곤충이 중력을 이겨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나는 날고 싶다. 자, 날자.> 103683호가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무겁고 둔해 보이던 뿔풍뎅 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103683호의 뒤에서 원활한 기계 장치가 돌 아가는 소리가 나면서 뭔가가 미끄러져나온다. 갈색 딱지 날개 두 개가 앞쪽으로 미끄러져나왔다. 투명한 밤색의 커다란 두 날개가 회 전하면서 비스듬하게 펼쳐지더니 짧고 힘찬 동작으로 한 번 퍼득인 다. 곧 시끄러운 소리가 사방에 퍼진다. 클리푸니는 103683호에게 뿔풍뎅이의 날개짓소리가 꽤나 요란하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충고를 빠뜨렸다. 붕붕거리는 소리가 점 점 샘해진다. 모든 것이 덜덜 떨린다. 103683호는 다음에 일어날 일 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뿔풍뎅이가 일으키는 먼지와 나뭇가루의 소용돌이가 시야를 어지 럽힌다. 뿔풍뎅이가 공중으로 올라가는데, 이상한 효과가 빚어진다. 뿔풍뎅이가 올라가는 게 아니라 도시가 땅 밑으로 가라앉는 듯한 느 낌이 든다. 아래서 더듬이로 인사를 건네는 여왕이 점점 작아진다. 여왕의 모습을 전혀 구별할 수 없게 되자, 103683호는 수천 걸음(수 천 센티미터)의 고도는 족히 올라와 있다고 생각한다. <직진하고 싶다.> 그 생각을 전하자 뿔풍뎅이는 즉시 앞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날갯 짓 소리를 더욱 요란하게 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날고 있다! 103683호가 날고 있다! 날개 없는 비생식 개미들의 한결같은 소망을 오늘 이루고 있는 것 이다. 결혼 비행을 하는 날 생식 개미들이 하는 것처럼 중력을 이겨 내고 공중의 차원을 정복한 것이다. 잠자리, 파리, 말벌 드이 103683호의 주위로 어지러이 스쳐간다. 냄새를 맡아보니 바로 앞에 새들의 둥지가 있다. 위험하다. 103683 호는 급히 방향을 돌리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공중은 땅과는 다르 다. 거기에서는 날개를 45도 이하로 내리지 않고서는 회전을 할 수 가 없다. 뿔풍뎅이가 103683호의 지시대로 따르자 모든 것이 흔들린다. 개미가 미끄러진다. 뿔풍뎅이의 딱지 속에 발톱을 박아넣어 버티 려고 했지만 아차 하는 사이에 발톱이 밀려난다. 검은 딱지 위에 긁 힌 자국이 생기면서 얇은 거스러미가 일었을 뿐이다. 버팀대가 되어 줄 만한 것이 없어서 개미는 어쩔 수 없이 그 비행 곤충의 옆구리로 굴러떨어진다. 허공에 떨어진 개미가 추락하기 시작한다. 뿔풍뎅이는 그런 사실 도 모른 채 선회를 마치고 새로운 창공을 향해 힘차게 날아가고 있다. 그 동안에 개미는 자꾸자꾸 떨어진다. 땅과 식물들과 흉칙한 바위 들이 그에게 덤벼들고 있다. 몸이 빙글빙글 돌고 더듬이가 걷잡을 수 없이 떨린다. 충돌이다! 그는 모든 충격을 다리로 받아내면서 되튀었다가, 더 먼 곳으로 다시 떨어지고 또 다시 튀어오른다. 마침 폭신한 이끼 무더기가 마 지막 공중 제비의 충격을 덜어준다. 개미는 아주 가볍고 강인한 곤충이라서 자유 낙하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 아주 높이 솟은 나무에서 떨어져도 개미는 아무 일도 없었 던 것처럼 자기 일을 다시 시작한다. 103683호는 추락에 뒤따르는 현기증 때문에 약간 비틀거릴 뿐 아 무런 탈이 없다. 그는 더듬이를 앞으로 내밀고 재빨리 닦은 다음, 자기 도시 쪽으로 가는 길로 접어든다. 클리푸니는 움직이지 않았다. 클리푸니는 103683호가 지붕 위에 다시 나타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다. <걱정말게, 다시 해보세.> 여왕개미는 병정개미를 이륙용 활주로로 다시 데려간다. <자네는 병정개미 8만에다 이 길들인 뿔풍뎅이 용병 67마리의 지 원을 받을 수 있을거야. 뿔풍뎅이들은 대단한 원군이 되어줄걸세. 그들을 조종하는 법을 배워야 하네.> 103683호는 다른 뿔풍뎅이에 올라타고 다시 이륙한다. 첫번째 시 험비행은 실패했지만 이번 뿔풍뎅이와는 더 뜻이 잘 맞을 듯하다. 포수 개미 하나가 103683호의 오른쪽에서 동시에 이륙한다. 그들 은 나란히 날아가면서 서로에게 신호를 보낸다. 날아가는 속도가 빠 르기 때문에 더 이상 페로몬으로 소통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조종사들은 즉시 더듬이의 움직임에 토대를 둔 몸짓 언어를 고안해 냈다. 더듬이를 세웠다. 접었다. 함으로써 멀리서도 이해할 수 있는 그들 나름의 모르스 부호를 만들어 낸 것이다. 포수 개미는 뿔풍뎅이의 더듬이를 놓고 그의 등판 위에서 거닐 수 있다고 알려온다. 발톱을 등딱지의 오톨도톨한 부분에 꽉 박고 있으 면 떨어질 염려가 없다는 것이다. 그 포수 개미는 그 기술을 완벽하 게 익힌 것처럼 보인다. 이어서 포수 개미는 뿔풍뎅이의 다리를 타 고 내려올 수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그렇게 되면 아래쪽으로 배를 들이대고 밑으로 지나가는 모든 것을 향해 위에서 사격을 할 수 있다. 103683호는 그런 모든 곡예 비행을 터득하는 데 약간 애를 먹었 지만, 곧 자기가 2천 걸음의 높이로 날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그 비행 곤충에 적응할 수 있게 된다. 뿔풍뎅이가 풀에 닿을 정도로 급 강하할 때는 풀들을 잡아당기기도 하고 꽃줄기를 싹둑 자르기도 한다. 그렇게 해보고 나니 자신감이 생긴다. 뿔풍뎅이 예순일곱 마리가 있으면 그 신..., 아니 손가락 몇 마리는 해치울 수 있을 것도 같다. <급상승, 그 다음엔 급강하!> 103683호가 뿔풍뎅이에게 명령한다. 병정개미는 더듬이에 느껴지는 속도감을 줄이기 시작한다. 참으로 훌륭한 비행 부대이다! 개미 문명에 아주 커다란 진보가 이루어졌 다! 그는 뿔풍뎅이를 타고 비행하는 이 기적 같은 일을 경험한 첫 세대에 속하게 된다! 속도가 그를 황홀하게 만들고 있다. 방금 전의 추락은 그에게 별 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았고 그는 이제 공중을 날아다니는 일은 별로 위험할 게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는 나선 비행, 공중 회전 등과 같은 곡예 비행까지도 지시한다. 103683호는 처음 맛보는 놀라 운 느낌을 만끽한다. 공중에서의 위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의 존 스톤씨 기관이 작동을 멈춘다. 그는 이제 위아래, 앞뒤가 어딘지 구 별하지 못한다. 그래도 나무가 바로 앞에 나타나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재빨리 선회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비행기 타는 재미에 흠뻑 빠져서 103683호는 하늘이 불길하게 어 두워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함참이 지나서야 그는 자기가 타고 있는 뿔풍뎅이가 불안해 하고 있음을 느낀다. 뿔풍뎅이는 이제 그의 지시에 바로 응하지 않고, 고도를 유지하라는 명령에도 따르지 않는 다. 느끼기 힘들 만큼 조금씩 뿔풍뎅이가 하강하고 있다. 46. 노래 기억 페로몬 번호: 85 주제: 혁신의 노래 페로몬 제공자: 클리푸니 여왕 나는 위대한 개혁자다. 나는 백성들을 틀에 박힌 일상에서 끌어내어 경이의 세계로 이끈다. 나는 역설이 가득 담긴 기묘한 진리를 일깨우고 미래를 알려준다. 나는 체제를 무너뜨린다. 체계가 진보하려면 일단은 무너져야 한다. 나처럼 소심하고 어눌하고 자신감 없이 말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나처럼 무한한 약점을 가지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나처럼 유전 형질이 보잘것없는 자는 아무도 없다. 나에겐 지성 대신에 감성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나에겐 나를 무겁게 만드는 어떤 지식도 어떤 지혜도 없기 때문이다. 허공에 떠도는 직관만이 나의 벌걸음을 이끈다. 그 직관이 어디에서 오는지 나는 모른다. 그것을 알고 싶지도 않다. 47. 자종 브라젤의 생각 오귀스타 할머니는 회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자종 브라젤은 손을 입에 갖다대고 헛기침을 했다. 모두 그를 둘 러싸고 그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방 도를 전혀 찾지 못하던 터라 그들의 기대는 더욱 간절했다. 양식도 없고, 지하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도 없 고, 바깥 사람들에게 연락할 수도 전혀 없는 상황에서, 백 살 먹은 노인과 사내 아이가 포함된 스무 명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남기를 바란다는 말인가? 자종 브라젤은 자세를 똑바로 추스리면서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봅시다. 누가 우리를 여기에 이끌었습니 까? 에드몽 웰즈입니다. 그는 우리가 이 동굴 속에 살면서 그의 작 업을 이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우리가 과감하게 위험한 상황 속 에 뛰어들 것으로 내다보았습니다. 나는 그것을 확신합니다. 지하실 로 내려오는 일은 개인적인 깨달음의 과정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는 집단적인 깨달음의 과정에서 나타난 하나의 중요한 시련입니다. 우리가 각자 홀로 이루어낸 것을 이제 함께 이 루어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정삼각형 네 개의 수수께끼를 풀었습 니다. 우리의 사고 방식을 바꿀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의 정신 속에 있는 문을 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끈기를 가지고 계 속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역시 에드몽은 우리에게 열쇠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두려움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하기 때문에 그것을 못 보고 있을 뿐입니다." "어렵게 얘기하지 마시고 그 열쇠가 뭔지나 빨리 말씀하세요. 교 수님이 제안하려는 해결책이 뭡니까?" 소방대원 하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종 브라젤은 자기 얘기를 계속했다. "정삼각형 네 개의 수수께끼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그 수수께 기는 우리에게 사고 방식의 수정을 요구했습니다. '다른 식으로 생 각해야 한다.'는 말을 에드몽은 되풀이했습니다. '다른 식으로 생각 해야 한다....' 치안 대원 하나가 다시 소리쳤다. "하지만 우리는 쥐들처럼 이곳에 갇혀 있습니다. 이것은 달리 생 각해 볼 여지가 없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다른 식 으로 생각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몸 속에 갇 혀 있는 것이지 정신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는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말만 계속 그렇게 하지 마시고 좋은 방안이 있으면 후딱 제시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입을 다무시고요." "어머니 몸 밖으로 나온 아기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던 따뜻한 양 수가 왜 사라졌는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기는 어머니의 자궁 속 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문은 이미 닫힌 뒤 입니다. 아기는 다시는 자유로운 바다 속으로 돌아갈 수 없는 물고 기와 같습니다. 춥고 눈부시고 너무 시끄럽습니다. 모태 밖은 지옥 이나 다름없습니다. 지금의 우리처럼 아기는 시련을 견디어내기가 어려울 것처럼 보입니다. 모두 그런 순간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우 리는 죽지 않았으며 공기와 빛과 추위에 적응했습니다. 우리는 양수 속에 살던 태아에서 공기를 호흡하는 아기로 변했습니다. 물고기에 서 포유 동물로 변한 것 입니다." "그래서요?" "우리는 지금 아기와 똑같은 위기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다시 적 응해 나가야 합니다. 이 새로운 상황에 우리를 맞추어나가야 합니다." "이 양반 지금 헛소리를 하고 있어요. 계속 헛소리만 하고 있는 거라고요!" 제라르 갈랭 형사가 천장으로 눈길을 올리며 소리쳤다. "아니예요, 그분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알 것 같아요. 우리는 해결책을 찾아낼거예요. 우리 모두가 찾으려고 하면 찾을 수 있을거예요." "물론 해결책이야 언제든지 찾을 수 있지. 굶어 죽기를 기다리는 것도 해결책이 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자종의 얘기를 더 들어보기로 하세. 그 사람 얘기 아직 안 끝났어." 오귀스타 할머니가 타일렀다. 자종 브라젤은 풍금 앞의 보면대 쪽으로 가서 '상대적이며 절대적 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들어올렸다. "저는 간밤에 이 사전을 다시 읽었습니다. 이 사전 어딘가에 해답 이 분명히 적혀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한참 만에 저는 이 런 구절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을 낭독해 보겠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48. 백과 사전 항상성 모든 생명체는 항상성을 추구한다. '항상성'이란 내부 환경과 외부 환경 사이의 평형을 뜻한다. 모든 생명체는 항상성을 유지하는 쪽으로 기능한다. 새는 날기 위 해서 속이 빈 뼈를 가지고 있다. 낙타는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물주머니를 가지고 있다. 카멜레온은 포식자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 고 가죽의 색소 구성을 변화시킨다. 다른 많은 종들과 마찬가지로 그 종들은 주위 환경의 모든 변화에 적응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 바깥 세계와 조화하는 방법을 찾지 못한 종들은 소멸했다. 항상성은 외부의 제약과 관련해서 우리 기관들이 스스로를 조절하 는 능력에서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평범한 사람들이 아주 가혹한 시련을 견뎌내면서 거 기에 자기의 기관을 적응시켜 나가는 것을 보고 놀랄 때가 많다. 전 쟁은 살아남기 위하여 스스로를 이겨내야 하는 상황인데, 그 전쟁중 에는 여태껏 고생을 모르던 사람들도 아무런 불평 없이 물과 건빵에 길들여진다. 깊은 산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은 며칠이 지나고 나 면 식용 식물을 구별할 줄 알게 되고, 사냥을 할 줄 알게 되며, 언 제나 혐오감만 주던 두더지, 거미, 쥐, 뱀 같은 동물들도 먹을 수 있게 된다. 다니엘 디포우의 '로빈슨 크루소'와 쥘 베른의 '신비로운 섬'은 항상성을 유지하는 인간의 능력을 그리는 소설들이다. 우리는 모두 완벽한 항상성을 끊임없이 추구해 나간다. 우리의 세 포들이 이미 악착같이 항상성을 추구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 이다. 세포들은 온도가 가장 알맞고 독성 물질이 섞이지 않은 최대 한 영양 액을 끊임업시 갈망한다. 그러나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그 상황에 적응한다. 술꾼의 간 세포는 술을 절제하는 사람들의 간 세포보다 알콜을 분해하는 데 더 익숙해져 있다. 흡연자의 허파 세 포는 니코틴에 저항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미트리다트왕은 자기의 몸을 비소에 견딜 수 있게 만들기까지 했다. 외부 환경이 적대적일수록 세포나 개체는 이제껏 잠자고 있던 능 력들을 자꾸 개발해 나간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읽기를 마치자 긴 침묵이 이어졌다. 자종 브라젤이 침묵을 깨뜨리 고 말을 덧붙였다. "만일 우리가 죽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 극단적인 환경에 적응하 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라르 갈랭이 분통을 터뜨렸다. "극단적인 환경이라고요. 말씀 잘 하셨습니다! 루이 11세 때의 죄 수들은 면적이 1평방미터밖에 안되는 '피예트'라는 감옥에 갇혀 있 었는데, 그들이 감옥 쇠창살에 적응했던가요? 총살을 당한 사람들이 가슴의 살갗을 단단하게 만들어서 총알을 밀어낼 수 있었던가요? 핵 전쟁을 겪은 일본 사람들은 방사능에 대한 저항력을 더 많이 가질 수 있게 되었던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적 응하고 싶어도 적응할 수 없는 외부 환경이 있는 겁니다." 알랭 빌솅이 보면대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아주 흥미 있는 구절을 읽기는 하셨습니다. 우리 문제와 관련해 서는 구체적인 해답을 전혀 못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드몽이 우리에게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살아 남고 싶으면 우리의 생존 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바꾼다고요?" "예, 바꾸는 겁니다. 지하에서 거의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혈거동 물이 되는 겁니다. 집단을 저항과 생존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개미들과의 의사 소통이 단절되고 나서 우리의 육신은 고통을 겪 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존 방식을 제대로 바꾸지 못했기 때문입니 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겁이 많으면서도 자 만심에 빠져 있는 인간으로 말입니다." 조나탕 웰즈가 자종 브라젤의 말에 동의하고 나섰다. "브라젤 교수님의 말씀이 옳아요. 우리는 이 지하실 밑바닥까지 우리의 육체를 이끌고 모든 길을 통과했어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가야할 길의 반밖에 안 되는 것이었어요. 어쨌든 이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가던 길을 계속 가도록 강요하고 있어요." "지하실 너머에 또 지하실이 있다는 얘기예요? 사원 밑을 파서 사 원의 지하실을 찾아보자는거요?