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저 자: 수산나 타마로 목 차 1 다시 월요일에(Di nuovo lunedi) 2 러브(Love) 3 어린 시절(Un'infanzia) 4 눈 속에서(Sotto la neve) 5 외로운 목소리를 위하여(Per voce sola) 다시 월요일에 ## 잘 있었니, 일기야. 다시 월요일이구나. 오늘은 진짜 가을에 접어든 것 같은 기분이 드 는 날이었어. 바람이 불고 드디어 노랗게 물든 나뭇잎들이 공중에서 원을 그리며 날아다녔 어. 달력상으로는 벌써 오래 전에 가을이 시작되었어야 해. 하지만 이제 대기층에 난 구멍 들 때문에 때가되면 당연히 찾아올 계절에 대해서도 확신을 할 수 없게 되었단다. 우리 앞 에는 어떤 미래가 놓여 있는 걸까? 가끔씩 혼자 이런 생각을 하곤 해. 물론 나나 제프의 미 래가 아니라 꼬마 도리의 미래를 생각해 보는 거지. 마침 오늘은 도리가 우리와 함께 산 지 꼭 6년째 되는 날이기도 해.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출판사에서 내 일을 도와주는 비서가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바에서 그녀는 내가 꼭 샴페인을 한잔 마셔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야. 그녀가 잔을 들면서,<선생님의 귀여운 꼬마를 위하여!>라고 말했을 때에야 겨 우 샴페인을 마셔야 하는 이유를 알았단다. 그래, 벌써 기념일이 된 거야! 도리에겐 제2의 생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 아이에겐 태어난 날과 입양된 날, 두 번의 생일이 있는 셈이 지. 난 도리를 입양했을 때 나와 제프가 느꼈던 감동을 고스란히 떠올려 보았어. 그 애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아무도 몰라. 야간 순찰을 돌던 경찰관이 그 애를 쓰레기통 속 에서 발견했어. 하얀 피부색으로 봐서 어쩌면 스페인 태생인지도 모르겠어. 어쨌든 검은 피 부나 노란 피부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우리 부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부터 많은 것을 원하지 않았어. 입양 단체에서 나오자마자 제프는 도리를 품안에 꼭 껴 안으며 이렇게 외쳤어. "쓰레기 더미라! 꼭 당신이 쓴 동화 같은데!" 동화라고? 그래! 오늘 편집회의에서 바로 이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토론을 했어. 우리는 여섯 살에서 열 살 가량의 어린이들을 위한 새로운 동화 전집을 출판할 계획이거든. 내 동 료인 로리는 시기적으로 봐서 지금은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을 출판하는 게 좋다고 주장하더 군. 아이들은 괴물이라든가 마귀할멈, 침을 흘리는 거인, 사람을 잡아먹는 무서운 의붓아버 지, 이런 것들을 좋아한다는 거야. 말할 것도 없이 난 반대야. 어린이들에게는 좀더 나은 것을 마련해주고, 꿈을 안겨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야만 다정하고 섬세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들로 성장할 수 있거든. 저녁에 제프와 난 외식을 했어. 제프는 우리가 결혼하자마자 가보았던 그 이탈리아 식당으 로 날 데려갔어. 제프는 도리의 기념일을 알고 있다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도리의 입양 일을 축하하려고 날 밖으로 데리고 나간 게 틀림없어. 제프는 그렇게 신중하고 또 아주 예 민한 사람이니까. 가끔 잠자리에 들 때면 제프가 없는 내 인생은 어떨까, 내 자신에게 물어 보기도 해. 하지만 난 대답을 할 수가 없어. 이렇게 행복한데 그런 질문에 대답을 해서 뭐 그리 큰 문제가 되겠어? P.S. 집으로 돌아오다가 계단에서 넘어졌어. 왜 넘어졌는지는 잘 모르겠어. 감자자루처럼 굴러 떨어지는 나를 보고 제프는 틀림없이 재미있었을 거야. 그래도 그는 약간 걱정스러워 했는데 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났어. 그리고 <괜찮아요>라고 말했어. 그리고 나서 우리는 정말 실컷 웃어댔지. ## 안녕, 일기야. 어제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을 때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 오 늘 아침 눈을 뜨니 온몸이 쑤셔 혼났어. 목욕탕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서 정말 깜짝 놀았단다. 눈 주위가 권투선수처럼 시커먼 보랏빛으로 멍이 들어 버린 거야. 제프는 벌써 출근을 해서 곁에 없었어. 그는 자기 일에 푹 빠져 있는데, 대체 어디서 그런 추진력이 생기는지 모를 정도라니까! 어쨌든 오늘은 출판사에 가지 않기로 했어. 꼬마 도리와 함께 집에서 하루 종일 쉴 거야.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어. 도리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우리는 이불 속으로 들어갈 거야. 그리고 저녁 식사를 할 때까지 그 애에게 동화를 들려 줄 거야. 언제나 그랬듯이 도리는 《푸른 수염》이나 《엄지 둥이》 이야기를 듣고 싶어할 거고 난 보통 때처럼 신데렐라 이 야기를 해주려고 애쓰겠지. 이따금씩 그 애의 작은 눈 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곤 해. 그 그림자를 보면 마음이 좋지 않아. 동화를 들려주고 또 부드럽게 타일러서, 도리의 눈에 드리워진 그 그림자를 걷어낼 테야. ## 이제 밤 열 시가 되었어. 계획대로 오후를 보냈단다. 침대에 누워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 며 도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어. 우리는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지. 도리는 작문 숙제를 해야 했어. 제목은 <우리 아빠>.언제나 아주 쉽게 글을 쓰던 애가 이번에는 연 필을 들고 하얀 종이 위에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당황스런 얼굴로 나를 쳐다보더구나. 그 래서 내가 그 애를 도와주었지. "알았어, 너 뭘 써야 할지 몰라서 그러는구나." 하긴 아빠라는 주제는 무슨 말부터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를 정도로 그렇게 멋진 주제 아니 겠어! 그래서 작문 숙제를 할 수 있도록 슬쩍 아빠 이야기를 해주었지. 아빠는 변호사 일을 하시고 항상 약한 사람들을 보호해 주시는데, 그런 점에서 보면 로빈 훗과 약간 비슷하다고 말이야. 키가 크고 힘도 세서, 두 손가락만 가지고도 코끼리의 숨을 막아 죽일 수도 있고,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우리 두 사람을 들어올릴 수도 있다고 말해 줬어. 그러자 도리는 당 황스러움을 이겨내고 숙제를 시작했어. 한 시간 내내 정신을 집중해서 주의 깊게 글을 썼 어. ## 오늘 저녁 제프는 식사시간에 집에 돌아오지 않았어. 가끔씩 그는 집에 전화 한 통 못할 정도로 너무 정신없이 일을 할 때가 있어. 게다가 오늘은 우리가 저녁을 먹지 않는 날이기 도 해. 제프는 우리 모두 새로운 식이요법을 시작하길 원했어. 하루 저녁은 식사를 하고, 그 다음날 저녁은 식사를 하지 않고 뜨거운 물만 마시는 식이요법이야. 캘리포니아에 있는 어떤 의사가 권한 방법이지. "불순물을 제거해 내면 생각도 가벼워진답니다." 사실이야. 난 그 식이요법을 시작하고 일주일이 지난 후부터 어느새 몸이 아주 좋아지는 것을 느꼈어. 공기 중에, 그리고 우리가 먹는 음식 속에 너무나 많은 불순물이 들어 있으니 까 당연히 우리 몸 속도 청소해 주어야겠지. 영혼과 몸을 투명하게 만들기. 이게 그 의사의 프로그램이야. 꼬마 도리는 처음에는 싫다고 했어. 그 애는 뜨거운 물 대신 우유에 콘프레 이크를 넣어 먹고 싶어했지. 난 침착하게, 아빠가 하시는 일은 다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설 명해 주었어. 도리는 곧 내 말을 알아들었어. 마치 수프를 먹듯이 입으로 호호 불면서 뜨거 운 물을 마셨어. 이불 속에 들어가서는 늘 그러듯이 곧 아기곰 인형을 찾아서 있는 힘껏 가 슴에 끌어안았어. 방에서 나오려는데 도리가 내게 물었어. 방문을 열쇠로 잠가 줄 수 없냐고...... "바보 같은 소리, 우리 집에서 열쇠로 잠그는 문은 하나밖에 없어." 내가 말해 주었어. 물론 방문을 그대로 열어 놓고 복도의 불빛이 침대가 있는 곳까지 스며 들도록 내버려두었지. 그 나이에는 한밤중에 무서움을 느끼기도 하니까. 한밤중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려면 자신을 가져야 하고, 어두운 곳에는 불을 밝혀 놓아야 하지. 실제로 별 것 아닌 이 작전이 곧 효과를 나타냈어. 도리가 별다른 질문 없이 금방 잠이 들었거든. 난 응접실에서 자정이 넘을 때까지 뜨개질을 했어. 도리에게 주려고 풀오버를 짜는 중이 야. 앞을 터서 단추를 달 거야. 색깔은 그 애가 좋아하는 짙은 초록이야. 왼쪽에 작은 집들 을 수놓고 그 위에는 태양과 무지개를 수놓을 거야. ## 잘 있었니, 일기야. 오늘은 다시 출판사에 나갔어. 아홉 시에 전에 말한 그 전집 건으로 회의를 했어. 로리는 자기 생각을 굽히지 않았고 나 역시 내 생각을 꺽지 않았지. 어젯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나는 잘 자는지 살펴보려고 아이의 방에 들렸어. 도리는 작은 곰인형을 끌어안고 피곤에 지친 강아지처럼 깊이 잠들어 있더구나. 나는 그 모습을 떠올리면서 로리 에게 얘기했지. 당신에겐 아이가 없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터무니 없는 괴물 이야기로 평온한 어린이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는 없다고 말이야. 그 순간 그녀는 애매한 웃음으로 받아넘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회의가 끝나자 입술을 깨물며 내 곁에 다가와서는 내 눈이 왜 그렇게 되었느냐고 물어 보았을 뿐이야. 난 사실대로 계단에서 넘어졌다고 말해 주었어. 그러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바보같 이 말했어. "요새 너무 자주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거 아냐, 응? 뭐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 지? " 그리고 나서 자기 여자 친구 하나가 균형 중추를 치료하는 의사에게 치료를 받은 적이 있 다며 그 의사의 주소를 내게 일러주겠다는 거야. 하도 권하는 바람에 결국 난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받아들었지만. 쳐다보지도 않고 다른 종이들과 함께 가방에 쑤셔 넣어 버렸어. 점심을 먹고 나서 세 시에 출판사에서 나왔어. 도리의 새 담임 선생님이 나와 면담을 하고 싶어했거든. 별로 걱정하지 않았어.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할지 다 알고 있었으니까. "애가 너무 말랐어요. 그리고 주의가 산만하고 기운이 없어 보여요. " 처음 있는 일은 아니야. 난 벌써 다른 여선생 님들에게 몇 번이나 되풀이했던 말을 이 여 선생 님에게 다시 했어. "이 애가 어떻게 세상에 태어났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태어나서 처음 얼마간은 범죄자들 속에서, 아주 불우한 환경에서 살았어요. " 선생님은 도리가 다른 아이들과 똑같을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 거야. 담 임 선생님과 나는 헤어질 때쯤에는 좋은 친구가 되었어. 나와 헤어지면서 선생님은 혹시 자 동차에 부딪혔냐고 물었어. 혈압이 낮은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제자리에 붙어 있는 부엌 선반을 올려다보기도 힘들 때가 있다고 대답해 주었어. 우리는 같이 웃었어. 그녀도 혈압이 낮아 현기증으로 고생하고 있다더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리는 내 손을 잡고는 있었지만 계속 고개를 숙이고 걸었어. "네 잘못이 아니야. " 내가 도리에게 말했어. "나도 네 나이 때는 그랬어. 땅에 뒹구는 노란 낙엽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이 세상에 없는 것 같았으니까. " 제프는 벌써 집에 돌아와 있었어. 신발을 신고 윗도리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몸을 쭉 펴 고 누워 있었어. 덧창도 다 닫아 놓았고 불도 켜놓지 않았지. 평소 그는 과로로 인한 두통 으로 자주 고생했는데, 오늘도 역시 두통 때문에 힘든 것 같았어. 그를 깨우지 않으려고 불 도 켜지 않고 즉시 도리를 침대에 눕히고 제프가 있는 방으로 갔어. 때로는 오후에 낮잠을 자는 게 건강에 좋을 수도 있어. 한밤중에 갑자기 도리가 곰인형을 손에 들고 잠옷 바람인 채로 우리 방 문가에 나타났어. 처음에는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그리고는 점점 더 큰 소리로 배가 고파 죽을 것 같다고 말 했어. 우리는 그 애의 말을 못 들은 체했어. 그 애가 그렇게 변덕을 부릴 때마다 안쓰러워 할 수는 없으니까! 도리가 계속 우겨대자 제프는 제발 거짓말 좀 그만하고 가서 자라고 간 청했어. 이 세상에는 진짜 굶주리는 아이가 얼마나 많은데! 하지만 도리는 한 발자국도 움 직이지 않았어. 뭔가에 사로잡히면 그 애는 바위 덩어리보다 더 묵직해진다니까. 제프가 날 쌔게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서 부엌에 데려갔다가 도리의 침실로 들어갔지. 제프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피곤에 지쳐 기운이 없을 때에도 항상 사랑하는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마지막 있는 힘까지 다 짜내는 사람이야. 기운이 다 빠져 버린 게 틀림없어. 방에 돌 아오자마자 다시 잠이 들었으니까. 난 몸을 돌려 그에게 입을 맞춰 주었어. 잠이 오지 않아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다시 잠이 들었어. 뜰 안쪽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어린 아기처럼 울어댔지. ## 안녕, 일기야, 금요일이야! 또 한 주가 지나갔어! 며칠 사이에 계절이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 버렸어. 이제 모자나 장갑 없이 외출했다가는 폐렴에 걸리기 십상이야. 오늘 아침에 도리는 기분이 몹시 안 좋았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도, 식사를 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스카 프를 두르고 장갑을 끼는 것도 싫다고 했어. 언젠가 길을 걷다가 다리 한 쪽이 아파서 걷고 싶지 않다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는 거였어. 그래서 인내심을 가지고 《늑대 소년》이야기를 들려주었지. "아프지도 않은데 아픈 체하면 안 돼. 그랬다가 정말 병에 걸릴지도 모르잖아. 너처럼 건 강한 팔과 다리를 갖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봐! " 내 이야기가 그 애의 가슴 깊은 곳에 가 닿았던 게 틀림없어. 고개를 숙이고 내 앞을 재빠 르게 스쳐 지나가 학교 쪽으로 갔으니까. 학교 앞에서 입을 맞추어 주려다가 촉촉하게 젖은 눈을 보고 그 애가 울었다는 걸 알았어. 그렇게 예민한 아이야! 정확하게 두어 마디만 하면 그 애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니까. 한동안 로리와 벌인 논쟁을 끝내 버리려고 정말 깜짝 놀랄 일을 저지르고 말았어. 전집의 제1권을 내가 쓰겠다고 말한 거야. 로리는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았고 편집위원회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어. 물론 최종적인 결정은 없을 것 같아. 동화 구상을 하는 것말고도 (난 가능하면 빨리 이야기를 끝내고 싶어)초록색 풀오버도 떠야 하니까. ## 보통 때처럼 토요일과 일요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어. 토요일에는 날씨가 화 창했어. 그래서 제프와 나는 시골로 소풍을 가기로 했어. 공기가 차가워서 몸을 찌르는 것 같더군. 도리는 자동차를 타고 싶지 않아서 소풍을 가지 않겠다고 했어. 훌쩍거리며 울기까 지 했어. 중도에 제프는 차를 세우고 도리더러 차에서 내리라고 했어. 그리고는 개를 좋아 하니까 차 트렁크에 타고 가면 어떻겠냐고 물어 보았어. 그 애를 트렁크 안에 태우고 나서 야 우리는 조용히 여행할 수 있었어. 우리가 잡담을 나누는 도안에 가끔씩 자동차 뒤쪽에서 강아지가 힘없이 짖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 왔어. 우리는 웃었어. 꼬마 도리는 그렇게 재치 가 있다니까. 자기가 진짜 개가 된 체한 거지. 시골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어. 난 제프에게 동화 전집에 들어갈 책을 쓸 계획이라고 말했 어. 제프는 아주 좋아했어. 이야기를 만들어 내려고 애쓰지 말고 도리의 이야기를 쓰는 게 어떻겠냐며. 정말 좋은 생각이야. 도리의 이야기가 바로 진짜 동화처럼 해피엔딩이니까. 일요일에는 날씨가 좋지 않았어. 제프는 아침 일찍 나갔어.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일을 해내니까. 도리는 점심때가 거의 다되어서야 일어났어. 그 래서 난 오전 내내 작업을 할 수 있었어. 오후에 난 도리에게 흰색 작은 노트를 주면서 동 화 쓰는 일을 좀 도와달라고 했어. 그 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연필을 집어들고 구석 에 가서 앉았어. 그 애가 심각한 어린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며 글을 쓰는 동안 난 뜨개질을 했어. 이번 주 안에 풀오버는 완성될 거야. 저녁 식사를 하기 바로 전에 작은 마찰이 있었 어. 소매 길이를 재보기 위해 도리에게 옷을 한번 입혀 보려고 했는데 그 애는 내 말을 듣 지 않았어. 그렇다고 이렇다 할 말다툼을 한 것은 절대 아니었어. 그저 내가 팔 길이를 재 보려고 불렀더니 그 애는 자기 팔을 내놓지 않고 몇 번이고 인형에서 떼어낸 팔을 내미는 거였어. 그래서 원한다면 풀오버를 다 뜬 다음에 인형 옷도 똑같이 하나 만들어 주겠다고 말했더니 그제서야 작은 팔을 내밀어서 간신히 옷을 입혀 볼 수 있었지. 제프는 저녁 식사시간에 집에 돌아오지 않았어. 오늘 저녁은 식사 대신 뜨거운 물을 마시 는 저녁이야. 물을 마시면서 도리는 약간 박하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했어. 그 애가 침대 에 누웠을 때, 발레 수업 참가 신청서에 서명을 해주어야 한다는 사실이 생각났어. 난 신청 서를 접어서 침대 맡의 책상 위에 놓아두었어. "내일 아침에 아빠에게 서명해 달라고 하자. " 그 애에게 말했어. 그리고 다른 날처럼 그 애의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어. 제프는 내가 잠자리에 들고나서야 집에 돌아왔어. 날 깨우지 않으려고 어둠 속에서 조심조 심 걸어 들어오는 그의 발소리를 들었어. 난 눈을 감은 채, 잠이 깼으니까 불을 켜도 된다 고 투덜거리듯 말했어. 그는 불을 켜고 옷을 벗은 다음 곁에 누워 내 얼굴을 쓰다듬었어. 난 계속 동화 생각을 하고 있었지.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할지, 적당한 첫마디를 찾을 궁리 만 하고 있어. ## 안녕, 일기야. 다시 월요일이구나! 정신과 의사들은 월요일 같은 날에는 일종의 증후군 이 존재한다고 말하지. 주말의 느슨해진 기분 때문에 모든 감각들이 마비되어, 새롭게 한 주일이 시작되었는데도 다시 활동하기를 거부하기도 한다는군. 난 의사들의 말이 맞을까 봐 두려워! 사실 오늘 아침에 난 냉장고 옆에 있는 선반과 정면으로 부딪혔어. 말할 것도 없이 선반의 모서리에 부딪힌 거지. 관자놀이 주위가 찢어져 피가 흘렀어. 도리가 깨기 전에 얼 음으로 피를 멎게 해보려고 애를 썼어. 제프는 벌써 일어나서 목욕탕에 있었어. 도리가 부 엌에 왔을 때 난 그 애에게 발레학교 신청서를 상기시켜 주었지. "아침 먹고요. " 하지만 아침을 먹고 나서도 그 애는 아버지에게 가려고 하지 않았어. 난 할 수 없이 그 애 를 목욕탕 문 앞까지 데려다 주고 그 작은 손가락으로 문을 두드리게 해주었지. 제프는 문 두드리는 소리를 금방 알아듣지 못했어. 면도를 하면서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있었거 든. 마침내 목욕탕 문이 열렸어. 제프가 너무나 힘차게 문을 열었기 때문에 하마터면 도리가 앞으로 넘어질 뻔했어. 두 사람만 남겨 두고 난 옷을 갈아입으러 갔어. 치마 지퍼를 올릴 때 제프가 큰소리로 몇 번이나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어. "대체 입이 붙어 버린 거야, 아니면 벙어리야? " 도리는 겨우겨우 용기를 내서 신청서에 아버지 서명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겠지. 유쾌하게 왈츠 음의 박자에 맞추어 노래하는 제프의 목소리가 들려 왔어. 목욕탕 앞을 지나면서 안쪽 을 슬쩍 들여다보니 두 사람이 춤을 추고 있었어. 그는 건장한 팔로 도리를 들어올려 공중 에서 빙빙 돌려주었어. 땅에 내려놓았다가 또다시 안아 올려 허공에서 빙빙 돌려주었어. 이 렇게 한 십여 분 정도 장난을 치다가 제프는 보통 때보다 출근 준비가 늦었다는 것을 깨달 았던 모양이다. 그는 나와 아이에게 인사를 하고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나갔어. 난 욕실로 들어갔지. 도리는 아직도 욕조에 누워 있었어. 흥분하고 기진맥진한 모습이었어. 그 애의 눈빛을 보니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학교에 갈 수 없을 것 같았어. 난 다시 한번 결석을 허 락했어. 세상이 곧 끝나 버리는 것도 아닌데, 뭐! 게다가 나 역시 오늘 사무실에 나가지 않 기로 했어. 로리가 내 관자놀이의 상처를 보고 또 그 의사를 찾아가 보라고 충고하는 소리 를 듣고 싶지 않았거든. 도리의 풀오버를 마무리하고 인형의 스웨터를 뜰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거야. 첫 번째 소매를 꿰매고 두 번째 소매를 거의 다 꿰매 가고 있는 중이었어. 도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 못했지. 그런데 발레 복을 입어 보고 싶다고 했어. 옷을 입히느라 난 뜨개질을 미루어 놓았지. 도리는 팔다리를 움직일 수도 없게 지쳐 있었어. 애가 이렇게 될 정도로 흥분시키 지 말라고 제프에게 일러두어야겠어. 도리는 너무나 예민한 아이여서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도 곧잘 흥분하니까. 사실 타이츠를 입히자마자 그걸 더럽혀 놓았어. 아기 때처럼 타이츠에 변을 보았던 거야. 그러더니 옷 앞에 달린 레이스 장식에다 구토를 했어. 난 젖은 걸레를 가져 와서 모두 닦아주었어. 세면대에 도리의 입을 갖다 대자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어. 그래서 피도 닦아주었어. 도리가 너무 많이 먹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난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내가 그 애 쪽으로 몸을 숙였을 때 벌써 잠이 들어 있었어. 참아야 지, 가끔씩은 눈을 감는 법도 배울 필요가 있어. 이런 짬을 이용해서 동화를 좀더 써야겠 어. 물론 이야기는 쓰레기통 속에서 아이를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될 거야. 하지만 끝은? 혹 시 도리의 노트 속에서 좋은 생각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노트를 찾아보아야겠어. 사람들은 괴물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괴물은 아직도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아 빠는 낮에는 변호사이지만 밤에는 괴물입니다. 난 잠을 잘 때 문이 열려 있는 것이 두려워 테디를 꼭 끌어안고 잡니다. 테디는 내 작은 곰인형인데 우리는 오래 전 에 친구가 되었습니다. 테디는 헝겊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내가 테디에게 적당한 말 을 하고 가슴에 입을 맞추어 주면 그는 생기를 띠고 다른 그 어떤 것보다 힘이 쎄집니다. 매일 밤 테디는 괴물이 찾아오면 나를 지켜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매일 아침 나는 우리가 어른이 되면 함께 달아나자고 약속합니다. 달콤한 뽕나무 열매와 발을 적시는 꿀을 찾아 숲 속을 여기저기 헤매 다닐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행복하게 끝나는 동화 속의 주인공들처럼 행복할 겁니다. 러 브 모든 일은 그 아이가 잠든 사이에 벌어졌다. 강으로 나간 새끼 고양이를 잡을 때처럼, 자 루 하나가 아이의 머리 위에 씌워졌다. 그리고 나서 아이를 담은 자루는 트럭에 실렸다. 트 럭 위에는 다른 자루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들은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대체 어 디로? 아무도 몰랐다. 아주 어린아이들은 훌쩍거리며 울었고 어른들은 큰소리로 다투었다. 몇 시간을 달리다가 트럭이 멈췄다. 주위에서는 귀뚜라미가 울었다. 여전히 한밤중이었고 시골 이었다. 얼굴을 가린 남자가 트럭 뒤로 올라왔다. 그는 트럭 안의 사람들을 보고 바닥에 누 우라고 했다. 그리고 큰 천으로 사람들을 덮어 씌웠다. 남자는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꼼짝하지 마. 아무 소리도 내지 마. 기침을 하거나 웃어서도 안 돼. 누가 올라와서 뭐라 고 해도 숨도 쉬지 마. " 그런 다음 천 위에 건초 더미를 흩어 놓았다. 거기서 조금 더 가서 트럭은 멈춰 섰다. 다 시 시끄러운 소리들이 들렸다. 시동을 걸었다 껐다 하는 소리, 삐걱거리는 바퀴 소리, 클랙 슨 소리, 큰소리로 떠드는 사람의 목소리. 정말 한 남자가 트럭 위로 올라오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운전사는 침착하게 천천히 대꾸했다. 질문을 하던 남자도 트럭에서 내리면서 웃어댔는데 두 사람은 마치 오래 된 친구라도 되는 듯했다. 트럭은 계속 여러 시간을 달렸다. 그들이 트럭에서 내렸을 때는 다시 밤이었다. 서로 바짝 붙어 있던 그들은 모두 아주 작 은 아파트 안에 갇혔다. 잠이 깬 어린아이들은 다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 아파트에서 약 한 달간 머물렀다. 키가 크고 콧수염이 난 남자 하나가 그들과 함께 생활했다. 사람들은 그를 드라고미르라고 불렀다. 그 남자는 어떤 때는 친절했고 또 어떤 때는 그렇지 않았다. 화가 나면 목의 힘줄이 다 튀어나올 정도로 고함을 질러대고 주 먹질과 발길질은 예사였다. 이런 일은 특히 수업 시간에 자주 벌어졌다. 가방을 여는 법과 손목에서 시계를 끌러 내는 것을 배웠다. 그가 가방을 들고 있거나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고 다른 아이들은 모두 그의 주변에 달라붙어 있었다. 선발된 학생은 그 한가운데로 천천히 지 나가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가볍게 스치면서 물건을 훔쳐내야만 했다. 아주 어린아이들이나 겁이 많은 사람들은 실수를 했다. 만약 지갑을 빼내기 전에 손가락의 움직임이 느껴지면 드 라고미르는 소리를 지르며 몸을 돌렸고, 바로 학생의 목덜미를 잡았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 에게 본때를 보여 주기 위해 그 학생을 피가 날 정도로 두들겨 팼다. 소매치기 연습을 완벽 하게 다섯 번 해낸 사람은 아파트를 떠나야만 했다. 자기 발로 걸어서 혼자 나가는 것이 아 니라, 번쩍번쩍 윤이 나는 검은색 큰 차를 운전하는 묵묵하고 세련된 남자를 따라 나갔다. 일주일이 지나자 어느새 뛰어난 학생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뒤 3주 간격으로 몇 명씩 떠났다. 아이 역시 그 큰 자동차에 올라탔다. 알렌카, 미란다, 보고슬라브가 아이와 함께 자동차 를 탔다. 그들은 아주 먼길을 갔다. 가도 가도 끝이 없었고 자동차는 속력을 내서 달렸다. 차는 식당 앞에서 멈추었다. 아파트가 있던 도시보다 훨씬 더웠다. 남자는 그들을 차에서 내리게 하고 캐러멜과 아이스크림과 빵을 사주었다. 마치 친자식이라도 되는 듯이 그들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사주었다. 식당 종업원 앞에서는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 다. 새 도시는 아파트가 있던 도시보다 훨씬 더 컸는데 집들의 모양이 모두 똑같았고 나무도 별로 없었다. 그들은 여러 천막을 전전했다. 아이는 맨 마지막에 차에서 내렸다. 아이는 이미 석 달 전부터 긴 머리에 날개 달린, 백색 돌 거인들이 사는 그 다리 위에서 일을 했다. 아이는 두꺼운 종이를 손에 들고 다리 위를 왔다갔다했다. 다리에서 일을 시작 한 뒤로 아이는 지나가던 엄마들이 자기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다. "봤지? 조심해야 돼. 그렇지 않았다가는 집시들이 널 데려가 버릴 거야. " 아이는 아무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이미 집시였던 자신을 멀리 떨어진 이곳으 로 데려온 사람들은 누구일까? 베스나는 열 살이었고 언청이였다. 아이는 유고슬라비아 남쪽의 어느 부족 출신이었다. 아이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는 아이 말고도 벌써 열 명의 자녀가 있었다. 언청이인 입 때문 에 절대 결혼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겨울이 오기 전에 아이의 부모들은 스노우 타이어 두 개를 받는 대가로 어떤 상인에게 딸을 팔아 넘겼다. 새 집은 아이가 떠나온 집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었고 많은 형제 자매가 있었다. 아버지 미르코는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일했고, 츠베차라는 이름의 어머니 는 아주 어린 자식들과 함께 시내로 나가 구걸을 했다. 하지만 밤이 되어, 모두들 불가나 텔레비전 주위에 모여 앉을 때 베스나는 그 누구의 곁에도 가까이 다가가 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이는 자기가 친딸이 아니라는 것과 서로 다른 부족이며 피붙이 하나 없이 이곳에 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미르코와 츠베차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매일 저녁 아 이가 주머니 가득 돈을 가지고 돌아오는 일뿐이었다. 아이를 맞는 것은 언제나 미르코였다. 그는 천막 앞에서 한 손을 뻗은 채 아이를 맞았다. 돈을 많이 벌어온 날은 죽 한 사발을 주었고 그렇지 않으면 마구 때리며 고함을 쳤다. "이 갈보년, 네가 지금 호텔에 사는 줄 알아? 우리가 지금 호텔에 살고 있냐고? 그랜드 호 텔에 살고 있냐고? 그랜드 호텔에 사는 거냔 말이야! " 어떤 날 밤이면 미르코는 친구들과 나가서 잔뜩 취해 돌아왔다. 그러면 아이는 두 손으로 이를 덜덜 떨었다. 너무나 이가 세게 떨려서 멈출 수도 없었다. 아이의 친아버지도 그와 똑같았다. 그럴 때면 아이는 아버지가 손을 못 대게 재빨리, 아주 날쌔게 도망을 쳤다. 토 끼처럼 깡충깡충 뛰어서 강 쪽으로 달아났다. 강가에서, 관목들 속에 몸을 숨기고 새벽이 찾아오길 기다렸다. 강! 아이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강이 몹시 그리웠다. 강가는 너무도 아름다웠는데! 겨울 이면 두꺼운 얼음이 얼고 그 밑으로 강물이 흘렀다. 봄이 되면 얼음이 깨져서 여기저기서 얼음덩이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쩡쩡 울려 왔다. 검둥오리들이 있어서 그 알을 깨뜨려 먹기 도 했다. 싸우기 좋아하는 물오리도 한 쌍 있었다. 그리고 즙이 많은 과일들을 따먹을 수도 있었다. 여름에는 물이 차가워 사람들이 미역감으러 갔고, 그 고장 여인들은 빨래를 하러 가서 라디오처럼 쉬지 않고 수다를 떨어댔다. 지금 아이가 있는 다리 밑에도 강이 있었다. 약간 누런 빛깔의 강물이 천천히 흐르는 큰 강이었지만, 아무리 바라보아도 강은 아이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슬플 때면 눈을 감았다. 그러면 그 강물 소리는 다른 강물들의 소리로 변했고, 마치 따뜻한 피가 심장 의 안쪽을 지나 아이의 온몸을 휘감아 돌아 내부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아이 는 늘 슬펐기 때문에 거의 매일 이런 놀이를 했다. 여름이 성큼 다가온 그날 아침에도 아이는 그 놀이를 하고 있었다. 날씨는 벌써 아주 무 더웠다. 아이는 햇볕을 피하기 위해 그늘진 구석에 가서 똑바로 섰다. 그 시간쯤에는 지나 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조용히 고향의 강과 강물 옆 에 만발한 꽃들과 그 안에 숨은 개구리들을 생각할 수 있었다. 도로 위를 지나는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누군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 다. "꼬마야, 어디 아프니? " 아이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지 않았다. 곁에는 틀림없이 어린 딸을 데리고 지나가 던 어떤 아버지가 서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 후 어떤 손 하나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 다. 그래서 베스나는 눈을 뜨고 그를 보았다. 흰색 셔츠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는데, 머리 칼은 약간 회색 빛이 감돌았다. 그 남자는 다시 같은 질문을 했다. 베스나는 이렇다 저렇다 대꾸하지 않았다. 강을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한 손을 뻗으며 앞으로 뛰어 나가 이렇게 읊었다. "아저씨와 아저씨 가족들에게 건강과 행운이 가득하길 빌어요. " 그 남자는 미소를 지었고 결투를 하기 전에 남자들이 상대방을 바라보듯이, 또 속마음을 읽기라도 하려는 듯이 똑바로 서서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이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으 며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동전 두세 개를 꺼냈다.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손바닥에 직접 동전을 놓아주었다. 그렇게 하느라 아이의 손바닥에 그의 손이 닿았 다. 다리에는 여전히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왔던 길과는 반대 방향으로, 아주 느리게 걸어갔다. 발 밑의 아스팔트는 뜨거웠다. 아이가 남자를 부를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 남자를 쫓아 가서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핑계를 대고 동전 몇 닢을 더 구걸할 수도 있었다. 그 사이 해가 움직여 다리 위 천사 조각상의 그림자가 다른 쪽으로 옮겨가고 말았다. 그날 저녁에는 돈을 많이 가져 갈 수 없었다. 미르코는 아이를 두들겨 팼다. 아이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서 한 쪽 손바닥을 뺨 위에 얹었다. 느낌만은 절대 아니었다. 그 남자가 만졌던 손은 정말 아주 따뜻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 뒤 며칠 동안은 그 남자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는 그 남자를 다시 보게 되었다. 아이가 사는 천막 근처에 세워진 커다란 광고판 위에 그가 똑바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 에는 많은 글씨가 씌어져 있었다. 원래 모습과는 달리 그는 검은 콧수염을 길렀고 하얀 셔 츠 위에 권총을 찼다. 옆에 세탁기라든가 냉장고 같은 것도 없었고 손에 아무 것도 들고 있 지 않았다. 무엇을 팔기 위한 광고가 아니라 영화 같았다. 그는 분명 영화배우일 것이다. 눈빛으로 보아 영화배우가 틀림없었다. 그 다리를 지난 게 그날이 처음이었을까? 처음이었던 게 분명했다. 그 전에는 한번도 그 를 본 적이 없으니까. 어쩌면 그 남자도 베스나처럼 외국인일지도 모른다. 야자나무들이 서 있는 큰 호텔에서 살았거나 순백의 해변에서 반나체의 무희들에게 둘러싸여 살았는지도 모 른다. 아이의 입술을 보았을 때 그 남자는 웃거나 피하지 않고 가만히 만졌었다. 어느 날 오후 츠베차는 직접 아이를 데리고 시내로 나갔다. 그들은 커다란 호텔 앞을 두 서너 번 왔다갔다했는데 그때마다 베스나는 안쪽을 살펴보았다. 택시 안도 일일이 살피고 검은 유리가 달린 자동차의 안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열흘이 지났는데도 그 남자의 손이 스쳤을 때처럼 손바닥은 따뜻했다. 잠이 들기 전에 손 을 뺨 위에 올려놓았다. 무방비 상태의 작은 그 무엇, 새끼 고양이나 헝겊 곰이라도 되듯이 그 손을 뺨 위에 얹어 두었다. 이제 다리 위에 있을 때 눈을 감지 않았다. 강물은 이미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피곤 에 지쳐 있을 때에도 한밤중의 올빼미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6월말쯤에 도시에 소나기가 퍼부었다. 여행객들은 색색 깔의 비닐을 몸에 감고 가방으로 머리를 가렸다. 하늘은 아이가 고향 의 어느 교회에서 보았던 그림에서처럼, 검붉은 빛이 감도는 회색이 었고 사방에서 노란 번개가 내리쳤다. 이런 폭풍 속에서는 크고 힘이 센 천사 조각상들도 아무 도움이 안 되었다. 빗물이 머리에서 목을 타고 흐르는 동안 아이는, 남자의 손길이 스쳤던 손이 나머지 손처 럼 축축하고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천막으로 돌아가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기 때문 에 그 손을 다시 따뜻하게 만들 여유는 있었다. 영화관이 있는 거리에서 비는 우박으로 변 했다. 신발이 다 젖어 버려서 두 짝을 모두 벗어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바로 아이가 원하 던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권총을 찬 키가 큰 남자가 거기, 영화관 앞의 포스터 위에 있 었다. 매표소 앞에서 아이는 동전 두 주먹을 꺼냈다. 매표소에 앉아 있던 여자가 동전을 하 나하나 세더니 고개로 들어가라는 시늉을 하고 푸른색 입장권을 한 장 주었다. 극장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아이는 맨 앞줄에 앉아 두 다리를 앞으로 뻗었다. 그러고 있으니 마치 배우들이 자신에게만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는 경찰관이었고 이름은 〈심판관〉이었다. 진짜 이름이 아니라, 그가 정의롭게 행동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붙여 준 별명이었다. 그는 총을 쏘고, 주먹을 휘두르고, 또 내달렸다. 그처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동 차들이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사방에 부딪힐 때 그 아이는 거의 토할 뻔했다. 하얀 셔츠의 남자가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그가 악당들을 모두 물리쳤다. 영화는 세 번 끝났다가 세 번 다시 시작되었다. 베스나가 다리의 교차로에 도착했을 때는 아이들을 천막으로 데려가는 자동차가 이미 떠나 버린 뒤였다. 비는 더 이상 오지 않았지만 바람이 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했다. 생각에 잠겨 그저 다리 주 변의 거리를 왔다갔다할 뿐이었다. 아이는 여자 양말을 파는 상점의 진열대를 바라보다가 등뒤에서 갑자기 자동차가 삐익 하 며 멈추는 소리를 들었다. 어떻게 찾아냈을까? 미르코였다. 자동차 문이 열렸을 때도 아이 는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손 하나가 아이를 차안으로 잡아끌었다. 미르코는 이를 악 물고 무슨 말인가를 하더니 아이의 얼굴과 언청이 입술을 후려쳤다. 아이는 처음으로 자신 에게도 이빨과 코와 잇몸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들은 마치 나무토막처럼 무감각하게 붙어 있었다. 입안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서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이는 시끄러운 쇠사슬 소리에 잠이 깼다. 그것은 발목을 쇠기둥에 묶어 놓은 쇠사슬이 었다. 옆에 있는 커튼 너머에서 츠베차와 미르코와 그들의 아이들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들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이는 통증이 좀 덜한 쪽으로 누웠다. 무엇을 원했지? 아무 것 도 원한 게 없었다. 그 아이가 바란 것은 그저 영화가 끝난 다음에 한 손이 다른쪽 손보다 조금 더 따뜻해지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아이는 잠을 아주 많이 잤고 꿈도 많이 꾸었다. 경찰서장의 명령을 받은 그가 한 손에는 기관총을, 또 다른 손에는 단검을 들고 천막에 왔 다. 아무도 도망칠 수 없었다. 미르코도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총성이 들린 다음 침묵이 찾아들었다. 갑자기 불빛이 아이의 얼굴에 비쳐 왔다. 그였다. 그는 아이의 팔을 잡았다. 정말 불빛이 비쳤다. 하지만 그것은 츠베차가 쇠사슬을 풀어 주려고 비춘 불빛이었다. 아이는 바로 그날 그 다리 위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어느새 여름이었다. 많은 관광객 들이 지나갔다. 그들은 풀밭에 몰려다니는 양떼들같이, 고독하게 걸어 나가는 사슴 떼처럼 나란히 붙어 다녔다. 베스나는 손에 두꺼운 종이를 들고,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접 근했다. 돈을 주지 않으면 훔쳐 낼 생각이었다. 어느 날 아침 아이의 자리 앞에 흑인 한 사람이 자리를 잡았다. 그는 목걸이와 플라스틱 코끼리를 팔았다. 손님들이 있을 때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아이에게 눈길을 건넸고 단둘 이 있을 때는 아이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너무나 빠르게 말을 했기 때문에 아이는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한번은 그가 아이를 힘차게 끌어안았다. 그래서 아이는 주먹을 날려 배를 한 대 후려쳤다. 작은 주먹이었다. 머리로 생각한 주먹과 진짜 손으로 만들어 낸 주먹은 너무 차이가 컸다.'퍽'소리가 났다. 흑인은 웃으면서 배를 문질렀다. 아이가 원했던 것은 훨씬 더 센 주먹이었다. 대체 관광객들은 무엇 때문에 한밤중에도 떼지어 돌아다니는 걸까......밤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밤눈이 밝은 숲속의 동물들만이 밤에 활동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관광객들 은 밤에도 낮과 다름없이 돌아다녔다. 대부분 젊은이들이었다. 함께 몰려다녔고 때로는 서 로 부둥켜안기도 했다. 잘 부르지도 못하는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불러대기도 했다. 취한 것 같기도 했고 실제로도 취해 있었다. 다리 위에 술 냄새를 길게 남기고 갔다. 아이는 그들을 따라가서 구걸을 했다. 그들은 아이가 구걸하는 소리를 못 들은 체하거나 다른 쪽으로 돌아 갔다. 내기를 할 때처럼 동전을 공중에 던졌다. 아이가 동전을 주우려고 몸을 숙이면 그들 은 금방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불이 켜져 있는 동안은 사람들이 떼지어 강물처럼 왔다갔다 했다. 그 뒤에는 한 번에 몇 명씩 지나가기도 했다. 한 무리가 지나가고 다른 무리가 지나 갈 때까지는 약간의 간격이 있었다. 바로 이 휴식 시간에 흑인이 다가와서 작은 반지를 하 나 주면서 말했다. "너하고 난 약혼한 거야. " 그러더니 아이의 입안에 자기 혀를 들이밀었다. 아이가 이를 악무는 바람에 흑인의 혀는 아이의 이빨 사이에 물리고 말았다. 그러자 흑인이 거세게 아이의 뺨을 후려갈겼다. 아이의 머리가 반대편으로 휙 돌아갔다. 하지만 흑인은 더 이상 아이를 때리지 못했다. 발소리도 들리지 않게 조용히 누군가가 다 가와서 흑인의 팔을 움켜쥐며 가로막은 것이다. 그의 셔츠는 흰색이었고 넓었다. 그가 한 손으로 아이의 얼굴에서 머리카락들을 떼어 주었을 때 아이는 가슴이 철렁했다. 가슴이 쿵 쾅거렸다. 마치 심장이 목 위로 튀어 올랐다가 밑으로, 무릎 밑으로 툭 떨어지는 것 같았 다! 그 사람이었다. 〈심판관〉,바로 그 사람이었다. 흑인이 사라지자마자 그는 다리 위에 혼자 있으면 안 된다고 우겼다. 아이는 하늘을 쳐다 보았다. 달이 떠 있는 위치로 가늠해 보니, 한참을 기다려야 자동차가 데리러 올 것 같았 다. 아이는 유순하게 남자를 따라 근처에 있는 바로 갔다. 야외 바의 테이블에는 많은 관광 객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관광객들 한가운데에 앉았다. 남자가 무엇을 좀 마시든지, 아 니면 뭘 좀 먹겠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비록 콧수염은 없지만 당신이 누구인지 잘 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는 아이를 위해 생크림을 얹은 커다란 아이스크림과 비스킷을 시켰고 자 기는 노란빛이 도는 술을 시켰다. 그리고 많은 질문을 했다. '엄마는 계시니? 아빠는? 태어 난 곳이 어디니? 학교는 다녀 본적이 없니? 정말 예쁜 아가씨 같구나. 그런데 진짜 나이는 몇 살이지? 이탈리아어를 할 줄 아니, 아니면 집시들 말밖에 모르니? 혹시 말을 못하는 것 은 아니겠지? ' 이런 말을 하면서 그는 아이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 사이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아이스크 림은 아이 앞에서 눈처럼 녹아 내렸지만 그것을 먹을 용기가 전혀 나지 않았다. "무슨 맛이 나는지 볼까." 그가 이렇게 말하고는 숟가락으로 생크림을 하나 가득 퍼서 아이의 입술에 갖다 대었다. 그렇게 하는 모습이 마치 엄마 지빠귀가 강가의 관목 숲 속에 있는 새끼 새들에게 먹이를 주는 것 같았다. 그 아이는 자신도 새끼 새가 아닐까 궁금했다. 아이는 입을 벌렸다. 그것 은 끈끈하고 달콤해서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아도 목으로 술술 넘어갔다. 술잔이 비었을 때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이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그를 다시 다리 위로 데리고 왔다. 그들은 조금 더 기다렸다. 달이 다시 지평선 쪽으로 더 기울 었다. 아이는 자동차가 벌써 지나가 버렸다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행히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새벽이 될 때까지 여기 있어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다고. 그들은 다 시 다리를 건넜다. 그의 집에는 육중한 가구들과 아주 큰 텔레비전이 있었다. 그는 아이를 소파에 앉혀 놓고 텔레비전을 켰다. 그리고 자기는 다른 방으로 사라졌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쥐들을 쫓던 고 양이가 아주 높은 궁전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아래로 떨어졌을 때 그가 돌아왔다. 그 는 안에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 외투같이 생긴 것을 걸치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목욕하고 자자. " 그러더니 아이를 소파에서 안아 올렸다. 그의 냄새는 미르코의 것과는 달랐다. 두려움이 아니라 핥아 보고 싶은 욕망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옷을 벗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고 싶어했다. 외투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변기 위에 앉았다. 베스나는 한번도 욕조에서 목욕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안에 들어가 있다가 마개가 열리면 어디로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일까? 그가 도와주었다. 부드러운 스펀지로 아이의 등과 배를 문질러 주었다. 스펀지가 아이의 두 다리 사이로 지나갔다. 머리도 감겨 주었다. 물 속에 머리카락을 풀어놓아 머리카락이 날개처럼 퍼졌다. 그리고 나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몸 으로 밖으로 나오자 그가 수건으로 감싸주었다. 그는 가끔씩 손놀림을 멈추면서 천천히 아 이의 몸을 닦아주었다. 집안에는 아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밝은 방이 하나 있었다. 한가운데에는 작은 침대가 놓여 있었고 주변에는 장난감들이 많았다. 심판관은 아이를 그 방으로 데려갔다. 둘 다 아 무 것도 걸치지 않았다. 심판관은 아이를 이불 속에 눕혔다. 그리고 나서 책을 한 권 집어 동화를 읽어 주기 시작했다. 종이로 만든 외다리 발레리나를 사랑하는 외다리 종이 병사의 이야기였다. 남자의 입술이 아이의 입술 위에 포개졌다. 어렴풋이 잠이 들었던 아이는 흠칫했다. 아이 는 몸을 둥글게 구부렸다. 동화는 그렇게 끝나 버리고 말았나? 한밤중에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아이는 새끼 고양이였다. 엄마 고양이의 따뜻한 혀가 아 이의 몸을 앞뒤로 닦아주었다. 아이는 온몸을 떨었다. 그렇지만 다리 위에서 추위에 떨 때 와는 달랐다. 마치 미지근한 강물이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오기라도 하듯이 몸을 떨었다. 다음날 아침 〈심판관〉은 다리에서 약간 떨어진 곳까지 아이를 데려다 주고 갔다. 떠나 기 전에 천 리라 짜리 지폐 두 장을 아이의 주머니에 찔러 주었다. 아직 관광객들의 모습 이 보이지 않고 일터로 나가는 사람들만 분주히 지나가는 것으로 보아서 다른 날처럼 제시 간에 다리에 도착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날도 다른 날과 똑같이 보냈다. 아니, 똑같지만은 않았다. 사람들의 셔츠 사이로 흰 셔츠가 불쑥 튀어나오면 아이의 심장은 터질 듯이 두근거 렸다. 아이는 남자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 역시 다시 오겠다 거나 기다리라는 말을 하 지 않았다. 한번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 다시 또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의 체취는 아침에 빵집 앞에서 맡던 냄새와 비슷했다. 밤이 되자 정각에 자동차를 타는 곳으로 갔다. 먼저 뒷좌석에 탄 아이들은 벌써 잠시 들 어 있었다. 다시 그 자리에 나타난 아이를 보고도 운전사는 주시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리 고 다른 날 밤처럼 재빠르게 시내로 차를 몰았다. 아무도 아이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눈치채 지 못했던 것일까? 틀림없이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천막 안에 들어갔을 때 미르코는 아이를 때리지 않았 다. 형제들이 소리지르면 달려와 아이의 무릎에 달라붙었다. 하지만 그렇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모두들 자기 짚더미 위에 가서 누웠을 때 미르코가 아이의 곁으로 다가왔다. 낮은 목소리로 말을 했지만 아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바 지 지퍼를 내리고 한 손을 그 안에 집어넣었다. 아이의 옆에 누운 그가 아이의 귀를 아플 정도로 깨물었다. "갈보, 꼬마 갈보 년아, 다른 놈들 것도 들어갔으니 내 것도 들어가야지. " 그러더니 아이 위에 올라타고 치마를 들어올렸다. 처음 시도했을 때는 들어갈 수가 없었 다. 두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힘을 써서 아이의 두 다리를 쫙 벌려 놓았다. 그리고 열쇠가 없는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발길질을 해서 문을 부수고 들어가듯이 아이의 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왔을 때 무엇인가가 찢어졌고 찢어지고 있었다. 앞으로 가면 갈수록 더 많은 불 길이 타올랐다. 더 거세게 훨훨 타올랐다. 그럴 때마다 나가 주길 바랐지만 뜻대로 되지 않 았고, 미르코의 그것은 절대 나가려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더 이상 나가 주길 바라는 희망마저 잊었을 때 모든 것이 끝났다. 그는 죽은 사 람처럼 아이의 몸 위로 쓰러졌다. 잠시 후 지퍼가 열린 바지 차림 그대로 그는 자기 마누라 가 누워 있는 침대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베스나는 다시 다리 위로 나갔다. 어젯밤에 당한 일 때문에 두 다리를 꼭 붙 이고 다녀야 했다. 