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개미의 날 두 번째 비밀 지하의 신들 39. 원정 준비 <자네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나?> 질문을 받은 개미는 대답을 못 하고 있다가 되묻는다. <자네는 손가락을 죽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나?> <전혀 모르겠어.> 도시 곳곳에서 병정개미들이 무리를 지어 손가락들을 치러 가는 대원정을 준비하고 있다. 보병 개미들은 위턱을 갈고 포수 개미들은 주머니에 개미산을 채운다. 기병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발 이 빠른 보병 개미들은 다리의 털을 자르고 있다. 적들에게 죽음과 페허를 뿌리러 돌진해 갈 때 공기의 저항을 조금이라도 덜 받으려는 것이다. 모두가 손가락들과 세계의 끝과 그 괴물들을 박멸할 수 있게 해줄 새로운 전투 기술에 대한 이야기들만 하고 있었다. 개미들은 이 원정을 위험하긴 하지만 아주 흥미 있는 사냥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포수 개미 하나가 60도짜리 개미산을 채우고 있다. 독의 농도가 너무 진해서 그의 배끝에서 김이 피어오른다. <우리는 이것으로 손가락들을 해치울 것이다.> 그가 의기양양하게 페로몬을 발한다. 옛날에 뱀 한 마리를 죽인 적이 있다고 주장하는 한 병정개미가 더듬이를 닦으면서 자기 의견을 밝힌다. <손가락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사납지는 않을거야.> 사실 손가락들을 상대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아는 개미는 하 나도 없다. 클리푸니가 원정군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대부분의 벨 로캉 개미들은 손가락들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전설로만 여기고 손 가락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몇몇 병정개미들은 세계의 끝을 다녀온 탐험 개미 103683호가 자 기들을 이끌 것이라고 알려준다. 그 경험 많은 개미가 함께 참가한 다는 사실에 모든 병정개미들은 즐거워한다. 병정개미들이 작은 무리를 지어 꿀단지 개미들의 방으로 간다. 당 분을 가득 채워 힘을 얻으려는 것이다. 병정개미들은 언제 출발 신 호가 내려질지 모르지만 모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반체제 개 미 열 마리가 무장한 병정개미들의 무리 속에 조심스럽게 스며든다. 그들은 아무 페로몬도 발산하지 않으면서, 방 안에 떠도는 페로몬들 을 주의깊게 끌어모으고 있다. 그들의 더듬이가 계속해서 바르르 떨린다. 40. 통째로 들려간 개미 도시 페로몬: 탐험 보고 정보 출처: 비생식 병정개미 계급의 사냥 개미 주제: 중대한 사고 정보 제공자: 척후 개미 230호 그 재난은 오늘 아침 이른 시간에 일어났다. 하늘이 갑자기 컴컴 해졌다. 손가락들이 연방의 한 도시인 지울리캉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정예 군단들이 중무장한 포수 개미들의 부대와 함께 즉시 싸우러 나갔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지만 허사였다. 손가락들이 나타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어마어마하게 큰 판판하고 단단한 물건이 땅을 가르 더니 도시 바로 옆으로 쳐들어와 방들을 토막내고 알들을 으깨고 통 로를 잘라버렸다. 그러고 나서 그 판판한 물건은 온 도시를 흔들어 대다가 위로 들어올렸다. 놀랍게도 도시 전체를 들어올렸다. 그것도 단 한번에!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우리는 투명하고 질긴 커다란 껍 질 같은 것 안으로 부어졌다. 우리 도시는 위아래가 거꾸로 뒤집혔 다. 산란실들이 전복되었고 곡물 창고가 무너졌다. 우리 알들은 사 방으로 흩어졌다. 우리 여왕이 포로가 되었고 상처를 입었다. 나는 그 커다랗고 투명한 껍질이 몇 차례 심하게 들썩거리는 바람에 때맞 추어 밖으로 도망칠 수가 있었다. 도처에 손가락들의 냄새가 진동했다. 41. 에드몽폴리스 레티샤 웰즈는 퐁텐블로 숲에서 방금 파온 개미집을 커다란 어항 안에 집어넣었다. 레티샤는 얼굴을 미지근한 유리에 바짝 붙이고 안 을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관찰하고 있는 개미들에게는 그녀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 다. 새로 파온 그 불개미떼는 활기가 있어 보인다. 레티샤는 전에도 몇 차례 개미들을 집에 옮겨다놓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별로 활기가 없는 개미였다. 빨강개미나 까망개미들은 웬지 모 르게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 개미들은 먹이를 주어도 먹이가 낯선 탓인지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레티샤가 손을 내밀기가 무섭게 그 개미들은 달아나버렸다. 그렇게 일 주일이 지나고 나면 그 개미들은 쇠약해져 버렸다. 개미들이 모두 영리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기 는 커녕 조금 우둔한 종도 적지 않았다. 보잘것 없는 일상의 삶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그 개미들은 터무니없는 절망에 빠져버렸다. 그러나 그 불개미들은 그녀에게 대단한 만족감을 느끼게 해주었 다. 그 개미들은 끊임없이 일에 몰두했고, 잔가지들을 끌고 다녔으 며, 서로 더듬이를 비비기도 하고 밀고 당기며 싸우기도 했다. 그 개미들은 그때까지 본 어떤 개미들보다도 훨씬 생기에 차 있었다. 레티샤가 새로운 먹이를 주자 그 개미들은 손가락을 물려고 하거나 손가락 위로 기어올라왔다. 레티샤는 습기를 보존하기 위해서 개미 상자의 바닥에 석고를 넣 어두었다. 개미들은 석고 위에 통로를 마련했다. 왼쪽에는 잔가지로 된 작은 지붕이 있었다. 가운데에는 모래밭이 있었으며 오른쪽에는 굴곡이 심한 이끼 숲이 정원 구실을 하고 있었다. 레티샤는 설탕물 이 담긴 플라스틱 병을, 개미들이 거기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솜 마개로 막아서 넣어두었다. 모래밭 한가운데에는 원형 경 기장처럼 생긴 재떨이를 놓고 그 안에 얇게 썬 사과 조각과 타라마 (훈제한 대구 알, 식용유, 생 크림, 레몬 등으로 만드는 그리스 식 요리의 하나)를 담아놓았다. 개미들은 타라마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개미들이 집 안에 들어오는 걸 싫어하는데, 레티샤 웰즈는 개미들이 자기 집에 살게 하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 었다. 거실의 개미집이 안겨주는 가장 큰 문제는 개미 상자 안의 흙 이 썩는다는 것이었다. 금붕어의 물을 정기적으로 갈아주어야 하듯 이, 개미들의 흙도 2주에 한 번씩 갈아주어야 했다. 그러나 금붕어 의 물을 갈려면 물수위를 조작하는 것으로 족하지만 개미들의 흙을 갈아주는 일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 일을 하자면 어항 이 두개 필요했다. 하나는 개미들이 살고 있는 어항으로 습기가 말 라버린 흙이 들어 있고, 다른 하나는 습기가 있는 흙이 들어 있는 새 어항이었다. 레티샤는 두 어항 사이에 대롱을 설치했다. 그러면 개미들은 습기가 많은 쪽으로 옮겨갔다. 개미들이 이동하는 데 하루 낮이 꼬박 걸리는 때도 있었다. 레티샤는 이미 자기 개미집들 덕분에 여러 차례 속을 끓였다. 어 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어항-정확히 말하면 의항-에 있는 모든 개미 들이 배 마디가 잘린 채 죽어 있었다. 유리를 통해 들여다보니 개미 들의 시체가 을씨년스럽게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그 개미들은 마치 노예 상태에 있기보다는 죽기를 바란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강제로 입주된 개미들 가운데 어떤 개미들은 도망가기 위해서 갖 은 짓을 다 했다. 그녀는 얼굴에 기어오르는 개미 때문에 잠이 깬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개미 한 마리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은 백 마리쯤되는 개미가 아파트 안에서 활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 는 것이었다. 그래서 레티샤는 개미 사냥에 나서야만 했고, 개미들 을 작은 숟가락과 시험관으로 사로잡아 유리 감옥 안에 다시 집어넣었다. 개미들의 억류 상태를 개선하고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싶어서 레티샤는 어항 안에 분재 식물로 된 작은 정원을 만들어주었다. 개 미들이 보다 다채로운 풍경을 즐기며 산책할 수 있도록 레티샤는 자 갈이 있는 구역과 잔가지가 있는 구역, 조약돌이 깔린 구역 등을 마 련해 주었다. 또 그들이 사냥가는 기분을 다시 느낄 수 있도록, 자 기가 '에드몽폴리스'라고 명명한 개미 상자 안에 살아 있는 작은 귀 뚜라미를 넣어주기도 했다. 병정개미들은 분재 식물 사이로 귀뚜라 미들을 쫓아다니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불개미들은 그녀에게 아주 놀라운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그 개미 상자 뚜껑을 열었을 때, 모든 개미들이 그녀 쪽으 로 배을 들어대고 일제히 개미산을 쏘았다. 레티샤는 어쩌다가 노란 구름처럼 한바탕 뿜어지는 그 개미산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시야가 흐릿해지면서 붉고 푸른 것이 보이는 환각 증세가 일어났다. 놀라운 발견이었다! 개미들이 뿜어대는 증기가 마약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다니! 레티샤는 즉시 그 현상을 연구 수첩에 기록해 두었다. 레티샤는 이미 개미집과 관련된 희귀한 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병에 걸린 사람들은 마치 자석에 끌리듯이 개미집을 정신없이 찾아 다닌다고 했다. 몇 시간 걸려서 개미집을 찾아내고는 그 사람들은 개미들을 게걸스럽게 먹었다. 사람들은 피 속에 개미산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레티샤는 이제 그 사람들이 사실은 개미산이 일으키는 환각 효과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레티샤는 제정신으로 돌아오자, 개미집을 돌보는 데 필요한 도구 들(작은 대롱, 족집게, 시험관 등)을 정돈해 놓고 자기의 취미 활동 을 일시 중단했다. 이제부터는 신문 기자로서 자기 일에만 몰두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먼젓번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다음 기사도 그 수수 께끼 투성이의 살타 형제 사건에 대한 것이었다. 레티샤는 그 사건 의 베일을 한시라도 빨리 벗기고 싶었다. 42. 백과 사전 말의 힘 말의 힘은 아주 대단하다. 당신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는 죽은 지 오래 되었지만, 한 권 의 책을 구성하고 있는 이 글자들의 집합 덕분에 여전히 힘이 있다. 나는 언제까지라도 이 책을 떠나지 않으며, 그 대신 이 책은 나의 힘을 빌린다. 당신은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 면 시체인 내가, 송장인 내가, 해골인 내가 살아있는 당신에게 당신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사실이다. 완전히 죽어 있는 내가 당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어떤 대륙에 살고 있든, 어떤 시대에 살고 있든, 나는 당신이 내 말 을 따르도록 만들 수 있다. 바로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을 매기로 해서 말이다. 그럼 내가 곧 당신에게 그것을 증명해 보이겠다. 자, 당신에게 나는 이렇게 명령한다. 페이지를 넘기시오! 어떤가? 보았다시피, 당신은 나의 명령에 순종했다. 나는 죽은 사 람이다. 그럼에도 당신은 내 말에 따랐다. 나는 이 책 속에 있다. 나는 이 책 속에 살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자기 단어들의 힘을 남용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 책은 당신의 손아귀에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거듭거듭 질문을 하기 바란다. 당신은 이 책을 언제나 마 음대로 활용할 수 있다. 당신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언제나 이 책의 행 속 또는 행 사이 어디엔가 적혀 있을 것이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43. 꼭 알아야 할 페로몬 클리푸니는 경비 개미들에게 103683호를 데려오라고 일렀다. 경비 개미들이 그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닌 끝에 마침내 뿔풍뎅이 축사 가 있는 곳에서 그를 찾아냈다. 경비 개미들은 그를 화학 정보실로 데리고 간다. 여왕개미가 거의 앉은 자세로 그를 기다리고 있다. 여왕은 기억 페로몬에 더듬이를 담가보았던 모양이다. 아직 더듬이 끝이 젖어 있 다는 것이 그걸 말해 준다. <우리가 나눈 대화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았네.> 클리푸니는 먼저 지구의 손가락들을 모두 죽이기에는 8만의 병력 으로 불충분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나서 아주 놀라운 사건을 전해 준다. <방금 사고가 하나 생겼다. 아주 끔찍한 재난이다. 그 소식을 접 하고 보니 그 괴물들의 힘과 관련해서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든다. 손 가락들이 연방 도시 지울리캉을 빼앗아갔다. 그들은 도시 전체를 거 대하고 투명한 껍질에 담아 갔다.> 103683호는 그런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났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며, 또 왜 그런 일이 일어나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여왕도 모른다. 사건은 아주 빠르게 전개되었고 유일한 생 존자는 아직 그 대재난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지울리캉 사건만을 떼어놓고 생각해선 안 된다. 매일 손가락들과 관 련된 새로운 사건들이 터지고 있다. 이 모든 사건들이 일어나는 양상을 보면 손가락들이 빠른 속도로 번식하고 있고 숲을 침범하기로 작정한 것처럼 느껴진다. 날이 갈수 록 그들의 존재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목격자들의 진술이 엇갈리고 있다. 어떤 자들은 시커멓고 판판한 동물들을 보았다고 했고, 어떤 자들은 둥글고 불그스름한 동물들을 보았다고 했다. <우리는 자연이 낳은 하나의 이변이라고 할 만한 이상한 동물을 상대하고 있는 것 같다.> 103683호가 잠깐 동안 공상에 빠진다. <그들이 우리의 신이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곧 우리의 신에게 정 면으로 맞서게 되는 것이 아닌가?> 클리푸니는 103683호에게 따라오라고 한다. 여왕이 그를 지붕 꼭 대기로 데려간다. 그곳에 다다르니 몇몇 병정개미들이 그들에게 인 사를 하고 여왕을 에워싼다. 유일한 산란 개미가 도시 밖으로 나가 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벨로캉의 화신으로서 없어서는 안 되는 생 식 개미를 새가 나타나 낚아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포수 개미들은 이미 사격 자세를 취하고 무엇이든 시야에 들어오 는 대로 겨냥할 준비를 하고 있다. 클리푸니는 지붕 꼭대기를 돌아 시야가 탁 트인 장소에 다다른다. 결혼 비행할 때 이륙용 활주로 같은 구실을 하는 곳이다. 뿔풍뎅이 몇 마리가 평화로이 싹을 뜯어먹으면서 거기에 머물고 있었다. 구리빛을 살짝 띠고 있는 그들의 등딱지가 반짝거린다. 여왕도 103683호에게 뿔풍뎅이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 올라타보라고 권한다. <자, 이건 우리의 혁신 운동이 이룬 기적의 하나일세. 이 녀석들 을 우리는 커다란 비행 곤충으로 길들이는 데 성공했네. 한 마리를 골라 시험해 보게.> 103683호는 뿔풍뎅이 조종하는 법을 모른다. 클리푸니는 그에게 몇 가지 페로몬을 발하여 조언한다. <자네 더듬이를 언제나 뿔풍뎅이의 더듬이 가까이에 두고, 그에게 가고 싶은 곳을 지시하게. 자네 생각을 아주 분명하게 그의 더듬이 에 전달해서 그를 이끌고 가는 것일세. 그 지시에 따라 뿔풍뎅이는 아주 신속하게 움직일걸세. 이제 자네가 직접 그것을 확인해 보게. 회전할 때는 균형을 잡겠다고 반대 방향으로 몸을 기울이는 일은 없 도록 하게. 뿔풍뎅이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야 하네.> 44. CCG에서 알아낸 것 CCGd의 상징은 머리가 셋 달린 흰 독수리였다. 세 머리 가운데 두 개는 위태롭게 축 늘어진 형상인데, 마지막 하 나는 당당하게 곧추서서 은색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굴뚝의 수와 거기에서 뿜어내는 연기가 엄청나서, 마치 이 나라에 서 사용하는 물건은 모두 그 공장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 회사는 하나의 작은 도시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회사안에는 전기 자동차가 운행되고 있었다. 멜리에스 경정과 카위자크 형사가 Y동을 향해 차를 타고 가는 동 안, 영업부 간부 하나가 그 회사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CCG는 화공 약품과 가정용품, 플라스틱 제품, 식료품 등의 주성분이 되는 화학 물질을 주로 생산하고 있었다. 시장에서 서로 각축전을 벌이는 225개의 세탁제와 세척제가 CCG에 서 생산한 똑같은 세제용 분말을 원료로 삼고 있었다. 치즈를 원료 로 만든 365개의 상품이 슈퍼마켓의 고객을 확보하려고 경쟁하고 있 었다. 또 CCG의 합성 수지가 장난감과 가구 등의 원료가 되고 있었다. CCG는 스위스에 본부를 둔 다국적 기업으로서, 치약, 왁스, 식료 품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분야에서 세계 제일의 생산량을 자랑하고 있었다. Y동에 다다라, 두 경찰관은 살타 형제와 카롤린 노가르의 연구실 까지 안내를 받았다. 살타 형제와 카롤린 노가르의 작업실이 서로 이웃해 있는 것을 알아내고 두 경찰관은 깜짝 놀랐다. 멜리에스가 물었다. "그들은 서로 아는 사이였군요?" 하얀 작업복 차림으로 그들을 맞이한 여드름투성이의 화학자가 소리쳤다. "가끔 같이 일했어요." "최근에 어떤 연구 프로젝트에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었나요?" "예, 하지만 당분간 그것을 비밀에 부치기로 했었어요. 그들은 동 료들에게 그 프로젝트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너무 이르다고 그들은 주장했지요." "그들의 전문 분야가 뭐였지요?" "이것저것 다 했어요. 그들은 우리의 많은 연구 개발 분야에 관계 했습니다. 왁스, 연마용 분말, 접착제 등 화학이 응용되는 모든 분 야에 관심을 가졌어요. 그들은 종종 자기들의 재능을 결합해서 좋은 성과를 거두곤 했어요. 하지만 최근의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생각을 쫓고 있던 카위자크가 끼여들었다. "그 사람들 혹시 사람을 투명하게 만들 수 있는 물질에 대해서 연 구하지 않았나요?" 그 화학자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투명 인간을 만들 수 있는 물질이라뇨? 농담이시겠죠?" "천만에요. 오히려 아주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 화학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설명을 드리지요. 우리 몸은 절대로 투명해 질 수 없 습니다. 우리 몸은 너무 복잡한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 서 아무리 전채적인 과학자라도 그 세포들을 한꺼번에 물처럼 투명 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카위자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과학은 그의 전문 분야가 아 니었다. 그래서 뭔가 미흡하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멜리에스는 웬 헛소리들이냐는 듯 어깨를 으쓱 들어올려 보이고 는, 아주 직업적인 어투로 물었다. "그들이 연구하고 있던 물질이 플라스크 같은 데 담겨 있지 않을 까요? 그런게 있으면 좀 보여주시겠어요?" "그게 저...."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예, 벌써 누군가가 와서 그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멜리에스가 선반 위에서 머리카락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 사람은 여자군요." 그가 말했다. 화학자는 깜짝 놀랐다. "맞습니다.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경정은 아주 자신 만만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여자 나이는 스물다섯에서 서른 사이이고 건강 상태는 완벽하 며, 유럽 인과 아시아 인의 혼혈이고 혈관계는 아주 양호하군요." "지금 저한테 물어보고 계신 겁니까?" "아니오. 깨끗한 선반 위에 떨어진 이 머리카락을 보고 그런 걸 알아냈다는 겁니다. 제가 알아낸 게 틀립니까?" 그 화학자는 무척 놀라워하는 눈치였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런게 어떻게 그런 세세한 것까지 알아내 셨습니까?" 