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갈지도 모를 지하실을 또 찾잔 말이오?" 갈랭 형사가 말을 비비꼬았다. "아닙니다. 내 말을 들어보세요. 우리가 가야 할 길의 반은 육체 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몸으로 그것을 잘 통과했습니다. 다른 반은 우리의 정신과 관련된 것으로 이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정신을 바 꾸는 것, 즉 우리의 머리 속에서 돌연 변이와도 같은 혁신을 일으키 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혈거 동물이 되었으니 혈거 동물로서 살 아가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중에 누군가가 여자 하나에 남자 열여덟 명으로는 우리 집단이 제대로 굴러가기를 바랄 수가 없 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인간 사회라면 그 말이 맞습니다. 그러 나 곤충의 사회라면 어떻겠습니까?" 뤼시 웰즈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뤼시는 자기 남편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지하에 갇힌 채 식량도 거의 없는 상태 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자신들을 무엇인가로 바 꾸어나가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똑같은 단어를 입술에 올렸다. "개미" 49. 비 대기에 전기가 충만해 있다. 음전기를 띤 이온의 소용돌이에 번개 가 불을 붙인다. 장중한 으르렁거림이 뒤따르고 또 한 차례의 번개 가 일면서 하늘을 산산조각 내고 나뭇잎 위에 백색과 보라색으로 된 불길한 빛을 쏘아댄다. 새들은 파리들보다 더 낮게 난다. 또 한차례의 벼락이 크르릉거린다. 쇳덩이 같은 구름들이 갈라진 다. 뿔풍뎅이의 딱지가 번쩍인다. 103683호는 그 번쩍이는 표면 위 에서 아래로 떨어질까 전전 긍긍한다. 세계의 끝을 지키는 손가락들 과 맞섰을 때와 똑같은 무기력함이 엄습한다. <돌아가야 한다.> 그는 뿔풍뎅이에게 명령한다. 그러나 벌서 빗발이 촘촘해진다. 잘못하다간 그 빗방울에 맞아 죽 을 수도 있다. 어마어마하게 긴 수정실 같던 빗줄기 대신에 점선 같 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커다란 곤충도 날개에 그런 빗방울을 맞으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뿔풍뎅이는 공포에 사로잡혀 빽빽하게 쏟아지는 빗발 한가운데를 진동진동 헤쳐나간다. 빗방울 사이로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쓴다. 103683호는 더 이상 통제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그저 발톱과 부착 반에 힘을 잔뜩 주고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빗방울도 뿔풍뎅이들도 너무 빠르다. 103683호는 차라리 자기의 겹눈을 감고, 앞, 뒤, 위, 아래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위험을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다. 그러나 개미들에겐 눈꺼풀이 없다! 한시바삐 뭍에 닿을 수 있으 면 좋으련만! 가는 빗방울 하나가 103683호를 힘껏 후려쳐서 그의 더듬이가 가 슴에 붙어버린다. 더듬이가 젖어버리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느낄 수가 없다. 이제는 진동을 감지할 수 없다. 이제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시각뿐이다. 그 때문에 공포가 더욱 심해진다. 뿔풍뎅이는 이제 제정신이 아니다. 빗방울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 나가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날개 끝에 물기가 닿을 때마다 몸뚱 이가 점점 무거워진다. 묵직한 빗방울 하나를 가까스로 피했으나 더 커다란 빗방울이 덤 벼든다. 그것을 피하려고 뿔풍뎅이가 45도로 몸을 비튼다. 아슬아슬 하게 피하기는 했으나 그 물방울이 뿔풍뎅이의 다리로 떨어졌다가 더듬이로 튀어오른다. 뿔풍뎅이가 한 순간 외부 세계에 대한 지각을 잃는다. 깜빡 정신 을 잃었던 모양이다. 뿔풍뎅이가 다시 정신을 차려 비행을 계속하려 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번개 불빛에 번쩍이는 투명한 물기둥이 그들의 정면을 막아선다. 뿔풍뎅이는 두 날개를 수직으로 세워 제동을 건다. 그러나 날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제동이 걸리지 않는다. 그들은 앞으로 고꾸라지 면서 몇 차례의 공중 돌기를 한다 103683호가 뿔풍뎅이의 딱지를 너무 세게 그러쥐는 바람에 그의 발톱이 키틴질을 뚫어버렸다. 103683호의 젖은 더듬이가 눈을 후려 치더니 거기에 달라붙어버린다. 물기둥과 부딪히고 나서 그들은 다 시 다른 빗줄기와 부딪쳤다. 흥건히 젖은 그들의 몸뚱이는 원래 무 게보다 열배나 무거워졌다. 그들은 익은 배가 떨어지듯이 도시의 잔 가지 지붕위로 떨어진다. 뿔풍뎅이는 박살이 나버렸다. 뿔은 부서지고 머리가 산산조각이 났다. 그의 딱지 날개는 혼자서라도 비행을 계속하려는 듯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 몸이 가벼운 103683호는 다친 데 없이 그 재난을 벗 어났다. 그러나 비가 계속 내리고 있으니 쉴 틈이 없다. 그는 더듬 이를 대충 닦고 도시의 입구로 향한다. 통풍 구멍 하나가 나타난다. 일개미들이 도시가 물에 잠기는 것을 막으려고 그 구멍을 막아놓았다. 그러나 103683호는 그 둑을 뚫고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안으로 들어가니 경비 개미들이 그를 힐책 한다. 도시가 위험에 빠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마구 뚫고 들어 오느냐고, 아닌게아니라 가는 물줄기가 그의 뒤를 따라 흘러들고 있 다. 건축 개미들이 달려들어 제방을 다시 틀어막는 걸 보면서 103683호는 마음을 놓고 빠른 걸음으로 나아간다. 그가 기진 맥진한 채로 멍하니 발걸음을 멈추자, 동정심 많은 일 개미 하나가 영양 교환을 제안한다. 그는 감사히 여기며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두 개미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입을 맞춘 다음 갈무리 주머니 바닥에 있는 먹이를 되올린다. 도시 안의 다사로움, 먹이를 나누어 주는 동료, 그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 영양 교환이 끝나자 103683호는 어떤 터널 안으로 들어간 다음 다 시 몇 개의 통로를 지난다. 50. 미로 통로는 어두웠고 창자 속처럼 축축했다. 이상한 냄새들이 떠돌고 있었다. 바닥에는 썩은 먹거리 부스러기와 잡다한 쓰레기들이 널려 있었다. 바닥이 발에 늘어붙는 느낌이 들었고 벽에서는 습기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무리를 짓고 있었다. 부랑자, 거지, 가짜 악사, 진짜 인간 쓰레기들이 역겨운 냄새를 피우며 떼지어 모여들고 있었다. 그 사람들 가운데 아랫단이 잘룩한 빨간 잠바를 입은 남자 하나가 다가왔다. "아니, 저 아가씨 지하철 안을 혼자 돌아다니잖아! 위험하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지? 보디가드 하나쯤은 필요하겠는걸." 그는 빈정거리면서 그녀의 주위에서 춤을 추듯 배회했다. 레티샤 웰즈는 그런 경우에 무뢰한들이 함부로 굴지 못하게 하는 법을 익혀놓았다. 레티샤는 연보라빛 눈동자가 거의 발갛게 변하도 록 매섭게 쏘아보면서 일침을 놓았다. "꺼져!" 사내는 투덜거리면서 멀어져갔다. "에이, 깐깐한데! 잘못했다간 잡아먹으려고 덤비겠는걸!" 이번에는 그 방법이 제대로 통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게 잘 통한 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지하철이 어쨌든 가장 정확한 교통 수단이 된 것은 틀림없지만, 현대판 약탈자들의 소굴이 된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레티샤가 플랫폼에 내려섰을 때는 열차 하나가 막 지나가고 난 뒤 였다. 두 사람이 지나가고, 이어서 세 명의 승객이 반대쪽으로 지나 갔다. 어느새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지하철 노조에서 기습 파업이라도 일으킨 것은 아닐까 하고 의아 해 하기도 하고, 앞의 어떤 정거장에서 어떤 멍청이가 열차 안으로 뛰어들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윽고 두 개의 둥그런 불빛이 나타났다. 제동 장치의 날카로운 마찰음이 레티샤의 고막을 뚫고 고실 안으로 파고들었다. 기다란 튜 브가 플랫폼을 따라 늘어섰다. 녹슨 철판으로 만든, 색을 칠해 놓은 튜브였다. 그 철판 위에는 광고들과 매직 펜이나 칼로 써놓은 갖가 지 낙서도 붙어 있었다: '얼간이들에게 죽음을!', '이것 읽는 자 역 먹어라!', '바빌로야, 너의 최후가 가까이 왔다!', '미친놈들의 나 라 X이다.' 운운. 휘갈긴 난잡한 그림들은 물론이고, 문이 열렸을 때 레티샤는 객차 안이 벌써 터질 듯이 만원임을 알고 낭패감에 빠졌다. 사람들의 얼 굴과 손이 유리창에 눌려 납작해질 정도였다. 열차 안이 이 지경인 데도, 아무도 불평을 하거나 구조를 요청할 엄두도 못 내고 있는 듯했다. 사람들은 자진해서, 게다가 돈까지 내가면서 몇 입방미터의 뜨거 운 양철 상자 안으로 500명이 넘게 몰려들었다. 레티샤는 이 많은 사람들을 매일같이 콩나물 시루 같은 객차 안으로 꾸역꾸역 몰려들 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제 발로 그런 상황 을 찾아들어갈 만큼 어리석은 동물이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객차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누더기를 걸친 노파가 내뿜는 시큼한 냄새와 싸구려 향수 냄새를 풍기는 어떤 부인의 팔에 안긴 병든 사 내아이의 토악질 냄새, 그리고 어떤 건축공의 역겨운 땀냄새가 훅 끼쳐왔다. 레티샤의 주위에는 생긴 건 멀쩡해 가지고 레티샤의 엉덩 이를 쓰다듬으려는 뻔뻔한 남자, 차표를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차장, 동전이나 식권을 구걸하는 실업자, 그 북새통에서도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랑제콜 준비반에 다니는 마흔다섯 명의 장난꾸러기들은 다들 무 관심한 틈을 이용해서 볼펜 끝으로 자기들 좌석의 인조 가죽 천에 구멍을 내려고 했고, 한 무리의 군인들은 '제대!'라고 함성을 지르 고 있었다. 차창은 수백 명의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뿜어대는 날숨 때문에 부옇게 흐려져 있었다. 레티샤 웰즈는 탁한 공기를 되도록 천천히 들이마시면서 이를 앙 다물고 겨우겨우 참고 있었다. 그래도 레티샤는 불평할 처지가 아니 었다. 그녀가 집에서 직장까지 가는 데는 30분 정도면 충분하지만, 러시아워에 지하철 안에서 매일 3시간을 보내는 승객들도 있는 터였다. 공상 과학 소설을 쓴 어떤 작가도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예상 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철판 상자 안에서 수천 명씩 짓눌리는 것을 받아들이는 문명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불꽃을 튀기며 레일 위를 미끄러져갔다. 레티샤 웰즈는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잊은 채 평온을 찾으려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호흡을 조절해서 마음의 평 정을 유지하는 법을 가르쳤다. 호흡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되 면 심장 박동을 다스려 그것을 늦출 수도 있을 것이라고 아버지는 생각했었다. 잡념이 생겨서 레티샤는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레티샤는 어 머니를 생각하고 있었다. 안 돼, 그건 생각하지 말자.... 안돼. 레티샤는 눈을 떴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지고 있었다. 공간에 여유가 생겼다. 빈 자리까지 있었다. 레티샤는 빈 자리로 서둘러 달려가 앉은 다음 잠을 청했다. 종점에서 내리기 때문에 잠 이 들어도 걱정할 게 없었다. 지하철 안에 있다는 의식이 사라지면 서 마음이 편해졌다. 51. 백과 사전 연금술 연금술의 모든 공정은 세계의 탄생을 모방하거나 재연하는 것을 겨냥하고 있다. 연금술에는 여섯 가지의 공정이 필요하다. 즉, 배 소, 분해, 용해, 증류, 융합, 정련이 그것이다. 이 여섯가지의 공정은 네 단계로 전개된다. 즉 굽는 단계인 흑색 작업, 증발의 단계인 백색 작업, 호흡의 단계인 적색 작업을 거쳐 마지막 정련의 단계에서 금분이 나온다. 이렇게 해서 나온 금분은 '원탁의 기사 전설'에 나오는 요술사 메를랭의 금가루와 비슷하다.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완전하게 만들고 싶으면 그 금가루를 뿌려주 기만 하면 된다. 사실 많은 이야기와 신화들은 그 줄거리 속에 그와 같은 처방을 숨기고 있다. 백설 공주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백설 공주는 연금술의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 최종 결과물이다. 그것은 어 떻게 얻어진 것인가? 일곱 난쟁이를 통해서이다('난쟁이 nain'은 지 식을 뜻하는 라틴어 'gnomes'또는 'gnosis'에서 나온 것이다). 그 일곱 난쟁이들은 일곱 가지 금속, 즉 납, 주석, 철, 구리, 수은, 은, 금을 나타내며, 그 일곱 가지 금속은 다시 일곱 개의 별, 즉 토 성, 목성, 화성, 금성, 수성, 달, 태양과 연결되어 있고, 그 일곱 개의 별은 다시 까다로움, 우둔함, 몽상적임 등과 같은 인간의 일곱 가지 성격과 연결되어 있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52. 물과의 전쟁 번개가 여전히 줄무늬를 만들며 하늘을 뒤흔들고 있다. 거대한 구 름들이 섬광을 발하며 쪼개지는 모습이 장관이건만, 그것을 보고 감 탄할 기분을 느끼는 개미는 하나도 없다. 우레는 한낱 재앙일 뿐이다. 빗방울들이 포탄처럼 도시 위로 떨어진다. 때늦게 사냥을 나간 탓 에 밖에서 늑장을 부리고 있던 병정개미들은 빗방울 탄환에 맞아 죽었다. 벨로캉 내부라고 해서 재앙이 비껴가지는 않는다. 더구나 봄철에 클리푸니가 시도했던 여러 실험들 가운데 하나가 더 큰 재앙을 불러 들이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여왕은 구역과 구역 사이의 교통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운하를 파 게 했었다. 그러나 빗물이 쏟아져들어오면서 이 지하 운하에 물이 붇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커다란 강물이 되어 경비 개미들이 성난 물결을 제어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지붕의 상황은 더욱 나쁘다. 빗방울들이 잔가지 지붕을 뚫어버리 자 몇몇 틈새로 물이 쏟아져들어온다. 103683호는 그 틈새들 가운데 제일 크게 벌어진 것을 간신히 틀어 막고 페로몬을 발한다. <모두 햇빛방으로 가라. 알 모다기들을 구해야 한다.> 한 무리의 병정개미들이 쇄도하는 물결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의 뒤를 따라 서둘러 달려간다.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은 햇빛방은 평소와는 달리 어두웠다. 격렬 한 불안감에 사로잡힌 일개미들이 천장에 붙어서 낙엽으로 구멍을 막으려고 전전 긍긍한다. 그러나 어느새 물이 다시 나타나서 바닥에 줄지어 놓여 있는 알 모다기 속으로 흘러든다. 모든 것이 젖어버린 다. 모든 고치들을 구하기는 불가능하다. 고치들이 너무 많다. 유 모 개미들은 올된 애벌레 몇 마리만 겨우 구해낸다. 일개미들에게 부랴부랴 던져준 알들이 바닥에 떨어져 깨진다. 그때 103683호는 반체제 개미들을 떠올렸다. 물이 자꾸 내려가서 뿔풍뎅이 축사를 덮치면, 반체제 개미들이 몰살할지도 모른다. 1단계 경보 페로몬이 발산된다. 위험을 알리는 페로몬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많은 페로몬들이 수증기와 뒤섞인다. 2단계 경보 페로몬이 발산된다. 병정개미, 일개미, 유모개미, 생 식개미 등 모두가 배 끝으로 격렬하게 벽을 두드린다. 전투 준비의 신호가 온 도시에 진동한다. 팡, 팡, 팡, 비상! 비상! 온 도시가 공포의 도가니로 변한다. 물 웅덩이에 빠진 개미들마저 다른 개미들에게 위험을 알리려고 물 속의 바닥을 두드린다. 마치 혈관 속의 피가 혈관 벽을 두드리듯이 요동치고 있다. 도시의 심장이 두근거린다. 커다란 빗방울들이 지붕을 뚫고들어오는 소리가 널리 퍼진다. 폭, 폭, 폭. 뾰족하게 갈아놓기까지 한 위턱들이 물방울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다. 3단계 경보 페로몬이 퍼져나간다. 가장 위급한 상황이다. 흥분한 몇몇 일개미들이 사방으로 달려간다. 팽팽히 긴장된 그들의 더듬이 에서 뜻 모를 울부짖음이 담긴 페로몬들이 쏟아져나온다. 흥분을 억 제하지 못하고 그들 중의 몇몇은 동료들에게 달려들어 상처를 내기도 한다. 불개미들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경보 페로몬은 뒤푸르 씨 샘에 서 발산되는 물질이다. N-데칸이라 불리는, 휘발성이 강한 탄화수소 의 하나로서 화학식은 C10H12이다. 그 페로몬의 냄새는 겨울잠을 자 고 있는 유모 개미를 사나운 미치광이로 만들 수 있을 만큼 아주 진하다. 문지기 개미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사나운 물결이 금단 구역이라 고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영웅적인 문지기 개미들이 납작한 머리로 입구를 꽉 막고 있었기 때문에 물이 도시 한가운데의 그루터기 안으로는 스며들지 않았다. 클리푸니 여왕을 비롯한 금단 구역의 거주자들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물은 이제 진딧물 축사로 쏟아져내리고 있다. 풀빛 가축들이 냄새 언어로 신음을 내뱉고 있다. 물을 피해 도망을 치지 않을 수 없게 된 목축 개미들은 곧 알을 낳을 채비를 하고 있는 한 무리의 진딧물 만 구해 가지고 달아난다. 개미들은 곳곳에 둑을 쌓아보려고도 하고, 주요한 통로에 전략적 으로 설치해 놓은 둑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면서 성난 급류를 막아보 려고 애면글면한다. 그러나 물의 힘엔 당할 수가 없다. 둑이 부서지 고, 갈라지고, 쪼개진다. 막혀 있던 물이 터지면서 용감한 건축 개 미들을 휩쓸어간다. 익사자들을 실은 물이 통로 천장을 무너뜨리고 다리를 뽑아버리고 지하의 지형을 온통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나더니 이제 버섯 재배장 으로 쏟아져 들어간다. 