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품처럼 사라진 젊은 나날들 - 보리스 비앙 저 *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 작가 소개 1 ∼ 68 작가 소개 프랑스 소설가 포스트 모더니즘의 원조격으로 불림. 2차 대전 당시 활발하게 활동했던 작가로 싸르트르 이후의 젊은 지성인으로 손꼽혔다. 그러나 아깝게도 한창 활동할 나이에 요절하였다. 저서에 <그 무덤에 침을 뱉어라>가 있다. 1 코랭은 세면을 끝내고, 커다란 수건으로 온 몸을 동그랗게 꼬아서 말아올린 채 욕탕에서 나왔다. 그리고 유리 선반에서 향수 뿌리개를 집어 들었다. 연한 빛깔의 머리칼에 향기 좋은 향유를 듬뿍 뿌리고 호박처럼 둥근 빗으로 머리를 빗었다. 56 빗이 비단과 같은 그의 머리카락을 훑어 내려갔다. 그때마다 포크로 살구잼 위에 흠집을 냈을 때처럼 오렌지 빛깔의 길고 가느다란 그물 무늬가 생겼다. 코랭은 머리 손질을 다 한 후, 빗을 내려놓고, 시선을 신비롭게 연출하기 위하여 수직으로 세워진 속눈썹 끝을 손톱깍기로 잘라냈다. 그의 눈썹은 빨리 자라기 때문에 그는 자주 속눈썹을 잘라냈다. 이번에는 피부 상태를 점검하기 위하여 옆에 놓인 커다란 거울로 다가갔다. 그는 거울에 붙어있는 작은 전등불을 켰다. 몇 개의 여드름이 코 날개 주변에 돌출되어 있었다. 커다란 거울 안에 구질구질하게 드러나 있던 여드름은 그의 화난 모습을 보고 피부 밑으로 슬금슬금 숨는 듯했다. 코랭은 그제서야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전등불을 껐다. 그는 몸에 남아있는 마지막 물기까지도 전부 닦아내려는 듯 수건을 풀어서 발가락 사이에 끼워 넣었다. 거울 속에 비친 코랭은 마치 '헐리우드의 매점'에서 슬림역을 맡고 있는 블론드처럼 보였다. 키가 크고 늘씬한 그는 동그란 머리에 작은 귀를 갖고 있었다. 황금빛 얼굴에는 코가 곧게 내리뻗어 있었다. 그는 종종 어린애같은 미소를 지었는데, 그때마다 턱에 보조개가 생겼다. 코랭이란 이름은 친절한 그의 이미지와 잘 어울렸다. 아가씨들에게는 항상 부드러운 얼굴 표정과 목소리로 대했고, 친구들과 말할 때는 유쾌한 목소리와 경쾌한 동작을 취했다. 그는 항상 좋은 기분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면 잠을 잤다. 잠은 그에게 우울을 극복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그는 욕조 바닥을 막고 있는 구멍의 마개를 열어 물을 흘려보냈다. 욕실 바닥은 밝은 노란색 사암 도기로 되어 있었는데, 비스듬히 경사가 져서 물이 정해진 곳으로 흘러 내려갔다. 상어가죽 샌달에 미끄러지듯 발을 집어넣은 코랭은 깊은 물 색깔처럼 진한 푸른색 골덴 바지와 연갈색 칼라마코 나사로 짠 실내복을 걸쳤다. 이 실내복은 그의 이미지와도 잘 맞아서 우아한 느낌을 주었다. 수건을 건조기 위에 내려놓고 욕탕 깔개를 욕조 가장자리 위에 올려놓았다. 깔개 위에 굵은 소금을 뿌리자 깔개는 작은 비누 거품을 토해내며 그동안 먹었던 물을 토해냈다. 그는 욕실에서 나와 저녁 식사 준비가 잘 되어가는지 확인하려고 부엌으로 갔다. 오늘은 겨우 토요일밖에 안됐지만, 코랭은 쉬크를 초대했다. 코랭의 집 근처에 살고 있는 쉬크는 매주 월요일 저녁 코랭과 함께 식사를 하는 가까운 친구였다. 이번에 새로 고용한 요리사 니꼴라에게 새롭고 산뜻한 맛이 나는 요리를 준비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코랭은 하루라도 빨리 그 음식을 쉬크에게 선보이고 싶었다. 쉬크는 코랭과 마찬가지로 미혼이었다. 그들은 22살의 동갑나기였으며, 둘 다 문학에 취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주 다른 면이 있었다. 코랭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될만큼 금전적인 여유가 있었으나, 쉬크는 항상 돈에 쫓기는 형편이었다. 쉬크는 매월 8일이면 관청에서 근무하고 있는 삼촌을 찾아가 돈을 꾸었다. 그의 직업은 엔지니어였는데, 이 일만 가지고는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도 벅찼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항상 명령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들은 쉬크보다도 더 잘 먹고 잘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이끌어 가자니 함부로 얕보일 수도 없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이 먹고 입는 수준을 따라가야 했다. 그러자니 그의 생활은 자연히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코랭은 어려운 사정에 있는 쉬크를 도와주기 위하여 항상 빼놓지 않고 저녁 식사에 그를 초대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항상 쉬크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신경써야 했고, 그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인상도 주지 말아야 했다. 복도는 벽면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햇빛이 천정에서 쏟아져 들어와 유리에 반사되어 복도를 환하게 밝혀주었다. 빛을 좋아하는 코랭이 특별히 장치한 것이다. 복도엔 정성스럽게 윤을 낸 놋쇠 수도꼭지가 몇 개 있었는데, 햇빛이 그 위에 미끄러지면서 환상적인 유희를 연출해 냈다. 그때마다 복도에서 기르고 있는 생쥐는 빛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추듯 복도를 돌아다니며 찍찍거렸다. 분무기로 뿜어 낸 듯 바닥에도 햇빛이 넘쳐 흘렀는데, 빛은 마치 작은 물방울들처럼 무리져 바닥을 굴러다녔다. 코랭은 생쥐 앞을 지나가면서 생쥐의 수염을 쓰다듬어 주었다. 생쥐의 콧수염은 검고 길었으며, 회색 털은 햇빛을 받아 신비로운 광택이 났다. 요리사는 생쥐가 너무 살찌지 않게 신경써서 영양가 있는 요리만 골라서 주었다. 생쥐는 주로 복도를 돌아다니며 놀았는데, 낮에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코랭은 에나멜 칠이 된 부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요리사 니꼴라는 계기판을 감독하고 있었다. 부엌 안 벽에도 문처럼 연한 노란색 에나멜 칠이 되어 있었는데, 니꼴라는 벽을 따라 늘어선 여러가지 취사용 기계의 문자판이 달려 있는 조종판 앞에 앉아 있었다. 칠면조를 굽고 있는 전기오븐 바늘은 '완성'과 '완성 직전'사이를 규칙적으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요리가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른 것이다. 드디어 바늘이 '완성'을 가리켰다. 니꼴라는 초록색 단추를 눌러 능숙하게 걸쇠를 벗겨냈다. 그런 다음 니꼴라는 재빨리 오븐의 전원을 끄고 접시 소독 기구를 작동시켰다. "맛있을까?" 코랭이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그의 표정은 의심이라기보다는 '어떤 맛일까?' 하는 호기심에 가까운 것이었다. "틀림없습니다!" 니꼴라는 배시시 웃으며 힘주어 말했다. 니꼴라는 오븐에서 칠면조를 꺼냈다. 코랭은 눈으로만 보고도 맛있게 아주 잘 익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식으로는 무엇을 준비했지?" "아참! 이걸 어쩌나.....! 새로운 걸 준비해야 한다는 걸 미처 생각 못했네...... 저번처럼 <구페의 요리>를 준비했는데 괜찮겠습니까?" "<구페의 요리>도 ㄱ찮은데, 뭘. 구페보다도 솜씨없는 요리사들이 수두룩한걸. <구페의 요리> 중 어떤 음식을 만들려고 하지?" "<구페의 요리> 638페이지요. 제가 중요한 부분을 읽어 드릴게요." 코랭은 니꼴라가 책을 가지러 간 사이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의자는 방수된 비단에 벌집 모양의 고무를 집어 넣어 등받이를 만든 것으로 팔걸이가 없었다. 니꼴라는 코랭 옆으로 다가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전식을 만드는 일반적인 방법과 같이 따뜻한 파이 껍질을 만든다. 큰 뱀장어를 준비하여 3cm씩 토막내어 자른다. 그런 다음 뱀장어 토막을 냄비 안에 집어 넣고, 백 포도주와 소금과 후추, 얇게 썰은 양파, 파슬리 한 가지, 백리향(百里香), 월계수, 그리고 약간의 마늘을 넣는다." 여기까지 읽은 후 니꼴라는 책에서 눈을 뗀 후 불평하듯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양파나 마늘을 잘게 갈 수가 없어요. 믹서가 너무 낡았거든요." "새 것으로 바꿔 주지." 코랭이 선뜻 대답하자 니꼴라는 만족한 웃음을 띠고 계속해서 책을 읽었다. "익히고 난 후엔 냄비 속에 있는 뱀장어를 끄집어 내어 튀김용 접시에 놓는다. 그런 다음 냄비에 남아 있는 부스러기들은 명주로 된 여과기로 걸러낸다. 그리고 에스파니아 소스를 넣고, 숟가락에 찐득하게 달라붙을 정도로 소스를 진하게 졸인다. 다시 이 소스를 뱀장어 위에 붓고 2분 동안 끓인다. 2분 후, 소스가 뱀장어에 스며들면 준비한 파이 껍질 속에 뱀장어를 넣는다. 그런 다음, 파이 껍질 가장자리에 송이 버섯 줄기를 둘러 모양을 내고, 가운데 잉어 요리를 올려 놓는다. 그런 다음 원하는 만큼 소스를 친다." "좋았어. 내 생각에 쉬크가 좋아할 것 같아." "저는 쉬크 씨를 한번도 뵙지 못했어요. 만약 이 요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다음 번에 다른 것을 준비할게요. 다음 번엔 확실하게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요리를 정확하게 구분해서 순서대로 차려놓을 수 있을 겁니다." "알았어...... 나는 그만 나가서 식탁을 살펴봐야겠어." 코랭은 뒤돌아서며 말했다. 그는 복도로 나가 사무실을 가로질러, 푸른색이 뒤엉켜 있는 카페트가 깔린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 벽지는 베이지색과 분홍색이었는데 안락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식당은 가로 5미터, 세로 5미터의 장방형이었는데, 루이-암스트롱 가(街)로부터 창문을 통해 빛이 흘러 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홈을 따라 움직이는 거울 칸막이를 제치고 창문을 열면 봄 내음도 맡을 수 있었다. 반대편 구석엔 떡갈나무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 옆에는 푸른색 모로코 가죽 쿠션으로 되어 있는 의자가 둘 있었다. 게다가 낮고 긴 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레코드와 높은 출력을 가진 고성능 오디오 등이 있었고, 책장과 대칭되어 있는 장엔 접시, 컵, 그리고 세련된 식기 등이 정돈되어 있었다. 코랭은 탁자보로 밝고 푸른 천을 선택했다. 그리고 식탁 한가운데에 포르말린 저장용으로 만든 병을 놓았다. 병에 각인된 병아리 새끼는 니진스키가 안무한 <장미의 요정>을 흉내낸 것 같았다. 그리고 탁자 둘레엔 가는 끈 모양의 미모사 몇 가지를 놓았다. 이것은 한 정원사가 수업을 마치고 나오다가 잡화상에서 리본 모양의 검은색 감초와 동그란 공 모양의 미모사를 교배하여 얻어낸 것이다. 코랭은 개인 접시 두 개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이 접시는 흰 바탕에 투명한 황금색 가로 창살무늬가 새겨진 자기 접시였다. 구멍이 숭숭 뚫린 손잡이가 있는 스텐레스 스틸의 수저와 포크, 나이프에는 행운을 선사한다는 무당벌레가 그려져 있었다. 그는 크리스탈 잔과 냅킨을 모자처럼 접어 챙겨 놓았다. 준비가 끝나자마자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쉬크가 도착한 것이다. 코랭은 탁자보의 주름 접힌 부분을 펴 놓고 문을 열었다. "잘 지냈니?" 쉬크가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너도 잘 지냈니?" 코랭이 대꾸했다. "겉옷 먼저 벗어. 니꼴라를 소개해 줄게." "니꼴라? 아! 새로 들어온 요리사?" "그래, 지난 번에 있었던 요리사한테 벨기에 커피 1킬로그램을 얹어서 숙모님 요리사와 맞바꿨어." "요리 잘 하니?" 쉬크가 물었다. "자기 할 일은 잘 챙겨서 해. 그리고 그는 구페의 제자이기도 해." "구페? 그 유명한 해적?" 쉬크는 질겁을 하며 짧고 검은 콧수염을 씁쓸하게 쓰어내렸다. "하하하, 해적이라니? 쥘 구페라는 유명한 요리사말야!" "아, 그래? 난 또...... " 쉬크가 무안한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쉬크는 코랭을 따라 타일이 깔려 있는 복도를 지나가며 생쥐들을 쓰다듬어 주었다. "니꼴라, 내 친구 쉬크를 소개할께." "처음 뵙겠습니다." 니꼴라가 말했다. "반갑습니다, 니꼴라씨. 혹시... 당신에게 알리스라는 조카가 있지 않나요?" "네, 있습니다. 아주 예쁜 아이지요." "알리스는 당신과 닮은 곳이 많군요. 첫눈에 알아봤어요. 어딘지 정확히는 꼬집을 수 없지만 좀 다른 점이 있는 것도 같고......" 쉬크가 고개를 옆으로 꼬며 말했다. "저는 걔에 비해 너무 크지요. 제 조카는 저보다 더 늘씬하구요. 저를 정확히 보셨어요...... 그런데 알리스는 어떻게 아시죠?" "하하하, 그럴 일이 있습니다."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코랭이 실망한 듯한 표정으로 니꼴라를 쳐다보았다. "니꼴라, 이제 우리는 따지고 보면 가족이잖아. 그런데 조카가 있다는 이야기는 왜 안했지?" 코랭의 실망하는 표정을 보고 니꼴라는 당황해 하다가 어떻게 그를 이해시킬 수 있을 지 잠시 생각했다. "내 누님은 철학을 공부했지요. 형님은 크게 출세하셨지만 당신 자신은 기껏 수학 교수에게 시집갔다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셨죠. 그렇다고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잃은 것은 아니었어요. 누님은 자신의 초라한 모습으로 인해 가문을 욕되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자신에 대해 떠벌리고 다니는 것을 싫어하셨죠." "아...... 듣고 보니 당신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 자, 그 얘긴 그만 하고 이제 우리에게 뱀장어 파이나 구경시켜 주지 그래." 코랭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호, 뱀장어 파이라고?" 쉬크는 신기하다는 듯 오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니꼴라가 급한 목소리로 그를 제지시켰다. "지금 오븐을 열면 위험해요. 바깥 공기는 오븐 안의 공기보다 습기가 적기 때문에 바깥 공기가 오븐 속으로 들어가면 오븐 안의 습기가 없어져서 요리를 망치는 수가 생겨요." 쉬크는 멋적게 웃었다. "뱀장어 파이가 식탁에 오르는 것은 처음인데, 식탁에 가만히 앉아서 감상하는 편이 낫겠는걸." "그렇게 하세요. 요리를 해야 하니까 자리를 비켜주시겠어요?" "그래, 니꼴라. 우린 물러날 테니까 하던 일을 계속해." 쉬크가 자리를 양보해 주자 니꼴라는 하던 일을 다시 시작했다. 니꼴라는 생선 전식에 가자미 살과 버섯을 얇게 썰어 만든 젤리를 꺼냈다. 니꼴라가 일하는 모습을 보며 코랭과 쉬크는 부엌을 나갔다. "식사 전에 술 한잔 할까? 피아노 칵테일이 준비되어 있는데, 어때, 한번 시음해볼래?" 쉬크보다 한발 앞서서 복도를 지나가던 코랭이 뒤돌아보며 물었다. "기기가 작동돼?" "완벽해. 조정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긴 하지만, 결과는 항상 처음 기대를 앞지른다니까. <블랙 앤 탠 판타지>를 참고해서 만든 것인데 정말 기막힌 조립품이 나왔어." "어떤 원리지?" "음표마다 향신료나 리쾨르 술 또는 알콜 음료 등이 연결되어 있어. 페달을 세게 밟으면 달걀을 풀어 휘저은 것이 만들어지고, 약하게 밟으면 얼음이 나오는 거야. 젤츠는 고음에서 바이브레이션을 넣어야 돼. 양은 시간과 정비례하지. 온음표를 치면 정량의 4배가 나오고, 4분음표를 치면 정량이 나오지. 또 64분 음표를 치면 정량의 16분의 1이 나오게 되는 거야. 또 느린 곡을 연주하면 농도가 높아져 아주 진한 칵테일이 만들어지는 음 구조를 가지고 있지. 만약 원한다면 곡조의 연주 시간에 따라 정량 단위를 늘였다 줄였다 할 수도 있어. 예를 들어 백분의 일 단위로 감소시킬 경우 측면을 조정해서 아주 잘 조합된 음료를 마실 수 있는 거야." "너무 복잡할 것 같은데 ......" "그렇게 겁먹을 정도로 복잡한 것은 아니야. 전기 스위치와 계전기로 다 조종할 수 있어. 자세한 것은 너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세세한건 설명하지 않을께. 게다가 피아노도 실제로 연주할 수 있으니까." "대단하군!" "그렇지만 불편한 게 하나 있어. 달걀을 풀어 휘젓는 세 개의 페달이 말썽이야. 지나치게 즉흥적이고 격렬한 음악을 연주하면 달걀 찌거기가 칵테일 속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있어. 손을 좀 봐야겠어. 그러나 조심해서 만들면 그런대로 ㄱ찮아. 생크림을 먹으려면 낮은 음 '솔'을 치면 되지." "내가 <러브레스 러브>를 연주해볼게. 굉장할 거야." "칵테일 피아노는 아직 작업실에 있어. 보호판이 고정되어 있지 않거든. 가보자. 우선 20리터쯤 되는 칵테일 두 잔을 만들어 보자구." 쉬크는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연주가 끝나자 앞에 있던 판의 한 부분이 순식간에 접히면서 일렬로 늘어선 잔들이 나타났다. 그 중 두 개의 잔에 맛있게 보이는 칵테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코랭이 다시 말했다. "나는 네가 음표를 잘못 친 순간 더럭 겁이 났어. 다행히 화음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화음도 조정되니?" 쉬크가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완벽한 것은 아니야. 그렇게 되면 너무 복잡해질 것 같아 몇 개에만 설치해 놨어. 자, 어서 마시고 밥 먹으러 가자." 2 "이 뱀장어 파이 아주 맛있는데. 누가 생각해 냈지?" 쉬크가 입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니꼴라야. 찬물이 나오는 수도관을 통해서 제멋대로 드나들던 뱀장어가 있어. 그 뱀장어를 잡아서 만든거야." "신기한데." "그 놈의 뱀장어가 수도관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치약 튜브를 이빨로 눌러서 치약을 짜내더라구. 니꼴라는 미국식 파인애플 파이만 만들었는데, 아마 그 파이가 뱀장어를 유혹했나 봐." "어떻게?" "니꼴라가 이번엔 치약 튜브대신 파인애플 파이를 통째로 갖다 놓았어. 이번에도 뱀장어란 놈이 고개를 내밀고 파인애플 파이를 꿀꺽 삼키더라구. 그리곤 머리를 수도관 속으로 다시 집어넣었는데, 그 큰 파인애플 파이를 어디 마음대로 할 수 있겠어? 머리를 끌어 당길면 당길수록 파인애플 파이 속으로 이빨만 깊이 박히는 거야. 그렇게 꿈틀거리고 있을 때 니꼴라가 들어와서 ..." "니꼴라가 들어와서?" "네 입맛이 떨어질까봐 더 이상 말을 못하겠어." "말해봐. 난 사실 식욕이 별로 없어." "바로 그 순간 니꼴라가 들어와서 뱀장어의 머리를 면도날로 잘라버린거야. 그리고 나서 수도꼭지를 열으니까 뱀장어의 나머지 부분이 툭 떨어지는 거야." "그게 다야? 파이 더 줘. 뱀장어 가족들이 수도관 속에 많이 살았으면 좋겠다." "안 그래도 니꼴라가 그걸 알아낼려고 딸기파이를 만들기도 했어...... 아참, 그런데 네가 말했던 알리스라는 여자는 어떻게 알았지?" "하하하. 지금 그 여자를 생각하고 있었어. 쟝-솔 강연회에서 만났어. 우리는 둘 다 똑같이 연단 아래에 배를 깔고 누워 있었지. 그런 모습으로 만났지." "어떻게 생겼어?"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음, 하여간 예뻐..." "그래? ..." 그때 니꼴라가 칠면조 요리를 가지고 들어왔다. "우리와 함께 식사하지 그래, 니꼴라. 우리는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잖아." 코랭이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생쥐들을 먼저 보살피고 돌아오겠어요. 칠면조는 이미 잘라 놨어요...그리고 소스는 여기 있구요." "자. 잘봐, 쉬크. 망고 열매와 노간주나무 열매가 들어간 소스를 만든 다음, 송아지 고기를 말은 것에 그 소스를 넣은거야. 위를 누르면 소스가 가느다랗게 나오지." "놀랍군!" 시선을 음식에 고정시키고 쉬크가 감탄하듯 말했다. "그녀와 사귀기기까지 어떻게 했지? 이야기해 주지 않을래?" 코랭이 말을 이었다. "좋아, 얘기해 줄께. 내가 그 여자에게 쟝-솔 파르트르를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의 작품을 수집한다고 하더군. 그래서 내가 말했지 '나도 그래요.' 그리고 그 여자에게 말할 때마다 '나도 마찬가지예요.'라고 계속 대답하는 거야. 물론 반대의 경우에도. 마지막엔 실존주의자들처럼 경험을 통해서 판단하려고 이렇게 말했겠지? '나는 당신을 너무나 사랑해요.' 그랬더니 그녀가 난감한 표정이 되더라고." "경험이 실패가 됐군." "그래, 그렇지만 그녀는 그래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어. 강연회가 끝난 후 강당을 빠져나오며 말했지. '나는 저쪽으로 가요' 그랬더니 그녀가 대뜸 대답하는 거야. '나는 아니예요.'" "하하하하하." 코랭이 통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뭐라고 덧붙인 줄 알아?" "글쎄?" "'나는 이쪽으로 가요.'" "야, 그거 굉장한 여잔데!" "그래서 나도 말했지. '나도 그런데요.' 그리고 나서 나는 그녀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녔지."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됐는데?" "흠... 그러자니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더라고." "그래서?" 코랭은 숨이 막히는지 부르고뉴 산 포도주를 반 리터나 마셨다. "그래서 잠도 함께 잤지...... 내일 그녀와 함께 스케이트장엘 가기로 했어. 일요일이라 사람이 북적거릴 것 같아서 아침에 가기로 했거든. 나는 스케이트를 못 타니까 지루할지도 모르겠어. 그렇지만 파르트르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래 함께 가자. 니꼴라랑 같이 갈께. 그에게 혹시 다른 여자 조카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후후후." "하하하." 3 코랭은 지하철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갔다. 처음에 출구를 잘못 들어서서 역을 거의 한바퀴 다 돌아야만 했다. 코랭은 노란색 실크 손수건을 꺼내 바람 부는 방향을 알아냈는데, 손수건의 노란 빛깔은 바람에 날려 몰리토르 스케이트장으로 보이는 들쭉날쭉한 형태의 큰 건물을 가리켰다. 건물 쪽에는 동계 수영장이 있었다. 코랭은 수영장을 지나 구리로 만든 빗장이 걸려 있고 유리가 끼워져 있는 자동문을 가로질러 석회분이 덮힌 구조물 안으로 들어갔다. 정기권을 내밀자, 정기권 위에 이미 뚫려 있던 두 개의 구멍이 역무원에게 윙크했다. 정기권을 받아 쥔 역무원은 공범자처럼 미소 지으며 윙크에 답하기라도 하는 듯 노란색 표지에 세 번째 구멍을 뚫었다. 역무원이 정기권을 돌려주자 코랭은 러시아제 가죽 지갑 속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 카페트가 깔린 왼쪽 복도로 들어섰다. 복도 끝에는 박스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1층에는 더 이상 자리가 없었다. 그가 콘크리트 계단에 올라섰을 때 키가 큰 무리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무언가 불안정한 느낌을 주었다. 그들 중 흰 자켓을 입은 사나이가 코랭에게 탈의실 문을 열어 주었다. 코랭은 그에게 팁을 건네주었다. 사기꾼같은 얼굴의 사나이는 상자에 팁을 챙겨 넣은 다음, 검은 장방형의 칠판 위에 코랭의 첫 머리 글자를 분필로 휘갈겨 쓰고, 수도원 지하감옥 같은 곳에 그를 남겨 두고 나가버렸다. 코랭은 불쾌한 감정을 털어버리려는 듯 손을 커다랗게 휘저으며 타원형 트랙의 웅성거림 속으로 들어갔다. 트랙은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뒤섞여 아주 시끄러웠다.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의 발 구르는 소리는 진창으로 뒤덮인 길을 행진하는 군대의 발소리와 비교할 만큼 시끄러웠다. 코랭은 그 소음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으로 다시 밀려났다. 코랭은 눈을 부릅뜨고 알리스와 쉬크를 찾았지만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니꼴라와 만나려면 좀 더 있어야 했다. 그는 점심 식사 준비 때문에 아직도 부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구두끈을 끄르던 코랭은 구두 밑창이 찢어진 것을 알았다. 주머니에서 원통형으로 말린 방수포를 꺼냈지만 그것으로는 찢어진 부분을 메꾸기엔 충분하지 않았다. 시멘트 의자 밑에 구두를 집어넣고 스케이트를 꺼냈다. 그는 노란색과 보라색의 굵은 줄무늬가 엇갈려 있는 털양말을 신고 있었는 데, 그 위에 스케이트 신발을 신었다. 스케이트 날 앞 부분은 두 부분으로 갈라져 쉽게 방향을 바꿀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코랭은 탈의실을 빠져나와 한 층 내려갔다. 그곳도 콘크리트 복도위에 작은 구멍이 뚫려있는 고무 입힌 카페트가 깔려 있었는데, 이 위를 지나서 얼음판으로 나오자마자 코랭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트랙으로 나간 순간 몸 전체가 흔들렸다. 코랭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두 개의 나무 계단 위에 황급히 올라섰다. 그때 나무 계단 위에 놓여 있던 달걀이 그의 스케이트 날 밑에서 으깨어졌다. 청소부 한 명이 나타나 여기 저기 흩어진 달걀 껍질을 줍기 시작했다. 쑥스러워진 코랭은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때 코랭은 반대편 트랙에 있는 쉬크와 알리스를 발견했다. 손짓을 했지만 쉬크는 코랭을 보지 못했다. 코랭은 할수없이 그들 앞으로 가기 위하여 앞으로 돌진했다. 그러나 그는 방향을 틀 수가 없었다. 그의 몸은 사람들을 쳐내며 앞으로 곧장 나아갔다. 그가 비명을 지르자 여기저기서 그를 붙잡아 겨우 자리에 쓰러뜨렸다. 팔, 다리, 어깨가 욱신거렸다. 코랭은 말할 수 없는 절망 속으로 무너졌다. 그는 엉덩이가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햇볕 때문에 얼음이 녹아 찰랑거리고 있었다. 그의 절망에 가까운 표정을 보고 스케이트장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그들은 신기한 동물을 서로 쳐다보려고 아우성치며 모여드는 군중이었다. 쉬크와 알리스는 여전히 트랙에 남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반대편으로 모여들자 호기심이 일어 그쪽으로 다가갔다. 쉬크는 군중 속을 헤치고 다가갔다. 그는 날 앞쪽이 두 가닥으로 갈라진 스케이트를 신고 얼음판에 자빠져 있는 코랭을 보았다. 쉬크는 코랭의 발목을 잡아 당겨 겨우 군중 속에서 끌어냈다. 쉬크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코랭에게 알리스를 소개했다. 둘은 서로 악수를 했다. 쉬크가 알리스의 오른손을 잡고 있어서 코랭은 알리스의 왼편에 섰다. 그들이 트랙 오른편 끝에 이르렀을 때 장내 방송이 나왔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제부터 청소를 해야 하니 트랙에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청소부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산더미 같이 쌓인 쓰레기에 지친 이들은 쓰레기를 긁는 연장을 들고 몰리토르 찬가를 부르며 쓰레기 넣는 구멍 쪽으로 한꺼번에 돌진해 갔다. 이 노래는 바이앙-꾸뛰리에가 1709년 작곡한 노래인데 다음과 같은 가사로 시작되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트랙에서 나가주세요. (부탁 드립니다) 우리들이 청소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그들은 노래 사이 사이에 날카롭게 신경을 건드리는 클랙션을 울려 물에 흠뻑 젖은 코랭의 초라한 영혼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청소부들의 노래에 박수갈채를 보냈고, 구멍은 다시 닫혔다. 쉬크와 알리스, 그리고 코랭도 짧은 기도를 하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코랭은 알리스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하얀색 스웨터와 노란색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색감이 조화를 이루어 산뜻한 느낌을 주었다. 우연인지 몰라도 단화도 하얀 색과 노란 색이 섞여 있었고, 그 위에 하키용 스케이트 신발을 겹쳐 신었다. 구두 윗부분까지 검정색 긴 면 양말을 신고, 그 위에 짧은 흰 양말을 신었는데, 면 끈으로 발목을 세번 돌려서 발목을 졸라매고 있었다. 그녀의 목엔 진한 녹색 비단 스카프가 둘러져 있었으며, 숱이 많은 머리 카락은 액자처럼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푸른 눈은 무방비 상태였는데, 황금빛의 싱싱한 피부때문에 눈빛의 볼륨이 제한되어 보였다. 동그란 팔과 가느다란 허리는 서로 대조를 이루어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코랭의 몸이 흔들렸다. 그는 균형감각을 찾기 위하여 다른 쪽을 쳐다보았다. 균형을 되찾는데 성공한 코랭은 눈을 얼음판에 고정시킨 채 쉬크에게 말을 건넸다. "뱀장어 파이는 소화 잘 됐어?" "말도 하지 마. 혹시 한 마리 잡을 수 있을까 해서 밤새도록 내 방 수도꼭지에서 낚시질을 했으니까. 그런데 우리 집에 오는 건 송어들 뿐이었어." 쉬크가 농담을 섞어서 대답하였다. "니꼴라 정도면 아마 송어로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을 거야." 코랭은 확신하듯 힘있게 말했다. 코랭은 힐끔 알리스를 쳐다보면서 니꼴라는 놀랄만한 재능을 가진 요리사라고 덧붙였다. "나의 어머니는 당신의 오빠가 성공적인 인생을 거두었는데 반해 자신은 겨우 수학 교수와 결혼했다고 슬퍼하셨어요." "아버지가 수학교수이신가요?" 코랭이 물었다. "네, 꼴레주 드 프랑스 교수협회 학사원 회원이었고 또 그와 비슷한 협회에도 계셨죠. 애처로운 일이죠. 서른 여덟 살에 그만... 더 훌륭한 업적을 남길 수도 있었는데... 그러나 다행히도 니꼴라 삼촌이 많이 도와주고 있어서 생활하는덴 지장이 없어요." "니꼴라도 오늘 아침 오기로 하기 않았니?" 쉬크가 코랭을 바라보며 물었다. 알리스의 깨끗한 머리카락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풍겨왔다. 코랭은 현기증을 느끼고 조금 뒤로 물러섰다. "아마 늦을 거야. 오늘 아침 무언가 생각하고 있었어...... 두 사람 다 우리 집에서 점심식사를 하면 어때? 그러면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알 수 있을 텐데." "그럴 수 없어. 내가 너의 그런 제의를 받아들일 것 같니? 그건 너의 그릇된 생각이야. 너는 너의 '4차원 세계'나 탐색해 보는게 차라리 나을거야. 아무리 네가 원하더라도 나는 알리스가 네 집에 가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뭐라고?... 쉬크가 한 말 들었어요?" 코랭이 동의를 구하듯 알리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5분 전부터 속도를 과시하며 달리는 키 큰 사나이가 몸통을 잔뜩 앞으로 숙인 채 바닥에 닿을락말락하게 코랭의 가랭이 사이를 지나가면서 그의 몸을 공중으로 들어올렸기 때문이다. 코랭은 꺼꾸로 쳐박히지 않으려고 1층 관람석 가장자리를 꽉 움켜쥐었다가 쉬크와 알리스 옆으로 뛰어내리듯 몸을 던져 넘어졌다. "저렇게 빨리 달리는 녀석이 어딨어! 그냥 둘 수 없어." 코랭은 화가 나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손가락으로 성호를 그었다. 그 순간 그렇게 스케이트를 잘 타던 사나이가 반대편 트랙에 있는 식당 벽에 부딪쳐 으깨졌다. 그 모습은 마치 잔인한 꼬마가 해파리를 능지처참시킨 것처럼 벽에 착 달라붙은 모습이었다. 청소부들이 다시 트랙으로 나와 쓰레기를 청소하기 시작했는데, 그들 중 한 명이 사고난 장소로 가 위험하다는 표시로 십자를 그어 놓았다. 그 십자가가 녹는 동안 종교 음악이 계속 들려왔다. 청소가 끝났을 때 모든 것은 질서를 되찾았다. 쉬크와 알리스, 코랭은 다시 트랙을 돌았다. 4 "니꼴라가 저기 있어요!" 알리스가 소리쳤다. 모두 알리스가 가리키는 쪽을 돌아보았다. 니꼴라가 개찰구 쪽으로 오고 있었다. "아니, 저 여자는 이시스 아니야?" 코랭이 소리쳤다. 이시스가 트랙 위에 나타났다. 이시스도 그들을 발견하고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안녕, 이시스. 알리스를 소개할께. 여기는 알리스, 그리고 여기는 이시스, 쉬크는 알지?" 코랭이 그들을 서로 소개했다. 그들은 서로 악수를 나누었다. 인사가 끝나자 쉬크는 이시스를 코랭에게 남겨놓은 채 알리스와 함께 스케이트를 타고 반대 쪽으로 가버렸다. 두 사람도 서로 쳐다보다가 그들 뒤를 따라갔다. "만나서 반가워." 이시스가 말했다. 코랭 역시 그녀를 만나서 반가웠다. 이시스는 열 여덟 살인데, 밤색 머리털과 흰색 스웨터, 노란색 치마, 상큼한 녹색 스카프, 흰색과 노란색이 뒤섞인 구두를 신었고, 선글라스도 끼고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코랭은 그녀의 부모를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다음 주일 낮에 모임이 있어. 뒤퐁 생일이거든." "뒤퐁이 누군데?" "내가 키우는 푸들 강아지. 친구들을 모두 초대했어. 올래? 오후 4시인데..." "물론 가야지." "네 친구들도 초대할거지?" "쉬크와 알리스 말이야?" "응, 인상이 좋던데. 그럼 다음 일요일에 만나." "아니, 벌써 가려고?" "응, 나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열시부터 여기에 있었거든....." "겨우 열한시 밖에 안됐는데!..... 그럼, 그 동안 왜 못봤지?" "난 바에 있었거든!... 안녕!..." 5 코랭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거리를 바삐 걸어갔다. 건조한 바람이 매섭게 불었고, 금이 간 작은 얼음 조각들이 탁탁 소리를 내며 신발 밑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매서운 바람을 가리기 위해 토시, 머플러, 외투의 깃 등으로 턱까지 감싸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철사로 만든 새장을 들고 가다가 그것으로 추위를 막으려는 듯 얼굴을 가렸다. 바람이 불자 용수철이 달린 새장 문이 그 사람의 이마를 때렸다. "내일은 뽕또잔느 집에 가야지." 코랭은 고개를 숙이고 걷다가 혼자 중얼거렸다. 그들은 이시스의 부모였다. "오늘 저녁은 쉬크와 같이 밥을 먹어야겠다. 그리고 내일 외출할 준비를 해야지....." 그는 보도 가장자리 선을 밟지 않기 위하여 걸음을 크게 내디뎠다. 균형을 잃기 쉬운 불안한 동작이었다. "만약 내가 이 선을 밟지 않고 스무 걸음만 간다면, 내일은 코에 여드름이 나지 않을 거야." 코랭은 코를 씰룩거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이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야, 바보같은 짓이지. 그렇지만 여드름은 안 날거야." 그는 자신의 행동이 우습게 생각되어 아홉번째 선을 힘차게 밟았다. 그는 얼음을 뚫고 땅 속에서 솟아오르는 푸른색과 분홍색이 섞인 난초 한 송이를 꺾으려고 몸을 구부렸다. 난초에서 알리스 머리카락의 향기가 풍겨왔다. "내일 알리스를 만날까?... 아니야." 코랭은 자신의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것은 생각도 하지 말아야 했다. 알리스는 분명 쉬크의 소유니까. "그들은 단 둘이 있을 때에도 늘 쟝-솔 파르트르에 관한 이야기만 할까?..." 그들이 단 둘이 있을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역시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쟝-솔 파르트르는 일 년 동안 몇 편의 평론을 썼을까? 모르긴 해도 아무튼 집에 도착할 때까지 셀 수 있는 분량은 넘을 테지..... 니꼴라는 오 오늘 저녁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잘 생각해 보니 니꼴라와 알리스가 닮았다는 사실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같은 핏줄이니까. 그런데 생각하면 안될 것이 다시 머리 속에 떠올랐다. "도대체 니꼴라는 오늘 저녁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알리스와 닮은 니꼴라는...... 니꼴라는 알리스보다 열한 살이 더 많지. 그러니까 그는 스물 아홉 살이군. 그는 요리에 타고난 소질을 가지고 있지. 오늘 저녁 그는 프리캉토(라드를 넣은 쇠고기 또는 생선 요리)를 만들거야."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코랭은 어느새 동네 입구에 도착했다. "히한한 일이군. 꽃 가게에 셔터가 없어. 꽃 도둑이 없나 보지? 그래, 꽃도둑이 있다는 건 서글픈 일이니까.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 코랭은 손을 뻗어 꽃부리가 휘어져 있는 오렌지색과 회색이 섞인 난초 한 송이를 땄다. 꽃은 다채로운 빛깔을 내뿜고 있었다. "검은 수염이 난 생쥐색 꽃이군... 집에 다 왔구나." 코랭은 양털로 덮인 돌 계단을 올라갔다. 은빛 유리문의 자물쇠에 작은 금열쇠를 꽂았다. "나의 충실한 하인들이여 내게로 오라!... 내가 돌아 왔도다!..." 코랭은 비옷을 의자 위에 던져 놓고 니꼴라에게 갔다. 6 "니꼴라, 오늘 저녁 프리캉토 만들거야?" 코랭이 물었다. "아이구, 미리 알려 주시지요. 저는 다른 것을 준비했는데......" "이런, 언제까지 나를 남 대하듯 할거지?" "그 이유를 알고 싶으시면 말씀드리지요. 제 생각에 친밀한 관계란 항상 어떤 선을 유지할 때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저의 태도가 특별히 문제될 것도 없구요." "니꼴라, 당신은 거만해." "저는 저의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그것이 주인님에게 불만이 될 수는 없을 텐데요." "물론이지. 그렇지만 조금 덜 차갑게 행동해 줬으면 좋겠어." "저는 주인님에 대해서 은밀하긴 하지만 진실한 애정을 가지고 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나도 똑같은 감정이야. 그런데 오늘 저녁은 무엇을 먹지?" "구페의 전통을 다시 한번 지키는 의미에서 이번에는 사향 냄새가 나는 포루투갈 산(産) 포도주를 넣은 돼지 옆구리살 소시지를 만들어 보도록 하지요." "어떻게 만들지?" "흠...... 가르쳐 드릴까요? 돼지가 소리를 지르더라도 침착하게 껍질을 벗겨서 살을 떼냅니다. 껍질은 잘 보관하시구요. 얇게 잘라서 아주 뜨거운 버터에 살짝 구운 바다 가재 다리 속에 순대를 넣습니다. 가벼운 찜 냄비 속에 젤리, 당밀, 사탕 등을 넣고 끓인 다음, 불을 옆으로 옮겨 놓습니다. 그리고 공간을 만들어 약한 불에 오래 끓인 쌀을 둥근 쇠고리 모양으로 배열합니다. 끓이던 순대에서 저음으로 소리가 나면 불에서 재빨리 끄집어 내서 고급 포트 와인을 살짝 뿌리지요. 식탁에 내놓을 때에는 소스와 찬 우유를 다시 뿌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쌀밥을 곁들이면 됩니다." "할 말이 없군. 대단해. 아, 참, 니꼴라. 내일 아침 내 코 위에 여드름이 날 것 같아?" 니꼴라는 코랭의 코를 살펴본 후 날 것 같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들썩거렸다. "참, 생각난 김에 물어보겠는데, 비글므와라는 춤을 출줄 알아?" 코랭이 니꼴라에게 물었다. "저는 그 춤의 아류라고 할 수 있는 보아씨에르 스타일하고, 지난 상반기에 뇌이유에서 처음 만들어진 트라몽탕 스타일밖에 몰라요. 그러나 그 춤들도 다 안다고 할 순 없어요. 겨우 기초만 배웠으니까요." "필요한 테크닉만 익히면 배울 수 있을까?" "그럴거예요. 핵심적인 건 하나도 복잡한 게 없거든요. 터무니없는 잘못이라든지, 감각이 무뎌서 벌어지는 실수만 없다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부기-우기 리듬에 맞추어 벨모아 춤을 춘다는 등의 실수 말이예요." "그게 잘못된 건가요?" "감각이 없어서 저지른 잘못이지요." 니꼴라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껍질을 벗긴 자몽을 테이블 위에 놓고 찬물에 손을 담갔다. "바빠?" "아니요. 요리는 이제 시작인걸요." "그렇다면 내게 비글므와 춤의 기초를 가르쳐 주면 좋겠는데. 내가 레코드 판을 올려 놓을 테니까 거실로 와." "내 생각에는 듀크 엘링턴이 편곡한 스타일 중에 분위기 있는 템포가 있는데, 그것을 선택하면 좋을 겁니다. 아니면 자니 히쥐를 위한 협주곡이나......" "알았어." 코랭이 들뜬 걸음으로 부엌을 뛰어 나갔다. 7 "주인님도 아시겠지만 이 춤의 원리는 두 광원이 동시에 진동 운동을 할 경우에 간선 현상이 일어난다는 점에 있어요." "나는 춤에 그런 고도의 물리적 요소가 이용되는 줄 몰랐는데." "이 경우에는 춤을 추는 남자와 여자가 아주 가깝게 서서 음악의 리듬을 따라 온몸을 파동치듯 움직이는 거예요." 코랭은 조금 불안한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그러면 파장의 정점과 최대폭을 만들어 댄스 홀 안의 분위기에 압력을 가하게 되지요." "물론 그렇겠지..." 코랭은 넋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니꼴라는 계속 말을 이었다. "비글므와 춤을 아주 잘 추는 사람들은 팔 다리를 따로따로 진동시켜서 기생 파장을 만들기도 해요. 자, 이제 설명은 그만하고 어떻게 추는지 보여드릴께요." 니꼴라가 추천한 대로 코랭은 '클로에' 음반을 전축 턴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는 바늘 끝을 음반의 첫번째 홈속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하는 니꼴라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8 "주인님도 할 수 있어요. 조금 더 해보세요." "왜 느린 곡에 맞추어 춤을 추지? 더 힘들잖아." "그게 다 이유가 있지요. 춤추는 여자와 남자는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원칙이예요. 느린 곡에 맞추어 춤을 추면 파동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두 파트너의 적당한 거리를 발견할 수 있고, 여기에 맞추어 고정시킬 수 있어요. 일단 그렇게 되면 머리와 두 발은 마음대로 할 수 있지요. 이건 이론상으로 얻은 결과예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세심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글므와 춤을 빠른 곡에 맞추어 흑인들처럼 춤을 추지요." "그건 무슨 뜻이지?" "발과 머리를 유동점으로 삼아야 하는데, 허리를 중간 유동점으로 하기 때문에 앞가슴뼈나 무릎이 고정되어 버려서 정확한 동작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코랭이 얼굴을 붉혔다. "알았어." "부기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출 때는 전체적으로 끈적끈적한 분위기를 연출할수록 효과적이예요. 이런 말을 사용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음란한 효과를 낳게 되는 겁니다." 코랭은 깊이 생각에 빠졌다. "어디에서 이 춤을 배웠죠?" "조카 딸에게서 배웠어요... 비글므와 춤에 관한 완벽한 이론은 우리 매형과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제가 정립했구요. 