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한 유전자가 살아남는다 [ 한국어판 서 ] 이 책을 처음 구상하게 된 것은 케임브리지 대학 세인트존스 칼리지 에서 고고학과 인류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인 1981년이었다. 그 당시, 사회인류학자들과 문화인류학자들은 강의 시간에 한결같이 부족 사회 구성에서의 성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고고학자들은 농담할 때를 제외 하곤 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풍토였다. 그러나 나는 성이 매우 중요 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선사 시대 미술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 한 결과, 선사 시대의 성행위에 대한 생생하고도 사실적인 자료가 있다 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이 책을 쓸 준비가 되었을 때에는 좀더 중요한 다른 문제들이 있었다. 특히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유전학자와 생물학자들이 한편이 되고 사회학자와 문화사학자들이 다른 한편이 되어 격렬한 논 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전자는 인간의 모든 행동,특히 성행위는 유전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후자는 인간은 본디 자유 로운 존재이며 성행위는 사회적 행동으로서 생물학과무관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나는 이 두 가지 견해에 모두 반대하는 입장이다. 생물학과 문화 사 이에는 끊임없는 상호 작용이 이루어져 왔으며, 그 중요성의 우선 순위 를 매길 수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해 왔다(그 결과물 이 바로 이 책이다). 이러한 나의 주장은 상식적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 르지만, 사실 이론화하여 방어하기가 매우 어려운 견해이다. 유명한 말 을 빌리자면, 진리는 '순수할 경우가 극히 드물며 결코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의 양쪽 진영에서 모두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이것은 내가 바라던 바였다). 이 책은 결코 한번 읽고 말 책이 아니다. 모든 주장이 처음부터 일관성 있게 논리적으로 전개되어 있으며,현대 사회에서 섹스가 무엇을 의미하며 미래에는 무엇을의미 할지에 대한 결론으로 마무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중간부분에서 는 주로 선사 시대 유럽의 고고학적 기록들을 고찰하고 있지만, 전세계 적으로 일반화할 수 있는 이론이 되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이 책은 현재 미국과 영국,독일과 브라질 등에서 대중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 내 이론이 한국의 여러 독자들에게도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를 바라며, 우리의 과거에 대해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 으면 하는 바람이다. 1998년 4월 티머시 테일러 [ 머리 말 ] [ 자연을넘어 ] 1991년,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접경 지대에 있는 외츠탈 알프스 (Otztal Alps)의 빙하 속에서 시체 한 구가 발견되었다. 시체를 처음 발 견한 등산가 에리카 지몬(Erica Simon)은 그 가냘픈 골격을 보고 여자 의 시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몇 년 전쯤에 스키를 타다가 실수로 낭 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은 여자 같았다. 그러나 얼음 속에서 시체를 꺼내 본 결과, 시체는 젖가슴이 없었고 남자의 성기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옷과 소지품이 요즈음에는볼수없는것들이었다. 시체는 '얼 음 인(Iceman)'이라고 불렸고 '외치諦tzi)'라는 별명이 붙었다. 고고학자들은 외치가 지금으로부터 5,000여 년 전인 기원전 3300년, 유럽 중부의 석기 시대인들이 처음으로 금속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무 렵 죽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는 아마도 한 계곡에서 다른 계곡으 로 넘어가다가 눈보라를 만나 눈 속에 파묻혀 죽었을 것이다. 외치는 동翡脚도끼를 비롯한 여러 가지 소지품을 지니고 있었는데, 부적 같은 것도 있었다. 외치의 시체는 보존상태가훌륭한편이었다. 사망당시 의 그의 나이는 스물다섯에서 마흔 살 정도로 추정되었는데, 이것은 전 체적인 모습과 치아상태를 연구한 결과였다. 그의 등뼈 양쪽과 두다 리에는 아직도 문신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시체가 발견되어 정밀 검사 결과가 발표될 때까지 사람들이 가장 궁금하게 여긴 것은 그가 남 자냐 여자냐는 것, 그리고 그의 성별과 사인의 연관성이었다. 처음 시체를 검사했을 때 얼음 인간은 음낭은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음경이 없었다. 그래서 별의별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날짐승이 그의 성기를 먹어 치웠을 것이라는 등, 시체를 얼음속에서 꺼낼 때 떨어져 나갔을 것이라는 등, 누가 몰래 절단하여 몇십만 달러를 받고 선사 시 대 성기를 수집하는 사람에게 팔았을 것이라는 등‥‥‥‥ 심지어는 조사 단장이었던 콘라드 스핀들러(Konrad Spindler) 박사가 훔쳐 갔다고 비 난하는사람도 있었다. 대중 잡지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이론은, 얼 음 인간이 남의 아내와 간통하다가 그 남편에게 현장을 들켜서 성기를 잘리고 산을 넘어 도망치 다가 얼어 죽었다는 이야기였다. 음낭에서 고 환이 긁어 내졌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외치가 근 :默近東) 근처에서 온 거세된 제사장이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근동에 서는 제사장이 '위대한 어머니 여신'의 신전에서 의식을 집전하기 위해 서는 성기를 잘라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93년에 발표된 최종 검시 보고서에서 따르면, 얼음 인간의 성기는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포피에 싸인 음경과 고환이 남아 있었지만 추위와 얼음의 건조 효과 때문에 오 그라들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외치의 음낭에 정자 은행의 정자처럼 급속 냉동되어 아직 생식력이 있는 정자가 들어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자 오스트리아 여자들이 인공 수정으로 외치의 아이를 낳을 수 없겠냐고 문의하는 소동이 벌어 졌다. 그들의 동기는 호기심,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 또는 정신 이상 따 위였지만, 먼 옛날 알프스산맥에서 살았던 어느 종족의 '순수한 혈 통'을 물려받은 아이를 낳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현대의 임상의학 기술로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윤리적인 문제가 따른다. 만일 외치에게 자식이 있었다면 200 여 세대가 지난 오늘날의 알프스 산맥 주변에 여전히 그의 직계 후손들 이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외치의 아이를 낳고자하는 여자 들 가운데 외치의 직계 후손이 있을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 여자 들 모두가 외치의 후손일지도 모른다. 자연인류학자토르스타인 쇠볼 트(Torstein Sjpvold)는 5,000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안할 때, 이론적으 로는 얼음 인간이 지구상의 모든 인간의 직계 조상일 수도 있다고 말했 다. 물론 지리적 여건이나 혼인 풍습 등을 고려할 때 이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근친상간이 될지도 모르는 인공 수정으로 얼음 인간을 '되살린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은 기본적인 생식 방식인 섹스 의 또 다른 의미를 깨닫게 해 준다. 다시 말해서, 섹스는 인간이 육체의 소멸을초월하여 불멸을추구할수 있는 수단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그자체가초월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즉, 황홀경이라는질적으 로 전혀 다른 삶을 체험하게 해 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10억 년에 이르는 지구상의 섹스의 역사에 있어서, 오늘날 의 섹스와는불멸과초월, 황홀경의 의미에서 전혀 다르다. 지금과 같 은 모습의 인간이 등장한 것은 겨우 15만 년 전쯤이었지만 고등동물은 생식을 위한 짝을 신중하게 선택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인류가 가지고 있는 정신적 특성들 가운데에는 선택된 것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수공 작이 화려한 무지갯빛 꼬리 부채를 갖게 된 것은 수백만 년 동안 암공 작이 마음에 드는 수컷을 선택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 인간이 지금처럼 뇌가 커지고 다른 동물들보다 월등한 지능을 갖게 된 것도 우리 조상들이 생식을 위한 짝을 신중하게 선택해 왔기 때문이라 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진화해 온 우리 인간은 이제 동물들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아득한 과거를 탐사하고 선사 시대까지 우리 자신의 기원을 조사하기에 이르렀다. 이 책은 생물학과 문화의 결합에 관한 이야기이다. 황금 음경 씌우 개, 섹스 장면을 묘사한 선사 시대의 그림, 매머드의 상아로 만든 음경, 아이를 출산하는 여자를 묘사한 조각물, 매독 환자의 유골, 최음제로 쓰인 약초의 불에 탄잔해 등, 일반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수많은 고 고학적 증거가 그 바탕이다. 이야기는 인간이 처음 등장하고 성 문화가 시작된 태고 시대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지난 5,000년 동안의 성 문화 와 그에 대한 편견과 혼란을 재조명하는 것으로 끝난다. 모든 종류의 성행위와생식과성별과힘에 대해 설명하고 과거의 여러 인간사회에 서 섹스와 성별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서술할 것이다. [ 자연 선택과 성적 선택 ] 40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침팬지와 비슷한 동물의 소규모 집단이 유일하게 뒷다리로 걷기 시작했다. 그들이 뒷다리로 걷게 된 이유에 대 해서는 이론이 분분하다. 어쨌거나 그것은 의미심장한 전환점이었다. 바로 현대인의 기원이었던 것이다. 나무를 타고 다니던 우리 조상은 번 식에 성공했고 다양한 행위에서 성적 흥분을 느꼈을 것이다. 어쩌면 혼 자서 또는 집단으로 성적 쾌락을 즐기는 오늘날의 피그미침팬지, 즉 보 노보처럼 극단적이었을지도 모른다. 피그미침팬지는 생식과 무관한 섹 스를 즐기며 동성애와 근친 상간도 즐긴다. 인류가 등장하기 전의 우리 영장류 조상의 성행위가 얼마나 다양했건 간에 성행위에는 인식과 욕 망의 바탕이 되는 신체적 아름다움이 개입되었다. 암컷은 커다란음핵 과 젖가슴을 가지고 있었고 수컷은 아주 작은 음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암컷과 수컷 모두가 무성한 털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아름다움의 기준이 극적으로 변했다. 직립보행을 하게 됨에 따라 암컷의 성기가 가려지고 엉덩이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또 암컷의 젖가슴이 발달하기 시작하고, 암컷과 수컷의 몸을 뒤덮고 있 던 무성한 털이 점점 없어지기 시작했다. 음핵은 작아지고 음경은 점점 더 커졌다. 자연 선택, 즉 '적자생존의 법칙'만으로는 이 모든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 자연 선택의 과정에서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직면한 종은 변 화하거나 멸종된다. 변화는 어느 종에게서나 발생한다. 개체들사이에 는 차이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 가장 잘 적 응하는 개체만이 제 특성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준다. 세대가 바뀌고 수 백만년, 수천만년이 지나면서 변화는 계속된다. 양과비슷한동물이 기린으로 변하고 어류가 파충류 동물로 변하며 파충류가 조류로 변한 다. 변화하는 과정에서 두 종으로 분리되기도 한다. 그런 경우에는 개 체들 사이의 상호 인식의 기준도 점점 변한다. 이를테면, 기린은 오카 피와 조상이 같지만 이제는 오카피와 교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윈 (Charles Darwin) 자신도 인정했듯이 자연 도태만으로는 지구상의 다 양한 생명체의 생성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이를테면, 수공작의 峯리는 육식동물의 표적이 되기 쉽다. 하지만 그런 약점에 대한 중요한 보상이 뒤따른다(이것은 이 책의 요점의 하나이기도하다). 즉, 암공작이 수공 작의 화려한 童리를 섹시하게 여기는 것이다. 다윈은 인간의 특징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기본적인 생존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인류는 사촌인 영장류 동물들과는 달리 몸을 보호하는 털이 없다는 것이 그 한 예이다. 그는 그런 특징의 원인 을 '성적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짝을선택하는기준이 외부환경의 압 력만큼이나 진화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성적 선택을 할 때 에는 무력을 쓰기도 한다. 주로 수컷이 그렇지만, 이성과 교미할 기회 를 얻기 위해서 다른 개체와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암컷은 瑞식을 위 해 보다 신중한 선택을 한다. 힘은 다른수컷들보다 약하더라도 더 영 리하고 더 매력적인 수컷을 선택하곤 한다. [ 두발로 걷는 동물의 등장 ] 직립보행도 생존과 연관시켜 설명하기 어려운 인간의 특징이다. 두 발로 서서 걸어다니면 더 힘들고 느리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두 발로 서서 걸어다님에 따라성적 매력의 초점이 바뀌었다. 교미의 방식도바 뀌어 뒤로 하다가 앞으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골반의 형태가 변하여 산도(産道)가 일그러져 출산이 더 고통스럽고 위험해졌다. 게다가 머리 는 더 커졌다. 인간의 뇌의 크기는 지난 400만 년 동안 무려 세 배로 커 졌다. 이 놀라운 변화는 생물학적 관점만으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다. 400만 년 전의 우리의 원시인 조상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존재만은 아 니었다. 생물학적인 변화와 더불어 전혀 새로운 차원이 생겨난 것이다. 바로 문화이다. 직립보행은 원시인 조상의 손을 자유롭게 해 주었다. 주먹으로 땅바 닥을 짚으며 걸어다니고 나무를 타고 다닐 때보다 주변의 물체를 훨씬 더 많이 도구로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물체를 필요에 맞 게 변형시켜 쓰기 시작하면서 최초의 인공물이 등장했다. 현존하는 문 화의 증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돌을 다듬어서 도구나 무기로 사용 한 것으로 그 연대가 250만 년 전이다. 그러나 우리의 조상이 환경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 쓴 초기의 인공물 가운데에는 깨진 돌보다는 그 보다다루기 쉬운 풀, 짐승의 가죽, 나무껍질, 나무따위로만든 것이 더 많았을 것이다. 다만 그것들은 돌처럼 오래 가지 못하기 때문에 썩 어 없어져서 발굴되지 않았을 뿐이다. 최초의 석기는 남자사냥꾼들이 만들어 썼다는 것이 현재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섹스, 뇌의 크기, 출산 방식의 변화등에 관한여러 가 지 증거를 볼 때, 인류만의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을 가능성이 많다. 우리 인간은 계속 네 발로 걸어다닐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산도가 좁아져서 태아의 큰 머리가 빠져나오기 힘들게 되는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손이 자유롭지 못했다면 인간이 지금과 같은 지 능을 갖게 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직립보행은 도구 사용의 원동력 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사소통의 가능성도 높였다. 상체를 자유로이 쓸 수 있게 되었고 폐와 횡격막이 보다 복잡한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 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는 160만 년 전쯤에 처음 생겨났다. 그리고 그에 따라 정말이건 거짓말이건 사랑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최초의 의복도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을 가능성이 많다. 비록 그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없지만, 성기를 가리거나 강조하여 보 다 적극적으로 신체를 표현하기 위해 옷을 입기 시작했을 것이다. 옷은 성별의 개념을 세웠다. 그 전에는 생물학적인 특징에 의해서만 구별되던 성이 이제는 옷에 의해 구별되기 시작한 것이다. 옷은 처음부 터 남자옷과 여자옷이 구분되어 있었다. 따라서 옷을 바꾸어 입게 되 면 성별이 모호해짐을 인식하게 되었다. 원숭이처럼 털로 뒤덮여 있지 않은 선사 시대 인류의 몸은 하나의 물질적인 대상이 되어 화장으로 이 미지를 바꿀 수도 있었다. 털이 없는 피부에 칠을 하여 모양을 내기 시 작한 것이다. 섹스도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면서 더 오랫동안 하게 되었 다. 선사 시대 인류는 자연적인 산아 제한법을 썼을 가능성이 많다. 인 류는 지난 400만 년 동안 섹스와 생식을 의식적으로 구분해 왔다는 것 이 나의 생각이다. [ 해부학적 구조는 운명? ] 문화는 성적 선택에 꾸준히 새롭고 다양한 기준을 부여했다. 이제 짝 을선택하는기준은후보자의 타고난 장점과 외모만이 아니었다. 노래 솜씨, 사냥 솜씨, 춤 솜씨, 그림 그리는 솜씨 따위의 후천적인 기술이 성적 매력을 좌우하게 되었다. 160만 년 전부터 '해부학적 의미에서의 현대인'이 처음등장한 15만년 전까지, 인간의 뇌는 계속해서 커졌다. 그 이후부터는 큰 뇌를 가져야만 적응할 수 있는 환경의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뇌가 커짐으로써 생겨난 뛰어난 문화적 능력 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성적 집착이었을 것이다. 연가(戀歌)와 예쁜 꽃다발이 경쟁자에 대한 공격만큼이나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이런 진화의 새로운 단계가 의미하는 바는 참으로 크다. 지그문트 프 로이트(Sigmund Freud)가 '해부학적 구조는 운명'이라고 말했듯이, 유전학자들과 사회생물학자들도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유전자의 노예라 는 말을 하곤 한다. 그들은 우리의 성행위와 성의 정치학이 본능적인 것으로서, 동물 일반의 행동 양식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 다. 그들이 내린 결론에 따르면, 여자는 섹스와 생식의 목적이 남자와 근본적으로 다르므로 현대 사회에서의 불균형은 생물학적으로 불가피 한 것이다. 남자는 '사냥꾼' 이라서 여자가 견제하려고 애쓰지만 견제하 지 못하는 무분별하고 충동적 이며 창의적인 동물이라는 견해는 많은 비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호응을 얻고 있다. 한편, 여 자는 본디 생물학적으로 남자보다 우월하며, 남자가 여자를 억압하는 현대의 부권 사회는 보다 자연스러운 형태인 모권 사회가 잠시 중단되 어 있는 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도 있다. 초기의 인간 사회가 모권 사회였을 것이라고 처음 주장한 사람들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민속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성적 평등을 유지하 고 있는 대영제국령의 몇몇 원주민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아 여자들이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그들이 보기에 남자 들이 지배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프로이트는 1930년대의 설을 주장한 프랑스의 진화론자-역주)식 진◎를 겪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전자가 아니라 문화를 통해, 경험으로 습득한 정보를 물려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프리카에서 세계 곳곳으로 진출하면서 여러 가 지 환경에 서서히 생물학적으로 적응해 온 것이 아니라, 문화를 이용하 여 환경을 우리에게 순응시켜 온 것이다. [ 성 문화-인간이 선택 ] 현대인은 공통된 생물학적 동기와 타고난 육체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데 물론 이것은 어느 정도 필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자는 아이를 낳을 수 있지만 남자는 아이를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여자들이 억압받고 있는 현실이 선사 시대에서 비롯된 것이라 면, 그 기원은 생물학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문화적인 것이다. 나는 인간이 농사를 짓기 시작했을 때부터 성적 불평등이 시작되었다 고 생각한다. 인간은 농사를 지음으로써 대부분의 다른 포유동물들처 럼 자연의 식량 자원에 의존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식량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근동과 유럽에서는 1만년 전쯤에 농경 생활이 시작되었다. 더 이상 떠돌아다니지 않고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고 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신석기 시대의 혁명'이라고 불린다. 역설적인 것은, 처음농경 생활을 주도한 것은 여자였지만 나중에는 농경 생활이 여자를 노예화 시켰다는 것이다. 동물을 길들여서 그 젖을 식량으로 쓰게 됨에 따라 여자는 그 전보다 아이를 더 빨리 기를 수 있게 되었고, 점점 더 가정에 얽매이게 되었다. 섹스와 생식에 관한 인간의 선택은 생물학을 고쳐 놓거나 아예 부정 할수도 있다. 콘돔, 유방확대 수술, 음경 확대 수술, 인공수정, 대리 임신, 제왕절개 수술, 동성애, 포피 절제와 음핵 절제, 전화 섹스와 컴 퓨터를 이용한 가상 현실 섹스, 수도원과 매음굴, 포르노, 검열, 다양한 혼인 방식‥‥‥‥ 이 모든것이 우리 사회의 성 문화의 일부이다. 더 정확 하게 말하자면, 이것들은 현대 세계의 다양하고 상호 배타적인 성 문화 들의 단면들이다. 인류학자 어니스트 겔너(Ernest Gellner)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인류의 유전학적 공통점은 놀라을 정도의 행동의 가변 성이다‥‥그러나 인류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회학적 사실은 이 가변 성이 어느 한 사회 안에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 의식과 자유 의지의 산물인 문화에는 역설적이게도정교한 금지 체계가 있다. 사회 마다 섹스에 관한 나름대로의 규범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어느 사회에나 그 규범을 위반하는 개체가 있게 마련이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지만 실제로는 무시될 때가 많았다는 것은 이브를 유혹한 뱀의 이야기이다 그 역사가 더 길다. [ 선사시대 탐구하기-유골, 인공물, 환경물 ] 우리로 하여금 그 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고고학뿐이다. 고고학적 기록, 즉 인류의 과거의 흔적은 크게 서너 가 지로나눌수 있다. 첫째, 인체, 즉 유골이나그보다더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시체가있다. 이런 것들은제물을바치던 곳, 전쟁터, 또 는 우발적인 사망이 발생한 곳(얼음 인간의 경우처럼)에서 발굴된다. 두 번째 증거는 인간이 만든 여러 가지 물건이다. 유골과 함께 출토된 작은 인공물도 있고, 많은 인공물이 한꺼번에 발견되는 주거지나 묘지 따위의 유적도 있다. 유적 가운데에는 스톤헨지(Stonehenge;영국 월트 셔 주 솔즈베리 평원에 있는 일단의 거대한 돌기둥. 석기 시대 후기의 유적이다-역주)처럼 동떨어져 있는 기념물도 있고, 얼음 인간이 발견 된 곳에서 가까운 알프스 산맥의 발카모니카(Val Camonica) 계곡처럼 넓은지역에 분산되어 있는것도 있다. 발카모니카계곡의 절벽에는신 비로운 선사 시대의 그림이 잔뜩 새겨져 있다. 선사 시대 인류는 주위 환경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고고학적 증거로 환경물이라고 한다.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함 유율이 높아지고 있는 것도 일종의 환경 물이며, 그 원인의 하나인 열대 다우림의 지속적인 벌목과 화재도 환경 물이다. 고고학자들은 과거에 발생했던 현상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연구할수 있다. 이를테면, 호 수의 침전물을 검사하거나 토탄지(宜炭地)에서 발견되는 여러 시대의 꽃가루를 분석하는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이런 방법으로 현대 그리스 의 바위 투성이 불모지나 히스(황무지에 무성하는 진달래과의 상록 소 관목-역주)로 뒤덮인 영국의 황무지가 환경물이라는 것을 밝혀 냈다 이 두환경물은선사시대의 삼림 벌채와 토양의 황폐화에 의해 생겨난 것들이다. 인공물과 환경물의 중간에는 동물학적 및 고식물학적 증거가 있다. 이것은 인간이 동물과 식물을 이용한 흔적이나 동물과 식물에 영향을 끼친 흔적을 말한다. 음식물찌꺼기로 남은 뼛조각, 탄화된 곡물, 썩어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견과류의 껍질 따위를 분석함으로써, 고고학 자들은 선사 시대의 식생활을 추정할 수 있다. 1만 3,000년 전쯤에 등 장한 북아메리카 최초의 인간이 덩치가 큰 동물들을 멸종시킨 주범인 지 아닌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그럴 가능성이 많다. 선사 시대의 인 류도 오늘날의 우리처럼 사방을 개척하고 다녔을 것이다. 자연 환경과 음식에 대한 한 사회의 견해는 섹스나 남녀간의 특정 관계에 대한 태도 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신석기 시대의 유럽에서는 농경 생활을 하는 부족이 급격히 증가하여 그 전까지 그 곳에서 수렵채취 생활을 하 던 부족들을 순전히 수적 우세로 정복했다◎ 확산되는 농경 생활은 생태 계를 파괴하기 시작했다(이것은 인간의 섹스 및 생식의 목적과 밀접하 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 현상은 전세계의 삼림이 모두 사라질 때 까지 계속될 듯하다. [ 고고학적 기록의 함정 ] 고고학적 기록에는 의도적인 것과 우연한것이 있다. 오늘날의 열대 다우림 벌목은 의도적인 것이고, 그에 따른 이산화탄소의 증가는 우연 한 것이다. 스톤헨지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의도적 으로 만든 것으로서 지금도 여전히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식 품을 가공 처리하던 곳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곳이 아니다. 그런 유적들은 고고학자들이 땅 속에서 동물의 작은 뼛조 각을 캐내고 버려진 조개류의 껍질과 견과류의 껍질을 정성스레 분류 할 때에야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얼음 인간은 사고로 죽었고, 늘 입던 옷을 입은 채 죽은 곳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후세 사람들 에게 보일 생각이었다면 그런 옷을 입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통, 흔히 고고학자들이 옛사람들의 유골을 발굴하는 곳은 여러 가 지 부장품이 함께 들어 있는 무덤이다. 그런 부장품을 함께 묻은 목적 은 후세 사람들과 그들의 신들에게 사자(死者)에 관해서 알리기 위해서 였다. 그리고 그런 부장품들이 보여 주는 것은 사자의 실제 삶과 크게 다를 수도 있다. 선사 시대에 관한 진실을 알아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성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는 선사 시대의 미술은 당시 사람들의 정신 세계를 묘사하고 있지만, 그들의 실제 생활상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얼음 인간이 살았던 시대와 거의 같은 시기에 시베리아 동부에서 바위에 새겨진 석기 시대 그림은 스키를 신고 말코손바닥사슴과 성교 를시도하는남자를묘사하고 있다(그림 7-5 참조). 실제로그시도가 성공했을 수도 있지만, 그 그림은 상징적인 것일 가능성이 더 많다. 그 림 속의 남자의 머리는 새의 머리처럼 생겼다. 그러므로 그 그림은사 실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주술사의 초인적인 용맹을 상징한 것 일 수도 있다. 어쩌면 장난으로 그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해 석은 결코 억지가 아니다. 미술은 흔히 사물을 이상화한다. 빙하기의 '비너스상'만 보아도 그렇다. 그런 '건장한 몸매'는 당시의 여자들이 실 제로는가질 수 없는몸매였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몸매가 '아름다 운여자'의 기준이었을 것이다. '우연한' 고고학적 기록은 우리의 선사 시대 조상의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가공 처리된 열매의 껍질을 보면 선사 시대 사람들이 최음제를 사용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고, 해골에 남아 있는 질병의 흔적을 보고 그 사회의 어느 계층이 가 장 많은 피해를 입었는지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선사 시대의 유물은 극히 드물다. 인류의 성 문화는 영구적인 물질적 요소(장신구, 음경 씌우개, 에로틱한 그림 등)와 한시 적인 비물질적 요소(노래, 춤, 낭만적 이상 등)로 이루어진다. 고고학자 들이 직접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것은 옛 문화의 물질적인 잔재뿐이다. 물론 그런 것을 신중하게 분석하고 해석하면 다른 영역까지 추정할 수 도 있다. 이를테면, 발에 굳은살이 박혀 있고 손톱이 잘 다듬어져 있는 이집트의 남자 미라는 그가 생전에 직업 무용수였음을 말해 준다. 그리 고 신전의 내부 장식을 보면 그가 어떤 춤을 추었는지 알 수 있다. [ 쓰레기를 조사하여 성생활을 추론하다 ] 옛사람들의 성생활과 그에 내포된 감정을 상세하게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고고학적으로는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없는 구전되는 것들뿐 이다. 하지만 고고학적 증거는 과장되거나 허위일 때가 많은 말과는 달 리 실생활을 사실대로 보여 준다는 장점이 있다. 고고학자 빌 라티예 (Bill Rathje)는 미국 애리조나 주 투손(Tucson)에 있는 쓰레기 처리장 에서 장기적인 조사 작업을 하고 있다. 그의 학생들은 쓰레기를 분류하 여 사람들이 버린 물건들을 분석하고 있다. 라티예가 이 작업을 통해 재구성한 투손 시민의 식생활은 사회학자들이 설문조사를 통해 얻은 결과와 많이 다르다. 이를테면, 어느 동네 주민들의 설문지 응답에 따 르면 맥주를 마시는 가정은 15퍼센트밖에 안 되고, 그것도 1주일에 8캔 이상 마시는 가정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버린 맥주 용기와 포장재를 바탕으로 한 고고학적 분석에 따르면, 1주일에 8캔 이상 마시는 가정이 54퍼센트이며 맥주를 전혀 마시지 않는 가정은20퍼센트에 지나지 않 는다. 쓰레기를 조사하면 사람들의 성생활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대도시 의 쓰레기 처리장에 수거된 쓰레기에는 버린 피임 기구와 그 포장재, 망가진 섹스 기구, 구멍난 공기주입식 기구와 해진 옷, 성병 치료제, 포 르노 잡지 따위가 들어 있다(이 가운데에는 상점에서 파는 것도 있고 직접 만든 것도 있다). 라티예는 투손 위생국의 협조를 받아 연구하고 있지만, 이런 쓰레기를 조사하기 위해서는 시민의 비공식적인 협조도 필요하다. 그러므로 그가 그런 '섹스쓰레기'를 분석하여 사람들이 '실 제로 하는 일'과 '한다고 말하는 일'을 비교하지 않는 것은 그리 이상 한 일이 아닐 것이다. 투손 시민들이 라티예의 작업을 의식하고 그런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기가 민망하여 다른 방법으로 폐기했는지도 모르 기 때문이다. 투손의 쓰레기 처리장에서 발견되는 쓰레기처럼 현재 발견되는 물질 적 증거는 쉽게 감정할 수 있다. 그러나 선사 시대의 유물을 감정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어떤 물건이 어디에 쓰였는지 그 용도를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발굴된 유물도 보다 크고 복잡한 어떤 물 건의 일부일 때가 많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쉽게 감정할 수 없는 인 공물을 흔히 '의식용품' 이라는 광범위한 범주로 분류한다. 그렇지만 신 기술이 개발됨에 따라 평범한 물건의 용도를 보다 정확하게 밝혀 낼 수 있게 되었다. 이를테면, 가스크로마토그래피로 선사시대의 그룻안에 남아 있는 화학 물질을 분석하여 젖, 아편, 올리브유, 송진 따위의 미세 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지극히 현대적인 개념, 성 ] 현대의 투손 시민은 섹스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 다. 하지만 선사 시대 사회에 대해서도 같은 가정을 할 수는 없다. 그러 나 섹스가 어느 인간 사회에서나 중요한 역할을 차지해 왔음은 틀림이 없다. 인류학자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Bronislaw Malinowski)는 1929년에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섹스는 단순히 생리학 적인 행위가 아니다‥‥‥섹스에는 사랑이 내포되어 있다. 섹스는결혼 이나가정 같은 고귀한 제도의 핵이 되며 예술의 혼이 된다. 섹스는문 화의 모든 측면을 지배한다. " 그러나 섹스의 이런 편재성(遍在性) 때문 에 섹스를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것은쉽지 않다. 성 문화는 실로 미묘 하고 모순된 의미로 가득 차 있다. 프랑스의 작가 미셀 푸코(Michel Foucault)는그의 저서 『성의 역사』(Histofofsexual쏜v)에서 '성'은현 대적인 개념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19세기 및 20세기의 서양의 개념이며 개개인의 정신적 중심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나 름대로의 성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개인의 '진정한' 성적 성향은 잘 살려질 수도 있고 억압될 수도 있다. 자신의 성적 특성은 자기 관찰 또는 여러 섹스 파트너와의 경험, 그리 고 정신분석학자와의 상담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중세 유럽 사람들은 섹스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고대 그리스인이나 바빌로니아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서양이건 서양이 아니건 오늘날 에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러므로 선사 시대 인류는 섹스에 대해 프로이트 이후의 현대인과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 았음이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5,000년 된 정자로 인공 수정을 한다는 것은 현대 윤리의 차원을 넘어서는 어려운 문제들을 제기한다. 외치는 자신이 현 대인의 아버지가 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기혼자였을 까? 그의 소지품과 문신은 오늘날의 결혼반지처럼 기혼자임을 나타내 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살던 시대의 유럽 사회에 결혼 제도가 있었는지, 그리고 만일 있 었다면 일부일처제였는지 일부다처 제 였는지 일처다부제였는지, 아니 면 또 다른 제도였는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외치는 섹스와 아이의 연관성을 알았을까? 그리고 만일 알았다면 어떤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 을까? 어쩌면 그는 이성애에는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 얼음 인간은 최초의 게이였다? ] 얼음 인간을 '성적 대상'으로 생각한사람들은 얼음 인간의 아이를 낳겠다고 나선 여자들만이 아니었다. 남자 동성애자들도 얼음 인간을 선사 시대의 남자 동성애자로 생각했다. 오스트리아 빈의 게이 잡지 幣다 나히리히틸(Lambda Nachrichten)지는 외치의 고환뿐만 아니라 (직장)에도정자가들어 있다는 기사를 냈다. "외치는 최초의 남자 동성애자였다‥‥‥외치는 수동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것은의심할여 지가없다‥‥‥조사단은방사성 탄소연대 측정법으로정자의 연대를 측정했다. " 이 이야기는 유럽과 아메리카대륙의 언론과게이들사이에 급속도로 퍼졌다. 그리고 동성애가 선사 시대부터 유래된 정상적인 성생 활임을 입증하는 좋은 증거로 여겨졌다. 영국의 일부 고고학자들 사이에 서는 외치가 지니고 있던 여러 가지 소지품으로 보아 그는 주술사였으 며, 그런 사회적 특권을 바탕으로 이성애와 동성애를 다 즐길 수 있었을 것이라는 소문도 떠돌았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결국 음경이 없다는 이야기처럼 뜬소문임이 밝혀졌다. 얼음 인간의 직장에서는 정자가 발견 되지 않았다. 정자가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아예 정자 가 있는지 찾아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만일 조사단이 외치의 직장에 정자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외치의 직장에 정자 가 들어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정 자가 발견되었다고 해도 외치가 동성애를 즐겼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직장에 정자가 있고 없고가 반드시 그의 성생활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 다. 왜냐 하면 그가 동성애를 즐겼을 수도 있고 다른 남자에게 강간당 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외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주변 상황으로 보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누군가가 시간(誘姦)했을지 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얼음 인간의 직장에 정자가 들어 있는지 조사하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직장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핀들러는 이렇게 말했다. "고고학적 지식이 없는 발굴단이 외치의 시체를 발굴할 때, 항문에서 골반에 이르는 부분이 기압식 끌에 ◎의해 훼손되었다. 골반의 근육 조직 은 검사하지 않았고 표본을 채취하지도 않았다. 탈수 현상으로 오그라 든 내장을 검사하기 위해 컴퓨터 단층촬영을 했을 때에도 직장은 발견 되지 않았다. " 외치의 직장을 검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는 했지만 조사 단에게 그럴 생각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스핀들러도 밝혔듯이, 그와 그 의 동료들은 외치의 유해를 검사하는 몇 달 동안 '언론에 보도된 황당 무계한 기사'를 보고 강박감을 느꼈을 것이다. 스핀들러는 얼음 인간에 대한 자신의 저서에서 그림을 그리지는 않 았지만 얼음 인간의 성기에 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언론의 허황된 추측 때문에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얼음 인 간의 은밀한 신체 부위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겠지 만,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로써 허무맹랑한추측을반박하지 않을수 없다‥‥우리에게 신석기 시대의 인간은 하나의 연구대상일 뿐이다. ·얼음 인간은 자신이 연구 대상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 다. 그리고 이런 일이 그의 종교적 성향에 위배될 수도 있다‥‥‥그러 므로 우리는 그의 사체에 대해 우리 사회의 윤리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예수회 소속 신학자인 한스 로터(Hans Rotter) 박사도, '이것이 과 학적으로 의미가 깊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얼음 인간의 인간적 존엄성 을 모독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스핀들러의 논지는 사뭇 진지하지만, 그의 사고방식에는 찬성할 수 없다. 그는 얼음인간의 성적 성향이 '은밀한' 문제라고 전제하고 있는 데 이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다고 해도, 얼 음 인간의 신체의 어느 부분이 그의 성적 성향과 연관되어 있는지는 아 무도 알 수가 없다. 목덜미나 발을 섹스와 연관된 은밀한 부분으로 여 기는 종족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외치가 자신의 몸의 어느 부분을 섹스와 연관된 은밀한 부분으로 여겼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스핀들러의 조사단은 외치의 신체와 소지품(신성시되거나 금기시된 것 일지도 모르는)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검사할 때는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 섹스에 대한 고정 관념을 넘어 ] 푸코의 이론에 따르면, 섹스에 대한 우리의 현대적 사고방식이 (생물 학적 관점에서건 사회문화적 관점에서건) 다른 시대의 사고방식보다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섹스에 대한 서양의 고찰의 역사는 짧지 만, 인체에 대한 진실을 독점한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그리고 인간이 나 원숭이나 다른 고등 포유동물들의 여러 가지 성행위에 대해 절대적 인 정의를 내린 사람도 없다(고등동물의 성행위는 경험과 본능과 우연 한 발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되기는 하지만). 다른 사회의 성 풍습을 비판하기는 쉽다. 16세기의 스페인 사람들은 그들이 정복한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사회에서 동성애와 복장 도착 (이성의 옷을 입기 좋아하는 변태적 성향-역주)이 성행하는 것을 보고 분노했다. 그래서 그런 '변태 행위'를묘사한조각과 장신구와기념비 를 모조리 없애 버렸다. 지금도 몇몇 박물관에서는 "외설스럽거나 사람 들에게 공개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고 판단되는 고고학적 증거를 감추 어 두고 있다. 이른바 '매음굴 표'로 불리는, 매음굴의 섹스서비스를 묘사한 동전 같은 로마 시대의 유물이 유럽의 몇몇 박물관 지하실에서 빛을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얼음 인간의 경우처럼, 진실이 공개 되지 않으면 갖가지 소문이 떠돌게 마련이다. 선사 시대의 성 풍습에 관한 자료는 전세계에 걸쳐 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구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나는 선사 시대 후기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의 후반부에서는 유럽과 서아시아와 구소련에 초점을 맞추었다. 나는 이 지역들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동료들과 아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감추어져 있거나 일반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자료들을 찾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자료들과 연관된 내용들 가운데에는 세 계적으로 공통된 것들이 많다(전세계로 확산된 서구 사상 덕분에 그렇 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 자료들은 5,000년 전쯤까지 거슬러 올 라가 당시 유라시아에서의 인류의 다양한성행위를 입증해 준다. 수간 (獸姦), 동성애, 매춘(매춘은 인류 역사상가장오래 된 직업이 절대 아 니다), 복장 도착, 성도착, 호르몬 요법, 가학피학성 변태 성욕, 피임에 대한관심, '순수혈통' 잇기,곡예나시합같은섹스,정신 수양으로서 의 섹스‥‥‥‥ 이런 다양한 변태적 성행위'들은 기독교 가치관이 세계 를 지배하기 시작하자 지하로 숨어 버렸다. 그리고 낭만적이고 고상한 사랑이 숭상되고 육체적인 섹스는 사악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이러한 전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런 전통은 비교적 최근에 우리의 성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이 지난 몇천 년은 장장 400만 년에 걸친 인류의 섹스의 역사에 비하면 한 순간일 뿐이다. 인류의 성 문화의 진화 과정을 돌이켜봄으로써(옛사 람들의 생활을 추측하기보다는 실제 생활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다 가올 400만 년의 우리의 미래를 가늠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인류 성 문화의 진화 ] 이아고의 말은 사랑과 욕정과 질투, 은밀하고도 공공연한 행위로서 의 섹스, 우리와 다른 동물들 사이의 작은 차이, 그리고 우리 인간들 사 이의 엄청난 차이를 나타낸다. '등이 둘인 짐승'이란 문화에 의해 변화 해 온 원초적 동물 본성의 산물이다. 유전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인간과 침팬지는 유전 암호의 98퍼센트가 동일하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과 침 팬지 사이에는 서로를 수용할 수 없는 큰 틈이 있다. 그리고 이 틈은 처 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인간과 침팬지는 800만 년 전에 똑같은 조 상에게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침팬지가 비교적 변화하지 않은 데 반해 인간은 400만 년 전부터 급속도로 진화하기 시작해서 그때부터 지금까 지 적어도 열 종이 넘는 인류가 등장했다. 그 가운데에는 초기의 종에서 진화한 것도 있고 독자적으로 진화한 것도 있었다. 이 중간 종들은 화석 뼛조각과 원시적인 석기 몇 가지로 겨우 그 존재가 증명되지만, 구체적 인 생김새와 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의 독특한 인간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우리가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된 것은 우리가 몸의 열을 식히기 위해 알몸이 되어야 했던 위대한 사냥꾼이었기 때문(사냥꾼설)이 아니 다. 또여자의 커다란 젖가슴이 아이의 부표로 쓰였다고 하는,즉 바다 에서 진화했기 때문(수생설)도 아니다. 남자가 섹스를 제공받는 것에 대 한 대가로 여자와 아이에게 고기를 제공했기 때문(일부일처제설)도 아 니다. 나는 우리의 진화가 복합적 이고도 우연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인 류의 진화에는 성적인 매력과 문화의 생성이 중요한 축으로 작용했다. 진화 과정에서도 특히 두드러진 변화들 가운데에는 '성적 선택' 과 연관 된 것이 많았을 것이다. 이를테면 몸에 털이 없다는 신체적 특징을 선호 하게 된 것도 그것이 생활하는 데 이점이 있어서 라기보다는 성적인 매 력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흔히 남자들이 위대한 문화적 진보를 이루는 동안 여자들은 굴 속에 서 아이들이나 돌보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자들도 인간의 진보 를 가능하게 한 중요한 발명을 많이 했다. 180만 년 전쯤에 발명된 아기 띠는 하찮은 발명품 같지만 아기의 뇌가 더 오랜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발달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뇌의 발달은 곧 언어 의 탄생으로 이어졌고,언어는 우리의 생식 및 성생활에서 분수령이 되 었으며 수많은 가능성으로 가득 찬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 잃어버린 고리의 잃어버린 음경 ] 원숭이는 나무를 타고 다니며 꽥꽥거리고 난잡하게 교미하는 지능이 낮은 털북숭이 동물이고, 우리 인간은 옷으로 알몸을 가리고 두 발로 서 서 걸어다니면서 말을 하고 좋아하는 상대와 결혼하여 품위 있는성생 활을 하는 최고의 고등동물이라면, 과연 진화의 과정에서 그 중간 단계 에 있었던 동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몸은 반쯤 털로 뒤덮여 있고, 모 피 조각을 걸치고 구부정한 자세로 걸어다니며, 동굴에서 살고, "나 타 잔,너 제인." 식의 원시적인 언어를 쓴다. 허락 없이 마음대로 여자를 취하고 몽등이로 경쟁자들을 물리친다. 이런 것들이 가장 보편적인 추 측이다. 영화 제작자들과 만화가들이 흔히 이런 식으로 원시인을 묘사 하는 것은 결코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다. 성 차별을 비롯한 모든 것은 우리를 가르치는 교과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림 1-1은 1971년에 출판된 『원숭이에서 아담까지』(FromApe to Adam)라는 책에 나오는 인류의 진화 과정이다. 맨 왼쪽의 유인원은 침 팬지처럼 구부정하고 털로 뒤덮여 있다. 그 다음 유인원은 잃어버린 고 리(유인원과 인간의 중간에 있었다고 가상되는 인류-역주)의 하나로 키는 점점 더 커지고 털은적어지며 서투르게나마 직립보행을 하며 몽 둥이나 돌멩이를 들고 다닌다. 맨 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원인(原人)이다. 수염이 텁수룩하고 완전한 직립보행을 하지만 아직 키가 작아서 머리 를 꼿꼿이 쳐들지 못하고 툭 튀어나온 이마 밑으로 쉴새없이 곁눈질을 하고 다닌다. 맨 오른쪽은 해부학적 의미에서의 현대인으로서 아직 알 몸이며 머리를 높이 쳐들고 다닌다. 또 수염과 머리를 단정하게 기르고 빗어 멋을 내며 스스로 만든 창을 들고 다닌다. 이 그림에서는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가 구별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직립보행과 털 없는 몸과 지능 발달 등은 옷을 입기 시작하는 문화적 진화보다 앞선다. 이 그림에 따르면 생물학적 진화는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이루어졌다. 우리 조상은 두 발로 서서 걷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뻣뻣한 목과 요통 에 시달린 것이다. 그림 1-2처럼 보다 최근에 화가들이 표현한 직립보행으로의 전환은 한층 더 사실적이다. 맨 왼쪽의 침팬지 같은 유인원은 진화 과정상 한 단계로 끝나며 금방 털이 없어진다. 이 그림에서는 생물학적 진화와 문 화적 진화의 구별이 그림 1-1에서처럼 두드러지지 않는다. 가운데의 두 인류는 두 가지 물건을 들고 있다. 왼쪽의 인류는 불붙은 나뭇조각과 부 싯돌을, 오른쪽의 인류는 부싯돌과 창을 들고 있다. 그러나 그림 1-1에 서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옷을 입게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고 보는데 아마도 이것은 에덴 동산신화의 영향인 것 같다. 우리는 아담처 럼 아프리카를 떠나기 전까지는 부끄러움을 몰랐던 것이다. 그림에서 보면 고고학자로 묘사된 현대인만이 자유롭게 걷는다. 성기가 바지 속 에 잘 감추어져 있다는 것에 안심하고 처음으로 오른발이 아닌 왼발을 앞으로 내딛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그림에는 잘못된 점이 많다. 비록 이런 그림을 그릴 때에는 대 표적인 한 개체만 그리는 것이 오랜 전통이지만, 우리가 아는 한 인간은 늘 성적이고 사회적이었으며 집단 생활을 했다. 두 그림 모두가 인류의 키가 점점 더 커진 것으로 묘사해 완전한 인간이 되기까지의 육체적 및 상징적 발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잘못되었다. 처음 으로 불을 쓰기 시작한 160만 년 전의 우리 조상은 현대인보다도 키가 더 컸다. 그리고 그림 1-1에서는 해부학적 의미에서의 현대인만 피부 가 하얗지만, 그림 1-2에서는 모두 다 피부가 하얗다. 그러나 인류의 진 화는 아프리카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아프리카 사 람들은 피부가 검다. 두 그림 다 남성 중심적이다. 진화는 여자의 자궁과 골반 속에서 이 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를 진화의 중심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원숭이에서 아담까지』라는 책의 제목에서부터 남성 편향주의를 엿볼 수 있다. 실제로 이 두 그림에는 원인의 다리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나 타나 있지 않다. 오른쪽 다리가 성기 부분을 가리도록 그린 것은 진화에 있어서의 성의 핵심적인 역할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때문이다. 우리의 생식 및 성생활은 다른 동물들과 다르다. 우리의 성기는 유별 나다. 다른 영장류와 비교해 보면 인간 수컷의 음경은 엄청나게 크다. 이완되어 있어도 겉으로 드러난다. 털이 없는 피부도 영장류 중에서 유 일한 특징이다. 음부에만 털이 나 있기 때문에 성기 부분이 더욱 두드러 져 보인다. 이것은 인간의 암컷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다른 영장류 의 암컷처럼 발정기 때 외음부가빨갛게 부풀어오르는대신 항상 성기 를 두드러져 보이게 한다. 다른 영장류에는 없는 엉덩이도 수컷의 경우 나 암컷의 경우나 성적 매력의 초점이다. 그리고 인간의 암컷은 커다란 젖가슴이 있다. 다른 영장류도 젖을 먹이지만 젖가슴은 없기 때문에 인 간의 젖가슴이 큰 것을 젖을 먹이기 위해서라고 볼 수만은 없다. 그러므 도 성적 매력의 초점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 인류의 음경은 점점 더 커졌을 가능성이 많다. 고릴라,오랑우 탄,침팬지,피그미침팬지 등은 모두 음경이 아주 작다. 이완되어 있을 때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인간의 음경이 큰 것에 대한 가장 일반 적인 이론은.격렬한 '정자경쟁' 때문에 음경이 점점 더 커졌다는것이 다. 실제로 한 암컷이 여러 수컷과 교미하는 영장류 사이에서는 정자 경 쟁이 치열하다. 그러므로 한 암컷을 임신시킨 수컷이 그 암컷의 유일한 짝은 아니다. 암컷은 여러 수컷의 정자를 동시에 지니고 있을 수도 있 다. 그야말로 정자들이 난자에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경쟁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자 경쟁에서의 승리는 생산할 수 있는 정액의 양과 직결된다. 정액은 단순히 다른 수컷의 정자를 쓸어 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정액 은 저마다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는 다양한 정자를 품고 있는데 난자와 결합하는 임무를 띤 정자도 있고, 다른 수컷의 정자를 차단하는 정자도 있고, 다른 수컷의 정자를 공격하는 정자도 있다. 그러므로 음경이 길수 록 정자가 자궁 경부 가까이 진입할 수 있고 먼저 들어가 있던 다른 수 컷의 정자를 쓸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의 질은 신축성이 뛰어나서 어떤 크기의 음경도 받아들일 수 있고 남자의 음경은 크기에 상관없이 힘차고 정확하게 사정한다. 따라서 음경의 크기와 난자와의 수정 가능성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고릴라나 침팬지 같은 대 형 유인원은 여러 암컷과 교미하고 정자를 더 많이 만들어 내기 위해 고환은 점점 커졌지만 음경은 작다(침팬지는 체중을 기준으로 비교할 때 인간의 세 배나 되는 정자를 만들어 낸다). 인간의 음경에서 중요한 것은 발기했을 때의 기계적인 수정 능력이 아니라 이완되어 있을 때의 가시성(可視性)이다. 오늘날 현대인은 음경 을 크게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쓰고 있지만, 음경 확대 수술을 받는다 해도 발기했을 때의 크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음경 확대 수 술을 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아내를 비롯한 섹스 파트너의 압력 때문에 수술을 받은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성 적 쾌감을 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과시하기 위해서 음경 확대 수술을 받는다는 것이다. 음경의 크기는 남자들 세계의 경쟁의 일부인 동시에 결속의 일부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의 선호도가 인간 의 음경의 크기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직립보행을 하고 몸의 털이 없어짐에 따라 음경은 눈에 더 잘 띄게 되었고,그래서 발기하지 않았을 때의 크기가 중요해졌다. 그리고음경 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생물학적 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고릴라는 몸의 크기로 수컷과 암컷이 쉽게 구별되는데 수컷이 암컷보 다 훨씬 더 크며 다른 수컷과 몸의 크기를 겨루어 암컷을 차지한다. 음 경의 크기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에는 남자와 여자의 몸의 크기가 비슷하다. 물론 평균치로 따지면 남자가 여자보다 크지만, 성인의 경우에는 남자보다 큰 여자도 상당히 많다. 그래서 외형적인 특징을 바탕으로 성을 구별할 때 성기의 생김새와 젖가슴이나 수염의 유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음 경이 남성의 외형적인 평가 기준이 되면 진화 과정에서 점점 더 커지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어느 시대에나 큰 음경을 선호하는 여자들이 있었 을 테고 작은 음경을 선호하는 여자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음 경이 점점 더 커졌고 그 크기의 상한선은 성교할 때의 육체적 편의성과 음경의 발기력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나 털이 없는 알몸 상태에서는 눈에 잘 띄고 통제하기 어려운 음 경이 꽤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영장류의 성행위와 사회적 행동은 매우 복잡한데, 이것은 솔직한 감정을 감추고 전략적으로 유리한 감정을 꾸 미는 마키아벨리식 지능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인 구달煊anti Goodall) 은 나이지리아 곰베(Gombe)의 침 팬지들에게서 이런 사실을 발견한 바 있다. 음경이 발기되었다는 것은 마음이야 어떻건 성적인 흥미가 있다 는 뜻이다. 수컷 피그미침팬지는 구애할 때 앉아서 상체를 뒤로 젖히고 암컷에게 발기한 음경을 보여 준다. 그러나 평소에는 몸이 털로 덮여 있 고 자세가 구부정하기 때문에 두 발로 서서 걸어다니는 영장류보다 발 기한 음경을 더 잘 감출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음경이 커진 것에 대 해 두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첫째, 왜 남자도 여자처럼 성기 부분만 제 외하고 알몸이 되었을까?둘째.옷(아담의 무화과 잎사귀)은음경이 점 점 커지자 입기 시작한 것일까? 첫번째 의문에 대한 답은 플리오트로피(pleiotropy), 즉 어느 종의 한 쪽성(性)에 일어난 진화적 변화가 다른 성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현상 과 관계가 있다. 이런 점에서 포유동물은 유전학적으로 조류와 다르다. 이를테면, 자기 과시와 싸움을 위해 생겨난 숫염소와 수사슴의 뿔은 그 정도는 다르지만 암염소와 암사슴에게도 있다. 그러므로 여자가 성적 선택을 통해 알몸이 되자 비록 그 정도는 다르지만 남자도 따라서 알몸 이 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오늘날의 현대인의 행태로 미루어 보아도 그 렇다. 언제 옷을 입기 시작했느냐는 문제는 진화 과정에서의 문화 발달의 정도에 달려 있다. 안타깝게도 의복의 발달 과정은 파악하기가 매우 어 렵다. 옷처럼 부드러운 유기 물질은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 다. 하지만 다른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 문화 발달에 대해 가정해 볼 수 는 있다. [ 인간은사냥꾼? ] 우리는 흔히 남자는 문화적 발달을 주도했고 여자는 자연적인 상태 에 머물러 있었다는 뿌리 깊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 원시인을 연구하는 남자 학자들의 이론에 따르면, 남자는 돌로 만든 무기를 휘두르며 사냥 을 했고 여자는 동굴 속에서 아이를 키웠다고 한다. 남자의 지능이 더 뛰어나게 된 것도 사냥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류의 기원에 대한 사냥꾼설은 최근에는 성 차별이라는 비판을 받 고 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수렵채취 사회에서 그렇듯이, 선사 시대에도 수렵은 주로 남자가 하고 채취는 주로 여자가 했다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고고학자 린다 허콤브(Linda 班urcombe)는 이런 가정을 성 차별 로 생각하는 여학생들을 위해 이렇게 썼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여자는 오랫동안 아이 곁을 떠나 있을 수 없다. 사 냥감과는 달리 움직이지 않고 위험하지도 않은 식물성 식량을 채취하면 식 량을 구하는 일에 아이가 방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냥할 때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 아이는 심각한 방해가 된다. 그러므로 여자가 식량을 구하는 일은 아 이의 나이에 영향을 받는다. 아이는 나이 든 사람들에게 맡기고 젊은 사람들 이 식량을 구하러 먼 길을 떠날 수도 있다‥‥‥이런 것을 성 차별로 생각하 는 것은 진화의 한 단계로서의 동종이형(dimorphism;동일한 종이 두 개의 다른 형질을 나타내는 현상.여기서는 동일 종의 암수의 형태가 다른 성적 이형을 가리킨다-역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며 '일의 지위'에 있어서 우 리 자신의 문화적 체험만을 고집하는 것이다. 이런 여학생들은 그들 자신이 사냥을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여자가 사냥꾼으로 인식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냥이 남자의 일이었건 아니었건, 사냥꾼설은 생물문화적 진화에서 의 여자의 역할을 격하시킨다. 이 이론에 따르면,사냥할 때에는 서로 대화를 나누고 무기를 만들어야 하므로 사냥은 언어와 기술의 진보에 서 중요한 바탕이 되었으며, 수동적이고 생물학적으로 한계가 있는 여 자는 가만히 앉아서 그런 진화의 덕을 보았다. 동물학자 데스먼드 모리 스(Desmond Morris)는 1967년에 출판된 『털 없는 원숭이』(The Naked Ape)에서 인간이 털이 없는 알몸으로 진화한 것은 바로 사냥 때문이라 고 말했다. 몸의 열을 식히기 위해 알몸이 되었다는 것이다(그러나 그는 사자와 치타가 털로 뒤덮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냥을 잘 한다는 사실 을 인정했다). 그는 인간이 털이 없어진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 다고 주장했다. 사냥하는 원숭이가 다른 라이벌 육식동물들과 다른 점은 사냥감을 빠른 속도로 추격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그러나 사냥감을 추격하지 않 고서는 사냥할 수가 없었다. 사냥하는 원숭이는 뛰어난 지능으로 치밀한 작 전을 세우고 치명적인 무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사냥감을 추격하는 것은 이 만저만 힘든 일이 아니었다‥‥‥몸을 뒤덮은 털을 없애고 피부의 땀샘을 늘 림으로써 사냥할 때 발생하는 몸의 열기를 식힐 수 있었다. 공기 중에 드러 난 몸통과 팔다리에서 땀이 증발하면서 몸의 열이 식는 것이다. 이것은 일상 생활에서뿐만 아니라 사냥감을 추격할 때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모리스의 사냥 때문에 몸의 털이 없어졌다는 이론에는 두 가지 허점 이 있다. 첫째, 인간은 힘들여 사냥감을 추격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미 죽은 동물을 거두어 먹었을 것이고 사냥을 할 때에도 사 냥감을 맹렬하게 추격하기보다는 위장 및 매복 작전을 사용하고 창 같 은 던지는 무기를 썼을 것이다. 둘째, 다윈도 인정했듯이, 비록 인종마 다 털이 난 정도가 다르지만 대체로 여자가 남자보다 털이 적다는 것이 다. 만일 모리스의 이론이 옳다면 여자가 남자보다 털이 더 많아야 한 다. 사냥을 하지 않으므로 몸을 보호해 주는 털을 계속 가지고 있으려 고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윈은 여자가 남자보다 털이 적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두 가지 결론 을 내렸다. 첫째, 알몸으로의 진화는 인간이 아프리카에서 다른 지역으 로 이동하기 전에 이루어졌다. 둘째, 남자보다 여자가 알몸으로의 진화 를 선호했다는 것이다. [ 물에 뜨는 젖가슴 -피상한 수상 낙원 ] 모리스는 털 없는 원숭이』를 쓴 뒤에 생각을 바꾸었다. 그러나 1994 년에 출판된 『인간이라는 동물』(The Human Animal)에서는 더 이치에 맞지 않는 이론을 늘어놓았다. 인간이 진화 과정에서 물에서 살 때 털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수생 원숭이' 가설은 1970년대에 일레인 모건 (ElaineMorgan)이 해양 생물학자 앨리스터 하디(AlisterHardy) 경의 이론을 바탕으로 처음 발표했다. 요점을 말하자면 이렇다. 인간은 돌고 래나 고래처럼 매끈한 피부를 가지고 있으며 그 밑에는 체온을 유지해 주는 피하지방이 있다. 피부에는 헤엄칠 때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쏠리 는 잔털이 나 있다. 그리고 다른 영장류와는 달리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 에 부분적인 물갈퀴가 있다. 1,000만 년 전에서 500만 년 전까지의 기간에 대해서는 화석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데 모건은 그 이유가 인간이 이 기간 동안에 바다에서 살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녀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이 두 발로 서 서 걷게 된 것은 얕은 물에서 걸어다니기 위해서 였으며, 손을 정교하게 쓰게 된 것은 조개를 잡기 위해서였다(또한 해양 단백질은 우리의 뇌가 커지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또, 여자의 젖가슴이 발달한 것도 바다에서 살았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파도 속에서 자라면 서 부표처럼 뭔가 붙잡을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자의 긴 머리카락도 아이에게 붙잡을 것이 되어 주었다. 커다란 엉덩이는 물 밖으로 나와 자 갈밭에 앉아서 아이에게 젖을 먹일 때 편리했다. 처녀막은 모래가 질 속 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 주었다(모건의 이론대로라면 처녀 시절에만 이런 편리한 기능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를 낳는 것 도 물 속에서 낳는 것이 더 편했다. 모건은 바다 속에 들어가서 아이를 낳곤 하는 어느 열대 지방 섬의 원주민을 그 증거로 들었다.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모스크바에서 처음 시도되었고 프랑스의 산과 의사 미◎ 오 딘(Miche10dent)이 '자연' 분만법의 하나로 대중화시킨 현대의 '수중 분만' 도 하나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수생설은 확실한 증거가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문제점이 많다. 인간이 물에서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할 만한 유일한 증거를 든다면 악어에 의해 손상된 듯한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와 파란 트로푸스 보이세이(Paranthropus boisei)의 두개골이다. 만일 인간이 바다에서 살기에 적합했다면 왜 지금은 바다에서 살지 않는 걸까? 대답 은 간단하다. 바다에서 살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바다에서 살지 않 는 것이다. 인간의 피하지방은 해양 포유동물의 피하지방과는 다르다. 그래서 물 속에 오래 있으면 체온이 금방 떨어진다. 오딩의 수중 분만법 은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약물이나 외과 수술을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연적인' 분만법일 뿐이다. 분만 욕조도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 적인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몸이 작은 갓난아기는 체온이 금방 올라가거나 떨어지기 쉬우므로 물의 온도를 잘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생설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이 밖에도 많다. 인간보다 훨씬 더 몸집이 큰 해양 포유동물은 표면적보다 체적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모 피가 필요 없지만, 물개처럼 몸의 크기가 인간과 비슷한 해양 포유동물 은 모피가 있다. 우리의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있는 빈약한 물갈퀴는 헤엄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어린아이가 파도 속에서 털 없는 젖가슴을 붙잡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침팬지처럼 털이 많은 동물 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선형으로 난 잔털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앨리스터 하디의 요점은 수생설에서 주장하는 바와는 전혀 다 른 것이었다. 