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과학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다 제13장 넓은 모자와 그 편협한 마음 1961년 2월부터 6월에 걸쳐 조르주 퀴비에 남작의 망령이 파리 인류학회에 출몰했다. 프 랑스 박물학계의 아리스토텔레스라고까지 불렸던-대단히 뻔뻔스러운 호칭이었지만, 그는 그 호칭을 굳이 거부하려 하지않았다-위대한 퀴비에는 183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정신이 깃들여 있는 육체의 납골당은 폴 브로카와 루이피에르 그라티올레가 뇌의 크기와 지능 사이의 관계를 둘러싸고 논쟁을벌일 무렵까지 존속했다. 논쟁의 첫 라운드에서 그라티올레는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탁월한인물은 큰 머리로 식 별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과감히 주장했다(그렇지만 오해하지 말라. 그라티올레는 군 주제의 화신으로서 결코 평등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유럽 백인 남성의 우월성을 뒷받침하 기 위한 다른 근거를 제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한편 인류학회의 창설자이자 당시 최고의 두개 계측학자였던 브로카는만약 뇌 크기 의 차이가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각 인종의 뇌를 연구하는일은 흥미와 유용성을 모 두 잃게 될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그는 이런 질문을던졌다. 자신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즉 여러 인종의 상대적가치와 두개골에 대한 계측 결과가 무관하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인류학자들은 지금까지 머리의 크기를 재 는 데 그처럼 막대한 시간을 할애한것일까. 지금까지 인류학회에서 토론된 여러 가지 문제들 가운데 지금 우리앞에 놓인 문제만큼 흥 미롭고 중요한 문제는 없다. 두개골학의 중요성은인류학자들에게 매우 강한 인상을 주어, 우 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인류학의 다른 영역을 포기하면서까지 두개골 연구에만 헌신해왔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자료 속에서 여러 인종의 지적 가치와 관계되는 모종의 정보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브로카와 그라티올레는 5개월에 걸쳐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훗날 그들 사이의 논쟁을 출 간한 회보는 약 200쪽에 달했다. 논쟁은 때로 격렬한감정적 싸움으로 치닫기도 했다. 논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브로카의 상관 중 한 사람이 중요한 일격을 가했다. "뇌의 부피가 지능에 대해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대개가 작은머리를 가지고 있 음을 나는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결국브로카측이 압승을 거두었다. 이 논쟁이 계속되는 동안 조르주 퀴비에의 뇌만큼 브로카에게 중요한정보를 제공하는 원 천은 없었고, 또한 그의 뇌 이상으로 빈번한 논쟁의주제이자 폭넓은 토론 대상이 된 것도 없었다. 당시 최고의 해부학자였으며. 동물을 하등한 것에서부터 고등한 것에이르기까지 인간중심 주의적인anthropocentric 사다리 형태로 분류하는게 아니라, 기능에 따라-동물이 어떻게 생 활하는가-분류함으로써 우리들의 동물계에 대한 이해를 올바로 세워준 사람, 퀴비에. 고생물학의 창시자이고, 멸종이라는 사실을 처음 밝히고, 지구와 생물계의역사를 함께 이 해하는 데 필요한 대격변catastrophes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퀴비에. 탈레랑(Talleyrand, 프랑스 정치가로 외상을 지냄/옮긴이)과 마찬가지로대혁명에서 군주제 에 이르는 모든 프랑스 정부에 일관되게 봉사하여 제 명을누리고 자신의 침상 위에서 세상 을 떠난 정치가, 퀴비에(퀴비에는 편지에서자신이 혁명에 공감하고 있는 것처럼 꾸며대고 있지만, 실제로는 대혁명의가장 떠들썩하던 시기를 노르망디 지방에서 가정 교사를 하며 지 냈다. 그는1795년에야 파리로 나와 그 후 단 한 번도 파리를 떠나지 않았다). 최근에 그의 전기를 쓴 F. 부르디에는 퀴비에 신체의 개체 발생을 말하고있지만, 그의 문 장은 퀴비에의 힘과 영향력에 대한 훌륭한 은유를 제공하고있다. "퀴비에는 몸집이 작고, 대 혁명이 진행되던 무렵에는 대단히 여위어있었다. 그런데 제정 시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살이 찌기 시작했다. 그리고왕정 복고가 되자 대단히 비만해졌다." 퀴에의 동시대인들은 그의 '큰 머리'에 경탄했다. 어느 숭배자는 그것이 "그의 풍모 전체 에 부정할 수 없는 위엄을 주어서 그의 얼굴은 깊은 명상에빠져 있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고 단언할 정도였다. 그런 이유로 퀴비에가세상을 떠났을 때, 동료 학자들은 학문적인 흥미 와 호기심으로 그 거대한두개골을 절개해보기로 했다. 1832년 5월 15일 화요일 오전 일곱 시, 당시 프랑스 최고의 의사와생물학자들이 조르주 퀴비에의 사체를 해부하기 위해 모였다. 그들은 내장부터시작해서 "특히 주목할 것이 없다" 는 사실을 확인한 후 두개골로 관심을 집중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강력한 지능을 가진 기계를 조사하려 하고 있다"라고당시 담당 의사는 쓰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기대는 충분한 보상을 얻었다. 조르주 퀴비에의 뇌 무게는 약 1,830그램으로 평균보다 400그램, 지금까지측정된 정상적인 뇌 중 최대의 것보다도 무려 200그램이나 더 무거웠다. 확인되지 않은 보고나 정확치 않은 추정에 의하면 올리버 크롬웰, 조나단스위프트, 그리고 바이런 경 등의 뇌가 거의 비슷한 크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퀴비에는 뛰어난 지적 능력과 뇌의 크기가 서로 상응한다는 직접적인 증거를제공한 셈이 다. 그러데 브로카는 논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주장상당부분을 퀴비에의 뇌에 맞추어 제기했다. 그런데 주장을 상세하게 조사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문제가 드러났다. 퀴 비에의 의사들은 너무 놀라고 열광한 나머지 그의 뇌와 두개골을 보존하는 것을 잊고 말았 던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두개골에 관한 측정 결과를 기록하지도 않았다. 따라서뇌 무게가 1,830그램 이라는 수치는 검증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어쩌면 수치가잘못된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라티올레는 뇌를 대신할 수 있는 대용품을찾으려고 애썼다. 그때 한 가지 영감이 떠올랐 다. "의사들은 항상 사람의 뇌 무게를측정하지는 않지만, 모자만드는 사람은 반드시 고객의 머리 크기를 잰다. 나는이 새로운 정보원을 통해 당신에게 흥미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 는(아니 내가 감히그렇게 바라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그라티올레는 그 위대한 인물의 뇌에 비하면 지극히 신빙성 없는 물건을증거로 제시했다. 그는 퀴비에의 모자를 찾아낸 것이다! 이렇게 하여 두 차례에 걸친논쟁으로 프랑 스 최고의 지식인들은 낡아빠진 펠트 모자가 갖는 의미를 심사숙고한 것이다. 그라티올레는 퀴비에의 모자 치수가 길이 21.8센티미터 폭 18.0센티미터였다고보고했다. 그런 다음 그는 '파리에서 가장 교양 있고 유명한 모자상의 한 사람'인M. 퓨리오라는 인물 에게 자문을 구했다. 퓨리오는 모자의 최대 표준은 21.5센티미터,폭 18.5센티미터였다고 그에 게 말해주었다. 이 정도로 큰 모자를 쓰는 사람은 좀처럼없지만, 퀴비에가 유일한 인물은 아 니었던 셈이다. 게다가 그라티올레는 그 모자가"아주 오랫동안 썼기 때문에 부드러워졌다" 는 사실을 자못 유쾌하다는 듯이 보고했다. 퀴비에가 그 모자를 살 때에는 아마 그정도로 크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퀴비에의머리 칼은 예외적일 만큼 숱이 많아서 항상 더부룩한 모습이었다. 그라티올레는이렇게 단언했다. "이것은, 설령 퀴비에의 머리가 대단히 컸다 하더라도 그 크기가예외적이거나 비길 데 없을 만큼은 아니었음을 명백히 입증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그라티올레의 논적들은 의 사들의 기록을 믿는 쪽을 선택했고, 모직물로된 모자 하나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기를 거 부했다. 그 후 20년 이상의 기간이지난 1883년, G 에르베라는 사람이 다시 퀴비에의 뇌 문 제를 들춰내 그 동안주목받지 못했던 한 가지 사실을 표면화시켰다. 즉 퀴비에의 머리는 분 명 실제로측정되었으며 단지 그 수치가 해부 기록에서 누락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두개골은 매우 컸다. 해부를 위해 그 유명한 두발은 깎여 있었다. 그에게 필적하는 최대의 머리 둘레 치수를 갖는 사람은 '과학자들과 문학자들'가운데 겨우 6퍼센트에 불과했고(그것도 두발을 포함해서 잰 치수로), 시종을들던 하인으로서는 전무했 다. 또한 에르베는 문제의 모직 모자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일화를 소개 했다. "퀴비에는 그의 손님 대기실 테이블 위에 자신의 모자를놔두는 버릇이 있었다. 그를 방문한 다른 교수나 정치가들이 이따금씩 써보면그 모자는 늘 눈 밑까지 내려왔다." 이렇게 해서 '클수록 좋다'는 원칙이 거의 승리할 단계에 이르면서에르베는 브로카가 가 로챈 승리를 목전에서 다시 빼앗아온 것처럼 보였따. 그러나 지나치면 부족한 것과 마찬가 지로 화가 될 수 있듯이 에르베에게도 문제가 발생했다. 퀴비에의 뇌가 다른 '천재'들의 뇌 를 훨씬상회할 만큼 큰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는 퀴비에의 해부 기록과 무척 허약했던 젊은 시절의 건강 기록을 샅샅히조사해서 퀴비 에가 '일과성청년성뇌수종transient juvenile hydrocephaly' 이라는길다란 명칭의 질병을 앓 았던 사실을 추측해냈다. 뇌수종이란 말 그대로 뇌에 물이고이는 병이다. 만약 퀴비에의 두 개골이 성장 초기 액체의 압력에 의해 후천적으로확장된 것이라면, 뇌는 정상 크기였던 것 이 크게 발육한 것이 아니라, 밀도를저하시키면서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부풀어올랐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확대된 공간이 뇌가 이상 크기로까지 성장하는 것을 허용했을까? 퀴비에의 뇌는 측정 후에 처분되어버렸기 때문에 에르베는 이 근본적인 문제를해결할 수 없 었다. 남아 있는 것은 1,830그램이라는 숫자뿐이었다. '퀴비에의 뇌가 손실되면서 과학은 지 금까지 얻은 가장 귀중한 자료 중 하나를 잃었다"라고에르베는 쓰고 있다. 표면적으로 볼 때 이 이야기는 한바탕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처럼 들린다. 프랑스 최고의 인류학자들이 죽어 세상을 떠난 동료 학자의 모자가갖는 의미를 둘러싸고 격 렬한 논쟁을 벌였다는 사실은 역사를 볼 때 가장 범하기 쉬운 위험한 추측, 즉 과거를 소박 한 얼간이들의 영역으로보고, 역사의 길을 진보하는 것으로 보고, 그리고 현재를 세련되고 개화된 세계로 보는 관점과 직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런 이야기를 웃음거리로 넘기고 만다면, 우리는 결코사태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단계에서 우리가 이야기할수 있는 한 인간의 지적 능력은 지난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만약옛날의 지적인 사람들이 현재의 우리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이는 문제에엄청난 정력을 기울였다면, 잘못된 것은 그들의 세계에 대한 우리들의이해이지 그들 의 인식 자체가 아니다. 과거에 있었던 무의미한 사태의 표준적인 예로 곧잘 인용되는 사례-바늘대가리에 천사가 몇 명 올라갈 수 있는가를 둘러싼 논쟁-도 실제로는신학자들이 5명인가 18명인가 하는 사 람의 숫자를 가지고 싸운 것이 아니라,하나의 바늘이 유한의 수를 수용할 수 있는지 아니면 무한의 수를 수용할 수있는지를 놓고 벌인 '논쟁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만 한다면 그 의미를 올바로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신학 체계에서는 천사가 유형인지 무형인지 여부가 매우 중요한 문제였기때문이다. 이 경우 19세기 인류학에서 퀴비에의 뇌가 결정적으로 중요했다는 사실을 올바로 이해하는 단 서는 앞에서 인용했던 브로카의 말 마지막 줄에있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자료 속에서 여 러 인종의 지적 가치에 관계되는 어떤 정보를 찾아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브로카와 그의 학파는, 그들이 '인간의 과학'에서 기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던 것-어느 개 인이나 집단이 다른 개인이나 집단보다 우수한 이유를설명하는-이 뇌의 크기와 지능과의 상관 관계를 통해 해결될 수 있음을 입증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들은 각각의 가치에 대한 선험적인 확신-남성 대 여성, 백인 대흑인, '천재' 대 범인 등-에 따라 사람들을 나누고 각각의 뇌 크기가 서로다르다는 사실을 입증하려 했 다. 저명한 사람(실은 남성)의 뇌는 그들의 주장을뒷받침해주는 증거 자료가 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퀴비에는 '알짜 중의알짜'였다. 