거기에서도 소중한 것들이 휩쓸려간다. 농경 개미들은 겨우 약간의 팡이 홀씨만을 챙겨가지고 달아난다. 물에 사는 딱정벌레, 즉 클리푸니가 그토록 길들이고 싶어하던 그 물방개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 환호 작약하면서 물에 떠내려오는 진 딧물들과 개미들의 시체와 허우적거리는 애벌레들을 잡아먹는다. 물을 피해 돌고 또 돌아 103683호는 마침내 뿔풍뎅이들의 축사에 다다른다. 그 가련한 천장이 너무 낮아서 뿔풍뎅이들은 이내 천장에 부딪히고 공포에 휩싸인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엄청난 손실을 피할 수 없다. 부 지런한 일개미들은 뿔풍뎅이 알 몇 개라도 구할 생각으로 알이 들어 있는 둥근 똥 덩어리를 정신없이 밀고간다. 다리가 물에 젖자 뿔풍뎅이들은 격렬한 공포에 사로잡혀 뿔로 천 장을 들이받는다. 103683호는 병정개미로서의 용맹성을 발휘하여 그 들이 뿔질을 해대는 사이로 지나간다. 마침내 반체제 개미들의 은신처 입구가 나타난다. 신을 믿는 자들 도 믿지 않는 자들도 모두 거기에 있다. 그런데 신을 믿지 않는 자 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움직이고 있는데, 신을 믿는 자들은 이상하게 도 잠잠하다. 그들은 재앙에도 별로 놀라지 않는 모양이다. <우리는 신들을 제대로 봉양하지 못했다. 그래서 신들이 물로 벌 을 내리시는 것이다.> 103683호는 단조롭게 되풀이되는 그들의 페로몬을 중단시키고 그 들을 설득한다. <조금 있으면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진다. 반체제 운동을 계속하고 싶으면 지체없이 달아나야 한다.> 개미들이 마침내 그의 페로몬을 받아들이고 그의 뒤를 따른다. 그 곳을 막 떠나려는데 24호라 불리는 개미가 나방 고치를 내민다. 103683호가 전에 거기를 찾아왔을 때 놓고 갔던 그 고치다. <메르쿠리우스 임무를 위한 거야. 이걸 잘 챙겨야 해.> 더 이상 묻지 않고 103683호는 고치를 받아 몸에 지닌 다음, 반체 제 개미들을 이끌고 나아간다. 그러나 이제 뿔풍뎅이 축사를 통과하 기가 어렵게 되었다. 방이 물에 잠겨 있다. 뿔풍뎅이들도 개미들도 모두 물 위에 둥둥 떠 있다. <한시바삐 새 터널을 파야 한다.> 103683호가 명령한다. 물이 점점 올라온다.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저기 널려 있던 먹이들이 떠오른다. 물이 점점 빠르게 올라온다. 그래도 신을 믿는 개미들은 불평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도시를 휩쓸고 있는 그 비가 클리푸니의 원정을 막기 위해 온 것이 라고 믿고 있다. 53. 가슴 저미는 추억 "미안해요, 아가씨." 누군가가 레티샤 웰즈에게 말했다. 다시 눈을 떠 보니 아직 종점에 다다르지 않았다. 어떤 여자가 그 녀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미안해요, 아가씨. 뜨개 바늘로 아가씨를 찌른 것 같아요." "괜찮아요." 레티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인은 분홍색 털실로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자기가 뜨개질한 천을 펼쳐놓느라고 자리를 많이 차지하고 있었다. 레티샤 웰즈는 '손가락들'을 움직이며 거미처럼 실을 뽑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뜨개 바늘들이 귀에 거슬리는 쇳소리를 내면서 매듭을 자꾸 늘려가고 있었다. 여인의 분홍색 작품은 배내옷을 닮았다. 저 여자는 플란넬로 만든 저 굴레를 어떤 가련한 아이에게 씌우려는 것일까 하고 레티샤는 생 각했다. 마치 그 질문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여인은 사기질로 된 멋 진 틀니를 드러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우리 아들 주려고 그래요." 바로 그 순간에 레티샤의 눈길은 어떤 포스터에 머물렀다. '우리 나라는 아이들을 필요로 합니다. 출산율 저하에 맞서 싸웁시다.' 레티샤 웰즈는 약간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아이들을 만든다는 것! 자기를 닮은 생명을 만들어 자기 생명을 확장하고 자기를 대량 으로 퍼뜨린다는 것! 그것은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본원적인 질서이 다. 먼저 양을 생각하고 그 다음에 질을 생각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아이를 낳는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 은 어떤 나라의 어떤 정책도 초월하는 영원한 선전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다. 그 선전이란, 지구 위에 인간의 영향력을 확대하라는 것이다. 레티샤 웰즈는 그 아기 엄마의 어깨를 붙잡고 눈을 똑바로 바라보 면서 다은과 같이 외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안 돼요. 더 이상 아이를 만들지 마세요. 참으세요. 좀 삼가세요. 도대체 이게 뭐예 요? 피임약을 드시고 당신이 사랑하는 남자들에게 콘돔을 주세요. 내가 당신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처럼 당신도 임신 가능성이 많은 친 구들을 설득하세요. 제대로 된 아이가 하나 생길 때 막돼먹은 애들 은 100명이 생겨요. 그건 해볼 만한 일이 못 되잖아요. 마구잡이로 만들어진 그런 애들이 나중에 세상을 주름잡게 되는 거예요. 지금 그 결과를 우리가 보고 있잖아요? 당신 어머니가 좀더 신중한 분이 었다면 이 모든 고통을 피할 수 있었을 거예요. 당신 부모님들이 당 신을 세상에 내보낸 것과 같은 못된 짓을 당신 자녀들에게 되풀이하 지 마세요. 서로 사랑하는 걸 중단하세요. 당신 자신이 성장하는 것 은 좋지만 당신을 닮은 생명을 늘리지는 마세요.' 레티샤는 일종의 염세주의자였다. 염세주의적 증상 가운데서도 대 인 공포증의 단계에 있었다. 대인 공포증의 발작이 일어날 때마다 레티샤의 입 안에 씁쓸한 뒷맛이 남곤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놀 라운 것은 그 씁쓸한 맛을 그녀 자신이 그다지 불쾌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레티샤는 마음을 가다듬고 그물을 만드는 거미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와 마주 보고 있는 그 얼굴은 어미된 자의 행복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안 돼. 그걸 생각해선 안 돼. 그러나 기어이 그녀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어머니였다. 그녀의 어머니 링미였다. 링미 웰즈는 급성 백혈병에 걸려 있었다. 혈액 암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병은 누구도 용서하는 법이 없었다. 레티샤가 그녀의 다정 한 어머니 링미에게 의사들이 뭐라고 하더냐고 물으면, 어머니는 이 렇게 말하곤 했었다. "걱정하지 마라. 곧 나을 게다. 의사들은 잘 될거라고 하고 약도 점점 효능이 좋아지고 있잖니?" 그러나 욕실 세면대에는 종종 피가 흥건했고 진통제 병은 금방금 방 바닥이 났다. 어머니는 의사가 지시한 분량을 초과해서 진통제를 복용했다. 이제 어머니의 고통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날 구급차가 와서 어머니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걱정하지 마라. 거기 가면 필요한 기계가 다 있고 전문 의사들이 나를 돌보아줄 거란다. 내가 없는 동안 집 잘 보고 아빠 말씀 잘 들 어라. 그리고 매일 병원으로 나를 보러 오너라." 어머니 말대로 병원에는 필요한 기계가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그 래서 어머니는 죽음에 이르지 않았다. 어머니는 세 번 자살을 시도 했는데, 그때마다 의사들이 죽음의 순간에서 어머니를 구해냈다. 어 머니가 몸부림을 치자 그들은 가죽띠로 어머니를 묶고 모르핀을 주 사했다. 레티샤가 어머니를 찾아갔을 때 어머니의 팔은 약물 주사와 수혈 때문에 생긴 혈종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나니 링미 웰즈는 쭈그렁 노파가 되어버렸다. "네 엄마는 돌아가시지 않을거야.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네 엄마 를 지켜줄게." 의사들은 그렇게 장담했지만 링미 웰즈는 그들이 자기 목숨을 구 해주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딸의 팔을 잡고 어머니는 이렇게 속삭였다. "난 말이다.... 죽고 싶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런 부탁을 한들 열네 살짜리 계집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사람이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 사람이 병실에서 간호를 받고 세 끼 식 사를 하는 데 매일 천 프랑씩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 더욱 그러했다. 아버지 에드몽 웰즈도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한 다음부터 눈에 띄 게 늙어갔다. 링미는 남편에게 임종을 지켜달라고 부탁했었다. 에드 몽은 아내가 더 이상 차도를 보이지 않자 체념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아내에게 호흡을 조절해서 심장 박동을 늦추는 법을 가르쳤다. 그는 아내에게 최면을 걸었다. 물론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지 만, 레티샤는 어머니가 잠드는 것을 돕기 위하여 아버지가 어떻게 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당신의 마음은 지금 고요해. 아주 고요해. 당신의 숨결은 앞뒤로 일렁거리는 물결과도 같다. 물결이 잔잔해. 앞으로, 뒤로, 당신의 숨결의 호수로 변해 가려는 바다야. 앞으로, 뒤로, 호흡이 점점 느 려지고 점점 깊어지고 있어. 숨을 한 번 쉴 때마다 당신은 더 강해 지고 더 유연해지고 있어. 당신은 이제 당신의 몸을 느끼지 않아. 당신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가벼운 깃털이야. 자, 이제 바람 속에 서 떠다니는거야." 어머니는 깃털이 되어 날아갔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고요한 미소 가 깃들여 있었다. 어머니는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죽어 있었다. 곧 소생 담당 의사들이 비상 벨을 울렸다. 그들은 한 마리 해오라기 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막고 싶어하는 족제비들처럼 어머니의 시신을 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머니가 정말로 이겼다. 그 후로 레티샤는 꼭 풀어야 할 자기만의 수수께끼를 가지게 되었 다. 그것은 암이라는 수수께끼였다. 거기다가 레티샤는 하나의 강박 관념도 갖게 되었다. 의사들을 비롯해서 인간의 운명을 쥐고 흔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증오가 그것이었다. 아무도 암을 퇴치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그 해결책을 찾는 데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 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레티샤는 확신했다. 그러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레티샤는 암 연구가가 되기로 했 다. 레티샤는 암이 퇴치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했고, 어머 니를 구할 생각은 안 하고 고통만 가중시켰던 그 의사들이 무능했다 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했다. 그녀에게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와 수수 께끼에 대한 열정만이 남았다. 기자라는 직업은 추잡한 인간에 대한 그녀의 공격 욕구와 불가사 의 한 일에 대한 뿌리깊은 열정을 동시에 충족시켜 주었다. 레티샤 는 자기의 기사를 통해 불의를 폭로하고, 대중을 선동한 위선자들을 맹렬히 공격했다. 유감스러운 것은 위선자들이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는 것이었다. 레티샤는 곧 자기의 직장 동료들이 위선자 대열의 선 두에 설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말할 때는 용감한데 행동할 때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논평을 할 때는 정의파임을 자 처하는 사람들이 봉급을 인상해 주겠다는 달콤한 약속 앞에서는 비 열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언론계 사람들에 비하면 그래도 의료계 는 멋진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레티샤는 언론계 내에 자기의 생태적 지위, 즉 자기의 사 냥터를 마련했다. 레티샤는 오리 무중에 빠진 몇 건의 형사 사건을 해결해서 명성을 얻었다. 현재 그녀의 동료들은 그녀가 추락할 때를 기다리면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레티샤는 추락하는 일이 없 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다음의 전리품을 위해서 레티샤는 자기의 사냥 목록에 살타-노가 르 사건을 올려놓고 있었다. 명민한 멜리에스 경정에게는 안된 일이 지만 어쩔 수 없다! 드디어 종점이었다. 레티샤는 내릴 채비를 했다. "잘 가요, 아가씨." 지하철 문을 나서는 그녀에게 배내옷을 챙기면서 뜨개질하는 여자 가 말했다. 54. 백과 사전 어떻게 장애물이 앞에 나타났을 때, 사람이 보이는 최초의 반응은 '왜 이 런 문제가 생긴 거지? 이것은 누구의 잘못이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 그는 잘못을 범한 사람을 찾고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그에게 부과해야 할 벌이 무엇인지를 찾는다. 똑같은 상황에서 개미는 먼저 '어떻게, 누구의 도움을 받아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개미 세계에는 '유죄'라는 개념이 전혀 없다. '왜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까'라고 자문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하 면 일이 제대로 되게 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하는 사람들 사이에 커 다란 차이가 생기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현재 인간 세계는 '왜'라고 묻는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어떻게'라고 묻는 사람들이 다스리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55. 물바다, 엄청난 물바다 개미들은 위턱과 발톱을 이용해 열심히 땅을 판다. 파고 또 파는 방법 이외에는 달리 구원의 길이 없다. 구조 터널을 파기에 골몰해 있는 반체제 개미들의 주위로 땅이 울리는 소리가 번져나간다. 물이 완전히 도시를 휩쓸고 있다. 클리푸니의 멋진 계획과 빛나는 성과물들이 물결에 씻겨 한낱 쓰레기가 되고 만다. 헛된 꿈이었다. 정원도, 버섯 재배장도, 축사도, 꿀단지 개미들의 방도, 겨울용 곡 식 창고도, 온도가 조절되는 영아실도, 햇빛방도, 수로망도 한낱 부 질없는 꿈이었다.... 그 모든 것들이 전혀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 럼 소용돌이 속으로 덧없이 사라지고 있다. 갑자기 구조 터널의 측벽이 터지면서 물기둥이 분출한다. 103683 호와 그의 동료들은 흙을 삼키면서까지 되도록 빨리 파려고 애쓴다. 그러나 터널을 파는 일은 불가능하다. 급류가 그들을 덮쳐버린 것이다. 103683호는 이제 그들 앞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제대로 헤아릴 수가 없다. 그들은 벌써 배까지 흠뻑 젖었다. 물은 빠른 속 도로 계속 올라오고 있다. 56. 잠수 잠수. 이제 몸이 완전히 물에 잠겼다. 이제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었다. 레티샤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 고 한동안 물 속에 머물렀다. 레티샤는 물을 좋아했다. 욕조의 수면 아래에 들어가 있으면 머리채가 부풀어오르고 살갗이 판지처럼 되었다. 레티샤는 그것을 일상적인 목욕 의식이라고 불렀다. 미지근한 물과 침묵, 그것이 레티샤가 휴식을 취하는 방법이었다. 그러고 있으면 레티샤는 자신이 마치 호수의 공주라도 된 느낌이 들었다. 레티샤는 자기가 죽는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수십 초 동안 호흡을 정지한 채 머물러 있었다. 물 속에서 버티는 시간이 매일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 레티샤는 마치 양수 속에 있는 태아처럼 무릎을 구부려 턱 밑까지 당겨 올리고 천천히 몸을 흔들었다. 일종의 수중 무용인 셈인데 그 의미는 그녀만이 알고 있었다. 레티샤는 머리 속의 모든 잡념을 지워버리기 시작했다. 암 퇴장, 살타 퇴장, (딩동). '일요 메아리' 편집국 퇴장. 자기의 아름다움 퇴장, (딩동). 지하철 퇴장, 애 낳는 여자 퇴장, 여름날 대대적인 벌채를 하듯 레티샤는 잡념을 지워나갔다. 딩동. 레티샤는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모든 것이 메마른 느낌이 다. 건조하다. 싫다. (딩!동!).... 시끄럽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초인종을 누르고 있었다. 레티샤는 공기 호흡을 알아낸 양서류의 동물처럼 엉금엉금 기어서 욕조 밖으로 나왔다. 레티샤는 커다란 가운을 들어 몸을 감싼 다음 종종걸음을 치며 거실로 나왔다. "누구세요?" 문 너머로 그녀가 물었다. "경찰입니다." 레티샤는 문에 난 어안 렌즈 구멍을 들여다보고 멜리에스 경정을 알아보았다.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오셨나요?" "수색 영장을 가지고 왔습니다." 레티샤는 마지 못해 문을 열었다. 멜리에스는 전혀 서두르는 기색 을 보이지 않았다. "CCG에 갔었는데 그 사람들 말이, 어떤 플라스크들을 당신이 챙겨 갔다는군요. 그런데 그 플라스크 안에 살타 형제와 카롤린 노가르가 연구하던 화학 약품이 들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찾으러 왔습니다." 