그는 유아의 경우에 한하여 그렇다고 했으며,다른 영장류 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이라고 주장했다(실은 이것도 잘 못된 주장이었다). 만일 모리스의 주장대로 헤엄치기에 적합하게 털이 났었다면 왜 얼마 뒤에는 없어졌을까? [ 나무 위의 루시 ]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고고학적 증거는 인간이 뇌가 커지기 오래 전 에 직립보행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증명하여 전통적인 진화 이론을 완전히 뒤엎어 버렸다. 직립보행을 하기 시작한 뒤에 뇌가 세 배나 커졌 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직립보행을 하기 위해서는 골반의 구조 가 바뀌어야 하는데, 직립보행에 적합하게 바뀐 구조로는 산도가 구부 러져 머리가 큰 아기를 낳기가 훨씬 더 힘들기 때문이다. 인간의 진화 과정을 재구성하는 것은 십억 개쯤 되는 조각 그림 가운 데서 몇천 개만 가지고 전체 그림을 맞추는 것과 같다. 400만 년 전에서 100만 년 전까지의 기간에 대해, 원숭이 또는 인간과 비슷한 선사 시대 생물들의 화석이 5,000개쯤 남아 있다. 계산상으로는 600년에 한 개의 화석이 남아 있는 셈이지만,실제로는 시대별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지 않다. 이 5,000개의 화석은 단지 10여 종의 것으로 보이며, 그나마 온전 하게 남아 있는 것은 단 두 개뿐이다. 치아 한 개나 작은 턱뼈 조각만 남 아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인류의 진화 과정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지난 25년 동안 많은 진전이 있었다(비록 인간의 기원을 연구하는 분야는 논쟁과 파벌로 가 득 차 있지만). 그 대표적인 것을 들자면, 우리는 이제 원숭이가 진화하 여 인간이 되었다는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인류의 진화 는 수많은 변종을 거쳐 이루어졌다. 키가 작은 종, 키가 큰 종, 영리한 종, 힘이 센 종, 육식을 하는 종, 채식을 하는 종‥‥‥‥ 어떤 종은 멸종했 고, 어떤 종은 잠시 다른 길로 가다가 되돌아왔으며, 어떤 종은 다른 길 로 빠져서 진화에 성공했다. 그래서 일정한 양상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그림 1-3의 도표는 인류의 진화 과정을 약식으로 나타낸 것이다(내가 그림 1◎ 인류의 진화계보. 1.아르디퍼테쿠스라미두스 2.오스트랄로펴테쿠스아나멘시스 3. '라에톨리 발자국' 4. '루시' (오스트랄로퍼테쿠스 아파렌시스) 5. '타응 아기'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 6. '검은 두개골' (파란트로푸스 아에토피테쿠스) 7. 스워트쳐랜스 (파란트로푸스 로부스투스) 8. 진잔트로푸스(파란트로푸스 보이세이) 9. KMM-ER 1805 (호모 하빌리스) 10. 초기 호모 루돌펜시스 11. KMM-ER 1470(후기 호모 루돌펜시스) 12. '나리오코토메 소년' (호모 에르가스테르) 13. 모조케르토(호모 에렉투스) 14. 보도(초기 고대 호모사피엔스) IS.아시아후기 호모에렉투스 16. '페트랄로나두개골' 17.라페라시 (네안데르탈) 18.해부학적으로 최초의 현대인(호모사피엔스) 19.크로마뇽인 20.정복 이전 아메리카 인디언 21.태즈메이니아인 22.현대인 -유전공학, 에이즈 인터넷 - 문자, 도시, 농경, 마을 동굴 벽화. 비너스상 산파 악岺, 의복, 언어, 불 --애르잤스테르 도구 제작. 집 가슴, 거대한 음경 일부 직립보행 원시적 도구 제기하는 문제들 가운데에는 주제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 겠지만 실은 젖가슴, 엉덩이, 알몸, 큰 음경 따위의 변화와 밀접한 연관 이 있다). 인간은 스스로를 영장류라고 명명했다 영장류는 포유동물로서 3,700만 년 전에 처음 지구상에 나타났다. 최초의 영장류는 몸집이 작 고 털로 뒤덮였으며 정면을 바라보는 커다란 눈이 달린, 나무 위에서 사 는 여우원숭이였다. 800만 년 전, 아프리카 동부에서 지질학적 대변동 이 일어나 서쪽이 산맥으로 가로막힌 커다란 지구(耭溝)가 생겨났다. 이 산맥은 침팬지와 고릴라의 조상들을 아프리카 중부 및 서부의 열대 다 우림 속에 고립시켰다. 동부는 점점 더 건조해졌고 450만 년 전,대지 구 근처에서 살던 우리의 조상은 처음으로 두 발로 서서 걷기 시작했다. 숲이 점점 더 줄어들었기 때문에 그들이 나무에서 내려온 것은 선택 이었다기보다는 필요에 의해서였을 것이다. 1978년, 선사학자 메리 리 키(Mary Leakey)는 탄자니아 북부의 라에톨리(Laetoli)에서 극적인 발 견을 했다. 선사 시대의 호숫가에서 두 발로 서서 걸어다니던 생물이 남 긴 발자국 화석 세 쌍을 발견한 것이다. 그 발자국들은 찍힌 직후에 화 산재에 파묻혔다. 아마 그 생물들은 화산 폭발을 피해 도망가고 있었을 것이다(발자국으로 보아 달리지는 않았다). 화산재의 연대는 350만 년 전이다. 발자국의 크기와 발자국 사이의 간격으로 보아 발자국을 남긴 생물들의 키는 150센티미터쯤 되었다. 근처에서 발견된 화석 뼈들은 아 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지만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Australopithecus端Irensis)'라는 종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초기 오스 트랄로피테쿠스는 에티오피아의 아파르(Afw)지역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여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라고 명명되었다. 에티오피아의 아파르 지역은 1974년에 돈 조한슨(Don Johanson)이 일명 '루시 (Lucy)'(그림 1-3의 4번)라는 화석을 발견한 곳이다. 화석 가운데에서 가장 유명한 이 화석 유골은 40퍼센트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 어 있었다. 조한슨은 300만 년 전에는 호반이었던 하다르(HardEr) 지방에서 발 견된 50여 개의 화석 유골과 더불어 루시가후기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와 초기 인류의 조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지 답사를 하고 아주 작 은 일부밖에 남아 있지 않은 뼈를 분석하고 또 분석할 때마다 인류의 기원은 더욱더 복잡해진다(이 책을 쓰는 동안에만도 두 종이 더 나타났 다). 분명한 것은, '잃어버린 고리' 가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것이 다. 인류의 진화의 양상에는 주기적인 파동이 있다. 인간과 비슷한 초기 의 생물들이 진화할 때마다 새로운 변종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 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오래 된 화석은 연대를 측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어떤 생물들이 동시대의 것들이며 어떤 생물들이 같은종의 여러 진화단계 를 나타내는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인류가 급속도로 진화한 것 에 비하면 이런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180 만 년 전에는 아프리카 동부에 6종의 인류가 살았지만, 100만 년 전에 는 한두 종으로 줄어들었다. 이런 주기적인 파동의 양상은 여러 종의 인류사이에 치열한경쟁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이 종들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그림 1-3 참조). '파란트로푸스군(群)(Paranthropines)'으로도 불리는 건장한 후기 오스 트랄로피테쿠스:.瑞오른쪽), 그보다 호리호리한 오스트랄로퍼테쿠스군 과 하빌리스군木◎운데), 그리고 초기 인류인 호모계(왼쪽). 가운데와 오 른쪽의 종들은 뇌가 비교적 작았고, 두 발로 서서 걸었지만 나무에서 완 전히 내려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조상이 속해 있는 왼쪽의 종들 은 나무에서 내려와 대초원에서 살았다. 그리고 250만 년 전과 180만 년 전 사이에 뇌의 크기가 현대인의 2분의 1 내지 3분의 2쯤 될 만큼 커 졌다. 100만 년 전에는 지역에 따라 큰 차이가 있긴 했지만 뇌가 큰 종 인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만 살아남았다. 조한슨은 루시(그림 1-3의 4번)가 인류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논쟁의 여지가 있는 가정을 몇 가지 해야 했다. 첫째,그는 화석 유골 을 '루시' (비틀스의 노래에 나오는 이름이다)라고 명명할 때 그것이 여자의 것이라고 가정했다. 골반의 구조와 105센티미터의 작은 키를 근거로 성을 구별한 것이다. 조한슨은 더 나아가, 라에톨리에 발자 국을 남긴 150센티미터의 원시인은 남자이며, 이 사실에서 나타나듯이 남자와 여자의 키는 차이가 컸다고 가정했다. 만일 조한슨의 가정이 옳 다면, 꼬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의 성적 차이는 현대인처럼 근소 하지 않고 고릴라의 경우처럼 두드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라에톨리에서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의 뼈 가 그 근처에 발자국을 남긴 종의 것이라고 단정할 만한 증거는 없다. 시카고 대학교의 러셀 터틀(Rusell Turttle)은 루시가 그 발자국을 남겼 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는 루시가 다른 오스트랄로피테쿠스군 생 물들처럼 대초원보다는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나무 위에서 더 많은 시간 을 보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리버풀에 있는 무어스 대학교의 피터 휠 러(Peter Wheeler)는 이 논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루시 같은 오스트 랄로피테쿠스군 생물이 두 발로 서서 걸어다니지 못했다면 뭔가 다른 종이 '라에톨리의 발자국'을 남겼을 것이다. " 취리히 대학교의 호이슬 러(HEusler)와 슈미트(Schmid)는 얼마 전에 루시의 골반을 다시 분석해 보고, 루시는 자기 종의 평균 크기의 뇌를 가진 아기를 낳지 못했을 것 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런 골반을 가진 개체는 그 종에서 루 시가 마지막이었을 것이므로◎ 이름을 루시퍼'(성경에서 말하는 사탄 또는 마왕의 이름-역주)로 바꾸는 것이 낫겠다고 말했다. [ 아름다움의 추구 ] 체온 조절은 인류의 진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해 왔다. 대초원에 서 두 발로 서서 걸어다닌 것도 체온을 조절하기 위해서 였으며, 뇌가 점 점 더 커진 것도 체온을 조절하기 위해서 였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보 았듯이, 체온 조절과 연관시켜 생각할 때 수생설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몸에서 털이 없어진 것이 전적으로 체온 조절 때문이었다 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물론 열대 지방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는 발가벗고 있는 것이 좋겠지만,밤에는 추워서 벌벌 떨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몸 의 털이 없어짐에 따라 옷이 등장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림 1-1에는 인 류가 발가벗고 살았던 것처럼 묘사되어 있지만,실제로는 거의 불가능 한 일이다. 다윈도 "인간에게 알몸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자 연 선택에 의해 몸의 털이 없어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고 말했다. 그 럼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다윈의 진화론과 비슷한 이론을 내세웠던 앨프레드 러셀 월리스(Al「red Rus駱1 Wallace)는 인간 의 알몸은 진화가 아니라 신의 섭리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윈은 1871 년에 출판된 『인간의 계보와 성적 선택』(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에서 '성적 선택'이라는 또 다른 이론을 내 세웠다. 다윈의 이론에 따르면, 성적 선택은 '그 종의 번식과 연관된, 같은 성 의 다른 개체들에 대한 어떤 개체들의 성공'에 달려 있다. 이와는 대조 적으로 자연 선택은 '제반 생활 여건과 연관된,남녀노소에 상관없이 어떤 개체들의 성공'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자연 선택 과 성적 선택이 상충될 수도 있다. 성적 선택에 따라 진화하다 보면 환 경에의 적응력이 오히려 더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윈은 아일랜 드 (포유류 사슴과 가운데 가장 큰 종, 말코손바닥사슴 -역주)가 멸종한 것은 수컷의 거대한 뿔 때문이라고 했다. 암컷의 발정기에 수컷 이 서로 뿔을 과시하며 싸우다 보니 뿔이 점점 더 커졌고, 결국에는 너 무 커진 뿔 때문에 환경을 견디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윈은 알몸으로의 진화가 비교적 일찍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그 의 주장에 따르면 여자들의 털이 먼저 없어졌으며, 그 이유는 털이 거추 장스러워서가 아니라 없는 것이 남자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보였기 때 문이었다. 여자의 털이 없어지자 그 영향으로 남자도 털이 없어졌지만, 남자는 여자에 비해서 조금 없어졌다. 그리고 인간은 아프리카에서 다 른지역으로 퍼져 나간뒤,성적 선택에 따라여러 가지 모양의 수염을 기르게 되었다. 인간이 알몸이 된 것이 바로 성적 선택 때문이라는 그의 이론은 사냥꾼설(이 이론에 따르면 남자보다 여자가 털이 더 많아야 한 다)이나 수생설(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체온 저하와 악어 때문에 멸 종했을 것이다)보다는 논리적이지만,현대 학자들의 지지를 많이 받지 는 못하고 있다. 다윈의 이론이 현대 학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유를 들자면 '특 정 배우자 인식 체계(Specific Mate Recognition System)'라는 이론을 들 수 있다. 다윈의 성적 선택 개념을 연장시킨 이 현대 이론에 따르면, 모든 종은 암수의 외관상의 차이와는 별도로 저마다 자신에게 알맞은 배우자를 찾기 위해 외모에서 서로 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 새의 경우 다른 개체와 달라 보일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은 깃털의 색깔 과 모양을 바꾸는 것이다. 아프리카 동부의 초기 인류 사회처럼 경쟁과 종분화(種分化)가 심했던 곳에서는 자신이 속한 종을 구별하는 능력이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원시인은 깃털은 없었지만 털과 두드러진 음부 가 있었다. 그러므로 다른 종과 이런 신체적 특징을 다르게 함으로써 자 기 종마다의 독특한 특성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처럼 알몸이 된 것으로 보아, 호모계가 가장 털이 적었다 그림 1윅 털 없는 젖가슴은 우리의 진화 초기에 성적으로 선택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의 기준은 달라질 수 있다. 미래의 어느 문화는 털북숭이 젖가슴을 매력적으로 여기고 젖가슴에 털이 많이 난 여자를 선호할지도 모른다. 사진은 머리를 자른 직후의 어느 여자를 찍은 것 이다(1982년 과리) . 고 추정할수 있다. 그런데 특정 배우자인식 체계론은 가장 먼저 알몸 으로 진화한 것이 왜 오스트랄로피테쿠스계가 아니라 호모계였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저 우연이었을까?만일 오스트랄로피테쿠스계가 알몸으로 진화하고 호모계는 고릴라처럼 털북숭이였더라도 오스트랄 로피테쿠스계는 멸종하고 우리가 살아남았을까? 나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다윈의 이론을 되살리되 부 분적으로 수정해야 한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직립보행은 발 정기가 되면 빨갛게 되는 암컷의 음부를 가려 주었다. 엉덩이 근육을 발 달시켰을 뿐만 아니라 영장류 사회에서 성적 신호가 되는 암컷의 음부 를 가려 준 것이다. 그러자 음부가 드러나지 않게 된 대신에 엉덩이의 털이 없어지고, 털이 없는 엉덩이와 비슷하게 생긴 젖가슴이 몸 앞에 생 겨났다. 다시 말해서, 알몸으로의 진화는 성적 신호가 되는 음부가 가려 진 것에 대한 보상인 셈이다. 그러므로 알몸으로의 진화는 털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음부의 확 장'이었다. 이 과정은 문화적 환경 안에서의 성적 선택을 통해 완성되었 다. 옷과 미용술이 발달하여 털이 없어진 부분을 가리게 되었고 그에 따라털이 없는 부분이 점점 더 확장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가털 없는 원숭이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이 점에 대해서는 4장에서 자세히 서술할 것이다). 데스먼드 모리스는 털 없는 원숭이』에서 젖가슴은 엉덩이를 모방한 성적 신호라고 말했다. 개코원숭이를 비롯한 몇 가지 영장류의 암컷은 젖꼭지 둘레에 엉덩이의 음부처럼 빨갛고 동그란 피부가 있는데,앉아 있을 때에도 수컷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맨드릴 같은 영장 류의 수컷도 그렇게 동그랗게 드러난 피부가 있지만, 음부를 모방한 것 은 얼굴이남자의 수염이 그렇듯이).이렇게 암컷이나 수컷이 몸의 전 면에 성적 신호를 가지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암컷의 젖꼭지는 성공 적인 생식을 위한 기능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고, 영장류의 수컷은 얼굴 의 생김새와 표정으로 배우자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두 발로 서서 걸어다니기 시작한 영장류는 엉덩이의 털은 없어졌지 만 다른 부분은 여전히 털로 뒤덮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젖가슴이 엉 덩이를 모방한 것이라는 모리스의 이론이 옳다면 젖가슴도 털이 없었 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다른 부분도 점차 털이 없어지기 시작했을 테고, 탐스러운 엉덩이와 젖가슴이 성적으로 중요한 부분이 되었을 것 이다. 그러나모리스의 이론은 엉덩이의 털이 없어진 것에 대해 적절한 해명을 하지 못한다. 여자의 엉덩이는 일부 영장류의 암컷처럼 발정기 가 되었다고 해서 빨개지지 않는다. 따라서 털이 없는 엉덩이가 성적 신 호가 아니라면 젖가슴도 엉덩이를 모방한 성적 신호라고 보기 어렵게 된다. 직립보행을 하면 엉덩이의 근육이 변형되어 반원형의 엉덩이가 형성 된다. 그리고 이 엉덩이에 에너지를 지방으로 축적할 수 있게 되며 엉덩 이에 지방이 축적되어도 움직이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 엉덩이의 근육 이 발달하거나 지방이 축적된다고 해서 엉덩이의 털이 없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엉덩이의 발달을 성적 선택으로 보면 엉덩이의 털 이 없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여자가 두 발로 서서 걷게 되자 발정기가 되면 빨갛게 되었던 외음부가 가려졌다 빨갛게 부풀어오른 외음부를 일부러 드러낼 수도 있었겠지만 다리 사이에 있기 때문에 불편했을 것 이다. 그래서 엉덩이의 털이 없어지고 외음부에 음모가 생겨났다. 엉덩 이 자체는 빨갛게 부풀어 오르는 부분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근육의 움직임과 지방 축적 기능이 방해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피하지 방에도 나름대로의 성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몸에 축적된 지방의 양에 따라 임신 능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지방 섭취량이 적으면 배란 이 불규칙하게 되거나 아예 안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배란이 규칙적이라 고 해도 몸에 축적된 지방의 양이 너무 적으면 수정란이 착상하지 못할 수도 있다 젖가슴은 이제 성적 상징으로 여겨지는 엉덩이를 모방하여 크게 부 풀어오르고 털이 없어졌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와 오스트 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꾸Australopithecus africanu피 같은 초기 오 스츠랄로피테쿠스군은 그 골반 구조로 보아 엉덩이가 반원형이 아니었 던 것 같다. 그러므로 루시는 루시퍼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젖 가슴은 없었을 것이다. 라에톨리에 발자국을 남긴 생물에게 젖가슴이 있었는지는 판단하기가 더욱더 어렵다. 우리는 아직 그 생물이 무엇이 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 엉덩이에서 뇌로 ] 새로운화석 증거가 아무리 많이 발견된다고 해도 메리 리키가발견 한 라에톨리의 발자국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피터 휠러는 그 발자국이 체온의 상승이라는 생리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나무가 줄어들면 드러난 몸은 더 많은 햇빛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햇빛 을 많이 받아 몸이 과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은 햇빛에 노 출되는 부분을 줄이는 것이다. 실제로 열대 지방에 사는 한 영장류는 두 발로 서서 햇빛에 노출되는 부분을 줄인다. 그러나 대초원에 사는 동물 들은 거의 다 두 발로 서지 않고도 잘 견딘다. 휠러는 뉴욕 주립대학교 의 인류학자딘 포크(DeanFalk)의 연구와 연관시켜 뇌의 크기를 중요 하게 생각한다. 포크의 '냉각장치 이론'에 따르면, 큰 뇌를 서늘하게 유 지하는 데에는 특별한 문제들이 따른다. 그리고 이 문제들에 대한 해결 책은, 두개골에 나 있는 작은 구멍들을 통해 이어진 혈관을 타고 피가 뇌를 드나들게 하는 것이다. 포크는 인류의 뇌가 커질수록 두개골의 구멍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직립보행은 그런 냉각장치와 더불어 뇌가 발달하는 데 확실한 영향을 줄 수 있다. 머리가 지면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공중에 있을수록 훨씬 더 시원한 공기를 쇨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손을 자유 로이 쓸 수 있으므로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할 수 있고, 이것은 곧바로 뇌조직에 변화를 일으켜 뇌가 더 커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도 있다. 직립보행을 하면 골 반의 구조가 달라지고, 달라진 구조는 출산을 어렵게 만들며 태아의 머 리의 크기를 제한하게 된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직립보행을 곧바로 뇌 의 발달과 연관시킬 수 없게 된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00만 년 전에서 200만 년 전 사이에 아프리카 동부의 기후가서늘 해지고 건조해졌다. 그에 따라 인류도 더 다양한 종으로 나뉘었다. 오스 트랄로피테쿠스군과 파란트로푸스군은 주로 식물성 음식을 먹었고, 하 빌리스군은 주로 고기와 생선 같은 고단백 음식을 먹은 것으로 보인다. 호모 루돌펜시스(Ho3mo rudolfesrsis)는 여러 가지 곡물, 견과, 열매, 야채 따위를 먹고 살았다. 그리고 이 원시인들은 다른 영장류와 마찬가지로 자연발생적인 물체를 도구로 사용했던 것 같다. 그러나 270만 년 전쯤 부터는 돌을 깎아 만든 도구를 사용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스워트 크랜스(Swartkrans)에서 발견된 약 170만 년 전의 건장한 파란트로푸 t꾸그림 1-3의 7번)의 瑞는 돌로 만든 도구와 함께 발견되었다. 그의 손 을 보면 그런 도구를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아 보이지만, 같은 장소에서 하빌리스의 뼈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서는 정말로 그가 그런 도구를 만 들었는지 의문이다('하빌리스'라는 이름은 이들의 도구를 만드는 기술 때문에 붙은 것이다-역주). 우리는 흔히 정교하게 만든 석기를 '도구'라고 말하지만, 이 석기들은 도구가 아니라 무기로 쓰였을 가능성이 더 많다. 현대인과 비교할 때 초 기 인류는 거의 다 남녀간의 키 차이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초 기 인류 사회는 일부다처 제 사회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남자들이 여자 의 선택을 받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기 때문에, 강한 남자는 여러 여자 와 성관계를 갖고 몸집이 작고 약한 남자는 도태한 것이다. 그러나 고릴 라나 침 팬지와는 달리 송곳니의 크기는 남녀간에 별 차이가 없었다. 고 릴라와 침팬지는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벌일 때 커다란 송곳니 를 드러내며 경쟁자를 위협한다. 원시인에게 커다란 송곳니가 없었다는 사실은 켄트 주립대학교의 오 언 러브조이(Owen Lovejoy) 교수가 주장한 일부일처제론을 뒷받침해 주기도 했다. 러브조이는 인류의 성생활은 일부일처제를 바탕으로 이루 어졌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초기 조상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여자 와 그 자식이 사냥꾼 배우자의 독점적인 부양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 이다. 그러나 이 일부일처제론은 여러 가지 의문을 남긴다. 오늘날처럼 일부일처제가 널리 채택된 것은 지난 500년 동안의 기독교적 가치관의 영향 때문이다. 비록 몇몇 대인구권은 일부일처제를 채택했지만, 단일 사회들은 지금도 거의 다 일부다처 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므로 원시 인류 사회에서 일부일처제가 생겨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부일처제론의 약점은 또 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남자들이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할 때 이빨보다는 무기를 썼을 가능성이 더 많다는 점이다. 커다란 송곳니가 훌륭한 무기도 못 될뿐더러 여자에게 매력적 으로 보이지도 못했다면 송곳니가 발달하지 않았을 것이고, 송곳니를 크게 키우는 데 드는 영양학적인 비용을 생각하면 오히려 작아졌을 것 이기 때문이다. 초기 인류 사회에서 같은 종이든 다른 종이든 간에 서로 싸을 때에는 무기를 썼을 것이다. 당시의 무기라는 것은 고고학자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인공물이기보다는 돌멩이같이 자연에 널려 있던 물체였을 것이다. 크리스토퍼 크뉘젤(Christopher Kniisel)처럼 '투척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류가 돌멩이 같은 것을 던지기에 편하기 때 문에 두 발로 서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크뉘젤의 가설이 옳다면, 오스트 랄로피테쿠스 아나멘시스가 두 발로 서서 걸어다닌 것은 바로 주변에 서 발견한 물체를 무기로 썼음을 입증한다. [ 최초의 말 ] 180만 년 전, 당시의 호모계(후기 루돌펜시스와 하빌리스군)가 모두 사라지고 새로운 종이 나타났다. 이 새로운 호모계는 아프리카에서 유 럽, 코카서스 지방, 중국, 자바 등지로 진출했다. 버나드 우드(Bernad Wood)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생김새가 비슷한 이 새 로운 호모계 종들을 아프리카계인 호딘 에르가스테르(HolfBo erfaster) 와 비아프리카계인 호모 에렉투스로 나누었다. 호모 에렉투스의 표본 중 가장 오래 된 것은 자바(Java)에서 발견된 모조케르토(Mosokerto) 두개::詠그림 1-3의 13번, 181만 년 전)이고, 가장 잘 보존된 호모 에르 가스테르는 카모야 키메우(Kamoya Kimeu)가 케냐의 나리오코토메 (Nariokotome)에서 발견한,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는 소년의 유골그림 1-3의 12번)이다. 리처드 리키(Richard Leakey)와 알란 워커(Alan Walke틋가 측정한 나리오코토메 유골의 연대는 160만 년 전이다. 나리오코토메 유골의 두개골 안쪽의 석고본을 떠본 결과, 우뇌와 좌 뇌의 기능 분화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우뇌는 도구를 만드는 능 력과 관계가 있고 좌뇌는 도구를 던지는 능력과 관계가 있다. 글린 이삭 (Glynn Isaac)이 올두바이 협곡(oiduvai Gorge)에서 발견한, 돌을 깎아 만든 투척용 무기는 이들 원시인이 작은 사냥감을 사냥했을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또한 골수가 들어 있는 端를 분석한 결과, 고기를 먹었음 을 알 수 있었다(죽은 동물의 고기를 거두어 먹었을 수도 있겠지만). 나 리오코토메 소년의 어금니는 아직 자라고 있는 중이었다. 따라서 죽었 을 때의 나이가 열 살쯤이었던 것 같은데(치아의 농양으로 보아 패혈증 으로 죽었던 것 같다) 당시 키가 이미 158센티미터나 되었다. 만일 죽지 않고 어른이 되었으면 183센티미터쯤 되었을 것이다. 호모 에르가스테 르는 ?뇌는 현대인의 3분의 2정도였지만 몸집은 현대인보다 더 크고 건장했다. 몇 가지 의문점이 있기는 하지만,언어 능력을 담당하는 뇌 조직인 브로카 중추(Broca's area)가 있는 것으로 보아 나리오코토메 소년은 말 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흉곽의 근육 조직으로 보아 호 흡 기능이 현대인만큼 원활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스티븐 핀커(Steven Pinker)는 『언어 본능』(The Language Instinct)에서, 인류가 최초로 한 말은 "등에 털이 많이도 났구만!"이었을 것이라는 릴리 톰린(Lily Tomlin)의 추측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최초의 말은 그런 말이 아니 었을 것이다. 원시 시대에 관한 영화에 흔히 나오듯이, 오르가슴에 이른 것처럼 그저 꽥꽥거리며 소리를 지르는 정도였을 것이다. 언어는 행동을 대신해 줄 무엇인가에 대한 필요성을 느낄 때에만 개 발된다. 곰베침팬지는 뱀이 나타난 것처럼 꽥꽥거려 다른 침팬지들을 속이고 먹을 것을 훔치는 지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인간과 가장 비슷 한 피그미침팬지는 인간처럼 섹스에 대한 관심이 많다. 따라서 이 둘이 언어 발달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었을지도 모른다. 섹스는 개체간의 유대뿐만 아니라 기만을 가능하게 하는 육체적 및 사회적 접촉이다. 섹스는 닉 험프리(Nick Humphrey)가 말한 자기 관찰, 즉 같은 상황에서 자신이 느낄 감정을 유추함으로써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을 갖게 해 주었다. 또한 섹스는 자신의 마음에 대한 거짓 정보를 흘림으로써 상대방에게 영향을 주거나 상대방을 이용하기에 좋 은 상황을 제공해 준다. 다시 말해서, 섹스는 의식적인 선택으로 이루어 지므로 언어 발달의 바탕이 될 수 있다. 오르가슴을 가장하는 능력은 언 어 능력처럼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다. 180만 년 전의 문화적 다양성은 진정한 사회가 존재했음을 뒷받침해 준다. 글린 이삭의 주장에 따르면, 가정을 이루고 조직적인 사냥을 하고 식량을 분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언어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남자 는 수렵을 맡고 여자는 채취를 맡는 식의 최초의 성별 분업도 이때쯤 시 작되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남자와 여자의 뇌의 차이가 아주 미미해서 정교한 실험 을 해야만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몇 가지 사소한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능력의 우열을 나타내는 것들은 아니다. 이런 차이점들이 선천 적인 것인지 후천적인 것인지 또는 선천적인 요소와 후천적인 요소가 결합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여자는 손과 눈의 조화로 하는 일과 언어 능력에서 약간 우월하고 남자는 오리엔티어링 같은 공간 지각 능 력에서 약간 우월한 것 같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석기 문화는 남자 보다 여자가 창시했을 가능성이 더 많다. 그러나 그 차이가 너무 미미해 서 뭐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선사 시대에 남자와 여자가 한 일이 같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여자는 아이가 아주 어릴 때는 아이를 돌보는 일을 주로 맡았을 것이다. 아이를 돌보는 일은 인간이 두 발로 걷기 시 작함에 따라 그 전보다 훨씬 더 중요해졌고, 몸의 털이 없어지면서 더욱 더 중요해졌다. 침팬지 새끼는 어미의 털을붙잡고 매달려 있기 때문에 어미가 사지를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지만, 인간처럼 두 발로 서서 걸으 면 이것이 어려워진다. 이제 발은 걷는 데에만 쓰고 뭘 붙잡는 데에는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가슴에 매달리는 것은 더욱더 어렵다. 게다 가 몸의 털이 없으면 거의 불가능하다. 일레인 모건의 수생설은 문제점이 많지만,모건은 아이의 운반이라 는 이 실제적인 문제에 대해 많이 연구했다. 오언 러브조이는 원시 사회 가 일부일처제를 채택한 주요인은 여자가 아이와 짐을 동시에 운반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여자는 성공적인 생식을 위해 가만히 앉아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인류의 진화에 관한 돈 조한슨 의 저서 『루시의 아이』(Lucyi Chi14의 표지에는 데이비드 버겐(David Bergen)이 그린,어른의 어깨에 걸터앉아 있는 아이의 그림이 있다. 그 아이가 머리카락을 붙잡고 매달리지 않는 한 한쪽 손을 못 쓰게 된다. [ 아기띠 -영원한 문화의 요람 ] 이에 대해 논리적인 결론을 내리자면,여자들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최초의 인공물인 '아기띠'를 발명했을 것이다. 유모차가 개발되기 전까 지는 세계 어디에서나 아기띠를 썼다. 가장 간단한 것은 짐승 가죽으로 만든 끈을 엮어 주머니 모양을 만들어 한쪽 어깨에 매는 것이다. 짐승의 힘줄은 아기띠를 비롯하여 뭘 묶는 데 유용하게 쓰였다. 올두바이 협곡 의 유적에서 발굴된 200만 년 전 내지 160만 년 전의 유물을 보면, 당시 의 인류가 대초원에서 사는 커다란 짐승들의 시체에서 힘줄을 꺼내 썼 음을 알 수 있다. 그림 1-6 오바힘ㅂWovahimba) 아기띠. 나미비아의 한 여자가 전통적인 방법과 새로운 방법을 병행하여 아이들을 운반하고 있다. 원시인은 돌을 다듬어서 도구를 만드는 능력이 있었으므로 아기띠도 생각해 냈을 것이다. 만일 '투척설'이 옳다면,인간은 다른 동물들보다 던지는 능력이 뛰어나므로 사냥과 싸움에서도 유리했을 것이다. 돌멩이 같은 것을 던질 때도 손으로 그냥 던지기도 하고, 끈으로 만든 올가미에 돌멩이를 얹어 빙빙 돌리다가 던져서 돌멩이가 날아가는 속도를 높이 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천연 용기에 물이나 작은 물체를 담아 운반하는 등(이것은 다른 영장류에게서도 볼 수 있는 행동이다) 다른 활동에서도 뭔가를 운반하는 법을 터득했을 것이다. 부드러운 유기 물 질은 썩어 없어지기 때문에 아기띠가 언제 발명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적 발달을 바탕으로 한 간접적인 증거는 있다. 나는 아기띠의 발명이 더 큰 뇌로의 진화에서 가장 주요한 진보였다 그림 1-7 오언 러브조이가 재현한 '루시'의 골반(가운데)을 현대 여nt왼쪽)와 침팬지 (오른쪽)와 비교한 것이다. 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이 직립보행은 골반의 구조를 변화시켰고, 이 것은 머리의 크기를 오히려 제한했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다. 영장류의 골반은 직립보행 또는 1恣半)직립보행 인류의 골반과 크게 다르다. 루시 의 골반을 침팬지의 골반이나 인간의 골반과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 다. 그림 1-7 참조). 위에서 본 모양을 비교해 보면 차이점이 더 두드러 진다(그림 1-8 참조). 침팬지와 오스트랄로피테쿠스계와 인간의 골반의 단면을 차례로 살 펴보면, 오른쪽으로 갈수록 출산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짐을 알 수 있다. 침팬지의 경우에는 골반의 입구와 중간부와 출구의 단면이 거의 똑같 기 때문에,새끼의 머리가 산도를 빠져나올 때 옆으로 돌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에는 입구와 중간부와 출구의 단면이 두드러지게 다르기 때문에, 아기의 머리가 산도를 빠져나올 때 옆으로 돌아야 한다. 아기를 출산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진 것이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계의 경우는 재구성하기가 어렵지만, 현대인의 경우처럼 아기의 머리가 산도 를 빠져나올 때 옆으로 돌았을 것이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계의 경우, 침 팬지보다 산도가 훨씬 좁아서 아기 머리의 크기가 두드러지게 제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럼 인류는 어떻 게 이런 문제를 극복하고 뇌가 커졌을까? 해답은 간단하다. 아기의 머 리가 아직 작을 때 출산하여 자궁 밖에서 머리와 뇌가 계속해서 발달하 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은 신생아 때의 성장 속도가 가장 빠르다. 인간의 경우에는 신생아의 뇌의 무게가 성인의 29퍼센트밖에 안 되지 만, 다른 영장류의 새끼는 42퍼센트쯤 된다. 인간의 신생아는 생후 18 개월 동안 뇌가 계속 발달한다. 이때에는 두개골의 봉합선이 굳는 속도 가 아주 느리기 때문에 두개골이 뇌의 발달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문제 는,침팬진 세끼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훨씬 더 미숙하기 때문 에 머리를 잘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태어날 때 뇌가 덜 발달해 있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의 발달이 함께 지연된다. 그래서 인간의 신생아는 정신적으로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미숙한 것이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계는 뇌가 침 팬지보다 크게 발달하지 않았다. 어 렵게 태어난 신생아는 아직 몸에 털이 많이 남아 있는 엄마에게 매달려 있었을것이다. 식물을씹는강럭한턱뼈의 운동이 아직 봉합선이 굳지 않은 신생아의 두개골을 벌려 놓는 작용을 했을 것이다. 그 이후 호모계 가 나타나면서 뇌가 급속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아기띠가 개발됨에 따라 아이를 돌보기가 훨씬 더 쉬워졌다. 그리고 미숙한 신생아는 엄마의 보살핌을 받으며 뇌를 발달시킬 수 있었다. 여 자들이 어쩔 수 없이 남자의 부양에 의지하면서 아이를 키우다가 혁신 적인 해결책을 찾아 낸 것이다. 아기띠는 육체적으로 무능한 아이를 잘 돌볼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아이의 뇌가 세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게 했을 것이다. 월리엄 시어즈(William Sears)의 말을 빌리자면, "아기 업기는 아기를 인간으로 만든다. " 엄마가 걸을 때 흔들리는 것은 자궁 속에서 흔들리던 것과 똑같다. 이러한 흔들림은 귓속에 있는 평형 기관을 자극하여 아기의 신체 기능의 틀을 잡아 주고 아기를 안정시켜 더 잘자라게 해 준다. 전문가들의 연구에 따르면,엄마의 등에 업히거 나 유모차를 타고 엄마와 함께 다니는 아기는 누워만 있는 아기보다 시 각과 청각이 더 예민해진다고 한다. 20만 년 전에서 10만 년 전 사이, 후기 고대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 인(Neanderthal)의 중간 단계에서 오늘날처럼 아기의 머리가 엄마의 산 도를 빠져나올 때 회전해야 할 만큼 뇌가 커졌다. 카렌 로젠버그(Karen Rosenberg)는 이때에는 아기가 산도를 빠져나올 때 아기의 위치를 조 정해 주는 산파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 두뇌 게임 ] 더 큰 뇌가 인간에게 어떤 이득을 주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 단점은 분명하다. 레슬리 아이엘로(Leslie Aiello)가 주장했듯이, 더 큰 뇌는 훨씬 더 많은 영양분 공급을 필요로 했으며 출산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따라서 큰 뇌가 이득이 되는 데에는 뇌의 발달의 시기가 중요 했다. 비약적인 진화는 여러 종의 인류가 등장하여 치열한 경쟁을 벌였 던 250만 년 전부터 160만 년 전 사이에 이루어졌다. 짧은 기간에 뇌가 비약적으로 발달한 것이다. 그에 따라 체계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계획 을 세우며 노동을 분담하는 능력을 한꺼번에 갖게 되었다. 이런 능력을 갖게 된 우리 조상은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종들보다 유리한 고지에 올라섰다. 그러나 다른 종들이 거의 멸종한 다음에도 뇌는 계속해서 커 졌다.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종들이 없어지고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뒤 에도 뇌가 계속해서 커진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개체간의 경쟁 때문일 수도 있고 큰 머리를 선호하는 성적 선택 때문일 수도 있다. 다윈은 인 간의 뇌를 수공작의 깃털에 비교하면서 성적 선택 때문이라고 했다. 그 리고 최근에는 일종의 '도피성' 성적 선택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는 이 론도 등장했다. 그러나 다윈의 생각처럼 성적 선택이 어느 한성(남성) 에게만 작용하고 다른 성(여성)에게는 약하게 작용했다고 생각해야 할 이유는없다. 남자나여자나큰머리를더 '섹시하게' 생각했을수도있 다. 언어의 발달은 노래의 발달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데 현대인의 구애에서 보면 이 두 가지가 다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인간의 정신적 능력이 발달했는지는 모르지만,정신적 능력의 발달은 남녀 양성 모두에게서 이루어졌다. 다른동물들과는 달리,인간은성에 따른 뇌의 차이가 거의 없다. 다른 동물들은 수컷과 암컷의 뇌의 차이가 커서 행동과 인식의 양상이 뚜렷하게 구별된다. 이런 차이는 행동을 결 정하는 유전학적 요소, 즉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새와 곤충에게서 특히 두드러진다. 포유동물은 새와 곤충에 비해 인식력의 발달에서 학습이 더 주요하게 작용한다. 특히 인간은 거의 모든 것을 경험을 통해 배운 다. 그래서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는 적응력이 다른 어느 동물보다 뛰어 나다. 아이를 돌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왜냐 하면 필요에 따라 남자와 여자가 역할을 바꿀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성에 따른 본능적인 행동의 구분을 버리고 경험으로 터득한 후천적인 노동의 분담을 택했다. 아기띠의 발명은 뇌의 발달에서뿐만 아니라 성 문화에서도 전환점이 되었다. 성의 구별이 사물과 개념의 영역에까지 연장되어 사회적 성 (gender)의 개념이 싹트게 된 것이다. 영장류에 있어서 도구의 사용은 성별에 구애되지 않는다. 엄마가 아들이나 딸에게 똑같이, 아끼던 돌망 치를 물려줄 수 있다. 그러나 아기띠는 전혀 다른 물건이다. 아이를 돌 볼 때 필요한, 엄마와 아이의 지속적인 접촉을 상징하는 아기띠는 남자 가 사용할 때에도 똑같이 여성성을 내포한다. 사회적 성에 따른 의복의 발달도 아기띠처럼 기능적이면서도 성과 관련된 물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아기띠는 뇌의 발달을 촉진시켰고, 그에 따라 우리는 완전한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언어를 사용함에 따라 상상을 즐기게 되었을 것이다. 남녀가 서로의 생각과 상상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 것이다. 서로의 감정 교환과 이해를 통해 섹스의 즐거움이 배가되는 인간만의 독특한 사랑은, 시와 달콤한 말의 바탕이 되는 이 상상력이라 는 새로운 능력에서 비롯되었다. 섹스는 순전히 본능적 이고 육체적이었 던 데서 벗어나 서로를 이해하는 정신적 행위로 발전했다. 상상할 수 있 는 능력은 또 남녀가 섹스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식량 따위의 다른 것 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게 했다. 우리는 이렇게 복합적인 능력을 물려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과 상상과 믿음에 따라 저마다 다른 성 문화 와 풍습을 가지게 되었다. 농가에서 발견된 유골은 남자일 수도 있다. 또는 남녀 양성의 특성을 모 두 지닌 간성(間性)으로서 여자처럼 살다가 첫날밤에 비밀이 탄로난 사 람일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일은 극히 드물지만 실제로 일어난다. 그것은 평범한 매장이 아니었지만, 경찰과 농부, 오스트리아 고고학자들과 나 는 처음부터 그 유골의 성에 대해 무언의 합의를 하고 있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살해된 여인은 우리 현대 사회의 통념과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증거를 확인해 보지도 않았다. '증거'란그저 우리가 보고자 기대한 것이었을 뿐이다. 신중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우리가 과 거에서 발견하는 모든 것은 그저 우리의 추측일 뿐이다. 저메인 그리어 (Germaine Greer)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고고학자들이 반쯤 남아 있는 대퇴골을 보고 스무 살 된 여자의 것이라고 말하면, 그 말이 증명할 수 없는 추측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의 확신을 믿는다. 그런 추측은 여자에 대한 고고학자들의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들은 그 뼈가 전형적인 여자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여자의 것 이어야만 한다. "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 뿌리박혀 있는 여성에 대한통념에 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수많은 추정과 판단의 착오가 저질러져 왔 고, 그런 착오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동료 고고학자들 가운데에는 이 말에 불쾌해 하는 사람이 많다. 25년 전에 『여자 내시』(The Female Eunuch)가 출판된 뒤로, 인간 유골의 성 을 판별하는 기술은 많이 발전했다. DNA를 분석하는 방법은 비용이 많 이 들기는 하지만 가장 정확한 방법으로 불에 탄 뼈까지 분석할 수 있 다. 그러나왠지 널리 쓰이지 않고 있다. 돈조한슨이 발견한오스트랄 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는 오랫동안 '루시'라고 널리 알려져 왔기 때문 에,그골반이 남자의 것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밝히는 데 20년이 넘 게 걸렸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리오코토메의 '소년'은 젊은 사냥꾼으로 알려져 왔기 때문에, 그 특정 시기와 장소에서 여자와 남자의 골격이 어 떻게 달랐는지 생각해 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 또한 우리는 먼 옛날에 남자와 여자가 노동을 어떻게 분담했는지에 대해 편견 없이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도 않는다. 만일 오스트리아와 그 농가가 현대의 알바니아에 있었다면, 그 유골 은 생물학적으로는 여자이지만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때 사회학적으 로는 남자였을 가능성이 많다. 인간의 성 문화에는 두 가지 범주, 즉 생 물학적인 성과사회학적인 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알바니아의 '결의 동정녀들(The Sworn Virgins)'은 열 살이 되기 전에 남자가 되기 로 결심한 생물학적 의미에서의 여자들의 집단이다. 그들은 순결을 지 킬 것을 맹세하고 남자의 옷을 입으며, 남자들과 함께 일하고 남자들에 게서 남자로 인정받는다. 남자와 다른 점은 아무도 그들을 죽일 수 없다 는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은원 관계로 얼룩진 사회에서 집안을 책임져 야 하는 가장으로서 누리는 혜택의 하나이다. 마을의 촌장이 되는 사람 도 있다. 나는 이 장에서 우리가 뼈(두개골 성)뿐만 아니라 몸과 행동(두뇌 성) 에 따라 다른사람을 남자' 또는 '여자◎인식할때의 감정적 배경과 그것이 선사 시대 사히를 해석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에 대해 이 야기하고자 한다. [ 뼈를 섞고 짝을 맞춘다 ] 한 쌍의 염색체에 Y 염색체가 있느냐 없느냐는 성을 구분하는 기준 이 된다('간성' 성기도 있지만).알다시피 남성 염색체는 X Y이고 여성 염색체는 XX이다. 성에 따른 동종이형, 즉 팔다리 같은 부위의 외형적 차이는 정도의 문제일 뿐이다. 거의 모든 사회에서 남자가 여자보다 크 지만, 남자보다 큰 여자도 많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를 작은 사람과 은 사람으로 구별할 수는 없다. 육체는 성행위와 결합되지 않는 한 그저 단순한 잠재력일 뿐이다. 그리 고 어떤 사람들은 성행위가 뇌의 선천적인 생리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후천적인 학습과 문화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염색체는X班이다. 성에 따른 동종이형,즉 팔다리 같은 부위의 외형적 차이는 정도의 문제일 뿐이다. 거의 모든 사회에서 남자가 여자보다 크 지만, 남자보다 큰 여자도 많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를 작은 사람과 큰 사람으로 구별할 수는 없다. 보통 성인 여자의 골격은 성인 남자의 골격보다 작고 덜 건장하며, 골반이 넓적하고, 턱뼈가 갸름하고, 이마가 반듯하다. 그러나 이런 차이 는 평균적인 것일 뿐 차이가 없는 경우도 많다. 어느 사회에서나 남자와 여자의 유전학적인 골격의 기초는 똑같다. 서로 다른 호르몬의 분비 때 문에 성인이 되면서 달라질 뿐이다. 여자는 사춘기가 되면 골반이 넓어 져 걷고 달리는 능력이 저하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출산 능력 이 제고된다. 즉, 아이를 낳을 때가 되면 출산을 촉진시키는 호르몬인 릴랙신(relaxin)이 분비되어 골반의 출구가 1.3센티미터쯤 더 넓어진다 그러나 남자의 경우에는 골반이 넓어지는 것에 대한 보상이 없고, 사춘 기에 분비되는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이 골반이 넓 어지는 것을 억제한다. 골격은 몸의 고정되어 있는 틀이 아니라 계속해서 성장하고 변형된 다. 낡은 뼈가 없어지고 새 뼈가 생겨나면서 모양과 크기가 죽을 때까지 계속 변한다. 성 염색체가 골격의 기초에 영향을 주는 몇몇 호르몬을 통 제하지만, 다른 요소들이 호르몬 분비량을 변화시켜 골격에 영향을 주 는 경우도 있다. 식생활의 스트레스와 정서적인 스트레스는 성장에 방 해가 될 수 있으며 치아에 줄무늬를 남기기도 한다. 그러므로 남자의 골 격과 여자의 골격을 구별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남자가 여 자보다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사회라면 남자의 평균 신장이 여자의 평 균 신장과 비슷할 것이다. 사춘기에 격렬한 운동을 많이 하는 여자 운동 선수는 남성 호르몬인 안드로겐(androgen)이 많이 분비되어 골반이 넓 어지지 않고 남자처럼 좁을 수도 있다. 실제로 은퇴한 뒤에 뒤늦게 '골 격의 사춘기'를 맞는 여자 운동선수도 있다. 우리는 선사 시대의 남자들과 여자들이 무슨 활동을 했는지 잘 모른 다. 네안데르탈인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관절염과 신체적 손상으로 보 아, 네안데르탈인은 매우 격렬한 육체적 활동을 했던 것 같다. 또 그들 은 성에 따른 골격의 차이가 거의 없는데 성적 선택 때문에 여자도 안 드로겐이 많이 분비되었던 것 같다. 사람이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느냐'는 그 일 자체와 마찬가지로 골격에 영향을 준다. 인류학자 팀 잉골드(Timlngold)가 말했듯이,어떤 일을 ◎◎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뉴욕 사람과 시베리아의 모피 사냥꾼의 걸음걸이가 다르고, 남자와 여자의 걸음걸이가 다르다. 미국이나 유럽 의 대도시에서 토요일 밤에 흔히 볼 수 있듯이, 남자는 거드럭거리며 걷 고 여자는 흔들거리며 걷는다. 심지어는 아이들도 골반의 모양이 달라 지기 한참 전에 벌써 이런 차이를 나타낸다. 어른들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여자답게' 또는 남자답게' 걸어야 한다고 배울 뿐만 아니라 신발의 모양도 남녀가 다르다. 성에 따른 걸음걸이는 거꾸로 될 수도 있다. 남자처럼 보이고 싶은 여자는 남자의 걸음걸이를 흉내낼 수 있고, 여자처럼 보이고 싶은 남자는 여자의 걸음걸이를 흉내 낼 수 있다. 그러나 골격에 대한 물리적인 스트레스는 상당한 차이를 초 래한다. 이런 여러 가지 변수에도 불구하고 인류학자들은 유골의 성별을 95 퍼센트 정도까지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의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할 때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말하는 성 은 어떤 성인가? 성의 기준은 다양하다. 유골에는 유전학적인 성만 있 는 것이 아니다. 육체의 성(육체가 나타내는 성적 특성)이 있고, 그 육체 의 남성 또는 여성으로서의 생식력이 있다(남자의 경우에는 여자를 임 신시킬 수 있는 수정 능력, 여자의 경우에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능력). [ 음경과 음핵 ] 인간 골격의 공통된 유전학적 기초는 몸 전체의 유전학적 기초의 일 부이다. 뼈와 살의 구조는 본디 여성적인 것으로 남성적인 특성은 호르 몬 분비에 의해 재차 이루어진다. 남자도 젖꼭지가 있는 것은 젖꼭지가 그 본디 구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남자의 젖꼭지는 젖을 만들어 내지 는 않지만 '凍염소 같은 종의 수컷은 젖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성적인 자극에 매우 민감하다. 또한 남자는 전립선 기저부에 여자의 자궁과 비 슷한 '전립선 소실(uterus masculinis)' 이라는 기관이 있는데, 요도로 통 하는 구멍 둘레에 여자의 처녀막과 비슷한 얇은 막이 붙어 있고, 그 바 로 옆에 사정관이 나 있다. 남자가 항문을 통해 느끼는 오르가슴은 바로 이 기관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Could)와 리처드 르원틴(Richard Lewontin)은 「산 마르코 성당의 공복(拱腹)J(The Spandrels of San Marco)이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생물의 어떤 구조는 의도적으로 진화 한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필요한 다른 어떤 것의 부산물로서 생겨난 것인지도 모른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들은 이러한 개념을 베네치아에 있는산 마르코성당을비롯한 몇몇 성당의 내부에 있는 '공복'이라는 건축학적 구조(작고 평평한 삼각형의 벽면)에 비유했다. 그림을 그리기 에 좋은 이 공복은∼둥근 천장이 지붕을 떠받치는 각도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 구조물을 지탱하는 데 꼭 필요하지는 않다. 굴드와 르원틴은 남 자의 젖꼭지도 공복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적인 자극에 민감한 특 성은 필요나 선택에 의해 진화한 것이 아니라, 그림의 테두리 장식처럼 일종의 부가급부라는 것이다. 남자의 음경에 관해서는, 많은 생물학자가 인체가 본디 여성적인 구 조라는 이론에 반대한다. 그들은 여자의 음핵을 일종의 공복으로 본다. 여자의 음핵은 일종의 부산물로서 음경으로 발달할 수 있는 배(胚)세포 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굴드의 주장에 따르면, 여자의 오르가슴은 진 화적 견지에서 볼 때 기능적인 것이 아니다. 오르가슴 없이도 임신이 가 능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이 옳다면, 여자의 오르가슴이 남자의 오르 가슴에 비해 불확실한(역기능을 일으키기 쉬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 고 하겠다. 그러나 음핵은 미성숙한 세포들로 뭉쳐진 아체(芽體)가 아니다. 인간 의 음핵은 상당 부분이 가려져 있지만 실은 음경보다 작지 않다. 이완되 어 있을 때에는 소음순에 의해 부분적으로 또는 전부 가려진다. 머리 부 분에 해당하는 3∼5센티미터가 지나면 두 갈래로 갈라지고, 질 입구 양 쪽에 발기성 조직인 '전정구i瑞前庭球根)'이 15∼20센티미터쯤뻗어 있 다. 2,000만 년 전에는 우리와 조상이 같았던 영장류인 여우원숭이의 암컷은 요도가 음핵 속에 나 있어서 배뇨 방식이 수컷과 같다. 그리고 하이에나의 암컷은 음핵이 수컷의 음경처럼 아주길고 그속에 산도가 나 있다 이런 사실들은 음핵이 진화상 아무 의미도 없는 부산물에 불과 하다는 이론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 고대인의 지혜 ] 여성의 오르가슴 생리학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열띤 토론의 쟁점이 되 어 왔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정신적으로 건강한 여자는 성인이 되면 오르가슴의 중심이 음핵에서 질로 옮겨 간다고 주장했다. 한편 앨프레 드 킨제이(Alfred linsey)는 질을 중심으로 한 오르가슴은 "생물학적으 로 불가능하다. "고 주장했다. 그러나 적절한 방법을 터득하고 주의를 집중하면 몸의 어떤 부분이라도 자극을 받아 오르가슴에 이를 수 있으 므로,질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여자의 음부는 어느 부분이나 다 성적 쾌감과 연결될 수 있으며 임신과도 밀접한 관계 가 있다. 고대 그리스의 의사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와 그의 제자들은 여 성의 섹스와 생식의 생리학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 바 있다. 히포크라 테스는 구전되던 것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기록으로 옮겨지던 기원전 460년쯤에 태어났다. 당시에는 의사가법적으로 인정된 직업이 아니었 기 때문에, 의사들은 다른 치료자들이나 훈련자들과 경쟁해야 했다. 히 포크라테스의 의학 지식은 그 자신의 직접 경험뿐만 아니라,산파들과 현명한 여자들의 구전 지식을 바탕으로 했을 것이다. 그 여자들은 인간 의 골반의 진화 때문에 지난 10만여 년 동안 꾸준히 발전해 온 기술과 지식을 이어 오고 있었다. 만일 히포크라테스가 그 여자들의 지식에 의 존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허락 없이 그 여자들의 지식을 이용한 것이 바로 남자가 임신과 출산을 독점하고 있는 현대적 추세의 시초였다고 하겠다. 히포크라테스는 여성의 성생리를 능동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자궁이 수분을 찾아 몸 안을 자유로이 돌아다닐 정도로 능동적이라고 생각했 다. 때로는 한곳에 가만히 있기도 하고, 때로는 바싹 마르기도 하고, 때 로는 간 쪽으로 이동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현대 학자들은 히포크라 테스의 부인과 의학을 터무니없는 공상쯤으로 여긴다. 그러나 단지 설 명이 틀렸을 뿐 히포크라테스의 기본 개념은 옳았다. 자궁 내막 증식증 (endometriosis)에 걸리면,자궁 내벽의 일부가 떨어져 나와 뱃속의 다 른 부분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드물게 팔이나 폐나 머리 등으로 이동하 기도 한다. 그러므로 간으로 이동하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자궁 내막 증식증은 매우 고통스럽기 때문에(감염된 부위에서 매월 정기적 으로 염증이 일어나기도 한다)고대 그리스의 치료자들은 수술이나 약 초로 이 증상을 치료하려 했다. 히포크라테스는 환자가 죽었을 때 감염 된 조직을 검사해 보았을 것이다. 그는 여자의 오르가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성교할 때 여자의 질이 마찰되면 자궁이 자극을 받아 온몸에서 쾌감과 열 이 발생한다 ) 몸에서 뭔가가분비되는데,이 물질은 자궁으로 들어가서 자궁을 축축하게 만든다. 자궁이 보통 때보다 많이 열려 있을 때에는 자궁 밖 으로 나가기도 한다. 여자는 일단 성교가 시작되면 남자가 사정할 때까지 계 속 쾌감을 느낀다. 그리고 성교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면 남자보다 먼저 방사 하고, 일단 방사한 뒤에는 쾌감이 줄어든다. 마지막 문장은 여자의 사정을 뜻한다. 사정을 해 본 여자들은 여자도 사정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 동안 현대 의학에서는(주로 남자들 이) 여자의 사정을 잘 인정하지 않았다. 히포크라테스는 여자가 스스로 자궁 경부를 움직여서 남자의 정액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성교할 때 임신하고 싶지 않으면 두 당사자가 분비하는 정액을 몸 밖으로 배출한다. 그러나 임신하고 싶을 때에는 정액을 배출하지 않고 자궁 안에 수용한다. 자궁이 정액을 받아들여 경부를 받는 것이다‥‥‥‥출산 경험 이 있는여자는정액을받아들인 날짜를 기억하여 임신한 날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작용은 현대 의학에서도 입증된다. 여자가 오르가슴에 이르 면 질의 끝부분이 풍선처럼 부풀어서 남자의 정액을 수용하는 일종의 주머니가 된다. 그런 후 자궁 경부가 그 속으로 들어가서 정액을 자궁 안으로 빨아올린다. 이때 남자의 정액도 이러한 작용을 돕는데 정액에 함유되어 있는 지방산 프로스타글란딘이 질의 수축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히포크라테스의 생각은 리버풀의 연구자 로빈 베이커(RobinBaker) 와 마크 벨리스(Mark Belli꾸가 발견한 사실과 맞아떨어진다. 그들의 연 구에 의하면, 여자는 자신의 몸 속에 들어온 정액을 통제할 수 있기 때 문에 임신하고 싶지 않으면 정액을 몸 밖으로 배출하고 임신하고 싶으 면 정액을 빨아들인다는 것이다. 여자의 자위행위는 이런 기능을 촉진 시킨다. 말하자면 의도적으로 자궁의 수축 작동을 일으켜서, 성교한 뒤 며칠 동안 특정 남자의 정액을 자궁 속에 간직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 르가슴과 자궁의 수축 작용을 적절히 통제하면 두 사람 이상의 상대와 성관계를 갖고도 특정 상대의 정액만 받아들여서 그 사람의 아이를 임 신할 수 있다. 여자의 몸에 대한 구전 지식을 바탕으로 한 히포크라테스의 이론과 베이커와 벨리스의 연구에 따르면,여자의 음핵은 나름대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음핵은 질구와 조금 떨어져서 음부 맨 윗부분에 있기 때문 에, 손가락이나 물건을 질 속에 삽입하여 세균에 감염될 위험 없이 자위 행위를 즐길 수 있다. 그러므로 굴드의 말처럼 여자의 음핵과 오르가슴 이 아무 기능이 없는 장식적인 것이 아니라,반대로 남자의 오르가슴이 공복일 수 있는 것이다. 음경은 정상적인 사정에 필수적인 것 같지만, 사정할 때 반드시 음경이 경련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정액을 오줌처럼 지속적으로 배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르가슴에 이르렀을 때 음경이 경련하는 것은 질의 수축 작용에 대한 단순한 신경근육적 반 응일 수 있다. 이처럼 남자의 성기와 여자의 성기가 비슷하다는 사실은 성교할 때 의 남자와 여자의 심리적 배경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을 뜻할지도 모 른다. 섹스는 주로 정신적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여자의 정신 세계와 남자의 정신 세계가 똑같을까? [ 남자와 여자적 기준 ] 사람들은 흔히 남자와 여자는 태어날 때부터 정신적으로 서로 다르 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 방면의 전문가들은 성 인 남자와 성인 여자의 뇌에서 구조적인 차이를 발견했다고 주장하지 만, 이런 차이가 선천적인 것인지 아니면 성장 과정에서 유전자, 호르몬, 사회화 따위의 요소가 끼친 영향 때문에 후천적으로 발생하는 것인지 는 분명하지 않다 어렸을 때에 받는 문화의 영향을 경시하는 것은 현대 사회의 고질적 인 버릇이다. 흔히, 아기는 그 행동에서 성적 차이의 일반적 원칙을 찾 아볼 수 있는 순수한 자연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매트 리들리(Matt Ridley)는 『붉은 여왕-성과 인간성의 진화』(The Red Queen:Sex and the Evolution of Human Nature)에서 어느 어머니가 한 신문사에 보낸 편지를 인용하고 있다. "어느 날 방바닥에 람자아이' 장난감들과 '여 자아이' 장난감들을 마구 늘어놓고 우리 쌍둥이 아들과 딸이 어떤 것을 고르는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은 자동차나 기차를 집어들었고 딸 은 인형을 집어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배웠다는 귀지의 독 자들은 그 이유를 뭐라고 할지 알고 싶군요" 이에 대한 리들리의 대답 은 이렇다. 총이나 인형을 좋아하게 만드는 유전자는 없지만, 남성적 본능을 불러일으켜서 남자흉내를 내게 하고,여성적 본능을 불러일으 켜서 여자 흉내를 내게 하는 유전자' 는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억지에 가깝다. 아기들은 흔히 갓 태어났을 때부터 남자나 여자로 취급되기 때문에 아버지나 어머니, 또는 그들의 활동 영 역을 흉내내는 법을 쉽게 터득할 수 있다. 앞서의 어머니가 제기한 문제 에 관해 말하자면, 장난감들을 완전히 무작위로 늘어놓고 쌍둥이 남매 에게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고르게 했는지도 불분명하고, 두 남매가 어 떤 장난감을 고르는지 얼마 동안 관찰하고 기록했는지도 불분명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그 아이들의 선택에는 여러 가지 문화적 요소가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 어머니가 신문사에 편지를 보내 』다른 사람들보 다 많이 배웠다는 독자들' 에게 도전했다는 것은 곧 그녀가 어떤 특정한 대답을 선호하는 편견을 이미 가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인형을 가지고 노는 남자아이나 총을 가지고 노는 여자아이를 조롱하는 사회에서는, '잘못된' 취향을 가지고 있는 쌍둥이를 둔 어머니는 그런 사실을 숨기 려 하게 마련이다 남녀의 두뇌의 차이를 살피는 기준은 이보다 훨씬 더 과학적이다. 남 녀의 두뇌의 차이는 지능 측정을 통해 뚜렷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일반 적으로 여자는 언어 능력이 약간 더 우월하고 남자는 공간 지각 능력이 약간 더 우월하다. 남자와 여자가 세상을 보는 눈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 같다. 몇몇 연구자들의 이론에 따르면, 남자 태아는 임신 6주쯤에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많이 분비되는데,이것이 두뇌 성의 발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이때 테스토스테론이 분비되지 않은 아기는 사춘기가 되면 테스토스테론이 분비되어 비록 나중에라도 신체 적으로는 남성화되지만 여전히 여성적인 두뇌를 갖게 된다. 한편, G. 에 델만(G. Edelman)이 얼마 전에 제시한 증거에 따르면, 사람의 뇌의 신 경 조직은 주로 유년기에 학습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다고 한다. [ 성의 등급 ] 인체의 성장을 주도하는 호르몬은 동물과 식물에서도 발견되며, 인 공 호르몬도 있다. 그래서 호르몬 수치를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도 있다. 스포츠 관계자들이 운동선수들의 유전자와 호르몬을 검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자 운동선수가 안드로겐 보충제를 복용하여 남자 같은 골 격을 가질 수도 있다(스포츠는 거의 다 남자 위주이다. 장거리 해양 수 영처럼 여자가 더 잘 하는 종목은 아예 올림픽 경기에 끼지도 못한다). 그러나 호르몬 분비량과 유전학적인 남성적 또는 여성적 특징은 개인 차가 크다. 1968년,국제올림픽위원회는 '성별 확인' 절차의 하나로 모든 여자 선수는 次◎ 염색체 확인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규정을 세웠다. 1985 년도 국제학생경기대회에서는 스페인의 여자 선수 마리아 마르티네스 파티노가실격 판정을 받았다. 신체적으로는 남성적 특징이 전혀 없었 지만 염색체가X Y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는 판정 불복 소송에서 승리하여 자격을 회복했다. 스포츠 관계자들은 겉으로는 여자처럼 보이 고 생리 구조도 여자이지만X Y염색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X班 염색체를 가지고 있지만 부신 생식 증후군(adreno-genital syndrome)에 걸린 태아는 자궁 속에 있을 때 안드로겐에 반응하여 남자같이 성장한다. 이런 사람은 유전자 검사법이 보편화된 뒤에는 그 자격이 애매해졌지만 그 전에는 남자 선 수로 뛰었을 것이다. 유전학적인 기준만으로 판단한다면, 이런 사람은 다른 모든 면에서 남자라고 해도 여자로 뛰어야 할 것이다. 신체와 성의 변종은 이 밖에도 많다. 부신 생식 증후군이 심하지 않 은 여자 태아는 부분적으로만 남성적인 특징을 가질 수도 있다. 남자의 고환처럼 커다란 음순, 음경처럼 긴 음핵, 건장한 골격 등. 밑으로 내려 오지 않은 고환을 가지고 태어나는 남자아이도 많은데 이들은 사춘기 가 되기 전에 고환이 밑으로 내려오지 않으면 부신 기능이 마비되어 마 치 여자같은몸을갖게 된다. 성 염색체가 일정하지 않거나성 염색체 의 수가 다른 사람도 있다. 이를테면, XX 염색체를 지닌 세포와 X Y 염 색체를지닌 세포들이 모자이크처럼 섞여 있는 것이다. X염색체가 한 개밖에 없는 이른바 터너 증후군에 걸린 태아는 여자의 몸을 갖게 되지 만 난소가 없다. 염색체가 3개 이상인 경우도 있다. 가장 흔한 것은 班XY형으로(클라 인펠터 증후군-역주)성기는 남자의 성기인데 골반의 형태와 호르몬 분비 양상은 여자이며, 수정 능력이 없을 수도 있다. 5-알파 환원 효소 결핍증(5-alpha-reductase deficiency)이라는 해괴한 유전성 증후군도 있다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38건의 사례가 발견된 바 있는데, X Y 염색 체를가진 태아가 태어날 때부터 여자처럼 보이더니 클수록 점점 신체 적으로 거의 여자로 성장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다가 사춘기가 되면 갑 자기 남자로 바뀌어 음순이 고환으로 발달하고 음핵이 음경으로 발달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요도 입구가 음경 밑에 그대로 남아 있어서 사정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남녀 양성,즉 남자와 여자의 내외 생식기를 다가지고 있는사람도 있다. 