주인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매형은 학사원 회원인데 어렵지 않게 그 방법을 이해했어요. 십구년 전에 그렇게 했다는 말까지 덧붙이더라구요..." "자네 조카 딸이 열 여덟살이던가?" 코랭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리고 삼개월이 더 됐죠...... 괜찮으시다면 이제 돌아가서 요리를 끝내야겠어요." "그래. 고마웠어." 코랭은 다 돌아간 음반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9 '푸른색 와이셔츠에 베이지색 양복을 입고, 베이지색과 빨간색이 섞인 넥타이를 메고, 작은 구멍을 뚫어 장식한 쉬에드 가죽구두와 빨간색과 베이지색이 섞인 양말을 신는게 좋겠지. 우선 깨끗이 씻고, 면도를 한 다음 전체적으로 검토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엌에 있는 니꼴라에게 물어봐야겠어' 옷을 다 입은 다음 코랭은 큰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쳐보았다. 의젓한 모습이었다. 코랭은 만족한 미소를 띠고 니꼴라의 방으로 갔다. "니꼴라, 나와 함께 춤추러 가지 않겠어?" "주인님이 원하시면 저로서는 가야만 하겠지요. 하지만 사실 저는 아주 급하게 끝내야 하는 일이 몇 가지 있거든요." "당신을 궁지에 몰아 넣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혼자 가기도 뭐하고 ......" "저는 이 동네의 철학 모임 회장직을 맡고 있기 때문에 집회에 열심히 나가야 돼요." "오늘 주제가 뭔지 물어봐도 될까?" "고용과 징집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겁니다. 장-쏠 파르트르의 이론에 따른 참여, 식민지 군대의 지원, 또는 재복무, 그리고 피고용인들의 고용 계약 조건, 그리고 담보 등에 관하여 비교할 겁니다." "야, 그거 쉬크가 흥미있어 하겠는데!"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이 모임은 아주 폐쇄적입니다. 쉬크는 본 회의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지 모릅니다. 피고용인들만이 가능하니까요..." "니꼴라, 왜 항상 복수형으로 말하지?" "'하인'이라는 단어는 그냥 평범하게 느껴지지만, '피고용인들'이라는 단어는 아주 공격적인 의미가 있음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당신 말이 옳아. 당신 생각에 오늘 내가 여자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알리스 같은 여자를 원하는데......" "내 조카를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한 생각이예요. 쉬크가 먼저 그 아이를 선택했으니까요." "그렇지만, 나는 정말 사랑에 빠지고 싶어......" 물주전자의 주둥이에서 김이 조금씩 솟아 올라오자 니꼴라는 뚜껑을 열었다. 그때 수위가 올라와 편지 두 통을 전해주었다. "내 우편물 있어?" "죄송합니다. 두 통 다 제게 온 거예요. 주인님도 소식을 기다리고 있나요?" "어떤 처녀가 내게 편지를 썼으면 좋겠어. 그러면 그녀를 열렬히 사랑할 수 있을 텐데." "아침 식사 하실래요? 열두시거든요. 황소꼬리 으깬 것하고 멸치를 넣고 버터로 튀긴 빵, 향료를 넣은 펀치가 한 잔 준비되어 있어요." "니꼴라, 쉬크는 내가 다른 처녀를 초대하지 않는 한 당신 조카와 함께 저녁 식사에 오지 않겠다는 걸까?" "실례되는 말이지만, 저라도 그렇게 할겁니다. 주인님은 누가 봐도 잘 생긴 청년입니다만..." "니꼴라, 만약 내가 오늘 저녁 사랑에 빠지지 못한다면...... 쉬크에게 대항하는 뜻에서 보봐아르 공작 부인의 작품들을 수집할거야." 10 "나는 사랑을 하고 싶다." 코랭은 거울을 쳐다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너는 사랑을 하고 싶다. 그는 사랑을 하고 싶다. 우리는 사랑을 하고 싶다. 모두가 다 사랑을 하고 싶다." 그는 목욕탕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맸다. "이제 나는 윗도리를 입고 외투를 걸친 후에 목도리를 한다. 오른쪽에 장갑을 끼고 왼쪽 장갑을 낀다. 머리가 헝클어지지 않도록 모자는 쓰지 말자." "너는 거기서 뭐하니?" 코랭은 검은 수염이 있는 회색 생쥐를 불렀다. 생쥐는 양치질용 컵 안쪽 가장자리에 팔꿈치를 괴고 무관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생쥐에게 다가가기 위하여 노란색 에나멜 장방형 욕조 가장자리에 앉았다. "내가 퐁뜨잔느 씨 집에서 옛 친구 쇼즈를 만난다고 가정해 보렴......" 알아들었다는 듯 생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여자 사촌이 있다고 가정해도 재미있을 것 같지 않니? 그녀는 흰색 셔츠에다 노란색 치마 차림에, 음...... 이름은 알 ... 오네짐므라고 하자..." 셍쥐가 발을 꼬더니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쳐다보다가 코랭은 다시 입을 열었다. "예쁜 이름은 아니야. 그렇지만 너는 생쥐인데다 수염까지 났잖아. 너의 비참한 몰골에 비한다면, 그래, 그 이름이 대체 어떻다는 거야?" 그는 몸을 일으켰다. "벌써 세시야. 너 때문에 시간을 허비했어. 쉬크... 쉬크는 분명히 아주 빨리 올거야." 그는 입으로 손가락을 빨았다. 화덕에 넣은 것처럼 손가락이 얼얼했다. "공기 속에 사랑이 있어. 그래서 뜨거워지는 거야." "나는, 너는, 그는, 우리들은, 당신들은, 그들은 모두 사랑을 하기 위해 일어난다...... 너 컵에서 나오고 싶니?" 생쥐가 컵에서 나오더니 고무 젖꼭지 모양의 비누를 잘라 먹었다. "아무거나 씹지 마. 그러고 보니 너 정말 먹보로구나!......" 그는 욕탕을 나와 방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윗저고리를 걸쳤다. "니꼴라는 분명히 떠났을 거야... 그는 분명히 멋진 처녀들을 알고 있을 거야... 오퇴이유의 처녀들은 철학자들의 집에 들어가서 하녀처럼 웬만한 일은 다 했다던데..." 그는 방문을 닫았다. 그때, 문 뒤에서 벌거벗은 볼기를 때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런, 왼쪽 소매 안감이 찢어졌군... 헝겊이 없는데... 할수없지. 나는 생각에만 잠겨 있고 싶은데... 그러다가 계단에서 넘어지면 턱이 깨질지도 몰라..." 연보라색의 카페트가 깔린 계단은 세 단에 하나씩만 닳아져 있었다. 코랭은 언제나 계단을 세 단씩 성큼성큼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니켈로 도금한 계단 끝 부분을 밟는 순간 그만 미끄러져 난간에 부딪치고 말았다. "이런 빌어먹을, 바보같은 짓을 했군. 나도, 너도, 모두 다 바보들이야!..." 등이 아팠다. 드러난 어깨에 입을 맞출 때와 같은 소리를 내면서 겉 문이 닫혔다. "이 거리에 볼거리가 있나?" 맨 앞에서 토목공 두 명이 돌차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빨간색으로 색칠한 십자가를 놀이에 필요한 돌 원반으로 사용하였다. 코랭은 그들을 지나쳐 걸었다. 좌우에 내리닫는 창문이 있는 멋있는 건축물들이 서 있었다. 한 여인이 창가에서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코랭이 손 키스를 보내자, 그 여인은 검은색과 은색이 섞인 프란넬로 짠 침대 깔개를 머리 위로 흔들었다. 대형 건물의 냉랭한 외형은 상점 덕분에 화려해 보였다. 탁발승들이 쓰는 물건들을 전시해 놓은 진열대가 코랭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샐러드용 유리 그릇과 의자나 방석 등의 속을 채울 때 쓰는 장식못 등이 지난 주에 비하여 가격이 올랐음을 알았다. 길을 가던 도중에 코랭은 개 한마리와 어떤 두 사람과 더 마주쳤다. 추운 날씨 때문에 거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다. 집이 없는 사람들은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친 채 입 안과 목구멍이 헐어서 죽어갔다. 네거리에 있는 한 경찰관은 짧은 외투 속에 머리를 감추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검정색 큰 우산처럼 보였다. 카페의 웨이터들은 몸에 열을 내려고 카페 주변을 한 바퀴씩 돌고 있었다. 그리고 두 연인이 현관 아래에서 서로 껴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코랭은 이상한 슬픔이 ㅅ구쳐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저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 나는, 나는 저들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빌어먹을..." 코랭은 길을 건넜다. 그의 등 뒤로 두 연인은 현관 아래에서 여전히 껴안고 있었다. 코랭은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달렸다. 그때 눈꺼풀 아래로 여러 아가씨들이 보였다. 그는 얼른 눈을 떴다. 정면에 한 아가씨가 서 있었다. 그녀도 그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하얀 양털 신발 속의 하얀 다리, 광택없는 가죽 외투, 잘 어울리는 모자가 인상적이었다. 챙없는 모자 밑으로 보이는 적갈색 머리카락과 어깨를 아주 넓어 보이도록 하는 외투가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저 여자를 앞질러 가자.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을 보고 싶다." 그는 발걸음을 빨리 했다. 그러나 그 여자를 앞질러 갔을 때, 코랭은 울음이 나올 뻔했다. 그녀는 적어도 쉰 아홉 살은 되어 보였다. 결국 그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인도변에 털썩 주저 앉아 실컷 울었다. 그렇게 울고 나니 가슴이 후련해졌다. 눈물이 따닥 따닥 소리를 내며 매끈한 화강암 위에 떨어졌다. 그는 다시 일어나 걸었다. 그러나 머릿 속은 혼란스러웠다. 5분 후에 그는 이시스 퐁또잔느의 집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가씨 두 명이 앞을 지나치더니, 바로 그 집으로 들어갔다. 코랭은 다시 가슴이 부풀어 오르면서 가볍게 공중으로 붕 뜨는 기분이 되어 그 아가씨들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11 2층으로 올라가자마자 와글와글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계단은 마치 째즈에 등장하는 비브라폰의 원통형 공명기 속에 들어 있는 추진 날개처럼 세 번 구부러지면서 소리를 증폭시켰다. 코랭은 두 아가씨의 뒤꿈치를 바로 코 앞에 두고 쳐다보면서 올라갔다. 두 아가씨의 예쁜 뒤꿈치는 굽이 높은 진짜 가죽 구두와 우아해 보이는 발목 때문에 더 예쁘게 보였다. 이어서 애벌레처럼 살짝 주름진 긴 양말의 솔기와 무릎 관절의 움푹 들어간 부분이 드러났다. 코랭은 넋을 잃고 쳐다보느라고 멈칫하는 바람에 두 계단 뒤쳐졌다.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왼편의 아가씨를 쳐다보았다. 촘촘하게 짜여진 스타킹과 그림자가 진 허연 넙적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또 다른 아가씨의 주름 치마는 눈요기 거리를 제공하지는 못했지만, 염소가죽의 외투 아래로 먼저 보았던 아가씨의 엉덩이보다 더 큰 엉덩이가 흔들리면서 작은 주름을 계속 만들어 냈다. 이 주름은 오래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흐트러졌다. 두 아가씨가 3층에서 걸음을 멈추자 코랭은 점잖게 자신의 발을 내려다 보았다. 두 아가씨를 따라가자 하녀가 문을 열었다. "안녕 코랭, 별 일 없었어?" 이시스가 반갑게 그를 맞으며 물었다. 코랭은 이시스의 머리카락 주변에 입을 맞췄다. 좋은 냄새가 났다. "그렇지만 내 생일이 아니야. 뒤퐁의 생일이란 말이야!" "뒤퐁은 어디 있지? 인사를 해야겠는데......" "지저분해 죽겠어. 오늘 아침 이뻐보이라고 이발소에 데려갔거든. 그리고 목욕까지 시켰는데, 두시에 친구들 셋이 더러운 뼈다귀 세 뭉치를 들고 와서 데려가 버렸어. 아마 끔찍한 모습을 하고 돌아올거야!......" "아무리 그래도 생일이잖아." 이중문의 벽구멍 사이로 처녀 총각들이 보였다. 열 두어 명 정도가 춤을 추고 있었다. 대부분 열중쉬어 자세를 한 채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모여서 그다지 서로 끌리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외투를 벗어. 내가 남자용 탈의실로 데려다 줄께." 이시스가 말했다. 코랭은 그녀를 따라가다가 또 다른 아가씨 두 명과 마주쳤다. 그녀들은 핸드백과 분갑을 흔들어 소리를 내면서 여자용 탈의실로 바뀐 이시스 방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복도 천장에는 정육점 주인에게 빌려온 쇠갈고리가 여러 개 매달려 있었고, 그 중 두 개의 쇠갈고리 끝에서 가죽을 잘 벗긴 양 머리 두 개가 웃고 있었다. 이시스가 말한 남자용 탈의실은 바로 이시스 아버지의 방으로, 방 안에 있던 가구를 치워놓고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방 안엔 코트들이 어지럽게 방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코랭도 외투를 벗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집어 던져놓고 거울 앞에 서서 이리저리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자, 가요. 매력있는 아가씨들을 소개시켜 줄테니까." 코랭이 늦장을 부리자 이시스가 재촉하듯 말했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옷이야." 코랭이 이시스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그녀의 드레스는 편도 열매의 녹색 빛깔을 띤 양모로 만들어 진 것이었는데, 아주 단순한 모양이었다. 등판에 색다른 천으로 철제 창살 악세사리가 붙어 있었고, 큼직한 사기 단추도 달려 있었다. "정말 멋있게 보여?" 이시스가 장난끼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눈부셔. 창살 사이로 손을 넣어도 되겠어? 혹시 물리지나 않을까 몰라......" 코랭은 그녀의 몸을 더욱 바짝 당기며 중얼거렸다. "호호, 너무 확신하지 마." 이시스는 몸을 살짝 빼더니 코랭의 손을 잡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방으로 그를 끌고 갔다. "어?... 알리스와 쉬크가 벌써 와 있었잖아?" 방으로 들어서자 알리스와 쉬크가 정답게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자, 이리 와.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 아가씨들은 대체로 괜찮아 보였다. 그녀들 중 한 명은 녹색 모직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큼직한 금빛 사기 단추가 달려 있고, 등에는 독특한 요크가 눈에 확 띄었다. "저 아가씨를 소개시켜 줘." 코랭은 아시스를 향해 조르는 듯한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해주는 대로 얌전히 있을 수 없어?" 이시스는 꾸짖듯 그에게 말했다. 이시스는 어느 한 여자 앞으로 코랭을 끌고 갔다. 코랭이 이시스의 손을 잡아당기며 버텼지만 소용없었다. 상대편 여자가 벌써 코랭을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이 쪽은 코랭이예요. 코랭, 클로에를 소개할께요." 코랭은 침을 삼켰다. 뜨거운 튀김을 먹다 데인 사람처럼 입 안이 얼얼해 졌다. "안녕하세요..." 코랭이 멍한 표정으로 서 있자 클로에가 먼저 인사를 했다. 코랭은 당황해서 손짓을 해 보이고 웃음을 지었으나, 자신이 느끼기에도 어색했다. "그럼, 잘 해봐." 이시스가 익살스럽게 웃으며 자리를 피해 주었다. "안녕...... 음, <듀크 앨링턴>은 클로에 당신이 편곡한 거예요?" "......?" 클로에는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코랭을 쳐다보았다. 코랭은 바보같은 말을 내뱉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 실수를 한 것이다. 클로에가 <듀크 앨링턴>을 편곡한 것이 아니라, 듀크 앨링턴이 <클로에>를 편곡한 사람이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코랭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뒤돌아서서 나가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 그의 소매를 잡았다. "그렇게 하고 어디를 가려고 그래? 설마 벌써 가려는 건 아니겠지? 언제 가까이 왔는지 쉬크가 눈을 찡긋거리며 서 있었다. "자, 이것 좀 보라구!..." 쉬크는 붉은색 모로코 가죽으로 겉표지를 싼 작은 책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이 책은 파르트르의 <토사물에 관한 파라독스> 원본이야......" "그래? 결국 찾아냈군!" 말을 마치고 난 후 코랭은 도망치듯 몸을 돌렸다. 그때 알리스가 코랭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와 한번도 춤추지 않고 그냥 가버리기예요?" "미안해요. 그렇지만 나는 너무 바보같이 굴었기 때문에 더이상 여기에 있을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누군가 당신을 이렇게 바라보며 부탁할 땐 들어줄 수 있는 거잖아요." "알리스......" 코랭의 목소리는 거의 울음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그녀를 껴안으며 그녀의 머리칼에 뺨을 문질렀다. "아니, 정말 왜 그래요?" "제기랄... 제기랄... 바보같은 놈! 나란 놈은 정말 지겨워......" "대체 왜 그래요? 침착하게 애기해 봐요." "저기 저 아가씨 보여요?" "클로에?" "아는 아가씨예요? "네." "저 아가씨에게 바보같은 소리를 했어요. 그래서 그냥 가고 싶어진 거예요." 코랭은 자기 가슴 속에서 마치 독일 군가를 연주하는 듯, 큰 북 소리만 둥둥 울린다는 말은 차마 덧붙이지 못했다. "예쁘지 않아요?" 알리스가 물었다. 클로에는 붉은 입술에 갈색 머리로 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드레스는 그녀의 화려한 외모에 비하여 좀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로서는 감히 어떻게 해볼 수가 없어요!" 코랭이 말했다. "좋은 여자라고 생각한다면 다시 한번 시도해봐요." 알리스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달래듯 말했다. 코랭은 알리스 등에 둘렀던 팔을 풀었다. 입술을 한번 꽉 다문 후 클로에 곁으로 다시 다가갔다. "춤 추겠어요?"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더니 오른손을 코랭의 어깨 위에 올려 놓았다. 코랭은 그녀의 차가운 손가락이 목덜미를 스치는 것을 느꼈다. . 그는 오른쪽 목 근육을 움직여서 두 사람의 몸 간격을 좁혔다. 클로에는 다시 한번 코랭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푸른색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흔들어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후, 자신의 얼굴을 코랭의 뺨에 갖다댔다. 순간 코랭은 숨이 멈추는 듯했다. 주위는 깊은 침묵에 잠겼다. 이 세상엔 오직 클로에와 자신만이 존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 밖에 모든 것은 다 가치를 잃은 듯했다. 그러나 실제로 레코드 판이 멈춰 있었다. 이를 깨닫고 그제서야 현실로 돌아온 코랭은 마치 낯선 땅에 막 들어온 사람처럼 신기한 눈빛으로 주위를 쳐다보았다. 천장에 격자창이 있어서 윗층에 세 든 사람이 그들이 춤추고 있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다는 것, 물이 만들어낸 무지개가 술장식 같이 늘어져 벽 아랫 부분을 덮고 있다는 것, 여러 색의 기체가 여기 저기 만들어 놓은 구멍에서 새어 나오고 있다는 것, 여자 친구인 이시스가 자기 앞에 선 채 쁘띠 푸르를 쟁반에 얹어 그들에게 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닭았다. "고마워요, 이시스." 클로에가 과자를 집어들고 곱슬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고마워, 이시스." 코랭도 잔가지를 연상시키는 작은 에클레르를 하나 집어들면서 말했다. 이시스가 옆으로 가자 코랭은 힘껏 과자를 입 속에 넣고 씹었다. "과자가 아주 맛있는데요." 어색한 침묵을 깨려는 듯 코랭은 커다란 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말을 마치자마자 코랭은 캑캑거리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과자 속에 있던 성게 가시가 목에 걸린 것이다. 클로에가 예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왜 그래요?" 코랭은 그녀의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서서 기침을 하고 나서야 진정되었다. "또 바보같은 짓을 했어." 코랭은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다. 그 사이 클로에는 저쪽으로 가 술잔 두 개를 들고 돌아와 그에게 내밀었다. "마셔요, 좀 나아질거예요." "고마워요, 샴페인 같은데......" "이것저것 섞은 거예요." 코랭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런데 갑자기 목에 거품이 차 오르면서 숨이 막혔다. 코랭은 조금 전보다도 더 큰 소리로 캑캑거렸다. 드디어 클로에는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기 시작했다. 쉬크와 알리스가 코랭 곁으로 다가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쉬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렇게 독한 것인 줄 몰랐어." 코랭은 기침이 터져나와 겨우 말을 마쳤다. "술 마실 줄 모르나 봐요." 클로에가 장난끼 있는 웃음을 띠고 대답했다. 알리스가 여전히 캑캑거리고 있는 코랭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모두 식탁 앞에 앉았다. "됐어, 이제 조용하군. 좋은 곡 한 판 틀어볼까?......" 쉬크는 코랭을 향해 눈짓을 했다. "비글므아 춤 어때요?" 알리스가 제안했다. 그녀가 턴테이블 곁으로 갔다. "자, 판 올려놨어요." 음악은 부기-우기였다. 클로에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설마, 저 음악에 맞추어 비글므아를 추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코랭은 놀란 표정으로 클로에를 말렸다. "왜, 안돼?..." 쉬크가 저항하듯 되물었다. "저런 거 보지 말아요." 코랭은 덩달아 일어서서 클로에의 팔을 잡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여 클로에의 귀와 어깨 사이에 입을 맞추었다. 클로에의 몸이 떨렸다. 그러나 몸을 빼지는 않았다. 코랭도 입술을 떼지 않았다. 그 사이 알리스와 쉬크는 흑인 스타일의 비글므아 춤을 훌륭하게 재현하고 있었다. 그 때 박자가 빨라졌다. 알리스는 쉬크에게서 몸을 떼어 낸 다음 어떤 춤을 출까 곰곰히 생각하는지 잠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쉬크는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긴 의자에 벌렁 누워서, 옆에 서 있던 코랭과 클로에의 다리를 잡아당겨 쓰러뜨렸다. 코랭이 자리에 털썩 주저 앉자 클로에도 그 옆에 편안하게 자리 잡았다. "자, 일들은 잘 되어 가나? ...... 얌전한 아가씨군, 안 그래?" 쉬크가 의미 심장한 눈짓을 지으며 말했다. 매력적인 표정이었다. 클로에가 쉬크를 향해 미소지었다. 코랭은 뭔가 보여주려는 듯 말없이 팔로 클로에의 목을 감싸더니 그녀의 맨 윗단추를 아무 생각 없는 듯 만지작거렸다. 단추는 곧 풀어졌다. 한얀 속살이 코랭의 눈에 들어왔다. 그 때 알리스가 판을 돌려놓고 자리로 돌아왔다. "좀 비켜요, 쉬크. 코랭과 당신 사이에 앉고 싶어요." 그녀는 레코드 판을 잘 골랐다. 듀크 앨링턴이 편곡한 [클로에]였다. 코랭이 클로에 귀 근처의 머리칼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바로 당신을 위한 곡이예요." 클로에가 뭐라고 대답하려고 했을 때,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일어서서 춤추러 나가면서 생긴 소음으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클로에는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이 무대에서 춤추는 모습을 쳐다보던 코랭이 클로에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 그녀가 계속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눈빛은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바다와 같이 짙푸른 눈동자였다. 12 "그 여자 다시 만날 거니?" 쉬크가 코랭에게 물었다. 그들은 니꼴라가 해 온 호박 요리가 놓여있는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할지. 너 아니? 그 아가씨 정말 예의 바르더라. 지난번 이시스 집에서는 샴페인을 너무 마시는 게 걸리긴 하지만 ......" "그런 모습이 아주 잘 어울리던데. 예쁜 아가씨야...... 그런데 그런 표정은 뭐야? 제발 얼굴 좀 펴라! 오늘 파르트르의 <구토증이 일어나기 전에 해야 할 선택>이란 책을 찾아냈다." "......그런데 그 많은 돈은 다 어디에서 생기는 거야?" 순간 쉬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책 값이 꽤 비싸지만, 그 책을 손에 넣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어. 나는 파르트르의 책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야. 그가 쓴 것은 전부 다 필요해." "그렇지만 그는 끊임없이 쓰고 있어. 일주일에 최소한 다섯 편은 쓸 거야." "나도 잘 알아." "......어떻게 하면 클로에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쉬크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코랭은 그의 기분을 전환시켜 주기 위하여 화제를 돌렸다. 쉬크는 코랭을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장-쏠 파르트르 이야기만 하느라고 너를 귀찮게 했구나.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널 돕고 싶어... 내가 어떻게 해 줘야 되지?" "골치 아파 죽겠어. 어쩔 때는 절망 속에 빠져있다가, 또 어쩔 때는 한 없이 행복한 느낌이 드는 거야. 뭔가를 이렇게 갈망한다는 건 분명히 기분 좋은 일인 것 같아." 코랭은 평소 그 답지않게 흥분하고 있었다. "햇빛이 비치는 마른 땅 위에, 마른 풀밭 위에 눕고 싶어. 작은 벌레들이 떼지어 돌아다니고 있고, 마른 이끼도 끼어 있는 밀짚처럼 바삭바삭한 노란 풀밭. 그런 풀밭에 눕고 싶다고. 생울타리와 바위와 심하게 뒤틀린 나무들과 작은 이파리들. 정말 멋있겠지!" "클로에는?" "물론 클로에도 옆에 있어야지. 클로에는 내 가슴 속에 있어." 코랭의 눈빛은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코랭이 몸을 뒤척이자 식탁이 흔들렸고, 물병이 그들의 침묵 사이로 수정처럼 맑게 찰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벽에 반사되어 방 안에 흩어졌다. "백포도주를 좀더 할까?" 코랭이 어색한 침묵을 깨뜨리기 위하여 말을 걸었다. "그래!" 니꼴라가 다음 요리를 내왔다. 오렌지 리쾨르를 섞은 빵으로 파인애플이 올려져 있었다. "고마워, 니꼴라... 한가지 묻겠는데, 내가 사랑하는 어떤 아가씨를 다시 만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코랭이 니꼴라에게 물었다. "주인님. 그런 일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일지 몰라도 저는 한번도 그런 일을 겪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씀드릴 수 없군요... 부끄러운 일이지만, 다 내 팔자라고 생각합니다." 코랭은 니꼴라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 같아서 마음이 언짢아졌다. 코랭이 당황하는 것을 보고 쉬크가 그를 거들어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니꼴라, 당신은 자니 바이스 뮐러처럼 생겼어요. 당신은 당신 모습을 잘 모르겠지만, 정말 멋진 남자예요." "저를 그렇게 높이 평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니꼴라는 코랭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 여자의 부모에게 그녀의 습관이나, 잘 가는 곳을 물어 보세요. 그런 정보를 얻어내면 아마 무슨 좋은 방도가 생길거예요." "좀 복잡하긴 하지만, 어쩐지 가능성 있는 말 같군.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바보가 되나봐. 이미 오래 전부터 그런 생각은 했는데... 쉬크에겐 말하지 못했거든." 니꼴라는 찬찬히 미소를 지으며 다시 부엌으로 돌아갔다. "굉장한 사람이야." 니꼴라의 뒷모습을 보며 코랭이 중얼거렸다. "그래, 맞아. 저 사람은 요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어." 쉬크가 맞장구를 쳤다. 코랭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쉬크를 쳐다보았다. 쉬크는 니꼴라가 요리 뿐 아니라 인생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백포도주를 다시 마셨다. 니꼴라가 커다란 케이크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추가로 드리는 후식입니다." 니꼴라가 케이크를 식탁에 놓으며 말했다. 코랭은 칼을 집어 편편한 표면을 자르려다 멈칫했다. "너무 아름다운 케이크야. 그냥 자르기에는 아까우니 조금만 기다리지." "기다림이란 단조로 시작되는 전주곡이지." 쉬크가 말했다. "왜 그렇다는 거지?" 코랭이 물으며 쉬크의 잔에 에테르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는 금빛의 포도주를 채웠다. "모르겠어. 앞뒤 생각없이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야." "술맛 좀 봐!" 그들은 함께 잔을 비웠다. "굉장하군!..." 쉬크는 두 눈에 불그스름한 빛을 띠면서 감탄했다. "이것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을거야. 아마, 아무도 흉내내지 못할걸?" 코랭도 감격하여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너 역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사람이야." 쉬크가 코랭에게 대꾸했다. 코랭은 꿈꾸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리가 이 멋진 술을 마시고 있으면 클로에가 올거야." "그건 확실하지 않아." "날 실망시키는 말은 하지 마." 코랭은 쉬크 앞으로 자신의 잔을 내밀며 말했다. 쉬크는 두 개의 잔을 다시 채운 후, 자신의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기다려!" 코랭이 쉬크를 제지시켰다. 코랭은 작은 램프와 천장에 있는 등을 껐다. 방안엔 평소 코랭이 명상에 잠길 때 켜 놓던 스코틀랜드산 성모상에서 흘러 나온 초록색 불빛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 쉬크가 감격한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초록색 불빛을 받아 크리스탈 잔 속에 담긴 포도주에서 어렴풋한 섬광이 발산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온갖 색깔의 무수히 많은 점들이 반짝거리는 것과 같았다. "마시자!" 코랭이 잔을 높이 들어 보였다. 그들은 술을 들이켰다. 술을 마신 후에도 입술에 미광이 남아 있는 듯했다. 코랭이 다시 불을 켰다. "한 번만으론 부족해. 오늘 밤에 이 한 병을 다 마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케이크를 잘라야지?" 쉬크가 코랭을 제지시켰다. 코랭은 은칼을 집어 들고 반들거리는 흰색 케이크 위에 조심스럽게 나선을 그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더니 놀라운 표정으로 나선이 그려진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쉬크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을 크게 뜨고 코랭을 쳐다보았다. "실험해 볼 것이 있어." 코랭은 테이블 위에 꽂혀 있던 꽃다발에서 호랑가시나무 잎사귀 하나를 땄다. 그리고 나서 코랭은 손가락 끝으로 케이크를 빠르게 돌리면서 다른 한 손으로 호랑가시나무 잎사귀 끝부분을 나선 속에 그었다. "들어봐... 마치 턴 테이블에 올려진 판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 같지 않아?" 쉬크는 코랭의 말에 따라 귀를 기울였다. "듀크 앨링턴이 편곡한 <클로에>야!" 쉬크는 코랭을 쳐다보았다. 코랭은 너무 감격해 있었기 때문에 창백해 보이기조차 했다. 쉬크에게도 어떤 음률이 들리는 듯했다. 그는 갑자기 코랭을 밀쳐내고 칼을 집어들더니 단숨에 케이크를 반으로 잘랐다. "아!......" 케이크의 하얀 속살이 드러나자 둘은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았다. 케이크 안에는 쉬크에게는 파르트르의 새로운 아티클이, 코랭에게는 클로에와의 데이트 약속이 들어 있었다. 13 코랭은 광장 모퉁이에서 클로에를 기다리고 있었다. 광장은 원형이었고, 그 안에 성당과 작은 공원, 그리고 벤취가 있었다. 광장 앞으로는 승용차와 버스가 마카담식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태양도 코랭과 함께 오랫동안 클로에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야생 강낭콩이 싹을 틔우는 것을 도와주는 일과, 사람들에게 알맞은 그늘을 만들어 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또 창문을 가리는 겉문을 열도록 하고, 가로등 불빛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고 있었다. 코랭은 장갑 끝부분을 둘둘 말면서 클로에가 나타났을 때 무슨 말부터 해야 할 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첫 마디는 약속 시간이 다가오면서 여러가지로 바뀌었다. 클로에를 만나서 무엇을 해야 할지, 또 어디로 가야 할 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찻집으로 갈까 생각도 했지만, 그곳은 주로 40대의 먹보 아줌마들이 모여 손가락을 빨면서 생크림 케이크를 일곱 개씩 먹어치우는 곳이어서 마음 내키지 않았다. 그는 남자들만이 폭음폭식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또 남자들은 어떤 곳에서든지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좋아하지 않을 테니 영화관은 안될 것이고, 국회의사당 견학도 반가와하지 않을 거야. 송아지 경주는 무서워할 테니 갈 수도 없고, 생-루이 병원은 출입금지니까 불가능하고,...생-라자르 역에는 바퀴 손수레만 있고 기차는 한 대도 없으니 가나마나지...그럼, 대체 어디로 ..." "안녕하세요?" 생각에 잠겨 있던 코랭은 클로에가 뒤 쪽에서 갑자기 말을 걸자 어깨를 움칫했다. 그는 갑자기 나타난 그녀의 손을 잡기 위해 허둥대며 장갑을 벗으려고 했다. 너무 허둥거리다 장갑에서 빠져 나온 손이 그만 자기 코를 한 대 세게 쳤다. "악!..." 코랭은 얼굴을 감싸 쥐고 비명을 질렀다. 클로에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고 그의 앞에 똑바로 섰다. "갑자기 나타나 당황하신 것 같군요!" 코랭은 여전히 얼굴을 감싸 쥔 채 그녀를 살폈다. 그녀는 머리 색깔과 똑같은 색깔의 긴 털이 달린 모피 코트와, 챙이 없는 모자, 그리고 작고 짧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녀는 코랭의 팔을 잡았다. "이젠 그만 팔 좀 내려요. 오늘은 좀 어색해 보이네요!" "지난번에는 조금 있으니까 나아졌는데..." 코랭은 변명하듯 말했다. 그의 어린애 같은 말에 클로에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코랭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또 다시 크게 웃어제꼈다. "날 놀리는 거예요? 짖꿎군요." "... 미안해요. 그런게 아니라... 날 만나서 기쁘세요?" "그럼요!" 둘은 서로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둘은 팔짱을 끼고 발길이 닿는 대로 인도를 따라 걸었다. 작은 장미빛 구름 한 가닥이 공중에서 내려오더니 코랭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함께 걸어도 될까?" "그래, 따라 와." 코랭이 대답했다. 클로에는 코랭이 혼잣말을 하자 우습다는 표정으로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구름이 그들 둘을 감쌌다. 그 안은 훈훈했고 설탕 처럼 달콤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클로에, 사람들은 우리를 볼 수 없어요!... 그렇지만 우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어요! 멋있지 않아요?" 코랭이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그래도 조금은 보여요. 앞을 조심하세요." 클로에가 말했다. "상관 없어요. 아무튼 기분 좋아요... 지금 이 순간에 특별히 하고 싶은 거 있어요?" "음...산책이요... 혹시, 따분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죠?" "전혀 그렇지 않아요." "아무거나 얘기해 보세요." "나는 아는 게 별로 없어요. 진열장 구경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저것 좀 봐요!... 재미있는데요!" 둘은 발걸음을 멈추고 진열장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 안엔 아름다운 여자 한 명이 용수철 달린 매트 위에서 쉬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을 드러내 놓고 있었는데, 어떤 기계가 흰색의 가느다란 털로 된 길고 부드러운 솔로 그녀의 젖가슴을 아래에서 위로 쓰다듬고 있었다. 게시판에는 [앙티포드 뒤 샤를르 레베랑으로 당신의 구두 값을 절약하십시오] 라고 써 있었다. "좋은 아이디어군요." 클로에가 말했다. "그렇지만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좀...손으로 만지게 하면 훨씬 더 기분 좋을 텐데......" 코랭의 말에 클로에는 얼굴을 붉혔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나는 남자들이 처녀들 앞에서 그렇게 야한 소리 하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미안해요... 그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가 미안한 표정을 짓자 클로에는 자기가 화나지 않았음을 알리려는 듯 웃으면서 그를 살짝 밀었다. 또 다른 진열장 안에는 앞치마를 두른 뚱뚱한 남자가 어린아이들의 목을 조르고 있는 모습이 진열되어 있었다. [빈민구제사업]을 선전하는 진열장이었다. "돈이 어디로 새어 들어가는지 알겠어요. 소수의 사람들이 전부 쥐고 있어요. 그걸 처리하기에도 힘이 들텐데." "저건 실제가 아니예요." 코랭이 심각한 표정으로 진열장을 바라보는 보습을 보며 클로에가 근심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알아요? 빈민구제소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는게 없는데." "나는 저런 게 싫어요. 전에는 저런 식으로 만든 선전용 진열장이 없었는데... 저런 것이 반드시 혁신적인 방법이 되는 것은 아니예요."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어리석은 짓임을 깨달은 사람에게만 영향을 미칠테니까." "그런데 저건 또 뭐지요?..." 클로에가 화제를 돌리기 위하여 다른 진열장을 가리켜 보였다. 그 진열장 안에는 어떤 사람이 둥글둥글하고 포동포동한 배를 내밀고 고무바퀴 위에 올라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광고판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전기 다리미로 다림질을 한다면 당신은 더 이상 살이 찌지 않을 것입니다.' "나 저 사람 알아요!... 지난 번 내 요리사였던 세르주의 배가 분명해요!... 그런데 저 사람 저기에서 뭘 하는 거지?" "그게 무슨 상관이예요. 그게 누구의 배라고 말씀하지 마세요. 배가 너무 많이 나오긴 했지만..." "저 사람 요리를 잘 만들었는데..." "그만 가요. 혐오감이 생겨서 더 이상 진열장을 보고 싶지 않아요." 클로에가 인상을 찌푸리고 돌아섰다. "그럼, 이제 무얼 하지요? 차 마시러 갈까요?" 코랭은 자신의 말에 도리어 자신이 놀랬다. 만약 클로에가 좋다고 말하기라도 한다면 난감해질 게 분명했다. 그는 차마실 만한 적당한 장소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니요. 차마실 시간이 아닌데요... 게다가 나는 차마시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코랭이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바지 멜빵이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게 무슨 소리예요?" "제가 마른 나무 가지를 밟았어요." 코랭이 빨갛게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숲 속을 산책하면 어떨까요?" 클로에가 제의했다. 그것은 코랭도 바라는 바였다. 코랭은 아주 만족한 표정으로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예요. 아마 조용하고 아늑할거예요. 더군다나 이 시간이면 아무도 없을 거고..." 클로에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래서 그런게 아니예요." 클로에는 샐쭉해져 코랭을 흘겨봤다. "우리는 산책로를 벗어나지 않을 거예요. 그래야 발이 젖지 않을 테니까요." 그녀는 방금 모욕당한 기분을 앙갚음 하기라도 하듯 말을 덧붙였다. "지하도로 가요." 코랭은 팔짱을 낀 클로에의 팔을 더 바짝 잡아당기며 말했다. 지하도 양편에는 큰 새장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이것들은 시(市)에서 기념물과 작은 공원에 날려보낼 비둘기를 가두어 기르는 곳이었다. 그 곳에는 참새들도 사육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웬만하면 지하도를 이용하지 않았다. 지하도는 온갖 새들이 날개를 푸드덕거리는 바람에 흰색과 푸른색 깃털이 이리저리 날아다녀 공기가 말할 수 없이 나빴기 때문이었다. "쉬지 않고 저렇게 날아다니나요?" 클로에는 새들의 날개짓에 챙이 없는 모자가 날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꽉 움켜잡으면서 말했다. "매일 똑같은 건 아니예요...비둘기들 사이를 빨리 빠져 나갑시다. 