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저자명: 어빈 웰시 출판사명: 문학사상사 출판년도: 1997 추천의 말 20세기를 움직인 100권의 책 중 당당히 10위에 오른 소설 -영국의 방송 및 출판사 조사에서 조지 오웰의 '1984년'과'동물농장'등에 이어 '트레인스포팅'이 상위권에 오른 이유는 무엇인가? 민용태 (시인, 고려대학 교수)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선정된 5천여 권 중 10위 "20세기의 1백 년 동안에 인류의 정신을 살찌우고, 세계에 가장 큰 영향 끼친 탁월한 책 1백 권을 선정한다면 당신은 어떤 책을 꼽겠습니까?" 이러한 설문을 내걸고, 지난해 영국에선 광범위한 조사를 실시했다. 영국의 상업 텔레비전 방송국인 채널4와 굴지의 출판사 워터스턴이 공동으로 실시한 이 여론 조사에서, 어빈 웰시의 '트레인스포팅'이 10위를 차지하여 영국 사회를 놀라게 했다. 이 조사는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실시됐는데, 전국의 각계각층을 대표할 수 있는 표본 인구가 망라된 독자 2만 5천 명을 상대로, 그들 각자가 다섯 권 씩의 책을 추천케 해서 모두 5천여 권의 후보작이 등장했으며, 그중 '트레인스포팅'이 당당하게 10위를 차지한 것이다. '트레인스포팅'의 앞 순위로는 J.R.R. 톨킨의 '반지 전쟁' 및 조지 오웰의 '1984년'과 '동물농장',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등 세계적 명작이 선정되었다. 바로 그런 명저의 뒤를 이어 10위를 차지한 '트레인스포팅'은, 안네 프랑크의 '안네의 일기'(26위)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79위)나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 공원'(92위) 등을 훨씬 앞질러 20세기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책으로 선정된 사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건 첫째로 젊은이들의 세기라고 할 20세기에 그들을 가장 강력하게 매료시켰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젊은이들이 기성 사회의 모랄이나 가치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독과 방황과 일탈 행동을 서슴지 않는 것이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들은 기성 세대에 반기를 들고, 주체하기 어려운 정신적 갈등과 고민 끝에 마약과 환각제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그러나 쾌락은 순간이고, 육체와 정신을 갈갈이 찢어놓는 고통과 시련의 나락으로 전락하고 만다. 젊은 세대들이 현실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해 벌이는 처절한 사투와 그들의 꿈과 낭만이 깨어지는 모습 생생하게 묘사 그 질곡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며 처절한 사투를 계속하는 젊은 군상들-그들이 지향하는 세계와 냉혹한 현실, 그리고 그들의 꿈과 낭만이 어떻게 기성의 사회와 세대에 의해서 깨어지는가를, 이 소설은 너무도 생생하게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둘째로 이 작품은 '성격만큼 많이 팔려야 할 책'이라는 '레벨 Inc'지의 극찬의 말처럼 영, 미, 캐나다 등 영어권에서 수천만 부가판매되었으며 세계 10여 개국에 번역되어 20세기에 가장 많은 독자를 획득했고, 계속해서 더욱 많이 획득해가고 있는 책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셋째로 이 소설은 연극화되고 뒤이어 영화화되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관객을 동원한 영화로서도 손꼽히고 있다. 한국에서도 1997년 4월 20일 현재 1개월 이상 장기 상영되고 있어,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시아에서도 '트레인스포팅'에 대한 인기는 열광적인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한데 영화는 시간과 표현에 절대적인 제약이 있어, 이 원작 소설에 나오는 적지 않은 등장 인물들이 생략되고, 줄거리 자체도 단축생략의 부분이 많다. 특히 난잡한 번역과 자막의 한계로 원작 소설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재미를 충분히 느낄 수 없다는 비평을 받아 왔다. 그래서 영화를 먼저 본 사람은 소설을 읽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소설을 먼저 읽은 독자도 영화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라는 궁금증에 못 이겨 영화관을 찾게 마련이라고 알려져 있다. 기성의 규율과 관습으로부터 일탈을 꿈꾸는 젊은이들 어느 시대나 젊은이들의 반동은 존재한다. 기성의 온갖 규율과 관습에 순순히 적응하지 못하는 일단의 젊은이들은 끊임없이 일탈을 꿈꾼다. 철저한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기존의 가치들에 저항하는 도전 의식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힘이란 얼마나 보잘것 없는가. 그들의 절규에 도대체 누가 귀기울여준단 말인가.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자신마저도 극복할 수 없는 철옹성처럼 느껴질 뿐이다. 그래서 어느새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분노가 쌓이고 자기 연민에 빠져 스스로를 학대하게 된다. 무절제한 알코올과 폭력, 섹스, 나아가 마약에까지 몸을 내맡기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파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기 십상이다. 자기 스스로 개척하며 영위할 여지는 거의 사라져버렸고, 오로지 한 가지 선택만이 남은 현대인의 삶. 타인들이 지나간 길만을 따라 살아가기를 강요당하는, 단지 상표와 디자인과 크기 등의 사이에서 선택의 스트레스만이 남아 있는 삶. 그 속에서 허물어져 가는 젊은 인생들이 있다. 기성세대들은 '우리를 선택하라. 인생을 선택하라. 세탁기를 선택하라. 자동차를 선택하라. 소파에 앉아 인스턴트 식품을 먹으면서 정신을 마비시키고 영혼을 피폐하게 만드는 게임쇼를 보는 인생을 선택하라. 자신이 갈겨놓은 애새끼들한테 창피한 존재가 되어 자신을 저주하면서 헛되이 썩어가는 인생을 선택하라.' 이런 삶의 속성을 목구멍에 처넣으려는 사회의 면전에 대고 주인공 렌튼은 당당히 선언한다. "나는 인생을 선택하지 않을 것을 선택한다"라고. 바로 그와 같은 젊은이들이 영혼을 잃어버린 도시 스코틀랜드의 에든비러에서, 변방의 변방을 꿈꾸며 살고 있다. 죽어버린 문화, 잃어버린 영혼의 도시 스코틀랜드에서 변방의 변방을 꿈꾸며 사는 인생들 마약에 대해서만은 성실하면서도 진실한 구도자와 같은 자세로 살아가는 렌튼, 같은 마약중독자지만 천진난만하고 상냥한 성격의 스퍼드, 숀 코너리와 제임스 본드에 관한 한 백과사전이며 부드러운 매너로 여자들을 유혹하는 식보이, 마약은 하지 않지만 지독한 성격 파탄자로 사소한 일에도 폭력을 휘두르며 친구들 위에 군림하는 백비. '트레인스포팅'은 그 네 명의 젊은이들을 비롯해서 델마와 루이스를 연상시키는 알리슨과 켈리를 등장시켜, '그들만의 삶'을 충격적이며 박진감 넘치는 언어로 리얼하게 펼쳐 보여준다. 이들은 바깥 사회에서 보면 전형적인 쓰레기이며 양심이 결핍된 철부지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형편없는 등장 인물인 벡비마저도, 어느 정도의 인간미가 느껴질 정도로 자신의 분신인 주인공들에게 보내는 작가의 연민 어린 따뜻한 시선이 구석구석 느껴진다. 한 마디로 이 소설은 어둡지만 침울하지는 않다. 각박하고 암담한 현실 앞에서 크게 한바탕 웃어버릴 수 있는 젊은이들을 위한 이야기이다. 렌튼이 화장실 속에서 파리를 짓이겨 자기가 응원하는 축구팀의 애칭인 'Hibs'라고 쓰고 예술작품인 것처럼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만 나올 수 있는 마음속의 어떤 관념이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현현(epephany)이라고나 할까, '트레인스포팅'은 바로 그런 순간을 포착한 마술 같은 소설책이다. 젊은이들의 방황과 마약에 대한 경각심을 동시에 일깨워주는 책 주인공 렌튼이 헤로인을 하는 이유는 복잡한 세상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그의 말을 인용해 보면, 마약을 할 때는 단 한 가지의 문제, 즉 약을 어떻게 손에 넣는냐의 문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약을 끊는 순간 섹스, 직업, 그리고 인간 관계에서 빚어지는 온갖 문젯거리가 고개를 든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하지만 그런 렌튼도 마약의 파괴성이 점차 육체와 정신을 좀먹어 들어가는 것을 의식하고 여러 번 끊으려는 노력을 하지만, 현실을 직며할 수 없는 자신 때문에 결국은 언제나 제자리로 되돌아가고 만다. 마침내 그를 가두고 있는 틀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지만, 그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범죄와 배신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어떻게 보면 철저하게 냉소적인 결말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러한 어두운 이야기를 어빈 웰시는 특유의 경쾌하고 신랄한 어조로 렌튼을 비롯한 여러 낙오자들의 내면을 유머러스하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펼쳐보이며, 어느새 독자의 공감을 얻어내고 ㅁㄴ다. 동시에 현재 스코틀랜드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점, 즉 정체성, 인종 차별, 정치 상황, 그리고 전바적인 영혼의 죽음 등에 대해 하나하나 짚어 나간다. 여기서의 마약은 소품일 뿐, 본류는 방황하는 젊은 군상과 리얼한 사회 비판 이 소설에서 마약은, 마약에 중독된 뒷골목의 풍경은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소품일 뿐이다. 풍요로운 현대 사회에서 한없는 결핍을 느끼는 군상들, 그들의 애처로운 저항 속에 살아 숨쉬는 젊음이 이 작품의 주제인 것이다. 그리고 선택만을 강요하는 이 견고한 세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자고 호소한다. 그렇기 때문에 '트레인스포팅'의 메시지는 스코틀랜드, 아니 영국에 국한되지 않고 그토록 전세계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한편 그들이 마약이나 환각제에 빠져들어 삶의 파탄 지경에 이르고, 그 수렁에서 헤쳐 나오려는 처절한 몸부림 같은 노력도 이 소설에 있어 부수적인 부분이긴 하지만 꽤나 절대적인 교훈적 효과를 갖는다고 알려져 있다. 쾌락은 순간이지만 고통은 영원할 수 있다는 마약이나 약물 중독의 장면들은, 오늘날 세계의 청소년들에게 있어 자살과 다름없는 그런 행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접근을 막는 데 있어 다른 어느 저서보다 크나큰 영향을 미쳤으며, 또 중독 상태에 있는 많은 젊은이들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도 큰힘이 됐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으리라 생각하며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역자의 말 허위와 위선에 찬 기성세대를 향한 젊음의 통렬한 풍자 -영화는 매체상의 제약으로 극도로 단축된 줄거리, 메시지의 많은 부분과 적잖은 등장인물의 생략이 있었다. 그러한 부분이 모두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이 소설은 젊은이들에게는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기 위해서, 기성 세대들은 젊은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꼭 읽어볼 만하다. 임지현 약물 중독에 절은 젊은이들의 밑바닥 인생 이야기, 그러나 소설전체를 관통하는 청춘의 정서는 진짜다 내가 소설 '트레인스포팅'을 알게 된 것은 영화가 화제를 모으면서부터였다. 어빈 웰시, 스코틀랜드의 주로 마약 문화에 대해 글을 쓰는 컬트 작가라는 데 호기심이 발동해서 책을 샀지만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내 눈을 의심했다. 3음절 이상의 말을 제외하고는 영어의 형상을 하고 있는 단어가 거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이건 영국 소설이라기보다 스코틀랜드 소설이다.) 말로만 듣던 악명 높은 스코티시즘의 실체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작품이 영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을까? 하지만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며 렌튼과 그의 친구들이 폭포수 같은 스코틀랜드 사투리로 쏟아내는 황동한 독백에 나도 모르게 푹 빠져들어, 이 책은 꼭 번역해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표면적으로는 마약, 특히 헤로인에 절은 젊은이들의 밑바닥 인생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청춘의 정서는 진짜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하며 농담으로 얼버무리려 해도 어쩔 수 없이 표면에 솟아오르는, 기성 세대가 만들어놓은 ?? 그들의 상처와 분노와 연민이 스코틀랜드라는 지구의 ?? 넘어서, 우리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 바로 거기에 있다. 만약 영화를 보고(극도로 단축한 스토리의 전개말고도 형편없이 오역해놓은 자막 탓도 있겠지만) 이거 뭐 우리랑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잖아, 라고 생각했거나 그저 트렌디한 음악 영화라고 생각한 사람이 혹시라도 있다면 소설을 읽고 다시 생각해보기 바란다. 밥맛 없는 기성 세대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는 주인공 렌튼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마치 철없는 10대처럼 행동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20대 초반에서 중반에 이르는 엄연한 성인들이다. 렌튼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자신이 어느새 밥맛 없는 기성 세대와 타협하기 시작했음을 부정하지 않지만 끝까지 그들의 추악한 논리에 끝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으려 하고(해리 로더의 노래처럼) 그 무기로 헤로인을 택한다. 이기 팝의 가사대로 "영혼을 지키기 위해 마약을 하는" 것이며, 한다미로 '그들'이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인생을 선택하지 않기를 선택했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렌튼은 항변한다. 하지만 렌튼은 그의 주위를 맴도는 친구들이 헤로인에 의해, 서서히 더 이상 옛날의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변해가는 것을 무력하게 바라봐야만 한다. 자신 역시 헤로인에서 벗어나려고 이런 저런 노력을 하고 타협을 해서 좋은 직장을 잡아도 마약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가장 마지막에 친구들을 배신하고 망명처로 자리잡은 곳이 하필이면 유럽의 드럭 캐피탈인 암스테르담이라는 사실 또한 여러 해석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 소설은 우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소꿉친구들이 "단지 얼굴만 아는 사이"로 변해버리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이며, 잔인한 현실 앞에 신성한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냉정할 정도로 담담하게 써내려가고 있다. 이 소설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자 스코틀랜드의 무서운 신예 감독 대니 보일에 의해 영화화되어 다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영화가 원작의 정신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체의 특성상 소설이 전달하려 했던 메시지의 많은 부분이 여백으로 남아 버렸다. 물론 전위 영화를 만들 생각이 아닌 이상 소설의 복잡한 인물 구성과 자유분방한 내러티브를 그대로 영화화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겠지만, 영화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많은 매력적인 등장 인물들이 사라지거나 다른 인물의 에피소드로 흡수되어 버린 것은 유감이다. 인간 사회를 황폐화시키는 온갖 편견과 독선에 대한 젊은 세대들의 고발적 의미 성격이 전혀 틀린 두 여자의 결합(레슬리와 알리슨)이라든가, 가장 지적 수준이 높은 인물과 낮은 인물을 결합시킨 데이비 미첼과 스퍼드 커플이 후자의 예이다. 또한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나레이션을 할 기회를 부여받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켈리가 영화화 단계에서 삭제된 것 역시, '문제 있는 사내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영화가 취한 노선에 혼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한다. 상대적으로 덜 위협적인 다이안이 여주인공 격(?)이 되어 버린 것 역시 그런 맥락이라고 짐작이 된다. 그와 함께 소설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인간 사회를 황폐화시키는 온갖 종류의 편협과 독선에 대한 고발 역시 배경 뒤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스코틀랜드 내에 존재하는 지역간 종교간의 갈등, 그리고 피지배자이면서도 다시 다른 박해 대상을 찾아야만 하는 인간의 절망적인 속성에 대한 고찰은, 공간적인 한계를 넘어 우리 사회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끝으로 번역하는 데 있어서, 등장인물들이 별명, 애칭, 그리고 본명까지 합하면 보통 서너 가지의 호칭으로 불리워지는 바람에 처음에는 통일을 시킬까 생각했지만 소설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호칭이나 고유명사의 경우, 되도록이면 그쪽 발음을 존중했다. 또 역주를 좀 많다 싶을 정도로 과감하게 집어넣은 까닭은 작품의 문화적 콘텍스트를 되도록 충실하게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소박한 희망에서였다. '트레인스포팅'을 먼 나라 정키들의 미친 짓을 나열했다고 보든가, 동시대 젊은이들의 통과의례적인 고뇌를 신선하게 그렸다고 생각하든가,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감수성, 개방성 그리고 성장환경에 따른 의식 차이에 달려 있다. 하지만 그런 점은 다 접어두고라도 이 소설은 정말 한번쯤 젊은이라면 스스로를 돌아보기 위해서, 또 기성 세대는 젊은이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읽어볼 만한 뜻있고 재미있는 소설이다. 끝으로 동일 인물인데도 두 가지에서 네 가지로 지칭되는 이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에서 8까지 콤마로 구별해서 나열한 동일 인물의 각기 다른 이름은 본명, 별명 또는 애칭 등의 순으로 다음과 같이 혼용 표기했음을 밝힌다. '동일 등장 인물들의 호칭 정리' 1. 마크 렌튼, 렌츠, 렌트보이 2. 프랭크 벡비, 프랑코, 베거 3.사이먼 윌리엄슨, 식보이, 사이 4.대니(다니엘) 머피, 스퍼드 5.랍 맥롤린, 세컨드 프라이즈, 세크스 6.알리슨, 알리 7.조니 스원, 수녀원장, 스워니, 화이트 스원 8.마이클 포레스터, 마이크, 마이키, 포리 차례 제1장 약을 끊는 의식 1. 헤로인 보이스와 장 클로드 반담과 수녀원장: -렌튼의 이야기 2. 정크 딜레마 No. 63 3.에든버러 페스티벌의 첫날: -렌튼의 이야기 4.가슴속의 블랙홀: -식보이의 이야기 5.사춘기가 끝날 무렵: 니나의 이야기 6.새해 첫날의 승리: -스티비의 이야기 7.당연한 이야기: -렌튼의 이야기 8.정크 딜레마 No.64 9.내 남자: -세컨드 프라이즈의 이야기 10.실업 구제소의 마수에서 확실하게 빠져나오는 법 제2장 다시 저주의 늪 속으로 11. 스코틀랜드는 영혼을 지키기 위해 마약을 한다: -토미의 이야기 12. 맥주잔 소동: -렌튼의 이야기 13.실망: -벡비의 이야기 14.아랫도리의 고민: -렌튼의 이야기 15.오물 칵테일: -데이비의 이야기 16.정크 딜레마 No.65 17.포크 선샤인에서 비탄에 잠겨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다 제3장 두번째 의식 18.수상한 맥주의 맛: -벡비의 이야기 19.나나 할머니와 나치 녀석들: -스퍼드의 이야기 20.백 년 만의 섹스 21. 한밤중의 메도우스 공원에서: -스퍼드의 이야기 제4장 인생을 선택하라 22. 길고 힘든 하루를 견뎌내기 위해서: -렌튼의 이야기 23.정크 딜레마 No.66 24.개 잡기: -식보이의 이야기 25.내 안의 나를 찾아서: -렌튼의 이야기 26.가택 연금: -렌튼의 이야기 27.형을 묻던 날의 정사: -렌튼의 이야기 28.정크 딜레마 No.67 제5장 유랑하는 젊음 29.잔인한 도시 런던의 밤: -렌튼의 이야기 30.'나쁜 피': -데이비의 이야기 31. 꺼지지 않는 불빛 32. 여자들만의 해방구: -켈리의 이야기 33."마크 헌트 없어요?": -렌튼의 이야기 제6장 폐허의 고향으로 34.프로를 위한 손쉬운 돈벌이: -스퍼드의 이야기 35.새끼 고양이와 에이즈: -렌튼의 이야기 36. 매티의 추억 37.스트레이트 딜레마 No.1: 렌튼의 이야기 38.세기의 '만찬': -켈리의 이야기 39.리스 센트럴 역에서 트레인스포팅 40.다리 잘린 남자 41. 웨스트 그랜튼의 겨울: -렌튼의 이야기 42. 스코틀랜드 상이용사 제7장 출구 43.새로운 인생을 위하여 @FF 제1장 약을 끊는 의식 1. 헤로인 보이스와 장 클로드 반담과 수녀원장과: 렌튼의 이야기 식보이는 비오듯이 땀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줄곧 텔레비전만 응시하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 자식에 대해 신경을 끊으려고 애썼다. 그 녀석은 내 기분을 망쳐놓고 있었다. 나는 오직 장 클로드 반담의 비디오에 주의를 집중하려고 했다. 그런 종류의 영화에선 필수적인 드라마틱한 도입부. 다음 단계로 비열한 악당을 등장하게 해서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허점투성인 엉성한 스토리를 어떻게 해서든 이어나간다. 이제 곧 장 클로드와 악당이 1대 1로 맞붙을 찰나였다. "렌츠, 난 수녀원장을 보러가야만 되겠어." 식보이가 숨을 가쁘게 쉬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이," 하고 난 말했다. 이 작식이 내 시야에서 꺼져 혼자 제 갈길을 가 나와 장 클로드 단둘만 있도록 내버려둬줬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나도 금방 상태가 나빠질 것 같고, 이 녀석만 보내면 약을 혼자 다 챙길 것이다. 놈이 식보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1년 내내 마약의 금단 증상에 시달리고 있어서가 아니다. 철저히 병적인 녀석이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빨리 가자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녀석이 말한다. "잠깐 기다려. 난 장 클로드가 이 건방진 새끼를 두들겨 패는 걸 보고 싶단 말야." 지금 떠나면 이 영화의 다음 부분은 영영 보지 못할 것이다. 돌아올 때쯤에는 난 너무 취해 제 정신이 아닐 테고 그나마 2,3일 있다 올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보지도 않은 비디오의 연체료를 물어야 된다. "난 지금 당장 가애 돼, 새꺄!" 식보이가 일어서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곤 창가로 가서 몸을 기댔다. 사낭꾼에게 잡힌 짐승처럼 숨을 내쉬고 있는 그의 눈 속에는 약에 대한 갈망만 보일 뿐이었다. 나는 리모콘으로 비디오를 껐다. "젠장, 이게 무슨 낭비야. 무슨 낭비냐고." 나도 식보이에게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정말 성가신 놈이다. 그러자 그 녀석은 뒤를 휙 돌아보며 째려봤다. "연체로는 내가 줄게. 네가 부어 있는 건 그것 때문이지? 비디오 가게에 겨우 50펜스 정도 내는 걸 가지고 그렇게 원통해할 것까진 없잖아," 이 녀석은 사람을 째째한 놈으로 만드는 데엔 뭐가 있다. "난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냐" 하고 말했지만 정말 그런지는 나 자신도 자신이 없었다. "아, 그러셔? 내 말은, 이쪽은 괴로워죽겠는데 친구라는 작자가 일부러 꼼지락거리며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고 즐거워한다는 거야!" 식보이의 눈은 축구공만큼 커져서 나를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뭔가를 호소하는 듯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건 나의 배신 행위에 대한 통렬한 항의었다. 내가 만약 애아빠가 될 정도로 오래 살더라도 절대로 내 아이는 식보이 같은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가 이럴 때면 나는 꼼짝할 수가 없다. "난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아님 빨리 빌어먹을 재킷이나 걸쳐!" 거리에는 택시가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택시라는 건 탈 일이 없을 때에만 줄지어 서 있는 법이다. 5월이지만 이렇게 비깥에 서 있자니 불알이 오그라들 정도로 추웠다. 난 아직은 괜찮지만 곧 금단 증상이 엄습할 것이다, 틀림없이. "딴 때 같으면 발에 치일 정도로 택시가 늘어서 있었잖아. 발에 치일 정도로. 제기랄, 에든버러 페스티벌(매년 에든버리에서 여름에 열리는 공연 예술 축제 - 역주) 이 돌아오기만 하면 택시를 잡아본 기억이 없다니까. 게을러 빠져서 염병할 교회 강당에서 다음 공연 장소까지 100미터도 걷기 싫어하는 디룩디룩 살찐 부자 관광객 놈들만골라 태우려고 돌아다니잖아. 돈만 밝히는 빌어먹을 택시 기사 놈들 같으니라고." 식보이는 씩씩거리며 정신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리스 워크 쪽을 보려고 돌린 그의 목근육은 긴장으로 팽팽하고 눈은 급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열러 있었다. 간신히 한 대가 왔다. 셀수츠(트레이닝복 - 역주) 위에 조종사 점퍼를 걸친 젊은 녀석들이 우리보다 먼저 와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식보이는 그 녀석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차도 한복판까지 나가서 고함을 질렀다. "택시!" "야, 너 뭐하는 거야?" 스포츠 머리에 검정, 자주, 하늘색이 섞인 얼룩덜룩한 셀수츠를 입은 녀석이 외쳤다. "꺼져, 임마. 우리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어." 식보이는 이렇게 되받아치며 택시 문을 열었다. "저기 또 한 대 오잖아." 그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검은 택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재수 좋은 줄 알아, 이 건방진 자식들아." "꺼져, 이 여드름투성이 꼬마녀석이. 빨리 빌어먹을 택시나 타라고!" 식보이가 택시에 올라타며 또 한 번 큰소리를 쳤다. 우리는 앞을 다투어 택시를 탔다. "톨크로스까지 가주세요." 내가 운전 기사에게 말하는 순간, 차창 유리에 가래침이 날아와 쫘악 퍼졌다. "야, 짜샤, 한 번 해보자는 거야? 덤벼, 이 똥오줌도 못 가리는 새끼들!" 셸수츠가 고함을 질렀다. 택시 운전 기사는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매우 착실한 놈 같았다. 정말 대부분의 택시 기사들은 착실한 인간이다. 국민보험을 지불하고 자유업에 종사하는 녀석들은 이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인간 쓰레기인 것이다. 택시는 U턴을 한 다음, 리스 워크를 향해 속도를 냈다. "잘한다, 이 주책 바가지야. 너나 나나 이제 앞으로 혼자 집에 돌아가면 그 자식들이 행여나 가만 놔두겠다." 나는 식보이에게 화가 단단히 났다. "너 설마 저런 얼간이 놈들이 무서워서 그러는 선 아니겠지?" 이놈은 정말 내 신경을 박박 긁어놓는다. "그래! 그래, 난 무서워. 혼자 있을 때 저 셸수츠 놈들에게 습격당하는 건. 내가 염병할 장 클로드 반담인 줄 아냐? 넌 정말 구제불능인 먹통 새끼다, 사이먼." 나는 그를 '사이' 라든가 '식보이' 라고 부르는 대신 내 말의 심각성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사이먼이라고 불렀다. "난 수녀원장을 만나고 싶을 뿐이야. 다른 새끼들이랑 상관하기 싫어, 알겠냐?" 라고 말하고 놈은 인지를 입술에 갖다대고 나를 노려봤다. "내 입술을 잘 보라고. 사이먼은 수-녀-원-장을 만나고 싶단 말야." 식보이는 그렇게 말하고 택시 기사의 뒤통수를 노려보면서, 손가락 끝으로 무릎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마치 좀더 속도를 내라는 듯이. "쟤네들 중엔 맥클린네 동생도 있었어. 대니와 챈시의 동생 말야." "쳇, 그게 어쨌단 말야?" 식보이는 코웃음을 쳤지만 마음속의 불안을 감출 순 없었다. "맥클린 형제라면 나도 알고 있어. 챈시는 괜찮은 놈이야." "동생을 열받게 하지만 않으면 괜찮은 녀석이겠지." 식보이는 더 이상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나도 그를 구박하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떠들어봤자 에너지 낭비다. 그가 말없이 참고 있는 금단 증상의 고통은 아주 지독한 것처럼 보여 내가 아무리 애를 써봤자 그의 비참한 상태를 눈꼽만치라도 더 이상 악화시킬 길이 없으니까. '수녀원장' 이란, 조니 스원을 가리킨다. 화이트 스원(백조) 이라고 부르는 녀석들도 있다. 그는 톨크로스를 본거지로 삼고 사이트 힐과 웨스트 헤일즈 구변의 거래를 도맡고 있었다. 수워니나 그의 소주인 레이미 쪽에서 구할 수 있을 때는 시커가 취급하는 무어하우스의 불량배들에게 사지 않고 스워니를 찾았다. 대개 수워니 쪽이 더 등급이 높은 마약을 소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니 수원과 나는 옛날에는 아주 친한 친구였다. '포티 시슬'에서 함께 축구를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니는 그냥 마약상에 불과하다. 스워니가 이런 말을 했던 걸 기억한다. "이 장사는 친구가 끼여들면 안 돼. 그저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있을 뿐이야." 나는 약물에 깊이 빠지기 전까지는 그가 인정머리 없고 거만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그 자식이 어떤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조니는 거래상 겸 정키, 즉 약물중독자다. 마약을 하지 않는 마약상은 이족 세계의 사다리를 몇 칸 더 올라가야 볼 수 있다. 우리가 스워니를 '수녀원장' 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약 경력이 오래된 데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다. 나 역시 금방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조니의 방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가는데 갑자기 심한 경련이 일어났다. 젖은 스펀지를 짜는 것처럼 땀방울이 둑뚝 떨어졌다. 한 계단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땀구멍에서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식보이는 나보다 더한 것 같았으나 그 녀석은 이미 나의 세계에서 사라져버렸다. 약을 구할 수 있는 조니의 방과 약으로 이어지는 길을 식보이가 막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 녀석이 계단 난간에 축 처져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식보이는 계단 난간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난간에다 대고 토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괜찮냐, 사이먼?" 나는 시간을 지체시키는 그 자식에게 짜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식보이는 머리를 흔들고 눈을 치뜨더니 그냥 내버려두라는 뜻으로 손을 저으며 나를 내쫓았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식보이 같은 기분일 때에는 지껄이기도 싫고 남이 말을 걸어와도 반갑지 않은 법이다. 어떠한 성가심도 원치 않는 것이다. 나는 때때로 사람들이 정키가 되는 이유는 무의식적으로 한 가닥의 고요함을 갈망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간신히 계단을 다 오르자 이미 머리 꼭대기까지 취해 있는 조니가 맞아주었다. 그의 방 안은 이미 약을 할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식보이에 렌트 보이(남창 - 역주) 까지 왔잖아. 둘 다 엉망진창이군." 조니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머리가 돈 것 같이 웃어댔다. 그는 헤로인을 할 때 곧잘 코카인을 함께 흡입한다든지 둘을 혼합한 스피드볼 (주사기로 투입하는 마약의 혼합물 -역주 )을 만들어 사용하곤 했다. 환각 상태에 빠져 있으면 하루 종일 벽만 쳐다보면서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서이다. 이렇게 금단 증상에 시달리고 있을 때는 약에 취해 혼자 붕 떠 있는 자식보다 더 재수 없는 건 없다. 왜냐하면 황홀경에 푹 빠져 남이 괴로워하는 걸 알지도 못하고 상관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알코올 중독자는 술집에 있는 모든 놈들을 자기처럼 만들려고 하는 반면, 진짜 정키(공범을 원하는 사이비 마약 사용자가 아닌) 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레이미와 알리슨이 거기 와 있었다. 알리는 약을 가열하고 있었다. 근사한 작품이 될 것 같아 보였다. 조니는 왈츠를 추듯이 알리슨에게 다가가서 세레나데를 불렸다. "헤이, 아름다운 아가씨, 뭘 만들고 있나요......." 그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길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레이미쪽으로 몸을 돌렸다. 레이미는 바닷물에 떨어진 몇 방울의 피까지도 냄새 맡을 수 있는 상어들처럼 그 어떤 혼잡한 거리에서도 경찰관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음악 좀 틀어줘, 레이미. 이제 엘비스 코스텔로(사회 풍자적인 노래들로 유명한 영국의 뉴웨이브 싱어송 라이터 - 역주) 의 신곡은 진력이 났어. 하지만 그 빌어먹을 녀석의 노래를 트는 걸 그만둘 수도 없으니, 젠장. 정말 더럽게 멋진 자식이야." "워털루의 남쪽으로 달리는 단선 열차." 레이미가 말했다. 약 기운이 다 돼서 한계점에 이르렀을 때, 녀석에게 약을 사려고 하면 이렇게 사람 머리를 돌게 하는 앞뒤도 맞지 않고 뜻도 모를 말을 한다. 레이미가 얼마나 헤로인에 깊이 빠져 있는가는 항상 우리를 감탄케 했다. 레이미는 내 친구 스퍼드와 약간 비슷했다. 나는 언제나 그들을 타고난 고전적인 애시드 헤드라고 생각했다. 식보이는 스퍼드와 레이미가 동일 인물이라는 이론을 세웠었다. 그들은 눈곱만치도 닮은 데가 없었는데도 그런 주장을 하게 된 건 순전히 그들이 동일한 활동 반경 안에서 움직이는데 불구하고 한 번도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어쨌든 그 악취미 녀석은 (헤로인)을 틀어서 정키의 불문율을 깨트렸다. 루 리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리더이자 훗날 솔로로 활동한 뉴욕의 전위 로커 - 역주) 의 '록콘롤 애니멀' 에 실린 버전이었다. 이건 금단 증세로 괴로울 때 들으면 벨벳 언더그라운드 앤드니코의 오리지널 버전 이상으로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래도 이 버전에는 존 케일의 유리를 긁어대는 듯한 비올라 연주는 들어있지 않다. 거기에는 진짜 견뎌낼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으악, 집어쳐, 레이미!" 알리가 소리쳤다. "주사기를 찔러 흐름에 몸을 맡겨봐, 흔들어요 베이비, 흔들어봐요 허니,,,,,, 우리는 모두 죽은 백인 쓰레기,,,,,, ." 레이미는 즉흥 랩을 홍얼거리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엉덩이를 흔들었다. 그리고 나서 녀석은 식보이 앞에 앉았는데 의도적으로 알리의 옆자리를 노린 행위였다. 그는 그녀가 촛불로 태우고 있는 숟가락 속의 내용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레이미는 식보이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당기더니 그의 입술에 뜨거운 키스를 했다. 식보이는 부들부들 떨면서 그를 밀쳤다. "집어쳐,이 바보 같은 자식!" 조니와 알리는 큰소리로 웃었다. 온몸의 뼈를 믹서로 갈고 무딘 톱으로 써는 듯한 느낌만 아니었더라면 나도 같이 다라서 웃었을 것이다. 식보이는 알리슨의 팔꿈치 위쪽을 단단히 묶어줬다. 알리 다음에 주사를 맞은 순서를 확보하겠다는 얄팍한 계산 속에서다. 그는 그녀의 가늘고 창백한 팔을 톡톡 두드려 정맥이 드러나게 했다. "내가 해줄까?" 그가 물었다. 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주사기 속으로 5시시를 빨아들이기 전에 솜뭉치를 숟가락에 떨어드리고 후 불었다. 알리의 팔에는 굵고 파란 정맥이 마치 피부를 뚫고 올라올 기세로 팽팽하게 솟아 있었다. 식보이는 그녀의 살을 바늘로 찌르고 천천히 약을 흘려보냈다. 주사기에는 형액이 거꾸로 빨려올라왔다. 그녀는 아주 잠깐 식보이를 애원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의 뇌속으로 헤로인 칵테일을 처넣는 식보이의 얼굴은 추한 파충류처럼 보였다. 알리슨은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벌어진 입에서는 오르가슴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식보이의 눈은 이제 천진난만한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크리스마스 아침, 트리 아래 산처럼 쌓인 예쁘게 포장된 선물 더미를 쳐다보는 아이 같았다. 흔들리는 촛불 빛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은 기묘하게 아름답고 순수해 보였다. "이건 그 어떤 섹스보다 더 휼륭해,,,,,, 세상의 그 어떤 페니스보다 훨씬 좋아,,,,,, ." 알리는 숨을 헐떡였다. 그녀는 진심이었다. 그 말에 산란해져 나는 내 것이 아직 제자리에 붙어 있는지 바지 위로 더듬어봤다.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자기 것을 만지니까 속이 메스꺼워졌다. 조니는 식보이에게 자기 주사기를 건네줬다. "자, 네 건 이거야. 하지만 꼭 이 주사기로 해야 돼. 오늘은 동료들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 테스트해 보는 날이거든." 그는 웃고 있었지만 농담을 하고 있진 않았다. 식보이는 고개를 저었다. "난 남의 주사 바늘이나 주사기를 절대 쓰지 않아. 내 것은 여기가져왔어." "이런, 그건 별로 사교적인 행동이 못 되는걸. 렌츠? 레이미? 알리? 어떻게 생각해? 넌 나 화이트 스원, 수녀원장님이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혈액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거냐? 나의 여린 감슴은 상처받았어.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내 주사기를 쓰지 않으면 너한텐 약도 없다는 거야." 그는 과장된 미소를 지어보이며 엉망인 치아를 쏙 드러냈다. 나는 그것이 조니 스원의 입에서 나올 말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스워니답지 않다. 절대로 아니다. 어떤 사악한 악마가 그의 육체에 침범해서 그의 마음에 독기를 불어넣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내가 조니 스원이라고 알고 있던 선량하고 농담을 잘하는 친구와는 백만 마일이나 차이가 있다. 누구나 그를 좋은 녀석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안에는 우리 엄마도 끼여 있다. 축구를 좋아하고 낙천적인 조니 스원은 메도우뱅크에서 축구 시합을 할 때마다 선수들의 유니폼 세탁을 도맡아하면서도 단 한 번도 불평을 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 나가다간 헤로인을 맞으려다 날 샐 것 같아서 나는 화가치밀어올랐다. "빌어먹을, 조니, 헛소리 그만하고 정신차려. 자, 돈이라면 여기 이렇게 가져왔잖아" 하고 나는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그는 최책감에서인지 눈 앞에서 현찰을 봤기 때문인진 모르지만 금방 예전의 조니 스원으로 되돌아왔다. "그렇게 정색하지 마. 농담도 못하냐? 이 화이트 스원님이 친구들에게 해코지할 사람으로 보여? 자, 너희 건 여기 있어. 얍삽한 놈들. 그래, 위생은 중요해." 그러고 나서 조니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곡시 녀석을 알고 있지? 그 친구 지금 에이즈에 걸렸어." "정말이야?" 나는 물었다. 누가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고 누구는 멀쩡하다든지 하는 소문은 끊임없이 나돌곤 한다. 나는 그런 뜬소문을 일일이 믿지 않고 보통은 무시한다. 다만 곡시에 대해서는 여러 경로를 통해 소문을 듣고 있었다. "응. 아직 에이즈가 발병하진 않았지만 검사 결과가 양성으로 나왔어. 그래도 나는 그 녀석에게 말했지, '이건 세상의 끝이 아냐, 곡시. 바이러스와 함께 사는 법을 배우며 되는 거야. 아무런 고통 없이 그런 식으로 공존하고 있는 녀석들이 세상엔 얼마든지 있어. 몇 년이 지나도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수도 있다고. 바이러스가 없는 녀석이라 하더라도 내일 차에 치여 죽을지도 모르잖아.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어. 그냥 체념해선 안 돼. 앞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는 거야." 피 속에 에이즈 바이러스가 침범해 들어온 것이 자기 자신만 아니라면, 철학자인 척하는 건 간단하다. 어쨌든, 조니는 전에 없이 식보이가 헤로인을 가열하고 주사하는 것까지 도와줬다. 식보이가 탄성을 지르려고 할 때, 그는 정맥을 세우고 주사기에 피를 역류시키고는 생명을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마법의 샘물을 혈관 안으로 밀어넣었다. 식보이는 스워니를 힘껏 껴안았다. 그러고는 그의 어깨에 양팔을 걸친 채 축 늘어졌다. 그들은 이제 완전히 풀어져 서로의 품 안에서 섹스의 여운을 즐기고 있는 여인들처럼 보였다. 이제 식보이가 조니에게 세레나데를 불러줄 차례다. '스워니,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사랑하는지, 소중한 나의 스워니......." 몇 분 전의 원 수들은 이제 영혼의 동반자가 되어 있었다. 나도 헤로인을 한 대 맞았다. 적당한 정맥을 찾을 때까지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렸다. 정맥은 보통 사람과 달라서 피부 속 깊숙이 파묻혀 있다. 겨우 찾아내고 나서 나는 서서히 음미해가면서 약을 흘려넣었다. 알리가 말한 그대로였다. 이제까지 겪은 최고의 오르가슴을 20배로 증폭해도 이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나의 메마르고 갈라진 뼈들은 아름다운 헤로인의 부드러운 포옹으로 사르르 녹아내렸다. 땅이 흔들렸다. 그리고 아직도 움 직이도 있다. 알리슨은 나에게, 켈리가. 중절한 후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으니 마나러 가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조는 책망하는 투는 아니었지만 마치 내가 켈리의 임신과 중절에 책임이 있기라도 한 듯이 말했다. "왜 내가 켈리를 보려 가야 해? 그 일은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데." 나는 방어적으로 말했다. "넌 그애의 친구잖아, 안 그래?" 난 조니의 말을 인용해서 우리는 이제 단지 얼굴만 아는 사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 유흑을 느꼈다. 그 말이 내 머릿속에서 근사하게 울렸다. '우리는 이제 단지 얼굴만 아는 사이야.' 그 말은 우리 약쟁이들의 개인적인 상황을 초월한 것처럼 들린다. 마치 우리시대에 대한 번뜩이는 메타포(상징) 처럼 . 나는 유혹을 억눌렀다. 그 대신 난 우리 모두가 켈리의 친구들인데 왜 구태여 나만 따로 집어내서 그녀를 방문할 의무를 지우냐고 따졌다. "빌어먹을, 마크. 넌 그애가 너한테 홀딱 반했던 걸 모르니?" "켈리가? 말도 안 돼!" 난 깜짝 놀랏다. 당황스럽고 난처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난 눈치코치도 없는 바보 천치다. "정말이라니까. 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어. 그앤 언제나 네 얘기만 했다고. 마크가 이랬어, 마크가 저랬어 하고 말야." 나를 마크라고 부르는 녀석은 거의 없다. 대개는 '렌츠', 좀 심한녀석은 '렌트보이(남창 - 역주)' 라고 부른다. 그런 식으로 불려지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싫은 눈치를 표정에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녀석들 모두에게 즐거움을 한 번 더 제공하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까. 식보이는 이 말을 모두 듣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얼굴을 돌렸다. "그게 정말이라고 생각하냐? 켈리가 나에게 반했다고?" "그애가 너랑 자보고 싶어한다는 것은 개나 소나 다 알고 있어. 비밀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어. 난 그애를 이해할 수 없지만 말야. 걔 정신 감정을 받아봐야 되지 않을까?" "말해줘서 고맙다, 짜샤." "만약 네가 바깥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고 컴컴한 방구석에서 비디오나 하루 종일 때리고 있다면 나로서도 이런 일을 가르쳐레줄레야 가르쳐줄 수도 없지?" "하지만 켈리는 나한테 아무 소리도 안 했어. 쭈뼛쭈뼛한 멍청한 여자 같으니라고." "그럼 티셔츠 앞에 써붙이고 다니라는 거야? 넌 정말 여자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마크." 알리슨의말에 식보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마지막 말에 기분이 상했지만 나는 그 문제를 가볍게 받아 넘겨버리기로 작정했다. 나를 놀리기 위한 거짓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총지휘는 식보이가 했을 거다. 이 망할 놈의 트러블 메이커는 인생을 제멋대로 비틀거리며 살아가는 주제에 자기 친구들의 우정을 망치는 덫을 여기저기 파묻으며 돌아다닌다. 그런 일을 해서 도대체 무슨 놈의 줄거움을 느끼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나는 조니에게 헤로인을 조금 샀다. "방금 내린 눈처럼 순수하다고, 이 물건은." 그는 나에게 말했다. 그 이야긴 독이 될 만한 성분을 제거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이제 슬슬 이런 녀석들과는 헤어져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니는 내 귀에다 대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절주절대고 있었다. 듣기 싫은 소리뿐이었다. 누가 누구를 등쳐먹었고 시민치안모임은 공연히 마약 반대 히스테리를 조장해서 우리같이 선량한 중독자들의 생활을 비참하게 만들려 한다는 따위였다. 그는 또 자기의 눈물겨운 반생에 대해 구질구질하게 늘어놓더니 이제 마약을 딱 끊고 태국으로 건너갈 거라고 꿈 같은 소리를 지껄였다. 녀석의 말대로 태국 여자들은 남자를 받들어 모실 줄 알며 하얀 피부와 주머니 속에 빳빳한 10파운드짜리 지폐 몇 장만 있으면 왕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는 이보다 더 심한 이야기까지 했다. 냉소적이고 남을 깔아 뭉개는 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이건 화이트 스원이 아니다 또 그 속에 있는 악마가 지껄이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아니, 스워니 본인일지라도 몰라. 알 게 뭐야. 누가 상관이나 한대 알리슨과 식보이 사이에서 짤막짤막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다음 마약 거래 약속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그들은 일어나 함께 방을 나갔다. 그들은 심심하고 미적지근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침실에서 섹스를 하고 있을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여자들은 다른 놈팽이들과 이야기하고 차를 마시는 식으로 식보이와 섹스를 했다. 레이미는 벽에 크레용으로 낙서를 하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자기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오히려 녀석뿐 아니라 다른 모든 놈들에게도 최선의 상태이다. 나는 알리슨이 한 말에 대해 생각했다. 켈리는 지난주에 막 임신중절을 했다. 만약 알리가 켈리와 한번 자주라는 뜻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나처럼 소심한 녀석은 그녀를 찾아가도 섹스할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다. 틀림없이 아직도 뭔가 그녀 안에 남아 있을 것이다. 끈적끈적한 핏덩어리나 태아의 잔해 같은 것이. 아마 난 구재불능인 천치일지도 모른다. 알리슨 말이 맞다. 난 여자들에 대해 잘 모른다. 난 다른 어떤 것도 아는 게 없다. 켈리는 인치에 살고 있는데 버스로 가기에도 어렵고 택시를 타자니 돈이 없다. 아마 여기서라면 버스로 갈 수 있겠지만 어느 버스가 그곳으로 가는지 모른다. 솔직히 말하면 난 지금 약 때문에 섹스를 하기에는 너무 기진맥진하고 수다를 떨기에도 너무 취해 있다. 10번 버스가 왔다. 나는 장 클로드 반담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리스로 돌아가기로 했다. 집에 가는 동안 내내 실실 웃으며 장 클로드가 악당을 처절하게 응징하는 모습을 그려보고 있었다. 2. 정크 딜레마 NO. 63 나는 헤로인이 내몸 구석구석을 씻어주는 대로 놔두고 있다. 차라리 안으로 스며들며 정화시켜준다고 할까,,,,,, 약은 속에서부터 날 깨긋하게 해준다. 내 안의 바다. 문제는 이 아름다운 대양이 유독한 표류물들을 산더미처럼 실어나른다는 점이다. 독은 바닷물로 희석되지만 썰물 때가 되면 내 육체 안에 쓰레기만을 남겨놓는다. 약은 준 것만큼 가져간다. 약은 내 몸에서 엔돌핀, 고통을 견디게 하는 능력을 씻어 가버린다. 이들이 원상태로 회복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 똥 구덩이 같은 방의 벽지는 정말 흉직하다. 경악스러울 정도이다. 아마도 어느 산 송장 같은 놈이 옛날 옛적에 발랐던 것 같다. 하지만 내게는 딱 어울린다. 나 역시 그런 산 송장 같은 놈이니까. 이제 영 생각처럼 몸이 움직여주질 않는다,,,,,, 하지만 모든 게 다 갖춰줘 있다. 땀으로 끈적거리는 손을 뻗기만 하면 모두 닿을 수 있게 놓여져 있다. 주사기, 주사 바늘, 숟가락, 양초, 라이터, 헤로인봉지, 좋아. 완벽하군. 구렇지만 곧 썰물이 찾아오고 나의 바다는 파도에 씻겨진 독에 찌든 쓰레기들만 내 몸 안에 남겨놓을 것이다. 난 그때가 두렵다. 다음 헤로인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촛불위에 올려놓고 약이 용해되는 것을 기다리며 나는 생각에 잠긴다. 만조의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독으로 고통받는 시간은 점점 더 길어진다. 그렇지만 나의 손을 멈추게 하려면 이런 정도의 생각으론 어림도 없다. 3. 에든버리 페스티벌의 첫날: 렌튼의 이야기 뭐든지 세 번째는 가능한 법. 언젠가 식보이가 했던 말 대로다. 마약을 실제로 끊기 전에, 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미리 알아둬야한다. 사람은 실패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얻는 교훈은 준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그가 옳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번에 나는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한 달치 집세를 미리 내고 링스 공원이 훤히 내다보이는 이 널찍하고 텅 빈 방을 빌렸다. 몽고메리 가의 집 주소를 아는 놈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현금 지불! 가장 어려웠던 것은 그 많은 현찰을 손에서 내놓는 일이었다. 반면 가장 쉬웠던 것은 오늘 아침 왼팔에 마지막으로 주사를 한방 때리는 일이었다. 이 결전을 준비하는 동안 나를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줄 뭔가가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나서 커크게이트로 쏜살같이 달려가 쇼핑리스트에 적힌 물건들을 사왔다. 하인즈 토마토 수프 10통과 버섯 수프 8통 (둘 다 그냥 차가운 대로 먹을 것), 바닐라 아이스크림 큰 것 1통 (냉장고가 없으니 녹은 걸 그대로 마실 것), 밀크 오브 마그네시아 소화제 2병, 두통약 1병, 린스테드 구취 제거제 1팩, 멀티 비타민 1병, 미네랄 워터 4리터, 루코제이드 아이소토닉 드링크 12병, 잡지류: (비즈) (스코티시 풋불 투데이) (핀터), 그리고 포르노 잡지들 가장 중요한 물품은 부모님 집에 갔을 때 이미 손에 넣었다. 엄마의 욕실 캐비닛에서 가져온 발륨 (신경 안정제, 디아즈팜 이라고도 한다 - 역주) 한 병이다. 난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엄마는 이제 더 이상 발륨을 먹지 않으니까. 그리고 만약 발륨이 필요해진다 하더라도 나이든 아줌마인 만큼 동네 약사 놈은 젤리 사탕처럼 간단히 처방해줄 것이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리스트에 있는 모든 항목에 차례로 체크를 했다. 이 방은 가구도 없고 카펫도 깔려 있지 않다. 방 한가운데에 슬리핑백을 얹은 매트리스가 놓여 있고, 전기 난로와 작은 나무 의자 위에 흑백 텔레비젼이 있을 뿐이다. 나는 갈색 플라스틱 양동이를 세 개 준비했다. 그 속엔 물로 희석한 소독액이 반쯤 들어 있다. 각각 똥, 토사물, 오줌을 받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간이 침대에서 쉽게 손이 닿을 수 있는 위치에 수프, 주스 그리고 약품들을 죽 늘어놓았다. 나는 그 끔찍한 쇼핑을 위한 체력이 필요했기에 마지막으로 한 방했었다. 마지막에 사들인 헤로인은 수면을 돕고 금단 증상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사용할 작정이다. 될 수 있는 한 소량의 정해진 양만을 사용할 것다. 그런데 당장 필요해진다. 심한 금단 증상이 찾아오고 있다. 증상은 여느 때와 똑같이 시작된다. 우선 뱃속이 슬슬 메스꺼워지고 원인 모를 공포가 엄습한다. 메스꺼움이 서서히 조여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왠지 기분이 좋지 않다는 느낌은 곧바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태로 치닫는다. 치통이 이빨에서 턱과 눈까지 퍼지더니 이윽고 너무나 괴롭고 참기 어려워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격렬한 통증이 온몸의 뼈 마디마디까지 번진다. 그러자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땀이 줄줄 쏟아져내린다. 거기에 오한이 차 지붕에 내린 가을 서리처럼 등어리 전체에 착 달라붙은 듯한 느낌이다. 지금 당장 어떻게든 손을 쓰지 않으면 도저히 못 견디겠다. 갑자기 약을 끊어서 정면으로 금단 증상과 맞서는 건 절대로 무리다. 중독 상태에서 천천히 풀려나게 해줄 가벼운 약이 필요하다. 내가 구할 수 있는 것은 고작 헤로인 정도다. 이 뒤틀린 손발을 풀어주고 잠을 자려면 아주 조금만, 딱 한 방만 더 해야겠다. 그리고 나서 약하고는 이제 안녕이다. 스워니는 행방불명이고 시커는 교도소에 있다. 남은 것은 레이미뿐이다. 나는 복도에 있는 공중전화로 놈을 불러냈다. 다이얼을 돌리는데 누군가 날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갑작스러운 접촉에 순간 흠칫했지만 뒤돌아보고 누군가 확인해볼 마음도 들지 않았다. 새로운 이웃들과 어울릴 필요성이 생기기 전에 이런 곳에서 어서 빠져나가고 싶을 따름이다. 그런 쓰레기들은 날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놈은 아무도 없다. 있다면 레이미뿐이다. 전화기에서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그녀는 코를 훌쩍이다. 여름 감기일까 아니면 헤로인 중독 증세일까? "레이미 거기 있어요? 마크인데요." 레이미가 내 이야기를 이 여자에게 해뒀는지 난 그 여자가 누군지 몰랐지만 상대방은 날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금세 싸늘해졌다. "레이미는 여기 없어요, 런던에 갔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런던이오? 제기랄,,,,,, 언제 온대요?" "몰라요." "나한테 뭐 남긴 거 없어요?" 그런 일은 절대로 없겠지. 망할 놈. "음, 없어요,,,,,, ." 나는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내려놨다. 남은 건 양자택일밖에 없다. 첫째, 꾹 참고 방으로 되돌아온다. 둘째, 포레스터 놈에게 전화를 걸고 무어하우스에 가서 실컷 욕을 먹고 질나쁜 헤로인을 바가지 쓴다. 비교할 여지도 없다. 20분이면 충분하잖은가. "무어하우스요." 32번 버스 운전사에게 확인하고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45펜스를 요금함 속에 쑤셔넣었다. 폭풍우가 칠 때면 아무리 거지 같은 항구라도 천국이다. 그리고 폭풍우는 이미 나의 얼굴을 사정없이 강타하고 있다. 버스 안쪽으로 들어가려 했더니 웬 할망구가 더러운 물건이라도 보듯이 나를 노려봤다. 틀림없이 지금 내 꼴은 말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난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나한테 나 자신과 마이크 포레스터 그리고 우리 둘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까마득하게 먼 거리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거리는 이 버스에 의해 조금씩 좁혀지고 있다. 나는 아래층의 뒷자리에 앉았다. 버스는 거의 텅 비어 있었다. 거너편 좌석에는 어떤 젊은 여자가 소니 워크맨을 들고 있었다. 예쁘냐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워크맨이란 혼자서만 듣게 돼 있는 물건이지만 음악 소리가 나한테까지 똑똑하게 들렸다. 데이빗 보위의 노래,,,,,, (골든 이어즈) 였다. 살아 있어 봤자 별수없다고 말하지 마. 에인젤,,,,,, 하늘을 쳐다봐, 인생은 지금 막 시작됐잖아, 밤은 따스하고 낮은 흥청거리는데,,,,,, 난 이때까지 보위가 만들었던 모든 앨범을 갖고 있다. 한 장도 빠잠없이. 해적판이고 뭐고 산더미처럼 사들였다. 그런데도 난 보위나 그의 음악 따윈 지금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 내 머릿속엔 마이크 포레스터, 아무 앨범도 만들지 않은 그 못생기고 재주 없는 자식 생각 뿐이다. 싱글 하나 내지 않았지만 마이키 베이비 (포레스터의 애칭)가 지금 이 순간만은 나의 모든 것이다. 물론 다른 자식의 말을 표절한 것이겠지만 언젠가 식보이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이 순간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내 생각으로는 초콜릿 광고에 나왔던 어떤 논팽이가 오리지널인 것 같다) 하지만 그 말의 원래의 의미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기껏해야 내 의식의 변두리에서 맴돌고 있을 뿐이다. 순간이란, 병자인 나와 치유자인 마이키다. 웬 노파가 - 늙은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이 시간대에는 언제나 버스에 타고 있다 - 운전사를 붙들고 주절대고 있다. 그 할망구는 버스 번호, 노선, 시간표에 대한 시시껄렁한 질문을 끝도 없이 늘어 놓고 있었다. 탈려면 타고 말려면 마, 이 빌어먹을 할망구! 나는 남을 아랑곳하지 않는 그녀의 쪼잔함과 버스 운전사의 줏대 없는 너그러움에 숨이 막힐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사람들은 요즘 젊은 애들은 버릇이 없다느니 공공 시설물을 예사로 파괴한다느니 하고 떠들어대지만 이런 늙은이들이 자행하는 정신적인 파괴 행위는 어떤가? 드디어 그 할망구는 차를 탔지만 아직도 뭔가 중얼중얼 지껄여대고 있었다. 노파는 내 바로 앞좌석에 앉았다. 나는 노파의 뒤통수에 시선을 집중했다. 뇌출혈이나 심장 발작이라도 일으켜 쓰려졌으면 좋겠다,,,,,, 안 돼. 난 중간에서 생각을 멈췄다. 정말로 그렇게 됐다간 더 늦어지잖아. 내가 겪었던 괴로움을 그 할망구가 보상하려면 느리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아야 한다. 만약 이 노파가 갑자기 죽어버리면 사람들에게 법석을 떨 건덕지를 줄 뿐이다. 사람들은 그럴 구실만 있으면 오만 법석을 다 피우는 법이니까. 맞아, 암세포라면 확실히 그 일을 해내겠지. 난 노파의 몸 속에서 악성 암세포가 자라서 퍼지기를 빌었다. 세포가 퍼져가는 것을 느끼기조차 했다. 하지만 암세포가 퍼지고 있는 곳은 노파의 몸 속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몸 속이었다. 이제 기진맥진해져서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못하겠다. 그 할망구에 대한 증오도 사라졌다. 지금 내가 유일하게 느끼는 건 완전한 무감각이다. 노파는 이제 '순간' 밖에 있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따금 버스의 흔들림 때문에 머리가 목에서 뚝 떨어져 내 앞에 있는 성질 못된 노파의 무릎 위로 날아갈 것처럼 홱 젖혀졌다. 나는 무릎 위에 팔꿈치를 괴고 머리를 단단히 잡았다. 이제 이러다간 정류장을 지나쳐버리겠지. 안 돼.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나는 쇼핑센터 맞은편 페니웰 로드에 내렸다. 나는 분리대를 뛰어넘어 쇼핑센터로 달려갔다. 한 번도 점포가 들어선 적이 없는 강철 셔티가 굳게 내려진 상가를 지나 차가 한대도 주차한 적이 없는 주차장을 가로질렸다. 상가가 들어선 이래 그런 일은 없었다. 벌써 20년도 넘었다. 포레스터의 메조네트 (공통 주택 - 역주)는 무어하우스에서 비교적 큰 축에 속한다. 이 주변은 대개 건물이 2층짜리지만 녀석이 사는 건물은 5층짜리여서 덕분에 엘리베이터까지 있다. 하지만 작동되지는 않는다. 나는 체력을 아끼기 위해 벽을 짚어가며 기어오르듯이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경련, 통증, 식은땀, 거기에 중추신경이 거의 완전히 붕괴 상태에 이른데다가 장마저 풀가동되기 시작했다. 몸 안의 가스가 이동하는 불쾌한 느낌, 그토록 길었던 변비의 불길한 해동 조짐. 나는 포레스터의 문 앞에서 평정을 잃지 않으려고 인간힘을 썼다. 그렇지만 그는 내가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헤로인 중독자였던 마약상이라면 금단 증상에 시달리는 사람 정도는 언제나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난 단지 그놈에게 나의 상태가 얼마나 절박한지 숨기고 싶을 뿐이었다. 포레스터에게 내가 필요한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나는 어떠한 개수작이나 모욕도 참을 수 있지만 필요 이상으로 이쪽의 상태를 광고하고 다닐 필요는 없잖은가. 포레스터는 쇠창살이 쳐진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나의 붉은 머리를 분명히 봤을 것이다. 하지만 놈은 한참을 기다리게 한 뒤 겨우 문을 열어줬다. 그 새끼는 내가 자기 집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벌써 나를 물먹이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엔 따스함이란 한 올도 느껴지지 않았다. "잘 있었냐, 렌츠?" "그저 그래, 마이크." 그는 날 '마크' 라고 부르는 대신 '렌츠' 라고 불렀고 나는 그를 '포리' 라고 하는 대신 '마이크' 라고 불렀다. 칼자루를 쥔 건 녀석 쪽이다. 이 경우, 비위를 맞춰주는 것이 최선일까? 일단은 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더니 "들어와," 하고 말했다. 나는 고분고분 그 녀석의 뒤를 따라갔다. 소파에는 다리가 부러진 뚱뚱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여자 옆에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았다. 깁스를 한 다리를 커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있었는데 핑크빛 팬티와 더러운 깁스 사이에 팅팅 불은 허연 피부가 흉직한 몰골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그녀의 젖가슴은 거대한 기네스 맥주 피처 위에 걸쳐져 있었고 속옷 같은 갈색 상의는 터질 듯한 하얀 비곗살을 조이고 있었다. 게다가 뿌리 근처에서 탁한 회갈색이 보이는 탈색한 땋은 머리는 기름이 잔뜩 끼여 있었다. 그 여자는 나의 존재를 의식하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도 않고 포레스터의 바보 같은 놈담에 마치 당나귀 울음소리를 연상시키는 끔찍한 웃음으로 도리어 나를 민망하게 만들었다. 녀석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보나마나 내 몰골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포레스터는 내 맞은편의 낡아빠진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빈약한 체격이지만 얼굴은 피둥피둥했고 이제 겨우 스물다섯인데도 머리가 거의 완전히 벗겨졌다. 지난 2년 동안 갑자기 녀석의 머리카락이 엄청나게 빠져버려 난 그가 에이즈 바이러스에라도 감염된 게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일찍 죽는 것은 착한 사람뿐이라고 하니까. 다른 때 같으면 난 신랄한 응수를 했을 테지만 지금은 차라리 우리 할머니의 인공 항문에 연결된 똥 주머니를 비우는 쪽을 택할 것이다. 어쨌든 마이키는 내 구세주가 아닌가. 마이키 옆의 다른 의자에는 성질이 고약하게 생긴 녀석이 앉아 있었다. 그 녀석의 눈길은 그 퉁퉁 불은 암퇘지 같은 여자에게, 아니 그녀가 피우고 있는 아마추어가 만 듯한 마리화나에 가 있었다. 그녀는 연극배우같이 야단스럽게 한 모금 들이마시고는 고약하게 생긴 남자에게 넘겨줬다. 나는 이렇게 악사빠른 쥐새끼 같은 얼굴에 죽은 곤충 같은 눈을 한 녀석들이 제일 싫다. 그렇게 생긴 녀석들이 모두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녀석 옷차림이 그의 정체를 말해주고 있었다. 평범한 녀석은 아니다. 그는 분명 원저 그룹 호탤들, 즉 소튼, 바 엘, 퍼스, 피터헤드 교도소 중 한 곳에서 있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들어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짙은 감색 나팔바지, 검은 구두에 파란 줄이 칼라와 손목에 들어간 겨자색 폴로 셔츠를 입고 있었고 의자 등받이에는 녹색 파카 (이런 한여름에!)가 걸려 있었다. 자기 소개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둥근 얼굴을 한 나의 우상, 마이크 포레스터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그는 자신이 지배자라는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고압적인 위세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밤늦게까지 자지 않으려는 아이처럼 끊임없이 떠들어대고 있다. 미스터 패션, 내가 조니 소튼이라고 이름 붙인 녀석은 아무 말도 안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띠고 있다가 가끔씩 거짓으로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치켜떴다. 녀석은 육식동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뚱뚱한 암퇘지는 - 맙소사 그녀는 정말로 그로테스크하다 - 때때로 당나귀처럼 웃어댔고 난 나대로 적절한 타이밍에서 비굴한 웃음소리를 억지로 짜냈다. 그의 개 같은 소리를 얼마 동안 듣고 있자니 괴롭고 토할 것 같아서 할 수 없이 그들의 대화에 끼여들었다. 나의 무언의 신호는 경멸적으로 무시당한 까닭에 나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끼여들어서 미안한데 사업 이야기를 좀 해도 좋을까? 마이키, 약은 있겠지?" 뜻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포레스터가 지금까지 취하고 있던 고자세를 아무리 관대히 봐준다해도 이건 너무 지나치다. "입 닥쳐, 이 새꺄! 내가 말해도 좋다고 할 때까지 아가리 닫고 있어. 우리랑 같이 있는 게 마음에 안 들면 꺼지면 되는 거야. 알았으면 더 이상 궁시렁대지 마." "아냐, 기분 나쁘게 할 작정은 아니었어." 나는 무조건 항복하고 들어갔다. 뭐니뭐니해도 이 녀석은 현재 나에게는 하느님이나 다름없다. 나는 이 녀석의 똥으로 이빨을 닦기위해 유리 조각이 깔린 길을 네 발로 박박 기어서 천 마일을 오르라고해도 그대로 따를 것이다. 이 녀석도 나도 둘 다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이 (마이키 포레스터라는 강철 같은 사나이의 미케팅 )이란 이름의 게임에서 나란 존재는 기껏해야 장기의 졸에 불과하다. 마이키를 알고 있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코미디처럼 보일 정도로 엉성하기 짝이 없는 컨셉트에 기초한 게임이다. 게다가 이것은 조니 소튼에게 보이기 위한 게임이란 것도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알 게 뭐야? 이건 마이크의 게임이고 내가 그의 전화번호를 돌렸을 때 난 자진해서 조롱당하는 역할을 떠맡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 후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 동안 나는 그보다 더 지독한 굴욕을 견뎌냈다. 그렇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는 이 세상의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약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미워하지 않으며(약을 구 하는 걸 방해하는 자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약을 살 수 없는 상황을 제외하고). 빌어먹을 포레스터 같은 자식들은, 약을 팔 생각이 없으면 절대로 나를 이토록 못살게 굴 리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나를 싫어하는 이유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흐뭇한 자기 만족에 빠진다. 옛날에 마이크는 자기를 경멸하던 여자에게 반한 적이 있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난 그 여자를 데리고 잤다. 그 사건은 나난 그 여자에게나 별 의미가 없었지만 마이크는 극도로 화를 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해봤겠지만 손에 넣지 못하는 것일수록 더 갖고 싶은 법이고, 별로 갖고 싶지 않은 것일수록 '자, 제발 잡수세요' 하고 쟁반에 담아 갖다바치는 법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섹스만이 예외일 수는 없다. 나 역시 갖고 싶은 걸 끝내 못 가진 경험이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경험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생긴 대로 노는, 심통맞은 살찐 다람쥐 같은 자식은 사소한 원한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는 것이다. 그래도 난 그를 사랑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는 약을 갖고 있으니까. 마이키는 나에게 창피를 주는 게임에 슬슬 전력이 났다. 이런 일방적인 게임은 새디스트에게는 플라스틱 인형에 핀을 꽃는 것만큼이나 시시한 거니까. 나 역시 일부러라도 좀더 그를 즐겁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의 멍청하다고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말에 일일이 반응을 나타낼 기력도 더 이상 없었다. 그가 마침내 말했다. "쇠 있냐?" 나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혀진 지폐를 몇 장 꺼냈다. 그리고 커피 테이블 위에 놓고 비굴하게 구겨진 돈을 편 류, '보스' 인 마이키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며 공손하게 현찰을 바쳤다. 그때야 비로소 나는 돼지 상판을 한 여자의 깁스에, 굵은 매직으로 허벅지 안쪽에서 사타구니 쪽으로 커다란 화살표가 그려진 것을봤다. 그 옆을 따라 대문자로 '여기에 삽입하시오' 라고 적혀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난 창자가 뒤집히는 것 같았다. 있는 힘을 다해 마이키의 손에서 약을 빼앗아 이런 녀석들과는 이제 영영 작별을 고하고 싶다는 충동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이키는 내 손에서 돈을 낚아채더니 주머니에서 어이없게도 두 개의 캡슐을 꺼냈다. 나는 이런 걸 본 적이 없었다. 밀랍 같은 코팅이 되어 있는 미사일 모양의 단단한 캡슐이었다. 갑자기 격렬한 분모가 어디서인지 모르게 치밀어올랐다. 아니, 어디에서인지 모르는 게 아니다. 이런 분노의 감정은 헤로인에서 오는 것이거나, 아니면 헤로인이 끊어질지 모른다는 공포심에서 오는 것이다. '뭐야, 이건? "아편이야. 아편 좌약." 마이키의 어조가 싹 바뀌었다. 조심스럽게 거의 변명하는 듯한 어조엿다. 나의 분노는 폭발했고 우리의 병적인 공생 관계는 박살이났다. "이걸 갖고 대체 날더러 뭐 하란 거야?" 라고 말한 순간 나도 모르게 거기에 대한 대답이 떠올라서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영국에서 엉덩이에 처넣으라는 말은 욕으로 쓰임 - 역주 ). 마이키는 코너에서 빠져나왔다. "진짜로 내가 말해줘야 하겠냐?" 조금 전까지의 기새가 되살아난 마이키가 빈정거리며 물었다. 소튼이 옆에서 비웃고 있었고 암퇘지는 또 당나귀같이 웃었다. 하지만 내가 조금도 재미있어하지 않자 마이키는 말을 이었다, "꼭 헤로인이 아니더라도 괜찮잖아? 서서히 약효가 나면서 고통을 없애주고 약을 끊게 해주는 걸 찾고 있었지? 거기엔 이것 이상 좋은게 없어. 꼭 너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더군. 이 좌약은 장에서 흡수되어 서서히 약효가 나고 또 약효가 사라질 때도 서서히 사라지지. 병원에 있는 놈들도 이걸 사용하고 있더군." "잘 될 것 같냐?" "경험자에게 물어보지 그래?" 마이키는 씩 웃었으나 내가 아니라 소튼을 향해서였다. 암돼지는 기름이 줄줄 흐르는 머리를 뒤로 젖히며 커다랗고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나는 마이키가 하라는 대로 했다. 경험자의 말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화장실로 가 신중에 신중을 기해 좌약을 항문 속에 밀어넣었다. 항문에 손가락을 쑤셔넣는 일은 머리털 나고 처음 하는 일이었다. 희미한 메스꺼움이 올라왔다. 나는 거울을 봤다. 빨간 머리는 부석부석하고 땀에 절어 있었으며 창백한 얼굴은 끔찍한 여드름투성이였다. 그중에서 두 개가 특히 두드러졌다. 이건 종기로 분류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하나는 빰에 또 하나는 턱에 나 있었다. 암돼지와 내가 천생연분의 커플이 될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자, 우리 두 사람이 곤돌라를 타고 배네치아의 운하를 떠다니는 말도 안되는 그림이 떠올라서 우스워졌다. 몸은 괴로웠지만 약을 손에 넣은 까닭에 기분이 좋아져서 아래층으로 돌아왔다. "약효가 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유유히 거실로 들어온 나에게 포레스터가 불쑥 말했다. "있잖아, 그 동안 약이 나에게 해준 일들을 생각하면 그놈들을 내 똥구멍에 처넣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처음으로 조니 소튼을 웃겼다. 부어오른 입술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암퇘지는 내가 자기의 첫아기를 제물로 바치기 위해 죽이기라도 한 듯 날 바라봤다. 그녀의 고통스럽고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터져나올지경이었다. 마이키는 매우 상처받은 듯한, 이제 농담은 이만 끝내지 하는 표정을 지었는데, 내게 대한 지배력을 상실한 걸 깨닫고 체념한 듯한 모습이었다. 나에 대한 그의 지배력은 현금 거래가 끝난 순간 사라진 것이다. 놈은 쇼핑센터에 갈겨진 개똥이나 다름없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못하다. 자, 여기까지다. "어쨌든 다음에 또 보자고." 나는 소튼과 암퇘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를 띤 소튼은 온방 안을 휘저어 놓을 정도로 강렬한 윙크를 나에게 보냈다. 암퇘지의 얼굴에선 웃음이 가셨다. 나는 이 두 사람의 표정 변화가 마이크와 나 사이의 힘의 균형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진 증거라고 생각했다. 이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 마이키는 현관 밖까지 나를 배웅하러 나왔다. "음, 또 보자. 아까는 여러 가지 싫은 소리해서 미안해. 저 도넬리라는 자식,,,,,,. 녀석은 날 안절부절못하게 만든단 말야. 저놈은 사람 골치 아프게 하는 데는 일인자야.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지. 너무 나쁘게 생각하진 마, 마크." "나중에 보자, 포리." 그 자식이 진짜로 걱정하진 않더라도 약간 불안하게 만들 정도로 내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들리기를 바라며 말했다. 하지만 반 정도는 그놈을 좀 봐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냉정한 생각이지만 나는 다시 그를 필요로 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 만약 계속 이 따위로 생각하고 있으면 내가 이제까지 한 짓거리는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은가. 계단을 다 내려갔을 즈음에는 토하고 싶던 것도 싹 없어졌다. 몸의 이곳저곳 쑤시고 아프긴 하지만 견딜 만했다. 좌약이 벌써 효력을 내고 있다고 자신을 속이는 것도 바보스런 짓 같지만 적어도 심리적으로는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신경이 쓰이는 것은 장 속에 느껴지는 엄청난 흐름이다. 마치 뱃속이 녹는 것 같은 느낌이다. 벌써 닷샌가 엿새째 변을 보지 못했다. 이제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방귀가 나오더니 곧 맥박이 빨라지며 팬티 뒤에 축축한 덩어리가 느껴졌다. 나는 힘껏 제동을 걸었고 괄약근을 있는 대로 조였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만약 즉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더 끔찍한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나는 마이크의 아파트로 다시 갈까 생각해봤지만 당분간은 그녀석과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때마침 쇼핑센터에 있는 마권장 (경마장 밖에서 마권을 거래하는 장소 - 역주) 뒤편에 화장실이 있었던 게 생각났다. 나는 담배 연기 자욱한 가게에 들어가서 곧바로 화장실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이게 웬 개 같은 경우람. 두 남자가 화장실 입구에 선 채 거기서 직접 볼일을 보고 있었는데 화장실 바닥은 깊이가 족히 3센티미터는 될 고약한 냄새가 나는 썩은 오줌 연못을 이루고 있었다. 예전에 잘 다녔던 수영장에 있는 발 소독용 풀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둘은 통로에 선 채 페니스를 탈탈 털더니 코푼 손수건을 주머니 속에 도로 집어넣는 것처럼 바지 지퍼 안에 쑤셔넣었다. 한 녀석이 어쩐지 수상하다는 듯이 날 째려보더니 길을 가로막았다. "변소는 꽉 막혔어, 친구. 저기 앉아서 똥을 쌀 건가?" 그는 화장지와 똥 덩어리가 둥둥 떠다니는 갈색 액체가 가득 찬, 깔개도 없는 변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난 그를 엄숙하게 바라봤다. "이봐, 그래도 난 들어가야만 돼." "너 여기서 마약이라도 할 작정이냐?" 젠장, 지금 내가 무어하우스의 찰스 브론슨을 상대할 상황이냐? 다만 이 자식에 비하면 찰스 브론슨은 마이클 J. 폭스 정도밖에 안된다. 사실 녀석은 엘비스 프레슬리같이 생겼다. 땅속에서 썩고 있는 지금의 엘비스 말이다. 퉁퉁한 왕년의 불량 소년. "당장 비키지 못해." 나의 분노가 꽤 설득력이 있었는지 녀석이 진짜로 사과했다. "나쁜 뜻은 아니었네, 친구. 다만 이 근처 젊은 놈들이 여기를 마약하는 장소로 만들려고 해놔서 말야. 우린 그런 건 두고 못 보거든." "빌어먹을 새끼들." 하고 그의 친구가 거들었다. "이봐, 난 벌써 며칠 동안이나 똥을 못 싼 데다가 지금 설사 때문에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야. 급하단 말야. 저 화장실은 개도 안 들어갈 것같이 생겼지만 저기 아니면 난 바지에 싸야 한다고. 난 약같은 건 없어. 알코올만으로도 충분히 골치 아파, 다른 건 관심도 없다고." 자식은 안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길을 비켜줬다. 나는 문 안쪽으로 발을 들여놓은 순간 운동화에 오줌이 배어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까 약은 없다고 한 말이 생각나서 웃었다. 지금 내 팬티 속은 똥투성이가 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다만 한가지 다행스러 것은 적어도 문의 잠금쇠만은 멀쩡하다는 것이다. 변소의 지독한 상태를 생각해보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나는 팬티를 내리고 차갑고 축축한 변기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뱃속의 모든 것을 비우냈다. 큰창자, 작은창자, 밥통, 지라, 간, 콩팥, 염통, 허파, 그리고 뇌수까지 모조리 항문을 통해 변기에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똥을 싸는 동안 파리 떼들이 얼굴에 달라들어 등줄기가 오싹했다. 그중 한 놈을 잡으려 했다. 뜻밖에도 단번에 잡아버려 기분이 좋았다. 손 안에서 웅웅거리게 놔뒀다가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꽉 쥐었다. 손을 펴보니 커다랗고 더러운 왕파리였다. 거대하고 털이 잔뜩 난 건포도 같은 왕파리. 나는 그놈을 맞은편 벽에 짓이겼다. 파리의 내장과 파부와 피를 잉크 삼아 둘째 손가락으로 'H', 'I', 그리고 'B' 라고 썼다. 'S' 를 쓰려고 했지만 잉크가 떨어졌다. 그래서 잉크가 남아도는 'H'에서 빌려 'S' 를 마저 썼다. 나는 엉덩이 밑의 똥 구덩이 속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가능한 한 뒤로 물러앉아서 나의 작품을 감상했다. 성가셨던 왕파리가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근사한 예술 작품으로 둔갑한 것이다. 이것은 내 인생의 다른 면에도 해당되는 긍정적인 메타포가 아닐까하고 철학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가 저지른 일에 생각이 미쳤다. 충격이 온몸을 마비시켰다. 차가운 공포가 몸 속을 휘저었다. 나는 한순간 얼어붙은 듯이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하지만 단지 한순간뿐이었다. 나는 변기에서 미끄러지듯이 내려왔다. 철퍽, 바닥에 고여 있는 오줌이 무릎으로 큉겨졌다. 청바지가 바닥에 축 처져 오줌을 탐욕스럽게 흡수하고 있었지만 그런 것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셔츠의 소매를 걷어올리고 방금 내가 싼 똥과 때때로 고름이 베어나오는 팔의 주사자국을 보며 아주 잠깐 주저하다 똥물 속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나는 꼼꼼하게 변기 안을 휘저었고 곧 좌약 한 개를 찾아냈다. 약에 묻은 똥을 손가락으로 털어내고 살펴봤다. 약간 녹았지만 거의 무사했다. 나는 좌약을 물탱크 위에 붙여뒀다. 또 무어하우스에서 필튼 일대에 사는 온갖 잡놈들의 똥과 토약질 한 것을 한참 동안 휘젓고 나서야 나머지 한 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구역질이 나왔지만 어쨌든 하얀 보물 덩어리를 손에 넣었고 놀랍게도 먼젓번 것보다 상태가 더 좋았다. 똥보다도 오히려 오히려 물의 촉감이 더 기분 나빴다. 똥색으로 물든 팔은 반팔 티셔츠를 입고 일광욕을 한 것처럼 보였다. 오수관이 굽어 있는 곳까지 손을 뻗쳐야 했기 때문에 팔꿈치 훨씬 위까지 더러워져 있었다. 피부 위에 흐르는 똥물 때문에 불쾌해진 나는 세면대의 찬물로 팔을 씻었다. 완벽하고 꼼꼼하게 씻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참을 수 있을 정도는 됐다. 팬티의 깨끗한 부분으로 엉덩이를 닦고는 똥 범벅이 된 팬티를 변기 속의 다른 오물 곁에 처넣었다. 흠뻑 젖은 리바이스 청바지를 치켜올리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악취보다는 다리의 젖은 감촉 때문에 현기증이 났다. "빨랑 나와, 임마. 이러다 여기서 싸겠어!" "빌어먹을, 좀만 참아." 나는 좌약을 삼켜버릴까 하는 유혹을 느꼈지만 또 한번 생각한 후 그만뒀다. 원래 좌약이란 항문 속에 넣어야 효과가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게다가 밀랍 같은 것이 이렇게 끈적끈적 붙어 있으니 내려 보내기도 어렵다. 뱃속을 텅 비웠으니 이것들은 이제 안전하게 제자리에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두 놈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마권장을 나오려고 하자 사람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되지게 오래 있네' 하는 비난의 눈초리를 보내던 오줌 마려운 녀석들 뿐만이 아니라, 나의 형편없는 꼬락서니를 본 녀석들도 하나씩 둘씩 나를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그중 한 놈은 위협 섞인 말을 던졌지만, 다행히 다른 놈들은 마권의 신청서나 텔레비전의 경마 중계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나는 가게를 나오면서 텔레비젼을 향해 미친듯이 팔을 휘젓고 있는 밸비스 - 브론슨을 봤다. 버스 정류장에 와서야 비로소 찌는 듯한 더위를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오늘부터 에든버러 페스티벌이 시작된다고 말해준 게 생각났다. 글쎄, 적어도 날씨 하나는 끝내주는군. 나는 버스 정류장 옆의 담장에 앉아 청바지를 햇빛에 말렸다. 32번 버스가 오는 게 보였다. 난 버스에 올라타 햇살이 눈부신 리스로 향했다. 새 아파트로 가는 계단을 올라가며 이제 정말 안팎으로 깨긋한 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4. 가슴속의 블랙홀: 식보이의 이야기 항문이 정액으로 꽉 찬 나의 친애하는 렌트 보이가 제발 시시한 잠꼬대를 내 귓가에서 지껄여대는 걸 이제 그만둬줬으면 좋겠다. 눈앞에 여자의 VPL (눈에 훤히 보이는 팬티 라인 - 역주)이 있는데 그걸 철저하게 음미하려면 나의 온 신경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좋아! 이제 됐다! 나는 지금 한계점에 도달해 있어 망할놈의 한계점에 도달해 있다고. 요 며칠간 호르몬이 핀볼 머신의 쇠공처럼 몸 안을 휘젓고 다니고 온갖 빛과 소리가 머릿속에서 번쩍번쩍한단 말야. 그리고 이렇게 헌팅하기 딱 좋은 날씨에 렌츠가 날 보고 어디로 가자고 했는 줄 알아? 그 자식은 뻔뻔스럽게도 술과 썩은 정액과 몇주 전에 버렸어야 할 쓰레기 남새가 진동하는 자기 방에 들어가서 비디오를 보자는 거야. 커튼을 쳐서 햇빛과 뇌파를 차단하고 난 후, 마리화나를 한 손에 든 채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무거나 보고 바보처럼 실실 쪼개는 꼴이란. 농 농 농, 무슈 렌튼, 사이먼은 캄캄한 방 안에 틀어박혀 리스의 천민들과 정키들이 마구 지껄여대는 개소리를 오후 내내 듣는 데는 익숙하지 않단다. 왜냐하면, 베이비 난 너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고, 넌 나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어,,,,,, 젠장. 웬 뚱뚱한 여자가 나와 VPL 사이로 파고들어 왔다. 그 엄청난 화장실 덕분에 VPL의 황홀한 히프선이 가려졌다. 세상에 그렇게 거대한 엉덩이를 갖고 어떻게 그런 타이트한 레깅스를 입을생각을 했는지,,,,,, 이건 사이먼의 섬세한 비위를 완전히 무시한 시각적 폭력이다!! "야, 저기 잘빠진 영계가 하나 지나간다!" 하고 내가 빈정거리니까, "시꺼, 이 성차별주의자 섀끼 (원래는 여성의 성기를 뜻하는 비어이지만 여기서는 사람들에 대한 욕으로 쓰임 - 역주)야," 하고 렌츠가 말했다. 난 그 개자식을 무시하고 싶었다. 자고로 친구란 족속들은 빌어먹을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그들은 언제나 나의 사회적, 성적 그리고 지적인 수준을 열등한 자기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고 한다. 그래도 이 먹통이 행여 자기가 나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기를 죽여놓을 필요가 있었다. "네가 '컨트' 라는 말과 '성차별주의자' 라는 말을 동시에 쓴다는 사실 자체가 너라고 하는 녀석이, 하긴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도 만찬가지지만, 성차별에 관해 마구잡이식이고 뒤죽박죽인 견해밖에 갖고 있지 않다는 걸 폭로하고 있는 거야." 녀석은 한방 맞았다. 무슨 말로 되받아칠까, 그는 우물쭈물하며 상황을 만회하려고 무리하게 예쓰고 있다. 렌트 보이 대 사이먼, 0 대 1. 녀석이라고 모를 리 없다. 렌튼, 렌튼, 지금 몇 대 몇이지? 다리는 여자들의 몸무게로 금방 무너져내릴 것 같았다. 우, 울랄라, 춤을 춰요, 우, 울랄라, 사이먼 댄싱,,,,,, 눈 앞에는 모든 민족, 피부색, 종교, 국가의 여자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오 예, 좋았어! 자, 기회가 왔다. 동양계 여자 둘이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다. 사이먼은 달려간다. 이건 좋은 건수인데. 렌츠 같은 건 엿이나 먹으라지, 그 바보 같은 자식은 미국 여자밖에 좋아하지 않는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어디로 가시는 길이죠?" 나는 물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스코틀랜드식 친절이다, 그럼, 여자를 꼬시는 데 그보다 더 나은 건 없지, 젊은 숀 코너리, 새로운 본드가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아가씨들, 이것은 새로운 본드 에이지니까,,,,,, "우린 로열 마일을 찾고 있어요." 그녀는 상류 계급 잉글랜드 식민주의자의 악센트로 대답했다. 뭐 이런 얍삽한 팬티들이 있나. 사이먼 가라사대, 손을 발에 갖다대,,,,,, . 당연히 렌트 보이는 이렇게 많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이다 보니까 삶은 가지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가끔 난 이 녀석이, 발기란 높은 담장 너머로 오줌을 갈기기 위해서 일어난다고 믿고 있지 않나하고 생각한다. "절 따라오시죠. 연극 보러 가는 길인가요?" 지금 여기서 아무리 꼬시려고 해봤자 패스티벌의 매력엔 당할 수 없지. "네," 하고 인형 중의 하나가 나에게 '브레히트: 코커서스 백묵원 - 노팅엄 대학 연극부' 라고 쓰여 있는 전단을 건네줬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여드름투성이에 째지는 목소리를 가진 얼간이들이 졸업하기 전에 예술가인 척하면서 거들먹거리는 짓거리일 거다. 졸업만 하면 마을 어린이들을 백혈병에 걸리게 하는 원자력 발전소나, 공장을 폐쇄시켜 노동자들을 빈곤과 절망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리는 컨설팅 회사에 취직할 자식들이다. 하지만 우선 연극 무대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와야만 하겠지. 버러지 같은 놈들이야. 나의 오랜 친구이자 우유 배달부였던 숀, 내말이 맞지? 암, 사이먼, 자네가 말한 그대로야. 숀과 나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둘 다 에든버러 출신이고 둘 다 우유 배달 소년이었다. 나는 리스 일대만 돌았지만 숀이 말한 대로하면 그는 에든버러 시내의 모든 집에 우유를 배달했다. 당시의 근로기준법은 지금보다 미성년자 노동에 너그러웠을 것이다. 우리가 다른 점은 생김새이다. 생긴 거라면 숀도 사이먼에게는 상대도 안 된다. 저런, 렌츠가 지금 '갈릴레오' 라든지 '마더 커리지' 가 어쩌고 '바알' 은 뭐고 하면서 주접떨고 있잖아. 저년들이 거기에 넘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젠장 이거 한대 얻어맞았는걸. 이 멍청한 자식도 쓸모가 있었구나. 세상엔 정말 놀라운 일이 많이 일어나는구먼. 그래, 사이먼. 아는 게 많을수록 믿는 게 적어진다잖아. 응, 우리 둘 다 마찬가지야, 숀. 그 동양 계집들은 연극을 구경하러 가버렸지만 나중에 디콘의 클럽에서 보자는 약속을 받아냈다. 렌츠는 못 온다고 했다. 훌쩍 훌쩍. 난 오늘 밤 슬퍼서 잠도 못 잘 거야. 그는 모가돈 양, 귀여운 헤이즐을 만난단다,,,,,, 그럼 난 양손에 꽃이로구나,,,,,, 만약 내가 약속 장속에 가기로 마음먹는다면 말이다. 난 바쁜 몸이라고. 하지만 사람은 자기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겠지. 안 그런가, 숀? 그렇고말고, 사이먼. 나는 렌츠를 떼어놓았다. 이제 녀석이 돌아가서 약을 하다 죽어도 알 바 아니다. 도대체 친구란 놈들은 하나같이 모두 한심한 것들뿐이다. 스퍼드, 세컨드 프라이즈,, 백비, 메티, 토미 - 모두 이마에 '정- 박- 아 ' 라고 써붙이고 다니는 녀석들이다. 모두 지독한 먹통들이다. 이런 겁쟁이에 마약중독자에 희망도 없고 막가는 인생의 낙오자들에게 이제 신물이 난다. 나는 에너지가 넘치는 젊은이다. 사회적 성공을 지향하며 추진력이 강하고, 추진력이 강하고, 추진력이 강하고,,,,,, . 사회주의자들은 동지라든지 계급이라든지 노동조합이니 사회가 어쩌고 하면서 끝없이 떠들어댄다. 모두 씨알도 안 먹힐 소리다. 보수당원들은 고용주라든지, 국가라든지, 가족이 어쩌고 하면서 떠들어댄다. 그건 더 씨알도 안 먹힐 소리다. 이것은 나, 여기 있는 바로 나, 사이먼 데이비드 윌리엄슨, 빌어먹을 누메로 우노(넘버원) 전세계의 투쟁이다. 그리고 일방적인 싸움이다. 이건 정말 개같이 쉬운 싸움이다,,,,,, . 모두 엿이나 먹어라. 난 자네의 제멋대로의 개인주의에 경의를 표하네, 사이먼, 마치 나의 젊었을 때의 모습을보는 것 같군 그래. 말해줘서 고맙네, 숀.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말을 했지. 윽,,,,,,웬 여드름쟁이가 하츠의 스카프를 매고 있잖아,,,,,, 맞아, 오늘 놈들의 홈 경기가 있지. 참상이군. 이건 완전히 난반패션주의자야 하고 광고하고 다니는 꼴이네. 내 남동생이 하츠 스카프를 매고 돌아다니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여동생이 창녀촌으로 걸어들어가는 걸 보는 게 낫겠다. 씨, 정말이라고,,,,,,어이쿠, 또 여자 레슬러가 지나간다,,,,,, 배낭족인가, 잘 태웠군,,,,,, 음,,,,,, 빨고, 박고, 빨고, 박고, ,,,,,, 모두 나락에 떨어진다,,,,,, . ,,,,,, 어디로 갈까 ,,,,,, 체육관에서 땀이나 뺄까, 사우나와 일광욕 기계가 들어왔다는데 ,,,,,, 근육이나 좀 키워 봐?,,,,,, 헤로인 때문에 손이 부들부들 떨리던 일은 이제 찜찜한 기역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 아가씨들, 말리안느, 안드리아, 알리,,,,,, 오늘 밤은 어떤 애에게 나와 동참할 수 있는 행운을 안겨줄까? 누가 가장 명기일까? 그야 물론 나지. 어쩌면 클럽에서 누군가 만날지도 몰라. 그 활기란 놀라울 정도다. 거기에는 세 가지 분류의 그룹이 있는데, 여자들, 스트레이트 남자들, 그리고 게이 남자들이다. 게이 남자들은 우람한 알통에 맥주를 걸판지게 마시는 나이트클럽 어깨 타입의 스트레이트 남자들을 낚으러 다닌다. 스트레이트 남자들은 여자들을 낚으러 다니고, 여자들은 날렵하고 얄상한 게이 남자들에게 정신이 팔려 있다. 