이런 '간성'이 태어날 확률은 의외로 높아서,천 명에 한두 명은 있다. 산업화된 사회에서는 간성 아기가 태어나면 의사가 유전자 검사 로아기의 성별을 판단한 다음에 '진짜' 성에 맞게 성기를수술하고호 르몬의 분비를 성에 맞춰 조절한다. 그러나 비(非)서구 사회에서는 그런 아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런 타고난 특징을 바꾸려는 의학적 시도를 적대시한다. 간성이 태어날 확률은 사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리고 비정상적인 유 전학적 특성은 지역적인 차이를 가질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태아가 잉 태되었을 때부터 태어날 때까지 그런 특성의 보유의 여부는 그 사회가 직면해 있는 환경적 스트레스의 정도에 달려 있을 수 있다. 통계를 바탕 으로 보면 생활 여건이 열악할수록 비정상적인 아기가 태어날 확률이 훨씬 더 낮다. 동물계에서는 다른 동물보다 가축들 사이에서 간성 동물 이 태어날 확률이 높은데,선택적인 생식에 따른 유전학적 부작용으로 보인다. 고고학적으로 입증된 바는 없지만, 간성은 선사 시대에도 오늘날과 거의 같은 비율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선사 시대 사회는 간성을 '정상화'시키는 수술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을 것이므로 간성은 사람 들의 이목을 끌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다양했 을 것이다. 긍정적인 반응으로는 간성을 상황에 따라 남자나 여자로 받 아들이거나(쉬쉬 하면서),제3의 잡동사니 성 집단으로 분류하거나(기 원전 2000년 경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거세된 남자, 동성애, 복장 도착자, 간성 등을 '사그우르사그(sag-ur-sag)'라는 공인된 집단에 포함시켰다), 또는 특별한 사람으로 떠받들었을 것이다(고대 그리스에서는 남녀 양 성을 반신(半神)으로 여겼다). 그리고 부정적인 반응으로는 아기 때 죽 이거나(태어났을 때 간성임이 확인되면), 추방했을 것이다(나중에 간성 으로 성장하면). [ 남자의 그늘에 가린 여자 ] 아이를 낳을 수 있고 또 낳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성 적 차이의 뚜렷한 기준이 된다. 이런 성적 차이는 유골에도 나타난다. 흔히 골반에 난 흠집은 아이를 낳은 적이 있음을 나타낸다(흠집의 정도 가 반드시 출산 횟수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무덤에서 어른 유골 속 그림 2-1 사후 출산. 태아의 다리가 아직도 산도 안에 있다. 이 유골은 영국 햄프썬 주 킹스워시의 워시 파크에서 발견된 앵글로색슨족의 공동묘지에서 발굴되었다. 에 든 태아의 유골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얼마 전에 이스라엘의 베이 트 샤메시(Beitsham醮h)에서 발굴된 4세기의 무덤에서 열네 살쯤 되 어 보이는 사람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그 유골은 여자의 것으로 판명되 었는데,골격의 구조 때문이 아니라 골반 안에 다 자란 태아의 유골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와 태아의 사망 원인은 골반이 너무 좁아서 태아의 머리가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여자의 유골 속 에 불에 탄 대마초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아이를 낳을 때 대마초를 피웠던 것 같다. 대마초는 진통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자궁의 수축 력을높인다(파피루스종이에 쓰여진 고대 이집트의 의학적 기록에 따 르면, 출산할 때 대마초를 사용한 것은 적어도 기원전 1550년으로 거슬 러 올라간다).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관 속의 출산'에서도 유골의 성별을 확인할 수 있다. 영국 햄프셔 주 워시 파크에서 발견된 앵글로색슨족의 묘지에 서는 태아가 산도에 든 채 죽은 여자의 유골이 발굴된 바 있다. 발굴했 을 때에는 태아가 거의 다 빠져나오고 발만 산도 속에 들어 있는 채 매 장된 것처럼 보였지만,사실은 매장된 뒤에 손상된 근육조직이 이완되 고 내장이 부패하면서 가스가 발생하여 태아가 산도 밖으로 밀려난 것 이었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사회적 성을 '여성'으로 규정하는 특징의 하나 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영원히 여자로 간주되는 것은 아니 다. 뉴기니의 후아족은 출산을 남성적인 일로 간주한다. 그들은 '누 (nu)' 라는 물질의 유무를 기준으로 육체적 성과 사회적 성을 구별한다. 누는 액체 상태의 '생명의 정수'로서 여자가 만들어 내는 것이지만,성 교와음식물을통해 남자에게 옮겨질 수도 있다. '피가파(figapa)' 사람 은누가많고 '카코리kakora)' 사람은 누가 아주적다. 피가파사람이 란 아이를 낳을 때가 된 여자, 남자 또는 여자아이(아이는 엄마의 자궁 에서 나오므로), 아이를 하나나 둘 낳고 폐경기가 지난 여자, 성관계를 많이 가졌으며 누가 많이 든 음식물을 많이 먹은 늙은 남자 등을 말한 다. 그리고 카코라 사람은 이성과 성관계를 갖지 않았으며 누가 많이 든 음식물을 먹지 않은 남자, 아이를 셋 이상 낳고 폐경기가 지난 여자(몸 속의 누가 많이 빠져나가서 남성 화되어 남자들의 집에서 사는 여자) 등 을 말한다. 남자와 여자의 몸은 해부학적으로 아주 비슷해서 문신, 음경 확대, 음 핵 절제 따위로 신체상의 성적 차이를 강조하는 사회가 많다. 에티오피 아의 하즈다족은 나이 든 여자들이 여자아이를 여자로 만드는 수술을 한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음핵과 대음순을 잘라 내는데(소음순까지 잘라 낼 때도 있다), 음핵과 대음순을 남자의 고환이나 음경과 같은 것 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풍습에서 볼 수 있듯,성은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라 문화적 습관이다. 물론 이런 풍습도 육체적인 차이 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인류학자 페넬로페 브라운(Penelope Brown)과 L. j. 조르다노바(L. J. Jordanova)의 말처럼, 신체상의 차이 에 대한 문화적 시각은 참으로 다양하다. 오스트리아의 농가에서 발견된 앞서의 유골은 성별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하다. 보통 죽은 사람을 묻을 때에는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부장품을 함께 묻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고고학자들 은 그런 인공물이 성별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칼은 남성을 상징하고 물레가락은 여성을 상징한다고 여긴다. 남자가 하는 일과 여 자가 하는 일이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문제가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사회인류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인공물이 나타내는 성별 은 경우에 따라 다르다. 죽음을 삶의 반대로 여길 수 있듯, 어떤 선사 시 대 사회에서는 죽은 사람의 성에 반대되는 성의 부장품을 묻어 주었을 수도있다. 이를테면,남자는 '여성' 부장품과 함께 묻고,여자는 남성' 부장품과 함께 묻는 것이다. 부장품의 기능을 歌릴 때 고고학자의 편견이 작용하는 경우도 많다. 내 연구를 돕고 있는 앨리슨 디건(Alison Deegan)은 나에게 이런 편지 를 보낸 바 있다. "두 주일 전에 전형적인 사례가 있었습니다. 한 유골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작은 칼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골이 여자 의 것이라고 밝혀지자마자 칼이 물레가락으로 둔갑한 겁니다. " [ 얼음 인간과 게이 유전자 ] 얼음 인간 외치는 도끼와 사냥 장비 따위의 고고학자들이 일반적으 로남자의 것이라고 여기는 여러 가지 인공물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콘 라드 스핀들러는 얼음 인간의 성별에 관해서 이렇게 말했다. "인류학적 인 성별 확인 결과가 고고학적인 성별 확인 결과와 일치한다. 따라서 하 우슬라브요흐(Hauslabjoch)의 시체는 남자의 것임이 분명하다. " 스핀 들러는 여기서 서로 다른 두 가지 의미에서 남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 는데 그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으로, 그 중 하나는 증거에 의해 명백하 게 입증된 것이다. 물론 외치의 골격과 신체 조직은 남자의 것이 분명하 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말하는 남자'의 개념이 외치가 살던 사회에 도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어쩌면 그 시대의 남자'의 개념이 5,000 년 뒤인 오늘날의 서구 사회의 남자'라는 개념의 기원인지도 모르긴 하지만). 우리가 발견한 증거들만 보면,신석기 시대 유럽의 옷 입는 풍습은 오늘날과 크게 달랐다. 외치는 가죽으로 만든 사타구니 가리개를 입고 있었는데, 가죽을 엉덩이 사이로 팽팽하게 잡아당겨 벨트 같은 것에 고 정시켰던 것 같다. 영국의 게이 잡지 『캐피털 게이』(CapitaIGay)는 이 에 대해 「가죽 옷을 입은 석기 시대의 게이」라는 제목의 표지 기사를 냈 다. 과연 외치는 남자들만의 사회에 속한 완전한 성인 남자였을까? 어 쩌면 후아족의 崙은 남자들처럼 누 같은 물질로 가득 차서 더 이상 남 자로 간주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증거가 없으므로 외치의 성별에 대해 여러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뇌를 분석해 보면 그의 성생활에 대해 감추어진 사실을 알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네덜란드 뇌 연구소의 딕 스와브(Dick Swaab) 는 얼마 전에 흥미로운 사실을 밝혀 낸 바 있다. 인간의 뇌에는 성행위 와 직결되는 BSTc라는 부분이 있는데, 여자가 남자보다 더 작으며, 남 자에서 여자로 성전환하는 사람남자의 몸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어릴 때부터 "내 몸 속에 여자가 들어 있다. "고 생각해 온 사람)도 작다는 것 이다. 한편,미국의 몇몇 연구자는 뇌의 발달과 성적 취향에 영향을 주는 '게이 유전자'가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사이먼 르베이(Simon Levay) 는 남자 시체를 몇 구 분석해 보았다(그 가운데에는 에이즈로 죽은 남 자들도 있었다). 그 결과, 생전에 동성애를 한 사람들은 이성애만 한 사 람들보다뇌 속의 INAH3세포군이 더 작았다. 그러나,이 세포군의 상 대적 크기가 믿을 만한 기준이 된다고 해도(뇌가 방부제 속에 들어 있 는 시간에 따라 내부 조직의 수축 정도가 다르므로 믿을 만한 기준이라 고 볼 수는 없지만), 그 사람들의 성생활이 확실한 것이라고 해도(확실 한 것이 아니었지만),그리고 세포군의 크기와 행동의 연관성이 통계적 으로 타당한 것이라고 해도(타당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INAH3의 상대적 크기가 게이 유전자 때문인지 에이즈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 다. 또는INAH3이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행동의 영향을 받아 INAH3의 크기가 변하는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실제로 르베이 의 주장은 아직 입증된 바 없다. 게이 유전자 이론은 통계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아무리 믿을 만한 것 이라고 해도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영국의 풍자 희극단 구디스(Goodies)는 키가 작은 사람들을 차별하는 사회를 가상한 희극을 공연한 바 있다. 그런 사회에서는 '큰 키 유전자'를 가지 고 있는 사람이 우월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월감 콤플렉스 유전자'가 생기지는 않는다. 거꾸로, 키가 큰 사람들을 차별하 는 사회에서는 큰 키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열등감을 느낄 것이 다. 이 경우에도 역시 '우월감 콤플렉스 유전자'가 생겨나지는 않듯이 '열등감 콤플렉스 유전자'가 생기지 않는다. 게이 유전자 이론에도 이와 똑같은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어떤 유 전학적 특성과 동성애 취향 사이에 통계적으로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고 해도 그렇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게이 유전자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특정 문화 안에서 그런 연관성이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 을 뿐이다. 동성애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게이 유전자를 가 지고 있다고 할 수 없으며,게이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동성애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도 없다. 쌍둥이 들을 보아도 그렇다. 그들의 유전학적 특성은 똑같지만 성인이 되었을 때의 성적 취향은 전 혀 다를 수 있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철학자들과 군인들 사이에서 남자 동성애가성행했지만,게이 유전자같은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집단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게이 유전자에 대한 논쟁은 성의 선사 시대에서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인간의 행동은 유전적인 요소와 문화적 환경 가운데 어느 것에 좌우되 는 것일까? 현대인들은 섹스에 대해 토론할 때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을 구별하려는 경향이 있다. 일부 종교에서는 생식을 위한 것이 아닌 성행위,특히 동성애를 죄악으로 여긴다 게이 유전자에 대한 여자 및 남자 동성애자들의 관심도 바로 그런 편견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게이 유전자 때문이다. "라는 말이 "나는 동성애가 더 좋아서 동성 애를 한다. "는 말보다 더 도덕적인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생물학과 문화는 삶의 모든 측면에서 복잡하게 맞물려 있다. 유전학, 자궁 안의 호르몬 분비,유년기의 학습과 체험,그리고 성인이 된 후의 개인적 및 정치적 요소들이 개개인의 성에 대한 개념과 성적 취향의 발 달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생물학과 문화를 분리하여 생각할 수는 없 다. 생물학적인 성은,과학적으로 끌어 낸 지식과 수많은 뿌리 깊은 편 견과 무의식적인 가정으로 이루어진 현대 서구 사회의 성에 대한 관념 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오스트리아의 농가에서 발견된 그 유골이 남자의 것인지,여자 의 것인지 밝히지 못했다. 그러나,골반에 난흠집과DNA를 분석하여 그것이 여자였고 아이를 낳은 적이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고 해도, 내가 그녀의 성(gender)에 대해 무엇을 알아 낼 수 있겠는가? 그녀가 살았던 사회에서의 그녀의 생활에 대해 무엇을 알아 낼 수 있겠는가? 이런 관 점에서 볼 때 선사 시대 고고학에서의 성별 문제는 참으로 난해하다. 그 러나 앞으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알아 낼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인간의 다양성과 가변성을 부분적으로나마 파악하면 과거의 양상도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단 한 구의 유골에서 얻을 수 있 는 증거로는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 유기체의 신비 ] 월리엄 게르하르디(William Gerhardie)의 소설 『여러 나라 말을 아는 사람들』(The Polyglots)에서, 주인공은 사촌 여동생이 다른 사람에게 시 집 가는 날 밤에 그녀와의 사랑의 결실을 맺고 허탈감에 빠져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무리 깊은사랑도 결국 '오목한것은오목한것이고볼 록한 것은 볼록한 것'임을 증명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오목함과 볼록함을 위험하고 혼란을 야기하는 음란한 것으로 여 기는 사회도 있다. 영국, 아일랜드, 중국, 알바니아 등지에서는 발기한 음경, 성교,사정, 발기한 음핵 등 인간의 성행위를 묘사한 모든 시각 정 보를 검열하고 있다. 유고슬라비아의 영화감독 두만 마카베예ffDusan Makavejev)가 만든 영화 「유기체의 신비」는 성행위를 노골적으로 묘사 했다는 이유로 영국에서 일부가 삭제되고 상영되었다. 성행위의 정의는 사회마다 다르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팔을 만지 는 행위를 단순히 그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한 행위로 여기는 사회도 있지만, 공격적인 행위나 성행위로 보는 사회도 있다. 하반신이 마비된 사람들 중에는 팔꿈치의 접촉만으로도 오르가슴에 이르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게는 그런 단순한 신체적 접촉이 바로 성행 위인 셈이다. 그러므로 섹스에 대해 그것이 무엇이라는 보편적인 정의를 내리기는 극히 어렵다. 섹스에 초점을 맞춘 육체와 정신의 철학인 동양의 탄트라 요가(tantric yoga)에 정통한 사람들은 온몸으로 느끼는 오르가슴 상태 를 몇 시간 동안이나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산업 사회에 서는 흔히 섹스를 인체의 여러 가지 기능의 하나로 여긴다. 특히 공산 국 가에서는 섹스를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는 행위쯤으로 여긴다. 건강을 위해 필요한 짧고 직선적인 행위로 여기는 것이다. 이 경우 섹스에 필요 한 이상적인 시간은 2분을 넘지 않는다. 스스로 성기를 자극하여 쾌감을 즐기는 행위는(반드시 오르가슴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아주 일찍부터 시작된다. 임신부에게 초음파 검사 를 해 보면,자궁 속의 남자아이가 자위행위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현 대 서구 사회에서는 아이들이 자위행위를 시작하는 평균 연령이 생후 18개월이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영국에서는 자위행위(특히 어린아 이의 자위행위)를 부도덕하고 건강에 해로운 행위로 여겨서 이것을 막 는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 가운데에는 음핵의 외부를 제거하 는 음핵 절제술도 있었다. 미국에서는 1950년대까지도 여자아이들에게 이 수술을 하곤 했으며, 지금도 세계 여러 곳에 이 풍습이 남아 있다. 그런 강제적인 방법이 사용됨에 따라,사적이고 은밀한 것이었던 인 간의 성행위가 의학과 법학과 정신의학 분야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리 처드 크라프트에빙(Richard Krafft-Ebing), 헤이블록 엘리스(Havelock Ellis), 지그문트 프로이트,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등의 선구자 들은 섹스에 대한 이론을 세우고 여러 가지 성행위에 이름을 붙였다. 병 명처럼 들리는 기뇨증(嗜尿症), 호암증(好暗症), 복장 도착, 대물(對物) 성욕 도착, 그리고 뭐라고 규정하기가 애매모호하여 그럴 듯한 이름을 붙인 승화, 전이(轉移), 오르곤 에너지(특별하게 생긴 상자 안에 앉아 있 으면 몸 속에 축적된다는 정력 -역주) 생산 등. 그러나 처음에는 '도착' 으로 여겨졌던 행위들이 실은보편적이라는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이 정상'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그런 행위들은 성에 관한 책에서 노골적으 로 묘사됨에 따라 더 보편화되었기 때문인지, 나중에는 ◎1양성'으로 불 리게 되었다. 물론 시대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관념들도 있다. 여자는 남자보다 성적인 관심이 적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다임성을 인정하면 서도 일부일처제를 바탕으로 한 이성애를 바람직한 성행위로 여기는 것도 그렇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개념은 고등 포유동물에게는 적용되지 않으며 특히 영장류에게는 더욱더 그렇다. 나는 먼저 성행위의 기원에 대한 사실과 가정을 요약 설명한 다음, 고등동물의 경우 섹스가 생식 행위에서 점차 쾌락과 힘의 원천으로 변 천한 과정에 대해 설명할 생각이다. 양성교(bisexuality)는 동물의 세계 에 널리 퍼져 있지만,특히 인간과가장가까운피그미침팬지는놀라을 만큼 다양한 성행위를 즐긴다. 물론 섹스를 쾌락과 힘의 원천으로 한층 더 발전시킨 것은 인간이다. 선사 시대의 우리 조상은 식물을 이용하여 피임에 성공함으로써 필연적인 생식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이것으로 섹 스 파트너와 자식을 보다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특히 여자들이) 성적 선택을 바탕으로 한 진화를 촉진시켰을 것이다. [ 여자와 섹스전쟁 ] 미국의 유명한 법학자 리처드 포스너(Richard Posner)는 1992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섹스와 이성』(SexandReason)에서 성행위의 여러 가지 형태를 규정하는 법적 기준을 세우려 했다. 부부 생활과 간음, 산 아 제한, 민간 사회와 군대에서의 동성애, 강간, 성애 예술, 포르노, 나체 주의,성인들 사이의 또는 어린이와의 강제적 섹스,그리고 양자 결연, 대리모 출산,인공 수정,우생:歌선택적 생식 또는 인종적 동기에 따른 생식) 등을 둘러싼 복잡한 문제들. 그는 섹스의 역사와 섹스에 대한 현 대의 여러 가지 이론을 바탕으로 삼았는데,여자의 성적 관심에 대해서 는 이렇게 말했다. 성공적인 생식을 원하는 여자는 성적 취향에 있어서 남자보다 더 까다로 워야 한다. 임신을 중요한 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여러 가지 위험 속에서 살았던 진화기의 여자들은 자식의 아버지가 될 배우자의 질에 신경 을 많이 써야 했다‥‥ 성욕이 강하면 다양한 섹스를 즐기려는 욕망이 생기 게 된다. 또 섹스 파트너를 까다롭게 고르려는 전략을 고수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성욕이 강한 여자는 자연 선택에 의해 도태되게 마련이다. 이 주장은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영장류의 성생활은 전혀 그렇지 않 다. 영장류의 암컷은 성욕이 강하지만 그렇다고 섹스 파트너를 마음대 로 고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포스너는 더 나아가 이렇게 주장 했다. 여자가 남자보다 성욕이 약하다는 증거가 많이 있다(물론 그렇지 않은 여 자도 있지만). 이를테면, 남자 동성애 부부는 이성애 부부보다 자주 성관계를 갖지만,여자 동성애 부부는 평균적으로 이성애 부부보다 성관계 횟수가 적 다. 포스너는 통계를 바탕으로 이런 주장을 내세웠지만, 이 통계는 刻은 의미의 성행위에 대한 통계가 아니라 성교에 대한 통계이다. 게다가 그 는 질보다는 얼마나 자주 성관계를 갖느냐 하는 양에 초점을 맞추었다. 여자는 남자보다 여러 번 오르가슴에 이르고 온몸으로 섹스를 즐긴다. 그러므로 여자의 성욕이 더 강하다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통계 자료는 서양의 경우에 여자가 남자보다 성욕이 약하다는 이론을 뒷받침한다. 낸시 프라이데이(Nancy Friday)도 여자는 어릴 때 부터 성에 대한 무지를 강요당한다고 말한 바 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 는 관습 때문에 남자아이와는 달리 자신의 성적 특징에 대해 모르는 채 자란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음핵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안다고 해도 그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프라이데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신적인 음핵 절제술'을 받는 것이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할 수는 없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의 신체적 차이는 존재의 차원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나 타낸다. 수정란이 암컷의 몸 속에서 성장하는 인간의 경우, 임신한 여자 의 가장 큰 관심사는 태아가 잘 자라서 나중에 성인이 되어 성공적으로 생식하는 것이다. 남자의 관심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여자는 자신의 몸 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가 자신의 유전자의 절반을 물려받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하지만 남자는 배우자를 밤낮으로 지켜보지 않는 한 배우자의 몸 속에 있는 아 이가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여러 명의 여자를 임신시키려고 할 테고, 다른 남자들이 똑같은 전략을 쓰고 있다면 더욱더 그럴 것이다. 여러 상대와 성관계를 가져야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다음 세대가 나올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일부 일처제를 고수하면 자신의 아이를 낳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전략적인 차이가 바로 이른바 장녀간의 싸움' 의 원인이다. 진 화에서 같은 종 안에서의 경쟁(남자 또는 여자끼리의)이 다른 종과의 경쟁만큼이나 중요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마르크스(Marx)와 엥겔 스(angles)는 "최초의 노동의 분담은 육아에서의 남자와 여자의 노동의 분담이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엥겔스는 더 나아가, "역사상 최초의 계 급 적대는 일부일처제 결혼 생활에서의 남자와 여자의 적대적 관계이 며, 최초의 계급 억압은 남자가 여자를 억압하기 시작한 일이다. "라고 말했다. 인간은 자식에게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주기 위한 전략을 전혀 몰랐 었다. 유전자 개념이 등장한 것은 겨우 100년 전이었다. 그러므로 그 전 에는 유전자를 생각하며 생식 활동을 했을 리가 없다. 이보다 더욱더 중 요한사실은,여자는 임신하여 아이를 낳을 때까지 적어도9개월 동안 생식 활동에 헌신하지만 남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 는 유전학에 대해 알건 모르건 이 9개월 동안 다른 여자들을 임신시키 며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 정자 경쟁 ] 인간의 경우,결혼 생활과 성생활은 서로 별개의 것일 때가 많다 일 부일처이건 일부다처이건 일처다부이건, 성생활에 대한 규칙이 엄격하 게 지켜지지 않는 것이다. 로빈 베이커와 마크 벨리스가 얼마 전에 실시 한 유전학적 부성(父性)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아이들의 약 10퍼센 트가 표면상의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식으로 판명되었다(물론 그 아버지들은 자기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베이커와 벨리스는 남자의 생물학적 구조가 간음하기에 알맞다고 생 각한다. 인간의 수컷은 다른 영장류에 비해 고환이 크고 필요 이상으로 많은 정자를 생산한다. 정상적인 임신은 한 개의 난자와 한 개의 정자가 결합하여 이루어진다. 한 번 사정할 때 방출되는 정자의 수가 평균 225 만 개라고 할 때, 그 나머지인 224만 9,999개의 정자는 쓸모가 없는 셈 이다. 베이커와 벨리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침팬지나 사자처럼 정 자 경쟁을 한다. 정자의 대다수는 난자를 찾아가려고 애쓰지 않고 다른 사람의 정자가 침입하는 것을 막는다. 어떤 것들은 다른 사람의 정자를 공격하기 위해 기다리고. 어떤 것들은 서로 뭉쳐서 침입자를 막는 바리 케이드를 형성한다 이런 정자들은 鷺리의 모양이 임무에 알맞게 기형 으로 되어 있는 것 같다. 또한 어떤 남자가 자신의 배우자와 하루 종일 함께 있으면서 성교하 면, 하루 동안 배우자와 떨어져 있을 때(배우자가 다른 남자와 성교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때)보다 훨씬 더 적은 양의 정자를 사정한다. 물론 남자의 정자가 다른 남자의 정자를 쫓아 낼 수도 있지만, 어떤 남자의 아이를 임신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여자이다. 여자는 성교 시의 오르가 슴과 그 뒤의 자위행위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정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다f(제2장 참조). 베이커와 벨리스의 조사에서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은 여자들은 왜 그랬을까? 매트 리들리는 이 현상을 안더스 묄러(Anthers Muller)의 연 구를 바탕으로 사회생물학적으로 해석한다. 동물학자인 묄러는 재미있 는 사실을 발견했다. 수컷 제비는 외모가 매력적일수록 생식에 관심이 없다. 그래서 암컷 제비는 평범하게 생겼지만 생식에 관심이 많은 짝을 찾는다. 리들리는 인간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돈은 많지만 못생긴 남자와 결혼한 후 따로 잘생긴 애인을 두는 여자가 그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잘생긴 애인의 아이를 임신하려는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물질적인 부를 무엇보다도 중요시하는 사회에서는 돈 많은 사 람의 유전자를 가진 아이가 잘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 들과 사회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는 여자의 심리를 사회생물학적으로만 해석하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이다 베이커와 벨리스가 조사를 실시한 리버풀은 국제적인 항구 도시로서 산업 혁명 이후로 수많은 선원과 노동자가 드나드는 곳이다. 그런 환경 때문에 결혼 생활에서 정절이 지켜지지 않는 것일까?그렇다고 하기는 어려을 것이다. 어쨌거나 두 연구자의 통계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고 해도 그들의 결론은 너무 단순하다. 여러 가지 실제적인 이유를 생각 할 때, 순전히 성적인 쾌락을 위해 선택한 애인의 아이를 임신할 가능성 이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술에 취해서 우연히 만난 사람과 섹스를 즐 길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혼외 정사를 즐기는 사람들이 콘돔이나 페서리를 꼭꼭 챙겨 가지고 다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피 임 기구를 가지고 다니다가 자신의 배우자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어 떻게 할 것인가. [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우리의 친척들 ] 인간을 비롯한 여러 동물의 성행위와 생식행위를 사회생물학적으로 만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단순히 성적 퀘락만을 위해서 성행위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러 고등동물의 경우,진화의 과정에서 성적 쾌감이 함께 발달함에 따라 섹스와 생식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생식을 하기 위해서는 섹스를 해야 하지만, 섹스는 반드시 생식을 목적으로 하 지 않는다. 이것은 야성 동물이건 길들인 동물이건 동물의 성행위를 관 찰해 보면 분명히 나타난다. 소, 돼지, 토끼 따위의 가축을 관찰해 보면, 성적으로 민감한 암컷은 다른 암컷이 발정기가 되면 수컷처럼 그 암컷의 등에 올라타 교미 동작 을 한다(물론 수컷이 있으면 수컷과 교미하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컷도 다른 수컷의 등에 올라타 교미 동작을 하고,이때 암컷 역할을 하는 수컷은 마치 암컷 같은 반응을 나타낸다(물론 발정한 암컷이 있으 면 암컷과 교미하려고 한다). 동물학자들의 관찰에 따르면, 포유동물의 암컷도 수컷처럼 오르가슴을 느낀다. 붉은털원숭이에 대한 실험에서, 전기 칫솔로 암컷의 음핵을 자극하면서 뇌파를 측정해 보았더니 수컷 과 비슷한 뇌파를 나타냈다. 동물학자들은 관찰을 바탕으로 이런 결론을 내렸다. "수컷과 암컷의 행동을 관찰해 볼 때, 암수 양성의 선천적인 신경근육 체계에 각각 반대 성의 성적 반응을 전달하는 체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물은 아무 때 나 생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런 체계가 이로우면 이로웠지 해롭 지는 않을 것이다 최근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200종 이상의 포유동물, 조류, 파충류, 양서류, 어류, 곤충 등이 수컷 또는 암컷끼리 동성애를 한 다(동성애만 하는 집단은 없지만). 생물학자들은 대형 유인원의 성행위를 관찰하여 우리 인간 조상의 성행위를 추정함으로써 인간의 성적 본성을 규명하려 했다. 그러나 불 행하게도 그런 영장류의 성행위는 종마다 다를 뿐만 아니라 같은 종 안 에서도 집단마다 다르다. 그러므로 어느 영장류를 관찰 대상으로 삼느 냐에 따라 인간의 성적 본성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특성도 있다. 이를테면, 대부분의 영장류에 있어서 초기 학습이 매우 중요한 것 같다. 성행위의 관찰이나 직접적인 참여와 실험을 통해 여섯 살이 되기 전에 성적 지식을 습득하지 못한 수컷 침팬지는 아무리 성적으로 흥분 되어도,또는 암컷이 아무리 협조적이어도 암컷과의 교미에 성공하지 못한다. 중요.한 시기에 반응 능력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해 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붉은털원숭이나 짧은꼬리원숭이 같은 영장류는 사로잡힌 상태에서 는 선천적으로 타고나지 않은 다양한 성행위를 한다. 자위행위, 동성애, 이성애 기피 따위의 off상태에서는 보이지 않던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런 행위를 하는 이유는 사로잡혀 있는 것이 지루해서일 수도 있다. 그 래서 그런 행위는 진정한 성적 본성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그런 행위는 2,000만 년 전에 존재했던 영장류와 비슷한 오늘날 의 영장류의 경우에 선천적으로 타고난 생물학적 성향이 사회적으로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off에서의 성행위를 관찰해 보면 동물의 성적 본성이 가변적임을 확인할 수 있다. 대형 유인원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종은 자이르 중부에 서 사는 피그미침팬지이다. 피그미침팬지의 생태가 알려진 것은 최근이 었다. 그 이유는, 피그미침팬지의 생태가 영장류 사회에서나 인간 사회 에서나 수컷의 지배가 자연스럽고 보편적 이라는 기존의 관념에 어긋나 기 때문일 것이다. 이 방면의 전문가들은 흔히 인간을 침팬지나 고릴라에 비교해 왔다. 우리 인간이 이 두 원숭이와 진화상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 만, 유전학적으로는 인간과 두 원숭이 사이의 유사성보다는 두 원숭이 사이의 유사성이 더 크다. 그러나 침팬지도 두 가지 이상의 종이 있다. 피그미침팬지는(다른 침팬지들보다 몸집이 작은 것은 아니다) 실은 별 개의 종으로서 다른 침 팬지들보다 걸음걸이가 더 똑바르고 골격이 덜 전문화되어 있다. 피그미침팬지는 400만 년 전의 초기 오스트랄로피테 쿠스계와 가장 비슷한 생물이다. 앨리슨 졸리(Alison Jolly)를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진화학자들이 피그미침팬지를 오랫동안 무시해 온 보다 큰 이유는 우 리 인간의 성적 청교도주의 때문이다. "피그미침팬지의 난잡한 성행위 에 비하면 소돔과 고모라는 교구 목사의 다과회에 지나지 않는다. "는 것이다. 피그미침팬지는 거의 때를 가리지 않고 성행위를 한다. 성숙한 수컷과 암컷이 성행위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암컷끼리 서로 성기를 비 벼 대곤 한다. 수컷들은 '음경 펜싱'을 즐기거나 서로 부풀어오른 엉덩 이를 비벼 댄다. 인간이 볼 때 가장 놀라운 것은,성숙한 피그미침팬지 가 새끼와 성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흔히 어미가 자신의 어린 새끼와 성 행위를 한다. 이때 유일한 금기는 여섯 살이 넘은 수컷 새끼와의 성행위 이다. 피그미침팬지 새끼에게 섹스는 일상적인 생활의 일부이며 애정 표현,장난,학습 등 성장의 모든 요소와 결합되어 있다. 피그미침팬지 에게는 섹스가 사회적 유대의 유지에 필요한 일상적 이고 자연스러운 활동인 것 같다. 그렇다고 인간의 성적 본성도 피그미침팬지와 같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문화적 제약만 없다면 우리도 피그미침팬지처럼 행동할 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피그미침팬지의 성생활로 미루어 볼 때 우 리의 먼 조상도 그처럼 다양한 성행위를 즐겼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실제로 피그미침팬지의 성행위 가운데 인간이 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인간이 피그미침팬지의 행동을 해석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 그 대표적인 본보기가 먹 을 것과 섹스의 교환' 이론이다. off에서의 수컷 피그미침팬지는 먹을 것을 가지고 암컷에게 접근해서 함께 나누어 먹고 교미를 한다. 전문가 들은 이것을 일종의 거래라고 해석한다. 인류의 진화와 심지어 현대인 의 행동도 이런 거래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 다. 로버트 제이 러셀(Robert Jay Russell)은 이것을 가리켜 '여우원숭 이의 유산'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먼 조상의 하나인 여우원숭이에게서 볼 수 있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멋진 남자에게서 고급 식당의 저녁 식사를 대접받고 성관계를 갖는 여자는 모두 창녀라 고 말하는 것과 같다(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여자 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섹스를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는 점에 서 성 차별주의적인 해석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섹스를 제공하지만 남 자는 여자에게 섹스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피 그미침팬지를유심히 관찰해 보면,수컷이 암컷에게 먹을 것을함께 먹 자고 제의할 뿐만 아니라, 섹스도 함께 즐기자고 제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보이지 않는섹스 ] 현대인의 성행위와 대형 유인원의 성행위 사이의 가장 두드러진 차 이는 은밀함이 다. 영장류도 때로는 성행위를 은밀하게 하곤 하지만, 거 의 항상 다른 개체들이 보고 듣는 가운데서 성행위를 한다. 그러나 인간 의 성행위는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을 만큼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어네스틴 프리들(Ernestine Friedl)은 「보이지 않는 섹스 (Sex the Invisible)라는 논설에서 세계 여러 민족에 관한 민족학 서적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은밀한 성교는 거의 보편적 이라고 할수 있다. "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런 은밀함에 관한 여러 가지 사회생물학적 인 설명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녀의 전제는 증명되지 않는다. 민 족학 서적 그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도인 상인들이 1400년 부터 바닷길을 탐험하기 시작하면서 쓴 세계 여러 나라의 원주민에 대 한 이야기에는 공개적인 성행위에 대한 내용이 많다.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를 개척하고 기독교를 전파하기 전에는,세계 의 여러 민족이 적어도 때로는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겼던 것으로 보인 다. 특히 휴런족 같은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여러 상 대와 섹스를 즐겼던 것 같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그런 문란해 보이는 성 생활을 엄격하게 통제했기 때문에 19세기에 인류학자들이 그런 사회를 연구하러 갔을 때에는 이미 문화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성생활이 달라 진 것이다(달라진 것이 아니라면 유럽인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숨겼을 것이다). 그러나현대 서구사회의 경우 성행위를 은밀하게 한다는 프리들의 생각은 틀렸다. 비록 공개적인 성행위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룹 섹스도 있고 라이브 쇼나 포르노 비디오처럼 수많은 사람 에게 드러내 보이는 섹스도 있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성행위를 볼 수 있는 사회도 많다. 진 리들로프 (lean LiedlofD는 『연속 개념』(The Continuum Concept)에서 아마존 강 유역에 사는 예콰나 인디언은 어린아이가 부모의 성교를 지켜보는 것 을 당연하게 여기며,그런 행위를 보지 못한 아이는 부모와의 '중요한 정신생물학적 유대'를 구축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예콰나 인디언은 아 이들에게 사냥하는 법도 가르친다. 한 문화에서 받아들여지는 풍습이 다른 문화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으며 전혀 다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보통 작은 아파트에서 살 기 때문에 아이가 부모의 성행위를 목격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 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를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일부 러 성행위를 보게 하는 것은 아니다. [ 실력 행사 ] 영장류 사회에서는 학습을 통해 성행위를 배운다. 또한 동성애를 즐 기고 '쾌락을 위한 섹◎를 즐기는 고등동물이 많다. 그럼에도불구하 고 사회생물학자들은 성행위가 전적으로 생식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 다. 이를테면, 침팬지 수컷이 동성애를 하는 것은 수컷끼리의 결속을 다 지거나 다른 수컷에 대한 복종의 뜻이라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서, 생식 을 위해 암컷에게 접근하는 한편 새끼가 지니고 있는 제 유전자를 지키 기 위해 동맹 관계를 형성하거나, 서열을 결정하는 과정의 하나라는 것 이다. 그러나 섹스가 실력을 과시하기 위한 행위라는 이론도 문제가 있다. 사회생물학자들은 흔히 남자는 선천적으로 여러 상대와 성관계를 가지 려 하고 여자는 선천적으로 한 상대와만 성관계를 가지려 한다고 생각 한다. 로빈 베이커는 『정자 전쟁』(Spem Wars)에서 남자는 보통 평생 동안 열두 명의 여자와 성관계를 갖고 여자는 여덟 명의 남자와 성관계 를 갖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짝이 맞지 않기 때문에 모순이다. 베이커의 설문조사의 또 다른 문제점은, 남자는 흔히 과장하려는 경향 이 있고여자는수치스러운사실을숨기려는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 렇지만 현대 서구 사회가 성관계 횟수에서가 아니라 성관계에 내포된 힘의 관계에서 기형적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사회생물학에 따르면, 남자가 여자를 강간하는 것은 폭력적이고 범 죄적이긴 하지만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려는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민족학자 로빈 던바(Robin Dunbar)의 주장에 따르면, 강간은 다른 방법 으로는 섹스 상대를 구할 수 없는 신체적으로 열등한 남자가 쓰는 진화 학적으로 그럴 듯한 방법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로빈 베이커는 여자 는 유전학적인 필요에 따라 생식 능력이 평균 수준을 넘는 남자를 찾게 마련이라고 주장한다. 참으로 놀라운 이론이므로 좀더 자세히 소개해 보겠다. 베이커는 이렇게 말한다. "강간범은 평균 수준이 넘는 생식 능력을 갖고 있으므로, 여자의 몸이 강간범의 유전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한 번 밖에 없는 기회가 왔을 때 흔쾌히 그 유전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 다. 그러나 여자에게는 생식 능력이 가장 뛰어난 강간범의 유전자를 받 아들이는 것이 생식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만일 곧 붙잡히고 말 무능 력한 강간범의 아이를 임신하면,남자아이일 경우 남자로서 열등한 특 성을 물려받은 아이가 태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영리하고 결단력이 있 으며 유능한강간범이 아니면 몸을 허락하지 않으려 하게 마련이다. 그 래서 극소수의 여자만이 강간을 당하고, 강간을 당한 여자는 거의 어김 없이 임신하는 것이다. " 해괴할 뿐만 아니라 전혀 이치에도 맞지 않는 이론이다. 강간을 유전 학적으로 우월한 남자의 행위로 여기는 것은 말도 안 되지만, 억지로 뜯 어 맞추자면 그런 짓을 저지르는 용기가 뛰어나다고나(현대 사회는 어 떤 행위에서건 그 성공을 우선시하므로) 할까? 게다가, 강간을 당하는 극소수의 여자가 알려지는 것은 강간범이 붙잡혀 기소되기 때문이다(런 던의 강간위험 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강간범이 붙잡히는 확률은 천 명에 한 명밖에 안 된다). 그리고, 강간을 당하여 임신한다고 해도 대부 분 이 아이를 낙태시킨다. 그러므로 강간과 생식의 연관성에 대한 이 연 구는 강간이 힘을 과시하고 쾌락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무시하 고 있다고 하겠다. 강간은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려는 의미 있는 행위 가 결코 아니다. 전쟁 중에 상대편 여자들을 임신시킬 목적으로 강간을 저지르는 곳 도 있다. 최근에 벌어진 보스니아 전쟁에서 세르비아인들은 사회를 붕 괴시킬 목적으로 회교도 여자들을 강간하고 있는 것이다. 강간당한 여 자는 추방되기 때문이다. 여자들과 아이들이 있는 곳을 무차별로 폭격 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세르비아계 혈통을 물려받은 아이들을 낳 기 위해서가 아니다. 전시에나 평시에나, 강간은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 서 잘 자라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성 행위이다. [ 생물학에 거역한다 ] 피임은 사회생물학자들의 이론을 완전히 뒤집어 엎는다. 인간에게는 학습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각은 바뀔 수 있다. 의식적으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사고력의 발달은 특정 유전자의 발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이를테면, '게이 유전자'가 있다고 가정하듯이 '자유의지 유전자'라는 것이 있다고 가정해 볼수 있을 것 이다). 그러나 그런 사고력은 다른 유전자들의 결정을 가로막는다. 이를 테면,어떤 일을 하려는 '본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정반대되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은 피임을 함으로써 의식적으로 유전자에 거역할 수 있다. 독신 생활을 할 수도 있고, 이성과 성관계는 갖지만 아이를 낳지 않을 수도 있다. 피임은 고무로 만든 콘돔이나 은박지에 싸인 알약 같은 최근의 발 명품이 아니다. 우리 몸은 이미 문화적으로 촉진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피임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 밖에도 자연에는 여러 가지 피임 방법이 있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면 생리가 억제된다. 아이가 젖을 빨면 시상하부 에서 분비되는 마취성 물질이 증가하여 배란에 필요한 호르몬의 생성 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생리는 아이를 낳은 지 여섯 달 정도 지나면 다 시 시작되지만, 아이에게 젖을 계속 먹이면 배란과 새로운 수태가 지연 된다. 생리를 하지 않으면 생리할 때 빠져나가는 철분이 젖으로 들어가 는 이점이 있다. 갓난아기를 잘 키우는 데 전념해야 하는 것도 아이를 낳자마자 다시 임신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이다. 아이에게 자신의 젖을 먹임으로써 임신을 피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피임법이다. 여자들은 아이에게 반드시 자신의 젖을 먹 이며, 그 젖은 공짜이다. 옛날 사람들은 이 방법을 알고 지금보다 더 보 편적으로 이용했다. 그래서 히포크라테스의 경구50번을 보면 "여자의 생리를 억제하려면 젖꼭지에 되도록 큰 그룻을 갖다 대라."라고 되어 있고, 39번에도 "임신하지도 않았고 아이를 낳지도 않은 여자가 젖이 나오면 생리가 멈춘 것이다. "라고 되어 있다. 플로베르(Flaubert)의 소 설 『보바리 부인』(Madame Bovaw)에서도 나오듯이, 여자는 몸을 파는 한편 젖을 먹이는 유모로도 일할 수 있다. 선사 시대 사람들은 정자를 빨아들이는 자궁 경부, 태아의 성장과 인 공 유산, 수유를 이용한 생리 억제 등에 대한 지식으로 임신을 조절했을 것이다. 그들은 또 가성(苛性) 페서리나 차단식 페서리를 알고 사용했 다. 기원전 1900년 경의 고대 이집트의 부인과 의학 기록을 보면 천연 탄산소다와 악어 똥을 섞어 만든 약품이 나온다. 치음제도 되고 살정제 도 되는 약이었다. 기원전 1550년에서 기원전 1500년 사이에 쓰여진 또 다른 기록을 보면 정자를 죽이는 성분이 들어 있는 아카시아 수지로 만든 페서리도 나와 있다. 고대 로마에서는 질 속에 레몬 반 개를 집어 넣어 피임하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레몬이 광범위하게 재배되기 시작 한 것은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에서부터 였다). [ 잊혀진 열매 ] 식물들 가운데에는 인간의 생식 기능에 호르몬 같은 작용을 하고 경 구 피임약이나 초기 낙태'수정 란이 자궁에 착상하는 것을 막는, 성관 계 직후에 쓰는 피임약)으로 쓰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이런 식물은 흔 할 뿐만 아니라 약효도 뛰어나기 때문에 선사 시대부터 사용되었을 가 능성이 많다. 그러나 이런 가정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은 간접적인 증거밖 에 없다. 그런 식물들이 포함하고 있는 호르몬 성분,오늘날에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널리 사용되었다는 사 실, 그리고 영장류를 비롯한 동물이 사용할 가능성 등 네 가지가 그 증거이다. 식물이 동물과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는 성 호르몬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1933년에, 볼렐슬락프 스카르진스키(Boleslaw Skarzynski)가 버드나무에서 에스트로겐과 비슷한 수산화에스트린이 라는 물질을 발견하면서 이 사실이 과학적으로 인정되기 시작했다. 같 은 해, 아돌프 부테난트(Adolf Butenandt)와 H.야코비(H. Jacobi)는 대 추야자와 석류에서 여성 호르몬을 추출했다. 실제로 식물에는 인체에 영향을끼칠 수 있는 복합화학물질이 많이 들어 있다. 이러한물질들 은 생리를 중단시키거나 촉진시킬 수 있으며 생리전 증후군을 완화시 킬 수도 있다. 피임약이나 낙태 약으로 쓰일 수도 있으며 최음제로 쓰일 수도 있다. 서양 학자들은 윤리적 가치관과 편견 때문에 과거 및 현재의 여러 전 통 사회에서 쓰여 온 자연적인 생식 조절법을 과소평가해 왔다. 현대 서 양의 식물도감과 약전(藥典)에는 성 기능에 대한 식물의 영향은 나와 있지 않고 "임신 중에는 쓰지 말아야 한다. "는 공식 같은 경고문만 나와 있다. 효과가 뛰어난 초기 낙태약의 하나인 own 당근은 최근의 조사에 서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 주 서부, 버지니아 주 서부, 테네시 주, 인디 애나 주 등지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이 밝혀 졌음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이후로는 어떤 의학 관련 서적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식물학자들과 사회인류학자들과 민족학자들 가운데서 그런 민간 요 법을 쓰는 사람들의 성생활에 대해 조사한 사람은 극소수였다. 게다가, 연구 주제가 여자의 몸과 생활에 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들 대 부분이 남자였다 약초 처방은 산파들과 여자치료자들의 비방의 하나 로 좀처럼 공개되지 않는다. 태국 북부의 고산 지대에서 사는 부족들을 오랫동안 연구한 민속식물학자 에드워드 앤더슨(Edward Anderson)은 '수태, 임신, 출산 그리고 출산 직후 몇 주 동안의 중요한 시기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거의 모든 여자들이 나나 남자 통역 자들과는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다. 남자들도 이 시기에 여자들이 쓰는 식물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 고 있지만,이 문제는 순전히 여자들만의 영역인 것 같다. 태국인 동료로서 태국 북부 지방 말을 잘 하는 파얍 대학교의 두앙두엔 푸차로엔(Duangduen Poocharoen)과 태국어를 잘 하고 내 조수로 일한 딸 에리카(Erica)는 이 문 제에 관해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식물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은 인도에서 비롯되었다. 동종 요법과 자 연 요법을 바탕으로 하는 인도의 이른바 아유르베다 요법(Ayurvedic medicine)은 약 75종의 식물을 이용하는데, 이 가운데 28종은 낙태 효 과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가운데 10종은 생리 촉진제로도 쓰인다. 따라서 이것들은 생리를 촉진시키는 다른48종의 식물과 함께 성관계 직후나 성관계 후 생리가 없을 때 초기 낙태 약으로 쓸 수도 있다. 이런 식물들의 섭취 방법은 다양하다. 씨,열매,기름,뿌리,껍질,꽃 그리고 대나무의 경우에는 마디를 먹는다. 좌약처럼 질 속에 넣는 경우 도 있고,달여서 마시는 경우도 있다. 두 가지 방법을 병행하는 경우도 있다. 어쨌거나 복용량과 생식 기능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식물들 가운데에는 약효는 각기 다르지만 여자의 경우 젖이 잘 나오게 하거나 출산 이후 자궁을 수축시키거나 구토증을 완화시키고 남자의 경우 발 기 불능 같은 성 기능 장애를 치료하며, 여자와 남자 모두에게 최음제로 쓰이는 것도 많이 있다. 이를테면, 사프란에는 적게 쓰면 생리를 촉진시 키고 생리통을 완화시키지만, 많이 쓰면 최음 효과와 낙태 효과가 있는 피크로크로신이라는 물질이 들어 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이런 식물들 에 대한 임상실험이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어서 그 유효 성분이 무엇 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말레이 반도 등지의 열대 다우림 지역에 사는 민족들도 여러 가지 식물을 약으로 쓴다. 중앙 아시아의 대초원에서는 茴香)의 일종인 페룰라 모스차타를 낙태 약으로 쓴다. 이 지역에는 비슷한 약효가 있는 향쑥도 자라고 있다. 미국 뉴멕시코 주의 남아메리 카계 사람들은 풀의 일종인 루타의 잎을 전통적인 낙태 약으로 쓴다. 유 럽쪽 북극에 사는 사미족은 나무 껍질에 끼는 이끼를 피임약으로 쓴다. 한편, 기후가 온화한 지방에서 식물을 피임약으로 썼다는 증거는 히포 크라테스와 소라누스(Soranus) 등이 남긴 유럽의 의학 관련 문헌에 남 아 있다. 히포크라테스는 own 당근의 씨를 먹으면 박하를 달여 마실 때와 마 찬가지로 임신이 예방되거나 중단된다는 것을 알았다(기원전 421년에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도 이런 말을 했다). 1986년에 실시된 실 험에 따르면,own 당근에는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하게 하는 호르몬인 프로게스테론의 생성을 억제하는 물질이 들어 있다. 따라서 성관계 직 후의 낙태 약으로 쓰일 수 있는 것이다. 약효가 가장 강한 식물은 기원전 7세기에 고대 그리스인들이 북아프리카 해안에서 발견한 큰회향일 것 이다. 이것은 피임 효과가 매우 뛰어나고 비싼 값에 팔렸기 때문에 3세 기 또는 4세기 말에 멸종되었다. 큰회향의 유효 성분은 페루졸이라는 물질이었는데 이 페루졸은 쥐를 대상으로 한 임상 실험에서 성교 후 사 흘 동안 임신을 억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몰業沒蘂)과 향쑥과 루타도 낙태약으로 쓰였다. 이런 식물들은 값이 비쌌지만 아이를 한 명 더 키우는 것보다는 훨씬 싸다. 폴리비우스(Polybius)가 기원전 2세기에 쓴 기록에 따르면, 그리 스 사람들은 아이를 하나 또는 둘로 제한했다. 갓난아기를 죽이는 방법 을 썼을 수도 있겠지만 의학 문헌에는 그런 기록은 없다. 왜곡된 성비를 나타내는 인구통계적 증거도 없다 영아 살해 풍습이 있는 사회에서는 보통 남자아이보다 여자아이를 더 많이 죽이기 때문에 성비의 불균형 현상이 나타난다). 고고학적으로는 따로 만들어진 신생아 무덤을 보고 영아 살해 풍습이 있었는지 추정할 수 있지만 흔한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여러 가지 피임법을 썼던 것 같다. 2세기 초에 쓰여진 소라누스의 「부인과 의학」(Gynecology)이라는 논문을 보면 그는 피임 과 낙태를 구별하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열거하고 있다. 소라누스가 열 거한 10종의 식물 가운데 8종은 현대에 이루어진 실험에서도 확실한 약효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옛날 여자들과 세계의 여러 전통 사회의 여자들이 여러 가지의 산아 제한법을 쓴 것은 분명하지만, 남자들이 어떤 예방 조치를 취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콘돔을 만드는 재료와 기술이 있었으리라고 추 측할 수는 있지만, 히포크라테스가 남긴 문헌에는 남자의 피임법에 대 한 기록이 없다. 다만 히포크라테스는 어떤 실험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이런 말을 했다. "파이프 끝에 주머니를 씌운다고 가정하자. 이 파이프 를 통해 주머니를 채우는 것이다. " 바로 콘돔의 원리이다. 1세기에 디오 스코리데스(Dioscorides)가 남긴 의학 문헌을 보면, '페리클리메논'이라 는 식물을 달인 물을 37일 동안 마시면 남자의 수정 능력이 없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 페리클리메논이 어떤 식물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인동덩굴이었을 것이다. 현대의 민속학 서적에 따르면,아마존 강 유역에 사는 데니 인디언들은 경구 피임약을 쓰는데 남자나 여자가 쿠라레와 비슷한 식물을 복용하면 피임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는 남자에게만 효과가 있고 약 여섯 달 동안만 일시적인 불임증이 지속 되는 것 같다. [ 임신 중절을 지지한 선사 시대 사회 ] 섹스의 역사에 대한틀에 박힌 이론이 있는데 바로 원시인은섹스와 아기의 연관성을 몰랐다는 것이다. 레이 태너힐(Reay Tannahill)은 『역 사 속의 섹스』(Sex in Histof)의 첫 페이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농경 생활이 시작되기 전의 선사 시대 남자들은 아이를 낳는 일에서의 자신의 육체적 역할을 전혀 몰랐다. " 또한 영국의 유명한 과학자 제임 스 바이먼트(James Biment) 경도 이렇게 말했다. "석기 시대 사람들은 섹스와 아홉 달 뒤에 생기는 일의 연관성을 몰랐던 것 같다. 아홉까지 셀 수나 있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선사 시대의 삶은 인구를 제한할 필요가 없고, 그 가능성조차 생각할 여지가 없는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 다고 생각한다. '생존을 위한 투쟁'은 1798년에 『인구론』(Essay on Population)의 초 판을 펴낸 토머스 맬서스(Thomas Malthus)가 만들어 낸 말이다. 맬서 스는 인간의 수는 자연적으로 증가하며 전쟁, 기근, 질병, 재난, 부도덕 한 행위에 의해서만 감소한다고 주장했다. 『인구::歌의 재판에서는 인구 제한의 또다른 요소로서 '도덕적 억제',즉결혼연령의 연기와성욕의 엄격한 절제를 들었다. 맬서스는 마녀 사냥이 시작된 지 300여 년이 지 난 뒤에 살았다. 그 시대는 여자는 의과 대학에 다닐 수 없었고 식물을 이용한 여자들의 전통적인 피임법은 이미 유실되었거나 지하로 숨었을 때였다. 사냥을 하는 사람들의 수가 그의 이론처럼 증가하지 않은 이유 에 대해서 맬서스는 그 사람들은 서로에게 큰 열정을 느끼지 못했다는 궁색한 설명을 했다. 그러나 수렵채취 사회에도 열정은 있었다. 서구의 식민주의자들이 남태평양에서 만난 원주민들은 섹스를 즐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 하게도 인구는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영국의 인 류학자 조지 피트리버스(Georgepitt-Rivers)는 1927년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유럽의 선교사들과 정부 관리들은 미혼 여자들이 신비로운 피임약을 사용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무의 잎이나 뿌리를 거미 알이나 뱀 껍질 같은 마법 의 물질과 섞어 만든 약을 마시는 것이다. 나도 멜라네시아나 파푸아의 주술 사들과 告은 여자들에게서 그런 마법의 약을 얻었지만, 그런 것이 정말로 효 과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가장 영향력 있는 인류학 이론은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의 이론 이다. 그는 1929년에 쓴 『멜라네시아 서북부 야만인들의 성생활』(The Sexual 곤꼰 ◎ 點cages in North-Western Melanesia)에서, 트로브리안 드 섬의 원주민들이 난잡한 섹스를 즐기면서도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 를 피임을 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성생활을 절제 해야 한다고 말하면 그들은 몹시 싫어하거나 비웃는다‥‥‥그들은 질 외 사정을 하는 것도 아니고 화학적 또는 물리적 피임법에 대해서 아는 것도 아니다. " 멜라네시아에 살던 유럽 사람들은 말리노프스키의 이론을 반박했다. 그들은 원주민들이 약초 요법을 사용한다고 생각했다. 한 관리는 이렇 게 말했다. "여자는 성관계를 갖고 나서 남자의 정자플몸딕斗으로몰아 내는 특별한 배출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여러 원주민에게서 들었다. 그런 힘은 사용할수록 더 세질 것이다.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 다. " 이것은 히포크라테스가 묘사한 여자의 임신 조절 능력과 거의 똑 같다. 말리노프스키는 트로브리안드 섬과 안다만 섬의 원주민들이 임신의 생리학을 모른다고 주장했다. 아이는 성령이 자궁 속으로 들어가서 생 기는 것이며, 정자는 태아를 성장시키는 영양분일 뿐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믿는다는 것이 정자와 출산의 연관 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른 어떤 인간 사회와 마찬가 지로 그들 역시 처녀로 남아 있으면 임신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생식에는 반드시 남자의 오르가슴이 개입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남자 동성애나 여자 동성애, 무생물을 이용한 섹스, 인간과 동물의 섹스 따위로는 임신과 그에 따른 출산이 이루어지 지 않는다. 동양이나 서양이나,생명의 탄생에는 신이 개입된다고 믿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나 또한 생명의 탄생에서 육체의 역할을 부정하 지는 않지만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태도라고 생각 한다. 수컷의 성행위를 그에 따른 2세의 생산과 연관된 행위라고 가정할 때, 동물의 수컷은 후각을 비롯한 감각을 통해 새끼에게서 자신의 뭔가 (현대적 용어로 말하자면 자신의 유전자)를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 아버지도 생김새뿐만 아니라 후각으로 자식을 인식할 수도 있다. 동물의 암컷은 발정기에 수컷과 교미하면 임신한다는 것을 본능 적으로 아는 것 같다. 자신의 몸에 대해 예민한 인간의 암컷은 자신의 임신 순간을 정확하게 안다. 자신이 언제 배란했고 언제 배우자의 정자 를 받아들였으며, 언제 수태에 따른 호르몬 분비 작용이 시작되었는지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사 시대 사람들은 성행위와 아이의 출산 이 서로 무관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하는 것은 억지일 것이다. 생식학적으로 말해서 인간은 崙-전략가(K-strategist)'이다. 다시 말 해서,아이는 적게 낳지만 아이에게 투자를 많이 한다. 피임은 아이를 갖지 않고 성적 쾌락을 즐기기 위한 방법일 뿐만 아니라 K-전략의 일부 이다. 자식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출산의 시기부터 자식의 수까지 모든 것을 의식적으로 조절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며 진화상의 성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특정 식물들이 인간의 생식 기능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세계의 거 의 모든 민족이 알고 있었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도시화 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거의 모든 인간이 金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수 렵채취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수만 가지의 식물성 화합물을 접하게 된 다. 이들은 보통 200종의 먹을 수 있는 식물을 이용하며, 이 식물들에는 각각 약 200가지의 복합 유기 화학 물질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상당수는 특정 식물에만 있다. 그러므로 비슷한 종의 식물이라도 그 효 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 이를테면, '독성을 가진' 어떤 식물(Aneilema lineolatum)은 특정 채소(Aneilema nudinorum)와 친족이다. 몇몇 지역 에서는 식물들의 40퍼센트가 성 기능에 영향을 끼치는 에스트로겐 성 분을 함유하고 있다. 어떤 식물들은 만지기만 해도 인간의 성 기능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를테면, 로마 시대부터 술을 빚는 데 쓰여 온 홉(HusrfEius lupullfs)은 남자의 경우에는 성욕을 감퇴시키고 여자의 경우에는 생리를 중단시킨 다고 알려졌다. 그 이유는 여성 호르몬이 함유된 흡의 기름이 피부에 스 며들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인간은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 가지 식 물의 특성에 대해 알게 되었겠지만, 식물이 동물에게 끼치는 영향을 보 고 알기도 했다. 이를테면, 농부들은 가축에게 담쟁이덩굴 같은 특정 식 물을 먹이면 생식이 중단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담쟁이덩굴에는 에 스트로겐 성분이 함유되어 있다. 동물도 그런 식물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몇몇 설치동물은 먹이가 달 라지면 생식이 촉진된다. 특히, 짖는 원숭이와 같은 영장류는 생식을 촉 진시킬 목적으로 먹이를 바꾸는 것 같다. 침팬지는 임신 조절이 목적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식물을 약용으로 쓴다 한편, 오랑우탕은 입술이 검 게 변하고 피부가 벗겨지게 하는 등의 독성을 가지고 있는 특정 나무 (Melanochyla, Melanorrhoea, Dispyros)의 잎과 껍질과 열매를 일부러 먹는다. 영장류 동물학자 폴 베이시(Paul Vasey)는 그런 독성이 자궁 내 벽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오랑우탄 사회에서 강간이 일어난 다는 사실로 볼 때, 암컷이 새끼를 낙태시키기 위해서 그런 식물을 먹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증거로볼 때,나는선사시대 사람들이 이미 임신을조절 했으며 섹스와 생식을 구별했다고 생각한다. 고대 이집트인과 고대 그 리스인은 수천 년 전에 피임법을 썼다. 청동기 시대에 유럽과 근동에서 기록된 여러 가지 기술은 현대에 와서 실험을 통해 그 효과가 입증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보다 훨씬 더 옛날에 이미 그런 기술이 개발되어 있었 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그 증거가 없을 뿐이다. 약초는 일찍 이 4만 년 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피임이나 낙태 효과가 있는 식물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아직 없다. 생식 조절은 우리의 진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성적 선택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게 했으며, 아이들에게 더 많은 문화적 투자를 하게 했다. 선사 시대 사회는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잘 알고 있었 을 것이다. 이성과의 섹스와 그에 따른 임신의 관계를 알았다는 사실은 곧 의식의 진화를 뜻한다. 그러나 모든 선사 시대 사회가 다 똑같지는 않았다. 어떤 사실을 잊어버리거나 문화적으로 묻어 버리는 경우가 항 상 있기 때문이다(인간은 원래 이런 일에 능하다). 「유기체의 신비」라는 영화를 검열할 필요를 느끼는 사회라면 그 구성원들이 선천적으로 가 지고 있는 신체에 대한 지식을 말살할 수도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전승 되어 온 여자 치료자들의 지혜를 사악한 미신으로 간주했을 수도 있다. 사회적 목적으로 섹스에 대한지식과 에로틱한 예술을 통제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3만여 년 전의 마지막 빙하기에 이미 시작된 일이다. [ 석기 시대 ] 선사 시대의 우리 조상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썼다. 