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인간의 진화 제9장 미키마우스에게 보내는 생물학적 경의 나이가 들어 정열이 차분함으로 바뀌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찾아볼수 있다. 리턴 스트 레이치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에 대한 신랄한 전기속에서 그녀의 만년을 다음과 같이 기술 하고 있다. 끈기 있게 기다리던 운명은 나이팅게일 양에게 못된 장난을 쳤다. 그녀가 긴 생애 동안 박애와 공공 정신으로 살아간 것은 오직 운명의 가혹함 때문이었다. 그녀의 미덕은 바로 그 가혹함 속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세월은 빈정대며 이 도도한 여인에게 벌을 내렸다. 그녀에게서 가시를 빼버 린 것이다 그녀는 부드러워지지 않으면안 되었다. 이제 그녀는 온화함과 자기 만족으로 위 축되지 않으면안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이름이 매우 평범해진 동물이 어린 시절에는 훨씬더 맹렬했을지도 모른 다는-어떤 사람들은 이런 대비를 모독적으로 느끼고 경악할지도 모르지만-사실을 발견하더 라도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 미키 마우스는 1978년에 영예로운 만 50세를 맞이했다. 그것을 기념해 그가 처음 출연한 영화 '증기선 월리'(1928년)가 미국 각지의 영화관에서 재상영되었다. 원래 미키는 제멋대로 였고, 심지어는 조금 사디스트적인 경향도 있었다. 어느 장면에서 미키와 미니는 당시로서는 무척 자극적인 새로운 음향 효과를 이용해 배 위의 다른 동물들을 쥐어짜고 비틀어서 발랄 한 '짚 속의 칠면조'의 합창을 시작한다. 그들은 집오리를 꼭 끌어안아 울음소리를 내게 하고, 염소의 꼬리를빙빙 돌리고, 돼지의 젖꼭지를 꼬집고, 실로폰 대용으로 암소의 이를 마구두들겨대고, 암소의 젖통으로 백파이프 를 불어댄다. 크리스토퍼 핀치는 준공식적인 그림의 역사라는 점에서 디즈니 업적을 이렇게 해설한다. "20년대 후반, 영화관에서 대성공을 거둔 미키 마우스는 오늘날 우리들 대부분에게 익숙해 있는 것처럼 절대 예의바른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는 가장 좋게 말해도 개구쟁이이고, 심지어 는 잔혹성까지 내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미키는 곧 자신의 행동을 바로잡았고, 결말이 나지 않는 미니와의관계나 모티와 페르디의 입장 등을 관객의 가십이나 추측에 맡기게 되었다. 핀치는 이렇게 계속한다. "미키는... 거의 국민적인 상징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지위를 확보했고,앞으로도 모든 시대 에 걸쳐 상징이 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된다. 가끔 그가상례를 벗어나기라도 하면, 국민들의 도덕성을 자신들이 지키고 있다고생각하는 시민이나 단체들로부터 즉각 숱한 항의 편지를 받게 된다... 결국미키에게는 착실한 시민의 역할을 하도록 끊임없이 압력이 가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미키의 성격이 부드럽게 순화되어감에 따라 그의 외모도 변해갔다. 디즈니의 팬들 가운데는 시간이 지남에 따른 미키의 변모를 알아차리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미키의 외면적인 변화 이면에 그에숨겨진 주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은 거의 없다(나는 그렇다고생각한다). 사실 나는 디즈니의 만화가들도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분명하게자각하지 못할 것이라 고 확신한다. 이러한 변화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조금씩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미키는 과거에 비해 부드럽고비공격적인 성격으로 바뀌면서 차차 그 외모도 어린아이 의 모습으로 변한것이다. (미키의 나이는 전혀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만화에 나오는 대개의 등장인물들과 마찬가지 로 미키도 시간이라는 참혹한 파괴의 손길에 아무런영향도 받지 않았다-, 고정돼 있는 나이 에 나타나는 이러한 외견상의 변모는바로 진화적인 변형이다. 진화적인 현상으로 유아화되 는 것을 네오테니(neoteny,유형에서 성적인 성숙에 이르는 상태/옮긴이]라고 한다. 이 문제 에 대해서는나중에 다시 설명하겠다.)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일어나는 형태 변화를 다룬 중요한 생물학적문헌이 있다. 자궁 속 에 있는 인간의 태아는 두부끝이 먼저 분화해발끝보다 빨리 성장하기 때문에(생물학 용어로 는 '전후방향구배anteroposterior gradient'라고 한다), 갓 태어난 아기들은 상대적으로큰 머 리와 중간 크기의 몸통, 그리고 상대적으로 작은 팔다리를 가지게된다. 이 구배는 성장 과정에서 다리와 발이 머리보다 커지면서 역전된다. 머리의 성장도 계속 되지만 몸의 다른 부분에 비해 그 성장 속도가느리기 때문에 머리의 상대적 크기가 작아지 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 성장의 전 과정을 통해 두부 자체에 여러 가지 변화가확산된다. 뇌의 성장은 3세 이후 갑자기 느려진다. 유아의 구 모양의두개골은 점점 갸름해지고 눈썹의 위치가 낮아 져 성인의 모습으로 변해간다. 눈은 거의 성장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 크기는 급속히줄어든다. 그러나 아래턱과 윗턱은 차츰 커진다. 아이들은 성인보다 큰머리와 큰 눈, 작은 턱, 크게 부풀어오른 두개골, 작고 땅딸막한 다리와발을 가진다. 이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지만 성인이 될수록 머리는 전체적으로 한층 원숭이의 것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미키는 우리들과 함께해 온 지난 50년 동안, 이 개체 발생의경로를 역행해왔다. ' 증기선 월리'에 나오는 초라한 생쥐와 같은 캐릭터가 마법의 나라에 사는 귀엽고 악의 없는 주인공이 됨에 따라 그의용모는 조금씩 어리게 변해갔다. 1940년경이 되자 과거에는 돼지의 젖꼭지를 비틀어 대던 악동이 말을듣지 않는다는 이유 로 엉덩이를 세게 걷어차이는('판타지아' 속의 '마법사의제자') 신세가 되었다. 1953년경 미 키 최후의 만화에서 낚시를 간 미키는물을 뿜어대는 대합조개의 행패를 저지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디즈니 만화가들은 자연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변화를 흉내내 미키를 변형시켜 갔다. 그들은 미키가 아이들처럼 짧고 땅딸막한다리를 갖게 하기 위해 바지의 위치를 내려 그의 호리호리한 다리에 헐렁헐렁한 옷을 입혔다(팔다리도 상당히 굵어져 그 관절은 칠칠치 못해 보인다). 머리는 몸에 비해 상대적으로 커져 용모는 한층 더 어린아이와 흡사하게되었다. 미키의 코 길이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지만 조금 굵어졌기 때문에돌출감이 완화된 느낌을 주었다. 또한 그의 눈은 두 단계를 거쳐 발달했다. 첫번째 단계는 선조형 미키의 검은 눈 전체가 자손형 미키의 눈동자로 바뀌어가는, 불연 속적 이지만 현저한 진화적 변화이다. 두 번째 단계는그 이후에 계속된 변화로서 눈 자체가 조금씩 커진 것이다. 미키의 두개골이 점차 부풀어오른 변화도 재미있는 과정을 겪으며 진행되었다. 그의 진화 는 귀와 타원형의 코가 달려 있는 하나의 원으로머리를 표현한다는 일종의 불문률에 구속되 어 있기 때문이다. 그 원 형태는 부풀어오른 두개골을 직접 표현하는 것으로 바뀌지 않았다. 대신양쪽 귀가 약간 뒤쪽으로 옮겨져 코와의 거리가 멀어지고, 경사진 이마대신 등근 이마 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관찰을 수량적으로 과학화하기 위해 나는 미키의 계통 발생과정에 나타난 세 단계 의 외모를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성능이 좋은다이얼 캘리퍼스로 재보았다. 즉 1930년대 초 기의 코가 가늘고 귀가 앞쪽으로 쏠려 있던 얼굴(제1단계), 훨씬 나중인 '미키의 잭과 콩나 무'(1947년)에 나오는 얼굴(제2단계), 그리고 근년의 미키 마우스(제3단계)이렇게 세 단계를 측정해본 것이다. 나는 미키의 점진적인 유아화를 나타내는 세 가지 징후를 측정해보았다. 머리의 길이(코뿌리에서 뒤쪽 귀의 정점까지)에 대한 눈의 크기(높이의최대치)의 백분률, 신 장에 대한 머리 길이의 백분률, 그리고 앞쪽에 있던귀가 뒤편으로 이동한 것을 나타낸 두개 의 크기(즉 코뿌리에서 뒤쪽 귀끝까지의 거리에 대한 코뿌리에서 앞쪽 귀 끝까지 거리의 백 분률). 이 세 가지 퍼센티지는 모두 착실히 증가해갔다. 눈의 크기는 머리길이의 27퍼센트에서 47퍼센트까지, 머리 길이는 신장의 42.7퍼센트에서 48.1퍼센트까지, 그리고 코에서 앞쪽 귀까 지의 거리와 코에서 뒤쪽귀까지와의 비율은 71.7퍼센트에서 놀랍게도 95.6퍼센트로 껑충 뛰 었다. 나는 비교를 위해 미키의 젊은 '조카' 모티 마우스에 대해서도 똑같은 측정을 해보았다. 미키의 머리 길이는 모티만큼 작아지지는 않았지만, 그 밖의 다른 특성에서는 모티와 가깝 게 진화해 갔다. 어쩌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명색이 과학자라는 사람이 생쥐를 상대로 도대체 무슨 짓 을 하고 있느냐고 꾸짖을지도 모른다. 지금 하고있는 이야기가 절반은 실없는 소리이고, 절 반은 재미 삼아 하는 것임은물론이다(나는 지금도 '시민 케인'보다는 '피노키오' 쪽을 더 좋 아한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실제로는 두 가지 -진지한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우선 디즈니가 왜 자신의 가장 유명한 캐릭터를 일정한방향으로, 그토록 서서히 장기간에 걸쳐 변화시켰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적인 상징이라는 것은 그렇게 변덕스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시장 조사 담당자들(특히 인형 산업)은 어떤 용모가 귀엽고 친숙한 느낌으로대중들에게 호 소력을 가지는지 알기 위해서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가며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생물학 자들 역시 넓은 범위에 걸친 다양한동물들에 대해 같은 문제를 연구하면서 엄청난 시간을 보낸다. 콘라트 로렌츠는 그의 가장 유명한 논문에서, 인간은 아기와 성인 사이에 나타나는 형태 상의 차이를 행동의 중요한 신호로 사용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아성을 나타내는 여러 가 지 특징들이 어른들에게 아기에대한 애정과 양육하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선천적 인 격발 메커니즘'의 방아쇠를 당긴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유아적 용모의 동물을 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따뜻하게 품어주고 싶 은 마음을 갖은 적이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아기를 기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이 반응의 적응가adaptive value는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기에 덧붙여 로렌츠는 자신이 생각한 격발 메커니즘으로 디즈니가 미키에게 점차적으로 부여한 유아적 특징을 그대로 열거한다. 즉 "머리가상대적으로 큰 점, 안면보다 두개골이 더 큰 점, 눈이 크고 얼굴의 아래쪽에 위치하는 점 이마가 부풀어올라 있는 점, 짧고 땅딸막한 사지, 일관되게 신체의 모든 부분이 부드럽고 탄력이 있는 점 그리고 서투른동작." (유아적 특징에 대해 어른들이 애정 어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우리의선조인 영장류로부터 직접 전달받은 선천적인 것인지-로렌츠가 주장하듯이-. 아니면 단지 아기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으로부터 학습된 후, 학습된 특정한 신호에 애정의 끈을 결합시키는 진화적 경향이 이 식된 것에 지나지 않은지를 둘러싼 논쟁의 여지가 많은 문제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는 다 루지 않겠다. 내 주장은 어느 쪽의 경우에도 똑같이 통용된다. 왜냐하면 그 생물학적기반이 직접 프로 그램되었든, 또는 학습을 통해 그 신호와 결부시키는능력이 형성되었든 간에 나는 유아적 특징이 어른들에게 강한 애정을유발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로렌츠 논문의 주된 명제를-인간은 소위 게슈탈트gestalt. 즉경험의 통일적인 전체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격발 기구로 작용하는 일련의구체적인 특징들에 대해 반응하 는 것이라는-내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삼고 싶다. 이러한 주장은 로렌츠에게는 매우 중 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과 다른 척추 동물의 행동 양식이 동일하게 진화하였음을주장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러 종류의 새의 경우 '게슈탈트'에 대해서도다는 추상적인 특징에 대해 반응하는 경향이 크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1950년에 발표된 로렌츠의 이 논문 에는, '동물 및 인간 사회에서의 전체와 부분'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디즈니가 미키의 외견을 조금씩 바꾸어간 사실은 지금까지 이야기한 배경속에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그는 한 가지 경향을 순차적으로발전시킴으로써 로렌츠가 이야기한 일차적 격발 기구를 작동시킨 것이다). 로렌츠는 우리들이 인간과 동일한 기준으로 다른 동물들을 판단하고있다는 점을-진화적 인 맥락에서 볼 때 그 판단은 전혀 부적절할지도모르지만-지적한 다음, 유아적 특징이 우리 모두에게 가지는 힘과, 그러한 특징이 미치는 영향의 추상적 특성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 성인들은 자신들의 아기를 키우기 위해 발달한 반응으로 인해 그런 감 정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 반응을 다른 동물이 갖는 동일한 특징에까지 전이시킨다는 것이 다. 많은 동물들은 인간이 갖는 애정의 감응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몇가지 이유로, 사람의 아기에게는 있지만 성인들은 이미 잃어버린 몇 가지 특징들-특히 상대적으로 큰 눈, 턱이 뒤로 들어가고 이마가 둥글게불거져 나온 얼팔 모습 등- 을 갖추고 있다. 우리 어른들은 이 런 동물에 반해 애완용으로 기르기도 하고. 야외에서는 멈춰 서서 그들을 넋잃고 바라보기 도 한다. 반면에 우리들은 그들보다 더 사이 좋은 친구가 되거나 찬미의 대상이될 수도 있는 동물 들을 단지 눈이 작고 코가 길다는 이유로 배척하기도한다. 