멜리에스는 내친 김에 그 화학자를 더 놀려주기로 했다. "머리카락이 매끈매끈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감은 지 얼마 안 되는 머리카락입니다. 냄새를 맡아보세요. 아직은 향기가 남아 있습 니다. 터럭의 심이 두껍습니다. 이건 젊은 사람 것입니다. 심을 둘 러싸고 있는 막의 지름이 넓습니다. 그것은 동양인들의 특성이지요. 또 피막안에 든 심의 빛깔이 아주 좋습니다. 그러므로 혈관계가 완 벽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여자가 '일요 메아리'에 근 무한다는 것도 알 수 있겠군요." "에이, 절 놀리시는군요. 머리카락 하나에서 그 모든 걸 알아냈다 는 말입니까?" 멜리에스는 레티샤 웰즈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을 흉내냈다. "다 아는 수가 있습니다." 카위자크 형사는 자기 역시 직관력이 부족하지 않다는 걸 입증하 고 싶어했다. "그 여자가 여기서 뭘 훔쳐갔지요?" "아무것도 훔쳐가지 않았는데요. 그 여자는 우리에게 그 플라스크 들을 가져가도 되는냐고 물었습니다. 집에 가져가서 시간 날 때 조 사해 보겠다는 거였지요. 우리는 뭐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어요." 경정의 성난 얼굴을 보고 화학자가 변명을 덧붙였다. "우리는 경찰이 오리라는 것도, 경찰이 그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 는 것도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물론 경찰에서 원하는 대로 그것들을 보관해 두었겠지요." 멜리에스가 카위자크를 이끌고 발길을 돌렸다. "레티샤 웰즈가 우리에게 많은 걸 가르쳐줄거예요." 45. 뿔풍뎅이 시험 비행 103683호는 뿔풍뎅이의 앞가슴 등판에 올라탔다. 그 비행기는 길이 네 걸음에 너비가 두 걸음은ㅇ 족히 된다. 조종 석에서 바라보니 뿔풍뎅이 이마의 휘어진 뿔이 마치 뱃머리가 돌출 한 것처럼 똑바로 솟아 있다. 그 뿔의 구실은 여러 가지다. 적의 배 를 가르는 창인가 하면 개미산 사격을 위한 조준기이고, 군함으로 치면 충각이요 염소로 치면 뿔이기도 하다. 이제 103683호에게 닥친 문제는 뿔풍뎅이를 조종하는 것이다. '생 각을 뿔풍뎅이의 더듬이에 전달해서 조종하는 것'이라고 클리푸니가 조금 전에 일러주었다. 당장 해보는 게 좋겠다. 103683호는 자기 더듬이를 뿔풍뎅이의 더듬이에 연결하고 이륙에 대해 생각을 모은다. 그런데 이 시커먼 딱정벌레목 곤충이 중력을 이겨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나는 날고 싶다. 자, 날자.> 103683호가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무겁고 둔해 보이던 뿔풍뎅 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103683호의 뒤에서 원활한 기계 장치가 돌 아가는 소리가 나면서 뭔가가 미끄러져나온다. 갈색 딱지 날개 두 개가 앞쪽으로 미끄러져나왔다. 투명한 밤색의 커다란 두 날개가 회 전하면서 비스듬하게 펼쳐지더니 짧고 힘찬 동작으로 한 번 퍼득인 다. 곧 시끄러운 소리가 사방에 퍼진다. 클리푸니는 103683호에게 뿔풍뎅이의 날개짓소리가 꽤나 요란하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충고를 빠뜨렸다. 붕붕거리는 소리가 점 점 샘해진다. 모든 것이 덜덜 떨린다. 103683호는 다음에 일어날 일 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뿔풍뎅이가 일으키는 먼지와 나뭇가루의 소용돌이가 시야를 어지 럽힌다. 뿔풍뎅이가 공중으로 올라가는데, 이상한 효과가 빚어진다. 뿔풍뎅이가 올라가는 게 아니라 도시가 땅 밑으로 가라앉는 듯한 느 낌이 든다. 아래서 더듬이로 인사를 건네는 여왕이 점점 작아진다. 여왕의 모습을 전혀 구별할 수 없게 되자, 103683호는 수천 걸음(수 천 센티미터)의 고도는 족히 올라와 있다고 생각한다. <직진하고 싶다.> 그 생각을 전하자 뿔풍뎅이는 즉시 앞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날갯 짓 소리를 더욱 요란하게 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날고 있다! 103683호가 날고 있다! 날개 없는 비생식 개미들의 한결같은 소망을 오늘 이루고 있는 것 이다. 결혼 비행을 하는 날 생식 개미들이 하는 것처럼 중력을 이겨 내고 공중의 차원을 정복한 것이다. 잠자리, 파리, 말벌 드이 103683호의 주위로 어지러이 스쳐간다. 냄새를 맡아보니 바로 앞에 새들의 둥지가 있다. 위험하다. 103683 호는 급히 방향을 돌리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공중은 땅과는 다르 다. 거기에서는 날개를 45도 이하로 내리지 않고서는 회전을 할 수 가 없다. 뿔풍뎅이가 103683호의 지시대로 따르자 모든 것이 흔들린다. 개미가 미끄러진다. 뿔풍뎅이의 딱지 속에 발톱을 박아넣어 버티 려고 했지만 아차 하는 사이에 발톱이 밀려난다. 검은 딱지 위에 긁 힌 자국이 생기면서 얇은 거스러미가 일었을 뿐이다. 버팀대가 되어 줄 만한 것이 없어서 개미는 어쩔 수 없이 그 비행 곤충의 옆구리로 굴러떨어진다. 허공에 떨어진 개미가 추락하기 시작한다. 뿔풍뎅이는 그런 사실 도 모른 채 선회를 마치고 새로운 창공을 향해 힘차게 날아가고 있다. 그 동안에 개미는 자꾸자꾸 떨어진다. 땅과 식물들과 흉칙한 바위 들이 그에게 덤벼들고 있다. 몸이 빙글빙글 돌고 더듬이가 걷잡을 수 없이 떨린다. 충돌이다! 그는 모든 충격을 다리로 받아내면서 되튀었다가, 더 먼 곳으로 다시 떨어지고 또 다시 튀어오른다. 마침 폭신한 이끼 무더기가 마 지막 공중 제비의 충격을 덜어준다. 개미는 아주 가볍고 강인한 곤충이라서 자유 낙하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 아주 높이 솟은 나무에서 떨어져도 개미는 아무 일도 없었 던 것처럼 자기 일을 다시 시작한다. 103683호는 추락에 뒤따르는 현기증 때문에 약간 비틀거릴 뿐 아 무런 탈이 없다. 그는 더듬이를 앞으로 내밀고 재빨리 닦은 다음, 자기 도시 쪽으로 가는 길로 접어든다. 클리푸니는 움직이지 않았다. 클리푸니는 103683호가 지붕 위에 다시 나타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다. <걱정말게, 다시 해보세.> 여왕개미는 병정개미를 이륙용 활주로로 다시 데려간다. <자네는 병정개미 8만에다 이 길들인 뿔풍뎅이 용병 67마리의 지 원을 받을 수 있을거야. 뿔풍뎅이들은 대단한 원군이 되어줄걸세. 그들을 조종하는 법을 배워야 하네.> 103683호는 다른 뿔풍뎅이에 올라타고 다시 이륙한다. 첫번째 시 험비행은 실패했지만 이번 뿔풍뎅이와는 더 뜻이 잘 맞을 듯하다. 포수 개미 하나가 103683호의 오른쪽에서 동시에 이륙한다. 그들 은 나란히 날아가면서 서로에게 신호를 보낸다. 날아가는 속도가 빠 르기 때문에 더 이상 페로몬으로 소통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조종사들은 즉시 더듬이의 움직임에 토대를 둔 몸짓 언어를 고안해 냈다. 더듬이를 세웠다. 접었다. 함으로써 멀리서도 이해할 수 있는 그들 나름의 모르스 부호를 만들어 낸 것이다. 포수 개미는 뿔풍뎅이의 더듬이를 놓고 그의 등판 위에서 거닐 수 있다고 알려온다. 발톱을 등딱지의 오톨도톨한 부분에 꽉 박고 있으 면 떨어질 염려가 없다는 것이다. 그 포수 개미는 그 기술을 완벽하 게 익힌 것처럼 보인다. 이어서 포수 개미는 뿔풍뎅이의 다리를 타 고 내려올 수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그렇게 되면 아래쪽으로 배를 들이대고 밑으로 지나가는 모든 것을 향해 위에서 사격을 할 수 있다. 103683호는 그런 모든 곡예 비행을 터득하는 데 약간 애를 먹었 지만, 곧 자기가 2천 걸음의 높이로 날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그 비행 곤충에 적응할 수 있게 된다. 뿔풍뎅이가 풀에 닿을 정도로 급 강하할 때는 풀들을 잡아당기기도 하고 꽃줄기를 싹둑 자르기도 한다. 그렇게 해보고 나니 자신감이 생긴다. 뿔풍뎅이 예순일곱 마리가 있으면 그 신..., 아니 손가락 몇 마리는 해치울 수 있을 것도 같다. <급상승, 그 다음엔 급강하!> 103683호가 뿔풍뎅이에게 명령한다. 병정개미는 더듬이에 느껴지는 속도감을 줄이기 시작한다. 참으로 훌륭한 비행 부대이다! 개미 문명에 아주 커다란 진보가 이루어졌 다! 그는 뿔풍뎅이를 타고 비행하는 이 기적 같은 일을 경험한 첫 세대에 속하게 된다! 속도가 그를 황홀하게 만들고 있다. 방금 전의 추락은 그에게 별 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았고 그는 이제 공중을 날아다니는 일은 별로 위험할 게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는 나선 비행, 공중 회전 등과 같은 곡예 비행까지도 지시한다. 103683호는 처음 맛보는 놀라 운 느낌을 만끽한다. 공중에서의 위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의 존 스톤씨 기관이 작동을 멈춘다. 그는 이제 위아래, 앞뒤가 어딘지 구 별하지 못한다. 그래도 나무가 바로 앞에 나타나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재빨리 선회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비행기 타는 재미에 흠뻑 빠져서 103683호는 하늘이 불길하게 어 두워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함참이 지나서야 그는 자기가 타고 있는 뿔풍뎅이가 불안해 하고 있음을 느낀다. 뿔풍뎅이는 이제 그의 지시에 바로 응하지 않고, 고도를 유지하라는 명령에도 따르지 않는 다. 느끼기 힘들 만큼 조금씩 뿔풍뎅이가 하강하고 있다. 46. 노래 기억 페로몬 번호: 85 주제: 혁신의 노래 페로몬 제공자: 클리푸니 여왕 나는 위대한 개혁자다. 나는 백성들을 틀에 박힌 일상에서 끌어내어 경이의 세계로 이끈다. 나는 역설이 가득 담긴 기묘한 진리를 일깨우고 미래를 알려준다. 나는 체제를 무너뜨린다. 체계가 진보하려면 일단은 무너져야 한다. 나처럼 소심하고 어눌하고 자신감 없이 말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나처럼 무한한 약점을 가지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나처럼 유전 형질이 보잘것없는 자는 아무도 없다. 나에겐 지성 대신에 감성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나에겐 나를 무겁게 만드는 어떤 지식도 어떤 지혜도 없기 때문이다. 허공에 떠도는 직관만이 나의 벌걸음을 이끈다. 그 직관이 어디에서 오는지 나는 모른다. 그것을 알고 싶지도 않다. 47. 자종 브라젤의 생각 오귀스타 할머니는 회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자종 브라젤은 손을 입에 갖다대고 헛기침을 했다. 모두 그를 둘 러싸고 그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방 도를 전혀 찾지 못하던 터라 그들의 기대는 더욱 간절했다. 양식도 없고, 지하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도 없 고, 바깥 사람들에게 연락할 수도 전혀 없는 상황에서, 백 살 먹은 노인과 사내 아이가 포함된 스무 명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남기를 바란다는 말인가? 자종 브라젤은 자세를 똑바로 추스리면서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봅시다. 누가 우리를 여기에 이끌었습니 까? 에드몽 웰즈입니다. 그는 우리가 이 동굴 속에 살면서 그의 작 업을 이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우리가 과감하게 위험한 상황 속 에 뛰어들 것으로 내다보았습니다. 나는 그것을 확신합니다. 지하실 로 내려오는 일은 개인적인 깨달음의 과정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는 집단적인 깨달음의 과정에서 나타난 하나의 중요한 시련입니다. 우리가 각자 홀로 이루어낸 것을 이제 함께 이 루어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정삼각형 네 개의 수수께끼를 풀었습 니다. 우리의 사고 방식을 바꿀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의 정신 속에 있는 문을 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끈기를 가지고 계 속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역시 에드몽은 우리에게 열쇠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두려움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하기 때문에 그것을 못 보고 있을 뿐입니다." "어렵게 얘기하지 마시고 그 열쇠가 뭔지나 빨리 말씀하세요. 교 수님이 제안하려는 해결책이 뭡니까?" 소방대원 하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종 브라젤은 자기 얘기를 계속했다. "정삼각형 네 개의 수수께끼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그 수수께 기는 우리에게 사고 방식의 수정을 요구했습니다. '다른 식으로 생 각해야 한다.'는 말을 에드몽은 되풀이했습니다. '다른 식으로 생각 해야 한다....' 치안 대원 하나가 다시 소리쳤다. "하지만 우리는 쥐들처럼 이곳에 갇혀 있습니다. 이것은 달리 생 각해 볼 여지가 없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다른 식 으로 생각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몸 속에 갇 혀 있는 것이지 정신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는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말만 계속 그렇게 하지 마시고 좋은 방안이 있으면 후딱 제시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입을 다무시고요." "어머니 몸 밖으로 나온 아기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던 따뜻한 양 수가 왜 사라졌는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기는 어머니의 자궁 속 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문은 이미 닫힌 뒤 입니다. 아기는 다시는 자유로운 바다 속으로 돌아갈 수 없는 물고 기와 같습니다. 춥고 눈부시고 너무 시끄럽습니다. 모태 밖은 지옥 이나 다름없습니다. 지금의 우리처럼 아기는 시련을 견디어내기가 어려울 것처럼 보입니다. 모두 그런 순간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우 리는 죽지 않았으며 공기와 빛과 추위에 적응했습니다. 우리는 양수 속에 살던 태아에서 공기를 호흡하는 아기로 변했습니다. 물고기에 서 포유 동물로 변한 것 입니다." "그래서요?" "우리는 지금 아기와 똑같은 위기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다시 적 응해 나가야 합니다. 이 새로운 상황에 우리를 맞추어나가야 합니다." "이 양반 지금 헛소리를 하고 있어요. 계속 헛소리만 하고 있는 거라고요!" 제라르 갈랭 형사가 천장으로 눈길을 올리며 소리쳤다. "아니예요, 그분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알 것 같아요. 우리는 해결책을 찾아낼거예요. 우리 모두가 찾으려고 하면 찾을 수 있을거예요." "물론 해결책이야 언제든지 찾을 수 있지. 굶어 죽기를 기다리는 것도 해결책이 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자종의 얘기를 더 들어보기로 하세. 그 사람 얘기 아직 안 끝났어." 오귀스타 할머니가 타일렀다. 자종 브라젤은 풍금 앞의 보면대 쪽으로 가서 '상대적이며 절대적 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들어올렸다. "저는 간밤에 이 사전을 다시 읽었습니다. 이 사전 어딘가에 해답 이 분명히 적혀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한참 만에 저는 이 런 구절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을 낭독해 보겠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48. 백과 사전 항상성 모든 생명체는 항상성을 추구한다. '항상성'이란 내부 환경과 외부 환경 사이의 평형을 뜻한다. 모든 생명체는 항상성을 유지하는 쪽으로 기능한다. 새는 날기 위 해서 속이 빈 뼈를 가지고 있다. 낙타는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물주머니를 가지고 있다. 카멜레온은 포식자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 고 가죽의 색소 구성을 변화시킨다. 다른 많은 종들과 마찬가지로 그 종들은 주위 환경의 모든 변화에 적응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 바깥 세계와 조화하는 방법을 찾지 못한 종들은 소멸했다. 항상성은 외부의 제약과 관련해서 우리 기관들이 스스로를 조절하 는 능력에서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평범한 사람들이 아주 가혹한 시련을 견뎌내면서 거 기에 자기의 기관을 적응시켜 나가는 것을 보고 놀랄 때가 많다. 전 쟁은 살아남기 위하여 스스로를 이겨내야 하는 상황인데, 그 전쟁중 에는 여태껏 고생을 모르던 사람들도 아무런 불평 없이 물과 건빵에 길들여진다. 깊은 산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은 며칠이 지나고 나 면 식용 식물을 구별할 줄 알게 되고, 사냥을 할 줄 알게 되며, 언 제나 혐오감만 주던 두더지, 거미, 쥐, 뱀 같은 동물들도 먹을 수 있게 된다. 다니엘 디포우의 '로빈슨 크루소'와 쥘 베른의 '신비로운 섬'은 항상성을 유지하는 인간의 능력을 그리는 소설들이다. 우리는 모두 완벽한 항상성을 끊임없이 추구해 나간다. 우리의 세 포들이 이미 악착같이 항상성을 추구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 이다. 세포들은 온도가 가장 알맞고 독성 물질이 섞이지 않은 최대 한 영양 액을 끊임업시 갈망한다. 그러나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그 상황에 적응한다. 술꾼의 간 세포는 술을 절제하는 사람들의 간 세포보다 알콜을 분해하는 데 더 익숙해져 있다. 흡연자의 허파 세 포는 니코틴에 저항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미트리다트왕은 자기의 몸을 비소에 견딜 수 있게 만들기까지 했다. 외부 환경이 적대적일수록 세포나 개체는 이제껏 잠자고 있던 능 력들을 자꾸 개발해 나간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읽기를 마치자 긴 침묵이 이어졌다. 자종 브라젤이 침묵을 깨뜨리 고 말을 덧붙였다. "만일 우리가 죽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 극단적인 환경에 적응하 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라르 갈랭이 분통을 터뜨렸다. "극단적인 환경이라고요. 말씀 잘 하셨습니다! 루이 11세 때의 죄 수들은 면적이 1평방미터밖에 안되는 '피예트'라는 감옥에 갇혀 있 었는데, 그들이 감옥 쇠창살에 적응했던가요? 총살을 당한 사람들이 가슴의 살갗을 단단하게 만들어서 총알을 밀어낼 수 있었던가요? 핵 전쟁을 겪은 일본 사람들은 방사능에 대한 저항력을 더 많이 가질 수 있게 되었던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적 응하고 싶어도 적응할 수 없는 외부 환경이 있는 겁니다." 알랭 빌솅이 보면대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아주 흥미 있는 구절을 읽기는 하셨습니다. 우리 문제와 관련해 서는 구체적인 해답을 전혀 못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드몽이 우리에게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살아 남고 싶으면 우리의 생존 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바꾼다고요?" "예, 바꾸는 겁니다. 지하에서 거의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혈거동 물이 되는 겁니다. 집단을 저항과 생존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개미들과의 의사 소통이 단절되고 나서 우리의 육신은 고통을 겪 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존 방식을 제대로 바꾸지 못했기 때문입니 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겁이 많으면서도 자 만심에 빠져 있는 인간으로 말입니다." 조나탕 웰즈가 자종 브라젤의 말에 동의하고 나섰다. "브라젤 교수님의 말씀이 옳아요. 우리는 이 지하실 밑바닥까지 우리의 육체를 이끌고 모든 길을 통과했어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가야할 길의 반밖에 안 되는 것이었어요. 어쨌든 이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가던 길을 계속 가도록 강요하고 있어요." "지하실 너머에 또 지하실이 있다는 얘기예요? 사원 밑을 파서 사 원의 지하실을 찾아보자는거요?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갈지도 모를 지하실을 또 찾잔 말이오?" 갈랭 형사가 말을 비비꼬았다. "아닙니다. 내 말을 들어보세요. 우리가 가야 할 길의 반은 육체 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몸으로 그것을 잘 통과했습니다. 