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덤에 침을 뱉어라 - 보리스 비앙 저 *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 작가 소개 프롤로그 1 ∼ 24 작가 소개 프랑스 소설가 포스트 모더니즘의 원조격으로 불림. 2차 대전 당시 활발하게 활동했던 작가로 싸르트르 이후의 젊은 지성인으로 손꼽혔다. 그러나 아깝게도 한창 활동할 나이에 요절하였다. 저서에 <거품처럼 사라진 젊은 나날들>이 있다. 프롤로그 쟝 달류엉이 설리번을 처음 만난 것은 1946년 7월 무렵이었다. 그날 미국인과 프랑스인이 참석하는 한 모임에서 설리번과 처음 만났고, 이틀 뒤 설리번은 그에게 원고를 가져왔다. 그리고 설리번은 그에게, 자기 자신은 이제 백인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아직 백인이라기보다는 흑인 쪽에 가깝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해마다 몇 천명이란 흑인(법률면에서의 흑인)이 인구조사표에서 사라져 갑자기 반대쪽의 백인이 되어 나타나지 않던가. (백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또는 그반대의 경우에도 백인 자식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때에도 법률적으로는 흑인이 된다.) 설리번은 아직도 흑인을 좋아하는 흑인이기 때문에, 이른바 선량한 흑인 - 그 같잖은 문학작품에나 나올 만한, 다정하게 등을 두드리는 백인의 뽀얀 손길을 은근히 기대하는 패거리- 에 대해서는 역겨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설리번은 백인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 흑인도 있으며, 그런 흑인을 만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 짧은 소설 속에서 증명하려 했던 것이다. 어쨌든 쟝 달류엉은 친구의 소개로 이 책의 사연을 알았고 곧 그 간행권을 얻어냈다. 설리번도 주저없이 자신의 원고를 프랑스에 남기고 가는 일에 찬성했다. 설리번의 과감한 결단은, 설리번 자신이 이미 미국의 출판업자와 교섭하면서 미국에서 이런 책을 출판하기는 다 틀렸다는 사실을 익히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이 출간되면 우리나라(프랑스)의 저명한 모럴리스트평론가 선생들께서는 이 책의 어느 대목에 대해선 리얼리즘의 정도가 너무 지나친 것 아니냐고 열을 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소설과 헨리 밀러의 작품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지적해 두는 것도 이 소설을 위해서 그리 나쁘진 않을 게다. 밀러는 어떤 경우라도 태연하게 가장 사실적이고 격렬한 말을 쓴다. 그런데 설리번은 반대로 생생한 말을 쓰기보다는도리어 갖가지 말의 표현과 구문(構文)으로 슬며시 암시하는 방법을 택한다. 이런 뜻에서 그는 도리어 라틴적 에로티시즘 문학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 글을 읽는 분들은 그가 뚜렷이 제임스 케인의 영향도 받았다는 사실을 눈치챌 것이다. (그러나 작자는 원고나 그밖의 수단에서 일인칭을 사용하는 수법을 채택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될 수 없겠지만, 케인의 짧은 소설 3편을 모은 '쓰리 오브 어 카인드'의 기묘한 머리말 가운데에서 그 필연성을 짐작할 뿐이다.) 설리번의 이 작품 속에는 공포소설의 후계자인 근대파의 영향도 나타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설리번이 유명한 선배들보다 먼저, 그리고 더 본격적으로 새디스틱했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그의 작품이 미국에서 간행될 수 없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발행했더라도 곧바로 발매금지가 되었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의 밑바닥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사회에선 뭐라고 말하든 간에, 실제로 아직까지 학대받고 위협받고 있는 인종 사이에 나타날 수 있는 복수심, 게다가 백인 지배에서 탈출하려는 주술적인 면도 드러나 있다. 이것은 마치 석기시대에 살던 인간들이 먹이를 구하기 위해 화살에 맞은 들짐승그림을 벽에 그린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는 또 현실성을 무시한 듯한 대목도 상당부분 나오면서, 반면 대중의 기호를 철저히 따르고 있는 대목도 볼 수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천국처럼 생각되고 있는 미국은 청교도나 알콜중독자, 성가신 도덕주의자 패거리의 나라이기도 한 것이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작가들은 독창성의 발휘보다는 이미 미국이라는 천국에서 만들어져 유명해진 수법들을 그대로 따르려 하고 있다. 애초에 부끄러움이나 체면 따위는 내팽개쳐 버린채. 그렇지. 그들은 자신의 상품이(혹은 작품이) 잘만 팔린다면 구태여 수단을 가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테니까. 1 백턴에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클렘이 이 도시를 추천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 자신이 아무리 겁에 질렸다 하더라도, 이대로 북부까지 곧장 달려가기에는 휘발유가 모자랐다. 이제 기껏해야 5리터밖에는 없는 것이다.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약간의 돈, 그리고 클렘의 편지가 전부이다. 짐은 전혀 문제가 안될 정도의 것밖에는 없다. 그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도 잊어버렸다. 자동차의 트렁크 속에는 아이들이나 속을 만한 싸구려 6.35구경 권총이 한 자루 들어있다. 경관이 집으로 아우의 시체를 끌고 와 묻으라고 했을 때 아우의 호주머니에 들어있던 것이다. 정말이지 나는 무엇보다도 클렘의 편지에 의지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 덕택으로 어떻게든지 꾸려나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아니 어떻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핸들 위에 불안하게 놓여 있는 두 손과 손가락과 손톱을 쳐다보았다. 아무에게도 시비를 당할 것이 없다. 나는 절대 걱정없다. 그렇지, 이젠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형 톰이 클렘을 안 것은 대학에서였다. 클렘만이 다른 백인학생과 같은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말도 클렘이 먼저 걸어왔던 것이다. 둘은 함께 술을 마시기도 하고 클렘의 차로 놀러다니기도 했다. 일반 백인 학생들도 그런 클렘의 태도 때문인지, 톰을 관대하게 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클렘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장 경영을 위해 대학을 떠나자, 톰형도 역시 퇴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우리에게로 돌아왔다.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문제없이 학교선생으로 임명되었다. 거기까진 모든게 좋았다. 그러나 동생 사건 때문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나는 위선적으로 침묵을 지켰지만, 당사자인 동생은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조용히 있어 봤자,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백인 아가씨의 아버지와 오빠가 그를 처치한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톰형이 할 수 있었던 일은 클렘에게 편지를 쓰는 일뿐이었다. 내가 이제 고향에 남아있을 수가 없게 되었으니까, 톰형은 무슨 직업이든 내가 일할 만한 직장을 찾아달라고 클렘에게 부탁한 것이다. 그러나 너무 먼 곳은 곤란하다. 이따금 형과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일단 아무도 우리들의 일을 아는 사람들이 없는 곳이어야 한다. 톰형은 내 얼굴 생김새나 성격으로 보아 위험은 전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형이 생각한 대로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역시 동생의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백턴 번화가의 고용 점포주인 - 이것이 클렘이 내게 구해준 새 직업이었다. 나는 선임자를 만나 이제 이곳에서 내가 해야할 일을 사흘에 걸쳐 배웠다. 내가 부임하면서 다른 지역으로 떠나게 된 그 친구는 자신의 전근이 마치 영전이라도 되는 양 거드름을 피워댔다. 햇살이 따스한 날이었다. 거리의 이정표에는 '펄 하버 스트리트'라고 적혀 있었다. 클렘은 이 거리의 이름까지는 확실히 몰랐을 것이다. 이정표에는 작은 글씨로 거리의 옛이름도 씌어 있었다. 207번지의 모퉁이를 돌자 찾던 가게가 보였다. 가게안에는 선임자로 보이는 사내가 금전등록기 뒤쪽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문을 열어보고야 알았지만, 중년의 그 사내는 색이 바랜듯한 엷은 금발에짙은 푸른 색의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무얼 찾으십니까?" "이 편지를 잠깐 봐주시겠습니까?" "아, 그럼 당신이 내 후임자로 오는 분이군요. 어디 편지를 봅시다." 그는 편지를 받아 뒷면까지 차근차근 읽어 보고서야 나에게 돌려주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그저 보이는 대로 재고나부랑이나 쌓여있을 뿐이니까." 그가 가게 안을 쓰윽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판매라든지, 광고라든지 하는 일은 본점에서 보내주는 팜플렛이나 안내책자대로 하면 되고, 그밖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본점의 감사관 지시를 따르면 문제는 없을거요." "체인 스토어 식으로 운영되는 모양이군요." "그런 식이지. 지점이 꽤 많은 편이오." "그래요? 그런데 뭐가 제일 잘 팔리나요?" "그야 소설이지. 하지만 3류소설뿐이요. 하기야 나랑은 상관도 없는 일이지만, 종교서적도 나쁘진 않소. 교육도서도 그럭저럭 나가는 편이구. 아동물은 별반 팔리지 않지. 진지한 책도 안되구. 게다가 나 역시도 그런 책이 많이 팔리길 기대한 적이 없으니까." "당신 말대로라면 종교서적도 진지한 책속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요." 그가 쩝쩝거리며 입술에 침을 축였다. "거 하지도 않은 말까지 만들지 마슈." 나는 쓸개 빠진 놈처럼 낄낄거리며 웃었다. "뭐 신경 쓸 거 없어요. 나도 유신론자는 아니니까." "그래요? 허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티내지 않는 게 좋을거요. 그리고 주일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러 가는 거요. 그러잖으면 곧 쫓겨나는 봉변을 당하게 될 테니까." "물론이죠. 목사님 얘길 들으러 가야죠." "자, 이건데." 그가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좀 체크해 보슈. 이게 지난달의 회계장부인데 보기보단 간단한 일이지. 당신이 할 일은 본점에서 보내주는 책을 팔고 매일 출납을 체크했다가 결과만 세 부 만들어 놓으면 되는거요. 본점에선 매달 두 번씩 수금하러 올거요. 이쪽 급료는 수표로 보내주는 데, 본봉 말고도 약간의 수당이 있을거요." "어디 좀 볼까요." 나는 그 종이쪽을 받아들고 낮은 카운터 위에 걸터앉았다. 그 위에는 손님들이 선반에서 꺼내 보고 버려둔 책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이 동네엔 뭐 재미있는 일좀 없나요?" "별일이야 있것수. 요앞의 편의점 근처에 가면 제법 반반한 여자들도 볼 수 있고, 그리곤 2블럭쯤 떨어진 술집에서 위스키나 홀짝이는 정도지." 사내는 기분좋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여기선 몇 년이나 계셨지요?" "오 년일거요. 또 오 년쯤 다른 지방에서 일해야 될거고." "그게 끝나면?" "그 양반 궁금한 것도 많네." "그거야 당신 탓이지. 묻지도 않은 앞날 얘기까지 꺼내니까 자꾸 궁금할 밖에." 그는 입술을 실룩거리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 말하니까 그렇기도 하군. 그럼 말하겠는데, 앞으로 오 년쯤 일하곤 은퇴해야겠지." "은퇴하면 뭘 하시려구?" "글을 쓰는 거요. 베스트셀러를 쓰는 거지. 역사물 말이요. 흑인들이 백인 여자하고 자고도 린치를 안 받게 되는 소설이라든지, 더러운 슬럼가에서 자라면서도 악에 물들지 않고 티없이 깨끗하고 순진하게 세상에 나온 젊고 순진한 아가씨들이 나오는 소설을 쓸거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입가에 묘한 조소가 흘렀다. "일단 베스트셀러만 되면 그 다음엔 굉장히 대담하고 독창적인 것도 쓸거요. 이 나라에서 대담해진다는 건 극히 간단한 일이니까. 누구든지 마음속에 품었던 얘기를 생각나는 대로 쓰면 되는거지." "성공을 빌겠어요." "아, 성공하고 말고. 벌써 여섯 권 분량이나 말끔히 정리해 뒀거든." "그동안 출판은 안했던가요?" "출판사에 아는 사람도 없고, 돈도 없고." "그럼 어떡하나?" "어쩌긴, 한 오년 일하면 그 돈쯤이야 못모으겠소?" "당신은 꼭 성공할 거요." 내가 결론 대신 말해 주었다. 서점 경영은 어려울 게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사나흘은 제법 바빴다. 우선 밀린 주문서를 정리해야 했고, 그일이 끝나자 한센은 (사내의 이름이었다.) 손님에 관한 여러가지 정보를 제공해 주었는데, 그중 일부 패거리는 정기적으로 그를 찾아와 문학 얘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나 그 작자들이 알고 있는 일이라야 기껏 '새터데이 리뷰'나, 그 지방에서는 제법 저명한 지방지의 문예란에서 주워들은 것에 불과했다. 나는 우선은 그 작자들이 한센과 토론하고 있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면서 그 작자들의 얼굴을 익히고 이름을 외웠다. 그 작자들은 서점을 찾을 때마다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고 불러주는 나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했다. 잠자리도 쉽게 해결됐다. 한센은 건너편 편의점의 2층에 방 두 개를 빌려 쓰고 있었는데 내가 그대로 인계받기로 한 것이다. 게다가 그 방이 빌 때까지의 사흘간을 호텔에서 지낼 수 있도록 몇 달러 가불까지 해주었다. 더구나 고마운 건 세 끼 식사 가운데 두 끼는 항상 초대해 주었다. 자신에 대한 내 빚이 더 이상 불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였던 것이다. 볼수록 괜찮은 친구였다. 그래도 그가 쓸 베스트셀러 얘기에는 맞장구 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호락호락 될 일이 아니었으므로. 그러나 그에게도 보이지 않는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되면 좋겠지만. 세번째 날 그는 나를 술집 '리카르도'로 데려갔다. 점심식사 전에 한 잔의 술을 마시기 위하여. 시간은 오전 10시였다. 그는 오후에 떠나야만 했다. 이제 그와 함께 마지막으로 식사를 할 것이다. 이제 나는혼자서 이 거리를 상대해야 한다. 열심히 뛰어야지. 한센과 알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갖고 있던 돈으로는 지난 나흘간 퍽이나 고생했을 것이다. 한센의 도움 덕택으로 쉽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리카르도란 술집은 어느 지방이나 흔히 있는, 깨끗한 듯 하면서도 어쩐지 어정쩡한 기분이 드는 곳이다. 튀김양파와 도너츠의 냄새가 진동하고, 카운터에는 뭐라고 꼬집어 말할 만한 특징이 없는 사내가 멍청히 신문을 읽고 있었다. "뭘 드릴까요?" 사내가 물었다. "버번 두 잔." 한센이 눈짓으로 동의를 구하며 주문했다. 나는 괜찮다는 몸짓을 했다. 웨이터는 큰 글라스에 버번과 얼음을 채운 뒤 빨대를 꽂아 가져왔다. "난 늘 이렇게 해서 마시지만, 만약에 싫다면......" 한센이 미안한듯 얘기를 꺼냈다. "아니 이걸로 좋아요." 얼음으로 차게 냉각시킨 버번을 그것도 빨대로 마셔본 적이 없는 사람에겐 그 맛이 어떤 것인지 짐작 조차도 가지 않을 것이다. 그 맛은 입에 불을 당긴 것 같이 강렬했다. 달콤한 불이랄까, 굉장한 맛이었다. "이거 마실 만한데요." 얼굴을 찡그리며 내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술맛을 본지도 꽤 오래 된 것 같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몹시 놀란 표정을 하고 있다. 한센이 웃기 시작했다. "곧 익숙해질거요. 당신이 그 술맛에 길들여질 동안 나는 새로운 술집에서 내 술마시는 스타일에 대해 얘기하고 있을거요. 웨이터가 말귀를 잘 알아들어야 할텐데......" "정들자 이별이라더니, 섭섭한 걸요." 그가 발그레한 술기운으로 웃었다. "그런 소리 말아요. 내가 이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었다면 당신은 여전히 고향집을 지켰겠지. 어쨌거나 나는 오 년이나 해먹었으니 이제 슬슬 떠날 때도 됐지." 그는 단 숨에 잔을 들이키고는 또 한잔을 주문했다. "걱정마슈. 당신도 이 술맛에 곧 익숙해 질테니까." 그가 새삼스레 내 아래위를 훑어보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도대체 호감이 가지 않는 인간이오. 그런데 한가지 만큼은 매력적인 걸 가진 것 같소. 목소리 말이요." 나는 말없이 웃었다.이 친구, 드디어 하고 싶은 말을 하는군. "굉장히 짱짱한 목소릴 갖고 있더군. 노래하고 싶은 거요?" "아뇨, 이따금 기분전환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노래를 부른지도 참 오래 되었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렇지. 동생의 사건이 (gooss의 일이 있기 전에는 나는 노래를 할때 항상 기타를 친다.) 일어나기 전만 해도 노래를 즐겼었다. 핸디의 블루스나, 뉴올리온즈의 옛노래, 그리고 내가 작곡한 노래까지. 작곡한 노래를 기타와 함께 불렀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기타를 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젠 즐길 마음도 사라지고 없다. 돈이 필요했다. 그것도 많은 돈이. 할 일이 많다. 돈이 필요했다. "당신 가족은 모두 다 당신과 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소? 그 목소리라면 어떤 여자도 정복할 수 있을거요." 한센이 말했다. 나는 괜히 어깨를 움츠렸다. "그 일에 흥미가 없단 말은 아니겠지?" 그가 내 등을 툭 쳤다. "편의점 쪽으로 가 보라구. 모두 나와 있을 테니까. 그 아가씨들은 이 거리에선 제법 유행을 안다고 하는 짧은 양말 아가씨들인데 저희들끼리 그룹을 지어 다니지. 빨간 양말에 줄무늬 스웨터를 걸치고 프랭크 시나트라에게 팬 레터니, 뭐니를 보낸다오. 벌써 얼굴쯤은 봤을텐데...... 아, 날마다 서점에 붙어 있었으니 무리였겠군." 나도 버번 한 잔을 더 마셨다. 발끝까지 풀어지는 것 같았다. 온몸에 술기운이 얼큰하게 오르고 있었다. 고향 거리에서는 이런 야한 양말 따위로 멋부리는 어릿광대 같은 처녀들은 볼 수 없었다. 이제 이 동네에서는 실컷 볼 수 있을 것이다. 열 대여섯살 먹은 계집애들이 이제 막 불거진 가슴을 뽐내느라 몸에 착 달라붙는 스웨터를 입고 있는 꼴이란. 앙큼한 계집애들, 남자가 어딜 쳐다보고 있는지 잘알고 있는 요 여우같은 계집애들. 거기다 아랫도리는 어떻고, 짙은 초록색과 노랑색의 현란한 짧은 양말에다 단화 차림. 그리고 벙벙한 플레어 스커트 밑으로 드러난 동그란 무릎. 자리에 앉으면 언제든지 가랑이를 벌리고, 슬쩍슬쩍 내보이는 그 하얀 팬티. 언제나 즐거운 요 앙큼한 계집애들. 한센이 느끼하게 말했다. "저년들은 알아서 떨어지니까 부담스럽지 않지. 어때, 내가 좋은 데를 알고 있는데 혹시 생각있나?" "내가 여자에 걸신들린 놈처럼 보이나 보죠." "그게 아니라......, 내가 말하는 건 그냥 춤을 추고, 술이나 마시자는 거지." 그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 때 나는 꽤나 마음이 당기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모두 괜찮은 계집애들 뿐인데, 아마 자네를 만나러 서점에도 올 거야." "도대체 뭘하러 여길 온다는 거죠?" "배우 사진을 사려고 오지만 그건 마치 우연인 것처럼 가장하고, 정작 들어와서는 아주 새침떼기 얼굴을 하고는 정신분석학 책을 사들고 나가지. 그 애들은 모두 의학공부를 하고 있거든." "아, 그래요?" 나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이 말을 끝으로 한센은 화제를 바꾸어 다른 얘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점심을 끝낸 오후 두 시 무렵 그는 이 거리에서 떠나갔다. 이제 나는 혼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외로워졌다. 2 이 도시에 도착해서 2주일쯤 지났을까. 슬슬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줄곧 서점에만 붙어 산 덕택인지 매상은 한센 때보다 좋았다. 책은 계속 팔려 나갔고, 본점에선 매주 책 뭉텅이와 함께 그림이 들은 전단이나 디스플레이를 위한 안내자료 같은 것을 보내주었다. 신간의 경우라도 3-4시간이면 대강의 내용을 요약할수 있고 4-5페이지 넘기면 책을 펼쳐 너댓 군대 띄엄띄엄 읽으면 내용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충분이란 말은, 이쁜 표지나 짤막한 저자의 약력, 광고에 쓰인 멋진 카피 정도의, 뻔한 선전에 걸려드는 순진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에 충분하다는 얘기이다. 책은 모두 비쌌지만, 선전 덕택인지 잘팔렸다. 결국은 진지한 마음으로 괜찮은 책을 사는 사람은 드물다는 좋은 증거였다. 다만 자기네들과 관련이 있다든지, 화제를 모으고 있는 책이니까 읽어보고 싶다는 정도이지, 그 책의 내용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느 종류의 책이든 광고용 전단이 따라나왔다. 이 광고문안 또한 걸작이라 손님들은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흥분하면서 책을 사곤 했다. 본점에서는 문제가 있는 책은 이런 방식으로 판매를 유도했는데, 그런 책들은 가게에 내놓자마자 반나절이면 팔려버렸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정말 싫증을 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날마다 되풀이되는 기계적인 장사절차에 이골이 나서 이젠 다른 일까지 두루 생각할 여유가 생긴 것이라고나 할까. 모든 일이 너무나 잘됐고 그러면서도 웬지 초조해지고 있었다. 좋은 날씨였다. 여름도 끝나가고 있었다. 거리는 온통 팍팍한 흙먼지 투성이었다. 이 도시를 끼고 흐르는 강 하류쪽의 나무그늘에 앉으면 시원할 것이다. 이 곳에 온 이후 아직 외출 한 번 하지 않았다. 물론 이 도시의 변두리나 전원지역 같은 데는 아예 길도 모르는 형편이니. 새로운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거기다 또 하나의 강렬한 욕망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여자를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저녁 다섯 시, 쇠로 된 셔터를 내리며 오늘은 매일 하던 공부를 쉬기로 했다. 모자를 집어들고, 웃옷을 팔에 걸친 채 그냥 맞은쪽 편의점 쪽으로 걸어갔다. 그 2층이 내 방이었기 때문이다. 아래 가게에는 손님이 셋 있었다. 열 여섯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한 사람. 그리고 역시 그 또래의 계집애 둘이 있었다. 그들은 멍청한 눈으로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또다시 아이스밀크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나는 하얀 아이스밀크를 본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졌다. 눈이 돌 듯한 어지러움까지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웃옷 안주머니에 안정제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두 계집애 가운데 그래도 나이가 많아 보이는 계집애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상당히 풍만한 젖가슴을 가진 웨이츄레스가 심드렁하게 얼굴을 쳐들었다. "밀크 말고는 뭐가 있죠?" 내가 물었다. "레몬은 어때요? 그레이프 후르츠, 토마토, 코카콜라?" "그레이프 후르츠를 줘요. 너무 많이 넣지 말고." 그녀가 주방엘 다녀오는 동안 나는 웃옷 호주머니를 뒤져 병을 꺼냈다. "알콜은 곤란한데요." 웨이츄레스가 피곤한 표정으로 항의했다. "아, 알았어요. 이건 약이거든." 나도 피곤했다. "걱정마요. 영업허가증을 빼앗길 일은 없으니까." 계산은 1달러 짜리로 치렀다. 아침에 봉급이 도착했다. 1주일에 90달러씩 받았다. 클렘은 꽤 좋은 연줄을 갖고 있었다. 거스름돈을 받고, 기분껏 팁을 주었다. 버번이 들은 그레이프 후르츠는 그다지 산뜻한 맛은 못되었다. 그러나 어쨌거나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천천히 기분이 좋아졌다. 뭐 어떻게 되겠지. 세명의 똘마니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억울하지만 이런 코흘리개 풋나기 패거리에게 스물여섯살의 남자란 이미 노인의 부류로 취급되는 것이다. 나는 금발의 작은 계집애에게 씽긋 웃어보였다. 그 계집애는 대답 대신 하늘색과 하얀색 줄무늬의 칼라가 없는 스웨터를 입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다. 좋은 인상과 제법 탄탄한 몸집이었다. 만지면 틀림없이 익을 대로 익은 오얏처럼 탄력이 있고 싱싱할 것이다. 브레지어도 하지 않아 젖꼭지가 스웨터 위로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계집애가 생긋 웃었다. "더운데." 슬쩍 말을 건네보았다. "죽겠어요." 계집애는 기지개를 켜면서 말을 받았다. 두 겨드랑이 밑이 땀으로 흠씬 젖어 있었다. 갑자기 다른 곳까지 연상되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을 떨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세워둔 주크박스에다 5센트를 던져 넣었다. "춤출 만한 기운은 있어?" 계집애에게 다가서며 내가 물었다. "흐흥, 살해되는 건 아니겠죠." 그녀는 내목을 감싸고, 너무 바싹 달라붙었기 때문에 나는 숨쉬기도 어려웠다. 그녀에게선 보송보송한 아기와 같은 냄새가 났다. 약간 말랐기 때문에 오른손 만으로도 그녀의 어깨까지 싸안을 수 있었다. 나는 왼손을 차츰차츰 위로 올려 손가락이 젖가슴 바로 밑까지 기어들도록 했다. 나머지 둘도 이쪽을 보고 있었으나, 음악이 나오자 따라서 춤추기 시작했다. 음악은 다이너 쇼어의 '슈 프라이 파이'였다. 계집애는 음악에 맞추어 몸을 흔들며 가사를 흥얼거렸다. 웨이츄레스는 읽고 있던 잡지에서 얼굴을 들어 우리들이 춤추는 것을 바라보더니 이내 잡지로 눈길을 돌렸다. 어쨌든 계집애의 스웨터 밑은 알몸이었다. 느낌이 좋았다. 레코드가 멈춰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상태로 2분이 지나면 어쩔 수 없을 정도로 흥분될 것만 같아서였다. 음악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온 계집애가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어른 치고는 제법 잘 추는데요." 계집애가 말했다. "뭘 할아버지한테서 배웠지." "그럴 거예요. 퍽 구식인 걸요." 그녀가 이죽거렸다. "요즘 유행하는 째즈댄스에는 못당하지만, 그래도 네게 좋은걸 가르쳐줄 수 있지." "좋은 거, 어른이 하는 일 말예요?" 계집애가 눈을 곱게 흘기면서 물었다. "당신 맘 정도는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죠." 이런 여우 같은 계집애. "기타 치세요?" 옆자리에 앉아있던 사내녀석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녀석은 졸다 일어난 것처럼 게슴츠레한 표정이었다. "아마 노래도 하시겠지." 계집애가 거들었다. "글쎄 조금은 했지." "물론 갭 칼로웨이 보다 잘 부르겠지요?" 처음의 계집애가 놀렸다. 아마 다른 놈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신경쓰였던 모양이다. 여기서 잘 넘어가야지. "어디든 기타 있는 데로 데려다 줘." 은근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솜씨를 보여주지. 뽐낼 만한 실력은 아니지만 블루스라면 문제 없거든." 그녀는 내 눈길을 그대로 받아들인 채로 말했다. "그래요. 그럼 B.J한테로 갈까요." "그 남자 기타 갖고 있나?" "그 여자 기타 갖고 있어요. 베티 쥰이란 여자예요." "난 발티 쥬니어인가 했지." 내가 놀렸다. "그래요? 하지만 발티 쥬니어도 여기 살고 있는 걸요. 가죠." "지금 가는 거야?" 사내녀석이 물었다. "여부있나?" 계집애가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좋았어. 난 딕이라고 해요." 사내녀석이 자신을 소개했다. "얘는 지키고요." 녀석이 나와 함께 춤춘 계집애를 가리켰다. "난 쥬디에요." 또 다른 계집애가 끼어들었다. "난 리 앤더슨이야. 요 앞에서 서점을 하고 있지." "그런 건 알고 있어요. 