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장 시간의 장구함 1979년 1월 1일 오전 2시, 나는 토스카니니의 마지막 연주회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날 밤, 고금을 통해 가장 위대한 거장이었고, 서양 음악의 모든 것을 절대 오류가 없는 기억 속에 담아내고 있는 이 거인이 수 초 동안 멈칫거리 며 그 영예로운 지위를 상실했던 것이다. 만약 영웅이 불사신이라면 어 떻게 그들이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겠는가? 지그 프리트는 어깨에, 아킬레스는 발 뒤꿈치에 급소를 가져야 했고, 슈퍼맨 은 크립토나이트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칼 마르크스는 모든 역사적인 사건은 두 번-첫번째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우스운 익살극으로-일어난다고 말했다. 토스카니니의 실수가 비극적인(영웅적인 의미에서) 것이었다면, 나는 바로 두 시간 전에 그 익살극을 목격한 셈이다. 나는 가이 롬바르도(미국의 경음악 지휘자, 그 가 이끄는 악단은 매년 1월 1일이 시작되는 순간에 '올드 랭 사인'을 연주 했다/옮긴이)의 유령이 박자를 틀리게 지휘한 것을 듣고 있었다. 신만이 알고 있을 긴 세월 동안 처음으로 그 부드러운 소리, 새해를 맞이하는 저 안온한 소리가 어떤 신비로운 일순간에 갑자기 산산이 부서졌다. 그후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누군가가 깜빡 잊고 1975년의 최후의 1분이 특별히 61초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지휘자인 가이 롬바 르도에게 이야기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너무 일찍 연주를 시작했고,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지 못했다. 원자 시계와 천문학적 시계의 보조를 맞추기 위해 1초를 더하게 되었 다는 소식은 신문을 통해 널리 보도되었지만, 대개의 기사는 반은 농담 조로 그 내용을 다루었다. 사실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요즘 들 어 즐거운 소식을 찾아보기란 하늘에 별 따기만큼 어려우니 말이다. 더 구나 대개의 신문들이 똑같은 주제를 다루었다. 모든 기사들은 극도의 엄밀함에 매달리는 과학자들을 조롱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겨우 1초라 는 시간이 뭐 그리 중요하냐는 투였다. 그래서 나는 1년에 5만분의 1초라는 다른 숫자를 상기했다. 1초라는 거대한 짐승 앞에 선 한 마리의 개미와도 같은 이 숫자는 조수의 마 찰로 인해 생긴 지구 자전 시간의 연간 감속률이다. 여기에서 나는 이 처럼 '중요치 않은' 수치가 지질학적 시간의 장구함 속에서 어떻게 중 요한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지구의 자전이 조금씩 느려진다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알려졌다. 유 명한 혜성에게 이름을 준 대부이며 18세기 초에 영국 왕립천문대장을 지냈던 에드먼드 핼리는 과거에 식이 일어난 실제 위치에 대한 기록과, 그가 살던 시대의 지구 자전 속도를 기초로 예측된 가시 면적 사이에서 규칙적인 불일치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의 계산 결과 만약 과거에 자전 속도가 더 빨랐다고 가정한다면 그 불일치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핼리의 계산은 그 후 몇 번이나 수정을 거듭하고 다시 해석되었다. 그 결과 식을 기록해놓음 으로써 과거 2-3000년 동안 1세기에 약 2밀리초(1밀리초는 1천분의 1초/옮긴이)라는 비율로 자전이 느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핼리 자신은 이 감속에 대해 적절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18세기 말엽에 이 현상을 설명한 사람은 다재 다능한 천재였던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였다. 그는 달을 끌어들여 10세기 말경 조수로 인한 마찰이 지구의 자전을 느리게 했다고 주장했다. 달이 지구의 바닷물을 자기쪽으로 끌어당기는 만조 때에는 해수면이 높아지며 지구가 자전을 하고 있기 때문에 높아진 해수면은 계속 달을 향하게 된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관찰하고 있는 우리들 눈에 만조는 지구 주위를 서쪽으로 천천히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 만조는 육지와 바다를 가로질러 연속적으로-육지 위의 수역 에서도 소규모 조석이 일어난다-이동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엄청난 마찰이 생긴다. 천문학자인 로버트 재스트로와 M. H. 톰프슨은 이렇게 쓰고 있다. "매일같이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다. 