로렌츠는 인간의 아기와 흡사한 특징을 갖는 여러 가지 동물들의독일어 명칭이 그러한 특징을 갖지 않는 가까운 친척 종들 보다 큼에도불구하고, '-chen'(-혠)이라는 접미사로 끝난다는 -가령 'Rotkehlchen'(유럽울새), Eichhornchen'(다람쥐), 그리고 'Kaninchen'(토끼) -사실을 지적했다(독일어에서 '-chen' 으로 끝나는 말은 모두 '작다' 는 의미를 가진다/옮긴이). 더욱이 로렌츠는 매우 흥미로운 어떤 부분에서, 다른 동물이나 또는사람과 비슷한 특징을 갖고 있는 무생물을 보고 생물학적으로 부적절한반응을 나타내는 우리의 능력에 대해 자신 의 논의를 확장하고 있다. "경이적인 어떤 대상들은 인간의 특성인 '경험적 결부experientialattachment'에 의해서 놀 랄 만하고 매우 특수한 감정적 가치를 획득할수 있다... 마치 산봉우리처럼 머리 윗부분이 솟아 있고 그 아래쪽으로는 낭떠러지같이 깎아지른 얼굴, 두터운 적란운이 뭉게뭉게 피어오 른것 같은 모습 등은 꼿꼿이 서서 앞으로 몸을 조금 기울인 성인 남자의모습과 같은 직접적 인 과시 효과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위협이다. 우리들은 낙타와 같은 동물을 보면 냉담하고 비우호적인 느낌을 받지않을 수 없다. 그것 은 낙타가 수많은 인류 문화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오만한 거절의 제스처'를-그 자신은 전 혀 의식하지 못한 채, 그리고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런 제스처를 할 때 우리는 머리를 높이 들어 코의 위치를 눈보다 높게 한다. 그리고 눈을 반쯤 뜨고 코로 바람을 내뿜는다. 요컨대 영국의 전형적인상류 계급들이나 그들의 잘 훈련된 하인들이 흔히 하는 '흥!'이다. 로렌츠의 다음과 같은 글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 모든 것들은경멸하는 상대가 발산하는 모든 감각적인 양상에 대한 거절을 상징한다." 그러나 불쌍한 낙타에게는 입을 아래로 당겨 머리를 낮추면서 코를길다란 눈보다 높이 들어올리는 게 불가능하다. 로렌츠가 우리들에게상기시켜주었듯이, 만약 당신이 낙타가 당신의 손에서 먹이를 먹을지,그렇지 않으 면 침을 뱉으려 하는지를 알려면 양쪽 귀의 모습을 보면 된다. 찰스 다윈은 1872년에 출간된 '인간 및 동물의 감정 표현'이라는 중요한 저서에서, 원래는 동물의 적응적인 행동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지만, 이후 인간에게는 상징으로 내면화된 여 러 가지 몸짓의 진화적 기반을 밝혀내려고 시도했다. 그 결과 그는 형태뿐 아니라 감정에도 진화적인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주장했다. 인간은 격노할 때에 윗입술을 들어올려 싸움용 송곳니-지금은 사라져버린-를드러내 보이 려 한다. 우리가 나타내는 혐오의 제스처는 피할 수 없는 상황에닥쳤을 때 구역질을 일으킨 다는 고도로 적응적인 행동과 결부되는 안면움직임인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많은 동시대 인에게는 무척 실망스러운일이었지만 다윈은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극도의 공포 때문에 머리털이 곤두서거나광포한 분노 때문에 이를 드러내는 등의 몇 가지 표정은 인간이 과거에그보다 훨씬 낮은 동물적인 상태로 존재 했다는 믿음이 없다면 이해하기어려운 것이다." 어쨌든 인간의 유아기에서 볼 수 있는 특징들은 다른 동물에서 관찰될 때에도 우리들에게 강한 감정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따라서 나는 점차 어린 방향으로 역행하는 미키 마우스의 진화 경로는 디즈니나 그의만화가들이 무의식적으로 이 생물학적 원리를 발견했음을 나타낸 다고주장하고 싶다. 실제로 디즈니 만화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의 감정 상태는 거의 동일 한 특징들에 기초한다. 이런 정도로까지 마법의 왕국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 환상-즉인간의 추상에 대한 능력과 인간 자신의 성장 과정에서 신체의 형태가바뀌어가는 데 대한 우리들의 적절한 반응을 다른 동물들에게 (부적절하게)전이시키려 드는 인간의 버릇-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다. 도널드 덕도 세월이 흐르면서 차차 어린 용모를 갖게 된다. 그의 가늘고 길던 주둥이는 짧아지고 눈은 커졌다. 미키가 모티의 용모에 닮아갔듯이 도널드도 조금씩 휴이, 루이, 그리 고 듀이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도널드는 미키의 옛날 품행이 나쁘던 시대의 모습을 이어받 아 튀어나온 주둥이와 경사진 이마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어른다운특징을 갖고 있다. 마우스의 악당이나 사기꾼들은 모두 외견상 미키보다 어른스럽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실 제 연령으로는 미키와 같은 나이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1936년에 디즈니는 '미키 마우스의 라이벌'이라는 단편을 제작한 적이 있었다. 미키가 미니를 데리고 사이 좋게 교외로 피크닉을가려고 하자 노란색 스포츠 카를 탄 멋쟁 이 모티머가 그들을 방해한다. 악명 높은 모티머는 몸 길이의 29퍼센트밖에 되지 않는 머리를 가지고있다. 그에 비해 미 키의 머리는 몸 길이의 45퍼센트이다. 코의 길이는미키가 얼굴의 49퍼센트인 데 비해 모티 머는 얼굴 길이의 80퍼센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니는 언제나 그렇듯이 모티머에게 마 음이 끌리는데,이때 근처의 들판에서 달려온 친절한 숫소가 모티머를 쫓아낸다). 디즈니 만화에 나오는 그 밖의 등장 인물들의-뽐내는 싸움 대장 페그레그핏, 사랑스럽지 만 단순한 얼뜨기 구피 등-과장된 어른스러운 외모를 생각해보라. 미키 마우스 외모의 편력과 관련된 두 번째이자 중요한 생물학적 논의가 있다. 나는 그가 영원한 젊음을 획득한 경로는 우리들 인간의 진화사를 요약적으로 반복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왜냐하면인류는 '네오테닉'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원래 우리들의 선조가 어린 시기에 가지고 있던 특징을 어른이될 때까지 유지하는 현상을 오랜 시기에 걸쳐 계속하면서 지금까지진화해왔다. '증기선 윌리'에 나오는 미키와 마찬가지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속하는 우리들의 선조는 튀어나온 턱과 납작한 두개를 가 지고 있었다. 인간의 태아기 때 두개의 형태는 침팬지 태아기의 그것과 그다지다르지 않다. 그리고 인 간의 두개는 성장 과정에서도 큰 변화를 나타내지 않는 변형 과정을 거친다. 즉 출생 후에 는 뇌가 몸의 다른 부분보다훨씬 천천히 성장하기 때문에 두개가 상대적으로 작게 되고 위 턱과 아래턱은 상대적으로 커져간다. 그러나 침팬지의 경우, 다 자란 침팬지는 그 형태상 새끼와 크게 다르며,성장 과정에서도 심한 변화를 겪는다. 그에 비해 인간은 성장 과정을완만하게 진행시키기 때문에 어른의 모 습은 아기 시절과 그리 다르지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른이 된 후에도 어린 시절의 특징 이 크게달라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다. 분명 우리도 아기와 어른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나타날 정도로 변하지만, 그 차이는 침팬 지나 그 밖의 다른 고등 영장류에서 나타나는 차이보다 훨씬 작다. 인간의 경우, 이처럼 특별히 느린 발육 속도가 '네오테니'의 원인이되었다. 일반적으로 영 장류는 포유류 가운데 발육이 느린 동물에 속한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어떤 동물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이 경향이두드러진다. 우리들은 10개월에 가까운 긴 임신 기간, 매우 긴 유 년기그리고 포유류 가운데 가장 긴 수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유아적인특성이 오래 지속 되는 형태상의 이점들이 우리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있다. 첫째, 우리의 뇌가 확장된 것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태아기의급속한 성장 속도가 출생 후까지 어느 정도 지속된 결과이다(모든 포유류의 뇌는 자궁 속에서 급성장하지만 출생 후 에는 거의 성장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우리 인간은 이 태아기의 양상이 출생 후까지 계속된다). 다른 한편으로 발육 시점의 변화 자체도 그에 뒤지지 않는 중요한 요소이다. 인간은 학습 력이 뛰어난 동물이며, 유년기가 길어지자 교육에의한 문화의 전달이 가능하게 되었다. 대부 분의 동물들은 유년기에 유연성을 보여주며 놀이를 즐기는 특성이 있다. 그러나 차츰 성숙 하면서엄격하게 프로그램된 패턴을 따르게 된다. 로렌츠는 앞에서 언급한 논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정상적인 인간의인간다운 특성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특색은-즉 발육 과정의모든 단계에서 항상 나타나는 특색은-확실 히 우리들이 갖는 '네오테닉'한성격에 빚지고 있다." 요컨대 우리들은 미키와 마찬가지로 나이를 먹는다고 크게 달라지도록 성장하지 않는다. 미키, 앞으로 반세기 동안 네게 행운이 있기를. 너와 같이 언제까지나 젊음을 유지하고 싶지 만, 그렇다 해도 너보다는 조금 더 슬기로워지고 싶다. 제10장 인류최고의 사기극 필드다운 인 오래된 미스터리보다 더 흥미로운 일은 없을 것이다. 추리 소설 중에서조세핀 테이의 '시 간의 딸The Daughter of Time'을 사상 최고의 탐정 소설로 꼽는 사람이 적지 않은 까닭은, 그 주인공이 현대의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로저 액크로이드와 같은 살인자가 아니라 리처드 3세였기 때문이었다. 과거로부터 전설적인 이야기는 항상 뜨겁지만 비교적 결실이적은 논쟁 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칼잡이 잭(1888년에서 1889년까지 런던의 이스트 엔드 지역에서 많은여성 주로 매춘부를 죽인 범인이 스스로를 부른 이름. 범인이 잡히지않았기 때문에 그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옮긴이)'은 과연 누구였는가? 셰익스피어는 과연 셰익스피어였을까? 약 25년 전에 역사상 모든 수수께끼가운데서도 1급에 속하는 사건이 내가 몸담고 있는 고생물학 분야에서일어났 다. 1953년, 필트다운 인(Piltdown man, 영국 서섹스 주 필트다운에서발견되어 플라이스토 세 최고의 인류로 생각되었으나 후일 조작된 가짜임이밝혀졌다/옮긴이)이 지극히 불확실한 속임수에 의해 저질러진 분명한사기극이었음이 밝혀졌다. 그 후 근년에 이르기까지도 대중들의 관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티라노사우루스와 알로사 우루스를 구별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필트다운 인'이라는 속임수를 만들어낸 사람에 대해서 는 명백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는 '누가 한 짓인가?'를 문제 삼기보다는 지적인 의미에서 더 흥 미로워 보이는 문제를 논해보고 싶다. 우선 첫째로,처음에 모든 사람이 필트다운 인을 용인 한 까닭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최근 보도된 뉴스 기사에서 또 한 사람의 수상한 용의자가 -내가보기에는 형편없이 빈약한 증거로-추가되었기 때문에, 나는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젊은 시기에 추리 소설 애독자이기도 한 연유로, 이적절한 시기에 드디어 나 자신의 편견을 발표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1912년 영국 서섹스 주의 변호사이며 아마추어 고고학자이기도 한 찰스 도우슨이 대영박물 관 자연사관의 지질학 부문 관리관이었던 아서 스미스 우드워드에게 여러 개의 두개골 파편 을 가지고 왔다. 도우슨의 이야기로는 최초에 발견된 파편은 1908년 한 채석장에서 일하고 있던 노무자들이 발굴했다는 것이었다. 그 후 그는 준설한 흙더미를 뒤져서 몇개의 파편을 더 찾아냈다. 심하게마모되고 짙은 색 으로 찌든 그 뼛조각은 아주 먼 옛날의 사력 층에서 나온것으로 생각되었다. 그것들은 그 이후 시기에 매장된 인간들의 유골이아니었다. 그런데 그 파편이 이상할 정도로 두꺼웠음에 도 불구하고 두개골전체의 형태는 놀라울 만치 근대적인 것처럼 보였다. 스미스 우드워드는 무척 신중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겉으로 흥분을 나타내지는않았다. 도 우슨에게 안내되어 필트다운으로 간 그는 그곳의 자갈 퇴적장에서테야르 드 샤르댕과 함께 다른 증거를 찾았다(그렇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지만,약 15년 전에 '현상으로서의 인간'이라 는 저서에서 생물 진화와 자연, 그리고신을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벌여 숭배받았던 과학자이 자 신학자인 바로 그테야르이다. 그는 1908년,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건너와 필트다운 가까운 헤이스팅스의예수회 신학교에 서 연구하고 있었다. 1909년 5월 31일 그는 마침 한 채석장에서도우슨을 만났다. 이 노련한 변호사와 젊은 프랑스 인 예수회 신도는 곧 친한친구이자 동학자, 그리고 공동 탐사자가 되 었다). 어느 날 그들이 함께 조사하고 있을 때, 지금은 유명해진 문제의 아래턱뼈를 도우슨이 발 견했다. 두개골 파편과 마찬가지로 이 아래턱뼈도짙은 빛깔을 띠고 있었지만, 그 형태는 두 개골이 인간과 흡사한 만큼유인원과 흡사하게 보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사람의 아래턱뼈에 는 흔하게 발견되지만 유인원에게서는 나타나는 일이 없는 평평하게 마모된어금니가 두 개 붙어 있었다 불행히도 이 아래턱뼈는 두개골과의 관계를 밝혀줄 만한 귀중한 두 장소에서, 유인원과 인간 사이의 차이점을나타내는 관절과 두개골 부분이 결손돼 있었다. 스미스 우드워드와 도우슨은 1912년 12월 18일, 두개골 파편, 아래턱뼈, 가공된 부싯돌과 그 밖의 뼈들과 함께 발견된 발굴물, 그리고 그연대가 아주 오래 전임을 보여주는 많은 포 유류 화석들로 준비를 하고런던 지질학회를 찾아가 학자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들에 대한평가는 찬사와 비난이 뒤섞인 것이었지만, 대체적으로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속임수를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일부 비평가들은 사람의두개골과, 유인원의 것 과 비슷한 아래턱뼈의 결합으로 인해 서로 다른 두동물의 뼈가 같은 채석장에서 뒤섞인 것 일 수도 있다는 암시를 받았다. 그 후 3년 동안 도우슨과 스미스 우드워드는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 이상 훌륭한 것이 없을 만큼 뛰어난 발굴물을몇 가지 더 제시해서 반론을 제기했다. 