손님을 쫓아 달려갈 때면 몸 안쪽이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아픈데다가 정신까지 산만해 며칠 동안은 보통 때보다 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하지만 미르코는 이제 아이를 때리지 않았다. 때리는 대신 다른 짓을 하고 싶어했다. 아 이는 미르코를 〈심판관〉이라고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그의 체취를 느끼고 털이 나고 탄 탄한 그의 등을 보고 있다고 상상했다. 어떤 때는 상상을 하는 것도 너무나 피곤했다. 그러 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바닥에 흩어진 물건들을 하나 둘 셌다. 하얀 셔츠가 그렇게 많이 지나갔건만 그의 것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 까? 어쩌면 지금 위험한 임무를 맡아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사이 아이는 그에게 다른 이름을 붙여 주었다. 며칠 전에 다리 옆에 새로운 광고판이 하나 세워졌다. 팬티와 브래지어만 걸친 아가씨가 손에 하트 모양의 풍선을 들고 발끝으로 그 위에 서 있었다. 그 옆에 입술처럼 빨간 글자로 무엇인가가 적혀 있었다. 아이는 글을 읽을 줄 아는 꼬마에게 그게 무슨 글자냐고 물어 보았다. 〈러브〉라고 꼬마가 대답했다. 러브는 마음이었고 아이가 마음속으로 그에 대해 느끼는 어떤 것이었다. 러브, 러브...... 아이는 몇 번이나 중얼거렸고 며칠 동안 무슨 노래나 되는 듯이 불러댔다. 어느 날 밤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미르코는 아이의 마음은 딴 데 가 있고 몸만 내맡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몹시 화를 내더니 마구 두들겨 팬 다음 아이를 테이블 모서 리와 가스통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러더니 자기 물건을 아이의 입에 집어넣고 구역질 나는 정액을 사정해 버렸다. 아이는 그가 보는 앞에서 구토를 했다. 그리고 혼자 남아 있을 때 또 한번 토해 냈다. 아이는 울고 싶어서 눈을 꼭 감았다. 눈을 꼭 감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 었다. 다음날 아침 다리 위에서 아이는 어릴 때부터 알고 있던 마술을 걸어 보기로 했다. 〈러 브〉라고 말을 하고 여러 번 둥글게 침을 뱉었다. 큰 것을 원하지 않고, 진심으로 원하면 마술이 걸렸다. 마술이 걸렸다. 점심 시간이 되기 직전, 하얀 셔츠의 그 남자가 나타났다. 아무 데도 갈 곳 없는 사람처럼 터덜터덜 걸어오는 사람은 바로 그였다. 그런데 그는 아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가 버렸다. 혹시 마술에 걸려 무엇인가 잊어버림 것일까? 그래서 아이는 러 브에게 소리쳤다. 화살 같기도 하고 칼날 같기도 한 외침은 그의 등 한가운데에 가서 꽂혔 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다시 아이에게 돌아왔다. 그의 집 부엌에서 그가 두 사람만 먹을 식사를 간단히 준비했다. 아이는 그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선생님이며 아주 먼 곳에 있는 학교에서 기술을 가르친다고 말했 다. 새 영화가 분명했다. 한 영화에서 그는 경찰이었고 다른 영화에서는 선생님이었다. 그는 책을 많이 읽었고 아는 것도 아주 많았다. 경찰이든 선생님이든 그는 힘센 사람이었다. 셔 츠 밑으로 언제라도 금방 힘을 쓸 수 있는 단단한 근육들이 보였다. 식사를 할 때 그는 자기 무릎 위에 아이를 앉히려고 했다. 둥지 속에 들어 있는 새끼에게 모이를 주듯, 아주 천천히 아이의 입에 음식을 넣어 주었다. 그런 다음 목욕을 하라고 우겼 다. 먼저처럼 아이의 옷을 벗기고 자기 옷도 벗었다. 그가 넌 정말 예쁘다고 말했다. 그리 고 한 손으로 아이의 몸을 쓰다듬었다. 등을 쓰다듬다가 엉덩이에서 손을 멈추었다. 물 속 에서 다리를 벌리고 그 안쪽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는 갑자기 겁이 났다. 혹시 우연찮게, 미르코에게도 다리를 벌렸던 것을 눈치채면 어떻게 하지? 절대, 절대 다리를 벌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몸을 숙이고 천천히, 입으로 무엇인가를 찾듯이, 혀로 온몸을 애무했을 때 아이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고 다리는 저절로 벌어졌다. 미지근한 물 속에서 아이는 두 손가락을 몸 속 깊숙한 곳으로 집어넣었다. 변기 위에 앉아 있던 그 역시 두 다 리 사이를 한 손으로 잡고 눈을 감은 채 손을 앞뒤로 움직였다. 욕조에서 나오자 그는 아이에게 잠옷을 입혀 주었다. 아직 해가 높이 떠 있었는데도 아이 를 침대로 데리고 갔다. 밝은 침대가 있고 주위에 장난감이 많이 놓여 있던 지난번의 그 방 이었다. 아이는 외다리 병사의 이야기를 계속 들려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그를 만나지 못했던 몇 주 내내 그 이야기가 어떻게 끝났는지 궁금했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걸 껴안고 자거라. " 헝겊 곰 인형을 손에 들려주었다. 그리고 불을 끈 뒤 소리내지 않고 나갔다. 베스나는 그의 말을 들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든 것처럼 눈을 감 았지만 잠은 멀리 달아나 버렸다. 그가 다시 방에 들어와 아주 천천히 아이의 잠옷을 벗기 고 몸 위로 올라왔을 때도 깨어 있었다. 그는 몸을 심하게 움직이며 여러 가지 말을 했다. 아이는 속으로 이야기했다. "러브, 러브, 나의 러브. " 아이는 그 집에서 나흘을 보냈다. 항상 같이 목욕을 하고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았다. 아이가 잠든 체할 때마다 그는 아이의 몸 위로 올라와 앞뒤로 몸을 움직였다. 둘쨋날 누군 가 벨을 눌렀다. 아이는 미르코가 찾아왔을까 봐 덜컥 겁이 났다. 러브가 문을 열어 주지 않은 것으로 보아 러브도 미르코가 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누구세요'라고 묻 지도 않았다. 가끔씩 전화벨이 울리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러브는 전화를 받기 전에 아이를 다른 방으로 밀어 넣었다. 아이를 방안으로 밀어 넣으면서 조용히, 꼼짝 말고 있어야 한다 고 말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 그는 보통 때보다 일찍 일어났다. 그는 아이가 평상시에 입고 있 던 옷을 입혀 주었다. 조금 앞서 걸으면서 아이를 다시 다리로 데려다 주었다. 몸을 돌려 작별인사를 하지도 않았다. 다시 오겠다는 약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는 이번에는 그 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걸 확신했다. 마지막날 밤 심하게 몸을 움직이면 서 그가 귓속말을 했다. "널 정말 사랑한다, 내 꼬마야. 정말......우리 아기를 하나 만들자. " 러브......아이 역시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영원히 젖을 줄 작은 고양이를 원했다. 마치 한번도 다리를 떠나 보지 않은 사람처럼 아이는 온종일 다리 위에서 보냈다. 달이 높이 떴을 때 아이는 자동차를 기다리는 장소로 갔다. 약간 겁이 나기도 했고 또 아무렇지 않기도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없어졌다고 아이에게 매질을 할까? 수없이 주먹질을 해댈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이는 자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말할 것이다. 곧 결혼을 할 것이 며 그 전에 먼저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것 이다. 혹시 그 자리에서 자신을 위해 파티라도 열어 줄지 모른다. 높이 떠올랐던 달이 기울기 시작했다. 자동차는 오지 않았다. 그 어디에도 자동차를 기다 리는 아이들이 없었다. 달이 벌써 서쪽 하늘로 기울고 있었지만 아이는 여전히 그곳에 꼼짝 않고 있었다. 경찰차 한 대만 속력을 늦추며 지나갔을 뿐이다. 아이는 큰 플라타너스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잠깐 동안 나무 껍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개미 두 마리가 둥글게 원 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들은 소리 없이 서로를 찾는 더듬이들처럼 움직였다. 그들이 아이를 잊어버린다는 게 있을 수나 있는 일일까? 부자들이 많이 사는 북부로 이사 를 갈 거라고 가끔씩 미르코가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긴 하다. 혹시 다른 일이 생겼을지 도 모른다. 러브가 아이와 헤어진 뒤, 청혼을 하러 천막에 갔을지도 모른다. 미르코가 결혼 을 허락하지 않자 총을 가지고 간 러브가 천막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여 버렸을지도 모른 다. 지금 러브는 집에서 쉬고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아이가 러브를 찾아갈 차례였다. 달이 진 반대쪽에서 동이 떠올랐다. 베스나는 러브의 아파트를 향해 걸었다. 아파트 앞에 도착할 무렵 그때 막 운행을 시작한 버스들이 지나가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었다. 덧창들이 열려 있었다. 불 켜진 창문이 하나 있었다. 아이는 초인종에 손을 댔다가 마치 불에 데기라 도 한 것처럼 얼른 손을 떼었다. 문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서 기다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 힘을 주어 다시 초인종을 눌러 보았다. 셋을 셀 때까지 손가락을 떼지 않았 다. 그러는 동안 마음이 다시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멎는 것 같기도 했고 목 위로, 혀 위로 올라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꼼짝 않고 서 있는데도 뜀박질을 할 때처럼 심장이 쿵쿵 뛰었다. 세 번째 초인종을 누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이는 이렇게 생각했다. 러브가 깊이 잠들었나 봐. 너무 깊이 잠들어 초인종 소리도 안 들리는 거야. 문 앞에서 기다리자니 몹시 배가 고팠다. 그래서 빵집에 가서 있는 돈을 다 털어 브리오 슈와 샌드위치를 샀다. 빵을 다 먹고 난 뒤에, 다시 한번 러브를 기다려 보다가 다리로 가 기로 결정했다. 아이는 자유로웠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처럼 산책을 할 수도 있었고 진열장 앞에 서서 구경을 할 수도 있었다. 진열된 물건들을 구경하다가 선물을 가지고 러브에게 가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 다. 여러 가지 물건들을 살펴보다가 하트 모양으로 만들어진 장밋빛 작은 비누를 발견한 아 이는 그것을 선물하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비누를 어떻게 손에 넣느냐는 것이었다. 큰 상점 이라면 손님들이 많아 아무도 그 아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을 테니 비누 하나 훔쳐내기는 어 렵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 앞에 있는 가게는 아주 작았고 여주인이 계산대 바로 뒤에 서 있 었다. 비누를 가지려면 먼저 돈이 필요했다. 이제 길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지나가는 버스마다 사람들을 많이 실어 거북이 걸음을 했다. 아이는 아무 버스에나 올라탔다. 사람이 너무 많아 올라타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팔꿈치와 주머니, 엉덩이와 가방, 터질 듯이 불룩하고 물렁물렁한 배들 사이에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빨리 행동을 취해 시내를 벗어나기 전에 사람들 틈에 섞 여 내려야 했다. 학생들과 신사들과 비닐봉지를 든 중국인들이 있었다. 드디어 배가 불룩 한, 부드러운 가죽가방을 든 우아한 부인 곁에 가서 섰다. 손가락이 지갑에 닿았을 때, 아이는 자기 앞에 서 있는 러브와 그에게 하트 모양의 비누 를 내미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고함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아이의 머리채를 휘어잡았고 다른 누군가가 뺨을 두 번 갈 겼다. 버스 안쪽에 있던 사람이 운전사에게 소리쳤다. "차를 세워요! "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보지 않았으면 다 훔쳐 갔어도 모를 뻔했어요. " 남자가 말했다. "주위에 이런 집시가 있으면 항상 눈을 크게 뜨고 지켜봐야 합니다. " 그러더니 우산 손잡이를 붙잡듯 베스나의 목을 움켜쥐었다. 불을 환하게 켠 경찰 차가 도 착했다. 아이가 발길질에 차여 버스에서 굴러 떨어졌기 때문에 경찰들은 차에서 내릴 필요 가 없었다. 흰색과 푸른색이 칠해진 경찰 차는 힘차게 달렸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 을 태우고 가기라도 하듯 사이렌을 울려댔다. 경찰들은 커다란 건물 앞에 아이를 내려놓았 다. 건물 안의 큰방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모두 벽 쪽을 향한 채 두 개의 긴 의 자에 앉아 있었다. 땅을 바라보거나 아무 것도 보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 었다. 한참 뒤에 아이를 불렀다. 발이 시렸고 다시 배가 고팠다. 그런데 아이가 러브의 집 으로 찾아가지도 않고 다리 위에도 없으면, 러브는 아이가 영영 떠나 버렸다고 생각하거나, 혹 아이에게 자기는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닌가 보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제복을 입고 책상 뒤에 앉아 있던 여자가 아이에게 이름을 물었다. 갑자기 아무 이유 없 이 눈물이 쏟아졌다. 등뒤에서 어떤 남자가 고함을 쳤다. "주머니에 눈물을 넣고 다니다가 계속 찔끔거린다니까! " 여자가 아이 쪽으로 몸을 내밀고 다시 한번 부드럽게 물었다. "이름이 뭐니? " 첫 번째 부서에 있던 남자, 제복 입은 여자에게 이것저것 알려 주었던 그 남자가 말했다. "절대 진짜 이름을 말하지 않을 거요. " 여자가 세 번째로 이름을 물었을 때 베스나는 고개를 들고 아직도 축축하게 젖은 눈으로 중얼거렸다. "러브예요. " "몇 살이지? " 아이는 두 손을 모두 들어 열 손가락을 다 폈다. 조금 뒤에 베스나는 다른 소녀들과 함께 트럭 위에 올라탔다. 아주 작은 창이 두 개 나 있었고 그 위에는 망이 쳐져있었다. 그래서 밖의 소리는 들을 수 있었지만 아무 것도 보이 지 않았다. 시멘트를 깔아 놓은 아주 커다란 뜰에 내렸다. 한가운데에 나무가 두 그루 서 있었다. 또다시 다른 방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 뒤 한 여자가 베스나의 이름을 부르더 니 사진을 찍었다. 번호를 일러주고 몸무게를 달고 키를 쟀다. 예전에 친아버지와 함께 집 에서 키우던 말을 데리고 이곳과 비슷한 곳에 간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말의 몸무게를 달 고 키를 잰 다음 다른 곳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서 말을 똑바로 눕혀 놓았다. 이마 한가운 데 있던 하얀 별 모양이 빨간 색으로 변하더니, 바위에서 솟아 나오는 샘물처럼 쉴새없이 피가 솟구쳐 나왔다. 지금 아이에게도 그런 일이 벌어지려는 것일까? 아이를 데리러 왔던 부인은 아이를 데려가기 위해 적잖이 애를 먹어야 했다. 또 다른 방 이 있었다. 방안에는 의자 두 개와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부인은 아이에게 얼룩처럼 생 긴 것들을 차례차례 보여 주면서 '이게 뭐지' 하고 질문을 했다. "진짜 네 나이는 몇 살이니? " "부모 형제는 어디에 있니? " "학교에는 다녀 봤니? " "읽고 쓸 줄 아니? " "왜 네가 거기 있었는지 아니? " 그런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좋아, 말을 하고 싶어지면 나를 불러라. " 아이에게 종이 한 장과 펜을 주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서명할 곳을 가리켰다. "간단히 네 이름을 쓰면 돼. " 그런데 이름이 러브라면 어떻게 서명을 할까? 하트를 그리면 될 것이다. 베스나는 펜을 숟가락처럼 잡고 아주 천천히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그려 하트 모양을 만 들어 냈다. 그 뒤 며칠 동안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아이는 다른 소녀들과 한방에서 지냈다. 식사시간이 되면 식사를 했고 밖으로 나가는 시 간이 되면 뜰로 나갔다. 러브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그곳에서 잘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아 무도 괴롭히지 않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먹을 것을 주었으며 자고 싶으면 언제든지 잘 수 있었다. 러브의 존재를 가까이에서 느껴 보기 위해 간이 침대 위에서 혼자 외다리 병사의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는 이랬다. 외다리 병사가 두 다리가 온전한 다른 병사들과 함께 상자 안에 있는 아주 멋진 집에 도착했다. 그 집에는 발레리나도 살고 있었다. 발레리나도 두 다리가 모두 있었지만 한 다리로만 서 있었기 때문에 외다리처럼 보였다. 그렇게 해서 외다리 병사가 발 레리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병사는 발레리나에게 말을 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병사가 창가에 서 있을 때 세찬 바람이 불어와 아래로 떨어져 버리 고 말았다. 한 어린아이가 그를 작은 종이배 위에 올려놓았다. 작은 종이배는 물위로 떠내 려가다가 어떤 물고기 앞에 이르렀다. 물고기는 종이배를 삼켜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병사 는 물고기의 새끼처럼 물고기의 뱃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아이가 알고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이야기는 절대 이렇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 다. 그가 동화책을 읽어 주었을 때 아직도 남은 페이지가 많은 것으로 보아 이야기는 훨씬 더 긴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아이가 간이침대에서 혼자 동화를 중얼거리고 있는데, 한 여자가 문가에 서서 러브라는 이름을 큰소리로 불렀다. 마치 발로 등을 차이기라도 한 것처럼, 아 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 여자를 따라 복도로 나갔다. 그 여자와 한두 걸음 떨어져 걸었다. 러브는 저 문들 뒤, 어딘가에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이는 그를 보자마자 달려가 목을 껴 안을까? 그래, 그러면 그도 힘센 두 팔로 나를 높이 안아 줄 것이다. 그리고 둘이 이곳에서 나가게 될 것이다. 자동차가 밖에 세워져 있을 거고 그들이 타자마자 곧 떠날 것이다. 그 여자가 손잡이에 손가락을 댔을 때 아이는 러브에게 뛰어들 준비를 하느라고 약간 무 릎을 구부렸다...... 문이 열렸다. 러브 대신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아이를 기다리고 있 었다. 남자가 말했다. "〈사랑〉이 왔구나! " 그 아이를 번쩍 안아서 작은 침대 위에 눕히며 말했다. "팬티를 벗어라. " 그는 미르코 같지도 않았고 심판관 같지도 않았다. 그는 자기 성기 대신 쇠로 된 기구를 집어넣었다. 부드러운 말도, 난폭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손이 더러워지지도 않았는 데 물로 손을 씻었다. 손을 씻으며 몇 번 '으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아이가 다시 속옷을 입고 침대에서 내려왔을 때 이렇게 말했다. "알고 있었니? 네 뱃속에 지금 아기가 들어 있단다. " 이 남자가 반짝반짝 빛나는 차가운 쇠로 뱃속에 아기를 집어넣었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 었다. 그가 몸 안으로 넣기 전에 아이는 그 물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숟가락처럼 생겼다. 깔때기 같기도 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러브다. 러브가 마지막날 밤 그 아이도 모르게 몰래 아기를 뱃속에 넣어 준 것이다. 그가 말했었다. '널 정말 사랑한 다, 내 꼬마야, 정말. 우리 아기를 하나 만들자.' 그래서 아기가 생긴 것이다. 아이의 뱃속 이 작은 집이라도 되는 듯이 그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이는 최근에 입맛이 없었다. 원하는 것은 뭐든지 먹을 수 있었지만 먹고 싶 지가 않았다. 구토증도 났던 것 같다. 미르코가 자기 물건을 입에 집어넣었을 때처럼 자꾸 토하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아기가 뱃속에 있었다. 오래 전부터 뱃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이따금씩 달걀을 먹으려고 깨뜨려도 먹을 수가 없을 때가 있는데, 달걀의 노른자 대신 침같 이 생긴 것이 그 안에 있었다. 진짜 침보다 약간 도 딱딱했다. 한번은 자세히 살펴보니, 침 위에 두 개의 눈같이 생긴 것이 있었는데, 한쪽 부분은 부드 럽고 반쯤 열려 있어서 부리같이 보였다. 알속에 조금만 더 있었으면 분명 그 침은 병아리 가 되었을 것이다. 이제 아이의 배는 달걀이 되었다. 그리고 이 달걀은 계속, 그 안에 무엇인가가 들어 있다 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차릴 때까지 커질 것이다. 지금도 예전보다 커졌고 커지고 있는 중이 었다. 2월경에 기름진 흙덩이를 들어올려 보면 그 밑에는 벌써 큰 풀들이 자라고 있다. 그 러나 땅속에서 자라고 있을 뿐이었다. 아기가 자라고 있어. 아이는 두 손을 배 위에 얹고 간이 침대에 누웠다. 다음날 아침 아이는 더 이상 간이 침대 위에 누워 있지 않았다. 어떤 부인과 기차를 타고 가는 중이었다. 그 부인은 아이의 손을 잡았다. 이런 곳에 있기에는 너무 어려서 역으로 가 서 집에 데려다 줄 거라고 그곳 사람들이 말했다. 아이는 지금까지 기차를 타본 적이 없었 다. 기차는 멋졌다. 한곳에 앉자 세상이 앞으로 달려나갔고 반대편에 앉자 뒤로 달렸다. 러 브의 집으로 자기를 데려다 부기 위해 기차가 달리는 거라고 생각하자 움직이는 기차가 더 욱더 멋져 보였다. 러브에게 간다고 말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아이는 알 수 있었다.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겨울이 온다는 것을 새들이 알아차리듯이, 이 세상에는 말로 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옆에 앉은 부인은 친절해서 가끔씩 이렇게 물었 다. "뭘 좀 먹을래? 화장실 갈래? " 하지만 아이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저 되도록 이면 빨리, 아주 빨리 달려가고 싶 었다. 그러다가 아이는 잠이 들어 버렸다. 머리를 여기저기 부딪히면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아이는 다리 위의 천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굴이 돌로 되어 있었는데 그 돌이 사방으로 부서져 내렸다. 그래도 아이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돌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멈춰 보려 고 애쓰다가 진짜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다. 엄마는 화가 나서 주위의 풀밭에 대고 아이의 이름을 외쳐댔다. 하지만 아이는 엄마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수풀 속에 앉아 있는데 두 다 리 사이에 알이 하나 들어 있었다. 달걀 껍질이 깨지더니 병아리 대신 천사가 나왔다. 다리 위의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가벼웠다. 너무나 가벼워서 아이의 손을 잡아 하늘로 데리고 갔다. 어느새 아이는 러브의 집에 있었다. 어떻게 하늘을 날았는지는 모르겠다. 아파트에는 아이 혼자였다. 그가 곧 돌아올 것이다. 개들이 기분이 좋아 여기저 기 뛰어다니듯이, 아이도 너무 행복해 사방을 돌아다녔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문 앞에 서 있었다. 러브가 아니라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는 아이의 팔을 붙잡아 뒤 로 비틀었다. 아이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아이는 갑자기 잠이 깼다. 여기가 어딜까? 맞다, 아이는 기차 안에 있었다. 창 밖의 세상은 그 어느 쪽으로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불현듯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깨달았다. 강가에 사는 진짜 부모 형제에게 돌아 가는 중이었다. 부인의 팔을 잡고 몸을 흔들며 소변이 급하다고 소리쳤다. 아이는 화장실 안에 그냥 앉아 있었다. 부인은 밖에서 기다렸고 가끔씩 문을 두드렸다. 기차가 속력을 늦출 때, 있는 힘껏 배를 들이밀었다. 물 속에서 피를 게걸스럽게 삼켜버리는 납작하고 끈끈한 동물들의 흉내를 내보려고 애썼다. 그렇게 해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래쪽은 풀밭이었다. 가을이었기 때문 에 풀들은 성장을 멈추었다. 러브의 도시로 돌아가는 데 꼬박 나흘이 걸렸다. 자동차와 트럭에 올라탔다가 내리곤 했 다. 어떤 운전사들은 아이를 데려다 주는 대가로 무엇인가를 요구했다. 그러면 아이는 미르 코에게 했듯이 아무 생각 없이 몸을 허락했다. 도시의 변두리에 도착했을 때는 깊은 밤이었 다. 곧장 러브의 집으로 가지 않고 대문이 열려 있는 어떤 집으로 들어갔다. 지하실과 계단 사이에 몸을 숨겼다. 잠이 오지 않았다. 한데서 잠을 자는 것은 오늘로 끝날 것이다. 천사 들의 날개가 눈에 보이지 않게 내려와 신발이 되어 주지는 않을까? 내일 아침 그런 일이 생 긴다면 러브의 집까지 날아갈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된다면 계단을 올라가지 않고 곧장 러 브의 아파트에 얼굴을 내밀 수 있을 텐데. 지금쯤 러브는 아직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어 린아이처럼 깊고 깊은 잠을......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유리창을 두드릴 것이 다. 그가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겠지. 그러면 아이는 안으로 살짝 뛰어내려 그에게 뱃속에 서 자라고 있는 알을 보여 줄 것이다. 그 이후로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고 즐겁게 살 것이 다. 새벽녘에 버스를 타고 강으로 갔다. 거기서부터는 걸어서 갔다. 신발은 언제나 신던 그 신발이었고 날개가 솟아 있지는 않았다. 날아갈 수 없어 러브의 아파트 밑에서 위를 오려다 보아야만 했다. 창문 두 개에 불이 켜져 있었고 그중 하나는 유리창이 열려 있었다. 아이가 현관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자 그 소리는 비밀스럽게 , 아파트 위로 올라갔다가 열려진 창문 을 통해 아이의 귀에 다시 울려 퍼졌다. 그러는 동안 심장은 어떻게 위로 끌어올릴 수도 없 을 정도로 아래로 아래로 곤두박질을 쳤다. 다시 한번 초인종을 눌렀다. 심장이 쿵쿵 울렸 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기는 했지만 잘못 들은 것 인지도 무른다. 커튼 뒤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여자 같았다. 아이가 떠난 사이 러브가 다른 곳으로, 더 큰집으로 이사를 간 것은 아닐까? 사실을 알아 보려면 지금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 보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현관문에서 두 사람이 나왔다. 그들 뒤로 조금 뚱뚱한 어린아이가 나왔을 때 아이는 아파트 안으로 들 어갔다. 두 계단씩 달려 올라가서 숨을 고르려고 러브의 아파트 앞에 잠깐 서 있었다. 층계 참에서 그 전에는 한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어떤 느낌을 받았다. 비록 움직이지는 않았지 만......움직이지 않는 것만도 아니었다. 뱃속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렸다. 아기가 벌써? 이렇게 빨리 나오려는 것일까? 벌써 아기가 태어나면 아마 러브는 다른 사람의 아기라고 생 각할지도 모른다. 아이는 잠시 기다려야만 했다. 한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말했다. "이렇게 성급하게 굴면 안 돼. 조금 있으면 나하고 너하고 아빠하고 함께 지낼 수 있어. " 그런 다음 까치발을 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초인종 소리가 아주 컸기 때문에 문 밖에서도 들렸다. 사람의 목소리, 남자아이의 목소리도 들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 그러자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이렇게 대답했다. "전보인가 보다. " 그리고 문 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얼굴을 가렸던 머리칼을 어깨 뒤로 쓸어 넘기고 똑바로 섰다. 하지만 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파트 안쪽에서 남자의 목소리 가 새어 나왔다. "문 열지 마! " 그 목소리가 이렇게 소리쳤다. "집시들이나 지옥 사자들 말고 이 시간에 올 사람이 도대체 누가 있어! " 러브였다. 아이는 잠깐 동안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어. 러브 같기는 하지만 절대 아닐 거야. ' 달아나 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갑자기 다리가 나무로 변한 것 같았다. 발 아 래에서 시작된 뿌리가 다리로, 그리고 온몸으로 뻗어 나가 한 그루의 나무가 되는 것 같았 다. 심장은 아직 제자리에 있었지만 돌처럼 굳어 버렸다. 돌덩이가 되어 숨을 멈춘 것 같았 다. 안에서 다시 말 소리가 들려 왔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려주세요. "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곧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학교에 늦겠다. 자기 전에 다시 해주마. " 영화 속의 목소리, 바로 그 목소리였다. 러브의 목소리. 이제 가슴의 돌들은 공중으로 튀어나와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어떻게 내려왔는지도 모르 게 계단을 내려왔다. 1층을 지나 계속 계단을 내려가 지하실에 도착했다. 벽이 없었다면 아 이는 더 앞으로 갔을 것이다. 벽 앞에서 아이는 무릎을 꿇었다가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배가 고프지도, 졸리지도 않았고 원하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자기가 있는 곳이 어디인 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뱃속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였다. 혹시 침일까? 그래, 틀림없었다. 아 기가 밖으로 나와 빛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하실 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이상한 악취도 풍겼다. 아기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면 아기는 가만히 있겠다고, 다시는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줄까? 아는 이야기라고는 언제나 똑같은 그 이야기밖에 없었 다. 서로 외다리인 두 사람이 사랑하는 그 이야기 말이다. 남자는 병사였고 여자는 춤을 추 었다. 남자의 사랑이 여자보다 훨씬 더 강했다. 그 여자는 사실 그와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를 거의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불행한 일이 벌어졌 다. 병사가 창문에서 떨어졌고 물고기가 그를 집어삼켜 버린 것이다. 물고기의 배 안은 아 주 어두워서 아무 것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때 그는 언젠가 자기가 침이었을 때 이런 뱃속 에서 살았었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날 물고기가 그물에 걸렸고 어느 신사가 물고기를 통째 로 먹어 버렸다. 병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 았기 때문에 병사가 없어졌다는 게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았다. 한편 발레리나는 다른 병사 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병사는 다리가 셋이었다. 그들은 결혼하여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 다. 그가 발레리나에게 다리를 하나 주었기 때문이다. 태어나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는지 누가 알겠는가? 아이의 아기는 이 런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밖 으로 나왔다. 아이는 두 다리의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틀림없는 피였다. 어린 시절 첫 번째 면담 예를 들어 이런 일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동시에 정반대 방향에서 움직인 자동차 두 대 가 있습니다. 두 대 중 한 대는 먼저 출발했어야 하는데 차주인이 막 떠나려는 순간에 전화 가 와서 30분 동안이나 전화를 붙들고 있었던 겁니다. 전화를 받으러 가지 않았다면 제시간 에 떠날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는 전화를 받으러 갔고 예정된 시간보다 늦었습니다. 그 래서 두 대의 자동차는 똑같은 시간에 떠나게 된 거지요. 두 대의 자동차가 이미 여행을 시 작했을 때, 그들이 달려가던 길 위에 대형 트럭이 뒤집혀 있었습니다. 트럭은 곧 옮겨졌지 만 바닥에 기름 자국은 남아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을 두 대 중의 한 대가 아주 빠른 속도 로 지나갑니다. 어떤 차선 위에 기름이 있을까요? 바로 지금 빠른 속도로 지나간 그 자동차 의 차선 위에 있습니다. 다른 자동차 한 대는 조금 전부터 몸이 몹시 안 좋은 자기 아내를 생각해서 천천히 갑니다. 아내를 병원에 데려 가야겠다고 생각한 그 순간 반대편 차선의 자 동차 한 대가 달려들었습니다. 결국 달려든 자동차와 충돌을 하고 맙니다. 그는 그 자리에 서 숨졌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전화벨이 울려도 전화를 받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대신 다른 누군가가 죽었을 수도 있고, 아무 도 죽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죽을 운명이었던 사람은 벌써 집에 도착해서 슬리퍼 를 신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무시무시한 사고 소식을 듣게 될 겁니다. 사고가 난 도로가 그 가 지나왔던 바로 그 도로일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그 도로입니다. 시간도 거의 비슷합니 다. '정말 운이 좋았어'라고 아내에게 말한 뒤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깁니다. 운이었 죠. 알겠습니까? 운이 좋았던 겁니다. 어쨌든 이야기를 계속 해봅시다. 여섯 살 때부터 벌써 '난 의사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하 는 어린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커서는 정말 그렇게 됩니다. 또 어떤 아이들은 엔지니어 나 선교사, 자동차 수리공이 되고 싶다고 말하고 또 그렇게 됩니다. 내 학교 친구 중에는 다섯 살 때 벌써 가전 제품들을 모두 분해하고 완벽하게 조립할 줄 아는 아이가 있었습니 다. 그 애는 물리학자가 되고 싶어했고, 소질이 있었습니다. 이해하시겠어요? 피 속에 혹은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몸 어딘가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지오반니는 물리학자가 될 것 이다. 지오반니는 다른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물리학자가 될 것이다.' 나도 그랬습니다. 난 운이 좋은 아이였죠. 질문하는 것을 배운 바로 그날 내 역할이 무엇 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난 인간들을 치료하거나 기계들을 조립하기 위해 태어나지는 않았습니다. 난 주위 사물들을 정리하기 위해 태어났죠. 당신도 잘 알겠지만 난 가을의 어 느 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서류에서 읽으셨겠죠. 의미 있는 정보이기 때문에 말씀드리 는 것입니다. 내 별점에서는 세심하고도 완고한 인내심, 두드러진 정리 의식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가을이라는 계절이 지닌 특성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죽어 가고, 이것들이 땅속에 모여 서로 뒤섞인 다음 천천히 썩어서 조금 뒤에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는 계절이지요. 자 기성찰, 분석, 정확함, 비범한 기억력, 이런 것들이 바로 이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이 지닌 특성이랍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말을 배우기 시작한 바로 그때부터, 아니면 바로 그 직후부터 난 질문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외 출을 하면 어머니에게 '이건 뭐예요?''저건 뭐예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이 건 돌이야''저건 새란다'하고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어머니의 대답은 맞기도 했고 틀리기도 했습니다. 돌은 언제나 각양각색이었고, 새는 밤 색의 작은 새거나 노란 부리를 가진 커다란 검정 새였기 때문입니다. 정리를 할 필요가 있 었습니다. 정리를 하려면 그 이름들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어머니에게 물었습니 다. '이건 뭐예요?''저건 뭐예요?' 그러면 어머니는, '귀찮게 좀 하지 말아라. 아까 말해 줬잖니' 라고 하면서 내 팔을 끌고 앞으로 걸어가셨습니다. 그 당시 우리 어머니는 간호사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병원에 가면 어머니 와 함께 일하는 분들이 내 볼을 꼬집었습니다. 그리고 내게 말했습니다. '넌, 참 좋겠다. 네 엄마는 세상 그 누구보다 훌륭한 분이셔!' 사실 어머니는 참을성이 부족한 점을 빼면 훌 륭한 분이었습니다. 나는 식사를 하면서 오로지 한 가지 -사물들의 이름- 만 생각했기 때문 에 밥을 아주 천천히 먹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주 급하게 식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내 입에 음식을 집어넣으려고 코를 비틀곤 했습니다.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게 되면 난 어 쩔 수 없이 입을 벌렸고, 그러면 어머니가 재빨리 목구멍 속으로 음식을 집어넣었습니다. 어머니와 난 고기 때문에 많이 다투었습니다. 난 고기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것 은 마찬가지입니다. 피는 언제나 공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두 번째 면담 어머니는 내가 태어난 직후부터 간호사 일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일에 일 이상의 애정 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어머니는 수십 장의 감사 카드를 받았습니다. 어 머니는 정성껏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하지만 집에서는 늘 지쳐 있었습니다. 그래서 난 아 주 어릴 때 이미, 너무 질문을 많이 해서 어머니를 귀찮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 었습니다. 그래서 나 혼자 질문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다가 다행히도 학교에 다니게 되었 습니다. 학교에서 난 읽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제야 내 질서는 진정한 형태를 갖게 되었습 니다. 무릎 위에 책을 얹어 놓고 몇 시간이고 큰소리로 읽었습니다. 천천히, 한 글자 한 글 자 또박또박 읽었습니다. 하나의 모양이 그려져 있고 그 옆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배가 빨간 새는 울새이고 거의 투명에 가까운 돌은 석영(石英)이라는 것을 알 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감동을 느꼈습니다. 주위에 무질서하게 놓여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 이든 제자리에 놓았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걸 제자리에 놓을 사람은 아무도 없 었습니다. 반드시 내가 해야 했습니다. 내가 처음으로 애정을 가진 대상은 돌이었습니다. 돌들은 목록을 만들기가 가장 쉬웠습니 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었기 때문에 그저 몸을 구부려 줍기만 하면 됐습니다. 일곱 살 때 난 돌을 벌써 백 개도 더 모았습니다. 엄마에게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말하기가 겁이 나기도 했고 엄마를 놀래키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어른이 되면 난 과학자가 되겠 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주 위대한 과학자 말입니다. 어머니는 아마 그 사실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될 것입니다. 어느 날 아침 신문을 펴보고 어머니는 당신 아들 사진이 신문에 실린 것 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처음에 어머니는 잘못된 기사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 목을 읽고 그 기사가 사실이라는 것을, 아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의 한 사람 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모두 용서해 주실 겁니다. 어머니의 환자들이 회복되었을 때 그들을 껴안았듯이 나를 껴안아 주실 겁니다. 그 무렵 어머니와 나는 함께 잤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부른 게 아니라 어머니가 잠들면 내가 어머니 침대로 갔습니다. 시트는 차디찼습니다. 어머니는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잠 들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가파른 절벽 끝에 서 있는 암벽 등반가 같았습니다. 나 역시 침 대에서 떨어질 것 같은 자세로 잠을 자는 어머니의 모습이 좋아서 어머니 뒤에서, 등을 꼭 껴안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나는 거의 아침이 될 때까지 함께 그렇게 잤습니다. 그러다 가 해가 뜨기 직전에 난 내 침대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꼭 한 가지 이유 때문에 화를 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뭐냐 하면, 내가 어머니 의 눈을 쳐다보지 않는다는 거였죠. 사실 난 언제나 땅만 쳐다보았습니다. 아마 돌을 찾는 습관 때문이었을 거예요. 잘 모르겠어요. 난 담임 선생님과도, 어머니와도, 다른 그 누구와 도 눈을 맞추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날 쳐다봐! ' 하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난 얼굴이 빨개졌죠. 다시 어머니가 '날 쳐다봐! ' 라고 말하면 내 목은 직각으로 구부러지 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내 턱을 잡아 억지로 고개를 쳐들었습니다. 어머니는 탁, 소리가 날 정도로 내 고개를 뒤로 젖혔고 난 눈을 감았습니다. 내가 눈을 감으면 어머니는 손가락으로 눈을 벌려, 마치 커튼이나 되는 양 눈꺼풀을 들어올렸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똑 바로 쳐다보며 소리쳤습니다. '날 쳐다 봐! 날 쳐다보란 말이야! ' 눈을 마주치지 않는 사 람은 비겁한 사람이거나 좋지 않은 생각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어머니 에게 돌들에 대한 이야기를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른이 되어 어머니를 깜짝 놀 라게 해드려야 하니까요. 그래서 난 언제나 돌을 담을 통들을 잔뜩 가지고 다녔습니다. 바로 그 무렵에 아저씨들이 우리 집에 오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내가 잠들기 전, 내 돌들 의 이름을 모두 다시 외워 보기 전에 정기적으로 들렀습니다. 난 돌들을 하나하나 쳐다보면 서 이름을 외운 게 아니라 이불 속에 누워 눈을 감고 외웠습니다. 그 이름들을 하나도 틀리 지 않고 정확하게 외웠다 해도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아저씨들이란 우리 엄마의 남자 친구들을 가리키는 겁니다. 그들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면 우리 집에 찾아왔습니다. 아저씨들은 하나 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나하고는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머니의 기분을 상하게 했습니다. 분명합니다. 문 이 모두 닫혀 있었는데도 나는 몇 번인가 어머니가 흐느껴 우는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렇다 고 해서 돌들의 이름을 외울 때 실수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랬다가는 어머니가 속이 상 해 죽었을 테니까요. 아니, 지금도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면 그것은 바로 내 덕택일 거라고 난 믿고 있습니다. 질서, 자기 성찰, 비범한 기억력, 보셨죠? 벌써 그때 난 위대한 과학자 가 될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 면담 학교 생활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난 다른 아이들이 싫었습니다. 그 애들은 소 란스러웠고 아무 이유도 없이 고함을 질러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혹시 나도 그 애들처 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고함을 치고 옷을 더럽히고 말을 안 듣고, 또 말 을 안 들었다고 꾸중을 듣고 말이에요. 하지만 난 그때 전혀 다른 것에 푹 빠져 있었습니 다. 선생님은 분수를 설명했는데 난 어떻게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 형태들이 존재할 수 있 는지를 생각했습니다. 왜 한 마리의 새가 아니라 수많은 새들이 존재해야 할까요? 왜 쥐는 한 마리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람쥐도 존재하고 비버까지 존재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때 난 진화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고, 먹고 먹히고 적당한 피난처를 찾고 새로운 질서가 나 타날 때까지 그 피난처에 안전하게 몸을 숨기는 유리한 변화의 역사를 전혀 몰랐습니다. 15 년 전에는 아이들에게 이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여섯 살 된 아이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아이들은 티라노사우러스와 그 공룡 들이 사라진 이유를 너무나 잘 압니다. 아기들이 어떻게 태어나고 은하수가 어떻게 사라질 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때 아이들은 아무 도 몰랐습니다. 기껏해야 선생님이 이렇게 말해 주었을 뿐입니다. '어느 날 하느님이 잠에서 깼을 때 아주 심심하셨어. 그래서 무료함을 달 래 보려고 세상을 만드셨지. 꼭 6일 동안 세상을 만드신 뒤 7일째 되는 날 휴식을 하셨어. 그날이 바로 일요일이란다.' 난 그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어요. 비오듯 땀이 흐르는 하느 님의 이마와 어마어마하게 크며 단단한 근육으로 뭉쳐진 하느님의 팔, 세상을 만드느라 지 쳐버린 그 팔과 가볍게 흔들리는 손가락들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 니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항상 우리는 주기도문을 외웠어요. '하늘에 계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하고 말이에요. 그런데 전지전능하다면 피곤을 느껴서는 안 되는 거 아니에 요? 이렇게 사물들과 이름들을 계속 생각했기 때문에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았습니다. 어느 해인가, 선생님이 엄마를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드님은 냉담하고 우둔해요. 관심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집에서 어머니는 내게 소리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내 게 이렇게 말했죠. '넌 왜 다른 아이들하고 뜰에 나가 놀지 않는 거니? ' 그러면서 나를 밖 으로 떠밀었습니다. 가끔씩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쳐다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기도 했 습니다. 개들이 막 잠들려고 할 때처럼 깊은, 그렇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하지만 그 러다가 병원으로 일하러 나갔고 아저씨들이 어머니를 만나러 왔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종 종 내 존재를 잊어버리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넌 커서 점원이나 되고 싶은 모양이구나.' 나는 그렇다고 시인했습니다. 난 '예' 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확 실하게 위대한 과학자만 될 수 있다면 나는 옷감을 팔든 소시지를 팔든 아무 상관이 없었습 니다. 난 선생님의 질문에 아주 멋지게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이런 게 왜 이렇게 되 었는지 너희들 중에 아는 사람? ' 하고 질문했습니다. 나는 선생님이 질문을 다 마치기도 전에 벌써 답을 알았습니다. 알고 있었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런 답이 나올 수 없을 거야. 틀림없이 함정이 숨어 있을 거야. 내가 생각한 답은 너무 단순해. 세상에 이보다 더 단순한 것은 없을 거야.' 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아이가 답을 말했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바로 그 답이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놀란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았습니다. 