만약 이 에너지를 유용한 목적을 위해 회수할 수만 있다면, 전세계 전력 필요량의 수 배에 달하는 엄청난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에너지는 연안 해수를 불안스럽게 휘몰아치게 만들고, 지각의 암석을 약간 데우는 과정에서 사라져간다." 조수로 인한 마찰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지구의 장구한 역사에서는 주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 마찰이 회전하는 지구 에 브레이크로 작용했고, 한 세기에 약 2밀리초, 즉 1년에 5만분의 1초 라는 느린 비율로 지구의 자전을 느리게 만드는 것이다. 조수 마찰에 의한 제동은 서로 연관된 두 가지 흥미로운 효과를 일으 킨다. 하나는 1년의 일수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줄어든다는 것이다. 1년의 길이는 공식적인 세슘Cesium 원자 시계와 비교해볼 때 거의 일 정한 것처럼 보인다. 그 불변성은 경험, 즉 천문학적인 측정과 이론의 양면에서 모두 확인되었다. 다른 한편 우리는 달의 인력으로 생긴 조석의 작용이 지구의 자전을 느리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태양의 인력으로 생긴 조수의 작용이 지구 의 공전을 감속시킬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태양에 의한 밀, 썰물의 효과는 아주 미약하고, 우주 공간 속을 빠른 속도로 돌진하는 지구는 엄청난 관성 모멘트를 가지고 있기 때문아 10억 년당 1년의 길이가 겨우 3초의 비율로 늘어나는 데 그친다. 따라서 우리는 그 숫자는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구가 탄생한 시점에서 앞으로 약 50억 년 뒤 태양이 폭발해 지구가 소멸할 때까지(약 100억 년 동안) 느려지는 시간은 고작 30초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둘째, 지구가 감속됨에 따라 각운동량(운동하는 물체가 있을 때, 지 정된 점에 관한 그 물체 운동량의 모멘트/옮긴이)을 잃지만 달은-지구와 달로 이루어진 계의 각운동량 보존 법칙에 따라-지구가 잃은 만큼의 운동량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달은 지구를 공전하는 동안 지구와의 거 리를 차차 늘려가면서 이것을 실현시키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달은 지 구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10월의 맑은 날 밤, 달이 지평선 위로 막 얼굴을 내밀어 (하늘에 떠 있을 때보다) 크게 보일 때, 당신은 5억 5천만 년 전에 삼엽충이 보고 있던 달의 모습을 보고 있는 셈이다. 달이 점차 멀어진다는 생각을 처 음 제기한 사람은 찰스 다윈의 차남이자 천문학자였던 G. H. 다윈이 다. 그는 달이 태평양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생각했고, 그 돌발적 탄생 시기를 산출하는 데 현재 달의 후퇴 속도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 법을 사용했다(그 방법은 적절한 것이었지만, 오늘날에는 판구조론 덕분에 태평양이 항구적으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특정한 지질학적 시기에 형성 된 지형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요약하자면, 달에 의해 발생한 조수의 마찰이 오랜 시간에 걸쳐 두 가지 결과를 일으킨 것이다. 그것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갖느 현사으로 서, 1년의 일수가 줄어들며 지구 자전이 감속하는 것과, 지구와 달의 거리가 늘어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천문학자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러한 현상을 이론적으로 알고 있었 고, 지질학적 시간이라는 척도에서는 수 밀리초에 불과한 짧은 기간 동 안 실제로 그 현상을 측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구한 지질학적 시간에 걸쳐 그 효과를 측정하는 방법은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과거의 감속률을 기준으로 현재의 감속률을 추정하는 방법만으로는 불 충분할 것이다. 왜냐하면 제동을 거는 세기가 대륙과 해양의 지형이나 구성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제동 효과는 조석이 얕은 바다에 파급될 때 가장 커지고, 깊은 바다와 육지에 비교적 경미한 마찰을 일으키면서 이동할 때 가장 작아진다. 