다른 반은 우리의 정신과 관련된 것으로 이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정신을 바 꾸는 것, 즉 우리의 머리 속에서 돌연 변이와도 같은 혁신을 일으키 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혈거 동물이 되었으니 혈거 동물로서 살 아가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중에 누군가가 여자 하나에 남자 열여덟 명으로는 우리 집단이 제대로 굴러가기를 바랄 수가 없 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인간 사회라면 그 말이 맞습니다. 그러 나 곤충의 사회라면 어떻겠습니까?" 뤼시 웰즈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뤼시는 자기 남편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지하에 갇힌 채 식량도 거의 없는 상태 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자신들을 무엇인가로 바 꾸어나가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똑같은 단어를 입술에 올렸다. "개미" 49. 비 대기에 전기가 충만해 있다. 음전기를 띤 이온의 소용돌이에 번개 가 불을 붙인다. 장중한 으르렁거림이 뒤따르고 또 한 차례의 번개 가 일면서 하늘을 산산조각 내고 나뭇잎 위에 백색과 보라색으로 된 불길한 빛을 쏘아댄다. 새들은 파리들보다 더 낮게 난다. 또 한차례의 벼락이 크르릉거린다. 쇳덩이 같은 구름들이 갈라진 다. 뿔풍뎅이의 딱지가 번쩍인다. 103683호는 그 번쩍이는 표면 위 에서 아래로 떨어질까 전전 긍긍한다. 세계의 끝을 지키는 손가락들 과 맞섰을 때와 똑같은 무기력함이 엄습한다. <돌아가야 한다.> 그는 뿔풍뎅이에게 명령한다. 그러나 벌서 빗발이 촘촘해진다. 잘못하다간 그 빗방울에 맞아 죽 을 수도 있다. 어마어마하게 긴 수정실 같던 빗줄기 대신에 점선 같 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커다란 곤충도 날개에 그런 빗방울을 맞으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뿔풍뎅이는 공포에 사로잡혀 빽빽하게 쏟아지는 빗발 한가운데를 진동진동 헤쳐나간다. 빗방울 사이로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쓴다. 103683호는 더 이상 통제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그저 발톱과 부착 반에 힘을 잔뜩 주고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빗방울도 뿔풍뎅이들도 너무 빠르다. 103683호는 차라리 자기의 겹눈을 감고, 앞, 뒤, 위, 아래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위험을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다. 그러나 개미들에겐 눈꺼풀이 없다! 한시바삐 뭍에 닿을 수 있으 면 좋으련만! 가는 빗방울 하나가 103683호를 힘껏 후려쳐서 그의 더듬이가 가 슴에 붙어버린다. 더듬이가 젖어버리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느낄 수가 없다. 이제는 진동을 감지할 수 없다. 이제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시각뿐이다. 그 때문에 공포가 더욱 심해진다. 뿔풍뎅이는 이제 제정신이 아니다. 빗방울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 나가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날개 끝에 물기가 닿을 때마다 몸뚱 이가 점점 무거워진다. 묵직한 빗방울 하나를 가까스로 피했으나 더 커다란 빗방울이 덤 벼든다. 그것을 피하려고 뿔풍뎅이가 45도로 몸을 비튼다. 아슬아슬 하게 피하기는 했으나 그 물방울이 뿔풍뎅이의 다리로 떨어졌다가 더듬이로 튀어오른다. 뿔풍뎅이가 한 순간 외부 세계에 대한 지각을 잃는다. 깜빡 정신 을 잃었던 모양이다. 뿔풍뎅이가 다시 정신을 차려 비행을 계속하려 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번개 불빛에 번쩍이는 투명한 물기둥이 그들의 정면을 막아선다. 뿔풍뎅이는 두 날개를 수직으로 세워 제동을 건다. 그러나 날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제동이 걸리지 않는다. 그들은 앞으로 고꾸라지 면서 몇 차례의 공중 돌기를 한다 103683호가 뿔풍뎅이의 딱지를 너무 세게 그러쥐는 바람에 그의 발톱이 키틴질을 뚫어버렸다. 103683호의 젖은 더듬이가 눈을 후려 치더니 거기에 달라붙어버린다. 물기둥과 부딪히고 나서 그들은 다 시 다른 빗줄기와 부딪쳤다. 흥건히 젖은 그들의 몸뚱이는 원래 무 게보다 열배나 무거워졌다. 그들은 익은 배가 떨어지듯이 도시의 잔 가지 지붕위로 떨어진다. 뿔풍뎅이는 박살이 나버렸다. 뿔은 부서지고 머리가 산산조각이 났다. 그의 딱지 날개는 혼자서라도 비행을 계속하려는 듯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 몸이 가벼운 103683호는 다친 데 없이 그 재난을 벗 어났다. 그러나 비가 계속 내리고 있으니 쉴 틈이 없다. 그는 더듬 이를 대충 닦고 도시의 입구로 향한다. 통풍 구멍 하나가 나타난다. 일개미들이 도시가 물에 잠기는 것을 막으려고 그 구멍을 막아놓았다. 그러나 103683호는 그 둑을 뚫고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안으로 들어가니 경비 개미들이 그를 힐책 한다. 도시가 위험에 빠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마구 뚫고 들어 오느냐고, 아닌게아니라 가는 물줄기가 그의 뒤를 따라 흘러들고 있 다. 건축 개미들이 달려들어 제방을 다시 틀어막는 걸 보면서 103683호는 마음을 놓고 빠른 걸음으로 나아간다. 그가 기진 맥진한 채로 멍하니 발걸음을 멈추자, 동정심 많은 일 개미 하나가 영양 교환을 제안한다. 그는 감사히 여기며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두 개미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입을 맞춘 다음 갈무리 주머니 바닥에 있는 먹이를 되올린다. 도시 안의 다사로움, 먹이를 나누어 주는 동료, 그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 영양 교환이 끝나자 103683호는 어떤 터널 안으로 들어간 다음 다 시 몇 개의 통로를 지난다. 50. 미로 통로는 어두웠고 창자 속처럼 축축했다. 이상한 냄새들이 떠돌고 있었다. 바닥에는 썩은 먹거리 부스러기와 잡다한 쓰레기들이 널려 있었다. 바닥이 발에 늘어붙는 느낌이 들었고 벽에서는 습기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무리를 짓고 있었다. 부랑자, 거지, 가짜 악사, 진짜 인간 쓰레기들이 역겨운 냄새를 피우며 떼지어 모여들고 있었다. 그 사람들 가운데 아랫단이 잘룩한 빨간 잠바를 입은 남자 하나가 다가왔다. "아니, 저 아가씨 지하철 안을 혼자 돌아다니잖아! 위험하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지? 보디가드 하나쯤은 필요하겠는걸." 그는 빈정거리면서 그녀의 주위에서 춤을 추듯 배회했다. 레티샤 웰즈는 그런 경우에 무뢰한들이 함부로 굴지 못하게 하는 법을 익혀놓았다. 레티샤는 연보라빛 눈동자가 거의 발갛게 변하도 록 매섭게 쏘아보면서 일침을 놓았다. "꺼져!" 사내는 투덜거리면서 멀어져갔다. "에이, 깐깐한데! 잘못했다간 잡아먹으려고 덤비겠는걸!" 이번에는 그 방법이 제대로 통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게 잘 통한 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지하철이 어쨌든 가장 정확한 교통 수단이 된 것은 틀림없지만, 현대판 약탈자들의 소굴이 된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레티샤가 플랫폼에 내려섰을 때는 열차 하나가 막 지나가고 난 뒤 였다. 두 사람이 지나가고, 이어서 세 명의 승객이 반대쪽으로 지나 갔다. 어느새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지하철 노조에서 기습 파업이라도 일으킨 것은 아닐까 하고 의아 해 하기도 하고, 앞의 어떤 정거장에서 어떤 멍청이가 열차 안으로 뛰어들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윽고 두 개의 둥그런 불빛이 나타났다. 제동 장치의 날카로운 마찰음이 레티샤의 고막을 뚫고 고실 안으로 파고들었다. 기다란 튜 브가 플랫폼을 따라 늘어섰다. 녹슨 철판으로 만든, 색을 칠해 놓은 튜브였다. 그 철판 위에는 광고들과 매직 펜이나 칼로 써놓은 갖가 지 낙서도 붙어 있었다: '얼간이들에게 죽음을!', '이것 읽는 자 역 먹어라!', '바빌로야, 너의 최후가 가까이 왔다!', '미친놈들의 나 라 X이다.' 운운. 휘갈긴 난잡한 그림들은 물론이고, 문이 열렸을 때 레티샤는 객차 안이 벌써 터질 듯이 만원임을 알고 낭패감에 빠졌다. 사람들의 얼 굴과 손이 유리창에 눌려 납작해질 정도였다. 열차 안이 이 지경인 데도, 아무도 불평을 하거나 구조를 요청할 엄두도 못 내고 있는 듯했다. 사람들은 자진해서, 게다가 돈까지 내가면서 몇 입방미터의 뜨거 운 양철 상자 안으로 500명이 넘게 몰려들었다. 레티샤는 이 많은 사람들을 매일같이 콩나물 시루 같은 객차 안으로 꾸역꾸역 몰려들 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제 발로 그런 상황 을 찾아들어갈 만큼 어리석은 동물이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객차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누더기를 걸친 노파가 내뿜는 시큼한 냄새와 싸구려 향수 냄새를 풍기는 어떤 부인의 팔에 안긴 병든 사 내아이의 토악질 냄새, 그리고 어떤 건축공의 역겨운 땀냄새가 훅 끼쳐왔다. 레티샤의 주위에는 생긴 건 멀쩡해 가지고 레티샤의 엉덩 이를 쓰다듬으려는 뻔뻔한 남자, 차표를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차장, 동전이나 식권을 구걸하는 실업자, 그 북새통에서도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랑제콜 준비반에 다니는 마흔다섯 명의 장난꾸러기들은 다들 무 관심한 틈을 이용해서 볼펜 끝으로 자기들 좌석의 인조 가죽 천에 구멍을 내려고 했고, 한 무리의 군인들은 '제대!'라고 함성을 지르 고 있었다. 차창은 수백 명의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뿜어대는 날숨 때문에 부옇게 흐려져 있었다. 레티샤 웰즈는 탁한 공기를 되도록 천천히 들이마시면서 이를 앙 다물고 겨우겨우 참고 있었다. 그래도 레티샤는 불평할 처지가 아니 었다. 그녀가 집에서 직장까지 가는 데는 30분 정도면 충분하지만, 러시아워에 지하철 안에서 매일 3시간을 보내는 승객들도 있는 터였다. 공상 과학 소설을 쓴 어떤 작가도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예상 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철판 상자 안에서 수천 명씩 짓눌리는 것을 받아들이는 문명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불꽃을 튀기며 레일 위를 미끄러져갔다. 레티샤 웰즈는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잊은 채 평온을 찾으려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호흡을 조절해서 마음의 평 정을 유지하는 법을 가르쳤다. 호흡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되 면 심장 박동을 다스려 그것을 늦출 수도 있을 것이라고 아버지는 생각했었다. 잡념이 생겨서 레티샤는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레티샤는 어 머니를 생각하고 있었다. 안 돼, 그건 생각하지 말자.... 안돼. 레티샤는 눈을 떴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지고 있었다. 공간에 여유가 생겼다. 빈 자리까지 있었다. 레티샤는 빈 자리로 서둘러 달려가 앉은 다음 잠을 청했다. 종점에서 내리기 때문에 잠 이 들어도 걱정할 게 없었다. 지하철 안에 있다는 의식이 사라지면 서 마음이 편해졌다. 51. 백과 사전 연금술 연금술의 모든 공정은 세계의 탄생을 모방하거나 재연하는 것을 겨냥하고 있다. 연금술에는 여섯 가지의 공정이 필요하다. 즉, 배 소, 분해, 용해, 증류, 융합, 정련이 그것이다. 이 여섯가지의 공정은 네 단계로 전개된다. 즉 굽는 단계인 흑색 작업, 증발의 단계인 백색 작업, 호흡의 단계인 적색 작업을 거쳐 마지막 정련의 단계에서 금분이 나온다. 이렇게 해서 나온 금분은 '원탁의 기사 전설'에 나오는 요술사 메를랭의 금가루와 비슷하다.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완전하게 만들고 싶으면 그 금가루를 뿌려주 기만 하면 된다. 사실 많은 이야기와 신화들은 그 줄거리 속에 그와 같은 처방을 숨기고 있다. 백설 공주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백설 공주는 연금술의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 최종 결과물이다. 그것은 어 떻게 얻어진 것인가? 일곱 난쟁이를 통해서이다('난쟁이 nain'은 지 식을 뜻하는 라틴어 'gnomes'또는 'gnosis'에서 나온 것이다). 그 일곱 난쟁이들은 일곱 가지 금속, 즉 납, 주석, 철, 구리, 수은, 은, 금을 나타내며, 그 일곱 가지 금속은 다시 일곱 개의 별, 즉 토 성, 목성, 화성, 금성, 수성, 달, 태양과 연결되어 있고, 그 일곱 개의 별은 다시 까다로움, 우둔함, 몽상적임 등과 같은 인간의 일곱 가지 성격과 연결되어 있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52. 물과의 전쟁 번개가 여전히 줄무늬를 만들며 하늘을 뒤흔들고 있다. 거대한 구 름들이 섬광을 발하며 쪼개지는 모습이 장관이건만, 그것을 보고 감 탄할 기분을 느끼는 개미는 하나도 없다. 우레는 한낱 재앙일 뿐이다. 빗방울들이 포탄처럼 도시 위로 떨어진다. 때늦게 사냥을 나간 탓 에 밖에서 늑장을 부리고 있던 병정개미들은 빗방울 탄환에 맞아 죽었다. 벨로캉 내부라고 해서 재앙이 비껴가지는 않는다. 더구나 봄철에 클리푸니가 시도했던 여러 실험들 가운데 하나가 더 큰 재앙을 불러 들이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여왕은 구역과 구역 사이의 교통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운하를 파 게 했었다. 그러나 빗물이 쏟아져들어오면서 이 지하 운하에 물이 붇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커다란 강물이 되어 경비 개미들이 성난 물결을 제어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지붕의 상황은 더욱 나쁘다. 빗방울들이 잔가지 지붕을 뚫어버리 자 몇몇 틈새로 물이 쏟아져들어온다. 103683호는 그 틈새들 가운데 제일 크게 벌어진 것을 간신히 틀어 막고 페로몬을 발한다. <모두 햇빛방으로 가라. 알 모다기들을 구해야 한다.> 한 무리의 병정개미들이 쇄도하는 물결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의 뒤를 따라 서둘러 달려간다.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은 햇빛방은 평소와는 달리 어두웠다. 격렬 한 불안감에 사로잡힌 일개미들이 천장에 붙어서 낙엽으로 구멍을 막으려고 전전 긍긍한다. 그러나 어느새 물이 다시 나타나서 바닥에 줄지어 놓여 있는 알 모다기 속으로 흘러든다. 모든 것이 젖어버린 다. 모든 고치들을 구하기는 불가능하다. 고치들이 너무 많다. 유 모 개미들은 올된 애벌레 몇 마리만 겨우 구해낸다. 일개미들에게 부랴부랴 던져준 알들이 바닥에 떨어져 깨진다. 그때 103683호는 반체제 개미들을 떠올렸다. 물이 자꾸 내려가서 뿔풍뎅이 축사를 덮치면, 반체제 개미들이 몰살할지도 모른다. 1단계 경보 페로몬이 발산된다. 위험을 알리는 페로몬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많은 페로몬들이 수증기와 뒤섞인다. 2단계 경보 페로몬이 발산된다. 병정개미, 일개미, 유모개미, 생 식개미 등 모두가 배 끝으로 격렬하게 벽을 두드린다. 전투 준비의 신호가 온 도시에 진동한다. 팡, 팡, 팡, 비상! 비상! 온 도시가 공포의 도가니로 변한다. 물 웅덩이에 빠진 개미들마저 다른 개미들에게 위험을 알리려고 물 속의 바닥을 두드린다. 마치 혈관 속의 피가 혈관 벽을 두드리듯이 요동치고 있다. 도시의 심장이 두근거린다. 커다란 빗방울들이 지붕을 뚫고들어오는 소리가 널리 퍼진다. 폭, 폭, 폭. 뾰족하게 갈아놓기까지 한 위턱들이 물방울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다. 3단계 경보 페로몬이 퍼져나간다. 가장 위급한 상황이다. 흥분한 몇몇 일개미들이 사방으로 달려간다. 팽팽히 긴장된 그들의 더듬이 에서 뜻 모를 울부짖음이 담긴 페로몬들이 쏟아져나온다. 흥분을 억 제하지 못하고 그들 중의 몇몇은 동료들에게 달려들어 상처를 내기도 한다. 불개미들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경보 페로몬은 뒤푸르 씨 샘에 서 발산되는 물질이다. N-데칸이라 불리는, 휘발성이 강한 탄화수소 의 하나로서 화학식은 C10H12이다. 그 페로몬의 냄새는 겨울잠을 자 고 있는 유모 개미를 사나운 미치광이로 만들 수 있을 만큼 아주 진하다. 문지기 개미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사나운 물결이 금단 구역이라 고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영웅적인 문지기 개미들이 납작한 머리로 입구를 꽉 막고 있었기 때문에 물이 도시 한가운데의 그루터기 안으로는 스며들지 않았다. 클리푸니 여왕을 비롯한 금단 구역의 거주자들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물은 이제 진딧물 축사로 쏟아져내리고 있다. 풀빛 가축들이 냄새 언어로 신음을 내뱉고 있다. 물을 피해 도망을 치지 않을 수 없게 된 목축 개미들은 곧 알을 낳을 채비를 하고 있는 한 무리의 진딧물 만 구해 가지고 달아난다. 개미들은 곳곳에 둑을 쌓아보려고도 하고, 주요한 통로에 전략적 으로 설치해 놓은 둑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면서 성난 급류를 막아보 려고 애면글면한다. 그러나 물의 힘엔 당할 수가 없다. 둑이 부서지 고, 갈라지고, 쪼개진다. 막혀 있던 물이 터지면서 용감한 건축 개 미들을 휩쓸어간다. 익사자들을 실은 물이 통로 천장을 무너뜨리고 다리를 뽑아버리고 지하의 지형을 온통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나더니 이제 버섯 재배장 으로 쏟아져 들어간다. 거기에서도 소중한 것들이 휩쓸려간다. 농경 개미들은 겨우 약간의 팡이 홀씨만을 챙겨가지고 달아난다. 물에 사는 딱정벌레, 즉 클리푸니가 그토록 길들이고 싶어하던 그 물방개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 환호 작약하면서 물에 떠내려오는 진 딧물들과 개미들의 시체와 허우적거리는 애벌레들을 잡아먹는다. 물을 피해 돌고 또 돌아 103683호는 마침내 뿔풍뎅이들의 축사에 다다른다. 그 가련한 천장이 너무 낮아서 뿔풍뎅이들은 이내 천장에 부딪히고 공포에 휩싸인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엄청난 손실을 피할 수 없다. 부 지런한 일개미들은 뿔풍뎅이 알 몇 개라도 구할 생각으로 알이 들어 있는 둥근 똥 덩어리를 정신없이 밀고간다. 다리가 물에 젖자 뿔풍뎅이들은 격렬한 공포에 사로잡혀 뿔로 천 장을 들이받는다. 103683호는 병정개미로서의 용맹성을 발휘하여 그 들이 뿔질을 해대는 사이로 지나간다. 마침내 반체제 개미들의 은신처 입구가 나타난다. 신을 믿는 자들 도 믿지 않는 자들도 모두 거기에 있다. 그런데 신을 믿지 않는 자 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움직이고 있는데, 신을 믿는 자들은 이상하게 도 잠잠하다. 그들은 재앙에도 별로 놀라지 않는 모양이다. <우리는 신들을 제대로 봉양하지 못했다. 그래서 신들이 물로 벌 을 내리시는 것이다.> 103683호는 단조롭게 되풀이되는 그들의 페로몬을 중단시키고 그 들을 설득한다. <조금 있으면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진다. 반체제 운동을 계속하고 싶으면 지체없이 달아나야 한다.> 개미들이 마침내 그의 페로몬을 받아들이고 그의 뒤를 따른다. 그 곳을 막 떠나려는데 24호라 불리는 개미가 나방 고치를 내민다. 103683호가 전에 거기를 찾아왔을 때 놓고 갔던 그 고치다. <메르쿠리우스 임무를 위한 거야. 이걸 잘 챙겨야 해.> 더 이상 묻지 않고 103683호는 고치를 받아 몸에 지닌 다음, 반체 제 개미들을 이끌고 나아간다. 그러나 이제 뿔풍뎅이 축사를 통과하 기가 어렵게 되었다. 방이 물에 잠겨 있다. 뿔풍뎅이들도 개미들도 모두 물 위에 둥둥 떠 있다. <한시바삐 새 터널을 파야 한다.> 103683호가 명령한다. 물이 점점 올라온다.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저기 널려 있던 먹이들이 떠오른다. 물이 점점 빠르게 올라온다. 그래도 신을 믿는 개미들은 불평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도시를 휩쓸고 있는 그 비가 클리푸니의 원정을 막기 위해 온 것이 라고 믿고 있다. 53. 가슴 저미는 추억 "미안해요, 아가씨." 누군가가 레티샤 웰즈에게 말했다. 다시 눈을 떠 보니 아직 종점에 다다르지 않았다. 어떤 여자가 그 녀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미안해요, 아가씨. 뜨개 바늘로 아가씨를 찌른 것 같아요." "괜찮아요." 레티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인은 분홍색 털실로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자기가 뜨개질한 천을 펼쳐놓느라고 자리를 많이 차지하고 있었다. 레티샤 웰즈는 '손가락들'을 움직이며 거미처럼 실을 뽑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뜨개 바늘들이 귀에 거슬리는 쇳소리를 내면서 매듭을 자꾸 늘려가고 있었다. 여인의 분홍색 작품은 배내옷을 닮았다. 저 여자는 플란넬로 만든 저 굴레를 어떤 가련한 아이에게 씌우려는 것일까 하고 레티샤는 생 각했다. 