레티샤는 플라스크들을 가져와서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웰즈 양, 이 안에 뭐가 들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일을 너무 쉽게 하려고 그러시는군요. 제가 멜리에스 씨 일을 도 울 의무는 없잖아요? 화학적인 감정을 하느라고 우리 신문사 돈까 지 썼는걸요. 감정 결과를 밝히는 문제는 우리 신문사 소관이지 저 하곤 상관없어요." 그는 후줄그레한 옷차림으로 여전히 문턱에 선 채, 자기에게 도전 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이 어여쁜 처녀를 앞에 두고 거의 주눅이 들어 있었다. "웰즈 양, 좀 들어가도 될까요?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멜리에스는 세찬 소나기를 만난 듯 흠뻑 젖어 있었다. 그가 딛고 있는 현관의 깔개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레티샤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좋아요, 하지만 조금만 있다 가셔야 돼요. 당신에게 할애할 시간 이 별로 없어요." 멜리에스는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고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고약한 날씨예요." "푹푹 찌고 나더니 소나기가 오는군요." "계절이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버렸어요. 더위에서 추위로, 건기에 서 우기로 넘어가는 자연스런 과정이 없어졌어요." "자, 들어오세요. 앉으세요. 뭣 좀 드실래요?" "뭐가 있습니까?" "꿀술 어때요?" "그게 뭔데요?" "꿀하고 물하고 효모를 섞은 다음 발효시킨 거예요. 올림푸스의 신들과 켈트의 드루이드 승려들이 마시던 음료예요." "어디 그 올림푸스 신들의 음료 좀 마셔봅시다." "좀 기다려주세요. 먼저 머리를 말려야겠어요." 욕실에서 헤어드라이어가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멜리에 스는 벌떡 일어났다. 그 틈을 이용해서 집을 조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한것이다. 레티샤의 집은 고급 아파트였다. 모든 장식이 집 주인의 고상한 취향을 보여 주고 있었다. 쌍쌍이 얼싸안고 있는 사람들을 표현한 비취 장식물도 있었다. 할로겐 등이 벽에 걸린 동물 도판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벽 쪽으로 다가가 그 도판 가운데 하나를 들여다보았다. 세계 전역에 사는 50여 종의 개미 목록이 적혀 있고 개미들이 정 확하게 그려져 있었다. 헤어드라이어는 여전히 윙윙거리고 있었다. 개미의 종류가 갖가지였다. 오토바이 타는 순찰 대원을 닮은, 다 리에 하얀 털이 달린 검은 개미 Rhopalothrix orbis, 가슴 전체에 뿔이 돋아 있는 개미 Acromymex versixcolor, 끝에 집게가 달린 나 팔 모양의 대롱을 머리에 달고 있는 개미 Orectnathus, 히피 족 같 은 느낌을 주는 기다란 털 타래가 달린 개미 Tingimyrmex mirabilis. 개미들이 그토록 다양한 모습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경정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는 곤충학자의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검은 래커 를 칠한 문 하나를 발견하고 그는 그것을 열어보려고 했다. 문은 잠 겨 있었다. 주머니에서 머리 핀 하나를 꺼내 자물쇠를 몰래 따려고 하는데, 헤어드라이어 돌아가는 소리가 갑자기 그쳤다. 그는 얼른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레티샤의 머리 모양은 이제 루이즈 브룩 식으로 돌아와 있었다. 레티샤는 허리에 주름을 넣은 기다란 비단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멜 리에스는 그녀의 외모에 이끌리지 않으려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개미에 관심이 많으신가 보죠?" 그가 사교적인 어투로 물었다. "별로예요. 저희 아버지께서 관심이 많으셨지요. 아버지께서는 대 단한 개미 전문가이셨어요. 이 도판들은 스무 살 때 생일 선물로 아 버지께서 주신 거예요." "웰즈 양 아버님이라면 에드몽 웰즈 박사 말씀이군요." 그 말에 레티샤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저희 아버님을 아세요?" "그 분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습니다. 우리 경찰 에서 그분을 잘 알게 된 것은 그분이 시바리트 가에 있는 그 저주받 은 지하실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죠. 그 사건 기억하시죠? 스물한 명 이나 되는 사람들이 끝없는 동굴 속으로 사라졌던 사건 말입니다." "물론이죠. 그 사람들 중에 제 사촌 오빠와 올케, 조카, 할머니가 들어 있는 걸요." "이상한 사건이오." "수수께끼를 그토록 좋아하시는 분이 어떻게 그 실종 사건에 대해 서는 수사를 안 하셨어요?" "저는 그 당시 다른 사건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 지하실 사건을 맡았던 것은 알랭 빌솅 경정이었지요. 그런데 그 사람에게 운이 따 르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다시는 올라오지 못 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불가사의한 일을 좋아하시는 웰즈 양도 마 찬가지인 줄로 알고 있는데...." 그 말에 레티샤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좋아하는 건 불가사의를 없애는 거죠." "살타 형제와 카롤린 노가르의 살인범을 웰즈 양이 찾아낼 수 있 을 것 같습니까?" "어쨌든 해봐야죠. 저희 독자들에게 기쁨을 주는 일이니까요." "당신의 조사 작업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저한테 이야기해 주 시지 않겠습니까?" 레티샤는 고개를 저었다. "각자 자기 방식대로 찾아보는 게 좋겠어요. 그래야 서로에게 방 해가 안 될 테니까 말이죠." 멜리에스는 껌 하나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그것을 씹고 있으니 언제나 그렇듯이 마음이 훨씬 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다시 물었다. "저 검은 문 뒤에는 뭐가 있어요?" 레티샤 웰즈는 그 난데없는 질문에 한 순간 놀랐지만, 대답하기 거북하다는 표정을 얼른 감추고 별거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제 서제예요. 그러나 보여드리지는 않을 거예요. 말 그대로 난장 판이 돼 있거든요." 말을 끝내고 나서 레티샤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기다란 궐련 파이프에 끼운 다음 까마귀 모양으로 생긴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멜리에스는 자기가 몰두하고 있는 문제로 다시 돌아갔다. "당신은 당신이 조하하신 것에 대해 비밀을 유지하고 싶은 모양입 니다만, 저는 제 수사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말씀드릴 생각입니다." 레티샤는 자개빛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뿜어내고 말했다. "좋으실 대로 하세요."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네 명의 피해자는 모두 CCG에서 일했습니 다. 사람들은 직업적인 경쟁 의식 때문에 어떤 불순한 유혹에 이끌 릴 수 있습니다. 대기업에서는 적대 관계가 흔히 나타납니다. 사람 들은 승진 문제나 봉급 문제 때문에 서로 시기하고 중상합니다. 그 리고 과학자들의 세계에도 이익에 급급한 사람들은 흔히 있습니다. 따라서 경쟁 관계에 있는 화학자의 소행일 거라는 가정이 자연스럽 게 떠오르게 됩니다. 어떤 화학자가 동료들을 독살했을 가능성이 있 습니다. 그가 사용한 독은 나중에 효과가 나타나는 맹독입니다. 그 렇게 가정하면 부검을 통해 밝혀진 소화기 내의 그 헐어서 생긴 상 처들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너무 앞질러가고 계시는군요. 멜리에스 씨. 당신은 독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줄곧 공포 쪽을 잊고 계시나봐요. 아주 심 한 정신적 충격을 받아도 위장이 헐 수 있어요. 그리고 네 피살자들 은 모두 아주 심한 공포를 느꼈어요. 공포가 이 사건의 열쇠예요. 멜리에스 씨도 저도 그들의 얼굴에 공포를 불러일으킨 게 무엇인지 를 아직 모르고 있어요." 멜리에스가 반박했다. "물론 나도 그 공포에 대해서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공포 를 느끼게 할 수 있는 걸 모두 떠올려봤는걸요." 레티샤는 다시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내뿜었다. "그럼 멜리에스 씨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게 뭐예요?" 멜리에스는 자기가 먼저 그 질문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다가, 거꾸 로 질문을 받고 나자 완전히 허를 찔린 기분이 되었다. "그건.... 음...." "다른 어떤 것보다 무서워하는 뭐가가 있지 않아요?" "그것을 털어놓고 말씀드릴 테니까, 그 대신 당신도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뭔지 진지하게 말씀해 주셔야 됩니다." 레티샤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좋아요." 멜리에스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는.... 저는 늑대를.... 늑대를 무서워합니다." "늑대요?" 레티샤는 웃음을 터뜨리며 '늑대'라는 말을 되뇌었다. 레티샤는 몸을 일으켜 그에게 꿀술 한 잔을 갖다주었다. "저는 진실을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레티샤는 다시 일어나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멀리에 그녀 의 관심을 끄는 무엇인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음.... 저는 말이에요.... 저는.... 당신을 무서워해요." "농담 그만 하시고, 진지하게 말씀하시기로 약속했잖아요." 레티샤가 몸을 돌려 다시 담배 연기의 소용돌이을 일으켰다. 터키 옥 빛깔의 담배 연기 사이로 그녀의 연보라빛 눈동자가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정말이에요. 전 당신을 두려워해요. 당신 너머에 있는 전 인류를 두려워해요. 남자, 여자, 노인, 아가 등 모든 사람들을 두려워해요. 우리는 어디에서나 야만인들처럼 행동하고 있어요. 저는 우리 인간 의 육체가 흉칙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가운데 누구도 오징어가 모기 의 아름다움을 못 따라간다고 생각해요...." "정말입니까?" 레티샤의 태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그토록 잘 통제되던 그녀 의 눈길은 유약함을 가장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녀의 두 눈에 광기 가 어려 있었다. 어떤 유령이 그녀의 심성을 사로잡고 있었다. 레티 샤는 기꺼이 그 광기의 힘에 자기를 내맡기고 있었다. 아무것도 거 리낄 게 없었다. 레티샤는 자기가 이제 겨우 알게 된 한 경찰관과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 "저는 우리가 인간들이 너무 오만하고, 젠 체하고, 거드름피우며, 스스로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너무 자랑스러워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농부와 신부와 병사들을 두려워하고, 의사와 환자들을 두려워 하며, 저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도, 저에게 이익을 주려는 사람들 도 두려워해요. 우리는 우리 손에 닿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고 있어 요. 우리가 파괴할 수 없는 것을 오염시켜요. 우리의 기막힌 오염 능력을 당해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화성인들이 우리 지 구에 오지 않은 것은 지구인들이 두렵기 때문일 거라고 저는 확신해 요. 화성인들은 겁을 먹고 있어요. 그들은 우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동물들과 우리 자신에게 행하는 것과 똑같이 그들을 대할까봐 두려워하는 거예요. 저는 제가 하나의 인간이라는 사실이 수치스러 워요. 저는 두려워요. 저는 저를 닮은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레티샤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하고 말을 이었다. "늑대들 때문에 죽는 사람의 수와 사람들 때문에 죽는 사람의 수 를 비교해 보세요. 나의 두려움이 당신의 두려움보다 더 온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사람들을 무서워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당신 자신이 하나의 인간 이잖습니까?" "그건 저도 잘 알아요. 저 자신에게서 두려움을 느낄 때도 있는걸요." 멜리에스는 놀란 눈으로 갑자기 증오의 빛이 서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레티샤는 얼른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아, 우리 다른 거 생각하기로 해요. 우린 둘 다 수수께끼를 좋아 해요. 마침 전 국민의 성원을 받고 있는 우리의 퀴즈 프로그램이 나 올 시간이군요. 당신에게 우리 시대의 가장 신명나는 텔레비전 시청 의 기회를 제공할까 하는데요." "고맙군요." 레티샤는 리모컨을 작동시켜 '알쏭달쏭 함정 퀴즈'를 찾았다. 57. 백과 사전 역학 관계 쥐들을 상대로 하나의 실험이 이루어졌다. 낭시 대학 행동 생물학 연구소의 디디에 드조르라는 연구자는 쥐들이 수영에 어떻게 적응하 는가를 알아보는 실험을 했다.그는 쥐 여섯 마리를 한 우리 안에 넣 었다. 그 우리의 문은 하나뿐인데, 그 문이 수영장으로 통하게 되어 있어서, 쥐들은 먹이를 나누어주는 사료통에 도달하기 위해서 수영 장을 건너야만 했다. 여섯 마리의 쥐들은 일제히 헤엄을 쳐서 먹이 를 구하려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곧 확인되었다. 쥐들 사이에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즉, 헤엄 을 치고 먹이를 빼앗기는 쥐가 두 마리, 헤엄을 치지 않고 먹이를 빼앗아 먹는 쥐가 두 마리, 헤엄도 안 치고 먹이를 빼앗지도 못하는 천덕꾸러기 쥐가 한 마리였다. 먹이를 빼앗기는 두 쥐는 물 속으로 헤엄을 쳐서 먹이를 구하러 갔다. 그 쥐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자, 먹이를 빼앗아 먹는 두 쥐는 그 쥐들을 때리고 머리를 물 속에 처박 았다. 결국 애써 먹이를 가져온 두 쥐들은 자기들의 먹이를 내놓고 말았다. 두 착취자가 배불리 먹고 난 다음에야 굴복한 두 피착취자 들은 자기들의 크로케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착취자들은 헤엄을 치는 일이 없었다. 그 쥐들은 헤엄치는 쥐들을 때려서 먹이를 빼앗 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독립적인 쥐는 아주 힘이 세기 때문에 착 취자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천덕꾸러기 쥐는 헤엄을 칠 줄도 모르고 헤엄치는 쥐들에게 겁을 줄 수도 없었기 때문에, 다 른 쥐들이 싸울 때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먹었다. 그 후에 다시 실험이 행해진 스무 개의 우리에서도 역시 똑같은 구조, 즉 피착취자 두 마리, 착취자 두 마리, 독립적인 쥐 한 마리, 천덕꾸러기 쥐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러한 위계 구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그 연구자는 착취자 여섯 마리를 함께 우리에 넣었다. 그 쥐들은 밤새도록 서로 싸웠다. 다음날 아침 이 되자, 그 쥐들 가운데 두 마리가 식사 당번이 되었고, 한 마리는 혼자 헤엄을 쳤으며, 나머지 한 마리는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참 아내고 있었다. 착취자들에게 굴복했던 쥐들을 상대로 역시 똑같은 실험을 했다. 다음날 새벽이 되자, 그 쥐들 가운데 두 마리가 왕초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실험에서 우리가 정작 음미해 보아야 할 대목은, 쥐들 의 뇌를 연구하기 위해서 머리통을 열어보았을 때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쥐가 바로 착취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착취자들은 필시 피착취자들이 복종하지 않게 될까봐 무척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58. 젖지 않은 방 물이 그들의 등을 핥는다. 103683호와 그의 동료들은 미친 듯이 천장을 파고들어간다. 그들의 몸뚱이가 온통 급류에 뒤덮일 즈음,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들이 마침내 젖지 않은 방에 다다른 것이다. 살았다. 그들은 재빨리 자기들이 들어온 구멍을 막는다. 모래로 된 벽이 버틸 수 있을 것인가? 그랬다. 급류는 그 벽을 빙 돌아서 더 부서지 기 쉬운 통로들 쪽으로 쏟아져 들어간다. 그 작은 방에서 서로 바싹 몸을 붙인 채 웅크리고 있는 그 개미들은 기분이 한결 나아짐을 느낀다. 반체제 개미들은 자기들의 수를 헤아려보고 살아남은 자가 50마리 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신을 믿는 소수의 개미들은 여전 히 중얼거리는 듯한 페로몬을 발하고 있다. <우리는 손가락들을 제대로 공양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늘 을 열어버린 것이다.> 개미 세계의 우주 발생 이론에서는 지구가 입방체로 되어 있고 그 위에 구름 천장이 있으며 그 구름 천장에 '하늘의 바다'가 담겨 있 다고 보고 있다. 하늘의 바다가 너무 무거워지면 천장이 갈라지면서 이른바 비라는 것이 쏟아져내린다는 것이다. 신을 믿는 개미들은 그 구름 천장이 쪼개지는 것은 손가락들이 거 기를 발톱으로 찌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어쨌든간 에, 개미들은 모두 날이 개기를 기다리면서 최선을 다해서 서로 돕 고 있다. 몇몇 개미들은 입과 입을 맞대고 영양교환을 한다. 어떤 개미들은 몸에 남아 있는 열기를 보호하려고 서로 몸을 비비대고 있다. 103683호는 더듬이를 벽에 대고 물의 공격을 받고 있는 도시가 아 직도 진동하고 있음을 느낀다. 