우 선 1913년, 테야르 신부는 매우 중요한 아래턱의 송곳니를 발견했다. 그것 역시 형태상으로 는 유인원의 것과 흡사했지만 인간의 이처럼 현저히 마모되어 있었다. 그 후 1915년에 도 우슨은 최초의 발견 장소로부터 2마일 떨어진 두 번째 장소에서, 두꺼운 인간의 두개 파편 두 개와 사람의 이빨처럼 마모된 유인원형의 이빨 하나로 이루어진 이전과 동일한 조합의 화석을 발견했다. 이 발견으로 그 동안 도우슨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에게 지지를 보냈다. 처음에는 비판자였지만 그 후 지지자로 돌아선, 당시 미국의 저명한고생물학자인 헨리 페 어필드 오스본은 이렇게 쓰고 있다. 만약 선사 시대의 여러 가지 인간 현상을 관장하는 신의 섭리가 존재한다면, 이 경우가 분명 그 섭리가 현현한 것이다. 왜냐하면 도우슨이 발견한 제2의 필트다운 인의 파편 세 개 는 원래의 유형과 비교함으로써 확증을 얻는 데 우리들이 선택할 만한 바로 그런 유골이었 기 때문이다... 그것에 상응하는 첫번째 필트다운 인의 화석과 나란히 놓아두면 그것들은 정 확히 일치한다 조금의 차이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스본 자신은 알지 못했던 신의 섭리가 필트다운에서 인간의형태로 나타났다. 그 후 30년 동안 필트다운 인은 다소 미흡한 점이 있기는 했지만 일단 용인되었고, 인류 전 사에서 일정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후 1949년에 케니스 P 오클리가 필트다운 인의 유골에 대해 불소 시험을 해보았다. 동물의 뼈는 퇴적물 속에 묻혀 있던 시간과 주위 암석 이나 토양의 불소 함유량에 따라 불소를 흡수하는 성질을 다르게 나타낸다. 시험 결과 필트다운 인의 두개골과 아래턱배 모두에는 간신히 검출할 수 있을 만한 불소 밖에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므로 그 유골들은 사력층 속에 오랫동안 묻혀 있었던 것 이 아니었다. 그때까지도 오들리는 그것이 가짜라고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이 필트다운 인의 유골이비교적 현대에 와서야 비로소 오래된 사력층 속에 묻히게 되었으리라는 가설을 세웠다. 몇 년이 지나자 오클리는 J. S. 바이너, W. E. 르 그로 클라크와 공동연구 결과 '매장'이 금세기에 의도적으로 위장되었음을 알아내게 되었다. 그는 문제의 머리뼈와 턱뼈가 인위적으로 착색되었고, 부싯돌과 그 밖의다른 뼈는 현대의 칼날을 이용해서 가공되었으며, 함께 발견된 포유류의뼈는 진짜 화석이기는 하지만 다른 장 소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는 사실을폭로한 것이다. 게다가 이빨은 사람의 이빨과 비슷하게 보이기 위해 줄로 간 것이었다. 인간의 머리뼈에 유인원의 것과 흡사한 아래턱뼈가 붙어 있는 이 옛날의이형은 가능한 한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완성된 것이었다. 두개골은 현대인의 것이었고, 아래턱뼈는 오랑우탄의 것이었다. 그러면 이런 종류의 발굴을 그토록 애타게 기다렸던 이유로 지극히 단순한이 이형의 정체 를 간파할 수 없었던 학자들을 상대로 이 정도로 기이한 사기행각을 벌인 사람은 도대체 누 구였을까? 최초 세 사람의 학자들 가운데 테야르는 너무 어려서 그 발굴물의 진위를 파악하지 못했 을 것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또한 스미스 우드워드는 필트다운 인의 실재를 확인하는데 반생을 바치면서 80세경부터는 눈까지 보이지않게되었고 은퇴 후 '최초의 영국인'(1948년) 이라는 쇼비니슴적인 제목의 최후저서를통해 저술할 만큼 진실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내 생각에도 그 판단이 옳은 것 같다). 따라서 의심은 도우슨에게 집중되었다. 그가 그런 일을 저지르게 된 동기를납득할 수 있 게 제시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에게 그럴 기회가 있었던 것은사실이다. 도우슨은 지금까 지 몇 차례에 걸쳐 중요한 발굴을 한 공적으로 상당한명성을 얻은 아마추어 학자였다. 그가 새로운 발굴에 지나치게 집착했고, 올바른판단력을 결여하고 있었으며, 다른 아마추어 학자 들에 대해 얼마쯤 비양심적인행동을 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사기극에 직접 관계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불구하고 J. S. 바이너의 '필트다운의 위조'(1955년)라는 책 속에 잘 요약되어 있듯이정황 증거는 상 당히 유력했다. 그러나 도우슨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 발굴물이 고도로 교묘하게 위조된 점으로봐서 최 소한 누군가 더 전문적인 과학자가 관계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나는 그런 관점을, 그처럼 서투른 위조를 좀더 일찍 간파할 수 없었던 데대한 자 신들의 면구스러움을 달래기 위해 연구자들이 펴는 억지 주장이라고생각해왔다. 분명 착색 은 더없이 완벽한 수준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도구'들은형편없는 수준으로 깎여 있 었고, 이빨의 마모도 조잡한 것이었다. 조작이 폭로된 후과학자들이 다시 조사한 결과 이빨 에 고의적으로 긁어낸 자국이 있다는 사실이금방 밝혀졌다. 르 그로 클라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인위적인 마모의 증거가 곧 눈에 띄었다. 실제로 그것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명료했기 때문에 충분히 의문이 제기될수 있었으 리라고 생각된다. 어떻게 좀더 빨리 그 사실이 밝혀지지 않을 수 있었는지의아할 정도다." 위조의 핵심은 어떤 부분을 제거할 것인지-턱과 턱 관절을 미리부숴야 한다는 것-을 잘 알 고 있었다는 점이다. 1978년 11월, 또 한 사람의 학자가 음모에 가세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필트다운 인이 다시 기사화되었다. 옥스퍼드 대학의 지질학과 명예 교수를 지낸 J. A. 더글러스가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자신이 맡았던 강좌의 전임자인 W. J. 솔러스가 범인으로 생각 된다는내용의 이야기를 테이프에 녹음해 놓았던 것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더글러스는 세 가지 항목을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것들은 거의 증거로 채택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1. 솔러스와 스미스 우드워드는 서로 원한 맺힌 적이다(그래서 어쨌다는것인가? 학계란 어느 곳이나 살무사들의 소굴과 같은 법이다. 그러나 논쟁과교묘한 속임수는 차원을 달리하 는 문제이다). 2. 1910년에 더글러스는 솔러스에게 마스토돈(코끼리와 흡사한 태곳적동물/옮긴이)의 뼈를 몇 개 건네준 적이 있는데, 이 배들이 바로 이 동물 배의일부로 사용되었을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뼈나 이빨은 그다지 희귀한 것이아니다). 3. 솔러스는 과거에 중크롬산칼륨을 납품받은 적이 있었지만, 더글러스나솔러스의 사진 기 사는 왜 그런 화학 약품이 그에게 필요한지 알 수 없었다. 필트다운 인의 뼈를 착색하는 데에는 중크롬산칼륨이 사용되었다(그것은 사진기술에서도 꼭 필요한 화학 물질이었다. 나는 솔러스의 사진 기사가 일으킨혼동을, 그 교수가 부정한 사용 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유력한 증거로 간주할 수없다고 생각한다). 솔러스를 범인으로 생각할 만한 증거는 매우 박약한 것이었다. 따라서 나는 왜영국과 미 국의 유력한 학술 잡지가 이러한 모호한 주장에 그처럼 많은 지면을할애했는지 의아하게 생 각한다. '태고의 사냥꾼들'이라는 유명한 저서에서, 솔러스가 교묘한 빈정거림으로 읽힐만큼 열정 적인 어조로 필트다운 인에 대한 스미스 우드워드의 견해를 지지했다는패러독스만 없었어도 나는 그를 범인 후보에서 완전히 제외시켰을 것이다. 내 관점에서는 오직 세 가지 가설만이 큰 의미를 갖는다. 첫째, 도우슨이 많은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고 있었고. 일부 아마추어 고고학자들로부터 미 움을 받고-물론 다른 사람들로부터는 같은 정도로 존경을 받고 있었지만-있었다는 점이다. 같은 나라 사람들 중에는 그를 사기꾼으로 보는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일부는그가 전문 가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데 대해 심하게 질시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의 동료 가운데 누군가가 이 복잡하고 특이한 방식의 복수를 생각해냈을것이다. 두 번째 가설은 가장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는 것으로서, 명성을 위한것이었든 전문가들 의 세계에서 주목받고 싶었기 때문이든 간에 도우슨이 단독으로 사기극을 벌였다는 것이다. 제3의 가설은 앞의 두 가지보다 훨씬 흥미롭다. 그 가설에 의하면,필트다운 인은 악의적인 위조가 아니라 어느 한 개인이 저지른 도가 지나친 장난이었다는 것이다. 이 관점은 그를 잘 알고 있는 많은 뛰어난척추 동물 고생물학자들의 '지론'을 대변하는 것이다. 나는 여러 가지증거들을 면밀히 검토해 그 증거들의 문제점을 밝혀내려고 애썼다. 마침내 나는 이 마지막 가설이 가장 유력한 관점은 아니라 하더라도 일관되고 가장 설득 력 있는 것임을 알았다. 지금 내가 생활하고 있는 하버드대학의 박물관 관장을 역임했던 미 국 최고의 척추 동물 고생물학자였던 A. S. 로머는 종종 자신이 품고 있던 의구심을 내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루이스 리키도 같은 생각이었다. 리키의 자서전에는 익명의 '제2의 남자'라고만 나 와 있지만, 그 내용을 읽어보면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특정 개인을 지칭하 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나이를 먹어 다른 모습으로 변한 후에 자신의 젊었던 시절의모습을 기억해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노년의 테야르 드샤르댕은 대중에게는 매우 근엄한, 마치 신 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우리 시대의 걸출한 예언자로서 각계 각층의 사람들로부터 대단한 칭송을받았다. 그러나 그도 과거에는 장난을 좋아하는 학생 시절이 있었다. 그는 이 이야기에 스미스 우드워드가 등장하기 3년 전부터 도우슨을 알고 있었다. 그전에 그는 예수회에서 이집트로 파견되어 있었기 때문에필트다운에 '반입된' 동물 화석의 일부를 이루는 동물의 뼈-아마도 튀니지나 몰타 등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생각된다-를 손에 넣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도우슨과 테야르가 야외나 선술집 등의 장소에서오랜 시일에 걸쳐 음모를 꾸몄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다. 도우슨의 경우에는 거들먹거리는 전문가들이 잘 속는다는 사실을폭로하기 위해, 그리고 테야르의 경우에는 모국 프랑스가 인류학의 여왕이라고 불릴 만큼 화석 인류를 풍부히 가지 고 있으며 그 사실을 무척즐기고 있는 데 비해 영국인들은 실제 인류 화석을 하나도 갖지 못하고있다는 사실을 조롱하면서 다시 한 번 영국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기위해서였을 수 있다. 필경 그들은 함께 작업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영국 과학계의 유력한권위자들이 그 정도 로 필트다운 인에게 희망을 쏟을 줄은 꿈에도 예상치못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처음에는 사실을 고백할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 후 테야르는 영국을 떠나 1차 세계대전중에 들것을 메는 위생병이되었다. 내가 보기에 는 1915년에 제2의 필트다운 발견으로 음모를 완성시킨 사람이 바로 도우슨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장난으로시작된 작은 일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해 커다란 악몽 이 된 상태였다. 도우슨은 전혀 예상치 못한 병에 걸려 이듬해인 1916년에 죽었다. 테야르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돌아올 수 없었다. 그때까지 영국의 인류학계와 고생물학계에서는 세 사람의 권위자들-아서 스미스 우드워 드, 그래프튼 엘리엇 스미스, 그리고 아서 키스-이필트다운 인의 실재를 증명하기 위해 자 신들의 시간을 모두 투자하고있었다(이들 세 사람의 학자들은 두 사람의 아서 경과 한 사람 의 그래프튼경으로 삶을 마쳤다. 그러나 이 영예로운 지위는 주로 고인류 화석 분포도에영 국을 참여시킨 공적에 대한 대가로 증정된 것이었다). 만약 테야르가 1918년에 그 사실을 고백했다면. 그의 전도 유망한 생애-그 중에는 후일 북경 원인 화석의 발견을 기록하는 중대한 역할도 포함되어있다-는 갑작스럽게 종말을 고 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시편의 작자의 가르침,그리고 그보다 훨씬 후에 필트다운에서 수 마일 떨어진 곳에 설립된 서섹스 대학의 표어 "침묵을 지키라 그리고 알라... 를 죽을 때까 지 따른 셈이다. 그것은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억측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끝없는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다음과 같은 더 흥미로운 물음을 떠오르게 한다. 처음에 사람들이 필트다운 인을 믿은 이유는 도대체 무엇 일까? 필트다운 인은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창조물이었다. 완전한 현대인의 두개골과 유인 원과 흡사한 아래턱뼈를 가진 선조를 우리의 계통으로 용인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필트다운 인에 대해 반대하던 사람이 결코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시적이나마 인정을 받았던 필트다운 인은 갈등 속에서 태어나 그 후에도 숱한 논쟁을 통 해 성장했다. 많은 학자들이 필트다운 인은 우연히같은 퇴적물 속에 섞이게 된 두 종의 동 물이 서로 혼합되어 이루어진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40년대 초에 당시 세계 최고의 해부학자였던 프란츠바이덴라이히는(돌이켜 생각하면 그의 지적은 매우 정확한 것이었다) 이렇게쓰고 있다. "에오안트로푸스 Eoanthropus(필트다운 인을 나타내는 학명으로서'최초의 인간dawn man'이라는 의미)는 화 석 인류의 목록에서 말소되어야한다. 이것은 현대인의 두개와 오랑우탄의 아래턱뼈, 그리고 이빨의 파편을인위적으로 결합시켜 놓은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해 아서 키스 경은 빈정거리며 이렇게 응수했다. "이것은기존의 관점에 맞지 않는다고 사실을 배제시키려는 하나의 방법이다. 