마치 그 질문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여인은 사기질로 된 멋 진 틀니를 드러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우리 아들 주려고 그래요." 바로 그 순간에 레티샤의 눈길은 어떤 포스터에 머물렀다. '우리 나라는 아이들을 필요로 합니다. 출산율 저하에 맞서 싸웁시다.' 레티샤 웰즈는 약간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아이들을 만든다는 것! 자기를 닮은 생명을 만들어 자기 생명을 확장하고 자기를 대량 으로 퍼뜨린다는 것! 그것은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본원적인 질서이 다. 먼저 양을 생각하고 그 다음에 질을 생각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아이를 낳는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 은 어떤 나라의 어떤 정책도 초월하는 영원한 선전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다. 그 선전이란, 지구 위에 인간의 영향력을 확대하라는 것이다. 레티샤 웰즈는 그 아기 엄마의 어깨를 붙잡고 눈을 똑바로 바라보 면서 다은과 같이 외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안 돼요. 더 이상 아이를 만들지 마세요. 참으세요. 좀 삼가세요. 도대체 이게 뭐예 요? 피임약을 드시고 당신이 사랑하는 남자들에게 콘돔을 주세요. 내가 당신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처럼 당신도 임신 가능성이 많은 친 구들을 설득하세요. 제대로 된 아이가 하나 생길 때 막돼먹은 애들 은 100명이 생겨요. 그건 해볼 만한 일이 못 되잖아요. 마구잡이로 만들어진 그런 애들이 나중에 세상을 주름잡게 되는 거예요. 지금 그 결과를 우리가 보고 있잖아요? 당신 어머니가 좀더 신중한 분이 었다면 이 모든 고통을 피할 수 있었을 거예요. 당신 부모님들이 당 신을 세상에 내보낸 것과 같은 못된 짓을 당신 자녀들에게 되풀이하 지 마세요. 서로 사랑하는 걸 중단하세요. 당신 자신이 성장하는 것 은 좋지만 당신을 닮은 생명을 늘리지는 마세요.' 레티샤는 일종의 염세주의자였다. 염세주의적 증상 가운데서도 대 인 공포증의 단계에 있었다. 대인 공포증의 발작이 일어날 때마다 레티샤의 입 안에 씁쓸한 뒷맛이 남곤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놀 라운 것은 그 씁쓸한 맛을 그녀 자신이 그다지 불쾌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레티샤는 마음을 가다듬고 그물을 만드는 거미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와 마주 보고 있는 그 얼굴은 어미된 자의 행복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안 돼. 그걸 생각해선 안 돼. 그러나 기어이 그녀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어머니였다. 그녀의 어머니 링미였다. 링미 웰즈는 급성 백혈병에 걸려 있었다. 혈액 암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병은 누구도 용서하는 법이 없었다. 레티샤가 그녀의 다정 한 어머니 링미에게 의사들이 뭐라고 하더냐고 물으면, 어머니는 이 렇게 말하곤 했었다. "걱정하지 마라. 곧 나을 게다. 의사들은 잘 될거라고 하고 약도 점점 효능이 좋아지고 있잖니?" 그러나 욕실 세면대에는 종종 피가 흥건했고 진통제 병은 금방금 방 바닥이 났다. 어머니는 의사가 지시한 분량을 초과해서 진통제를 복용했다. 이제 어머니의 고통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날 구급차가 와서 어머니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걱정하지 마라. 거기 가면 필요한 기계가 다 있고 전문 의사들이 나를 돌보아줄 거란다. 내가 없는 동안 집 잘 보고 아빠 말씀 잘 들 어라. 그리고 매일 병원으로 나를 보러 오너라." 어머니 말대로 병원에는 필요한 기계가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그 래서 어머니는 죽음에 이르지 않았다. 어머니는 세 번 자살을 시도 했는데, 그때마다 의사들이 죽음의 순간에서 어머니를 구해냈다. 어 머니가 몸부림을 치자 그들은 가죽띠로 어머니를 묶고 모르핀을 주 사했다. 레티샤가 어머니를 찾아갔을 때 어머니의 팔은 약물 주사와 수혈 때문에 생긴 혈종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나니 링미 웰즈는 쭈그렁 노파가 되어버렸다. "네 엄마는 돌아가시지 않을거야.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네 엄마 를 지켜줄게." 의사들은 그렇게 장담했지만 링미 웰즈는 그들이 자기 목숨을 구 해주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딸의 팔을 잡고 어머니는 이렇게 속삭였다. "난 말이다.... 죽고 싶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런 부탁을 한들 열네 살짜리 계집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사람이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 사람이 병실에서 간호를 받고 세 끼 식 사를 하는 데 매일 천 프랑씩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 더욱 그러했다. 아버지 에드몽 웰즈도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한 다음부터 눈에 띄 게 늙어갔다. 링미는 남편에게 임종을 지켜달라고 부탁했었다. 에드 몽은 아내가 더 이상 차도를 보이지 않자 체념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아내에게 호흡을 조절해서 심장 박동을 늦추는 법을 가르쳤다. 그는 아내에게 최면을 걸었다. 물론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지 만, 레티샤는 어머니가 잠드는 것을 돕기 위하여 아버지가 어떻게 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당신의 마음은 지금 고요해. 아주 고요해. 당신의 숨결은 앞뒤로 일렁거리는 물결과도 같다. 물결이 잔잔해. 앞으로, 뒤로, 당신의 숨결의 호수로 변해 가려는 바다야. 앞으로, 뒤로, 호흡이 점점 느 려지고 점점 깊어지고 있어. 숨을 한 번 쉴 때마다 당신은 더 강해 지고 더 유연해지고 있어. 당신은 이제 당신의 몸을 느끼지 않아. 당신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가벼운 깃털이야. 자, 이제 바람 속에 서 떠다니는거야." 어머니는 깃털이 되어 날아갔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고요한 미소 가 깃들여 있었다. 어머니는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죽어 있었다. 곧 소생 담당 의사들이 비상 벨을 울렸다. 그들은 한 마리 해오라기 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막고 싶어하는 족제비들처럼 어머니의 시신을 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머니가 정말로 이겼다. 그 후로 레티샤는 꼭 풀어야 할 자기만의 수수께끼를 가지게 되었 다. 그것은 암이라는 수수께끼였다. 거기다가 레티샤는 하나의 강박 관념도 갖게 되었다. 의사들을 비롯해서 인간의 운명을 쥐고 흔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증오가 그것이었다. 아무도 암을 퇴치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그 해결책을 찾는 데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 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레티샤는 확신했다. 그러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레티샤는 암 연구가가 되기로 했 다. 레티샤는 암이 퇴치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했고, 어머 니를 구할 생각은 안 하고 고통만 가중시켰던 그 의사들이 무능했다 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했다. 그녀에게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와 수수 께끼에 대한 열정만이 남았다. 기자라는 직업은 추잡한 인간에 대한 그녀의 공격 욕구와 불가사 의 한 일에 대한 뿌리깊은 열정을 동시에 충족시켜 주었다. 레티샤 는 자기의 기사를 통해 불의를 폭로하고, 대중을 선동한 위선자들을 맹렬히 공격했다. 유감스러운 것은 위선자들이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는 것이었다. 레티샤는 곧 자기의 직장 동료들이 위선자 대열의 선 두에 설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말할 때는 용감한데 행동할 때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논평을 할 때는 정의파임을 자 처하는 사람들이 봉급을 인상해 주겠다는 달콤한 약속 앞에서는 비 열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언론계 사람들에 비하면 그래도 의료계 는 멋진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레티샤는 언론계 내에 자기의 생태적 지위, 즉 자기의 사 냥터를 마련했다. 레티샤는 오리 무중에 빠진 몇 건의 형사 사건을 해결해서 명성을 얻었다. 현재 그녀의 동료들은 그녀가 추락할 때를 기다리면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레티샤는 추락하는 일이 없 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다음의 전리품을 위해서 레티샤는 자기의 사냥 목록에 살타-노가 르 사건을 올려놓고 있었다. 명민한 멜리에스 경정에게는 안된 일이 지만 어쩔 수 없다! 드디어 종점이었다. 레티샤는 내릴 채비를 했다. "잘 가요, 아가씨." 지하철 문을 나서는 그녀에게 배내옷을 챙기면서 뜨개질하는 여자 가 말했다. 54. 백과 사전 어떻게 장애물이 앞에 나타났을 때, 사람이 보이는 최초의 반응은 '왜 이 런 문제가 생긴 거지? 이것은 누구의 잘못이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 그는 잘못을 범한 사람을 찾고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그에게 부과해야 할 벌이 무엇인지를 찾는다. 똑같은 상황에서 개미는 먼저 '어떻게, 누구의 도움을 받아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개미 세계에는 '유죄'라는 개념이 전혀 없다. '왜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까'라고 자문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하 면 일이 제대로 되게 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하는 사람들 사이에 커 다란 차이가 생기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현재 인간 세계는 '왜'라고 묻는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어떻게'라고 묻는 사람들이 다스리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55. 물바다, 엄청난 물바다 개미들은 위턱과 발톱을 이용해 열심히 땅을 판다. 파고 또 파는 방법 이외에는 달리 구원의 길이 없다. 구조 터널을 파기에 골몰해 있는 반체제 개미들의 주위로 땅이 울리는 소리가 번져나간다. 물이 완전히 도시를 휩쓸고 있다. 클리푸니의 멋진 계획과 빛나는 성과물들이 물결에 씻겨 한낱 쓰레기가 되고 만다. 헛된 꿈이었다. 정원도, 버섯 재배장도, 축사도, 꿀단지 개미들의 방도, 겨울용 곡 식 창고도, 온도가 조절되는 영아실도, 햇빛방도, 수로망도 한낱 부 질없는 꿈이었다.... 그 모든 것들이 전혀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 럼 소용돌이 속으로 덧없이 사라지고 있다. 갑자기 구조 터널의 측벽이 터지면서 물기둥이 분출한다. 103683 호와 그의 동료들은 흙을 삼키면서까지 되도록 빨리 파려고 애쓴다. 그러나 터널을 파는 일은 불가능하다. 급류가 그들을 덮쳐버린 것이다. 103683호는 이제 그들 앞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제대로 헤아릴 수가 없다. 그들은 벌써 배까지 흠뻑 젖었다. 물은 빠른 속 도로 계속 올라오고 있다. 56. 잠수 잠수. 이제 몸이 완전히 물에 잠겼다. 이제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었다. 레티샤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 고 한동안 물 속에 머물렀다. 레티샤는 물을 좋아했다. 욕조의 수면 아래에 들어가 있으면 머리채가 부풀어오르고 살갗이 판지처럼 되었다. 레티샤는 그것을 일상적인 목욕 의식이라고 불렀다. 미지근한 물과 침묵, 그것이 레티샤가 휴식을 취하는 방법이었다. 그러고 있으면 레티샤는 자신이 마치 호수의 공주라도 된 느낌이 들었다. 레티샤는 자기가 죽는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수십 초 동안 호흡을 정지한 채 머물러 있었다. 물 속에서 버티는 시간이 매일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 레티샤는 마치 양수 속에 있는 태아처럼 무릎을 구부려 턱 밑까지 당겨 올리고 천천히 몸을 흔들었다. 일종의 수중 무용인 셈인데 그 의미는 그녀만이 알고 있었다. 레티샤는 머리 속의 모든 잡념을 지워버리기 시작했다. 암 퇴장, 살타 퇴장, (딩동). '일요 메아리' 편집국 퇴장. 자기의 아름다움 퇴장, (딩동). 지하철 퇴장, 애 낳는 여자 퇴장, 여름날 대대적인 벌채를 하듯 레티샤는 잡념을 지워나갔다. 딩동. 레티샤는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모든 것이 메마른 느낌이 다. 건조하다. 싫다. (딩!동!).... 시끄럽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초인종을 누르고 있었다. 레티샤는 공기 호흡을 알아낸 양서류의 동물처럼 엉금엉금 기어서 욕조 밖으로 나왔다. 레티샤는 커다란 가운을 들어 몸을 감싼 다음 종종걸음을 치며 거실로 나왔다. "누구세요?" 문 너머로 그녀가 물었다. "경찰입니다." 레티샤는 문에 난 어안 렌즈 구멍을 들여다보고 멜리에스 경정을 알아보았다.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오셨나요?" "수색 영장을 가지고 왔습니다." 레티샤는 마지 못해 문을 열었다. 멜리에스는 전혀 서두르는 기색 을 보이지 않았다. "CCG에 갔었는데 그 사람들 말이, 어떤 플라스크들을 당신이 챙겨 갔다는군요. 그런데 그 플라스크 안에 살타 형제와 카롤린 노가르가 연구하던 화학 약품이 들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찾으러 왔습니다." 레티샤는 플라스크들을 가져와서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웰즈 양, 이 안에 뭐가 들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일을 너무 쉽게 하려고 그러시는군요. 제가 멜리에스 씨 일을 도 울 의무는 없잖아요? 화학적인 감정을 하느라고 우리 신문사 돈까 지 썼는걸요. 감정 결과를 밝히는 문제는 우리 신문사 소관이지 저 하곤 상관없어요." 그는 후줄그레한 옷차림으로 여전히 문턱에 선 채, 자기에게 도전 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이 어여쁜 처녀를 앞에 두고 거의 주눅이 들어 있었다. "웰즈 양, 좀 들어가도 될까요?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멜리에스는 세찬 소나기를 만난 듯 흠뻑 젖어 있었다. 그가 딛고 있는 현관의 깔개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레티샤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좋아요, 하지만 조금만 있다 가셔야 돼요. 당신에게 할애할 시간 이 별로 없어요." 멜리에스는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고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고약한 날씨예요." "푹푹 찌고 나더니 소나기가 오는군요." "계절이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버렸어요. 더위에서 추위로, 건기에 서 우기로 넘어가는 자연스런 과정이 없어졌어요." "자, 들어오세요. 앉으세요. 뭣 좀 드실래요?" "뭐가 있습니까?" "꿀술 어때요?" "그게 뭔데요?" "꿀하고 물하고 효모를 섞은 다음 발효시킨 거예요. 올림푸스의 신들과 켈트의 드루이드 승려들이 마시던 음료예요." "어디 그 올림푸스 신들의 음료 좀 마셔봅시다." "좀 기다려주세요. 먼저 머리를 말려야겠어요." 욕실에서 헤어드라이어가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멜리에 스는 벌떡 일어났다. 그 틈을 이용해서 집을 조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한것이다. 레티샤의 집은 고급 아파트였다. 모든 장식이 집 주인의 고상한 취향을 보여 주고 있었다. 쌍쌍이 얼싸안고 있는 사람들을 표현한 비취 장식물도 있었다. 할로겐 등이 벽에 걸린 동물 도판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벽 쪽으로 다가가 그 도판 가운데 하나를 들여다보았다. 세계 전역에 사는 50여 종의 개미 목록이 적혀 있고 개미들이 정 확하게 그려져 있었다. 헤어드라이어는 여전히 윙윙거리고 있었다. 개미의 종류가 갖가지였다. 오토바이 타는 순찰 대원을 닮은, 다 리에 하얀 털이 달린 검은 개미 Rhopalothrix orbis, 가슴 전체에 뿔이 돋아 있는 개미 Acromymex versixcolor, 끝에 집게가 달린 나 팔 모양의 대롱을 머리에 달고 있는 개미 Orectnathus, 히피 족 같 은 느낌을 주는 기다란 털 타래가 달린 개미 Tingimyrmex mirabilis. 개미들이 그토록 다양한 모습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경정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는 곤충학자의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검은 래커 를 칠한 문 하나를 발견하고 그는 그것을 열어보려고 했다. 문은 잠 겨 있었다. 주머니에서 머리 핀 하나를 꺼내 자물쇠를 몰래 따려고 하는데, 헤어드라이어 돌아가는 소리가 갑자기 그쳤다. 그는 얼른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레티샤의 머리 모양은 이제 루이즈 브룩 식으로 돌아와 있었다. 레티샤는 허리에 주름을 넣은 기다란 비단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멜 리에스는 그녀의 외모에 이끌리지 않으려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개미에 관심이 많으신가 보죠?" 그가 사교적인 어투로 물었다. "별로예요. 저희 아버지께서 관심이 많으셨지요. 아버지께서는 대 단한 개미 전문가이셨어요. 이 도판들은 스무 살 때 생일 선물로 아 버지께서 주신 거예요." "웰즈 양 아버님이라면 에드몽 웰즈 박사 말씀이군요." 그 말에 레티샤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저희 아버님을 아세요?" "그 분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습니다. 우리 경찰 에서 그분을 잘 알게 된 것은 그분이 시바리트 가에 있는 그 저주받 은 지하실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죠. 그 사건 기억하시죠? 스물한 명 이나 되는 사람들이 끝없는 동굴 속으로 사라졌던 사건 말입니다." "물론이죠. 그 사람들 중에 제 사촌 오빠와 올케, 조카, 할머니가 들어 있는 걸요." "이상한 사건이오." "수수께끼를 그토록 좋아하시는 분이 어떻게 그 실종 사건에 대해 서는 수사를 안 하셨어요?" "저는 그 당시 다른 사건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 지하실 사건을 맡았던 것은 알랭 빌솅 경정이었지요. 그런데 그 사람에게 운이 따 르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다시는 올라오지 못 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불가사의한 일을 좋아하시는 웰즈 양도 마 찬가지인 줄로 알고 있는데...." 그 말에 레티샤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좋아하는 건 불가사의를 없애는 거죠." "살타 형제와 카롤린 노가르의 살인범을 웰즈 양이 찾아낼 수 있 을 것 같습니까?" "어쨌든 해봐야죠. 저희 독자들에게 기쁨을 주는 일이니까요." "당신의 조사 작업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저한테 이야기해 주 시지 않겠습니까?" 레티샤는 고개를 저었다. "각자 자기 방식대로 찾아보는 게 좋겠어요. 그래야 서로에게 방 해가 안 될 테니까 말이죠." 멜리에스는 껌 하나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그것을 씹고 있으니 언제나 그렇듯이 마음이 훨씬 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다시 물었다. "저 검은 문 뒤에는 뭐가 있어요?" 레티샤 웰즈는 그 난데없는 질문에 한 순간 놀랐지만, 대답하기 거북하다는 표정을 얼른 감추고 별거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제 서제예요. 그러나 보여드리지는 않을 거예요. 말 그대로 난장 판이 돼 있거든요." 