브로카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었다. 일반적으로 뇌는 여성보다 남성 평범한 재능을 갖는 사람들보다 비범한 사람들, 열등한 인종보다는 우월한 인종이 더 크다. 그 밖의조건이 같을 때 지능의 발달과 뇌의 부피 사이 에는 주목할 만한 관계가 있다. 브로카는 1880년에 죽었지만, 그의 제자들은 뛰어난 뇌의 목록 작성작업을 계속해나갔다 (실제로 그들은 브로카 자신의 뇌를 그 목록에 추가했다. 그의 뇌는 1,484그램이라는 평범한 무게였지만 말이다). 고명한 동료학자들을 해부하는 것은 해부학자나 인류학자들 사이에서 가내 공업과같은 것이 되었다. 미국의 유명한 의사였던 E.A 스피츠카는 이런 말로 자신의 뛰어난 친구들을끌어들였다. " 내게는 사체 해부를 생각하는 것이 사체가 무덤 속에서분해되어가는 상태를 상상하는 것만 큼 싫지는 않다. " 모두 미국 민족학계의일인자였던 존 웨슬리 파월과 W. J. 맥기는 누가 더 큰 뇌를 가지고 있는지내기를 걸어 스피츠카가 그들의 사후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 는 계약을맺기까지 했다(그 결과는 막상막하였다. 파웰과 맥기의 뇌 크기는 거의 같아그 차 이는 몸의 크기 차이에 의해 빚어지는 정도에 불과했다). 스피츠카는 1907년까지 115명에 이르는 뛰어난 남성의 뇌에 대한 자료목록을 작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목록이 길어짐에 따라 그 결과는 더욱모호해져 갔다. 목록 맨 위쪽에는 1883년에 투르게네프가 드디어 2,000그램이라는 장벽을 돌파해 퀴비에를 제쳤다. 그러나 표 의 맨아랫부분에 이르면 당황과 굴욕감이 만연해진다.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미국의 시인/옮긴이)은 무게가 약 1,282그램밖에되지 않는 뇌 를 가지고도 미국 찬가의 여러 변형 판들을 듣고 예민하게 식별해낼수 있었다. 또한 골상학 (뇌의 국부적 영역의 크기로 정신적인 특징을 판정하는 독창적 '학문')의 창시자 프란츠 요 제프 갈의 뇌는 겨우 1,198그램밖에 되지 않았다. 그 후 1924년에 아나톨 프랑스는 2,012그램인 투르케네프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1,017그램 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렇지만 스퍼츠카는 결코 뜻을굽히지 않았다. 그는 선험적 인 선입견에 맞도록 자료를 세심히 선별해 한 사람의뛰어난 백인 남성의 큰 뇌, 아프리카 부시맨 여성의 뇌, 그리고 한 마리의 고릴라뇌를 순서대로 늘어세운 것이다(그는 흑인의 뇌 중 큰 것과 백인의 뇌 중 작은 것을골라서 순서를 뒤바꿀 수도 있었다). 여기서도 스피츠카는 조르주 퀴비에의 망령을 다시 불러내고 있다. 그는 이렇게결론지었 다 "퀴비에나 새커리(Thackeray, 영국의 소설가/옮긴이)와 줄루 족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종 족/옮긴이)이나 부시맨의 차이는 사람과 고릴라나오랑우탄과의 차이만큼 큰 것이다." 이 정도로 극명한 인종 차별은 오늘날의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찾아볼수 없을 것이다. 또 한 인종이나 남녀 등의 서열을 뇌의 평균 크기로 결정하려는 사람도 없으리라고 본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지능을 형성하는물질적 기반에 대한 열광적인 관심은 (마치 그것이 당연하기 라도 하듯)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실제로 우리들에게는 '큰 것이 좋은 것'이라는 조잡한 원칙이-대단히미묘하고 파악하기 힘든 질적인 것을 평가하기 위해 쉽게 측정할 수 있는양적 기준을 사용하는 것-여전히 존 재한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자동차와가치를 결정하는 데 사용하는 방법을 지금도 여전히 뇌에까지 적용하기도 한다. 이 글은 아인슈타인의 뇌의 행방을 다룬 최근 기사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렇다. 조사를 위해 적출되었던 아인슈타인의 뇌는 그 결과가 사후 25년이지난 지금까지 도 아직 공표되지 않고 있다. 남아 있는 일부는-다른 부분은여러 명의 전문가들에게 맡겨졌 다-캔자스 주 위치타의 한 사무소 '코스타 사이다Costa cider'라고 표시된 마분지 상자로 포장되어 있는 한 유리병속에있다. 지금까지 아무런 내용도 공표되지 않았던 것은 특이한 사실이 아무것도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뇌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지극히 평범한 남성의 범주에 속하는 것입니다"라고 그 유리병 주인은 이야기한다. 방금 내가 들은 것은 퀴비에나 아나톨 프랑스가 저세상에서 합창을 하듯 박장대소하는 소 리가 아닐까? 그들 두 사람은 고국의 속담 plus ca change, plus c'est la meme chose(세상 은 변화할수록 더 똑같아지는 법)를 몇 번이나 중얼대고있지나 않을까? 뇌의 물질적 구조가 어떠한 방법으로든 지능을 나타낸다는 것은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뇌 전체의 크기나 외 형은 뇌 자체의 가치에 관해 어떠한 이야기도 해주지 않는다. 나는 똑같이 재능 있는 사람 들이 면화밭이나 근무조건이 열악한 공장에서 살다 죽어간 것이 확실한 것 이상으로 아인슈 타인의 뇌무게나 대뇌 표면의 주름에 흥미를 갖지 않는다. 제14장 여성의 뇌 조지 엘리엇은 그의 작품 '미들 마치Middle March'서문에서 재능 있는여성들이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생애를 보내고 있는데 대해 한탄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그녀들의 생애가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은, 절대자가 여자의 본성을만드는 데 사용했던 바 로 그 부적절한 모호함 때문이라고 생각하는사람들도 있다. 만약 여자의 무능함 정도가 숫 자를 3까지밖에 셀 수없을 만큼 명백한 것이라면. 여성이 차지하는 사회적인 몫은 과학적인 확실함을 가지고 논의되어도 좋을 것이다. 엘리엇은 여성의 능력에는 선천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사고 방식을 시종 일관 공격했다. 그러나 1872년에 그녀가 이 글을 썼을 무렵, 유럽의인체측정학anthropometry을 주도한 인물 들은 여성의 열등성을 '과학적인 확실함을 가지고' 측정하기 위해 활발한 시도를 벌이고 있 었다. 인체측정학, 즉 사람의 몸 크기를 재는 학문은 오늘날에는 과학의 최첨단을 달리는 인기 있는 분야가 아니지만, 19세기에는 오랜 기간에 걸쳐 인문학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것은 지 능 검사가 인종, 계급, 남녀 등사이에 부당한 비교를 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두개골 측 정을 대체할 때까지 널리 이루어지고 있었다. 두개골 측정, 즉 두개골의 여러 부분의 크기를 재는 학문은 가장 큰주목과 경외를 받고 있었다. 이 영역에서 의문의 여지가 없을 만큼확실한 일인자였던 폴 브로카는 파리 대학 의 학부의 외과학 교수로,그의 주위에는 문하생과 아류들 일파가 모이고 있었다. 그들의 연구는 너무도 정밀하고 누가 보더라도 논박의 여지가 없을 정도여서 큰 영향력을행사했고, 19세기 과학의 가장 소중한 보배로 높이 평가 받았다. 브로카의 연구는 어떤 반론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용의 주도하고 면밀한 주의력과 정밀성을 발휘해 측정을 계속했기 때문일까?(실제로 그는 그러했다. 브로카가 수 립한 정밀하기 그지없는 처리 절차에는 나도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제시한 숫자는 실로 확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과학은 추론에 의한 실천이지 무수한 사실들로 이루어진 목 록이 아니다. 따라서 숫자 그 자체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여러분이 그 숫자를 이용해 무 엇을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브로카는 자신을 객관성의 사도로, 즉 사실 앞에서는 머리를 굽히고 모든미신이나 감상은 철저히 물리치는 인간으로 묘사했다. 그는 이렇게 단언했다. "사람의 지혜가 진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거나, 진리 앞에 굴복하지 않는 신앙은-아무리 존경스럽다 하더라도-존재하지 않고, 또한 그와 같은 관심사는-아무리 정당한 것이라 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여자는 남자보다 작은 뇌를 갖고 있으며, 이 사실에대해 브로카는. 그것은 남성 사회의 일반적인 편견을 뒷받침해주는 것처럼보일지 도 모르지만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과학적인 진리라고 주장했다. 브로카의 문하생 가운데 가장 말썽꾼이었던 L. 마누브리에는 여성의열등성을 받아들이기 거부했다. 그는 브로카가 제시한 숫자들이 여성들에게 지운 무거운 짐에 대해 동정을 나타 내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지금까지 여성들은 각자의 재능과 자격 면허장을 여실히 증명해왔다. 그러나 그런 여성들 의 재능이 콩도르세나 존 스튜어트 밀 등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숫자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러한 숫자들은 마치 커다란 망치처럼 불쌍한 여성들의 머리 위에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숫자에는, 교회의 신부들이 여성을 멸시하며 보내는 최악의저주보다 더 흉악스 런 논평이나 빈정거림이 뒤따랐다. 과거 신학자들은 여성이 영혼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를 문제 삼았다. 그로부터수세기가 지나자 여성에게 인간적인 지능을 인정하지 않는 과학자들 이 나타났다. 브로카의 주장은 두 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성립될 수 있었다. 하나는근대 사회에서 남자 의 뇌가 여자보다 크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들이고, 다른 하나는 시대가 변천해 가면서 남자의 우월성이 더 높아졌다고추정되는 자료들이다. 이러한 것들을 포괄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자료는파리에 있는 네 군데의 병원에서 자신이 직접 수행한 사체 해부를 통해얻어낸 것이었다. 그는 292명의 남자 뇌를 측정한 결과 1,325그램이라는 평균 중량을산출했고, 140명의 여자 뇌에 대해서는 평균 1,144그램이라는 결과를얻어냈다. 그러니까 181그램의 차이, 즉 남자 뇌 무게의 14퍼센트가 차이진것이다. 물론 브로카는 이 차이의 일부가 남자의 신체가 여자보다 크다는사실에서 연유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몸의 크기가 미치는 영향을 측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여자가 남자만큼 이지적 이지 않다는 것은-사실 이것은 자료를 통해 검증되어야할 전제일 뿐 그 자료에 의거해 이 론화할 내용이 아니다-우리가 선험적으로 알고 있는 사항이기 때문에 몸의 크기는 이러한 차이를 모두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우리는 여성의 뇌가 작은 것이 여성의 신체가 작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의존하는가라는 물 음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티데만은 이런식의 설명을 제시했다. 그러나 우리는 여성이 평 균적으로 남성만큼이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 차이는 과장된 것이 아니라바로 진 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여성의 뇌가 상대적으로 작다는 사실에 대해 일부 는 체격상으로 열등하기 때문이며일부는 지능상으로 열등하기 추정해도 좋을 것이다. 엘리엇이 '미들 마치'를 발간한 이듬해인 1873년, 브로카는 롬모르(L'Homme Mort, 죽은 사람이라는 뜻임/옮긴이) 동굴에서 발견된 선사시대인의 두개골 용량을 측정했다. 그 결과 그는 현대인의 경우 그 차이는개체군에 따라 129.5부터 220.75세제곱센티미터 사이에 달하는 데 비해그 시대 남성과 여성의 뇌 사이에는 약 99.5세제곱센티미터의 차이밖에나지 않는다 는 사실을 발견했다. 브로카의 문하생들 가운데 수제자인 토피나르는, 시대가 경과하면서남녀의 뇌용량에 차이 가 커진 것은 우월한 남성과 열등한 여성에 대해 각기별개의 진화적 압력이 가해진 결과라 고 설명했다. 생존 경쟁에서 두 사람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싸우는 남자. 내일에 대한 모든 우려와 책임을 짊어지는 남자, 환경이나 경쟁 상대인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항상 능동적인 남자는그가 보호하고 키우는 여자, 아무런 무거운 짐도 지지 않고 아이들을 키우고 남성과 섹스를 하는 등의 수동적인 역할을 주된 임무로삼으며 항상 앉아서 일하는 데 익숙해진 여자보다 더 큰 뇌를 필요로 한다. 1879년에 브로카 진영에서 여성 멸시의 기수였던 귀스타브 르 봉은이러한 자료를 이용해 근대 과학 문헌 가운데 여성에 대해 가장 악질적인 공격이라고 일컬어질 만한 내용의 글을 발표했다(아리스토텔레스만큼지독하지는 않지만). 나는 그의 관점을 브로카 일파를 대표하는 것으로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의견은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인류학 잡지에 게재되었다. 