정말 그렇게 간단하단 말인가?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 그 답은 존재할 수 있는 답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진짜 답은 수천 개도 더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랬습니다. 사실이기 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알고, 또한 알면서 정리를 하는 것이 었습니다. 물론 난 여러 과목들 중에서 특히 산수를 좋아했습니다. 성적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그래 도 난 산수를 좋아했습니다. '만약 60리터 용량의 물통이 있는데 수도꼭지에서 1분에 4리터 씩 그 물통으로 물이 들어간다면, 물통 하나 가득 물을 받으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같은 문제가 나오면 나 말고는 모두 제시간에 답을 적을 수 있었습니다. 내 머릿속에서는 천장 한 조각이 떨어져 내리고 천장과 함께 위층에 사는 부인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물이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올 뿐만 아니라 통에서 흘러 넘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위층 부인이 죽는 일까지 벌어지는 겁니다. 보셨죠? 난 정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모든 일은 완전히 달라졌을 겁니다. 저번에 말한 자동차 생각나세요? 모 든 일은 그렇게 벌어지는 것입니다. 제시간에 이동을 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문제입니 다. 네 번째 면담 학교 생활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습니다. 집에서 난 거의 혼자 지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옳은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난 거기, 교실 안에서는 다른 이이들이 하는 행동 을 지켜보았습니다. 적대감 같은 게 생겨났습니다. 여선생 님들은 틀림없이 그다지 훌륭한 교육을 받지 못했을 겁니다. 역사와 지리 말고도 선생님들은 부드러움을 가르쳤어야 합니다. 나는 선생님들이 그것을 가르쳤는지, 아니면 벌 써 우리들의 내부에 들어 있다고 생각해서 가르치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내 담임 선생님은 부드러움을 몰랐습니다. 항상 고함을 쳤고 소리를 지르지 않을 때는 지쳐 있 었습니다. 어느 날 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작문 숙제를 내주셨습니다. 작문 제목은 '우리 아빠' 였 습니다. 내가 몇 살 때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마 거의 여덟 살이 다 되어 가고 있었을 때거나, 그보다 약간 더 나이를 먹었을 때의 일일 겁니다. 난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듣자마자 교단으로 가서 선생님에게 천천히 말했습니다. "선생님, 전 숙제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습니다. "숙제를 해야 돼! 다른 아이들처럼 너도 숙제를 해야 돼!" 이제 문제는 이것이었습니다. 난 아빠를 직접 만난 적이 없지만 아빠가 어떤 일을 하시는 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빠가 하는 일이 비밀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말 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비밀, 바로 그렇습니다. 아빠는 비밀 요원이었습니다. 솔직 히 말하자면 아빠가 그런 일을 한다고 내게 일러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저 나 혼 자 그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던 것입니다. 나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어머니에게 물 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난 내 예상대로 아빠가 비밀 요원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집에 계시지 않는 겁 니다. 마침내 종이를 들고 난 이렇게 적었습니다. '난 우리 아빠를 모릅니다. 그것은 아빠가 아무에게도 알려서는 안 되는 비밀스러운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빠가 키가 크고 힘이 세며 권총을 아주 잘 쏜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아빠의 손은 크고 단단하며 손톱은 언제나 짧습니다. 아빠는 당수의 유단자 이며 한 주먹에 황소를 죽일 수 있습니다. 난 아빠가 어디에 계시는지, 무엇을 하시는지 모 릅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착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악당들을 무찌르 고 계시다는 겁니다. 어느 날 아빠는 임무를 마치신 뒤 나를 데리러 학교에 오실 겁니다. 어쩌면 빨간색 줄무늬가 쳐진 화려한 제복을 입고 오실 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그때 모두들 우리 아빠가 누군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아빠가 비밀 요원이고 매일 목 숨을 건 위험한 생활을 한다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면 안 됩니다.' 그런 다음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 숙제는 읽고 난 뒤 태워 버리셨으면 좋겠습니다.' 난 선생님을 믿지 않았다면 이런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 다음날 어떤 일 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아이들의 숙제를 들고 들어온 선생님은 자리에 앉더니 이렇게 말 했습니다. "거짓말은 금방 들통나는 거야." 그러더니 내 숙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난 당황해 어쩔 줄 몰랐고 다른 아이들은 웃어대 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은 숙제를 다 읽은 뒤, 내게 돌려주며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거짓말이나 꾸며대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 그날부터 아이들이 모두 나를 놀려댔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밖으로 나갈 때면 나를 떠다 밀면서 소리쳤습니다. "저 사람이 네 아버지냐? 아니, 저기 저 사람인가? 아니다, 아야, 저쪽 좀 봐. 나무 옆에 있는데! 비밀 요원이라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되잖아! " 아이들은 모두 자기 엄마나 아빠가 데리러 왔습니다. 뭐 하러 그러는 걸까요? 학교에서 집까지 아주 가깝기 때문에 부모들이 아이를 데리러 온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과보호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여튼 나를 데리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엄마는 병원에서 일하기 때문에 올 수 없었습니다. 난 언제나 아빠를 기다렸지 만 아빠 역시 오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해에도 내 친구들은 여전히 나를 놀렸습니다. 아이들은 약간 멍청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지겨워질 때까지 그것을 즐깁니다. 그런데 여름에 일이 터졌습니다. 그 사이 난 아주 많이 컸습니다. 거의 소년처럼 보였습니다. 힘도 세져서 우리 반 아이들 중에서 내가 제일 힘이 셌습니다. 난 아이들이 놀려도 그냥 내버려두었습니 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줄곧 1등을 하는 아이가 있는데, 그날은 아무도 그 애를 데 리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 애는 아주 연약했으며 여자아이처럼 살랑거리는 금발을 하고 있 었습니다. 대개는 그 애 엄마가 학교에 왔습니다. 밍크 코트를 입은 걔 엄마는 교문에서 약 간 떨어진 곳에 미소를 짓고 서서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날, 그 애는 어쩔 줄 몰라했습니 다. 그래서 내가 집까지 데려다 줄 테니 걱정할 것 없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마치 그 애보 다 훨씬 큰 어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애를 얼싸안았습니다. 공원으로 들어가자고 그 애를 설득하느라 난 좀 애를 먹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애는 공원에 들 어가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 애가 내 앞에서 바지의 지퍼를 열기 전에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을 하고 나서, 나는 손을 집게처럼 만들어 그 애의 목을 졸랐습니다.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어 눈물을 흘릴 때까지 목을 졸랐습니다. "네 아버지는 직업이 뭐냐?" 목을 조르면서 그 애에게 소리쳤습니다. "네 아버지는 직업이 뭐냐고?" 그 애는 달아나 버렸습니다. 나는 그 애 등뒤에서 소리쳤습니다. "너 누구한테 말하면 죽여 버릴 거야." 하지만 그 애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자기에게 벌어졌던 이야기를 모두 해버렸습니다. 그 애 부모들이 우리 집에 전화했습니다.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수화기 를 내려놓았습니다. 어머니는 신발로 나를 후려쳤고 빗자루로 두들겨 팼습니다. 마치 미친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는 고함을 쳤습니다. "넌 네 아비하고 똑같아, 이 후레자식아. 넌 정말 후레자식이야."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머니는 화가 날 때면 항상 그렇게 소리쳤습니다. 그날 아버지는 많이 취해 있었고 어머니는 약간 흥분해 있었습니다. 간호사들의 실습 과 정이 끝나고, 그것을 축하하는 파티가 있던 날 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결혼을 해서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이 있는 내과과장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조금 좋아하기도 했지 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취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아시죠? 그렇게 많 은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일이 벌어졌고, 어머니는 너무나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너무 젊었고 돈도 없는 데다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은 나를 낳겠다고 했다가 어느 날은 또 안 된다고 했습니 다. 어머니는 그 남자가 나의 존재를 인정하고 돈을 좀 주기를 개대했습니다. 그가 어머니에게, 자기에게 그렇게 쉽게 몸을 허락한 것을 보면 틀림없이 다른 남자들과 도 잠을 잤을 테니 뱃속의 아이는 분명 자기 아이가 아닐 것이라고 말했을 때는, 이미 시기 적으로 너무 늦어 유산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난 어머니 뱃속에서 이미 다 자라 버렸기 때 문에 이젠 쫒아 내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다섯 번째 면담 공원에서 있었던 그 사건 이후 어머니는 나를 냉담하게 대했습니다. 병원에 가지 않고 집 에 있을 때 어머니는 내가 방안에 없는 듯이 행동했습니다. 난 어머니와 같은 방안에 있었 지만 모르는 체한 거지요. 난 거의 혼자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가끔씩 화를 냈습니다. 나 때문에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어머니 자신의 일 때문이었습니다. 그럴 때면 어 머니는 마구 고함을 질렀습니다. "어떻게 하든 널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 만들겠어! 그래, 널 기숙학교에 처넣어 버릴 거야! 그래 거기선 널 올바른 인간으로 만들어 주겠지."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습니다. 어머니가 참을성이 없어서 그렇게 화를 내고 난 뒤에는 이내 조용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난 벌써 300가지도 넘는 광물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진짜 수집품이지요. 바로 그 무렵 나 는 학교 도서관에서 지질도감을 빌렸습니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다 적혀 있었습니다. 지구 가 언제 탄생했는지, 돌들이 언제 지구에 자리잡게 되었는지 등등 모든 것이 다 적혀 있었 습니다. 그리고 또 돌들이 왜 계속 지구에 남아 있는지, 그 이유도 적혀 있었습니다. 그 책 의 도움으로 나는 모든 광물들에 대해 자세하고도 긴 카드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나는 여 러 가지 색깔의 작은 종이들을 수도 없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황철광이고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라고 적어 넣었습니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내부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이런 저런 용도에 이용된다''몇 월 몇 일에 내 소유가 되었다' 등등의 것들을 적어 넣었습 니다. 그런 식으로 시간은 아주 빨리 흘렀습니다.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우리 집에 드나들던 아저씨들 가운데 어떤 아저씨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자주 집에 드나든다는 것도 눈여겨보지 않았고, 엄마가 예전보다 훨씬 고함을 지른 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뒤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습니다. 그 아저씨가 스포츠카를 몰고 와서 나를 태워 가지고 어디론가 갔습니다. 도로를 달리면서 그 아저씨는 자기는 의사이고 병원에서 우리 엄마를 만났다고 말했습니다. '나쁘지 않군' 하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바닷가에 도착했습니다. 겨울이었습니다. 난 그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닷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빈깡통과 플라스틱 병들이 돌들에 뒤섞여 있었습니다. 난 약간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고의 발이 잠길 때까지 물 속에 들어갔고 그는 몸을 숙이고 돌을 주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앞으로 던졌습니다. 돌은 살아 있는 것처럼 물위에서 세 번을 통통 튀어 나가더니 네 번째에 물밑으로 가라앉았습니 다. 나는 돌을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돌을 하나 주워 내 손 에 쥐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번 해보라고 말했습니다. 난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난 돌을 손에 쥐고 주먹에 쥐고 굴렸습니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돌만 굴렸습니다. 그러자 그가 나를 놀리기 시작했습니다. "제대로 할 수 없을까 봐 돌을 던지지 않는 거지. 잘 못할까 봐, 꼴사납게 될까 봐 겁이 나는 거지." 난 아무렇지도 않은 체하며 그냥 그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엔 약간 짜증이 났습니다. 내가 돌을 던질 줄 몰라 그냥 팔만 휘젓는다고 한번 상상해 보세요......내가 정 신을 집중하고 긴장한 채 돌을 던지려고 할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그가 한 손 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난 네 엄마를 사랑해. 그리고 네 엄마도 날 사랑하고. 우린 곧 결혼을 해서 세 식구가 모 두 함께 살 거야." 나는 바로 그 순간 돌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벌써 주의가 산만해졌기 때문에 돌은 더 나 가지 않고 첫 번째 지점에서 물 속에 잠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집으로 가서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엄마는 감자가 곁들여진 닭 요리를 준비했고 그는 케이크를 사 가지고 왔습니다. 케이크를 먹을 때까지는 모든 일이 순조로웠습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내 접시 위에 케이크 한 조각 을 놓아주었을 때 난 이렇게 소리치고 말았습니다. "난 먹기 싫어요!" "너 케이크 좋아하잖니."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면서 계속 먹으라고 권했습니다. 난 다시 소리쳤습니다. "난 먹지 않을래요. 구역질이 나요." 마침내 손바닥이 날아왔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끌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그가 듣지 못하도 록 내 귀에 대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이번에도 내 인생을 망가뜨리면 그냥 두지 않을 거야, 알겠어?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거 라고. 그러더니 차라리 내 손으로 널 죽여 버리고 말겠어." 그날 밤 나는 자다가 갑자기 잠에서 깼습니다. 침대 위에 벌떡 일어나 앉아서 그 이전에 는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짓을 했습니다. 믿어지지 않으시죠? 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난 이틀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계속 침대에 앉아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러자 엄마 가 내 곁에 와서 아주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내게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우는 거니? 그저께 내가 한 말 때문이야? 얘, 이제 내가 그저 신경질이 나서 그런 말을 한 거라는 걸 이해할 만한 나이가 되지 않았니? 왜 계속 우는 거야?" 내가 말했습니다. "나도 모르겠어요. 엄마가 한 말 때문에 우는 게 아니에요. 왜 우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그러자 엄마가 말했습니다. "알았다, 얘야. 그만 울어야겠다고 결심하면 식사를 준비해 주마." 사실은 내가 왜 우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그걸 말할 수 없었습니다. 대지는 그 딱딱한 표면 밑에 뜨겁고 부드러운 심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 밑 에 갇혀 있지만 누군가, 예를 들면 지진 같은 것이 지표면을 흔들어 놓으면 부드러운 심장 은 위로 올라옵니다. 계속 올라오다가 수도꼭지들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물 대신 그 심장이 튀어나와 모두를 죽이고 말 것입니다. 엄마도 죽이게 될 것입니다. 어머니는 세탁기를 열고 그 안을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않으니까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는 울었습니다. 여섯 번째 면담 그런 일이 있은 뒤, 그 일에 대해 그러니까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나는 별로 듣지 못했습니다. 아저씨는 가끔씩 우리 집에 와 있거나 엄마를 데리러 들렀습니다. 그리고 엄마 와 아저씨는 영화를 보러 가거나 아저씨가 아는 사람과 저녁을 먹으러 갔습니다. 난 그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미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무 감정도 없었습니다. 그는 내게는 가구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냥 거기 있었을 뿐입니다. 나는 그를 피하려고 애썼습 니다. 난 그 사람도 나를 침대 머리의 탁자나 찬장, 아니면 뭐 그와 비슷한 종류의 물건 정 도로 생각한다고 믿었습니다. 엄마는 침대였고 난 그 옆에 놓인 탁자였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나를 곁들여 데려가야만 했습니다. 어쨌든 몇 달 후 여름이 되었습니다. 학교는 방학을 했습니다. 엄마는 내가 기운이 없어 보이니까 시골에 있는 이모 집에 잠깐 보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시골은 정말 멋있었습니 다. 난 하루 종일 들판을 쏘다녔고 날 귀찮게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난 계속 돌 을 수집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밖에서 살았기 때문에 난 차츰 새들에게도 흥미를 갖 기 시작했습니다. 난 작고 하얀 공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난 항상 공책을 가지고 다니며 이름을 모르는 동물을 만날 때마다 그 동물을 만난 장소와 생김새를 공책에 적어 넣었습니다. 도시로 돌아 올 때쯤 나는 정말 행복했습니다. 내가 아는 돌 종류가 300개도 더 될 뿐만 아니라 이제 20 여종의 새 이름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내 앞에 또 다른 학문 분야가 펼쳐지기 시작했고, 그 속에서 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엄마가 역에 마중을 나와 있었습니다. 반대편 도로에 새 차 한 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차에 올라탔고 엄마가 좁은 길을 운전해 가는 동안 나는 작고 하양 그 공책을 꺼냈습니다. 공책을 꺼내 손에 들고서야 나는 엄마가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것을 깨 달았습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어,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 중이에요?" 엄마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기어를 바꾸며 말했습니다. "아저씨와 난 결혼했단다. 이젠 아저씨 집에서 모두 함께 사는 거야." 나는 작은 공책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습니다. 그리고 차창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새 아버 지 집에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지금까지 난 아무리 큰 상점일지라도 3인용 침대를 파는 것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는 사이 엄마와 나는 새집에 도착했습니다. 그 집은 정원이 있고 철문이 달린 저택이 었습니다.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철문은 저절로 열렸습니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집은 2층이었는데 2층과 1층 사이에 크고 하얀 계단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계단 꼭대기 에 팔짱을 끼고 서서 우리가 올라오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난 그가 어떤 미소를 지었는지 지금도 기억합니다. 밑에서 위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면서 보았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그가 서 있는 계단에 도착했고 예기치 않게 그가 내 팔을 잡았습니다. 난 거기 서서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새집이 마음에 드니?" 그리고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좋다면 아빠라고 불러도 된다." 난 천천히 싫다고 대답했습니다. 너무나 느리게 대답을 해서 두 사람 모두 그 말을 알아 듣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아니면 못 들은 체했는지도 모릅니다. 식사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나를 새 방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스케이트 를 타도 될 정도로 큰방이었습니다. 어쨌든 난 그 방의 옷장에 내 옷들을 정리해 넣었습니 다. 식탁에서 엄마와 그는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우리 결혼 기념으로 네게 선물을 하나 사주기로 했어. 제일 갖고 싶은 게 뭐니? 자전거? 축구공?" 난 생각을 하고 또 했습니다. 그러다가 말했습니다. "큰 새장하고 새를 한 쌍 사주세요." "오, 안돼! 새는 더럽고 너무 시끄러워! 그런 걸 뭐 하러 가지려고 하니?" 엄마가 이렇게 말했지만 그가 끼어 들었습니다. "아니야, 리타. 약속은 약속이잖아! 새를 갖고 싶니? 그럼 새를 사주마." 그래서 오후에 우리 세 사람은 모두 함께 외출을 했습니다. 우리는 새를 전문으로 파는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난 정말 행복했습니다. 들어갈 때는 까마귀 두 마리를 사야겠다고 생 각했지만 올리브색 카나리아를 두 마리 사는 데 모두 동의했습니다. 내게 새를 팔았던 그 사람이 카나리아가 부부라고 말해 주었기 때문에 난 새장 앞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습 니다. 그 새들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려고 난 그 앞에 서서 기다렸습니다. 벌써 말씀드렸죠, 그렇죠? 그때까지 난 돌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서 새들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새 두 마리를 사지 않았더라면 혹시 그 이후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항상 똑같은 문제, 그러니까 자동차 두 대의 문제입니다. 어쨌든 그들은 내게 선물을 했고 난 그것들을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난 새들 앞에서 시 간을 보내며 관찰한 것을 기록했습니다. 〈11시 30분, 수컷이 오른쪽 나뭇가지에 뛰어올랐고 암컷이 밑에서 수컷을 쳐다보며 그대 로 있다.〉〈11시 33분, 암컷이 왼쪽으로 날아가서 계속 아래를 쳐다보다가 그 모양대로 앞 으로 나간다.〉 난 텔레비전에서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입을 맞춥니다. 분명 합니다. 하지만 그 새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위로 올라갔다가 아래로 내려가고 먹고 마시고 노란 똥을 싸고 짹짹 소리를 냈습니다.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식탁에서 일이 벌어졌습니다. 부엌에 있는 새장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 습니다. 그래서 의자를 밀고 일어섰습니다. 그 소리가 사랑의 소리인지 아닌지 살펴보러 갔 습니다. 진짜 사랑의 소리였습니다. 두 놈은 서로 붙어서 칼을 부딪치듯 부리를 비비고 있 었습니다. 그래서 난 조용히 식탁으로 돌아와 내 자리에 앉아 다시 포크를 손에 들었습니 다. 그러나 라자냐가 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엄마가 말했습니다. "누가 너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도 된다고 했지?" 난 엄마를 쳐다보았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의자에서 일어나는 데도, 운전할 때 처럼 면허증이 필요한 것일까요? 그래서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엄마가 계속 말했습니다. "아빠에게 용서를 빌어라." "용서요?" 내가 대답했습니다. "누구에게요?" "네 아버지가 누구인지 잘 알 텐데." 엄마가 내게 말했습니다. 눈 밑이 약간 누르스름해 진 것 같았습니다. "잘 모르겠는데요." 내가 대답했습니다. "넌 잘 알고 있어." 이렇게 말하고서는 턱으로 엄마의 새 남편을 가리켰습니다. 그래서 난 아주 천천히 이렇 게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나는 다시 식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넌 내 집에서 살고 있고 내가 널 먹여 살리고 있어. 이제 네 아버지는 나야. 잘못했다고 해라." 뭔가 이해하기 어렵지 않으세요? 어쨌든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날 사건은 그렇게 끝난 게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가 커질수록 난 혼란스러워졌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한 가지에 대 해 이야기하는데 난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벌 떡 일어서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들에겐 위엄을 보여 주어야 해."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역시 의자에서 일어나 있었습니다. 그가 내 팔을 잡았습니 다. 그리고 팔을 심하게 비틀었고 난 너무나 아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버렸습니다. 그 러자 그가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다시 말했습니다. "잘못했다고 할거냐?" 나는 그의 슬리퍼를 바라보았습니다. 너무나 아파 거의 숨을 쉴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 다. 그래서 입을 열었고 용서해 달라는 말, 바로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왔습니다. 내가 다시 의자에 앉자 그도 자기 의자에 앉아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 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생활이 바뀔 거야!"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나는 아까 용서해 달라고 말한 사람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 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까지 나는 나의 내부에,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 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일곱 번째 면담 하루하루가 그렇게 흘렀습니다. 나는 학교에 갔고, 엄마와 그는 함께 직장에 나갔습니다. 내가 학교가 끝나고 집에 와도 그들은 병원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녁 식사시간까지 나는 혼자 지냈습니다. 그들과 약속한 대로라면 오후에 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난 이제 중학 교에 다니고 있었고 숙제도 산더미처럼 많았습니다. 하지만 난 공부 같은 것은 전혀 대수롭 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들어 있어서 집안에 가만히 있을 수 가 없었습니다. 밤늦게까지 여기저기 돌아다녔습니다. 물론 내게는 언제나 목적지가 있었고 남들은 자주 이용하지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길들도 있었습니다. 특히 나는 바닷가의 길을 좋아했습니다. 가끔씩 집 근처의 늪지에 물새들이 날아왔습니다. 어떤 때는 논병아리가 오기도 했습니 다. 그러면 나는 몇 시간씩 그 새들을 지켜보았습니다. 내가 지켜보는 동안 그 새들은 쌓여 있는 작은 비닐봉지들 사이사이로 우아하게 모습을 감춰 버렸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런 모 든 움직임을 하얀 공책에 적어 넣었습니다. 저녁이 되어 엄마와 그가 퇴근을 할 때쯤이면 난 벌써 집에 돌아와 있었습니다. 난 책상의 전등을 켜놓고 책 위에 팔을 괴고 앉아 책을 읽는 체했습니다. 엄마는 아주 기뻐했습니다. 방문 밑으로 새어나가는 불빛을 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아직도 책상에 앉아 있어요. 고개를 숙이고 책을 보고 있다구요." 그 역시 아주 만족스러워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할 정도였습니다. "지각 있는 꼬마 신사가 되어가고 있군!" 정작 만족을 못 느끼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물론 카나리아 때문이었죠. 이제 그 놈들은 서로 사랑을 했습니다. 이 점은 이미 내가 확인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새끼 낳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나는 잠옷 바람에 새장이 있는 곳으로 달 려갔습니다. 아침마다 가서 봐도 새끼들은 없었습니다.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카 나리아는 수염이나 유방이 없습니다, 아시겠어요? 두 놈 다 암컷일 수도 있고 끔찍하게도 두 놈 다 어린 수컷일수도 있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난 더 불안해졌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을 하면 아기가 태어납니다. 그 전 주(週)에 엄마가 내게 말해 주었 습니다. 엄마와 그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식사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대개 그 시간이 되면 우리가 모두 모일 수 있었습니다. 식 사를 하면서 엄마는 식탁 밑으로 배를 만지며 말했습니다. "곧 동생이 생길 거야."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난 엄마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입을 열고 물어 보았습니다. "왜요?" 그가 낮은 목소리로 내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면 아기가 생기는 거란다." 아셨죠? 그러니까 내 카나리아에게도 당연히 새끼가 생겨야 했던 거죠. 하여튼 내 동생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몸을 웅크리며 '아!'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 렀습니다. 그리고 곧 엄마의 아랫도리가 피바다가 되었습니다. 마치 고장난 수도처럼 피가 계속 쏟아졌습니다. 엄마와 그는 물론 마음이 맞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왜 결혼을 했겠습니까? 단지 그가 질투가 심했을 뿐입니다. 그는 엄마가 아주 오래 전에 다른 남자와 자본 경험이 있기 때문 에 또다시 다른 남자들에게 눈을 돌리고 그들에게 갈 수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는 가끔씩 외박을 했습니다. 집에 들어오기는 했는데 아주 늦은 시간에 들어왔습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엄마와 나는 벌써 잠들어 있었지만 둘 다 그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일부러 큰소리를 냈습니다. 문을 꽝 닫았고 그런 다음에는 손에 잡히는 대로 모두 집 어 던졌습니다. 굶주린 늑대처럼 화를 내며 1층과 2층을 오르내렸습니다. 먹이를 찾았던 겁 니다. 바로 엄마와 나였습니다. 난 아무렇지도 않은 체했습니다. 엄마는 어땠는지 잘 모르 겠습니다. 난 돌들의 이름을 하나씩 외웠습니다. 아시겠어요? 이제는 새에게로 관심을 돌렸지만 난 돌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녹주석(綠柱石), 싸라기눈 돌, 황철광, 유황, 석영, 장밋빛 돌, 형석, 오팔......그렇게 외우다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습니다. 도움이 되었을까요, 아닐까요, 다음날 아침 엄마는 유산을 했습니다. 여덟 번째 면담 마침내 새끼들이 태어났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알이었지요. 그러다가 한 주가 지나자 새 끼들이 나왔는데 눈과 커다란 부리 위에 살이 조금 붙은 것이 꼭 작은 괴물들 같았습니다. 그런 모습이 보기 흉하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난 그 두 놈들이 서로 사랑을 나눴고, 한 놈 은 수컷이고 다른 놈은 암컷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입니다. 처음 며칠 동안은 계속 새장 앞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 공책에 새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기록했습니다.〈두 놈 가 운데 한 마리는 계속 둥지에 있었다. 한 놈이 먹을 것을 물어 오는 동안 다른 한 놈은 새끼 들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그들은 정말 다정한 부모였습니다. 태어난 지 일주일이 다 되어 갈 무렵 새끼들의 깃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자세히 바라보면 아주 사랑스러웠습니다. 새 끼들이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 그 눈은 공처럼 검고 컸습니다. 엄마와 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눈치도 채지 못했을 겁니다. 분명합니다. 우리는 저녁이 되어 식탁에 앉을 때에만 겨우 얼굴을 보았습니다. 대개 그들은 자기들 이야 기를 했습니다. 난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지못해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항상 딴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봤어요? 321호 환자에게 다시 출혈이 생겼어요......" 그러면 그가 말했습니다. "내가 벌써 세 번이나 봉합을 해주었어. 이젠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어. 혈관이 썩어 가고 있거든." 그리고 결핵성 부스럼으로 얼굴이 썩어 들어가는 어떤 환자가 있는데, 뼈 위에 살가죽만 붙은 해골 같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옛날에는 예쁜 아가씨였어요. 내가 사진을 봤거든요. 정말 예쁜 처녀였는데......" 엄마가 말했습니다. 또 트럭에 두 다리가 잘려 병원에 온 환자도 있었습니다. 그 환자의 어머니는 아들이 죽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살을 하려고 했답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 하자면 그들은 항상 이런 이야기, 자기들 직업에 관련된 이야기만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난 그런 이야기들을 듣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혹시 정원의 지빠귀가 전에 둥지를 만들어 놓 은 것은 아닐까?' '전에 보았던 그 작은 새가 굴뚝새일까, 아닐까?' 어느 날 이런 모든 것에 짜증이 났습니다. 갑자기 난 포크를 내려놓고 소리를 질렀습니 다. "다른 이야기 좀 할 수 없어요?!"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나요, 예? 난 정말 피가 무서웠어요.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넌 우리 일이 마음에 안 드니? 아니면......" 그가 계속 말했습니다. "꼬마 조류학자께서는 피가 무서운가 보구나, 응?" 난 포크로 접시 위에 놓인 완두콩을 밀어댔습니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고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이젠 너도 어른이 되기로 결심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진짜 사나이들은 아무 것도 겁내지 않아. 두려움을 이겨내는 거지. 그걸 이겨 내지 못하면 겁쟁이밖에 안 되는 거야. 넌 아마 겁쟁이가 되고 싶은 모양이지, 응?" 그러니까 그의 머릿속에는 바로 이런 생각들이 박혀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내가 비록 비틀어지게 태어나긴 했지만, 그러니까 사생아로 태어나기는 했지만 허약한 남자가 되어서 는 안 되고 절대 내 친아버지를 닮아서도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를 올바르게 세 워 놓을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 죄도 저지르지 않고도 항상 죄 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 엄마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나를 올바르게 세워 놓는다는 것일까요? 그는 나를 철 조각이나 나무로 생 각하는 겁니다. 내가 만약 그의 곁에서 걷기라도 하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길을 가로막았어. 누가 그러라고 했니?" 그리고는 내 뺨을 때렸습니다. 만약 내가 복도에서 천천히 떨어져 걸으면 소리를 질렀습 니다. "너 지금 날 피하려는 거지? 용기를 내라!" 그리고 또 뺨을 때렸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난 올바른 인간이 되기 위해 이래도 맞고 저 래도 맞아야 했습니다. 엄마는 만족스러워했습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이집트의 조각상처럼 희미한 미소를 지었을 뿐입니다. 난 가끔 울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요? 그러면 엄마가 내 곁에 와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습니다. "너도 알지? 다 너 잘되라고 그러시는 거야. 널 친아들처럼 사랑해. 네 친 아빠는 한번도 널 사랑한 적이 없잖니. 네가 어른이 되면 고맙게 생각할 거야. 두고 보렴." 처음보다 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그가 그렇게 착한 사람이라면 내가 어떻게 나쁜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카나리아들은 절대 자기 새끼들에게 그렇게 차갑게 굴지 않았습니다. 항상 가까운 곳에 앉아서 새끼들이 입을 벌릴 때마다 먹이를 넣어 주었습니다. 그래요, 난 공책에 다 적어 놓 았습니다.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나는 그 모습을 스케치해 놓기도 했습니다. 아홉 번째 면담 피 사건은 이미 지나간 옛날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날은 식탁에서 아무 일 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와 엄마는 삐뚤어진 나를 그냥 내버려두고 다시 병원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 다음날도, 그 다음 다음날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난 이미 그 일은 순조롭게 넘어갔다고 믿 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일요일 아침, 엄마는 근무일이라서 병원에 나간 뒤였습니다. 그가 휘파람을 불며 나를 깨우러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어나라. 낚시하러 가자!" 그는 낚시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는 너무 넓어서 위압감을 주는 바다보다는 산 속의 작 은 개울에서 하는 낚시를 즐겼습니다. "긴장을 풀어 버리는 데는 낚시보다 좋은 게 없어." 그가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옷을 입고 하얀 공책을 들고 그를 따라갔습니다. 자동차로 두 시간 정도 가 서 우리는 한적한 작은 계곡에 닿았습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돌들 틈으로 흐르는 시 냇물 소리만 크게 들려 왔습니다. 그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는데, 간혹 말을 할 때면 아주 다정했습니다. 적당한 자리를 찾은 뒤 자기 낚싯줄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작은 것도 하나 꺼내 내게 주었습니다. 그 즉시 고맙지만 난 싫다고 말했습니다. 그 주위에 틀림없이 물총 새 , 할미새, 지빠귀 같은 새들이 수없이 날아다닐 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낚시를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돌 위에 가만히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행 복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계속 낚시를 하라고 했습니다. "한 가지 일 때문에 다른 일을 포기하지 말아라. 넌 낚시를 하면서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새들을 바라볼 수도 있어. 게다가 낚시를 하려면 꼼짝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하니까 새들을 더 잘 관찰할 수 있지." 이야기는 좀더 계속됩니다. 그는 내게 낚시를 하라고 말했습니다. 난 고맙지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의 눈을 쳐다보게 되었는 데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어 낚시를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낚싯줄 두 개를 드리워 놓고 파리를 미끼로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내 자리를 가리키 며 말했습니다. "넌 저기서 해라." 자기는 좀더 산 쪽으로 앉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소리쳤습니다. "미끼가 물린 것 같으면 힘껏 네 쪽으로 릴을 감아라." 그러더니 그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나도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대로 진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내 낚싯줄이 물위 로 펄떡 뛰어올랐습니다. 난 겨우 줄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움직이지 못하게 줄을 움켜쥐 고는 릴을 다시 감아 올렸습니다. 그가 도와주러 내 옆으로 왔습니다. 내 뒤에 서서 나와 함께 낚싯줄을 잡아당겼습니다. 잠깐동안 있는 힘을 다해 잡아당기자 어마어마하게 큰 송어 가 물 밖으로 끌려 나왔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잘했다. 네가 해냈어!" 나도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너무 좋아서, 물고기가 공중에서 요동을 치면서 우리 둘 사이에, 우리 둘의 다리 사이에 당도할 때까지 미소를 지었습니다. 물고기는 아직 살아 있 었고 반짝반짝 빛이 났습니다. 하지만 곧 비늘 위에 흙이 덮였습니다. 그러자 마치 물고기 는 내부에 어떤 충격이 가해진 듯 쉴 새 없이 이쪽저쪽으로 퍼덕이기 시작했습니다. 물고기 의 한쪽 눈이 내 쪽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다가 반대쪽으로 몸을 뒤척여 또 다른 눈으로 나 를 쳐다보았습니다. 눈동자는 검고 작았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작은 지푸라기 하나가 붙어 있었습니다. 날 보고 있지만 몸통 한가운데가......금속의 갈고리가 눈을 관통하고 지나갔 습니다. 그 주위는 온통 피투성이였습니다. 난 고개를 동리고 말했습니다. "이제 다시 물 속에 넣어 주면 안 돼요, 예?" 그는 한 손으로 내 턱을 잡더니 부숴 져라 움켜쥐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중에 먹으려고 고기를 낚는다는 것쯤은 너도 알겠지?" 그 순간 주위는 고요했습니다. 멀리서 날고 있는 할미새의 노래 소리가 들렸습니다. 할미 새가 사라지자마자 그는 내게 돌을 하나 주면서 말했습니다. "네가 죽여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돌을 땅에 떨어뜨렸습니다. 그는 돌을 집어 다 시 한번 내게 들려주었습니다. 결론만 말하자면 그런 장면은 몇 번이나 되풀이되었습니다. 그가 천천히 말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참을성이 있는지 시험해 보는 거군." 하지만 난 그가 별로 참을성이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항상 생각해 왔습니다. 몇 분이 지 나자 주먹이 날아 왔습니다. 너무나 세게 쳐서 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땅바닥에 쓰러진 채 그가 돌로 물고기의 머리를 내리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속에 박혀 있는 낚싯바늘과 함께 물고기의 머리가 짓이겨졌습니다. 모든 게 다 끝났어. 내가 다시 일어섰을 때 그는 주머니에서 칼을 꺼냈습니다. 그 칼로 송어의 머리를 잘랐습 니다. 손에 머리를 들고 내 쪽으로 왔습니다. 피와 노란 골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 습니다. 난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쨌든 난 일어섰습니다. 하 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그가 벌써 내 목을 움켜쥐었고 물고기 머리를 들고 있던 그 손을 폈 습니다. 그리고 물고기의 머리를 내 얼굴에 문질렀습니다. 거의 정오쯤이었을 겁니다. 그는 자동차에 오르면서 내 어깨를 감싸 안고 말했습니다. "너 아직도 피가 그렇게 무섭니?" 그러더니 무슨 다정한 학교 친구나 되듯이 나를 자기 옆으로 바짝 끌어당겼습니다. 나는 도시에 도착할 때까지 얼굴을 씻지 못했습니다. 도시 근교에 접어들자 그는 비로소 작은 우물 앞에 자동차를 세웠습니다. "내려서 빨리 얼굴을 씻고 와." 얼굴을 씻기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벌써 살갗에 피가 말라붙어 있었고 몸 속 깊숙한 곳까 지, 심지어 머릿속까지 피가 흘러 들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난 엄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냥 이런 말만 했 습니다. "너 무슨 물고기 봤지? 믿어지지 않겠지만 당신 아들이 진짜 물고기를 잡았어!" 그러더니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바로 그날 저녁, 우리는 감자와 마요네즈를 넣고 송어를 끓여 먹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도 그들과 함께 아무 말 없이 그 음식을 먹었습니다. 조금 뒤에 목욕탕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할 수 있는 한 목구멍 깊숙이 손가락을 집어넣었습니다. 