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다윈이 성 선택이라는 면에서 월리스에게 영향을 줄 수 없었던 데 대해 괴로워했다면, 이제 그는 월리스가 종착점까지 와서 갑자기 방 향을 전환한 사실에 아연 실색했다. 1869년, 그는 월리스에게 이런 편 지를 보냈다. "저는 당신이 당신 스스로의 자식이면서 동시에 내 자식이기도 한 것을 너무도 완벽하게 죽이지 말았으면 합니다." 한 달 후 그는 다시 간곡히 충고했다. "만일 당신이 내게 직접 이야기하지만 않았다면, 저는 '인간에 관한 당신의 견해'는 다른 어떤 사람이 덧붙여 쓴 것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당신도 예상하고 있겠지만, 나는 당신과 큰 견해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점에 대해 무척 가슴아프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난에 매우 민감해진 월리스는 그 후 인간 지능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나의 특별한 이단적인 견해"라고 부르게 되었다. 내내 일관성을 유지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꾼 것 은 월리스에게 인간을 자연 선택이라는 체계 속으로 완전히 포괄시키기 위한 마지막 한 걸음-다윈이 '인류의 기원'(1871년)과 '감정의 표현' (1872년)이라는 두 권의 책에서 훌륭한 불요 불굴의 태도로 전진시켰던 것과 같은 한 걸음-을 내딛을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일반 적이었다. 따라서 월리스는 인간 지능의 기원에 대한 입장과 관련된 세가지 이유 가운데 한 가지 또는 그 이상 때문에 역사적으로 다윈보다 못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첫째, 단순한 소심함 때문이며, 둘째,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문화적 구속이나 전통적인 통념을 넘어설 수 없었기 때문이며, 셋째, 성 선택에 대한 논쟁에서 자연 선택을 그처럼 강하게 주장했으면서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연 선택을 저버렸다는 일관성의 부재 때문이다. 나는 월리스의 정신을 분석하는 식의 일은 결코 할 수 없다. 그리고 인간 지능과 그 밖의 동물 행동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간격을 지키려 했 던 그의 마음 깊은 곳의 동기에 대해 논의할 생각도 없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논리를 평가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이 부정확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라고 단언할 수 있다. 월리스 는 동물에서 인간으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문턱에서 자연 선택이라는 원리를 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가 인간의 정신에 대해서도 시종 일관 자연 선택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오히려 그의 자연 선택에 대한 경직된 사고 방식 때문이었다. 그는 결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는 중요한 진화적 변화가 일어난 원인을 오직 자연 선택에서 찾으려 했다. 다윈과 벌인 두 가지-성 선택과 인간 지능의 기원에 대한-논쟁은 그의 일관된 주장을 잘 드러내 주고 있으며, 어느 때는 자연 선택론을 고수했다가 다른 경우에는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모순된 태도를 결코 보이지 않았다. 월리스가 인간 지능에 대해 오류를 범한 것은 그의 경직된 선택주의가 부적절했기 때문이지, 그것을 적용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그의 주장에서 보이는 결함들은 오늘날 가장 '현대적'이라고 하는 진화론적 추론에서도 종종 드러나는 약점이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오늘날 우리들의 연구에 대해서도 많은 시사점을 제시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공교롭게도 월리스의 경직된 선택주의가 다윈이 내세운 다원론pluralism보다도 더욱 오늘날 유행하는 '신다윈주의Neo-Darwinism'라는 사고 방식에 훨씬 가깝기 때문이다. 월리스는 인간 지능의 독특함에 대해 여러 가지 주장을 전개했다. 당 시로서는 그의 주장이 극도로 낯선 것이었지만, 지금에 와서 그 주장을 되짚어보면 그것은 최고의 칭송을 받을 만한 견해였다고 본다. 월리스 는 19세기의 몇 안 되는 인종차별 반대론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인류의 모든 인종은 선천적으로 동등한 지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고 확신했다. 월리스는 해부학적이고 문화적인 두 가지 주장을 통해 기 존의 통념을 깨뜨리며 평등주의를 고수했다. 우선 그는 '야만인'의 뇌 가 백인 것보다 결코 작지 않으며 구조도 빈약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가장 하등한 야만인의 뇌나 선사 시대 인류의 뇌는 그 크기와 복잡성 에서 가장 고등한 유형의 것과 비교해...거의 손색이 없다." 게다가 아무리 미개한 야만인이라도 일단 문화적인 조건만 마련되면 가장 우아 한 생활 속에 동화될 수 있는 것을 볼 때 미개함이란 능력 자체가 결여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 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등한 종족들에게도 잠재해 있는 것이다. 세계 각지에서 유럽인에 의해 조직 훈련된 원주민 군악대가 최고 수준의 현대 음악을 훌륭히 연주할 수 있었던 예는 이것을 잘 증명해준다." 물론 인종차별 반대론자라 불렀다고 해서 월리스가 모든 민족의 문화 적 특성을 그 본질적인 가치 면에서부터 동등하게 보았다는 것은 아니 다. 월리스는 당시 대개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유럽식 생활 양식의 우 월성을 의심하지 않은 문화적 애국주의자였다. 그는 '야만인'의 능력에 관해서는 완고하게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다음과 같은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는 한, 야만인의 생활에 대해 유치한 의견밖에 갖지 못했던 것은 분명하다. "우리들의 법률, 우리들의 정부, 우리들의 과학은 다양하게 일어나는 복잡한 현상을 통해 예상 결과를 추론해내도록 언제나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심지어 체스 같은 게임도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능력을 고도로 발휘하게 한다. 이런 측면을 추상적 개념을 나타내는 단어라곤 하나도 없는 야만인의 언어와 비교해보라. 극히 간단한 필요성 이상의 통찰력은 야만인에게 불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의 감각에 직접 호소하지 않는 일반 문제들에 관해 사유하고 추론하고 그 문제들을 서로 결부 비교한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불가능하다." 여기에 월리스의 딜레마가 있다. 요컨대 우리들의 선조들과 오늘날 생존해 있는 원주민과 같은 모든 '야만인'들은 유럽의 예술,도덕,철학의 가장 섬세한 정묘함까지 발전시키고 그 가치를 완전히 인식할 수 있을 만한 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그들은 빈곤한 언어와 도덕을 가진 초보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원래 지니고 있는 능력의 극히 작은 일부밖에 사용하지 않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나 자연 선택은 당장의 사용immediate use에만 유용한 특징을 만들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뇌가 원시 사회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것은 적절하지 못한 과대 설계에 해당한다. 따라서 자연 선택이 인간의 지능을 형성시킬 수 없다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제기되 는 것이다. 야만인들의 좁게 한정된 정신적 발달을 위해서는... 고릴라 뇌의 1.5배 정도로도 충분하다. 따라서 그들이 실제 가지고 있는 커다란 뇌는 결코 진화의 여러 법칙 가운데 어느 하나에 의해 단독적으로 발달된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그 법칙에 따르면 진화의 본질은 각 종에 필요한 만큼 정확하게 균형잡힌 조직의 단계를 이끄는 것이지 결코 그것을 능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 선택은 유인원의 뇌보다 조금 고등한 정도의 뇌를 야만인에게 주는 이상의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철학자의 뇌와 거의 다름없는 뇌를 갖고 있다. 월리스는 이 일반적인 주장을 추상적인 지능에 한정시키지 않고 모든 유럽적인 '우아함'의 측면, 특히 언어와 음악에까지 확장시켰다. "특히 여성의 경우, 후두에 나타나는 음악적 음성이 갖는 힘, 넓은 음역, 유연 함, 감미로움"에 대한 그의 관점을 살펴보면 이러한 그의 생각을 분명 히 알 수 있다. 야만인의 습관을 보면 어떻게 이러한 능력이 자연 선택에 의해 발달 할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이 능력은 그들에게 결코 필요하지도, 사용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야만인의 노래는 대개 단조로운 외침에 지나지 않고, 더구나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야만인들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아내를 고르는 일은 결코 없고, 거친 건강미나 강한 힘, 신체의 아름다움 등이 선택의 기준이 될 뿐이다. 따라서 문명인들 사이에서나 그 효력을 가지게 될 이 훌륭한 힘을 성 선택이 발달시켰을 리가 없다. 이 기관은 초기 인류에게는 필요없는 최신의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마치 인간의 미래 진보를 예측하고 미리 준비된 것처럼 보인다. 결국 필요 이상의 능력이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거나 필요로 하기 전 에 나타난 것이라면 그것들은 자연 선택의 산물일 수 없다. 만약 그것 들이 미래의 필요성을 미리 예상하고 발생한 것이라면, 그것은 훨씬 고 등한 지능을 가진 존재가 직접 만들어낸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현상들로부터 내가 도출해낼 수 있는 것은 우월한 지성이 인류의 발전을 어떤 특정한 방향, 그리고 특정한 목표를 향해 이끌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월리스는 자연 신학의 진영에 다시 가세하게 되었다. 이때 에도 다윈은 간곡히 충고했지만, 월리스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고 결국 그 사실을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월리스의 잘못은 진화론을 인간에게 확대시키기를 꺼려했다는 데 있지 않았다. 그의 진화 사상 전체에 널리 퍼져 있는 초선택주의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잘못이 있었다. 만약 초선택주의가 유효하다면, 모든 생물의 각 부분이 오직 당장의 이용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월리스의 의견은 반박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들보다 더 큰 뇌를 가졌던 초기 크로마뇽 인은 동굴 벽에 놀랄 만한 그림을 그렸다. 그렇지만 그들은 기호를 사용하지도 컴퓨터를 제작하지도 않았다. 원시 시대 이후로 우리들이 이룩한 모든 것은 한결같은 능력의 뇌에 기반을 둔 문화적 진화의 산물이다. 월리스의 관점에 따르면, 그러한 뇌는 처음부터 원래 목표했던 기능을 훨씬 초과하는 과잉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자연 선택의 산물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초선택주의는 근거가 미약하다. 그것은 다윈의 훨씬 더 정 교한 관점을 서투르게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생물이 갖는 형태와 기능의 본질을 무시하고 잘못 이해했다. 자연 선택은 어떤 특정 한 기능 또는 기능군을 '위해' 하나의 기관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이 해당 기관의 능력을 완전하게 특정 짓는다고 장담할 수 는 없다. 특정한 목적을 위해 설계된 것은 그 구조상의 복잡함으로 인 래 그 밖의 여러 가지 다른 기능도 함께 수행하는 것이다. 어떤 회사의 컴퓨터는 매월 지불하는 수표를 발행하기 위해 설치될 수도 있지만, 같은 기계가 선거 개표 결과를 분석하기도 하고, 또는 오목놀이에서 사람을 이기기도-최소한 대등한 경기를 벌이기도-한다. 우리들의 큰 뇌 는 음식물을 얻고, 사회에 적응하고, 그 밖의 일에 필요한 능숙함을 획 득하기 '위해' 발달하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능숙함이 이러한 복잡한 기계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는 아니다. 다행히도 그 한계 중에는 모두가 할 수 있는 쇼핑 목록 쓰기에서부터 극소수 사람만이 가능한 그랜드 오페라 곡 쓰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능력이 포함돼 있다. 그리고 우리들의 후두는 사회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분절음을 또박또박 내기 '위해' 생겨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부학적 설계들은 샤워를 하며 부르는 콧노래에서부터, 극히 드물게는 프리마 돈나의 노래에 이르기까지 훨씬 다양한 기능을 우리에게 준다. 오랫동안 초선택주의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들과 함께 해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의 조화라는 신화-이 세계는 모든 있을 수 있는 세계 가운데 최선의 세계이며, 만물은 그 세계 속에서 가능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라는(이 경우 모든 생물의 구조는 구체적인 목적을 위해 훌륭 하게 설계되었다는)-가 19세기 후반의 과학관으로 모습을 바꾼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것은 볼테르가 소설 '캉디드Candide' 속에서 생생하게 풍자한 어리석은 팡그로스 박사의 환상-세계는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것이라는-이다. 