르 봉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파리 사람들처럼 가장 지적인 인종에서도 여성들은 가장 발달한 남성의 뇌보다는 고릴라 의 뇌에 더 가까운 뇌 크기를 갖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열등성은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다. 따라서 우리가 논의할 수 있는 것은 열등성의 정도일 뿐이지열등 성 자체는 아니다. 오늘날 시인이나 작가들뿐 아니라 여성의 지능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까지도모두 여성들 이 인류 진화의 가장 열등한 형태이며 또한 그녀들이 (남성)성인이나(남성) 교양인이라기보 다는 아이들이나 야만인에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여자들은 변덕스러움, 사고와 논리의 결여, 추론 능력의 부재 등에서만 남성을 능가한다. 보 통의 남성보다 훨씬 뛰어난 걸출한 여성이 일부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 이다. 그러나 그런 여성들은, 예를 들면 아주 드물게 머리가 둘 달린 고릴라와같은 괴물이 태어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예외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여성들을 완전히 무시하더라도 별반 지장이 없을 것이다. 나아가 르 봉은 자신의 견해가 갖는 사회적인 함축을 전혀 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당 시 미국의 진보적인 개혁자들이 여성들에게도 남자들과 똑같은 기준으로 고등 교육을 시켜 야 한다고 주장한 데 대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여성에게 동등한 교육을 베풀어 그 결과로서 그녀들에게도 똑같은목표를 추구하게 하려는 욕구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망상이다... 여성들이 자연으로부터 받은 열등한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가정을 떠나 지금 우리 들이 벌이고 있는 싸움에 가세하는 날, 그날이야말로 사회 혁명이 시작되는 날일 것이다. 그 리고 가족이라는 신성한 연대를 유지하던 모든 것은 전부 사라져버릴 것이다. 여러분들의 귀에 익숙한 말이 아닌가?(내가 이 에세이를 쓸 무렵까지만해도 나는 르 봉이 라는 사람이 화려한 언변의 소유자이기는 하지만 학계에서는주변부에 머문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후 나는 그가 유력한과학자로서 사회심리학의 시조 가운데 한 사람이 며, 오늘날에도 자주 인용되는군집 행동에 관한 획기적인 저작 '군중심리'(1895년)를 썼고, 무의식의 동기에관한 연구로 유명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이러한 견해 전체의 기반이 된 브로카의 자료를 조사해보았다. 그 결과 그가 제시한 숫자는 대체로 정확하지만 그 해석에는 정당한 근거가 빠져 있음을 발 견했다. 시대가 흐르면서 그 차이가 커진다는 주장을 뒷받침해줄 만한 자료들은 간단히 폐 기시킬 수 있다. 브로카의 주장은 롬모르 동굴에서 출토된 견본들-모두 7개의 남자 두개골과 6개의 여자 두개골-을 기반으로 해서 세워진 것이었다. 이렇듯 빈약한 자료를 가지고 그만큼 광범위한 결론을 도출해낸 경우는 다시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1888년에 토피나르는 브로카가 파리 시내의 몇 군데 병원에서 수집한더욱 광범위한 자료 를 공표했다. 브로카는 뇌의 크기와 함께 신장과 연령을 기록해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현대 의 통계학을 이용해 그것들(신장과 연령)이 미치는 영향을 제거할 수 있다. 뇌의 무게는 노 령화됨에따라 감소한다. 그런데 브로카가 조사한 여성들은 평균적으로 남성들보다 훨씬 나이가많았다. 또한 뇌의 무게는 키와 함께 증가한다. 그가 조사한 남성의 평균신장은 여성보다 0.5피트 정도 컸다. 나는 뇌의 크기에 대한 신장과 연령의영향을 동시에 평가하는 다중회귀 법multiple regression이라는 기술을응용해보았다. 여성에 대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 남성의 평균 신장 과 평균연령에 상응하는 여성의 뇌는 1,212그램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신장과 연령을 고려해 그 차이를 수정한 결과 브로카가 제시한 181그램이라는차이가 113 그램으로 약 1/3 이상 감소했다. 나는 뇌의 크기에 중대한 영향을미친다고 알려진 다른 요 인들을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머지 차이가 어떻게나온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여기에 는 사인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흔히 퇴행성 질병은 뇌의 크기를 상당히 축소시킨다(그 영향은 노령화에따른 감소와는 다 른 것이다). 역시 브로카의 자료에 대해 연구했던 유진슈라이더는 사고로 죽은 사람의 뇌는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뇌보다 평균60그램 가량 무겁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 미국 내 의 병원에서 얻은 최신 자료에따르면, 퇴행성 동맥 경화증에 의한 사망과, 상해 또는 사고로 인한 사망사이에는 100그램에 달하는 차이가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브로카가 해부한 사체의 대부분은 고령의 여자였으며, 더욱이 남성들에비해 만성 퇴행성 질환이 더 흔하게 일어나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뇌의 크기를 조사하는 오늘날의 연구자들이 몸의 크기가 미 치는 강한 영향력을 없앨 만한 적절한 척도에 관해 아직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분적으로는 신장이 타당한 척도가 될 수 있지만, 같은 키의 남자와 여자가같은 체격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체중은 신장의 경우보다 더 적절치 못하다. 체중에 나타나는 변이의 대부분은 천성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후천적인영양 섭취의 정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살이 쪘느냐 여위었느냐 여부는뇌의 크기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 문이다. 마누브리에는 1880년대에 이 주제를 연구하기 시작하여 근육의 양과 세기가 그 척 도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이 파악하기 힘든 특성을 측정하였다. 그결과 같은 신장의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도 남자에게 유리한 현저한 차이가나타났지만 그가 '성에 따른 부피 sexual mass'라 이름 붙인 것에 의해 보정한결과 실제로는 여자 쪽이 뇌의 크기에서 약간 앞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따라서 신장과 연령을 고려해 산출한 113그램이라는 차이는 지나치게큰 것이었다. 아마 실제 차이는 제로에 가까울지도 모르며, 이것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에게 유리할지도 모 른다. 그런데 113그램이라는차이는 브로카의 자료에 나오는 5피트 4인치의 남자 뇌와 6피트 4인치의 남자 뇌 사이의 평균적인 차이이기도 하다. 우리는-특히 나처럼 키가 작은 사람들 은-높은 지능이 키가 큰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어쨌든 브로카의 자료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그의자료가 남자가 여자보다 큰 뇌를 가지고 있다는 단호한 주장을 허용하지 않는것만은 확실하다. 브로카 일파가 사회에 미친 영향을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뇌에 관한 그의 일 련의 발언이 사회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인 하나의 집단에 대한 단발적인 편견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의 발언은, 실제로는 특정 시대의 사회적 차별에 불과한 것을 생물학적으로 이미 결정된 것인 양 호도하는 보편론이라는 전체 맥락 속에서 판단될 필요가 있다. 여성, 흑인 빈민 등의 여러 집단들이 똑같은 멸시를 받아왔으며 여성이 브로카의 당치 않 은 주장의 희생물이 된 것은 당시 그가 여성의 뇌에 대한자료를 비교적 간단히 얻을 수 있 었기 때문이었을 뿐이다. 여성은 유달리모욕을 받아왔지만, 또한 부당히 권리를 빼앗겨온 다 른 집단들의 대리인역할을 해오기도 했다. 브로카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은 1881년에 이렇 게쓰고 있다. "흑인 남자는 백인 여자의 뇌보다 그리 무겁지 않은 뇌를 가지고있다." 이러한 나란한 배치는 다른 많은 분야에 걸친 인류학상의 논의로 확장되었다. 특히 해부학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여성과 흑인은 백인 아이들과 흡사하다는-발생반복설 recapitulation에 의하면, 백인 아이들은 인류 진화상에서 선조의 (원시적인) 성인 단계를 나 타내고 있다고 하는-여러 가지 주장으로이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여성들의 투쟁이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결코 공허한수사에 그 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마리아 몬테소리는 자신의 활동 영역을아동에게 교육적 감화를 주 는 데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그녀는 로마 대학에서수년에 걸쳐 인류학 강의를 계속했고, '교 육 인류학'(영어판은 1913년에 발간됨)이라는주요저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몬테소리는 평등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브로카의 연구를 거의 모두 지지했고,같은 나 라 사람인 체사레 롬브로소CesareLombroso가 제창한 선천적 범죄성에대한 학설에도 찬동 했다. 그녀는 자신의 학교에서 아동의 머리 둘레를 측정해가장 유망한 아이는 큰 뇌를 가지 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여성에 관한브로카의 여러 가지 판단은 그녀에게 쓸모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마누브리에의 연구를 자세히 검토했고, 그를 통해 자료를 적절히 보정하면여자가 남자보다 조금 큰 뇌를 가진 셈이 된다는 그의 시험적인 주장을중시했다. 그녀는 지능 면에 서는 여성이 앞서고. 체력 면에서는 지금까지 남자가 우위를 유지해왔다고 결론지었다. 그러 나 과학 기술은 권력수단으로서의 육체의 근력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곧 여자의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는 진정으로 뛰어난 인간이 존재할 것이다. 윤리적,정서적으로강력한 사람 들이 실제로 나타날 것이다. 아마도 이런 과정에서 여성의인류학적 우월성에 관한 수수께끼 가 해결될 것이며, 따라서 여성 지배의 시대가곧 다가올 것이다. 역사상 여성은 언제나 인간 의 정서와 도덕과 명예의 관리자역할을 해왔다." 이것은 인간 특정 집단의 열등성을 논하는 '과학적' 주장에 대한 해독제구실을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한편으로는 생물학적 구별의 정당성을긍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자료 는 남자들의 이해 관계에 따라 곡해된것이고 실제로는 불리한 입장에 있는 집단이 훨씬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기도할 것이다. 근년 들어 엘렌 모건은 '여성의 유래'라는 저서에서 이러 한 논지를펴고 있다. 이 책은 여성의 입장에서 인간의 선사 시대를 사변적으로 재구성한-그 리고 남자에 의해, 남자를 위해 적어진 더 유명한 이야기들만큼이나 형편없는-것이다. 나는 이런 유의 유치한 방식이 아닌 다른 전술을 사용하고 싶다. 몬테소리나모건은 브로 카의 신조를 이어받아 그보다 한층 더 적합한 결론에 도달했다. 그에 비해 나는 인간의 특정 집단에 생물학적인 평가를 가하려는 모든 기도에대해 '터무니 없는 중상 모략'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주고 싶다. 조지 엘리엇은 불리한 처지에 있는 여러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이러한 생물학적딱지 붙이 기가 어떤 비극을 덧씌었는지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사람들, 즉 비범한 재 능을 가진 여성들을 위해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한 것이다. 나는 자신들의 꿈이 세상에서 업신여겨지는 사람들 뿐 아니라, 자신이 꿈꿀 수있다는 사 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녀의 주장을 더 널리펼치고자 한다. 그러나 내 글재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의 뛰어난 산문시를따라갈 수 없으니 결론을 대 신해서 '미들 마치'의 서문을 옮겨놓기로 하겠다. 사람들의 다양성의 범위는 부인들의 머리 모양이나, 산문 또는 운문으로 씌어진 사랑 이 야기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폭넓게 펼쳐져 있다. 갈색 연못 여기저기에서 백조 새끼들이 집 오리 새끼들과 섞여 불안스럽게자라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노 모양의 발을 가진 자신의 동족들과 교제하느라활력 있게 흐르는 강물을 찾는 걸 포기하고 고여 썩어가고 있는 연못에 안주하고만다. 여기저기에서 무로부터 출발한 여성 창시자 성 테레사가 태어난다. 