결국 어느 놈도 원하는 걸 손에 넣지 못하고 만다. 나 빼고는, 안 그래 숀? 그렇고 말고, 사이먼. 저번에 갔을 때 날 헌팅하려고 했던 게이 자식을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놈은 카페테리아에서 자기가 에이즈 양성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매일 즐겁게 산댔다. 뭐 사형선고를 받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렇게 기분좋게 지내는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자식이길래 생판 남에게 그딴 얘길 지껄여? 십중팔구는 헛소리일 거다. 지저분한 게이 놈 ,,,,,, 그리고 보니 생각이 나네, 콘돔을 사둬야겠다 ,,,,,, 그렇지만 에든버러에서 여자와 자는 정도로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될 리는 없다. 곡시란 녀석이 여자한테 에이즈가 옮았다고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마약 주사 때문이거나 남몰래 어느 녀석의 엉덩이를 갖다박고서 그렇게 됐을 거다. 만약 렌튼, 스퍼드, 스워니나 시커 같은 녀석들과 같은 주사 바늘을 쓰고서도 무사하다면 뭔 짓을 해도 에이즈에 걸릴 리는 없다. 그렇지만,,,,,, 운명을 하늘에 맡겨서야 안 되지 ,,,,,,. 그렇지만 그런들 또 어때 ,,,,,, 적어도 여자들과 섹스를 할 수 있고 그녀들의 지갑에서 돈을 꺼낼 수 있는 한 나는 여기 있을 거고 꿋굿하게 살아 있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는데. 그래, 그것뿐이야. 그것밖에 없어. 다른건 아무래도 좋아. 다른 걸론 나의 이 빌어먹을 가슴팎 한가운데에 쑤셔넣은 주먹 같은, 커다란 블렉홀을 메꿀 수 없어. 5. 사춘기가 끝날 무렵: 니나의 이야기 엄마가 발산하고 있는 착각의 여지가 없는 노여움에도 불구하고 니나는 도대체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엄마가 보내고 있는 신호는 햇갈리는 것이었다. 첫 번째 신호는 '방해되지 않게 얌전히 있어' 였다. 그리고 나서는 '거기 서 있기만 할 거냐' 라고 신호를 보냈다. 앨리스 외숙모 주위로는 떼거지로 몰려온 친척들이 벽을 이루고 서 있었다. 니나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는 앨리스 숙모를 볼 수 없었지만 방 건너편에서 들리는 나직하게 위로하는 소리로 미루어볼 때 외숙모가 그 근처 어딘가에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엄마는 니나를 노려봤다. 히드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머리가 아홉인 뱀 - 역주)의 머리 중 하나처럼 보인다. 저쪽에서는 '자' '자' 앨리스,' 라든지 '진짜 좋은 사람이었는데,' 하는 판에 박힌 말들이 들렸다. 니나는 엄마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 홍차. 그녀는 신호를 무시하려 했지만 엄마의 눈초리는 집요하게 집중포화를 퍼붓고 있다 차 - 좀 더 가져오라니까. 니나는 읽고 있던 (뉴무지컬 익스프레스) 지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안락의자에서 일어나 커다란 식탁으로 가서 차 주전자와 거의 비어 있는 우유통이 놓여 있는 쟁반을 집어들었다. 부엌에 걸려 있는 거울을 봤다. 윗입술 옆에 돋아난 여드름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검은 단발머리는 바로 어젯밤 감았는데도 벌써 기름이 꼈다. 배를 슬쩍 문질러보니 물이 고인 것처럼 느껴졌다. 생리가 시작될 징조다. 우울해진다. 니나는 이 이상야릇한 비탄의 향연에는 낄 수가 없었다. 이런 건 정말 쿨하지 못하다. 앤디 삼촌의 죽음에 그녀가 보여준 캐주얼한 무심함은 일부러 꾸민 태도가 아니었다. 어릴 적 니나는 친척 들 둥에서 앤디 삼촌을 가장 잘 따랐고 외삼촌은 그녀를 잘 데리고 놀았었다. 적어도 친척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그녀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실제 있었던 일이었다. 놈담, 간지르기, 게임, 끝도 없이 안겨주던 아이스크림과 과자. 그렇지만 지금의 자신과 그때의 자신 사이에 감정적인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앤디 삼촌에 대해서도 감정적으로 연결이 안 된다. 친척들이 자기의 어렸을 적 이야기를 회상하는 걸 듣자니까 창피해서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마치 지금의 자기를 본질적으로 부정하는 것 같았다. 아니, 더 나쁘다. 쿨하지 못한 일이다. 적어도 그녀는 지금 장례식에 가는 사람답게 옷을 입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귀찮게 참견했기 때문이다. 니나는 자기 친척들은 모두 지독하게 따분한 인간들이라고 생각했다. 하나같이 자기네들의 비참한 일생 동안 내내 세속적인 것에만 집착한다. 그것이 그들을 한테 묶어주는 음울한 접착제인 것이다. "저앤 검은 옷밖에 입지 않는군. 내가 젊었을 땐 여자애들은 흡혈귀처럼 보이려고 애쓰는 대신 밝고 예쁜 색 옷을 입었다고." 보압 삼촌, 뚱뚱하고 멍청한 보압 삼촌이 그렇게 말했다. 친척들은 큰소리로 웃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어리석고 비굴한 웃음이었다. 뭔가 재미있는 말을 들은 데 대한 의사 표시를 하려는 어른들의 웃음이라기보다 학교에서 강자의 편에 붙어 있으려고 하는 겁에 질린 아이의 쭈뻣뿌뻣한 웃음소리에 더 가까웠다. 니나는 비로소 그 웃음의 이면에는 유머 이상의 의미가 숨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긴장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 일치 단결해서 죽음의 신에 맞서기 위한 웃음이었다. 앤디의 죽음은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의 화젯거리 중 최우선적 위치에 떠올랐다. 주전자 뚜껑이 덜컥거리기 시작했다. 니나는 홍차를 타가지고 돌아왔다. "괜찮아, 앨리스. 걱정하지 말아요. 자, 니나가 홍차를 갖고 왔어." 아브릴 숙모가 말했다. 도대체 숙모는 PG팁스 홍차에 대해 무슨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하고 있는 거야 하고 생각했다. 홍차 한 잔이 24년 간 옆에 있던 사람을 잃은 외숙모에게 무슨 보상이 될 수 있을까? "심장에 문제가 있으면 정말 큰일이야," 하고 케니 삼촌이 말했다. "그래도 고통없이 갔으니 다행이야. 암으로 고통스러워 하며 천천히 죽어가는 것보단 낫지. 우리 아버지도 심장 때문에 돌아가셨지. 피츠 패트릭 집안의 저주인가 봐. 자네 할아버지 말야." 그는 니나의 사촌인 말콤을 보고 씩 웃었다. 비록 말콤은 케니의 조카였지만 그는 아저씨보다 겨우 네 살 어릴 뿐, 나이는 더 들어보였다. "언젠가는 심장병이나 암 같은 건 모두 과거의 이야기가 돼버릴날이 올 거야." 말콤이 대담하게 잘라 말했다. "그렇겠지, 의학은 점점 발달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엘사의 경과는 어때?" "또 수술을 받아야 될 것 같아. 난관 수술 말야. 그게 어떤 수술이나 하면,,,,,,. ." 니나는 방에서 뛰쳐나갔다. 말콤은 불임 치료를 위해 아내가 받는 수술에 대해 늘어놓을 작정인 것 같다. 수술에 대한 자세한 묘사를 듣고 있노라면 손가락 끝이 저릿저릿하다. 왜 사람들은 상대방이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단지 빽빽 우는 아이를 만들기 위해 그런 끔찍한 수술을 받는 여자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을까? 또 여자에게 그런 몹쓸 짓을 하도록 부추기는 남자는 어떤 자식일까? 그녀가 보도로 나갔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캐시 이모와 이모부인 데이비였다. 리스에서 보니리그로 온 것치고는 빨리 온 셈이다. 캐시는 니나를 끌러안았다. "오, 니나. 앨리스는 어디 있지?" 니나는 캐시 이모를 좋아했다. 그녀는 이모와 숙모들 중에는 가장 사교적인데다가 니나를 어린애 취급하지 않고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준다. 캐시는 안으로 들어가서 올케인 앨리스를 껴안았다. 그리고 니나의 엄마인 언니 아이린을 껴안았다. 그 다음에 남동생들인 케니와 보압을 차례로 껴안았다. 니나는 캐시가 끌어안는 순서를 보고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데이비는 방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과묵하게 꾸벅하고 인사를 했다. "맙소사, 자네 그 낡은 밴으로 온 것치곤 빨리 왔군, 데이비." 보압이 말했다. "아, 그건 우회도로 덕분이야. 포토벨라 바로 앞에서 우회로를 타고 보니리그로 들어오기 직전에 내리면 돼." 데이비가 고지식하게 자세히 설명해줬다.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이번에는 가족 주치의인 닥터 심이다. 닥터 심은 엄숙한 표정을 한 채 거만하고 사무적인 걸음걸이로 들어왔다. 상황에 어울리는 동정심을 보이면서도 유족들에게 신뢰감을 안겨주기 위해서인지 태도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심은 자신이 그 일을 휼륭히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니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흥분한 아줌마들이 록스타에 몰려드는 그루피(스타를 광적으로 쫓아다니는 여자들- 역주)처럼 그를 에워싸고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얼마 후, 보압, 케내, 캐시, 데이비 그리고 아이린은 닥터 심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그들이 방을 떠나자 니나는 생리가 시작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니나도 어른들을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넌 아래층에 가 있어!" 아이린이 뒤를 보며 딸을 야단쳤다. "난 그냥 화장실에 가는 길이야." 화가 난 니나가 말대꾸했다. 화장실 안에서 까만 레이스 장갑부터 시작해서 차례대로 옷을 벗었다. 피해 상황을 조사해보니 팬티는 버렸지만 다행히 검은 레킹스는 무사했다. 끈끈하고 검붉은 피가 화장실 카펫 위에 떨어졌다. "빌어먹을." 그녀는 그렇게 내뱉고는 화장지를 뜯어 피가 흘러내라는 것을 막았다. 그러고 나서 화장실 캐비닛을 뒤졌지만 탐폰이나 생리대는 찾을수 없었다. 앨리스가 벌써 폐경기가 올 때던가? 그럴지도 모르지. 화장지를 물에 적셔 카펫을 닦았더니 핏자국이 거의 사라졌다. 니나는 망설이다 샤워대로 들어갔다. 물을 끼얹은 후 그녀는 화장지로 패드를 만들고 얼른 옷을 입었다. 팬티는 세면대에서 빨아서 물기를 짠 후 재킷 주머니 속에 쑤셔넣었다. 윗입술 위의 여드름을 짜니까 훨씬 기분이 좋아졌다. 어른들이 방을 나와서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곳에 있으면 지루해죽겠어,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엄마에게 용돈을 받아낼 기회가 올 때까지는 참는 수밖에 없다. 오늘 밤은 쇼나와 트레이시와 함께 에든버러에 가서 칼튼 스튜디오에서 하는 라이브 공연을 보기로 했다. 생리중에 외출하는 건 반갑지 않았다. 남자애들은 여자애가 생리하고 있으면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냄새로 금방 안다고 쇼나가 말했기 때문이다. 쇼나는 남자 애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비록 니나보다 한 살이 어렸지만 벌써 두 번이나 경험이 있다. 한 번은 그레엄 레드파스와, 그리고 또 한번은 아비모어에서 만난 프랑스 소년과 자봤단다. 니나는 아직 남자와 사귄 적도 없고 자본 적도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여자애들이 그런 건 별 거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남자애들은 너무 멍청하고 까다로운데다 따분하고 흥분을 너무 잘 한다고 했다. 니나는 남자애들이 그녀에게 보이는 반응을 재미있어했다. 오히려 얼어버린 채 넋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애들은 보는 걸 좋아했다. 첫경험은 오래 사귀어서 잘 알고 있는 사람과 할 생각이었다. 연상이 좋겠지만 케니 삼촌 같은 사람은 사양하겠다. 삼촌은 마치 한 마리 개를 연상시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곤 했다. 핏발 선 눈에 입술 밖으로 슬쩍 삐져 나온 혓바닥. 케니 삼촌이 그렇게 나이가 맣은데도 불구하고 쇼나와 다른 친구들이 말하는 서툰 남자애들과 비슷하리라고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라이브에 가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집에서 텔레비전 보는 것 외엔 대안이 없었다. 그건 바로 엄마와 저 바보 같은 동생 녀석과 함께 (브루스 보사이스의 제너레이션 게임) 을 보게 되는 걸 의미한다. 동생은 상품이 컨베이어 밸트를 타고 나오면 흥분해 어쩔 줄 몰라하며 빠른 속도로 하나하나 그 이름들을 주워섬긴다. 째지는 듯한 이상한 목소리로 말이다. 그리고 엄마는 거실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할 것이다. 자기의 바보 같은 남자 친구인 두기가 그러는 건 가만히 놔두는 주제에.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암이나 심장병의 원인이 되어서 그런다기보다는 단순히 기분상의 이유에서 그러는 거니까. 다만 그렇게 되면 니나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2층으로 가야하는데 그것이 끔찍했다. 그녀의 방은 너무 춥다. 히터를 틀어도 방이 더워지려면 말보로 담배 20개피쯤 피우는 시간이 걸린다. 웃고 넘길 일이 아니다. 오늘밤은 라이브 클럽에 가서 기회를 만들 거다. 욕실을 나와서 니나는 앤디 삼촌을 보러 갔다. 삼촌의 시신은 담요가 덮인 채 침대 위에 놓여져 있다. 누군가 입을 다물게 해드렸구나, 하고 니나는 생각했다. 삼촌은 술에 취해서 축구나 정치에 관해 싸울 듯이 논쟁을 하다 그대로 얼어붙은 채 죽어버린 듯이 보였다. 삼촌의 몸은 말라서 나약해보였다. 하지만 살아 있을 때도 언제나 그랬다. 니나는 삼촌이 저 뼈마디가 굵은 손을 아무데서나 불쑥 내밀어 끈질기게 옆구리를 간지럽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마 앤디 삼촌은 그 무렵부터 벌써 죽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니나는 앨리스 숙모한테 혹시 빌릴 만한 팬티가 없나 서랍을 뒤지기로 했다. 앤디 삼촌의 양말과 팬티가 서랍장 맨 위 칸에 있었다. 앨리스의 속옷은 그 밑의 서랍에 있었다. 니나는 앨리스가 가진 다양한 속옷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거의 무릎까지 오는 거대한 팬티에서부터 숙모가 걸치고 있는 모습을 상상도 할 수 없는 야한 레이스 팬티에 이르기까지 오만 종류의 팬티가 다 있었다. 그중에서도 니나가 가진 검은 레이스 장갑과 같은 재질로 된 팬티가 눈에 띄었다. 장갑을 벗고 팬티를 만져봤다. 마음에 들었던 건 검은레이스 팬티였지만 그녀는 핑크색 꽃무늬 팬티를 골라 욕실로 돌아와서 입었다. 아래층에 내려오니까 분위기를 띄우는 윤활재로 술이 홍차를 몰아낸 후였다. 닥터 심은 한손에 위스키 잔을 들고 서서 캐니 삼촌과 보압 삼촌, 그리고 말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말콤이 난관에 관한 질문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남자들은 모두 술을 마시는 일이 중대한 의무라도 되는 양 비장한 결의를 품고 마시고 있었다. 모두 슬퍼하고 있었지만 안도의 분위기를 숨기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번이 앤디 삼촌의 세 번째 발작이었고 마침내 그는 죽었다. 이제부터는 앨리스에게 전화가 올 때마다 놀라서 허둥지둥하는 일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말콤의 동생인 또 다은 사촌, 제프가 왔다. 니나는 제프가 증오와 흡사한 감정이 담긴 눈길로 자신을 쳐다본다고 느꼈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이상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제프는 원래부터 싫은 녀석이었다. 다른 사촌들 역시 한결같았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범위 내에서 말이다. 캐시 이모와 데이비 이모부 (그는 글래스고 출신의 신도교였다) 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다. 첫째인 빌리는 제대한 지 얼마 안 됐고 마크는 약물중독자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 둘은 앤디 삼촌이나 다른 보니리그의 친척들과 거의 안면이 없었기 때문에 여기에는 오지 않았다. 아마 장례식 때에는 얼굴을 내밀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때도 오지 않을지 모른다. 캐시와 데이비에게는 사실 자식이 한 명 더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서 데이비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1년쯤 전에 죽었다.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심한 장애가 있어서 인생의 대부분을 병원에서 보냈었다. 니나는 그를 한 번밖에 만난 적이 없다. 뒤틀린 몸으로 휠체어에 앉아 입을 벌린 채 멍하게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데이비 주니어가 죽었을 때 캐시와 데이비의 심정이 어땠을까. 아마오늘처럼 슬프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겠지. 빌어먹을. 제프가 그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언젠가 쇼나는 그가 '웨트 웨트 웨트' 의 보컬 마티 펠로우를 닮았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니나는 마티도, 그가 속해 있던 웨드 3 그룹도 아주 싫어했지만 어쨌든 제프와는 닮은 구석이 없다고 생각했다. "잘 있었니, 니나?" "응, 앤디 삼촌은 참 안됐어." "그래, 하지만 할 수 없지, 뭐." 제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스물한 살이었고 니나에겐 엄청난 나이였다. "학교는 언제 졸업하지?" 그가 물었다. "내년에. 난 더 다니가 싫은데 엄마가 난리쳐서 그냥 다니기로 했어." "O 그레이드(고교의 과목별 수료 자격-역주) 딸 거니?" "응." "어느 과목에서?" "영어, 대수, 수학, 미술, 회계학, 물리, 현대 사회학." "합격할 거 같아?" "응, 수학 말고는 별로 어렵지 않아." "그러고 나선 뭐 할 거니?" "취직해야지. 아니면 직업 훈련이라도 받든지." "진학은 하지 않을 거야?" "안 해." "하는 게 좋을 텐데. 너라면 대학에 갈 수 있어." "가서 뭐 하게?" 제프는 말문이 막혔다. 얼마 전에 영문학 학위를 받고 졸업했는데도 실업 수당을 타는 신세다. 그의 동기생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대학은 재미난 곳이야." 그는 말했다. 니나는 그녀를 바라보던 제프의 눈빛에서 증오라고 느꼈던 감정이 사실은 욕정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눈치챘다. 그는 오기 전에 이미 한잔해서 자제력이 뚝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이제 제법 어른스러워졌구나, 니나." "응." 니나는 자기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의식하고 자신이 미워졌다. "여기서 나가는 게 어때? 너 펍에 들어갈 수 있지? 거기 가서 한잔하지 않을래?" 니나는 이 유혹을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 잠시 망설였다. 비록 제프가 대학이 어떠니 하는 소리를 계속한다 하더라도 여기서 그냥 이대로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둘이 같이 펍에 앉아 있으면 반드시 누군가의 눈에 띌 것이다. 여기는 보니리그니까 곧 소문이 퍼질 것이다. 쇼나와 트레이시가 들으면 그 검은 머리의 연상의 남자가 누군지 궁금해할 것이다. 이거 놓치기엔 너무 아까운 기회잖아. 어때 니나는 퍼뜩 장갑 생각을 했다. 깜빡 잊고 앤디 삼촌 방의 서랍장 위에 두고 와버렸다. "좋아, 가자. 하지만 잠깐 화장실에 갔다올께." 니나는 자리를 빠져나와 2층으로 올라갔다. 장갑은 서랍장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니나는 장갑을 재킷 주머니 속에 넣으려다 젖은 팬티가 들어 있길래 얼른 꺼내서 반대편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앤디 삼촌 쪽에 눈길이 갔다. 아까와는 뭔가 달라보였다. 그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삼촌의 몸이 조금 움직였다. 맙소사, 삼촌은 분명히 몸을 움직였다. 니나는 그의 손을 만져봤다. 따스했다. 니나는 정신없이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갔다. "앤디 삼촌이! 앤디 삼촌이 ,,,,, 빨리 와보세요 ,,,,,,. 삼촌이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아뇨,,,,,, ."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나를 쳐다봤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케니였다. 케니는 한 번에 세 계단씩 뛰어올라갔다. 그 뒤를 데이비와 닥터 심이 따라갔다. 앨리스는 입을 벌린 채 불안하게 몸을 떨고 있었지만 니나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이는 좋은 사람이었어,,,,,, 내개 손을 댄 적이 한 번도 ,,,,,," 그녀는 헛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뭔가에 끌리는 듯 모두의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케니가 형의 땀이 맺힌 이마를 짚고는 손을 잡아봤다. "열이 펄펄 나고 있잖아! 앤디는 죽지 않았어! 앤디는 살아 있어!" 닥터 심이 앤디를 진찰하려 했을 때 앨리스가 그를 밀쳐대고 완전히 속박에서 풀려난 것처럼 파자마를 입고 있는 남편의 따스한 몸에 메달렸다. "앤디! 앤디! 내 말 들려요?" 앤디의 머리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의 멍하니 얼어붙은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몸도 축 늘어진 채였다. 니나는 미친 사람처럼 킥킥거렸다. 사람들은 광폭한 정신병자라도 되는 양 앨리스를 붙들고 있었다, 닥터 심이 앤디를 진찰하는 동안 남자도 여자도 앨리스가 진정되도록 여르고 달랬다. "아닙니다. 유감이지만 피츠 패트릭 씨는 돌아가셨습니다. 심장이 멎어 있습니다." 닥터 심이 엄숙하게 말했다. 그는 물러서서 담요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허리를 굽히고 벽에서 플러그를 뽑은 다음 침대 밑에서 하얀 전기 코드 끝에 달려 있는 스위치를 꺼냈다. "누군가 전기 담요를 끄는 걸 잊었군요. 몸이 따뜻한 것도 땀을 흘린 것도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난 또, 깜짝 놀랐잖아." 케니가 웃었다. 그리고 제프가 노려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변명하듯 말했다. "틀림없이 앤디도 배가 아프게 웃고 있을 거야. 앤디의 유머 감각은 우리 모두 알고 있잖아." 그는 봐달라는 듯이 두 팔을 벌렸다. "이 나쁜 자식 ...... 앨리스 생각도 해줘야 되잖아 ......"제프는 분노를 가누지 못한 나머지 더듬거리며 내뱉었다. 그리고 방을 뛰쳐나갔다. "제프. 제프. 어이, 잠깐만 기다려...... ." 케니가 말리려 했지만 현관문이 쾅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니나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폭발한 것 같은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으려니 옆구리가 당겼다. 캐시가 니나의 어깨를 껴안고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아, 니나. 누구나 실수는 있는 법이야. 걱정하지 마." 순간 니나는 자신이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안에서 치밀어오르는 울음에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맡긴채 긴장이 풀리자 캐시의 품 안에서 축 늘어졌다. 추억, 달콤한 어린 시절의 추억이 그녀의 의식 속에서 밀려왔다. 이곳에 머물러 있었던 행복과 사랑, 앤디와 앨리스와 함께 나눴던 추억은 이제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FF 6.새해 첫날의 승리 : 스티비의 이야기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새꺄!" 프랑코가 스티비의 머리에 팔을 휘감으며 말했다. 스티비는 목근육이 찌ㅅ어지는 것 같았지만 남의 눈을 의식했기 때문에 자제력을 총동원해서 상대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애썼다. 스티비는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다정하게 답례의 인사를 했다. 그러고 나서 그곳에 모인 다른 사람들과도 새해 인사를 나눴다. 사람들은 그가 머뭇거리며 내민 손을 으스러질 정도로 꽉 쥐고 뻣뻣한 등짝을 철썩 때리며 꾹 다문 입술에 키스했다. 하지만 스티비의 머릿속에는 오직 전화와 런던과 스텔라뿐이었다. 스텔라는 아직 전화를 하지 않았다. 더 불길한 사실은 그가 전화를 걸었을 때 그녀가 집에 없었다는 점이다. 자기 어머니의 집에도 없었다. 스티비는 그녀를 사이에 두고 키스 밀라드와 경쟁하던 중에 에든비러로 돌아와버렸던 것이다. 이제 그 자식은 이때다 하고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겠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스텔라와 키스는 같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젯밤처럼. 키스 밀라드는 시시한 놈이었다. 스티비도 마찬가지다. 물론 스텔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건 나쁜 결합이다. 하지만 스티비의 눈에는 스텔라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으로 보였다. 그 점이 그녀를 좀 덜 시시하게 만들었다. 아니, 전혀 시시하지 않게 만들었다. "새꺄, 그렇게 뻣뻣하게 서 있지 마! 오늘은 염병할 설날이라고!" 프랑코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고 권한다기보다는 아예 명령을 내렸다. 그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원한다면 억지로 재미있게 놀아야 했다. 하지만 억지로 즐거운 척할 필요는 없었다. 무서울 정도로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 등진 세계와 다시 융화하는 건 스티비에겐 힘든 일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주목하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이 사람들은 누구야? 뭘 원하는 거야? 정답은 그들은 자기의 옛 친구였고 원하고 있는것은 바로 자기였다.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그의 의식 속으로 파고들자 가뜩이나 어두운 기분이 더 울적해졌다. 난 한 소녀를 사랑했네, 한 예쁘고 귀여운 소녀를, 그녀는 산골짝의 히스꽃처럼 아름다웠지, 그녀는 히스꽃처럼 사랑스러웠지. 사랑스러운 보라색의 히스꽃, 메리, 나의스코틀랜드 초롱꽃. 모두 흥겹게 따라 불렀다. "설날에는 헤리 로더의 노래가 최고야." 도우시가 말했다. 자기를 둘러싼 사람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스티비는 상대적으로 자신이 얼마만큼 불행한지 알게 되었다. 끝없는 우울함에 빠져 그는 빠르게 추락하며 좋았던 시절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자기 주위를 맴돌고 있는 즐거웠던 지난날은 손만 뻗치면 닿을 듯했지만 그의 마음은 잔인한 감옥 같았다. 갇혀 있는 그의 영혼에게 자유의 빛을 비춰줄 뿐 굳게 닫혀 있었다. 스티비는 엑스포트 맥주를 마시며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오늘 잠을 잘 넘길 수 있기를 빌었다. 프랭크 벡비가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여긴 그의 아파트였고 그는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해줘야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오늘 야간 경기 티켓을 네 것까지 사놨다. 스티비, 하츠 응원단 놈들을 쫄게 만들자고." 렌튼이 그에게 말했다. "펍에서 텔레비전으로 볼 사람은 없어? 중계방송 해주는 걸로 알고 있는데." 스티비가 본 적이 없는 검은 머리의 아담한 여자와 수다를 떨고 있던 식보이가 그를 돌아봤다. "짜식, 웃기고 있네, 너 런던에서 나쁜 버릇이 들었구나, 스티비. 말해두는 말야, 난 텔레비전에서 중계하는 축구 같은 건 딱 질색이라고. 그건 꼭 장화를 끼고 섹스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안전한 섹스, 안전한 축구, 안전 같은 건 모두 엿먹으라고 해. '자, 우리 모두 함께 안전한 세계를 건설합시다' 하는 거야 뭐야?"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비웃었다. 스티비는 식보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재주가 있었다는 걸 잊고 있었다. 렌츠는 식보이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저런 건 흔한 일이 아닌데, 하고 스ㅌ비는 생각했다. 두 사람은 언제나 서로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었다. 일례로 만약 한쪽이 어떤 여자를 보고 퀸카라고 말하면 또 한 사람은 저것도 얼굴이냐, 하고 말하는 식이었다. "텔레비전 축구 중계 같은 건 방송 금지시켜 버려야 돼. 게으른 놈들이 퍼진 엉덩이를 끌고 경기장에 오게 만들어야 한다고." 렌츠의 말이었다. "좋아, 할 수 없지." 스티비는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렌츠와 식보이 사이의 연합은 금방 깨졌다. "네가 퍼진 엉덩이 어쩌고 하고 떠들 입장이냐? 이 나무늘보 같은 자식아. 하루에 헤로인을 10분만 끊으면 저번 시즌보담 축구장에 훨 많이 갈 거다." 식보이가 코웃음쳤다. "새꺄, 간이 부었냐..." 렌츠는 스티비를 보고는 식보이를 가리키며 엄지손가락으로 욕을 했다. "사람들은 이 녀석을 걸어다니는 약통이라고 부르지. 하도 약을 많이 들고 다니니까." 그들은 계속 서로 갈궈댔다. 스티비는 처음에는 재미있게 구경했지만 이제 슬슬 질리기 시작했다. "스티비, 2월달에 너희 집에 좀 가있겠다는 말 잊지 않았지?" 렌츠가 그에게 말했다. 스티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건 좀 잊어버리거나 없었던 일로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렌츠는 친구였지만 마약 중독자였다. 런던에 오기가 무섭게 또다시 토니와 닉시와 어울려 헤로인을 할 것이다. 이 세 사람은 언제나 실업 연금을 타먹을 주소를 가진 친구를 찾고 있었다. 덕분에 렌츠는 한 번도 일을 안 했지만 언제나 돈을 갖고 있었다. 그건 식보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자기 돈이나 남의 돈이나 모두 자기 돈처럼 썼다. "경기가 끝난 후 매티네 집에서 파티가 있을 거야. 론 가의 새 집에서 말야. 칼같이 나타나라고." 벡비가 그들에게 소리질렀다. 또 파티야. 스티비에겐 파티도 일이었다. 설날 파티는 끝없이 계속된다. 설날 기분이 겨우 가라앉는 것은 파티와 파티 사이의 간격이 뜸해지는 4일쯤이다. 그 간격은 점차 넓어져서 마침내 주말에만 파티가 열리는 평소의 생활 패턴으로 되돌간다. 친구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가뜩이나 작은 아파트는 금방이라도 바닥이 꺼질 것 같았다. 스티비는 베거(거지)라고 불리는 프랑코가 이토록 느긋하게 있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세컨드 프라이즈(2등상)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랍 맥롤린이 커튼 뒤에서 실례를 했을 때도 벡비는 그를 패지 않았다. 세컨드 프라이즈는 벌써 몇 주 동안이나 정신없이 취해 있었다. 설날은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술 마실 편리한 구실을 준다. 세컨드 프라이즈의 애인 캐롤은 그의 추태에 화를 내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는 애초에 그녀가 여기 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스티비는 부엌으로 갔다. 그곳은 다른 곳보다 조용해서 전화벨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다. 그는 여피 비즈니스맨처럼 자기가 갈 만한 전화번호 리스트를 엄마에게 맡겨놓고 스텔라에게 전화가 왔을 때 전해주게 해뒀다. 스티비는 평소에는 가지도 않는 켄트의 헛간 같은 폅에서 그녀에게 고백했었다. 그는 자기 마음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스텔라는 뜻밖인데다 지금 이 자리에서 대답하기엔 너무 중대한 문제니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가 스코틀랜드에 있을 때 전화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그들은 펍을 나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스티비는 킹스크로스까지 가기 위해 어깨에 스포츠백을 메고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다리를 건너는 그녀를 지켜봤다. 스텔라의 긴 밤색 곱슬머리가 바람에 휘날렸다. 그녀는 덩키 재킷, 미니스커트, 두꺼운 검은색 울 타이츠 차림에 약 25센티미터 정도 되는 독마틴 부츠를 신고 있었다. 스텔라가 뒤돌아보길 기다렸지만 그녀는 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스티비는 역에서 벨 위스키를 샀고 웨벌리 역으로 전차가 들어올 무렵에는 깨끗이 비워버렸다. 그때 이후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부엌 벽에 깔린 타일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포마이카 카운터 위에 앉아 있었다. 프랑코의 여자 친구인 준이 들어와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술병을 집어들고 얼른 자리를 떴다. 준은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파티 같은 데서는 분위기에 압도당해 버리는 것 같다. 대신 프랑코가 두 사람분의 말을 해버린다. 준이 나갖 이번엔 니콜라가 들어왔다. 스피드가 침을 질질 흘리면서 주인을 따라다니는 충실한 개처럼 그녀를 따라 들어왔다. "안녕... 스티비... 새해 복많이 받아, 음, 그러니까…." 스피드가 비벅됐다. "아니, 벌써 만났잖아. 어젯밤 트론에 함께 가놓고 잊어버렸냐?" "아... 맞아. 미안." 스퍼드는 정신을 차리고 애플 사이다 병을 집었다. '안녕, 스티비? 런던은 어때?" 니콜라가 물었다. 하느님 맙소사, 스티비는 생각했다. 니콜라는 너무나 편한 이야기 상대였다. 자칫하다간 모든 걸 털어놓겠는데... 아냐, 그건 안 되지... 괜찮아, 돼. 스티비는 말하기 시작했다. 니콜라는 참을성 있게 들어줬다. 스퍼드는 가끔 동정이 간다는 표정으로 '정말 큰일이군' 하고 말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이 바보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말을 멈출 수 없었다. 니콜라는 지금 내가 얼마나 지겨울까? 스퍼드 같은 놈한테까지도 지겨운 존재가 돼버리다니. 그렇지만 그는 이야기를 그만 둘 수 없었다. 스퍼드는 결국 나가버렸고 대신 켈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린다가 끼여들었다. 거실에서는 축구 응원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니콜라는 현실적인 충고를 몇 마디 해줬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든지, 전화가 오기를 기다리든지 아니면 런던에 가서 직접 만나렴." "스티비! 빨랑 이리 오지 못해, 새꺄!" 벡비가 고함을 질렀다. 스티비는 문자 그대로 코가 꿰인 채 얌전하게 거실로 돌아왔다. "부엌에서 여자들한테 잘난 척하고 있었냐, 새꺄. 넌 저기 나긋나긋하게 앉아 있는 재즈 순수주의자보다 더 나쁜 새끼야." 그는 함께 수다 떨던 여자와 키스하고 있는 식보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들은 아까 식보이가 그녀에게 '기본적으로 나는 재즈 순수주의자라고,' 하면서 소개하는 것을 들었었다. 우리 모두 푸른 더블린으로 진군하자 - 여왕을 깨부수자! 햇살에 번쩍이는 투구를 쓰고 - 야만인 놈들을 깨부수자! 주황색 어깨띠를 매고 총검을 휘두르자. 톰슨 기관총의 메아리에 맞서. 스티비는 우울하게 앉아 있었다. 이런 소음 속에서는 전화벨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토미가 소리쳤다. "야, 좀 조용히 해! 이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란 말야." 울프톤스 (사회비판적 노래를 부르는 아일랜드의 포크 그룹 - 역주) 의 <바니 스트랜드> 였다. 토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외로운 바나 스트랜드에서 나홀로... 울프촌스의 <제임스 코놀리> 가 흘러나오자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도 있었다. "더럽게 멋진 반항아, 더럽게 훌륭한 사회주의자, 그리고 더럽게 근사한 아일랜드인이었던 염병할 제임스 코놀리, 젠장." 개브가 렌튼에게 말하자 그는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는 레코드에 나오는 노래들을 따라 불렀고 다른 사람들은 음악 소리 때문에 소리를 질러가면서 대화를 계속했다. 그렇지만 <올드 브리게이드의 소년들> 이 나오자 모든 사람들이 따라 불렀다. 식보이조차 하던 키스를 멈추고 끼여들었다. 오, 아버지, 왜 그렇게 슬퍼하시나요? 이렇게 아름다운 부활절 아침에. "너도 불러, 짜샤!" 토미가 스티브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지르면서 말했다. 벡비는 스티비의 손에 억지로 맥주를 쥐어주고서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아이랜드의 사나이들은 그들이 태어난 고향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데. 스티비는 이렇게 다 함께 노래하는 일에 대해 좋지 않은 에감이 들었다. 거기에는 뭔가 절실한 감정이 들어 있었다. 마치 다 함께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강한 동료 의식으로 맺어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부르는 것은 가사에 나오는 대로, '무기를 손에 들어라' 하는 노래이지 스코틀랜드나 설날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전쟁을 위한 노래였다. 스티비는 아무하고도 싸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름다운 노래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계속해서 들이부어지는 술 때문에 돌기 시작한 취기가 이제 뒷일이 걱정이 될 정도로 심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몸 안의 아드레날린을 모두 소모해서 쓰러질 때까지 계속 마실 것이다. 나는 아버지 같은 사나이가 되고 싶어 IRA에 들어갔네 - 급진파 IRA 에! 복도의 전화가 울렸다. 준이 받았다. 다음 순간 벡비가 수화기를 빼앗다시피 하고 준을 쫓아냈다. 그녀는 유령처럼 거실로 흘러들어 왔다. "누구라고? 누구? 그게 누군데? 스티비?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요. 어쨌든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아가씨." 프랑코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했다. "네가 어딧 굴러먹는 누군지 모르지만 말야 ..." 그는 거실로 들어왔다. "스티비, 웬 빌어먹을 아가씨가 전화했어. 건방진 잉글랜드 악센트로 꼭 입에 알사탕을 물고 지껄이는 것 같더군. 런던이라는데." "우와! 이 엉큼한 자식!" 스티비가 소파에서 튀어오르듯이 일어서자 토미가 놀려댔다. 그는 30분 전부터 오줌이 마려워서 견딜 수 없었지만 제대로 걸을 수 있을지 몰라 불안에 하며 계속 참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멀쩡하게 걸을 수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를 '스티비' 라고 하지 않고 '스티브' 라고 불렀다. 런던에서는 모두 그렇게 부른다. "어디에 갔었어?" "스텔라, 어디 갔었냐고? 난 어제도 너한테 전화했어. 너야말로 어디에 있니? 지금 뭐하고 있어?" 그는 하마터면 누구와 함께 있냐고 물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난 린네 집에 갔었어." 그녀는 말했다. 당연하잖아. 칭포드, 아니면 그와 비슷한 따분하고 끔찍한 시골에 사는 언니네 집에 갔었구나. 스티비는 행복한 나머지 온몸이 떨려왔다. "새해 복 많이 받어!" 마음이 놓인 그는 이제 완전히 날아갈 것 같았다. 삐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전화기에 동전을 집어넣는 소리가 났다. 스텔라는 집에서 거는 게 아니었다. 그럼 어디에 있는 거지? 밀라드와 함께 펍에 있는 건가? "너도 새해 복 많이 받아, 스티브. 난 지금 킹스 크로스 역에 와있어. 10분 후에 에든비러행 기차를 탈 거야. 10시 45분에 역에 마중나와 줄 거니?" "젠장, 하느님 맙소사! 농담 아니지 ... 오, 빌어먹을! 그래. 무슨 일이 있어도 10시 45분에 나가 있을게. 넌 정말 멋진 새해를 맞게 해줬어. 스텔라... 내가 요전날 밤에 말한 거... 난 그때 이상으로 널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그거 잘됐네, 왜냐하면 난 너와 사랑에 빠진 것 같으니까... 그동안 죽 네 생각만 하고 있었어." 목구멍에서 뭔가 치밀어올랐다. 그는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는 걸 느꼈다. 눈물 한 방울이 눈에서 뚝 떨어져 볼을 타고 흘렀다. "스티브... 괜찮아?" 스텔라가 물었다. "이 이상 어떻게 더 괜찮아. 스텔라, 사랑해. 진짜야, 거짓말이 아냐." "앗, 빌어먹을... 동전이 떨어졌네. 날 바람 맞출 생각은 하지도마, 스티브. 난 지금 너랑 장난하는 게 아니니까... 그럼 11시 15분 전에 보자... 사랑해." "나도 널 사랑해! 사랑한다고!" 삐 소리가 나더니 전화가 끊어졌다. 스티비는 수화기가 스텔라의 몸이라도 되는 듯이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그리고 나서 수화기를 내려놓고 아까부터 참아왔던 오줌을 누러 갔다. 살아 있는 것을 이렇게 절실하게 느낀 적이 없었다. 냄새나는 자신의 오줌이 변기에 닿아 흩어지는 걸 보며 그의 머리는 즐거운 사색에 빠져들었다. 오늘은 새해 첫날이다. 올드 랭 사인 (스코틀랜드 민요인 석별의 노래-역주). 그는 모든 인간에게 사랑을 느꼈다. 특히 스텔라에게, 그리고 파티에 모인 친구들에게. 그의 동지들. 다스한 마음을 가진 반항아들. 이 땅의 소금과 같은 사람들. 심지어는 하츠 응원단 녀석들까지 사랑했다.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이다. 단지 자기네 팀을 응원하고 있을 뿐이다. 시함 결과가 어떻든 상관하지 말고 올해는 놈들에게도 새해 인사를 하자. 스티비는 에든비러의 모든 파티에 스텔라를 데려가 즐거운 시간을 가질 것이다. 정말 멋질 것이다. 축구리그 같은 건 바보 같고 엉뚱한 난센스다. 노동 계급의 단결을 방해할 뿐이고 부르주아의 주도권이 도전받지 않게 해주는 안전 장치일 뿐이다. 스티비가 혼자 생각해낸 이론이다. 그는 곧장 방으로 들어가서 프로클레이머스 (1985년에 에든비러에서 결성된 쌍둥이 형제 포크 듀오 - 역주)의 <선샤인 온 리스>를 턴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이 사람들이 자신의 친구들이라는 사실을 함께 축하하고 싶었다. 직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기타가 코드를 때렸다. 먼저 틀던 레코드를 도중에 중단하자 사람들은 야유를 보냈지만 스티비의 기쁨에 넘치는 표정을 보고 조용해졌다. 그는 돌아다니면서 토미, 렌츠, 그리고 벡비의 등을 철썩 때렸고 켈리와 왈츠를 췄다. 그의 갑작스런 변신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기분이 좋아져서 댜행이야," 하고 개브가 말했다. 축구 경기가 벌어지는 동안에도 스티비는 계속 들떠 있었다. 단지 스티비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최악의 시합이었다. 그는 또다시 친구들과 거리가 생겼다. 처음에는 그들의 행복을 공유할 수 없었는데 이번에는 절망을 공유할 수 없었다. 힙스는 하츠에게 지고 있었다. 두 팀 모두 창피할 정도로 많은 찬스를 놓치고 있었다. 애들 장난 같은 게임이었지만 하츠는 그래도 몇 개의 찬스를 득점으로 연결시켰다. 식보이는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있다. 프랑코는 살기등등한 눈초리로 열광하는 하츠 응원단이 있는 그라운드 반대편을 노려보고 있다. 렌츠는 메니저가 사임해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토미와 숀은 수비 실책에 대한 논쟁을 하며 실점에 대한 책임을 골고루 나눠갖게 하려고 했다. 개브는 심판이 편파적인 판정을 한다고 욕하고 있었고 도우시는 한참 전에 지나가버린 힙스의 실책을 계속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스퍼드는 마약에 세컨드 프라이즈는 알코올에 각각 머리 꼭대기까지 취해서 벡비의 아파트에서 뒹굴고 있었다. 두 녀석의 티켓은 이제 마리화나를 말아 피우는 용도 외엔 쓸모가 없다. 하지만 스티비는 지금 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연애중이니까. 경기가 끝나자 그는 친구들과 헤어져서 스텔라를 만나러 역으로 갔다. 하츠 응원단 대부분이 역시 그와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스티비는 험악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한 녀석이 그에게 뭐라고 소리쳤다. 젠장, 이 자식들은 4대 1로 이겼잖아. 도대체 뭘 원하는 거지? 피? 물어보나마나였다. 스티비는 역에 닿을 때까지 상상력이라곤 전혀 없는 하츠 응원단의 욕설을 참아냈다. 그는 생각했다. 분명히 '힙스 개자식' 이나 '피니언 (19세기 중반 뉴욕에서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결성된 결사대 피니어의 회원 - 역주) 새끼 보다 더 신선한 욕설을 찾을 수 있을 텐데. ㅇ떤 용감한 자식이 친구들의 부추김을 받았는지 그의 뒤에서 발을 걸었다. 스티비는 힙스의 스카프를 벗고 올 걸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는 이제 런던 사람인데 이 모든 시시한 일이 지금의 내 인생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스티비는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려고 애쓰고 싶지도 않았다. 역 중앙홀에 하츠 응원단 한 무리가 그가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힙스 개자식!" 한 젊은이가 소리쳤다. "이봐, 너희들 뭔가 오해하고 있어. 난 보르시아 뮌헨글라드바흐의 팬이야." 그의 입가로 주먹이 날아왔다고 생각한 순간 피 맛이 느껴졌다. 그를 몇 번 더 거더찬 다음 하츠 패거들은 그 자리를 떠났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아! 사랑과 평화가 하츠 응원단 여러분에게도 깃들기를!" 그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고는 터져서 부어오른 입술을 빨았다. "저 새끼 미친 거 아냐?" 한 녀석이 말했다. 스티비는 그들이 다시 자기를 패러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놈들은 어린아이를 둘 데리고 있는 동양 여자에게 가서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망할 놈의 파키스탄 매춘부!" "너희 나라로 꺼죠!" 그들은 여자를 향해 일제히 원숭이처럼 소리를 지르더니 원숭이 흉내를 내면서 역을 떠났다. "정말 매력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들이군요." 스티비는 그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마치 족제비를 만난 토끼 같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는 피투성이에 술 냄새를 풍기며 혀꼬부라진 소리로 지껄이는 또 다른 백인 남자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아까 자기를 위협하던 젊은이처럼 축구팀의 스카프를 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옳다는 것을 스티비는 아프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힙스의 녹색스카프를 한 녀석들도 충분히 그녀를 공격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어떠한 응원단에도 바보 같은 녀석들은 끼여 있기 마련이니까. 기차는 20분 가까이나 연착됐다. 영국 철도국의 기준으로는 아주 훌륭한 기록이었다. 열차 안에 그녀가 과연 타고 있을까? 망상이 스티브를 엄습했다. 두려움의 파도가 온몸을 떨게 만들었다. 안 올 가능성은 높다. 어느때보다도 높다.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머리속에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때 바로 그녀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가 이때까지 그려왔던 모습과 다른, 훨씬 생생하고 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인 그녀가 미소띤 얼굴로 서 있었다. 그는 두 사람 사이에 가로놓인 ㅉ랍은 거리를 뛰어가 그녀를 껴안았다. 그들은 오랫동안 키스를 나눴다. 이윽고 입술을 땠을 때 플랫폼은 이미 텅 비어 있었고 그녀를 싣고 온 기차는 이미 던디를 향해 출발한 후였다. 7.당연한 이야기 : 렌튼의 이야기 방 밖에서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창가의 내 옆에서 자고 있던 식보이가 호각 소리를 들은 개처럼 벌떡 일어났다. 내 몸은 부르르 떨렸다. 그 비명소리는 내 몸을 찢어놓은 듯했다. 레슬리가 울부짖으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정말 끔찍한 소리였다. 그녀가 비명소리를 그쳐주길 바랐다. 지금 당장. 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아무도 그런 소린 참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지금 같은 때는. 난 제발 그녀가 비명소리를 당장 그쳐주길 바랐다. 뭔가를 이토록 강하게 소원한 것은 내평생 처음이었다. "아기가 가버렸어... 아기가 가버렸단 말야... 도온이... 오 하느님..." 빌어먹을, 이 정도가 그 끔찍한 비명소리 중에서 내가 알아 들을 수 있는 전부였다. 레슬리는 너덜너덜한 소파 위로 쓰러졌다. 나는 레슬리 머리 위 벽에 낀 갈색 얼룩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저건 무슨 얼룩일까? 어쩌다 저런 곳에 얼룩이 졌을까? 식보이가 벌떡 일어났다. 눈이 개구리처럼 튀어나와서 말이다. 개구리, 정말 지금 그 녀석의 모습은 개구리를 연상하게 했다. 녀석이 갑자기 뛰어오른 폼도 개구리와 비슷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꼼짝하지 않고 있던 사람치고는 대단히 날렵한 동작이었다. 그는 레슬리를 2,3초 동안 바라보더니 침실로 뛰어갔다. 메티와 스퍼드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이 두리번거리고 있었지만 그들의 약에 절어 멍해진 머릿속에도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입력된 듯했다. 난 이럴줄 알고 있었다. 제기랄, 난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난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마다 언제난 말하는 대사를 내뱉었다. "곧 약을 만들어 줄게." 난 그들에게 말했다. 매티가 날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퍼드는 일어나서 소파로 갔다. 그는 레슬리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순간 난 스퍼드가 레슬리를 껴안고 위로할 줄 알았다. 그가 그렇게 해주길 바랐다. 나라도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스퍼드는 그저 그녀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 있는 나조차도 지금 그가 뭘 하고 있는지 감이 잡힌다. 녀석은 지금 그녀의 목에 있는 카다란 사마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나 때문이야... 나 대문이야," 레슬리는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 "저, 레스... 그러니까 마크가 지금 약을 끓이고 있어, 저... 있잖아, 그러니까 저..." 스퍼드가 그녀에게 말했다. 스퍼드가 말하는 건 지난 며칠 안에 처음으로 들었다. 물론 자식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무슨 말이든 하긴 했을 것이다. 내가 못 들었을 뿐이겠지. 식보이가 되돌아왔다. 마치 목을 보이지 않는 줄로 팽팽하게 묶어 있는 힘껏 당기는 것처럼, 몸에 뻣뻣하게 힘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끔찍하기까지 했다. 마치 영화 <엑소시스트> 에 나오는 악마의 목소리를 연상케 했다. 나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씨팔... 정말 막가는 인생이야, 안 그래? 이런 일도 다 일어나고. 빌어먹을, 어떡하면 좋지?" 그런 모습의 녀석을 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자식을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사이?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야?" 식보이가 내게 다가왔다. 난 녀석에게 걷어차이는 줄 알았다. 녀석과 난 가장 친한 친구이긴 하지만 술 취했을 때나 상대방을 화나게 했을 때 치고박고하면서 싸운 적이 있다. 그렇다고 심각한 싸움은 아니었고 화가 나서 주먹이 몇 번 오가는 정도였다. 친구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난 지금 약 때문에 다시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하고 있다. 지금 녀석에게 얻어맞는다면 온몸의 뼈가 산산조각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녀석은 그저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고마워. 오, 정말 고마워요 식보이, 고마워 사이먼. "끝장이야. 모두 끝장이야!" 그는 절망적으로 쥐어쌌다. 마치 차에 친 개가 누군가 와서 고통을 끝내주길 기다리는 그런 신음소리였다. 매티와 스퍼드가 일어나서 침실로 달려갔다. 나는 식보이를 밀치고 그 뒤를 다랐다. 아기를 보기 전에 이미 그 방에서 죽음의 냄시를 맡을 수 있었다. 아기용 침대 속에서 도온은 엎어져 있었다. 아기는, 도온은 싸늘하게 식어 이미 숨저 있었다. 눈 언저리가 파랗게 변해 있었다. 만저보지 않아도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기는 마치 애들 옷장 바닥에 버려진 작은 인형처럼 누워 있었다. 그 정도로 작았다. 너무나 자그마했다. 조그만 동온. 정말 어이 없는 일이다. "귀여운 도온... 믿을 수 없어. 이건 너무 잔인해..." 매티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정말 너무해, 이건... 빌어먹을 ..." 스퍼드는 고개를 떨구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매티는 아직도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대로 안에서부터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여기서 나갈 테야. 더 이상 못견디겠어." "웃기지 마, 매티! 지금 아무도 이 집에서 나가선 안 돼!" 식보이가 소리쳤다. "이봐, 진정해. 진정하라고." 너부터 진정해라, 스퍼드. "지금 이곳에는 약과 주사기 천지야. 지금 이 동네는 몇 주 전부터 경찰들이 쫙 갈려 있어. 지금 걸리면 모두 철창행이야. 밖은 어딜 가도 놈들뿐이라고." 식보이는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을 억제하려고 애썼다. 경찰과 얽히는 일에 대해서라면 우리의 의견은 반드시 일치한다. 약에 관한 문제라면 우리는 모두 리버럴하지만 어떻나 형태의 공권력 개입도 온몸으로 반대한다. "응, 하지만 여기서 도망가야 될지도 몰라. 레슬리는 우리가 여길 치우고 도망간 후에 경찰이나 앰뷸런스를 부르면 되는거고," 하고 나는 배티의 말에 찬성하며 말했다. "이봐... 레슬리와 함께 있어줘야 되는 거 아냐. 우린 친구잖아. 안 그래?" 스퍼드가 대담한 말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동료 의식 다위는 좀 너무 비현실적인 얘기 아냐? 매티는 다시 그의 고래를 저었다. 그는 소튼에서 6개월 살고 나온 지 알마 안 된다. 만약 다시 들어가면 정말 심한 꼴을 당할 거다. 그렇지만 밖에는 경찰놈들이 우글거린다. 적어도 그렇게 느껴졌다. 식보이의 망상 쪽이 동료애를 호소하는 스퍼드의 말보다 나에게는 더 그러듯하게 들렸다. 그렇다고 화장실에 약을 몽땅 흘려보내는 것만은 참아줬으면 좋겠다. 차라리 감옥에 들어가는 게 낫지. "난 이렇게 생각해. 이 애는 레슬리의 아잊, 그렇지? 만약 레슬리가 잘 돌봐줬더라면 죽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런데 왜 우리까지 말려들어야 하지?" 매티가 말했다. 식보이의 숨결이 한결 빨라졌다. "이런 말 하긴 좀 뭐하지만 매티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하고 나도 말했다. 난 점점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한방만 맞고 도망가면 소원이 없겠다. 식보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군. 보통때 같으면 녀석은 남이야 듣든 말든 눈에 보이는 녀석마다 명령을 내리지 않고는 적성이 풀리지 않는데. 스퍼드가 말했다. "그럴 수 없어. 그러니까 레스를 저렇게 내버려두면 안 돼. 있잖아, 응... 내 말은 그러니까 ... 빌어먹을,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난 식보이를 쳐다보며 물었다. "누구의 애지?" 식보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미 맥길버리 아냐?" 하고 매티가 말했다. "미친 놈,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식보이가 퉁명스럽게 비웃었다. "너, 순진한 척 시치미 떼지 마. 새꺄." 매티가 나한테 달려들었다. "뭐? 뭐라고 했어, 새꺄? 무슨 수작이야?" 하고 나는 대답했다. 밑도 끝도 없이 폭발한 자식 대문에 완전히 당황해버렸다. "너 거기 있었잖아, 렌츠. 보브 설리번의 파티에 말야" 하고 그가 말했다. '아냐, 임마. 난 레슬리랑 잔 적이 한 번도 없어." 난 진실을 말하고 있었고 곧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에는 남이 하는 말의 정반대가 곧 사실이라고 믿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특히 섹스의 문제에 관해서라면 말이다. "그럼 설리번네 파티에서 왜 다음날 아침 레슬리와 함께 널부러져 있었지?" "난 취했었단 말야, 임마. 꼭지가 완전히 돌아버렸었다고. 계단을 베고 자면 다음날 목이 아파잖아. 난 마지막으로 여자랑 잔 게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날 정도라고." 이 말엔 녀석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약에 절어 살았는지 그리고 그것이 그 방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모두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있잖아, 저 ... 누가 그러는데 ... 음, 시커의 애라고 ..." 스퍼드가 말했다. "시커가 아냐." 식보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 나서 죽은 아기의 차가운 볼에 손을 갖다댔다.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가슴이 저며오는 것 같았다. 수수께끼가 하나 풀렸다. 죽은 도온의 얼굴은 나의 친구 사이먼 윌리업슨과 아주 닮아 있었다. 식보이는 재킷 소매를 걷어붙이고 주사 자국에서 고름이 흐르는 팔을 드러냈다. "이제 두 번 다시 그 망할 물건에는 손도 대지 않을 거야. 난 지금 이 순간부터 약은 일체 안 하겠어." 그는 누군가를 침대로 끌어들이거나 돈을 울궈낼 때 짓는 상처받은 짐승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난 거의 그에게 넘어갈 뻔했다. 매티가 그를 쳐다봤다. "참아, 사이. 너무 성급하게 결론 내리지 마. 아기가 이렇게 된 것은 헤로인 때문이 아냐. 레슬리의 잘못도 아냐. 아깐 제정신으로 한 말이 아내. 그녀는 좋은 엄마였어. 아기를 사랑했어. 누구 잘못도 아냐. 그냥 수면사에 불과해. 아기가 자다 죽는 일은 흔히 있잖아." "그래, 그러니까, 수면사야 ... 알겠어?" 스퍼드가 맞장구쳤다. 갑자기 모두 다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매티, 스퍼드, 식보이, 레슬리. 난 너희들 모두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럴려고 했는데 내 입에서 나온 건, '약 만들게' 라는 한마디였다. 모두 어안이벙벙해서 날 쳐다봤다. "난 원래 이렇잖아." 이렇게 말하고 변명하듯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거실로 갔다. 정말 한심하다. 레슬리. 난 이런 일에는 빌어먹을 정도로 쓸모가 없다. 아니 소용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레슬리는 꼼짝 않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꼭 안아주며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뼈 마디가 뒤틀리고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것 같아, 지금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손 댈 수 없다. 그 대신 난 헛소리만 늘어놓았다. "정말 미안해 레스 ... 하지만 누구의 잘못도 아냐 ... 수면사인걸 ... 귀여운 도온 ... 진짜 안됐어 ... 정말 어이없는 일이야 ... 너무 잔인해." 레슬리는 고개를 들어 날 바라봤다. 그녀의 여위고 창백한 얼굴은 우윳빛 비닐을 입힌 해골 같았다. 눈 언저리가 빨갛고 눈 밑에 거무스름하게 그림자가 져 있었다. "약 만든다고 했지? 난 한방 맞아야겠어, 마크. 정말 한방 맞아야겠어. 어서 마키, 빨리 만들어줘 ..." 이제야 겨우 나도 실제로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방 안에는 주사기와 주사 바늘 따위가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어떤 것이 내 것이었더라? 식보이는 무슨 일이 잇어도 절대로 남의 주사기는 쓰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그건 순 뻥이다. 이런 정신 상태일 때는 그런 사소한 일엔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이다. 나는 가장 가까운 데 있는 것을 집었다. 최소한 방 저족에 앉아 있던 스퍼드의 주사기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만약 스퍼드가 아직 에이즈에 감염되지 않았다면 정부는 통계전문가를 리스에 파견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확률의 법칙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니까. 나는 숟가락과 라이터, 솜뭉치와 시커가 감히 헤로인이라고 부르는 주방용 세제나 다름없는 물건을 꺼냈다. 내 주위로 다른 녀석들까지 우르르 몰러들었다. "야, 불빛 좀 가로막지 마." 나는 녀석들에게 뒤로 좀 물러서라고 손짓하며 딱딱거렸다. 내가 눈꼴시게 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마음 한구석에는 그런 자신이 미웠다. 나도 다른 놈들이 나한테 그러면 역겨워지기 대문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라도 일단 막강한 위치에 오르고 나면 절대 권력은 부패한다는 진리를 부정할 만한 성인은 없다. 놈들은 몇 걸음 물러나서 내 손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자식들, 너희들 차레는 아직 멀었어. 레슬리가 먼저야. 그리고 레슬리보단 내가 먼저야. 당연한 이야기 아냐?` 8.정크 딜레마 No.64 "마크! 마크! 문 좀 열어라! 안에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거기 있는 거 다 안다고!" 엄마다. 엄마를 만난 지 벌써 한참 됐다. 나는 문 바로 앞에 뒹굴고 있었다. 그 문을 열면 좁은 복도가 있고, 또 하나의 문이 있다. 엄마는 그 문 너머 쪽에 있다. "마크! 부탁이다. 제발 부탁이니 문 좀 열어다오! 엄마다, 마크! 문 좀 열어달라니까!" 울고 있는 것 같다. '무흘 열허라' 로 들린다. 난 엄마를 사랑한다. 엄청 사랑하고 있지만 딱 부러지게 어떤 식으로 사랑한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어쨌든 이런 식의 사랑은 얼굴을 마주보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을 불가능에 가깝게 만들어버린다. 그래도 난 엄마를 사랑한다. 너무 사랑해서 엄마한테 나 같은 아들이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른 아들을 찾아내다가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제 별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해주고 싶다. 문은 열 수가 없다. 절대로. 그 대신, 다시 마약을 만들기로 했다. 벌써 때가 됐다고 중추신경이 악을 쓰고 있다. 빌어먹을, 사는게 갈수록 어려워진다니까. 제기랄, 이 헤로인, 불순물이 잔뜩 들어가 있잖아, 보라니까, 제대로 녹지를 않잖아. 이 빌어먹을 시커 녀석! 조만간 아빠와 엄마 집에도 들러보아야겠군. 얼굴이나 보러. 좋아, 최우선 사항으로 메로를 해두자. 단, 시커를 만나러 가는 것이 최최우선이야, 물론. 9.내 남자 : 세컨드 프라이즈의 이야기 이런 젠장. 우리들은 잠깐 몇 잔 마시러 왔을 뿐이다. 하지만 완전히 미친 것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봤어, 지금? 저거 완전 정신 나간 자식이네" 하고 토미가 말했다. "그냥 내버려둬. 상관하지 않는 게 좋아. 어떤 사정인지 모르니깐 말이야" 하고 나는 녀석에게 말했다. 하지만 나도 보았다. 독똑히 보았다. 남자가 여자를 때린 것이다. 손바닥으로 뺨을 때렸다든가 그런 얘기가 아니다. 완전히 편치를 날런 것이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녀석들이 토미 옆에 앉아 있어서 다행이야, 내 옆이 아니고. "내가 그렇다고 말하면 그런 거야! 잔말 하지 마!" 남자가 다시 여자에게 고함을 쳤다.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긴 금발의 스프링 머리를 한 덩치 큰 사내가 고개를 돌려서 희죽 웃었으나 곧 다시 다트 게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트 게임을 하고 있는 패거리들은 한 사람도 돌아다보지 않았다. "이거 80펜스 하냐?" 나는 거의 바닥이 난 토미의 글라스를 가리켰다. "응." 내가 바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사움이 시작되었다. 목소리가 들려온다. 바텐더에게도 스프링 머리에게도 들렸던 모양이다. "쳐 봐! 또 때려보지 그래. 어서 쳐 봐!" 여자가 남자를 도발시키고 있었다. 여자의 목소리는 째져서 유령의 목소리 같았다.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지걸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그 여자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여자가 앉아 있는 장소에서 들려오기 때문이라는 것뿐이다. 이놈의 펍은 텅텅비어 있었다. 우린 아무 데나 앉을 수 있었다. 그런데 고르고 골라서 하필이면 이 자리에 앉았을까? 남자가 여자의 얼굴은 주먹으로 때렸다. 그러자 여자의 입에서 피가 뿜어나왔다. " 더 대리지 그래, 이 배알도 없는 놈아. 빨리 때려보라니까!" 남자가 또 때렸다. 여자는 비명을 질렀고 동시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울기 시작했다. 남자는 여자로부터 불과 몇 센티미터 떨어진 곳에 앉아 입을 벌린 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여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랑 싸움인가?" 스프링 머리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었다. 나도 마주 웃어보였다. 어째서 그런 짓을 했을까? 다만 친구가 필요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줄곧 비밀로 하고 있지만 나는 내가 알코올 중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럴 때, 친구들은 모르는 사람인 척한다. 나처럼 술마시고 꼬장 부리는 버릇을 가진 녀석 외에는 모두 다 그렇다. 나는 회식 머리칼과 콧수염을 기른 중년의 바텐더 쪽을 봤다. 바텐더는 고개를 흔들며 무엇인가 중얼중얼거렸다. 잔을 들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절대로, 절대로 여자를 때리면 안된다. 아버지는 자주 그렇게 말했었다. 여자를 패는 놈은 최고로 저질인 인간 쓰레기라고 말하곤 했다. 여자를 때리고 있던 자식은 아버지가 말했던 최고로 저질인 인간 쓰레기같이 생겼다. 기름이 잔뜩 밴 검은 머리ㅋㄹ, 깡마른 창백한 얼굴에 검은 콧수염. 족제비같이 생긴 별 볼일 없는 새끼. 이제 이런 술집엔 더 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술을 마시러 온 것뿐이다. 두세 잔만 마시고 그만두겠다고 토미를 꼬셔서, 이곳에 온 것이다. 술의 양은 내가 컨트롤해야지. 한두 모금은 너무 적고 한두 피인트 정도. 그러나 이런 사건이 생기면 위스키 생각이 간절해진다. 캐롤은 자기 집에 돌아가 있다. 이제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겨놓고 갔다. 나는 잠깐 한 잔 걸치러 왔을 뿐이지만, 이런식으로 마시다가는 역시 술에 취할지도 모른다. 좌석에 돌아와보니까, 토미가 있는 대로 화가 나서 씩씩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뭔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 세컨드 프라이즈 ... " 하고 토미가 이를 갈면서 말한다. 여자의 눈꺼풀은 퉁퉁 부어올라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턱은 온통 부어오르고 입에선 아직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냘퍼보이는 여자라서, 다시 한 번 얻어맞으면 산산조각이 나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도 그냥 항복을 하지 않는다. "그게 네 대답이란 말이지. 어차피 언제나 같은 대답이지만 말야." 여자가 울면서 내뱉듯이 말했다. 화를 내고 있는 동시에 자기 자신이 불쌍해지기도 했겠지. "입 닥쳐! 닥치라고 말했잖아! 닥치지 못 하겠어!" 남자 쪽도 분노를 억누를 수 없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할 작정인데?" "이년이 ... " 하고 남자는 다시 주먹을 쳐들었다. "이봐, 그만하면 됐잖아. 당신 지금 제정신이 아냐." 토미가 그에게 말했다. "너완 상관없는 일이야! 쓸데없는 참견하지 말라고!" 남자는 토미에게 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했다. "이봐요, 두 사람 모두 당장 그만둬요. 지금 당장 그만두라공ㅅ!" 하고 바텐더가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스프링 머리가 히죽히죽 웃고, 다트를 하고 있던 남자들도 몇 사람인가 뒤를 돌아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나에게도 관계가 있는 일이 되었단 말야, 당신,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응?" 토미가 모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제기랄, 토미. 제발 진정해." 나는 바텐더를 의식하면서 마지못해 토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토미는 간단히 내 손을 뿌리쳤다. '너도 한 대 맞고 싶냐?" 하고 남자가 말했다. "내가 가만히 앉아서 얻어맞을 것 같냐? 이 개 같은 놈아! 자아, 밖으로 나가자! 따라와, 새꺄!" 토미는 도발하듯이 그렇게 말했다. 사내는 겁을 집어먹었다. 무리도 아니다. 토미는 체격이 상당히 건장한 녀석이니까 말이다. '너하고는 관계 없는 일이야" 하고 한풀 꺾인 사내가 말했다. 그때였다. 여자가 토미를 보고 악을 썼다. "내 남자야! 당신이 때리고 있는 사람은 내 남자란 말이야!" 여자가 몸을 앞으로 기울여토미의 얼굴을 할퀴었는데, 토미는 어안이 벙벙해서 여자의 손을 방어할 수가 없었다. 그 다음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토미가 일어나서 문제의 사내 턱을 강타하자, 사내는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나는 바에 있던 스프링 머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턱주가리를 한방 갈기고, 녀석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바닥으로 쓰러뜨린 후 얼굴을 두어 번 차줬다. 하지만 한 번은 녀석이 손으로 막은 것 같고, 난 운동화를 신고 있었으니까, 명중한 다른 한 방도 그다지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녀석은 팔을 휘둘러대서 머리칼을 움켜잡고 있던 내 손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시뻘건 얼굴에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뒷걸음질을 쳤다. 나는 이제 죽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는 날 간단하게, 때려눕힐 수 있을 텐데도 그 녀석은 양손을 벌린 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지?" "당신, 이게 무슨 재미있는 구경거리인 줄 알아?" "무슨 얘기야?" 녀석은 정말로 감을 잡지 못하는 것 같다. "경찰을 부르겠어! 모두들 나가! 안 나가면 경찰을 부를 테니까!" 정말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수화기를 집어들고 바텐더가 악을 썼다. "너희들 이런 곳에서 싸우면 어떡하냐?" 다트 게임을 하고 있던 뚱보가 으르렁댔다. 여전히 다트를 손에서 놓지 않은 채여싸ㄷ. "이봐, 나나 아무짓도 안 했어" 하고 스프링 머리가 나에게 말했다. "그럼 내가 잘못 알았나 보지" 하고 나는 말했다. 이 소동의 주인공인 남녀는 '우리는 조용히 한잔 하러 왔을 뿐이야' 라고 말하면서 은근 슬쩍 술집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야, 이 빌어먹을 놈들아. 이 사람은 내 남자야!" 문을 나서면서 여자가 이쪽을 보고 악을 썼다. 토미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 세컨드 프라이즈. 우리도 여기서 나가자." 다트 게임을 패거리의 뚱보는 - 폅의 이름과 다트 표적판 그림과 그 밑에 '스튜' 라는 이름이 들어간 빨간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 아직도 기분이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이 술집에 와서 소동을 피우지 말라고. 이곳은 너희 동네가 아니잖아. 난 너희들이 누군지 알아. 그 빨강 머리 녀석과 꽁지 머리를 한 윌리엄슨 놈과 어울려 다니는 놈들이지? 놈들은 마약을 파는 약쟁이들이야. 그런 쓰레기들이 여기 들락날락거리는 걸 가만히 놔둘 수 없어." "우린 마약 거래 같은 건 안 해" 하고 토미가 말했다. "그래? 이 술집에선 안 한다는 이야긴가?" 하고 뚱보가 반박했다. "이제 그만둬, 스투, 저 삶들 탓이 아니니까. 알란 벤터스와 녀석의 계집 탓이야. 그것들은 여기서 가장 지독한 약쟁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그러냐?"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금발 사내가 말했다. "그런 말다툼은 술집에서 하지 말고 집에 가서 하면 되잖아" 하고 다른 남자가 말했다. "집안 싸움이야. 그건. 조용히 술 마시러 온 사람을 방해하면 안되지." 금발머리가 맞장구쳤다. 술집을 나올 때가 더 무서웠다. 놈들이 쫓아나오면 어쩌나 하고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으나 토미는 느긋했다. '잠깐 기다려" 하고 토미가 말했다. "시끄러워, 빨리 여기서 나가자고." 우리들은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술집 쪽을 돌아다보았으나, 아무도 쫓아나오는 기척이 없다. 그 미친 남녀가 앞족에서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자식하고 할 얘기가 있어." 토미는 그렇게 말하고 그들을 쫓아가려고 했다. 그때 버스가 오는것이 보였다. A 22번. 마침 잘 됐다. "냅둬, 토미. 저기 버스 왔잖아. 빨리 타자고." 우리들은 정류장까지 달려가서 버스에 뛰어올랐다. 몇 정거장 안 가지만 2층 안쪽까지 갔다. 자리에 앉자 토미가 물었다. "나 얼굴, 괜찮냐?"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형편없어. 아니, 그 여자 때문에 조금 나아진 것 같은데" 하고 나는 그렇게 말해주었다. 토미는 버스 창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런 병신 같은 계집 때문에!" "병신 같은 한 쌍이지" 하고 나는 말했다. 토미를 할퀸 것은 여자 족인데도 그 여자가 아니라 사내를 때린 토미는 과연 대단하ㄷ. 소식적엔 나도 도저히 남들 앞에서 자랑할 수 없는 일을 여러 가지 했지만, 여자를 때린 적만은 없었다. 캐롤이 말한 건 순거짓말이다. 내가 그녀에게 폭력을 휘둘렀다고 하고 다니지만, 난 손도 댄 일이 없다. 조용히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도망을 치니 붙잡았을 뿐이다. 그녀는 붙잡는 것과 때리는 것은 같은 것이니까, 폭력을 휘두른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는 다만 그녀를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싶었을 뿐이다. 얘기가 하고 싶었을 뿐이다. 렌츠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캐롤의 말이 맞다고 했다. 캐롤은 마음이 내키는 대로 왔다가 ㄹ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된다. 난 다만 얘기가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프랑코는 내 말이 맞다고 했다. 깊이 사귀게 되면 그런 거라고 렌츠에게 가르쳐주었다. 버스에 타고 있으니까, 멀미가 나서 토할 것 같았다. 토미도 그랬을 것이다. 우리 두 삶은 모두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내일이 되면 우리들은 다시 렌츠, 베거, 스퍼드, 식보이 같은 녀석들과 술집에 가서 오늘의 일을 바보처럼 자라하고 있을 것이다. 10. 실업구제소의 마수에서 확실하게 빠져나오는 법 1. 준비 스퍼드와 렌튼은 로열 마일의 펍에 있었다. 이 술집은 미국 물이 든 테마 바를 자처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잡동사니가 난잡하게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참 이상한 사람이야, 두 사람 모두 같은 직장을 소개해 주다니, 안 그래?" 스퍼드는 기네스를 홀짝거렸다. "나에겐 엄청난 날벼락이야. 난 빌어먹을 일자리 같은 건 필요없는데 말야. 이건 악몽이야" 하고 렌튼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지금은 실업 수당을 받고 있는 쪽이 훨씬 더 편한데 말야." "문제는 말이지, 스퍼드. 만약 진지하게 하지 않고 일부러 면접을 엉터리로 하면, 공공 직업 소개소 직원에게 통보가 간다는 거야. 난 런던에서 한 번 당했었어. 또 한 번 그러면 난 다시는 런던에서 실업 수당 받을 생각은 꿈도 못 꾸게 되는 거야." "응 ...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럼, 어쩐다냐?" "그러니까 의욕이 넘치는 체해야 한단 말야. 하지만 그래도 꼭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일할 의욕이 있는데 일자리가 없다고 생각하면, 저쪽도 할 수 없이 실업 수당을 계속 줘야 되잖아? 즉 평소대로 행동하고, 솔직하게 대답하고 있으면 절대로 채용된다는 얘기지. 다만 입을 다문 채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으면, 놈들은 곧장 직업 소개소로 달려갈 거야. 그러고는 이렇게 말할 테비. '그놈은 이제 신경 쓰지 마' 라고 말야." "나에게는 무리야. 안 그래 ... 그렇지? 그런 식으로 제대로 해낼수가 없다고 ... 안 그러니? 나는 그런 데 가선 주눅이 들어서 ..." "토미가 스퍼드 (암페타민, 필로폰과 같은 계열의 중추신경 흥분제 - 역주) 를 줬어. 네 면접 시간은 몇 시니?" "두시 반." "그래, 나는 한 시야. 두 시에 여기로 돌아올게. 내 넥타이를 빌려줄 테니까. 그리고 스피드도 갖고 올게. 그럼 너도 단 사람같이 자신이 넘쳐서 능숙하게 자기 선전을 할 수 있을 거야. 알겠냐? 자아, 그럼 이력서나 써보자." 두 사람은 이력서를 꺼내서 탁자 위에 펼쳤다. 렌튼의 이력서는 벌써 절반쯤 메꾸어져 있었다. 스퍼드는 학력란을 읽어봤다. "야 ... 이게 뭐냐? 조지 헤리옷이라니 ... 리스에서 제일 좋은 고등학교잖아?" "에든버러에서는 일류 학교를 나오지 않으면 좋은 직업을 얻을 수 없다는 건 상식이야. 하지만 기껏해야 호텔의 포터에 조지 헤리옷 졸업생을 채용할 리가 없지. 그런 일은 상놈들이나 할 짓이야. 그러니까 너도 비스하게 써넣으면 돼. 이력서에 오기라느니 크레기라느니 그런 식으로 써놓았다가는 혹시 채용될지도 모르니까 ... 젠장, 가야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지각해서 ㄴ안 돼. 그럼, 갔다올게." 2. 과정 : 미스터 렌튼 (오후 한 시) 나를 맞이한 인사 과장은 비싼 양복을 입은 밥맛 없는 여드럼투성이 녀석이었는데 약복 어깨에 비듬이 코카인 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5파운드짜리 지폐를 말아서 주머니에 쑤셔넣어주고 싶어졌다. 얼빠진 얼굴과 여드름이 이 살살이가 자아내려고 하고 있는 분위기를 망치고 있었다. 난 헤로인에 가장 심하게 절었을 때도 피부가 저 녀석처럼 끔찍하게 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저놈은 들러리에 불과하다. 면접장의 두목은 한가운데에 있는 꼴사나운 뚱보다. 왼쪽에는 차가운 미소를 띤, 남자와 헷갈릴 것 같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투피스 정장에 짙은 화장. 추녀의 전형이다. 기껏해야 포터를 면접하는 것치곤 엄청 화려한 라인업이잖아, 이거. 첫 질문은 예상한 대로였다. 둥보가 나에게 다정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력서를 보니까 조지 헤리옷을 졸업하신 것 같군요." "네 ... 정말 좋은 시절이었죠. 이제 ㄴ 아주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집니다." 이력서에서 조지 헤리옷을 조렁ㅂ했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면접에서 한 말은 정말이었다. 진짜로 조지 헤리옷에 다닌 적이 있긴 있었다. 길스랜드 건설 현장에서 견습으로 일하고 있었을 때, 그 학교의 공사장에서 일한 적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포더링엄 선생님은 지금도 학교에 계시나요?" 빌어먹을! 문제, 다음 중 하나에 ○표 하시오. 1) 네, 여전하십니다. 2) 교수님께서는 은퇴하셨습니다. 안 돼. 너무 위험하다. 적당히 얼버무려두자. "맙소사, 정말 옛날 생각이 나게 하시는군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뚱보 씨는 그 말을 듣고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곤란한데. 이렇게 되다간 면접이 끝나고 이 친구들, 혹시 채용합니다, 하고 말을 꺼내는 것 아냐? 그 다음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나의 가설은 뒤집어지고 말았다. 이 작자들, 혹시 박사 학위를 가진 야심가에게 도살장의 청소부 일을 맡길 정도라면 상업학교만 졸없한 정신병자에게 원자력 발전소 엔지니어를 맡기는 거 아냐?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큰일나겠다. 난처하게 되었다. 이 뚱보 씨는 나를 신세가 불쌍하게 꼬여버린 조지 헤리옷 졸업생이라고 생각하고, 구원의 손길을 뻗으려고 하고 있다. 엄청난 계산 착오다, 렌튼. 이 병신아. 그렇게 생각했을 때, 여드름 녀석이 날 살려줬다. 내가 놈을 여드름 녀석 (dick, 음경과 남자의 경멸적 호칭이란 이중적 의미가 있다 - 역주) 이라고 부르는 것은 섣부른 추측이 아니다. 몸에서 보이는 곳은 모두 여드름으로 덮여 있으니까. 그 작자가 쭈뼛거리며 질문했다. "그 ... 저 ... 그러니까 ... 미스터 렌튼 ... 설명을 ... 해 ... 주시겠습니까 ... 당신의 경력이 띄엄띄엄한데요 ... 저 ... ?" 너부터 말을 띄엄띄엄하는 이유를 설명해 봐라, 짜샤. "네, 오랫동안 헤로인 중독으로 시달리고 있어서요. 끊어보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요. 그 탓으로 일을 오랫동안 게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께는 솔직하게 얘기해두는 편이 좋겠지요. 장차 저의 고용주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이것으로 결정타를 날렸다. 세 사람 모두 불편해하기 시작했다. "저기, 음,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스터 렌튼 ... 저, 그 밖에도 면접 예정자가 더 있어서 이만 ... 정말 감사합니다. 결과는 나중에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휴, 꼭 마술 같았다. 저 느끼한 자식은 금세 벽을 쌓고 싸늘한 태도로 나왔다. 이것으로 놈들도 설마 내가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고 이야기하진 않겠지 ... 3.과정 : 미스터 머피 (오후 2시 30분) 이 스퍼드는 캡이다. 어쩐지 힘이 넘치는 느낌인걸. 면접이 이렇게 기다려지다니. 렌츠가 말했지. 자신을 선전하고 진실을 말하라고. 좋아, 가자고, 스퍼드. 즐기러 가는 거야 ... "이력서를 보니까 조지 헤리옷 고등학교를 졸업하셨군요. 오늘은 어쩐지 헤리옷 동창회 같군요." 그렇겠지, 뚱보 고양이 시. "사실은, 솔직하게 얘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사실, 저는 오기 졸업생입니다. 세인트 오거스틴 고등학교 말입니다. 그 뒤에 크레기로 가서 ... 네, 크렉로이스튼 말입니다. 그런데 헤리옷 졸업이라고 쓴 것은 그 편이 쉽게 취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에든버러는 차별이 심하잖습니까, 안 그래요?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있는 사람들은 헤리옷이라든가, 다니엘 스튜어트라든가, 안 그래요? 당신도 '오, 크렉로이스튼을 졸업하셨군요' 하면서 반가워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거든요." "아니, 나는 다만 대화의 실마리를 찾고 있었을 뿐입니다. 우연히 나도 헤리옷을 졸업했으니까요. 당신의 긴장을 풀어드리려고 생각한 거예요. 그리고 차별이라고 했는데, 그 점은 안심하십시오. 새로운 기회균등 조례에 의해서 차별 금지가 강조되고 있으니까요." "그것 참 잘 됐군요. 안심인데요. 그냥, 이 일을 무슨 일이 있어도 하고 싶어서요. 혹시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돼서 어젯밤엔 잠도 잘 못 잤어요. 이력서에 크렉로이스튼 졸업이라고 써 있으면 모두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크렉로이스튼을 나온 놈치고 제대로 된 녀석은 하나도 없어, 라고요. 안 그래요? 하지만, 스콧 니스베트를 알고 있죠? 프로 축구의. 훈스의 ... 아니지, 레인젓의 1군에 있으면서 소네스 감독이 비싼 돈을 주고 데려온 외국 선수를 제치고, 정식 선수가 된 친구 말이에요. 아세요? 그 친구가 크레기 1년 후배거든요." "그렇습니까? 어쨌든 말입니다. 미스터 머피, 우리는 당신의 학력이나, 당신 이외의 취직 히망자의 학력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보다 우리는 당신의 성적 쪽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다섯 과목에서 0그레이드를 취득했다고 쓰여 있는데 ..." "잠깐만요. 거기서 스톱. 0그레이드라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그렇게 쓰면 이곳의 면접을 받을 수 있지 않을가 해서요. 제가 얼마나 의욕에 넘치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을 뿐에요. 이 일을 꼭 한번 해복 싶었으니까요." "잘 들으세요, 미스터 머피. 당신은 정부의 고용 촉진부 산하의 직업 소개소 소개로 이곳에 와 있는 것입니다. 거짓말 같은 것은 하지 않아도 면접은 받을 수 있단 말입니다." "그래요 ... 그야, 물론 당신 말이 맞겠지요. 결정하는 것은 당신이니까요. 그러니까 당신이 대장이신가 보죠?" "네,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좀처럼 얘기가 진전이 안 되는군요. 그럼 왜 거짓말을 할 정도로 이 일을 하고 싶은적, 먼저 얘기를 해주시겠습니까?"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네? 무엇이 필요한데요?" "아, 쇠 있잖아요. 현찰, 배춧잎, 뭐 그런 거 있잖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아아, 그런 사정이군요. 하지만, 왜 레저 산업에서 일하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그야 물론 즐겁게 지내는 건 누구나 좋아하잔아요, 안 그래요? 그저 조그만 즐거움 말예요, 네? 그런 게 바로 레저잖아요. 사람들이 즐겁게 노는 걸 보면 나도 기분이 좋거든요." "그렇군요,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가면을 덮어쓴 것처럼 짙은 화장을 한 젊은 여자가 말했다. 이 여자 꽤 괜찮은데 ... "당신의 장점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음 ... 유머가 풍부하다는 거죠. 인간은 유머가 필요하다요. 꼭 필요하다고요, 안 그래요?" '안 그래요?'를 너무 많이 쓰지 말아야지. 날 경박한 놈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니까. "단점은요?" 양복을 걸친, 째지는 목소리를 가진 놈이 물었다. 아, 이 작자가 바로 여드름 밥맛이군. 여드름 투성이라고 렌츠가 말하더니, 정말 농담이 아니었군 그래. 표범 새끼처럼 얼룩덜룩하군. "아마 내가 너무 완벽주의자라는 것일까요?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일이 잘못 되면 그 자리에서 당장 내던져버리고 싶어지거든요. 하지만 오늘의 면접은 굉장히 잘 하고 있다는 느낌이 전해져오는군요, 안 그래요?" "대단히 감사합니다, 미스터 머피. 결과는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아니, 그것은 내가 할말이에요. 지금가지 본 중에서 최고의 면접이니까요, 안 그래요?" 하고 나는 말하곤 벌떡 일어나서 모든 사람과 악수를 했다. 4.검토 스퍼드는 폅에 돌아와서 렌튼을 만났다. "어떻게 됐냐, 스퍼드?" "성공이야, 성공, 너무 지나치게 잘 했는지도 몰라. 채용당할지도 모르겠어. 불길한 에감이 들어. 하지만, 그건 그렇고, 이 스퍼드, 정말로 잘 듣더라고. 인터뷰에서 이렇게 잘 해낸 적은 처음이야. 캡이었어, 렌츠, 정말 죽여줬다고." "그럼 성공을 축하하면서 한잔 하자! 그 스피드, 좀더 줄까?" "물론이지, 렌츠. 물론이고 말고." @FF 제2장 다시저주의 늪속으로 11. 스코틀랜드는 영혼을 지키기 위해 마약을 한다: 토미의 이야기 리지한테는 바로우랜드의 콘서트 같은 것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말았어야 했다. 절대로, 절대로 말이다. 실업 수당을 타자마자 나는 즉시 입장권을 샀다. 그때까지는 땡전 한푼 없었으니까. 그런데 공교롭게도 콘서트와 리지의 생일이 같은 날이었던 것이다. 즉, 콘서트 티켓이냐, 리지의 선물이냐의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생각할것까지도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이기 팝(미국의 펑크 로커)의 콘서트다. 리지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염병할 이기 팝의 콘서트 티켓은 살 수 있고, 내 생일 선물은 살수 없다는 거야?" 그것이 리지의 반응이었다. 내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짐작이 가? 그녀는 미친 것처럼 화를 냈어. 오해하지 말아줘. 리지가 무슨 말을 하는진 알아. 내 탓이야. 내가 죽일 놈이지. 내가 너무 순진했던 거야, 그게 나 토미걸랑. 떠벌이 토미. 언제나 이놈의 주둥아리 때문에 일을 망치지. 만일 내가 좀더 그 뭐라더라, 표리부동이라고 하던가? 표리부동한 인간이었다면 티켓 얘기 같은 건 하지도 않았을 텐데. 너무 신바람이 났기 때문에 무의식중에 줄줄 털어놔 버렸다. 천하에 무서운 것이 없는 토미 건(기관총). 정말 얼빠진 녀석이라니까.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콘서트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콘서트가 열리기 전날 밤, 리지가 무슨 일이 있어도(피고인)을 보러 가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 (택시 드라이버)에 나왔던 여배우가 나온다는 것이다. 나는 그 영화는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지나치게 선전이 된 영화는 오히려 볼 생각이 나질 않는다. 아니, 실은 보고 싶다 보고 싶지 않다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하는수 없이 그의 바로우랜드 콘서트 얘기를 꺼냈다. "그러니까, 내일은 안 된다고. 바로우랜드로 이기 팝의 콘서트에 갈 예정이니까. 미치하고 함께 말이야." "그럼 나와 영화 구경을 가는 것보다 빌어먹을 데이비 미첼하고 콘서트에 가는 게 더 좋다는 얘기니?" 역시 리지다워. 여자들과 사이코들이 즐겨 사용하는 비장의 무기, 대답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다. 이 순간부터 내 대답이 우리들의 관계의 앞날을 좌우하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그렇고 말고'라고 불쑥 말할 뻔했지만, 그렇게 대답한다면 리지와는 끝장이 날 것이다. 난 그녀와 섹스를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는데도 말이다. 아니, 정말 그녀와의 섹스는 최고라니까. 뒤에서 하는 건 정말로 기가 막히다. 리지의 낮은 신음소리. 노란색 실크 베개에 펼쳐진 리지의 깨끗한 머리칼. 노란색 베개 커버는 스퍼드가 집들이 선물로 일부러 프린시스 스트리트의 브리티시홈 스토어에서 훔쳐다 준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의 프라이버시를 공개하면 안 된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잠자리에서의 리지의 이미지는 너무나도 강렬해서, 평소에는 심술이 사납다든가, 1년 내내 짜증을 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정도로는 그 이미지가 퇴색되지 않는다. 난 그녀가 언제나 침대속에 있을 때의 리지로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사과를 하고 일르고 달랬으나 리지는 집요했고 용서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다정하고 아름다운 것은 역시 잠자리 안에서뿐이다. 언제까지나 저런 심술 사나운 얼굴을 하고 있다가는 그 아름다운 얼굴이 금세 폭싹 늙어버릴 것이다. 리지는 '쓰레기 같은 자식'을 비롯해서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욕을 동원해서 쏟아놓고도 속이 풀리지 않는 모양인지, 또다시 욕설을 퍼부었다. 불쌍한 토미 건. 오늘을 끝으로 위대한 용사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제부터는 '위대한 패잔병'이라고 불러다오. 하지만, 이것은 이기 팝 탓이 아니다. 이기 팝의 탓이라고는 단언할 수가 없잖은가? 그도 그럴 것이, 이기가 바로우랜드 콘서트를 계획했을 때, 자신 때문에 알지도 못하는 인간이 이 정도의 재난에 말려들 것이라는 것은 예상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말야. 