월리스보다 1세기 앞서 저술된 책이지만, 이 책에서 낙천주의자였던 팡그로스 박사는 월리스의 주장이 갖는 오류의 본질을 정확하게 집어내면서 이렇게 말한다. "사물들은 지금 있는 대로가 아닌 다른 무엇일 수 없다. 모든 것은 최선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 우리의 코는 안경을 쓰기 위해 만들어졌다. 따라서 우리는 안경을 쓴다. 다리는 구두를 신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구두를 신는다." 이런 극단적인 낙천주의는 오늘날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 행동을 주제로 한 수많은 통속적 문헌들은 인간이 수렵을 '위해' 큰 뇌를 진화시켰다고 주장하며, 현대 모든 악의 근원을 이러한 생활 양식 때문에 형성된 인간의 사고와 감정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설명한다. 역설적이게도 월리스의 초선택주의는 한때 그가 뒤엎으려고 무던히 애썼던 창조론의 기본 신념-사물에는 '정의'가 있고 각각의 물건은 전체 속에서 일정한 지위를 갖는다는 믿음-으로 되돌아갔다. 부당하게도월리스는 다윈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그는 창조의 아름다움과 조화와 완전성을 마음속에서부터 믿는 사람 이었다. 그는 애정 어리고 인내심 강하고 경의심 넘치는 연구를 생 물의 여러 가지 현상에 바쳤지만, 처음에 그의 가르침은 파렴치하고 무신론적인 견해라고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적응 현상 을 밝혀내면서 가장 하찮은 생물의 전혀 중요치 않은 부분도 나름대 로 쓸모와 목적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나는 자연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 않겠다. 그 러나 생물 구조 역시 숨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구조가 어떤 한 가지 목적을 위해 형성되었다 하더라도, 그 외의 다른 기능에 사용될 수 있 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유연성 속에 우리들의 삶의 번잡함messiness과 희망이 함께 놓여 있는 것이다. 제5장 중도를 지켰던 다윈 "우리는 비탄의 해협을 항해하기 시작했다." 오디세우스는 이렇게 이야 기한다. "한편에는 스킬라가 살고 있다. 스킬라는 발이 열둘이나 달려 있고, 엄청나게 긴 머리가 여섯이나 되는 괴물이다. 그 끔찍한 머리들 에는 두껍고 조밀한 이빨이 3열로 나 있는 입이 붙어 있고, 그 속에는 음험하고 검은 죽음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엄청난 카리브디스(배를 삼킨다고 전해지는 규모가 큰 소용돌이 괴물/옮긴이)가 바닷물을 빨아들인다. 그녀는 트림을 할 때마다 마치 거대한 불 위에 올려놓은 가마솥처럼 가장 깊은 안쪽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오디세우스는 간신히 카리브디스를 비켜 갈 수 있었지만, 스킬라는 가장 뛰어난 뱃사람 여섯 명을 낚아채 그의 눈앞에서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그는 그 일에 대해 "바닷길을 찾는 항해 도중에 겪어야 했던 고통 가운데 내 눈으로 목격한 가장 비참한 일"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전설이나 은유 속에서 사람을 꾀는 괴물과 위험들은 쌍을 이루며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프라이팬과 불(jump out of fryingpan into fire, 작은 화를 피하려다 큰 낭패를 당한다는 미국의 속담/옮긴이), 악마와 깊고 푸른 바다 등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완고하기까지 한 견실함(기독교 복음 전도자들의 편 협함과 완고함), 또는 그리 유쾌하지 않는 두 대립물 사이의 중립(아리스 토텔레스가 황금이라고 말한 중립) 사이에서 어느 쪽을 택해야만 한다. 바람직하지 않은 양 극단 사이를 헤쳐 나간다는 생각은 분별 있는 생활 을 위한 가장 중심적인 규칙이다. 과학적 창조성의 본질은 토론의 영원한 화젯거리이며, 아울러 중용이라는 황금률을 추구하기 위한 최고의 후보이다. 극단적인 두 가지 입장이 신중치 못한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직접 경쟁을 벌이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한편이 부상하면 다른 쪽이 가라앉는 식으로 서로를 대체시켜왔다. 첫번째 입장, 이른바 귀납주의는 뛰어난 과학자란 우선은 뛰어난 관 찰자이며 인내심 강한 정보 수집자라는 주장을 신봉해왔다. 귀납주의자 들의 주장에 따르면, 새로운 학설은 수많은 사실들을 기반으로 할 때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건축학적 관점에서 개개의 사실은 청 사진 없이 세워진 건조물의 벽돌 하나하나에 해당된다. 따라서 벽돌을 쌓기 전에 이론(즉 완성된 건조물)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생각하는 것은 성급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일찍이 귀납주의는 과학 분야에서 상당한 지배력을 행사했고 일종의 '공식적'인 입장을 나타내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귀납주의는 설령 잘못된 결과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완전한 성실 성, 완벽한 객관성, 그리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최종적 진리를 향한 과학적 전진이라는 성질을 끊임없이 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판자들이 지적했듯이, 귀납주의는 과학이란 분야를 일반적 으로 천재성에 뒤따르는 주관적인 속성이나 기발함, 직관이 관여하지 않는 거의 비인간적이다고 말할 수 있는 비정한 분야로 만들어버렸다. 비판자들은 위대한 과학자라면 실험이나 관찰보다는 독특한 예감과 종 합력에서 남보다 뛰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귀납주의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분명히 타당한 견해이다. 그래서 나는 지난 30년간 귀납주의가 사물을 좀더 깊이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서곡으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해 왔었다는 사실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그런 비판자들 가운데는 귀납주의에 대해 강도 높은 공격을 퍼붓고는 창조적 사고란 본질적으로 주관적임을 강조하면서 귀납주의를 대신하여 또 다른 극단적이고 비생산적인 주장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러한 '유레카'식 관점에서 보면 창조성이란 천재적인 인물에게만 허용되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성한 무엇이다. 그것은 예상이나 예견, 그리고 분석 등을 절대 허용하지 않으며 마치 전광 석화처럼 일어난다. 그러나 이러한 전광 석화의 번개를 맞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밖에 없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저 외경과 감격 속에서 그들을 지켜보야만 한다 ('유레카'란 아르키메데스가 시라쿠사에서 목욕을 하다가, 자기 몸 때문에 욕조 밖으로 넘쳐흐른 물을 보고 영감을 받아 비중을 측정하는 방법을 알아낸 뒤에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거리로 뛰쳐나가 '유레카(내가 발견했다)' 라고 외쳤다는 데서 전해지는 말이다). 나 역시 이처럼 서로 대립하는 극단적인 입장에 의해 주술에서 깨어 났다. 귀납주의는 천재를 지루하고 틀에 박힌 활동으로 축소시켜버린 다. 반면 유레카주의는 천재를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이해하고 배울 수 있는 분야가 아닌 본질적으로 신비스러운 영역에 있는 도달하기 어려운 지위로 인정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두 가지 관점의 좋은 측면만을 취하고 유레카주의의 엘리트성과 귀납주의의 평범성을 버릴 수는 없을까? 창조성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성격을 용인하지 않고,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능력-천재를 흉내내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해는 할 수 있는 능력-을 강조하거나 증폭시키는 하나의 사고 양식으로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과학사 속에서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러한 높은 지위를 얻었다. 그 것은 자격만 있으면 누구나 올라갈 수 있는 지위이다. 그러한 이유로 진화생물학 분야의 최고 성자인 찰스 다윈은 귀납주의자와 유레카주의 자 양 진영에서 모두 가장 좋은 예로 제시되어왔다. 나는 이 장에서 이러한 해석은 모두 잘못이며, 자연 선택설을 위한 다윈 자신의 기나긴 모험여행에 관해 최근 이루어진 연구 결과가 그의 중간적인 위치를 입증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고자 한다. 다윈의 시대에는 귀납주의의 세력이 워낙 강해 다윈 자신도 그 영향 력 아래 있었다. 노년에 들어서도 자신이 젊은 시절에 열중했던 업적을 귀납주의적 사고 방식에 따라 잘못 서술했다. 출판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자식들에게 교훈을 남기기 위해 쓴 자서전에서 그는 이후 100년 가까이 역사가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 유명한 몇 구절을 남겼다. 자연 선택설에 이르게 된 도정을 기술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참된 베이컨적 원칙들에 따라 연구했고, 아무런 이론도 없이 광범위하 게 구체적 사례를 수집했다. " 다윈에 관한 귀납주의적 해석은 주로 '비글'호(1831년에서 1836년까 지 남아메카 남단을 측량하고 오스트레일리아,남양 제도를 주항했던 영 국 군함의 이름. 다윈은 이 배에 편승하여 그때의 경험에 의거한 '비글 호 항해기'를 썼음/옮긴이)에 탑승했던 5년간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그가 목사를 꿈꾸던 학생에서 목사들에 대한 복수자로 변신하게 된 것은 새계 전체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력 덕분이었다. 따라서 전통적인 설명 에 따르면, 남아메리카의 거대한 화석 포유류 뼈, 갈라파고스 군도와 거북과 핀치류, 오스트레일리아의 유대목 동물군들을 잇달아 발견하면 서 다윈의 눈은 차츰 뜨이게 되었다. 그리고 진화의 진실과 신화의 자연 선택적 메커니즘은 그가 완전한 객관성이라는 체로 수많은 사실들을 걸러냄으로써 점진적으로 그에게 다가오게 된 것이다. 이런 설명의 부적합성은 진부한 첫번째 예, 즉 갈라파고스의 소위 다 윈 핀치Darwin's finch의 허위성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오늘 날 우리는 이 작은 새가 남미 대륙에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공통의 선조 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새들은 외딴 갈라파고스 군도에 일군의 종을 형성하며 방산 분화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소수 육생종만이 남미 대륙과 갈라파고스 사이에 놓인 드넓은 대양이라는 장애물을 건널 수 있었다. 그러다 간혹 운좋은 이주성 새들이 혼잡한 본토에서 그들의 생존 기회를 제한했던 경쟁 상대가 없고 거주 생물들이 적은 세계를 찾아내기도 했다. 따라서 핀치류는 다른 새들에게 차지되게 마련인 역할로 진화해서, 유명한 섭식을 위한 일습 적응set of adaptations for feeding-씨앗을 씹어 으깨는 형태, 곤충을 먹는 형태, 심지어는 식물들이 곤충을 격퇴시키기 위해 발달시킨 선인장 가시를 능란하게 처리하는 형태 등-을 발달시켰다. 격리-대륙과 섬의 격리와 많은 섬 사이의 격리-가 분리, 독립적인 적응, 그리고 종분화를 일으키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관점에 따르면, 다윈은 이들 핀치류를 발견해 그들의 역사를 정확하게 추정했다. 다윈은 자신의 노트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기록을 몇 줄 남겼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뒷받침해줄 만한 약간의 근거라도 있다면 군도의 동물학은 계속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종의 안정성을 뿌리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지 워싱턴의 벚나무에서부터 십자군 신앙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영웅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통속적인 읽을거리를 자극하는 것은 진실성보다는 희망이다. 분명히 다윈은 핀치류를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핀치류가 하나의 공통된 선조에서 분리된 변종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실제로 그는 많은 핀치류에 대해 그것을 발견한 섬의 이름조차 기록해놓지 않았다. 그가 붙인 꼬리표 중에는 단지 "갈라파고스 군도"라고만 적혀 있는 것도 있었다. 새로운 종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격리가 수행하는 역할에 대해 그가 현지에서 인식한 사실은 그 정도에 머물렀다. 그가 진화론을 재정립하게 된 것은 런던에 돌아간 후 대영박물관의 한 조류학자가 그 새들이 모두 핀치 류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확인한 다음이었다. 다윈의 노트에서 자주 인용되는 부분은, 갈라파고스의 거북이나, 원 주민들이 몸과 비늘의 크기와 형태에 나타나는 미세한 차이를 통해 "모 든 거북을 어떤 섬에서 온 것인지 그 자리에서 판별할 수 있다"는 등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것은 핀치류에 대한 전통적 이야기와는 다른 훨씬 차원이 낮은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핀치류는 하나하나가 별개의 종이며 진화의 산 증거인데 비해 육지 거북 사이의 미묘한 차이는 하나의 종 속에서 나타나는 작은 지리적 변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작은 차이가 증폭되어 새로운 종을 만들어냈다는 주장은 오늘날 우리들도 잘 알고 있듯이 비약적인 추론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모든 창조론자들은 지리적 변이를 인정하면서도(인종의 경우를 보라), 그 변이가 최초에 창조된 원형archetype이라는 엄격한 한계 너머까지 진행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나는 비글 호 항해가 다윈의 생애에 준 결정적인 영향을 과소 평가할 생각은 없다. 