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비밀을 밝혀주는 차골 네 살 무렵 나의 장래 소망은 쓰레기를 수거하는 청소부가 되는 것이 었다. 나는 깡통들이 딸그랑거리는 소리와 컴프레서가 돌아가는 소리를 무척 좋아했다. 게다가 나는 뉴욕 주의 모든 쓰레기를 한 대의 대형 트 럭에 몰아넣을 수 있다는 데 매우 매혹되었다. 얼마 후 다섯 살이 되었 을 때, 아버지가 나를 자연사 박물관으로 데리고 가 티라노사우루스를 구경시켜준 적이 있었다. 그 화석 동물을 쳐다보고 있는데 한 남자가 큰 소리를 내며 재채기를 했다. 깜짝 놀라 간이 콩알만해졌던 나는 나도 모르게 '세마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신앙 고백/옮긴이)'을 읊조릴 뻔했다. 그러나 그 동물의 거대 한 뼈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그 자세로 늠름하게 서 있었다. 그곳을 떠 나면서 나는 이 다음에 크면 반드시 고생물 학자가 되리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벌써 먼 옛날이 된 1940년대 말엽에는 어린 소년이 고생물학에 흥미를 갖게 할 만한 것들이 별로 없었다. 내가 기억해낼 수 있는 것들로는 '판 타지아(디즈니의 1940년작 만화 영화로 공룡 멸종에 대한 이야기를 다 루고 있다/옮긴이)' '앨리 웁(1933년작 미국 만화로 선사 시대와 현대를 오가는 혈거인 이야기/옮긴이)' 그리고 박물관 매점에 진열돼 있던 금속 으로 만든 모조 골동품 조각이 고작이었다. 그 가짜 골동품은 내가 사기에는 너무 비싼 데다가 별로 사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조잡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책 속에서 무엇 보다 강한 인상을 받았다. 땅위에서는 체중을 지탱할 수 없기 때문에 소택지의 물에 잠겨 일생을 지냈다는 브론토사우루스, 싸울 때는 잔인 하지만 움직임이 서투르고 미련스러웠다는 티라노사우루스 등이 내 관심을 끌었다. 한마디로 이들은 모두 느리고 육중한 걸음걸이로 돌아다니며 마치 콩 처럼 작은 뇌를 가진 냉혈 동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불완전함을 말해주는 궁극적인 증거로 백악기의 대멸종기에 모두 전멸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사고 방식 속에 있는 한 가지 요소가 늘 나를 괴롭혀 왔다. 이러한 결함을 가진 공룡들은 그토록 훌륭하게, 또한 그처럼 오랫 동안 번성한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포유류의 선조였던 수궁류에 속하는 파충류는 공룡이 번성하기 전에 벌써 여럿으로 분화했고 수도 늘어나 있었다. 그렇다면 공룡이 아니라 수궁류가 지구의 지배권을 물려받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포유류 자체는 공룡과 거의 같은 시기에 진화해서, 소형이면서 특징적인 동물로 약 1억년 동안 생존했다. 공룡이 그처럼 느려빠지고 우둔하고 비효 율적이었다면 포유류가 곧바로 확산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1970년대에 여러 고생물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한 놀라운 해답을 제기 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공룡은 민첩하고 활발했으며 온혈 동물이 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공룡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공룡의 큰 계통의 한 가지가 그 밖의 가지들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 남아 있지 않은가? 우리는 그것을 조류라고 부른다. 일찍이 나는 이 에세이에서 온혈 공룡에 대한 이야기는 쓰지 않을 작 정이었다. 이 새로운 복음은 텔리비전, 신문, 잡지, 그 밖의 일반 대중 들을 대상으로 씌어진 서적 등에서 충분히 확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 글을 읽는 독자층인 지적인 일반인들은 벌써 귀가 아플 정도로 그 이야 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몇 가지 이유로 당초의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끝없이 계속될 것 같은 논쟁 속에서 나는 문제의 핵심이 되는 두 가지 주장 -공룡이 온혈 동물이라는 주장과 공룡이 조류의 선조였다는 주장-의 관계에 대해 널리 확산된 오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나는 공룡과 조류의 관계에 대한 오해가 잘못된 이유로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그에 비해 조류의 선조와 공룡의 온혈성을 깔끔하게 묶어줄 만한 올바른 이유는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결합이 가장 과격한-공룡을 파충류에서 떼어내어 전통적인 조류의 분류 항목으로 지위를 내리고, 공룡류와 조류를 하나로 통합시킨 새로운 강을 만들어서 척추 동물의 분류 체계를 재편성하자는-주장을 뒷받침해준다. 이렇게 되면 육생 척추 동물은 두 냉혈성 집단인 양서강과 파충강, 그리고 두 개의 온혈성 집단인 공룡강과 포유강이라는 네 개의 강으로 분리된다. 나는 이 새로운 분류 방식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아직 입장을 결정하지는 못했지만, 그 주장의 독자성과 매력은 존중하고 싶다. 조류의 선조가 공룡이라는 주장은 처음 들었을 때만큼 충격적인 것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은 계통수에서 하나의 가지 위치를 조금 바꾸는 정 도일 뿐이다. 최초의 새였던 시조새와 코엘루로사우루스라 불리는 소형 공룡 가운데 한 집단과의 유연 관계가 지극히 가깝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토마스 헨리 헉슬리와 19세기 대부분의 고생물학자들은 공룡과 조류가 직계의 계통 관계를 가지며 조류의 선조가 공룡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금세기에 들어 헉슬리의 관점은 겉보기에는 타당한 어떤 단순 한 이유로 인기를 잃었다. 진화 과정에서 한번 완전히 상실된 몸의 복 잡한 구조가 다시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진화에서 어떤 방향을 지시하는 신비스러운 힘에 호소하려는 것이 아니 라 단지 수학적인 확률에 근거한 사실일 뿐이다. 몸의 복잡한 부분은 생물체의 발생 기구 전체와 복잡한 방식으로 상호 작용하는 다수의 유전자에 의해 만들어진다. 만약 이러한 체계가 진화의 결과로 상실된다면, 다시 조금씩 형성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헉슬 리의 주장이 배격된 것은 쇄골이라 불리는 단 하나의 뼈 때문이었다. 시조새를 포함해서 조류에서는 좌우 양측의 쇄골이 중앙에서 결합되어 차골(V자형의 뼈)을 이룬다. 콜로넬 샌더즈(캔터키 프라이드 치킨사의 창업주, 이 상점 앞에 서 있는 흰 머리에 흰 옷을 입은 인물이 바로 콜로 넬 샌더즈이다/옮긴이)의 단골 손님들에게는 '위시본wishbone'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실제로 공룡이 모두 쇄골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들이 조류의 직접적인 선조일 수는 없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완벽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정적인 논거가 후세에 이루어진 발견에 의해 무효가 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헉슬리의 반대자들도 시조새와 코엘루로사우루스류의 공룡 사 이에 나타나는 구조상의 유사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조 류와 공룡의 유연 관계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것을 골랐다. 즉 조류와 파충류가 모두 아직 쇄골을 가지고 있는 파충류의 한 집단에서 갈라져 나왔고, 그 후 한쪽 계통(공룡)에서는 쇄골이 사라지고, 다른 한 쪽 계통(조류)에서는 그것이 강화되어 서로 결합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다. 공통의 선조로 가장 유력한 후보는 트라이아스기의 조생치를 가진 파충류(파충류의 선조로서 이가 턱뼈의 홈 또는 구멍에 삽입되어 있는 특징을 가짐/옮긴이)에 속하는 의사악어류pseudosuchians라 불리는 군 의 파충류였다. 대다수 사람들은 조류가 지금까지 살아 남은 공룡의 한 계통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러한 충격적인 주장은 지금까지 인정되어온 척추 동물의 유연 관계에 대한 관점을 혼란시킬 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 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고생물학자라면 누구나 공룡과 조류가 가 까운 관계라는 주장을 옹호한다. 근년 들어 이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논쟁의 핵심은 계통 발생의 분기 점에서 이루어진 약간의 이동에 대한 것이다. 즉 조류가 의사악어류에서 분리된 후손인지, 아니면 의사악어류의 자손이었던 코엘루로사우루스 공룡으로부터 분리된 것인지를 둘러싼 문제이다. 가령 조류가 의사악 어류의 단계에서 분기한 것이라면, 그들은 공룡류의 자손이라고 말할 수 없다(당시 공룡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또한 만약 조류가 코엘루로사우루스로부터 진화했다면, 그들은 공룡의 줄기에서 살아 남은 유일한 가지가 되는 셈이다. 의사악어류와 원시 공룡은 무척 닮았기 때문에 실제 분기점은 조류 생물학에서 그다지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 벌새가 스테고사우루스나 트리케라톱스에서 진화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식으로 설명을 계속하면 많은 독자들은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곧 (다른 이유로)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주 장을 펼 작정이다. 나는 계통수의 이런 작은 가지의 문제가 실제로 전 문적인 고생물학자들에게는 가장 큰 관심사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 다. 우리는 무엇이 무엇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는가에 대해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생명계의 역사를 복 원하는 것이 우리들의 임무이고, 우리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가 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착심과 같은 정도로 자신들이 좋아하는 생물 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약 자신의 사촌 형제 가 실제로는 자신의 부친이라는 사실을 안다면-설령 그 발견으로 자 신의 생물학적 형성 과정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크게 걱정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예일 대학의 고생물학자인 존 오스트롬이 '공룡설'을 부활시켰다. 그는 시조새의 모든 표본을-지금까지 발견된 다섯 개의 표본 모두-재조사했다. 우선 공룡을 조류의 선조라고 보는 입장에 대한 주된 반대론이 반박되었다. 두 종류의 코엘루로사우루스 공룡이 쇄골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따라서 더 이상 이들이 조류 선조의 후보에서 제외되는 일은 없게 되었다. 두 번째로 오스트롬은 시조새와 코엘루로사우 루스 사이에 구조상 현저한 유사성이 있음을 매우 자세히 입증하고 있다. 시조새와 코엘루로사우루스의 공통적인 특성 대부분은 의사악어류에서는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그 특성들은 각기 따로 두 번 발생했거나(의사악어 류가 조류와 공룡 모두의 선조인 경우), 아니면 한 번 발생해서 조류가 선조인 공룡으로부터 그러한 특성을 계승했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같은 특성이 따로따로 발생하는 경우는 진화 과정에서 흔히 일어나는 특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현상을 병행 진화parallelism, 또는 수렴 convergence이라고 부른다. 두 군의 생물들이 같은 생활 양식을 공유 하고 있을 때, 우리는 소수의, 비교적 단순하고 명백히 적응적인 구조 를 향해 수렴이 일어나리라고 예상한다. 남아메리카에 생존했던, 검치를 가진 유대목 육식 동물과 태반을 가진 검치 '호랑이'를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28장을 참조하라). 그러나 세부적인 구조에서 적응적 필연성이 명백히 드러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부분과 부분이 서로 대응성을 갖고 있는 경우, 이들 두 집단은 공통의 선조로부터 진화했기 때문에 그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결론내리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오스트롬의 공룡설 부활에 찬성한다. 공룡을 조류의 선조로 보는 시각에 대한 유일한 큰 장애는 일부 코엘루로사우루스 공룡에서 쇄 골이 발견되면서 이미 제거되었다. 조류는 공룡에서 진화했다. 그렇다고 과연 그 말이, 비속하고 지루한 표현을 인용하자면, 공룡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일까? 좀더 실제적인 질문을 하자면, 공룡과 살아 남은 그 유일한 대표격인 조류가 같은 군 으로 분류되는 것일까? 미국의 고생물학자 R. T 배커와 P. M 골턴이 조류와 공룡을 함께 수용하는 공룡강이라는 척추 동물의 새로운 강을 제창했을 때, 그들은 바로 이러한 관점을 채택한 것이다. 