소름 끼치는 우연의 일치지, 안 그래? 그래도 이기 팝은 리지가 울화통을 터뜨리는 데 도화선 역할을 하고 말았다. 리지는 진짜 강철로 만든 여자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다. 식보이까지도 나를 질투하고 있다. 리지의 연인이라는 간판은 훈장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유명세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그녀와 싸우고 난 뒤, 펍을 나왔을 때는, 이것으로 이제 나에게는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졌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파트로 돌아와서 스피드를 들이마시고, 메리다운 사과주 반 병을 들이켰다. 그래도 잠이 오지를 않아 렌츠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집으로 와서 함께 척 노리스의 비디오를 보지 않겠느냐고 꼬셨다. 렌츠는 내일부터 런던에 가는 모양이다. 요즘 렌츠는 에든버러에 있는 것보다 런던에 가 있는 쪽이 훨씬 더 많다. 문제의 실업 수당 지불이 어떻고 하면서 말이다. 그 자식은 몇 년 전에 네덜란드의 하비치 후크 해협 횡단 페리호에서 일하고 있었을 때 사귀게 된 친구들의 권유로, 실업 수당 사기 조직에 들어가 있었다. 런던에 있는 동안에 '타운 앤드 컨트리'에서 하는 이기 팝의 공연을 구경하러 갈 생각인 것 같다. 우리들은 마리화나를 피우고, 이상하게 따분한 것 같은 차가운 얼굴을 한 척 노리스가 다발이 되어 덤벼드는 공산주의자 악마들을 박살내는 걸 보면서 머리가 떨어져나갈 정도로 크게 웃어댔다. 맨정신일 때 같으면 이런 시시한 영화는 돈을 준다고 해도 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약에 취했을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재미있다. 다음날 일어나보니까 심한 구내염(입 안의 점막에 일어나는 세균성 염증)이 몇 개 돋아 있었다. 템프스-최근에 같은 건물에 이사를 온 개브 템펄리-는 자업자득이라고 했다. 스피드 과용으로 조만간 죽을 거야. '너 정도의 학력이라면 일자리가 있는 게 당연한데'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템프스에게 짜증을 냈다. 우리 엄마 같은 소리 작작해라,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용서하지 않겠어. 그러나 개브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다. 친구놈들 중에서 일자리를 갖고 있는 것은 개브 하나뿐이다. 실업자 구제소 같은 곳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래서 늘 우리들 모두로부터 구박받고 있다. 불쌍한 놈. 더구나 어젯밤에는 나와 렌츠 때문에 시끄러워서 잠을 자지 못한 것 같다. 일을 하고 있는 놈들은 모두 그렇지만, 개브 템프스도 실업 수당을 타먹는 녀석이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으면 배가 아파한다. 게다가 렌츠가 매일 템프스를 찾아가서 실업 수당의 신청 방법을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에 대해서도 분개하고 있다. 나는 어머니 집에 찾아가서 콘서트에 갈 용돈을 뜯어냈다. 술이나 마약을 살 돈과 기차값이 필요하다. 나는 스피드 애호가다. 스피드는 술과 잘 어울리고, 나는 술을 좋아하니까. '스피드광 토미'라고해줘. 어머니는 설교를 시작했다. 마약은 위험하다. 네가 그런 생활을 하고 있어서 엄마는 실망이다. 아버지는 저렇게 잠자코 있지만 네 일을 여간 걱정하고 있는 게 아니란다. 그 뒤, 아버지가 직장에서 돌아왔다. 어머니가 2층으로 가 있는 동안 이번에는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다. 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네 일을 정말로 걱정하고 있단다. 솔직히 말해서, 아버지는 너의 생활 태도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약은 이제 그만하거라. 아버지는 숨겨도 모두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이상한 일도 다 있지. 나는 정키도 아편 중독자도 그리고 스피드광도 알고 있지만, 가장 질이 나쁜 약물 중독자는 세컨드 프라이즈 같은 알코올 중독자다. 세컨드 프라이즈는 랍 맥롤린을 말한다. 녀석은 상당한 중증의 알코올 중독자다. 나는 용돈을 뜯어가지고 헵스의 펍에서 미치와 합류했다. 미치는 아직도 게일과 사귀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 함께 자지는 않은 것 같다. 미치의 얘기를 10분쯤만 듣고 있으면, 그쯤은 알 수 있다. 미치는 벌써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도 얼마간 돈을 뜯어냈다. 우리들은 맥주를 1파인트 글라스로 네 잔씩 마시고 열차를 탔다. 글래스고까지 가는 동안 나는 엑스포트 맥주를 네 캔을 마시고 스피드를 두 번 했다. 글래스고에 도착해서는 새미 도우의 술집에서 두어 잔 마시고, 택시를 타고 린치의 펍으로 옮겼다. 여기서도 두 파인트, 아니 세 파인트 마셨다. 그리고 나서 변소에 가서 스피드를 한 번씩 하고, 이기 팝의 노래를 메들리로 부르고, 마로우랜드 맞은편 갤로우게이트 쇼핑센터에 있는 사라센 헤드라는 펍으로 옮겨갔다. 여기서도 알루미늄 호일에 싼 스피드를 정신없이 들이마시고, 사과술을 마시고, 포도주로 마무리를 했다. 펍을 나왔을 때는 벌써 네온사인을 겨우 알아볼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곤드레만드레로 취해 있었다. 바깥은 얼어죽을 것처럼 추웠다. 정말로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들은 비틀비틀 밝은 쪽을 행해서 걸어가서는 콘서트 홀로 들어갔다. 이기 팝이 벌써 연주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 들렸으나, 우리 두 사람은 곧장 바로 향했다. 나는 찢어져 가는 티셔츠를 벗어던졌다. 미치는 고급 스피드인 코카인을 포마이커 탁자에 늘어놓았다. 다음 순간, 분위기가 일변했다. 미치가 돈이 어쨌다고 하면서,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우리들은 혀 꼬부라진 소리로 격렬하게 말싸움을 하고, 이윽고 주먹 싸움으로 까지 발전했다. 어느 쪽이 먼저 손을 댔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힘이 들어가지 않는 주먹으로 때리고 맞고 하니까 별로 상처를 입지도 않았다. 엄청 취해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코피가 가슴과 탁자에 뚝뚝 떨어지는 게 보였을 때에는 버럭 화가 치밀었다. 나는 미치의 머리칼을 움켜잡아 머리를 벽에다 박아주려고 했으나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누군가가 나를 미치에게서 떼어내고, 우리 두 사람은 모두 바에서 바깥 홀로 내동댕이쳐졌다. 나는 일어나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노래를 부르면서, 땀투성이의 몸들이 밀고당기는 홀 안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밀어젖히면서 앞으로 앞으로 전진해나갔다. 어떤 남자가 박치기를 해왔으나, 나는 뒤로 피해서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그 녀석에게 보복을 하는 것도 잊은 채 오로지 앞으로 돌진했다. 무대 바로 앞에까지 나가서는,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밴드는(네온 포레스트)를 연주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내 등을 후려치면서 말하는 것이 들렸다. "이봐, 머리가 돈 것 아니야?" 나는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몸을 비비꼬면서 포고잉(록콘서트에서 겅중겅중 뛰는 행위)을 계속했다. '아메리카는 영혼을 지키기 위해 마약을 한다'는 대목에 이르렀을때, 이기 팝이 내 눈을 똑바로 보았다. 단 이기는 '아메리카'를 '스코틀랜드'라고 노래했다. 보라, 우리들에 대해서 단 한마디로 이렇게까지 정확히 묘사한 인간이 과거에 있었는가... ? 나는 무도병(얼굴,손,발 등의 근육이 저절로 심하게 움직이는 병)에서 깨어나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강렬한 경외심을 품고서 이기 팝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이미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12. 맥주잔 소동: 렌튼의 이야기 벡비의 문제는......아니, 벡비는 문제가 한없이 많은 녀석이지. 하지만 내가 가장 심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녀석과 있을 때는 절대로 방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술이 들어갔을 때는 더 그렇다. 우리들에 대한 그의 인식이 아주 조금만 달라져도, 우리들은 가장 친한 친구에게서 단숨에 박해 대상으로 격하되어 버린다. 그것이 싫다면 노골적으로 아첨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신경을 쓰면서 벡비의 비위를 맞춰줄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래도 엄밀하게 그어진 경계선 안에선 명백하게 불경스런 행위도 어느 정도 용인됐다. 제3자에게는 이 경계선이 보이지 않지만, 우리들은 벌써 직감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알 수 있게 되었다하더라도, 그 자식의 기분 여하에 따라서 규칙은 시시각각 변한다. 그래서 벡비와 사귀는 것은 여자와 사귀기 위한 좋은 예행 연습이라고 생각한다. 감수성이 몸에 붙게 된다. 즉, 타인의 요망 사항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여자와 함께 있을 때는 늘 벡비와 함께 있을 때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도록 하고 있다. 어쨌든 잠시라도 말이다. 벡비와 나는 기보의 스물한 번째 생일 파티에 초대를 받았다. 참석 여부에 대한 회답을 해주어야 하고, 더구나 동반자가 필요한 정식 파티였다. 나는 헤이즐을 꼬시고, 벡비는 준을 데리고 오기로 되어 있었다. 준은 임신중이지만 아직 눈에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우리들은 로즈 스트리트의 펍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곳이 좋다고 말을 꺼낸 것은 벡비였다. 말해두지만, 이 로즈 스트리트라는 곳은 형편없는 얼간이나 관광객에게밖에 어울리지 않는 동네다. 헤이즐과 나의 관계는 약간 기묘했다. 사귀다 헤어지다를 되풀이 하면서, 벌써 4년이나 사귀고 있다. 일종의 묵계 같은 것이 있어서, 내가 마약을 맞기 시작하면 헤이즐은 잠자코 모습을 감춘다. 그래도 헤이즐이 나에게서 떠나지 않는 것은, 헤이즐도 나만큼 문제가 있는 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이즐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은 정상이라고 우겨댄다. 헤이즐의 경우, 문제는 마약이 아니라 섹스이다. 우리들은 좀처럼 섹스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마약 탓으로 섹스를 할 수 없는 경우가 많고, 헤이즐은 언제나 불감증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불감증인 여자는 없고, 임포텐츠인 남자가 있을 뿐이라고들 하지만 말이다. 대개의 경우, 그것은 사실이고 나 역시 내가 섹스 방면에 도사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가 없다. 나의 끝도 없는 마약 경력을 보면 일목요연할 것이다. 헤이즐은 어렸을 때 자기 아버지한테 겁탈을 당했었다. 아주 오래전, 술에 취했을 때, 그렇게 말했었다. 그때는 나도 같은 정도로 곤드레만드레 취해 있었으니까, 제대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해 달라고 했지만, 헤이즐은 더 이상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이후 우리의 섹스 라이프는 한마디로 재난이었다. 어차피 우리들의 잠자리는 항상 실패작이었다. 기나긴 세월 동안 실컷 감질나게 해놓고 가까스로 오케이해 주었으나 섹스를 하고 있는 동안 내내 헤이즐은 몸을 경직시키고 매트리스를 꽉 움켜쥐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 결국 섹스는 하지 않기로 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서핑보드하고 섹스를 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세상에 어떤 전희를 시도해봐도 헤이즐의 긴장을 풀어줄 수는 없었다. 오히려 더 긴장하게 만들어서, 구역질까지 일으키는 실정이었다. 언젠가 헤이즐이 몸을 열 수 있는 상대를 찾아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어쨌든, 우리들은 기묘한 동맹을 맺었다. 적당한 표현을 달리 생각해낼 수는 없는데 쉽게 말해서, 사회적으로 서로 이용하기로 한것이다. 즉 외관을 꾸미는 데 서로를 이용한다는 얘기다. 헤이즐은 불감증이라는 것을 숨기고, 나는 마약 탓으로 임포라는 걸 숨기는데 이처럼 편리한 방법은 없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완전히 진짜로 받아들이고, 가까운 장래에 헤이즐이 며느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을 가르쳐주면 뭐라고 말할까? 하여튼 그건 그렇고, 나는 헤이즐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밤의 파티에 함께 가달라고 했다. 한 쌍의 문제아 커플이다. 베거는 우리들이 술집에 가기 전부터 벌써 마시고 있었다. 깡패들이 흔히 그렇듯이 양복을 쫙 빼입은 그는 음산하고 살기등등해 보였다. 문신이 소매 아래, 손 그리고 칼라 밑까지 걸쳐져 있는 것이 보인다. 마치 그의 문신은 옷 밑에 가려져 있는 게 못마땅해서 밝은 쪽을 향해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것 같았다. "야, 렌트 보이! 잘 지내냐, 새꺄?"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로 베거가 소리쳤다. 때와 장소를 분간하지 못하는 인간이다. "이봐, 너도 건강하고?" 그 다음에는 헤이즐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입은 옷이 아주 잘 어울리는 걸. 그런데 이 녀석 좀 보라고." 나를 가리키고, 수수께끼 같은 한마디를 던졌다. "스타일이 있다니까." 그러고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그럴 듯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 녀석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쓰레기야. 하지만, 이 녀석은 스타일 이라는 걸 가지고 있거든. 영리하고. 기품이 있어. 이 몸하고는 조금 다르지." 벡비가 친구들의 있지도 않은 장점을 만들어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은근히 자신을 칭찬하라고 재촉하는 뻔뻔스러운 녀석이다. 헤이즐과 준은 친구라고 할 만한 사이는 아니지만, 현명하게도 베거의, 아니 프랑코 장군의 상대역을 나에게 떠맡기고 잡담을 하기 시작했다. 벡비와 단둘이서만 술을 마시는 것은 꽤 오래간만이다. 달리 누군가가 있으면 쉬엄쉬엄 상대를 할 수 있지만, 혼자서는 도무지 방심을 할 수가 없다. 나의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벡비가 내 옆구리를 난폭하게 푹 찔렀다. 친구 사이가 아니었다면 폭행이라고 해석해도 항의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세게 말이다. 그러고는 자기가 봤던 쓸데없이 폭력 장면만 늘어놓은 액션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난폭한 액션 신을 여기서 재현해 보여주겠다고 하면서 태권도의 지르기라든가, 목 조르기, 나이프로 찌르기 등을 나를 상대로 실연해 보이겠다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영화를 봤으면 두 번은 봤을 거다. 아직 취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식이라면 내일 깨보면 멍이 여러 군데 들어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2층 발코니에 있는 바에서 마시고 있었는데 한 요란한 패거리의 사람들이 붐비는 1층으로 쿵쾅거리며 들어오는 게 보였다. 놈들은 커다란 소리로 떠들어대며 주위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면서 목에 힘을 주고 걸어다니고 있다. 나는 저런 인간들이 제일 싫다. 모두 벡비 같은 자식들이다. 이런 놈들은, 가령 파키스탄인이나 호모라든가, 자기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을 보면, 상대를 불문하고 야구 방망이로 날려보내고 싶어한다. 이 최저의 나라에서도 최저의 족속들이다. 영국이 이 나라를 식민지로 삼은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잘못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영국인을 미워하지 않는다. 녀석들은 그냥 얼간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린 그 얼간이들의 식민지가 되었다. 우리들은 식민 지배자로 선택할 수조차도 없었다. 그렇다, 우리들은 전락해가는 얼간이들한테 지배당하고 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가? 우리들은 최저 중의 최저, 이 땅의 쓰레기인 것이다. 천지창조 때 이 세상으로 배설된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비참하고, 비굴하고, 비천하며, 한심한 쓰레기이다. 나는 영국인을 미워하지 않는다. 자기네들 놀고 싶은 대로 놔두면 된다. 내가 미워하고 있는 것은 스코틀랜드인이다. 벡비는 이번에는 줄러 매시슨에 대해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옛날에 벡비가 반했던 여자다. 줄리는 벡비를 좋아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줄리가 좋았다. 정말로 좋은 아가씨였다. 에이즈에 감염되고 나서 갓난애를 낳았으나, 아기는 음성이어서 안심했다. 그런데, 병원의 의사들은 방사능 차단복에 거창한 헬멧까지 쓴 직원 두 사람을 붙여서, 줄리와 갓난애를 구급차로 집까지 태워다주었다. 1985년의 일이었다. 예상한 대로의 결과가 일어났다. 이웃들은 그 모습을 보고 잔뜩 겁을 집어먹고, 줄리를 집에서 쫓아내버렸다. 일단 에이즈 감염자라는 딱지가 붙어버리면, 인생은 끝나고 만다. 특히 혼자 사는 여자는 더 그렇다. 결국 줄리는 정신적으로도 지치고, 더구나 면역력도 저하되었기 때문에 그 뒤 곧 상태가 악화되었다. 줄리가 죽은 것은 작년 크리스마스날이었다. 나는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 스퍼드 방의 매트리스 위에서 내 구토물에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일어날 기운 같은 것은 남아 있지를 않았다. 후회하고 있다. 줄리와 나는 좋은 친구였으니까 말이다. 함께 자거나 그런 짓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그대로 있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의 우정에 흔히 있는 변화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섹스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더욱 깊게 만들든가, 끝나게 만들든가 중 어느 쪽이다. 함께 잔 뒤, 앞이나 뒤로는 갈 수가 있지만,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은 곤란하다. 줄리는 헤로인을 하기 시작하고 나서 엄청나게 예뻐졌다. 대개의 여자가 예뻐진다. 헤로인은 여자들의 내부에 숨겨져 있는 최고의 것을 이끌어내는 것 같다. 그러나 헤로인이라는 것은 우선 주고, 그 다음에는 이자를 붙여서 그것을 다시 빼앗아간다. 벡비가 세상을 떠난 그녀에게 하는 한마디. "한 번 하고 싶었는데, 너하고. 아이고 아까워라." 나는 너에게 주기 아까운, 좋은 여자였다고 말해주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분노가 얼굴에 나타나지 않도록 했다. 입술이 찢어질 곤경에 빠지기 십상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술을 사오기로 했다. 조금 전의 똘마니들이 밀고당기고 하면서 내친 김에 관계 없는 사람들도 밀어젖히고는, 카운터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술을 주문하는 것도 겁이 났다. 상처자국 투성이의 가죽과 문신을 봉합시킨 인간 모양의 껍데기가-아니, 물론 안에 무엇인가 있을 테지만-불안에 떨고 있는 바텐더에게 악을 쓰고 있었다. "보드카 더블에 콜라 탄 것! 이봐, 너, 보드카 더블에 콜라라고 했잖아, 짜샤!" 나는 안쪽 선반에 놓인 위스키 병을 응시하고, 온 신경을 집중해서 그 녀석과 눈을 마주치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눈이 별개의 생명채처럼 제멋대로 옆으로 움직여버렸다. 주먹이나 술병이 날라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뺨이 열을 띄고 실룩실룩하고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꼭지가 완전히 돌아버린 최악의 미치광이들이다. 술을 가지고 2층으로 돌아갔다. 우선 두 여자들에게 작은 글라스, 그 다음에 우리들의 큰 글라스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다음 순간, 우리가 염려하던 그 일이 일어났다. 나는 엑스포트의 1파인트 글라스를 벡비 앞에 놓았을 뿐이다. 그는 그것을 집어들더니 벌컥벌컥 단번에 마셔버렸다. 그러고는 빈 글라스를 난간 너머로 내던졌다. 어깨 너머로, 아주 태연스럽게. 그잔은 흔히 볼 수 있는 손잡이가 달린 묵직한 맥주 글라스였다. 그것이 공중을 날아가는 것이 내 눈에 비쳤다. 벡비 쪽을 돌아다보니까, 그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헤이즐과 준은 당황해하고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불안으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글라스는 똘마니들 중 하나의 머리에 떨어졌다. 이마가 쩍 하고 갈라짐과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동료들은 갑자기 임전 태세를 취하고, 그중 하나는 옆 테이블로 돌진해서 무고한 사람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또 다른 녀석은 쟁반에 술을 얹어 나르고 있던 불운한 사내를 작살냈다. 벡비는 벌떡 일어나더니, 전속력으로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그리고 아래층 한가운데서 멈춰섰다. "사람이 글라스에 얻어맞았다! 내가 범인을 찾아낼 때까지 한 놈도 여기서 나가면 안 된다!" 벡비는 큰소리로 말하더니, 아무것도 모르는 커플에게 명령하고 웨이터들에게 지시를 했다. 똘마니들조차도 진짜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우리들끼리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까." 보드카 앤드 콜라 섞은 것 더블이 말했다. 벡비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더블은 감탄한 것 같았다. 다음에 벡비는 바텐더에게 다가갔다. "거기 있는 너! 어서 경찰에 신고해!" "그만둬! 안 돼! 경찰은 부르지 말라고!" 하고 미치광이 군단의 한 사람이 외쳤다. 보나마나 팔 길이로도 모자랄 정도의 긴 전과 기록이 있는 모양이다. 불쌍한 바텐더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는채, 카운터 너머 쪽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벡비는 우뚝 서 있었다. 목의 근육이 불끈 부풀어올랐다. 카운터를 한 바퀴 노려보고, 2층 좌석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2층 좌석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상업 고등학교나 머레이필드 고교 같은 곳을 나왔을 것 같은 청년들을 향해서 소리쳤다. "뭔가 본 사람 없나? 거기 너, 뭘 봤니?" "없는데요... " 하고 한 사람이 겁먹은 듯이 대답했다. 나는 헤이즐과 준에게 난간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라고 말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벡비는 마치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속에서 등장 인물 전원에게 질문 공세를 펴는, 정신이상자 탐정 같았다. 컵을 맞은 그 녀석은 확실히 머리의 회로가 끊어졌다. 그것은 누가봐도 확실했다. 나는 아래층에 내려가, 카운터에 있던 타올을 똘마니의 깨진 이마에 대고 지혈을 시키려고 했다. 똘마니가 비명을 질렀다. 감사의 뜻으로 지르는 것인지, 아니면 나의 불알을 밟아 뭉개려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손을 떼지 않았다. 미치광이 군단 속에 있던 뚱보가 카운터 근처에 있던 다른 패거리에게 다가가더니, 그 가운데 하나를 머리로 박았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여자들은 비명을 지르고, 남자들은 서로서로 욕설을 퍼붓고, 주먹을 날렸다. 유리 깨지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내가 주위 사람들을 헤치면서, 헤이즐과 준을 끌고 나오려고 2층 좌석으로 돌아갈 즈음엔, 이마가 깨진 똘마니의 흰 셔츠는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누군가가 옆에서 내 얼굴을 때렸다. 주먹이 힐끗 보였기 때문에, 아슬아슬한 순간에 피할 수 있어서, 정통으로 얻어맞지는 않았다. 난 놈에게 고개를 돌렸고, 그 녀석은 이렇게 말했다. "덤벼라, 이 병신 같은 놈아! 덤비라니까!" "짜식, 놀고 있군." 나는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녀석은 계속 덤벼들려고 했으나, 친구 같아 보이는 녀석이 그의 팔을 잡았다. 어이쿠, 살았다! 저런 녀석과 싸움이 붙으면 곤란하지. 상당히 체격이 좋은 녀석이어서, 그 체중을 실은 펀치를 정통으로 맞았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그만둬, 머키. 그 녀석은 관계가 없잖아." 동료가 놈에게 말했다. 나는 재빨리 그 자리를 떴다. 헤이즐과 준을 데리고 계단을 내려왔다. 나를 습격한 머키란 자식은 이번에는 다른 녀석의 멱살을 잡고 있다. 일층 한가운데에 사람이 없는 틈새가 나 있어서, 나는 헤이즐과 준을 데리고 그곳을 지나 출입구로 향했다. "여자랑 있으니까 나가게 해줘." 나는 눈 앞에서 싸움을 시작하려고 하고 있는 2인조에게 말했다. 하나가 다른 한쪽에게 덤벼들고, 우리들은 그때 생겨난 틈새로 빠져나갔다. 펍에서 로즈 스트리트로 나오니까, 벡비와 또 한 자식이(보드카 더블이었다) 길 옆에 쓰러진 불쌍한 녀석을 둘이서 발로 걷어차고 있었다. "프랭크!" 하고 준이 피가 얼어 붙을 것만 같은 비명을 질렀다. 헤이즐은 나에게서 조금씩 떨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맞잡은 손이 팽팽이 당겨졌다. "프랑코! 도망치자고!" 나는 그의 팔을 잡고 소리쳤다. 벡비는 발길질을 멈추고, 자신의 작품을 내려다보면서 내 팔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서 내 얼굴을 뚫어질 듯이 응시했다. 나는 한순간 주먹이 날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마치 내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렌츠. 아무도 리스의 프랑코님한테 기어오를 수 없어. 녀석들에게 그 사실을 박아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박아두지 않으면..." "고마워, 친구!" 하고 프랑코의 학살의 공범, 더불이 말했다. 프랑코는 씨익 한번 웃어보이고는 다짜고짜 녀석의 급소를 세게 차올렸다. 보고 있는 나까지 아팠다. "나야말로 고맙다, 새꺄!" 벡비는 그렇게 말하고는 보드카 더블의 얼굴을 때렸다. 그러자 더블이 버렁 나가떨어졌다. 새하얀 이가 탄환처럼 녀석의 입에서 튀어 나와 몇 피트 앞의 티 한점 없는 보도에 떨어졌다. "프랭크! 무슨 짓을 하는 거야!"하고 준이 외쳤다.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들은 벡비를 질질 끌다시피 해서 그 자리를 떠났다. "저 녀석이랑 그 술집에 있던 한 패는 내 형제를 찌른 놈들이라고!"하고 벡비는 미친 듯이 화를 내고 있었다. 준은 세게 한 방 얻어맞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분명히 베거의 동생 조는 몇 해전에, 니드리의 펍에서 싸움을 하다가 칼에 찔렸다. 그러나 애당초 싸움을 건 것은 조였으며, 찔렸다고 해도 별로 대단한 상처는 아니었다. 게다가 어차피 프랑코와 조는 으르렁거리는 사이였다. 그래도 벡비는 그 부상 사건을 구실로, 정기적으로 술에 곤드레로 취하고 동네 깡패들에게 싸움을 걸고 있다. 이 녀석도 언제 칼에 찔릴지 모른다. 그것은 절대 틀림없다. 공교롭게도 내가 함께 있을 때가 아니었으면 좋으련만. 헤이즐과 나는 프랑코와 준에게서 상당히 뒤떨어져서 걷고 있었다. 헤이즐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벡비, 어디가 잘못된 거 아니야? 아까 글라스 맞은 사람의 이마 봤지? 제발 집으로 돌아가자." 나는 자신도 모르게 벡비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려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내 자신이 싫어진다. 하지만 화를 내고 있는 헤이즐을 달래는 것은 무리였으며, 말다툼으로 발전하는 것도 견딜 수가 없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간단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1년 내내 벡비의 일로 피차 거짓말을 주고받고 있으니까 말이다. '벡비의 신화'라는 것은, 우리들의 거짓말로 만들어진 셈이다. 그리고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벡비 자신도 그 새빨간 거짓말을 믿고 있다. 벡비가 지금처럼 된 것은, 우리들의 탓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신화: 벡비는 훌륭한 유머 센스를 갖고 있다. 현실: 벡비는 유머 센스는 타인의, 대개는 동료의 불운이나 실수, 약점이 노출된 경우에만 발휘된다. 신화: 벡비는 '강철의 사나이'이다. 현실: 솔직히 말해서 나이프, 야구 방맘이. 블라스 넉클(격투할 때 손가락 관절에 끼우는 쇠조각), 맥주 글라스, 끝을 뾰족하게 만든 뜨개질 바늘과 같은 무기를 갖고 있지 않을 때의 벡비는 그다지 뛰어난 싸움꾼이 아니다. 다만 이 이론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하는, 간덩이가 부운 놈은 나를 포함해서 거의 없지만, 사실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토미가 언젠가 벡비와 싸워서 그의 결점을 공개적으로 보여준 적이 있다. 그에게 상당한 돈을 주고 싸움을 부추기게 한 것이다. 말해두고 싶은 것은 토미는 상당히 싸움에 능숙한 자식이라는 거다. 결론은 그래도 벡비의 우세승이었다. 신화: 친구들은 벡비를 존경하고 있다. 현실: 친구들은 벡비를 두려워하고 있다. 신화: 벡비는 친구들에는 결코 손을 대지 않는다. 현실: 벡비의 친구들은 이 명제를 애써 증명해보이려고 생각할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다. 그리고, 이것에 도전한 기특한 녀석들은 전원, 이 명제가 옳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보였다. 신화: 벡비는 친구들을 감싸준다. 현실: 벡비는 어느 악의 없는 멍청이가 잘못해서 우리에게 맥주를 흘리거나, 부딪치면 철저하게 두들겨 패준다. 그런 진짜 미치광이가 벡비의 친구들을 괴롭히면 냅둔다. 왜냐하면, 벡비의 추종자인 우리들보다 그러한 사이코들 쪽이 벡비와 더 친하기 때문이다. 그는 소년원이나 교도소, 부랑자 수용소나 프리메이슨 결사 같은 것을 통해서, 그런 인간들을 많이 알고 있다. 하여간 그런 '신화'가 있으니까, 그날 밤도 나는 그를 위해서 변호를 해 준 것이다. "에어즐, 프랑코가 회로가 끊어져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그건 그 녀석들이 동생 조를 생명 유지 장치 없이는 살 수 없는 상태로 만들었기 때문이야. 게다가 그 형제는 사이가 너무나 좋았거든." 벡비는 헤로인과 비슷하다. 버릇이 되어버린 것이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선생님이 나에게 말했다. "마트 렌튼, 너는 프란시스 벡비 옆에 앉거라." 중학교 올라가서도 또 벡비 옆에 앉게 되었다. 성적을 올려서 0레벨의 학급을 옮긴 것도, 따지고 보면 벡비로부터 떨어지고 싶은 일념에서 한 일이었다. 그러나 벡비가 퇴학을 당해서 폴몬트의 다른 학교로 간 순간, 나의 성적도 내려가서, 보통 학급으로 되돌아갔다. 그래도 어쨌든 벡비하고는 떨어질 수가 있었다. 그 뒤, 고르기의 건축업자 밑에서 견습 목수를 하고 있을 무렵, 나는 텔포드 칼리지에 목공 기술자의 국가 시험 연수를 받으러 갔다. 카페테리아에서 감자튀김을 먹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벡비가 사이코 친구들과 함께 나타났다. 비행 소년 대상의 금속 세공의 직업 연수를 받으러 와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유의 연수라는 것은 일부러 무기상을 찾지 않더라도, 잘 베어지는 금속 무기를 손에 넣을 수 있도록 그 녀석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목수 견습을 그만두고 A레벨(학과별로 단과 대학 정도의 학력 수준을 인정해주는 자격 고사)을 준비하는 칼리지로 가서, 그곳에서 애버딘 대학으로 진학할 무렵에는, 어차피 또 신입생 환영 파티 같은 곳에서, 애꿎은 중류 계급 출신의 안경을 쓴 도련님들한테 왜 쳐다봐, 하면서 박살을 내고 있는 베거와 만나게 될 거라고, 절반은 체념하고 있었다. 어쨌든, 벡비라는 녀석은 최악의 인간이다. 그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난처하게도 녀석은 내 친구인 것이다. 어쩔 수 없잖은가? 우리들은 걸음을 재촉해서 그들의 뒤를 좇아갔다. 문제아 4인조가 함께 걷고 있었다. 13.실망: 벡비의 이야기 나는 그 자식을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만치 잘 알고 있고 말고. 크레기 시절에는 녀석을 더럽게 만만치 않은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나 케브 스트로나크와 그의 패거리들과 사귀고 있었다. 그 거지 같은 사이코 녀석들과 말이다. 오해하면 안 된다. 나는 그 녀석을 제대로 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가 알게 되었다. 한 녀석이 그에게 어디 출신이냐고 물어본 것이다. "제이키!(그 녀석의 이름이다)너, 그랜틴 출신이냐, 아니면 로이스틴 출신이냐?" 그랬더니 그 녀석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랜틴은 로이스틴이고, 로이스틴은 그랜틴이야." 난 그 순간부터 그 녀석의 수준을 단숨에 끌어내렸다. 하지만 그것은 학교 다닐 때의 이야기야, 알았어? 아주 빌어먹을 만치 먼 옛날이야기라고. 그건 그렇다 치고, 1주일쯤 전이던가, 토미와 세크스-랍 멕롤린, 즉 세컨드 프라이즈다-하고 볼리라고 하는 펍에 술을 마시러갔다. 그랬더니 그 새끼가 크레기를 같이 다녔던 엄청나게 큰 제이키 바로 그 녀석이 안으로 들어왔지. 녀석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나는 그 녀석과 함께 돌멩이로 게들의 대군을 작살 내면서 놀던 때의 일을 생각해냈지. 그 빌어먹을 항구에서 말야. 저쪽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누군지 전혀 기억을 못했어... 나쁜 새끼. 그건 또 괜찮다 치고, 그 녀석의 친구인 여드름쟁이 얼간이가 놈의 내기돈을 당구대에 올려놓으려고 했어. 내기 당구를 하자는 거야. 알고 있겠지? 그래서 나는 안경 쓴 병신 같은 녀석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해 주었어. "저 녀석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어." 안경잡이는 차례를 기다리는 흑판에 이름을 써놓았는데도, 내가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으면 틀림없이 잠자코 있었을 거야. 나는 싸움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어. 만약 그 녀석들이 덤벼들면, 나도 상대를 해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그러니까,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지? 난 이런 싸움 거리를 찾아다니는 사람은 아니지만 손에는 당구 큐대를 들고 있었고, 만일 저 빌어먹을 자식이 원한다면, 큐의 굵은 쪽으로 여드름쟁이의 세수대야를 쑤셔줄 수도 있었어. 더구나 나이프도 갖고 있었거든. 당연한 일이지.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싸움 거리를 찾아서 돌아다니고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시건방진 자식들이 먼저 싸움을 걸어온다면, 나도 상대를 해주지 않을 수가 없지. 그런 연유로 안경잡이가 돈을 걸고 공을 세트하기 시작했어 여드름쟁이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았어. 나는 그 더럽게 만만치 않은 녀석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지. 적어도 자식은 학교 다닐 때는 꽤 으시시한 녀석이었다고. 그 녀석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어. 그 빌어먹을 입을 한 번도 열지 않았다고. 자식. 토미가 말했다. "야, 프랑코, 저 녀석. 꽤나 뻔뻔스러운데?" 토미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이 녀석 역시 겁이 없는 녀석이다. 그 녀석들에게도 토미의 목소리가 들렸을 테지. 그러나 이번에도 입을 열지 않았어. 여드름쟁이도, 옛날에는 꽤나 만만치 않았던 그 녀석도 조용했어. 싸움이 붙으면 2대 2야. 세컨드 프라이즈는 왜 빼놨는지 알고 있겠지? 오해하면 안 돼. 나도 세컨드 프라이즈는 소중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거든. 하지만 싸움만 벌어지면 이 새끼는 영락없이 겁에 질려버린다고. 완전히 꼬리를 내리고 덜덜 떤다니까. 하긴 애초에 큐대도 제대로 못 잡는 녀석이지. 수요일 아침 열한 시 반의 일이야. 틀림없이 욕 나올 정도로 멋진 한판이 되었을 거야. 그런데 그 녀석들은 한마디도 대꾸를 하지 않는 거야, 여드름쟁이 쪽은 처음부터 상대를 하고 있지 않았지만, 만만치 않은 녀석에게는, 아니 옛날에는 만만치 않았던 녀석에게는 정말 실망했다니까. 결국은 대단한 녀석이 아니었다는 얘기지. 털어놓고 말해버린다면, 사내 새끼도 아니란 말야. 난 정말 무지무지하게 실망했어. 그 망할 놈의 자식한테 말야. 14.아랫도리의 고민: 렌튼의 이야기 바늘을 찌를 곳을 필사적으로 찾아야 하다니 정말로 싫은 일이다. 어제는 하는 수 없이 페니스에다 놓았다. 내 몸 중에서는 정맥이 가장 똑똑히 보이는 곳이다. 이런 버릇은 들이고 싶지 않다. 뭐, 지금 현재로서는 있을 법하진 않지만, 오줌을 누는 것 이외의 용도가 언젠가 발견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현관의 벨이 울리고 있다. 빌어먹을! 보나마나 그 똥오줌도 못가리는 집주인 자식인 게 틀림없다. 박스터 영감 아들말이다. 그래도 아버지 박스터는-신이여, 그 망할 영감의 영혼에 평화를 주소서-실업자 주택 수당이 아직 나오지 않았느냐는 따위의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 단순한 망령난 영감이었다. 영감이 찾아오면, 나는 영감이 좋아하는 선량한 젊은이 역할을 연기했다. 웃옷을 벗겨주고, 우선 앉으세요, 하고 의자를 권하고, 엑스포트 맥주를 권한다. 그러고는 경마 이야기나 50년대에 스미스, 존슨, 라일리, 턴불, 그리고 오몬드의 '페이머스 화이브'라고 불리던 포워드 진이 현역이었을 무렵의 힙스 축구팀 이야기를 한다. 나는 경마는 잘 모르고, 50년대의 힙스 팀도 모르지만, 박스터 영감이 얘기하는 거라고는 그 두 가지밖에 없으니까, 나도 어느 틈엔가 대충 외워버렸다. 영감이 얘기를 하고 있는 틈에, 나는 벗겨준 웃옷 주머니를 뒤져서 현금을 빼낸다. 영감은 언제나 두툼한 돈 다발을 가지고 다닌다. 그렇게 해서 나는 영감의 돈으로 집세를 내든가, 얼마 전에 냈잖아요, 하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돈이 떨어지면 일부러 전화를 걸어서 박스터 영감을 불러내는 일도 있었다. 스퍼드나 식보이가 나한테 얹혀 살고 있었을 때에는 수도가 잡겨지지 않는다든가, 유리창이 깨졌다든가 하고는 영감을 불러냈다. 식보이가 낡은 흑백 텔레비젼을 집어던진다거나 하는 식으로 일부러 유리창을 깬 적도 있었다. 우리는 여러 차례 속아넘어가기 쉬운 박스터 영감을 불러다놓고 돈을 훔쳐냈다. 그 영감의 주머니에는 언제나 큰돈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영감이 어딘가에서 강도를 만날 때를 위해서 전부는 훔치지 않고, 얼마간의 돈은 남겨두곤 했다. 그러던 박스터 영감은 천국으로 가버렸다. 그 대신에 집주인이 된것은 유머 감각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영감의 아들놈이다. 그 녀석은 이런 돼지우리도 집세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렌츠!" 누군가가 편지통 틈새로 소리치고 있었다. "렌츠!" 집주인은 아니다. 토미다. 이런 시간에 뭐 하러 찾아왔을까? "잠깐만 기다려, 토미. 곧 열게." 나는 다시 페니스에 바늘을 꽂았다. 이것으로 이틀 연속이다. 바늘을 꽂을 때, 나는 무시무시한 바다뱀에게 무슨 실험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새각했다. 이 짓도 점점 그로테스크해져 간다. 금세 쾌감이 나의 뇌까지 찌르고 올라왔다. 한순간 꿈꾸는 듯한 심정이 되었으나, 다음 순간에는 토할 것만 같았다. 이 약이 이 정도로까지 질이 좋을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아서, 약간 독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등에 뚫린 가상의 총탄 구멍에서 엷은 공기가 흘러들어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약물 과용 상태는 아니다. 침착해라. 폐를 계속 움직여야 한다. 옳지. 잘 한다, 잘 해. 나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토미에게 문을 열어줬다. 마조르카 섬에서 구릿빛으로 태운 피부도 그대로였다. 햇빛 때문에 노랗게 바랜 머리칼은 짧게 깎아 젤을 발라 뒤로 넘겼다. 한쪽 귓볼에는 후프형의 귀걸이. 부드러운 푸른색 눈동자. 토미는 상당히 멋진 사내다. 구릿빛 피부는 녀석의 잘생긴 외모를 최고로 돋보이게 해줬다. 핸섬하고 대범하고 지적이며 게다가 싸움도 잘 하는 토미. 주위 사람들로부터 시샘을 받을 것 같은 인물이다. 그러나 왠지 이 녀석은 시샘을 받지 않는다. 자신의 장점을 이용하는 자신만만한 사람도 아니고, 옆에서 보고 있으면 공연히 아니꼬워지는 우쭐대는 인간도 아니다. 토미가 말했다. "리지와 헤어졌어." 축하한다고 말을 해야 할까, 안됐다고 말을 해야 할까? 리지는 섹스 파트너로서는 최고지만, 뱃사람처럼 입이 험하고, 그 눈으로 노려보면 불알이 오므라들 정도다. 어쩌면 토미도 기뻐해야 좋을지, 슬퍼해야 좋을지, 아직 잘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일로 머리가 꽉 차 있는 것이다. 언제나처럼 헤로인을 하다니, 이 멍청한 자식, 이라고도 말하지 않고, 좌우지간 지금의 나의 상태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으니까. 헤로인을 맞으면 타인에게는 무관심해지는 법이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신경을 써주는 시늉을 했다. 사실은 바깥 세계의 일 따위는 아무래도 좋지만 말이다. "열받았니?" "모르겠어. 솔직히 말해서 가장 서운한 것은 섹스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거야. 그리고 언제나 옆에 있어 주던 사람이 없어졌다는 거겠지." 토미는 나보다 사람들을 더 필요로 한다. 리지에 관한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중학교 시절의 것이다. 나는 벡비와 개리 맥비와 함께 최악의 나치 영감, 발란스의 사감 눈을 피해서, 링스 공원의 육상 경기 트랙 옆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짧은 팬티를 입고 달리는 여자의 모습이 잘 보여서, 새로운 마스터베이션 거리를 수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바로 리지였다. 리지는 신나게 달리고 있었으나, 결승점 앞에서 휘청휘청 달리고 있던 덩치 큰 모라그 '탐폰'헨더슨에게 추월당해서, 2등이 되었다. 우리들은 배를 깔고 누워, 팔꿈치를 짚고 턱을 손바닥으로 고이고서, 리지가 꼴사나운 표정을 띠고 열심히 달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일에 사납게 달려드는 리지다운 얼굴이었다. 정말로 모든 것이? 좋아. 토미가 기운을 차리면 섹스할 땐 어떤지 물어보자. 아냐, 그만둘까... ? 역시 물어보자. 어쨌든 그런 식으로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벡비 쪽을 보니까, 녀석은 여학생 쪽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면서 엉덩이를 천천히 흔들고 있었다. "귀여운 리지 맥킨토시... 굉장하구나... 굉장한 엉덩이야, 언제해도 굉장하다니까... 멋진 엉덩이야... 굉장한 유방이라고..." 그렇게 말하고는 녀석은 잔디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무렵의 나는 지금만큼 벡비를 경계하고 있지 않았다. 녀석은 보스가 아니고, 단지 나쁜 친구에 지나지 않았으며, 우리 형인 빌리에게 약간 겁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내성적임에도 불구하고 형의 평판 덕분에 무사히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좋았다. 아니, 실제로 그랬다. 하여간 그런 일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배를 깔고 있는 벡비를 뒤집었다. 그러자 녀석의 흙투성이가된 수도꼭지에서, 하얀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녀석은 부드러운 잔디에 나이프로 구멍을 파가지고, 땅바닥과 그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배를 잡고 웃었다. 벡비의 꼴이라니! '완전 사이코'라고 하는, 그 녀석 자신이 퍼뜨린-아니, 우리들이 퍼뜨린 헛소문을 자기도 믿게 되기 전의 벡비는, 지금과는 달라서 훨씬 태평스러운 인간이었다. "우와, 프랑코, 이 지저분한 자식!" 하고 개리가 말했다. 벡비는 페니스를 집어넣고 지퍼를 올리고는 정액과 흙을 움켜집어 개리의 얼굴에 문질러댔다. 하마터면 나도 당할 뻔했다. 그러나 개리가 폭발해서 벡비의 운동화 바닥을 힘껏 걷어찼다. 그러자 벡비는 허옇게 된 얼굴을 하고 씩씩거리며 가버렸다. 이것은 리지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벡비의 이야기일까? 그러나 리지와 탐폰.헨더슨의 격렬한 경쟁이 계기가 되어 일어난 사건이다. 어쨌든 2,3년 전에 토미가 리지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을 때, 대부분의 친구들은 부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식보이조차도 리지하고는 잔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놀랍게도 토미는 아직도 헤로인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주사기나 그런 것은 온 방안에 흩어져 있고, 내가 약에 취해 있다는걸 틀림없이 알아차렸을 텐데도 말이다. 이런 경우, 여느 때의 토미 같으면, 우리 엄마의 서투른 흉내를 낸다. 그러다 제명에 못 죽을거다, 집어쳐라, 그런 쓰레기 없이도 살 수 있잖니, 등등. 그런데, 오늘은 이런 식으로 나왔다. "야, 그거 맞으면 어떻게 되냐?" 순수한 호기심에서 묻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마약을 맞으면 어떻게 되느냐 따위는 얘기하기도 싫었다. 로열 에든버러 졸업생이나 시티 졸업생 녀석들이 하고 있는 시시껄렁한 카운슬링에서는 그런 것을 장황하게 늘어 놓아야 했지만. 쓸데없는 참견이다. 그러나 토미는 집요했다. "야, 좀 가르쳐줘라, 마크. 알고 싶어서 그래." 생각해보면 좋을 때나 나쁠 때나(대개는 나쁜 쪽이지만) 줄곧 함께 지내온 친구 사이다. 최소한 설명하는 노력 정도는 해주어도 좋겠지. 카운슬러(사실 경찰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에게는 설명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놀랄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가라앉았다. "잘 알 수가 없어, 토미. 나로서도 말이야. 뭐라고 할까, 여러 가지 것이 평소 때보다 리얼하게 보이는 거야. 인생이란 따분하고 무의미한 거잖아? 태어났을 때는 희망에 넘쳐 있지만, 그런 것은 조금씩 입에 담지 않게 되지. 더구나 중요한 답을 제대로 찾기도 전에 누구나 언젠가는 죽어버린다는 걸 깨닫게 되지. 자기 멋대로 현실을 해석해서 그럴듯한 신념을 만들어내지만,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즉 가치 있는 것, 중요한 것, 진실에 관계가 있는 지식은 조금도 늘어나지 않아. 기본적으로 인간이라는 것은 짧고, 실망스런 인생을 보내지. 그리고 죽는 거야. 인생이란 아무런 쓸모도 없는 거야. 직업이니, 인간관계니. 그런 것이 있으니까 인생도 그다지 쓸모 없는 것은 아니라고 착각을 하게 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헤로인은 정직한 약이지. 그런 환상을 모두 떨쳐버려 주니까. 헤로인을 맞으면 밝은 기분일 때라면 자신은 불사신이라는 생각이 들거든. 우울한 때는 본시부터 안고 있던 혐오가 더욱더 강해지지. 다른 마약을 써보았자 이런 식으로는 안 돼. 생각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약이 아니야. 한방 맞고 행복감을 얻을 뿐이야. 헤로인을 맞은 뒤에는 싫은 것도 있는 그대로 보이게 되지. 자신을 속이지 못하게 되는 거야." "거짓말, 거짓말일 거야"하고 토미가 말했다. 그래, 아마 거짓말일 것이다. 같은 것을 지난주에 물어보았다면, 나는 전혀 다른 말을 지껄여댔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일 묻는다면 또 다른 말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지금은 다른 마약이 따분하고 무의미하게 생각되어도, 헤로인만은 효과가 있다고 하는 설을 주장해두자. 나의 문제는 갖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 그러니까 가령 걸프렌드라든가, 아파트, 일자리, 돈 같은 것이 정말로 손에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된 순간, 갑자기 그 모든 것이 시시하고 따분한 것으로 생각되어서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돼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약만은 다르다. 헤로인에게 등을 돌리려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헤로인 쪽에서 나를 놓아주질 않는다. 마약과 잘 사귀는 것은 최고로 어렵다. 하지만 엄청난 스릴도 맛볼 수 있다. "엄청난 스릴도 맛볼 수 있어." 토미가 내 눈을 보고 말했다. "나도 해봐야겠어. 맞아보고 싶어." "집어쳐." "엄청난 스릴이라면서? 꼭 한번 시험해보고 싶어." "그만두는 게 좋아. 이봐, 토미. 난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거야." 내가 말리니까 토미는 더욱더 실험해보고 싶어진 모양이다. "돈이라면 갖고 있어. 자아, 그러니까 내게도 만들어 달라니까." "토미... 제발 부탁이니까..." "왜 그래? 야, 나하고 너 사이잖아? 만들어 달라니깐. 내 일이라면 걱정할 것 없어. 한 번 맞았다고 해서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안 그래?"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녀석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주사기와 바늘을 꼼꼼하게 소독하고 1회분을 약하게 만들어서 놓아주었다. "정말 죽이는데, 마크... 이거 완전히 롤러코스터 타는 것 같잖아... 와, 날아갈 것 같아..." 녀석의 반응은 날 경악시켰다. 누구 말마따나 이 세상에는 타고난 헤로인쟁이가 있긴 있는 모양이다... 한참 있다가 약기운이 떨어진 토미가 그만 돌아가려고 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자, 이걸로 된 거다, 토미. 이제 넌 모든 걸 해본 거야. LSD, 스피드, E(엑스터시, 스피드와 비슷한 흥분제), 머시룸(환각 작용을 일으키는 버섯의 일종), 넴뷰틀(중추신경 억제제), 발륨, 헤로인, 이제 다 해본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머릿속에 깊이 새겨두라고. 오늘 것을 최초이자 최후의 것으로 해야 하는 거야." 최후의 것으로 하라고 한 것은, 틀림없이 녀석이 조금 나눠달라고, 집에 가서 또 하고 싶다고 말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도 남에게 나누어줄 정도로 많이 가지고 있지 않다. 한번도 여분으로 가지고 있어 본 역사가 없다. "그래, 그렇게 할게." 토미는 그렇게 말하고 재킷을 입었다. 토미가 돌아간 뒤, 수도꼭지가 가려워서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그러나 긁을 수는 없다. 긁으면 세균이 들어가버린다. 그렇게 되면 이번에야말로 진짜 비참한 꼴이 될 것이다. 에 보관해 잠가두었다. 다른 비행기 한 대는 히말라야의 남쪽에 추락했다고 하는데 그 지역 주민들은 미개한 정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불교를 믿지 않았으며 거의 나체로 돌아다녔다. 티베트 사람들은 그들의 독화살을 무척 두려워했다. 그들은 모피와 사향을 소금이나 가짜 장신구와 교환하려고 아주 가끔씩 숲에서 나왔는데 그럴 때면 미국 비ㅓ행기에서만 나올 수 있는 그런 물건들을 가지고 나왔다. 이것이 미국 조종사들이 불행을 당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유일한 소식이었다. 조사를 해보았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장소를 찾아 조사해보고 싶었지만 그 지역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군대 개편과 신앙심 고취 티베트의 정치적 상황은 점점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북경의 중국인들은 그들이 티베트를 곧 〈해방〉시켜 줄 거라고 엄숙하게 선언했다. 라사에서도 이 협박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중국 공산군은 항상 계획안 일을 실행에 옮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티베트 정부는 급하게 군대를 개편하기 시작했다. 내각장관 중 한 명이 이런 특수 임무를 맡았다. 티베트에는 상설 군대복무를 해야 했다. 그것은 국가에 대한 그들의 의무였는데 독일과 같은 그런 의미에서의 병역 의무는 아니었다. 국가는 그 사람 개인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숫자의 남자들이 군복무를 해야 했다. 그것은 국가에 대한 그들의 의무였는데 독일과 같은 그런 의미에서의 병역 의무는 아니었다. 국가는 그 사람개인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단지 숫자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군복무를 해야 하는 사람은 대리인을 사서 대신 보낼 수도 있었다. 대신 군대에 간 남자들은 평생 동안 군인으로 남기도 했다. 인도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ㄴ는 군대의 교관들은 현대식 무기도 잘 다루었다. 군대의 명령어는 지금까지 티베트 어, 인도어 영국어를 섞어서 사용했다. 새로 부임한 장관은 첫번째로 군대 명령을 티베트 어로 통일시켰다. 「신이여 국왕을 도우소서」라는 영국찬가 대신 티베트 찬가의 가사와 멜로디가 새로 만들어졌다. 티베트의 자주성을 찬양하는 내용이며 고귀한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에 대한 맹세가 포함되어 있었다. 라사 주위의 평평한 초지는 군대 연습장으로 바뀌었다. 새로이 연대가 편성되었으며 국회는 귀족과 부자들에게 1,000명의 군인과 장비를 부담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들 스스로 복무를 하든지 대리인을 보내든지는 그들의 자율에 맡겼다. 일반 관리 혹은 ㄹ승려 관리들이 장교로 교육받는 교육 과정이 개설되었으며 그들은 대부분 이 일에 찬성했다. 군복은 여름에는 카키색 면으로, 겨울에는 티베트산 호두 껍질로 물들인 초록색 모직으로 통일했다. 그 군복은 티베트의 전통의상 스타일과 일치했다. 이불로도 사용할 수 있는 외투 같은 종류의 망토, 그 밑에 긴 바지를 입고 티베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긴 장화를 신었다. 여름에는 챙이 넓은 모자를 써서 강한 햇빛을 막았고 겨울에는 털모자로 추위를 막았다. 밀집 대형으로 한데 모인 군대는 잘 짜여진 용감한 군대라는 인상을 주었다. 물론 유럽이나 미국의 군대와 비교해서는 안 된다. 프로이센의 상사가 보았더라면 즈집잡을 것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티베트 군인들의 무조건적인 복종심은 다른 군대에서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군대는 대부분 맹목적인 복종에 익숙해 있는 농노들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놀랄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 자신들의 나라와 종교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어해졌다. 그래서 당시 티베트 군인들은 투자와 자부심으로 가득 찼다. 평화로운 시대에 티베트에서는 군대에 관해 많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물론 당시에도 고향의 자치 기구가 군에 복무하는 사람들의 양식을 지원하고 자금을 댔다. 하지만 정부는 좋은 조직의 중요성을 깨달아 직접 장교와 군인들에게 급료를 지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새로 편입된 많은 군대를 철저한 관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수송 부대에 갑자기 너무 많은 짐이 부과되었으며 빵 원료가 되는 곡물이 저장된 창고는 너무 멀었다. 모든 마을에는 많은 곡식을 저장해 놓은 창고가 있었다. 창문은 없지만 공기 구명이 있는 커다란 돌 건물로 그 안에서 곡식은 아무 해도 입지 않고 몇십 년씩 저장되었다. 건조한 공기가 부패를 막았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날 경우 전방으로 예상되는 곳으로 곡물을 옮겨 놓았기 때문에 이제 창고는 빠르게 비어갔다. 하지만 양식의 부족이 티베트를 오래 위협하지는 않았다. 티베트 주위에 담을 쌓아놓는다 해도 아무도 굶주림이나 추위로 고통받지 않을 것이다. 이 거대한 나라에는 300만 명의 주민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기 때문이다. 군대의 부엌에서는 풍요로운 음식이 제공되었다. 그 외에도 군인들은 담배와 창을 받았으며 그것으로 만족했다. 티베트 군대에서도 장교와 군인은 군복으로 쉽게 구분되었다. 계급이 높아질수록 순금으로 만든 장식이 수도 없이 많이 달렸다. 그런 것에 대한 엄격한 규칙이 없었던 것이다. 금 견장 외에도 많은 반짝이는 장식품을 가슴에 단 장군도 있었다. 아마도 그는 외국 잡지를 보고선 외국의 장군을 모텔로 삼아 자신을 꾸몄던 것 같다. 티베트에는 훈장이 없었다. 티베트의 군인들은 훈장대신 구체적인 보상품을 받았다. 승리를 하면 노획품 중 무기만 정부에 제출하고 나머지 물건들에 대한 모든 권리를 가지기 때문에 약탈 행위가 갖았다. 내가 자주 함께했던 도둑떼 토벌에서도 그런 예를 자주 볼 수 있었다. 지방 뵌포는 도둑들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면 정부에 도움을 청했다. 그러면 작은 군부대가 투입되었는데 군인들은 이미 잘 알려진 도둑들의 무자비한 전투방식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회를 매우 열망했다. 그들은 많은 노획물을 얻을 생각만 햇지 위험은 생각하지 않았다. 노획물에 대한 이런 권리 때문에 부끄러운 일이 여러 번 있었다. 나 자신도 이런 보상 방식 때문에 여러 사람이 생명을 빼앗긴 슬픈 사례를 직접 본 적이 있다. 중공군이 트루키스탄(터키 계 민족의 거주지인 중앙 아시아의 역사적 지방이름 - 옮긴이)을 점령했을 때 거기 주둔하고 있던 미국인 영사 마슈넌은 젊은 동향인 베섹과 백러시아인 세 명과 함게 티베트로 도주하려 했다. 그는 인도에서 사절을 보내 티베트 정부에게 여행 허가를 요청했다. 라사는 각지의 강화된 국경 수비대와 정찰대에게 긴급 사자를 보내 망명자들이 어려움 없이 티베트로 들어올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들은 쿠엔룬을 거쳐 창탕강을 통과했다. 낙타는 훌륭하게 잘 견디어 냈으며 컁을 사냥해서 신선한 고기를 조달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정부가 보낸 사자가 미국인과 그의 동행들이 넘으려 했던 국경에 너무 늦게 도착했다. 경비대는 심문하지도 않고 그들을 공격했다. 강한 책임감 보다는 무거운 짐을 진 낙타 열두 마리 때문에 공격했을 것이다. 미국인 공사와 러시아인 두 명은 죽었으며 또 한 명의 러시아인은 부사당했다. 베색만이 아무 부상도 당하지 않은 채 거기서 도망쳤지만 곧 다시 붙잡혔다. 경비대는 그와 부상당한 러시아인을 데리고 인근 지역의 총독에게 데리고 갔다. 경비대는 두 미국인과 동행인들을 정부의 손님으로 받아들이라는 명령을 가지고 온 사자와 마주쳤다. 이제 분위기는 ㄹ반전되었다. 티베트 군인들은 완전히 기가 죽었으며 정중해졌다. 그 사견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세사람으리 목숨을 앗아간 사건이었다. 총독은 라사로 보고서를 보냈으며 라사의 정부는 그 사건에 관해 듣고는 경악했다. 정부는 가능한 한 모든 방법으로 애도의 뜻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인도에서 교육받은 위생병이 선물을 가지고 베섹과 부상자에게로 왔다. 정부는 그들을 공격한 경비병에 대해 증언해 달라며 라사로 그들을 초청했다. 영어를 약간 할 줄 아는 고위 관리가 말을 타고 나가 관습대로 도착한 사람들을 맞이했다. 나도 고위 관리와 함께 갓는데 젊은 미국인이 나 같은 백인과 그의 경험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을가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정부가 그 살건에 아무 책임도 없으며 그 사건에 대해 무척 유감스러워 하고 있다는 것을 그에게 설득시키고 싶었다. 비ㅓ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가운데 젊은 미국인을 만났다. 키가 큰 젊은이로, 뒤에 있던 작은 말이 그의 몸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 불쌍한 미국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상상이 갔다. 소규모의 카라반이 몇 달 동안 사람들에 쫓기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여행을 계속했는데 망명을 기대했던 나라 사람과의 첫 만남이 그들 중 세 사람에게 죽음을 안겨준 것이다. 이미 새 옷과 신발이 정부의 텐트 안에 마련되어 있었다. 라사에서는 손님들을 맞기 위해 요리사와 하인이 있는 숙소를 준비해 놓았다. 다행히도 러시아인 바시리예프의 상처는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곧 그는 목발을 짚고 절룩거리며 정원을 산책할 수 있엇다. 그들이 한 달간 라사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베섹과 친해졌다. 그는 자신을 그러헥 무례하게 영접했던 나라에 대해 어떤 원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가 배상으로 요구한 것은 총독에게 데리고 가면서 그를 아주 거칠게 다루었던 군인을 벌주라는 것뿐이었다. 거짓으로 벌주는 척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없애기 위하여 그가 보는 데서 그 군인이 벌을 받았다. 그러나 군인이 혹독하게 채찍질당하는 것을 보자 그는 벌을 줄여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군인이 채찍질당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었으며 그 사진은 나중에《라이프》에 실렸다. 그래서 티베트 정부는 고잇ㄱ적으로 속죄할 수 있었다. 라사 정부는 죽은 사람들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하기 위해 서양식 풍습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오늘날 창탕의 한가운데에서 소박한 십자가 세 개를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구조될 거라고 굳게 믿는 순간 죽음을 당했다는 점이 그들의 이야기를 더욱 가슴을 아프게 했다. 베섹은 달라이 라마를 접견하고선 미국의 대리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던 시킴 국경까지 계속 이동했다. 불안한 시기였기 때문에 계속 많은 도망자들이 티베트로 망명했다. 다른 사람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낙타 카라반이 창탕을 통해 라사에 도착했는데 몽골의 왕자와 그의 두 아내였다. 한 사람은 폴란드 여자였고 한 사람은 몽골 여자였는데 나는 엄청난 일을 해낸 두 여인을 보고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더욱 놀랐던 것은 그들이 사랑스론 아이 둘을 함께 데려왔다는 사실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탈출 여행을 잘 견디어냈다. 그들은 반 년 동안 라사에 머물었으며 지금은 인도에 살고 있다. 우리 시대의 비극을 확인할 수 있었던 탈출 사건도 있었다. 백러시아인 150명이 고향에서 출발해 걸어서 러시아를 통과했다. 몇 년 동안 여행을 하면서 아주 힘들고 체력 소모가 심한 탈출 여행을 끝내고 라사에 도착했을 때는 그들 중 스무 명만이 살아 남았다. 정부는 성심것 그들을 도와주었다. 양식을 제공했으며 수송 수단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다시 인도로 가야만 할 처지였다. 그렇게 전 세계를 헤매며 쫓겨다녔다. 며칠 전에 들은 소식에 의하면 그들 스무 명이 함부르크에 무사히 도착했으며 거기서 미국으로 가는 ㄹ배를 탄다고 했다. 고통스런 방황 후에 마침내 미국에 정착하려는 것이다. 정부는 이런 위험한 시기에 외적인 방위력을 총동원했을 뿐 아니라 내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했다. 그러기 위해 정부는 티베트의 생활 전반에 걸쳐 가장 강력한 지주 역할을 했던 종교에 손을 댈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해 새로운 지시가 발표되었고 새로운 관리들이 투입되었으며 새로운 정책들을 티베트 전체에 조직화할 수 있는 엄청난 자금이 지원됐다. 티베트의 모든 승려들은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티베트 경전인 캉유르를 읽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새로운 오색 깃발과 법륜이 각지에 세워져 신의 도움을 간구했다. 특별히 강하다는 귀한 부적이 오래된 함에서 꺼내졌다. 공양은 두 배로 늘어났으며 산 위에는 어디나 불이 피워졌다. 산곡대기에 세워진 새 법륜들이 바람을 받아 돌면서 티베트 사람들의 소망을 라마교 수호신에게 보냈다. 종교의 힘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티베트 사람들은 그들이 자주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신이 확실하게 그들을 보호해 주기를 바랐다. 그 사이 북경의 라디오는 티베트 어로 뉴스를 내보내기 시작했으며 티베트를 곧 〈해방〉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계속 되풀이했다. 20. 백 년만의 섹스 그들은 온종일 술이 머리 꼭대기까지 취한 채 지냈다. 지금도 크롬과 네온이 소용돌이치는 촌스러운 육욕의 집합소에서 계속 마셔대고 있다. 비싼 술이란 술은 모두 다 갖추고 있지만 아무리 보아도 세련된 HLS 칵테일 바는 영 아니다. 사람들이 이 곳에 모여드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직 초저녁이다. 술을 마시고, 잡담을 나누고, 음악을 들으러 왔을 뿐이라는 시늉을 하고 있어도, 이 시간이라면 아직 속이 들여다보이지는 않는다. 마약과 술 탓으로, 스퍼드와 렌튼의 헤로인이 깰 때의 성적 욕망은 손을 댈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그 곳에 있는 여자는 모두 엄청나게 섹시하게 보였다. 괜찮은 남자를 보아도 불끈불끈 솟는다. 차례차례로 눈이 옮겨가서, 목표를 한 사람으로 압축시킬 수가 없다. 그런 식으로 그 곳에 있기만 해도, 마지막으로 여자와 함께 잔 것이 얼마나 먼 옛날의 일인지, 새삼스럽게 통감하게 된다. 식보이가 음악에 맞춰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이 곳에서 걸 헌팅을 하지 못하면, 오늘은 포기하라고." 식보이라면 언제나처럼 그렇게 남의 일처럼 말할 수가 있다. 식보인 이미 승리를 손 안에 집어넣어서 여유가 만만하니까. 눈 밑의 그늘을 보면 민토 호텔에 묵고 있는 그 미국 여자들과 아침부터 계속 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스퍼드에게도 렌튼에게도 그리고 백비에게도 두 사람 중 어느 쪽인가를 양보 받을 가능성은 없다. 두 사람은 어느 쪽이나 식보이와 돌아갈 것이고, 덤이 따라간다면 싫어할 것이 틀림없다. 식보이 녀석은 단순히 놈들에게 이 자리에 얼굴을 내밀어주는 은총을 베푼 것뿐이니까. "그 두 사람은 굉장히 질이 좋은 코카인을 갖고 있어. 그런 건 지금까지 해본 적이 없다니까." 스퍼드가 말했다. "모닝사이드의 스피드도 좋잖아?" "코카인이라고... 흥, 그런 건 여피족 놈들이나 하는 쓰레기 같은 거야." 렌튼은 헤로인을 끊은 지 몇 주일이 되었지만, 헤로인 이외의 다른 마약에 대한 헤로인 애호가 특유의 경멸은 아직 없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저런 공주님들이 돌아오셨군. 그럼 너희들끼리 그 지저분한 작전을 수행해주길 바라며 난 이만." 식보이는 경멸하듯이 고개를 흔들고 그렇게 말하더니, 우월감을 담은 거만한 표정으로 바를 둘러 보았다. "이게 노동자 계급의 낙이라는 거로군"하고 그가 코웃음쳤다. 스퍼드와 렌튼은 속이 뒤집어 졌다. 식보이와 친구가 되면 섹스에 대한 질투를 느끼게 된다. 스퍼드와 렌튼은 오늘 밤의 식보이가'민토의 처녀들'과 벌이는 코카인을 곁들인 2대 1 섹스 게임은 어떤 걸까 하고 상상했다. 그들로서는 상상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식보이는 자신의 섹스 모험담을 절대로 상세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식보이의 그 신중함은 같이 잔 여자에 대한 배려라기보다는 그 방면에 대해 자기보다 덜 활동적인 친구들을 고문하기 위해서였다. 스퍼드와 렌튼은 부유한 관광객이 코카인이 있는 2대 1 섹스는 식보이와 같은 섹스 귀족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특권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런 후진 바에 만족하는 것이 자기들의 분수를 지키는 일이었다. 렌튼은 멀리서 식보이를 바라보며 녀석의 입에서 나오고 있을 거짓말에 대해 상상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적어도 여자와 먼저 사라지는 것은 식보이에게는 항상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렌튼과 스퍼드는 백비마저 별도로 행동하고 있는 걸 깨닫고 아연해 있었다. 백비가 지금 얘기를 나누고 있는 여자는 꽤 예쁜데, 하고 스퍼드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엉덩이가 너무 커, 하고 렌튼이 심술궂게 지적했다. 세상에 저렇게 사이코 끼가 있는 녀석에게 매력을 느끼는 여자도 있구나. 악의로 가득 찬 질투를 느끼며 렌튼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비싸게 먹힐걸. 비참한 생활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백비의 걸프랜드인 준이 그 좋은 예다. 지금쯤 애를 낳느라고 입원해 있겠지. 간단하게 자기 주장이 옳다는 걸 증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 렌튼은 맥주를 쭉 들이켰다. 증명 끝. 그러나 렌튼은 언제나처럼 자기 분석에 모드에 돌입해 있어서 자기 만족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엉덩이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다시 자기 기만 메커니즘을 작동시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렌튼의 마음 한구석에선 자기야말로 이 술집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언제나 가장 멋진 사람에게서도 흉칙한 점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흉칙한 부분을 따로 떼어내 집중하고 있으면 그 사람의 아름다움을 마음속에서 말끔히 지워버릴 수 있었다. 한편으론 자신의 추악함은 아무렇게도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지금 렌튼은 백비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이 이상 비참해질 순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백비와 새로운 애인은 식보이와 미국 여자들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 미국 여자들은 꽤 괜찮아 보였다. 적어도 갈색으로 태운 피부와 값 비싼 옷차림 때문에라도 괜찮게 보였다. 백비와 식보이가 아주 친한 친구처럼 행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까, 구역질이 치밀어 오른다. 여느 때는 서로 헐뜯기만 하는 주제에. 성공자와 탈락자를 가르는 것은 다른 분야에서도 그렇지만, 섹스의 영역에서도 역시 손이 빠르느냐 느리느냐 하는 점에 달려 있다. "아무래도 너랑 나만 남은 것 같은데, 스퍼드." "응, 그래... 그런 것 같아, 캣보이." 스퍼드는 다른 사람은 흔히 '캣보이'라고 부른다. 렌튼은 그 말의 울림이 좋았다. 다만 자기가 그렇게 불리는 것은 싫었다. 고양이는 렌튼을 기분 나쁘게 했다. "야, 스퍼드. 나, 헤로인을 끊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 그렇게 말한 것은 아마도 스퍼드가 충격을 받아서, 그 술 취한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일 거다. 그러나 그 말이 입에서 나온 순간, 자신이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 굉장히 힘들지?... 안 그래?" 스퍼드는 꽉 다문 입술에서 공기를 밀어내듯이 말했다. 알았다. 조금 전에 화장실에서 했던, 그가 쓰레기라고 단언했던 스피드가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헤로인을 그만두면, 우리는 닥치는 대로 어떤 마약이나 복용하는 무책임한 멍청이로 전락해버리니까 곤란하다. 일단 헤로인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다른 쓰레기가 끼여 들 틈이 없는데 말이다. 찌걸여대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스피드는 렌튼의 몸 안에서, 술이나 마리화나보다 훨씬 더 앞을 달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스퍼드. 헤로인을 하고 있을 때는 그것만으로 충분해. 헤로인 문제만을 걱정하고 있으면 돼. 빌리를 알고 있지? 우리 형 말이야. 형은 바로 얼마 전에 빌어먹을 육군으로 복귀하는 계약서에 사인했어. 멍청하게 벨파스트에 간다나. 난 언제나 그 자식이 돌았다는 걸 알고 있었지. 제국주의의 기생충 같다니까. 하지만 형이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이렇게 말했어. '나는 민간인 같은 것은 될 수가 없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군인이라는 것은 정키와 마찬가지야, 단 한 가지 다른 것은 정키는 총에 맞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거 야. 쏘는 것은 항상 자기 쪽이니까." "그 말은 어딘가 좀 이상하지 않니?" "아니 끝까지 들어봐. 생각해봐라. 군대에 있으면 군대 쪽에서 무엇이든지 다 해준단 말야. 먹을 것에 대한 걱정도 필요 없고. 군인이 기지에서 나오거나 하면 사기가 떨어지고, 근처의 주민에게 폐가 된다고 해서, 기지 안의 거지 같은 클럽에서 술까지 싸게 마실 수 있게 되어 있어. 그러나 제대를 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가 전부 마련하지 않으며 안 되잖아." "그건 그래. 하지만 역시 좀 이상하다고. 왜냐하면..." 스퍼드가 끼여 들려고 했으나 헨튼의 연설은 멈추지를 않는다. 술병으로 이마를 쾅 하고 때릴 정도의 행동을 하지 않으면, 렌튼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설사 때려봤자 몇 초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을까?" "그건 그래. 하지만 역시 좀 이상하다고. 왜냐하면..." 스퍼드가 끼여 들려고 했으나 렌튼의 연설은 멈추지를 않는다. 술병으로 이마를 쾅 하고 때릴 정도의 행동을 하지 않으면, 렌튼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설사 때려봤자 몇 초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을까? "어... 잠깐 기다려. 우선 들어보라니까, 끝까지 말하게 해줘. 내가 어디까지 말했더라?... 그렇지! 그러니까 헤로인을 하고 있으면 약을 손에 넣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으면 되는 거야. 그러나 마약을 끊으면 여러 가지로 걱정거리가 생기거든. 돈 없으면 술을 못 마셔. 돈 있으면 너무 마셔, 여자가 없으면 그 짓을 못해, 여자가 있으면 너무 귀찮아. 사사건건 잔소리를 해서 숨도 못 쉬게 하지. 없이 살든가 참고 살든가 하나를 택하든지, 두들겨 부수고 죄책감에 후회하게 되지. 청구서나 식비라든가, 법원에서 혹시 호출장이 날아올까, 개 같은 네오나치놈들에게 두들겨 맞으면 어떡할까 하는 걱정거리들은 명실공히 정키였던 때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 들뿐이라고. 정키라면 단 한 가지 일만 걱정하고 있으면 된단 말야. 살기 쉬워지거든. 내 말 알아듣겠니?" 렌튼은 잠깐 충전을 위해 말을 멈췄다. "알았어. 하지만 왠지 비참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그런 것은 살아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거야. 안 그래? 금단 증상 때... 우울해서 밑바닥에 떨어져 있을 때 ... 뼈가 삐걱거리고... 그건 독약이란 말야. 단순한 독약... 그러니까 다시 그런 생활로 돌아가겠다는 헛소리는 입에 담지도 마." 스퍼드의 반론에서는 온화하고 태평스러운 스퍼드답지 않게 얼마간의 독기가 느껴졌다. 렌튼은 아무래도 기분이 상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몽땅 헛소리야. 루 리드를 들어서 그래." 스퍼드는 자기도 모르게 주워 가고 싶어지는, 아줌마들을 홀리는 버려진 고양이의 미소를 지었다. 식보이와 두 미국 여자, 애너벨과 루이즈는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식보이는 30분 간 베거 치켜세우기 라는 친구로서의 의무를 깨끗이 완수하고 있었다. 하긴 베거가 친구들을 거느리는 유일한 이유라고 렌튼은 생각했다. 자기가 싫어하고 있는 인간을 친구로 갖다니, 그것은 미친 짓이다. 그러나 백비는 헤로인과 마찬가지여서, 습관이 되어 버린다. 더구나 위험한 습관이다. 통계를 보면, 모르는 상대에게 살해당하는 것보다 가족이나 친구한테 살해당하는 확률 쪽이 높다. 그런데도 세상에는 사이코 친구들로 주위를 둘러싸면 자기도 강해진다고 믿는 인간들이 있다. 그렇게 하면 잔혹한 외부 세계로부터 몸을 보호 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그 정반대라고 하는데 말이다. 식보이는 미국 여자들을 데리고 출입구로 향하면서 렌튼을 돌아 다보고, 문 너머로 사라지기 직전에, 로저 무어 풍으로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려 보였다. 스퍼드가 불러일으키는 망상이 렌튼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렇구나, 식보이가 여자에게 환영 받는 것은 눈썹을 한쪽만 치켜 올릴 수 있기 때문이구나! 핸튼은 눈썹을 한쪽만 치켜 올리는 게 꽤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거울 앞에 서서 연습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때마다 양쪽 눈썹이 동시에 치켜 올라가 버린다. 대량의 술과 흘러간 시간의 공범이 되어서 신경을 집중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폐점 시간 전이 되자, 그때까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상대라도, 저 정도라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게 된다. 나머지 30분이 되니까, 멋진 상대처럼 생각되었다. 렌튼의 눈이 주위를 방황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까,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간 긴 밤색 머리에 호리호리한 여자가 보였다. 멋지게 태운 피부. 화장으로 센스 있게 돋보이게 한 섬세한 이목구비. 다갈색 상의에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여자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자 팬티의 라인이 뚜렷이 떠올라서, 렌튼의 머리에 피가 치솟아 올랐다. 그래,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 통통한 얼굴의 사내가 그 여자와 동행에게 아주 친밀한 듯이 얘기를 걸고 있었다. 목의 단추를 풀은 셔츠 앞이, 터질 듯한 배에 밀려 올라가서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뚱보에 대한 편견을 숨기지 못하는 렌튼은 이 때다 싶어서 하고 싶은 소리를 모두 풀어놓았다. "스퍼드, 저 뚱뚱한 친구를 좀 봐. 먹는 것밖에 모르는 돼지 같은 놈. 난 체질이 어쩌구 신진대사의 차이가 어쩌구 하는 개소리는 믿지 않아. 텔레비젼 뉴스에서 에티오피아 뚱보 같은 것 본 적이 없을 걸. 선천성 뚱보라는 게 있다면 당연히 에티오피아에도 뚱보가 있어야 되잖아? 말도 안 돼." 스퍼드는 렌튼이 격앙된 어조로 쏟아놓는 이야기에 술에 취한 얼굴로 웃기만 했다. 저 아가씨, 그래도 보는 눈이 있군. 저것 좀 봐, 뚱보를 격퇴했는데. 렌튼은 그녀가 뚱보를 다루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위엄에 찬 단호한 거부. 뚱보의 자존심을 철저하게 깔아뭉개지는 않고, 그러나 상대에게 흥미가 없다는 걸 확실하게 깨닫게 해준다. 뚱보는 미소를 지으며 별 수 없다는 듯이 팔을 벌리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함께 온 일행이 놀려대듯이 큰소리로 웃는다. 그 사건을 지켜본 렌튼은 이렇게 된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여자에게 말을 걸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따라오라고 스퍼드에게 신호했다. 자기가 선제 공격을 가하기는 싫었기 때문에 여느 때 같으면 절대로 자기 쪽에서 먼저 말을 걸지 않는 스퍼드가 동행한 여자 쪽에 말을 걸었을 때, 렌튼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분명 아까 한 스퍼드가 효력을 발휘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곧 스퍼드가 프랭크 자파 이야기를 청산유수를 늘어놓고 있는 것이 들렸다. 저 녀석 제정신이야? 렌튼은 캐주얼하지만 자신의 흥미를 분명히 나타내고, 진지하지만 경쾌하게 보이는 접근을 시도했다. 적어도 자신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야기를 방해해서 미안하군요. 다만 조금 전에 말을 걸어온 뚱뚱한 친구를 우아하게 쫓아버리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요. 틀림없이 얘기를 나누면 재미있는 분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내가 당신 취향이 아니라면 그렇다고 말해줘도 상관없어요. 그런데, 난 마크라고 해요." 여자는 약간 곤혹스러워 하는 듯하면서 깔보는 것 같은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렌튼은 적어도 '저리 가보세요'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얘기를 나누는 상이에 자신의 외모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스퍼드의 효력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검게 물들인 머리칼이 멍청이처럼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하고 걱정이 되었다. 검정으로 하면 빨강머리의 숙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주황색의 주근깨가 한층 눈에 띈다. 그는 자기 스타더스트 시대(데이비드 보이가 동명의 가상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앨범을 발표했던 1970년 대초-역주)의 데이비드 보위를 닮았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몇 해 전에 어떤 여자가 스코틀랜드 대표이기도 한 애버딘 출신의 프로 축구 선수 알렉맥리시와 꼭 닮았다고 말했다. 그 이래 렌튼에겐 그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렌튼은 알렉 맥리시가 은퇴하면, 감사의 표시로 맥리시 은퇴 기념품을 사러 애버딘으로 가줄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 식보이가 안됐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그에게 이렇게 말해줬다. "이봐, 알렉 맥리시를 꼭 닮은 녀석이 여자에게 환영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냐?" 그런 연유로 맥리시의 이미지를 떨쳐버리려고 머리칼을 검게 물들이고, 뾰족하게 세우는 스타일로 바꾸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보니까, 이번에는 모처럼 여자를 낚아도 옷을 벗고 빨간 음모가 보인다면 배꼽을 잡고 웃는 게 아닐까 하고 걱정이 되었다. 눈썹도 검게 물들였으니까, 기왕 그럴 바에야 음모도 염색을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멍청하게도 렌튼은 그 문제를 어머니에게 의논해버렸다. 갱년기 장애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작작해라, 마크!" 여자의 이름은 다이안이었다. 아무래도 그녀를 예쁜 아가씨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용모에 대한 기준을 총족시키는 건 상대의 필수 조건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경험으로 볼 때, 마약이 몸과 머릿속을 뛰어 돌아다니고 있을 때의 자신의 판단은 결코 신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음악 이야기가 나왔다. 다이안은 심플 마인즈(1980년대의 인기 뉴웨이브 그룹-역주)가 좋다고 말해서, 처음으로 가벼운 논쟁이 벌어졌다. 렌튼은 심플 마인즈를 싫어하고 있었다. "U2의 흉내를 내서 정치색이 짙은 음악을 만들게 된 후부터 심플마인즈는 최악이 돼 버렸다고 생각해. 펌프 록(음악이나 용모에 화려한 스타일을 내세우는 록-역주)의 왕도를 벗어나, 유치한 정치관을 내세우게 되고 나서부터\ 나는 그들을 믿지 않게 되었어. 초기의 곡은 굉장히 좋았지만, "뉴 골드 드림"부터는 쓰레기야. 만델라가 어떻게 했다든가 하는 곡을 듣고 있으면 토할 것 같다니까." 심플 마인즈는 만델라나 남아프리카의 인종 차별 반대 운동을 진심으로 지원하려 했다고, 다이안은 말했다. 렌튼은 냉정하게 결론을 내리려고 퉁명스럽게 고개를 흔들었으나, 암페타민과 다이안의 반론 탓으로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머리로 피가 솟구쳐 올라왔다. "난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지를 1979년부터 모으고 있어. 아니 몇 해 전에 다 내버리긴 했지만, 그 속의 인터뷰에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밴드에 대해서 짐 커(심플 마인즈의 리더-역주)가 마구 공격한 뒤, 심플 마인즈는 오로지 음악만을 추구하고 있다고 단언한 게 똑똑히 기억 난다니까." "인간은 변하는 법이야." 다이안이 정면으로 반박했다. 렌튼은 그 순수하고 단순한 논리에 허를 찔렸다. 점점 더 그 아가씨가 마음에 들었다. 어깨를 쳐들어 보이고, 패배를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스승, 피터 가브리엘(제네시스의 리더였고, 1977년부터 솔로로 활동함-역주)에게 항상 한걸음 미치지 못했다든가 '라이브 에이드(1985년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에 열린 에티오피아 난민 구호 콘서트-역주)'이래, 선량한 사람처럼 보이려고 하는 것이 록 스타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됐다든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러나 입 밖에 내는 것은 그만두고, 지금부터는 음악에 관해서 강요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음악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은 일 아니겠는가. 얼마 뒤, 다이안과 그녀의 동행인은 화장실에 가서 렌튼과 스퍼드에 대한 품평회를 했다. 다이안은 렌튼과 함께 돌아가야 할 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크라는 사람은 좀 심술궂은 데가 있었다. 하지만 이 술집 안에 있는 다른 남자들도 모두 마찬가지고 게다가 마크는 다른 남자와 어딘가 다른 것 같은 느낌도 든다고. 그렇다고 해서 열을 올릴 정도로 다르다는 얘기는 아니고. 하지만, 이미 시간도 이렇게 늦고 했으니까... 스퍼드가 렌튼 쪽을 향해서 뭐라고 말을 했지만, 더 팜(리버풀 출신의 6인조 얼터너티브 밴드-역주)의 곡이 시끄러워서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이런 음악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마약이라고 해서 취해 있을 때가 아니면 차마 듣고 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약에 취해 있을 때 더 팜 같은 걸 듣고 있으면 약이 아깝다. 그럴 바에는 테크노 계통의 음악이 광광 울리고 있는 레이브(힙합보다 상당히 빠른 댄스 리듬-역주)클럽에라도 가는 편이 훨씬 낫지. 스퍼드가 하는 말이 들렸다고 해도 어차피 대갈통이 너무나 지쳐 있어서 대받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다이안과 얘기를 하고 있는 동안 그럭저럭 견디어 내고 있던 렌튼의 대갈통은 상으로 휴가를 얻고 있었다. 그 다음에 렌튼은 리버풀에서 놀러 왔다는 사내를 향해서, 자신의 일을 이것저것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그의 악센트나 몸짓이 데이보라고 하는 친구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자, 실은 그 사내는 조금도 데이보와 닮지 않았으며, 처음 만나는 상대에게 자신의 일을 시시콜콜히 지껄여대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래서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스퍼드는 보이지 않고, 자신은 몹시 취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이안은 이미 과거의 기억이 되어 있었다. 약에 의한 무감각 상태로 격리된, 몽롱하고 뜨거운 감각이 되었다. 차가운 공기를 쐬려고 밖으로 나가자, 마침 택시에 올라타려고 하는 다이안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다면 스퍼드는 동행의 여자와 함께 있다는 얘기인가? 렌튼은 질투에 몸부림쳤다. 그리고 여자를 꼬시지 못한 것이 자기 혼자라는 것을 깨닫고, 아연해졌다. 강렬한 절망감에 등을 떠 밀린 채, 그는 태연함을 가장하고 다이안에게로 다가갔다. "다이안, 택시에 함께 타도 될까?" 다이안은 농담이시겠지 하는 얼굴을 했다. "난 포레스터 파크에 간다고." "잘 됐군. 나도 그쪽 방향이니까." 렌튼은 거짓말을 했다. 그러고 나서 자신에게 타일렀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렇게 된 거야. 택시 안에서 얘기를 했다. 다이안은 동행인 리사와 말다툼을 해서 먼저 돌아가기로 한 거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스퍼드와 또 한 사람의 다른 멍청이와 함께 아직도 플로어에서 신나게 춤을 추고 있더라고. 두 남자는 서로 리사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어. 렌튼은 또 한 사람의 멍청이가 이기는 쪽에 돈을 걸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리사가 얼마나 형편없는 앤 줄 아냐고 얘기하는 다이안의 불쾌해 보이는 얼굴은 마치 만화 같았다. 라사의 못된 행각을 이것저것 늘어놓으나 렌튼은 그런 자질구레한 일을 그 정도로까지 심하게 헐뜯지 않아도 될 텐데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지독한 아가씨는 전세계를 찾아보아도 있을 것 같지 않다고,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나 라사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다이안의 기분이 점점 나빠져가기 때문에,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화제를 바꾸었다. 말하면 곤란한 것은 빼놓으면서 스퍼드와 백비의 웃기는 이야기를 해줬다. 단 식보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식보이는 여자에게 인기가 있으니까 렌튼은 자기가 만난 여자를 될 수 있으면 그에게서 멀리 떼어놓으려고 한다. 설사 대화 속이라도 마찬가지다. 다이안의 기분이 좋아지자, 렌튼은 키스를 해도 좋으냐고 물었다. 다이안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무래도 좋다는 것인지, 아직 결정하기에는 이르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지, 어느 쪽으로나 다 해석이 가능하다. 그래도 렌튼은 싫다고 딱 잘라 거절당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좋다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키스를 했다. 다이안의 향수 냄새는 렌튼을 자극했다. 다이안은 렌튼이 깡말라서 뼈밖에 안 남았지만 키스는 꽤 잘한다고 생각했다. 한숨 돌린 뒤 렌튼은, 좀더 오랫동안 함께 있고 싶어서 아까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은 폴레스터 파크에 살고 있는 게 아니라고 고백했다. 다이안은 스스로도 의외였지만 그 말을 듣자 기뻐했다. "들어가서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가지 않을래?" "좋지" 렌튼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으나,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커피뿐이야." 다이안은 그렇게 덧붙였다. 렌튼은 도대체 어떤 의미로 말한 것일까 하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짜냈다. 은근히 섹스를 암시하면서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의연한 말투였다. 렌튼은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는 시골 얼간이처럼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절대로 소리를 내면 안 돼. 모두들 자고 있으니까." 다이안이 말했다. 베이비시티가 딸린 갓난애가 아파트에 있는 그림을 상상한 렌튼은 기대할 수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니까 아이가 딸린 여자와 잔 적은 한 번도 없다. 왠지 묘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아파트에 들어가자 사람이 있는 기척이 났으나, 아기들 특유의 오줌이나 응가나 베이비 파우더 냄새는 나지 않았다. "다이아..." "쉿! 모두 자고 있다니까." 다이안이 가로막았다. "깨우지 않도록 조심해. 곤란해지니까." "자고 있다니, 누가?" 렌튼은 쭈뼛거리면서 물었다. "쉿!" 렌튼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과거의 소름 끼치는 경험이나 남들한테서 들은 비참한 시간들이 꼬리를 물고 머리에 떠올랐다. 절대 채식주의자인 룸메이트의 이야기에서, 사이코 뚜쟁이의 이야기까지, 온갖 체험담이 담긴 데이터베이스를 황급히 검색했다. 