말을 끝내고 나서 레티샤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기다란 궐련 파이프에 끼운 다음 까마귀 모양으로 생긴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멜리에스는 자기가 몰두하고 있는 문제로 다시 돌아갔다. "당신은 당신이 조하하신 것에 대해 비밀을 유지하고 싶은 모양입 니다만, 저는 제 수사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말씀드릴 생각입니다." 레티샤는 자개빛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뿜어내고 말했다. "좋으실 대로 하세요."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네 명의 피해자는 모두 CCG에서 일했습니 다. 사람들은 직업적인 경쟁 의식 때문에 어떤 불순한 유혹에 이끌 릴 수 있습니다. 대기업에서는 적대 관계가 흔히 나타납니다. 사람 들은 승진 문제나 봉급 문제 때문에 서로 시기하고 중상합니다. 그 리고 과학자들의 세계에도 이익에 급급한 사람들은 흔히 있습니다. 따라서 경쟁 관계에 있는 화학자의 소행일 거라는 가정이 자연스럽 게 떠오르게 됩니다. 어떤 화학자가 동료들을 독살했을 가능성이 있 습니다. 그가 사용한 독은 나중에 효과가 나타나는 맹독입니다. 그 렇게 가정하면 부검을 통해 밝혀진 소화기 내의 그 헐어서 생긴 상 처들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너무 앞질러가고 계시는군요. 멜리에스 씨. 당신은 독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줄곧 공포 쪽을 잊고 계시나봐요. 아주 심 한 정신적 충격을 받아도 위장이 헐 수 있어요. 그리고 네 피살자들 은 모두 아주 심한 공포를 느꼈어요. 공포가 이 사건의 열쇠예요. 멜리에스 씨도 저도 그들의 얼굴에 공포를 불러일으킨 게 무엇인지 를 아직 모르고 있어요." 멜리에스가 반박했다. "물론 나도 그 공포에 대해서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공포 를 느끼게 할 수 있는 걸 모두 떠올려봤는걸요." 레티샤는 다시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내뿜었다. "그럼 멜리에스 씨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게 뭐예요?" 멜리에스는 자기가 먼저 그 질문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다가, 거꾸 로 질문을 받고 나자 완전히 허를 찔린 기분이 되었다. "그건.... 음...." "다른 어떤 것보다 무서워하는 뭐가가 있지 않아요?" "그것을 털어놓고 말씀드릴 테니까, 그 대신 당신도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뭔지 진지하게 말씀해 주셔야 됩니다." 레티샤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좋아요." 멜리에스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는.... 저는 늑대를.... 늑대를 무서워합니다." "늑대요?" 레티샤는 웃음을 터뜨리며 '늑대'라는 말을 되뇌었다. 레티샤는 몸을 일으켜 그에게 꿀술 한 잔을 갖다주었다. "저는 진실을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레티샤는 다시 일어나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멀리에 그녀 의 관심을 끄는 무엇인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음.... 저는 말이에요.... 저는.... 당신을 무서워해요." "농담 그만 하시고, 진지하게 말씀하시기로 약속했잖아요." 레티샤가 몸을 돌려 다시 담배 연기의 소용돌이을 일으켰다. 터키 옥 빛깔의 담배 연기 사이로 그녀의 연보라빛 눈동자가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정말이에요. 전 당신을 두려워해요. 당신 너머에 있는 전 인류를 두려워해요. 남자, 여자, 노인, 아가 등 모든 사람들을 두려워해요. 우리는 어디에서나 야만인들처럼 행동하고 있어요. 저는 우리 인간 의 육체가 흉칙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가운데 누구도 오징어가 모기 의 아름다움을 못 따라간다고 생각해요...." "정말입니까?" 레티샤의 태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그토록 잘 통제되던 그녀 의 눈길은 유약함을 가장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녀의 두 눈에 광기 가 어려 있었다. 어떤 유령이 그녀의 심성을 사로잡고 있었다. 레티 샤는 기꺼이 그 광기의 힘에 자기를 내맡기고 있었다. 아무것도 거 리낄 게 없었다. 레티샤는 자기가 이제 겨우 알게 된 한 경찰관과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 "저는 우리가 인간들이 너무 오만하고, 젠 체하고, 거드름피우며, 스스로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너무 자랑스러워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농부와 신부와 병사들을 두려워하고, 의사와 환자들을 두려워 하며, 저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도, 저에게 이익을 주려는 사람들 도 두려워해요. 우리는 우리 손에 닿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고 있어 요. 우리가 파괴할 수 없는 것을 오염시켜요. 우리의 기막힌 오염 능력을 당해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화성인들이 우리 지 구에 오지 않은 것은 지구인들이 두렵기 때문일 거라고 저는 확신해 요. 화성인들은 겁을 먹고 있어요. 그들은 우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동물들과 우리 자신에게 행하는 것과 똑같이 그들을 대할까봐 두려워하는 거예요. 저는 제가 하나의 인간이라는 사실이 수치스러 워요. 저는 두려워요. 저는 저를 닮은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레티샤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하고 말을 이었다. "늑대들 때문에 죽는 사람의 수와 사람들 때문에 죽는 사람의 수 를 비교해 보세요. 나의 두려움이 당신의 두려움보다 더 온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사람들을 무서워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당신 자신이 하나의 인간 이잖습니까?" "그건 저도 잘 알아요. 저 자신에게서 두려움을 느낄 때도 있는걸요." 멜리에스는 놀란 눈으로 갑자기 증오의 빛이 서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레티샤는 얼른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아, 우리 다른 거 생각하기로 해요. 우린 둘 다 수수께끼를 좋아 해요. 마침 전 국민의 성원을 받고 있는 우리의 퀴즈 프로그램이 나 올 시간이군요. 당신에게 우리 시대의 가장 신명나는 텔레비전 시청 의 기회를 제공할까 하는데요." "고맙군요." 레티샤는 리모컨을 작동시켜 '알쏭달쏭 함정 퀴즈'를 찾았다. 57. 백과 사전 역학 관계 쥐들을 상대로 하나의 실험이 이루어졌다. 낭시 대학 행동 생물학 연구소의 디디에 드조르라는 연구자는 쥐들이 수영에 어떻게 적응하 는가를 알아보는 실험을 했다.그는 쥐 여섯 마리를 한 우리 안에 넣 었다. 그 우리의 문은 하나뿐인데, 그 문이 수영장으로 통하게 되어 있어서, 쥐들은 먹이를 나누어주는 사료통에 도달하기 위해서 수영 장을 건너야만 했다. 여섯 마리의 쥐들은 일제히 헤엄을 쳐서 먹이 를 구하려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곧 확인되었다. 쥐들 사이에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즉, 헤엄 을 치고 먹이를 빼앗기는 쥐가 두 마리, 헤엄을 치지 않고 먹이를 빼앗아 먹는 쥐가 두 마리, 헤엄도 안 치고 먹이를 빼앗지도 못하는 천덕꾸러기 쥐가 한 마리였다. 먹이를 빼앗기는 두 쥐는 물 속으로 헤엄을 쳐서 먹이를 구하러 갔다. 그 쥐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자, 먹이를 빼앗아 먹는 두 쥐는 그 쥐들을 때리고 머리를 물 속에 처박 았다. 결국 애써 먹이를 가져온 두 쥐들은 자기들의 먹이를 내놓고 말았다. 두 착취자가 배불리 먹고 난 다음에야 굴복한 두 피착취자 들은 자기들의 크로케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착취자들은 헤엄을 치는 일이 없었다. 그 쥐들은 헤엄치는 쥐들을 때려서 먹이를 빼앗 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독립적인 쥐는 아주 힘이 세기 때문에 착 취자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천덕꾸러기 쥐는 헤엄을 칠 줄도 모르고 헤엄치는 쥐들에게 겁을 줄 수도 없었기 때문에, 다 른 쥐들이 싸울 때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먹었다. 그 후에 다시 실험이 행해진 스무 개의 우리에서도 역시 똑같은 구조, 즉 피착취자 두 마리, 착취자 두 마리, 독립적인 쥐 한 마리, 천덕꾸러기 쥐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러한 위계 구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그 연구자는 착취자 여섯 마리를 함께 우리에 넣었다. 그 쥐들은 밤새도록 서로 싸웠다. 다음날 아침 이 되자, 그 쥐들 가운데 두 마리가 식사 당번이 되었고, 한 마리는 혼자 헤엄을 쳤으며, 나머지 한 마리는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참 아내고 있었다. 착취자들에게 굴복했던 쥐들을 상대로 역시 똑같은 실험을 했다. 다음날 새벽이 되자, 그 쥐들 가운데 두 마리가 왕초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실험에서 우리가 정작 음미해 보아야 할 대목은, 쥐들 의 뇌를 연구하기 위해서 머리통을 열어보았을 때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쥐가 바로 착취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착취자들은 필시 피착취자들이 복종하지 않게 될까봐 무척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58. 젖지 않은 방 물이 그들의 등을 핥는다. 103683호와 그의 동료들은 미친 듯이 천장을 파고들어간다. 그들의 몸뚱이가 온통 급류에 뒤덮일 즈음,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들이 마침내 젖지 않은 방에 다다른 것이다. 살았다. 그들은 재빨리 자기들이 들어온 구멍을 막는다. 모래로 된 벽이 버틸 수 있을 것인가? 그랬다. 급류는 그 벽을 빙 돌아서 더 부서지 기 쉬운 통로들 쪽으로 쏟아져 들어간다. 그 작은 방에서 서로 바싹 몸을 붙인 채 웅크리고 있는 그 개미들은 기분이 한결 나아짐을 느낀다. 반체제 개미들은 자기들의 수를 헤아려보고 살아남은 자가 50마리 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신을 믿는 소수의 개미들은 여전 히 중얼거리는 듯한 페로몬을 발하고 있다. <우리는 손가락들을 제대로 공양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늘 을 열어버린 것이다.> 개미 세계의 우주 발생 이론에서는 지구가 입방체로 되어 있고 그 위에 구름 천장이 있으며 그 구름 천장에 '하늘의 바다'가 담겨 있 다고 보고 있다. 하늘의 바다가 너무 무거워지면 천장이 갈라지면서 이른바 비라는 것이 쏟아져내린다는 것이다. 신을 믿는 개미들은 그 구름 천장이 쪼개지는 것은 손가락들이 거 기를 발톱으로 찌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어쨌든간 에, 개미들은 모두 날이 개기를 기다리면서 최선을 다해서 서로 돕 고 있다. 몇몇 개미들은 입과 입을 맞대고 영양교환을 한다. 어떤 개미들은 몸에 남아 있는 열기를 보호하려고 서로 몸을 비비대고 있다. 103683호는 더듬이를 벽에 대고 물의 공격을 받고 있는 도시가 아 직도 진동하고 있음을 느낀다. 벨로캉은 이제 움직이지 않는다. 물이라는 적에 완전히 박살이 난 것이다. 여러 가지 형태를 지닌 그 적은 투명한 다리를 이용하여 아 무구멍으로나 마구 쳐들어온다. 개미들보다 훨씬 더 유연하고 적응 력이 강한 그 비라는 괴물에게 화 있을진저! 순진한 병정개미들은 자기들에게로 미끄러져 오는 물방울을 위턱으로 쳐서 쪼갠다. 물방 울 하나를 죽이면 곧 네 개가 나타난다. 떨어지는 비에 대고 다리를 휘두르면 빗물이 다리에 달라붙는다. 비에 대고 개미산을 쏘면 비는 부식제가 되어버린다. 비를 떼밀면 비는 개미를 맞아들이고 개미들 을 붙들어둔다. 물결에 휩쓸려 희생된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도시의 모든 문들이 뻥 뚫려 있다. 벨로캉 전체가 익사한 것이나 다름없는 몰골이다. 59. 텔레비젼 라미레 부인의 곤혹스러운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그녀가 새로 운 수수께끼인 그 수열 문제에서 헤매고 난 뒤부터 그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두 배로 뛰었다. 이제껏 실패한 적이 없는 어떤 사람이 갈 팡질팡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가학적인 쾌감을 느끼는 모양이 었다. 그게 아니라면 대중들은 승리자보다 패배자에게서 더 쉽게 친 밀감을 느끼는 한편, 패배자들을 더 좋아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쾌활한 모습으로 사회자가 물었다. -자, 라미레 여사, 이 문제의 답을 찾으셨습니까? -아니오. 아직 못 찾았어요. -자, 정신을 집중해 보세요. 라미레 여사! 저희가 제시한 수열을 보시면서 뭐 생각나는 게 없으십니까? 카메라가 먼저 백색 판을 향했다가 이어 생각에 잠긴 채 설명있고 라미레 부인에게로 쏠렸다. -이 수열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머리가 뒤죽박죽이 돼요. 어려워 요. 너무 어려워요. 그렇지만 어떤 리듬 같은 것이 있는 것 같기는 해요.... 맨 앞에는 언제나 '1'이 나오고....'2'는 가운데 모여 있어요.... 라미레 부인은 글자가 적혀 있는 백색 판 앞으로 다가가서 마치 국민학교 여선생님처럼 설명하기 시작했다. -언뜻 보면 지수적인 수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건 아닙니다. 저는 '1'들과 '2'들 사이에 어떤 규칙이 있다고 생 각했습니다. 그런데 '3'이라는 숫자가 튀어나오더니 역시 계속 늘어 납니다.... 그래서 저는 전혀 규칙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 다. 임의의 방식으로 배열된 숫자들로 이루어진 어떤 혼돈의 세계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성으로서 의 육감이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고 있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 숫 자들은 아무렇게나 놓인 게 아니야'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라미레 부인, 이 수열을 보시면서 무엇을 생각하셨나요? 라미레 부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우스갯소리 좀 할까요? 그녀가 말했다. -라미레 여사의 생각을 들어보겠습니다. 여사께서 뭔가를 생각하 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럼, 라미레 여사, 생각하신 게 뭔가요? -우주의 탄생에 관한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라미레 부인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부인의 말이 이어졌다. -'1'은 신의 불꽃입니다. 그것이 커지고, 그 다음에 나뉩니다. 저 에게 우주를 지배하는 수학 방정식을 수수께끼로 내놓다니, 그게 어 디 가당하기나 한 일입니까? 아인슈타인이 평생 동안 찾으려다가 못 찾은 것을 저보고 찾으란 말입니까? 세계의 모든 물리학자들이 오매 불망 찾아헤매는 그것을요? 사회자의 얼굴에 처음으로 그 방송의 주제에 걸맞는 수수께끼 같 은 표정이 어렸다. -그럴 수도 있지요, 라미레 여사. 그래서 저희 프로그램이 바로 <알쏭달쏭.... ....함정퀴즈!> 방청석에서 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렇습니다. <알쏭달쏭 함정 퀴즈>는 한계를 모릅니다. 자, 라미 레 여사,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조커를 쓰시겠습니까? -조커를 쓰겠습니다. 추가 정보가 필요합니다. -백색 판을 보십시오. 사회자가 소리쳤다. 사회자는 다들 이미 알고 있는 수열을 되풀이해서 썼다. 1 11 12 1121 122111 112213 12221131 그런 다음, 여전히 자기의 메모지를 보지도 않은 채, 여덟 번째 줄의 수를 덧붙였다. 1223123111 -힌트를 상기시켜 드리겠습니다. 첫번재 힌트는 '영리한 사람일수 록 답을 찾기가 어렵다'였습니다. 두 번째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 은 다 잊어버려야 한다'였습니다. 자, 그러면 세 번째 힌트를 드리 겠습니다. '우주가 그렇듯이 이 수수께끼는 절대적인 단순성에 기원 을 두고 있다'입니다. 박수 갈채. -라미레 여사, 제가 한 가지 도움 말씀을 드릴까요? 사회자가 다시 쾌활한 낯빛으로 물었다. -부탁합니다. 도전자가 말했다. -제가 보기엔 말이예요. 라미레 여사께선 별로 단순하지도 않고 별로 어리석지도 않습니다. 한마디로 충분히 비어 있지 않습니다. 여사의 지능이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여사의 세포 속으로 후퇴해 서 여사의 내부에 아직 남아 있는 순진한 소녀를 다시 만나십시오. 그럼, 시청자 여러분, 오늘은 여기서 작별 인사를 드려야겠습니 다. 내일 뵙겠습니다. 변함없는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레티샤 웰즈는 텔레비젼을 껐다. "점점 재미있어져 가지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그 수수께끼의 답을 찾으셨나요?" "아뇨, 당신은요?" "저도 역시, 우리는 너무 영리한 모양입니다. 그 사회자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멜리에스는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그는 플라스크를 자기의 넓은 호주머니 안에 넣었다. 현관을 나서며 그가 다시 물었다. "우리 서로 귀찮게 하지 않고 서로 도와가며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게 안 되는 이유가 뭐죠?" "첫째는 저에게 혼자서 일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고요. 둘째는 경찰과 언론은 결코 좋은 사이가 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예외라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레티샤는 흑단 같은 짧은 머리채를 흔들었다. "예외는 없어요. 자, 멜리에스 씨, 더 나은 쪽이 이기길 바라겠어요." "당신이 그걸 원하시니, 나도 더 나은 쪽이 이기길 바라겠습니다." 그는 계단 속으로 사라졌다. 60. 원정군 출발하다. 비가 탈진해서 후퇴한다. 모든 전선에서 후퇴하고 있다. 비에게도 포식자는 있다. 그 이름은 '태양'이다. 개미 문명의 오랜 동맹자인 태양은 좀 늑장을 부리긴 했어도 때가 되어 나타났다. 태양이 재빨 리 하늘의 벌어진 틈을 메꾸어버리자, '하늘의 바다'는 더 이상 '세 계'로 흘러내리지 않는다. 재앙에서 살아남은 벨로캉 개미들은 몸을 말리고 덥히기 위해서 도시 밖으로 나온다. 비가 내리면 개미들은 겨울잠과도 같은 상태에 빠진다. 습기가 추위 대신에 몰려온다는 점만 다르다. 습기는 추위 보다 더 나쁘다. 추위는 잠들게 할 뿐이나 습기는 개미들을 죽이기 때문이다. 밖에서 개미들은 비를 정복한 태양에서 찬사를 보낸다. 몇몇 개 미들은 옛부터 전해오는 햇빛의 찬가를 읊조린다. 햇살이 우리의 텅 빈 몸 안으로 들어와 고통에 겨운 우리의 근육을 움직이고 갈라진 우리의 생각을 맺어주도다. 도시 안 곳곳에서 개미들이 그 냄새 노래를 되풀이한다. 그러나 벨로캉은 참담한 패배를 겪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빗방울 에 맞아 구멍이 숭숭 뚫린 채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은 지붕에서 맑 은 물줄기가 솟아나는데, 그 물줄기에 검은 덩어리가 섞여 나온다. 익사자들의 시체다. 다른 도시에서 전해 온 소식도 우울하긴 마찬가지다. 단 한차례의 소나기가 위풍 당당하던 불개미 연방을 이렇게 무참히 유린할 수 있 단 말인가? 단 한차례의 비가 하나의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단 말인가? 지붕이 폐허가 되면서 햇빛방이 드러나 있는데, 그 안에 있는 고 치들은 이제 진흙탕 속의 축축한 알갱이에 지나지 않는다. 알들을 지키겠다고 다리 사이에 알 모다기를 싣고 가던 수많은 유모 개미들 이 그것들을 물에 빠뜨려 죽음을 맞게 했다. 앞다리 끝에 알 모다기 를 얹고 머리 위로 올려서 옮긴 몇몇 유모 개미들은 알들을 구하는 데 성공했다. 금단 지역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고 있던 문지기 개미들 가운데 생존자는 별로 없다. 그 몇 안 되는 생존자들이 금단 구역의 입구를 빠져 나온다. 그들은 두려움을 느끼면서 엄청난 재난이 휩쓸고 간 자리를 둘러본다. 클리푸니 자신도 피해가 막심한 것을 보고 놀라움 을 금치 못한다. 물의 공격에도 버틸 수 있는 도시를 건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 나? 