얕은 바다는 현재 지구의 지형에서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지만, 과거 여러 시대에는 수백 만 평방마일이라는 광대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한 시대에 일어난 큰 조석의 마찰은 그 밖의 시대, 특히 모든 대륙이 하나로 결합되어 하나의 초대륙 '판게아'를 이루고 있던 시대의 대단히 낮은 감속률과 대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시간이 흐르면서 자전이 느려지는 패턴은 천문학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지질학적인 문제인 셈이다. 나는 지질학이라는 내가 연구하는 분야가, 비록 모호하기는 하지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준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데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 그 정보란 몇 개의 화석 자료가 그 성장 패턴 속에 기록하고 있는 태곳적 천문학적 리듬이다. 거만한 수학자들이나 현대의 실험적인 지구물리학자들은 비천한 화석의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려 들지 않는 경 우가 많다. 그래도 지구의 자전을 전공하는 한 뛰어난 연구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고생물학이 지구물리학자들을 구원해줄 것 같다." 100년 이상 전부터 고생물학자들은 화석 단면에 규칙적인 간격을 가 진 성장선이 나타난다는 사실에 이따금씩 주의를 기울였다. 일부 학자 들은 그러한 성장선이 나무의 나이테와 마찬가지로 날, 달, 해 등의 천 문학적 주기를 나타낼지 모른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런 관찰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30년대에 마 팅 잉Ting ying Ma이라는 조금 비현실적일 정도로 공상적이지만 매우 흥미로운 중국의 고생물학자가 태곳적 적도가 어디에 위치했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화석 산호에 나타나는 나이테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온도가 거의 일정한 적도 부근에서 서식하는 산호에는 계절 적인 성장선이 나타나지 않지만, 위도가 높아지면 성장선이 분명히 나타 난다). 그러나 하나의 나이테에 수백 개나 포함되어 있는 미세한 층상 구조를 연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60년대 초에 코넬 대학의 고생물학자 존 웨스트 웰스가 이처럼 극 히 미세한 줄무늬가 각기 하루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나무의 경 우, 겨울의 느린 성장과 여름의 빠른 성장이 교대로 나타나 나이테가 형성되듯이, 산호에서는 밤의 느린 성장과 낮의 빠른 성장이 교차된다). 그는 거친(약 1년 동안의) 성장대와 미세한 성장선을 모두 가진 현생 산호를 조사해서, 하나의 성장대 속에서 평균 약 360개의 미세한 선을 셀 수 있었다. 그리고 미세한 선이 하루에 하나씩 만들어진다고 결론지었다. 그런 다음 웰스는 자신이 수집한 화석들 가운데서 보존 상태가 지극히 양호 해 미세한 성장선을 그대로 남기고 있다고 추정되는 산호 화석을 찾 았다. 극히 소수의 표본밖에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는 그것들을 이용해 고생물학의 역사상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연구 가운데 하나를 달성할 수 있었다. 즉 약 3억 7천만 년 전의 한 무리의 산호에는 하나의 거친 성장대 속에 평균 약 400개의 미세한 성장선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 산호에게 1년은 약 400일로 이루어지는 셈이다. 이렇게 해서 아주 오래된 천문학적 이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직접적인 지질학적 증거가 발견된 것이다. 그러나 웰스의 산호는 이 이야기의 절반, 즉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하 루의 길이가 늘어난다는 사실을 확인해준 것에 불과하다. 나머지 절반, 즉 달이 차츰 지구에서 멀어진다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일 성 장대와 월 성장대를 모두 가진 화석이 필요하다. 만약 먼 옛날에 달이 지구에 더 가까이 있었다면 달은 지금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지구 주위 를 공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사용하던 태음월은 29.53 태양일 인 현재의 태음월보다 적은 일수를 가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웰스가 1963년에 '산호의 성장과 지질 연대 측정법'이라는 유명한 논 문을 발표한 이래, 달의 공전 주기성에 관한 몇 가지 주장이 나타났다. 가장 최근에 프린스턴 대학의 고생물학자 피터 칸과 콜로라도 주립대학 의 물리학자 스티븐 폼피가 달의 역사를 이해하는 열쇠는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앵무조개 속에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앵무조개의 껍질은 '격벽septa'이라 불리는 규칙적인 칸막이로 나누 어진 여러 개의 작은 방으로 구분되어 있다. 