다이안은 렌튼을 침실에 안내하고는 싱글 베드에 앉게 했다. 그리고는 모습을 감추더니 몇 분 후, 커피가 들어간 머그를 두 개 가지고 돌아왔다. 설탕이 들어가 있었다. 렌튼은 여느 때 같으면 블랙밖에 마시지 않지만 맛 같은 것은 거의 알 수가 없었다. "침대로 갈까?" 다이안이 눈썹을 치켜 뜨고 묘하게 태연한 열정을 보이며 속삭였다. "음... 그것도 괜찮겠지..." 렌튼은 커피를 뱉어버릴 뻔하면서 대답했다. 맥박이 빨라지고 불안이 솟구쳐 올랐다. 어색해하는 숫총각 같았다. 약과 알코올의 칵테일 탓으로 서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절대로 소리를 내면 안 돼"하고 다이안이 말했다. 렌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렌튼은 서둘러서 점퍼와 티셔츠를 벗고, 그 다음에 운동화, 양말, 청바지를 벗었다. 빨간 음모가 창피해서 팬티는 침대에 기어들어가고 나서 벗었다. 다이안이 옷을 벗고 있는 걸 보고 있는데 발기해버렸다. 렌튼은 안심했다. 다이안은 천천히 옷을 벗었다. 남이 보고 있어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 같다. 렌튼은 좋은 몸매라고 생각했다. 머릿속에서 축구 응원가 "히어 위 고"가 몇 번씩이나 울려 펴진다. "나는 위가 좋아." 다이안은 그렇게 말하고 담요를 벗겼다. 렌튼의 빨간 음모가 드러났다. 고맙게도 다이안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렌튼은 페니스를 자랑스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여느 때보다 훨씬 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발기해 있는 걸 보는 것이 오래간만이니까 그렇게 보이겠지, 하고 렌튼은 생각했다. 다이안은 그리 감탄하는 것 같지도 않다. 훨씬 튼 것도 본 적이 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전희를 하기 시작했다. 다이안은 즐기고 있었다. 지금까지 관계한 남자들과는 달리, 렌튼이 열심히 애무해주는 것이 기뻤다. 그러나, 렌튼의 손가락이 바기나를 더듬자 다이안은 몸을 경직시키고, 렌튼의 손을 밀쳐냈다. "벌써 충분히 젖어 있어." 렌튼은 그 말을 듣고 얼마간 멍하게 있었다. 그 말이 너무 차갑고 기계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한 순간 페니스가 늘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니, 늘어지지 않았다. 다이안은 그 곳에 입을 갖다 대고 있었고 그것은 자아, 기적 중의 기적이다, 아직도 딱딱한 채가 아닌가! 다이안에게 감 싸인 채 렌튼은 낮게 신음소리를 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움직이며 더욱 깊이 들어갔다. 입 안에서 움직이는 다이안의 혀를 느끼며 렌튼은 그녀의 엉덩이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아아, 얼마나 오래간만인가! 당장이라도 사정할 것 같다. 다이안은 렌튼이 절정의 직전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저런, 이 사람 역시 쓸모가 없다는 얘긴가? 안 돼! 렌튼은 다이안을 의식 밖으로 쫓아내고, 마거릿 대처하고 섹스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려고 했다. 폴 다니엘즈(영국의 유명한 마술사-역주), 워레스 머서(히츠의 구단주-역주), 지미 세이블 그리고 사정을 늦추게 할 만한 다른 밥맛들과 섹스를 하고 있다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다이안은 그 기회를 이용해서, 커다란 스케이드 보드에 올라탄 딜도(인조 페니스, 섹스의 소두구-역주)처럼 꼼짝하지 않고 있는 렌튼을 상대로 허리를 움직여 클라이맥스에 도달했다. 한 손을 렌튼의 가슴을 짚고, 절정에 도달했을 때 내는 비명을 억누르려고 다른 손 집게손가락을 깨무는 다이안을 보는 것만으로 렌튼은 사정을 해버렸다. 월레스 머서와 섹스를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사정했을 때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요한 개구쟁이의 손에 쥐여진 물총처럼 페니스가 계속 정액을 방출했다. 오랜 금욕을 한 뒤라서 그런지, 지붕을 뚫고 나갈 정도의 기세였다. 만일 렌튼이 관계한 여자에 대해서 떠벌리고 다니는 타입이었다면, 동시에 절정에 도달하게 했다고 자랑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유치한 놈들에게 그림처럼 자세히 설명하며 서비스를 해주는 것보다 애매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씩 웃어주는 편이, 정력 좋은 놈이라는 평판을 얻기 쉽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식보이에게서 터득한 비결이었다. 사실 난 성 차별 반대론 자인데도, 이런 성 차별적인 이기심은 어쩔 수 없구나. 정말이지 남자란 불쌍한 동물이라고 렌튼은 생각했다. 다이안이 몸에서 내려오자, 렌튼은 달콤한 잠 속으로 떨어져갔다. 그래, 한밤중에 일어나서 다시 한 번 섹스를 하자. 조금 전보다 긴장을 푸고 좀 더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거야. 부진의 늪에서 빠져 나온 이상 내 실력을 보여줘야지. 골이 들어가지 않는 슬럼프를 가까스로 벗어나서 다음 시합까지 기다릴 수 없는 스트라이커도 이런 기분이겠지. 다음 순간, 다이안의 말이 뼈 속가지 뚫고 들어와서 박혔다. "이제 돌아가." 렌튼이 항의를 할 틈도 주지 않고 다이안은 침대에서 내려와 팬티를 걸쳤다. 렌튼의 짙은 정액이 흘러나와서 허벅지 안쪽을 천천히 흐르고 있다. 이때 처음으로 렌튼은 무방비한 섹스와 에이즈 감염의 위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주사기를 같이 쓴 다음에 검사를 받았으니까, 자신은 음성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다이안은 어떤가 하는 것이었다. 렌튼과 자는 여자면 어느 누구하고라도 잘 것이다. 다이안은 렌튼을 사정없이 쫓아내려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렌튼의 연약한 성적 자존심은 산산조각이 나서, 순식간에 정력이 넘치는 멋진 사내로부터 조루남으로 격하되었다. 요즘 많은 사람들과 하나의 주사기를 돌아가면서 사용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리고 몇 년 동안 수도 없이 주사 바늘을 같이 사용해도 괜찮았는데, 단 한 번의 섹스로 에이즈가 감염됐다고 한다면, 다 팔자소관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으리라. "자고 가면 안 돼?" 나약하고 비굴한 목소리였다. 식보이가 여기에 있다면, 가차없이 비웃었을 것이다. 다이안은 렌튼을 똑바로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조용히 있어 준다면 소파는 괜찮아. 만일 누군가와 만난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해줘. 어서, 옷 입어." 어울리지 않는 빨간색 음모가 다시 마음에 걸리기 시작하던 렌튼은 기꺼이 그 명령에 따랐다. 다이안은 거실 소파로 렌튼을 안내했다. 그러고는 팬티 하나만 걸치고 떨고 있는 렌튼을 남겨놓고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침낭과 그의 옷을 안고 돌아왔다. "미안." 다이안은 그렇게 속삭이고 키스를 했다. 진한 키스를 주고받는 사이에 렌튼의 페니스는 다시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운 밑으로 손을 집어넣으려고 하니까, 다이안이 가로막았다. "그만 가봐야 돼." 다이안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이안이 가버리자, 렌튼은 공허함과 낭패감을 느꼈다. 소파에 드러누워 침낭 속으로 들어가 지퍼를 올렸다.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채로 누워서, 거실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해보려고 했다. 다이안의 동거인들은 남자는 절대로 데리고 오지 말라고 하는 골샌님이겠지. 그러니까 틀림없이 다이안은 처음 보는 남자를 끌고 들어와서 그와 아무렇지도 않게 자는 여자라고 낙인 찍히기 싫은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이 번뜩이는 재치와, 결점이 있기는 하지만 개성적인 아름다움에, 저항할 수 없게 되었다는 얘긴가? 렌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존심을 달랬다. 자기로서도 꽤 설득력 있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얼마 뒤, 그는 변덕스러운 잠으로 빠져 들었는데 이상한 꿈을 꾸고 말았다. 원래 이상한 꿈을 잘 꾸는 체질이었지만, 그 꿈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깜짝 놀랄 정도로 선명하게 기억해낼 수 있었기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 꿈속에서 렌튼은 푸른색 네온이 켜져 있는 새하얀 방안의 벽에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호마이카 테이블이 죽 늘어서 있고, 그 위에 토막 난 시체가 얹혀 있었고 오노 요코(존 레논의 일본인 부인이자 전위 예술가-역주)와 힙스의 수비수인 고든 헌터가 사람의 뼈와 살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다. 그들은 렌튼에게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상스러운 욕을 퍼부으면서, 입으로 살점을 쭉 찢어서 우적우적 씹고 있었다. 입가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그 다음에 테이블에 얹혀지는 것은 틀림없이 나일 거라고 렌튼은 생각했다. 그래서 렌튼은 고든의 비위를 맞추려고 했다. 나는 옛날부터 당신의 열렬한 팬이었어요. 하지만 이스터 로드의 수비수는 절대로 타협을 하지 않는다는 평판 그대로, 그는 아무 말 없이 씩 웃었다. 그 곳에서 다른 꿈으로 넘어가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이번에는 벌거벗고 설사를 뒤집어쓴 채, 제대로 옷을 입고 있는 식보이와 함께 리스강을 바라보면서 달걀과 토마토와 구운 빵을 먹고 있었다. 그 다음 꿈에서는 알칸 브랜드의 알루미늄 호일의 비키니밖에 걸치지 않은 미인에게 유혹을 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자라고 생각했던 자는 사실은 남자였다. 그는 그 남자와 모 안의 온갖 구멍을 사용해서 섹스를 하고 있었다. 비누거품 같은 액체가 구멍에서 스며 나오고 있었다.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베이컨 지지는 냄새에 잠이 깼다. 거실 바로 안쪽에 있는 부엌으로 여자가 들어가는 뒷모습이 흘끗 보였으나, 다이안은 아니었다. 다음에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겁이 덜컥 났다. 낯선 장소에서 숙취로 고생하며 팬티 하나만 걸치고 있을 때,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것, 그것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렌튼은 자고 있는 척 했다. 조심스럽게 실눈을 뜨고 보니까, 렌튼과 비슷한 키일까, 조금 작은 남자가 부엌으로 조용히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낮은 목소리로 얘기를 하고 있었으나, 렌튼에게도 들렸다. "그럼, 다이안이 또 친구를 데리고 왔단 말이지?" 남자가 말했다. 렌튼은 '친구'라고 말했을 때의, 얼마간 경멸하는 듯한 억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요.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화를 내거나, 또 엉뚱한 결론으로 비약시키거나 하지도 말고." 두 사람이 거실로 돌아오는 기척이 나고 이윽고 다시 나갔다. 렌튼은 서둘러 티셔츠와 점퍼를 입었다. 그러고는 침낭의 지퍼를 내리고 방바닥에 발을 내리는 것과 청바지를 끌어올리는 일을 거의 동시에 했다. 침낭을 단정하게 접고, 흐트러진 쿠션을 본래대로 다시 늘어놓았다. 양말과 운동하는 냄새가 났지만, 그대로 신었다. 이정도 냄새가 심하면 무리겠지만, 아무도 이 냄새를 알아차리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렌튼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 피로를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그러나 숙취는 느낄 수 있었다. 숙취는 골목 어귀에 숨어서 기회를 노리는 참을성 많은 강도처럼 언제나 렌튼의 영혼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안녕!" 다이안아 아닌 다른 여자가 거실로 들어왔다. 커다랗고 아름다운 눈과 섬세하고 뾰족한 턱을 가진 미인이었다. 근데 어디에선가 본 얼굴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안녕, 난 마크라고 해요." 여자는 자기 소개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렌튼에 대해서 알고 싶어 했다. "그래, 다이안의 친구라고?" 왠지 시비조의 질문이었다. 렌튼은 안전을 기하기 위해 너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 아니라, 다소의 설득력이 있는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난처하게도 그는 정키의 특수 기술인 '설득력 있게 거짓말하기'가 몸에 배어 이제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진실같이 들리게 거짓말을 했다. 렌튼은 잠시 망설였다. 정말 약(정크)을 끊기 전에 거짓말(정크)하는 버릇을 고치는 것이 선결 문제다. "글쎄요, 친구라기보다는 다이안의 친구의 친구죠. 리사를 알고 계십니까?"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거짓말에 힘을 얻은 렌튼의 입에 선 기분이 좋을 정도로 술술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그것이 조금 창피하게 됐군요. 어제는 내 생일이었는데 그만 상당히 술에 취해버렸습니다. 아파트 열쇠는 잃어버렸고, 룸메이트는 지금 그리스로 놀러 가 있지요. 정말 난처했어요. 문을 뜯고 들어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어쨌든 너무 술에 취해서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를 않았죠. 잘못돼서 자기 아파트 불법침입한 죄로 체포당할 수도 있었고요! 그때 고맙게도 다이안을 만났고 그녀는 친절하게도 이 소파에서 자게 해줬죠. 당신은 다이안의 룸메이트죠?" "어머... 글쎄, 그럴 수도 있죠." 그녀는 수상쩍게 웃었고 렌튼은 이들은 어떤 관계일까 하고 필사적으로 궁리를 했다. 어딘가 좀 이상하다. 조금 전의 남자가 들어와서 렌튼을 보고 퉁명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렌튼은 얼은 듯한 미소로 답했다. "여기는 마크." 여자가 말했다. "안녕." 남자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두 사람 모두 나와 같은 정도의 나이거나 조금 위일 것이다. 렌튼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평소부터 나이에 관해서는 안목이 없었다. 다이안은 두 사람보다 조금 나이가 어린 것 같다. 아마도 이 두 사람은 다이안에 대해서 비뚤어진 부모의 마음 같은 것을 품고 있는 모양이다. 연상의 사람들에게서 그런 경향을 종종 봐 왔다. 그들은 자기보다 인기가 있고, 생기발랄한 연하의 사람을 지배하려고 한다. 대개의 경우, 그것은 연하의 사람들에게는 있고 자기에게는 없는 점들을 질투하기 때문이다. 그 부당한 질투가 친절이나 과보호로 둔갑한다. 렌튼은 그 두 사람에게서 그것을 느꼈다. 그래서 두 사람에 대한 적의가 끓어올랐다. 다음 순간, 렌튼은 충격의 물결에 쾅 하고 한방 얻어맞고 기절할 뻔했다. 한 소녀가 거실로 들어왔다. 그 소녀를 봤을 때, 렌튼의 등에 소름이 쫙 끼쳤다. 소녀는 다이안과 너무나도 비슷했다. 그러나 기껏해야 중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다이안 본인이라는 것을 안 것은, 몇 초인가 지나고 난 후 였다. 여자가 화장을 지울 때, '얼굴을 벗긴다'고 하는 이유를 순식간에 알 수 있었다. 다이안은 10대 초반으로 보였다. 그녀는 렌튼이 충격 받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렌튼은 남녀에게로 눈길을 보냈다. 다이안에게 부모와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 진짜 부모니까. 사태를 깨달은 렌튼은 마치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좀더 일찍 꿰뚫어보지 못했다니, 정말 구재불능의 멍청이라고 생각했다. 네 사람은 식탁에 앉아서 아침 식사를 했다. 아직 충격에서 깨어나지 못한 렌튼은 다이안의 부모에게 매우 신사적으로 심문 받았다. "그래 무엇을 하고 있는 분이신가?"하고 모친이 물었다. 무엇을 하고 있다니, 그것이 직업을 의미하는 거라면,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렌튼은 시럽 수당 사기 조직의 멤버로, 다섯 종류의 주소를 사용해서 실업 수당을 신청하고 있었다. 애든버러와 리빙스턴, 그랠스고에서 각각 한 건씩. 런던 시내에서 두 군데. 세퍼드 부시와 해크니의 주소를 빌리고 있다. 이런 식으로 정부를 벗겨 먹으면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자기도 모르게 그 동안 이룬 성과를 선전하고 돌아다니고 싶어진다. 그러나 잠자코 있는 편이 몸에 이롭다는 것은 렌튼도 알고 있다. 독선적이고 참견하기 좋아하고 게다가 성인군자인 체하는 녀석들이 언제 어디서 귀를 곤두세우고 있다 찌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은 그 돈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섯 건이나 되는 실업 수당 신청을 실수 없이 관리하고 있는 내 능력은 대단한 것이니까. 더구나 헤로인 중독과 싸워가면서 하는 일 아닌가! 덕택에 렌튼은 전국의 실업자 구제소에 출두하고, 주소를 빌려주고 있는 조직의 멤버와의 연락을 끊어지지 않도록 하고, 토니와 캐롤라인, 닉시로부터 런던에서의 면접 예정 연락이 있으면 곧장 히치 하이크로 런던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버거킹의 노팅힐 게이트점에서 전도 유망한 일자리를 소개 받았는데도 렌튼이 거절했기 때문에, 세퍼드 부시의 실업자 구제소에서 의심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렌튼은 머릿속에서 엉터리 직업 일람표를 검색하여 하나를 끄집어 냈다. "지역 위원호의 리크리에이션부 미술관과의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죠. 저는 지역 사회사 컬렉션 담당으로, 주로 하이 스트리트의 피플스 스토리에서 일하고 있죠." 다이안의 부모는 다소 당혹해 했지만 일단은 감탄한 것 같았다. 렌튼이 기대했던 대로의 반응이었다. 신바람이 난 렌튼은 건방지지 않고 신중한 타입을 연기해서 더욱 평가를 올려놓으려고 생각하고, 겸손한 어조로 계속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쓰레기 더미를 샅샅이 뒤져서 버려진 물건을 캐낸 후 노동자 계급의 일상사를 엿볼 수 있는 믿을 만한 사료로 둔갑시켜 내놓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전시중에 깨지거나 하지 않도록 점검을 합니다.." "그것은 머리가 좋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로군"하고 아버지가 렌튼에게 말했다. 그러나 눈은 다이안 쪽을 보고 있었다. 렌튼은 다이안과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피하면 오히려 의심을 산다는 것은 알고는 있었지만,아무리 해도 다이안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아니 그렇지도 않습니다"하고 겸손해 했다. "하지만 자격이 필요하겠지." "아아, 네, 애버딘 대학에서 역사학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었다. 애버딘 대학에 입학하고, 대학의 공부 같은 것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으나, 장학금을 마약과 매춘부에게 쏟아 붓고 있었던 게 탄로나서 1학년을 다니던 중 퇴학을 당했다. 말하자면, 애버딘 대학 사상 처음으로 학생이외의 여자와 관계한 학생이 되었던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편이 더 낫다고 렌튼은 자부하고 있었다. "항상 이 녀석에게 말하지. 학력은 중요한 거라고"하고 아버지는 다이안을 보고 그것 보라는 듯이 잔소리를 했다. 렌튼은 그러한 아버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 음모에 가담하고 있는 자신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이안의 변태 삼촌이라도 된 것 같았다. 다이안이 하다 못해 상급 시험을 치룰 만한 나이였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그때 어머니니까 끼여 들어서 렌튼의 희망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다이안은 내년의 역사의 0그레이드 시험을 치룬다오." 미소. "그러고 나서 프랑스어, 영어, 미술, 수학도." 렌튼은 속으로 움찔했다. 그렇다면 14세란 말인가! "마크는 그런 것엔 흥미가 없대요." 다이안이 말했다. 대화의 '주제'가 돼 버린 힘없는 어린아이들이 부모의 비위를 맞출 때 쓰는 영리하고 다 큰 어른 같은 말투였다. 나도 옛날에 아빠와 엄마가 싸움을 시작할 때면 자주 저런 식으로 말을 했었지, 하고 렌튼은 생각했다. 하지만 다이안의 말투는 무척이나 퉁명스러워서 어린애처럼 들렸다. 의도한 것과는 정반대였다. 렌튼의 두뇌는 이미 초과 근무를 뛰고 있었다. 이런 걸 바로 미성년자 추행이라고 하는 거다. 교도소에 갈 수도 있어. 오, 정말이라니까, 더구나 나오기도 힘들지. 나와 봤자 성 범죄자라는 낙인 찍히지. 소튼에 들어가면 매일 이마가 박살날 거다. 성 범죄자. 아동 추행, 미성년자 강간, 아동에 대한 음란 행위... 백비 같은 사이코 죄수들의 수군거림이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아이는 겨우 여섯 살이었다더군... 강간이라면서... 나나 자네 같은 사람의 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빌어먹을, 날 잡아라. 렌튼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먹고 있던 베이컨 때문에 속이 메스꺼워졌다. 그는 여러 해 전부터 채식주의를 실천해오고 있었다. 물론 정치 사상이라든가 도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다만 고기 맛이 딱 질색이라는 이유뿐이다. 그러나 무슨일이 있어도 다이안의 부모에게 나쁜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다. 그래도 소시지에 손을 대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이런 음식에는 유독 성분이 잔뜩 들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 헤로인을 마구 맞고 있었던 것을 생각해내고, 쓴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자기 몸 속에 뭘 집어넣는지 조심해야 돼 다이안에게 그렇게 말하면 재미있어 할까? 불안해하고 있었지만, 그 말의 이중적인 의미를 깨닫자, 도저히 참을 수 없어져서 꺽꺽 거리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렌튼은 고개를 흔들고, 거짓말을 해서, 아니 같은 거짓말을 다시 한 번 해서 어떻게든 넘기려고 했다. "그건 그렇고, 나도 멍청이입니다. 어젯밤에는 상당히 술에 취했던 모양이에요. 평소에는 그다지 술을 마시지 않거든요. 하지만, 누구나 스물 두 살의 시절은 일생에 한 번밖에 찾아오지 않는 법이니까요." 다이안의 부모는 22세라는 말을 듣고 설마하는 얼굴을 했다. 랜튼은 25세였지만, 40세라고 해도 통할 정도로 겉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예의 바르게 듣고 있다.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재킷과 열쇠를 잃어버렸어요. 다이안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께서도 친절하게 하룻밤 재워주신 데다가, 맛있는 아침 식사까지 신세를 졌군요. 소시지를 모두 먹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벌써 배가 꽉찼습니다. 평소엔 아침 식사를 이렇게 진수성찬으로 하지 않거든요." "자넨 너무 마른 것 같아"하고 어머니가 말했다. "아파트에서 혼자 살면 그렇게 되지. 동쪽으로 가든 서쪽으로 가든 자기 집이 최고야." 아버지가 얼빠진 소리를 하자 식탁은 어색한 침묵에 감싸였다. 곤혹스러워진 아버지가 덧붙였다. "그렇게들 흔히 말하지 않는가?" 그리고 내친 김에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아파트엔 어떻게 들어갈 생각인가?" 이러한 사람들은 렌튼을 정말로 소름 끼치게 만든다. 자기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법을 어긴 적이 없다는 식의 얼굴로 렌튼을 바라본다. 다이안이 술집에서 남자를 유혹하는 그런 아가씨가 된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 부부는 화가 날 정도로 건전해 보였다. 아버지는 대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했으며, 어머니의 눈 언저리에는 잔주름이 희미하게 새겨지고 있었지만, 제3자에겐, 자기와 같은 연배로 비칠 거라고 렌튼은 생각했다. 오히려 그들 쪽이 훨씬 건강해 보인다고 하겠지. "억지로 열고 들어갈 수밖에 없겠지요. 자물쇠가 붙어 있을 뿐이니까요. 정말 바보 같죠. 오래 전부터 상자 모양의 자물쇠를 달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달지 않기를 잘 했어요. 건물에 들어가는데도 열쇠가 필요하지만, 그것은 이웃 사람에게 연락해서 열어 달라고 하면 돼요." "내가 도와줄 수 있을지 모르겠군. 나는 목수니까. 어디에 살고 있나?" 아버지가 물었다. 이 말에는 렌튼도 얼마간 당황했지만,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줬기 때문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저도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목수를 한 적이 있으니까요." 이것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엇다. 사실을 이야기하면 왠지 불안했다. 거짓말을 하는 편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진실을 이야기하면, 바로 현실로 되돌아가게 돼서 자신이 나약하게 느껴진다. 다이안의 아버지가 호오, 하고 눈썹을 치켜 올렸기 때문에 렌튼은 이렇게 덧붙였다. "고르기에 있는 길스랜드 목공소에서 견습으로 있었습니다." "아아, 랠프 길스랜드라면 나도 알고 있지. 한심한 녀석이지만." 아버지는 조금 전보다 격의없이 말했다. 공통의 지인을 발견한 것이다. "네, 내가 그 곳을 그만둔 이유 중 하나는 그 사람 때문입니다." 테이블 아래서 다이안이 다리를 슬금슬금 밀어붙여 왔다. 렌튼은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래서 홍차를 단숨에 들이마셨다. "이제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정말로 고마웠습니다." "잠깐 기다려. 금방 준비하고 올 테니 시내까지 같이 가." 렌튼이 안 된다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 전에 다이안은 일어나서 가버렸다. 렌튼은 건성으로 식탁을 치우는 것을 도와줬다. 그년의 어머니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기 시작하자, 아버지한테 안내를 받아 거실의 소파에 걸터앉았다. 두 사람만이 되자 렌튼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자네 거짓말은 빤히 들여다보여."하고 말할 것이 틀림없다고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랠프 길스랜드 같은 공통의 지인에 대한 화제로 이야기의 꽃이 피었다. 렌튼은 랠프의 동생 콜린이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것 참 쌤 통이라고 생각했다. 다음에는 축구 이야기가 나왔다. 다이안의 아버지는 하츠 팬이고 렌튼은 힙스 팬이었다. 이번 시즌의 힙스는 애든버러의 어떤 팀에게도 재미를 못보고 있죠. 아니야, 힙스는 스코틀랜드의 어떤 팀에게도 재미를 못보고 있지, 하고 아버지는 재빨리 정정해줬다. "힙스 놈들은 우리하고 싸워서 거의 이기지 못했지, 안 그런가?" 렌튼은 싱긋이 웃었다. 이 사람의 딸과 잔 것을 처음으로 기쁘게 생각했다. 물론 육체적 만족을 얻었기 때문은 아니다. 어쨌든 그는 놀라워하고 있었다. 섹스와 힙스라고 하는, 헤로인을 하고 있었을 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것이, 돌연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변해버렸다. 혹시 어쩌면 나의 마약 습관은 80년대 들어와서 시작된 힙스의 슬럼프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다이안이 준비를 마쳤다. 어젯밤보다는 화장이 연해서, 실제 나이보다 두 살 위인 16세 정도로 보였다. 집을 나와서 걷기 시작하자, 렌튼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으나, 누군가에게 들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약간 창피했다. 이 근처에는 얼굴을 아는 놈들이 몇 있었다. 대부분 마약상이나 중독자들이었다. 지금 여기서 그 녀석들에게 들키면, 뚜쟁이가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우스 자일 역에서 전차를 타고, 헤이마켓 역에서 내렸다. 전차에 타고 있는 동안 다이안은 렌튼의 손을 꼬옥 잡은 채 쉴 새없이 지껄여댔다. 엄격한 부모로부터 해방되어서 다이안도 안심하고 있었다. 게다가 렌튼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고 싶어했다. 이 사람 덕분에 하시시(대마초) 구하기가 쉬워질지도 몰라. 렌튼은 어젯밤의 일을 생각하다 다이안이 한 짓을 생각해내고 몸서리를 쳤다. 도대체 누구한테서 그런 테크닉을 배운 것일까? 더구나 그 자신감에 넘치는 태도라니. 렌튼은 자기 자신이 25세가 아니라, 55세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위 사람들이 힐끔힐끔 이쪽을 쳐다보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어젯밤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렌튼은 지저분하고 땀 냄새가 나고,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다이안은 타이츠와 같이 착 달라붙는 검은 레강스 위에 흰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렌튼은 어느 쪽이든 하나만 걸쳐도 될 텐테, 하고 생각했다. 헤이마켓 역에서 렌튼이 (스콧스맨)과 (데일리 레코드)를 사고 있으려니까, 한 남자가 다이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렌튼은 그것을 깨닫자 왠지 화가 나서 그 남자를 노려봤다. 아마 자기 혐오를 그에게 투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달리 로드의 레코드 가게에 들어가, 앨범을 골랐다. 숙취가 갑자기 심해지기 시작해서, 렌튼은 상당히 짜증스러워 하고 있었다. 다이안은 차례차례로 앨범을 꺼내 보이고, 이것이 굉장하다든가, 저것이 최고라고 말했다. 렌튼은 대부분 쓰레기라고 생각했으나, 신경이 곤두서서 논쟁할 기력도 없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탁 쳤다. "야, 렌츠 아니야? 잘 지내?" 찰흙 조각에서 철사가 튀어나오듯이 뼈와 중추신경이 살을 찢고 튀어나왔다가 다시 기어들어갔다. 돌아 다보니까, 조니 스원의 동생 디트였다. "그저 그래, 디크. 너는?" 심장이 파열될 것 같은 느낌을 숨기고 태연한 척 말했다. "그저 그렇지 뭘." 디크는 렌튼에게 동행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봤다. "아 참, 나 지금 갈 길이 바쁘거든. 그럼, 다시 보자고. 식보이에게 전화해 달라고 전해줘. 20파운드 꿔준 게 있거든." "그 녀석에게는 나도 돈을 꿔줬는데." "그 녀석은 말주변이 좋으니까. 그럼, 난 간다, 마크." 디크는 다이안 쪽을 돌아다 보았다. "아가씨, 다시 만나요. 소개도 해주지 않다니, 이 녀석은 예의를 모르는 친구라니까. 연인이라서 그렇겠지? 하여간 이 녀석을 조심하라고요." 렌튼과 다이안은 처음으로 타인으로부터 '연인'이라는 말을 ... 듣고, 어색한 웃음을 띠고 디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렌튼은 빨리 혼자가 되고 싶었다. 숙취가 점점 심해져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 좀 봐, 다이안... 나, 이제 그만 돌아가야 돼. 리스에서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했어. 축구 시합을 보러 가기로 했거든." 다이안은 알았다는 듯이 체념한 얼굴을 하고 렌튼을 쳐다봤다. 그리고 렌튼에겐 쳇이라고 들린 이상한 혀차는 소릴 냈다. 다이안은 하시시를 갖고 있느냐고 아직 묻지도 않았는데 렌튼이 가려고 해서 짜증이 났다. "어디에 살고 있어?" 백에서 펜과 종이를 꺼냈다. "포레스터 파크라고는 하지 말고"라고 덧붙이며 그녀는 씩 웃었다. 렌튼은 몽고 메리 스트리트의 진짜 주소를 썼다. 머리가 지끈지끈 거려서 엉터리 주소 같은 건 떠오르지도 않는다. 다이안이 가버리자 렌튼은 강렬한 자기 혐오를 느꼈다. 다이안과 잤기 때문일까, 아니면 두 번 다시 그녀와 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어느 쪽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날 밤, 현관 벨이 울렸다. 무일푼이었기 때문에 토요일 밤인데도 집에 틀어박혀서 비디오로 (브래독:미씽 인 액션 3)를 보고 있었다. 문을 여니까 거기에 다이안이 서 있었다. 화장을 한 다이안은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구미가 당기는 성숙한 여자로 되돌아가 있었다. "들어와." 교도소 생활에 얼마나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궁금해하며 렌튼은 말했다. 하시시 냄새구나, 다이안은 생각했다. 정말로 하시시였으면 좋겠다. 21. 한밤중의 메도우스 공원에서: 스퍼드의 이야기 어떤 펍이나, 그러니까, 굉장히 붐비고 있었어. 다음 공연에 가기 전에 한잔하려는 미친 토박이들과 페스티벌 관광객들로 보이는 사람들로 터져나갈 것 같만 같았어. 그럴 듯한 쇼도 있지만... 입장료가 너무 비싼 것 같아. 벡비는 청바지에 오줌을 쌌다... "프랑코, 너 오줌 쌌지?" 백비의 색깔이 바랜 청바지에 생긴 작은 얼룩을 가리키면서 렌츠가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건 빌어먹을 물이야, 물. 손을 씻었을 뿐야. 넌 씻는 게 뭔지도 모를 테지만 말이다, 이 빨강머리 새꺄." 이 자식은 물을 끔찍이 싫어한다. 특히 비누와 섞인 상태일 때는. 식보이는 예쁜 여자를 찾아서 술집 안을 둘러보고 있다. 놈은 정말이지 여자를 좋아한다. 남자끼리만 있으면 금세 싫증이 나는 모양이다. 어쩌면 그래서 식보이는 여자를 다루는 것이 능숙한지도 모른다. 아니, 여자를 다루는 것이 능숙하지 못하면 살아갈 수가 없겠지. 그래, 틀림없이 그럴 거야. 매티는 고개를 흔들면서 조그맣게 혼자말을 중얼거리고 있다. 매티는 어딘가 조금 이상하다... 헤로인 탓만은 아니다. 정신적으로 잘못됐다는 거다. 심한 우울증인가. 렌튼과 벡비는 말타툼을 하고 있다. 렌튼은 조금 조심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벡비는 어쨌든 간에... 정글 호랑이 같은 녀석이니까. 우리는 보통의 겁 많은 고양이들이다. 얌전한 집 고양이 같은 놈들이라고. "그런 새끼들이야말 바로 빌어먹을 부자들이라고. 너희 같은 놈들은 맨날 부자들을 때려죽이자 어쩌고 하는 무정부주의자 같은 헛소리를 지껄이는 주제에 이제 와서 겁먹고 빼려는 거냐?" 벡비는 렌튼을 비웃었다. 더할 수 없이 밉살스러운 모습이었다. 까만 눈썹 아래 더 까만 눈, 숱 많은 검은 머리는 스킨 헤드들보다는 좀 길었다. "뺀다든가, 그런 문제가 아니라니까, 프랑코. 마음이 내키지 않을 뿐이야, 이대로 충분히 즐겁잖아. 스피드랑 엑스터시도 있고 말야. 이대로 여기서 기분을 내면 되잖아, 아니면, 레이브 클럽에라도 가든가, 밤새도록 메도우스를 우왕좌왕하는 것은 사양하겠어. 메도우스에는 커다란 야외 극장이랑 시시한 유원지 같은 게 생겼다고. 그렇다면 경찰도 우글거리고 있을 거야, 너무 위험하다니까." "나는 빌어먹을 레이브 클럽 같은 덴 안 가. 그런 곳은 애들 놀이터라고 말한 건 너잖아." "그래, 하지만 가봤더니 그렇지만도 않던걸." "어쨌든 난 안 가. 그것보다는 펍을 여러 군데 돌아다니다 재수 없는 새끼를 하나 집어서 변소로 끌고 들어가자고." "싫어, 재미없어!" "이런 배짱없는 자식! 요전 주말에 '불 앤드 부시'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도 쫄아 있는 거지?" "아니, 그런 건 아냐. 다만 그 일은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할 뿐이야. 하나부터 열까지 말야." 벡비는 렌튼을 노려봤다. 의자에 앉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지더니 그대로 렌튼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벡비가 렌튼 보이를 잡으려나 보다. "뭐라고? 야! 너도 한 번 만져줘 봐? 이 건방진 쨔샤!" "그만둬, 프랑코. 진정하라고." 식보이가 말했다. 성질이 고약한 벡비도 지나쳤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 발톱은 집어넣어야지, 캣보이. 사람들에게 말랑말랑한 살을 좀 보여주렴. 녀석은 정말 나쁜 고양이다. 덩치 크고 음흉한 흑표범이다. "셔먼 탱크 같은 미국 놈을 날려버린 것뿐이잖냐? 네가 그놈의 뭐라도 되냐? 그렇게 건방진 놈들은 무슨 꼴을 당해도 싸! 게다가 발리의 술집에서 돈을 나눌 때, 넌 잠시도 돈에서 눈을 못 때더라." "그 녀석, 의식 불명으로 병원으로 실려 갔단 말야, 출혈 고다로. 신문에 그렇게..." "그래도 이젠 멀쩡해졌다는데, 왜 난리냐? 신문에 그렇게 나 있었잖아! 죽진 않았으니까 별로 대수로운 일도 아니잖아. 또 별일 있었다 하더라도, 그게 어쨌다는 거야? 애당초 그런 돈 많은 미국 놈이 이런 곳에 발을 들여놓은 게 잘못이지. 그런 새끼가 어떻게 되든 알게 뭐야. 그리고 너도 쨔샤, 사람을 찌른 적 있잖아? 학교에서 엑크윌슨 말야. 그 주제에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냐?" 그 말을 듣고 렌츠는 입을 다물었다. 렌츠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그건 진짜로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렌츠의 경우는 앙칼지게 할퀴는 고양이를 혼내주는 정도의 사건이었다. 어떤 놈을 잡으려고 계획까지 세워놓고 두들겨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베거는 그 차이를 모른다. 어쨌든 그 일은 너무 지독했다. 정말 그런 건 딱 질색이다... 그 양키는 좀처럼 지갑을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었다, 벡비가 나이프를 꺼내 들었는데도 말이다... 글 양키가 마지막으로 말한 것은, '넌 날 찌르지 못할 거야'였다. 벡비는 완전히 열 받아서 정신없이 해치웠다. 그러니까 나이프로 말이다. 하마터면 지갑을 빼앗는 걸 잊어버릴 뻔했다. 벡비가 그 녀석의 얼굴을 발로 걷어차고 있는 동안에, 나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어서 지갑을 훔쳤다. 피가 오줌과 뒤섞여서 변기로 떨어져 흐르고 있었다. 끔찍해, 끔찍해, 정말 끔찍했어, 알겠어?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침대 안에서도 몸이 덜덜 떨린다. 미합중국 아이오와 주 디 모인즈에서 온 리처드 하우저라는 그때 그 양키와 비슷하게 생긴 녀석을 볼 때마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버린다. 미국인이 지껄여대고 있는 목소리만 들어도 펄쩍 뛰고 만다. 폭력이란 정말 끔찍한 거다. 우리들의 프랑코 장군은 그날 만 우리들 모두를 강간한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들이 창녀라도 되는 것 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의 엉덩이를 쑤셔놓은 뒤, 돈으로 입을 틀어 막아버렸다. 나쁜 고양이 베거. 흉폭한 야생 고양이 베거. "나하고 함께 갈 녀석 없냐? 스퍼드, 넌?" 하고 벡비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는 아랫입술을 꽉 물고 있다. "음... 그러니까... 폭력 같은 건 ... 난 딱 질색이니까... 이대로 여기서 술이나 마시고 있겠어... 알았지?" "너도 겁쟁이냐?" 벡비는 나에게서 눈을 돌렸다 실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이런 일에 내가 좋아라 하고 따라오리라곤 기대하고 있지 않았을 테니까... 뭐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는 반응이지만 요즘 세상에 뭐가 좋고 뭐가 나쁜지 알고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안 그래? 식보이가 자긴 연인이지 싸움꾼은 아니다, 그런 비슷한 말을 했고 그 말에 벡비가 뭐라고 퍼부어주려고 했을 때 매티가 불쑥 말했다. "내가 가주지." 그 순간 벡비는 식보이에게 흥미를 잃었다. 베거 보이는 매티를 추켜올리면서, 우리들더러 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비겁자라고 욕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매티야말로 세계에서 제일 가는 비겁자였다. 왜냐하면 프랑코가 말하는 건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설설기며 복종하니까... 난 단 한 번도 매티를 좋아한 적이 없다... 놈은 완전히 맛이 간 녀석이다. 친구끼린 서로 험담도 하고 그러는 법이지만, 그러나 매티가 그럴 땐 뭐라고 할까 단순한 험담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증오라고나 할까, 뭔 말인지 알겠어? 그냥 기분 좋아하고 있는 것도 매티한테는 범죄같이 생각되니 봐. 녀석은 다른 놈이 행복해하는 꼴을 못 보는 거야, 그러니까. 갑자기 한 번도 매티와 1대 1로 어울린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때는 나와 렌츠... 또는 나와 토미... 또는 나와 랍... 또는 나와 식보이... 심지어 나와 프랑코 대원수 둘이만 있었던 적은 있지만 나와 매티, 이런 자리는 없었던 거야, 그러니까. 나븐 고양이들은 바구니를 떠나 먹이를 사냥하러 떠나고 분위기는 마치... 아주 끝내줬다. 식보이는 E(엑스터시)를 꺼냈다. 최상급 화이트 도브구나 하고 생각했다. E는 정신 흥분제다. 대부분의 엑스터시는 MDMA(메틸리렌 디옥시 메탐페타민, 엑스터시의 주성분-역주)따윈 찾아볼 수 없는 쓰레기다. 어쨌든 효과는 스피드와 애시드(LSD)를 섞어놓은 것 같은데 내가 가지고 다니는 물건은 언제나 그저 괜찮은 스피드 같을 뿐이었어, 알겠어? 하지만 이건 정말 죽이는 물건이었어. 완전 프랭크 자파 같았다니까... 그래 바로 그러야, '자파'같다... 난 프랭크 자파와 그의 (조스 개랄지), (엘로우 스노우), (주위시 프린세스), (카톨릭 걸스)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가 있으면 얼마나 근사할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사랑해줄 여자 말이다... 섹스를 떠나서, 아니지 섹스만이 아니고... 소중하게 사랑해줄 여자를. 왜냐하면 난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픈 기분이었거든, 섹스 차원이 아니라... 그냥 사랑해줄 누군가를 바랐다... 하지만 렌츠는 헤이즐과 식보이가 있고... 식보이는, 글쎄, 여자가 떼거지로 있었다... 하지만 이 캣보이들이 나보다 더 행복해보이진 않았다. "다른 사람의 풀이 더 푸른 법이야, 태양은 항상 반대쪽을 비추지..." 난 이렇게 흥얼거렸다. 평소엔 절대 노래를 부르지 않지만 약만 하면 노래하기 시작한다. 난 프랭크 자파의 딸인 문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녀라면 바랄 게 없겠지...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다니니까…레코딩 스튜디오를 누비고 다니겠지... 그저 창조의 과정을 지켜보기 위해... 알겠어? 창조의 과정 말야. "우와, 이거 죽이는데... 뭔가 하지 않으면 기절해버리겠어..." 식보이가 머리를 움켜쥐었다. 렌튼은 셔츠를 풀어 헤치고, 자기 젖꼭지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스퍼드... 내 젖꼭지 좀 보라고. 이상한 느낌이야. 이런 젖꼭지를 하고 있는 자식은 본 적이 없어." 내가 사랑에 대해서 얘기하기 시작하자, 렌튼은 사랑 같은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사랑은 종교 같은 거라고 말했다. 국가는 우리들에게 그러한 시시한 걸 믿게 하려고 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하면 우리들을 조종하기 쉽지 않겠어? 머리통을 텅 비워놓을 수가 있으니까. 입만 열면 정치 얘기를 떠벌리지 않고는 못 배기는 고양이가 있다. 하지만 렌튼의 그런 면은 싫지 않다. 왜냐하면, 렌튼 자신은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왜냐하면... 왜냐하면, 우리들은 보이는 건 뭐든지 우스갯거리로 만들어 버리니까... 카운터에 있는 저 미친 녀석, 핏대를 올리고 있군... 저 잉글랜드에서 온 페스티벌 관광객 타입의 속물같이 생긴 아가씨는 방금 코앞에서 누군가 방귀를 뀐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식보이가 말했다. "야, 메도우스에 가서 벡비와 매티를 까무라치게 해줄까... 단순하고, 따분하고, 멍청한 사기꾼 똘마니 자식들!" "그건 위험해, 캣보이. 놈들은 진짜 위험한 놈들이야... 그러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팬들을 위해 한번 해보자." 렌튼이 말했다. 그 말은 힙스가 나온 맨 섬의 프리시즌 토너먼트 광고에서 렌튼과 식보이가 따온 것이다. 그 광고에는 힙스의 간판 선수인 알렉스 밀러가 멍청한 얼굴로 찍혀 있고, 밑에는 '팬들을 위해 한번 해보자'라고 쓰여 있다. 이제 그들은 약을 시작하기 전에 항상 그렇게 말한다. 우리들은 어슬렁어슬렁 펍을 나와서 길을 건너 공원으로 향했다. 우리는 시나트라를 흉내내서 과장된 뉴욕 악센트로 노래를 불렀다. 당신과 나, 한 쌍의 호모 커플 같네. 메도우스를 거닐며 물망초를 하나 가득 꺾으면서. 저 쪽에서 여자 두 명이 이쪽으로 걸어온다... 아는 여자였다... 로잔나와 질이다. 두 사람 모두 정말로 예쁘다, 귀족 학교를 나와서... 길레스피 졸업생이든가, 매리 어스킨 졸업생이든가... 언제나 '서던'이라는 술집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 음악과 마약과 그리고 경험을 찾아서... 식보이가 팔을 뻗어서 질을 끌어안자, 렌튼도 로잔나를 끌어 안았다. 나는 짝이 없어서 멍하니 그들을 보고 있었다. 창녀들의 집회에 나온 짝 없는 페니스 같은 느낌이다. 열렬히 키스를 하고 있다. 그건 잔혹한 짓이야. 그래, 잔혹하다고. 렌튼이 먼저 키스를 그만두었으나 로잔나를 포옹한 팔은 풀지 않았다. 렌튼은 장난으로 저러는 거겠지... 왜냐하면... 렌튼이 도노반의 펍에서 꼬신 여자아이는 이렇게 나이가 많지 않았거든. 그 아이는 이름이 뭐였더라? 다이안? 렌튼은 나쁜 고양이다. 식보이는 저런, 질을 나무에 밀어붙이고 있다. "귀여운 아가씨, 잘 있었어? 어디 가는 길이지?" 식보이가 질에게 물었다. "'서던'에 가는 길이야." 질은 약간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간 취한 부잣집 공주 같은 느낌? 질의 얼굴에는 잡티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아가씨들, 차갑게 대하려 하고 있지만, 사실은 렌튼과 식보이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다. 이 여자들은 우리의 슈퍼스타 정키 콤비한테라면 무슨 일을 당해도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정말로 냉정한 여자라면, 놈들의 얼굴을 한방 갈기고, 비틀거리며 몸을 웅크리는 것을 잠자코 보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 두 아가씨는 싫은 척하고 있을 뿐이다. 마치 '엄마 아빠에게 야단 맞아요'하는 시늉을 하고 있다. 하지만, 렌튼은 그 약점을 파고들거나 하지는 않는다. 벌써 충분히 단맛은 보았으니까. 그러나 식보이의 경우는 얘기가 다르다. 식보이는 질의 청바지 속에 손을 집어넣고서... "난 여자를 잘 알고 있어. 여기에 약을 숨기고 있을 거야." "사이먼! 아무 것도 숨기지 않았어! 사이먼! 사이먼! " 질이 무서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식보이는 질을 놓아줬다. 모두가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지금 한 짓이 장난이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고 나서 여자들은 가버렸다. "오늘 밤,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식보이가 여자들의 등에 대고 외쳤다. "그래... '서던'으로 찾아온다면." 질이 뒤를 보고 걸으면서 대답했다. 식보이는 넓적다리를 탁 하고 쳤다. "저 귀여운 년들을 집으로 데려가서, 기절할 때까지 해주고 싶었는데. 저것들도 하고 싶어서 안달하고 있었는데." 나와 렌튼에게 말했다기보다는, 자신에게 그렇게 말한 것 같았다. 렌츠가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악을 쓰기 시작했다. "사이먼! 다람쥐다! 저기 네 발 있는 곳에! 빨리 죽여버려!" 식보이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다람쥐를 가까이 오게 하려고 했지만, 다람쥐는 겁을 집어먹고 오히려 달아나버렸다. 몸을 잔뜩 웅크리며 매우 이상한 동작으로 도망쳤다. 은회색을 띤 마법의 동물. 렌츠는 돌멩이를 집어서 다람쥐에게 던졌다. 돌멩이가 다람쥐의 바로 옆을 스쳐갔기 때문에 나는 깜짝 놀라서 한순간 심장이 멎었다. 렌츠가 미친 듯이 웃으면서 다시 또 다른 돌멩이를 주우려고 했기 때문에, 나는 그를 가로막았다. "좀 내버려둬. 저 다람쥐는 아무한테도 해를 끼치지 않잖아!" 나는 마크가 함부로 동물에게 상처를 입히려고 하는 것이 싫었다... 그런 짓을 하면 안 되지 않는가. 그런 식으로 다른 동물에게 상처를 입히려고 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할 수도 없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그런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다람쥐는 굉장히 귀여운 동물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있다. 자유로운 동물이다. 렌츠는 그래서 다람쥐를 싫어하는 것이다. 다람쥐는 자유롭게 살고 있으니까. 나는 렌츠를 붙잡고 있었지만, 렌츠는 아직도 웃고 있었다. 고상해 보이는 중년 부인 두 사람이 우리들 쪽을 빤히 바라보면서 지나쳐갔다. 왠지 무척 불쾌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렌츠의 눈이 번뜩 빛났다. "저년들을 잡아라!" 렌츠는 식보이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여자들에게도 확실히 들리도록 큰소리로. "섹스를 할 때 찢어지지 않도록 셀로판지로 감고 나서 하라고!" 다람쥐는 날쌔게 식보이에게서 도망쳐갔지만, 여자들은 고개를 돌려서 길거리에 굴러다니고 있는 개똥이라도 본 것 같은 눈으로 우리들을 보고 있었다. 나도 큰소리로 웃었지만, 계속 렌츠를 붙잡고 있었다. "야, 저 레즈비언들이 도대체 누구를 보고 있는 거지? 저 추녀들이!"하고 렌츠가 여자들에게 들리도록 말했다. 여자들은 방향을 바꾸더니, 조금 전보다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식보이가 고함쳤다. "잘 가라, 이 고비 사막처럼 바짝 마른 X지들아!" 그러고서 식보이는 이쪽을 보고 말했다. "저 늙은이들, 뭐가 그리워서 우리들에게 추파를 보낸 거야? 저런 여자와 하고 싶어하는 녀석은 없을 거야. 이렇게 캄캄한 곳에서라도 말이야. 저런 여자와 할 정도면, 문방구에서 샌드 페이퍼라도 사다가 비벼대는 편이 더 낫다고!" "X까지 마! 털만 나 있으면 새벽(도온)의 틈새에라도 쑤셔 넣을 녀석이!"하고 렌츠가 말했다. 아마 이 말을 한순간 후회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도온'은 죽은 레슬리의 아기 이름이다. 자다가 갑자기 죽어버린 작은 아기. 모두들 어렴풋이 알고 있다. 식보이가 도온의 아버지라는 것을... 그러나 식보이는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닥쳐, 이 머리에 정액만 꽉 찬 저능아 자식! 너야말로 개하고도 할 놈 아냐? 지금까지 내가 한 여자는 말이야,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모두 할 만한 값어치가 있는 여자들 뿐이었어." 언젠가 식보이가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집으로 데리고 갔던 그 스탠드 방의 여자가 생각났다. 특별히 예쁘게 생긴 여자라고는 할 수 없었다. 무론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는 법이지만. "그 스탠드 바의 아가씨를 기억하고 있니? 이름이 뭐라고 했지?" "넌 잠자코 있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와 엑세스 카드로 샌드위치가 된 페니스를 가지고 매춘 굴에 가도 아무하고 할 수 없으니까." 깎아내리기 경쟁이 시작되었다. 그러고 나서 조금 걸었다. 나는 귀여운 도온과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며 자유롭게 살고 있는 다람쥐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간단하게 그들을 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난 소름이 끼치고, 슬프고, 화가 났다... 렌츠와 식보이는 자기들끼리 가버렸다. 나는 방향을 바꿔서 다른 쪽으로 걸아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렌츠가 뒤쫓아왔다. "왜 그래, 스퍼드?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말 좀 해봐." "그 다람쥐를 죽이려고 했잖아." "야, 기껏해야 다람쥐인데 왜 그래, 스퍼드? 해충 같은 놈들 아니냐고... "하면서 렌츠가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나와 너만큼은 해가 없는 동물일지도 모르잖아... 어떤 동물이 해가 있다고 누가 결정할 수 있겠어... 아까 그 고상한 여자들은 우리들을 해충 같은 놈들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그 여자들이 우리를 죽여도 괜찮다는 얘기니?" "잘못했어. 대니... 기껏해야 다람쥐라고 생각한 거야. 미안해. 네가 동물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어. 다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 알고 있겠지? 대니... 이런 빌어먹을! 그러니까 말이야. 나는 지금 엉망진창이야. 대니. 나도 잘 모르겠어. 벡비의 일이라든가... 마약이라든가. 난 지금 뭘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모든 것이 그냥 뒤죽박죽일 뿐야. 대니. 아무튼 뭐가 뭔지 모르겠어. 정말로 잘못했어." 렌츠가 나를 '대니'라고 부르다니. 이게 몇 년 만일까? 한번 그렇게 부르기 시작하면 '스퍼드'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정말로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같았다. "그래... 이제 됐어, 캣보이. 기껏해야 동물 한 마리 갖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다만 도온 같은 죄 없는 조그만 생명체에 대해서 생각했을 뿐이야... 그런 것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니까." 렌츠는 갑자기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너는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녀석이야. 술이라든가 약 때문에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야. 난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거라고. 술도 약도 하고 있지 않을 때, 다른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털어놓았을 때는, 그것은 절대로 확실한 진짜 내 마음이란 말이야..." 나는 렌츠의 등을 탁탁 두드려주었다. 같은 말을 나도 렌츠에게 하고 싶었지만, 렌츠가 말했기 때문에 나도 말하는 것 같이 들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말하고 말았다. 뒤쪽에서 식보이가 고함을 치고 있었다. "야, 거기 있는 호모들. 나무 그늘에 숨어서 한방 할 생각이냐? 아니면 나와 함께 베거와 매티를 찾으러 갈래?" 나와 렌츠는 팔을 풀고 큰소리로 웃었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저 고양이는 온 시내의 쓰레기 자루를 씻고 돌아다니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 그래도 식보이 역시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녀석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제4장 인생을 선택하라. 22. 길고 힘든 하루를 견뎌내기 위해서: 랜튼의 이야기 피고인석의 나와 스퍼드를 응시하는 치안 판사의 표정은 연민과 증오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피고인은 팔아넘길 목적으로 워터스톤 서점에서 책을 훔쳤지요?" 책을 팔아넘기다니, 천만의 말씀이다. "아닙니다." 나는 대답했다. "네." 동시에 스퍼드가 말했다. 우리들은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처럼 오랜 시간을 들여서 머리 말을 맞추었는데도 이 짜식, 단 2분 만에 파토를 내고 말았다. 치안 판사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생각해보면, 판사들도 결코 화려한 직업이 아니다. 하루 종일 멍청한 녀석들을 상대해야 하니까 매우 피곤할 것이다. 그래도 급료는 엄청나게 맣이 받을 것이고, 이쪽이 부탁해서 판사가 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좀더 프로답게 재판해주었으면 좋겠다. 짜증스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말고 좀더 사무적으로 말이다. "미스터 랜턴, 당신은 책을 팔아넘길 생각은 없었단 말입니까?" "그래요, 네, 그렇습니다, 판사님. 제가 읽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빌어먹을 작자는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키에르케고르를 읽어단 말이지요? 그러면 키에르케고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시겠습니까, 미스터 랜턴?" "저는 키에르케고르의 주관성과 진실이라는 개념에 흥미가 있습니다. 특히 선택에 관한 그의 사고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참다운 선택은 의심과 불확실성으로부터 행해지고, 경험이나 타자의 조언은 불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상당한 비판도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의 개념은 부르조아의 실존주의적 철학이며 사회적 지식의 토대를 파괴하려고 한다는 비판입니다. 하지만, 편견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하는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지식이 부정되면 개인을 지배하려고 하는 사회적 통제력이 약해지고 그리고,,,,,, 죄송합니다, 그만 저도 모르게 지껄여대서,,,,,,," 나는 도중에 드만두었다. 판사들은 머리가 좋은 피고를 싫어한다. 지나치게 지껄여대면 벌금이 비싸지는 경우도 있다. 아니, 절금 정도로는 넘어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겸손하게 굴어라, 랜튼. 겸손하게 말이다. 치안 판사는 비웃듯이 코를 킁킁거렸다. 이 작자는 먹물이니까 위대한 철학자에 대해서라면 나 같은 일반 서민보다 훨씬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판사가 되려면 상당한 두뇌가 필요하니깐. 그러니까 아무나 판사가 될 수 없다는 얘기지. 방척석의 백비가 식보이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미스터 머피, 당신은 헤로인을 사는 자금으로 쓰기 위해서, 다른 곳에서 훔쳐온 것과 마찬가지로, 그 책을 팔아넘길 생각이었다는 얘기지요?" "예, 딱 들어맞았어요,,,,,,아니, 그 말씀 그대로입니다." 스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까지의 진지한 얼굴이 우물쭈물하는 표정으로 변해 갔다. "미스터 머피, 당신은 상습적으로 물건을 훔쳤습니다." 스퍼드는 자기탓은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떨었다. "당신은 현재도 헤로인 중독ㅇ이라고 기록에 쓰여 있습니다. 거기에 절도 중독이 추가되겠군요, 미스터 머피.당신이 그런 식으로 되풀이해서 훔치는 물건은 누군가가 열심히 일을 해서 만든 것입니다.그리고 그것을 사는 사람도 열심히 일을 한 돈으로 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소한, 하지만 계속적인 범죄로부터 손을 씻게 하려고 여러 가지 노력이 행해져 왔으나, 지금까지는 모두 무위로 끝났습니다. 따라서, 당신에게는 금고 10개월 형을 내립니다." "감사합니다...........아,그게 아니라......그럴 필요가, 그러니까....." "미스터 렌튼. 당신의 경우는 다릅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신도 헤로인 중독자군요. 그러니 마약을 끊으려고 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약물을 끊은뒤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 때문에 절도를 하게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본 범정은 그 주장을 인정합니다. 그리고ㅓ 미스터 로즈를 떼민 것은 당신에 대한 폭력을 그만두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며, 그 사람을 넘어지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하는 주장도 인정합니다. 따라서, 금고 6개월을 인도 하지만, 약물 중독의 적절한 치료를 계속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집행 유해를 인정합니다. 보호 감찰관을 임명하고 경과를 관찰하겠습니다. 그리고 체포되었을 때의 소지품속에 자신이 사용하기 위한 대마초가 있었다고 하지만,법원은 위법한 약물의 사용을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헤로인을 끊은데서 오는 우울증 증상을 극복하기 위해 대마초를 사용했다고 주장했지만 말입니다. 이 위법 약물의 소지에 대해서는 1백 파운드의 벌금을 부과하기로 하겠습니다. 앞으로 는 다른 방법으로 우울증을 극복하도록 하시오. 친구인 다니엘 머피와 마찬가지로 주어진 기회를 헛되이 보내고 또다시 이 법정에 나타나는 일이 있다면, 다음에는 가차없이 실형을 언도하겠습니다. 알겠습니까? 아아, 잘 알았다니까. 잘도 속아넘어가는 놈이로군. 당신, 내 마음에 쏙드는데, 이 머리에 똥만 찬놈아. "감사합니다,판사님. 제가 가족이나 친구들을 얼마나 실망시키고 있었는지, 뼈에 사무치게 깨달았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판사님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안고 있다고 자각하는 것은 재활에 빼놓을 수는 없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치료소에는 정기적으로 다니고 있으며, 유지 요법에서도 메타돈(진통제,헤로인 치료제로 사용됨-역주)과 테마제한을 처방받고 있습니다. 더 이상 자기 기만으로 나 자신을 속이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신의 힘을 빌려서 반드시 완쾌해 보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치안 판사는 혹시 연극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내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얼굴에 나타날 리가 없잖은가!평소에도 백비 상대로 연극을 하고 있었으니까, 진지한 얼굴을 하는 것이 낫지.진심이라고 생각됐는지 판사는 폐정을 선언했다. 나는 자유의 몸이 되고, 불쌍한 스퍼드는 이대로 교도소행이다. 경관이 스퍼드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미안, 참 안됐어." 나는 말을 걸었다. 굉장히 의리없는 녀석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괜찮아,헤로인을 끊을 수가 있고, 서튼 교도소라면 하시시를 마음대로 할 수가 있으니까. 별로 힘들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스퍼드는 무뚝뚝한 경찰놈에게 호송되어 가버렸다. 법정 밖으로 나가자 엄마가 다가와서 나를 껄어안았다. 지친 얼굴에는 눈밑에 그늘이 생겼다. "오오, 마크. 마크야, 정말 이제부터는 어떻게 하면 좋겠니?" "멍청한 자식.그런 쓰레기를 계속하단 죽고 말 거다." 형 빌리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형한테 한마디 쏘아붙이려 생각했다. 애당초 와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고, 우둔하기 짝이 없는 비판 같은 것은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입을 열려과 했을 때, 프랑코 벡비가 다가왔다. "렌츠!정말 잘했어, 임마! 결과가 좋게 나와서 다행이야, 안 그래? 스퍼드는 불쌍하게 됐지만 말야. 생각하고 있었던것 보다는 그래도 가벼웠으니까 10개월까지 살지 않아도 나올거야. 얌전하게 있으면 반년이면 나올수가 있어. 좀더 짧을 수도 있고" 광고 회사의 중역 같은 차림을 한 식보이가 엄마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나에게 파충류 같은 웃음을 보냈다. "자, 빌어먹을 축하 파티를 열어줘야지. 디콘네 술집으로 할까/ 프랑코가 말을 꺼냈다. 우리들은 멍한 채 줄줄이 프랑코를 따라서 법원을 나왔다. 아무도 다른제안을 할 기력이 없었으므로, 축하 파티안의 부전승이었다. "엄마와 아빠에게 얼마나 폐를 끼쳤는지, 네가 알고만 있다면......" 엄마가 진지한 얼굴을 하고 나를 응시했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 하고 빌리 형이 경멸하듯이 말했다. "책을 훔치질 않나. 정말 예날부터 밥맛 없는 새끼였어." "책을 훔치는 일은 벌써 6년 전부터 해왔어. 엄마 집과 내 아파트에 염병할 좀의 책이 4천 파운드어치 쌓여 있어. 돈을 내고 산책이 한 권이라도 있는 줄 알아? 도둑질을 해서 4천 파운드나 벌었단 말야, 이 돌대가리야." "어머, 마크 거짓말이겠지? 그 책이 전부....."어머니가 비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제는 하지 않을 거야, 엄마. 언제나 말했잖아. 한번이라도 붙잡히는 날에는 그날로 그만 두겟다고. 붙잡히면 끝장이니까.그것이 은퇴 시기라는 거야. 더 엔드. 자, 이제 이애기는 이것으로 끝." 나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엄마도 내가 진심이라는 걸 알았는지 화제를 바꿨다. "그리고, 말 좀 함부로 하지 말아라. 너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빌리에게 말했다. "어디서 배워온거야? 난 집에서 그런 말 같은 건 쓰지도 않았는데." 빌리는 내쪽들 돌아다보고, 영문을 알수 없다는 듯한 얼굴을 하면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도 빌리를 보며 같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 형제가 일치 단결하다니, 별일이 다 있다. 마시기 시작하자, 보두들 눈 깜빡할 사이에 취해버렸다. 엄마가 자신의 생리에 대해서 떠들기 시작했기 때문에 빌리형과 나는 두손을 들고 말았다. 47세나 되었는데도 아직 생리가 있다고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으니 말이다. "하여간 홍수 같았다니까. 탑폰은 소용이 없어.파열된 수도관을 <이브닝 뉴스>지로 틀어 막으려고 하는 거나 같으니까." 엄마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큰소리로 웃었다. "리스 독커스 클럽에서 칼스버그 스페셜을 너무 많이 마셨어"라고 할 때와 같은 그 천박한 웃음이었다. 어머니가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혹시 어쩌면 발륨과 섞어서 마셨을지도 모른다. "그만 좀 해요, 엄마." "어머, 설마 네 엄마가 널 창피하게 만든다는 소리 같은 건 하지 않겠지? 하고 엄마는 나의 야윈 뺨을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꼬집었다. "우리 귀여운 아가야를 빼앗기지 않게 되어서 기쁜 것뿐이란다. 그래, 이 녀석은 귀여운 아가야라고 부르면 싫어하지. 그러나 너희들은 언제나 엄마의 귀여운 아가야란다. 너희 둘 다 말이야. 옛날에 넌 이 노래를 불러주면 좋아했었지. 기억하고 있니? 네가 유모차에 탄 귀여운 아기였을 때 들려줬잖아." 나는 이를 악물었다. 목구멍이 바짝바짝 타고 얼굴에서 핏기가 싸악 가시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제발 그만두라니까. "엄마의 귀여운 아기는 쇼트 브레드, 쇼트 브레드, 엄마의 귀여운 아기는 쇼트 브레드를 제일 좋와햐..." 엄마가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식보이는 신이 나서 함께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스퍼드가 부러워졌다. 아아, 차라리 내가 교도소에 갔으면 좋았을걸. "잘도 노래를 부르고 있군. 노래나 부르고 앉아 있다니, 이 뻔뻔스런 놈들 같으니라고!" 스퍼드의 어머니가 펌으로 들어왔다. "머피 부인. 대니 일은 정말로 유감입니다..." 나는 말했다. "유감이라고! 유감인 것은 이쪽이야! 네놈이나 거기 있는 쓰레기같은 녀석들이 없었더라면 우리 대니가 교도소에 들어가지 않았을 거란 말야!" "자아 자아, 콜린, 진정하세요. 슬픈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좋지 않아요" 하고 엄마가 일어섰다. "공연한 트집이 아니라고요! 나쁜 것은 이 녀석이잖아요!" 그렇게 말하고 밉살스럽다는 듯이 나를 가리켰다. "이 녀석이 우리 대니에게 나쁜 짓을 가르쳤어요. 그런데도 재판에서는 혼자 잘난 척 지껄여대더니 혼자만 싹 빠져나왔잖아요? 그래요, 이 녀석과 저기 있는 벼락맞을 2인조 탓이라고요!" 나뿐만 아니라 식보이와 베거에게도 화를 내고 있다는 걸 알고 나는 안심했다. 식보이는 잠자코 있었느나 이런 지독한 모욕은 처음이라는 듯한 얼글을 하더니 애처롭다는 듯이 고개을 흔들었다. "당신 말이 너무 지나치잖아!" 벡비가 맹렬한 기세로 악을 썼다. 이 녀석의 세계에는 침범할 수 없는 대상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사 상대가 방금 자식을 교도소로 보낸 리스의 중년 여인이라 하더라고. "나는 그런 쓰레기에는 손을 댄 적도 없고요, 렌츠와 스퍼... 마크와 대니에게는 그런 짓은 바보 같은 거라고 타일렀단 말요! 식... 사이먼도 벌써 몇 개월 전에 그만뒀다고요." 백비는 벌떡 일어났다. 녀석은 한번 화를 내면 제동여 걸리지 않는다. 다행히 머피 부인을 때리는 대신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꽝하고 때리면서 고함을 쳤다. "그래서 난 당신의 그 빌어먹을 아들놈에게 약을 끊게 하려고 노력했단 말요!" 머피 부인은 뒤돌아서 술집을 뛰쳐나갔다. 그 얼굴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절망적인 표정이었다. 아들이 교도소에 수감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들에게 품고 있던 환상조차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나는 머피 부인이 불쌍해졌다. 그리고 프랑코에게 화가 났다. "흥, 저 여자는 동네 스피커란다."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침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콜린의 심정은 이해해. 자식이 교도소에 갇히게 되었으니까." 그러더니 내 얼굴을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말썽꾸러기 자식이라도 눈 앞에서 없어져버린다는 것은... 그건 그렇고 프랭크, 갓년에는 잘 있니?" 하고 엄마는 백비 쪽을 보았다. 우리 엄마 같은 사람들의 프랭코 같은 못된 놈들에게 얼마나 간단하게 넘어가나 생각하니 오싹해졌다. "예, 랜튼 부인. 엄청 많이 자랐어요." "캐시라고 불러주렴. 렌튼 부인이라니! 꼭 할머니라도 된 것처럼 들리는구나!" "사실이 그러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하고 나는 참견을 했다. 그러나 엄마는 나를 완벽하게 무시했으며, 아무도 웃지 않았다. 빌리조차 웃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벡비도 식보이도 건방진 조카 녀석을 쥐어패고 싶지만 부모가 있어서 차마 그러지 못하고 있는 숙부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나는 벡비의 갓난애와 같은 급의 신분으로 격하된 셈이다. "사내아이였던가, 프랭크?" 같은 부모끼리 엄마가 물었다. "네, 물론이죠. 준에게 말했어요. 만일 계집애라면 뱃속으로 다시 돌려보내갰다고요." 준의 모습이 눈에 떠올랐다. 회색이 섞인 오트밀 색깔의 피부, 기름기가 많은 머리칼, 탄력 없고 깡마른 몸. 시체처럼 표정이 없는 얼굴-웃는 것도 찡그리는 것도 못한다. 갓난에의 소름끼치는 울음 소리 때문에 너덜너덜해진 신경을 발륨으로 달랜 것이다. 프랑코는 불쌍한 아들에게 철저하게 관심을 갖지 않겠지만, 준은 그 갓난애를 끝까지 사랑해줄 것이다. 그것은 맹목적이며, 숨막히는, 무엇이든지 받아주고 용서해주는 사랑이다. 그 사랑으로 갓난애는 틀림없이 아빠와 꼭 같이 자라날 것이다. 부잣집 자식들이 태아 때부터 명문 고교의 길을 약속받고 있는 것처럼, 그 아이의 이름은 준의 자궁에 있었을 때부터 소튼 교도소의 감방 예약 리스터에 기입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아빠 프랑코는 지금과 같은 장소에 있을 것이다-그렇다, 술집에 말이다. "이제 곧 나도 할머니가 된단다! 정말로 믿을 수가 없구나." 엄마는 외경과 자랑이 뒤섞인 눈으로 빌리 형을 바라보았다. 빌리형은 자랑스러운 듯이 미소를 지었다. 빌리 형의 마누라 샤론이 임신한 이래, 빌리 형은 엄마, 아빠의 골든 보이가 되었다. 경관에게 끌려갔다 돌아온 횟수가 나보다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혀졌다. 적어도 나는 형처럼 우리 집 현관 앞에서 붙들려지는 않을 정도의 상식은 갖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없었던 일로 되었다. 단지 빌어먹을 군대에 들어갈 계약을 하고(이번에는 6년 계약이다), 어느 화냥년에게 애를 배개 만들었다는 것만 빼고 말이다. 엄마, 아빠에게 너는 앞으로 도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잔소리를 들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잔소리는커녕 장하다는 듯이 싱글싱글 웃으며 좋아들 하고 있다. "빌리, 딸이 태어나거든 샤론의 뱃속으로 되돌려 보내버려." 백버가 조금 전과 같은 말을 했으나 이번엔 혀가 꼬부라졌다. 술이 머리 꼭대기까지 찬 것 같았다. 언제부터 마시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술주정뱅이가 여기에도 한 사람 있다. "좋았어, 그래야지 남자지, 프랑코" 식보이가 백버의 등을 탁 하고 쳤다. 그렇게 치켜세워 놓으면, 신바람이 난 이 녀석이 폭언을 내뱉고, 벡버 명언집에 신작을 추가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나와 식보이는 백버의 우둔하고 성차별적인 수많은 폭언을 수집해서, 녀석이 없을 때 그 흉내를 내면서 놀고 있다. 그 놀이는 허파가 터질 정도로 재미있다. 만일 벡버에게 들통이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상상하면 스릴까지 있다. 식보이 같은 경우는, 벡비의 뒤쪽에서 이상한 얼굴을 해보이는 정도까지 발전했다. 언젠가 우리 둘 가운데 하나는, 아니 어쩌면 양쪽 다 지나치게 장난을 치다가, 주먹이나 술병이나 '야구 방망이로 예의범절을 가르쳐주마(벡비 명언 정신집에서 인용)'가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택시를 잡아타고 리스로 향했다. 벡비가 '도시는 술값이 비싸'라고 투덜투덜거리기 시작하고, 리스야말로 엔토테인먼트 센터라고 말도 안 되는 연설을 시작했다. 빌리도 그렇다고 말했으나 그는 단순히 자기 집 근처의 술집으로 옮기고 싶은 것 뿐이다. 아마 임신한 마누라도, 집 근처의 술집에서 전화를 걸고 있다는 것을 알면 안심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식보이는 신바람이 나서 택시를 불렀다. 만일 내가 먼저 리스 같은 곳은 싫다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 녀석은 틀림없이 싫다고 말했을 것이다. 리스워크의 밑에 있는 펌에 들어갔다. 나는 이 술집을 아무래도 좋아할 수가 없었지만, 웬지 언제나 결국은 이 집에 찾아 오게 되고 만다. 바텐더인 뚱보 말콤이 가게 부담으로 나에게 보드카 더블을 대접해 줬다. "판결에 대해 들었네, 다행이구먼." 나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중년 남자 두 명이 벡비를 할리우드의 대스타라도 되는 것처럼 칙사 대접을 하고 있었다. 놈들은 그다지 재미있지도 않은 벡비의 이야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리고 있다. 전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몇 번씩이나 들었을 텐데. 식보이가 엄청난 특혜라도 베푸는 듯한 얼굴로 돈을 과시해 보이면서 모두에게 술을 대접하기 시작했다. ":빌리! 라거야? 렌튼 부인... 아니, 캐시는요? 뭐라고요? 진 앤드 버터 레몬?" 우리들이 있는 구석 테이블을 향해서 바에서 고함을 친다. 나는 보고 말았다. 누구라도 병균처럼 피해서 지나갈 것 같은, 못생기고 멍청해보이는 자식과 뭔가 수군거리고 있던 벡비가 식보이에게 은밀하게 돈 다발을 건네주고, 술값을 치르게 하고 있었다. 빌리는 전화로 샤론과 말다툼을 하고 있다. "그래서 내 그 빌어먹을 동생 놈이 하마터면 별을 달 뻔했다니까. 책을 훔친 것과 점원 폭행과 마약 불법 소지죄. 하지만 집행 유예 판결이 내렸다고. 우리 엄마까지 함께 있다니까! 축하 파티 정도는 해야 당연하지 않겠어. 빌어벅을..." 저렇게 있지도 않은 형제애까지 끌어들이는 것을 보니까, 꽤 궁지에 몰려 있는 모양이다. "저기 행성탈출(찰튼 해스튼 주연의 원숭이가 지배하는 미래의 지구에 대한 1967년도 영화-역주)이 있어"하고 식보이가 한 남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분명히 그 영화의 엑스트라가 빠져나온 것 같은 작자이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그 작자는 완전히 술에 취해서 얘기 상대를 찾고 있었다. 쳇, 눈이 마주쳐버렸군. 이쪽으로 다가온다. "경마를 좋아하나?"하고 녀석이 나에게 물었다. "아니." "축구는?" 혀가 꼬부라졌다. "아니." "그럼 럭비는?" 이제 똥줄이 타는 모양이다. "아니." 호모 상댈 찾고 있는지, 단지 얘기 상댈 찾고 있는지 잘 알 수가 없다. 아마 이 작자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하여간 나에게는 관심을 잃은 모양인지, 이번에는 식보이 쪽을 보았다. "경마는 좋아해?" "아니. 내친 김에 말한다면 축구도 럭비도 다 싫어해. 영화라면 좋아하지만. 특히 (행성탈출)은 재미있더군. 그 영화 봤어? 그런 말이 정말로 있는 줄 알았다고." "아아! 그 영화라면 기억하고 있지. (행성탈출) 말이지. 찰튼 해스톤과 로디 맥... 그 녀석은 뭐라고 했더라. 조그만 녀석 말이야. 누구 얘긴지 알고 있겠지? 안 그래, 당신, 알고 있지?" 행성탈출이 내 얼굴을 보았다. "맥도월(원숭이 닥터 코넬리우스 역으로 나온 배우-역주)" "맞아!" 행성탈출은 신바람이 나서 말하고, 식보이 쪽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오늘은 그 귀여운 아가씨랑 함께 안 왔니?" "뭐? 누구라고?" 식보이는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왜 그 금발 아가씨 말이야. 요전날 밤에 데리고 왔었잖아?" "아, 그애." "좋은 여자였어... 아니,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해. 악의는 없었으니까." "아니, 별ㄹ 상관없어"하고 식보이는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30파운드에 당신에게 빌려줄께." "정말이야?" "그럼. 하지만 변대짓은 안 하기야. 스탠더드 패키지로 50파운드." 나는 귀를 의심했다. 식보이는 진심이었다. 행성탈출에게 마리아 앤더슨을 알선하려고 하고 있었다. 정키인 마리아. 지난 몇 개월 동안 식보이와 붙었다가 떨어졌다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 녀석은 그 마리아를 돈으로 팔려고 하고 있었다. 식보이도 그 정도로까지 타락했나 하고 생각하니까. 아니 우리들로 여기까지 와버렸는가 하고 생각하니까 구역질이 났다. 다시 스퍼드가 부러워졌다. 나는 식보이를 끌어당겼다. "야, 임마 이게 무슨 짓이냐?" "보면 모르냐? 내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중이다. 불만이야? 너, 언제부터 사회 사업가가 됐냐?" "그것하고 이건 얘기가 다르다고. 안 어린 시절 같이 뛰놀던 내 친구는 도대체 어디 가버렸냐고 묻고 있는 거야." "그럼 너는 뭐냐? '미스터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는'이라도 되는 줄 아냐?" "아냐, 하지만 나는 다른 자식의 신셀 조져놓진 않아." "놀고 있네. 토미가 시커 같은 녀석과 사귀게 된 개 네 탓이 아니라 이거냐?" 식모이의 눈은 양심과 가책이나 연민으로 얼룩지지 않은 크리스털처럼 차갑고 믿을 수 없어 보였다. 식보이는 다시 행성탈출 쪽으로 다가갔다. 나는 이렇게 말하려고 했었다. 토미는 자신이 선택할 수가 있었어. 그러나 마리아는 선택할 수가 없어. 하지만 만일 그렇게 말을 했다면 무엇이 선택이고 무엇이 선택이 아니냐에 대한 격론이 시작 됐을 것이다. 어느 정도 약을 맞으면 선택이라는 개념이 과거의 일이 돼버리는 걸까? 그것만 알고 있다면, 알 수만 있다면.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토미가 펍에 나타났다. 곤드레만드레 취한 세컨드 프라이즈와 함께다. 토미는 헤로인을 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절대로 하지 않았는데, 아마 우리들 탓일 것이다. 내 탓일 것이다. 토미는 계속 스피드밖에 하지 않았다. 리지와 헤어진 것 때문에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토미는 우울한 얼굴을 하고, 한마디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세컨드 프라이즈가 내 손을 으스러질 정도로 세게 잡았다. "이 세상에 마크 랜튼은 하나밖에 없다!"하는 합창이 술집 안에 울려 퍼졌다. 이빨이 없는 윌리 셰인 영감까지도 큰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한쪽 다리밖에 없는 마음씨 좋은 베거의 할아버지도 그랬다. 베거와 내가 모르는 사이코 두 명도, 식보이와 빌리 형도, 그리고 우리 엄마까지 동참하고 있었다. 토미가 내 등을 두드렸다. "다행이야!" 그러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헤로인, 갖고 있니?" 없어, 끊을 수 있는 동안에 끊으라고 말해줬다. 그러자 녀석은 자만심이 강한 녀석들이 흔희 말하듯이, 나는 끊으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전에도 똑같은 대사를 들은 적이 있다. 나도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아마 다시 그렇게 말하게 되겠지. 나는 가장 가까운 인간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고독을 느낀 적은 없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말이다. 행성탈출은 완전히 우리들의 일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녀석이 마리아 앤더슨과 하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 봤으나, 아름다운 그림이라고는 할 수가 없었다. 그 녀석이 다른 어떤 여자하고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도 아름다운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 만일 녀석이 우리 엄마에게 말을 걸려고 한다면, 그 잘난 쌍통에 맥주잔을 뎐져 버릴 것이다. 앤디 로건이 술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 녀석은 언제나 원기왕성하며, 지저분한 범죄와 교도소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다. 로건과 처음 만난 것은 2,3년 전으로, 공영 골프장에서 캐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두 사람 모두 꽤 큰돈을 빼돌렸다. 우리들을 그 사기에 끌어들인 것은 골프장의 경비 주임이기도 했던 검표원이었다. 그때는 돈을 잘 벌었다. 받은 급료를 쓰지 않아도 되었을 정도였다. 나는 로건을 좋아했지만, 직장 동료 이상의 우정으로는 발전하지 않았다. 로건과는 그 당시의 추억담밖에 할 얘기가 없었다. 그러나 모두들 추억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야, 그때 일 기억하고 있냐... ?"로부터 시작된 대화가 어느 틈엔가 불운한 스퍼드의 이야기로 옮겨갔다. 이번에는 프록시가 들어와서 나를 손짓으로 바로 불렀다. 약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마약을 끊는 치료를 받는 중이라고, 바보 같은 소리 집어치워, 헤로인을 그만두고 제대로 된 인간이 되려고 생각한 순간, 책두둑으로 체포되다니 세상 참 아이러니컬하지. 그건 그렇고, 메타돈이라는 약에는 완전히 두손 들었다. 그 약은 공연히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 서점에서 둥근 얼굴의 점원이 영웅이라고 되는 것처럼 덤벼둘었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나는 프록시에게 말했다. 나는 약물 치료 요법을 받고 있다고. 그랬더니 녀석은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나가버렸다. 나와 프록시가 얘기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린 빌리 형이 녀석을 술집 밖에서 쫓아나갔으나, 나는 달려가서 빌리 형을 말렸다. "저 병신, 주먹 맛을 좀 봐야 돼"하고 빌리 형이 악다문 이빨 사이로 으르렁거렸다. "그냥 내버려둬, 괜히 왜 그러는 거야?" 프록시는 약의 조달 문제 때문에 머리가 꽉 차 있는 모양인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어디론가 곧장 달려가 버렸다. "저 빌어먹을 새끼! 너도 저런 쓰레기와 사귀고 있으니까 이상한 일에 말려드는 거야." 빌리 형은 술집 안으로 들어와서 자리에 앉았는데, 샤론과 준이 술집으로 향해 오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벡비는 준이 펍에 있는 것을 깨닫ㅏ, 바난하듯이 노려봤다. "얘새끼는 어떻게 하고 왔어?" "언니에게 맡겨놓고 왔어." 준은 겁먹은 듯이 말했다. 벡비는 적의가 담긴 눈과 반쯤 열린 입과 얼어붙은 얼굴을 준에게서 돌리고, 지금 들은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하고는, 잘했가고 말해야 할까, 화를 내야 할까, 무시해야 할까를 궁리해까. 그러나 결국은 토미 쪽을 돌아다보고, 너란 녀석은 정말로 굉장한 녀석이라고 다정하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가 가진 친지들인가? 빌리 형은 닥치는 대로 참견을 하며 보수파 새끼다운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 샤론은 대가리가 두 개 달린 인간을 보는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엄마는 완전히 취해서 술집 여자같이 굴고 있고, 식보이는…으, 그 밥맛 없는 자식. 스퍼드는 교도소, 매티는 입원중인데 아부도 병문안도 가지 않고 매티의 얘기는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마치 놈이 세상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고 벡비는... 신이 나 있다. 준은 끔찍한 트레이닝복에 감싸인 일그러진 뼈 무더기 같다. 그냥도 보기 싫은 옷인데, 볼쌍사나운 멋멋한 몸매를 한층 더 강조하고 있었다. 나는 변소에 가서 오줌을 눴다. 다시 그 쓰레기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마음이 나지를 않았다. 나느 옆문으로 해서 몰래 밖으로 빠져나왔다. 다음 메타돈까지 앞으로 열네 시간 하고 15분. 정부 공인의 마약 중독이다. 저 토할 것 같은 젤리를, 헤로인 주사 대신에 하루에 3회, 이 치료법을 쓰고 있는 녀석은 누구나 3회분의 메타돈을 한꺼번에 먹고, 헤로인을 사러 달려갔다. 내일 아침까지, 그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는 기다릴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꼭 한 번만 맞으려고 조니 스원에게 뛰어갔다. 정말 이번 한번뿐이다. 길고 힘든 하루를 견뎌내기 위해서. 23.징크 딜레마 NO. 66 움직이는 것이 힘들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움직일 수 있다. 전에도 움직였잖아? 본래 우리들 인간은 계속 움직일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지만, 필요한 것이 바로 옆에 갖추어져 있는데, 왜 움직이지? 하지만 나는 어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구역질을 참을 수 없게 되면, 나는 반드시 움직인다. 과거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다만, 움직이고 싶어질 정도로 심해진 적이 있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무서워진다. 나는 곧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으니까. 괜찮아. 틀림없이 움직일 수 있을 거야. 괜찮을 거야, 절대로. 24. 개잡기: 식보이의 이야기 저런... 나의 적은 이게 정말 큰일났다. 제임스 본드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사실 그 녀석은 정말로 상대가 안 되는 녀석이었다. 스킨헤드. 녹색의 보머재킷. 23센티미터짜리 독마틴 부츠. 전형적인 저능아다. 더구나 멍멍이가 충실하게 따라다니고 있다. 불독(pit bull), 똥개(shit bull), 개소리(bullshit), 테리어... 이빨과 네 다리뿐인 저능가. 저런, 나무에 대고 오줌을 싸고 있네. 이리 와, 이쪽이야. 공원이 보이는 아파트에서나 맛볼 수 있는 재미. 텔레스코프의 조준을 네다리 짐승에게 맞춘다. 나의 상상일지도 모르지만, 최근에 이 녀석의 조준은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우수한 저격수인 사이면 남은 애용하는 22구경 공기총의 고장쯤은 문제도 삼지 않는다. 이번에는 조준을 스킨헤드의 이마에 맞춘다. 그러고는 녀석의 몸을 핥듯이 조준을 아래위로 이동시킨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어깨의 힘을 빼고... 다시 한 번... 이 저능아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 정도로 관심을 기울여준 자가 아무도 없겠지. 이 정도의 손길을, 이 정도의... 그렇다. 사랑을. 이렇게 거실에 있으면서, 저 녀석에게 고통을 줄 힘을 손에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만 해도 마음이 들뜨기 시작한다. 어둠의 암살자라고 불러줘, 미스 머니폐니. 하지만 내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불독 쪽이다. 저 사냥개가 주인에게 덤벼들어 불알을 물어뜯는 것과 동시에 인간과 짐승의 감동적인 관계가 끝장나는 순간을 구경하고 싶다. 얼마 전에 저격한 로트와일러 종의 똥개보다는 요란스럽게 떠들어주었으면 재미있을 텐데. 저번에 커다란 로트와일러 종의 옆머리를 맞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똥개가 트레이닝복을 입은 퉁명스러운 얼굴의 주인에게 덤벼들었다고 생각하는가? 흥, 행여나 그랬을려고... (코로네이션 스트리트)(Coronation Street, 1960년부터 30년 넘게 계속된 노동자 계급을 다룬 텔레비젼 연속극-역주) 베라와 아이비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 똥개는 낑낑 하고 울었을 뿐이다. 남들은 나를 식보이, 사기꾼, 뇌사 상태의 파괴자라고 부른다. 자, 이 총알을 먹어라, 피도, 록키, 람보, 아니 타이슨일까? 어차피 너의 지능이 모자라는 주인은 그 정도의 이름밖에는 생각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네가 학살한 애새끼들과 네가 엉망징창으로 짓이겨 놓은 얼굴과, 네가 길거리에 싸놓은 똥의 복수다. 아니, 그것보다 공원에 똥을 갈겨놓으니까 이런 꼴을 당한다고 생각해라. 로디언 선데이 아마추어 리그 소속 애비힐 애슬레틱 팀의 미드필더인 사이먼 님이 슬라이딩 태클을 할 때마다 달라붙던 개똥의 복수다. 주인과 똥개가 옆으로 나란히 섰다. 나는 방아쇠를 당기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좋았어! 똥개가 비명을 지르고, 스킨헤드의 팔꿈치를 꽉 물었다. 멋진 솜씨야, 사이먼. 아, 고마워, 숀. "셰인! 셰인! 이 멍청한 똥개! 너 죽여버린다! 셰에에에인!" 스캔헤드는 악을 쓰면서 개를 발로 걷어차고 있다. 그렇지만 무식한 독마틴 부츠도 그 괴물에게는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괴물은 더욱더 악랄하게 물어뜯었다. 어쨌든 사냥개인 것이다. 사냥감을 놓을 리가 없지. 원래 사나운 맛에 저런 종류의 개를 키우는 게 아니겠는가! 스킨헤드는 이미 절반쯤은 미쳐 있었다. 처음에는 뿌리치려고 했지만 그건 너무나 아프기 때문인지, 이번에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인정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살인 기계를 협박해보거나, 달래보거나, 얼러보거나 이것저것 시도하고 있다. 어떤 아저씨가 다가와서 도와주려고 했으나, 개가 노려보며 기다려라, 다음은 네 차례다. 라고 말하듯이 으르렁대니까 슬슬 도망쳐버렸다. 나는 알루미늄 배트를 집어들고서 전속력으로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순간을 위해 그 법석을 떤 것이다. 자아, 헌터의 출동이다! 기대감으로 입 안이 빠짝바짝 마른다. 식보이 사냥하러 가다. 좀 힘들겠는데, 사이면. 아냐, 문제없어, 숀.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스킨헤드가 비명을 질렀다. 생각한 것보다 어린데. "괜찮아. 진정하라고." 나는 스킨헤드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 사이먼 님이 왔으니까. 개에게 들키지 않도록 살그머니 뒤로 돌아갔다. 설마 그런 일이야 없겠지만, 스킨헤드를 놓고 나에게 덤벼들면 만사가 끝장이니까 말이다. 스킨헤드의 팔과 개의 입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보머재킷의 옆구리로 스며들어간다. 스킨헤드는 내가 배트로 개의 머리를 내려칠 거라고 생각할 거다. 그러나 그것은 로라 맥이완의 성욕을 채워주는 임무에 랜튼이나 스퍼드를 파견하는 것과 같다. 내려치는 대신에 나는 살며시 개의 목걸이를 들어올리고 배트의 손잡이를 끼워넣었다. 배트를 비틀고, 트위스트, 또 트위스트... 트위스트 앤드 샤우트... 아직도 죽지 않는다. 스킨헤드는 무릎을 꿇고 당장이라고 고통으로 기절할 것처럼 보인다. 나는 계속 비틀기만 했고 개의 목 근육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계속 비틀어 댔다. 렛츠 트위스트 어게인, 지난 여름처럼 또 한 번 트위스트. 나는 녀석이 죽을 때까지 목을 계속 조여댔다. 개는 을씨년스러운 신음소리를 몇 번씩이나 코와 입으로 내뿜은 뒤, 겨우 촉 늘어졌다. 단발마의 비명 속에서도, 그 후 한참이 지나서 감자 자루처럼 움직이지 않게 된 뒤에도, 그 녀석은 스킨헤드의 팔을 꽉 문 채로 놓지 않았다. 나는 목걸이에서 배트를 벗겨내고, 배트를 사용해거 개의 입을 벌려 팔을 빼냈다. 경찰이 달려왔을 때쯤엔 누더기가 된 보머재킷으로 붕대를 만들어 스킨헤드의 팔에 감아주고 있었다. 스킨헤드는 경관이나 구급대에게 나의 도움으로 살아났다고 쉴새 없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정말 혼났어요. 뭐가 잘못돼서 '파리 한마리 죽이지 못하는-정말로 그렇게 말했다. 바보 같은 상투 문구를 말이다-귀여운 셰인이 그런 피에 굶주린 괴물로 변신했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이봐, 그런 짐승은 언제 어느 때 괴물로 변해도 이상할 것 없다고. 스킨헤드를 구급차에 싣고 나서 젊은 경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너무나 한심하군. 이런 개는 걸어다니는 흉기야. 무지한 사람들이 기르는 것은 자유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나폭해진다는 걸 모르니 참으로 답답한 일이야." 