열 번째 면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일요일은 세례를 받은 것 같기도 했고 분수령 같은 것이 되기 도 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난 시간이 달라졌다고 믿습 니다. 모든 것이 아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분명하게 느낄 수는 없었지만 그 어 떤 것이 내 손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피 냄새였습니다. 손을 깨끗이 씻어도 그 냄새는 남아 있었습니다. 그날 밤 난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입가에서도 눈 주위에서도 계속 피 냄새가 났습니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면 베개 속으로 그 냄새가 스며드는 것 같았습니다. 얼굴을 높이 쳐들 고 혀로 입술 끝을 핥으면 축축하고도 부드러운 피가 느껴졌습니다. 공포와 혐오감을 맛보 았지만 그것 말고 다른 느낌도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어올 때 사람들이 '이 바람은 무엇인 가를 예고하는군' 하고 말하는 것과 약간 비슷합니다. 아니면 주제 음악을 들을 때 처음 몇 음정만 들어도 이 곡이 우울하게 끝날지 유쾌하게 끝날지 알아맞힐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요컨대 인생에서도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났고 그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다는 거죠. 사람들은 아주 사소한 일 때문에 다른 어떤 것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탈선을 해서 그 이전에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로 걸어가게 됩니다. 내가 정확하게 말한 건지, 당신이 나를 제대로 이해했는지 잘 모르겠군요. 나 역시 그 당 시에는 그런 사실을 몰랐습니다. 다시 모든 사건들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서 이제서야 그 사 실을 알게 된 거죠. 세례식? 아니 오히려 도유식(주:병이나 악마를 쫓거나 신성한 힘을 주 입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몸에 기름을 바르는 의식)이라고 하는 게 더 나을 겁니다. 하이에 나가 먹는 썩은 고기 냄새와 비슷한 그 어떤 것이었지요. 하여튼 내 자신의 습관을 지키기 위해, 난 월요일 아침, 밤새 한잠도 못 잤지만 학교에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옷을 입기 전에 내 카나리아 가족들이 어떤지 보러 갔습니다. 처음에 나는 내 눈앞에 벌어진 일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을 그냥 바라보 았습니다. 그렇게 바라보면서 난 '지금 꿈을 꾸는 거야' 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런데 내 뒤로 엄마가 지나가면서 나를 툭 건드렸기 때문에 내가 깨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 고 새장 바닥에 갈기갈기 찢겨진 몸뚱이들이 바로 내 새끼 카나리아들의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한 마리는 오른쪽에, 다른 두 마리는 왼쪽과 물통 옆에 있었습니다. 모두 들 목과 배가 찢겨져 짧은 깃털 사이로 내장들이 다 보였습니다. 아직 날지도 못하는 새끼 들인데 모두 둥지가 아닌, 둥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죽어 있었습니다. 부모 새들은 아무 렇지도 않은 체했습니다. 짹짹거리면서 이쪽 나뭇가지에서 저쪽 가지로 가볍게 뛰었습니 다.'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난 내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한 발자국도,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어 새장 앞에 그냥 서 있었습니다. 나는 계속 잠옷 차림으로 새장 앞에 서 있었고 벌써 외투까지 걸친 그가 내 곁에 와 섰을 때 내 발은 맨발이었습니다. 그는 내 곁에 서서 창살 사이로 새장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더니 이 렇게 말했습니다. "저런, 다 죽었구나." 그날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학교에 간다고 말하고 집을 나왔지만 가지 않았습니 다. 난 버스를 타고 바다로 갔습니다. 점심 시간이 될 때까지 해변가를 배회했습니다. 그곳 에 있었지만 마치 그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아주 분명하게 내 가 나무토막이 되어 버린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습니다. 나무든 돌이든 그런 것은 아무래 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 무엇이 된다 해도 아무 느낌이 없었을 겁니다. 그래요, 난 불 속 에 내 팔 하나를 집어넣고, 불꽃이 훨훨 타올라도 그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었습 니다. 결국 아주 작은 부분만이 살아 남게 되니까요. 살아 남은 부분은 절대 꺼지지 않는 불꽃같은 것일 거예요. 그것이 남아 생각을 하는 거지요. 내가 깨닫지도 못한 사이에 그 부 분이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날처럼 난 혼자 점심을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뒤 난 무얼 하면 좋을지 몰라 잠을 자러 갔습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나는 갑자기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습니 다. 꿈을 꾸었습니다. 다른 날처럼 그날도 난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는 불길에 사로잡혔습니다. 불길은 안에서부터 타올랐습니다. 난 물로 뛰어들었지만 불을 끌 수 없었 습니다. 그래서 온몸의 숨을 한곳으로 모아 큰소리로 고함을 쳤습니다. 꿈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소리를 쳤습니다. 그 소리에 놀라 잠을 깨어 보니 방안이었습니다. 난 저녁식사 시간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딱 한 번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부엌에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새장 앞을 지나게 되었지만 못 본 체했습니다. 피 냄새가 풍겼습니 다. 난 겁이 나서 죽은 새들을 치울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날 밤처럼 어머니와 그가 자동 차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정원에 주차를 해놓고 집으로 올라왔습니다. 식탁에 앉아 포도주를 마시며 그가 말했습니다. "난 네가 저 죽은 새들을 좀 갖다 버렸으면 좋겠는데." 난 그러겠다고도 싫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가 자리에 서 일어나 새장을 살펴보러 갔습니다. 다시 부엌에 들어오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체 뭘 기다리는 거냐, 엉? 구더기가 다 파먹길 기다리는 거냐?" 나는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는 내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우려고 애썼습니다. 나는 손가락으로 식탁보를 움켜쥐고 발로 식탁 다리를 걸었습니다. 그는 날 잡아 끌려고 했 고 난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목 힘줄들이 불거져 나왔습니다. 그 사이 엄마가 수프를 식탁 위에 갖다 놓았는데, 앞에 놓인 접시에서 수프에 든 초록색 야채들이 물결 쳤습니다. 그가 소리쳤습니다. "빨리 치워!" 나도 지지 않았습니다. "싫어요!" 이런 상황이 2분 정도 계속되었을 겁니다. 나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기습적으로 그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당신이 치워, 이 살인자!" 정면에서 그에게 수프 접시를 집어던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물이 들어 있는 큰그릇에 내 머리를 처넣었다가 밖으로 끄집어냈습니다. 잠시 후 내 방으로 데리고 가서 방문을 잠갔습니다. 열쇠 소리만은 분명하게 기억합니다. 난 땅바닥 에 내팽겨쳐졌고 그는 발길질을 하고 주먹을 휘둘렀습니다. 한동안은 방어를 해보았지만 이 내 지쳐 버렸습니다. 소용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체했습니다. 조금 뒤 나는 내 침대에, 그러니까 내 침대 밑에 누워 있었습니다. 동굴 속에 있는 것 같 은 기분이 들어 그곳에 누워있었을 겁니다. 피 냄새가 났습니다. 혀를 내밀어 보았습니다. 코피가 나고 있었습니다. 온몸이 터져 피가 났습니다. 당신에게 말했었죠. 그날 일은 세례 식이나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다음날 나는 기숙학교로 가게 되었습니다. 열한 번째 면담 물론 난 심리학자와 면담을 해야 했습니다. 보세요, 난 벌써 당신의 분야도 경험을 했다 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난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내게 이야기를 시키려고 애를 쓴 사람은 바로 그 심리학자였죠. 내가 계속 고집을 부리며 입을 열지 않자 그는 내게 그림 을 그려보라고 했습니다. 난 할 수 있는 한 엉터리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기숙학교 로 갔습니다. 혹시 내가 말을 좀 했거나 좀더 신경을 써서 그림을 그렸다면 기숙학교에는 안 갔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일은 그렇게 되었고 바로 그날 나는 떠나게 되었습니다. 기 분이 좋았냐구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은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랬 을 겁니다. 난 그들에게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는 생각에 아주 행복했으니까요. 단 한 가지 걱정은 내 공부가 중단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고기 사건이 벌어진 그 일요일 이후 난 내 공책에 아무 것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돌을 수집하는 일이나 새의 움직임을 쫓는 일도 하 지 않았지요. 너무 급하게 떠나는 바람에 나는 내 기록들을 모두 집에 그냥 놓아두고 갔습 니다. 기숙학교는 불투명한 유리들이 달린 누런 건물이었습니다. 그 건물은 들판 한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난 뒤였습니다. 학생들은 모 두 서로를 알고 있었습니다. 첫날은 수도원장이 나를 맞았습니다. 원장은 백발이 성성한 신 부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은 금방 물에서 빼낸 것처럼 축축했습니다. 그는 자기 방에서,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지 않고 떼로 모여 다니면 얼마나 안심이 되 는지, 그들에게 막대기를 사용하는 게 얼마나 현명한 일인지를 이야기했습니다. 난 전혀 알 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한동안 난 아이들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학교 병실에서 며칠을 보냈으니까요. 병실에는 나말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난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며칠을 보냈습니 다. 내 앞의 벽만 바라보았습니다. 난 내 수집품들을 분류하는 데 정신을 집중시켜 보려고 했습니다. 이름을 외는 습관을 잃지 않기 위해 생각나는 이름을 몇 번이고 떠올려 보았습니 다. 하지만 너무 추웠기 때문에 이름을 제대로 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수집품들의 이름 과 모양이 혼동되기 시작했습니다. 회복되자마자 난 다시 내 방으로, 그리고 학급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규율들 이 있었습니다. 난 그때 그 규율들을 잘 몰라서 실수를 했고 항상 벌을 받았습니다. 친구들 과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었다면 아마 학교 생활이 훨씬 나았을 겁니다. 하지만 학생들끼리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주임 교사의 감시 아래서 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왜 그랬는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학생들이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 호감이 곧 바로 그 어떤 것으로 변하게 될까 봐 겁을 냈던 것입니다. 난 그때까지 그러한 것들이 존재 한다는 것도 몰랐고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남자끼리도 성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물론 그렇게 감시를 해도 그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밤에, 혹은 화장실에 갈 때 그런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일을 좋아했느냐구요, 아 니면 싫어했냐구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식의 의문은 가져 본 적이 없었습니다. 처음 경험했을 때는 그저 아프기만 했습니다. 약간 놀라기도 했는데 그 후에는 습관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매일 어떻게 하면 그 일을 할 수 있을까만 생각했습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나도 다른 아이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었습 니다. 보세요, 만약 그 시기를 정의할 말을 생각해야 한다면 내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 은 추위와 어둠입니다. 방과 복도가 아무런 장식도 없이 크기만 했기 때문에 는 추웠고, 해 가 들지 않는 데다가 불빛도 아주 약했기 때문에 항상 어둠침침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그 일은 아주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서로의 체온으로 약간 의 온기라도 느껴 보려고 그 일을 한 것입니다. 봄을 넘기고서야 나는 겨우 추위가 공기의 온도와 연결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 습니다. 차갑게 변하는 것은 살갗이었고, 살갗 밑에는 살이 있었습니다. 가끔씩 나는 움직 이지 않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때때로 나는 심장도 얼음으로 변해 버려 가슴 상자 속에 가 만히 담겨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냉동실에 들어 있는 쇠고기 덩이처럼 말입니 다. 우리 부모는 단 한번도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았습니다. 편지 한 장 보내지 않았습니다. 꼭 한 번, 기숙학교에 온 지 두 달만에 엽서가 한 장 도착했습니다. 엽서 뒤에는 '잘 지내길 바란다.' 라고 씌어 있었고 뒤에는 '리타' 라는 서명이 들어 있었습니다. 한 학기가 끝나기 직전, 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니까 그 일을 하다가 발각된 거죠. 난 아주 어린 학생과 함께 있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나쁜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우린 그 저 서로 손을 잡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어쨌든 신부님이 문을 열었고 환한 불빛이 우리를 비추었습니다. 어린아이가 훌쩍거리기 시작했고 자기는 아무 죄도 없으며 내가 억지로 그 짓을 했다고 소리쳤습니다. 우리는 목덜미를 잡혀 어느 방으로 끌려갔습니다. 잠시 후 원장 신부님이 손에 자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그 어린아이에게 책상 위에 손을 올려놓으라고 했 습니다. 그리고 자로 손을 때렸습니다. 손바닥에 피가 날 때까지 때렸습니다. 가끔씩 매질 을 멈추고 내가 그 모습을 지켜보는지 확인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 애를 문 앞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는 아이를 내보내기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게 네 친구 덕택이니 감사해라." 이제 원장 신부님과 나 단둘만 남았습니다. 난 이제 내 차례라고 생각했고 매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원장 신부님은 내 곁에 와서 어깨 위에 팔을 얹으며 말했습니다. "유감스럽지만 널 가두어야겠다." 그래서 난 '별로 나쁘지 않군'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날 어두운 방안에 들여보내고 열 쇠로 문을 잠갔을 때, 난 행복한 감정 같은 것이 느껴져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난 기숙학교에서 지낸 이래 처음으로 춥지 않았습니다. 난 아까 보았 던 어린아이의 손과 그 손위에 흐르던 피를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내 몸 속에서 따뜻한 기 운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돌이나 쇠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밑에, 그 안 에 아직도 살아 있는 따뜻한 그 무엇인가가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 후 난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라 잠을 잤습니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지만 문을 여는 열쇠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습니다. 내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곧 누군가가 내게 달려들어 나를 눕히고 내 몸 위에 올라왔습니다. 난 그 사람이 얼굴에 무시무시한 가면을 쓴 것을 언뜻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말 했습니다. "가만히 있어. 난 악마야. 움직이지 마." 어쨌든 그의 손이 내 몸을 만지자마자 난 그가 악마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손 은 축축하고 매끄러웠습니다. 원장 신부님의 손처럼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겠죠, 예? 당신도 벌써 아셨어요? 난 그저 말을 할 수 없습 니다. 그 순간부터 내 마음은 다시 차가워졌고 그 상태는 영원히 지속되었습니다. 며칠 뒤 난 그 방에서 풀려났고, 산책 시간에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 학교에서 달아났습 니다. 내가 살던 도시까지 가는 데에는 이틀이 걸렸습니다. 걸어서 조금 가다가 차를 얻어 타고 가기도 했습니다. 엄마도 사건의 전모를 알고 나면 내가 돌아오길 잘했다고 생각할 거라는 확신은 점차 강해졌습니다. 모든 일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잘 풀릴 겁니다. 아마 엄마와 그 는 나를 좋아하게 될 겁니다. 그러면 된 거지요. 우리는 그렇게 살 것입니다. 초인종을 누를 때 나는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의 자동차가 없었기 때문에 나 는 더 침착해질 수 있었습니다.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계속 미소를 지었고 부엌으로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머니는 오븐 앞에 서 있었는데 발소리를 듣고 몸을 돌렸습니다. 난 어머니가 팔을 벌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엄마, 내가 왔어요!" 어머니가 대답했습니다. "나고 안다." 그러더니 다시 요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열두 번째 면담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싶으세요? 난 다시 기숙학교로 돌아가고 말았습니 다. 그래요, 학교에서는 나를 다시 데려가기 위해 약간의 거짓말을 꾸며댔습니다. 그들은 내가 다시 돌아오길 바라지 않으며 한번 달아난 학생은 다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했습니 다. 엄마는 다시 받아달라고 거의 애원하다시피 했고 마침내 그들도 승낙을 했습니다. 나는 이틀 후에 다시 떠났습니다. 집에서 보낸 그 며칠간은 약간 이상했습니다. 엄마와 그는 내게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그곳에 내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들은 즐거워하지도, 그렇다고 화를 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뿐 이었습니다. 하루는 아침에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라 내 방에 그냥 있는데 엄마가 들어왔습 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앉아라. 네게 할말이 있다." 나는 침대에 앉았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너무나 추워서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습니다. 몸 이 떨렸고 이가 부딪쳤습니다. 난 그간에 일어난 일을 어머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내 말을 믿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엄마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넌 거짓말쟁이야. 모두 네가 꾸며낸 이야기지.' 내가 몸을 덜덜 떨자 엄마는 내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너 일부러 몸을 떠는 거지. 이렇게 따뜻한데 어떻게 추울 수가 있니?" 그래서 난 떨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애를 써보았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습니 다. 그래서 일부러 그러는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옷장에 가서 스웨터 두 개를 꺼내 옷 위에 껴입었습니다. 그러자 엄마는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한숨을 쉬면서 말했습니다. "부모가 된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너는 잘 모를 거다." 엄마는 배를 쓰다듬었습니다. 배를 내려다보다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새로운 소식이 있어. 중요한 소식이지. 곧 네 동생이 생길 거야." 난 천천히 엄마를 살펴보았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은 아무런 표시도 나지 않았습니 다. 엄마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내 마음은 이미 딴 곳에 가 있었습니다. 거기, 엄마 앞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나무토막이었습니다. 엄마의 목소리가 계곡 에 울려 퍼지는 메아리처럼 들렸습니다......엄마는 지쳤고 너무 일이 많으며, 아빠도 지쳤 답니다. 이제 곧 아기가 태어날 테니 내가 착한 마음을 먹고 기숙학교로 돌아가면 모두에게 훨씬 더 좋은 일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이건 잘못된 이야기' 라고 생각하며 나무에 겨우 매달려 있는 나뭇잎처럼 다시 몸을 떨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 며칠 동안 그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두어 번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처음 같이 식사를 했을 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체했습니다. 내 쪽으로 등을 돌리고 눈은 그 너머를 바라보았습니다. 두 번째 식사를 할 때, 자리에 앉자마자 딸꾹질이 크게 나왔습니 다. 입을 막아 보았지만 딸꾹질 소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그가 몸을 돌려 말했습 니다. "이제 그만 해도 될 텐데." 그러자 딸꾹질은 더 크게 나왔습니다. 주위는 조용했고 식당 안에서는 딸꾹질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접시 위에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던지더니 내 쪽으로 왔습 니다. 난 몸을 작게 웅크렸습니다. 잠깐 동안 피해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그가 내 게 오기 전에 엄마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습니다. "제발 이러지 말아요." 그는 잠깐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가 몸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문을 쾅 닫으며 집에서 나가 버렸습니다. 그 뒤 난 엄마를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 엄마는 내 방에 와서 잘 자라는 인사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떠나려고 밖에 나와서 엄마 방의 창을 보기 위해 몸 을 돌렸지만 엄마는 창문 뒤에 서 있지 않았습니다. 혼자 여행을 했기 때문에 다시 달아날 수도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차를 타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내 주머니에는 단돈 1리라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게 뭡니까? 난 단 한번이라도 착한 아이가 되어 보고 싶었습니다. 동생이 태어난다는 것은 두 사람이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틀림없습니다. 그래 요, 난 그 사랑이 올리브 기름의 얼룩처럼 넓게 퍼져 나가길 바랐습니다. 그 자국이 아주 커지길 바랐습니다. 얼마 후 그 속으로 나도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커지 길...... 그러니까 모든 일을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내가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았습니다. 학교에 돌아가자마자 난 벌을 받았습니다. 난 석 달 동안 외출을 할 수 없었습니다. 여름 이 되었고 학교에 남아 있는 사람은 열 명 남짓이었습니다. 낙제를 했기 때문에 난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해야 했습니다. 다른 것을 생각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난 계속 책만 보았고 쉬 는 시간에는 내 수집품들을 분류했습니다. 그 시기에도 난 모든 것을 다 잃은 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열심히, 아주 열심히 하면 아직은 위대한 과학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 한 겁니다. 원장 신부님요? 복도에서 겨우 두 번 마주쳤을 뿐입니다. 볼따구니를 한방 먹이고 난 당 신의 본색을 알고 있다고 소리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가 한 손으로 내 턱을 만 지면 난 그저 얼굴이 빨개져 눈을 내리깔고 말았습니다. 가을이 되었습니다. 난 우수한 성적으로 시험에 통과했습니다. 아무도 내게 두꺼운 옷을 보내 주거나 하는 일에 신경을 써주지 않았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될 때까지 집에 전화를 할 수 없다는 것도 내게 내려진 벌의 하나였습니다. 그 몇 달 동안 추위가 점점 더 심해졌고 그 추위는 내 뼈를 갉아먹었습니다. 낮에 이 방 저 방 걸어다닐 때면 대퇴골이 부딪치는 소리와 쇄골(鎖骨)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몸이 다 얼어붙었습니다. 그래서 얼어붙은 살끼리 서걱거리며 부딪쳤습니다. 냉동실에서 생선을 꺼 내 본 적 있으세요? 그 생선을 식탁 위에 집어던지면 돌덩이가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납 니다. 그 몇 달 동안 내가 꼭 그랬습니다. 난 애타게 밤이 되길 기다렸습니다. 이불 속의 온기를 기다린 거죠. 하지만 그 기다림은 헛된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이불 속에서도 몹시 추웠으니까요. 내 옆에는 아주 어린 꼬마가 있었는데 그 애는 항상 훌쩍거렸습니다. 난 그 울음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다른 생각, 촉촉하고 따뜻한 대지의 심장을 생각했습니다. 상상 속에서 땅 밑으로 내려가는 겁니다. 계속 내려가 땅의 맨 끝, 아주 따뜻한 곳에 이르는 겁 니다. 그곳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불덩이가 파동을 치고 있습니다. 땅이 회전할 때 그 불길 은 여기저기로 흔들리면서 무시무시한 회오리들을 만들어 냅니다. 이런 상상은 가끔씩 꿈으로 이어졌습니다. 꿈속에서 그 불덩이는 자기 공간에서 규칙적으 로 움직이거나 과일의 씨처럼 그곳에 그대로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격렬하게 사방을 강타 하곤 했습니다. 두들기고 또 두들기다가 마침내는 빈틈과 단층(斷層)을 발견했습니다. 그러 면 부글부글 끓는 소리를 내며 높은 곳으로 올라왔습니다. 올라오고 또 올라와서 바다와 호 수는 불바다가 되고 땅 위에 있는 수도꼭지에서는 용암과 화산의 자갈들이 흘러 나왔습니 다. 그리고 왜 그런지 알 수는 없지만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대지의 심 장만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심장, 가슴 상자 한가운데에 있던 그 심장도 폭발을 하고 말았 습니다. 눈에서 입에서 피가 계속 흘러 나왔습니다. 손가락 끝에서는 핏줄기가 길게 이어졌 습니다. 난 항상 그 순간 잠이 깼습니다. 잠이 깨자마자 추위를 느꼈습니다. 그 사이 옆의 꼬마는 잠이 들어서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주위에는 깊은 정적만이 감돌았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식사를 하는데 전보가 왔습니다. 난 화장실에 가서 전보를 뜯 어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네 동생이 태어났다. 이름은 벤베누토 야.〉 열세 번째 면담 어디까지 이야기하다 말았죠? 내 동생이 태어난 이야기를 했나요? 그래요, 난 그 전보를 읽고도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난 어머니의 부른 배 도 보지 못했고 어머니와 그가 사랑하는 모습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난 이렇게 생각했 어요. '아버지 얼굴보다는 내 얼굴을 더 많이 닮았으면 좋겠어. 아주 호감이 가는 아기였으 면 좋겠군......' 그 일 말고는 별다른 일없이 조용히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 시기에 대해서는 난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아침이면 수업에 들어갔고 오후에는 공부를 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모 두 함께 근처의 들판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축구팀이 만들어졌지만 난 거기 들어가지 않 았습니다. 난 움직이는 것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교실이나 도서관에서 공부하 는 게 좋았습니다. 어른이 되려면 아직도 5년이나 더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 다. 그래서 난 어른이 되기 위해 온 힘을 다 기울였습니다. 난 누구와도 이야기를 하지 않 았습니다. 학교에서도 묻는 말에만 대답을 했습니다. 왜 그랬느냐 구요? 나도 잘 모릅니다. 말하기가 싫었고 할말도 없었고 할말도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나무토막이 아니라 시들어 가는 과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 작했습니다. 교실밖에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화 창한 날에는 하루 종일 그 나무를 보았고 안개가 낀 날에는 나무에 매달린 감을 보았습니 다. 처음에는 나무 몸통에 가지만 달려 있었는데 잎이 달리고 동그스름하고 매끄러운, 밝은 오렌지색의 감이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차츰차츰 이파리들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초록색 이 파리들이 적갈색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적갈색 나뭇잎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나무에는 아 주 강렬한 색깔의 감들만 매달려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난 창 밖을 바라다보며 중얼거렸습니다. '오늘은 저 나뭇잎들이 떨어질 거야. 땅바닥에 쌓인 낙엽들 속에서 썩어 갈 거야.' 하지만 나뭇잎들은 매일 아침 제자리에 매달 려 있었으며 그 나무 위에서 점점 더 작아지고 붉어졌습니다. 나뭇잎들은 그렇게 모습을 바 꾸는 중이었습니다. 내 내부에서도 변화가 일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에 또 다른 목소리가 난 전혀 앞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여튼 그사이에도 집에서는 겨울옷을 부쳐 주지 않았습니다. 소포도 부쳐 주지 않았고 아무 소식도 없었습니다. 2월이던가요? 난 용기를 내서 전화를 걸기로 했습니다. 그렇습니 다. 벌써 전화를 걸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지 꽤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전화를 하 지 않았냐 구요? 전화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뿐입니다. 어쨌든 난 마 침내 전화를 걸기로 결심했고, 동전을 마련해서 적당한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 시간은 다 름아니라 바로 그가 집에 없는 시간입니다. 나는 전화부스에 들어갔습니다. 수화기에서 뚜 뚜 소리가 들릴 때 목에서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려 등을 적셨습니다. 나는 기다리 고 또 기다렸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는 순간, 누군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그였습니다. 그는 병원에 있지 않고 집에 있었습니다. 어쨌든 나는 용기를 내서 재가 누구라고 이름을 밝혀야 했습니다. 왜 내 이름을 말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목소리만 듣고는 내가 누군지 모를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 같 습니다. 나라고 말하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엄마를 바꿔 주랴?" 그래서 난 말할 것도 없이 '예' 하고 대답했습니다. 잠시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 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엄마는 우리 아기에게 우유를 주고 있어 서 전화를 받을 수 없다. 그러니까 시간 있을 때 다시 전화하거라' 라고 말한 뒤 다른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습니다. 난 손에 수화기를 든 채 잠시 그 자리에 가만 히 있었습니다. 아기에게 우유를 주고 있다는 것은 생가지도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난 다정 한 말을 듣기는커녕 수화기를 통해 전달된 너무나 냉담한 반응에 더욱 더 추워지기만 했습 니다. 바로 그날 감 몇 개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기지에서 툭 떨어져 내렸습니다. 의자 위에 올라서면 나무 몸통 아래로 떨어져 산산조각 나는 감들과 핏자국처럼 붉은 나뭇 잎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사육제 기간에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육제 마지막 날, 그러니까 고해성사를 하 기 바로 전날이었습니다. 그날 기숙사에서는 작은 파티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날, 그러니까 그날 밤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리는 다음날 아침 곧 그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곱 시가 조금 못 되어서 그 학생을 발견한 사람은 정원사였습니다. 그는 나보다 약간 어렸습니다. 두어 번 내게 숙 제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던 아이였습니다. 파티가 벌어지는 동안 그 애는 즐거워하는 아이들 틈에 끼여서 다른 아이들처럼 웃고 떠들며 여기저기 뛰어다녔습니다. 난 시체를 보지 못했습니다. 안뜰에서 붉은 피와 내장으로 얼룩진 아스팔트를 발견했습니 다. 물론 선생님들은 우리가 그 근처에 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남의 피를 빨 아먹는 사람, 피를 보고 또 다른 피를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어쨌든 난 그 얼룩을 보자마자 이것이 실수로 일어났거나 뭔가 발에 걸려 우연히 벌어진 사건은 아 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잘못해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펄쩍 뛰어내린 것입니다. 그는 나무 위에 매달려 있기가 지겨워져 나무에서 떨어지는 감들처럼 밑으로 뛰어내린 것입니다. 다음날 밤 나는 다리와 팔과 배를 만져 보았습니다. 어느 지점에 내가 있는 것일까요> 나 의 외부는 건조하고 말라 비틀어져 버렸습니다. 내 몸 속에서는 더 이상 수액이 돌지 않았 습니다. 긴바늘을 몸 속에 집어넣어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았습니다. 깊고 아득한 곳에서 아직도 무엇인가가 움직일 뿐이었습니다. 그 움직임이 무엇인지 난 알 수 없었습니다. 아마 그것은 본질적인 움직임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면 힘찬 동력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난 두 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목소리다 들려왔습니다. 어떤 목소리냐고요? 내가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항상 내게 말하는 바로 그 목소리였습니다. 그 목소리는 내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나무에 매달린 감처럼 언젠가 떨어져 인생을 끝마치려고 태어난 게 아니니 몸을 피하라고 충고했습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이건 기억이 납니다. 탐험가들의 모 습, 그러니까 출발을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매다가 나중에 유명해진 사람들의 모 습이 하나하나 모두 떠올랐습니다. 배를 타고 싶었느냐 구요? 어쩌면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늘 그 생각만 하다가 결국은 그 생각을 실행에 옮깁니다. 그래서 나는 달아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산책 시간에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면 일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수풀 속으로 숨어 들어가 거기서 들판으로 나가면 위기를 모 면할 수 있었으니까요. 바다에는 가지 못했습니다. 사흘 동안 나는 주변의 숲 속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녔습니다. 춥고 배가 고팠습니다. 난 역으로 가서 대합실에 들어갔습니다. 내가 역 벤치에 몸을 누이 고 잠을 청하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치며 물었습니다. "너 차표 있니?" 말할 것도 없이 경찰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뭐 하러 내게 그런 질문을 했겠습니까? 열 네 번째 면담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대합실에서 경찰들은 나를 경찰서 로 데려갔습니다. 난 거기서 거의 한 시간 정도 기다렸습니다. 어떤 부인이 다가와서 이것 저것 많은 것을 물었습니다. 나는 모두 꾸며서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곧 거짓말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찌 되 었든 전화 구어 통이면 그들은 나에 관해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나는 기숙학교에서 지내는 게 지겨워서 떠났다고 말했습니다. 가족도 있고 아직 얼굴은 못 봤지 만 갓난 동생도 있으며, 가족들과 함께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부인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받아 적기만 했습니다. 그녀가 내 얘기를 잘 못 알아들으면 다시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서류 양식이 다른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모든 게 다 잘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나에게 서류에 서명을 하라고 한 뒤 어 떤 방에 데리고 가서 다른 말없이 사라졌습니다. 그 순간 나는 한 가지만 생각했습니다.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한 거죠. 감옥이나 그 비슷한 곳으로 가게 되지도 몰랐지만 난 추호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싶 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난 기다렸습니다. 추웠습니다. 배도 고팠습니다. 다행히 경찰이 오더니 뭐 먹고 싶은 게 없냐고 물었습니다. 난 샌드위치가 먹고 싶다고, 안에 뭐가 들어 있어도 좋으니 샌드위치를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해가 서서히 기울고 밤이 왔습니다. 이런저런 상황을 모두 다 생각해 보았습니다. 감옥이 그렇게 엄격하 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 경찰들이 집에 전화를 했는데 그가 '당신들이 처리하세요. 우린 그 애를 데려오고 싶지 않소' 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등등......구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물건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처럼 그렇게 볼멘소리고 대답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면 경찰들이 아직도 내 말을 믿지 않아서, 지금 사진들을 하나하나 뒤적이며 카드의 색인을 찾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피곤이 밀려들었습니다. 생각을 하고 또 해보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 니다. 그래서 난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혀 머리를 벽에 기댔습니다. 문소리에 설핏 들 었던 잠이 깼습니다. 아까 들어왔던 여자가 방안에 들어왔고 그 뒤에 엄마가 있었습니다. 내가 눈앞에 벌어진 일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엄마는 내게 달려들어 두 팔로 날 꼭 끌 어안았습니다. 그 방 한가운데서 난 예전에 엄마와 함께 잘 때 맡았던 냄새를 다시 맡았습 니다. 누군가 말을 했습니다. 바로 엄마였습니다. "학교에서 네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난 뒤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단다. 내 아들, 별일 없었니?" 이렇게 말하더니 내 머리와 얼굴과 눈을 쓰다듬었습니다. 마치 내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면 엄마가 앞을 볼 수 없기라도 한 듯 그렇게 나를 쓰다듬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방으로 갔습니다. 엄마도 서류에 서명을 해야 했습니다. 서명이 끝나자마자 엄마는 거기에 있던 사람들의 손을 일일이 잡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어떻게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모두들 친절하게 대해 주셨어요' 하고 내가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나를 조사했던 그 여자 는 문이 있는 데까지 우리를 바래다주었습니다. 문에 서서 우리가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손 을 흔들며 인사를 했습니다. 모퉁이에 자동차가 한 대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차안에는 그가 타고 있었습니 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내 어린 동생도 타고 있었습니다. 난 차에 올라탔고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약간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포대기에 보따리처럼 싸여 있는 아 기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으흐흐, 몸이 어떻게 된 거지?" 아기는 자고 있었습니다. 아마 겁이 났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내 얼굴이 별로 마음에 안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눈을 뜬 아기가 미친 듯이 울어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엄마가 아기를 품에 안았지만 아기를 달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한 손으로 기어 를 바꿔 가며 운전을 했습니다. 입술을 꼭 깨물고 너무 속력을 내거나, 아니면 너무 느리게 운전을 했습니다. 우리는 약 두 시간 정도의 거리를 자동차로 달렸는데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이런 식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아기가 다시 잠들었을 때도 엄마나 그, 둘 다 입을 열 지 않았습니다. 나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아기가 아주 사랑스럽다거나, 가족들과 함께 있어서 기쁘다거나, 앞으로는 착한 아이가 되겠다 거나 등의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혀가 굳어 버린 것 같았습니다. 나무나 유리가 되어 버린 것 같았습니다. 만화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긴 도화선이 달린 둥근 폭탄이 하나 있는데 검은 색으로 반짝 반짝 윤이 납니다. 도화선에 불이 붙었고 모두들 그 사실을 잘 알지만 아무도 도화선의 불 을 끄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폭탄을 미루며 달렸습니다. 폭탄 이 터졌을 때 사람들은 아직도 폭탄 주변에 있었습니다. 어떤 것이 진실이었을까요? 경찰서 안에서 엄마가 한 포옹일까요, 아니면 차안의 침묵일 까요? 어떤 게 진실이고 어떤 게 거짓일까요? 난 내 자신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답 을 알 수 없었습니다. 집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내 방은 내 동생의 방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주 작은 하얀 색 침대가 방안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작은 곰이 들어 있었습니다. 빛 이 들어오면서 동시에 음악이 나오는 전등도 있었습니다. "넌 부엌에서 자라." 엄마가 말했습니다. "어딘가에 아직 낡은 캠핑용 침대가 있을 거야." 다른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내 눈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침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열 다섯 번째 면담 마침내 나는 다시 집에 돌아왔습니다. 내가 원했던 자리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는 그곳 에서 지냈습니다. 그때는 모든 일이 다 잘 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달리 어떻게 될 수 있었 겠습니까? 난 두 자동차의 이야기를 잊어버렸습니다. 결국 그날 밤 나는 간이 침대에서 잠을 잤습니다. 아주 곤하게 잤습니다. 오랫동안 도망 다니던 동물같이 꿈도 없이 잤습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그들은 벌써 식당에서 식사를 하 고 있었습니다. 난 계속 눈을 감고 그들이 나갈 때까지 자는 체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일어 나서 천천히 옷을 입었습니다. 기숙학교에서처럼 종소리를 듣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모든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졌습니다. 냉장고에서 먹을 것을 꺼내 먹 은 뒤 집 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옷장과 서랍을 열어 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다 궁금했습니다. 물론 난 내 물건들을 찾아보았습니다. 따뜻한 내 옷들과 수집해 놓 았던 돌들과 올리브색 카나리아 한 쌍을 찾아보았습니다. 찾고 또 찾았지만 어디에도 내 물 건들은 없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약 두 시간 뒤에 지하실에서 내 카나리아 새장을 발견했습니다. 이미 새장 안에는 카나리아들이 없었습니다. 새들이 있던 자리에는 아주 큰 거미가 들어앉았는데 새장의 창살과 창살 사이에 거미집을 지어 놓았습니다. 점심 식사시간에 그들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기는 탁아소에 가 있었습니다. 그 래서 난 저녁이 될 때까지 집에 혼자 있었습니다. 먼저 집에 돌아온 사람은 엄마였습니다. 나는 아기를 안고 계단을 오르는 엄마를 미소로 맞았습니다. 엄마도 아기를 테이블 위에 뉘어 놓고 기저귀를 갈아주면서 미소를 지었습니 다. 