벨로캉은 이제 움직이지 않는다. 물이라는 적에 완전히 박살이 난 것이다. 여러 가지 형태를 지닌 그 적은 투명한 다리를 이용하여 아 무구멍으로나 마구 쳐들어온다. 개미들보다 훨씬 더 유연하고 적응 력이 강한 그 비라는 괴물에게 화 있을진저! 순진한 병정개미들은 자기들에게로 미끄러져 오는 물방울을 위턱으로 쳐서 쪼갠다. 물방 울 하나를 죽이면 곧 네 개가 나타난다. 떨어지는 비에 대고 다리를 휘두르면 빗물이 다리에 달라붙는다. 비에 대고 개미산을 쏘면 비는 부식제가 되어버린다. 비를 떼밀면 비는 개미를 맞아들이고 개미들 을 붙들어둔다. 물결에 휩쓸려 희생된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도시의 모든 문들이 뻥 뚫려 있다. 벨로캉 전체가 익사한 것이나 다름없는 몰골이다. 59. 텔레비젼 라미레 부인의 곤혹스러운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그녀가 새로 운 수수께끼인 그 수열 문제에서 헤매고 난 뒤부터 그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두 배로 뛰었다. 이제껏 실패한 적이 없는 어떤 사람이 갈 팡질팡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가학적인 쾌감을 느끼는 모양이 었다. 그게 아니라면 대중들은 승리자보다 패배자에게서 더 쉽게 친 밀감을 느끼는 한편, 패배자들을 더 좋아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쾌활한 모습으로 사회자가 물었다. -자, 라미레 여사, 이 문제의 답을 찾으셨습니까? -아니오. 아직 못 찾았어요. -자, 정신을 집중해 보세요. 라미레 여사! 저희가 제시한 수열을 보시면서 뭐 생각나는 게 없으십니까? 카메라가 먼저 백색 판을 향했다가 이어 생각에 잠긴 채 설명있고 라미레 부인에게로 쏠렸다. -이 수열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머리가 뒤죽박죽이 돼요. 어려워 요. 너무 어려워요. 그렇지만 어떤 리듬 같은 것이 있는 것 같기는 해요.... 맨 앞에는 언제나 '1'이 나오고....'2'는 가운데 모여 있어요.... 라미레 부인은 글자가 적혀 있는 백색 판 앞으로 다가가서 마치 국민학교 여선생님처럼 설명하기 시작했다. -언뜻 보면 지수적인 수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건 아닙니다. 저는 '1'들과 '2'들 사이에 어떤 규칙이 있다고 생 각했습니다. 그런데 '3'이라는 숫자가 튀어나오더니 역시 계속 늘어 납니다.... 그래서 저는 전혀 규칙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 다. 임의의 방식으로 배열된 숫자들로 이루어진 어떤 혼돈의 세계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성으로서 의 육감이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고 있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 숫 자들은 아무렇게나 놓인 게 아니야'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라미레 부인, 이 수열을 보시면서 무엇을 생각하셨나요? 라미레 부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우스갯소리 좀 할까요? 그녀가 말했다. -라미레 여사의 생각을 들어보겠습니다. 여사께서 뭔가를 생각하 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럼, 라미레 여사, 생각하신 게 뭔가요? -우주의 탄생에 관한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라미레 부인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부인의 말이 이어졌다. -'1'은 신의 불꽃입니다. 그것이 커지고, 그 다음에 나뉩니다. 저 에게 우주를 지배하는 수학 방정식을 수수께끼로 내놓다니, 그게 어 디 가당하기나 한 일입니까? 아인슈타인이 평생 동안 찾으려다가 못 찾은 것을 저보고 찾으란 말입니까? 세계의 모든 물리학자들이 오매 불망 찾아헤매는 그것을요? 사회자의 얼굴에 처음으로 그 방송의 주제에 걸맞는 수수께끼 같 은 표정이 어렸다. -그럴 수도 있지요, 라미레 여사. 그래서 저희 프로그램이 바로 <알쏭달쏭.... ....함정퀴즈!> 방청석에서 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렇습니다. <알쏭달쏭 함정 퀴즈>는 한계를 모릅니다. 자, 라미 레 여사,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조커를 쓰시겠습니까? -조커를 쓰겠습니다. 추가 정보가 필요합니다. -백색 판을 보십시오. 사회자가 소리쳤다. 사회자는 다들 이미 알고 있는 수열을 되풀이해서 썼다. 1 11 12 1121 122111 112213 12221131 그런 다음, 여전히 자기의 메모지를 보지도 않은 채, 여덟 번째 줄의 수를 덧붙였다. 1223123111 -힌트를 상기시켜 드리겠습니다. 첫번재 힌트는 '영리한 사람일수 록 답을 찾기가 어렵다'였습니다. 두 번째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 은 다 잊어버려야 한다'였습니다. 자, 그러면 세 번째 힌트를 드리 겠습니다. '우주가 그렇듯이 이 수수께끼는 절대적인 단순성에 기원 을 두고 있다'입니다. 박수 갈채. -라미레 여사, 제가 한 가지 도움 말씀을 드릴까요? 사회자가 다시 쾌활한 낯빛으로 물었다. -부탁합니다. 도전자가 말했다. -제가 보기엔 말이예요. 라미레 여사께선 별로 단순하지도 않고 별로 어리석지도 않습니다. 한마디로 충분히 비어 있지 않습니다. 여사의 지능이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여사의 세포 속으로 후퇴해 서 여사의 내부에 아직 남아 있는 순진한 소녀를 다시 만나십시오. 그럼, 시청자 여러분, 오늘은 여기서 작별 인사를 드려야겠습니 다. 내일 뵙겠습니다. 변함없는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레티샤 웰즈는 텔레비젼을 껐다. "점점 재미있어져 가지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그 수수께끼의 답을 찾으셨나요?" "아뇨, 당신은요?" "저도 역시, 우리는 너무 영리한 모양입니다. 그 사회자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멜리에스는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그는 플라스크를 자기의 넓은 호주머니 안에 넣었다. 현관을 나서며 그가 다시 물었다. "우리 서로 귀찮게 하지 않고 서로 도와가며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게 안 되는 이유가 뭐죠?" "첫째는 저에게 혼자서 일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고요. 둘째는 경찰과 언론은 결코 좋은 사이가 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예외라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레티샤는 흑단 같은 짧은 머리채를 흔들었다. "예외는 없어요. 자, 멜리에스 씨, 더 나은 쪽이 이기길 바라겠어요." "당신이 그걸 원하시니, 나도 더 나은 쪽이 이기길 바라겠습니다." 그는 계단 속으로 사라졌다. 60. 원정군 출발하다. 비가 탈진해서 후퇴한다. 모든 전선에서 후퇴하고 있다. 비에게도 포식자는 있다. 그 이름은 '태양'이다. 개미 문명의 오랜 동맹자인 태양은 좀 늑장을 부리긴 했어도 때가 되어 나타났다. 태양이 재빨 리 하늘의 벌어진 틈을 메꾸어버리자, '하늘의 바다'는 더 이상 '세 계'로 흘러내리지 않는다. 재앙에서 살아남은 벨로캉 개미들은 몸을 말리고 덥히기 위해서 도시 밖으로 나온다. 비가 내리면 개미들은 겨울잠과도 같은 상태에 빠진다. 습기가 추위 대신에 몰려온다는 점만 다르다. 습기는 추위 보다 더 나쁘다. 추위는 잠들게 할 뿐이나 습기는 개미들을 죽이기 때문이다. 밖에서 개미들은 비를 정복한 태양에서 찬사를 보낸다. 몇몇 개 미들은 옛부터 전해오는 햇빛의 찬가를 읊조린다. 햇살이 우리의 텅 빈 몸 안으로 들어와 고통에 겨운 우리의 근육을 움직이고 갈라진 우리의 생각을 맺어주도다. 도시 안 곳곳에서 개미들이 그 냄새 노래를 되풀이한다. 그러나 벨로캉은 참담한 패배를 겪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빗방울 에 맞아 구멍이 숭숭 뚫린 채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은 지붕에서 맑 은 물줄기가 솟아나는데, 그 물줄기에 검은 덩어리가 섞여 나온다. 익사자들의 시체다. 다른 도시에서 전해 온 소식도 우울하긴 마찬가지다. 단 한차례의 소나기가 위풍 당당하던 불개미 연방을 이렇게 무참히 유린할 수 있 단 말인가? 단 한차례의 비가 하나의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단 말인가? 지붕이 폐허가 되면서 햇빛방이 드러나 있는데, 그 안에 있는 고 치들은 이제 진흙탕 속의 축축한 알갱이에 지나지 않는다. 알들을 지키겠다고 다리 사이에 알 모다기를 싣고 가던 수많은 유모 개미들 이 그것들을 물에 빠뜨려 죽음을 맞게 했다. 앞다리 끝에 알 모다기 를 얹고 머리 위로 올려서 옮긴 몇몇 유모 개미들은 알들을 구하는 데 성공했다. 금단 지역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고 있던 문지기 개미들 가운데 생존자는 별로 없다. 그 몇 안 되는 생존자들이 금단 구역의 입구를 빠져 나온다. 그들은 두려움을 느끼면서 엄청난 재난이 휩쓸고 간 자리를 둘러본다. 클리푸니 자신도 피해가 막심한 것을 보고 놀라움 을 금치 못한다. 물의 공격에도 버틸 수 있는 도시를 건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 나? 한바탕 쏟아져들어오는 물줄기만으로도 세계가 개미 문명의 초 기로 되돌아가버린다면 지혜라고 하는 게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103683호와 반체제 개미들도 그들의 은신처를 떠난다. 103683호는 곧 여왕개미를 만나러 간다. 61. 검은 액체 막시밀리앵 메커리어스 교수는 벨뷔 호텔의 자기 방에서 시험관의 내용물을 살펴보고 있었다. 카롤린 노가르가 그에게 전해 준 물질이 검은 액체로 변해 있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두 방문객이 오기로 되어 있었다. 이디오피아의 두 학자인 질 오데르진과 쉬잔 오데르진 부부였다. "잘 되어갑니까?" 그 남자가 다짜고짜 물었다. "계획한 대로 완벽하게 되어갑니다." 매커리어스 교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살타 형제네 집에 전화를 했더니 안 받던데요." "별일 아닐겁니다. 휴가 여행이라도 떠난 게지요 뭐." "카롤린 노가르네 집에도 전화를 안 받던데요." "그 사람들 모두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제 좀 쉬고 싶어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좀 쉰다고요?" 쉬잔 오데르진이 비꼬듯 말했다. 쉬잔은 손가방을 열고 신문 스크랩 몇 장을 꺼냈다. 살타 형제 와 카롤린 노가르의 죽음과 관련된 기사들이었다. "당신은 신문도 안 봐요. 메커리어스 교수? 몇몇 신문들은 이미 그 사건들을 '납량 스릴러'라고 호들갑을 떨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 데 뭐 계획한 대로 완벽하게 되어간다고요?" 적갈색 머리의 메커리어스 교수는 그 소식을 접하고도 별로 걱정 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계란을 깨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두 이디오피아 인의 얼굴에는 불안한 빛이 역력했다. "계란이 다 깨지기 전에 '오믈렛'이 익기를 바랄 뿐이지요." 메커리어스 교수는 미소를 지으면서 두 사람에게 작업대 위에 있 는 시험관을 가리켰다. "저기 있습니다. 우리의 '오믈렛'입니다." 세 사람은 다같이 푸르스름한 빛을 띤 검은 액체를 감탄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오데르진 교수는 검은 액체가 담긴 플라스크를 아주 조 심스럽게 저고리 안쪽의 호주머니에 넣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메커리어스 씨, 몸조심하십시오." "걱정마십시오. 나의 두 그레이하운드가 나를 지켜줄 겁니다." "그레이하운드요? 그 녀석들 우리가 왔는데 짖지도 않네요. 그런 개들을 믿을 수 있어요?" 쉬잔이 소리쳤다. "오늘 밤엔 그 녀석들이 여기에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검사를 하 느라고 수의사가 데리고 있어요. 그렇지만 내일부터는 여기에서 나 를 지켜줄 것입니다. 나의 충직한 경호원들이지요." 두 이디오피아 인이 떠났다. 매커리어스는 지친 몸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62. 반체제 개미들 살아남은 반체제 개미들이 벨로캉 교외에 있는 어떤 딸기나무 아 래에 모여 있다. 향긋한 딸기 냄새가 그들의 대화 페로몬에 섞여들 기 때문에, 누군가가 우연히 그쪽으로 지나가면서 더듬이 냄새를 맡 더라도 그들의 대화 내용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103683호도 그 무 리 속에 끼여 있다. 그는 세력이 이렇게 약해진 마당에 장차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고 그들에게 묻는다. 그들 가운데 가장 연배가 높은, 신을 믿지 않는 개미가 대답한다. <우리의 힘은 미약하오. 하지만 우리는 손가락들이 죽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는 않소. 우리는 먹여살리기 위해서 훨씬 더 열심히 일할 것이오.> 그들이 차례차례 더듬이를 세워 찬동의 뜻을 표시한다. 엄청난 대 홍수를 겪은 뒤이지만 그들의 결심엔 변화가 없다. 신을 믿는 개미 하나가 103683호 쪽으로 몸을 돌려 나방 고치를 가리키며 페로몬을 발한다. <당신은 떠나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입니다. 원정군을 이끌고 세계 끝까지 가십시오. 메르쿠리우스 임무를 위해서 그래야만 합니다.> <손가락들 한 쌍을 데려오도록 해보십시오. 그들을 돌보면서 그들 이 노예 상태에서 번식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게 말입니다.> 신을 믿지 않는 다른 개미가 요구한다. 그 무리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24호가 103683호와 함께 가겠다고 나선다. 그는 손가락들을 만나고, 냄새 맡고, 만져보고 싶어한다. 리빙스턴 박사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리빙스턴 박사는 통역자 일 뿐이다. 24호는 설사 그러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손가락들과 직 접적으로 접촉하기를 바란다. 24호가 계속 고집을 부린다. 그는 103683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하다못해 전투중에 고치를 대신 들고 있게 해도 된다. 다른 반체제 개미들은 당돌한 지원자에게서 놀라움을 느낀다. <저 친구 왜 저러지?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103683호가 다른 개미들에게 묻는다. 다른 개미들이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그 젊은 비생식 개미는 103683호의 새로운 모험에 동행하고 싶어서 그런다며 뜻을 굽히지 않는다. 103683호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그를 보조자로 받아들인다. 그는 24호가 발하는 냄새에서 친근함마저 느끼고 있다. 그 냄새는 24호가 사악한 구석이 전혀 없는 순진한 개미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24호는 모험을 하는 과정에서 신을 믿는 개미들의 '모순'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그때 또 다른 반체제 개미가 자기도 함께 모험을 떠나겠다고 나선 다. 24호의 손위인 23호이다. 원정대는 내일 아침 해뜰 무렵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다. 두 지원 자들은 그 시간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63. 메커리어스의 죽음 침대 발치에서 분명히 무슨 소리가 들렸다. 막시밀리앵 메커리어 스 교수는 그러한 사실을 확신했다. 뭔가가 그의 잠을 깨웠고 그것 이 지금 저기에서 꼼짝 않고 머물러 있다. 그의 신경이 곤두섰다. 틀림없이 이불이 미미한 진동 때문에 흔들렸다. 그러나 위대한 과학자가 그런 것에 겁을 먹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메커리어스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침대 발치를 향해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이불을 흔들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처음에 그는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기도 하고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 다. 그러나 그것들이 그에게 덤벼들었을 때, 마치 천으로 된 동굴 속에 갇힌 것처럼 동작이 부자연스럽게 된 그는 얼굴로 달려드는 그 것들을 미처 막을 겨를 조차 없었다. 만일 누가 그 순간에 방 안에 있었다면 마치 사랑의 밤을 보내느 라고 침대가 들썩이는 것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밤이 아니라 죽음의 밤이었다. 64. 백과 사전 변이 중국인들이 티벳을 합병했을 때, 그들은 그 고장에도 중국인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중국인 가족들을 거기에 정착시켰다. 그러나 티벳 지방의 기압을 중국인들은 견뎌내기가 쉽지 않았다. 티 벳 기압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은 어지럼증을 느꼈고 몸이 붓기도 했 다. 그리고 어떤 생리적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티벳으 로 이주한 여인들은 아이를 낳을 수도 없게 되었다. 그에 반해서 티 벳 여인들은 가장 지대가 높은 마을에서도 매일같이 아이들을 쑥쑥 잘도 낳았다. 마치 거기에 살기에 신체적으로 부적합한 침략자들을 티벳의 땅이 거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65. 머나먼 행군 새벽녘부터 병정개미들이 제2동문 근처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제2 동이라는 이름은 그럴 듯하지만 이제는 그저 빗물에 파헤쳐진 축축 한 작가지 더미에 불과하다. 추위를 느끼는 개미들은 다리를 뻗는 운동으로 굽은 것을 풀고 몸 에 열기를 불어넣는다. 다른 개미들은 위턱을 뾰족하게 갈기도 하고 전투 때의 자세와 위장 동작들을 흉내내고 있다. 점점 불어나는 원정군 위로 이윽고 해가 솟아오른다. 