따라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어떻게 내리는가에 실제로는 분류학상의 기본적인 사고 방식이 얽혀 있는 것이다(이처럼 뜨거운 주제와 관련해서 전문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어 미안하지만, 분류학적 형식에 관한 문제와 신체 구조와 생리에 관한 생물학적 주장을 분명히 구별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중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분류학자들 가운데는 오직 계통 분기의 패턴에 의거해서만 생물을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시 말해 어떤 선조 계통이 두 계통으로 갈라져 나와 각각의 계통이 자손 계통을 갖지 않는다면 (공룡과 조류와 같이), 그 경우 이들 두 계통은 형식적인 분류에서 둘 중 어느 한쪽이, 이들 두 군과는 다른 공통의 선조를 갖는 계통과 같은 강으로 통합되기-가령 공룡과 다른 파충류가 하나로 통합되는 것처럼 -전에 근연 관계가 더 가까운 동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분류학에서 이야기하는 이른바 분기론cladistc의 입장에서는 조류가 파충류가 아닌 것처럼 공룡 역시 파충류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이 규칙에 따르면, 조류가 파충류가 아니면 공룡과 조류는 하나의 새로운 강이 되는 것이다. 다른 분류학자들은, 계통의 분기점은 분류를 하기 위한 유일한 기준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구조상의 적응적인 방산adaptive divergence의 정도를 분기점과 같은 비중으로 평가한다. 분기론에 따르면, 소와 폐어는 폐어와 연어보다도 가까운 유연 관계를 갖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육기아강(sarcopterygian, 폐어를 포함하는 집단)의 어류가 아주 오랜 옛날에 조기아강(actinopterygian, 연어를 포함하는 보통의 경골 어류 집단)에서 분리된 후에 육생 척추 동물의 선조가 조기아강 에서 분기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전통 이론의 분류 방법에서는 분기 패턴과 생물학적 구조를 함께 고려하기 때문에 폐어와 연어를 모두 어류로 분류한다. 그것은 양자 가 모두 수생 척추 동물의 특징을 공통적으로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소 는 양서류에서 파충류를 거쳐 포유류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진화적 변화를 겪은 데 비해, 폐어는 정체 상태를 유지해 2억 5천만 년 전과 별다른 차이 가 없는 외관들 가지고 있다. 언젠가 유명한 철학자가 말했듯이 물고기는 역시 물고기인 것이다. 전통적인 분류 방식에서는 분기한 후에 나타나는 진화 속도의 차이를 생물을 분류하는 데 사용한다. 때로는 어떤 집단이 큰 방산을 나타내기 때문에 독립된 지위가 부여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전통적인 방식에 서 포유류는 독립된 한 집단이 되고, 폐어는 그 밖의 어류와 함께 분류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람은 별개의 한 집단이 되고, 침팬지와 오랑 우탄은 함께 분류된다(인간과 침팬지의 분기가 침팬지와 오랑우탄이 분리 된 것보다 최근에 분기점을 공유하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조류가 공룡으로부터 분기했다 하더라도, 조류 역시 독립된 한 집단이 되며 공룡은 파충류에 포함된다. 만약 조류가 공룡으로부터 분리된 후에 그 엄청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해부학적 특징을 진화시킨 것이라면, 또한 공룡이 기본적인 파충류의 체제로부터 멀리 일탈하지 않았 다면, 조류는 독립적으로 분류되고 공룡류는 그 계통 분기의 역사와 무관 하게 파충류와 함께 분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야 우리는 마침내 원래의 핵심적인 문제로 돌아오게 되었 다. 그리고 지금까지 언급한 분류학의 전문적인 주제들을 공룡이 온혈 이었는가라는 주제와 하나로 묶게 되었다. 조류는 그 기본적인 특징을 공룡으로부터 직접 계승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현대의 거의 모든 조 류가 대부분의 공룡들과는 전혀 다른 생활 양식(날기와 작은 크기)을 가 지고 있는데도 우리는 배커와 골톤이 주장한 공룡강이라는 분류를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일까? 결국 박쥐도 고래도 아르마딜로(남미산 야행성 포 유 동물/옮긴이)도 모두 포유류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조류의 경우, 하늘을 날기 위한 적응적인 기반을 제공하는 두 가지 큰 특성을 생각해보자. 몸을 들어올리고 추진력을 주는 깃털, 그리고 비행이라는 격렬한 활동에 필요한 높은 물질 대사를 항상 유지하는 데 필요한 온혈성이 그것이다. 시조새는 이들 특성을 선조인 공룡으로부터 계승할 수 있었을까? R. T 배커는 공룡이 온혈이었다고 주장하는 가장 수준 높은 보고서 를 제출했다. 그의 논쟁적인 주장은 크게 4개의 근거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 1. 뼈의 구조에 관하여 냉혈 동물은 체온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할 수 없다. 냉혈 동물의 체온은 외부 온도에 따라 변동한다. 따라서 계절이 뚜렷한 지역, 즉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이 있는 지역에 사는 냉혈 동물은 조밀하게 이루어진 뼈의 맨 바깥쪽 표층에 동심원 모양의 성장선을-여름 의 빠른 성장과 겨울의 느린 성장이 번갈아 나타나는 층상 구조-갖고 있다(물론 나무의 나이테도 이와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반면 온혈 동물은 내부 체온이 계절 변화와 상관없이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기 때문에 이러한 층상 구조가 나타나지 않는다. 계절 변화가 뚜렷한 지역에서 발견된 공룡 화석의 뼈에서도 이러한 성장선이 관찰되지 않는다. 2. 지리적 분포에 관하여 몸집이 큰 냉혈 동물은 겨울의 짧은 낮에 체 온을 충분히 올릴 수 없고, 동면을 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찾기에는 몸집이 너무 크기 때문에, 적도에서 멀리 떨어진 고위도 지방에서는 살지 않았다. 그런데 일부 대형 공룡들은 극북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전혀 햇볕 이 닿지 않는 긴 겨울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되었다. 3. 화석 생태학에 관하여 온혈 육식 동물은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같은 크기의 냉혈 육식 동물보다 먹이를 많이 섭취해야 한다. 따라서 포식자와 피식자의 몸 크기가 거의 같은 경우 냉혈 동물 사회에서는 온혈 동물 사회보다 포식자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많다(한 마리당 먹이의 수가 훨씬 작기 때문에). 피식자에 대한 포식자의 비율은 냉혈 동물 사회에서는 40퍼센트까지 이르는 데 비해 온혈 동물 사회에서는 3퍼센트를 넘지 않는 다. 공룡의 동물상에는 포식자의 수가 적으며, 포식자의 상대적 크기는 오늘날의 온혈 동물 사회에서 예상되는 크기와 같다. 4. 공룡의 몸 구조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공룡류는 느린 속도로 움직이 는 대형 동물로 묘사되지만, 최근 이루어지고 있는 복원 작업은 (25장 참조) 대부분의 대형 공룡들이 그 운동 기관의 구조와 사지의 비율에서 주행성 포유류와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의 조류가 달고 다니는 깃털은 공룡에게서 물려받은 것 일까? 브론토사우루스의 동류 가운데 공작처럼 깃털이 뒤덮인 종류가 없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왜 시조새는 깃털로 덮인 것일까? 비행을 위 해서라면 깃털은 조류에게만 속하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하늘을 나는 공룡을 상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하늘을 날았던 익룡목 동물들은 다 른 집단에 속한다). 그러나 오스트롬의 해부학적 복원은 시조새가 하늘 을 날 수 있었음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날개가 돋아 나온 전완(사람의 팔뚝에 해당하는 부분/옮긴이)은 견대에 연결되어 있어 날개 치기를 하기에는 전혀 적절치 않은 구조였다. 오스 트롬은 깃털이 두 가지 기능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즉 몸집이 작은 온혈 동물에서는 열이 발산되는 것을 막아주었고, 날아다니는 곤충이나 그 밖의 먹이를 낚아챌 때 먹이를 완전히 품는 듯이 잡을 수 있도록 일종의 바구 니와 같은 기능을 해준다는 것이다. 시조새는 몸집이 작은 동물이었다. 체중은 1파운드 이하였고 서 있을 때의 신장은 가장 작은 공룡보다 1피트나 작았다. 몸집이 작은 동물은 부피에 대한 표면적의 비율이 크다(29, 30장을 보라). 열은 전신에서 발 생해서 그 표면에서 방출된다. 몸집이 작은 온혈 동물은 열이 상대적으 로 넓은 몸 표면에서 계속 발산되기 때문에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 특별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뒤쥐는 체모라 난 모피로 덮여 단열되지만, 체내에서 계속 열을 발생 시키기 위해서는 항상 먹이를 먹어대야 한다. 그에 비해 몸집이 큰 동물은 부피에 대한 표면적의 비율이 작기 때문에 단열물을 갖지 않고도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공룡 또는 그 자손들이 소형화함에 따라 온혈성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단열물을 필요로 하게 되었을 것 이다. 따라서 깃털은 몸집이 작은 공룡이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적응 수단으로 기능했을지도 모른다. 배커는 작은 코엘루로 사우루스의 대부분이 깃털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른다고 주장했다(깃털의 모습이 보존되어 있는 화석은 좀처럼 없고, 시조새는 깃털의 흔적이 정교하게 남아 있는 희귀한 예에 속한다). 처음에 단열물로 발달한 깃털은 곧 비행에서 다른 기능을 갖게 되었 다. 사실 깃털이 비행 외에 아무런 효용을 갖지 않는다고 한다면, 과연 어떻게 깃털이 계속 진화하게 된 사실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조류의 선조는 분명 하늘을 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깃털이 한꺼번에 완 전한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자연 선택이 깃털이 필 요없던 선조 동물들을 통해 몇 차례의 중간 단계를 거치면서 하나의 적 응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단열이라는 최초의 기능을 가정하면, 온혈 공룡이 작은 크기라는 생태학적 유리함을 획득할 수 있 는 장치로서의 깃털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조류가 코엘루로사우루스 공룡의 자손이라는 오스트롬의 주장은 공룡 이 온혈성이라는 사실이나 깃털이 원래 단열재로 기능했다는 사실 토 대로 삼지 않는다. 대신 그의 주장은 비교해부학의 고전적인 방법, 즉 뼈와 뼈 사이의 부분 대 부분에서 나타나는 유사성과, 그러한 현저한 유사성이 수렴이 아니라 공통의 선조를 반영하는 것임에 틀림없다는 사고 방식을 기초로 한다. 나는 공룡의 온혈성을 둘러싼 최근의 논쟁이 어떻게 결론지어지더라도 오스트롬의 주장은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반 대중은 조류가 깃털과 온혈성이라는 최초의 적응을 공룡 류로부터 직접 계승한 경우에만 조류가 공룡에서 유래했다는 이론이 설 득력 있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만약 조류가 갈라져 나온 뒤에 이러한 적응을 발달시킨 것이라면 공룡은 그 생리적 특징에서 훌륭한 파충류이 며, 따라서 그들은 거북, 도마뱀 그리고 그 밖의 동류와 함께 파충강으 로 분류되어야 하는 것이다(내 분류학적 관점에 따르면, 나는 분기론보다 전통 이론에게 더 가깝다). 그렇지만 만약 공룡이 정말 온혈 동물이었다면, 또한 만약 깃털이 작은 몸으로 온혈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었다면 조류가 번성할 수 있었던 기반은 공룡류로부터 계승된 셈이 된다. 그리고 만약 공룡이 그 생리적 특징에서 다른 파충류보다 조류에 더 가까웠다면, 조류와 공룡을 정식으로 '공룡강'이라는 새로운 강으로서 분류해야 한다는 고전적인 해부학적 관점 을-계통에 관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지지하는 근거를 얻고 있는 셈이다. 배커와 골톤은 이렇게 쓰고 있다. "조류의 확산은 공룡이 지닌 기본 적인 생리와 구조를 공중 생활에 이용한 것이다. 그것은 박쥐의 확산이 포유류가 지닌 기본적이고 원시적인 생리를 공중 생활에 이용한 것과 같다. 우리는 단지 하늘을 난다는 이유만으로 박쥐를 독립된 강으로 분 류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조류가 하늘을 난다거나, 새의 종이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로 그들을 공룡으로부터 분리된 독자적인 강으로 분류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달 하순에 당신이 차골을 뜯을 때가 있거든 꼭 티라노사우루스를 생각하라(11월 마지막 주 목요일의 추수감사절때 칠면조 고기를 먹을 때를 의미하는 것임/옮긴이). 그리고 아주 먼 옛날 모든 공룡의 대표였고, 우리에게 공포의 대상인 티라노사우루스에게 감사드려라. 제27장 자연계의 교묘한 얽힘 자연의 사슬 가운데 열 번째 고리를 끊든 천 번째 고리를 끊든 곧 자연의 사슬은 파괴되고 만다. 알렉산더 포프, '인간에 대한 에세이' (1733년) 포프의 이 2행 문구는 조금 과장된 것이기는 하지만 생태계에서 살아 가는 생물들 사이에 상호 관계가 어떠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지 잘 표현 해내고 있다. 그러나 생태계란 하나의 종이 멸종하였다고 도미노 현상 처럼 연쇄적으로 작용할 만큼 불안정하게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멸종은 모든 생물 종의 공통된 숙명이기 때문이다. 어떤 하나의 생물 종이 [멸종하면서] 그들의 생태계를 모조리 가지고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종들은 흔히 롱펠로가 묘사한 "어두운 밤에 서로를 지나치는 배들"처럼 서로에 대해 크게 의존하고 있다. 뉴욕시는 개가 없더라도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바퀴벌레가 없는 뉴욕 생활이 가능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한번 시험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상호 의존하는 짧은 연쇄는 어디서든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서로 다 른 종에 속하는 생물과 생물 사이에 갖는 기묘한 결합은 일반인들을 대 상으로 박물학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좋은 소재가 되어왔다. 