그녀의사랑의 심장 고 동과 성취되지 않은 미덕을 구하는 흐느낌이 울려 퍼지지만,그러나 그 울려 퍼짐은 인내심 깊게 식별할 수 있는 업적을 찾으려는 집중 대신장애물들에 막혀 흩어지고 만다. 제15장 다운증후군 생물체 안에서 생식 세포가 만들어질 때, 쌍을 이룬 상동 염색체가 접합한 후 두 번 분리 되는 현상을 '감수 분열'이라고 한다. 이것은 생명계에서 일어나는 가장 정교한 공학 engineering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성공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성 생식은 난자와 정자가 각각 보통의 체세포가 갖는 유전 정보의 정확히 절반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성립한 다. 수정에 의해 두 쌍의 반쪽 염색체가 합쳐져서 전체 유전 정보가 복구되며두 개체의 부모 로부터 온 유전자가 자식에게서 혼합되는 현상, 그 자체가다윈적 과정의 필수 조건인 변이 성variability의 기초를 형성한다. 이처럼염색체 수가 절반이 되는 현상은 모든 염색체가 쌍 을 이루어 각 쌍의 한쪽이양측으로 끌려가서 양쪽의 생식 세포로 이동하는 감수 분열이 일 어날 때발생한다. 어떤 양치류 식물의 체세포는 600쌍 이상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는데, 대부분의경우 이것 들은 감수분열에 의해 각 쌍이 거의 오류 없이 이분된다. 이 사실을알면 감수 분열의 정확 성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생물 기계라고 공장의 기계처럼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종종분열의 오류가 발 생할 때도 있다. 드물게는 이러한 잘못이 생물을 새로운 진화방향으로 이끄는 전조가 되기 도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이러한 오류는 결함을가진 정자나 난자로부터 생긴 개체에 불 행을 가져오게 된다. 감수 분열의잘못으로 가장 흔히 나타나는 문제점은 상동 염색체가 분 리되는 기회를 놓치는경우로서 이를 흔히 불분리non-disjunction라고 부른다. 한 쌍의 양쪽이 함께 어느 한쪽 생식 세포 속으로 들어가 다른 쪽 체세포는염색체가 한 개 모자라는 결과를 낳는다. 불분리로 인해 하나의 과잉 염색체를갖는 생식 세포와 정상적 인 생식 세포가 결합해서 태어나는 아이는 모든 체세포에염색체를 정상으로 두개씩 갖는 것 이 아니라 같은 염색체를 세 개씩 갖게 된다. 이러한 이상 현상을 트리소미(trisomy, 3염색체성, 2배체의 체세포 염색체 수가2n+1이 되 는 현상/옮긴이)라고 한다. 인간의 경우에는 21번 염색체가 가장 자주불분리를 일으키고, 그 로 인한 영향은 비극에 가까울 만큼 비참하다. 신생아600명 가운데 한 명, 또는 천 명 가운 데 한 명꼴로 여분의 21번 염색체를 가지게 된다. 이 상태는 전문어로 '트리소미 21'이라고 부른다. 이 불운한 아이들은경증 또는 중증의 정 신 지체를 겪다가 단명으로 삶을 마감하는 경우가많다. 게다가 그 아이들은 손이 짧고 넓고, 입천장이 높고 좁고, 안면이등글고, 이마가 넓고, 코가 작고, 코뿌리가 평평하고, 혀가 두껍 고 도랑이 져있는 등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트리소미 21은 산모의 나이가 많을수록 자주 나타난다. 트리소미 21이 일어나는원인이 무 엇인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 이상이 염색체 때문에 일어난다는사실도 1959년에서야 겨우 발견되었을 정도다. 이것이 그렇듯 빈번하게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다른 염색체들 이 비슷한 빈도로 불분리를 일으키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모른 다. 또한 여분의 21번째 염색체가 왜 트리소미 21과 관련된 매우 독특한 형태상의이상을 일으 키는지에 대해서도 단 하나의 단서도 찾아내지 못한 형편이다. 그러나 적어도 태아 세포의 염색체 수를 세 봄으로써 '태내에 있는 동안' 그 이상 여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이른 시기에 태아를 중절할지에대해 부모에게 선택하게 할 수는 있다. 어쩌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것이다. 그리고 어딘 가 한 가지 빠진 이야기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는 한 가지 이야 기를 빠뜨렸다. 트리소미 21은 대개 몽고 백치, 몽고증 다운증후군 등의 이름으로 불려왔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운증후군에 걸린 아이들을 본 적이 있겠지만, 왜그 상태가 몽 고증이라 불리는지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다운증후군에 걸린 아이들을 보 면 즉각 그것을 앓고 있다는 것을알아챌 수 있지만, (앞에서 열거했듯이) 그들의 외견상 특 징만으로는 아시아 인 특유의 것이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물론 일부는 작기는 하지만 분명히 식별할 수 있는 몽고 주름(윗눈까풀가장자리의 안쪽 끝이 잔주름이 되어 내안각을 덮고 있는 것. 몽고 인종에서흔히 볼 수 있다/옮긴이)을 나타 내기도 하고 피부가 약한 노란빛을 띠는 경우도있다. 1866년 존 랭든 하이든 다운 박사는 이 증후군을 처음 기술할 때, 이처럼분명치 않고 일정하게 나타나지 않는 특성만으로 그 환 자들을 아시아 인과비교한 것이다. 그러나 다운이 이러한 이름을 붙이게 된 뒷배경에는 약간 예외적이고 오도되고표면적인 몇 가지 유사점보다 더 많은 내용이 숨어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이과학적인 인종 차별의 역 사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단적으로 말해주기때문이다. 다운 박사가 사용한 몽고라든가 백치와 같은 말은 어떤 단선적 사다리 위에여러 인간 유 형들을 등위 매기는 당시 만연하던 문화적 편견에 그 뿌리를내리고 있는 전문적인 용어였 다. 그러나 이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가운데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또한 그 용어에는 사다리에사람들을 등급짓는 집단이 항상 자신이 속한 집단을 사다리의 정 상에 위치하도록하려는 편견이 배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편견은 아직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과거에 백치라는 말은 정신적인 결함을 3단계로 분류한 것 가운데 가장 심한결함을 나타 내는 것이었다. 백치는 말을 배울 수 없는 정도이고, 그보다 한 단계위인 치우는 말은 할 수 있지만 글은 쓰지 못한다. 세 번째 수준은 가벼운 '정신 박약'인데, 이 단계에 대해서는 용 어상 상당한 논쟁이 있었다. 미국에서 대부분의 임상의들은, 바보를 의미하는 희랍어에서 따온'노둔자moron'라는 H H. 고더드의 용어를 사용했다. 그런데 노둔자라는 말은은유적 측면에서 우둔한 사람을 놀리 던 옛날의 농담과 비슷한 의미의단어였긴 했지만, 옛날부터 사용된 통칭이 아니라 금세기에 들어선 후에야생겨난 전문 용어였다. 처음으로 지능 검사를 가지고 경직된 유전학적 해석을 시작한 세 사람 가운데한 사람이었 던 고더드는 정신적 가치에 대한 자신의 단선적인 분류가 정신결함의 수준을 매기는 정도를 넘어 사람의 종족이나 국적에 대한 천성적인 등급에까지 확장될 수 있다고 믿었다. 즉 남부나 동부 유럽에서 온 이민을 최하위에 놓고(평균적으로 노둔자의수준으로 분류된 다), 유서깊은 미국의 백인 신교도(WASP)를 최상위에 놓는식이었다 (고더드는 뉴욕 항의 엘리스 섬(뉴욕 만에 있는 작은 섬으로서 그곳에는 당시이민 검역소 가 있었음/옮긴이)에 도착한 이민에 대해 IQ 검사를 실시했다. 그결과 그는 이민자의 80퍼 센트 이상을 정신 박약으로 판정해 그들을 유럽으로되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66년에 다운 박사가 '백치들의 민족적 분류에 관한 고찰'이라는 논문을'런던 호스피탈 리포트London Hospital Reports'지에 발표했을 당시 그는엘즈우드 정신 박약아 보호원의 의 료부 부장을 맡고 있었다. 겨우 3쪽에 불과한 그 논문에서 그는 아프리카 인, 말레이 인, 아메리카 인디언 그리고 그 밖의 아시아 여러 민족을 연상시키는 코카서스인종 '백치'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기 상 천외한 비유 속에서'몽고인 유형 주위에 위치하는 백치들'만이 전문적인 호칭으로 문헌 속에남아 있는 것이다. 다운의 논문을 그에 대한 예비 지식을 갖지 않은 채 읽는다면, 그 속에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중대한 목적성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편견을 가진 한 남자가 제시하는 단편적이고 지극히표면적이며 거의 변 덕스럽다고까지 할 수 있는 비유임에 분명하다. 그의 시대에 그것은 당시 최고의 생물학적 이론(그리고 뿌리 깊은 인종 차별)에기반해서 정신적 결함에 대한 보편적, 인과론적 분류방식을 수립하려는 시도의한 구체적인 예에 불과 하다. 다운 박사는 인과 관계가 없는 기묘한 몇 가지유사점을 식별하는 것 이상으로 큰 모 험을 한 셈이다. 정신적 결함을 분류하기위한 당시까지의 시도에 대해 다운은 이렇게 불만 을 토로하고 있다. 선천적인 정신 장애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인 사람이라면 아마도관찰의 대상이 된 여러 결함을 어떻게 배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두고 자주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 환자에 대한 기록에 의존한다고해서 어려움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분류 체계는 거의 모두가 애매하고 인 위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 눈앞에 나타나는 여러 현상을관념적으로 구별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개개의 환자에게 실제적인 영향을 주는 데에도 완전히 실패하 고 있다. 다운이 살던 시대에 발생반복설은 생물학자들이 생물계를 고등한 형태에서 하등한 형태에 이르기까지 순서대로 편성하는 데에 최고의 지침서 역할을 담당했다(그러나 오늘날 발생반 복설과 그것이 조장한 분류학의'사다리식 접근 방식'은 모두 쇠퇴하였다. 물론 그것들은 당 연히 사라져야할 이론들이었다.여기에 대해서는 졸저 '개체 발생과 계통 발생'(1977년)을 참 조하라). 이 설은 한마디로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라고 요약할 수있으며, 고등 동물은 그 배의 발생 과정에서 그보다 하등한 선조 동물의성숙한 형태를 암시해주는 일련의 발육 단계를 순서대로 거친다는 관점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배는 맨 처음에는 물고기처럼 아가미 틈gill slit이발달하고, 그 후 파충 류처럼 3개의 심실로 분리된 심장이 발생하며, 그런다음은 포유류의 꼬리가 나타난다. 이 반 복설은 백인 과학자들의 뿌리 깊은인종 차별주의 때문에 빈번히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하등한' 인종의 성인이 행하는 정상적인 행동과 비교하기 위해 자신의아이들(백인 아이 들)의 행동에 주목한 사람도 있었다. 반복설주의자들은 루이아가시가 고생물학, 비교해부학, 그리고 발생학의 '3중 병행'이라고 부른 것-화석 기록으로 나타나는 실제의 선조, 원시적인 형태를 대표하는 현존동물, 그리고 고등 동물의 성장 과정에서 나타나는 배 상태의 초기 여 러단계-을 확인하려고 했다. 인간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인종 차별적인 전통 속에서 이 3중 병행이란,화석으로 나타나 는 선조(아직 발견되지 않은), '야만인' 또는 그보다 하등한인종의 성인, 그리고 백인의 아이 들을 의미했다. 그러나 반복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네 번째 대응물, 즉 우월인종 가운데 비정상 적으로 나타나는 특정 종류의 성인을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형태와 행동상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이상을 '귀선 유전' 또는 '발육 정지'에 의한 것으로 생각했다. 격세 유전이라고도 불리는 귀선 유전은 과거에 사라졌던 선조 때의특징이 이미 진화가 일 어난 어떤 계통에 자연 발생적으로 다시 나타나성인이 된 뒤에도 계속 남게 되는 것을 말한 다. 예를 들어 '범죄인류학'의창시자인 체사레 롬브로소는 범죄자의 대부분은 야수적인 과거 가 되살아나기때문에 생물학적인 힘에 이끌려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아가 그는 원숭이적인 형태-뒤로 후퇴한 전두부, 앞으로 튀어나온 턱,긴 팔 등-의 '징후 '를 통해 '선천성 범죄자'를 식별해내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이와는 반대로 발육 정지는 태아기 때에는 정상적인 특성으로 나타나지만 발육과 더불어 변형이 일어나거나, 또는 더 진전되거나 복잡화되어야 할 신체의 여러 가지 특성이 성숙한 뒤에도 그대로 굳어지는 것을 가리킨다. 반복설에서는 이러한 태생기의 정상적인 특성이 그 보다원시적인 동물의 성숙기 상태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코카서스 인종의 태아에게 발육 정지가 일어나면, 그 사람은정상인에 비해 발 육 과정이 조금 낮은 단계에서 태어나는 것이며, 보다하등한 인종의 특징적인 형태로 되돌 아간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화석 인류,하등한 인종의 정상적인 성인, 백인의 아이들 그리 고 귀선 유전 또는 발육 정지를일으킨 불운한 백인 성인이라는 4중 병행을 갖게 되었다. 다운 박사와 머릿속에 잘못된 통찰의 섬광이 일어난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속에서였다. 즉 코카서스 인종의 일부 백치에게 나타나는 정신적 결함은 하등인종의 성인에게는 정상으 로 간주되는 특성이나 능력에 해당하기 때문이라는것이다. 