한바탕 쏟아져들어오는 물줄기만으로도 세계가 개미 문명의 초 기로 되돌아가버린다면 지혜라고 하는 게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103683호와 반체제 개미들도 그들의 은신처를 떠난다. 103683호는 곧 여왕개미를 만나러 간다. 61. 검은 액체 막시밀리앵 메커리어스 교수는 벨뷔 호텔의 자기 방에서 시험관의 내용물을 살펴보고 있었다. 카롤린 노가르가 그에게 전해 준 물질이 검은 액체로 변해 있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두 방문객이 오기로 되어 있었다. 이디오피아의 두 학자인 질 오데르진과 쉬잔 오데르진 부부였다. "잘 되어갑니까?" 그 남자가 다짜고짜 물었다. "계획한 대로 완벽하게 되어갑니다." 매커리어스 교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살타 형제네 집에 전화를 했더니 안 받던데요." "별일 아닐겁니다. 휴가 여행이라도 떠난 게지요 뭐." "카롤린 노가르네 집에도 전화를 안 받던데요." "그 사람들 모두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제 좀 쉬고 싶어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좀 쉰다고요?" 쉬잔 오데르진이 비꼬듯 말했다. 쉬잔은 손가방을 열고 신문 스크랩 몇 장을 꺼냈다. 살타 형제 와 카롤린 노가르의 죽음과 관련된 기사들이었다. "당신은 신문도 안 봐요. 메커리어스 교수? 몇몇 신문들은 이미 그 사건들을 '납량 스릴러'라고 호들갑을 떨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 데 뭐 계획한 대로 완벽하게 되어간다고요?" 적갈색 머리의 메커리어스 교수는 그 소식을 접하고도 별로 걱정 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계란을 깨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두 이디오피아 인의 얼굴에는 불안한 빛이 역력했다. "계란이 다 깨지기 전에 '오믈렛'이 익기를 바랄 뿐이지요." 메커리어스 교수는 미소를 지으면서 두 사람에게 작업대 위에 있 는 시험관을 가리켰다. "저기 있습니다. 우리의 '오믈렛'입니다." 세 사람은 다같이 푸르스름한 빛을 띤 검은 액체를 감탄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오데르진 교수는 검은 액체가 담긴 플라스크를 아주 조 심스럽게 저고리 안쪽의 호주머니에 넣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메커리어스 씨, 몸조심하십시오." "걱정마십시오. 나의 두 그레이하운드가 나를 지켜줄 겁니다." "그레이하운드요? 그 녀석들 우리가 왔는데 짖지도 않네요. 그런 개들을 믿을 수 있어요?" 쉬잔이 소리쳤다. "오늘 밤엔 그 녀석들이 여기에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검사를 하 느라고 수의사가 데리고 있어요. 그렇지만 내일부터는 여기에서 나 를 지켜줄 것입니다. 나의 충직한 경호원들이지요." 두 이디오피아 인이 떠났다. 매커리어스는 지친 몸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62. 반체제 개미들 살아남은 반체제 개미들이 벨로캉 교외에 있는 어떤 딸기나무 아 래에 모여 있다. 향긋한 딸기 냄새가 그들의 대화 페로몬에 섞여들 기 때문에, 누군가가 우연히 그쪽으로 지나가면서 더듬이 냄새를 맡 더라도 그들의 대화 내용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103683호도 그 무 리 속에 끼여 있다. 그는 세력이 이렇게 약해진 마당에 장차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고 그들에게 묻는다. 그들 가운데 가장 연배가 높은, 신을 믿지 않는 개미가 대답한다. <우리의 힘은 미약하오. 하지만 우리는 손가락들이 죽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는 않소. 우리는 먹여살리기 위해서 훨씬 더 열심히 일할 것이오.> 그들이 차례차례 더듬이를 세워 찬동의 뜻을 표시한다. 엄청난 대 홍수를 겪은 뒤이지만 그들의 결심엔 변화가 없다. 신을 믿는 개미 하나가 103683호 쪽으로 몸을 돌려 나방 고치를 가리키며 페로몬을 발한다. <당신은 떠나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입니다. 원정군을 이끌고 세계 끝까지 가십시오. 메르쿠리우스 임무를 위해서 그래야만 합니다.> <손가락들 한 쌍을 데려오도록 해보십시오. 그들을 돌보면서 그들 이 노예 상태에서 번식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게 말입니다.> 신을 믿지 않는 다른 개미가 요구한다. 그 무리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24호가 103683호와 함께 가겠다고 나선다. 그는 손가락들을 만나고, 냄새 맡고, 만져보고 싶어한다. 리빙스턴 박사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리빙스턴 박사는 통역자 일 뿐이다. 24호는 설사 그러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손가락들과 직 접적으로 접촉하기를 바란다. 24호가 계속 고집을 부린다. 그는 103683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하다못해 전투중에 고치를 대신 들고 있게 해도 된다. 다른 반체제 개미들은 당돌한 지원자에게서 놀라움을 느낀다. <저 친구 왜 저러지?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103683호가 다른 개미들에게 묻는다. 다른 개미들이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그 젊은 비생식 개미는 103683호의 새로운 모험에 동행하고 싶어서 그런다며 뜻을 굽히지 않는다. 103683호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그를 보조자로 받아들인다. 그는 24호가 발하는 냄새에서 친근함마저 느끼고 있다. 그 냄새는 24호가 사악한 구석이 전혀 없는 순진한 개미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24호는 모험을 하는 과정에서 신을 믿는 개미들의 '모순'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그때 또 다른 반체제 개미가 자기도 함께 모험을 떠나겠다고 나선 다. 24호의 손위인 23호이다. 원정대는 내일 아침 해뜰 무렵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다. 두 지원 자들은 그 시간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63. 메커리어스의 죽음 침대 발치에서 분명히 무슨 소리가 들렸다. 막시밀리앵 메커리어 스 교수는 그러한 사실을 확신했다. 뭔가가 그의 잠을 깨웠고 그것 이 지금 저기에서 꼼짝 않고 머물러 있다. 그의 신경이 곤두섰다. 틀림없이 이불이 미미한 진동 때문에 흔들렸다. 그러나 위대한 과학자가 그런 것에 겁을 먹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메커리어스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침대 발치를 향해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이불을 흔들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처음에 그는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기도 하고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 다. 그러나 그것들이 그에게 덤벼들었을 때, 마치 천으로 된 동굴 속에 갇힌 것처럼 동작이 부자연스럽게 된 그는 얼굴로 달려드는 그 것들을 미처 막을 겨를 조차 없었다. 만일 누가 그 순간에 방 안에 있었다면 마치 사랑의 밤을 보내느 라고 침대가 들썩이는 것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밤이 아니라 죽음의 밤이었다. 64. 백과 사전 변이 중국인들이 티벳을 합병했을 때, 그들은 그 고장에도 중국인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중국인 가족들을 거기에 정착시켰다. 그러나 티벳 지방의 기압을 중국인들은 견뎌내기가 쉽지 않았다. 티 벳 기압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은 어지럼증을 느꼈고 몸이 붓기도 했 다. 그리고 어떤 생리적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티벳으 로 이주한 여인들은 아이를 낳을 수도 없게 되었다. 그에 반해서 티 벳 여인들은 가장 지대가 높은 마을에서도 매일같이 아이들을 쑥쑥 잘도 낳았다. 마치 거기에 살기에 신체적으로 부적합한 침략자들을 티벳의 땅이 거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65. 머나먼 행군 새벽녘부터 병정개미들이 제2동문 근처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제2 동이라는 이름은 그럴 듯하지만 이제는 그저 빗물에 파헤쳐진 축축 한 작가지 더미에 불과하다. 추위를 느끼는 개미들은 다리를 뻗는 운동으로 굽은 것을 풀고 몸 에 열기를 불어넣는다. 다른 개미들은 위턱을 뾰족하게 갈기도 하고 전투 때의 자세와 위장 동작들을 흉내내고 있다. 점점 불어나는 원정군 위로 이윽고 해가 솟아오른다. 그 햇빛을 받은 등딱지들이 반짝인다. 흥분이 고조되면서 모두 자기들이 위대 한 순간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맛본다. 103683호가 나타나자 많은 개미들이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한다. 그 병정개미의 좌우에서 두 반체제 개미가 호위를 하고 있다. 24호 는 나방 고치를 몸에 지니고 있는데, 그 희끄무레한 형체가 다른 개 미들의 눈에 띈다. <이 고치는 뭐야?> 어떤 병정개미가 묻는다. <별거 아니예요. 먹이예요.> 24호가 대답한다. 이번에는 뿔풍뎅이들이 다다른다. 30마리밖에 안 되지만 그들의 풍모는 당당하다. 개미들이 좀더 가까이에서 그들을 보려고 서로 떠 민다. 개미들은 그들의 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지만, 뿔풍뎅이들은 자기들이 꼭 필요할 때만 하늘을 난다고 설명한다. 당분간 그들도 개미들처럼 걸어갈 것이다. 개미들은 자기들의 수를 헤아리고, 서로 격려하고 축하하고, 먹이 를 나눈다. 분비꿀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물이 휩쓸고 간 폐허 위에서 건져낸 진딧물의 다리 조각이 분배된다. 개미 세계에서는 뭐 든지 그냥 버리는 법이 없다. 개미들은 죽은 알과 고치도 먹는다. 물먹은 스폰지 같은 고기 조각들이 행렬 속으로 건네지자 개미들은 물기를 뺀다음 게걸스럽게 먹는다. 개미들이 그 차가운 고기를 거의 다 먹어치우자 어딘선가 신호가 날아와서 행군 대형으로 정렬할 것을 지시한다. 그런 다음, 손가락 들을 치러 가는 대원정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가 날아온다. <앞으로 전진!> 출발이다. 개미들이 긴 행렬을 지으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벨로캉 이 자기의 팔을 동쪽으로 뻗고 있는 것이다. 태양이 기분좋은 열기 를 뿌리기 시작한다. 병정개미들은 햇볕을 기리는 옛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더듬이로 부르는 냄새의 노래이다. 햇살이 우리의 텅 빈 몸 안으로 들어와 고통에 겨운 우리의 근육을 움직이고 갈라진 우리의 생각을 맺어주도다. 개미들은 차례로 돌아가며 노래를 이어 부른다. 우리는 모두 태양의 티끌이라네. 빛의 거품이여, 우리의 영혼 속으로 들어오게나. 우리 영혼은 언젠가 빛의 거품이 될 것이니. 우리는 모두 햇볕의 산물이라네. 우리는 모두 태양의 티끌이라네. 지구여, 우리에게 생존의 길을 열어주게나. 우리는 그 길을 따라 사방으로 달릴 것이고 마침내 더 이상 나아갈 필요가 없는 장소를 찾으려 하네. 우리는 모두 태양의 티끌이라네. 용병 개미들은 그 가사가 담긴 페로몬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배마디를 긁으면서 그 노래에 반주를 넣는다. 음악소리를 잘 내기 위해서 그들은 가슴의 키틴질 끝을 배 마디의 맨 아래쪽에 자리잡은 가로 무늬의 띠로 이동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귀뚜라미 울 음 같은 소리를 낸다. 그러나 귀뚜라미 소리보다 날카롭고 울림이 적은 소리이다. 노래가 끝나자 개미들은 페로몬을 발하지 않고 걷는다. 걸음걸이 는 자유 분방하지만 심장 박동의 리듬은 누구에게나 똑같다. 개미들은 저마다 손가락들과 그 괴물들에 대한 무시무시한 전설들 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무리를 이끌고 있으니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경쾌하다. 바람마저도 그들의 일을 도 우려는 듯 홀연히 일어나 그들의 발걸음을 제촉하고 있다. 행렬의 선두에서 103683호는 더듬이 위로 스쳐가는 풀과 나뭇잎들 의 냄새를 맡는다. 103683호가 익히 알고 있는 냄새가 주위에 가득하다. 겁을 먹고 달아나는 작은 동물들, 매혹적인 향기로 그들을 유혹하는 화려한 꽃 들, 개미에게 적대적인 어떤 동물들이 숨어 있을 컴컴한 풀숲, 풀노 린재가 우글거리는 고사리들.... 그래, 모든 게 그대로야. 처음 모험을 나섰을 때도 이랬지. 모든게 그대로야. 그 독특한 냄새가 배어 있다. 다시 시작하는 위대한 모험의 냄새! 66. 백과 사전 파킨슨 법칙 파킨슨 법칙(같은 이름의 파킨슨 병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에 따르면, 어떤 기업이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점점 능력이 없는 사람 들을 고용하면서도 급료는 과다하게 지급하게 된다고 한다. 그 이유 는 아주 간단하다. 고위 간부들이 강력한 경쟁자들이 나타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위험한 경쟁자들이 생기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능한 사 람들을 고용하는 것이다. 또 사람들이 반기를 들 생각을 못하게 하 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급료를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배 계급들은 영원한 평온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67. 새로운 법칙 "막시밀리앵 메커리어스 교수는 미국 아칸소 화공 대학의 최고 권 위자였습니다. 프랑스에 와서 그는 일주일 전부터 이 호텔에 묵고 있었습니다." 카위자크 형사가 서류를 뒤적이면서 말했다. 자크 멜리에스는 방 안을 왔다갔다. 하면서 카위자크 형사의 이야 기를 듣고 있었다. 보초를 서고 있던 경관 하나가 문으로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경정님, '일요 메아리'의 어떤 여기자가 뵙고 싶다고 하는데요. 들여보낼까요?" "그래." 레티샤 웰즈가 나타났다. 여느때처럼 멋지게 검은 비단 정장 가운 데 하나를 입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웰즈 양.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예까지 행차하였습 니까? 더 나은 쪽이 이길 때까지 따로따로 일해야 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요." "수수께끼 현장에 함께 있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잖아요? 우리가 <알쏭달쏭 함정 퀴즈>를 함께 볼 때도 똑같은 문제를 각자 자기 방 식대로 푸는 것 아니겠어요? 그건 그렇고, CCG에서 가져온 약병은 감정해 보셨어요?" "예, 연구실에서 하는 얘기로는 독인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 안 에 뭔가가 많이 들어 있다고 하던데, 그 이름을 잊어버렸어요. 아주 독성이 강하답니다. 갖가지 살충제를 만드는데 쓰이는 거라더군요." "그럼 이제 멜리에스 씨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저만큼 아시겠군 요. 그런데 카롤린 노가르의 부검 결과는 어떤가요?" "심장 마비예요. 내출혈의 흔적이 많아요. 여전히 똑같은 일이 되 풀이되고 있어요." "음.... 이 사람은 어때요? 역시 엄청난 공포 때문이군요?" 적갈색 머리의 그 학자는 배를 깔고 엎드려 있었는데, 머리를 방 문객들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마치 방문객들에게 놀랍고 무시무시 한 일의 증인이 되어달라고 부탁이라도 하는 모습이었다. 눈은 툭 불거져나왔고 입에서 어떤 지저분한 점액이 흘러나와 풍성한 턱수염 을 더럽혀놓고 있었으며, 귀에서는 역시 피가 흘러나와 있었다. 그 리고 이마에 하얀 실 같은 것이 묻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는 죽기 전에 하얀 천으로 얼굴을 막았던 모양이었다. 꽉 움켜쥔 손은 배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이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멜리에스가 물었다. "막시밀리앵 매커리어스 교수 아니예요? 세계적인 살충제 전문가라고 들었는데요 ." "그래요, 살충제 전문가지요. 유명한 살충제 연구가를 죽이려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그들은 그 유명한 화학자의 눈이 뒤집힌 시체를 들여다보았다. "어떤 자연 보호 운동 단체가 아닐까요?" 레티샤가 의견을 말했다. "그럴 리가요, 아예 곤충들이 죽였다고 하지 그러세요?" 멜리에스가 코웃음을 쳤다. 레티샤는 검은색 앞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신문을 읽을 줄 아는 건 사람들뿐 이니까 이 신문 기사 좀 보세요." 레티샤는 신문 기사 스크랩을 하나 내밀었다. 막시밀리앵 메커리 어스 교수가 세계에 곤충이 창궐하는 문제를 다루는 세미나에 참석 하기 위애 파리에 왔다는 것을 알리는 기사였다. 거기에는 그가 벨 뷔 호텔에 머물 예정이라는 것도 밝혀놓고 있었다. 자크 멜리에스는 기사를 읽고 카위자크에게 넘겼다. 카위자크는 그것을 받아 서류철 안에 넣었다. 멜리에스는 방 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레티샤가 곁에 있다 는 것을 의식하면서, 그는 치밀한 전문가의 면모를 보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역시 흉기도, 불법 침입의 흔적도, 지문도, 육안으로 보이 는 상처도 없었다. 살타 형제, 카롤린 노가르 사건에서와 마찬가지 로 실마리가 전혀 없었다. 이곳 역시 제1군 파리가 거쳐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살인범은 피 해자가 죽은 후에 사건 현장에서 5분 동안 머물렀다. 시체를 감시하 기 위해서거나 모든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뭘 좀 찾으셨어요?" 카위자크가 물었다. "역시 파리들이 무서워서 접근조차 못한, 무엇이 있었어." 카위자크 형사가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레티샤가 물었다. "파리라니요? 파리가 뭘 어쨌다는 거예요?" 자기가 역시 레티샤보다 한수 위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경정 은 레티샤에게 파리에 대한 짤막한 강의를 늘어놓았다.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데 파리를 이용하자는 생각을 제일 먼저 한 사람은 브루아렐이라는 교수였습니다. 1890년에 파리의 어떤 집 굴 뚝에서 새까맣게 그슬린 태아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집에는 몇 달 전부터 많은 세입자들이 거쳐갔습니다.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어린 시체를 굴뚝에 숨겼을까 하는데 수사의 초점이 모아졌지요. 브 루아렐이 그 수수께끼를 풀었어요. 그는 피살자의 입에서 파리 알을 채취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 알이 성숙한 정도를 고려하여 시간을 측정해서 그 태아가 굴뚝에 버려진 날짜를 알아냈습니다. 물론 일 주일 정도의 시차가 있기는 했지만 범인을 체포하는 데는 아무런 문 제가 없었습니다." 형오감 때문에 낯을 찡그리는 아름다운 여기자를 보고 멜리에스는 더욱 힘을 얻어 자기 얘기를 계속했다. "저도 그 방법을 활용해서 사건을 해결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교 사의 시체가 그의 학교에서 발견되었는데, 수사를 하고 보니 범인은 그 사람을 숲에서 살해한 다음, 학생들의 보복을 받은 것처럼 위장 하려고 교실로 옮겨놓은 것이었습니다. 파리들이 자기들 방식으로 증언을 해주었지요. 시체에서 채취한 애벌레들은 분명히 숲에 사는 파리의 애벌레들이었지요." 언젠가 레티샤는 기회가 닿으면 그 이론을 주제로 해서 기사를 써 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멜리에스는 자기의 전문가다운 면모를 괴사한 것에 흡족해 하면서 침대 곁으로 가서 조사를 계속했다. 조명 돋보기를 이용해서 그는 마침내 시체 파자마 바지쪽에 뚫린 정삼각형 모양의 작은 구멍을 찾아냈다. 여기자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멜리에스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이 작은 구멍이 보이죠? 이것과 똑같은 구멍이 살타 형제 가운데 한 사람의 저고리에도 있었어요. 형태가 똑같아요. 정확하게...." 츠스스스.... 독특한 그 소리가 멜리에스 경정의 귀에 들렸다. 그는 머리를 들 고 천장을 바라보다가 파리 한 마리를 찾아냈다. 그 파리는 몇 걸음 을 걸어가다가 홱 날아가더니 그들의 머리 위에서 빙빙 돌았다. 어 떤 경관이 그 소리가 성가셔서 파리를 잡으려고 했으나 경정이 말렸 다. 멜리에스는 파리가 가는 대로 따라가서 파리가 어디에 앉는지를 알고 싶었다. "보세요!" 공중에서 몇 바퀴를 돌며 모든 경찰관과 여기자의 인내심을 시험 하던 파리가 이윽고 시체의 목 위에 내려앉았다. 그런 다음 파리는 턱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 메커리어스 교수의 시체 밑으로 사라졌다. 