미국의 생리학자이자 시인 이기도 한 올리버 웬델 홈즈는 이처럼 아름다운 형태와 구조에 매료되어 사람들에게 각자의 정신생활을 높이도록 권하기도 했다. 자신을 위해 더 넓은 저택을 지으라, 우리의 영혼이여 계절은 쏜살같이 흘러가고, 당신에게는 낮은 천정을 남기고 떠나간다! 지금까지 살았던 어떤 집보다도 높고 새로운 전당에서 더욱 큰 돔으로 하늘로부터 당신을 가리라 드디어 당신이 자유의 몸이 되는 날까지. 그리고 삶이라는 쉼없는 바다에 이미 비좁아진 너의 껍질을 띄어 보내라. 그런데 나는 앵무조개의 격벽이 홈스가 정신의 불멸성에 대한 명상에 사용한 것이나, 오닐이 희곡 제목에 무단으로 차용한 것보다 훨씬 큰 유용성을 가졌다고 이야기해야겠다. 칸과 폼피는 앵무조개 껍질의 외면 에 나타나는 미세한 성장선의 수를 세어 각각의 작은 방(격벽과 격벽 사 이의 공간)에 평균 약 30개의 미세한 선이 들어 있으며, 그 숫자는 서로 다른 앵무조개의 껍질에서, 또한 같은 껍질의 모든 방에서 거의 일정하 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태평양 일대의 심해에 사는 앵무조개는 태양의 주기에 따라 매일 부침하기 때문에-밤이 되면 해수면으로 떠오른다-칸과 폼피는 하나의 미세한 선이 하루를 기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격벽의 생성은 달 주기에 맞추어 이루어졌는지도 모른다. 사람을 포함한 상당수의 동물은 대개 생식과 결부된 월주기를 갖는다. 앵무조개류는 화석으로 흔하게 발견된다(현생 앵무조개는 무척 다양했 던 집단 가운데 유일하게 생존해 남은 종류다). 칸과 폼피는 4억 2천만 년 전에서 2천 5백만 년 전에 걸쳐 살았던 25개의 앵무조개를 조사해 하나의 작은 방 속에 들어 있는 가느다란 선의 숫자를 셌다. 그리고 현 생종에서는 선의 숫자가 약30개, 가장 새로운 화석에서는 약25개, 가 장 오래된 화석에서는 겨우 9개인 것으로 볼 때 연대가 오래될수록 규 칙적으로 그 숫자가 줄어든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만약 달이 4억 l천만년 전에-당시 하루는 21시간이었다-약 9태양일에 지구 주위를 공전했다면 달은 현재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었을 것이다. 칸과 폼피는 몇 가지 방정식을 푼 결과 이들 먼 옛날의 앵무조개류는 지구로부터 현재 거리의 2/5정도의 위치에 있는 달을 보고 있었다고 결론지었다(실제 그들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화석의 성장 리듬에 관한 많은 자료에 대해 내 자 신이 상반된 느낌을 받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연구 방법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여러 가지 문제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 성 장선들이 어떤 주기성을 나타내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미세한 선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선은 일반적으로 태 양일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지만 그 선들이 조수의 주기-지구의 자전과 달의 공전 모두를 포함하는 주기성-에 대한 반응 이라고 하자. 만약 달이 먼 옛날에는 지금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공전했다면, 태 곳적 조수의 주기는 현재와 같은 태양일에 가깝지 않았을 것이다(여기 에서 앵무조개의 가느다란 성장선이 조석의 영향보다 오히려 수직 방향의 밤 낮 주기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폼피의 주장의-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중요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그들은 세 가지 예외적인 경우를 들면서, 그 앵무조개들이 얕은 연안 수역에 살았으며, 따라서 조석을 기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설령 성장선이 태양의 주기에 대한 반응이라 하더라도, 먼 옛날의 1개월 또는 1년이 며칠이었는지를 어떻게 추정할 수 있을까? 단 순한 셈으로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다. 동물들이 하루를 건 너뛰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하루에 두 개의 성장선을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장선을 세어보면 실제 일수보다 적은 숫자가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현생종 산호에서는 1년에 365개의 성장선이 아니라 평균 360개의 성장선이 나타난다. 