따라서 약 20년 후에 롬브로소가 범죄자들에게서 원숭이적 형태의 특징을 찾기 위해 그들 의 몸을 측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다운 박사는 하등인종의 여러 가지 특징을 상세히 조사했 다. 충분히 계획적인 확신을 가지고 구하라. 그러면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 다! 다운은 분명 흥분한 어조로 자신의 연구 성과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그는정신적인 결함의 자연적 인과론적 분류 방법을 확립한 것이다(아니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이 렇게 쓰고 있다. "나는 얼마 동안 정신박약자를 여러 인종적인 표준에 따라 배열 분류함으 로써 바꾸어 말하면자연적인 체계를 수립할 수 있다는 데 주목했다" 결함이 심하면 심할수록 발육 정지는 심각하고, 또한 그에 상응하는 인종의등급도 낮다. 그는 "몇 가지 확실한 에티오피아 변종의 실례"를 발견하여, 그들의"돌출한 눈" "두꺼운 입 술" 그리고 "반드시 검은색은 아니지만... 양털처럼 오그라든 머리카락" 등의 특성을 기술했 다. 그리고 그들은 "유럽인의 자손이기는 하지만 횐 니그로의 표본"이라고 쓰고 있다. 그런 다음 "말레이시아 변종 부근에 배열되는" 그 밖의 백치들을 기술하고,"짧은 이마, 돌출한 볼, 움푹 들어간 눈, 그리고 약간 원숭이적인 코를 가진"그 밖의 백치들은 "원래 미 국 대륙에 거주했던" 종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말한다. 결국 그는 여러 인종의 사다리를 밟고 올라 마침내 코카서스 인종의바로 아래 계단, 즉 ' 위대한 몽고족'에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계속한다. "엄청난 수의 선천적 백치가 전형적인 몽고인이다. 이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어서 그 표본을 모두 비교해보면 각각 다른 부모의 아이들이라고 믿기 어려을 정도다." 그 후 다운은 오늘날 트리소미 21, 또는 다운증후군이라고 불리는 질병에걸린 한 소년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그 기술 자체는 매우 정확한 것이었지만,아시아 인의 특징- '약간 흐리 고 노란 색'를 띤 피부 외에-은 거의 지적하지 않고있다. 다운은 아시아 여러 민족과 '몽고 백치'의 외견상 유사점을 상정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그 외에도 그는 이 증상을 나타내는 아이들의 행동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익살꾼 연기자 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뛰어난 모방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문장에 숨겨진 의미를 간파하기 위해서는 19세기의 인종 차별에 관한문헌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아시아 문화의 심오한 깊이나정교함은 코카서스 인종의 인종 차별주의자에게는 몹시 곤혹스러운 것이었음이명백하다. 특히 중국 사회는 유럽 문화가 아직 미개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무렵에 이미고도로 제련 된 상태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이다(벤야민 디즈레일리(BenjaminDisraeli, 영국 수상을 지낸 적이 있는 유태계 영국인/옮긴이)는 반유태적 조롱에 대해 응수했다. "그렇소, 나는 유태계입니다. 그리고 매우 훌륭한 신사인 여러분의 선조가잔인한 야만인이 었을 무렵... 나의 선조는 솔로몬 사원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승려였습니다"). 코카서스 인들 은 이 풀기 힘든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아시아 인의 지적인 힘은 인정하지만 그 능력은 혁 신적인 천재의 능력이기보다는남의 것을 흉내내기 잘하는 능력에 불과하다는 식의 설명을 붙였다. 다운은 발육 정지(그는 그 원인이 양친이 결핵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가 트리소 미 21의 원인이라는 말로 이 장애를 일으킨 아이들에대한 기술을 끝맺었다. "그 소년의 용 모는 유럽인의 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특징은 너무 도 빈번하게나타나서, 이러한 인종적 특색이 퇴화의 결과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당시 기준으로 다운의 입장은 인종론 중에서도 '자유주의자'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는 세계의 모든 인종이 같은 선조에서 나온 것이며,각각의 지위에 따른 등급을 매겨 단일한 가 계로 통합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등 인종이 전혀 다른 창조 행위를 나타내기 때문에 백인을 향해'진보'하는 식의 일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한 다른 학자들의 주장과 맞서싸우기 위해 자신의 인종적 백치 분류법을 사용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러한 인종의 구획이 명확하고 고정된 것이라면, 질병이 그 벽을허물고 다른 구획에 속 하는 성원의 특징을 흡사한 방식으로 흉내낼수 있도록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내 가 기록한 관찰은 인종 사이의 차이는 고유한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것임을 말해준다고생각 지 않을 수 없다. 인류에게 일어난 퇴화 현상을 나타내는 이러한 실례는, 인간이라는 종의일체성을 뒷받침 해주는 몇 가지 논거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정신적 결함에 관한 다운의 주장은 어느 정도 학자들의 주목을 끌었지만 이 분야를 지배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몽고 백치(때로는 몽고증이라는 좀더 부드러운 표현으로 불리기도 한다)라는 명칭은 다운이 그 말을만든 이유가 거의 잊혀진 뒤에 오랫동안 남아 있다. 다운의 친아들은 아시아 인의 지위가 낮다는 것을 긍정하고 정신적 결함을진화적인 귀선 유전과 결부시키는 일반론을 지지하였지만, 부친이 아시아 인과 트리소미 21를 일으킨 아이 들을 비교한 것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 몽고 인종의 특징과 체형을 연상시키는 여러 가지 특성은 실제로는 이 인종 이 가지고 있지 않은 그 밖의 여러 가지 특징과언제나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그러한 사실 은 지극히 우연적이고 외면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이것이 귀선 유전의 일례라면, 그것은 일부 민족학자들이 그 밖의모든 인종의 기원 이라고 생각하는 몽고 인종의 계통보다 훨씬 이전의선조에게 되돌아가는 귀선 유전이 되어 야 할 것이다. 의학자들이 트리소미 21을 아시아 인 속에서도, 또한 다운의 분류에따라 아시아 인보다 하등한 인종 속에서도 찾아내려고 애쓰고 있을 때,다운의 트리소미 21에 대한 이론은-다운 의 그다지 효력 없는 인종 차별적 체계 속에서조차-기반을 잃었다. (어느 의사는 '몽고 인종의 몽고증환자'라고 표현하지만, 이러한 어색한변명은 거의 지지 를 얻지 못했다) 이 증상이 좀더 고등한 인종의 정상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이것은 퇴화에 의해서 일어난 것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인간의 21번째 염색체와 서로 같을 것이라 생각되는 여분의 염색체를갖는 침팬지에서도 그와 유사한 특징들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운의 이론이 틀렸음이 입증되었다면 그가 사용했던 명칭은 어떻게되는 것인가? 수년 전 에 피터 메더워 경과 아시아 과학자팀이 '몽고 백치'와 '몽고증'이라는 명칭 대신 '다운증후 군'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도록영국의 몇몇 출판사를 설득한 적이 있었다. 미국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있었던 것 같지만 아직도 몽고증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있다. 이에 대해 반대 의견을 펼치는 사람들 중에는, 명칭을 바꾸려는 노력은자신이 속하지 않 은 영역에 사회적인 이해 관계를 끌어들여 지금까지 널리사용되어온 용어 체계를 혼란시키 는 경박한 자유주의자의 잘못된 시도에지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나도 이미 확정된 용어가 변덕스럽게 바뀌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바 하의 마태 수난곡을 합창할 때마다 극도의 불쾌감을 느낀다. 그리고 격노한 유태인 군중의 한 사람으로서 몇 세기에 걸쳐 반유태주의를 '공식적으로' 정 당화한 다음과 같은 구절을 큰 소리로 외친다. "Sein Blut komme uber uns und unsre Kinder(그의 피는 우리와 우리들의 자손에까지 흘러내리는도다)" 그러나 이 일절이 가리키고 있는 그가어느 다른 문맥 속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바하의 원문을 '일점 일획'도 바꾸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러나 과학상의 명칭은 문학 작품과는 경우가 다르다. '몽고 백치'는 단지 비방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잘못된 명칭이다. 더 이상 우리는 정신적 결함을 단선적인 순서로 분류하지 않는다. 다운증후군이 있는 아이들은 약간의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대체로 그다지 아시아 인과 닮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이 명칭은 인종적인 귀선 유전이 정신적 결 함의 원인이라고 하는 이미 잘못된것으로 알려진 다운 이론의 문맥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 선량한 의사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면, 트리소미 21을 '다운증후군'이라고불러 그의 이름을 기리기로 하자. 제16장 빅토리아풍에 숨어 있는 결함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장황하긴 하지만 그래도 매우 장대한 소설들을남겼다. 그러나 동 시에 그들은 지루함과 부정확한 묘사로는 그 무엇에도 필적할 만한 것이 없는 문학 장르를 만들어내어 세계를 속여서 팔아먹는 데-얼핏 보기에는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 지만-성공했다. 걸출한 인물의 '생애와 서간집'이라고 불리는 여러 권으로 이루어진유형의 장르가 바로 그것이다. 대개 슬픔에 젖은 미망인이나 효성이 지극한 아들 딸에 의해 조심스러운 객관적 기술로 씌어진 이 장황한 찬사는 마치 고인이 남긴 말이나 업적을 그대로 기록한 것인 양 치장된다. 이런 종류의 저작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걸출한 빅토리아 시대인들이 실제 로 자신들이 받아들인 도덕적 가치관에 따라살았었다고 믿게 될 것이다. 그것은 리턴 스트 레이치의 '빅토리아 시대의 뛰어난 사람들'이 이미 50년 이상 전에 묻어버렸던 꿈 같은 주 제를다시 11집어내어 믿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엘리자베스 케리 아가시-유명한 보스턴 시민이었고, 래드클리프 칼리지의 창설자이자 초 대 학장이었던, 미국 제일의 박물학자의 헌신적아내-는 이러한 책의 저자에게 요구되는 자 격을(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포함해서) 남김없이 갖추고 있었다. 그녀의 작품 '루이 아가시의 생애와 서간'은, 매력적이었고 논쟁을 좋아했지만 결코 성실 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한 남자를 자제심 강하고 정치적 수완과 식견을 고루 갖춘 청렴 결 백한 모범적 인간으로 만들어냈다. 나는 지금 루이 아가시가 1859년에 세운 건물(하버드 대학 비교동물학박물관의 본동)에서 이 에세이를 쓰고 있다. 위대한 퀴비에의 수제자로서 화석 어류의 세계적인 연구자였던 아 가시는 미국에서 지내기 위해1840년대 말에 그가 태어난 스위스를 떠났다. 그는 유명한 유럽인이자 매력적인 인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보스턴에서찰스턴에 이르는 사교계와 지식인 사회에서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1873년에 죽을 때까지 계속 미국 박물학 연구의 선두에 서 있었다. 나는 루이의 공식적인 발언이 언제나 예의 바름의 본보기였고, 그의사적인 편지는 그 열 광적인 인품에 어울렸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표면적으로는 루이의 편지를 충실히 공개하 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엘리자베스의 책은, 끊임없는 에너지의 원천이며 항상 논쟁의 초점 이 돼온이 인물을 신중하고 고상한 신사로 감쪽같이 바꿔버리고 말았다. 최근 루이 아가시의 인종에 대한 관점을 조사하던 중에 나는 E. 주리의 전기('루이 아가 시, 과학계에서의 생애'라는 책)에 나와 있는 이야기에서 몇 가지 착상을 얻어 엘리자베스판 의 편지와 루이가 쓴 원래 편지사이에 재미있는 불일치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어 나는 엘리자베스가 원문을 부분적으로 삭제했으며, 자신이 내용을삭제했음을 나타내 기 위해 생략 부호(가령 점 세 개를 찍어서 중략되었음을 나타내는 기호)를 표기하지도 않 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데다행스럽게도 하버드 대학에는 원본 편지가 보존되어 있었 다. 