그 항해는 다윈이 좋아하던 독립적인 자기 자극 방식으로 그에게 생각할 수 있는 장소와 자유, 그리고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주 었다. (대학 생활에서 그가 느끼던 위화감, 일반적인 기준으로 말하자면 중 간 정도에 그친 성적 등은 주입식 교육 과정에서 그가 얼마나 불행했는지 잘 말해주고 있다) 그는 1834년에 남아메리카에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나는 벽개(광물이나 암석에 난 규칙적인 갈라짐/옮긴이)나 층리, 융기선 등에 대해서는 전혀 명확한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내게 많은 사실을 이야기해줄 수 있는 책도 갖고 있지 않으며, 책이 내게 가르쳐주는 사실을 내 눈앞에 펼쳐진 사실에 적용할 수도 없다. 따라서 결국 나는 나 자신의 결론을 이끌어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수수께끼이다." 다윈은 자신이 본 암석과 식물, 그리고 동물들에 자극되어 모든 창조성의 근원이 되는 의구심이라는 중요한 태도를 갖게 되었다. 1836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 이 대륙의 기후와 지리는 어떤 면에서도 유대목의 발생에 유리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다윈은 이성적인 신이 왜 그토록 많은 유대목을 이 대륙에 만들어냈는지 의구심을 품었다. "나는 햇볕이 좋은 강가에 엎드려 세계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서 이 나라의 동물들이 기묘한 특색을 가진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이성으로 해석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확실히 두 사람의 창조자가 따로따로 일한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그럼에도 다윈은 진화론을 수립하지 못한 채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 는 마음속에서는 이미 생물이 진화한다는 진리를 깨닫고 있었지만, 그 것을 설명할 메커니즘을 찾지 못했다. 자연 선택설은 비글 호 항해에서 얻은 여러 가지 사실들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후 2 년에 걸친 사색과 고투-과거 20년 동안 발견되어 출판된 노트들 속에 잘 투영되어 있다-를 통해 형성되었다. 이 노트를 통해 우리는 그가 몇 가지 이론을 검증하고 폐기시키고 때로는 잘못된 단서를 좇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후일 그가 자신은 마음을 비우고 많은 사실을 기록했다고 주장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는 항상 그 의미와 통찰을 깊이 음미하면서 철학자와 시인, 그리고 경제학자 등의 저작을 읽었다. 자연 선택설이 비글 호 항해에서 얻은 사실을 기초로 귀납적으 로 얻어졌다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훗날 그는 이 노트 가운데 한 권에 '윤리에 대한 형이상학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라고 이름붙였다. 그러나 이 우회적인 경로가 귀납주의라는 스킬라와 다른 것이라면, 그것은 마찬가지로 단순화된 신화, 즉 유레카주의라는 카리브디스를 낳은 셈이 된다. 화가 치밀 정도로 사람들을 혼란시킨 자서전에서 실제로 다원은 '유레카'를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자연 선택설이 좌절 과 암중 모색으로 점철된 1년 이상의 기간이 지난 후, 전혀 뜻하지 않 게 섬광처럼 우연히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1838년 10월, 그러니까 내가 체계적인 조사를 시작한 지 15개월 가 량이 지난 뒤에 나는 우연히 인구 문제를 논한 맬서스의 책을 읽었 다. 나는 동식물의 습성에 대한 관찰을 오랫동안 계속해 왔기 때문에 도처에서 벌어지는 생존 투쟁을 평가할 만한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 었다. 어느 순간, 이러한 상황에서는 주변 환경에 유리한 변이는 보 존되지만 불리한 변이는 소멸하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새로운 종의 형성일 것이다 거기에 서 나는 드디어 작동 가능한 이론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이 노트도 다원이 말년에 한 회상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 일 이 일어났을 때, 그의 맬서스적 통찰에 대한 어떤 특별한 환희를 기록 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기 때문이다. 다윈은 그 이야기를 감탄부호(!) 하 나도 붙이지 않고-흥분할 때면 그는 곧잘 두 개나 세 개 정도 감탄부호 를 붙였다-지극히 평범한 투로 짧게 언급했을 뿐이었다. 그는 어떠한 암시도 없이 파악하기 힘든 혼란스러운 세계를 새로운 통찰로 재해석했을 뿐이다. 다음날 그는 영장류의 성적 호기심에 관해 그보다 훨씬 긴 글을 썼다. 자연 선택설은 마치 기술자가 그러하듯이 자연계의 많은 사실로부터 귀납적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며, 또한 우연히 맬서스를 읽고 계발된 잠 재 의식으로부터 번개처럼 떠올린 것도 아니다. 실제로 그것은, 여러 곳으로 가지를 쳐 나가긴 했지만 그 자체로서 질서 있는 방식으로 이루 어진 의식적이고 생산적인 탐색의 결과였다. 그 탐색은 다윈 자신의 생물학과는 거리가 먼, 여러 가지 다른 분야에서 얻어낸 놀랄 만큼 폭넓은 범위의 통찰과, 자연사의 수많은 사실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다윈은 귀납주의와 유레카주의 사이에서 중용의 길을 걸었다. 그의 능력은 평범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접근할 수 없을 만큼 비범한 것도 아니었다. 다윈에 관한 문헌학은 1959년 '종의 기원' 출간 100주년이 된 이래 폭발적으로 확산됐다. 다원의 노트 출간과, 비글 호의 귀환과 맬서스적 통찰 사이의 주요 2년간에 대한 집중적 연구로 다윈의 창조성은 '중용' 적인 이론이라는 결말로 끝이 났다. 특히 중요한 두 권의 저작이 각기 대단히 넓은 시야와 대단히 좁은 시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윈의 생애에서 이 시기를 논한 하워드 E. 그루버는 뛰어난 지적, 심리학적 관점에서 씌어진 전기 '다원의 인간론Dawin on Man'에서 다윈의 탐구과정에서 나타난 모든 잘못된 단서와 전환점들을 추적하고 있다. 그루 버에 따르면, 다윈은 끊임없이 여러 가지 가설을 생각해낸 다음 그것들 을 시험하여 잘못된 가설을 폐기시키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 시켰지, 사실들을 이것저것 긁어모으는 일은 절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새로운 종의 수명은 처음부터 결정돼 있다는 공상적인 가설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가설들을 거쳐 하나의 종은 생존 경쟁이 치열한 싸움장인 이 세계에서 경쟁에 의해 멸종한다는 개념을 향해 접근해갔다. 그가 맬서스의 '인구론'를 읽었을 때 느꼈던 희열에 가까운 느낌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그때 이미 그 조각그림맞추기 퍼즐이 한두 개의 조각만 더 맞추면 완성되는 단계에까지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반 S. 슈베버는 맬서스를 읽기 전 수 주일 동안의 다윈 행동에 대해 기록이 허용하는 한 극히 미세한 부분까지 재현해냈다(다시 찾아가본 '종의 기원'의 기원, '생물학사 저널'(1977년). 슈베버는 조각 퍼즐의 마 지막 한 조각은 자연계의 새로운 사실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 라 다윈의 연구 분야와는 거리가 먼 지적 방황을 통해 발견할 수 있었 다고 주장한다. 한때 다윈은 사회과학자이자 철학자인 오귀스트 콩트의 유명한 저서 '실증철학 강의'에 관한 긴 서평을 읽은 적이 있었다. 특히 그는 "훌륭한 이론은 예견 가능하다는 성격을 띠며, 최소한 잠재적으로 양에 관계된 것이다"라는 콩트의 주장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 다음 그는 더걸드 스튜어트의 '아담 스미스의 생애와 저작에 관해서'를 읽었고, 사회 전체 구조에 관한 이론은 구속되지 않은 행동을 분석하는 것 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스코틀랜드학파 경제학자들의 기본 이념을 흡수 했다(자연 선택설은 무엇보다 번식에서 성공하려는 개개 생물들의 투쟁에 관한 이론인 것이다). 이어서 그는 정량화quantification를 모색하게 되었고, 그런 가운데 그는 당시 유명한 벨기에 인 통계학자 아돌프 케틀레가 저술한 매우 긴 분석을 읽었다. 케틀레의 연구에서 그는 특히 맬서스의 정량적인 주장-인구는 기하 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데 비해 식량 공급은 산술 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치열한 생존경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주장-에 마음이 끌렸다. 이전에도 다윈은 여러 차례 맬서스적인 주장을 읽은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주장이 갖는 중요성을 올바로 인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는 우 연히 맬서스를 읽은 것이 아니라 이미 그 내용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윈이 이야기한 '재미 삼아'라는 말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는 케틀레의 간접적인 언급으로 이미 충격을 주었던 유명한 주장을 명확히 기술된 원저작으로 읽어보고 싶다는 욕구라고 추정해야 옳을 것이다. 다윈이 자연 선택설을 수립하기 전의 중요한 몇 시기에 대해 상세히 분석한 슈베버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문득 다윈이 생물학이라는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는 결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을 해보았다. 직접 그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사회과학자, 경제학자, 그 리고 통계학자들이었다. 만약 천재성이라는 것에 어떠한 공통 분모가 있다면, 나는 폭넓은 관심과 여러 분야 사이에 유용한 유사성을 이끌어내는 능력을 우선으로 꼽겠다. 실제로 자연 선택설은 아담 스미스식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을 생물학 에 연장한 것으로-다윈 자신이 그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는지 여부는 확실히 모르지만-파악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스미스가 전개한 주장의 본질은 일종의 역설이었다. 다시 말해 그의 주장은, 모든 사람에게 최대의 이익을 줄 수 있는 경제 형태를 원한다면, 각 개인으로 하여금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며 경쟁하고 싸우게 하라는 것이다. 그 과정 에서 옥석이 가려지고 무능력한 자가 제거되고 나면 안정되고 조화로운 사회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한 스미스는 운명적으로 미리 정해진 여러 가지 원리나 더욱 고도한 제어가 아니라 각 개인 사이의 투쟁으로부터 뚜렷한 질서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다윈이 읽은 더걸드 스튜어트의 책에서는 스미스가 주장한 체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어떤 국민을 발전시키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계획은... 그들이 정의의 여러 규칙들을 지키는 한도 내에서 모든 사람들 각자의 방법으로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게 만들고, 또한 개별 기업과 자본을 같은 입장에 있는 다른 시민들의 그것들과 완전히 자유롭게 경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경우보다 큰 몫의 자본을 특정 산업으로 돌리려고... 노력하는 정책은 모두... 실제로는 그것이 추진하려 하는 원대한 목표를 파탄으로 몰고 가고 만다. 슈베버는 이렇게 쓰고 있다. "스코틀랜드학파는 사회에 대해, 개인 행동의 종합이 그 사회가 기반으로 삼고 있는 여러 가지 제도로 귀결하 며, 이러한 사회는 안정되고 발전된 사회로서, 계획하거나 지시하는 사 람 없이도 제대로 기능한다고 분석하고 있다." 우리는 다윈의 독창성이 진화라는 개념 자체를 지지한 데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안다. 그 이전에 이미 많은 과학자들이 그런 일을 했었다. 그 의 특별한 공헌은 증거 자료에 의해 그것을 입증했다는 데 있으며, 또 한 진화가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관해 참신한 이론을 전개했다는 데 있 다. 다윈 이전의 진화론자들은 완성을 향한 내적 경향이나 이미 타고난 방향성 등에 기초를 둔 별 실현성 없는 도식을 제안했다. 다윈은 각 개 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직접적인 상호 작용을 기반으로 자연스럽고 논증 가능한 이론을 주창했다(그의 반대자들까지도 그 이론을 무자비하고 냉혹 한 기계론으로 간주할 정도였다) 자연 선택설은 합리적인 경제를 추구한 아담 스미스의 기본적인 주장을 생물학적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더욱 높은 외적인(신에 의한) 통제력이나, 전체에 대해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여러 가지 법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현대식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각 개체가 생식에 성공하는 편차에 따라 유전자를 미래 세대로 전달하기 위해-벌어지는 개체 간의 투쟁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주장을 듣고 당혹감을 느꼈다. 