아주 흐린 날에는 낮이라고 해도 밤보다 크게 빠른 성장을 보이지 않으니 성장선이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한 웰스의 최초의 연구를 상기하라). 게다가 가장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면, 성장선이 천문학적 주기성 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단 말인가? 성장선이 날, 달, 해를 기록할 것이라고 가정하게 만드는 근거는 그것들의 기하학적 규칙 성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동물은 규칙적인 성장 속에 천문학적 주기를 성실하게 기록 하는 수동적인 기계가 아니다. 동물들은 그 밖에도 체내 시계를 가지고 있다. 그 시계는 날, 조석, 계절 등 천문학적 시간과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이는 물질 대사 리듬에 맞춰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거의 모든 동물들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차츰 성장률이 저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성장선은 일정한 속도로 계속해서 증가한다. 또한 앵무조개의 격벽과 격벽 사이의 거리는 일생 동안 항상 규칙적으로 넓어진다. 격벽은 정말 한 달에 하나씩 규칙적으 로 만들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나중에 만들어진 것은 더 오랜 시간을 걸쳐 만들어지는 것일까? 앵무조개는 보름달이 뜰 때마다 격벽을 하나씩 만든 것이 아니라, 연체 부위가 규칙적으로 늘어나는 작은 방의 용적을 가득 채울 때마다 격벽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주로 이런 이유때문에 나는 칸과 폼피의 결론에 매우 회의적인 입장이다. 시간적으로 잘 일치하지 않은 데이터가 많은 까닭은 이러한 여러 가 지 문제가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헌 속에는 불행하게도 아직까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남아 있다. 산호에 의해 흔적화된 달의 주기성을 대상으로 연구한 어느 한 실험은 3억 5천 만년 이전에는 한달의 길이가 칸과 폼피가 생각하는 일수의 세 배에 달 한다는 사실을 시사할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두 가지 이유로 이러한 시도에 만족하며 아 울러 낙관하고 있다. 첫째, 내용적으로는 전혀 일치하지 않아도 모든 연구가 동일한 기본 패턴-1년당 일수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감소하는 -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모두가 무비판적으로 열광하던 최 초의 시기가 지나자 고생물학자들은 성장선이 정말로 무엇을 나타내는 지 알아내기 위해 필수적이지만 무척 힘든 작업-조절된 조건하에서 현생 동물을 대상으로 실험적 연구를 하는 것-에 착수하고 있다. 이제 곧 화석 자료에서 나타나는 불일치를 해결할 수 있는 기준을 얻게 될 것이다. 지질학과 관련하여 이처럼 매혹적이고 흥미진진한 문제들이 뒤얽혀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점들을 생각해보자. 만 약 식의 데이터에서 추정되는 최근 달의 후퇴를 과거로 거슬러 올라 가 연장해보면, 달은 약 10억 년 전에 로슈의 한계(Roche ilmit, 어떤 천체의 중심과 인접한 다른 천체가 접근할 수 있는 한계 거리/옮긴이)에 부닥치게 된다. 로슈의 한계 내에는 큰 물체가 존재할 수 없다. 만약 거대한 물체가 외부에서 그 속으로 들어온다면 그 결과는 분명치 않지만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그렇게 되면 거대한 조석이 지구 위를 휩쓸고 달 표면은 융해될 것이다. 그러나 아폴로 우주선이 채집해온 달 표면 암석을 조사해본 결과 과거에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그리고 현재의 데이터를 기초로 추정되는 후퇴 속도는-1년에 5.8센티미터-칸과 폼피가 주장한 평균 속도보다-1년에 94.5센티미터-훨씬 작다). 따라서 달은 그 표면이 40억 년 이상 전에 굳어진 이래 10억년 전에도, 그 후에도 지구에 그 정도로 가깝게 접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달의 후퇴 속도는 지구 역사의 초기에는 훨씬 느렸다가 갑자기 변화해서 급격하게 뒤로 물러났거나, 아니면 지구가 형성된 훨씬 뒤에 달이 현재의 궤도에 들어왔을 것 같다. 어쨌든 과거에 달은 지구와 훨씬 더 가까웠다. 그리고 이렇듯 달라진 상호 관계는 두 천체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지구의 경우, 펀디Fundy 만의 위험한 조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난 조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초기의 퇴적암 속에서 그러한 징후를 조심스럽게 찾아볼 수 있다. 달의 경우에는 칸과 폼피가 흥미로운 주장 을 제기하고 있다. 