참새들은 바람을 덜 일으키니까 좀 나을 거예요." 클로에는 코랭에게 몸을 바싹 붙였다. 그들은 서둘러 위험 지역을 벗어났다. 코랭은 여유가 생기자 뒤를 돌아다 보았다. 구름은 더이상 그들을 따라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빗나갔다. 지하도를 나오자 구름이 다시 그들을 감쌌다. 지름길로 달려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14 벤치는 진한 녹색이었는데, 약간 축축했다. 어쨌든 산책로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쾌적한 분위기였다. "춥지 않아요?" 코랭이 물었다. "아니요. 좀 쌀쌀하게 느껴지지만 기분은 상쾌해요... 저 구름 가까이 가고 싶어요." "아!..." 코랭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클로에의 눈빛은 꿈꾸는 듯했는데, 그녀의 말과 표정은 코랭의 가슴 속에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코랭은 클로에의 허리를 껴안았다. 바람이 불어와서 그녀의 챙 없는 모자를 옆으로 떨어뜨렸다. 그의 코 밑으로 클로에의 머리카락 향내가 풍겨왔다. 그는 바람에 물결치면서 반들반들 윤기를 흘리고 있는 머리카락에 입술을 갖다 댔다. "당신과 함께 있으니 좋군요." 코랭이 속삭였다. 클로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녀의 몸이 그에게 기울었다. 코랭은 그녀의 몸을 더욱 가까이 안으며 그녀의 귓볼에 입술을 가져갔다. "지루하지 않았요?" 클로에는 지루하지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코랭은 그녀의 몸을 더욱 세차게 끌어당겼다. "나는..." 코랭은 무슨 말을 하려고 다시 클로에의 귀에 입을 가져갔다. 그 순간 클로에가 코랭의 정면으로 얼굴을 돌렸기 때문에 실수처럼 입술이 닿았다. 키스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코랭은 입술을 떼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클로에의 입술이 움직이며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코랭은 이번에는 길게 입을 맞추었다. 키스가 끝난 후 그는 말없이 클로에의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묻고 움직이지 않았다. 15 "와 줘서 고마워, 알리스. 그런데, 여자는 당신 혼자야..." 코랭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아. 쉬크도 허락했는걸." 쉬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러나 알리스의 목소리는 쾌활하지가 않았다. "클로에를 부르려고 했는데... 클로에는 지금 파리에 없어. 3주 예정으로 친척들이랑 남쪽으로 떠났어." "그렇다면 네 기분이 좋지 않겠구나." 쉬크가 말했다. "아니,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행복해 본 적이 없어. 아, 참. 우리 약혼한다는 소식도 전해야 되겠는데." "축하해!" 쉬크는 일부러 알리스의 시선을 피하는 것 같았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니? 잘 되는 것 같지 않는데." 코랭이 둘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아무 일 없어. 쉬크가 바보같아서 그래." 쉬크가 말이 없자 알리스가 퉁명스런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절대로 그렇지 않아. 코랭, 알리스 말 믿지 마. 하지만 아무 일도 없어." 쉬크가 말했다. "두 사람 다 같은 말을 하고 있는데, 의견은 일치하지 않는군. 그러니까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거짓말을 했든지, 아니면 둘 다 거짓말이겠지... 밥이나 먹으러 가지." 모두 식당으로 갔다. "앉아요, 알리스. 내 옆에 앉아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줘요." 코랭이 알리스에게 말했다. "쉬크는 바보야. 날 제대로 먹여 살릴 돈도 없으면서, 왜 나를 붙잡아 두려는지 모르겠어. 왜 그런 잘못을 저지르려는지... 게다가 내가 청혼을 거절하니까 나와 결혼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어." "그래, 나는 그런 놈이야. 치사한 놈이라고!" 쉬크가 말했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코랭이 안됐다는 듯 걱정스럽게 쉬크를 쳐다보았다. 코랭은 현재 너무나 행복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의 불행이 더 걱정스럽게 생각되었다. "꼭 돈 때문만은 아니야. 알리스 부모님이 결혼을 허락하지 않으셔. 그들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야. 이와 비슷한 경우를 예로 든 게 파르트르 책에 나와." "대단한 책이데. 코랭, 당신은 안 읽어 봤어요?" 알리스가 말했다. "바로 이 모습이 두 사람의 현재 모습이야. 두 사람의 돈은 계속 파르트르에게로 흘러가고 있다구." 쉬크와 알리스가 고개를 숙였다. "그건 내 잘못이야 . 알리스는 더 이상 파르트르를 위해서 돈을 쓰지 않아. 그녀는 나와 함께 살게 된 후부터는 파르트르에 관해서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어." 쉬크의 목소리에는 자신에 대한 비난이 섞여 있었다. "나는 파르트르보다 당신을 더 사랑해요." 알리스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울먹이다시피 했다. "알리스, 당신은 착한 여자야. 그런 당신에게 나는 어울리지 않는 놈이고. 하지만 파르트르 작품을 수집하는 건 내 취미인데, 불행하게도 기술자 월급으론 그런 생활을 할 수가 없어." 쉬크는 절망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군. 두 사람 다 앞으로 잘 됐으면 좋겠어. 이제 냅킨이나 펴 보자구." 코랭의 말대로 그들이 냅킨을 폈을 때 그 밑에서 조그만 선물들이 나왔다. 쉬크의 냅킨 아래에는 스컹크 가죽이 반쯤 섞인 가죽으로 제본된 <토사물>이란 제목의 책이 한 권 나왔고, 알리스 냅킨 밑에는 굵은 금반지가 나왔다. "아!..." 알리스는 그 금반지를 보고 감탄했다. 그리고 코랭의 목에 매달렸다.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이예요.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코랭은 알리스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알리스는 그날따라 더 예뻐보였다. "무슨 향수를 쓰세요? 클로에는 정제된 난초 향유를 쓰던데." "나는 향수가 없어요." 알리스가 원망하는 듯한 시선으로 쉬크를 힐끔 쳐다보고 말했다. "자연스러운 거야." 쉬크가 말했다. "그런데 참 놀라운데요!... 당신에게선 시냇물이 흐르고 있고, 키 작은 소나무가 서 있는 숲 냄새가 나요." 코랭은 알리스를 달래주려고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 "클로에 이야기나 해 줘요." 알리스는 피식 웃으며 좀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때 니꼴라가 전식을 들고 들어왔다. "니꼴라 삼촌,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니꼴라를 보고 알리스는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그래." 니꼴라가 대답했다. 그가 식탁 위에 접시를 올려 놓았다. "나에게 키스해 주지 않을 거예요?" 니꼴라가 무뚝뚝하게 자기 할 일만 하자 알리스가 그를 재촉했다. "니꼴라,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하면 어떨까? 그런다면 나로서는 아주 기쁜 일이겠는데......" 코랭이 니꼴라를 편하게 해 주려고 말했다. "그래요, 우리 함께 식사해요." 알리스도 덩달아 말했다. "주인님은 저를 혼란스럽게 하시네요. 고맙기는 하지만 이런 차림으로 식탁에 앉을 수는 없어요." "그러지 말고 내 말을 들으면 좋겠는데... 지금 옷차림이 그렇게 걸린다면 옷을 갈아 입고 오면 되지. 이건 명령이예요." 코랭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옷 갈아 입고 오겠습니다." 그는 접시를 식탁 위에 올려놓더니 식당을 나갔다. "...그런데 클로에는 어때요?" 알리스가 몸을 코랭 쪽으로 숙이고 재차 물었다. "드세요. 무슨 음식인지 나도 잘 몰라요. 그렇지만 확실히 맛있을 거예요." 코랭은 일부러 엉뚱한 말을 했다. "너 우리를 애타게 만드는구나!" 쉬크가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한 달 후에 클로에와 결혼할 거야. 나는 당장 내일이라도 결혼하고 싶은데..." "두 사람은 정말 행운아들이예요!." 알리스가 부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의 눈은 젖어 있었다. 쉬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코랭은 자신이 부자라는 사실이 이번처럼 부끄러운 적이 없었다. "쉬크, 내 돈 쓸래?" 알리스는 코랭의 엉뚱한 제안에 미소 띤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 그의 지극한 마음씀에 감격해서 혈관 속에서 뜨거운 것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필요없어." "알리스와 결혼할 수 있을 거야." "알리스의 부모님은 우리 결혼을 원치 않으셔. 나 역시 알리스와 부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걸 원치 않고...알리스는 아직 어려." "내가 왜 어려요? 나는 어리지 않아요." 알리스는 선정적인 앞가슴을 내밀면서 풀솜을 넣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모욕을 당한 사람처럼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거렸다. "진정해요. 쉬크가 말하려는 뜻은 그런 게 아니예요!...쉬크, 나한테 금화 십만 개가 있는데 너에게 4분의 1을 줄께. 그만하면 걱정없이 살 수 있을 거야. 일을 계속하면 그럭저럭 다 잘 될거야." "......아무리 고맙다는 말을 해도 충분치가 않군.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 지 모르겠어." "나에게 고마와 하지 마. 내게 관심있는 건 나와 친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거든."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내가 열께요." 알리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쉬크, 당신이 나무랐던 것처럼 이 중에서 내가 제일 어리잖아요." 알리스는 쉬크를 향해 한마디 쏘아붙이고는 부드러운 카페트 위에 미세한 홈을 내며 걸어갔다. 초인종을 누른 건 니꼴라였다. 그는 뒷 계단을 통해 내려갔기 때문에 앞 문은 그대로 잠겨 있었다. 그는 베이지색과 녹색의 갈매기 무늬가 있는 둥근 주름이 잡힌 두꺼운 천으로 된 외투에 납작한 펠트 모자, 돼지 가죽으로 만든 장갑과 인도산 악어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외투를 벗는 순간 밤색 비로드 저고리와 암록색을 띤 푸른 바지가 화려하게 드러났다. "와. 너무 멋있어요!..." 알리스는 감탄했다. "잘 지내니? 귀여운 알리스! 너는 항상 예쁘구나!" 그는 알리스의 뺨을 어루만졌다. "식탁으로 가요." "안녕들 하시오, 친구들." 니꼴라가 식당으로 들어오면서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하. 이제서야 주인님이란 호칭을 떼어 냈군요." "물론 벌써부터 할 수는 있었죠. 이번 기회에 우리 넷 사이에서 존칭을 없애버리면 안될까요?" "좋아, 앉아." 코랭이 대뜸 반말로 말했다. 니꼴라는 쉬크 맞은 편에 앉았다. "우리 전식 먹자!" 쉬크가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너희들 내 결혼식에 들러리 노릇 할 수 있니?" 코랭은 식탁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물론이지. 그렇지만 그때 못생긴 처녀하고 짝지워 주는 일은 없어야 돼." 쉬크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신부 들러리는 이시스와 알리스에게 부탁할 생각이야. 그리고 데마레 형제한테 남자 들러리를 부탁할 거야." "알리스, 부엌에 가서 오븐 속에 있는 접시를 가져와라. 지금쯤 다 됐을 거야." 니꼴라가 알리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알리스는 니꼴라가 시키는 대로 큰 은접시를 가져왔다. 쉬크가 뚜껑을 연 순간 뜻밖에도 재킷을 입은 코랭과 웨딩드레스를 입은 클로에의 모습이 조각된 거위 간이 나왔다. 그 둘레에는 결혼 날짜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구석엔 '니꼴라'라는 서명도 적혀 있었다. 모두들 감탄했다. 코랭도 니꼴라의 마음 씀씀이에 감탄했는지 눈에 반짝이는 작은 눈물이 글썽거렸다. 16 코랭은 거리를 달려갔다. "멋진 결혼식이 될거야... 내일이면, 내일 아침이면 친구들도 모두 다 올거고..." 길은 클로에에게로 이어졌다. "클로에, 당신 입술은 부드러워. 당신 얼굴은 과일처럼 풋풋해. 당신 눈은 보아야 할 것만 보이고, 당신 육체는 내 몸을 달아오르게 하지..." 비탈진 거리에 굴러가는 유리 구슬을 쫓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몇 달 동안, 몇 달 동안 계속 당신에게 키스하고 있어야만 만족할 것 같아. 어떤 아쉬움도 남기지 않는 키스를 하려면 몇 달이고, 몇 년이고... 나는 당신과 함께 하고 싶어. 당신의 손, 머리칼 ,눈, 목......" 세 소녀가 원무곡을 노래하면서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클로에, 나는 내 가슴 위에 당신의 가슴을 얹어 놓고, 내 손은 당신 몸 위에서 노닐고 싶어. 내 목 둘레에 당신의 팔을 두르고, 당신의 향기로운 머리는 내 어깨의 움푹한 곳에 놓고, 당신의 꿈틀거리는 살갗을, 당신의 향내를 느끼고 싶어..." 하늘은 푸르고 청명했지만, 아직도 날씨는 추웠다. 검은 색으로 뒤덮혔던 나무에 푸릇한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는 꽃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클로에를 위하여 꽃을 한아름 선물하고 싶어요." "언제 배달해 드릴까요?" 여주인이 물었다. 그녀는 젊고 갸날펐으며 꽃을 무척 이나 좋아했다. "내일 아침이요. 그리고 나에게도 배달해 주세요. 백합과 흰 글라디올라스, 장미와 여러가지 흰 꽃 등속으로 방을 가득 채워주고, 특히 붉은색 장미 다발은 큰 것으로..." 17 데마레 형제는 결혼식에 입고 갈 옷을 고르고 있었다. 쌍동이인 그들은 결혼식에서 취해야 할 연출을 아주 잘 했기 때문에 남자 들러리로 자주 초대되었다. 코올리앙이 형이었는데, 그의 머리카락은 검은색에 곱슬이었고, 살갗은 희고 부드러워서 마치 소녀처럼 보였으며, 코는 곧게 내리 뻗었고, 크고 노란 눈썹에 푸른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동생 페가즈는 눈썹이 초록색이란 것만 제외하고 모든 생김새가 형과 똑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썹으로 그들 둘을 구별하였다. 그들은 적성에 맞을 뿐 아니라 보수도 넉넉했기 때문에 들러리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또 그 일만 가지고도 먹고 살기에 충분했기 때문에 특별히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혼식에 들러리로 참석하는 날은 기껏해야 일주일에 한 번 뿐이었다. 그 나머지 날은 그냥 빈둥거리며 놀았는데, 그렇게 하는 일 없이 놀다보니 방탕해지기도 했다. 바로 전 날 밤에도 코올리앙은 한 처녀에게 못된 짓을 하느라고 늦게야 집으로 돌아왔었다. 페가즈는 삼면 거울 앞에서 허리 맛사지를 하며 형을 추궁했다. "대체 몇 시에 들어온 거야?" "몰라...나 좀 내버려 둬. 허리 맛사지나 해." 코올리앙은 핀셋으로 눈썹을 뽑으며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형은 음란해! 그 여자가 창녀라니...... 만약 숙모님이 그걸 보셨다면!..." "야, 너는 그런 적 한번도 없었어?" 코올리앙이 협박조로 말했다. "내가 언제?" 페가즈는 허리 맛사지 하던 것을 멈추고 약간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형을 쳐다보았다. "됐다, 그만 두자. 네가 부끄러워서 땅 속으로 숨는 꼴을 어떻게 구경하겠니. 내 바지 단추나 채워 줘." 그들은 뒷쪽이 트인 특수한 바지를 입고 있어서 혼자 힘으론 도저히 단추 를 채울 수 없었다. "그것 봐, 형! 아무 말도 못하잖아..." 페가즈가 히죽거리며 대꾸했다. "됐어. 그만 두자고 말했잖아." 코올리앙이 신경질적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페가즈는 그 기세에 눌려 입을 다물었다. "오늘 결혼하는 사람은 누구야?" "코랭과 클로에." 페가즈는 클로에의 모습을 떠올리고 불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말투가 왜 그렇게 시원찮아? 코랭이나 클로에 모두 좋은 사람들인데." "그래, 그 사람들이야 좋은 사람들이지. 그렇지만 그 여자 가슴은 너무 너무 동그랗게 생겼어. 꼭 남자같다구." "나는 그 여자 예쁘더라... 그 여자 가슴만 보면 만져 보고 싶어지더라... 너는 안 그러니?..." 페가즈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형을 쳐다보더니 내뱉듯이 말했다. "추잡한 인간! 형은 음탕한 인간이야... 형같은 인간도 언젠가는 여자와 결혼하겠지..." 18 신부가 제의실에서 나왔다. 물결무늬가 그려진 커다란 장식용 종이 상자를 들고 복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칠장이의 트럭이 도착하면, 제단까지 들어오게 하시오. 조제프." 신부가 복사에게 말했다. 대개 직업적인 모든 복사는 조제프라고 불렸는데, 복사는 성당에서 주로 제의방을 지키는 일을 했다. "전부 다 노란색으로 칠할까요?" 조제프가 물었다. "보라색 줄도 그어야죠." 일꾼인 엠마누엘 쥐도가 말했다. 그는 크고 건장했으며, 인상도 좋았다. "그래요, 주교가 축복하러 오시거든요. 이리 오세요. 상자 속의 것들을 가지고 연주가들의 발코니를 칠하세요." 신부가 말했다. "몇 명의 연주가들이 오나요?" 복사가 물었다. "일흔 세 명입니다." 엠마누엘 쥐도가 대답했다. "그리고 열 네 명의 성가대." 신부가 자랑스럽게 덧붙였다. 복사가 길게 휘파람 소리를 냈다. "퓨우----" "결혼하는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라면서!" "그래. 부자들이란 늘 그런 식이야." "하객들도 오겠지요?" 일꾼이 물었다. "아주 많이! 나는 기다란 붉은색 미늘 창과 붉은색 손잡이가 있는 지팡이를 들고 갈거예요." "아니야, 노란색 미늘 창과 보라색 지팡이를 들어야 눈에 띌거야." 신부가 말했다. 그들은 발코니 아래에 도착했다. 신부가 둥근 천장을 받치고 있는 기둥 가운데 숨겨져 있는 작은 문을 열었다. 한 사람씩 좁은 아르키메데스식 나선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희미한 빛 한 줄기가 위에서 비쳐왔다. 나선 계단을 스물네 번 돌 때까지 올라간 그들은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서 멈췄다. "힘든데!" 신부가 말했다. 맨 밑에 있던 복사가 맞장구쳤고, 열기를 내뿜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던 일꾼도 그 말에 동의했다. "아직도 두 번 반을 더 돌아야 해." 신부가 말했다. 그들은 제단과 마주한 평평한 곳 위에 올라섰다. 지상으로부터 백 미터나 올라온 그들은 안개 때문에 서로의 모습이 똑똑하게 보이지 않았다. 단지 어렴풋하게 서로의 위치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간 구름은 중앙 홀을 통과하며 소복한 회색 눈송이로 변했다. "날씨가 좋을 것 같아요. 백리향이 나는데요." 일꾼이 구름 냄새를 맡으며 말했다. "수레국화 향기도 은은하게 풍겨와요." 복사가 말했다. "결혼식이 성황리에 끝나길 바랄 뿐이지." 신부가 말했다. 그들은 상자를 내려놓고 안에 든 장식품으로 연주가들이 사용할 의자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접혀져 있던 의자들을 편 복사가 입김을 불어 먼지를 털어낸 다음 신부에게 넘겨주었다. 기둥과 기둥이 위로 솟아오르고 있어 멀리에서 보면 서로 붙어 있는것 처럼 보였다. 무광택의 돌은 아름다운 하얀 크림색으로 부드러우면서 강렬한 햇볕을 받아 가볍고 은은한 빛을 사방에 반사시키고 있었다. 그 나머지 것은 모두 녹청색이었다. "마이크를 닦아야겠는데." 신부가 복사에게 말했다. "하나만 더 펴면 돼요! 그리고 나서 닦을께요!" 그는 배낭에서 빨간색 헝겊을 꺼내더니 첫번째 마이크 받침을 열심히 닦기 시작했다. 마이크는 모두 네 개가 있었는데, 소리가 성당 밖으로 울려 퍼지는 차임벨 소리와 서로 연결되도록 오케스트라의 의자 앞에 일렬로 놓여 있었다. 물론 안에서도 음악 소리가 잘 울려 퍼지도록 설치되어 있었다. "서둘러요, 조제프. 엠마누엘과 나는 다 끝났어요." 신부가 소리쳤다. "기다려요, 오 분만 참아 주세요." 장식품을 넣어두는 상자 뚜껑을 덮고 난 일꾼과 신부는 결혼식이 끝난 후에 쉽게 되찾기 위하여 상자를 발코니 구석에 치워놓았다. "다 끝났어요!" 그들은 낙하산 끈에 고리를 걸고서 우아하게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색깔이 서로 다른 커다란 꽃 세 송이가 부드럽게 찰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활짝 피었고, 그들은 중앙 홀의 반들반들한 포석 위에 무사히 내려 앉았다. 19 "나 예쁘니?" 클로에는 은대야의 물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깨 위에는 검은 콧수염을 가진 회색의 생쥐가 반사광을 쳐다보며 다리로 코를 문지르고 있었다. 클로에는 향기처럼 섬세하며 피부색과 똑같은 색의 스타킹에 굽이 높은 흰 가죽구두를 신었다. 허약한 손목을 더욱 더 섬약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무거운 푸른색 금팔찌만 빼면 그녀는 알몸이었다. "옷을 입어야겠다고 생각하니?" 생쥐는 자기도 모르게 클로에의 둥근 목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와 그녀의 젖가슴에 몸을 기댔다. 생쥐가 밑에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자, 이제 너를 바닥에 내려 놓아야겠어. 너 오늘 저녁 코랭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 알고 있니? 다른 생쥐들한테 작별 인사를 해야겠어!..." 카페트 위에 생쥐를 내려 놓은 후 창밖을 내다 본 클로에는 커튼을 내린 다음 침대로 다가갔다. 침대 위에는 하얀 드레스가 펼쳐져 있었고, 이시스와 알리스의 연한 물및 드레스도 놓여 있었다. "준비됐니?" 알리스는 목욕탕에서 이시스가 머리 빗는 걸 도와주고 있었다. 이들도 구두와 스타킹은 벌써부터 신고 있었다. "너희들고 그렇고 나도 그렇고 느린 편이구나. 내가 오늘 아침 결혼한다는 사실 알고 있니?" 클로에는 일부러 심각한 말투로 말했다.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어!" 알리스가 말했다. "충분해. 넌 벌써 머리 손질도 끝났잖아!" 이시스가 거들었다. 클로에는 귀걸이를 흔들며 웃었다. 목욕탕 안은 수증기로 꽉 차 있어서 후덥지근했고, 알리스의 등은 육감적으로 보였다. 클로에는 알리스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시스는 거울 앞에 앉아 알리스에게 머리 손질을 맡겨 두고 있었다. "간지러워!" 알리스가 깔깔대기 시작했다. 클로에는 일부러 옆구리나 허리같이 간지럼 잘 타는 곳만 골라서 쓰다듬어 주었다. 알리스의 살갗은 뜨겁고 생기가 넘쳤다. 시간을 보내려고 손톱을 매만지고 있던 이시스가 소리쳤다. "내 머리 망치겠어!" "너희 둘 다 예쁜데. 이런 모습으로 결혼식에 갈 수 없다니 유감이구나. 스타킹하고 구두만 신고 나가면 좋을 텐데 말이야." "가서 옷이나 입으시지 이 아가씨야. 그러다 결혼식 늦겠어." 알리스가 말했다. "안아줘, 나는 너무 행복해!" 클로에가 말했다. 알리스가 클로에를 목욕탕에서 내보냈다. 클로에는 침대 위에 앉았다. 그리고 드레스의 레이스를 보면서 혼자 웃었다. 우선 셀로판으로 된 작은 브래지어와 흰색 새틴 팬티를 걸쳤다. 그것들은 탄탄한 몸매에 근사하게 잘 맞았다. 20 "됐니?" "아직 안됐어." 쉬크는 벌써 열네 번째 코랭의 넥타이를 고쳐 매어 주고 있었다. 아무리 해도 만족스럽게 모양이 나질 않았다. "장갑으로 매도 괜찮을 텐데" 코랭이 말했다. "진짜 그게 더 괜찮을 것 같아?" 쉬크가 물었다. "잘 모르겠어. 그냥 생각이 나서." "진작 그렇게 해볼걸!" "그래, 그렇지만 잘 안되면 결혼식에 늦을지도 몰라."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으니까 걱정마." 그는 민첩하게 움직여 재빨리 넥타이의 양쪽을 힘있게 당겼다. 넥타이 가운데가 끊어지면서 그의 손가락에 걸렸다. "세 번째야." 코랭은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됐어... 나도 알아..." 쉬크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 쉬더니 턱을 비벼댔다. "웬일이지?" "나도 잘 모르겠어. 어쨋든 비정상이야 " "그래, 분명히 비정상이야. 이제 안보고 해볼께." 쉬크는 네 번째 넥타이를 집어 들었다. 아주 흥겨운 기분으로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벌레 한 마리를 쳐다보면서 건성으로 코랭의 목에 넥타이를 감았다. 넥타이의 큰 쪽을 작은 쪽 가장자리 밑으로 돌려서 고리 모양으로 만든 후, 이 안에 큰 쪽을 넣어 빼낸 다음 오른 쪽으로 한 바퀴 돌렸다가 다시 밑으로 집어 넣는 순간 느닷없이 쉬크의 집게 손가락이 으스러지면서 넥타이가 매졌다. 쉬크는 암탁이 꼭꼭거리는 듯한 신음소리를 냈다. "이런! 고약한 것 같으니!" "아프니?" 코랭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손톱이 새까맣게 됐어." "아이구 불쌍해!" 쉬크는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코랭의 목을 쳐다보았다. "잠깐!... 매듭이 매졌어!... 움직이지 마!..." 그는 코랭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쉬크는 탁자 위에서 파스텔화를 그릴 때 사용하는 정착액이 든 병을 집어 들었다. 작은 분무식 튜브 끝을 천천히 입에 대고 살금살금 코랭에게 다가섰다. 코랭은 천장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물보라 같은 정착액이 넥타이 중앙에 뿌려졌다. 넥타이는 순간적으로 경련을 일으키더니 정착액의 수지가 굳어지는 것과 동시에 제 자리에 고정되었다. 21 코랭은 집을 나섰다. 쉬크가 뒤를 따랐다. 그들은 걸어서 클로에에게 갔다. 니꼴라는 성당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니꼴라는 구페의 요리책에 있는 특별 요리가 익어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두들 굉장한 요리를 기대하고 있었다. 길을 가던 중 쉬크가 한 서점 앞에서 갑자기 멈춰 섰다. 진열대 가운데에 파르트르의 <곰팡내>라는 책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 책은 보라색 모로코 가죽의 장정에 보부아르 공작 부인의 문장(紋章)이 어울린 것으로 값비싼 보석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 저것 좀 봐!..." "뭐? 아, 저거?..." "그래" 쉬크는 갖고 싶은 욕심에 군침을 삼켰다. "근데 저 책은 네가 갖고 있는 거로 아는데..." "저런 장정은 없어!... " "제발! 그만하고 빨리 가자. 나 바쁘다구!" "적어도 금화 한두 개는 있어야겠는걸." "그렇겠지." 코랭은 그렇게 말하면서 그 책방에서 멀어져 갔다. 쉬크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코랭, 돈 좀 빌려줘." 코랭은 걸음을 멈췄다. 안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금화 이만 오천 개도 오래가지는 못하겠구나." 쉬크는 얼굴을 붉히면서 머리를 숙인 채 손을 내밀었다. 돈을 받아든 쉬크는 서점으로 뛰어 들어갔다. 코랭은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쉬크의 기쁜 모습을 보자 이번에는 동정어린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너 미쳤구나! 얼마줬니?" "값은 중요하지 않아. 빨리 가자." 그들은 걸음을 재촉했다. 쉬크는 날으는 용을 탄 것처럼 보였다. 클로에의 집 앞에는 코랭이 주문한 하얀 자동차와 운전사가 금방 도착하여 사람들이 흥미있게 구경하고 있었다. 내부는 하얀 색 모피로 덮여 있었고, 훈훈한 온기와 함께 음악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고 구름은 가볍게 떠 있었다. 그렇게 추운 날씨는 아니었다.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바닥이 두 사람의 발 밑에서 부풀어오르더니 맥없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층에 멈췄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들은 벨을 울렸다. 문이 열렸다. 클로에가 기다리고 있었다. 셀로판으로 된 브래지어와 작은 흰색 팬티, 스타킹 외에 모슬린으로 짠 양면의 옷과 얇은 명주 망사로 된 커다란 베일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이 베일은 어깨에서부터 시작되어 머리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알리스와 이스시도 클로에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이들의 옷 색깔은 물빛이었다. 곱슬곱슬한 머리칼은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면서 내려오다가 어깨 쯤에서 진한 향기를 풍기는 묵직한 덩어리로 바뀌었다.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코랭은 알고 있었다. 클로에의 화장과 옷 매무새가 흐트러질까봐 껴안아보지도 못하고 코랭은 알리스와 이시스에게 매달렸다. 알리스와 이시스는 코랭이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보면서,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도록 가만히 있었다. 모든 방은 코랭이 고른 흰 꽃으로 가득 차 있었고, 흐트러진 침대 위에 붉은 장미꽃잎이 떨어져 있었다. 꽃향기와 여자들의 향기가 뒤섞이자 쉬크는 자신이 마치 꿀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알리스는 머리에 붉은 보라색의 난초꽃 한송이를, 이시스는 진홍색의 장미 한 송이를, 클로에는 하얀색의 굵은 동백 한 송이를 꽂고 있었다. 클로에는 백합꽃을 한다발 들고 있었는데, 막 만들어 방금 유약을 칠해 놓은 두릅나무 잎사귀모양의 팔찌가 푸른색 금팔찌 옆에서 광택을 내고 있었다. 약혼반지는 모르스 부호로 코랭의 이름을 그려 넣은 사각형과 장방형의 작은 다이아몬드로 덮여 있었다. 온 힘을 다해 크랭크를 돌리고 있는 촬영기사의 머리가 한쪽 모퉁이에 있는 꽃다발 밑에서 나타났다. 코랭은 잠깐 동안 클로에와 포즈를 취했고, 후에 쉬크, 알리스 그리고 이시스가 포즈를 잡았다. 모두들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먼저 탄 클로에의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의 케이블은 적재량을 초과할 경우 무거운 무게 때문에 굳이 단추를 누르지 않아도 저절로 움직였다. 하지만 다시 올라가 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두들 조심해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운전사는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세 아가씨는 뒷 좌석에 타고 쉬크가 앞자리에 오르자 곧 출발하였다. 거리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다 자동차를 돌아 보았다. 그들은 자동차 안에 있는 사람들이 대통령쯤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황금과 번쩍이는 무엇을 보고 다시 제 갈 길로 사라져 갔다. 성당은 그다지 멀지 않았다. 자동차는 우아한 하트 모양을 그린 후 계단 아래에 정차했다. 조각이 있는 두 개의 굵은 기둥 사이로 보이는 계단 위에서는 신부와 일꾼, 그리고 복사가 결혼식에 앞서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 뒷편에는 흰색의 긴 비단 휘장이 땅바닥까지 늘어져 있었고, 열네 명의 어린이 성가대가 발레를 추고 있었다. 남자 아이들은 흰 블라우스와 빨간 반바지 차림에 흰구두를 신고 있었다. 여자 아이들은 반바지 대신 빨간색의 짧은 주름치마를 입고 있었으며 머리에 빨간 깃털을 하나씩 꽂고 있었다. 일흔 세명의 연주가들이 발코니에서 벌써 무언가 연주하고 있었으며 종소리도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너무 가장자리에 있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 바람에 부악단장이 지휘봉을 다시 잡자 갑자기 불협화음이 들렸다. 지휘자가 돌바닥 위에 떨어지는 소리를 무마하려고 연주자들은 다른 화음을 구사했지만, 지휘자가 떨어진 소리는 성당 밑바닥부터 뒤흔들었다. 코랭과 클로에는 신부와 일꾼, 그리고 복사가 벌이는 퍼레이드를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두 명의 조수 복사들은 뒷편 성당 입구에서 미늘 창을 보여줄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부는 북채를 좋은 솜씨로 다루다가 마지막으로 북을 둥둥 울렸고, 일꾼은 피리로 고양이 울음소리만큼 아주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이 소리는 새로운 신부를 보려고 계단을 따라 쭉 늘어서 있던 여신도들의 신앙심에 불을 지피는 효과를 보였다. 복사는 마지막 화음을 내던 중 콘트라베이스 현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그때 열네 명의 어린이 성가대들이 한 줄로 늘어서서 계단을 내려왔는데, 여자 아이들은 자동차의 오른쪽에 남자 아이들은 왼쪽에 정렬했다. 클로에가 문에서 내렸다. 흰 드레스 속에서 그녀는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고 행복해 보였다. 알리스와 이시스는 그 뒤를 따랐다. 니꼴라는 이제 막 도착해서 그들과 합류했다. 코랭은 클로에와, 쉬크는 알리스와, 니꼴라는 이시스와 팔장을 끼고 계단을 올랐다. 데마레 형제의 형인 코리올랑은 오른쪽에 그리고 페가즈는 왼쪽에서 그 뒤를 따랐고 어린이 성가대원들이 짝을 지어 계단 양쪽에 늘어서 있었다. 코랭과 친구들은 층계에서 우왕좌왕 하던 끝에 성당 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완전히 마무리했다. 먼저 코랭이 알리스와 함께, 다음은 니꼴라가 클로에와, 마지막으로 쉬크가 이시스의 팔짱을 끼고 들어가는 것이다. 데마레 형제가 그 뒤를 따르는데, 이번에는 페가즈가 오른편에, 코리올랑이 왼편에 섰다. 신부와 신자들은 돌기를 멈추고 행렬의 선두에 서서 모두 다 함께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르며 문으로 몰려갔다. 조수 복사들은 성수가 가득찬 작고 가느다란 크리스탈 공을 지나가면서 머리로 깨뜨렸다. 그들의 머리에는 향을 피울 수 있는 막대기가 꽂혀 있었는데 남자에게선 노란색 불꽃이, 여자에게선 보라색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성당 입구에는 마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코랭과 알리스가 맨 앞에 서 있던 마차를 타고 곧장 출발하였다. 마차는 종교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어두운 통로로 들어섰다. 마차는 천둥소리를 내며 궤도 위를 질주했고, 음악은 우렁차게 울렸다. 복도 오른쪽으로 돌아서자 성인의 조각상이 녹색 빛을 받으며 나타났다. 그 조각상이 무시무시하게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기 때문에 알리스는 코랭에게 바짝 달라 붙었다. 거미줄이 얼굴을 스쳐 지나가자 기도문의 일절이 그들의 머리 속에 떠올랐다. 성모 마리아의 환영이 두 번째로 나타나고, 눈언저리에 멍이 든 마땅치않은 표정의 신이 세 번째로 나타나자 코랭은 알고 있는 기도문은 전부 다 떠올려 알리스에게 외워주었다. 마차는 귀가 멍할 정도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측면에 있는 돔 아래에 섰다. 코랭은 먼저 내려 알리스가 자기 자리로 가도록 길을 비켜주고 클로에를 기다렸다. 클로에는 금방 나타났다. 두 사람은 중앙 홀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와 있었다. 둘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아름다운 결혼식을 즐기고 있었다. 복사들은 예쁜 의상을 입고 깡총깡총 뛰면서 나타났다. 그 뒤를 이어 신부가 주교를 수행하며 등장했다.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자 주교는 커다란 빌로드 안락의자에 앉았다. 돌바닥에 놓인 의자에서 나는 소리는 듣기 좋았다. 음악소리가 순식간에 멈췄다. 신부가 제단 앞에 무릎을 끊고 머리를 땅에 세 번 부딪치고, 버동이 코랭과 클로에에게 자리로 안내하는 동안 복사는 어린이 성가대를 제단 양쪽에 정렬시켰다. 성당 내부에는 고요한 침묵이 흘렀고,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사방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와 금빛 물체 위에 매혹적인 광선을 일으켰으며 그 빛을 다시 사방으로 퍼뜨렸다. 성당 중앙 홀에 그려진 노란색과 보라색 줄무늬는 마치 누워있는 거대한 말벌의 배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높은 곳에 자리잡은 악단이 합창곡을 연주하기 시작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구름이 성당 안으로 들어 왔다. 구름에서는 산에서 자라는 풀냄새와 고수 냄새가 풍겼다. 성당 안은 따뜻해서 솜처럼 온화한 공기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았다. 손을 잡은 코랭과 클로에는 제단 앞에 하얀 비로드 천으로 덮인 기도대 앞에 무릎을 끓고 예식을 기다렸다. 신부는 두 사람 앞에서 두툼한 책을 아주 빠른 속도로 뒤적거리곤 했는데, 미사 문구를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는 가끔 고개를 들어 클로에를 힐끗 쳐다보기도 했는데, 그것은 클로에가 입고 있는 드레스가 무척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책장넘기기를 멈추고 일어섰다. 그가 지휘자에게 손짓을 하자 서곡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숨을 한번 내쉰 후 신부는 열한 대의 트럼펫 반주에 맞추어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주교는 사목 지팡이에 손을 올려놓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는 자기 차례가 되면 누군가 깨울것임을 알고 있었다. 코랭은 발표된지 오래된, 그래서 유명한 듀크 앨링턴의 편곡인 '클로에'를 서곡으로 연주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코랭 앞에는 예수가 커다란 검은색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 예수는 초대받아 기쁘다는 듯 모든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코랭은 클로에의 손을 잡은 채 예수에게 어렴풋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코랭은 약간 피곤했다. 결혼식에 금화 5천개라는 꽤 많은 비용을 소모했는데, 그만큼 성공적이어서 아주 흡족했다. 제단은 온통 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코랭은 그 순간 연주되는 곡이 마음에 들었다. 앞에 서 있는 신부를 보자 코랭은 그 곡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눈을 감은 채 약간 앞으로 숙이면서 말했다. "네" 클로에도 "네"라고 말했다. 신부는 두 사람의 손을 힘껏 잡았다. 연주는 더 힘차게 진행되었고 주교가 강론하려고 일어섰다. 복사는 두 줄로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로 살짝 들어오더니 책을 펼친 쉬크의 손가락을 지팡이로 세게 내리쳤다. 22 주교는 떠났다. 코랭과 클로에는 제의실 안에 선 채 행복하게 잘 살라는 악수와 축하욕설을 듣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하면 첫날밤을 잘 보낼 수 있는지 충고해 주기도 했다. 한 행상은 지나가다 말고 사진 한번 배워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클로에와 코랭은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성당 안에서는 계속해서 음악이 연주되었고 사람들은 춤추기 시작하였다. 성호를 그은 아이스크림과 다과류, 그리고 대구를 넣은 샌드위치가 제공되었다. 언제나 엉덩이에 커다란 구멍이 난 수도복을 입고 있던 신부는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는데, 그는 코랭이 지불한 5천개의 금화에서 생기는 수익금으로 새 외투를 사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지휘자가 연주 시작 전에 죽었다는 이유로 지휘자에게 지불해야 할 사례금 지불을 거부하는 사기행각을 벌였다. 복사들은 어린이 성가대원들이 입고 있던 옷을 벗기고 평상복으로 갈아입혔다. 복사 대장은 특별히 여자 어린이를 맡았다. 임시로 고용된 두 명의 조수 복사는 이미 떠났다. 칠장이의 트럭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칠장이들은 노란색과 보라색의 페인트를 벗겨서 진한 악취가 풍기는 작은 항아리에 다시 집어넣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코랭과 클로에 옆에 알리스와 쉬크, 이시스와 니꼴라도 역시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데마레 형제도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형이 옆에 있는 이시스에게 너무 다가서는 것을 본 페가즈는 그를 성도착자로 취급하고 있는 힘을 다해 엉덩이를 꼬집었다. 모두들 돌아가고 열두 명 정도가 남았다. 그들은 코랭과 클로에의 친구들로 오후 모임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제단 위에 장식된 꽃을 마지막으로 한번 더 감상한 후 성당을 나섰다. 층계로 내려서는 순간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클로에는 기침을 하기 시작하더니 재빨리 계단을 내려가 따뜻한 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쿠션에 몸을 파묻고 코랭을 기다렸다. 사람들은 계단 위에서 서성거리면서 연주가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23 코랭의 방은 정사각형 모양에 가까왔으며, 천장이 아주 높았다. 벽에는 바닥에서 대략 1미터 20센티 되는 지점에서부터 사방 50센티 정도 되는 창구가 나 있었다. 여기를 통해서 햇빛이 잘 들어왔다. 바닥은 연한 오렌지색의 두터운 카페트가 깔려 있었고, 벽에는 천연가죽이 걸려 있었다. 