벌써 1주일 전부터 소문이 난걸요." "오호, 내가 그렇게 유명인사가 됐나." "워낙에 남자가 귀한 동네니까." 쥬디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들 넷은 나란히 밖으로 나갔다. 딕은 여전히 건들거리고 있었고, 다른 아이들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채 였다. 버번은 충분히 남아 있었다. 필요하다면 그들을 좀더 흥분시킬 수도 있을 만큼이었다. "좋아, 지옥이라도 따라가지." 딕의 구식 차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이 쥬디와 함께 앞에 타고 지키와 나는 뒷좌석에 앉았다. "그런데 이 동네에서 뭘하고 지내지, 젊은 친구들." 내가 물었다. 차가 천천히 출발하자, 좌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지키가 얼굴을 돌리고 대답했다. "공부하고 있어요, 모두." "공부?" "여러가지에요." "내쪽으로 다가오지. 얘기하기가 더 편할 것 같은데." 세찬 바람 때문에 소리를 돋구며 그렇게 말했다. "글쎄요, 좀 있다가......" 우물쭈물 그녀가 대답했다. 지키는 아직도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무슨 영화에서인가 익힌 표정이 틀림없다. "너무 깊어지는 건 싫단 말이지?" "그건 아니지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느닷없이 지키의 어깨를 잡고, 우악스럽게 내쪽으로 끌어당겼다. "잠깐 스톱!" 앞자리의 쥬디가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의 대화법은 정말 신나는데요." 나는 지키를 내 왼쪽에 끌어앉힌다는 구실로 그녀의 여기저기를 두루 주무르고 있었다. 그리 나쁘지도 않은데다 그녀도 이런 자세를 잘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지키가 내 옆에 앉자마자 나는 재빠르게 목 둘레에 손을 돌렸다. "얌전히 있어. 그러잖으면 엉덩이를 두드려 줄 테다." "그 병에 뭐가 들어있어요?" 나는 윗 저고리를 내 무릎 위에 놓았었다. 지키가 벗어놓은 내 저고리 속으로 손을 디밀어 왔다. 일부러 그러려고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만약에 그렇다면 처음부터 버번을 노린게 분명했다. "움직이지마. 내가 줄께." 니켈 마개를 빼고 병을 내밀었다. 그녀는 단숨에 두 모금을 들이켰다. "이봐, 너만 마시면 안돼!" 백밀러로 뒤쪽을 쳐다보며 딕이 소리쳤다. "우리는 빼놓을 셈이요. 리, 이 악당." "걱정 마. 또 있으니까." 딕은 왼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오른손을 내밀고 술병을 재촉했다. "농담 아냐, 빨리 줘요." 쥬디가 신경질적으로 끼어들었다. "아직 죽는 건 질색이니까, 운전이나 똑똑히 해." 지키도 지지않고 대꾸했다. "니가 이 그룹의 리더냐? 니가 제일 무섭구나." 내가 웃으며 쥬디에게 말했다. "아, 맞아요." 쥬디는 딕이 내게 병을 돌려주려고 하는 것을 잽싸게 손을 내밀어 빼앗았다. 되돌아 왔을 때는 이미 빈 병이었다. "어때? 기분이 좋아졌어?" 쥬디의 제멋대로의 사고방식을 묵인하고 물었다. "어느 정도요. 하지만 아직 멀었어요." 그녀의 눈에 눈물이 빛나고 있었다. 목소리는 약간 목을 졸린듯한 느낌이었지만 제법이었다. "이제 남은게 없나요?" 지키가 아쉬운듯 물었다. "뭐 걱정마. 더 사오지. 기타를 가지러 갔다가 한 번 더 술집에 갔다올 수 있잖아." "아저씨는 좋겠어요. 우리에겐 아무도 술을 팔지 않거든요." "어린애들에겐 술을 팔 수 없지." 내가 비웃듯 말했다. "우린 어린애가 아니에요." 지키가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이제 지키는 술이 올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내 어깨에 찰싹 달라붙은 채로 내가 욕심껏 주무르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었다. 차가 멈추었다. 나는 마음놓고 그녀의 온몸을 만지고 있었다. "곧 돌아올께요." 딕이 말했다. 그는 차에서 내려 집 쪽으로 달려갔다. 그 집은 근처의 다른 집들처럼 같은 건축업자에 의해 지어진 것 같았다. 집들의 모양이 하나같이 똑같았다. 잠시후 딕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한손에 에나멜 케이스에 넣은 기타를 들고 있었다. 소리가 나게 문짝을 닫고는 성큼 성큼 걸어 차까지 돌아왔다. "B.J는 집에 없어. 어떻게 하지." "나중에 돌려주면 돼. 어쨌든 타지. 술집에 가서 빈병을 채워 와야지." 내가 말했다. "아저씨 얘기가 참 빨리 퍼질 것 같아요." 쥬디가 흥분한 듯 말했다. "아,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이 시끌벅적한 뒤죽박죽 놀음에 끌려 들어온 게 너희들 탓이라는 것도 알아줄거야." 우리들은 달려온 길을 되돌려 달려갔다. 기타 때문에 앉은 자리가 거북살스러웠다. 나는 풋나기에게 술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도록 말하고, 혼자만 내려 술을 사러 갔다. 빈병에 버번을 가득 채우고 새 병까지 한 병 사들고 모두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차 안에선 딕과 쥬디가 앞좌석에 무릎을 꿇고 뒷좌석의 지키를 노려보며 말다툼이 한창이었다. "어때요, 리. 수영하러 가지 않을래요?" 딕이 물었다. "아, 좋아. 근데 수영팬티좀 빌려줄래. 갖고 있는게 없거든." "아, 그것 쯤이야, 어떻게 할 수 있죠." 우리는 차를 돌려 거리에서 나왔다. 그리고 시내에서 벗어나자마자, 가까스로 차가 들어갈까 말까 한 사잇길로 들어섰다. 몹시 나쁜 길이었다. 아니 아예 사람 손길이 닿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수영하기 기막히게 좋은 데가 있어요. 아무도 안 와요. 게다가 물도 최고거든요." "그 송어가 잡힌다는 강 말이야?" "그래요. 강변엔 구슬 같은 조약돌과 하얀 모래가 깔려 있지요. 거기는우리 밖에 모르는 별천지에요." "아, 그래......" 길은 참기 어려울 정도로 더러웠다. 심한 진동으로 곧 턱이 빠질 것만 같았다. "차라리 이런 차 같은 건 집어치우고 불도우저로 바꾸면 어때?" "그래도 이 길이 좋은 거죠, 덕택에 귀찮은 녀석들이 얼씬도 않으니까요." 딕이 더욱 힘껏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온몸이 거덜나도 참는 수밖엔. 돌투성이 모퉁이를 돌아 150미터쯤 달리다 차는 멈추었다. 근처에는 이름도 모를 나무들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차는 어느 큼직한 단풍나무 앞에서 멈추고, 딕과 쥬디가 깔깔거리며 뛰어내렸다. 내가 먼저 내려 차에서 내리는 지키를 받아 안아 주었다. 딕이 기타를 들고 앞서 걸어갔고, 그 뒤로 내가 어슬렁거리며 따라갔다. 큰 가지 밑을 지나 좁은 길로 들어서자 갑자기 강이 보였다. 그 강은 진을 가득 채운 글라스처럼 맑게 들여다 보였다. 태양은 기울고 있었지만 더위는 아직도 심했다. 맑은 강물은 저무는 태양빛을 받아 더욱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강물은 메마른 먼지투성이의 풀밭언덕 바로 밑에서 출렁이고 있었다. "괜찮군. 자네들이 찾아낸 곳인가?" "그러믄요. 이제 우리 실력을 알겠죠. 얕잡아 보면 큰코 다칠 거에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목덜미로 크고 메마른 흙덩이가 날아 들었다. "이봐, 자꾸 까불면 선물이 돌아가지 않을거야." 나는 내 말의 뜻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좀 과장된 자세로 툭툭 호주머니를 두드려 보였다. "어머, 투정부리지 마세요. 늙은 블루스 가수 양반. 그보다도 수영솜씨나 보여줘요." "이봐, 수영팬티는?" 내가 딕에게 물었다. "그까짓 건 신경쓰지 말아요. 아무도 없으니까." 뒤돌아 보자 쥬디는 벌써 스웨터를 벗어던지고 있었다. 속에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스커트가 쓱 미끄러져 내리자 그녀는 잠깐 사이에 양말과 구두까지 내던지고 있었다. 그리곤 하얀 알몸인 채로 누워 있었다. 나는 순식간에 뭣에 홀린 놈처럼 멍청하게 서있었다. 어쨌든 그런 내 꼴을 보고 그녀가 큰 소리로 웃지 않았다면 나는 그대로 후끈 달아 까무라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딕과 지키도 어느새 알몸이 되어 쥬디 옆에서 딩굴고 있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제일 어색하고 겸연쩍은 것은 나뿐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나는 딕이 몹시 마른 것을 보고 자신을 얻었다. 녀석은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했다. "그래, 좋아. 이렇게 된 마당에 거드름을 떨어도 별수 없겠지." 내가 명랑하게 떠들었다. 나는 일부러 천천히 옷을 벗었다. 나는 내 알몸에는 충분히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도 분명 느꼈을 것이다. 나는 크게 사지를 쭉 뻗어 기지개를 켜고는 그들의 옆에 앉았다. 아까 지키와 시시덕거리던 때의 흥분이 아직 가시지 않았으나, 그것을 숨기는 일은 일체 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체가 되는 갑작스런 상황에 내가 맥도 못추고 당황할 줄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기타를 잡았다. 좋은 기타였다. 그러나 맨땅에 앉아 기타를 치기가 불편했다. "차에서 쿠션을 가져와야겠는데." "나도 같이 갈래요." 지키가 말했다. 그녀는 날래게 나뭇가지 사이를 누비고 갔다. 동그란 얼굴 밑에 달려 있는 앳된 알몸이 나무 사이를 걸어가는 것을 보자,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키는 탱탱한 몸 만큼이나 동작도 빨랐다. 내가 차 있는 데까지 갔을 때 그녀는 이미 무거운 쿠션을 들고 되돌아 오는 길이었다. "그걸 이리 줘." "성가시게 굴지 마요. 타잔." 지키가 낄낄거리며 외쳤다. 나는 들은 척도 않고 야수처럼 그녀를 뒤에서 붙잡았다. 그녀는 쿠션을 놓고 내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마치 암원숭이와 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도 나의 그런 기분을 알아차렸는지 갑자기 맹렬히 반항하기 시작했다. 나는 결국 웃고야 말았다. 하기야 이렇게 나오지 않으면 재미가 없지. 그 근처는 풀이 무성해서 에어 매트리스처럼 푹신푹신했다. 그녀가 땅에 딩굴자, 나도 그 위에 겹쳤다. 우리는 마치 야만인처럼 딩굴며 다투었다. 그녀는 젖꼭지 끝까지 볕에 타 있었다. 대개의 여자는 알몸이 되면 브래지어 자국이 남아있어 보기 싫지만, 그녀에겐 그런 것이 일체 없었다. 살결은 살구처럼 매끈매끈하고 몸매는 앳되기만 했으나, 가까스로 아래를 더듬고 보니 앳되기는 커녕 아주 경험이 풍부한 여자였다. 요 몇 달 사이에 처음 만난 최고의 테크닉 소유자였다. 손가락으로 더듬어 가자 두 허리는 정말 매끈매끈하고 뚜렷이 잘룩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수박처럼 단단한 엉덩이가 있었다. 겨우 10분이나 지났을까, 그녀는 잠든 척하고 있었다. 내가 마지막까지 해치워버리려 하자 그녀는 느닷없이 나를 떠다밀고 강 쪽으로 도망쳐 갔다. 나는 쿠션을 집어들고 그녀의 뒤를 ㅉ았다. 물가까지 가자, 그녀는 획 몸을 내던져 미끈하게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어머, 벌써 헤엄치니?" 쥬디의 소리였다. 그녀는 깍지 낀 두 손을 머리밑에 깔고 드러누운 채로 버드나무 잔가지를 깨물고 있었다. 딕은 바로 그 옆에 누워 그녀의 허벅지를 더듬고 있었다. 술병 하나가 비어져 땅에 딩굴고 있었다. 그녀가 내 눈길을 눈치챈 듯, "흐흥, 이거 비었어요." 웃으며 말하고는, "하지만 아직도 하나는 남겨 놓았어요." 지키는 강 한가운데서 텀벙텀벙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나는 웃옥 속을 뒤져 또 한개의 병을 꺼내들고 물로 뛰어들었다. 물은 미적지근 했다. 나는 요란하게 첨벙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강바닥까지는 2미터쯤은 되는 모양인지, 흐름이 없는 데도 깊이를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목마르지 않아?" 내가 한 손으로 물을 저어 선헤엄을 치며 물었다. "목마를 리 없잖아요. 뭐예요. 로데오에서 일등상을 따낸 듯한 얼굴을 하고, 나 정말 싫어요." "이리 와. 온몸의 힘을 빼고 바로 누워, 조용히 물위에 뜨게 해." 그녀는 바로 누웠다. 나는 쓱 그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한 손을 그녀의 몸통에 비스듬히 놓았다. 그리고 또 한손으론 버번병을 내밀었다. 그녀가 그것을 마시는 동안 나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넓적다리 안쪽까지 쓰다듬어갔다. 그녀는 천천히 다리를 벌렸다.나는 물속에서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그녀가 내 위에 올라탄 모양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깊은 곳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조금씩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3 이런 식으로 9월까지 계속되었다. 그들의 그룹에는 그밖에도 5, 6명의 젊은 남녀가 있었다. 기타 임자인 B.J도 그 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몸집은 좋지 않았으나, 그 살결은 정말 불가사의한 냄새를 풍기곤 했었다. 스지 앤 역시 금발인데, 지키보다도 통통한 몸매였다. 샤턴은 머리 빛깔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아가씨였고, 또 아침부터 하루종일 춤만 추는 아가씨도 있었다. 그에 비하면 사내녀석들은 더럽게 못생겨 처먹었다. 나는 이후로 다시 그들과 함께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거리의 주민들이 상대해 주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은 강 언저리에서 서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놈들은 비밀을 지켜주었다. 내가 진과 버번의 좋은 공급원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계집애 전부와 차례차례로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너무 간단해 나중에는 싱거워서 싫어졌다. 그녀들은 섹스를 마치 이를 닦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정말 이 패거리는 마치 원숭이의 한떼 같았다. 몸차림은 시시껄렁하고, 먹는 것에는 결사적이며, 시끌덤벙한데다가 질도 나빴다. 그런 그들은 그때의 나에겐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기타를 쳤다. 그리고 남자 패거리를 가볍게 부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만약에 그럴 수 없다고 할지라도 기타를 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녀석들을 누를 수 있었다. 녀석들은 내게 새로 유행하는 춤을 가르쳐 주었다. 그때마다 금방 내가 녀석들보다도 춤을 잘 추게 되었다. 그건 녀석들이 서투르다는 것이 아니다. 내 솜씨가 워낙 좋았다는 것이다. 즐거웠지만 나는 또 동생 일을 생각하게 되어 제대로 잠들 수 없었다. 톰형하고는 이후로 두 번쯤 만났었다. 그는 이럭저럭 버텨 나가는 것 같았다. 이제 그 사건은 세상의 화제에서 멀어졌다. 모두들 톰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으며, 특히 나에 관해서는 원래부터 관심들이 없었다. 안느 모랑의 아버지는 문제의 딸년을 주립대학으로 쫓아버리고,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톰형이 잘 되어가느냐고 묻기에 벌써 은행예금이 120달러나 된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절약하고 있었다. 알콜만은 유일한 예외였지만. 서점의 매상은 좋았다. 여름이 끝날 무렵에는 승급하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톰형은 내게 종교상의 의식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나는 그런 일은 신경도 안 쓰고 있었지만, 그래도 잘 꾸려나가 세상에 눈치채이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톰형은 신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한센과 마찬가지로 일요일엔 예배에 나가긴 했지만, 머리가 이상해지지 않는 한, 신 같은 것을 믿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고 싶었기 때문에, 톰형처럼 할 수는 없었다. 교회에서 나오면서 우리들은 다시 강가를 찾았고 수치심은 팽개치고 여자들을 차례로 돌렸다. 마치 교미기가 된 원숭이집단 처럼. 실제로 우리는 원숭이 집단이었다. 그렇게 여름이 가고 우기(雨期)가 시작 됐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전보다 더 자주 술집에 드나들게 되었다. 그리고 이따금 편의점에 들러 근처의 도둑고양이 같은 불량배들과 시시덕거렸다. 나는 실제로 그놈들보다도 유행댄스에 익숙해 있었다. 춤에 관해서는 원래부터 소질이 있는 모양이다. 바캉스 가 끝나고, 백턴의 부자 패들이 한꺼번에 돌아왔다. 그들은 플로리다라든지, 산타 모니카라든지, 그밖에 나같은 놈들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곳에 가 있었던 것이다. 모두 황금빛으로 잘 그을려,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살빛이 검은 것은 강 언저리에서 쭉 지내온 우리도 지지 않았다. 이제 서점은 놈들의 안전한 놀이터가 되었다. 이 패거리들은 아직 내 정체에 대해 몰랐으나, 나는 걱정이 없었다. 시간도 충분하고 서두를 것은 없다. 4 얼마 안 가 딕스타도 돌아왔다. 나는 그룹 패거리들로부터 귀에서 진물이 나도록 그에 대한 얘기를 듣고 있었다. 딕스타는 시내의 고급 주택가 중에서도 제일 멋진 곳에 살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뉴욕에 살고 있었으나, 그는 일 년 내내 백턴에 있었다. 심장이 약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부모는 백턴 출신이었으며, 이곳에서도 공부할 마음만 있으면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이곳에 눌러 앉았던 것이다. 나는 이제 딕스타의 고급 승용차나, 골프그룹이나, 술 창고나, 홈바아 둥에 익숙해져 있었다. 마치 지금까지 쭉 그의 집에 살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본인을 직접 만났을 때에도 실망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았다. 생각한 대로 추잡하고 별볼일 없는 녀석이었다. 놈은 마르고 밤색 머리를 가진 약간 인디언같은 사나이였다. 음험한 듯한 검은 눈, 곱슬 머리에다 매부리코, 그 코밑에는 얄팍한 입술이 붙어 있었다. 거기다 놈은 무서운 손을 가지고 있었다. 커다란 라켓 같으며, 손톱은 잘못 붙인 것처럼 세로보다도 가로가 길고 게다가 병자의 그것처럼 툭 불거져 있었다. 녀석들은 피냄새 나는 날간에 덤벼드는 개처럼 딕스타의 뒤를 쫓고 있었다. 알콜 공급자로서의 내 위치는 약간 떨어졌으나 아직 기타의 솜씨가 있었다. 게다가 나는 녀석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탭댄스란 비장의 기술이 있었다. 나는 여유있게 기다리면 되었다. 먹음직스런 큰 먹이가 걸릴 때까지. 아우 일을 밤마다 꿈꾸게 되면서부터 그동안 노려왔던 안성맞춤의 먹이가 반드시 딕스타의 그룹 안에서 발견될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딕스타의 마음에 든 모양이다. 원래는 내 훌륭한 근육이나, 큰 키나, 기타 솜씨 덕택으로 싫어할 텐데 그는 반대로 그런 것에 끌린 것이다. 나는 그가 갖지 못한 것을 전부 갖고 있었다. 대신 그는 돈을 쥐고 있는 셈이었다. 우리는 뜻이 맞았다. 게다가 그는 처음부터 이해했다. 내가 무언가 괜찮은 조건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음을. 우리는 처음부터 뜻이 맞았다. 게다가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가 뭣이든 해낼 수 있는 배짱있는 인간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정말이지 녀석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는 어림짐작도 못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 누가 어떻게 내 생각을 알아 차릴 수 있는가? 생각으로는 녀석은 단지 나와 한패가 되어 최고의 난잡한 파티를 하고 싶어할 정도였다. 사실 그것에 관해서는 그의 속셈이 어긋나지 않았다. 시내는 이제 완전하게 가득차 벅적거리고 있었다. 자연과학, 지질학, 물리학, 게다가 그 밖의 그런 종류의 교과서가 팔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예의 그룹 패거리는 학교 친구들을 내 서점으로 보내 주었다. 계집애들은 지독할 정도였다. 열네살이 되면 벌써 패팅의 한 가지라도 하고 싶어지는 모양이었다. 책을 산다는 구실로 패팅에 대한 핑계를 만들려고 갖가지 궁리를 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렇게 하면 목적은 달성할 수 있었다. 그녀들은 나에게 여름방학의 단련 결과를 자랑하는 척 팔의 근육을 만지게 하고는, 차츰 다리 안쪽으로 손을 옮겨가게 했다. 정말로 지독한 년들이다. 그러나 진지한 손님도 어느 정도는 있었으며, 나로서도 일은 소중히 여겼다. 그런데 이년들은 대낮부터 시간에 관계없이 암캐처럼 뜨거워져 있었고, 땅 위에 뚝뚝 떨어질 정도로 항상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서점의 점원조차 이런 꼴을 당하니 대학의 교수들도 그다지 편한 직업은 아닐 것이다. 강의가 다시 시작되자, 나는 조금 한가할 수 있었다. 그녀들이 오후에만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딱 질색인 것은 사내 녀석들까지도 나를 좋아하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사내도 아니었고 계집애도 아니었다. 제법 남자다운 체격의 패거리도 있었지만, 그외의 녀석들은 모두 여자와 마찬가지로 내 가랑이로 들어가고 싶어했다. 또 언제나 춤을 추고 싶어하는 것도 피곤했다. 다섯 명이 모여서 춤을 추지 않은 일은 한 번도 없었다. 하기야 그런 일은 내게는 그다지 나쁜 일은 아니었다. 원래 그것은 대개 우리들 흑인에게서 나온 것이니까. 나는 이제 자신의 얼굴이나 몸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안도 갖고 있지 않았다. 절대로 의심하지 않을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전 수영장에서 딕스타 때문에 놀랐다. 나는 벌거벗은 채로 계집애 하나를 두 팔 위에서 마치 인형처럼 빙빙 돌리기도 하고, 공중에 던지기도 하며 바보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녀석은 내 뒤에서 배를 깔고 엎드린 채 그런 내 모양을 말없이 보고 있었다. 등에 물을 뺀 주사바늘의 흔적이 있는 그 초라한 체격의 남자 알몸은 정말이지 제대로 눈뜨고 볼 수 없었다. 그는 두번이나 늑막을 앓았던 것이다. 그런 그가 치켜뜬 눈 너머로 나를 쳐다보며, "자네는 보통 사람과 몸집이 다르군. 마치 흑인 권투선수처럼 어깨가 처졌거든." 나는 하마터면 여자를 그 자리에 떨어뜨릴 뻔 할 정도로 놀랐다. 그리고 내가 만든 노래를 부르며 그의 둘레를 춤추며 걸었다. 모두 웃어댔으나 나는 언짢은 기분이었다. 딕스타 혼자만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나를 진득이 보고 있었다. 밤이 되자 나는 목욕탕의 거울 속에 있는 내자신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엉겁결에 웃어버렸다. 금발의 머리털, 엷은 장미빛의 하얀 살결. 이정도라면 무슨 위험이 있단 말인가. 감쪽같이 속여 보일 테다. 딕스타 녀석이 이상한 말을 했지만, 그것은 질투야. 게다가 나는 확실히 처진 어깨를 하고 있다.그러나 그것이 어쨌단 말인가. 나는 오랜만에 걱정없이 푹 잠들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 딕스타의 집에서 주말파티를 열었다. 나는 약식 야회복을 빌리러 갔다. 옷 빌리는 곳에서는 간단히 내 몸에 맞추어 주었다. 전에 입었던 녀석이 나와 얼추 같은 체격이었는지, 전연 꼴사납지 않았다. 나는 그날 밤, 또 다시 아우 일을 생각했다. 5 딕스타의 집에 간 나는 왜 야회복 착용을 하라고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우리 그룹은 좋은 집안 사람들의 큰 무리 속에 삼켜진 형식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눈으로 낯이 익은 패거리들이 있는 것을 알았다. 의사와 목사, 그 밖에 같은 종류의 패거리이다. 흑인 하인이 내 모자를 받으러 왔다. 그밖에도 또 두 명 정도의 하인이 있었다. 딕스타는 내 팔을 잡고, 부모에게 소개했다. 그의 생일 파티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와 비슷했다. 밤색 머리의 여자로 그와 마찬가지로 기분나쁜 눈매를 하고 있었다. 또 아버지란 작자는 다른 사람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듯한 태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개로 눌러 천천히 질식사시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B.J, 쥬디, 지키, 그밖의 그룹 계집애들도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렇게 예복을 입으니 여간 귀엽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녀들이 고상한 척 칵테일을 마시기도 하고, 진지한 표정의 안경장이 녀석들에게 유인되어 춤추는 것을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그녀들의 성기가 생각나는 것이었다. 때때로 우리는 서로 눈짓하며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개같은 분위기였다. 마실것은 얼마든지 있었다. 딕스타는 이것으로라도 일단 친구들을 대우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한두 아가씨와 함꼐 룸바를 추기도 하고, 술을마시기도 했다. 그렇게라도 하는 수밖에는 별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쥬디와 블루스를 한 곡 추고 나자, 꽤 기운이 솟았다. 이 아가씨는 나와는 별로 많이 자지는 않은 편이었다. 어쩐지 나를 피하고 있는 듯 했으며, 나도 꼭 그녀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 밤은, 그녀의 침대에서 살아서 나올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였다. 웬 더위가 이다지도 심할까. 그녀는 나를 딕스타의 방으로 데려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둘만이 있기엔 어려울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대신 술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그 순간 지금 막 도착한 그룹의 모습을 보자 나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여자가 셋 - 그 가운데 둘은 젊고, 또 하나는 40대였다. 거기에 남자가 한 명 딸려 있으나, 이 나이 지긋한 작자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드디어 안성맞춤의 먹이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아우는 너무나 기뻐 무덤 속에서 자다가 몸을 뒤채고 있을 것이다. 나는 엉겁결에 쥬디의 팔을 억세게 쥐었다. 그녀는 내가 자신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 틀림없다. 내게로 몸을 밀착하는 것이었다. 아, 그 아가씨들을 보고 있자, 나는 함께 얽어 모조리 침대로 끌어들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쥬디에게서 손을 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짝 그녀의 엉덩이를 만졌다. "저 귀여운 아가씬 누구야, 쥬디?" "흥미있는 거예요? 이 나이 먹은 책장사 양반." "그야... 그런데 딕스타가 저런 미인을 어디서 데려왔을까." "양가의 규수란 말이에요. 변두리에서 판치는 촌년들과는 다르죠, 수영하러 데려가서 우물딱주물딱 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거 분하군. 저 두 아가씨와 사귈 수만 있다면야, 저 노파까지 떠맡는대도 좋겠는데." "그리 흥분해도 소용없어요. 도대체가 저 애들은 여기 인간이 아니니까." "어디에 살고 있는 거야?" "플릭스 빌이에요. 여기서 1000Km쯤 떨어진 곳이죠. 딕스타 아버지의 옛친구이거든요." "저 두 사람이?" "그래요. 당신 머리가 이상한 거 아니에요, 오늘은. 둘은 자매이고, 그 뒤는 그 부모거든요. 루우 애스키스와 진 애스키스. 진이 금발 쪽이죠. 진이 언니고 루우는 다섯 살(cing ans) 손아래거든요." "그럼 루우는 열 여섯살(seize)이란 말인가?" "열 다섯(quinze). 앤더슨은 우리 그룹에서 빠져나가 애스키스 영감의 딸들을 뒤쫓으려는 건가요?" "바보 소리 하지마, 쥬디. 하지만 넌 저 애들이 괜찮다고 생각하잖아?" "난 남자쪽이 좋아요. 미안하지만 오늘은 전연 정상이에요. 자, 춤이나 춰요, 리." "나를 그녀들에게 소개시켜 주지 않겠어." "그건 딕스타에게 부탁하면 어때요?" "좋았어." 나는 끝나가는 음악에 맞추어 잠깐 그녀와 춤추고 미련없이 내팽개치고 딕스타한테로 갔다. 