하 나의 조류와 균류가 지의류를 형성하고, 광합성을 하는 미생물이 초를 형성하는 산호의 조직 속에 살고 있다. 자연 선택은 기회주의를 그 본질로 삼는다. 다시 말해 생물을 그때 그때 환경에 부합하도록 만들기는 하지만 결코 미래를 예상할 수는 없다. 한 생물 종이 다른 종에 대해 끊을 수 없는 의존 관계를 진화시키는 일은 종종 있다. 변덕스러운 세계에서는 이렇듯 유용한 결합이 그 생물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내 박사학위 논문은 버뮤다 제도의 화석 달팽이를 주제로 한 것이었 다. 해안을 따라 걷노라면 커다란 소라게가-이 소라게는 커다란 집게 발을 가지고 있다-어울리지 않게 갈고둥의 작은 껍질에 마치 쑤셔 박 히듯이 들어가 있는 모습을 자주 발견한다. 왜 소라게는 불편한 숙소에서 좀더 편안한 하숙으로 옮기지 않는 걸까? 나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런 소라게를 능가하는 것은 빈번하게 부동산 시장을 출입하는 오늘날의 기업 경영자들뿐일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한 마리의 소라게가 적당한 크기의 숙박 시설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숙박 시설은 서인도 제도 일대에서 주식 으로 쓰이는 '웰크(식용으로 쓰이는 쇠고둥의 일종/옮긴이)'라 불리는 대형 고둥 껍질이었다. 그러나 그 껍질은 아주 오래된 사구 속에서 오랜 세월 동안 씻겨진 화석이다. 그 껍질은 지금 그 속에 들어 있는 소라게의 선조가 12만 년 전에 그 사구로 운반해온 것이다. 나는 그 후 수개월 동안 소라게와 그 껍질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대부분의 소라게들은 갈고둥 껍질에 억지로 들어가 있었지만, 소수는 웰크 껍질 속에서 살았다. 그 껍질은 항상 화석이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문헌을 조사했다 그 결과 1907년에 이미 애디슨 E. 베릴이 나를 앞질러 이것을 먼저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 게 되었다. 그는 루이 아가시의 제자로 예일 대학에 재직하던 분류학자 였고, 버뮤다의 박물지를 공들여 기록한 사람이기도 했다. 베릴은 살아있는 웰크에 대한 자료를 얻기 위해 버뮤다의 역사 기록 들을 뒤졌고, 그 섬에 인간이 정주한 초기에는 웰크가 아주 풍부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예를 들어 존 스미스 선장은 1614-1615년의 대기근 동안 한 뱃사람의 운명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살아 남은 사람 중 한 명은 수풀속에 숨어 웰크와 통통하게 살찐 참게만을 먹고 지냈다." 또 다른 선원은 웰크의 껍질을 태워 얻은 석회를 거북의 기름으로 개서 배의 갈라진 틈을 메꾸는 시멘트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베릴이 남긴 현생 웰크에 관한 최후의 기록은 전쟁이 한창이던 1812년에 버뮤다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 취사장에서 기어 나톤 살아 있는 웰크에 대한 것이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근년에는 한 마리도 발견되지 않았고, "그 지방의 가장 나 이 많은 노인들의 기억을 더듬어도 살아 있는 웰크가 잡힌 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고 한다. 지난 70년 동안 웰크가 버뮤다에서 멸 종했다는 베릴의 결론을 뒤집을 만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내가 베릴의 기록을 읽었을 때, 체노비타 디오게네스Cenobita diogenes (대형 소라게의 학명이다)가 처한 딱한 처지는 흔히 인간 이외의 생물들 에게 들씌워지는-필경 부당하기 짝이 없는-인간 중심적인 행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금할 수 없게 했다. 이 소라게가 버뮤다에서 서서히 사라 져 버리는 것이 자연의 숙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갈고둥 껍질은 너무 작아서 소라게의 새끼나 성체 가운데 아주 작은 놈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외의 소라게에게는 갈고둥 껍질이 적당치 않은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소라게가 다 자란 후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점차 줄어드는 소중한 필수품(쇠고둥 껍질)을 찾아내 소유하는 것이-탈취하는 일도 자주 벌어진다-필수적이다. 그러나 근년 들어 버뮤 다 제도에서 쇠고둥은 요즈음 유행어를 빌리자면 '회복 불가능한 자원'이 되기 때문에 소라게들은 여전히 몇 세기 전의 껍질을 재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껍질은 두껍고 튼튼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파도나 암석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공급은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다. 매년 사구에서 소수의 '새로운' 껍질이 굴러 떨어진다. 그 새로운 껍질은 먼 옛날에 언덕 위로 껍질을 운반해 올린 선조 소라게들이 남긴 귀중한 유산이다. 그러나 이런 껍질들로는 수요를 충당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들은 전위적인 영화나 시나리오에 흔히 등장하는 염세적인 관점-완전히 지친 생존자들이 최후 한 조각의 음식물을 얻기 위해 사투를 계속한다는 식의 스토리-을 만족시키도록 운명지어진 것처럼 보인다. 이 대형 소라게를 명명한 학자는 정말 멋들어진 이름을 붙여준 셈이다. 견유학파인 디오게네스는 정직한 사람을 찾기 위해 등을 밝히고 아테네 거리를 헤맸지만 단 한 사람도 찾지 못했다. 체노비타 디오게네스도 자기에게 맞는 껍질을 찾아 헤매면서 차츰 사라져갈 것이다. 대형 소라게에 얽힌 이 가슴아픈 이야기는, 최근 이와 흡사한 이야기 를 들었을 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갑자기 떠올랐다. 앞에서 했던 이야 기에서는 소라게와 웰크가 진화적인 의존 관계를 형성했다고 했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수목의 씨앗과 도도라는 새가 훨씬 특이한 조합을 이룬다. 그런데 이번 이야기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19세기의 지질학자들 가운데 대격변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였던 윌리엄 버클랜드는 생명의 역사를 한 장의 큰 그림에 요약했다. 이 그 림은 여러 겹으로 겹쳐져 '지질학과 광물학에 대한 자연 신학적 고찰' 이라는 제목의 당시 유명한 저서 속에 끼여 있었다. 그 그림은 대멸종 당시 희생되었던 동물들을 멸종한 시대별로 정리해놓았다. 그리고 주요 동물들은 한데 모아놓았다. 어룡, 공룡, 암모나이트, 익룡 등이 한 무리를 이루었고, 매머드, 긴털 코뿔소, 거대한 동굴곰 등이 또 한 무리를 형성하고 있다. 맨 오른쪽에는 현대의 동물로서 우리 시대에 기록된 최초의 멸종 생물인 도도가 혼자 서 있다. 몸집이 크고 날 수 없었던 도도(이 새의 체중은 25파운드가 넘었다)는 인도양의 모리셔스 섬에 상당수 서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15세기에 처음 발견된 후 채 200년도 지나지 않아 멸종하고 말았다. 맛이 뛰어난 도도의 알을 남획한 인간들과, 일찍부터 선원들이 모리셔스 섬에 들여온 돼지가 그 원인이었다. 1681년 이후 살아 있는 도도는 단 한 마리도 목격되지 않았다. 그런데 1977년 8월에 위스콘신 대학의 야생 생태학자 스탠리 A. 템 플이 다음과 같은 신기한 이야기를 보고했다(그 후에 일어난 논쟁에 관해 서는 '후기'를 참조하라), 그는, 그리고 그 이전의 다른 사람들은 칼바리 아 마요르Calvaria major라는 거목이 모리셔스 섬에서 거의 멸종 상태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1973년에 그는 남아 있는 원시림 속에서 겨우 13그루에 지나지 않는 '과성숙했고 고사하고 있는 노목'을 찾아낼 수 있었을 뿐이었다. 모리셔스 섬의 경험 많은 삼림 관리인들은이 거목의 수령을 3천 년 이상으로 추측 했다. 이 나무들은 매년 겉보기에는 수정된 것처럼 보이는 완전한 형태의 씨앗을 만들어내지만 실제로는 단 하나의 씨앗도 발아하지 않으며, 따라서 어린 나무는 한 그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인공적으로 이 나무가 자라기에 적합한 기후를 갖춘 종묘장을 만들어 그 씨앗들을 발아시키려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과거 에는 모리셔스 섬에 칼바리아가 아주 흔했던 것으로 보이며, 과거의 삼림 관리 기록에 따르면 이 나무가 매우 넓은 지역에 걸쳐 벌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름이 2인치 가량 되는 칼바리아의 열매에는 두께가 1/2인치 정도되는 단단한 핵으로 덮힌 씨앗이 들어 있었다. 이 핵은 수분이 많은 과육질 층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바깥쪽에 엷은 외피가 덮혀 있다. 템플은 견 고한 핵이 "내부에 있는 배가 팽창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종자가 발아할 기회를 놓치는 것이라고 추론했다. 그러면 먼 옛날에는 어떻게 발아한 것일까? 템플은 두 가지 사실을 하나로 묶었다. 초기의 탐험자들은 도도가 삼 림 속 거대한 나무의 열매와 씨앗을 주식으로 삼았다는 기록을 전하고 있다. 실제로 칼바리아 핵의 잔해가 도도의 유해 속에서 발견되기도 했 다. 도도는 견고한 먹이를 깨뜨릴 수 있을 만큼 자갈이 많이 들어 있는 튼튼한 모래주머니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덧붙여 지금까지 살아 있 는 칼바리아 나무의 수령이 도도가 멸종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는 사 실은 이 두 종이 매우 밀접한 관계에 놓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도도는 약300년 전에 종적을 감추었고, 그 후에 발아한 칼바리아 나무의 씨앗 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템플은 도도의 모래주머니 속에서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적응 전략으로서 칼바리아가 씨앗을 아주 두꺼운 핵으로 둘러싸도록 진 화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나무는 스스로의 번식을 도도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하나를 얻은 대신 다른 하나를 내준 꼴이다. 도도의 모래주머니 속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는 핵은 배가 스스로의 힘으로 발아하기에는 지나치게 두꺼웠다. 이처럼 일찍이 씨앗을 위협하던 모래주머니가 이제는 칼바리아가 번식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가 된 것이다. 이제 씨앗이 발아하기 위해서는 두꺼운 핵이 마멸되고 그 표면이 깎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러 종류의 작은 동물들이 칼바리아의 열매를 먹지만, 그들은 단지 수분이 많은 육질부를 갉아먹을 뿐 중심부에 있는 핵은 건 드리지 않는다. 반면에 도도는 이 열매를 통째로 삼킬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이 새는 과육을 소화시킨 후 핵을 뱉거나, 모래주머니에서 핵을 벗겨낸 다음 똥과 함께 배설했을 것이다. 템플은 씨앗이 여러 동물의 소화관을 거친 후 발아율이 현저히 높아진 여러 사례를 인용했다. 그런 다음 템플은 여러 종류의 현생 조류의 체중과 모래주머니에서 발생하는 힘 사이의 관계를 그래프로 나타내 도도의 모래주머니가 갖는 파괴력을 추정해보았다. 여기에서 얻어진 곡선을 도도의 체중에까지 연 장한 결과, 칼바리아의 핵은 파괴에 저항할 정도로 충분히 두껍다는 결 론을 얻게 되었다. 실제로 가장 두꺼운 핵은 마멸에 의해 약 30퍼센트 가 줄어들지 않는 한 파괴되지 않았다. 도도는 그전 상태에서 씨앗을 토해내거나 장으로 보냈을 것이다. 템플은 오늘날 살아 있는 새 가운데 도도와 가장 비슷한 칠면조를 선택해서 한 번에 하나씩 강제로 칼바리아의 핵을 먹여보았다. 칠면조의 모래주머니 에서 17개의 씨앗 중 7개가 부숴졌고, 나머지 10개는 칠면조가 토해냈거나 상당히 마모되어 배설물과 함께 배출되었다. 템플은 이 씨앗들을 심었고, 그 결과 3개의 씨앗이 발아했다. 그는 "이것들이 지난 300년 넘는 기간 동안 처음 발아한 칼바리아의 씨앗일지 모른다"라고 썼다. 어쩌면 인공적으로 마모시킨 종자를 뿌리는 방법으로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 칼바리아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풍부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관찰력이 결합해서 자연 파괴가 아니라 보전으로 이어지는 일도 이따금씩 일어난다. 나는 '내추럴 히스토리'지의 연재 에세이가 5년째에 접어들 무렵 이 이야기를 썼다. 처음에 나는 자연사에 관한 흥미거리를 늘어놓는 지금까지의 상투적인 방식에서 벗어나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었다. 다시 말해 자연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무언가 특별한 이야기를 진화론의 일반 원리에 결부시키고 싶 었다. 판다와 바다거북을 진화의 증거로서 불완전한 점들과 결부시키고, 자성 박테리아를 비례 증감의 여러 가지 원리에 결부시키고, 몸 속에서 어미를 먹는 진드기를 성비에 관한 피셔의 이론과 결합시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번 칼럼에서는 우리들의 복잡한 세계에서 사물들은 모두 다른 사물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그리고 국부적으로는 붕괴된다 하더라도 그 여파는 훨씬 멀리에까지 미친다는 단순한 교훈이외에 아무런 목표도 갖고 있지 않다. 이 글에서 서로 연관을 갖는 두 가지 이야기를 언급한 것은 단지 그 이야기들이 한편으로는 가슴아프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미롭게 나를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후기 자연사에 얽힌 이야기 가운데는 널리 받아들여지기에는 너무 아름답 고 복잡한 것들이 있다. 