침대는 카페트 위가 아닌 벽 중간의 편편한 곳에 걸려 있었다. 붉은색과 흰색의 구리제품으로 장식된 시라쿠제 떡갈나무의 작은 사다리를 통해 침대에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침대를 놓은 편편한 곳의 아랫부분은 규방으로 쓰였다. 이곳에는 책과 안락의자, 달라이-라마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코랭은 아직 자고 있었다. 막 잠에서 깨어난 클로에는 코랭을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더 어려 보였다. 방안은 소방 펌프에 의해서 난방이 잘 되었다. 침대에 남아있는 것은 시트 한 장 뿐이었고, 그 나머지 것들은 온 방 안에서 곡예를 벌이고 있었다. 클로에는 턱을 무릎에 받치고 앉아서 눈을 문지르다가 기지개를 켜는 바람에 뒤로 넘어져 베개가 그 무게에 눌려 쑥 들어가 버렸다. 코랭은 긴 베개를 안고서 배를 깔고 누운 채 애늙은이처럼 침을 흘리고 있었다. 클로에는 웃음을 터뜨리면서 무릎을 끓고 앉아 코랭을 사정없이 흔들어 깨웠다. 잠에서 깨어난 코랭은 클로에에게 입맞춤을 하려고 일어났다. 클로에는 싫지 않은 듯 코랭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그를 특별한 곳으로 인도했다. 클로에의 살갗에선 복숭아 반죽같은 향취와 용연향이 풍겼다. 검은색 콧수염을 가진 회색 생쥐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니꼴라가 기다리고 있다고 알렸다. 두 사람은 신혼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급히 침대 밖으로 뛰어내렸다. 생쥐는 두 사람이 무관심한 틈을 타서 침대 머리 맡에 있었던 사포딜라 열매가 들어 있는 커다란 초코렛 상자에서 초코렛을 잔뜩 꺼냈다. 그들은 급히 세면을 끝내고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입은 후 서둘러 부엌으로 향했다. 니꼴라가 멋있는 요리로 아침 식사를 마련했다. 생쥐는 그들을 뒤따라오다가 복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왜 햇빛이 평소와 같이 그곳에 잘 들어오지 않는지 한 바탕 욕을 해대고 싶어서였다. "잘 잤어요?" 니꼴라가 물었다. 니꼴라의 눈은 검은색으로 그늘져 있었고, 안색은 흐리멍텅해 보였다. "잘 잤어요." 서 있기가 힘들었는지 클로에가 털석 의자에 주저 앉으면서 말했다. "잘 잤어? 니꼴라." 코랭이 미끄러져서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물었다. "내가 이시스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는데 예상했던 대로 술을 먹이더라고." 클로에가 물었다. "이시스의 부모님들이 안 계셨나봐요?" "네. 여사촌 두 명만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얼마나 나를 묶어두려고 했는지 몰라요." 코랭이 응큼하게 물었다. "몇 살인데?" "나도 몰라, 그런데 만져보니까 한 명은 열 여섯 살쯤 된 것 같고, 또 한 명은 열 여덟 살쯤 된 것 같았어." 코랭이 물었다. "그 집에서 밤 샜니?" "응!... 세 여자 모두 약간 취했었어. 그래서... 그 여자들을 침대에 눕혀야 했지. 이시스의 침대는 굉장히 크더라... 자리가 하나 남아 있었어. 너를 깨우고 싶지 않아서 그 여자들하고 같이 잤지." "잤다구요?...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보니 침대가 딱딱했나봐요..." 니꼴라는 어색하게 기침을 하더니 전열기구 주변에서 분주히 움직였다. 그리고 화제를 바꾸고 싶다는 듯 물었다. "맛 좀 보세요." 살구 속에 대추야자와 말린 자두를 넣고, 여기에 카라멜을 입혀 기름기가 있는 시럽에 담근 것이었다. "운전할 줄 알아?" 코랭이 니꼴라에게 물었다. "해보지." "냄새가 참 좋아요. 같이 아침 식사해요, 니꼴라." 클로에가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기력을 잘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을 먹어야 할까봐요." 니꼴라는 코랭과 클로에가 지켜보는 가운데 끔찍한 음료를 만들어 냈다. 백포도주와 식초 한 스픈, 달걀 노른자 다섯 개, 굴 두 개, 생크림과 함께 잘게 채친 쇠고기 백 그램, 차아황산염 소다 한 줌이 들어갔다. 이 모든 것이 전속력으로 움직이는 전자 가속기의 소리를 내며 그의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어때?" 찡그린 니꼴라를 보면서 코랭이 숨막힐 정도로 웃어대며 물었다. "괜찮아..." 니꼴라가 힘겹게 대답했다. 효과가 신속하게 나타났다. 그의 눈은 벤젠이라도 바른 것처럼 감쪽같이 검은 무리가 없어졌고, 안색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니꼴라는 몸을 흔들며 주먹을 쥐더니 얼굴을 붉혔다. 클로에는 약간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배 안 아파요? 니꼴라." "천만에요!... 다음 요리 드릴께요. 먹고 떠납시다." 24 커다란 흰색 자동차는 도로의 바퀴 흔적을 따라 조심스럽게 달렸다. 뒷좌석에서는 코랭과 클로에가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며 바깥풍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고, 새들은 코랭과 클로에의 자동차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과 같이 전화선에 닿을락말락 하게 날고 있었다. 새들의 날카로운 울음소리는 꼭 납을 입힌 듯 물구덩이의 수면 위에 반사되곤 하였다. 클로에가 코랭에게 물었다. "왜 꼭 이 길로 가야 되는 거죠?" "이게 지름길이야. 어쩔 수 없이 여기를 지나가야 해. 일반 도로는 낡았어. 날씨가 계속 좋아던 탓에 사람들이 그 도로로 많이 몰렸거든. 그래서 지금 남아 있는 도로는 여기뿐이라구. 불안해 하지마. 니꼴라가 운전을 잘 하니까." "저 빛." 클로에가 말했다. 클로에의 심장은 굉장히 딱딱한 달걀 껍질 속에 갇힌 것처럼 빠르게 고동쳤다. 한 쪽 팔로 클로에를 안은 코랭은 그녀가 새끼 고양기라도 되는 것처럼 머리칼 밑에 있는 클로에의 우아한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클로에가 움츠리면서 말했다. "그래요, 날 좀 만져주세요. 혼자는 두려워요..." "자동차 창 유리를 노란색으로 바꾸어 줄까?" "여러 색깔로요..." 코랭이 초록, 파랑, 노랑, 빨강의 단추를 누르자 자동차의 창 유리는 명령에 맞게 색깔이 바뀌었다. 그러자 무지개가 뜬 것 처럼 전신주를 지나칠 때마다 흰색 모피 위에서 알록달록한 색깔의 그림자가 춤을 추었다. 클로에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길 양 편에는 메마르고 빛 바랜 짧은 이끼가 있었고, 가끔씩 헝클어진 머리처럼 뒤얽히고 비틀린 나무도 나타났다. 바람 한점 안불어 잔 물결이 일지 않던 진흙탕 길은 차바퀴가 지나갈 때마다 흙탕물을 내뿜었다. 니꼴라는 무너진 도로 한가운데를 겨우 달리고 있었다. 니꼴라는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계속 이런 길이 이어지지는 않을 거예요. 금방 바뀔 거예요." 고개를 돌려 오른쪽 창유리를 보는 순간 클로에는 몸서리를 쳤다. 온몸이 비늘로 덮힌 짐승이 전신주 옆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저것 좀 봐요, 코랭... 저게 뭐죠?..." 코랭이 눈을 돌렸다. "나도 모르겠는데. 별로 험상궂은 것 같지는 않은데 ..." 니꼴라가 어깨너머로 대답했다. "전화선 고치는 사람이야. 진흙이 자기 몸에 튈까봐 저런 식으로 옷을 입는 거라구..." "그런데... 너무 흉하게 생겼어..." 클로에가 중얼거렸다. 코랭은 클로에를 꼭 껴안았다. "무서워 하지 마. 사람이잖아..." 자동차 바퀴가 굴러가는 땅이 전보다는 단단해진 것 같았다. 어슴푸레한 빛이 지평선을 물들이고 있었다. "저것 봐. 태양이야..." 코랭이 말했다. 니꼴라가 아니라는 듯 고래를 흔들었다. "저건 구리광산이야. 이제 곧 저기를 지나가게 될거야." 니콜라 옆에 있던 생쥐가 귀를 곤두세웠다. "이제 뜨거워질거야." 니꼴라가 말을 계속했다. 길은 여러 번 구부러졌다. 진흙탕에서 김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구리 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하얀 수증기가 자동차를 감쌌다. 조금 후에 진흙이 단단하게 굳어지면서 여기저기 금이 가고 먼지가 자욱한 차도가 나타났다. 저만치 앞에서는 엄청나게 큰 가마 속처럼 공기가 진동하고 있었다. "나는 저런게 싫어. 다른 쪽으로 가면 안돼요?" 클로에가 말했다. "이 길뿐이야. 구페의 책을 가져왔는데... 보겠어?" 코랭이 물었다. 그들은 여행 도중 필요한 것들은 모두 다 살 생각이었으므로 아무 것도 챙겨온 것이 없었다. "창유리 내려 줄까?" 코랭이 다시 물었다. "네, 이제는 빛을 견딜만해요." 다시 커브를 도는가 했더니 어느새 그들은 구리 광산 한가운데로 들어와 있었다. 계단 모양으로 늘어서 있는 광대한 면적의 푸르스름한 구리 광산은 그 건조함을 한없이 펼쳐보이고 있었다. 신비로운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 수백 명이 불 주위에서 일하고 있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피라미드 식으로 차곡차곡 쌓은 연료를 전기 광차에 계속해서 싣고 있었다. 열을 받아 녹은 구리는 붉은 개울처럼 흐르며 바위만큼 단단하고 구멍이 많은 광재로 변했다. 여기저기 보이는 거대한 저장소에 구리가 모아지면 기계가 그것을 펌프로 빨아들여 타원형의 관 속으로 옮기곤 했다. 클로에가 감탄했다. "굉장하네요!..." "꽤 많이 남는 사업이지." 몇몇 사람이 일손을 멈추고 자동차가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코랭 일행을 약간 비웃는 듯한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키가 크고 건장했으며 쉽게 동요되지 않을 사람들처럼 보였다. "저 사람들은 우리를 좋아하지 않아요. 여기를 빨리 빠져나가요." 클로에가 말했다. "일을 하니까..." 코랭이 말했다. "그건 이유가 되지 않아요." 니꼴라가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자동차는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구리가 용해되는 소리를 뚫으며 금이 가 있는 도로를 질주했다. "조금만 가면 편안한 도로를 만나게 될 거예요." 니꼴라가 말했다. 25 "그 사람들 왜 그렇게 냉소적이지요? 일하는게 즐겁지 않은가 봐..." "그들도 노동은 좋은 것이라는 말은 들어서 알고 있지. 그리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일하는 것이 좋다고 믿고 있고. 그렇지만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 그냥 습관적인거고, 그것에 대해서 특별히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뿐이야." "어쨌든 기계가 할 수 있는 일을 사람이 한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에요." "기계는 누가 만들고?" "물론 사람이 만들겠지요. 달걀을 만들려면 암탉이 있어야 하지만, 암탉만 있으면 달걀을 많이 가질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암탉에서 시작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왜 기계를 못 만드는지 알아야 해. 부족한 건 시간이야. 사람들이 생활에 시달려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 있으니 일 할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 거라구."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닌가요?" "아니야. 만약 사람들이 기계 만들 시간을 갖게 되면 그 이후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될거라구.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기계를 만들어 일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보다 일하면서 살려고 한다는 거야." "굉장히 복잡하군요." "아니야. 아주 간단해. 물론 이런 일은 점진적으로 일어날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소비재를 만드는라 시간을 모조리 소비하고 있어..." "그렇지만 당신은 사람들이 집에서 아내와 포옹하고 수영장에 가고 오락거리를 찾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들은 미처 그런 생각을 못해." "그렇지만 일하는게 즐겁다는 생각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의 잘못인가요?" "그래, 그건 그들의 잘못은 아니야. 왜냐하면 그들은 이런 말을 들었거든. '노동은 신성하고, 즐겁고, 아름답고, 가장 중요하고, 오로지 노동자만이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일을 시키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는데 그들은 그것을 이용하지 못하고 있는 거지." "그러면 그들이 바보란 말이예요?" "그래 그들은 바보야. 그래서 그들은 노동이야말로 가장 좋은 것이라고 믿게 만드는 자들과 사이좋게 지내게 되는 거라구. 그래서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발전을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일을 덜하기 위한 어떤 수고도 하지 않는 거야." "다른 얘기 해요. 그런 문제는 사람 힘만 빼겠어요. 내 머리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 "벌써 말했는데..." 코랭은 클로에를 무릎에 앉혔다. 그는 자신이 비할 데 없이 행복한 사람임을 다시 한번 느꼈다. "당신의 모든 것 그리고 구석 구석까지 다 사랑한다고 벌써 말했잖아." "자세히 더 얘기해 줘요." 클로에는 독없는 뱀처럼 코랭에 팔에 안기어 어리광을 부렸다. 26 "여기 내리시겠어요?" 니콜라가 물었다. 자동차는 도로변에 있는 호텔 앞에 섰다. 반사광이 물결처럼 어른거리는 미끈미끈하고 잘 닦여진 도로였다. 양편에는 원통형의 나무들과 싱그러운 풀, 태양, 들판의 암소, 낡은 울타리, 꽃이 만발한 생울타리, 사과가 달려있는 사과나무, 낙엽들, 여기저기 풍경의 변화를 연출하는 하얀 눈, 종려나무, 미모사, 호텔 정원의 북프랑스 소나무, 두 마리의 양과 술에 취한 개를 데리고 있는 헝클어진 적갈색 머리카락의 소년 등이 눈에 들어왔다. 길 한 쪽은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다른 한 쪽에는 바람이 불지 않았다. 그들은 마음 내키는 쪽을 택했다. 나무 두 그루 중 한 그루만이 그늘을 갖고 있었고, 구덩이들 중에서도 한 구덩이 속에서만 개구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내리자. 어쨌든 오늘 안으로 남쪽까지 갈 수는 없을 테니까." 코랭이 말했다. 니콜라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돼지 가죽으로 된 멋있는 운전사 복장에 잘 어울리는 우아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두 걸음쯤 물러선 후 자동차를 바라보았다. 코랭과 클로에도 차에서 내렸다. "우리 차가 아주 더러워졌네요. 진흙탕을 지나온거예요." 니콜라가 말했다. "괜찮아요. 호텔에서 세차하면 될거예요." 클로에가 말했다. "들어가서 방이 있는지 알아 보지. 먹을 만한 게 있는지도 살펴 보고." "좋아요." 니콜라는 손을 모자로 가져가며 대답했지만, 어떤 때보다도 더 격앙된 표정이었다. 니콜라는 밀랍을 입힌 참나무 살문을 밀었다. 손잡이가 빌로드 천으로 싸여 있어서 순간적으로 전율이 일어났다. 발 밑에서 바드득 소리가 나는 자갈밭을 걸어가는 듯한 느낌으로 두 번째 장소로 들어왔다. 창유리가 끼워진 문이 천천히 무겁게 열렸다. 미늘덧문이 내려지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햇빛은 부드럽게 사과를 비추고 마침내는 싱싱하고 푸르른 작은 사과나무를 부화시킨다. 사과나무는 순식간에 꽃을 피우고 더 작은 사과를 맺는다. 세 번째 장소로 들어서면 녹색의 이끼 종류와 장미 외에는 눈에 띄는 것이 없었는데, 여기서는 작은 사과가 구슬처럼 굴러다녔다. 몇 마리의 곤충들이 재빨리 날아다니며 햇빛 속에서 윙윙대고 있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쪽에서는 벼 이삭이 살며시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나뭇잎은 조용히 바삭바삭 소리를 내면서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날개 달린 곤충 몇 마리가 드넓은 호수 쪽으로 날고 있었는데, 증기선의 바퀴 소리와 비슷한 찰랑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기류를 거슬러 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코랭과 클로에는 아무 말없이 붙어서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심장은 부기 리듬에 맞추어 고동치고 있었다. 창유리를 끼운 문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났다. 니콜라가 다시 나타났다. 그의 모자는 엉망이었고, 옷도 헝클어져 있었다. "쫓겨 났어?" 코랭이 물었다. "아닙니다. 두 분에게 방을 내 주고 자동차도 맡아줄 수 있답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휴!... 주인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의 딸이 나를 맞이하였는데..." "옷차림 좀 정돈해. 단정해 보이지 않잖아." "용서하세요. 그렇지만 방 두 개를 얻기 위해서 이 정도의 희생은 각오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가서 옷 갈아입고 와. 정상적인 상태에서 이야기하자구. 자네는 지금 꼭 실패에 실을 감듯 내 신경을 조이고 있어!" 클로에는 하얀 눈을 작게 뭉치며 놀고 있었다. 부드럽고 차가운 눈송이는 쉽게 녹지 않고 하얀색으로 남아 있었다. "얼마나 예쁜지 보세요." 앵초와 수레국화 그리고 개양귀비가 흰 눈을 맞고 있었다. "그래, 그렇지만 눈을 만지면 안돼. 감기 걸릴지 모른다구." "아니예요." 이렇게 말한 클로에는 견직물이 찢어지는 듯한 기침 소리를 계속해서 냈다. 코랭이 클로에를 껴안으며 말했다. "나의 클로에, 그렇게 기침하지 말아! 내 마음이 아프단 말이야!" 클로에의 손에서 털어낸 눈이 솜털처럼 천천히 떨어지더니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기 시작했다. "나는 저런 눈이 싫어." 니콜라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난 후 즉시 말을 고쳤다. "제가 금방 한 말 용서해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코랭이 신발 한 짝을 벗더니 가차없이 니콜라를 향해 던졌다. 마침 니꼴라는 바지에 묻은 작은 얼룩을 지우려고 몸을 숙이고 있었다. 그는 유리깨지는 소리에 일어섰다. 니콜라는 나무라듯 소리쳤다. "그건 주인님의 창문이 아니란 말이예요!..." "할수없지! 바람이 잘 통하겠네... 바보같은 소리 하더니 잘됐지!..." 코랭은 클로에의 부축을 받아 한쪽 다리로 깡총깡총 뛰면서 호텔로 향했다. 깨진 유리창은 다시 자라나기 시작했다. 희미한 광채를 무지개처럼 내뿜으며 여러가지로 변해서 일정한 색깔이 없는 얇은 막이 창틀 가장자리에 생겨난 것이다. 27 "잘 잤니?" 코랭이 물었다. "그런대로, 너는?" 니콜라는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클로에가 하품을 하면서 꽃봉오리 시럽의 작은 단지를 집어 들었다. "나는 저 유리창 때문에 잠을 못 잤어요." "닫히지 않아요?" 니콜라가 물었다. "완전히 닫히지 않아요. 숫구멍이 활짝 열려 있어서 바람이 얼마나 밀려 들어 오던지. 오늘 아침 내 가슴은 눈으로 가득 뒤덮여 있었어요..." "치명적이군요. 제가 혼쭐이 나도록 야단칠께요. 그런데 오늘 아침에 떠나는 건 맞아요?" "오후에 떠나자." 코랭이 말했다. "그렇다면, 운전복을 다시 입어야겠군." "오! 니콜라... 너 계속 그러면... 나는..." "알았어. 지금 안 입을게." 니콜라는 봉오리 시럽을 단숨에 들이 마시고 버터를 바른 빵도 다 먹어치웠다. "부엌좀 보고 올게." 니콜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용 천공기를 이용해서 넥타이 매듭을 고쳐 매면서 말했다. 그가 방을 나서자 곧 이어 부엌을 향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고, 이내 작아졌다. "내가 어떻게 해 주었으면 좋겠어, 내 사랑하는 클로에?" "안아줘요." "그래!... 그리고 또?" "그리고... 큰 소리로 말할 수가 없어요..." "좋아. 그리고 무엇을 할거야?" "그리고 나면 아마 점심식사 시간이 될거예요. 안아줘요. 추워요. 이 하얀 눈이..." 태양이 황금빛 물결처럼 방 안으로 밀려왔다. "여기는 춥지 않아" "아니예요, 나는 추워요. 그리고 난 후에 알리스에게 편지를 쓸거예요..." 클로에가 코랭에게 바싹 다가서며 말했다. 28 길목 첫머리부터 장-쏠 강연회를 들으려는 사람들의 아우성으로 붐볐다. 초대장의 진위를 살펴보기 위해서 설치된 차단선의 감시망을 피하려고 사람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는데, 가짜 초대장이 만 장쯤 발견되었다. 어떤 사람은 영구차를 타고 나타났다. 헌병은 강철로 만든 긴 창으로 여기저기 쑤시면서 떡갈나무 관을 못질하여 다시 매장할 수 없도록 만들었고, 또 진짜 죽은 사람의 수의를 망가뜨리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특별기를 타고 와 낙하산으로 뛰어내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부르제에서는 서로 비행기를 타겠다고 싸우는 등 엉망이었다.) 소방대원은 그들을 상대로 소방호스로 물을 뿜어 공격함으로써 낙하산을 다른 곳으로 유인해냈다. 물론 그들은 현장에서 비참하게 익사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하수구 가장자리에 매달린 채 안간힘을 다 써 빠져나오려는 순간 이음새에 쇠를 붙인 구두발에 사정없이 채여 다시 하수도 속에 박혀버렸다. 그 뒷일은 들쥐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열성적인 팬들은 어떤 방해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물에 빠져죽는 사람 따로 있고, 끝없이 되풀이해서 시도하는 사람 따로 있었다. 그래서 이들의 웅성거림은 굵고 우렁차게 구르는 듯한 소리를 반사시키면서 절정을 향해 올라갔다. 순진한 사람들, 소식에 능통한 사람들, 주인공의 주변 인물들은 가짜와 쉽게 구별되는 진짜 증명서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비밀 요원들이 50센티 간격으로 지키고 있는 아주 좁은 통로를 지나 모여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숫자는 엄청나게 많았고, 강연장은 이미 모여든 사람들로 가득하였고, 밀려드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쉬크는 전날 밤부터 이곳에 와 있었다. 수위에게 엄청난 돈을 주고 그를 대신하기로 하였는데, 이 일을 위해서 예비용 쇠지레로 수위의 왼쪽 다리를 부러뜨렸다. 쉬크는 파르트르에 관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았다. 알리스와 이시스도 함께 파르트르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강연을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이 곳에서 밤을 지샌 것이다. 진한 녹색의 수위 제복을 입은 쉬크는 아주 매혹적이었다. 코랭으로부터 받은 2만 5천개의 금화는 쉬크를 게으르게 만들었다. 밀려든 청중들의 생김새는 아주 별스러웠다. 남자들은 이마가 뒤로 젖혀진 얼굴에 안경을 끼고 있었다. 머리털은 빳빳하게 섰고, 노르스름해진 담배 꽁초를 피우기도 하고 과자를 먹다가 트림을 하기도 하였다. 여자들은 길게 땋아 늘어뜨린 별볼일없는 머리를 두 개골에 두른 사람, 알몸 위에 짧은 털외투를 걸쳤기 때문에 젖가슴 일부가 어둠 속에서 얼핏 보이는 사람 등 천태만상이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1층 대강의실의 천장 절반은 유리가 끼워져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프레스코 그림이 차지하고 있었다. 절망적인 또한 여성적인 서민생활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는 청중들의 관심을 모으기에 적합했다. 늦게 도착한 사람들은 한 쪽 발로 바싹 붙어 있는 옆 사람을 밀어내야 했기 때문에 다른 한 발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보부아르 공작부인과 수행원들이 뻐기면서 앉아 있는 특별석은 무기력한 서민의 시선을 끌었는데, 옷차림이 어찌나 사치스러웠는지 접는 의자에 열을 지어 앉아 있는 철학자들의 모습이 우스워보일 정도였다. 강연회 시간이 다가오자 청중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몇몇 학생들은 오르끄지 남작부인이 쓴 <산 위에서의 서약>에 나오는 구절 중 일부를 삭제해서 큰 소리로 낭독했다. 그들이 청중의 마음 속에 의혹을 심어주려고 애쓰는 바람에 한쪽에서 소동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장-쏠 파르트르가 가까이 오고 있었다. 코끼리의 콧소리가 길에서 들려오자 쉬크는 수위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내려다 보았다. 코끼리 등 위에 철갑을 두른 가마에 올라 탄 장-쏠의 그림자가 멀리 보였다. 주름투성이의 거칠은 코끼리 등은 신호등의 빨간 불빛을 받아 괴상하게 보였다. 가마의 네 귀퉁이에서는 도끼로 무장한 특급사수들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코끼리는 군중을 헤치며 성큼성큼 나아갔다. 네 개의 기둥이 쿵쿵거리는 듯한 발소리는 가혹한 운명처럼 가까워졌다. 문 앞에서 코끼리가 무릎을 꿇자 특급사수들이 내렸다. 파르트르가 우아하게 사수들 사이로 뛰어내리자 경호원들이 도끼를 휘둘러 길을 내주었다. 파르트르는 연단을 향했다. 비밀요원들이 모든 문을 닫자 쉬크는 이시스와 알리스를 이끌고 연단 뒤로 통하는 비밀통로로 달렸다. 연단 뒤쪽에는 표피로 된 비로드 천을 걸어 놓았는데, 쉬크는 여기에 구멍을 뚫었다. 그들은 방석에 앉아 기다렸다. 그들로부터 1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파르트르가 강연문 읽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금욕주의자를 연상시키는 그의 유연한 몸에서는 신비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가 하는 사소한 동작 하나에도 가공할 만한 매력이 배어 있었다. 거기에 사로잡힌 청중은 초조한 표정으로 시작을 알리는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들은 자궁이 흥분하는 바람에 졸도하는 일이 많았다. 연단 아래까지 접근해 와서는 공간을 덜 차지해야 된다며 주섬주섬 옷을 벗는 스물 여덟 명의 헐떡임을 알리스와 이시스, 쉬크는 나란히 듣고 있었다. "생각나?" 알리스는 정겨운 눈길로 쉬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우리 저기에서 만났지..." 쉬크는 알리스에게 고개를 숙여 부드럽게 키스했다. "두 사람이 저기 있었어?" 이시스가 물었다. "응, 재미있었어." "그랬을 것 같군. 그런데 쉬크, 그게 뭐지?" "녹음기야. 강연회 때 쓸려고 샀어." 쉬크는 옆에 있던 검은 상자를 열기 시작했다. "야! 정말 좋은 생각인데!... 그게 있으면 열심히 귀 기울일 필요가 없잖아!..." "그래, 게다가 집에서 밤새도록 들을 수도 있어. 물론 테이프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선 그렇게 하지 않는게 좋겠지만. 나는 녹음을 해 갖고 '성자의 외침'같은 상점에 부탁해서 상업판을 발매하도록 할거야." "돈이 많이 들 텐데..." "아! 그런 건 상관없어!..." 알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알리스 자신에게만 들릴 정도로 가벼운 한숨이었다. "강연이 시작됐어! 책상 위에 있는 공용 라디오에 내 마이크를 설치해 놨어. 발각되지 않을 거야." 장-쏠의 강연이 막 시작됐다. 무엇보다도 셔터의 철컥거리는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신문사와 방송사, 영화사의 사진기자 그리고 리포터들의 취재가 열을 올리며 시작됐다. 그 중 한 사람이 뒤로 물러서려다 넘어져 끔찍한 혼란이 일어났다. 화가 난 동료들이 그에게 달려들더니 마그네슘 분말을 뿌렸다. 눈부신 섬광 속으로 사라지는 그를 보며 모두들 흡족해 했고, 비밀요원들은 그 자리에 남아 있는 모두를 감옥으로 끌고 갔다. "신난다! 나 혼자만 녹음하는 거야!" 쉬크가 소리쳤다. 비교적 조용했던 청중들은 이제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파르트르가 한마디 할 때마다 고함과 감탄사가 터져나왔고 찬미하는 통에 강연 내용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다 알아들으려고 애쓰지 말아. 시간이 나면 녹음된 걸 들으면 되니까." 쉬크가 말했다. "여기에서는 단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어. 생쥐가 찍찍거리는 것같이 소리가 작아. 참, 클로에 소식 들었어?" "편지 한 통 받았어." 알리스가 대답했다. "드디어 도착했니?" "응, 떠나는건 성공했는데, 머무르는 기간은 단축할 모양이야. 클로에 건강이 별로 좋지 않다는데." "니콜라는?" "잘 있대. 클로에 말에 니콜라가 호텔마다 주인 딸한테 못된 짓을 하나봐." "그 사람 괜찮은 사람인데. 난 왜 요리사가 됐는지 궁금해." 쉬크가 끼어들었다. "그래. 그건 참 이상해." "왜들 그래?" 알리스가 말했다. "나는 파르트르 수집가보다 요리사가 낫다고 생각해." 쉬크의 귀를 꼬집으며 알리스가 덧붙였다. "클로에가 큰 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편지에 무슨 병인지를 쓰지 않았어. 가슴이 아프다던데..." "클로에는 정말 예뻐. 아프다는 게 상상이 안돼." 쉬크가 소곤거렸다. "아! 저것 좀 봐!..." 천장 일부가 들어 올려지더니 머리들이 일렬로 나타났다. 대담한 팬들이 아무도 몰래 대형 스테인드글라스까지 접근하여 까다로운 작전을 실시한 것이다. 경호원들이 떼밀어내자 사람들은 창문 테두리에 악착같이 매달렸다. "저 사람들 잘못은 없어. 이 강연은 굉장한 거니까!..." 파르트르가 일어나더니 토사물의 박제 견본들을 청중에게 보여주었다. 날사과와 적포도주가 섞인 아주 아름다운 토사물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시스와 알리스와 쉬크가 있던 막 뒤도 마찬가지였다. "걔네들 언제쯤 오지?"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한대." "본 지 굉장히 오래된 것 같애!..." "그래 결혼식 때 보고 못봤잖아..." "결혼식은 정말 성공적이었어." "그래, 바로 그날 저녁 니콜라가 너를 배웅했었지..." 쉬크가 한마디 거들었다. 다행히 천장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강연장으로 내려앉는 통에 이시스는 그 날 밤일을 꼬치꼬치 애기하지 않아도 됐다. 먼지가 구름처럼 솟아 올랐다. 회반죽 부스러기 속에서 희끄무레한 형체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비틀거리더니 잔해 위를 떠도는 숨 막힐 듯이 자욱한 연기에 질식되어 쓰러졌다. 파르트르가 강연을 멈추었다. 그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같은 돌발사건에 휘말리는 광경을 보게 돼 즐겁다는 듯 엉덩이를 두드리며 껄껄 웃어댔다. 그리고 먼지를 한 모금 들이마시더니 미친 사람처럼 기침하기 시작했다. 흥분한 쉬크는 녹음기 스위치를 돌렸다. 굵은 초록빛 섬광이 지면 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더니 마루판의 틈새로 사라졌다. 두 번째, 세 번째 섬광이 계속되었다. 다리가 수없이 많이 달린 흉칙한 짐승이 녹음기에서 나오려는 순간 전원을 꺼버렸다. "내가 뭐하는 거지? 이거 움직이지 않잖아? 마이크에 먼지가 끼었군." 강연장은 수라장이 되었다. 병에 들어 있던 물을 다 마신 파르트르는 강연장을 떠날 준비를 하였다. 마지막 원고를 다 읽은 것이다. 쉬크는 결심했다. "이쪽 출구를 사용하라고 권해야지. 앞서 가십시오. 제가 따라갈께요." 29 복도에 들어선 니콜라는 걸음을 멈췄다. 거의 햇볕이 들어 오지 않음이 분명했다. 타일을 깐 바닥은 옅은 안개로 둘러싸인 듯 건조해 보였다. 햇살은 금속성의 작은 방울이 되어 튀어오르는 대신 지면에서 으깨져 둔하고 연한 물구덩이가 되어 여기저기 흩어져버렸다. 양떼구름처럼 생긴 해가 떠 있던 벽도 이제는 예전처럼 균일하게 광을 내지는 않았다. 생쥐들은 이러한 변화를 특별히 불편해 하지는 않았지만, 검은 수염의 회색 생쥐만은 답답함을 역력히 나타냈다. 니콜라는 이 수염 생쥐가 여행을 중도에 그만 둔 것에 대하여, 또 여행 중에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관계를 맺지 못한 것에 대하여 많이 아쉬워 하고 있다고 짐작하였다. "불만스럽니?" 니콜라가 물었다. 생쥐는 불쾌하다는 몸짓을 하더니 벽을 가리켰다. "그래, 이건 아니야. 전에는 훨씬 더 나았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니꼴라는 걸음을 멈추고 뭔가 생각하더니 역시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생쥐가 팔짱을 낀 채 건성으로 뭔가를 씹다가 고양이용 츄잉검인 것을 알고는 급히 뱉어냈다. 가게주인이 착각했던 모양이다. 클로에는 코랭과 함께 식당에 앉아 있었다. "어때? 좀 나아졌어?" "어, 그렇게 평범한 말투를 쓰기로 했어?" 코랭이 말했다. "옷에 갖춰 신을 구두가 없거든." 니콜라가 설명했다. "나쁘지 않은데요." 클로에가 말했다. 클로에의 눈은 생기있게 반짝거리고 있었고, 집에 돌아와 기쁜지 안색이 좋았다. "클로에가 닭고기 파이를 절반이나 먹었어." "기분좋은 일이네. 그런데 그건 구페의 요리가 아니잖아." "오늘은 뭘하고 싶어, 클로에?" 코랭이 물었다. "지금 곧 아침 식사를 하면 어떨까?" 니콜라가 끼어들었다. "두 사람하고 이시스, 쉬크 그리고 알리스와 외출도 하고 스케이트장에도 가보고 싶고, 쇼핑도 하고 댄스파티에 가보고 싶고, 초록색 반지도 하나 사고 싶어요." "좋아요, 그럼 지금 즉시 요리를 시작할께요." "평상복 차림으로 요리해요. 그래야 우리 마음이 훨씬 더 편하니까요. 게다가 외출 준비도 금방 끝낼 수 있을 거구." "나는 금화상자에서 돈을 꺼내 올게. 클로에 당신이 친구들한테 전화 해. 멋진 외출이 될거야." "그래요, 내가 전화할게요." 클로에가 전화기 쪽으로 달려갔다. 수화기를 집어든 클로에는 자기가 쉬크와 통화하고 싶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부엉이 울음 소리를 냈다. 니콜라가 작은 지렛대를 눌러 식탁을 치우자 더러운 식기들이 카페트 밑에 감추어진 굵은 수송관을 통해 수채 구멍으로 나갔다. 그가 복도로 나가자 생쥐가 뒷다리를 들고 타일 하나를 열심히 문지르고 있었다. 생쥐가 문지른 타일은 다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야! 드디어 해냈구나!... 놀랍다!" 생쥐는 까쁜 숨을 몰아쉬며 살갗이 벗겨져 피가 나고 있는 손가락 끝을 니콜라에게 보여주었다. "아프겠다!... 이리와. 아직도 이쪽은 햇볕이 많이 드니까 여기로 오라구. 내가 붕대를 감아줄께..." 니콜라는 생쥐를 가슴팍 호주머니 속에 집어 넣었고, 생쥐는 두 눈을 반쯤 감은 채 헐떡거리며 다리를 주머니 밖으로 늘어뜨렸다. 코랭은 금화가 든 상자 손잡이를 돌리며 콧노래를 불렀다. 최근 들어 이유없이 밀려오던 불안에서 벗어난 그는 자신의 심장이 오렌지 모양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상자는 상아를 박아 넣은 흰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고, 손잡이는 초록색과 검정색이 섞인 자수정으로 되어 있었다. 상자에 달린 수량기가 6만 개의 금화를 가리키고 있었다. 뚜껑이 삐걱거리며 부드럽게 움직이는 순간, 코랭은 미소를 거두었다. 수량기가 두세 번 진동하더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지하면서 3만 5천의 눈금에서 멈추어 버렸다. 상자 속에 급히 손을 집어 넣은 코랭은 이 수치가 정확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재빨리 암산해 본 그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10만 개 중에서 알리스와의 결혼 비용으로 2만 5천 개를 쉬크에게 주었고, 자동차 값으로 5천 개를 썼고, 결혼식 비용으로 5천 개를 썼으니... 물론 나머지는 저절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코랭은 다소 안심했다. "모든 것이 정상이야." 코랭은 큰소리로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변하고 있었다. 필요한 만큼 금화를 집어 들었던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절반은 다시 상자 속에 집어 넣었다. 손잡이가 딱딱 소리를 내며 급속히 돌아갔다. 그는 수량기의 숫자판을 톡톡 치면서 바늘이 정확한 숫자를 가리키고 있음을 확인했다. 코랭은 몸을 일으켰다. 클로에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을 해주기 위한 비용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사실에 놀라 잠시 서 있었다. 그는 아침마다 머리가 풀어진 채 침대에 누워 있는 클로에를 생각했다. 누워있는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는 시트의 모양, 시트를 들추었을 때 보이는 그녀의 호박색 피부를 생각하며 미소짓다가 마지못해 금화상자를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들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클로에가 옷을 입고 있었다. "니콜라에게 샌드위치를 만들라고 말해줘요. 지금 곧 떠날 수 있도록... 이시스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어요." 코랭이 그녀의 어깨를 껴안고 니콜라에게 알리기 위하여 달려갔다. 생쥐를 막 치료해 주고 난 니콜라는 대나무로 목발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됐어, 오늘밤까지 목발을 짚고 다니면 표시가 안 날거야." "생쥐가 왜 이렇게 됐지?" 코랭이 생쥐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생쥐가 복도의 타일 바닥을 청소하려고 했어. 청소는 깨끗하게 됐지만, 덕분에 이렇게 된거야." "걱정마. 혼자 있어도 곧 나을 거야." "모르겠어. 이상해. 타일이 숨을 잘 못 쉬는 것 같애." "괜찮아지겠지... 아무튼 괜찮을 거야...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잖아?" "그래" 코랭이 부엌 창문 앞에 잠시 서 있었다. "아마 오래돼서 낡은 것일지도 몰라. 바꾸어 볼까..." "돈이 꽤 많이 들텐데." "그렇겠군, 기다리는 게 낫겠어." "어떻게 할건데?" "요리하지 마. 샌드위치만 조금 만들어... 지금 곧 떠나야 되니까." "좋아. 나도 옷을 입어야지." 니콜라가 생쥐를 바닥에 내려놓자 생쥐는 작은 목발을 짚고 비틀거리면서 문으로 향했다. 생쥐의 수염이 양쪽으로 삐져 나와 있었다. 30 코랭과 클로에가 떠난 뒤 거리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이제 나뭇잎들도 어느 정도 커졌고, 생기없던 색깔의 집들도 지난 여름이 남겨놓은 부드러운 베이지색을 벗어나 희미한 녹색을 띠기 시작했다. 포장된 도로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자 탄력성을 갖게 되면서 부드러워졌고, 공기는 나무딸기 향으로 가득찼다. 날씨는 아직 쌀쌀한 공기를 담고 있었지만, 푸르스름한 유리 창문 뒤에 좋은 날씨가 가까이 있음이 느껴졌다. 초록색과 푸른색의 꽃들이 인도 변에서 자라나고 있었고, 수액(樹液)은 달팽이들이 입을 맞출 때처럼 가볍고 축축한 소리를 내면서 가느다란 꽃줄기 둘레를 감돌아 올라갔다. 니콜라가 맨 앞에서 걸었다. 그는 따뜻한 모직으로 된 겨자 빛깔의 운동복을 상하로 입고 안에는 목부분이 둥글게 말린 두툼한 스웨터를 받쳐 입었는데, 자가드 직물로 짠 그 스웨터에는 구페의 요리책 607페이지에 나오는 연어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꽃들이 고무창이 달린 그의 노란 가죽구두에 살짝 구져지곤 했다. 그는 자동차를 위해 파 놓은 두 고랑 사이를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코랭과 클로에가 뒤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클로에는 코랭의 손을 잡은 채 공기를 흠뻑 들이마시며 향내를 맡았다. 클로에는 작은 흰색 모직 드레스 위에 표범가죽 반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부드럽게 가공된 가죽의 표범 무늬 얼룩은 확대되어 달무리로 변하기도 했다가 다시 떼어져 기묘하게 서로 충돌하기도 했다. 그녀의 머리칼은 이리저리 자유롭게 나부끼면서 쟈스민 향과 패랭이 꽃 향기가 섞인 부드러운 냄새를 발산했다. 코랭은 눈을 반쯤 감은 채 그 향기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그의 입술은 향기를 들이마실 때마다 살며시 떨리곤 했다. 소름끼칠 정도로 반듯반듯해 보이던 집들의 표면이 약간 흐트러진 모습으로 보였다. 니콜라는 당황해서 에나멜 칠을 한 표지판을 읽느라 이따금씩 걸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무엇부터 할거야?" 코랭이 물었다. "백화점에 가야겠어요. 입을 옷이 하나도 없거든요." "평소에 잘 가는 '깔로뜨 자매' 양장점으로 가지 그래" "아니예요. 백화점에서 기성복도 사고 다른 것도 이것 저것 살래요." 코랭이 니콜라에게 말했다. "이시스가 당신을 보면 틀림없이 좋아할거예요." "왜?" 니콜라가 물었다. "글쎄요..." 시드니 베쎄 거리를 돌아서니 목적지가 나왔다. 수위는 문 앞에 놓인 자동 흔들의자에 앉아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는데, 의자에 장치된 엔진이 폴카 리듬에 맞추어 폭발음을 냈다. 낡은 시스템이었다. 이시스가 그들을 맞이했다. 쉬크와 알리스는 이미 와 있었다. 빨간색 드레스를 걸친 이시스가 니콜라를 보고 웃었다. 그녀가 클로에를 껴안았고, 두 사람은 잠깐 서로 키스를 나누었다. "안색이 좋은데, 클로에. 아픈줄 알았어. 이제 안심이야." "응,좋아졌어. 니콜라와 코랭이 보살펴준 덕이지." "사촌들은 잘 있나요?" 니콜라가 물었다. "이틀에 한번씩 당신 소식을 물어요." 이시스의 대답에 니콜라가 살짝 돌리면서 말했다. "매력적인 아가씨들이예요. 그렇지만 당신은 폐쇄적이예요." "그건 그래요..." "여행은?" 쉬크가 물었다. "좋았어. 처음에 도로가 엉망이었지만 괜찮아졌어." 코랭이 대답했다. "눈이 온 것만 빼면 아주 좋았는데..." 클로에는 가슴으로 손을 가져갔다. "우리 이제 어디 가요?" 알리스가 물었다. "원한다면 파르트르의 강연 내용을 요약해 줄 수 있는데." 쉬크가 말했다. "우리가 여행 떠난 후에도 파르트르 작품 많이 샀니?" 코랭이 물었다. "응!... 아니... 아니야..." "직장 일은 어때?" "아!... 잘 돼가고 있어... 내가 쫓겨나면 대신 들어올 친구가 한 명 있지." "그 사람이 무보수로 일한단 말이야?" "아!... 거의 돈을 안 받지! 지금 곧 스케이트장이나 가는 게 어때?" "아니예요, 우리는 백화점에 들르기로 했어요. 그렇지만 남자들이 스케이트를 타고 싶다면..." "그것도 괜찮은 생각인데." 코랭이 대답했다. "내가 여자들이랑 백화점에 갈께. 나도 이것 저것 사야 되거든." 니콜라가 말했다. "그래도 좋겠군요. 