따라서 약간의 수고를 들여 탐색을 한 결과 흥미로운 자료를 직접 볼 수 있었다. 남북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10여 년 동안 아가시는 흑인과 인디언의 지위에 관해 강 경한 입장을 표명했다. 북군측의 양자로 입양되었던 그는 노예 제도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 러나 다른 한편, 상류 사회를구성하던 코카서스 인종의 일원이기도 했던 그는 노예제의 부 정과 인종적 평등 개념을 한데 결부시키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아가시는 만물의 근본 원리에 따라 냉정한 추론을 거친 후에 불가피한 귀결로서 인종 문 제에 관한 자신의 태도를 표명했다. 그는 종이란정적인 것이며 창조된 존재라는 입장을 고 수했다(1873년 세상을 떠날 무렵 그는 다윈주의의 거센 물결에 반항하는 입장에 섰기 때문 에 실질적으로생물학자들 사이에서 고립되었다). 생물 종은 지구상의 단일한 지역에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전 지역에걸쳐 동시에 창조된 다. 유연 관계가 가까운 종들은 지리적으로 서로 분리된 지역에 발생해서 각기 해당 지역의 우세 환경에 적응하는 경우도흔히 있다. 여러 인종은 상호 교섭이나 이주 등을 통해 서로 뒤섞이기 전까지 이러한 기준을 만족시키기 때문에, 각각의 인종은 생물학적으로 별개의 종 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미국의 이 저명한 생물학자는 그가 미국에 오기 1년전부터 이 나라에 불어 닥치고 있던 논쟁에서-아담은 전 인류의 선조였는가, 아니면 오로지 백인만의 선조였는가? 흑인이나 인디언은 백인의 형제인가, 아니면 단순히 백인의 유사물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단호하게 반대론을 전개했다. 아가시도 그 중 한 사람이었던 다원발생론자(polygenist, 생물 종이나품종이 둘 이상의 원 종으로부터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옮긴이)들은 주요만 인종들은 각기 별개의 종으로 창조된 것이라는 입장을 주장했다. 그에 비해 일원파생론자monogenist들은 단일한 기원을 주장했고, 에덴 동산에서 시작하여 불평등한 퇴화를 거친 결과 각 인종이 각기 다르게 등급지어진다고 보았다. 이 논쟁에 평등 주의자들은 가담하지 않았다. 이론상으로는, 1896년에 플레시 대 퍼거슨의 논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이다. 말대로 별개의 계통이라는 것이 반드시 불평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1954년에 브라운 대 토페카 교육 위원회 논쟁의 승리자들이 지적했듯이 힘을 쥔 집 단은 항상 자신들과 다른 계통을 분리하는 데 우월성이라는 개념을 결부시키게 마련이다. 내가 알고 있는 미국의 다원발생론자들은 대부분 백인이 그 밖의 인종과 다르며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아가시는 자신이 다원발생설을 지지하고 나서는 것은 정치적 신조나사회적 편견과는 아무 런 관계가 없다고 강변했다. 그는 자신에 대해 박물학사 연구에 나오는 흥미로운 여러 가지 사실들을 확실히 수립하려고시도하는 겸손하고 공평 무사한 학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런 이론들이 노예 제도를 지탱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 러 가지 반론이 제기되어왔다. ... 과연 그런 유의 비판이 철학적 연구에 대한 공정한 반론이 라고 할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들이 관계하는 것은 오로지 인류 기원에 관한 문제뿐이다. 정치가들, 또는 자신이 인간사회를 통제하는 데 관여하고 있다고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그 결과를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 우리는 정치적인 사건을 포 함하는 어떠한 무제에도 일체 그 연관성을 갖지 않는다. ... 박물학자들은 인간의 물질적인 여러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순수한 학문상의 문제로 생각하고, 그것들을 정치나 종교와 관계없이 연구할 권리를 갖고 있다. 이러한 용감한 말들에도 불구하고 아가시는 인종 문제에 관한 이 중요한 언명을('크리스 찬 이그재미너Christian Examiner'[1850년])에 발표되 었다) 몇 가지 명백한 사화적 권고로 끝맺고 있다. 그는 우선 분리와 불평등의 원칙에 대해 확인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지구 표면의 여러 인간 종족이 정주해 있다. ... 따라서 우리에게는 이러한 종족들 사이에 상대적인 등급을 설정할 의무가 있다." 그 결과 어떤 계층 구조가 탄생할지는 자명하다. "굴 복하지 않고 용맹 무쌍하고자긍심이 강한 인디언, 그들은 유순하고 비굴하고 모방하기 좋아 하는 니그로에 비해, 또는 교활하고 잔꾀에 능하고 겁쟁이인 몽고 인종에 비해 얼마나 다른 가! 이러한 여러 라지 사실이 여러 인종이 자연계에서 동일한 수준에 위치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는가?" 자신의 정치적인 메시지를일반화시켜 분명하게 밝힌 것은 아니었지만, 아가시는 마지막으로 구체적인사회 정책을 제안하며 자신의 글을 맺는다. 따라서 이것은 순수한 정신적 생활을 위해 정치를 버릴 것을 선언한 앞의 발언과 명백히 모순된다. 아가시는 타고난 능력에 맞게 교육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흑인은 육체 노 동에 맞게, 백인은 정신 노동에맞도록 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각 인종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면, 그들 각각에게 제공해야할 최선의 교육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 만약 우리들이 유색 인종과 관계를 맺어야 할 때, 평등이라는 관점에서 그들을 대하지 않고,우리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차이를 충분히 의식하 는 방법으로, 또한 각각의 인종에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기질을 키우고자 하는 열망에 따라 행동한다면, 유색 인종에 관한 인간사의 허다한 문제들이 종전보다 훨씬 현명하게 처 리되리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매우 두드러진' 기질이란 온순함, 비굴함, 모방하기좋아함 등의 성향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가시가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품고 있었는지 십분 추측할 수 있다. 아가시가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던 주된 이유는 아마도 그가 주로 자신의 신변에 일어난 여러 가지 사실들, 그리고 그 속에 구현된 추상화된 이론을 통해서만 동기를 얻는 한 사람 의 과학자로서 발언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종에 관한 그의 생각이 어디서 근원하는지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정말 그는 박물학에 대한 사랑 외에는 어떠한 동기나성향, 그리고 원동력 등을 전혀 갖지 않았을까? '루이 아가시의 생애와 서한'에서 삭제된 많은 문장이 이 의구심을 해소할 수 있 는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그 삭제된 구절들을 읽으면 성문제에 대한 거의 본능적인 반응과 두려움에 깊이 뿌리 내린 강한 편견을 가진 한 남자의 모습이떠오른다. 130년이 지난 후에도 그 강렬함의 충격이 변하지 않는 첫 구절은 아가시가 흑인과 처음 만났을 때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그는 유럽에 있는 동안 흑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1846년에 처음 미국에 도착한그는 자신의 경험을 상세하게 적은 긴 편지를 모친에게 보냈 다. 엘리자베스 아가시는 필라델피아에 대한 부분에서 루이가 박물관과과학자들의 자택을 방 문한 이야기만을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흑인에 대해 루이가 받은 첫인상을-호텔 식당의 웨 이터들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생략부호도 없이 말살했다. 1846년 그는 여전히 인류의 일체 성을믿고 있을 만큼 비과학적 기반에 토대한 것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 최초로 무삭제 원본을 소개해보기로 하겠다. 제가 흑인과 처음으로 장시간 동안 접촉한 것은 필라델피아에서 였습니다. 제가 묵던 호 텔의 하인들은 모두 유색인들이었습니다. 당시제가 받았던 인상을 글로 표현하기란 매우 힘 듭니다. 특히 그들로 인해 일어난 감정이 같은 인간 유형에 대한 동포감이나, 우리 인류의 기원은 단일한 조상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던 관념에 반하기 때문입니 다. 그렇지만 진리는 그 모든 것에 우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이 타락하고 퇴화한 인종을 보면서 연민의 느낌을 받았었고, 그들도 실제로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그 운명 에 동정심을 느꼈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들이 우리와 같은 혈통이 아니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습니다. 두꺼운 입술과 이를 드러낸 검은 얼굴, 고수머리, 굽혀진 무릎,긴 손, 크고 휘어진 손톱, 그리고 특히 납빛을 한 손바닥 등 때문에 저는 그들에게 이야기를 할 때마다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멀리 떨어진 풍경에 눈길을 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내게 음식을 가져다주기 위해 내 접시 쪽으로 소름끼치는 손을 뻗을 때면, 나는 이런 하인들의 서비스를 받으며 식사를하느니 차라리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빵한 조각을 먹는 편이 나을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입니다. 여러나라에서 백인의 생활과 흑인의 생활을 이렇듯 밀접하게 결부시킨것은 백인의 입장에 서 그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요! 신이시여, 이러한 접촉으로부터 우리들을 지켜주소서 ! 두 번째 문서는 남북 전쟁이 벌어지던 와중에 씌어진 것이었다. '공화국 찬가'의 작사자인 줄리아 워드 하우의 남편이었던 사무엘 하우와링컨 대통령의 조사 위원회 구성원 가운데 한 사람이 다시 하나로 뭉친국가에서 혹인이 담당해야 할 역할에 관한 의견을 듣기 위해 아가 시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1863년 8월, 아가시는 네 통의 길고 열렬한 회답을 보냈다. 엘리자베스아가시는 이러한 편 지 내용 일부를 제멋대로 삭제했고, 루이의 주장을 만물의 근본 원리에 근거하고 진리에 대 한 사랑만으로 표명된 진솔한 견해로 바꿔버렸다. 한마디로 요약해서, 루이는 백인의 우월성이 희석되지 않도록 모든인종이 따로 격리되어 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약한 계통인 백인 혼혈아는 점차 소멸할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격리는 자연스럽게 일어나게될 것이다. 그리고 흑인들은 그들에게 적합하지 않은 북방 기후를 떠나게 될 것이다(그들은 아프리카 에 적합한 종으로 창조되었으니까). 그들은 무리를지어 남쪽으로 이동해서 결국 저지에 위 치한 몇 개 주에 정착하게 될것이다. 한편 백인들은 해안 지방과 고지에서 지배권을 유지하 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려할 만한 상황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으로 이들 여러 주를승인할 필요가 있으 며, 심지어는 연방에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아이티 공화국과 라이베리아 공화국(둘 다 주민의 대부분이흑인으로 된 공화 국/옮긴이)'를 승인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대폭 삭제한 부분은 루이의 동기가 전혀 다른 것임을여실히 폭로한다. 그 문장들에는 생생한 두려움과 맹목적인 편견이 얼룩져 있었다. 그녀는 계획적으로 세 종류의 기술을 제거했다. 우선 그녀는 흑인을심하게 모욕하는 부분 을 삭제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다른 인종들과는 달리 모든 점에서 그들은 오로지 아 이들과 비교하는 것만이허락됩니다. 몸은 어른의 키로 성장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아이들의 그것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그녀는 각 인종 내에서의 지혜와 부유함, 그리고 사회적 지위사이의 상관 관계에 관 한 엘리트주의적 주장을 모두 제거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다른 인종간의 잡혼에 대해 루 이가 가지고 있던 심각한두려움을 알아차릴 수 있다. 나는 그로 인한 결과에 몸서리가 쳐질 정도입니다. 우리는 상류 사회에서 자라나는 각 개 인이 우수함이나 세련됨, 문화 등의 획득물을지키기 위해 만인의 평등이라는 영향에 맞서 싸워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러한 어려움에 더해 육체적 무능함이라는 훨씬 더 끈질긴 영향이 가해진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상태에 처하게 되겠습니까. 우리들의 교육 제도의 개선이 ... 