그는 홀 끝쪽에서 보잘것 없는 여자를 설득하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봐, 딕스타." "아아." 그는 돌아다 보았다. 그리고 나를 비웃는 듯한 눈으로 보았으나 나는 그런 것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저 아가씨들 말야. 애스키스라고 한다지. 소개해 주게." "아, 좋아. 함께 오게나." 가까이 다가가서 보자, 둘 다 아까 흠바에서 본 이상으로 좋았다. 굉장한 미인이었다. 나는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지껄여서 루우를 유인하고는 레코드판을 쌓아놓은 데서 찾아 내온 슬로우 넘버로 춤추었다. 이때만큼 나는 몸에 딱 맞는 예복을 입고 와서 좋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느님과 이 예복을 만든 녀석에게 감사하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습관 이상으로 몸을 떼고 춤추었다. 우리 그룹에서는 마음이 내키면 딱 달라붙어 춤추지만, 나는 그녀를 상대로 그렇게 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녀는 뭣인가 굉장히 복잡한 향수를 뿌리고 있었다. 틀림없이 비싼 것이리라. 어쩌면 프랑스제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 밤색 머리털을 하나로 합쳐 한쪽으로 땋고 있었다. 야성의 고양이 같은 노란 눈이 갸름한 얼굴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몸매는...... 아니 그것은 너무 생각 안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있는지 그녀의 드레스는 저절로 떨어지지 않게 되어있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어깨에도 목둘레에도 드레스가 떨어지지 않도록 걸어 놓은 것은 일체 없고, 다만 두 젖가슴으로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실제로 이만치 단단하고 뾰죽한 것이 젖가슴이라면 이 정도 무게의 옷 한 타스쯤은 너끈히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약간 오른쪽으로 밀었다. 그 순간 벌어진 예복 사이로 그녀의 유방 앞끝이 뚜렷이 그것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가슴에 느껴졌다. 다른 여자들은 춤추기 위한 옷 밑으로 속옷 끝이 엿보이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런 일이 없도록 잘 여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양쪽 겨드랑이에서 발 뒤꿈치에 이르기까지 미끈하니 실로 매끄러운 선밖엔 없다.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건네려고 생각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이 근처에선 한번도 볼 수가 없었을까?" "왜요, 지금 여기에 있는 걸요." 그녀는 몸을 약간 젖히고 내 얼굴을 보았다. 내가 넉넉히 머리 하나쯤은 키가 컸다. "아니 난 이 시내에선......" "플릭스 빌에 오면 언제든 있어요." "그럼 그곳에 방이라도 빌릴까보다." 나는 이런 식으로 공격개시를 잠깐 망설였다. 너무 허겁지겁하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여자란 으레 반응이 느린 법이다. 이판사판 해보는 수밖에 별 도리 없다. 그러나 그녀는 그다지 동요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조금 웃었으나, 눈은 차디찬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야 당신을 좋아하는 남자도 많을 테니까." 이렇게 되면 뚝심있게 밀고 나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게다가 저 눈매처럼 정말로 냉정한 여자라면 이런 태도를 취할 이유가 없지. "그렇지만......, 플릭스 빌엔 재미있는 사람은 그다지 없어요." "그래? 그럼 내게도 기회가 있는 셈이군." "하지만 당신이 재미있는 사람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잖아요." 한 대 보기좋게 먹었다. 내 스스로가 덫에 걸려든 셈이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히 놓치진 않겠다. "당신은 나쁘진 않겠어요. 하지만 잘못 보는 수도 있죠. 아무튼 전연 모르니까요, 당신에 관한 일을." "난 딕스타나 디크 페이지의 친구지만." "디크라면 나도 알고 있어요. 저 딕스타는 이상한 사람이죠." "아니 본질적으로 이상한 건 아닐걸. 아뭏든 돈이 너무 많으니까."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틀림없이 우리 집도 싫을 거예요. 우리 집도 꽤 많은 돈을 갖고 있으니까요." "아, 그런 느낌이야." 하고 그녀의 머리털에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녀는 또 방긋 웃었다. "내 향수 좋아요?" "아, 정말 좋군." "이상하군요. 난 또 당신이 경주마라든지, 총에 바르는 기름이라든지, 아니면 다시마 냄샐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죠." "사람을 놀리는군. 이런 허우대에 천사같은 미소년이 아니라고 탓한들 무슨 소용이야." "그런 천사 같은 미소년은 아주 싫어요. 하지만 말을 좋아하는 남자는 더 싫어요." "난 아직까지 그런 말 같은 동물에 가까이 한적도 없지만 말야. 그런데 또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어머, 나 아직 여기 있잖아요. 이제부터 밤새도록 사귈 수 있는데도." "그것만으론 부족해." "그건 당신 하기에 달린 거 아니에요?" 말을 마친 그녀가 나에게서 멀어져갔다. 마침 음악이 끝났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많은 사람들의 사이를 누비고 사라져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쪽을 돌아다 보며 놀리듯이 웃었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포기할만한 웃음도 아니었다. 그녀는 눈부실 정도로 멋진 몸매의 곡선을 갖고 있었다. 홈바로 되돌아와 보니 디크와 지키가 마티니를 마시고 있었다. 둘 다 몹시 지루한 듯했다. "이봐, 디크. 자네는 너무 웃음이 헤픈 거 아냐. 머지않아 얼굴 모양이 이상해질 거야." "어때요, 기분은? 장발 양반." 지키가 쫑알거렸다. "뭘 하고 있었어요? 흑인여자 상대로 시시덕거린 거예요, 아니면 고급 매춘부를 쫓아다니고 있었던 건가요?" "장발 양반은 지금 약간 난처해진 거야. 재미있는 녀석을 몇명 붙들어 도망치자구. 내가 참다운 즐거움을 줄테니까." "재미난 녀석? 고양이 같은 눈을 하고 어깨끈이 없는 드레스를 입은 여자?" "이봐, 지키."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 두 손목을 잡고 말했다. "미인을 좋아하면 안된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그녀의 눈을 굳은 표정으로 쳐다보며 그 몸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녀는 온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당신 따분한 거죠? 리. 그룹 패거리가 싫어진 거예요? 하지만. 우리 아빠도 1년에 2만 달러쯤은 줄거에요." "이봐, 어쨌든 넌 이런 데가 재미있는 거야? 난 이제 따분해 죽을 것만 같아. 술병을 갖고 어디론가 가버리자구. 이런 데 있으면 숨이 막혀 버리니까." "하지만 딕스타가 기분나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아니 딕스타는 우리 일만 신경을 쓰고 있을 리 없어." "그럼 당신의 맘에 든 미인들은 어떡하죠? 간단히 따라오리라고 생각하나요?" "그 여자들이라면 디크와 친지 사이 아냐." 내가 디크에게 윙크하며 말했다. 디크는, 오늘은 여느 때보다 머리 회전이 잘되어 무릎을 탁 치고 말했다. "리, 당신은 대단해. 절대 예감이 틀린 적이 없으니까." "난 멋없는 장발 인디언은 아니거든." "아니 그건 가발일 거야." "그 둘을 찾아 이곳으로 데려오지. 아니 그보다도 내 차에 타도록 해줘. 뭣하면 네 차에 타게 해도 좋지만." "하지만 무슨 핑계를 대지." "아니 디크. 자네는 그 아가씨들과 여러가지 아이적의 회상 얘길 하고 싶은 거 아냐." 디크는 그다지 자신이 없는 듯한 태도로 싱글싱글 웃으면서 나갔다. 대화를 듣고 있던 지키는 나를 바보 취급하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가 신호하자 가까이 다가왔다. "쥬디와 빌 녀석을 찾아줘. 그리고 술을 7~8병 부탁해." "어딜 가는 거예요." "어딜 가면 좋을까?" "우리 집엔 아빠 엄마가 모두 안 계세요. 남동생이 있지만, 곧 잠들어버리죠. 우리 집에 가면?" "정말 넌 멋져, 지키. 인디언의 명예를 걸고 말하지만."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어 "나와 할 테에요?" "음?" "나와 하죠, 리." "아, 물론이지." 나는 지키와는 꽤 경험이 있어 이제 싫증이 나 있었으나 그때는 또 벌써 그 자리에서 당장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브닝 드레스를 차려입고 물결치는 부드러운 머리를 왼쪽 볼에 드리우고 조금 사팔뜨기 기분이 드는 눈과 순진한 입술의 그녀를 보고 있자, 아무래도 흥분되는 것이었다. 그녀도 호흡하는 것이 전보다 빨라졌으며, 양쪽 볼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바보 천치 같아요, 난. 늘 하고 있으면서 말이죠. 하지만 난 좋아요." "알았어, 지키." 어깨를 쓰다듬어 주며 내가 말했다. "곧 죽는 게 아니니까, 아직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그녀는 몹시 힘들여 내 손목을 움켜쥐더니 내가 불잡기도 전에 벌써 가버리고 말았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내 자신의 정체를 그녀에게 밝혀주고 싶었다. 그녀가 어떤 얼굴을 하는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키는 나에게 적합한 먹이의 자격은 없었다. 나는 존 헨리와 같이 강한 감정이 일어났다. 그리고 내 가슴은 터져버릴 것 같은 지경에 다다랐다. 나는 간이식당에 돌아와서 카운터의 남자에게 마티니더블을 주문했다. 그리고 그것을 단숨에 들이마시자 디크의 지원을 하러 가려고 생각했다. 그때 언니인 애스키스가 나타났다. 그녀는 딕스타와 지껄이고 있었다. 이마 위에 머리털을 드리우고 있는 디크가 나는 보통 때보다 훨씬 마땅치 않았다. 그러나 예복은 정말로 잘 어울렸다. 그것을 입고 있으면 하얀 와이셔츠에 검게 탄 얼굴빛이 비쳐 마치 '난 마이애미에서 바캉스를 하고 왔다.'하는 것과도 같았다. 나는 둘이 있는 곳으로 가자. "딕스타, 애스키스양에게 슬로우를 추자고 하면 자네에게 살해당하지는 않겠지?" "아니 자네는 내겐 좀 너무 강해, 리. 자네와 싸움은 질색이지." 실제로 그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이 사나이의 참뜻은 여간해서 알기 어려웠다. 나는 그때 이미 진 애스키스를 껴안고 있었다. 나 자신은 루우가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자매는 다섯살의 차이가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진 애스키스는 거의 나와 마찬가지의 큰 키였다. 적어도 루우와는 10센티미터쯤의 차이가 있었다. 그녀는 검고 투명한 투피스 식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 스커트는 일곱겹으로 되어있었다. 또 브래지어는 매우 공들여 만든 것이었는데 최소한도로 숨길 곳 밖에는 가리지 않았다. 그녀의 살갗은 흰 눈빛이었고 어깨와 관자놀이 언저리에 몇 개의 주근깨가 있었다. 짧게 자른 고수머리 덕택으로 머리는 둥글게 보였다. 게다가 얼굴 자체도 루우보다 둥글었다. "여기서도 제법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내가 물었다. "이런 파티는 언제나 똑같지요. 이게 다른 것 보다 썩 나쁜것 같지는 않은데요." "잠간만 기다려요." 내가 말했다. 나는 다른 것을 준비했다. 진은 확실히 춤솜씨가 훌륭했다. 덕택으로 나는 편했다. 게다가 아무런 염려없이 동생보다도 가까이 끌어안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동생처럼 일일이 아래에서 나를 치켜보며 얘기해야만 하는 번거로움이 그녀에겐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볼을 내쪽으로 붙여 왔다. 눈길을 아래로 내리깔자 모양이 좋은 귀나, 이색적인 짧은 머리털이나, 둥근 어깨 등이 잘 보였다. 그녀에게선 샐비어와 들풀의 냄새가 풍겼다. "무슨 향수를 쓰고 있지?" 내가 또 질문을 했다. 그 이유는 그녀가 앞서의 질문에 도무지 대답하지 않은 채로 였기 때문이었다. "난 향수 같은 건 뿌리지 않아요." 나도 그런 일을 집요하게 묻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어딘가 정말로 즐길 수 있는 곳에 가보려 하는데, 어떨까?" "그렇다면? 어떤...?" 그녀는 한가로운 소리로 얼굴도 들지 않고 말했다. 치이크(남녀가 뺨을 맞대고 추는 춤)를 추고 있었기 때문에, 뒤에서 말을 건네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즉 술도 담배도 충분히 하고, 춤출 장소도 충분히 있다는 얘기지." "여기와 다르면 기분이 달라질지도 모르겠는데요. 여기선 마치 인디언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으니 말예요." 사실 우리는 5분 전부터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앞으로 나갈 수도 없으며 뒤로 물러날 수도 없어, 리듬을 타며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고, 그래도 허리에 한 손을 감은 채로 입구 쪽으로 이끌고 갔다. "그럼 가지. 친구들한테 가자구." "네, 좋아요." 나는 그녀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뒤를 돌아보았고 정면에서 그녀의 술냄새 어린 숨을 받고 말았다. 진을 반 병쯤 마신 것이 확실했다. "어때요, 당신의 친구들이란?" "음, 퍽 좋은 녀석들이지." 우리는 수월하게 현관을 빠져나갔다. 바깥의 공기는 뜨뜻미지근했고, 어디선가 풍겨나오는 재스민의 향내가 떠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난 당신에 관한 일은 전연 모르는데." 출입문에 멈추어 서서 그녀가 말했다. "그렇지 않을걸..... 내가 바로 그 늙은친구 리 엔더슨이야." 나는 그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녀는 웃다가, 한순간 비틀거렸다. "물론, 리 엔더슨. 오세요, 리. 모두 기다리고 있어요." 이번에는 내가 따라가는 데 고생했다. 그녀는 다섯 단의 계단을 2초만에 굴러 떨어지듯이 달려 내려갔다. 나는 10미터나 쫓아가서야 가까스로 달라붙었다. "이봐, 너무 서둘지 마." 나는 그녀를 두 팔로 꽉 잡았다. "차는 저기야." 차 안에는 쥬디와 빌이 벌써 기다리고 있었다. "술이라면 있어요. 디크는 딴 패거리와 앞차예요." 하고 쥬디가 말했다. "루우 애스키스는?" 낮은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네, 그녀도 틀림없이 타고 있어요. 돈 쥬앙. 자, 출발해요." 앞 좌석 등에 머리를 젖히고 있던 진 애스키스는 빌에게 힘없는 손을 내밀었다. "헬로! 요즘 어때요? 비 내리고 있어요?" "아니 전혀." 빌이 말했다. "온도계에 의하면 수은주가 5미터쯤 내려간다지만, 그건 내일 일이야." "그래요. 그런데 이 자동차는 상당히 구닥다리 물건인데요." "오, 소중한 애인의 욕은 하지 말아 줘. 춥진 않아?" 나는 몸을 구부렸다가 모포를 찾는 척하고 일으키는 바람에 마치 실수로 그렇게 된 것처럼 커프스 버튼으로 그녀의 스커트를 걸어 무릎께까지 끌어 올려 버렸다. 굉장한 다리였다. "더워요. 죽겠어요." 진이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엔진을 걸고 먼저 출발한 디크 차를 뒤쫓았다. 딕스타의 집 앞에는 온갖 종류의 차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런 낡은 내 차 같은 것은 어떤 차든지 상관없이 빨리 바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새차가 아니더라도 잘 할 수 있었다. 지키는 딕스타의 집에서 별로 멀지 않은 버지니아식의 원두막 같은 집에 살고 있었다. 그 마당은 키가 큰 관목의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어, 그 때문에 둘레 집들의 마당과는 취향을 달리하고 있었다. 나는 디크의 붉은 칠 램프가 꺼진 것을 보았다. 나도 차를 멈추었다. 앞차 도어가 큰 소리를 내고 닫히는 것이 들려왔다. 4명이 내렸다. 디크와 지키와 루우. 거기에 누군가 또 한명 있었다. 나는 그 친구의 계단 오르는 소리를 듣고 절름발이인 니콜라스라고 생각했다. 디크는 두 개의 술병을 갖고 있었으며, 쥬디와 빌도 같은 정도의 병을 갖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 애스키스는 차에서 내리고 싶지 않은 태도였다. 나는 차 둘레를 삥 돌아 반대편 도어를 열고 한쪽 손을 그녀의 무릎 밑에 살며시 넣고 또 한 손을 목덜미 뒤로 돌렸다. 그녀는 쿨쿨 자고 있었다. 쥬디가 내 뒤로 왔다. "녹초가 됐군요, 당신 연인은. 리, 당신 그녀와 복싱이라고 했나요?" "아니 내 탓인지, 아니면 너무 진을 마신 탓인지 모르지만, 아뭏든 이렇게 쌔근쌔근 자고 있는 건 내 탓은 아냐." "절호의 찬스가 아니에요. 이용해야죠." "성가시군. 고주망태가 된 여자가 상대라면 너무 저항이 없어 할 맛이 없다구." "네, 잠깐만......" 진의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녀가 눈을 뜬 것이다. "도데체 언제까지 사람을 끌고 다니는 거죠?" 나는 그녀가 지금 막 토하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진이 토하는 동안 내내 그녀의 머리를 지탱해 주고 있었다. 지독하다. 나오는 것은 진뿐이었다. 게다가 큰 말을 지탱하는 것처럼힘이 든다. 그녀는 이제 완전히 몸을 내맡긴 채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한 손으로 지탱하고 있었다. "내 옷을 한 팔로 벗겨 줘." 내가 쥬디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예복의 한쪽 팔을 벗겨 주었기 때문에 나는 팔을 바꾸어 진을 지탱했다. "좋아." 하고 쥬디가 내 옷을 벗기며 말했다. "들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하세요." 그 사이에 빌은 술병을 갖고 사라져버렸다. "물은 어디 있니?" 내가 쥬디에게 물었다. "집안에요. 이리 와요. 뒤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나는, 한 발짝 떼어 놓을 때마다 넘어질 것처럼 마당의 작은 자갈길 위를 걸어가는 진을 이끌고 쥬디 뒤를 따라갔다. 정말로 무거운 여자로군. 두 팔로도 가까스로 당해내는 형편이었다. 쥬디는 앞장서 계단을 올라가 이층으로 안내했다. 딴 패거리들은 벌써 아래 거실에서 시끌덤벙 떠들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문을 꽉 닫았기 때문에 그들의 큰 소리도 그다지 잘 들리진 않았다. 나는 어둠 속에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쥬디의 모습만을 뒤ㅉ아서 손으로 더듬으며 올라갔다. 이층에 가자 그녀는 겨우 스위치를 찾아냈고, 나는 목욕실로 들어갔다. 욕조 앞에는 커다란 카페트가 놓여 있었다. "이 위에 놔요." 쥬디가 말했다. "농담하지마. 먼저 스커트를 벗겨 줘." 쥬디는 지퍼를 따고, 엷은 옷감의 스커트를 눈 깜짝할 사이에 벗기고는 스타킹을 둘둘 말았다. 나는 진 애스키스가 이 목욕실 카페트 위에 알몸으로 눕기 전까지는 정말로 글래머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정말 꿈결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입 언저리로부터 조금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입술을 닦아 주었다.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내 기분 문제이다. 쥬디는 약상자를 자꾸만 뒤지고 있었는데 "좋은 걸 찾았어요, 리. 이걸 먹여요." "그 여자는 지금은 아무것도 못 먹어. 잠자고 있으니까. 게다가 위속은 텅 비었거든." "그래요? 그럼 해버려요, 리. 나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눈을 뜨면 싫다고 할지도 모르잖아요." "굉장한 여자로군, 너는." "그건 당신 생각 나름이죠. 리, 내가 옷을 입고 있으면 신경이 쓰이나요?" 그녀는 도어 쪽으로 가서 열쇠를 돌렸다. 그리고 드레스와 브래지어를 떼었다. 그 다음은 스타킹을 신고 있을 뿐이었다. "리, 당신 것이예요." 그녀는 목욕통 위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더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내 신경은 온통 불꽃을 튀고 있었다. "그녀 위에 붙어요, 리. 서둘러요." "쥬디. 당신은 추잡하군." "왜요? 이 여자 위에 있는 당신을 보는 것이 나에겐 재미있어. 자, 리. 자 어서......" 나는 진 위에 쓰러졌다. 그러나 쥬디 때문에 기분이 아주 이상해지고 있었다. 도무지 화끈 달아오르지 않았다. 나는 무릎 꿇은 채로 있었다. 내 두 발 사이에 진이 누워 있었다. 그때 쥬디가 다가왔다. 나는 쥬디의 손이 내 몸에 닿아 나를 흥분시키는 것을 알았다. 쥬디는 계속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자칫하면 큰 소리를 칠 뻔했다. 몹시 흥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진 애스키스는 꼼짝달싹도 안하고 있었다. 이윽고 내 눈길이 그녀의 얼굴에 떨어졌다. 아직도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가 눈을 반쯤 떴다. 그러나 또 감았다. 나는 그녀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알았다. 그렇다. 몸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쥬디는 아까와 같은 짓을 계속하고 또 한 손으로 내 하반신을 애무하고 있었다. 쥬디는 일어났다. 역시 그녀도 한낮처럼 밝은 속에선 조금 떨떠름한 모양이다. 그녀는 다시 돌아왔다. 나는 또 아까처럼 할 셈인가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나에게 몸을 구부렸다. 나는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가슴이 내 등에 판판하게 닿도록 했다. 반대 방향으로 그리고 이제는 반대로 손이 아니었다. 그녀의 입술이었다. 6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나자 다른 사람들 생각이 나면서 비로소 걱정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두 여자로부터 빠져나왔다. 그러나 도대체 방안의 어디쯤에 있는지 조차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머리는 약간 어지러웠으며 등은 아팠다. 허리는 진에게 사정없이 긁혔기 때문에 온통 상처투성이었다. 나는 벽까지 기어가 방향감각을 되찾고, 겨우 스위치를 찾아냈다. 그 사이에 쥬디는 꾸물꾸물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전등을 밝히자, 그녀는 바닥에 주저 앉은 채로 눈을 부비고 있었다. 진 애스키스는 여전히 카페트 위에 엎드린 채로 머리를 팔 위에 올려 놓고 자고 있었다. 정말로 날씬한 허리였다. 나는 급히 셔츠와 바지를 입었다. 쥬디는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나는 수건에 물을 적셨다. 그리고 진의 머리를 일으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려고 했다. 그런데 어럽쇼. 그녀는 눈을 크게 뜬 채로, 더구나 놀랍게도 웃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몸통 가운데를 들어 욕조 가장자리에 앉혔다. "샤워를 하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너무 피로했어요. 조금 과음했나봐요." "그런가봐." 쥬디가 맞장구쳤다. "걱정할 것 없어. 조금 자면 곧 좋아질 거예요." 내가 그녀를 바라보며 안심시켰다. 그러자 그녀는 일어나 내 목에 달라붙었다. 키스도 꽤 잘했다. 나는 부드럽게 몸을 빼면서 그녀를 욕조 속에 집어넣었다. "눈을 감고 얼굴을 들고 있어요." 샤워를 틀자 그녀의 몸으로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따뜻한 물에 젖자 그녀는 곧 생기를 되찾았다. 그리곤 젖꼭지 끝의 빛깔이 한층 더 짙어지고, 모양은 더욱 이쁘장하게 내밀어졌다. "아, 이 좋은 기분." 쥬디가 스타킹을 신으며 말했다. "서둘러요. 둘 다. 지금 내려가면 마실 것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목욕 가운을 집어들었다. 진이 샤워를 잠그는 동안 나는 그녀의 젖은 몸을 커다란 타월로 폭 감싸 주었다. 그렇게 해 주는 것이 싫을 리가 없었다. "여긴 어디에요? 딕스타의 집?" 그녀가 물었다. "아니 딴 친구 집이야. 딕스타 집은 너무 재미가 없어놔서." "데려와 줘서 고마와요. 여기가 훨씬 기분이 좋아요." 진의 몸은 말끔히 물기가 가셨다. 나는 그녀에게 드레스를 내밀었다. "이걸 입어. 그리고 화장을 고치도록 해." 나는 문쪽으로 갔다. 그리고 쥬디를 위해 그 문을 열어주자 그녀는 질풍처럼 계단을 내려갔다. 나도 그 뒤를 따라가려고 했다. "잠깐 기다려요, 리." 진이 말했다. 진은 브래지어 끈을 끼워달라는 듯이 등을 휙 돌렸다. 나는 그녀의 목덜미를 가볍게 깨물었다. 그녀는 뒤로 돌아섰다. "당신 나와 함께 또 자고 싶어요?" "기꺼이. 당신이 원할때라면." 내가 말했다 "당신의 동생이 당신이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 다면." "루우가 이곳에 와 있어요?" "물론이지." "아, 그래요. 그건 잘 됐는데요. 감시할 수 있으니까." "감시하는 일이라면 오히려 루우가 나을걸." "당신은 그 애를 어떻게 생각하죠?" "그녀와도 자고 싶다고 생각하지." 그녀는 또 웃었다. "그녀는 굉장한 미인이라고 생각해 . 나는 당신처럼 그녀와도 함께 있고 싶어. 당신이 옷 벗은 것을 보았던 것 처럼...... 부탁하지 않는 편이 낫겠지." 내가 말했다. "어머머, 당신은 정말로 어처구니 없는 사람이군요." "미안하군. 어쨌든 품위있는 예의범절을 배울 틈이 없어놔서." "난 지금 당신 식의 방법이 좋아요." 그녀가 어리광부리는 듯한 눈짓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두른채 도어 쪽으로 이끌고 갔다. "내려가야 할 시간이야." "당신의 목소리 역시 좋아요." "이리와요." "당신 나와 결혼하고 싶어요?" "장난치지 말아요." 나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장난친 것 아니예요. 이제 당신은 나와 결혼해야만 해요." 그녀는 확신에 찬 분위기로 조용히 말했다. "나는 당신과 결혼할 수 없어요." "왜요?" "나는 당신 동생이 더 좋아요." 그녀는 또 웃었다. "리. 당신 정말 맘에 들어요." "그거 고맙군." 나도 웃었다. 패거리들은 아래층의 넓은 방에서 늘어지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나는 문을 열고 진을 먼저 들여보냈다. 일제히 불만 섞인 환영의 소리가 일어났다. 모두들 젤라틴으로 굳힌 쇠고기 통조림을 꺼내 돼지처럼 먹고 있었다. 디크와 니콜라스는 셔츠 앞자락에 온통 통조림 소스투성이였다. 루우는 그 화려한 드레스에다 위에서 아래까지 거대한 마요네즈 소오스의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쥬디와 지키는 그야말로 체면차릴 틈도 없이 마구 먹어치우고 있었다. 벌써 다섯 개의 술병이 거의 비워져 가고 있었다. 방안의 라디오에서는 댄스 음악이 나지막하게 흐르고 있었다. 통닭을 보자 진 애스키스는 짐승처럼 환성을 지르며 두 손으로 커다란 덩이를 끌어안고 물어 뜯었다. 나도 앉아서 접시에 먹을 것을 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운이 좋은것 같다. 틀림없이 모든 일이 잘 풀려 나갈 것이다. 7 새벽 세 시가 되자, 딕스타에게서 전화가 왔다. 진은 아까보다도 더 철저하게 취해버릴 셈인지, 부지런히 마셔대고 있었다. 그것을 기화로 나는 그녀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싶어하는 니콜라스에게 그녀를 떠맡겨 버렸다. 그리고 나는 동생에게 착 달라붙어 될 수 있는 대로 술을 마시게 했다. 그러나 루우는 어지간해서는 내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지 않아, 나도 온갖 수단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딕스타가 전화로 애스키스 자매의 부모가 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수상쩍게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왔다. 나는 어떻게 여기 있는 것을 알았느냐고 물었으나, 그는 화가 난듯 피식 웃을 뿐이었다. 나는 왜 그곳을 살짝 떠나왔나 하는 것에 대한 구구한 변명을 했다. "괜찮아, 리. 오늘 밤은 이곳이 전혀 재미없다는 것쯤 나 자신도 잘 알고 있어. 딱딱한 패거리들뿐이니까." "그럼 이리로 오게나. 딕스타." "이제 마실 것이 떨어졌나?" "아니, 그래서가 아니라, 자네도 기분전환이 될걸세." "여전히 지독하구만. 으레 그러듯이 얼렁뚱땅하고 넘어가려고?하지만 지금은 갈 수 없어. 이곳 사정이 허락만 한다면 가지만 도저히 안돼. 애스키스 자매의 부모에겐 뭐라고 할까?" "집까지 전송한다고 하게나." "그건 별로 기뻐하지 않을걸, 리. 어쨌든......" "이제 둘 다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나이일텐데." "알았어 리. 그러나 부모들은 그들을 혼자 남겨두지 않는다고 알고 있을거야. "딕스타, 알아서 정리해 주게. 자네를 믿네." "오케이,리. 