과학자가추구해야 하는 정상적인 방법은 사실을 배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에 맞는이론을 수립하는 것이다." 게다가 누군가가 이 문제를 계속 추구해 나갔다면, 거기에는 그 조작을 처음부터 간파할 수 있는 근거도 분명히 출간되어 있었다. 치아해부학자인 C. W. 라인은 테야르가 발견한 송 곳니는 그 필트다운 인이죽기 직전에 돋아난 어린 치아였음을 알아냈고, 따라서 그 심한 마 모의정도는 치아의 연령과 매우 모순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 밖에 먼 옛날 필트다운 인의 '도구'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강한 의심을품었던 사람들 도 있었다. 서섹스 주의 아마추어 학자들의 모임에는-그 중에는 도우슨의 동료들도 몇 사람 포함되어 있었다-필트다운 인이 가짜가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린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발표하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단지 가십거리를 들춰내는 즐거움에 탐닉하는 데 그치는게 아니라 필트다운 인의 사례를 통해 과학 연구의 본질에 관한 무언가를 배우려 한다면, 우리는 영국 최고의 고생물학자들이 한 사람도 남김없이 그 어색한 조작물을 그토록 쉽게 받아들였다는 역설을 풀어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모두 과학적인 실천과 관련되는 통념적인 신화-사실은 '냉엄'하고모든 것에 선행 하는 것이고, 과학적인 이해는 가장 작은 정보들까지도 끈기 게 수집하고 철저히 조사하는 과정을 통해 증가한다는 믿음-와 긴밀히연결되어 있는 모순들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조작극 사건은 과학이란 개인적인 희망이나 문화적인편견, 영예에 대한 욕구 등에 의해 추진될 수 있으며, 또한 실수나 잘못으로인해 엉뚱한 경로를 거치는 과정에 서 자연에 대한 한층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할수 있도록 하는 인간 활동의 하나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시사해주었다. 강렬한 희망에 영합해 벌어진 사기 행각: 필트다운 사건이 일어나기전에 영국의 고인류학 자들은 오늘날 지구 밖 생물체를 찾는 연구자들이빠져들고 있는 것과 같은 수렁 속에 빠져 있었다. 직접적인 증거라고는 하나도 없는 끝없는 추측의 악순환이 거듭되었던것이다. 인간의 세 공이라고 하기에는 의심스러운 약간의 부싯돌 '문화'라든가,오래된 사력층 속에서 발견되었 지만 극히 최근에 매장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몇 개의 뼛조각을 제외하고 영국인들은 과거의 선조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에 비해 프랑스 인은 풍부한 숫자의 네안데르탈 인, 크로마뇽 인, 그리고그들과 연관된 미술 작품과 도구 등으로 풍성한 축복을 받고 있었다. 프랑스의인류학자들은 이렇듯 비교조 차 안 되는 증거물의 풍부함으로 영국인의 코를납작하게 만들었고, 은근히 그 사실을 즐기 고 있었다. 이런 형국을 역전시키는데 필트다운 인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증거물이었다. 필트다운 인은 시기적으로 네안데르탈인보다 훨씬 오래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만약 필트타운 인이 눈썹 부위가 돌출한 네안데르탈 인이 출현하기 수십만 년전에 이미 충 분히 근대적인 두개를 가지고 있었다면, 필트다운 인이 우리 현생인류의 직접적인 선조일 가능성이 높고 프랑스의 네안데르탈 인은 그 곁가지가되는 셈이었다. 스미스 우드워드는 이 렇게 공언했다. "현생 인류는 필트다운의 두개가 처음으로 그 증거를 제공한 원시적인 뿌리 로부터 직접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는 데 비해 네안데르탈 인은 초기 인류의 퇴화한 곁가지 에 불과하다." 필트다운 인의 주석 자들은 종종 이러한 국제적인 경쟁을 언급한 반면, 이와마찬가지로 중요한 그 밖의 여러 가지 요소에 대해서는 별반 주목하지 않았다. 문화적 편견 때문에 상쇄된 이형성: 유인원의 아래턱뼈에 인간의 두개를 가졌다면 오늘날 에는 누구나 그 심한 불균형을 한번 의심해 보았을것이다. 그러나 1913년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 무렵에는 상당수저명한 고생물학자들이 인류 진화에서 보이는 '뇌의 선행성 brainprimacy'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문화적인 요소가 농후한 것이었다. 그 관점은 오늘날에 역점을두는 역사적 우선성 historical Priority에서 기인한 잘못된 추정 결과 생겨난 것이다. 즉 우리들은 이성의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므로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뇌는 우리들 신체 다른 부분이 변형되기 전에 먼저 커졌으며 다른 신체 변형을야기시킨 원인이 된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현생 인류의 것에 가까운 커진 뇌와 원숭이와 흡사한 몸을 동시에갖춘 선조의 화 석이 발견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공교롭게도자연은 반대의 길을 택했다. 우리들의 가장 오래된 선조로 알려진 오스트랄로테쿠스는 완전히 직립했지만 뇌는 여전히 작았다). 그러한 이유로 필트다운 인은학자들 사이에 널리 예상되고 기대되었던 선조의 모 습과 정확히 부합되는 것이었다. 그래프튼 엘리엇 스미스는 1924년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필트다운 인의 머리뼈가 그토록 비상한 관심을 끄는 이유는, 그것이뇌가 인류의 진화를 선도했다는 관점을 실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정신 구조의 풍부함에 힘입어 원숭이 상태에서 출현하였다는것은 더할 나위 없이 자명한 진실이다... 뇌는, 턱뼈나 안면, 그리고 신체가 아직까지 인류의 유인원 선조의 조잡한 상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시대에 인간의 수준라고 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했다. 바꿔 말하면 최초의 인류는... 지나치게 큰 뇌를 가진 유인원에 불과했다. 필트다운 인의 두개가 갖는 중요성은 그것이 이러한추론에 명백한 확증을 준다는 점이다. 또한 필트다운 인은 유럽의 백인들 사이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생각되던, 인종과 연 관된 몇 가지 관점을 뒷받침해주었다. 필트다운의사력층과 거의 같은 연대로 추정되는 중국 의 지층에서 북경 원인이 발견되자, 1930년대에서 1940년대에 걸쳐 필트다운 인을 근거로 백인이훨씬 오래 전부터 출현했음을 주장하는 백인 우월주의적인 계통수가 문헌 속에 등장 하기 시작했다(필트다운 인의 진실성을 가장 앞장서서 주장했던 스미스 우드워드, 키스 등 의 학자들은 이러한 계통수를 한 번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북경 원인(처음에는 시난트로푸스(Sinanthropus라고 불렸지만, 지금은호모 에렉투스Homo erecfus로 인정되고 있다)은 현대인의 2/3)정도의 뇌를가지고 있었으며 중국에서 살았는데 비해, 필트다운 인은 완전히 발달한뇌를 가지고 영국에 살고 있었다. 만약 최초의 영국인인 필트다운 인이백인종의 선조이고 그 밖의 다른 피부색을 가진 인종의 선조가 호모에렉투스 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백인은 다른 인종보다 훨씬 앞서 완전한인류에 도달하는 문턱을 넘 어선 셈이 된다. 이러한 고상한 상태로 더 오랫동안 살아왔기 때문에 백인은 문명의 여러가지 기술에서 필 연적으로 앞설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사실을 기대되는 일에 끼워 맞춤으로써 상쇄된 이형성: 우리들은 필트다운 인이 사람의 두개골과 유인원의 아래턱뼈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알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과학자들이 난처한 변칙이나 이형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검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주는사례이다. C. E. 스미스를 비롯한 그 밖의 사람들은 인류가 뇌를 향해'진화적인 경주'를 벌인 것으 로 주장하고 있지만, 너무나 완벽해서 아래턱뼈가변화하기 전에 뇌가 완전히 사람과 같은 형태로 발전했어야만 하는 뇌의 독립성에대해서까지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필트다 운 인은 사실이기에는지나치게 훌륭했다. 키스가 바이덴라이히에게 보낸 조롱이 옳다면, 필트다운 인을 지지하는학자들은 인간의 두개골에 유인원의 아래턱뼈가 붙어 있다는 해괴하기 짝없는사실에 맞는 이론을 억지로 만 들어 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였다. 그들은 '사실'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것은, 정보라는 것은 언제나문화나 희망이나 기대라는 강력한 필터를 통과한 다음에야 사람 들의 귀에들어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증이다. 필트다운 유적에 대한 '순수'한 기록에 나타나는 불변의 주제로서우리는 그 두개가 매우 현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원숭이와 같은 일련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실제로 스미스 우드워드는 처음에 뇌 용적을 약 1,070cc(현대인의 뇌 용적은평균 1,400내 지 1,500정도이다)로 추정했으며, 그래프튼 엘리엇 스미스는1913년의 최초의 논문에서 뇌의 주형cast을 기술하면서, 현대인 뇌의고등한 정신 능력을 나타내는 영역이 필트다운 인의 뇌 에서부터 확대되었다고 하는 분명한 징후를 발견했다. 그는 이렇게 결론맺었다 "우리들은 이것을 지금까지 기록된 것 가운데가장 원시적이고 또 한 가장 원숭이적인 사람의 뇌라고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이 뇌는 그 소유자가 동물계에서 어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지분명히 말해주는 아 래턱뼈와 그 동일 개체 속에서 쌍을 이루고 있을 것이라는예상과 일치한다." 오클리의 폭로 가 있기 1년 전, 아서 키스 경은 최후의 중요한저작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 이마는 오랑우탄의 그것과 닮았고, 눈자위 위가 돌출되지 않았다. 그모형으로 볼 때 전두골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보르네오나 수마트라에 서식하는오랑우탄의 전두골과 유사하 다." 현대의 호모 사피엔스도 눈구멍 윗부분의돌기, 즉 눈썹 부분의 돌출이 미약하다는 사실 을 덧붙여둔다. 다른 한편 아래턱뼈를 면밀히 조사한 결과, 이러한 유인원적인 턱뼈로보기에는 현저히 인 간적이라 할 수 있는 일련의 특징을 발견했다(치아의위조된 마모 외에도). 키스 경은 치아의 경우에 원숭이보다도 사람과 비슷한 모양으로 턱뼈에 박혀 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강조하 고 있다. 관행에 의해 방해받은 발견: 그 무렵 대영박물관은 누구나 가까이 접근할 수 있도록 소장 한 표본을 공개 보관하고 있었다. 이것은 최근에야볼 수 있는 반가운 경향으로서, 주요 연구 박물관에서 완고한 태도를(문자 그대로, 그리고 비 유적으로도) 제거시키는 데 선구적인 기 여를 했다. 도서 관리를 빙자하여 이용자들의 도서 이용을 막는 도서관 직원의상투적인 방법과 마찬 가지로 필트다운 인의 관리자들은 실제 유골에 접근하는 것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었다. 외부 연구자가 그 뼈를 보는것은 대개 허용되었지만 만지는 것은 금지되었다. 석고로 만든 모형만이 접촉할 수 있었다. 그 모형은 비율이나 미세한부분까지 정확히 복 제해낸 데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지만,이 조작극의 전모가 밝혀지기 위해서는 실물에 대한 접근이 반드시 필요했었다. 인공 착색이나 치아의 마모 등은 석고 모형으로는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루이스 리키는 그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이 책을 1972년에 쓰면서 필트다운 인의 위조가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은 이유에 대 해 자문할 때, 스미스 우드워드의 후계자인 배서Bather 박사를 처음 만나러 간 1933년의 일 이 기억난다... 나는그에게 초기 인류에 관한 교과서의 원고를 준비하기 위해 필트다운의 화 석을 자세히 조사해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나는 지하실로 안내되어 그 표본을 볼 수 있었다. 그것들은 금고 속에서 꺼내져 테이블 위에 놓였다. 그리고 각각의 화석 옆에는 훌륭한 모형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실물에 손 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단지 그것들을 눈으로 보고,모형이 정말 훌륭 한 복제라는 사실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다음갑작스럽게 실물이 치워져 금고에 다 시 넣어졌다. 오전중의 나머지 시간 동안모형만이 조사를 위해 남겨졌다. 그곳을 찾은 외부 연구자들은 모두 이러한 조건하에 필트다운 표본을 조사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은 그 표본이 내 친구나 현재의 케네스 오클리에 의해 관리된 후에야 바뀌게 되었 다. 오클리에는 그 파편들을마치 왕관에 박힌 보석처럼 소중하게 다룰 게 아니라 중요한 화 석정도로간주해야 한다고-조심스럽게 관리는 하지만 거기에서 최대 한도의 과학적증거를 얻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생각하고 있었다. 헨리 페어필드 오스본은 별로 너그러운 인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인간, 파르나소스에 오 르다.'(1927년)라는 인류 진보의 역사적 과정을 이야기한저작 속에서 스미스 우드워드에 대 해 거의 비굴할 정도로 경의를 바치고 있다. 그는 1921년에 대영박물관을 방문할 때까지만 해도 회의적이었다. 그해 6월 24일일요일 아침,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예배에 참석한 후" 오스본은 "지금은 그 증 거가 충분히 입증된 대영제국의 "최초의 인간"의 유물화석을 보기 위해 대영박물관으로 향 했다.(그는 뉴욕의 자연사박물관 관장이라는자격으로 그 유뮬의 실물을 볼 수 있었다)." 거기에서 오스본은 완전히 입장을 바꾸어 필트다운 인의 유골을 "선사 시대인류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자연계가 역설로 가득 차 있으며, 우주의 질서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정작 오스본은 두 가지 수준의 질서가운데 인간의 질서 밖에는-즉 속임수에 불과한 희극과, 그보다 더 파악하기는힘들지만 자연에 대한 이론에 불 가피하게 부과되는 미묘한 질서-보지 못했다. 