그 햇빛을 받은 등딱지들이 반짝인다. 흥분이 고조되면서 모두 자기들이 위대 한 순간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맛본다. 103683호가 나타나자 많은 개미들이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한다. 그 병정개미의 좌우에서 두 반체제 개미가 호위를 하고 있다. 24호 는 나방 고치를 몸에 지니고 있는데, 그 희끄무레한 형체가 다른 개 미들의 눈에 띈다. <이 고치는 뭐야?> 어떤 병정개미가 묻는다. <별거 아니예요. 먹이예요.> 24호가 대답한다. 이번에는 뿔풍뎅이들이 다다른다. 30마리밖에 안 되지만 그들의 풍모는 당당하다. 개미들이 좀더 가까이에서 그들을 보려고 서로 떠 민다. 개미들은 그들의 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지만, 뿔풍뎅이들은 자기들이 꼭 필요할 때만 하늘을 난다고 설명한다. 당분간 그들도 개미들처럼 걸어갈 것이다. 개미들은 자기들의 수를 헤아리고, 서로 격려하고 축하하고, 먹이 를 나눈다. 분비꿀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물이 휩쓸고 간 폐허 위에서 건져낸 진딧물의 다리 조각이 분배된다. 개미 세계에서는 뭐 든지 그냥 버리는 법이 없다. 개미들은 죽은 알과 고치도 먹는다. 물먹은 스폰지 같은 고기 조각들이 행렬 속으로 건네지자 개미들은 물기를 뺀다음 게걸스럽게 먹는다. 개미들이 그 차가운 고기를 거의 다 먹어치우자 어딘선가 신호가 날아와서 행군 대형으로 정렬할 것을 지시한다. 그런 다음, 손가락 들을 치러 가는 대원정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가 날아온다. <앞으로 전진!> 출발이다. 개미들이 긴 행렬을 지으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벨로캉 이 자기의 팔을 동쪽으로 뻗고 있는 것이다. 태양이 기분좋은 열기 를 뿌리기 시작한다. 병정개미들은 햇볕을 기리는 옛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더듬이로 부르는 냄새의 노래이다. 햇살이 우리의 텅 빈 몸 안으로 들어와 고통에 겨운 우리의 근육을 움직이고 갈라진 우리의 생각을 맺어주도다. 개미들은 차례로 돌아가며 노래를 이어 부른다. 우리는 모두 태양의 티끌이라네. 빛의 거품이여, 우리의 영혼 속으로 들어오게나. 우리 영혼은 언젠가 빛의 거품이 될 것이니. 우리는 모두 햇볕의 산물이라네. 우리는 모두 태양의 티끌이라네. 지구여, 우리에게 생존의 길을 열어주게나. 우리는 그 길을 따라 사방으로 달릴 것이고 마침내 더 이상 나아갈 필요가 없는 장소를 찾으려 하네. 우리는 모두 태양의 티끌이라네. 용병 개미들은 그 가사가 담긴 페로몬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배마디를 긁으면서 그 노래에 반주를 넣는다. 음악소리를 잘 내기 위해서 그들은 가슴의 키틴질 끝을 배 마디의 맨 아래쪽에 자리잡은 가로 무늬의 띠로 이동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귀뚜라미 울 음 같은 소리를 낸다. 그러나 귀뚜라미 소리보다 날카롭고 울림이 적은 소리이다. 노래가 끝나자 개미들은 페로몬을 발하지 않고 걷는다. 걸음걸이 는 자유 분방하지만 심장 박동의 리듬은 누구에게나 똑같다. 개미들은 저마다 손가락들과 그 괴물들에 대한 무시무시한 전설들 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무리를 이끌고 있으니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경쾌하다. 바람마저도 그들의 일을 도 우려는 듯 홀연히 일어나 그들의 발걸음을 제촉하고 있다. 행렬의 선두에서 103683호는 더듬이 위로 스쳐가는 풀과 나뭇잎들 의 냄새를 맡는다. 103683호가 익히 알고 있는 냄새가 주위에 가득하다. 겁을 먹고 달아나는 작은 동물들, 매혹적인 향기로 그들을 유혹하는 화려한 꽃 들, 개미에게 적대적인 어떤 동물들이 숨어 있을 컴컴한 풀숲, 풀노 린재가 우글거리는 고사리들.... 그래, 모든 게 그대로야. 처음 모험을 나섰을 때도 이랬지. 모든게 그대로야. 그 독특한 냄새가 배어 있다. 다시 시작하는 위대한 모험의 냄새! 66. 백과 사전 파킨슨 법칙 파킨슨 법칙(같은 이름의 파킨슨 병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에 따르면, 어떤 기업이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점점 능력이 없는 사람 들을 고용하면서도 급료는 과다하게 지급하게 된다고 한다. 그 이유 는 아주 간단하다. 고위 간부들이 강력한 경쟁자들이 나타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위험한 경쟁자들이 생기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능한 사 람들을 고용하는 것이다. 또 사람들이 반기를 들 생각을 못하게 하 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급료를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배 계급들은 영원한 평온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67. 새로운 법칙 "막시밀리앵 메커리어스 교수는 미국 아칸소 화공 대학의 최고 권 위자였습니다. 프랑스에 와서 그는 일주일 전부터 이 호텔에 묵고 있었습니다." 카위자크 형사가 서류를 뒤적이면서 말했다. 자크 멜리에스는 방 안을 왔다갔다. 하면서 카위자크 형사의 이야 기를 듣고 있었다. 보초를 서고 있던 경관 하나가 문으로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경정님, '일요 메아리'의 어떤 여기자가 뵙고 싶다고 하는데요. 들여보낼까요?" "그래." 레티샤 웰즈가 나타났다. 여느때처럼 멋지게 검은 비단 정장 가운 데 하나를 입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웰즈 양.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예까지 행차하였습 니까? 더 나은 쪽이 이길 때까지 따로따로 일해야 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요." "수수께끼 현장에 함께 있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잖아요? 우리가 <알쏭달쏭 함정 퀴즈>를 함께 볼 때도 똑같은 문제를 각자 자기 방 식대로 푸는 것 아니겠어요? 그건 그렇고, CCG에서 가져온 약병은 감정해 보셨어요?" "예, 연구실에서 하는 얘기로는 독인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 안 에 뭔가가 많이 들어 있다고 하던데, 그 이름을 잊어버렸어요. 아주 독성이 강하답니다. 갖가지 살충제를 만드는데 쓰이는 거라더군요." "그럼 이제 멜리에스 씨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저만큼 아시겠군 요. 그런데 카롤린 노가르의 부검 결과는 어떤가요?" "심장 마비예요. 내출혈의 흔적이 많아요. 여전히 똑같은 일이 되 풀이되고 있어요." "음.... 이 사람은 어때요? 역시 엄청난 공포 때문이군요?" 적갈색 머리의 그 학자는 배를 깔고 엎드려 있었는데, 머리를 방 문객들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마치 방문객들에게 놀랍고 무시무시 한 일의 증인이 되어달라고 부탁이라도 하는 모습이었다. 눈은 툭 불거져나왔고 입에서 어떤 지저분한 점액이 흘러나와 풍성한 턱수염 을 더럽혀놓고 있었으며, 귀에서는 역시 피가 흘러나와 있었다. 그 리고 이마에 하얀 실 같은 것이 묻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는 죽기 전에 하얀 천으로 얼굴을 막았던 모양이었다. 꽉 움켜쥔 손은 배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이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멜리에스가 물었다. "막시밀리앵 매커리어스 교수 아니예요? 세계적인 살충제 전문가라고 들었는데요 ." "그래요, 살충제 전문가지요. 유명한 살충제 연구가를 죽이려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그들은 그 유명한 화학자의 눈이 뒤집힌 시체를 들여다보았다. "어떤 자연 보호 운동 단체가 아닐까요?" 레티샤가 의견을 말했다. "그럴 리가요, 아예 곤충들이 죽였다고 하지 그러세요?" 멜리에스가 코웃음을 쳤다. 레티샤는 검은색 앞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신문을 읽을 줄 아는 건 사람들뿐 이니까 이 신문 기사 좀 보세요." 레티샤는 신문 기사 스크랩을 하나 내밀었다. 막시밀리앵 메커리 어스 교수가 세계에 곤충이 창궐하는 문제를 다루는 세미나에 참석 하기 위애 파리에 왔다는 것을 알리는 기사였다. 거기에는 그가 벨 뷔 호텔에 머물 예정이라는 것도 밝혀놓고 있었다. 자크 멜리에스는 기사를 읽고 카위자크에게 넘겼다. 카위자크는 그것을 받아 서류철 안에 넣었다. 멜리에스는 방 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레티샤가 곁에 있다 는 것을 의식하면서, 그는 치밀한 전문가의 면모를 보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역시 흉기도, 불법 침입의 흔적도, 지문도, 육안으로 보이 는 상처도 없었다. 살타 형제, 카롤린 노가르 사건에서와 마찬가지 로 실마리가 전혀 없었다. 이곳 역시 제1군 파리가 거쳐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살인범은 피 해자가 죽은 후에 사건 현장에서 5분 동안 머물렀다. 시체를 감시하 기 위해서거나 모든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뭘 좀 찾으셨어요?" 카위자크가 물었다. "역시 파리들이 무서워서 접근조차 못한, 무엇이 있었어." 카위자크 형사가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레티샤가 물었다. "파리라니요? 파리가 뭘 어쨌다는 거예요?" 자기가 역시 레티샤보다 한수 위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경정 은 레티샤에게 파리에 대한 짤막한 강의를 늘어놓았다.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데 파리를 이용하자는 생각을 제일 먼저 한 사람은 브루아렐이라는 교수였습니다. 1890년에 파리의 어떤 집 굴 뚝에서 새까맣게 그슬린 태아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집에는 몇 달 전부터 많은 세입자들이 거쳐갔습니다.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어린 시체를 굴뚝에 숨겼을까 하는데 수사의 초점이 모아졌지요. 브 루아렐이 그 수수께끼를 풀었어요. 그는 피살자의 입에서 파리 알을 채취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 알이 성숙한 정도를 고려하여 시간을 측정해서 그 태아가 굴뚝에 버려진 날짜를 알아냈습니다. 물론 일 주일 정도의 시차가 있기는 했지만 범인을 체포하는 데는 아무런 문 제가 없었습니다." 형오감 때문에 낯을 찡그리는 아름다운 여기자를 보고 멜리에스는 더욱 힘을 얻어 자기 얘기를 계속했다. "저도 그 방법을 활용해서 사건을 해결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교 사의 시체가 그의 학교에서 발견되었는데, 수사를 하고 보니 범인은 그 사람을 숲에서 살해한 다음, 학생들의 보복을 받은 것처럼 위장 하려고 교실로 옮겨놓은 것이었습니다. 파리들이 자기들 방식으로 증언을 해주었지요. 시체에서 채취한 애벌레들은 분명히 숲에 사는 파리의 애벌레들이었지요." 언젠가 레티샤는 기회가 닿으면 그 이론을 주제로 해서 기사를 써 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멜리에스는 자기의 전문가다운 면모를 괴사한 것에 흡족해 하면서 침대 곁으로 가서 조사를 계속했다. 조명 돋보기를 이용해서 그는 마침내 시체 파자마 바지쪽에 뚫린 정삼각형 모양의 작은 구멍을 찾아냈다. 여기자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멜리에스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이 작은 구멍이 보이죠? 이것과 똑같은 구멍이 살타 형제 가운데 한 사람의 저고리에도 있었어요. 형태가 똑같아요. 정확하게...." 츠스스스.... 독특한 그 소리가 멜리에스 경정의 귀에 들렸다. 그는 머리를 들 고 천장을 바라보다가 파리 한 마리를 찾아냈다. 그 파리는 몇 걸음 을 걸어가다가 홱 날아가더니 그들의 머리 위에서 빙빙 돌았다. 어 떤 경관이 그 소리가 성가셔서 파리를 잡으려고 했으나 경정이 말렸 다. 멜리에스는 파리가 가는 대로 따라가서 파리가 어디에 앉는지를 알고 싶었다. "보세요!" 공중에서 몇 바퀴를 돌며 모든 경찰관과 여기자의 인내심을 시험 하던 파리가 이윽고 시체의 목 위에 내려앉았다. 그런 다음 파리는 턱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 메커리어스 교수의 시체 밑으로 사라졌다. 자크 멜리에스는 호기심을 느끼며 시체 곁으로 다가가 파리가 어 디에 있는지를 확인하려고 시체를 뒤집었다. 그가 그 글자들을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메커리어스 교수는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힘을 내어 집게손가락 에 귀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묻혀 시트 위에다 한 단어를 써놓았다. 그런 다음에 그는 다시 그 위에 엎어진 듯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살인자가 그 메시지를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거나 바로 그 순간에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 일곱 글자를 읽으려고 다가갔다. 파리는 일곱 글자 중 첫번째 글자에 남은 피를 주둥이로 빨고 있 었다. 그 글자는 'F'였다. 오르되브로를 맛있게 먹은 파리는 자리를 옮겨가며 'O', 'U', 'R', 'M', 'I', 'S'의 피를 차례로 빨아들였다 (프랑스 어 'FOURMIS'는 '개미들'이라는 뜻). 68. 레티샤에게 보내는 편지 사랑하는 딸 레티샤에게. 먼저 나의 죄를 묻지 말라는 부탁을 하고 싶다. 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네 곁에 머무는 것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너는 볼 때마다 나는 네 어머니를 보았고, 그것은 나의 뇌 를 벌겋게 달군 칼로 찌르는 것과 같은 고통이었다. 나는 어떤 것에도 상처를 입지 않고 폭풍이 불면 턱을 앙다물고 견딜 줄 아는 강한 사람이 아니란다. 폭풍이 몰아쳐오면 나는 차라 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고 낙엽처럼 바람에 몸을 내맡기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일반적으로 가장 비열하다고 생각되는 행위, 즉 도피를 선택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밖의 다른 어떤 것도 너와 나 를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너는 혼자 자랄 것이고 혼자 배울 것이며 네 안에 있 는 힘과 방어 능력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것이 가장 나쁜 학교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인생 에서 우리는 언제나 혼자이며 나중에 그것을 깨닫고 나면 더 잘 지 낼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네가 너의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식구들 중에 너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언제나 나 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은밀히 간직해 왔다. 그러니 나를 다시 찾으 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나는 나의 집을 조카 에드몽에게 물려 주었다. 그 집에는 가지 말아라. 그에게 이야기도 하지 말고 아무것 도 요구하지 말아라. 너에게는 완전히 성격이 다른 유산을 남겨놓았다. 이 선물은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하찮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호기심 많 고 진취적인 사람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점에 대 해서는 나는 너를 믿고 있다. 내가 너에게 주는 선물은 어떤 기계의 설계도이다. 그 기계를 사 용하면 개미들의 냄새 언어를 해독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기계 에 '로제타 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이유는 나폴레옹의 원정군 이 발견한 로제타 석이 이집트 글자를 해독하는 열쇠가 되었듯이 이 기계가 인간과 개미라는 두 종, 각자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 두 문명 사이에 다리를 놓아줄 유일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 기계는 번역가다. 이 기계를 매개로 해서 우리 는 개미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개미들과 대화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개미들과 대화하는 것! 이해할 수 있겠니? 나는 이제 겨우 이것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벌써 이 기 계는 나에게 경이로운 전망을 열어주고 있다. 나에게 남아 있는 삶 으로는 이 일을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네가 내 일을 계속해 주기를 바란다. 나의 뒤를 이어 다른, 그리고 훗날 다른 사람을 선택하여 이 일을 물려주기 바란다. 그래 야만 이 일이 망각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게 된다. 하지만 아주 신 중하게 행동하여야 한다. 개미들의 문명을 인간들에게 백일하에 드 러내놓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이 일을 진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 이야기하지 말거라. 네가 이 편지를 받을 때쯤이면 네 사촌 조나탕이 내가 지하실에 남겨놓은 이 기계의 원형을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 서 그 가능성을 그리 높게 보지는 않는다만, 어쨌든 그건 별로 중요 하지 않다. 네가 이 길에 관심을 갖고 따라온다면 아주 경이로운 일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딸아, 사랑한다. 에드몽 웰즈 추신1. '로제타 석'설계도를 동봉한다. 