아기는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아기가 나를 본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활짝 미소를 지 었습니다. 그 순간 내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기도 나를 보고 벙긋 벙긋 웃었던 겁니다. 아기가 나를 보고 웃고 내가 다시 아기에게 답례를 하는데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엄마가 문을 열어 주러 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몸을 숙여 아기를 품에 안았습 니다. 아기는 여전히 웃고 있었습니다. 조용히, 가까이에서 아기를 보다가 아기가 나를 닮 았다는 것, 아버지가 아니라 내 입과 눈을 닮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같이 웃으며 거기 있을 때 엄마와 그가 방안에 들어왔습니다. 엄마는 나를 바라보 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를 보자 '아기를 내려놔' 하고 고함을 쳤습니다. 그러더니 내게서 아기를 빼앗아 갔습니다. 아기는 금방 큰소리로 울어댔습니다. 얼굴이 새 빨개지도록 울어댔습니다. 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난감했습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어쩌면 내 얼굴도 붉어졌는지 모릅니다.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그런 데 왜 그런지는 나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방에서 나와 지하실로 내려갔습니다. 거기 서 저녁 식사시간이 되길 기다렸습니다. 물론 난 시계를 차고 있었습니다. 성체 성사를 기념하는 뜻으로 오래 전에 선물 받은 것 입니다. 난 시계를 바라보다가 바늘이 여덟 시를 가리킬 때 부엌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벌써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들어온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나는 식탁에 다가가서 내 자리에 앉았습니다. 내 자리에는 접시도 물 컵도, 심지어는 포크와 나 이프도 놓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순백의 식탁보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난 말뚝처럼 거기 그냥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엄마와 그의 접시 와 아무 것도 놓여 있지 않은 내 자리를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나는요?" 내가 이렇게 말했지만 아무도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접시를 쳐다보며 계속 먹기 만 했습니다. 난 엄마가 두 번째 요리를 식탁에 가져다 놓는 것을 보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습니다. 거리로 나와 불이 환하게 켜진 창문들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창문의 불이 꺼졌 을 때 난 몸을 움직여 조금 돌아다녀 보았습니다. 내겐 집 열쇠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 이 초인종을 눌러야 했습니다. 엄마가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엄마는 잠옷에 가운을 걸친 차림이었습니다. 내가 계단을 올라갔을 때 엄마가 말했습니다. "식탁에 왜 네 자리가 없는지 물어 보았던 것 같은데......" 난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그러자 엄마가 말했습니다. "보렴, 넌 기숙사에 최소한 6월까지는 있었어야 해. 그런데 네가 바보 같은 짓을 해서, 허 락도 없이 학교를 떠나서 어쩔 수 없이 널 집에 데리고 있는 거야. 넌 여기 있지만 우리에 게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우리는 네가 아직도 기숙사에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어.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넌 그 약속들을 네 손으로 직접 깨버렸어. 우 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다 너를 위한 거야. 내 말 알겠어?" 분명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난 좋다고 했습니다. 엄마에게 인사를 하고 간이 침대로 가서 잠을 잤습니다. 그 뒤에야 난 겨우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내 게 아침 인사를 하거나 잘 자라는 인사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 습니다. 식탁의 내 자리는 언제나 비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난 되도록 집에 있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루 종일 거리를 쏘다녔고, 그러다가 잠을 자거나 냉장고에서 뭐라 도 꺼내 먹으려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디를 돌아다녔냐 구요? 나도 잘 기억이 나지 않 습니다. 로봇처럼, 허수아비처럼 걸어 다녔습니다. 두 번인가, 달리는 버스에 내 몸을 던져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 습니다. 가끔씩 점심 시간에 학교로 갔습니다. 거기서 팔짱을 끼고 내가 부모라도 되는 양 학교에서 나오는 아이들을 지켜보았습니다. 어떤 아이가 달려나와서 엄마나 아빠를 껴안았 습니다. 갑자기 나의 내부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였습니다. 내 뱃속에서 불꽃이 타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불꽃은 배에서 눈으로 올라와 내 눈이 빨개졌습니다. 대지의 축축하고 따뜻한 심장이 내 내부로 들어와 폭발해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그런 순간에는 내가 아직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에 말씀 드렸었죠. 난 그들이 외출을 하거나 잠이 들었을 때를 틈타 먹을 것을 찾아 냉장고 문을 열었습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삼켰습니다. 어떤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내게 말을 하지 않는데 내가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밤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버터를 바른 청어를 먹었습니다. 솔직히 내겐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는 것 따위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 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게 중요한 것은 이제 아무 것도 없었지만, 잘 알다시피 본능이란 마 지막까지도 살아 남는 것이지요. 나는 이미 거의 존재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었지만 엄마의 남편은 아직도 살아 있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난 그 청어들을 마지못해 먹고서 내 침대 위 에 몸을 쭉 펴고 누웠습니다. 그날 밤 그는 늦게 돌아왔습니다. 돌아오자마자 냉장고를 열었습니다. 잠깐 동안 냉장고 문을 열어둔 채 가만히 있다가 소리쳤습니다. "누가 내 청어 다 먹어 치운 거야?" 그가 으르릉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불 밑에 머리를 파묻은 나는 그가 저쪽, 엄마가 있는 방으로 가서 다시 큰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네 아들 놈, 그 사생아가 내 청어를 다 먹어 버렸어! 날 골탕먹이려고 다 먹어 치운 거라 구." 엄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작은 소 리로 대답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가 다시 소리를 지르며 집안을 왔다갔다하기 시 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깰 수 있는 것은 다 깨부수어 버렸습니다. 사실 문 뒤에서 그가 부엌 으로 오고 있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난 그가 내 침대를 발길로 걷어차 침대가 쓰러지는 소 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더 큰소리로 고함을 질러댔고 계속 나를 찾았습니다. 난 오로지 한 가지만 바랐습니다. 그가 빨리 지쳐 버리기를......하지만 그는 힘이 넘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옷장 문을 열고 나를 찾아냈습니다. 나는 그의 눈앞에서 구토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 니다. 그는 숨을 헐떡거렸습니다. 숨을 몰아 쉬면서 그는 말했습니다. "앞으로 냉장고에서 내 음식을 꺼내 먹을 꿈도 꾸지 마!" 그리고 주먹을 휘둘러서 날 바닥에 쓰러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 나는 옷장에서 잠을 잤습니다. 나는 한겨울 동국 속에 있는 여우처럼 옷으로 몸을 둘둘 말았습니다. 그 일이 있은 뒤 몇 달 동안은 특별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너무 신경질적이었 습니다. 엄마가 나를 쳐다보지 않을 때 난 몰래 엄마를 훔쳐보았습니다. 엄마를 훔쳐보면서 어쩌면 엄마도 행복한 체할 뿐이며, 속으로는 나처럼 슬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사이 내 동상은 많이 컷 기어다니는 법을 배웠습니다. 언제나 뒤로 기는 것 밖에 할 줄 몰랐습니다. 어떤 물건을 보면 가까이 가고 싶어했지만 언제나 멀어지기만 했습 니다. 뒤로 가면 갈수록 더 크게 소리를 질렀고 성질을 부렸습니다. 난 아기를 내 품에 안아 따뜻한 체온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내게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저 멀리서 아기를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여름이 되기 얼마 전부터 엄마의 남편은 갈수록 신경질적으로 변해 갔습니다. 다시 질투 가 심해졌고, 술이 취해 밤늦게 돌아오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나는 숨을 수 있는 곳에 몸을 피했습니다. 난 저녁 식사 전에 안전하게 숨을 수 있는 곳을 미리 찾아 놓았습니다. 들키지 않으려고 매일 장소를 바꾸었습니다. 그가 소리치는 것이 들렸습니다. 다른 때처럼 '후레자 식!' 이라고도 했습니다. 두 다리를 딱 벌리고 서서 갈보, 화냥년, 사생아라고 외쳤습니다. 엄마에게 그렇게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가 뭐라고 했는지 난 모릅니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으니까요. 엄마가 야간 근무하는 날이라 집에 없을 때는, 엄마에게 하듯 내게 똑같이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동안 재빨리 도망치는 법 을 배웠습니다. 난 항상 운동화를 신고 있어서 빨리 달릴 수 있었습니다. 그 몇 달 동안 그 에게 잡힌 것은 겨우 두 번밖에 없었습니다. 난 그의 발 밑에 있었는데 그가 내게 발길질을 해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발길질을 해대긴 했어도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 다. 그의 발 밑에 있던 것은 내가 아니라 내가 밀어 넣은 자동 인형이었으니까요. 낮에 거리를 돌아다니면 나는 혼란스러웠습니다. 내가 존재하는 것은 먹기 위해서도, 잠 자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밤을 위해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팽팽하게 긴장된 신경 을 느슨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전기의 법칙을 잘 알고 계시겠죠? 어떤 물체를 방전한 다음 다시 충전하면 어떤 일이 생 깁니다. 너무 오래 충전하면 폭발을 하는 거지요. 그렇게 6월초까지 지냈습니다. 그 무렵에 일이 생겼습니다. 엄마가 병이 난 것입니다. 난 엄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의사도 왔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 습니다. 어쨌든 엄마는 침대에 누워서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엄마와 나만 집에 있으면 난 엄마 방에 가서 엄마를 바라보았습니다. 엄마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습 니다. 어느 날 아침 엄마가 손짓으로 가까이 오라고 할 때까지 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난 엄마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갔습니다.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습니다. 엄마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잠깐 눈을 떴습니 다. 엄마는 손으로 내 손을 찾았습니다. 마침내 내 손을 찾아 힘껏 움켜쥐었습니다. 난 엄 마의 손이 너무 차가워 깜짝 놀랐습니다. 내 손보다 훨씬 차가웠습니다. 동생요? 동생은 집에 없었습니다. 엄마가 병이 나고 얼마 뒤에 시골의 이모 집으로 보냈 습니다. 예전에 내가 갔던 그 이모 집 말입니다. 결론만 말하자면 엄마가 병이 났는데도 그는 여전히 술에 취해 집에 돌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엄마가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 그를 더 화나게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거의 매일 밤 몸을 숨겨야 했습니다. 그는 나를 찾아 다녔고 엄마를 찾았습니다. 위 아래로 오르내리면서 고함을 치고 닥치는 대로 부수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에라도 길들 여지게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그런 일도 그렇습니다. 조금 시간이 흐르면 모든 일 이 정상인 것처럼, 그런 일도 다른 일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그가 다른 날보다 훨씬 더 취해서 돌아왔습니다. 그날 엄마는 많이 아팠습니다. 길거리에서부터 고함을 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계단을 올라와서 내가 숨어 있는 옷장을 지나 곧장 엄마 방으로 갔습니다. 분명하게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잠시 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난 내 은신처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고함 과 구타 소리다 분명하게 들려 왔습니다. 엄마의 목소리도 들렸습니다. 흐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울고 있거나 울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신문에 매일 이런 기사가 실리지 않습니까? 힘이 없거나 겁 많은 남자가 특별한 상황에서 초인적인 힘을 갖게 되어 무슨 일이든 해내고, 갑자기 딴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누구 한테도 지지 않는 무적의 인간처럼 행동하는 겁니다. 그날 밤 내게도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난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옷장 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사자 같은 발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그들의 방으로 달려들었습니다. 근 육이 경직되고 심장은 터져 나갈 것 같았습니다. 엄마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는 손에 칼을 들고 엄마 위에 올라앉아 있었습니다. 난 아직도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합니 다. 다가가던 내 모습과 '안 돼!' 하고 소리치던 엄마의 모습을 모두 말입니다. 그는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곧 엄마의 피가 내 몸 위로 튀어 올랐습니다. 하지만 동적이었던 그 정확한 움직임, 그러니까 어떻게 그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내 손으로 그의 배를 찔렀는 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난 여전히 칼을 움켜쥔 채 뒤쪽으로 펄쩍 뛰었습니다. 무슨 일 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채 난 재빠르게 달아났습니다. 길거리에서 처음 마주친 분수에서 손을 씻었습니다. 물 속에서 오랫동안 손을 문질렀습니 다. 손에 달라붙은 피는 곧 지워졌지만 그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내 몸 속에 그 냄 새가 남아 있었습니다. 저번에 송어 피처럼, 비밀스럽게, 손가락에서 그 위로, 콧구멍 속에 있는 그 어떤 곳으로, 머릿속으로 올라갔습니다. 난 일주일 동안 시내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녔습니다. 대개는 밤에 돌아다녔습니다. 신문 을 읽지 않아서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움직이는 것은 내가 아니라 로 봇이었고 내장이 다 폭발한 야수였습니다. 그 며칠 동안 나는 네 사람을 죽였습니다. 처음 세 사람의 시체는 금방 발견되었습니다. 네 번째 시체는 아직도 찾고 있습니다. 난 그 아이들을 모두 학교 밖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모두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나는 여 러 학교를 돌아다녔습니다. 수업이 끝나도 마중 나오는 이가 없는 아이들을 골라 미소를 지 으며 태연하게 아이들에게 다가갔습니다. 내가 그들의 먼 친척이라고 말하면 그 애들은 좋 아라 흔쾌하게 나를 따라왔습니다. 난 그 애들이 영원히 그렇게 행복하길 원했습니다. 처음 세 명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겠죠. 보고서에서 읽으셨을 테니까요. 목을 졸라 죽이 고 남색(男色)을 하고, 그랬죠. 아직도 거기 그대로 있을 거예요. 철도의 하역장 옆에 묻어 놓았거든요. 네 명 중에 그 애가 제일 어릴 겁니다. 일곱 살이나 여덟 살 정도예요. 나이가 더 많지는 않을 거예요. 침착하고 똑똑한 얼굴이었죠. 그 애를 품안에 안았을 때 느낀 그런 욕망을 다 른 아이들에게서는 느껴 보지 못했어요. 오로지 그 아이에게서만 느꼈을 뿐이에요. 그래서 난 오래 생각하지 않고 칼로 그 애의 가슴을 갈랐습니다. 아주 부드러웠어요. 버터를 두 조 각 내듯 그렇게 가슴을 둘로 벌려 보았습니다. 가슴의 왼쪽에 심장이 있었습니다. 아직 뛰 고 있었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귀중한 것을 다루듯이 심장을 조심스럽게 밖으로 끄집어냈습니다. 마지막 한입을 다 심키고 나자 내 몸 속이 아주 따뜻해졌고 마음이 평온해졌습니다. 몇 년 만에 처 음으로 난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몇 시간 뒤 나는 체포되었습니다. 난 경찰 차를 보자마자 모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경 찰들은 나를 추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난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경찰들을 기다렸습니다. 내가 여기 수감되었을 때 난 우리 엄마의 남편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저 칼로 그의 배를 슬쩍 스치기만 했던 것입니다. 미리 그 사실을 알았다면 내가 다른 아이들을 죽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누가 그 런 말을 할 수 있죠? 당신인가요? 분명 위기는 모면할 수 있었겠지요. 후회하느냐 구요? 고통스럽냐 구요? 그가 어찌 되었 든 그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입니다. 게다가 언제나 두 대의 자 동차의 문제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두 대는 충돌을 할까요, 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오로지 출발한 시간에 달려 있는 겁니다. 눈 속에서 1969년 2월 28일, 헬싱키에서 안녕. 회의 때문에 핀란드에 와 있단다. 3일 동안 회의를 했고 어제 저녁에는 참가자들을 위한 작별 회식이 있었어. 난 별로 그 자리에 참석하고 싶지가 않았지. 그래서 몸이 아프다는 핑 계를 대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회의실에서 호텔까지 걸어왔어. 이제 3월인데도 아직 눈이 수북히 쌓여 있었어. 길을 따라 걷다가 통나무집이 나오면 난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었단 다. 어느새 어두워져서 창턱에는 촛불들이 켜져 있었어. 이렇게 창턱에 촛불을 켜놓는 것이 지방에 널리 퍼져 있는 관습이라고 내 친구가 설명해 주더구나. 이렇게 하면 겨울이라도 해 가 긴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거야. 어찌 되었든 어둠이 너무 빨리 찾아온다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길거리로 흘러나오는 불빛에서 따뜻함이 느껴졌어. 그 안에서 감 도는 따뜻한 분위기를 상상해 볼 수 있지만 잘못된 상상일 수도 있겠지. 따스함이 새어 나 오는 그 안에 어떤 지옥들이 도사리고 있는지 누가 알겠니! 하여튼 눈으로 뒤덮인 조용한 거리를 산책하면서 난 곰 세 마리의 오두막에 몰래 들어간〈금발 곱슬머리〉소녀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어. 난 얼른 집에 가 따뜻한 우유를 한 잔 마시고 이불 속에 들어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잠을 자고 싶었단다. 보렴, 사람들은 종종 자기가 원했던 일들을 꿈속에서 이루기도 한단다. 눈을 뜬 채, 강렬 하게 원했던 것을 꿈꿀 수도 있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을 감으면 그런 꿈이 절대 나타나 지 않는 경우도 있어. 난 언제나 눈을 뜨고 꿈을 꾼단다. 눈보라가 치는 길을 걸어가다가 불빛을 하나 발견하는 거야. 어떤 집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지. 난 그 집으로 들어간단다. 안에는 아무도 없는데 아주 아늑한 거야. 그래서 나는 옷을 벗고 플란넬 잠옷을 입고 나무 로 만든 큰 침대로 가서 빨간 하트가 수놓인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거기서 잠을 자는 거지. 이불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눈이 내리는 소리를 듣는 거야. 눈송이가 하나하 나 지붕 위에 쌓이는 소리를 듣지. 내겐 아무런 의심도 없고, 기다림도 없어. 그저 쉬는 거 야. 난 행복하고 그것으로 만족스럽단다. 잠깐 동안 나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 라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내 안에서 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 최상의 평온이란다. 어제 저녁, 호텔 방의 차갑고 특징 없는 시트 속에서 눈을 감으려는 순간에도 난 이런 꿈 을 꾸고 싶었어. 하지만 전혀 다른 꿈을 꾸었단다. 내가 아주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어. 어릴 때 가지고 놀 던 인형들의 집에 갇혀 있었지. 얇은 나무로 된 2층 짜리 집인데, 여러 개의 문과 창문이 나 있었고 여러 가지 작은 장식들도 붙어 있었어. 식탁에 앉아 보니 내 인형 하나가 거기에 있었지. 창문에 얼굴을 대고 내 방을 들여다보았어. 신발이 여기 한 짝, 저기 한 짝 놓여 있었고 책상 위에 책이 펼쳐져 있었지. 그런데 그것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거기 그렇게 쓸 쓸하게 버려져 있었던 것 같았어. 난 무슨 말이든 해보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 어. 갑자기 몸 속부터 추워지기 시작했단다. 그래서 작은 침대로 가서 누웠지. 얼마 동안 거기 누워 있었는지 몰라. 하지만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처음에는 아주 작았다가 점점 더 커지는 목소리를 들었단다. 남자아이의 목소리였어. 무슨 소리인지 구별할 수는 없었지만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노래를 부른다는 것을 알았지. 자장가였어. 가끔씩 노래를 멈추고 유쾌하게 웃었어. 그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팔과 다리 를 움직여 보려고 했지. 하지만 머리에서 발끝까지 얼음 덩어리로 둘러싸여 있어 꼼짝할 수 없었어. 고함을 쳐보려고 애썼지만 고함 소리도 얼음에 짓눌리고 말았어. 하지만 고함 소리 는 내가 자는 호텔 방안에 울려 퍼졌고, 난 내가 지른 소리에 놀라 잠이 깼단다. 지금 나는 가운 차림으로 여기, 창문 옆의 작을 책상에 앉아 있어. 호텔 종업원이 아침 식사를 가져 왔어. 식사를 하고 나니 한결 나아진 것 같다. 시계를 보니 공항터미널의 약속 시간까지 정확히 네 시간밖에 남아 있지 않구나. 그래서 난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 는 채 호텔 이름이 박힌 종이를 집어서 지금까지 용기가 없어서 하지 못한 일을 하기로 했 단다. 바로 네게 편지를 쓰는 거야. 1969년 3월 1일 로마에서 두 시간 전에 집에 돌아왔다. 짐을 풀고 더러워진 것은 세탁을 했어. 차를 한잔 만들어 응접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마셨단다. 텔레비전은 꺼놓은 상태였지. 이 편지를 절대 다시 쓸 수 없으리라 생각했어. 기절할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단다. 난 강한 여자 야. 적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지. 난 절대 굴복하지 않았어, 절대. 하지만 이제는 주 저앉았어. 이젠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어. 마치 내가 틀어 놓은 수도꼭지 같아. 물이 흘러 나오면 난 그 물을 막을 수가 없어. 평범한 비유겠지만 난 이렇게 잘 들어맞는 비유를 어디 서도 본 적이 없단다. 게다가 난 독창성이라는 강점을 한번도 가져 본 적이 없단다. 돌아올 때 사장과 비행기를 같이 탔어. 직장을 그만두겠다는 얘기를 하려고 난 비행기가 얼른 이륙하기만을 기다렸단다. 그는 내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 지. "이번에 기상학자들 회의 때문에 잠시 머리에 이상이 온 것 아니야?" 나는 웃으면서 내 머리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대답했어. 난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 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어. 정말 오랫동안 그걸 생각해 왔어. 그는 내가 생각을 바꾸지 않 자 놀라는 것 같았어. 그가 말했어. "혹시 자신이 늙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응? 잘 알겠지만 젊은 처녀들이 아무리 많 아도 당신은 언제나 우리 사무실에서 가장 유능한 일꾼이야. 모두들 당신을 좋아하고 존경 하고 있어." 난 그에게 그만두려는 이유를 말해 보려고 애썼지. "어머니도 돌아가신 지금, 난 이제 일할 필요가 없어요. 어머니가 앞으로 100년 정도는 아 무 일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유산을 남겨 주셨거든요." 나는 몹시 지쳤을 뿐만 아니라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의 말을 통역해 주려고 세상의 반대편 으로 날아가고 싶은 의욕마저 없어졌다고 그에게 말했어. 그쯤 되니까 사장도 내 말을 이해하는 것 같았어. 내 나이 정도 된 여자들이 피로를 느끼 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대개는 조금 쉬고 나면, 그러니까 휴가 여행이 라도 다녀오고 나면 곧 회복되곤 했지. "멕시코에 다녀오는 게 어떻겠나? 어때, 아주 멋있을 것 같지 않나!" 그가 결론까지 내렸어.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어. 20년이나 함께 일했기 때문에 가끔 부부처럼 느껴 질 때도 있었어. "알베르토, 지금부터 난 내가 있고 싶은 곳에서 지낼래요. 거긴 바로 우리 집이에요." 내가 그에게 대답했어. 그는 잠깐동안 무슨 걱정이 있는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 어. 그런 다음 갑자기 나를,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어. 그러더니 천천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건가?" 비행기가 거대한 구름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어. 그때 난 네게 쓸 편지를 생각했어. 그에게 대답했지. "그래요, 어떻게 보면 그런 셈이긴 하죠." 난 정리가 잘된 완벽한 우리 집을 둘러보았어. 모두들 내가 물려받게 될 거라고 예상했 지. 고급 취향의 가구들, 우리 가문에서 쓰던 몇 가지 골동품들, 그리고 현대식 부엌이 갖 추어진 집이야. 응접실의 테이블 위에는 항상 싱싱한 꽃이 우아하게 꽂혀 있단다. 오랫동안 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이 집은 내게 피난처였어. 내게는 나만의 사소한 행동들, 개인적인 버릇이 있어. 작년까지는 위층에 어머니가 계셨어. 대개는 내가 올라가서 어머니를 뵈었지. 식사 후에 엄마를 뵈러 올라가곤 했었지. 모든 것이 다 제자리에 있는지 살펴보고 나서 다시 내 거처 로 내려오곤 했어. 이렇게 어머니를 만나 뵙고, 다정하게 구는 행동은 내게 위안을 준 게 아니라 사실 짐처럼 부담스럽게만 여겨졌어. 사랑......바로 이게 필요했을 거야.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나를 보살펴 주셨지. 이제 노인이 되셨으니 내가 어머니를 보살펴 드려야 했어. 하지만 오랫동안 하나의 행동, 사랑에서 나오는 행동이 존재하지 않았지. 그것은 어 머니를 보살펴 드리는 일에서 의무감과는 다른 그 어떤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을 거야. 나는 반항할 수 있었어. 하지만 반항을 하려면 예전에, 아주 오래 전에 내 인생의 초기에 했어야 할거야. 어머니가 이미 노인이 되어 버렸는데 반항이 무슨 의미가 있겠니? 내 인생 에서 변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내 인생을 결정한 것은 바로 어머니였어. 난 그저 어머 니의 말을 따르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지. 내가 항상 느껴 왔던 대로 나는 눈먼 개거나 온순하고 조용한 짐승이어서 모두들 나를 신뢰했지. 내가 모든 이들의 믿음을 배신 할 수 있었을까? 아니야, 난 그럴 수 없었어. 비열함이란, 알겠지만......노인이 되어가면 서 부딪히게 되는 것이란다. 나이가 들면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못했던 일 들을 모두 다 생각하게 된단다. 공허함과 상실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선을 바라보듯이, 확실 하고 조용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거야. 인생에는 수많은 일들이 존재하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아. 아무 색깔 없는 시간의 흐름만이 있을 뿐이지. 지금에서 야 난 그걸 알았어. 사랑에는 힘이 필요한 거야.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해. 하 지만 이런 사실을 내게 말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우리 부모님이 계약이 아닌 다른 어 떤 이유 때문에 함께 계시는 모습을 나는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어. 사랑은 동화 속에나 나 오는 것이었어. 사랑이란 불쌍한 양치기 소녀가 벌컥벌컥 마셔 버린 마법의 묘약, 잠자는 공주를 깨워 주는 입맞춤 같은 거였어. 난 가끔씩 거리로 나가 소녀들과 젊은 여자들을 살펴본단다. 내가 이십대를 보내던 시절 과는 너무 많이 달라졌지. 그들과 나를 비교해 보면서 난 질투심 같은 것을 느낀단다. 좋은 집안의 처녀들은 오로지 훌륭한 결혼을 하기 위해 얌전히 성장해야 했어. 교훈적인 이야기 들만 읽었고 그런 것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어. 병마와 싸우던 그 마지막 몇 달 동안, 어머니가 눈을 감고 큰 베개에 머리를 묻고 계실 때, 난 수도 없이 어머니를 증오하고 있는 나 자신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어. 절대 말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어. 그런 것들은 한번 틀어 놓으면 와르르 쏟아져 나오는 수도꼭지 같으니까. 난 어머니의 고집스러운 오만 함을 증오했어. 나에게 생명을 준 뒤 하루하루, 한 방울 한 방울 그 생명을 빼앗아 가려고 했던 어머니를 증오했던 거야. 하지만 인생의 황혼에 다다른 노인을 어떻게 증오할 수 있겠 니? 난 내 자신이 괴물같이 여겨졌어. 어쩌면 정말 괴물인지도 몰라. 날 괴물이라고 할 사람은 내가 아니지. 네가 모든 이야기를 다 들으면 판단할 수 있을 거 야. 이것만은 말할 수 있어.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난 생전 처음으로 내 폐부 깊숙이 공 기가 스며 들어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난 숨을 쉴 수 있었어. '무엇인가가 틀림없이 변할 거야.' 이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어. 오래 전부터 계속 나를 조여 왔던 그 원 을 깨뜨리고 싶었어. 결정을 할 때까지 몇 달이 흘렀단다. 사설 연구소에 출근하는 아침이 면 내가 옛날과는 다르게 걷는 것 같기도 했어.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천천히 걸었지. '이 건 내가 생전 처음 용기 있게 행동해 보는 거야.' 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집을 나서자마자 난 정반대로 생각했지. '에마누엘라, 이건 네 인생에서 네가 저지른 가장 비겁한 행동들 중 의 하나에 불과해.' 난 금방 진정이 되었어. 네 출생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이름도 정확히 모르는 산파뿐 이었어. 너를 찾기는 거의 불가능하겠지. 분명히 세 달 후에 내게 전화를 해서 아기가 기운 이 없다고, 흔적은 전혀 남기지 않았다고 말해 주었을지도 몰라. 난 다 잘될 거라고 말하고 수고비를 주었는지도 모르지. 난 아무런 동요 없이 평상시의 생활로 돌아왔을 수도 있을 거 야. 하지만 일이 그렇게 된 것은 아니란다. 그와 알게 된 것은 정말 평범한 사건 때문이었어. 난 길 반대편에서 내가 탈 전차가 오는 것을 봤어. 전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달렸지. 달리다가 뭔가에 걸려 넘어져 버렸지. 책을 묶 은 끈이 풀어졌고 난 아스팔트에서 굴러 버렸어. 아픈지 어떤지 생각해 보기도 전에 난 그 가 내민 손을 보았어. 그는 내 팔을 붙잡아 일으켜 주었어. 내가 일어서자마자 그는 물었 어. "괜찮아요?" 그리고는 밑에서 위로 천천히 내 몸을 훑어보았어. 나는 흘깃 그를 쳐다보았지. 그는 젊 었고 연합군 군복을 입고 있었어. 내가 말했어. "아무렇지도 않아요. 고맙습니다." 난 책을 주으려고 몸을 숙였어. 그가 나보다 더 빨리 몸을 숙여 책을 주은 다음 끈으로 묶어 내게 건넸어. 난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지. "이제 가야 해요. 늦었어요." 그가 나를 바래다주겠다고 고집을 부렸어. 난 거절했어. "고맙지만 괜찮아요. 난 혼자서도 충분히 갈 수 있어요." 그래도 그는 날 바래다주었어. 길을 걸으며 그는 자기 이야기를 조금 했지. 그는 군의관 이고 이탈리아에 온 지는 1년 조금 더 되었지만 태어날 때부터 이탈리아에 살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어. 그의 조부모가 이탈리아 사람이었대. 아마 레코 근방 태생이셨던 것 같아. 어쩌면 그래서 자기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어. 그는 부대 에서 제일 먼저 이탈리아어를 배웠어.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이야기를 하는 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거든. 두 구역 정도 간 뒤, 그에게 다 왔다고 말하자 그가 물었어. "어디 살아요?" 난 애매하게 손짓을 하며 저쪽에 산다고 말했어. 그는 내 말을 믿는 것 같았어. "그럼 잘 가요." 그가 말했어. 나도 인사를 하고 앞으로 걸어갔어. 난 모퉁이를 돌기 전에 그가 있는 곳을 보려고 몸을 돌렸어. 그는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어.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가 내게 미소를 보냈어. 그는 가지런하고 하얀 이를 보이며 웃었어. 그는 키가 크고 건장했으며 게 리 쿠퍼처럼 선량한 눈길을 지녔어. 그 다음날 학교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그를 발견했을 때 난 피하지 않았어. 마치 그가 거 기 와 있다는 것을 미리 알기라도 한 것처럼 미소를 지으며 그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지. 그 는 손에 꽃 한 송이를 들고 있었어. 난 그에게 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 난 열심히 말했 어. 그리고 말하는 동안 내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어. 난 혼자 있을 때도 그를 생각하기 시 작했어.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미소를 지었지. 잠자기 전에는 그 사람 생각을 하면서 베개 를 끌어안았어. 난 소녀들을 위한 소설을 아주 많이 읽었지. 이게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어.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난 아주 충격을 받았어. 소설을 읽어보면 사랑은 바로 그렇게 시작되 더라구. 난 벌써 미래를 생각했지. 잔디밭이 있는 작은 집과 식히려고 창가에 놓아둔 달콤 한 케이크들을 눈앞에 그려보았어. 그는 화물차처럼 아주 큰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 거야. 밤이 되면 그는 병원에서 지쳐 돌아오고 난 먹을 것을 준비하지. 그는 자기가 치료한 환자 들의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고 난 그의 이야기를 들어. 난 그와 그의 고귀한 행동을 자랑스 럽게 생각하며 생활하는 거야. 3년 후에는 벌써 아이들이 둘이나 되지. 빨간 머리에 주근깨 투성이의 아이들이야. 아이들은 생기는 대로 다 나을 거야. 우리는 처음 만난 날처럼 사랑 하며 살아가는 거야. 우린 정말 행복해. 그러니까 다른 일은 벌어질 수도 없어. 한달 뒤 그는 내게 일요일 오후에 외출할 수 있느냐고 물었어. 난 부모님들에게 거짓말을 했어. 친구 집에 가서 수학 복습을 하겠다고 했지. 물론 그 친구는 그와의 일을 모두 알고 있었어. 친구는 내 부탁을 들어주었어. 우리는 극장에 갔어. 내 심장은 마구 뛰었고 영화가 어떤 내용인지 제대로 볼 수도 없었 어. 제2부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나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어. 그의 혀 때문에 난 너무나 놀랐어. 입을 맞추는 데도 혀가 사용된다는 것을 난 몰랐거든. 입을 맞춘 그 순간부터 시간은 속력을 내서 달렸어. 난 빨리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어. 우리 부모님에게 이 사실을 말씀드리고 그 즉시 미국으로 가는 거야. 하지만 그에게는 이런 계획 을 한번도 말해 본 적이 없어.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아마 겁이 났던 것 같아. 그는 서 른 살이었고 난 열 여섯 살이었거든. 그는 벌써 가정을 가지고 있는데 내게 그 이야기를 하 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어. 어느 날 그의 윗도리 주머니에 미국 우표가 붙은 엽서 한 장이 삐죽 튀어나온 것을 보았어. 뭐라고 써 있는지 읽을 수는 없었지만 글씨체로 보아 틀림없이 여자가 보낸 것이었어. 그렇지만 이번에도 난 아무 것도 묻지 않았어. 그가 나를 끌어안고 내 눈을 보며 사랑의 말을 속삭일 때 그런 의심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어. 멀리멀리 달아나 버렸지. 그래, 그 사람은 내가 그를 사랑하듯이 나를 사랑했어. 몇 달 동안 우리 부모님들은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하셨어. 다만 학교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무엇인가 의심을 하기 시작하셨어. 어쨌든 나는 비밀을 지켰어. 미국으로 떠나기 바로 전에 급하게 결혼식을 올려야 할 때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씀 드리려고 했어. 부모님들은 반대할 게 분명했지. 하지만 그를 만 나게 되면 분명 모든 저항감을 던져 버릴 거라고 확신하기도 했어. 내가 너무 순진했어, 그렇지 않니? 어쩌면 약간 어리석었는지도 모르겠어. 난 네게 이 이 야기를 들려주어야 하는 건지 오랫동안 망설였단다. 비록 내가 초라한 모습이 되더라도 난 네가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아이라는 걸 알기를 바랐으니까. 아니 적어도 난 그렇게 믿었다 는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구나. 우리가 서로를 알고 지낸 지 여섯 달 뒤에 그런 일이 생겼어. 생리를 기다렸는데 생리가 없었어. 난 다시 한 달을 더 기다렸다가 그에게 말하기로 했어. 일요일 오후에 텅 빈 거리 를 산책하면서 그에게 사실대로 말했어. 나는 그 순간을 수천 번도 도 상상했지. 나는 그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끌어안고 공중으로 안아 올릴 거라고 믿었어. 하지만 그는 내가 마지막 단어를 말하자 -'아이'라는 말이었어-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어.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턱을 비볐지. 그리고 이렇게 말했어. "아, 그래?" 난 거의 분명하다고 대답했지만 그 순간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어. 그가 직접 검사를 했 지. 사실이었어. 난 임신을 한 거야. 그 뒤 며칠 동안은 그를 만날 수가 없었어. 일주일도 더 넘게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어. 마침내 내가 직접 그의 숙소로 찾아가 봤어. 난간에 기대어 몇 시간을 기다렸는지 모른단다. 그가 나를 보자 깜짝 놀랐어. 귀찮아하는 것 같기 도 했지.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어. 그는 한 팔로 내 어깨를 감싸 안았어. 그리고 '여기서 이러면 안 돼' 라고 한마디했어. 그는 내게 카모밀라 차 한 잔을 시켜 주었어. 내가 찻잔을 들어 입으로 불어 식히는데, 그가 자기는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말했어.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고 하더구나. 되도 록 빨리 결혼에 필요한 서류를 만들 것이고, 미국의 오레곤까지 올 수 있는 비행기표를 보 내겠다고 했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어. 어느새 영화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았어. 나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우리 부모님에게 인사를 하고 모든 사실을 말씀드릴 수 있겠느냐고 물어 보았어. 그는 좋다고 했어. 떠나기 전에 하루라도 시간이 나면 우리 집 에 달려오겠다고 했지. 그런 다음 바로 일어섰어. 의자 소리가 시끄럽게 났지. 그가 말했 어. "지금 바로 가봐야 해." 난 그의 소매를 잡았어. 주소를 알려 달라고 하자 그는 봉투 가장자리에다 주소를 휘갈겨 쓴 뒤 내게 건네주었어. 떠나기 전에 내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어 주었지. 난 그를 바라보았어. 그의 바지와 카키색 윗도리, 경쾌한 걸음걸이로 인도를 따라 멀어져 가는 그의 긴 다리를 바라보았어. 그가 언제 이탈리아를 떠났는지는 몰라. 열 이틀 동안이나 기다렸는데 그는 나타나지 않 았어. 난 공중전화 부스에서 사령부에 전화를 걸었지. 사령부에서는 그가 최근 출발한 함대 와 함께 떠났다고 말해 주었어. 다른 말은 물어보지도 못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지. 하지만 난 그때까지도 절망하지 않았어. 난 그를 믿었으니까. 그가 내게 말한 것이 모두 사실일 거라고 믿었어. 보렴, 소설의 여주인공들은 다 그렇거든. 어떤 일을 당해도 긍정적 인 힘을 갖고서 모든 역경과 맞서고, 마침내는 모든 일이 최선의 방향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 달에 그와 함께《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봤어. 바로 그날 저녁, 나는 잠들기 전에 스칼렛 오하라가 영화에서 했던 말을 중얼거려 봤어. '어쨌든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 다음날 아침 학교에 가지 않고 바에 가서 그에게 편지를 썼어. 알고 있는 시적인 표현들을 모두 동원해서,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해 온 우리 들의 미래를 이야기했어. 긴급한 상황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했어. 나는 모든 일이 다 해 결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위안하면서 내 자신을 속였단다. 한 달도 더 넘게 답장을 기다렸지. 어느 날 아침 편지가 왔어. 하지만 그것은 그의 편지 가 아니라 주소 불명이라는 도장이 찍힌 내 편지였어.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주위에 있던 것을 모두 다 부숴 버렸어. 모든 것을 다 말이야. 하 지만 너는 아니야. 너는 내 뱃속에서 계속 자라고 있었고 그걸 숨길 방법이 없었어. 나는 도망칠 생각을 했어. 우리 부모님들이 나를 쫓아내는 상상을 하기도 했어. 성냥팔이 소녀처럼 먹을 것을 구걸하며 이 집 저 집 떠돌아다니는 내 모습을 그려보았어. 난 내 악에 펼쳐질 최악의 상황을 떠올렸고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그 상황을 마주하는 나를 그려보았 어. 내가 예상했던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어. 어머니와 아버지는 꺼림칙한 침묵을 지키 며 그 소식을 받아들였어. 우리들은 식탁에 앉아 있었지. 잠시 후 아버지가 말씀하셨어. "네 방으로 가거라." 난 내 방에 혼자 있게 되자 침대 발치에 무릎을 꿇었어. 기도를 했고 우리 부모님들의 너 그러움에 감사를 드렸어. 지금에서야 그게 오히려 내게는 불행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내게 행운이 찾아왔다고 믿었어. 하늘에서 내게 은총을 내린 것 같았어. 다음날 어머니는 응접실로 나를 불렀어. 맨 먼저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를 대고 학교를 자퇴하라고 말씀하셨어. 그런 다음 어머니와 함께 시골에 있는 우리 별장에 가서 그곳에서 남들의 눈을 피해 출산을 기다리자고 하셨지. 난 너무나 놀라고 또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 했지. 어머니에게 입을 맞추고 고맙다고 말했어. 어머니는 이제 눈에 띄게 부른 내 배를 보 면서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어. "네가 조금만 더 일찍 말했더라면 일이 훨씬 더 잘 풀렸을 거야." 그때 난 미리 말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지. 절망적인 순간에도 난 너를 없애 야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않았거든. 나는 곧 임신에 대한 책을 한 권 마련했어. 나는 하루하루 네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게 되었어. 팔과 다리 모양이 갖추어지고 머리는 이 미 아주 커졌어. 팔과 다리에서 작은 손가락과 발가락이 나오는 거야. 작지만 완벽한 손을 갖게 되고 손톱은 좀더 뒤에 나오게 되지. 내가 어떻게 너를 밖으로 끌어내서 수술대 위의 세면대에 집어던질 수 있겠니? 네 아버지에 대한 원한이 자리잡았다 해도 그런 짓을 할 수 는 없었어. 난 너를 임신하게 된 그 순간을 머리에 떠올렸어. 그 짧은 순간만큼은 우리가 서로 사랑했으니까. 그 사랑이 한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해도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너 의 존재는 그 순간을 확장시켜 놓은 거야. 그 순간은 앞으로의 삶으로 남겨지는 거야. 난 너를 사랑할거고 네 아버지와 닮은 부분까지도 사랑할 수 있을 거야. 바로 부드러운 기억 때문이지. 그렇게,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난 시골에 갔어. 그 몇 달 동안 난 어머니 이외의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 우린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난 꽃들과 그 꽃에 내려앉는 벌들을 지켜보았지. 나 역시 자연의 일부분임을 느꼈어. 그런 기분을 느끼며 나의 내부에서 커다란 힘이 감지되었어. 나 혼자 있을 때면 종종 너와 이야기를 나누었어. 이야기를 나눌 때 너를 리카르도라고 불렀지. 난 네가 분명 사내아이일 거라고 믿었어. 원탁의 기사를 아주 좋아했 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네게 붙였지. 리카르도 쿠오레 디 레오네, 너도 알지? 거의 여덟 달이 다 되어갈 무렵 난 어머니 몰래 네게 입힐 작은 옷을 하나 만들기 시작했 어. 뜨개질바늘 하나로 옷을 떴지. 남색 양모 실을 사용했어. 그 옷을 완성하는 데 사십 일 이 더 걸렸단다. 난 그런 일에 익숙하지 않았거든. 마지막 부분을 떴을 때 나는 의기양양하 게 어머니에게 옷을 보여 주었어.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입술을 삐죽이며 그 옷을 바라보 셨어. 난 어머니의 침묵에 화가 나 소리를 쳤지. "이제 어떻게 짜는지 알았으니까 앞으로 열 개는 더 만들 거예요!" 그 순간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어. "시간 낭비만 했구나. 넌 절대 아기를 볼 수 없을 거야." 처음에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단다. 하지만 어머니가 내가 아직 미성년자여서 아기 가 태어났을 때 필요한 서류도 갖출 능력이 없다고 말씀하셨을 때 겨우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지. 법률상의 서류 때문에 난 태어나지도 않은 내 아기를 포기해야만 했어. 반항을 했느냐구? 내 방식대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의사 표현을 했어. 난 흐느껴 울었고 어머니는 나를 위로 해 주셨지. 난 눈물을 흘리며 말했어. 부모님들에게 짐이 된다 면 내가 돈을 벌겠다고, 우리가 부끄러우면 영원히, 태어날 아기와 함께 사라져 버리겠다고 말했지. 어머니는 나를 납득시키려 아를 썼어. '엄마와 아빠는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야.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은 다 네 행복을 위해서란다. 넌 사고를 당한 거야. 사고를 당했을 때 처럼 치료를 받아야 해.' 