알아서 할께 잘 놀게." "안녕." 나는 수화기를 놓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지키와 빌이 조금 지나친 장난을 치고 있었다. 나는 루우가 어떤 반응을 나타낼까 호기심에 끌려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도 역시 이끌리고 있는 눈치였다. "뭘 마시겠어?" "위스키." "좋아. 그럼 빨리 이걸 마셔버려. 그리고 춤추는 거야." 나는 그녀의 몸을 붙잡고 딴 방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왜 그리로 가는 거예요?" "이곳은 너무 시끄럽잖아?" 그녀는 잠자코 따라왔다. 그리고 별로 까다롭게 굴것도 없이 소파에 나와 나란히 앉았다. 그러나 시험삼아 슬쩍 손을 내밀었다가 남자로서는 처음으로 모욕스런 따귀를 된통으로 얻어맞았다. 나는 굉장히 열이 받쳤지만 그래도 계속 빙글빙글 웃었다. "점잖게 구세요." 루우가 따지듯이 말했다. "너무 심한 거 아냐." "내가 시작한 일이 아니에요." "그런 일이 문제가 아냐. 넌 이곳을 주일학교의 집회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라구. 아니면 빙고게임이라도 할 셈이야?" "그래요. 하지만 내가 당신 수작에 넘어가는 건 싫어요." "싫든, 좋든 넌 넘어가게 되어 있어." "당신, 우리 아빠의 돈이 목적인 거죠." "아니 목적은 이거야." 나는 느닷없이 그녀를 소파 위에 떠다밀고 드레스의 앞섶을 찢었다. 그녀는 미친듯이 난폭하게 반항했다. "놔요! 당신은 마치 짐승같군요." "아니 난 인간이야." "당신은 정말 싫어요." 그녀가 몸을 빼내며 뇌까렸다. "도대체 한 시간 동안이나 위에서 진과 무슨 짓을 했죠."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 쥬디와 함께였던 건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당신 그룹의 정체가 뭔지 알 만해요, 리 앤더슨. 게다가 어떤 인간들과 교제하고 있는지도." "루우, 맹세해. 내가 진의 몸에 손을 댄 건 다만 그녀를 간호하기 위해서야." "거짓말이예요. 당신, 언니가 내려올 때 얼굴은 보지 않았죠?" "넌 마치 질투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녀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말야, 만약에 내가 네 언니에게 손을 댔다면 지금 또 이렇게 네게 붙당길 만한 기분이 남아있겠어?" "언니한테 지지 않을 거예요, 나는." 나는 여전히 그녀를 소파 위에서 누르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반항은 하지 않았다. 대신 가슴은 격렬하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래 루우. 넌 언니한테 지지 않을 만해." 나는 그녀를 떼어놓고 재빨리 물러났다. 격렬한 반응이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는 몸을 돌려 울기 시작했다. 8 그후 나는 또 이전의 일을 시작했다. 이제 일을 저지른 것이다. 다음은 되는대로 내맡길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내겐 정말이지 그녀 자매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우선 그런 눈짓을 하던 진이 나를 그렇게 쉽사리 잊을 리가 없다. 게다가 또 루우는 나이가 나이니만큼 지키네 집에서 그 정도로 잘 발라 맞추어 놓았으니까 어떻게 될 것이다. 다음 주가 되자, 다량의 책이 들어왔다. 가을시즌이 끝나고 겨울시즌으로 들어선다는 뜻이다. 나는 잘 꾸려나갔고 여전히 돈을 모으고 있었다. 벌써 상당히 모아놓고 있었다. 뭐 대단한 액수는 아니었으나, 나로서는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그 사이 꽤 돈이 들었다. 옷을 새로 맞추고, 차를 수선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일도 있고 해서 나는 몇 번 스톡클럽에서 연주하는, 이 거리 유일의 악단에서 스페어 기타리스트 노릇도 했다. 이 스톡클럽이란 뉴욕의 것과 같은 이름의 클럽하고는 관계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곳에는 안경을 쓴 젊은 녀석들이 보험금 대리업자나, 트랙터 판매상의 딸들을 데리고 곧잘 왔다. 스페어 기타리스트 노릇은 약간의 돈이 되는데다가, 그곳을 이용해 책을 파는 일도 있었다. 그룹의 패거리들도 이따금 왔다. 나는 그들과는 여전히 규칙적으로 만나며, 쥬디와 지키와의 섹스도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지키를 버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 두 아가씨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아뭏든 나는 놀라우리만큼 정력이 넘치고 있었다. 더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열심히 운동을 해 복서처럼 근육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 어느날 밤의 일 - 그렇지. 그것은 딕스타의 파티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 째의 일이었다. 톰형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급히 와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토요일을 이용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톰형이 편지를 한 이상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난처한 일이 틀림없었다. 그 지방 제일의 악당인 상원의원 발버의 명령으로 백인들이 선거 투표의 방해를 한 것이다. 흑인이 투표권을 얻은 뒤로 발버는 차츰 도발행위를 강화시키고 있었다. 특히 이번 경우는 지독해서 투표 이틀 전에 그의 부하가 흑인들의 집회를 폭력으로 해산시켜, 결국 참가자들까지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형은 흑인학교의 교사로서 정식으로 항의를 해, 당국에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그 이튿날 몰매를 맞은 것이다. 그는 나에게 차로 와달라고 했으며, 어디든 딴 곳으로 가고 싶다고 써 보냈다. 집에 도착하자, 형은 방안에서 호젓이 의자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딱 벌어진 몸집을 잔뜩 움츠리고 머리를 싸쥐고 있는 모습을 보자 나도 마음이 아팠다. 분노로 내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흑인의 피가 내 온몸을 내딛고, 귓전에서 격렬히 고함치고 있는 것을 들었다. 형이 일어서서 내 어깨를 붙잡았다. 입술은 부어오르고, 제대로 말도 못하는 상태였다. 위로하기 위해 어깨를 두드리려는 나를 그가 말렸다. "채찍으로 맞은 거야." 형이 말했다. "누가 그랬어?" "발버의 부하와 모런의 아들이야." "짐승 같은! 또 그 작자야." 두 주먹을 부르쥐며 나는 차츰 무서운 분노의 포로가 되어 갔다. "그자를 해치울까, 형." "아냐. 넌 흑인다운 데가 없으니까 백인들 속에 뒤섞여 살면 돼." "하지만 난 형에 비하면 하찮은 인간이야." "내 손을 봐. 손톱을 봐. 머리를 봐. 난 흑인이야. 흑인일 수밖에 별 도리가 없지. 하지만 넌 달라." 그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나를 쳐다 보았다. 정말로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넌 달라, 리. 넌 이런 처지에서 감쪽같이 도망쳐야 해. 하느님이 도와 주실 거다. 하느님이 말야." "아냐, 하느님이 그런 걸 걱정해 줄 리 없어." 그는 잔잔한 웃음을 띠었다. 나의 신앙심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리, 넌 너무 젊은 때 거리로 나가 신앙을 잃었지만 최후의 심판 때 하느님은 꼭 널 용서하실 거다. 마음을 넓게 열고 매달리지 않으면 안돼." "그래, 형은 어디로 갈 작정이야. 돈은 있어?" "돈은 있어, 리. 난 다만 너와 함께 이 집을 떠나고 싶었던 거야. 난 말야......" 그는 거기서 말을 중단했다. 입이 잔뜩 부풀었기 때문에 쉽게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난 집을 태우고 싶어, 리. 이 집은 아버지가 세우신 거야.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것도 모두 아버지의 덕택이지. 아버진 피부 빛깔론 거의 백인이었어, 리. 하지만 이 일만은 기억해 둬야 해. 아버진 자신이 흑인이란 걸 결코 부인하려 들진 않았어. 동생은 죽었으니까 흑인 아버지가 손수 세운 이 집을 이젠 아무에게도 주고 싶지않은 거야." 나에겐 할 말이 없었다. 나는 톰형이 짐을 꾸리는 것을 거들었다. 그리고 둘이서 그것을 내 차에 실었다. 우리 집은 변두리의 외딴집이었다. 나는 톰형에게 마지막 정리를 맡기고, 차에 실은 짐을 정리하기 위해 집을 나왔다. 몇 분 후에 톰형도 나왔다. "자, 가볼까. 아무튼 아직 이 땅에 흑인을 위한 정의가 행해질 날은 오지 않았으니까." 부엌 안에서 붉은 불이 확 솟아나는가 싶더니, 별안간 그것이 커졌다. 석유 깡통이 폭발하는 무딘 소리가 나고, 이웃방의 창문도 밝아졌다. 뒤이어 긴 불꽃이 나무 벽에 갈라진 틈을 만들고, 바람이 불길을 부채질 했다. 집 둘레가 온통 붉어지고, 그 붉은 빛 속에서 톰형의 얼굴이 땀에 빛나고 있었다. 두 줄기 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리는 뒤돌아 서서 사라졌다. 톰형이 집을 팔려고 작정했다면 팔 수도 있었고, 돈만 있으면 모런가의 그자들을 혼내주거나, 어쩌면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해치울 수가 있었을 텐데. 그러나 나에겐 그가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을 방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톰형에게는 아직까지도 선악이라든지, 하느님이라든지 하는 편견이 너무도 뿌리깊게 파고들어 있는 것이다. 그는 너무 정직했다. 그 때문에 파멸하게 된 것이다. 그는 착한 일을 하면 반드시 갚음이 있을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우연일 뿐이다. 요컨대 중요한 것은 복수하는 일이다. 그래. 완벽하게 복수하는 것이다. 그 뒤는 어떻게 되든지 상관 없다. 나는 살해된 동생을 생각했다. 동생은 나보다도 살결이 흰 빛이었다. 하기야 나 자신도 퍽 살결이 희니까 그 이상 희게 되는 것이 가능하다면 말이지만. 앤느 모런의 아버지는 내 동생이 그의 딸을 유혹해 함께 외출했다는 소리를 듣자, 우물쭈물하지 않았다. 동생은 한번도 시내를 떠난 적이 없었다. 나는 10년 이상이나 떠나 있었다. 그리고 내가 흑인이란 사실을 모르는 인간들과 교제하는 사이에, 나는 그 언짢은 비굴함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었다. 그렇지. 백인들 덕택으로 천천히 마치 반사작용처럼 우리들 내부에 스며들어버린 그 비굴함. 톰형의 상처투성이의 입으로 하여금 하느님이 이러니 저러니 말하게 하는 그 빌어먹을 비굴함. 그리고 더구나 우리 형제 흑인들이 백인의 발소리만 들려도 곧 모습을 감추게 만드는 그 격렬한 공포감. 그런 것들로부터 나는 자유가 된 것이다. 백인과 똑같은 살결이라면 나도 이길 수 있다. 백인들이란 정말로 수다스러워서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는 사람 앞에서는 무심코 진실을 얘기하고 만다. 빌, 디크, 쥬디 등에 대해서는 나는 꽤 점수를 따고 있다. 그러나 그애들에게 너희들은 그동안 흑인에게 속고 있었던 것이라고 폭로해 보았자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루우와 진에게라면 모런이나, 백인 전체에 대해 복수한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그들은 나를 쏘아 죽일수 없다. 내 동생을 총으로 쏘아 죽인것 같이. 차 안에서 톰형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피곤한 모양이었다. 나는 액셀레이터를 더욱 강하게 밟았다. 형을 매치슨 역까지 데리고 가서, 북부행 급행열차를 태워야만 했기 때문이다. 형은 뉴욕으로 가기로 했다. 톰은 정말 좋은 형이다. 센티멘탈하면서도 묘하게 겸손한 데가 있는 사람...... 9 나는 다음날 백턴으로 돌아오자마자 한숨도 자지 않은 채 일에 착수했다. 잠을 잘 수 없었다. 그 다음날도 계속 기회를 노렸다. 드디어 열 한 시 무렵에 전화가 울리고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진 애스키스가 딕스타와 그밖의 패거리하고 나를 주말에 자기 집으로 초대해 준 것이다. 나는 물론 승낙했다. 그러나 너무 감지덕지한 태도는 보이지 않으려 했다. "어떻게 시간을 내서 갈 작정이긴 하지만......" "꼭 오도록 해요." 그녀가 애원하듯이 말했다. "기사가 부족할 리는 없을 테고. 그보다도 정말로 불편한 곳에 살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군." "이 근처의 남자들에겐 과음한 여자 상대는 어림도 없거든요." 내가 심드렁하니 잠자코 있자 그런 내 태도를 눈치챘는지, 전화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꼭 와줘요. 정말로 당신이 만나고 싶어 죽겠어요. 리 앤더슨. 동생도 기뻐할 거예요." "그럼 내 대신 그녀에게 키스해 줘. 그리고 그녀에겐 내 대신 네게 키스하라고 말해 줘." 나는 전보다도 더 열심히 일을 했다. 말끔히 원기를 되찾았다. 저녁이 되자, 편의점에서 그룹 패거리와 합류하고 쥬디와 지키를 차에 태워 데리고 갔다. 차는 섹스하는 데는 그다지 알맞지 않다. 그러나 그 차 덕택으로 지금까지 생각도 하지 못한 멋진 체위를 생각해낼 수가 있었다. 덕택으로 그날 밤은 또 잘 잤다. 다음날 파티를 위한 옷과 슈트케이스 한 개와 새로운 잠옷을 두 벌 샀다. 거기에다 없어도 상관없는 물건이기는 하지만, 역시 갖고 있는 편이 좋을 듯한 물건을 이것저것 여러가지 사들였다. 나는 녀석들이 있는 곳에서 부랑자 취급을 받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일단 깔끔한 인간으로 통하려면 어느 정도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목요일 저녁 다섯 시 반 무렵 내가 금전등록기의 돈을 계산하고 전표를 붙이고 있자, 딕스타의 차가 서점 앞에서 멈추는 것이 보였다. 열어준 문을 통해 그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이,리. 일은 잘 돼가고 있나?" "그럭저럭 돼가지. 대학은?" "아, 여전히 화려하진 못해. 어쨌든 난 야구나 하키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모범학생일 수는 없지." "그런데 무슨 일인가?" "어디 가서 함께 저녁식사라도 할까 하고, 들러 본거야. 그리고 식사가 끝나거든 좀 재미있는 놀이를 보여줄까 하는데." "좋았어, 딕스타. 5분쯤 기다려 주게." "차 안에 있겠어." 나는 전표와 돈을 케이스 안에 우겨 넣고 셔터를 내리자, 웃옷을 집어들고 뒷문으로 나갔다. 정말 기분나쁘게 무겁고도 답답한 공기였다. 이미 가을도 꽤 깊었는데 너무 더웠다. 공기중에 습도가 많아서 물건을 손에 들면 모두 끈적끈적했다. "기타를 가져갈까?" 내가 딕스타에게 말했다. "아니 괜찮아. 오늘밤 놀이는 내게 맡겨 줘." "그래, 좋았어." 나는 앞좌석에 올라 그의 옆에 앉았다. 이 풋나기는 제대로 운전도 못한다. 이렇게 훌륭한 차인데도 불구하고 기어를 넣자마자, 엔진 고장을 일으키는 실정이니 할 말이 없다. "어딜 데려가려는 거야, 딕스타?" "우선 스톤클럽에 가서 저녁식사를 하지. 그리곤 갈 데로 가는 거지." "그런데 자네 토요일엔 애스키스 자매한테 갈거지." "음. 뭣하면 태워주겠어." 그렇게만 한다면 구닥다리 중고차를 타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딕스타를 보증인 형식으로 데리고 가는 것도 나쁘진 않다. "고마워, 부탁해." "자네 골프하나, 리?" "머리에 털난 이후로 한 번밖엔 해 본적이 없어." "골프복이나 클럽은 갖고 있나?" "그런 걸 갖고 있을 리가 없잖나. 날 황제 쯤으로 생각하는 건가." "애스키스가에는 골프장이 있지. 미리 충고해두지만, 의사한테서 골프는 금지됐다고 하는 편이 좋을 거야." "그런 말 누가 믿을까." 나는 신음하듯이 말했다. "그럼 트럼프 놀이의 브리지는?" "아, 그건 어지간히 하지." "어지간히 잘하는 편인가?" "아니, 어지간히 못하는 편이지." "그럼, 그것도 말해두지만, 브리지 같은 건 한번 하면 쭉 빠져버린다느니, 뭐니 하는 편이 좋을 거야." "하지만 할 줄은 안단 말이야." 물고 늘어졌다. "5백달러쯤 잃고도 태연한 얼굴을 할 수 있겠나?" "아니 그건 좀 곤란한걸." "그렇다면 이것도 내가 말하는 대로 하는 편이 좋겠어." "오늘은 굉장히 신경을 쓰는군. 내가 그자들과 교제하기엔 너무 빈털터리라고 생각하나. 그걸 분명히 말하게나. 난 여기서 실례할 테니까." "그런 투로 말하지 말고, 도리어 내게 감사해야 하잖을까. 난 다만 자네가, 그래, 자네 말대로 그자들과 그럭저럭 어울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러는 것뿐이니까." "왜 그런 일에 신경을 쓰는 건가?" "왜라니. 신경이 쓰여지니까 하는 수 없잖나." 그때 갑자기 신호가 바뀌면서 그가 난폭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는 튀어나갈듯 앞으로 기울었으나, 곧 원상태로 되돌아왔다. "정말로 왜 자네가 흥미를 갖는지 알 수 없군." "아니, 자네가 그 아가씨들을 어쩔 속셈인지 알고 싶은 걸세." "미인이라면 누구나 흥미를 갖는 게 당연하잖나." "하지만 자넨 그만한 정도의 미인인데다 더구나 간단히 떨어지는 여자애들을 한 타스쯤 알고 있을 텐데." "도대체 그 정도의 미인이란 게 어느 정도고, 간단히 떨어지느니 뭐니 하는 게 무슨 소리야." 그는 마치 뭔가 이상한 생각이 있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오히려 안전한 운전을 위해 앞쪽을 잘 보아주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자네에겐 그저 혀를 내두를밖에." "솔직하게 말해서 그 자매는 내 취미에 딱 맞아." "아, 자네가 그걸 좋아하는 건 잘 알고 있네." 딕스타가 말했다. 그러나 그가 아까부터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난 그 둘과 자는 건 쥬디나 지키와 자는 것과 그다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자넨 오직 그것만이 목적이 아니잖나, 리." "아니, 그것만의 얘기야." "그럼 조심하는 게 좋겠어. 자네가 진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 아가씬 오분간의 통화 속에서 네번이나 자네 이름을 입에 올렸으니까." "그런 강한 인상을 줬다니 기쁘군." "그런 여자하고 자는 날엔 아무래도 반드시 결혼해야하는 난처한 처지가 닥칠 걸세. 적어도 난 그녀들은 그런 여자라고 생각하네만, 어쨌든 이제 10년 간이나 교제하고 있었으니 말일세." "그래. 그럼 난 행운아라 할 수 있겠는데. 어쨌든 난 그 둘과 결혼할 맘은 없지만, 양쪽 다 자보려고 생각하니까." 딕스타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나를 빤히 쳐다 보았다. 내가 지키 집에서 한 일을 쥬디가 모조리 지껄여댄 것일까. 아니면 그는 실제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일까. 나는 이 사나이야말로 4분의 1만 들으면 그 다음은 듣지 않아도 알아차린다고 생각했다. "내리지." 그가 말했다. 문득 정신을 차리자 스톡클럽 앞에 차가 멈추고 있었다. 나는 시키는 대로 내렸다. 그리고 딕스타에 앞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카운터의 밤색머리 아가씨에게 팁을 준 것은 그였다. 내가 잘 아는 제복이 예약한 테이블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곳은 일류 식당의 흉내를 내느라고 여간 애쓰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스꽝스럴 뿐이었다. 나는 곁을 지나던 밴드마스터 블럿키와 악수했다. 칵테일 시간이기 때문에, 밴드는 댄스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손님 대부분이 나에겐 낯익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언제든지 무대 쪽에서 바라보는 버릇 때문에 이처럼 관객 쪽에 서서 자신이 적의 한복판에 있는 것을 깨닫자, 아무래도 이상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자리에 앉아 딕스타가 마티니를 청했다. "리, 이젠 더이상 그 얘긴 하고 싶쟎네. 그들은 조심하는 편이 좋을 걸세." "조심이라면 언제든지 하고 있네. 자네가 무슨 뜻으로 그러는진 몰라도 난 언제든 요령껏 하고 있어."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2분 후에는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상류방식으로, 함축성 있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따질 마음을 먹고 직선적으로 솔직히 토로할 때는 여간 영리하고 재치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10 스톡크럽을 나왔을 때는 둘 다 꽤 얼큰해져 있었다. 딕스타가 투덜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나는 얼른 핸들을 붙잡았다. "모처럼 토요일의 초대가 있는데, 자네 운전 덕택으로 내 얼굴을 엉망으로 찌그려뜨릴 순 없으니까 말야. 짐은 간혹 살해당하는 기분이 들곤 한단 말야." "하지만 자넨 길을 모르잖나, 리."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아. 가르쳐 주면 되지." "자네가 지금까지 한번도 가본 일이 없는 길이야. 게다가 정말로 까다롭다네." "시끄러워. 거리 이름은?" "알았어. 그럼 스티펀 스트리트 300번지로 가게." "저쪽 방향이지?" 내가 손가락으로 저쪽을 막연히 가리키며 물었다. "아, 알고 있었나?" "난 뭣이든 알고 있지. 그럼 출발하겠네." 이 고급차는 정말 운전하기가 쉬웠다. 그런데도 딕스타는 이 차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부모가 타는 캐딜락을 더 좋아했다. 그러나 이 차도 내 차에 비하면 굉장히 멋진 편이다. "스티펀 스트리트로 가나?" "아니 그 옆이라네." 딕스타가 말했다. 꽤 마셨는데도 그는 멀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한 모금도 안 마신 것 같았다. 우리는 거리의 빈민가로 들어갔다. 스티펀 스트리트는 애초부터 그다지 나쁜 거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200번지부터 싸구려 주택이 들어서고 그 다음에는 단층의 날림집뿐으로 그것도 번지가 늘어나는 대로 갈수록 초라해질 뿐이었다. 300번지쯤 되자, 집들은 그냥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그 집들 앞에는 낡은 허접쓰레기 같은 차가 몇 대 있었다. 모두 포드 시대의 것에 가까왔다. 나는 차를 그가 지정한 장소에 세웠다. "이리 오게, 리. 좀 걷는거야." 그가 차 문을 잠그고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나무가 듬성듬성있고, 담이 허물어진 곳이 나왔다. 딕스타는, 위쪽이 판자로 된 2층 건물 앞에서 멈추었다. 마당은 깡그리 황폐했는데도 그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철책만은 아직 좋은 상태였다. 그는 주인을 부르지도 않은 채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벌써 거의 어두워져, 둘레에는 기묘한 그림자가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리 오게, 리. 이곳일세." "아, 따라가겠네." 집 앞에는 장미가 한 그루 있었다. 비록 한 그루밖에 없었지만, 이 꽃의 향기가 이 언저리에 가득차 있는 오물의 지독한 냄새를 없애고 있었다. 딕스타는 집 앞에 달려 있는 현관 계단을 올라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뚱뚱한 흑인 여자가 문을 열었다. 그녀는 말없이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턱턱 걸어가버렸다. 딕스타는 그 뒤를 따라갔다. 나는 문을 닫았다. 2층으 로 올라가자 흑인 여자가 몸을 뒤로 비키면서, 우리를 통과시켰다. 그곳은 작은 방이었는데 장의자가 하나, 술병이 하나, 글라스가 둘, 그리고 열한살에서 열두살쯤 되어보이는 소녀가 둘 있었다. 하나는 주근깨투성이의 자그마하고 동그란 얼굴의 붉은 머리였다. 또 하나는 흑인이었다. 아무래도 이 흑인 소녀가 손위인 모양이었다. 두 소녀는 셔츠에다 짤막한 스커트를 입고, 장의자의 온순하게 앉아 있었다. "이봐, 이 손님들은 돈을 준단다. 고분고분 굴어야 해." 그녀는 문을 닫고 우리만 남겨 놓았다. 나는 딕스타를 보았다. "옷을 벗게나, 리. 여기는 굉장히 덥군." 그는 붉은 머리 쪽을 향했다. "거들어 줘, 죠." "난 폴리라고 해요. 당신 내게 돈을 주는 거죠?" "아, 주고말고." 그는 호주머니에서 꼬기꼬기 구겨진 10달러 지폐를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바지를 벗는 걸 거들어 줘." 나는 아직 꼼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붉은 머리 소녀가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열두살이나 지났을까, 짤막한 스커트 밑의 엉덩이는 앙징맞을 정도로 동그랗다. 나는 딕스타가 이쪽을 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난 붉은머리를 택할 테야." 그가 말했다. "하지만 이건 교도소 감이야. 알고 있겠지." "그애 피부 빛깔에 신경이 쓰이는 건 아닌가?" 대답 대신 그가 갑자기 내던지듯이 말했다. 그는 전부터 무언가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여전히 눈 위에 머리털을 드리운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두 소녀도 두려운지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이리 와, 폴리. 한 잔 마실까?" 딕스타가 권했다. "안 마실래요. 안 마셔도 거들 수 있걸랑요." 1분도 지나지 않은 동안에 그는 벌써 옷을 벗고 소녀를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채, 우울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아프게 하진 않죠?" 폴리가 말했다. "입 다물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야. 그렇잖으면 돈을 안 줄 테다." 그는 내 쪽을 향했다. 나는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다른 소녀를 보았다. 그녀는 지금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는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그저 머리를 박박 긁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벌써 제법 여인의 티를 내고 있었다. "이리 와." 내가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리. 이애들은 모두 깨끗하다네. 이봐, 잠자코 못있겠어!" 폴리는 울음을 그치고 크게 코를 풀어댔다. 흑인 소녀가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너무 커요.... 나를 아프게 해요." 그녀가 말했다. "입닥쳐. 5달러 더 줄께." 딕스타가 말했다. 그는 마치 개와 같았다. 폴리의 눈물은 이제 소리없이 흘렀다. 작은 흑인소녀는 나를 쳐다보았다. "옷 벗어. livan위에 와" 내가 말했다. 내가 그녀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녀는 작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치 지옥과 같은 광증을 보였다. 11 토요일 밤이 되었으나 딕스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차를 타고 그의 집까지 찾아가보기로 했다. 만약에 그도 함께 간다면 내 차는 그의 차고에 두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혼자 가면 그 뿐이다. 엊그제 밤 헤어질 때만 해도 그는 녹초가 되어있었다. 그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술에 취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온갖 난잡한 방법으로 성의 장난을 해댔다. 돈만 주면 상대는 온순해지는 것으로 생각한 모양인데, 흑인 여자 안나가 돌연 들어와, 이젠 다시 이 집안에 들여 놓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그점으로 보더라도 그가 이곳에 온 것이 처음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다. 안나는 폴리에게 붕대를 붙여 주고 수면제를 주었으나, 딕스타가 떨어지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투덜대면서도 폴리를 그냥 두고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딕스타의 기분을 잘 알았다. 나 역시도 흑인 소녀 안에 들어간 채로 여간해서 나올 마음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조심해서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으려고 신경을 썼으나, 그녀는 단 한번 조차도 우는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그날의 이런 상황으로 말미암아 딕스타가 주말을 애스키스가에서 지내기 위해 나와 함께 갈 만한 기운이 있는지 어떤지 의문이었다. 나도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는 지독하게 괴로웠으므로. 그 아침의 상태는 술집 영감이 잘 알고 있다. 나는 아침 아홉 시인데도 트리플 존비를 주문했다. 