가장 중요한 결 론 가운데 몇몇 부분이 해당 연구 분야 자체의 자료가 아닌 그 시대 정 치나 문화에서 얻은 유추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는 과학의 순수성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칼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연 선택설과 당시 영국 사회의 유사성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다윈이 노동, 경쟁, 새로운 시장의 개척, '발명' , 게다가 맬서스적인 '생존 투쟁' 등의 요소로 이루어진 영국 사회를 동식물 사이에서 인 식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홉스가 이야기하는 'bellum omnium conftra omnes'(만인의, 만인에 대한 싸 움)입니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열렬한 다윈 숭배자였다. 그리고 일견 역설적으 로 보이는 이 사실 속에 문제를 푸는 열쇠가 있다. 이 장에서 다룬 모든 주제에 포함되는 여러 가지 이유-귀납주의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 창조성에는 다른 분야까지 포괄하는 폭넓은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 유 추는 통찰을 얻기 위한 깊은 원천이라는 것 -로 나는 위대한 사상가는 그의 사회적 배경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러나 어떤 사상의 원천은 그 사상의 올바름 또는 그로 인한 결실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발견의 심리와 발견의 유용성은 그야말로 전혀 별개의 문제 인 것이다. 다윈이 주장한 자연 선택의 개념은 경제학에서 도용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은 여전히 옳을 수 있다. 독일의 사회주의자 카우츠키는 1902년에 이렇게 쓰고 있다. "어떤 개념이 특정 계급에서 나오거나 그들의 이해 관계에 합치한다는 사실은 그 개 념이 올바르거나 그릇된지에 대해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여기서 아담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 체계가 그 자신의 영역인 경제학에서 유효 하지 않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아이러니컬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질서와 조화보다는 오히려 소수 독점과 혁명으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개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은 자연의 법칙인 것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들은 위대한 통찰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행운이라는 막연 한 현상으로 돌리기 위해 이렇게 주장한다. 즉 다윈이 부유한 집에 태 어난 것은 행운이며, 비글 호에 탑승하게 된 것도 행운이며, 당대의 여 러 가지 개념들 속에서 생활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고, 우연히 맬서 스 목사의 저서를 읽게 된 것도 행운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는 시기 적절하게 적재 적소에 절묘하게 들어맞았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물을 이해하려고 애쓴 개인적인 고투, 폭넓은 관심과 연구, 진화 메커니즘에 대한 탐구의 방향성 등 많은 문헌에 나타난 다윈의 모습을 읽으면서 우리는 왜 파스퇴르가 "준비된 사람에게는 운이 따른다"라는 유명한 경구를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6장 태어나기도 전에 죽는 진드기 어린 시절에 자주 묻던, 하늘은 왜 푸른가, 달은 왜 차고 이지러지는가, 풀은 왜 푸른빛을 띠는가 등의 순진 무구한 질문만큼 부모들을 당혹하 게 만들고 무능함을 절감하게 하는 일이 또 있을까? 부모는 그 답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당신들의 부모 세대에게 그리 신통한 대답 을 못 들었던 연유로 그런 질문에 대해 준비를 해본 적이 없었다. 따라서 그만큼 당황감도 큰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그런 질문들에 대답하기 어려워하는 까닭은 스스로가 그 문제들을-지극히 초보적이거나, 또는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매우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일견 분명한 것으로 생각되면서도 실제로는 잘못된 답을 주기 십상인 문제 가운데 우리들의 생물학적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인간, 그리고 우리와 친숙한 대부분의 생물 종에 서 왜 남자(수컷)와 여자(암컷)의 숫자가 거의 같은가 하는 문제이다 (사람의 경우, 태어날 때에는 남자 쪽이 여자 쪽보다 많지만 사망률이 다르기 때문에 그 후에는 여자 쪽이 조금 더 많아진다. 하지만 1:1비율은 크게 손 상되지 않는다). 얼핏 생각하기에 그 답은 라블레(Rabelais, 프랑스의 풍자 작가/옮긴이)가 풍자했듯이 "사람의 얼굴에 있는 코처럼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결국 유성 생식을 위해서는 상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숫자가 똑같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교배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이것은 다윈이 이야기하는 번식 능력 극대의 행복한 상황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따라서 우리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고, 앞에 소개했던 비유를 셰익스피어가 개작한 "사람 얼굴의 코처럼 알 수 없고 불가해하고 보이지 않는"이라는 말로 바꾸게 된다. 만약 어떤 동물에게 번식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가장 적합한 상태라면 수컷과 암컷의 숫자가 같을 필요가 있겠는가? 요컨대 우리들과 가까운 종을 예로 든다면, 난자의 크기는 언제나 정자보다 훨씬 크고 수가 적기 때문에 암컷이 낳는 자손의 수에는 한계가 있다. 즉 난자 하나는 자손 한 개체를 만들 수 있지만 정자는 그렇지 못하다. 또한 하나의 수컷은 여러 암컷을 임신시킬 수 있다. 그러면 1개체의 수컷이 9개체의 암컷과 교배할 수 있는데도 100개체로 이루어진 개체군에서 10개체의 수컷과 90개체의 암컷 비율로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일 이 비율로 암컷 수컷이 구성된다면 그 번식 능력은 암컷 수컷이 각각 50개체인 개체군보다 훨씬 뛰어날 것이다. 암컷이 많은 개체군은 번식률이 더 빨라져 수컷과 암컷의 숫자를 동일하게 유지하는 개체군과의 모든 진화적 경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그러므로 얼핏 생각하기에는 자명한 것으로 보이는 사실도 실제로는 확실한 것이 못 되며 여전히 다음과 같은 문제를 남기고 있다. 유성 생식을 하는 대부분 종의 암컷 수컷이 거의 같은 수를 이루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부분의 진화생물학자들에 따르면,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다윈의 자연 선택설이 생식의 성공을 추구하는 개체들 간-전체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의 투쟁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쉽게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자연 선택설은 개체군이나 종, 생태계 등의 이익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90개체의 암컷과 10개체의 수컷으로 이루어진 개체군 쪽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은 개체군 전체를 기준으로 볼 때 생겨난 것이다(그것은 대부분의 사람 들이 진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통념으로서 완전히 잘못된 관점이다. 진화가 개체군 전체의 이익을 위해 일어나는 것이라면, 유성 생식을 하는 종의 수 컷 수는 상대적으로 암컷보다 적어야만 할 것이다). 진화가 군 안에서 일어날 경우, 분명 암컷이 수컷보다 많으면 훨씬 유리할 텐데 실제로는 수컷과 암컷의 수가 똑같다. 이 사실은 자연 선택이 번식을 극대화시키려는 각 개체 간의 투쟁을 통해 작용한다고 본 다윈의 주장을 훌릉하게 입증해주는 것이다. 다윈의 주장은 영국의 뛰어난 수리생물학자인 R. A. 피셔에 의해 처음으로 그 골격이 잡혔다. 피셔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가령 어느 한쪽의 성이 우세해지기 시작했 다고 가정하자. 예를 들어 수컷이 암컷보다 적게 태어났다고 하자. 그 러면 수컷은 수가 적어지는 만큼 교배할 기회가 늘어난다. 따라서 암컷 이 낳는 자손보다 많은 자손을 남길 기회를 갖게 된다. 즉 평균 한 마리 이상의 암컷을 임신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유전 인자가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수컷의 상대적 비율에 영향을 준다면(실제 이러한 인자가 존재한다), 수컷을 낳는 유전적 경향을 가진 부모는 다윈적인 유리함을 획득하는 셈이 된다. 즉 자손에게는 수컷 쪽이 많을 때 높은 번식상의 성공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2대 자손으로 오면 평균 숫자 이상이 번식하게 된다. 그 때문에 수컷의 번식을 선호하는 유전자가 확산되어 수컷의 출생이 많아진다. 그러나 이러한 수컷의 유리함은 수컷 출생이 불어나면서 점차 저하되다가 이윽고 수컷과 암컷이 서로 동수가 될 때 완전히 사라진다. 이것은 암컷의 수가 적을 때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성 비율은 다윈적인 과정에 의해서 '1:1'이라는 평형치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물학자는 피셔의 성 비율 이론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을 까? 공교롭게도 이 이론을 예측할 수 있게 해주는 종들은 최초의 관찰 이상의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일단 기본적인 주장의 골격을 세운 다 음, 자기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종의 자웅 숫자가 서로 동일한지의 여 부를 확인했다고 하자. 그 후 서로 다른 수천 종이 같은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우리들이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이 성 비율이 모두 생물 종에 적합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하나의 새로운 종이 늘어날 때마다 우리가 같은 정도의 확신을 얻는 것은 아니다. 암컷과 수컷의 성 비율이 성립하는 것은 다른 요인에 의한 것은 아닐까? 피셔의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예외를 찾을 필요가 있다. 다시 말 해 그가 내세운 이론의 전제가 성립하지 않을 수 있는 흔하지 않은 상 황-성 비율이 어떻게 1:1에서 벗어나는가를 구체적으로 예견할 수 있 는-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만약 전제의 변화가 결과의 변화 에 대한 명확하고 성공적인 예견으로 이어진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우 리들의 확신을 강력히 뒷받침할 수 있는 독립된 검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방법은 "예외는 법칙을 시험한다"는 오래된 격언을 구현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이 격언이 'prove'(입증한다)라는 말의 비일상적인 의미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그 의의를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prove'는 'probare'(조사한다, 또는 시도한다는 의미)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오늘날 이 단어가 갖는 일반적 의미는 '최종적이고 설득력 있는 입증'을 나타내지만, 앞에 든 격언은 예외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유효성을 발휘한다는 의미를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단어의 어원에 좀더 가까운 다른 의미로 'prove'('proving ground'(시험장I이나 인쇄소의 'proof (교정쇄))는 같은 어원에서 유래한 probe'(정밀조사, 탐사)에 더 가깝다. 예외란 변화된 상황 속에서 나타난 결과를 조사하고 검사함으로써 그 법칙을 탐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연계의 풍부한 다양성이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야생 조 류 관찰자들은 붉은관모토히새(towhee, 멧새과의 일종/옮긴이), 의족을 한 것 같은 토히새, 등에 반점이 있는 토히새, 위아래 부리가 서로 어긋 나 있는 솔잣새, 사팔뜨기 토히새 등을 관찰,기록해나가지만 이러한 새의 이미지는 부당한 비웃음거리가 되거나, 박물학자들이 실제로 생물 의 다양성을 다룰 때에 그 본질을 잘못 보게 하는 수가 있다. 우리들이 자연사의 과학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연계의 풍부함 덕택이었다. 그 다양성으로 인해 모든 규칙을 찾아내는 과정에는 적절한 예외들이 발견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이함이나 괴이함은 보편성을 다시 한 번 검증해주는 것이지, 단지 경외심이나 한바탕 웃음으 로 넘기거나 기술하고 지나갈 만한 것이 아니다. 다행히도 자연은 피셔의 주장에 위배되는 사례들을 거의 낭비에 가까 울 만큼 풍부하게 제공해준다. 1967년에 영국의 생물학자 W. D. 해밀 턴(현재 미시건 대학에 재직)은 그와 같은 사례와 논의를 정리하여 '이상 한 성비'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쓴 적이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이러 한 위배 사례 가운데 가장 명백하고 중요한 하나를 예로 들어 논하고자 한다. 간혹 자연이 우리 인간의 훈계를 따르는 경우가 있다. 예로부터 형제 자매 간의 성관계는 피해야 할 금기로 알려져왔다.