그분들은 무의식 속에서나마 잠시라도 내 인생이 파괴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으셨던 거야. 난 젊고 예쁘고 똑똑하고 집안도 좋았으니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아이가 딸려있는데 어디서 남편을 구하겠니? 난 이제 운이 나빠 생긴 과거의 일보다는 미래를 생각해야만 했어. 네가 반대해 봐야 소용없다고 어머니가 말할 때까지 계속 항의를 했어. 난 아주 지쳐 버렸어. 그뿐이었어. 난 미성년자였고, 그 탓에 부모님들이 나 대신 결 정해야 했지. 다른 말을 덧붙여 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걸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에 야 비로소 알게 되었어. 출산일이 한 달 정도 남아 있었어. 난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그 한 달을 보냈단다. 난 기도를 하고 성모 마리아에게 도와달라고 애원을 했어. "한없이 자애로우신 마리아시여, 모든 이들의 어머니여, 저를 지켜 주소서." 난 기적을 기대했어. 그가 돌아오는 기적 말이야. 하지만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산통이 왔어. 넌 아주 정상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단다. 적당한 크기였어. 하지만 의사는 이렇게 힘겹고 오래 진통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말했어. 난 아픔 따위는 두렵지 않았어. 그저 네가 떠나갈까 봐 겁이 났어. 힘을 주는 대신 되도록 너 를 내 안에 억눌러 두려고 애썼어. 난 수축시킬 수 있는 근육이란 근육은 다 수축시켰어. 이건 두 사람 모두에게 아주 위험스러운 일이었어. 같은 순간에 함께 죽어버리고 싶었던 거 야. 하지만 자연의 힘은 강인하단다. 삶이란 완벽하게 계획된 것이야. 넌 세상으로 나왔어. 건강한 사내아이였어. 산파가 곧 너를 포대기에 싸서 팔에 안고 옆방으로 사라졌어. 1초 정 도 였을까......널 언뜻 봤어. 네 머리를 보았지. 빨간 머리였어. 그날 아침이후로 무감각 한 세월이 계속되었어. 난 도시로 돌아왔지만 아무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어. 난 말도 하지 않았어. 기분 전환 삼아 여기 저기를 둘러보았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보지 않았어. 두 달 후 우리 집 주치의의 동의를 얻어 스위스 병원으로 갔어. 이 시기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어. 색깔, 얼굴, 소리, 그 어떤 것도 잘 기억 나지 않아. 잠을 자면서, 침묵 속에서 너와 대화하면서 시간을 보냈단다. 난 이렇게 말했지. "자, 엄마에게 다시 한번 웃어 보렴." 엄마들이 아기들에게 하는 그런 일상적인 말을 했던 거야. 네 배를 꼬집기도 하고 통통한 다리에 입을 맞추어 주었어. 너를 품안에 안고 창가에 서서 몇 시간씩 보내기도 했단다. 눈 이 내렸단다. 털이 잔뜩 난 새끼 새들이 먹이를 찾느라고 풀밭을 팔짝팔짝 뛰어다니면 난 네게 보여 주려고 손가락으로 그 새들을 가리키는 거야. 그리고 나서 해빙기가 찾아왔어. 아래쪽 정원에서 시커멓게 얼룩진 땅덩어리와 그 위로 아네모네 끛봉오리가 언뜻언뜻 보이 기 시작했어. 그때 나의 내부에서도 무엇인가가 꿈틀거렸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나도 몰라. 알 수 없는 어떤 이유 때문에 난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기로 했어. 열의로 위장된 감정만이 유일하게 내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어. 의사들은 만 족스로워 했어. 부활절이 되기 전에 난 밀라노로 돌아왔어. 가정교사와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았지. 혹시 네가 너를 길러 준 부모가 친부모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넌 법의 테두리 를 벗어난 네 친 엄마의 대담한 과거를 상상할 거야. 네 엄마가 그저 평범한 사람의 하나이 며, 길거리나 버스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항상 정장을 차려입고 등을 꼿꼿하게 펴고 다 니는 그런 부인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요즈음 시내에서는 학생들의 데모가 자주 있지. 물샐틈없이 많은 학생들이 떼를 지어 '부 르주아 사회를 타도하자!' 고 소리치며 거리를 내달리는 거야. 어쩌면 너도 그들 틈에 끼여 있을지도 몰라. 푸른색 코트를 입고 핸드백을 들고 지나가는 나를 보면 어쩌면 너도 경멸의 눈초리를 보낼지도 몰라. 하지만 얘야, 인간의 영혼은 옷차림이나 외면보다 훨씬 더 복잡한 것이란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조롱을 당해도 꿋꿋할 수 있다면 옷을 찢어 버리고 바리케이트 위 로 올라가 학생들과 함께 외치고 싶어. 우리의 틀을 만들고 우리를 갈라놓는 것은 고통과 폭력이자, 어떤 파카를 입었느냐, 어떤 외투를 입었느냐가 아니란다. 평범하게 행동하고 평 범하게 말했다는 죄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유령 같은 삶을 살아야 했어. 우리는 위선에 서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하고, 또 장애물을 뛰어넘어야 해. 그래서 난 학생들의 폭력이 두 렵구나. 하나의 거짓말을 또 다른 거짓말로 대체할 태세를 갖춘 맹목적인 그들을 그냥 바라 본다. 너와 함께 살았다면 이런 문제를 두고 서로 심하게 다투었을지도 모르잖니! 하지만 그러 한 말다툼들도 아름다웠을 것 같구나. 둘 다 조금씩 성장학 수 있었을 테니. 내게 남은 너에 대한 기억은 시골에서 만든 그 남색 옷밖에 없어. 난 그 옷을 아직도 옷 장 서랍에 간직하고 있단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그런 밤이 너무도 많단다- 난 그 옷을 꺼내 쓰다듬어 본단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 네가 그 옷을 입어 본 적도 없는데 그 옷에 는 갓난아기 냄새가 배어 있단다. 우유, 오줌, 분 냄새 같은 것들이...... 이쯤 되면 넌 아마 짜증이 날 거야.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 노인네가 뭘 말하려 는 거지? 아니면 아는 것이 이렇게 많은 사람이 어떻게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는지 의심 스러울지도 몰라. 나 자신도 수도 없이 질문을 해보았어. 분명한 대답 대신 어떤 느낌만을 찾아냈단다. 너도 이런 일을 경험해 보았는지 잘 모르겠구나. 봄에 들녘을 거닐다 보면 방 추형의 칙칙한 껍질들을 발견할 수 있을 거야. 그건 뱀의 허물이란다. 그것에 정확히 들어 맞는 몸체가 있었을 것이고 눈의 자리가 있었을 거야. 이제 그 안에는 살아 있는 동물이나 심장, 폐, 독이 든 송곳니는 없어. 모두 빠져나가 버린 거야. 보렴, 네가 태어났던 그날부 터 난 내 자신이 속에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그 뱀의 허물 같다고 생각했어. 외부에서 보면 난 사랑스럽고 상냥한 처녀였지만 나의 내부에 있는 내장들은 감정의 힘 때문에 모두 녹아 버리고 아무 것도 없었어. 난 로봇 같았지. 아니 로봇이었어. 지금도 마찬가지야. 단 지, 나고 모르는 어떤 부분에 손상되지 않은 투시력을 간직하고 있었단다. 객석에 앉아 스 크린 테스트를 하는 감독처럼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지켜보았어. 난 다른 사람의 삶을 지켜 보고 평가했어. 세상에 대한 의견들이 나의 전부를 구성하는 듯했어. 어쩌면 세상사에 휩쓸 리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훨씬 더 분명하게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었는지 도 몰라. 지금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난 살아 있는 동안에 생각을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런대로 현명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아. 그리고 내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는 바로 이거야. '현명하게 네 자신을 살펴보아라!' 삶이란 현명함과는 아주 거리가 멀지! 삶이란 계속적인 움직임과 능력으로 이루어 나가는 거지. 삶의 한가운데서 잘 버텨 내기 위 해서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유연하고 개방적인 태도로 처신해야 한단다. 건강할 때 는 현명함이란 게 그저 쓸모 없는 선로에 불과해. 넌 그 위를 왔다갔다할 수 있어. 그 길을 잘 기억해 두거라.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끝나는지 알고 있어야 해. 그것을 알면 넌 네 자신이 침착하고 힘센 존재가 된 것 같은 생각이 들 거야. 그런데 만약 선로를 바꾸면, 다 른 길로 달려가게 되면?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단다. 이미 네게 말했지만 내 몸은 오랫동안 텅 빈 껍질, 빈 봉투에 불과했어. 사실이지만 그렇 지 않은 부분도 있었어. 매년 널 임신했을 때와 똑같은 현상이 나타났어. 널 임신했던 그 달이 되면 천천히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어. 꼭 뱃속에 뭐가 들어 있는 것 같았어. 그 다음달에는 구역질이 나고 자 꾸 졸렸어. 아홉 달이 지나고 나면 널 낳을 때와 똑같이 몸이 끔찍하게 아팠어. 그리고 나 면 다시 정상이 되는 거야. 물론 처음 몇 번은 병원에 갔었어. 우스운 일이지만 난 성모 마 리아에게 일어난 것과 비슷한 어떤 일이 내게 일어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했어. 그러니 까 높으신 분의 중재로 내가 아기를 갖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지. 기억하지는 못하 지만 혹시 한두 시간 정도 기절했을 수도 있고, 그 때 그런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저 상상 임신이었을 뿐이야. 난 이제 그런 일에 익숙해져 버렸어. 사무실에 서 내 여자 동료들은 이렇게 말했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거의 아무 것도 먹지 않는데 어떻게 이렇게 살이 찔 수 있어요?" 병원에 가서 호르몬 검사를 해보라고 충고를 해주었어. 거리에서 내 옆으로 지나가던 사 람이 임신을 축하한다고 조그맣게 말하기도 했어. 그러면 나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고 더 빨 리 걸었어. 25년 동안, 계절이 지날 때마다 아직도 살아 있는 내 몸의 일부분은 그런 의식 을 거행했단다. 그러고 나면 고열에 시달리고 갑작스럽고 격렬하게 눈물이 쏟아지곤 했어. 그리고 마침내 폐경기가 되었어. 그 순간 난 생각했단다. '마침내 모든 일이 다 끝났어.' 그 사이 오랫동안 병을 앓으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아버지는 내가 공부를 다 끝마치 기도 전에 돌아가셨지. 난 이제 인생의 새로운 장(章)이 여리리라 믿었어. 초라하고 슬프지 만 처음으로 내 인생이 시작되는 거라고 말이야. 난 꽃꽂이 강습에 등록을 했어. 일요일 오 후에는 친구들과 차를 마셨어. 그런데 다른 해처럼, 봄이 되자 다시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어. 졸립지는 않았지만 다른 때처럼 배는 불러 왔어. 이제야 난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어. 그것은 형벌이었어. 죽 는 날까지 갚아야 할 비겁한 행동의 대가였어. 그런데 배가 정상으로 돌아와야 할 시기에도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난 걱정이 되기 시작 했어. 지난달에는 사립 탐정에게 다녀왔단다. 내가 왜 그랬는지 이성적으로는 설명을 할 수 가 없어. 아마 예감 같은 거겠지. 어쩌면 얼굴을 드러내고, 내 형벌을 끝내고 싶다는 의지 였는지도 모르겠어. 난 살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평온한 네 상태를 흔들어 놓으며 존 재하지도 않는 내 권리들을 요구하고 싶지도 않았어. 난 그저 널 낳은 날로부터 두 달이 지난 뒤 거의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아파서 의사 에게 갔어. 운명의 장난이라고 할까. 바로 그날 사립탐정이 소식을 알려 왔어. 넌 살아 있 었어! 네 아버지는 엔지니어이고 어머니는 불어 선생님이라고 하더구나. 넌 의학을 공부하 는 중이고. 넌 우리 집보다 불과 두 구역 위에서 살고 있었어. 일주일 뒤에 의사도 결과를 알려 왔어. "유감스럽지만, 뱃속에 거의 어린아이만큼 큰 종양이 있어요." 그 몇 달 동안 난 종양이라고는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어. 하지만 의사가 그 소식을 알 려 왔을 때 조금도 놀라지 않았어. 난 20년 이상을 내 뱃속에서 무엇인가가 자라길 간절히 바랐었지. 드디어 그 바람이 이루어졌어. 약간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것은 내 안에서 삶을 지켜 주었던 게 아니라 죽음을 키워 오고 있었던 거야. "조금만 미리 알았더라도......" 의사가 절망적인 눈빛으로 말했어. 난 괜찮다는 표시로 어깨를 으쓱했어. 어쨌든 잠시 후 그는 내게 약간 희망적인 말을 했어 -아마 직업상 그랬을 거야-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고. 암세포가 퍼져 나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했지. 내게 검사서를 한 장 줬어. 그러는 게 낫 다면 따르겠다고 했어. 하지만 사실 내겐 그런 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어. 갑작스럽게 죽음을 통고 받으면 많은 사람들이 거의 미치광이가 되어 버린단다. 울고 절 망하고 자기가 가진 돈을 모두 향락에 바쳐 버리기도 하지. 어떤 사람들은 또 갑자기 종교 에 귀의해서 남아 있는 모든 힘을 신앙에 바친단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어. 의사마저 깜 짝 놀랐지. 너에 대한 소식이 날 아주 행복하게 만들었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화원에 들렀어. 오후 내내 꽃꽂이에 몰두했단다. 배운 대로 만들지 않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어. 마른나무 가지들과 이끼들과 지의(地衣)류 식물의 뿌리들, 그리 고 찔레나무 가지를 많이 준비했지. 주홍빛이 도는 빨간 열매들을 가지에 꽂지 않고 흙과 이끼 사이에 반쯤 감춰 놓았어. 저녁 식사를 잊을 정도로 그 모양과 색깔들에 빠져 있었어. 흡족해져서 방향을 바꾸어 가며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지. 그래, 완벽한 꽃꽂이였어. 규칙에 맞게 완벽했다는 게 아니라 나의 내부에 들어 있는 것을 마침내 완벽하게 표현해 냈 다는 말이야. 난 그 작품에 〈눈 속에서〉라는 이름을 붙였어. 그 다음날 나는 미리 신청해 놓았던 검사를 받았어. 그런 다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헬싱키에서 열리는 회의를 위해 떠났던 거지. 그곳에서,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눈 때문 이었을까? 아니면 침묵 때문이었을까? - 난 네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어. 후회하느냐고? 아 니란다. 난 아주 좋단다. 내일 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입원할 거야. 핀란드에서 돌아와서 -내가 왜 지금 네게 이런 이야기를 할까? - 난 망설이지 않고 너를 보러 갔었단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 문지기 여자에게 네 방 창문이 어딘지 물어 보았어. 난 무슨 약속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가끔씩 시계를 보면서 오후 내내 네 방 창문 아래서 서 성였단다. 다섯 시가 거의 다 되었을 무렵 겨우 창문 뒤로 아주 재빠르게 지나가는 그림자 하나를 보았어. 1969년 6월 18일 로마에서 다시 편지를 쓴다, 얘야. 난 아직 살아 있고 여전히 널 마음에 간직하고 있단다. 암세포 아기는 온몸으로 퍼져 나갔어. 처음에는 간으로, 그리고 그 뒤에는 뇌로 옮겨 앉았어. 사무 실 사람들도 내 병을 알았지. 알베르토는 병원으로 문병을 왔어. 그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 했어. "믿을 수가 없어. 그렇게 건강했는데......" 물론 그는 네 이야기를 모른단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어머니와 아버지 말고는 아무도 없어. 네가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네 친 엄마가 아니라 미친 늙은이 정도로밖에 안 보일 거야. 그리고 언젠가 집에서 나오다가 너희 집 앞 벤치에 앉아 있던 나를 보고서도 그렇게 생각했 을 거야. 우리는 어쩌다가 시선이 마주쳤었지. 넌 금방 입을 삐죽거리면 시선을 돌렸어. 그 러는 게 당연해. 내 머리는 거의 다 빠져 버렸고 피부는 닳아빠진 누런 껍데기처럼 두개골 위에 붙어 있었으니까. 난 네게 달려가서 너를 껴안고 네 몸 속에서 꿈틀거리는 생생한 삶 을 느껴 보고 싶었단다. 하지만 난 뭔가를 찾는 사람처럼 땅바닥만을 내려다보았고 한 발로 먼지를 밀고 있었지. 난 이제 아무도 만나지 않아. 알고 지냈던 사람도 별로 없지만 날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 도 없단다. 너무도 분명한 죽음의 그림자가 사람들을 두렵게 만든 거야. 난 죽기 전에 요양 소로 가기를 거절했어. 난 복잡한 일들이나 수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이런 게 다 싫단 다. 얼마 남아 있지도 않은 인생을 위해 다시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보내야 할 이유가 어 디 있겠니? 소녀 시절, 아직은 시를 이해하던 나이에 난 헝가리 출신 시인이 쓴 시를 한 편 읽었어. 처음은 어떻게 시작되는지 기억 나지 않는데 마지막 구절만큼은 분명하게 떠오른 다. 헛되이 살아 왔네 죽음마저도 헛된 일인 것을 요즈음에는 이 구절을 항상 머릿속에 떠올린단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너를 보려고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기 시작했어. 난 네 집 앞에서 고양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어. 난 한 놈 한 놈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지. 모두 함께 몰려 오면 난 아이들을 부르듯 이름을 부른단다. 당황스러워 하던 문지기 여자의 눈을 쳐다보았 어. '그녀는 M양이 정신이 나가 버렸나 봐' 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어. 길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내 머리를 쳐다본다는 것을 알지만 난 화가 나기보다는 즐겁단다. 죽음은 단숨에 나의 현명함을 거워가 버렸나 봐! 난 이제 곧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야. 게다가 내게 중요한 게 뭐가 있겠니? 지금도 내게 현명함이 남아 있다면 마지막으로 의미 있는 말을 해 줄 수도 있을 거야. 남아 있는 인생에서 새겨 둘 만한 중요하고 아주 아름다운 말들 말이 야. 하지만 이제는 우스운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구나. 내 머릿속에 미치광이 세포들이 활동 하고 있는 것일까? 누가 알겠니...... 지난밤에는 꿈을 꾸었어. 그 꿈이었지. 난 몇 시간을 눈보라 속에서 헤매었어. 걸을 때마 다 무릎까지 눈 속에 빠졌지. 앞으로 가면 갈수록 걷기가 더 힘들었고 끝이 없어 보였어.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을 보았을 때, 꽁꽁 얼어붙어 무감각해진 내 몸 속으로 어느새 따스함 이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어. 나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힘을 냈어. 나는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러 문 앞에 쓰러졌어. 잠겨 있지는 않았지만 반쯤 닫혀 있던 문이 열렸어. 집안에는 벽 난로가 타고 있었고 식탁 위에는 포도주와 수프가 놓여 있었어. 난 수프를 먹고 포도주를 마셨어. 건 다음 위층으로 올라갔지. 침대가 준비되어 있었고 베개 위에는 하냔 플란넬 잠 옷이 개켜져 있었어. 잠옷을 입은 뒤 난 오리털 이불 속으로 들어갔어. 옆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지. 밖에는 아직도 세차게 눈보라가 불었어. 난 눈을 뜨고 눈송이들을 하나하나 세 보 았어. 지붕 위에 내려앉는 눈송이들과 창턱에 떨어져 녹아 버리는 눈송이들이었지. 그러다 가 주변의 숲에, 나뭇가지에, 나무 꼭대기에, 땅에 내려앉는 눈송이들을 모두 보았어. 난 결국 그 하얀 눈 속에 누워 있었던 거야. 난 얼음같이 단단한 땅을 팠어. 그리고 점점 더 밑으로 내려갔어. 거기에는 도토리들과 새싹들과 봄이 되면 잠에서 깨어날 봄기운들이 있었 어. 난 다른 놈과 엉켜 잠을 자고 있는 뱀들과 죽은 듯이 두 다리를 쭉 벌리고 누워 있는 개구리들을 보았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 나지 않아. 벌레나 눈동자, 아니면 한 마리의 개 미였는지도 몰라. 그 밑에서 난 가볍게 움직였어.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또 누워 있지 않는 것 같기도 했어. 난 거기 있었지만 이 세상 어디에든 존재하는 것 같았어. 갑자기 촛불이 꺼졌고 잠이 들었어. 난 꿈을 꾸었어.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오늘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단다. 난 겨우 옷장 문을 열고 남색 아기 옷을 꺼냈어. 다림질을 한 다음 먼저 꽃이 그려진 포장지로 포장을 하고 소포종 이로 쌌어. 난 핸드백에 버스 표가 두 장 들어 있는지 확인을 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우체 국으로 갔어. 발신인 이름과 주소를 꾸며댔지. 창구에서 여직원이 안에 편지가 들어 있냐고 물었어. 난 대답했지. "아니오, 없어요." 그런 다음 저울 위에 소포를 던졌어. 그걸 보고 내가 몸을 떨자 여직원이 깜짝 놀라 물었 어. "깨지는 건가요?" 나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대답했어. "깨지기 쉬운 거예요." 외로운 목소리를 위하여 어제 방송국 사람들이 다녀갔단다. 난 두 시부터 기다렸는데 그 사람들은 네 시가 가의 다 되어갈 때쯤 왔어. 그들은 오자마자 곧 플러그를 찾았어. 그들이 내 소파 앞에 카메라 를 설치하는 동안 난 인터뷰할 여기자에게 텔레비전 출연이 처음이라고 재빠르게 말했어. 그 사람들은 정말 내가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정말 나를 원했을까? 여기자가 나를 안심시켰어. "기계가 없다고 생각하고 말씀하시면 돼요." 그 사이 남자들은 주위에서 계속 기계를 작동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어. 그들이 소파나 책 을 다른 자리로 옮길 때마다 난 몸을 떨었어. 가구를 옮겨서가 아니라 그 밑에 있는 얼룩 때문이었단다. 너도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알지. 난 기운이 없는데다가 집 안 청소를 도와주러 오는 사람도 없어. 가구 주위에 왜 그렇게 먼지가 많은지 어떻게 그들에게 설명할 수 있겠니? 젊은 네게는 그런 걱정을 하는 게 우습고 바보같이 여겨질 거야, 안 그러니? 하 지만 난 정말 당황했단다. 과거에 받은 교육 때문이지, 별건 아니야. 그래서 그들이 조명을 켰을 때 난 내 얼굴만 찍고 방안에 있는 물건들, 그러니까 책이나 남편 사진 같은 것들은 비추지 말라고 부탁했어. 난 다시 물었지. "지금 방송이 됩니까?" 모두 웃었어. 아니, 서너 달 뒤에 방송될 거라고 하더구나. 그러니까 내 마음에 들지 않 는 부분이 있으면 편집 과정에서 잘라낼 수도 있다는 거야.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는 거냐, 응? 그들은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난 이제 웬만해서는 많은 것을 믿지는 않는단다...... 삼십 분 뒤 인터뷰 준비가 다 되었지. 한 남자가 클랩 스틱(주:딱따기.영화 활영 전후에 카메라 앞에서 치는 딱따기 모양의 도구)을 치며 소리쳤어. "먼저, 생존자들." 그러자 영화 촬영기가 돌아가기 시작했어. 여기자는 내 앞에 앉았어. 생글거리며 내 이름 과 성을 말했고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어. "당신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습니까?" 처음에는 목소리가 떨렸지만 차츰 평상시와 같은 목소리로 돌아왔지. 난 내 어린 시절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도시 생활을 이야기했어. 우리 아버지, 어머 니, 그리고 그분들의 출신에 대해 이야기했지. 또 내가 어떻게 남편을 알게 되었는지, 처음 에 유태인 탄압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이야기했단다. 난 정말 감정의 기복 없이 이야기 를 잘해 나갔어. 알겠니,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지. 마치 내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는 것도 느끼지 못했 어. 인터뷰 기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미소를 지었지. 만족스러워 보였어. 난 다시 내 딸의 출생과 힘겨웠던 그 애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어......딸에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순간 여기자가 처음으로 내 말을 끊었어. "그게 언제였나요?" 그녀가 물었지. 그래서 나는 속으로 지나간 여름들을 계산해 보았지. 계산을 하긴 했는데, 그 뒤 아무 생 각이 나지 않았어. 난 다시 침착하게 계산을 했지만 머리로 정확히 계산을 해서 입밖에 내 려는 순간 벌써 그것을 잊어버리고 말았어. 난 다시 한 번 계산을 해봤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어. 여기자는 별로 걱정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어. 하지만 난 걱정스러웠고 시간이 지날수록 흥분을 하게 됐지. 모든 일은 바로 그 중단된 대화에서 비롯되었어. 예기치 못하게 그만 이야기의 맥을 놓쳐 버리고 말았단다. 이게 바로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지. 난 대화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무슨 말이든 해보려고 애썼어. 그렇지만 머리는 텅 비어 버렸지. 촬영기는 계속 돌아갔고 방안에 는 촬영기 돌아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어. 잠시 후 여기자가 나를 도와주기 위해 말했 지. 그녀는 이렇게 말했어. "어머니도 비극적으로 돌아가셨다던데요?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그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난 깜짝 놀랐지. 그 순간 난 어머니를 생각한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사건들을 생각하고 있 었거든. 어머니가 아니라 바닥에 석회가 달라붙은 부엌 주전자가 내 눈앞에 나타났어. 난 머리에서 그 주전자를 지우며 말했어. "돌아가셨죠." 그러자 창문에 놓아둔 제라늄이 눈앞에 나타났어. 3년 동안 흙을 갈아주지 않아 완전히 누렇게 시들고 말라비틀어진 제라늄이었어. 난 이 생각도 쫓아냈다. 모두들 당황하기 시작 했어. 마치 어렸을 때 장난처럼 몸을 빙빙 돌리고, 또 눈을 꼭 감고 다시 빙빙 돌고, 더 세 게 돌고 돌다가 멈췄을 때와 같은 일이 벌어졌어. 아이들은 그렇게 빙빙 돌다가 눈을 뜨면 아직도 주위의 모든 것들이 돌고 있어서, 숲 속에 버려진 엄지둥이처럼 대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잖니. 그와 비슷한 일이 내게도 벌어진 거야. 난 당황했고 대체 내가 어디 앉 아 있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 그 순간 여기자가 다시 질문을 했어. 물론 그녀는 벌써 나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다 알고 있었어. 다만 내 이야기를 모르는 시청자들을 위해 질문을 한 것이지. "어머니께서는 병원에 입원해 계시다가 사라지셨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그러자 마개가 튀어 나왔어. 입으로 눈으로 내 몸 위로 튀어 올랐어. 나는 소리쳤지. "난 모른다우!" 그리고 나서 울기 시작했어. 시트에 덮인 어머니의 얼굴과 여윈 몸을 보았지. 이야기를 하는 그 순간 어머니의 모습이 다시 나타난 게 아니었어. 그때 그 순간, 그 일이 벌어졌던 그 순간을 내가 되돌아가 어머니를 보는 것 같았지. 난 눈물이 말라 버렸어. 그런 일이 있 은 뒤, 오랜 세월 동안 한번도 울어 본 일이 없단다. 난 그때 일을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 어. 그런데 육십 년이 지난 지금, 갑자기 어머니가 거기, 내 눈앞에 계셨어. 침대 위에 누 워 있었어. 그리고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져 있던 빈 침대와 문을 꼭꼭 닫은 채 내 눈앞에서 떠나가던 독일군의 트럭이 눈앞에 있었어. 이제 낡은 나룻배가 움직일 때처럼 내 속에서 삐 걱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어. 난 노년의 감정을 잘 알고 있단다. 그 감정들이 이렇게 폭발을 한 거야.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노인들은 시간이 갈수록 눈물이 많아지고 어떤 것을 시작하면 끝을 맺지 못하게 돼. 그리고 어떤 일에도 위안을 받지 못한 채 몇 시간씩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거야. 마음은 점점 더 무기력해지고, 자기 마음을 숨기는 데 서툴러지지. 그 리고 눈은 언제나 젖어 있단다. 잠을 잘 때만, 깊은 잠에 빠질 때에만 그런 상황에서 벗어 날 수 있어. 어제 내게도 그런 일이 벌어졌단다. 네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지금도 얼굴이 화 끈거릴 정도로 부끄럽구나. 여기자는 손에 노트를 든 채 꼼짝 않고 서 있었어. 방안에는 아직도 촬영기 돌아가는 소 리가 들렸어. 난 촬영기를 껐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았던 거지. 모두들 무엇에라도 홀 린 사람들처럼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있었어. 그 사이 나는 눈물을 더 많이 흘렸고 심지어 흐느껴 울었어. 어머니 때문에 울었고, 그 동안 울지 못했기 때문에 울었고, 이제 울 수 있 었기 때문에 울었어. 그들은 그런 내 모습을 촬영했어. 난 계속 눈물을 흘리면서 둘째손가 락으로 인터뷰를 할 수 없다는 표시를 했단다. 너도 알다시피 난 다리가 불편하잖니. 그래 서 일어설 수도, 다른 방으로 갈 수도 없었어. 싫다는 표시를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 그래서 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어. 두 손을 모아 얼굴을 모두 가려 버렸어. 눈물이 주르 륵 흘러내렸지. 가슴이 뜨거워졌고 스웨터가 젖었단다. 난 이제 됐다고 말하려고 했어. 그 말을 하려고 내게 남아 있는 힘을 모두 모았어. 몸의 한 끝, 혀 취에 힘을 집중시켜 보려고 애썼지. 온몸에 들어 있던 숨을 모두 들이 켠 후 겨우 입을 열 수 있었어. 난 이렇게 소리 쳤어. "냉장고엔 이제 버터 한 조각 없어요!" 그제야 사람들은 움직였고 기계를 멈추었어. 그들이 집에서 나간 뒤에도 나는 계속 울고 있었어. 난 밤새 울었어. 혹 넌 눈물을 멈출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알고 있니? 넌 그 안에서 많은 사람들을 접하니까 그런 방법도 잘 알 겠구나. 난 진정할 수 없었고 잠을 잘 수도 없었어. '나이 탓이기도 하지' 라는 생각이 네 머리에 박혀 있겠지. 너는 이런 생각을 떨쳐 낼 수 없을 거야. 모든 것이 다 위로 올라왔 어. 비행기들 속에 들어 있는 블랙 박스처럼 말이다. 비행기들은 아주 오랜 시간 훌륭한 비 행을 했어. 블랙 박스가 '우리는 바다와 산 위를 날고 폭풍우를 견뎌 냈다. 상태는 아주 좋 고 완벽하다' 하고 말했어. 그런 다음 비행기가 추락했고 블랙 박스가 발견되었어. 볼트가 흔들리면서 날개가 흔들렸던 거야. 처음에는 날개가 흔들렸고 그 후에는 비행기 전체가 흔 들린 거지. 그러다가 비행기는 검은 심장인 블랙 박스 안에 많은 비밀들을 새겨 둔 채 폭발 하고 말았어. 왜 이런 말을 하느냐고? 사실 난 비행기와 블랙 박스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어. 내가 아 는 것이라고는 그저 신문에서 읽은 것뿐이지. "넌 혀가 있어서 말하는 거야." 우리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어. 맞아. 하지만 알겠니? 내 주위에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 혼자 남게 되자, 난 혼자 말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어. 몇 시간이고 혼자 이야 기를 했단다. 결국에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처럼 의미 없는 소음이 되어 버리고 밀 지만 말이다. 내 제라늄을 한번 봐라. 내가 어떻게 해주어야 그 식물이 다시 제 색깔을 찾을 수 있을 까? 누렇게 변한 제라늄은 제 자리에 있어. 난 매일 아침 일어나서 이제 뽑아 버려야겠다고 생각하곤 해.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밤이 되면 제라늄은 여전히 그 자 리에 있는 거야. 한층 더 시든 채로. 네가 나를 만나러 올 때마다 난 놀란단다. '왜 그럴까' 하고 난 생각한단다. 고통 같은 것은 이제 없을 거야, 그렇지? 그렇다면 다른 무엇이 있을까? 나는 날이 갈수록 더 어리석 어지는 늙은이일 뿐이란다. 네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소용이 없어. 내 자신이 그걸 잘 알 고 있으니까. 무엇을 가지러 방에 갔다가도 내가 그 방에 왜 들어갔는지 생각이 나지 않을 때도 있어. 왔다갔다하다가 결국은 방에서 나오고 말지. 어느 날은 또 어땠는지 아니? 파스 타(주:밀가루와 달걀을 반죽한 이탈리아 음식. 마카로니와 스파게티류가 다 여기 속한다.) 를 넣어 삶지도 않고 끓인 물을 쏟아 버렸어......너도 그럴 때가 있니? 물론 너도 그런 경 험이 있을 거야. 하지만 젊은이들은 노인들과는 달리, 다른 생각을 하느라 자기가 할 일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지. 바로 그런 행동 때문에 난 내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 었단다. 처음에는 기억들이 모두 머릿속에 한 줄로 나란히 서 있었어. 좋은 기억들, 모두 말이야. 넌 바로 어제 누구를 만났고 6년 전 세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기억하고 있지. 그런 기억들은 진주 목걸이의 진주처럼 한 줄로 정렬해 있을 거야. 그러다가 갑자기 그렇지 만은 않다는 것, 무엇인가가 빠져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그건 바로 이런 기분이야. 기억은 나무로 만든 집의 마룻바닥과 같단다. 천천히 마루청 몇 개가 썩어 가게 돼. 거의 망가져 버린 마루청도 있지만 겉으로 보면 다른 것들과 똑같거든. 그래서 넌 안심을 하고 그냥 내버려둘 거야.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어떤 마루청이 밑으로 풀썩 꺼져 버리는 거야. 네가 갈 수 없는 어떤 층으로 사라져 버리는 거지. 그러면 그 축(軸)과 주위에 있던 모든 것들을 포기해 버려야 해. 마치 모든 것들이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말이다. 해가 가면 갈수록 깊은 틈은 더 커지고 모든 것이 회오리바람처럼 소용돌이친단다. 넌 그 소용돌이 속 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해. 조그만 실수 때문에, 작기는 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부 분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으니까. 그러면 암흑이 찾아오겠지, 그렇지? 암흑이 찾아오긴 하지만 넌 아직 살아 있어. 그건 정 말 무서운 일이며 화가 나는 일이기도 해. 심장과 배는 계속 살아 숨쉬고 앞으로도 몇 년이 나 더 살 수 있는데 넌 이제 그 육체에 없는 거야. 주변 사람들이 널 보살펴 주겠지. 네게 맛있는 음식을 먹여 줄 거야. 더러워지면 어린아 이를 씻기듯이 네 몸을 씻겨 줄 거야. 그리고 어린아이에게 하듯이 네게 이야기하겠지. 그 런 일들은 오로지 네 심장과 배를 위해 하는 일이란다. 사람들은 그 기관들을 살리는 게 다 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듯이 행동할 거야. 가끔씩 내 인생의 유일한 행운은 바로 이거라는 생각을 해. 난 늙었고 이 세상에 나를 돌봐 줄 사람 하나 없이 혼자라는 것 말이야. 내 내 장들을 먹여 살리는 일에 신경을 써 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건 정말 다행이야. 너, G 부 인 생각나니? 너도 그 부인을 알고 있지? 세 달 전부터 그 부인의 자식들이 그녀를 방안에 가두고 열쇠로 방문을 잠가 놓는다는 구나. 매일 아침 부엌으로 가서 '내 간식 어디 있어?' 라고 묻는다는 거야. 그런 뒤에는 식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이렇게 말한다는 거야. 안녕, 안 녕, 학교에 갔다 오게요...... 알겠니? 차라리 혼자 마룻바닥에 쓰러져 있다가 소방관들에게 발견되는 게 더 낫지 않겠 니? 보렴, 가끔씩 난 오후 내내 여기 이 소파에 앉아 조금씩 희미해지는 빛을 본단다. 방안 이 온통 희미해지고, 그 뒤에 밤이 찾아오지. 난 여기 이 전등 아래서 신문을 읽기도 하고 좋아하는 시를 읽기도 해. 조금만 읽어도 피곤해져서 얼마 읽지 못하고 내려놓는단다. 난 눈을 감으며 이렇게 말을 해. "자, 분명히 영혼은 아직 존재하고 있어." 하지만 그 후 G 부인이 내게 전화를 해서 말하는 거야. "나 정말 기분이 좋다. 오늘 나 산수에서 8점을 맞았거든. 우리 집에 와서 숙제하지 않을 래?" 그러면 나는 다시 의문을 갖는단다. 'G 부인의 영혼은 아직 존재하는 걸까? 있다면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벌써 저 높은 곳으로 가서 육체가 빨리 따라오길 기다리는 것은 아닐 까?' 어쩌면 영혼은 없고, 지금까지 단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애초에 심장과 내장과 혀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영혼이 시작되는 지점이 있다면 대체 어느 곳일까? 영혼의 끝이 있다면 그 끝은 어디일까? 살아남게 된다면 어느 곳에 영혼을 맡아 두는 창고가 있는 것일까? 주인을 찾는 강아지처럼 이 육체 저 육체로 돌아다녀야 하는 것일까? 물어 볼 필요 도 없는 것들이지, 그렇지 않니? 깊이 파고들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믿어야 해. 하지만 난 항상 파고드는 나쁜 버릇이 있지. 그런 생각을 뿌리뽑을 수가 없었어. 난 위선자야. 난 이렇게 말하지. "영혼은 존재하지 않아. 그래도 괜찮아." 하지만 결국 이렇게 말한단다. "영혼이 존재했으면 좋겠어." 어쩌면 존재할지도 모르지. 다만 내가 그것을 볼 수 없고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할 뿐이야. 영혼은 분리될 수 있을까? 떨어져 나왔다가 다시 붙을 수 있을까? 작은 공처럼 생겨 굴러다닐까? 들어보렴. 내가 어릴 때 우리 아버지는 토요일을 아주 좋아하셨어. 토요일은 꼭 지키고 싶어하셨어. 그래서 우리는 금요일 날 해가 진 뒤부터 토요일 해가 질 때까지 다른 어떤 일 도 하지 않았단다. 난 아주 즐거웠어. 그건 꼭 어떤 놀이 같았거든. 지금도 그런 놀이를 하 는지는 잘 모르겠구나. 앞으로 걸러가다가 어떤 명령이 떨어지면 모두 그 자리에 멈춰 서는 놀이 말이다. 그러니까 토요일 아침에는 그런 습관이 있었어. 아버지와 나는 단둘이 시내를 산책했어. 그러면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씀하셨어. "자, 보렴. 모든 것이 이중으로 보이지. 왜 그런지 아니? 오늘, 바로 오늘, 영혼의 눈이 아니라 바로 네 눈으로 보기 때문이란다." 그건 요술이나 마법 같은 것이었어. 어릴 때는 그런 것들을 사랑하지. 어른이 되어서도 그것들을 사랑할 수 있다면 정말 멋지겠지만. 어쨌든 그것은 생각이 아니라 사실이었어. 토 요일에는 일요일이나 수요일에는 들을 수 없던, 나지막이 살랑거리는 소리를 들었어. 난 모 든 것을 이중으로 보았어. 이쪽에는 가만히 서 있는 육체가 있었고 다른 쪽에는 앞으로 나 가는 어떤 것, 여러 가지 물건들 틈에서 물고기처럼 재빠르게, 뱀장어처럼 민첩하고 날쌔게 움직이는 어떤 것이 있었어. 이상하지? 하지만 그 당시 난 내가 아주 가벼워져서 몸이 없어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너도 이스라엘에 있을 때 이런 감정을 맛보지 않았니? 그러면 넌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가끔씩 나는 내가 아주 중요한 정치적 인물, 그러니까 가령 대통령이나, 뭐 그 비슷한 사 람이 되어 있는 상상을 해봐. 내가 그런 인물이 되면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아니? 훌륭한 법률을 제정하고 개혁을 하는 등의 일은 꿈도 꾸지 않는다. 그런 일보다는 그저 모든 사람 들이 의무적으로 하루 쉴 수 있는 날을 만들고 싶단다. 이미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즐기고 있는 휴가 같은 게 아니라 그저 휴식만을 위한 날 말이야. 그런 날이 생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상태가 아주 좋아질 거라고 난 생각해. 토요일에는 우리 어머니도 평온하셨어. 전축 옆의 안락의자에 앉아 하루 종일 시간을 보 내셨어. 손만 천천히 움직이거나 어린아이처럼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셨지. 내가 기억 하기로는 토요일에는 어머니에게 격렬한 위기 상황이 발생한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 같아. 다른 날들은 그렇지 않았어. 특히 계절이 변할 때, 그러니까 겨울과 봄 사이, 여름과 가을 사이에 몹시 격렬하게 발작을 하셨어. 어머니의 머리에 들어 있는 생각은 이런 것이었어. 뇌 속에 바이러스가 살고 있는데 그것들 때문에 뇌에서 삐익삐익 소리가 난다는 거지. 그리 고 그 바이러스들이 천천히 뇌를 갉아먹는다는 거야. 유일한 구원자는 꿀벌들인데, 꿀벌들 만이 긴 침으로 그 바이러스들을 하나하나 밖으로 끄집어 낼 수 있다는 거였지. 송곳으로 찔러 바이러스들을 끄집어내듯이 꿀벌 침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거야. 머리카락들, 그 밑의 살갗, 두개골이 모든 것에 구멍을 낼 수 있다는 거지. 그것은 잔인하고 가혹한 사냥이 되겠지만 결국에는 착한 곤충들이 승리를 거두고, 어머니는 영원히 구원될 거라는 거야. 실 제로 난 지금도, 창가에 서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큰소리로 벌떼들을 부르는 어머니의 모습 이 생각난단다. 물론 어머니는 태어날 때부터 정신이상자는 아니었어. 그랬다면 우리 아버 지와 결혼할 수 없었을 테니까.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엄마는 다정 다감 하고 그 근방에서는 보기 드문 온순한 처녀였어. 모든 일은 나 때문에, 내가 태어남으로써 시작된 거였어. 내가 어른이 된 후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어머니는 내가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그렇게 되셨다는 구나. 날 낳고 두 시간 뒤에 자기 몸이 더러우니까 씻어야 한다고 했 다는 거야. 그리고 나를 보자 이렇게 소리쳤다는군. "저 못생긴 것, 갖다 버리세요!" 그 후 의사들은 어머니에게 이런저런 일이 벌어졌던 것 같다고 말했어. 그게 내게 무슨 소 용이겠니? 하여튼 나는 미친 여자의 딸로 태어났어. 그건 어떤 오점 같은 거야......이해하 겠니? 그것 때문에 난 그렇게 활기 있게 살 수 없었어. 항상 광기가 잠복해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너도 미친 여자가 되는 건 두렵지 않니? 이제는 조만간 사람들이 모두 미 쳐 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지금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그게 정상이야. 하지만 내게 그것은 다른 일이었어. 내 피에 어머니의 피가 섞여 있고 그 피가 내 안에서 소용돌이친다고 생각했었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가끔 밤이 되면 난 그 광기를 몸으로 느낀 적도 있었어. 내 피를 타고 이리저리 흐르며 내게 말하는 거야. '자, 이리 오렴. 내 쪽으로 오렴.' 하고. 지난주에 텔레비전에서 일본의 분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봤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이 니? 일본인들의 머리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야! 혹 분재를 어떻게 만드는지 아니? 분재가 된 나무들도 처음에는 다른 나무들과 똑같았다는 구나. 사과나무, 배나무, 올리브나무 모드 말 이야. 씨앗일 때는 거의 비슷하다는 거지. 그러니까 똑같은 모양에, 똑같은 나뭇잎에, 똑같 은 색깔, 결국 모든 것이 똑같은 거야. 그것들은 다른 나무들처럼 성장할 수 있었어. 아니 성장해야만 했지.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어. 언제나 사람이 나무들을 감시하고 여기를 자르 고 저기도 자르고 자라지 못하게 누르고 작은 나무가 되게 묶어 놓아 버렸으니까. 나도 그런 일을 겪었어. 난 언제나 혼자 아주 사소한 생각들, 평범한 생각들을 하면서 지 낼 수밖에 없었단다. 고스란히 기억나는구나. 예를 들면 이런 거야. 너도 알다시피, 소녀 시절에는 원대한 생각들을 품고 살지. 여름이면 난 가끔씩 밤늦게까지 돌아다녔어. 바닷가 를 따라 걸으면서 내 위에서 별빛을 뿜어내며 빛나는 하늘을 느낄 수 있었어. 내 머리 위에 별이 가득한 하늘이, 모든 것을 다 감싸는 시트처럼 커다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어. 난 하늘 에 별이 있다는 것을, 너무나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하지만 난 고개를 들어서는 안 된다고 내 자신을 억눌렀어. 난 무서웠던 거야, 이해하겠니? 어둠·고요함·멀리 보이는 별 빛이 무서웠고, 잠복해 있는 그 피가 무서웠어. 난 오랫동안 바닷가에 가서도 절대 물에 들 어가지 않았어. 그리고 줄거리가 미리 요약되어 있지 않은 책은 읽지 않았어. 내 남편? 소녀 시절에 알게 되었어. 남편을 만나고 나서 사정이 약간 나아졌어. 그 시기 에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을 하셨어. 난 가끔씩 어머니를 만나러 갔지. 그는 삶의 의미였어. 미래를 생각했지. 그는 막 법과 대학을 졸업한 상태였고 취미로 조각을 했어. 그는 강하고 조용한 남자였단다. 그때 난 결혼과 아이들, 그리고 엄마로서의 내 역할을 생각했지. 바로 그 몇 달 동안 최초의 시위가 시작되었어. 난 그 3월의 오후를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단다. 기억이라는 것은 정말 이상한 거 야. 바로 어제 일어난 일은 잘 생각나지 않는데 아주 오래 전 일들은 지금 내 눈앞에서 벌 어지는 일처럼 고스란히 떠오르니 말이야. 아버지와 나는 창문을 열어 둔 채 응접실에 있었 어. 아버지는 바이올린을 조율하고 계셨고, 난 책을 읽었어. 갑자기 시위 행렬이 지나 가면 서 독일어로 크게 소리치는 거였어. "유겐 라우스(Jugen raus:주-유태인들 꺼져라)!" 그래서 나는 책을 내려놓고 아버지에게 물었지. "뭐라고 하는 거예요?" 아버지는 바이올린을 내려놓지 않고 말씀하셨어. "유겐트 라우스(Jugend raus). '젊은이들은 밖으로 나와라' 라고 하는 거지." "왜요?" "그게 옳으니까. 저 사람들 말이 맞아. 젊은이들은 밖에 나가서 즐겁게 놀아야 해......" 알겠니? 아버지는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으셨어. 신에 대한 믿음을 배신하는 것은 죄악이 었어. 아버지는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던 게 분명해. 오랜 세월이 흐르고 온갖 일들을 겪을 대로 겪고 난 뒤 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 '신 은 그 무엇에도 관여하지 않으셨어. 어쩌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몰라. 혹시 존재한다 하더라도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는 모양이야.' 머리에 바이러스를 넣은 것은 신이 아니었 어. 어머니의 균형을 잃게 한 이도 신이 아니라 신의 맞수였어. 어쨌든 나도 나 자신을 이해해 보려고 애를 썼어. 어느 정도는 그의 영향 때문이기도 했 고, 또한 내게 정신이상자인 어머니가 있었으므로 그 어떤 불행도 더 이상 나를 괴롭힐 수 는 없을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기도 했지. 고통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난 이미 치를 만큼 치렀으니까......난 안정이 되었어. 이제 나에게 다른 일은 일어날 수 없었어. 그래서 난 혼수며 결혼 피로연 준비를 열심히 하면서 미래의 내 남편이 나를 만나러 올 날을 기다 렸어. 그 당시의 다른 처녀들처럼 난 그렇게 살았어. 제일 먼저 우리 두 사람과 우리들의 계획이 있었고, 두 번째·세 번째·네 번째 이야기는 아주 멀리까지 이어졌지. 어머니가 모 든 것을 뒤집어 놓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니? 이제, 가끔씩 너처럼 젊은 사람과 이야기하다 보면 너희들이 우리 세대보다 훨씬 더 낫다 는 생각을 하게 된단다. 너희들은 책을 읽고 정보를 얻고 아무 것도 놓치지 않으려고 주변 을 둘러보지. 난 이런 게 아주 마음에 든다. '좋아, 그래야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지' 라고 생각하지. 우리 시대에는 달랐단다. 위대한 것들, 종교라든가 하느님, 영혼 같은 것들 이 우선이었고 그 다음이 일상의 사소한 일들이었어. 이렇게 말해도 좋을까? 그 중간 지점 이 필요했던 거야. 어머니가 병원에 계실 때 독일로부터 이상한 소문이 들렸어. 믿을 수 없는 소문들이었지. 아버지는 그 소문을 믿지 않으셨어. 우리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떠날 때에도 아버지는 고집스럽게 태도를 굽히지 않으셨어.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아니? 이렇게 말씀하셨어.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도 불안해한다니까. 우리가 아무에게도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겠니?"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셨고 나는 당연히 아버지의 생각을 따르려고 애를 썼어. 어리석지, 그렇지? 지금 모든 일을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어머니 덕택이었어. 난 어제 겨우 그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아. 그래서 이유도 없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겠지. 어제는 내 가슴이 말을 했고 오늘은 내 머리가 말을 하는구나. 모든 일은 그렇게, 아주 천천히 진행되었어. 내가 벌써 말했지. 어머니는 3년 전부터 병원 에 입원해 계셨어. 어머니의 병이 점점 더 심해져서 더 이상 집에 계시는 게 불가능했어. 병원에서 어머니는 갑자기 유순해지셨어. 짧게 혹은 길게 휘파람을 불면서 침대에 누워 계 셨단다. 그리고 어머니가 만들어낸 언어로 친구들과 꿀벌들을 불렀지. 가끔씩 팔을 높이 쳐 들고 시험이라도 하듯이 팔을 흔드셨어. 바로 그런 모습들이 내게 남아 있는 어머니의 기억 이야. 5월의 어느 날 아침 그들이 어머니를 실어가 버렸는데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어. 난 손에 꽃을 들고 어머니에게 갔어. 어머니는 꿀벌들 때문에 항상 꽃을 원하셨어. 난 어머 니의 침대가 흐트러진 채 텅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어. 욕실에도 안 계셨고 응급실에도 안 계셨어. 나는 커다란 목소리로 의사들에게 물었어. "우리 어머니 어디 계세요?" 그러자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볼 뿐이었어. 난 정원으로 나가다가 독일군 트럭과 마주쳤어. 독일 병사가 운전하는 트럭이었는데 문이란 문은 다 닫혀 있었어. 