말은 주관적인 표현을 가능하게 하고 공통된 생 각의 발달을 가져왔다. 돌로 만든 도구 같은 물건의 대칭성과 표준화는 공통된 미적 감각을 갖게 했다. 주체와 객체가 만나는 지점은 인체였다. 개인인 동시에 공인이며,자연적 존재인 동시에 문화적 존재인 인간은 육체를 이용하여 몸짓과 표정으로 자신의 내면을 표현할 수 있었다. 점 점 털이 없어짐에 따라 인간의 몸은 하나의 캔버스가 되었다. 헤너 같은 식물로 만든 화장품을 피부와 머리에 바르기도 하고 눈동자를 확장시 키기 위해 벨라도나를 사용하기도 했다. 또 석간주 같은 광물성 염료는 피부를 아름답게 꾸미는데 쓰였다. 옷과 장신구는 몸의 특정 부분을 가 리거나 강조했으며 기분과 마음의 변화를 나타냈다. 몸에 칼자국을내 거나 문신을 새겨 영구적인 변화를 비할 수도 있었다. 나는 인간이 알몸으로 된 것이 몸을 치장하고 옷을 입기 시작한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육체 미술은 일종의 자기 표현으로 쓰 인 의식적(儀式的) 언어였다. 또한 통과 의례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신분 에 맞는 행동과 그 위반에 대한 벌의 개념을 갖게 해 주었다. [ 미술의 기원 ] 우리 조상이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기 시작한 것은 80만 년 전에서 23 만 3,000년 전 사이이다. 그 증거는 손으로 만든 사람 모양의 작은 조각 물로서, 1981년에 이스라엘의 골란 고원에 있는 베레카트람(Bierekhat Ram)이라는 곳에서 두 현무암 덩어리 사이의 퇴적층에서 발견되었다. 발굴자인 나마 고렌인바르(Naama Goren-Inbar)의 말에 따르면, 여자 의 형체와 비슷하게 생긴 돌멩이를 골라 홈을 파서 머리와 팔의 윤곽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젖가슴이 불룩 튀어나온 것 같기도 하지만,그 이상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미술적 이미지를 이해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30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증 거는 남아프리카의 마카판스가트(Makapansgat)에 있는, 오스트랄로피 테쿠스군이 살던 동굴 속의 퇴적물에서 발견된 사람의 얼굴처럼 생긴 돌멩이이다. 이 돌멩이는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으로서 두눈과머리털 손과 입이 있다 이것을 동굴로 가져온 오스트랄로피테쿠스군도 이런 모양을 알아 보았을 것이다. 마카판스가트의 돌멩이나 베레카트람의 조각물이 원시 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 주지는 않는다. 전자는 기이하게 생긴 자연 그림 斗1 이스라엘 베레카트람에서 발견된 23만 년 된 조각물 물이고,후자는 너무 조악하게 만든 것이어서 사람이라기보다는 거의 자연발생적인 돌멩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둘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전자에서는 희미한 자의식을 엿볼 수 있고 후 자는 원시인들이 서로의 모습을 조각으로 묘사했다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원시인들이 25만 년이 지나도록 남아 있을 만큼 단단한 돌로 베레카트람의 조각물 같은 것을 만들 수 있었다면, 혼처럼 가공하기 쉬 운 재료로는 무엇을 만들 수 있었을까? 또 자신의 몸을 가지고는 무엇 을 할 수 있었을까? 털 없는 피부가 그림을 그리는 캔버스가 되었으리라는 추측은 채색 재료가 발견되지 않는 한 증명할 수가 없다. 3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 되는 남아프리카의 중석기 시대 유적지에서는 석간주가 발견되고 있다. 고고학자 아이앤 와츠(lass Watts)는 기원전 13만 년에서 11만 년 사이 에 석간주가 사용되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석간주는 이 시기 이후 갑 자기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짐승 가죽을 보호하는 데 쓰였다는 것 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석간주의 채색 성분인 산화철이 가죽의 부패를 일으키는 콜라겐 분해 효소의 활동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바 나지역의 수렵채취 사회에서는 가죽으로 만든 물건의 수명이 콜라겐 분해 효소가 가죽을 부패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짧다 그래서 와츠 는 여자들이 생리 중인 것처럼 가장하는 데 석간주를 썼을 것이라고 주 장한다. 그의 이론은 인간의 문화적 진화가 '섹스 파업(sex strike)'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이스트 런던 대학교의 크리스 나이트(Chris Knight) 의 이론과 비슷하다. [ 섹스파업 이론 ] 마르크스주의와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이기적인 유전 자(selfish gene)' 이론을 바탕으로 한 섹스 파업 이론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의 중심에 생식의 갈등이 있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선사 시대 사회는 원시적인 공산주의 사회였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도시와 문자가 생겨남에 따라 계급이 등장하고 갈등과 사회적 모순이 생겨난 것이다. 수백만 년에 걸친 인류의 역사가 이미 밝혀진 지 금,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인류의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이 루어진 사회적 변화에 대해 그럴 듯한 이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섹 스 파업 이론은 남자와 여자의 유전자를 대립 관계에 있는 두 계급 요 소로 보려는 교묘한 시도이다. 사회생물학자들과 사회인류학자들 가운데에는 섹스 파업 이론을 받 아들인 사람이 많지만, 고고학자들 가운데에는 많지 않다. 섹스 파업 이 론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선사 시대의 여자들은 아이 때문에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할 수 없게 되자 밖에 나가서 먹을 짐승을 사냥해 올 남자가 필요해졌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만이 있 었다. 첫번째는 여러 여자가 한 남자를 공유하는 일부다처 가정을 이루 고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는 남자의 부양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남자들이 무거운 책임을 피해 집에 들어오지 않고 밖에 서 돌아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들은 성실한 한 남자의 부양 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우선 그들은 생리 주기를 일치시 켜야 했다. 모두 동시에 임신함으로써 남자들이 여러 아내를 거느리지 못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왜 이 방법이 효과가 있는지는 잘모르겠 다). 두 번째 선택은 주기적으로 성관계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 시기 는 생리 중일 때였다. 이 이론에 대해 긍정적인 리버풀 求학교의 로빈 던바는 이렇게 설명 한 바 있다. 원시 인류의 식생활에서 고기가 점차 중요한 요소가 됨에 따라, 머리가 점 점 더 커지는 자식을 키우는 여자들은 갈수록 남자들의 사냥에 더 많이 의존 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영장류의 수컷이 다 그렇듯이 남자들은 자식 을 키우는 여자들의 문제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섹스였다. 그래서 그들은 고기를 주고 섹스를 즐길 수 있다면 언제든지 기꺼 이 그런 거래를 하려 했다(이른바 인류의 사회적 진화에 대한 '매춘론' ). 그러나 생식의 책임을 진 여자들은 더 많은 고기가 필요해지자 '섹스 파업'이라는 조직적인 전략을 쓰게 되었다. 석간주도 이 이론과 관계가 있다. 카밀라 파워(Camilla Power)는 '섹 스 파업'을 예고하는 생리가 임신을 예고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남자들은 자신의 씨를 뿌릴 목적으로 생리 중인 여자의 주위를 어슬렁 거린다는 것이다(일단 씨를 뿌리고 나면 다시 사라질 테지만).크리스 나이트와 찰스 메이즐(Charles Maisels)은 생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생리는 여자의 임박한 임신을 예고한다. 반면에 임신할 수 없는 여자들은 피 를 보이지 않는다. 이기적인 유전자의 성질을 생각할 때, 자신에게 적합한 짝 을 찾는 남자들은 임신 중이거나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여자보다는 임신이 가능한 여자를 찾아 나섰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를 키우기에 바쁜 생 리가 없는 여자들은 남자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에 도움을 받지 못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여자들은 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마치 생리 중인 것처럼 꾸몄다. 임신이 가능하거나 가능하지 않은 '여자 연합'의 동지들과 함 께 어울리면서 서로 피를 빌리기도 하고 피처럼 보이는 염료를 쓰기도 했다. 남자가 바람을 피우지 못하도록 전략을 쓴 것이다. 인류가 공동 생활을 하게 된 것은 바로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이기적인 유전자 때문이다. 섹스 파업 이론의 결정적인 문제는 여자의 생리가 임신을 예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배란은 생리 중에 이루어지지 않고 생리 주기 중 에 이루어진다. 따라서 여자들이 생리 중인 것처럼 꾸미는 것은 배란기 를 모르기 때문이다. 사회생물학자들은 배란기를 모르는 것을 후천적이 아닌 선천적인 특성으로 여긴다(선천적이건 후천적이건 그 목적은 남 자들이 궁금하게 여기도록 하려는 것이지만).여자들이 자신의 배란기 를 모른다는 이론은 주로 동물행동학자들과 사회생물학자들이 많이 받 아들이고 있다. 리처드 알렉산더(Richard Alexander)와 캐서린 누난 (Katherine Noonan)의 주장에 따르면, 여자들은 배란기를 모르기 때문 에 여러 모로 바람직한 남자가 여러 여자와 성관계를 갖지 못하게 막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배란기를 모르는 것은 성공적인 생식에서 부모 모두의 역할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집단 생활에서만 나타났다. 인간이 다른 영장류와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런 독특한 사회적 환경 때문이다. " 낸시 벌리(Nancy Burley)는 또 다른 이론을 내세웠다. 여자들은 피임 할 줄 아는 지적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출산의 고통을 피하 고자 낳는 아이의 수를 최소한으로 줄였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자손이 적어지자자연 선택의 법칙에 따라 산아제한에 역행하는(배란기를 알 수 없는) 생식 주기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 육체에 대한지식 ] 섹스 파업 이론에도 벌리의 이론에도 문제가 있다. 사라 블래퍼 하디 (Sarah Staffer Hrdy)가 지적했듯이 배란기를 모르는 것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특성이 아니며,여러 영장류사회에서 발정기와 무관한 비생식 적 성행위가 이루어진다. 벌리는 선사 시대 여자들이 사용한 피임법은 주기 피임법뿐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도 수렵채취 생활을 하는 사회 의 여자들은 여러 가지 피임법을 사용하여 5년에 한 명 꼴로 아이를 낳 고 평생 동안평균 네댓 명의 아이를 낳는다. 이렇게 아이를 비교적 많 이 낳아도 인구 폭발이라는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수렵채취 사회에 서는 유아 사망률이 높기 때문이다. 잘라 말해서, 배란기를 몰랐기 때문 에 더 많은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인류가 진화에 성 공한 것은 아이를 많이 낳았기 때문이 아니라, 잘 키웠기 때문이다. 벌리의 이론의 결정적인 문제는 인간은 배란기를 모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여자가 자신의 배란기를 안다. 어느 쪽 난소가 배란하느냐 에 따라 몸의 왼쪽이나 오른쪽에 통증을 느끼는 여자도 있다. 배란기가 되면 배 같은 특정 부위의 피부색이 변하는 여자도 있다. 실제로 배란기 가 되면 생식에 필요한 점액이 분비된다. 질의 분비물이 여자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 남자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많아진다. 또한 여자들은 배 란기에 성욕이 왕성해진다는 것이 수많은 연구에서 입증되었다. 소규모 집단의 여자들은 서로 생리 주기와 배란기가 거의 같다(그 이유에 대해 서는 뒤에서 이야기하겠다). 다른 여자가 생리 중임을 냄새로 알고 거기 에 맞추는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사실을 종합할 때, 선사 시대 사람들 은 남자건 여자건 의식적으로나 본능적 으로나 생식 주기에 대해 잘 알 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1장에서 직립보행을 하게 됨에 따라 외음부가 빨갛게 부풀어오 르는 현상이 사라졌다고 말한 바 있다. 배란기를 모르는 것은 그런 진화 의 결과일 뿐이다. 3장에서는 생식 기관과 임신 조절에 대한 지식은 인 간 의식의 진화의 일부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여자가 언제 생식할 준비 가 되는지 남자들은 몰랐다고 가정할 이유가 없다. 섹스 파업 이론과 벌 리의 이론은 여자들이 '버거운 생식의 책임'을지고 있었다고가정하지 만, 수렵채취 생활을 하는 인간 사회와 대부분의 영장류 사회의 암컷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섹스 파업 이론은 생리를 이용한 섹스 파업이 효 과적이었을 것이라는 발상에 의존하고 있다. 남자들이 생리 중인 여자 나 다른 남자나 폐경기가 지난 여자와는 성관계를 갖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남자들이 원한 것이 조직 섹스뿐이었다면,무엇 때문에 섹스를 즐기는 데 필요한 고기를 구하기 위해 힘들여 사냥을 다녔겠는가? 섹스 파업 이론은 남자들이 원한 것은 단순한 섹스가 아니라 자기 자신은 아 이를 돌볼 필요가 없는 생식을 위한 섹스였다고 가정하고 있다. 또한 섹스 파업 이론은 남자들이 석간주에 속아 여자가 생리 중이라 고 믿는다고 가정하고 있다. 여자들의 생리 주기가 같았다면, 생리를 하 지 않는 여자는 초경 전이거나 폐경기가 지났거나 임신 중이었을 것이 다. 섹스 파업 이론에 따르면,오직 임신한 여자만이 아직도 그녀를 임 신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남자가 갖다 주는 고기를 필요로 했다. 그러 나 만일 그녀가 그 남자에게 여전히 임신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녀는 가장 중요한 시기인 임신 말기와 출산 후 몇 달 동안에 큰 어려움에 처 하게 된다. 그런 말을 믿는 바보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남자들 이 정말로 그런 위기에 처한 여자를 돕는 데 관심이 없었다면,파워가 말한 '여자 연합'의 동지들은 왜 그녀가 석간주를 쓰지 않아도 되도록 도와 주지 못했을까? [ 빈약한 임신 능력과 생리 주기의 일치 ] 섹스 파업 이론의 또 다른 약점은 생리 주기가 일치하게 되는 명쾌한 이유를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생리 주기가 일치하면 임신 능력이 없는 여자도 임신이 가능해진다. 여자의 임신 능력은 미묘한 것으로 임 신한 몸을 아홉 달 동안 건강하게 유지하기에 충분한 지방이 천천히 축 적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수렵채취 사회에서는 이런 필요 조건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현대에도 그렇듯이 농경 사회에서는 이 런 조건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지 않고 한 곳에 정착해 살며 식량 공급도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출산 간격이 훨씬 더 짧다. 생리 주기와배란기의 일치는 여자들이 함께 모여 살때 쉽게 이 루어진다. 그러나 고립된 생활을 하는 여자들은 배란기가 일정하지 않 기 쉬우며, 영양 공급이 원활하지 않으면 배란 기능이 아예 없어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생리 주기가 확실하고 일정한 여자가 한두 명 있는 여자 들의 집단에 속해 있으면 그렇지 못한 여자들도 생리적으로 동화될 수 있다. 한집단내에서 생리 주기의 일치는 아이를 키우는 데 큰도움이 되는 '여자 연대 의 결성을 가능하게 한다. 오늘날의 여러 전통 사회에서 그렇듯이 여자들이 생리 중일 때 남자 들이 사냥을 떠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 회가 여러 가지 이유로 생리 중의 섹스를 금기시한다. 피는 곧 죽음을 상징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여자의 피를 종교적으로 불경스럽다고 생 각하기도 한다. 생리 중에는 몸이 불결하고 임신이 되지 않으며 성욕도 느끼지 않는다(예외도 있지만)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런 금기가 당연할 수도 있겠다. 알렉산더 마르샤(AlexanderMarshack)는 후기 구석기 시대 유적 지에서 발견된 사슴의 뼈조각과 뿔조각을 다각도로 분석한 바 있다. 그 뼛조각들과 뿔조각들에는 규칙적인 칼자국이 나 있는데,시간을 기록한 표식으로 보인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표식이 다양해서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당시 사람들은 몸집이 큰 사냥감들의 이동 시기와 임신 기간 따위를 기록했다고 할 수 있다. 보리스 프롤로梨Boris Frolov)는 시베리아의 말타(Mal「ta)지방에서 발견된 복잡한 모양의 석판이 순록 의 임신 기간을 계산하는 데 쓰인 일종의 달력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여자들도 달의 움직임을 기록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생활 환경이 열악 한 사회에서는 일 년 중 임신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가 따로 있다. 실제 로 일년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인간의 임신 기간은 그런 상황을 고려해 임신할 것을 요구한다. 먹을 것이 풍부한 계절이 끝날 무렵(지방이 한껏 축적되는 시기)에 임신하여 이듬해 다시 먹을 것이 풍부한 계절이 시작 될 때 출산하는 것이다. [ 화장술의 이점 ] 섹스파업 이론은 먹을것과섹스의 교환(sex-for-food)' 이론과 마 찬가지로 성 차별주의적 전제를 내포하고 있다. 여자는 섹스를 남자만 큼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 다. 그러나 생식과 연관시켜 생각해 보면 먹 을 것과 섹스의 교환 이론이 더 그럴 듯하다. 그 이론이 선사 시대 여 자들이 석간주를 몸에 칠했다는 것에 대한 좀더 논리적인 설명일 수도 있다. 뇌가 점점 더 커지는 아이를 키우기가 갈수록 더 어려워지자 여자 들은 임신 횟수를 줄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아버지가 되기 위한 남자들의 경쟁도 더 치열해졌을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의 일부 전통 사 회에서는 남자들이 자신의 유전자를 받아 줄 짝을 매혹시키기 위해 몇 날 몇주 동안 몸치장을 한다. 그러므로 석간주는 여자들이 생리 중인 것 처럼 꾸미는데 쓰였다기보다는 남자들이 화장하는 데 쓰였을 가능성 이 훨씬 더 많다. 화장은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두 남자가 한 여자를 놓고 경쟁한 다고 가정하자. 한 명은 혈색이 좋고 다른 한 명은 건강은 나쁘지만 색 이 선명한 석간주를 가지고 있다. 그는 벨라도나로 눈동자를 확장시키 고 사향뒤쥐 기름을 귀 뒤에 바른다. 그는 건강이 나쁨에도 불구하고 이 런 재치 있는 문화적 기술로 외모경쟁에서 건강한 라이벌을물리치고 여자의 짝이 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선택이 여자에게는 불행이 될 수 도 있다. 어쩌면 아이를 혼자 힘으로 키워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이가 문화를 이용할 줄 아는 총명한 유전자를 물려받 으리라는 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우스꽝스러운 예이긴 하지만, 이것은 문화가 성적 선택과 자연 선택의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어서 예측하지 못한 다양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인간 사회에서 몸에 털 이 거의 없는 특성이 발달한 것도 세련된 몸치장을 한 사람이 털북숭이 와의 경쟁에서 이겼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인간이 미술에 눈을 뜬 시기는 23만 3,000년 전쯤으로 추정되지만, 고고학적 증거로 남아 있을 만큼 단단한 미술품을 많이 만들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만 년쯤이다. 그 오랜 세월에도 살아남은 선사 시대의 미 술품을 대하면 참으로 놀랍다. 빙하기에 유럽에서 만들어진 비너스상이 바로 그것이다. 이 비너스상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기에 앞서,기원전 10만 년부터 시작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와 네안데르탈인의 문화 발달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특히 근동에서는 해부학적 의 미에서의 현대인이 네안데르탈인과 공존했던 것 같지만 서로 어떤 관 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인구 밀도가 너무 낮아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크로마뇽인(Cro-Mignon)(그림 1-3 의 19번)의 두개골처럼 네안데르탈인의 특징과 현대인의 특징을 다 가 지고 있는 두개골을 보면, 유럽에서 이 두 종의 교배가 이루어졌을 가능 성이 있다. 마지막 네안데르탈인은 2만 8,000년 전쯤에 스페인에서 살았다. 빙 하기에 만들어진 비너스상의 연대는 마지막 네안데르탈인이 사라진 시 기에서 그 직후 사이이므로, 몇몇 과학자는 오직 해부학적 의미에서의 현대인만이 미술품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비록 조악하기는 하지만 베레카트람에서 발견된 조각품은 이 주장을 반박한다. 게다가, 네안데르탈인의 정교한 매장 방식으로 볼 때, 네안데 르탈인은미적 감각이 있었다. 이라크 북동쪽에 있는자그로스산맥의 구릉 지대에서 발견된 샤니다르(Shanidar) 동굴은 대표적인 네안데르탈 인 유적지이다. 랄프 솔레키(Ralph Solecki)는 1950년대에 이 동굴에서 네안데르탈인의 유골을 여럿 발견했다. 성인 일곱 명과 어린이 두 명인 이 유골들의 연대는 기원전 6만 년에서 4만 4,000년 사이이다. 그 가운 데 네 명은 인위적으로 매장되었으며, 이 네 명 가운데 한 명은 화환과 함께 매장되었다. 이 유골들은 네안데르탈인 사회에 상부상조 체계와 의학 지식이 있 었음을 나타내는 간접적인 증거를 갖고 있다. 샤니다르 1세로 불리는 유골은 나이가 서른 살에서 마흔다섯 살 사이이고 뇌의 용량은 1,600cc 이며(현대 유럽 남자 뇌의 평균 용량은 1,415cc이다),키가 168센티미 터쯤 되는 남자인데, 몸에 심한 상처를 입고도 여러 해 동안 살았다. 왼 쪽 눈구멍이 함몰되어 있었고, 오른팔과 오른쪽 어깨와 쇄골이 위축되 어 있었다. 팔뚝과 손은 아예 없었는데, 어디로 떨어져 나갔거나 절단되 었던 것 같다. 두 다리도 손상되어 있었다. 오늘날에도 이런 심한 부상 을 입으면 죽기 십상일 테고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이 없었을 것이다. 연대가 기원전 10만 년에서 4만 년으로 추정되는 시리아의 두라 (Dura) 동굴 유적지에서 발견된 여러 개의 화로는 이 시기에 약초를 사 용했음을 입증해 준다. 화로 안에서 불에 탄 자갈이 발견되었는데, 몸에 해로운 글루코사이드를 제거하기 위해 불에 구웠던 것 같다. 화로 옆에 는 높이가 2미터나 되는 유리지치(지칫과의 유럽산 식물-역주) 껍질 무더기가 발견되었다오늘날 유리지치는 생리전 증후군을 완화시키는 보조 식품으로 쓰인다). 유리지치 씨를 까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 러므로 그렇게 많은 유리지치를 소비한 것을 영양학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무리이다. 두라 동굴에서 살던 사람들은 유리지치의 유효 성분을 이용했던 것 같다 유리지치의 주요 유효 성분은 감마리놀렌산과 알파리놀렌산이다. 감 마리놀렌산은 생리전 증후군 치료에 효과가 있고, 알파리놀렌산은 알츠 하이머병(노인성 치매) 치료에 효과가 있다. 생리전 증후군을 현대 서양 인에게만 국한된 현상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감마리놀렌산은 모 유에도 함유되어 있다. 그러므로 현대 이전 사회와 전통 사회에서 아이 에게 오랫동안 젖을 먹이는 것은, 여자아이에게 감마리놀렌산을 충분히 공급하여 나중에 자라서 생리전 증후군에 시달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두라 동굴에 살던 사람들이 특별한 목적 없이 그렇게 많은 유리지치를 소비했을 리는 없다. 그들이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유 리지치는 흥미롭게도 최음 성분도 가지고 있다. 두라 동굴에서 발견된 증거를 볼 때, 그 당시 사람들은 주변에서 자 라는 식물들의 영양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그들의 특별한 효능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선사 시대 사람들도 피임 효과가 있는 식물을 이용했을 것이라는 나의 생각과도 일치한다. 야생 식물이 남아 있는 경 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원시인이 식물을 어떤 용도로사용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두라 동굴의 유리지치 퇴적물 같은 것이 남아 있 어야 그 용도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 통과 의례 ] 죽은 사람을 매장한 가장 오래 된 증거는 이스라엘의 스쿨(Skh訓) 동 굴에서 발견되었다. 스쿨 동굴에서는 10만 년 전쯤의 호모 사피엔스의 유골과 멧돼지의 턱뼈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함께 매장된 것들과 그 사 체의 생물학적 성별의 연관성은 비교적 최근인 기원전 1만 년부터 歌려 지기 시작했다(그 이유는 7장과 8장에서 이야기하겠다). 그렇지만 죽은 사람을 매장했다는 사실은 뭔가를 시사해 준다. 매장 은 하나의 '통과 의례(rite of passage)'이다. 통과 의례라는 말은 인류학 자 아놀드 반 게네프(Arnold van Gennep)가 현대 사회가 삶의 여러 단 계를 구분하는 방식을 표현하기 위해 쓴 말이다. 반 게네프의 이론에 따 르면 통과 의례는 초기 상태(살아 있는 상태), 최후 상태(죽은 상태), 그 리고 과도적 상태 등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과도적 상태가 있다고 해서 생물학적 의미에서의 죽음이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육체적 죽음 뒤에 사회적 죽음이 따른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두 죽음 사이의 간격이 바로 의례(장례식)이다. 육체적 죽음이 오면 육체는 과도 적인 상태에 놓인다.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지만 물질적인 형체는 남아 있다. 죽은 사람의 육체와 그 소지품이 다음 상태로 나아가 기 위해서는 장례식이 치러져야 한다. 그리고 장례식이 치러지고 나면 사회적으로도죽은 상태가 되어 더 이상사회의 일원으로 인식되지 않 는다(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반 게네프가 제시한 다른 통과 의례로는 출생, 유아에서 성인으로의 변화(특히 초경), 성인에서 어버이로의 변화, 그리고 미혼에서 기혼으로 의 변화 등이 있다. 출생은 죽음처럼 육체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적 인 측면도 있다. 아이의 이름을 짓는 의식이 바로 출생의 사회적인 완성 이다. 이 의식은 아이가 태어난 지 몇 주 뒤, 아이의 삶이 완전히 성립되 었을 때 치러진다. 이름을 짓기 전에 죽은 아이는 미처 사회적 개체가 되지 않았고,따라서 사회적 죽음을 겪지 않았으므로 장례식도치르지 않는다 고고학에서도, 출산 과정에서 죽은 아이가 산모와 함께 묻히는 경우는 있지만 신생아의 무덤이 따로 발견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그 정도가 약하긴 하지만 또 다른 변화를 들자면 동정 상실, 주거지의 변화 (집에서 나가 배우자와 함께 사는 것), 출산 등이 있다. 남자의 경우 아 버지가 될 때 의'談擬娩)이라는 의식을 치르는 시적도 많다. 산모처럼 집 안에 드러누워 산고를흉내내는것이다. 몇몇 북아메리카 인디언은, 남편이 지붕 밑으로 올라가서 고환에 끈을 묶어 밑으로 내려뜨린 다음 아내가 아이를 낳고 있는 동안 주기적으로 잡아당기는 풍습이 있다. 반 게네프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면, 죽은 사람을 매장하기 시작했음 을 보여 주는 고고학적 증거는 통과 의례를 치르는 사회적 세계가 시작 되었음을 말해 준다. 또한,죽음에 대한 의식을 치렀으면 출생에 대한 의식도 치렀을 것이다. 더 나아가, 출생과 죽음에 대한 의식을 치렀으면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다른 여러 가지 변화에 대한 의식도 치렀을 것 이다. 유라시아의 후기 구석기 시대 유적지에서는 이런 통과 의례들에 대한 증거가 발견된 바 있다. 이 유적지의 연대는 4만 년 전에서 1만 년 전 사이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는 인류의 창조적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 전한 시기였다. 기원전 4만 년 경의 유럽의 인류는 외모는 현대인과 매우 비슷했지 만 그 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현대인은 일찍이 10만 년 전에 존재했고 15만 년 전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베레카 트람의 조각물은 미술이 그보다 더 전에 시작되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 나 3만 년 전에 시작된 유럽의 후기 구석기 시대 미술은 그 규모도 훨씬 더 크고 여러 가지 극적인 문화적 변화를 수반한 것이었다. 후기 구석기 시대 인류는 마지막 빙하기에 유라시아 북부에서 살았 다. 2만 년 전쯤에는 빙하가 최대로 확산되어 알프스 산맥, 영국 북부, 스칸디나비아 반도, 폴란드 북부 등지를 뒤덮었다. 해수면이 낮았기 때 문에 지금의 영국과 아일랜드는 매머드, 털북숭이 코뿔소, 순록, 털북숭 이 off마,들소 따위가사는 툰드라 대륙의 일부였다. 프랑스 남부와 피레네 산맥에서 발견된 동굴 벽화에는 이 동물들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이른바 혈거인(cave men)' 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구석 기 시대 인류는 동굴에서 살지 않았다 동굴 입구에서 얼마 동안 산 흔 적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그들은 보통 천막이나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덩치가 큰 동물을 사냥한 것도 그 고기를 얻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건축 재료를 얻기 위해서였다. 러시아 남부에서는 매머드의 척추뼈를 쌓고 엄니를 세워(그 위에 가죽을 씌운 것으로 추정된다) 만든 집의 잔 해가 많이 발견된 바 있다. 체코 공화국의 돌니 베스토니체(Dolni Vastonice) 지방에서는 천막을 치고 그 안에서 석탄 난로를 피웠다. 짐 승의 기름으로 등잔불을 켰고, 짐승의 뼈와 이빨로 여러 가지 작은 미술 품을 만들었다. 후기 구석기 시대의 몇몇 무덤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의 복잡 한 관계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죽음에 대한 의식을 치렀음을 나 타내는 증거를 볼 수 있다. 빙하기에는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것은 이례 적인 일이었다. 빙하기 사람들은 오늘날의 일부 사회처럼 시체를 들판 에 내버리거나, 화장하여 재를 뿌리거나, 관에 넣어 강물에 띄워 보냈던 것 같다. 일반적으로 쓰인 장례법은 그것이 무엇이었건 매우 정교했겠 · 지만, 안타깝게도 고고학적 증거는 찾아볼 수가 없다. [ 붉은3인조 ] 몇 안 되는 선사 시대의 무덤들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얼마 전 에 보후슬라프 클리마(Bohuslav Klima)가 체코 공화국 브르노 근처에 있는 파블로프 고지의 돌니 베스토니체 지방의 옥외 거주지에서 발견 한 3인조 무덤이다. 얕은 구덩이에 시체 세 구가 누워 있었는데, 성별이 불확실한 골격이 비교적 가냘픈 남자이거나 여자로 추정된다)이 가운데 누워 있고 그 양쪽에 남자로 추정되는 두사람이 누워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스무 살쯤에 죽었지만 사망 원인은 알 수 없었다. 세 사람 이 누워 있는자세와위치는다분히 인위적이다. 누워 있는 모습이 자연 스러운 것으로 보아 사후 강직이 풀린 뒤에 나뭇가지로 덮어 태우고(그 림 4-2에서 검게 칠해진 것이 나뭇가지이다)흙을 넓게 덮은 것 같다. 구멍 器린 조가비,늑대 이빨,북극여우 이빨 따위와 의복이나 장신구 등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왼쪽 남자 옆에는 목걸이의 일부로 보이는 구 멍 뚫린 사람의 이가놓여 있었다. 이 무덤의 가장특이한 점은석간주 가 있다는 것과 시체들이 누워 있는 자세이다. 세 사람의 머리에 석간주 가 뿌려졌던 것 같다. 특히 가운데 사람의 허벅지 사이에는 석간주가 많 이 뿌려져 있다. 왼쪽 사람은 그 부분을 바라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부분으로 두손을 뻗고 있는데 이 사람의 음부에는 말뚝이 박혀 있다 가운데 사람은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오른쪽 사람을 바라보고 있으며, 오른쪽 사람은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가운데 사람과 약간 겹쳐진 채 땅바닥에 엎드린 자세로 누워 있다는 것이다. 돌니 베스토니체의 3인조무덤의 정확한 의미는 영원히 밝혀지지 않 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는 DNA 검사법으로 세 사람의 유전학적 성별을 가릴 수 있을 것이다. 고고학 분야에서는 아직 DNA 검사법이 널리 쓰이고 있지 않다. 비용도 많이 들고, 종종 다른 나라에 있는 실험 실로 유골을 옮겨야 하는 번거로운 문제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세 사람 다 젊고 뚜렷한 사망 원인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동시에 죽 었다고 볼 수 있다. 무서운 병에 걸려 죽었거나,독에 중독되어 죽었거 나, 물에 빠져 죽었는지도 모른다 제물로 희생되었거나 어떤 잘못을 저 질러서 처형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세 사람의 누워 있는 자세로 이야기를 꾸며 볼 수도 있다. 만일 가운 데 누워 있는 사람이 여자라면,그녀와 오른쪽 남자를 젊은 부부로 볼 수 있다. 오른쪽 남자가 엎드린 채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은 두 사람 사 이에 어떤 불화가 생겼음을 말해 준다. 왼쪽 남자는 제3의 역할을 한다. 그는 여자의 정부였을까? 무슨 짓을 했길래 죽어서 음경에 말뚝이 박혔 을까?왜 그의 두손이 상징적인 피가묻은여자의 허벅지 사이에 있을 까?물론 이것은 석간주가 피의 상징으로 쓰였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 이지만, 석간주가 매우 복잡한 사회적 및 성적 관계를 나타낸다는 것만 큼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들은 바로 이런 관계 때문에 원하지 않은 죽음 을 맞았을 수도 있다. 돌니 베스토니체 유적지에서도 석간주 덩어리(적철광)를 깎아 만든 비너스상이 발견되었다. 세 사람의 머리를 덮고 있는 석간주는 삶에서 의 피의 힘을 상징했을 수도 있다. 죽음으로의 변화와 내세에서의 재생 에 필요한 힘을 상징했을 수 있는 것이다. 가운데 누워 있는 사람의 허 벅지 사이에 있는 석간주는 그 부분과 피의 연관성을 나타낸다(적어도 여자인 경우. 그러므로 그 사람이 여자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할 수 있 다. 단순히 여자의 음부이기 때문에 석간주를 뿌린 것일까?아니면,왼 쪽 남자가 석간주로 만든 조각물을 여자의 음부에 대고 있었거나 질 속 으로 약간 삽입했는데 불에 타고 남은 것일까? 이 3인◎ 무덤에 대해 클리마는 문제가 있는 출산을 둘러싼 비극이 일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두 남자를 산파로 본다. 좀 억지스럽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의 생각이 옳을 수도 있겠다. 자연인류학자 데이 비드 프레이어(David Flayer)는 가운데 유골을 검사한 결과 고관절이 선천적으로 기형이었다는 것을 밝혀 냈다. 이것은 그림 4-2를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다. 골반과 연결되는 왼쪽 대퇴골의 고관절 부분이 정상적 인 오른쪽 남자처럼 약간 비스듬하지 않고 직각이다. 가운데 있는 사람 은 이런 기형 때문에 걸음걸이가 좀 이상했을 것이고 아이를 낳을 때에 도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여자라고 가정한다면). 그렇지 않다면 이 사람 은 특별하게 매장해야만 하는 남자나 간성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왼쪽 남자의 음부에 말뚝을 박은 공격적인 행위로 보아, 당시 사회가 매우 공 격적인 모권 사회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고 평화로운 '여신의 시 대'였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돌니 베스토니체의 3인조 무덤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이건 복합적인 의미를 품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우선 세 유골의 인위적인 위치만 보아도 그렇다. 성적인 의미가 강하며, 어떤 사회적 판단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성 범죄가 일어날 수 있으며, 따라서 비정상적이 고 부적절한 성행위를 규제하는 규율이 있었던 사회였을 가능성이 많 다. 그런 행위를 어떻게 장려하고 규제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빙하기의 미술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빙하기의 유럽의 미술에 대해서는 동굴벽화, 조각, 에칭, 작은조상 (彫像), 조각된 공예품 등 알려진 것이 많다. 이 가운데에는 성적인 표 현이 짙을 뿐만 아니라 성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던 것들 이 많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미술품들은 지금까지 거의 무시되어 왔다. 단지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는 상징적인 원칙에 대한 추상적인 이 론만 제시되었을 뿐이다. 나는 선사 시대의 미술품을 당시의 성 문화와 유리시켜 생각할 수 없 다고생각한다. 이 장에서는그러한미술품들을깊이 있게 살펴봄으로 서, 선사 시대의 복잡한 성 문화(섹스를 대상화하고 억압함으로써 남자 와 여자의 힘의 불균형을 만들어 내고 지속시킨)를 규명해 볼 것이다. [ 여러 가지 비너스상 ] 구석기 시대 미술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졌으며 선사 시대 미술품 가 운데 가장 흔한 것은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WillendorD에서 발견된 비너스상이다(그림 5-1 참조). 엉덩이와 젖가슴이 큰,길이 12.5센티미 터의 이 비너스상은 1908년에 오스트리아 남부 다뉴브 강가에서 발견 되었다. 이 비너스상이 발견된 곳은 빌렌도르프 2세라고 불리는 유적지 였다. 그 곳에서는 후기 구석기 시대 또는 마지막 빙하기(4만 년 전부 터 1만 2,000년 전까지 계속되었다)의 것으로 보이는 인류의 거주지 흔 적이 발견되었다. 석회암을깎아만든비너스상의 모양은 '조형적'이며, 몸의 주름진 부분에 석간주로 보이는 붉은 채색 재료가 남아 있어 몸 전체를 붉게 칠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빙하기에 만들어진 이런 작은 여인상은 지금까지 200개쯤 발견되었 다. 이 여인상들은 그 모양이 가지각색임에도 불구하고 고대 로마의 사 랑의 여신의 이름을 따서 비너스상'이라고 일괄적으로 불려 왔다. 이 러한 비너스상을 만든 목적과 그 기능은 지금까지도 토론의 쟁점이 되 고 있다. 선사 시대의 남자들이 峯형적인 포르◎로 만든 것일까? 아니 면 여자 주술사나 부족의 지도자나 '위대한 어머니 여신'을 묘사한 것 일까? 일상적인 힘과 초자연적인 힘을 연결하는 마법의 도구로 쓰였을 까? 아니면 여자들이 자기 자신을 묘사한 것일까? 어쨌거나 비너스상은 영구적인 이미지이다. 또한, 인류가 털이 없어 진 것은 비너스상이 만들어진 시기보다 훨씬 전이었지만, 몸에 털이 없 는 인류에 대한 최초의 확실한 증거이다. 빙하기의 인류는 비너스상을 만듬으로써 인간 또는 특정 종류의 인간의 모습을 규정했다고 할 수 있 다. 비너스상이 후기 구석기 시대 여자들의 참모습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여자들과 남자들의 눈에 비친 여자의 모습을 묘사한 것만큼은 틀림없을 것이다. 또한 비너스상은 자신의 신체적 특징에 대한 여자들 (그리고 아마도 남자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 후기 구석기 시대 여자들은 그 생명이 유한했고 그들의 육체는 자연의 리듬과 빙하 기의 혹독한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변했다. 그러나 비너스상은 돌이나 뼈, 이빨에 새겨졌기 때문에 수만 년 동안 없어지지 않고 살아남았다. 비너스상은 그 모양이 다양하다. 뚱뚱하고 발가벗은(또는 거의 발가 벗은) 것도 있고, 호리호리하고 옷을 입은 것도 있다(시베리아의 부레 트(Bouret)에서 발견된 것은 파카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연대가 가 장 앞선 것은 오스트리아 남부 갈겐베르3(Galgenberg)에서 발견된 녹 '獸緣崙)으로 만든 춤추는 비너스상이다 이것은 기원전 3만 년쯤에 만 들어졌지만 대부분의 비너스상은 기원전 2만 6,000년쯤에 만들어졌다. 비너스상이 발견된 지역은 러시아 남부의 대초원에서 서쪽의 피레네 산맥에 이른다. 러시아 남부의 대초원에서는 코스티엔키(Kostienki)와 몰로도바(Molodova)의 매머드 뼈로 만든 집 안에서 발견되었고, 피레 네 산맥에서는 동굴 안에서 발견되었다. 비너스상에 대한 해석은 다양 하지만, 후기 구석기 시대 사회의 구조나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이해하 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누가 비너스상을 만들었는지(여자인지 남자 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그리고 왜 만들었는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론은, 비너스상이 '위대한 여신'을 묘사한 것이 며 여자들이 지배한 모권 사회 시대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 은 빙하기의 유럽을 배경으로 한 장 오엘(Jean Auel)의 베스트 셀러인 『동굴곰족』(T灰 脚an of the Cave Bear)과 『매머드 사냥꾼들』(The MammothHunters)에 의해 대중화되었다. 고고학계에서는 이 이론을 지지하는사람이 많지 않지만, 비너스상의 의미에 대한 보편적인 이론 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동안 수많은 연구자가성 차별주의적인 해석 을 내렸다. 모권 사회 이론이 각광을 받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 다. 모권 사회 이론을 주도한 사람은 마리야 김부타스였다. 그녀는 말년에 『여신의 언어』 (The Language ◎ 論e Goddess)와 『여신의 문명』(The Civilization ◎脚e Goddess)을 썼 다. 이 두 권의 책은 빙하기와 그 바로 뒤인 유럽의 초기 농경 사회에서 여자들이 종교적 및 정치적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역설하 고 있다. 그녀의 이론은 주로 농경 문화에 초 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창조주 여 신'은 여러 면모를 가지고 있으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빙하기의 비너스상으로 묘사되 었다고 주장했다. 그림 5기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에서 발견된 비너스상. 석회암으로 만든 것이며 석간주 흔적이 남아 있다. 김부타스의 연구는 매우 학문적이었지만, 그녀의 추종자들의 연구는 신중하지 못한 부 분이 많다. 모니카 쇠(Monica Sj澔)와 바바라 모르(Barbara Mor)의 『위대한 우주의 어머니의 고대 종교』(The Ancient Religion of the Great Cosmic Mother◎All)나 『위대한 우주의 어머니』(The Great Cosmic Mother) 같은 책은 선사 시대에 대해 너무 일반적인 이론을 내세우고 있 다. 그로 말미암아 고고학적 해석의 어려움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들의 이론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니키 로버츠(Nickie Roberts) 같은 사 람은 매춘의 역사에 대한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쇠와 모르는 석기 시대의 여신의 힘이 비옥과 다산의 차원을 넘었음을 보 여 준다‥‥‥그녀는 전지전능한 존재였다. 우주와 자연에 생명력을불어넣 는 원동력이었다‥‥‥위대한 여신은 모든 생명의 창조자이자 보호자이며, 파괴자였다‥‥‥‥문화와 종교와 성은 똑같이 여신에게서 비롯되었듯이 모두 그림 5榮 러시아 서부 쿠르스크 근처에 있는 아브디보의 빙하기 유적지에서 발견된 네 개의 비너스상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섹스는신성한것이었다. 모든사람이 참여하여 생 명력과의 황홀한 결합을 즐기는 그룹 섹스를 여자 주술사가 이끌었다. 로버츠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의 사진 밑에 "태초에는 모권 사회 였다. "라는 설명을 달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람을 죽이고 아이를 낳고 섹스를 하는 등의 여 러 가지 행위를 벌이는 인도의 여신처럼 '위대한 여신'도 끊임없이 뭔 가를해야한다. 그러나빙하기의 비너스는꼼짝도하지 않고 있다. 빙 하기의 미술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은 남자이다. 흔히 동굴 벽에 반 인반수로 그려져 있으며 드물지만 작은 조각물로 형상화되어 있는 경 우도 있다. 임신한모습을묘사한것 같은 비너스는 있지만, 아이를낳 거나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여신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끈으로 된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비너스는 있지만, 그런 앞치마를 만들고 있는 비 너스는 없다. 사냥하거나 무언가를 죽이는 모습은 더더욱 찾아볼 수 없 다. 비록 비너스들이 움직이고 있었다고 해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볼수 없었을 것이다. 성적인 특징은 매우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반 면에 대다수가 얼굴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모권 사회 이론은 여권 신장운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 다. 김부타스의 연구는 뿌리 깊은 성 차별주의에 대항하여 선사 시대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해석을 확산시키기 위해 필요한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김부타스의 이론이 등장하기 전에는 모든 비너스상을 남자들이 만들었다고 여겼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관한 단언은 편견보다 증거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 조형적인 포르노 ] 돌니 베스토니체에서 여러 가지 조각물을 발굴한 카렐 압솔론(Karel Absolon)은 이렇게 말했다. "매머드 사냥꾼들의 정신적인 삶과 생산적 인 미술에 영향을 끼친 두 가지 동기는 섹스와 業주림이었다. " 그림 5-3 의 막대기처럼 생긴 조각물은 돌니 베스토니체에서 발굴된 조각물들 가운데 하나로 젖가슴으로 여겨지는 두 돌출부가 있다. 이에 대해 압솔 론은 이렇게 말했다. "이 작은 조각물을 만든 사람은 관심이 없는 부분 은 모두 무시하고 그의 성욕을 자극하는 젖가슴만 강조했다. 조형적인 포르노인 셈이다. " 그러나 압솔론이 말하는 젖가슴은 남자의 고환으로 볼 수도 있으며, 조각물 전체를 여자가 아니라 남자의 음경으로 볼 수 도 있다. 압솔론은 이 조각물을 남자가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남자 동 성애자들의 포르노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은 여자 가만든것일 수도 있다. 분명한것은, 이것과비슷한다른조각물들과 마찬가지로 이것 또한 보는 관점에 따라 그 의 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식용이나 다 른 특별한 용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 역시 배 제할 수 없다. 오늘날의 모조 음경도 시각적으 로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 음경은 음경이지만 끝이 머리를 땋은 여자의 얼굴처럼 생긴 것도 있고, 돌고래처럼 생긴 것도 있다. 돌니 베스 토니체에서 발견된 음경은 크기가 손가락만하 지만, 다른 것들은 15 ∼20센티미터쯤 된다(그 림 5-5, 5-6, 5-7, 5-8 참조). 비너스상이 성적 매력이 넘치는 이상적인 그림 5◎ 슬로바키아 돌니 베f니체에서 여자를 묘사한 것이라는 생각은 많은 반발에 발견된 남근막대기 부딪혔다 어떤 연구자들은 그런 생각을성 차 별주의적 해석으로 여긴다. 비너스상이 매력 적이지도 않고 에로틱하지도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프랑스의 빙하기 미술 전문가의 한 사람인 앙드레 르루아구랑(Andrf Leroi- Gourhan)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구석기 시대 여자들은 외모가 매우 단순했다. 알몸이었고 머리는 곱슬머리였으며, 두 손을 가슴 위에 포개고 있었고, 축 처진 거대한 젖가슴과 엉덩이가 작은 머리를 떠받치고 있었다. " 그런가 하면, 초기 빙하기 미술 연구의 선구자인 아베 브뢰유(Abbf Breuil)는 비너스상이 엉덩이의 피하지방 이 두드러지게 발달한 것으로 보아 엉덩이가 크기로 이름난 부시먼족 과 가까운 혈통의 아프리카계 여자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보다 최근에는 프랑스의 부인과 의사 뒤아르(Duhard)가 비너스상 들이 비만증의 여러 상태를 나타낸다고 말한 바 있다. 고베르(Gobert) 와 쥐드(Jude)는 비너스상들이 너무 땅딸막하기 때문에 다산의 상징으 로 볼 수 없고 폐경기가 지난 여자를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피에 트(Piette)는 비너스상의 크기와 모양이 다양한 것으로 보아 빙하기 여 자들의 두가지 기본유형, 즉 '뚱뚱한 여자'와 날씬한여자'를나타낸 다고 주장했다. 패트리샤 라이스(Patricia Rice)는 비너스상들이 여러 연령층의 여자들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비율을 바탕으로 비 너스상들을연령별로나누었다. 15살까지의 젊은여자가23퍼센트, 15 살에서 35살까지의 임신한성인 여자가 17퍼센트, 임신하지 않은성인 여자가 38퍼센트, 35살 이상의 여자가 22퍼센트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분석이 무슨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비너스상들은 어느 한지역에서 발견된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견되었고 그 모 양도 다양하기 때문에 단순하게 비교할 수는 없다. 빙하기의 유럽에는 먹을 것이 부족했으므로 다산을 비는 뜻에서 비 너스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살아남기 위 해서는 인구를 억제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앙리 델포르트(Henri Delporte)는 후기 구석기 시대의 비너스상들을 분석한 후 이 이론을 반 박했다. "선사 시대의 인류는 사냥꾼이었으며 석기를 사용했다고 단정 하면서 먹을 것을 구하기가 어려웠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 사 실 살아 있는 식량은 비교적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비너스상들을 보아 도 거의 다 영양상태가 좋아보인다. 그러나, 델포르트의 말이 암시하 듯 주요 식량은 남자들이 확보했을 것이다 추워서 식물이 살기 어려운 툰드라에서는 식량 확보에서 여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많이 줄어들었 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너스상들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경제적 불평등 이 점점 커지던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가정할 수 있다. 압솔론이 '포르노 이론'을 내세우자 비너스상을 에로틱한 미술로 여 기는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옛날의 에로틱한 미술품은 더 이상 성적인 자극을 주지 못하므로 알아보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당연한 일 인지도 모르겠다. 고대 그리스의 주연(酒宴) 장면은 노골적인 성적 표 현이 많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그저 호기심을 끄는 기이한 모습 일 뿐이다. 그러나 피아노 다리조차 에로틱하다고 덮개를 씌웠던 빅토 리아여왕시대에는 상황이 달랐다. 당시에는 알몸을보기가힘들었으 므로 누드화는 매우큰성적 자극이 되었다. 빙하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당시 유럽의 기온은 지금보다 평균 섭씨 10도쯤 낮았으므로(오 늘날의 알래스카 남부와 비슷했다) 두꺼운 옷을 입어야 했다. 그러나 비너스상은 모피를 입지 않은 알몸이다. 단열이 잘 된 오두막 안에서 석탄 난로 둘레에 모여 앉아 있을 때 옷을 벗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거스리(Guthrie)는 비너스상은 세계 최초의 포르노라면서 『플레이보이』지에 비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머리와 발은 작고 젖가슴과 엉덩이는 큰 전형적인 모습은 가장 매력적 인 부분을 강조한 것이며, 라 마들렌(La Madeleine) 동굴에서 발견된 비너스상의 두 다리를 벌린 자세는 '복종과 수줍음'을 뜻한다(하지만 그는 왜 이런 특징들이 에로틱하다는 것인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오스틴 대학교의 심리학 교수인 디벤드라 싱(Devendra Singh)에 따 르면, 남자 195명의 성적 기호를 조사한 결과 여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보편적인 기준이 있음이 드러났다고 한다. 즉, 남자들은 거의 다체중 은 평균치이고 허리와 엉덩이의 비율이 0.7쯤 되는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플레이보이』지는 지난 30년 동안 이런 여자를 센터폴드(잡지 한가운데에 접어 넣는 페이지 -역주) 모델로 썼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플레이보이』지가 에로틱한 것에 대한 현대 남자들의 생각에 영 향을끼친다는 것을 입증할 뿐이다. 현대 여자들이 어떤 여자를 에로틱 하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다. 루벤스(Rubens)의 그림 에 나오는 육감적인 여자들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모두 뚱뚱보들 이다. 그러므로 빙하기의 비너스상도 당시 사람들의 성적 취향에 영향 을 끼쳤을 것이다. 평균 체중도 싱의 기준보다 더 무거우며 허리와 엉 덩이의 비율도 0.7이 넘었을 것이다. [ 그너머의 육체들 ] 비너스상의 어떤 부분이 진짜 여자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고 어떤 부 분이 전통적인 표현 방식인지는 알기가 어렵다. 뚱뚱한 것은 비만이 아 니라 빙하기의 여자들이 추운 환경에서 살기 위해서 생리적 및 생식적 으로 필요한 조건이었을 수도 있다. 몸집이 클수록 살아남을 확률이 높 다는사실이 인간의 유전자구성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1846∼ 1847년에 미국에서 이주민들이 캘리포니아로 가다가 산 속에서 겨울을 맞게 되었을 때에도, 영양 상태가 좋은 여자들이 가장 오래 살아남았다. 온타리오 호를 헤엄쳐 건너는 시합처럼 체력과 지구력을 요하는 일에 서도 몸집이 큰 여자가 뛰어나다. 이와 마찬가지로, 빙하기의 유럽에서 도 비너스상처럼 몸집이 큰 여자는 생존력이 뛰어났을 것이다 이것은 식 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아이를 키우는 데도 매우 중요했을 것 그러므로 비너스상들은 이미 어머니가 된 여자들이 아니라 장차 어머니가 될 여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필요한 영양분과 체력을 충분히 쌓은 여자들인 것이다. 적어도 일 년 중 몇 달 동안만은 여자들이 비너스상처럼 뚱뚱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비너스상은 도대체 누가, 왜 만들었을까? 르로이 맥더모트(Leroy McDermott)는 비너스상은 여자들의 '자화 상'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 면, 여자들이 젖가슴 너머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아야 했으므로 젖가 슴이 강조되고 다리는 점점 가늘어졌다. 이 이론이 맞다면 비너스상의 얼굴이 없는 것도 설명된다. 자신의 얼굴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 나 나는 비너스상이 여자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첫째, 이 이론은 그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엉덩이 뒷부분과 뒤통수의 머리 카락 같은 것은 자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부분이지만 분명히 묘사되 어 있다. 둘째, 이 이론이 맞다면 여자들은 우선 알몸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알몸을 자세히 살펴보았을 텐데도 음핵 같은 것은 묘사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비너스상이 자화상이라면 사람의 중심인 얼 굴과 생리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음핵이 빠져 있는 자화상인 셈 이다. 이런 점에서 맥더로트의 이론은 설득력이 부족한 것 같다. 비너스상의 몇 가지 특징을 보면 비너스상을 다른 각도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 사라 넬슨(Sarah Nelson)은 비너스상이 너무 다양하기 때문 에 '공통된 성'(여자의 외면적인 특징을 말한다)을 가지고 있다는 것말 고는 똑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비너스상은 수백 년에 걸쳐 광범위한 지역에서 만들어졌으므로 그 의미도 지역에 따라 달랐을 법하지만, 실은 성별말고도 다른 공통된 특징들이 있다. 비너스상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영구적이라는 것이다. 표면이 닳아 서 매끄러운 것으로 보아 많이 만지작거렸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여 러 사람이 서로 주고받았을지도 모른다. 비너스상은 가지고 다닐 수 있 었으며 남에게 줄 수도 있었다. 남자를 묘사한 조각물은 발견되지 않은 사실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은 더욱더 커진다. 빙하기의 유럽 사회는 남자 조각물(음경은 제외)을 만들지 못하게 했거나, 우리가 지금으로서 는 알 수 없는 비 영구적인 재료로 남자 조각물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남자는 남에게 양도할 수 없었지만, 여자는 적어도 상징적으 로는 남에게 양도할수 있었다고 가정할수 있다. 그리고 남에게 양도 할수 있는 여자는 얼굴이 없고(여자의 신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생식 에 적합한 여자였을 것이다. '여자를 양도하는 행위'의 사회적 의미는 후기 구석기 시대 사회의 다른 특성들과 잘 맞아떨어진다. 이 시대 사회는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작은 마을들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마을들 사이의 교신이 매우 중요 했을 것이다. 비너스상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곧비 너스상이 모두가 다 아는 상징 물이었음을 뜻한다. 우리는 비너스상의 용도가무엇이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리고 비너스상의 의미가 일 정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느 낯선 남자의 아이를 낳기 위해 멀리 떨 어진 마을로 시집 가는 딸에 대한 기념품으로 신랑이 신부의 어머니에 게 주는 혼인 징표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신부의 얼굴을본 적이 없는 신랑은 얼굴 없는 조각물을 만들어서 신부의 부모에게 주었을 테 고, 신부의 부모는 그 조각물을 보면서 사랑하는 딸의 모습을 그려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추측은 후기 구석기 시대 사회에 혼인 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전 제로한다. 혼인 제도는뭐라고불리건 모든인간사회에 있었다. 빙하 기에 혼인 제도가 시작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후기 구석기 시대의 무덤은 장례라는 적어도 한 가지의 통과 의례의 존재를 분명히 증명하 고 있기 때문이다. 한가지가 있었다면 당연히 다른 통과 의례들도 있 었을 것이다. 경제적인 이유와 생식의 필요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혼인은 일종의 소유권 이양이라고 할 쑤 있다)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빙하기의 사회에서 여자는 양도할 수 있었지만 남자는 양도할 수 없 었다는 가정은 이른바 '동굴 미술'로 불리는 빙하기의 다른 미술적 표 현이 뒷받침해 준다. 동굴 미술의 성적인 내용은 오래 전부터 인정되고 토론되어 왔다. 르루아구랑은 규모가 비교적 큰 동굴들에서 발견된 여 러 가지 그림에 성별을 부여하여 남자와 여자로 나누었다. 비너스상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누가 동굴 벽에 그림을 그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림 5-4 바위에 새겨진 여자 성기(앙글레) 남자들이 그렸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나 역시 주로 남자들 이 그런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들이 그런 미술 작업에 참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동굴미술이 '대상화된' 수동적인 여자와 능동적인 남자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선사 시대 미술 전문가 폴 빈(Paul Bahn)은, 수많은 추상적인 상징을 한결같이 여자의 성기로 해석하는 르루아구랑의 시각은 성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현대인의 판단 착오라고 비판했다. "구석기 시대 의 화가들이 애써 구분한 상징들과 다양한 모양들을 한 가지로 몰아붙 이는 것은 억지이다. " 그러나 화가들은 똑같은 것을 저마다 달리 묘사 하게 마련이다. 실제로 폴리네시아의 몇몇 사회에서도 바위와 자갈에 그려 놓은 여자 성기 그림을 볼 수 있는데, 이스터 섬의 오롱고(Orongo) 에는 추상적으로 그린 음핵과 음문(얼핏 보면 만화로 그린 바퀴벌레 같 다)이 바위에 잔뜩 새겨져 있다. 이러한 바위는 여자아이의 음핵을 잡 아늘이는 의식에 쓰였다. '테마누모타포키(to manu mo ta poki)' 즉 '새 아이(bird child)'라고 불린 이 의식(1919년까지도 치러졌다)에서 는, 여자아이를 바위 위에 세워 놓고 주술사 다섯 명이 잡아늘인 음핵 을검사한다음 바위에 그그림을새겼다. 비너스상과 마찬가지로, 우 ── ─ ── 그힘5-5 프랑스 라 마들렌에서 발견된 막대기 리는 후기 구석기 시대에 누가 이전 여자 성기 그림을 그렸는지 모른다. 당시의 동굴 벽에서 발견되는 여자 성기 그림들(그림 5-4 참조)은 포르 노나 의식용 그림이었을 것이다. 남자가 그렸을 수도 있고 여자가 그렸 을 수도 있다(여자가 성적인 목적으로 그렸을 가능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여자 동성애 잡지를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폴리네시아에서는 남자들이 생식력의 상징으로 몸에 음문처럼 생긴 문신을 새겼다. 문신은 구석기 시대 미술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작은 구멍을 내는 기술도 있었고, 검댕 같은 채색 재료도 있었기 때문이다. 가죽을 꿰매는 데 쓰인 것으로 보이는 뼈로 만든 송곳은 흔한 도구였다. 동굴 속에서 횃불을 켜고 울퉁불퉁한 바위 벽에다 여러 가지 동물을 그 린 구석기 시대의 화가들은 그런 작업을 하기 전에 많은 연습을 했을 것이다. 매끈하고 움직이기도 하는 입체적인 표면에 그림을 새기는 문 신은 훌륭한 연습이 되었을 것이다. 동굴 벽에 그려진 여러 가지 추상적인 그림 가운데 상당수는 음문일 수도 있지만,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반의 말은옳다. 이 추상적인 그림들은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다. 라 마들렌 동굴 에서 발견된 뼈막대 조각은 음경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보기에는 암사자가 이상하게 새겨진 남자의 두 다리 사 이에서 거대한 음경을 할고 있는 것 같다(그림 5-5 참조). 반면에 이 그 림에서 음문을 본 사람들도 있다. 데니스 페이로니(Denis Peyrony)는 그림 5-6 남근 막대기 (브루니켈) 그림 5개 남근 막대기 (프레드모스트) 그림 5◎ 남근 막대기 (르 플라카르) 그림 5개 이중 남근 막대기 (고르주당페) 음문이 반쯤 열려 있고 털이 그려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가하면, 루 젯(Luquet)은 음문이 아니라 엉덩이와 항문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이 무 엇을 묘사한 것이건, 성적인 표현이며 남자 인간과 짐승이 성적으로 연 관되어 있는 것만큼은 틀림없다. [ 움직이는상징 ] 후기 구석기 시대 미술에는 한 남근 막대기가 많다. 고르 주당페(Gorge d'Enfer)에서 발견된 '이중 남근 막대기' 는 두 개의 음경 이 양쪽으로 달려 있는 재미있는모양을하고 있다그림 5-9 참조, 이 것은 현대의 모조 이중 음경과 똑같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남근 막대기들은 거의 다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아서 정확한 크기도 알 수 없 고 용도도 짐작할 수 없다. 이것들의 의미를 해석할 수는 없지만, 그 크 기는 현대의 모조 음경과 비슷하다. 그 크기와 모양과 명백한 상징성을 생각할 때 빙하기의 남근 막대기 의 용도는 뻔하지만, 이제까지 직설적인 해석은 금기시되어 왔다. 이 남근 막대기들은 흔히 의식용 물건, 지휘봉, 화살이나 창을 곧게 펴는 도구(고르주당페에서 발견된 이중 남근처럼 밑부분에 구멍이 있는 것 들) 따위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남근 막대기들은 틀림없이 음문이나 항문 또는 입에 삽입되었을 것이다. 압솔론이 추상화한 여자로 생각한 돌니 베스토니체의 남근 막대기는 손잡이가 달린 모조 음경으로 쓰였 을 것이다. 그리고 고르주당페에서 발견된 이중 남근 막대기 역시 두 여자가 음문에 삽입하는 데 쓰였을 것이다(물론 다른 식의 치환도 가능 하다). 밑부분의 구멍은끈같은것을끼우는구멍이었을것이다 그림 5-6, 5-7, 5-8은 여러 가지 남근 막대기를 나타낸 것이다. 물론 이 인공물이 현대적 의미에서의 섹스 기구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지만). 만일 의식이라는 말이 신뢰 감을 준다면 의식이 타락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오늘날 세계 여러 곳에서 의식의 타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모양의 남근 막 대기가 다른 일차적 또는 표면상의 용도가 있었다고 해」도, 그 크기와 모양으로 볼 때 성적인 용도를 배제할 수는 없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여러 인간사회에서 모조음경이 쓰였거나쓰이지 않은것에 대한체계 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므로 모조 음경의 사용은 인류의 역사에서 언제 어디서나보편적인 현상이었을 것이다. off 영장류는 성적 쾌감을 얻 기 위해 막대기 같은 물건을 질 속에 삽입하곤 한다. 모조 음경 사용을 묘사한 그림은 기원전 5∼4세기에 만들어진 고대 그리스의 도자기에 새겨진 것이 최초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지만, 원시인도 모조음경 을 썼을 가능성이 크다. 빙하기의 남근 막대기가 바로 그 증거일지도 모 른다. [ 그리말디상-자위행위자일까 남녀 양성일까? ] 수많은 비너스상 가운데 남근 막대기를 쓰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 이 있다. '그리말디(Grimaldi) 남녀 양성'이라고 불리는신비로운비너 스상이 그것이다. 반투명 녹색 동석(凍石)으로 만든 이 기묘한 조각물 은 그리말디 동굴에서 발견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고고학자들이 직접 발굴하지 않은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조각물의 윗부분은 특이한 점 이 없다. 젖가슴은축처져 있고배는불룩튀어나와있다. 이상한것은 팔이다. 빙하기의 조각가들은 비너스상을 만들 때 팔을 깔끔하게 처리 하지 못했다 비너스자체가 수동적이고 조각가가 둥글둥글한 모양으 그림 5-10 그리말디 남녀 양성 로 만들려고 애썼기 때문인지, 팔은 아예 만들지 않거나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처럼 뻣뻣한 막대기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그리말디상은 팔이 어깨에서 곧장 밑으로 내려오다가 중간에서 갑자기 사라졌다가 (떨어져 나갔는지도 모른다) 허벅지 끝부분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러고 는 몸 앞쪽에서 겹쳐져서 두 손이 음낭처럼 보이는 것을감싼다. 그리 고 축 처진 음낭에서 뻗어나온 이랑 같은 것이 팔과 배 밑부분 사이로 지나간다 앙리 델포르트를 비롯한 몇몇 연구자는 이런 이상한 모양을 보고 남녀 양성이라고 해석했다. 