우리도 쇼핑을 빨리 끝내면 스케이트를 탈 수 있을거야." 이시스가 말했다. 31 코랭과 쉬크가 스케이트를 탄지 한 시간쯤 지나자 빙판 위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늘 똑같은 소년 소녀들, 여느 때와 똑같은 낙하, 변함없이 긁는 연장을 들고 있는 청소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거의 매일 스케이트장을 찾는 단골들이 외우다시피 한 레코드판이 또 다시 올려졌다. 그 노래가 끝나자 뒷면을 틀었는데, 갑자기 레코드판이 멈춰지면서 모든 스피커를 통해서 맥빠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로지 하나의 스피커에서만 음악이 계속해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 맥빠진 목소리는 전화가 왔으니 통제실로 와달라고 코랭에게 전하는 메시지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코랭은 쉬크와 함께 서둘러 트랙 가장자리로 가더니 고무로 된 깔개 위에 올라섰다. 바를 따라 걸어가다가 전화기가 있는 통제실로 들어갔다. 레코드판을 돌리는 남자가 낡은 레코트 표면에 생긴 우둘두둘한 부분을 닦아내려고 솔로 문지르고 있었다. "여보세요!" 코랭이 수화기를 집어들며 말했다. 쉬크는 그가 처음에 놀란 표정을 짓더니 얼굴 빛이 순식간에 얼음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심각한 일이야?" 코랭이 입 다물라고 손짓을 했다. "지금 갈께." 코랭이 수화기에 대고 이렇게 말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통제실의 벽이 죄어들자 그는 쉬크와 함께 으깨지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는 스케이트를 신은 채 질주했다. 그의 발이 이리저리 꼬였다. 코랭은 심부름꾼을 불렀다. "빨리 내 탈의함을 열어줘요. 309번이요." "내 것도 열어줘요. 311번... " 쉬크도 말했다. 심부름꾼은 서두르는 기색없이 두 사람을 어슬렁 어슬렁 따라왔다. 코랭은 고개를 돌려 심부름꾼이 10미터쯤 떨어져 걸어오는 것을 보고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코랭은 스케이트를 신은 발로 심부름꾼의 턱 밑을 사정없이 난폭하게 올려찼다. 그의 머리가 기관실의 환기구 위에 떨어져 나갔다. 시체가 건성으로 들고 있는 열쇠를 코랭이 낚아챘다. 탈의함 하나를 연 코랭은 시체를 안으로 밀어 넣고 침을 뱉은 후 309번 탈의함을 향해 뛰었다. 쉬크가 문을 다시 닫았다. 쉬크가 숨을 헐떡이며 나타나 물었다. "무슨 일이야?" 코랭은 벌써 스케이트화를 벗고서 구두를 신은 상태였다. "클로에가 아파." "중병이야?" "몰라 졸도했나 봐." 코랭이 달리기 시작했다. 쉬크가 소리쳤다. "어디 가?" "우리집!..." 코랭이 소리치더니 소리가 쩡쩡 울려퍼지는 콘크리트 계단으로 사라져 버렸다. 스케이트장 반대편에서는 기관실이 환기되지 않는 바람에 질식한 사람들이 그곳을 빠져나왔다가 기진맥진한 채 트랙 주변에 털썩털썩 주저앉았다. 어안이 벙벙해진 쉬크는 손에 스케이트화를 든 채 코랭이 사라진 곳을 막연하게 쳐다보았다. 128번 탈의실 문 아래에서는 피가 거품을 일으키며 도랑처럼 꾸물꾸물 천천히 흘러나왔다. 그 붉은 액체는 다시 김을 모락모락내며 굵고 무거운 방울이 되어 얼음판 위를 흐르기 시작했다. 32 코랭은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눈 앞에 있던 사람들이 천천히 한쪽으로 기울어지더니 맥없이 찰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둥처럼 넘어져서 도로 위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것은 마치 손에서 놓친 커다란 상자와 같은 모습이었다. 코랭은 끝없이 달렸다. 그러자 건물 사이에 꽉 조여져 있었던 지평선의 날카로운 모퉁이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다 보니 밤이 되었다. 무기질에 무정형인 검정색 솜같은 밤과 무색의 천장같은 하늘, 그리고 날카로운 모퉁이였다. 그는 피라밋의 꼭대기를 향해 달리다가 어둠이 덜 한 곳에서 멈칫했다. 그러나 집까지는 아직도 세 블럭을 더 달려야 했다. 클로에는 첫날밤을 보낸 아름다운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호흡이 곤란한 것 같았다. 알리스가 그녀와 함께 있었다. 이시스는 구페의 책을 보면서 강장제를 만드는 니콜라를 도왔고, 생쥐는 침대 머리맡에서 마실 음료를 만들기 위해 탕약용 풀씨를 날카로운 이빨로 씹어 으깨고 있었다. 그러나 코랭은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쉬지 않고 달리면서 두려움에 떨었다. 왜 항상 함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것일까. 왜 두려움에 떨고 있는가. 어쩌면 사고일지도 몰라. 자동차에 치었는지도 몰라.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을거야. 그녀를 다시 못 볼지도 몰라. 그들이 나를 못 들어가게 할지도 몰라. 그렇지만 내가 클로에를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할거야. 나는 누가 뭐래도 클로에를 만날거야. 그렇지만 안돼, 코랭, 들어오지마... 어쩌면 가벼운 부상만 입었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손을 잡고 내일 블로뉴 숲에 가야지. 그리고 벤치에 앉아 잠자리에서 느낄 수 있는 그녀 향기가 배어 있는 머리칼에 내 머리카락을 갖다 댈거야. 눈 앞에서 길 바닥이 벌떡 일어서는 것 같았다. 그는 그것을 거인처럼 껑충 뛰어 넘어 2층으로 올라섰다. 문을 열었더니 검은 옷을 입은 사람도, 수도사도 없이 조용하고 평온했으며 회색과 푸른색의 그림이 그려진 카페트에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니콜라가 '별일 아니야.'라고 말했고, 클로에는 그를 다시 보게 되어 기쁘다는 듯 웃고 있었다. 33 클로에는 코랭에게 손을 맡겼다. 그녀는 코랭을 보고 있었다. 코랭은 약간 놀란 듯한 그녀의 맑은 눈을 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방 안에는 편편하게 쌓여 있던 근심들이 서로 밀치면서 머리를 들고 있었다. 가슴 속에 알 수 없는 힘이, 적대적인 존재가 있다고 느낀 클로에는 어떻게 싸워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자신의 육체 깊은 곳에 매달려 있는 적을 끌어내려고 가끔 기침을 하곤 했다. 클로에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가슴 속에 있는 적의 분노와 음험한 악에 그대로 굴복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숨소리는 가까스로 들렸다. 반들반들한 시트가 벌거벗은 긴 다리에 닿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렸다. 코랭은 허리를 약간 구부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밤이 되자 침대 머리맡에 켜놓은 램프가 동심원을 그리면서 작은 광핵 속으로 클로에를 빨아들였다. "음악을 들려주세요. 당신이 좋아하는 곡으로요." 클로에가 말했다. "피곤할텐데." 코랭의 말 소리는 아주 멀리에서 들려오는 듯했고, 그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그는 심장이 가슴을 전부 다 차지하고 있는 듯 느꼈다. "피곤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들려 주세요." 코랭이 일어나 떡갈나무 작은 사다리로 내려가 자동식 전축 위에 레코드판을 올렸다. 모든 방에 스피커 설치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 방의 스피커만 작동시켰다. "무슨 음악 틀었어요?" 클로에는 미소를 지었다. 무슨 노래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나?" "그럼요..." "아프지 않아?" "심하지는 않아요."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큰 강은 건너기 어렵다. 그곳에는 표류물이 춤을 추는 거품투성이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만들어진다. 외부의 어둠과 램프의 불 사이에 있던 추억은 암흑으로부터 역류해서 빛과 부딪치고 가끔은 빛 속에 잠기기도 하고, 빛 밖으로 나오기도 한다. 그러면서 하얀 배와 은빛을 드러내기도 한다. 클로에가 몸을 약간 일으켰다. "가까이 와. 내 옆에 앉아." 클로에에게 가까이 다가간 코랭이 비스듬히 누웠고, 그녀의 머리는 그의 왼팔에 푹 파묻혔다. 얇은 브라우스에 달린 레이스는 클로에의 금빛 피부 위에 제멋대로 무늬를 만들어 냈다. 이제 막 솟아오른 젖꼭지는 살며시 부풀어 올랐다. 클로에의 손이 코랭의 어깨를 꽉 움켜잡고 있었다. "화나지 않았어요?" "왜 화가 나?" "나같이 바보같은 아내를 얻어으니까요..." 코랭은 클로에의 어깨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팔을 조금만 집어넣어. 감기들겠어." "나는 춥지 않아요. 음악이나 들으세요." 자니 히쥐의 연주엔 아주 가볍고 설명하기 힘든 어떤 관능적인 것이 깃들어 있었다. 육체에서 해방된 순순한 형태의 관능으로 들려왔다. 음악 소리는 방의 모퉁이를 모두 다 둥글게 바꾸어 놓았다. 코랭과 클로에는 이제 동그란 구의 중심에 누워 있게 되었다. "무슨 곡이지요?" 클로에가 물었다. "<구혼하고 싶어라>" "나도 그렇게 느꼈어요. 우리 방이 이렇게 동그랗게 변했는데 의사가 어떻게 들어오지?" 34 니콜라가 문을 열였다. 의사가 혼자 서 있었다. 니콜라는 의사를 데리고 부엌으로 들어섰다. "이것 맛 좀 보시겠어요? 그리고 어떤지 말씀해 주세요." 자주색, 녹색, 청색 등 독특한 색깔을 지닌 음료가 유리처럼 만든 수빈 장치 속에 들어 있었다. "이게 뭐예요?" 의사가 물었다. "음료수예요..." 니콜라가 대답했다. "그건 나도 알아요. 어디에 쓰는 거지요?" "강장제요." 의사는 코에 잔을 갖다 대고 냄새를 맡더니 빨아들여 맛을 보았다. 그는 음료를 들이마신 다음 왕진가방을 내려 놓고 두 손으로 배를 움켜잡았다. "효험이 있겠지요? 그렇지 않아요?" 니콜라가 물었다. "푸!... 이거 사람 죽이는군... 당신 혹시 수의사 아니요?" "아니요. 요리사예요. 어쨌든 효험은 있나요?" "아주 좋아요. 난 벌써 원기를 되찾은 것 같은데..." "환자를 보러 가시지요. 당신은 소독된 셈이니까." 의사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지만, 그는 이미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아이쿠! 이봐요!... 그래 가지고 진찰할 수 있겠어요?" 니콜라가 소리쳤다. "글쎄요, 나는 다른 의사의 견해도 듣고 싶어요. 그래서 망즈망슈에게 와달라고 부탁했어요..." "알았어요. 이리 오세요" 니콜라는 뒷계단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세 층을 내려가서 오른편으로 도세요. 그 쪽으로 들어가면 되요..." 의사는 내려가더니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예요?" "여기..." "아! 좋아요!..." 니콜라는 문을 닫았다. 코랭이 나타났다. "누구지?" "의사. 그런데 이상하게 생겼어. 그래서 없애버렸지." "그렇지만 의사 한 명은 있어야 해." "물론이지. 망즈망슈가 올거야." "그 사람이 낫겠어." 벨이 울렸다. "여기 있어. 내가 나갈께." 코랭이 말했다. 복도에서 생쥐가 그의 다리를 따라서 기어 오르더니 오른쪽 어깨 위에 앉았다. 그는 서둘러 교수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안녕하세요!" 교수가 말했다. 그는 검은색 양복에 눈에 띌 정도로 선명한 노란색 와이셔츠를 받쳐입고 있었다. "생리학적으로 볼 때 노란색 바탕에 검은색은 최대의 대비 효과를 가져오지요. 덧붙여 말하자면, 시각적으로도 피로하지 않고 길거리에서 차에 깔려 죽는 일도 피할 수 있다는 겁니다." 교수는 선언서를 낭독하듯 또박또박 말했다. "그렇겠지요." 코랭이 그의 말을 인정했다. 망즈망슈 교수는 마흔 살쯤 되어 보였다. 그는 마흔이라는 나이에 걸맞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뾰족하고 짧은 수염뿐인 매끈한 얼굴에 무표정하게 생긴 안경을 쓰고 있었다. "저를 따라오시겠어요?" 코랭의 제의에 교수는 머뭇거렸다. "누가 아픕니까?" "클로에가 아픕니다." "아! 그이름을 들으니 어떤 노래가 생각나는군요..." "예, 맞아요." "좋아요. 갑시다. 진작 얘기했으면 좋았을걸. 그런데 무슨 병에 걸렸지요?" "저는 알 수 없지요." "솔직히 말하면, 저도 잘은 모릅니다." "그렇지만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코랭이 불안하게 물었다. "그럴 수도 있지요. 어쨌든 진찰은 해봐야지요..." 교수가 자신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아무튼 갑시다..." 교수를 방문 앞까지 안내한 코랭의 머릿 속에 불현듯 무슨 생각이 떠올랐다. "들어가실 때 조심하세요. 둥글거든요." "알았어요. 환자가 임신을 했나보죠?" "천만에요... 바보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방이 둥글단 말입니다." "동글동글 하다구요? 그럼 앨링턴 판을 올려놨나요?" "예" "우리 집에도 그 판이 있어요 <몽롱하니 기분 좋아>라는 곡 알아요?" "저도 좋아해요..." 말을 계속하려던 코랭은 클로에가 기다리고 있음을 상기하고 교수를 방 안으러 떼밀었다. "안녕하세요?" 그는 사다리를 올라갔다. "안녕하세요? 당신은 건강하세요?" 클로에가 물었다. "나는 간이 안 좋아서 가끔 고통스러워요. 간질환에 대해서 알아요?" "아니요, 몰라요." 그는 클로에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열이 약간 있군요? 그렇죠?..."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럴거예요. 괜찮으시다면, 청진을 할까 하는데요." "물론이지요.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교수는 왕진가방에서 청진기를 꺼내더니 클로에의 등에 갖다댔다. "숫자를 세어 보세요." 클로에는 숫자를 셋다. "그게 아니지요. 스물 여섯 다음에 스물 일곱 아니예요?" "아, 그래요. 미안해요." "됐어요. 기침은 해요?" "네" 클로에는 대답이 끝나자마자 기침을 했다. "의사 선생님, 무슨 병인가요? 중병인가요?" 코랭이 물었다. "음!... 오른쪽 폐에 무언가 있어요. 그런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럼 어쩌지요?" 코랭이 물었다. "병원에 오셔서 정밀검사를 받아야겠어요." "클로에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할 수는 없어요. 그러다가 오늘처럼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그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예요. 처방전을 줄테니 그대로 하세요." "예." 클로에가 대답했다. 그녀가 입에 손을 가져가더니 기침을 시작했다. "기침하지 마세요." 망즈망슈가 말했다. "제발 기침은 하지 마." 코랭도 말했다. "참을 수가 없어요." 클로에는 숨이 찬지 쉬엄쉬엄 말했다. "환자의 폐에서 이상한 음악 소리가 들려요." 의사의 말이었다. 그는 약간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상입니까? 선생님?" "어느 정도는..." 교수는 자신의 짧은 수염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수염은 철썩 소리를 내며 제 자리로 돌아갔다. "정밀진단을 받으러 언제쯤 가야 되지요?" 코랭이 물었다. "사흘 뒤에 오세요. 치료기구를 수리해야 되니까." "평소에 치료기구를 사용하지 않으시나 봐요?" 클로에가 물었다. "그래요, 나는 모형 비행기 만드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데 사람들이 한시도 빼놓지 않고 귀찮게 구는 바람에 일 년 전부터 손도 못대고 있는 상태예요. 그러니 완성할 수가 있어야지요. 정말 짜증나요!..." "그렇겠네요." 코랭이 말했다. "그들은 상어나 다름없어요. 나는 내 자신을 불행한 난파자에 비유하지요. 내가 탄 일엽편주를 뒤집으려고 탐욕스러운 괴물들이 내가 잠들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그것 참 적절한 비유네요." 클로에가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기침을 하지 않기 위해 살그머니 웃었다. 교수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 놓으며 말했다. "조심하세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1944년 10월 15일자 <토목 공학>에 따르면 우리에게 알려진 서른 다섯 종류의 상어 중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것은 서너 종에 불과하므로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비유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말씀을 아주 잘 하시는군요." 클로에가 감탄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클로에는 이 의사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건 <토목공학>에 나오는 이야기지, 내 이야기가 아니예요. 이제 그만 가 볼께요." 교수는 클로에의 오르뺨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더니 어깨를 살짝 치고는 작은 사다리를 내려갔다. 그의 오른발이 왼발에 걸리고 왼발은 사다리 맨밑에 걸리는 바람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등을 열심히 문지르면서 코랭에게 말했다. "당신은 특수한 시설을 갖추어 놓았군요." "죄송합니다." "게다가 이 공모양의 방에선 뭔가 의기소침한 분위기가 느껴져요. <몽롱하니 기분 좋아>를 틀면 아마 원상복귀가 될거요. 아니면 방을 좀 대패로 밀어서 편편하게 만들든지." "알았어요. 아페리티프 한 잔 드시겠어요?" 코랭이 말했다. "됐어요. 잘 있어요." 클로에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밑에서 올려다 보니 그녀는 전구불이 비스듬하게 비치고 있는 크고 낮은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이제 막 돋아난 풀밭을 비추는 햇빛과 흡사한 색깔의 빛이 그녀의 머리칼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들었고, 그 빛은 그녀의 살갗에 부딪치며 황금빛으로 변해 여기저기 내려 앉았다. 대기실에서 교수가 코랭에게 말했다. "부인이 아름다우시군요." "예" 코랭은 클로에가 병이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느닷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당신은 나를 난처하게 만드는군요... 당신을 위로해야 겠는데... 자..." 그가 웃옷 안주머니를 뒤지더니 붉은 가죽으로 장정한 작은 수첩을 꺼냈다. "보세요, 이게 내꺼요." "내꺼라니요?" 코랭은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면서 물었다. "내 아내란 말이요." 그러나 기계적으로 수첩을 펼쳤던 코랭은 웃음을 터뜨렸다. "됐어요, 예측한 대로군요. 누구든지 그걸 보면 재미있다고 웃더라고요. 그런데... 그 여자의 어떤 점이 그렇게 우스워 보입니까?" "나는... 나는 잘 모르겠어요..." 코랭은 우물우물 하더니 허리가 휘어질 정도로 웃어대며 주저앉았다. 교수는 수첩을 도로 가져갔다. "당신들은 다 똑같은 사람들이야. 여자들이란 예뻐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아까 말한 그 아페리티프는 다 되어가고 있는 거요?" 35 코랭은 쉬크를 동반하고 약국 문을 밀었다. '따르릉!...' 소리가 나자 문에 끼워져 있던 유리가 복잡하게 설치된 약병과 실험도구들 위로 무너져 내렸다. 주인이 그 소리에 놀라 나타났다. 그는 키가 크고 말랐으며 나이가 들어 보였다. 머리는 말갈기처럼 곤두섰고 덥수룩한 백발로 덮여 있었다. 그는 계산대로 돌진하더니 수화기를 집어들고 오랫동안 해 온 대로 몸에 밴 민첩성을 발휘하여 번호를 재빨리 돌렸다. "여보세요." 그의 목소리는 마치 진한 안개 속에서 울리는 경적과도 같이 요란했다. 발 밑에 길고 검은 바닥이 규칙적으로 앞뒤로 흔들리곤 했으며, 물보라가 파도처럼 계산대를 덮쳤다. "여보세요! 게르쉰 상점인가요? 우리 가게 출입문에 유리창 좀 끼워주세요. 15분 뒤에 온다구요?... 다른 손님이 올지 모르니까 빨리 오실 수 없나요... 좋아요..." 그가 수화기를 다시 내려 놓았는데, 수화기는 쉽게 자기 자리를 찾아가지 못했다. "어떻게 오셨나요?" "이 처방전대로 약을 지어 주세요." 약사는 처방전을 받아들더니 반으로 접은 다음 길고 좁은 끈으로 꼭 묵어서 단두대 처럼 생긴 작은 탁상용 재단기 속에 집어 넣었다. 그는 빨간색 스위치를 누르며 말했다. "됐습니다. 오늘 여섯시에 오시면 약이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굉장히 급한데요." 코랭이 말했다. "지금 당장 약을 받아야 해요." 쉬크가 거들었다. "좋아요, 기다려도 괜찮다면, 준비해 드리지요." 약사가 대답했다. 코랭과 쉬크는 계산대 바로 앞에 있는 자주색 비로드 천이 씌어진 긴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주인은 계산대 뒤에서 몸을 숙이더니 소리도 없이 조용히 포복해서 비밀문으로 나갔다. 그의 길고 마른 몸이 마루 위에 남긴 희미한 홈은 점점 더 희미해지더니 흔적도 없이 공중으로 사라져 버렸다. 두 사람은 벽을 바라보았다. 녹슬은 구리 진열대 위에는 상비약과 특효약이 든 병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각 진열대의 맨 마지막 칸에 놓여 있는 병들은 짙은 형광을 발산했다. 쉬크와 코랭의 뒤쪽에는 세자르 보르지아의 승마 의상을 입은 약국 주인이 그의 어머니와 간음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거대한 벽화가 결려 있었다. 책상 위에는 환약을 만드는 기계가 꽤 많이 놓여 있었고, 그 중 몇 대는 느릿느릿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푸른색 유리관에서 나온 환약은 밀랍으로 만들어진 손에 모아져서 다시 종이 주름이 접혀 있는 원뿔 안에 놓여졌다. 코랭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옆에 있는 기계에 눈을 갖다대고 들여다보았다. 그는 기계를 보호하고 있는 녹슨 통을 들어 올렸다. 기계 안을 보니 금속과 살이 반 반씩 섞인 혼합 동물이 열심히 재료를 삼키더니 크기가 일정한 큰 환약을 만들어 배설하는 것이었다. "쉬크, 이것 좀 봐." "뭔데?" "정말 신기한데!..." 쉬크도 바라보았다. 그 동물의 턱은 옆으로 길게 늘어나 있어서 입을 움직일 때마다 민첩하게 수평으로 이동하곤 했다. 살갗이 투명했기 때문에 얇은 쇠로 만든 통 모양의 갈비뼈와 완만한 속도로 움직이는 소화관까지 볼 수 있었다. "토끼를 변형시킨 거야." 쉬크가 말했다. "그래?" "흔히 쓰는 방법이지. 필요한 기능만 유지시키는 거야. 그 경우 소화의 화학적 부분은 없앤 채 소화관만 움직이게 만들어 놓은 거야. 일반적인 방법으로 환약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니까." "뭘 먹고 살아?" 코랭이 물었다. "크롬을 함유한 당근을 먹지. 내가 제대하고 나서 일했던 공장에서 그것을 만들었어. 그리고 환약 재료를 먹이는 거지..." "잘 만들었는데... 그럴듯한 환약이 나오잖아." "그래 둥글둥글하지." "말해 봐" 코랭이 뒤돌아 앉으며 말했다. "뭘?" "내가 여행 떠나기 전에 너한테 주었던 금화 2만 5천 개 중 지금 남아 있는게 몇 개나 되지?" "글쎄..." "너도 알리스와 결혼을 결심할 때가 됐어. 네가 이런 식으로 결혼을 질질 끈다면 얼마나 자존심 상하겠니?" "그건 그래!." "어쨌든 금화가 2만 개는 남아 있겠지? 그 정도면... 결혼하기에 충분한 액수니까..." "그런데 그게..." 말을 꺼내기 힘들었던지 쉬크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게 어쨌다구. 너만 돈 걱정하는 건 아니야..." 코랭은 캐물었다. "나도 잘 알아." "그런데?" "그런데 지금 남아 있는 금화는 3천 개밖에 안돼..." 코랭은 갑자기 피로가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희미하고 날카로운 어떤 것이 어렴풋한 파도소리를 내며 그의 머릿속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긴 의자 위에 앉은 그의 몸이 빳빳해졌다. "거짓말이겠지..." 코랭은 넥타이를 맨 채 막 장애물 경주를 끝마친 사람처럼 피곤했다. 그는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건 거짓말이야... 너 지금 농담하고 있는 거지." "아니야. 사실이야." 쉬크가 일어서며 말했다. 그가 손가락 끝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책상 모서리를 긁어댔다. 환약은 구슬이 구르는 듯 작은 소리를 내며 유리관 속을 굴렀고, 밀랍의 모형 손이 종이를 구기는 소리가 마들렌가의 식당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디에 다 썼니?" "파르트르의 책을 샀어." 쉬크가 호주머니를 뒤졌다. "이걸 봐. 어제 발견한 거야. 놀랍지?" 그것은 모로코 가죽으로 공들여 장정한 키르에키에고르 삽화가 들어 있는 <꽃들의 트림>이라는 책이었다. 코랭은 책을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 오지 않았다. 코랭과 클로에의 결혼식 때 보았던 알리스의 눈만이 어른거렸다. 클로에의 드레스를 바라보던 그 슬픈 눈빛... 쉬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쉬크의 눈은 그렇게 높은 곳까지 바라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 그래, 금화를 다 써버렸다는 거야?..." "지난 주에 그의 친필 원고 두 편을 샀어. 그리고 그의 강연에 7회 등록했고..." 이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흥분을 참느라고 떨고 있었다. "그걸 왜 묻는 거야? 내가 결혼하든 안하든 알리스에겐 상관없는 일이야. 이대로 지금처럼 지내는 게 행복해. 너도 알다시피 난 그녀를 무척 사랑해. 그녀 역시 파르트르를 열렬히 좋아하고 있고!" 기계 중의 한 대가 너무 빨리 작동되는 것 같았다. 환약이 폭포처럼 쏟아져서 원뿔 모양의 종이 속으로 떨어지는 순간 보라빛 섬광이 솟아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지? 위험한 거 아니야?" 코랭이 소리쳤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어쨋든 옆에 있으면 안되겠다." 문 닫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더니, 약국 주인이 계산대 뒤에서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오래 기다리게 했군요." 코랭이 안심시키듯 말했다. "괜찮습니다." 코랭이 문제의 기계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기계 중의 한 대가 너무 빨리 움직이는 것 같은데요..." "아이쿠!..." 약국 주인이 몸을 숙여 계산대 밑에서 기병총을 꺼내 침착하게 겨냥한 후 방아쇠를 당겼다. 기계가 허공에서 깡총깡총 뛰더니 숨을 헐떡거리며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 "괜찮아요. 이따금씩 토끼란 놈이 강철을 이겨먹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토끼를 죽여 없애야 한다구요." 그가 기계를 들어올려 안쪽 케이스에 기대어 놓더니 오줌을 누인 다음 못에다 걸어 놓았다. 그가 호주머니에서 네모난 통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약 여기 있어요. 약효가 아주 강하니까 조심해요. 정량을 넘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돼요." "아! 그런데 이게 무슨 병에 쓰는 약인가요?"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는 물결 모양의 기복이 있는 손톱의 긴 손으로 더부룩한 백발을 긁었다. "여러 가지 병을 고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 약을 먹고 오래 견디지 못할거예요..." "아! 약 값은 얼마인가요?" "꽤 비싸요. 당신이 나를 때려 눕히고 돈도 안 내고 가버릴지도..." "아! 나는 너무 피곤해요..." "금화 두 개인데요." 코랭은 지갑을 꺼냈다. "도둑맞은 기분이겠군요." "상관없어요." 코랭이 생기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돈을 내고 약국을 나왔다. 약국 주인은 두 사람을 문까지 배웅하면서 한마디 던졌다. "당신들은 바보예요. 나는 늙어서 오래 버티지 못하는데." "나는 시간이 없어요." 코랭은 중얼거렸다. "그건 거짓말이야.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 못했을 거야..." "이제 약을 받았으니 됐어요. 안녕히 계세요." 코랭이 말했다. 그는 거리를 비스듬히 가로질러 갔다. "알리스랑 결혼하지 않는다고 헤어지겠다는 것은 아니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어쨌든 그건 네 문제니까..." "인생이란 다 그런거야." "아니야!" 36 바람은 나뭇잎을 파고 들어가 새싹과 꽃 향기로 범벅이 되서는 나무를 비집고 다시 나왔다. 사람들은 조금 더 높은 곳을 걸었고, 공기를 강하게 들이마셨다. 햇빛은 천천히 넓게 자기 세력을 펼치다가 둥글고 반들반들한 구석처럼 직접 닿을 수 없는 곳이 나타나면 예민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까만 물체와 부딪치면 황금색 문어의 신경질적이고 정확한 동작처럼 순식간에 빛을 거두어들였다. 불에 타는 듯한 뜨거운 태양의 거대한 몸뚱이가 조금씩 다가와 멈춘 채 대륙의 물을 증발시키기 시작하자 벽시계가 세 번 울렸다. 코랭은 클로에에게 이야기 책을 읽어 주고 있었다. 그것은 행복한 종말을 고하는 사랑 이야기였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서로 편지를 교환하는 장면에 들어왔다. "왜 그렇게 길어요? 빨리 진행되는게 보통인데..." 클로에가 물었다. "그런 형식의 소설에 익숙해?" 코랭은 클로에의 눈에 막 닿으려고 하는 태양 광선의 끝을 사정없이 꼬집었다. 끝 부분이 슬그머니 움츠러들더니 방 안에 있던 가구들 위를 천천히 산책하기 시작했다. 클로에는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요, 익숙한 건 아닌데... 그런데 내가 보기엔 그런 것 같아서...." 코랭은 책을 덮었다. "당신 말이 옳아. 내사랑 클로에" 그는 일어나서 침대에 다가갔다. "환약 먹을 시간이야." 클로에는 몸서리쳤다. "정말 지겨워. 그래도 먹어야겠지?" "내 생각에 오늘 밤 의사를 찾아가면 무슨 병인지 알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 환약은 먹어야 해. 그러면 아마 다른 약을 줄꺼야..." "끔찍해요." "클로에, 분별있게 행동해야 돼." "약 한 알만 먹어도 내 가슴 속에서 두 마리의 짐승이 싸우는 것 같다구요. 그리고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정말 모르겠어요..." "그래 나도 알아. 그렇지만 가끔은 분별있는 행동이 필요해." 코랭은 작은 상자를 열었다. "색깔도 우중충하고 냄새도 안 좋아요." "약이 이상하다는 건 나도 알아. 그렇지만 먹어야 돼." "자, 봐요. 약이 저 혼자서 움직이는 데다가 반 쯤 투명한 걸 보면 이 안에 분명히 무언가 살고 있는게 분명해요." "약 먹을 때 마신 물 속에서는 오래 살지 못할 게 분명해." "그게 무슨 소리예요...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코랭은 웃었다. "만약 독이 있다면, 아마 당신 몸을 아주 튼튼하게 해 줄거야." 그는 고개를 숙여 클로에의 입을 맞추었다. "먹어요. 내사랑 클로에. 자 착하지!" "알았어요. 그러면 키스해 줘요!" "그러고 말고. 당신은 나처럼 못생긴 남편과 입맞추는게 지겹지도 않아?" "맞아요. 당신은 미남은 아니에요." 클로에가 놀려댔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 코랭은 고개를 숙였다. "잠을 충분히 못 잤어." 코랭이 말을 이었다. "안아줘요, 코랭. 나도 아주 못생긴 여자예요. 자, 환약 두 알만 주시구요." "미쳤어? 한 알만. 자, 삼켜..." 클로에가 눈을 감고 창백해진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됐어요. 다시 시작될텐데..." 그녀의 반짝거리는 머리카락 속에서 땀방울이 보였다. 코랭은 그녀 옆에 앉아서 목에 팔을 둘렀다. 그녀는 두 손을 잡아 쥐며 신음소리를 냈다. "진정해, 사랑하는 클로에. 그래야만 해." "아파요..." 클로에가 속삭였다. 커다란 눈물 방울이 그녀의 눈꺼풀 가장자리에 나타나더니 보드랍고 둥근 뺨 위에 차가운 자국을 그려 놓았다. 37 "서 있을 수가 없어요..." 클로에는 두 발을 딛고 일어 서려고 온 힘을 다했다. "도저히 안돼... 힘이 하나도 없어." 코랭이 가까이 다가가서 클로에를 들어 올렸다. 클로에가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잡아줘요. 떨어지겠어!..."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해서 피곤해진 거라구..." "아니에요. 그 나이든 약사가 만든 환약 때문이에요." 그녀는 혼자 힘으로 서보려고 애쓰다 비틀거렸다. 코랭이 그녀를 붙잡아주자 함께 침대 위에 쓰러져 버렸다. "나는 이러고 있는게 좋아요. 내 옆에 있어요. 우리가 같이 잔지도 오래 됐어요!" "그렇게 해서는 안돼." "아니예요. 그렇게 해야 돼요. 키스해줘요. 난 당신 아내에요. 그렇지요?" "그렇지만 당신 건강이 안좋아." "그건 내 잘못이 아니란 말이에요." 이렇게 말하는 클로에의 입은 금방 울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이 떨리고 있었다. 코랭이 고개를 숙이더니 마치 꽃에 입을 맞추는 것처럼 부드럽게 키스했다. "더 해주세요. 얼굴에만 하지말고... 당신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나요? 더이상 여자를 원하지 않나요?" 그는 그녀를 더 세게 안았다. 그녀의 몸은 포근했고 향기가 풍겼다. 그녀는 통통한 향수병 같았다. "그래요... 더..." 38 "늦겠어." "괜찮아요. 시계나 맞춰요." 클로에가 말했다. "정말 자동차를 안타고 가겠다는 거야?..." "네... 당신과 함께 산책하고 싶어요." "그렇지만 병원까지는 멀다구!..." "괜찮아요... 당신... 조금 전에 안아줘서 기운이 되살아났어요. 조금 걷고 싶어요." "그러면 니콜라에게 자동차를 가지고 우리를 마중나오라고 말할까?" "당신이 원한다면..." 클로에는 병원에 가기 위하여 가슴이 삼각형 모양으로 깊이 패인 연한 푸른색 작은 드레스와 스라소니 가죽으로 만든 반코트, 그리고 거기에 잘 어울리는 챙없는 모자 차림으로 나섰다. 염색한 뱀가죽 구두를 신자, 채비가 끝났다. "가자, 암고양이." "고양이가 아니예요, 스라소니예요." "발음하기 너무 힘들어." 그들은 방에서 현관으로 건너갔다. 클로에가 창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가 왜 이래요? 예전처럼 햇빛이 들지 않아요." "무슨 소리! 햇빛이 많은데 뭘..." "아니예요. 카페트 여기까지 햇빛이 비쳤다는게 분명히 생각나요. 그런데 지금은 여기까지 밖에 안오잖아요..."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거야." "아니예요. 절대로!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예요. 같은 시간인데 이러는 거라구요."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보기로 하자구." "자 보라구요. 햇빛이 일곱 번째 줄까지 왔었다구요. 그런데 지금은 다섯 번째 줄에서 그쳤어요." "가자. 늦었어." 클로에는 복도에 붙어 있는 대형 거울 앞을 지나가면서 미소를 지었다. 클로에의 병은 중병이 아닐테니 앞으로 자주 산책을 할 수 있을거다. 코랭은 금화를 아껴 쓸 것이고, 두 사람이 유쾌하게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이 남아 있을거다. 어쩌면 코랭이 일을 할지도 모르고... 자물쇠 빗장이 강철 부딪치는 소리를 내면서 닫혔다. 클로에가 코랭의 팔에 매달렸다. 그녀는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클로에가 두 걸음을 옮기는 동안 코랭은 한 걸음씩 걸었다. "기뻐요. 태양이 있고 나무에서 좋은 냄새도 나고." "그럼. 봄이잖아!" "그래요?" 클로에는 장난기 어린 눈으로 코랭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오른편 거리로 돌아섰다. 건물 둘을 더 지나서 병원 구역이 나타났다. 백 미터쯤 갔을까? 바람부는 날이면 아주 멀리까지 날아가는 마취제 냄새가 물씬 풍겨 왔다. 갑자기 인도의 구조가 바뀌었다. 좁고 조밀한 창살이 달린 콘크리트 철책으로 뒤덮혀 있는 탄탄하고 편편한 배수구가 인도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배수구 창살 아래로 에테르가 섞인 알코올이 흐르고 있어서 분비액과 혈농 그리고 피 솜뭉치를 씻어내리고 있었다. 반쯤 응고된 긴 혈액 섬유들은 휘발성인 에테르와 알코올에 섞였고, 절반쯤 부패한 살덩어리들은 너무 많이 녹아버린 빙산처럼 혼자 빙글빙글 돌면서 천천히 떠내려 갔다. 느껴지는 건 오로지 에테르 냄새뿐이었다. 가제와 붕대도 테를 풀어내면서 떠내려갔다. 하수관이 하나씩 각 병원 건물과 수평을 이루며 배수구 속에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하수관 구멍만 살펴보면 의사가 어떤 것을 전공했는지 알 수 있었다. 눈 알 하나가 빙글빙글 돌아가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더니 흡사 위험한 메두사처럼 불그스름하고 부드러운 커다란 면포 아래로 사려져 버렸다. "나는 저런거 싫어. 생김새는 정상이지만, 쳐다보기도 싫어." "괜찮아" "길 한가운데로 가요." "그래. 하지만 차에 깔려 죽을 거야." "차를 안타고 오겠다고 한 내가 잘못이예요. 이제는 더 이상 못 걷겠어." "그래도 그 뚱뚱한 외과 의사하고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는게 다행스럽지 않아?" "다왔어요?" 클로에가 갑자기 기침을 해댔다. 그러자 코랭이 창백해졌다. "그러지마, 기침하지 말라고. 클로에" 코랭은 애원했다. "알았어. 코랭..." 클로에가 애써 기침을 참으며 대답했다. "기침하지 마... 다 왔어. 조금만 참아...바로 저기야." 망즈망슈 교수의 간판에는 토목 인부의 삽을 삼키고 있는 거대한 턱이 그려져 있었는데, 철제로 만들어진 부분만 삐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클로에는 그것을 보고 웃었다. 기침이 나올까봐 조심스럽게 조용히 웃었다. 교수의 기적적인 치료에 관한 칼라 사진들이 조명을 받으며 벽을 따라 붙어 있었다. "이것 봐. 망즈망슈는 저명한 전문의야. 다른 병원하고는 비교가 안될 만큼 완벽하게 장식해 놓았잖아." 코랭이 말했다. "이건 저 사람이 돈이 많다는 말밖에는 더 이상의 의미는 없는 거예요." "취미가 고상하다는 말일 수도 있지. 굉장히 예술적이야." "그래요. 푸주간의 모델 생각이 나는데요." 안으로 들어가자 흰색 에나멜 칠을 한 원형의 넓은 현관이 나타났다. 여자 간호원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예약하셨나요?" "네. 조금 늦은 것 같아요..." 코랭이 대답했다. 그들은 간호원을 따라 갔다. 발자국은 무딘 소리를 내며 에나멜 바닥에 크게 울려 퍼졌다. 원형 칸막이의 벽에 있는 문이 계속해서 열렸고, 간호원은 건물 밖의 거대한 간판만큼 큰 금속 각인이 되어 있는 금제 목각품이 붙어 있는 문으로 코랭과 클로에를 안내했다. 문을 연 간호원은 코랭과 클로에가 들어갈 수 있도록 한쪽으로 비켜 섰다. 거대하고 투명한 문을 밀자, 바로 망즈망슈 교수의 사무실이었다. 교수는 창문 앞에 선 채 오포파낙스 향료의 액기스에 담근 칫솔로 턱수염에 향수를 묻히고 있는 중이었다. "자, 오늘은 기분이 어떠세요?" "그 환약은 끔찍했어요." 클로에가 말했다. 교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순간 혼혈 남.녀와 백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같았다. "골치아프군... 생각대로야." 그가 중얼거렸다. 그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여전히 칫솔을 들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것 좀 가지고 있어요." 그가 코랭의 손에 칫솔을 억지로 쥐어 주면서 말했다. 그리고 클로에에게 말을 건냈다. "앉으세요." 교수는 사무실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당신 폐에 뭔가 있어요. 정확히 말해서 폐 속에 뭔가 있어요. 바라는 건 그것이..." 그는 말을 멈추고 불쑥 일어났다. "말로 떠들어봤자 아무 소용없겠지. 나를 따라와요." 그렇게 말하고, 코랭에게 칫솔을 아무데나 놓으라고 덧붙여 말했다. 그는 안절부절했다. 코랭은 클로에와 교수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방금 자신과 두 사람 사이에 생긴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어뜨려야 했다. 그의 가슴은 묘한 불안감때문에 불규칙하게 뛰었다. 정신을 겨우 차린 코랭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있는 힘을 다해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가는 일은 성공했지만, 클로에의 손을 만지는 순간 모든 힘은 사라졌다. 클로에는 손을 교수에게 주었고, 교수는 천장을 크롬으로 도금한 작고 하얀 방으로 그녀를 데리고 들어갔고, 방의 한 쪽 면에는 똥똥하고 반들반들한 기계가 가득 놓여 있었다. "앉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아요." 교수가 말했다. 기계의 정면엔 크리스탈로 테를 두른 붉은 빛과 은빛이 섞인 화면이 있었고, 검은 에나멜이 칠해진 단 하나의 조정 스위치는 받침대 위에서 반짝였다. "여기 같이 있을 거예요?" 교수가 코랭에게 물었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코랭이 대답했다. 교수가 스위치를 돌렸다. 환한 빛이 급격하게 흐르면서 기계에서 새어나왔다. 그것이 기계 위에 설치된 환기구멍 속과 문 밑으로 사라지면서 화면이 조금씩 밝아졌다. 39 망즈망슈 교수는 코랭의 등을 톡톡쳤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좋아질 테니까." 코랭은 괴로운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클로에는 그의 팔을 잡았다. 밝은 표정을 지으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럼요, 오래 가지 않을 거예요."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차차 회복될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코랭이 대답했다. 원형의 현관때문에 코랭의 목소리는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천장에 반사되어 울렸다. "어쨌든 계산서는 집으로 보내드리지요." "좋아요, 고맙습니다. 의사 선생님." 코랭이 대답했다. "상태가 나아지거든 다시 오세요. 물론 검토조차 해보지 않았지만, 수술이라는 해결책도 있으니까..." "당연하지요." 클로에는 이렇게 말하면서 코랭의 팔을 힘껏 잡더니 울기 시작했다. 교수는 텃수염을 한 움큼이나 잡아 뺐다. "그것 참 골치 아프군." 침묵이 흘렀다. 여자 간호원 한 명이 투명한 문 건너편에 나타나더니 짧게 두 번 노크했다. '들어오시오'라고 씌어진 초록 표시등에 불이 들어왔다. "어떤 분이 니콜라가 와 있다고 두 분께 전해드리래요." "고마워, 까로슈." 