처음 트럭을 보았을 때 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어. 잠시 후 이 복도 저 복도를 왔다갔다하다가 갑자기 비어 있는 침대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서야 비로소 의심이 생겼어. 아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를 이해했다고 하는 편이 낫겠지. 밖으로 달려나갔어. 내가 정원에 도착했을 때 트럭은 시동을 걸고 막 떠나려 했지. 난 지금도 아스팔트 위에 흩어져 있던 그 꽃잎들이 아리도록 눈에 선해. 아무 소용이 없었어. 그 뒤 우리는 사방으로 어머니의 행방 을 수소문해 봤지. 아버지는 있는 힘껏 영향력 있는 친구들을 다 동원해 보았단다. 그렇지 만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어. 어머니는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셨어. 인종차별 정책 때문 이었지. 너도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겠지? 정신박약아나 정신이상자들은 유태인들보다 먼저 학살되었어. 그러다가 그 뒤 몇 주가 흐르고 나서 어떤 사람이 그러더군. 어머니가 독 일로 실려 가셨다고, 과학의 발전을 위해, 그러니까 실험을 위해 그곳으로 끌려간 것이라 고.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벌써 시내에서, 트럭의 배기관을 이용해 학살했을 거라고도 했 지. 네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부끄럽구나. 하지만 아직도 나는 어머니의 육체, 다시 말 해 유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단다. 전쟁이 끝난 후 상세한 명단이 나왔으니까 알려 들면 알 수 있었겠지.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단다. 너라면 어땠을까? 아직도 명단들을 구할 수 있으니까 넌 내가 죽기 전에 구해 주겠다고 할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제발 부탁이다. 난 그러고 싶지 않단다. 내게 이 조그마한 사치 를 허락해 주렴. 단 한번만이라도 비겁해진 내 모습을 보고 싶지 않구나. 알겠니? 그때는 고통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어. 마치 사진처럼 고통은 그 자리에 붙박 여 버렸단다. 그 일은 정말 갑자기 터졌어. 우리는 소문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 지.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 자신, 우리들의 안전을 생각해야 했단다. 엄마와 엄마의 종말 은 내 가슴속에 남아, 아주 작은 시멘트 덩어리로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았어. 결국 난 어머 니가 돌아가셨을 거라고 생각했어. 어디서 돌아가셨는지는 모르지만, 정확한 자료나 소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가슴으로 알 수 있었어. 그리고 어제, 그 인터뷰를 할 때 무엇인가가 터져 나왔던 거야. 가슴 밑바닥에 묻어 둔 어머니가 밖으로 나왔어. 입으로 나온 게 아니라 가슴 으로 나왔어. 내 옆에서 난 내 어머니의 육체, 작은 새 같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단다. 내가 제일 괴로운 게 뭔지 아니?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의 손을 잡아드릴 수 없었다는 거야. 눈을 감으면 곧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환자복을 입은 채 흔들리는 트럭 안에 있는 어머 니와 짐꾸러미처럼 밑으로 내던져지는 어머니의 모습이란다. 그리고......그리고 이제 됐 어. 이제 끝내자.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자. 난 다시는 네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아. 하지 만 생각해 보렴. 만약 어머니가 그렇게 최후를 맞지 않았다면 우리는 오랫동안 그 인종 학 살을 믿지 못했을 거야.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너무 늦어 버렸을 테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했던 거야. "어머니가 우리를 구해 주셨어." 어머니는 그저 우리의 짐이 되려고, 우리의 삶을 힘겹게 하려고 거기에 존재할 뿐이라고 늘 생각했었지. 하지만 보렴, 어머니는 바로 이런 이유로, 그러니까 우리가 계속 살아 나갈 수 있게 해주려고 이 세상에 왔다가 평생 고통스럽기만 한 짐을 지고 살다 가셨는지도 모르 겠어. 어딘가에 계산서가 존재할까? 입구에, 출구에, 학살에? 영혼도 마찬가지야. 난 어느 순간 에는 계산서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다가 또 어떤 때는 아니라고 말한단다. 어머니를 생각하고 그 희생의 의미를 생각하면 그런 것 같아. 하지만 난 다시 말하지. "대체 어떤 계산에 따라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죽게 만드는 거야?"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고, 아무도 결정하지 않았고 그 어떤 계산서도 없었어. 사건들이 일 어났고 그것으로 충분할 뿐이야. 이젠 정말 된 것 같구나. 내가 바보 같은 말들,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말들을 하고 있 구나. 내가 널 슬프게 했지, 그렇지? 대체 내가 웬일인지 모르겠구나. 난 이렇게 많은 말 을, 이런 식으로 해본 적이 없어. 이게 다 불면의 밤 때문인 것 같구나. 말들이 내 입에서 새어 나오는 걸 어떻게 막아 볼 도리가 없어. 네 이야기 좀 해보자. 아니 네가 말하는 게 더 낫겠다. 나에게 멋진 이야기 좀 해주렴. 오늘밤엔 우리 집에서 나가 뭘 할 거니? 춤추러 갈거니? * 뺨이 새빨개졌구나! 오늘 바람이 세게 불지, 그렇지? 너, 너무 옷을 얇게 입은 거 아니 니? 웃지 말아라. 난 엄마 노릇,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듯이 유태인 엄마 노릇을 그만둘 수가 없구나. 무시무시한 엄마들이지? 미안하지만 부엌에 가서 차를 좀 만들어 오렴. 주전 자는 불 위에 올려놨어. 준비가 다 되어 있어. 응접실에 가서 널 기다리마. 거기가 좀 따뜻 하니까. 구슬픈 울음소리처럼, 귀머거리인 나한테도 바람 소리가 들리는구나. 우스운 이야기인 데......바람은 항상 내게 이상한 기쁨을 준단다. 어린아이 같은 기쁨이지. 틀림없이 바람 이 머릿속으로 들어와서 내 생각들을 끌어내 갈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럴 거야. 그렇게 바람 부는 날이면, 나는 앞으로 내 남편이 될 약혼자와 카르소 고원으로 올라가곤 했었지. 고원의 가장자리에는 낮은 구릉이 있어. 네가 거길 아는지, 가본 적이 있는지 잘 모르겠 구나. 거기 서면 사방에서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을 수 있단다. 시내로 휘몰아치기 전 에 바람이 우선 이 지점에 모두 모이는 거야. 우리는 몇 시간이고 그곳에 있었어. 강한 돌 풍이 불어올 때마다 무기력하게 우리 자신을 내맡겼어. 갑자기 바람이 멈추었을 때 쓰러지 지 않으려면 기술이 필요했지. 바로 오늘 아침, 침대에 누워 있다가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를 들었단다. 남편과 함께 고원에서 보냈던 그런 오후가 떠올랐어. 그리고 갑자기 어떤 일이 생겼는지 아니? 고원으로 가고 싶어졌어. 약혼을 했던 그 무렵을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고원에 가본 적이 없었어. 그 이유를 넌 이해할 수 있겠지. 이제는 알 수 있을 거 야. 난 아무 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단다. 하지만 오늘 아침, 내 자신도 아주 놀랐는데 이 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래, 고원 위에 한번 올라가 보면 좋겠어. 풀로 뒤덮인 낮은 구릉 을 보고 싶어. 얼굴에, 코에, 귀에 얼음처럼 차가운 그 바람을 맞아 보고 싶어. 마지막으로 한번만 모두 다 보고 싶어.' 왜 마지막이라고 말하느냐구? 그렇게 느껴지니까. 너도 그런 경험 있을 거야, 그렇지? 여 행을 하다가 아주 멋진 곳에 갈 수도 있어. 하지만 결국은 그곳을 떠나야 하는 시간이 찾아 오게 된단다. 그러면 넌 무엇을 해야 할까? 네가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가서 가만히 네 자 신을 바라보는 거야. 그건 사물들을 내부에 간직하는 방법이야. 사물들을 비밀스러운 가방 에 넣어 두는 거야. 그러다가 어떤 나이에 이르면 갑자기 그것들을 다시 보고 싶어진단다. 약 두 달 전부터 그랬어. 말할 것도 없이 난 움직이지 않았고 그 어디에도 가지 않았어. 건 강 때문에, 돈 때문에 어디를 간다는 건 불가능하지. 하지만 난 그러고 싶어. 카르소 고원 으로 가서 마지막으로 모든 것들, 내 삶을 지켜보았던 것들에게 인사를 하고 싶어. 시(詩) 가 있는데 누구 거더라? 분명 릴케의 시일 거야. 아닌가 다른 사람의 것이었나? 어쨌든 이 런 감정을 아주 잘 표현해 준 시가 있어. 독일어로 된 한 구절, 아니 두 줄 정도를 기억하 는데......뭐더라? 음......들려줄 수가 없구나. 이젠 생각이 나지 않아. 내가 아주 좋아했 던 시였는데......이탈리아어로 된 시보다 훨씬 더 좋아했지. 지금도 나는 최고의 시는 존 재할 수 없다고 생각해. 보렴, 내 남편 브루노는 아주 멋진 시들을 암송하곤 했지. 그는 말했어. "시는 영혼을 쓰다듬어 주는 것 같아. 그것들을 항상 내면에 잘 정리해서 간직해 둘 필요 가 있어." 내가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시구들은 브루노가 가르쳐 준 거였어. 난 젊었을 때도 기억력 이 별로 좋지 않았단다. 고원에서 돌아올 때 브루노는 이렇게 말했어. "이 시들이 날 구원해 주었어. 이 시들 덕택에 난 나 자신을 구해낼 수 있었지." 아주 끔찍한 상황에서도 그는 시를 외웠어, 알겠니? 침묵 속에서 야수가 그 시들을 읊는 것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황에도 그 시들은 아무도 그의 머릿속에서 빼앗아 갈 수 없는 보물이었어. 어떻게 되었느냐구? 우리는 한 아파트에 숨어서 지냈어. 이미 결혼을 했고 그곳에서 함께 지냈지. 아버지는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배를 타는 데 성공하셨어. 우리는 그 다음 배를 타 고 떠나기로 되어 있었지. 그 집은 아버지 친구분들이 마련해 준거야. 역 근처에 있는 저택 의 맨 꼭대기 층이었지. 물론 우리는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닫아걸고 몰래 숨어 있었어. 아 래층에 사는 사람들이 움직이는 때를 기다렸고 그들이 움직이면 그때서야 우리도 움직일 수 있었어. 우리는 아주 민첩하게 움직이고 작은 소리로 말했지. 어둠 속에서 맨 발로 걸어 다 녔어. 수세식 변기의 물을 내리려면 아래층 사람들이 물을 내릴 때를 기다려야 했지. 우리 가 내는 모든 소음이 그들이 내는 소리와 뒤섞여 구별이 되지 않도록 꼭 들어맞아야 했어. 우리는 거기서 석 달을 살았어. 그게 신혼생활이었어.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사건이 벌어졌 지. 모든 것이 평온해 보여서 남편은 외출을 하기로 결정했어. 배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 밖 으로 나간 거지. 나는 창문 뒤에 서 있었어. 덧창은 나무였는데 약간 부서져 있었지. 난 모 든 것을 똑똑히 봤단다. 머리에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가 광장을 가로질러 가는 남편을 지 켜보았어. 광장을 반쯤 가로질러 갔을 때 자동차 한 대가 그에게 다가왔어. 한 남자가 내렸 고 남편과 그 남자는 잠깐 동안 소근소근 이야기를 했어. 갑자기 그 남자가 남편의 팔을 잡 더니 남편을 차안으로 끌어넣는 거야. 남편은 몸을 돌려 나를 쳐다보지 않았어. 내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았던 거야. 하지만 난 그 순간 그의 시선, 그의 눈을 본 것 같았어. 창가에 꼼짝 않고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는지 모르겠어. 난 쫓기는 짐승처럼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가 없었어. 주위에서 경찰들의 소리를 들었어. 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어. 그때 내가 어 떤 생각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아. 난 내가 아니었어. 갑자기 내 육체, 내 머리가 다른 걸로 변해 버린 것 같았어. 난 얼음 밑에서 잠자는 그런 동물이 된 것 같았어. 이름이 뭐더 라......모르모트였나? 그래 꼭 모르모트가 된 것 같았어. 그 뒤 어둠이 찾아왔고 몸을 움 직여 봤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어. 그때는 이런 생각밖에 할 수 없었어. 그들이 남편을 잡아갔으니 곧 나를 잡으러 올 수도 있겠다 싶었어. 난 구석으로 다가가 얼굴을 벽 에 대고 서 있었어. 그러다가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지. 천천히 소리 없이 몇 시간을 울었 어. 그날 아침 난 남편에게 여느 때와 다름없이, 또한 약간 서두르면서 인사를 했어. 왜 그 렇게 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난 그가 이렇게 사라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 그래 서 난 후회를 했던 거야. 그를 더 꼭 안아 주지 않았던 것에 대한 후회, 그의 눈을 쳐다보 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였어. 바보 같다구, 응? 우리가 몇 년을 사귀었는데 어떻게 그를, 그의 목소리를, 그의 몸을 잊을 수 있겠니? 하지만 이젠 그에게 인사를 할 수도 없고 안녕 이라거나 잘 갔다 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그 사실 때문에 마지막이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울었어. 곧 그를 잊어버릴까 봐 겁이 났고 기억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뒤섞여 버릴까 봐 두려웠어. 나 자신 때문에 겁이 났느냐구? 아니, 나 자신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어. 모든 일이 되 도록 빨리 끝나길 바랐어. 그뿐이란다. 아니, 죽음은 내게 아무런 느낌도 주지 않았어. 오 히려......너도 알지, 그 뒤에 내가 그 수녀원으로 갔던 것 말이야. 비밀조직에서 모든 일 을 준비해 주었어. 나는 사육제 마지막 날 밤 그 집에서 나왔어. 어수선한 틈을 이용하려고 일부러 그날을 기다린 거였어. 작을 마차에 몰래 숨어 산 속에 있는 그 수녀원으로 갔지. 난 전쟁이 끝날 때까지 거기서 지냈단다. 두 달 뒤 브루노에 대한 소식을 들었어. 사형을 당한 것은 아니었고 아직 이탈리아에 있는 한 수용소에 있는데 언제 떠나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지. 난 다시 기운을 냈단다. 영영 기운을 차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말이야. 남편을 자유롭게 해주려고, 그러니까 독일로 출발하기 전에 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게 하려고 온갖 궁리를 다 했어. 하지만 그는 지쳐 있었어. 난 시간이 지날수록 낙담했어. 그를 구해 내지 못할까 봐 겁이 났지. 손도 써보지 못하고 몇 날, 몇 주가 지났어. 난 수녀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 의 일과표와 똑같이 행동했지. 복도나 회랑을 산책했어. 수녀원에는 시멘트로 만든 작은 분 수가 있었는데 위에는 성모 마리아 상이 있었고 분수 안에는 빨간 물고기들이 살았어. 난 그 물고기들을 바라보았어. 물고기들도 나를 보았지. 물고기를 보면서 그 무렵 마지막으로 전해들은 소식을 되새기고 있었어. 기다림을 헛되게 만든 소식이었지. 그리고 무슨 일이 있 었는지 아니? 여행을 하거나 병이 났을 때 너도 그런 일을 경험한 적이 있을 거야. 그럴 때 넌 생각하 고 또 생각하겠지. 그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 상태라서 얼마 후에는 무엇이 사실이 고 무엇이 아닌지 구별할 수도 없게 되고 모든 것을 불분명하게 대하게 되지. 의심이 생겼 고, 그것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어. 내가 고통스러워할까 봐 그들은 사실대로 말해 주지 않았어. 하지만 몇 월이었더라? 아마 5월이었을 거야. 제단에 양귀비와 수레국화 꽃다발이 놓여 있었으니까 틀림없이 5월의 어느 날이었어. 내가 기다리던 소식이 암호로 다시 전해졌 어. 계획은 세부적인 것까지 모두 준비되어 있고 그 달 말이 되기 전에 브루노는 탈출할 수 있을 거라는 내용이었어. 그날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아니? 나 혼자 예배당에 가서 어린아이처럼 무릎을 꿇고 말했 어. "하느님, 고맙습니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이해하고, 무엇에 대해 감사한 것일까? 마침표도 없었 고, 효력을 발휘할 법률도 없었어. 시간마다 하나의 이야기를 머리에 그려보았고, 시간마다 그 이야기를 부정했어. "이건 하느님의 법률이야. 이건 운명이고 죄책감이야.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이야. 난 항 상 모든 일이 잘되길 기다렸는데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어. 마치 언제나 새로운 법률, 예기 치도 않던 법률이 그 효력을 발휘하는 것 같은 그런 일이 벌어졌지." 그러니까 난 사악하게도 내 죄 값을 다 치렀다고 생각했던 거야. 하지만 아직도 죄 값은 남아 있었어. 등을 돌렸을 때, 뒤통수를 치는 것 같아. 산다는 것은 그런 거란다, 알고 있 겠지. 우리는 마치 삽으로 땅을 파다 보면 꿈틀거리며 기어 나오는 벌레 같아. 갑자기 빛이 우리에게 비치면 우리는 미친 듯이 발버둥을 치지. 발버둥을 치는 우리의 몸짓이 새들을 유 혹한단다. 새들은 우리에게 달려들어 이 놈 저 놈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살아 남은 것들 은 다시 발버둥을 치는 거야. 그 삽의 흙이 던져져 우리는 흙으로 뒤덮이고 다시 어둠과 침 묵이 찾아오는 거야. 그러면 우리는 꼼짝 않고 그곳에 있어야 하지. 내가 너무 비관적이니? 아니, 희망적이라고 했던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니? 난 내 눈으로 직접 삶을 지켜보았 고 삶을 쫓아왔단다. 이제 늙은이가 되어 뒤를 돌아보고 있어.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잘 알 고 있단다. 어쨌든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 믿을 수 없겠지만 브루노는 탈출하고 싶어하지 않았어. 탈 출을 거부했어. 그는 탈출할 수 있었어.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었고 완벽했어. 취소한의 위험만 감수하면 되었어.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는 하지 않았어. 그는 '고맙지만 싫소. 여 기 남겠소' 라고 했다는 구나. 난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어. 하지만 난 수없이 그가 왜 그랬 는지를 생각해 보았단다. 그래, 내가 무슨 생각을 했겠니? 이런 거부는 바로 그의 성격의 일부분이기도 해. 그는 완벽하고 충실한 사람이었어. 그는 자기 인생을 다 바쳐 부당한 것 과 싸우려 했지. 바로 여기에 실마리가 있을 거야. 그는 그 어떤 특권을, 그러니까 자신만 지닐 수 있는 권리를 원치 않았어.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살다가 죽고 싶었던 거야. 그는 운명을 신뢰했지. 아니 신뢰한 게 아니라 신앙처럼 믿었어. 만약 운명이 그에게 죽음을, 그 것도 가장 가혹한 죽음을 제안했다면 그는 아무런 의문 없이 그 죽음을 받아들였을 거야. 그런 것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용기? 비겁함?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아니? 하루 는 이렇게 생각했고 또 하루는 저렇게 생각했어. 어쨌든 내 생각이 옳지 않니? 운명을 따른 다는 것은 정말 편리한 거야. 의문을 갖거나 선택할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내 마음에 가장 크게 자리한 것은 무엇보다도 이런 거였어. 내게 남편이 있는데, 내가 아주 사랑하는 그 남편이 운명과 나, 둘 중에서 운명을 선택한 거야. 그러면 난 뭐니? 아무 것도 아니잖아. 그에게 나는 그저 장식품에 불과했던 거야. 이렇게 말하니까 내가 굉장히 못된 여자 같지, 응? 하니만 난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릴 수 가 없었어. 난 몹시 실망했고 배신당한 것 같았지. 나에겐 더 이상 시간이 없었어. 모든 것 은 정지되어 있었어. 수녀원에서 지내는 나날은 그날이 그날이었어. 그가 돌아오기는 불가 능했어. 삶은 이렇게 구겨졌고 난 구겨진 이 인생을 끝까지 쫓아가야 할 것 같았어. 물론 무슨 일이든 일어나겠지. 어느 날엔가 전쟁이 끝나고 나도 다시 자유로워질 거야. 하지만 그게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겠니? 난 혼수 준비를 하는 데 꼬박 1년이 걸렸어. 시트와 베개 커버와 식탁보에 내 손으로 직접 수를 놓았어. 그 종이 상자 속에 들어 있었어. 수녀원의 내 방 창문으로 보이는 것은 밀밭밖에 없었어. 여름날의 오후에는, 너도 알겠지 만, 두세 시경이 제일 끔찍한 시간이야. 이 시간쯤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단다. 난 내 방 에 서서 밀밭을 가만히 내려다보았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것 같지 않니? 하지만 그게 엄 청난 두려움이나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어. 밀밭은 정지되어 있었어. 자신에 대한 확신 에 차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 바람 한 점 없었어. 그건 황금의 파도 같았어. 수녀원이 있는 곳에서 저 수평선 끝까지 빽빽하게 펼쳐졌어.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구? 매미 들 때문이야. 그래, 그 시끄러운 소리 때문이지. 찌르륵거린다고 하던가? 맞아, 제비들은 지저귀고 매미들은 찌르륵 울지. 난 너무나 시끄러운 매미 소리와 십 오 분마다 울려오는 수도원의 종소리를 들었어. 천천히, 땡그렁땡그렁 울리는 종소리와 파리 몇 마리가 윙윙거 리는 소리를 들었지. 파리들은 땀방울을 빨아먹으려고 내 얼굴 주위를 날아다녔어. 그런데, 그런데......내가 지금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 이런......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렸어......어쨌든 자연이란 그런 거란다. 보렴, 지금은 살아 있는 개미들을 보호하는 게 대유행이지. 아침마다 신문을 펼치면 나무 가 사라져 가고 있다, 개구리들 수가 줄어들고 있다, 하늘에 구멍이 생겼는데 아주 거대한 구멍이다, 이런 기사들을 읽게 돼. 난 이런 기사들을 모두 읽어보지만 잘 이해할 수가 없 어. 어떻게 이런 것들에 애정을 가질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넌 자연을 좋아하지, 그 렇지? 언젠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아. 네가 왜 자연을 좋아하는지 난 잘 모르겠구나. 내게 자연이란 모욕이고 뻔뻔스러움을 의미한단다. 우리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수녀원에 대해 얘기했나? 그래, 난 꼭 3년을 수녀님들과 함 께 생활했어. 그렇지만 수녀님들에 대해선 별달리 할말이 없구나. 하지만 그분들은 친절했 어. 게다가 나를 수녀원에 숨겨 주기 위해 그분들은 큰 위험을 감수하셨지. 난 부엌일을 돕 고 밭에 나가 일하고 닭 모이를 주었어. 난 그들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았거든. 만일 그런 식 의 생활을 하고 나면 네게도 이상한 결과가 나타나게 될 거야. 일종의 무감각 상태이지. 그러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순간에 맹세 - 아니, 뭐 다른 말이 있는데......그래 서약일 거야 - 하느님께 나 혼자 서약을 했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리고 단 한번 하느님 께 약속을 한 거야. 전쟁이 끝나도 수녀원에 남아 겸허하게, 남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남은 인생을 보내겠다고 말이야. 내 죄 값을 치르고 싶다고 생각했어.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비겁한 생각이었어. 난 몸을 숨길 곳이 필요했던 거야. 다행히도 수녀님들은 이런 사실을 몰랐지. 하느님과 내가 깨뜨려 버렸어도 적어도 그분들 앞에서는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었지. 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니? 난 이렇게 생각했어. '괜찮아, 결국 난 아무런 서약도 깨뜨리지 않은 거나 다름없어. 난 기독교도들의 신에게 약속을 했으니까. 하 지만 내 신은 기독교의 신이 아니야.' 이해하겠니? 신이 꼭 어떤 구역에만 살고 계시는 것 처럼, 그 구역을 벗어난 다른 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거야. 물론 난 형벌이 두 려웠어. 성경에서 하느님이 얼마나 화를 잘 내시는지 너도 알지? 하지만 그런 두려움은 그 렇게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인생이 있었고 모든 것을 다시 만들어 나가야 했으니까. 마지막 생존자들의 대열에 끼여 마침내 브루노가 돌아왔어. 그런데 왜 네 사랑이야기는 내게 들려주지 않니?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거니? 믿을 수가 없더구나.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넌 예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니, 응? 그렇지 않니? 네가 가끔씩 우리 집에 와서 나랑 이야기를 나눌 때, 너를 지켜보노라면 덜컥 겁이 나곤 한단다. 아니 겁이 나는 게 아니야. 불안한 거지. 네 미소 뒤에, 네 눈 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더구나. 가끔씩 난 '그 애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아주 착 한 아이야' 라고 혼자 말을 한단다. 그런데 네 눈 속에서 들여다볼 때마다 정반대의 생각을 하게 돼.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런 의문을 갖는 걸까? 그런 게 뭐 그리 중요하겠니? 이리 와서 내 이야기를 들어보렴. * 오늘은 바느질한 것 가지고 왔니? 미안하구나. 그런데 네가 바늘과 실을 그렇게 들고 있 는 것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난단다. 난 네가 바느질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한번 해볼래? 잘하는 구나. 난 단 한번도 바느질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 그리고 내 평 생, 한번도 무엇인가를 제대로 요리해 본 적이 없어. 아주 간단한 요리조차도 할 줄 몰랐 어. 우리 어머니는 정신이상자였고, 아버지는 내가 일하는 사람을 거느리고 살 거라고 생각 하셨어. 그래서 나이가 들어도 내게 집안 일을 가르쳐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혼자서도 배울 수 있다고?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 의지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하지 만 나는, 너도 알다시피 진취적인 정신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잖니. 어느 정도는 교육 탓이 라고도 할 수 있어. 가끔씩 나는 내 친구들의 손자들을 지켜보면서 그 애들끼리, 혹은 그들 의 부모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본단다. 그리고 말하지. "자, 봐, 저 애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편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니까." 내가 어렸을 때에는 복종하는 게 습관화되어 있었어. 적어도 내 경우에는 부모님들이 무 섭지는 않았어. 하지만 조심스러웠어. 부모님들을 대할 때 아주 조심스러웠고, 나중에는 남 편에게도 그랬어. 모든 게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지. 서로 사랑을 해도 토론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어. 어째든 브루노 같은 남자를 만난 것은 내게 행운이었어. 그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아주 개방적인 사람이었거든. 이론적으로 그랬다는 거지. 사실 내가 결정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 으니까.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무뚝뚝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어. 더 이상 남편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내 자신에게 납득시키는데 꼬박 3년이 걸렸어. 사 실 난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었어. 계속 희망을 가지고 있었어야 해. 하지만 난 그렇지 않 았어. 나는 그가 죽었다고 믿고 있었지. 그런데 매일매일 한 집에서 그와 생활을 다시 하게 된 거야. 우리는 남편과 아내의 생활을 다시 시작해야 했어.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그런 생활이었지. 그는 스물 여섯 살이었고 난 갓 스물 두 살이었지. 겨우 스물 두 살......이해 하겠니? 솔직히 말하자면 난 내가 몇 살인지도 잊고 있었어. 그 정도로 우린 늙고 지쳐 있 었어......밤에 함께 집에 있을 때, 난 라디오를 켜놓은 채 소파에 누워서 잠이 든 그의 모 습을 지켜보았어. 그러다 보면 아주 비현실적인 느낌에 사로잡혔어. 분명 남편도 그랬을 거 야. 난 그에게 아무 것도 물어 보지 않았어. 무엇인가를 묻는다는 게 옳지 않은 것 같았거든. 그가 말을 하면 그냥 들었을 뿐이야. 하지만 말을 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어. 브루노는 유 령 같았고, 마치 내가 결혼했었던 남자의 그림자 같았어. 그래, 나 역시 옛날의 나는 아니 었어. 고독했던 그 3년 동안 나의 내부에는 분명 어떤 변화가 생겼어. 하지만 난 내 자신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알 수 없었어. 자기 자신에게 빠져 있을 때 사람들은 자신이 변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가 힘들지. 어쨌든 브루노는 낮에는 아주 조용했어. 하지만 밤이 되면 흥분을 했어. 밤은 정말 지옥 같았어. 아침이면 종종 나는 시트들을 꿰매야 했어. 밤사이에 다 찢겨져 버렸기 때문이야. 시트를 엉망으로 만드는 건 브루노였어. 그는 마치 어떤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팔과 다리를 번쩍 들고 이를 악물었어.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어. 난 침대 모서리에 앉 아서 그를 쳐다보았어. 그를 돕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어. 그는 계속 독일어로 소리 질렀고 무슨 명령인가를 외쳐댔어. 네게 벌써 말하지 않았니, 응? 그가 독일 어로 말을 했기 때문에 난 그에게 말을 걸 수가 없었단다. 전후에, 그리고 특히 최근에 그 런 주제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오지. 생존자들의 증언, 심리학자들이나 역사학자들의 견해 를 담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 난 알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흥미도 없어. 난 한밤의 고함 소리와 찢어지고 조각난 시트를 통해 이미 다 경험했으니까. 어느 날, 길거리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 그 이전에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 어. 난 우유를 사기 위해 집 근처의 상점에 갔다가 천천히, 가능한 한 느릿느릿 걸어서 집 으로 돌아오고 있었어. 너도 알다시피 난 관절염 때문에 고개를 약간 숙이고 걷는 단다. 그 런데 인도를 따라 거의 반쯤 왔을 때였어. 아스팔트에서 도시에서 자라는 보기 흉한 풀들을 발견했어. 접은 틈에서 오만하게 밖으로 뻗어 나온 이파리들에서 아주 강한 생명력이 느껴 졌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어. 난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아 풀들을 모두 잡아 뽑았어. 하나하나 풀들을 잡아 뽑으며 이렇게 외쳤어. "꺼져, 저리 꺼져라, 이 못된 것들아!" 지나가던 신사 한 분이 팔을 잡아 일으켜 주어 다시 일어섰을 때에야 난 내가 어디에 있 는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단다. 그 순간 난 죽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어. 도 둑질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어. 그날 오후 내내, 그리고 밤이 이슥해질 때까지 내가 왜 그랬을까 생각을 하고 또 했어. 내가 왜 그 풀들을 잡아뜯었던 것일까? 보기 흉하기는 했지만 내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잖 아? 내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마침내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 절망 적일 정도로 강인한 그 풀들이 내 신경을 건드렸던 것 같아. 삶은 오만한 것이란다. 항상 앞으로 나가고 싶어하고, 또 앞으로 나가지. 그 어떤 일에도 신경 쓰지 않고 감정들을 뛰어 넘어 버린다. 넌 그게 자연의 법칙이라고 했지. 유전적인 요소들을 보호하고 그것들을 번식시킬 필요가 있다고도 했어. 그러면 자연이란 뭘까? 자연은 뻔뻔스러워. 너도 전에 그렇게 말한 적이 있 지? 나와 브루노에게도 그랬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녹여 버리고 무(無)의 상태로 만들었어야 해. 인도 사람들의 말처럼 다른 생에서 다시 태어나서 꼿꼿하고 고요한 삶을 누렸어야 해.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어. 우리는 지쳐 있었고 서로 무슨 말을 해야 하는 지도 몰 랐어. 힘이 남아 있어 밤까지 버틸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했어. 하지만 무엇인가가 우리가 가는 길을 가로막았어. 앞으로 밀고 잡아당겼어. 건강을 되찾자마자 브루노는 다시 일을 시 작하려고 했어. 두 달만에 공동 경영자로서 그를 받아 줄 공증인 사무소를 찾아냈어. 우리 들의 생활은 곧 여는 부르주아 신혼부부들처럼 평범하고 평온하게 되었어.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알겠니? 우리 위에, 우리 내부에는 그 무시무시한 3년이 숨어 있었어. 분명 그가 겪은 그 3년은 내 것보다 훨씬 더 끔찍했을 거야. 식사를 할 때면 그는 접시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마치 걸신들린 사람처럼 허겁지겁 먹어 치웠어. 먹었다기보다는 게걸스럽게 삼켜 버렸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 거야. 마치 이 음식을 먹고 나면 다시는 아무 것도 먹을 수 없기라도 하듯, 아니면 자기보다 훨씬 힘센 사람이 그 음식을 빼앗아 갈까 봐 겁을 내듯이 자기 앞에 놓인 음식에 집중했어. 그의 그런 행동은 나에게 전해졌어. 우리에겐 모든 일이 다 불안했어. 그렇다고 그의 성격이 변했다는 것은 아니야. 그는 내가 알고 있던 대로, 여전히 정직하 고 강한 남자였어. 하지만 가끔씩 분노를 폭발시키곤 했어.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식사 준 비가 덜 되어 있으면 그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물건들을 모두 부수어 버렸어. 그 럴 때면 난 내가 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난감했어. 난 그를 돕고, 그의 곁에 있고 싶 었지만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어. 그런 순간들이 지나면 갑자기 그는 조용해졌어. 소파에 가만히 앉아 허공을 응시하거나 집밖으로 나가 몇 시간씩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 아마 자신 의 행동이 부끄러워서 그랬을 거야. 그런 식의 행동은 전혀 그답지 않았으니까. 가끔씩 그 런 일이 벌어지고 난 뒤 혼자 집에 남아 난 이렇게 자책을 했어. '왜 그때 나도 독일로 가 지 않았을까? 왜 함께 죽지 않았을까? 왜 브루노는 그렇게 했는데 한 하지 않았지? 아직 무 엇이 남아 있길래 운명이 이런 선택을 하게 만든 것일까?' 물론 시간이 흘러 모든 것이 다 제자리를 찾게 되길 바랐어. 그의 육체가 기운을 찾으면 그의 정신도 제자리를 찾을 거라 믿었지. 그러나 시간을 빛을 잃어 갔어. 선명한 색깔들도 바래 갔지. 사람들이 네게 일반적인 이야기들을 하면 넌 절대 그것을 믿어서는 안 된단다. 그것은 사 실이 아니기 때문이지. 스스로 위안을 얻기 위해 반복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 저 그뿐인 거야. 물론 가끔씩 시간이 보상을 해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 사람들은 이런 거짓된 느낌을 가지고 살고 있어. 그건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야. 시간은 거짓된 느낌의 내 부에서 움직이고 있어. 그건 송곳과 같아서 구멍을 뚫고 그 구멍들을 깊은 틈으로, 심연으 로 바꾸어 놓고 마는 거란다. 이런 사실이 얼마나 이상한지......나이가 들어서야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단다. 그 이전에 알았더라면 훨씬 더 나은 삶을 살았을 텐데 말이야. 모든 일이 다 지나간 뒤에야 깨 달음이 오지만 그런 건 이미 아무 도움도 안 된단다. 지금 내가 네게 하듯이 입을 움직이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니. 하지만 늙은이들이 젊은이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젊은이 들이 그 이야기에 귀기울인다면 혹시 세상이 약간 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어쩌면 그 역시 아무 소용없을지도 모르지. 인생은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비극이야. 이야기 를 한다는 것은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는 것에 불과하지. 사람들은 모두 실수를 하게 마련 이야. 나이 들어서야 비로소 그것을 깨닫지. 그리고 후회한단다. 경험이라는 것은 아무 것 도 아니야. 모든 것은 언제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야. 그러면 단조롭지 않으냐고?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단조로운 게 꼭 나쁜 건 아니잖니. 경험이 성장을 도와줄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세상엔 언제나 그저 그런 드라마들이 항상 똑같이 펼쳐지기 때문이란다. 내가 무엇을 원했는지 아니? 난 나무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어. 삼나무나 올리브나무가 되고 싶었어. 밑으로는 튼튼한 뿌리를 내리고 위로는 무성 한 나뭇잎을 가진 나무 말이야. 식물들도 무엇인가를 느낀다고? 미국에서 그 사실을 발견했 다고? 난 그런지 몰랐어. 정말 그렇다면 방금 내가 한 말을 모두 취소하겠어. 난 나무도 되 고 싶지 않아, 절대...... 하지만 스물 네 살 때에는 그랬어. 그런 모든 것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갖지 않았어. 브 루노의 일은 아주 잘 풀렸고 난 집안 일에만 몰두했지. 봄에는 우리 두 사람 다 야릇한 행 복감에 젖어 있었어. 약혼 시절에나 맛보았던 그런 행복감이었지. 우리 내부에 열정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었지. 아주 자연스럽게 아이가 생겼어. 한 생명을 다시 만들어 낸 거란다, 알 수 있겠니? 난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마침내 우리도 경계선을 그을 수 있게 되었구나, 라고 생 각했어. 그 아기 때문에 ' 이젠 됐어. 처음부터 모든 일이 다시 시작될 거야 '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어. 처음 몇 달 동안 난 행복했어. 우린 행복했지. 넌 아마 잘 모르겠지만 여자가 임신을 하면 몸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난단다. 그러니까 몸 전체가 무감각해진단다. 매일 조금씩 변화가 생겨. 거울로 네 모습을 비추어 보면 네 눈이 아름답게 빛나는 것을 발 견하게 될 거야. 물론 짜증나는 일도 있지만 넌 그걸 거의 깨닫지 못하지. 넌 빛을 발하게 될 거야. 네 내부의 모든 것이 움직이고, 그 속에 질서가 있고, 네가 그 질서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네 몸이 빛을 발산하지. 내게는 아기가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어. 아기의 존재가 브루노의 상처를 치료해 주 어서 더 이상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지 않게 해주리라 기대했거든. 우리가 아는 사람들 중 에는,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 빠져 있다가 아들이 태어나면서 회복된 경우도 있었거든. 우리 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잖니? 가을이 되자 브루노는 다시 우울해졌어. 여러 번 격렬한 위기 상황을 겪기도 했지. 한번 은 그런 일을 겪은 뒤 집을 나가서 꼬박 이틀 동안 들어오지 않기도 했어. 그는 그런 상태 였지만 나는 계속 희망을 품고 있었어. '아기가 내 몸 속에 있어. 브루노는 아직 아기를 보지 못하는 거야. 아기가 태어나서 직접 보게 되면 모든 게 변할 거야. 브루노도 좋아질 거야.' 난 12월에 출산을 했단다. 정상 분만이었어. 다음날 브루노는 내 팔에 딸아이를 안기고 사진을 찍어 주었어. 아버지에게 보내 드리려는 것이었지. 난 아버지에게 새 생명이 태어났 다는 것과 나도 앞으로 계속 나아갈 힘이 생겼다는 것을 알려 드리고 싶었어. 아버지는 전 쟁이 끝날 무렵부터 팔레스타인에 살고 계셨어. 재혼도 하셨지. 키부츠에 살고 계셨는데, 편지를 보면 행복하신 것 같았어. 아기가 태어난 뒤 처음 몇 달 동안은 이상하게도 거의 기억나는 게 없어. 딸아이는 내 모 든 힘과 시간을 다 빨아들였어. 극성맞은 애였다는 소리는 아니야. 그 애는 조용한 아기였 어. 나를 파괴하는 것은 내가 없으면, 내가 보살피지 않으면 채 한 시간도 몸을 가눌 수 없 는 존재들이야. 주중에 브루노는 항상 사무실에 있었어. 식사시간에도 집에 오지 않았어. 토요일이 되어야만 우리는 함께 모일 수 있었지. 날씨가 좋으면 해변가로 산책도 나갔어. 그 당시 우린 별로 말을 많이 하지 않았어. 원래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지. 하 지만 난 우리 사이에서 굳건하고 파괴할 수 없는 그 어떤 것, 그 이전에는 맛보지 못했던 어떤 것을 감지할 수 있었어. 그것은 자존심·행복·집요함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우리는 정당한 도전을 했었다고 느꼈어. 그리고 결국은 이겨 나가리라고......아기를 보기만 해도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어. 아기는 하루하루 활기가 넘치고 명랑해졌어. 그 애가 태어 나기 전에 벌어졌던 일들이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 같았어. 브루노는 딸아이를 무척 사랑했지. 틈만 나면 아이를 안아 주었어. 그 당시에는 아버지들은 아기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았고, 육아는 전적으로 여자들의 몫이었단다. 그들은 아기가 귀찮게 할까 봐, 몸 이 더러워질까 봐 싫었던 거야. 대개의 아버지들은 자식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어. 하지만 브루노는 달랐어. 딸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그 아이를 너무나 사랑해 주었고 항상 그 아이 주변을 맴돌았어.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니? 내가 기억하건대 처음으로 내 주위에서 안개가 걷히는 듯한 기분이었단다. 내 앞에 투명하고 광대한 지평선이 끊임없이 펄쳐지는 것 같았어. 세레나의 성장과 세월의 흐름이 모두 다 그 지평선에 놓여 있었어. 성장하는 딸아이와 서 서히 쇠락해 가는 우리들......우리들은 그 하늘 아래에서 늙어 갈 거야. 그리고 어느 날 조금씩 사그라드는 촛불처럼 우리들도 그 하늘 밑에서 조용히 죽어 가겠지. 가끔씩 나의 확 신을 북돋우기 위해 - 이해하겠니, 나의 내부에서는 언제나 무엇인가 동요하고 있었어 - 계 산을 해보기까지 했단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생각해 봤어. 그리고 혼잣말을 했단다. ' 티치오에게는 벌써 꽤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 그러니까 이제 그에겐 아 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 사람은 아주 굉장한 삶을 살았으니까 어쩌면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라. ' 알겠니, 난 앉아서 저울에 약을 다는 약사처럼 모든 일을 저울질해 보았고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내 결론을 이끌어 냈어. 이미 고통스러운 일을 겪은 사람은 다 시는 고통 당하지 않을 거라는......어린아이 같은 장난이었어. 어린아이 같고 또 오만한 장난이었지. 하지만 나를 진정시키는 데는 도움이 되었어. 우리들의 생활이 안전하다고 확 신하고 싶었던 거지. 고통과의 관계는 아주 이상한 것이란다. 알겠니? 고통이 미약할 때에는 사람들은 언제나 저항하지. 이렇게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났으니 더 이상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무엇 때문에? 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너무 부당하지 때문이야. 그러니까 우리들의 내부에 어찌할 수 없는, 형평에 대한 감각이 살아 있는 거지. 사람들은 삶이란 파티 같은 것이고 고통이란 케이크 조각 같은 것이라고 믿고 있어. 그 케이크는 한 사람에게 하나씩 돌아가지 그 이상은 아니잖아. 사람들은 늙어 가고 점점 힘을 잃게 된단다. 날이 갈수록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나쁜 일밖에 없어. 그 뿐이야. 달리 생각하지 시작할 거야. 하루 종 일, 등을 다친 짐승처럼 햇볕 아래 누워 있게 될 거야. 움직이고 싶겠지만 그럴 수가 없어 서 그곳에 그냥 누워서 기다리게 되지. 아기를 갖는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지? 요즈음은 여자들 혼자, 그러니까 아버지 없이 아기 낳는 일이 유행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그래, 아이들이 어릴 때는 그런게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 하지만 아이들이 성장한 뒤에는 뭐라고 얘기해 줄 건가? 넌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는 않겠지? 난 네가 그렇게 경험이 많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단 다. 넌 어린아이는 사랑의 결과라고 했지. 맞아, 옳은 생각이야. 하지만 내 말을 믿어야 해. 부모가 되어 본 사람은 절대 그렇게 말하지 않을 거야. 그러면 아기란 뭘까? 아기는 가 방이야. 그 속에 모든 것을 집어넣을 수 있는 가방......네가 갖지 않았지만 갖고 싶어했던 것들을 넣을 수도 있단다. 네 공허함, 두려움 등등 네가 갖고 있지만 사실 원하지 않았던 것들을 거기에 담을 수도 있어. 보렴, 어떻게 행동하든 넌 아이에게 실수를 하게 될 거야. 실수를 인정하면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는 걸까? 아니, 그렇지 않아. 난 처음부터 실수들을 인정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 왜냐하면 네 것을 집어넣는데 너무 몰두해서, 가방 속에 이미 짐이 들어 있고, 그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이야. 너 지푸라기 놀이 알지?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데, 꼭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어. 하지만 아무도 그 일을 하려는 사람이 없어 지푸라기로 결정을 하는 거지. 짧은 지푸라기와 긴 지 푸라기들이 있는데 가장 긴 지푸라기를 잡은 사람이 하기 싫어도 그 일을 해야 하는 거지. 비록 알려고 하지는 않겠지만, 그리고 네 아기를 만들어 가는 사람은 바로 너라고 네 자신 을 속이기는 하겠지만, 사실 네 아기와 이 세상에 태어난 다른 아이들은 모두 자신의 손에 지푸라기를 들고 있는 거란다. 그 지푸라기에 모든 것이 다 씌어 있지. 그것은 일종의 제비 뽑기로서 너를 넘어서, 너보다 먼저, 네가 없어도 일어나는 일이지. 그래, 맞아. 선택할 수도 있을 거야. 서른 살에는 선택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 그 렇게 생각하는 게 옳지. 하지만 여든 살이 되면 그렇지 않단다. 이젠 더 이상 선택 가능성 을 믿을 수가 없어.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지. 차이점 은 단지 능동이냐 수동이냐에 달려 있어. 그러니까 선택을 하는 게 아니라 선택을 당하는 거지. 무엇을 위해? 누구에게? 글세, 나에게 묻지 마라. 난 그것을 확인했고 아직도 확인하고 있단다. 내 인생은 그 이상 더 나갈 수 없었어. * 춥구나. 웃옷을 좀 주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봄에 터졌어. 네가 복도를 따라 앞 으로 걸어올 때마다 네가 더 큰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구나. 이제 더 클 나이는 아니지? 아마 애가 점점 더 작아져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구나. 노인들은 다 이렇지. 가죽만 남아 뼈 에 달라붙어 있고 뼈는 또 점점 더 줄어들어. 모든 것이 소리 없이 떠나가거나 사라질 준비 를 하는 것처럼 보여......하지만 지난주에 넌 정말 커 보였단다. 운동을 많이 해서 그런 가? 아마 그럴 수도 있을 거야.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너 아니? 네게 질투를 느꼈어. 하 지만 나를 위해서, 그러니까 나도 너처럼 되고 싶어서 질투하는 게 아니라 너 같은 딸아이 를 갖고 싶어서란다. 세레나는 언제나 어깨를 구부정하고 하고 머리를 깊숙이 숙이고 다녔 단다. 언제든 한방 맞기를 기다리는 사람 같았어. 그래서 난 끊임없이 그 애에게 잔소리를 했지. " 똑바로 서서 앞을 봐. 할머니 같잖아? " 난 정말 화가 났어. 나도 그 애 나이 때는 그랬는데, 그런 모습이 그 애에게 유전된 것 같았지. 그 애가 브루노를 닮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싶었어. 그는 어깨가 넓고 운동 선수 같 은 체격을 지녔거든. 젊었을 때는 스포츠 광이었어. 독일에서 돌아왔을 때도 그는 여전히 강해 보였어. 봤지? 가방 이야기가 되풀이되는 거야. 혹시 네 부모님들은 지금의 너와는 전 혀 다른 딸을 원하지 않으셨을까 생각해 본 적 있니? 세레나가 활발하고 명랑한 아이였다고 네게 말했지? 사실이야. 그 애는 그랬어. 태어나서 거의 2년 동안은 그랬어. 그랬기 때문에 난 그 애에게 배신당하고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들 어. 이런 모습의 아이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아이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지. 아기와 함께 지내는 우리 두 사람의 행복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어. 