젖가슴과 발기한 음경을 다 가지고 있 는 남녀추니라는 것이다. 제 2장에서 말했듯이 드물기는 하지만 간성이 있음을 생각할 때, 남녀 양성을 묘사한 조각물이라는 해석이 억지는 아 니다. 그러나 그리말디상을 남녀 양성으로 해석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우선, 팔의 임자와 몸통 임자가 다른 것 같다 게다가 음경의 머리 부분 이 불분명하다. 간단히 말해서, 다른사람이 뒤에서 껴안고 이 몸통 임 자의 질 속에 모조 음경을 삽입하는 것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 다. 이 두 가지 해석 모두 문제가 있지만, 적당한 물건이 있음을 생각하 면 후자의 해석이 더 그럴 듯하다고 할 수 있다. 돌니 베스토니체의 3인 조 무덤에서도 왼쪽 남자가 여자로 보이는 사람의 음부에 두 손을 얹고 있었으며, 석간주로 만든 물건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더 욱더 그렇다. 그리말디 남녀 양성에 대해 또 다른 해석이 있을수도 있다. 이를테 면, 이상한자세로성교하는모습을묘사한것일 수도 있다. 이상한자 세로 성교하는 그림은 로셀(Laussel)의 동굴에서도 발견되었다. 로셀의 그림은 두사람의 성기가 결합되어 있는모습을묘사한것 같다. 사타 구니가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 평면적으로 그려져 있어서 상형문자 같 은 느낌을 준다. 하인츠 흥거(Heinz Hunger)에 따르면, 연구자들은 이 그림을 성교 장면으로 해석하기를 꺼렸다고 한다. 르루아구랑은 이 그 림을 보고 "성교하고 있는 두 남녀의 윤곽을 고쳐 그려서 아기를 거꾸 로 분만하는 모습을 묘사한 덜 혐오스러운 그림으로 바꾸고 싶은 충동 을 느꼈다. "고 한다. 그는 인간이 성교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데에는 예 술적인 문제가 따르며, 로셀의 그림은 다른 여러 가지 예술 양식에 공 통된 묘사법을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 황소와의 황홀경 ] 동굴 미술은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과 피레네 산맥에 집중되어 있다. 동굴 미술의 주요 특징 두 가지는 동굴과 그림이다. 그림은 석간주와 황토와 숯으로 그렸다. 몇몇 동굴 안에는 나무로 만든 비계의 잔해가 남아 있는데, 화가가 동굴 천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높이로 설치되 어 있다. 그을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불붙은 나뭇가지나 수지 양 그림 5-11 라스코 동굴 벽화 초로 작업 공간을 밝혔던 것 같다. 비너스상의 주요 특징이 영구성과 휴대성이라면, 동굴 미술의 주요 특징은 들어 가기도 어려울 만큼 깊은 동굴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사람이 들어갈 수 없을 만큼 깊은 곳에 그려져 있어서 수만 년 동안 발견되지 않은 그림들도 있다. 실제 로 1만 년쯤지난 뒤에는 완전히 잊혀졌다가 19세기에 이르러 과학적 인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동굴을 탐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은 털북숭이 코뿔소, 매머드, ot9마, 들소, 사슴 따위의 덩치가 큰 짐승의 그림이다. 그러나 가장 흔한 그림은 추 상적인 그림이다. 르루아구랑은 이것들을 '통통한 상징'(또는 여자의 상징)과 '가냘픈 상징'(또는 남자의 상징)두종류로나누었다. 동굴미 술을 신화적인 의미로 해석한 사람도 많다. 신화 작가 조지프 캠벨 (Joseph Campbell)은 라스코(Lascaux) 동굴의 이밀 지역'에 대해 이 렇게 묘사했다. 그림 5-12 프랑스 아리에주의 트루아 프레레 동굴에 그려져 있는 '마법사' 그림 5-13 프랑스 아리에주의 트루아 프레레 동굴에 그려져 있는 반인(半人) 들소 땅바닥에 드러누운 남자 앞에 항문에 서 성기로 창이 꽃힌 거대한 수들소가 서 있다. 남자는 주술적인 황홀경에 빠져 있 다. 새 가면을 쓰고 있으며, 음경이 창이 꽃힌 들소를 향해 꼿꼿이 서 있다. 발밑 에는 창이 놓여 있고, 옆에는 머리 부분 에 새가 새겨진 권장 또는 지팡이가 우뚝 서 있다. 그리고 이 주술사 뒤에는 커다 란 코뿔소가 똥을 누면서 걸어가고 있다. 캠벨은 좀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이 장면을 오스트레일리아의 切를 겨누는 남근 의식'과 연관시키고 있다. 이 주술 적인 의식에서, 주술사가 회음부 밑에 다 끝이 뾰족한 뼈를 숨기고 제물이 된 사람을 잠재우기 위해 자신의 정액이나 배설물을 뿌린다. 그런 다음음경 밑에 있는 뼈로 제물을 겨눈다. 캠벨은 라스 코의 그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코뿔 소는 주술사가 길들인 짐승일 것이다. 창이 꽃힌 부분‥‥‥ 창자가 쏟아지는 들소의 항문과 성기 사이의 부분은 오 스트레일리아의 주술사가 끝이 뾰족한 뼈로 겨누고 있는 부분과 일치한다. " 이 해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 지만,구석기 시대의 그림이 뭔가 복잡 하고 이상한 것을 묘사한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유형의 증거가 부족하므로 우리의 해석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알기 어렵다. 또 다른 시각은 동굴의 접근불가성에 대한나의 이야기처럼 일반적 인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다. 동굴 벽화는 비너스상과는 대조적으로 거 의 언제나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었다. 그러므로 몇몇 특별 한 사람만 그 그림을 볼 수 있었거나, 그런 그림의 존재를 알았을 것이 다. 동굴 자체가 음문과 질과 자궁의 상징이었는지도 모른다. 프랑스 아리에주 지방에 있는 니오(Niaux) 동굴에는 바위벽에 길고 약간 구부 러진 수직의 틈이 나 있다. 이것이 성적인 상징일지도 모른다고 보는 것은, 바위벽이 아래쪽으로 휘어지는 밑부분 양쪽에 커다란 붉은 얼룩 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이 얼룩은 열린 음순을 연상시킨다. 음모를 연 상하게 하는 불규칙적인 점무늬가찍혀 있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다. 여 러 가지 짐승이 그려져 있는 동굴은 동물들이 떼를 지어 갑자기 몰려나 오는 상징적인 자궁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당시 사냥꾼들이 연례적 으로 이동하다 계곡 같은 것에 가로막혀 멈추었을 때, 계곡 입구에서 여 러 가지 사냥감들이 갑자기 튀어나오던 것처럼. 동굴에는 여러 가지 모습의 남자가 그 려져 있다. 흔히 주술사로묘사되어 있으 며, 짐승의 특징을 가진 남자들도 있다. 캠벨이 말한 '새 가면'을쓴 남자외에는, 반은 들소이고 반은 사슴이다(그림 5-12, 5-13, 5-14). 들소와 사슴은 둘 다 여러 암컷을 거느리는 일부다처 집단이다. 후 기 구석기 시대 사회가 성공적인 일부다 처 사회를 이루고 있는 그 주변의 짐승들 그림 5-料 사람 엉덩 이에 음경이 발기한 들소 을 본 받았다는 것은 지나친 상상일까? 도르도뉴 지방의 로제리바스 (Laugerie-Basse)에서 발견된 순록의 뼈조각에는 음경이 발기한 숫사 슴이 반듯이 드러누운 '암사슴여자' 위에 서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 암사슴 여자는 목걸이와 여러 개의 팔찌를 하고 있고, 임신한 듯한 불룩한 배는 털로 뒤덮여 있으며, 다리는 사슴의 다리이다. 앞서 말한 비너스상의 해석도 일부다처제와 연관시키면 더 그럴 듯해진다(여자의 지위가 위대한 여신 이론의 경우에서와는 크게 달라지겠지만). [ 비법의 전수 ] 비너스상과 마찬가지로 동굴 미술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 이론을 세우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동굴 미술 은기원전2만5,000년쯤에 시작되어 1만년쯤에 끝났다. 이 시기는삶 의 다양한 측면에서 여러 가지 큰 변화가 일어난 시기이다. 그 동안 특 정 시기에 특정 미술 양식을 적용시키려는 여러 가지 시도가 이루어졌 다. 그러나 폴 반은 빙하기 미술 전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미술은 저마다 개성이 다른 화가들에 의해 창조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 다. 그러므로 이 기간에 산발적으로 나타난 색다른 미술 양식들을 일반 적인 틀에 짜 맞추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 또한 후기 구석기 시대에 현대 서양의 변화속도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 역시 부적절하다. "인습 타파주의자가 생겨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비협력은 곧 죽음을 뜻했 다. "라고 클라이브 갬블(Clive Gamble)이 지적했듯이, 빙하기의 환경 은 혹독했다. 문명 사회보다는 문맹 사회가 대대로 똑같은 생활 방식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크다. 문맹 사회는 기록보다는 기억에 의존하여 상 세한 문화적 지식을 전승하기 때문이다. 문화적 지식의 기본적인 요소 그림 5-15 로제리바스의 '사슴 여자' 순록의 뿔 또는 들소의 어깨뼈 조각에 새겨진 그림이다. 들은 1만 5,000년 이상 그대로 유지되었을 것이다. 그것들을 변경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동굴 속 깊은 곳에 있는 동굴 미술을 보기 위해서는 광원(光源)이 필 요했는데, 그 광원은밝은햇빛이 아니라동굴벽에 그려진 그 짐승들 에게서 추출한 수지였다. 이 삶과 재생의 상징에서 하얀 풀 같은 수지 는 정액을 상징했을지도 모른다(수만 년 뒤에 초기 기독교 세례식에서 남근 같은 촛불의 촛농이 세례반에 뚝뚝 떨어진 것처럼). 동굴은 새로 운세대의 짐승들을 탄생시키는자궁을상징했을것이다. 그리고정액 을상징하는 수지를동굴(자궁) 안으로들여갔을 것이다. 이런 상징성 은 동굴에 그치지 않고 빛의 개념 자체에도 적용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태양은 남성이나 신을, 땅은 여성을 상징했을 것이다. 이런 개괄적인 상징성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빙하기 인류가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을 보기 위해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행위의 신화적 및 사회적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나는 남자들이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한다(앞서 말했듯이 능동적인 여자를 묘사한 그림은 없으므로). 그 리고 그림을 그린 목적은, 남자아이들이 성인이 되기 위해 치르는 통과 의례 때 남자아이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였다고 생각한다. 이 해석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럴 듯한 해석이다. 힘들여 동굴 속 깊은 곳까 지 들어가서 그림을 그린 충분한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림은 남자아 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여자들에게는 보이지 말아야 했다. 조앤 밤버거(Joan Bamberger)의 '모권 사회 신화' 이론은 이런 해석을 뒷받침해 준다. 밤버거는 모권 사회 신화가 부권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으며 남자의 힘을 정당화하는 사회적 헌장 구실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아마조 니아의 신화 두 가지를 인용한다(이 두 신화는 금세기 초에 기록되었 다). 오스트리아의 인류학자 마르틴 구신데(Martin Gusinde) 신부가 기록한 야마나야간족의 신화는 '키나(kins)'라는 남자들의 오두막에서 이루어지는 전수에 관한 것으로 여자들이 먼저 키나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당시에는 여자들이 지배했다.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남자 들은 오늘날의 여자들처럼 고분고분했다‥‥‥‥오두막 안의 모든 일을 여자 들의 명령에 따라 남자들이 했다. 아이들을 돌보고 불을 지키고 가죽을 다듬 었다. 이것이 당시의 규범이었다‥‥‥그러다가 여자들이 키나오두막을만 들었고, 모든 일이 그 안에서 이루어졌다. 여자들은 키나 오두막 안에서 신령처럼 분장하고 밖으로 나와 남자 들에게 겁을 주었다. 남자들은 두려움에 복종했다. 그러던 어느 날, 키 나 오두막 안의 신령들에게 사냥한 짐승을 갖다 바치던 '태양의 남자' 가 신령 분장을 지우고 목욕하는 두 여자아이를 목격했다. 그는 그들이 신령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두 여자아이를 윽박질러 여자 들의 속임수를 실토하게 하고 다른 남자들에게 그 사실을 폭로했다. 남 자들은 키나 오두막을 공격하여 여자들을 죽이거나 짐승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때부터 남자들이 키나 오두막에서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들은 여자들이 그들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했다. " 밤버거가 인용한 두 번째 신화는 영국 선교사의 아들로서 셀크남족 을 연구한 E. 루카스 브리지스(E. Lucas Bridges)가 기록한 것이다. 셀 크남족의 남자들은 여자들에게는 출입이 금지된 '하인(ham)'이라는 오 두막이 있었다. 그들의 모권 사회 신화에 따르면, 여자들은 마법을 알 고 있었다. 여자◎아이들만의 오두막이 있었다. 남자들은 감히 그곳에 들어가려 하 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 가는 여자아이들은 마법을 배웠다. 그들을 화나게 하는 사람을 병들게 하거나 죽게 하는 법을 배웠다. 남자들은 두려움과 복종 속에서 살았다. 여자들에게 고기를 공급하는 데 쓰는 활과 화살이 있었지만, 그들은 이렇게 자문했다. "이런 무기가마법과 질병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다가여자들의 폭정이 더 이상 참을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남 자들은 마법을 아는 성인 여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리하여 여자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에는 편하게 살았다. 그러나 여자아이들이 성인 이 되면 똑같은 일이 되풀이될까 무서웠다. 남자들은 그런 사태를 미리 막기로 했다. 남자들만의 비밀 사회를 조직하 고 그들에 대한 수많은 사악한 음모가 꾸며졌던 여자들의 오두막을 없애 버 렸다. 그리고 여자들이 그들의 오두막인 하인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이 규칙을 어기는 여자는 처형했다. 밤버거의 주장에 따르면, 이 두 가지 신화의 공통점은 여자들의 과거 의 잘못을 빌미로 여자들에게 지식을 전수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한다 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를 활동과 공간에서 구별하는 남자들만의 공간 의 기원을 설명해 주려 한다는 신화의 용도가드러난셈이다. 이 신화 는 도덕적 의미에서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려는 문화적 규범의 일부로, 사회적 및 정치적으로 남자에게 더 많은 권리를 허용하는 가치관을 바 탕으로 하고 있다. " 남자아이들은 사춘기가 되면 어머니에게서 육체적 으로 독립하여 비밀 지식을 전수받는다. 그리고 전수 기간이 끝나면 정 식으로 성인 남자사회의 일원이 된다. 한편, 여자아이들은 평생 동안 지켜야 하는 행동에 있어서의 금지 및 제한 사항들을 배운다. 그리고 그런 규칙을 어기면 엄한 벌을 받게 된다. 이를테면, 브라질 중부의 카 야포족은 규칙을 어긴 여자아이를 집단으로 강간하는 남자들만의 집이 있다. 얼핏 보면 이 아마조니아의 모권 사회 신화들은 지금도 서양에 남아 있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신화들과는 전혀 다른 것 같다. 그러나 밤 버거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를 신격 화하건 어린아이나 소유물로 격하시키건 그 결과는 마찬가지 이다. 이런 시각으로는 여자를 남자의 사회 ·경제적 및 정치적 지위에 접근 시킬 수 없다‥‥‥‥모권 사회 신화는 여자를 제자리에 묶어 놓기 위한 수단 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자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모권 사회 신화를 없애 버려야 한다. 그녀가 말하는 신화는 비너스상과 동굴 미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비너스상을 남자들의 포르노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비너스상을 만든 사회는 모권 사회로 보이지 않는다. 후기 구석기 시대 사회는 야마나야간족과 셀크남족처럼 옛날부터 전승되어 온 여자의 모 습으로 상징되는 나름대로의 '모권 사회 신화'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동굴은 남자아이를 성인 남자사회의 일원으로 만들기에 이상적인 공 간이었을 것이다. 은밀하기 때문에 여자들의 접근을 막을 수 있었을 것 이다. [ 대초원의 가학 피학성 변태 성욕 ] 우리는 빙하기의 유럽에서 성별을 어떻게 구분했는지 아직도 확실히 모른다. 유일한 증거인 무덤이 드물기도 하지만, 무덤에서 발견된 의복 으로 성별을 추측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게다가 남녀 모두 목걸이 같은 장신구로 치장했던 것 같다. 의복의 흔적이 남아 있는 비너스상은 극히 드물다 시베리아의 부레트 동굴에서 발견된 파카도 남녀 공용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러시아 남부의 코스티엔키에서 발견된 비너스상들에 는 성별이 비교적 분명한 의복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림 5-16의 비너스상은 가죽끈 같은 것을 착용하고 있다. 이 끈은 목에서 V자 모양으로 내려와 젖가슴사이에서 합쳐진다. 그리고 여기 에서 다른 두 가닥이 뻗어나와 양쪽 젖가슴 위를 지나 팔 밑으로 들어 간다. 나는 실물로건 사진으로건 이 비너스상의 뒷모습을 본 적이 없어 서 이 두 가닥의 끈이 등 뒤 어느 부분에서 합쳐지는지는 모른다. 그러 나 두 팔이 등 뒤로 가 있고 어깨가 뒤로 젖혀져 있기 때문에 젖가슴이 앞으로내밀어지게 되어 있다. 젖가슴을 강조하는 이 띠는 남자에게는 그림 5-16 가슴띠를 맨 여자. 코스티엔키에서 발견된 83-2번 조각물이다. 그림 5-17 묶인 여자 코스티 엔키에서 발견된 87번 조각물이다.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므로 여자들의 의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것은 부서진 조각으로 여자의 음부와 허벅지 윗부분과 불룩 한배만남아 있는데, 두손이 끈으로 묶인 채 배 위에 얹혀져 있다. 이 두 비너스상의 끈은 머리카락이나 모피를 묘사할 때처럼 깃털 모양으 로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모피로 만든 끈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의 툰드라 기후를 생각할 때, 이런 의복에는 방한 또는 단열 기 능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젖가슴과 음부가 드러나 있으므로 장식적인 것도 아니다. 기능적인 것도 아니고 장식적인 것도 아닌 이 모피끈은 에로틱한 의복처럼 몸의 성적인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몸의 자세와 두 번째 비너스상의 묶인 손목은 복종과 저항 불능을 나타낸다. 성적인 속 박을 나타낸 것일까? 남자아이들에게 보여 주려고 만든 것일까? 이 여 자들은 원정에서 붙잡힌 포로들일 까? 나는 이른바 비너스상들이 다 그렇듯이 이 조각물도 대상화와 소유 의 개념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실과 거리가 먼 공상이 아니 었다고 생각한다. 첫번째 비너스상의 얼굴이 없는 것은 비현실적'이지 만, 가슴 위로 착용한 띠는 실물 그대로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그리 고 두 번째 비너스상에 대해서는, 묶인 손을 묘사할 줄 아는 조각가는 손을 묶는 방법도 잘 알았을 것이다. 빙하기에 유라시아에서 만들어진 물건들은 거의 다그의미가분명하지 않지만, 활발한성 문화가존재 했음은 분명하다. 여러 가지 고고학적 증거에 대한 나의 해석의 핵심은 공간과 활동에서 남녀가 구별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동굴은 사회의 한 집단만의 독점적인 공간이었다(남자들의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해석에는 한 사회에서 남자 또는 여자의 개념을 이루는 것은 무엇 인가라는 복잡한 문제가 뒤따른다. 빙하기 문화는 1만 년 전쯤에 빙하 가 녹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사라졌고 불과 몇백 년 만에 기후가 현저 하게 따뜻해졌다. 현대인의 세계 정복은 단순한 이주가 아니라 번식이었다. 인간은 환 경을 자신에게 맞춰 변화시키고 대륙을 횡단하면서 여러 가지 위험과 마주쳤다. 그러나 가장 자주 마주친 것은 문화를 사용하고 무기를 만들 고 고기를 먹고 똑바로 서서 걸어다니는 원숭이의 생활 방식을 배우지 않은 동물들이었다. 세 대륙에서 덩치가 가장 큰 동물들이 먼저 사라졌 다. 유럽에서 매머드가 사라지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거대한 유대 류 포유동물이 사라지고, 아메리카에서는 마스토돈이 사라졌다 인간 의 수는 계속 증가했으며 최소한 세계의 다섯 지역에서 농경 생활이 시 작되었다. 인간은동식물을길들이기 시작했다. 한곳에 정착하여 땅에 투자하는 것은 사회적 및 생태학적 관점에서 혁신적인 일이었다. 수렵채취 시대의 섹스는 공유와 상호 보완의 개념을 바탕으로 이루어 졌지만, 초기 농경 시대의 섹스는 판음적(觀淫的)이고 억압적이었으며, 동성애를 지양하고 생식에 초점을 두었다. ovA을 두려워한 인간은 야 생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기온이 올라가고 빙하기가 끝남에 따라 툰드라는 삼림지로 변했다. 영국의 기온은 오늘날보다도 더 높은 최고치에 이르렀고 스코틀랜드 남부에서는 한동안 라임나무가 자랐다. 땅이 온갖 생물로 가득 찾다. 빙하기 후의 유럽 사회는 '중석기 시대'로 불린다. 작고정교한화살촉 으로 대변되는 당시의 석기 제조 기술은 당시의 경제 생활의 기반이 폭 넓었음을 말해 준다. 울창한 삼림은 훌륭한 사냥터가 되었으며 풍부한 자원과 함께 인간의 수도 점점 증가했다. 인간은 계절의 순환에 따라 전에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곤 했다. 그런 장소들마다 나름대로의 기능 이 있었다. 영국 북해 해안에 있는 요크셔 주의 스타카르(Star CaW)는 유명한 중 석기 시대 거주지의 하나로서 하계 사냥 캠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피 트 롤리콘위(Pete Rowley-Conwy)는 이 지역에서 발견된 여러 가지 동 물의 흔적을 정밀 분석하여 당시 사람들의 계절에 따른 이동을재현한 바 있다. 스타카르는 여러 거주지 가운데 하나였던 것 같다. 롤리콘위 의 추정에 따르면, 마을 전체가 동계 사냥 캠프였던 배리 섬에서 해안 에 있는 하계 사냥 캠프로 이동하여 내륙에 있는 스타카르로 사냥 여행 을 떠나곤 했다. 중석기 시대 사람들은 고지대에 규모가 작은 거주지를 만들기도 했는데 언제 어떻게 이용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림 6기 중석기 시대의 사냥 캠프를 재현한 그림 그림 6-1은 덤불을 쌓아 만든 단열용 기반 위에 세워진 중석기 시대 의 동계 캠프를 재현한 모습이다. 스타카르는 롤리콘위 등의 연구자들 이 연구하기 전에는 하계 캠프가 아니라 동계 캠프로 여겨졌었다. 이 그림은 자연 환경이 비슷한 오늘날의 수렵채취 사회를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이를테면 물고기를 널어 말리는 건조대는 북아메리카 인디언 이 쓰는 것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사실 중석기 시대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는 오늘날의 수렵채취 사회를 모델로 삼고 있다. 중석기 시대처럼 먼 과거에 대해 연구할 때, 현존하는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연구하면 고고학적 증거에서 무엇에 주목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알래스카의 이뉴잇족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이 뉴잇족은 계절에 따라 이동하며, 용도에 따라 전문화된 거주지들이 있 다. 베이스 캠프, 사냥 캠프, 사냥한 짐승을 처리하는 곳뿐만 아니라, 그림 6-2 '아도라 그림'. 시칠리아에서 발견된 바위에 새겨져 있는 그림 이다. 고고학자 루이스 빈포드(Lewis Binford)가 '연인들의 캠프◎라고 말한 곳도 있다. '연인들의 캠프'는 신혼부부가 번잡한 집단생활에서 벗어 나 조용히 그들만의 관계를 다지는 곳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증거만을 바탕으로 할 때, 중석기 시대의 유럽에는 그런 곳은 없었다. 그러나오 늘날의 전통 사회와 비슷한 생활 방식을 엿볼 수는 있다. 중석기 시대의 유럽은 사냥꾼들의 천국이었다. 이런 풍요로움은 남 성과 여성이 뒤섞인 상징적인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스웨덴의 스카테 흘름(Stateholm)에서 발견된 무덤에는 남자와 여자의 유골이 뒤엉켜 있었다. 시칠리아의 아도리FAddaura)에서 발견된 바위에 새겨진 그림 에는 두 적은 남자가 뒤엉켜 있고 남자들과 여자들이 그 둘레를 돌며 춤추고 있다. 두 젊은 남자의 발기한 음경은 동성애를 나타내는 것 같 다. 다뉴브 강 하류의 아이언게이츠 협곡에 있는 레펜스키비르 (Lepenski Vir)에서 발견된 조각물에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할 수 없는 남녀 양성 인간들과 물고기가 뒤엉켜 있다(그림 6-3 참조). 몇몇 사람의 상반신의 밑부분에 달려 있는 발기한 음경처럼 생긴 것을음경 그림 6◎ 레펜스키비르에서 발견된 '물고기-여자-남자' 조각물 으로 보는 연구자가 많지만, 세로로 새겨져 있어서 음문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애매한 생김새는 여자와 남자의 해부학적인 유사성을 노린 의도적인 표현인 것 같다. 물고기처럼 생긴 얼굴들이 이런 해석을 뒷받침해 준다. 레펜스키비 르는 당시 유럽에서 물고기가 가장 많은 강의 하나였던 다뉴브 강 유역 에 세워진 반영구적인 거주지였다. 이 곳에서 살던 사람들의 생활은 산 란을위한 물고기의 이동에 달려 있었다. 남아 있는물고기뼈로 볼 때, 연어 같은 물고기가 그들의 식생활에서 매우 중요했다. 그들은 연어의 생식기를 보고 깜짝 놀랐을 것이다. 연어는 수컷과 암컷이 머리는 서로 다르지만생식기는똑같이 생겼다. 그러므로 남녀 양성 인간을묘사한 조각물도 인간의 그런 유사성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레펜스키 비르 사람들은 인간이 한때 연어였다는 신화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중석기 시대 사회는 빙하기 사회와는 그 사회적 구조가 크게 달랐다. 성별에 따른 불평등을 나타내는 증거도 거의 없고, 성 문화를 나타내는 증거도 거의 없다. 덩치가 큰 동물을 잡아먹고 살던 빙하기에는 식물성 식량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작았을 것이다. 여자는 임신하면 덩치가 큰 동물을 사냥할 수 없었다. 그리고 혹독한 자연 환경 속에서 아이를 키 우기 위해서는 뚱뚱해야 했을 것이다. 남자는 선사 및 유사 시대에 흔 히 그랬듯이 여자의 그런 약점을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얼음이 녹자 여자도 영양학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 마 음만 내키면 언제든지 떠날 수도 있었다. 남자는 폭력이나 폭력의 위협 으로 여자를 제압할 수 있었지만, 이미 경제적 주도권을 잃은 상태였다. 그러므로 중석기 시대 사회는 남녀가 비교적 평등한 사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평등은 오래 가지 못했다(실제로 존재했다면). 근동의 인 구 증가가 또 다른 요인이 되어 여자의 경제적 불평등을 다시 초래했고, 그런 불평등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농경 생활이 시작됨에 따라 생산과 소유의 법칙이 생겨난 것이다. [ 삼림 벌채 ]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왔다. 자연의 보 고에 대한지식을 바탕으로 한 수렵채취 생활은 불과 몇천 년 만에 지 구상에서 거의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흔히 천 년 전에는 다람쥐가 세 번 강에서 중부내륙지방을지나 워시까지 땅을 밟지 않고 영국을 횡 단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울창한 숲은 새로 형성된 숲이었다. 마지막 빙하기 말에 유럽 전역을 뒤덮었던 녹림은 이미 오래 전에 벌채 되었다. 사실 마지막 빙하기가 물러간 뒤로 삼림이 여러 번 벌채되었다 가 다시 자라났지만 벌채된 적이 더 많았다. 토탄지와 물에 잠긴 나무 그루터기에 남아 있는 고대의 꽃가루를 분 석한 결과에 따르면, 체계적인 삼림 벌채는 신석기 시대가 시작된 직후 인 기원전 4000년에서 3500년 사이에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남아메리 카의 아마존 강 유역에서처럼 아름드리 고목들을 마구잡이로 베었으리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조금씩 부분적으로 벌채했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새로 개발된 금속 도구를 이용한 기원전 2000년에서 서기 300년 사 이의 두 번째 벌채는 영국 남부의 삼림의 절반을 파괴했던 것으로 추정 된다. 유럽 본토에서는 삼림 벌채가 영국보다 훨씬 빠른 기원전 6000년 쯤에 발칸 반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자연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중 석기 시대 사람들이 왜 갑자기 그들의 생태계의 근본인 삼림을 없애기 시작했을까? 왜 쟁기와 소에 의존하게 되었을까? 농경 생활은 동식물의 생식을 인간 생활에 유리하도록 통제하는 것 을 뜻한다. 농경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종자용 동식물을 길들여야 하고 생산된 식량의 배급을 통제해야 한다. 농경 사회는 개간한 땅을 지키기 위해 마을을 이루고 정착해서 살아야 했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정착 생활을 하면 출산 간격이 짧아져서 생식의 법칙이 달라진다. 그리고 농 경 생활은 인간과 환경의 관계를 믿음의 관계에서 이용의 관계로 바꾸 어 놓는다. 또한땅은여자의 상징이 되어 '대지의 여신'이 농사와죽은 사람의 매장에서 중심이 되는 것이다. 대지의 여신은 열매를 맺게 할 뿐만 아니라, 적당한 때가되면 그녀의 자식을자궁속으로다시 거두 어들인다. 농부들이 쓴 『구약 성서』는 남자가 사회의 주도권을 잡고 있으며 폭 력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신은 남성이고 땅은 여 성이다. 아담과 이브는 나무 열매를 먹고 살던 곳에서 쫓겨났다. 그리 고 신이 저주한 땅을 갈아야 했다. 그들의 두 아들 카인과 아벨은 농사 의 두 가지 기본 요소인 목축과 경작을 상징한다. "아벨은 양을 쳤지만 카인은 땅을 갈았다. " 아벨을 죽인 카인은 신에게서 "입을 벌려 네 손에 묻은 네 형제의 피를 받아들인 땅의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경고의 말을 듣는다. [ 위대한 여신 ] 김부타스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이상한 신념이 있다. 초기의 농경 사 회는 여신을 숭배하는 전원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신석기 시대 초의 농 경 마을을 발굴할 때마다 흙으로 만든 여인상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김 부타스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미술과 신화에 있어서 구석기 시 대와 신석기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시대 사람들 모두 '창조주 여신'을 숭배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김부타스는 농경 사회를 수렵채취 사회보다 더 문명화된 사회로 여겼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농경 사회는 정착 생활을 했고 여자가 그 중심이었다. 남자는 모계 혈 통을중심으로 이루어진 집안에 장가 들었다. 신석기 시대 문화는 '모 계 중심적이고 평등주의적이며 평화로운 농경 문화' 였다. 김부타스의 추종자의 한 사람으로 기상학자였다가 고대 신비 연구자 가 된 조지 테렌스 미든(George Terence Meaden)은 농경 문화의 영국 은 스톤헨지를 세운 사람들처럼 '여신의 시대의 평화를 누린 계급 없는 평등한 사회'였다고 주장했다. 이 이론은 큰 호응을 얻었으며 페미니스 트 사회학자들과 뉴에이지 운동가들의 저서에서 '사실'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은 틀렸다. 나는 유럽의 초기 농경 사회가 섹스를 포함한 모든 것을 이용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당 시의 사람들은 폭력적이고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했다. 커다란 나무들을 마구 베어 내어 거대한 남근 바위를 세우고 살아 있는 제물을 바치며(주 로 여자나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치곤 했다) 신성시하는 사람들이었다. 『구약 성서』의 「창세기」 편은 3,000년 전인 기원전 900년쯤에 쓰여 졌지만, 농경 생활은 그보다 훨씬 전인 마지막 빙하기 말에 시작되었다. 농경 생활이 시작된 이유는 자연 환경의 변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빙하 는 1만 2,000년 전쯤에 녹기 시작했다. 빙하가 녹자 해수면이 높아지고 몇몇 지역에서늘해안이 물에 잠겼지만, 무거운 얼음덩어리에 깔려 있 던 땅이 되살아나서 새로운 해안이 생겨난 곳도 있었다. 베링 해에 얼 음덩어리와 바다사이로 육로가 생겨서 시베리아 동부에서 살던 사람 들이 북아메리카로 건너갈 수도 있었다. 이 사냥꾼들은 마스토돈떼를 지 나 남쪽으로 내려 갔다. 한편, 지중해 동쪽 끝은 해수면이 높아졌다. 이 곳의 수렵채취 사회 들은 적어도 250종의 유용한 식물을 알고 있었고, 계절에 따라 이 동하면서 그것들을 채취했다. 그들은 가젤 영양과 물고기를 잡아먹으면 서 잘살았다. 해수면이 높아질 당시 그들의 인구는 계속증가하고 있 었다. 그러나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풍부한 해양 자원이 사라져 버렸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방법으로 식량을 생산해야만 했고, 땅을 경작하기 시작했다. 요르단 계곡의 지진 지대에 세워진 예리코(Jericho)는 가장 먼저 농 경 생활을 시작한 마을의 하나였다. 예리코는 기원전 8500년쯤부터 기 원전 73년까지 이민족에게 점령되었다가 헤롯 왕이 되찾았다. 예리코 의 성벽은 수천 년 동안 수없이 재건되어 성서에도 자주 등장한다. 예 리코 사람들은 여남은 가지의 식물에 의존하게 되어 근처의 범람원에 서 밀과 보리를 재배했다. 홍수가 날 때마다 씨가썩기 때문에 범람원 에서는 야생 밀과 보리가 자생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비옥한 땅을 개간하여 곡식을 파종하고 수확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 파 종할 곡식을 남겨 놓았다. 이런 행위가 갖는 의미는 매우 컸다. 농경 생활로의 전환은 인간에게나 식물에게나 더퍼할 수 없는 선택이 었다. 인간은 수십만 년은 아닐지라도 수만 년 동안 쌓아 온 식물 에 대한 지식을 금방 잃어버렸고. 인간에 의해 재배되기 시작한 몇몇 식물들은 '생식'이라는 문제를 인간에 의해 조절당하게 되었다. 야생 보리가 익었을 때 줄기가 흔들려 땅에 떨어진 보리알은 그 이듬해에 싹 이 튼다. 그러나 호숫가에서는 이삭이 떨어져도 그냥썩어 버린다. 따 라서 예리코 사람들은 줄기와 보리알을 잇는 꽃대가 튼튼한 보리만 수 확하여 그 일부를 종자로 남겨 놓았다. 남겨 놓은 종자로 이듬해에 수 확한 보리는 꽃대가 더 튼튼해서 이삭이 줄기에 더 잘 매달려 있었고, 수확할 때마다 이런 자연 도태의 법칙이 되풀이되었다. 타작할 때 손실 되는 것은 대체로 알갱이가작은 것이었다. 보리와 야생 밀은 곧 길들여져서 알갱이는 점점 더 커졌고 타작하지 않는 한 쉽게 떨어지지 도 않았다. 식물의 생식이 인간사회에 의존하게 되었듯이 인간사회 역시 식물 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예리코등 근동의 여러 지방 사람들은 시간과 노 력을 투자하여 땅을 경작하고 야생 동물과 다른 집단으로부터 보호하 기 위해 그 곳에 머물러 살게 되어 점차 소유라는 개념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담장을 치고 그 안의 땅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 다(19세기의 프랑스의 정치사상가 피에르-조제프 프루동[Pierre- Joseph Proudhon]에 따르면, 소유의 개념은 그들을 믿어 줄 정도로 어 리석은 사람이 나타났을 때 시작되었다). 수렵채취 생활을 하던 선사 시대 사람들도 식량을 저장하고 노력을 투자하여 자연 환경으로부터 보상을 얻어 냈지만, 농업은 이런 활동을 질적으로 새로운 차원으로 올 려놓았다. 종자용 곡식은 개인의 생존에 필수적이었으므로 잘 보관하 고지켜야 했다. 종자용 곡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인류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정치적 힘을 갖게 되었다. [ 길들이기 ] 오스트레일리아의 고고학자이자 선사학자인 V.고든 차일드(V. Cordon Childe)는 인류의 역사에서 세 가지 혁명이 있었다고 말했다. 농경 또는 신석기 시대 혁명, 도시 혁명 그리고 산업 혁명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혁명이 일어날 때마다 인구가 증가하고 정치적 중앙집권화 가 이루어졌으며 인간의 환경 지배가 심화되었다. 신석기 시대라는 말 은 농경 문화의 석기 기술이 그 전의 것들과 달랐기 때문에 붙여진 말 이다. 이제 인류는 전처럼 돌을 깨뜨려 쓰지 않고 갈아서 표면이 부드 럽고 둥근 석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초기 농경 사회에서는 돌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것을 갈아서 써야 했 다. 이를테면 곡식도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야 했다. 런던의 자연사 박 물관의 테야 몰리슨(Theya MoBleson)은 지금의 시리아의 아부후레이 리(Abu Hureyra)라는 농촌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인의 유골 162구를 연구한 바 있다. 유골들의 연대는 1만 1,500년 전에서 7,500년 전 사이 로 밝혀졌다. 몰리슨은여자들이 무릎을꿇고 '앉은뱅이 맷돌'로 곡식 을 빻았다고 생각한다. 앉은뱅이 맷돌은 납작한 석판 위에 납작한 돌을 얹어 앞뒤로 움직이는 것으로서, 오래 사용하면 석판 가운데가 닳아서 오목해진다. 몰리슨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여자들의 유골에서 무리 한사용으로배가손상된 흔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척추는 휘어져 있고, 발가락에는심한골관절염을앓은흔적이 있으며, 대퇴골이 뒤틀 려 있고, 슬개골은 딱딱해져 있었다 경제적인 대변동이 일어나면 남녀의 관계가 달라질 수 있지만 어떻 게 달라질지 는 예측하기가 어렵다. 미국 텍사스 주 캐도언마운드 (Caddoan Mound)의 선사 시대 사회는 수렵채취 생활에서 농경 생활 로 전환하게 되었을 때, 남자와 여자의 신장의 차이가 크게 줄어들었다. 여자의 키는 많이 커지고 남자의 키는 상대적으로 조금 커졌다. 아마 농경 생활로 여자들의 영양 상태가 좋아졌던 것 같다. 그러나 미시시피 계곡에서는 앞서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남녀 모두의 키가작 아졌지만 특히 여자의 키가 더 작아졌다. 성별에 따른 동종이형이 더 심화된 것이다. 몰리슨의 연구는 신석기 시대의 매장 방식 때문에 가능했다. 신석기 시대 사회가 죽은 사람을 처리한 방식은 그 당시 인간 사회의 종교적인 관념에 변화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정치적인 의미로 해석할 때, 죽은 사람을 땅에 묻는 것은 계:默혈통의 전승과 그에 따른 재산 상속)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영토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노동을 투자하여 땅을 경작한 조상이 죽으면 그 땅에 묻는 것이다. 신석기 시 대 무덤에서 발견된 유골은 주로 웅크린 자세를 하고 있다. 자궁 속의 태아처럼 무릎을 굽히고 팔을 포개고 있다. 시체를 이런 자세로 묻기 위해서는 사지를 묶는 등의 특별한 처리가 필요했다. 이런 매장 방식으 로 볼 때, 땅은 일종의 자궁으로 여겨졌고 시체는 재생을 기다리고 있 다고 해석할 수 있다.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싹이 돋아나는 농사의 주기도 일종의 재생 주 기였다. 예리코에서는 비옥한 범람원의 흙을 두개골에 붙여 얼굴을 만 들고 별보배고등 껌질로 눈을 만들었다. 별보배고등은 여자의 성기를 나타내는 '천연 상징'으로서 재생에 필요한 여자의 출산 능력을 나타낸 다. 그러나예리코에서 발견된 두개골들은 『구약성서』의 「창세기」에서 남성 신이 흙으로 아담을 창조하는 장면을 떠을리게도 한다. 신석기 시대에는 여자의 출산이 더 활발해졌다. 한 곳에 머물러 살게 됨에 따라 출산의 간격이 짧아진 것이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필요 한 지방을 축적하는 문제는 비교적 안정된 농작물의 생산으로 해결되 었다. 출산이 잦아진 것에는 다른 이유들도 있었다. 수렵채취 생활을 할 때의 식물에 대한 지식이 실전되었기 때문에 식물을 이용한 피임법 도 함께 실전되었을 것이다. 이보다 더 중요하게는, 곡식을 재배하고 수확하고 빻는 일로 늘 바빠 수렵채취 생활을 할 때보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수렵채취 생활을 할 때에는 아이가 요구 할 때마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젖을 늦게 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제 3장에서 설명했듯이 젖을 먹이면 피임 효과가 있다). 수유를 통한 피임 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에게 먹이는 젖의 양이 아니라 젖을 먹이 는 횟수이다. 이를테면, 세 살 된 아이가 세 달 된 아이와 비슷한 양의 젖을 먹는다고 해도, 한 번에 많이 먹는 세 살 된 아이를 키울 때 임신 할 확률이 훨씬 더 높다. 젖을 먹이는 횟수가 줄어듬에 따라 산모의 몸 속의 프로락틴 함유량이 너무 적어서 배란을 억제하지 못하기 때 문이다. 농사는 매우 힘든 일이었고 특히 수확기에는 더 그랬다. 그러므로 신 석기 시대 여자들은 아이들이 원할 때마다 젖을 물리지 못하고 시간을 정해 놓고 젖을 물렸을 것이다. 따라서 아이가 아직 어림에도 불구하고 프로락틴 함유량이 낮아졌을 것이다. 이런 가정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 는 없지만, 인구가 계속 증가했고 기원전 5500년에는 일부러 젖을 뗀 증거도 있다. 불에 구운 질그릇을 만든 것은 젖을 떼기 위해서였다. 신 석기 시대 유아의 닳은 이를 분석한 몰리슨의 연구에 따르면, 불에 구 워서 만든 질그릇에 죽을 끓여서 일종의 이유식으로 먹인 것 같다. 신석기 시대에는 여자의 지위가 낮아졌던 것 같다. 그러나 신석기 시 대 초의 무덤에는 남자들이 더 부유했음을 나타내는 증거가 없다. 게다 가 orig 식물을 재배하고 질그릇룻을 만든 것 같은 중요한 혁신의 상당 부분은 여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수렵채취 시대의 성별에 따른 노동의 분담은 오늘날처럼 계속되었던 것 같다. 마거릿 에렌버그(Magaret Ehrenberg)는 오늘날의 농경 사회에서 쟁기나 기계를 쓰지 않고 소 규모 농사를 짓는 곳)을 조사한 바 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여자들만 농사를 짓는 곳은 50퍼센트이고 남자들만 농사를 짓는 곳은 겨우 17퍼 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에렌버그의 말을 옮기자면, "생산에 있어서 남 자가 더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회와 수십 년 또는 수백 년 동안 공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회들은 성별에 따른 이런 노동 분담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 남자는 동물이 중요해지는 시점에서 농사에 참여하는 경향이 있다(동물은 처음에는 그 고기가 유용했지만 나중에는 무거운 쟁기나 운송 수단을 끄는 데 유용해진다). 농사를 짓는 방법은 다양하다. 자연 환경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다르듯이, 농사의 기술도 지역마다 다르다. 체계적인 식물 재배가 시작 된 지 2,000년 뒤인 기원전 8500년 무렵, 가젤영양을 사냥했던 남자들 이 동물들(특히 양)을 마을 근처의 우리에 가두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양이 나중에는 염소와 소가 이런 식으로 길들여졌다. 동물 가운데 서도 살이 많고 온순한 것들만 골라 길들이고 성질이 사나운 것은 길들 이지 않았다. 길든 동물들은 점점 더 덩치가 커지고 유순해졌으며 일 년 내내 고기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그 배설물은 농사에서 훌륭한 비료가 되었다. 신석기 시대의 농경 생활이 얼마나 '혁신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고 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론이 분분하다. 나는 그 변화의 중요성은 아무 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농경 생활로의 전환은 1만 년 전에서 1만 2,000년 전 사이에 중국과 인도와 아메리카 대륙 등 대여섯 지역에서 서로다른시기에 독자적으로 이루어졌던 것 같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마스토돈의 멸종에 이바지했던 사냥꾼들이 페루 해안 같은 곳에 정착하여 5,000년 전쯤에 옥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농경 생활로의 전환은 제2의 혁신을 가져왔다. 도시가 생겨나고 인 구가 증가했으며 기술이 전문화되고 정치적 계급제가 생겨났다. 역법 (曆法), 수학, 문자등의 복잡한 기록및 계산방식이 생겨났다. 그러나 농경 생활로 전환한 이유는 지역마다 달랐다. 다시 말해서, 여러 가지 이유로 농경 생활을 선택했거나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농경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어쨌거나 농경 생활로의 전환은 수렵채취 생활 시대의 지식 의 실전과 인구의 증가에 따른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농경 생활이 시작 되기 전에 세계 인구가 꾸준히 증가한 것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 다. 인류는 1만 년 전에 이르러서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의 대 부분에 퍼져 살고 있었다. 그래서 더 좋은 곳으로 이동할 수가 없었다 살 만한 곳은 다른 종족이 이미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경 생활 이 시작되고 인구가 농토의 수용 한계를 벗어나게 되었을 때에는 다른 종족을 쫓아 내야 하는 새로운 도전이 생겨났다. 유럽에서 농경 생활이 시작된 것은 인구 증가 때문이었다. 농경 생활 은 기존의 사회 구조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 섹스와 생식에 대한 문화 적 태도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유럽에서는 빙하기가 끝남에 따라 인 간의 삶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지만, 농경 생활로의 전환은 그 변화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다. 스타카르나 레펜스키비르 같은 곳에 살던 중 석기 시대 사회는 기후가 따뜻해짐에 따라 인구가 증가했다.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중석기 시대의 인구증가는 농경 생활이 시작되 었을 때 안정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농경 생활이 완전히 정착 되었을 때에는 유럽의 인구가 다섯 배쯤 늘어나 있었던 것 같다. 농경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유럽으로 처음 들어온 것은 기원전 6000 년 무렵이었다. 지금의 터키에서 발칸 반도로 들어간 것이다. 그로 인 해 지중해 연안과 도서 지방에 농경 생활이 퍼졌다. 이주민들이 농사법 을 전파한 곳도 있었고, 현지의 중석기 시대 사람들이 질그릇, 길들인 동물, 재배할 수 있는 식물 따위의 농경 생활 요소를 받아들인 곳도 있 었다. 유럽 중부와 서부에서는 이런 식민지화나 자발적 채택이 1,000년 그림 6-4 위대한 여신 뒤인 기원전 4500년쯤에 시작되었고, 영국에서는 기원전 3800년쯤에 시작되었다. 발칸 반도와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먼저 생겨난 신석기 사회는 흙으 로 여인상을 많이 만들었다. 이 여인상은 오랜 전통에서 비롯되었으며 아나톨리아(지금의 터키)와의 교류에 의해서 새로워진 여신 중심의 농 경 생활 종교가 존재했다는 김부타스의 이론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모 런 중심적이고 여신을 숭배하는 농경 사회에 대한 그녀의 이론은, 주로 이 여인상에 대한해석과 터키의 코니아평원에 있는 아나톨리아의 농 촌 카탈후유3(fatal Hiiyiik)에서 발견된 증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 카탈후유크 ] 고고학자 제임스 멜라트(James Mellaart)는 1960년대에 카탈후유크 의 도심지에서 기원전 6200년에서 5500년 사이에 세워진 건물 14동을 발굴했다. 이 집들은 위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들어가게 되어 있었 다. 집 안의 구조와 조각물들과 벽에 그린 그림들은 잘 보존되어 있었 고 바닥 아래에 무덤이 있었다. 그 일차적인 증거물에 대한 멜라트의 발표는 잘못된 것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아이앤 호더(fan Nodder)의 연구가그신비의 일부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김부타스는 그 집들의 여러 가지 상 징물이 위대한 어머니 여신의 숭배와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흙으 로 만든 여인상도 '왕관을 쓰고 양 옆에 고양이과 동물을 거느린 위대 한 여신이 다리 사이로 나오는 아이에게 생명을 주는 모습'을 묘사한 것 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리 사이에 있는 것이 정말 아이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여자의 무릎의 모양으로 보아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편히 앉아 있는 것 같다. 아이를 낳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님이 분명 하다. 물론 김부타스의 주장대로 아이를 낳는 여신의 모습을 묘사한 것 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유럽 전체의 최고 신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카탈후유크에서 발굴된 집들 가운데 몇몇에는 내벽에 뿔 달린 황소 의 머리가 붙어 있다. 이 황소 머리는 강건하고 남성적으로 보이지만, 김부타스는 이것도 여신의 상징이라고 주장한다. 주둥등이 양쪽에 휘어 진 뿔이 달린 모습은 여자의 자궁과 나팔관과 난소를 상징하는 것이라 고 한다. 이러한 해석은 거의 억지에 가깝다. 물론그 당시의 카탈후유 크 사람들이 인체 구조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신석기 시대 에 폭력이 사용되었음을 나타내는 증거가 말해 주듯이(이것은 당시 사 회가평화를사랑하는 모권 사회였다는 김부타스의 주장에 반대된다), 당시 사람들은 인간의 내장에 대해 잘 알았던 것 같다. 신석기 시대 사 람들은 생리 때의 고통으로 난소의 생식학적인 중요성을 알았을 것이 다. 그러나 황소의 머리와 젖을 여자 생식기의 정교한 구조에 비유하는 그림 6-5 카탈후유크에서 발견된 독수리 여신의 신전.흰쪽 벽의 황소 머리 위에 젖가슴처럼 생긴 조각물이 붙어 있다. 정면으로 보이는 벽에는 '독수리 여신'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것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라트 역시 집 내벽에 그려진 그림들이 인간 아이와 뿔 달린 황소를 낳고 있는 여자를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사진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소는 농경 사 회에서 매우 중요했다. 김부타스의 이론으로는 가장 설명하기 힘든 증거는 이른바 '젖가슴' 이라고 불리는, 집 내벽에 붙어 있는 한쌍의 흙무더기이다. 카탈후유 크에서 발견된 여인상들의 젖가슴은 젖꼭지가불룩 튀어나와 있지 않 고 움푹 들어가 있다. 작은 여인상에 젖꼭지를 만들 때 불룩 튀어나오 게 만드는 것보다는 움푹 들어가게 만드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벽에 붙어 있는 흙무더기에는 독수리의 부리처럼 생긴 젖꼭지가 달려 있다. 흰목대머리수리(이 종인지도 의문이지만)는 벽에 그려진 그림들에도 있다 이것 또한 정확하게 발표되지 않았다). 앞서 말한 젖 떼기와 연관시켜 보면, 이 조각물은 아이가 어머니로부터 독립 하여 독수리처럼 고기를 쪼아먹는 모습을 묘사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 니면 반대로 어머니의 젖을 먹고 사는 아이를 부정적으로 여겨서 시체 를 먹고 사는 독수리에 비유한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몇몇 사회에서 는 젖꼭지에 레몬즙 같은 것을 바르는 등의 강제적인 방법으로 젖을 떼 곤 한다. 그러나 젖꼭지에 독수리의 부리를 다는 방법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므로 벽에 붙어 있는 흙무더기는 젖가슴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 쌍이 아니라 한 개만 있는 것도 있고 한 쌍이 세로로 붙어 있는 것도 있으며, 다 독수리 부리가 붙어 있는 것도 아니다. 여우 이빨이 붙어 있 는 것, 멧돼지 엄니가 붙어 있는 것, 족제비 두개골이 붙어 있는 것 등 여러 가지가 있다. [ 흙으로만든 여자 ] 아이앤 호더는 카탈후유크외 상징적인 표현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그것들이 '위대한 어머니 여신' 이론을뒷받침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 만,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살지 않고 농경 생활을 하면서 자연에 대항 하기 시작함에 따라 표면화된 틈과 인간 사회 사이의 긴장의 한 증거 라고 생각한다. 나는 카탈후유크에는 평화로운 모권 중심적 종교가 존 재했음을 말해 주는 증거가 없다고 생각한다. 벽에 붙어 있는 기괴한 것들은 세계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회를 나타낸다. 나라면 거실에 독 수리 부리가 달린 젖가슴을 걸어 놓느니, 차라리 영국의 화가 대미언 허스트(Damien Hirst)가 그린 포르말린 속의 양의 그림을 걸어 놓겠다. 카탈후유크의 증거들은 어린이에 대한 생각이 구석기 및 중석기 시대 사람들보다 더 복잡미묘하고 더 착취적인 사회의 존재를 보여 준다. 그 리고 이것은 신석기 시대의 유럽 사회에 대한 다른 증거들에서도 엿 볼 수 있다. 신석기 시대의 유럽에 대한 김부타스의 어머니 여신 이론의 가장 큰 문제는, 빙하기의 비너스상들이 그렇듯이 흙으로 만든 여인상들 가운 데 어머니라고 할수 있는 것은 극소수라는 것이다. 미술에서 어머니의 묘사는 보편적인 부분이 많다. 동정녀 마리아에서 인도의 여신 하리티 에 이르기까지, 가장 전형적인 표현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어머 니의 모습이다(그림 8-8 참조). 다른 표현으로는 아이가 어머니의 무 릎에 앉아있는모습, 아이가 태어나는 모습, 아이가 탯줄끝에 매달려 있는 모습(오스트레일리아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선사 시대의 바위 그림에서 흔히 볼수 있다) 등이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발견된 수백 개의 신석기 시대 조각물 가운데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를 묘사한 것은 단 하나밖에 없다. 이른바 次라다츠의 마돈나(Madonna from Gradac)'라고 불리는 이 조각물은 예전 유고슬 라비아의 모라바 강 유역에 있는 기원전 5000년 경의 거주지에서 발견 되었다. 아이를 낳는 모습을 묘사한 것도 극히 드물다. 이런 문제를 의식해서 였는지, 김부타스는 임신 기간을 상징하는 것 따위의 어머니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을 만한 다른 증거들에 의존했다. 몰타의 하갈킴(Hagar Qim) 사원 터에서 발견된 기원전 4000년의 작은 여인상은 등에 아홉 개의 눈금이 깊이 새겨져 있다. 김부타스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두 다리를 들어올리고 한 손으로 부풀어오른 음 문을 만지고 있는 이 여인상은 아이를 낳을 때가 된 것 같다. 등에 새겨 진 아홉 개의 눈금은 아홉 달의 임신 기간을 나타낸 것일까?" 이러한 추 정은 이 여자가 임신부라는 가정(이것도 문제가 있다)과 아홉이라는 숫 자의 상징성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아홉이라는 숫자는 임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가 쓰는 현대의 열두 달 달력으로는 임신 기간이 아 홉 달일 수 있지만, 신석기 시대에 쓰였음이 거의 확실한 태음력으로는 열 달이기 때문이다. 히포크라테스 시대에는 마지막 생리로부터 태음력으로 열 달을 임신 기간으로 계산했다. 태음력의 한 달은 정확하게 29일 12시간 44분 3초 이지만 보통 29일로 친다. 그러므로 열 달은290일이다. 현대의 임신 기간 계산법을 여러 가지가 있고 나이겔레의 법칙을 어떻게 적용하느 냐에 따라 달라진다. 나이겔레의 법칙에 따르면 마지막 생리로부터 9개 월 7일째 되는 날이 분만 예정일이다. 다시 말해서, 큰달과작은 달의 비율에 따라 임신 기간이 280일에서 283일 사이가 된다. 그러나 실제 임신 기간은 경우에 따라다르다. 한조사에 따르면, 첫 임신의 평균기 간에 따라서도 다르다. 프랑스에서는 마지막 생리로부터 41주째 되는 날을, 영국과 미국에서는 40주째 되는 날을 분만 예정일로 본다. 어쨌거나하갈킴 여인상의 등에 새겨진 아홉 개의 눈금이 임신 기간 을 상징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한 손은 머리 뒤로 하고 또 한 손은 음순 끝부분을 만지고 있는 방만한 자세로 보아, 이 여자는 아이를 낳 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위행위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자세 는 아이를 낳기에는 아주 불편한 자세이다. 현대에 와서 남자 의사들이 여자들에게서 분만의 주도권을 뺏기 위해 산모에게 이런 자세를 취하 게 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런 자세로 아이를 낳지 않았다. 하갈킴 여인상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교육적인 것이었을까, 상징 적인 것이었을까, 에로틱한 것이었을까? 신석기 시대의 여인상들이 어 머니 여신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일까? 땅의 비옥함의 기본 요소인 흙 자체에 실마리가 있는지도 모른다. 이 여인상들은 땅을 여자로 의인화 그림 6-6 몰타 섬 하갈킴에서 발견된 '자위행위를 하는 여자 한 것이다. 땅은 아이를 낳지 않으므로 여인상들에게는 아이가 없다. 땅은 곡식을 생산한다. 곡식의 씨앗은 물과 햇빛으로 땅 속에서만 싹튼 다. 흙으로 이런 여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흙을 물로 개서 모양을 빛 은 다음 태양의 불꽃을 대신하는 가마에 넣어 구워야 한다. 어쩌면 이 런 여인상 안에는 곡식의 씨앗이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 주의 깊은 여자 가장 ] 농경 생활은 유럽 동부에서부터 북부와 서부로 전파되었지만 동유럽 의 발칸 반도와 에게 해 인근 지역 이외에서는 여인상이 많이 발견되지 않았다. 고고학자들은 농경 생활을 전파한 사회를 '줄무늬 토기 문◎ 라고 부른다. 경작지의 경계선과 줄지어 늘어선 농작물을 연상하게 하 는 곡선과 기하학적 선을 새긴 질그릇을 일컫는 말이다. 줄무늬 토기 사람들은 기원전 5500년에서 5000년 사이에 헝가리의 평야와 우크라 이나 서부에서 지금의 독일과 네덜란드와 프랑스 북동부로 진출했다. 가볍고 모래처럼 바슬바슬한 '默개간하고 경작하기는 쉽지만 금방 척 박해진다)에서만 줄무늬 토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된다. 그들 이 개간지를 몇 년 동안 사용하다 버리고, 나중에 어느 정도 다시 비옥 해지면 돌아와 다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는 증거가 많이 있다. 예를 들 어 울타리의 말뚝을 세우는 구멍들이 겹쳐져 있는 것은 몇 채의 공동 주택으로 이루어진 마을이 서로 다른 시기에 같은 장소에 세워졌음을 나타낸다. 공동 주택은 줄무늬 토기 문화의 대표적인 특징의 하나이다. 너비가 6미터쯤 되고 길이가 15미터에서 30미터쯤 되는(길이가 더 짧은 것도 있고 45미터나 되는 것도 있다) 공동 주택은 영구적인 주거 공간이었으 며 단층이었던 것 같다. 평면 구조를 보면 신기하게도 한결같이 세 부 분으로나뉘어 있다. 이 공동 주택의 일부는축사로쓰였을수도 있지 만, 크기는 그 안에 사는 가정의 구성에 따라 결정되었던 것 같다. 오늘날의 여러 사회의 단독 가정 주택과 비교해 보면, 남자가 처가에 들어와 사는 모계 중심적인 가정은 여자가 시가에서 사는 부계 중심적 인 가정보다 더 큰집을짓는경향이 있음을 알수 있다. 그 이유를 한 가지 들자면, 여러 자매가 각자의 남편과 함께 사는 가정으로 남자가 장가 들어 사는 경우에는 여자들이 한지붕 밑에서 가사 일을 나누어 하 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의 집에서 사는 경우에 는 남자의 형제들이 독립 가정을 이루어 따로 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에렌버그도 지적했듯이, 줄무늬 토기 문화의 공동 주택은 전형적인 모 계 중심적 주거 형태의 범주 안에 든다. 오늘날의 몇몇 사회를 조사한 것을 바탕으로, 일부일처 가정은 네모난집에서 살고 일부다처 가정은 동그란 집에서 산다면서, 줄무늬 토기 사회는 일부일처제 사회였을 것 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다지 신빙성이 없는 이론이다. 혼인 형태와 주거 형태 사이의 연관성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줄무늬 토기 문화의 고고학적 흔적에는 개척 정신이 나타나 있다. 포 장마차를 타고 아메리카 인디언의 사냥터를 지나 서부로 진출한 미국 초기의 백인들처럼, 줄무늬 토기 문화의 이주민들의 삶도 많은 위험을 겪었을 것이다. 그들의 이동 속도는 서부 개척자들보다 훨씬 더 느렸다. 대서양 연안에 도착하는 데 무려 500년이나 걸렸다. 그들이 처음부터 해안 지역을 목표로 삼았는지, 아니면 인구 증가에 따라 자연히 서쪽으 로 진출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인구 증가는 그들의 진 출에서 핵심적인 요인이 되었다. 유럽 북부와 서부에서 농경 생활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중석기 시대 사회가 농사 기술과 길들인 동물과 곡물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고고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점점 더 먼 곳으로 진출하려는 주류 식민주의자들의 언저리에 서 일어나는 부분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사방으로 확산된 줄무늬 토기 문화의 특징이 일관된 것으로 보아, 줄 무늬 토기 문화 사람들이 새로운 땅을 개척하여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공동주택, 토기, 매장방식(시체를자궁속의 태아처럼 웅크린 자세로 묻었으며 집 밑에 묻기도 했다) 등은 그들의 보수적인 전통을 보여 준 다. 북아메리카의 개척자들이 그랬듯이, 절제된 생활방식이 신석기 시 대 이주민들의 어려운 삶을 지탱해 주었을 것이다. 중석기 시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삼림 환경을 포기했을 가능성은 매우적다. 고고학적으로 말해서, 이 시기에 횡사한사람들이 많았다는 증거가아주 많다. '양편' 모두가살상 기술이 뛰어났다. 중석기 시대 에 이미 살상 효과가 뛰어난 화살촉이 개발된 데 이어, 신석기 시대에 는 미늘과 슴베가 달린 새로운 화살촉이 개발되었다. 이 화살촉은 관통 하는 힘이 뛰어나서 심한 내출혈을 일으켰으며 화살을 뽑아 내도 화살 촉은여전히 몸에 박혀 있었다. 사람을 죽일 목적으로 특별히 이런 화 살촉을 만든 것 같고, 실제로도 그런 목적으로 쓰였다. 스페인의 신석 기 시대 유적지에서 발견된 두 구의 남자 유골이 이것을 증명해 준다. 한사람은 밑에서 쏜 화살을 맞았는데, 나무 위에 숨어 있었거나 요새 위에 서 있었던 것 같다. 화살은 배를 뚫고 요추에 박혔다. 아마 이 사 람은 즉사했을 것이다. 프랑스의 산과 의사 미셀 오당은 아이를 낳고 생후 몇 주 동안 신생 아를 다루는 방식에서 그 사회의 일반적인 성향을 엿볼 수 있다고 말한 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공격적 성향이 강한사회는 아이가 태어나자 마자 아이를 산모에게서 떼어 놓고 단백질과 항체가 풍부한 초유(初乳) 를 먹지 못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하면 선천적으로 체질이 허 약한 아이는 죽기 쉬우며, 아이에게 원초적인 분노심을 심어 준다. 아 이에게 초유를 먹이지 않으면 산모의 젖이 잘 나오지 않게 되어서 아이 를 키우기가 힘들어진다. 이런 사회는 아이가 어머니의 포근한 젖가슴 에 안겨 있는 시간도 제한한다. 젖을 먹이는 시간을 정해 놓을 뿐 아니 라 밤에는 오두막 안에 혼자 있게 하여 일찍 젖을 떼게 한다. 여자들은 아이를 낳는 데 상당한 시간을 뺏겼을 것이다. 그리고 구석 기 시대 여자들보다 신석기 시대 여자들이 더 많은 아이를 낳았을 것이 다. 신석기 시대의 출산 간격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오늘날 의 수렵채취 사회와 농경 사회를 살펴보면 전자는 출산 간격이 5년쯤 되고 후자는 1 ∼2년쯤 된다. 농경 사회의 여자들이 아이를 더 많이 낳 은 이유의 하나는 앞서 말했듯이 농경 생활을 함에 따라 아이에게 젖을 먹일 필요가 많이 줄었기 때문이다. 줄무늬 토기 문화 사회에서는 밑면 이 둥근 줄무늬 토기로 죽과 같은 이유식을 만들 수 있었으므로 일찍 젖을 뗄 수 있었을 것이다. 또 힘겨운 농사일도 일찍 젖을 떼게 하는 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오늘날의 수렵채취 사회를 보면,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도 건강하게 살아남기 위해 농경 사회보다는 일을 훨씬 더 적게 한다. 신석기 시대 이주민들이 북쪽과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발견한 여러 가지 식물의 피임 효과에 대해 알았을 가능성도 매우 적다. 어쩌면 그 들은 의도적으로 인구 증가를 꾀했는지도 모른다. 어려운 환경에서는 인구가 많은 것이 강점이 되기 때문이다. 농경 사회가 수렵채취 사회보 다 어린아이의 노동력을 더 유용하게 보았을 수도 있다. 잡초를 뽑는 일처럼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은 아이들에게도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빙하기 이후의 유럽 중석기 시대 경제는 번창했지만 어쩔 수 없이 서서 히 농경 경제에 의해 밀려났다. [ 동성애 談梁기 기원 ] 공동 주택이 모계 중심적인 대가족의 중심이었다는 생각은 가정이 초기 농경 사회에 있어서 문화의 중심이었음을 나타내는 증거에 의해 뒷받침된다. 영구적인 집이 등장한 것은 곧 섹스가 보다 은밀해져서, 공개적이고 유동적이었던 수렵채취 사회에서는 불가능했던 두 사람만 의 친교가 가능해 졌음을 뜻한다는 것이 그 동안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반대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대초원 지대 의 어떤 사회에서는, 부부가 완벽한 프라이버시를 보장받기 위해서 땅 바닥에 표식을 남겨 놓고 무성한 풀숲으로 들어가서 섹스를 즐긴다. 그 러나 숲이 위험한 곳일 경우에는 공동 주택에서는 함께 사는 연장자들 이 아들과 딸의 성행위를 훔쳐볼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성행위를 훔쳐보는 것은 동물의 성행위를 지켜보던 것 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씨황소가 암소와 교미하는 모 습을 보면서 섹스에 눈을 떴을 것이다. 카탈후유크 사람들이나 줄무뉘의 토기 문화 사람들이 황소를 '위대한 어머니 여신' 의 화신으로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상대적으로 수동적인 여성들을 거느린 활발 하고 기능적인 남성의 상징으로 여겼을 것이다. 사방이 벽으로 막힌 아 나톨리아 마을의 방이나, 욋가지를 엮어 엉성하게 칸막이를 만든 유럽 의 공동 주택에서 이루어진 이런 식의 성 교육은 이성간의 성행위의 바 람직한 면을 강조해 주지 못했을 것이다. 공동 주택 사회는 일부다처제였는지도 모른다. 횡사한 남자가 많았 음을 나타내는 증거를 볼 때 남녀의 성비가 1:1은 아니었던 것 같다. 따라서 가축을 키우는 부유한 남자들은 씨 황소처럼 여러 여자를 거느 리고 살았을 것이다. 더 나아가, 동성애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더 희박하다. 간성은 오래 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신석기 시대 사회에 동성애 공포증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농경 사회와 선언서라고 할 수 있는 구약 성서』에 도 동성애 공포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 있다. 가축은 비교적 자주 동성애 행위를 하지만 목축업자가 보기에는 전혀 '기능적'인 행위가 아 니다. 만일 그의 가축들이 모두 동성애를 한다면 그는 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씨황소의 생식 행위는 장려하고 동성애 같은 '역기능적' 인 행 위는 금지하게 마련이다. 동물을 길들이면 간성 출산율이 높아진 다는 증거가 있다. 그런 간성 동물은 다른 개체들을 오염시키지 못하도 록 오래 키우지 않고 잡아먹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적으로 애매모 호한특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의 아이 역시 그런 식으로다루었을지 도 모른다. 영구적인 집과 마을이 등장함에 따라 야생과 인간 사회의 대립, 안과 밖의 대립, 남자와 여자의 대립 등 서로에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여러 가지 대립이 생겨났다. 이런 대립들은 필연적인 것이었으며, 자연 의 산물은 인간 사회에 교화되어 안으로 들어오고, 문화의 산물은 밖으 로(orB으로) 퍼져 나갔다. 그 경계선은 문이나 울타리로 분명하게 정 해졌으며 과거 어느 때보다 소유권이 크게 강조되었다. 줄무늬로 질그 릇을 장식하는 것도 경계선을 긋는 습관을 나타낸다. 성별과 성행위의 정의도 그런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의인화된 거대한 기념물로 상징화되기 시작했다. [ 황금 음경의 무덤 ] 나는 여자들이 스톤헨지를 세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자들도 거들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그 기초 구덩이를 팔 때 한 여자가 제 물로 바쳐지기도 했겠지만, 스톤헨지는 분명히 남성적인 기념물이다. 나는 분명 남자가스톤헨지 건설을 명령했으며 그는 불행했을 것이라 고 생각한다. 하지의 태양이 돌기둥 위로 떠올라 동그라미 한가운데로 햇살이 들어오면, 태양의 힘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이것을 성 적인 상징으로 해석할수도 있다. 즉, 태양신이 돌기둥들사이의 공간 에다정액을뿌리는 것이다. 