나이를 먹은 경관이 지나치게 공손한 말투로, 배트를 어디애 쓸려고 갖고 있었냐고 나에게 물렀다. 보안 때문이죠, 이 부근에는 도둑놈이 많으니까요. 나는 그렇게 대답해주었다. 사이먼 님이 스스로 손을 더럽혀서 법을 어길 리가 없잖아? 그냥 갖고 있으면 든든해진다고 설명했다. 뭐, 애당초 대서양의 이쪽 편에서는, 야구를 하려고 생각하고 배트를 사는 녀석은 하나도 없으니까. "정말 그렇겠군요." 그 늙은 경찰은 말했다. 그렇겠지, 이 저능아야. 경찰이라는 놈들은 모두들 저능아들이잖아, 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 없지 않겠어, 사이먼? 그들은 나에게 용감한 청년이라고 말하고, 표창장을 주겠다고 말했다. 정말인가요, 고맙소, 경찰 양반. 하지만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인데 뭘. 식보이 님은 오늘 밤, 마리안느의 집에 가서 병적인(sick) 즐거움을 탐하기로 한다. 강아지 스타일을 즐기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된지, 물론. 셰인에 대한 작별 선물이니까. 나는 연처럼 높이 날아오르고 사슴뿔처럼 빡빡하게 되었다. 오늘은 어쩌면 이렇게 빌어먹게도 멋진 날일까! 25.내 안의 나를 찾아서: 랜튼의 이야기 마약을 이유로 교도소에 수감된 적은 없다. 그러나 나에게 카운슬링을 하려고 한 놈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흥, 카운슬링 같은 것은 엿이나 먹어라! 그런 걸 믿을 정도라면 독방에 쳐넣어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때조차 있다. 카운슬링이라는 것은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러 카운슬러를 소개받았다. 보통 정신과 의사에서 임상 심리학자, 사회사업 전문 요원에 이르기까지. 정신과 의사인 닥터 포브스는 환자 중심 요법이라는 것을 채용해서, 주로 프로이트의 심리분석 이론에 의거한 카운슬리을 했다. 즉, 과거에 대해서 나 자신에게 말을 하게 하고, 해결되지 않은 심리적 갈등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갈등의 존재를 확인하고 해결하는 것이, 헤로인 중독이라고 하는 형태로 표면화된, 나의 자기 파괴적 행동의 원인이 되고 있는 분노를 게거할 수 있다고 가정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리라. 나와 닥터 포브스가 나누는 대화의 전형적인 예. 닥터 포브스:동생의 일을, 그러니까 장애가 있는 동생이 있다고 말했지, 그 죽었다는 동생 이야기르 해볼까? (침묵) 나:왜요? (침묵) 닥터 포브스:동생의 일은 얘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 나:그건 아니에요. 다만 헤로인을 하고 있는 것이 동생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지 난 모르겠어요. 닥터 포브스:동생이 죽었을 때부터 자네의 헤로인 중독이 심해진 것처럼 생각되는데. 나:그 무렵에는 여러 가지 일이 있었어요. 동생이 죽은 것만을 거론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마침 그때, 애버딘에 갔었어요. 애버딘 대학에요. 대학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러고는 네덜란드행의 해협 횡단 페리호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헤로인이 원하는 대로 손에 들어왔어요. (침묵) 닥터 포브스:애버딘의 얘기로 돌아갈까? 애버딘 대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말했지? 나:네. 닥터 포브스:에버딘이 무엇이 마음에 들이 않았지? 나:대학입니다. 교수도 학생도 모든 것이 다요. 모두들 중류 계급의 따분한 녀석들이라 생각했어요. 닥터 포브스:그랬군. 대학 사람들과 인간 관계를 제대로 구축할 수가 없었다는 얘기군. 나:구축할 수가 없었다기보다는 구축하지 않은 거지요. 당신 입장에서 보면,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겠지만요(닥터 포브스는 애매하게 어기를 으쓱해보인다). ... 대학에 있는 녀석들에게는 전혀 흥미를 느길 수가 없었어요. (침묵) 즉, 무엇하러 다니고 있는지, 절 알 수가 없었어요. 그곳에 오래 있지 못할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말을 하고 싶으면 펍에 가면 되고, 여자가 필요하면 돈을 주고 사면 되니까요. 닥터 포브스:자네는 매춘부를 돈 주고 샀었지? 나:네. 닥터 포브스:그것은 대학에 있는 여학생과 사회적, 성적인 유대를 맺는 자네 자신의 능력에 자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겠지? (침묵) 나:아녜요, 대학의 여학생과도 두세 명은 사귀고 있었어요. 각터 포브스:그래서? 나:나는 섹스에만 흥미가 있었어요, 연예가 아니고. 그것을 숨길 생각도 그다지 없었고요. 나는 성욕의 대상으로밖에 여자를 보지 않았지요. 그러니까 그렇게 서로 속임수를 쓰기보다는, 돈을 지불하고 매춘부와 관계를 맺는 편이 훨신 정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무렵에는 나도 꽤 가다로운 윤리관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여자를 사는 데 장학금을 모두 써버려서 먹는 거나 책은 도둑질로 충당했지요. 도벽에 몸에 밴 것은 그 때문이에요. 마약 탓이 아니라고요. 그렇다고 마약 덕분에 그 버릇이 없어지거나 한 것도 아니지만. 닥터 포브스:으음. 동생 얘기로 돌아갈까? 장애가 있는 동생의 일로. 동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지? 나:잘 모르겠어요... 동생은 머리가 돌았었으니까요. 아니, 없는거나 마찬가지였어요. 완전히 마비되어 있었어요. 머리를 이렇게 옆쪽으로 돌리고, 언제나 같은 의자에 앉아 있을 뿐이었죠. 눈을 깜박이거나 음식을 삼키는 정도의 일밖에는 할 수 없었어요. 때때로 작은 소리를 냈어요.... 물건 같았어요, 인간이라기보다는... (침묵) 어렸을 때는 동생을 원망했던 것 같아요.우리엄마는 유모차에 동생을 태우고 돌아다녔어요. 이렇게 덩치가 큰 녀석을 말이에요. 나하고 빌리 형은 동네 꼬마들의 웃음거리였죠.녀석들은 이렇게 떠들어대는 거예요. '너희 동생은바보 병신이라면서?''네 동생은 좀비지?'그런시시한 소리를 이것저것 했어요.아이들이까 그랬을테지만, 그때는 그렇게 생각이 되지를 않았어요. 어렸을 때의 나는 카만 크고 숫기는 없는 아이였거든요. 그래서 나에게 어딘가 잘못된 구석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어됴 나도 데이비와 같은게 아닐까 하고... (오랜침묵) 닥터 포브스:그럼, 자네는 동생을 원망하고 있었다는 애기로군. 나:네,어렸을때 아주 어렸을 때는 그랬죠 그러는 사이에 동생은 병원에 들어 갔어요 아마 그것으로 내 문제도 해결되었다고 생각해요 동생은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동시에 내 마음속으로부터도 사라져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몇 번인가 병문안을 갔었자만,가보았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았어요. 의사 소통을 전혀 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안 그래요? 나는 동생이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났다고 생각해요. 데이비는 최악의 카드를 뽑는 거예요. 슬픈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생을 울면서 살아갈 수는 없잖아요. 동생은 동생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장소로 간 거예요.제대로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장소로요. 동생이 죽었을 때,나는 원망을 한 것에 대하여 자책감을 느꼈어요. 어째서 좀더 노력해보지 않았을까 하고 후회했어요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아무것도 해줄수가 없잖아요? (침묵) 닥터 포브스:그런 마음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적이 았나? 나:아뇨... 글세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는 어느정도 말을 했는지도 몰라요 이런식이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되었다. 사소한 문제, 중대한 문제, 따분한 것, 재미있는 것, 사실을 애기할 때도 있었으며 거짓말을 할 때에는 의사는 이런 것을 기대하고 있겠지 하고 생각했던 것을 말하거나, 의사가 화를 내거나 혼란스러워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 일부로 말하거나 했다. 그러나, 이러한것과 헤로인이 어딘가에서 연결되어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닥터 포브스의 카운슬링을 받거나, 심리분석이나 나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은지를 스스로도 연구한 덕택에, 여러 가지의 것을 알수 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죽은 동생 데이비와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진 못한 것 같다. 그러니까 장애자였던 동생의 인생과 그 결과로서의 죽음에 대해 나 자신이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이해도 하지 못하고 있고, 표현할 수도 없다. 어머니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느끼고, 그와 함께 아버지에 대해서 질투를 느끼고 있다. 내가 헤로인을 사용하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항문기 고착(프로이트의 개념으로, 어렸을 때 잘못된 배변 훈련에서 오는 강박감이 지배하는 성격-역주)이 원인으로, 요컨대 부모의 관심을 끌고 싶다는 것인데, 부모라고 하는권이에 반항하기 위해 몸 밖으로 대변을 내보내지 않는 대신에 헤로인을 내몸에 흘려넣고, 알번 사회와 대결하기 위한 파워를 그곳에서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황당한 애기 아닌가? 지금 말한 것은 전부 사실일지도 모르고,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도 잘 생각해보았고, 앞으로도 연구할 생각이다. 변명 같은 것은 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기껏해야 나의 헤로인 중독을 둘러싼 이슈에 부수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러한 걸 철저하게 애기를 나눈 것은 전혀 도움이 안되었다. 닥터 포브스도, 나와 같은 정도로 혼란스러워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임상 심리학자인 몰리 그레이브스는 원인을 규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동에 주목하고 개선 시키려고 했다. 닥터 포브스의 역할은 완료되고, 나를 제대로 된 인간으로 되돌릴 시기가 찾아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마침 그때 헤로인 양을 줄이는 치료를 시작했으나, 이것은 조금도 효과가 없었다. 다음에 메타돈 치료를 했는데, 상태를 한층 악화시켰을 뿐이었다. 약물 단속반의 카운슬러인 톰 쿠존은 의사가 아니라 사회 사업 전문 요원으로, 로저스식 치료자 중심 요법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중앙 도서관에 가서, 칼 로저스의 (인간이 되는 길)을 읽었다. 시시한 책이라고 생각했으나, 내가 어쩌면 진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톰이 인도해준 것은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나는 자신의 한계와 인생의 한계에 직면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나 자신과 세계를 경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그러한 자멸적인 한계를 받아들임으로써 건전한 마음, 또는 비일탈적인 정상적인 행동을 형성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성공과 실패는 단순히 욕망이 채워지는냐, 채워지지 않는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욕망은 인간 각자의 본능적 욕구에 의해 지배당하는 선천적인 것일 수도 있고, 주로 매스 미디어나 대중 문화를 통해서 제공되는 광고나 사회적 역할 모델에 자극받는 후천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톰은 내가 말하는 성공과 실패 개념은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개인에게밖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회로부터의 보상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 성공은(그리고 실패는) 순간적인 경험밖에는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험이 사회에서 용인받은 부와 힘, 지위 등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지속되지 않는다. 같은 의미로, 실패의 경험 역시 지속되지 않아 큰 의미가 없게 된다. 톰이 말하기를,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올렸다든가, 좋은 직장에 취직을 했다든가, 착한 아내를 얻었다고 하면서 나를 칭찬하는 것은 소용없다는 것이다. 그런 칭찬의 말은 나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일을 해냈을 때는 나도 기쁘다. 하지만, 그것을 평가해주는 사회를 나는 인정하고 있지 않으니까, 그 가치도 이내 사라져버린다. 내 생각으로는 톰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요컨대, 나는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래서, 이야기는 내가 나 자신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키고 있다는 것으로 되돌아간다. 문제는 사회가 좋은 쪽으로 크게 변화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으며, 내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변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는 나의 사고방식을 톰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현상이 나를 우울증으로 몰아넣는다고 한다. 즉, 분노를 나 자신에게 돌리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우울증이라고 말한다. 더구나 우울증은 노동 의욕을 감퇴시키고, 공허감을 더욱 확대시킨다. 헤로인이 그 공허감을 채워주지만, 그러나 그 뒤에 또 분노가 나 자신에게 향해진다고 톰은 말한다. 그 점에서는 나는 톰과 같은 의견이다. 그러나 톰은 이 상황에서는 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점에서 그는 나와는 의견이 다르다. 톰이 말하기를 나는 자신을 과소평가해서 괴로워하고 있으며, 그위에 책임을 사회에 전가시킴으로서 그 상황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사회가 보상이나 칭찬(그리고 그 반대인 비난도), 그 자체의 가치를 부정한다기보다는 그와 같은 찬사를 기분좋게 받아들일 수 없다(기분이 나빠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암시에 의해서 거부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즉 "난 그렇개 대단한 인간이 아니다(혹은 좀더 나은 인간이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이렇게 말한다. 흥,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헤이즐은 내가 벌써 몇 번째인지는 모르지만 약을 다시 맞기 시작하자,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헤로인을 맞으면 모두 널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인간이라고 생각해주니까, 넌 마약을 할 거야." 한심하다. 진절머리가 난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헤이즐의 사고방식 쪽이 오히려 마음에 든다. 자아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니까. 헤이즐은, 에고가 요구하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헤이즐은 백화점의 윈도우 드레서를 하고 있지만, 자신을 '디스플레이 아티스트'라고 부른다. 나는 왜 사회를 거부하고 내 쪽이 사회보다 위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것은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쪽이 위이기 때문이다. 그뿐이다. 그러한 태도의 결과가 이 빌어먹을 치료 요법 카운슬링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을 원치 않았다. 이것이냐, 교도소냐의 선택밖에 없었다. 스퍼드가 오히려 편한 쪽을 택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 입장에서 보면, 이 시시한 것 덕택에 오히려 물이 탁해지고 말았다. 문제점을 밝히기는커녕 더욱 혼란해지고 말았다. 아무도 내 일애 참견하지 않고, 나도 타인의 일에 참견을 하지 않는다는 것, 나는 기본적으로 그것밖에 원하고 있지 않다. 내가 마약을 좀 한다고 해서 개나 소나 날 해부해서 분석할 권리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일단 당사자가 그 권리를 인정해버리면, 지긋지긋한 성배(예수가 최후의 만찬에 사용한 술잔-역주) 찾기에 자신도 말려들어 가게 된다. 그들을 따르게 되고, 그들이 적용하는 엉망진청인 이론을 맞게 된다. 마약의존증이 사회의존증으로 변하는 것이다. 사회는 복잡한 기만의 논리를 발명하여, 사회의 주류로부터 벗어 난 인간들을 흡수하고 바꾸어나간다. 내가 모든 이론을 철저히 알고,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 위에 건전한 정신을 갖추고 있다고 가정할 때, 그래도 나는 헤로인을 맞으려고 생각할까? 세상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용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 자신이 실패했다는 신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부여한 것을 완전히 거부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선택하라. 인생을 선택하라. 월부금을 짊어진 인생을 선택하라. 세탁기를 선택하라. 자동차를 선택하라. 소파에 앉아 인스턴트 식품을 먹으면서 정신을 마비시키고 영혼을 피폐하게 만드는 퀴즈쇼를 보는 인생을 선택하라. 자신이 갈겨놓은 이기적이고 막돼먹은 애새끼들에게 창피한 존재가 되어 자신을 저주하면서 헛되이 썩어가는 인생을 선택하라. 인생을 선택하라. 하지만 나는 인생을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의 문제이다. 해리 로더는 이렇게 노래했다. "이 길이 계속되는 한, 나는 오로지 전진해가리라..." @FF 26.가택 연금: 렌튼의 이야기 이 침대는 본 적이 있다. 아니, 그것보다도 눈 앞의 벽에 낯이 익다. 70년대에 유행했던 구렛나루를 기른 패디 스탠튼이 나를 뚫어질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옆에서 이기 팝이 레코드의 산더미 위에 해머를 내려치고 있다. 내 방이다. 부모님 집의.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지, 머리를 쥐어짜내며 필사적으로 생각해내려고 했다. 조니스원의 집에 있을 때 기분이 나빠서 죽을 뻔한 것은 기억하고 있다. 다음 순간, 영상이 스쳐지나갔다. 스원과 알리슨이 나를 안고 계단을 내려가 택시에 밀어넣는다. 택시는 병원으로 달려간다. 좀 이상하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약 과다 복용으로 쓰러진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 나의 자랑이었다. 하지만 무슨 일에도 처음이라는 것은 있는 법이니까. 애당초 스원이 잘못이었다. 스원의 약은 언제나 순도가 낮으니까, 그것을 보강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스푼에 약을 약간 많이 담는다. 그런데 녀석이 어떻게 된 일인지 갑자기 순도가 높은 헤로인을 가지고 와서 놓아주었다. 문자 그대로 숨이 콱 막혀버렸다. 스원 녀석은 멍청이니까 병원에서 엄마집의 주소를 말했을 것이다. 그래서 2,3일 입원하고 호흡이 안정된 지금, 나는 여기에 이렇게 누워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정키의 지옥에 있다. 괴로원서 잠을 잘 수 가 없고, 그렇다고 해서 깨어 있는 것은 더욱 괴롭다. 오김의 사각지대 속에서 리얼하게 느껴지는 것은, 내 마음과 몸을 뒤덮고 있는, 깔아뭉개는것 같은 괴로움뿐이다. 한순간 엄마가 침대에 걸터앉아서 잠자코 나를 지켜보고 있는 걸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엄마가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엄마가 내 가슴에 앉아 있어서 이렇게 몸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질 정도로 괴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엄마는 나의 땀에 젖은 이마에 손을 갖다댔다. 멀레가 기어가는 것 같은 그 차가운 감촉에는 견딜 수 없었다. "열이 굉장히 나네." 엄마는 고개를 흔들면서 조용히 말했다.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나는 엄마의 손을 떨쳐버리려고 이불 위로 손을 뻗었다. 그 동작을 오해한 어머니는 양손으로 내손을 잡고, 마비될 정도로 세게 눌렀다. "엄마가 도와줄게. 이 병이 나을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마. 나을 때까지 엄마 아빠와 함께 이 집에 있는 거야. 이것을 극복해야 된다, 마크. 병에 이겨야 하는 거야!" 엄마는 진지한 눈을 반짝이면서 나를 응시했다. 목소리에는 종교적인 열의가 담겨 있었다. 물론이야, 엄마. 물론이고 말고. "반드시 극복할 수 있을 게다. 닥터 매튜스는 금단 증상은 심한 감기에 걸린 것과 같으니까, 별로 걱정할 것 없다더구나." 매듀스인지 뭔지 하는 작자, 마약을 끊어본 일이 있겠어? 그 위험한 노인네, 벽에 쿠션을 둘리친 정신 이상자용 병실에 감금하고서 2주일 정도 다이아몰핀(헤로인)을 하루 두 차례씩 주사한 다음에 2,3일쯤 그냥 내버려두고 싶군. 틀림없이 제발 소원이니까 헤로인을 달라고 애걸복걸할 테지. 그러면 나는 고객를 흔들고 이렇게 말해주는 거야. 진정해. 별 것도 아닌데 뭘 그래? 심한 감기에 걸린 거나 마찬가지니까. "테마제판을 줬어요?" "아니! 의사에게는 말해두었단다. 그런 주사는 그만 놔달라고. 그런 약 때문에 헤로인을 맞고 있었을 때보다 더 심해진 것 아니냐? 복통에 구통에 설사...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이제 약은 안 된다." "난 진료소로 돌아가는 편이 좋을지도 몰라요"하고 나는 헛된 기대를 품고 말해보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진료소는 안 된다. 메타돈은 더 이상 안 돼. 더 나빠졌을 뿐이야.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니? 너는 거짓말을 했어. 자기 엄마 아빠에게 거짓말을 했단 말야! 메타돈을 먹은 다음에 다시 헤로인을 사러 갔잖아. 이제부터는 깨끗한 몸이 되어야 한다. 엄마 아빠의 눈이 미칠 수 있는 이 집에 있어야 해. 그렇지 않아도 자식을 하나 잃어버렸잖니? 그런 일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엄마의 눈에 눈물이 넘쳤다. 불쌍한 엄마. 데이비가 태어나면서부터 지능이 낮았던 것을 당신 탓이라고 지금까지도 믿고 있다. 데이비를 시중하느라 몇 년 동안이나 고생을 했는데도 병원에 집어넣은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작년에 데이비가 죽은 일로 인해서 지금까지도 타격을 받고 있다. 엄마는 이웃 사람들이 엄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행실이 나쁘고 뻔뻔스러운 여편네라고 생각하고들 있는 걸 안다. 머리칼을 금발로 물들이고, 나이에 비해서 젊은 옷차림을 하고, 칼스버그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킨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엄마와 아빠가 데이비의 중증 장애를 구실로 해서, 포트 거리에서 이 강가의 깨끗한 공공 주택으로 감쪽같이 옮기고, 옮겨오자마자 불쌍한 아들을 장애인 시설에 쳐넣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남의 일에 참견하고 싶어하는 말 많은 자식들투성이인 리스 같은 장소에소는 그러한 쓸데없는 일이, 그러한 하찮은 시기가, 하나의 신화가 되어버린다. 이곳은 버려진 백인 쓰레기들의 땅, 버려진 백인 쓰레기로 가득 찬 쓰레기 같은 땅덩어리다. 누군가 아일랜드인은 유럽의 쓰레기라고 말했다. 그건 말도 안된다. 스코틀랜드인이야말로 쓰레기다. 아일랜드인은 자기네 나라를 되찾을 용기가 있었다. 적어도 대부분은 다시 찾지 않았는가? 런던에서 닉시의 형이 스코틀랜드인은 기생충이라고 말하는 걸 들었을때는 화가 났다. 그러나 지금은 그 자식이 말한 것 중에서 불쾌한 것은, 흑인들에 대한 차별적인 발언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른 것은 모두 딱 들어맞는 말이다. 모두들 이렇게 말할 것이다. 스코틀랜드인은 훌륭한 군인이 된다. 빌리 놈과 같은 군인이. 세간에서는 우리 아빠에 대해서도 수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글래스고 사투리도 그 이유 중 하나지만, 파슨 공구점에서 해고가 되었는데도 스트래시의 바에서 인생을 탄식하기는커녕 이스트 포츈과 이즐링튼의 시장에서 물건을 팔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악의는 없다. 모두 나 잘 되라고 생각하고 간호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엄마나 아빠는 전혀 모르고 있다. 재발 소원이다, 나를 구해내려고 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나를 지켜줘. "엄마... 여러 가지로 생각해주어서 고맙기는 하지만, 꼭 한 방만 맞고 싶어. 편안해질 테니까. 꼭 한 번만." 나는 애원했다. "말도 안 돼." 어느새 아빠가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엄마는 한 마디도 할 수 없게 됐다. "차를 끓였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마크. 이번에는 꼭 끊어야 해." 아빠는 무표정하게 그렇게 말했다. 턱을 내밀고, 양팔을 똑바로 옆구리에 붙이고서, 이번만은 어리광을 들어주지 않겠다는 결의를 단단히 나타내고 있다. "알았어... 좋아요." 나는 깃털 이불 속에서 처량한 소리를 냈다. 엄마가 감싸주듯 내 몸에 손을 올려놓는다. 우리 둘 다 퇴행해버렸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실패구나." 아버지는 책망하듯이 말하고, 죄상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목수 견습, 대학, 귀연운 연인. 모두 기회가 있었는데, 마크, 너는 그런 것들 전부를 망쳐버렸어." 고우반에서 자라나 15세 때 학교를 그만두고 취직을 했던 아빠한테는 기회 따윈 한 번도 없었다고 구태여 늘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그런 건 얼굴에 다 쓰여져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리스에서 자라나 16세 때 학교를 그만두고 목수 견습공이 된 것도, 별로 큰 차이는 없지 않은가. 더구나 아빠는 지금과 같은 불경기 시대에 자라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반박할 기력이 없었고, 반박해봤자 아빠 같은 글래스고 출신을 상대로 해서는 얘기가 안 된다. 스코틀랜드에서, 아니 서유럽에서, 아니다, 전세계에서, 정말로 고생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는 나 하나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 글래스고 출신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비참한 체험만을 진짜 고난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선 나는 다른 방향에서 공격을 가하기로 했다. "있잖아, 나 다시 런던으로 돌아갈까? 일자리라도 구해볼까 해서."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매티가 방 안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매티..." 그렇게 말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망할 놈의 고통이 다시 밀려오기 시작했다. "환각을 보고 있구나, 마크. 안 돼. 어디에도 보내지 않겠다. 다시 헤로인에 손을 대더라도 우리가 알 수 있게 집에 있도록 해라." 그것은 무리다. 이제 위장에 쌓여 있는 바위 같은 것은 수술이라도 하지 않으면 꺼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밀크 오브 마그네시아로 억지로라도 내려보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것은 효력이 나타날 때까진 며칠이고 계속 마셔야 될 거다. 아빠가 도망치듯이 방을 나가버리자, 나는 엄마를 꼬셔서 발륨을 몇 알 얻어냈다. 엄마는 데이비가 죽은 뒤, 반년 가량 발륨을 계속 먹고 있었다. 엄마는 스스로 발륨을 끊을 수 있었다고 해서, 마약중독자 재활 분야의 전문가처럼 행세하고 있으니까 곤란하다. 젠장, 내 것은 헤로인이라고요, 엄마. 이렇게 해서 나는 자택 연금 처분을 받게 되었다. 오전 중에도 힘이 들었지만, 오후에 비하면 그래도 편한 셈이었다. 아빠가 마약 중대에 대해 공부하고 돌아왔다. 도서관, 보건소, 사회 복지 사무소를 돌아본 모양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조사를 하고 조언을 듣고 팸플릿까지 얻어왔다. 게다가 아빠는 나에게 에이즈 검사를 받게 하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 말도 안 되는 검사를 다시 받다니, 천만의 말씀이다! 차 마실 시간이 되자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영감처럼 구부정하게 비틀비틀 계단을 내려갔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머리에 피가 올라가 쿵쿵 하고 울렸다. 한번은 머리가 파열되는 줄 알았다. 풍선처럼 펑 하고 소리를 내면서 머리가 쪼개지고, 피가 콸콸 쏟아져나오고, 두개골의 파편과 회색 뇌 조각이 엄마가 고른 싸구려 크림색 벽지에 날아가서 달라붙는 광경이 눈 앞에 떠올랐다. 엄마는 텔레비전 앞의 안락의자에 나를 앉혔다. 원래부터 뱃속이 뒤집힐 것 같았지만. 다진 고기는 그냥 보기에도 역겨웠다. "고기는 먹지 않는다고 말했잖아요." 나는 말했다. "어머, 이건 다진 고기와 감자야. 예전엔 굉장히 좋아했잖니? 그래, 먹는 게 변변치 못해서 네가 이렇게 된 거야. 고기를 먹어야지." 언제부터 채식주의가 헤로인 중독의 원인이 돼버렸지? "이건 좋은 스테이크 고긱를 다져서 만든 거야. 자, 어서 먹어라." 아빠가 말했다. 너무 바보 같아서 말도 안 나온다. 나는 트레이닝복에 슬리퍼 차람이었지만 이대로 집을 나가버릴까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자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아빠가 열쇠 꾸러미를 끄집어냈다. "문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다. 네 방에도 자물쇠를 달 거다." "그런 걸 빌어벅을 파시즘이라고 한다고요!" 나는 처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생관없다. 마음대로 악을 써보렴. 하지만, 그래도 아무 소용없을 거다. 그리고 집 안에서는 지저분한 말 좀 쓰지 말아라." 엄마가 맹렬한 기세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엄마나 아빠가 좋아서 이러는 줄 아니? 그렇지 않단다. 모두 너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야. 이제 너하고 빌리밖에 없기 때문이란다." 그러자 아빠가 엄마의 손을 다독거렸다. 나는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아빠도 억지로 입을 벌리고 쑤셔넣을 작정은 아니었는지 모처럼 산 비싼 다진고기가 쓰레기가 되는 걸 잠자코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실제로는 쓰레기가 된 것은 아니다. 아빠가 내 몫까지 먹었으니까. 나는 고기를 먹지 않고 차가운 파인즈 토마토 스프를 마셨으나, 그것만으로도 배가 꽉 찼다. 텔레비전의 퀴즈 쇼를 보면서, 한참 동안 유체이탈 상태에 있었다. 아빠가 엄마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들렸으나, 퀴즈 쇼 사회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빠의 목소리는 마치 텔레비젼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 스코틀랜드 인구는 영국 전체의 8퍼센트인데도, 에이즈 감염자는 16퍼센트나 된다고 하는군... 점수를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미스 포드?... 에든비리 인구는 스코틀랜드 전체의 7퍼센트밖에 되지 않지만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자 수는 전 스코틀랜드의 60퍼센트 이상이나 되지. 영국 전체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야... 다프네와존이 11점, 루시와 크리스는 15점이군요…들리는 얘기로는, 무어 하우스의 보건소에서 혈액 검사를 하는 놈들이 간염 검사를 하다 문제의 심각성을 발견했던 모양이야.... 아아, 애석하군요. 열심히했지만 패한 팀에게 여러분, 많은 박수를... 우링 애에게 이런 걸 판 자식들이 누군지만 알면 사람들을 모아 내 손으로 직접 뜨거운 맛을 보여줄 거야. 당연히 경찰들은 눈곱만치도 관심이 없겠지. 아직도 그런 쓰레기를 길에서 팔게 하니 말야... 참가자 전원에게는 소정의 상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에이즈 검사에서 양성으로 나왔다고 해도 모두 죽는 건 아냐. 내 말은, 캐시, 에이즈 바이러스 양성이 자동적으로 사형 선고를 의미하진 않는다는 거지. ... 스태포드셔의 리크에서 오신 톰과 실비아 히스입니다... 마크도 주사 바늘을 나눠 쓰는 짓 따윈 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애가 거짓말 하는 게 하루 이틀의 일인가... 여기를 보면, 실비아, 당신이 톰을 처음 만난 게 톰이 당신의 본네트 밑에 머리를 쑤셔넣고 있을 때라고 되어 있는데요... 우린 다만 만약의 경우를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라고, 캐시... 아, 정비소에서 당신의 차동차를 수리하고 있었다고. ... 마크에게 좀더 상식이 있다면... 첫 번째 게임은 '슛 투 킬'입니다... 그렇지만 자동적으로 사형 선고를 의미하는 건 아니래도... 시범을 보이는 데 그레이트 브리튼 로열 아처리 소사이어티(왕립 대영 양국협의)의 친애하는 렌 홈주보다도 더 적당한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얘기일 뿐이라니까, 캐시... 강렬한 구토기를 느꼈다. 방 안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나는 의자에게 굴러떨어지고, 토마토 수프색 내용물을 난로 앞의 융단 위에 토해놓았다. 침대로 옮겨진 기억은 없다. 자, 그럼, 첫사랑의 추억담을... 몸이 뒤틀리고, 짓눌려졌다. 마치 내가 길거리에서 쓰러졌는데 몸위에 커다란 쓰레기 통을 얹어놓고 그 속에 심술궂은 노가다들이 무거운 건축 자재들을 마구 부어놓으면서 몸 밑으로는 날카로운 쇠봉을 찔러넣어 날 꼬치로 만드는 것 같은 느낌이다. 옛날에 사귀고 있던 그이와... 지금 빌어먹을 시간이 어떻게 됐어? 아마 빌어먹을 7시 28분 같은데. 그 여자를 잊어버릴 수가 없는 거예요... 헤이즐. 그녀를 만나기만 하면 가슴이 두근거려서... 나는 짓눌려오는 깃털 이불을 밀어젖히고, 패디 스탠튼을 보았다. 패디. 난 어떻게 하면 좋지? 고든 듀리. 주크박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없어져버린 거야, 주크박스? 이기... 거기 있어줬구나. 살려줘. 살-려-줘. 뭐라고 했어? 넌 도무지 도움이 안 돼, 새꺄... 전혀 도움이 안 된다니까. ?? 절여진 세포 하나하나가 죽을 정도로 아프다. 암 죽음 괴롭다 괴롭다 괴롭다 죽음 죽음 죽음 에이즈 에이즈 모두 엿이나 먹어라 빌어벅을 새끼들 모두 엿이나 먹어라 암을 자초한 놈들-놈들에게서 도망칠 길은 없다 당해도 싸다 자기 잘못 자동적인 사형 선고 인생을 내팽개치고 있다 반드시 자동적인 사형 선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파괴하라 재활 파시즘 좋은 아내 좋은 자식 좋은 집 좋은 직장 좋다 좋은 아침 좋은 하루 만나서 반가워... 좋다 좋다 좋다 두뇌 장애 정신 분열 헤르페스 구내염 폐렴 아직 앞길이 창창하다 착한 처녀를 찾아 자리 잡아야지... 그 여자는 아직 내 첫사랑입니다 자업자득이다 잠.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잠을 자고 있는 것일까? 눈을 뜨고 있는 것일까? 내 알 바 아니다. 다시 괴로워져서 견딜 수가 없다. 한 가지만은 알고 있다. 몸을 움직이면 혀를 삼켜버릴 것이다. 내 잘란 혀를. 옛날처럼 엄마의 음식이 기다려졌다. 혀 샐러드. 자식에게 독을 먹여라. 그 혀를 먹어라. 아주 맛있는 혀란다, 마크. 그 혀를 먹어라. 꼼짝 않고 있어도 혀는 역시 식도로 미끄러져 떨어져갈 것이다. 혀가 미끄러져 내려가는 걸 느낄 수 있다. 나는 엉망진창인 악몽에 지칠대로 지쳐, 구토를 느끼고 몸을 일으켰으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심장이 쿵쿵 뛰고 있다. 초췌한 몸에서 땀이 흘러내린다. 나는 잠을 자고 있는 것일까아아아아? 그만두자. 나 말고 무엇인가 또 방에 있다. 침대 바로 위의 천장으로부터 기어나오려고 하고 있다. 아기다. 도온이다. 천장을 엉금엉금 기어다니고 있다. 울고 있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잘도 나를 죽게 했어어어어어"하고 아기가 말했다. 도온이 아니다. 그 귀여운 도온이 아니다. 그만둬. 이건 미친 짓이다. 아기는 흡혈귀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나 있다. 이빨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온몸에 기분나쁜 황록색 점액이 달라붙어 있다. 아기의 눈은 미치광이처럼 번득였다. "네가죽였어 날죽게만들었지 마약에찌들어머리가돌아버려 빌어먹을벽만쳐다보는 이빌어먹을약물중독자새끼 네배를찢어발겨서 네마약에찌든한심한회색살점을먹어주마 먼저약에절은페니스부터먹어주지왜냐하면난처녀인체로죽었으니까한 번도그짓을못해왔어화장도 해보지못했어멋있는옷도걸쳐보지못했어아무것도될수없었어왜냐하면 너같은빌어먹을약쟁이놈들이한번도날돌봐주지않았기때문이야 넌날죽게내버려뒀어숨이막혀괴로워하며죽게만들었어 그게얼마나괴로운지너도알겠지이나쁜새끼왜냐하면난빌어먹을영혼이 었기때문에지금도처절한고통을느끼고있으니까나쁜새끼자기밖에모르 는놈약쟁이새끼빌어먹을헤로인으로내모든걸뺏어갔어그러니까네약에 절은페니스를물어뜯어버리겠다펠라티오를하고싶나빌어먹을페라티오 를하고싶나펠라티오를하고싶나비이일어어머어억으으울." 아기가 천장에서 떨어져 나를 덮쳤다. 나는 손가락으로 부드러운 점토 같은 살과 끈적끈적한 점액을 벗겨냈으나, 아기는 소름끼치는 째진 목소리로 나를 계속 저주했다. 나는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몸부림쳤고 침대가 수직으로 튕겨 일어서더니 나는 방바닥을 뚫고 추락했다... 이건 꿈일까아아아아? 그것이 나의 첫사랑이었어요. 다음 순간, 나는 침대로 돌아와 있었고, 갓난애를 안고 조용히 흔들고 있었다. 귀여운 도온. 정말 안됐구나! 하지만 그것은 베개였다. 베개에 피가 묻어 있다. 혀에서 흘러내린 피일 것이다. 아마 도온이 왔다갔는지도 모른다. 인생은 이런 지독한 것이 아닐 것이다. 다시 고통이 찾아오고 그러고 나서 잠을 자고 또다시 고통이 찾아 왔다. 다시 의식을 되찾았을 때, 상당한 시간이 흘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인지는 알 수가 없다. 시계는 새벽 2시2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식보이가 의자에 앉아서 나를 보고 있었다. 근심스러운 얼굴빛을 은근히 깔보는 듯한 경멸의 표정으로 살짝 가리고 있었다. 홍차를 마시고 초콜릿 비스킷을 먹고 있는 녀석의 등 너머로 엄마와 아빠도 보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이런 일이었다. "사이먼이 병문안을 와주었단다." 엄마가 큰 소리로 선언했기 때문에 환각에 음향 효과가 붙게 된 것이 아닌 이상 환영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아까 도온처럼 말이다. 새벽(도온은 새벽이라는 뜻-역주)이 올 때마다 나는 죽어간다. 나는 식보이에게 웃어보였다. 도온의 아빠. "안녕, 사이." 녀석은 매력적인 청년 그 자체였다. 야만인 같은 우리 아빠와 친구 같은 태도로 농담을 섞어가며 축구 얘기를 하고, 우리 집의 주치의 같은 얼굴로 엄마에게 신경을 쓴다. "이건 바보나 하는 짓이에요, 렌튼 부인. 물론 저도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죠. 하지만 누구한테나 이런 말도 안 되는 생활에 등을 돌리고, 이젠 그만이라고 말해야만 할때가 반드시 찾아오는 법이니까요." 이젠 그만이라고 말하라고? 간단하다. 인생을 선택하라. 인생을 선택하라. 엄마와 아빠는 '영 사이먼'(녀석보다 내 쪽이 생일이 4개월 더 늦지만 한 번도 날 '영 렌튼'이라고 부른적이 없다)은 결코 마약에 빠져드는 일이 없으며 기껏해야 젊은 사람 특유의 호기심에서 약간 시험해본 정도가 고작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 두 사람의 눈에는 영 사이먼은 눈에 돋보이게 성공한 청년으로 비치고 있는 것이다. 영 사이먼의 애인들, 영 사이먼의 말쑥한 양복, 영 사이먼의 햇볕에 탄 건강미 넘치는 피부. 영 사이먼의 다운타운 아파트. 영 사이먼이 가끔 런던으로 놀러 가는 것조차 리스 비나니 아파트에 사는 호감가는 청년 신사의 유행을 쫓는 스릴에 찬 모험담에 흥취를 더하는 한 페이지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남쪽으로 여행을 떠나면 수상한 녀석들과 관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반드시 의심하는 주제에. 그러나 영 사이먼은 절대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녀석ㅇ에 대해선 우리들 비디오 세대의 '우리들의 울리'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도온은 식보이의 꿈에도 나타날까? 설마. 엄마도 아빠도 내놓고 말하지 않지만, '미피 택의 아들'이 나를 마약으로 끌어넣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스퍼드가 게으르고 칠칠치 못하고, 마약을 끊고 있을 때도 약에 취한 것처럼 멍청하게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스퍼드는 백비처럼 고약한 술버릇으로 애인을 화나게 만드는 일은 애당초 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부모님은 그 백비가, 그 사이코 배거가 늠른한 남자의 이상형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다. 프랑코가 난동을 부리면 자기 얼굴에 박힌 맥주 글라스 조각을 빼고 있을 불쌍한 자식들이 생길지 모르지만 녀석은 놀 땐 놀고 일할 땐 일하며, 기타 등등 기타 등등... 난 그 후 한 시간 가량 보보 취급을 당했다. 그리고 나서 엄마와 아빠는 식보이는 정말로 마약을 하지 않으며, 소중한 아들에게 헤로인을 은밀히 건네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그냥 동정해서 병문안을 와준 것 뿐이라는 걸 납득했는지 방을 나갔다. "여긴 변함없군." 식보이는 포스터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럼, 기다리고 있어. 지금 포르노 책을 꺼내줄 테니까." 어렸을 때는 자주 여기서 포르노 잡지를 보며 둘이서 자위를 했다. 지금은 그야말로 종마와 같으면서도 식보이는 섹스 개발 도상시대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싫어한다. 언제나처럼 녀석은 화제를 바꾸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으신 모양이군."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어떤 기분을 기대하고 온 건데? "빌어먹을, 그야 당연하지. 이제 이런 짓은 신물이 난다니까, 사이. 제발 부탁이니까 약 좀 주라." "안 돼. 나는 깨끗하단 말야, 마크. 이러다가 다시 스퍼드나 스워니 같은 패배자와 어울리게 된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옛날로 다시 돌아가게 될 거야. 농담 아니라고." 녀석은 그렇게 말하더니 입술을 오므리면서 연기를 내뱉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고맙다, 임마. 너무나 고마운 말씀이라서 눈물이 다 난다." "그만 좀 칭얼대라. 나도 얼마나 괴로운지 잘 알고 있어. 몇 년씩이나 했으니까 전부 기억하고 있지. 너 약 끊고 이틀째지? 그럼 벌써 최악의 시기는 넘긴 거야. 괴로운 것은 알지만 지금 다시 맞기 시작했다가는 말짱 헛수고라고. 일단은 발륨이라도 먹어둬라. 주말에는 내가 하시시를 사다줄 테니까." "하시시? 하시사라고! 너라는 녀석은 정말 대단한 코미디언이야! 냉동 완두콩 한 봉지로 제3세계의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하겠다는 소리랑 똑같이 들리는군." "무슨 소리. 야, 내 말 좀 들어봐. 그 고통이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진짜 싸움이 시작되는 거야. 우울증. 권태감. 귓구멍을 후비고 잘 들어둬. 자살을 하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가라않게 될 거야. 그러니까 무엇이든지 좋으니까 의지할 것이 필요하단 말야. 나는 마약을 끊은 뒤에 술을 마시게 됐어. 데킬라를 하루에 한 병 나팔 분 때도 있었지. 세컨드 프라이즈조차 내 앞에선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였어! 그러나 지금은 술도 끊었고, 여자도 생겼어." 식보이는 사진을 보여주었다. 녀석 옆에 빼어나게 아름다운 여자가 찍혀 있었다. "파비안느라고 해. 프랑스인이고. 휴가로 여기에 와 있는 거야. 그건 월터 스코트(스코틀랜드의 문호)기념탑에서 찍은 사진이야. 다음달에는 파리의 그녀의 부모의 집으로 놀러 가기로 되어 있어. 그 후에는 코르시카 섬이야. 그녀의 부모의 별장이 있대. 야, 정말 굉장하지? 여자가 프랑스말로 신음하는 것을 들으면서 하면 정신없이 몸이 달아오른다니까!" "그래? 뭐라고 말했을까? 틀림없이 이렇게 말했을 거야, '당신의 물건은 꽤나, 영어로 뭐라고 하더라, 아, 조그맣군요, 이봐요... 좀더 힘껏 밀어넣어 주지 않을래... '보나마나 프랑스어로 이런 말이나 했겠지 뭐." 식보이는 인내심 깊게, 그것으로 속이 후련해졌나, 하는 것 같은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쪽에서 그렇게 말한다면 이쪽에서도 말하겠는데, 지난주에 로라 맥이완을 만났어. 너도 완전히 똑같은 약점이 있는 것 같은 말을 얼핏 하더군. 마지막으로 잤던 날 너는 빙긋이 웃어보일 여유도 없었다면서?" 나는 빙긋이 웃고 어깨를 쳐들어보였다. 그 재난은 이미 과거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네가 대담하게도 페니스라고 부르고 있는 그 골무 같은 것으로는 여자는 물론이고 너도 만족할 수가 없었다면서?" 페니스의 사이즈에 관해서는 분명히 나에게는 식보이에게 반박할 자격이 없다. 녀석 것이 크다. 그것은 틀림없다. 옛날에는 웨이빌리역에 있는 즉석 사진 부스에서 페니스 사진을 자주 찍었다. 그 다음에 그 사진을 오래된 회색 버스 정류장의 유리에 붙여놓았다. '공공 예술 전람회'라고 명명해서 말이다. 식보이 쪽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페니스를 카메라의 렌즈에 바싹 붙이다시피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가 녀석에게 탄로나서, 녀석도 같은 짓을 하게 돼버렸지만. 로라 맥이완 사건에 관해서는 더욱더 할말이 없다. 그 여자는 변태다. 가장 기분이 좋을 때도 무섭다. 그 여자와 하룻밤 함께 지내기만 했는데도, 온몸에 상채기가 났다. 지금까지 맞은 주사 바늘 자국을 전부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많을 정도였다. 그날 밤의 일에 대해서 나는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변명을 쥐어 짜냈다. 사람들이 이런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식보이는 이 세상의 모든 녀석들에게 마크는 섹스실력이 엉망이라고 선전을 해댔다. "좋아, 그건 인정해. 그날 밤은 나 스스로도 한심스럽기 짝이 없었어. 하지만 나는 정신없이 술에 취해 있었고, 나를 침대로 질질 끌어다넣은 것은 그 여자였다고. 내가 자진해서 올라탄 게 아니야. 기대한 쪽이 잘못이지, 뭐." 녀석은 내 얼굴을 보면서 킥킥거리고 웃었다. 그 자식은 늘 이런식으로 남에게 다음 기회를 위해 아껴둔 스캔들이 아직 얼마든지 있다는 인상을 준다. "마크, 너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좀 생각해보라고. 얼마 전 공원을 어슬렁거려 봤더니 여학생투성이더라고. 그곳에서 마리화나라도 피워봐라, 파리 떼처럼 일제히 몰려들 거야. 영계 퍼레이드지. 외국산도 여기저기에 있었지. 마리화나를 피우고 있는 아이도 있었어. 그래, 리스에서도 예쁜 아가씨들을 몇 명씩이나 보았지. 예쁜 아가씨라고 하면, 일요일에 이스터 로드에서 미키 웨어를 만났는데 정말 죽이더라. 남자애들은 요즘 네가 안 보인다고 아우성이야. 이봐, 이기 팝이나 더 포그스(The Pogues, 캘틱 포크와 핑크를 혼합한 음악을 하는 6인조 밴드-역주)의 콘서트도 얼마 안 남았잖아? 너도 이제 슬슬 바짝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된 생활을 해야지. 죽을 때까지 계속 이런 어두운 방에 숨어 있을 수는 없잖아?" 녀석의 시시한 헛소리 같은 것에는 흥미가 없었다. "야, 앞으로 한 번만이라도 맞지 않으면 괴로워서 도저히 마약을 끊을 수 없을 것 같아. 사이먼. 메타돈이라도 좋으니까..." "얌전하게 있으면 타탄 스페셜의 칵테일 정도는 얻어마실 수 있을지도 몰라. 너희 어머니가 금요일에 독커스 클럽에 데리고 가볼까하고 말했으니까. 단, 네가 얌전히 굴 경우에 한해서야." 자못 은혜라도 베푸는 듯이 생색을 내는 빌어먹을 녀석이 돌아가자 나는 금세 녀석이 그리워졌다. 녀석이 곁에 있으면 고통을 대부분 잊어버릴 수 있었다. 마치 옛날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녀석이 찾아온 덕택에 여러 가지 것이 바뀌어 버렸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 뒤로부터 무엇인가가 일어났다. 헤로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헤로인을 하면서 살아나가든 헤로인 때문에 목숨을 잃든 헤로인을 하지 않고 살아나가든, 이미 절대로 옛날로는 돌아갈 수가 없는 이다. 나는 리스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스코틀랜드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영원히. 지금 즉시. 런던에 반 년 동안 가 있는다든가,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이 도시의 한계와 추악함을 똑똑히 보았다. 이제 두 번 다시 옛날과 마찬가지로 이 거리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2,3일 사이에 고통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내손으로 음식을 만들 수 있게 됐을 정도다. 세상 누구나 다 자기 어머니는 세계 제일의 요리 솜씨를 지녔다고 생각한다. 나도 옛날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독립된 생활을 시작할 때까지의 일이었다. 엄마는 최악의 요리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식사준비는 내가 직접 하기로 했다. 아빠는 '토끼 밥'이라고 비웃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내가 만든 칠리나 커리, 캐서롤(냄비에 넣어 찐 음식-역주)같은 것을 몰래 즐기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엄마는 자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부엌을 침범당해서 약간 기분이 상한 모양으로, 고기는 먹지 않으면 안 된다고 시끄럽게 잔소리를 했다. 그러나 그런 엄마도 꽤 맛있게 먹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고통과 함께 추악하고 어둡고 강렬한 우울증이 교대로 엄습해왔다. 이 정도로까지 완전한 절망감을 맛본 적은 처음이었다. 이따금씩 심한 불안감이 찾아오는 것 외에는, 그 절망감이 한없이 계속되었다. 너무나도 지독한 절망감에는 나는 몸조차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짜증이 나는 텔레비젼 프로를 보고 있어도 채널을 바꾸면 무엇인가 엉뚱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변을 보러 가고 싶어도 계단에서 무엇인가가 숨어 있으면 어쩌나 하고 무서워서 변소에도 가지 못했다. 식보이가 그런 증상에 대해 미리 말한 적이 있었든 없었든 간에, 미리 그것에 대비를 해둔다는 것은 무리다. 이것에 비하면 심한 숙취 같은 것은 목가적인 몽정을 꾸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가슴이 두근두근하네요. 찰칵 하고 채널이 바뀌는 소리. 리모콘이라는 것이 있어서 살았다. 버튼을 누르기만 해도 다른 세계로 이동할 수가 있으니까. 여자가 낡은 스포츠 용품을 바꾸려고 신품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더니, 남자는 인풋과 아웃풋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는 계산식을 들고 나와서 그것을 사용해서 집계한다면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지역 레벨에서의 이익의 견적도, 확정도 할 수 있고 결국은 청구서의 금액을 지불해야 되는 납세자의... "마크, 커피 마실래? 커피 바실 거냐고?"하고 엄마가 물었다.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다. 네, 주세요. 아뇨, 필요 없어요. 어느쪽인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잠자코 있다. 내가 커피를 마셔야 하는지 마셔서는 안 되는지, 엄마에게 결정하게 하면 된다. 그러한 차원의 권리, 즉 의사결정의 권리 같은 것은 엄마에게 맡겨두면 된다. 권리의 위임이란 권리 행상의 유보와 같다. "귀여운 아동복을 찾아냈다. 안젤라의 갓난애에게 맞을 것 같아서."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 분명히 귀엽다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옷을 들어보였다. 엄마는 그 아동복을 받기로 되어 있는 아기는 물론이고 애당초 안젤라가 도대체 누군인지,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싱긋이 웃었다. 엄마의 생활과 내 생활은 몇 년 전부터 전혀 다른 접점에서 영위되고 있었다. 커다란 공통점이 있기는 있지만 어디에 있는지 잘 알 수가 없다. 가령 나도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시커의 친구에게서 굉장히 질 좋은 헤로인을 샀다. 그 뻐드링니 녀석 마이야. 이름이 뭐더라?"라고. 이제 알겠지? 엄마는 내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옷을 사고, 나는 엄마가 모르는 녀석들로부터 마약을 사는 것이다. 아빠는 콧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짧게 깎은 머리에 콧수염, 저러다가 해방된 호모, 호모의 클론처럼 될 것이다. 프레디 머큐리(에이즈로 사망한 퀸의 리드 싱어-역주)같은. 아빠는 요즘의 문화 같은 건 전혀 모르고 있다. 설명해줬지만 전혀 귀담아듣지 않는다. 그런데 다음날이 되자, 콧수염이 없어져버렸다. '손질하기 귀않다'는 것이다. 라디오 4에서 클레어 그로건의 '돈 토크 투 미 어바우트 러브'가 흘러나오고 있고, 엄마는 부엌에서 렌즈콩 수프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머릿속에서는 조이 디비전(뉴 오더의 전신인 맨체스터 출신의 뉴웨이브 밴드-역주)의 '쉬즈 로스트 컨트롤'이 하루종일 웅웅대고 있었다. 이언 커티스(1980년에 자살한 조이 디비전의 리드 싱어-역주). 매티. 왠지 이 두 사람이 뒤범벅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통점은 단 하나. 죽음에 대한 갈망뿐이다. 그날은 그 정도밖에는 기록할 만한 일이 없었다. 주말이 되자 상태도 조금 좋아졌다. 사이먼이 마리화나를 사다주었지만, 그것은 에든버러의 어디에서나 팔고 있는 물건으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최저의 품질이었다. 나는 그것으로 스페이스 케이크(마약이 들어간 케이크)를 만들어 먹었다.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날 오후는 방에 틀어박혀서 환각 상태를 조금 맛보았다. 아직 외출할 생각은 나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엄마나 아빠와 함께 독커스클럽에 가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그러나, 아빠를 위해서 가주기로 했다. 두 분에게도 휴식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엄마와 아빠가 토요일에 그 클럽에 가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까지도 거의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레이트 정션 거리를 어슬렁어슬렁 걷고 있으려니까, 왠지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이 쓰였다. 아빠는 내가 도망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나에게서 눈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리스 워크에서 말리를 우연히 만나 잡담을 나누었다. 그러나 아빠가 끼여들어 말리 쪽을 '이 빌어먹을 마약상놈, 다리를 분질러놓겠다'는 눈으로 노려보고는 나에게 빨리 가지고 재촉했다. 불쌍한 말리. 말리는 마리화나에도 손대지 않는데. 로이드 비티가 나에게 쭈삣거리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몇 년 전까지는 로이드도 우리들과 한패였으나 자기 누나와 관계하고 있다는 것이 들통나서 쫓겨났다. 클럽에 들어가자 모두가 우리 엄마와 아빠에게 환하게 웃어보였다. 나에게는 일그러진 미소를 보냈다. 우리들이 테이블에 앉자, 여기저기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마주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이 보였다. 아빠는 내 등을 탁 하고 두드리고는 윙크를 했고, 엄마는 나를 보고 마음이 아플 정도로 다정한면서도 숨이 막힐 정도로 달콤한 미소를 띠었다. 두 분 모두 다정한 인간인 것이다. 정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두 분을 엄청나게 사랑하고 있다. 내가 이런 자식이라는 걸 알고 부모님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정말 가슴이 아프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여기에 있다. 불쌍하게도 레슬리는 도온의 상징을 볼 수 없었다. 지금 레슬리는 글래스고 남부종합병원에서 생명 유지 장치의 신세를 지고 있는 모양이다. 파라세티몰의 과다 복용. 레슬리는 그 무어하우스의 헤로인 지옥에 견딜 수가 없어 글래스고로 가서 결국은 포실의 스크릴과 가르보의 집에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러나 도망칠 길이 없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레슬리에게 남겨진 길은 자살뿐이었다. 스워니는 언제나처럼 상당히 신경질적이 되어 있었다. "요즘 질 좋은 것은 모두 글래스로 녀석들이 독점해버려서 말이야. 의사들이 쓰는 것 같은 순도가 높은 헤로인은 녀석들이 취급하고, 우리들은 정제를 긁어보아서 빻고 있는 형편이야. 더군다나 녀석들은 모처럼의 상품을 싸구려로 만들고 있어. 아예 주사 같은 것은 맞지 않고, 코로 빨아들이고 있으니까 정말 아깝지?" 경멸하듯이 그는 말했다. "게다가 레슬리는 글래스고의 질 좋은 상품을 내게 보내줘도 괜찮을 텐데 조금이라도 융통해준 적이 있었냐? 아냐, 죽은 애 때문에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있었을 뿐이라고. 아니, 오해하지는 말아 줘. 나도 분명히 불쌍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좋은 기회라고 생각지 않나? 미혼모라고 하는 굴레로부터 해방되지 않았냐고. 마음껏 활개를 쳐볼 좋은 기회를 만났다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굴레로부터의 해방. 얼마나 좋은 어감인가! 나도 이 클럽에서 꼼짝 않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굴레로부터 빨리 해방되고 싶다. 조키 린스튼이 와서 우리 테이블에 앉았다. 조키의 얼굴은 옆에서 보면 달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백발이 섞인 검은 머리칼이 덥수룩하다. 반소매의 푸른색 셔츠 소매 밑으로 문신이 보인다. 한쪽팔에는 '조키&렐레인-진실한 사랑은 영원히', 다른 쪽에는 '스코틀랜드'라고 하는 문자와 함께 사자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진실한 사랑은 도중에서 좌절되고, 까마득한 옛날에 엘레인은 조키를 버렸다. 조키는 지금 마거릿과 살고 있는데 마거릿은 이 문신을 싫어하고 있는 모양이다. 조키는 새로운 것으로 다시 새기려고 찾아가곤 하는데, 그때마다 겁을 집어먹고 바늘에서 에이즈가 전염될 것 같아서 무섭다고 핑계를 대고 있다. 사실은 지금도 엘레인을 잊을 수 없는 모양이다. 조키라고 하면 생각나는 것이, 파티에서 노래하고 있는 모습이다. 조지 해리슨(비틀스의 가타리스트-역주)의 '마이 스위트 로드'가 애창곡인데, 가사를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것 같다. 조키가 알고 있는 것은 타이틀과 '아이 리얼리 윈트 투 씨 유 로드'라는 대목뿐이고, 그 다음은 다 다 다... 라고밖에 하지 않는다. "데이비. 캐시. 오늘은 한층 더 예쁜데요. 데이비, 캐시를 내버려 두거나 하면 내가 데리고 도망쳐버릴 테니까, 이 글래스고의 바람둥이!" 조키는 러시아 기관총 소리처럼 스타카도로 말했다. 우리 엄마는 수줍어하고 있는 체를 했지만 그 얼굴를 보고 있으려니까 내 쪽이 창피스러워졌다. 나는 라거 잔 뒤에 얼굴을 숨겼다. 빙고 게임이 시작돼 술집안이 조용해진 것이 오히려 기쁜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여느때 같으면 내가 뭐라고 말을 할 때마다 술집안의 모든 멍청이들이 귀를 곤두세우고 있는 것 같아서 짜증이 났는데 이때만큼은 물을 뿌린 듯이 고요해져 있는 것이 기뻐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의 카드는 숫자가 다 맞았지만, '빙고!'하고 외쳐서 주목을 받는 것이 죽어도 싫었다. 그러나 운명과 조키는 그 밖의 많은 사람들 틈에 파묻혀 있고 싶다는 나의 희망을 좌절시키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의 빙고를 알아차리고 말았다. "빙고! 자네야, 마크! 마크가 빙고라고. 여기다. 큰소리로 말해야지. 자아, 정신을 똑바로 차리야지." 나는 그 작자에게 다정하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지금 당장 무참한 죽음이 이 시끄러운 인간에게 찾아와주기를 바라며. 라거 맥주는 넘쳐 난 변소의 내용물에 탄산을 섞은 것 같았다. 한모금 마셨을 뿐인데도 강렬한, 뱃속이 온통 뒤틀리는 것 같은 경련에 사로잡혀서 숨이 막혔다. 그 뒤에는 더 이상 잔에 입을 갖다댈 생각도 들지 않았으나, 조키와 아버지가 차례차례로 새로운 잔을 갖고 온다. 마거릿이 술집 안으로 들어왔다. 당장 마거릿과 우리 엄마는 보드카 & 토닉과 칼스버그를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밴드가 연주를 시작하고, 처음 얼마 동안은 고맙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지껄이지 않아도 됐으니까. <설튼스 어브 스윙>이 연주되자 아버지와 어머니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난 다이어 스트레이츠(Dire Straits : 마크 노플러가 이끄는 뉴 웨이브 그룹-역주)의 이 노래가 좋아." 마거릿이 말했다. "젊은 사람들의 음악이겠지만 어느 연대의 사람이라도 다이어 스트레이츠는 좋아하니까." 이 백치 같은 의견에 아니 이보세요, 하고 말해주고 싶은 충동에 하마터면 질 뻔했다. 그러나 그 대신에 조키와 축구 얘기를 하고 그냥 넘기기로 했다. "로스버그 같은 것은 사형에 처해버려. 그런 팀은 스코틀랜드가 시작된 이래의 수치라고" 하고 조키가 턱을 쑥 내밀면서 말했다. "아니, 그 작자 탓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소변은 자신의 페니스로 눌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달리 써먹을 녀석이 있나요?" "응, 하긴 그렇군... 하지만 나로서는 존 로버트슨에게 분발을 기대한다고. 좋은 선수니까 말이야. 스코틀랜드에서는 가장 안정된 스트라이커니까." 우리들은 판에 박은 듯한 축구 얘기를 계속했다. 나는 알맹이가 있는 대화로 만들어보려고 열심히 지껄여대고 있는 시늉을 해보았지만 참패로 끝났다. 아무래도 조키와 마거릿은 내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감시해달라고 부탁을 받은 것 같았다. 네 명 전원이 춤을 추는 경우는 한 번도 없고 순번대로 나를 지키고 있다. 조키와 엄마의 콤비로 <더 원더러>. 마거릿과 아빠가 <졸린>. 엄마와 아빠가 <롤링 다운 더 리버>. 마거릿과 조키가 <세이브 더 라스트 댄스 포 미>. 뚱보 가수가 <송 송 블루>를 부르기 시작하자 우리 엄마는 나를 봉제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댄스 플로어로 끌어안고 나갔다. 엄마는 춤을 잘 춘다는 것을 과시했고, 나는 남의 눈을 의식하면서 어색하게 춤을 추었다. 조명이 뜨거워서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밴드가 닐 다이아몬드 메들리를 연주하기 시작하자 창피스러움은 절정에 달했다. <포에버 인 블루진스> <러브 온 더 록스> <뷰티풀 노이즈>. 전부를 함께 주어야 했다. <스위트 캐롤라인>이 시작되었을 무렵에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되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이손을 흔들면서 춤을 추고 있는 것을 보더니 내 손을 잡고 강제로 마구 흔들어대면서 노래를 불렀다. "당신과 나의 손...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손을 뻗어줘요... 당신을 느끼며... 나를 어루만져줘요..." 테이블 쪽을 돌아다보니까, 조키는 언제나처럼 리스의 알 존슨(1929년 영화 <재즈싱어>에 출연한 가수 겸 배우-역주)이 되어 있었다. 갈수록 태산이라는 게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번에는 아빠가 10파운드짜리 지페를 주고 모두의 술을 사오라고 한다. 아무래도 오늘 밤의 과제는 특수 기능 개발 및 신뢰 회복 훈련인 것 같다. 나는 쟁반을 들고 바로 가서 줄을 섰다. 출구 쪽에 시선을 보내고 지페의 빠릿한 감촉을 확인한다. 두세 방 분은 살 수 있겠구나. 30붐남 있으면 시커네 집이나 수녀원장 조니 스윈네 집으로 갈 수가 있다. 한 방 맞고 이 악몽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 다음 순간, 아빠가 출구에 서 있는 것을 깨달었다. 요주의 인물을 감시하는 클럽 경비원 같은 얼굴로 나를 뚫어질 듯이 보고 있었다. 단, 이 경비원의 역할은 나르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지저분한 게임다. 고개를 돌려 줄로 돌아가자 옛날에 같은 반이었던 트리샤 맥킨레이가 줄에 서 있었다. 아무하고도 말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새삼스럽게 무시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트리샤는 벌써 나를 알아보고 방긋 웃어줬기 때문이다. "오랜만이다, 트리샤." "어머, 오래간만이야, 마크. 잘 지내고 있나?" "그저 그래. 너는?" "보시다시피. 여기는 제리. 제리, 여기는 마크야. 학교 때 같은 반이었어. 까마득한 옛날 일 같은데. 그렇게 생각지 않니?" 트리샤가 소개한 사람은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땀 냄새가 풍기는 고릴라였다. 고릴라가 뭐라고 웅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것 같아." "아직도 사이먼과 어울려 다녀? 여자애들은 모두 사이먼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하고 묻는다니까. 나는 그말만 들으면 짜증스러워져." "아, 그 녀석이라면 오늘 우리 집에 왔었어. 이제 곧 파리에 가는 모양이다. 그 다음에는 코르시카 섬이라나." 트리샤가 미소를 짓자, 고릴라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녀석의 얼굴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세상을 향해 덤벼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서덜랜드 일가의 누구일 것이다. 트리샤라면 좀더 괜찮은 사내를 찾을 수 있었을 텐데. 학교에 다닐 때의 트리샤는 남학생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나도 옛날에 트리샤를 쫓아다니던 때가 있었다. 트리샤와 애인 사이라고 주위 사람들이 생각해주기를 기대하고서 한 일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진짜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가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연출한 선전을 내 자산이 믿기 시작했고, 운행되지 않게 된 낡은 철로를 따라 둘이서 걷고 있을 때, 무의식중에 트리샤의 스웨터 안으로 손을 접어넣으려고 하다가 뺨을 세게 얻어맞았었다. 그런데도 식보이는 트리샤하고 잤다. 천하에 빌어먹을 녀석! "사이먼은 언제나 재미있는 곳만 찾아다닌다고 생각지 않니?" 트리샤는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빠 사이먼. "정말로 그래. 미성년자 강간, 뚜쟁이, 마약 밀매인, 그리고 공갈협박. 그는 그런 인간이라고." 나의 가시 독친 말투에 나 자신도 깜짝 놀랐다. 식보이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다. 아니, 식보이와 스퍼드와... 그리고 어쩌면 토미일까? 그런데 어째서 녀석에 대해 이렇게까지 악렬하게 깎아내리는 거지? 부모로서의 도리를 다 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친자식인지조차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녀석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녀석은 아무것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신경을 쓰지 않으니까 상처도 입지 않는다. 절대로. 이유야 어쨌든 간에 내가 그런 말을 했기 때문에 트리샤는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다. "무?... 아…그러면…또 만자자. 마크." 트리샤는 황급히 가버렸다. 트리샤가 술잔이 담긴 쟁반을 들고, 서덜랜드의 고릴라(나는 녀석이 서덜랜드라고 생각한다)는 내 쪽을 돌아다보면서 멀어져 갔다. 반들반들한 댄스 플로어에 미끄러 넘어질 뻔하면서 말이다. 식보이의 험담을 하다니 내가 어떻게 된 모양이다. 나는 다만 녀석이 약삭빠르게 행동하고, 언제나 나만 나쁜 놈이 되는 것이 견딜 수 없었던 것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일 뿐일지 모른다. 식보이에게도 녀석 나름대로의 걱정거리나 마음 고생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나보다 훨씬 적이 많을 것이다. 틀림없다. 하지만 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인가? 나는 술을 들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괜찮니, 마크?" 엄마가 물었다. "다시 태어난 것 같아, 엄마. 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 나는 제임스 케그니(30년대 갱영화의 단골 주인 배우-역주) 풍으로 말을 하려고 했지만, 역시 실패였다. 나는 무슨 일을 해도 잘 되는 법이 거의 없다. 그러나 실패나 성공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런 것을 누가 신경 쓰는가? 우리들은 모두 아주 짧은 시간을 살고, 그리고 죽는다. 그뿐이다. 그것뿐이다. 27.형을 묻던 날의 정사: 레튼의 이야기 정말 화창한 날씨였다. 그렇게 보였다. 접중해야 한다. 눈앞의 일에. 매장(埋葬)에 입회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아, 마크." 나직한 목소리. 나는 앞으로 걸어나가서 로프를 잡았다. 아버지와 찰리 숙부와 더기 숙부와 함께 형의 유해를 구멍 속으로 내린다. 장례식의 비용은 육군이 지불했다. "모든 것을 맡겨주십시요." 후생 담당 장교가 조용한 어조로 엄마에게 말했다. "모든 것을 맡겨주십시요." 그래, 매장에 입회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최근에는 대개 화장을 하니까. 관 속에는 무엇이 들어가 있는 것일까? 빌리의 몸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은 확실하다. 어머니와 형수인 샤론 쪽을 보았다. 숙모들이 모두들 모여들어서 두 사람을 위로하고 있다. 빌리의 친구였던 레니와 피즈보와 나즈. 그리고 육군의 동료들도 있었다. 빌리 보이, 빌리 보이. 헬로우, 헬로우. 여기 왔다. 이건 전혀 관계가 없다. 더 워커 브러더즈(64년도에 LA에서 결성돼 영국서 활동했던 포크트리오-역주)의 옛날 노래, 밋지 유어(울트라복스의 리드 싱어였다가 소로로 활동, 글래스고 출신-역주)가 리바이벌한 그 곳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후회하지 않아요, 울지 않고 작별을 고할 수 있어요, 당신이 돌아와주기를 원하지 않으니까…. 슬름 같은 것은 느끼지 않는다. 분노와 경멸밖에 느끼고 있지 않다. 형의 관에 영국 국기가 덮여지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은 저 얼간이. 아침 잘 하는 장교라는 작자가 어머니에게 얘기를 걸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배알이 뒤집힐 것 같다. 게다가 글래스고의 친척들까지 대거 몰려와서 아빠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그리고 빌리는 조국을 위해서 죽었다든가 하는 노래 근성에 젖은 시시한 헛소리를 주워섬기고 있다. 빌리는 멍청한 인간이었다. 순진하고 단순화고, 영웅 같은 존재가 아니다. 순교자가 아니다. 단순한 병신 머저리였다. 나는 갑자기 킥킥거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참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참을 수가 없다. 하마터면 뒤로 벌렁 남어져서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릴 뻔했는데, 그때 찰리 숙부가 내 팔을 움켜잡았다. 차가운 눈을 하고 있었다. 하긴 이 숙부의 경우는 항상 그렇지만. 에피숙모가 그 인간을 내게서 떼어냈다. "동요하고 있을 뿐이에요. 저 아이 나름대로 저렇게 슬퍼하고 있는 거라고요, 찰리. 저 아이는 동요하고 있을 뿐이에요." 이 글래스고의 더러운 놈. 목욕이라도 하고 다시 찾아와라. 빌리 보이. 놈들은 어렸을 때 형을 이렇게 불렀다. 잘 있었니, 빌리 보이? 소파 뒤에 숨어 있던 나한테는 마지못해 '야, 꼬마야'하는 식이었다. 빌리 보이, 빌리보. 내 위에 올라탄 형을 잘 기억하고 있어. 난 바닥에 깔려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지. 기도는 지푸라기 정도로 가늘게 짜부러져서 폐와 노에서 산소가 없어져가는 걸 느끼며 나는 기도했었어. 나의 야윈 몸이 눌려 죽어버리기 전에 엄마가 프레스토의 가게에서 돌아오게 해주소서. 얼룩이 지금도 생생해. 그게 그렇게 재미있었어, 빌리 보이? 그렇다면 됐어. 이미 형을 원망할 생각은 없어. 형은 늘 그쪽에 문제가 있었느니까. 똥오줌을 못 가려서 엄마를 미치게 만들었지. 어느 팀이 더 세지? 넌 나에게 묻는다. 체중을 싣고 손톱을 찔러넣고 좀더 세게 조여대면서. 하츠야. 그렇게 대답할 때까지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지. 정월 초하룻날의 타인캐슬의 시합에서 힙스가 7 대 0으로 이겼는데도 넌 하츠라고 말하게 했다. 나에게 그렇게 말하게 하는 것이 시합의 결과 자체보다 네겐 더 중요했지. 내 말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해주다니 영광으로 생각해야 될지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형님은 영국 육군에 입대하여 영국의 영지로 되어 있는 아일랜드의 크로스매글렌 기지 주변의 순찰대로 파견되었다. 형과 동료들이 차에서 내려 도로를 봉쇄한 바리케이드를 조사하려고 접근했을 때, 탕! 휙! 펑! 꽥! 한 순간에 그들은 저 세상으로 갔다. 앞으로 넌 3주만 있으면 이번 임무도 종료될 예정이었다. 빌리 형은 죽어서 영웅이 되었다고 모두들 말한다. 나는 그 노래를 생각해냈다. <빌리 돈 비 어 히어로>. 사실 빌리 형은 군복을 입고 있을 뿐인 무능한 인간이 채 소총을 손에 들고 시골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다가 죽었다. 자신을 죽으므로 몰아넣은 무수한 사정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채, 제국주의가 낳은 철부지 희생자로 죽었다. 그것이 가장 큰 범죄라고 생각한다. 빌리 형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죽었다는 것이. 형을 죽음으로 이끈 아일랜드에서의 위대한 모험 동안, 형을 움직이게 하고 있었던 것은 애매하고 근시안적인 감성뿐이었다. 형은 살았던 대로 죽었다. 아무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형의 죽음은 나에게 있어서는 좋은 일이었다. 열 시 뉴스에서도 보도되었다. 앤디 워홀(팝아트의 대표적 인물, 에이즈로 사망-역주)의 유명한 말을 빌린다면, 형은 죽고 나서 15분간 간만 유명해진 것이다. 여러 사람이 조문을 왔다. 엉뚱한 동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찾아와 준 것은 고마웠다.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으니까. 장관대리인지 누군지 높은 사람이 찾아와서, 먹물 냄새 풍기는 옥스퍼드식 영어로 빌리는 참으로 용감한 청년이었다고 치켜올렸다. 만일 여오아 폐하의 군인이 아니고 민간인이었다고 한다면 빌리라는 인간은 이런 잘난 척하는 놈들이 비겁한 똘마니라는 딱지르 붇일 타입의 인간이었는데 말이다. 그 얼간이는 빌리를 살해한 범인을 가차없이 체포해보이겠다고 말했다. 아아, 그렇게 해주시지. 범인은 틀림없이 국회의사당에 안에 있으니까. 부자들의 도구로 이용된 백인 쓰레기에 대한 작은 승리를 즐기자. 서덜랜드 형제나 그 졸개들로부터 놀림을 당하고 몸을 떨던 빌리. "네 동생은 바보 천지.". 그들은 축구가 싫증이 나면 빌리 형을 에워싸고 그렇게 놀려댔다. 그것은 70년대의 리스 최대의 히트곡 중 하나였다. 그 녀석들은 데이비의 얘기를 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내 얘기를 하고 있었을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다리 위에서 내가 보고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빌리 형, 형은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따. 무력한 채로. 어떤 기분이었지, 빌리 보이? 좋은 기분일 리가 없었겠지. 나는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조문객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니까, 기묘한 분위기였다. 스퍼드도 여기 와 있을 것이다. 소튼 교도소를 갓나온 깨끗한 스퍼드. 토미 같은 녀석도 와 있다.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 스퍼드가 건강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고, 토미가 살아 있는 죽음의 신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토미와 사이가 좋은 데이비 미첼도 얼굴을 보였다. 데이비하고는 까마득한 옛날, 견습 목수를 하고 있었을 때, 현장에서 함께 일을 한 적이 있다. 연인에게서 에이즈를 전염당한 모양이다. 이곳에 오다니, 용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벡비는 그 악당다우 존재감과 소동을 일으키는 능력이 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때를 골라서 메니돔으로 여행을 떠났다. 부도덕의 덩어리인 벡비가 곁에 있으면, 글래스고의 친척들쯤은 문제 없었을텐데. 식보이는 아직도 프랑스에 있고 꿈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 빌리 보이. 방을 함께 쓰던 때가 생각나.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같이 살 수 있었는지 짐작도 안 간다. 태양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 사람들이 태양을 숭배하는 이유도 알 수 있다. 하늘을 보면 태양이 있다. 누구에게나 보이고, 누구나 다 태양을 필요로 하고 있다. 방의 우선권은 형에게 있었지, 빌리 형. 형 쪽이 나보다 겨우 15개월 먼저 태어났는데, 힘은 정의다. 형은 심술사나운 얼굴을 하고 껌을 짝짝 씹고 있는 야윈 얼굴의 여자를 집에 데리고 와서 그 짓을 하고 있었다. 아니, 적어도 페팅 정도는 하고 있었다. 형은 나와 내 친구들과 축구 게임기를 복도로 내던지고 여자들은 나를 앤드로이드 같은 경멸의 눈으로 보았다. 내 리비풀 팀 선수 한명과, 셰필드 웬즈데이 선수 두 명을 형이 일부러 발뒤꿈치로 짓밟아버린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의미 같은 것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완전한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서 그것을 상징하는 행위가 필요했을 것이다. 안 그래, 빌리 보이? 사촌인 니나는 굉장히 섹시해져 있었다. 검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리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코트를 입고 있다. 약간 고딕품의 느낌이다. 빌리 형의 군대 동료와 글래스고계 숙부들이 사이좋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깨닫고 나도 모르게 <안개비>를 휘파람으로 불고 말았다. 지독한 뻐드렁니의 군대 동료 하나가 그것을 알아듣고는 놀라서 내 쪽을 바라보더니 화가 난 얼굴을 했다. 나는 손을 입에 갖다대고 녀석에게 키스를 던져주었다. 녀석은 한참 동안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으나 이윽고 난처한 듯이 시선을 돌렸다. 이겼다. 토끼 사냥시즌이다. 빌리 보이, 나는 형의 또 하나의 바보 천치 동생이었다. 형이 친구인 레나에게 말했던 것처럼 여자와 잔 적이 없는 바보 천치였다. 레니는 그 말을 듣자 천식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큰소리로 웃었다. 빌리 형답지 않았다. 구제불능의 얼간이 놈. 내가 윙크를 하자 니나는 어색한 듯이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가 보고 있다가 화를 머리끝까지 냈다. "또 그런 짓 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 알겠어?" 아버지는 눈이 안으로 푹 꺼져서 피곤해보였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슬퍼하며 침착성을 잃은 아버지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도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 서커스 같은 장례식을 거행하게한 아버지가 원망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 집에서 봐요, 아버지. 전 엄마한테 가 있을게요." 언제였던가 부엌에서 얘기 소리가 들려온 적이 있었다. "저 아이, 좀 이상한 것 아닐까, 캐시? 언제나 꼼짝 않고 조용히 있으니까 말이야. 정상이 아니라고. 빌리 좀 보라고." 엄마눈 이렇게 대답했다. "저 아이는 조금 별난 것뿐이에요. 별 것 아니에요." 빌리와는 달라요. 빌리 보이가 아니니까. 시끄러워서 마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녜요. 조용하기 때문에 마크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거예요. 마크가 큰소리로 떠들면서 달려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떼를 쓰는 일은 없어요. 그래도 마크는 찾아와요. 헬로우, 헬로우. 굿바이. 나는 미치의 차에 토마와 스피드와 함께 탔다. 세 사람 모두 집에는 들리지 않고 황급히 돌아갔다. 심하게 평정을 잃은 엄마가 언니인 아이린가 시누이인 엘리스의 부축을 받고 택시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 글래스고의 고모들이 뒤쪽에서 암탉처럼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어서 그 지독한 사투리가 나에게도 들렸다. 남자들의 사투리도 지독하지만, 여자들이 그런 말투로 떠들어대면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턱이 뾰족한 노파들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었다. 나이 먹은 친척의 장례식 쪽이 오히려 마음이 편한 모양이다. 유품 분배라는 것도 있으니까 말이다. 엄마는 빌리 형의 아내인 샤론의 팔을 잡고 있었다. 샤론의 뱃속에는 아기가 들어 있다. 장례식 때만 되면 왜들 모두 저렇게 서로의 팔을 붙잡는 것일까? "빌리는 너를,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넌 그 아이에게는 딱 맞는 아가씨였어." 엄마는 샤론에게 들려주는 것보다는 자신을 납득시키려고 하는 말같았다. 불쌍한 엄마. 2년 전에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 명뿐이다. 더군다나 하나 남은 자식이라곤 약물 중독자다. 이 세상은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 내가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니까, 샤론 형수가 에피 고모에게 묻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육군은 나에게도 얼마간은 둘 거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빌리의 아이가 이제 곧 태어난단 말예요... 빌리의 아이가..." 샤론 형수는 울먹이고 있었다. "달은 녹색의 치즈 찌꺼기로 만든 거라고 생각 안 하니?" 다행히 모두들 자기 얘기에 열중해서 내가 말한 것은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빌리 형과 마찬가지다. 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나 같은 것은 좆재하지 않는다는 시늉을 한다. 빌리 형, 나는 점점 형을 경멸하게 되었다. 여드름에서 고름을 짜내듯이 나는 공포를 조금씩 짜내고, 최후에는 경멸만 남았다. 물론 나에게는 나이프가 있었다. 그것 덕택에 평등하게 될 수가 있었다. 신체적인 핸디캡이 없어졌다. 에크 윌슨도 2한년 때 혼쭐이 나고 비로소 알았을 것이다. 빌어먹을 놈! 나이프와 폭탄. 지금과 마찬가지다. 폭탄은 안 돼, 안 돼. 어색함과 불편함이 더욱 심해져갔다. 사람들은 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 빌리는 훌륭한 청년이었다고 말한다. 나는 빌리 형을 칭찬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생각해낼 수 없어서 잠자코 있었다. 그런데 난처하게도 빌리 형의 군대 동료인 토끼 같은 앞니를 한 녀석, 아까 키스를 던져줬던 녀석이 슬금슬금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자네, 빌리의 동생이라면서?" 그 녀석이 말했다. 드러난 앞니가 바짝 메말라 있다. 미리 그렇다고 짐작을 했어야만 했다. 이 녀석도 글래스고계의 편협된 오렌지 당원인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의 친척들과 사이가 좋을 수 밖에. 녀석이 그런 말을 한 덕택에 일이 위험하게 되었다. 전원의 눈이 이쪽을 향하고 있다. 이런 염병할 토끼 녀석! "네, 그래요. 나는 빌리의 동생이었죠." 나는 농담조로 말했다. 녀석이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다. 일단은 관객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지. 지금 이 방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이 예의라고 생각하는 구역질 나는 위선에 노골적으로 타협하지 않고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려면 상투 문구를 늘어놓는 것이 제일이다. 이런 때는 상투 문구가 환영 받는다. 왜냐하면, 상투 문구 쪽이 훨씬 진실된 것처럼 들리며 뭔가 의미가 있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빌리 형과 내 의견이 일치하는 일은 그다지 없었지만..." "그러나 싸움을 할 정도는..." 케니 외삼촌이 거들어 주려고 했다. "...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죠. 우리 두 사람 모두 좋은 술과 즐거운 대화를 좋아했거든요. 우리들이 이렇게 우울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 것을 만일 빌리 형이 봤다면 배꼽을 잡고 웃지 않을까요?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거예요. 흥겹게 놉시다, 제발 부탁이니까, 라고요. 친구와 친척들이 모두 모여주었고, 꽤나 오랫동안 못만난 사이들이니까요." 주고받았던 카드들: 빌리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앤드 어 해피 뉴 이어(단 1월1일 3시부터 4시40분까지는 빼놓고) 마크가 마크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앤드 어 해피 뉴 이어 빌리가 하츠 OK 빌리에게 생일 축하해 마크로부터 그리고 빌리와 샤론에게서 보내져 온 카드: 마크 생일 축하한다 빌리와샤론 샤론이 손으로 쓴 카드였다. 아버지의 친척들, 글래스고의 멍청이들. 매년 7월의 오렌지 당원의 행사에 찾아오는 사람들. 이스터 로드나 타인캐슬에서 레인저스의 시합이 있을 때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나는 놈들이 드럼채플에 묵어주기를 원했다. 그들은 빌리 형에게 바친 나의 짤막한 연설에 감동을 받은 모양으로,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찰리 숙부만은 달랐다. 나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다. "너에게 있어서는 그냥 놀이에 지나지 않겠지. 안 그러냐, 마크?" "알았다면 하는 수 없군요." "너는 불쌍한 녀석이야." 숙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생각은 하고 있지도 않으면서요." 나는 반박했다. 숙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가버렸다. 그들은 맥이완 엑스포트와 위스키를 계속 비우고 있었다. 에피 고모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비음이 거슬리는 시골뜨기의 찡얼대는 울음소리 같았다. 나는 니나에게 다가갔다. "굉장히 예뻐졌는데 그래." 나는 그렇게 칭찬했으나 혀가 제대로 돌아가지를 않는다. 니나는 이미 그런 소리는 지겹게 많이 들었다는 긋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이곳을 빠져나가서 폭스 주점이나 몽고메리 스트리트의 아파트로 가지 않겠느냐고 꼬시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촌끼리 즐리면 범죄가 될까?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법률이라는 것은 무엇이든 금지하고 있으니까. "빌리 오빠는 정말 안됐어." 니나가 말했다. 나를 하찮은 얼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 정말로 그렇다. 나도 내가 20세가 될 때까지는, 20세 이상의 인간은 모두 얼간이고 얘기를 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세상을 알게 되어감에 따라서 내가 옳았다는 것도 알았다. 20세를 넘고 나서는 모든 것이 혐오스러운 타협의 연속이다. 쭈뼛쭈뼛거리면서 항복만 하고 있었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계속 그런 것이 계속될 것이다. 쳇, 칙 치키 칙 치키 찰리 숙부가 내가 니나를 꼬시려고 수작을 걸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니나의 정조를 지켜주려고 끼여들었다. 니나는 이런 냄새나는 뚱보에게 보호받을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찰리 숙부는 잠깐 일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내가 무시하자, 내 팔을 꽉 잡았다. 상당히 술에 취해 있다. 소곤소곤 얘기하는 목소리에 가시가 돋혀 있고, 위스키 냄세가 심하게 났다. "내 말 잘 들어, 여기서 썩 꺼져버리지 않으면 그 턱에 한방 먹여 주겠다! 너희 아버지가 보고 있지 않으면 벌써 날려보내 버렸을 게다. 너라는 녀석은 영 마음에 안 들어. 줄곧 마음에 들지 않았어. 거기에 비하면 너의 형 빌리는 너보다 열 배는 제대로 된 인간이었지. 정키 녀석. 너희 어머니나 아버지가 너 때문에 얼마나 쓰라린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 "확 까놓고 말하는 게 어때요?" 나는 숙부의 말을 가로막았다. 해냈다, 이 작자를 화나게 해줬다고 하는 달콤한 기쁨에 억눌려 있기는 했으나, 뱃속에서 분노가 쿵쿵 맥박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냉정하게 행동하자. 이 독선적인 녀석을 화나게 만들려면 그것이 제일이다. "좋아, 까놓고 말해줄까? 대학물 좀 먹었다고 잘난 척하는 놈아. 저기 벽까지 널 날려보내 주지." 찰리 숙부는 문신이 새겨져 있는 거대한 주먹을 내 눈 앞에 내밀었다. 나는 들고 있던 위스키 잔을 움켜쥐었다. 이 작자가 그 더러운 손을 내 몸에 대도록 가만히 있을 줄 알아? 덤벼들면 유리잔이 얼굴에 박힐 거다. 나는 숙부의 주먹을 밀어냈다. "발라는 바예요. 어디 한 번 때려보시지. 나중에 그것을 재료로 마스터베이션을 해줄 테니까. 우리들 대학 중퇴 정키는 모두 변태라고. 당신 같은 인간은 그 정도의 가치밖에는 없어. 이 쓰레기 같은 인간. 게다가 나를 너무 얕보고 있군. 밖으로 나가고 싶으면 그렇게 말씀하시지." 나는 문 쪽을 가리켰다. 방 안이 빌리의 관 정도로 오그라들고, 나하고 숙부 두 사람밖에 없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모두 제자리에 있다. 모두 우리를 보고 있다. 숙부는 나의 가슴을 가볍게 찔렀다. "오늘은 이미 한 번 장례식을 치렀어! 한 건 더 치루는 건 사양하겠다." 케니 외삼촌이 다가와서 나를 떼어냈다. "저런 오렌지 녀석은 그냥 내버려둬라, 마크. 어머니 생각도 좀 해야지. 만일 네가 싸움이라도 해봐라. 쓰러져버리실 게다. 오늘은 빌리의 장례식이다. 제발 때와 장소를 헤아리려무나." 케니는 좋은 사람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약간 아니꼬울 때도 있지만.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은 있어도, 냄새나는 오렌지 녀석보다는 예스맨 카토릭 녀석 쪽이 낫다. 엄마 쪽의 예스맨 카톨릭 신자들과, 아버지 쪽의 오렌지 당원인 부랑자들을 비교한다면 말이다. 나는 위스키를 쭉 들이켰다. 불붙는 것 같은 쓴맛이 목구멍에서 가슴으로 내려가는 감촉이 기분좋았으나, 느글거리는 위장을 직격하자 울격 하고 구역질이 솟구쳐 올라왔다. 나는 화장실로 향했다. 마침 형수 샤론이 나오는 길이었다. 나는 길을 가로막았다. 샤론과 나는 거의 말을 한 적이 없다. 샤론은 술에 취해서 몽롱해 있었다. 임심과 알코올 탓으로, 얼굴이 푸석푸석하고 새빨갛다. "잠깐만요, 샤론. 잠깐 얘기라도 합시다. 여기라면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테니까요." 나는 샤론의 등을 떠밀어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이럴 때는 서로 도와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든가, 의막 없는 말을 횡설수설 지껄여대면서 샤론을 애무했다. 커다랗게 된 배를 만지고, 앞으로 태어날 조카인지 조카딸의 뒷바라지를 어떻게든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들은 키스를 했다. 나느 손을 밑으로 뻗어서 임신복 위에서 펜티의 라인을 더듬었따. 그 다음에는 그곳을 애무하고 있었다. 샤론은 바지에서 내 페니스를 끄집어내고 있었다. 