해장으로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백턴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거의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에야 비로소 과음하면 어떻게 되는지 톡톡히 알 수 있었다. 하기야 적당히만 마신다면 도리어 머리가 상쾌해지는 약이 되지만. 어쨌든 오늘 아침은 쾌조라 나는 원기왕성하게 딕스타의 집 앞에서 차를 세운 것이다. 그는 내 짐작과는 반대로 깨끗이 수염을 깎고 낙타색 개버딘 양복에다 초록과 장미색 줄무늬의 셔츠를 입고, 내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식사 했나 리?" "아침은 질색이지만 오늘은 미리 먹어두어야 할 것 같은데." 잘 차려입은 딕스타는 아이처럼 그늘이 없고, 비뚤어져 보이지도 않았으며 산뜻했다. 하지만 역시 제 나이보다는 더 나이들어 보였다. 특히 눈이 그렇다. "그럼 햄과 마아말레이드(오렌지, 귤 등의 껍질로 만든 잼)를 조금 청하고 싶은데." 내가 말했다. 하인이 푸짐하게 상을 보아주었다. 나는 식사할 때 너무 고분고분히 뒷시중드는 것이 싫었으나, 딕스타는 아주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곧 출발했다. 나는 내 차에 실었던 짐을 그의 차에 밀어넣었다. 딕스타는 조수석에 앉았다. "자네가 운전하게나. 그게 좋겠어." 그가 눈을 치켜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엊그저께 일로 언급한 것은 이때 뿐이었다. 그후로는 그곳에 닿을 때까지 계속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는 묻지도 않은 애스키스 자매의 부모에 대한 얘기를 여러가지 해 주었다. 이 두 비인간은 상당한 돈은 갖고 있었으나, 그와 동시에 자신들과 다른 피부 빛깔의 인간을 태연하게 착취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 덕택으로 오늘날의 지위를 쌓아올린 것이다. 그들은 자마이카나 타히티에 설탕수수 농장을 몇 개 갖고 있으며, 딕스타의 말에 의하면 그 집에서는 집에서 빚은 럼주를 마실 정도라는 것이었다. "자네가 잘 가는 그 술집의 트리플 존비 같은 건 어림도 없는 술이라네, 리." "좋았어. 그럼 마셔봐야지." 말하자마자, 나는 힘차게 속력을 냈다. 한 시간을 약간 넘겨 160킬로미터쯤의 거리를 달려 플릭스빌에 들어섰다. 그 다음은 딕스타가 길을 가르쳐 주었다. 그곳은 백턴보다 훨씬 작은 곳이었으나, 집들은 그곳이 더 훌륭해 개인개인의 집 마당도 훨씬 넓었다. 어쨌든 돈이 굉장히 많은 사람들만이 살고 있는 듯한 동네였다. 애스키스가의 철문은 열려 있었다. 나는 기어를 넣고 차고로 통하는 비스듬한 사면을 올라갔다. 내가 운전하면 차가 고장을 일으키는 일이란 도무지 없었다. 나는 먼저 도착한 두 대 뒤에 나란히 차를 세웠다. "벌써 손님이 와 있군." "아냐. 이 두 대는 모두 이 집 차야. 손님은 우리뿐인 것 같네. 그밖엔 이 근처의 패거리들이 몇몇 오는 정도겠지. 이곳 패거리들은 차례차례 서로 초대하고 있다네. 집에 틀어박혀 있으면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다나? 집에 틀어박혀 있는 일도 없는 것들이." "딱한 사람들이군." 그가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짐을 들고 현관으로 가려는데, 진 애스키스가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테니스 라켓을 들고 있었다. 흰색의 짧은 팬츠에 푸른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몸에 붙어 그녀의 풍성한 몸매의 선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어머, 어서오세요." 그녀는 분명히 우리가 온 것을 기뻐하는 눈치였다. "뭐든 마셔야겠죠." 내가 딕스타를 보자, 그도 나를 보았다. 우리는 좋다는 듯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루우는 어디 있어." 딕스타가 물었다. "그애는 위에 올라갔어요. 옷을 갈아입고 있을 거예요." "응?" 의아스러워 내가 다시 물었다. "여기선 브리지를 하는데도 일일이 정장하는 건가?" 진은 크게 웃었다. "숏팬츠를 갈아입으러 갔다는 말이었어요. 당신들도 더 편한 걸로 갈아입고 오세요. 방으로 안내해 드릴께요." "당신도 그 팬츠를 갈아입는 게 좋지 않겠어? 이제까지 최저 한 시간은 쭉 그것만 입고 있었을테니까." 나도 한 대 맞은 것이 분해 우겨대듯 응수했다. 그 순간 손이 아릿할 정도로 라켓에 얻어 맞았다. "난 그다지 땀을 많이 흘리지 않아요. 이젠 그런 나이가 아니니까." 진이 지지않고 말했다. "그럼 시합에도 졌겠군." "그래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또 웃었다. 웃는 얼굴에 자신이 있는지. "그럼 한 시합 신청해도 괜찮겠군. 아니 물론 지금 당장은 아냐. 내일 아침 얘기지만." 딕스타가 말했다. "네, 좋아요." 진이 또 웃으며 받았다. 내 잘못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은 내가 상대하는 편이 좋을 듯했다. "그래?" 하고 나는 말을 이었다. "그럼 코트는 둘 있으니까 난 루우와 하겠어. 그리고 진 사람끼리 또 하는 거야. 교묘하게 지도록 해, 진. 그럼 둘이서 할 수 있으니까." "좋아요." 진이 말했다. "그런 식으로 모두 엉터리시합을 한다면 내가 지겠어." 이번에는 딕스타가 말했다. 우리는 셋이 한꺼번에 웃었다. 별로 우스웠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답답해졌기 때문에 웃기라도 해야 했다. 딕스타와 나는 진을 따라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안에 들어서자 진은 우리 둘을, 흰 보닛 모자를 쓴 깡마른 흑인 하녀에게 맡겼다. 12 방에서 옷을 갈아입자 나는 아랫층으로 내려가 딕스타와 그밖의 패거리들과 어울렸다. 남자 둘과 여자 둘이 있었다. 남녀가 짝이 딱 들어 맞는다. 진은 남자 둘과 더불어 브리지를 하고 있었다. 루우도 있었다. 나는 딕스타에게 또 한 여자를 상대시키고, 우선 라디오의 스위치를 틀어 댄스 음악을 흐르게 했다. 루우는 새로운 향수를 뿌리고 있었다. 요전 것보다 좋았다. 그러나 난 한번 놀려주려고 생각했다. "향수를 바꾸었군, 루우." "네. 이거 맘에 안 들어요?" "아니 좋아. 하지만 그런 건 못쓰는데." "네?" "향수는 바꾸는 게 아냐. 정말로 멋장이는 늘 같은 향수밖에 쓰지 않거든." "어디서 그런 걸 배웠어요?" "그 쯤이야 누구든 알고 있잖아. 옛부터 내려온 프랑스의 관습이지. 프랑스제의 향수를 쓰나?" "그게 제일 좋은걸요." "그야 그렇지. 하지만 하나의 관습을 지킨다면 다른 관습도 전부 지켜야지." "리 앤더슨, 당신 도대체 어디서 그런 걸 배웠어요?" "이건 교육의 덕이지." "당신 어느 대학 나왔죠?" "넌 모르는 대학이야." "그렇다면?" "난 미국에 돌아오기 전에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공부했지." "그럼 왜 지금같은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일도 있잖아요?" "난 지금 이대로도 충분해." "당신 가족은?" "형제가 둘 있었어." "있었다뇨?" "아우는 죽어버렸어, 사고로." "그럼 형님은?" "형은 아직 살아있어. 뉴욕에." "그분과 만나고 싶은데요." 하고 루우가 말했다. 그녀는 딕스타와 지키 집에서 보인 오만하고 밉살스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때 한 일까지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난 네게 내 형까지 소개하고 싶진 않아." 그것은 정직한 고백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쨌든간에 지금 그녀가 이전 일을 잊었다고 생각한 것은 큰 잘못이었다. "당신 친구들은 이상해요." 그녀가 불쑥 말한 것이다. 우리는 계속 춤추고 있었다. 곡과 곡 사이에 간격이 없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별로 대답을 안해도 괜찮았다. "그날, 우리 언니에게 뭘 했어요? 언니는 확 변했거든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다만 술이 깨는 걸 도왔을 뿐이지. 술 깨는 데는 기막힌 방법이 있거든." "농담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당신은 통 알 수 없어요." "그럴까. 난 잘못이 없는데." 그후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몇 분동안 춤에만 골몰했다. 나에게 안긴 채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내가 언니와 함께 있었어야 했어요." 그녀는 그것이 결론인 것처럼 말했다. "아, 나도 그랬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해. 그러면 지금쯤 질투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그러나 이런 투로 말하고 나니 내 자신의 귀 뒤쪽 언저리가 확 달아올랐다. 진의 몸이 생각난 것이다. 한꺼번에 이 둘과 해버리고 죽일까. 물론 그렇다는 사실을 알리고 나서 말이다. 그러나...... 안돼. 불가능하다. "당신 본마음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럼 도대체 뭐라고 해야 내가 본 마음으로 하고 있다는 걸 알아줄까?" 그녀는 격렬하게 내 말에 반발하고 현학적이니,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느니 하며 쫑알거리는 것이었다. 매우 기분이 나빠졌다. "아니 난 다만 네가 언제면 내가 사실을 말하다는 걸 알지, 그게 알고 싶을 뿐이야." "난 당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가 좋아요." "그리고 아무 짓도 하지 않을 때 말인가?" 나는 좀더 힘을 주어 그녀를 껴안았다.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 분명했다. 눈을 내리깔았다. 여기에서 손을 늦추면 안된다. 게다가 그녀도 "그건 당신 하기 나름이죠." 하면서 쫑알거리지 않는가. "넌 내가 하는 일 전부를 인정하지 않는 거야?" "모두에게 똑같은 짓을 한다면 싫어요." 나는 슬슬 일이 무르익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거의 쓰러져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만 더하면 된다. 나는 정말로 이것으로 한판 승부가 날른지 확인하고 싶었다. "수수께끼를 하고 있는 것 같군. 도대체 넌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야?" 그녀는 이번에는 눈을 내리까는 정도가 아니라 숫제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실제로 나보다도 키가 작았다. 머리에 크고 하얀 카네이션을 꽂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당신은 내가 무슨 얘길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요전에 소파 위에서 당신이 한 일을 말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난 당신 여자가 아니예요. 얼간이도 아니고. 자, 제 질문에 대답하세요." "글쎄, 난 그런 짓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때가 극히 드물거든." "거짓말. 난 당신 친구들이 하는 짓을 다 보았어요." "그건 친구가 아냐. 한패지." "그런 말장난은 그만두세요. 그럼 당신은 그 한패 여자들에게는 그런 짓을 하는 거예요?" "그런 여자들과 그런 짓을 하고 싶은 기분이 들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요......" 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때에 따라선 사람들과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거 아니예요?" 이 말을 들은 이상 끌어안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가슴을 애무하려고 했다. 이 아가씨는 미꾸라지 같아서 잡았다고 생각하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이제 완전히 나가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접촉한 것만으로도 노여워한다. 그래도 공격을 멈출 순 없지. "그럼 난 뭐야, 아무래도 좋은 패거리와는 다른가?" "몰라요. 어쨌든 당신은 좋은 체격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 탓은 아닐 거예요. 그래요, 그 목소리죠." "목소리가 어쨌단 거야?" "흔한 목소리가 아니예요." 나는 또 정말로 웃어댔다. "아, 그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많이 부른 탓이야." "아녜요. 난 가수나, 기타리스트 중 당신 같은 창법의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요. 참, 당신 비슷한 목소릴 들은 적은 있어요. 그래요. 그곳에서죠. 하이티에요. 흑인들의 목소리죠." "반가운 말을 해주시는군. 그들은 최고의 가수니까말야."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하지만 미국 음악은 전부 그들에게서 나온 거야." "모두 거짓말이예요. 유명한 댄스 뮤직의 큰 악단은 모두 백인이죠." "그야 그렇지. 백인은 흑인이 발견한 걸 그들 자신보다도 더 잘 이용할 수 있는 처지에 놓여 있으니까." "그건 어떨지...... 하지만 훌륭한 작곡가는 모두 흑인이잖아요. 가령 듀크 엘링턴 같은 경우도 그렇죠?" "아냐. 거쉰이라든지 칸같은 백인도 많이 있잖아? 이런 패거리들은 모두 유럽에서 온 이민이지만, 흑인을 가장 잘 이해하고 받아들인거야. 거쉰의 작품전부는 흑인 것을 그대로 흉내내든가, 교묘하게 변경해 썼을 뿐, 정말로 독창적인 선율이 단 하나라도 있어야 말이지. '랩소디 인 블루'에 그런 대목이 한 군데라도 있으면 눈을 부비고 한번 보고 싶을 지경이야." "당신은 이상한 사람이예요. 아무튼 난 흑인은 딱 질색이예요." 나는 톰형의 일을 생각하고, 자칫하면 하느님에게 감사할 뻔했다. 어쨌든 그때 나는 너무나 이 여자에게 욕정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분노같은 감정은 느끼지 않았다. 게다가 개운하게 일을 해치우려면 하느님 같은 것은 필요없었다. "넌 다른 세상 사람들과 꼭 같군. 자신들이 발견한 것도 아닌데 우쭐해하고 있으니 말이지." "난 당신이 하는 말을 잘 알 수 없어요." "너도 여행해 봐. 그럼 영화나, 자동차, 나일론, 그리고 또 경마도 모두 미국 백인들이 발명한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을 거야. 째즈 음악도 그렇지." "이제 그만 다른 얘길 해요. 당신 너무 책을 많이 읽었어요." 그들은 옆 테이블에서 브리지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 아가씨에게는 어물쩍 술을 마시게 하기 전에는 아무 짓도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가장 참을성있게 일을 추진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딕스타에게서 너희 집 특제 럼주 얘길 들었는데, 그건 구름 위의 신화같은 얘길까, 아니면 우리같은 대수롭지 않은 사람들한테도 손이 닿는 건가?" "네, 물론 드리겠어요. 당신이 목마른 걸 눈치채지 못하다니, 나도 참." 내가 손을 떼자, 그녀는 홈 바가 있는 곳으로 갔다. "화이트 럼과 레드 럼이 있는데, 섞겠어요?" "아, 섞는 게 좋겠어. 그리고 오렌지 쥬스를 조금 떨어뜨려 줘. 목말라 죽을 것 같아." "그야 식은 죽 먹기죠." 방안 저쪽 브리지 테이블에 앉아 있던 패거리가 우리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이봐, 루우. 여기도 부탁해." "좋아요. 하지만 자기 스스로 가지러 와야 해요." 그녀가 엉거주춤 몸을 구부린 것을 보는 일은 역시 참 싱그럽다. 그녀는 저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가슴께가 둥글게 파여 젖가슴 부분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은 요전에 만난 때와는 달리 머리털을 전부 왼쪽으로 느려놓았다. 화장도 퍽이나 엷어, 그야말로 꿀꺽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넌 참 아리따운 아가씨군." 그녀가 럼주 병을 든 채로 몸을 일으켰다. "또 시작하지 말아요." "시작하진 않아. 아까의 계속이야." "그럼 계속하지 말아요. 아뭏든 당신은 템포가 너무 빨라요. 전혀 즐겁지도 않은데." "아냐, 모든 일이란 너무 오래 계속하면 안되지." "그럴 리 없어요. 즐거운 일이라면 언제까지라도 계속해야죠." "넌 즐거운 일이 뭔지나 알고 말하는 거야?" "네, 가령 당신과 얘기하는 일." "즐거운 건 너뿐이야. 이기주의자군." "당신은 참 지독한 사람이군요. 나와 얘길 하고 있으면 지루해서 견딜 수 없단 말인가요?" "넌 날 보고 있으면 되겠지만, 난 단지 지껄이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거든. 하기야 나도 너와 얘길 계속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있긴 하지. 그 동안엔 브리지를 안해도 되니까 말이지." "당신 브리지가 싫은가요?" 그녀가 글라스를 가득 채워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절반을 마셨다. "이거 맛 좋은데." 그리곤 글라스를 가리키며. "게다가 네가 만들어 준 게 기뻐." 그녀의 볼이 빨개졌다. "지금 같은 당신이 정말 멋져요." "하지만 난 다른 뜻으로도 더 멋질 수 있는데 말야." 나는 그 이상 깊이 들어가지 않고 글라스를 비웠다. 실지회복에 성공한 셈이다. 정말 이 아가씨에겐 쩔쩔맸다. 낚시하러 가면 이런 식으로 힘든 송어도 있다. 진이 일어나 글라스를 가지러 왔다. "당신 루우와 함께라 지루하지 않아요?" "어머, 친철하군." 루우가 심통을 내며 말했다. "루우는 정말 매력적이야. 아주 좋아. 그녀에게 구혼하고 싶은데, 허락해 주지 않을래?" "절대 안돼요. 내게 우선권이 있으니까요." "그럼 난 뭐야? " "넌 아직 젊지않니? 지금부터지. 하지만 난......" 나는 웃어버렸다. 진은 실제로 동생보다 두살 많아 보일 뿐이다. "그런 얼빠진 웃음소린 내지 마요. 언니, 이젠 제법 시들었다고 생각지 않아?" 정말 우스꽝스런 자매이다. 더구나 그러고도 서로 잘 조화되는 모양이다. "너도 나이 먹어 언니보다 시들지 않는다면 둘 다 한꺼번에 얻고 싶을 거야." "지독한 사람이군. 난 브리지하러 돌아가겠어요. 나중에 나와 춤춰야 해요." 진이 돌아가면서 말했다. "어머, 누구 맘대로... 이번엔 내게 우선권이 있으니까. 자, 언닌 냉큼 가서 때묻은 트럼프나 주무르시지." 나와 루우는 또 춤추기 시작했으나 곧 라디오의 음악프로가 바뀌었다. 내가 밖에 나가 산책하면서 다리의 피로를 풀자고 제안했다. "당신과 둘만이 있는 건 싫어요." "위험은 없어. 아슬아슬할 땐 큰소릴 지르면 될 게 아냐." "글쎄요. 그렇게 해서 남들한테 머저리 취급을 받으란 말이군요." "알았어. 그럼 그 대신 좀 마시기로 하지. 너만 괜찮다면." 나는 홈바에 가서 정신이 들 술을 두 잔 마련했다. 돌아올 때까지 루우는 그곳에 그대로 진득이 서 있었다. "마시겠어?" 그녀는 노란 눈을 감으면서 안 마시겠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나는 그녀와 어울리는 것을 포기하고, 방안을 가로질러 진의 브리지 상황을 보러 갔다. "행운을 가져왔어." "마침 잘 됐군요. 그거라도 없으면 따분할 뻔했죠." 그녀는 온 얼굴에 기쁜 웃음을 띠고 가볍게 돌아보며 말했다. "나 130달러나 손해봤어요. 지독하죠." "글쎄 그 130달러가 네 전재산에서 차지하는 비율 나름이지만." "이제 그만 하면 어떨까?" 진이 제의했다. 아까부터 굳이 트럼프를 하겠다는 의사가 보이지 않는 다른 세 사람이 일제히 일어섰다. 딕스타는 벌써 아까부터 네번째의 아가씨를 마당으로 데리고 나갔다. "이런 거 밖엔 하질 않나요?" 진이 경멸하듯이 라디오를 가리키며 물었다. "더 좋은 걸 찾아보지." 그녀는 라디오 다이얼을 만지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럭저럭 춤출 만한 음악을 찾아냈다. 두 남자 가운데 한 명이 루우에게 신청했다. 나머지 두 명도 함께 추기 시작했다. 나는 춤을 시작하기에 앞서 진에게 술을 먹이기 위해 홈바 쪽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녀는 이렇게 하기만 하면 떨어지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13 둘만의 긴 대화 다음에는 루우와 새로이 얘기할 기회가 없는 채로, 딕스타와 나는 함께 2층 침실로 돌아왔다. 우리 방은 딸들과 같은 쪽에 있었다. 부모들의 방은 반대 쪽에 있었다. 딴 패거리는 저마다 자기집으로 되돌아갔다. 부모들 방이 반대 쪽이라고 하지만, 오늘은 뉴욕인지 하이티인지 가고 집에 없었다. 그러니까 차례로 말하면 내 방 다음에 딕스타이고, 다음에 진, 루우로 나란히 있었다. 몰래 들어가기에는 꽤 떨떠름한 위치이다. 나는 옷을 벗고 천천히 샤워를 하며 말꼬리털로 만든 장갑으로 쓱쓱 몸을 문질렀다. 옆방에서 딕스타가 뭣인가 달그락달그락 소리내며 움직이는 것이 들린다. 어느덧 나갔는가 했더니, 5분쯤 지나 돌아와 글라스를 채우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술을 징발하러 갔다 온 모양이다. 제법 근사한 생각을 한 셈이다. 나는 그의 방과 욕실과의 경계가 되어 있는 연락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가 곧 문께로 다가왔다. "이봐, 딕스타. 지금 술병소리가 난 것 같은데, 꿈이었나." "한 병 줄께. 두 병 가져왔어." 럼주였다. 술은 그 시간에 따라 잠들기 위해서도 또는 반대로 깨어 있기 위해서도 두루 쓸 수 있다. 나는 마시고 깨어 있을 속셈이지만, 딕스타는 얼마 안가 잠들은 모양이다. 그는 나와 다른 방식으로 마신 것이다. 나는 30분쯤 기다렸다가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팬티 위에 잠옷을 웃옷만 걸친 채였다. 잠옷바지가 아무래도 거북했다. 복도는 어두침침했다. 그러나 방의 위치는 잘 알고 있었다. 두꺼운 카페트가 깔려 있어, 그 위에서 야구를 한대도 소리가 하나도 안날 듯 싶었다. 그래서 발소리를 죽일 필요도 없었으며, 섬세하게 신경을 쓰며 조심할 필요도 없이 척척 걸어가 루우 방의 문을 조용히 노크했다. 그녀가 문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보다도 가까이 다가오는 그녀의 기척을 느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열쇠가 돌아갔다. 나는 방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자, 재빨리 옻칠을 한 도어를 닫았다. 루우는 영화배우나 입을 법한 멋지고 하얀 네글리제를 입고 있었다. 그밖에는 언뜻 보기에 레이스의 브레지어와 그것과 한쌍이 되어 있는 레이스의 팬티만 입고 있을 뿐이었다. "화내고 있잖나 하고 와 본 거야." "여기 너무 오래 있지 마세요." "그렇다면 왜 나를 위해 문을 열어 준 거야. 도대체 누구라고 생각했지?" "그런 건 알 리 없죠. 어쩌면 수지라고 생각하고......" "수지는 벌써 잠들었어. 하녀도 마찬가지야. 그쯤은 빤히 알고 있을텐데." "뭘 하려는 거예요?" "뭘 하다니, 이거야." 나는 달려들어 그녀를 붙들고 뜨거운 키스를 해 주었다. 그리곤 귀 언저리를 마구 두들겨 맞았다. 아마 지금까지 얻어맞은 펀치 중에서도 가장 센 펀치일 것이다. 자신만만했던 나도 손을 떼어버렸다. "당신, 이 무슨 야만스런 짓이에요?" 머리카락은 이제 보통으로 가리마가 타져, 정말 귀여운 것은 일일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나는 침착을 잃지 않았다. 럼주의 덕택이었다. "너무 큰 소릴 내는군. 틀림없이 진의 귀에 들렸을 걸." "내 방 사이엔 욕실이 있어요." "그거 안성맞춤이군." 나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시작했다. 그녀는 잠옷 너머로 나를 깨물으려 하고 있었다. "알았어. 어쨌든 넌 지금까지 혼자서 잘난 척 해온 거야. 너같은 것쯤으로 애간장을 태우다니, 쪼다같으니라구." 그녀는 당장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으나, 그 눈은 노여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흐트러진 옷을 고쳐 입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쓱 돌아서, 문께로 걸어갔다. "잘 자요. 속옷이 상하게 돼서 안됐군. 갈아입혀 주겠다는 식의 참견은 안 하겠지만, 새옷을 사거든 계산서는 내게로 보내 줘." 이렇게까지 짓궂게 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런 일에는 내가 소질이 있는 모양이다.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안했지만, 두 주먹이 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곤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갑자기 몸을 돌렸다. 그 덕에 나는 잠시나마 그녀의 누드를 감상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참으로 기묘한 상태인 채로 그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곧장 별다른 망설임도 없이 다음 방 - 즉 진의 방문을 열었다. 그녀는 열쇠를 잠그지 않고 있었다. 나는 거침없이 욕실께로 가서 니켈제 자물쇠를 돌렸다. 방안은 부드러운 광선이 들어오고 있었고, 오렌지 빛깔의 벽종이가 한층 더 분위기를 온화하게 하고 있었다. 진은 나지막한 침대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손톱손질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얼굴을 돌리고 내가 방문을 잠그고 다가서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심장이 강하군요." 그녀가 몸을 일으켜 침대 위에 앉아 내 팔의 근육을 매만졌다. "좋은 몸집이군요." "아냐, 지금 막 태어난 어린 양처럼 여린 몸짓이지." 그녀는 내 몸에 자신의 몸을 부벼대며 키스했다. 그러나 곧 몸을 뒤로 물리고 입술을 닦았다. "당신은 루우한테서 왔군요. 그애 향수 냄새가 풍겨요." 아차. 나도 루우가 향수를 바른 것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었다. 진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렸고 애써 내 눈길을 피했다. 내가 그녀의 두 어깨를 잡았다. "바보로군" "하지만 당신 몸에서 그애 냄새가 나는 걸요." "그거 안됐군. 내가 좀 뾰로퉁하게 만들었지." 나는 어쩌면 루우가 지금도 알몸인 채로 방 한 가운데에 무참히 서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나는 더욱 더 흥분했다. 진은 그것을 눈치채고 얼굴이 빨개졌다. "이러면 곤란한가?" "아뇨." 나지막한 소리로 그녀가 대답했다. 둘이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누워 있었다. 내가 가볍게 그녀를 떠밀자 방향을 바꾸고 접근했다. 그녀가 발을 약간 움직였다. "그만둬요." 그녀 말대로 곧 중지했다. 나는 그녀 목덜미에 입술이 닿을까 말까한 정도의 가벼운 키스를 연속적으로 퍼부었다. 내 입술이 그녀의 가슴에 접근하는데 따라 살갗이 켕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싫은가?" 그러면서도 나는 강제적으로 하려고 했다. "싫어요." "무릎 꿇어." "싫어요." 그대로 옆으로 눕히며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얼굴을 보자, 감은 눈에서 눈물이 번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그대로 있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대로 있었다. 14 내가 내 방으로 돌아온 것은 아침 다섯시가 다 돼서였다. 나는 찬 샤워를 하며 욕실 벽에 착붙어, 딕스타에게 잠깐 와서 좀 갈겨달라고 부탁했다. 그에게 몇 대 얻어맞자 겨우 정신이 났다. 그러나 나조차 이 지경인데 진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딕스타는 딕스타대로 럼주를 너무 마셔 술 냄새가 이만저만 고약한게 아니었다. 2미터나 떨어져 있어도 숨에서 풍기는 냄새를 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우유를 3리터쯤 마시고, 골프장을 한 바퀴 돌고 오는 편이 좋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그는 테니스 코트에서 진과 만날 예정이었으나, 그녀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루우가 혼자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잘게 모를 내어 주름잡은 주름치마를 입고, 안이 부드러운 털로 된 자켓에 밝은 빛깔의 블라우스를 받친 차림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나는 이 여자가 갖고 싶었다. 그러나 아침에는 비교적 침착한 기분으로 있을 수 있었다. 내가 먼저 아침인사를 했다. "안녕." 대답하는 그녀의 말투가 차디찼다. 아니 차다기보다도 구슬펐다. "화났나? 어젯밤 일은 사과하겠어." "당신이 나쁜 건 아니에요. 태어날 때부터 그런 식일 테니까요." "아니 난 원래부터 그런 건 아냐. 그후로 그리 됐을 뿐이지." "당신에 관한 자세한 일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요." "넌 아직 내 얘기에 흥미를 가질만한 나이가 아닌 걸." "나중에 그런 말 안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할 날이 올거에요, 리." "허어, 그건 또 어떻게?" "이젠 그만둬요. 나하고 있을 땐 더 솔직할 수 없어요?" "아, 좋아. 나도 더러는 순진해지고 싶으니까." 그녀는 엉겁결에 씽긋 웃어버렸다. 나는 아침식사가 끝나자 그녀를 따라 테니스 코트로 갔다. 이 여자는 그다지 오래 화낼 수 없는 성미인가 보다. 우리는 점심까지 테니스를 쳤다. 