어쨌든 나는 인간의 질서가 우리와 우주와의 상호 관계를 완전히 덮어씌운다는사실로 비 관하지 않는다. 그 베일이 아무리 질긴 직물로 되어 있다 하더라도결국은 반투명이어서 내 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후기 필트다운 사건이 사람들에게 갖는 매력은 앞으로도 약해질 것 같지 않다. 이글이 1979년 3월에 처음 발표된 후, 찬반 양론의 편지가 쏟아졌다. 물론 그 핵심적인쟁점은 테야르에 관 한 것이었다. 사실 나의 원래 의도는 도우슨이 단독으로 이 일을저질렀다고 보는게 가장 사 실에 가깝다고 지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테야르에 대한의혹을 길게 조목조목 지적할 생각 이 아니었다. 도우슨에게 불리한 설명은 이미바이너가 훌륭하게 제기했고, 나로서는 굳이 덭 불일 이야기도 없었다. 나는 지금도 바이너의 주장을 가장 설득력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또한 나는 만일 유일한 합리적인 대안이 있다면(내 견해로는 제2의 필트다운의 발굴현장에서 도우슨이 연루된 게 확실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것은 공동 모의-즉다른 한 사람이 도우슨에게 협력했다는-를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으로는솔러스나 G. E. 스미스 자신을 포함하 는 다른 후보들에 대한 최근의 관점들은 모두결코 있을 수 없는 터무니없는 주장인 것 같 다. 따라서 나로서는 처음부터 도우슨과 함께 지낸 것으로 확인된 한 사람의 학자에게만왜 유 독 주의가 집중되지 않았는지 납득되지 않는다. 특히 척추 동물 고생물학계에서테야르의 뛰 어난 몇몇 동료 학자들이 그가 연루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자신들의생각을 숨겼기-또는 공 개적으로 이야기는 했어도 마치 암호처럼 애매하게 표현했기-때문이다. 1979년 12월 3일, 애슐리 몬터규는 내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그는 편지에서,오클 리의 폭로가 있은 직후 자신이 그 소식을 테야르에게 전했는데, 테야르는 이에대해 전혀 사 건의 내막을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고 내게 알려주었다. "테야르에대해서는 당신의 견해가 잘못됐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에 대해 잘압니다. 그 뉴스가 '뉴욕 타 임즈'지에 보도된 다음날, 그 못된 속임수를 그에게 처음알린 사람은 바로 저였습니다. 그의 반응이 가장이었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습니다. 나는 그 장본인이 도우슨이라는데 추호의 의심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작년 9월 파 리에서 피에르 P. 그라세, 장 피보트를 비롯해 테야르의 동시대인이자 동료 학자였던 여러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 모두 테야르가공범자였다고 보는 관점을 터무니없 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더욱이 후일 예수회의프랑수아 뤼소 신부는 케네스 P. 오클리 가 조작극을 폭로한 후에 테야르가 오클리에게쓴 편지의 사본을 내게 보내주었다. 그는 그 편지 사본이 자기와 같은 수도회 신자에대한 나의 의심을 완화시켜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거꾸로 나의 의심은 더 강해졌다. 그 편지에서 테야르는 치명적인 과실을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탐정'이라는 새로운 일에 흥미를 느끼게 된 나는영국으로 가서 1980년 4월 16일에 케네스 오클리를 방문하였다. 그는 테야르가 자신에게 보낸 그 밖의 편 지들을 보여주었고, 그 밖의 의심스러운 점에 대해서도나와 견해를 같이했다. 이제 나는 증 거라는 저울이 필트다운의 음모에서 테야르가 도우슨의 공범자였다는 쪽으로 확실히 기울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전모를 머지않아 '내추럴 히스토리'지에 밝힐 작정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테 야르가 오클리에게 보낸 최초의 편지로부터 얻은 심증만을 언급하기로 하겠다. 테야르는 만족스러움을 나타내면서 이렇게 쓰기 시작했다. "필트다운문제를 귀하가해결하 실 수 있었던 데 대해 마음으로부터 축하를 보냅니다. ... 감상적으로 이야기하자면,그것은 나의 가장 빛나는 청년 시절의 고생물학상의 기억 가운데 하나를 손상시키는것임에도 불구 하고 귀하의 결론에는 마음속으로부터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는 '심리학적인 수수께끼'라든 지 누가 그 일을 한 것인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계속 써 내려갔다. 그 후보에서 스미스 에드워드를 제외한다는 점에서 그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일치했지 만, 다른 한편 도우슨에 관해서는 그의 성격이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연루 시키는 데 반대했다. "그는 올곧고 정열적인 사람이었습니다. ... 게다가 아서 경에 대한 깊은 우정으로볼 때, 그가 자기의 친구를 수년간 계획적으로 속이고 있었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않습니다. 우리 들이 현장에 있을 때, 나는 그의 거동에서 어떤 의심스러운 점도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테야 르는 이 사건 전체가 우발적으로 어떤 아마추어 수집가가유인원의 뼈를 인간의 머리뼈 파편 이 포함되어 있는 자갈더미에 버렸기 때문에발생한 사건일지도 모른다는, 그 자신도 인정하 듯이 그다지 진지하지 않은 이야기로편지를 끝냈다. (그러나 테야르는 이러한 가설을 가지고 2마일 떨어진 필트다운의 두 번째 현장에서유인 원과 인간이라는 같은 조합을 가진 머리뼈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 테야르의 실책은 필트다운의 두 번째 발견물 에 관한 기술 속에 있다. 그는 다음과같이 쓰고 있다. "도우슨은 두 번째 발굴 지점 현장으 로 나를 데리고 가서 벌판의표면에 모아놓은 자갈의 퇴적더미 위에서 어금니 하나와 작은 머리뼈 조각 몇 개를발견했다고 내게 설명해주었습니다.(원문대로)" 지금 우리는 도우슨이 테야르를 두 번째 현장으로 데리고 간 것이 1913년의 조사여행이었 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문헌 목록의 바이너 참조). 또한 그는 1914년에 스미스 우드워드를 그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두 차례의 여행에서 발견해낸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914년 1 월 20일, 도우슨은 스미스 우드워드에게 편지를써서 머리뼈의 파편을 두 개 발견한 사실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1915년 7월에그는 어금니 하나를 발견한 낭보를 다시 써서 보냈다. 스미스 우드워드는 도우슨이 1915년에 이들 표본을 발굴했다고 추정하고 있다(출판물 속 에서 그렇게 쓰고 있다. 문헌 목록의 바이너 참조). 도우슨은 1915년 말경중병을 얻어 이듬 해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스미스 우드워드는 두 번째 발견물에 관해 그 이상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결정적인 대목이 있다. 앞서 인용한 편지 속에서 테야 르는 도우슨이두 번째 장소에서 발굴된 치아와 머리뼈 파편에 대해 자신에게 이야기했다고 분명히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클로드 큐에노가 쓴 테야르의 전기에는 테야르가 1914년 12월에 징병소집을 받았 고, 1915년 1월 22일에는 전선에 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도우슨이 그 어금니를 1915 년 7월에야 최초로 '공식적으로' 발견한 것이라면,또한 테야르가 '이 조작극에 관여하지 않 았다면' 어떻게 그는 그 발견 사실을알고 있었을까? 나는 도우슨이 1913년에 결백한 테야르에게 그 화석을 보여주었으면서스미스 우드워드에 게는 그로부터 2년 동안 알리지 않았다-특히 1914년에 있었던이틀에 걸친 현지 조사 동안 두 번째 발견 장소에 스미스 우드워드를 데리고 간후에도-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이라고 생각한다. 테야르와 스미스우드워드는 친구 사이였기 때문에 서로의 노트를 비교하 는 일은 언제든지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도우슨에게 이러한 모순이 있었다면, 그가 숨기고 있는 것은완전히 드러났을 것이다. 두 번째로 테야르는 오클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1911년에 처음 도우슨을 만났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도우슨이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필트다운에서 세 번이나 네 번 가량 그와 아서 경과 함께 일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1911년에 헤이스팅스 근처의 채 석장에서우연히 만난 후로)." 그러나 테야르가 1909년 봄이나 여름에 처음으로도우슨을 만 난 것은 확실하다(문헌 목록의 바이너 참조). 도우슨은 테야르를 스미스 우드워드에게 소개 시켰다. 테야르는 1909년 말엽에 초기 포유류의 희귀한 치아 한 개를 포함해서 그가지금까지 발견 한 몇 개의 화석을 스미스 우드워드에게 맡겼다. 스미스 우드워드는이 자료에 대해 1911년 에 런던 지질학회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었고, 강연 후 있었던 토론에서 도우슨은 1909년 이래 테야르와 다른 한 사람의 목사로부터 받은 '인내심 강하고 숙련된 도움'에 대해 사의 를 표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결정적인 증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1911년에 처음 만났다하더라도 공모를 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도우슨은 필트다운 인머리뼈의 최초의 조각을 1911 년 가을에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어떤 노무자가 '몇 년' 전에 그 파편을 자신에게 주었다 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40년이 지나 그 사건을 기억해내려고 애썼던 사람을 상대로 2년간 의 오차를 꼬투리 잡을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도우슨의 발견 직후에 처음 만났다는 늦은(그리고 잘못된) 날짜는확실히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런데 범인이 누구인가라는 흥미로운 의문을 밀어두고 이 에세이의 원래 주제-맨 처음에 그 발견을 모두 받아들인이유는 무엇인가-에 관해 다시 이야기하자면, 나의 동료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최초의 주장이 제기된 무렵인 1913년 11월 13일자의 '네이 처'(영국의 과학 잡지/옮긴이)에 나와 있는 흥미로운 기사를 보내주었다. 그 기사에서 런던 대학 킹스 칼리지의 데이비드 워터슨는 정확하게(또한 확실하게)그 머 리뼈는 인간의 것이고, 아래턱뼈는 유인원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결론짓고 있다. "이 아래턱뼈와 머리뼈를 동일 개체의 것으로 간주하는것은 침팬지의 발을 본질적으 로 인간의 다리나 넙적다리뼈에 이어 붙이는것만큼이나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 처음부터 올바른 설명이 있어왔지만 기대와열망, 그리고 편견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려 운 일이었다. 제11장 인류진화의 가장 큰 한 걸음 얼마 전에 발간된 졸저 '다윈 이후'라는 책 가운데 인류 진화를 다룬 6장의 첫머리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최근 들어 선행 인류의 새로운 주요 화석들이 끊임없이 발굴되고 있어 어떠한 강의 노트 도 본질적으로 비 합리적인, 경제 분야에서 쓰이는 '계획적인 진부화'라는 용어가 적용되는 운명에 처해 있다. 매년이 주제에 대한 강의를 할 때면 나는 낡은 강의철을 열고 그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을 들어내 가까운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그러면 이제 그 주제에 대해 다시 시작하기로 하자. 나는 내가 그런 글을 썼다는 점이 무척이나 기쁘다. 같은 책 같은 장의 뒷부분에서 폈던 주장을 취소하면서 이 구절을 다시 인용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 글에서 나는 우리에게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호미니드Hominid(사람과의 동물/옮 긴이) 화석-335만 년에서 375만 년 전의치아와 턱뼈-을 메리 리키가 탄자니아의 올두바이 계곡에서 남쪽으로30마일 떨어진 라에톨리Laetoli에서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소개했다. 메리 리키는 그 유물들이 우리들과 같은 호모속 동물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내가 알기로 그녀는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따라서 나는 그 글에서, 뇌는 작지만 완전한 직립 자세를 취하고 있는오스트랄로피테쿠스 에서 시작하여 그보다 더 큰 뇌를 가진 호모에 이르기까지의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진화 경로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또한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인류 진화의 계통수 속에서 하 나의 곁가지에 불과하다는주장 등을 제기했다. 그 후 1979년 초, 시대적으로는 사람과에 속하는 어떤 화석보다도 오래되었고, 외견상으로 는 훨씬 더 원시적인 새로운 종이-돈 요한슨과팀 화이트에 의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 렌시스거Australopithecusafarensis'라고 명명된-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여러 신문에 떠들썩하 게보도되었다. 가장 오래된 호미니드는 우리들 현생 인류와 같은 호모속동물이었다는 메리 리키의 주장과, 가장 오래된 호미니드는 그 밖의 사람과의 화석에는 볼 수 없는 유인원과 흡사한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으니 새로운 종으로 명명해야 한다고 본 요한슨과 화이트의 결정, 이두 가지 주장만큼 차이가 큰 것이 또 있을까? 