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열성 유전자가 이중으로 발현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이러한 열성 유전자들은 줄어드는 경향이 있고, 혈연 관계가 없는 두 사람의 부모 가 그 유전자를 모두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 적다. 그러나 두 사람의 형제 자매가 같은 유전자를 가질 확률은 보통 50퍼센트이다). 그러나 일부 동물들은 이러한 규칙을 따르지 않으며 형제와 자매 사이-아마 유일하게 형제 자매 사이의 교배만 할 것이다-에 교배를 하고 있다. 형제 자매 사이의 교배가 상습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은 1:1의 성 비율 을 문제 삼는 피셔 주장의 대전제를 뿌리째 뒤엎는 것이다. 만약 암컷 들이 항상 자기 형제에 의해 수정된다면, 다음 세대에 교배를 하는 두 배우자는 같은 양친에게서 태어나게 된다. 피셔는 수컷들이 암컷과는 다른 부모를 가진다고 가정하고, 그런 가정하에서 수컷의 공급 부족은 수컷을 우선적으로 낳을 수 있는 부모에게 유전적인 우월성을 줄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러나 만약 같은 양친이 그 손자의 어미와 아비를 모두 낳는다면, 이들이 낳게 되는 새끼들의 수컷과 암컷의 비율과 관계없이 모든 손자들에게 동일한 유전적 특성을 주게 된다. 이렇게 되면 수 컷과 암컷이 같은 수를 유지해야 할 이유가 없어지며, 따라서 암컷이 우세하게 된다는 이전의 주장이 다시 제기된다. 만약 조부모가 손자에게 전달해줄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이 한정돼 있다면, 그리고 더 많은 손자들을 낳는 조부모들이 다윈적 의미에서 더 유리한 지위를 차지한다면 조부모들은 될 수 있는 한 많은 딸을 낳고 아들의 경우에는 모든 딸 에게 확실히 수정을 시킬 수 있을 만큼만 낳을 것이다. 즉 만약 아들에 게 충분한 성적 능력만 있다면, 그 양친은 아들을 한 개체만 낳고 나머 지 에너지를 될 수 있는 한 많은 딸들을 낳는 데 쏟을 것이다. 항상 그렇듯이 아낌없이 베푸는 풍부한 자연은 피셔의 법칙을 엄밀히 검증할 수 있도록 무수히 많은 예외를 제공함으로써 우리를 도와준다. 실제로 형제 자매 사이에 교배를 하는 종은 가장 적은 숫자의 수컷을 낳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E. A. 올버드리와 M. S. F. 토피크가 1966년에 기술한 아다크티리디움속Adactylidium 진드기 수컷의 기묘한 일생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 진드기는 어미 몸에서 나온 뒤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죽어버리기 때문에 얼핏 보기에는 그 짧은 생애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모체 밖에 있는 동안 그 수컷은 먹이를 먹거나 교미도 하지 않는다. 성체로 짧은 기간을 살아가는 동물들은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하루살이는 긴 유생 기간을 끝낸 후 겨우 하루밖에 살지 못한다. 그래도 하루살이는 이 귀중한 몇 시간 동안 교미를 해서 자신의 종족이 계속 유지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아다크티리디움의 수컷은 전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단지 태어나서 죽는 것처럼 보인다. 불가사의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생활 주기 전체를 조사하여 모 체의 체내까지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다크티리디움의 임신한 암컷은 털날개라는 곤충의 알에 기생한다. 이 하나의 알이 아다크티리 디움 암컷이 모든 새끼들을 키우는 유일한 영양원이 된다. 이 암컷은 죽을 때까지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먹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알 려진 바로는 이 진드기는 오직 형제 자매 사이의 교배만을 한다. 그러 므로 최소의 수컷을 낳을 것이다. 게다가 생식에 필요한 모든 에너지원이 단 하나의 털날개 알에 한정돼 있기 때문에 새끼 수도 한정돼 있으며, 새끼들 중에 암컷이 많을수록 유리하다. 실제로 이 진드기는 5마리 내지 8마리의 자매들과, 그녀들의 형제이자 남편인 단 한 마리의 수컷으로 이루어지는 한배 새끼들을 키운다. 그러나 오직 한 마리의 수컷만을 낳는다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다. 만약 공교롭게도 그 한 마리의 수컷이 죽기라도 한다면 자매들은 모두 처녀로 늙게 되고, 그 모친의 진화적 생애는끝날테니까 말이다. 만약 이 진드기가 단 한 마리의 수컷만을 낳아서 생식력 있는 암컷들 로 이루어지는 한배 새끼들의 수를 극대화시킬 수 있었다면, 두 가지 적응 현상이-수컷을 보호함과 동시에 그 자매들이 가까이 있도록 만 드는 것-위험성을 줄일 수도 있다. 어미 몸 속에서 유충으로부터 성충 이 될 때까지 양육한 다음 그 모체라는 튼튼한 껍질벽 내에서 서로 교 미시키는 방식으로 새끼들 모두를 완전히 모체 내에서 길러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 실제로 어미 진드기가 털날개의 알에 달라붙은지 약 48시간이 지나면 6개 내지 9개의 알이 이 어미 진드기의 체내에서 부화된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유충들은 어미의 몸을 먹는다. 문자그대로 모체를 몸 안쪽에서부터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것이다. 이틀후 새끼 진드기는 성체가 되고, 한 마리의 수컷이 나머지 자매들과 교미를 한다. 이 무렵 모체의 체내 조직은 산산조각이 나고, 비어 있는 곳은 진드기의 성충들, 그 배설물, 그들이 탈피한 유충기와 번데기 시기의 껍질로 가득 찬다. 이 새끼들은 이윽고 모체의 벽에 구멍을 뚫고 밖으로 빠져 나오게 된다. 그 중에서 암컷들은 다시 털날개의 알을 찾아 동일한 과정을 시작해야 하지만 수컷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진화적인 역할을 끝낸 상태다. 수컷은 모체에서 나와 바깥 세계의 아름다움을 접하자마자 곧 죽는다. 그런데 그 과정을 한 단계 더 모체 내에서 계속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수컷이 모체 밖으로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매들과 교미를 끝내면 수컷의 임무는 끝난 것이다. 말 그대로 시므온의 '찬송의 노래'('Nunc Dimittis, 시므온의 노래. 누가복음 2:29-32/옮긴이)의-"오 주여! 이제 약속하신 대로 이 종을 놓아주셔서 내가 평안히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진드기판을 불러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 다채 다양한 생명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은 어느 것이라도 적어도 한 번쯤은 일어날 수 있다. 아다크티리디움과 가까운 친척뻘인 진드기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아카로페낙스 트리볼리Acarophenax tribolii라는 이름의 이 종은 오직 형제 자매 사이의 교배만을 한다. 단 한 개체의 수컷을 포함 해 15개의 알이 모체 속에서 발육한다. 그 수컷은 어미 진드기의 껍질 속에서 부화한 다음 모든 자매와 교미하고, 그 후 모체 밖으로 태어나 기 전에 죽어간다. 이 진드기의 생애는 그다지 재미가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카로페낙스 수컷은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서야 자식을 낳아서 성취한 것과 동일한 일을 자신의 진화적 연속성을 위해 해낸 것이다. 자연계의 기묘함은 훌륭한 소설을 능가한다. 그것은 생명의 역사와 그 의미에 관한 흥미로운 이론들의 한계점들을 탐색하기 위한 좋은 소재인 것이다. 제7장 라마르크의 미묘한 색조 유감스럽게도 이 세상이 개인의 기대에 따라 바뀌는 일이란 좀처럼 없 다. 세상이란 사리에 맞게 움직이는 법이 절대 없다. 구약성서 시편의 저자가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편 37편 25절/옮긴이)라고 썼을 때, 그는 세상을 올바르게 꿰뚫어 보지 못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성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비합리적인 횡포가 과학의 진보를 막는 일도 있다. 아인슈타인 이전에 과연 어느 누가, 어떤 물체의 질량과 나이 먹음aging이 빛과 같은 속도에 영향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믿었겠는가? 생명계가 진화의 산물이라면, 왜 그것이 가장 단순하고 직접적인 방 법으로 시작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가? 생물체가 자기 자신의 노 력으로 스스로를 개량하여 그 진보한 성질을 유전자 변화라는 형태로 자손에게 전한다고-전문 용어로는 오래 전부터 '획득형질의 유전'이 라고 불리고 있다-주장해서 안 되는 까닭은 또 무엇인가? 이러한 사고방식이 우리들의 상식에 호소하는 것은 그 단순성 때문만은 아니다. 필경 그 이상으로, 진화는 생물 자체가 열심히 노력해 진행되었고 본질적으로 앞으로 나아간다는 즐거운 함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들은 모두 언젠가는 죽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 났으며, 이 유한한 우주의 중심부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니만큼 '획득 형질의 유전'은 자연이 거부하는 또 하나의 인간 희망을 나타내는 것이 기도 하다. 획득형질의 유전은 흔히 라마르크주의라는 짧은 명칭으로-역사적으 로는 정확하지 않지만-알려져 있다. 프랑스의 위대한 생물학자였고 초기 진화론자였던 장 밥티스트 라마르크(1744-1829년)는 획득형질의 유전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획득형질 유전이 라마르크가 주장하는 진 화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그가 그 이론을 창시하지 않은 것도 확실하다. 라마르크 이전에 있었던 이 사고 방식의 계보를 더듬기 위해 지금까지 수백 권에 달하는 책이 저술되었다. 라마르크는 생명이란 지극히 단순한 형태 속에서 연속적으로, 그리고 자연 발생적으로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후 생명계는 '그 조직 체계를 끊임없이 복잡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어떠한 힘'에 의해 복잡성의 사다리를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 힘은 '절실한 요구'에 부응하는 생물의 창조적 반응을 통해 작용한다. 그러나 생명계는 단 하나의 사다리로 조직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위로 올라가는 길도 국지적 환경의 여러 가지 요구에 의해 그 진로를 바꾸는 경우가 흔히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린은 긴 목을 획득하고, 섭금류(조류를 생활 형태로 분류한 한 무리. 다리, 목, 부리가 모두 길어서 얕은 물 속을 걸어다니며 물고기 ·곤충 등을 잡아먹음/옮긴이)에 속하는 새는 물갈퀴가 달린 발을 획득한다. 한편 두더지나 동굴에 사는 물고기는 점차 시력을 잃어간다. '획득형질의 유전'은 이러한 도식 속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다하지만 중심적 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부모의 노력이 자손에게 이익을 제공해주는 메커니즘이기는 하지만, 사다리를 오르도록 진화를 추진하 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말엽에는 수많은 진화론자들이 다윈의 자연 선택설을 대체할 대안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라마르크를 다시 읽은 다음 라마르크 자신 의 의도와는 달리 그 핵심-발생이 연속한다는 것과, 복잡화를 일으키 는 여러 가지 힘이 있다는 것-은 모두 빼버리고 그 역학의 한 단면- 획득형질의 유전-만을 강조했다. 게다가 이들 자칭 '신라마르크주의자'들은, 진화라는 절실한 요구가 생물 자체가 능동적이고 또한 창조적으로 반응한 결과라고 한 라마르크의 근본 이념을 저버렸다. 그들은 '획득형질의 유전'이라는 개념을 계속 유지하기는 했지만, 획득이란 개념을 압도적인 자연 환경이 수동적인 생물에게 직접 부과하는 무엇으로 보았다. 나는 오늘날 하나의 용어로 통용되고 있는 라마르크주의를 "생물은 환경 적응에 필요한 여러 가지 형질을 획득함으로써, 또 그것들을 변화 된 유전 정보의 형태로 자손에게 전달함으로써 진화한다는 관점"이라고 정의하기로 하겠다. 그러나 나는 이 이름이 150년 전에 죽은 대단히 뛰 어난 학자를 칭송하는 데는 극히 빈약하기 짝이 없는 것임을 일러두고 싶다. 미묘함이나 풍부함은 이 세계에서 너무도 자주 폄하된다. 가령 불쌍한 '마시멜로'를 예로 들어보자. 사실 마시멜로는 식물의 이름이다. 과거에는 이 식물의 뿌리로 맛있는 캔디를 만들었지만, 오늘날 마시멜로는 녹말, 시럽, 설탕, 젤라틴으로 만들어진다. 이제는 처량한 대용품의 이름이 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라마르크주의는 금세기 들어서도 가장 잘 알려진 진 화 이론이라는 지위를 계속 유지해왔다. 다윈은 사실로 나타난 진화 현 상을 연구하는 데는 혁혁한 공헌을 세웠다. 그러나 그 메커니즘을 밝히 는 그의 이론, 즉 자연 선택설은 자연사의 전통과 멘델의 유전학이 1930년대에 하나로 융합될 때까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게다가 다윈 자신도 라마르크주의를 진화 메커니즘으로서의 자연 선택을 위해서는 부차적인 것으로 보았지만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하버드 대학의 고생물학자인-어쩌면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바로 이 책상에서 그 글을 썼을 것으로 생각되는-퍼시 레이먼드는 1930년대에 이르러서도 자신의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마도 대개의 사람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라마르크주의자일 것이다. 엄격한 비판자의 관점에서 보면 많은 사람이 라마르크보다 더한 라마르크주의자로 비칠지도 모른다." 