나는 다리가 마비되어 감각이 없을 정도였다. 잠시후 진과 딕 스타가 왔다. 둘 다 나처럼 몹시 피로해 보였다. "야, 생기있어 보이는데." 진에게 말했다. "그건 당신 얘기겠죠. 자신의 얼굴 보잖았어요?" 진이 대꾸했다. "이건 루우가 만든 거야." "그럼 딕스타가 완전히 뻗은 것도 내 탓이란 말예요? 당신들은 모두 럼주를 너무 많이 마셨어요. 어머, 딕스타. 당신은 5미터 앞에서도 럼주 냄새가 코를 찔러요." "그런 터무니 없는 소리. 리는 2미터 앞에서라고 했어." 딕스타가 항의했다. "허어, 내가 그런 말 했나?" "루우, 나하고 할까?" 이번에는 딕스타가 시합을 청했다. "그럴 거 없어요. 이번엔 진이 해야 해요." 루우가 언니를 걸고 넘어졌다. "어림도 없어. 나 오늘 아침은 안돼. 리, 점심 전에 산책이나 데려가 줘요." "하지만 여기에선 몇 시에 점심을 하는 거야, 도대체?" 딕스타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정해 놓은 시간은 없어요." 진이 대답했다. 그녀는 내 팔 밑에 자신의 팔을 밀어넣어 차고 쪽으로 데리고 갔다. "잠깐 딕스타의 차를 빌리까? 제일 앞쪽에 있으니까 끌어내기 간단하지." 그녀는 잠자코 내 팔을 억세게 껴안고, 될 수 있는 대로 몸을 착 달라 붙여 왔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계속하려 했으나, 그녀는 역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려 했다. 차를 탈 때만은 팔을 뺐으나, 내가 앉자, 또 곧 운전에 방해가 될 정도로 몸을 착 달라붙였다. 나는 차를 뒤로 몰아 차고에서 나오자 비탈진 사면을 내려갔다. 철문은 열려져 있었다. 밖으로 나가자 오른쪽으로 구부러지는 길이 나왔다. 그러나 어디로 통하는 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동네에서 나가려면 어디로 가야해?" "어디로 가다뇨. 어디로든 나갈 수 있어요." 백밀러로 보자,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이봐, 너무 많이 자는 거 아냐? 너무 잠만 자면 멍텅구리가 되지." 그녀는 느닷없이 벌떡 몸을 일으켜서 내 얼굴을 두손으로 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우선 속도부터 늦추었다. 그녀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키스해줘요, 리." "동네에서 나갈 때까지 기다려." "남 같은 거 상관없어요. 보면 어때요." "하지만 네 소문이......" "신경쓰지 않아도 좋다니까요. 키스해줘요." 5분쯤이라면 좋지만, 24시간 내내 키스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키스는 이젠 멀미가 난다. 나는 몸을 떼었다. "얌전히 있어." "키스해줘요, 리. 부탁이예요." 나는 거칠게 엑설레이터를 밟고 맨먼저 눈에 띤 왼쪽 길로 들어섰다. 일부러 덜컥덜컥 차를 흔들어 그녀가 내게서 떨어지도록 할 속셈이었다. 그러나 이 놈의 고급차는 끄떡도 않는다. 도무지 흔들릴 생각을 안한다. 그녀는 그것까지도 좋다며 내 목을 껴안았다. "정말로 이놈 저놈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단 말야." "네, 얼마든지 멋대로 지껄이라고 하세요. 나중에 곤란한 건 누군지 알고 있으니까." "나중이라니." "우리가 결혼하는 건 나중에나 알테니까." 이 아가씨 완전히 정신이 나갔구나. 사랑이란 하기만 하면 깡그리 얼이 빠지고, 정신이 얼떨떨해서 뭐가 뭔지 분간을 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도 일생동안 바가지를 긁는데는 정신이 멀쩡하니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우리 결혼하는 거야?"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내 오른손에 키스했다. "물론이예요." "언제?" "지금." "일요일은 안돼." "왜요?" "안된다면 안돼. 그건 바보 짓이야. 네 부모도 찬성할 리 없어." "그런 건 상관없어요." "난 돈도 없어." "우리 둘만 있으면 충분할 거예요." "나 혼자도 겨우겨우 꾸려가고 있는 형편이야." "집에서 보태줄 거예요." "웃기지마. 네 부모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게다가 너 역시도 나에 관해선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녀는 금방 얼굴이 빨개져서 내 어깨 뒤에 얼굴을 숨겼다. "당신 일이라면 다 알고 있어요. 당신에 관해선 줄줄 말할 수 있죠." 나는 그녀가 내게 얼마나 빠졌나 알아보고 싶었다. "아니, 그 정도의 여자는 너 말고도 지천이야." 그녀는 도무지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이제부턴 그러지 못하게 할 테니까." "하지만 넌 나에 관해선 아무것도 모르잖아?" "전에는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는 '나는 당신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몰랐다'란 제목의 유행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도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래요. 그러니까 얘기해 줘요." 노래를 그친 그녀가 정색하며 말했다. "물론 네가 나와 결혼하겠다는 걸 무리하게 말릴 생각은 없어. 하지만 내 과거의 기억을 없애고 싶은 마음도 없어." 말끝에 '루우를 후리기 전에는'이라고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솔직한 심정은 그랬다. 진은 내가 한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제 내 마음대로다. 이렇게 된 이상 루우와의 일을 조금 서두르지 않으면 안된다. 진은 내 무릎 위에 머리를 올려놓고 좌석 위에 드러누웠다. "당신에 관한 모든 걸 듣고 싶어요. 얘기해 줘요." "그래 좋아." 나는 캘리포니아 연안지대에서 태어나, 아버지는 스웨덴계로 내가 금발인 것도 그 때문이라고 말해 주었다. 부모가 가난했기 때문에, 아이적에는 숱하게 고생했다. 그리고 아홉살이 되어 불경기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무렵에는 내 손으로 벌어 먹기 위해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 다행히도 나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나는 그 사나이에 이끌려 유럽에 가서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10년쯤 살았다...... 그야말로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지껄여댄 얘기였다. 하긴 분명히 유럽에 10년쯤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지금 말한 것처럼 편한 처지는 아니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지식을 얻은 것은 모두 지금 말한 사나이 집에서였다. 나는 그 집의 하인으로 있었고, 그때 그 도서실에서 읽은 것이었다. 게다가 내가 흑인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 그 사나이가 나를 어떻게 대우했겠는가라든지, 그 사나이의 애인이 안 올 때 내가 대신 어떤 짓을 해야만 했었는지 하는 것은 일체 침묵을 지켰다. 또 짐승처럼 온갖 특별 서비스를 해준 덕택으로 돌아올 배삯을 받아냈고, 그로부터 떠나올 때까지의 그 비참한 형편에 대해서도 물론 말하지 않았다. 톰형이나 동생에 대해서도 입에서 나오는대로의 터무니 없는 얘기를 늘어놓았다. 물론 동생이 사고로 죽었을 때의 모양도 꾸며댔다. 남들은 동생의 죽음을 흑인의 잘못 탓이라고 했으며 사실 흑인들은 음험해서 고작 하인이 안성맞춤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그녀도 자신은 흑인에게 가까이 가기만 해도 기분이 언짢아진다고 말했다. 어쨌든 간에 귀국해 보니 부모 집은 남의 손에 넘어가고, 톰형은 뉴욕으로 떠나고, 동생은 땅속 2미터 아래에 묻혀 있었다. 그래 하는 수 없이 직업을 찾아 톰형의 친구 덕택으로 지금의 서점에 일자리를 찾게 되었다. 이 마지막 부분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마치 목사처럼 경건한 얼굴로 내 얘기를 들었고 나는 이제 아주 느긋해져 적당히 말을 보태서 그럴듯하게 얘기를 발라 맞추었다. 어차피 그녀의 부모가 우리 결혼을 허락할 리 없다. 너는 아직 스무살이 안되었으니 반대할 거라고 말해 주었다. 그런데도 진은 자신은 이미 스무살이 되었고, 부모의 허락없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우겨댔다. 나는 수입도 적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생활하고 있는 것이 좋다며 막무가내였다. 부모도 꼭 나를 마음에 들어할 거고 하이티나, 그밖의 어딘가에 일하는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아 줄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희망적이었다. 이런 얘기를 늘어놓으며 나는 길을 찾고 있었다. 그리하여 가까스로 딕스타와 함께 지났던 적이 있는 길로 나올 수 있었다. 어쨌든 나는 서점 일을 계속 할 테니까 내주에 만나러 오면 된다. 그렇게 해놓고 부모 몰래 살짝 남쪽으로 도망쳐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곳에서 며칠 지내고 나서 부부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면 만사는 우리 뜻대로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 얘기를 하며 차를 몰았다. 나는 그녀에게 루우한테 모두 얘기할 작정이냐고 물었다. 전부 얘기할 작정이지만 그전에 둘이서 한 일만은 입을 다물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진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동안에도 자신도 모르게 또 흥분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천만 다행으로 차 안이었기 때문에 탈 없이 진정할 수 있었다. 15 우리는 이것저것 하며 그럭저럭 오후를 보냈다. 어제보다 날씨가 나빴다. 이제 가을이다. 나는 루우의 친구들과 브리지를 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딕스타의 충고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고생해서 저축한 몇백 달러의 돈을 버릴 때가 아니다. 도대체가 여기 패거리들은 5,6백 달러 딴다든지, 잃는다든지 하는 것엔 관심도 없다. 오로지 그들은 시간을 보내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진은 늘 나만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와 둘이서만 있게 되었을 때 주의하라고 일렀다. 나는 또 루우하고 춤추었으나, 그녀는 퍽이나 경계했다. 무슨 재미있는 얘기를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나는 어젯밤의 피로도 말끔히 가셔 그녀의 가슴을 볼 때마다 또 흥분되었다. 그러나 그녀도 춤추면서 조금씩 장난치는 것은 별로 화내지 않았다. 어제처럼 밤이 깊어 손님들이 돌아가자, 우리 네 명만이 뒤에 남았다. 진은 서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는데도 자꾸 하고 싶어했으며, 나는 조금만 기다리라고 설득하느라 곤욕을 치렀다. 다행히도 그러는 동안에 그녀에게도 피로가 몰려와, 큰 도움이 되었다. 딕스타는 여전히 럼주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는 열 시 무렵이 되자, 저마다 제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돌아왔던 나는 곧 아래층으로 책을 한권 가지러 갔다. 또 진하고 시작할 마음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곧 잠들 수도 없을 것 같아서였다. 잠시후 방에 돌아와 보니, 침대 위에 루우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어젯밤과 같은 네글리제를 입고 있었으나 팬티만은 새것이었다. 나는 손을 대지 않았다. 나는 입구와 욕실을 잠그고 마치 그녀가 없는 것처럼 드러누웠다. 내가 옷을 벗고 있는 동안에 그녀의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침대에 들어가 비로소 말을 건넸다. "오늘 밤은 잠이 오지 않나, 루우? 그런데 뭘 해주면 될까?" "이렇게 있으면 당신 오늘밤 진한테 못 갈 걸요." "왜 내가 어젯밤 진한테 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들었는걸요." "이거야말로 놀랄 노짜군. 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했는데" 내가 놀리듯이 말했다. "왜 그 문을 둘 다 잠그죠?" "나는 잘 땐 꼭 문을 잠그지. 눈 떠보니 옆에 누가 있다든지 하는 건 질색이니까." 그녀는 발끝에서부터 머리꼭지까지 향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몇 킬로미터 밖에서도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에, 게다가 화장도 빈틈없었다. 그녀는 어젯밤처럼 머리카락을 한가운데서 곱게 가르고 있었다. 나는 조금만 손을 뻗어도 익은 과일을 따듯이 간단히 그녀를 손에 넣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미리 말해둘 것이 있다. "아무튼 넌 날 쫓아냈잖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건 그것뿐이야." "당신이란 사람은 예의를 몰라요." "그럴까. 오늘 밤은 특히 예의바른 셈인데. 네 앞에서 알몸이 되었던 건 유감이지만. 어차피 넌 보지 않았겠지?" "당신 진에게 뭘했어요?" 이번엔 그녀가 물고 늘어졌다. "괜찮겠어? 그럼 말하겠지만, 널 놀래키는 결과가 될 걸. 하지만 하는 수 없지. 네가 아는 게 좋을 테니까. 실은 요전에 그녀에게 키스했어. 그러자 그 이후로 그녀는 쭉 나만 쫓아다니는 거야." "요전이란 언제죠?" "지키네 집에서 간호해줬을 때의 일이지." "역시 그랬군요." "아무튼 거의 강제였어. 게다가 나도 좀 취했었고." "당신 진짜로 언니와 키스했어요?" "진짜라니?" "나한테 한 것처럼......" 그녀가 소근거렸다. "아니." 라고 말하면서, 마치 너무나 진실한 말투 같아 나 자신도 빙그레 웃고 말았다. "네 언닌 너무나 집요해 골치란 말야. 내가 갖고 싶은 건 너거든. 진에게 키스를 하긴 했지만, 그건 어머니에게 하는 키스와 같은 거야. 그런데 그녀가 이상해진 거야. 도대체 어떻게 하면 도망칠 수 있을까? 이대로가선 안될 것 같아. 언닌 틀림없이 네게 나와 결혼할 작정이라고 말할 거야. 오늘 아침 딕스타 차로 둘이서 드라이브할 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녀가 확실히 미인이긴 하지만 난 조금도 갖고 싶잖아. 조금 머리가 돈 것 같이 생각돼." "당신 나와 키스하기 전에 언니에게 먼저 키스했군요?" "아니 키스한 건 언니야. 내가 아니고...... 너도 알고 있겠지만, 인간은 누구나 흑인이 된 것처럼 절망할 때 자기한테 잘해 주는 사람한테는 감사하고 싶어지는 거야." "당신 언니에게 키스한 걸 후회하고 있어요?" "아니 내가 분하게 생각하는 건 그날밤 언니가 아니라, 네가 곯아떨어졌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것뿐이야." "그럼 지금 내게 키스하면 어때요?" 그녀는 꼼짝달싹도 안한 채 그윽하게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아니 그럴 순 없어. 진하고라면 상관할 거 아니지만, 네가 상대라면 나도 심각해지지. 그...... 걸 하기 전에는 네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겠어." "그걸 하기 전이라뇨?" 루우가 물었다. 그녀는 몸을 가볍게 돌려 내 팔을 만졌다. "바보짓이야. 어차피 불가능하지." "말해봐요." "결혼하기 전에는 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야. 루우. 하지만 넌 너무 젊어. 게다가 난 진에게서 도망칠 수도 없고, 그런 일을 하면 우리는 둘 다 일생동안 쫓겨다닐 거야." "당신 진지하게 그런 일 생각하고 있나요?" "그런 일이라니?" "나와 결혼하는 일 말예요." "불가능한 일이니까 진지하게 생각해도 소용없지. 하지만 말이야 난 제발 너와 함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지."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는 반대쪽을 향한 채 였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잠자코 있었으나, 그녀가 침대 위에 눕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리이." 잠시 후에 그녀가 불렀다. 나는 내 심장이 너무 격렬히 고동치기 때문에, 침대의 용수철이 떨리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뒤돌아보았다. 그녀는 네글리제와 그밖의 것을 모조리 벗고 발랑 누운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헐리우드의 어떤 제작자이든 간에, 이 아가씨의 가슴을 찍기 위해서라면 영화를 수백 편 만들어도 아깝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손대지 않았다. "너하곤 할 수 없어. 이번 일은 완전히 잘못됐어. 날 알기 전에 너희 둘은 잘 지냈잖아. 난 너희 사이를 가르는 짓을 하는 건 싫단 말야." 반사신경대로 따르면, 뻗어버릴 때까지 이 아가씨와 철저하게 섹스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참아내야 했다. "진은 확실히 당신을 좋아해요." "하지만 그걸 내가 어쩔 도리가 없지. 진은 나하고 결혼하고 싶어해. 어떻게 그런 맘이 됐는지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여기서 내가 거절해버리면 그녀는 반드시 우리가 만나는 걸 훼방놓을 거야. 해결법은 하나밖에 없어. 내가 진하고 결혼하고 네가 날 찾아오는 거야. 그럼 우린 만날 수 있잖아?" "그런 건 싫어요." "루우." 내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너하곤 자지 않겠어. 둘만이 되기 전까진 자지 않을 작정이야. 난 우선 진과 한번 결혼할 거야. 그러고 나서 어떻게든 둘만이 되는 거야. 도와주겠지?" 그녀가 나에게 키스했다. "자, 방에 돌아가 자도록 해. 서로 힘든 말을 했군. 방에 돌아가 얌전히 자는 거야." 그렇게 말하고 나도 일어나 그녀의 눈에 키스했다. "자, 잘 자요. 난 내일 아침 떠나. 아침 식사 때 함께 있어 줘. 다시 한번 얼굴을 보고 싶으니까." 그녀를 밖으로 내보내고 문을 닫았다. 이제 이 자매는 내가 하라는 대로 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기뻤다. 어쩌면 땅속 2미터 아래에 있는 아우녀석도 기뻐서 뒤채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우녀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흐뭇한 악수를 나누었다. 16 그로부터 며칠 후 톰형에게 편지를 받았다. 그는 자기자신에 대해선 별로 쓰지 않았다. 그러나 할렘가의 학교에서 그다지 고되진 않은 일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성서를 인용하고 있었는데, 주석이 붙어 있었다. 어쨌든 내가 성서에 대해 약하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그것은 욥기의 한 구절로 "나는 살을 물고 내 영혼을 내 손에 놓았도다" 라는 말씀이었다.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지만, 톰형의 주석에 의하면 말씀의 인물은 자신의 마지막 찬스를 걸었다든가, 또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간단한 것을 말하기 위해 왜 이렇듯 복잡한 표현을 써야만 했는지 불가사의했다. 톰은 도무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은 좋은 사람이다. 나는 모두 잘 되어 가고 있다는 답장을 쓰고, 50달러 지폐 한 장을 동봉했다. 가엾게도 형이 제대로 식사를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그것 외에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책이다. 여전히 책뿐이다. 본점을 거치지 않은 크리스마스 카드나 앨범도 받아들였다. 같은 가게의 점원이지만, 이런 것을 자기 멋대로 만들어 팔러 오는 패들이 수두룩하다. 계약서에는 이런 종류의 아르바이트는 금지되어 있었다. 나도 부질없는 위험을 무릅쓸 생각은 없었다. 이따금 다른 종류의 인간도 찾아왔다. 그 작자들은 음란 서적을 파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모두 거절했으나, 언제든지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그들은 흑인이나 혼혈아가 많았으며, 생활이 어려운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대개 한두 권은 사 주었다. 물론 파는 것은 아니다. 그룹의 패거리에게 주는 것이다. 쥬디는 특히 그런 종류의 책을 좋아했다. 그들은 여전히 편의점에 모이고 곧잘 나를 만나러 왔다. 나도 이 아이들과 적당히 지내고 있었다. 대개 이틀에 한 번 꼴로 여자아이를 만났다. 질이 나쁘다기 보다는 조금 모자랄 뿐이다. 그렇지만 쥬디는 별개이다. 진과 루우는 그 주에 둘이서 백턴에 들를 예정이었다. 그래 따로따로 두번의 테이트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진의 전화로는, 루우는 안 온다는 것이었다. 진은 다음 주말에 놀러오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거절의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아가씨의 말대로 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기분이 나쁘다고 와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나는 일이 밀려서 안되겠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그녀는 월요일 다섯 시경에 온다고 말을 꺼냈다. 그러면 수다를 떨 시간쯤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월요일까지는 이렇다 할 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 토요일 밤은 또 스톡 클럽의 스페어 기타리스트가 됐다. 15달러쯤 벌은 데다가 술도 잔뜩 마실 수 있었다. 그곳은 지불이 깨끗했다. 방에 있을 때는 책을 읽기도 하고, 기타 연습을 하기도 했다. 탭댄스는 요즘 게을리하고 있었다. 이젠 그런 짓 하지 않고도 그룹의 패거리를 잡아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애스키스 자매를 처치하거든 또 유유히 사라지기로 하자. 나는 아우의 작은 권총용 총알을 샀다. 그밖에도 두세 종류의 약을 샀다. 차는 정비소에서 두세 군데 고치도록 했다. 그 동안 딕스타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토요일 아침 만나러 가보았으나, 주말을 보내러 어디론가 떠난 뒤였다. 어딜 갔는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또 안나 노파한테 가서 어린 소녀와 즐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월요일 오후 네 시 반쯤 진의 차가 우리 서점 앞에서 섰다. 그녀는 남의 눈 같은 것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가게로 들어왔다. 마침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나에게 다가오자 느닷없이 마치 특별히 소중히 간직했던 것이라도 만난양 키스를 퍼부었다. 나는 우선 앉도록 했다. 쇠로 된 셔터는 일부러 닫지 않았다. 약속 시간보다 빨리 오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짙은 화장을 했는데도 그녀는 얼굴빛이 몹시 나쁘고, 눈자위는 검었다. 그녀는 여전히 손에 넣을 수 있는 한의 제일 비싼 옷을 입고 있었다. 모자도 백화점에서 팔고 있는 싸구려가 아니었다. 그 덕택으로 도리어 나이 들어 보였다. "여행은 좋았나?" "가깝던데요. 전에는 더 멀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직 약속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 그녀는 다이아몬드를 아로새긴 시계를 보았다. "그렇지도 않아요. 이제 다섯 시 이십오분 전이니까요." "네 시 이십구분이잖아. 그리 무턱대고 빨리 오면 곤란해." "안돼요?" 그녀의 달콤한 응석 바람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아, 아뭏든 난 놀고만 있을 수도 없으니까." "리, 그런 짓궂은 말 하지 말아요." 그녀가 소근거렸다. "아, 일이 끝나고라면 짓궂은 말을 안하지. 얼마든지 다정히 굴 수 있지만." "다정하게 대해줘요, 리. 나......" 그녀는 다음 말을 못하고 있었다. 나는 곧 눈치챘다. 그러나 그녀 입으로 말하도록 해야 한다. "확실히 말해 봐." "아이가 생겼어요." "정말?" 손가락으로 그녀를 위협하듯이 가리키며 말했다. "남자와 난잡한 짓을 했군."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얼굴을 몹시 긴장한 채였다. "리, 되도록 빨리 결혼해 주지 않으면 곤란해요. 큰 문제가 생길 거예요." "흔히 있는 일이야." 내가 시침을 뗐다. 그러나 다시 명확한 태도를 취했다. 모든 것을 준비하기까지는 그녀가 서투른 짓을 하면 곤란하다. 이런 상태가 되면 여자는 흔히 신경과민이 된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었다. "가만히 있어. 지금 가게를 닫을 테니까. 그러면 훨씬 맘이 가라앉겠지." 확실히 아이가 생겼다면 처리하기도 그만큼 수월할 것이다. 그녀가 자살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생긴 것이다. 나는 문께로 가서 셔터를 내리는 스위치를 눌렀다. 셔터는 천천히 내려왔다. 기름으로 잘 손질한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가 작게 들릴 뿐이다. 돌아보자 진은 모자를 벗고 머리카락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머리를 고치고 있었다. 모자를 벗은 편이 훨씬 좋았다. 확실히 미인이다. "우리, 언제 떠나나요?"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 "이렇게 됐으니 되도록이면 빨리 데려가 줘요." "주말 쯤엔 갈 수 있어. 이제 이쪽 정리는 얼추 끝났지만, 저쪽애서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하니까." "내가 돈을 갖고 나오겠어요." 나는 여자가 먹여주는 것은 절대로 싫었다. 설사 상대가 내가 죽이려는 당사자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건 나와 관계 없어. 네 돈을 쓰는 건 네 문제야. 이미 양해가 된 줄 알았는데."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언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의자 위에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괜찮아. 말해봐. 나 몰래 뭘 했지, 응?" "저쪽에 편지를 보냈어요. 신문에서 광고를 봤죠. 광고에 의하면 사람의 흔적이 없는 곳으로, 고독을 사랑하는 인간이나 둘이서만의 밀월을 즐기려는 한쌍에겐 안성맞춤이라는군요." "그렇지만 둘이서만 조용히 있고 싶은 쌍들이 모두 그곳으로 몰려오면 어쩌려고." 그녀는 웃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려 쉰 듯했다. 언제까지 비밀을 간직할 여자가 못된다. "답장이 왔어요. 밤엔 전용 별장에서 지내고 식사만 호텔에서 하게 된대요." "제일 좋은 건 네가 먼저 가는 거야. 난 나중에 갈테니. 그럼 이것저것 정리할 시간이 있으니까." "함께 가는 게 좋아요." "그렇겐 할 수 없어. 감시당하면 곤란하니까 집에 돌아가 있는 거야. 짐은 최소한도로 줄여. 이것저것 많이 가져갈 것 없거든. 그리고 가는 곳을 써서 남기는 일은 하지마. 부모에게 알릴 일은 없어." "당신은 언제 오겠어요?" "다음 월요일이야. 일요일 밤 여길 떠날 테니까." 그러나 문제는 루우이다. "이 일 물론 동생에게 고백했겠지?" "아직 안했어요." "눈치챘을 거야. 게다가 어차피 말해 두는 게 좋겠어. 부모와의 중개자 역할도 할테고, 너희들 자매 사이가 좋잖아?" "네." "그럼 동생에겐 말해둬. 하지만 떠날 날이 돼서 말이지. 가는 곳의 주소도 일러 주는 거야. 단, 네가 떠난 후에 비로소 그게 발견되도록 해." "어떡하면 좋을까요?" "편지를 써서 봉투에 넣어, 집에서 50킬로미터 쯤 떨어진 곳에서 우체통에 집어넣는 거야. 아니면 서랍장에 넣어 둬도 좋다.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까다로운 건 ㅅ어요. 우리 둘이서 모두에게 단순히 둘만이 있고 싶어 떠난다고 말하고 가면 안될까요?" "그렇게는 안돼. 넌 괜찮지만 난 돈 없는 건달이니까." "그런 건 상관없어요." "이봐, 정신차려. 넌 부자니까 돈 같은 건 상관없겠지만." "난 루우에게 고백은 못하겠어요. 그애는 이제 열다섯살이예요." 나는 웃었다. "넌 루우를 기저귀를 차고 있는 젖먹이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자매가 있는 가정에선 막내가 큰언니와 마찬가지로 모든 걸 알게 되는 거야. 만약 네게 열살짜리 동생이 있다면 그애도 루우에게 지지않을 정도로 뭐든지 알고 있겠지." "하지만 루우는 아직 어린애예요." "아, 그렇겠지. 그건 그녀가 입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어. 짙게 향수를 뿌리고 있지만, 그것도 순진하다는 표시일거야. 알겠어? 루우에겐 가르쳐 줄 필요가 있거든. 누군가 너와 부모와의 사이에 설 사람이 필요하다니까." "난 아무에게도 알리기 싫어요." 