요한슨과 화이트는 자신들이 발견한 뼈가 무언가 새롭고 근본적으로 다른뼈임에 틀림없다 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리키와요한슨, 그리고 화이트는 동일 한 화석 뼈를 놓고 서로 다른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새로운 발견에 대한 논쟁 이 아니라 같은 표본의 해석을둘러싼 논쟁을 지켜보고 있는 셈이다. 요한슨은 1972년부터 1977년에 걸쳐 에티오피아의 아파르Afar 지방에서 조사를 계속했다. 그 결과 훌륭한 호미니드의 화석을 여럿 발굴했다. 아파르 표본은 290만 년에서 330만 년 전의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가장 훌륭한 것은 '루시Lucy'라고 이름 붙여진 한 개체 분량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뼈이다. 그 골격은 40퍼센트 가깝게 발굴되었기 때문에 초기 인류 개체로는 지금까지알려진 어떤 표본보다도 완전에 가까운 것이었다(대부분의 호미니드 화석이끝없는 추측과 가설을 낳았지 만, 실은 턱뼈의 파편이나 두개골 조각에 불과했다). 요한슨과 화이트는 아파르 표본과 메리 리키가 발견한 라에톨리 화석이 형태가 같고 같은 종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아파르와라에톨리의 뼈와 치아는 350만 년 이상 전 이상 전의-그 밖의 아프리카 표본들은 그 후의 것이었다-호미니드에 대해 알려진 사실들을 모두 나타내고 있다는점도 지적했다. 게다가 그들은, 이러한 태곳적 치아와 머리뼈 파편은 그보다새로운 화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인원을 연상시키는 몇 가지 특징을공유하고 있 다고 주장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라에톨리와 아파르의 유물을 함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아파렌시스라는 새로운 종으로 분류하려 했던 것이다. 논쟁은 이제 막 뜨거워지기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벌써 세 가지 의견이 발표되었다. 즉 일 부 인류학자들은 다른 특징을 지적하면서 아파르와 라에톨리의 표본이 우리와 같은 호모속 의 구성원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이 오래된 화석이 호모속보다는 남아프리카나 동아프리카의 후기 오스 트랄로퍼테쿠스에 가깝다는 요한슨과 화이트의 결론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종임을 증명해 주는 차이점을 인정하지 않고,아파르와 라에톨리 화석을 1920년대에 남아프리카의 표본에 대해 명명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A. africanus'라는 종에 넣는 쪽을 더선호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아파르와 라에톨리의 화석에 새로 학명을 붙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요한슨과 화이트의 주장을 지지했다. 해부학에 관해서는 아마추어에 불과하니 내 견해는 그다지 중요하지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그림을 제시하는 편이 이 글의 모든 단어들보다 더 의미가 있다면-아니 최소한 한 번 보는 편이 천 마디 말에값한다는 등식을 인정한다면 그 절반 정도의 의미는 있다고 인정 할 수있을 것이다-, 아파르 호미니드의 구개 화석은 내게는 분명 '유인원'으로보인다고 말 하지 않을 수 없다(또한 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라는호칭이 내가 좋아하는 몇 가지 편견을 뒷받침해준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요한슨과 화이트는 아파르의 화석과 라에톨리의 화석이 시간적으로 100만 년이라는 거리 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거의 동일한 것임을 강조한다. 나는대부분의 동물 종이 장기간 각각의 계통을 유지하는 동안 그다지 변화하지 않는다고생각한다. 또한 거의 모든 진화적 변화는 새로운 계통이 선조 계통으로부터 빠른속도로 갈라져 나오는 시기에 높은 밀 도로 일어난다고 믿는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17장과 18장을 참조하라. 게다가 나는 인류의 진화 과정을사다리가 아니라 살아 있는 관목과 같이 여러 갈래로 뻗쳐 나온 것으로 마음속에그리고 있기 때문에, 종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한슨과화이트는 그 후에 이루어진 인류 진화에 대해 내가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더점진론인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두개골 치아, 그리고 분류상의 위치 이러한 것들을 둘러싸고 제기된 여러 가지주장에도 불구하고 아파르의 화석에는 아직까지 논의되지 않은 더욱 흥미로운특징이 있다. 사실 루시 의 골반과 다리뼈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가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직립 자세로 걷 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사실은신문에도 크게 보도되었지만, 그 내용은 크게 잘 못된 것이었다. 모든 신문이 과거의 정통적인 주장, 즉 큰 뇌와 직립 자세는 필경 뇌가 선도하는협력 관 계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으로 발달해왔다는-콩만한 크기의 뇌를 가진네발짐승에서 상체를 구부정하게 구부린 반쪽짜리 뇌를 가진 동물로, 그리고 마침내는완전히 직립한 큰 뇌를 갖 춘 호모로-기사를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싣고 있었다. 예를 들어 '뉴욕 타임즈'지 1979년 1월호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2족 보행의진화는, 상 체를 앞으로 구부리고 다리를 질질 끌듯이 걷는 '원인', 즉 지능이유인원보다는 높지만 현생 인류 정도는 아닌 우리들의 중간적인 선행자를 중심으로하는 점진적인 과정이었다고 생각되 어왔다" 적어도 과거 15년간의 우리들 지식에비추어보면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이야기이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1920년대에 발견된 후 이 호미니드는 비교적 작은 뇌와완전한 직립 자세를 가졌다는 사실이 알려졌다(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는현대인의 1/3정도의 뇌를 가졌고 완전한 직립 보행자세였다. 몸의 크기가 작았다고생각한 잘못된 견해는 바로잡 혔지만 뇌의 크기가 현대인과 크게 달랐다는 사실은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문헌을 조사해보면 작은 뇌와 직립 자세를 갖춘 이러한 '예외'적인 것은 오랫동안중요한 문제가 되어왔고 주요 문헌들은 모두 예외없이 이 주제를 각별히 다루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라는 종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으로 뇌의확대보다 직립 자세가 역사적으로 선행한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그것은, 다른 두 가지 사고 방식과 관련하여 대단히 참신하고 사람을 흥분시키는무언가를, 그리고 기묘하게 도 신문기사에서는 빠져 있거나 직립 자세가 선도한것인지 아닌지와 연관된 잘못된 보도 속 에 묻혀버린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완전한 직립 보행이약 400만년 전에 벌써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루시의 골반구조로 아파르 화석이 2족 직립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지만,라에톨리에서 발견된 주목할 만한 발자 국은 더 직접적인 증거를 제공한다. 그 후의 남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250만 년이상으로까지는 거슬 러 올라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완전직립 보행의역사를 약 15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 셈이다. 이러한 시간적인 연장이 갖는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논의를잠깐 중단하고 생물학의 반대쪽 끝으로-동물의 화석에서 분자의 수준으로-시선을 돌려야 할 것이다. 과거 15년 동안 분자 진화 연구자들은 다종 다양한생물이 갖는 동일한 효소와 단백질의 아미노산 배열에 관해 엄청난 자료를축적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를 기초로 놀라운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가령 화석 자료 속에서 공통의 선조로부터 분리된 연대를 확실히 판정할수 있는 한 쌍의 종을 분리시킨 결과, 우리는 이 양자 간의 아미노산 차이가두 종이 서로 갈라진 이후의 시 간과 놀랄 만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양계통의 격리 기간이 길면 길수록 다른 분자의 숫자가 많아진다-사실을 발견하게될 것이다. 이러한 규칙성을 기초로 특정 선조로부터 유래했음을 알려주는 명확한화석 증거가 없는 두 종이 분기한 시기를 예측하는 분자 시계가 고안되었다. 이시계는 고급 시계처럼 정확하 게 작동하는 것은 아니지만-어떤 저명한 지지자는그것을 '형편없는 시계' 라고 부르기도 한 다-그렇다고 완전히 틀리는 경우도좀처럼 없다. 다윈주의자들은 대체로 그 시계의 정확성에 무척 놀랐다. 왜냐하면자연 선택은 서로 다른 계통에 대해 서로 다른 시기에 여러 가지 속도로,다시 말해 급속히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해 야 하는 복잡한 생물에게는 무척빠르게 작용하고, 환경에 잘 적응한 안정된 개체군에게는 아주느리게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 선택이 개체군 진화에서 가장 우세한 원인이라면, 선택의 속도가웬만큼 일정하지 않 는 한-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사고 방식에 따르면 선택 속도는 일정하지 않다-유전적인 변화와 시간과의 높은 상관 관계를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다윈주의자들은 장구한 시간 척도로 볼 때는선택 속도의 불규칙성은 대체로 평준화된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변칙 적인예외에서 도망치려고 했다. 선택은 몇 세대 동안만 격렬하게 진행되고 그 후의 특정 시기 동안 전혀나타나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장기간에 걸친 평균적인 순변화는규칙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 윈주의자들은 분자 시계의 규칙성이자연 선택에 의해 중재되지 않는 진화 과정, 즉 중립적 인 돌연 변이의 임의적인고정을 나타낼지도 모른다는 문제에도 직면하게 되었다(이러한 여 러 가지 '뜨거운'주제들은 더 많은 시간과 지면이 허락되는 다른 기회에 다루기로 하겠다). 어쨌든 인간과 현생 아프리카 유인원(고릴라와 침팬지) 사이의 아미노산 차이에 대한 조 사는 대단히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형태적으로는뚜렷한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까지 조사된 사람과 유인원의 유전자는 거의 동일하다. 인간과 아프리카 유인원의 아미노산 배열 의 차이는평균 1퍼센트(정확하게 이야기하면 0.8퍼센트)이다. 이것은 분자 시계상공통의 선 조로부터 갈라져 나온 500만 년간의 기간에 상응한다. 이 사실을 발견한 버클리 대학의 생물학자 앨런 윌슨과 빈센트 사리치는 조사 과정의 오 차를 고려해 600만 년까지 받아들이지만 그 이상은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만약 이 시계가 옳다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는 호미니드 선조의 이론상의 한계에 간신히 포함되는셈이다. 최근까지 인류학자들은 널리 인정된 일반적인 규칙에 호미니드가 유일한 예외를 제공한다 고 우기면서 이 시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분자 시계에 대해 회의적인 것은 1400만 년보다 오래된 턱뼈 파편으로 알려진 라마 피테쿠스Ramapithecus라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발견된 화석 동물 때문이다. 많은 인류학 자들은 라마피테쿠스가 유인원과 인간의 경계에서 인간 쪽에 더 가깝다고-다시 말하면 유 인원과 호미니드의 분기는 1400만 년 전에 일어났다고-주장했다. 그러나 치아와 그것의 비율에 관한 전문적인 주장에 근거하는 이 견해는최근 들어 설득력 을 잃어가고 있다. 이전에 라마피테쿠스가 호미니드라고 믿었던가장 강력한 지지자들 가운 데 일부마저 이제 그것을 유인원으로, 또는유인원과 인간의 공통 선조에게 가깝기는 하지만 아직 분기하기 전 단계로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분자 시계는 너무도 정확해서 턱뼈의 파편에 관련한 가설적인 주장을 펴는정도로는 간단 히 도외시될 수 없다(지금 나는 2, 3년 전에 앨런 윌슨과주고받은 10달러 내기에 질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는 너그럽게도 유인원과인간의 가장 오래된 공통 선조의 연대로 최대한 700 만 년까지 인정해주었지만나는 그 이상을 주장했었다. 아직까지는 10달러를 주지 않았지만, 내가 이길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 같다-결국 나는 1980년 1월에 그에게 10달러를 지불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새로운 90년대를 맞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테니까). 이제 우리는 인류에 관한 견해를 바로잡기 위해 세 가지 측면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의 나이와직립 자세의 문제, 분자 시계로 측정한 유 인원과 인간의 분리 문제, 라마피테쿠스를 호미니드에서 몰아내는 문제라는 세 가지이다. 자연계에 대한 문화적인 편견보다 큰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의 진화에 대 해서 뇌를 중심에 놓고 바라보는 관점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초기 진화학자들은 뇌의 확대가 인간 골격의 현저한변화보다 먼저 일어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10장의 G. E 스미스의견해를 참조하라. 