또한 최근까지도 많은 사회과학 이론들-거기에 우리들이 흔히 가정하기 쉬운 다윈주의의 틀을 들씌우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개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마르크주의의 영향이 거기에까지 미 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개혁자들이 빈곤, 알코올 중독, 범죄 등의 '타락'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대개 그들은 그런 문제들을 문자 그대로 생각하고 있다 아버지의 죄는 확실히 유전되어 3대 이상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식으로 말이다. 1930년대, 소련 농업이 겪고 있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리센코가 라마르크주의적인 구제책을 주창했을 때 그는 19세기 초의 어리석은 짓을 재현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되살려내려 했던 것은 급속히 광채를 잃고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존중해야 할 이론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정보 한 토막이 그와 정치적인 주도권을 유지시켜주거나, 그가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사용한 방법들을 덜 생경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주장에 들어 있는 불가사의함을 조금쯤 덜어주었을 것이다. 리센코와 소련의 멘델주의자들 사이에 있었던 논쟁은 처음부터 합당한 과학적 논쟁이었다. 훗날 그는 속임수, 기만, 조작, 살인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자신의 지위를 고수하려고 몸부림쳤다. 그리고 그것은 비극이었다. 다윈의 자연 선택설은 라마르크주의보다 훨씬 복잡하다. 그것은 하나 의 힘이 아닌 두 개의 서로 다른 과정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두 이론은 모두 적응의 개념-생물은 새로운 조건에 가장 적합한 형태나 기능, 행 동을 진화시켜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 조건에 대해 반응한다고 하는 관점-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두 가지 이론 모두 환경에 대한 정보가 생물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안 된다. 라마르크주의의 경우에는 이러한 정보 전달이 더 직접적이다. 생물은 환경의 변화를 감지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응답하여, 그 적절한 반응을 자손에게 직접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다윈주의는 변이와 방향성의 원인이 되는 각각의 다른 힘 을 가지며 2단계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다윈주의자들은 첫 단계에 일어 나는 유전적 변이를 '임의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임의적'이 라는 단어는 "모든 방향이 동일하게 같다"는 수학적 의미로 쓰이는 것 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변이가 특정한 적응적 방향성 없이 일어난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데 쓰일 뿐이다. 예를 들어 기온이 낮아질 때, 다른 개체에 비해 털이 많이 난 개체가 그만큼 더 유리할 수 있는데, 그렇더라도 털이 많이 나는 유전적 변이가 높은 빈도로 일어나는 것은 아닌 것이다. 2단계 선택은 무방향성unoriented 변이에 작용하여 유리한 변이체에 그만큼 큰 번식상의 성 공을 주면서 하나의 개체군을 변화시킨다. 이것이 바로 라마르크주의와 다윈주의 사이의 본질적 차이이다. 기본 적으로 라마르크주의는 방향성이 있는 변이 이론이다. 만약 털이 많은 것이 유리하다면, 동물은 그 필요성을 인식하여 그것을 발전시키고 나 아가 그 잠재성을 후손에게 물려준다. 따라서 변이는 적응을 향해 방향 성을 갖게 되고, 자연 선택이라는 제2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라마르크주의에 나타난 방향성 있는 변이의 본질적 역할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흔히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환경이 유전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돌연 변이를 일으키는 화학적이 고 방사성을 띤 물질이 돌연 변이율을 높이고 어떤 개체군이 갖는 유전 적 변이의 풀pool을 확대시키는 식으로-라마르크주의는 옳은 것이 아 닐까? 이 메커니즘은 많은 변이를 일으킬지언정 변이를 유리한 쪽으로 추진하지는 않는다. 라마르크주의는 유전적 변이가 적응적인 방향으로 선택적으로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영국의 대표적 의학 잡지인 '랜싯Lancet'지의 1979년 6월 2일호에는 파울 E. M. 파인 박사의 글이 게재되었다. 그곳에서 박사는 획득은 되 더라도 방향성 없는 유전적 변이를 유전시키는 여러 가지 생물학적 경 로를 검토하여 소위 '라마르크주의'를 지지하는 주장을 제기했다. 본질적으로 벌거벗은naked DNA의 작은 덩어리인 바이러스는 박테리아의 유전 물질에 자신을 삽입시켜, 그 박테리아 염색체의 일부를 통해 그 자손에게 전달되는 경우가 있다. 또한 '역전사 효소reverse transcriptase'라 불리는 효소는 세포질의 RNA에서 '역방향으로' 세포핵의 DNA로 정보 읽기를 중재할 수 있다. 핵 DNA에서 시작하여 매개자 RNA를 거쳐 신체를 형성하는 단백질로 이동한다는, 거스를 수 없는 유일한 정보 흐름이 있다고 본 과거의 개념이 항상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왓슨 자신은 'DNA가 단백질을 만드는 RNA를 만든다'는 사실이 분자생물학상의 '중심적인 도그마'라고 절대시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파인은 박테리아 속으로 들어간 바이러스는 자손에게 전달되는 '획득형질'이기 때문에 일부 경우에는 라마르크주의가 옳을 때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파인은 하나의 형질이 적응하기 위해 획득된다는 라마르크주의의 요구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라마르크주의는 방향성을 갖 는 변이에 대한 이론이기 때문에). 이러한 생화학적 메커니즘 가운데 일부가 생존에 유리한 유전 정보로 통합되어 들어간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어쩌면 그것이 가능할 수도, 실제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흥미 진진한 새로운 전개이고, 진정한 라마르크주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환경 조건이나 획득된 적응이 성 세포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끈다는 믿음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는 멘델적 이론이나 DNA에 대한 생화학 연구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차가워진 날씨 가 정자나 난자의 염색체에 털이 길어지는 돌연 변이를 일으키라고 '명 령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핏 로즈는 그의 배우자에게 어떻게 정기를 전달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면 정말 멋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매우 간단할 것이다. 그것은 다윈적인 과정이 허용하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진화를 전진시킬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한 그것은 자연계의 방법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마르크주의는 적어도 인기 있는 공상 속에서는 계속 살아 남아 있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그 이유를 물어야 한다. 특 히 아서 커스틀러는 여러 권의 저서에서 전력을 다해 그 견해를 옹호하 고 있다. 그 중에서 '산파개구리(남유럽에 서식하는 무당개구리과의 총칭 /옮긴이)의 수수께끼'라는 책은 오스트리아의 라마르크주의 생물학자 폴 캐머러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데 책 한 권을 모두 할애한다. 폴 캐머러는 자신에게 커다란 영광을 안겨다준 개구리 표본이 실은 먹물을 주입 한 속임수였다는 사실이 발각되자 1926년에 자살하였다(그가 자살한 주 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커스틀러는 평소 비정하고 기계론적인 이론 이라고 생각하던 다윈주의의 정통성을 공격하기 위해 적어도 '미니 라 마르크주의mini-Lamarckianism'라는 것을 수립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라마르크주의가 두 가지 중요한 이유로 지속적인 호소력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첫째, 몇 가지 진화 현상이 일견 라마르크적 해석을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대개 라마르크주의가 갖는 호소력은 다윈주 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그 실례로서 많은 유전적 적응보다 유전 적 기반이 없는 행동상의 변화가 먼저 일어난다는 주장이 자주, 그리고 올바로 제기되는 것을 들 수 있다. 과거나 지금이나 박새과 새의 몇 종은 영국식 우유병 뚜껑을 비틀어 열어 그 속에 들어 있는 크림을 마시는 법을 배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새의 주둥이가 이 좀도둑질을 좀더 쉽게 할 수 있도록 형태상 진화한다고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우유를 종이 상자에 넣거나 가정 배달이 중지되는 일 등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 진화는 필경 맹아 상태에서 시들어버리고 말 것이다). 행동상의 능동적이고 비유전적인 혁신이 진화를 위한 기초를 다진다는 점에서 이것은 라마르크적인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다윈주의는 환경을 정련하는 뜨거운 불이라 보고 생물을 그 불 앞에서 단련되는 수동적 존재로 간주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다윈주의는 환경 결정론과 같은 기계론적인 주장이 아니다. 다윈주의는 생물을 환경에 의해 타격받는 당구공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 지 않는다. 이처럼 행동에 나타나는 혁신의 예는 완전히 다윈적인 것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창조자로서의 능동적 인 생물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우리들은 라마르크를 칭송한다. 우유병을 습격하는 방법을 기억한 박새는 그들 자신의 환경을 변화시킴으 로써 새로운 선택적 압력을 수립한 것이다. 이제 조금 다른 모양을 갖 게 된 부리는 자연 선택 원리에 의해 좀더 유리한 입장에 놓일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환경이 박새를 자극하여 유리한 형태를 향한 유전적 변 이를 일으키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리고 이 측면만이 라마르 크주의이다. '볼드윈 효과Baldwin effect' '유전적 동화'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또 하나의 현상은 그 성격으로 보아 더 라마르크적 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현상은 마찬가지로 다윈적인 관점에도 부 합한다. 그러면 고전적인 예를 들어보자. 예를 들어 타조는 다리에 경결(못과 같은 단단한 피부/옮긴이)이 있어 그 부분을 지면에 대고 무릎을 꿇듯이 앉는다. 그런데 그 경결은 실제로 사용되기 이전에 이미 알 속에서 발달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라마르크의 시나리오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 매끈한 다리를 가졌던 선조가 무릎을 꿇어앉기 시작했고, 비유전적 적응으로 경결을 획득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것은 사람들이 직업 때문에 손가락에 못이 박히거나(글을 많이 쓰는 작가들의 정우) 발뒤축에 두꺼운 각질이 생기는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그 후 경결은 사용하기도 전에 미리 발달하는 유전적 적응으로서 자손에게 전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전적 동화'에 대한 다윈적인 설명은 커스틀러가 좋아하는 예인 폴 캐머러의 산파개구리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캐머러는 그 사실을 모른 채 다윈적인 실험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육생 개구리는 앞발의 첫째 발가락에 깔쭉깔쭉한 돌출부- '교미 발판'이라 고도 불린다-를 가지고 물에서 살던 선조의 후손이다. 물에 사는 개구리 수컷은 미끄러운 조건에서 암컷과 교미할 때 암컷을 꽉 붙들기 위해 이 발판을 이용한다. 그러나 단단한 지면 위에서 교미하는 산파개구리는 이 돌출부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가끔 흔적의 형태로 이 돌출부가 남아 있는 예외적인 개체가 있는데, 이것을 보면 이 돌출부를 만들어내는 유전적인 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 것 같다. 캐머러는 육생종 산파개구리들을 물 속에 넣어 길렀다. 그리고 생존 에 부적합한 환경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소수의 알에서 다음 세대 를 번식시켰다. 이 과정을 수 세대에 걸쳐 반복한 결과 그는 교미 발판 을 가진 수컷 개구리를 얻어낼 수 있었다(나중에는 효과를 높이기 위해 개구리에 먹물을 주사했다. 그러나 그것은 캐머러 자신이 저지른 일은 아닌 것 같다). 따라서 캐머러는 자신이 라마르크적인 효과를 실증할 수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즉 그가 산파개구리를 선조의 환경으로 되돌려놓았고, 그 개구리는 선조의 적응을 다시 획득해 그것을 유전적 형태로 자손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캐머러가 한 것은 다윈적인 실험이었다. 그가 그 개구리 들을 물 속에서 번식하게 했을 때 극히 소수의 알만이 살아 남았다. 요 컨대 물 속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데 도움이 되는 모든 유전적 변이에 강한 선택적 압력이 작용한 것이다. 더구나 그는 수 세대에 걸쳐 이 압 력을 강화시켰다. 캐머러의 선택은 수중 생활에 유리한 유전자를 한데 모은 것이며, 이것은 제1세대 개구리의 부모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던 조합이었다. 