템플의 보고는 곧 신문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지 게 되었다(제일 먼저 '뉴욕 타임즈'를 비롯한 주요 일간지에 보도되었고, 그로부터 2개월 후에는 내 논문에 인용되었다). 이듬해에(1979년 3월 30 일) 모리셔스 섬 삼림국의 와달리 박사가 학술지 '사이언스'(템플의 최 초의 논문이 발표된 잡지이기도 하다)에 발표한 전문적인 논평에서 몇 가 지 의문을 제기했다. 다음에 소개한 글은 와달리 박사의 논평과 그에 대한 템플의 반박을 원문 그대로 수록한 것이다. 나는 식물과 동물 사이에 공진화가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일부 씨 앗의 종자는 동물의 장을 통과함으로써 발아에 도움을 받는다는 주장 자체를 반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유명한 도도와 칼바리아의 '상리 공 생mutualism'이 공진화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 음과 같은 이유로 지지할 수 없다. 1. 칼바리아 마요르는 강우량이 연간 2,500에서 3,800밀리미터인 모 리셔스 섬의 고지 다우림 지역에서 자란다. 반면 네덜란드 인들의 자료에 따르면, 도도는 북부 평지, 그리고 네덜란드 인들이 최초의 거류지를 마련한 장소인 동부 그랜드 포트지구의 구릉지역-즉 비교적 건조한 삼림-에 출몰했다. 따라서 도도와 칼바리아 마요르가 동일한 생태적인 지위를 가졌다고 생각하기는 매우 힘들다. 실제로 지금까지 저수지와 배수구 등을 만들기 위해 고지에서 광범위한 굴착 작업을 벌였 을때 도도의 뼈는 발견되지 않았다, 2. 일부 저자들은 마르 오 송주Mare aux Songes에서 목본 식물의 작은 씨앗이 발견된 사실, 그리고 도도를 비롯한 다른 새들이 그 씨앗들의 발아를 도왔을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들 종자는 칼바리아 마요르가 아니라 시데록실론 롱기 폴리움Sideroxylon longifolium으로 확인된, 저지에 서식하는 다른 종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3. 삼림국은 최근 수년에 걸쳐 조류의 도움 없이 칼바리아 마요르의 종자를 발아시키는 방법을 연구해서 큰 성과를 얻었다. 다소 발아율이 낮기는 하지만 최근 수십 년에 걸쳐 번식률이 현저히 저하된 많은 토착종의 발아율만큼은 낮지 않다. 그 번식률 저하는 이 자리에서 설명하기에는 서무도 복잡한 여러 가지 요인에 기인한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원숭이에 의한 약탈과 외래 식물의 침입이다. 4. 1941년 보건Vaughan과 위에Wiehe는 고지에 있는 최고 강우 림 지역을 조사한 결과, 75년에서 10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되는 어린 칼바리아의 상당히 큰 군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런데 도도가 멸종한 것은 1675년 무렵이다! 5. 칼바리아 마요르 씨앗이 발아하는 방식은 힐Hill이 기술하고 있 다. 그는 배가 어떻게 단단한 목질 내과피를 뚫고 나올 수 있는지를 밝혀냈다. 팽창한 배가 종자의 밑부분 절반을 명료한 파열대를 따라 가른 것이다. 칼바리아 마요르와 도도의 '신화'를 깨뜨리고 고지 평원에 돋아 나오 는 이 거대한 나무의 숫자를 늘리려는 모리셔스 삼림국의 노력을 올바 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모리셔스, 큐어파이프 삼림국 A. W 와달리 1978년 3월 28일 도도와 칼바리아 마요르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동식물 간의 상리 공생은 도도가 멸종한 이상 실험적인 입증 불가능하다. 내가 지적 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관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고, 따 라서 그 가능성이 칼바리아 마요르의 낮은 발아율을 설명해줄 수 있으 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역사적 복원에 잘못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점 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도도와 칼바리아가 지리적으로 격리되어 있었다는 와달 리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모리셔스 섬의 고지에서는 실제로 도 도의 뼈나 그 밖의 어떤 동물의 뼈도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 이유는 동 물들이 거기에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섬의 지형상 충적층(충적세에 생성 된 지층. 지질학상 가장 새로운 지층으로 자갈, 진흙, 모래, 토탄 등으로 이루어짐/옮긴이)이 고지에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지의 물이 모 이는 지역에는 주위의 고지에서 씻겨 내려온 동물의 뼈들이 많이 쌓여 있다. 하찌즈카가 요약한 초기 탐사자들의 기록에는 도도가 고지에서 발견 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히 적혀 있지만, 그는 도도가 엄밀히 해안에 사는 새였다는 오해를 푸는 데 중점을 두었다. 모리셔스의 과거 임업 기록은 칼바리아가 고지의 평원에서뿐 아니라 저지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원시림은 고지에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살아 남은 칼바리아 나무 중 하나는 겨우 해발 150미터 위치에 있다. 따라서 도도와 칼바리아 사이에서는 상리 공생적 관계가 발생할 수 있는 동지역성 sympatric 분포가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다. 인도양 일대에 분포한 사포타과(sapotaceous, 감나무목에 속하는 쌍 떡잎 식물/옮긴이) 식물의 분류 전문가들은 마르 오 송주의 습지에 있 는 충적층 퇴적물에서 시데록실론 롱기폴리움의 작은 종자와 함께 칼바 리아 마요르의 씨앗을 식별하고 있지만, 이것은 상리 공생의 문제와 거 의 관계가 없다. 상리 공생하는 종이 반드시 함께 화석화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모리셔스 삼림국은 극히 최근에 와서야 처음으로 칼바리아의 씨앗을 발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은 최근의 성공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 성공이 상리 공생설을 강화시켜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성공을 거둔 것은 씨앗을 심기 전에 핵을 기계로 마 모시켰기 때문이다. 도도의 소화관은 모리셔스 삼림국의 실무자들이 씨앗을 심기 전에 인공적으로 가공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방법 으로 칼바리아 씨앗의 내과피를 마모시킨 것에 해당한다. 와달리가 살아 남은 칼바리아의 수령에 관해 인용하고 있는 문헌은 의심스럽다. 그런 식으로 정확히 나이를 측정할 수 있는 간편한 방법 이 없기 때문이다. 마침 와달리가 인용한 논문의 공저자인 위에는 300 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살아 남은 나무의 수령에 관해서 내가 인용한 문 헌의 저자이기도 하다. 1930년대에는 현재보다 살아 남은 나무가 많았 다는 주장은 동의할 만하다. 그것은 칼바리아 마요르가 쇠퇴하고 있는 종이고 또한 1681년 이래 쇠퇴하는 경향이 계속되었다는 관점을 한층 더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 내가 힐을 인용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었다. 그러나 힐은 어떤 조건 하에서 종자가 발아하게 되었지를 기술하지 않았다. 그 자세한 설명이 없는 한 그의 기술은 상리 공생의 문제와 거의 아무런 관계도 없다. 스탠리 A. 탬플 위스콘신 대학 야생 생태학 교실 나는 템플이 와달리가 처음에 제기한 세 가지 논점에 대해 적절히, 그리고 훌륭하게 응답했다고 생각한다. 고생물학자로서 나는 고지에서 화석이 잘 발견되지 않는 점에 대한 그의 주장을 시인할 수밖에 없다. 고지의 동물상에 관해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화석 기록은 지극히 불 충분하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표본은 일반적으로 저지의 퇴적물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높은 곳에서 흘러 내려오는 과정에서 많이 마모되고 씻겨졌기 때문이다. 삼림국이 칼바리아의 씨앗을 발아시키기 전에 씨앗의 내과피를 마모 시켰다는 사실을 와달리가 언급하지 않은 것은 분명 잘못한 일이었다. 마모의 필요성이 템플 가설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템플도 그 자신의 발견보다 훨씬 앞선 모리셔스 현지인들의 노력을 증거로 삼지 않은 점에서 마찬가지로 부주의했다. 그렇지만 와달리의 네 번째 논점은 템플의 주장에 대한 반증을 내포 하고 있다. 만약 칼바리아의 '상당히 큰 군집'의 수령이 1941년에 100 세 이하였다면, 도도가 그 나무들의 발아를 도울 수는 없었다. 템플은 이처럼 젊은 나무의 존재가 확인된 것을 부정하고 있고, 나 자신도 이 결정적인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지금까지 소개한 논쟁은 과학 이야기를 일반 대중에게 전달할 때 사 람들을 혼란시키는 요소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여러 매체 들이 템플의 최초 논문을 인용해왔다. 그러나 그 후에 나타난 의문점에 대해 언급한 언론 매체는 단 한 곳도 없었다. 대부분의 '훌륭한' 이야기들은 대개 허위이거나 적어도 과장된 것임이 밝혀지지만, 그런 사실을 폭로하는 것은 흥미로운 가설만큼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박물학의 '고전'이라 불리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틀렸지만, 교과서에 나와 있는 이런 잘못된 도그마만큼 삭제되는 것에 꿋꿋이 저항 하는 것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와달리와 템플의 논쟁은 현 단계에서 판정하기 힘들 만큼 호각지세 다. 나는 템플 쪽을 지지하지만, 만약 와달리의 네 번째 주장이 옳다면 이 도도 가설은 토마스 헨리 헉슬리의 멋진 표현대로 "지저분하고 추악 하고 사소한 사실에 의해 매장된 아름다운 이론"이 되는 셈이다. 제28장 유대목 동물에 대한 재평가 나는 나와 같은 종의 탐욕 때문에 살아 활동하는 도도를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몹시 분개하고 있다. 칠면조만한 크기의 비둘기 과의 새라면 무언가 다른 점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곰팡이 냄새 나는 박제된 표본이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는 전혀 실감을 느낄 수 없다. 자연의 다양성을 마음껏 즐기고 모든 생물들로부터 교훈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호모사피엔스에게 백악기의 대멸종 이래 가장 큰 재앙이라고 이름붙이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약 200만 년에서 300만 년 전의 파나마 지협의 융기가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생물계의 비극 가운데 가장 파괴적인 사건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남아메리카는 제3기(즉 대륙 지역이 빙하에 뒤덮히기 시작하기까지의 7 천 만 년) 동안 내내 하나의 섬으로 이루어진 대륙이었다. 그리고 오스 트레일리아와 마찬가지로 이 대륙에는 매우 특이한 두 종류의 포유류가 살고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남아메리카가 폭넓고 다채로운 생물 형 태들을 가지고 있었던 데 비하면 무척 침체된 편이었다. 파나마 지협이 형성된 후 북아메리카에서 몰려온 동물들의 맹습을 받았지만 많은 생물종들이 살아 남았다. 그 중 일부는 그전보다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 번성했다. 어포섬(주머니쥐)은 북아메리카에서 캐나다까지 도달하였고, 아르마딜로는 계속 북쪽으로 진출해갔다. 소수 종이 계속 살아 남은 반면 다채로운 남미의 생물 종들이 멸종해 간 것은 남북 양 대륙의 포유류들이 접촉하면서 우월한 종이 지배하는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두 목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현존하는 포유류는 약 25목으로 분류된다). 식물을 먹는 다양하고 거대 한 집단이었던 포유류들이 오늘날까지 살아 남아 있다면 우리들의 동물 원이 얼마나 풍부해졌을지 상상해보라. 거기에는 찰스 다윈이 비글 호로부터 상륙 허가를 얻어 처음 그 화석을 발견한, 코뿔소 크기의 톡소돈Toxodon에서 티포테리움typotheres과 헤게 토테리움hegetotheres에 속하며 토끼나 설치류와 닮은 종류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다. 또한 두개의 작은 그룹, 즉 크고 긴 목을 가진 낙타와 흡사한 마크라우케니아macrauchenids, 그리고 가장 괄목할 만한 집단으로서 말과 닮은 프로테로테리움proterotheres으로 이루어진 골거목 litopterns을 생각해보라(프로테로테리움은 진짜 말과 비슷한 진화적 경로 를 부분적으로 반복해온 군이다). 가령 세 개의 발가락을 가진 디아디아포루스Diadiaphorus에 이어 하나의 발가락을 가진 토아테리움Thoatherium이 나타났음은 이를 잘 증명해준다. 토아테리움은 양쪽의 흔적 손가락이 오늘날의 말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 로 퇴화해 있다는 점에서 맨 오워(Man' O War, 미국 경주마 사상 최고의 경주마로 꼽힌 말의 이름/옮긴이)를 능가할 지경이다. 이들은 모두 지협의 융기로 시작된 남미 동물상의 붕괴에 휩쓸려 영원 히 사라지고 말았다(남제목notoungulates과 골거목 가운데 일부는 빙하 시대까지 살아 남았다. 어쩌면 그들은 초기 인간사냥꾼들에 의해 최후의 일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만약 남아메리카가 섬 대륙으로서 계속 남아 있었다면 그 중 다수가 지금까지도 살아 남았을 것이라고 확신 한다). 이들 남미의 초식 동물에 의존해 살아가던 토착 육식 동물들도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재규어와 그 동류에 해당하는 남미의 현생종 육식 동 물들은 모두 북아메리카에서 온 침입자들이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남 아메리카의 토착 육식 동물은 모두 유대목이었다(그러나 놀랍게도 일부 육식 동물에는 큰 몸집을 가진 포로라코스과phororhacids는 멸종한 새의 집단이 있었다). 