교수는 이렇게 말했고, 한마디 덧붙였다. "가봐요." "작별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코랭이 중얼거렸다. "물론... 잘가요... 몸 조리 잘 하시고... 가 보세요..." 40 "안좋은 일 있어요?" 니콜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자동차를 출발시키면서 물었다. 쿨로에는 흰색 모피털 속에 파묻힌 채 여전히 울고 있었다. 코랭은 죽은 사람같은 표정으로 있었다. 에테르에서 발산되는 기체가 길거리를 가득 메웠다. "가자." 코랭이 말했다. "무슨 병이야?" 니콜라가 물었다. "더 고약한 병은 없을 거야." 코랭은 괜한 말을 했다는 자책감에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는 자신의 경솔함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을 정도로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클로에는 자동차 한 구석에 쪼그린 채 주먹을 물어뜯고 있었다. 그녀의 윤기있는 머리칼이 얼굴 위로 흘러 내려 왔고, 모피털 모자는 발 밑에 밟혀 있었다. 갓난애처럼 엉엉 울었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미안해, 클로에. 내가 못난 놈이야." 코랭은 클로에를 껴안았다. 겁에 질린 그녀의 애처로운 두 눈에 입을 맞추던 그는 자신의 심장이 가슴 속에서 무언가 부딪치는 듯 쿵쿵거리면서 천천히 뛰는 것을 느꼈다. "당신은 꼭 나을 거야. 내 말은 무슨 병을 앓든 당신이 아픈 걸 보는 것 이상으로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거야..." "무서워요... 의사는 분명히 나를 수술할 거예요." "아니야. 당신 병은 그 전에 나을 거야." "무슨 병인데? 내가 뭐 도울 일 없나?" 니콜라가 물었다. 니콜라 역시 마음 아프다는 표정이었다. 평소에 명랑하던 그도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내 사랑하는 클로에. 진정해." 코랭이 말했다. "그래. 분명히 빨리 나을 거야." 니콜라가 말했다. "수련... 그게 어디에서 옮겨 붙은 걸까?" "클로에에게 수련이 있다니?" 니콜라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오른쪽 폐 속에 수련이 있어. 교수 말에 의하면 처음에 동물적인 어떤 것인 줄 알았대. 그런데 그게 아니고 수련이래. 화면에 나타나더라구. 벌써 상당히 자라났지만, 없애버릴 수 있을 거야." "그렇고 말고!" "그게 무슨 병인지 몰라! 그게 움직이면 얼마나 아프다구!!" "울지마. 그래봤자 피곤하기만 하잖아." 차는 출발했다. 니콜라는 복잡하게 뒤얽힌 집 사이로 천천히 차를 몰고 갔다. 태양이 나무 뒤쪽으로 천천히 사라지면서 바람이 차가워졌다. "의사는 클로에를 산으로 보내래. 추위가 그 더러운 것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코랭이 입을 열었다. "클로에는 길바닥에서 저런 병에 걸린거야. 구역질나는 것들로 가득찬 길 위에서." 니콜라가 말했다. "또 의사는 클로에 옆에는 항상 꽃이 있어야 한대. 그래야 수련이 겁을 내고 꽃을 피우지 않는대..." "무슨 소리야?" 니콜라가 물었다. "만약 수련이 꽃을 피우면 다른 수련이 생기니까, 절대로 꽃을 피우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거야..." "치료 방법이라는게 그게 다야?" "아니" "또 뭔데?" 코랭이 머뭇거리면서 대답을 안했다. 클로에가 자신에게 기대어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랭은 이제부터 클로에에게 안겨주어야 할 고통을 생각하니 너무나 괴로웠다. "물을 마시면 안된다는 거야..." "뭐라구?... 아니, 물을 마시지 말라구?..." "그래." "그래도 아주 마시지 말라는 말은 아니겠지?..." "하루에 두 숟가락만 마시래..." 코랭이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두 숟가락?..."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앞만 뚫어져라고 쳐다보았다. 41 알리스는 노크를 두 번 하고 기다렸다. 현관 문이 여느 때보다 좁아 보였다. 카페트도 흐릿해지고 더 얄팍해진 것 같았다. 니콜라가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코랭과 클로에 만나러 왔지요?" "네. 있나요?" "이리 오세요. 클로에는 집에 있어요." 그는 다시 문을 닫았다. 알리스는 카페트를 유심히 살폈다. "예전보다 덜 밝은 것 같아요. 왜 그렇지요?" "모르겠어요." "이상하네요. 여기에 그림이 한 점 있지 않았어요?" "생각 안나는데요." 그는 자신없이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공기가 예전같지는 않아요." 그녀는 잘 재단된 갈색 투피스 차림이었다. 손에는 커다란 수선화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옷이 잘 어울리는데요. 재밌어요?" "네. 쉬크가 해 준 옷이예요." "보기 좋군요." "나는 운이 좋아요. 보부아르 공작부인이 나랑 똑같은 치수의 옷을 입거든요. 할인되는 걸 샀어요. 쉬크는 이 옷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서류 한 장이 갖고 싶어서 옷을 산 거지요." "안색이 안좋아 보여요." 알리스가 니콜라를 보고 한마디 덧붙였다. "어휴!... 모르겠어요. 늙어버린 기분이예요." "신분증 좀 보여줘요." 니콜라는 바지 뒷주머니를 뒤졌다. "여기 있어요." 알리스는 신분증을 펼쳐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알리즈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스물 아홉살..." 니콜라가 말했다. "이것 봐요..." 알리스는 재빨리 계산했다. 신분증은 서른 다섯이었다. "이해할 수 없어요. 난 분명 스물 아홉인데..." 니콜라가 말했다. "걱정 말아요. 잘 정리될거예요." "당신 헤어 스타일이 마음에 들어요. 이제 클로에를 만나러 가야지요." 알리스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대체 이게 다 웬일이예요?" "오! 병때문이예요. 병때문에 모든 게 엉망이 된 거예요. 앞으로 모든 일이 잘 될거예요. 그리고 나도 젊어질거구요." 클로에는 연한 보라색의 실크 잠옷과 세틴 천을 누벼서 만든 연한 베이지 색의 실내복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주변은 꽃으로 가득했다. 특히 난초와 장미가 많았다. 수국과 패랭이꽃 그리고 동백꽃도 있었고 긴 복숭아나무 가지와 편도나무 가지, 쟈스민꽃도 한아름 눈에 띄었다. 가슴은 꽃으로 덮혀 있었다. 굵은 푸른색 꽃부리는 오른쪽 가슴의 호박색과 뚜렷한 대조를 보였다. 광대뼈는 장미빛이 살짝 지나칠 정도였다. 두 눈은 반짝였지만 수척해 보였다. 명주실 같은 머리카락은 정전기 현상으로 곤두서 있었다. "감기 들겠다! 이불을 덮어야지!" "아니야. 이렇게 하고 있어야 해. 이게 치료방법이거든." "꽃 참 예쁘다!" 알리스는 클로에를 웃기기 위하여 쾌활한 말투로 한마디 더 했다. "이러다가 코랭 파산하겠다." "그래." 클로에는 들릴듯 말듯한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갸날픈 미소를 지었다. 클로에는 나즈막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일자리를 찾고 있어. 그래서 집에 없는 거야." "그런데 왜 그런 식으로 말해?" "목이 말라..." 클로에가 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하루에 두 숟가락만 마시는 거야?" "응..." 클로에는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알리즈는 클로에에게 몸을 기울여 입맞춤을 했다. "금방 나을거야." "그래. 나는 내일 니콜라와 함께 떠나. 자동차로." "코랭은?" "남아 있어야 해. 일을 해야 되거든. 불상한 코랭!... 더이상 금화가 없어." "왜?" "꽃..." 클로에가 말했다. "그게 자라니?" "수련? 아니야. 내 생각에 수련은 없어질 것 같아." "좋겠다." "그래. 그런데 목이 너무 말라." "왜 불을 안 켜니? 너무 어둡다." "얼마 전부터 그래. 할 일이 없잖아. 그래서 이러고 있는 거야." 알리스가 스위치를 누르자 은은한 빛 무리가 램프 주위에서 나타났다. "램프가 죽어가고 있어. 벽면도 좁아지고 창문도." "정말?" 알리즈가 물었다. "저것 봐." 한쪽 벽 전체에 뚫려 있던 창구는 이제 양쪽 끝이 둥글게 부풀어 오른 두 개의 길쭉한 장방형으로 축소되어 버린 것이다. 창구 한가운데 꽃자루 같은 모양이 만들어져 양쪽 끝을 연결시키는 한편 햇볕을 차단시켰다. 천장은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낮아졌고, 코랭과 클로에의 침대가 놓여 있는 편편한 곳도 바닥에서 별로 높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 "몰라... 어머나, 저기 빛이 약간 보이는데." 검은 수염의 생쥐가 강렬한 섬광을 터뜨리는 타일 중 작은 조각 하나를 방금 방 안으로 가지고 온 것이다. "방이 너무 어둡다 싶으면 저렇게 금방 빛을 가져오곤 하지." 클로에가 설명했다. 그녀는 자신의 전리품을 머리맡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작은 생쥐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렇게 찾아와 줘서 고마워." 클로에가 말했다. "클로에, 정말로 사랑해." "알아. 그런데 쉬크는?" "아! 잘 있어. 나한테 투피스를 한 벌 사줬어." "예쁘다. 잘 어울려." 클로에는 말을 멈추었다. "아프니? 가엾은 클로에." 알리스는 몸을 숙여 클로에의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응,... 너무 목이 말라..." "내가 입맞춰 주면 덜 할거야." "그래." 알리스는 클로에에게 몸을 숙였다. "아! 네 입술 정말 싱그럽다..." 클로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리스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어디로 가는데?" "먼 곳은 아니야. 산으로 가." 클로에가 왼편으로 돌아누웠다. "너는 쉬크를 아주 많이 사랑하지?" "응, 그치만 그 사람은 나보다 책을 더 많이 사랑해." "나는 잘 모르겠어. 어쩌면 그게 진실일지도 모르지. 만약 내가 코랭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와 함께 사는 너를 몹시 사랑했을 거야." 알리스는 한번 더 입맞춤을 했다. 42 쉬크는 가게에서 나왔다. 가게에는 흥미로운 어떤 것도 없었다. 적갈색 가죽구두가 신겨져 있는 자기 발을 쳐다보며 걷고 있던 그는 두 발이 서로 반대편으로 자신을 끌어 당기고 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잠깐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마음 속으로 길모퉁이를 이등분한 그는 이등분된 선을 따라 걸었다. 그는 뚱보처럼 생긴 대형 택시에 깔려 죽을 뻔했는데, 우아한 모습으로 뛰어오른 덕에 살아났다. 그러는 바람에 쉬크는 지나가는 행인의 발 위에 떨어졌다. 행인은 욕설을 퍼부으면서 다친 곳을 치료하러 병원으로 들어갔다. 쉬크는 발걸음을 옮겼다. 정면에 책방이 하나 있는 것을 보니 그곳은 지미-눈 거리였고, 책방 간판은 블루 화이트의 마호가니 홀을 모방해서 그린 것이었다. 문을 밀자 문이 다시 그를 사납게 밀어냈다. 쉬크는 별수없이 창문을 통해 책방에 들어갔다. 서점 주인은 평화의 긴 담뱃대를 뽐내며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그는 쥐르 로망의 전집 위에 앉아 있었는데, 이 작품은 늘 그의 의자로 사용되었다. 히스 부식토로 만든 담뱃대는 아주 예뻤다. 그는 올리브 나뭇잎을 담뱃대에 채워 넣었다. 옆에는 대야 하나와 관자놀이를 식히기 위한 물에 젖은 수건 한장, 그리고 리클레스 박하향이 첨가된 술 한병이 담배의 효과를 더해 주기 위하여 준비되어 있었다. 주인은 고개를 들어 고약한 냄새나는 시선으로 쉬크를 바라보았다. "무엇을 원하세요?" "책을 좀 볼려고..." "보세요." 주인은 이렇게 말하고 대야 쪽으로 몸을 숙였다. 쉬크는 안으로 들어갔다. 무언가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곤충 몇 마리가 발에 밟혀 바드득 소리를 냈다. 낡은 가죽 냄새, 고약한 올리브 나뭇잎 연기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책은 알파벳 순서로 정리되어 있었지만 주인이 알파벳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쉬크는 B와 T사이에서 드디어 파르트르 코너를 찾아냈고, 곧 돋보기를 들고 장정을 면밀히 검토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네온사인에 관한 유명한 비평서인 <문자와 네온>이라는 책에서 흥미로운 지문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분출되는 흥분을 억누르며 부드러운 털이 달린 붓과, 스템프로 날짜를 찍을 때 쓰는 분말이 들어 있는 작은 상자 하나와, 부이유가 쓴 <모범 경찰 편람>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지갑에서 꺼낸 종이 쪽지와 세심하게 비교하던 쉬크는 갑자기 숨을 죽이며 동작을 멈추었다. 파르트르의 왼쪽 집게 손가락 지문이었다. 아직까지 파르트르의 낡은 파이프 외에는 다른 어떤 곳에서 단 한번도 발견한 일이 없었던 지문이었다. 쉬크는 뜻밖에 발견한 소중한 물건을 가슴에 꼭 안고 주인에게 갔다. "이거 얼마예요?" 주인이 책을 쳐다보더니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이쿠! 어떻게 그걸 찾아내셨지요!..." 쉬크는 짐짓 놀란 척 물었다. "이게 무슨 특별한 책입니까?" "후후!..." 주인이 이렇게 폭소를 터뜨리는 바람에 파이프는 대야 속으로 굴러떨어졌고 불은 이내 꺼지고 말았다. 주인은 욕지거리를 내뱉더니 형편없이 구질구질한 것을 이제는 빨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흡족해 하면서 두 손을 비볐다. 쉬크가 다시 한번 물었다. "값이 얼마냐고 물었는데..." 쉬크의 심장은 이미 떨어져 나가 난폭하고 불규칙하게 갈비뼈 위에서 쿵쿵거리고 있었다. "아이구! ... 당신 참 재미있는 사람이군요!..." 주인이 숨을 헐떡대더니 땅바닥을 구르며 소리쳤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쉬크는 당황했다. "이 지문을 손에 넣기 위해서 얼마나 얘를 썼는지 아슈? 평화담뱃대를 몇 개나 주었는지 몰라요. 게다가 마지막 순간에 가서는 담뱃대를 책하고 바꾸는 요술까지 배워야 했다구. 그 일을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구려..." "됐습니다. 파르트르를 아신다니까 묻겠는데, 가격이 얼마냐구요?" "얼마 안 비싸요. 그런데 더 좋은 게 있어요. 잠깐 기다려요." 주인은 벌떡 일어나서 서점 가운데에 있는 칸막이 뒤로 사라졌다. 금세 무언가 찾아 가지고 왔다. "여기 있어요." 웬 바지 한 벌을 계산대 위에 집어 던지며 말했다. 쉬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물었다. "이게 뭐예요?" 묘한 흥분이 쉬크를 감쌌다. "파르트르 바지예요." 주인이 자랑스럽게 소리쳤다. "어떻게 이걸 구했지요?" 쉬크는 황홀한 상태에 빠져들었다. "강연회에서 나온 거예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빼냈어요. 파이프도 있는데..." "내가 살께요." "뭐라구요? 다른 것이 또 있는데..." 쉬크는 손을 가슴으로 가져갔다. 심장의 고동을 억제할 수 없어서 그대로 날뛰도록 내버려 두었다. "자, 여기 있어요..." 쉬크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파르트르의 이빨 자국이 있는 파이프였다. "얼마지요?" "파르트르는 사진까지 삽입시켜서 스무 권짜리 <구토 백과사전>을 준비 하고 있다는 걸 당신도 알고 계시겠지요. 나는 그 육필 원고를 입수하려고..." "그렇지만 나는 전혀..." 쉬크는 깜짝 놀라 말했다. "전혀 뭐요?" 주인이 말했다. "세 가지 다 해서 얼마지요?" "금화 천 개는 주셔야지요. 그 이하는 안돼요. 어제만 해도 천 이백개를 준다는 사람이 있었는데, 안 팔았다구요. 그런데 손님이 너무 진지하니까 그 정도만 주시고 가져 가세요." 쉬크는 지갑을 꺼냈다. 안색이 무서울 정도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43 "이제는 식탁보도 못 덮겠어." 코랭이 말했다. "괜찮아. 그런데 식탁이 왜 이렇게 지저분한지 모르겠다. 이렇지 않았는데..." 쉬크가 말했다. "몰라, 청소를 할 수 없으니까 그런가 봐." 코랭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카페트가 양털이 아니었잖아? 면이었던 것 같은데..." "똑같은 거야.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어." "이상해. 세상이 좁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니콜라는 주사위 모양으로 자른 빵을 버터에 튀긴 크루통이 헤엄쳐 다니는 기름기 있는 스프를 가져왔다. 그는 스프를 큰 접시에 담아서 두 사람에게 주었다. "이게 뭐지, 니콜라?" 쉬크가 물었다. "이것 저것 분말을 넣고 끊인 스프. 맛이 좋아." "아! 구페의 요리 책?" "천만에! 이건 포미안식 요리법이야. 구페식 요리는 속물들이 좋아하지. 게다가 구페식 요리는 재료가 아주 많이 필요해!..." "그래도 필요한 재료는 다 들어간 것 같은데." "뭐라구? 필요한 건 가스와 버너 뿐이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 아무 생각도 안했어." 쉬크의 몸이 의자 위에서 흔들렸다. 대화를 어떤 식으로 끌고 가야할지 황당했다. "포도주 마실래? 지하 술창고에서 꺼낸 거야. 이게 마지막이야. 그런대로 괜찮아." 쉬크가 잔을 내밀었다. "사흘 전에 알리스가 클로에를 만나러 왔었대. 나는 못 만났어. 어제 니콜라가 클로에를 산에 데려다 주고 왔어." "알고 있어. 알리스에게 들었어." "망즈망슈 교수가 편지를 보냈어. 많은 액수를 청구했어. 그 사람 유능한가 봐." 코랭은 머리가 아팠다. 쉬크가 아무거나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쉬크는 창 밖의 허공 속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불쑥 일어나 주머니를 일 미터가량 잡아당겨서 창틀의 길이를 쟀다. "변한 것 같아." "어떻게?" 코랭은 무관심한 말투로 말했다. "줄었어. 방도 그렇고..." "무슨 소리야? 내가 보기에는 그대로인데..." 쉬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첩과 연필을 꺼내 숫자를 기록할 뿐이었다. "일자리는 찾았니?" 쉬크가 물었다. "아니... 오늘 오후에 약속이 하나 있고, 내일 하나 있고 그래." "무슨 일을 찾는데?" "아! 어떤 일이든지 괜찮아. 돈만 준다면 무슨 일이든지 상관없어. 꽃을 사려면 돈이 많이 필요해." "그렇겠지." "그런데 너는 어떻게 됐니?" "다른 친구가 내 일을 대신하기로 했었지. 나는 할 일이 많았거든..."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했단 말이야?" "응. 별 문제 없이. 내사정을 잘 알고 있었거든." "그리고 어떻게 됐는데?" "내가 일을 다시 하려고 하니까, 그들이 말하길 내 대신 일하던 친구가 일을 아주 잘한다면서 내가 원하다면 새 자리를 만들어 주겠다는 거야. 물론 보수도 훨씬 적어..." "이제 삼촌은 너에게 돈을 주실 수 없나 보지?" 코랭이 물었다. 그동안 코랭은 그런 질문을 한 일이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부탁을 할 수가 없어. 돌아가셨거든." "그런말 안했잖아..." "흥미있는 일이 아니잖아." 니콜라가 기름투성이의 프라이팬을 들고 나타났다. 검은색 소시지 세 개가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냥 이렇게 먹어. 요리를 끝까지 할 수가 없어. 온도를 특별히 올렸는데도 잘 익지 않아. 질산을 넣어서 이렇게 검게 된거야. 그래도 충분히 넣은건 아니야." 코랭은 포크로 소시지 한 개를 찍었다. 포크에 찍힌 소시지는 최후의 경련을 일으키며 온몸을 비틀며 꼬았다. "나는 하나 찍었어. 쉬크, 네 차례야." "나도 해보지. 야 이거 되게 단단하다." 기름이 식탁 위로 쏟아졌다. "이런, 빌어먹을!" "괜찮아. 나무들은 기름을 좋아하니까." 니콜라가 말했다. 쉬크가 소시지 먹는 데 성공했고, 니콜라는 세번째 소시지를 도로 들고 가버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전에도 이랬니?" "그래. 변하지 않은 곳이 없어. 어쩔 도리가 없어. 금화를 다 써버린 탓이야. 꼭 문둥병 같아..." "금화가 하나도 안 남았단 말이야?" "약간 남았지... 클로에가 산에 머무는 체재비와 꽃값을 미리 지불했어. 클로에 병만 나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내놓을 각오가 돼 있어. 그런데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어." 쉬크는 소시지를 다 먹었다. "자, 부엌 복도 좀 보자." "앞장 서." 양쪽으로 나 있는 창문 너머로는 흐릿하고 희미하게 여기저기 큰 검은 반점이 얼룩져 있었고, 가운데만이 반짝거리는 태양을 비쳤다. 몇 줄기의 빛이 복도 안까지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햇빛은 전에는 그토록 환하게 반짝이던 타일에 닿자마자 액화되더니 철철 흘러내리면서 길고 축축한 자국을 남겼다. 벽에서는 지하실 냄새가 났다. 검은 수염의 생쥐는 한쪽 모퉁이 높은 곳에 둥지를 만들어 놓았다. 예전과 달리 지면에서는 놀 수 없게 된 것이다. 생쥐는 아주 작은 천조각을 쌓아 놓고, 그 안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습기 때문에 끈적거리는 긴 수염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생쥐는 타일 바닥이 다시 반짝거리기를 기대하면서 잠간 문질러댔지만, 작은 다리로 문지르기엔 얼룩이 너무나 컸다. 그래서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구석쟁이에 힘없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난방기는 가동이 안돼니?" 쉬크가 물었다. "아니야, 진종일 가열되는 걸. 그런데 어쩔수없어. 바로 여기부터 시작이 됐거든..." "정말 지겹겠다! 건축기사를 불러야 되겠어..." "왔었어. 그런데 그 뒤로 그 사람도 병이 난 거야." "다 괜찮아질거야. 걱정하지 마."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해. 가서 니콜라랑 밥이나 마저 먹자." 두 사람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 역시 좁아졌다. 니콜라는 흰색으로 옻칠이 된 식탁 앞에 앉은 채 건성으로 책을 읽으며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이봐 니콜라..." "응, 안그래도 디저트 내가려던 참인데." "아니야. 여기에서 먹을께. 그 애기를 하려고 그러는게 아니야. 니콜라, 나한테 쫓겨나고 싶지 않지?" "당연하지." "그래도 그렇게 해야겠어. 여기 있으면 점점 더 쇠약해질거야. 8일 전부터 십 년은 늙은 것 같아." "아니야, 칠 년이야." 니콜라가 정정했다. "너의 이런 모습 보고 싶지 않아. 너는 이럴 필요가 없잖아. 공기 때문에 이렇게 된거야." "그런데 너는 괜찮아?" "너하고 경우가 틀리지. 나는 클로에 병만 치료하면, 나머지는 어떻든 상관없어. 공기가 좋든 나쁘든 신경쓰이지 않아. 네가 나가는 클럽은 잘되니?" "지금은 거의 안나가..." 코랭은 다시 한번 말했다. "그러지 마. 퐁또잔느가에서 요리사를 구한다고 해서 내가 대신 서명했어. 너도 나랑 똑같은 생각이었으면 좋겠어." "난 그렇게 할 수 없어." "그래도 가야 해." "너 참 못됐구나. 날더러 쥐새끼처럼 도망치라는 거야?" "아니야. 그렇지만 그렇게 해야 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알잖아." "그래, 알고 있어" 니콜라는 대답을 하고 책을 덮으면서 두 팔로 머리를 감쌌다. "화내면 안돼." "나 화 안났어." 니콜라는 투덜대듯 말했다. 니콜라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나는 바보같은 놈이야." "너는 멋진 놈이야." 코랭이 말했다. "아니야, 나는 마쉬멜로 열매 속에 숨고 싶어. 향기 때문이지. 나는 거기에서 조용히 살고 싶어..." 44 코랭이 채색유리를 통해 어렴풋한 빛이 흘러드는 계단을 올라가자 2층이 나타났다. 코랭은 벨소리가 울릴 때까지 기다렸다. 벨소리는 문지기가 코랭을 사장실로 안내하도록 지시하였다. 코랭은 문지기를 따라 바깥쪽이 안쪽보다 더 높은 커브로 되어 있는 긴 통로로 걸어갔다. 커브길의 양쪽 벽이 기울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하여 아주 빨리 걸어야 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 전에 그는 사장 앞에 섰다. 그는 공손한 태도로 손님 접대를 할 줄 모르는 소파에 앉았는데, 코랭의 무게를 받은 소파는 뒷발로 일어섰다가 자기 주인의 위압적인 행동에 겨우 제자리로 돌아갔다. "무슨 일이지요?" "그냥 왔어요!..." "할 수 있는 것이 뭐지요?" "이것 저것 기초는 배웠는데..." "내 말은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느냐는 말이요?" "가장 밝은 시간을 어둡게 만들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유가 뭐지요?" 사장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빛이 저를 힘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 우리 회사에서 어떤 사람을 구하는지 알고 있기나 해요?" "모릅니다." "나도 모르는데... 부사장한테 물어봐야 되겠군. 아무튼 당신은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왜 그렇다는 거지요?" "나도 모르겠는데..." 사장은 불안한 표정을 짓더니 앉아 있던 소파를 약간 뒤로 물렸다. "가까이 오지 마시오!..." "하지만... 저는 움직이지 않았는데요..." "그래요... 그래... 그런데 말이야..." 사장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계속 코랭을 쳐다보면서 책상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수화기를 들고 맹렬하게 흔들어댔다. "여보세요!... 지금 당장 이리 와요!..." 수화기를 제자리에 내려 놓은 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계속해서 코랭을 주시했다. "몇 살이지?" "스물 한 살입니다." "생각대로군..." 사장은 코랭을 마주보고 중얼거렸다. 노크 소리가 났다. "들어와요!" 소리치는 순간 사장의 얼굴에서 긴장이 사라졌다. 종이 먼지를 계속 마셔 초췌한 사나이, 기관지에서 목구멍에 이르기까지 반죽 상태의 섬유소로 가득 차 있을 것만 같은 사나이가 사무실에 들어왔다. 그는 서류 뭉치를 팔 밑에 끼고 있었다. "당신은 의자를 하나 망가뜨렸어." 사장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 그는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부서진 의자를 고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부사장이 코랭을 향해서 몸을 돌렸다. "의자 고칠 줄 알아요?" 코랭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글쎄요... 굉장히 어려운 일인가요? 의자 고치는 사람을 구하고 있는 거예요?" 코랭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소!" "당신은 확실히 고칠 수 없어..." 부사장이 말했다. "그사람을 왜 그렇게 보지?" 사장이 물었다.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이런 의자는 수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 사람은 내가 볼 때 의자를 수리할 수 없다는 인상을 풍기기 때문이구요." "그렇지만 의자 하나가 사무직 일자리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요?" 코랭이 물었다. "당신은 땅바닥에 앉아서 일을 하는 모양이지?" 사장이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일을 자주 안하는 것이 틀림없어요." 부사장이 한술 더 떠서 말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은 게으름뱅이야!..." 사장이 말했다. "맞아요... 당신은 게으름뱅이요..." 부사장이 맞장구쳤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게으름뱅이를 채용할 수 없어." 사장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사람 데려가... 저 사람이 왜 왔는지 알겠어... 빨리 데려가라구!... 게으름뱅이야 꺼져!" 부사장이 코랭에게 달려들었지만, 코랭은 다들 잊고 있었던 책상 위의 서류를 움켜들었다. "내 몸에 손만 대면..." 그는 문 쪽으로 한 걸음씩 뒷걸음쳤다. "꺼져버려!" 사장이 소리쳤다. "당신은 늙은 바보야." 코랭은 문 손잡이를 돌렸다. 그는 사무실을 향해서 서류를 내던지고는 복도 쪽으로 달렸다. 현관에 도착하는 순간 문지기는 그를 향해 권총을 쏘았다. 총알은 금방 닫힌 문짝에 공처럼 생긴 치즈 모양의 구멍을 냈다. 45 "아름다운 물건임은 인정합니다." 골동품 가게 중인이 코랭의 칵테일 피아노 주위를 돌며 말했다. "단풍나무로 만든겁니다." "알겠어요. 잘 작동되리라는 생각이 드네요." "제 물건 중에서 가장 좋은 물건을 팔려는 것입니다." "괴롭겠네요." 골동품 가게 주인이 나무에 그려져 있는 작은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그는 가구의 광채를 퇴색시키는 약간의 먼지를 불어서 날려 보냈다. "일 해서 돈을 벌고, 이 가구를 간직하고 싶지 않으세요?" 코랭은 사장실과 수위가 발사한 총소리를 상기하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팔 것이 하나도 안 남게 되면, 당신은 그곳에 가게 될 겁니다..." "만약 지출이 늘어나는 것으로 결정되면..." 이렇게 애기하던 코랭은 다시 고쳐 말했다. "... 만약 지출이 더 늘어나지 않게 된다면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만 팔아도 일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어요. 아주 잘 살지는 못해도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어요." "당신은 일을 좋아하지 않나요?" "끔찍해요. 일이란 인간을 기계 수준으로 격하시키거든요." "그런데 왜 당신의 지출은 계속해서 늘어납니까?" "꽃 값도 꽤 비싸거든요. 산에서의 생활비도 비싸고..." "하지만 부인께서 치유될 수만 있다면!" "오!" 코랭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잖아요." "그럼요! 물론이지요!..." "하지만 시간이 필요해요." "그래요. 그런데 태양이 떠나고 있으니..." "다시 돌아올거예요." 골동품 가게 주인이 격려의 말을 해 주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상황이 심각해요." 침묵이 흘렀다. 골동품 가게 주인이 칵테일 피아노를 가리키며 물었다. "준비는 돼 있어요?" "네, 집적통이 가득 채워져 있어요." "나는 피아노를 아주 잘 치니까 한번 시험해 볼 수 있겠군." "원한다면." "의자를 찾아볼께요." 그들은 가게 한가운데 있었는데, 코랭은 이미 이곳에 자신의 칵테일 피아노를 운반해 놓았다. 소파라든가 의자라든가 까치발 달린 테이블이라든가 기타 가구 모양을 한 기묘하고 낡은 물건들이 가게 안에 온통 무더기로 쌓아 올려져 있었다. 가게 안은 그렇게 환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인도산 밀랍과 청색 코머균의 냄새가 풍겼다. 주인이 나무 의자를 가져오더니 그 위에 앉았다. 문에서 자동식 자물쇠를 빼내자 문이 말을 안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방해받을 것이 없었다. "듀크 앨링턴을 아세요?..." "네, 알아요. <방랑자의 블루스>를 연주해 드리지요." "어떻게 조정할까요? 세 가지 주제를 한꺼번에 연주하실 거예요?" "네" "좋아요, 전부 해서 2분의 1리터가 나올겁니다." "좋아요!" 주인은 곧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그의 연주는 지극히 섬세했고 음표들은 마치 듀크의 곡을 연주하는 바니 비가드의 클라리넷에 달린 진주 모양의 장식처럼 가볍게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코랭은 음악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땅바닥에 앉아 칵테일 피아노에 등을 기대고 있었는데, 그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타원형의 굵고 부드러운 눈물 방울은 옥 위를 구르다가 먼지 속으로 흘러가곤 했다. 음악은 그를 뚫고 들어갔다가 여과되어 다시 나왔고, 그로부터 나온 곡은 <방랑자의 블루스>보다 <클로에>에 훨씬 더 가까왔다. 골동품 가게 주인은 목가처럼 소박한 대위 선율을 흥얼거리면서 마치 방울뱀처럼 머리를 좌우로 흔들곤 했다. 그는 세 가지 주제를 동시에 연주하고 나더니 손을 멈추었다. 코랭은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행복에 잠긴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클로에가 병에 걸리기 전에 기분이 바로 그런 기분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요?" 주인이 물었다. 코랭이 일어나더니 작은 부리형 페널을 조작해서 열었고, 두 사람은 무지개 빛 광채가 나는 음료가 채워진 잔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주인은 혀를 차면서 먼저 마셨다. "이거야말로 블루스의 맛이군. 블루스 자체의 맛이야. 당신의 발명품은 정말 훌륭해요!..." "네, 아주 잘 움직이지요." "흠,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값을 후하게 쳐 드리겠소." "정말 감사합니다. 나로서는 모든 일이 잘못되어 가는 거지만..." "사는게 다 그렇지요. 하는 일마다 다 잘 될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늘 잘못되어 가지 않을 수도 있지요. 사람들은 즐거웠던 순간들을 훨씬 더 잘 회상합니다. 그러니 나쁜 순간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내가 '안개낀 아침'을 연주할까요? 좋아요?" "네, 좋아요. 굉장한게 나올거예요. 후추 냄새와 연기 냄새를 가진 회색과 초록색 칵테일이지요." 주인이 다시 피아노 앞에 앉더니 <안개낀 아침>을 연주했다. 두 사람은 칵테일을 마셨다. 그리고 다시, <블루스 버블즈>를 연주하던 주인이 음표 두 개를 한꺼번에 연주하기 시작하다가 갑자기 멈추었다. 코랭은 서로 다른 두 곡을 동시에 들었다. 코랭은 조심스럽게 피아노 뚜껑을 닫았다. "자 이제 사업 이야기를 할까?" "그래요!" "당신의 칵테일 피아노는 환상적이야. 금화 3천 개를 드릴께요." "아니예요. 그건 너무 많아요." "그냥 받으세요." "그렇지만 그것은 바보같은 생각이예요. 전 그러고 싶지 않아요. 괜찮으시다면 금화 2천 개만 주세요." "그럴 수 없어요. 3천 개 받으세요." "저는 칵테일 피아노를 금화 3천 개에 팔고 싶지 않아요. 그건 도둑놈이나 마찬가지예요." "천만에요... 나는 잠시 후에 금화 4천 개를 받고 팔 수 있거든요..." 주인은 계속 고집을 피웠다. "당신이 칵테일 피아노를 팔지 않으리라는 건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잖아요." "그건 그래요. 자 그럼 우리 타협합시다. 금화 2천 5백 개를 드리지요." "좋아요. 그렇게 하지요." "자 여기 있습니다..." 코랭은 돈을 집어서 지갑 속에 조심스럽게 집어 넣었다. 그의 몸이 약간 비틀거렸다. "몸을 가누기가 쉽지 않군요." 코랭이 말했다. "그럴거예요. 이따금씩 나와 함께 연주를 들어주시겠지요?" "약속하지요. 이제 가 볼께요. 저도 볼 일이 좀 있거든요." "친절하기도 하시지!..." 두 사람은 가게를 나섰다. 녹청색의 하늘은 포장도로에 닿을락말락 걸려 있었고, 구름이 방금 부딪쳐 깨진 광장 바닥에는 크고 흰 반점들이 남아 있었다. "한바탕 쏟아진 모양이군." 주인이 말했다. 함께 몇 미터쯤 걸었을 때 코랭의 동행자가 상설 물품을 파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금방 올께요!..." 코랭이 보니 그가 어떤 물건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주머니 속에 감추었다. "됐어요!..." 골동품점 주인이 상점 문을 닫으며 말했다. "그게 뭐지요?" "연통관식 수준기예요. 당신을 바래다 주고 나서 내가 아는 레파토리를 전부 다 연주해 볼 생각이거든요..." 46 니콜라는 오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오븐 내부를 점검하는 중이었다. 윗부분이 약간 일그러진 상태였고, 금속판은 얇은 그뤼에르산 치즈 조각처럼 물렁물렁해져 버렸다. 복도 쪽에서 코랭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이 느껴졌다. 코랭이 문을 밀고 들어오면서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니콜라가 물었다. "팔았어. 2천 5백 개에..." "금화?..." "응" "예상 밖인데!..." "나도 예상 못했어. 오븐 보고 있는 중이야?" "응, 이 오븐이 목탄 솥으로 변하고 있는 중이라구.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생각하고 있는 거야..." "참 이상한 일이야. 오븐만 그러는게 아니야. 복도에 가 봤어?" "응, 다 죽어가고 있어..." "다시 한번 얘기하는데 난 네가 여기 남아 있는 걸 더 이상 견디질 못 하겠어." "편지가 와 있어." "클로에 편지?" "응, 식탁 위에 있어." 코랭이 편지 겉봉을 뜯자 클로에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읽는 대신 귀만 기울이고 있으면 되었다. 사랑하는 코랭, 나는 잘 지내고 있어요. 날씨도 무척 좋아요. 골치거리가 있다면 두더지들이예요. 은빛 털을 가진 두더지들은 눈과 땅 사이를 기어다니면서 밤이 되면 소리를 질러대지요. 아이들은 커다란 눈 언덕을 만들며 놀이를 하는데, 덕분에 사람들은 그 위에 보기 좋게 미끄러지기도 하지요. 햇살이 가득하니 나도 곧 돌아가게 될거예요. "좋은 소식이야. 니콜라, 이제 너는 퐁또잔느 집으로 옮기도록 해." "싫어." "가! 그 사람들은 요리사를 필요로 하고 있고, 나는 네가 여기 남아 있는걸 좋아하지 않는다구... 넌 갑자기 늙어 버렸어. 내가 너 대신 사인을 했단 말이야." "그럼 생쥐는 어떻게 해? 누가 먹을 걸 주지?" "내가 보살필께." "그럴 수는 없어. 내가 당장 쓰러지는 것도 아닌데." "절대 그렇지 않아. 여기 공기가 너를 억누르고 있다고... 그 누구도 견딜 수 없어." "그건 이유가 안돼." "아무튼 문제는 그게 아니야!..." 니콜라가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코랭은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 구페의 요리법에는 전혀 관심이 없나봐. 그래, 너는 체념에 빠져서 요리법까지 포기한거라구." 니콜라가 이의를 제기했다. "천만에, 그렇지 않아." "내 말좀 들어봐. 넌 이제 일요일에 정장을 하지도 않고 매일 아침에 하던 면도도 않하잖아." "그건 잘못이 아니야." "잘못이야. 나는 네 능력에 맞는 월급을 줄 수가 없어. 현재 너의 능력은 저하되고 있고, 그건 어느 정도 내 책임이라구." "그건 사실이 아니야. 그건 네 책임은 아니야." "안그래. 왜냐하면 나는 결혼을 했고 또..." "바보 같은 소리... 그럼 누가 요리를 해?" "내가." "그렇지만 넌 일을 해야 되잖아!... 시간이 없을 거야." "아니야 나는 일을 안해도 돼. 금화 2천 5백 개를 받고 칵테일 피아노를 팔았으니까." "그래? 그렇지만 그렇게 말해봤자 아무 소용없어!..." "퐁또잔느가로 가!" "정말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군! 그래 가 줄게. 넌 정말 못된 친구야." "넌 다시 예의바른 생활로 돌아가게 될거야." "자넨 내가 너무 격식을 차린다고 불만이 많았잖아..." "그랬지, 나랑 같이 있을 때야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자넨 날 난처하게 만드는군. 정말 나를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구." 47 코랭은 현관 문 두드리는 소리에 달려나갔다. 그의 실내화 한 짝에 큰 구멍이 뚫려 있었기 때문에 발을 양탄자 밑에 감추었다. "집이 높아졌군요." 망즈망슈가 집으로 들어서면서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는 진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발을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에 코랭은 얼굴을 붉히면서 그렇게 인사했다. "아파트를 옮겼군요, 지난 번보다 가까워졌어요." "이사하지 않았는데요. 그대로예요." "아닌것 같은데. 당신은 농담을 할 때 더 진지해지면서 더 재치있는 말을 하는데, 그건 당신의 장점이예요." "그래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어때요? 환자는?" "나아졌습니다. 안색도 좋아지고 이제 아프지도 않아요." "흠!... 그거 이상한 일인데." 그는 코랭과 함께 클로에 방으로 건너가면서 문틀에 부딪치지 않으려고 머리를 숙였지만 그 순간 문틀이 휘어지는 바람에 그의 입에서는 쌍소리가 튀어나왔다. 침대에 누워 있던 클로에는 교수가 들어서자 웃으면서 맞이했다. 방의 크기는 상당히 축소된 상태였다. 다른 방에 깔린 양탄자와는 반대로 이 방에 깔린 양탄자는 더 두꺼워져 있었고, 침대는 새틴 천으로 짠 커튼이 달린 알코브 안에 놓여 있었다. 큰 창은 꽃자루처럼 생긴 바위가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네 개의 작은 정사각형 창으로 완전히 분리되고 말았다. 약간 회색빛을 띠고 있었지만 깨끗한 빛이 방 안 가득 넘쳤다. 방은 더웠다. "이래도 집을 안 옮겼다고 우길거요?" "맹세코 안 옮겼습니다. 의사 선생님 ..." 코랭이 대답을 하자, 교수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불안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농담이었습니다!"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을 맺고 말았다. 망즈망슈가 침대로 다가갔다. "자, 옷을 벗어보세요. 청진을 하겠어요." 클로에가 솜털로 된 외투를 살짝 열어 보여주었다. "아! 여기를 수술했구요..." "예..." 그녀의 오른쪽 유방 아래에 완벽하게 둥근 작은 흉터가 남아 있었다. "그게 죽자 이리로 끄집어 냈나요? 크던가요?" "일 미터는 됐어요. 이십 센티쯤 되는 커다란 꽃이 피어 있었구요." 교수가 중얼중얼 말했다. "더러운 것 같으니라구!... 당신은 운이 없었군요. 그 정도 크기는 흔치 않은데!" "다른 꽃들이 그 꽃을 죽인거예요. 특히 맨 나중에 가져온 바닐라 나무 꽃이 그랬어요." "이상한 일이로군. 나 같으면 바닐라 나무가 그런 효과를 낳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난 그것보다는 노간주 나무나 아카시아 나무를 생각했어요. 당신도 아시겠지만 의학이란 얼간이들의 장난이거든요." 교수가 그녀의 청진을 마치고 일어났다. "좋습니다. 물론 흔적이 남긴 했지만..." "그래요?" "그렇습니다. 현재 당신의 폐는 거의 완전히 멎어 있는 상태예요." "그렇긴 해도 다른 쪽 폐가 좋다면, 불편할 것은 없어요.!" "남은 폐가 혹시 병을 앓는다면, 당신 남편이 난처한 경우를 당하게 될 겁니다." "내가 아니구요?" 클로에가 물었다. "이제 당신에겐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그가 다시 일어섰다. "당신에게 겁을 주고 싶진 않지만 상당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러겠어요." 