나느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줄곧 샤론을 동경하고 있었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계속 지껄여댔다. 하지만 그런 말을 새삼스럽게 할 필요는 없었다. 샤론은 벌써 펠라티오를 하려고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지껄여대고 있으면 왠지 안심이 되었다. 샤론이 내 것을 입에 물자 나는 금세 딱딱해졌다. 대단하다. 펠라티오를 잘 하는군. 형에게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샤론의 모습을 떠올리고 형의 페니스는 사정하는 순간에는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했다. 빌리 형에게 지금의 우리들을 보여주고 싶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묘한 경의를 담아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빌리한테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보일까?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빌리에 대해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절정에 도달하기 직전에 몸을 빼고 샤론을 엎드리게 했다. 샤론의 치마를 젖히고 팬티를 내렸다. 커다란 배가 축 쳐져서 바닥에 닿을락말락 햇다. 처음에는 항문에 삽입하려고 했지만 들어갈 여지가 없었고 무리하게 밀어붙이자니 페니스 끝이 아파서 무리였다. "거긴 안 돼, 안 된다고." 샤론이 말했기 때문에 나는 윤활유를 찾아 휘젓는 것을 그만두고, 손가락을 질에 집어넣었다. 콕 쏘는 비린 냄새가 났다. 하긴 그런 것을 지적한다면, 나의 페니스에서도 꽤나 불쾌한 냄새가 나고 있었고, 귀두 근처에는 때가 덕지덕지 끼여 있었다. 나는 그다지 몸을 자주 씻거나 위생에 관심이있는 편이 아니다. 그런 쪽으론 다분히 부랑자 같은 면과 정키다운 면이 있다. 나는 샤론의 희망대로 앞쪽에 삽입햇다. 처음에는 나의 능력에 대한 세간의 평판대로, 조그만 소시지를 골목에 던져넣은 꼴이었으나 내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샤론도 곽 조여왔다. 곧 애기가 태어난다고 했지, 나는 지금 어느 정도나 안쪽까지 들어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내 것이 태아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그림을 상상했다. 좋아. 삽입과 펠라티오를 동시에 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흥분이 되었다. 섹스를 하면 뱃속의 아기에게도 좋다고 했지. 혈액 순환이 좋아진다나 어떻다나. 조카의 행복을 생각해주는 것 쯤은 나도 할 수가 있다고. 노크 소리가 나고, 에피 고모의 코맹맹이 소리가 들려왔다. "거리서 뭘하고 있니?" "걱정 마세요, 샤론 형수가 토했어요. 임신을 했는데 과음을 한 것 같아요" 하고 나는 신음소리를 냈다. "시중을 들어주고 있는 거냐, 마크?" "그럼요... 이렇게 제대로 시중을 들어주고 있잖아요..." 나는 숨을 헐떡였다. 샤론의 신음소리가 점점 더 커져갔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다만... " 나는 정액을 발사하고 나서 샤론에게서 나왔다. 그러고는 조용히 샤론을 똑바로 눕히고 밀크색 유방을 드레스에서 끄집어내고 갓난애처럼 코를 갖다댔다. 그러자 샤론이 내 머리칼을 쓰다듬어주었다. 편안하고 상쾌한 기분이 됐다. "너무 좋았어요." 나는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만족스러웠다. "앞으로도 다시 만날 수 있지, 응?" 샤론이 말했다. 간절하게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세상에 이런 미친 여자가 다 있나! 나는 몸을 일으키고 샤론의 뺨에 키스를 했다. 지나치게 익어서 틴팅 불은 과일에 키스를 하는 것 같았다. 이럴 때 골치 아픈 일에 말려드는 것은 사양하겠다. 솔직히 말하면, 난 샤론에게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여자는 한 번 한 것만으로, 형에게서 동생으로 바꿔탈 수 잇다고 생각하고 있다. 곤란한 점은 그녀가 크게 트릴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아, 일어나서 제대로 옷매무새를 고치지 않으면 곤란해요, 샬론. 이런 모습을 보게 되면, 모두들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저 작자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요. 나는 알고 있지만, 샤론. 당신이 좋은 아가씨라는 것을. 하지만, 저자들은 모르고 잇다고." "나도 당신이 착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고." 샤론은 나를 격려하듯이 말했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빌리형에게는 너무나도 아까운 여자다. 아니, 마이러 힌들리(1963--1965년 사이에 남자친구와 함께 아홉 명의 어린이를 고문, 강간, 살인한 여자-역주)도, 마거릿 대처도 형에게는 아까울 정도다. 샤론은 여자들이 주입당하는 "좋은 남자를 만나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갖는 것이 여자의 행복"이라는 개소리에 감화되어서 두뇌를 으깬 감자같이 만들어버리는 잣대밖에서는 자신을 응시할 기회조차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노크 소리가 났다. "야, 이 문을 열지 않으면 부숴버릴 테다!" 찰리 숙부의 아들 캐미의 목소리였다. 스코틀랜드 컵 트로피와 꼭 닮은, 젊은 경찰 자식이다. 트로피의 손잡이 같은 커다란 귀. 그리고 무턱에 목은 가느다랗다. 내가 여기서 그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긴 '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녀석이 상상하고 있는 것처럼 '마약'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됐어... 곧 나갈게요." 샤론은 아래쪽을 닦고 나서 팬티를 끌어올리고, 옷매무새를 고쳤다. 커다란 배를 한 임산부가 너무나 빨리 움직였기 때문에 나는 감탄하고 말았다. 바로 조금 전까지 나하고 섹스를 하고 있었다니, 믿을 수가 없다. 내일이 되면 나는 오늘 일을 후회하고 있겠지만, 식보이의 입버릇처럼, 내일이 되면 또 어떻게 될 테지. 바보스러운 잡담이나 술로 잊어버릴 수 없는 고민이란 이 세상에는 없으니까. 나는 문을 열었다. "진정하라고, 독 그린의 순경 나리. 너는 임산부도 본 적 없냐?" 캐미의 얼빠진 천치 같은 표정을 본 순간 나는 녀석을 경멸했다. 그 자리의 분위기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샤론을 데리고 내 아파트로 돌아왔다. 우리는 그냥 얘기만 했다. 샤론은 내가 듣고 싶었던 것을 이것저것 지껄여댔다. 우리 엄마나 아빠는 알지 못했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을 일들이었다. 샤론에게 있어서 빌리는 형편없이 혐오스러운 인간이었다. 빌리는 사사건건 샤론을 구타하고 욕설을 퍼부었으며, 언제나 샤론을 마치 똥 취급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무엇 때문에 함께 산 거야?" "남편이기 때문이야.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잖아? 언젠가 이렇지 않을 때가 찾아오겠지, 언젠가 이 사람도 달라지겠지, 난 이 사람을 바꾸고 말 테야. 이렇게 말야." 그 기분은 잘 안다. 하지만 잘못된 생각이다. 빌리를 바꿔놓을 수 있는 사람은 IRA뿐이고, 그 녀석들도 빌리 못지않은 역겨운 녀석들이다. 나는 녀석들이 자유의 투사라고 하는 환상은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나의 형을 시체로 바꿔놓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IRA도 방아쇠를 당기는 역할을 수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7월이 되면 어깨띠와 피리를 들고 찾아오는 저 오렌지 자식들, 빌리의 우둔한 머리에 왕이니 국가가 어떠니 하는 쓰레기 같은 사상을 불어넣은 오렌지 새끼들이, 형을 죽인 거나 마찬가지다. 놈들은 의기양양해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고는 가족이 죽었다, 얼스터를 지키려다 IRA에게 당했다고 온 사방에 나팔을 불며 돌아다닐 것이다. 그들의 무의미한 분노는 더욱 부추겨지고, 펍에 가면 모든 사람들로부터 술을 대접받고, 다른 통일파 천치들로부터 더욱 깊은 신뢰를 받을 것이다. 내 동생을 못 살게 구는 새낀 용서하지 않겠다. 혜로인 대금을 받으려고 나를 펍까지 쫓아온, 팝스 그레이엄과 더기 후드에게 빌리 형이 그렇게 말했었다. 빌리 형이 그렇게 선언했던 것이다. 그렇다. 확신과 명쾌함으로 가득찬 그 말투는 협박이라는 수준을 넘어 있었다 나를 못 살게 굴던 녀석들은 얼굴을 마주보고, 도망치듯이 펍에서 나가버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킬킬거리고 웃었다. 스퍼드도 웃었다. 우리들은 약에 취해서 아무것도 무서운 것이 없었다. 빌리 형은 우리들을 비웃으며 말했다. "너희들, 정말로 구제 못할 놈들이다!" 그러고는 싸움판을 벌일 구실이 될 줄 알았던 팝스와 더기가 도망쳐버려서 실망하고 있는 자기 친구들에게로 가버렸다. 나는 계속 킬킬거리고 웃고 있었다. 고마워, 정말... 빌리 형은, 그 흰가루 때문에 내가 인생을 망치고 잇다고 말했다.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신물나게 말했다. 정말로 그것은...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인가? 빌리형이 도대체 뭔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그런... 샤론의 말대로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은 어렵다. 그러니까 나는 샤론이 빨리 돌아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나는 약을 만들 수가 있다. 약을 맞을 수가 있다. 모든 것을 잊기 위해서. 28 정크 딜레마 NO. 67 상실이란 상대성의 문제다. 매초 몇 명씩의 어린이가 벌레 새끼처럼 굶어 죽는다. 다른 나라의 일이라고 해서, 밑바닥에 깔려 있는 진실이 부정되는 법은 없다. 우리들이 정제를 빻아 녹여가지고 빚는 사이에 어딘가의 나라에서는 수천 명의 어린이들이, 그리고 이 나라에서도 몇 명인가의 어린이가 죽어간다. 그리고 그 사이에 추선 명의 돈많은 부자들이 투자한 돈이 이자를 낳고, 또 각자 수천 파운드씩 챙겨 부자가 된다. 정제를 빻는다-바보밖에 생각해내지 못할 일이다. 정제니까 그대로 뱃속에 집어넣어야 하는 것이다. 두뇌나 정맥은 이런 것을 직접 집어넣기에는 너무 섬세하다. 데니스 로스처럼. 데니스는 위스키를 정맥에 주사했다. 다음 순간 녀석은 눈이 까뒤집혀졌다. 못구멍에서 피가 뿜어져나오고, 눈 깜짝할 사이에 이 세상을 하직했다. 그런 페이스로 바닥에 코피가 뚝뚝 떨어진다면... 끝장이다. 정키의 객기... 아니, 그것이 아니다. 정키의 의무다. 그렇다, 나는 무섭다. 오줌을 쌀 정도로 무섭다. 그러나 오줌을 쌀 정도로 무서워하고 있는 나는, 정제를 빻고 있는 나하고는 별개의 인간이다. 정제를 빻고 있는 쪽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우울증에 계속 빠져 있는 것은 죽는 것보다도 훨씬 무섭다고 느낀다. 논쟁에 이기는 것은 언제나 이쪽의 나다. 정크(마약)가 있으면 진짜 딜레마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딜레마가 찾아오는 것은 정크가 없어졌을 때문이다. @FF 제5장 유랑하는 젊음 29. 잔인한 도시 런던의 밤: - 렌튼의 이야기- 안 돼. 도대체 이 자식들은 어디로 가버린 거야? 빌어먹을, 자업자득이군. 찾아간다고 미리 전화를 해뒀어야 했는데. 기습을 당한건 내 쪽이 됐잖아. 아무도 없다. 검게 칠한 문은 차갑게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마치 주인들은 벌써 돌아오지 않은 지 오래이며 돌아온다 하더라도 먼 훗날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 같았다. 나는 편지함으로 안을 들여다보았으나 현관 바닥에 우편물이 쌓여 있는지 어떤지를 알 수가 없었다. 화가 치밀어서 문을 발로 걷어찼다. 그러자 복도를 사이에 둔 건넛방 여자가- 음침한 여자였다-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무언가 물어보고 싶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무시했다. "그 집엔 아무도 없어요. 지난 2, 3일 동안 돌아오지 않은 것 같더군요." 여자는 그 속에 설마 폭탄이라도 들어 있는 거 아냐, 하는 듯한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의 스포츠 가방을 쳐다봤다. "한심하게 됐군" 하고 나는 퉁명스럽게 중얼거리고, 난처하다는 듯한 얼굴로 위를 쳐다봤다. 그런 얼굴을 하면 여자가 이렇게 말해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당신 낯이 익군요. 아, 예전에 여기서 몇 번 자고간 적이 있었죠? 스코틀랜드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할 텐데 들어와서 따끈한 차라도 들면서 친구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어때요?' 그러자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포기해요?? 앞으로 이틀은 안 돌아올 것 같으니까." 젠장. 염병할. 시팔. 빌어먹을! 녀석들은 아무 곳이나 쏘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 곳에도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돌아올지도 모른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해머스미스 브로드웨이를 걷기 시작했다. 낯익은 고장을 얼마 동안 떠나 있었을 때 흔히 있는 일이지만, 단 3개월 동안 오지 않았을 뿐인데도 런던은 낯선 도시 같은 기분이 들었다. 꿈속에서 뭔가를 볼 때 그렇듯이, 보이는 것 모두가 예전에 잘 알고 있던 것의 복제품 같은, 하지만 어딘지 약간 모자른 것 같은 느낌이다. 살아보지 않으면 그 고장을 잘 알 수 없다고 하지만, 살아보았다 하더라도 한참 동안 떠나 있다가 다시 보지 않으면, 참다운 모습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에든버러에서 스퍼드와 함께 프린시스 거리를 걷던 일이 생각난다. 우리 두 사람 모두 그 불쾌하기 짝이 없는 거리를 걷는 것을 싫어했다. 현대 자본주의가 낳은 저주받은 쌍둥이인 관광객이나 쇼핑객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성을 올려다보고 생각했다. 저건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하나의 건물에 불과하다. 우리들의 머릿속에는 브리티시 홈 스토어나 버진 레코드 같은 부류와 완전한 동급으로 매겨져 있는 걸. 도둑질의 즐거움을 찾아서 그 두 상점으로 향하고 있는 길에 스치고 지나간 사색??. 그런데, 에든버러를 떠나 있다가 오래간만에 웨이벌리 역에 돌아왔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것도 별로 나쁘진 않은데! 거리에서 보이는 것 모두가 소프트 포커스로 잡힌다. 아마 수면 부족이나 마약 부족 때문이겠지. 펍의 간판은 새것으로 바뀌었지만 써 있는 것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더 브리테니아. 대영 제국 만세! 나는 영국 국민이 아니니까, 자신을 영국 국민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건 추하고 인공적인 개념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를 스코틀랜드인이라고 느낀 적도 없다. 용사의 나라. 웃기지도 않는다. 스코틀랜드 같은 것은 더럽고 지저분한 나라다. 우리들 스코틀랜드인은 잉글랜드 귀족들의 똥 무더기에 키스를 하는 특권을 얻으려고 서로의 목을 조여왔다. 우리들의 대표 같은 얼굴을 하고 거짓말만 늘어놓는 기생충 같은 정치가 놈들과 양복 차림에 비굴한 미소를 짓고 있는 고리타분한 파시스트 놈들은 몽땅 긁어모아서 사형시켜버려야 된다. 가게 안에, 오늘 밤 안쪽 바에서 '게이 스킨헤드 나이트'의 이벤트를 한다고 쓴 입간판이 있었다. 이런 곳에서는 뭐가 뭔지 구별을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컬트나 하위 문화가 제각기 독립된 존재로 다루어진다. 이 거리라면 커다란 자유를 맛볼 수가 있다. 이곳이 런던이어서가 아니라 리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모두 휴가를 즐기고 있는 쓰레기들이기 때문이다. 일반석에서 나는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가게 안의 배치나 인테리어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 그것도 악취미 쪽으로. 옛날에는 지저분 하지만 마음 편한 동네 펍 같은 느낌으로, 친구에게 맥주를 퍼붓거나 변소에서 여자와 노닥거릴 수 있는 술집이었다. 그것이 지금은 무서울 정도로 청결한 가게로 변신했다. 싸구려 옷을 입은 딱딱하고 당혹한 표정의 몇몇 동네 사람들이 나무판자에 매달려 있는 난파선의 생존자처럼 카운터 구석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 밖에는 모두 여피족으로, 바보처럼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놈들은 이런 곳에까지 와서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녀석들은 어디에 있어도 사무실에 있을 때와 차이가 없다. 다른 것은 한 손에 들고 있는 게 전화기가 아니라, 술잔이라는 것뿐이다. 이 가게는 런던 중심부로 밀려드는 화이트칼라를 대상으로 하루 종일 식사를 내놓는 고상한 가게로 변해가고 있다. 데이브나 수지가 이런 영혼이 빠져나간 뒷간 같은 곳으로 술을 마시러 올 리가 없다. 그래도 바텐더 중 한 사람은 어딘지 낯이 익었다. "폴 데이비스는 지금도 여기로 마시러 오나요?" 나는 물었다. "당신, 그 스코틀랜드 녀석을 알고 있는 거요? 아스널에서 뛰고 있는 흑인 친구를 말하는 거죠?" 그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 내가 말하고 있는 건 리버풀 녀석이예요. 검은 머리를 세우고 스키 슬로프 같은 코를 가진 녀석. 한번 보면 절대로 잊지 못할 녀석이죠." "아하, 그 사람?? 알아요. 데이브 말이군요. 짧은 머리의 조그만 아가씨하고 언제나 함께 있었죠. 아니, 꽤 오랫동안 보지 못했는데요. 이미 이 동네를 떠났는지 어떤지도 분명치 않아요." 나는 거품이 나는 오줌 같은 맥주 1파인트를 주문하고 바텐더와 새로 찾아오는 손님들에 관한 얘기를 했다. "내 말 좀 들아봐요, 스코틀랜드 총각. 저런 사람들 대부분은 진짜 여피족도 아니라고." 바텐더는 그렇게 말하고 구석에 몰려 있는 양복을 입은 사람들 쪽을 경멸하듯이 손가락질했다. "대부분은 하루 종일 앉아만 있어서 바지 엉덩이가 반들반들해진 사무원이나 커미션으로 먹고사는 보험 회사의 영업 사원 같은 놈들이야. 주급 얼마로 겨우겨우 연명해가는 부류들이죠. 모두 겉만 번드르르한 녀석들, 안 그래요? 녀석들은 머리 꼭대기까지 빚에 파묻혀 있죠. 값비싼 양복을 입고 잘난 체하며 길거리는 활보하면서 연봉 5만 파운드라도 되는 것처럼 으스대지만, 사실은 연봉이 다섯 자리도 안 되는 녀석들이 대부분이라니까요." 그 녀석은 자기처럼 신랄한 이야기를 했지만 그 안에는 새겨들을 만한 점도 있었다. 분명히 에든버러와 비교한다면 런던에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이 굴러다니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그 흐름에 뛰어들면, 행운이 거저 굴러 들어온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다. 나는 거액의 월부금을 끌어안은 런던의 맞벌이 부부보다 자산 상황이 더 건전한 에든버러의 마약 밀매인을 알고 있다. 그런 런던의 멍청이들에게는 언젠가 재난이 들이닥칠 것이다. 길거리를 걸어다녀 보면 도처에 '차압' 딱지가 붙어 있지 않은가! 나는 아파트로 돌아왔다. 녀석들이 돌아온 기척은 없었다. 건넛방 여자가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와도 소용없대두요." 그녀는 잘난 척하는 목소리로 굉장히 고소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 늙은 작부년 같으니라고! 최악의 마귀 할멈이다. 검은 고양이가 몸을 비비꼬면서 복도로 나왔다. "쇼타! 쇼타! 이리 와, 이 망할 놈의 ??." 여자는 고양이를 주워올리더니 갓난애를 감싸듯이 끌어안고는 마치 내가 그런 똥자루 같은 고양이를 괴롭히려고 한 것처럼 나를 노려봤다. 세상에. 나는 고양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개도 고양이만큼이나 싫어했다. 모든 동물의 애완화 금지와 전세계의 개를 추방하자. 동물원에 장식 해놓는 개만 눈감아주자는 의견에 나는 대찬성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나와 식보이의 의견이 희한하게도 언제나 일치한다. 다시 펍으로 돌아가서 1파인트짜리 맥주를 두 잔 비웠다. 이 집이 이렇게 변해버리다니, 기분이 좀 우울하다. 이곳에서 함께 보냈던 수많은 밤들. 마치 그 과거가 낡은 장식품과 함께 버려진 느낌이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펍을 나와서 빅토리아 역 쪽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공중전화에서 멈춰 서서, 잔돈과 누더기가 된 수첩을 꺼집어냈다. 이제 그만 다른 숙박처를 찾는 편이 낫겠다. 그러나 여간 힘들지 않을 것이다. 스티비나 스텔라하고는 된통 싸웠으니까 환영받을 리가 없다. 안드레아스는 그리스에 돌아가 있고, 캐롤라인은 스페인을 여행중이다. 그 멍청이 토니는 프랑스에서 돌아온 식보이와 함께 에든버러에 있다. 놈에게 열쇠를 빌려오는 걸 잊었고, 저쪽도 열쇠 가져가는 걸 잊지 말라고 말하는 걸 잊은 것 같다. 샬린 힐, 브릭스톤에 살고 있는 샬린 힐. 그래, 샬린부터 찾아보자. 일이 잘만 되면 샬린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간에 누군가와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약을 끊으면- 아니, 마약을 끊다시피 하면, 이렇게 돼버린다. 고문이다. "여보세요." 샬린이 아닌 다른 여자가 받았다. "안녕하세요. 샬린은 집에 있나요?" "샬린이요??? 이사갔는데요. 어디로 갔더라, 스톡웰인가 어디라던데요?? 주소는 잘 모르겠어요?? 잠깐만 기다려봐요?? 미크! 미크! 혹시 샬린의 주소 알고 있어? 샬린 말야?? 미안하지만 모른다는데요." 오늘은 하는 일마다 왜 이러냐? 닉시라면 집에 있겠지. "없어, 없어. 브라이언 닉슨 없어. 갔어, 갔어." 아시아인 같은 녀석이 전화를 받았다. "새로운 주소는 알고 있나요?" "없어. 갔어. 브라이언 닉슨 없어." "어디에 사는지 알아요?" "뭐? 뭐? 못 알아듣겠어??" "브- 라- 이- 언 닉- 슨- 은 어- 디- 에 있어요?" "브라이언 닉슨 없어. 약 없어. 안녕, 안녕!" 그 녀석은 쾅 하고 난폭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미 시간도 늦었고 나는 이 도시에서 완전히 추방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글래스고 사투리의 알코올 중독자가 다가와서, 20펜스를 뜯어갔다. "정말 착한 총각이야. 정말로??" 하고 알코올 중독자가 신음하듯 말했다. "당신도 좋은 사람이야, 스코틀랜드 양반" 하고 나는 열심히 코크니(런던 이스트 엔드의 노동자 계급 사투리- 역주)를 흉내내서 대답했다. 런던에 있는 스코틀랜드인은 정말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특히 글래스고 멍청이들은 그냥도 주절주절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는데, 그것들은 그게 우정의 표시인 척 가증스럽게 군다. 이럴 때 부랑자 같은 거한테 같은 스코틀랜드 동포라고 붙들리는 것만은 절대 사양하고 싶다. 38번인가 58번 버스를 타고 해크니에 가서 달스톤에 사는 멜에게 전화를 겉어볼까 하고 생각했다. 다만 멜이 집에 없고, 더구나 전화번호부에 번호가 실려 있지 않으면 끝장이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보니까 나는 버스에는 타지 않고 빅토리아의 올나이트 영화관의 입장권을 사고 있었다. 새벽 다섯 시까지 밤새 포르노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올나이트 영화관은 가난뱅이의 긴급 숙박소이다. 알코올 중독자, 마약중독자, 부랑자, 색광, 사이코, 밤이 되면 모두들 올나이트 영화관에 줄줄이 모여든다. 요전에 이런 곳에서 밤을 새웠을 때,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이런 곳에 오지 않겠다고 자신에게 맹세했었는데. 몇 년 전에 닉시와 이곳에 찾아왔을 때, 어떤 꼬마가 칼에 찔렸었다. 순경이 달려와서 우리들도 포함하여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몽땅 경찰서로 끌고 가서 조사를 하려고 했다. 우리들은 1쿼트분의 하시시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얼른 먹어버렸다. 덕분에 경찰서에 끌려갈 차례가 되었을 때는 말을 할 수조차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이튿날, 보우 스트리트의 치안 판사 법원으로 끌려갔다. 그래 봤자 경찰서 바로 옆 건물이었지만. 그곳의 법원은 자신의 위반에 대해서 횡설수설하는 증언밖에 할 수없는 인간을 보면 무조건 벌금을 부과한다. 닉시와 나는 각각 30파운드의 벌금을 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때의 30파운드를 지금의 30파운드와 똑같이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런데도 나는 또 이곳에 와 있다. 게다가 이 영화관은 지난번 왔을 때 이래로, 더욱더 일직선의 몰락을 향해 달려온 것 같은 느낌이다. 영화는 전부가 포르노였다. 다만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갖가지 짐승들이 서로 물고 뜯고 하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잔인한 다큐멘터리가 유일한 예외였다. 영화의 영상미는 리처드 아텐보로(대작 영화를 주로 만든 영구의 감독 겸 배우- 역주)의 작품들과는 백만마일 정도는 차이가 났다. "깜둥이 새끼들! 빌어먹을 깜둥이 새끼들!" 원주민들이 들소같이 생긴 덩치 큰 동물에게 창을 던지자, 스코틀랜드 사투리가 영화관에 울려퍼졌다. 이 스코틀랜드 동물 애호가 인종 차별자 자식! 놈은 분명히 오랜지 당원일 거다. 내기를 해도 좋다. "저 망할 놈의 더러운 토인놈들!" "놈에게 아부하듯 코크니 사투리 녀석이 외쳤다. 뭐 이런 개 같은 곳이 있나. 나를 둘러싼 고함소리와 거친 숨소리를 떨쳐버리기 위해서 영화에 신경을 집중했다. 가장 좋았던 것은 미국식 영어로 더빙이 된 독일 영화였다. 줄거리는 별로 새로울 것도 없었다. 바이에른 지방의 민속 의상을 입은 젊은 여자가 농장의 모든 사내들과 몇몇 여자에게 여러 장소에서, 여러 방법으로 강간당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강간 장면 하나하나가 굉장히 기발해서 나도 모르게 끌려들어갔다. 아마도 이 지저분한 영화관에 찾아온 사람들 대부분은 실제 섹스보다 이런 영상을 보고 껄떡거리는 게 고작일 한심한 놈들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극장 안에 있는 몇 쌍이 한창 섹스를 하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신음소리로 짐작하건데 남자와 여자 커플외에도 남자와 남자 커플도 몇몇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나도 발기해 있어서 여기서 마스터베이션을 해버릴까 하고 생각했으나 다음 영화 때문에 금새 시들어버리고 말았다. 이번 영화는 영국 것이었다. 무대는 연말 파티 시즌의 런던의 어느 회사로 제목은, 그렇다, (오피스 파티)다. 얼마나 상상력이 풍부한 타이틀인가! 마이크 볼드윈이나 텔레비젼 드라마 (코로네이션 스트리트)에 나온 조니 브릭스 같은 스타들이 나왔다. (캐리 온)?? 시리즈와 비슷하지만 덜 웃기고 섹스가 더 많이 나온다. 마이크는 마지막에 겨우 여자와 하게 되지만 나온 순간부터 이쪽이 불쾌해지는 멍청이에게 굳이 좋은 일 시킬 건 없잖은가? 몇 번씩이나 꾸벅꾸벅 졸다가 갑자기 번쩍 떠졌다. 그 바람에 머리가 뒤로 훽 젖혀져 어깨에서 떨어지는 줄 알았다. 어떤 남자가 자리를 옮겨서 내 옆에 앉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녀석이 내 허벅지에 손을 올려놓는다. 나는 그 손을 뿌리쳤다. "썩 꺼져, 새꺄! 손 잘리고 싶냐?" "미안해, 미안해." 녀석은 유럽식 억양이 섞인 영어를 사용했다. 꽤 나이가 들었다. 처량한 목소리를 내는군. 시들어서 오그라든 얼굴이다. 왠지 내가 잘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니까. "난 호모가 아냐, 임마." 내가 그렇게 말하니까 녀석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호모가 아니라니깐."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나 자신을 가리켰다. 왠지 바보스럽게 느껴진다. 그런 것을 일일이 설명하고 있다니. "미안해, 잘못했어." 그러나 갑자기 나는 고민이 되었다. 남자와 함께 잔 일이 한 번도 없는데, 어떻게 호모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는가? 어떻게 확신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동성애란 어떤 건가를 알기 위해서 다른 남자와 한번 끝까지 가보고 싶다고 항상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든 한 번은 시험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왕 한다면 내가 주도권을 장악하지 않으면 싫다. 사내 녀석이 페니스가 내 항문으로 쑤시고 들어오다니, 천만의 말씀이다. 예전에, 런던의 어프렌티스라는 게이 바에서 굉장한 미소년을 낚은 적이 있다. 나는 그 녀석을 그 무렵에 빌려 살고 있던 포플러 스트리트의 낡은 아파트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마침 내가 그 녀석에게 펠라티오를 해주고 있는 장면을, 불쑥 들어온 토니와 캐롤라인에게 들키고 말았다. 죽고 싶을 만큼 창피했다. 콘돔을 씌운 페니스에 하는 펠라티오는 마치 프라스틱 딜도를 빨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사실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행위였지만 미소년 쪽이 먼저 해줬기 때문에 나도 보답해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테크닉으로 말하자면 미소년의 펠라티오는 정말 능숙했다. 하지만 그 녀석 표정을 보고 있으려니까 웃음이 나와서 전혀 일어서지가 않았다. 그래도 그 녀석은 아주 옛날에 내가 반했던 여자와 아주 비슷해서, 상상력과 집중력을 조금만 동원해도, 고무 속에 사정을 할 수 있어서 나도 놀랐었다. 그 사건에 관해 토니에게 이러쿵저러쿵 놀림을 당했지만, 캐롤라인 쪽은 쿨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부러워서 죽을 뻔했다고 나중에 나에게 털어놓았다. 그 미소년에게 완전히 반해버렸다고 했다. 하여간 그건 그렇다치고, 나는 싫지만 않다면, 끝까지 가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경험을 위해서 말이다. 문제는 나는 여자에게밖에 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자는 조금도 섹시해 보이지를 않는다. 모랄 문제가 아니라 미의식의 문제인 것이다. 그 중년 녀석은 동성애 방면의 처녀성을 가져갈 후보자 명단의 저 아래쪽에서 놀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 작자는 스토크 뉴잉튼에 있는 자기 아파트에서 자고 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흥, 스토크라면 멜의 집과도 가깝겠군- 에라, 될 대로 되라! 중년 남자는 이탈리아인으로, 이름은 조라고 했다. 틀림없이 조반니의 애칭일 것이다. 어떤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에 아내와 자식이 있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거짓말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약 중독자 생활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수많은 거짓말쟁이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도 거짓말의 프로가 되어서, 거짓말을 분별해내는 날카로운 후각도 갖게 되었다. 우리들은 빅토리아 역에서 심야 버스를 타고 스토크로 갔다. 버스는 젊은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약에 취한 자, 술에 취한 자, 파티에 가는 녀석, 파티에 갔다 오는 녀석, 이런 아저씨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녀석들 틈에 뒤섞여 있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 지하에 있는 조의 아파트는 처치 스트리트를 조금 벗어난 곳에 있었다. 처치 스트리트는 주변 지리는 잘 모르지만, 뉴잉튼 그린까지는 가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안은 굉장히 지저분했다. 곰팡이 냄새가 나는 방에는, 낡은 식기장과 옷장이 있고, 한가운데에 커다란 놋쇠 기둥이 달린 침대가 놓여 있었다. 구석 쪽에 부엌과 변소가 붙어 있었다. 이 작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방의 여기저기에 여자아이의 사진이 장식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가족이예요?" "응, 우리 가족이지. 이제 곧 이리로 이사오기로 되어 있네." 그래도 왠지 모르게 아직도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거짓말을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사실을 들어도 거짓말로 들리는 것일까. 그래도??. "빨리 만나보고 싶겠네요." "아, 물론이지." 조가 대답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자, 침대에 들어가라고. 거기서 자면 돼.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들었네. 얼마 동안 묵어도 좋아." 엉겹결에 그 작자를 살펴보았다. 체격은 내가 우세한 편이다. 그래, 어떠냐, 지쳐 있으니까. 나는 침대로 기어올라갔다. 그때 데니스 닐슨(공무원으로 있던 1978~ 1983년 사이에 열다섯 명의 청년들을 아파트로 유인해 토막 살인한 남자- 역주)의 이름이 머릿속을 지나가고, 불안이 힐끗 머리를 내밀었다. 체력적으로는 데니스 같은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던 녀석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녀석에게 교살당하고 토막이 쳐지고, 머리가 큰 냄비에 스튜로 만들어지기 전까지의 얘기다. 닐슨은 옛날에 내가 알고 있는 그린오크 출신의 녀석과 마찬가지로 크리클우드의 실업자 구제소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린오크 친구가 말해주길 어느 해 크리스마스에 닐슨은 직장 동료들에게 대접하려고 만들었다고 하면서 카레를 가지고 온 일이 있었다고 한다. 거짓말일지도 모르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하여간, 그 이야기는 그렇다치고, 나는 너무나 고단했기 때문에 그대로 눈을 감았다. 조가 옆에 누웠을 때는 가슴이 철렁했으나 나를 건드리려고 하는 것도 아니었고, 우리는 둘 다 옷을 모두 입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금새 경계 체제를 해제했다. 그리고 그대로 잠의 세계로 떨어져갔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얼마나 자고 있었는지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입 안이 바짝 말라 있었다. 얼굴이 젖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뺨을 만져 보았다. 유백색의 끈적끈적한 액체가 묻어났다. 뒤를 돌아다보니까, 중년 남자가 내 바로 옆에 드러누워 있었다. 발가벗은 채. 조그만 페니스에서 정액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더러운 늙은이?? 자고 있는 사이에 남의 얼굴에 대고 마스터베이션을 하다니?? 이 음탕한 늙은이!" 자신이 더러운 손수건처럼 느껴졌다. 방금 코를 푼 쓰레기. 갑자기 화가 치밀어올라서 그 작자의 턱을 한방 먹이고, 침대에서 끌어내렸다. 불뚝 튀어나온 배와 둥근 머리. 추악한 뚱보 난쟁이 같았다. 바닥에 몸을 웅크린 조를 나는 두세 번 발로 걷어찼으나 그 작자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이 더러운 늙은이, 빌어먹을??." 나는 방 안을 왔다갔다했다. 그 작자의 울음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침대의 놋쇠 기둥에 걸어놓은 목욕 가운을 벗겨서 그자의 추악한 벌거벗은 몸에 덮어주었다. "마리아, 안토니오." 조는 울먹이며 말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나는 그 작자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서 위로하고 있었다. "됐어. 이제 그만됐다고. 때릴 생각은 없었어요. 누가 내 얼굴에 대고 사정을 한 게 처음이라 열받았을 뿐이라고." 그것은 정말로 정말이었다. "다정하군??. 나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인간일세. 마리아?? 나의 마리아??." 조는 울부짖었다. 얼굴에 입밖에 없는 것 같았다. 새벽녘 박명 속에 빠끔히 뚫린 커다란 블랙홀. 술과 땀과 정액의 후텁지근한 냄새가 났다. "자, 카페에나 가보자고요. 거기서 얘기나 해요. 아침 식사도 하고. 내가 낼 테니까. 리들리 로드의 시장 옆에 좋은 곳이 있으니까. 이 시간이면 벌써 열었을 거예요." 그렇게 권한 것은 애타주의에서가 아니라, 이기주의에서였다. 달스튼에 있는 멜의 아파트가 그쪽 방향이었고, 이 음침한 지하실에서 어쨌든 나가고 싶었다. 조가 옷을 입자 우리들은 밖으로 나왔다. 스토키 하이 스트리트에서 킹스 로드를 터벅터벅 걸어 시장으로 향했다. 카페는 의외로 붐볐지만 그럭저럭 자리는 잡을 수가 있었다. 나는 치즈와 토마토를 얹은 배이글을 주문하고, 중년 남자는 보기에도 맛이 없어 보이는 거무스름한 삶은 고기를 부탁했다. 스탠포드 힐 근처의 유태인들이 즐겨 먹을 것 같은 음식이다. 그 작자는 이탈리아의 이야기를 이것저것 꺼내기 시작했다. 몇 년 전에 그 마리아라는 여자와 결혼했다. 그런데 마리아의 남동생인 안토니오와 조가 관계한 것이 들통난 모양이다. 그런 표현을 쓰면 안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해야 좋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조는 처남 안토니오를 사랑하고 있었을 것이고, 마리아도 사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건 그렇다치고, 나도 마약 관계로 소동을 일으키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치정 관계로 일으키는 소동이라니?? 생각도 하기 싫다. 어쨌든 그 가족 중에는 그 밖에도 카돌릭 신자인 힘깨나 쓰는 남자 형제가 두 명이나 있었고, 더구나 조에 의하면 그들은 네오폴리탄 카모라와 연관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두 사람은 이것은 용납할 수 없는 사태라고 생각했다. 조는 그 가족이 경영하는 레스토랑 밖에서 녀석들에게 붙잡혔다. 그리고 불쌍한 조는 온갖 망신을 당했다. 안토니오도 나중에 같은 꼴을 당했다. 안토니오는 그 뒤에 자살했다. 이탈리아 사회에서는 그런 식으로 치욕을 당하는 것은 살아나갈 수 없을 정도의 불명예라고 조는 말했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느냐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자 조는 안토니오는 열차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 문화권에서 그런 일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긴 하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는 영국으로 도망쳐 와서 여기저기의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일했다. 지저분한 아파트에 살면서 술에 취해 어린 사내나 중년여자를 낚아서는 봉을 잡거나 잡히거나 하며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도 또한 굉장히 비참한 인생이로군! 우리는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하여 멜의 아파트 쪽으로 향했다. 멜의 방에서 불빛이 보이고, 큰길까지 울려오고 있는 레게 음악 소리를 들은 순간, 나의 기분은 단숨에 맑게 개어버렸다. 어젯밤의 파티는 상당히 성대했는지 아직도 난장판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낯익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면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다. 모두 모여 있었다. 데이브. 수지. 닉시(곤드레만드레 술에 취해 있다). 샬린. 탈진해서 뻗어버린 몸뚱이들이 즐비하게 누워 있다. 여자 두 사람이 마주보고 춤을 추고 있었고 샬린도 어떤 사내와 춤을 추고 있었다. 폴과 닉시는 뭔가 피우고 있었다. 하시시는 아니다. 아편이다. 잉글랜드인 마약 중독자인 경우, 약을 주사하는 자보다 담배처럼 피우는 쑥이 더 많다. 주사기라는 것은 스코틀랜드의 명물, 에든버러의 명물 같은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들에게서 1회분을 얻었다. "다시 만나서 반갑다, 렌튼!" 닉시가 내 등을 두들겼다. 그러고는 조가 옆에 있는 것을 깨닫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 영감은 누구지?" 나는 조를 데리고 있었다. 그런 비애로 가득찬 인생담을 듣고 난 뒤에 차마 그대로 내버리고 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도 반가워, 닉시. 이 사람은 조야. 내 친구지. 스토키에 살고 있어." 나는 조의 등을 두드렸다. 조는 토끼장의 쇠망에 코를 갖다대고서 먹이를 달라고 보채는 토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폴과 닉스를 상대로 남자들의 세계 공통어인 축구 이야기- 나폴리와 리버풀과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에 대해서- 를 하고 있는 조를 놓아두고, 방 안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녔다. 나도 축구 이야기로 흥분할 때가 있지만, 의미 없는 따분한 이야기가 끝도 없이 계속되어서 짜증이 날 때도 있는 것이다. 부엌에는 남자 두 사람이 있었는데 인두세의 정당성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잘 알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나, 다른 사람은 제도권의 비겁한 아첨꾼이었다. 나는 이야기에 끼어들어, 아첨꾼에게 말해주었다. "이봐, 당신, 두 가지 점에서 엉뚱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군. 우선 노동당은 금세기 안에 정권을 잡을 가능성이 전혀 없어. 그리고 만에 하나 정권을 잡아도 무엇 하나 아주 조그마한 거라도 달라질 턱이 없을 거요." 그 작자는 우뚝 선 채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 옆에서 다른 녀석이 히죽 웃었다. "그래, 그거야, 아까부터 이 녀석에게 그걸 말하려고 하고 있었지." 녀석은 버밍엄 사투리로 말했다. 나는 부엌을 나왔다. 얼이 빠진 녀석은 아직도 멍하니 서 있었다. 침실에 들어가니까 남자가 여자의 그곳을 핥고 있었다. 그 두 사람으로부터 3피트 가량 떨어진 곳에서, 정키 두 명이 약을 맞고 있었다. 나는 정키를 바라봤다. 거짓말이겠지, 이 녀석들 주사기를 쓰고 있잖아?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에 불과하다. "얌마, 사진이라도 찍을 생각이야?" 하고 약을 만들고 있는 바싹 마른 고딕 펑크풍의 녀석이 말했다. "이봐, 그 잘난 주둥이를 뭉개줄까?" 하고 나는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했다. 녀석은 내게서 고개를 돌리고 약 만드는 일에 전념했다. 나는 한참 동안 녀석의 머리 꼭대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녀석이 헤로인을 주사하는 것을 끝까지 보고 나자, 난 기분이 누그러졌다. 남쪽으로 올 때마다 왠지 이런 식으로 자꾸만 도전적이 되고 만다. 도착하고 2, 3일은 그것이 계속된다. 나 스스로도 이유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설명하기 시작하면 해가 저물어버릴 것 같고, 너무나도 바보스러운 이유이기도 했다. 침실을 나오려고 했을 때, 여자의 신음소리와 남자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당신의 바기나는 어쩌면 이렇게 맛이 있지??." 나는 비틀거리면서 문을 열었다. 그 나직하고 부드러운 속삭임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당신의 바기나는 어쩌면 이렇게 맛이 있지??.' 그 목소리를 듣고, 내가 무엇을 찾아 이렇게 우왕좌왕하고 있는지 확실하게 깨달았다. 이곳은 여자를 고르기에 그렇게 좋은 장소는 아니다. 잠재적인 하룻밤 상대들을 찾으려 해도 비참할 정도로 여자가 없었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이런 새벽에는 괜찮은 여자는 모두 다른 사내들이 먼저 차지했던지 집으로 돌아가버렸을 것이다. 샬린도 어떤 사내와 함께 있고, 스물한 살 생일 선물이니 어쩌니 하면서 언젠가 식보이가 데리고 잤던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마티 펠더만(튀어나온 눈이 특징인 영국의 코미디언- 역주)과 꼭 같은 눈과 음모 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마저도 어느 녀석한테 한창 유혹을 당하고 있다. 태어나서 지금껏 나는 단 두 종류의 파티 외엔 인연이 없었다. 너무 일찍 가서 심심한 나머지 술을 잔뜩 퍼마셔서 좋은 기회를 날려버리든지 너무 늦게 가서 이미 파티가 끝나 있든가. 조는 난로 옆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저 얼굴은 겁을 집어먹고 있는 건지, 단순히 멍청히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나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다시 저 작자의 최루성 인생담을 듣게 될 것 같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죽고 싶을 정도로 우울해졌다. 그래도 역시 우리들은 모두 휴가를 즐기고 있는 쓰레기들이다. 30.'나쁜 피': 데이비의 이야기 알란 벤터스를 처음 만난 것은 '에이즈 바이러스 보균자 모임'이라는 자기 치료 그룹의 모임에서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벤터스는 금새 그 그룹을 빠져나가고 말았다. 아무래도 벤터스는 그다지 건강에 신경을 쓰는 성격이 아니었던 모양으로, 우리들 에이즈 바이러스 보균자가 걸리기 쉬운 '기회주의 감염증'의 하나에 걸리고 말았다. 나는 언제나 '기회주의 감염증'을 꽤 재치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들의 사회에서는 기회주의는 칭찬해야 할 자질이라고 믿어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기회주의'라는 말만 들으면, 파고들어갈 여지가 있는 시장을 재빨리 찾아내는 기업가나,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는 스트라이커를 연상하게 된다. 책략에 능숙한 인간들. '기회주의 감염증'도 그렇다. 그룹 멤버들의 건강 상태는 대충 비슷비슷했다. 항체 검사에서는 양성이었으나, 특별한 증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어떤 모임이나 강렬한 불안이 당장 분출되려는 최후의 선에서 가까스로 억제되어 있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누구나 다 부풀어오르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하고 다른 사람의 임파선을 훔쳐본다. 얘기를 하고 있는 상대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 바로 옆 근처를 헤메고 있는 걸 깨달으면 자꾸만 불안해진다. 그 무렵에는 타인의 그런 태도가 내 마음에 달라붙어 다니던 비현실감을 한층 더 강화시켜 주고 있었다. 내 몸에 닥쳐온 것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검사 결과조차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몸의 컨디션도 좋았고, 아무리 보아도 건강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검사가 잘못된 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두 차례씩이나 검사를 다시 받았지만, 검사 결과는 잘못됐다고 마음속 어딘가에서 줄곧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자기 기만도 도나로부터도 더 이상 나하고는 만나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들은 순간, 소리를 내면서 무너져내렸다. 그래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단호히 자신을 계속 기만하고 있었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신이 믿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만 믿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알란 벤터스가 호스피스(치료 가망이 없는 환자들이 편하게 죽음을 맞도록 도와주는 시설- 역주)에 들어가자 나는 그룹의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애당초 참석해도 마음만 우울해져서, 차라리 그를 방문하는 쪽에 시간을 쓰고 싶었다. 자기 치료 그룹의 카운슬러 중 한 사람인 톰도 마지못해 나의 결단에 동의했다. "당신이 알란을 문병간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데이브. 단 알란 편에서만 말이죠. 내가 지금 걱정하는 것은 당신이예요. 당신은 몸의 컨디션도 좋고 그룹의 목적은 서로 격려하면서 한껏 살아갈 용기를 갖자는 것 아니겠어요? 우리들이 에이즈 바이러스 보균자라고 해서 살아가는 것을 단념해서는 안 되니까??." 이런, 톰, 방금 그거 '오늘의 실언'감이군. "지금 '우리들'이라고 했나요? 그런 말은 당신도 에이즈 바이러스 보균자가 되고 나서 하시지 그래요." 톰의 건강한 핑크빛 뺨이 빨갛게 물들었다. 톰은 감정이 그대로 얼굴에 나타난다. 오랫동안에 걸쳐서 대인 관계의 기술을 철저하게 배웠으니까 마음속의 동요를 드러내거나 무심코 실언하지 않도록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어색한 상황에 부딪쳐도 눈을 피하거나 목소리를 떨지 않도록 말이다. 꼭 귀까지 새빨개지고 만다. "미안해요." 톰이 사과를 했다. 톰에게는 실수를 저지를 권리가 있다. 언제나 사람은 실수를 저지를 권리가 있다고 자신이 항상 말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나의 망가진 면역 시스템에게도 한번 그렇게 말해보시지. "나는 다만 알란과 함께 지내는 일이 당신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까봐 걱정하고 있을 뿐이예요. 알란이 쇠약해져 가는 것을 직접 본다는 건 당신을 위해서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알란은 그룹 활동에도 그다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이 아니었으니까." "그는 우리 중에서 에이즈 바이러스가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라구요." 톰은 나의 신소리를 무시하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톰에게는 주위 사람들의 불쾌한 언동을 무시할 권리가 있다. 우리들 누구에게나 그러한 권리가 있다. 톰은 그렇게 말했다. 나는 톰을 좋아한다. 항상 긍정적이려고 노력하고,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꿋꿋하게 개척해왔다. 그 동안 축 늘어진 몸뚱이를 하우위슨의 메스가 사정없이 절개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나의 일을 우울하고 비인간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혼이 찢겨나가는 것을 자켜봐야 하는 톰의 일에 비한다면, 나의 일 같은 것은 피크닉 같은 것이다. 톰은 그룹의 모임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계속 견뎌내고 있는 것이다. '에이즈 바이러스 보균자 모임'의 멤버는 거의 전원이 헤로인 정맥 주사로 감염된 사람들이다. 80년대 중반경부터 시내의 모든 곳에 생긴 슈팅 갤러리(마약 주사를 맞는 아지트- 역주)에서,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이다. 브레드 스트리트의 의료 기구 도매업자가 도산하여 새로운 주사 바늘이나 주사기가 품귀된 이래, 그들은 몇 개 안되는 주사기를 돌아가면서 사용했다. 내 친구 중에 리스의 중독자들과 사귀는 사이에 자신도 헤로인을 맞게 된 토미라는 녀석이 있다. 그 리스의 마약 중독자들 가운데 하나인 마크 렌튼은 내가 목수로 일하고 있었을 때, 같은 현장에서 일하고 있던 동료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마크는 몇 년씩이나 헤로인을 계속 맞고 있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한 아직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고, 헤로인 따위엔 손 한 번 댄 적 없는 나는 감염되었다. 그러나 마크는 원칙이 아니라 예외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에이즈 바이러스 보균자 모임'에는 정키가 절대 다수이다. 모임에는 언제나 팽팽한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정키들은 그룹에 두 사람 있는 호모들을 원망하고 있다. 그들은 애당초 에든버러의 마약 사회에 에이즈 바이러스가 퍼져나간 것은, 호모 집주인이 집세 대신에 어떤 힘 없는 정키를 강간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나와 두 명의 여성- 그 중 하나는 그 자신은 약을 하지 않지만 파트너가 정키였다- 은 호모와 정키 양쪽을 다 원망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호모도 정키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처음 얼마 동안, 우리들 자신은 아무 죄도 없는데 감염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그때는 정키나 호모들 탓으로 해두면 속이 편했다. 그러나 포스터를 눈으로 보고, 팸플릿을 읽고, 나는 변해갔다. 펑키 전성기에 섹스 피스톨스가 이렇게 노래했었다. '죄 없는 인간은 없다.'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다. 또 한 가지 덧붙여둬야겠다. 죄 없는 인간은 없으나 다른 인간보다 죄가 깊은 인간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알란 벤터스의 일이 떠오른다. 나는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뉘우칠 기회를 말이다. 그놈에게는 너무도 과분하다고 생각되지만. 어떤 모임에서 나는 최초의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알란 벤터스의 영혼을 내 손에 장악할 도정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나는 자신이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는 걸 알면서 무방비한 섹스를 한적이 있다. 지금 와서 그것을 후회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방 안은 쥐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참가자들은 불안한 듯이 의자에서 자리를 고쳐 앉거나 다리를 다시 포개거나 하고 있었다. 이윽고 린다가 고개를 흔들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톰이 방에서 나가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린다는 분노를 담은 시선을 똑바로 나에게 향하고 아니,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나서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린다의 분노 따위는 거의 안중에도 없었다. 벤터스의 얼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벤터스는 언제나처럼 특유의 따분해하는 듯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한 순간, 희미한 미소가 그의 입술에 떠오르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데이비, 큰맘 먹고 잘 털어놓았군요.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톰이 엄숙하게 말했다. 그렇지도 않아. 이 얼간아. 왜냐하면 새빨간 거짓말이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어깨가 상당히 가벼워졌을 줄로 생각해요." 톰은 나에게 뭔가 더 말을 하라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할 수 없이 나도 주어진 기회를 고맙게 이용하기로 했다. "아, 정말로 그래요, 톰.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던 것만 해도. 너무 심한 짓을 했어요?? 나도 용서를 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아??." 또 한 사람의 여성인 마조리가 경멸하듯이 나에게 뭐라고 말했으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 동안에도 린다는 울고 있었다. 그러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그 자식에게서는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놈의 이기적인 태도와 도덕 관념의 결여에 구역질이 났다. 사실은 그때 그 자리에서 그 녀석을 맨손으로 찢어 발겨주고 싶었다. 그러나 녀석을 파멸로 몰아넣을 멋진 계획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나는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눌렀다. 그의 육체는 병원균이 가져갈 것이다. 아무리 사악한 힘일지라도 일단은 그것이 병이 지향하는 승리인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향하는 승리는 보다 무겁고, 보다 의미가 깊은거였다. 나는 그의 혼이 갖고 싶었다. 영원불멸하다고 믿어지고 있는 혼에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새겨줄 생각이었다. 아멘. 톰이 참가자를 빙 둘러보았다. "누군가 데이비에게 공감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죠?" 오랜 침묵 뒤에- 그 동안에도 줄곧 내 눈은 아무런 감정도 나타내지 않는 벤터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정키인 곡시가 불안한 모습으로 무엇인가 웅얼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엄청난 기세로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난 벤터스가 말하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데이비, 고백해주어서 고마워요?? 나도 같은 짓을?? 나도 같은 짓을 저질렀어. 아무에게도 폐를 끼친 일이 없는, 죄 없는 여자에게?? 모든 것이 밉기만 했어요. 그것뿐이야?? 그러니까 그?? 생각했어요, 알게뭐야, 잃어버릴 게 아무것도 없는데?? 스물세 살이나 돼갖고도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망할 놈의 직업조차 없었어?? 아무러면 어때, 하고?? 여자에게 에이즈 바이러스 이야기를 했더니 새파랗게 질렸어요." 곡시는 어린애처럼 흐느껴 울었다. 이윽고 내 얼굴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미소는 본 적이 없었다. "?? 하지만, 괜찮았어. 그 아가씨도 검사를 받았거든. 반년 동안 세 번이나. 그녀는 감염되지 않았어요??." 같은 상황에서 감염된 마조리가 우리들을 욕했다. 그때, 그 일이 일어났다. 벤터스가 눈을 돌려서 나에게 미소를 보낸 것이다.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분노는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분노는, 깊은 고요함, 강렬한 청량감으로 희석되어 있었다. 나도 미소를 보냈다. 수면에 눈만 내놓고 강물을 마시는 짐승을 엿보고 있는 악어와 같은 기분을 맛보면서. "아니야?? 하고 곡시가 마조리의 자비를 구걸하듯 처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게 아니예요?? 그녀의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것은 내 검사 결과를 기다릴 때보다 훨씬 더 무서웠어?? 당신은 이해 못할거야?? 나는?? 그러니까, 나는?? 그런 게 아냐??." 톰이 떨리는 목소리로 두서없이 늘어놓는 곡시를 거들줬다. "자신이 감염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깊은 분노와 슬픔, 그리고 고통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이 말이 계기가 되어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장황하게 이어지는 토론이 급속히 열기를 띠게 되었다. 톰은 이렇게 해서 '현실에 직면하는' 일에 의해 '노여움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치료 과정의 하나로써 분명히 그룹의 몇명 정도에게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으나, 나는 피곤하고 우울해질 뿐이었다. 그것은 아마 그 무렵, 내가 은밀히 품고 있던 목적이 그들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개인의 책임에 관한 논의가 계속되는 동안, 벤터스는 언제나처럼 유익하고, 계몽적인 코멘트를 던져줬다. "말도 안 돼." 누군가가 열심히 무엇인가를 주장할 때마다 그놈은 그렇게 외쳤다. 그리고 톰도 반드시, 어째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냐고 물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니까." 벤터스는 그렇게 말하고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톰은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타인의 의견에 대한 또 다른 인간의 견해일 뿐이지." 그러면 톰은 그럼, 알란, 당신은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느냐고 되묻는다. 벤터스는 나하고는 관계가 없다고 대답하든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다는 식으로 말한다. 정확하게 뭐라고 말했는지는 기억 나지 않지만. 그러면 톰은 이번에는 이렇게 묻는다. 그렇다면, 왜 이 모임에 나옵니까? 벤터스는 대답한다. "그렇군요, 그럼 돌아가봐야겠군요." 벤터스가 나가자 방의 분위기가 단숨에 확 달라졌다. 마치 누군가가 지독한 방귀를 뀌고 난 뒤, 다시 자기 항문으로 빨아들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 놓고선 다음 모임에는 반드시 참석을 한다. 남을 경멸하는, 자기 혼자 잘났다는 표정을 짓고서 마치 자신만을 불사신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른 멤버가 긍정적으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하면 그의 희망을 꺽어놓고는 즐거워했다. 그룹으로부터 쫓겨나는 일이 없도록 적당히 자제하지만 모두를 의기소침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할 정도의 일격을 가했다. 벤터스의 몸을 좀먹는 병 같은 것은, 그 일거러진 마음에 서식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내가 모임에 참석하는 유일한 이유가 그를 관찰하기 위한 거라는 것을 모르는 벤터스는, 나를 자기와 동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모임에서 거의 입을 열지 않았고 다른 멤버가 뭐라고 이야기할 때는 일부러 빈틈없이 경멸하는 듯한 시선을 던져 놓았다. 그런 태도를 지속한 덕택에 벤터스와 친구가 될 밑바탕이 완성되었다. 그 녀석과 친구가 되는 것은 간단했다. 아무도 녀석을 좀더 잘 알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녀석과 친구가 되고 싶은 인간 따위는 달리 없었기 때문에, 나는 부전승으로 녀석의 친구라는 지위를 손에 넣었다. 우리들은 함께 술을 마시게 되었다. 저쪽은 무모하게 마셔대고, 나는 신중하게 양을 조절했다. 계통을 세워 조금씩 정보를 축적해나가면서, 차츰 그의 생활 구석구석을 파악하게 되었다. 나는 스트라스클라이드 대학의 화공과를 졸업했는데, 벤터스를 연구할 때와 같은 엄밀함과 열의를 가지고 화학을 연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벤터스가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은 에든버러의 감염자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주사기로 헤로인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에이즈 바이러스 양성으로 진단받기 전에 헤로인을 끊은 상태였으나, 진단을 받은 현재, 이번에는 구제할 길 없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있었다. 몇 시간씩이고 계속 술을 마셔대면서, 이따금 토스트 샌드위치를 집어먹는, 무모하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일상생활을 감안한다면, 온갖 감염이 얼마 뒤 저항력이 떨어진 몸을 습격해서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것이 틀림없다. 둘이서 술을 마시고 돌아다니는 사이, 나는 그의 생명은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생각한 대로 되었다. 얼마 뒤에, 그의 몸을 무수한 감염이 좀먹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까지와 똑같은 생활을 계속했다. 이윽고 호스피스에 다니게 되었다. 처음에는 외래 환자로 다녔다가 마침내 입원했다. 내가 호스피스에 갈 때는 언제나 비가 내리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얼어붙을 것 같은, 좀처럼 그칠 것 같지 않은 안개비. 옷을 몇 벌씩 껴입어도 ??선처럼 꿰뚫고 들어오는 바람. 추위는 폐렴과 같고 폐렴은 죽음과 같다. 그러나 그 무렵의 나는 그런 것은 거의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지금은 물론 몸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그래도 그때의 나에게는 목숨과 맞바꿔서라도 이룩하고 싶은 사명이 있었다. 꼭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었다. 호스피스의 건물은 꽤 세련돼 보였다. 회색의 블록 위에 노랗고 예쁜 벽돌을 깔아놓았다. 하지만 현관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에는 노란 벽돌이 없었다. 알란 벤터스를 문병갈 때마다 최후의 방문일이, 그리고 나의 복수가 성취되는 날이 조금씩 가까워오고 있었다. 얼마 뒤, 그의 마음속으로부터 사죄를 이끌어내는 것은 이미 시간적으로 무리라고 확신하는 날이 찾아왔다. 나는 복수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벤터스의 사죄를 듣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시기도 있었다. 만일 사죄의 말을 들을 수가 있었더라면, 나는 성선설을 믿으며 죽게 되었을 것이다. 벤터스의 생명력을 담고 있는 뼈와 가죽만으로 된, 시들어버린 그릇 안에는 어떠한 영혼도 깃들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인간애 따위는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내가 일하는 병원 동료인 질리안의 말에 의하면, 쇠약하고 썩어 문드러져가는 육체는 혼을 뚜렷하게 부각시켜서, 우리들 유한한 존재의 눈에도 보이게 만든다고 했다. 질리안은 매우 신앙심이 깊은 여자였으니 그녀다운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법이다. 내가 정말로 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혹시 어쩌면 사죄가 아니라 역시 복수만을 추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벤터스가 갓난애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어도 나는 역시 계획대로 추진했을지도 모른다. 머릿속에서 이렇게 논의를 하는 버릇은 톰의 카운슬링을 받은 부산물이다. 톰은 기본적인 진리를 강조했다. 당신은 아직 죽어가고 있지 않다. 그때가 찾아올 때까지는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도, 눈앞의 현실에 힘을 쏟음으로써 잊을 수가 있다고 하는 기본적인 진리를 강조했다. 그 무렵의 나는 그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톰이 말한 대로라고 믿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인간은 죽을 때까지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죽음이 시시한 것이었을 때에 대비해서- 나는 십중팔구 그렇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인생을 될 수 있는 대로, 만족할 수 있는 즐거운 체험으로 만들어두는 편이 이득이다. 병원의 간호사는 내가 옛날에 사귀었다가 흔해빠진 비참한 이별을 한 게일과 조금 비슷했다. 게일같이 차가운 표정의 여자였다. 그러나 간호사의 경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직업상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게일의 경우에는, 그녀의 쌀쌀함에 이유 따윈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게일과 닮은 그 간호사는 신경질적이면서도 진지하고, 동정이 담긴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알란 씨는 상당히 쇠약해졌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누지 않도록 해주세요." "네, 알았습니다." 나는 상냥하고 슬픈 미소를 지어보였다. 간호사가 환자를 걱정하는 직업인을 연기하고 있으니까 나도 친구를 걱정하는 문병객을 연기해두는 편이 나으리라. 나는 그 역할을 꽤 능숙하게 연기했다고 믿는다. "당신과 같은 좋은 친구가 있어서 알란 씨는 행복하겠어요"하고 간호사가 말했다. 알란과 같은 빌어먹을 인간에게 한 사람이라도 친구가 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빤히 들여다보였다. 나는 적당히 얼버무려놓고 작은 병실로 들어갔다. 알란은 상태가 몹시 나쁜 것 같았다. 나는 걱정이 되었다. 이 녀석은 이번 주말까지도 살 수 없을지 모른다. 그 동안 이 녀석을 위해 준비해둔 끔찍한 운명을 빠져나가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절대로 타이밍을 놓치면 안 된다. 처음 얼마 동안은 알란 벤터스가 엄청나게 육체적인 고통을 맛보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 나의 기쁨이었다. 나는 병을 앓더라도 저런 모습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때가 찾아오면 차고에 자물쇠를 걸고, 엔진을 걸어놓을 생각이다. 그러나 인간 쓰레기인 벤터스에게는 스스로 인생에 작별을 고할 만한 용기가 없다. 주위 사람들에게 최대한으로 폐를 끼치기 위해서라도 최후의 최후까지 삶에 매달릴 놈이다. "알란, 몸은 좀 어때?" 나는 물었다. 참으로 바보스러운 질문이다. 관습이라는 것은 이러한 어색할 때야말로 그 바보스러움을 드러내보인다. "그저 그래??" 벤터스는 쉬익, 하며 괴로운 듯이 호흡을 했다. 정말이야, 알란? 아픈 곳은 없어? 조금 야윈 것 같구나. 그래, 네 몸 속을 돌아다니고 있는 조그만 벌레 때문이겠지. 디스프린이라도 먹고 얼른 침대로 들어가는 게 좋을 거야.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 가뿐해져 있을 테니까 말야. "어디 아픈 곳은 없나? 하고 나는 기대하면서 물었다. "없어?? 모르핀이 있으니까?? 숨쉬기가 괴로울 뿐이야??."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야윌 대로 야위어서 뼈만 남은 그의 손가락이 내 손을 잡았다. 갑자기 유쾌한 기분이 솟구쳐올랐다. 움푹 들어간 눈을 감고 있는, 해골 같은 그의 얼굴에 대고 큰소리로 비웃어주고 싶어졌다. 아아, 불쌍한 알란! 간호사 아가씨, 나는 이 녀석을 잘 알고 있다고요. 이 녀석은 얼간이에 구제불능의 골칫거리라고요. 나는 웃음을 참으면서 벤터스가 숨을 쉬려고 헐떡거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젠 괜찮아, 알란. 내가 있으니까." "데이비, 너는 정말 좋은 친구야??." 알란은 심하게 기침을 했다. "이렇게 되기 전에 사귈 수 있었다면??." 그러고는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그런 건 이쪽에서 사양이다, 이 쓰레기 같은 새꺄??." 나는 그의 감겨진 눈꺼풀을 향해서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뭐라고 말했어??." 알란은 피로와 모르핀으로 몽롱해져 있었다. 게으른 새끼. 언제나 침대 퍼질러 있군. 이런 답답한 곳에 틀어박혀 있지 말고 이따금 밖으로 나가서 운동을 하는 게 좋을 거야. 조깅으로 공원 한 바퀴. 팔굽혀펴기 50회. 토끼 뜀뛰기 20회. "이런 상황에서 만나게 되어서 유감이라고 말했어." 벤터스는 만족스러운 듯이 으음 하고 신음하더니 잠에 떨어졌다. 나는 뼈만 앙상한 그의 손가락을 내 손에서 떼어냈다. 즐겁지 않은 꿈이라도 꾸거라, 이염병할 녀석! 간호사가 들어와서 내 친구의 상태를 확인했다. "예의없는 녀석이군. 병문안 왔는데 잠이 들어버리다니." 나는 그렇게 말하고 빙긋이 웃으며 시체 같은 벤터스를 내려다보았다. 간호사는 억지로 웃었다. 호모의 블랙유머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정키나 혈우병 환자인가? 그거야 간호사가 나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느냐고 달렸겠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그녀의 자유다. 나는 나 자신을 '복수의 천사'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구제불능의 인간을 그냥 죽여버린다면, 은혜를 베풀어주는 거나 같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궁리해냈다. 이제 곧 죽을 것을 알고 있으며, 더구나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 죽어가는 인간을 괴롭히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나는 벤터스와 얘기를 하고 있다가, 아니 벤터스가 지껄이는 것을 듣고 있다가, 그 방법을 찾아냈다. 죽어가는 인간은 살아 있는 인간을 통해 괴롭히면 된다. 그 녀석이 사랑하고 있는 인간을 통해서. "누구나 누군가를 사랑할 때가 있다"고 하는 노래가 있으나, 알란 벤터스는 그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인간 같았다. 그는 한마디로 인간을 싫어했고, 주위 사람들도 그 이상으로 그를 싫어했다. 그는 인간 관계를 모두 적대 관계로 파악하고 있었다. 아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악의에 찬 어조로 '사기꾼 새끼'라든지 혹은 조롱하듯이 '병신 새끼'라고 불렀다. 어느 쪽에 분류되느냐는 벤터스와 그 인간의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속이고, 이용하고, 괴롭혔느냐로 결정된다. 여자들은 경계선이 불분명한 두 가지 항목으로 나뉘어졌다. '생선 요리 같은 ??지'의 여자와, '찢어진 소파 같은 ??지'의 여자 둘 중의 하나였다. 벤터스는 여자를, 그의 말을 빌리면 '털 달린 구멍' 이상의 존재로는 보지 않았다. 유방과 엉덩이에 관한 모욕적인 언사조차도 이 친구가 굉장히 시야가 넓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나는 낙담했다. 이런 자식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나는 기다렸다. 그리고 그 인내는 보답을 받게 되었다. 비열한 개자식인 알란 벤터스에게도 사랑하는 인간이 꼭 한 사람 있었다. '그 꼬마가' 하고 말할 때의 목소리 톤의 변화. 틀림없다. 나는 신중하게 그로부터 정보를 이끌어냈다. 그에게는 웨스트 헤일즈에 사는 여자에게서 얻은 다섯 살 된 아들 케빈이 있었다. 그는 아들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그 여자를 '암소'라고 불렀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마음속 어딘가에서 그 여자를 사랑스럽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아이는 알란 벤터스가 얼마나 상처입을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성장한 아들의 모습을 절대로 볼 수 없다. 하지만 '꼬마'를 이처럼 사랑하고 있다. 그런 것을 얘기할 때 벤터스는 평상시의 자기와는 딴판으로 감정에 사로잡혀 고뇌에 몸부림쳐댄다. 벤터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자식이었다. 자신은 아들을 통해 어떻게 하든 삶을 이어나갈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벤터스의 전 애인 프란시스의 생활에 끼여드는 것은 간단했다. 프란시스는 벤터스를 미워하고 있었고, 그를 욕하고 다녔다. 그 말을 듣고 더욱더 그녀가 사랑스러워졌다. 단 이런 조건이 아니라면 프란시스 따위에게는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프란시스에 대해서 면밀히 조사한 후, 나는 촌스런 디스코텍에서의 '우연한 만남'을 연출했고, 매력적이고 인정이 많은 새로운 연인 후보를 연기했다. 물론 돈도 아끼지 않고 썼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는 나에게 열중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남자들에게 제대로 대접받은 경험이 없었다는 것은 보면 알 수가 있고, 그리고 아이를 데리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그녀는 현금 같은 것은 한참 동안 구경도 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최악이었던 것은 막상 섹스를 하게 되었을 때였다. 물론 나는 콘돔을 쓰겠다고 말했다. 이 단계에 이르기 전에 그녀는 벤터스와의 일을 나에게 털어놓았다. 나는 고결하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나는 당신을 신뢰하고 있으며 언제든지 기꺼이 콘돔 없이 섹스를 하겠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불안한 마음을 남기고 싶지 않다. 그래, 솔직히 말해두지 않으면 안되겠군. 나는 지금까지 여러 명의 여성과 잔 적이 있다. 벤터스라고 하는 사람과의 경험을 감안한다면, 지금도 그러한 불안감은 남아 있을 것 아닌가? 프란시스가 울기 시작했을 때는, 아뿔싸, 다 틀렸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눈물은 감사의 눈물이었다. "당신은 정말로 좋은 사람이야, 데이비. 자기도 그걸 알고 있어?" 프란시스는 말했다. 만일 나의 목적을 알고 있었다면, 그런 황송한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으나 벤터스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그런 감상은 금세 사라졌다. 이 정도면 최후까지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벤터스의 상태가 악화되었거나 붙어 있는 간호사가 없을 때를 골라서 프란시스와 밀회를 했다. 벤터스의 몸에 무수한 병들이 북적거리면서 그를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그 침략의 선봉은 폐렴이었다. 헤로인 루트로 감염된 사람들은 모두 그렇지만, 벤터스 역시 호모들이 자주 걸리는 끔찍한 피부암으로는 발전하지 않고 있었다. 폐렴의 최대 라이벌은 목구멍과 위장으로 퍼져나간 칸디다증(진균류인 칸디다가 정도 이상으로 번식하여 생기는 병- 역주)이었다. 칸디다증이 녀석을 끝장내는 도구가 되는 걸 전혀 바라지는 않지만, 내가 재빨리 계획을 진행시키지 않으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벤터스는 급속히 쇠약해져가고 있었다. 한때는 나도 초조해할 만큼 급격히 쇠약해져갔다. 나의 계획이 완성되기 전에 저 세상으로 가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고 걱정될 정도였다. 그러나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그야말로 절호의 타이밍으로. 지금 생각하면, 그토록 완벽한 타이밍이었던 것은 운이 절반, 나의 멋진 계획이 절반이었을 것이다. 벤터스는 뼈와 가죽만 남은 쭈굴쭈굴한 살덩어리가 되어서도 계속 삶에 매달려 있었다. 의사는 "이제 언제 사망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하고 말하고 있었다. 프란시스는 아이를 맡길 정도로 나를 신뢰하게 되었다. 나는 이따금 친구들하고 외출을 하라고 권했다. 그래서 프란시스는 아이와 나를 아파트에 남겨두고 토요일 밤에 여자 친구들과 인도 요리를 먹으러 갈 약속을 했다. 나는 그 기회를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그 중요한 날을 앞에 둔 수요일, 나는 부모님의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내 건강에 대해서 얘기해두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양친을 만나는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모님은 옥스갱 애비뉴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 어렸을 때는 굉장히 모던한 동네였던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볼품이 없는 지나간 시대의 유물 같은 빈민가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가 문을 열어 주었다. 한순간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동생이 아니고 나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지갑을 꺼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안심을 한 듯 기쁜 얼굴로 나를 맞아들였다. "어머, 이게 누구야?" 어머니는 노래하듯이 말하면서 앞장서서 서둘러 집 안으로 되돌아갔다. 서두르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코로네이션 스트리트)를 할 시간이었던 것이다. 마침 마이크 볼드윈이 드디어 동거중인 애인 알마 세즈웍의 추궁을 받고, 돈 많은 미망인 재커 잉그램에게 반했다고 고백하는 장면이었다. 마이크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다. 무엇인가 다른 힘에 조종되어, 사랑의 노예가 된 그에게는 이미 달리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는 것이다. 나는 톰의 말을 빌린다면, 그에게 공감을 느꼈다. 나는 증오의 노예였다. 사랑과 똑같이 가혹한 대가를 요구하는 주인을 가진 노예다. 나는 소파에 앉았다. "어, 이게 누구야?" 아버지는 (이브닝 뉴스)지에 시선을 떨어뜨린 채 어머니와 같은 말을 했다. 그러고는 지겹다는 듯이 물었다. "그래, 또 무슨 일이냐?" "별 일 아니예요." 별 볼일은 없어요, 아빠. 맞아. 내가 에이즈 바이러스 검사에서 양성이었다고 얘기했던가? 유행의 최첨단이죠? 최근에는 면역 시스템을 망가뜨리지 않으면 뒤떨어졌다는 얘기를 듣는다고요. "2백만 명의 중국인. 즉 2백만 명의 부랑자.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면 그 많은 인간들이 우리나라로 흘러들어올 거라는구나." 어버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러운 난쟁이들이 2백만이라??." 나는 아버지가 뿌린 미끼에는 걸려들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아버지가 언제나 '훌륭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던 일을 그만두고 대학에 들어간 이래 나는 학생 혁명가를 연기하고, 아버지는 그것에 대해서 완고한 보수주의자를 계속 연기해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게임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에 나는 내 역할을 졸업했으나, 아버지는 오히려 그것에 매달리게 되었다. "아빠는 파시스트로군요. 알고 계세요. 페니스가 발달 안 하면 그렇게 된다더군요"하고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고정용 기구 바이스같이 어머니의 관심을 장악하고 있던 (코로네이션 스트리트)의 마수에서 잠깐 풀려난 어머니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런 엉텅리 같은 말은 하는 게 아니다. 아빠는 그 방면의 능력은 벌써 증명해보였으니까 말이다." 아버지가 시비조로 반박했다. 내가 25세가 되었는데도,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없다는 것을 비꼬고 있는 것이다. 한순간 아버지가 실물을 꺼내서 내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했을 정도의 기세였다. 결국 그런 짓은 하지 않고 나의 농담에 대해서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아버지기 좋아하는 화제로 돌아갔다. "2백만 명씩이나 중국인들이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니기 시작하면 어떻게 한다?" '중국'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 집 앞거리에 먹다 만 중국 요리 도시락통이 흩어져 있는 광경이 상상됐다. 상상하는 것은 간단하다.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때때로 볼 수 있는 광경이죠." 나도 모르게 그 말을 입에 담고 있었다. "그렇지?" 내가 좋은 것을 지적했다는 듯이 아버지가 말했다. "거기다가 다시 2백만 명이 밀려들어오는 거야. 어떻게 생각하니?" "2백만 명 전원이 칼레도니안 플레이스로 밀려들어오는 것은 아니잖아요. 실제로 벌써 달리 빈민가도 꽉 차 있을 텐데요." "웃고 싶으면 웃어도 좋아. 일자리는 어떻게 하고? 지금도 2백만 명이 실업 수당으로 먹고살고 있단다. 집은? 골판지 상자 속에서 살고 있는 부랑자라면 이미 짜증스러울 정도로 많이 있잖느냐." 아아, 머리가 아파온다. 고맙게도 연속극의 수호자, 전능하신 우리 엄마가 끼여들었다. "두 사람 모두 조용히 좀 해요. 텔레비전을 보고 있잖아요!" 미안해요, 엄마. 엄마의 에이즈 바이러스 아들은 자기 멋대로라니까요. 알고 있어요. 마이크 볼드윈이 장래를 좌우할 중대한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는데 엄마를 방해하다니! 시들어버린 폐경기의 창녀는, 두 사람의 그로테스크한 호색한 중에서 어느쪽을 잠자리 상대로 고를까요? 기대하시라! 에이즈 바이러스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아버지는 그런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진보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어쨌든 나는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톰이 언제나 말하지 않았는가! 자신의 기분에 민감해 있으라고. 나의 기분은 이렇다. 아버지는 18세에 결혼하고, 내 나이가 되었을 때는 벌써 빽빽 우는 아이가 네 명이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는 나를 게이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판에 에이즈 건을 들고 나온다면 그 의심을 더 한층 강화시켜줄 뿐이다. 고백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하고 그 대신 맥주를 한 깡통 마시고, 아버지와 작은 소리로 축구 얘기를 했다. 아버지는 1970년 이래, 축구장으로 구경하러 간 적이 없다. 컬러 텔레비전이 아버지의 다리 대신 가주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0년, 위성방송이 등장해서, 아버지의 다리는 게을러질 대로 게을러졌다. 그래도 아버지는 축구의 제1인자를 자처하고 있었다. 타인의 의견 따위는 귀기울일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견해에 반론을 해보았자, 시간 낭비였다. 하지만 정치에 관해서는 어떤 견해를 열나게 주장하다가 그것과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하고는, 어느 틈엔가 그 정반대의 의견을 똑같이 열나게 주장하곤 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의견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얼마 안 있어 곧 이쪽의 의견을 대변해준다. 나는 한참 동안 앉아서 계속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고는 적당한 구실을 대고 돌아가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공구 상자를 확인했다. 이전에 목수로 일하고 있을 때 모아놓은, 수많은 성능 좋은 공구들. 토요일이 되자 그것을 끌어안고 웨스트 헤일즈에 있는 프란시스의 아파트로 갔다. 몇 가지 해놓을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란시스가 전혀 모를 일도 한 가지 있었다. 프란시스는 친구와 함께 식사를 하러 나갈 예정이라 매우 들떠 있었다. 준비를 하면서도 쉴새없이 지끌여댔다. 나는 '응'이나 '그래?'처럼 들리는 웅얼거리는 소리 말고 다른 대답을 하려고 했으나, 해야 할 일을 이것저것 생각하느라고 머리가 바빴다. 프란시스가 '얼굴을 덧씌우는' 동안, 이따금 일어나서 창문 밖을 내다보는 것 외에는, 잔뜩 긴장한 채 침대에 구부정하게 걸터앉아 있었다. 한평생 정도의 시간이 흘러갔다고 생각될 무렵, 인적이 없는 황량한 거리에 엔진 소리가 울려퍼졌다. 나는 창가로 달려가서 들뜬 목소리로 선언했다. "택시가 왔어!" 프란시스는 잠들어 있는 아이를 나에게 맡기고 출발했다. 모든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나는 벤터스 이하의 인간이 아닐까? 어린 캐빈. 우리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다. 메도우스 페스티벌에 데리고 간 적도 있고, 커크칼디 리그 컵 우승 결정전도 관전했고, 어린이 박물관에도 갔었다. 별로 대수로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진짜 아버지보다 내가 이 불쌍한 아이를 훨씬 더 많은 장소로 데리고 돌아다녀준 것 같다. 프란시스도 그런 말을 했다. 나는 죄책감에 가득 차 있었으나, 그것은 현상한 사진을 본 순간 엄습해온 전율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현상액 속에서 영상이 뚜렷하게 떠올라왔을 때, 나는 공포와 양심의 가책에 몸을 떨었다. 사진이 마르기를기다리면서 커피를 끓이고, 발륨을 두 알 삼켰다. 그리고 사진을 손에 들고 벤터스를 만나기 위해 호스피스로 향했다. 그는 육체적으로는, 생명의 불이 거의 꺼진 상태였다. 생기를 잃은 그의 눈을 들여다봤을 때는, 최악의 사태를 각오했다. 젊어도 치매에 걸리는 에이즈 환자가 있다. 벤터스도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만일 그가 치매에 걸려 있다면 복수의 기회도 없어지고 만다. 고맙게도 벤터스는 나의 기척을 알아챘다. 처음에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은 것은, 아마도 투여된 약물의 부작용 때문일 것이다. 곧 그의 눈이 나를 알아보았다. 언제나처럼 교활한 눈으로 뚫어지게 응시했다. 나에 대한 경멸이, 밉살스러운 웃음에 스며나와 있는 것을 느꼈다. 최후의 최후까지 자신을 떠받들어주는 얼간이를 찾아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서 그의 손을 잡았다. 깡마른 손가락을 한 개씩 한 개씩 꺾어서, 그의 몸 안의 구멍이라는 구멍에 모두 쑤셔넣어주고 싶었다. 내가 캐빈에게 한 행위도 다른 모든 일도 이 녀석 탓이라고 생각했다. "데이비, 자네는 참으로 좋은 친구야. 이럴 때 만나게 돼서 유감이지만." 내가 올 때마다 말하는 진부한 대사를 되풀이하고, 그는 쉬익 쉬익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손에 힘을 줬다. 벤터스는 무슨 일이냐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잘됐다. 이자식은 아직도 육체적인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주려고 하는 아픔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고나 할까. 나는 분명하게, 그리고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주사기로 인해서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고 얘기했었지. 그것은 거짓말이야. 나는 네게 많은 거짓말을 했어." "그게 무슨 말이지, 데이비?" "일단 들어보라고, 알란. 내 병은 연인한테 옮은 거야. 그녀는 자신이 감염됐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 어느 날 밤 펍에서 만난 어떤 개새끼한테 병이 옮았던 거야. 그녀는 속아 넘어가기 쉬운 성격에다 상당히 취해 있었지. 그놈은 자기 집에 가면 좋은 약이 있다고 말했어. 그래서 그녀는 따라갔던 거야. 그놈의 아파트로 말이야. 그 자식은 그녀를 강간했어. 어떤 짓을 했는지 짐작이 가겠지?" "데이비?? 도대체 무슨 말을???" "얘기해줄 테니까 잘 들어보라고. 그 자식은 칼로 위협하고 그녀를 로프로 꽁꽁 묶었지. 그렇게 해놓고 앞뒤로 강간을 하고 펠라티오까지 시켰어. 그녀는 심한 충격과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입었지.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기지?" "모르겠어?? 무슨 빌어먹을 말을 하고 있는지?? 데이비??." "시침떼지 말라고. 도나를 기억하고 있겠지? '서던'도 생각나지?" "난 술에 취해 있었어?? 너도 같은 짓을 했다고 말했잖아??." "그건 거짓말이야. 쇼한거지. 내 정액에 그런 것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일어설 것도 일어서지 않는다고??." "곡시?? 그 녀석의 일을 기억하고 있겠지???" "시끄러워. 곡시는 내가 제공한 기회에 덤벼든 것뿐이야. 그러나 너는 너에게도 같은 기회가 있었는데도 팬터마임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잠자코 앉아 있었다고." 내 입에서 떨어진 침방울이 놈의 주름살투성이의 이마를 덮은 땀과 섞여 사라져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굉장히 괴로웠했지. 하지만 의지가 강한 여자였어. 웬만한 여자 같으면 좌절해버렸을 거야. 그러나 도나는 깨끗이 털어버리려고 했어. 가진 건 좆밖에 없는 쓰레기 같은 자식에게 왜 인생을 깡그리 짓밟히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말은 쉽지.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해냈어. 다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 한 가지 있었지. 문제의 그 놈이 에이즈 바이러스 보균자라는 사실을. 얼마 뒤, 그녀는 다른 남자와 만났어.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지. 남자는 그녀를 좋아했지만 그녀가 남성이나 섹스에 마음과 몸을 열 수 없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지. 그렇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안 그래?" 나는 그 녀석의 몸에서 생명이라고 불리는 사악한 힘을 당장이라도 쥐어짜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기다려야 한다고 나 자신에게 타일렀다. 아직 멀엇어. 이 쓰레기 같은 자식아. 나는 심호흡을 하고 내가 느꼈던 공포를 다시금 맛보면서 말을 계속했다. "두 사람은 그 문제를 극복했어. 한동안은 즐거운 나날이 계속됐었지. 얼마 뒤, 그녀는 자신을 강간한 놈이 에이즈 바이러스 보균자였다는 것을 알았어. 그리고 자신도 양성이라는 것을. 그녀라고 하는 살아 있는 인간, 도덕을 존중하는 인간에게 가장 쓰라렸던 것은, 새로운 연인마저도 감염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였어. 모든 것이 네놈 탓이야, 이 강간범 새끼! 내가 바로 그 새로운 연인이야. 나라고. 여기 있는 이 얼간이라고!" 나는 자신을 가리켰다. "데이비?? 잘못했어?? 뭐라고 말을 해야 되지??? 자네는 좋은 친구였어?? 그 병 때문이야?? 무서운 병이야, 데이비. 죄없는 인간을 죽이는 병이라고?? 데이비, 죄없는 인간을??." "지금 와서 그런 말을 해보았자 이미 때는 늦었어. 