스미스가 필트다운 인이 실재한다고 확신한 것은 뇌의선행성을 신봉하는, 거의 열광적인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에른스트 해켈에서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이르는 수많은 뛰어난진화론자와 철학자 의 예언대로 1920년대에 이르자 작은 뇌를 가진 직립 자세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 누스가 그러한 독단론을 종식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의 선행성' (나는 이렇게 부르기를 좋아한다)은 지금도 겉모습만 바꾼 채 계속 주장되고 있다. 진화학자들은 직립 자세에역사적인 선행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과정이 매우 느린 속도로 일어났으며, 진정한 불연속-우리를 완전히 인간 답게 만든도약-은 훨씬 뒤에, 즉 인류의 뇌가 일찍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빠른 진화 속 도로 약 100만 년 동안 무려 3배 가량의 크기에 도달하게 됐을 때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했 다. 한 유명한 전문가가 약 10년 전에 쓴 다음과 같은 글을 살펴보자. "호모속 대뇌 형성에서의 큰 비약은 2족 보행이나 도구를 사용하는 손의 완성 등을 향한 약 1000만 년에 걸친 예비적 진화가 계속된 뒤에 과거 200만 년 안에 일어났다." 커스틀러 경 은 최근에 발간된 저서 '야누스'에서 이러한 인간다움humanity을 향한 대뇌의 도약이라는 사고 방식을 터무니없는 억측의 수준으로까지 확대시키고 있다. 커스틀러는 인간의 뇌가 매우 급속히 커졌기 때문에 고뇌나 이성의자리인 바깥충의 대뇌 피질이 뇌의 심부에 위치하는 정서적이고 동물적인중추를 제어할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한 다. 이 원시적인 야수성이 전쟁이나살인, 그 밖의 여러 가지 해악으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들이 인류 진화의 결정적인 요인으로서 직립 자세의 획득과뇌의 확대에 두는 상 대적인 중요성을 근본적으로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지금까지 우리는 직립 자세를 쉽게 얻은 점진적인 경향으로생각한 데 비해 뇌의 크기 증대는 놀랄 만큼 급격히 일어난 불 연속적인현상-진화 양식으로 보나 그 영향의 심대함으로 보나 매우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 해왔다. 그렇지만 나는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싶다. 실제로 직립 자세는 경이로움그 자체이며, 우 리 신체의 해부학적 구조가 빠른 속도로 근본적으로 재구성된결과 나타난 극히 일어나기 힘 든 사건이었다. 그 뒤에 일어난 뇌의 확대과정은 해부학 용어로는 2차적 부수 현상에 해당 하며, 인류 진화의 전체 패턴속에 이미 깊숙이 묻혀 있던 쉬운 변형이다. 분자 시계가 정확하다면, 최대 600만 년 전에(윌슨이나 사리치는 500만년이라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우리들은 고릴라와 침팬지와 함께 최후의공통 선조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추측하건대 그 공통의 선조는 대개 네 발로걷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유인원이나 원숭이들과 마찬가지로 때로는두발로 걸어 다녔을지도 모른다. 그 후 약 100만년이 지나자 이미 우리들의 선조는 여러분이나 나와 마찬가지로2족 보행을 하게 되었다. 이후에 일어난 뇌의 확대 과정이 아닌 바로 이 2족보행이 인류의 진화 과정에 서의 가장 큰 단속을 이루는 것이다. 물론 2족 보행이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 신체의 해부학적인구조, 그 중에서도 특히 발과 골반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필요로 한다. 게다가2족 보행은 인류 진 화의 전체적인 패턴과는 달리 해부학적인 재구성을 나타내고있다. 9장에서 미키 마우스에 대해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은 '네오테닉'한 동물이다. 즉 우리들은 선조들이 지녔던 유년기의 특징을 어른이 될 때까지 계속 유지하는방향으로 진 화해왔던 것이다. 인간의 큰 뇌, 작은 턱뼈, 몸에 난 털의 분포, 질구가 배 쪽을 향하고 있는 점등 수많은 특징은 유년기의 특징이 영구화한 결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직립자세는 그와 다른 문제다. 직립 자세는 유년기에 나타난 어떤 특징이 그대로유지되는 식의 '용이한' 경로를 통해 완성 될 수 없다. 아기의 다리는 상대적으로작고 연약한 데 비해 2족 자세는 강하고 긴 다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인류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에 이르러 직립하게 되었을 때게임은 이미 끝난 셈 이다. 다시 말해 이 단계에 이미 신체 구조의 주요한개조는 이미 완료되었고, 후속되는 변화 를 일으키기 위한 방아쇠는이미 당겨진 것이다. 이후 인류의 뇌가 커진 과정은 해부학적으 로 그리어렵지 않았다. 우리들은 태아기의 빠른 성장 속도를 이후까지 연장시킴으로써, 그리고성인이 되어 어린 시절 영장류 두개골의 특징적인 비율을 그대로 유지함으로써,우리의 더 커진 뇌를 우리 자 신의 성장 프로그램에서 제외시킨다. 일반적인패턴의 모든 부분들과 그 밖의 네오테닉한 특 징과의 조화 속에서 우리의 뇌는진화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추론의 오류-결과적으로 나타난 크기와, 원인의 강도 사이 의 관계를 잘못 나타낸 방정식-를 피하면서 이장을 끝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순수하게 몸의 구조가 개조되는 문제인 직립 자세는 광대한 범위에 영향을 주는 기본적인 문제이고, 뇌가커진 것은 표면적이고 이차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뇌가 커짐으로써 나타난 결과는 그 형성 과정의 상대적인용이함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무엇보다도 경이적인 것은 복잡계가-그 중에서도인간의 뇌는 가장 두드러진 경우이다-갖는 전체적 성질, 즉 그 구조에서단지 양적인 것에 불과한 변화를 놀랄 만큼 다 양한 특성을 갖은 기능으로 옮겨낼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이다. 지금은 새벽 두 시다. 이제야 간신히 이 장을 마치게 되었다. 냉장고에 가서 맥주를 한잔 해야겠다. 그리고 잠을 자러 갈 것이다. 나는 문화에 속박된 동물이기 때문에, 자리에 누워 한 시간 남짓 보는 꿈은 지금부터 내가 바닥에 대해 수직 자세를 취하고 두 발로 걸어가는 동작보다훨씬 경이적인 것이다. 제12장 생명계의 한가운데 뛰어난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에서 긴박한 드라마의 전개를 부드럽게 완화시키기 위해 약 간의 유머를 삽입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햄릿'에 나오는 무덤 파는 인부라든 가, 푸치니의 '투란도트Turandot'에 등장하는 세 사람의 조신 핑, 퐁, 팡 등은 이후 벌어지 는 괴로움이나 죽음 등에 대해 독자 관객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갖게 하는 기능을한다. 그렇지만 현재의 독자에게 웃음을 유발하는 에피소드가 원래는 그처럼 의도된 것이 아닌 경우도 가끔 있다. 시대의 변천이 처음에 있었던문맥상의 전후 관계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 리고, 변모한 오늘날의세계에서 처음에는 의도되지 않았던 말 그 자체가 유머를 갖게 되는 식이다. 그러한 문장이 지질학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본격적인 저서인 찰스 라이엘의 ' 지질학 원리'(1830년에서 33년에 걸쳐 3권으로 출판됨)에도 나온다. 이 책에서 라이엘은 먼 옛날에 살던 거대한 동물이 다시나타나 지구를 아름답게 장식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후 여러 속의 동물들이-그 기념물이 오늘날 여러 대륙의 태곳적 암석 속에 보존되어 있는-되돌아올 것이다. 거대한 이구아노돈(Iguanodon, 백악기의 거대한 파충류 이구아노돈 속의 초식 동물의 총칭/옮긴이)이 삼림에, 어룡(Ichthyosaur, 쥐라기에 전성했던 어룡목에속 하는 물고기 모양의 파충류/옮긴이)이 바다에 나타나는 한편 익룡은 그늘진 양치류 삼림 속 에서 다시 날게 될 것이다. 라이엘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이러한 이미지는 상당히 충격적인 것이긴하지만, 그의 주장 은 이 위대한 저서의 본질적인 주제에 해당한다. 라이엘은 균일성uniformity이라는 자신의 독자적인 개념, 요컨대 지구는 처음 생성될 때의 충격에서부터 '안정된' 이후까지 거의 똑같은 상태-전 지구적인 대격변도 없고, 그보다 훨 씬 높은 단계를 향한 착실한 전진도 없는 상태-를 유지해왔다는 생각을 제기하기 위해 '지 질학원리'를 쓴 것이다. 공룡의 멸종은 라이엘의 균일설에 대한 도전인 것처럼 보인다. 결국공룡은 그보다 고등한 포유류에 의해 대체된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리고이것은 생명계의 역사가 한쪽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해 라이엘은 공룡이 포유류에 의해 대체된 것은 장구한회귀성 주기('그레이트 이어(Great year. 천문학에서는 플라톤 년이라고도부르 며, 약 2만 5800년을 주기로 한다/옮긴이)')의 일부에 지나지 않고, 성을 향해 사다리의 한 계단을 오르는 데 불과하다고 응수했다. 기후는 순환하며, 생명계 역시 기후의 순환을 따라 변화한다. 그러므로다시 '그레이트 이 어'의 여름이 오면 냉혈의 파충류가 다시 나타나 지구를지배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라이엘은 균일설에 대한 자신의 열정적인 신념에도 불구하고지구가 언제나 같은 상태로 발전해간다는 자신의 이미지에 비교적 중요한 한 가지 예외를 두고 있다. 즉 지질학 적 시간의 최후 순간에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그는 인류의 출 현이라는사건을 지구 역사에서 하나의 불연속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한 걸음, 또는 비약이 동물계에 나타나는 규칙적인 변화의 일부인양 가장하는 것은 납득할 수 있는 비유를 넘어서는 것이다. " 이 말을 통해 라이엘은 자신의 체계에 가해지는 타격을 완화시키려 했음이 분명하ek. 그는 이러한 불연속이 도덕적인 세계-순수한 물질 세 계에 일어나는 정상 상태의 지속성 붕괴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의 확장-에서 일어나는사 건에만 국한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인간의 몸은 포유류 가운데 있는 롤스로이스와 같은 것으로 간주될수 없다는 뜻이 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다른 어느 동물들보다 인류가 훨씬 존엄성 높은존재라고 말할 때 염두 에 두어야 할 것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을 뿐동물에게는 없는 지적,도덕적 특성이다. 만약 인 간이 추론 능력을갖지 않고 하등 동물이 가지고 있는 본능만을 가지고 있다면 인간의 구성 은인간에게 확고한 우월성을 준다고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엘의 주장은 당시 박물학자들의 일반적인 경향을-자신이 속한 종 주위에 말뚝 울타리를 둘러치는 식의-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 울타리에는 "여기까지는 접근 가능, 여기서부터는 접근 불가"라고 쓴팻말이 걸려 있다. 우리들은 몇 번이나 반복해서, 아득한 태고의 성간 먼지에서침팬지에 이르는 모든 것을 남 김없이 포괄해 설명하는 식의 구상에 접한다. 그러고는 하나의 포괄적 체계의 문턱에서 인습적인 자부심과 편견이 끼여들어특이한 영장류 의 한 종에 예외적인 지위를 확보해주는 것이다. 나는 4장에서이와 같은 종류의 실패 사례 에 대해 설명했다. 인간 지성의 특수한 창조 과정, 즉 전적으로 자연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생물계에 비해 인 간의 지성은 유일하게 신의 힘이 개입해 탄생하였음을 인정한알프레드 러셀 월리스의 주장 이 바로 그것이다. 각각의 주장은 그 구체적인양상에서 제각기 다르지만 그 의도는 항상 동 일하다. 외도와도 같은 그 급격한비약이란 바로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다. 라이엘이 둘러친 울타리의 팻말은 이렇게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정신적인질서, 여기에 서부터 시작되다... 그리고 월리스의 울타리에는 "여기서부터 자연선택은 작용하지 않는다" 라고 씌어 있다. 다른 한편 다윈은 독자적인 사상 혁명을 동물계 전체에 걸쳐 수미 일관적용했다. 그리고 그는 그 혁명을 인간 삶의 가장 미묘한 영역으로까지확장시켰다. 인간 신체의 진화론은 그 야말로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최소한 인간의 마음만큼은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다윈은자신의 연구를 계속 진척시켰다. 그는 인간 감정의 가장 세련된 표현의 기원이동물에게 있다는 주장을 펴 는 데 한 권 모두를 할애한 저서를 발간했다. 그는 그 책에서 이렇게 묻는다. 감정이 먼저 진화했다면 사고는 훨씬 나중에발생한 것이 아닐까? 호모 사피엔스 주위에 둘러쳐진 울타리는 여러 개의받침대로 지탱되고 있다. 그 중 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의 기등은 준비와초월이라는 주장이다. 인간은 자연의 가장 보편적 인 힘들을 초월하고 있을 뿐아니라, 인간의 탄생 이전에 이미 존재하던 모든 것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에서 인간의 등장을 미리 예견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나는 이 두 가지 주장 가운데 준비론 쪽이 우리가 떨쳐내기 위해 노력해야할 훨씬 더 의 심스럽고 의미 심장한 편견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의 초월론은,인류라는 특이한 종의 역사가 일찍이 지구상에 한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여러가지 과정에 의해 지배되어왔다고 단언하고 있다. 7장에서 이야기했듯이문화적인 진화는 인류가 이룬 여러 가지 혁신 중에서도 가장 중 요한 것이다. 그것은 학습을 통한 기술과 지식, 그리고 행동의 전달-문화적인 획득형질의유전-에 의해 진 행된다. 이러한 비생물학적인 과정은 신속한 '라마르크적' 양식에 따라 이루어지는 데비해 생물학 적인 변화는 빙하의 작용처럼 완만한 다윈적 단계를 밟아 느리게진행되는 것이다. 