그녀의 두 눈이 커졌다. 그리고 수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남은 폐를 건강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이렇게 묻는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울먹이다시피 했다. "당황하지 말아요. 이제 어떤 다른 병에 걸릴 이유는 없으니까요." 교수가 주위를 둘러 보았다. "먼저번 아파트가 더 좋았어요. 공기가 더 맑았었는데," "그건 그래요. 하지만 그건 우리 잘못이 아니예요." 교수가 물었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나요?" "이것 저것 배웁니다. 그리고 클로에를 사랑하구요." "일을 해도 단 한 푼의 수입도 없습니까?" "네, 저는 사람들이 흔히 이해하고 있는 의미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교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노동이 고약한 것이라는 건 나도 잘 알지요. 하지만 우리가 뭘 하기로 선택했다고 해서 전부가 다 수입이 생기는 건 아닌데, 왜냐하면..." 그는 말을 멈췄다. "지난번에 당신이 놀랄만한 성과를 지닌 기계를 나에게 보여준 일이 있지요? 혹시 아직도 가지고 있나요?" "아니요. 팔았어요. 하지만 마실 것을 조금 만들어 드릴 수는 있는데요..." 망즈망슈는 노란색 와이셔츠 깃을 손가락으로 만지더니 목을 문질렀다. "당신을 따라가지요. 몸조리 잘하세요, 부인" "안녕히 가세요. 의사 선생님." 그녀는 침대 속으로 깊숙히 기어들어가면서 담요를 목 아래까지 끌어 올렸다. 자주색으로 테두리진 라벤더처럼 푸른색 시트 위에 놓인 그녀의 얼굴은 맑고 부드러웠다. 48 쉬크는 문을 지나면서 출근 카드를 체크했다. 공장으로 통하는 입구의 철문 문턱에 다가가자 여느 때와 같이 비틀거렸고, 검은 수증기와 연기가 얼굴에 사나운 입김을 내뿜었다. 그리고 소음이 귀를 때렸다. 터빈 교류 발전기가 부르릉거리는 소리, 서로 교차된 철근 장선 위로 동축이 굴러가는 소리, 함석판 위로 몰려가는 사납고 소란스러운 바람소리 등이었다. 통로에는 6미터 간격으로 불그레한 전구가 하나씩 켜져 있었지만, 몹시 어두웠다. 전구 불빛은 미끈미끈한 물체들 위로 완만하게 흘러내렸다가 울퉁불퉁한 벽과 바닥에 달라붙기도 하고 반들반들한 물체들 주위를 돌기도 했다. 그의 발 밑의 철판은 울툭불툭,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었으며, 그 구멍을 통해서 까막득히 아래에 있는 석재 가마의 검붉은 화구를 볼 수 있었다. 벽면에 생성된 물방울은 기계가 격렬하게 진동할 때마다 이따끔식 떨어져내리곤 했는데, 물방울들 중 하나가 목에 떨어질 때마다 쉬크는 전율하곤 했다. 그것은 오존 냄새를 풍기는 흐릿한 빛깔의 물이었다. 통로는 맨 끝에서 구부러졌고, 지면은 작업장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높은 공간에 툭 튀어나와 있었다. 아래편에서는 퉁퉁하게 생긴 기계들 앞에서 사람들이 탐욕스런 톱니바퀴에 몸이 갈가리 찢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며 싸우고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오른쪽 다리는 쇠로 된 무거운 테로 고정되어 있었다. 이 테는 하루에 딱 두 번, 한 낮과 밤에만 풀렸다. 사람들은 윗편에 설치된 좁은 도관 속에서 짤랑거리며 나오는 금속제 부품들을 기계에서 떼어놓곤 했다. 이 부품들을 제 때 거두어 들이지 않으면, 톱니바퀴들이 우글우글 움직이면서 화고 속으로 즉시 떨어져 버렸다. 갖가지 크기의 기계들이 있었다. 쉬크에겐 그 광경이 이미 눈에 익을 대로 익었다. 그는 여러 작업장 중 맨 끝에서 일하는데, 그의 임무는 기계가 잘 작동되는지 감독하고, 기계가 사람들의 살덩어리를 떼어낸 다음 멈추게 될 경우 그 기계를 수리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되어 있었다. 그는 갑판이 깔린 광주리형 하강기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궜다. 호주머니에서 파르트르의 책을 꺼낸 그는 조종스위치를 누른 다음 지상에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는 갑판이 금속제 완충장치에 부딪히면서 쿵하는 소리를 내는 순간 마비상태에서 벗어났다. 하강기를 나와 그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의 사무실은 유리가 끼워져 있고 조명이 희미한 아주 좁은 방으로써, 작업장을 감시할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서 다시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했던 그는 유체의 박동소리 그리고 기계들의 소음 속에서 잠이 들었다. 소음이 불협화음을 이루자 그는 불현듯 눈을 치켜 떴다. 그는 그 수상한 소리가 어디에서 나는지 두리번거렸다. 공기 정화용 분사 노즐 중 하나가 방금 작업장 한가운데서 뚝 멈추어 버리는 바람에 마치 둘로 잘린 것 처럼 허공에 떠 있었다. 노즐로부터 분리된 네 대의 기계가 요동을 치고 있었다. 기계가 요동치는 모습이 멀리서 보였는데 기계마다 어떤 것이 조금씩 내리 누르고 있었다. 쉬크는 읽던 책을 내려 놓고서 밖으로 달려 나갔다. 분사 노즐 조종판으로 달려가서 손잡이를 재빨리 내렸다. 손잡이가 내려진 노즐은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자루가 긴 낫의 날처럼 보였으며, 네 대의 기계에서 나오는 연기가 소용돌이치면서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그는 조종판을 버려둔 채 기계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기계는 서서히 멈추었다. 각 기계에 배치되어 있던 사람들이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들의 구부러진 오른쪽 다리는 쇠로 만든 테 때문에 기묘한 각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들의 오른손 네개는 손목으로부터 절단된 상태였다. 피는 사슬의 금속 위에 닿는 순간 연소되면서 산 채로 타죽는 짐승의 끔찍한 냄새를 공중에 퍼뜨렸다. 쉬크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열쇠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고정시켜 놓던 테를 푼 다음 그들을 기계 앞에 눕혔다. 다시 자기 사무실로 달려간 그는 전화를 걸어 의무원들을 불렀다. 그러고 나서 그는 조종판 옆으로 가서 분사 노즐을 다시 작동시켜 보려고 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액체는 일단 일직선으로 솟아 올랐다가도 네 번째 기계가 놓인 위치에 이르기만 하면 즉시 사라져 버렸다. 노즐은 마치 도끼로 절단시켜 놓은 것처럼 확실하게 잘려 있었다. 그는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책을 지루한 심정으로 만지작거리면서 중앙 사무실로 향했다. 그는 창구 뒤에 있는 여비서에게 말했다. "709번, 710번, 711번, 712번이 파손되었습니다. 네 사람은 교체해야 하고 기계들도 치워야 할 것 같습니다. 공장장님과 얘기할 수 있을까요?" 여비서가 니스칠한 마호가니 책상 위에 있는 붉은색 단추를 몇 개 눌러보더니 말했다. "들어가십시오. 기다리고 계십니다." 쉬크는 들어가서 자리에 앉았다. 인사과장이 심문이라도 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네 사람이 필요합니다." "좋아요, 내일 보내드리지요." "공기정화용 노즐 하나가 작동되지 않습니다. " "그건 내 소관이 아니오. 옆 사무실로 가보시오." 쉬크는 그 곳에서 나와 똑같은 절차를 밟은 다음 자재과장실로 들어갔다. 쉬크가 말했다. "6백 개의 공기정화용 노즐 중에서 한 개가 작동되지 않습니다." "전혀 안된단 말입니까?" "마무리 작동이 되지 않습니다." "그걸 다시 작동시킬 수 없었습니까?:" "예, 도저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당신이 소속된 작업장을 점검해 보도록 하겠소." "내 생산고가 감소됩니다. 빨리 해 주십시오." "그건 내 소관이 아니오. 생산과장을 만나보도록 하시오." 쉬크는 옆에 붙은 구역으로 가서 생산과장실로 들어갔다. 그곳은 눈부실 정도로 환한 사무실이었고, 사무실 뒤편에는 반투명의 유리로 된 큼직한 판이 벽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이 판 위에 붉은 색 선의 끝부분이 마치 나뭇잎 가장자리에 매달린 벌레처럼 오른쪽을 향해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판 아래에서는 크롬 도금이 된 큼직한 원형의 바늘이 휠씬 더 느리게 돌아가고 있었다. 생산과장이 말했다. "당신의 생산량이 0.7% 감소했습니다. 무슨 일이지요?" "기계 네 대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0.8%가 되면 당신은 해고입니다." 생산과장이 크롬 도금이 된 자신의 안락의자를 빙글 돌리면서 수준기의 눈금을 확인했다. "0.78%군요. 내가 당신 자리에 있었다면 벌써 무슨 수를 썼을 거요." "저는 이런 일이 처음입니다." "유감입니다. 우리는 아마 당신의 부서를 바꿀 수도 있을 겁니다..." "그거야 아무래도 좋습니다. 나는 꼭 일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니까요. 나는 일 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그런 말을 할 권리는 없소." 이렇게 말하고 나서 생산과장이 한마디 덧붙였다. "당신은 해고요." "할수없지요. 정의란 무엇입니까?" "나는 그런 말 들어본 일이 없소. 난 바빠요." 쉬크는 사무실을 나왔다. 그는 인사과장실로 다시 들어갔다. "임금을 받을 수 있습니까?" "몇 번입니까?" "709번 작업장. 엔지니어." "좋아요" 인사과장이 여비서를 돌아다보며 말했다. "필요한 조처를 취하시오." 그리고 그가 덧붙였다. "여보세요! 제700번 작업장에 5형의 스페어 기사 한 명" 여비서가 쉬크에게 봉투 하나를 주면서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금화 백 열 개가 들어 있습니다. " "고맙습니다." 쉬크는 이렇게 말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는 자기 대신 일하게 될 기술자와 마주쳤는데 금발머리에 몸이 마르고 피곤한 표정이 역력한 청년이었다. 쉬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서 그 안에 몸을 실었다. 49 "들어오세요." 디스크 돌리는 사람이 고함치듯 말했다. 그는 문쪽을 바라보았다. 쉬크였다. "안녕하세요. 내가 맡겼던 녹음 때문에 왔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지요. 30면인데 공구제작을 했고, 한 면에 번호를 매겨 20편씩 녹음 하는데 든 비용이 금화 백 여덟 개 입니다. 금화 백 다섯 개에 해 드리지요." "여기 있습니다. 금화 백 열 개짜리 수표인데 이서를 해드릴 테니 다섯 개를 거슬러 주세요." "좋아요." 디스크 돌리는 사람이 서랍을 열더니 빳빳한 금화 다섯 개짜리 새 지폐를 쉬크에게 주었다. 쉬크의 눈에서 나던 광채가 흐려졌다. 50 이시스가 차에서 내렸다. 니콜라가 운전을 했다. 그가 손목시계를 보더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코랭과 클로에가 있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니꼴라는 흰색 개버딘 천으로 된 새 제복에 챙 달린 흰색 가죽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다시 젊어지긴 했지만, 불안한 표정이 가득한 걸로 봐서 깊은 혼란에 빠져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코랭이 사는 층에서부터는 계단의 폭이 갑작스럽게 줄어들었다. 이시스는 두 팔을 벌리지 않아도 차가운 벽과 층계 난간을 동시에 만질 수 있었다. 양탄자는 마룻바닥을 겨우 가리고 있는 보잘것없는 보풀에 불과했다. 층계참에 올라선 그녀는 가볍게 숨을 헐떡이며 벨을 눌렀다. 문 열러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팽팽해져 있던 계단이 느슨해질 때마다 가볍게 삐걱거리는 소리에 이어 뭔가를 튀기는 듯 습한 소리가 이따금 들려올 뿐 그밖에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시스는 다시 벨을 눌렀다. 문 반대편에서는 쇠망치가 철판 위에서 가볍게 흔들거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살짝 흔들자 느닷없이 문이 열렸다. 이시스는 안으로 들어가다가 코랭에게 걸려 넘어질 뻔했다. 그는 얼굴을 비스듬하게 바닥에 갖다 붙이고 두 팔은 앞으로 내민 채 엎어져 있었다... 그의 두 눈은 감겨 있었다. 현관은 어두웠다. 창문 둘레에는 후광이 어려 있었는데,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잠을 자는 것이었다. 이시스는 코랭 옆에 무릎을 끓고서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피부가 살짝 전율하더니 두 눈이 눈꺼풀 아래서 움직였다. 그는 이시스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잠이 들었다. 이시스는 그의 몸을 살그머니 흔들었다. 그가 일어나 앉더니 입을 손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아, 내가 잠 들었었나 봐." "그래, 침대에서 자지 않아?" "아니 여기서 의사를 기다리다가 꽃을 사러 가려던 참이었어." 그는 전혀 갈피를 못잡겠다는 표정이었다. 이시스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 "클로에 때문이야. 다시 기침을 하고 있어." "가벼운 염증 때문일거야." "아니야 다른 쪽 폐가 아파." 이시스가 몸을 일으키더니 클로에 방으로 달려갔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쪽판 마루가 튀어나오곤 했다. 클로에의 방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침대에 누운 클로에는 머리를 베개 속에 반쯤 감춘 채 소리없이, 그러나 끊임없이 기침을 했다. 그녀는 이시스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자 몸을 약간 일으켜 숨을 돌렸다. 그녀는 이시스가 가까이 다가오자 희미한 미소를 지었고, 이시스는 침대 위에 앉아 병든 갓난애를 안듯 그녀를 두 팔로 안았다. 이시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기침하지마. 클로에" "꽃이 예쁘다." 클로에가 이시스의 머리에 꽂혀진 큼직한 카네이션에 코를 갖다대고 냄새를 맡더니 숨을 돌리며 말했다. 그녀가 덧붙여 말했다. "좋은데" 이시스가 물었다. "아직 아프니?" "다른 쪽 폐가 아픈 것 같아." "먼저번 폐 때문에 약간씩 기침을 하는 것 뿐일거야." "아니야, 코랭은 어디 있어? 꽃 사러 간거야?" "올거야. 아까 만났어. 그런데 돈은 있니?" "응, 아직은 조금 있어. 꽃을 사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 아무 필요도 없을 텐데!..." 이시스가 물었다. "아파?" "응, 하지만 많이 아프진 않아. 그런데 방이 변했어." "지금이 나은데. 옛날엔 너무 넓었잖아." 이시스는 마치 늪처럼 차갑던 쪽판 마루의 느낌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바뀌건 말건 난 상관없어. 따뜻하고 편하기만 하면 되지 뭐..." 클로에가 말했다. "그럼! 작은 아파트가 오히려 더 쓸만한 법이란다." "생쥐는 나랑 함께 살아. 보이지? 저기 모퉁이 말이야. 생쥐가 뭘 만드는지 모르겠어. 복도에는 가려고 하질 않아." "그래..." "카네이션 한번 더 줘 봐 향기가 좋은데." 이시스가 머리에서 꽃을 떼어 클로에에게 주자 클로에는 꽃의 향기를 길게 들이마셨다. "니콜라는 어떻게 지내?" "잘있어. 하지만 전처럼 명랑하지 않아. 내 다음에 올 때는 다른 꽃을 가져다 줄께." "난 니콜라를 참 좋아했어. 너 니콜라랑 결혼할거 아니니?" "그 사람은 나와 맞지 않아." "그건 상관없어. 그가 널 사랑한다면..." "우리 부모님이 그에게 그런 말을 못하셔. 아!..." 카네이션이 문득 창백해지더니 말라 비틀어지고 말았다. 꽃은 이제 미세한 가루가 되어 클로에의 가슴 위로 부셔져 내렸다. "아! 기침이 또 나오려고 해.. 이것 봐!" 그녀가 말을 멈추더니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가 다시 발작을 하듯 심하게 기침을 했다. 그녀가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바로... 이것 때문에... 꽃들이 다 죽는 거야..." "아무 말도 하지 마. 코랭이 꽃을 가져올 거야." 방안의 빛은 푸르렀고, 네 모퉁이는 거의 초록색에 가까웠다. 습기의 흔적은 아직 보이지 않았고 융단도 여전히 꽤 높이 걸려 있었지만, 정사각형으로 생긴 네 개의 창문 중 하나는 완전히 닫혀 있는 상태였다. 현관을 울리는 코랭의 축축한 발자국 소리가 이시스의 귀에 들려왔다. "코랭이야. 틀림없이 가져왔을 거야." 이시스가 말했다. 코랭이 나타났다. 라일락 꽃다발을 한아름 안고 있었다. "자! 클로에! 받아!..." 클로에가 두 팔을 내밀었다.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예요. 사랑하는 코랭." 그녀가 꽃다발을 또 다른 베개 위에 올려 놓더니 옆으로 돌아누우면서 달콤한 향기가 풍기는 흰색 꽃송이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시스가 일어났다. "가려구?" 코랭이 물었다. "응,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꽃을 가지고 다시 올께." "내일 아침 와 주면 고맙겠어. 일자리를 구하러 나가야 하는데 다시 의사를 보기 전에는 아내를 혼자 놔두고 싶지 않거든." "알았어..." 이시스는 조심스럽게 약간 몸을 숙여 클로에의 여린 뺨에 입을 맞추었다. 클로에가 손을 들어 이시스의 얼굴을 어루만졌지만, 머리는 돌리지 않았다. 클로에는 탐스러운 머리칼 주위에 소용돌이 모양으로 펼쳐져 있는 라일락 꽃 향기를 탐욕스럽게 들이마셨다. 51 코랭은 힘겹게 걷고 있었다. 가끔 고개를 들어 이정표를 보고는 자기가 길을 제대로 들어섰는지 확인하곤 했다. 바로 그때 우중충한 고동색과 푸른색 줄이 비스듬히 나 있는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멀리 비탈 위에는 온실 굴뚝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의 호주머니 속에는 국가 방위를 위해 일할 수 있는 20세에서 30세까지의 남자를 구한다는 내용이 실린 신문이 들어 있었다. 그는 서둘러서 걸었지만, 그의 두 발은 건물들과 도로 사이에 있는 흙 속에 빠지곤 했다. 그는 진흙 구멍에서 발을 잡아빼면서 걸음을 서둘렀다. 땅은 마치 둥근 근육처럼 금방 수축되었고, 거의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가벼운 침하만 계속되었다. 그 같은 침하는 거의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굴뚝들이 가까워졌다. 코랭은 자신의 심장이 미쳐 날뛰는 짐승처럼 가슴 속에서 진동하는 걸 느꼈다. 그는 호주머니의 옷감 위로 신문을 꽉 움켜잡았다. 바닥이 미끄러워지면서 그의 발 아래로 꺼져들어갔지만, 점점 딱딱해지더니 포장 도로가 나타났다. 진한 색의 새들이 초록색 연기가 가느다랗게 흘러나오는 굴뚝 꼭대기 주위를 돌고 있었다. 문은 하나뿐이었다. 안으로 들어간 그는 반짝거리는 창살에 발을 문지르고 나서 천장이 낮은 복도를 따라갔다. 바닥에는 빨간색 벽돌이 깔려 있었고, 벽의 윗부분에는 천장과 마찬가지로 수센티 두께의 판유리가 부착되어 있었다. 복도 맨 끝에 문이 하나 있었다. 신문에 지정된 번호가 문에 붙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광고에 나온 대로 노크없이 그냥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가 엉클어진 흰 와이셔츠 차림의 나이들어 보이는 남자가 책상 뒤편에서 개론서를 읽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쌍안경과 총기, 다양한 크기의 창 등 여러가지 무기들, 그리고 갖가지 크기의 심장 뽑개들이 완벽하게 수집되어 벽에 걸려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코랭이 입을 열었다. "안녕하시오?" 그 남자도 말했다. 그 남자는 나이에 비해 거칠고 쉰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광고를 보고 왔습니다." "아? 그래요? 광고를 낸 지 한 달째 아무 소득이 없었어요. 무척 힘든 일이라서 말이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돈을 많이 주니까요!" "그래요! 그렇지만 일은 당신 몸을 망칠 것이고 어쩌면 약값이 더 들지도 모를 일이요. 게다가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이러니 저러니 말나오는 것은 듣기 싫소. 그래도 보다시피 난 아직 살아 있수다..." "일하신 지 오래 됐습니까?" "일 년 됐지요. 난 스물 아홉살이오." 그는 쭈글쭈글한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얼굴의 주름을 어루만졌다. "이제 됐어요...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개론서를 읽을 수 있을 거고..." "난 돈이 필요해요." "누구나 다 그렇지. 하지만 이 일을 하면 아마 철학자처럼 될거요. 석 달만 지나면 당신은 지금보다는 돈이 덜 필요해질 겁니다." "제 아내를 치료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한 겁니다. " "아 그래요?" "아내가 아파요. 원래 난 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만." "유감이오. 여자란 병이 나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법이오." "난 아내를 사랑합니다." "그러시겠지요, 안그러면 당신이 일을 하려고 할 까닭이 없을 테니까. 당신이 할 일을 가르쳐주리다. 아래층으로 갑시다." 그는 반 돔으로 덮여 있는 깨끗한 통로와 붉은색 벽돌이 깔린 계단을 지나 눈에 잘 띄는 심볼 하나가 그려져 있는 문 중의 하나로 코랭을 데려갔다. "자, 다 왔습니다. 들어가시오. 무슨 일인지 설명해 주겠소." 나이들어 보이는 사나이가 말했다. 코랭은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정사각형이었고 작았다. 사면의 벽과 바닥은 유리로 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관 모양으로 생기긴 했지만, 일 미터는 족히 될 만큼 꽤나 묵직한 흙 더미가 놓여 있었다. 그 옆의 바닥에는 무거운 양털 담요가 둥글게 말려져 있었다. 가구는 단 한 점도 없었다. 벽에 만들어 놓은 작은 벽장 속에는 푸른색 철제 금고가 놓여 있었다. 남자가 금고를 열였다. 그는 가운데 아주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 원통형의 반짝거리는 물건 열 두 개를 끄집어 냈다. "당신도 알겠지만 국가 방위를 위해서는 특별히 선정한 무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우리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총신이 비틀리지 않고 고르게 자라나려면 인간의 체온이 필요합니다. 어떤 무기건 다 그래요." "아, 예" "당신은 심장과 간이 있는 부위와 일치되는 구멍을 땅에 열 두 개 판 다음 옷을 벗고 그 위에 누워야 합니다. 저기 양털 천을 몸에 덮고서 완벽하게 일정한 체온을 발산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그가 쉰 목소리로 웃고 나더니 오른쪽 넓적다리를 두드렸다. "난 매달 처음 이십 일 동안에는 열 네 개씩 만들곤 했지요. 아!... 그때는 나도 강인했는데!..." "그러고 나선 어떻게 합니까?" "그런 상태로 스물 네 시간 동안 있게 되면 총신이 자라나는 거요. 그럼 누가 와서 그것들을 꺼내가는 겁니다. 땅에 기름을 뿌려주면 당신은 똑같은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되지요." "총신은 아래 쪽으로 자랍니까?" "그렇소. 아래 부분에 빛을 받거든요. 총신이란 양성의 굴광성을 가지고 있지만 흙보다 더 무겁기 때문에 아래로 자라는 건데, 비틀리지 않게끔 특히 아랫부분에 빛을 쬐어주는 겁니다." "그럼 강선은 어떻게 만드는 겁니까?" "이 종류의 총신들은 자라나면서 동시에 강선을 만들지요. 선별된 씨앗들이거든요." "굴뚝은 어디에 쓰이지요?" "담요와 건물의 소독이라든가 환기를 위한 거지요. 효과가 매우 강하게끔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특별히 대비를 한다든가 할 필요는 없어요." "인공열로 안됩니까?" "잘 안되지요. 총신이 잘 자라나려면 인간의 열이 필요합니다." "여자도 씁니까?" "여자들은 이 일을 할 수가 없어요. 가슴이 납작하지가 않아서 체온이 잘 분산되지 않기 때문이요. 자, 이제 일을 한 번 해보시오." "정말로 하루에 금화 열 개씩 줍니까?" "물론이요. 열두 개 이상 하면 보너스도 있어요..." 남자가 방을 나가면서 문을 잠궜다. 코랭은 열 두 개의 씨앗을 손에 움켜쥐었다. 그는 씨앗을 옆에 내려놓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의 두 눈은 감겨 있었고, 입술은 이따금씩 떨렸다. 52 "웬일인지 모르겠소. 처음엔 잘 됐었는데, 하지만 최근 것 가지고는 특수 무기밖에 못 만들어요." "그래도 돈은 주시겠지요?" 그가 받아야할 돈은 금화 일흔 개에 보너스가 금화 열 개였다. 그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총신을 검사해본 결과 상당수가 비정상으로 판명되었다. "이걸 보시오." 남자가 말했다. 그는 총신 중 하나를 들고 있다가 나팔처럼 너부죽하게 벌어진 끝부분을 코랭에게 보여 주었다. "이해가 안 가는군요. 처음엔 완전히 원통형이었는데." "물론 이걸 가지고도 기통은 만들 수 있겠지만, 그건 5차대전 당시의 모델이고, 우리에게도 벌써 재고가 엄청나게 쌓여 있어요. 참, 곤란한 일이로군요." "전 최선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렇겠지요. 금화 팔십 개를 드리겠소." 그가 자기 책상 서랍에서 봉인이 된 봉투 하나를 꺼냈다. "경리과에 직접 가지 않아도 되게끔 내가 이리 가져오라고 시켰어요. 경리과에서 돈을 받으려면 몇 달씩 걸리기도 하는데, 보아하니 사정이 급한 것 같아서 말이오." "고맙습니다." "어제 일한 생산품을 아직 검사해보지 않았군요. 곧 도착할 겁니다. 잠시 기다리지 않겠소?" 떨리는 데다 고르지도 못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는 건 하나의 고통이었다. "그렇게 하지요." "탄약통이 없어요. 다른 총과 똑 같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세세한 부분 하나까지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겠지요."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화물 운반원이 살균된 흰색 손수레를 밀면서 나타났다. 흰색 린넨 천 밑에는 최근에 코랭이 만들어 낸 상품이 있었다. 린넨 천은 한 쪽 끝이 들어 올려져 있었다. 반듯한 원통형의 총신이 나타날 것 같지 않아서 코랭은 불안했다. 운반원이 문을 닫고 나갔다. "잘 만들어진 것 같지는 않군..." 그가 린넨 천을 들쳤다. 차가운 푸른색 강철로 만든 총신이 열두 개 들어 있었는데, 총신 끝에는 비로드 처럼 부드러운 꽃잎들 속에 베이지색의 그늘이 드리워진 싱싱하고 아름다운 백장미가 한 송이씩 활짝 피어 있었다. "오! ... 정말 아름다워!..."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침을 두 번 했을 뿐이었다. "내일부터 일 할 필요가 없게 됐어요." 그의 손가락은 손수레 가장자리를 신경질적으로 꽉 움켜쥐고 있었다. "제가 가지면 안되겠습니까? 클로에에게 주려고 그래요." "강철 부분에서 떼내면 죽을 거요. 보다시피 쇠로 만들어져 있어서..." "안 그럴텐데요." 코랭이 장미꽃을 조심스럽게 잡더니 줄기를 꺽으려고 했다. 소용이 없었다. 꽃잎 중 하나가 그의 손을 여러 센티 길이로 찢어 놓았다. 몇 모금은 되어 보이는 피가 손에서 흘러나오자 코랭은 반사적으로 입을 갖다 댔고, 곧 삼켰다. 그는 붉은색 초생달 모양이 나 있는 흰색 꽃잎을 바라보았고, 남자는 코랭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문쪽으로 천천히 밀어냈다. 53 클로에는 자고 있었다. 낮에는 수련 때문에 피부가 아름다운 크림 빛을 띠었으나, 잠자는 동안은 그렇지 않았다. 뺨에 붉은 반점까지 나타나곤 했다. 이마 밑의 두 눈은 마치 두 개의 푸르스름한 자국처럼 보여서 멀리서 보면 눈을 뜨고 있는 건지 감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코랭은 식당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클로에 주위에는 많은 꽃들이 있었다. 코랭은 다른 일자리를 구하러 나가기 전에 몇 시간 정도 더 기다릴 여유가 있었다. 그는 좋은 인상을 풍기기 위해서 좀 휴식을 취하고 싶었으며, 정말로 돈벌이가 되는 직장을 얻었으면 하고 바랐다.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창문은 문지방에서 10센티 정도만 열려져 있을 뿐 대부분 닫혀 있어, 빛이 좁은 띠 모양으로 새어 들어 올 뿐이었다. 코랭의 이마와 두 눈만 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얼굴의 나머지 부분은 어둠 속에 남아 있었다. 축음기 픽업이 자동으로 작동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음반을 한 장씩 손으로 직접 올려 놓아야 했다. 그는 피곤했다. 음반도 닳아 떨어진 상태였다. 어떤 음반은 멜로디조차 알아들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코랭은 클로에가 뭔가를 필요롤 한다면 생쥐가 즉시 자기에세 알려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니콜라는 이시스랑 결혼할까? 이시스는 결혼식 때 어떤 드레스를 입을까? 누가 초인종을 누르지? "안녕, 알리스. 클로에를 만나러 왔어?" "아니, 그냥 왔어." 두 사람은 그냥 식당에 있기로 했다. 알리스의 머리칼 때문에 방안이 더 환해졌다. 식당에는 의자 두 개가 있었다. "지겨운 모양이군, 난 지겹다는게 뭔지 알고 있어." "쉬크는 외출을 안해. 자기 집에 있어." "뭘 좀 가지고 가 보지." "아냐, 난 다른 곳에 있어야 해." "응. 페인트 칠을 다시 하는구나..." "그렇지 않아. 그 사람은 갖고 싶은 책을 다 가졌는데도, 더 이상 날 원하지 않아." "싸웠니?" "아니. 그 사람은 최근에 산 책을 값싼 가죽으로 장정할 수 있을 만큼의 금화밖에 없어. 그러니 나한테 아무 것도 줄 수가 없대. 만약 내가 그대로 있으면 내 손도 망가지고 용모도 추하게 변할 테니 더 이상 나를 붙잡아 두는 걸 자신이 용납할 수가 없대. 그렇게 말하고 끝이야." "그 친구 말이 맞아. 넌 일을 하면 안돼." "하지만 나는 쉬크를 사랑해. 나는 그를 위해서라면 일할 수 있어." "그래봤자 소용없어. 게다가 너는 너무 고와서 일할 수 없어." "그 사람이 나를 쫓아낸 이유가 뭐지? 내가 정말로 예뻐서?" "몰라. 하지만 난 네 머리칼과 얼굴을 몹시 좋아해." "자, 봐." 그녀가 일어나서 지퍼에 달린 작은 고리를 잡아당기자 옷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밝은 색의 모직 옷이었다. "음..." 방안이 무척 밝아져서 코랭은 알리스의 전신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막 날아 오르는 듯했고, 코랭이 만져본 갸날픈 두 다리의 긴 근육은 탄탄하고 뜨거웠다. "키스해도 돼?" 코랭이 물었다. "그럼, 난 널 몹시 사랑해." "너 감기 들겠다." 그녀가 코랭에게 다가왔다. 코랭의 무릎 위에 앉은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쉬지 않고 흘렀다. "왜 그 사람은 더 이상 날 원하지 않는 걸까?" 코랭은 그녀를 품에 안고 천천히 흔들어 주었다. "그 친구를 이해 못해.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쉬크는 좋은 애야." "그는 나를 몹시 사랑했어. 그는 책과 나를 동시에 소유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어! 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거야." "너 이러다 감기 들겠다." 그는 그녀를 껴안더니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알리스가 말했다. "왜 난 처음에 널 만나지 못했을까? 그랬더라면 난 널 열렬히 사랑했겠지만, 이젠 그럴 수가 없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니까." "잘 알아. 나도 이제는 클로에를 더 사랑하니까." 그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더니 그녀의 옷을 집었다. "옷 입어, 감기 들겠어." "아냐, 괜찮아." 그녀는 기계적으로 옷을 다시 입었다. 코랭이 말했다. "난 네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난 너무나 슬퍼. 그래도 난 쉬크를 위해서 무슨 일인가 할 수 있을 거야." "부모님께 돌아가. 널 보고 싶어할 거야... 아니면 이시스네 집으로 가든지." "쉬크는 그 쪽으로 안올거야. 쉬크가 안온다면 난 아무데도 가고 싶지 않아." "올거야. 내가 쉬크를 한번 만나 볼께." "아니야, 이젠 쉬크 집에 들어갈 수가 없어. 문이 늘 잠겨 있거든." "하여튼 만날거야. 아니면 그 친구가 날 찾아올지도 몰라." "그렇지 않아. 옛날의 쉬크가 아니야." "그렇지 않아. 사람은 바뀌지 않는 법이거든. 바뀌는 건 사물이지." "난 뭐가 뭔지 모르겠어." "내가 배웅해 줄께. 나도 일자리를 찾으러 나가야 해." "난 그 쪽으로 안가는데." "내려가는 데까지 바래다 줄게" 그녀는 코랭 앞에 서 있었다. 코랭은 알리스의 양 어깨에 손을 하나씩 올려 놓았다. 그녀의 목에서 솟아나는 온기와 살갗 가까이의 곱슬곱슬하고 부드러운 머리칼이 느껴졌다. 그는 두 손으로 알리스의 몸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이제 울고 있지 않았다. 언제 울었느냐는 표정이었다. "난 네가 바보같은 짓 하는 거 원하지 않아." "바보짓 안해..." "지겨워지면 다시 날 찾아와." "그럴지도 몰라." 그녀가 안 쪽을 쳐다보았다. 코랭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계단을 내려갔다. 그들은 축축한 계단에서 몇 번 미끄러지기도 했다. 아래에서 코랭은 그녀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선 채로 그가 사라져가는 걸 바라보았다. 54 마지막 책이 제본소에서 이제 막 배달되었다. 쉬크는 책을 어루만지다가 케이스에 다시 집어 넣었다. 책은 초록색의 두꺼운 가죽으로 싸여 있었고, 파르트르의 이름은 장정 위에 음각 문자로 새겨져 있어서 눈에 잘 띄었다. 평범한 출판물은 모두 선반에 한꺼번에 꽂아 두었고, 변형판과 수고, 초판, 특집호들은 벽 깊숙히 특별히 만들어 놓은 벽장에 넣어 두었다. 쉬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리스는 그를 떠났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떠나라고 말해야만 했다.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금화 하나와 치즈 한 조각 뿐이었다. 장롱은 서점주인이 기적적으로 구해준 파르트르의 낡은 의상들을 걸어 놓기에도 모자랄 정도였다. 그는 자기가 며칟날 그녀를 마지막으로 안았는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녀를 안느라고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파르트르의 강연문을 외우기 위해서 전축 픽업을 고쳐야 했던 것이다. 음반이 깨질지 모르니 강연문을 암기하는 편이 안전했다. 출판된 파르트르의 책은 거의 전부 모여 있었다. 가죽 케이스로 정성스럽게 보관된 호화판 장정, 금빛 나는 제본용 금속판, 여백이 넓은 푸른색의 값비싼 책들, 줄무늬 종이에 인쇄된 한정판 등은 비로드 가죽으로 싸여 있어서 부드러운 서류 분류함으로 구분되어 있는 한 쪽 벽 전체에 가득했다. 서류 분류함 하나에 작품이 하나씩 꽂혀 있었다. 잡지라든지 신문이라든지 정기 간행물에서 그가 열심히 발췌한 파르트르의 논설들은 가제본되어 반대편 벽에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쉬크는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알리스와 함께 산 지 얼마나 되었지?... 코랭이 준 금화는그녀와 결혼비용으로 쓰이게 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결혼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기다리고 그와 함께 있는 걸로 만족했지만, 여자가 단순히 어떤 남자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함께 산다는 걸 사람들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 역시 그녀를 사랑했다. 그는 그녀가 파르트르에게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시간을 허비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어떻게 파르트르 같은 분에게 무관심할 수 있단 말인가? ... 뭐든지, 무슨 문제든지 놀랍도록 정확하게 쓸 수 있는 그 분... 분명히 파르트르는 <구토 백과사전>을 일 년 안에 완성시킬 것이며, 보부아르공작 부인도 이 작업에 협조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보기 드문 육필 원고가 나오리라. 지금부터 금화를 충분히 벌어서 서점 주인에게 줄 선수금을 모아 놓아야 할 형편이다. 쉬크는 세금을 내지 않았다. <성녀 꼴롱브의 무덤>이라는 책의 형태로 되어 있는 세금이 그에게는 더 필요하였다. 알리스는 쉬크가 금화로 세금을 내기를 원했고, 자기 물건을 팔아서라도 세금을 내자는 제의까지 했었다. 그는 이 같은 제안을 받아들였는데, 그 세금 액수는 <성녀 꼴롱브의 무덤>을 정정하는 데 드는 액수에 불과했다. 알리스는 목걸이 없이도 아주 잘 지낼 수 있었다. 그는 문을 열까 말까 망설였다. 어쩌면 그녀는 그가 열쇠를 돌리기를 기다리면서 문 뒤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오는 그녀의 발자국 소리는 가볍게 두드려대는 망치소리가 점점 더 작아지는 것처럼 울리곤 했던 것이다. 그녀는 자기 부모 집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약간 늦어진 것에 불과하니까 빼먹은 수업은 금방 따라잡을 수 있다. 하지만 알리스는 거의 공부를 안했었다. 쉬크를 위해 식사 준비를 하고, 그의 넥타이를 다리는 등 그의 일에만 지나치게 매달려 있었다. 어쨌든 세금은 단 한푼도 납부하지 않을 거다. 세금을 안냈다고 집까지 ㅉ아와서 귀찮게 하는 전례가 있었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금화 하나 정도의 분할금을 납부하면 가만히 내버려 둘거고, 얼마 동안은 세금에 대해서 아무 이야기도 안하겠지. 파르트르 같은 사람도 세금을 냈을까? 아마 냈을 거다. 쉬크는 턴테이블이 두 개 붙어 있는 전축 픽업의 뚜껑을 들어올린 다음 쟝-쏠 파르트르의 서로 다른 음반 두 개를 올려 놓았다. 그는 낡은 두 가지 생각이 서로 충돌해서 새로운 생각이 솟아나도록 하기 위해서 음반 두 개를 동시에 들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두 개의 스피커로부터 똑같은 거리에 있는 위치에 앉았는데 충돌이 일어나면서 자동적으로 충격 효과가 보존될 수 있는 바로 그 장소에 자기 머리가 위치하도록 했다. 바늘이 음반 가장자리의 나선 위에서 찍찍거리더니 움푹한 홈 속에 들어 앉자 파르트르의 강연이 쉬크의 두개골 속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자리에서 창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종이를 태우는 듯한 아래 쪽의 붉은 연기가 푸른색 소용돌이를 이루며 지붕 위 여기저기서 솟아오르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붉은색이 푸른색을 침범해 들어가는 걸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55 경찰 집행관은 호주머니에서 호각을 꺼내 자기 뒤편에 걸려 있는 거대한 페루제 징을 두드리는 데 사용했다. 징 박은 구두가 아래층에서부터 한 층 한 층 뛰어 올라오는 소리, 무언가 계속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가장 우수한 무장 경찰들 중 여섯 명이 그의 사무실로 밀려들어 왔다. "더글라스!" 집행관이 이름을 불렀다. "예!" 첫번째 무장경찰이 대답했다. "더글라스" 집행관이 다시 똑같은 이름을 불렀다. "예!" 두 번째 무장경찰이 대답했다. 점호는 계속되었다. 집행관은 자기 부하들 이름을 전부 다 기억할 수 없었고, 더글라스는 전통적으로 사용되는 종속명이었다. "특수 임무요!" 그가 명령을 내렸다. 여섯 명의 무장경찰은 자기들이 12연발짜리 권총을 가지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윗호주머니에 똑같이 손을 올려 놓았다. "이번엔 내가 직접 지휘하겠소!" 집행관은 힘주어 말하고는 징을 난폭하게 두드렸다. 문이 열리면서 남자 비서가 나타났다. "나 출발합니다. 특수 임무요. 메모해 놓도록." 집행관이 통고했다. 비서가 메모철을 손으로 받쳐들었고, 곧 기록 자세를 취했다. 상관이 구술하기 시작했다. "쉬크 씨로부터 세금 징수 및 가압류. 불법적인 폭력 및 가혹한 징계가 있을 것임. 가택 침입에 이어 완전한 또는 부분적인 압류가 예상됨." 비서가 외쳤다. "다 적었습니다!" "가자. 더글러스." 그가 일어나서 선두에 서자 비행편대는 뻐꾸기가 날아오르는 모습을 흉내내면서 둔중하게 출격했다. 여섯 명의 무장 경찰은 몸에 착 달라붙은 검은색 가죽 비행복을 입고 가슴과 양어깨에 철갑을 둘렀으며, 검게 변한 강철로 만든 비행모 형태의 헬멧은 목덜미 아래까지 내려와 있어 관자놀이와 이마를 보호해 주었다. 모두들 무거운 금속제 구두를 신고 있었다. 집행관도 비슷한 차림었지만, 가죽이 붉은 색이었고, 양 어깨 위에는 금빛 별이 두 개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손에 작은 금빛 곤봉 하나를 들고 있었고, 허리띠에는 무거운 수류탄이 한 개 매달려 있었다. 특별 승용차가 정문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집행관이 혼자 뒷 좌석에 앉자 여섯 명의 무장경찰은 뚱뚱한 두 명이 한 쪽, 그 보다 마른 네 명이 반대 쪽의 자동차 옆 디딤대 위에 자리를 잡았다. 운전사가 차를 출발시켰다. 자동차에는 바퀴가 없었지만, 진동성 발이 많이 달려 있어서 분출기가 고장나더라도 타이어가 터질 위험은 없었다. 발들이 지면 위에서 거친 숨을 내쉬자 운전사는 첫 번째 분기점에서 급 커브를 꺾었다. 자동차 안에 있던 집행관은 파도의 맨 꼭대기에 올라 앉은 듯한 느낌이었다. 56 코랭의 멀어져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알리스는 마음 속으로 있는 힘을 다해 잘 가라는 인사를 했다. 클로에를 극진히 사랑하는 코랭은 그녀를 위해서 꽃을 사고 그녀의 가슴을 파고드는 공포와 싸우기 위해서 일자리를 찾으러 가는 것이다. 코랭의 넓은 어깨는 약간 처졌고 몹시 피곤해 보였으며, 그의 금발머리는 예전처럼 단정하게 빗질이 되어 있지 않았다. 쉬크는 매우 친절하게 파르트르 책에 대해서 말하고 파르트르에 대해 설명할 줄 알았다. 그는 실제로 파르트르 없이는 살 수가 없기 때문에 다른 걸 추구한다는 생각조차 않했다. 파르트르는 쉬크가 말하고 싶어하는 모든 것을 말했다. 파르트르가 백과사전을 출판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된다. 그것은 곧 쉬크의 죽음을 뜻한다. 쉬크는 도둑질을 하고 서점 주인을 죽일 것이다. 