그때 기회를 줬었지. 곡시와 마찬가지로." 벤터스는 나를 똑바로 보고 웃었다. 낮고 식식거리는 웃음소리. "그래서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날 죽일 셈인가? 죽이라고??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군?? 난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그의 시체 같은 야윈 얼굴에 생기가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추악한 에너지로 가득 채워졌다. 이것은 인간이 아니다. 그렇게 믿는 편이 나로서는 훨씬 편하다. 그 편이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데 편하다. 그리고 냉정해진 지금도, 나는 그것이 인간이 아니었다고 믿고 있다. 자아, 승부 패를 내놓을 때가 되었다. 나는 침착하게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사진을 끄집어냈다. "어떻게 할 것인가를 말하는 것보다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말하는 쪽이 낫겠지." 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의 얼굴에 나타난 당혹감을 느긋하게 음미했다. "이게 뭐지?? 무슨 속셈이야?" 최고의 기분이었다. 충격파가 그를 집어삼키고, 강렬한 공포로 해골처럼 된 머리가 흔들렸다.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 사진에 어떤 끔찍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하고 의아해하면서 떨고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해야 너를 화나게 만들 수 있을지 생각해보라고. 그리고 그것에 다시 1천 배를 해봐?? 그것도 아직 모자라겠지만." 나는 안됐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알란 벤터스에게 보여준 것은, 나와 프란시스의 사진이었다. 사진속의 우리들은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며 갓 맺어진 연인다운 오만함을 은연중에 풍기고 있었다. "이게 뭐야?" 알란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뼈만 남은 몸을 필사적으로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나는 한 손을 그의 가슴에 갖다대고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그를 원래 위치로 밀어보냈다. 하나의 우아한 동작에서 찾아낸 자신의 힘과 그의 무력함의 증거를 차분히 음미하면서. "침착하라고, 알란. 침착하라니깐. 의사와 간호사가 뭐라고 했지? 속 편하게 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 나는 사진 한 장을 제일 뒤로 돌려놓고 다음 사진을 보여줬다. "조금 전의 것은 케빈이 찍어준 사진이야. 꼬마치고는 잘 찍었지. 자, 이번에는 '꼬마'가 찍혀 있어." 두 장째의 사진에는, 스코틀랜드 대표팀의 유니폼을 입고 내 어깨 위에 올라타고 있는 케빈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것은 목소리라기보다 소리였다. 그 소리는 그의 입에서가 아니라 쇠약해진 몸의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 을씨년스러움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태연한 목소리에 계속 말했다. "요컨대, 이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야??." 나는 세 장째의 사진을 보여줬다. 부엌 의자에 묶여 있는 케빈이 찍혀 있었다. 머리가 한쪽으로 축 처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벤터스가 더 세밀하게 들여다봤더라면, 아들의 눈꺼풀이나 입술이 지나치게 창백하고 얼굴도 피에로처럼 새하얗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벤터스가 알아본 것은 케빈의 머리와 가슴, 그리고 무릎에 난 상처와 얼핏 보아서는 알몸이라는 것조차도 알 수 없을 만큼 온몸을 새빨갛게 물들인 피뿐이었다고 확신한다. 사진 속의 부엌은 피바다였다. 의자 바로 밑 리놀륨 바닥에도, 검붉은 웅덩이가 있었다. 간혹 피가 웅덩이 밖으로 튀겨져 마루에 길게 자국을 남기기도 했다. 똑바로 앉혀져 있는 케빈의 발치에는 날카롭게 날을 세운 나이프와 드리이버 외에도, 보쉬의 드릴, 블랙 앤드 데커의 연마기를 비롯한 갖가지 전동 공구가 흩어져 있었다. "아냐?? 안 돼?? 케빈?? 이럴 수는 없어?? 꼬마는 아무짓도 하지 않았는데?? 그앤 아무도 헤치지 않았는데?? 안 돼." 희망이나 인간미 따위는 조금도 느낄 수 없는 추한 흐느낌 소리였다. 나는 그의 듬성듬성 빠진 머리칼을 난폭하게 움켜잡아 머리를 베개에서 들어올렸다. 그리고 비열한 기쁨에 충만해서 그를 응시했다. 그의 해골 같은 머리가 늘어진 피부 밑으로 가라앉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사진을 그의 코앞에 갖다댔다. "난 어린 케빈도 아빠처럼 되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마침 자네의 전 애인과 자는 게 시들해져서 케빈에게?? 그 방면으로 초보를 가르쳐주기로 했어. 에이즈 바이러스가 아빠를 죽일 수 있다면 그의 애새끼 정도는 물론 쉽게 죽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 "케빈?? 케빈??!" 벤터스는 계속 신음했다. "유감스럽게도 케빈의 항문은 나에게는 너무 좁아서 할 수 없이 석공용 공구로 조금 넓혀야 됐어. 헌데 난처하게도 지나치게 몰두하다 보니 다른 장소에도 여기저기 구멍을 내버렸지 뭐야. 케빈이 너를 너무 닮아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했어. 고통은 느끼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무리겠지. 하지만 최소한 상당히 짧은 시간에 끝낸 편이야. 케빈이 죽기까지는 20분쯤 걸렸어. 울부짖고 고통을 느끼면서 보낸 20분 간이었지. 불쌍한 케빈. 네가 말한 대로 그건 죄 없는 인간을 죽이는 병이라고." 그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낮고 억누른 울음소리로, "안 돼, 안 돼!" 하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의 머리가 내 손 안에서 마구 흔들렸다. 간호사가 들어올까봐 걱정이 돼서 나는 그의 등뒤에서 베개를 한 개 빼냈다. "어린 케빈이 최후에 한 말은, '아빠'였어. 그것이 네 아들의 마지막 말이야. 미안하다, 케빈. 아빠는 먼 곳에 있단다. 나는 그렇게 말해줬지. 아빠는 먼 곳에 있다고 말야." 나는 동공이 크게 확대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공포와 절망으로 가득 찬, 새까만 무가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내려 놓고 베개를 얼굴에 밀어붙여서, 구역질나는 그의 신음소리를 지웠다. 베개를 세게 내리누르며 그 위에 내 머리의 무게를 얹었다. 반은 헐떡이며, 보니 ??의 옛날 노래가사를 바꿔서 흥얼거렸다. "데디, 대디 쿨, 대디, 대디 쿨?? 당신은 엄청난 얼간이였어. 바이 바이, 대디 쿨??." 벤터스의 가냘픈 저항이 멈출 때까지 나는 명랑하게 노래를 계속 불러댔다. 베개를 꽉 누른 채 그의 로커에 손을 뻗어서 (팬트하우스)지를 꺼냈다. 그는 이미 페이지도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을테니까 자위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성 연애자를 철저하게 싫어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잡지를 남들의 눈에 띄는 곳에 놓아두고 자신이 이성애자라고 바보 같은 시위를 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서서히 씩어가면서도 놈이 가장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은, 절대로 게이로는 오해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는 잡지를 베개 위에 펄쳐놓고 느긋하게 페이지를 넘기다가, 벤터스의 맥을 짚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죽은 것이다. 더욱 의미심장한 사실은, 그가 고문을 받으며 괴로워하다 비참하게 죽어갔다는 점이다. 시체에서 베개를 치우고 힘이 없어진 추한 머리를 들어봤다가 다시 떨어뜨렸다. 한참 동안 나는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눈도 입도 열려진 채 바보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인간의 추악한 미니어처 같았다. 아마도 시체는 애당초 인간의 미니어처일 것이다. 잊지 마라, 어치피 벤터스는 줄곧 추악한 미니어처였던 것이다. 나의 강렬한 경멸은 이내 사라지고, 대신 슬픔이 솟구쳐올랐다. 어째서 슬픔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시체에서 눈을 돌렸다. 그대로 꼼짝 않고 앉아 있다가 2, 3분이 지나자, 벤터스가 죽었다고 간호사에게 알렸다. 씨필드 화장터에서 열린 벤터스의 장례식에 나는 프란시스와 함께 참석했다. 프란시스에게 있어서는 정신적으로 괴로운 시간일 테니까, 옆에 있으면서 부축이라도 해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장례식의 참석자는 최저치를 갱신할 정도는 되지 않았다. 벤터스의 어머니와 누나를 비롯해서 '에이즈 바이러스 보균자 모임'에서도 톰을 비롯한 몇 사람이 나와 있었다. 목사는 벤터스에 대해 그럴듯한 말을 생각해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기특하게도 입에 발린 말을 하지도 않았다. 짧고 호감가는 설교였다. 알란은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고 목사는 말했다.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느님은 우리들 모두와 마찬가지로 알란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를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꽤 재미있는 생각이었으나, 그런 녀석이 천국에 받아들여진다면 틀림없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눈앞에 상당한 뇌물을 들이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나는 다른 장소에 가보기로 하겠다. 됐네! 밖으로 나와서 나는 화환을 확인했다. 벤터스에게는 한 개밖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 "알란에게. 사랑을 담아서. 엄마와 실비아가." 내가 아는 한 '엄마와 실비아'는 한 번도 호스피스로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 현명한 선택이다. 세상에는 옆에 있을 필요가 없을 때만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톰과 다른 동료들과 악수를 하고 프란시스와 케빈을 머슬버거의 루카스의 가게로 데리고 가서 딜럭스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다. 물론, 케빈에 관해 벤터스에게 한 말은 거짓말이었다. 나는 그녀석 같은 야비한 짐승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한 짓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느냐 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그 아이의 건강한 몸을 심각한 위험에 노출시켰다. 병원의 수술실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마취 의사의 역할이 갖는 중대함은 잘 알고 있었다. 환자를 살리는 것은, 하우위선과 같은 사디스틱한 돼지 놈들이 아니라, 마취의들이다. 마취의는 환자를 잠들게 하고 생명유지 장치에 접속되어 있는 동안 깨어나지 않도록 한다. 고도의 제어가 가해진 환경 아래서 모든 바이탈 사인(맥박, 호흡, 체온, 혈압 등)이 항상 체크된다. 그들은 환자를 염려해주는 것이다. 클로로포름은 상당히 조잡한 마취약이어서 꽤 위험하다. 그아이를 어떤 위험에 노출시켰는가를 생각할 때마다, 지금까지도 몸이 떨린다. 고맙게도 케빈은 후유증으로 악몽을 꿨을 뿐, 가벼운 두통 외엔 무사히 잠에서 깨어나주었다. 상처는 분장용품 상점에서 산 재료와 험브를 에너멜 페인트로 만들었다. 그리고 프란시스의 화장품과 탈콤 파우더를 사용해 케빈의 얼굴을 감쪽같이 시체처럼 만들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최대의 하이라이트는 병리학 연구실의 냉장고에서 슬쩍해온 혈액 비닐팩 세 통이었다. 하지만 복도에서 스쳐지나가던 하우위선놈이 기분나쁜 눈초리로 나를 노려봤을 때는 겁이 들컥 났었다. 하지만, 놈은 언제나 그런 눈으로 나를 본다. 언젠가 한 번 놈을 '미스터'라고 부르지 않고, '덕터(내과 의사)'라고 부른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별난 자식이다. 외과 의사는 대개 별종들이긴 하지만 말이다. 별종이 아니면 외과 의사를 못할 거다. 톰이 하는 일과 마찬가지다. 케빈을 약으로 잠들게 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했다. 최대의 난관은 무대 세트를 완료하고, 그 위를 모두 깨끗이 치우는 데 30분밖에 시간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것은, 케빈의 몸을 깨끗이 씻긴 다음에 침대로 데리고 가는 작업이었다. 물만으로는 지워지지 않아서, 테레빈유까지 동원해야 했다. 그 뒤에는 프란시스가 돌아올 때까지 밤새도록 부엌 청소를 했다. 하지만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사진은 진짜처럼 보였다. 벤터스를 속여 넘기기에 충분할 정도로 진짜같이 보였다. 알란 벤터스가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을 도와준 이래 내 인생은 상당히 좋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프란시스와는 헤어졌다. 애당초 우리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나를 베이비시터 겸 돈지갑으로밖에 보지 않았다. 물론 나도 벤터스가 죽은 다음에는, 더 이상 프란시스와 관계는 필요하지 않았다. 만날 수 없게 돼 서운하다고 생각한 것은 케빈 쪽이다. 케빈과 지내면서 이젠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도 프란시스는 벤터스로 인해 잃어버린 남자에 대한 신뢰감을 내가 되살려줬다고 말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내 사명을 찾아냈던 것 같다. 그 썩어빠진 놈이 그녀에게 남겨놓은 감정의 쓰레기를 깨끗이 치워버리는 역할을. 내 몸의 상태는, 다행스럽게도 요즘 들어 계속 좋아졌다. 증상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감기에 걸리는 것이 무섭고, 이따금 지나치게 걱정이 되곤 하지만 건강에는 신경을 쓰고 있다. 때때로 캔맥주를 마시는 정도 외엔 술은 입에 대지 않았다. 먹는 것에도 신경을 쓰고 매일 가벼운 운동도 한다. 정기적으로 혈액 검사를 받고, ??4(몸 안의 항체를 생성하는 세포- 역주) 수치를 정신차려서 보고 있다. 한계치인 800보다는 아직도 훨씬 위다. 실제로 수치는 전혀 내려가지 않았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나와 벤터스 사이에서 에이즈 바이러스를 중개했던 도나하고도 다시 가까워졌다. 우리들은 만일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서로 나눌 수 없었던 것을 찾아냈다. 아니, 어쩌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찾아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간에 세세하게 분석할 생각은 없다. 우리들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하지만, 톰의 공로도 인정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톰은 나에게 분노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비록 벤터스를 망각의 너머로 보내는 상당히 손쉬운 길을 택했지만 그의 말은 옳았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약간의 죄의식뿐, 이 정도는 스스로 해결할 수가 있다. 마침내 부모님에게도 내가 에이즈 바이러스 보균자라는 얘기를 했다. 어머니는 그냥 울면서 나를 껴안았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백한 얼굴로 잠자코 스포츠 뉴스를 보고 있었다. 어머니가 흐느껴 울면서 뭔가 한마디 해주라고 말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 아무 할말이 없어." 아버지는 몇 번씩이고 되풀이 말했다. 나의 눈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아파트에 있는데 현관의 벨이 울렸다. 틀림없이 도나라고 생각하고 현관과 계단 쪽 문을 열었다. 잠시 후, 문 앞에 아버지가 눈물이 글썽한 채 서 있었다. 아버지가 내 아파트로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으스러질 정도로 나를 힘껏 껴안고 몇 번이고 울면서 불렀다. "내 아들아!" 낮에 들었던 '글쎄, 아무 할말이 없어'에 비하면 세상이 달라보일 정도로 기분좋은 말이었다. 나도 자신을 잊고 큰소리로 실컷 울었다. 도나 때와 같은 일이 가족하고도 일어났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나와 아버지 사이에는 영영 찾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따스함을 알았다. 좀더 일찍 인간이 됐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아예 안 하는 것보다 늦는 게 낫다, 안 그런가? 밝은 햇살에 비쳐진 잔디가 선명한 녹색으로 빛나는 뒷뜰에서 아이들이 뛰놀고 있다. 하늘은 빨려들어갈 것처럼 투명한 청색이다. 인생은 멋지다! 나는 인생을 즐길 생각이다. 꼭 오래 살아 보이겠다. 의료진들이 장기 생존자라고 부르는 사람이 되겠다.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고 나는 알고 있다. 31. 꺼지지 않는 불빛 그들은 현관을 나와 아무도 없는 거리의 암흑 속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중 몇몇은 힘이 넘쳐 신나게 떠들어대며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고통을 참으며 곧 더욱 큰 고통과 불쾌감이 찾아오리라는 불안을 안고 유령처럼 소리도 없이 걷고 있었다. 그들이 향하고 있는 곳은 이스터 로드와 리스 워크를 잇는 골목에 늘어서 있는 다 쓰러져가는 아파트들의 버팀목 역할을 맡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펍이었다. 일대에 있는 다른 건물 벽들은 산뜻하게 새로 칠해졌지만 이곳만은 하루에 담배를 두 갑씩 피우는 골초의 ??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이 펍도 극히 표면적인 보수 외에는 20년 가까이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 시계는 새벽 5시 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유스호스텔의 노란 불이 켜져 있다. 인적이 없는 캄캄한 거리에서 비를 맞고 있는 사람에겐 그 불빛이 얼마나 안도가 되는지 모른다. 불빛을 보는 것이 며칠만일까 하고 스퍼드는 생각한다. 그들은 흡혈귀처럼 거의 밤에만 움직이고 있었다. 싸구려 아파트에 살면서 수면과 노동을 되풀이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었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기뻤다. 문을 연 지 몇 분 안 됐는데도, 펍은 붐비고 있었다. 바에는 맥주 펌프와 싱크대가 달린 기다란 포마이커 카운터가 놓여져 있었다. 같은 포마이커 판을 댄 상처투성이의 테이블들이 더러운 리놀륨 바닥위에 흔들거리며 서 있다. 카운터 안 쪽에는 이 가게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정교한 세공이 된 고풍스런 나무 술장이 놓여 있었다. 벌거벗은 전구가 발하는 천박스러운 노란빛은 니코틴으로 더럽혀진 벽에 사정없이 반사되고 있었다. 양조장이나 병원에서 교대제로 일하고 있는 진짜 노동자들로 펍은 꽉 차 있었으나, 이 술집이 이른 새벽은 영업 허가를 얻은 것은 그런 손님들을 기대했기 때문이니까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좀더 다급한 이유로 와 있는 사람도 몇 명 안 되지만 있긴 있었다. 여기에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와 있는 사람들이었다. 지금 펍에 들어온 일당도 필요에 의해서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들뜬 기분을 유지하거나, 혹은 들뜬 기분을 되찾고, 우울한 숙취의 습격에 대항하기 위해서 더욱더 많은 알코올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욱 중대한 이유가 또 한 가지 있다. 자신의 동료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리고 며칠 동안 계속되고 있는 난장판 파티를 하는 동안 그들을 하나로 묶어온 힘이 무엇이건 간에 그 힘이 사라지지 않도록 이곳으로 찾아온 것이다. 카운터에 기대어 ?? 나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그들이 펍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뚫어질 듯이 관찰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싸구려 술과, 북해로부터 불어오는 삭풍에 오랫동안 시달린 탓으로 망가져 있었다. 피부 밑의 혈관이라는 혈관은 다 터져버려서 마치 동네 카페에서 내놓는 덜익은 소시지처럼 보였다. 눈은 피부와는 대조적으로 차가운 청색이었으나, 흰자위는 펍의 벽과 같은 지저분한 회색이었다. 시끄러운 일당이 카운터로 다가가자, 그는 희미하게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얼굴이 굳어졌다. 젊은이 중 하나는 그의 아들이었다. 아니, 하나가 아닐지도 모르지, 하고 그는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젊었을 때는 그에게 매력을 느끼는 여자들도 꽤 있었다. 그들과 관계해서 비슷한 시기에 여러 명의 자식을 낳게 했다. 다만 그것은 술이 그의 얼굴 모습을 망가뜨리고 신랄한 독설을 이해 불능의 신음소리로 일그러뜨리기 전의 일이었다. 그는 문제의 젊은이를 응시하면서 말을 걸려고 했으나, 아무것도 할말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애초에 뭔가 할말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젊은이는 그의 쪽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고 술을 사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술고래 늙은이의 눈에도 그 청년이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자기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술을 마시는 즐거움과 친구들은 차츰 멀어져같으나, 술 자체는 떠나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즐거움과 친구들이 떠나간 공백을 술이 메꿔주게 되었다. 스퍼드는 이제 맥주는 절대 안 마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도우시의 아파트를 나오기 전에 욕실의 거울로 얼굴을 꼼꼼히 관찰했다. 핏기가 없는 얼굴에 여드름이 몇 개씩 생기고, 부풀어오른 무거운 눈꺼풀은 셔터를 내리고 현실을 몰아내려고 하고 있었다. 모래색 모리칼이 얹혀진 이마선은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그래, 다시 알코올을 마시기 전에, 배가 아프니까 토마토 주스를 마셔둘까? 아니면, 수분 공급을 생각해서 신선한 오렌지 한 개와 레모네이드를 주문하는 게 좋을지도 몰라. 그러나 앞장서서 바로 돌진한 프랭크 벡비가 내미는 맥주를 받아든 순간, 스스로를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건배, 프랑코." "나는 기네스가 좋겠어, 프랑코"하고 렌튼이 주문했다. 렌트은 바로 얼마 전에 런던에서 돌아온 길이었다. 엔든버러를 떠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돌아올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이 집의 기네스는 최저라고"하고 개브 템펄리가 말했다. "그래도 기네스가 좋아." 도우시는 웨이트리스를 보더니 눈썹이 번쩍 들려서 그녀를 향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예이, 예이, 예이, 그대는 아름다운 여인." 도우시는 며칠 전에 열린 '가장 끔찍한 노래자랑'에 참가해 마지막 결선까지 올라간 노래를 아직도 멈추지 않고 계속 부르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아가리 좀 닥치지 못해, 도우시?"하고 알리슨이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여기서 쫓겨나고 싶냐?" 어쨌든 웨이트리스는 도우시를 무시했다. 그러자 이번엔 렌튼에게 노래를 불러주기 시작했다. 렌튼은 피곤하다는 듯이 웃었다. 도우시의 단점은 누가 부추기면 완전히 뽕을 빼버리는 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분명히 며칠 전엔 그런대로 재미가 있었지만, 내가 부른 루퍼트 홈즈의 (에스케이프(더 피나 골라다 송))만큼은 못해. "리오에서 만났던 밤이 기억나네요?? 그 기네스, 맛없지? 이 집에서 기네스를 마시는 건 멍청한 짓이라고, 마크." "내가 이미 말해줬잖아." 개빈이 그것 보라는 듯이 말했다. "어때, 뭐." 렌튼은 게으른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술에 취한 것 같다. 켈리의 손이 셔츠 안으로 기어들어와 젖꼭지를 만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켈리는 밤새도록 이렇게 젖꼭지를 만지면서 가슴털이 없고 평평한 렌튼의 가슴이 좋다고 계속 떠들고 있다. 누가 젖꼭지를 만져주면 기분이 좋았다. 특히 켈리가 만져주면 좋은 쾌감을 느꼈다. "보드카 ?? 토닉." 뭘 마시겠느냐는 벡비의 제스춰에 켈리가 대답했다. "그리고 알리에게는 진 ?? 레모네이드를. 지금 화장실에 가 있지만." 그들은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고 스퍼드와 개빈만이 바 앞에 선 채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준은 잘 있니?" 켈리가 프랑코 벡비에게 애인의 근황을 물었다. 준은 바로 얼마 전에 아이를 낳았는데, 또 임신한 것 같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누구?" 프랑코가 시비조로 어깨를 으쓱했다. 이야기 끝. 렌튼은 새벽 프로를 내보내고 있는 텔레비젼을 올려다봤다. "앤 다이아몬드다." "뭐?" 켈리가 렌튼의 얼굴을 보았다. "저 년 한 번 죽이게 타주고 싶군"하고 벡비가 말했다. 알리슨과 켈리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민망한 듯 천장을 쳐다봤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그녀의 아기도 수면사를 했다고. 레슬리의 아이와 마찬가지로. 그 도온하고??." "정말 안됐어." "오히려 잘된 것 아냐? 수면사를 하지 않았으면 빌어먹을 에이즈로 죽었을 거니까. 에이즈보단 수면사가 훨 낫지"하고 벡비가 말했다. "레슬리는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돼 있지 않았어! 도온은 완벽한 건강체였어!" 알리슨이 불같이 화를 내면서 벡비에게 덤벼들었다. 렌튼은 벡비의 말투에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알리슨은 화가 나면 반드시 평소보다 고상한 말씨를 쓰는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하찮은 일에 신경을 쓰는 자신에 대하여 희미한 죄책감을 느꼈다. 벡비는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아무도 그렇다고는 하지 않았다고." 도우시가 아부하듯 말했다. 렌튼은 도우시를 도발하듯이 노려봤다. 물론 벡비를 이런 눈으로 노려보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보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도우시를 대신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뿐이었다. "아니,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무도 사실을 알 수 없다는 얘기야." 도우시가 쭈뼛거리면서 변명을 했다. 바에서는 스퍼드와 개빈이 혀꼬부라진 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렌츠가 켈리와 할까?" "글쎄, 켈리는 그 데즈 뭔가 하는 녀석하고 헤어졌고, 렌츠도 이미 헤이즐하고는 끝났어. 이른바 자유 계약 선수라는 얘기지." "그 데즈라는 녀석. 딱 질색이야." "?? 나는 그 고양이는 잘 모르니까??." "거짓말 마! 네 사촌형이잖아, 스퍼드? 데즈, 데즈 피니 말야!" "맞아?? 그 데즈 말야? 하지만 역시 잘 모른다고. 어렸을 때 몇 번 투닥투닥한 것뿐이야. 하지만 너무했어. 헤이즐은 다른 사내와 파티에 오고 렌츠는 켈리랑 붙어 있고?? 너무하다고." "그건 그렇고, 그 헤이즐이라는 여자, 완전히 무표정이더군. 난 그 여자가 웃는 걸 본 적이 없어. 하긴 렌츠하고 사귀고 있으면 당연할지도 모르지. 1년 내내 약에 취해 있는 녀석하고 함께 있어 봤자 별로 재미도 없을 테니까 말야." "그래?? 너무 지독해??." 개빈 녀석이 지금 말한 1년 내내 약에 취해 있다고 하는 것은 나를 빗대놓고 하는 말일까? 스퍼드는 한순간 그렇게 생각했지만 악의는 없었을 거라고 생각을 고쳤다. 개빈은 그렇게 치사한 놈은 아니니까 말이다. 스퍼드의 술에 절은 뇌세포는 섹스 쪽으로 향했다. 파티에 가면 이 녀석도 저 녀석도 여자와 사라져버린다. 스퍼드 이외의 전원이 말이다. 스퍼드는 여자와 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약도 술도 들어가 있지 않으면 너무나도 수줍고, 마약이나 술로 흥분하면 또 이번에는 너무나도 지랄멸렬해져서 여자의 관심을 끌 수 없게 되는 것이 스퍼드의 고민거리였다. 현재는 카일리 미노그와 약간 분위기가 비슷한 니콜라 핸론에게 열을 올리고 있었다. 몇 개월 전의 일이다. 사이트 힐의 파티에서 웨스트 헤일즈의 또 다른 파티로 이동할 때, 니콜라와 스퍼드는 걸어가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다른 친구들로부터 떨어져 둘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니콜라는 남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성격이었고, 스퍼드는 스피드로 흥분해 있던 탓도 있고 해서, 마음 편하게 얘기를 할 수가 있었다. 더구나 니콜라서는 스퍼드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줘서 스퍼드는 다음 파티에는 전혀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대로 걸으면서 계속 지껄이고 싶었다. 지하도에 왔을 때, 스퍼드는 니콜라의 어깨에 팔을 둘러도 될까, 하고 생각했다. 그 순간, 전부터 좋아했던 스미스(?? 모리세이가 몸담았던 맨체스터 출신의 칼리지 록 밴드- 역주)의 노래, (꺼지지 않는 불빛)의 한 구절이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어두운 지하도에서 생각했지 아아,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구나 하지만 갑자기 이상한 두려움이 찾아와 아무래도 물어볼 수 없게 되고 말았지. 모리세이의 슬픈 목소리가 스퍼드의 심정을 대변해줬다. 결국 니콜라의 어깨를 끌어안지 못한 채, 그대로 계속 지껄여대서 잘만 하면, 하는 속셈도 충족되지 못한 채 끝났다. 그 대신, 누군가의 집 침실에서 렌츠와 매티하고 헤로인을 맞는 바람에 그녀를 설득해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고민으로부터 해방됐다. 섹스의 기회가 스퍼드에게 찾아오는 것은 대개 좀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혔을 때였다. 그러한 경우에도 재난과 인연이 없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아무에게나 헤픈 것으로 유명한 로라 맥이완이 그 래스마켓의 펍에서 스퍼드를 만나자, 집에 같이 가자고 유혹했다. "내 엉덩이 쪽의 처녀를 갖지 않을래?" "뭐?" 스퍼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엉덩이 쪽에다 해달라니까. 그쪽은 아직 한 번도 안 해봤어." "음, 그것 참?? 영광인데, 아니, 그러니까?? 좋아??." 스퍼드는 선택받은 인간처럼 느껴졌다. 로라는 언제나 그룹에 집착해서, 그 그룹의 남자들과 한 번씩 자고나면 다음 그룹으로 옮겨간다. 식보이도, 렌튼도, 매티도 로라와 잔 적이 있지만 스퍼드가 지금부터 하려고 하는 것은 아직 아무도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로라는 우선 스퍼드에게 간단한 예방 조치를 하고 싶어했다. 그녀는 셀로판 테이프로 스퍼드의 손목과 발목을 묶었다. "왜 이렇게 하냐 하면, 네가 날 아프게 할까 봐 그러는 거야. 알겠어? 이런 식으로 옆에서 해줘. 조금이라도 아프면 그걸로 그만둘거야. 알았어? 상대가 누구라해도 난 아픈 건 싫다고. 지금까지 아파도 참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알았어?" 그녀는 쌀쌀하게 말했다. "응?? 알았어. 당연한 일이지??." 스퍼드가 말했다.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건 그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잡아먹을 듯한 어조에는 쇼크를 먹었다. 로라는 한 걸음 물러서서 자신의 작품을 감상했다. "빌어먹을, 정말 멋지군." 로라는 자신의 사타구니를 더듬으면서 그렇게 말했고, 스퍼드는 벌거벗고 묶인 채 침대에 뒹굴고 있었다. 자신의 나약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게 쑥스러워졌다. 테이프로 묶인 것도 처음이었고, 멋지다는 말을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 이윽고 로라는 스퍼드의 길고 가느다란 페니스를 입에 물고 펠라티오를 했다. 로라는 본능과 경험으로 절호의 타이밍을 알아차리고 펠라티오를 중지했다. 황홀해진 스퍼드가 사정하기 직전이었다. 그러고는 방을 나갔다. 스퍼드는 묶인 채로 있는 것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로라는 미치광이라는 소문이 나 있었다. 눈에 띄는 남자들 전부와 자게 된 것은 로이라고 하는 오랫동안 사귀어오던 남자의 임포텐츠(성교불능증)와 오줌 소태, 우울증에 신물이 나서, 정신병원에 보내버리고 난 뒤부터의 일이었다. 다만 가장 짜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남자의 불능이었던 것 같다. "그 작자는 몇 년째 섹스를 제대로 해준 적이 없었다니까." 로라는 로이를 정신병원에 보내버린 것은 그의 탓이라는 듯이 스퍼드에게 얘기했다. 하지만 잔혹한 면이나 무정한 면이 로라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지, 하고 스퍼드는 생각했다. 식보이는 로라를 '섹스의 여신'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로라는 침실로 돌아오자 꽁꽁 묶인 채 자신의 지배 아래에 놓여진 스퍼드를 응시했다. "이번에는 네가 뒤에서 해줘. 하지만 그 전에 네 물건에 바셀린을 듬뿍 발라줄게. 삽입할 때 내가 아프지 않도록 말야. 처음이니까 보나마나 힘이 들어가겠지만 될 수 있는 대로 긴장을 풀어보도록 할게." 로라는 마리화나를 깊이 들이마셨다. 로라가 말한 것은 엄밀히 말하면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욕실의 캐비닛에서 바셀린을 찾을 수 없자 그녀는 대용품을 찾아냈다. 끈적끈적하고 미끈미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로라는 그것을 스퍼드의 페니스에 넉넉히 발라주었다. 회끈화끈한 벅스 파스 연고였다. 그러자 페니스가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스퍼드는 너무 아파서 울부짖었다. 셀로판 테이프에서 빠져나오려고 손발을 힘껏 버둥거렸다. 페니스 끝에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진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이를 어쩌지? 미안해, 스퍼드." 로라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로라는 스퍼드를 침대에서 부축해 내려 욕실로 데리고 갔다. 스퍼드는 눈물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껑충껑충 뛰어서 따라갔다. 로라는 세면대에 물을 가득 채우더니 손발목에 감은 셀로판 테이프를 자를 나이프를 찾으러 갔다. 위태롭게 균형을 잡으면서 스퍼드는 페니스를 물에 집어넣었다. 따끔따끔하던 것이 더욱더 심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그는 엉덩방아를 찧고 그 여세로 이마를 변기에 세게 부딪쳐서 눈위가 찢어졌다. 로라가 욕실에 들어와보니까 스퍼드는 넘어져서 기절해 있고 검붉은 피가 리놀륨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로라는 구급차를 불렀다. 그리고 스퍼드가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눈 위는 여섯 바늘이나 꿰매어져 있었다. 뇌진탕으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결국 로라의 항문은 정복하지 못했다. 소문에 의하면, 그 뒤 욕구가 충족되지 못했던 로라는 식보이에게 전화를 걸었고, 결국 식보이는 친구의 대역을 맡았다고 한다. 이 재난 이후, 스퍼드는 니콜라 핸론에게 흥미를 느끼게 됐다. "닉키가 파티에 오지 않다니, 놀랐어?? 닉키 알고 있지?" 스퍼드는 개빈에게 말했다. "물론 알고 있지. 그 화냥년 말이지, 아무하고나 금방 자는." 개빈이 뜻하지 않은 말을 했다. "그래?" 전율과 불안을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가 없는 스퍼드의 낌새를 알아차린 개빈은 내심으로 재미있어하면서도 일부러 퉁명스럽고 사무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렇고 말고. 나도 몇 번인가 했는데. 그 여자는 나쁘지 않아. 식보이도 잤어. 렌츠도 잤고. 그래, 토미도 잤을 걸. 그 녀석도 분명히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 같으니까." "그래?? 흐음??." 스퍼드는 풀이 죽었으나 동시에 기대를 부풀렸다. 술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바로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으니까. 테이블에서 벡비가 이제 슬슬 배를 채울 음식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배가 고파 죽겠어. 뭔가 먹으러들 가자고. 다음에 좀더 그럴 듯한 술집으로 가자." 벡비는 궁상맞은 환경에 처한 오만한 몰락 귀족처럼 못마땅한 눈으로 니코틴에 절은 비좁은 바를 둘러보았다. 펍을 나왔지만 밖은 아직도 어두웠다. 그들은 포틀랜드 스트리트의 카페로 향했다. "모두 아침 식사 세트로 하자"하고 신이 난 벡비가 친구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렌튼을 제외한 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나는 고기는 싫어." 렌튼이 말했다. "네 빌어먹을 베이컨과 소시지와 블랙 푸딩은 내가 먹어줄게." 벡비가 말했다. "그래, 좋아. 제발 그래 주라"하고 렌튼은 비꼬듯이 대답했다. "알았어. 대신 계란과 콩과 토마토를 줄게!" "됐어." 렌튼은 웨이트리스를 쳐다봤다. "기름은 식물성? 동물성?" "동물성인데요." 웨이트리스는 정신박약아를 보는 것 같은 눈으로 렌튼을 바라보았다. "이봐, 렌츠.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잖아." 개빈이 말했다. "무엇을 먹든 그건 마크 마음대로야." 켈리가 감싸듯이 말했다. 알리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렌튼은 고상한 척하는 기둥서방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꾸 밥맛 떨어지게 굴래, 렌츠?" 벡비가 으르렁거렸다. "뭐가 밥맛 없다는 거야?" 렌튼은 웨이트리스에게 말했다. "나는 치즈 샐러드 롤 하나 주세요." "모두들 좋다고 말했잖아. 그러니까 모두에게 아침 식사 세트 갖다주쇼"하고 벡비가 잘라 말했다. 렌튼은 귀를 의심했다. 집어치라고 벡비에게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간신히 그 충동을 억누르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고기는 먹지 않는다니까, 프랑코." "빌어먹을 채식주의. 그런 건 다 개수작이야. 고기는 몸에 필요한 거야. 정키인 주제에 자기 입에 들어가는 거에는 꽤 까다롭게 구는군! 정말 웃기는 얘기지." "고기가 싫은 것뿐이야." 렌튼은 그렇게 말했으나 모두 킬킬거리며 비웃자 바보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동물을 죽이는 건 딱 질색이라는 따위의 말은 꺼내지도 말라고. 너 기억하고 있지? 옛날에 함께 공기총으로 개와 고양이를 쏘아 죽였잖아! 그래, 비둘기집에도 불을 질렀지. 이 자식은 흰쥐를 폭죽에 테이프로 묶어놓기도 했다니까!" "특별히 동물을 죽이는 게 싫다고 말하고 있는 건 아냐. 먹는 게 싫을 뿐이지." 렌튼은 어깨를 으쓱했다. 소년 시절의 잔학 행위를 켈리에게 폭로당해서 입장이 난처했다. "이런 잔인한 놈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개를 쏠 수 있는 거지? 내 신경으론 도저히 이해가 안 가." 알리슨이 고개를 저으면서 비아냥거렸다. "난 돼지를 죽여서 먹는 인간이 더 이해가 안가." 렌튼은 알리슨의 접시에 담긴 베이컨과 소시지를 가리켰다. "그것과 이것과는 다른 문제야." 스퍼드가 모두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그건 말야?? 난 렌츠가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단지 이유가 잘못된 것뿐이야. 우리들이 자기보다 약한 것들, 그러니까 동물 같은 것들에게 상냥하게 대할 수 없다면, 자기 자신도 사랑할 수 없는 거야. ??하지만 렌츠가 채식주의자인 건 좋은 일이라고?? 그러니까 계속해나갈 수 있다면 말이지만??." 벡비는 순간 휘청거리더니 스퍼드에게 피스 사인(??인 사인- 역주)을 했다. 그러자 다른 친구들이 웃었다. 렌튼은 스퍼드가 도움의 손길을 뻗어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비난의 화살을 스퍼드에게서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했다. "계속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 난 어쨌든 고기가 싫으니까. 먹으면 토할 것만 같애. 자아, 이제 이 얘기는 이쯤해두자." "흥, 그래도 모두 밥맛이 떨어진 건 변함이 없단 말야." "어째서?" "내가 그렇게 말하면 그런 거야!" 벡비는 자신을 가리키면서 으르렁거렸다. 렌튼은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더 이상 얘기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은 게걸스럽게 식사를 모두 먹어치웠다. 다만 켈리는 예외였다. 주위 친구들의 탐욕스런 시선을 깨닫지 못한 채 음식을 포크로 찔러대고 있다. 결국 한참 있다가 접시 위에 있는 것을 프랑코와 개빈의 빈 접시에 덜어줬다. 얼마 뒤 그들은 가게에서 쫓겨났다. 하츠 팀의 로고가 들어간 점퍼를 입은 신경질적인 느낌의 남자가 음식을 사러 가게로 들어오자 그들은 일제히 "힙스 팬이 아니면 인간이 아니다!"하고 악을 쓰기 시작하고, 그것을 계기로 축구 응원가나 '끔찍한 노래'를 메들리로 계속 불러댔다. 카운터에 있던 여자가 경찰을 부르겠다고 협박했기 때문에 그들은 품위 있게 펍을 나왔다. 다시 다른 펍으로 들어갔다. 렌튼과 켈리는 함께 한잔한 다음, 둘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개빈, 도우시 벡비, 스퍼드, 알리슨은 계속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었다. 한참 전부터 휘청거리고 있던 도우시는 마침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벡비는 바 앞에서 사이코 친구들에게 들러싸여 있었다. 개빈은 자기 것이라는 듯이 알리슨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 ??파우의 (차이나 인 유어 핸드)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스퍼드는 벡비가 주크박스를 틀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벡비는 언제나 이 곡이나 베를린의 (테이크 마이 브레스 어웨이), 휴먼 리그의 (돈트 유 원트 미)나 로드 스튜어트의 곡을 고른다. 개빈이 화장실로 비틀비틀 사라진 순간, 알리슨이 스퍼드 쪽을 돌아봤다. "스퍼드?? 대니. 나 집에 가고 싶어. 그만 일어나자." "뭐?? 그래?? 좋아." "하지만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건 싫어, 대니. 같이 가자." "음, 그래?? 집으로 말이지?? 응?? 좋아." 두 사람은 지칠 대로 지친 몸이 허용하는 한 눈에 띄지 않게 담배 연기로 꽉 찬 펍을 빠져나왔다. "날 데려다 주고 나서 잠시 함께 있어주지 않을래, 대니? 약이나 얘기를 하면서. 아무튼 지금은 혼자 있고 싶지 않아, 대니. 내 말 이해하겠지?" 길거리를 비틀거리고 걸으면서 알리슨이 말했다. 눈물에 젖은 눈이 강렬하게 스퍼드를 바라봤다. 스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리슨이 말하고 싶은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퍼드도 외톨이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32. 여자들만의 해방구:-캘리의 이야기- 알리슨은 정말로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둘이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나는 알리슨의 시시한 잡담을 열심히 이해해보려고 했다. 알리슨이 마크의 험담을 하기 시작하자, 별로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악의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사이먼과 알리슨은 어떻지? 사이먼은 달리 함께 잘 여자가 없을 때만 알리슨의 집에 찾아가서 적당히 이용하고 있을 뿐이잖은가? 알리슨은 이런 식으로까지 말할 자격이 없다. "오해하지마, 켈리. 나도 마크는 좋아해. 다만 마크에게는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아. 지금은 사귀지 않은 편이 좋을 것 같애." 알리가 보호자인 체하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내가 데즈와 헤어져서 만신창이가 됐고, 더구나 임신 중절까지 한 탓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쓸데없는 참견이다. 자신의 처신이 먼저가 아닐까? 알리슨은 지금 헤로인을 끊으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누구든지 인생에 관한 설료를 들려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머, 그럼 사이먼이라면 괜찮다는 얘기니?"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야, 켈리. 그것하고 이건 관계가 없어. 게다가 사이먼은 적어도 헤로인을 끊으려고 하고 있지만 마크는 그만둘 생각이 없으니까 말야." "마크는 정키가 아니야. 가끔 맛을 뿐이라고." "내 말이 맞아. 너 정말 다른 별에서 살다 왔나, 캘리? 마크가 그 헤이즐이라는 애애게 딱지를 맞은 것도 다 헤로인 탓이야. 마크는 헤로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애야. 켈리, 너도 정키 같은 말을 하게 된 것 같애. 그런 식으로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다가는 너도 곧 헤로인 중독자가 될 거야." 그녀와 말씨름할 생각은 없었다. 이쨌든 간에 알리슨은 곧 주택협의회에 면담을 하러 가야 되니까. 알리는 집세의 지불유예 신청을 하기 위해 만남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알리는 불안, 초조, 긴장에 시달렸지만 나타난 담당자는 좋은 사람이었다. 헤로인은 그만두었다는것, 구직 면접도 몇 군데 받았다고, 취직 면접도 몇 군데 받았다고 알리는 실망했다. 융는 인정되었다. 더구나 집세의 감액까지 인정되었다. 그래도 알리는 여전히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우체국 앞에서 인부들이 휘파람을 불며, "어이, 귀여운 아가씨!" 하고 우리들에게 소리를 질렀을 때의 반응으로 알수 있었다. 알리는, 그 간덩이 부은 가시나는, 그쪽을 돌아다보고 이렇게 말했다. "너, 애인 있어? 있을 턱이 없겠지. 너 같은 뚱보 추남에게 있을리가 있겠어? 포르노 책이나 들고 뒷간에 가서 너에게 손대고 싶어 하는 정신나간 유일한 인간과 섹스나 하라고-너 자신하고 말야!" 그 녀석은 엄청난 적의가 담긴 눈으로 알리를 노려봤지만, 애초부터 그렇게 생겨먹은 놈이었다. 다만 지금은 여자라는 사실 말고도 그녀를 증오할 어엿한 이유가 새겼다는 인상이었다. 이번에는 그 녀석의 동료가 소리쳤다. "우와! 우와! 한번 붙어 봐!" 우뚝 선 채 분노로 떨고 있는 최초의 사나이를 부추길 생각인 것 같았다. 또 다른 인부는 원숭이 같은 모습으로 발판에 매달려 있었다. 전원이 하등 영장류처럼 보였다. 모두 정신나갔어. "이 쌍년, 썩 꺼지지 못하겠어!" 하고 그가 말했다. 알리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골치 아프게 됐지만, 조금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왜냐하면, 통행인들이 몇 사람 멈춰서서 무슨 일인가 하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 타입의 배낭족 아가씨 두명이 우리들 바로 옆에 서 있었다. 그것을 깨닫자 왠지 기분이 굉장히 좋아졌다. 나도 미쳤군! 알리는-맙소사, 이애가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말했다. "그래, 날 희롱하고 있었을 때는 귀여운 아가씨라고 하더니 지금 썩 꺼지라고 할 땐 쌍년이라, 이거지? 흥, 하지만 넌 변함없이 뚱보에다 추남이야. 그리고 그건 앞으로도 계속 변하지 않을 거다!" "나라도 그렇게 말했을 거다!" 하고 배낭족 아가씨가 호주 사투리로 끼여들었다. "망할놈의 레즈비언 년들이!" 하고 다른 녀석이 소리쳤다. 레즈비언이라는 말을 듣고, 나도 완전히 꼭지가 돌아버렸다. 빌어먹을! 이 혐오스럽고 무식하기 짝이 없는 고릴라들에게 희롱당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만으로 감히 우리들을 레즈비언이라고 불러! "세상 남자가 모두 네놈처럼 구역질나는 새끼밖에 없다면 차라리 레즈비언이 되고 말겠다!" 하고 나는 소리를 질렀다. 내가 정말로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기가 막히는군! "당신들 정말로 구제불능이군. 저쪽에 가서 둘이서 비역질이나 하지들 그래?" 다른 호주 아가씨가 말했다. 그 무렵에는 상당한 인파가 몰려들었는데, 중년 여자 두 사람도 귀를 곤두세우고 있었다. "어머나, 저럴수가! 나이가 찬 아가씨가 남자에게 저런 말을 하다니." 한 부인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어때서요? 상대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인데요, 뭐. 젊은 아가씨들이 저렇게 서로 뭉쳐서 당당히 맞서다니 얼마나 훌륭해요! 우리 때도 저랬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저렇게 상스러운 말을 하다니, 힐다. 좀 듣기 거북하잖아요." 첫번째 중년 부인이 입을 삐죽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럼, 저쪽은 저렇게 막 말해도 되는 거예요?" 나는 그 여자에게 말했다. 인부들은 굉장한 인파가 몰려들었기 때문에 몹시 당황해했다. 사람들은 계속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굉장해! 그때 바로 람보 기질의 십장이 해결사 노륵을 하려고 나타났다. "이 짐승들을 어떻게 처리해주지 않을래요?" 하고 호주 아가씨가 말했다. "여기서 여자들을 희롱하는 것 말고는 이 사람들은 할 일이 없는 거예요?" "너희들, 안에 들어가 있어!" 하고 십장이 고함을 치며 인부들을 쫓아보냈다. 우리들은 와아 하고 환성을 질렀다. 멋진 기분이었다. 좋았어! 알리와 나는 호주 여자들과 함께 길 건너편에 있는 카페 리오로 돌아왔다. 중년 여자들도 따라왔다. '호주여자'들은 실은 뉴질랜드에서 온 아가씨들이고, 더구나 정말로 레즈비언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둘이서 전세계를 여행하며 돌아다닌다니, 부럽이 짝이 없었다! 나도 여행을 떠나고 싶다. 나하고 알리. 틀림없이 즐거울 것이다. 하지만 하필이면 고르고 골라서 11월에 스코틀랜드를 찾아오다니! 근본적으로 뭔가 잘못됐다고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여섯 명이서 하여간 별의별 것에 대해서 오랜 시간 동안 수다를 떨었다. 알리조차도 누그러진 것 같았다. 이윽고 내 아파트에 가서 하시시를 피우거나 차를 좀더 마시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중년 부인들에게도 권했지만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서 남편의 오후 차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들은 자기먹을 것은 자기가 챙기게 내버려두라고 말했지만 할 수 없었다. 한 부인은 정말로 따라오고 싶은 모습이었다. "나도 처녀들 같은 나이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그렇다면 인생을 전혀 다르게 살았을 텐데, 틀림없이."『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 이었다. 해방감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모두 마찬가지였다. 마법 같았다! 나의 아파트에서 알리, 베로니카와 제인(뉴질랜드 처녀들) 네 사람은 약에 취했다. 모두가 남자들을 깍아내렸다. 남자 따위는 모두 멍청이에다 어린애 같은 열등한 생물이라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여자에 대해서 이처럼 친밀함을 느낀것은 처음이었으며, 내가 레즈비언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까지 했다. 이따름 남자라는 것은 섹스상대 말고는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 밖의 경우에는 단순한 두통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좀 황당한 사고방식 같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가? 우리들 여자의 문제점은 그런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과, 남자들이 강요해오는 터무니 없는 개소리를 네, 네 하고 받아들이고 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이 열렸다. 마크였다. 마크의 얼굴을 보니까 나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마크는 우리들이 배를 잡고 웃고 있으니까, 무슨 일인가 하고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약 때문이라고 생각되지만 마크가 좀 이상하게 보였다. 남자들은 정말 이상하게 생겼다. 납작한 몸뚱이에, 이상하게 생긴 머리가 얹혀져 있다. 제인이 말한 대로 생식기를 몸 밖으로 늘어뜨리고 있는 이상한 동물이다. 불쌍한 녀석! "어이, 귀여운 총각!" 하고 베로니카가 웃었다. "난 저놈을 죽이게 타줬다고.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 그리 나쁜 물건은 아니었어. 다만 그 망할 게 너무 작았지만 말야." 나는 마크를 가리키면서, 프랑코처럼 말했다. 알리와 나는 여자들이 동경하는 프랭크 백비를-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마구 깎아내렸다. 불쌍한 마크, 화도 안 내고 잘도 참고 있는 다고 생각한다. 마크를 위해서 그것만은 칭찬해줘야지. 마크는 그냥 고개를 흔들며 웃었을 뿐이었다. "확실히 좋지 않을 때 찾아온 것 같군. 내일 다시 전화할께, 켈리." "오......불쌍한 마크......우리 여자들끼리 수다 떨고(crack)* 있었을 뿐이야......이해하지.....?" 알리가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알리의 말이 우스워서 큰소리로 웃었다. "얘는 여자의 어떤 균열(crack)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니?"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알리와 나는 무엇이든지 섹스하고 결부를 시킨다니까. 남자로 태어낫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특히 약을 먹고 흥분해 있을 때는 더 그렇다. "괜찮아, 그럼, 또 보자." 마크는 나에게 윙크를 하고는 돌아갔다. "흥, 제대로 된 남자도 있기는 하군." 하고 웃음이 가라앉자 제인이 말했다. "그래, 남자 쪽이 인원수가 적을 때는 저렇다니까." 나는 말했다. 말을 하면서 어째서 이런 가시돋힌 말을 하고 있지, 하고 말했다. 하지만 너무 깊이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33. 마크 헌트 없어요?: -렌트의 이야기 켈리는 남자 손님들이 주로 찾는 사우스 사이드의 바에서 일하고 있었다. 인기 있는 술집이라 캘리는 눈코 뜰새 없이 바빴다. 그 토요일 오후 렌튼, 스퍼드와 개반이 들렸을 때, 가게는 여느때보다 한층 더 붐비고 있었다. 건너편에 있는 펍의 전화로 식보이가 전화를 걸었다. "잠깐만 기다려, 마크." 술을 주문하려고 카운터로 다가간 렌튼에게 그렇게 말을 하고는, 켈리는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를 받고 대답했다. "네, 루더포드 바입니다." "여보세요." 식보이는 말콤 립킨드 상업학교 타입의 목소리를 꾸며서 말했다. "그쪽 술집에 마크 헌트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요?" "마크 렌튼이라면 있는데요." 켈리가 대답했다. 식보이는 빌어먹을, 들통이 났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대로 연기를 계속하기로 했다. "아니, 내가 찾고 있는 건 마크 헌트(Mark Hunt)*인데요." 저맞ㄶ은 목소리로 캘리에게 그렇게 되풀이 했다. "마크 헌트 없어요?" 하고 켈리는 손님 쪽을 향해서 고함쳤다. 거의 남자들뿐인 취객들이 일제히 켈러 쪽을 돌아다봤다. 어떤 얼굴이나 모두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혹시 누구 마크 헌트 못 봤어요?" 그러자 몇 사람의 남자들이 와아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못 봤어. 하지만 한 번 봤으면 좋겠는데!" 하고 누가 말했다. 켈리는 아직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왜들 웃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마크 헌트를 찾는다고 전화가 왔는데......." 목소리가 차츰 작아지다가 사라졌다. 켈리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가렸다. 그제야 그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데 그래!"하고 렌튼이 미소를 지었고 식보이가 펍으로 들어왔다. 렌튼과 식보이는 너무 웃다가 넘어지지 않도록, 문자 그대로 서로 매달려서 웃고 있었다. 켈리는 그들에게 물병에 절반쯤 남아 있던 물을 끼얹었으나, 두사람은 거의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남자들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농담이라도 캘리는 모욕당한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또한 농담을 농담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화를 내고 있는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그러나 곧 자신의 분노가 단순히 농담 때문이 아니라 가게에 있는 남자들의 반응에서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 안에 있던 캘리는 우리 속에서 재롱을 떤 동물원의 짐승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남자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입을 크게 벌리고, 벌개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악의에 찬 상놈들. 또 여자를 우스갯거리로 만들었군, 그녀는 생각했다. 바에 있는 멍청한 계집애. 렌튼은 켈리의 얼굴을 보고 그녀가 상처를 입고 분노에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웃음이 싹 가셨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켈리라면 유머가 통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왜 그러는 거지? '그때'라는 대답이 반사적으로 떠올랐으나 주위를 둘러보고, 바에 가득 찬 웃음소리가 아니었다. 린치를 가하는 폭도들의 웃음소리였다.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 하고 렌튼은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고. 제6장 : 폐허의 고향으로 프로를 위한 손쉬운 돈벌이:-스퍼드의 이야기- 그건 누워서 떡먹기였다, 식은죽 먹기였다고. 그렇지만, 백비는 정말 쿨하지 않았어. 엄청 날카로워져 있었다니까. 그러니까 이건 정말 정말이야. "빌어먹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알았지? 입도 벙긋하지 말라고." 그는 나한테 말했다. "어, 그러니까, 잘 알아들었어, 똑똑히, 확실히, 분명히, 그러니까 진정하라고, 프랑코, 진정해." 그러니까 우리는 한 건 올렸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좋아, 하지만 아무한테도 입 벙긋하지 마. 그 빌어먹을 렌츠한테도 안 돼. 알았어?" 어떤 고양이한테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법이다. 놈들은 상식이 어쩌고 하면 배신자, 하고 으르렁댄다. 알겠어? "그 돈으로 약을 사기만 해봐라. 당분간은 돈에 손도 대지마." 녀석은 이제 남이 돈을 어떻게 쓰나 하는 것까지 참견하는군. 이거 정말 시시한 짓이다. 우리는 어떤 꼬마한테 정보를 듣고 2천파운드(약 300만 원)씩을 각자 손에 넣었다. 그런데도 이 고양이는 아직도 털이 곤두서 있다. 한마디로 매거보이는 포근한 요람 안에서 몸을 말고 그르렁대는 고양이는 아닌 것이다. 우리는 맥주 한 파인트씩을 더 비우고 조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가 들고 다니는 스포츠 가방에는 아디다스나 헤드가 아닌 '정물'이라고 찍혀 있는 게 더 맞을 것 같았다. 2천 파운드라, 우와! 너무 겁내지 말아요, 이건 단지 내 호의의 표시니까......또 한 사람의 프랑코, 미스터 자파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택시는 우리를 백비의 집에 내려놓았다. 들어가니까 준이 아기를 무릎 위에 놓고 재우고 있었다. "애가 깼어." 그녀는 프랑코에게 설명하듯 이야기했다. 프랑코는 둘 다 죽여버리고 싶다는 듯이 노려봤다. "빌어먹을. 침실로 가자, 스퍼드. 니미, 자기 집구석에서도 맘대로 할 수 없으니!" 그는 문 쪽을 가리켰다. "무슨 일이야?" 준이 물었다. "꼬치꼬치 캐묻지마. 그 빌어먹을 에새끼나 잘 보고 있으라고!" 벡비가 딱딱거렸다. 녀석의 말을 듣고 있으면 도무지 자기 자식한테 하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안 그래? 어떤 의미로는 맞는 소리라고 생각되지만. 그러니까 프랑코는 어딜 보나 좋은 아버지 타입은 아니다......음, 그럼 프랑코는 도대체 어떤 타입이더라? 하지만 정말 매끈하게 해냈다. 주먹도, 말다툼도 오가지 않았다. 우리는 복사한 열쇠로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됐다. 카운터 뒤 현금 서랍 밑의 마루 타일에는 비밀 공간이 있었다. 그 안에는 돈이 가득 든 커다란 캔버스 가방이 있었다. 야, 캡인데! 아름다운 지폐와 동전들. 더 나은 세계로 날 보내줄 패스포트. 초인종이 울렸다. 프랑코와 나는 경찰인 줄 알고 약간 긴장했지만 자기 몫을 챙기러 온 애송이였다. 녀석도 약간 놀란 모습이었는데 왜냐하면 우리들이 침대에 온통 돈을 늘어놨기 때문이었다. 웃기는 꼴이었을 거야, 안 그래? "해냈구나."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침대 위에 있는 돈을 쳐다보던 그 녀석이 말했다. "앉아! 이 돈에 대해서 떠벌리고 다니면 알지?" 프랑코가 으르렁댔다. 우리의 꼬마 친구는 잔뜩 쫄아버린다. 나는 그애한테 너무 심하게 굴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어쨌든 녀석은 이 돈을 벌게 해준 장본인이잖아. 녀석은 우리에게 정보를 흘리고 복사하라고 열쇠까지 슬쩍 빼돌려줬다고. 입 밖으로 이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백배 고양이는 내 표정을 보고 읽어 버렸다. "이런 똘마니 새끼는 곧장 빌어먹을 학교로 달려가서 친구 놈들과 계집애들에게 잘난 척하려고 빌어먹을 돈을 뿌리고 다닐 놈이야." "아냐, 난 그딴 짓 안해." 녀석은 말했다. "닥쳐, 새까!" "백비가 비웃었다. 녀석은 다시 쫄아버렸다. 백비가 나를 보고 말했다. "나라면 반드시 그랬을 테니까." 그는 일어나더니 살벌한 기세로 다트 세개를 표적에 던졌다. 꼬마는 불안해 보였다. "밀고자 새끼보다 더 저질 새끼는,"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다트를 표적에서 뽑아 다시 똑같이 살벌한 기세로 던졌다. "바로 입싼 새끼야. 주둥아리 단속을 못하는 놈들은 밀고자 놈들보다 더 많은 피해를 입히지. 그런 새끼들이 밀고자 놈들보다 더 많은 피해를 입히지. 그런 새끼들은 밀고자 놈들을 먹여살리는 거야. 그리고 밀고자 놈들은 빌어먹을 경찰 놈들을 먹여 살리지. 그러면 우린 모두 날새는 거야." 그는 직통으로 녀석의 얼굴에 다트를 던졌다. 나는 펄쩍 뛰었고 꼬마는 비명을 지르더니 간질 환자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히스테리컬하게 울기 시작했다. 나는 백비가 다트의 플라스틱 부분만 던졌다는 것을 알았다. 던지기 직전에 슬쩍 뾰족한 금속 침을 빼버렸던 것이다. 이 불쌍한 친구는 쇼크 때문에 아직도 훌쩍이고 있었다. "그렇게 무서웠냐, 멍청한 새꺄! 겨우 플라스틱 조각 가지고!" 프랑코는 한심하다는 듯이 웃더니 돈을 세기 시작했다. 그 녀석에게는 거의 동전만 골라주었다. "만약 경찰이 물으면 포티에서 돈을 땄거나 빙고에서 이겼다고 말해. 한 놈에게라도 이 돈에 대해 빙긋하면 내가 네놈을 잡기 전에 경찰이 먼저 널 풀몬트로 보내주기를 기도해야 될 거다, 알았나?" "응......" 녀석은 아직도 떨고 있었다. "자, 이제 꺼져버려, DIY에서 토요일 아르바이트 하던 거나 마저하라고. 명심해, 만약 네 놈이 그 빌어먹을 돈을 뿌리고 다닌다는 것이 내 귀에 들어오면 악 소리 낼 틈도 없이 끝장날 줄 알아." 녀석은 돈을 챙겨 떠났다. 그 불쌍한 자식은 5천 파운드에 가까운 돈 중에서 껌 값이나 다름없는 겨우 몇 백 파운드만 받았다. 그래도 그 나이의 고양이한테는 엄청 큰 돈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래도 나는 프랑코가 그 꼬마한테 좀 심하게 굴었다고 생각한다. "이봐, 그 꼬마는 우리들에게 각자 2천 파운드씩 벌게 해줬잖아......음, 난 그냥 크랑코, 그러니까, 네가 녀석에게 좀 심하게 한 게 아닌가 하고, 알겠어?" "난 저 애송이 새끼가 떠벌리거나 돈자랑하면서 다니지 않게 조치한 것뿐이야. 저런 풋내기들하고 이런 일을 벌이는 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짓이야. 놈들은 입조심이란 걸 몰라, 알았냐? 내가 네놈이랑 가게나 집을 털러 돌아다니는 이유도 거기있어. 넌 진짜 프로페셔널이야, 나처럼. 그리고 넌 아무 놈한테도 떠벌리지 않아. 난 그런 프로페셔널리즘을 존중해, 스퍼드. 진짜 프로랑 일하면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거든." "응......맞아, 그러니까." 나는 말했다. 달리 뭐라고 말할 수 있었겠냐고. 진짜 프로페셔널이라. 어감이 괜찮은데. 정말 근사하게 들리는 말이야. 35. 새끼 고양이와 에이즈 : -렌튼의 이야기- 엄마 집에 묵으면 곧 참을 수 없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 성가신 일이 많다. 그래서 매티의 장례식까지 게브가 날 재워주개로 했다. 북으로 올라오는 기차 여행에선 내가 원했던 대로 아무 일 없었다. 워크맨에 The Fall(포스트펑크록을 표방하는 맨체스터 출신의 혼성 5인조 밴드-역주)의 테이프를 몇 개 틀고 라거를 네 개 비우고 H.P.러브크레프트(Howard Philip Lovecraft, 미국의 공포 소설 작가(1820~1937)-역주)의 책을 읽었다. H.P.는 빌어먹을 나치 새끼지만 훌륭한 이야기꾼이었다. 나는 맞은편 자리에 어떤 얼간이가 실실 웃으면서 엉덩이를 구차하게 밀어넣으려고 할 때마다 방해하면 알지. 하는 표정으로 노려봤다. 즐거운 여행이었다, 그러므로 짧게 느껴졌다. 개브의 새 아파트는 맥도널드 로드에 있었다. 나는 조신하게 굴기로 작정했다. 내가 갈 때마다 녀석의 기분은 좋은 적이 없었다.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녀석이 자기의 불운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내가 너무 자신의 입장을 내세웠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봐, 렌츠, 그 세컨드 프라이즈 자식 말인데." 그는 텅빈 거실을 가리키며 화가 난 듯 고개를 저었다. "난 놈에게 현금;을 주고 벽을 바르고 페인트 칠을 해놓으라고 했거든. 난 B & Q에 가 있을께, 하고 녀석이 나한테 말했어. 그러고 나선 놈을 보지 못했다고." 나의 본능은 개브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라고 시켰다. 애초에 세컨드 프라이즈에게 일을 맡긴 것부터가 미친 짓이었고, 게다가 현금을 먼저 주다니 완전히 돌았구나. 하지만 지금 그는 자기 행동에 대한 비판을 듣고 싶어하는 것 같지도 않고 더구나 나는 그의 손님이었다. 나는 가방을 객실에 내려놓고 그를 폅에 데려갔다. 나는 매타에 대해 듣고 싶어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했다. 당연히 그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었지만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매티는 자기가 에이즈에 감였됐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어. 아마 꽤 오래 전에 감염된 것 같아." 하고 개브가 말했다. "폐렴이었어, 아니면 암이었어?" "톡소플라즈마, 주혈원충병이었어." 개브는 고개를 저었다. "녀석은 리사를, 자기 딸을 만나고 싶어했어. 셜리의 아이, 생각나? 셜리는 녀석을 집 가까이에도 오지 못하게 했잖아. 당시 놈의 상태를 봐선 그런 취급을 당해도 놀랄 일은 아니었지. 어쨌든 니콜라 헨론이라고 생각나냐?" "그래, 니키 말이지?" "걔네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어. 그래서 매티가 한 마리 얻었지. 녀석은 고양이를 셜리한테 아이에게 전해달라고 건네줄 작정이었어. 그래서 고양이를 갖고 웨스터 헤일즈로 갔지. 딸에게 줄 선물로 말야." 나는 메티가 발작을 일으킨 사실과 새끼 고양이와의 연관점을 전혀 찾을 수 없었지만 어쨌든 매티다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매티답군. 아무 대책없이 고양이를 얻어서 다른 사람한테 돌보라고 안겨주다니. 분명히 셜리도 한소리 퍼부었겠지." "맞아, 바로 그대로야. 형광등 같은 놈이었어." 개브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셜리는 '난 고양이 뒤치다꺼리 같은 건 하기 싫으니까 다시 가져가버려. 그리고 내 눈 앞에서 썩 꺼지라고' 하고 말했지. 그래서 매티는 할 수 없이 고양이 새끼를 키우게 됐어.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상상이 갈 거야. 고양이는 방치됐어. 고양이 변소는 오줌이 찰랑 거리고 온 집 안이 고양이 똥투성이가 됐지. 매티는 해로인이나 진정제에 취해서 누워 있기만 했어. 아니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든가, 너도 그 녀석이 어떤지 알지? 내가 말한 대로 녀석은 자기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걸 몰랐어. 그리고 고양이 똥에서 주혈원충 병이 옮을 수 있다는 것도 몰랐지." "나도 몰랐어. 그게 도대체 뭔데?" 하고 나는 물었다. "아, 정말 끔찍한 병이야. 뇌에 생긴 종기 같은 거야, 알겠어?" 나는 몸을 떨었다. 불쌍한 매티, 가슴이 저며왔다. 나도 언젠가 머리에 종기가 생긴 적이 있었다. 그게 뇌 속에 났다고 상상해 봐라. 고름으로 머릿속이 꽉 찬 모습을. 빌어먹을. 매티. 빌어먹을. "그래서 어떻게 됐어?" "녀석은 두통으로 고생하기 시작했어. 그래서 고통을 없애기 위해 더 많은 약을 사용했지. 그러고 나서 발작을 일으켰대. 스물다섯 살 밖에 안 된 놈이 빌어먹을 뇌졸중이라니. 거짓말 같아. 그 녀석은 그 후 몰라보게 변했어. 길거리에서 만나도 그냥 지나칠 정도였지. 여기는 리스인데 말야, 알겠어? 녀석은 갑자기 할아버지가 된 것 같았오. 한쪽으로 몸이 기울어져서 일그러진 얼굴로 다시 병신처럼 절뚝거리며 다녔지. 하지만 그나마 그러고 다닌 것도 고작 2주정도였어. 그러고 나서 두 번째 발작을 일으켜서 죽어버렸지. 놈은 집 안에서 죽었어. 그 불쌍한 자식은 이웃들이 고양이 울음소리와 악취로 불평할 때까지 그대로 방치됐었지. 경찰이 문을 부수고 들어갔어. 매티는 얼굴을 말라붙은 토사물 웅덩이에 쳐박고 엎드린 채 죽어 있었어. 고양이는 무사했고." 나는 매티와 함께 버려진 아파트를 점거하고 살았던 세퍼드 부시시절을 회상했다. 그때가 놈의 인생에서 갖아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녀석은 그런 펑크다운 행동을 좋아했다.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녀석은 그 건물을 점거하고 살던 모든 여자와 한 번씩 자봤다. 그 여자들 중에는 내가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맨체스터에서 온 아가씨도 있었다. 색골 녀석. 우리가 다시 여기 돌아왔을 때부터 그 불씽힌 자식은 하는 일마다 꼬이기 시작했다. 그 다음부터는 일직선으로 여기까지 왔다. 불쌍한 매티. "빌어먹을." 개브가 중얼거렸다. "저 퍼퓸 제임스 새끼, 하필 이런 때 나타나는 거야." 고개를 쳐들자 활짝 웃는 얼굴로 우리 쪽으로 오고 있는 퍼퓸 제임스의 얼굴이 보였다. 아예 자기 술까지 들고왔다. "잘 있었어, 제임스?" "그럭저럭. 넌 대체 그 동안 어디 숨어 있었냐, 마크?" "런던에." 나는 대답했다. 퍼퓸 제임스는 성가시기 짝이 없는 놈이다. 얼굴만 보면 당장 향수를 팔려고 덤빈다. "혹시 요새 여자랑 사귀고 잇는 거 아냐, 마크?" "아니." 나는 기쁜 마음으로 알려줬다. 퍼퓸 제임스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입을 삐죽였다. "개브, 네 애인은 잘있어?" "잘 있어." 개브가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내가 착각한게 아니라면 지난번에 애인이랑 여기 왔었을 때 그녀가 쓴 향수, 니나 리치였지, 맞지?" "난 지금 향수 같은 거 살 기분이 아냐." 개브가 차가운 어조로 단호하게 말했다. 퍼퓸 제임스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팔을 벌렸다. "안됐군. 여자 마음을 사로잡는 데 향수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어. 꽃은 오래가지 않고 요즘같이 몸매에 신경쓰는 시대에는 초콜릿도 별로야. 그래도 구경이라도 해봐." 퍼퓸 제임스는 마치 우리들이 향수병을 보는 순간 생각을 고쳐먹기라도 할 것처럼 싱글싱글 웃으면서 막무가내로 상자를 열었다. "그래도 오늘은 실적이 좋으니까 불평해선 안 되겠지. 그런데 너희들 친구, 세컨드 프라이즈 말야. 한 시간쯤 전에 슈럽에서 만났거든. 꽤 취해서 하는 말이, '향수 좀 몇 병 줘. 난 지금 캐롤을 만나러 갈 거야. 그 동안 너무 못되게 굴었으니까 이제 좀 풀어줄 때도 됐지,' 하는 거야. 그러더니 잔뜩 사버렸어, 정말이야." 개브가 입을 쩍 벌렸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더니 할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퍼퓸 제임스는 다른 희생자를 찾아 라운지 건너편으로 뛰어갔다. 나는 맥주를 비웠다. "세컨드 프라이즈를 찾아보자. 녀석이 술로 네돈을 날려버리기 전에. 얼마나 줬는데?" "2백 파운드." 개브가 말했다. "멍청한 새끼." 나는 비웃으며 말했다. 참을 틈도 없이 불쑥 튀어나와 버렸다. "맞아, 내 머리속을 진찰받고 싶어" 하고 개브도 동의했지만 웃을 수 없었다. 결국 전혀 웃을 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36. 매티의 추억 : 1 "잘 있었어, 넬리? 정말 되지게 오랜만이군, 이 나쁜 자식." 프랑코는 넬리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목에는 뱀, 이마에는 야자수가 있는 외딴 섬 문신을 새겨넣은 넬리가 양복을 입으니까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런 일로 다시 만나게 된 건 유감이야." 넬리가 진지하게 말했다. 스퍼드, 알리슨, 그리고 스티비와 이야기하고 있던 렌튼은 오늘 첫 번째로 나온 '장례식장의 상투 문구'를 듣고 미소를 지었다. 신호를 받은 스퍼드는 이렇게 말했다. "불쌍한 매티. 정말 슬픈 소식이야, 안 그래?" "됐어, 난 빠질래." 알리슨은 팔짱을 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떨고 있었다. "우리도 조심하지 않으면 이렇게 될 거야. 그건 분명한 사실이야. 스퍼드, 너 아직 테스트 안 받아봤지?" 렌튼이 물었다. "이봐......지금은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잖아. 여긴 매티의 장례식장이야." "언젠가 적당한 땐데?" 렌튼이 말했다. "너 진짜 검사 한번 받아봐야 돼, 대니." 알리슨이 타이르듯 말했다. "아마 모르는게 약일지도 몰라. 매티가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 됐을 때 그 사실을 알았으면 어땠을 거라고 생각해?" "매티는 매티고 너는 너야. 자기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것을 알기 전에 녀석이 어떻게 살았었지?" 알리슨이 말했다. 스퍼드와 렌튼은 머리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화장터에 붙어 있는 작은 예배당 안에서 목사가 매티에 대해 추도사를 짤막하게 말했다. 그날 아침은 화장 스케쥴이 꽉 차 있었기 때문에 주절주절 늘어놓을 시간이 없었다. 간단한 코멘트와 찬송가 두곡, 한두 개의 기도, 그리고 시체를 소각로로 내려보내기 위해 스위치를 찰칵 눌렀다. 이 일을 몇 번 더 반복하고 나면 대기하던 다른 목사와 교대할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 매튜 코넬은 우리 인생에서 여러 다양한 역할을 채워줬습니다. 매튜는 아들이자 형제이자, 아버지이자, 친구였습니다. 매튜의 짧았던 일생의 마지막 나날은 쓸쓸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의 참모습이었던, 인생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찼던 다정한 젊은이로 그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매튜는 뛰어난 뮤지션이었고 훌륭한 기타 솜씨로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는 걸......." 렌튼은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옆에 서 있는 스퍼드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매티는 자기가 알고 있는 한 가장 형편없는 기타리스트였다. 그가 어느 정도 능숙하게 칠 수 있었던 노래는 도어스의 <로드하우스 블루스>와 클래시, 그리고 스테이터스 코우(60년대 말에 결성된 영국의 베테랑 하드룩 그룹-역주)의 곡뿐이었다. 그는 클래시를 썼지만 결코 마스터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티는 그의 팬더 스트래토캐스트 기타를 사랑했다. 기타는 그가 가장 최후로 내다 판 물건이었다. 매티는 자기 정맥을 쓰레기로 오염시키기 위해 앰프를 판 후에도 기타만은 놓지 않았었던 것이다. 불쌍한 매티, 렌튼은 생각했다. 우리들 중 과연 누가 진정한 그의 모습을 알 수 있었을까? 아니, 도대체 다른 사람의 진정한 모습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스티비는 지금 4백 마일 떨어진 홀로웨이 아파트에서 스텔라와 함께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동거 시작 후 처음으로 떨어져 있었다. 그는 속이 불편해졌다. 아무리 애를 써도 머릿속에서 매티의 모습이 자꾸 스텔라의 얼굴로 바뀌었다. 스퍼드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것은 정말 끔찍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더위, 벌레, 그리고 <네이버스>나 <홈 앤드 어웨이> 같은 연속극에서 보는 따분한 교외 주택 지구.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제대로 된 펍이 없는 것 같이 보였다. 그곳은 날씨가 더운 것 외에는 바버튼 메인스, 벅스톤 또는 이스트 크렉스 같은 곳의 복사판 같았다. 그냥 지독하게 따분하고 지독하게 시시한 곳 같았다. 그는 멜버른과 시드니의 오래된 동네는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그곳에도 에든버러, 글래스고, 아니 하다 못해 뉴욕같이 아파트가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왜 텔레비전에는 나오지 않는 걸까? 그러다가 왜 자기가 매티와 오스트레일리아를 연관지어서 생각하고 있을까 하고 궁금해 했다. 아마 그들이 들를 때마다 매티는 약에 취해 매트리스에 드러 누운 채 오스트레일리아 연속극을 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알리슨은 매티와 함께 잤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알리슨이 약을 시작하기 이전인 아주 옛날 일이었다. 그녀는 그때 열여덟 살이었다. 알리슨은 매티의 패니스를, 그 모습과 질감을 떠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떠올릴 수가 없었다. 매티의 몸은 그릴 수 있었다. 그는 마른 체격에 핸섬한 용모를 가진 젊은이였다. 그의 찌르는 듯한 시선은 항상 바쁘게 움직여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을 드러내줬다. 하지만 그녀가 가장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매티가 그녀를 침대로 데려가기 전에 해준 말이었다. "이제까지 한 번도 맛본 적이 없는 섹스가 될거야." 그 말은 맞는 말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형편 없는 섹스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해본 적이 없었다. 매티는 1초도 안 돼서 절정에 도달해 사정해버린 후 숨을 헐떡거리며 그녀의 몸에서 내려와버렸다. 알리슨은 불쾌함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정말 거지같아."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오며 그에게 말했다. 팽팽하게 한껏 달아올라 있었는데도 만족을 못 시켜준 매티에게 마구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녀는 옷을 걸쳤다. 매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렇지만 방을 나가면서 뒤돌아봤을 때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분명히 봤다고 확신한다. 그 모습이 가슴 깊이 남아 그녀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나무관과 겹쳐졌다. 알리슨은 그때 좀더 친절하게 대해줬더라면 하고 후회했다. 프랑코 백비는 혼란스럽고 화가 났다. 백비는 친구가 입은 상처는 곧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친구들을 잘 챙겨준다고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한 친구의 죽음은 곧 자신의 무능함으로 다가왔다. 프랑코는 그의 분노를 매티에게 향하는 걸로 이 딜레머를 해결했다. 그는 매티가 로디언 로드에서 자이포와 마이키 포레스터의 돈을 떼어먹고 자기한테 도망왔을 때 두 사람을 자신이 혼내줬던 일을 생각해냈다. 그한테는 말로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원칙의 문제였다. 친구의 뒤를 봐주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그는 비겁한 행동을 한 매티에게도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했다. 육체적으로는 구타, 사회적으로는 굴욕적인 욕설로 말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깨달았다. 그 새끼에게 더 호된 대가를 치르게 만들었어야 했다는 것을. 코넬 부인은 매티가 어린 아이였을 때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내애들은 으레 지저분한 법이지만 매티는 특히 지독했다. 어찌나 험하게 하고 다녔는지 신발과 옷이 얼마 안 되서 너덜너덜하게 떨어졌다. 그래서 그녀는 매티가 사춘기로 접어들며 펑크가 됐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지저분한 아이는 펑크가 되는 것이 차라리 나아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매티는 언제나 펑크였다. 어떤 사건이 생각났다. 매티가 어렸을 때, 의치를 박으러 가는 엄마를 쪼아온 적이 있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 속에서 그녀는 의치 때문에 사람들을 공연히 의식하고 있었다. 매티는 버스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엄마가 가짜 이를 박은걸 말해야 된다고 우겼다. 그애는 정말 다정한 아이였다. 착한 애들은 빨리 죽는 법이야,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애들은 일곱 살만 넘으면 엄마의 품 안에서 벗어난다. 그러고 나서 그 상태에 간신히 익숙해질 만한 열네 살 때 같은 일이 반복된다. 뭔가가 일어난다. 그러고 나서 거기에 헤로인을 집어넣으면 그들은 더 이상 같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헤로인이 늘어날수록 매티는 줄어든다. 그녀는 조용히 흐느꼈다. 발륨이 그녀의 슬픔을 산들바람처럼 어루만져 주며 성난 폭풍처럼 몰려드는 마음속의 불안과 비탄을 가라앉히려 했다. 매티의 동생인 앤터니는 복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형을 망친 모든 악당들에게 복수할 것이다. 그들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중 몇몇은 배짱 좋게도 이 자리에 얼굴을 내밀기까지 했다. 머피, 렌튼, 윌리암슨. 이 한심한 얼간이들은 마치 자기들은 똥 대신 아이스크림을 싼다는 듯이 의기양양하게 돌아다녔다. 쓰레기 같은 정키에 불과한 주제에 자기네들은 다른 사람이 모르고 있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군다. 그들, 그리고 놈들 뒤에 있는 더 기분나쁜 존재, 그의 형. 그의 나약하고 바보 같은 형은 그 악당에게 끌려가버린 것이다. 앤터니의 생각은 버려진 기차 역에서 데랙 서덜랜드가 자기를 실컷 두들겨 팼던 때로 거슬로 올라갔다. 매티가 그걸 알고는 자기보다 두 살 어리고 앤터니와는 동갑인 데렉을 혼내주러 갔다. 앤터니는 데렉이 형의 손에 의해 창피당하는 걸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형이 엉망으로 당하는 바람에 앤터니는 또다시 창피당해야 했다. 숙적인 데렉이 형을 가볍게 누르며 혼쭐을 내주는 광경을 지켜보는 일은 자기가 직접 당한 것만큼 상처가 컸다. 매티는 그때 그를 실망시켰다. 그 후부터는 모두를 실망시키기만 했다. 리사 코넬은 아빠가 저기 눈 앞에 보이는 상자에 들어가 있어서 슬펐다. 하지만 아빠는 천사처럼 날개가 나서 천당으로 올라갈 거라고 했다. 유모는 리사가 그 말을 하자 울어버렸다. 아빠는 상자 안에서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유모는 상자가 천당으로 올라간다고 했다. 리사는 날개가 나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천사인줄 알고 있었다. 상자에서 아빠를 꺼내지 않으면 날아갈 수 없을 텐데, 하고 걱정이 됐다. 그렇지만 어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 알겠지. 천당은 좋은 곳 같았다. 언젠가 나도 그곳에 가면 아빠를 만나겠지. 아빠가 웨스터 헤일즈로 리사를 만나러 올 때면 몸이 아프지 않았을 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아빠와 이야기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천당에 가면 아주 어렸을 때처럼 아빠와 놀 수 있으니까 참 멋질거다. 천당에 가면 아빠도 건강해지겠지. 천당은 웨스터 헤일즈랑은 다를 테니까. 셜리는 딸의 손을 꼭 잡고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쓰다음었다. 리사는 매티의 삶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이 아이 하나로는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반박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매티는 이름뿐인 아버지였다. 셜리는 매티가 아버지였다고 하는 목사의 말에 기분이 나빴다. 그녀가 엄마인 동시에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매티는 정자를 제공한 후 가끔 찾아와 리사와 놀아줬을 뿐이다. 그나마 헤로인에 빠지기 전의 일이다. 그것이 그가 한 전부였다. 그는 언제나 나약한 구석이 있었다. 책임과 자신의 감정을 직시할 능력이 없었다. 그녀가 만났던 대부분의 정키들은 속으로는 매우 로맨티스트였다. 매티가 그랬다. 셜리는 그런 그의 낭만적인 부분을 사랑했다. 그가 아직 활기에 넘치는 순수하고 부드럽고 다정한 남자였을 때의 일이었다. 하지만 결코 오래 가지 못했다. 해로인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냉혹하고 신랄해지기 시작했다. 오래 전 매티는 셜리에게 연애시를 써주곤 했었다. 아름다운 시들이었다. 문학적인 작품성이 있다든가 해서가 아니라 시가 전달해 주던 아름다운 감정의 순수함 이었다. 언젠가 그는 이제까지 써줬던 시 중에서 유난히 아름다운 시를 읽어준 후 태워버린 것이 있었다. 셜리는 울면서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물었다. 불꽃은 너무나 상징적으로 보였다. 그것은 그녀의 일생에서 가장 가슴 아픈 경험이었다. 그는 돌아서더니 쓰레기통 같은 아파트 안을 둘러봤다. "이것 좀 봐. 이렇게 살면서 꿈 같은 걸 꾸면 안 되는 거야. 그건 자기를 기만하고 고문하는 일이야." 그는 말했다. 그의 눈은 너무나 어두워서 뚫고 들어갈 수 없었다. 그의 냉소와 절망은 셜리에게 옮겨져서 더 나은 삶을 갈망하는 그녀의 희망을 앗아가버렸다. 매티의 영향력이 그녀의 생명력을 거의 파괴할 지경까지 가자 그녀는 용감하게 말했다. "이제 그만." 2 "조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술꾼들로 이루어진 조문객들에게 시달려 치져보이는 바텐더가 애원하듯 말했다. 몇 시간 동안이나 묵묵히 술을 마시며 회상에 잠기던 술자리는 합창으로 이어져ㅅ다. 노래를 부르니까 기분이 좋아지고 긴장이 누그러졌다. 바텐더의 호소는 묵살되었다. 부끄러운줄 알아라, 시머스 오브라이언, 더블린의 젊은 여자들은 모두 울부짖네, 그들은 거짓말과속임수만 일삼는 네게 지쳐버렸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시머스 오브라이언! "제발 조용히 해주세요! 조용히 해달라고요!" 그는 소리쳤다. 리스 링스의 부유한 지역에 있는 작은 호텔은 이런 작태에는 익숙해 있지 않았다. 그것이 평일인 경우엔 특히 더했다. "저 빌어먹을 새끼가 뭐라고 씨부리는 거야? 우리는 친구를 보내러온 거란 말야!" 백비는 바텐더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봤다. "이봐, 프랑고." 위험을 감지한 렌튼은 백비의 어깨를 움켜잡고 그의 기분을 좀 덜 공격적인 쪽으로 움직여보려고 애썼다. "매티와 함께 애인트리 스타디움으로 가서 국가대표팀 시합을 봤던 일 생각나냐?" "그래!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난 그때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 밥 맛 없는 자식한테 썩 꺼지라고 말했지. 그 자식 이름이 뭐였더라?" "키스 체그윈, 체거스였지." "그래, 체거스. 그런 이름이었어."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 녀석 말야? <체거스 플레이스 팝>에 나오는 녀석? 맞아?" 개브가 물었다. "바로 그 녀석이다." 렌튼이 말했다. 프랭크는 이야기를 계속하라고 너그럽게 그에게 웃어보였다. "우리는 대표팀 시합에 갔었잖아, 그렇지? 체거스 녀석은 리비풀의 시티 라디오를 위해 인터뷰를 하고 있었어. 관중석에 앉아 있는 머저리 놈들에게 헛소리를 늘어놓으면서 말야. 녀석이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어. 우리는 그런 자식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메티 그녀석 알잖아, 야 이거 방송 타겠는데 하고 생각했나봐. 리버풀에 와서 기쁩니다, 키스. 그리고 우린 정말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어쩌고 하면서 헛소리를 하잖아. 그러고 나서 이 멍청한 자식이, 그 체거스 새낀지 뭔지가 프랑코에게 마이크를 갖다댔어." 렌튼은 그때 상황을 재현했다. "이 자식은, '썩 꺼져, 이 빌어먹을 새꺄, 시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라, 이 건방진 자식!' 하고 소리쳤어. 체거스는 얼굴이 시뻘겋게 됐어. 그리고 그때 라디오에선 소위 생방에서 이런 말을 지우기 위해 하는 3초 신호음이 나왔지." 그들이 웃자 백비는 자기 행동을 변명했다. "우린 빌어먹을 시합을 보러 내려간 거지 빌어먹을 라디오에서 어떤 얼간이 자식과 이야기하려고 간 건 아니었잖아." 그는 마치 인터뷰하자고 귀찮게 달려드는 미디어에 질린 명사처럼 말했다. 하지만 프랑코는 항상 분개할 거리를 찾아냈다. "그 빌어먹을 식보이도 여기 왔어야 하는데, 매티는 그 자식 친구였잖아." 그가 말했다. "어, 개는 지금 프랑스에 있잖아.....그 여자하고 말야. 아마 그렇게 쉽게 떠나지 못했을 거야......그러니까.......여자가 아니라 프랑스를 말야."하고 스퍼드는 취해서 말했다. "그건 하등 문제가 안 돼. 렌츠와 스타비는 장례식 때문에 여기까지 올라왔잖아. 렌츠와 스티비가 빌어먹을 런던에서 여기까지 올라왔으면 식보이도 프랑스에서 왔었어야지." 스퍼드는 판단력은 알코올 때문에 심각할 정도로 마비되어 있었다. 그는 멍청하게도 계속 논쟁을 해나갔다. "그래, 하지만, 음......프랑스는 멀잖아......여기서 말하는 건 프랑스 남부야. 안 그래? 백브ㅡ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스퍼드를 노려봤다. 신호가 도달하지 못한게 분명하다. 그는 목소리 톤을 높여서 천천히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의 번쩍이는 눈 밑에 있는 입이 이상한 모양으로 일그러졌다. "만약 렌츠와 스티비가 빌어먹을 런던에서 여기까지 올라왔으면 식보이도 프랑스에서 왔었어야지!" "그래......맞는 말이야. 최소한 노력은 했어야지. 그래도 친구 장례식인데." 스퍼드는 백비 같은 사람이 몇 명 정도만 있어도 스코틀랜드 보수당은 끄떡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메시지의 내용이 아니라 그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이다. 백비는 메시지를 주입시키는데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스티비는 술자리가 거북했다. 이런 식으로 놀아본 지가 하도 오래 됐기 때문이다. 프랑코는 스티비와 렌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네놈들은 다시 보게 돼서 더럽게 반갑다. 스티비, 런던에서 이자식 좀 잘 보살펴줘라." 그러더니 렌튼을 쳐다봤다. "만약 네 놈들 매티처럼 된다면 늘씩하게 패줄 거다. 프랑코 형님의 말을 명심해." "내가 만약 매티처럼 된다면 늘씬하게 패줄 몸뚱이도 남아 있지 않을걸?" "내 말을 못 믿는 거냐? 난 네놈들의 시체를 파내서 릿위크로 끌고 다니며 축구공처럼 차줄 작정이야." "눈물나게 고맙다, 프랭크." "친구를 돌봐주는 건 당연한 거지. 너도 알아들었냐, 넬리?" "뭐?" 잔뜩 취한 넬리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난 여기 있는 이 새끼들한테 친구를 돌봐주라고 말하고 있었을 뿐이야." "그런 건 두 말하면 잔소리지." 스퍼드와 알리슨이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렌튼은 프랑코하테서 빠져나와 그들한테 갔다. 프랑코는 스티비가 트로피나 되는 것처럼 붙들고 녀석이 얼마나 멋진 남자인지 넬리한테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스퍼드는 렌튼을 쳐다봤다. "방금 알리한테 이건 정말 참기 힘든 일이라고 말하고 있었어. 난 내 나이 또래 녀석들의 장례식을 너무 많이 가본 것 같아. 다음에는 도대체 누구 차례일까?" 