유대목에 속하는 육식 동물도 북반구 여러 대륙에 있는 태반을 가진 육식 동물만큼 다양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작은 동물에서 곰 크기의 동물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종류가 있었다. 그 가운데 한 계통은 북 아메리카의 '검치호(위턱의 송곳니가 칼 모양으로 발달한 호랑이와 비슷한 화석 동물/옮긴이)'와 놀랄 만큼 흡사하게 진화했다. 즉 유대목인 틸라코스밀러스Thtlacosmilus는 먹이를 찌르는 긴 윗턱 송곳니와, 이 송곳니를 뒷편에서 지탱하는 듯한 테두리를 아래턱 뼈에 발달시켰다. 이 모습은 라 블레아(로스앤젤레스 근교)의 타르 늪에 보존되어 있는 스밀로돈smilodon과 똑같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오늘날 남아메리카에서 유대목의 상태는 그다지 나쁘지 않다. 북아메리카에는 버지니아 어포섬 정도가 서식하는 반면(실제로는 남미에서 이주한 것이지만), 남미에서 어포섬은 약65종에 이를 만큼 다양한 집단을 이루고 있다. 게다가 '오포섬 랫opossum rat' 이라 불리는 케놀레스테스속caenolestids의 주머니 없는 유대목이 진짜 어포섬과 유연 관계가 먼 별개의 집단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남미의 유대목 중에 세 번째로 큰 집단인 육식성 보르히에나 borhyaenids는 완전히 사라졌고, 북방에서 온 고양이과 동물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 하고 있다. 전통적인 관점에-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바로 이 관점에 반대하 기 위해서이다-따르면, 육식성 유대목이 멸종한 것은 주머니를 가진 유대목이 태반을 가진 포유류에 비해 전반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유대목과 난생 오리너구리와 바늘두더지를 제외하면 현생하는 포유 류는 모두 태반을 가지고 있다). 이 관점은 여간해서는 깨뜨리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유대목은 태반을 가진 대형 육식 동물이 아직 자리를 잡 지 못한 오스트레일리아와 남아메리카라는 고립된 섬 대륙에서만 번성 했다. 제3기 초기에 북아메리카에 있는 유대목은 태반을 가진 포유류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자 곧 종적을 감추었다. 다른 한편 남아메리카의 유대목은 북미와 남미를 연결해주는 중미를 통해 북방의 태반을 가진 포유류가 남 쪽으로 이주할 수 있게 되자 큰 타격을 받았다. 생물지리학과 지질학사에 기초를 둔 이러한 주장은 유대목이 태반을 가진 포유류에 비해 해부학적으로나 생리학적으로 뒤떨어진다는 종전의 사고 방식을 뒷받침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분류학 용어 자체도 이 러한 편견을 강화시켜준다. 포유류는 세 군으로 나뉜다. 난생의 단공류monotremes는 '원수아강(Prototheria, 포유류 가운데 가장 낮은 단계로 오리너구리, 바늘두더지 등이 여기에 속한다/옮긴이)' 또는 원시 포유류라고 불린다. 그에 비해 태반을 가진 포유류는 '진수하강 Eutheria', 즉 인정한 포유류라는 영예로운 명칭을 얻는다. 마지막으로 유대목은 '후수아강Metatheria', 즉 중간 단계의 포유류로-불완전한 포유류로-냉대를 받고 있다. 유대목이 다른 포유류보다 구조적으로 열등하다는 주장은 주로 유대 목과 유태반류의 생식 방식의 차이에 근거하고 있으며, '우리와 다른 것은 나쁜 것'이라는 오만한 가정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고 실제로도 경험했듯이 태반을 가진 포유류의 새끼는 어미와 밀접하게 연결돼서 어미로부터 혈액을 공급받는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이들의 갓 태어난 새끼는 생활력을 갖춘 거의 완전한 상태로 태어난다. 그에 비해 유대목의 태아는 모체 속에서 크게 성장하는 데 필요한 장치를 자신의 신체 내부에 발달시키지 않았다. 우리 몸은 외부에서 들어온 조직을 식별해내서 받아들이지 않는 신비 스러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질병에 대항하는 데 필수적인 방어 수단이 되는 반면, 최근에는 피부와 심장 이식과 같은 의학적 처치를 어렵게 하는 장애물이 되고 있기도 하다.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귀가 따가울 정도로 많이 듣고, 50퍼센트의 외가 쪽 유전자가 아이에게 전달됨에도 불구하고 태아는 여전히 어머니와 이질적인 조직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거부 반응을 막기 위해서는 모친의 면역 체계를 덮어 가릴 필요가 있다. 태반을 가진 포유류의 태아는 그 방법을 '배운 데' 비해 유대목의 태아는 배우지 못한 것이다. 유대목의 임신 기간은 대단히 짧다. 보통 어포섬의 경우 그 기간은 12-13일 정도이며, 그 후 새끼 어포섬은 체외 주머니 속에서 60일에서 70일 동안 발육을 계속한다. 게다가 모체 내에서의 발육도 모체와 밀접 한 결합을 이루며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모체로부터 차단된 상태에서 진행된다. 임신 기간의 2/3는 림프구의 침입을 막는 모체의 기관이자 면역 체계의 '병사'라고 할 수 있는 '알 껍질막shell membrane'속에서 진행된다. 그 후 수일간, 일반적으로는 난황낭을 통하여 태반과 접촉한다. 이 기간 동안 모체는 면역 체계를 작동시키고, 곧 이어 태아가 태어난다(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미의 몸에서 추방된다). 갓 태어난 유대목 새끼는 발육 정도에서 볼 때 태반을 가진 포유류의 초기 배에 해당한다. 머리와 앞다리는 비교적 빨리 발생하지만, 뒷다리 는 대개 미분화된 맹아와 같은 상태에 불과하다. 태어난 후 이 생물은 위험한 여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젖꼭지가 있는 모체의 주머니까지 꽤 긴 거리를 천천히 이동해야 하는 것이다(여기서 우리는 잘 발달한 앞 다리가 왜 필요한지 이해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태반을 갖춘 자궁 속 에서 진행되는 우리들의 태아기 생활은 훨씬 편하고 확실히 더 나은 것 처럼 보인다. 그러면 유대목의 열등성을 주장하는 생물지리학과 몸의 구조에 대한 설명을 어떤 식으로 반박할 수 있을까? 내 동료 존 A. W. 커쉬는 최근 여러 가지 주장을 정리했다. 그는 P. 파커의 논문을 인용해 유대목의 생식 양식이 하등한 것이 아니며 다만 다른 적응 양식을 따랐을 뿐이 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유대목의 태아는 모체의 면역 체계 작동을 정지시키며 자궁 속에서 완전히 발생할 수 있는 기구를 진화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이른 출생 역시 하나의 적응 전략일 수 있다. 또한 모체의 태아에 대한 거부 반응이 반드시 설계상의 실패나 진화적 기회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살아 남기 어려운 조건에 적응하기 위해 아주 먼 옛날부터 발전 시킨 좀더 완벽한 접근 방식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파커의 주장은 개체가 자신의 번식률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즉 자신의 유전자가 미래 세대에 발현될 기회를 증가시키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라고 말한 다윈의 주장에 곧바로 귀착한다. 이 목적을(무의식적으로) 추구하기 위해 취할 만한 서로 다르고, 모두 똑같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 여러 가지 전략이 있다. 태반을 가진 포유류의 어미는 새끼가 태어나기 전까지 막대한 시간과 에너지를 들인다. 이렇듯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는 일이 새끼가 잘 자라날 가능성을 높일 수는 있지만, 어미 자신으로 볼 땐 상당한 모험을 하는 셈이다. 만약 어미가 그 새끼를 잃기라도 한다면, 어미는 아무런 진화적 이득도 얻지 못한 채 생애의 일정 기간으로 제한돼 있는 생식적 노력의 상당 부분을 돌이킬 수 없이 낭비해버리는 셈이 된다. 태어난 새끼 가운데 죽는 숫자가 훨씬 더 많기 때문에 유대목 어미는 큰 희생을 치른 것이지만 생식에 소모한 손실은 작다. 임신 기간이 아주 짧기 때문에 어미는 같은 번식기에 다시 한 번 새끼를 가질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작은 태아는 모체의 에너지원을 크게 소모 시키지 않으며, 쉽고 빠른 출산은 모체에게 거의 위험을 주지 않는다. 다시 생물지리학적인 사실로 눈을 돌리면, 커쉬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남아메리카가 북반구 유태반류의 세계에 발을 붙일 수 없었던 열등 동 물들의 피난처 구실을 했다는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이 동물들 이 남반구에서 다양하게 번성한 것은 주변부에서 이루어진 미미한 노력 이 아니라, 그 선조들이 살던 본고장에서 이룬 성공을 반영하는 것이라 고 보았다. 이 주장은 보르히에나(남미의 육식성 유대목)와 티라키누스thylacines (오스트레일리아의 육식성 유대목) 사이에 밀접한 계통적 관계가 있다는 M. A 아처의 견해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 지금까지 분류학자들은 이 두 군을 진화적 근사-앞에서 설명했듯이 유대목과, 유태반류인 검치 호랑이 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유사한 적응적 특징이 따로따로 발달하는 것-의 예로 간주해왔다. 실제로 분류학자들은 유대목이 오스트레일리아와 남아메리카로 방산한 것이 북반구 대륙에서 밀려난 원시 유대목이 양 대륙에 각기 따로따로 침입함으로써 나타난 서로 전혀 관계가 없는 사건으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만약 보르히에나와 티라키누스가 밀접한 유연 관계에 있다면, 남쪽의 양 대륙은 아마도 남극 대륙을 경유해서 그들의 거주 생물 가운데 일부를 교환했을 것이다(대륙 이동에 관한 최근의 지질학적 관점에 따르 면, 남반구의 여러 대륙은 공룡 멸종 후 포유류가 번성한 무렵에는 지금 보다 훨씬 가까웠다고 한다). 좀더 소극적인 관점에 따르면, 유대목은 남아메리카를 두 번에 걸쳐 따로 침입한 것이 아니라(보르히에나의 선조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그 밖의 것은 북아메리카에서), 원래는 유대목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기원 했는데 단지 티라키누스가 진화한 후에 남아메리카로 확산된 것이라고 상상된다. 엄청나게 복잡한 우리들의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설명이 옳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커쉬의 주장은 유대목의 고향이 발상지가 아닌 피난처에 불과하다는 일반적인 사고 방식에 대해 매우 중요한 의문을 제기 한다. 그렇지만 나는 이처럼 몸의 구조와 생물지리학이라는 양면에서 유대 목를 옹호하는 것이 앞에서 소개한 기초적인 사실-파나마 지협의 융 기, 태반을 가진 육식 동물의 침입, 유대목 육식 동물의 급속한 쇠락, 그 후 유태반류의 번성-앞에서는 기가 꺾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 을 수 없다. 이러한 여러 사실들은 북아메리카의 유태반 육식 동물이 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했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나는 기발한 추측으로 이 불유쾌한 사실로부터 도망칠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 쪽을 택하겠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유대목이 태반을 가진 포유류와 대등하다는 주장을 계속 옹호할 수 있을까? 보르히에나가 싸움에서 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유대목이었기 때 문에 패배하였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나는 유대목이든 태반을 가 진 포유류든 간에 님아메리카의 모든 토착 육식 동물에게 어려운 시기 가 있었으리라 예측하는 생태학적 주장을 더 따르고 싶다. 우연히 유대 목이 희생자가 됐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원인에 의 한 것이었지 분류학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단지 이 두 사실이 우연 히 일치했을 따름이다. R. T 배커는 제3기의 육식성 포유류에 대한 연구를 해왔다. 몇 가지 새로운 개념과 종래 축적된 지혜를 한데 종합한 결과 그는 북방의 태반 을 가진 육식 동물들이 두 가지 진화적 '테스트'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 아냈다. 그들은 단기간에 이루어진 대멸종을 두 차례나 경험했다. 따라 서 그 뒤를 잇는 새로운 군들은 더 적응적인 유연성을 가졌을 것이다. 번성을 계속하던 시기에 다양한 포식자와 피식자들은 심한 경쟁, 섭식 (빠른 섭취와 능률적으로 음식을 씹는 일)과 이동 능력(매복형 포식자의 경우에는 빠른 가속성, 장거리형 포식자의 경우에는 지구력) 등에서 꾸준 한 개량을 보이는 진화적 경향을 낳았다. 그런데 남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육식 동물은 어떠한 테스트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대량 멸종을 경험하지 않았고, 최초의 종이 계속 자리를 지켰다. 그곳의 동물들은 결코 북반구만큼 다양하게 번식하지 못했고, 경쟁도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배커는 그 동물들이 달리기나 섭식에 관한 형태상의 특수화에서 같은 시기 북쪽에 살던 육식 동물보다 훨씬 수준이 낮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뇌의 크기에 관한 H. J. 제리슨의 연구도 인상적인 확증을 제공해준 다. 북반구 여러 대륙에서는 태반을 가진 포식자와 피식자가 모두 제3 기에 조금씩 뇌를 진화시켰다. 