세레나가 말을 배우고 집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하자 브루노는 변해 버렸어. 모든 것이 그를 짜증나게 만들 었던 거야. 그 시기, 아기가 두세 살이 되어 가는 그 시기는 아주 힘들지. 항상 아기의 뒤 를 쫓아다녀야 하고 다른 아기를 때리거나 넘어뜨리지 않게 잠시도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되 지. 아기들은 물건들을 땅에 집어 던져 실험을 해보고 망가뜨리기 일쑤지. 인내심이 많이 필요한 시기야. 그 후에 아기들은 변덕을 배우게 되지. 오래 전에 심리학자인 내 친구가 한 말에 따르면 아이들은 일부러 그런다는 거야. 자기 자신을 시험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다름 것들을 시험하는 방법이라고 하더군.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걸 몰랐어. 그것은 그냥 변덕이 었을 뿐이야. 그래서 그 변덕을 억눌러 버리려했지. 그러던 어느 날 식사 도중에 브루노가 폭발을 했어(세레나가 벌써 숟가락을 세 번이나 바닥에 집어 던졌거든. 그 애는 먹는 법을 배우려 하지 않았어).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소리쳤어. " 넌 네가 얼마나 운이 좋은 지도 모르는구나." 그러더니 문을 쾅 닫고 집에서 나가 버렸어.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브루노는 집에 돌아왔어. 난 그에게 어디 갔었느냐고 묻지 않았 어. 브루노 자신도 어디에 갔다 왔는지 모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어쨌든 그날부터 전쟁 이 시작되었어. 브루노는 언제나 눈을 부릅뜨고 어린 딸이 어떤 해를 끼치지나 않을까 지켜 보았어. 나를 나무랐고 내게 능력이 없다고 탓했어. 가끔 고함을 질렀고 그러고는 며칠씩 사라져 버렸어. 난 아이를 잘 살피려고 애를 썼고 그 애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어. 그 이상 의 행동을 한다는 게 우리에겐 불가능했어. 난 그가 어떤 식으로든 적의를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가 갈수록 더 신경질적으로 되어갔으니까. 알겠니? 내 인생의 의미는 거기, 브 루노와 세레나 속에 있었는데 갑자기 그 두 사람 모두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된 거 야. 그들은 그들끼리 전쟁을 치르고 있었지. 나는 그 한가운데, 두 개의 불길 한가운데 나 무 기둥처럼 서 있었어. 이유? 글쎄 잘 모르겠구나.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르지. 브루노의 내부에서,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느 부분에서 삶을 증오하기 시작한 거야. 그 런데 세레나는 바로 그가 증오하는 그 삶이었어. 한번은 다른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발 작을 했어. 나는 그에게 말을 걸려고 애썼어.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난 아무렇지도 않은 체했지. 하지만 세레나가 잠이 들었을 때 그가 있는 응접실로 갔어. 난 그 앞에 앉아 이렇 게 말했지. "브루노, 할말이 있어요." 난 그자 이렇게 말했을 뿐이야. 그런데 그는 금방 울음을 터뜨렸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가 리고 울었어. 흐느낌으로 인해 그의 몸이 심하게 떨렸어. 마치 어린아이 같았지. 한 달 후 그의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가 그가 자주 결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사무 실에는 집에 일이 있다고 하고, 집에는 사무실에 간다고 했던 거야. 어디에 가 있었을까? 난 알 수가 없었지. 어린아이가 있는 몸으로 그의 뒤를 밟을 수도 없었으니까. 우리와 함께 있을 때는 점점 더 말이 없어졌어. 토요일에도 우리와 바닷가에 가기보다는 자기 볼일을 보 러 가는 시간이 많아졌지. 그를 이해하기 위해 내가 한 일이 뭔지 아니? 그의 눈을 쳐다보 는 것이었어. 그가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몇 시간이고 조용히 그를 쳐다볼 수 있었 어. 그의 시선은 공허했고 먼 곳을 향해 있었어. 그 뒤 어느 날 나는 편지를 한 통 받았어. 어떤 편지였는지 아니?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편지, 글씨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신 문의 글자를 오려 붙인 편지였어. 그 편지에는, 브루노에게 정부가 있는데 아마 틀림없이 딴 살림을 차렸을 거라고, 그래서 집에서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는 거라고 씌어 있 었어. 내가 그 말을 믿었을 것 같니? 전혀 믿지 않았어. 편지를 읽고 난 뒤 둥글게 말아 태 워 버렸어. 혹 남편이 편지를 발견하고, 이 편지에 드러난 사람들의 사악함 때문에 고통받 게 하고 싶지 않았어. 그가 점점 변해 갔고 수용소에서 돌아왔던 그 당시의 밤들로 다시 돌 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는 눈을 감은 채 소리를 질러댔고 입고있던 파자마를 찢어 버렸 어. 난 아무런 확신도 가질 수 없게 되었어 - 사람들은 그 어떤 것에도 확신을 가질 수가 없는 거란다 - 하지만 이미 말했듯 혹시 그 괴로웠던 3년 동안의 기억이 되살아나서, 하루 하루 그의 내부를 잠식해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해보기는 했어. 모래와 퇴적물 을 나르는 강물들, 생각나니? 퇴적물들과 모래는 천천히, 1센티미터씩 바다를 사라지게 만 들고 바다를 삼켜 버리지. 우리 머릿속에서도 그 비슷한 일이 벌어진단다. 그 무렵 꼭 한번 그를 길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어. 우연한 일이었는데 그날은 정말 날씨 가 좋았어. 난 세레나를 데리고 항구에 가서 배를 보여 주고 있었어. 그는 우리를 보지 못 했지. 세레나도 자기 아버지가 그렇게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어. 그를 알 아본 사람은 나밖에 없었는데,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다니는 그의 모습 때문에 알아볼 수 있었지.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구?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 그는 방파제 끝에 앉아 있 었는데 양쪽에는 두 명의 낚시꾼들이 있었어. 그 낚시꾼들과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고 생각 해. 그들은 고기를 낚았고 그는 고기 잡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어. 한 사람이 물고 기를 끌어올렸을 때도 그는 바다에서 눈을 떼지 않았어. 계속 바다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 지. 그 모습은 나를 흔들어 놓았어. 나의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기 시작한 거야. 뭐 냐고? 구름이었어. 지평선 위에 맑게 떠 있는 모습을 보면 힘이 나던 그 큰 구름이었지. 너 도 그런 경험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구나. 아직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지만 사실은 직감적 으로 모든 것을 느끼는 경우들이 종종 있지. 그건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힘들이랄 수 있지. 아니, 난 그것들을 믿기가 힘들었어. 오히려 알 수 없는 어떤 부분에 벌써 어떤 낌새, 신 호 수수께끼 같은 것들을 쌓아 놓고 있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 그 러니까 일이 벌어졌을 때 비로소, 필요했던 것은 바로 이 사건이었다는 것, 이 사건이 바로 마지막 카드였다는 것을 깨닫게 될 거야. 그러니까 전화가 온 건 바로 그날 오후였어. 가을이었고 비가 내렸지. 난 모두 기억하고 있단다. 그때 난 세레나에게 간식을 만들어 주고 있었어. 전화를 받기도 전에 나는 벌써 무 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았어. 경찰의 전화를 받고도 난 조금도 놀라지 않았어. 그들이 입을 열기 전에 내가 먼저 물었어. "브루노는 어디 있죠?" 장소는 내가 짐작했던 곳이 아니었어. 이것만은 내 예측에서 벗어났지. 난 투신 자살을 했으리라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아니었어. 그의 시체는 기차가 지나가는 길에 의해 정확하 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지는 고원에서 발견되었어. 아니, 난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야. 그 이후에도 난 언제나 그 근처로 지나가지 않 으려고 애썼어. 어디냐고? 동쪽에서 기차로 실어온 젖소들을 가두어 두던 큰 가축 창고 옆 이었던 것 같아. 너도 그곳을 알고 있니? 밤이 되면 으스스하냐구? 가축들이 울부짖느냐구? 넌 가축들도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다고 말하려는 거지? 아니야,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가축들은 다음날이면 자신들이 죽을 거라는 것도 모르니까. 어쨌든 브루노는, 나중에 경찰 이 들려 준 이야기에 따르면, 거기에 대피소 같은 것을 만들어 놓았다는 구나. 며칠씩 집을 비우면 틀림없이 그곳에 있었을 거야. 그 안에서 경찰들은 브루노의 신발과 신문 조각들이 들어 있는 서류가방을 찾아냈어. 난 브루노가 죽었다는 사실 이외의 다른 일에는 신경 쓰지 않았단다. 내게는 세레나가 있었고 난 그 애 생각을 해야 했어. 난 엄마였으니까. 해결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들이 너무나 많았고 아이가 있었어. 내가 아빠는 여행을 떠났다고 말해 주 긴 했지만 그 애도 뭔가 눈치챈 게 틀림없었어. 그 애는 약간 이상했어. 잠을 잘 때나 숙제 를 할 때 주의 깊게 살펴보면 세레나는 점점 브루노를 닮아 가는 거야. 브루노의 영혼 일부 분이 마치 그 애 속에 자리잡은 것 같았어. 하지만 그가 지녔던 정직하고 강한 모습은 아니 었지. 오히려 세상을 뜨기 전의 허약하고 흔들리던 모습이 담겨 있었지. 학교 성적은 좋았 어. 그 앤 정말 총명했어. 어쩌면 세레나를 망가뜨린 게 바로 그 총명함이었는지도 몰라. 총명함은 하늘이 주신 선물이라고 말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어쩌면 총명하지 않 은 사람으로 사는 게 훨씬 더 나을지도 몰라. 학교 성적은 뛰어났지만 그 애에겐 친구가 없 었어. 항상 혼자였고 매사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어. 난 그 애의 등을 떠밀어 밖으로 내보냈 고 책을 읽게 했어. 보통 엄마들이 어떻게 하는지 너도 알지, 응? 난 세레나가 너무 폐쇄적 인 아이가 될까 봐 걱정스러웠단다. 그 애의 어깨 위에, 등뒤에, 그리고 내면에 우리 어머 니의 모습이 들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어.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그걸 볼 수 있었 어...... 예를 들어 이런 것, 유전적인 위험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렴. 브루노와 나는 완전히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단다. 지금 이야기하듯, 그런 강박관념에서 해방되었느냐구? 그래, 우린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았어. 네게 이미 설명했듯 그건 당연한 일이었지. 죄값을 치르기 위 해서는 겸손하게 행동하고 모든 것을 극복해야 해. 그런데 세레나와 단둘이 남게 되자 그런 생각이 떠나질 않았어. 그건 고정관념이 되어버 렸어. 어쩌면 내가 너무 그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도 몰라. 난 세레나의 모든 행동을 다 관 찰했어. 그 애는 항상 울고 있었어. 눈물을 많이 흘리는 사춘기가 되기도 전에 일찍부터 울 기 시작했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려 흐느껴 우는 거야. 그런데 도무지 울 이유가 없었어. 내가 물어 보았지. "왜 우니?" 그러면 더 크게 울면서 소리쳤어. "나도 몰라요!" 그러고는 내 품으로 달려들었지. 그 당시에는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 같은 것이 본격적으 로 논의되지 않은 상태였지. 정신병자들은 정신병원에 갔고 나머지 사람들은 상식을 가지고 살아갔어. 상식만 있으면 됐어. 그래서 난 그 애를 위로해 주고 품에 안아 주었어. 하지만 어떤 때는 나도 짜증이 나서 몇 시간이고 혼자 울게 내버려두기도 했지. 물론 그 애 앞에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난 두려웠어. 다시 한번 세상일들이 내 손에서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어. 이 세상에서 내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세레나밖에 없었어. 그래, 소파에 앉아 있다가 난 가끔씩 텔레비전을 켜고 여기저기 돌려본단다. 마음에 드는 프로가 하나도 없어. 어쨌든 과학 프로그램이 나오면 난 텔레비전을 꺼버린단다. 그런 프로 그램들은 세상일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여 주거든. 흥미로운 것이긴 하지만 난 그런 걸 알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어. 염색체에 대한 이야기, 유전자에 대한 이야기, 그런 얘긴 정말 참을 수가 없단다.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보여주는 여러 색깔과 모양들을 참고 볼 수가 없어. 이 쥐는 그 어미 때문에 이렇게 되었고, 저쪽 것은 어떻고......다른 사람들도 참기 어렵고 무시무시한 생각이 들 거야. 세레나는 열 다섯 살 때 자살을 기도했단다. 그 애는 소파에 누워 있었는데 아직 숨이 붙 어 있었어. 그 애가 입원해 있는 동안 아무 것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그 동안의 일 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환상이었어. 브루노가 독일에서 보냈던 그 세월은 고스 란히 유전자 속에 새겨져서 억눌려 있었던 거야. 과학자들은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나는 그 렇다고 믿어. 유전자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말이야. 그 애는 마치 자기가 독일에 있었던 것처럼 고통스러워했어. 어쩌면 더 고통스러웠는지도 몰라. 그 애는 자기가 왜 고통 스러워하는지도 몰랐으니까 말이야. 고통이 그 애를 갈기갈기 찢었고 그 애는 견디기 어려 워했어. 바람 소리만 들어도 몸을 부르르 떨었어. 그 애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내가 죄 인이었어. 이스라엘에서는 강제 수용소가 젊은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 고 있다며? 그러니까 넌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사실이야. 공포가 신경섬유 속 에 녹아서 자식들에게 전해지는 거야. 자식들은 그걸 자기 자식에게 전해 주고......세대와 세대에 걸쳐 계속되는 거지. 물론 세대가 거듭될수록 점점 더 약해져서 끝내는 소멸하고 말 겠지. 공포가 소멸되는 바로 그 지점에 분명 또 다른 공포가 마련되어 있을 거야. 신선하고 생생한 공포가 거기서 널 기다리다가......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너도 이 소리 들리니? 이 소리가 뭘까? 냉장고 소리일까? 우리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내 생각에는......그래, 바로 여기까지 했지. 난 착한 사람 들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단다. 어디엔가 존재한다면 만나 보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 본 적이 없단다. 나 역시 착한 여자는 아니니까. 난 내 자신을 속일 정 도로 거짓말쟁이는 아니야. 난 조금도 착하지 않아. 우리의 내부로 들어와서 우리를 휘감 고, 동물들도 절대 저지르지 않을 짓을 하게 만드는 악이 존재하기 때문에 선한 사람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거야. 동물들은 자기 먹이로 결정된 것만 먹는단다. 무분별하게 그저 단순히 자기 취향 때문에 먹지는 않아. 취향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인간 들에게서, 그들의 심장에서 나오는 거야. 그것을 인간의 내부에 불어넣어 준 사람은 누굴 까? 누군가가 틀림없이 그 안에 넣어 주었을 텐데...... 세레나와 나는 산에 갔었어. 그날 우리는 한방에서,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지. 세레나가 어릴 때 이후로 처음이었던 것 같아. 어느 날 밤 나는 고함 소리에 잠이 깼어. 한동안은 브 루노가 소리를 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어. 난 불을 켰지. 그리고 소리를 지른 게 내 딸이라 는 것을 알았어. 그 애는 눈을 감고 소리를 지르며 팔다리를 휘저었어. 그래서 난 침대 가 장자리에 앉았어. 꼼짝 않고 거기 앉아서 다시 한번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단다. 한밤중 에 시간은 마치 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널리 퍼지고 확장된단다. 갑자기 오래 전에 하느님 과 했던 그 약속이 떠올랐어. 그래, 난 그때 하느님께 물물교환을 제안했었어. 내 여생을 바치는 대가로 평온을 달라고 부탁했었어. 그런데 난 하느님께 그것을 드리지 않은 거야. 한번도......하느님은 이유가 있으셨어. 이제 하느님은 화가 나서 나를 벌주시는 거야. 내 인생은 달라질 수도 있었어. 어느 순간에 내 인생이 구겨졌다면 그것은 바로 내 탓이야. 구 겨지고 둥글게 말려 앞으로 달려나가 한 점에 집중되어 있었고, 고통 속에서 펼쳐졌어. 그 놀이를 피할 수 있었을까, 응? 난 죽고 싶었고 인생에 실패했다고 자인하고 싶었단다. 내가 아직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은 자살밖에 없었어. 내가 세레나나, 뭐 그와 비슷한 다른 것을 생각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거야. 세레나는 오래 전부터 주먹에 작은 지푸라기를 꽉쥐고 거기 있었어......난 그 지푸라기를 예전에도 본 적이 있어. 결국 난 아 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 세레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는 그 어 떤 것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야. 내가 비겁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난 커튼을 떼어 냈어. 어느 날엔가 세레나가 틀림없이 그 안에 들어갈 테니까. 밖에는 소 나무들이 많았는데 그 소나무 위, 허공에 새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어. 거의 움직이지 않았 는데 아마 매였을 거야. 세레나가 라디오를 켰어. 노래가 흘러 나왔어. 그 노래 구절이 생 각나는구나. 이런 노래였지. "삶의 이 어마어마한 혼돈이......" * 한 주 내내 이 소파에 앉아 네가 오기를 기다렸단다. 난 이제 더 이상 옛날 이야기는 하 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 날씨나 몇 가지 알고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 지. 속으로 입을 꿰매 버렸어. 분명해. 하지만 너를 보자 어떻게 된 건지 입이 열리고 저 혼자 떠들어대는구나......그 노래, 알겠니? 모든 것이 우스워지는 지점이 있어. 나하고 절친했던 친구의 손녀가 죽었단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배우고 입을 떼기 시작했 는데 말이야. 갑자기 그 아이의 눈이 잘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는 구나. 그 아이의 몸 속에 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있었던 거야. 여기저기 암세포가 자라고 있었어. 활기차고 횡포한 그 암이 아이의 뇌와 그 나머지 것을 모두 잡아먹어 버린 거야. 장례식에서 난 친구 곁에 서 있다가 웃어 버렸어. 대체 왜 순진무구한 어린 생명이 고통만 당하다가 죽어간 것일까? 난 무릎을 꿇고 있는 모든 삶들에게 물어 보고 싶었고 제발 내 부탁을 들어 달라고 간청하고 싶었어. 너도 그런 경험 있니? 슬픈 일을 당했는데 눈물이 나오는 게 아니라 웃음이 나는 거야. 웃고 또 웃고, 웃음을 더 이상 멈출 수가 없는 거지. 옳은 태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웃음이 나와. 불행 때문에 사람들은 웃을 수 있단다. 불행이 적으면 적을수록 눈물이 나오고, 크면 클수록 웃음이 나오는 거야. 한 가지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망가졌을 때 사람들은 코미 디를 보듯 웃어댄단다. 모든 것이 다 쓰러져 버리고 주인공마저 쓰러질 때 사람들은 즐거워 하지. 내 인생도 그런 거야. 내가 하나하나 내 이야기를 드려주면 사람들도 조금은 믿어 줄 거야. 하지만 어느 순간에 이르면 다른 일이 벌어지게 돼. 삶들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고 웃음을 터뜨릴 거야. 바로 이 때문에 난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단다. 난 한번도 내 이야기를 다해 본 적이 없어. 사람들이 틀림없이 웃을 테니까. 넌 아직 웃지 않는구나. 웃지 않는 것 같기는 한데, 네 마음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니? 네가 교양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지. 난 남의 인생을 구경하는 나쁜 버릇이 있단다. 남의 인생을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하곤 하 지. '시장의 과일들 같구나.' 너도 알겠지만 요즘에 나오는 과일들은 모두 동글동글하고 색 깔도 모두 일정해. 텔레비전에서는 호르몬 때문에 과일이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결국에는 이 호르몬이 암을 유발시키고 적어도 암이 생기는 데 일조 한다는 거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과일이 완벽하게 존재한다는 거야. 꽃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는데 꽃 들이 복제되기도 한다더구나. 난 대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어쨌든 흉한 말이라 는 생각이 들었어. 예를 들어 장미 비슷한 것을 만들어 낼 수는 있겠지만, 그걸 장미라고 할 수 있을까. 복제된 장미에는 단 한 가지 요소가 빠져 있는데, 바로 향기가 없다니까 말 이다. 아버지는 가끔씩 팔레스타인에서 편지를 보내 오셨어. 아버지는 가축 우리에서 일하신다고 했어. 가축 키우는 방법도 아주 현대화되었대. 그 어 디서도 어린이들의 교과서에 나노는 그런 송아지는 거의 태어나지 않는다는 구나. 모두 똑 같고 완전하다는 거야. 하지만 백 마리 가운데 한 마리는 머리가 두 개에 다리가 세 개로 태어나기도 한 대.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을 너도 알겠지. 희귀한 혁명이야. 배 두 개가 서 로 붙어서 열렸어. 한 개의 배처럼 가지와 과육, 씨들이 다 있는데 두 개라는 거야. 자연의 실수지. 박물관에 보관되고 책에 실리겠지. 나는 다른 삶들의 삶을 지켜보며 확인했단다. 그들의 삶은 대개 고요하고 사소한 일들만 벌어졌어. 삶들은 조용히 살다가 또 조용히 죽어 갔어. 네 주변만 살펴봐도 알 수 있지. 네 집을 한번 봐. 주변에 평범한 일상들이 흐르는 것을 볼 거야. 하지만 그러다가 가끔씩 무엇인가가 멈춰지지. 어느 지점에서 중단되는지는 몰라. 어쨌든 다양한 삶이 있는 거야. 모든 불행은 자석 위의 철자루처럼 그 지점으로 간단다. 거기 끼여들어 온 힘을 다 기울 이고 자극을 주는 거야. 사람들은 불안정하게 이 세상에 태어나고, 죽을 때는 태어날 때보 다 더 불안정한 상태에서 눈을 감는 거란다. 기술, 그리고 인간이 인간 위에 군림하게 만들 어 놓은 것 때문만을 아니야. 어떤 것이 더 높은 곳에, 또 어떤 것이 더 낮은 곳에 있는 것 일까. 그러니까 누구의 죄일까? 선택되는 거일까? 아니면 선택을 하는 것일까? 어느 날 신 부님이 내게 말했어. "당신의 삶은 은혜로운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뭐가 은혜로운 것인지 물어 보고 싶어. 무엇을 위해 사람들은 앞으로 나가는 것이고, 괴로움을 견뎌내며, 다시 힘을 내려고 애를 쓰는 것일까? 과학자들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어.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했어야만 해. 불행이란 몇몇 장소에, 단지 그곳에만, 항상 그곳에 자리한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할거야. 내가 생각 하기에 불행 밑에는 화학 법칙과 유사한 그 무엇이 들어 있어. 화학 물들은 서로 끌어당기 거나 밀어붙이거든. 그런 이유로 과학자들이 불행을 연구하고, 일종의 해독제 같은 것을 발 명해야 한다고 말하는 거란다. 난 이제 잠을 잘 수가 없어. 수면제를 복용하긴 했지만 눈을 뜨고 있었어. 창문에서 온기 와 먼지가 스며 들어왔어. 제라늄은 여전히 거기에,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상태로 그곳에 놓여 있어. 한밤에 하수도 속에 들어가서 일하는 잠수부들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어. 그들은 시간당 200만 리라를 받는 다더구나. 난 보수라고는 한푼도 받지 않고 한밤 내내 이 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어. 나 역시 물 속에서 일하는데 말이야. 이불들은 물 속에 있는 동굴 이야. 어둠 속이지. 거기서 나는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기도 하고, 몸을 뒤척인단다. 나 가고 싶지만 어느 쪽이 수면인지 알 수 없단다. 하늘이 있다면 어디 있는 것일까? 벌써 아홉 시니? 가야 하지? 가기 전에 날 좀 안아 주렴. * 편지들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 한번 볼래? 믿을 수 없지, 응? 15년이 더 지났는데도 계속 난 편지를 받고 있단다. 항상 똑같은 양식으로 그 위에 이렇게 씌어 있어. '저는 여기 우리 집에서 쉬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그리고 내 딸 세레나가 남기고 간 것들 을 이야기한단다. 언젠가, 아주 오래 전에 나도 답장을 썼어. 난 감사하다는 말을 수없이 써놓았어. 그런데 잘 모르기는 해도 편지는 그 어디로도 발송되지 않았을 거야. 아니 사람 들이 내 글씨를 알아 볼 수도 없었을 거야. 세월이 흘러 글씨 쓰는 법도 변해 버렸으니까. 오늘 날씨가 덥지, 응? 곧 휴가철이 되겠구나. 넌 어디 좋은 데 가니? 아니, 난 여기 있을 거야. 넌 어디로 갈 건데? 덧창을 좀 닫아야겠다. 작을 선풍기가 한 대 있는데, 지금 주전 자가 놓여 있는 그 책상 위에 올려놓았지. 난 텔레비전을 보거나 보지 않아도 그냥 켜두지. 책을 읽지는 않아. 흥미가 없거든. 사람 들은 호기심이 일 때 책을 읽지. 난 이제 더 이상 책을 읽지 않아. 세레나가 죽은 뒤로 난 책 한 권을 끝까지 다 읽은 적이 없어. 그래, 그 애는 탐욕스럽게 책을 읽어댔어. 너도 저 쪽 방들 봤지? 사방 벽을 다 덮은 그 책들이 다 세레나 거였어.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책을 사서 모았어. 갑자기 그 애는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지. 탐정 소설을 몹시 좋아했어. 그리고 범죄 사건에 관련된 기사들을 신문에서 모두 오려서 서류철에 분류해 놓았지. 노란 색 서류철 속에 들어 있는 것은 강간 기사, 빨간색 서류철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살인 사 건......그 애는 열광적으로 계속 정리를 해나갔어. 살인자는 그 애의 몸 속으로 들어가 그 애와 똑같이 숨을 쉬었고, 그 애는 그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봤어. 그 애는 어디서라도 살인자를 찾아냈어. 세레나는 아주 복잡한 이야기들을 써나갔지. 어떨 때는 누가 죽었는지 도 모를 정도로 이야기가 복잡해지기도 했어. 난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 그런데 그 애 는 아주 간단하다는 거야. 사실 난 그런 이야기들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그 애가 쓰는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 아니라 살인 사건 따위에 그 애가 몰두한다는 사실 이. 그 애는 시체들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꽃들에 묻혀 사는 사람 같았어. 몇 년 뒤 그 애의 소설들이 출판되고 성공을 거두었지. 그래서 난 혼자 생각했지. '어쩌면 이게 사실인지도 몰라. 세레나의 재능은 바로 이것인지도 몰라. 이것도 다른 직업과 똑같겠지. 그 애는 의사 나 변호사가 될 수도 있었어. 그런데 탐정 소설을 썼어. 이 직업도 다른 것들처럼 괜찮을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내 마음이 편안했던 건 결코 아니야. 그 애가 침착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더라면 나도 그럴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 애는 갈수록 더 초조해 보였어. 성공을 하고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을 계속 써도 전혀 안정되지 않았던 모양이야. 그게 탈출 구는 아니었던 거야. 이해하겠니? 무엇인가가 흘러가고 있어서 멈추지 않았어, 절대. 그것 은 자극 같은 것이었어. 종종 그 애는 자기가 쓴 소설과 자신의 실제 삶을 혼동했어. 길거 리에서도 자기가 미행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옷장을 여는 것도 무서워했어. 그 몇 년 동 안 그 애는 아주 커다란 무엇인가가 자기 속에 들어 있다고, 그러니까 결국은 그 탐정 소설 속에 있다고 했어. 그 애는 그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은 그것을 표현해 낼 수가 없었어. 여기저기 여행을 다녀 보기도 했지만 상태는 계속 더 나빠졌지. 난 그 애에게 아무런 충고 도 하지 않았어. 아무 말도......난 입을 다물고 있었지.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있겠니? 결 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라고? 그 애가 미국 여행을 하겠다고 말했을 때 - 미국에는 수많은 범죄들이 발생하니까 영감을 얻기 위해 뉴욕으로 갔어 - 난 그 애에게 '잘했다. 좋은 생각 이야' 라고 했단다. 한 달 뒤에 경찰관 한 사람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 애를 발견했단다. 도대체 누가 그 애 를 목졸라 죽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단다. 신문에서는 그 애가 자기가 쓴 소설과 똑같이 살해당했다고 보도했지. 경찰에서도 몇 가 지 조사를 했단다. 왜 그 애가 그 엘리베이터를 탔을까? 그날 밤 무엇을 했을까? 사건은 결 론이 나지 않았어. 내겐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았단다. 소식을 들었을 때 내 기분이 어땠는 지 아니? 소름끼치는 일이야. 이런 말을 한다는 게 부끄럽구나. 난 그 소식을 듣고 안심이 되었단다. 물론 나 자신을 생각해서 안심했다는 게 아니야. 그 애를 생각하면 그렇다는 거 지. 내가 고물처럼 보이니? 그렇게 변했을 수도 있어. 삶이란 말이지......뿌리를 내리고 성장을 하다가 뿌리가 뽑히게 될 날을 기다리는 거란다. 난 혼자 되면서부터 인도인들의 이야기, 그러니까 영혼이 움직여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 겨 다니며, 저 생에서 했던 일의 대가를 여기서 받으며, 그 대가를 다 치른 사람들은 행복 하게 산다는 그 이야기가 사실일까 의문을 갖곤 했단다. 만약 그렇다면 내가 다른 생을 위 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난 수도 없이 그런 생각을 했어. 하지만 오히려 알게 될까 봐 두렵구나. 난 아마 다른 생에서 악어였든지, 굶주린 호랑이였을 거야. 그 생에서 난 내 두 손으로 수없이 피를 흩뿌렸을 거야. 그때 뿌린 피가 지금 내 주위에 흐르는 거야. 내가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나? 살인을 하는 시기가 있고 치료해야 할 시기가 있는 거야. 파괴해 야 할 시기가 있고 건축해야 할 시기가 있지. 난 모든 것을 다 죽였고 모든 것을 다 파괴했 어. 내가 무엇인가를 다시 떠올리고 계획할 수 있을까......몇 가지 생각들이 떠돌아 다녔 어. 바보같이 난폭한 생각들이지. 왜 아직도 나는 살아 있는 거지, 왜 움직이고 몸을 돌리 고 또 돌리는 거지? 왜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지? 만약 교훈이 있다면 어떤 걸까? 난 여기저기 고함을 치는데 아무도 내 외침에 귀기울여 주지 않아. 그래서 난 사람들이 어 떻게 자신을 맡기고 어떤 신뢰를 갖고 살아가는지 의문을 가져 보았어. 무엇에 대한 신뢰? 난 수도 없이 후회를 했단다. 어떤 부분에서 관대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였어. 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쳐 본 족이 없었어. 그런 생각조차 가져 본 적이 없어. 그런데도 불행은 폭우처럼 내 위로 쏟아졌어. 그래서 난 이런 생각을 했단다. 처음에 나쁜 짓을 한 사람이 나라면, 그 후에는 다시 행 복해질 수 없는 것일까? 그 후에는? 누가 그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고 말할 수 있을 까? 난 이제 저울이라든가 계산서 같은 것을 보지도 믿지도 않아.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가 않아. 사람들이 놀이를 하고 생각을 하는 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여기야. 세레나가 죽었을 때 난 잠시 이런 생각을 했어. 그리고 난 이게 마지막 시련이라고 생각했지. 무엇인 가가 하늘에서 내려올 것 같았고, 바로 그 순간 깊고 긴 숨이 내려와야만 할 것 같았어. 하 지만 아무 것도 내려오지 않았어. 난 시시껄렁한 일들을 생각하며 여기 이 소파에 앉아 있 었어. 동굴에서 이를 갈고 있는 쥐새끼들 같지. 어쩌면 나를 파괴했던 것은 바로 그 사소함 이었는지도 몰라. 난 감히 뭔가를 해볼 엄두를 내지 못했어. 나의 시선? 마치 부활절을 앞 둔 새끼 양의 눈 같았어. 나는 마치 도끼를 맞는 양처럼 두 눈을 꼭 감고 거기서 있었지. 도끼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목 위에 차가운 도끼 날이 닿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 그 것은 차갑게 정지된 바람 같았지. 난 많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는지도 모르는데 그것들을 활용하지 못했어. 난 무기력하게 앞으로 갔지. 나를 앞으로 떠미는 파도가 있었고, 난 바다 한가운데 낡은 신발 짝이나 항아리처럼 떠 있었어. 내 인생의 하루하루를 거품 속에서 왔다 갔다했을 뿐이야. 난 결코 그 어느 곳에도 도달할 수 없었어. 난 악하게 살지도, 선하게 살 지도 않았어. 난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 오늘 네가 오기 전에 난 낡은 잡지 한 권을 펴보았단다. 한 나이 많은 철학자와 나눈 장 문의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었어(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둔 철학자들을 인터뷰하곤 하잖니). 그 철학자는 노년에 대해 이야기했어. 그는 자연이란 자비롭고 또한 섭리를 품고 있다고 말 하더구나. 어떤 순간에 이르면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되고 사람들은 더 이상 강한 감정들을 느끼지 않으며, 감각들도 느려지고 느끼는 것도 적고 보이는 것도 적어진다고 했어. 모든 기대는 완화되어 버리고, 고요한 바다에서 항해를 하는 거야. 해안선은 점점 더 멀어져 가 고 가끔씩 색깔이 변하고......그러다 사라져 버린다는 거야. 그게 종말이지. 그 글을 다 읽었을 때 내가 어떻게 하고 싶었는지 아니? 편지를 한 장 쓰고 싶었어. 그렇 지만 잡지 날짜를 보고는 편지를 쓰지 않았어. 너무 오래 된 잡지라서 그 철학자가 이세상 사람이 아닌 게 분명했거든. 어쨌든, 만일 내가 그에게 편지를 쓴다면 이렇게 쓸 생각이었 지. 당신은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고 말이야. 모든 것이 멀어진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야. 아 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부분적으로는 사실일 수 있겠지. 느끼는 것도 적고, 보이는 것도 적고, 움직임도 적어질 수 있어. 하지만 이런 것이 삶에 도움을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점 점 더 삶을 어렵게 만든단다. 윤곽들이 흐려지고, 즐거움들이 사라지지. 그런데 바로 그때 아주 극적으로 핵심적인 불꽃이 솟아올라 불타오르게 된단다. 몸 위로 넘실거리다가 너를 파괴시켜 버리고 말지. 노인들에게 열정이 없다는 말은 거짓이야. 노인들은 무시무시할 정 도의 열정을 지니고 있어. 노인들의 열정을 부채질하고 강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후회의 감 정이란다. 탄식할 필요는 없어.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알아야 해. 요람에서부터 자 장가처럼 그 사실을 노래해 주었어야 해. 하지만 그렇게 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그러 면 어떻게 해야 알 수 있을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너무 늦어 버리고 말지. 너도 봤니? 언제나 출발점으로 돌아오게 되는 거야. 그때는 달아날 수가 없어. 그때쯤이면 네 다리에서는 힘이 빠지고 눈은 빛을 잃고 귀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아주 작 은 소리뿐이지. 그러다가 갑자기 내부에서 우스운 욕망이 생겨난단다. 몸을 움직여 떠나고 싶어지지. 긴 여행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나지. 새로운 장소에 가보고 싶고, 이미 가봤던 곳 에 또 가보고 싶기도 해. 세상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그런 일이 생긴단다. 난 여행을 별로 많이 해보지 못했어. 베네치아, 피렌체......다른 사람들도 가보는 그 정 도지, 뭐. 딱 한번 난 아주 긴 여행을 했단다(세레나가 열두 살 때였어). 아버지를 만나러 이스라엘에 갔지. 아버지는 그때 연세가 아주 많으셨어. 난 세레나에게 아직 살아 계신, 이 세상에 단 한 분뿐인 할아버지를 만나게 해주고 싶었어. 그 당시 세레나는 최악의 상태였어. 는 머릿속에서 맴도는 생각이 계속 그 애에게 이야기 하곤 했지. 누군가가 - 내 생각에는 학교에서 들은 것 같은데 - 히틀러가 아직 죽지 않았다 고 그 애에게 말해 주었던 거야. 히틀러의 시체가 이스라엘의 벙커 속에 들어 있는데 어떤 게 그의 것인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말이야. 이미 그때부터 추리 소설가 의 재능이 그 애 내부에서 싹트고 있었지. 그 애는 하루 종일 온갖 추리를 하며 시간을 보 냈어. 그 애가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은 점점 더 무시무시해졌어. 히틀러는 죽기 얼마 전에 팔레스타인에서 자기와 거의 비슷하게 생긴 남자를 죽였어. 어쩌면 연구실에서 히틀러 자신이 직접 그 남자를 만들어 냈는지도 몰라. 장미들을 복제해 내듯이. 그리고 그를 죽였 지. 그 후 사건이 표면화되기 전에 히틀러는 그 연구소에서 도망을 쳤어. 그는 달아날 때 지하갱도를 이용했어. 이 갱도는 히틀러가 권력을 쥐고 나서 파놓은 거였어. 이스라엘에서 가장 뛰어난 엔지니어들이 그 갱도를 만들었지. 마치 우리 몸 속의 혈관처럼 그 갱도는 세 계 각국으로 뻗어 나가는 거야. 오스트레일리아로, 인도차이나로, 그린랜드와 칠레로 이어 지는 거지. 비밀 문들이 있어서 그 어디에서든 그 문을 이용할 수가 있는 거야. 물론 그 안에는 음식과 물뿐만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다 준비되어 있었지. 그 안에는 수천 명이 생활할 수 있는 보급품들이 준비되어 있는데, 히틀러 한 사람만 그 곳 에 사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지. 그는 인간을 복제해 낼 수 있는 기계를 갖고 있었어. 히틀 러는 직접 사냥개들을 길렀어. 아주 뛰어난 개들이었지. 그 안에서 이미 수많은 개들이 열 마리씩 몰려 다녔어. 이제 갱도에는 거의 자리가 없어. 개들은 지치지도 않고 뛰어 다니는 거야. 탐욕스럽게 킁킁거리며 모든 냄새를 빨아들이는 거야. 공기를 빨아들이며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지. 자신들이 원하던 냄새를 맡으면 이를 갈아. 그들은 입을 쩍 벌리고 언제든지 뛰어오를 준비가 된 늑대들이야. 20년 전부터 그 지하 갱도에 살고 있었고, 그 속에서 번식 을 하며 떼를 지어 몰려 다녔어.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오로지 휘파람 소리, 그러니까 신호 였어. 더러운 것들을 세상에서 쫓아낼 시간이라고 그들에게 일러주는 신호야. 너 이해하겠니? 세레나는 이런 환상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살았단다. 그 애에게서는 이게 환상이 아니라 사실이었어. 그 애는 자기 몸을 씻는 데 오랜 시간을 보냈어. 살갗이 다 벗 겨질 정도로 힘을 들여 몸을 문질렀단다. 절대 맨홀이나 환기통 위로 걷지 않았어. 밤이 되 면 변기 위에 대리석판을 갖다 올려놓았지. 그 애를 데리고 이스라엘에 가는 건 좋은 생각 인 것 같았어. 최상의 생각이었지.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고 그곳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내가 그 애에게 말했어. "늑대는 어느 곳에서든지 나올 수 있지만 그곳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단다. 늑대를 물리칠 태세를 갖춘 아주 힘센 군대가 거기 있으니까." 그리고 또 그곳이 마음에 들고 우리 마음이 편안하다면 거기 가서 살자고 말해 주었지. 꼭 우리가 살던 도시에 살아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었어. 실제로 그 애는 이스라엘에 가서 약간 진정되는 것 같았어. 그 애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고 잇는 할아버지를 좋아했어. 할아버지는 젖소들과 바이올린만을 생각하고 사셨지. 들이 오랫동안 감귤 밭을 산책하곤 했지. 이미 아버지에게 역사란 빛 바랜 기억에 불과했어. 아 버지는 식물들이 커 가는 것을 지켜보고 송아지들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셨어. 아버지의 삶 은 거기, 자연 속에 모두 들어 있었어. 아버지는 행복하셨고 그 행복감을 세레나에게 전할 수 있었어. 우리는 키부츠의 평화에 잠겨 한 달을 보냈단다. 돌아오기 일주일 전에 난 그 근방으로 짧은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어. 난 며칠간이라도 아 버지와 세레나가 단들이 지내길 바랐어. 내가 없는 게 어쩌면 세레나가 어떤 결정을 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거든. 난 그저 간단한 가방 하나만 들고 요르단에 도착했 어. 예루살렘에서 야파 문 근처의 여관에 숙소를 정했지. 사흘 동안 나는 아무런 목적도 없 이 도시를 왔다갔다했어. 수녀원에서 생활하던 그때 이후 처음으로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나 자신과 단둘이 있을 수 있었어. 가끔씩 좁은 골목길 한가운데서 무에진(주:회교 사원의 기도 시간을 알리는 사람)의 외침 소리와 종소리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추면, 난 비현실적인 느낌에 사로잡혔어. 그곳은 거의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신성이 충만한 곳이었어. 그래서 난 야트막한 담벼락 위에 걸터앉아 두 손으로 다리를 감싸고 힘껏 껴안았지. 마지막 이틀 동안 나는 버스를 타고 더 아래쪽, 그러니까 사해 쪽으로 갔단다. 예루살렘을 벗어나자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이 펼쳐졌어. 올리브 밭들을 지나니 그곳에서 부터는 사막이 펼쳐져 있었어. 모두 바위로 이루어진 무시무시한 사막이었어. 버스가 사막 으로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부터 초조해지기 시작했어. 아무 것도 없는 그곳에, 그 무더위 속에 나 혼자 있다는 사실이 겁이 난 거야. 하루 종일 무얼 해야 할까? 난 버스에서 내려 되돌아가고 싶었지만 너무 늦었지. 난 아가(주:구약 성서 중의 한 책)계곡에서 내렸어. 너도 거기 가봤을 것 같은데......멀 리 마사다의 요새가 거대한 성벽처럼 보였단다. 앞에는 물결 하나 일지 않는 유리 같은 바 다가 있었어. 잠깐 동안 나는 바닷가를 걸어 보았단다.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어 발이 물 속에 잠겼지. 난 완전히 물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어. 하지만 그 죽은 물들이 나를 다시 빨아들이고 내 심장과 눈을 태워 버릴까 봐 겁이 났어. 걷고 또 걸으면서 난 시간을 잊어버렸어. 너도 알겠지만 거기서는 해가 빨리 진단다. 셔 터를 내리듯 어둠이 그렇게 빨리 내려앉지. 갑자기 주위 사물의 윤곽을 구별할 수 없게 되 었을 때 비로소 난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어. 거리로 다시 나가 버스를 기다려야 했지. 정류장 표시가 있는 곳에서 난 기다리기 시작했어.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 해는 이미 져버 렸고 버스가 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어. 난 생각에 잠겨 버스 시간을 확인해 보는 것도 잊었 어. 버스도 없었고 지나가는 자동차도 한 대 없었어. 잠깐 동안 켜져 있던 몇 안 되는 전등 불도 꺼지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어. 갑자기 토요일처럼 모든 것이 움직이지 않고 이중으 로 보이기 시작했어. 정말 토요일 같았어. 덮니? 선풍기 틀어줄까? 그러면 창문을 좀 열어 놓을래? 바람이 좀 들어오게. 이 안은 숨 이 막힐 것 같아. 그래도 옮겨 앉아라. 안 그러면 목이 아플 거야. 지금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사막? 그래, 난 거기, 주머니에 가진 돈 하나 없 이 혼자 있었어. 돈이 있었다 해도 여관을 찾을 수 없었을 거야. 난 내륙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단다. 거리에서 잠을 자게 될까 봐 두려웠어. 이 세상 어디에나 나쁜 사람들이 있다 는 건 너도 잘 알지. 밤이었지만 사위가 훤했어.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었어. 그 하얀 달 빛이 사방으로, 모래 위로, 바위 위로, 이파리가 다 떨어진 아카시아 나뭇가지 위로 퍼져 나갔어. 그 달빛의 인도를 받아 작은 계곡으로 들어갔어. 강이 하나 있었는데 마치 열대 식 물같이 생긴 식물들 밑으로, 그 주위로 물이 흘렀어. 공포에 사로잡힐 법했지. 한번도 낯선 곳에서 야영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두려워해야 할 상황인데 아주 평온했어. 노래까지 불 렀다니까. 우리 어머니가 부르시던 그 꿀벌들의 노래였어. 난 내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있 다는 것이 정말 좋았어. 이상한 행복감 같은 걸 느꼈다고나 할까. 난 생각했어. 지금 죽을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하겠다고......아주 행복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았어. 몸을 보호할 만 한 자리를 찾아내서 누웠어. 한낮에 뜨겁게 달구어진 모래는 아직도 따뜻했어. 그것은 따뜻 한 이불이 되어 주었어. 하늘에는 별이 총총했고......나는 그 한가운데 있었어. 회오리바 람이 부는 깊은 소용돌이 속에 누워 난 하늘을 마주했지. 잠이 들기 전에 오랫동안 하늘을 바라보았어. 이런 일도 처음이었단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별들의 이름을 잘 몰라 너무 안타까웠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렇듯이 그 별들은 모두 똑같았고 그저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어. 시리우스, 오리온, 켄타우로스......이상한 생각이 들었어. 어머니와 브루노가 저 위에, 별 위에 걸터앉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지. 내가 그 별 이름들을 알았다면 이름을 부를 수 있었을 거야. 그리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거야. 살아 있을 때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결국, 알겠지. 다시 토요일이 된 거야. 난 다시 모든 것을 이중으로 바라보았지. 사물들이 모두 단 하나의 시선 속에서 용해되어 나타나는 것 같았고 또 실재하는 것 같았어. 주위에서 승냥이 우는소리와 밤의 소리들이 조그맣게 들려 왔어. 그 시간쯤이면 사막이 살아나는 시간이었지. 이상한 소리들도 들렸지만 난 별로 겁이 나지 않았어. 잠이 들기 전에 난 요나(주:《구약 성서》<요나기>의 주인공. 니느웨에서 설교하라 는 신의 명령을 거역한 죄로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고기밥이 되어, 사흘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회개하고 육지로 나와 니느웨 전도의 의무를 다함.)를 생각했고 그의 반역을 생각했 어. 그를 삼켜 레비아탄(주:물 속에 사는 거대한 괴수)은 나도 삼켜 버렸지. 나는 태어날 때부터 그 속에 갇혀 플랑크톤 속에 서 있었어. 그러는 사이 괴물은 심연 속으로, 맹목적으 로 동요하는 소용돌이 속으로 헤엄쳐 들어갔지......그러니까 난 가끔씩 입을 벌리고, 수면 으로 올라가 물고기를 잡아먹으려는 괴물의 존재를 깨닫지도 못하고 거기에 사로잡혀 있었 던 거야. 괴물은 물고기를 먹고 공기도 마셨어. 그러자 칼날 같은 빛이 내 안으로 들어왔 어. 그 빛은 목과 기관지와 식도를 비추었지.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그 빛을 보았다면 나 자신도 비추어 주었을 거야. 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어. 새벽녘에 희미한 빛이 땅에서 올라왔어. 천천히 모든 것을 쓰다듬으며 위로 올라왔지. 난 눈을 뜨고 말했어. "빛은 충격을 주지 않고 쓰다듬는구나." 빛이 모든 것을 쓰다듬으며 퍼졌고 바람이 강해졌어. 바람은 그렇게 오래 불지 않았어. 해가 높이 뜨자 금방 멈췄지. 나는 햇볕과 바람 한가운데에 몸을 쭉 펴고 누워 있었어. 난 더 이상 소용돌이치는 회오리바람이 아니라 바람 속의 바람, 호흡과 숨결이었어. 난 더 이 상 아무 것도 아니었어. 난 일어나고 싶은 생각도, 그곳을 떠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 어. 사물의 형태가 뚜렷하게 보일 때까지 거기 있었어. 꼼짝 않고 누워 있던 바로 그 순간 이런 것을 느꼈단다. 난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내 밑의 땅은 움직이고, 규칙적이고 부드러 운 방식으로 앞뒤로 나가고 있었어. 처음엔 지진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어. 만약 지진이었다면 나무들도 흔들렸어야 해. 땅의 움직임은 모든 것을 뒤 흔들어 놓을 정도로 커졌으니까. 나는 다시 귀기울였어. 더 잘 듣기 위해 완전히 몸을 쭉 펴고 누웠어. 잠시 후 나는 깨달았지. 너무나 짧은 순간이어서 그 이후에는 더 이상 느낄 수가 없었지만. 네게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겠구나. 네가 여기서 나가면서 웃을까 봐, 집 으로 가면서 불쌍한 할머니라고 말할까 봐 겁이 나는구나. 하지만 그렇지는 않단다.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해 주렴. 그날은 토요일이었으니까. 땅은 숨을 쉰단다. 그 위에 사는 우리와 함께 평온한 숨을 쉰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