조만간 교양 없는 사람들의 냉담함이나하층 계급의 조잡 함이 주는 영향을 상쇄시켜 그들을 지금보다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등한 인종의 피가 우리 자손의 피 속으로 계속 흘러 들어오는 사태가 허용된다면 그들의 오염을어떻게 뿌리뽑을 수 있겠습니까? 셋째, 이것은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그녀는 교잡에 관한 긴 문장을몇 군데 삭제하고 있 다. 그 문장들을 읽어보면 모든 편지가 그녀가 조작하려 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지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다른 인종간의 성적 접촉에 대한 루이의 강렬한 본능적 반감을 읽을 수 있다. 이 비이성적인 깊은 공포는 인종이 각기 개별적으로 창조된 것이라는추상적 관념과 같은 정도로 강력한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이렇게 쓰고 있다, "혼혈아를 만들어내는 것 은 문명사회에서 근친 상간이인격의 순결에 대한 범죄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에 대한 범죄 입니다. ... 나는 그것이 자연스런 정서의 완전한 도착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천성적인 혐오감 은 너무도 강한 것이어서 노예 폐지론을 주장하던그의 견해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흑인에 대한 동정을 반영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오히려 많은 '흑인'들에게 백인의 피가 충분히 섞여 있어서 백인들이 그 부분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어보자. "현재 남북 전쟁을 통해 절정에 달하고 있는 노예 제도 에 대한 혐오감은, 주로 남부 여러 주 신사들의 자손이, 비록 아직까지는 그렇지 않지만 결 국 니그로(원문 그대로)로서 우리들 가운데로 들어올 때, 그들 속에 우리들 자신의 특성이 있음을 인정한다는 측면에서, 무의식적으로라도 조장되어왔다는 데에는 의심의여지가 없습 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 인종이 천성적으로 서로를 배척한다면, 어떻게 '남부의 신사들'은 자신 들의 소유물이 된 여자들을 즐겨 겁탈할 수 있었을까? 아가시는 가정 노예로 사용되는 흑백 혼혈아(mulatto, 흑인과 백인사이에 태어난 1대 혼혈아/옮긴이)를 맹렬히 비난했다. 그녀들 의 흰색은남자들을 유혹하고, 검은 색은 도발한다든 것이다. 불쌍하고 순진한 젊은 [백인] 남자들은 그 여자들에게 유혹되어 덫에 빠지는 셈이다. 남부의 젊은 남자들은 성적 충동을 느끼면 언제나 유색[흑백 혼혈]가정 노예를 상대로 간 단히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접촉이] 그 방면에서의 본능을 둔감하게 만들어 점차 좀더 음란하고자극적인 상대를 찾게 만듭니다. 나는 방탕한 젊은이들이 완전한 흑인을 요구한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서로 다 른 인종의 개인들 사이의 결합은 가능하겠지만,거기에 인격을 향상시키는 요소가 전혀 없다 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그관계에는 애정도 없고, 진보나 향상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없습니 다. 그것은 오로지 육체적인 결합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전 세대의 신사들이 맨 처음 흑백 혼혈아를 낳게 되었을때, 자신의 혐오감을 어 떻게 극복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이 자리에서 엘리자베스가 특정 구절을 삭제한 이유를 상세하게 파고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순히 선입관 때문에 형성된 것을 논 리적인내용으로 바꾸려 한 의식적인 열망이 그녀의 행위를 촉발시켰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다. 아마도 빅토리아 시대의 고상한 척하는 풍습이 성에 관한 구체적인언급을 대중들 앞에 공 공연히 내놓기를 꺼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어쨌든그녀의 삭제 행위는 루이 아가시의 사상을 왜곡하고 그의 의도를 과학자들의 마음에 드는 허구적인-그 견해들이 가공되지 않은 정보 를 공평무사하게 조사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는 식의-모형으로 조작한 것이다. 이렇듯 삭제된 부분을 복원해 넣음으로써 우리는 흑인과 처음 접촉할 당시에 루이 아기시 가 다원발생론자처럼 서로 다른 인종끼리는 서로다른 종에 속한다고 생각할 만큼 충격적인 역한 느낌을 받았음을 알 수있다. 또한 인종의 혼합에 대한 그의 극단적인 관점은 추상적인 잡종형성의 이론보다는 강렬한 성적 혐오에 의해서 한층 더 견고화되었음도확인하게 되었 다. 인종 차별은 종종 자신을 이끌어온 편견을 은폐시키기 위해 객관성이라는 표면상의 외피 로 치장하려는 과학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아왔다. 아가시의 사례는 너무 먼 옛날의 일처럼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그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제5부 변화의 속도 제17장 진화적 변화의 단속적 본질 찰스 다윈의 혁명적인 저서가 서점 진열대에 오르기 하루 전날인 1859년 11월 23일, 그는 친구인 토마스 헨리 헉슬리로부터 평상시와는 사뭇다른 내용의 편지를 한 통 받았다. 그것 은 머지않아 논쟁이 일어났을때에도 변치 않고 다윈을 지지하겠다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한 어떠한희생도 기꺼이 치르겠다는 따뜻한 격려의 내용이었다. "불가피한 경우에는 화형에 처해질 각오도 하고 있소. ... 나는 언제라도쓸 수 있도록 갈고 리 발톱과 부리를 갈고 있소." 동시에 그는 이런 경고도 잊지 않았다. "당신은 Natura non facit saltum라는 말을 너무도철저하게 받아들여 그로 인해 불필요한 어려움을 당해왔습니 다." 흔히 린네가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 라틴어 구절은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라 는 의미이다. 다윈은 이 오래된 표어의 충실한 신봉자였다. 지질학에서의 점진론을 대표하는 찰스 라이엘의 영향을 받아 다윈은 진화라는 것은 그 누구도 살아서 목격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린 속도로 진행되는 장중하고 정연한 과정이라고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다. 다윈은 선조와 그 자손들이 '가장 미세한 배열을 이룬 단계'를 형성하는 '한없이 많은 이 행적인 사슬의 고리'에 의해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오직 장대한 시간만이 이러한 완만한 과정을 거쳐 많은 것을 이루어낼수 있는 것이다. 헉슬리는 다윈이 끝까지 투쟁을 벌일 요량으로 자신의 이론 주위에배수진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연 선택은 속도에 관한 한어떤 가정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진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하는 경우에도 자연 선택은 마찬가지로 작용할 것이다. 그의 이론 앞에 놓인 길 은험난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연 선택설에 이렇듯 불필요하고 아마도 그릇된 추정의무거운 굴레를 씌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화석 기록은 점진적 변화라는관점을 지지하지 않는다. 반론의 여지가 없 을 정도로 짧은 기간 동안사라져버린 동물상은 얼마든지 있다. 새로운 종들은 거의 언제나 같은 지역에서 발견된 더 오래된 암석속의 선조형과 아무런 중간 고리 없이 갑작스럽게 화석 기록 속에나타난다. 헉슬리는 진화가 완만하고 산발적인 퇴적 작용 과정의 한현장에서 덜미를 잡히는 일이 좀처럼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된다고 믿었다. 다윈이 과학을 막 수련하던 시절, 급격한 변화를 지지하는 사람들과점진적 변화를 지지하 던 사람들 사이의 대립은 지질학과 연관된 학문분야에서 특히 심했다. 다윈이 왜 라이엘을 비롯한 점진론자들의 입장을 따르기로 선택했는지 그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적어도 한 가 지만은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어느 한 견해에 대한 선호는 경험적인 정보에 대한 우월한 인식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이 문제에 대해 자연은 잡다한 이야기를,그것도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로 들려주 었다(그리고 지금도계속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결정에서 문화적, 방법론적 선호는 자료가 갖는 강제력에 맞먹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변화에 대한 보편 철학과 같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관한 한, 과학과 사회는 대개 긴밀 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일찍이 유럽 군주제하의 정적인 체제는 수많은 학자 들에 의해 자연 법칙의 구현으로서 정당화되었다.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 영국의 시인/옮긴이)는 이렇게 읊고 있다. 질서는 하늘의 근본 원칙이다, 또한 하늘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고 또한 반 드시 그러해야 함을 인정하고 있느니. 군주제가 타도되고 18세기가 온통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갈무렵, 과학자들은 비 로소 변화를 정도에서 벗어난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우주 질서의 정상적인 일부로 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학자들은 인간 사회의 사회적 변혁을 위해 필요한 완만하고질서있는 변화라는 자 유로운 관점을 자연계로 전이시켰다. 많은 과학자들에게 자연의 대격변은 그들의 위대한 동 료였던 라부아지에를 앗아간프랑스의 공포시대(reign of terror, 라부아지에는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치 시대에 조세 청부인이라는 전력 때문에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옮긴이)와 마찬가 지로 위협적인 것으로 비쳐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질학적 기록은 격변적 변화와 마찬가지로 점진적 변화에 대해서도 증거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진화의 속도가 거의 일정 불변하다는 점진론을 옹 호하는 과정에서 다윈은 라이엘의 매우 독특한 논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그는 그 밑에 내재하는 '실재reality'를 위해서 상식,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모 습을 배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흔히 알려진 신화적인 이야기와는 달리 다윈과 라이엘은 퀴 비에나 버크랜드 등 격변론자들의 신학적 환상에 대항해 객관성을 옹호한 진정한 과학의 영 웅은아니었다. 격변론자들도 점진론자와 똑같은 정도로 깊이 과학에 관여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어야 하며 점진적인 기록에 빠져있는 것으로 보이는 여러 부분들을 격변적 변화라는 있는 그대로의역사적 사실에 삽입시켜서는 절대 안 된다는 훨씬 더 '객관적'인 견해를받아들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다윈은 지질학적 기록은 극도로 불완전한-다 찢어지고 몇 장밖에 남지 않은 책, 두세 줄밖에 남지 않은 페이지,한두 개 단 어밖에 남지 않은 행과 같은-것이라고 쓰고 있다. 우리들이 실제로 화석 기록 속에서 완만한 진화적 변화를 볼 수 없는까닭은 우리가 무수 한 발걸음 가운데 고작 한 걸음만을 연구하고 있기때문이다. 변화가 갑작스레 일어나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은 그 중간 단계가(책장이 찢겨 나가듯)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화석 기록 속에 과도적인 형태가 극히 드물게 발견된다는 사실은 지금도 여전히 고생물학 분야에서 풀어야 할 주요 과제이다. 우리들의 교과서를 장식하고 있는 계통수는 그 작은 가 지의 선이나 가지의 갈림길부근에서나 실제 자료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 외의 부분은 설령 매우 합리적으로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추측에불과하고, 거기에 대한 화석 증거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윈은이처럼 '있는 그대로의 기록'을 부정하는 데 자 신의 전 학설을 걸 만큼점진론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었다. 지질학적 기록은 극도로 불완전하다. 그리고 이 사실은 우리가 왜이미 멸종하거나 현존하 는 모든 생물계를 미세한 등급으로 구분된단계로써 한데 묶어줄 만한 무한한 변이를 찾아낼 수 없는 이유를대체로 설명해줄 것이다. 지질학적 기록의 본질을 이런 관점에서 보려 들지 않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나의 이론을 전면적으로 거부할 것이다. 