그러나 남아메리카에 분포하는 육식성 유대목과 그 피식자인 태반을 가진 포유류는 모두 같은 몸 크기의 평균 적인 현생 포유류에 비해 무려 50퍼센트밖에 되지 않거나 그것보다 더 작은 뇌의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유대목과 태반을 가진 포유류의 해부학적 특성이 큰 차이를 갖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진화적인 도전에 각기 대응 해온 상대적인 역사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령 우연히 북쪽의 육식 동물이 유대목이고 남쪽의 육식 동물이 태반을 가진 포유류였다고 한다면, 나는 남아메리카측이 패배한 원인은 그들이 지협을 통해서만 교류 했기 때문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북아메리카의 동물상은 대량 멸종과 격렬한 경쟁 등 엄중한 시련으로 항상 테스트되어왔지만, 남아메리카의 육식 동물은 심각한 도전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 파나마 지협이 해면 위로 모습을 나타냈을 때 그들은 처음으로 진화적인 저울 위에 올려진 셈이다. 그리고 다니엘의 왕(신바 빌로니아의 왕. 여러 차례의 원정으로 바빌로니아의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신바빌로니아는 결국 멸망하고 만다/옮긴이)처럼 그들은 힘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제8부 몸 크기와 시간 제29장 우리에게 할당된 수명 E. L. 독토로우의 소설 '래그타임Ragtime'에 존 P. 모건과 헨리 포드 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대화에서 모건은 컨베이어 시스템이라 는 것은 자연의 지혜를 충실히 옮겨놓은 것이라고 극구 칭찬한다. 당신이 고안한 컨베이어 시스템은 천재적인 공업가의 뛰어난 업적일 뿐 아니라 생물의 진리를 투영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결국 부품이 교환 가능하다는 것은 자연 법칙의 하나입니다. ... 모든 포유류는 같은 방식으로 번식하고, 같은 형태로 설계된 영양 섭취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동일한 소화기와 순환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같은 감각을 향유합니다. ... 공통의 설계 덕분에 분류학자들은 포유류를 포유류로 분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업계의 오만한 거물이라면 모호한 얼버무림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 이다. 그래도 나는 모건의 말에 대해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라는 애매하기만 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만약 모건이 컨베이어 시스템을 대형 포유류와 소형 포유류의 기하학적 복제라고 생 각했다면 그의 견해는 틀렸다. 코끼리는 생쥐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작 은 뇌와 굵은 다리를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차이가 의미하는 것은 개 개 동물의 특수성이 아니라 포유류 몸의 설계를 지배하는 일반적인 법 칙인 것이다. 그러나 만약 모건이 대형 동물은 같은 군에 속하는 소형 동물과 본질 적으로 같다고 말한다면 그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유사성이란 변하지 않는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하학의 근본 법칙대로라면 동물들이 제각기 다른 크기를 가지면서 동일한 방식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 형태를 바꾸지 않을 수 없다. 갈릴레오는 1638년에 고전적 법칙의 한 예를 수립했다. 즉 동물 다리의 세기는 그 횡단면의 면적(길이x길이)의 함수이며, 양 다리가 지탱해야 하는 체중은 그 동물의 부피(길이x길이 x길이)에 따라 변한다. 만약 어떤 포유류가 몸이 커지는 데 따라 다리의 굵기를 상대적으로도 증가시키지 않는다면, 곧 그 포유류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체중은 양 다리가 지탱할 수 있는 무게의 한계보다 훨씬 높은 비율로 증대하니까). 기능적인 측면에서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동물들은 그 형태를 바꿀 필요가 있다. 이러한 형태 변화에 대한 연구를 '비례 증감론scaling theory'이라고 한다. 그 연구 덕분에 포유류의 체중이 생쥐에서 고래에 이르기까지 무 려 2,500만 배로 증가하는 동안 그 형태도 뚜렷한 규칙성에 따라 변화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모든 포유류에서 체중에 대한 뇌 무게의 관계 를 이른바 '생쥐-코끼리 곡선(또는 뒤쥐-고래 곡선)'으로 그려보면, 일반 적인 법칙을 나타내는 하나의 곡선에서 일탈하는 종이 거의 없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소형 포유류에서 대형 포유류로 옮아감에 따라 뇌의 무 게는 체중의 2/3의 비율로 증대하는 데 그친다(사람은 청백돌고래와 함 께 그 곡선의 윗쪽으로 가장 크게 일탈한다는 영예를 차지한다). 우리는 물체를 지탱하는 기본적인 물리적 성격에서 이러한 규칙성을 자주 예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심장은 펌프이다. 포유류의 심장은 종 류를 불문하고 본질적으로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작은 심장 은 큰 심장보다 빠르게 박동한다(대장간에서 사용하는 풀무와 구식 풍금 의 큰 송풍 장치와 비교해 손가락 정도 크기의 장난감 풀무가 어느 정도 빨리 움직일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좋을 것이다). 포유류의 '생쥐-코끼리 곡선'를 보면 소형 포유류에서 대형 포유류로 이동함에 따라 심장 박동 시간은 체중의 1/4에서 1/3의 비율로 증대한다. 이러한 결론은 거미 심장 박동의 비례 증감에 관한 J. E. 카렐과 R. D. 히 스코트의 최근 연구에서도 확인되었다. 그들은 레이저광으로 이미 휴식중인 거미의 심장을 쬐기 시작해서, 체중의 약 1천 배의 범위에 걸친 18종을 대상으로. '게거미-타란툴라거미(이탈리아 독거미의 일종/옮긴이) 곡선'을 그렸다. 여기서도 심장 박동 시간은 체중의 약 2/5의 비율(엄밀하게는 0.499배의 비율)로 증대한다. 우리는 심장에 관한 이러한 연구 결과를 확장시켜 소형 동물과 대형 동물의 생활 속도에 관한 일반적인 공식을 이끌어낼 수 있다. 소형 동 물은 대형 동물보다 빠르게 일생을 보낸다. 소형 동물의 심장은 훨씬 빠르게 움직이고, 그들은 더 자주 호흡하고, 맥박은 훨씬 빠르게 박동 한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른바 생명의 불이라는 신진 대사 비율이 포유류의 경우 체중의 3/4의 비율로 늘어나는 데 그친다는 점이 다. 생존을 계속하기 위해 대형 포유류는 소형 동물에 해당되는 단위 부피당 열을 발생시킬 필요가 없다. 몸집이 작은 뒤쥐는 미친 듯이 돌 아다니며 포유류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로 물질 대사의 불을 계속 지피 기 때문에 눈을 뜨고 있는 동안에는 거의 언제나 먹이를 먹고 있다. 그 에 비해 흰긴수염고래는 위엄 있게 물 속을 미끄러지듯 헤엄치기 때문에 그 심장은 온혈 동물 가운데 가장 느린 리듬으로 박동한다. 포유류의 수명을 비례 증감의 관점에서 보면 이처럼 비교하기 힘든 데이터들을 흥미롭게 종합할 수 있다. 우리는 다양한 크기의 포유류 애 완 동물을 통해 작은 포유류가 일반적으로 수명이 짧다는 사실을 경험 적으로 알고 있다. 실제로 포유류의 수명은 심장 박동이나 호흡의 길이 와 비슷한 비율로-소형 동물에서 대형 동물로 옮아 감에 따라 체중의 1/4에서 1/3의 비율로-길어진다(호모 사피엔스는 이러한 일반 원칙에서 벗어나는 아주 특수한 동물이다. 우리는 비슷한 크기의 다른 포유류보다 훨씬 오래 산다. 9장에서 나는 인간이 '네오테니'라 불리는 진화 과정에 -우리의 선조인 영장류의 유아기 때 특징을 나타내는 외관이나 성장 속도가 성인이 될 때까지 유지되는 것-의해 진화해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인간의 수명이 긴 원인도 네오테니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포유류와 비교해 인간 일생의 각 단계는 '너무도 느리게' 온다. 인간은 긴 임신 기간을 거쳐 무력한 태아의 형태로 태어나 긴 유년기를 보낸 다음 에야 겨우 성인이 된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아주 큰 온혈 동물이나 누릴 수 있는 연령까지 살 수 있다). 대개 우리는 기껏해야 1년이나 2년의 생애를 끝내고 죽는 애완용 생 쥐나 저빌쥐를 불쌍히 여긴다. 사람이 1세기 가까이 사는 데 비하면 그 들의 일생은 얼마나 짧은가? 나는 이 장의 중심 주제로 우리가 이런 동 정심을 품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라고-물론 우리가 품는 개인적인 슬픔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리고 그것은 과학의 대상도 아니다-주장하고자 한다. '래그타임'에서 모건이 소형 포유류와 대형 포유류가 본질적으로 같다고 말한 것은 옳았다. 그들의 수명은 각각의 생활 속도에 따라 비례 증감하며, 따라서 모든 동물은 거의 같은 길이의 생물학적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다. 소형 포유류는 빠르게 움직이고 생명의 불을 급속하게 태우고 짧은 기간을 산다. 반면 대형 포유류는 느린 속도로 장기간 생존한다. 그들 자신의 체내 시계로 측정하면, 서로 다른 크기의 포유류들이라도 모두 같은 시간을 사는 셈이다.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이 중요한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속 깊이 박혀 있는 서양식 사고 습관이다.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뉴턴의 절대적인 시간을 유일한 척도로 간 주하도록 훈련받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부엌에 걸려 일정한 속도로 똑 딱거리는 시계를 모든 사물에 들씌운다. 우리는 생쥐의 민첩함에 혀를 내두르고, 하마의 느린 움직임을 지루하다고 느낀다. 그러자 모든 동물 은 자신의 생물 시계에 적절한 보조에 맞추어 살아가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인 천문학적 시간이 생물에 대해 갖는 의의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31장을 참조). 동물들은 살아 남기 위해 절대 시간 을 측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슴은 언제 자신의 뿔을 재생시켜야 할지, 새는 언제 이동을 시작해야 할지 알아야 한다. 동물들은 각기 자신의 24시간 리듬으로 낮과 밤의 주기를 반복한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장거 리로 이동할 때 시차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것은 자연이 원하는 바보다 훨 씬 빠르게 지구 표면을 이동한 데 대해 우리가 지불하는 대가인 것이다. 그렇지만 절대적인 시간은 생물학적 시간을 측정하는 데에 적절한 척 도가 되지 못한다. 혹등고래의 장엄한 노래를 생각해보라. E. O. 윌슨 은 이러한 발성이 갖는 경외로운 효과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그 음 조는 사람의 귀에는 왠지 등골이 오싹하면서도 무척 아름답게 느껴진 다. 중저음의 신음 소리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소프라노 음이 갑작스럽게 음조가 오르내리는 비명과 반복되며 교차한다." 우리는 이 노래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 모른다. 어쩌면 혹등고래는 그 노랫소리로 서로를 찾아내어 매년 대양을 가로질러 이동하는 동안 함께 지낼 수 있는 지도 모른다. 아니면 구애하는 수컷이 짝을 부르는 연가인지도 모른다. 이 고래들은 제각기 특징 있는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의 매우 복 잡한 패턴이 매우 정확하게 몇 차례 되풀이된다. 내가 지난 10년 동안 알게 된 수많은 과학적 사실 가운데 한 마리의 고래가 부르는 노래가 30분 이상 계속된다는 로저 S. 페인의 보고만큼 감명 깊은 것은 없다. 나는 나단조 미사곡 첫머리에 나오는 약 5분간의 기도문도 제대로 기억 하지 못한다(그렇다고 내 노력이 모자란 것은 절대 아니다). 어떻게 한 마 리의 고래가 30분 동안 울고, 그 후 정확하게 그 곡조를 반복할 수 있 는 것일까? 30분 가량의 반복 주기는 도대체 어떤 용도를 가진 것일까? 그것은 우리들이 보기에는 너무 긴 노래이다. 우리는 (페인 기록 장치를 이용해 데이터를 충분히 조사하지 않는 한) 그것을 한 곡의 노래로 파악 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나는 고래의 신진 대사 비율을 상기했다. 사람과 비교해 고래의 생활 속도는 엄청나게 느 리다. 고래가 30분이라는 기간 동안 무엇을 지각하는지에 대해 과연 우 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혹등고래는 자신의 신진 대사율에 맞추어 세 계를 측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고래에게 30분의 노래는 우리들의 1분간의 왈츠에 해당하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더라도 그 노래는 가히 경이적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모든 동물에게서 발견된 단일한 과시display 가운데 가장 정교한 것이다. 나는 단지 고래 자신의 관점을 온당하게 평가하고 싶을 따름이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포유류가 평균적으로 대개 동일한 생물학적 시간 을 산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수치적으로 엄밀한 자료를 제공할 수도 있다. W. R, 스탈과 B. 군서, 그리고 E. 구에라가 1950년대 말엽 부터 1960년대 초에 걸쳐 고안한 방법에서는 체중과 같은 비율로 비례 증감하는 여러 가지 생물학적 성질을 대상으로 '생쥐-코끼리' 방정식을 구한다. 예를 들어 군서와 구에라는 포유류의 체중에 대한 호흡시간 (숨의 길이)과 박동 시간(심장 박동 1회의 길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다음과 같은 방정식을 세웠다 호흡 시간 = 0,0000470 x 체중^0.28 심장 박동 시간 = 0,0000119 x 체중^0.28 (수학이라면 절레절레 고개부터 흔드는 독자라도 이런 수식에 기가 질릴 필요는 없다. 이 방정식은 호흡 시간과 심장 박동 시간이 소형 포유류에서 대형 포유류로 옮아 감에 따라 체중의 약 0.28배의 비율로 증가한다는 것 을 이야기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이 두 개의 방정식을 양변으로 나누면 체중은 모두 같은 비율로 증가하기 때문에 약분이 가능하다. 