자크 멜리에스는 호기심을 느끼며 시체 곁으로 다가가 파리가 어 디에 있는지를 확인하려고 시체를 뒤집었다. 그가 그 글자들을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메커리어스 교수는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힘을 내어 집게손가락 에 귀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묻혀 시트 위에다 한 단어를 써놓았다. 그런 다음에 그는 다시 그 위에 엎어진 듯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살인자가 그 메시지를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거나 바로 그 순간에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 일곱 글자를 읽으려고 다가갔다. 파리는 일곱 글자 중 첫번째 글자에 남은 피를 주둥이로 빨고 있 었다. 그 글자는 'F'였다. 오르되브로를 맛있게 먹은 파리는 자리를 옮겨가며 'O', 'U', 'R', 'M', 'I', 'S'의 피를 차례로 빨아들였다 (프랑스 어 'FOURMIS'는 '개미들'이라는 뜻). 68. 레티샤에게 보내는 편지 사랑하는 딸 레티샤에게. 먼저 나의 죄를 묻지 말라는 부탁을 하고 싶다. 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네 곁에 머무는 것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너는 볼 때마다 나는 네 어머니를 보았고, 그것은 나의 뇌 를 벌겋게 달군 칼로 찌르는 것과 같은 고통이었다. 나는 어떤 것에도 상처를 입지 않고 폭풍이 불면 턱을 앙다물고 견딜 줄 아는 강한 사람이 아니란다. 폭풍이 몰아쳐오면 나는 차라 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고 낙엽처럼 바람에 몸을 내맡기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일반적으로 가장 비열하다고 생각되는 행위, 즉 도피를 선택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밖의 다른 어떤 것도 너와 나 를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너는 혼자 자랄 것이고 혼자 배울 것이며 네 안에 있 는 힘과 방어 능력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것이 가장 나쁜 학교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인생 에서 우리는 언제나 혼자이며 나중에 그것을 깨닫고 나면 더 잘 지 낼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네가 너의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식구들 중에 너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언제나 나 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은밀히 간직해 왔다. 그러니 나를 다시 찾으 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나는 나의 집을 조카 에드몽에게 물려 주었다. 그 집에는 가지 말아라. 그에게 이야기도 하지 말고 아무것 도 요구하지 말아라. 너에게는 완전히 성격이 다른 유산을 남겨놓았다. 이 선물은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하찮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호기심 많 고 진취적인 사람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점에 대 해서는 나는 너를 믿고 있다. 내가 너에게 주는 선물은 어떤 기계의 설계도이다. 그 기계를 사 용하면 개미들의 냄새 언어를 해독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기계 에 '로제타 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이유는 나폴레옹의 원정군 이 발견한 로제타 석이 이집트 글자를 해독하는 열쇠가 되었듯이 이 기계가 인간과 개미라는 두 종, 각자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 두 문명 사이에 다리를 놓아줄 유일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 기계는 번역가다. 이 기계를 매개로 해서 우리 는 개미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개미들과 대화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개미들과 대화하는 것! 이해할 수 있겠니? 나는 이제 겨우 이것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벌써 이 기 계는 나에게 경이로운 전망을 열어주고 있다. 나에게 남아 있는 삶 으로는 이 일을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네가 내 일을 계속해 주기를 바란다. 나의 뒤를 이어 다른, 그리고 훗날 다른 사람을 선택하여 이 일을 물려주기 바란다. 그래 야만 이 일이 망각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게 된다. 하지만 아주 신 중하게 행동하여야 한다. 개미들의 문명을 인간들에게 백일하에 드 러내놓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이 일을 진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 이야기하지 말거라. 네가 이 편지를 받을 때쯤이면 네 사촌 조나탕이 내가 지하실에 남겨놓은 이 기계의 원형을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 서 그 가능성을 그리 높게 보지는 않는다만, 어쨌든 그건 별로 중요 하지 않다. 네가 이 길에 관심을 갖고 따라온다면 아주 경이로운 일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딸아, 사랑한다. 에드몽 웰즈 추신1. '로제타 석'설계도를 동봉한다. 추신2. 나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의 제2권도 동봉한다. 그것의 사본 한 부는 내 집, 지하실의 안쪽 끝에 있다. 이 책은 지식의 모든 분야를 담으려고 한 것인데, 곤충 분야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 전'은 비유하자면 스페인의 여관과도 같다. 각자 그 안에 들어가서 자기가 찾으려는 것을 찾으면 된다. 매번 읽을 때마다 의미가 달라 질 것이다. 왜냐하면 책을 읽는 행위는 독자의 삶과 공명하며 독자 자신의 세계관과 조화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내가 너에게 보내는 안내자로 생각하려므나. 추신3. 네가 어렸을 때 내가 수수께끼 하나를 낸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너는 그때도 수수께끼를 좋아 했었다). 나는 너에게 성냥개비 여섯 개를 사용해서 정삼각형 네 개 를 어떻게 만드냐고 물었다. 그리고 답을 찾는 걸 도와주려고 다음 과 같은 문장을 힌트로 주었다. 즉,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야 한 다.'가 그것이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너는 답을 찾아냈지. 삼차원을 여는 것,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 입체적인 피 라미드를 세우는 것, 그것은 첫걸음이었다. 나는 이제 너에게 다른 수수께끼를 주려고 한다. 두 번째 걸음을 내딛게 하는 수수께끼다. 역시 여섯 개의 성냥개비로 정삼각형을, 네 개가 아니라 여섯 개를 만들 수 있겠니? 다음 문장이 답을 찾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첫번째 문장과 반대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남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해야 한 다.'는 것이다. 69. 지상 20만 리 원정대가 나아간다. 숲이 달라진다. 석회암이 침식된 자리마다 젓 니같은 사암이 드러나 있다. 히스, 이끼, 고사리 정글이 이어진다. 8월의 폭염 때문에 흥분한 개미들이 아주 오랜 시간을 걸어서 마 침내 연방의 동쪽 도시를, 즉 리뷰캉, 주비주비캉, 제디베이나캉 등 에 이르렀다. 가는 곳마다 개미들은 원정군에게 분비꿀이 담긴 고치 와 벼룩 햄과 곡물을 다져넣은 귀뚜라미 머리를 대접했다. 주비주빛 캉에서는 행군 도중에 분비꿀을 짜 먹으라고 무려 160마리의 진딧물떼를 주었다. 그런 다음 개미들은 손가락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가 손가락들을 화제로 대화를 했다. 손가락들과 관련된 사고를 모르는 개미는 하나도 없었다. 수 차례의 원정대가 납작하게 눌려 죽은 채 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주비주비캉은 손가락들과 직접 맞닥뜨린 경험이 없었다. 주비주비캉 개미들은 원정군에 힘을 보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면서도 곧 무당벌레 사냥이 시작될 것이고, 자기들의 방대한 진딧물 가축 떼를 보호하자면 모든 병정개미들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다음에 다다른 곳이 제디베이나캉이다. 너도밤나무 뿌리 속에 세워진 아름다운 도시이다. 제디베이나캉 개미들은 그다지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그들은 농도가 60%나 되는 새로운 고농축 개미산으로 무장한 포수 개미 1개 군단을 과감하게 떼어주었다. 그리고 그에 곁 들여 그 포수 개미들의 군량이 가득 담긴 고치 스무 개를 주었다. 제디베이나캉에서도 손가락들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 손가락들은 제디베이나캉의 나무 껍질에 커다란 침으로 부호를 새겼다. 너도밤 나무는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나머지 독성의 나뭇진을 분비하기 시작 했다. 그 독 때문에 하마터면 제디베이나캉의 모든 개미들이 독살당 할 뻔했다. 제디베이나캉 개미들은 너도밤나무 껍질의 상처가 아무 는 동안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손가락들이 유익한 존재일 수도 있잖아요? 우리가 그들의 행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24호의 순진한 더듬이 참견에 모든 개미들이 어리둥절해 한다. 손 가락들을 치러 가는 마당에 그런 페로몬을 발하다니! 103683호는 재 빨리 그 경솔한 24호를 두둔하러 간다. <벨로캉에서는 예상되는 모든 경우를 다 따져본다. 그건 사고 훈 련의 목적을 어떠한 역경이 닥치더라도 놀라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103683호는 그렇게 얼버무린다. 벨로캉 개미 하나가 제디베이나캉 개미들에게 클리푸니 여왕이 이 원정을 염두에 두고 만든 최신의 혁신 노래를 가르쳐준다. 어떤 적을 선택하느냐가 그대의 가치를 결정한다. 도마뱀과 싸우는 자는 도마뱀이 된다. 새와 싸우는 자는 새가 된다. 진드기와 싸우는 자는 진드기가 된다. 그럼 신과 싸우는 자는 신이 되는 걸까 하고 103683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쨌든 그 노래는 제디베이나캉 개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많 은 개미들이 원정군들에게 클리푸니 여왕의 이룬 혁신적인 기술에 대해서 묻는다. 벨로캉 개미들은 주저없이 자기들의 도시가 어떻게 뿔풍뎅이를 길들여 개가를 올렸는지 이야기한다. 벨로캉 개미들은 도시 내부의 운하와 신병기, 새로운 농업 기술, 건축술의 변화에 대 해서 이야기한다. <우리는 혁신 운동이 그렇게 빛나는 성과를 올렸는지 몰랐다네.> 제디베이니키우니 여왕이 페로몬을 발한다. 물론, 벨로캉 개미 가운데 최근에 소나기 때문에 생긴 피해라든가 도시 내부에 손가락들을 지지하는 반체제 개미들에 대해서 더듬이를 놀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제디베이나캉 개미들은 대단히 감동을 받고 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개미 세계의 가장 진보적인 기술은 진딧물 사육, 버섯 재배, 분비꿀 발효로 요약되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런 혁신이 일어났단 말인가! 마침내 개미들의 화제가 원정에 관한 것으로 옮아간다. 103683호는 원정군이 강을 건너 세계의 끝으로 지나면, 거기서부 터 한 마리의 손가락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되도록 넓은 지역을 수 색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제디베이니키우니 여왕은 중심 도시의 3천 병력으로 세계의 모든 손가락들을 다 죽일 수 있느냐며 의아해 한다. 103683호는 비행 부 대의 지원이 있긴 하지만 자기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약간의 회의를 가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제디베이니키우니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원정군에게 경기병 군단을 빌려주기로 약속한다. 그 경기병들은 다리가 길고 아주 날쌔기 때문 에 도망가는 손가락들을 추격하는 데 쓸모가 많을 것이다. 원정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고 여왕이 화제를 바꾼다. 어떤 새 도 시에서 이상한 짓을 자행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 도시는 개미 도시 가 아니라 꿀벌 도시, 아스콜레인 벌집이다. 때로는 그 도시를 황금 의 벌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도시는 여기에서 아주 가까운 곳, 즉 잔털이 많은 커다란 떡갈나무에서 오른쪽으로 네 번째 되는 나무 에 세워졌다. 거기를 본거지로 삼아 그들은 꿀과 꽃가루를 모은다. 그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들이 개미들을 가차없이 공격한다는 것이다. 말벌들이 그런 약탈 행위를 한다면 그 런가 보다 하겠지만 꿀벌들이 그런다는 건 어딘가 좀 불안하다. 제디베이니키우니는 그 꿀벌들이 팽창주의적인 야심을 지닌 것으 로 생각하고 있다. 그 꿀벌들은 점점 중심 도시 벨로캉으로 다가가 면서 개미들을 공격하고 있다. 개미들은 그들을 물리치기가 쉽지 않 다. 대개는 독침 공격을 당할까 두려워서 자기들의 사냥물을 포기하게 된다. <꿀벌들은 독침을 쏘고 나면 죽는다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뿔풍뎅이 한 마리가 묻는다. 뿔풍뎅이가 그렇게 개미에게 직접 페로몬을 발한다는 사실에 제디 베이나캉 개미들이 놀란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 역시 원정군에 참여 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개의치 않고 제디베이나캉 개미 하나가 대답에 응한다. <아니오. 항상 그렇지는 않다오. 꿀벌들이 죽는 경우는 너무 깊이 침을 박았을 때뿐입니다.> 또 하나의 신화가 무너진다. 개미들은 유용한 정보들을 아주 많이 교환했다. 그러나 벌써 밤이 찾아온다. 벨로캉 개미들은 아낌없는 지원에 대해서 제디베이나캉 개미들에게 감사한다. 두 도시의 개미들이 서로 어울려 영양 교환을 실행한다. 개미들의 밤이 그들을 강요된 수면으로 이끌기 전에 동 료의 더듬이를 서로 닦아준다. 70. 백과 사전 질서 질서는 무질서를 낳고 무질서는 질서를 낳는다. 이론상으로는, 오 믈렛을 만들기 위해 계란을 휘저으면 오믈렛이 다시 계란의 형태를 휘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 오믈렛이 안에 무질서 를 많이 넣으면 넣을수록 최초의 알의 질서를 되찾을 기회는 점점 많아질 것이다. 결국 질서란 무질서의 결합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우주가 확장 되면 될수록 점점 더 무질서한 상태로 빠져든다. 무질서가 확장되면 새로운 질서들을 낳는다. 그 새로운 질서들 중에 최초의 질서와 똑 같은 것이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바로 당 신 앞에, 공간과 시간 속에, 혼돈에 가득찬 우리 우주의 끝에 태초 의 빅뱅들이 존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71. 피리 부는 사나이 딩, 동! 레티샤는 재빨리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멜리에스 씨. 또 텔레비젼 보러 오셨나 보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왔습니다. 내 생각을 털어놓고 얘기하고 싶어서요. 제 얘기를 들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웰즈 양이 생각하 고 계신 걸 들려달라고 강권하지는 않겠습니다." 레티샤는 그를 들어오게 했다. "좋아요, 멜리에스 씨. 귀를 활짝 열고 있겠습니다." 레티샤는 그에게 안락 의자를 가리켜보이고 그의 정면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았다. 멜리에스는 먼저 드레스의 그리스 식 주름과 가는 머리채 속의 비 취성 장식에 찬사를 보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살인자는 폐쇄된 공간을 자유 자재로 드나 들 수 있는 자이고,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자이며, 어떤 흔적도 남기 지 않는 자이고, 살충제 전문의 화학자만 노리는 자입니다." "한 가지 더 있어요. 파리에 공포감을 주는 자이기도 하지요." 꿀술 두 잔을 대접하고 커다란 연보라빛 눈으로 그를 똑바로 쳐다 보며 레티샤가 덧붙였다. "그렇지요. 그런데 그 메커리어스라는 인물이 우리에게 새로운 요 소를 하나 안겨주었습니다. 바로 '푸르미(개미)라는 단어입니다. 그 러나 우리는 지금 살충제 연구가들을 공격하는 개미들을 상대로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지요. 그 생각은 확실히 재미있습 니다. 그런데...." "그런데 너무 비현실적이죠." "바로 그겁니다." "개미들이 살인범이었다면 흔적을 남겼을 거예요. 예를 들어볼까 요? 개미들은 널려 있는 음식물들에 관심을 가졌을 거예요. 싱싱한 사과를 보고 그냥 지나칠 개미는 없어요. 그런데 메커리어스 침대 머리맡 탁자 위에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사과 하나가 있었어요." "훌륭한 관찰력이에요." 레티샤가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흔적도 흉기도 불법 침입도 없는 밀폐된 공간에 서의 사건에 머물러 있어요. 어쩌면 그것을 이해하기에 우리의 상상 력이 빈곤한 건지도 모르죠." "젠장, 살인자가 되는 방법이 2천 가지나 되니 말이지요!" 레티샤 웰즈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범죄 수법이 날로 교묘해져 가고 있어요. 그에 따라 추리 소설도 진보하지요. 서기 5천 년의 크리스티나 화성의 코난 도일이 추리 소설을 쓴다면 어 떻게 쓸지 상상해 보면 어떨까요? 그러면 멜리에스씨 수사에 진전이 있을 거라고 생 각해요." 레티샤를 바라보는 자크 멜리에스의 눈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러자 레티샤는 쑥스러움을 느끼면서 권련용 파이프를 가지러 갔 다. 레티샤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담배 연기로 막을 만들어 그의 시 선을 가로막았다. "웰즈 양은 제가 스스로 과신하고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쓰신 적이 있어요. 웰즈 양이 옳았어요. 그러나 너무 늦어서 잘못을 고치 지 못하는 법은 없어요. 코웃음을 치실지도 모르지만 웰즈 양을 만 난 다음부터 저는 다른 방식으로, 더 넓게 생각하기 시작했지요.... 이런 얘기를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지만 저는 이제 개미들을 의심하 기 시작했어요!" "또 그 개미예요?" 짜증스럽다는 듯이 그녀가 말했다. "잠깐만요? 우리는 개미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많을 거예요. 개미 들도 공범을 가질 수 있어요. 아믈랭의 피리 부는 사나이 이야기를 아십니까?" "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 "옛날에 아믈랭이라는 도시에 쥐들이 습격해 왔습니다." 멜리에스가 이야기의 서두를 꺼냈다. "쥐들이 도시에 우글우글했습니다. 쥐들이 너무 많아서 사람들은 그것들을 처치할 방도를 못 찾고 있었지요. 죽이면 죽일수록 점점 더 많이 나타났어요. 쥐들이 식량을 거덜내면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 로 번식해 갔어요. 도시 거주자들은 모든 걸 그대로 둔 채 도시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한 젊은이가 나타나서 도 시를 쥐들로부터 구해줄 터이니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달라는 것 이었어요. 도시의 유지들은 더 이상 손해볼 게 없겠다. 싶어 군말없 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지요. 그러자 젊은이가 피리를 불기 시작했 습니다. 피리 소리에 홀린 쥐들이 한데 모여들더니 그가 가는 곳을 따라서 멀리 사라졌어요. 피리 부는 사나이는 쥐들을 강 쪽으로 이 끌고 가서 강물에 빠뜨렸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이가 대가를 요구하 자 도시의 유지들은 쥐들에게서 해방되고 나니까 마음이 달라져서 그 젊은이를 맞대놓고 비웃었지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왜 하시는 거죠?"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말이죠. 