다윈의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고생물학자들에게 곤란한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 는 훌륭한 도피처 구실을 해주고 있다. 즉 진화의 흔적을 직접적인 형태로는 조금밖에 드러 내지 않는 화석 기록을 손 에 넣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당혹스러워하는 고생물학자들은 종종 이런 핑계를 대고 도망치려고 한다. 그렇지만 나는 그 문화적 방법론의 뿌리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점진론이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유효성을 묵살할 생각은 전혀 없다(일반적 견해라는 것들을 모두 같은 기반을 갖기 때문에). 나는 단지 진화의 흔적이암석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 다. 지금까지 고생물학자들은 다윈의 점진론적 주장 때문에 실로 엄청난대가를 치러왔다. 우 리는 스스로가 생명 역사에 대한 유일하고 참된 연구자라고 자부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 선택으로 진화를 설명하는 상투적인 수법을 계속해나가기에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자료가 변변치 못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자료 부족은 너무도 심각한 것이어서, 우리들이 연구하 고 있다고 공언하는 과정 자체를 결코 볼 수 없을 정도다. 수년 전부터 나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의 닐스 엘드리지와 함께 이골치 아픈 모순을 해결 할 방법을 제기해왔다. 우리 두 사람은 헉슬리의 경고가 옳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진화 이론 에서 점진적 변화라는 관점은 필요하지 않다. 사실 우리가 화석 기록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바로다윈적 과정이 작동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들이 거절해야 할 것은 점진론이지 다 윈주의 그 자체가 아니다. 대부분의 화석 생물의 역사는 점진론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다음의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1. 정지Stasis. 대부분의 생물 종은 지구상에 생존하는 동안 특정한방향성을 갖는 변화를 나 타내지 않는다. 그들은 화석 기록에 나타 날 때나 사라질 때나 똑같은 모습으로 보인다. 대 개 형태상의 변화는 제한되게 마련이며, 방향성은 더욱이 없다. 2. 돌연한 출현Sudden appearance. 어느 지역에서 특정 생물 종들은 그 선조가 조금씩 변형 되는 과정을 거쳐 서서히 등장하는 것이아니라 한꺼번에 '완전히 완성된' 상태로 출현한다. 진화는 두 가지 주된 양식으로 전개된다. 첫째, 계통의 변형으로 어떤 개체군 전체가 하나 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화한다. 그러나 모든진화적 변화가 이런 양식으로 일어난다면, 생명계는 오랫동안 지탱될수 없을 것이다. 계통 발생에 의한 진화는 다양성을 증가시키는 것이아니라, 하나의 종에서 다른 종으로의 변형을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멸종(다른 종으로 진화하지 않고 사멸하여 사라wu버리는 것/옮긴이)이란 지극히 흔한 일 이기 때문에 다양성을 증대시키는 메커니즘을 갖지않은 생물상은 이윽고 전멸할 것이다. 두 번째 양식은 종분화speciation라 불리는 것으로서, 이 과정이 지구에 생물을 보급한다. 종분 화란 살아남은 부모의 계통에서 새로운 종이 가지를 쳐 나오는 것을 말한다. 다윈이 종분화 과정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문제를 논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는 진 화적 변화에 관한 대부분의 논의를 계통에 의한변형이라는 주형에 쏟아 부었다. 이런 맥락 에서 정지와 돌연한 출현이라는 현상의 원인은 기록의 불완전에 돌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가령 새로운 종이 선조의 개체군 전체의 변형에 의해 생겨난것이라면, 그리고 그 변형 과정을 우리가 실제로 관찰할 수 없다면(종들은그 존재범위 전체에 걸쳐 본질적으 로 정적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가진화석 기록은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엘드리지와 나는 종분화 자체가 거의 모든 진화적 변화의 원인이라고생각한다. 게다가 종 분화가 일어나는 방식 자체가 화석 기록에 돌연한출현과 정지가 더 자주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라고 본다. 종분화에 관한 주요 이론들은 한결같이 아주 작은 개체군에서 급속한분열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이지역성allopatric, 즉 지리적 종분화 이론은거의 모든 경우에 진화학자들로부터 선호되고 있다(이지역성이란 지역에따라 다르다는 의미이다). 새로운 종은 선조 개체군의 소 수가 선조 종의분포 지역 주변부에 격리될 때 나타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에세이를 1977년에 썼다. 그 후 진화생물학 분야는 주요 관점에 변화가 일어났 다. 이지역성의 진화를 주창하는 정설이 후퇴하고, 동지역성sympatric의 종분화를 설명하는 몇 가지 메커니즘이 그 실례와타당성 면에서 모두 득세하고 있다(동지역성 종분화론에서는 새로운 종이그 선조 종이 분포한 지역 내에서 형성된다고 설명된다). 이러한 동지역성의 몇 가지 메커니즘은 화석 기록을 설명하는 데 엘드리지와 내게 필요한 두 가지 조건-작은 개체군 속에서 신속하게 일어나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 나로 결합되었다. 일반적으로동지역성 메커니즘들은 종래의 이지역성 종분화론이 상정하는 것에 비해더 작은 집단과 더 급속한 변화를 주장하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선조 종과 접촉할 가능성이 있는 집단들은 더 많은개체 수의 선조 종 과 교잡함으로써 유리한 변이가 희석되지 않도록 하기위해 생식 격리가 일어나는 방향으로 신속하게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지역성 종분화 모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들은 화이트의 글을 참조하라.) 다수이고 안정된 중심부의 개체군은 균질화homogenizing라는 강력한영향력을 행사한다. 따라서 어느 한 개체에 좀더 유리한 돌연 변이가일어나더라도 그것이 확산되기에는 개체군 이 너무 광대하기 때문에 그영향력은 희석되고 만다. 그런 돌연 변이는 빈도 면에서 매우 더디게 일어날 수 있어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 때문 에 개체군 속에 정착하기 전에 그 선택가(selectivevalue, 자연 선택이 유리하게 작용하여 생 존에 유리한 특성/옮긴이)를 잃게 된다. 따라서 화석 기록에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규모 가 큰 개체군에 일어나는 계통 변형은 극히 드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변부에 산재하는 작은 집단들은 그 모 계통으로부터 분리되는 경우가 많다. 이 들은 선조들의 분포 지역 한 구석에서 작은 개체군으로 생활한다. 이러한 주변부는 선조 종 집단이 분포한 생태학적 한계에 해당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선택적 압력(자연 선 택에 작용하는 환경의 여러 가지 특성. 가령 먹이의 부족이나 포식자의 활동, 짝짓기 상대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 등이 그것이다/옮긴이)이 강하다. 그리고 생존에 유리한 변이는 빠른 속도로 확산된다. 결국 주변부에 속한 규모가 작은 격 리 집단은 진화적 변화의 실험장과 같은 셈이다. 진화가 주로 주변부 격리 집단에서 발생하는 종분화라는 형태로 일어난다면, 화석 기록이 포함하고 있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우리들이 발견하는 화석은 보통 규모가 큰 중심부 개체 군의 유물이기 때문에 종은거의 전 분포 지역에 걸쳐 정적인 상태에 있을 것이다. 선조 종이 살고 있는 모든 지역에서, 자손 종은 그것이 진화한 주변지역에서 이동해온 결 과 갑작스럽게 나타날 것이다. 주변 지역에서 우리는 종분화의 직접적인 증거를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행운을 얻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이다. 진화가 아주 작은 개체군 속에서 급속히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화석 기록은 진화 이론이 예언한 것을 충실히 나타내고 있으며, 과거에는 풍부했던 이야기가 형편없이 삭제된 초라한 잔재로 남은 것만은 아니다. 엘드리지와 나는 이러한 체계를 '단속평형punctuated equilibria' 모형이라고 부른다. 각 계통들은 전 역사에 거쳐 거의 변화하지 않지만,이따금 급격하게 일어나는 종분화라는 사건 때문에 그 평온함이 단속된다. 그리고 진화란 이러한 단속의 전개와 생존이 뒤섞여 교차하 면서 진행되는 것이다(주변부 격리 집단의 종분화가 급격히 일어난다고 말할 때,나는 지질 학자로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는 수백 년에서 수천 년이라는 긴 기간이 걸리기 때문에, 여러분이 한 그루의 나무에 달라붙어 종분화를 하고 있는 꿀벌을 평생 동안 관찰한다 해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1천 년이라는세월은 대부분의 화석 무척추 동물 종의 평균존속 기간이 라는 척도-500만 년에서 1천만 년-에서 본다면 지극히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는다. 지질학자들이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지는 사건을 설명할 수 있는 경우란 좀처럼 없 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시간을 그저순간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보통이다). 만약 점진론이 자연계의 사실이기보다 서양적 사고 방식의 산물이라면 편견을 없애고 우 리들의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변화를 설명하는 다른 원리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소련에서 과학자들은변화에 관한 다른 철학적 원리-헤겔 철학을 엥겔스가 정식화한 이른바 변증법적 여러 법칙들-로 훈련되어 있다. 변증법의 여러 법칙들은 분명 '단속'적이다. 예를 들어 그들은 '양에서 질로의 전환'이라 는 개념을 이야기한다. 우리에게는 이 말이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실 제로 그 말의 의미는, 어떤 계에 느린 속도로 스트레스가 계속 축적되다 보면 일정한 한계 점에 도달해 갑작스런 비약이 일어나 변화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물을 가열하면 결국 끓게 된다. 노동자를 계속 착취하면 이윽고 혁명이 일어난다. 엘드리지와 나는 많은 소련의 고생물학 자들이 우리들의 '단속평형설'과 흡사한 체계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남다른 흥미 를 느꼈다. 그러나 나는 이 단속적 변화라는 철학의 보편적 '진리성'을 단호하게역설할 생각은 없다. 이러한 웅대한 개념만이 유효하다고 하는 배타덕인 주장을 펴는 것은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일일 것이다. 때로는 점진론이 특정한 사실을 훌륭하게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나는 애팔 래치아 산맥 상공을 비행할 때면 언제나, 주위의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암석이 서서히 침식 된 결과 평행하게 형성된 경이적인 산등성이들에 경외심을 금치 못한다). 나는 단지 지배적인 철학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복수성, 그리고 이러한 철학은-그 것이 아무리 꼭꼭 숨어 있고 표면적으로는 불명료하게 보인다 하더라도-필연적으로 우리들 의 모든 사고를 구속하게 된다는 인식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변증법의 여러 가지 법칙은 어떤 이데올로기를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 서방의 점 진주의에 대한 선호는 같은 이데올로기를 훨씬 더 섬세하고 미묘하게 제기하고 있는 것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나는 단속적인 관점이생물학적 또는 지질학적 변화의 속도를 그 밖의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정확히, 그리고 빈도 높게 설명해낼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 이유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정상 상태에 있는 복잡계complex system들 은 대개 변화에 대해 강한 저항성을 갖는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영국의 동료 지질학자 디렉 V. 에이저는 지질학적변화에 관한 단속적인 관점을 지지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지구 상의모든 지역의 역사는, 마치 병영에서 생활하는 한 병사와 마찬가지로 길고도 지루한 시 기와 짧은 공포의 시기로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