먼 옛날 달이 지구와 더 가까웠을 때 지구의 인력이 지금보다 더 강했다는 사실이 오늘날 달 표면에 있는 바다가 우리들이 볼 수 있는 쪽에 집중되어 있는 이유가 되거나(달의 바다는 액체 상태 마 그마의 거대한 분출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달의 질량 중심이 지구 가까 운 쪽에 편중되어 있다는 사실과 연관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지질학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가운데 시간의 장대함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한 우리의 결론을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도 격지 않는다. 우리는 아주 쉽게 지구의 나이가 45 억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적으로 아는 것과 그 실체를 인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 이다. 숫자 그 자체로 볼 때 45억이라는 수는 그리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따라서 지구가 얼마나 오랫동안 존재해왔는지, 그리고 인류가 진화해온 시간이-우리들의 일생이 우주의 연령에 비한다면 순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얼마나 짧은지를 강조하기 위해 은유나 상징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다. 지구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 자주 쓰이는 은유는 인류 문명이 최후의 수 초에 해당하는 24시간짜리 시계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는 인간 생활의 척도에서 볼 때 전혀 무의미한 미세한 힘이 갖는 매력을 더 강조하고 싶다. 조금 전에 우리는 또 1년을 보냈고, 지구의 자전은 5만분의 1초만큼 더 느려졌다. 그래서 도대체 어쨌다는 것인가? 지금까 지 당신이 읽은 내용이 그 답이다. 옮긴이후기 자연은 뛰어난 땜장이이다. 판다의 엄지손가락은 사람처럼 다른 손가락들과 마주 볼 수 있다는 놀라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판다의 손가락을 자세히 살펴보면 더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의 숫자가 네 개가 아니라 다섯 개인 것이다. 그렇다면 판다의 엄지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 "판다의 실제 엄지손가락은 다른 역할에 할당되어 있어서 별도의 기능 을 갖기에는 지나치게 특수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물건을 붙잡을 수 있 도록 서로 마주 볼 수 있는 손가락으로 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판다는 손에 있는 다른 부분을 활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손목뼈를 확장 시켜 엄지로 이용한다는 조금 꼴사납기는 하지만 일단 도움이 되는 해결 방법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판다의 엄지손가락은 "뛰어난 신발명이 아닌 임시 변통의 처방"이었던 셈이다. 다윈의 난에 대한 연구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자연에서 우리는 이런 식의 임시 변통적 장치들을 무수히 찾아볼 수 있다. 공학자가 생각해내 는 가장 뛰어난 고안물도 역사의 힘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판다의 엄지는 자연이 "뛰어난 땜장이이기는 하지만 성스러운 공장 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일러준다. 이 책 '판다의 엄지'의 저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판다의 엄지라는 불완전하고 기이한 사례를 통해 진화의 진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굴드는 얼핏 보면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 현상을 제기하면서 우리를 중요한 질문으로 이끄는 놀라운 재주를 지녔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에 빨려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점장이식 임시 변통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데? 이것을 굳이 임시 변통이라고 부를 까닭 이있을까?"