교미 발판은 일종의 수중 생활에 대한 적응이기 때문에, 그것이 나타난다는 것은 물 속에서 살아 남을 수 있게 해주는 유전자 집합과-캐머러의 다윈적 선택에 의해 빈도가 높아진-관련이 있는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타조의 경우에도 처음에는 비유전적 적응으로 경결이 발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땅에 무릎을 꿇고 앉는 습성 그 자체가 이러한 경결에 의해 강화되면서, 이러한 특성들을 유전자 속에 암호로 기록하여 임의적인 유전적 변이를 보존하게 하는 새로운 선택적 압력으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경결 자체가 획득형질의 유전을 통해 성체에서부터 새끼에게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전달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두 번째, 내가 라마르크주의가 아직도 매력을 잃지 않은 더욱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 관점이 우리 삶에 본질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 우주와 직면할 때 우리에게 얼마간의 안락함(위안감)을 주기 때문이다. 라마르크주의는 인간이 갖는 편견 가운데서도 가장 뿌리 깊 은 두 가지-즉 노력은 항상 보답을 받아야 한다는 우리들의 신념과 이 세계란 본질적으로 목표를 가지며 끊임없이 발전한다는 우리들의 희 망-를 강화시킨다. 그 관점이 커스틀러와 같은 휴머니스트들에게 호소력을 갖는 실제 이유는 유전성에 관한 학문적 논의이기보다 오히려 이러한 위안감 때문이다. 그에 비해 다윈주의는 이러한 위안감을 주지 않는다. 다윈주의는, 생물이란 제각기 번식상의 성공을 목표로 싸우는 과정에서 국지적인 환경에 적응해간다고 주장할 뿐이기 때문이다. 다윈주의에 따르면 우리는 라마르크주의와는 다른 무엇에서 의미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미술, 음악, 문학, 윤리학, 개인의 투쟁, 그리고 커스틀러식 휴머니즘 등이 그런 것이 아닐까? 그 답이-설령 그 답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개인적인 것이라 하더라도-우리들 자신 속에 있는데도 왜 자연에 대해 요구를 하고, 자연의 운행 방식을 거기에 맞추어 좁게 한정하려 하는 것일까? 따라서 현재 우리의 판단에 기초한다면 라마르크주의는 지금까지 그 것이 위치해온 영역에서는-즉 유전적인 전달에 대한 생물학적 이론으 로서는-잘못된 이론이다. 그러나 순전히 비유적인 의미에서만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또 하나의 '진화'-인류의 문화적 인 진화-를 가져오는 '유전'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호모 사피엔스는 적어도 5만 년 이상 전에 나타났으며, 그 후 어떠한 유전적 진전이 있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나는 평균적인 크로마뇽 인이 적절한 훈련을 받기만 하면 우리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전문가와 같은 정도로 컴퓨터를 조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실제로 크로마뇽 인들은 우리 현대 인보다 조금 큰 뇌를 가졌다). 지금까지 우리 인류가 성취해온 것은 모두 문화적인 진화의 결과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지금까지의 생명 역사에 적용되는 척도로는 잴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그것을 달성해왔다. 지질학자들은 지구의 장구한 역사라는 맥락에서 수백 년이나 수천 년과 같은 규모의 시간을 다를 수 없다. 그렇지만 이 마이크로초(100만 분의 1초/옮긴이)에 해당하는 짧은 시간 동안 우리들은 어떤 일관된 생물학적 발명의-자의식이라 불리는-영향으로 지구의 표면을 바꾸어왔다. 도끼를 든 10만 명의 사람에서 폭탄, 우주선, 도시, 텔레비전, 컴퓨터 등을 가진 40억 이상의 인류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과정이 본질적인 유전적 변화 없이 이루어진 것이다. 문화적인 진화는 다윈적인 과정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다윈적인 진화는 호모 사피엔스 속에서도 계속되지만, 그 속 도가 너무 느려서 우리들의 역사에 더 이상 큰 영향을 주지 못하게 되 었다. 지구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을 이루는 한 점이 달성된 것은 마침내 라마르크적인 과정이 그 역사에 작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류의 문화적 진화는 그 본질에서 우리들의 생물학적 역사와는 전혀 다르며 오히려 라마르크적이다. 우리들이 한 세대 동안에 배운 것은 교육이나 집필에 의해 다음 세대에 관한 한 획득형질이 계승되는 것이다. 라마르크적인 진화는 신속함과 축적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라마르크적인 진화는 우리 과거의 순수한 생물학적 변화 양식과, 현대 우리들이 새롭고 해방적인-또는 그것이 지옥의 나락일지도 모르지만-무엇을 향해 미친 듯이 돌진해가는 양식사이에 근본 적인 차이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제8장 이타적인 집단과 이기적인 유전자 물질 세계는 상자 속에 또 다른 상자가 들어 있는 구조. 계속 그 수준이 높아지는 여러 층의 계층 구조로 배열될 수 있다. 원자에서 출발하여 원자로 이루어진 분자로, 분자로 구성된 결정으로, 광물로, 암석으로, 지구로, 태양계로, 무수한 항성들로 이루어진 은하로, 그리고 무수한 은하들로 이루어진 우주로... 이러한 여러 가지 수준에는 또한 여러 가지 힘이 작용한다. 돌은 중력 때문에 낙하하지만 원자나 분자 수준에서 중력은 아주 미약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계산에서는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생명 역시 여러 가지 수준에서 작동한다. 또한 진화 과정에서 그 각 각의 수준은 독자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면 이 장에서는 유전자, 생물 개체, 그리고 종이라는 세 가지 주요 수준에 대해 생각해보자. 유전자 는 생물 개체를 생성하는 청사진이고, 개체는 종이라는 건축물을 구 축하는 기본적인 벽돌이다. 진화는 돌연 변이를 필요로 한다. 자연 선택은 무수히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과정 없이는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돌연 변이의 궁극적인 근원이자 변이를 일으키는 단위는 유전자이다. 그러나 진화하는 것은 개체가 아니다. 개체는 단지 성장하고 번식하고 죽을 뿐이다. 진화적인 변화는 상호 작용하는 생물 개체의 집단 속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진화를 일으키는 단위는 종이다. 즉 철학자 데이비드 헐이 썼듯이, 유전자가 변화하여 개체가 선택되고 그로 인해 종이 진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통적인 다윈주의의 관점이다. 개체를 선택의 단위로 보는 것은 다윈 사상의 중심 주제이다. 다윈은 자연계의 정묘한 균형이 '그보다 높은 곳'에 기인하는 것이 아님을 강 조했다. 또한 진화는 '생태계의 이익'이나 '종의 이익'조차도 인식하지 않는다. 조화나 안정성이란 무수한 개체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현대적인 어법으로 말하면, 좀더 큰 번식상의 성 공을 거두면서 자신의 유전자를 미래 세대에게 전해주는 과정에서-나 타나는 간접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선택의 단위는 바로 개체이고, '생존을 위한 투쟁'은 개체 간에 일어나는 문제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지난 15년 동안 개체에 초점을 맞추는 다윈의 관점에 대해 진 화학자들 사이에서 의문이 제기되고 활발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도전은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위로부터는, 15년 전에 스코틀 랜드의 생물학자인 V. C. 윈 에드워즈가 최소한 사회 행동의 진화에서 는 집단이-개체가 아니라-선택의 단위라고 주장하여 정통파 학자들 에게 싸움을 걸었다. 밑으로부터는, 최근에 영국의 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선택적 단위는 유전자 자체이고, 개체는 단지 (유전자를 보관하는) 일시적인 용기receptacles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해 나를 격분시켰다. 윈 에드워즈는 '사회 행동과 관련한 동물의 분산'이라는 대작에서 '집단 선택' 을 지지 옹호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한 가지 딜레마에서 자신의 논의를 시작했다. 만약 개체가 오직 생식상의 성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만 투쟁하는 것이라면, 그토록 많은 숫자의 종들이 활용할 수 있는 자원에 맞춰 그 개체 수를 조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해 전통적인 다윈주의적 입장은 먹이, 기후, 포식이라는 외부 압력에서 대답을 구한다. 즉 일정 숫자의 개체가 먹이를 얻게 되면 다른 개체들은 굶주리기(또는 얼어 죽고, 또는 먹히기) 때문에 개체 수가 자연스럽게 조정된다는 것이다. 반면 윈 에드워즈는 동물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의 제약을 측정하고 그 제약에 맞춰 스스로 번식을 조절함으로써 자기들의 개체 수에 균형을 잡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사고 방식이 다윈이 주장한 '개체 선택'에 위배된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다수의 개체가 그들 집단 전체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의 생식을 포기하거나 제약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윈 에드워즈는 대부분의 종이 다소간 다수의 별개 집단으로 분리돼 있다고 가정했다. 일부 집단은 자신들의 번식을 조절하는 방법을 전혀 진화시키지 않았다. 이러한 집단에서는 개체 선택이 최고의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 그 집단은 조건이 바람직한 시기에는 개체 수를 늘려 번 성하지만 불리한 시기에는 스스로를 조절할 수 없어 심각한 피해를 입 거나 심지어는 멸종할 수도 있다. 또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다수의 개체가 자신들의 번식을 희생하는 조절 시스템을 발달시키는 집단도 있다. (만약 선택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체를 유리하게 할 뿐이라면 이런 시스템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집단은 좋은 시기에도 나쁜 시기에도 생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주장대로라면 진화는 집단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이지 개체 간의 투쟁이 아니다. 그리고 집단이 각 개체의 이타적 협동에 의해 자신들의 개체 수를 조절한다면, 그 집단은 살아 남을 수 있다. 윈 에드워즈는 이렇게 쓰고 있다. "사회 조직이라는 것은 전진적 진화를 하는 능력과, 그 자체가 하나의 실체로서 완성되어가는 능력을 가진다는 가정이 필요하다." 그는 이러한 관점으로 대부분의 동물 행동을 재해석했다. 즉 환경이 란 생식을 위한 차표를 어느 한정된 매수만 인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동물들은 상습화된 경쟁이라는 정교한 시스템을 통해 차표를 얻기 위해 서로 싸운다. 육생종의 경우에는 한 구획의 땅이 한 장의 차표에 상응 하기 때문에 동물들(대개 수컷)은 그 구획에 대해 일정한 태도를 취한 다. 이 싸움에서 진 쪽은 솔직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전체의 이익을 위해 주변부로 물러난다(물론 윈 에드워즈는 승자나 패자 어느 쪽도 그러한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패자가 깨끗이 자신의 패배 를 인정하는 행동의 배후에는 어떤 의식되지 않은 호르몬적 메커니즘이 있 을 것이라 추정했다). 우열 관계의 계층 구조를 갖는 종의 경우에 차표는 장소에 따라 적절 한 숫자만큼만 할당되기 때문에, 동물들은 순위를 놓고 서로 경쟁을 벌 인다. 그 경쟁은 주로 위협이나 엄포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검투사처럼 목숨을 걸고 싸워 상대를 죽이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차표를 둘러싼 경쟁을 벌 일 뿐이다. 이러한 경쟁은 누가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는지 시험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제비뽑기와 같은 것으로서, 적정한 매수의 차표를 나누 어주는 것이 누가 이기는가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다. 윈 에드워즈는 "경쟁의 상습화와 사회의 확립이란 실제로는 동일하다"라고 단언했다. 그렇다면 과연 동물들은 어떻게 차표의 매수를 알 수 있을까? 그들이 자신들의 개체 수를 조사할 수 없는 이상 그것을 알 수 없는 것은 분명 하다. 윈 에드워즈는 그의 가장 놀라운 가설에서, 동물들이 무리를 지 어 이동하거나 함께 모여 지저귀는 등의 단체 행동이 개체 수 조사를 위한 유효한 장치이며, 이 장치는 집단 선택을 통해 진화한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는 새의 울음소리, 여치와 귀뚜라미 그리고 개구리가 내는 진동음, 물고기가 물 속에서 내는 소리, 반디의 명멸 등도 그런 장치에 속한다고 말했다. 이 책이 출간된. 후 약 10년 동안 다윈주의자들은 윈 에드워즈를 맹렬히 공격했다. 그들은 두 가지 전술을 사용했다. 첫째, 그들은 윈 에드워즈의 관찰 자체는 대부분 인정했지만, 오히려 그 사실들을 개체 선택의 실례로 재해석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누가 이기는가 여부는 그야말로 우열 관계의 계층 구조나 세력권 의식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수컷과 암컷의 성 비율이 50:50이고, 성적 경쟁에서 성공한 한 마리의 수컷이 여러 마리의 암컷을 독점한다면 일부 수컷은 자손을 번식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서 모든 개체는 조금이라도 많은 유전자를 자손에게 전한다는 다윈적인 상을 받기 위해 경쟁을 벌인다. 