렌튼은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되든 적어도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겠지. 만약 대학에 사별학과 같은 게 있다면 난 지금쯤 박사 학위를 땄을 거야." 폐점 시간이 되자 그들은 차가운 밤거리로 나와 술꾸러미를 들고 백비의 아파트로 향했다. 이미 모두들 열두 시간씩이나 술을 마시며 매티의 일생과 그의 죽음의 동기에 대해 되씹고 난 후였다. 가진 통찰력을 몽땅 동원해서 생각하면 할수록 잔인한 미궁 속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결국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 하나도 없었다. @FF 37. 스트레이트 딜레마 NO.1 -랜튼의 이야기- "이봐, 한번 피워보기나 해, 괜찮아." 그녀는 마리화나를 나에게 내밀며 말했다. 도대체 내가 어쩌다 여기 오게 됐지? 난 지금쯤 집에 돌아가서 옷 갈아입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다이애나 황태자비랑 자고 있어야 하는데. 이건 마크의 잘못이다. 놈과 놈의 '하루 일과 후의 한잔' 때문이다. 봐라, 난 완전히 꿔다논 보릿자루 꼴이다. 진과 티셔츠를 입고 자기가 실제보다 더 쿨한 줄 알고 거들먹거리는 녀석들이 득시글거리는 이 아늑한 아파트에서 양복과 넥타이 차림으로 쭈그리고 앉아 있다. 주말 밤의 광기 따윈 정말 지겨운 것이다. "그 사람 좀 가만 놔둬, 폴라." 펍에서 만난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정말로 나랑 자고 싶어서 난리다. 처음부터 런던의 밤 문화에서 흔히 그러듯 노골적으로 밝히며 달려들었다. 변소에 가서 그녀가 어떻게 생겼었더라, 하고 그려볼 때마다 희미한 윤곽도 떠오르지 않지만 그래도 그녀는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여기 모인 녀석들은 제일 밥맛 없는 타입이다. 피가 흐르지 않는 플라스틱 새끼들. 그런 놈들과 뭔가 할 수 있는 건 섹스밖에 없다. 그리고 가버리면 되는 것이다. 놈들은 내가 만약 그 외에 다른 짓을 하면 실망할 거라는 인상까지 풍겼다. 이렇게 말하니까 꼭 식보이 같군. 그렇지만 녀석의 태도 같은 것에도 마땅히 제자리가 있는 법. 그것은 바로 지금 이곳이다. "싫어. 한번 피워봐, 넥타이 오빠. 이렇게 좋은 건 아직 못 해봤을 거야." 난 보드카를 한 모금 마시고 그 여자를 찬찬히 바라봤다. 그녀는 멋지게 태운 피부와 잘 다등믄 머리칼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이 여자의 찌들고 건강하지 못한 인상을 역으로 강조하고 있었다. 나는 주위 사람들을 훑어봤다. 첨단 트랜드를 찾아 헤매는 멍청한 자식들. 이 공동 묘지는 그런 놈들로 꽉 찼다. 나는 마리화나를 받아들고 한 모금 빨고 난 후 다시 돌려줬다. "마리화나, 아편도 약간 섞였지, 맞지?" 나는 물었다. 사실 꽤 좋은 물건이었다. "응..." 그녀는 약간 당황해서 말했다. 나는 그녀의 손 안에서 타고 있는 마리화나를 다시 쳐다봤다. 뭔가 느끼려고 했다. 아무것이라도 상관없었다. 내가 진짜로 원하고 있는 것은 나의 이성을 마비시켜서 저기 있는 저 마리화나에 손을 뻗어 입으로 가져가 진공 청소기처럼 빨아들이라고 속삭여줄, 내 몸안에 웅크리고 있는 못된 악마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와서 놀려고 하질 않았다. 어쩌면 더 이상 내 몸 안에 살지 않는지도 모른다. 이제 아홉 시에서 다섯 시까지 일하는 얼간이밖에 남겨지지 않았다 "모처럼의 친절이지만 사양하겠어. 날 바보라고 부를려면 맘대로해. 하지만 난 언제나 약에 대해선 민감해져. 주위에서 약 때문에 신세 망친 사람을 하도 여럿 봐놔서 말야." 내 말 속의 가시를 눈치챈듯 그녀는 날 뚫어지게 노려봤다. 그녀는 바보 같은 기분이 들었는지 일어나서 내 곁을 떠났다. "당신은 미쳤어, 정말이야." 펍에서 만난 이름모를 여자가 말하고서 웃었다. 웃음소리가 너무 요란했다. 켈리가 그립다. 그녀는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켈리는 기분좋은 웃음소리를 가졌는데. 솔직히 말해서 마약은 이제 지겹다. 비록 지금의 나는 약을 하던 나보다 훨씬 더 지겨운 녀석이지만 말이다. 단 이러한 지겨움은 오히려 신선한 것이라서 보기보다는 그다지 따분하지 않다. 조금만 더 이런 상태로 지내봐야겠다. 조금만 더. 38. 세기의 '만찬' -켈리의 이야기- 맙소사, 오늘 밤도 그렇고 그런 밤이 될 것이 뻔하다. 차라리 바쁜 게 낫지 이렇게 가만히 있을 때는 시간이 가질 않는다. 물론 팁도 생기지 않는다, 제기랄! 바는 거의 텅 비어 있었다. 앤디는 심심해하는 얼굴로 (이브닝 뉴스)지를 읽고 있다. 그레이엄은 주방에서 누군가 먹어주길 바라며 음식을 만들고 있다. 나는 매우 피곤해져서 바에 기댓다. 내일 아침 철학 수업에 리포트를 내야 한다. 윤리에 관한 것으로 윤리란 상대적인 것이냐, 절대적인 것이냐, 만약 그렇다면 어떤 상황하에서 그러한가, 등등... 생각하기만 하면 우울해진다. 교대하고 나면 그걸 쓰느라 밤을 꼴딱 샐 판이다. 말도 안돼. 런던이 그립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크는 그립다... 조금. 조금보다는 더 많이 그리울지도 모르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은 아니었다. 마크는 만약 내가 대학에 가길 원한다면 런던에서도 다닐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장학금으로 사는 것은 어디서나 쉽지 않고 더구나 런던에서는 불가능하다, 단순히 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해줬다. 그러자 마크는 자기는 꽤 수입이 좋으니까 둘이서 어떻게든 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래, 난 지적인 창녀고 넌 펌프라 이거지. 난 그런 관곈 원하지 않아, 하고 쏘아줬다. 마크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어쨌든 나는 돌아왔고 그는 머물렀다. 두 사람 다 이렇게 된 걸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마크는 날 다정하게 대해주지만 진짜로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 같진 않다. 나는 마크와 6개월을 함께 살았지만 아직도 그를 잘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가끔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원한 것뿐이지 그의 잘못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네 명의 남자가 레스토랑에 들어왔다. 술에 취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럴 수가. 한 사람은 약간 낯이 익었다. 아마 대학에서 봤었을지도 모른다. "뭘 드릴까요?" 앤디가 물었다. "가장 좋은 맥주 두 병... 그리고 네 사람 분의 테이블..." 그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그들의 악센트, 옷차림, 그리고 태도로 짐작해서 중류 또는 중상류 계급의 영국인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에든버러는 그런 백인 식민지 정착자 타입의 인간들이 우굴거린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 자신 또한 런던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대학에서 곧잘 뉴캐슬이나 리버풀, 그리고 버밍엄 사람들과 코크니들과 마주치곤 했었다. 이제 그곳은 실패한 옥스브리지의 홈카운티(런던 주변의 여러 주-역주) 타입과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몇몇 에든버러 상업학교 얼간이들의 놀이터이다. 나는 그들에게 미소를 지어야 한다. 선입관을 버리고 그들을 하나의 인간으로서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마크의 영향이다. 그의 편견은 전염성이 강하다. 그 미친자식.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한 사람이 말했다. "스코틀랜드에서 예쁜 여자를 봤다. 그걸 뭐라고 부르는 줄 알아?" 상대는 소리쳤다. "관광객!" 그들은 매우 큰소리로 떠들었다. 건방진 자식들. 그러고 나서 첫 번째 사람은 내 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하지만 모르겠어. 저런 여자는 침대에서 내쫓지 않을 것 같은데 말야."' 나쁜 자식. 이 빌어먹을 얼간이 자식.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그 말을 못들은 척하려고 애썼다. 난 이 일을 그만둘 형편이 못 된다. 난 돈이 필요하다. 돈이 없으면 대학도 학위도 끝이다. 난 학위가 필요하다.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학위가 필요하다. 그들이 메뉴를 훑어보고 있는 동안 그들 중 짙은 갈색 머리에 구렛나루를 길게 기른 빼빼마른 얼간이 하나가 날 보고 음탕하게 웃었다. "안녕, 달링?" 그는 코크니 악센트를 흉내내서 말했다. 요즘 부유한 젊은이들 사이에서 하류 계급의 악센트를 흉내내는 게 유행인가 보군, 하고 생각했다. 맙소사, 이 재수없는 것들에게 썩 꺼지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런 쓰레기들을 꼭 상대하고 있어야 하나... 물론, 그렇지. "어이 그 우거지상 좀 펴보라고. 아가씨!" 뚱보 녀석이 주제넘게 소리쳤다. 감수성이니 지성 같은 것에 오염되지도 않은, 그런 건 무제도 안 된다는 듯한 도도하고 무식한 부잣집 자식의 목소리였다. 나는 비굴하게 웃어보려고 애썼지만 얼굴 근육이 얼어붙어 버렸다. 정말 고맙기도 하셔라. 주문받는 일은 악몽 같았다. 놈들은 직업에 대한 화제에 몰두해 있었다. 상품 브로커, 홍보 기관, 그리고 기업의 법률 고문 등이 가장 인기 있는 직장 같았다. 그리고 사이사이 나에게 말을 걸거나 자존심에 금가는 이야기를 했다. 빼빼 마른 얼간이는 진짜로 나에게 근무가 끝나는 게 언제냐고 물었다. 나는 놈들이 탁자를 두드려대며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는 소리 때문에 듣지 못한 척했다. 주문을 다 받고 모욕감으로 신경이 너덜너덜해진 채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분노로 몸을 떨면서 내가 얼마나 더 참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루이즈나 마리사처럼 같은 여자로서 이야기할 상대가 오늘 밤 여기 나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저 빌어먹을 얼간이들을 여기서 내쫓을 수 없나요?" 나는 그레이엄에게 딱딱거렸다. "이건 장사야. 손님은 언제나 옳은 법이야. 비록 놈이 아무리 밥맛없는 녀석이라도 말야." 마크가 식보이와 함께 작년 여름 웸블리에서 열렸던 (올해 최고의 명마) 쇼의 출장 연회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들려준 경험담이 생각났다. 그는 언제나 권력을 가진 것은 웨이터들이라고 말했다. 웨이터를 화나게 하지 말라. 물론 마크의 말이 옳다. 이제 그 권력을 행사할 때가 왔다. 지금 심한 생리통 때문에 안 그래도 힘들어 죽을 지경이다. 그런데 심한 출혈을 느꼈다. 나는 화장실로 가서 탐폰을 갈았다. 그리고 분비물에 푹 젖은 탐폰을 화장지로 쌌다. 이 부유한 제국주의자 놈들 중 두 명이 수르를 주문했다. 우리 가게의 트렌디한 메뉴인 토마토와 오렌지 수프였다. 그레이엄이 메인 코스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를 노려 나는 피가 줄줄 흐르는 탐폰을 티백처럼 첫 번째 수프 속으로 담갔다. 포크로 눌러서 구역질 나는 내용물을 짜냈다. 자궁 속에서 나온 검은 핏줄기 몇 가닥이 수프 표면에 떠올랐다. 몇 번 휘저으니까 완전히 녹아버렸다. 나는 에피타이저인 파테(거위나 오리 간 페이스트-역주) 두 접시와 수프 두 그릇을 테이블로 운반했다. 그리고 그 빼빼 마른 얼간이에게 특별히 간을 한 수프가 돌아가도록 했다. 일행 중 하나인 갈색 수염을 기르고 시각적 폭력이라고바께에는 할 수 없는 흉칙하게 튀어나온 이빨을 한 녀석이 다시 큰소리로 하와이가 얼마나 끔찍한 곳인가 떠들고 있었다. "너무 빌어먹게 더웠어. 더위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남켈리포니아의 풍요롭고 따끈따끈한 햇빛하고는 질적으로 달라서 말야. 거기는 너무 습기가 많아서 언제나 돼지처럼 땀을 줄줄 흘리고 있어야 된다고. 게다가 바보 같은 싸구려 기념품을 팔려는 농부 놈들에게 밤낮없이 시달려야 하지." "와인 좀더 갖다줘!" 뚱뚱한 금발머리 얼간이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나는 화장실로 가서 소스펜에 오줌을 채웠다. 방광염은 나의 골칫거리였다. 특히 생리중에는 더했다. 나의 오줌은 부옇게 탁해져 있어서 요도염 기미가 보였다. 나는 오줌으로 와인을 희석했다. 약간 부옇게 됐지만 놈들은 너무 취해 있어서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와인은 4분의 1가량 싱크에 따라 내버리고 나머지를 저항의 의지를 담은 나의 오줌으로 채웠다. 나느 생선 요리에 나머지 오줌을 부었다. 생선에 절여진 소스와 색깔도 농도도 비슷하다. 맙소사! 얼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모두 먹고 마셔댔다. 화장실에서 신문지 위에 똥을 싸는 일은 어려웠다. 너무 작아서 쯔그려 앉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레이엄이 또 뭐라고 소리친다. 나는 간신이 조그만 묽은 똥 덩어리를 하나 짜내고 밖으로 들고 나가 크림과 함께 섞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초콜릿 소스에 타서 팬에 데웠다. 그리고 소스를 프로피테롤(초콜릿을 바른 작은 슈크림-역주) 위에 끼얹었다.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죽여주는군! 엄청난 힘으로 충전이 된 나는 이제 놈들의 모욕을 사실상 즐기기까지 되었다. 이제 웃음 짓는 일이 훨씬 쉬워졌다. 뚱보 자식이 제일 재수가 없어서 쥐약을 약간 갈아놓은 아이스크림을 먹게 됐다. 그레이엄에게 해가 되지 말아야 할 텐데. 레스토랑이 문 닫는 것은 바라지 않으니까. 이제 나의 리포트에는 상황에 따라 윤리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써 넣어야 할 의무를 느낀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 자신에게 정직했을 경우를 가정했을 때의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라몬트 박사의 관점과는 대립적인 입장이므로 아무래도 그의 비위를 맞춰서 높은 학점을 받으려면 절대성 논리에 충실해야 될 것 같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39.리스 센트럴 역에서 트레인 스포팅 웨이빌리 쪽으로 걸어가면서 쳐다본 도시는 기분나쁘고 낯설어보였다. 두 남자가 우체국 옆, 칼튼 로드의 아치 밑으로 난 길에 서서 상대방에 대고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아니면 놈들은 나한테 소리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싸움하기에는 때와 장소도 마땅치 않다. 그렇다고 딱히 적당한 때와 장소라는 게 있을까? 무거운 짐을 들었지만 나는 걸음을 재촉하며 리스 스트리트로 들어섰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거리야? 미친 놈들. 이 자식들을 그냥... 나는 계속 걸었다. 빠른 걸음으로. 극장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두 얼간이들의 고함소리는 오페라를 보고 떼지어 나오는 중산 계급 자식들이 감상을 토로하는 수다로 바뀌었다. (카르멘) 이었다. 그들 중 몇몇은 미리 예약해놓은, 워크의 꼭대기에 있는 레스토랑들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계속 걸었다. 쭉 내리막길이었다. 나는 옛날 내가 살던 몽고메리 거리의 아파트와 옛날 마약쟁이 시절 놀았던, 건물 벽이 새롭게 단장된 알버트 거리를 지나갔다. 사이렌을 시끄럽게 울리며 경찰차 한 대가 워크 거리를 달려갔다. 세 남자가 펍에서 비틀거리며 나와 중국 음식집으로 들어갔다. 그중 하나는 의식적으로 나와 눈을 마주치려 했다. 눈에 띄는 재수없는 자식에게 스트레스 해소를 하려는 유치한 구실이지만 미친 녀석이라면 옳다구나 하고 달려들 것이다. 다시 묵묵히 걸음을 재촉했다. 확률적인 측면에서, 밤의 이 시간대에는 워크 거리를 걸어내려가면 갈수록 입술이 터질 가능성이 점점 높아진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점점 깊이 들어갈수록 나는 안심이 되었다. 여기는 리스다. 아마도 이런 게 고향인가 보다. 토하는 소리가 들려서 공사장 쪽으로 난 골목 안을 들여다보았다. 세컨드 프라이즈가 거하게 토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가 제정신을 차릴 때까지 말없이 기다렸다가 이야기를 걸었다. "이봐, 랍. 괜찮냐?" 그는 뒤를 돌아보고 비틀거렸다. 그리고 길 건너편 심야 영업하는 동야 음식점의 강철 셔터처럼 쾅 소리를 내며 닫히기를 원하는 눈꺼풀에 저항하며 나에게 초점을 맞추려고 했다. 세컨드 프라이즈는 다음과 같은 뜻이었다고 해석되는 웅얼거림을 내뱉었다. "어이, 렌츠 너도 속물이 다 됐군... 짜식..." 그는 비틀거리며 달려들더니 주먹을 날렸다. 무거운 짐에도 불구하고 나는 얼른 뒤로 피할 수 있었다. 그 바보 자식은 벽에 처박히더니 뒷걸음질을 치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는 그를 일으켜줬고 녀석은 도저히 알아듣지 못할 헛소리를 늘어놨지만 적어도 아까보다는 얌전해졌다. 자리를 옮기려고 녀석의 몸에 팔을 둘러 부축하자마자 그는 카드로 쌓은 집처럼 무너졌다. 만성적인 알코올 중독자들이 몸에 익히게 되는 무력함으로 녀석은 나에게 완전히 몸을 맡겨버렸다. 나는 그 빌어먹을 자식이 또다시 길바닥에 나뒹굴지 않도록 받치기 위해 여행가방을 내려놔야 했다. 이건 끝이 없잖아. 택시 한 대가 워크를 올라와, 손을 들어 세우고 세컨드 프라이즈를 뒷좌석에 밀어넣었다. 택시 기사는 별로 달갑지 않은 얼굴을 했지만 난 그에게 5파운드를 주고 말했다. "호손베일의 보우토우에서 내려줘요. 거기서부터라면 집을 찾아갈 수 있을 거예요." 어쨌든 지금은 크리스마스 명절 기간이다. 세컨드 프라이즈 같은 자식은 매년 이맘 때면 별로 튀는 일 없이 지낼 수 있다. 나는 세컨드 프라이즈와 함께 택시에 올라타고 엄마 집에 가고 싶은 유혹은 느꼈지만 토미 영거의 펍에 가는 쪽이 더 구미에 당겼다. 벡비가 안에서 몇몇 미친 녀석들과 떠들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는 낯익은 얼굴이었다. "렌츠! 빌어먹을 어떻게 지냈냐. 새꺄! 방금 런던에서 오는 길이냐?" "응" 벡비와 악수를 하자 그는 나를 끌어당기더니 등을 철썩 내리쳤다. "지금 방금 세컨드 프라이즈를 택시에 버리고 오는 길이야." 나는 말했다. "그 새끼. 놈에게 썩 꺼지라고 했어. 그 세컨드, 버릇없는, 프라이즈 놈. 그 새끼는 정말 빌어먹을 혹 덩어리야. 빌어먹을 약쟁이보다 더 나빠. 만약 크리스마스만 아니었다면 손수 두들겨패서 버릇을 가르쳐줬을 텐데. 그 새끼하고는 더 이상 상종 하나 봐라. 이제 확실하게 끝났어." 벡비가 일행에게 날 소개했다. 세컨드 프라이즈가 저질렀다고 하는, 이 무리에서 쫓겨날 만한 짓이 어떤 건지 알고 싶지조차 않았다. 놈들 중에 도넬리라고 하는 소튼에서 살다온 녀석이 있었다. 예전에 마이키 포레스터가 알랑거리던 자식이다. 놈은 포레스터가 짜증스러워져서 한번 늘씬하게 패줬던 모양이었다.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말이다. 놈보다 당해도 싼 녀석이 또 어디 있겠는가. 벡비가 날 한쪽으로 끌고 가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너 토미가 아프다는 거 알고 있냐?" "그래, 들었어." "나중에 한번 그 새끼한테 들려봐." "응, 물론 그럴 생각이었어." "당연히 그래야지. 넌 특히 토미한테 가봐야 돼. 난 널 탓하는 건 아냐, 렌츠. 세컨드 프라이즈한테도 그렇게 말했어. 난 토미 일로 렌츠를 탓하지 않는다고. 자기 인생은 자기 거니까. 난 세컨드 프라이즈 놈에게도 그렇게 이야기했지." 그러고 나서 벡비는 내가 얼마나 멋진 놈인지 한참을 늘어놓더니 반대 급부를 바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난 의무적으로 그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나는 잠시 동안 벡비의 습관적인 자아 고취를 위한 소도구 노릇을 하며 놈을 강철 같은 사나이면서 엄청난 정력가로 묘사하는 벡비의 몇몇 고전을 일행에게 들려줬다. 이런 이야기는 다른 누군가의 입에서 나오면 좀더 진실같이 들리는 법이다. 우리 두 사람은 그러고 나서 함께 펍을 나와 워크 거리를 걸어내려갔다. 나는 엄마 집에 가서 드러누워 자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벡비는 자기 집에 가서 좀더 마시자고 고집을 부렸다. 벡비와 함께 워크 거리를 걷노라니 내 자신이 희생물이기보다는 포식동물처럼 느껴졌다. 나는 눈을 마주칠 녀석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 얼간이인가를 깨닫고 그만뒀다. 우리는 워크 밑에 있는, 이제는 버려진 창고가 되어버린 황폐한 구 센트럴 스테이션에 가서 볼 일을 봤다. 그곳은 곧 헐려져서 수퍼마켓과 수영장이 들어설 예정이다. 그곳에 기차가 다니던 시절을 기억하기에는 난 너무 어리지만 어쨌든 옛날 기차 역의 철거는 날 슬프게 만들었다. "이 역은 크기가 엄청났대. 여기에서 모든 곳으로 가는 기차를 탈 수 있었어, 그것도 한꺼번에 말야.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더라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줌이 차가운 돌에 튕겨 흩어지는 모습을 바람보며 나는 말했다. "만약 이 역에 아직도 기차가 다닌다면 이 빌어먹을 촌구석에서 떠나는 차에 올라타 있을 거야." 벡비가 말했다. 그가 리스에 대해 그런 식으로 깔아뭉개는 것은 전혀 그답지 않았다. 이곳을 로맨틱하게 그리는 게 정상이다. 벡비가 쳐다보고 있던 늙은 주정뱅이가 한손에 와인 병을 든 채 비틀거리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곳은 술도 마시고 뻗어서 자기도 하는 주정뱅이들 천지였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너희들? 트레인스포팅이라도 하나, 응?"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의 빌어먹을 위트에 자기가 감탄하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 "그래요." 벡비가 말했다. 그러고는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놈의 늙은이." "오, 그래, 그럼 방해하지 않고 물러나주지. 트레인스포팅 열심히 하라고!" 그는 비틀거리며 멀어져갔다. 그의 컥컥대는 주정뱅이 특유의 웃음소리가 황폐한 창고를 가득 채웠다. 나느 벡비가 이상할 정도로 얌전해지고 불편해보이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내게서 등을 돌렸다. 그때서야 난 그 늙은 주정뱅이가 벡비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듀크 거리에서 어떤 녀석과 마주치기 전까지 묵묵히 걷고만 있었다. 벡비는 그 녕석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 그는 쓰러져서 우리의 얼굴을 잠깐 올려다보더니 태아같이 몸을 웅크렸다. 벡비가 납작 엎드린 그의 몸뚱이를 발로 차며 입 밖에 낸 말은 '미친 새끼' 한 마디뿐이었다. 그 녀석이 벡비를 올려다봤을 때 얼굴에 떠 오른 표정은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한 것이었다. 나는 형식적이나마 말리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결국 벡비는 날 돌아보고 우리가 향하던 방향 쪽으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우리는 길 위에 엎어져 있는 남자를 내버려두고 말 한마디 없이 다시 길을 걸었다. 두 사람 중 누구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40.다리 잘린 남자 조니가 다리를 절단한 후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그가 어떤 상태에 있을지 몰랐다. 지난번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는 온몬이 종기로 뒤덮여서 여전히 방콕으로 간다고 헛소리를 늘어놓았었다. 놈은 바로 얼마 전에 다리를 잃은 사람치고는 놀랄 만큼 생기 발랄해 보였다. "렌츠! 얌마! 어떻게 지내냐?" "나쁘진 않아, 조니. 다리 일은 정말 유감이야." 그는 나의 염려를 비웃었다. "전도양양하던 축구 선수 경력이 위기에 몰려버렸어. 그래도 개리멕케이는 다리 정도로 축구를 그만두지 않았지, 안 그래?" 나는 조용히 웃고만 있었다. "화이트 수원은 그렇게 오랫동안 병원에 처박혀 있지 않을 거야. 일단 이놈의 목발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다시 이 바닥으로 돌아올 거야. 누구도 백조의 날개를 잘라버릴 수 없어. 내 다리는 가져갈 수 있어도 날개만은 어림도 없어." 그는 팔을 자기 어깨로 가져가 만약 혹시라도 날개가 있다면 돋아나 있을 자리를 만져보았다. 내 생각으로는 녀석은 자기가 정말로 정말로 날개가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당신은 이 새를 바-꿀-수 없어(레너스 스키너드의 '프리버드'의 가사-역주) ..." 그는 흥얼거렸다. 난 도대체 녀석이 무슨 속셈인지 궁금했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녀석이 말했다. "그 사이클로진을 한 번 해봐. 그거 하나 쓰면 쓰레기지만 메타돈이랑 한번 섞어서 써봐. 우와, 굉장하다고! 내가 일생 동안 해본 것중 가장 황홀했어. 1984년에 했던 그 콜롬비아 물건보다도 훨씬 나아. 네가 요즘 약을 끊었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만약 다시 할 생각이 있으면 그 칵테일을 한 번 시도해 봐." "그렇게 생각해?" "빌어먹을, 정말 최고라니까. 너 수년원장이 누군지 알잖냐, 렌츠. 난 마약에 관한 한 자유 시장 원칙을 믿어. 그래도 이것만은 국립보건원에 공을 돌려야 돼. 다리를 자르고 나서 보존 요법을 시작하고부터 이 산업에서, 국가가 사기업과 경쟁하면서 만족할 만한 상품을 생산해서 고객에게 낮은 가격에 제공하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게 됐거든. 메타돈과 사이클로진의 혼합물은 말야, 맙소사, 난 그냥 병원에 가서 진통제를 타면 사이클로진이 처방된 놈들을 찾아 보면 되는 거야. 그건 암이나 에이즈에 걸린 불쌍한 놈들에게 나눠주는 약이건든. 약간의 물물교환으로 모두 행복해지는 거지." 조니는 정맥이란 정맥은 모두 바늘 구멍투성이가 돼서 동맥에다 주사하기 시작했다. 몇 방만 놓아도 회저(신체 조직의 일부가 썩어 기능을 잃는 병-역주) 가 생겼다. 그러고 나서 다리를 잘라야 했다. 그는 내가 붕대가 감긴 다리 밑둥을 쳐다보는 걸 알았다. 하지만 자꾸 눈이 그쪽으로 향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네가 뭘 생각하는 줄 알아, 쨔샤. 하지만 놈들은 화이트 스원의 가운데 다리는 뺏지 못했지!" "난 그런 생각 안 했어." 나는 반막했지만 그는 복서 팬티 밖으로 그의 페니스를 꺼내 올려 놨다. "그렇게 크게 쓸모 있는 놈은 아니지만 말야." 그는 웃었다. 그때 난 그의 머리가 마른 딱지로 덮여 있다는 걸 알았다. 상처가 회복되고 있다는 표시였다. "말라가고 있는 것 같은데, 조니, 그 종기 같은 것들 말야." "그래, 난 그 동안 메타돈과 사이클로진 혼합물만 하고 주사는 뚝 끊었었거든. 내가 잘린 다리 밑둥을 봤을 때 난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지. 주사 바늘을 꽂을 새로운 정맥이 잔뜩 늘어났잖아. 하지만 병원 직원 놈이 말했지. '꿈도 꾸지 말아요, 거기에 바늘을 꽂으면 당신은 끝이에요." 라고. 하지만 보존 요법은 그리 나쁘지 않았어. 화이트 스원의 전략은 빨리 움직일 수 있게 돼서 약을 완전히 끊고 난 후 다시 이 장사에 띄어들 거야. 이번에는 정식으로 순수하게 이익만을 위해 사업을 할거야." 그는 딱지로 덮인 페니스를 다시 팬티 안으로 밀어넣었다. "너 그거하고 작별하고 싶냐?" 나는 넌지시 찔렀다. 녀석은 내 말은 듣고 있지도 않았다. "아냐, 돈을 모으는 게 목적이야. 그러고 나서 방콕에 가는 거야." 비록 다리 하나를 잃었지만 태국으로 탈출하는 환상만은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명심하라고, '태국에 갈 때까지 여자와 자는 걸 미루고 싶지 않다고. 약을 끊으면 그쪽 문제가 절실해지잖아. 난 아침에 간호사가 붕대를 갈아주러 올 때마다 텐트가 쳐지곤 했었어. 이젠 아기 팔뚝 끝에 사과가 달린 형색으로 얌전히 앉아 있게 됐지." "움직일 수만 있게 되라고, 조니." 나는 그를 격려해줬다. "행여나 그렇게 되겠다. 누가 다리 하나짜리 자식을 데리고 자고 싶겠냐? 난 이 보상을 꼭 해야겠어. 화이트 스원의 빅 컴백으로 말야. 그래도 보상은 여자로 받고 싶어. 단지 사업적인 관계로 한정하고 말야. 아직도 켈리랑 자는 사이냐?" 그는 심술궂게 말했다. "아냐, 켈리는 여기 올라와 있었어." 난 그가 그런 식으로 말한 것도 내가 그런 식으로 대답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알리슨 년이 요 전날 찾아왔었어." 화가 난 이유를 밝히며 그는 말했다. 알리와 켈리는 가장 친한 친구다. "아, 그랬어?" "어떤 병신을 구경하기 위해서." 그는 턱으로 붕대가 감긴 다리 밑둥을 가리켰다. "이봐, 조니, 알리는 그럴 애가 아냐." 그는 다시 웃고 디카프 다이어트 코크 병을 잡고 한 모금 마셨다. "냉장고에 한 병 있어" 하고 그는 부엌을 가리키며 권했다. 난 됐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 요전 날 한 번 들렸었지. 한 몇 주 됐나, 아마. 난 '한 번 해주겠어? 옛정을 생각해서 말야' 하고 말했지. 그러니까 그건 옛날에 그렇게 친했던 수녀원장, 화이트 스원을 위해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란 말야. 그 냉정한 년은 날 그냥 놔두고 가버렸어." 그는 정나미가 떨어진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난 그냥 매춘부 년이랑 한 번도 자보지 못했어, 알아? 일생 동안 한번도 말야. 그 여자가 하자고 성화였을 때도 말야. 옛날이라면 한 방이라고 하면 한 번에 좋다고 달려들었을 거야." "맞아." 나는 맞장구를 쳤다. 그건 사실이다. 안 그런가? 언제나 나와 알리 사이에는 조용한 적대감이 흐르고 있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이유는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녀에 관한 한 최악의 것을 믿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화이트 스원은 아가씨의 곤란한 처지를 이용하는 치사한 녀석은 아니었지." 하고 말하고는 그는 웃음지었다. "그럼, 물론이지." 전혀 믿을 수 없었지만 맞장구쳐줬다. "절대로 아니고 말고." 그는 강하게 반박해왔다. "어쨌든 난 손을 안 댔잖아, 안 그래? 푸딩 맛이 어떤가를 보려면 먹는 게 제일이지." "그래, 다만 헤로인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지, 뭐." "어, 어, 어." 그는 콜라 깡통으로 가슴을 문지르며 말했다. "화이트 스원은 절대로 친구들을 배신하지 않아. 그게 나의 황금률 1번이야. 헤로인 때문에도, 무엇 때문에도 절대로 안 해. 이 문제에 대해서 화이트 스원을 절대 의심하지 마, 렌츠. 나라고 언제나 헤로인에 절어 있었던 것은 아냐. 난 내가 원하기만 하면 손가락 한 번 까딱하는 것으로 그녀를 가질 수 있었어. 내가 헤로인에 취해 있을 때라고 말야. 난 그녀의 핌프(Pimp, 포주-역주)가 될 수도 있었어. 그건 식은죽 먹기지. 난 그년을 팬티를 걸치지 않게 하고 미니스커트를 입혀 이스터 로드에 내려보낼 수도 있었어. 뭐라고 대들면 한 대 치고 오두막 뒤의 술집바닥에 눕힐 수도 있었더. 밖에 서서 머리당 5파운드씩 받으며 술집 손님 모두와 하게 만들 수도 있었어. 밑천을 조금 들이고도 이익을 천문학적으로 남길 수 있었겠지. 그러고 나서 그 다음주에는 타이니로 내려가서 에이즈에 감염된 모든 하츠 놈들을 상대하게 하는 거야."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미스터 카도나보다도 더 많은 주사장을 세우는 데 관계했던 조니는 아직도 에이즈에 걸리지 않았다. 그는 하츠 놈들만 에이즈에 걸리고 힙스 녀석들은 감염되지 않는다는 희한한 이론을 갖고 있다. "난 은퇴 사업으로 핌프 짓을 할 수도 있었어. 몇 주일만 하면 태국으로 갈 수 있었을 거야. 그러면 동양 엉덩이들이 내 앞에 줄을 섰겠지.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어. 난 절대로 친구를 배신하지 않으니까."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 되는 건 힘든 일이야, 조니." 난 미소를 지었다.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더 이상 조니가 꿈꾸고 있는 동방 모험기를 들어주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 맞는 소리야. 나의 문제는 언제나 틀린 쪽을 까먹는다는 거야. 이 사업에선 동정은 금물이야. 절대 원칙 아래서는 모두 그저 아는 사람으로 끝나야 돼. 하지만 이 마음 약한 화이트 스원이라는 자식은 사업에 우정 관계가 끼여들게 해버리지. 그리고 그 이기적인 친구는 그 보답을 어떻게 했지? 난 그저 그녀에게 펠라티오를 한 번 해달라고 했을 뿐이야. 처음엔 다리 때문에 불쌍해서라도 해주겠다고 했지. 난 그녀가 얼굴에 화장을 더 두껍게 하도록 만들었어. 그리고 그걸 꺼냈지. 그녀는 고름이 줄줄 흐르는 물건을 바라봤어. 난 말했지. '걱정하지 마. 침은 천연 항생제니까." "그건 맞는 말이야." 나는 맞장구쳤다. 이제 한계다. "그래, 그리고 또, 렌츠. 우리가 77년도에 가졌던 생각은 옳았어. 우리는 빌어먹을 세상을 침 속에 가라앉히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침을 뱉고 다녔었지." "언젠가는 침이 모두 말라버린다는 것은 슬픈 일이야." 나는 자리를 벗어나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래, 맞는 말이야." 조니는 말했다. 이제 조용해졌다. 이제 떠날 때이다. 41. 웨스트 그랜튼의 겨울 -렌튼의 이야기- 토미는 건강해보였다. 끔찍한 일이다. 녀석은 죽을 것이다. 몇 주 후에 아니면 한 15년 후, 그 사이에 토미는 더 이상 여기 없을 것이다. 나도 똑같은 꼴이 될 수도 있다. 다만 다른 점은 토미에 관한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잘 지내, 토미?" 나는 말했다. 놈은 아주 건강해보였다. "그래." 그는 말했다. 토미는 너덜너덜한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공기는 눅눅했고 오래 전에 갖다버렸어야 할 쓰레기 냄새가 났다. "어때?" "나쁘지 않아." "그 이야기 계속 하는 게 좋니?" 난 물어야 했다. "그렇지는 않아." 그는 그런 것처럼 말했다. 나는 어색한 자세로 똑같이 생긴 의자에 앉았다. 딱딱하고 여기저기 스프링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 의자는 적어도 수십 년 동안 가난한 사람들의 손을 돌아다니다 이제는 토미의 손에 들어왔다. 나는 이제야 겨우 토미가 그리 건강해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일부인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마치 그가 덜 맞춰진 직소 퍼즐이라도 된 것처럼. 쇼크나 우울증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치 토미의 일부가 이미 죽어버렸고 난 그걸 슬퍼하는 것 같았다. 나는 죽음이란 하나의 사건이라기보다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보통 서서히 죽어간다. 죽음의 부분이 서서히 증가하면서 말이다. 그들은 집이나 병원 같은 장소에서 서서히 썩어가는 것이다. 토미는 웨스트 그렌튼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자기 엄마와 의절했다. 벽이 온통 갈라져서 정맥류 아파트라고 불리는 이곳은 시평의회의 무주택자 구제소를 통해 얻었다. 1만 5천 명이나 주택 분양 대기자 명단에 있었지만 아무도 이곳을 원하지는 않았다. 여기는 감옥이다. 평의회의 잘못은 아니지만 정부는 좋은 집은 모두 비싼 값에 팔아버리고 토미 같은 놈들에게는 이런 쓰레기만 남겨놓았다. 정치적으로는 이치가 맞는 이야기다. 정부를 지지하는 표는 이곳에서 한 표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누가 자기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뭔가 도와주려 하겠는가? 윤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건 별개의 문제다. 하지만 윤리가 정치랑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정치란 언제나 돈에 얽힌 문젠데. "런던은 어때?" 그는 물었다. "나쁘지 않아, 토미. 정말 여기랑 별로 다른 게 없어." "그래, 그렇겠지." 그는 비고듯이 말했다. 두꺼운 판ㅈ를 덧댄 문에 커다랗고 까만 글자로 '에이즈 환자'라고 써 있었다. 또 "호모' 와 '정키'라고 쓴 글자도 보였다. 스킨헤드 녀석들은 아무한테나 행패를 부릴 것이다. 아직까지 다행히 토비의 면전에 대고 뭐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토미는 깔끔한 녀석이다. 놈은 벡비가 야구 방망이의 규율이라고 부르는 것을 믿는다. 그는 벡비같이 강한 친구도 있고 나처럼 그리 강하지 못한 친구도 있다.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토미는 이런 학대에 점점 무력해져 갈 것이다. 그의 친구들은 그의 필요가 늘어날 수록 줄어들 것이다. 그것이 역설적이고 사악한, 인생의 공식이란 거다. "테스트 받아봤니?" 그는 물었다. "응" "말짱해?" "응" 토미가 나를 쳐다봤다. 마치 화가 난 동시에 애원하는 듯한 눈길이었다. "넌 나보다 더 많이 맞았잖아. 그리고 주사 바늘도 돌려 썼고. 식보이, 기즈보, 레이미, 스퍼드, 스워니... 매티의 주사기까지 사용했었잖아, 빌어먹을. 매티의 주사 바늘만은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해줘!" "절대로 난 바늘을 같이 사용하지 않았어, 토미. 모든 놈들이 그렇제 말하지만 사실은 아냐. 적어도 아지트에선 절대로 안 그랬어." 나는 그에게 말해줬다. 우습게도 난 키즈보에 대해서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벌써 몇 년째 교도소에 있다. 오랫동안 놈을 면회가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결국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은 것 같다. "거짓말하지 마! 나쁜 새끼! 넌 분명히 주사 바늘을 돌렸어!" 토미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그는 울기 시작했다. 그 녀석이 울면 나도 울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느낀 것은 흉칙하고 숨이 막힐 듯한 분노뿐이었다. "난 한 번도 주사기를 같이 쓰지 않았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다시 뒤로 기대로 앉아서 혼자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이제 악의가 사라진 목소리로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세상 일이란 참 묘해, 안 그래? 날 헤로인으로 끌어들인 건 너와 스퍼드, 식보이, 그리고 스워니 같은 놈들인데 말야. 난 세컨드 프라이즈와 프랑코 같은 놈들과 앉아서 맥주를 마시면서 너희들을 세상에서 제일 가는 천치라고 비웃곤 했지. 그리고 난 리지랑 헤어졌어, 생각나? 너의 집으로 찾아가 한방 놔달라고 부탁했어. 난 뭐 어때, 한 번뿐인ㄷ, 하고 생각했어. 그 후론 계속 한 번뿐을 되풀이했어." 그때 일을 기억한다. 젠장, 겨우 몇 달 전 일이다. 불쌍한 녀석은 다른 사람보다 특정한 약물에 훨씬 더 중독되기 쉽다. 마치 세컨드 프라이즈와 알코올처럼. 토미는 격렬한 기세로 헤로인에 달려들었다. 누구도 헤로인을 조절할 수 없다. 하지만 난 중독 상태에 적응해 버린 몇몇 자식들을 알고 있다. 그중에는 나 자신도 포함된다. 난 이미 여러 번 끊은 경험이 있다. 끊었다가 다시 시작하는 일은 마치 교도소에 가는 것과 같다. 감옥에 갈 때마다 범죄에서 발을 씻을 가능성은 점점 줄어든다. 헤로인을 다시 시작할 때마다 완전히 끊을 가능성은 점점 줄어든다. 단지 그속에 약이 있었던 사실만으로 토미에게 첫 번째 한방을 맞도록 내가 부추긴 것은 아닐까? 아마도. 틀림없이. 그런 나는 유죄인가? 충분히 유죄이다. "정말 미안해, 토미." "난 도대체 뭘해야 될지 모르겠어, 마크. 이제 난 어떻게 해야하지?" 나는 그저 거기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토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계속해서 너의 길을 가. 그것이 네가 할 수 있는 전부야. 자기 몸을 좀 돌보라고. 어쩌면 나빠지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데이비 미첼 좀 보라고. 데이비는 토미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였다. 그는 평생 헤로인은 손도 대지 않았는데 에이즈에 감염되어 버렸다. 하지만 데이비는 건강하다. 그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내가 아는 어떤 사람보다도 건전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토미가 당장 이 아파트의 연료비도 낼 형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데이비 미첼이 아니다. 데렉 자멘(에이즈로 죽기 전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던 영국의 영화 감독-역주) 은 고사하고서라도 말이다. 따뜻한 방에서 살며 몸을 깨끗이 하고 균형잡힌 신선한 음식물을 섭취하며 새로운 도전으로 언제나 정신의 자극을 유지하는 일 따위는 토미에겐 엄두도 못 낼 일이다. 그가 폐렴이나 암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15년도, 아니 10년도, 아니 5년도 채 못 살 것이다. 토미는 웨스트 그랜튼의 겨울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미안해, 토미. 정말로 미안해." 나는 자꾸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약 있어?" 고개를 똑바로 들고 내 얼굴을 바라보며 그가 물었다. "난 이제 끊었어, 토미." 라고 말했지만 그는 코웃음도 안 쳤다. "그럼 돈 좀 꿔줘. 곧 집세 청구서가 날라올 거야." 나는 주머니를 뒤져서 꼬깃꼬깃 접힌 5파운드 지폐 두 장을 꺼냈다. 나는 매티의 장례식 때 일을 생각했다. 다음 차례는 토미라고 생각했고 그 사실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특히 더 무력했다. 그는 돈을 가져갔다. 우리의 눈이 마주치고 그 사이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아주 좋은 것이었다. 하지만 단지 찰나의 일이었고 곧 사라져버렸다. 42. 스코틀랜드 상이용사 조니 스원은 화장실 거울에다 자신의 박박 밀은 머리를 살펴보고 있었다. 몇 주 전 그는 자기의 길고 더러운 머리카락을 밀어버렸다. 이제 턱에 난 수염을 밀어버려야 한다. 다리가 하나밖에 없을 때는 면도하는 일이 아주 고역이다. 더구나 조니는 아직도 한쪽 다리로 균형잡는 일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몇 번 얼굴을 그은 다음 간신히 봐줄 수 있을 만큼 익숙해졌다. 그는 이제 두 번 다시 휠체어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작정했다. "자, 다시 거리로 돌아가는 거야." 그는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뜯어보며 혼자말을 했다. 조니는 깨끗해보였다. 별로 기분좋은 일이 아니었고 그렇게 되기 위한 노력도 귀찮기 짝이 없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퇴역병에게서 어떤 수준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병사) 의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절도 있게 거수 경례를 올려붙였다. 다리 밑둥에 멘 붕대가 신경 쓰였다. 붕대는 더러워보였다. 지역 보건소의간호사 하비 부인은 오늘 와서 붕대를 갈아줄 예정이다. 분명 몸을 깨끗이 하라고 이것저것 잔소리를 해대겠지. 그는 온전한 다리 쪽을 살펴봤다. 그 다리는 둘 중 좀 처지는 쪽이었다. 무릎이 몇 달 전에 축구 시합에서 입은 부상 탓에 시큰거렸다. 이제 온몸의 체중을 다 떠맡게 됐으니 더욱더 시큰거리게 될 것이다. 조니는 이쪽 다리 동맥에 주사를 놓을걸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 회저가 생겨서 의사가 잘라버린 다리는 이 다리가 됐을 텐데. 오른손잡이인 탓이야, 그는 생각했다. 차가운 거리 밖으로 나와 그는 목발에 몸을 의지하며 웨이벌리 역쪽으로 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고통스러웠다. 고통은 잘려진 밑둥에서뿐만이 아니라 온몸에서 오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가 삼켰던 메타돈 두 알과 진정제가 고통을 누그러뜨려줬다. 조니는 마켓 거리가 끝나는 곳에 팻말을 세웠다. 커다란 카드보드 종이에 검은 글자로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 포클란드 상이용사-나는 나라를 위해 다리를 잃었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조니가 진짜 이름을 알지 못하는 실버라는 정키가 느릿느릿 다가왔다. "약 없어, 스워니?" 그는 물었다. "없어. 하지만 레이미는 토요일 날 온다고 들었어." "토요일은 곤란한데." 실버가 한숨을 쉬었다. "원숭이 한 마리가 내 몸 속에서 지금 당장 먹이를 집어넣어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어." "여기 있는 화이트 스원은 비지니스맨이야, 실버." 조니가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만약 팔 상품이 있으면 내가 안 팔고 넘어갈 것 같아?" 실버는 실망한 듯 보였다. 꼬질꼬질한 검은 오버코트가 그의 회색 빛 야윈 피부를 느슨하게 덮고 있었다. "내가 갖고 있는 처방전은 다 울궈먹었어." 동정을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는 듯한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그리고 그의 죽은 눈동자에 희미하게 불이 들어왔다. "이봐, 스워니 그걸로 돈이 벌리냐?" "문 하나가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리는 법이지." 조니가 입을 벌리고 웃자 썩은 이빨들이 보였다. "약을 파는 것보다 이 짓이 더 벌이가 좋아. 자, 이제 날 좀 보내주지 않을래? 난 여기에서 빌어먹을 생계비를 벌어야 하니까. 나같이 정직한 군인이 정키랑 이야기하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냐? 나중에 보자." 실버는 그의 말을 간신히 이해하는 것도 급급해서 자기를 모욕하는 줄조차 몰랐다. "난 그럼 병원에 가봐야겠어. 누군가 진통제를 팔지도 모르니까." "오 르브와." 조니는 그의 등뒤에 대고 소리쳤다. 그는 괜찮은 장사를 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그의 모자에 동전을 떨어뜨렸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 생활에 불행이 끼여들기라도 할 것처럼 고개를 돌리거나 앞만 보고 간다.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후하게 적선을 해줬다. 젊은 사람들이 나이 먹은 사람들보다 더 마음이 좋았다. 성실해보이는 사람들이 부자처럼 보이는 사람보다 더 돈을 많이 줬다. 5파운드 지폐가 모자 속으로 떨어졌다. "신의 은총이 있기를." 조니는 인사했다. "천만의 말씀이오." 한 중년 남자가 말했다. "우리 모두는 당신 같은 청년들에게 빚을 지고 있소. 그렇게 젊은 나이에 그런 고통을 겪다니 정말 안됐군요." "전 후회하지 않습니다. 불행하다고 신세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죠. 그게 바로 제 철학입니다. 나는 우리나라를 사랑합니다. 만약 다시 조국을 위해 싸울 기회가 주어진다면 망설이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전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 돌아왔는걸요. 구스 그린 전투에서 좋은 친구를 몇 명 잃기도 했지요." 조니는 아련한 시선으로 먼 곳을 바라봤다. 그는 거의 자신이 한 거짓말을 믿을 정도로 도취되어 있었다. 그는 중년 남자를 돌아봤다. "그래도 당신같이 우리를 기억해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보람을 느낍니다." "행운을 비네." 중년 남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고 마켓 거리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얼간이 자식." 조니는 중얼거리며 옆구리로 터져나오려는 발작적인 웃음을 억누르느라 푹 숙인 머리를 흔들었다. 두 시간 동안 26.78파운드를 벌었다. 나쁘지 않은 벌이다. 게다가 아주 쉬운 일이다. 조니는 기다리는 데느 도가 터 있었다. 영국 국영 철도의 최악의 연착도 조니의 평정을 뒤흔들어놓지 못했다. 하지만 얼음같이 차가운 열이 맥박을 점점 빠르게 하고 땀구멍에서 끈끈하고 독성이 있는 땀이 나오면서, 곧 엄습할 금단 증세를 예고하기 시작했다. 어떤 야위고 가냘픈 여자가 그에게 다가왔을 때 그는 짐을 싸서 집에 가려던 참이었다. "당신 왕립 스코틀랜드 군에 있었나요? 내 아들 브라이언도 스코틀랜드 군에 있었어요. 브라이언 레이들로 말예요." "어, 전 해병대라서, 부인." 조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브라이언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어요, 주여, 그에게 은총은. 그애는 스물한 살이었어요. 내 다을. 아주 착한 아이였죠." 여자의 눈은 눈물이 글썽글썽해졌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져 신음소리처럼 됐고 그것이 자아내는 무력함으로 더욱 불쌍해 보였다. "있잖아, 난 그 대처를 죽을 때까지 미워할 거야. 내가 그 여자를 저주하지 않고 지나가는 날은 하루도 없을 정도야." 그녀는 지갑을 꺼내 20파운드 지폐를 꺼내 조니의 손에 쥐어줬다. "자, 여기 있어요. 내가 가진 돈은 이게 전부지만 자네가 가져줬으면 좋겠어." 그녀는 흐느끼기 시작하더니 비틀거리면서 그에게서 멀어졌다. 마치 칼에 찔리기라도 한 모습이었다. "신의 은총이 있기를." 조니가 그녀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왕립 스코틀랜드 군에게 신의 은총이 있기를." 사이클로진을 갖고 있던 그는 그 돈으로 메타돈을 섞을 수 있게 되어 손뼉을 쳤다. 신경 안정제와 의약품의 칵테일, 더 나은 시간을 위한 그의 티켓이다. 문외한들이 조롱하는 그 한 사람만을 위한 조그마한 천국.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누리는 행복을 결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알보는 그의 암에 처방된 사이클로진 한 상자를 가지고 있었다. 조니는 오후에 그의 병든 친구를 방문할 것이다. 알보는 조니가 그의 신경 안정제를 필요로 하는 것 만큼 그의 진통제를 필요로 한다. 결핍의 상호 우연. 그래, 왕립 스코틀랜드 군에게 신의 은총이 있기를. 그리고 국립보건원에 신의 은총이 있기를. 제 7장 출구 43.새로운 인생을 위하여 질척질척 기분나쁜 밤이었다. 잔뜩 찌푸린 하늘. 구름은 밑에서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머리 위에 당장이라도 시커먼 내용물을 토해내려 하고 있었다. 새벽이 되고부터 벌써 몇 번째인가? 버스 터미널은 마치 안과 밖을 뒤집어놓고 기름으로 범벅을 해놓은 사회보장 사무소 같았다. 커다란 꿈과 빈약한 주머니로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엄숙한 얼굴로 런던행 줄에 늘어선다. 야간 버스보다 싸게 가려면 히치하이크밖에는 없다. 애버딘발 던디 경유의 버스가 도착했다. 벡비는 담담하게 좌석 예약권을 확인하고 이미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적의에 찬 시선으로 노려봤다. 그러고는 발치에 놓아둔 아디다스 가방을 보았다. 렌튼은 스퍼드 쪽을 보고 팽팽하게 날이 선 벡비를 턱으로 가리키고는, 스퍼드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자식, 틀림없이 누군가 우리 자리에 먼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그래야 싸움 걸 구실이 생기니까 말이야." 스퍼드는 미소를 지으면 렌튼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봤다. 그런 스퍼드를 보면서 이번 계획인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넌 감도 못 잡을 거라고 생각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건 거창한 계획이었다. 그래서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한방 맞을 필요가 있었다. 몇 개월 만의 헤로인이었다. 신경이 곤두설 대로 곤두선 벡비가 뒤를 돌아보더니, 렌튼과 스퍼드가 자신에게 불경죄를 저지를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살벌하게 웃어보였다. "식보이는 데체 어디 짱박혀 있는 거야?" "글쎄, 나는 모르겠는데." 스퍼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곧 오겠지, 뭐." 렌튼은 아디다스 가방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 물건의 20퍼센트는 그 자식 거니까." 그것이 놈의 피해망상에 불을 붙였다. "목소리 좀 낮추지 못해, 새꺄!" 벡비는 으르렁댔다. 그러고는 주위를 둘러보고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좋다,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까 눈이 마주치지 않을까, 이제 곧 폭발할 것 같은 분노를 쏟아놓을 목표가 되어주지 않을까 하고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노려봤다. 그 다음에 벌어질 일은 아무래도 좋았다. 아니, 안 되지. 여기서는 냉정하지 않으면 안 되지. 위험이 너무 많다. 모든 것이 수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벡비 쪽을 보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벡비를 의식하는 사람들은 모두 벡비가 뿜어대는 살기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을 발휘해서 '나 저기 저 미친 놈이 보이지 않아' 하는 식으로 행동했다. 벡비의 친구들조차 그와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렌튼은 녹색 야구 모자를 푹 눌러 써서 눈을 가렸다. 아일랜드 공화국 대표팀의 유니폼을 입은 스퍼드는 때마침 앞에 있던 청바지를 입을 금발 아가씨가 배낭을 내려놓은 바람에 드러난 탱탱한 어덩이를 응시하고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세컨드 프라이즈는 발밑의 엄청 큰 흰 비닐 봉지에 들어있는 캔맥주를 지키면서, 끊임없이 마시고 있었다. 터미널의 반대쪽, 자칭 펍이라고 우기는 판잣집 뒤에서는 식보이가 몰리하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몰리는 창녀인데 에이즈 바아러스 보균자였다. 그녀는 이따름 밤에 역전에서 손님을 낚으러 어슬렁거린다. 몇 주 전에 리스에 있는 지저분한 디스코 바에서 식보이가 깊은 키스를 해준 이래 몰리는 그에게 푹 빠져 있었다. 그날 밤 식보이는 술김에 에이즈 바이러스 같은 것은 그렇게 간단히 감영되지 않는다는 자기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거의 하룻밤 내내 몰리와 프렌치 키스를 하면서 보냈다. 술이 깬 후에야 비소로 겁이 덜컥 나서 이빨을 대여섯 번은 닦았지만, 한잠도 자지 못하고 불안한 하룻밤을 보냈다. 식보이는 펍 뒤쪽에서 친구들을 은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저런 자식들은 기다리게 놔둬도 된다. 그는 버스에 타기 전에 경찰에게 미행당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만일 지금 경찰이 나타난다면, 저 녀석들만 체포당하면 되는 것이다. "야, 10파운드만 빌려주지 않을래?" 식보이는 몰리에게 부탁했다. 아디다스 가방에 3,500파운드 상당의 자기 몫이 들어 있다는 것을 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쪽은 자산이도 이쪽은 유동 자산이다. 그리고 항상 문제가 있는 것은 유동 자산 쪽인 것이다. "좋아." 몰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핸드백을 열었다. 식보이는 자기도 모르게 감동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핸드백 안에 상당한 현금이 들어 있는 것이 보이자 제기랄, 왜 20파운드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하고 자신을 꾸짖었다. "미안한데... 이제 놈들에게 가봐야겠어. 대도시의 불빛이 나를 기다리고 있거든." 식보이는 몰리의 곱슬머리를 걷어올리고 키스를 했다. 단 이번에는 뺨에, 그것도 우롱하듯이 가볍게 키스를 했다. "돌아오면 전화해줘, 사이먼." 식보이의 호리호리하지만 탄탄한 몸이 멀어져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몰리가 소리쳤다. 식보이는 고개들 돌렸다. "그만해. 가고 싶지 않아지니까. 가고 싶지 않아진다고. 그럼 몸 조심하고 잘 있어!" 그는 위크를 하고 티없이 따뜻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흥, 골빈 창녀 같으니라고!" 식보이는 투덜거리며 경멸하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몰리는 아마추어다. 그런 장사를 해나가기에는 세상을 너무나 모른다. 사내들의 희생물이 될 뿐이다. 연민과 경멸이 뒤섞인 기묘한 감정이 치솟았다. 식보이는 모퉁이를 돌자 재빨리 좌우를 둘러보고 경찰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버스 앞에 줄서 있는 친구들을 보고 있으려니까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벡비는 늦게 왔다고 야단이었다. 물론 언제든지 이 녀석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오늘처럼 위험이 사방에 깔려 있는 상황에서는 여느 때보다 더욱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을 것이다. 식보이는 벡비가 어젯밤의 즉석 파티에서 '우연한' 폭력 사태를 야기시키려고 은밀히 획책하고 있었던 것을 상기했다. 벡비의 성질을 조심하지 않으면, 전원이 사이좋게 종신형을 먹을지도 모른다. 세컨드 프라이즈는 생각했던 것처럼 벌써 상당히 술에 취해 있었다. 걱정이 되는 것은 터미널에 오기 전에, 이 술주정뱅이가 무슨 얘기를 떠벌리고 왔느냐 하는 점이다. 자신이 어디 있는지조차 항상 잊어버리는 녀석이다. 그러니 뭘 지껄여댔는지 기억하고 있을 턱이 없다. 이번 계획은 정말로 무모한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불안해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더욱 걱정이 되는 것은 스퍼드와 렌튼이었다. 두 사람 모두 누가 봐도 약에 취해 있다. 위험한 사태에 전원을 말려들게 하는 자가 있다면, 이 두 놈 중 하나일 것이다. 런던의 일을 그만두고 에든버러로 돌아온 이래, 상당히 오랫동안 참고 있던 렌튼조차, 시커가 구해준 순수한 콜럼비아산 헤로인의 유혹에는 이길수가 없었다. 이것은 진짜야. 파키스탄제의 싸구려에 익숙해 있던 에든버러의 정키가 평생에 한 번 맞을 수 있을까 말까한 물건이라고 헨튼은 말했다. 스퍼드도 물론 렌튼의 행동에 동참했다. 스퍼드는 그런 녀석이다. 천진난만한 놀이를 손쉽게 범죄로 바꿔버리는 스퍼드의 재능은 식보이를 항상 놀라게 했다. 그 녀석은 틀림없이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너, 태아라기보다는 잠재적인 마약 중독과 인격 정해의 집합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은 존재였을 것이다. '리틀 셰프' 에서 소금통인가 뭔가를 슬쩍해가지고 우리 모두를 감방 신세를 지게 만든 그런 자식인 것이다. 그래, 벡비는 문제도 아냐, 식보이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이 계획을 실패로 끝나게 할 녀석이 있다면 그건 틀림없이 스퍼드다. 식보이는 세컨드 프라이즈를 노려봤다. '세컨드 프라이즈' 라는 별명은 술이 취하면 금세 자신은 싸움을 잘 한다고 착가하고 날뛰다가 처첨한 꼴을 당한다는 데서 붙여졌다. 세컨드 프라이즈가 잘 하는 것은 권투가 아니라 축구였다. 굉장한 재능을 가진 축구 선수였던 그는 스코틀랜드 학생 선발 시절 때 벌써 국제적인 스타였고, 16세에 영국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계약을 했다. 하지만 당시에 이미 알코올 중독자 끼가 있었다. 팀에서 목이 잘려 스코틀랜드로 쫓겨올 때까지 2년 동안 팀으로부터 돈을 울궈낼 수 있었던 것은, 축구계의 알려지지 않은 기적 중 하나다. 뛰어난 재능을 망쳐먹은 녀석이라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식보이는 좀더 잔혹한 진실을 알고 있었다. 세컨드 프라이즈는 걸어다니는 절망 덩어리였다. 그의 인생 전체를 두고 볼 때 음주벽은 가혹한 저주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축구의 뛰어난 재능 쪽이 변덕스런 일탈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버스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렌튼과 스퍼드는 정키 특유의 흐느적거리는 걸음걸이였다. 약도 약이지만 일의 경과로 인해 어리둥절한 탓도 있었다. 런던으로 가서 일생일대의 대사업을 헤치우고 나서 기분 전환을 하기 위해 파리로 간다. 헤로인을 현금으로 바꾸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더구나 런던의 안드레아스가 모든 준비를 해놓고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식보이의 눈에는 친구들이 부엌의 싱크대에 쌓여 있는 더러워진 접시처럼 보였다. 어쨌든 짜증스러워 견딜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불쾌한 기분은 당연히 동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식보이는 믿고 있었다. 버스 계단을 올라가려고 했을 때, 누군가 식보이를 불러 세웠다. "사이먼." "또 그 창녀는 아니겠지?" 식보이는 중얼거렸으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몰리보다 젊은 아가씨였다. "프랑코, 내 자리를 잡아줘. 곧 돌아올 테니까." 벡비는 증오와 질투가 치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좌석에 앉아 식보이와 손을 잡고 있는 파란 카굴(후드가 달린 상의-역주)을 입은 아가씨를 응시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저 게집이나 후리고 다니는 자식 때문에 우리 모두 호된 꼴을 당할 거야!" 벡비는 멍청히 앉아 있는 렌튼에게 씩씩거렸다. 벡비는 카굴 속에 숨겨져 있는 아가씨의 육체를 상상하려고 했다. 옛날에 저 아가씨에게 반한 적이 있었다. 그 여자를 데리고 하고 싶은 일에 대새 이것저것 공상을 하곤 했었다. 오늘처럼 화장을 하고 있지 않은 담백한 얼굴이 오히려 더 예뻐 보였다. 식보이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입을 꾹 다물고 눈을 커다랗게 떠서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척 연기하고 있다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벡비는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게 되자, 식보이를 힘으로라도 버스로 끌고 들어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일어서려고 했을 때 녀석이 버스로 돌아와, 사악한 눈초리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버스 뒤쪽, 벌써부터 오줌 냄새가 진동하고 있는 화학 처리식 변소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세컨드 프라이즈는 맨 뒷 좌석을 확보하고서 캔맥주 봉지를 끌어안고 있다. 그 앞쪽으로 스퍼드와 렌튼, 그리고 벡비와 식보이 순으로 앉았다. "식보이, 지금 그 여자, 탐 맥그레거의 딸이지?" 좌석 등받이 틈새로 렌튼이 백지처럼 히죽거리며 얼굴을 내밀었다. "맞아." "탐은 아직도 널 갈구고 있냐?" 하고 벡비가 물었다. "응, 내가 저 꼬마 창녀와 붙어다니는 게 티꺼운가봐. 하지만, 그런 주제에 자기가 가진 그 똥통 같은 클럽에 술 마시러 오는 영계들은 모조리 집적거린다니까. 형편 없는 위선자 놈 같으니라고." "피들러 바에서 그 새끼한테 끌려나갔었지? 그때 바지에 똥을 쌀만큼 쫄았었다면서?" "내가 뭘 어쨌다고? 도대체 어떤 놈이 그런 헛소리를 한 거야? 그 새끼가 나에게 '우리 딸에게 손가락 한 개라도 대봐라... ' 하고 집어대길래 난 '손가락 한 개라고? 벌써 몇 달 동안 끼고 자고 있다, 짜샤' 하고 말해줬다고." 렌튼은 쓴웃음을 지었다. 세컨드 프라이즈는 제대로 듣지도 못한 주제에 큰소리로 웃었다. 그는 아직 편안하게 가혹한 바깥 사회와 접촉할 수 있을 정도로 취하지는 않았다. 스퍼드는 잠자코 있었으나 금단 증상이 온몸의 뼈ㄹ를 더욱더 세게 조여와서 얼굴을 찡그렸다. 벡비는 식보이가 멕그레거에게 달려들 용기가 있다고는 영 믿어지지 않았다. "웃기지 마! 네가 그 작자에게 대들었을 리가 없어." "정말이야. 그때 난 지미 버즈비랑 함께였더. 그 맥그레거라은 작자는 버즈비한테는 꼼짝 못해. 놈은 캐쉬 가의 누구에게나 겁을 집어먹고 있다고. 그놈이 제일 무서워하고 있는 것은 그 집 사람들이 자기 클럽에서 싸움을 벌이는 일이야." "지미 버즈비? 그런 자식 별 것 아냐. 형편없는 겁쟁이지. 딘의 술집에서 한번 날려보내줬지. 생각나냐, 렌츠? 야? 이봐, 렌츠! 내가 그 버즈비 녀석을 때려눕혔을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겠지?" 벡비는 이 녀석에게 설명해주라는 듯한 얼굴로 좌석 너머로 렌트을 봤으나 렌튼도 스퍼드와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오한이 나고, 심한 구역질이 엄습했다. 벡비가 요구하는 자세한 설명은커녕 보일듯 말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건 몇 년 얘기야. 지금은 못할 거야." 식보이가 약올렸다. "뭐? 누가 못한다는 거야? 응? 내가 못할 것 같냐? 이 떡을 칠 놈!" 하고 벡비는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흥분했다. "흥, 아무래도 좋은 일을 가지고 뭘 그래." 식보이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의 고전적인 수법이었다. 논쟁의 세세한 항목에서 이길 수 없게 되면 아예 논점 자체를 시시한 것으로 깎아내려버린다. "글 자식은 나에게 대들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거야." 벡비가 딱딱거렸다. 식보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벡비가 제3자인 버즈비를 예를 들며 식보이에게 경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도가 너무 지나쳤던 것 같다. 스퍼드 머피는 얼굴을 차창에 밀어붙이며 말없이 고통을 참고 있었다. 땀이 비오듯이 흐르고, 온몸의 뼈를 갈아대고 있는 것 같았다. 식보이는 약삭 빠르게 공동의 목표를 찾아냈다. "이봐 프랑코, 이 녀석들." 그는 벡비를 쳐다보며 뒷좌석을 턱으로 가리켰다. "약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을 텐데. 거짓말쟁이 놈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들까지 위험해질 거야." 식보이의 목소리에는 경멸과 자기 연민이 담겨 있엇다. 뭔가 하려고 할 때마다 한심하게도 친구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 되는 이 나약한 머저리들로 인해 일을 망치는 것도 운명이라고 체념한 것 같았다. 하지만 식보이는 벡비의 공감을 얻어낼 수 없었다. 벡비는 렌튼이나 스퍼드의 소행보다도 식보이의 태도가 훨씬 비위에 거슬렸던 것이다. "불평 좀 작작해라. 너도 새꺄 1년 내내 약을 했던 주제에..." "벌써 오랫동안 하지 않았어. 이 멍청한 자식들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지만 말야." "그럼 넌 스퍼드도 필요 없단 말이지?" 하고 벡비는 소금 비슷한 과립이 들어 있는 은색 호일 봉지를 톡톡 두드리면서 놀려댔다. 식보이도 사실은 무엇이든 약을 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스퍼드가 있으면 이 끔찍한 여행도 짧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벡비에게 사정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할 수 없이 똑바로 앞을 응시한 채 조용히 고개를 젓고, 조그만 소리로 투덜거렸다. 뱃속을 조여오는 불안이 터뜨릴 길없는 분노를 차례차례 치밀어올라오게 했다. 이윽고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세컨드 프라이즈가 안고 있는 비닐 봉지에서 맥이완 엑스포트를 한 개 집어들려고 했다. "자기 마실 것은 자지가 챙기라고 했잖아!" 세컨드 프라이즈의 얼굴은 알을 훔치려고 다가오는 맹수를 본 흉칙한 새 같았다. "한 개 정돈 괜찮잖아, 이 치사한 자식아! 빌어먹을!" 식보이는 화를 벌컥 내면서 세컨드 프라이즈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그러자 세컨드 프라이즈는 마지 못해서 한 개를 꺼내줬다. 그러나 결국 식보이는 맥주 한 캔을 다 마실 수가 없었다. 공복에 맥주는 속을 뒤집어놨기 때문이다. 바로 뒷좌석에서는 렌튼의 금단 증상이 급속히 악화되고 있었다.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곧 스퍼드를 배신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비즈니스에 동정은 금물이고, 지금 같은 특수 상황 아래서는 우선 자기부터 살고 봐야 한다. 렌튼은 스퍼드 쪽을 보았다. "어휴, 변비 땜에 죽겠다. 변소에 가서 좀 앉았다 올게." 스퍼드가 금방 정신을 차렸다. "혼자서 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이지." 렌튼은 시침을 떼고 대답했다. 스퍼드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차창에 처량하게 달라붙었다. 렌튼은 변소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리고 알루미늄 변기 가장자리에 튀어 있는 오줌을 닦아냈다. 위생 때문이 아니라 소름이 돋은 엉덩이에 물기가 묻으면 기분이 나쁠 것 같아서 그랬을 뿐이다. 작은 세면대에 숟가락, 주사기, 주사바늘, 솜뭉치를 늘어놓았다. 갈색이 섞인 흰 가루가 들어 있는 작은 봉지를 꺼내서, 소중한 숟가락에 내용물을 털어넣는다. 주사기로 물을 5cc 빨아올리고 가루가 날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숟가락에 따른다. 헤로인을 끓일 준비를 하고 있을 때만 발휘되는 집중력이 손의 떨림을 딱 멈추게 했다. 베니돔 플라스틱 라이터로 숟가락을 가볍데 데우고, 주사 바늘 끝으로 좀처럼 녹지 않는 가루를 휘저어서 주사액을 만들었다. 버스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으나 렌튼은 그 진동에 맞춰서 움직였다. 정키들만 가진, 달팽이관의 레이더 같은 평형 감각이 A1 고속 도로의 모든 커브와 요철 하나하나를 감지해냈다. 덕분에 솜뭉치를 숟가락에 담갔을 때도, 귀중한 액체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주사 바늘을 솜뭉치에 집어넣고 적갈색 액체를 주사기로 빨아들였다. 그리고는 벨트를 풀려고 했다. 청바지 벨트 구멍에 쇠 장식이 걸려서 욕을 했다. 내장이 제멋대로 속에서 뒤집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벨트를 억지로 잡아뻬 팔꿈치 조금 위에 감고 나서, 누렇게 된 이빨로 잡아당겼다. 그 자세로 있으려니까 목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킬 것 같았다. 끈기 있게 팔을 두드려서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정맥을 찾았다. 망설임이 순간 렌튼의 마음 한켠을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몸을 짓이기는 겉은 경련이 온몸을 덮치자 그 망설임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주사 바늘을 꽂았다. 부드러운 살을 헤치면서 가느다란 강철이 꿰뚫고 들어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주사액을 약간 밀어넣고, 혈액이 주사기로 역류해 가득 채울 때까지 몇 분의 1초 정도 기다렸다. 그러고는 벨트를 풀고 단숨에 정맥 안으로 발사 했다. 고개를 쳐들고 천천히 쾌감을 음미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몇 분인지, 몇 시간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대로 한참 동안 앉아 있다가 얼마 뒤, 몸을 일으켜 거울을 들여다봤다. "정말 좋아보이는데." 렌튼은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에 키스했다. 뜨거운 입술에 섬뜩한 유리가 와 닿았다. 고대를 돌려 뺨을 거울에 갖다대고 유리를 핥았다. 그러고는 뒤로 물러나서 억지로 고통스러운 표정을 만들었다. 문을 연 순간, 스퍼드의 눈이 그를 관찰할 것이다. 쉽지 않겠지만, 앞으로 계속 아픈 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컨드 프라이즈는 지독한 숙취를 폭주로 떨쳐버린 후였다. 항상 취했거나 숙취에 시달리거나 두 가지 상황을 오가는 것 외엔 모르는 세컨드 프라이즈에게 이런 형용사는 불필요하겠지만, 어쨌든 글자 그대로 다시 살아난 것처럼 보였다. 벡비도 이 정도 거리를 로디언 주나 보더스 주 경찰의 눈에 띄지 않고 온 이상, 조금 전보다는 긴장을 풀고 있었다. 승리는 눈앞에 있었다. 스퍼드는 금단 증상에 괴로워하면서도 자고 있었다. 렌튼도 아까보다는 조금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식보이조차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돼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긴장을 풀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평화도 식보이와 렌튼이 '벨벳 언더그라운드' 결성 전과 해산 후의 루 리드의 업적에 대해서 논쟁을 시작하자, 허무하게 깨져버렸다. 식보이는 렌튼이 맹공격을 퍼붓자 그답지 않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게 아니고..." 식보이는 렌튼에게 반격할 말이 떠오르지 않자 가냘프게 머리를 흔들고 딴전을 피웠따. 렌튼은 그런 상황일 때 식보이가 즐겨 사용하는 격렬한 분노의 포화를 대신 퍼부어줬다. 적의 항복을 음미하며 렌튼은 언젠가 오래된 보도 영화에서 본 무솔리니처럼 고개를 한껏 젖히고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꼈다. 식보이는 별 수 없이 다른 승객을 관찰하면서 마음을 달래기로 했다. 바로 앞 좌석에는 노부인 두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이따금 이 쪽을 돌아다보고는 암탉 같은 목소리로, '말조심' 어쩌고 하며 쓸데 없는 참견을 하고 있었다. 오래된 파우더로 조금 희미해졌지만 그들에게는 노인네 특유의 오줌과 땀 냄새가 났다. 건너편 좌석에는 트레이닝복을 입은 뚱보 부부가 앉아 있었다. 트레이닝복을 입는 녀석들은 우리들과는 완전히 종자가 다른 놈들이지. 식보이는 빈정거렸다. 그러고 보면 벡비가 트레이닝복이 한 벌도 없다는 것은 의외이다. 그래. 현금이 들어오면 재미삼아 한 벌 사주기로 할까? 미국산 불독 새끼도 덤으로 붙여주자. 벡비가 내팽개쳐둔다 해도 그 집에는 갓난애가 있으니까 굶어죽진 않겠지. 그런데 가시 덤불뿐인 버스 안에 한 송이 장미꽃이 피어 있었다. 잘 빠진 금발의 배낭족을 발견한 순간, 식보이는 주위의 승객들을 악의에 찬 시선으로 관찰하는 것을 중단했다. 그녀는 트레이닝복 부부 앞 좌석에 고고하게 앉아 있었다. 그때 렌튼은 장난기가 발동해서. 라이터를 꺼내 식보이의 포니 테일에 불을 붙였다. 머리칼일 지글지글 타서, 버스 뒤쪽의 온갖 냄새에, 다시 새로운 악취가 섞였다. 사태를 깨달은 식보이는 벌떡 튀어올라 렌튼에게 소리쳤다. "집어치치 못해!" 그는 항복, 하고 쳐든 렌튼의 손목을 잡았다. 벡비, 세컨드 프라이즈와 렌튼의 웃음소리가 버스 안에 울려퍼지자 식보이는 내뱉었다. "유치한 새끼들!" 그러나 렌튼의 장난은 친구들 옆을 떠나 배낭족 아가씨 옆으로 이동할 구실을 줬다. 식보이는 '이탈리아인이 그걸 더 잘한다' 라고 쓴 티셔츠를 벗었다. 그러자 날렵하고 탄탄한 구릿빛 몸통이 나타났다. 식보이는 어머니가 이탈리아인이긴 하지만, 자신의 뿌리를 자랑스럽게 여겨서 그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혼자 또 잘난 체한다고 친구들을 화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여행 가방을 내려놓고 안을 뒤져봤다. 정치적으로도 건전하고 적당히 쿨한 '만델라 데이' 티셔츠도 있었지만, 주류 노선의 냄새가 나는 데다 너무 슬로건 같았다. 더구나 이미 시대에 뒤떨어졌다. 만델락 교도소 밖에 있는 것에 익숙해져버리면, 만델라도 그냥 따분한 노인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이버니언 축구 클럽-유럽의 투사' 티셔츠는 흘끗 보기만 하고 다시 처박았다. 산디니스타도 이미 구식이다. 결국 코르시카섬에서 태운 피부를 가장 돋보이게 할 새하얀 'Fall' 티셔츠로 결정했다. 그리고 옷을 입고 나서 문제의 아가씨 옆에 가서 태연히 앉았다. "실레합니다. 죄송합니다만 같이 앉아도 될까요? 함께 여행하는 친구들의 행동이 제 취향에는 너무 유치하다고 느껴져서 같이 앉아 있을 수가 없군요." 렌튼은 감탄과 혐오가 뒤섞인 눈으로 식보이가 단순한 건달에서 여자들의 이상적인 남성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목소리의 느낌과 악센트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진지한 얼굴로 흥미를 보이며 새로운 동행에게 경계심을 풀게 하는 질문을 쉴새없이 던져 교묘히 상대방에 대해 알아낸다. 식보이가 "네, 나는 원래가 재즈 순수주의자라서요." 하고 말하는 것을 듣자 렌튼은 속이 뒤집혔다. "식보이가 또 해냈군." 렌튼은 벡비에게 관찰 결과를 보고했다. "저 새끼를 위해서도 잘된 일이지." 벡비는 야유조로 말했다. "최소한 저 수다쟁이 놈을 쫓아보낼 수는 있게 됐잖아. 겨우 나타났는가 싶더니 불평만 늘어놓고... 빌어먹을 새끼." "하지만 모두들 긴장하고 있어서 그런 거야, 프랑코. 아무튼 많은 것이 걸려 있는 일이니까. 더구나 요전날 밤, 스피드를 그렇게 많이 했으니 모두 날카로워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 "저 빌어먹을 놈 편은 들어주지 말라고. 저 뺀질뺀질한 새끼에게는 예의범절이라는 걸 가르쳐줘야 한다니까. 하여간 곧 뼈저리게 깨닫게 해주지. 예의를 몸에 인힌다고 손해볼 건 없으니까." 알맹이가 있는 토론이 될 것 같지 않다고 판단한 렌튼은 조석에 몸을 기대고, 헤로인의 마사지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몸의 마디마디가 풀리고 주름이 펴졌다. 확실히 고급품은 고급품이다. 벡비의 식보이에 대한 악감정은 질투보다는 자신을 홀로 놔두고 자리를 옮겨버렸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옆에 앉아줬으면 하고 원하고 있는 것이다. 곧이어 스피드가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생각이 차례로 떠올랐다. 벡비는 이런 멋진 통찰을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으면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다. 들어줄 상대가 필요했다. 렌튼은 이 위험한 징조를 알아차렸다. 세컨드 프라이즈는 뒤에서 요란하게 코를 골고 있었다. 저 녀석은 벡비에게 도움을 줄 수 없을 것이다. 렌튼은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면서 스퍼드를 쿡쿡 찔러 깨웠다. "렌튼, 자냐?" 벡비가 말을 걸었다. "으음..." 렌튼은 신음소리를 냈다. "스퍼드는?" "뭐라고?" 스퍼드가 짜증스러운 듯이 말했다. 큰 실수였다. 벡비는 당장 뒤를 돌아보더니 좌석에 무릎을 대고 스퍼드의 머리 위로 얼굴을 들이밀고는 늘 하는 얘기를 시작했다. "... 그래서 나는 그것 위에 올라탔지. 그랬더니 미친 듯이 악을 쓰는 거야. 나는 그 암소 같은 년이 좋아 죽을려고 하는 줄 알았더니 날 밀어젖히더라고. 보니까 거기서 피가 나오고 있는 거야. 빌어먹을 기저귀 타임 때처럼 말야.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해주려고 생각했지. 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 특히 이렇게 텐트 친 상태에선 말이지. 하지만 알고 보니 그게 빌어먹을 유산이라는 거더라고." "으응." "좋아. 그럼 다음 이야기로 넘어간다. 숀과 내가 오블로모브 바에서 암캐 두마리를 낚았던 이야기는 했던가?" "응..." 스퍼드는 들릴락말락하게 신음소리를 냈다. 얼굴이 슬로 모션으로 파열하는 브라운관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버스가 휴게소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절실한 심정으로 벡비에게서 해방되길 원했던 스퍼드에겐 다행한 일이었지만 세컨드 프라이즈는 별로 달갑지 않았다. 이제 겨우 잠이 들었나 했더니 버스 안의 불이 일제히 켜져 편안한 망각 상태에서 그를 냉혹하게 떼어놓았다. 그는 어리벙벙한 채 잠에서 깨어났다. 알코올 탓으로 감각이 마비되어 있었다. 멍청하게 뜬 눈은 초점을 맞출 수가 없었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범벅이 되어 빚어내는 불협화음은 그렇지 않아도 징징 울리는 귀를 사정없이 공격했다. 계속 쩍 벌여져 있던 입은 바짝 말라서 다물어지지도 않는다. 그는 본능적으로 테넨트 수러 라거의 보라색 캔에 손을 뻗쳐서 침 대신 맥주로 입 안을 축였다. 그들은 추위와 더불어 피로와 약에 시달리고 있는 몸을 질질 끌며 육교를 건넜다. 단 하나 예외는 식보이로, 그는 배낭족 아가씨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그들 앞을 경쾌한 스텝으로 걷고 있었다. 천박하게 장식이 된 트러스트 하우스 포트 카페테리아에서 벡비는 식보이의 팔을 잡고 그를 줄 밖으로 끌어냈다. "너 저 여자한테 허튼수작할 생각 마. 저 빌어먹을 여학생의 주머니에서 빼낸 겨우 몇백 파운드 때문에 빌어먹을 경찰이 우릴 덮치는 건 질색이니까. 더군다나 1만 8펀 파운드어치의 헤로인을 갖고 있을 때는 더욱더 사양하고 싶어." "돌았냐, 내가 그딴 짓 하게?" 식보이는 화를 내며 쏘아붙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벡비가 적절한 때에 경고를 해준 건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그는 여자와 진한 키스를 나누면서도 카멜레온 같은 눈을 부릅뜨고 그녀가 지갑을 놓아뒀을 만한 곳을 정신없이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카페로 갔을 때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벡비의 말이 맞다. 지금은 그런 모험을 할 때가 아니다. 언제나 육감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군. 하고 식보이는 생각했다. 식보이는 일부러 화가 난 얼굴을 하고 벡비의 손을 뿌리치곤, 줄을 서고 있는 새 걸프렌드 옆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것을 계기로 그 아가씨에 대한 흥미가 급속도로 식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스페인에 8게으ㅏㄹ 긴 체류하고, 그 뒤 사우스햄튼 대학의 법학부로 진학하게 되어 있다고 흥분해서 얘기했으나 식보이는 제대로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런던에서의 체류 장소를 물어보니까, 하루나 이틀 신세를 져도 괜찮겠다고 생각되는 웨스트 엔드의 기분좋은 호텔이 아니라, 킹스 크로스 역 근처에 있는 싸구려 여인숙이라는 것을 알고 완전히 싫증을 느꼈다. 그때까지는 안드레아스가 주선해준 이번 거래가 무사히 끝나면 이 여자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버스는 가까스로 벽돌 건물이 늘어선 런던 북부의 교외로 들어갔다. 스위스 카티지 지역 근처에 이르자 식보이는 그리운 듯이 창 밖을 바라봤다. 그 여자는 아직도 그 술집에서 일을 하고 있을까? 아니야. 지금까지 있을 턱이 없지, 그는 생각했다. 런던에서는 같은 펍에서 6개월씩이나 근무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이른 새벽인데도 런던 중심부는 벌써 정체가 심해서, 버스는 거북이 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버스는 짜증날 정도로 시간을 들여서 간신히 빅토리아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소포에서 내팽개쳐진 깨진 도자기처럼 그들은 버스를 내렸다. 빅토리아 역에서 빅토리아선을 타고 핀스베리 파크에 가느냐, 여기서 택시를 타느냐, 의견이 갈라졌다. 대량의 헤로인을 들고 런던을 우왕좌왕하는 것보다는 택시를 타는 편이 안전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한 대의 택시에 꽉꽉 끼여타고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운전사에게는 핀스베리 파크의 특설 천막에서 행해지는 '더 포그스' 의 콘서트에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파리로 가기 전에 정말로 그 콘서트에 갈 계획이었다. 취미와 실익을 겸한 안성맞춤의 위장물이었기 때문이다. 택시는 버스가 지나온 길을 상당히 되돌아가더니 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안드레아스의 호텔 앞에서 멈춰섰다. 안드레아스는 그리스 이민자의 아들로, 아버지가 사망한 뒤 호텔을 상속받았다. 아버지가 살이 있었을 때는 주로 사고로 집을 잃은 가족에게 임시로 거처를 제공하는 호텔이었다. 생활 터전을 잃은 시민에게 단기적인 체류 장소를 알선하는 책임은 각 지역의 자치 평의회에 있는데, 핀스베리 파크 지구는 해크니, 해링기, 이즐링튼의 세 자치구에 걸쳐 있어서 호텔은 크게 번창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드레아스는 런던의 비즈니스맨 대상의 매춘굴로 만들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머리를 굴렸다. 지금은 그가 지향하는 업계 제일의 매춘굴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몇 명인간의 매춘부들의 안전한 보금자리가 되어 있었다. 도시에 사는 중류 계급의 남자들도 안드레아스의 무거운 입과 호텔의 청결함이나 안전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식보이와 안드레아스는 같은 여자를 꼬셔서 자는 바람에 서로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곧 의기투합하여 몇 건이가 협력해서 일을 했다. 주로 시시한 보험금 사기나 현금카드 사기였다. 그러나 호텔을 상속받고부터 안드레아스는 차츰 식보이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더 이상 식보이 같은 똘마니하고 어울릴 신분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식보이가 양질의 헤로인을 대량으로 손에 넣었다고 연락을 해오자 안드레아스는 어느 시대에나 환상으로 끝나고 마는 위험한 환상에 사로잡혔다. 즉 자기 돈을 들이지 않고 거물들과 어울림으로써 자신의 허영심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지불해야 할 대가는 피트 길버트와 에든버러의 똘마니 연합을 소개시켜주는 것뿐이다. 길버트는 마약업계에서는 고참인 프로였다. 온갖 마약을 사들여서 팔아치운다. 길버트는 마약은 어디까지나 사업이며 다른 사업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경찰이나 법원과 같은 국가의 간섭도 사업상의 위험 부담 중 하나에 지나지 않으며, 보통으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이익이 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 정도의 위험은 무릅쓸 가치가 있었다. 길버트는 전형적인 브로커로, 그 정도의 연줄이나 자금이 있으면 마약을 사들이고, 보관하고, 낱개로 포장해서 말단의 판매인에게 팔아넘길 수가 있다. 길버트는 이 스코틀랜드에서 왔다고 하는 녀석들이 우연히 큰 거래에 부딪친 운좋은 아마추어라는 것을 한 순간에 간파했다. 그러나 헤로인의 높은 질에는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라면 1만 7천 파운드까지는 줘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면서 1만 5천 파운드면 사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1만 8천까지는 받을 생각으로 2만 파운드를 요구했다. 결국 1만 6천 파운드에 거래가 성립되었다. 길버트는 이것을 낱개로 포장해서 팔면 최저 6만 파운드는 벌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했다. 그는 국경 너머 가난한 쪽에서 찾아온 멍청한 녀석들과의 거래는 피곤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이 녀석들에게 마약을 판 인간과 직접 거래를 하고 싶었다. 이런 양질의 마약을 이런 한심 했다. 그러나 길거리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렌튼은 길을 건넜다. 그는 함성 소리를 듣고 엉겁결에 멈춰 섰다. 오후에 열릴 '더 포그스' 콘서트에 가는 젊은이들인 모양이다. 켈틱의 유니폼을 입은 한 무리의 청년들이 비틀거리면서 다가왔다. 완전히 술에 취해 있었다. 렌튼은 잔뜩 긴장해서 그들 옆을 지나갔다. 젊은이들은 렌튼을 무시하고 지나쳐갔다. 253번 버스가 다가오는 것이 보이자 휴우 하고 안도의 숨의 내쉬었다. 버스에 올라타자 핀스베리 파크가 멀어져갔다. 렌튼은 마치 자동 조종 장치로 컨트롤되고 있는 것처럼 해크니에서 버스를 내려 리버풀로 가는 차로 갈아탔다. 돈이 담겨 있는 가방을 안고 있으니까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피해 망상에 사로잡혀 버렸다. 모든 사람들이 강도나 소매치기로 돌변할 것 같았다. 벡비와 비슷한 검은 가죽 재킷을 입은 사람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었다. 리버풀행 버스 안에서 역시 그냥 되돌아갈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가방에 손을 찔런넣고 돈 뭉치의 감촉을 확인하자 생각이 달라졌다. 목적지에 내리자 애비 내셔널 뱅크 지점으로 들어가 이미 구좌에 들어가 있는 27파운드 32펜스에 9천 파운드를 추가했다. 창구 직원은 눈 한 번 깜박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이곳을 시티(구 런던 지역에 세워진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역주) 인 것이다. 몸에 지닌 현금이 7천 파운드로 줄었기 때문에 마음이 약간 가벼워지자, 리버풀 역으로 가서 암스테르담까지 왕복 차표를 샀다. 하지만 편도 티켓만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는 기차 안에서 콘크리트와 벽돌 뿐인 에섹스의 경치가 할위치 항구에 가까워져갈수록 싱싱한 초록색 일색으로 변해가는 것을 지켜봤다. 파크스튼의 부두에 도착한 후 홀란드의 후크행 페리호의 출항까지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정키는 기다리는 것이 특기이기 때문이다. 몇 해 전에 렌튼은 이 항로에서 스튜어드로 일을 했었다. 당시 같이 일하던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를 빌었다. 페리호가 출항하자 피해 망상은 차츰 사라져갔다. 그 대신에 처음으로 강렬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식보이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와 함께 경험한 갖가지 일들이 되살아났다. 좋을 때도 있었고, 나쁠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함께 극복해왔다. 식보이라면 이번 손해도 만회 할 수 있을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타인의 돈을 울궈내는 재능을 타고났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자신이 그를 배신했다는 점이었다. 식보이의, 분개하고 있다기보다는 상처를 입은 것 같은 표정이 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식보이하고는 조금씩 소원해져 가고 있었다. 이전에는 주위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주기 위한 장난에 지나지 않았던 두 사람 사이의 다툼이 의식처럼 되풀이되어 가는 사이에 서서히 현실의 적으로 변해갔다. 이렇게 된 것이 오히려 잘 됐다고 렌튼은 생각했다. 식보이는 이해해줄 것이다. 아마 이를 갈면서도 자기의 행동에 감탄을 보낼지도 모른다. 식보이의 분노는 렌튼보다 먼저 결행할 배짱이 없었던 자신에게 대부분 향해질 것이다. 세컨드 프라이즈에게는 은혜를 베풀어줬다고 자신을 납득시키는 것은 간단했다. 이번 계획을 밑천으로 세컨드 프아이즈가 범죄 피해자 구제금을 내놓은 것을 생각하면 불쌍한 짓을 했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세컨드 프라이즈는 자신을 파멸시키는 데 정신이 없어서 구원의 손길이 뻗쳐와도 모르고 지나갈 것이다. 그 녀석에게 3천 파운드를 주느니 제초제 병을 건네주는 편이 낫다. 그 편이 단시간 내에, 더구나 결과적으로는 보다 작은 고통으로 세컨드 프라이즈를 죽게 할 수가 있다. 그것은 세컨드 프라이즈의 선택에 맡길 일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당초 그 병의 본질은 중요한 선택을 하는 능력을 세컨드 프라이즈로부터 빼앗아버리는 것이 아니었을까? 렌튼은 방금 가장 친한 친구를 배신한 정키 주제에 그런 식으로 고결한 척 늘어놓는 아이러니에 쓴웃음을 지었다. 잠깐, 나는 정키인가? 그렇다. 지금 분명히 다시 헤로인을 맞았다. 그러나 헤로인을 하지 않는 기간이 차츰 길어지고 있다. 그래도 지금은 그 물음에 확실한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시간만이 대답할 수 있다. 렌튼이 정말로 마음속으로부터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은 스퍼드였다. 그는 스퍼드를 좋아했다. 다른 사람의 주머니나 핸드백이나 집에서 물건을 멋대로 집어오는 그의 버릇 때문에 남에게 얼마간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안겨준 게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남을 상처 입힌 일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물건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물건에 대해서 너무나도 많은 애정을 쏟는다. 사회가 물질지상주의나 물신 숭배에 기우는 것은 스퍼드의 책임이 아니다. 스퍼드는 한 번도 일이 제대로 풀린 적이 없었다. 세계는 그를 계속 배신하고, 그리고 지금은 친구까지도 그를 배신했다. 렌튼이 단 한 사람에게만 보상한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스퍼드일 것이다. 남은 것은 벡비였다. 놈에게는 아무런 동정도 느끼지 않았다. 그 녀석은 누군가의 버릇을 고쳐준다고 끝은 뾰족하게 깎은 뜨게바늘을 불쌍한 상대의 가슴에 쑤셔박는 사이코다. 나이프보다 뜨게바늘 쪽이 늑골에 방해당할 확률이 낮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놈이다. 렌튼은 '바인'에서 벡비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로이 스네든을 글래스로 때렸을 때의 일을 생각해냈다. 벡비가 숙취로 고생하고 있었을 때 로이가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는 이유뿐이었다. 그것은 추악하고 구역질나는, 전혀 의미가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벡비의 행위 이상으로 추악한 것은 렌튼을 포함한 전원이 한패가 되어서 그 사건을 정당화하는 시나리오까지 생각해냈다는 일이었다. 그것은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벡비의 절대적 지위를 확립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그리고 그와 어울림으로써 자신들의 지위도 간접적으로 확립하려는 속셈이 있었다. 도덕적 견지에서 그것은 비열하기 짝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에 비하면 벡비를 배신한 렌튼의 죄 따위는 고결한 행위라고 해도 될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벡비였다. 벡비에겐 동료를 배신하는 일은 사형에 해당하는 가장 무거운 죄이다. 렌튼은 벡비를 이용했다. 벡비를 이용해서 스스로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했다. 벡비가 있기 때문에그는 이제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원하던 일을 해냈다. 리스에도, 에든버러에도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조차 이제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영원히. 그곳에 잇으면 지금의 자신 이외는 될 수가 없다. 모든 것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된 지금이라면, 되고 싶었던 자신이 될 수 있다. 쓰러지든지 일어서든지 모든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 불안하기도 하고 흥분이 되기도 했다. 렌튼은 암스테르담에서 시작될 새로운 인생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