나는 그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짓궂은 표정을 짓고 비웃듯이 말했다. "넌 그 정도로 네가 발견한 남자가 부끄러운 거야." 그녀는 입술을 떨기 시작했다. 나는 기어코 울음을 터뜨리는구나 생각했다. 진은 일어나자. "왜 그리 짓궂은 말만 하는 거예요? 날 괴롭히는 게 즐거운가요? 내가 잠자코 있고 싶은 건 무섭기 때문이예요." "무섭다니 뭐가?" "당신이. 결혼하기 전에 날 버리지나 않을까 해서요."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럼 넌 내가 설사 널 버리고 싶어도 결혼하면 단념할 걸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네, 아이가 있으면요." "그야 아이가 있으면 이혼은 할 수 없어. 하지만 버리고 싶어지면 역시 버리게 돼." 이번에는 그녀도 결국 울기 시작했다. 의자에 털썩 앉아 얼굴을 숙였다. 눈물이 그 둥근 양볼에 흘러 내렸다. 나는 좀 지나쳤다고 생각되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목덜미를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아, 리, 나는 당신이 설마 이러리라곤 생각도 안했어요. 날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당신은 만족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때도 얼간이 같은 대답을 하고 말았다. 갑자기 그녀가 토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수건 한 장이 없었다. 급히 가게 안에 뛰어들어가 가정부가 청소에 쓰는 걸레를 가져왔다. 임신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가까스로 훌쩍거리는 것을 그쳤다. 내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녀의 눈은 마치 씻은 뒤처럼 눈물로 빛나고 있었으며, 숨결도 거칠었다. 구두도 더럽혀져 있었기 때문에, 종이로 닦아 주었다. 고약한 냄새에 질렸으나, 그래도 허리를 구부려 키스했다. 그러자 그녀는 뜻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격렬하게 나를 꽉 껴안는 것이었다. 정말 이 여자는 생활이 개판이었다. 술을 너무 마신다든가, 남자와 지나치게 정사를 하든가로 늘 어딘가 고장이 나있는 것이다. "얼른 가는 게 좋겠어. 집에 돌아가. 몸을 회복하고 목요일 밤이 되거든 짐을 꾸려 집을 나오는 거야. 월요일엔 나도 가지. 벌써 결혼허가증을 수배해 놨어." 그녀는 기운을 되찾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웃음을 띠었다. "리, 그게 정말이예요?" "물론이지." "어머나, 리. 당신은 너무 좋은 사람이에요., 우린 꼭 행복해질 거예요." 정말 멍청하게 남을 미워할 줄 모르는 여자다. 젊은 여자란 이런 경우, 보통은 더 까다롭게 굴며, 더 어려운 말을 하는 법이다. 나는 그녀를 일으켜 세워 옷 사이로 유방을 애무해 주었다. 그녀는 몸을 구부리며 머리를 뒤로 젖혔다. 계속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가게 안을 환기시키고 싶었다. 냄새가 지독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입을 손으로 누른 채 일어나 다시 토했다. 나는 그녀를 강제로 일으켜 세우고 코트를 입혔다. 그리고 가게의 뒷문에서 차까지 그녀를 안고 가서 운전석에 태웠다. 나는 잠자코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정도의 컨디션이라면 사고는 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안으로 돌아와 목욕을 했다. 어쨌든 고약한 냄새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7 나는 그때까지도 그 두 여자를 죽이면 어떤 복잡한 사태가 벌어지는가 하는 것에 관해서는 일체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사실 어떤 때는 계획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중지한 채 한가롭게 책이나 팔고 싶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우를 위해서도, 톰형을 위해서도, 나 자신을 위해서도 어떤 일이 있든 간에 해야만 한다. 나같은 상태의 인간으로, 자신의 검은 피를 잊고 언제든지 백인 쪽에 붙어서 기회가 있으면 태연히 흑인을 두드려패는 놈들이 있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이런 놈들이라면 죽인다 해도 기분이 좋을 것이다. 어쨌든 일을 하나씩 처리해 나가야만 한다. 먼저 애스키스 자매이다. 딴 패들은 이제부터라도 얼마든지 처치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쥬디, 지키, 빌에 베티처럼 늘 사귀고 있는 패거리들은 값어치가 없다. 애스키스 자매는 약간의 연습이다. 다음은 더 교묘하게 해서 누군가 거물을 해치우겠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선 한두 사람을 하는데 그쳐선 안된다. 그러나 조금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있다. 그렇다, 우선 두 마리 암컷을 죽여버린 다음 어떻게 해서 숨길까가 문제이다. 제일 좋은 것은 자동차 사고로 위장하는 일이다. 물론 그녀들이 무슨 용건으로 국경지방에 와 있었나 당국은 의아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검시(檢屍)를 해서 진이 임신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으로 끝이다. 루우는 다만 언니를 따라온 것이 된다. 그리고 나는 전혀 무관계가 되는 셈이다. 사건이 처리되고 열기가 식어 세상 사람들의 관심이 엷어지면 그녀들의 부모에게 진상을 말해 준다. 딸들이 흑인에게 처치된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후 잠시 동안은 멀리 가서 있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또 새로이 시작할 뿐이다. 계획으로선 어처구니 없을만큼 간단하나, 이런 것이 도리어 제일 잘 되는 것이다. 나에게는 진과 더불어 저쪽에 도착한지 1주일 이내에 루우가 올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내 포로인 것이다. 우선 진도 데리고 외출한다. 운전하는 것은 진이다. 핸들을 쥐고 있을 때 구역질이 엄습한다. 흔히 있는 일이 아닌가. 나는 곧 밖으로 뛰어나간다. 이제부터 가는 곳에는 이런 형편에 알맞는 장소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루우는 언니와 앞에 타고 나는 뒤에 탄다. 우선 루우를 해치운다. 그리고 그것을 본 진이 핸들에서 손을 떼면 도리어 잘 되는 셈이다.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장이다. 그러나 이 자동차 얘기는 나에겐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도대체가 낡고 진부한 수법이다. 게다가 너무 빨리 처치된다. 나는 그녀들에게 내가 왜 너희들을 죽이는가? 그것을 말할 시간을 갖고 싶다. 그녀들이 자기 스스로도 내 덫에 걸린 것을 깨닫게 하고, 이제부터 어떤 꼴을 당한는가 알려 놓은 다음 해치우고 싶은 것이다. 자동차....그러나 훗일은. 자동차는 마무리를 위하여 아무래도 필요하다. 그렇다, 이렇게 하자. 우선 둘을 고즈넉한 장소로 데려간다. 거기서 처치한다. 물론 이유는 말해 준다. 그리고 차에 넣어 이번에는 사고를 가장한다. 앞의 것과 같은 정도로 간단한 아이디어지만, 훨씬 만족스럽지 않은가. 만족스럽다? 정말일까? 나는 좀더 이런 일들을 이리저리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자 차츰 초조해졌다. 그러다 될대로 되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 아우를 회상했다. 게다가 루우와의 마지막 대화가 생각났다. 나는 그녀에게 해줄 일을 막연히 이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뚜렷한 형태를 갖게 된 것이다. 좋다. 나는 내 뜻을 이루는 일이라면 충분히 위험을 무릅쓸 것이다. 될 수 있으면 자동차로, 안되면 그것은 그것대로 하는 수 없다. 국경까지는 멀지 않다. 멕시코에 가버리면 사형은 없다. 이런 일을 생각하며 나는 한편 또 하나의 계획을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며칠 동안 나는 많은 양의 버번 위스키를 마셨다. 머리는 잘 움직여 주였다. 권총 총알 이외에도 여러가지 것을 샀다. 삽과 곡괭이, 끈도 샀다. 나는 아직 마지막 아이디어가 잘 될지, 어떨지 자신이 없었다. 만약에 잘 된다면 어차피 화약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뒤에 산 것이 쓸모 있게 된다. 게다가 삽과 곡괭이는 언뜻 머리에 떠오른 또 하나의 아이디어를 채택했을 경우, 꼭 필요한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이런 일을 계획할 경우, 처음부터 하나의 플랜을 자세한 데까지 빈틈없이 짜서 그것을 고집하는 것은 잘못이다. 언제든지 어느 정도 우연에 맡기는 부분이 있는 편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좋은 기회가 왔을 때는 그것을 살리는데 필요한 전부의 것을 갖추어 갖고 있어야만 한다. 나는 뭔가 뚜렷한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자, 먼저만치 마음이 별로 당기지 않았다. 나는 중대한 요소를 하나 고려에 넣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시간이다. 내가 계획을 실행할 때까지는 아직 상당한 시간이 있는 것이다. 나는 너무 이 일만을 생각하는 것을 피하기로 했다. 신경이 곤두서서 좋을 리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는 곳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루우도 요전의 타협이 내 뜻대로의 효과를 올리고 있다면 아무에게도 애기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과연 그렇게 일이 척척 들어맞았나 어쨌나는 그곳에 가 보면 곧 알 수 있는 것이다. 최후의 순간... 출발 한 시간 전이 되어 나는 돌연 공포감에 사로잡혀, 정말로 루우가 기다려 줄까 어떨까 미심쩍어졌다. 최악의 순간이었다. 나는 테이블에 앉은 채 마시고 있었다. 도대체 몇 잔을 마셨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으나, 그러면서도 버번 위스키가 마치 맹물처럼 느껴질 정도로 정신이 멀쩡했다. 내가 태어난 집 부엌에서 석유통이 폭발했을 때, 그때부터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는 이미 결정이 난 것이다. 나는 간이백화점에 가서 전화박스 안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시외 통화계를 불러내 플릭스빌의 번호를 부탁했다. 하녀가 루우를 바꿔주었다.. "여보세요." "리 앤더슨이야, 어때?" "뭐가요?" "진이 없어졌지." "네." "간 곳을 알고 있나?" "네." "언니한테서 들었나?" 나는 루우가 전화에서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고 있는 것을 들었다. "언니는 그 주소가 쓰여 있는 신문광고에다 일부러 눈에 띄게 표를 해놨는 걸요." 이 아가씨, 실로 눈치가 빠르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마중가겠어." 내가 말했다. "언니한테 안가요?" "가지. 하지만 널 데리고 말야." "싫어요." "뭐야. 자기자신도 결국 가게 될 건 분명히 알고 있을 텐데." 그녀가 아무 대답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말을 계속했다. "그러니까 내가 널 데리러 가면 그것으로 모든 게 말끔히 끝나는 거야 ." "하지만 왜 언니를 만나러 가는 거예요?" "그녀에게 분명히 말해 줘야 하기 때문이지." "뭘 말해 주는 거예요?" "그건 가는 도중에 얘기하겠어. 짐을 꾸려가지고 오도록 해." "어디서 기다리면 되죠?" "지금 곧 갈게. 두 시간 후에 도착할 테니까." "자기 차로 오는 거예요?" "그래. 네 방에서 기다려 줘. 세 번 경적을 울릴 테니까." "생각해 보겠어요." "그럼 두 시간 후에." 나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끊어버렸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았다. 나는 전화박스를 나와 돈을 지불하고 내 방으로 돌아갔다. 짐은 이미 차 안에 넣어 놓았고, 돈은 몸에 지니고 있었다. 나는 본점에 편지로, 형이 병을 앓고 있어 급히 가보아야 한다고 써 보냈다. 톰형도 이런 거짓말은 용서해 줄 것이다. 이제 서점 일을 어떻게 할 작정인지, 나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생활의 쓰라림이나, 불안이나 하는 것은 전혀 경험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러나 이번 일 때문에 온통 머리가 어수선하고 산란해져서, 평상시처럼 침착할 수가 없었다. 그곳에 가서 모든 것을 처리하고 난 후라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딴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나는 무슨 일이든 간에 중도에 그만두는 것은 딱 질색인 성미인 것이다. 그것은 이번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잊은 물건은 없는지 둘러보고 나서 모자를 집어들었다.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열쇠는 가지고 가기로 했다. 한 블럭 앞에 주차시켜 놓은 내 차 쪽으로 걸어갔다. 엔진에 시동을 걸고, 힘차게 출발했다. 시내를 벗어나자 더 밟을 수 없는데까지 힘껏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몸은 차가 내달리는 대로 흔들리고 있었다. 18 길은 몹시 어두웠다. 다행히도 차는 적었다. 반대 쪽엔 주로 덤프트럭들이 달릴 뿐이었다. 남쪽으로 향하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속력을 내고 있었다. 엔진은 마치 트랙터처럼 처절하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고, 한란계는 섭씨 9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차 또한 너끈하게 그것을 견뎌내고 있었다. 나는 다만 신경을 가라앉히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 기세로 한 시간이나 달리자, 기분이 상쾌해졌기 때문에 약간 속도를 늦추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차체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밤은 습기가 차 있어 추웠다. 슬슬 겨울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코우트는 슈우트케이스 안에 넣어버린 채였다. 게다가 몸과는 상관없이 마음은 열이 올라 추위를 느낄 수가 없었다. 나는 이정표에 신경을 썼는데, 덕분에 길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따금 주유소가 보이기도하고 오두막집이 서너 채 있는가 하면 또 길이었다. 드물게 무슨 짐승인가가 길로 뛰어나오기도 했다. 그 다음은 과수원이나, 밭이나, 아니면 전혀 아무것도 없는 거치른 들판이 계속 될 뿐이었다. 나는 시속 160킬로미터로 두 시간을 달려 온 셈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170킬로미터나, 180킬로미터는 됐을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백턴의 시내에서 나올 때 소비한 시간이나,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전원 둘레를 크게 돌은 시간을 계산에 넣지 않고서의 얘기다. 나는 한 시간 반쯤으로 루우의 집 앞에 도착했다. 내 차가 최대한 무리를 한 것이다. 나는 루우가 틀림없이 준비를 갖추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차를 천천히 몰아서 문 앞을 지나자, 될 수 있는대로 집에서 가까운 데까지 가서 경적을 세번 울렸다. 처음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차가 서있는 곳에서 루우 방의 창문은 보이지 않았으나, 차에서 내릴 용기는 없었다. 게다가 가족들을 깨워도 곤란하기 때문에, 다시한번 경적을 울리는 것도 싫었다. 나는 그대로 진득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경을 가라앉히려 담배에 불을 붙일 때 두 손이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2분 후에 담배를 던져버리고는, 몹시 망설이던 끝에 드디어 또 세 번 경적을 울렸다. 그리고 어찌할 바를 몰랐기 때문에 차에서 내리려는데, 그녀가 다가오는 기척이 있었다. 그녀는 환한 색의 코우트를 입고 있었다. 모자는 쓰지 않았고,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밤색의 커다란 핸드백을 들고 있었는데, 짐은 그것뿐이었다. 그녀는 차에 올라타 내 옆에 앉았다. 입술을 꼭 다문채 말이 없었다. 나는 그녀 위에 덥치듯이 하며 조수석의 문을 닫았다. 그러나 키스는 하려 들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을 듯이 꽉 닫혀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차를 되돌려 원래의 길로 들어섰다. 그녀는 눈 앞의 길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곁눈질로 보며, 교외에 나가면 조금은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힘차게 100킬로미터로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목적지가 이젠 그다지 멀리 느껴지지 않았다. 공기도 전보다는 건조했고, 어둡다고는 해도 전만은 못했다. 지금부터 500에서 600킬로미터는 더 달려야만 한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루우 옆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차 안은 온통 그녀의 향수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이 나를 몹시 흥분시켰다. 찢겨진 팬티를 입은 채로 방안에 서서 고양이같은 눈으로 노려보던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일부러 큰 한숨울 내쉬었다. 그녀는 다시 살아나는 사람처럼 천천히 눈을 떴다. 나는 더 편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다. 이대로는 아무래도 너무 서먹했기 때문이다. "춥지 않아?" "아뇨." 그러나 그녀는 떨고 있었다. 그래서 내 기분은 더욱 언짢아졌다. 나는 그녀가 질투하고 있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운전에 열중해야 했다. 이렇듯 어색한 상태에서는 말만으로 간단하게 기분을 풀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핸들에서 한 손을 떼 오른쪽 옆의 바구니 속을 더듬었다. 위스키 병을 꺼내 그녀의 무릎 위에 놓고 컵도 하나 꺼냈다. 그 다음 라디오의 볼륨을 돌렸다. 더 빨리 라디오를 생각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어쨌든 기분이 가라앉는 것 처럼 보였다. 모든 것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초조해졌다. 다행히도 그녀는 병을 들어 마개를 따서 단숨에 한 컵을 따라 마셨다. 내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녀는 또 컵에 가득 채워 이번에도 자기만 마셔버렸다. 그런 후에야 겨우 나에게 한 컵 따라 주었다. 그녀는 병과 컵을 바구니에 넣고는, 어느정도 상기되는지 코트 단추를 두 개 풀렀다. 그 아래에는 깃의 접은 부분이 매우 큰 짤막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그 위 단추도 땄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위험했기 때문에, 나는 앞쪽 길만을 뚫어져라 쳐 다보고 있었다. 차 안은 그녀의 향수와 알콜, 담배 냄새가 뒤섞여 풍기고 있었다. 이 냄새는 정말 신경을 자극한다. 그러나 나는 유리문을 열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상태가 반 시간쯤 더 계속 되었다. 이윽고 그녀는 다시한번 바구니 뚜껑을 열더니, 또 두 컵쯤 마셨다. 이젠 더워졌는지 코우트를 벗었다. 이쪽에 다가오듯 몸을 움직이는 기회를 잡아 나는 몸을 구부리고 귀 바로 아래에 키스했다. 그녀는 급히 몸을 떼고, 나를 돌아다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위스키 효과가 슬슬 나타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80킬로미터쯤 더 말없이 운전하다가 드디어 공격을 시작했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더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기분이 나빠?" "걱정말아요." 천천히 그녀가 말했다. "나 같은 사람과 함께 드라이브할 기분이 안되는 거야?" "아뇨, 걱정 말래두요." "언니를 만나러 가는 게 싫은가?" "언니 얘긴 하지말아요." "좋은 아가씨인데 말야." "그렇죠. 게다가 섹스도 썩 잘하잖아요?" 나는 말문이 막혔다. 쥬디나, 지키나, B.J같은 패거리의 입에서 나왔다면 그냥 흘려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설마 루우가 이런 말을 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루우는 말도 못하고 있는 내 꼬락서니를 보면서 숨이 막힐 정도가 될 때까지 웃어댔다. 그렇게 웃는 것을 보니 꽤 마신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 아닌가요?" "아, 그만해." "언니는 정말로 그런 거죠?" "그건 몰라." 그녀는 또 웃었다. "헛수고예요, 리. 난 입술에 키스한 것만으로 아이가 생긴다고 생각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니까." "누가 아이 일을 말했어?" "진은 아이가 생긴 거죠?" "너 어떻게 된 거 아냐." "리, 그만 둬요. 난 분명히 알고 있으니까." "네 언니와 잔 적이 없어." "거짓말." "자지 않았다면 자지 않은 거야. 설사 만일에 잤다고 해도 아이 같은 건 생기지 않아." "그럼 왜 늘 그렇게 몸이 아프죠?" "지키의 집에서도 몸이 아팠잖아? 그땐 아이는커녕 손도 않댔어. 언니는 위가 약한 거야." "그럼 딴 데는 어떻죠? 전부 약한 거 아니예요?"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나를 팼다. 대단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제법 자극을 느꼈다. 근육이 없는 대신에 운동신경은 좋았고, 테니스로 잘 단련된 몸매였다. 그녀가 겨우 패는 것을 멈췄고,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기분이 후련해졌어?" "원래 내 기분은 후련했었죠. 진은 어땠어요? 뒤에 기분 좋았어요?" "뒤라니 무슨 뒤야?" "그녀와 잔 뒤 말예요." 그녀는 이런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어쩔줄 모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언니는 내가 처음이 아냐." 나는 또 마구 두드려 맞았다. "더러워요. 거짓말장이군요, 당신이란 사람은." 그녀는 한참을 나를 두드려 팬 덕택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문쪽을 향한 채 앉아 있었다. "난 처음부터 자는 데에는 네가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 넌 냄새가 좋거든. 하지만 진은 섹스에 능숙해. 언니가 떠나고 우리 둘만 남게되면 조금은 섭섭할 거야." 그녀는 꼼짝달싹도 하지 않고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 순간 가슴이 조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곤 눈앞이 아찔해졌다. 루우가 이제 의미를 알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곧 하는 거예요? 아니면 끝나고서?" "하다닌 뭘 해?" 나지막한 소리로 어눌하게 내가 말했다. 나는 태연하게 지껄일 수 없었다. "당신 나하고 잘 테예요?" 그녀가 물었다. 그러나 그 소리가 너무나 낮았기 때문에, 그 말을 들었다기보다도 느낌으로 알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황소처럼 흥분해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우선 그녀를 처치해야지." 나는 그녀가 완전히 나에게 빠져있는 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싫어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게도 언니가 소중한 거야? 무서워졌는데." "아뇨. 난 기다리는 게 싫은 거예요." 그러나 그 순간 다행히도 주유소가 나타났기 때문에 차를 세웠다. 뭐든지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완전히 후끈 달아오를 지경이었던 것이다. 나는 앉은 채로 기름을 가득 채우도록 말했다. 루우는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무엇인가 말하자, 주유소 점원이 판잣집을 가리켰다. 그녀는 모습을 감춘지 10분쯤 지나서 나타났다. 나는 그 사이를 이용해 타이어에 공기를 넣었다. 그리고 주유소 점원에겐 샌드위치를 주문했지만 먹을 수는 없었다. 루우는 도로 제 자리에 앉았다. 돈을 지불하자, 사나이는 또 자러 돌아갔다. 그리고 한 시간인가, 두 시간을 처절한 기세로 달리고 또 달렸다. 루우는 이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벌써 잠들은 것 같았다. 나도 완전히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 문득 그녀가 기지개를 켜는가 싶더니, 또 바구니를 열고 계속적으로 세 컵 마셨다. 나는 이제 그녀가 움직이는 것을 볼 때마다 흥분해 오는 자신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운전을 계속할까 생각했으나, 10킬로미터쯤 더 가서 길가에 차를 세웠다. 아직 밤이었다. 그러나 새벽이 가까운 것을 알았다. 그리고 바람 한점 없었다. 잡초나 관목의 작은 숲이 여기저기 깔려있을 뿐이다. 30분쯤 전에 동네를 지난 듯한 기분이 든다. 나는 브레이크를 걸고, 병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다음 루우에게 내리라고 말했다. 그녀는 문을 열고 핸드백을 꺼내 들고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 뒤를 따랐다. 그녀는 숲 쪽으로 걸어가다 멈추더니 담배를 요구했다. 담배는 차안에 있었다. 기다리라고 말할 때 그녀는 핸드백 속을 뒤지고 있었으나, 나는 벌써 되돌아 걷고 있었다. 차까지 단숨에 달려와 담배를 꺼내고, 온 김에 술병을 집어들었다. 이미 거의 빈 병이었으나, 뭐 걱정할 건 없다. 트렁크에는 몇 병 더 들어있으니까. 나는 되돌아가느라고 걷기 시작했으나, 흥분으로 몸이 거북스러워 그녀에게 가기 전부터 미리 단추를 풀기 시작해다. 바로 그때였다. 권총의 섬광이 번쩍인 것은. 그리고 그와 동시에 왼쪽 팔꿈치가 날아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팔은 내 몸통을 따라 축 늘어졌다. 단추를 푸느라 손을 올렸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총알이 심장을 뚫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은 잠깐이었지만 생생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그녀 위에 몸을 날려 손목을 비틀고 있었다. 그리곤 관자놀이를 힘껏 후려갈겼다. 그녀가 물고 덤비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을 잃고 땅 위에 쓰러져 꼼짝달싹도 못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아직 충분하치 않다. 권총을 집어 호주머니에 넣었다. 내 것과 같은 6.35구경에 지나지 않은데, 제법 겨냥을 잘했다. 나는 다시 차로 돌아왔다. 상처입은 왼팔을 오른팔로 끌어안고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분노가 더욱 격렬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아픔이 덜했을 것이다. 나는 찾고 있던 것을 발견했다. 전기줄이다. 전기줄을찾아내자 곧장 루우에게로 갔다. 그녀는 그제서야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의 두 팔을 묶으려고 했으나, 쓸 수 있는 내 팔은 하나밖에는 없었다. 가까스로 묶고 나서는 마구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스커트를 벗기고 스웨터를 찢었다. 그리고 또 갈기기 시작했다. 하늘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그녀의 몸뚱이는 어두운 나무 그늘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때 그녀가 무엇인가 지껄이기 시작했다. 내게는 절대로 언니를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까 딕스타에게 전화로 경찰에 알리라고 말해 두었다는 것이다. 언니를 죽인다는 말을 꺼냈기 때문에, 내가 엄청난 악한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낄낄 웃었다. 