따라서 진 쪽도 자 신의 희생이 공통의 이익을 높인다는 사실에 만족해서 기꺼이 그곳을 떠나는 일은 없다. 그들은 그저 패했을 따름이다. 운이 좋으면 다음 번에는 이길지도 모른다. 이러한 과정의 결과로 잘 조절된 개체군이 탄생할 수도 있지만, 그 메커니즘은 기본적으로 개체 간의 투쟁인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이타주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윈 에드워즈가 내놓은 실례들은 거의 모두가 각 개체의 이기성에 대한 이야기로 바꿀 수 있다. 예를 들어 많은 새의 군집에서 자신들을 노리는 포식자를 발견한 최초의 개체가 경계음을 낸다. 그 결과 무리는 흩어지지만, 집단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최초의 경계음을 낸 개체는 포식자의 주의를 자신에게 집중시킴으로써 -집단의 이익을 위한 자기 파괴(아니면 최소한 위험 감수)에 의해-무리의 동료들을 구하는 셈이 된다. 이러한 이타적인 발성자를 갖는 집단은, 다른 동료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개체에게는 큰 위험이 따를지 모르지만, 이기적인 조용한 집단보다 진 화라는 측면에서 훨씬 더 유리하다. 그런데 이 논쟁 과정에서 최초의 외침이 그 발성자에게 이칙이 된다고 해석하는, 적어도 10여 가지의 다 른 관점들이 제기되었다. 요컨대 최초 외침이 무리의 움직임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그 결과 포식자를 혼란에 빠뜨려 최초의 발성자를 포함해 어떠한 개체도 잡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또는 발성자는 안전한 곳으로 달아나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혼자 그런 행동을 취했다가 대열을 이탈한 자신이 포식자의 표적이 되는 사태를 우려해 , 무리 전체가 자신과 함께 움직이도록 소리를 지른다고 한다. 그는 최초의 발성자이기 때문에 동료들에 비해 불리한 입장에 처할지도 모르지만(또는 제일 먼저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유리할 수도 있다), 소리를 지르지 않아서 포식자가 임의적으로 무리 중 한 개체 (어쩌면 자신이 먹이가 될 수도 있다)를 잡도록 무방비 상태로 방치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집단 선택에 반대하는 두 번째 전술은 개인적인 이익이 아닌 이타주 의적인 행동도 살아 남은 가까운 혈연을 통해 유전자를 전파한다는 이 기적인 장치로-이른바 혈연 선택kinselection 이론이다-재해석한다. 즉 형제 자매는 보통 평균적으로 유전자의 절반 가량을 공유한다. 만약 당신이 세 명의 형제 자매를 구하기 위해 죽는다면, 당신은 세 명의 형 제 자매의 번식을 통해 당신의 유전자를 150퍼센트 다음 세대에 전달하 는 셈이다 이 경우에도 당신은-설령 당신 자신의 육체적 존속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진화적 이익을 위해 행동한 것이다. 혈연 선택은 다윈의 개체 선택의 한 형태인 것이다. 이러한 대안적 설명들은 집단 선택을 용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런 설명들은 좀더 전통적인 다윈주의적 개체 선택을 되풀이하는 데 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꺼림칙한 것은 이 지속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이 주제에 대해 합의가(필경 잘못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 실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진화학자들은 집단 선택이 특정한 구체적인 상황-멀리 분리되어 있고, 사회적인 응집력이 강하며, 서로 직접적인 경쟁을 벌이고 있는 많은 무리들로 구성된 종-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분리된 집단은 혈연 집단인-여기서는 집단 내의 이타주의에 대한 하나의 설명으로서 혈연 선택이 선호된다-경우가 흔하다는 이유로 이러한 상황이 흔히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체 선택론이 위로부터의 집단 선택론과 싸움을 벌인 후에 비교적 큰 상처를 입지 않았던 바로 그때 다른 진화학자들은 아래로부 터의 공격을 시작한다. 그들은 개체가 아니라 유전자가 선택의 단위라 고 주장한다. 그들은 '닭이란 또 다른 달걀을 만들기 위해 달걀이 취하 는 한 가지 방법에 불과하다'라는 버틀러의 유명한 말을 다시 들고 나 오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전개한다. 그들은 동물이란 DNA가 더 많은 DNA를 만들어내기 위해 필요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저서 '이기적인 유전자 The Selfish Gene'에서 이 주장을 강력하게 제기했다. 그는 "육체란 유전자가 유전자를 변화되지 않은채 보존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라고 쓰고 있다. 도킨스의 입장에 따르면, 진화는 저마다 더 많은 자신의 복제를 획득 하려는 유전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이다. 육체는 유전자가 잠시 동안 모여 있는 장소에 불과하다. 육체는 일시적인 보관 용기이며 유 전자에 의해 조작되는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s에 지나지 않는다. 일단 유전자가 복제되어 다음 세대의 육체 속에서 더 많은 복제를 전파 하려는 탐욕스런 갈망이 만족되면, 육신이라는 기계는 지질학적 파편으 로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생존 기계-유전자라고 알려진 이기적인 분자들을 보존하도 록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로봇 전달자이다... 지금 유전자들은 거대한 잡동사니 로봇 속에 안전하게 거대한 군집 을 이루며 존재한다... 그들은 당신 속에도 내 안에도 있다. 그들은 우리들을, 우리의 몸과 마음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그들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들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이다. 도킨스는 개체를 선택의 단위로 생각하는 다윈주의적 관점을 버리고 있다. "나는 선택의, 따라서 자기 이익의 기본 단위가 종도, 집단도, 엄 밀히 이야기하자면 개체도 아니라는 주장을 제기할 작정이다. 그것은 유전의 단위, 바로 유전자이다." 따라서 우리는 혈연 선택이나, 일견 이 타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에 관해서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셈이다. 신체는 적절한 단위가 아니다. 유전자는 어디서든 자신의 복제를 식별하려 고 노력할 뿐이다. 유전자는 자신의 복제를 보존시키고 더 많은 복제를 만들기 위해 작용할 뿐이다. 유전자는 어떤 육체가 자신의 일시적인 집 이 될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방금 언급한 여러 가지 주장 가운데 가장 과격하고 가장 충격적 인 요소에-의식적인 행동을 유전자의 탓으로 돌리는-대해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비판을 시작하고자 한다. 도킨스는 여러분이나 나와 마찬가지로 유전자 자체가 계획을 하거나 구상을 가지 고 있지는 않으며, 유전자가 의식적으로 스스로를 보존하는 행위자로서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그는 나 자신(감히 그 가운데 한 사람에 속하기를 희망하는)을 포함해 진화에 관한 대중과학서를 집필하는 필자들이면 누구나(필경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은유적 표현을 일반적인 경우보다 화려하게, 그리고 일관되게 주장했을 뿐이다. 그가 "유전자는 더 많은 자신의 복제를 만들려고 노력한다"라고 썼을 때 실제로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선택은, 우연히 다음 세대에 더 많은 복제를 남기는 방식으로 변이를 일으킨 유전자에게 훨씬 유리하게 작용한다." 후자는 길고 장황한 데 비해 전자는 그 의미 자체는 부정확하지만 은유로서는 직접적이고 사람들이 더 쉽게 수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밑으로부터 가해지는 도킨스의 공격에 한 가지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큰 힘을 유전자에 부여한다 하더라도 유전자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그것은 유전자가 자연 선택에 직접 노출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택은 유전자를 직접 볼 수 없고 유전자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직접 고를 수 없다. 선택은 그 매개체로서 생물의 신체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전자는 세포 속에 숨겨진 DNA의 지극히 작은 조각이다. 반면 선택이 보는 것은 그것이 들어 있는 신체, 즉 생물의 개체이다. 선택이 어떤 개체를 선호하는 것은 그 개체가 특정한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개체가 유달리 힘이 강하거나, 좀더 격리되어 있거나, 성적인 성숙이 빠르거나, 싸움에서 더 사납거나, 다른 개체에 비해 더 아름답기 때문이다. 만약 자연 선택이 더 강한 신체를 선호한다고 가정하고, 선택이 강함이라는 특성에 대해 유전자에 직접 작용한다면, 도킨스의 입장은 아마 옳을 것이다. 또한 만약 신체가 그 유전자들의 명백한 지표라면 서로 경쟁하는 DNA 조각들은 각기 제 빛깔을 외부적으로 나타낼 것이고, 선택은 그들에게 직접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신체란 실제 그런 것이 아니다. 당신의 왼쪽 무릎이나 당신의 손톱처럼 눈에 보이는 특정 형태에 관 여하는 개별 유전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를 비롯해 모든 생물의 몸 은 개별 유전자에 의해 구축되는 각각의 부분으로 분해될 수 없다. 수 백에 이르는 많은 유전자들이 서로 협동해서 신체의 거의 대부분을 구 축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유전자 작용은 마치 만화경처럼 변화 무방한 일련의 환경적 영향을-그런 환경에는 배 상태의 것도 출생 후의 것 도 있으며, 내적인 것도 있고 외적인 것도 있다-받는다. 몸의 일부분은 유전자가 변형된 것이 아니며, 선택은 각 부분에 직접 작용하지도 않는다. 선택은 생물체를 그 전체로서 받아들이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복잡한 방식으로 상호 작용하는 여러 부분들이 전체적인 조합으로 그 생물에게 유리함을 주기 때문이다. 개별 유전자가 자신의 생존 경로를 계획한다는 식의 이미지는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발생유전학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도킨스에게는 또 다른 은유가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다수의 유전자들이 의원 총회를 열어 동맹 을 결성하고, 조약에 가맹할 기회를 노리고, 있을 법한 상황을 예측한 다는 것이다. 그처럼 많은 유전자들을 하나로 융합시키고, 환경에 의해 중재되는 작용의 계층적인 연쇄로 결합했을 때, 거기에 완성되는 물체를 우리들은 '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게다가 도킨스의 관점은 유전자가 몸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다. 어떤 생물의 성공에 차이를 가져오는 구조, 생리, 행동 등의 일부에 유전자가 변형되어 나타나지 않는 한 선택은 개별 유전자를 볼 수 없다. 따라서 유전자와 몸 사이에 '1:1' 대응이 필요할 뿐 아니라(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비판했다) 1:1의 적응적인 대응까지 필요하게 된 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도킨스의 이론은 '몸의 모든 부분만 제각기 자연 선택이라는 가혹한 시련 속에서 완성된다는 범선택론적인 주장을 부정하는 진화학자가 점차 늘어나고 있는 시기에 제기되었다. 거의 전 부는 아니라 해도, 많은 유전자가 여러 가지 변이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잘 (또는 적어도 충분히) 작동할 것이다. 그리고 선택은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식으로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대부분의 유전자가 선택이라는 열병식에 스스로를 드러낼 수 없다면, 그들은 선택의 대상 단위가 될 수 없다. 결국 나는 도킨스의 이론이 주는 매력은 서구의 과학적 사고에 얽혀있는 몇 가지 악습-우리가 원자론, 환원주의, 결정론(이런 전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용서해주기 바란다) 등으로 부르는 태도-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전체란 모두 '기본적'인 단위로 분해시켜 이해할 수 있다는 사고 방식, 미시적 단위의 고유 성질이 거시적 결과를 낳으며 동시에 설명할 수 있다는 사고 방식, 그리고 모든 사건이나 사물은 명백하고 예측가능하고 결정적인 원인을 갖는다는 사고 방식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몇 개의 작은 요소로 이루어지고 그전의 역사에 영향을 받지 않는 단순한 현상을 연구하는 데는 유효했다. 지금 나는 가스스토브의 손잡이를 돌리면 불이 붙을 것이라는 데에는 상당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실제로 불이 붙는다), 여러 가지 기체 법칙은 분자에서 시 작하여 그보다 큰 부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그러나 생물은 유전자들의 융합 이상의 무엇이다. 생물은 역사라는 중대한 요소를 가지고 있고, 그 몸의 여러 가지 부분은 복잡한 상호 작용을 한다. 생물의 몸은 협동하여 작용하고,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선택에 노출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으로 변형되는 식으로 작용하는 수많은 유전자 들로 구성된다. 물의 물리적, 화학적 성질을 결정하는 분자들은 유전자 와 몸의 구성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형편없는 비유에 불과하다. 나는 나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최소한 통일적 전체성에 대한 나의 직관은 생물학적 진실을 꿰뚫고 있을 것이라고 확 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