반면에 이것을 예언의 실현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인간이 자신의 위대한 계산 능력과, 번식과 확산을 통한 자연의 정복을 뽐내는 것이다. 이번 장에서의 나의 논지는 이렇다. 거대한 돌기둥과 돌무더기가 곳 곳에 서 있는 선사 시대의 영국 풍경은 단순히 우주적인 성적 상징의 무대가 아니다. 석기 시대의 남자아이들이 젖을 뗐을 때 느꼈을 무력감 과 세상을 향한 분노에 대한 심리적 보상의 표현이기도 하다. 나는 갈 수록 인구가 늘어나던 호전적인 사회가 전사들이 필요해지자 남자아이 들을 선발하여 엄격하게 훈련시 켰다고 생각한다. [ 아이들을 뺏기 위한 전쟁 ] 독일 남서부의 탈하임(Talheim) 근처에서 발견된 줄무늬 토기 문화 마을의 언저리에서 발굴된 공동묘지는 초기 농경 생활의 냉엄한 현실 을 잘보여 준다. 하나의 구덩이 안에 34구의 뒤틀린 유골들이 뒤엉켜 있었다. 대부분의 유골들이 심하게 손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돌도끼 와 몽둥이에 맞아 죽었던 것 같다. 그러나 두 명은 화살을 맞고 죽었다. 스스로를 방어하다가 입는 것으로 보이는 골절상이 없는 사실 등 여러 가지 증거로 보아, 이들은 기습 공격을 받았고 즉결 처형된 것 같다. 시 체들은 소지품을 모두 뺏기고 버려졌다. 한 마을 사람들 전부가 이 구 덩이에 묻힌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살에서 여섯 살까지 의 어린이가7명, 청소년이 9명, 성인이 18명이다. 추정 성별과 연령에 따르면, 성인 남자는9명이다. 이 가운데 3명은 쉰 살이 넘었고 1명은 예순살에서 일흔살사이이다. 여자는7명이고 이 가운데 6명은아이 를 낳을 수 있는 나이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한 살이 채 안 된 아 이는 단 한 명도 없고, 늙은 여자는 한 명밖에 없다는 것이다. 콘라드 스괸들러(얼음 인간 조사단장이었던 고고학자)는 탈하임 공 동묘지에 유아의 유골이 없는 것에 대해 '어떤 원시인들이 새로운 혈통 그림 7-1 어린아이에게 염소의 젖을 먹이는 모습 을 얻기 위해 이 마을의 어린아이들을 유괴하려고 학살극을 벌였을 것' 이라고 말했다 어린아이들을 유괴하려고 한 마을 전체를 몰살했다는 것이다. 스핀들러는 더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유괴한 어린아이들이 새로운 사회의 언어와 문화에 쉽게 동화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연령 제 한이 필요했다. 다른 신석기 시대 유적지들에서 심심찮게 발견된 것 같 은 식인 행위는 없었다. 탈하임에서 발견된 유골들은 略에 도살의 흔적 이 없다. " 시체들을 매장함으로써 위생적으로 처리한 것은 공격자들이 마을 전체를 뺏으려 했음을 나타낸다고 했다. 집과 가축과 경작지와 저 장된 곡식을 모조리 빼앗았다는 것이다. 만일 구덩이에 묻힌 사람들이 그 마을의 거주민 전체였다면, 이 마을은 나이 든 남자들이 젊은 아내 를 데리고 산 부권 중심적인 대가족 사회였을 것이다. 유전자 검사법 등을 이용하여 분석해 보면 더 그럴 듯한 해석이 가능해질 것이다. 스핀들러의 가정에 따르면, 고아가 된 아이들이 아무 표시도 안 된 공동묘지 근처에서 그들의 부모를 죽인 사람들을 도우며 살았다는 말 이 된다. 그리고 살아남은 유아들은 너무 어려서 젖을 뗄 수 없었을 것 이다. 이 아이들을 키우는 방법은 자명하다. 첫번째 방법은 곡물로 만 든 죽을 먹여 키우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을 그런 음식으로 키우 면 사망률이 높았을 것이다. 그런 음식은 영양학적으로도 부적당할 뿐 만 아니라 모유에 포함된 것 같은 항체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법은 유모의 젖을 먹이는 것이다. 유모의 젖은 영양학적으로도 훌륭하고 항체도 제공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자신의 아이 가 죽고 없는 여성들이 있어야 가능하다. 세 번째 방법은 염소 같은 가 축의 젖을 먹이는 것이다. 이 방법은 기괴하기는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 와 근대 유럽의사생아 병원에서 많이 쓰인 방법이었다. 동물의 젖은 영양학적으로는큰 문제가 없지만 사람에게 필요한 항체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아이가 젖을 제공하는 동물의 병에 걸릴 위험이 있다. 탈하임의 학살이 유아들을 뺏기 위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렇다면 이 유아들을 동물의 젖으로 키웠는지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석기 시대 후기에 들어서면서 동물의 젖이 널리 사용되었음은 분명 하다. [ 베이비 붐 ] 줄무늬 토기 문화의 전성기로부터 1,500년 뒤인 기원전 3500년 무 렵, 유럽의 몇몇 후기 신석기 시대 사회에서는 동물의 젖을 아이에게 먹였다. 단지, 컵, 체, 냄비 따위의 액체와반액체를만드는데 쓰인 듯 한 여러 가지 질그릇룻이 그 증거이다. 고고학자 앤드루세라트(An螢ew Sherratt)는 이를 발전(소를 이용하여 무거운 짐을 운반하고, 양을 키워 양털을 얻기 시작산한 것을 포함한)을 '부산물 혁명'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고기와 가축과 略 따위의 동물의 일차적인 산물을 이용하는 것과 구별하기 위한 말이다. 이런 부산물 이용의 증거는 같은 시기의 근동에 서도 찾아볼 수 있다(미술품으로 남아 있다). 동물을 이용하여 땅을 가 는 방법은 신석기 시대 후기에 개발되었다. 인류가 신석기 시대 후기에 이르러 비로소 바슬바슬한 황토를 버리고 비옥하지만 매우 단단한 진 혼 땅을 경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물의 젖을 이용한 시기 는 세라트가 제시한 것보다 훨씬 더 빨랐을지도 모른다. 고고학자 피터 보구키(Peter Bogucki)는 줄무늬 토기 문화 사람들이 키운 가축의 연령 과 성별로 미루어 보아 젖을 얻기 위해 키운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러 가지 줄무늬 토기에서 체를 찾아 내기도 했다. 아이에게 동물의 젖을 먹이려는 것이 낙농을 시작한 가장 그럴 듯한 이유로보인다. 낙농이 시작된 곳은 공동주택 안이었을 것이다. 부모 는 벌채하러 나가고, 아이는 나이 든 친척들에게 맡겨져 염소의 젖을 물고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아이와 동물의 새끼가 똑같이 젖을 먹고 인간 여자와 동물 암컷이 똑같이 젖을 생산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자연 스러운 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성인 인간이 송아지나 새끼 양의 먹 이를 별일 없이 정기적으로 마시는 것은 기괴한 일이므로(오늘날에는 그렇지 않지만), 그런 것이 일상화되기에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체 와 이유컵 같은 특별한 용도의 그릇도 그런 것이 일상화되었을 때 개발 되었을 것이다. 이유컵은 프랑스, 이탈리아, 카르파티 아 분지 등지의 초기 농경 뭍화 유적지에서 발견되었으며, 수단의 제벨모야(Jebel Moya)의 쌍뜻이 아기의 무덤에서도 발견되었다. 그 연대는 아프리카 에 목축 생활이 전파된 시기인 기원전 1000년 무렵이다. 처음에는 순전 히 아이에게 젖을먹이기 위해 이런 그릇이 개발되었지만나중에는성 인을 위한 단지, 컵, 사발 따위도 함께 개발되었다. 이 그릇들은 젖을 먹는 데에만 쓰이지 않았고(젖을 많이 마시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치 즈, 요구르트, 우유술따위의 새로운음식을먹는데에도쓰였다. 이런 동물과의 밀접한 접촉에는 위험이 따랐다. 당시 사람들의 유골을분석 한결과, 이때 처음으로 결핵이 소에게서 인간에게 전염되었다. 아이가 소의 젖을 빨다가 처음 전염되었을 것이다. 아이에게 동물의 젖을 먹이는 것은 높은 유아 사망률을 초래했지만, 아이를 더 많이 낳을 수 있다는 장점이 보다 중요하게 여겨졌다 신석 기 시대 유럽의 인구 증가는,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서 농경 생활로의 전환이 이루어질 때 발생한 인구 증가와 비슷하다. 목축업이 경제의 중 요한 요소가 되기 시작했을 때의 인구 증가는 의도적이었을 수도 있다. 김부타스는신석기 시대 후기와 청동기 시대 초기의 특징은 남녀의 불 평등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녀는 이런 불평등이 급격하게 발생했으 며, 그 이유는 유럽 동부에 살던 유목민족쿠르간족이 서쪽으로 이동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석기 시대 초에는 남녀가 평등을 유지하며 평 화롭게 살았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유목민의 이동 생활 때문에 남녀의 불평등이 심화되었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다. 수렵채취 경제 의 수렵 생활에서 비롯된 목축은 소 한 쌍과 함께 묻힌 남자의 무덤에 서 볼 수 있듯이 남자가 주도했을 가능성이 많다. [ 남자와동물 ] 영국과 아일랜드의 고지대, 스칸디나비아 반도, 유럽 북서부의 알프 스산맥, 동쪽의 우즈베키스탄, 시베리아, 몽고 그리고 그 너머에서는 바위에 새긴 그림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 그림들은 신석기 시대에 시 작된 양치기들과 소치기들의 영역 표시 전통이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왔음을 나타낸다. 여러 가지 기준을 가지고 살펴보면 그림의 연대를 비 교적 정확하게 추정할수 있다. 이를테면, 이탈리아북부의 발카모니카 에서 발견된 그림을 보면 몇몇 남자가 그 근처의 청동기 시대의 저지대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은 긴 미늘창을 들고 있다. 발카모니카에서 발견된 그림의 하나인 그림 7-3에는 네 사람이 그려 져 있다. 맨 왼쪽에 있는 사람은 몰이 막대기를 들고 소 두 마리를 몰고 있다. 소 한 마리는 분명히 수컷이다. 두번째 사람은 두 마리의 소가 끄는 쟁기를 조종하고 있다. 다리 사이의 돌출부를 보면 남자인 것 같 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이 사람 뒤에는 다른 한 사람이 젖먹이를 업고 구부린 자세로 괭이질을 하고 있다. 이 그림에 어떤 신화적 의미가들 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성별에 따른 노동의 분담을 나타내고 있는 것만 은 틀림없다큼은분명하다. 땅을 가는 사람들은 아이를 업고 있지 않다. 전통적인 관념에 따라 해석하자면, 땅을 갈고 있는 사람들은 남자이고 아이를 업 고 괭이질을 하고 있는 사람은 여자이다. 수간을 묘사한 그림들에도 남자와 동물의 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 발 카모니카에서 발견된 다른 그림을 보면, 한 남자가 당나귀로 보이는 동 그림 7-3 발카모니카에서 발견된 그림으로 쟁기질과 괭이질, 아이 운반을 묘사하고 있다. 물한테 음경을 삽입하고 있다. 시베리아에서 발견된 그림들은 더 흥미 롭다. 말코솔바닥사슴이 교미하는 그림도 있고, 남자인간이 말코손바 닥사슴과 성교하는(또는 성교를 시도하는) 그림도 있다. 그림 7-5의 남 자는 스키를신고 있다. 이 동물들은 가축은 아니지만, 사회인류학자 팀 잉골드가오늘날의 라플란드(Lapland) 지방(유럽 북쪽끝지방-역 주)의 목자를 사이에서 발견했듯이 길들인 동물이다. 수간을 묘사 한 그림은 음경의 힘을 강조하기 위한 것 같다.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 부에서 발견된 몇몇 바위 그림은 음경이 전면을 향하=B 있고 다른 그림 들과 겹쳐져 있어서 누구의 것인지 또 사람들의 성별은 어떤지 알아보 기가 어렵다. 몇몇 연구자의 주장에 따르면, 보후슬린(Bohuslan)에서 발견된 '흔함 그림은동성애를묘사한것인지도 모른다. 러시아의 바 위 미술 연구자인 노라 노브고로도바(Nora Novgorodova)가 발표한 몽 고에서 발견된 세 사람의 그림은 동성애를 묘사한 것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음경을 만지는 것은 두 격투자의 성별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적 인 표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노브고로도바가 아직 발표하지 않은 다른 그림들은 분명히 성행위를 묘사한 것일 것이다. 가운데 있는 여자 가 한 남자와 성교하면서 입으로는 다른 남자의 음경을 빨고 있다. 노 브고로도바는 이 그림들이 의식적 또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주 그림 7-4 발카모니카에서 발견된 '당나귀와 성교하는 남◎ 그림.이 그림은 기원전 3000년쯤에 그려진 것으로서, 알프스 지방에 당나귀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그림 7킬 스키를 신고 말코손바닥사슴과 성교를 시도하는 남자. 앙가라 강 유역에서 발견된 그림이다. 장한다. 그러나 그림으로 그릴 수 있는 것은 실제 행동으로 옮길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런 노골적인 그림을 그린 사회가 실제로는 이런 행위 를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러나 스키를 신고 말코손바닥사슴과 성교 하는 그림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다. 동물을 기르는 사람들은 음경과 정자의 생식력에 대해 잘 알았을 것 이다. 고기나 젖을 얻기 위해 동물을 기르는 일은 동물을 도살하는 것 이 그 전부는 아니다. 암컷과 수컷의 성비와 그 교배 방식도 잘 조절해 야만 한다. 젖소를 기르기 위해서는 씨황소가 한 마리 꼭 필요하지만 자주 암소들로부터 격리해야 한다. 인간이 동물의 성행위를 통제하는 것은 남자가 여자의 성행위를 통제하는 것과 비슷했을 것이다. 땅과 가 축과 여자에 대한 소유 개념이 등장함에 따라 혼인 같은 형식에 의한 성적 독점권이 강조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개척 경제 사회는 땅과 여자 의 처녀성을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처음으로 강간에 관한 법을 만 든 것은 초기 농경 사회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자의 재산과 혈통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빙 하기 미술에서는 분명하게 나타났다가 중석기 시대의 고고학적 증거에 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음경의 이미지는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 다시 나 타난다. [ 바르나히 43번 무덤 ] 1968년, 불가리아의 혹해 연안에 있는 바르나(Vima)에서 250개가 넘는무덤이 있는 공동묘지가 발견되었다. 그연대는기원전4000년쯤 으로 추정된다. 이때는 줄무늬 토기 문화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뒤이 며 얼음 인간이 살았던 때보다 겨우700년 앞선 시기였다. 또한 이때 유럽 동부에서 처음으로 구리와 금이 많이 사용되었다(얼음 인간 외치 가 가지고 있던 동도끼는 금속이 풍부한 발칸 지방에서 구한 것일 가능 성이 많다). 무덤들 중에는 보존상태가좋지 않아서 이렇다 할 정보 거 리가되지 못하는 것도 있었고, 유골이 없는빈 것도 있었다. 그나머지 150여 개는 남자 또는 여자의 무덤으로 분류되었는데 43번 무덤에는 금속제 유물이 많이 들어 있었다. 유골은 오른손에 의식용 동도끼를 들 고 있었다. 나무손잡이는 썩어 없어지고 금으로 만든 테 또는원통만 여러 개 남아 있다. 금으로 만든 팔찌와 원반도 여러 개 있었는데, 원반 에 뚫린 구멍으로 보아 정교한 옷에 꿰매 달았음을 알 수 있다. 43번 무덤의 부장품 가운데 가장 진기한 것은 금 박편으로 만든 인공 물로 그 모양과 크기가 음경의 끝부분과 비슷하다. 유골의 다리 사이에 서 발견된 이것은 흔히 '음경 씌우개'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것은특이 하고 불완전한 물건이고, 그 기능에 대해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 없으 므로, 나는 이것을 그냥 '음경 장식물'이라고 부르겠다. 금 박편 한장 으로 만든 이것은 길이가 5센티미터쯤 되고 지름이 1.3센티미터쯤 된 다. 가장자리에 작은 구멍이 여럿 나 있는 것으로 보아, 송아지 가죽 같 은 유기 물질에 꿰매 달았던 것 같다(바르나의 공동묘지에 묻힌 사람들 은 소를 키웠다. 이 시기의 거주지에서 발견된 동물의 瑞를 보아도 그 렇고, 다른 무덤들에서 발견된 금으로 만든 소 모양의 의복 장식물을 모아도 그렇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장식물이었음이 분명 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어떤 특별한 기능을 갖고 있었느냐는 것 이다. 이 음경 장식물이 사치스러운 콘돔이었을 가능성은희박하다. 그끝 에 구멍이 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구멍을 통해 오줌을 누거나 사 정하는 것이 가능해 보이므로 실제로 음경에 끼웠을 수도 있다. 성병 전염을 예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콘돔으로 쓰였을 수도 있다. 그림 7-6 '황금 음경의 무덤'.바르나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43번 무덤이다. 금은 저자극성 물질이므로 예민한 피부와 접촉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이것을 콘돔처럼 생긴 얇은 짐승 가죽에 꿰매 달았을 수도 있고, 더 나 아가 음경 자체에다 꿰매 달았을 수도 있다(이것을 지나친 추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갈수록 널리 퍼지고 있는, 성기 장식을 전문으로 다루 는 잡지를 보면 될 것이다). 어쨌거나 이 음경 장식물을 끼우고 성교나 자위행위를 해서 사정할 수 있었을까? 지름이 발기한 음경에 꼭 맞았을 수도 있지만, 음경의 크기는 인종마다 다르고 당시 바르나 남자들의 평 균 크기를 모르므로 뭐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발기했을 때의 크기는 현대인을 기준으로 보면 작은 편인 것 같다. 어쨌거나 이 음경 장식물은 음경의 귀두 부분과 자루의 일부를 덮었을 것이고, 자루의 나 머지 부분은 감각적인 접촉에 노출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열대 지방의 전통 부족들 중에도 이 음경 장식물과 비슷한 음 경 씌우개를 쓰는 부족이 많다. 이들의 음경 씌우개는 끝에 구멍이 없 지만 피임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인류학자들의 비교 분석에 따르면, 음 경 씌우개는 주로 겸손이나 예의의 표시로 쓰인다. 음경 씌우개를 쓰는 남자는 몸의 다른 부분은 거의 가리지 않는다. 음경 씌우개는 음경처럼 생겼지만 외설스럽지도 않고 음경의 해부학적인 토양을 노골적으로 드 러내지도 않는다. 남자임을 추상적으로 상징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며, 빳빳하고 불투명하기 때문에 음경의 상태가 드러나지 않는다. 무화과 나무 잎이긴 하지만 튼튼한 것으로 만들며, 구멍이 없기 때문에 오줌을 눌 때는 벗긴다. 바르나의 음경 장식물은 이런 종류의 음경 씌우개는 아닌 것 같다. 끝에 구멍이 있고 쓰인 곳도 열대 지방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음 경을 금으로 씌우는 것은 결코 겸손한 행위가 아니다. 흑해 연안 지방 은 여름에는 무더울지 모르지만 겨울에는 몹시 춥다. 그 동안 발견된 당시 사람들의 의복 증거로 보아도, 당시 사람들은 옷을 두둑하게 입었 다. 43번 무덤에서 발견된 여러 가지 금 장식물과 의복 장식물로 보아 서는 무덤의 주인은 맨팔에 팔찌를 주렁주렁 끼었고, 몸통과 다리는 옷 으로 감쌌다. 몸통 위에는 옷에다 꿰매 다는 작은 금단추 또는 금조각 이 많이 놓여 있었고, 두 무릎 위에는 바지나 얼음 인간의 각반 같은 것 에 달았을듯한원반모양의 금장식물이 놓여 있었다. 커다란금원반 들로 만든 정교한 머리 장식물도 있었다. 여러 가지 점에서 바르나의 음경 장식물은 르네상스 시대의 샅주머 니(남자의 바지 앞부분에 달아 바지 속에 감추어진 음경을 강조한 주머 니)와 비슷한 것 같다. 르네상스시대에 잠간 유행했던 이 샅주머니처 럼, 음경 장식물도 안에 심을 넣어 음경이 꼿꼿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이 게 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랬다면 잘 보이지 않는 끝부분의 구멍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이 음경 장식물은 보이기 위해 만든 것이 다. 그러나 시체의 옷을 재구성해 보면 이런 추리에도 의문이 생긴다. 사람이 죽자마자 시체에 옷을 입혀 바로 땅 속에 묻으면 시체는 화학 작용에 의해 해체된다. 내장이 팽창하여 터지기도 하는데 그때 구슬 목 걸이 같은 작은 물건들은 관 주위로 흩어지기도 한다. 시체를 관에 넣 지 않고 매장하는 경우에도 작은 장신구 같은 것들이 처음에 있던 곳에 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시체를 천으로 꼭 끼 게 감싸거나 자궁 속의 태아처럼 사지를 오므려서 옆으로 눕혀 묻으면 이런 해체를 막을 수 있다. 바르나의 무덤은 세 가지가 있는데 시체를 똑바로 눕혀 묻은 무덤(확장식 매장), 시체의 무릎을 오므려서 옆으로 눕혀 묻은 무덤(축약식 매장), 그리고 시체가 없는 무덤(바다에서 죽은 사람의 무덤일 것이다) 등이다. 음경 장식물이 발견된 무덤은 확장식 매장이지만 옷과 장신구가 사 방으로 흩어져 있지 않았다. 따라서 장례식을 치르기 전에(사회적 죽음 이 이루어지기 전에) 생물학적 죽음 이후 얼마 동안 시체를 전시했을 수도 있다. 이 기간 동안시체는 시체를 안치하는오두막안에 놓여 있 었을 것이다. 위 속의 가스가 빠져나오고 부패가 시작됨에 .따라 내장이 팽창했다가 이완되면서 코를 찌르는 악취가 사방으로 퍼졌을 것이다. 그리고 시체가 완전히 축 늘어졌을 때 옷을 입혔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나에서 발견된 의복의 흔적은 수의의 흔적이다. 따라서 음경 장식 물 역시 사람이 죽었을 때에만 쓰는, 내세에서 쓸 상징적인 음경이었는 지도 모른다. [ 황금음경 -남자용장신구일까 여자용 모조음경일까? ] 바르나의 공동묘지에서 음경 장식물이 발견된 무덤은 하나뿐이다. 썩어 없어지는 재료로 만든 음경 장식물들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런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무덤은 거세당한 불행한 남자의 무덤이었 을까? 그 답은 알 수 없지만 굳이 이런 추측을 할 필요도 없다. 43번 무 덤은 지위를 나타내는물건과 장식물이 가장 많이 들어 있는 '가장부 유할 무덤이기 때문이다. 묻힌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모르지만 어쨌든 매우 중요한 사람 (사후에라도)이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금으 로 만든 음경 장식물은 르네상스 시대의 샅주머니 같은 것일 가능성이 많다. 이 사람은 신분이 매우높은 '황금음경을 가진 남자'였다. 하지 만 정말로 남자였을까? 음경 장식물이 신분의 상징이었다면, 반드시 음경에 끼울 필요는 없 었을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빳빳한 샅주머니는 속옷 위에 끈으로 매 다는 독립적인 장식물이었다. 그러므로 음경 장식물도 여자들이 살아서 나 죽어서 착용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추측을 하기 전에 지금까지 남자로 추정되어 온 이 유골의 성별부터 확인해야 할 것이다. 성별의 문제가 제기되면 모든 것이 불확실해진다. 바르나 공동묘지 에 대한발굴보고서에는유골의 성별이 남성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 성별 판단의 기준에는 문제가 있다 부장품이 진열된 사진의 유골은 실 제 유골이 아니라 플라스틱 모형이다). 43번 무덤의 주인은 골격도 남 자의 것이고 염색체도X Y형인, 모든 면에서 남성인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유전학적으로는 여성인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어떤 신화를 연출한 여자 주술사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에티오피아 의 하즈다족에게는 얼룩말의 음경을 몸에 매달고 여러 아름다운 아내 를 만족시키는 여자에 대한 신화가 있다). 또는 성별이 불분명한 사람 이었을 수도 있다. 공동묘지에서 발굴된 150여 개의 유골 가운데 한두 구는 간성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43번 무덤의 주인도유전학적으 로는 여자였지만 남성적인 성향이 강하여 골격에 남성적인 특성이 많 이 생긴 사람이었을 수 있다(그래서 자연인류학자는 골격의 특징과 부 장품의 성격을 감안하여 남자의 유골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수많은 무덤 가운데 단 한 개에만 황금 음경 장식물이 들어 있 는 것에 대한 하나의 설명 방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3번 무덤의 주인은 수많은 사람 가운데 죽어서 황금 음경 장식물을 다는 한 사람으로 뽑혔다. 이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샅주머니와는 달리 끝부분에 구멍이 있으므로, 음경에 이것을 끼우고 사정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끼울 때에는 발기한 음경에 끼웠겠지만 안에다 뭘 채워 넣었을수도 있다. 오늘날에도 끈으로 허리에 매달게 되어 있는 '사정 하는 모조 음경'이 있다(대량 생산되어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고 있지만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지 는 않는다). 플라스틱이나 고무로 만든 이 모조 음경은 끝부분에 구멍이 나 있고, 이 구멍은 크림 같은 것으로 채우게 되어 있는 모조 음낭과 가느다란 관으로 연결되어 있다. 음낭을 쥐어짜면 크림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귀두 부분을 금으로 만든 음경 장식물은 이런 것보다 더 복잡한 모조 성기의 일부였을 것이다. 즉, 바 르나 사람들이 키우던 소와 양에게서 얻은 천연 피막과 가는 관으로 음 경과 음낭을 만들고, 그런 가축이 생산하는 젖과 크림을 모조 또는 상 징적인 정액으로 사용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바르나의 음경 장식물이 '사정하는 모조 음경'의 일부였다 고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런 해석은 이치에 맞지 않다. 오늘날 의 모조 음경은 일종의 성 기구로 장례식 같은 데 쓰이는 물건이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바르나의 음경 장식물은 다른 특별한 용도가 있었던 것 같다. 만일 끝부분의 구멍으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면 그 구멍은 일종의 감퇴를 뜻했을 것이다. 그리고 뭔가가 나왔다면 이 음경 장식물 은 공개적인 의식용 물건이었을 것이다. 현대의 기괴한 성행위를 선사 시대의 순박하고 도덕적이고 건전한 사람들에게까지 적용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겠다. 사람들은 흔히 인류가 동굴에서 살던 시대는 현대 문명 같은 혼란과 퇴폐가 없는 순수 한 '자연 상태'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물학적 구조가우리와똑같 은 인류는 무려 10만년 전에 나타났다. 그들도 우리처럼 삶과죽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 가지 기록과 증거로 볼 때 5,000 년 전 무렵의 근동에서는 오늘날의 우리처럼 동성애, 성도착, 복장 도 착, 자위행위 등 여러 가지 성행위를 즐겼다. [ 자위행위를 하는 신 ] 고대 이집트와 수메르의 문헌을 보면, 남자가 집행했건 여자가 집행 했건 종교 의식이 남자의 사정 기능에 초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집트의 종교 문헌을 보면, 보편적인 창조 신화에서 남자의 자위행위가 그림 7-7 라리사에서 발견된 '자위행위를 하는 남자' 가장 핵심적인 행위이다. 기원전 2600년쯤에 쓰여진 피라미드 기록 527호에는 이런 말이 있다. '脚양신 아툼(Atum)은 헬리오폴리스에서 자위행위를 하여 형제와 누이를 만들어 냈다. 그는 손으로 자신의 음경 을 잡고 사정의 쾌감을 즐겼고, 그리하여 슈(Shu)와 테프누트(Tefnut) 가 태어났다. " 이 창조의 자위행위는 물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손의 여 신 유사스(lusas)가 돕기도 했다고 여겨졌다. 사정된 정액은 이집트의 젖줄인 나일 강이 되었다. 카르나3(KMi·h)의 여자제사장들은 해마 다신의 사정을 도 왔으므로 '신의 손'이라고 불렸다. 메소포타미아 문 명의 문헌에는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다. "암소에게 달려드는 황소처럼 욕정에 가득 찬 엔키(Enki)가 음경을 쳐들고 사정하여 티그리스 강에 물을 가득 채웠다. " 신석기 시대의 그리스 디미니(Dimini) 문화에서 만들어진, 자위행위 를 하는 남자를 묘사한 작은 진흙 조상은 그 연대가 바르나 공동묘지 (기원전 5000∼4500년)와 똑같다. 라리사(Liwisa) 근처에서 발견된 이 조상은 하갈킴에서 발견된 자위행위를 하는 여인상과 유사한 점이 많 다. 남자의 정액을 '천연 비◎로여긴 것은농경 사회뿐만이 아니었다. 북아메리카의 주니족은 '춘계 승마' 의식 때 해부학적으로는 남자이지 만 양성인 남자여자'를 언덕 위로 데려가서 o脚 생물이 돌아오도록 자위행위를 하게 했다. [ 대지의 창조 ] 남성 생식기의 생식력 강조, 땅을 여성으로 보는시각, 그리고 일찍 젖을 떼고 아이를 냉정하게 다루는 태도에서 비롯된 인생관은 신석기 시대의 영국에 복합적인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이것들은 스톤헨지 같은 기념물과 길다란 흙무덤을 만든 이유를 밝히는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도 있다. 영국에서의 농경 생활로의 전환은 여러 면에서 의문점이 많다. 꽃가 루 흔적을 바탕으로 추정한 초기의 삼림 벌채는 수많은 영구 거주지의 흔적과 일치하지 않는다. 줄무늬 토기 문화의 공동 주택 마을 같은 것 도 찾아볼 수 없다. 오직 들판에 세워진 기념물들만 남아 있다. 이미 존 재하고 있던 현실적인 동시에 상징적인 환경(중석기 시대에 만들어진 도로망과 특별한 장소들로 이루어진) 속에 이런 기념물들을 세웠던 것 같다. 이런 기념물들말고 농경 생활에 따른 주요한 변화는 죽은 사람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나타났다. 중석기 시대의 시체 처리 방식에 대해서 는 시체를 땅 속에 묻었다는 것말고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중석기 시대에는 시체를 자연의 생명 순환에 내맡겼다 자연력에 노출시키거 나썩은고기를먹고사는 새들의 밥으로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 나 푸셀로지(Fussell's Lodge) 같은 곳에는 긴 흙무덤이 있고, 그 안에 돌로 만든 납골당 또는 시체 안치소가 있다. 무덤의 상징성은 파낸 흙의 처리에서 알 수 잇다.·◎ 시체를 넣은 다음 다시 흙으로 덮으면 얼마쯤의 흙이 남는다. 이 남은 흙 의 양은 묻힌 시체의 크기에 비례한다 그러므로 남은 흙에다 다른 흙 을 너 보태서 무덤을 크게 만들면 무덤의 상징적인 중요성(무덤 속에 묻힌 사람의 가상의 크기)이 커진다. 농경 문화에서는 농사에서의 죽음과 재생의 주기가 인간의 삶이나 죽음과 비슷하며 다음에 벌어질 일에 대한 실마리가 된다. 긴 흙무덤 속에 묻혀 있는 유골은 땅의 자궁속에서 재생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씨앗과 같다 흙무덤 밑의 땅은 대부분이 갈려 있었다. 영국의 고고학 자들은 이것을 그저 부인으로 여겼으며, 의식용 기념물의 건축을 기초 적인 경제 생활의 단적인 증거로만 여겼다. 그러나사우스스트리트 흙 무덤처럼 땅을 깊게 간 흔적이 있는 것도 있다. 그러므로 흙무덤 밑의 땅이 갈려 있는 것은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파촐드(Patzold)는독일 에 있는 인형 흙무덤 밑의 땅이 갈려 있는 것은 죽은 사람을 땅에 '심 기' 위한의식으로 '쓰인 작업이었다고 주장한다. 긴 흑 무덤에는섬기처럼 꺾긴 것이 많다. 길다란모양은흔 히 남근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사실 흙무덤의 길다란 모양은 부계 혈통 ◎ 계승, 토지 소유권의 확인,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아들로의 재산 상 속을 상징하기에 적합하다 그러나 긴 흙무덤으로 들어가는 길은 여자 의 신체적 특징을 갖고 있다. 이것은 흔히 두팔 사이의 구멍으로묘사 된다. 그러나 두 다리 사이에는 구멍이 있지만 두 팔 사이에는 구멍이 없다. 고고학 사진가 믹 샤프(Mick Sharp)는 신석기 시대의 흙 죽은 자들의 영혼이 좁은 입구를 통해 다시 태어난곳, 죽은 자들의 유골이 처음에 창조되었던 뱃속에 편히 누워 있다. 영국 해협 건너 브르타뉴 반도의 마른(Marne) 지방에는 백악층 속에 만들어진 무덤들이 있다. 무덤 속의 방 내벽에는 얼굴, 젖가슴, 목 장식 등을묘사했거나한쌍의 젖가슴만을 그린 그림들이 있다. 양식화되었 지만 여자를 묘사한 것이 분명한 이 그림들은 신석기 시대 무덤의 모양 과 여자의 연관성을 높인다. 브르타뉴 반도의 카르나에서는 피카소의 추상화에 못지않은 걸작이 발견되었는데 이 그림은 가까이 에서 보면 마치 젖가슴이 달린 커다란 음문처럼 보이기도 하고 얼굴처럼 보이기 도 한다(얼굴로 보면 젖가슴은 눈이 된다). 죽은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는 생각을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표현했 을까? 무덤 입구의 방향을 보면 흥미로운 추정을 할수 있다. 이 경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일랜드 보인 지방의 벤드에 있는 뉴그레인지 (Newgrange) 통로 무덤이다. 뉴그레인지는 임신부의 배처럼 둥글고 (콩팥처럼 생겼다고 할 수도 있다) 커다란 흙무덤으로서 가장자리에는 소용돌이무늬가 새겨진 연석들이 박혀 있다 김부타스와 그 추종자들은 이 소용돌이무늬가 음문과 위대한 여신을 상징한다고 주장했다). 돌기 둥 사이로 난 통로가 흙무덤 속의 석실까지 연결되어 있는데, 무게를 떠받치는 돌출부가 달린 돌덩어리들을 가로로 쌓아 만든 둥근 천장이 석실을덮고 있다. 통로의 바깥쪽 출입구가 흥미롭다. 문이 있고, 상인 방 위에 편지함의 구멍 같은 좁은 틈이 나 있다. 신기한 것은 이 기념물 의 방위이다. 일 년 중 어느 하루에만(12월 21일의 동지) 햇살이 상인 방위의 좁은틈으로들어가 석실 뒷벽을비추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 현상은 17분 동안만 지속된다. 이 기념물이 암시하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태양을 남자의 생식력으 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햇살을 남자 인간과 씨짐승의 음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음경의 생식력은 땅을 署는 쟁기와 갈퀴의 힘과도 연관된다 (영어의 'fork(갈퀴)' 는 인도유럽어로서 본디 'fuck(성교)' 와 같은 뜻으 로 쓰였다). 여성을 씨를 뿌리는 땅으로 여기는 것은 모든 농경 문화에 서 공통적이었으며 탈무드, 베다, 이집트의 문헌 등에도 나온다. 뉴그 레인지에는 남성적인 힘이 여성인 흙무덤 속으로 들어간다는 개념이 잘 나타나 있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은 해1年]의 부활과 상징적으로 연 관되어 있다. 동지가 지나면 태양이 돌아오게 되어 있다. 태양이 돌아 오지 않으면 봄은 오지 않는다. 이런 상징적인 방위는 스코틀랜드 북동 쪽에 있는 오크니(Orkney) 제도의 메스하우(Maes Howe)의 둥근 천장 이 달린 무덤 등 다른 신석기 시대 유적지에서도 볼 수 있다. 일 년 중 특정 시점에서의 태양과 땅의 상대적 위치는 이런 기념물들이 처음세 워진 이후 약간 달라졌다. 만일 우리가 기원전 1800년에 스코틀랜드 킨 트로(Kintraw)의 거대한 남근 바위(그림 7-9) 옆에 서 있었다면 신석 기인들이 연출한 장관을 볼수 있었을 것이다. 믹 샤프는 이렇게 말했 다. "언덕의 경사면에 있는 인공 흙무덤 같은 것 위에 서서 북동쪽을 바 라보면, 주라 산봉우리 뒤로 졌던.동지의 태양이 V자 모양의 틈 아래쪽 에서 다시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 스톤헨지에서는 가운 데의 성역에서 돌기둥 위로 떠오르는 한여름의 태양을 볼수 있다. 이 런 기념물들은 수많은 사람의 노동으로 세워졌지만, 이런 장관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선택된 소수뿐이었을 것이다. [ 돌세우기 ] 신석기 시대의 거석(巨石)들의 의미가 모두 똑 같았는지 아니었는지 그림 7개 스코틀랜드 킨트로에 있는 돌기둥 는 단정하기 어렵다. 영국 해협 양쪽의 영국과 브르타뉴 반도에서 발견 된 이 거대한 석조물들은 단독으로, 직선상으로, 또는 원형으로 세워졌 다. 스톤헨지의 거석들은 한곳에 모여 거석 단지를 이루고 있다. 어쩌 면 확 트인 전망을 연출하기 위해 베어 낸 나무들 대신 세워 놓은 것인 지도 모른다. 브르타뉴 반도의 카르나 근처에 있는 기념물의 하나인 그 랜드 멘히르 브리세(Grand Menhir Brisf)는 세 조각으로 부서져 있다. 기원전 4000년쯤에 세우려다가 쓰러져 부서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세 워졌으면 높이가 18미터가 넘었을 것이다. 기원전 2500년 무렵부터 영국에서는 긴 흙무덤이 점차 사라지고 환 상열석(環狀列石)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 동안 환상열석의 기하학적 구조와천문학적 배열은 과장되어 왔다.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는 고고학자가 아닌 사람들이 이 환상열석이 선사 시대의 컴퓨터이자 천문대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신석기 시대의 영국 기상이 오늘날보 다는 조금 더 나았다고 해도 하늘은 거의 항상 흐려서 별자리를 관찰하 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기념물을세을 때 어느 정도의 풍압차가 있 어서 동지 및 하지의 일출과 일물, 월출과 월몰 등 주요 천체 운동에 맞 추어 방위를 잡을 수만 있었다면 천문대 구실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천체 운동은 흐린 날씨가 일 주일만 계속되어도 제대로 파 악할 수가 없다. 거석 건축의 근본적인 동기를 조사하기 위해서는 초기 농경 문화의 사회적 구조와 특히 아이들의 문화적 적응에 대해 연구할 필요가 있다. 나는 신석기 시대에는 어린이를 잠재적인 노동력으로 여겨서 일찍 젖 을 떼는 풍습이 생겼다고 주장한 바 있다. 탈하임의 학살과 영국에서 발견된 여러 가지 고고학적 증거가 말해 주듯이, 어린이에 대한 태도는 냉혹했다. 우드헨지(Woodhenge :스톤헨지 근처에서 발견된 나무로 만 든 기념물로서, 커다란 말뚝 구멍으로 이루어진 동심원들과 그 가장자 리의 얕은 도랑과 둑만 남아 있다)에서는 세 살 된 여자아이의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두개골이 도끼에 맞아 으깨져 있었다. 스코틀랜드에서 많은 유적지를 발굴한 바 있는 쫀 바버(John Barber)는 통로 무덤 근처 에서 발견된 유아 무덤(절터니스에서 10개, 이스비스터에서 24개)은 신생아 살해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스톤헨 지에서는 입구 근처의 커다란 도랑 안에 여자와 아이가 묻혀 있었다. 여자(적어도 몇몇 여자)에 대한 태도도 어린이에 대한 태도와 다를 바 가 없었던 것 같다. 신석기 시대 유적지에는 여자를 산 제물로 희생시 켜 묻은듯한무덤이 많이 있다. 아일랜드의 커리헨지(Curragh Henge) 에서 발견된 무덤이 그 대표적인 예로 여자를 산 채로 묻었던 것 같다. 대영 박물관의 아이엔 키니스(fan Kinnes)는 이렇게 말한다. "유골이 많지는 않지만 주로 여자의 유골이고, 특별한 의식에서 제물로 바쳐졌 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 이제 신석기 시대 사회의 정신적인 측면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 동안 몇몇 연구자가 이런 시도를 했고, 최근에는 피터 엘리스(Peter Ellis)가 거석 기념물은 '집단적인 망상에 사로잡혀 거대한성적 조형 물들을 만 든 증거' 라고 말했다. 이런 발달심리학자들과 미셀 오당의 이론을 종합 하면 신석기 문화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수렵채취 사회에서는 아이들이 대여섯 살까지 젖을 먹고 자란다. 이런 아이들은 믿음과 의지와 공유의 원칙을 보여 주는 어머니 의 무조건적인 사랑에서 큰 기쁨과 위안을 얻는다. 오랫동안 젖을 먹는 다고 해서 결코 의존적인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린 시절의 행복한 경험에서 비롯된 강한 자긍심을 바탕으로 자립심이 강한 사람 이 된다. 그러나 일찍 젖을떼면 정반대의 심리적 성향이 나타난다. 예 를 들어 전사(戰士) 사회에서는 신생아에게 초유를 먹이지 않고 물을 먹이곤 한다. 아이는 분노를 인식하는 능력이 없지 않는 한분노를 느 끼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 어린 시절의 분노는 잠재의식 속에 공격성으 로 자리잡게 된다. 젖을 떼는 방법은 보통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처음 에는 젖을 먹이는 횟수를 제한하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떼는 것이다. 앞 서 말했듯이, 일찍 젖을떼는 것은 농경 사회의 특징이며 출산 간격을 줄이는 요인이 된다. 이런 인위적인 조절의 결과는 사회마다 다르다. 젖가슴에 대한 문화 적 집착이 생겨날 수도 있다. 오늘날의 미국처럼, 어떤 여자도 자신이 '제대로된' 젖가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젖가슴이 이 상화되는 것이다. 이보다 더 체계적인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흔히 젖을 떼면 아이는 반발심을 느끼고 운다. 그러나 젖을 떼기 위해서는 아이에게 혼자 자는 습관을 들일 때처럼 아이의 울음을 무시해야 한다. 이 방법을 현대 용어로는 '통제된 울음'이라고 한다. 아이가먹을것이 나 안락이나 관심을 얻기 위해 울어도 내버려 두고, 이렇게 내버려 두 는시간을날마다조금씩 늘리는 것이다. 결국 아이는 울지 않게 된다. 그 이유는 포유동물과 조류의 새끼에게서 볼 수 있는 동물적인 본능과 관계가 있다. 그 본능은, "네가 울어도 아무도 오지 않으면 너는 버림받 은것이다. 너는버림받았으므로죽음의 위험에 처했다. 그러므로힘을 아껴서 살아남을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 울면 힘이 소모된다. 그러므로 울음을 그쳐야 한다. "라는 것이다. 아이는 바로 이런 본능에 따라 행동 한다. 그러나 울음을 그치기 전에 자신이 보호자로부터 버림받았음을 인정하는 심리적 충격을 받아들여야 한다. '통제된 울음'을 이용한 조절은 우울증에 관한 가장 유력한 이론의 하나인 마틴 셀리그먼(Martin Seligman)의 터득된 무력함' 이론과 밀 접한 관계가 있다. 셀리그먼의 이론의 요점은 대충 이렇다. 어떤 상황 에 대한 특정 반응(배가 고프면 우는 것 같은)이 아무 효과도 거두지 못 하면, 또는 그 효과가 어떤 육체적 또는 정신적 상태의 경험과 아무 상 관이 없으면, 그 사람은 현실로부터 고립된 느낌과 함께 현실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겪 은 이런 무력감에서 비롯되는 우울증은 예측할 수 있는 일들을 중심으 로 삶을 꾸려 나감으로써 완화시킬 수 있다. 철저하게 통제된 일과에 따라 살면서 장차 벌어질 일들을 예측함으로써 세상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에 대해 보상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또 다른 시각에서 거석 기념물을 바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 국립 박물관의 고고학자 앨리슨 세리든 (Alison Sheridan)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우리는 시간과 계절을 통제할 수 있다. 태양이 똑같은 곳에 나타나게 할 수 있다:라고 생각했 던 것 같다. " 세리든은 계절의 흐름에 의존하는 농경 사회에서는 항상 이런 통제가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농사에는 스톤헨지 같은 거 대한 건축물들이 필요하지 않다. 나는 영국의 신석기 시대 사회가 거대 한 기념물의 과장된 예언력에서 위안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정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은 체옵스(Cheops)의 대피라미드를 보고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이 거대한 건축물을 인간의 욕구불만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 [ 질보다 양 ] 통로무덤, 돌기둥, 환상열석: 직선 또는원형 흙무덤 따위의 예언적 인 기념물은 '거대한 성적 조형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크기는 "크 면 클수록 좋다. "는 농경 사회의 사고방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수렵채취 사회의 주요 관심사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자원을 조사하고 채취하는 것이었지만, 농경 사회의 핵심은 몇 가지 자 원을극대화하는 것이다. 되도록 많이 생산하여 잉여 농산물을확보하 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식량, 노동, 아이, 섹스 따위에서 질보다 양이 중요하다. 신석기 시대의 거석 기념물은 고갈된 자연 환경에 위대한 남근의 힘과 위대한 자궁의 힘을 불어넣기 위한 것 일지도 모른다. 물론 의식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석기 시대 사 회는 태양신에게서 흘러나오는 남성적 힘과 땅속에 들어 있는 여성적 힘을 믿었을 것이다. 이런 믿음의 지역에 따른 정도 차이는 우리로서는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종교사학자 제인 해리슨(Jane Harrison) 은 1921년에 이런 글을 썼다. 인간은자신보다강하고뛰어난존재들을만들어 냈다. 그리고이 존재들 이 실은 자신의 욕구의 표현임을 잊어버리고,자신의 갈등을 이 존재들에게 떠맡긴다. 이제 인간은더 이상자신의 갈등을 무의식 속에 묻을 필요가 없 다. 신들이 인간을 위해 그 갈등을 해결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풍부하지만 수동적인 자연의 여신과 하늘을 지배하는 복수심 많은 남성 신, 이 양대 절대적 존재의 개념은 신석기 시대의 유라시아에서 비 롯되었다. 여러 종교적 사상 체계와 결합된 이 개념은지금도그 영향 력이 크다. 기독교 신앙과 상징주의도 이 개념의 상당 부분을 받아들이 고 있다.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보면, 신이 불가사의한 남근처럼 생긴 거석으로묘사되어 있다. 여러 행성과 위성에 남근바위 가서 있고, 동그란 난자들이 남근 바위의 창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 다. 점점 더 심각한 생태계의 파괴로 치닫는 우리의 광적인 진보의 이 면에는 인간과 자연의 투쟁이라는 세상의 양분 개념이 도사리고있다. [ 주술사와 아마존 ] 기원전 5세기에 여러 나라 말을 쓰는 소아시아의 어느 작은 마을에 서 태어난 그리스인 헤로도토스(Herodotos)가 평생 동안 쓴 역작 『역 사』(History)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지만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최초이자 최고의 기록이다. 그리스의 작고 민주적인 도 시국가들이 전제주의적인 막강한 페르시아를 치는 이야기는 세계 모든 민족 역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헤로도토스는 세계 곳곳을 여행 하면서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쓴 역사는 정치적 인 것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직접 경험과 상인들의 이야기와 기록된 신 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그의 이야기에는 아마존과 거세된 남자, 복장 도 착 주술사와 식인종, 늑대 인간과 괴물 따위의 온갖 것들이 등장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여러 가지 사회적 풍습과 종교적 믿음과 성 풍습을 이 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오늘날의 고고학은 헤로도토스가 믿었던 이야기들을 확인하는 셈이다. 고대 신화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의 하나는 아마존(Amazon)에 관한것이다. 헤로도토스의 이야기에 따르면, 아마존은여자전사들의 종족으로 그리스의 적이었고 지금의 우크라이나와 남부 러시아의 대초 원 지대에서 살았다. 이 두 지역은 헤로도토스 시절에는 스키타이 (Scythai :돈 강 서쪽)와 사우로마티아(Sauromatia;돈 강 동쪽으로 나 중에는 사르마티아Isarmatia]라고 불렸다)라고 불렸다. 이 신화는 그 동안 수많은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으며, 9세기에는 요한 야코프 바흐오펜(Johann Jacob Bachofen)이 모권 사회 정치에 대한 개념을 정 립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바흐오펜을 비판하는 사람 들은 이 신화를 터무니없는 공상이라고 일축했다. 이번 장에서의 나의 논지는, 신석기 시대 말부터 유럽이 정치적으로 점점 복잡해짐에 따라 사회적 성이 점점 더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청동 기 및 철기 시대에 농사 기술이 발달하고 금속 사용이 증가하고 교역이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은 부유해졌다. 정교하고 화려한 기념물 등으로 무덤 주인의 높은 지위를 나타낼 때에는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성별을 표시했다(남자와 여자의 의복의 구별). 사람들이 남자와 여자는 당연히 다른 옷을 입는다는 생각을 받아들였다면, 생물학적인 특성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부자와 가난뱅이의 구별 같은 다른 구별들의 당위성은 더 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생물학적 성의 표시는 실은 사회적 성의 표시였다. 남자 무 덤'과 '여자무덤'을 구별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상당수의 생물학적 남 자와 여자가 반대 성의 부장품과 함께 묻혔다. 여자는 남자의 옷을 입 고 남자는 여자의 옷을 입고 묻힌 것이다. 철기 시대에는 거세된 남자 같은 새로운 신체적 범주들이 등장하고, 생물학적 남자를 여성화시키 는 호르몬 요법이 사용되기 시작함에 따라 생물학을 채용하기 시작했 다. 켈트족이 동양의 탄트라 요가에서 비롯된 기술을 받아들였을 때에 는 다양한 성행위와 성 지식이 성행했다. 만일 이때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았다면 유럽의 성 문화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 성의 매장 ] 신석기 시대의 긴 흙무덤에서는성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았다. 남자 와 여자의 유골이 공간적으로 구별되어 있는 경우는 있었다. 랜힐 (Lanhill)에서 발견된 무덤에서는 남쪽 방에는 주로 여자가 묻혀 있고 북쪽 방에는 남자가 묻혀 있었다. 죽은 사람의 성별 구분은 유럽 북부 와서부에서 금속이 처음사용되기 시작한비커기(기원전 2600∼1800 년)에 더 두드러졌다. 이른바 비커인'들은흔히 죽은사람을종처럼 생 긴 토기 컵(비커)과 함께 단독으로 묻었다. 여자는 남쪽이나 남서쪽을 향하게 묻었고 남자는 북쪽이나 북동쪽을 향하게 묻었다. 이렇게 구분 한 것은 죽은 사람들이 부활하여 성에 따라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 다고 생각해서였을것이다. 그들은 천국까지도 성에 따라 구분되어 있 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국과 유럽 대륙에서 발견된 남자 무덤에는 흔히 구리로 만든 작은 칼이 들어 있다. 이것은활을쏠때 손목 보호대로 쓰였을 '간격판'처럼 남성을 상징한다. 남자는 여러 가지 부장품과 함께 원형 흙무덤 밑에 단독으로 묻혔다. 그런 원형 흙무덤은 전에 세워진 거석 기념물 둘레에 산재해 있다. 거석 기념물을 대신하는 한편 영토를 표시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단검을 반드시 남자와만 연관시킬 수는 없다. 모라비아의 브르 노(Brno) 근처에서 발견된 묘지에서는 생물학적 여자의 무덤에 구리로 만든 단검이 들어 있었다. 이것으로 볼 때, 성별에 따른 매장 방식은 그 것이 제도화된 직후부터 그것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파기된 것 같다. 금속의 등장은 성별에 따른 노동의 분담과 성별 개념의 새로운 기준 이 되었다. 금속은 남성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이런 개념은 거석 기념 물이 사라진 것과 상통하며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칼이 새로운 남 근의 상징이 되었다. 여기에서도 생물학적 성과 사회학적 성의 차이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최근에 카라그웨 왕국(지금의 우간다)의 이구르와 지방의 철 생산에 대해 고고학적 연구를 한 앤드루 리드(Andrew Reid) 와 레이첼 매클린(Rachel MacLean)은 이렇게 말한다. 흔히 여자는, 특히 임신한 여자는 제련 작업에 위험한 존재로 여겨져서 접 근이 금지된다‥‥‥‥그러나 위험 요소가 되는 것은 '여자로서의 여자' 가 아니 다. 어린이와 폐경기가 지난 여자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위험한 것은 위험하고불분명하며 그래서 통제할수없는여자의 임신 능력이다. 이 힘은 태아와도 같은 철에 해를 끼칠 수 있다. 그래서 실패를 막기 위해 여자가 제 련 작업장에 접근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제련 작업을 하는 남자들도 제련 작업 직전이나 도중에 성교를 하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유라시아에 농경 생활이 전파됨에 따라 새로운 금속 기술이 나날이 발전했다. 무른 구리 합금이 주석을 섞어 만든 단단한 청동으로 발전하 고, 청동이 철로 발전했다. 광업이 널리 퍼졌으며, 남부에서는 도시가 생겨났다. 호박과 채색 유리와 나중에는 노예를 매매하는 교역망이 확 장되었고, 유라시아의 인구 밀도가 높아짐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인종이 섞여 살게 되었다. 광역 경제의 틀 안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는전문기 능 집단들이 생겨났다. 말을 잘 타는 대초원 지대의 스키타이 족이 유럽 과 중국과 인도로 이루어진 구세계 전체로 확산된 경제적 체계의 주도 권을잡았다. 이 체계 안에는 정착적인 농경 생활, 계절에 따른유목생 활, 완전한유목생활등다양한생활방식이 공존했다. 상인, 직업 군 인, 기술자, 해적, 귀족, 노예 등 다양한 계층이 어우러져 살았다. 전에는(이를테면 신석기 시대의 공동 주택 사회에서는) 사회적 지위 가출생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나 청동기 및 철기 시대의 여러 전문 적인 비자치 집단은 사회적 인식을 높임으로써 자신들의 지위를 향상 시켰다. 그 방법은 인종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시베리아 알타이 지방의 파지리3(Pazyryk)에서 발견된 냉동 보존된 스키타이 족의 시체에는 동 물 모양의 문신이 잔뜩 새겨져 있다. 이것은 대초원 지대의 전형적인 미술 양식이다. 문신은 살았거나 죽었거나 또는 세계 어느 곳에 있거나 그의 신분표식이 되었다. 스키타이족을비롯하여 켈트족, 트라키아인, 페르시아인, 그리스인 등은 금속 세공품으로 몸을 장식했다 초기 농경 사회에서는토기 양식으로 부족의 특성을 나타냈지만, 청동기 및 철기 시대의 미술품은 가지고 다닐 수 있었으며 깨지지도 않았다. 몸에 매달 고 다닌 것이다. [ 아내의 매장 ] 청동기 및 철기 시대의 몇몇 사회에서는 남녀가 비교적 평등했다. 여 자가 지도자가 된 사회도 있었다. 서기 60년에 로마 점령군과 맞서 싸 운 영국 동부의 이 세니족의 여왕 부디카(Boudicca;또는 보디시아 (Boadicea))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부를 쌓을 수 있는 기회에 서는 남자와 여자가 불평등했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경제적으로 불리 했다. 이것은 무덤의 위치에서도 나타난다. 헤로도토스의 이야기에 따 르면, 트라키아에서는 족장이 죽으면 그의 아내들은 누가 가장 사랑받 던 아내였는지를 가리기 위해 경쟁을 했다고 한다. 뽑힌 여자는 남편의 무덤 옆에서 죽음으로써 남편과 함께 저 세상으로 가는 영광을 누렸다 뽑히지 않은 여자들은 공개적인 망신을 당했다. 보그단 니콜로프 (Bogdan Nikolov)가 1965년에 불가리아 브라차(Vratsa)에서 발굴한 무덤에서는 이 이야기와 일치하는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된 바 있다. 기 원전 350년 무렵, 한 성인 남자가 묻히고 그 옆에 갈비뼈 사이에 단검 이 꽃힌 여자가 묻혔다. 정말 이 여자가 자살한 것인지는 고고학적 방 법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 트라키아와 스키타이의 부유한 남자의 무덤에서는 흔히 여자의 유골 한 구가 나란히 발견된다. 이것은 스키타이의 귀족들이 외교적인 목적 으로 여러 여자와 결혼했을 것이라는 헤로도토스의 이야기와 상충되는 것 같다. 당시 사회가 일부다처제였지만 아내들의 서열이 있었을수도 있다. 첩도 있고, 외교적인 목적의 아내도 있고, 혈통을 계승하기 위한 아내(합법적인 상속자들의 모친)도 있는 등, 일부다처제라도 그 내용이 복잡했을 수 있다. 스키타이의 왕들은 모든 상속이 부계를 중심으로 이 루어졌으므로(이상하게도 모든 것을 막내 아들이 물려받는 말자(末子) 상속이었다) 어떤 여자건 마음대로 선택했을 것이다. 말자 상속은 나이 가 더 많고 경험도 더 많은 아들들의 충성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였을 것이다. 누가 상속자가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왕은 살아 있는 한 얼마 든지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 장신구나 장식물에는 흔히 신이나 영웅의 삶을 묘사한 그림이 들어 있었다. 불가리아 중북부의 레트니차(Letnitsa)에서 발견된 기원전 4세 기의 아름다운 은도금 마구는 설화에 나오는 여러 장면을 묘사한 것 같 다.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 그리고 간성으로 보이기도 하는 성별이 그림 8-1 불가리아 레트니차에서 발견된 마구 장식 불분명한 사람이 묘사되어 있다. 이 장식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흔 히 '상試聖婚)'이라고 불리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그림 8-1 참조). 노골적인 성행위를 묘사한 이 조각의 두 남녀가 인간인지 신인 지는 알 수 없지만 신분이 서로 다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고 있는 것 같다 (강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 남녀의 생물학적인 성별은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남자는 갑옷과 바지를 입고 앉아 있다. 머리에는 상투를 틀었다. 발기한음경이 튀어 나와 있고 고환도 보인다. 여자가 남자 위에 올라타 있는데, 음모에 싸 인 음문이 남자의 음경을 덮어 싸고 있다. 여자의 한 쪽 발이 남자의 엉 덩이 밑으로 들어가 있는 것 같다(얼핏 보면 작은 쿠션처럼 보일 수도 있다). 여자도 옷을 입고 있지만 옷 앞부분에 동그랗게 그려진 젖가슴 이 여자임을 나타낸다. 젖가슴이 옷에 난 구멍으로 튀어나와 있는 것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일 수도 있지만, 미술적인 표현 기법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이 장면을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거나 강간하는 모습으로 해석 하는 것은 여성 상위의 체위를 묘사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자세는 영 국과 미국의 선교사들이 독특한 섹스 예의를 전파하기 전까지는 인도, 중국, 이집트 등 세계 곳곳에서 보편적으로 쓰인 자세였다. 내가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두 남녀의 왼쪽에 서 있는 두 번째 여자 때문이다. 이 '시종'은두가지 물건을 들고 있다. 오른손에는 술 같은 음료가 들었을 항아리를 들고 있고, 왼손에는 잎이 달린 나뭇가지를 들 고 있다. 그리고 길다란 나뭇가지 끝에 달린 잎이 남자의 시야를 가리 고 있다. 이 나뭇가지를 이렇게 그린 것은 남자가 자신이 누구와 섹스 를 하고 있는지 볼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반라의 상태 로 앉아 있는 남자의 자세와 신비의 음료는 이 남자가 약물에 취했음을 뜻한다. 우리는 이 그림의 진정한 뜻을 결코 정확하게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눈먼 사랑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육체적이고 음모적인 것으로 보인다. 만일 이 그림의 주제가 정말로 강제적인 섹스라면, 유혹하는 사람과 그 방조자가 여자라는 점 에서 매우 독특한 유물이다. 이 장식판이 신화를 묘사한 것인지, 실제 사건을 묘사한 것인지, 아니면 은세공인이 상상한 그림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자의 지배에 대한 남자의 두려움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고, 남자를 지배하고 싶은 여자의 욕망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다. [ 아마존의 힘 ] 사나운 아마존의 전설에도 여자의 힘에 대한 두려움이 나타나 있다. 아마존의 전설은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16세기의 포르 투갈 탐험가들은 브라질의 열대 다우림 지역에서 여자 전사들을 발견 했을 때 그 지역과 그 곳을 흐르는 강을 '아마존'이라고 불렀다. 畔潑 (Amazon)이라는 말의 정확한 뜻은 분명하지 않지만, '젖가슴이 없는' 이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인 '아마조스(a-mazos)'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전설에 따르면, 아마존은 젖가슴이 하나밖에 없었다고 한다. 히포크라테스도 아마존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 면, 여자들이 딸이 사춘기가 되기 전에 딸의 왼쪽젖가슴 부분을 불로 지져서 나중에 젖가슴이 자라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활을 쏠 때 왼쪽 젖가슴이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아마존 여자들이 실제로 존재했다면, 말을 탈 때 가슴띠를 착용하기가 어려워서 그랬을지도 모 른다. 대초원의 유목민은 작고 빠른 말을 탔는데 그런 말을 잘 타기 위 해서는 힘과 유연성이 필요했다. 오늘날의 여자 궁사들이 오른쪽 젖가 슴을 동여매는 이유는 긴 활시위를 몸의 오른쪽으로 당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을 타고 쏘는 짧은 반사궁을 쏠 때에는 활시위를 몸통의 왼쪽 에서 오른쪽으로 짧게 당긴다. 그러면 왼쪽 젖꼭지가 사선(射線)에 놓 이게 되고 이것은 짧은 활의 위력을 생각할 때 매우 위험한 일이다. 짧은 활의 화살은 거의 석궁 화살과 같은 속도로 날아가며 갑옷도 꿰뚫는다. 한쪽 젖가슴을 제거한 또 다른 이유를 추측하자면, 반은 남자인 여자 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일 수도 있다. 인도의 남녀 양성 신들은 몸이 반쪽은 탐스러운 젖가슴이 달린 여자이고 나머지 반쪽은 가슴이 납작 한 남자이다. 히포크라테스의 이야기에 따르면, 아마존 여자들은 세 명의 적을죽 여서 그 머리 가죽을 벗길 때까지 싸웠다고 한다. 그러고 나면 남자와 혼인하여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남은 오른쪽 젖가슴으로 아이를 키웠 다).그뒤에는 '부족전체가동원되는원정이 있지 않는한' 말을타고 싸움에 나갈 필요가 없었다. 헤로도토스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남겼 고, 아마존 여자들을 '남자를 죽이는 사람'을 뜻하는 '오이오르파타 (Oiorpata)' 라고 불렀다. 헤로도토스는 사우로마티아 지방의 돈 강 동쪽에서 쓰이는 이상한 1恣半)스키타이어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아마존에 대한 이야기를썼 그림 8-2 아마존의 무덤. 우크라이나 촐로드니야르(Cholodnyi Yu)에서 발견된 20번 무덤으로, 사진 한가운데 의 유골은 여자로 추정되며 발 밑의 유골은 젊은 남자로 추정된다. 다. 이야기는 대충 이렇다. 어느 날 일단의 스키타이족 청년들이 다른 종족과 전투를 벌였다. 적을 죽이고 갑옷을 벗겨 보았더니 놀랍게도 그 들은여자였다. 아마존이었던 것이다. 청년들은 더 이상아마존과싸우 지 않고 구혼하기로 했다. 아마존과 혼인하여 낳은 아이는 용맹한 전사 가 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들은 아마존의 캠프 맞은편에 캠프를 치 고 정오까지 기다렸다. 정오쯤에 아마존 여자들이 둘씩 짝을 지어 오줌 을 누러 나오기 때문이었다. 스키타이족 청년 두 명이 오줌 누러 나온 아마존 여자 두 명에게 살금살금 접근했다. 아마존 여자들은 그들을 받 아들이고 성관계를 가졌다. 양쪽 모두 서로의 언어를 몰랐지만 그 다음 날 각자 친구를 한 명씩 더 데려와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리하여 스키 타이 청년들과 아마존 여자들은 모두 짝을 지어 성관계를 갖게 되었다. 스키타이족 청년들은 아마존의 언어를 배우지 못했지만, 아마존 여자 들은 불완전하기는 했지만 스키타이어를 금방 배웠다. 스키타이족 청 년들은 아마존 여자들에게 그들의 마을로 함께 가서 혼인하자고 했다. 그러나 아마존 여자들은 거절했다. "우리는 당신네 여자들과 같이 살 수없다. 생활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활을쏘고창을던지고 말을 타지만 '여자들이 하는 일'은 할 줄 모른다. " 스키타이족 청년들은 아마존 여자들과 함께 사우로마티아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아마존 여 자들은 스키타이어를 완벽하게 터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르마티아어 라는 스키타이어의 방언이 생겨났다. 이와 같은 헤로도토스의 신화적 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사우로마티아라고 불리던 돈 강 동쪽 지방에 아마존 여 전사들의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여전사들의 무덤은 19세기에 테레크 강 유역의 코카서스 산맥에서 무덤 몇 개가 발견되었을 때 처음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한 무 덤에서 여자일 가능성이 높은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갑옷과 화살과 점 판암으로 만든 원반과 철로 만든 칼이 함께 묻혀 있었다. 그리고 그 근 처의 아을 스테판 즈민다(Aul Stepan Zminda)에서 발견된 무덤들에는 여전사와 말이 많이 묻혀 있었다(그러나 연대는 스키타이 시대 이후로 밝혀졌다). 우크라이나의 체르토물리3(Chertomlyk)에서 발견된 초대 형 홀무덤 주변을 발굴한 결과에 따르면, 전사 무덤 50개 가운데 4개가 아마존 여전사 같아 보이는 여자의 무덤이었다. 그 가운데 한 여자는 등에 화살촉이 박혀 있었고, 두번째 무덤에는 철로 만든 육중한 방패 가들어 있었으며, 세 번째 무덤에는 어린아이가 함께 묻혀 있었다. 세 번째 무덤은 헤로도토스나 히포크라테스의 이야기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스키타이 지방에서는 지금까지 여전사의 무덤이 40개쯤 발견되었다. 그리고 사우로마티아지방에서 발견된 철기 시대 전사 무덤의 20퍼센 트는 여자의 무덤으로 알려졌다. 20퍼센트도 놀라운 수치이지만 너무 적게 추정된 것 같다. 이들 유골의 성별은 현대인과의 비교를 바탕으로 구분되었다. 그러나 여자의 유골도 우리가 말하는 남성적 특징'을 가 지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아마존 여 전사들이 생식을 조절할 수 있었다 는 것으로 보아(히포크라테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경구 피임얀사 우로마티아 지방에서 자라는 향쑥이나 아위 같은 식물)을 썼을지도 모 른다. 그러나 격렬한 신체적 활동 때문에 생리가 불순했거나 없었을 수 도 있다. 오늘날의 몇몇 여자 운동선수처럼 임신 능력이 없어질 만큼 몸의 지방질을 근육으로 만들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아마존 여자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골반이 남자처럼 좁았을 가 능성이 많다. 이들의 유골의 성별을 확인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은 이 런 호르몬적 요소뿐만이 아니다. 단기적인 성적 선택 때문에 유전학적 으로보다 장성적인' 신체를 갖게 되었을수도있다는것이다. 적을 세 명 죽인 여자만이 가정을 가질 수 있다는 아마존의 법칙은 용맹한 여자만이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었음을 뜻한다. 그 런 사회에서는 남성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는 여자가 생식에서 유리했 을 것이다. 그런 여자는 지나치게 남성적이라는 이유로 추방되지 않고 오히려 좋은 남자를 마음대로 고를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 디까지나 가정이다. 그러나 이런 가정의 요점은, 스키타이족여자들은 빙하기 여자들과는 달리 신체적 특징이 특이할수록 더 높이 평가되었 다는것이다. 아마존 같은 여전사의 무덤이 보다 '여성적인' 여자의 무 덤과 나란히 있다는 것은 여전사가 되는 것이 절대적 의무는 아니었음 을 말해 준다. 아마존 여전사의 이야기는 현대인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다. 흔 히 여자들은 아마존 여전사의 신화를 들으면 보다 큰 힘을 떠올린다. 그러나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철기 시대에 그런 여자들이 존재했다 는 것은 이례적이다. 엥겔스는 유목 생활은 '남성의 여성 억압'의 새로 운 장을 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마르크스 사상에 고취된 사회학자들 도같은 생각을 했다. 마리아미스(Maria Mies)는 이렇게 말했다. '凌 전적인 유목민이 남자의 여자지배를 비롯한 모든지배 관계의 아버지 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 아마존 여전사는 이런 지배 관계 때문에 생겨났을까? 현대에 쓰여진 민족학 서적을 보면 여자가 남자 옷을 입고 남자 역할 을 맡는 경우가 많다. 월터 월리엄스(Walter Williams)는 이에 관해 『영혼과 육체-아메리카 인디언 문화의 성적 다양성』(rho Spiritand the Flesh . Sexual DiversiD in American Indian Culture)이라는 책을 썼 다. 아마존 강 유역의 여 전사들은 1576년에 페드로 데 마갈레스 데 간 Eh(Pedro de Mag刻haets de Gandovo)에 의해 아마존이라고 불렸다. 마갈레스 데 간도보는 아마존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들은 머리를 남자 처럼 짧게 자르며 활과화살을들고 전쟁터에 나가고 사냥을 한다. 전 쟁터에 나가거나 사냥을 할 때에는 항상 남자들과 동행한다. 각자 시중 드는 여자를 한 명씩 거느리고 있고, 결혼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 끼리 짝을 지어 부부처럼 행세한다. " 이 아마존들은 생물학적으로는 동 성이었지만 월리엄스가 말하는 '사회적 이성 관계'를 유지했다. 아내 역할을 하는 여자는 자신을 동성애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결혼 생 활이 끝나면 아무 문제 없이 생물학적 남자와 혼인할 수 있었다. 이것 이 북아메리카의 보편적인 풍습이었지만 스키타이에서는 달랐다(적어 도 그리스인들이 생각하기에는). 카스카족이나 잉갈릭족 같은 알래스카의 몇몇 종족은 아들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가족의 생존이 덩치 큰 짐승에게 달려 있었고, 이 덩 치 큰 짐승을 사냥하는 것은 남자가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딸 만 있는 집에서는 딸들 가운데서 한 명을 골라 보통 다섯 살 때쯤부터 '남자처럼' 키웠다. 그렇게 성장한 '여자남자'는흔히 뛰어난사냥꾼이 되었다. 특히 잉갈릭족의 경우에는 이 '여자 남자'가 남자들만 들어가 는 한증탕에도 들어가곤 했다. 한증탕 안의 '진짜 남자'들은 그 '여자 남자'의 생물학적 성을 무시했다. 스키타이에서는 경제적 요소들도 중요했던 것 같다. 특히 스키타이 사회에 큰 변화를 일으킨 외부인들이 들여온 경제적 요인들이 대표적 인 것 같다. 