추신2. 나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의 제2권도 동봉한다. 그것의 사본 한 부는 내 집, 지하실의 안쪽 끝에 있다. 이 책은 지식의 모든 분야를 담으려고 한 것인데, 곤충 분야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 전'은 비유하자면 스페인의 여관과도 같다. 각자 그 안에 들어가서 자기가 찾으려는 것을 찾으면 된다. 매번 읽을 때마다 의미가 달라 질 것이다. 왜냐하면 책을 읽는 행위는 독자의 삶과 공명하며 독자 자신의 세계관과 조화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내가 너에게 보내는 안내자로 생각하려므나. 추신3. 네가 어렸을 때 내가 수수께끼 하나를 낸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너는 그때도 수수께끼를 좋아 했었다). 나는 너에게 성냥개비 여섯 개를 사용해서 정삼각형 네 개 를 어떻게 만드냐고 물었다. 그리고 답을 찾는 걸 도와주려고 다음 과 같은 문장을 힌트로 주었다. 즉,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야 한 다.'가 그것이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너는 답을 찾아냈지. 삼차원을 여는 것,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 입체적인 피 라미드를 세우는 것, 그것은 첫걸음이었다. 나는 이제 너에게 다른 수수께끼를 주려고 한다. 두 번째 걸음을 내딛게 하는 수수께끼다. 역시 여섯 개의 성냥개비로 정삼각형을, 네 개가 아니라 여섯 개를 만들 수 있겠니? 다음 문장이 답을 찾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첫번째 문장과 반대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남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해야 한 다.'는 것이다. 69. 지상 20만 리 원정대가 나아간다. 숲이 달라진다. 석회암이 침식된 자리마다 젓 니같은 사암이 드러나 있다. 히스, 이끼, 고사리 정글이 이어진다. 8월의 폭염 때문에 흥분한 개미들이 아주 오랜 시간을 걸어서 마 침내 연방의 동쪽 도시를, 즉 리뷰캉, 주비주비캉, 제디베이나캉 등 에 이르렀다. 가는 곳마다 개미들은 원정군에게 분비꿀이 담긴 고치 와 벼룩 햄과 곡물을 다져넣은 귀뚜라미 머리를 대접했다. 주비주빛 캉에서는 행군 도중에 분비꿀을 짜 먹으라고 무려 160마리의 진딧물떼를 주었다. 그런 다음 개미들은 손가락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가 손가락들을 화제로 대화를 했다. 손가락들과 관련된 사고를 모르는 개미는 하나도 없었다. 수 차례의 원정대가 납작하게 눌려 죽은 채 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주비주비캉은 손가락들과 직접 맞닥뜨린 경험이 없었다. 주비주비캉 개미들은 원정군에 힘을 보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면서도 곧 무당벌레 사냥이 시작될 것이고, 자기들의 방대한 진딧물 가축 떼를 보호하자면 모든 병정개미들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다음에 다다른 곳이 제디베이나캉이다. 너도밤나무 뿌리 속에 세워진 아름다운 도시이다. 제디베이나캉 개미들은 그다지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그들은 농도가 60%나 되는 새로운 고농축 개미산으로 무장한 포수 개미 1개 군단을 과감하게 떼어주었다. 그리고 그에 곁 들여 그 포수 개미들의 군량이 가득 담긴 고치 스무 개를 주었다. 제디베이나캉에서도 손가락들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 손가락들은 제디베이나캉의 나무 껍질에 커다란 침으로 부호를 새겼다. 너도밤 나무는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나머지 독성의 나뭇진을 분비하기 시작 했다. 그 독 때문에 하마터면 제디베이나캉의 모든 개미들이 독살당 할 뻔했다. 제디베이나캉 개미들은 너도밤나무 껍질의 상처가 아무 는 동안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손가락들이 유익한 존재일 수도 있잖아요? 우리가 그들의 행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24호의 순진한 더듬이 참견에 모든 개미들이 어리둥절해 한다. 손 가락들을 치러 가는 마당에 그런 페로몬을 발하다니! 103683호는 재 빨리 그 경솔한 24호를 두둔하러 간다. <벨로캉에서는 예상되는 모든 경우를 다 따져본다. 그건 사고 훈 련의 목적을 어떠한 역경이 닥치더라도 놀라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103683호는 그렇게 얼버무린다. 벨로캉 개미 하나가 제디베이나캉 개미들에게 클리푸니 여왕이 이 원정을 염두에 두고 만든 최신의 혁신 노래를 가르쳐준다. 어떤 적을 선택하느냐가 그대의 가치를 결정한다. 도마뱀과 싸우는 자는 도마뱀이 된다. 새와 싸우는 자는 새가 된다. 진드기와 싸우는 자는 진드기가 된다. 그럼 신과 싸우는 자는 신이 되는 걸까 하고 103683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쨌든 그 노래는 제디베이나캉 개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많 은 개미들이 원정군들에게 클리푸니 여왕의 이룬 혁신적인 기술에 대해서 묻는다. 벨로캉 개미들은 주저없이 자기들의 도시가 어떻게 뿔풍뎅이를 길들여 개가를 올렸는지 이야기한다. 벨로캉 개미들은 도시 내부의 운하와 신병기, 새로운 농업 기술, 건축술의 변화에 대 해서 이야기한다. <우리는 혁신 운동이 그렇게 빛나는 성과를 올렸는지 몰랐다네.> 제디베이니키우니 여왕이 페로몬을 발한다. 물론, 벨로캉 개미 가운데 최근에 소나기 때문에 생긴 피해라든가 도시 내부에 손가락들을 지지하는 반체제 개미들에 대해서 더듬이를 놀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제디베이나캉 개미들은 대단히 감동을 받고 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개미 세계의 가장 진보적인 기술은 진딧물 사육, 버섯 재배, 분비꿀 발효로 요약되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런 혁신이 일어났단 말인가! 마침내 개미들의 화제가 원정에 관한 것으로 옮아간다. 103683호는 원정군이 강을 건너 세계의 끝으로 지나면, 거기서부 터 한 마리의 손가락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되도록 넓은 지역을 수 색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제디베이니키우니 여왕은 중심 도시의 3천 병력으로 세계의 모든 손가락들을 다 죽일 수 있느냐며 의아해 한다. 103683호는 비행 부 대의 지원이 있긴 하지만 자기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약간의 회의를 가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제디베이니키우니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원정군에게 경기병 군단을 빌려주기로 약속한다. 그 경기병들은 다리가 길고 아주 날쌔기 때문 에 도망가는 손가락들을 추격하는 데 쓸모가 많을 것이다. 원정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고 여왕이 화제를 바꾼다. 어떤 새 도 시에서 이상한 짓을 자행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 도시는 개미 도시 가 아니라 꿀벌 도시, 아스콜레인 벌집이다. 때로는 그 도시를 황금 의 벌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도시는 여기에서 아주 가까운 곳, 즉 잔털이 많은 커다란 떡갈나무에서 오른쪽으로 네 번째 되는 나무 에 세워졌다. 거기를 본거지로 삼아 그들은 꿀과 꽃가루를 모은다. 그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들이 개미들을 가차없이 공격한다는 것이다. 말벌들이 그런 약탈 행위를 한다면 그 런가 보다 하겠지만 꿀벌들이 그런다는 건 어딘가 좀 불안하다. 제디베이니키우니는 그 꿀벌들이 팽창주의적인 야심을 지닌 것으 로 생각하고 있다. 그 꿀벌들은 점점 중심 도시 벨로캉으로 다가가 면서 개미들을 공격하고 있다. 개미들은 그들을 물리치기가 쉽지 않 다. 대개는 독침 공격을 당할까 두려워서 자기들의 사냥물을 포기하게 된다. <꿀벌들은 독침을 쏘고 나면 죽는다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뿔풍뎅이 한 마리가 묻는다. 뿔풍뎅이가 그렇게 개미에게 직접 페로몬을 발한다는 사실에 제디 베이나캉 개미들이 놀란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 역시 원정군에 참여 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개의치 않고 제디베이나캉 개미 하나가 대답에 응한다. <아니오. 항상 그렇지는 않다오. 꿀벌들이 죽는 경우는 너무 깊이 침을 박았을 때뿐입니다.> 또 하나의 신화가 무너진다. 개미들은 유용한 정보들을 아주 많이 교환했다. 그러나 벌써 밤이 찾아온다. 벨로캉 개미들은 아낌없는 지원에 대해서 제디베이나캉 개미들에게 감사한다. 두 도시의 개미들이 서로 어울려 영양 교환을 실행한다. 개미들의 밤이 그들을 강요된 수면으로 이끌기 전에 동 료의 더듬이를 서로 닦아준다. 70. 백과 사전 질서 질서는 무질서를 낳고 무질서는 질서를 낳는다. 이론상으로는, 오 믈렛을 만들기 위해 계란을 휘저으면 오믈렛이 다시 계란의 형태를 휘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 오믈렛이 안에 무질서 를 많이 넣으면 넣을수록 최초의 알의 질서를 되찾을 기회는 점점 많아질 것이다. 결국 질서란 무질서의 결합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우주가 확장 되면 될수록 점점 더 무질서한 상태로 빠져든다. 무질서가 확장되면 새로운 질서들을 낳는다. 그 새로운 질서들 중에 최초의 질서와 똑 같은 것이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바로 당 신 앞에, 공간과 시간 속에, 혼돈에 가득찬 우리 우주의 끝에 태초 의 빅뱅들이 존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71. 피리 부는 사나이 딩, 동! 레티샤는 재빨리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멜리에스 씨. 또 텔레비젼 보러 오셨나 보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왔습니다. 내 생각을 털어놓고 얘기하고 싶어서요. 제 얘기를 들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웰즈 양이 생각하 고 계신 걸 들려달라고 강권하지는 않겠습니다." 레티샤는 그를 들어오게 했다. "좋아요, 멜리에스 씨. 귀를 활짝 열고 있겠습니다." 레티샤는 그에게 안락 의자를 가리켜보이고 그의 정면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았다. 멜리에스는 먼저 드레스의 그리스 식 주름과 가는 머리채 속의 비 취성 장식에 찬사를 보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살인자는 폐쇄된 공간을 자유 자재로 드나 들 수 있는 자이고,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자이며, 어떤 흔적도 남기 지 않는 자이고, 살충제 전문의 화학자만 노리는 자입니다." "한 가지 더 있어요. 파리에 공포감을 주는 자이기도 하지요." 꿀술 두 잔을 대접하고 커다란 연보라빛 눈으로 그를 똑바로 쳐다 보며 레티샤가 덧붙였다. "그렇지요. 그런데 그 메커리어스라는 인물이 우리에게 새로운 요 소를 하나 안겨주었습니다. 바로 '푸르미(개미)라는 단어입니다. 그 러나 우리는 지금 살충제 연구가들을 공격하는 개미들을 상대로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지요. 그 생각은 확실히 재미있습 니다. 그런데...." "그런데 너무 비현실적이죠." "바로 그겁니다." "개미들이 살인범이었다면 흔적을 남겼을 거예요. 예를 들어볼까 요? 개미들은 널려 있는 음식물들에 관심을 가졌을 거예요. 싱싱한 사과를 보고 그냥 지나칠 개미는 없어요. 그런데 메커리어스 침대 머리맡 탁자 위에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사과 하나가 있었어요." "훌륭한 관찰력이에요." 레티샤가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흔적도 흉기도 불법 침입도 없는 밀폐된 공간에 서의 사건에 머물러 있어요. 어쩌면 그것을 이해하기에 우리의 상상 력이 빈곤한 건지도 모르죠." "젠장, 살인자가 되는 방법이 2천 가지나 되니 말이지요!" 레티샤 웰즈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범죄 수법이 날로 교묘해져 가고 있어요. 그에 따라 추리 소설도 진보하지요. 서기 5천 년의 크리스티나 화성의 코난 도일이 추리 소설을 쓴다면 어 떻게 쓸지 상상해 보면 어떨까요? 그러면 멜리에스씨 수사에 진전이 있을 거라고 생 각해요." 레티샤를 바라보는 자크 멜리에스의 눈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러자 레티샤는 쑥스러움을 느끼면서 권련용 파이프를 가지러 갔 다. 레티샤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담배 연기로 막을 만들어 그의 시 선을 가로막았다. "웰즈 양은 제가 스스로 과신하고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쓰신 적이 있어요. 웰즈 양이 옳았어요. 그러나 너무 늦어서 잘못을 고치 지 못하는 법은 없어요. 코웃음을 치실지도 모르지만 웰즈 양을 만 난 다음부터 저는 다른 방식으로, 더 넓게 생각하기 시작했지요.... 이런 얘기를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지만 저는 이제 개미들을 의심하 기 시작했어요!" "또 그 개미예요?" 짜증스럽다는 듯이 그녀가 말했다. "잠깐만요? 우리는 개미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많을 거예요. 개미 들도 공범을 가질 수 있어요. 아믈랭의 피리 부는 사나이 이야기를 아십니까?" "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 "옛날에 아믈랭이라는 도시에 쥐들이 습격해 왔습니다." 멜리에스가 이야기의 서두를 꺼냈다. "쥐들이 도시에 우글우글했습니다. 쥐들이 너무 많아서 사람들은 그것들을 처치할 방도를 못 찾고 있었지요. 죽이면 죽일수록 점점 더 많이 나타났어요. 쥐들이 식량을 거덜내면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 로 번식해 갔어요. 도시 거주자들은 모든 걸 그대로 둔 채 도시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한 젊은이가 나타나서 도 시를 쥐들로부터 구해줄 터이니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달라는 것 이었어요. 도시의 유지들은 더 이상 손해볼 게 없겠다. 싶어 군말없 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지요. 그러자 젊은이가 피리를 불기 시작했 습니다. 피리 소리에 홀린 쥐들이 한데 모여들더니 그가 가는 곳을 따라서 멀리 사라졌어요. 피리 부는 사나이는 쥐들을 강 쪽으로 이 끌고 가서 강물에 빠뜨렸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이가 대가를 요구하 자 도시의 유지들은 쥐들에게서 해방되고 나니까 마음이 달라져서 그 젊은이를 맞대놓고 비웃었지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왜 하시는 거죠?"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말이죠. 한번 비슷한 상황을 상상해 보자는 겁니다. 즉, 개미들을 조종할 수 있는 '피리 부는 사나이'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지요. 개미들의 가장 사악한 적인 살충제 발명가 들에게 복수하고 싶어하는 어떤 사람들 말이에요." 멜리에스가 마침내 레티샤의 흥미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레티 샤는 연보라빛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계속하세요." 그녀가 말했다. 레티샤는 흥분이 되는지 담배를 한 모금 길게 빨아들였다. 멜리에스는 새삼스럽게 들떠서 안절부절못하며, 뜸을 들였다. 그 의 뇌 속 회로에서 '맞았음'을 알리는 신호가 깜박였다. "찾아낸 것 같습니다." 레티샤 웰즈는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뭘 찾았다는 거예요?" "개미들을 길들이는 사람이 범인이에요. 개미들이 피해자들의 몸 안으로 뚫고 들어가서 위턱으로 공격을 가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출혈과 같은 결과가 나타난 거지요. 그러고 나서 개미들은 귀 같 은 곳을 통해 밖으로 다시 나왔어요. 많은 시체들의 귀에서 피가 흘 렀던 것은 그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 뒤에 개미들은 다시 모 여서 다친 제 동료들을 데리고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느라고 5분이 걸린 겁니다. 그 시간 동안 제1군에 속하는 파리들이 접근 못했던 것이지요. 제 추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멜리에스가 설명을 시작할 때부터 레티샤 웰즈는 사실상 그와 함 께 이야기에 도취되고 있었다. 레티샤는 권련 파이프에 다른 담배 한 개비를 끼우고 불을 붙였다. 레티샤는 그가 옳을 수도 있다고 인 정하면서도, 자기가 알기로는 개미들을 길들여서 호텔 안으로 들여 보내 방을 고르게 하고 어떤 사람을 죽인 다음 조용히 개미집으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있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했다. "있을 겁니다. 그런 방법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제가 그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자신 있습니다." 자크 멜리에스는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는 대단히 자신감에 차 있었다. "5000년대의 추리 소설을 상상할 필요가 없겠지요? 약간의 분별력 과 상식만 있으면 충분한 겁니다." 멜리에스가 잘라 말했다. 그러자 레티샤 웰즈는 이맛살을 찡그리며 말했다. "잘 해보세요, 멜리에스 씨. 당신이 제대로 맞출 것 같군요." 