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는 완전한 원래의 설계 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필자가 우리에게 하려고 했던 말, "진화란 어떤 목적을 향해 한걸음 한 걸음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완전한 무엇이 아니다"라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진화를 바라보는 인간들의 관점, 즉 진화론에 대해서 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굴드는 현대의 종합설이 진화를 어떤 틀 속에 가두어놓는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국지적인 개체군 속에서 일어나 는 점진적이고 적응적인 변화'라는 다윈주의의 기본 관점에 귀착시키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굴드는 자연이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며 진화는 여러 가지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진화란 누적적이고 점진적이라는 생각 또한 마찬가지이다. 필자와 엘드리지는 진화의 "단속평형punctuated equilibrium" 모형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단속평형설이란 "대부분의 계통이 각각의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은 거의 변화하지 않지만, 이따금 급격하게 일어나는 종분화라는 사건에 의해 그 평형이 단속되는 것, 그리고 진화란 이러한 단속의 전개와 생존이 뒤섞여 교차하면서 진행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논쟁은 아직까지 확실한 결말이 나지 않고 있지만, 최근 복잡성 과학complexity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컴퓨터 모형으로 생물의 진화 과정을 시뮬레이트(모의 실험)한 결과는 단속평형설이 사실에 가깝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이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는 이유는 필자가 진화나 진화론에 대 해 새로운 관점이나 풍부한 사고를 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우리 사회, 우리 삶의 여러 굽이굽이에 고여 있고 굳어 있는 수많은 것들을 판다의 엄지로 흔들고 휘저으면서 그 속에서 드러나는 숱한 문제점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인종주의를 뒷받침했던 두뇌 계측학, 그리고 IQ검사를 비롯한 숱한 그 현대판들. 객관적이라고 믿어지는 과학에 들씌워져 있는 숱한 인간 들의 감정과 희망, 그리고 이해 관계들. '멍청한 공룡'이라는 인간들의 편견이 보여주는 인간중심주의. 사람이나 동물의 몸이란 유전자를 나르는 용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로 비약한 도킨스의 환원주의와 유전자 결정론... 더욱이 그는 오늘날 복잡성 과학이나 체계 이론의 접근 방식을 자신의 연구 분야에 훌륭하게 수용시키고 있다. 그는 '역사적 과학'이라는 접근 방식을 통해 "생물은 유전자들의 융합 이상의 무엇이며, 생물은 역사라는 중대한 요소를 가지고 있고, 그 몸의 여러 부분은 복잡한 상호 작용을 한다"는 관점으로 환원론. 결정론, 원자 론을 단호히 배격한다. 역사는 수많은 것들을 포함한다. 역사는 판다의 엄지를 만들어내고, 완벽한 설계처럼 보이는 것을 순식간에 멸종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객관적인 것인 양 생각하는 과학자체도 역사의 산물 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저명한 학자이자 탁월한 과학 저술가이다. 그는 진화생물학, 고생물학, 동물행동학 등의 전문 분야에 한정되지 않고 과 학사, 과학사회학 등의 폭넓은 안목으로 과학의 중요한 주제들에 뛰어 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섣부른 주장을 펴기보다 독자들에게 풍 부한 사실을 제시하고, 여러 가지 견해를 공평하게 제기해 독자들이 스 스로 판단을 내리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보기 드문 재주를 지닌 인물이다. 그런 면에서 굴드는 과학 글쓰기에서 한 지평을 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문장은 숱한 은유로 가득 차 있고,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간직하고 있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가능한 한 그 의미들을 살려내려 노력했지만, 얼마나 필자의 뜻을 올바로 전달했 는지 무척 의심스럽다. 제대로 의미가 파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 것은 전적으로 옮긴이의 책임임을 밝혀 둔다. 좋은 책을 낼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세종서적과 까다로운 옮긴이의 주문에도 불평하지 않고 여 러 차례 원고를 다듬어준 편집부원들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