이러한 현상 역시 역사에서 유사한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16세기에 캐나다에 상륙한 유럽의 모피 장사꾼들은 원주민 남녀간의 힘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유럽인이 들어오기 전에는 중석기 시대의 유 럽 사회가 그랬듯이 남녀가 평등한 사회였다. 성별에 따른 노동 분담 체계가 있어서 여자들은 주로 식물성 식량을 채취하고 옷감을 엮으며 남자들은사냥을 했다. 이성의 옷을 입고 이성의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기호 때문이었다. 남녀 모두 부 를 쌓을 수 있었고 존경받는 연장자의 지위에 오를 수도 있었다 유럽 인들은 원주민들에게 총과 담요를 주고 모피를 수집했다 그래서 원주 민 사냥꾼들(대다수가 남자였다)은 여자들보다 훨씬 더 부유해졌다. 성 별에 따른 불평등에 직면한 생물학적 여자들은 개인의 지위를 유지하 기 위해 남자의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스키타이 사회도 이 경우와비 슷했을 것이다. 헤로도토스와 히포크라테스가 스키타이 지방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 던 것은 그리스인들이 흑해 연안에 교역 식민지를 건설했기 때문이었 다. 이 식민지를 통해 곡물과 노예가 아테네 등 여러 도시국가로 흘러 들어갔다. 기원전 700년에서 기원전 350년 사이에 대초원 지대의 호전 적인 유목민들의 세력이 커진 것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그 들은 그리스인들을 위해 노예 장사와 약탈질을 일삼았고, 그 대가로 그 리스의 금은세공인들이 만든 아름다운 미술품들을 받았다. 헤로도토스 의 이야기에 따르면, 흑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1沆우랄 산맥 근처 였던 것 같다)에 살던 부족의 하나인 이세도네스족은 남녀의 정치적 힘 이 평등했다고 한다. 그러나 흑해에 가까운 지방일수록 그렇지 않았다. 부장품이 많고 화려한 무덤은 전부 남자 무덤이라는 사실이 이것을 입 증해 준다. 체르토물리크 지방의 중무장한 진짜 여 전사들은 사회적 지위가 높았 을 것이다. 노예 장사와 약탈로 부를 쌓을 기회가 많았을 것이기 때문 이다. 히포크라테스도 언급했지만, 여자들이 약탈에 참여하는 것은의 무 군복무 제도 같은 것으로 발전했을지도 모른다. 여자들이 원정에 참 여했을가능성은 대초원 지대의 끝에 있는 중국에서 발견된 유물이 뒷 받침해 준다. 중국에서는 진흙으로 만든 실물 크기의 여군들이 발견 되었다. 농경 사회와 그 뒤의 도시국가의 번창은 여자들의 경제적 지위를 약 하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복합적이지만, 시장 경제에서는 아이를 키우 는 것이 경제 활동으로 인정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자 원이 시장 생산을 기준으로 배급된다면, 그리고 아이의 생산이 생산의 한 분야로 간주되지 않는다면, 아이가 있는 여자들에게는 사회적 신용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여자의 경제적 중요성이 줄어듬에 따라 대부분의 경우 여자의 성이 상품화된다. [ 섹스의 상품화 및 유희화 ] 여러 가지 증거를 볼 때, 철기 시대의 유럽에는 여자가 몸을 파는 '섹 스 매매'가 있었다. 매춘이 있었음을 입증하는가장확실한증거는고 대 로마의 이른바 '매음굴표'이다. 동전처럼 생긴 이 표는오랫동안잘 못 해석되었고, 여러 가지 성행위 장면을 묘사한 것들은 거의 다 박물 관지하실에 숨겨져 있다. 표 한쪽면에는성행위가묘사되어 있고 다 른면에는숫자가새겨져 있다. 이런 이상한디자인은최근까지도전문 그림 8◎ 로마의 '매음굴표' 앞면과 뒷면을 그린 것이다. 가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성행위와 숫자 사이에 ol무 연관이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전 전문가인 바르샤바 대학교의 알렉산더 부르세(Aleksander Bursche)는 얼마 전에 미세한 디자인의 변화를 바 탕으로 로마 시대 초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이 표들의 연대 순서를 밝히 는 데 성공했다. 로마 시대는 전반적인 인플레이션 시대였다. 부르세는 이를 근거로 두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첫째, 나중에 만들어진 것일수록그가치가 더 높다. 둘째, 표에 새겨진 성행위 자세는 표의 상대적 가치와일치한 다. 비 전문가가 보기에는 왜 펠라티오(여자가 남자의 음경을 입으로 애 무하는 행위 -역주)가 배위(背位) 성교보다 싼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 다. 그러나 부르세는 오늘날의 바르샤바의 매춘부들에 대한 설문조사 를 통해 성행위 자세와 표의 가치 사이에는 어떤 체계적인 관계가 있었 을 것이라는 직감을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매춘부들에게 어떤 자 세와 행위에 더 많은 화대를 받는지 물었다. 그들의 '가격 체계' 는 표의 상대적 가치와 일치했다. 손님을 많이 받는 매춘부는 질의 통증이 가장 큰 위험이다. 따라서 배위 성교처럼 음경이 깊이 삽입되는 자세는 더 고통스러운만큼 화대를 더 많이 받는다. 매음굴 표에는 보다 폭넓은 사회학적 의미도 있다. 로마군이 원정한 유럽 전역에서 이 표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제도화된 매춘이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었음을 뜻한다. 리비아나 다키아에서 온 용병은 하드리 안성벽에서 근무할 때 칼레도니아(스코틀랜드의 옛 이름-역주)웨 매 춘부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매춘부는 그가 뭘 원 하는지 정확하게 알았을 것이다. 매음굴표는 표의 디자인과 제조, 매 음굴의 유지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을 관리하는 제도적인 섹스 산업 의 존재를 뜻한다. 매춘부들은 자신이 벌어들인 돈을 장부에 기록할 수 있었겠지만, 재무 관리는 그들이 하지 않았다. 매음굴을 경영하는 사람 이 돈을 받았다. 어쩌면 매춘부들은 화대를 받지 않는 노예들이었을 수 도 있다. 전쟁의 혼란에 빠진 무법천지의 사회에서 군대가 그들을 보호 해 주는 데 대한 대가로 섹스를 제공했을 수도 있다. 특정 지방의 매춘부들은 그 지방 출신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헤로도 토스는 기원전 5세기의 트라키아에 대한 기록에서, 트라키아인들은 딸 을 그리스에 노예로 팔았다고 말하고 있다. 가장 매력적인 여자들과 일 잘 하는 여자들은 당연히 다른 곳으로도 팔려 갔을 것이다. 유골의 얽 은 자국을 분석해 보면 로마 제국에 매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매독 이 크게 성행했던 것 같지는 않지만, 매음굴도 그 확산에 영향을 끼쳤 을 것이다. 매음굴 표는 제도화된 '성행위 자세 레퍼터리'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확실한 증거이다. 이런 레퍼터리가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지금으 로서는 알 수 없다.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는 철기 시대 초에 유럽에서 도 이루어졌다. 이탈리아 북부의 에트루리아(Etruria) 문화와 알프스 산 맥 남동부의 할슈타트(Hallstatt) 문화에서 쓰인 '시툴라 (situla)'라는 청 동으로 만든 커다란 포도주 단지에는 성행위가 노골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들에는 고고학적 증거로 남아 있지 않은 여러 가지 일상 용품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성교하는 두 남녀의 율동적인 움직임에 따라 출렁거리는 침대와 매트리스도 볼 수 있다. 이 철기 시 대의 시툴라는 선사 시대의 유럽에서 섹스가 침대 위에서 이루어졌음 을 나타내는 직접적인 증거가 된다(침대를 쓰기 시작한 것은 훨씬 더 전이었던 것 같지만). 시툴라와 연대가 같은(기원전 5세기) 독일 호흐 도르프에서 발견된 왕자의 무덤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침대가 들어 있 었다. 이 침대는 내세에서의 안식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실제 생활 에서도 쓰였을 것이다. 그림 8-4 정상 체위. 이탈리아 산제노에서 발견된 청동 술단지 에 새겨져 있는 그림이다. 그림 8-5 섹스시합 장면.슬로베니아브레지에에서 발견된 청동허리띠 장식판조각에 새겨져 있는 그림 이다. 청 동 술단지 에 새겨진 그림들과 비슷하다. 시툴라에 새겨진 침실에서는 섹스만 즐긴 것이 아니었다. 시툴라에 는 한쪽에서는 먹고 마시고 다른 한쪽에서는 힘을 겨루는 장면이 묘사 되어 있다. 그리고 흔히 성행위가 동반된다. 그림의 성격은 한결같다. 두 남자가 시합을 벌이고 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이긴 사람에게 상으 로 주는 시툴라가 화분 위에 놓여 있다. 두 사람이 바지를 벗고 마주 서 서 아령을 들어올리기도 하는데 발기한 음경이 서로를 향해 꼿꼿이 서 있다. 이런 육체적인 시합뿐만 아니라 지적인 시합도 있다. 두사람이 긴 의자의 양쪽 끝에 앉아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다. 가장 특이한 그림은 성행위를 묘사한 것으로서 청동을 두드려 펴서 만든허리띠 장식판에 새겨져 있다. 안타깝게도이 허리띠 장식판은일 부만 남아 있지만, 이런 그림의 보편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완전한 그림 으로 재구성해 볼 수 있다. 이런 고고학적 증거를 숨기거나 없애 버리 려 했던 현대인의 체면치레를 생각할 때, 이런 유물이 남아 있다는 것 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부서져서 일부만 남아 있는 것도 어쩌면 언젠가 없애 버리려고 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아 있는 조 각을 보면, 두 남녀가 성교를 하고 있다. 머리에 스카프를 쓰고 있는 여 자가 의자에 앉아 남자의 삽입을 돕기 위해 다리를 높이 쳐들고 있다. 남자는 고개를 뒤로 돌려 상으로 주는 술단지 쪽을 바라보고 있다. 남 아 있는 조각에는술단지까지만그려져 있지만, 술단지 오른쪽의 그림 도 이 그림과 똑같았을 것이 틀림없다. 즉, 또 다른 남자가 고개를 돌리 고 어깨 너머로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 그림은 남자들끼 리의 성적인 경쟁을 묘사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경쟁의 내용은 무엇 이었을까? 눈싸움을 하고 있는 것일까? 누가 오래 참는지, 아니면 누가 먼저 여자를 정복하는지, 아니면 누가 먼저 사정하는지 겨루는 것일까? 여자는매춘부일까, 아니면 남자의 아내일까? 얌전하게 보이려고머리 에 스카프를 쓴 것으로 보아 처녀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시합이 여자의 욕정이나 쾌락에 초점을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두 남자는 여자보다 상대편 경쟁자에게 관심이 더 많다. 여자의 무표정한 얼굴은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나 타낸다. 다시 말해서, 남자의 일시적인 섹스 도구가 된 것이다. 이 그림 을 새긴 청동세공인은 여자를 묘사할 때 기쁨이나 만족 등의 특별한 감 정을 표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 복장도착주술사 ] 철기 시대의 남자들이 모두 황소처럼 기운이 넘쳤던 것은 아니다. 혹 해 연안 대초원 지대의 스키타이 족은 당시로서는 가장 용맹한 군대의 하나였지만, 히포크라테스에 따르면 '성적으로 가장무기력한' 남자들 이기도 했다. 특히 전사들은 더 그랬다. "그들은 남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말을돌보면서 보냈을뿐 아니라, 추 위와 피로 때문에 성적 욕구를 아예 잊어버렸다. 그들은 또 바지를 입 고 많은 시간을 말을 타고 달렸기 때문에 성적인 능력이 감퇴했다. 결 국 대다수의 남자가 성불구가 되어 여자가 하는 일을 하고 여자처럼 행 동하고 말했다‥‥‥‥그들은 남자의 특성을 잃어 버렸다면서 여자의 옷 을 입었다. " 말하자면 그들은 복장 도착 자였다. 헤로도토스는 그들이 '여자의 병'을 앓았다고 말했다. 이 말이 사실일까? 우리가 히포크라테스를 아는 한, 비록 현대적 시 각에서 볼 때 그의 설명을 받아들일 수 없을지는 몰라도 그가 전혀 근 거 없는 이야기를 꾸며 냈을 것 같지는 않다. 말을 너무 많이 타면 성적 인 능력이 감퇴될 수 있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이런 증상이 지프차를 타고 험한 오지를 돌아다 니다 보면 생긴다고 해서 '지리학자의 고환'이라고 불린다. 사이클링 선 수들 역시 이런 문제를 호소한다. 이런 식으로 고환에 가해진 손상은 회복되지 않을 수도 있다. 처음에는 정액에 피가 섞여 나오다가 나중에 는 발기 및 사정 능력이 손실된다. '여자의 병'이라는 것도 정액에 피가 섞여 나오는 것을 일컫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가능성들도 있다. 안장에 너무 오래 앉아 있는 것은 성기뿐만 아니라 항문에도 나쁜 영향 을 끼친다. 영국의 외과 의사 존 아던(John Arderne)은 백년 전쟁(1337 ∼1453년)에서 돌아온 기사들의 치루수술을 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안장에 앉아 있어서 혈액 순환이 잘 안 되고 일부 근육이 부분적으로 퇴화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항문 및 직장내벽에 작은 구멍이 생긴 것 이다. 스키타이족의 원정도 백년 전쟁처럼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헤로 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28년 동안 계속된 전쟁도 있었다 바지를 입는 것의 문제점 또한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일리가 있다. 영장류는 고환이 몸 밖에 있기 때문에 정자가 저온에서 생성된다. 체온보다 몇 도 낮은 온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정자는 여자의 질 속 에서는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정자는 높은 온도에서 는 잘 생성되지 않는다. 그런데 꼭 끼는 바지를 입으면 고환 부분의 온 도가 체온과 비슷해진다. 스키타이족의 생활 방식은 성기 부분에 여러 가지 장애를 일으켰을 것이다. 그리고그 중에는 '여자의 병'이라는 이 상한 증상을 일으키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족의 복장 도착을 '남녀 양성'으로 해석하면 서 남녀 양성은 '에나리(Enaree)'라고 불렸다고 했다. 스키타이족은 인 도유럽어족의 하나인 이란어를 썼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는 인도유럽 어와비슷한 부분이 많다. 산스크리트어의 』ㄹHnara)'는남자를 뜻하 고, '아나端a-nara)' 또는 '에나瑞e-nara)'는 남성다움이 없는'을 뜻 한다. 헤로도토스의 이야기에 따르면, 아스칼론신전의 여자제사장들 이 에 나리들을 병들게 했고, 에나리들은 병이 나으면 점쟁이 또는 예언 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라임나무 껍질을 꼬았다가 푸는 방법으로 왕과 다른 지도자들을 위해 점을 쳤다. 그들의 지위는 높아졌지만 동시 에 약해졌다. 그들의 예언은 존중되었지만, 예언이 틀릴 경우에는처형 되었던 것이다 스키타이족에 대한 헤로도토스의 기록이 고고학적 증거와 대체로 일 치함을 고려할 때, 복장 도착 점쟁이들에 대한 이야기도 사실인 듯하다. 헤로도투스가 말하는 에나리와 비슷한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는 많다. 북아메리카에서는 여자처럼 옷을 입는 남자를 가리켜 '베르다체(berdache)' 라고 한다. 아마존 강 유역의 아마존들처럼 이들도 다른 남자들과 문화적으로는 이성간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동 성간인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들을 배우자로 삼는 남자들 은 다른 정상적인 유부남들과 똑같이 취급된다. 몇몇 평윈 인디언은 의 도적으로 베르다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아직 사춘기가 안 된 남자아 이들을 안장 없이 말을 타게 하여 고환을 손상시킴으로써 여성 호르몬 의 분비를 촉진시키는 것이다. 폴리네시아(마후스(mahus) ), 인도(히즈 라스(hijras)), 유럽(카스트라 티⊂castrati)), 아시아 및 아프리카의 일부 지방에도 베르다체와 비슷한 존재가 있거나 있었다. 일부에서는 성기 를 변형시키거나 절단하는 경우도 있다. 복장 도착 주술은 현대의 시베 리아 지방에도 있었다. 시베리아 지방은 철기 시대에 스키타이 족과 밀 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히포크라테스에 따르면, 스키타이족 남자들의 상당수가 복장 도착자 였다. 말을타고 달리다가성불구가된 것이다. 한편 헤로도토스의 기 록은 그들이 점쟁이 또는 예언자로서 훨씬 더 전문화된 역할을 맡았음 을 시사하고 있다. 에나리들이 어떤 사람들이었건, 그들을 여자 같은 남자나 남자 동성애자로만 단정할 수는 없다. 스키타이에는 사회적 성 전환은 있었지만 애매모호한 성은 없었다. 한 귀족 남자가 바지를 입지 않고 그리스인들처럼 치렁치렁한 치마 같은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리 고 동성애를 즐기는 그리스 남자들과 술집에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여자처럼 변했다고 동료들에게 맞아 죽었다. '여자 같은 것' 과 남성다움을 잃어버리고점쟁이가되는것'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 가 있었던 것이다. [ 미약과 성 전환약 ] 에나리는 자신을 여자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었을까? 스키타이족 남 자는 그리스 미술에서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르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 어 있다. 그러므로 여자가 되려는 남자는 먼저 수염을 처리해야 했을 것이다. 아메리카의 베르다체는 이런 문제가 없다. 원래 수염이 없거나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에나리는 면도를 했을까? 유럽에서는 청동기 시 대 중반부터 청동으로 만든 질 좋은 면도칼이 쓰였지만, 스키타이 지방 에서는 면도칼이 발견된 적이 없다. 1세기의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 (Ovidius)의 시를 보면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으며 에나리의 진정 한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오비디우스는 흑해 연안의 그 리스 식민지인 토미스로 유배되어 유명한 연가(戀歌)들을 썼다. 그의 『연애』(Amores) 제1편 제8행을 보면 이렇게 쓰여 있다. "그녀는 마녀 라네. 마법의 주문을 외워 강이 거꾸로 흐르게 할 수 있고, 강력한 최음제를 만들 줄 안다네. 약초 로 만든 약이나 마법의 악기를 언제 써야 할지 알며, 발정한 암말에게서 최음제를 추출하는 법을 안다네." 말에 대한 언급은 『여자를 위한 미안술』(On Facial Treatment for Ladies)에도 나온다. "약초와 약을 믿 지 말라. 발정한 암말에게서 추출한 그 무서운 약을 내버려라." 임신한 암말의 오줌에서 추출한 이 약 은 오늘날 '프레마린' 이라는 상표로 판매 되어 남자에서 여자로 성전환한 사람의 호르몬 요법제로 쓰인다. 복합 에스트리 올(성 호르몬의 일종)이 많이 함유된 이 약을 복용하면 피부가 여자처럼 부드러 그림 8-6 우크라이나 부크 강 남쪽 유역의 소콜로바 모길라(Sokolova Mogila)의 '여자 제사장' 워지고 수염이 자라지 않으며 젖가슴이 커진다. 오비디우스는 토미스 에서 마녀의 마약을 알게 되었을까? 스키타이는 호메로스 시절부터 '암말의 젖을짜는사람들'의 땅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해괴해 보일지 도 모르지만 대초원 지대에 사는 유목민은 흔히 가축의 오줌을 마신다. 이를테면, 몽고인들은 낙타의 오줌을 마신다. 이런 풍습은 호전적인 스 키타이족에게 전략적인 이점이 되었을 것이다. 물을 찾았는데 적이 그 물에 독을 풀었거나 오염시켰을 위험이 있다고 가정해 보면 그 물을 말 에게 먼저 마시게 하여 '걸러서 마시는 것'이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사실을 종합하여 생각할 때, 스키타이 족은 임신한 암말의 오 줌이 남자의 신체적 발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았을 것이다. 오비디우스는 더 극적인 신체적 변형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연애』 제2편 제3행에 이렇게 쓰여 있다. "불행하게도 당신의 여자의 시종은 남자도여자도 아닌, 섹스를 즐길 수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네 남자아 이들의 성기를 자르기 시작한 사람은 그 자신부터 거세되어야 했다네." 오비디우스가 말하는 거세는 음경과 고환을 다 자르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현대 인도의 '히즈라◎도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히즈라스는 성기가 잘린 며성화된 소년으로 춤을 추거나 점을 치고, 또 몸을 팔아 먹고 산다. 오비디우스의 시는 에나리의 정체와 에나리가 자신의 외모를 여자처 럼 만든 방법을 추측하는 실마리가 되지만, 이것은 고고학적인 방법으 로 확인되어야만 한다. 부크 강 남쪽의 소콜로바 흙무덤에서 발견된 사 르마티아의 '여자 제사장'의 무덤(연대는 오비디우스가 연가를 쓴 시기 와 같다)을 비롯한 몇몇 무덤에는 에나리의 무덤이라고 추측하게 하는 이상한 부장품들이 들어 있다. 소콜로바 흙무덤에 묻혀 있는 유골은 마 흔 살에서 마흔다섯 살 정도의 여자의 것이라고 알려졌지만, 발표된 유 골의 치수는 신빙성이 없다. 진귀한 이집트산 물건들을 비롯하여 남근, 별보배고등 껍질(전통적인 음문의 상징이다), 아이를 낳는 여자의 조상 등 여러 가지 모형과 상징물이 들어 있었다. 흔히 여자들이 화장할 때 쓰는 독특한 청동 거울도 들어 있었다. 거울의 손잡이는 수염이 난 남 자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긴 치마를 입고 있으며 부장품으로 쓰이는 의식용 그릇을 들고 있다. 유골을 정밀 분석해 보지 않고서는 뭐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지만, 재구성한 얼굴 을 보아서는 분명히 남자이다. 그리스 문헌과 연관시켜 이 유골을 분석 한다면, 평생 동안 임신한 암말의 오줌을 의식용 그릇에 담아 마신 생물 학적 남자의 이 유골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아서는 남자라고 하기 어려 울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 철기 시대 덴마크의 탄트라 섹스 ] 그림 8-7 불가리아 레트니차에서 발견된 마구 장식에 새겨져 있는 남녀 양성 레트니차 장식판들 가운데 하나 에는, 수염도 없고 젖가슴도 없으 며 긴 치마 같은 옷을 입은 에나리 같은 사람이 거울을 들고 다리가 셋 달린 뱀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가장정교한 신석기 시대 미술품의 하나인 군데 스트룹(Gundestrup) 가마솥에도 소콜로바의 청동 거을 손잡이에 묘 사된 사람과 비슷한 사람이 묘사되 어 있다. 다른 점은, 이 사람은 수 염이 없고 남녀 양성임이 분명하다 는 것이다. 군데스트룹 가마솥은 기원전 2세기에 유럽 남동부에서 만들 어졌다. 지금의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 지방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만들어진 지 몇 년 뒤에 덴마크 유틀란트의 황무지에서 유실 되었다. 그뒤 황무지 주변에 늪이 생겨났고, 1891년에 토탄을캐던 사 람들이 가마솥을 다시 발견했다. 이 가마솥은 커다란 반원형의 사발에 은으로 만든 여러 개의 판을 붙 인 것이다. 이 은판들에는 사람들과 전설의 동물들이 묘사되어 있다. 바깥쪽을 향한 판들에는 신들과 여신들이 묘사되어 있다. 신은 수염이 있고 여신은 수염이 없으므로, 이 신들과 여신들은 성별을 표현하는 일 종의 기준이 된다. 남녀 양성도 많이 그려져 있다. 가장 특이한 그림은, 수사슴의 뿔이 달린 모자를 쓰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황홀경에 빠진 듯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을 묘사한 것이다. 오른손으로 수사슴의 목고삐 를 잡고 있고 왼손으로는 숫양의 머리가 달린 남근 같은 뱀을 붙잡고 있다. 여러 가지 동물에 둘러싸인 이 사람은 흔히 켈트족의 신 케르누 노스(Cernunnos)로 여겨진다. 수염도 없고 젖가슴도 없어서 성별이 불 분명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세이다. 두 다리가 땅바닥에 붙어 있지 않고위에 떠있다. 얼핏 보면 알아보기가 어렵지만, 이 사람은발가락 한 개에 몸을 싣고 공중에 떠있다(옆에 있는 수사슴의 발굽이 지면을 나타낸다). 오른발은 왼쪽 허벅지와 가랑이 사이에 끼여 있고, 발뒤꿈 치가 음낭과 항문 사이에 있는 회음부를 누르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사람은 탄트라 요가에서 가장 어려운 자세(아사나(asana))의 하나를 취하고 있다. 탄트라 요가는 비교적 뒤늦게 생겨난 고행 요가의 하나로 서 동물의 힘에 초점을 두는 것이 특징이다. 이 요가를 수행하는사람 은 섹스와 약물을 이용하여 의식 상태의 변화를 꾀할 수 있다. 남아시아 인더스 계곡에 있는 고대 유적 도시 모헨조다로(Mohenjo- Daro)에서도 군데스트룹 가마솥에 새겨진 것과 비슷한 그림이 발견되 었다. 그 연대는 군데스트룹 가마솥보다 앞선 기원전 2000년이고, 장 식용 금속판에 새겨져 있지 않고 돌로 만든 인장에 새겨져 있다. 그러 나 묘사된 사람의 특징은 매우 비슷하다. 인더스 계곡에서 발견된 다른 그림 8-10 탄트라식 복장 도착. 모헨조다로에서 발견된 기원전 2000년경의 인장 조각에 새겨져 그림들과 비교할 때, 이 사람은 당시의 기준으로는 여자 복장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고환과 발기한 음경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이 남자여자'는머리에 커다란 뿔을 쓰고 있고군데스트룹가마 솥에 새겨진 사람처럼 여러 가지 동물에 둘러싸여 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사람도 탄트라 요가의 아사나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점은 두 발꿈치가 모두 회음부를 누르고 있다는 것이다. 라이스 대학교의 토머스 매케빌리(Thomas McEvilly)는 이 그림의 배경을조 사한끝에 이것이 인도 최초의 탄트라 요가 또는 섹스 요가를 묘사한 그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탄트라 요가와 대초원 지대의 샤머 니즘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덧붙였다. 군데스트룹 가마솥에 새겨진 그림은 성적 특성이 애매모호한 특별한 사람을 묘사한 것 같다. 이 사람은 남자와 여자, 동물의 특성을 모두 가 지고 있다. 주술사 같기도 하고, 성적 에너지를 이용하여 변화된 의식 상태에 빠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가마솥의 밑부분에는 또다른주술 사같은사람이 새겨져 있다. 이 사람은 칼을 휘두르고 있고 어깨에는 동물의 털이 나 있으며 젖가슴이 있다(그림 8-11). 헤로도토스가말하 는 에나리는 바로 이런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유럽에서 기독교가 생겨난 직후에 이런 정교한 성적 표현이 등장했 다는 것은 역설적 이다. 만일 역사적 상황이 달랐다면, 중세 유럽의 왕 실들은 데칸 고원의 힌두교 신전들에 그려진 것 같은 관능적인 그림에 둘러싸여 고급 매춘부들의 에로틱한 춤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의식과 섹스의 연계는 로마 카톨릭 교 회가 등장함에 따라 지하로 숨어 버렸다. [ 나쁜 섹스 ]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이교도 및 초기 기독교 시절의 유럽에서 부 적절한 섹스에 대해서 무자비한 탄압이 있었다는 것은 고고학적으로 추적할 수 있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영국 일부, 베네룩스의 습지 등에서 발견된 수많은 시체를 비롯한 중요한 증거들에 대한 상세 한 법의학적 보고서가 없기 때문에 정확한 해석을 하기는 어렵다(습지 에서 발견된 시체들 가운데에는 횡사하거나 제물로 희생된 것으로 보 이는시체가 많다). 차라리 사료(史料)가훨씬 더 유용하다. 이 사료들 은 고고학적 증거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을 뒷받침해 주기 때문이다. 중세 초, 해럴드 블루투:꾸班arald Bluetooth) 왕은 부정한 왕비 거닐 드(Gunnhild)를 늪에 빠뜨려 죽였다. 늪에 빠뜨려 죽이는 것은 간음에 대한 일반적인 처벌이었다. 강간당했거나 근친상간한 여자도 같은 방 법으로 죽이곤 했다. 이런 식의 처형은 발각되자마자 재판도 없이 이루 어졌다. 남자의 정액은 약 열흘 동안 여자의 질 속에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런 식으로 처형된 여자들의 몸 속에는 아직 정액이 들어 있 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액은 화학 성분 때문에 다른 것들과 함께 보 존되었을 것이다. 로마의 저술가 타키투스(Tacitus)는 2세기 초에 독일 의 부족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인구가 많은 이 나라에서는 간음이 극 히 드물다. 간음한 여자에 대한 처벌은 약식으로 이루어지며 그 남편에 게 맡겨진다. 남편은 친척들이 보는 앞에서 아내의 옷을 벗긴 다음 체 모를 모두 깎고 집 밖으로 끌고 나가 온 마을을 돌며 매질한다. " 간음한 여자에 대한 가장 심한 처벌은 다른 나쁜 짓을 한 사람을 처벌할 때처 럼 형구를씌워 늪속에 빠뜨려 죽이는것'이었을 것이다. 덴마크빈데 비의 토탄늪에서는 1세기경의 독일의 한 사춘기 소녀의 시체가 발견되 었다. 알몸에 머리카락이 깎여 있었고 눈은 가려져 있었으며, 목에 무 거운 굴레가 씌워져 있었다. 그러나법의학자들은정액의 흔적이 있는 지 검사하지 않았다. 강간에 대한 태도를 보여 주는 고고학적 증거도 있다. 영국 햄프셔 주 킹스워시의 워시 파크에서 발굴된 6∼7세기의 앵글로색슨족의 공동 묘지에서 열여섯 살된 여자의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양쪽대퇴골이 심 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오른쪽 대퇴골 맨 윗부분에 난 상처는 골반과 연결된 근육 두 개가 뼈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생긴 것이었다. 고고학자 소냐 호크스(Soma Hawkes)와 병리학자 캘빈 웰스(Calvin Wells)는 1975년의 보고서에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젊은 사람의 근육 이 파열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억지로 가랑이를 벌리려는 힘에 대항하여 가랑이를 오므리려다가 파열된 것 같다‥‥‥‥다시 말해서, 이 상처는 무자비한 강간에서 비롯된 것이다‥‥‥런쪽 대퇴골 뒤쪽 무릎 바로 위에 난 상처는 강간자가 음경을 삽입하기 위해 소녀의 무릎을 억 지로 세울 때 생긴 것 같다. " 오늘날의 병리학자들은 배에 난 상처에 대 해 이런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증 거는 또 있다. 이 소녀의 무덤에는 부장품이 하나도 없었다. 이것은 아주 드문 경우 로, 소녀의 신분이 낮았음을 나타낸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78번 무 덤의 젊은 여자는 부장품 없이 묻혔을 뿐만 아니라 엎드린 자세로 묻혔 다. 그리고 유골의 자세로 보아, 땅속에 묻힐 때 아직 살아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증거들은 강간 희생자에 대한 태도를 보여 주는 역사적 증 거의 하나이다. 울프스탠(Wulfstan)의 『앵글로색슨족에 대한 늑대의 충 고』(Sermo Lupi ad Anglos)는 자신의 아내가 여남은 명의 바이킹족에 게 강간당하는 모습을 억지로 지켜보는 앵글로색슨족 남자를 묘사하고 있다. 울프스탠은 여자보다는 남자의 수치심을 더 강조했다. 이 시대의 앵글로색슨 사회에 대한 보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생각할 때, 여자가 강간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면 그 일이 남자의 집안에 가한 불명예를 씻 기 위해 여자를 처형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초원 지대의 철기 시대 사회에 존재했던 종교적인 복장 도착의 전 통은 유럽의 이교도시절에도 계속되었던 것 같다.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독일의 나하르발리족은 숲 속에서 종교 의식을 올렸다. 이때 의식을 주관하는 제사장은 여자 복장을 했다고 한다. 영국 제도에 정착 하여 산 독일계 앵글로색슨족의 이교도 신앙에 대해 쓴 사학자 비드 (Bede)는 상세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제사장이 거세한숫말 대신 암 말을 탔다고 했다(복합 에스트리올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흥 미로운 것은, 오늘날의 전통 사회에서는 주술사가 흔히 버드나무 지팡 이로 점을 친다는 것이다(버드나무에도 복합 에스트리올이 함유되어 있다). 고고학자 크리스토퍼 크뉘젤은 이미 발굴된 앵글로색슨족의 묘 지에 대한 기록에서 복장 도착 주술사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을 찾기 시 작했다. 기독교는 이교도 주술사의 복장 도착을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오늘 날 성직자의 복장은 로마 시대의 토가(고대 로마인의 긴 겉옷-역주)에 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유럽 북부 로 퍼질 때 왜 기독교 가치관과 맞지 않는 이런 복장이 계속해서 쓰였 는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아마 주술사의 복장에 대한 이교도의 고정 관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와 함께 기독교 의식의 성적인 요소들은 지 금까지도 남아 있다. 특히 세례 의식이 그렇다. 중세 후기에는 성인만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는 사람은 발가벗고 교회에 가서 세례반 속으 로 들어갔다. 그러면 커다란 흰 양초에서 흘러내리는 뜨거운 촛농이 세 례반으로 떨어져서 생명력을 주는 세례반의 힘을 불러일으켰다. 하얀 촛농은 남자의 정액을 상징하고 세례반은 여자의 자궁을 상징한다(앞 서, 황금 음경의 무덤과 라스코의 동굴 벽화에 관한 부분에서도 언급한 그림 8-12 콘월의 메난톨 무덤 바 있다). 기사도는 철기 시대에 시작되었다. 머나먼 타향에서 사랑하는 사람 을 그리워한 대초원 지대의 말 타는 사람들이 기사의 원형이다. 이것은 중세 유럽에서 어느 왕의 성 안에 갇힌 순결하고 아름다운 공주를 아내 로 맞은 방랑기사의 이야기로 바뀌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서사시 『가 웨인 경과 녹색 기사』(Sir Gawain and the Green Knight)에서처럼 사 랑과 섹스가 분리되었다. 섹스는 사랑을 더럽히는 것이었다. 맬러리 (Malory)의 『아서 왕의 죽음』(The Death◎Arthur)에는 사랑과 섹스 의 분리에 따른 복잡한 문제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 기네비어 왕비에 대한 아서 왕의 사랑은 미완성이다. '사타구니'를 다쳤기 때문이다. 랜 슬롯은 기네비어 왕비와 간통한다. 아서 왕은 겉으로는 정숙한 왕비의 내면에 숨어 있는 음란함에 대해 두려움을느긴다. 기네비어 왕비는 임 그림 8-13 영국 도심의 언덕에 케르네아바스 거 인 그려져 있는 신하지 않고 성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약초를 이용한 피임법은 중세 말기까지 전승되었고 인구 안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물론 다른 여러 가지 성행위도 계속되었다. 참회록이 증명하듯이, 수 도원에서는 동성애가 성행했다. 처음 출전한 젊은 병사는 고참 전사의 동성애 상대가 되는 것이 관례였다. 중세의 성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격 리 수용되었기 때문에 여자 동성애도 은밀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 러나선사시대를 거쳐 현대 초기까지 인류의 진화사에서 여자동성애 에 대한 물적 증거는 거의 없다. 과거의 성적 표현들은 다시 해석되어 살아남았거나 억압되었다. 시 기는 알 수 없지만, 고리 모양의 돌이 뭉툭한 두 남근 바위 사이에 세워 져서 상징적인 재생을 기리는 여러 가지 전통 의식에 쓰였다. 태양신의 음경이 드나든 이 상징물은신석기 시대의 메난톨(Men-an-Tol) 무덤의 입구 구실을 했다. 영국 도싯 주 케르네아바스(Cerne Abbas)에는 선사 시대에 그려진 거인상이 있다. 몽둥이를 휘두르고 있는 이 거인은 한때 언덕 요새의 바깥쪽 비탈에 서서 망을 보았을 것이다 발기한 음경은 성적인 표현이 아니라 억센 힘과 공격성을 뜻한다. 이 그림은 마을의 처녀 총각들에게 한여름 밤의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임신이 잘 안 되는 젊은 여자들은 밤에 언덕 위로 올라가서 이 거인의 음경 위에 누워 잤 다. 기독교는 섹스를 통한 종교적 초월을 상징하는 켈트족의 뿔 달린 신 케르누노스를 악마로 해석했다. [ 섹스와 사치 금지법 ] 인간 성별의 다양한 기준은 시대가 바뀌면서 문화에 의해 점점 더 정 형화된 것 같다. 청동기 시대 이전의 무덤은 오직 유골의 생물학적 특 징에 따라 성별이 결정되며 불분명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나중에는 사 회적 성을 상징하고 성별의 모호함을 은폐하는 부장품이 나타났다. 사 회적 성은 남녀의 차이를 객관화했지만 때로는 생물학을 초월하기도 했다. 죽은 사람의 생물학적 성별을 판단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고대 이 집트의 무덤 1770번은 유골만 보아서는 젊은 여자로 보이는 사람의 정 교한 무덤이다. 이 무덤에는 금으로 만든 젖꼭지 씌우개(여자의 무덤에 서 흔히 발견된다)가들어 있었지만 인공 음경(붕대로 만든 것으로 남 자무덤에서 주로 발견된다)도들어 있었다. 이집트학자로절리 데이비 드(Rosalie David)는 신중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이 사람은 나일 강에 빠져 죽었는데, 시체를 건져 냈을 때는 이미 너무 심 하게 부패되어 있어서 생물학적 성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미라를 만드는 염꾼들은 섣부른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이 사람을 저승으로 보 낼 때 남자와 여자의 부장품을 함께 넣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집트 의 미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자로 여겨졌다. 그러다가 엑스선 검사 결과, 붕대로 엉덩이와 젖가슴을 부풀려서 여자처럼 만들어져서 묻힌 남자라는사실이 밝혀졌다. 다른여러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오늘날 신체를 규정하는 생물학적 성과 당시 사회의 사회적 성을 구별 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남녀가 구별되는 의복의 등장은 보다 복잡한 사회적 계급 제도의 바 탕이 된다. 제1장에서 언급한 바 있는 아기띠는 여자들이 어린아이를 운반하기 위해 만든 것일 가능성이 크지만, 남자들이 사용했을 수도 있 다. 물건은 그 용도에 따라 무생물임에도 불구하고 성별을 갖게 된다. 사실 생물학적 성과 사회학적 성을 바탕으로 생각하면 사람과 물건의 차이가 생각만큼분명하지 않다. 생리대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임신 능 력이 있는 여자가 쓰는 물건으로 여긴다. 여자가 분비하는 생물학적 물 질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좁은 의미에서 생각하면, 옷은 냄새와 분비물 을 흡수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옷은 그것을 입는 사람의 분신이 된 다. 그러므로 성별에 따라 노동을 분담하는 사회에서는 성별을 가진 물 건이 된다. 남자 옷과 여자 옷의 구별은 옷이 처음 개발되었을 때부터 있었던 것 같다. 기능적인 요소(젖을 먹이기 편하게 만들거나 오줌을 누기 편하게 만드는 등)와 성적 매력의 표현을 바탕으로 구조와 모양이 달랐을 것이 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부장품이 생물학적 성별을 나타내 기 시작한 것은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였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소단위 의 선사 시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신분이 그 사람의 개성과 공동 생활에 대한 특별한 기여에 따라 결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보다 포괄적인 구 분(처음에는 남녀의 구별, 나중에는 개인의 구별)이 이루어진 것은 인 구가 증가하고 농경 생활이 시작된 이후였다. 성별에 따른 옷의 구별은 사회적 불평등을 부추겼으며, 그것을 어기 는 것은 범죄로 여겨졌다(『구약 성서』에는 복장 도착이 중죄로 명시되 어 있다). 왕관은 왕의 사회적 힘을 상징한다. 그의 발 밑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호위병과 대신과 시녀와 하녀는 저마다 자신들의 지위를 나 타내는 옷을 입는다. 만일 이들이 가장 행렬에서처럼 저마다의 취향에 따라 옷을 입는다면 복장이 상징하는 사회적 계급 제도가 무너진다. 예복은 규칙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에 가장복이 가지고 있지 않은 힘 을 가지고 있다. 성별에 따른 옷의 구분은 다른 종류의 상태를 나타내 는 옷에까지 '자연의 힘'을 부여한다. 남녀가 서로 다른옷을 입을 때, 그 옷은 생물학적 차이에 따라 다르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남자와 여자 는서로에게 '자연스러운' 옷을 입는것이다. 이런 논리는왕과거지의 옷의 '자연스러움'을 정당화하며, 더 나아가 사회적 계급 제도를 정당 화한다. 성별 구분의 규칙은 사치 금지법에도 적용된다. 그러므로 사회 적 성전환이 성행하는사회는성별과사회적 계급에 따른 '적합한' 복 장을규정하는 엄격한규칙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런 사회일수록 더 애매모호한 성별을 용납하지 않는다. 옷이 곧 그 사람의 성인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스키타이의 에나리들은여자처럼 옷을 입 고 여자처럼 말할수 있었다. 그러나 치마 같은 그리스인들의 옷을 입 고 그리스인들과 어울려 주연을 벌인 스킬레스 왕은 살해되었다. 신분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규정될 수 있다. 생물학적 성과 사회학적 성과 사회적 신력도 작용하지만, 개인의 외모와 성격과 취향도 작용한 다. 그러나 개인의 이런 여러 가지 측면이 그사람이 죽은뒤에 어떻게 표현되느냐는 그사람을 묻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수천 수만 년이 지난 지금 고고학자들이 이런 여러 가지 변수를 다 고려해서 제대로 해 석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1953년, 프랑스 부르고뉴지방의 몽라 수아성 근처에서 기원전 5세기 초의 것으로 보이는 화려한 무덤이 발 견되었다. 이른바 비(Vix)공주의 무덤'으로불리는이 무덤을부유한 여자의 무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복장 도착 남자 주술사의 무 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유골도 그렇지만 여러 가지 장신구도 그 성별이 불분명하다. 물론 철기 시대 유럽의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부 유했지만, 부자 여자들도 있었다. 비 유골은 골반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DNA 검사법이 없었던 당시에는 두개골의 치수를 바탕으로 성별을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 러나 이런 방법을쓸 때에는 유골의 인종이 중요한 변수가 된다. 죽은 사람이 주로 덴마크에서 발견되는 키가 크고 건장한 금발의 북유럽인 이었다면, 비 유골의 두개골은 여자의 것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비 공 주'가 체격이 가냘픈 지중해 연안의 종족이었다면 남자일 가능성이 크다. 인종을 따지는 것이 좋건 싫건, 인종은 성별을 판단하는 데 중요한 요소이다. 인종은 섹스에서 비롯되었다. 성적 취향에 맞는 짝을 고르는 성적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인종의 구분선은 성의 구분선만 큼이나 불분명하다. 인종은 성의 역사에 대한 책에서 다를 만한 주제로는 알맞지 않아 보 일 수도 있다. 또한 인종은 세밀한 조사를 거치지 않은 여러 가지 주장 으로 얼룩진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민감한 주제이다. 인종은 문화와 생물 학이 정치적인 측면에서 만나는 접점이다. 인종의 역학은 성적 매력과 생식에 좌우되며 집단 학살에 좌우되기도 한다. 다양한 인종은 먼 옛날 부터 서로 다른 진화 과정을 밟아 왔을까? 아니면 현대인의 지리적 및 수적 팽창에 따라 비교적 최근에 발생한 현상일까? 오로지 선사 시대에 대한 연구만이 그 해답을 구할 수 있다. 성기는 인간의 신체적 특성들 가운데 가장 다양한 것의 하나이다. 음 핵과 음순과 음경과 젖꼭지의 크기나 모양은 세계의 여러 종족마다 모 두다르다. 찰스다윈은 이런 차이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그는남자와 여자의 머리카락 발달의 차이와 지역에 따른 피부색의 차이도 유심히 관찰했다. 그는 이런 여러 가지 차이가성적 선택에서 비롯되었다고 생 각했다. 사회마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서로 다르며 개인의 성적 선택이 그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그는 미세한 차이 역시 그 런 선택에서 비롯된타고 생각했다. 이를테면,하와이 제도의 처녀들이 유럽에서 온 포경선 선원들에게 이를 옮겼을 때 이가 배 위에서 살지 못 한 것에 대해 다윈은, 유럽 선원과 원주민의 혈액의 구성에 미세한 차이 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인류는 다윈이 보기에는 하나의 종이었다. 신체적으로 아무리 두드러지게 다른 두 인종이 혼인해도신 체적 특성이 똑같은 인종끼리의 결합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이가 태어났다. '비글'호의 항해는 서로 다른 인종들을 서로 가까이 다가서게 했지만 그것은 그리 특별한 사건은 아니었다. 왜냐 하면 인간은 끊임없이 이동 해 왔기 때문이다. 고립된 생활과 우연에 의해 지방에 따른 신체적 특 성이 생겨났지만, 신체적 특성이 다른 종족들과 만나 결합하기도 했다. 몇몇 종족은 태즈메이니oWTasmania;오스트레일리아 남동쪽에 있는 섬-역주) 원주민처럼 높아진 해수면 때문에 일시적으로 고립되기도 했다. 태즈메이니아족이 오랜 세월 동안고립되어 있었다면 다른종족 들과 교배하지 못하고 별개의 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지질학적 연대 규모의 오랜 세월을 필요로 했을것이다. 태즈메이니아 족의 고립은 실제로는 유럽인들에 의해 중단되었다. 태즈메이니아족은 곧 인종적 순수성을 상실했으며, 다른 종족과 혼인하지 않은 사람들은 병들어 죽거나 총살되어 박물관과 수집가의 인종표본이 되었다. 그리 고 1877년에는 마지막 순수 태즈메이니아인이 죽었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적인 멸종이 아니라 집단 학살의 결과였다. ││ │ │ │ │ 그림 9-1 19세기의 산족여자두 명. (A)이른바 '호텐토트 비너스' (B)코라나족여자 (C), (D)산족 여자의 외성기. (C)는 길게 늘어져 있는 소음순이고, (D)는 이것을 양쪽으로 들어올린 것이다. 화석 증거가 말해 주듯이, 수많은 종족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인류 는 여러 종류로 분리되어 수십만 년 동안 서로 가까이 살면서 더 진화 하거나 멸종했다(제1장 그림 1-3 참조). 우리는 비록 이들을 여러 종으 로 분류하고 서로 다른 이름을 붙였지만, 이들은 서로간에 이종교배도 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여러 종류의 원시인들 사이의 차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상적인 현대인이라면 오 스트랄로피테쿠스계와는 성관계를 갖지 않을 것이라는 옥스퍼드 대학 교의 동물학자 존 베이커(john Baker)의 말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계가 멸종했으므로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직계 조상이 여러 종류 의 원시인들과 가까이 어울려 살았던 160만 년 전에는 그럴 기회가 많 았을 것이다. 베이커의 주장처럼 그들도 서로에 대해 성적 혐오감을 느 꼈을까? 유전학적으로 서로 맞지 않았거나,행동학적으로 서로 어울리 지 않았을까? 나는 선사 시대에도 인종 차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인종 차별은 초 기 인류를 여러 종으로 분리되게 하고, 몇몇 종을 멸종하게 한 요인들 가운데 하나였다. 마지막 원시인은 네안데르탈인이었다. 2만 6,000년 전쯤에 네안데르탈인이 멸종함에 따라 우리가 지구상에서 유일한 직립 보행 인류가 되었다. 우리의 유전학적 특성은 우리가 하나의 종임을 중 명하지만, 우리는 자기 자신과 겉모습이 다른 종족을 완전히 다른 별개 의 종으로 취급하곤 한다. 심지어는 짐승처럼 사냥하며 잡아먹기까지 한다. 그러나 다른 보조 요인도 있었다. 잡종화는 두 종류가 따로따로 진화 할때보다빠르게 새로운 특성을 가진 새로운 종류를 만들어 낸다. 인 류의 화석 증거의 가장 놀라운 특징의 하나는 고고학자들과 고생물학 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다양성이다. 어느 한 시기에 도대체 몇 종류나 살았을까? 똑같은 화석이 단 한 개도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다양성은 수백만 년 동안 지속되었던 것 같다. 잡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영리해 야한다. 발생 초기에는그수가매우적기 때문이다 우리 현대인의 영 리한 두뇌도 그런 다양성의 도전에 의해 촉진된 것일지도 모른다. 인구가 폭발하기 직전에 이르렀고 세계 여행이 쉬워진 오늘날에는 여러 인종이 서로 만날 기회가 많아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인종간의 차 이가 없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여러 인종이 서로 무차별로 교배하면 우 리는 금방 하나의 인종으로 동일화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취향과 습관과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는 인종의 구분선이 아무리 유동적이라고 해도 짝을 선택하는 데 우선적인 기준 이 되기 때문이다. [ 플라톤의 등이 둘인 남녀 양성 ] 인종에 대한 생각은 적어도 2,500년 전에 시작되었다. 세익스피어가 데스데모나와 오셀로의 미완성 사랑을 묘사할 때 쓴 '등이 둘인 짐승' 이라는 말은 사랑을 '두 사람이 하나로 합쳐진 사람'으로 의인화한 것 인지도 모른다. 이런 개념의 창시자는 플라톤이다. 사랑에 대한 격렬한 토론을 다룬 플라톤의 『향연』(The Symposium)에서 희극 극작가 아리스 토파네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은 원래는 등과 엮구리가 둘씩 있는 완전한 원이었다. 팔과 다리는 네 개씩이었고 똑같이 생긴 얼굴이 둘 있었다. 성기도 두 개였다. 성은 세 가지가 있었다. 남자와 여자뿐만 아 니라 남자의 성기와 여자의 성기가 하나씩 있는 남녀 양성도 있었다. 그러나 임신과 출산은 두 성의 육체적 결합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고 메 뚜기처럼 땅바닥에 사정하여 이루어졌다. 이 원시인은 수레바퀴처럼 빠른 속도로 굴러 다녔으며 자부심이 강하고 힘이 셌다. 신들은 이런 원시인에게서 위협을 느꼈다. 마침내 제우스는 아폴론에게 원시인을 둘로 쪼개 힘을 약화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새로 창조된 인간은 그때부터 다른반쪽'을찾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남자동성애자와여 자동성애자와 이성애자가 나타났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행복에 이 르는 길은 사랑의 여신의 명령에 따라 원래 자신에게 속했던 제 짝을 찾는 것에 있다. " '우리 인간(our race)'으로 해석된 그리스어는 인류 전체를 나타내지 만좁은의미에서는 '인종(race)'이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우리의 진 정한 반쪽은 우리 자신과 색깔이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등이 둘인 짐 승에 대한플라톤의 이야기는 동성애와 이성애의 힘을설명할뿐만 아 니라, 그리스인과 비路1)그리스인(피부색이 까만 리비아인, 밀가루 반 죽처럼 창백한 스키타이인, 주로 그리스의 일반가정에서 노예로 일한 여러 종족등) 사이의 외관적 차이가 지속되었음을 말해 준다. 이보다 훨씬 뒤에 미국 남부에서 그랬듯이, 주인과 노예의 성관계는 신체적 특 징이 색다른 아이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흑해에서 돌아온 뒤에 두 가지 인종으로 이루어진 스 키타이의 한사회에 대해 기록했다. 그들은 숲속에 있는큰도시(실제 로 발굴된 고대 도시와 똑같다)에서 살았다. 이 사회는 서로 다른 말을 쓰는두종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원주민인 부디니족은유목생활을 했고, 고대 그리스인들로서 교역 소에서 나와 부디니족과 함께 살기 시 작한 겔로니족은 농경 생활을 했다. 이 두 종족은신체적 특징이 서로 달랐다. "부디니족은눈이 파랗고 머리카락이 붉었으며, 겔로니족은생 김새와 색깔이 모두 부디니족과는 달랐다. " 이 두 종족의 신체적 특징은 스키타이에서 함께 살면서도 그대로 유 지되었다(더 두드러졌을 수도 있다). 함께 살았지만 서로 다른 생활 방 식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부디니족과 겔로니족은 서로 경쟁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외교적 수단으로 종족간의 혼인을 해야 할 필요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재산을 상속하는 방식도 서로 달랐다. 부디니족은 가축을 상속했고, 겔로니족은 농지를 상속했다. 이것은 그 들이 같은 종족 안에서의 혼인을 추구했음을 뜻한다. 이 두 종족의 신체 적 특징은 인종적 특징과 함께 사회적 신분을 나타냈을 것이다. [ 선택된 사람들 ] 1400년부터 시작된 유럽인들의 '발견의 항해'는 세계 여러 곳에 흩어 져 사는 종족들의 차이를 크게 줄여 놓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들이 처음부터 다양한 인간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유일신 을 믿는 유대교와 기독교는 어느 한 종족이 다른 종족보다 더 '선택된 종족 이라고 생각했다. 1655년에 칼뱅주의 사상가 이사크 드 라 페레 르(Isaac de la Peyrare)가 내세운 다원발생설에 따르면, 아담의 후손은 유대인뿐이며 다른 인종들은 모두 그 이전에 신이 연습삼아 창조한 인 종들이다. 다원발생설은 신세계의 농장과 광산에서 서아프리카 출신 노예들과 서인도 제도의 원주민들을 착취하는 데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문명과 문자를 모르는 세계 崙곳의 비유럽인들의 생활 방식은 원시적이며 획 일적이라고 여겨졌다. 몇몇 사회에서 쓰이는 석기는 유럽에서 발견된 비슷한 물건들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선사 시대의 인공물들 을 처음에는 요정의 작품이라고 여겼지만, 이제는 '아담 이전의 인류' 의 흔적으로 믿게 되었다. 18세기에 들어서서 여론이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쪽으로 기울자프 랑스와 스코틀랜드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류의 '정신적 일체성'을 강조했다. 세계의 모든 민족이 성향은 저마다 다르지만 감정과 지적 능 력이 똑같다는 것이었다. 기술의 진보에서의 차이는 환경과시간과 기 회의 차이 때문이라고 했다. 따라서 어느 민족이나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고상한 야만인'의 개념을 세웠다. 원시인이라고 불리는 선사 시대 사람들은 세 계와 조화를 이루고 살았으며, 온갖 악을 품고 있는 서구 문명은 오히 려 그런 원시 사회를 동경해야 마땅하다고 했다. 그러나 억압받는 인종들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그런 계몽운동 이론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19세기에는 더 이상 다원발생 설이 거론되지 않았지만, 민족적 '기질' 또는 '정신'을 강조하는 제국 주의와 낭만적 민족주의가 생겨났다(이런 민족적 기질은 단순히 문화 적인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프랑스의 왕정주의자 조제파르튀 드 고비노(Joseph-Arthur de Gobineau)의 저술 에는 이런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인류의 불평등에 대해』(Essay 05f tole Isfefualip ◎脚f Hunfan Rafes)에서 문명이 쇠퇴하여 몰락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처음에는 단 하나의 이유를 찾아 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경제적 및 이념적 요소에 일관성이 없다고판단하여 결 국 인종 이론에 의지하게 되었다. 고비노는 몇몇 인종만이 문화적 창의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능력 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창의적인 인종들이 모여 국가를 세우 고 인종간 혼인으로 동종화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세운 도시들은 이주 민 노동자, 상인, 노예 등 외부인들을 끌어들였다. 이런 다양성은 국제 적 사회를 만들었고, 문명 창시 능력이 없었던 사람들이 창시 능력이 있었던 사람들과 뒤섞였다. 고비노는문명을 창시하는 능력이 있는특 별히 축복받은 인종 열을 제시했다. 중국인, 이집트인, 아시리아인, 인 도인, 그리스인, 로마인, 멕시코인, 페루인(거대한 기념물과 문자를 만 든 인종들이다), '앨러게이니 문명'을 세운 애팔래치아 고원의 북아메 리카 인디언, 그리고 북유럽의 게르만계 민족들이었다. 바위 투성이의 땅에 문명을 세운 아르메니아인과 '무슨 일이든지 해내고 자유로우며 강하고지적인 민족'인 유대인은 제외되었다. 고비노에 따르면, 유대인 이 피라미드나 거대한 제국을 세우지 못한 것은 에티오피아와 아비시 니아를 정복했다는 북아프리카의 햄족과 섞였기 때문이다(이 이론은 나중에 하인리히 히물러 (Heinrich Himmler)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 되었다). 그는 피부색이 더 검온다른 아프리카인들은 경멸했으며, "유 럽 인은 결코 니그로를 문명화할 수 없다. "라고 말했다. 다윈의 진화론은 선천적인 인종적 불평등에 대한 믿음을 굳혀 주었 다. 『종의 기원』(Origin◎Species)이 출판되기 1년 전인 1858년에 출 판된 펠릭사르시메드 푸세(『騈x-Archim誠e Pouchet)의 논문집 『인류 의 다양성에 대해』(On the MultipliciD ◎ Human Races)의 초판은 인 류의 다양성은 자연발생적인 여러 가지 개별 행위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푸세는 다윈의 진화생물학에 감화되어 재판에서는 다른 이론을 내세웠다. 현대인의 여러 종은 원숭이와 비슷한 단일 조상 에서 비롯되었으며 다른 종들끼리보다원숭이 조상과 각각 더 가까웠 다는 것이다. 한편 칼 보크트(Carl Vogt)는 1863년에 이렇게 주장했다. "인종적 차이는 우리의 조상이 인간과 원숭이의 중간쯤 되는 어느 한 종이 아니라, 지역적 테두리 안에서 여러 종의 원숭이로부터 진화할수 있었던 여러 계통이었음을 말해 준다. " 보크트는 이러한 다양한 계통의 점진적인 진화는 점차 한 방향으로 통일되었고, 그에 따라 서로 비슷해 졌다고 주장했다.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은 흔히 피부색이 하얗지 않은 인 종들은진화의 주류에서 벗어나 진화의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는 존재 들이라고 생각했다. 다윈은 『인간의 계보와 성적 선택』에서 모든 현대인의 조상이 하나 라는 이론을 지지했다. 모든 현대인은 하나의 종이며 그 지역적 차이는 뒤늦은 진화 때문이라고 했다. 이 지역적 차이는 자연 환경 때문에 생 겨난것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에서 비롯되었다. 다시 말해서, 짝을선 택할 때 눈동자색이나 피부색 같은 외면적인 특징뿐만 아니라, 정신적 인 특징도 따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선택에 따라 도덕도 발전했다. 천 하고 이기적인 동물적 본능이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고상한도덕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인종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같은 인종 안 에서도 경계선이 생겨났고 남자의 절제와 여자의 정숙이 지조, 용기와 함께 부각되었다. 이것은 부유한사람들이 '무절제하고 방탕하며 사악 한' 가난한 사람들과 혼인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가난한 사람들은 임 신 능력은뛰어났지만유아사망률이 높았다. 1878년, 다윈의 조수조 지 로마니스:(George Romanes)는 대영 학술협회에서 정신적 진화에 대 한 이론을 발표했다. 물론 그가 증거로 내세운 사람들은 선사 시대의 우리의 조상이 아니었다. 『타임』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야만인들, 어 린아이들, 백치들, 그리고 교육받지 못한 농아들'이었다. 증거도 없이 현대인은 아프리카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한 다윈의 이론 은동시대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1856년, 독일 뒤셀도르프근 처의 네안더 강 유역에서 이상한 두개골이 발견되었다. 수많은 학자가 이 두개골과 1886년에 벨기에에서 발견된 두 구의 유골을 근거로 원숭 이에서 인간으로의 진화가 유럽에서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그러나 문 제는 네안데르탈인이 실은 원숭이와 비슷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세 한 내용을 모르는 일반인들은 심한 관절염을 앓은 네안데르탈인의 유 골을 재현한 것을 보고 구부정하게 서 있는 원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 나 불쑥 튀어나온 이마와 움푹 꺼진 턱 뒤에는 현대인의 것만큼 크거나 오히려 더 큰 뇌가 들어 있었다(지능은 떨어졌을지도 모르지만). 1912년에는 영국 서섹스 주 필트다운(Piltdown)에서 발견되었다는, 생김새가 이상하고 매우 오래 된 것으로 보이는 유골이 인류의 조상으 로 등장했지만 이 '필트다운인'은 결국 가짜로 밝혀졌다. 치아가 붙어 있는 오랑우탄 턱뼈를 교묘하게 착색하고 오래 되었지만 현대인의 것 이 분명한 두개골 조각들을 붙여서 멸종된 털북숭이 코뿔소의 뼈가 발 견된 곳에 묻어 놓았던 것이다. 필트다운인이 잠시나마 인류의 조상으 로 인정된 것은 두개골이 크고 턱뼈가 짐승의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인류가 지능을 통해 짐승 같은 상태로부터 진화했다는 계몽운동 시대 의 믿음과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필트다운 유적지와 관계된 저명한 과학자들 가운데 누가 그런 조작 극을 연출했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 에는 노골적인 인종 차별은 아닐지라도 민족주의가 내포되어 있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영국인은 자신의 조상은 영국인 아니면 적어도유럽 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프리카인은 절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믿음을 증명해 주는 증거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 다면 그런 증거를 만들어 낸다고 해서 나쁠 게 없지 않은가? 이런 민족 주의는 지금도 극성을 부리고 있다. 최근에 필트다운에서 멀지 않은 복 스그로브(Boxgrove)에서 50만 년 된 호모 사피엔스의 다리뼈가 발견되 었을때, 언론은당시에는영국이라는섬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초 의 영국인' 이라고 떠들어 댔다. 1995년에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오르세(Orce)에서 발견된 새 로운 화석을 바탕으로 '최초의 유럽인'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 팔다리 뼈들이 몇몇 연구자의 주장대로 호모 에렉투스의 것인지 아니면 발이 넷 달린 육식 동물의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다윈은 성적 선택이 인류의 다양한 요인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오 리족 같은 종족들은 '자연 선택(자연 도태)'에 의해 멸종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비글호의 선실에서 이렇게 썼다. "뉴질랜드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열등한 종족에게 자연 도태가 적용되고 있다. " 다윈의 사촌형 제의 하나인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lon)은 인간 생식의 지적인 측 면에 초점을 맞추고, 모든 도덕적 및 정신적 특성은 유전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경주마에게 적용되고 있는 것처럼 보다 과학적인 생식을 통해 더 고상한 인류'가 나타나게 해야 한다고 했다. 나중에 마 리 스토프스(Marie Slopes)는 이런 우생학적 개념을 바탕으로 피임법 을 대중화시키기도 했다. 영국의 하층 계급 사람 그리고 안경을 쓰는 사람들)의 성욕을 감퇴시켜서 그들의 열등한 특성을 물려받은 후손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골턴과 다윈이 살던 때는 아직 유전 자가 발견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래서 골턴은 유전의 비밀이 피 속에 있 다고 믿었다. 그는 집에 여러 종의 토끼를 갖다 놓고, 정기적으로 토끼 의 피를 서로 바꾸어 수혈해 보았다. 그렇게 하면 토끼의 털 색깔이 바 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 금발을 좋아하는 나치 ] 고비노는 키가크고 눈이 파랗고 머리카락이 금발인 북유럽의 게르 만계 민족들의 피가 우수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들을 인도유럽어를 만든 아리아족의 한 갈래로 보았다(아리아족이라는 이름은 인도의 서 사시에서 북방의 침입자로 등장하는 아리아인에서 비롯되었다). 아리 아족은 아시리아 문명을 제외한 구세계의 모든 문명을 창시했으며 인 도에서 중국으로 문명을 전파했다. 나중에 영국의 해부학자 그래프턴 엘리엇 스미스(Grafton Eliot Smith)는 선천적으로 우수한 한 민족의 활동에 의해 세계의 문화가 발전했다는 이런 역사관을 바탕으로 고대 이집트인이 모든 문명의 창시자라는 이론을 내세웠다. 그리고 가장 최 근에는 토르 하이에르딜CThor Heyerdahl)이 이런 개념을 바탕으로 새 로운 이론을 내세웠다. 아메리카 대륙과 외딴 이스터 섬 등지에 있는 피라미드들과 거대한 석상들이 모두 이집트의 태양신 라(Ra)의 방랑 제 사장들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게르만족의 우수성을 가장 열렬하게 주장한 사람은 독일의 자연인류 학자이자 선사학자인 한스 귄터(Hans Ciinther)였다. 귄터는 그의 저서 『유럽사의 인종적 요소』(The Racial Elements ◎European History)에 서 유럽의 모든 인종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인종은 신체적 특징과 정신적 특징의 적절한 결합을 통해 다른 집단과 구별되 며 그런 특징을 가진 후손만 생산하는 집단에서 나타난다. " 그는 더 나 아가 유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순수 또는 잡종 혈통의 다섯 인종을 열 거했다. 북방 민족, 지중해 연안 민족, 디나르 민족(유고슬라비아 및 그 주변의 산악 지대에 사는 민족들-역주), 알프스 민족, 그리고 발트 해 동부 민족 등이다. 귄터는 스스로를 북방 민족이라고 여기고 "북방 민 족의 눈은 초롱초롱하게 빛난다. "라고 말했다. 또한미국과유럽의 '북 방 민족' 유명인사들을 열거하며 북방 민족은 '위대한 정치가의 업적' 을 쌓기에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귄터는·눈이 파란 천재들과 다른 인종들을 비교했다. "북방 민족의 생김새가 윤곽이 굵고 뚜렷하다면, 지중해 연안 민족은 여자처럼 부드 럽고 고우며 법과 질서에 대한 의식이 희박하다. 바바리아, 오스트리 아-헝가리, 이탈리아 북부, 폴란드와 루마니아의 일부 지역에서 주로 볼 수 있으며 눈이 갈색이고 머리가 검은 디나르 민족은 조금 더 낫다. 정신적인 능력을 평가한다면 디나르 민족을 유럽의 모든 인종 가운데 두 번째로 치겠다. 러시아 국경 지대에서 볼 수 있는 발트 해 동부 민족 은개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늘 비생산적인 생각만 한다. 개인적으로건 가정적으로건 위생 관념이 없다. 알프스 민족은 생각이 깊고 근면하며 편협하다. 그러나 경범죄자와 3류 사기꾼과 좀도둑과 성도착자가 들끓 는다. " 귄터는 유럽에 뿌리를 둔 다른 민족들, 특히 '서아시아계(유대 인)' 와 니그로계' 에 대해서는 극히 경멸스러운 태도를 나타냈다. 귄터가 보기 로는(그가 보기에) 생김새를 그처럼 독일인이 아닌 사람 들의 문화적 및 사회적 삶의 약점과 연관시켰다. 그는 문명이 '북방혈 통이 감소하는쪽으로 쇠퇴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북방혈통이라는 것은 없다. 물론 혈액형은 있지만, 혈액형은 순수하고 유일한 것이 아 니며 전세계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만일 귄터 자신의 피를티에라델푸 에고인에게 수혈한다고 해도 티에라델푸에고인의 문화적 행동은 조금 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순수 혈통의 전승은 나치가 주도한 독일의 신(新)이교 부활의 핵심이 었다. 고고학의 지지를 받은 이 이념의 기초를 세운사람은 영향력 있 는 선사학자 구스타프 코시나(Gustav Kossinna)였다. 코시나는 19세기 말에 '고고학적 문화'라는 개념을 정립했다. 고고학적 문화란 종교와 생김새와정신이 똑같은 순수 민족을 유형화하는 것이다. 코시나는선 사 시대에서 독일적인 사회를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독일어를 쓰 는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들은 질서 있고 청결한 생활과 정교한 건축 양 식에 의해 고대 슬라브족(오늘날 독일 동쪽에 사는 민족)의 마을들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코시나는 만(N)자 십자상 같은 상징들과 룬 문자(북유럽의 고대 문 자)는 게르만족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至기와 인 도의 장식 문양에서 만자 십자상이 발견되는 것은 게르만족이 그리스 와 인도에 문명을 전파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인도의 장 식 문양에서 볼 수 있다는 만자 십자상은 아홉 개의 점을 배열한 것으 로 힌두교의 신들을 나타낸다). 그는 고고학적 기술을 이용하여 타키투 스가 『게르마니아』(Germania)를 쓴 시대와 신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 라가 게르만족의 흔적을 찾았다. 특히 그는 지금의 폴란드의 동부 지역 인 오스트마르크(Ostmark)가 본래 게르만족의 영토였음을 중명하려고 애썼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뒤에 베르사유 조약의 조서 를 작성할 때에도 오스트마르크가 독일 영토라고 주장했지만 인정되지 않았다. 코시나의 제자들은 전후에 독일의 여러 대학교에서 영향력 있 는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1921년에 코시나가 죽고 나서는 그 상당수 가 막 생겨난 나치당에 가입했다. 