알리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파르트르는 자기처럼 마시고 쓰는 사람들과 함께 같은 술집에서 마시고 쓰면서 하루를 보내곤 했다. 술집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알리스가 안으로 들어가자 파르트르는 평소 자기가 앉는 자리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고, 함께 있던 많은 사람들은 조용히 말을 주고 받았다. 알리스는 쟝-쏠 옆의 의자가 기적적으로 하나 비어 있는 걸 보고 앉았다. 그녀는 무릎 위에 무거운 가방을 올려놓고서 지퍼를 열었다. 쟝-쏠의 어깨너머로 <백과사전> 제 19권의 페이지 제목이 보였다. 그녀는 쟝-쏠의 팔 위에 조심스럽게 한 손을 올려 놓았다. 그가 쓰던 일을 멈췄다. "벌써 여기까지 쓰셨군요." "그렇소, 내게 할 말이 있나요?" "그 책을 출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그건 안되겠어.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거든." 그가 안경을 벗어서 렌즈 위를 훅 불더니 다시 썼다. 그의 눈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렇겠지요. 그렇지만 제 말은 출판을 연기해 달라는 거예요." "아! 그렇다면 생각해 보지." "10년은 연기하셔야 해요." "그래요?" "네, 10년. 그 이상도 좋아요. 알고 계시겠지만, 사람들이 저금해서 당신 책을 살 수 있도록 하는게 더 나을거예요." "이 책은 읽기에 꽤나 따분할거요. 쓰고 있는 나도 벌써부터 따분해지기 시작하고 있으니까. 종이를 쥐고 있었더니 왼쪽 손목에 심한 경련이 일어나는군요." "안됐군요." "내가 경련을 일으키는게 말이오?" "아니요. 당신이 출판을 연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 말이예요." "왜 그렇다는 거지?" "설명하지요, 쉬크는 전 재산을 당신 책을 사는데 다 써버려서 지금은 무일푼이예요." "다른 걸 사는게 나을 텐데. 나는 절대로 내 책은 안사요." "그는 당신 책을 좋아해요." "그거야 그의 권리지요. 자신이 선택해서 산 겁니다." "제가 보기에 그 사람은 너무 깊이 빠져들었어요. 나 역시 나름대로 선택을 하지만 그가 나와 함께 사는 걸 더 이상 원치 않기 때문에 난 자유예요. 난 당신이 출판을 연기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당신을 죽일거예요." "당신은 나로 하여금 내 실존 수단을 잃어버리도록 하려는군. 내가 죽으면 작가로서 내 권리는 어떻게 하란 말이요?" "그거야 당신 문제지요, 난 무엇보다도 당신을 죽이고 싶기 때문에 모든 문제를 다 고려할 수 없어요." "하지만 내가 그런 이유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건 잘 알겠지요?" "그래요." 그렇게 말하고 알리스는 핸드백을 열더니 며칠 전 쉬크의 책상 서랍에서 꺼낸 심장 뽑개를 꺼냈다. "셔츠 칼라 좀 풀어주시겠어요?" "이봐요, 이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인데." 그가 칼라 단추를 풀었다. 알리스가 힘을 모으더니 단호한 동작으로 심장뽑개를 파르트르의 가슴에 꽂았다. 그가 알리스를 바라보더니 금방 죽어갔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기 심장이 사면체라는 것을 확인하자 놀란 눈길을 던졌다. 알리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이제 장-솔 파르트르는 죽었다. 그녀는 <백과사전>의 원고를 집어 던져버렸다. 종업원 한 명이 와서 피와 잉크가 작은 장방형 식탁 위에 범벅이 된 것을 닦아냈다. 그녀가 종업원에게 돈을 치르고 심장뽑개의 가지 두 개를 벌리자 파르트르의 심장은 식탁 위에 남아 있게 되었다. 그녀는 번쩍거리는 심장뽑개를 다시 구부려서 핸드백 속에 집어넣은 다음 파르트르 주머니 속에 있던 성냥을 들고서 거리로 나왔다. 57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진한 연기가 진열장에 가득 차자 사람들이 쳐다보기 시작했는데 파르트르 책에 불이 잘 안 붙었던 탓에 그녀는 성냥을 세 개나 켜고 나서야 불을 피울 수 있었다. 서점 주인은 자기 책상 뒤에 누워 있었고, 옆에 있는 그의 심장은 불에 타기 시작했는데 검은 불꽃과 끓어오르는 피가 벌써 심장에서 분출하고 있었다. 3백 미터 뒤에 있는 서점 두 군데도 삐걱 거리는 소리, 윙윙 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타오르고 있었고 서점 주인들은 죽었으며, 쉬크에게 책을 팔았던 사람들은 누구든 똑같은 식으로 죽을 것이며 그들이 소유한 서점은 불에 타버릴 것이다. 알리스는 눈물을 흘리며 서둘러 걸었다. 자기 심장을 바라보던 장-쏠 파르트르의 눈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그를 죽일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었다. 단지 그의 새 책이 나오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파산의 길로 들어서는 쉬크를 구해보려고 했던 것뿐이었다. 그들은 한통속이 되어 쉬크를 따돌렸고, 쉬크에게서 돈을 빼앗으려고 했고, 파르트르에 대한 쉬크의 열정을 이용했고, 쓸모없는 낡은 옷가지와 지문이 있는 파이프를 그에게 팔았으니 자신들에게 어울리는 운명을 맞이한 것이다. 가제본 된 책들이 꽂혀 있는 진열대가 왼편으로 보이자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숨을 한번 들이마신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서점 주인이 다가왔다. "무슨 책을 찾으십니까?" "파르트르 책 있나요?" "물론이지요. 그렇지만 그 양반의 유골은 어떤 점잖은 고객이 예약을 하셨기 때문에 팔 수가 없습니다." "쉬크 말이예요?" "아... 그래요. 그 이름이 맞는 것 같은데.." "그 사람은 이제 여기 와서 그런 걸 살 일은 없을 거예요." 알리스는 그에게 다가가면서 손수건을 일부러 떨어뜨렸다. 그가 손수건을 주으려고 몸을 숙이자 그녀는 재빨리 그의 등에 심장뽑개를 꽂았다. 그의 몸은 바들바들 떨며 울고 있었다. 그는 쓰러져 얼굴을 마룻바닥에 쳐박았다. 나와서 심장뽑개를 다시 보니 두 개의 가지 사이에 연한 적색의 아주 작은 심장이 끼여 있었는데, 알리스가 가지를 벌리자 심장이 주인 옆으로 굴러갔다. 서둘러야 했으므로 그녀는 신문더미를 집어 들고, 성냥을 긋고, 불쏘시개를 만들어 계산대 밑에 던진 다음 그 위에 신문을 올려 놓았다. 가장 가까운 책상 위에 있던 니콜라 칼라스의 열 두 권짜리 전집을 불 길 속에 집어 넣자 불꽃은 뜨겁게 진동하면서 책에 달려 들었다. 계산대의 목재가 바드득 소리를 내며 연기를 냈고 증기가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책장에 끝까지 남아 있던 책들을 뒤엎어 불 속에 집어 넣고서 더듬더듬 서점을 나온 알리스는 아무도 서점 안으로 못 들어가도록 자물쇠를 빼버린 다음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그녀의 두 눈은 따끔거렸고 머리에서는 연기 냄새가 났는데 바람이 금방 금방 말려주는 바람에 눈물이 뺨 위로는 거의 흘러내리지 않았다. 쉬크가 사는 동네 쪽으로 가면서 보이는 서점들은 쉬크에게 위험을 끼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남은 건 두 세 곳 정도였다. 그녀는 다음 서점으로 들어가기 전에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녀의 뒤 편 멀리, 연기가 굵은 기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르는 중이었고, 사람들은 소방대의 복잡한 장비들이 가동되는 광경을 보겠다며 몰려가고 있었다. 그녀가 서점 문을 들어서는 순간 하얀색의 대형 자동차들이 거리를 달려 지나갔다. 그녀가 유리창 너머로 그 자동차들이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서점 주인이 무슨 책을 찾느냐고 물으면서 다가왔다. 58 "당신, 당신은 저기 문 오른쪽을 맡으시오." 집행관이 말했다. 그가 뚱둥한 두 경찰 중의 두번째 사람을 돌아보며 말을 계속했다. "더글라스, 당신은 왼쪽을 맡고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아요." 호명당한 두 무장 경찰들이 권총을 손에 쥐더니 규정에 나오는 대로 오른손을 오른쪽 허벅지를 따라 내려뜨려 총신이 무릎을 향하게 했다. 그들이 헬멧 턱끈을 턱 아래에 잡아 매자 턱이 앞 뒤로 삐져나왔다. 집행관이 야윈 무장 경관 네 명을 데리고 들어갔다. 그는 아무도 내보내지 말라는 임무와 함께 그 중 두 명을 문 양쪽에 배치시켰다. 그는 남은 두 말라깽이를 데리고 계단으로 향했다. 그들은 흑갈색의 얼굴, 검은눈, 얇은 입술 등 생긴 모습이 흡사했다. 59 쉬크는 끝까지 동시에 들었던 두 장의 음반을 바꾸기 위해서 전축 픽업을 정지시켰다. 그는 다른 시리즈의 음반을 꺼냈다. 한 음반속에서 그는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알리스의 사진을 발견했다. 정면이 4분의 3쯤 보이는 사진으로 조명을 희미하게 받고 있는 걸로 봐서 머리카락 윗부분이 햇빛을 받도록 하려고 뒤편에 투광기를 설치한 것이 틀림 없었다. 그는 새 음반을 올려놓고서 사진을 손에 들었다. 창 밖을 흘낏 바라본 그는 가까운 곳에서 연기가 기둥처럼 솟아오르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새로 올려놓은 두 장의 음반을 들으려고도 했고, 동시에 아래로 내려가서 옆에 있는 서점을 살펴보고 싶기도 했다. 그는 자리에 앉았다. 사진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그녀가 파르트르와 흡사해 보였다. 파르트르의 영상이 조금씩 알리스의 영상과 겹치면서 파르트르가 쉬크에게 미소를 지었다. 틀림없이 그는 쉬크가 원하는 것을 헌정할 것처럼 느껴졌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에 그가 귀를 기울이자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는 사진을 내려 놓고 전축 픽업을 끈 다음 문을 열어 주러 갔다. 문을 열었더니 한 무장 경관의 검은색 가죽 비행복이 보였고, 두 번째 경관이 그 뒤를 따랐으며 경찰 집행관이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어슴푸레한 빛에 잠긴 층계참의 반사광이 그의 붉은색 옷과 검은색 헬멧 위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쉬크, 맞습니까?" 집행관이 물었다. 쉬크가 뒷걸음질을 쳤고 그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그는 꽤 많은 책들이 꽂혀 있는 벽까지 뒷걸음질을 쳤다. "무슨 일이지요?" 집행관이 가슴께에 주머니를 뒤지더니 서류를 읽었다. '쉬크씨로부터 세금 징수 및 가압류를 할 것. 불법적인 폭력 행위 및 가혹한 징계가 있을 것임. 가택침입에 이은 완전한 또는 부분적인 압류가 예상됨.' "하지만... 난 세금을 낼 겁니다." "좋소. 차후에 납부하도록 하시오. 우선 우리는 당신에게 불법적인 폭력행위를 이행해야 합니다." "돈을 드리겠어요." "물론 그래야지요." 쉬크는 책상으로 다가가 서랍을 열였다. 그는 서랍 속에 큰 모델의 심장뽑개와 좋지 않은 상태의 형사잡이를 넣어두었다. 심장뽑개는 안 보였지만, 형사잡이는 낡은 서류더미를 울룩불룩하게 만들어 놓고 있었다. "이봐요, 당신 지금 분명히 돈을 찾고 있는 거요?" 무장 경찰이 서로 떨어져 서더니 권총을 잡았다. 쉬크가 다시 일어섰는데, 그는 형사잡이를 손에 들고 있었다. "대장님! 조심하십시오." "발사할까요, 대장님?" "그런 수작에 넘어갈 내가 아니야..." 쉬크가 대꾸했다. "좋아, 그럼 당신 책을 압수하기로 하겠소." 경찰 한 명이 손에 닿는 대로 한 권을 집었다. 그는 책을 사납게 펼쳤다. "글자뿐인데요, 대장님." "강제집행 하시오." 무장 경찰이 책의 장정을 움켜쥐더니 세게 흔들어 댔다. 쉬크가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책에 손대지 말아요! 그 책, 거기 놔요!" 쉬크가 부르짖으며 형사잡이를 들어 올렸지만 그 강철 덩어리는 딱하고 부딪치는 소리도 없이 내려앉아 버렸다. "발사할까요?" 무장 경찰이 다시 한번 물었다. 책에서 장정이 벗겨지는 순간 쉬크가 쓸모없는 형사잡이를 손에서 놓으면서 앞으로 달려나갔다. "발사하시오. 더글러스." 쉬크의 몸이 무장 경찰들의 발 밑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두 무장 경찰이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불법 폭력행위를 할까요?" 쉬크가 다시 한 번 살짝 움직였다. 그가 두 손을 짚고 일어나더니 겨우 무릎을 끓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린 채 배를 잡고 있었고 그의 두 눈에서는 땀방울이 떨어졌다. 이마에는 커다란 상처가 나 있었다. "그 책을 그냥 내버려 두시오..." 그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입에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이 책들을 짓밟을 것이오. 내 생각에 당신은 잠시 후에 죽을 것 같소." 쉬크의 머리가 다시 축 늘어졌다. 그는 머리를 다시 들어 올리려고 애를 썼지만 삼각형 모양의 금속판이 안에서 돌아가는 것처럼 배가 아팠다. 그는 한 쪽 발을 딛고 일어서는 데 성공했으나, 다른 쪽 무릎은 펴지지 않았다. 무장 경찰들이 책 있는 곳으로 다가갔고, 집행관은 쉬크를 향해 두 걸음을 내디뎠다. "책에 손대지 마시오." 쉬크가 이렇게 말했다. 피가 목구멍 속에서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머리는 점점 더 수그러들었다. 그가 배에서 손을 떼었다. 피묻은 빨간 손이 표적도 없이 허공을 때렸다. 그러다가 얼굴을 바닥에 갖다댄 채 다시 쓰러져 버렸다. 경찰 집행관이 발로 그를 뒤집어 엎었다.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두 눈은 방보다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가 이마에서 한 줄로 흘러내리는 바람에 그의 얼굴은 둘로 나뉘어 졌다. "짓밟아, 더글라스! 나는 이 소리나는 기구를 부술 테니까." 창문 앞을 지나던 그는 큼직한 버섯처럼 생긴 연기가 이웃집 일층에서 솟아나더니 자기 쪽으로 서서히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세세하게 짓밟을 필요 없어. 옆집이 불타고 있으니까. 중요한 건 빨리 해치우는 거요. 흔적을 남기지 마시오. 물론 나는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서에 기록할 것이오." 쉬크의 얼굴은 새까맣게 변했다. 피가 그의 몸 아래로 흘러 응고되더니 별로 변했다. 60 니콜라는 알리스가 방금 불을 지른 서점들 중 끝에서 두번재 서점을 지나쳤다. 그는 일 나가는 코랭을 길에서 우연히 만났고, 자기 여자 조카가 괴로움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기가 나가는 클럽에 방금 전화를 했다가 파르트르의 죽음을 알게 되자 알리스를 뒤쫓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를 위로하고 사기를 복돋워 주고 그녀가 전처럼 명랑해질 때까지 함께 있어주고 싶었다. 쉬크 집을 보았더니 옆에 있는 서점의 진열장에서 길고 가느다란 불꽃이 솟아나면서 마치 망치질을 하듯 유리창을 산산조각 내는 것이었다. 그는 문 앞에 경찰 집행관의 자동차가 서 있는 걸 알아보았다. 자동차 운전수는 위험지역을 피하려고 차를 약간 전진시켰고, 무장 경찰들의 검은 그림자도 눈에 띄었다. 소방대가 금방 나타났다. 소방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서점 앞에 멈추었다. 니콜라는 자물쇠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는 발로 문을 부수는데 성공,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가게 안은 온통 불길에 싸여 있었다. 서점 주인은 두 발이 불길에 휩싸인 채 드러누워 있었고, 그의 심장은 옆에 놓여 있었다. 니콜라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쉬크의 심장뽑개를 보았다. 솟아오른 불길의 커다란 빨간색 공과 뾰족한 혀가 단숨에 서점의 두꺼운 벽을 꿰뚫었다. 니콜라는 불에 데이지 않으려고 바닥에 몸은 던졌는데 바로 그 순간 그는 소방대의 소화용 분사 노즐에서 쏟아져 나오는 공기가 자기 몸 위로 세차게 움직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분사 노즐이 불길을 밑에서부터 공격하자 불길이 내는 소리는 더욱 더 커졌다. 책들이 탁탁 소리를 내면서 타고 있었다. 책장들이 펄럭이면서 날아오르더니 분사 노즐에서 공기가 나오는 것과 반대 방향으로 니콜라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그는 알리스가 불 속에 있지 않을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빠져나갔을 만한 문을 찾아낼 수 없었다. 불은 소방수들과 싸우면서 한층 더 넓어보이는 일층을 잿더미로 만들더니 순식간에 치솟아 올랐다. 우중충한 색깔의 재 한가운데에 불꽃보다 더 빛나는 섬광이 남아 있었다. 연기는 위층으로 빨려들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책을 태웠던 불은 꺼졌지만, 천장은 더 활활 타올랐다. 바닥 주변에 남아 있는 거라곤 그 섬광뿐이었다. 재로 더렵혀지고 머리칼도 새까매진 니콜라는 힘겨운 숨을 내쉬면서 그 빛을 향해 기어 올라갔다. 분주히 움직이는 소방수들의 장화 소리가 들려왔다. 비틀어진 철제 들보 아래, 황금색 머리털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불길이 그 머리털을 먹어치울 수 없었던 게, 머리털이 불길보다 더 눈부시게 빛났던 것이다. 그는 머리칼을 안주머니에 집어 넣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멈칫거리며 걸었다. 소방수들이 그가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 보았다. 위층에서 불길이 맹위를 떨쳤고 소방수들은 소화액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건물을 따로 고립시켜서 그냥 타도록 내버려 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니콜라는 인도를 따라 걸었다. 그의 가슴 위에 놓인 오른 손은 알리스의 머리칼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경찰 집행관의 자동차가 소리를 내며 그를 지나쳐 달려갔다. 자동차 뒷좌석에 집행관의 빨간색 가죽 비행복이 보였다. 그는 햇빛에 푹 잠긴 채 웃도리 깃을 약간 열어 놓은 상태였다. 그의 두 눈만이 어둠 속에 남아 있었다. 61 서른 번째 기둥이 코랭의 눈에 띄었다. 아침부터 금 저장고 지하실을 걷고 있었다. 금 도둑을 보면 소리 지르는 것이 임무였다. 지하실은 무척 넓었다. 그 안을 한 바퀴 돌려면 빨리 걸어도 하루는 걸렸다. 지하실 한가운데에는 금이 독가스를 쐬며 익어가는 엄폐된 방이 하나 있었다. 지하실을 하루에 한 바퀴씩 돌 수만 있다면 보수는 꽤 많이 받을 수 있었다. 코랭은 자신의 건강상태가 썩 좋지 않게 느껴진데다 지하실 내부는 너무 어두웠다. 그는 이따금씩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다보고 시간표를 보느라 시간을 허비하곤 했다. 뒤를 돌아다보면 방금 본 램프가 아주 작은 점이 되어 반짝이는 것이었고, 앞을 보면 다음 번 램프가 서서히 켜지는 것이었다. 금도둑이 매일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정해진 시각에 순찰을 돌지 않으면 감봉을 감수해야만 했다. 시간표를 잘 지켜야 도둑이 나타났을 때 소리를 지를 수가 있었다. 그들은 아주 규칙적인 도둑들이었다. 코랭은 오른발이 아팠다. 지하실은 단단한 인공석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바닥이 고르지 않고 울퉁불퉁했다. 그는 정해진 시각에 서른 번째 기둥에 도착할 수 있게끔 여덟 번째 흰 선을 지나면서부터는 서둘러 걸었다. 걸음걸이에 박자를 맞추기 위해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던 그는, 메아리가 토막토막 끊기는 위협적인 목소리로 그의 것과 반대되는 노래를 되돌려 보내자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는 아픈 다리를 끌고 계속 걸어서 서른 번째 기둥을 지나쳐 갔다. 그는 뭔가가 뒤에 있다고 생각하고서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분이 늦었기 때문에 그는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하려고 서둘러 걸었다. 62 식당은 이제 들어갈 수 없었다. 축축한 어둠 속에서 식물성 반, 광물성 반의 방출물이 흐르면서 천장과 바닥이 붙어버린 것이다. 복도로 통하는 문도 열리지 않았다. 현관에서 클로에의 방으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만 남아 있었다. 이시스가 먼저 지나갔고 니콜라가 그 뒤를 따라갔다. 니콜라는 얼 빠진 사람 같았다. 그의 웃옷 안주머니에는 뭔가가 들어 있어서 불룩했고 그는 이따금씩 가슴으로 손을 가져갔다. 이시스는 방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침대부터 바라봤는데 클로에는 여전히 꽃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담요 위로 보이는 그녀의 두 손은 백옥 같았다. 그녀는 베이지 색으로 보이는 커다란 흰색 난초 꽃을 겨우 붙잡고 있었다. 눈을 뜨고 있던 그녀는 이시스가 자기 옆에 앉은 것을 보자 몸을 약간 움직였다. 니콜라는 클로에를 보는 순간 고개를 돌렸다. 그는 사실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싶었다. 그는 클로에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어루만졌다. 니콜라가 앉자 클로에는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두 사람을 보게 되어 기쁜 듯했다. "잤니?" 이시스가 나즈막히 물었다. 클로에가 눈짓으로 아니라고 말했다. 그녀는 야윈 손가락으로 이시스의 손을 찾았다. 그녀는 다른 손으로 생쥐를 붙잡고 있었는데, 생쥐는 검고 선명한 눈을 반짝이면서 니콜라에게 다가가려고 침대 위를 종종걸음쳤다. 그가 생쥐를 살그머니 잡고서 윤기있는 작은 주둥이에 입을 맞추자 생쥐는 다시 클로에 옆으로 돌아갔다. 꽃들은 침대 주위에서 몸을 떨고 있었는데, 꽃이 오래 가지 않는 것으로 봐서 클로에는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더욱 약해지는 걸 느끼고 있었다. "코랭은 어디 있어?" 이시스가 물었다. "일..." 클로에가 거친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말하지 마. 다른 방법으로 질문할께." 그녀가 클로에의 얼굴에 자신의 아름다운 갈색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작업장에서 일하는 거야?" 클로에의 눈꺼풀이 감겼다. 그때 현관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코랭이 문에 나타났다. 그는 새로운 꽃을 들고 있었지만, 일자리를 잃어버렸다. 도둑이 일찍 다녀가는 바람에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최선을 다했으므로 약간의 돈을 벌어서 꽃을 살 수 있었다. 클로에는 편안해진 듯 비교적 환하게 웃고 있었다. 코랭은 그녀 곁으로 바싹 다가갔다. 그는 그녀가 힘에 부칠 정도로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었는데 이제는 그녀를 완전히 망가뜨릴까봐 두려워서 살그머니 어루만지기만 했다. 그는 일을 하느라고 상처투성이가 된 볼품없는 손으로 머리를 매끈하게 가다듬어 주었다. 그곳에는 니콜라와 코랭, 이시스, 클로에가 있었다. 니콜라는 쉬크와 알리스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고 클로에는 상태가 갈수록 악화된다며 울기 시작했다. 63 경리부에서는 코랭에게 돈을 많이 주었지만, 그러나 너무 늦어버렸다. 이제 그는 매일같이 사람들의 집에 올라가야ㅁ 한다. 명단을 넘겨 받으면 불행이 일어나기 하루 전에 그 불행을 알리는 것이었다. 매일같이 그는 인구가 많은 구역 또는 고급 주택가로 갔다. 그는 엄청나게 많은 계단을 오르곤 했다. 그는 형편없는 대접을 받았다. 사람들은 상처입기 쉬운 무거운 물체들을 그의 머리에 내던지거나 냉혹하고 날카로운 말을 내뱉으면서 내쫓기 일쑤였다. 그는 그런 일을 해준 댓가로 돈을 받아서 꽃을 살 수 있었다. 그는 이 일을 계속하기로 했다.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일, 그것은 바로 문 앞에서 내쫓기는 일이었다. 피로는 그를 고문했고 두 무릎을 납땜질하는 듯했으며 얼굴을 파고 들었다. 이제 그의 두 눈에 보이는 건 사람들의 추한 모습 뿐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닥쳐올 불행을 예고했다. 그때마다 그는 주먹질과 고함, 눈물, 욕설과 함께 쫓겨 났다. 두 계단을 올라간 그는 복도를 따라 걸어가서 문을 두드렸다가 즉시 뒷걸음질쳤다. 사람들은 그가 쓰고 있는 검은색 모자를 눈치 채고 그를 구박했지만, 코랭은 입을 꾹 다물고 있어야만 했다. 그는 이런 일을 하는 댓가로 돈을 받았다. 문이 열렸다. 그는 나쁜 소식을 전하고 그곳을 떠났다. 무거운 나무조각이 그의 등에 와 맞았다. 다음에 찾아가야 할 이름을 명단에서 찾던 그는 자기 이름이 적혀 있는 걸 보았다. 그러자 그는 모자를 집어던진 채 길을 걷기 시작했고, 클로에가 내일 죽게 되리라는 걸 알게 된 그의 가슴은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64 신부와 복사가 얘기를 나누고 있어서 코랭은 그들의 얘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다가갔다. 발 밑이 보이질 않아서 그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비틀거리곤 했다. 그의 두 눈은 침대에 누워 있는 클로에를, 그녀의 검은 머리와 곧은 코, 약간 튀어나온 이마, 달걀모양의 얼굴, 그리고 그녀를 세상 밖으로 내던져버린 채 감겨 있는 눈꺼풀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례식 때문에 오셨나요?" 신부가 물었다. "클로에가 죽었어요." 신부는 '클로에가 죽었어요'라고 말하는 걸 들었지만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알았소. 돈을 얼마나 쓸 겁니까? 틀림없이 멋진 장례식을 원하시겠지요?" "예." "금화 2천 개를 내시면 아주 잘 해드리지요. 그보다 더 비싼 것도 있지만..." "난 금화가 스무 개밖에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안되겠지만 서른 개나 마흔 개 정도는 더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신부는 허파가 꽉 찰 정도로 공기를 들이마시더니 진저리나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내쉬었다. "그럼 당신에게 필요한 건 빈민들의 장례식이군." "나는 가난해요.... 그런데 클로에가 죽었어요..." "알았소. 하지만 사람이란 늘 품위있게 묻힐 수 있을 만큼 벌어 놓고 나서 죽을 준비를 해야 되는 법이오. 그런데 당신에게는 금화 오백 개도 없어요." "아닙니다... 분할이 가능하다면 백 개까지 낼 수 있을거요. '클로에가 죽었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세요?" "난 이런 일에 이골이 났기 때문에 아무 느낌도 안들어. 신께 호소해 보라고 충고해야 되겠지만, 그렇게 보잘것없는 액수로 신을 성가시게 한다는게 과연 정당한 일일까. 걱정이 되는군..." "아! 신을 귀찮게 하지는 않겠어요. 클로에가 죽었는데 신이 무슨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주제를 좀 바꿔봐요. 생각... 해보시오... 난 잘 모르겠는데 아무거나 ... 예를 들어..." "금화 백 개를 내면 장례식을 품위있게 치를 수 있을까요?" "난 그런 식의 해결책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소. 백오십 개라면 어떻게 해보겠지만." "백오십 개를 내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당신은 일을 하고 있잖아요... 이 서류에 서명하시오..." "그러지요." "만약에 당신이 금화 이백 개를 낼 경우 배불뚝이와 복사가 당신을 편들거고 백오십 개를 낼 경우에는 상대를 편들거요." "글쎄요. 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오래 할 것 같지 않아요." "그럼 백오십 개로 합시다. 정말 형편없는 장례식이 될거요. 당신이 이런 식으로 인색하게 구니 정말이지 진저리가 나는군..." "미안합니다." "서류에 서명해야 합니다." 신부가 이렇게 말하면서 코랭을 거칠게 떼밀었다. 코랭이 의자에 부딪쳤다. 그 소리를 들은 신부가 노발대발 화를 내면서 다시 코랭을 제의실 쪽으로 떼밀었다. 65 두 짐꾼은 아파트 현관에서 자기네들을 기다리고 있는 코랭을 발견했다. 계단이 점점 더 망가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물을 뒤집어 쓴 꼴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가지고 있던 옷 중에서 가장 낡은 옷을 입고 있어서 옷 찢어지는 것 정도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의 작업복에 뚫린 구멍 틈으로 굵고 보기 흉한 다리에 난 빨간 털이 보였다. 그들은 빈민 장례식에 관한 규정에 나오는 대로 코랭의 배를 때리며 인사를 했다. 이제 현관은 지하실 복도를 연상시킬 정도롤 변해 버렸다. 그들은 머리를 숙인 채 클로에의 방까지 갔다. 일련번호가 적혀 있고 울퉁불퉁한 낡은 검은 상자 하나뿐, 클로에는 보이지 않았다. 짐꾼들은 상자를 들더니 수양을 집어던지듯 창밖으로 내던져버렸다. 금화 오백 개 이상을 냈을 경우에만 죽은 사람을 팔로 안고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상자가 저렇게 울퉁불퉁하구나' 코랭은 클로에가 상처를 입고 멍들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울었다. 그는 그녀가 이제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생각에 더욱 큰 소리로 울었다. 상자는 도로 위에서 깨지는 소리를 내며 옆에서 놀고 있던 아이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짐꾼들은 어린아이를 인도 쪽으로 밀어내더니 상자를 영구차 위로 끌어 올렸다. 그것은 빨간 페인트가 칠해진 낡은 트럭이었다. 두 짐꾼들 중 한 명이 운전을 했다.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이 트럭을 뒤따라 갔다. 니콜라와 이시스와 코랭, 그리고 그들이 잘 모르는 두 세 사람 뿐이었다. 트럭은 무척 빨리 달렸다. 따라 잡으려면 뛰어야 했다. 트럭 운전사는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그는 금화 2백 50개 이상을 받았을 경우에만 입을 다무는 것이었다. 성당 앞에서 차가 멈추었고 검은 상자는 그들이 장례식 관계로 안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냥 그곳에 놓여 있었다. 찌푸린 표정의 신부는 그들에게 등을 돌린 채 건성으로 몸을 흔들어 댔다. 코랭은 제대 앞에 서 있었다. 코랭은 눈을 들었다. 그의 앞쪽, 내벽의 십자가에 예수가 매달려 있었다. 예수는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코랭은 그에게 물었다. "클로에는 왜 죽었습니까?" "나는 책임 없소. 다른 얘기나 합시다..." 예수가 대답했다. "그럼 누구랑 상관이 있습니까?" 코랭이 물었다. 그들이 들릴듯 말듯한 낮은 소리로 얘기를 나누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들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우린 아니요." "전 당신을 우리 결혼식에 초대했어요." "성황리에 끝났지요. 나도 꽤 재미가 있었고. 그런데 이번에는 왜 돈을 더 많이 내놓지 않았습니까?" "난 이제 돈이 없는데다가 이번에는 결혼식을 올리는게 아닙니다." "그렇겠지요" 예수는 난처한 표정이었다. "그와는 상당히 다른 일이지요. 이번에는 클로에가 죽었어요... 나는 그 검은 상자를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음......" 예수가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지겨운 표정이었다. 신부는 라틴어로 된 시구를 외쳐대었다. "왜 클로에를 죽게 만들었습니까?" 코랭이 물었다. "아이고!... 그만 하시오." 예수가 대답했다. 예수는 못에 박힌 상태에서 나름대로 더 편안한 자세를 잡아 보려고 애썼다. "클로에는 너무도 온순한 여자였어요. 마음도 그렇고 실제로도 그렇고 나쁜 짓이라고 해본 일이 없단 말입니다." "종교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오." 예수가 하품을 하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가시관의 경사도를 바꾸기 위해서 머리를 약간 흔들었다. "우리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군요. 알 필요가 없겠지요." 코랭이 눈을 내리 깔았다. 예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코랭이 다시 머리를 들었다. 예수의 가슴이 서서히 그리고 규칙적으로 들어올려지곤 했다. 그의 얼굴 모습에서는 평온한 표정이 생생하게 나타났다. 그의 두 눈은 감겨져 있었고, 콧구멍에서는 마치 포식한 고양이처럼 만족스러워서 가볍게 가르랑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순간 신부가 펄쩍 뛰어오르면서 튜브를 불었고, 그래서 장례식은 끝났다. 신부가 가장 먼저 성당을 떠나 큼지막한 징박힌 구두를 신고 제의방으로 들어갔다. 코랭과 이시스와 니콜라는 밖으로 나와 트럭 위에서 기다렸다. 그때 복사와 배불뚝이가 환한 색의 옷을 화려하게 차려입고 나타났다. 그들은 코랭에게 야유를 하기 시작하더니 트럭 주위에서 야만인들처럼 춤을 추는 것이었다. 코랭은 빈민 장례식 서류에 서명을 했기 때문에 귀를 막기만 했을 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고스란히 한 줌의 자갈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66 그들은 무척 오랫동안 거리를 걸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뒤를 돌아다 보지 않았고, 날은 저물어갔다. 빈민 묘지는 아주 먼 곳에 있었다. 빨간색 트럭은 엔진에서 즐거운 폭음을 연속적으로 터뜨리면서 길 위를 구르기도 하고 뛰어오르기도 했다. 코랭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이따금씩 미소를 짓곤 했다. 니콜라와 이시스는 그의 뒤편에서 걷고 있었다. 이시스는 때때로 코랭의 어깨를 어루만져주곤 했다. 길도 멈추고 트럭도 멈추었다. 물이 나타났다. 짐꾼들이 검은 상자를 트럭에서 내렸다. 코랭이 묘지에 가보는 건 처음이었다. 묘지는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섬 안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 섬의 윤곽은 수량에 따라 자주 바뀌곤 했다. 안개 너머로 섬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트럭은 강가에 세워두었다. 끝이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린 긴 회색 구름다리를 통해 섬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짐꾼들이 쌍소리를 내뱉었고 그 중 첫번째 사람이 다리에 발을 내디뎠는데 다리의 너비가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상자를 굵은 생가죽 끈으로 묶어서 목에 한 바퀴 감은 다음 어깨에 맸는데 두번째 짐꾼이 숨이 막히는 듯 얼굴이 보랏빛으로 변했다. 안개의 회색 빛을 배경으로 해서 보이는 그 검은 상자는 사람의 마음을 무척 서글프게 했다. 코랭이 그 뒤를 따랐다. 니콜라와 이시스도 다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맨 앞에 선 짐꾼이 일부러 발을 구르는 바람에 다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그는 약간의 설탕이 시럽액 속에 들어갔을 때처럼 풀어헤쳐진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하강음계를 이루며 다리 위에서 울리자, 다리가 조금씩 안 쪽으로 휘어졌고 그들은 다리 중앙에 도달했다. 한가운데를 지나가자 다리가 수면에 닿으면서 잔물결이 양쪽에서 좌우대칭을 이루며 찰랑거렸다. 물이 다리를 거의 전부 덮어버렸다. 물은 짙고 투명했다. 코랭은 오른쪽으로 몸을 숙여 물 속 깊은 곳을 바라보았는데, 그 속에서 하얀 것이 어렴풋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니콜라와 이시스가 뒤에서 걸음을 멈추었는데 그들은 마치 물 위에 서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짐꾼들은 계속 걸었다. 절반쯤 남은 나머지 길은 오르막이었고, 그들이 다리 중간을 지나오자 작은 파도들이 줄어들더니 다리가 흡입음을 내면서 물에서 떨어져 나갔다. 짐꾼들이 뛰기 시작했다. 검은 상자의 손잡이가 상자의 내벽에 부딪쳐 소리를 냈다. 코랭과 그의 친구들에 앞서 섬에 도착한 짐꾼들은 짙은 색의 초목들이 양편으로 울타리 처럼 늘어서 있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오솔길은 기묘하리만큼 구불구불하고 황량한 모습이었으며 작은 구멍이 많은 땅바닥은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것만 같았다. 길이 약간 넓어졌다. 초목들의 잎사귀는 연한 회색으로 바뀌었고, 금빛의 잎맥은 비로드처럼 반질반질한 잎사귀 살 위에서 더욱 또렷하게 드러났다. 키가 크고 울창한 나무들은 한 쪽 길가에서 다른 쪽 길가까지 활 모양으로 늘어져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돔을 통해서 보이는 태양은 섬광이 없는 백색 빛무리를 이루었다. 오솔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자 짐꾼들은 지체없이 오른쪽 길을 택했다. 코랭과 이시스, 니콜라도 그들을 따라 잡기 위해서 서둘러 걸었다. 숲 속에서는 동물들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회색 빛 잎사귀들만이 이따금씩 땅바닥 위로 무겁게 떨어져 내리곤 했다. 짐꾼들이 나무를 무거운 구둣발로 차자 해면처럼 물렁물렁한 나무껍질에 푸르스름한 멍이 생겨났다. 묘지는 섬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바위 위로 기어오르자 하늘하늘해 보이는 나무들의 꼭대기 너머로 반대편 강가 쪽의 먼 하늘이 언뜻 보였다. 별 봄맞이 꽃과 회향 풀꽃이 피어 있는 벌판 위의 그 하늘에서는 작은 독수리들이 천천히 날아다니고 있었다. 짐꾼들은 넓은 묘혈 근처에 멈추었다. 그들은 '샐러드처럼'이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클로에의 관을 좌우로 흔들기 시작하더니 연결차단장치를 눌렀다. 뚜껑이 열리더니 뭔가가 삐거덕 거리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면서 묘혈 속으로 떨어졌다. 두번째 짐꾼이 반쯤 목이 졸린 채 쓰러지듯 땅바닥에 주저앉았는데, 가죽끈이 목에서 빨리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코랭과 니콜라가 뛰어서 도착했고 이시스가 그 뒤를 이어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그러자 기름투성이의 낡은 작업복을 입은 배불뚝이와 복사가 갑자기 석총 뒤에서 나타나더니 묘혈 속에 흙과 돌을 집어던지면서 곰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코랭이 털썩 주저앉아 무릎을 끊었다. 그는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쥐었으며, 돌들은 무딘 소리를 내며 묘혈 속으로 떨어졌고, 복사와 배불뚝이와 두 짐꾼은 서로 악수를 나누고 나서 묘혈 주위를 한 바퀴 돌더니 갑자기 오솔길 쪽으로 달려가서 파장돌춤을 추며 사라져 버렸다. 배불뚝이가 호른을 불자 쉰 소리가 죽은 것 같은 공기 속에서 진동했다. 흙이 조금씩 흘러내렸고 이삼 분쯤 뒤에 클로에의 몸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67 검은 수염이 난 생쥐가 애를 쓴 끝에 마지막으로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 생쥐가 빠져나오자 즉시 천장과 바닥이 붙어 버렸고, 벌레가 기어간 듯한 모양의 불활성 물질이 봉합된 부분의 틈 사이로 비틀린 채 천천히 솟아 올랐다. 현관은 양쪽 벽이 휘청거리면서 서로 접근하고 있었다. 생쥐는 현관으로 통하는 복도를 황급히 달려가서 문 밑으로 빠져 나갈 수 있었다. 생쥐는 계단까지 내려가서 인도 위에서 멈췄다. 잠시 망설이던 생쥐는 방향을 분간할 수 있게 되자 묘지 쪽으로 출발했다. 68 "정말 난 거기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어." 고양이가 말했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난 아직 어리지만, 최후의 순간까지 잘 먹고 살았단다." 생쥐가 말을 받았다. "나도 그렇지만 난 자살하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어. 그러니 넌 내가 왜 그게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지 알거야." "네가 그를 보지 못해서 그러는 거야." "그는 지금 뭘하고 있니?" 고양이가 물었다. 그렇지만 고양이는 그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 절실한 것은 아니었다. "물가에 있단다. 기다리고 있다가 시간이 되면 다리 한가운데 가는 거야. 뭔가를 보려는 거지." "굉장한 걸 볼 수는 없을 거야. 아마 수련을 보는 거겠지." "그래, 그는 다시 올라가서 수련을 죽이겠다고 기다리는 거야." "바보같은 짓이야. 도대체 흥미가 느껴지질 않아." "시간이 지나면 그는 물가로 돌아와서 사진을 바라본단다." "전혀 먹질 않니?" "응, 무척 허약해졌어. 나로서 견디기 힘든 일이지. 언젠가 그 다리 위에서 발을 헛딛고 말거야." "아무려면 어때? 그가 불행하다고 치자. 그래서 어떻다는 거야?..." "그는 불행하지는 않아. 고통스러워 하는 거지. 내가 감수하기 힘든 건 바로 그 점이야. 게다가 그는 몸을 너무 앞으로 숙이고 있어서 물 속에 빠지게 될거야." "사정이 그렇다면 널 도와주고 싶어. 하지만 난, 내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왜 '사정이 그렇다면'이라고 말하는지조차도 모르겠다." "넌 참 좋은 고양이야." "머리를 내 입 속에 넣고 기다리렴." "오래 걸릴까?" "누군가 내 꼬리를 밟은 만큼의 시간이 걸릴거야. 난 재빠르게 반사신경을 움직여야 해. 하지만 난 네 머리를 통과시킬 테니 두려워 하지마." 생쥐가 고양이의 턱을 벌리더니 자기 머리를 날카로운 이빨사이에 집어 넣었다. 생쥐가 머리를 곧장 다시 빼냈다. 생쥐가 물었다. "너 오늘 아침에 상어 먹었니?" "이봐! 너 이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가도 돼. 나는 그 계획이라는 것에 진력이 난다고. 너 혼자 알아서 하란 말이야." 그는 화가 난 것 같았다. "화내지 마." 생쥐가 작고 검은 두 눈을 감더니 자기 머리를 정위치에 갖다 놓았다. 고양이는 자신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부드러운 잿빛 목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 놓았다. 생쥐의 검은색 수염이 고양이의 수염과 뒤섞였다. 고양이가 털이 무성한 꼬리를 풀더니 인도 위로 질질 끌고 갔다. 그때 '사도 쥘르' 고아원의 눈먼 소녀 열 두 명이 노래를 부르며 걸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