한번 비슷한 상황을 상상해 보자는 겁니다. 즉, 개미들을 조종할 수 있는 '피리 부는 사나이'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지요. 개미들의 가장 사악한 적인 살충제 발명가 들에게 복수하고 싶어하는 어떤 사람들 말이에요." 멜리에스가 마침내 레티샤의 흥미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레티 샤는 연보라빛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계속하세요." 그녀가 말했다. 레티샤는 흥분이 되는지 담배를 한 모금 길게 빨아들였다. 멜리에스는 새삼스럽게 들떠서 안절부절못하며, 뜸을 들였다. 그 의 뇌 속 회로에서 '맞았음'을 알리는 신호가 깜박였다. "찾아낸 것 같습니다." 레티샤 웰즈는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뭘 찾았다는 거예요?" "개미들을 길들이는 사람이 범인이에요. 개미들이 피해자들의 몸 안으로 뚫고 들어가서 위턱으로 공격을 가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출혈과 같은 결과가 나타난 거지요. 그러고 나서 개미들은 귀 같 은 곳을 통해 밖으로 다시 나왔어요. 많은 시체들의 귀에서 피가 흘 렀던 것은 그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 뒤에 개미들은 다시 모 여서 다친 제 동료들을 데리고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느라고 5분이 걸린 겁니다. 그 시간 동안 제1군에 속하는 파리들이 접근 못했던 것이지요. 제 추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멜리에스가 설명을 시작할 때부터 레티샤 웰즈는 사실상 그와 함 께 이야기에 도취되고 있었다. 레티샤는 권련 파이프에 다른 담배 한 개비를 끼우고 불을 붙였다. 레티샤는 그가 옳을 수도 있다고 인 정하면서도, 자기가 알기로는 개미들을 길들여서 호텔 안으로 들여 보내 방을 고르게 하고 어떤 사람을 죽인 다음 조용히 개미집으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있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했다. "있을 겁니다. 그런 방법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제가 그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자신 있습니다." 자크 멜리에스는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는 대단히 자신감에 차 있었다. "5000년대의 추리 소설을 상상할 필요가 없겠지요? 약간의 분별력 과 상식만 있으면 충분한 겁니다." 멜리에스가 잘라 말했다. 그러자 레티샤 웰즈는 이맛살을 찡그리며 말했다. "잘 해보세요, 멜리에스 씨. 당신이 제대로 맞출 것 같군요." 멜리에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당장 부검의에게 문의해서 피해자들의 몸 암에 상처가 개미들의 위턱의 공격을 받아 생긴 것인 지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혼자 남은 레티샤 웰즈의 얼굴에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이 어렸다. 레티샤는 열쇠를 꺼내 검은 래커를 칠한 방문을 연 다음, 사과를 얇 게 썰어서 개미 상자 안에 있는 2만 5천 마리의 개미들에게 주었다. 72. 우리는 모두 개미다. 조나탕 웰즈는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에서 수천 년 전 태평양의 한 섬에 개미 숭배자들이 살고 있었음을 일깨워주는 구절을 찾아냈다. 에드몽 웰즈의 설명에 따르면 그 사람들은 음식을 줄이고 명상을 수행하면서 특별한 정신적 능력을 개발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사람들의 공동체는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이유 때문에 사라졌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이야기는 불가사의한 비밀로만 남아 있었다. 지하 사원에 사는 스무 명의 사람들은 토론을 거친 후에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든 아니든간에 그 수행 방법을 모방하기로 했다. 영양 결핍이 점차 심해져 감에 따라 그들은 힘을 아끼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주 작은 몸짓이라도 그들에겐 힘에 겨웠다. 그들은 점점 말을 적게 하게 되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럴수 록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눈길 하나, 미소 하나, 턱 짓 하나로도 의사 소통을 하기에 충분했다. 주의를 집중하는 능력이 엄청나게 향상되었다. 걷고 있을 때 그들은 근육 하나하나 관절 하 나하나의 움직임을 의식했다. 그들은 생각으로 숨이 들어오고 나가 는 것을 뒤쫓을 수 있었다. 그들의 후각과 청각은 동물이나 원시인에 비할 만큼 예민해졌다. 만성적인 기아 상태가 그들의 미각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다. 영양 실조가 빚어낸 집단적인 또는 개인적인 환각마저도 하나의 감각이 되었다. 뤼시 웰즈는 자기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직접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을 때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런 현상이 그녀에 게는 웬지 난잡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직접적인 의사 소통이 자종 브라젤 같은 고결한 영혼과 이루어질 때는 즐거움 기분으로 그 것에 임했다. 나날이 먹을 것이 희귀해져 감에 따라 정신 수련은 강도를 더해갔다. 그러나 누구나 최선의 결과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육체적인 활동과 밖에서 돌아다니는 일에 익숙해져 있는 소방대원들과 치안 대원들은 때때로 분노와 밀실 공포증 때문에 비명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억누르곤 했다.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고 더 맑아지고 더 깊어진 눈으로 서로를 뚫 어지게 쳐다보면서 그들은 모두 누가 누군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아갔다. 그들은 서로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비슷해져 가는 듯 했다. 니콜라 웰즈만은 어리다는 이유로 영양을 제대로 공급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아주 분명히 구별이 되었다. 그들은 되도록이면 서 있는 자세를 피했고(육체적인 힘이 없는 사 람에게 그것은 너무 피곤한 일이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거나 사지로 기어다니기를 좋아했다. 초기의 고통 뒤에 날이 갈수록 조금 씩 일종의 평정이 찾아왔다. 그것은 정신 착란의 한 형태가 아니었을까? 그러던 어느날 아침(그들끼리 정한 아침), 컴퓨터의 프린터에서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불개미 도시 벨로캉의 반체제 파들이 전 여왕의 죽음 때문에 두절되었던 접촉을 재개하고 싶어했다. 반체 제 진영의 개미들은 그들이 파견한 탐지 로봇인 '리빙스턴 박사'를 매개로해서 대화를 시도했다. 반체제 개미들은 인간들을 돕고 싶어 했는데, 실제로 그 개미들은 그들의 위에 놓인 화강암 속의 통로를 이용하여 식량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73. 변이 손가락들을 지지하는 반체제 개미들의 원조 덕분에 오귀스타 할머 니와 그 동료들은 이제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비록 낮은 수준이긴 했지만 영양을 규칙적으로 안정 적으로 섭취했다. 그러고 나니 아주 미약하나마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 지옥 속에서의 삶을 그럭저럭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뤼시 웰즈의 제안에 따라 그들은 지상에서 사용하던 인간의 이름 을 버리기로 했다. 이제 모두의 모습이 비슷해졌기 때문에 굳이 이 름을 가질 필요없이, 번호만 있어도 충분했다. 그것이 가져온 효과 는 대단했다. 성을 잃는 것은 조상들의 역사가 지닌 무게를 포기하 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그들이 새 생명을 얻은 듯한 느낌을 주었 다. 그들은 모두 이제 막, 함께 태어난 것이었다. 이름을 잃는다는 것은 구별이 되고 싶어하는 마음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다니엘 로젠펠트(일명12호)의 제안에 따라 그들은 새로운 공통의 언어를 찾기로 했다. 새로운 언어를 찾아낸 사람은 자종 브라젤(일 명14호)이었다. "인간은 입으로 소리의 파동을 내보내서 의사 소통을 합니다. 그 러나 그 음파는 너무 복잡하고 혼미합니다. 단 하나의 순수한 음파 를 발산하고 그 속에 모두가 진동을 내면서 들어가면 어떨까요?" 그 일은 힌두교의 어떤 종파에서 행하는 것과 같은 좀 우스꽝스러 운 모습을 띠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은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그 일의 목표는 그들을 다른 차원으로, 다른 존재의 지평으로 올려 놓으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두 함께 수행해야 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수련에 열중했다. 그들은 가부좌를 틀거나 좀더 유연한 반가부좌를 한 자세로 원을 그리고 앉아, 등을 곧게 펴고 서로 팔을 잡았다. 그들은 몸을 앞으 로 기울여 머리를 원 한가운데에 모은 다음, 각자 돌아가면서 자기 의 소리를 냈다. 각자 자기 소리에 진동을 내놓는 것이다. 마침내 그들은 하나의 똑같은 음에 자기의 음조를 조화시켰다. 수련을 쌓아 나아감에 따라 그들은 모두 자기 음역의 가장 낮은 소리로 노래를 했고, 그들의 음성은 배 안에서 올라오게 되었다. 그들은 '음'이라는 음절을 선택했다. 그것은 근원의 소리, 땅고 무한한 우주의 노래로서 모든 것을 뚫고들어갔다. '옴'은 어떤 레스 토랑의 웅성거리는 소음이면서 동시에 산의 침묵의 소리였다. 그들의 눈은 잠겨 있었고 그들의 호흡은 느리고 깊고 동시적이었 다.그들은 가벼워졌으며 모든 것을 잊고 소리 속에 녹아들어갔다. 그들은 소리 그 자체였다. '옴'은 모든 것이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끝나는 소리였다. 그 의식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의식이 끝나고 나면 그들은 조용 히 흩어져서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기도 하고 이리저러한 자기의 일 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 일이란 청소하기, 식량 관리하기, 반체제 개미들과 대화하기 등이었다. 니콜라만이 그 의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니콜라가 자유 의사로 그 의식에 참여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판단했다. 마찬 가지로 사람들은 모두 니콜라를 잘 먹여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어 쨌든 개미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알이었다. 어느날 그들은 개미들과의 텔레파시를 통한 의사 소통을 시도했 다.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모양이었다. 그 들 사이에서조차 텔레파시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기대는 버려 야 했다. 텔레파시는 두 교신자 중 어느 쪽에서도 저항이 없다는 조 건에서 두 번 중 한 번만 제대로 이루어졌다. 오귀스타 할머니는 여전히 회상에 잠겨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조금씩 조금씩 개미들이 되어갔다. 몸은 아닐지라 도 머리 속에서는 분명히 그러했다. 74. 백과 사전 아프리카 두더지 아프리카 두더지 Heterocephalus glaber는 이디오피아와 케냐 북 부 사이의 동아프리카에 산다. 그 동물은 앞을 보지 못하며 분홍색 살갗에는 털이 나 있고, 앞니를 이용해서 수 킬로미터에 걸친 땅굴 을 팔 수 있다. 그러나 그 동물의 놀라운 점은 다른 데 있다. 아프리카 두더지는 곤충과 똑같은 방식으로 모듬살이를 하는 유일한 포유류로 알려져 있다. 아프리카 두더지의 한 군체에는 평균 5백 마리의 개체가 모여 산다. 그 개체들 사이에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것이 개 미 세계에서와 똑같이 주요한 세 계급, 즉 생식 계급, 노동 계급, 병정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미 세계의 여왕개미에 해당하는 한 마리의 암컷은 한 배에 서른 머리까지 모든 계급의 새끼를 낳을 수 있다. 유일한 출산자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 암컷은 자기 오줌 속에 냄새 나는 물질을 분비해서 굴 속에 있는 다른 암컷들의 생식 호르몬이 분비되 는 것을 억제시킨다. 아프리카 두더지가 거의 사막이나 다름없는 지 역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생물 종이 군체를 이루며 살아간다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아프리카 두더지는 덩잊루기와 뿌리를 먹고 산다. 이따금 덩치 큰 먹이가 걸리기도 하 는데 대개 그 먹이는 아주 널리 산재되어 있다. 독립 생활을 하는 설치류 동물도 자기 앞으로 곧장 수 킬로미터의 땅굴을 팔 수는 있 을 것이다. 그러나 모듬살이를 하게 되면 먹이를 찾을 기회가 훨씬 많아진다. 작은 덩이줄기가 하나라도 발견되면 모두가 똑같이 나누 어 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두더지가 개미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수컷이 교미를 하고 나서도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75. 아침 아주 묵직해 보이는 분홍빛 공이 다가온다. 그가 그 공에게 페로 몬을 발한다. <나는 당신 종족에 대해서 아무런 적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소.> 그러나 그 공은 멈추지 않고 계속 다가와 그를 짓눌러버린다. 103683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난다. 늘 악몽에 시달 리기 때문에 그는 수면 시간을 줄이고 기온이 조금만 변해도 깨어날 수 있도록 몸의 상태를 조절해 놓고 있었다. 그는 아직 손가락들을 꿈에서 보고 있다. 그들에 대한 생각을 중 단해야 한다. 손가락들을 무서워하면, 때가 왔을 때 제대로 싸울 수 가 없을 것이다. 두려움이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103683호는 옛날에 어머니 벨로키우키우니가 자기와 자기 동료들 에게 들려준 개미 전설 하나를 기억하고 있다. 그 전설이 담긴 페로 몬은 아직 기억 장치 속에 들어 있다. 약간의 습기를 제공하면 기억 들이 온전히 되살아난다. <옛날에 우리 왕조에 굼굼니라는 여왕이 있었는데, 그 여왕은 마 음의 병에 걸린 채 산란실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 여왕은 세 가 지 문제 때문에 속을 끓이면서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 세 가지 문제란 이런 것이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언제일까? 살아가면서 이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행복의 비결은 무엇일까? 여왕은 자기 자매들, 백성들과 그 문제를 가지고 토론했다. 풍부한 정신을 가졌다는 연방의 모든 개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 았지만 만족할 만한 해답이 없었다. 개미들은 여왕이 병이 났으며 여왕이 골몰해 있는 문제들은 결코 겨레의 생존에 중요한 문제가 아 니라고 말했다. 아무도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자 여왕은 점점 쇠약해졌다. 온 겨레가 근심하기 시작했다. 유일한 살란자인 여왕을 잃는다면 큰일 이었다. 그래서 온 도시의 개미들이 처음으로 진지하게 그 추상적인 문제들을 곰곰히 생각하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은? 가장 중요한 일은? 행복의 비결은? 모든 개미들이 대답을 내놓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먹을 때이다.왜냐하면 먹이를 먹으면 힘이 생기 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종족을 유지하고 도시를 방어할 병 정개미들을 늘리기 위해서 번식을 하는 것이다. 행복의 비결은 열기 다. 왜냐하면 열기는 화학적인 만족감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 해답 중의 어느 것도 굼굼니 여왕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서 여왕은 도시를 떠나 혼자서 위대한 바깥 세계로 나갔다. 바깥 세 상에서 여왕은 살아남기 위해서 처절하게 싸워야만 했다. 사흘 후 여왕이 돌아와보니 도시는 온통 슬픔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여왕은 자기의 해답을 가지고 돌아왔다. 깨달음은 야만적인 개미들을 상대 로 무자비한 격투를 벌이던 와중에 찾아왔다. 가장 중요한 순간은 지금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현재에서만 행동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에 몰두하지 않는 자는 미래도 놓 치게 된다.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것과 맞서는 것 이다. 만일 여왕이 자기를 죽이려는 병정개미를 처치하지 못했다면 여왕이 죽었을 것이다. 행복의 비결은 전투가 끝난 다음에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살아서 땅위를 걷는다는 것이다. 아주 단순한 것들이다. 현재의 순간을 즐기는 것.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일에 몰두하는 것. 땅 위를 걷는 것. 그것이 굼굼니 여왕이 남긴 삶의 위대한 세 가지 비결이다. 24호가 103683호에게로 다가온다. 그는 '신들'에 대한 자기의 믿음에 대해서 설명하고 싶어한다. 103683호는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더듬이릉 움직여 24 호의 설명을 제지하고는 그에게 도시 앞에서 함께 산책을 하자고 권한다. <아름답지, 안 그런가?> 24호는 대답하지 않는다. 103683호는 잔잔하게 페로몬을 발한다. <우리가 손가락들을 만나고 죽이는 임무를 맡고 있는 건 사실이지 만, 그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야. 지금 여기에 있는 것, 여행하는 것 등도 중요한 일이야. 결국 가장 중요한 순간은 메르쿠리우스 임 무를 달성하거나 손가락들을 정복할 때가 아니라 아마 우리 둘이 아 침 일찍 동료 개미들에게 싸여 있는 지금 이 순간일거야.> 103683호는 그에게 굼굼니 여왕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24호는 자기 생각엔 마음의 병에 걸린 여왕 이야기보다 그들의 임 무가 더 중요해 보인다고 페로몬을 발한다. 24호는 손가락들에게 다 가가 어쩌면 그들을 보고 만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다른 개미의 페로몬에 더듬이를 기울이지 않는다. 24호가 103683호에게 손가락들을 보았느냐고 묻는다. <그들을 보았던 것 같기는 해. 그러나 모르겠어. 앞으로도 모를거 야. 그들은 우리하고 아주 달라.> 24호가 의아해 한다. 103683호는 그 문제를 가지고 페로몬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그는 신들이 손가락들은 아니라고 믿고 있 다. 신들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손가락들과는 다른 것이다. 어쩌면 신은 그 빛나는 자연, 저 나무들, 이 숲, 우리를 둘 러싸고 있는 이 어마어마하게 풍요로운 동식물일지도 모른다. 그렇 다. 그에게는 바로 이 지구의 아름다운 장관에서 믿음을 구하기가 더 쉬울 듯하다. 바로 그때 불그스레한 한 줄기 빛이 지평선 위에 드리운다. 103683호는 더듬이 끝으로 그 빛을 가리키며 페로몬을 발한다. <보게, 참 아름답지 않은가?> 24호는 그 감동을 함께 나누지 못한다. 그러자 103683호는 재담삼 아서 이렇게 페로몬을 발한다. <나는 신이다. 왜냐하면 태양에게 떠오르라고 명령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3683호는 네 개의 뒷다리로 평형을 유지하면서 몸을 세운 다음 더듬이로 하늘을 가리키며 강한 페로몬을 내뿜는다. <태양아, 너에게 명령하노니, 솟아라!> 그러자 태양이 웃자란 풀 너머로 한 줄기 빛을 내쏜다. 하늘은 갖 가지 빛깔의 축제를 벌이고 있다. 황톳빛, 보랏빛, 연보랏빛, 빨강, 오렌지빛, 금빛의 축제. 빛, 따사로움, 아름다움, 모든 것이 103683 호가 지시한 순간에 나타났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을 과소 평가하고 있는지도 몰라.> 103683호가 말한다. 24호는 '손가락들은 우리의 신이다'라는 페로몬을 되풀이하고 싶 다. 하지만 태양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는 냄새를 발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