멜리에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당장 부검의에게 문의해서 피해자들의 몸 암에 상처가 개미들의 위턱의 공격을 받아 생긴 것인 지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혼자 남은 레티샤 웰즈의 얼굴에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이 어렸다. 레티샤는 열쇠를 꺼내 검은 래커를 칠한 방문을 연 다음, 사과를 얇 게 썰어서 개미 상자 안에 있는 2만 5천 마리의 개미들에게 주었다. 72. 우리는 모두 개미다. 조나탕 웰즈는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에서 수천 년 전 태평양의 한 섬에 개미 숭배자들이 살고 있었음을 일깨워주는 구절을 찾아냈다. 에드몽 웰즈의 설명에 따르면 그 사람들은 음식을 줄이고 명상을 수행하면서 특별한 정신적 능력을 개발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사람들의 공동체는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이유 때문에 사라졌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이야기는 불가사의한 비밀로만 남아 있었다. 지하 사원에 사는 스무 명의 사람들은 토론을 거친 후에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든 아니든간에 그 수행 방법을 모방하기로 했다. 영양 결핍이 점차 심해져 감에 따라 그들은 힘을 아끼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주 작은 몸짓이라도 그들에겐 힘에 겨웠다. 그들은 점점 말을 적게 하게 되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럴수 록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눈길 하나, 미소 하나, 턱 짓 하나로도 의사 소통을 하기에 충분했다. 주의를 집중하는 능력이 엄청나게 향상되었다. 걷고 있을 때 그들은 근육 하나하나 관절 하 나하나의 움직임을 의식했다. 그들은 생각으로 숨이 들어오고 나가 는 것을 뒤쫓을 수 있었다. 그들의 후각과 청각은 동물이나 원시인에 비할 만큼 예민해졌다. 만성적인 기아 상태가 그들의 미각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다. 영양 실조가 빚어낸 집단적인 또는 개인적인 환각마저도 하나의 감각이 되었다. 뤼시 웰즈는 자기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직접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을 때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런 현상이 그녀에 게는 웬지 난잡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직접적인 의사 소통이 자종 브라젤 같은 고결한 영혼과 이루어질 때는 즐거움 기분으로 그 것에 임했다. 나날이 먹을 것이 희귀해져 감에 따라 정신 수련은 강도를 더해갔다. 그러나 누구나 최선의 결과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육체적인 활동과 밖에서 돌아다니는 일에 익숙해져 있는 소방대원들과 치안 대원들은 때때로 분노와 밀실 공포증 때문에 비명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억누르곤 했다.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고 더 맑아지고 더 깊어진 눈으로 서로를 뚫 어지게 쳐다보면서 그들은 모두 누가 누군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아갔다. 그들은 서로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비슷해져 가는 듯 했다. 니콜라 웰즈만은 어리다는 이유로 영양을 제대로 공급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아주 분명히 구별이 되었다. 그들은 되도록이면 서 있는 자세를 피했고(육체적인 힘이 없는 사 람에게 그것은 너무 피곤한 일이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거나 사지로 기어다니기를 좋아했다. 초기의 고통 뒤에 날이 갈수록 조금 씩 일종의 평정이 찾아왔다. 그것은 정신 착란의 한 형태가 아니었을까? 그러던 어느날 아침(그들끼리 정한 아침), 컴퓨터의 프린터에서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불개미 도시 벨로캉의 반체제 파들이 전 여왕의 죽음 때문에 두절되었던 접촉을 재개하고 싶어했다. 반체 제 진영의 개미들은 그들이 파견한 탐지 로봇인 '리빙스턴 박사'를 매개로해서 대화를 시도했다. 반체제 개미들은 인간들을 돕고 싶어 했는데, 실제로 그 개미들은 그들의 위에 놓인 화강암 속의 통로를 이용하여 식량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73. 변이 손가락들을 지지하는 반체제 개미들의 원조 덕분에 오귀스타 할머 니와 그 동료들은 이제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비록 낮은 수준이긴 했지만 영양을 규칙적으로 안정 적으로 섭취했다. 그러고 나니 아주 미약하나마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 지옥 속에서의 삶을 그럭저럭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뤼시 웰즈의 제안에 따라 그들은 지상에서 사용하던 인간의 이름 을 버리기로 했다. 이제 모두의 모습이 비슷해졌기 때문에 굳이 이 름을 가질 필요없이, 번호만 있어도 충분했다. 그것이 가져온 효과 는 대단했다. 성을 잃는 것은 조상들의 역사가 지닌 무게를 포기하 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그들이 새 생명을 얻은 듯한 느낌을 주었 다. 그들은 모두 이제 막, 함께 태어난 것이었다. 이름을 잃는다는 것은 구별이 되고 싶어하는 마음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다니엘 로젠펠트(일명12호)의 제안에 따라 그들은 새로운 공통의 언어를 찾기로 했다. 새로운 언어를 찾아낸 사람은 자종 브라젤(일 명14호)이었다. "인간은 입으로 소리의 파동을 내보내서 의사 소통을 합니다. 그 러나 그 음파는 너무 복잡하고 혼미합니다. 단 하나의 순수한 음파 를 발산하고 그 속에 모두가 진동을 내면서 들어가면 어떨까요?" 그 일은 힌두교의 어떤 종파에서 행하는 것과 같은 좀 우스꽝스러 운 모습을 띠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은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그 일의 목표는 그들을 다른 차원으로, 다른 존재의 지평으로 올려 놓으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두 함께 수행해야 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수련에 열중했다. 그들은 가부좌를 틀거나 좀더 유연한 반가부좌를 한 자세로 원을 그리고 앉아, 등을 곧게 펴고 서로 팔을 잡았다. 그들은 몸을 앞으 로 기울여 머리를 원 한가운데에 모은 다음, 각자 돌아가면서 자기 의 소리를 냈다. 각자 자기 소리에 진동을 내놓는 것이다. 마침내 그들은 하나의 똑같은 음에 자기의 음조를 조화시켰다. 수련을 쌓아 나아감에 따라 그들은 모두 자기 음역의 가장 낮은 소리로 노래를 했고, 그들의 음성은 배 안에서 올라오게 되었다. 그들은 '음'이라는 음절을 선택했다. 그것은 근원의 소리, 땅고 무한한 우주의 노래로서 모든 것을 뚫고들어갔다. '옴'은 어떤 레스 토랑의 웅성거리는 소음이면서 동시에 산의 침묵의 소리였다. 그들의 눈은 잠겨 있었고 그들의 호흡은 느리고 깊고 동시적이었 다.그들은 가벼워졌으며 모든 것을 잊고 소리 속에 녹아들어갔다. 그들은 소리 그 자체였다. '옴'은 모든 것이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끝나는 소리였다. 그 의식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의식이 끝나고 나면 그들은 조용 히 흩어져서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기도 하고 이리저러한 자기의 일 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 일이란 청소하기, 식량 관리하기, 반체제 개미들과 대화하기 등이었다. 니콜라만이 그 의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니콜라가 자유 의사로 그 의식에 참여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판단했다. 마찬 가지로 사람들은 모두 니콜라를 잘 먹여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어 쨌든 개미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알이었다. 어느날 그들은 개미들과의 텔레파시를 통한 의사 소통을 시도했 다.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모양이었다. 그 들 사이에서조차 텔레파시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기대는 버려 야 했다. 텔레파시는 두 교신자 중 어느 쪽에서도 저항이 없다는 조 건에서 두 번 중 한 번만 제대로 이루어졌다. 오귀스타 할머니는 여전히 회상에 잠겨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조금씩 조금씩 개미들이 되어갔다. 몸은 아닐지라 도 머리 속에서는 분명히 그러했다. 74. 백과 사전 아프리카 두더지 아프리카 두더지 Heterocephalus glaber는 이디오피아와 케냐 북 부 사이의 동아프리카에 산다. 그 동물은 앞을 보지 못하며 분홍색 살갗에는 털이 나 있고, 앞니를 이용해서 수 킬로미터에 걸친 땅굴 을 팔 수 있다. 그러나 그 동물의 놀라운 점은 다른 데 있다. 아프리카 두더지는 곤충과 똑같은 방식으로 모듬살이를 하는 유일한 포유류로 알려져 있다. 아프리카 두더지의 한 군체에는 평균 5백 마리의 개체가 모여 산다. 그 개체들 사이에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것이 개 미 세계에서와 똑같이 주요한 세 계급, 즉 생식 계급, 노동 계급, 병정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미 세계의 여왕개미에 해당하는 한 마리의 암컷은 한 배에 서른 머리까지 모든 계급의 새끼를 낳을 수 있다. 유일한 출산자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 암컷은 자기 오줌 속에 냄새 나는 물질을 분비해서 굴 속에 있는 다른 암컷들의 생식 호르몬이 분비되 는 것을 억제시킨다. 아프리카 두더지가 거의 사막이나 다름없는 지 역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생물 종이 군체를 이루며 살아간다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아프리카 두더지는 덩잊루기와 뿌리를 먹고 산다. 이따금 덩치 큰 먹이가 걸리기도 하 는데 대개 그 먹이는 아주 널리 산재되어 있다. 독립 생활을 하는 설치류 동물도 자기 앞으로 곧장 수 킬로미터의 땅굴을 팔 수는 있 을 것이다. 그러나 모듬살이를 하게 되면 먹이를 찾을 기회가 훨씬 많아진다. 작은 덩이줄기가 하나라도 발견되면 모두가 똑같이 나누 어 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두더지가 개미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수컷이 교미를 하고 나서도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75. 아침 아주 묵직해 보이는 분홍빛 공이 다가온다. 그가 그 공에게 페로 몬을 발한다. <나는 당신 종족에 대해서 아무런 적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소.> 그러나 그 공은 멈추지 않고 계속 다가와 그를 짓눌러버린다. 103683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난다. 늘 악몽에 시달 리기 때문에 그는 수면 시간을 줄이고 기온이 조금만 변해도 깨어날 수 있도록 몸의 상태를 조절해 놓고 있었다. 그는 아직 손가락들을 꿈에서 보고 있다. 그들에 대한 생각을 중 단해야 한다. 손가락들을 무서워하면, 때가 왔을 때 제대로 싸울 수 가 없을 것이다. 두려움이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103683호는 옛날에 어머니 벨로키우키우니가 자기와 자기 동료들 에게 들려준 개미 전설 하나를 기억하고 있다. 그 전설이 담긴 페로 몬은 아직 기억 장치 속에 들어 있다. 약간의 습기를 제공하면 기억 들이 온전히 되살아난다. <옛날에 우리 왕조에 굼굼니라는 여왕이 있었는데, 그 여왕은 마 음의 병에 걸린 채 산란실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 여왕은 세 가 지 문제 때문에 속을 끓이면서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 세 가지 문제란 이런 것이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언제일까? 살아가면서 이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행복의 비결은 무엇일까? 여왕은 자기 자매들, 백성들과 그 문제를 가지고 토론했다. 풍부한 정신을 가졌다는 연방의 모든 개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 았지만 만족할 만한 해답이 없었다. 개미들은 여왕이 병이 났으며 여왕이 골몰해 있는 문제들은 결코 겨레의 생존에 중요한 문제가 아 니라고 말했다. 아무도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자 여왕은 점점 쇠약해졌다. 온 겨레가 근심하기 시작했다. 유일한 살란자인 여왕을 잃는다면 큰일 이었다. 그래서 온 도시의 개미들이 처음으로 진지하게 그 추상적인 문제들을 곰곰히 생각하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은? 가장 중요한 일은? 행복의 비결은? 모든 개미들이 대답을 내놓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먹을 때이다.왜냐하면 먹이를 먹으면 힘이 생기 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종족을 유지하고 도시를 방어할 병 정개미들을 늘리기 위해서 번식을 하는 것이다. 행복의 비결은 열기 다. 왜냐하면 열기는 화학적인 만족감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 해답 중의 어느 것도 굼굼니 여왕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서 여왕은 도시를 떠나 혼자서 위대한 바깥 세계로 나갔다. 바깥 세 상에서 여왕은 살아남기 위해서 처절하게 싸워야만 했다. 사흘 후 여왕이 돌아와보니 도시는 온통 슬픔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여왕은 자기의 해답을 가지고 돌아왔다. 깨달음은 야만적인 개미들을 상대 로 무자비한 격투를 벌이던 와중에 찾아왔다. 가장 중요한 순간은 지금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현재에서만 행동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에 몰두하지 않는 자는 미래도 놓 치게 된다.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것과 맞서는 것 이다. 만일 여왕이 자기를 죽이려는 병정개미를 처치하지 못했다면 여왕이 죽었을 것이다. 행복의 비결은 전투가 끝난 다음에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살아서 땅위를 걷는다는 것이다. 아주 단순한 것들이다. 현재의 순간을 즐기는 것.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일에 몰두하는 것. 땅 위를 걷는 것. 그것이 굼굼니 여왕이 남긴 삶의 위대한 세 가지 비결이다. 24호가 103683호에게로 다가온다. 그는 '신들'에 대한 자기의 믿음에 대해서 설명하고 싶어한다. 103683호는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더듬이릉 움직여 24 호의 설명을 제지하고는 그에게 도시 앞에서 함께 산책을 하자고 권한다. <아름답지, 안 그런가?> 24호는 대답하지 않는다. 103683호는 잔잔하게 페로몬을 발한다. <우리가 손가락들을 만나고 죽이는 임무를 맡고 있는 건 사실이지 만, 그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야. 지금 여기에 있는 것, 여행하는 것 등도 중요한 일이야. 결국 가장 중요한 순간은 메르쿠리우스 임 무를 달성하거나 손가락들을 정복할 때가 아니라 아마 우리 둘이 아 침 일찍 동료 개미들에게 싸여 있는 지금 이 순간일거야.> 103683호는 그에게 굼굼니 여왕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24호는 자기 생각엔 마음의 병에 걸린 여왕 이야기보다 그들의 임 무가 더 중요해 보인다고 페로몬을 발한다. 24호는 손가락들에게 다 가가 어쩌면 그들을 보고 만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다른 개미의 페로몬에 더듬이를 기울이지 않는다. 24호가 103683호에게 손가락들을 보았느냐고 묻는다. <그들을 보았던 것 같기는 해. 그러나 모르겠어. 앞으로도 모를거 야. 그들은 우리하고 아주 달라.> 24호가 의아해 한다. 103683호는 그 문제를 가지고 페로몬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그는 신들이 손가락들은 아니라고 믿고 있 다. 신들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손가락들과는 다른 것이다. 어쩌면 신은 그 빛나는 자연, 저 나무들, 이 숲, 우리를 둘 러싸고 있는 이 어마어마하게 풍요로운 동식물일지도 모른다. 그렇 다. 그에게는 바로 이 지구의 아름다운 장관에서 믿음을 구하기가 더 쉬울 듯하다. 바로 그때 불그스레한 한 줄기 빛이 지평선 위에 드리운다. 103683호는 더듬이 끝으로 그 빛을 가리키며 페로몬을 발한다. <보게, 참 아름답지 않은가?> 24호는 그 감동을 함께 나누지 못한다. 그러자 103683호는 재담삼 아서 이렇게 페로몬을 발한다. <나는 신이다. 왜냐하면 태양에게 떠오르라고 명령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3683호는 네 개의 뒷다리로 평형을 유지하면서 몸을 세운 다음 더듬이로 하늘을 가리키며 강한 페로몬을 내뿜는다. <태양아, 너에게 명령하노니, 솟아라!> 그러자 태양이 웃자란 풀 너머로 한 줄기 빛을 내쏜다. 하늘은 갖 가지 빛깔의 축제를 벌이고 있다. 황톳빛, 보랏빛, 연보랏빛, 빨강, 오렌지빛, 금빛의 축제. 빛, 따사로움, 아름다움, 모든 것이 103683 호가 지시한 순간에 나타났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을 과소 평가하고 있는지도 몰라.> 103683호가 말한다. 24호는 '손가락들은 우리의 신이다'라는 페로몬을 되풀이하고 싶 다. 하지만 태양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는 냄새를 발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