호흡 시간 / 심장 박동 시간 = (0.0000470 x 체중^0.28) / (0.0000119 x 체중^0.28) = 4.0 이것은 심장 박동 시간에 대한 호흡 시간의 비율이 포유류가 얼마만 한 크기든 모두 4.0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포유류는 크기와 무관하게 모두 심장이 4번 박동할 때 한 번꼴로 호흡을 하는 셈이다. 소형 포유류는 대형 포유류보다 호흡과 심장 박동이 빠르지만, 동물의 몸집이 커짐에 따라 호흡과 심장 박동은 상대적인 비율로 느려진다. 또한 수명은 체중과 같은 비율로 비례 증감한다(소형 포유류에서 대형 포유류로 이동함에 따라 0.28배의 비율로). 이것은 호흡 시간과 심장 박 동 시간의 수명에 대한 비율이 모든 크기의 포유류에게서 일정하다는 의미이다. 위에서 했던 것과 같은 계산을 해보면, 포유류는 크기와 무 관하게 일생 동안 약2억 회의 호흡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따라서 심장 박동은 8억 회 가량이 되는 셈이다). 소형 포유류는 빨리 호흡하는 대신 짧은 기간밖에 살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 심장의 체내 시계와 호흡 리듬으로 측정하면 모든 포유류는 같은 기간 동안 사는 셈이다(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자신의 호흡 회수와 맥박을 계산해보고 자신이 훨씬 전에 이미 죽었어야 한다는 계산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호모 사피엔스는 지능이 발달했다는 사실 외에도 여러가지 측면에서 비정상적인 포유류이다. 우리의 수명은 같은 크기의 포유류 에게 '할당된' 수명의 약 3배나 되지만, 호흡은 '정상적인' 비율로 하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크기의 보통 포유류에 비해 일생 동안 약 3배만큼 호흡을 더 한다. 나는 이러한 여분의 수명이 네오테니가 가져다준 고마운 결과라고 생각한다). 하루살이는 성충이 되고 나서 단 하루밖에 살지 못한다. 아마도 이 곤충은 우리들이 평생을 사는 것처럼 그 하루를 경험할 것이다. 그렇다 고 세상의 모든 것이 상대적인 것만은 아니다. 하루살이처럼 세계를 짧 은 시간 동안만 흘낏 본다면, 더욱 긴 시간에 걸쳐 일어나는 사건을 해 석할 때 왜곡이 일어날 것이다. 다윈 이전 시대의 진화론자였던 로버트 챔버스는 1844년에 개구리로 변태해가는 올챙이를 바라보는 하루살이의 이야기를 썼다. 4월의 어느 날에 태어나 웅덩이 위를 날고 있는 하루살이가 물 속에 있는 올챙이를 지켜보고 있다고 하자. 하루살이가 노충이 된 오후, 그 정도로 긴 시간이 지났는데도 올챙이에게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 니, 하루살이는 올챙이의 아가미가 퇴화하고, 몸 안쪽의 폐가 아가미를 대체하고, 뒷다리가 자라나기 시작하고, 꼬리가 사라지면서 이윽고 육상의 주민이 되어간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지질학적인 시계로 재면 인간의 의식은 밤 12시가 되기 약 1분 전에 나타난 셈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이라는 하루살이들은 긴 역사 속에 묻혀 있는 메시지는 알지도 못한 채 태곳적 세계를 마음 대로 구부려 우리들의 의도에 맞추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가 4월의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살아 있기를 기원하자. 제30장 자연의 인력-박테리아, 새 그리고 꿀벌 "당신은 여자들 가운데 가장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유명한 말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수태되었음을 알릴 때 한 말이다. 중 세와 르네상스기 회화에 등장하는 가브리엘은 대개 정성 들여 그려진 새의 날개를 넓게 펼치고 있다. 작년에 피렌체를 방문하는 동안 나는 이탈리아 거장들이 그린 가브리엘 날개에 대한 '비교해부학'적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마리아와 가브리엘의 얼굴은 정말 아름다웠고 풍부한 몸짓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라 안젤리코와 마르티니가 그린 날개 는 복잡하고 아름다운 깃털은 달고 있었지만, 어딘지 굳어 있고 생기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다음 나는 레오나르도가 그린 그림을 보았다. 그가 그린 가브리 엘의 날개는 너무도 부드럽고 우아해서 나는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가브리엘의 얼굴을 조사하거나, 그가 마리아에게 준 충격을 생각할 겨 를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곧 나는 레오나르도가 그린 그림이 왜 남다른 차이를 갖는지 깨달았다. 새를 연구했고 날개의 공기 역학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었던 레오나 르도는 실제로 작동 가능한 날개를 가브리엘의 등에 그려 넣었던 것이다. 그 날개는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기능적이었다. 날개들은 방향이나 휘어 짐이 제대로 묘사되었을 뿐 아니라 깃털의 결도 정확하게 배열돼 있었다. 가브리엘이 조금만 더 가벼웠다면 신의 인도 없이도 혼자서 하늘을 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에 비해 다른 화가들이 그린 가브리엘은 실제로는 작동할 수 없는 약하고 서툰 장식물을 짊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심미 적인 아름다움과 기능적인 아름다움이 손에 손을 잡고(이 경우에는 날개와 날개를 잡고) 서로를 떠받쳐준다는 말을 상기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뛰어난 예에서-질주하는 치타, 사력을 다해 도망치는 가젤, 하늘로 솟구치는 독수리, 이리저리 헤엄치는 참 치, 그리고 심지어는 미끄러지듯 기어가는 뱀이나 느릿느릿 이동하는 자벌레 등-우리들이 아름다운 형태로 인식하는 것은 동시에 물리학적 문제에 대해 훌륭한 해결책을 주기도 한다. 진화생물학에 등장하는 적응의 개념을 설명하려 할 때 우리는 흔히 생물이 물리학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생물은 음식물을 섭취하고 이동할 수 있는 매우 능률적인 기계로 진화해왔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경우가 많다. 마리아가 가브리엘에게 어떻게 자신이 수태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 하면서, '나는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라고 묻자 천사는 "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라고 대답 했다. 그러나 자연이 할 수 없는 일은 무수히 많다. 그렇지만 자연은(신보다) 훨씬 뛰어난 일을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뛰어난 설계는 어떤 생물의 형태와 기술자가 만든 청사진의 일치에 의해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 나는 훨씬 더 충격적인 뛰어난 설계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 다. 그것은 자신의 몸 속에 직접 정교한 기계를 만드는 생물이다. 그 기 계란 자석이고, 그 생물은 '하등한' 박테리아이다. 가브리엘이 떠난 후 마리아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하늘의 도움으로 수태한 엘리사벳을 방문 했다.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의 아기(후일 세례자 요한이 된다)는 "복중에서 뛰놀았다('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 중에서 뛰노는지라', 누가복음 1장 41절/옮긴이)". 그리고 마리아는"et exaltavit humilis(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누가복음 1장 52절/옮긴이)"라 는 1행-훗날 바흐에 의해 비견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게 작곡되었다 -을 포함하는 성모송을 불렀다. 모 든 생물 가운데 가장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전통적인 (그리고 불합리한) '생명의 사다리' 첫번째 계단을 이루고 있는 미세한 크기의 박테리아는 다른 생물이라면 그것을 나타내는 데 수 미터가 필요했을 뛰어난 경이와 아름다움을 겨우 수 미크론으로 표현하고 있다. 1975년에 뉴햄프셔 대학의 미생물학자 리처드 P. 블레이크모어가 매 사추세츠 주의 우즈홀 근처의 퇴적물 속에서 '주자성magnetotactic' 박테리아를 발견했다(주지성geotactic 생물이 중력이 작용하는 방향으로 향하고 주광성phototactic 생물이 빛이 오는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과 마찬 가지로, 주자성 박테리아는 자기장 속에서 정해진 방향을 따라 일렬로 헤엄쳐 간다). 그 후 블레이크모어는 1년 동안 일리노이 대학의 미생물학자 랄프 울프와 함께 주자성 박테리아의 순수한 계통을 분리, 배양하는 데 성공 했다. 그런 다음 블레이크모어와 울프는 자기물리학의 전문가인 매사 추세츠 공과대학의 국립 자기 연구소의 리처드 B. 프랭켈에게 도움을 청했다(나는 자신의 연구에 대해 인내심 깊고 명쾌하게 설명해준 프랭켈 박사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프랭켈과 그의 동료들은 그 박테리아 각 균체 속에는 한 변이 약 500 옹스트롬인 정육면체에 가까운 형태의 불투명한 소립자 20개 가량이 한 개의 자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1옹스트롬은 1밀리미터의 1 천만분의 1이다). 이 소립자들은 자철광(Fe3O4)이라는-천연 자석이라 고도 불린다-자성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그 후 프랭켈은 박테리아 1개당 자기 모멘트의 총량을 계산해서 각 균체가 브라운 운동의 방해 작용에 저항해 지구의 자장 속에서 스스로의 방향을 잡기에 충분할 만큼 자철광을 함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들의 몸을 안정시키는 중력이나 곤충 정도의 중간 크기 물체에 작용 하는 표면 장력 등에 영향을 받지 않을 만큼 작은 입자들은 그것들이 부유 하고 있는 매개물의 열에너지에 의해 임의적인 방식으로 서로 충돌한다. 이것을 '브라운brown 운동'이라고 한다. 창문으로 비쳐 든 햇볕 속에서 먼지 입자들이 '춤추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브라운 운동의 한 예이다). 주자성 박테리아는 자신의 극미한 몸 속에서 나침반으로 기능할 수 있는 실질적으로 유명한 구조물을 이용해 놀라운 기계를 만든 것이다. 프랭켈은 왜 자철광이 소립자로 배열되어야 하는지, 또한 그 소립자는 왜 한 변의 길이가 약 500 옹스트롬이어야 하는지를 설명해주었다. 유효한 나침반으로 작용하기 위해 자철광은 이른바 단자구single domain입자로-북쪽과 남쪽을 가리키는 양극을 가지고 단일한 자기 모멘트를 갖는 작은 자석 조각으로-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박테 리아는 자기 모멘트의 N극이 이웃의 S극에 접하며-프랭켈의 말을 빌리면, "서커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코끼리들이 머리를 서로의 엉덩이에 대고 동그 랗게 원을 그리듯이"-일렬로 나란히 선 입자의 고리를 이루고 있다. 이런 식으로 고리 전체는 북쪽과 남쪽을 가리키는 양극을 가진 자성 쌍극자로 기능하는 것이다. 만약 입자의 크기가 더 작다면(한 변이 400옹스트롬 이하), 그 입자들 은 '초상자성superparamagnetic' 을-상온에서의 열에너지가 그 입자 내부 에서 자기 모멘트의 방향 전환을 일으킬 것이라는 엄청난 말-가질 것이다. 반면 만약 입자의 한 변 길이가 1,000옹스트롬보다 크면, 제각기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개별적인 자구magnetic domain들이 그 입자 내부에 형성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이 그 입자 전체의 자기 모멘트를 줄어들게 하거나 상쇄시킬 것이다. 따라서 프랭켈은 "이 박테리아는 나침반으로 작동하기에 가장 적절한 크기인 500옹스트롬의 자철광 소립자를 만들어 물리학적으로 흥미로운 문제를 해결한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진화생물학은 주로 '왜'를 다루는 과학이기 때문에 이렇게 작 은 생물이 자석을 이용해서 애당초 무엇을 하려 했는가라는 물음을 제 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한 개의 박테리아가 몇 분의 생존 기간 동안 활동 하는 범위는 수 인치 정도에 불과하니 북쪽이나 남쪽을 향하는 운동이 어떤 적응적인 움직임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박테리아가 선호하는 운동 방향이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 것일까? 프랭켈은 이런 박테리아에게는 이동 능력이 가장 중요할 것 이라고 주장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 그것은 매우 설득력 있는 설명 이었다. 아래쪽은 수중 환경속에서 퇴적물이 가라앉는 방향이고, 또한 박테리아가 좋아하는 산소 압력에 도달하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그렇 다면 이 경우 '천한 사람'은 자신의 지위를 더 낮게 해주기를 바라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박테리아는 어느 쪽이 밑을 향한 방향인지 어떻게 알 수 있 는 것일까? 우리의 오만함과 편견에 비추어본다면 이런 물음은 한낱 어 리석은 질문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박테리아는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밑으로 떨어질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들이 위에서 밑으로 떨어지는 것은 중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력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까닭은 우리의 몸이 크기 때문 이다(중력은 물리학에서 가장 '약한 힘'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예이다[중력, 전자기력, 약한 핵력, 강한 핵력으로 이루어지는 자연계의 네 가지 기본력 가운데서 중력이 가장 약하다/옮긴이]). 