귄터의 주장에 따르면, 문화의 발전은 농경 생활의 개발과 함께 시작 되었다. 그리고 농경 생활을 시작한 민족은 키가크고 눈이 파랗고 머 리가 금발인 북방 민족의 하나인 덴마크인이었다(덴마크는 독일의 이 웃이다). 이 새로운 문화는 기원전 1200년 무렵에 남쪽으로 전파되었 다. 북방 민족이 그리스로 내려가서 고대 문명의 기초를 세운 것이다. 말하자면 귄터는 그리스인의 모든 업적이 게르만족 덕분이었다고 주장 했다. 이런 광적인 민족주의는 그리스의 대리석상들에서 북방 민족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는 그의 주장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그는 도대 체 어떻게 하얀 대리석상에서 파란 눈과 금발을 볼 수 있었을까? 귄터 는 로마 제국이 크게 흥한 것도 역시 북방 민족의 우수성에서 비롯되었 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성공은 재난을 가져왔다. 그의 말대로라면, 로마 제국의 시민들이 서로 섞이면서 북방 민족의 우수한 피가 희석되 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귄터는 이 가상 현상을 비북방 민족◎ 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이 현 상이 바로 전반적인 쇠퇴의 요인이 되었고 서아시아의 고리대금업자 들이 로마로 들어와 지도층의 우수한 유전자를 오염시키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로마인들은 스스로의 실수를 깨닫고 좀더 북방 민족처럼 보 이려고 애썼다. 귄터는 몇 가지 기막힌 증거를 주워 모아 터무니없는 이론을내세웠다. 그가 찾아 낸 증거는 이런 것이었다. 시인 유베날은 메살리나가 금발 가발로 검은 머리를 감춘다고 했다. '◎벼락부자들은 머 리카락이 검은 아내와 딸들에게 독일산 금발을 사게 했다:' 또한 유대 의 헤롯 왕은 카라칼라 황제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카라칼라 황제 는 아프리카계와 아시아계의 혼혈이며 금발 가발을 쓰고 게르만족의 옷을 입는다. " 돈 많고 할 일 없는 부유층이 이집트인이나 당나귀나 이 성(異性)처럼 꾸며 입었다는 이야기는 흔하다. 고대 로마에서는 '야만 인 놀이' 가 인기 높은 오락이었다. 귄터의 주장에 따르면, 네로 황제의 눈이 파랗고 머리가 금발이었다는 사실은 북방 민족의 정신적 특성과 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한다 귄터는 북방 민족의 혈통이 여러 다른 민족의 혈통과 섞이는 바람에 로마제국이 멸망했다고 주장했다. 로마제국은 잡혼(雜婚) 때문에 힘 이 약해져서 쓰러지고 말았다. 로마가겪은첫 패배는 서기 9년에 토이 토부르거발트에서 벌어진 북방의 게르만족과의 전투에서였다. 북방 민 족의 혈통은 로마가 멸망한 뒤에도 게르만족 용병의 유입에 의해 한동 안유지되었다. '그러나결국서아시아계, 동양계, 햄족, 니그로, 그리 고 북쪽의 알프스 민족과 디나르 민족의 나쁜 영향은 모든 것의 종말을 가져왔다. 로마는 북방 혈통이 잡종화되는 바람에 결국 쓰러지고 말았 다. " 이런 환상적이고 공격적인 인종사가 제3제국에 주는 암시는 분명했 다. 그들은 인종의 구분선을 분명히 하기만 하면 세계를 지배할 수 있 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그들의 숙명이라고 생각했으며 골 턴의 우생학 이론을 바탕으로 나쁜 피'의 제거를 통한 '인종적 우생' 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해 육체에 대한 숭배가 시작되었다. 잘 다린 민속 의상과 번쩍거리는 제복을 번갈아 입는 의식과 나치주의가 꽃 을 피웠다. 하인리히 히물러는 유럽의 후기 구석기 시대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 를 셈족(오늘날의 유대인과 아랍인)과 햄족 사이의 가상의 연관성과 연 결시켜 다시 해석했다. 빌렌도르프와 돌니 베스토니체에서 발견된 비 너스상은 현대의 부시먼족 여자에게서 볼 수 있는 둔부 피하지방 과다 증을나타내는것이라면서, 그는 빙하기의 유럽인을 '호텐토트(남아프 리카의 미개 종족-역주)계 유대인' 이라는 잡종으로 규정했다. 이 종족 은 농경 생활을 하는 북방의 우수한 게르만족이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 멸종된 열등하고 불순한 종족이었다. 나치당은 고대의 종교적 상징물과 기독교 상징물을 결합하여 신이교 집회를 자주 열었다. 악명 높은 '종마 사육장'을 세우고 혈통 좋은 처녀 들을 선발해서 당 간부들의 씨받이로 삼았다. 집단 수용소를 세워 유대 인, 집시, 남자 동성애자,복장 도착자 등 생물학적으로 역기능을 일으키 는 인간 사회 낙오자들을 수용했다. 타키투스가 말한 고대 독일의 복장 도착 주술사들이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지 는 말하기 어렵지만, 그 들은 나치의 신화에 등장하지 않았다. 역사가 E. H.흡스봄(E. H. Hobsbawm)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나라를 세 우는 일의 일부이다. " [ 인종의 의미 ] 인종적 순수성에 대한 나치의 생각은 과학적 논의에 정면으로 대항 하는 것들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거론되고 있다. 인종 차 별 정책을 고집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구정 권하에서 일하던 고고학자 들과 자연인류학자들은 인종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쳤지만 결코 굴복하 지 않았다. 이를테면, 올두바이의 호모 하빌리스 화석에 대한 골격형태 학의 권위자인 필립 토비아스(Philip Tobias)는 인종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인종의 의미』(The iweaning ◎ Race)라는 소책자를 펴냈다. 오늘날 생물인류학자들은 인종 문제에 대해 몇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 다. 첫째, 각 개인의 신체적 특징은 그 사람만의 독특한 유전자 조합에 의해 결정되며 출생, 성장, 식생활, 질병 따위의 환경적 요소들의 영향 을받는다. 둘째, 인종의 구분선은쉽게 그을수 없지만, 여러 인종사 이의 유전학적 차이보다는 같은 인종 안에서의 유전학적 차이가 훨씬 더 크다. 월터 p.보드머(Walter F. Bodmer)와 루카 카발리스포르사 (Luca Cavalli-Sforza)의 공동 연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하나의 개별 문화권내에는 이제까지 밝혀진 모든 가변 유전 형질의 85퍼센트가 존 재하지만, 서로 다른 문화권간의 평균 유전학적 차이는 8퍼센트이고, 세계의 모든 인종 사이의 유전학적 차이는 평균 7퍼센트에 지나지 않는 다. 그러므로 인류는 본디 다형적(ploytypic)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한 물질(피)을 독점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인종적 순수성이 란 완전히 허구 인 셈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7퍼센트라는 인종간의 유전학적 차이가 주로 외면적 특징의 차이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 외면적 특징은 곧바로 성 적 선택의 기준이 되며 금방 달라질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비교적 독특한 인종들의 존재를 설명해 준다. 독특한 인종들끼리 교배하면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잡종이다. 그러나 잡종이라고 해서 그들의 유 전자가 다른 인종보다 더 뒤섞여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 수가 처 음에는 적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종에 대한 연구는 정확한 구분선을 그 리는 작업이 아니라 변화의 추세를 관찰하는 작업이다. 인종의 분류는 혈액형, 피부색, 두개골 모양, 치열, 기타 여러 가지 유전학적 변수가 운데 어느 것을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런 변수들의 측정 과 비교가 인종 분류의 근거가 되기 위해서는, 변화의 추세가 생식에서 의 선택을 나타내고 그에 따라 우리의 형태학적 발달과 지리적 확산의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한다. 192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타웅(Taung)에서 발견된 오스트랄로피 테쿠스 아프리카누스의 두개골이 최초의 '잃어버린 고리'로 확인되었 다. 그에 따라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생겨났다는다윈의 이론이 받아들 여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화석 조상의 하나인 나리오코토 메 소년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계가 아직 많이 살고 있던 160만 년 전 에 살았다. 따라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계와 교배했을 가능성이 크다. 학자들이 나리오코토메 소년을 '호◎ 로 분류한 것은, 그가 오스트랄로 피테쿠스계와 파란트로푸스계 등의 다른 초기 인류들과 다른 종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종屬)' 이었음을 나타낸다. 현대인의 인종적 다양성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계를 제외한 여러 호 모계가 아프리카에서 나와 사방으로 진출했을 때 시작되었다고 주장하 는 학자들도 있다. 세계 곳곳에서 저마다 독특한 인종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럽의 몇몇 학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럽의 인종 들은 후기 구석기 시대의 동굴 미술을 창조할 만큼 재능이 뛰어난, 가 장 독특하게 진화한 인종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 인종의 기원 ] 인류의 진화에 대한 토론은 주로 종과 아종(亞種)과 인종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동물학자들이 살아 있는 생물들을 그런 식 으로 분류하는 것도 어렵겠지만, 뼛조각들만 가지고 이미 오래 전에 멸 종된 생물들을 분류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개는 골격의 모 양이 다양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의 종이다(늑대나 코요테와 교배하 여 잡종화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양과 염소는 종도 서로 다르고 속도 서로 다르지만 골격의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유골만으로는 분류하기 가 매우 어렵다. 종류가 열여덟 종쯤 되는 긴꼬리원숭이는 골격은 거의 똑같지만 서로 교배하지 않는다.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는, 분류학자들은 측정할 수 있는 외형적인 특징보다 는 생식 방식을 바탕으로 종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의 하나이 다. 재갈매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스칸디나비아 지방의 재갈매기는 영국의 재갈매기와 다르다. 또한 영국의 재갈매기는 아이슬란드의 재갈매기와 다르다. 그들의 가장 큰 차이는 몇 가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깃털 색깔의 차이이다. 그러나 각 집단의 재갈매기들은 가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 이종교배를 한다. 한 종에서 파생된 일곱 종류의 재갈매기가 북극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돌면서 이종교배한다. 그러나 러시아북부에 사는 일곱 번째 재갈매기 는 원이 끝나는 지점인 백해에 사는 스칸디나비아 재갈매기와 교배하 지 않는다. 유전학적으로는 교배할 수 있지만 생식 방식이 서로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이 두 종류는 서로 교배하지 않고 무리를 지어 생존 을 위한 싸움을 벌인다. 한편에서는 종의 변화가 계속되고 다른 한편에 서는 종이 분리되는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독일어로 '포르멘크라이 스(Formenkreis)' 라고 한다. 400만 년 전부터 계속된 인류의 진화도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을 것 이다 '정상적인 현대인이라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계와는 성관계를 갖 지 않을 것' 이라는 존 베이커의 주장은, 초기의 건장한 파란트로푸스군 과 프로토하빌리스군(protohabiline), 호모 에르가스테르가 저마다 별개 의 종이 될 정도로 분리된 이유가 무엇이냐는 문제를 제기한다. '각인 찍기(다른종에 대한 배타성)'도 그 이유의 하나일 수 있다. 초기 인류 는 현대인보다 융통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긴꼬리원숭이처럼 직계 아유 형(subtype)과 더 가까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철칙은 아니다. 로빈 던바가 증명했듯이, 개코원숭이의 여러 종은 own에서 특별한 상황이 벌어지면 서로 이종교배도 한다. 인류가 여러 유형으로종분화된 이 유는 아마도 고립 생활 때문일 것이다. 초기 인류들은 아프리카 동부의 초원 지대에서 함께 살았지만 생태학적 영역은 서로 달랐다. 초기 파란 트로푸스계는 식물을 먹고 살았지만, 초기 호모 에르가스테르는 고기 를 먹고 살았다. 이러한 집단간의 생태학적 전문화는 처음에는 미미한 것이었지만 차 츰 '병목 현상'을 일으켜 다른 집단과 교배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더 적어졌고, 그에 따라 집단 내의 신체적 특성을 바탕으로 한 독특한 미 의 기준이 생겨났다. 집단 내, 또는 생태학적 특성이 같은 두 집단 사이 의 성적 선택은 그 종의 외면적 특징을 급속도로 변화시킬 수 있다. 리 처드 도킨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수컷이 암컷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유전자의 확산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물론 그 반대 도 성립된다. 여기에 일부다처제까지 가세하면 이런 현상은 더욱더 심 화된다. 신체적으로 매력적일수록 더 많은 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혐오스러운 외면적 특징은 유아 살해나 성적 회피를 통해 도태되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피부색에 대한 문화적 평가는 사람들에게 소외감 을 줄 수 있다. 선사시대의 소규모 집단에서는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 유만으로도 충분히 고립되었을 것이다. 음식을 나누어 먹을 때에도 차 별 대우를 받았을 테고, 이것은 생존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보다 더 혐오스러운 제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18세기 말, 영국 의 골동품 수집가 존 프레르(John Frere)는 선사 시대의 석기들이 인간 이 만든 것임을 처음으로 알아 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무기'라고 생 각했다. 오늘날 우리가 석기를 '도구'라고 부르는 것은 완곡한 표현일 수 있다. 선사시대 후기의 석기는 분명히 무기이다. 예를들어 우리는 150만년 전에서 15만년 전사이에 만들어진 커다란 '아슬기(期)의 손 도끼'가 어떻게 쓰였는지 모를 뿐이다. 분명 사람이나 짐승을 죽이는 데 쓰였을 것이다. 인류의 여러 종 또는 아종은 100만 년 전에서 15만 년 전 사이에 존 재했다. 이 시기에 호모에렉투스와호모에르가스테르가사라지고 '후 기 고대 사피엔스가 등장했다. 에티오피아 보도(Bodo)에서 발견된 두 개골 같은 과도기적 화석은 ◎이 고대 사피엔스의 것으로서 여러 가 지 석기가 발견된 곳에서 함께 발견된다. 보도 두개골은 상처로 뒤덮여 있고 머리의 살을 발라 낸 것 같았다. 이 사람은 잡종이었을까? 생존과 종족의 순수성을 위해 경쟁하는 다른 집단에 의해 희생된 불행한 혼혈 이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전쟁에는 늘 인종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그리고 현대로 올수록 전쟁의 흔적이 더 많이 나타난다). 이것은 결코지나친 추측이 아니다. 한종족이 두편으로 나뉘어 싸움을벌인 다고하자. 처음그들사이에는신체적 차이가 없었지만, 두편으로나 뉘어 있기 때문에 서로 교배할 수 있는 기회가 적어진다. 따라서 이런 대립이 오래 지속되면 유전학적 차이가 점점 심화되고서로다른미의 기준이 생겨날 테고, 그 결과 차츰 서로 다른 종으로 분화하게 된다. 최근에 미시건 대학교의 고인류학자인 밀포드 월포프(Milford WolpofD가내세운 ◎1지역 가설'은 오래 된 논쟁을 다시 부추기고 있 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종적 차이는 아주 일찍부터 시작되었으며 현대 세계의 여러 인종의 공통점은 꾸준한 인종간의 생식을 통해 이루 어졌다. 그리고 이런 교배에 의해 현대인의 사고력 같은 '진보된' 특징 이 모든 집단에서 생겨났다. 중국인들은 월포프의 이론을 지지했다. 호 모 에렉투스가 아프리카에서 중국으로 이주하여 180만 년 동안 진화한 끝에 현대 중국인이 되었다는 가설은 자신들의 민족주의적 이념과 잘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지역 가설은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지만, 나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연구자는 해부학적 의미에서의 현대인이 10만 년 전에서 20만 년 전 사 이에 아프리카에 단 한 번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이 아프리카 기원설은 원래 세계 각지의 여자의 태반에서 발견된 미토콘드리아 aNA의 차이 에 대한 레베카 칸(Rebecca Cann)등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 증거는 '아프리카의 이◎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다시 말해서, 이 아프리카 출신 여자의 후손이 아프리카에서 세계 각지로 진출하여 기 존의 호모 에렉투스 집단들을 대체했음을 증명한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해부학적 의미에서의 현대인은 15만 년 전에 아프 리카 동부에서 진화하여 10만 년 전에 근동으로 진출했으며, 그 뒤에도 다른 지역으로 계속 퍼져 나가 기존의 호모 에렉투스 집단들을 대체했 다. 그리고 5만 년 전에는 심해 항해용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인류 최 초로(그리고 유일하게) 오스트레일리아에 상륙했다. 월포프의 다지역 가설이 사실이라면, 현대인은 지금처럼 서로 비슷하지 않을 것이다(월 포프는 집단간의 '여자 교환'을통해 지금과 같은 인류의 동질성이 이 루어졌다고 주장한다). 아프리카 기원설을 따른다면 현대인이 기존의 인류를 대체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강점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이런 대체를 진화의 주요 요인으로 생각하는 함부르크 대학교의 귄터 브로 이어(Ciinther Brliuer)의 말처럼, 후기 고대 사피엔스와 현대인이 섞였 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종교배와 잡종화에 의해 보다 원시적인 집단 들도 여기에 흡수되었을 것이다. 해부학적 의미에서의 현대인이 유럽에 퍼진 것에 대해, 몇몇 연구자 는 보다 원시적인 집단인 네안데르탈인이 그와 교배할 수 없는 새로운 종에 의해 밀려났다고 주장한다. 분류학자들은 네안데르탈인을 우리와 함께 호모계로 분류하지만, '호모사피엔스와 '호모 네안데르탈인시 ◎ 를 서로 다른 종으로 분류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호모 사피엔 스 사피엔◎ 와 '호모 사피엔스 네안데르탈렌시◎ 로 분류하는 사람들 도 있다. 이 두 종의 차이는 단지 인종적인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네안 데르탈인은 왜 현대인과 교배하지 않고 멸종될 때까지 차별성을 유지 했을까? 네안데르탈인과 현대인 사이에서 생긴 자손이 있었을까? 그들 은 얼마나 달랐을까? 자료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이런 의문에 대한 대답 은 흔히 연구자 개개인의 편견에 따라 다르다. 유럽에서의 네안데르탈인의 상황은 재갈매기와 비슷했을지도 모른 다. 본디 후기 고대 사피엔스의 변종인 네안데르탈인의 조상은 단계적 으로 지중해 연안 지방과 유럽에 진출하면서 그 신체적 및 문화적 특성 이 점점 더 고유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방식으로 진화한 현대 인을 만났을 때, 두 종의 차이가 너무 커서 체계적인 교배가 이루어지 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재갈매기가 아니다. 갈매기는 태어날 때 다른 식구들 을 보고 미래의 짝의 생김새에 대해 고정 관념을 갖는다(이른바 '각인 찍기'로 불린다). 그래서 새끼의 어미와 아비를 분홍색으로 칠해 놓으 면, 새끼는 자라서 분홍색으로 칠해진 짝에게만 성적인 반응을 나타내 게 된다. 인간은 이보다훨씬 더 복잡하다. 그러나분명한것은, 인간의 성적 학습에도 '각인 찍기' 효과가어느정도는적용된다는것이다. 다 른성적 관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공중전화 박스, 자동차, 안전핀 같 은 물건을 성적인 대상으로 숭배하는 남자도 있고, 특정 알파벳에 성적 흥분을 느끼는 여자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간의 성적 취향은 그 렇게 제한되어 있지 않다. 다른 동물들과 성행위를 하기도 한다(이것은 성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 때문이 아니라 호기심 때문이다). 수간은 신석기 시대에도 있었고 지금도 성행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시골의 사춘기 남자아이가 가축과 성행위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알려졌다. 도시 사람들은 실물 대신 흔히 공기주입식 기구를 쓴다 우 편 주문 카탈로그를 보면 "구린내 없이 시골 생활의 즐거움을 맛보라." 고 꼬드긴다. 개나 고양이가 섹스 파트너로 쓰이기도 한다. 애완견과 성행위를 즐겼다는 여자들도 많다. 길들지 않은 동물과도 성행위를 할 수 있다. 선사 시대에는 스키를 신고 말코손바닥사슴과 성교하는 남자 가 있었지'談그림 7-5 참조), 현대에는 돌고래 수컷과성행위를한남 자가있다. 뱀, 생쥐, 기타여러 가지 작은동물을몸속에 삽입하는여 자도 있고 남자도 있다). 뿐만 아니라 닭(산 닭이나 죽은 닭), 물고기, 나방 따위를 성적 대상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증거는 부족하지만 허무 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런 동물들을 어떻게 쓰는지는 상상에 맡기 겠다. 사로잡은 영장류 동물과 성관계를 가진 경우도 보고된 바 있다. [ 세계의 여러 인종 ] 지난400만년 동안의 인류의 진화는 그야말로 대격변이었다. 수많 은 종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어쩌면 아직도 많은 종들이 우리의 발 견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부다처제 사회에서 이루어졌을 성 적 선택에 의한 빠른속도의 종분화는 현대에서도 여러 인종의 출현을 가져왔다. 원시 사회가 일부일처제 사회였을 것이라는 오언 러브조이 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다. 그랬다면 현대인의 다양한 특성이 짧은 기간에 지금처럼 다양한 인종으로 정착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일처제가 아직 보편적인 제도로 정착되지 않았을 때 이미 인종의 다양화가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류에 의한 세계 식민지화의 시기와 인종적 유사성을 비교하는 연구에 따르면 그 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현대인이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을 때 병목 현상이 잦아 지면서 인종의 다양화가촉진되었다. 아메리카대륙을 비롯한 몇몇 지 역은 바다를 통해서가 아니라 1만 3,000년 전에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사이에 잠시 생겼던 것과 같은 육로로 이동한 종족들이 개척하였을 것 이다. 새로운 땅으로 이동하여 지리적으로 고립된 종족은 '창시자'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아메리카대륙에서 발생한 모든유전학적 변화는 개척자 집단들의 유전학적 잠재력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몇몇 인종적 특성은 특별한 기후에 적응하려는 자연 선택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인종적 특성이 반드시 기후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열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흔히 피부색이 검다. 검은색이 햇빛으로부 터 피부를 보호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극지방으로 올라갈수록 피부 색이 하얘진다. 피부의 비타민 D 생성을 촉진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 러나 이런 '적응'은 신체적 매력을 추구하는 문화적 선택에서 비롯되었 을 가능성이 더 크다. 콩고 분지에서는 피부색이 새까만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은 구름이 자주 끼어서 햇빛이 나는 시간이 하루 평균에 세 시간쯤밖에 안 된다(게다가 숲이 차양 구실을 한다). 반 면에 햇빛이 거의 하루 종일 내리쬐는 티베트 고원에서 사는 사람들은 피부가 하얗다. 동물은 환경에 적응하지만 인간은 환경을 인간에게 순 응시킨다. 인간은 문화를 이용하여 어디에서나 살 수 있다. 기후적 요소가 비교적 많이 작용하는 경우는 한대 지방에서 사는 사 람들에게서 볼 수 있다. 이들은 두개골이 크고 얼굴이 긴 경향을 보인 다. 추운 지방에 사는 유럽인과 아메리카 인디언의 두개골 모양은 더운 지방에 사는 오스트레일리아-멜라네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의 두개골 모 양과 현저하게 다르다. 이런 차이가 기후에 대한 적응에서 비롯되었다 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비교 기준과 상충되기 때문이다. 지구 식민 지화의 역사를 바탕으로 구분하면,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이 한편이 되 고 오스트레일리아인과 아메리카 인디언과 폴리네시아인이 한 편이 되 기 때문이다. 두개골의 모양에 대한 현대의 정밀 연구를 바탕으로 할 때, 현대의 여러 인종은 다지역 가설처럼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어느 한종에서 파생되었다. 이 연구는 '주요소분석'이라 는 통계학적 방법으로3,000개가넘는 고대 및 현대의 여러 인종의 두 개골을 비슷한 것들끼리 분류하는 것이다. 그 결과, 네안데르탈인(라 페라시 1과 라 사철에서 발견된 3만 5,000년 전의 네안데르탈인의 유골 등)은 현대인보다 고대 호모사피엔스 이스라엘의 스쿨 동굴에서 발견 된 9만 년 전의 5번 두개골 등)와 더 가까웠다. 초기 현대인과 고대인은 같은 시기에 같은 지역에서 살았다(스쿨 동굴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카프제에서 발견된 9만 2,000년 전의 유골들이 이를 입증한다). 그러나 초기 현대인은 고대인과 네안데르탈인보다 현대인에 더 가깝다. 이런 사실들로 보아, 네안데르탈인은 나중에 유럽에서 잡종화되었을 수도 있지만 별개의 종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네안데르탈인의 유골은 흔히 상처가 많지만, 그들이 멸종된 것은 현 대인과의 직접적인 충돌 때문이 아니라, 제한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과 생식 능력의 차이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네안데르탈인은 현대 인보다체격이 더 컸다. 그러므로 번식이 더 빨랐을 것이다. 뉴욕주립 대학교 버펄로 캠퍼스의 에즈라 주브로(Ezra Zubrow)의 컴퓨터 시뮬 레이션에 따르면, 네안데르탈인의 생식 능력이 현대인에 비해 조금만 떨어져도 현대인이 네안데르탈인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 인류가 마지막으로 개척한 아메리카 대륙과 폴리네시아의 종족들이 가장 현저한 골격의 차이를 보여 준다. 다른 지역들에서는 다른 인종간 의 교배에 의해 골격의 특징이 비슷해졌다(인종 통합과 직계 조상을 나 타내는 특정 피부색이 주기적으로 강조되기는 했지만). 북아메리카에 서는 골격의 특징이 유전자와 언어와 치열의 특징과 일치한다. 이것은 인류가세 차례에 걸쳐 베링 해협을 건너 각각 고(古) 인디언, 서북해 안의 나데네족, 그리고 에스키모-알류트족이 되었음을 뜻한다. 평원 인 디언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는 그들이 여러 다양한 집단으로 이루어졌 음을 뜻한다. 따라서 두개골과 골격의 공통성은 나중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 근친상간과 소유권 ] 사회마다 다른 방식으로 지역에 따른 인종적 차이가 생겨나고 지속 되며 해소된다. 이를테면, 평원 인디언은 족외혼 풍습이 있었다. 생존 이 활발한 교류와 동맹 관계에 좌우되기 때문에 족외혼은 수렵채취 사 회의 전형적인 특징이다(영장류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농경 사 회에서는 종족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동족 혼인이 보편적 이다. 그래서 과거 영국의 노퍽 지방과 아일랜드에서 그랬듯이 형제자매끼리 혼인하 는 경우도 많다. 제6장에서도 말했듯이, 신석기 시대 유럽에서 농경 생활의 확산은 주로 줄무늬 토기 문화의 공동 주택 거주자들 같은 집단의 이동에 의해 이루어졌다. 유럽 중부 및 서부에서 금속이 쓰이기 시작한 것도 이른바 '비커인'(고고학적 증거가 불충분하다)의 이주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 시대 문화에 대해서는, 민족성에 초점을 맞추고 매장에서의 정 교한 성별 표시에 유의하면 혼인 풍습을 짐작할 수 있다. 서유럽에서는 동쪽에서 들여온 장신구로 치장한 외국인 여자의 유골이 발견된다. 바 덴뷔르템베르크의 필링겐 근처 막달레넨베르그(Magdalenenberg)에서 발굴된 기원전 6세기의 철기 시대 다중 흙무덤에서는 한 여자의 무덤에 전형적인 스페인산허리띠 장식판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이 여자가스 페인에서 왔음을 뜻한다. 물론허리띠 장식판을상인에게서 샀을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교역품은 그 시기에 흔히 거래된 물건이 아니었고, 본디 동맹을 상징하는 뜻으로 만든 것이었다. 상류층 여자가 멀리 떨어 진 다른 사회로 시집 가곤 했다는 것은 문헌에도 나온다.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와 트라괴아의 상류층 사이에서 일부다처제와 외교적 목적의 혼인이 성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로마 시대에는(카이사르의 기록에 따르면) 서유럽의 켈트족의 여러 부족 사이에서 동맹을 위한 족외혼이 성행했다. 철기 시대에는 혈통과 종족에 대한 관심이 크게 대두되었다. 인간이 신석기 시대부터 off 동물을 길들이기 시작하여 사육에 성공한 것은 특별한 특성을 목표로 삼고(특히 말의 경우) 있었음을 뜻한다. 그런 생 식 기술을 인간 자신에게도 적용했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바 있는 스키타이족 청년들과 아마존 여 전사들의 집단 혼인이 그 증거라고 하 겠다. 제8장에서도 언급했지만, 보다 남성적인 유전학적 특성이 매우 빠른 속도로 상류층 여자들 사이에 정착되었을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에서는 일부다처제가 보편적 이었다고 했다. 일부다처 제는 성 적 선택의 효과를 증폭시켰을 것이다. 내전과 노예 수출에 의해 스키타 이의 인구가정예화되는 한편, 일부다처 제는 새로운 종족의 탄생을 향 한 변화를 급속도로 촉진시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역적인 편의보다는 사회적이고 계층적인 목적으로 선택 적 생식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생식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계 층은 동맹을 맺기 위해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종족과 혼인한 군부 지 도자들이었을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장군들에게 아시아의 귀족 집 안과 혼인할 것을 독려했다. 그럼으로써 두 종족의 장점을 물려받은 새 로운 세대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의 미술에는 순수성과 잡종성 두 가지 모두에 대한 개념이 잘 나 타나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그리폰은 독수리의 날개와 부리, 사자의 발톱, 물고기 또는 파충류의 비늘을 가진 복합적인 동물이었다. 하늘과 바다와 땅에 사는 동물의 장점을 모두 갖춘 완벽한 동물인 셈이 다. 반인반수(半人半獸) 생물은이 밖에도 켄타우룬구半人半馬), 파우 니(半人半羊) 등 많다. 상인, 노예, 용병, 유목민 등 이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유라시아에 매우 복잡한 다민족 사회를 만들었고 민족마다 독특한 특성을 강조하 기 위해 애썼다. 이를테면, 5세기에 우크라이나 지방에 묻힌 훈족(홍노 족)의 유골들은 두개골기형이 두드러진다. 머리가뒤쪽으로늘어져 있 는것이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이런 현상은 어릴 때부터 머리를 동 여매는 풍습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유전학적 요소도 작용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머리가 길쭉한 것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한사회에서는그 런 특성을 정착시키기 위한성적 선택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 러나 이보다는 상류층의 신체적 특징을 만들어 내기 위해 머리를 동여 맸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런 식으로라도 다른 계층과 구별되는 독특한 신분 표시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런 인위적인 기형 화는 인종적 특성을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적인 다양성을 감 추기 위해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최근에는 뼈에서 DNA를 추출하여 분석하는 기술에 힘입어 고대 사 회에서 이루어졌던 선택적 생식이 확인되고 있다. 스콧 우드워드(Scott Woodward)와 월프레드 그릭스(Wilfred Griggs)는 이집트의 파윰 오아 시스 근처에서 백만 명 이상이 묻혀 있는 공동묘지를 발굴하고 있다. 이 곳은 오랜 세월에 걸쳐 점점 더 입자가 고운진흙이 쌓인 침적토이 기 때문에 지면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 따라서 맨 밑에 있는 것이 가장 오래 된 무덤이고 맨 위에 있는 기독교식 무덤이 가장 최근의 무덤이다. DNA 분석에 따르면, 밑에 묻힌 사람들은 유전학적으로 서로 매우 비 슷하고, 위에 묻힌 사람일수록 유전학적으로 보다 더 다양하다. 이 초기 단계의 분석 결과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집안의 재산을지키 거나 인종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형제자매끼리 혼인했다는 가정을 뒷받침해 준다. 전에는 역사 기록에 남아 있는 왕족들 사이에서만 이런 풍습이 있었다고 알려졌다(그리고 이런 혼인은 선천성 질환을 일으킨 다고 여겨졌다). 근친혼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끼 치는지는 아무도 정 확하게 모른다. 그러나 지속적인 근친혼은 개의 경우처럼 인간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파윰의 후기 유골들의 다양성을 기 독교 시대 초기의 대 이동에만 연관시켜서 해석할 수는 없다. 기독교가 근친혼을 근친상간으로 규정한 것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 지능일까 지식일까? ] 여러 증거들이 선사 시대부터 다양한 형태의 족외혼이 이루어졌음을 증명함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혈통' 이라는 개념은 아직도 남아 있어서 백인 우월주의 신화는 지금도 계속된다. 수많은 문화에서 나타나는 인 간의 미묘한 지능을 두 자리 또는 세 자리 숫자로 나타낼 수 있다고 생 각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특히 그런 신화에 집착한다. 아인슈타인은 '148'이었다. 이른바 이 '지능지수' 또는 IQ'는 이것을 고안해 낸 사 람들이 인간의 선천적인 지능을 말해 준다고 생각하는 테스트의 결과 이다. 수십 년 동안의 통계를 통해 많은 중대한 결함이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능 지수를 측정하는 사람들은 남자가 여자보다, 백인이 흑 인보다, 부자가 가난뱅이보다 지능이 더 높다는 것이 그들의 테스트에 의해 증명된다고 주장한다. 1969년, A. R. 옌젠(A. R. Jensen)은 니그 로' 의 지능 지수가 백인보다 평균 15점 낮다는 증거를 제시하면서, 지 능에 유전학적 요소가 크게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1994년에는 리처드 헤른스타인(Richard Herrnstein)과 찰스 머리(Charles Hurray)가 비슷 한 증거를 제시했다. 지능 지수에 집착하는 것은 인간의 개인적인 동기와 문화적 학습의 미묘함을이해하지 못함을 뜻한다. 필립 토비아스가밝혔듯이, 남아프 리카 공화국에서 여러 번 실시된 지능 지수 테스트는 교육을 잘 받은 백인들에게 유리한 것이었다. 문화적 편견을 바탕으로 한 초기의 지능 테스트는 분노와 의구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시험관들이 더 공정하다고 주장하면서 새로 만든 더욱 추상적인 성격의 지능 테스트는 흑인들의 의욕을 꺾어 버렸다. 테스트 결과가 특정 집단의 열등성을 '증명'한다 면, 그런 테스트에 대한그 집단의 관심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그런 테 스트를 치르는 데 대해 어떤 보상이 주어지고(그럴 리가 없지만), 문화 적 학습의 차이에 좌우되지 않는 테스트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해도 (이것 또한 불가능하지만), 여러 인종을 테스트 한 결과의 차이가 인종 을 바탕으로 한 유전학적 요소가 있음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이것은 환 경이 정신적 능력의 발달에 일반적인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치 기 때문이다. 사이먼 비슈벨(Simon Biesheuvel)과 그의 동료들의 실험에 따르면, 단백질이 부족한 먹이를 먹고 자란 쥐는 지능 테스트에서 낮은 점수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 결과는 다시 단백질이 많은 먹이를 먹기 시작해도 2세에게 유전된다. 심지어 3세에게까지 유전되기도 한다. 영양학적 및 정서적 스트레스는 동물의 합리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저하시킨다. 그 리고 이런 결과는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인간에게도 적용된다. 3대에 걸 쳐 전쟁, 기아, 영양불량, 학살 그리고 이주를 겪은 인종의 복잡한 역 사는 지배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해 만든 지능 지수 테스 트의 결과에 불리한 효과를 일으키게 마련이다. 지능 지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자료에서 나타나는 예외적 인 경우('플린 효과')를 설명하지 못한다. 20여 개 국에서 실시된 온갖 종류의 지능 지수 테스트의 결과에 따르면, 지능 지수가 1920년부터 계 속 올라갔다(스웨덴과 덴마크에서는 세대마다 10점이, 이스라엘과 벨 기에에서는 세대마다 20점이 올라갔다). 이런 추세를 거꾸로 돌려 보면 뉴턴과 갈릴레오의 지능 지수는 거의 밑바닥을 맴돌 것이다. 옌젠은 이 현상이 영양 상태의 개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사람들은 키 도 더 커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효과를 발견한 제임스 R. 플린(Ismes R. Rynn)은 새로운 세대가 그 전 세대보다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것 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지능 지수 테스트가 유전학적으로 타고난 지능을 나타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사고력은 말과 문자에서 비롯되고, 우리의 뇌 는 태어난 이후에 말과 문자에 적응하기 때문이다. 지능 지수 테스트는 다른 상징 체계(문자 등)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문화적 환경의 일부일 뿐이다. 그러므로 지능 지수 테스트는 지능이 아니라 지식을 측정하는 것이다. 나의 작은딸은 '모양맞추기' 상자를가지고있다. 모양맞추기 상자 는 여러 가지 지능 지수 테스트처럼 이른바 '추상 원리'를 바탕으로 한 장난감이다. 아이는 여러 가지 모양의 블록을 그것에 맞는 구멍에 집어 넣는다. 맞지 않는 구멍에 억지로 집어넣기도 하는데 그것은 맞는지 보 기 위해서이다(그래서 맞는 것도 있다). 뚜껑을 열고 블록들을 상자에 그냥 담을 때도 있다. 상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언니의 행동을 지켜볼 때도 있다. 아이가이 상자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것은 선천적인 지능이 아니라, 문화적 지식과 선택에 관한 문제이다. 침팬지 는 이런 모양 맞추기 놀이 실험을 바탕으로 오랑우탕보다 지능이 뛰어 나다고 평가되었다 인간에 의해). ouf 오랑우탕은 자발적인 학습 능력 이 뛰어나지만 실험실 안에서 모양 맞추기 놀이를 하는 것은 거부한다. 이것은 오랑우탄이 유전학적으로 우둔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납치한 사람의 행동을 억지로 흉내내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모양 맞추기는 모든 어린이의 세계관을 바꾸어 놓는다. 내가 우리 딸에게 '옳은' 답을 가르쳐 주건 안가르쳐 주건, 모양맞추기 놀 이는지능지수 테스트에서 우리 딸에게 문화적 선취점을 부여할 것이 다. 누구보다 유리하냐고? 글쎄‥‥‥‥ 그런 상자를 한번도본적이 없 는 아프리카어느시골 마을의 여자아이보다는 유리하지 않을까? 디지 털 시계, 자동차속도계, 품목별로 분류된 수퍼마켓 영수증따위를 본 우리 딸은 수학 지능 지수 테스트에서도 비슷한 이점을 누릴 것이다. 아프리카 어느 시골 마을의 여자아이는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서 너 개의 말을 유창하게 했을수도 있다. 수백 가지의 동식물을구분할 줄 알고, 그 효능까지 낱낱이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타고 난 지능에서 비롯된 이런 문화적 지식은 여러 수 가운데에서 홀수를 골 라 내는 것 같은 문제를 푸는 데에는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지능이 유전과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은 아니다. 제1장에서 말했듯 이, 우리의 커다란 뇌는 지난400만 년 동안의 성적 선택의 직접적인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인의 지능이 지금처럼 발달한 것은뇌 와신경계의 여러 부분에 필요한수많은유전자에 대한 선택이 이루어 졌기 때문이다. 반면에, 호모사피엔스가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갈 때 생김새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생겨난 것은 눈동자색이나 피부색이나 성기의 크기 같은 소수의 가시적인 유전자에 대한 선택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택은 인체의 고급 기능과는 아무 상관도 없으며 지 방색으로 쉽게 정착될 수 있는 것들이다. 인종의 역사를 볼 때, 지역적으로 서로 다른 집단들 사이의 선천적인 정신적 특성의 차이(남자와 여자사이의 차이 같은)는 미미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이런 차이를 직접적으로 측정할 수는 없다. 인간 은 문화를 떠나 생물학적 존재로만 존재하지는 않으며 인종도 역시 마 찬가지이다. 인종은 생물학적 물질을 이용하는 문화적 산물이다. 그러 나, 선택적 생식에 의해 특정 특성이 강화되고 급변이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유행은 훈족의 길쭉한 머리처럼 훨씬 더 급진적인 변화를 필요 로 한다. 인간은 흔히 생물학적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신체적 적 응력을높인다. 피부를 검게 칠하거나 하얗게 칠할수도 있다. 어떤 특 징이 선천적인 것인지 어떤 특징이 인위적인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려 울 만큼, 성기 같은 부드러운 조직을 자르거나 잡아늘일 수도 있다. 인 위적인 변화가 유전학적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다윈이 살던 시대의 파라과이의 남자들은 수염이 없기 때문에 면도할 필요가 없었다(지난 세대의 여자들이 수염이 없는 남자를더 매력적으로 여겼기 때문일 것 이다). 하지만눈썹과속눈썹은뽑아야했다. 눈썹이 짙은사람은눈썹 을 뽑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을 것이다. 그래서 여자에게 구애할 시간 을 뺏겼을 것이다. 아니면 게을러서 여자의 사랑을 차지하지 못했을 수 도 있다. 어쨌거나 분명한것은, 문화적 유행이 성적 접촉 기회에 영향 을 끼칠 수 있으며, 따라서 유전학적 변화의 요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이다. 문화적 현상인 인종 차별은 바로 인종을 만들어 내는 메커니즘의 하 나이다. '북방민족성' 같은특정 특성이 유전학적인 근거가 있건 없건, 이것은 종마사육장과 집단 수용소에서처럼 성적 선택의 기준으로 쓰 일 수도 있다. 지능 지수는 이미 성적 선택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 예로 영국인과 미국인은 지능 지수가 120 이상이어야 회원 자 격이 주어지는 '멘사(Mensa)'라는 클럽에서 배우자를 찾고자 한다. 미 국에서는 돈만 많이 주면 지능 지수가 높은 사람의 정자로 인공 수정을 받을 수 있다. 지능 지수 테스트가 어떤 유전학적 특성을 측정하는 것 이든, 장차 일부 사회에서 더 보편화될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그 선택의 결과는 우리의 기대에 어긋날 수도 있다. 5,000년 묵은 얼음 인간의 정자로 인공 수정 시술을 받으려는 오스트 리아 여자들은, 플린 효과와 알프스 민족에 대한 귄터의 평가대로라면, 그런 정자로 태어난 아이는 지능 지수가 마이너스 수치를 나타내고 나 중에 좀도둑이나 성도착자가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 다. 지능 지수를 광신하는 사람의 아이는 밀림 속의 오랑우탄보다 실험 실 안의 침펀지처럼 행동하는 유전학적 특성을 가질 수도 있다.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부모의 그런 문화가 아이의 그런 행동을 부추길 것임 은 분명하다. 선사 시대의 산아 제한과 식물을 이용한 피임법은 여기서 이야기된 모든 것을 다시 확인해 준다. 섹스는 반드시 출산과 직결되지 않는다 (이성간의 섹스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아이를 낳고자 할 때에는 섹스를 즐길 때보다 더 신중을 기한다. 신분에 대한 집착은 외모에서 그치지 않고 성행위에도 포함된다. 플 라톤이 말한 '완벽한 반쪽'을 찾는 낭만적인 사랑이 갈수록 이상화되는 오늘날의 지구촌에서, 성적 취향은 인종적 편견과 마찬가지로 온갖 가 식적인 말들을 만들어 낸다. 남자동성애자', '이성애자', '여자동성 애자', '복장도착자' 등사회적 낙인이 찍히는 것이다. 우리는매우 유 연한 잠재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누구나 이런 낙인이 찍힌다. [ 맺음말 ] [ 문화를넘어 ] 우리는 선사 시대로 돌아갈 수도 없고 또 선사 시대에 대한 모든 것 을알수도없다.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선사시대 사람 들의 일상 생활과 사랑은 거의 다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현대인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장류 친척들도 흔히 즐기는 여자 동성애 따위의 성행 위는 고고학적 증거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선사 시대 의 아메리카 대륙과 고대 인도의 성 문화처럼 우리가 아는 것도 많지 만, 공간과 특별한 지식이 부족한 나로서는 이런 것을 재현할 수 없을 뿐이다. 나는 중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언 급하지 않았다. 앞으로 DNA 검사법을 이용하여 유골의 성별을 확인하 는 작업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사회학적 성별에 대한 이론이 정립 되면 이 책에서 언급된 선사 시대 사회의 성 문화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생물학과 문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밀접하게 연관되 어 있다. 단순하고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을나타내는성 도덕의 기준 은 비판적인 시각으로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기준이 옹호하는 것이 정말로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굳이 강요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 문이다. 현대 미국의 이른바 '도덕적인 대다수'는 자연스러운 성 도덕 이 갈수록 타락하는 현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특별한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도덕을 나쁜' 문화의 작용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들은 생물학을 내세우며 성적 부도덕을 다른 인종들 탓으로 돌린 다. 캐나다의 한심리학자는최근에 "흑인종은생물학적으로불안정한 결혼생활을 할 확률이 높다. "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오늘날 가장 저 명한 사회인류학자의 하나인 에드먼드 리치(Edmund Leach)는 인간의 제도는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결혼'이라는 말을 보편적인 범주로 삼 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이런 다양성이 인종적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어리석은생각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혼인 형 태는 한 사회 안에서도 끊임없이 변했기 때문이다(이를테면 아프리카 에 회교가 퍼짐에 따라 그랬듯이). 어떤 기준을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는, 유럽의 선교사들이 사모아 섬에 가서 원주민에게 다른 성생활을 종용하던 시대에는 그다지 복잡 한 문제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이해가 증진되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생활 방식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지 못한다. 하지만 성 도덕의 문제는 여러 가지 측 면에서 아직도 미결 상태이다. 포르노는 영국에서는 사람을 타락시키 는사악한것으로 간주되어 법으로 제재되지만, 유럽 대륙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영국의 헌법이 부도덕과 타락에 취약한 것일까? 정보통 신의 발달에 따라 특정 성 도덕을 범세계적인 문화적 기준으로 세우려 는 경쟁이 더 치열해지겠지만, 오히려 정보망의 발달에 힘입어 문화적 다양성이 더 심화될지도 모른다 모든 인간 사회의 성 문화에 공통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 지만, 대다수의 사회는 문화적 고유성을 유지하고 있다. 성인과 아동 간의 섹스, 근친상간, 죽은 사람과의 섹스, 그리고 그 빈도는 비교적 낮 을지 모르지만 동물과의 섹스는 여러 사회에서 사회적 및 도덕적으로 금기시되고 있다. 이것이 다른 영장류들과는 다른 공통된 유전학적 특 성에서 비롯된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남자 동성애, 여자 동성애, 자 위행위, 그룹 섹스, 구강 섹스, 생리 중의 섹스, 이성간의 항문 섹스, 섹 스 쇼, 나체주의, 복장 도착 따위에 대한 태도는 사회마다 달라서 보편 적인 기준이 없다(굳이 그 공통점을 찾는다면 대부분의 사회에서 이런 성행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1장에서도 말했듯이 우리의 몸에 털이 없다는 사실 자체는 자연스 러운상태가 아니다. 현재의 이러한 상태는 성적 선택을 통해 생물·문 화적으로 생겨났으며 의복의 발달과 함께 진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 체주의자(또는 '자연주의자' )처럼 옷을 입지 않는 것이 옷을 입는 것보 다 더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다. 고무나 가죽이나 실크로 만든 옷을 입 고 섹스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입지 않는 것이 변태가 아니듯이 역시 변태가 아니다. 생물 문화적 관점에서 볼 때, 성욕 도착자나 나체주의 자나 점잖은 이성 부부(남편은 줄무의 파자마를 입고 아내는 분홍색 나 일론 가운을 입는)나 모두 똑같이 정상적인 사람들이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오직 자신만이 옳고 서로를 해괴하게 여기는 것 역시 생물·문 화적으로 정상이다. 우리는 자신의 문화에 대한 신념이 매우 확고하다. 인류의 지구 정복을 가능하게 한 사회적 단결은 바로 이런 문화적 확신 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생물학적 반격을극복하기 위하여 ] 내가 '자연을 넘어'라는 말로 이 책의 서두를 펼친 것은사회생물학 자들에게 도전하는 뜻에서였다. 인간의 성 문화의 다양성은 단순히 유 전학적 요인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의 문화는 단기적인 목 적을위해 생물학을 채택할 뿐이다. 이제 '문화를 넘어'라는말로 이 책 을 마무리하는 것은 보다 장기적인 생물학적 반격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다. 우리는 '운명으로서의 생물학'과 '자유로서의 문화' 이 둘 가운 데서 어느 하나만을선택할수는 없다. 미국 애틀랜타 주 에모리 대학 교의 보이드 이튼(Boyd Eaton)은 이른바 다윈식 의학'을 추진하는 의 사들 가운데 하나이다. 다윈식 의학'은 질병과 건강에 대한 우리의 문 화적 해결책은 오랜 세월에 걸친 생물학적 진화의 유산을 고려해야 한 다는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로저 르윈(Roger Lewin)은 이렇게 말한다. 이튼의 이론은 이런 것이다. 서양 여자들은 생식 방식의 변화에 따라 지금 도 수렵채취 생활을 하는 사회의 여자들에 비해 유방암과 자궁암, 난소암에 걸릴 확률이 최고 백 배까지 더 높다. 그 이유는 더 이른 초경, 더 늦은 초산, 더 적은 출산, 더 늦은 폐경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 대의 여자들은 젖을 먹이는 기간도 훨씬 더 짧다. 이런 차이 때문에 수렵채 취 사회의 여자들은 평생 동안 평균 158번 배란하지만 현대의 유복한 여자 들은 평균 451번 배란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문화의 한 단면일 뿐이다. 유모차 같은 발명품은 아이를 더 편하고 쉽게 운반하게 해 주지만 좋 지 않은 생물학적 역효과를 초래했다. 선사 시대의 우리 조상이 몸의 털이 없어지고 두 발로 서서 걸어다니게 됨에 따라 발명한 아기띠는 아 이의 평형 감각을 발달시켜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 발달을 촉진시켰다. 최근에 서양인들 사이에서 급격히 퍼지고 있는 골다공증도 아이에게 젖을 먹이지 않아 몸의 칼슘균형이 깨진 데다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경우도 드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생물학과 문화의 상호 작용은 우리를 궁지에 빠뜨린다. 이제 와 서 수렵채취 생활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유전공학으로 모유와 다름없는 우유를 만들기보다는, 여자들이 아무 제약 없이 아이에게 젖 을 먹일 수 있는 사회적 장치를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우유의 성분을 아무리 모유와 비슷하게 만든다고 해도 인체의 면역성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래서 세계보건기구와 유니세프도 2년 이상 모유 를 먹일 것을 권장하고 있다. 인공 모유를 만들려는 시도는 신석기 시 대 농경 사회의 부권 중심적 가치관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생물학적 반격은 남자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바지를 입고 말을 탔기 때문에 성 기능이 약화된 스키타이족 남자들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있다. 바지는 유목민 등 추운 지방에서 사는 사람들이 발명한 것 이다. 더운 지방에서 산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바지를 입지 않았다. 하 지만 바지는 오늘날 범세계적인 기준이 되었다. 자동차를 타는 시간이 많은 서양 남자들은 지난 몇십 년 동안 정자 수가 크게 줄어 불임증 환 자가 많다 수돗물에 함유되어 있는 여성 호르몬 에스트로겐 잔여물과 농작물의 잔류 농약 성분도 문제가 된다). 킬트(남자용 치마) 패션을 부 활시키려는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 장 폴 골티에(lean-Paul Gaultier) 의 시도는 일종의 다윈식 해결책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과학자들은 섹스의 유전학적 및 행동학적 근원을 밝힘으로써 그 신비를 풀려고 애썼다 현재 생물학자들이 그 결과를 종 합하고 있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다. 문화가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피임, 낙태, 시험관 수정, 정자 은행 따위의 문화의 개입은 자연계의 다 른 구성원들에게 적용되는 선택과 진화의 법칙을 무너뜨린다. 사회학자 앤터니 기든스(Anthony middens)는 그의 저서 『친교의 변 형』(rho Transformation of lntimacy)에서, 현대 섹스의 특징은 '인위적 색◎의 등장이라고 주장했다. 이 말은 '잘 만든 일본산 모조성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섹스와 생물학적 필요, 이 양자의 분리를 말한다. 생식 없는 섹스의 결과는 섹스 없는 생식이다. 리처드 포스너도 시험관 수정을 통해 '섹스 없는 생식'을 가능하게 하는 신기술의 사회적 및 법 적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한 바 있다. 포스너의 관점은 성교에 초점을 두고 있다. 시험관 수정에 필요한 정자는 내가 아는 한 남자의 자위행 위로 얻어진다. 그리고 이것이 성행위가 아니라면 이것은 결국 아무것 도 아니다. 시험관 수정은 새로운 기술이지만, 인공 수정 자체는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이를테면, 아이를 원하는 여자 동성애자들이 어떤 남자의 정액을 얻어 숟가락 같은 것으로 수정시킬 수도 있다). 그러므 로 선사 시대의 우리 조상도 인공 수정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기든스의 이론은 성공적인 생식 조절은 최근에 와서야 개발된 것이라 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제3장 참조). 그러나 인간이 생식 조절 능력을 상실한 것은 문화적 환경 때문에 생식 조절이 불가능해졌을 때 뿐이었다. 문화는 우리의 신체적 능력을 손상시킬 수도 있다. 오늘날의 여러 소 규모 사회에서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선사 시대 사회에서는 쪼그리고 앉는 것이 전형적인 휴식 자세였다. 이 자세는 골반 기저근(基底筋)을 튼튼하게 유지해 준다. 켈트족 역시 이런 자세를 취했다. 대초원 지대 의 주술사들과 인도의 탄트라 수행자들은 이런 자세의 성적 효과를 잘 알았다. 그러나 제8장에서 살펴본 청동 시툴라에 새겨진 여자들은 침대 와 의자 위에서 섹스를 했다. 이런 자세는 당시에는 새로운 것이었지만 로마 시대부터는 보편화되었다. 오늘날 일상 생활에서 의자의 사용은 세계적인 추세이다. 이런 자세는 힘이 들지 않기 때문에 골반기저근이 느슨해진다. 그리고 골반 기저근이 느슨해지면 성적 쾌감이 줄어든다. 그래서 성과학자 케겔(Kegel) 박사는 괄약근을 튼튼하게 하는 방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 '케겔 요법'을 쓰면 성적 쾌감을 정상화시키거나 증진시킬 뿐만 아니라생식 조절 능력을 높일 수도 있다. 여자가 임신을 원하지 않을 때 자궁을 수축시켜 정액을 몸 밖으로 밀어 내는 것은(히포크라테스의 이야기에 따르면) 근육이 약하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탄트라를수행하 는 남자는 사정하지 않고도 오르가슴에 이를 수 있다(정액을 요도로 내 보내지 않고 방광 속으로 사출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생식을 조절하여 소수의 자식을 집중적으로 키울 수 있게 한 우리 몸 에 대한 지식은 장기적인 학습과 복합적인 문화 발달의 원동력이 되었 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문화는 너무 비대해져서 생물학이 상실될 위 기에 처했다. 우리는 애당초 존재할 필요가 없는 문제들에 대해서조차 문화적 해결책을 찾기 위해 엄청난 노력과 자원을 소모하고 있다. 이를테면, 경구 피임약은 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실패작이었다. 가브 리엘 파머(Gabrielle Palmer)의 『수유(授乳)의 정치학』(The Politics◎ Breasweeding)에 따르면, 경구 피임약은 오히려 세계 인구 증가의 주 요인이었다. 수유는 경구 피임약과 양립할 수 없으므로, 경구 피임약을 복용하는 사람들은 모유의 피임 효과라는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사람 들은 서양 과학에 현혹되어 전통적인 피임법을 마다하고 경구 피임약 을 쓰지만 약효가 나타날 만큼 규칙적으로 쓰지는 못한다◎그러나 제약 회사들은 경구 피임약과 함께 써야 하는 보조약과 조제 분유를 만드는 회사들과 더불어 큰돈을 벌었다). 경구 피임약은 열대 지방에서 또 다 른 문제를 일으켰다. 경구 피임약의 실패로 인해 급속히 증가한 인구가, 조상들이 산아 제한을 위해 쓴 천연 약전인 열대 다우림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400만 년의 세월을 돌이켜보고 다음 400만 년을 겸허한 자세로 맞아들여야 한다. 지금부터 400만 년이 지난 뒤에도 우리 종이 살아남아 있을 가능성은 많지만, 그것이 누구의 후손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서양에서는 이제 더 이상 개인의 생물학적 생식이 문화적으로 강요되지 않는다. 생식을 바탕으로 한 성 도덕을 유지하는 것은 어리석 은 짓이고, 현재의 세계 인구 수준을 생각한다면 위험한 짓이다. 문화 적 지식의 발달과 전승은 우리의 미래에 밝은 희망을 주지만, 그것은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사고가 그 기반이 될 때이다. 만일 우리의 타고난 유연성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오 스트랄로피테쿠스계 같은 종말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종말은 조만간 올 것이다. 그리고 그 종말이 오면 우리처럼 흥미로운 종은 묘비에 기록되어 남을 자격이 있을 것이 다. 이런 괴테의 말이 새겨지지 않을까? 그들이 무엇을 했고 무엇을 시도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들이 사랑했다는 것뿐‥‥‥ [ 옮긴이의 말 ] 섹스는 생물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나 인간의 최대 관심사이다. 이 성에 눈을 뜨는 사춘기가 되면 마음에 드는 이성을 찾아 나서고, 그런 사람을 찾으면 결혼이라는 합법적 제도를 통해 -반드시 그런 것은 아 니지만-육체적 ·정신적 결합을 꾀하고,또 더러는 제 짝을 두고도 다 른 이성을 꾀거나 상호 합의에 따라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고‥‥‥‥ 이런 우리의 습성이 그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 주변을 잠간 둘러보기만 해도 우리가 얼마나 알게 모르게 섹스 에 집착하며, 우리의 삶이 섹스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이른바 '섹스 어필'이라는 것이 우리의 호기심을 얼마 나 자극하며, 또 우리가 이것을 얼마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지는 새삼 돌이켜볼 필요조차 없다. 따라서, 좀 극단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오 늘날 우리 인류 문화의 원동력은 바로 섹스라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한 정신의 통제로 육체적 본능을 초월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 만, 거의 모든 사람의 경우 섹스에 대한 욕구는 먹고살려는 본능만큼 필 연적으로 삶을 좌우한다. 나는 섹스의 윤리에 대해 한마디 할 만한 자격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다만, 지구상에서 가장 진화한 동물인 인간에게 섹스는 생물학적 본능에 따른 생식 행위 이상의 것이며, 따라서 섹스를 금기시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의 상호 합의에 따른사회적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는 비정상적 행위'는 우리의 상호 합의를 무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배척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이 정상 적인 것이고 무엇이 비정상적인 것인가 하는 문제도 상당히 어려운 문 제이기는 하다. 굳이 기준을 세워 본다면, '지나치게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는 것'이 흔히 인정하는 객관적 기준이 아닐까? 이 책의 저자 티머시 테일러도 이와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인 류의 진화는 다윈식의 적자생존 법칙뿐만 아니라 '성적 선택'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졌으며,진화 자체도 곧 성 문화의 진화라는 것이다. 인간이 영장류 가운데 유일하게 몸의 털이 없어진 것도 살아남기 위한 본능과 투쟁의 결과라기보다는 이성에게 더 섹시하게 보이기 위한 성적 경쟁 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다. 인간이 직립보행을 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이론이 분분하다. 티모 시 테일러는 이러한 이론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한편,여러 가지 '대 중에게 공개되지 않은 비밀스러운 증거'를 들면서 자신의 이론을 역설 하고 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그 흥미로운 증거들을 볼 때 -저자의 해 석이 옳은지 그른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그의 이론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또한 여러 가지 고고학적 기록에 대한 참신하고 풍부한 고찰은 지적 호기심과 함께 독서의 즐거움을 충족시켜 준다. 고고학자 가 선사 시대의 성 문화를 집대성하여 이렇듯 센세이셔널한 주장을 한 경우는 서양에서도 드물기 때문에 이 책의 의의는 크다고 할 것이다. 사실,이 책에 소개된 그림들을 보면 선사 시대의 포르노가 아닐까 싶을 만큼 매우 선정적 이고 충격적이다 남성 및 여성간의 동성애, 복장 도착, 성도착, 자위행위, 수간, 집단 성교, 매춘 등 우리가 흔히 비도덕적 이며 비정상적 이라고 여기는 모든 성행위가 선사 시대에도 있었다니, 제도와 문화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다. 아울러,그런 사 실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를 왜 특정 계층만 독점하고 대중에게는 숨기 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일반 대중을 계몽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인간의 본성을 고결한 것으로 미화시키려는,어쩌면 공정한 학문적 태도에서 벗어난 일부 학자들의 횡포가 아닐까?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그것은 끝없이 광대한 우주에서 작은 티끌에 지나지 않는 이 지구에 한정되는 말일 뿐이다. 게다가 인류 란,서로에 대한 의미 없는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온갖 살상 도구를 만들어 내고 갖가지 음모를 꾸미는 종이 아니던가. 동물원 철창살 안에 갇혀 구경거리가 되고 있는 동물들 중에는-비록 단편적이라 하더라 도-우리가 본받아야 할 미덕을 가진 종들이 많다. 어쨌거나 인류의 진화는 오랜 세월에 걸친 수많은 학자들의 연구에 도불구하고 아직도 신비에 싸여 있는 부분이 많다. 그 이유는 간단하 다. 흔히 '잃어버린 고리'라고 불리는, 중간 단계의 여러 고고학적 증거 가 많이 모자라기 때문이고, 그 동안 발견된 고고학적 증거들에 대한 해 석에서도 이론이 분분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최초의 인간이라고 알 려진 '루시'가 과연 여자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골격이 비교적 작다고 여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기에 덧 붙여,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이 다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우리의 최초의 조상이 원숭이의 조상과 같은 종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철창살 밖에서 구경하는 입장이 되고 원숭이는 철창살 안에서 구경 당하는 신세가 되었을까? 거기에는 환경적 요소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같은 종이라도 그 서식지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적응하고 변화했을 것이기 때문이 다. 그러나 티머시 테일러는 환경적 요소뿐만 아니라 '성적 선택'이 크 게 작용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의 눈부신 문명을 가능하게 한 두뇌와 지능의 발달도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기 위한 '성적 선택'에 의 해 급격히 촉진되었다는 것이다. 저자의 여러 가지 주장에 대한 판단은 땅 속에 묻혀 있는 역사의 몫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선적인 것은 이 책을 읽는 여러 독자들의 판단 이다. 그리고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이만큼 이루어 놓은 이 시대에 섹 스가 어떻게 해석되고 있으며 그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998년 4월 김용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