그러자 그녀도 따라 잔웃음을 흘렸고, 나는 곧바로 그녀의 턱주가리를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그녀의 가슴은 차디차고 단단했다. 격양된 내 자신을 억누르며 왜 나를 쏘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내가 더러운 흑인이란 사실을 딕스타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다고 했다. 나와 함께 온 것도 언니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였으며, 나를 누구보다도 미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또 웃어주었다. 그러나 심장은 몹시 두근거렸고, 손은 떨렸으며, 왼팔은 출혈이 심했다. 피가 팔을 따라 흐르고 있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나는 아우가 백인에게 살해당했으나, 너는 그렇게 간단히 해치울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렇지만 어차피 그녀가 살아날 길은 없을 것이라고도 말해 주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더욱 가혹하게 얼굴을 때렸다. 그러자 그녀는 또 눈을 뜨는 것이었다. 아침이었다. 두 눈이 분노의 눈물로 번들번들 빛나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녀 위에 몸을 구부렸다. 그리곤 킁킁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녀의 온몸의 냄새를 맡았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온몸을 마음껏 물었다. 처음엔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려 했지만, 그 순간 그녀가 돼지처럼 고함치기 시작 했다. 그것은 소름이 끼칠 만큼의 처절한 비명이었다. 그래서 나는 온몸에 힘을 주고 이빨을 앙다물어 그녀의 연한 살점을 물어뜯어냈다. 어디, 계속 소리질러봐 내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었다. 지금까지 여자가 이런 비명소리를 내는 것은 들은 적이 없었다. 문득 나는 팬티 속이 온통 젖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에는 깜짝 놀랐으나, 지금 누가 오면 야단이라는 것이 더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나는 다시 그녀를 갈겨댔다. 그녀는 피를 많이 흘리고 있었다. 그래도 오른손 주먹만으로 턱 언저리를 계속 후려쳤다. 이빨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계속 두들겨 팼다. 어떻게 해서든 비명소리를 그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더욱 힘을 주어 때렸다. 그리고 스커트를 주워 입 위에 대고 짓눌렀다. 그런 다음 그 머리를 깔고 앉았다. 그녀는 머리를 눌린채 구더기처럼 꿈틀거리며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렇게 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으리라곤 생각하지도 않았다. 갑자기 그녀가 처절하고도 격렬하게 움직였다. 다친 왼팔이 떨어져 나가는가 싶을 정도였다. 나는 이제야 내가 얼마나 화가 나 있었는지를 알았다. 산 채로 그녀의 가죽을 벗기는 짓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놀랐다. 나는 일어나 그녀를 발로 찬 다음, 그녀의 급소를 눌러 완전히 보내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흙묻은 발을 가슴에 비스듬히 올려 놓고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온통 피투성이었다. 천천히 발에 힘을 주어 밟았다. 드디어 움직임이 멈추었다. 나는 또 다시 그동안 참았던 욕정이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 무릎이 떨렸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움이 몰려왔다. 19 계획대로라면 삽과 곡괭이를 가져와 그녀를 묻어야 했지만, 경찰이 무서웠다. 진을 처치할 때까지는 체포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지금은 그 죽은 아우가 나를 이끌어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루우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묶어 놨던 전기줄을 풀었다. 손목에는 깊은 자국이 나 있었다. 그녀는 만지가 데마다 흐물흐물했다. 죽은 지 얼마 안되는 시체란 이런 것인가 보다. 유방은 벌써 모양이 허물어지려 하고 있었다. 얼굴을 덮은 스커트는 그대로 두었다. 두번다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대신에 시계를 가졌다. 뭐든지 그녀의 물건을 지니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문득 내 얼굴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걱정스러웠다. 차까지 달려가 백밀러를 들여다 보았자만 그다지 대수로울 것은 없었다. 위스키로 얼굴을 닦았다. 팔의 출혈은 벌써 그치고 있었다. 나는 그 상처입은 팔을 옷소매에서 가까스로 빼내 머플러와 전기줄로 몸통에 붙게 묶었다. 얼마나 아픈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팔을 구부리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트렁크에서 또 한 병의 위스키를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술기운으로 가까스로 구부릴 수 있었다.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동쪽에서 태양이 떠오를 판이었다. 나는 차 안에 둔 루우의 코트를 꺼내 그녀에게 덮어 주려고 갔다. 그 코우트를 가져 가고 싶은 마음은 하나도 없었다.걸음을 떼는데 발이 마비되어 감각이 없었다. 그러나 손이 떨리는 것은 그동안 조금 진정되어 있었다. 나는 다시 핸들을 잡고 시동을 걸었다. 루우가 딕스타에게 뭐라고 했을까. 경찰이 따라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으나, 걱정되진 않았다. 까짓것 올테면 오라지. 어차피 드라마 뒤에는 백 뮤직이 깔리는 법이니까. 이번에는 진을 해치우고 싶었다. 그리고 아까 루우를 죽였을 때 경험했던 그 강렬한 감각을 다시한번 맛보고 싶었다. 그렇다. 그것이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다. 물론 경찰은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일까지 중지할 생각은 없었다. 경찰이 나를 따라잡으려면 앞으로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간단히 붙잡힐 내가 아니지. 앞으로 500킬로미터만 가면 나머지 일도 끝낼 수 있다. 왼팔의 감각은 없어졌고, 이제 출혈도 끝난 모양이다. 20 목적지에 도착하기 한 시간쯤 전부터 지나온 일들이 회상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기타아를 손에 든 날 일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그때 나는 한 곡만을 연습하고 있었다. '성자가 거리에 온다'란 곡이었는데 나중엔 그 곡을 완전히 연주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노래까지 할 수 있었다. 어느날 밤 가족들을 놀래켜 줄 생각으로 기타아를 빌려 왔다. 톰형은 함께 노래했다. 아우는 미친 듯이, 마치 큰 행진의 뒤를 쫓아가는 것처럼 테이블 둘레를 빙빙 돌며 춤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대기를 집어들고 치어리더걸처럼 빙글빙글 돌려 보였다. 그때 마침 아버지가 돌아왔다. 아버지도 크게 웃고, 함께 노래했다. 그리곤 기타를 돌려줬는데, 다음날 눈을 뜨니, 다른 기타가 내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중고품이긴 했지만 내겐 새것 보다도 좋았다. 그후로도 매일 조금씩 연습을 계속했다. 기타아를 갖고 있으면 인간은 누구나 게으름뱅이가 되는 모양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기타아를 집어들고 한 곡 쳐본다. 그리곤 제자리에 놓고, 잠깐 멍청히 있다가 또 집어들어 한두 소절 연주하거나 휘파람에 맞추어 반주해 보든지 한다. 그러면 하루가 다간다. 이런 식으로 매일 매일이 금방 지나가 버린다. 갑자기 차가 퉁탕거리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잠시 잠들었던 모양이다. 이제 왼팔의 감각은 전혀 없다. 몹시 목이 말랐다. 기분을 바꾸려고 또 옛기억을 더듬어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린 뒤부터 다시 진 애스키스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짓눌렀다.심장은 또 다시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으며, 핸들을 쥔 오른손은 덜덜 떨렸다. 한 손으로 운전하는 것은 확실히 힘든 일이었다. 지금쯤 톰형은 무얼 하고 있을까? 틀림없이 기도를 하고 있을 거야. 아니 그보다도 아이들에게 뭐라고 가르치고 있을까? 내가 클렘을 알고, 백턴에 오게 된 것도 톰형 덕택이다. 이 거리에서 3개월 정도 서점을 했으니 그동안 제법 벌이가 된 셈이다. 처음 지키와 물 속에서 섹스하던 것을 회상했다. 그날 강물은 너무 깨끗하고 맑았다. 알몸의 지키, 젊고 매끈매끈한게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문득 루우의 그 검고 웨이브가 진 그 깊은 숲을 떠올렸다. 그러자 물었을 때의 입맛이 되살아났다. 달콤하고, 약간 짜고, 뜨거웠다. 게다가 그 두 넓적다리 향수 냄새... 그 비명소리가 아직도 들려오는 듯했다. 이마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핸들에서 손을 떼고 땀을 닦을 수는 없었다. 위에 가스가 가득 차면서 부풀어 올라 횡격막을 눌렀다. 귓속에는 아직도 루우의 비명소리가 쟁쟁했다. 나는 클랙슨을 힘껏 눌렀다. 시외용과 시내용의 두개를 한꺼번에 눌러 루우의 비명소리를 멈추려 했다. 그동안 85킬로미터쯤 달려온 것 같다. 자동차가 내리막길로 접어들면서 속도계의 바늘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이제 날은 밝았다. 통행하는 차도 많았고, 나는 앞서 달리는 느린 차를 차례차례 앞질러 갔다. 그리고 그동안 계속 누르고 있던 클랙슨에서 비로소 손을 뗐다. 혹시나 오토바이를 탄 경관과 마주치게 되면 달아날 개솔린이 부족할 것 같아서였다. 그곳에 도착하면 진의 차로 바꿔타자. 그러나 도대체 언제쯤 도착할 수 있을까. 나는 차 안에서 돼지처럼 끙끙거리며 신음하기 시작했다. 더욱 속력을 냈다. 그리고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은 채 급회전을 했다. 타이어에서 찢어지는 소리가 났고 차는 옆으로 미끄러졌다. 차는 거의 길 왼쪽 가장자리까지 가서야 가까스로 멈췄다. 나는 여전히 액설레이터를 밟을 수 있는 데까지 계속 밟고 있었다. 그리고 웃기 시작했다. 테이블 둘레를 돌고 춤추며 '성자가 거리에 온다'를 노래하던 아우처럼 그렇게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이제 무섭지는 않았다. 열에 들뜬 열병환자처럼 그저 정신없이 차를 몰았다. 21 호텔 앞에 이르자, 그 진저리쳐지는 몸의 떨림이 또 시작되었다. 열한 시 반 가까이였다. 진은 내가 일러둔 대로 함께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오른쪽 문을 열고 내렸다. 왼팔의 상처 때문에, 그 외에는 할 수가 없었다. 진이 묵고 있는 호텔은 이 지방에 흔히 있는 흰 건물로 블라인드가 모두 내려져 있었다. 벌써 10월도 끝머리인데도 이 근처는 아직 태양 광선이 따뜻했다. 로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신문의 광고와는 전혀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그러나 한 채만 호젓한 게, 고즈넉한 것으로 말하면 이 이상의 곳은 없을 것 같았다. 주변에는 주유소로 보이는 오두막집 같이 초라한 집이 몇 채 있을 뿐이었다. 주유소는 술집도 겸하고 있었고, 길에서 외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 덤프카 운전기사들이나 이용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호텔에서 나왔다. 진에게 들어 기억하는 바에 의하면, 손님이 자는 집은 모두 호텔에서 떨어진 곳에 새워져 있었다. 그 집들은 작은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가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 나는 차를 버리고 그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길은 바로 구부러져 거기서 조금 가자, 진의 차와 마주쳤다. 비교적 깨끗한 방이 두개쯤 있어 보이는 오두막집 앞에 차가 세워져 있었다. 나는 물을 것도 없이 집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는 팔걸이의자에 앉아 있었으나, 잠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얼굴빛은 창백했지만 여전히 아리따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깨우려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 순간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바보처럼 허둥지둥 전화기로 뛰어갔다. 심장이 또다시 두근거리고 있었다. 나는 송수화기를 들었다가 곧 다시 걸어놓았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 사람은 딕스타나, 경찰뿐일 것이다. 진은 눈을 부비며 일어섰다. 나는 무조건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나올만큼 강렬하게 키스했다. 이제 완전히 잠에서 깬 것 같았다. 그녀를 한손으로 껴안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때 그녀는 내 옷의 한쪽 소매가 흔들거리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어떻게 된 거예요, 리?"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웃어보였다. 퍽이나 어색한 웃음이었다. "아무것도 아냐. 차에서 내릴 때 멍청이처럼 굴러 팔꿈치를 다쳤어." "하지만 피가 나왔잖아요." "작은 상처야..... 이리 와, 진. 난 여행에 지쳤어. 너와 둘이서만 있고 싶어." 그때 또 전화벨이 울렸다. 전류가 전선을 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몸속을 관통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나 자신을 억누르지 못하고 느닷없이 수화기를 움켜잡고 방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곤 구두 뒤꿈치로 밟아서 다시는 소리가 나지 못하게 만들어 놨다. 그러자 갑자기 루우의 얼굴을 흙발로 짓밟았을 때와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자칫하면 그대로 도망칠 뻔했다. 입술이 덜덜 떨리는 게 미친 사람처럼 보였으리란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다행히도 진은 상처에 대해서 더이상 묻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자, 나는 그녀에게 차를 타라고 말했다. 잠깐 가까운 곳에 가서 둘만이 함께 있자. 점심식사는 나중에 하러 돌아오면 된다. 벌써 점심시간이었으나, 그녀는 기운이 없고, 먹고 싶은 눈치도 아니었다. 여전히 병이다. 틀림없이 아이가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몸이 갑자기 뒤로 쏠리면서 차는 출발했다. 자,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진의 차 엔진 소리를 듣고 나자, 나는 겨우 마음이 가라앉아 전화 일에 대한 한두 마디 사과를 했다. 그녀는 내 태도가 수상쩍은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이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녀는 내게 바싹 달라붙어 내 어깨 위에 머리를 올려 놓았다. 나는 20킬로미터쯤 달리다가 어디든 차를 세우기 좋은 곳을 물색했다. 차는 둑 위를 달리고 있었다. 비탈을 내려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차를 그곳에 세웠다. 진이 먼저 내렸다. 나는 호주머니에 넣었던 루우의 권총을 만져 보았다. 그러나 곧장 그것을 사용할 마음은 없었다. 한 팔로도 진쯤이야 충분히 처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구두를 고쳐 신기 위해 몸을 구부렸다. 잘룩한 허리의 선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는 숏스커트 아래로 허연 넓적다리가 보였다. 나는 입술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숲 곁에서 멈추었다. 앉으면 길이 보이지 않는 곳이 있었다. 그녀는 땅바닥에 누웠고, 우린 그 자리에서 섹스를 했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까지 가지 못했다. 그녀의 맹렬한 허리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리고 나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동안에 그녀는 오르가즘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를 골라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유색 인종과 자면 늘 그렇게 좋은 건가?"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안이 벙벙해 있는 것이다. "내 몸엔 8분의 1이상 흑인의 피가 섞여 있어." 그녀는 눈을 떴다. 나는 차디차게 웃어주었다. 그녀는 역시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시시콜콜하게 얘기해 주었다. 아우가 어느 백인 여자를 좋아했다. 그러자 그녀 아버지와 오빠가 아우에게 앙갚음을 해, 아우가 죽었다. 그래서 나는 한 명이 당한 댓가로 두 명에게 복수하려 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리곤 호주머니를 뒤져 루우의 시계를 꺼내 보였다. 그리고 루우의 눈알을 가져다 주고 싶었지만, 내가 너무 심하게 짓밟아 눈알까지 몽땅 못스게 되어 그만두었다고 말해 주었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도 꽤 힘이 들었다. 어쨌든 말이 제대로 나와 주지 않았다. 그녀는 스커트를 배까지 걷어올린 채 땅바닥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그ㄸ '무엇인가'가 척추를 따라 몸속을 뚫고 지나가는 느꼈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그녀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 '무엇인가'는 올 데까지 온 살기였던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잠깐이었지만 이미 그녀는 정신을 잃어 버린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전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목을 조르는 대로 내맡기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목덜미에 총구를 대고 두 방을 쏘았다. 피가 부글거리는 거품과 함께 넘쳐 흘렀다. 눈시울을 통해 엷게 흰자위가 보였다.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아마 이때 숨이 완전히 끊어진 모양이었다. 나는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그녀의 몸을 엎어 놓은 다음 아직 따스한 그녀의 몸에 대고 또 한번 섹스를 했다. 그 직후 내가 기절한 것이 틀림없다. 의식을 되찾았을 때 그녀는 온통 차디찬 시체가 되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걸어보려 했지만 몸뚱이를 질질 끌 듯이 걷는 것이 고작이었다. 눈앞이 어찔어찔해서 견디기 어려웠다. 핸들 앞에 앉아서 위스키를 내 차 안에 놓고 온것을 생각해냈다. 그러자 손이 또 떨리기 시작했다. 22 칼라프즈 경찰부장은 파이프를 책상 위에 놓았다. "놈을 체포할 수 있을까." 카터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일단 해보면 어때요." "상대는 1톤짜리 차로 시속 130킬로미터가 넘게 날듯이 달리고 있어. 그걸 오토바이 두 대로 따라 잡겠다니 어림 반푼어치나 있는 소린가." "하지만 해보자구요. 목숨을 건 일이지만, 하는 데까지 해봐야지요." 바로우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말랐으나 몸집이 큰 밤색 머리의 사나이였다. 느슨한 말투로 지껄였다. "아, 난 좋아." "그럼 갈까?" 칼라프즈는 둘을 바라보았다. "괜찮을 거야. 목숨은 걸지만, 성공하면 승진감이지." "그깟 깜둥이놈이 나라 안을 온통 제멋대로 불바다와 피투성이로 만드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순 없잖아요." 카터가 흥분한 듯 지껄였다. 칼라프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시계를 보다가 말했다. "지금 다섯 시야. 10분쯤 전에 전화가 왔었어. 놈은 5분 후 들이닥칠 거야. 물론 이곳을 통과하면 말이지만." "놈은 여자를 둘이나 죽였어요." 바로우가 받았다. 그는 다리 가랑이께에 차고 있는 권총을 점검하고 나서 문쪽을 향했다. "그리고 뒤에서 쫓고 있는 패도 있어." "보고에 의하면 놈은 아직 죽지 않았어. 특별기동대 차도 한 대 나와 있고, 다른 차도 한 대 더 나와 있을 거야." "이제 출발하는 게 좋겠어." "자넨 뒤에 타게나." 바로우에게 말하고 나서 카터가 덧붙였다. "한 대의 오토바이로 가는 거야." "그건 규칙 위반이야." 순경부장이 말을 막았다. "바로우는 사격이 능숙해요. 나도 혼자서 운전하면서 쏘진 못하죠." 카터가 대답했다. "알았어. 맘대로 하게. 난 모르겠네." 칼라프즈가 포기한 듯 말했다. 인디언인 카터는 오토바이 에진을 스타트시켰다. 바로우도 카터의 오토바이에 뛰어 올라 탔다. 그는 카터와 등을 맞대고 앉아 몸과 몸을 가죽끈으로 서로 묶었다. "시내에서 나가거든 곧 속력을 늦춰." 바로우가 걱정스레 말했다. "하지만 이건 규칙 위반이야." 칼라프즈는 거의 동시에 중얼거리고 바로우의 빈 오토바이를 서글프게 바라보았다. 그는 어깨를 움츠리고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곧 도로 나와 금방 통과한 흰색 대형 뷰ㅇ이 굉장한 엔진 소리를 내며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 오고, 오토바이 네 대와 차 한 대가 그 바로 뒤를 쫓아가는 것도 바라보았다. "형편 없는 길이야." 칼라프즈가 신음하듯 말했다. 이번에는 그는 그대로 밖에 선 채로 있었다. 사이렌 소리가 차츰 멀어져 갔다. 23 리 앤더슨은 무언가 물건을 깨무는 것처럼 이빨을 갈며 아득아득 소리를 내고 있었다. 오른손은 핸들 위에서 초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눈은 움푹하게 들어가고, 온 얼굴이 땀투성이었다. 금발 머리는 땀과 먼지 때문에 찰싹 붙어있었다. 귀를 기울이자, 뒤쫓아오던 사이렌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러나 길이 너무 나빠 저쪽을 쏠 수가 없다. 그리고 눈앞에는 오토바이가 나타났기 때문에, 그것을 앞지르려고 그는 차를 왼쪽으로 비껴 몰았다. 그러나 오토바이는 그와 일정한 거리를 계속 유지했고, 앞지를 수가 없었다. 별안간 앞 유리창에 별 모양의 균열이 생기면서 그의 온 얼굴에 잘게 깨진 유리 파편이 날아와 박혔다. 앞의 오토바이는 리가 탄 차에서 보면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우는 사격장에서처럼 꼼꼼하게 쏘고 있었다. 리는 두 발째와 세 발째의 불빛을 보았다. 그러나 총알은 모두 표적을 맞추지 못했다. 리는 그제서야 지그재그 운전을 하면서 총알을 피하려 했으나, 또 앞유리에 별 모양의 균열이 생겼다. 이번에는 더욱 얼굴에 가까웠다. 45구경의 큰 총알이 지나간 동그란 구멍에서 맹렬히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잠시 후 리는 자신이 몰고 있는 차의 속도가 빨라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리의 차가 앞 오토바이에 차츰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시후 리는 오토바이 쪽에서 속도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리는 웃음을 띠며 액셀레이터를 밟을 수 있는 데까지 밟았다. 바로 앞에 바로우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나 그 순간 리의 오른쪽 어깨를 총알이 뚫고 지나갔다. 그래도 리는 핸들을 놓지 않고 이를 악물며 오토바이를 앞질렀다. 앞에 나서기만 하면 일단 위험은 사라지는 것이다. 길은 한번 구부러졌으나, 곧 또다시 직선이 되었다. 카터와 바로우는 여전히 집요하게 바로 뒤에서 쫓고 있었다.차의 스프링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조금 흔들리기만 해도 상처입은 리에게는 몹시 고통스러웠다. 리는 백밀러를 보았다. 아직도 쫓아오는 것은 여전히 그 둘뿐이었다. 카터가 속도를 늦추어 길가에 멈추고 바로우를 앞을 향하도록 고쳐 앉히는 것이 보였다. 그들로서도 리를 앞지르는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길은 100미터쯤 앞에서 두 갈래 길로 갈라져 있었다. 리는 건물 같은 것을 발견했다. 그는 여전히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속력을 올렸다. 그리고 길 옆에 있는, 갈은 지 얼마 안되는 밭으로 몰고 들어갔다. 차는 굉장한 기세로 튀어올라 뒤집힐 듯이 뒤흔들렸으나, 가까스로 헛간 앞에서 멈추었다. 그는 차에서 내려 그 입구까지 갔다. 두 팔의 고통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몸통에 붙여 묶었던 왼팔도 피가 통하게 되어, 그는 너무나 혹독한 고통에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리는 다락방으로 통하는 나무 계단에 뛰어올랐다. 순간 균형을 잃어 떨어질 뻔했으나, 어렵사리 균형을 되찾았다. 그런 다음 그는 나무로 된 커다란 원형의 계단 발판을 이빨로 물고 착 달라붙었다. 그러나 그다음 오랫동안은 계단의 중간에서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었다. 계단 발판에서 갈라져 나온 가시가 그의 입술을 찔러대 입언저리도 온통 피로 물들고 있었다. 가까스로 몇 계단을 더 올라갔다. 밖에선 사이렌 소리가 더욱 가깝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 순간 리는 사이렌 소리보다도 더 크게 루우의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 비명소리는 그의 머릿속에서 다시 꿈틀거리면서 생명을 얻고 있었다. 리는 다시 한번 루우를 죽이고 싶었다. 다락방의 창밖으론 노란 흙이 깔린 밭이 멀리 보였다.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산들바람이 길가의 풀들을 흔들고 있었다. 피가 오른쪽 소매 속을 흘러 앞가슴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그는 점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잠시 후,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다시 공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이젠 추격대가 완전히 헛간을 포위하고 있었다. 아련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었고, 이빨을 제멋대로 탁탁 마주 부딪치고 있었다. 계단 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신음하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처음엔 나지막한 것이었으나, 점점 크고 격렬한 것으로 변해갔다. 리는 호주머니 속의 권총을 꺼내려고 버르적 거렸다. 그리고 엄청난 노력 끝에 가까스로 권총을 꺼내 들었다. 그는 푸른 제복의 경찰들이 나타날 입구 쪽에서 되도록 멀찍한 벽에 기대어 있었다. 권총을 겨누고는 있었지만 쏘지도 못했다. 소리는 그쳤다. 그러자 리의 신음소리도 그쳤다. 리의 가슴 위로 머리가 힘없이 떨어졌다. 그는 아직도 무슨 소린가를 듣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같았다. 또 루우나 진의 이름도 들리는 것 같았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45 구경의 굵은 총알이 그의 허리를 뚫고 지나갔다. 헛간의 거치른 나무바닥 위로 그의 입에서 흘러내린 한 줄기 붉은 피가 무늬를 그리며 번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왼팔을 묶었던 전기줄이 그 바닥 위에 깊고 푸른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24 마을 사람들은 죽은 그를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매달린 시체의 아랫배 부분에는 그가 살아있을 때처럼 툭 불거진 성기가 한심스럽고도 서글픈 혹을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