나는 이 러한 라마르크적 과정의 전개가, 다른 것을 능가한다는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초월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생물학적 진화는 맞지도 않고그 무엇에 의해 패퇴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먼 옛날과 마찬가지로 지금도지속되고 있으며, 여러 문화의 유형을 제약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너무도 완만하기 때문에 현대 문명의 엄청난 변화 속도에큰 영향을 미 치지는 않는다. 그에 비해 준비론은 더 깊은 인간의 오만을드러낸다. 최소한 초월론은 40억 년에 걸친 인류 탄생 이전의 역사를 인류가갖는 특별한 재능의 전조로 간주하도록 강요하지 는 않는다. 우리 인류는 예측불가능한 행운 덕분에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며 아직까지 도 무언가 새롭고강한 것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준비론은 인류의 뒤늦은 출현의 전조를 그 이전까지의 장구하고 복잡한역사의 모 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추적하도록 이끌고 있다. 고작 지구 역사의10만 분의 1에 지나지 않는-약 50억 년 가운데 5만 년-기간 동안 지구상에 생존한일개 종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지극히 터무니없는 자만과 과장인 셈이다. 라이엘과 월리스 두 사람도 일종의 준비론을 설교했다. 사실상 울타리를 치는데 동조한 모든 사람들이 거의 똑같은 주장을 펼쳤다. 라이엘은 정상 상태로기다리고 있는 지구, 다시 말해 자신의 숭고하고 균일한 설계를 이해하고 제대로평가할 수 있는 지각 있는 생물체의 출현을 열망하는 지구의 모습을 묘사했다. 또한 만년에 심령학 쪽으로 방향을 바꾼 월리스는, 궁극적으로 인체의 진화란그전에 이미 존재하던 마음과 그것을 사용할 능력을 갖춘 신체를 하나로결합시키기 위해 일어나는 것이 라는 범속한 주장을 전개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정신 세계의 존재를 인정하는 우리들은 이 우주를, 무한한 생명과완전성을 갖춘 정신적 존재가 발전하는 데 모든 부분에 걸쳐 적응하는 일관되고 장대한 전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우리들에게 세계-물리적인 구조가매우 복잡하며, 장대한 지질학적 전개 과정을 겪었고, 식 물계와 동물계에서는완만한 진화를 이루었으며, 그리고 종국에는 인류의 출현을 보게 된 이 세계-의총체적이고 유일한 존재이유는 인간의 신체와 결합된 인간 정신의 발달을 위해서임 에 분명하다. 나는 현대의 진화학자들이 모두 월리스가 주장한 준비론이라는-문자 그대로 인간의 예정 -관점을 부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이런 주장의 그럴싸한 변형판이 있지 않 을까? 나는 그런 주장이수립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계의 역사를 잘못 보는방법 이라고 확신한다. 그 현대판은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예정된 운명이라는 것을 단념하고있다. 다시 말해 그 것은, 원시 박테리아 속에 호모 사피엔스의 싹이 숨어 있었다든지, 어떠한 영적인 힘이 마음 을 받아들일 자격을 갖춘 최초의 몸에 그 마음을 부어 넣을 수 있기를 갈망하면서 생물 진 화를 지도해왔다는 식의 사고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에 현대판 준비론은, 자연 선택은 앞서 있었던 설계 모형도다 더우월한 설계를 형성 하도록 하기 때문에 완전히 자연스럽게 밀어나는 진화과정은 어떠한 특정 경로를 거친다는 견해를 취한다. 개량이 일어나는 경로들은구성 재료의 성질과 지구의 환경에 의해 엄격히 제약된다. 뛰어난 비행 동물이나 수중 동물, 그리고 주행 동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경로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아니 어쩌면 단 하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원시 박테리아의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이 과정을 다시 한 번 시작할 수 있다면, 진화는 다시금거의 같은 경로를 거치게 될 것이다. 진화는 폭넓고 평탄한 경사면에 물을흘려내리는 것보다 미늘톱니바퀴를 하나씩 돌 리는 것에 더 흡사하다. 그것은밀집한 행진처럼 진행하는 것으로서, 각 단계가 그 과정을 한 단계 높이고각 단계가 다음 단계에 없어서는 안 될 준비 단계가 된다. 생명은 현미경적 화학 현상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제는 의식이 존재하기에까지이르렀으니, 그 미늘톱니바퀴에는 일련의 단계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각 단계들은필경 예정이라는 말이 갖는 오래된 의미에서의 '준비'는 아니지만, 그리 놀랍지않은 다음 순서로 이어지는 예측 가 능하고 필연적인 단계들인 것이다. 중요한의미에서 이러한 단계들은 인류가 진화해온 길을 준비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들은 어떤 이유로-설령 그 이유가 신의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공학적인 메커 니즘에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진화가 밀집 행진처럼 한 걸음 한 걸음 진행해온 것이라면, 화석 기록은연속되고 완만한 조직의 발전 패턴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패턴이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진화적인 미늘톱니바퀴의 상 정을 어렵게 만드는 가장 치명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이후 21장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생 명은 지구 자체가 형성된 후에 태어났고, 그런 다음 30억 년-지구 전 역사의 약 5/6에 해당 하는 기간-에걸쳐 거의 동일한 상태로 지속되었다. 이 장구한 기간 동안 생명은 원핵 생물의 수준-유성 생식이나 복잡한 신진대사를 할 수 있게 하는 내부 구조(핵, 미토콘드리아 등)을 갖지 않은 박테리아와남조류 세포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약 30억 년 동안 생명의 최고 형태는조 매트algal mat-침전물을 꽁꽁 얽어 매는 원핵 생물인 해초류가 만든 얇은층-였다. 그 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6억 년 전에 실질적으로 거의 모든 동물의주요 설계가 수백만 년에 걸쳐 나타났다. 우리는 '캄브리아기의 폭발Cambrianexplosion'이 왜 그 무렵에 일어났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사건이그때 일어나야 했다거나, 또는 어떤 식 으로든 일어나야 했다고 생각해야 할 아무런이유도 없다. 과학자들 중에는 산소의 양이 적었다는 사실이 복잡한 동물이 좀더 일찍진화하는 것을 방 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만약 그런 주장이 사실이라면,미늘톱니바퀴는 여전히 작 동하고 있는 셈이다. 무대는 모든 준비를 마친 채무려 30억 년 동안이나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사는 특정 방향으로돌려져야 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산소가 필요했다. 따라서 원핵 생물인 광합성생물이 지구의 원시 대기에는 없었던 이 귀중한 기체를 조금씩 공급하기 시작할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실제로 지구의 원시 대기에서는 산소가 매우 희박했거나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은 캄브리아기의 폭발이 일어나기 10억 년 이상 전에광합성에 의해 다 량의 산소가 발생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캄브리아기의 폭발을 애당초 일 어날 필요가 전혀 없었거나, 또는 그런 식으로일어날 필요가 없는 우연한 사건 이상의 것으 로 생각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것이다. 그것은 한 장의 막(세포막)으로 덮힌 원핵 생물의 공생 집단이 진핵성(핵을가진) 세포로 진화해온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것은 진핵성 세포가효율적인 유성 생식을 발달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성이라는 것이다윈적인 과정에 필요한 유전적 변이성을 유포하고 조절했기 때문에 일어난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핵심은 다음과 같다. 즉 만약 캄브리아기의 폭발이 실제 기간보다 10억 년 가량 더 오랫동안일어났다면-캄브 리아기의 폭발 이후 생명이 사용한 시간의 약 두 배의 기간이 걸렸다면-미늘톱니바퀴라는 가설은 생명의 역사를 빗대어 표현하는 상징으로는 적절치 못하게 된다. 굳이 은유를 사용해야 한다면, 나는 폭넓고 완만하고 균질한 경사면을 상상하고 싶다. 그 정상 근처에 물방울이 임의적으로 떨어진다. 대개의물방울은 흘러내리는 도중 말라버린다. 그러나 이따금 그 물은 밑까지흘러내려 미래에 강이 될 계곡을 형성하게 된다. 이 경사면에 는이러한 무수한 계곡이 여기저기에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그 계곡들의 위치는 지극히 우연한 것이다. 이런 실험을 여러 차례반복한다면, 경우 에 따라서는 하나의 계곡도 생겨나지 않을 수 있고, 때로는 전혀다른 계곡 체계가 생겨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 우리는무수한 계곡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펼쳐져 있는 모습이나, 그 계곡들이 바다에 이어진 모습을 바라보면서 해안선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이것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런 모습 외의 다른 계곡의 모습은 생길수 없다고 생각 하기는 얼마나 쉬운 일인가. 나는 이러한 경사면의 비유에 그 경쟁 상대인 미늘톱니바퀴 비유의차용물이 하나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최초의 경사면은 정상에떨어지는 물방울에 일정한 방향을 부여한다 대부분의 물방울들이 흐르기 전에말라버리고, 흘러내리는 경우에도 무수한 경로를 따라 흐 르더라도. 그렇다면 최초의 경사면은 비록 약하기는 하지만 어떤 예측 가능성을내포하고 있는 게 아 닐까? 필경 의식의 영역은 이처럼 긴 해안선을 가지고있을 것이기 때문에 무수한 계곡들 중 에서 어느 계곡은 결국 그 해안선에도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들은 또 하나의 압력, 내가 이 글을 쓰게 만든압력과 맞닥뜨리게 된 다(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여기까지 도달하기에는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거의 모든 물방울 은 말라버릴 것이다. 지금 존재하는 어떤 계곡이 지구 표면 최초의 경사면에 형성되기 위해 서는 30억년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우리들이 알고 있는 모든 계곡이 형성되기까지는 60억 년, 120억 년 또는 200억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만약 지구의 역사가 영원했다면 우리는 필연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지구는 영원하지 않다 천체물리학자인 월리엄 A. 파울러는 태양이 100억 년 내지 120억 년간 존속한 다음 중심 에 있는 수소 연료를 모두 소진할 것이라고 한다. 그 후 태양은 폭발하여 적색 거성으로 변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태양은 목성이 공전하고 있는 궤도 이상으로 팽창하여 지구를 삼켜버리게될 것이다. 지구가 태어나서 소멸하기까지 전 기간의 중간 정도의 시점에서 인류가출현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인식-우리들을생각에 잠기게 하고 소름끼치게 만드는 종류의 인식-이다. 앞에서 설명했던경사면의 비유가 그 임의성과 예측 불가능성에도 불구하 고 유효하다면, 나는지구가 그토록 복잡한 생명계를 진화시킬 필요가 조금도 없었다고 결론 내리지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생명계가 조류 매트 이상으로 발전하기까지는 30억 년이 걸렸다. 지구가 계속존재하는 한 그 다섯 배의 시간이 걸려도 무방할 것이다. 바꿔 말해 만약 우리가 다시 한 번 그 과정을 실험해볼 수 있다면, 우리 태양계에서역사상 가장 엄청난 사건, 즉 태양계의 어머니인 태양 이 연료를 소진해서폭발하는 사건은 그 최고의 무언의 증인을 조류 매트에게서 찾을지도모 르는 일이다.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도 지구상의 생명계가 맞는 종국적인 파괴에 대해고찰했다(당시 물 리학자들은 태양이 연료를 다 태우고 나면 지구는 얼어붙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시인할 수 없었다. 그는 "좀더 높은 수준의 삶을위해 싸우고 있는 인류의 완만한 진보, 순교자들의 번민, 희생자들의 신음,모든 시대에 만연한 악과 비참하고 부당한 괴로움, 자유를 위한 싸움, 정의를목표로 쏟아 붓는 노력, 덕에 대한 열망, 그리고 인 류의 복지 등 모든 것이완전히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상상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지 워진 엄청난정신적인 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 월리스는 이 문제에 대해 영적 생명의 영원성이라는, 진부하기만 한기독교적인 해결 책을 선택했다. "이렇듯 고귀한 발전을 할 수 있을 만한 잠재능력이 있는 존재는... 더욱 높 고 영원한 존재로 미리 운명지어진 것이 확실하다." 여기서 나는 감히 다른 주장을 제기하 고 싶다. 화석 기록에 따르면, 화석무척추 동물의 평균적인 종은 500만 년에서 1천만 년 가 량 존속한다(그 확실성에대해서는 다소 의심의 여지가 있지만, 가장 오랫동안 존속한 종은 2억 년 이상계속되었다고 한다). 척추 동물 종들의 수명은 더 작은 것이 보통이다. 만약 인류가 지금부터 50억 년 가량 후까지도 살아 남아서 지구의 파멸을목격한다면, 일 찍이 생명계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일을 달성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기쁨에 들떠 기꺼이 '백조의 노래' (백조는 죽을 때 가장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는 설이 있다/옮긴이)-이 세상의 영화를 떠난다sictransit gloria mundi-를 불러야 할 것이다. 물론 인류는 우주선 군단을 편성해 우주로 날아올라 조금 후에 일어나게 될다음 번 빅뱅 (우주론에서 말하는 우주의 기원에 해당하는 대폭발/옮긴이)에서야소멸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과학 소설의 열렬한팬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