우리는 서로 경쟁하는 여러 가지 힘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세계에 살고 있고, 그 힘들의 상대적인 세기는 일차적으로 그 힘이 작용하는 물체의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크기를 가지며 우리에게 친숙한 생물들에서는 부피에 대한 표면적의 비율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생물체가 크면 클수록 이 비율은 작아진다. 면적은 길이의 제곱에 비례하고, 부피는 길이의 세제 곱에 비례해서 증가하기 때문이다. 곤충과 같은 작은 생물은 몸 표면에 작용하는 여러 가지 힘들에 의해 지배받는다. 어떤 곤충은 수면 위를 걸을 수 있다. 또한 천정에 거꾸로 매달려 걸을 수 있는 종류도 있다. 그것은 표면 장력이 아주 강한 반면 천정에서 이 곤충을 떼어놓으려는 중력이 아주 약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중력은 부피에 대해(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정한 중력장에서 부피에 비례하는 질량에 대해) 작용한다. 사람은 부피에 대한 표면적의 비율이 작기 때문에 중력에 의해 지배받는다. 그러나 곤충은 중력으로 인해 어려 움을 겪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박테리아의 경우에는 그런 일이 전혀 없다. 박테리아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와는 전혀 달라 우리는 사물의 존재 방식과 작동 방식에 대한 기존의 고정 관념을 모두 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에 여러분이 텔리비전에서 '마이크로 결사 대'를 볼 기회가 있다면, 주연을 맡은 라크엘 웰치와 포식성 백혈구 등에서 잠깐 눈을 돌려 과연 탐사자들이 현미경으로나 알아볼 수 있는 극미한 크기로 인체 속에서 여행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라(영화에서 그들은 마치 보통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보다도 브라운 운동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임의적으로 움직이는 얼룩으로 인해 뿌옇게 흐려진다. 또한 아이작 아시모프가 지적하듯이 이 정도 척도의 세계에서는 혈액의 점성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들의 탐사선은 프로펠러를 돌려 추진해 나갈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아시모프는 그 탐사선이 박테리아처럼 편모를 추진 수단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갈릴레오 이래 비례 증감론의 제1인자였던 다시 톰슨은 만약 박테리 아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모든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뛰어난 저서 '성장과 형태에 관해서'(1942년에 초판이 발간되었지만, 아 직도 절판되지 않았다)에서 그는 '크기에 관하여'라는 장을 다음과 같은 명문으로 끝맺고 있다. 생명계는 물리학이 다루는 크기에 비교하면 실로 좁은 범위를 갖는다. 그렇지만 생명계는 인간, 곤충, 세균이 살아가면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담당하는 상이한 세 가지 조건을 모두 포괄할 수 있을 만큼 폭넓다. 인간은 중력에 지배되며 어머니인 대지를 발판으로 삼아 살아간다. 물방개는 수면을 사활의 터전으로, 즉 위험하기 짝이 없는 철조망이자 동시에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지지대로 삼고 살아간다. 세균이 생활하고 있는 제3의 세계에서 중력은 잊혀지고 액체의 점성, 스토크스(Stokes, 영국의 물리학자 이름으로 점성의 단위로 사용된다/ 옮긴이)의 법칙이 지배하는 저항, 브라운 운동에 의한 분자의 충돌, 그 리고 이온화한 매질의 전하 등이 물리적 환경을 구축하며 생물에 대해 강력하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곳에서 우세한 여러 가지 요인은 우리들의 척도에서는 더 이상 영향을 발휘하지 못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경험한 적이 없는 세계, 모든 선입견을 근본에서부터 뜯어 고치지 않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박테리아는 어떻게 어느 쪽이 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우리는 자석을 오직 평형상의 방향을 정하는 데에만 쓰기 때문에 지구의 자장이 수직 방향으로 작용하는 성향도 있으며, 그 세기는 위도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때가 많다(실제로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수직 방향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나침반은 수직 방향의 흔들림이 생기지 않도록 제작 되어 있다. 인간은 중력에 지배되는 대형 생물이기 때문에 어느 쪽이 밑 인지를 알고 있다. "어느 쪽이 위인지" 모른다고 말하면 바보 취급을 당 하는 것은 오직 우리가 살아가는 거시 규모뿐이다). 나침반의 바늘은 지구 자력선의 방향을 가리킨다. 적도상에서 자력선은 지구 표면에 대해 수평이다. 그러나 양극으로 갈수록 자력선은 차츰 지구의 내부를 향해 기울어진다. 그리고 자극에 다다르면 자침은 바로 아래쪽을 가리킨다. 지금 내가 있는 보스톤의 위도에서는 실제로 수직 성분이 수평 성분보다 강하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자침인 박테리아가 북쪽을 향해 헤엄 칠 때, 그 박테리아는 우즈홀에서는 아래쪽을 향해 헤엄치는 것이다. 박테리아의 나침반에 이러한 기능이 있으리라는 것은 아직까지는 순 전히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박테리아가 아래쪽을 향해 헤 엄치기 위해 그 자석을 사용하는 것이라면(서로 다른 박테리아를 찾기 위 한 목적이거나, 또는 우리에게는 낮선 그들만의 세계에서 오직 신만이 알 수 있는 어떤 일을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검증 가능한 몇 가지 예측 을 할 수 있다. 즉 적도 부근의 생활에 적응해 자연적인 개체군을 형성하고 있는 동일 종의 구성원들은 자석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자침이 수직 성분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남반구에서는 주자성 박테리아가 역전된 극성을 나타내고, 자남극을 찾아 헤엄칠 것이다. 자철광이 그보다 몸집이 큰 여러 동물들의 몸을 이루는 구성 요소라 는 사실도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동물들의 경우 자철광은 모두 수평면 상에서 방향을 찾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사람 정도의 크기를 가진 생물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나침반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매패, 권패와 가까운 유연 관계에 있는 대합조개와 카이튼(chiton, 딱지조개류에 속하는 조개의 일종/옮긴이)은 주로 열대 지역 해수면 가까운 높이의 바위에서 산다. 이들은 치설이라 불리는 길다란 막대 비슷한 기관으로 바위에서 먹이를 얻는다. 이 치설의 끝부분은 자철광 으로 이루어져 있다. 많은 카이튼들은 자신들이 사는 장소에서 상당히 먼 거리까지 여행을 하기도 하지만, 여행이 끝난 다음에는 정확히 원래의 장소로 '귀향'한다. 여기에서 그들이 방향을 찾는 데 자철광을 사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그런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아무런 증거도 확보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카이튼이 지구의 자기장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자철광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확실치 않다. 프랭켈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자철광 입자들 대부분이 단자구의 상한을 넘어서고 있다고 말한다. 꿀벌의 어떤 종류는 복부에 자철광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꿀 벌이 지구 자기장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이 주제에 대 해서는 문헌 목록에 나와 있는 J. L. 굴드[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 이다], J. L. 쉬빙크, 그리고 K. S. 드파이에스의 글을 참조하라). 꿀벌은 수직면을 이루고 있는 벌집 표면에서 그 유명한 춤을 춘다. 꿀벌은 이 춤을 통해 태양과의 관계에서 먹이가 있는 장소까지의 방향을 중력과의 관계에서 춤을 춘 각도로 변환시키고 있는 것이다. 만약 벌집이 눕혀져 꿀벌이 수평면상에서 춤추지 않으면 안 된다면, 그들은 중력과의 관계에서 방향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처음에는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없다. 그러나 수 주일이 지나면 그들은 마침내 그들의 춤을 나침반과 같은 방향으로 맞출 수 있게 된다. 게다가 방향에 대한 아무런 암시도 얻을 누 없는 텅빈 벌통 속에 꿀벌의 한 무리를 옮겨놓으면, 원래의 벌통과 같은 자력선의 방향에 맞추어 새로운 벌집을 짓는다. 역시 집을 찾아가는 데 선수인 비둘기들은 뇌와 머리뼈 사이에 자철광으로 이루어진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자철광이 단자구로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의 자석과 같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문헌 목록의 C. Walcott et al., 1979를 참조). 이 세계는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는 신호들로 가득 차 있다. 작은 생 물들은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힘들로 가득 찬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우리와 비슷한 크기의 많은 생물들도 우리에게 익숙한 감각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능력을 갖는다. 박쥐는 우리가 들을 수 없는-극소수의 사람들은 들을 수 있지만-주파수로 음파를 발사하는 방법으로 방해물 을 피해 간다. 많은 곤충들은 자외선을 볼 수 있으며, 꽃의 '보이지 않는' 안내선을 따라 그들이 먹이로 삼는 꿀로 인도되며, 이 과정에서 다른 꽃으로 꽃가루를 옮겨 수정을 돕는다(식물들은 곤충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러한 방향을 지시하는 색 줄 무늬를 사용하는 것이다) . 이런 점들을 생각한다면 우리들이 얼마나 형편없는 지각력을 가지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처럼 매력적이고 생생한 신호들에 둘 러싸여 있으면서도 우리는 자연 속에서 보지(듣지, 냄새 맡지, 촉감으로 느끼지, 맛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평범한 마술사들의 묘기도 우리의 지각 범위를 넘어서 영혼의 세계를 흘낏 들여다보는 새로운 힘이라도 되는 양 쉽사리 속아 넘어간다. 비일상적인 것은 환상일 수 있다. 그리고 돌팔이들의 피난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초인적'인 지각 능력은 새, 꿀벌, 박테리아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생물들 속에 실제로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들이 직접 감지할 수 없는 것을 느끼고 이해하기 위해서 과학이 만들어낸 도구들을 사용할 수 있다. 후기 박테리아가 자신의 체내에 자석을 만든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프랭켈은 이 작은 생물에게는 북쪽으로 헤엄치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아래쪽으로 헤엄치는 것(그것은 북반구의 중위도나 고위도 지방에서 나침반을 가진 생물체들에게 또 다른 중요성을 갖는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추측했다. 그의 추측에 고무되어, 나는 프랭켈 의 설명이 옳다면 남반구의 자성 박테리아는 아래쪽으로 헤엄치기 위해 서 남쪽 방향으로 헤엄칠 것이라고, 다시 말해 그들의 자극성이 북반구 에 있는 같은 종류의 박테리아와 반대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1980년 3월에 프랭켈은 동료 R. P. 블레이크모어와 A. J. 칼마인과 함께 쓴 논문을 내게 보내주었다. 그 논문은 아직 출간되기 전의 것이 었다. 그들 두 사람은 뉴질랜드와 태즈메이니아로 가서 남반구의 자성 박테리아의 자극성을 조사했다. 그 결과 실제로 그 박테리아가 모두 남 쪽으로, 그리고 아래쪽으로 헤엄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발견으로 프랭켈의 가설과 내 글의 기본 입장은 명쾌하게 입증된 셈이다. 또한 그들은 매우 흥미로운 실험을 통해 또 다른 확증을 얻을 수 있 었다. 우선 그들은 매사추세츠 주 우즈홀에서 자성 박테리아를 채집해 북쪽으로 헤엄치는 세포들의 표본을 두 무리로 나누었다. 그들은 그 중 한 무리를 보통의 극성을 가진 실험실에서 수 세대에 걸쳐 배양하고, 나머지 한 무리는 남반구의 상태를 모의 실험하기 위해 반대 극성을 갖 는 실험실에서 증식시켰다. 수 주일이 지나자 보통의 극성을 가진 실험실에서는 북쪽으로 헤엄치는 세포가 여전히 지배적인 데 비해, 반대의 자성을 갖는 실험실에서는 남쪽 으로 헤엄치는 세포가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박테리아의 세포는 일생 동안 극성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이 극적인 변화가 나타난 것은 아마도 아래쪽으로 헤엄치는 능력에 대해 자연 선택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쪽 실험실에서도 북쪽으로 헤엄치는 세포와 남쪽으로 헤엄 치는 세포가 나타날 수 있지만, 자연 선택이 아래쪽으로 헤엄칠 수 없는 개체들을 신속하게 제거해버릴 것이다. 프랭켈은 지금 적도에서, 즉 자기장에 아래로 향하는 성분이 전혀 없 는 장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조사할 계획이라고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