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다의 엄지 지은이:스티븐 제이굴드 출판사:세종서적 봉사자:한양대학교 공학대학 화학공학과 신중갑, 김명수 머리말 미국의 동물학자인 E. B 윌슨은 '발생과 유전에서의 세포'라는 이미 고전이 된 뛰어난 저서의 속표지에서 플리니우스의 책에 나온 모토를 옮겨놓고 있다. 플리니우스는 AD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대분화를 조 사하기 위해 배로 나폴리 만에 나와 있을 때, 폼페이 시민들을 질식시 켰던 것과 같은 가스에 휩쓸려 뜻하지 않게 죽음을 당한 대박물학자이 다. 그는 이렇게 썼다. "Natura nusquam magis est tota quam in minimis(가장 작은 피조물에서처럼 자연이 그 완전성을 드러내는 곳은 어 디에도 없다)." 두말 할 나위 없이 윌슨은 이 위대한 로마인이 전혀 모르고 있던 극미한 구조, 즉 생물체의 극미한 구성 단위를 찬미하기 위해 플리니우스의 말을 멋대로 차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플리니우스의 그 말은 생물 개체의 문제를 염두에 두고 한 것이었다. 플리니우스의 이 말은 나를 매혹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연사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오랜 옛날부터 지속돼온 틀에 박힌 양식(신화가 이 야기하듯이 자주 지켜지는 것은 아니지만)에서는, 자연사에 관한 에세이 가 동물들의 특이성, 예를 들면 비버beaver가 불가사의한 토목 공사를 벌인다거나, 거미가 부드러운 거미줄을 치는 방법 등을 기술하는 정도에 그쳤었다. 물론 그런 일에도 분명 즐거움이 있을 것이며,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생물은 모두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을 우리들에게 말해줄 수 있다. 모든 생물이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요컨대 생물의 형태라든지 그 행동은 우리들이 그것들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한, 일반적인 메시지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 가르침에 사용되는 언어가 바로 진화론이다. 따라서 이 즐거움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자연과학의 모든 분야 가운데 가장 재미있고 중요한 분야의 하나인 진화론의 세계에 내가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던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 다. 소년 시절, 내가 자연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에는 진화론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들은 것도 전혀 없었다. 고작해야 공룡에 대해 외경심을 품는 정도였다. 나는 고생물학자란 뼈를 파내 그것들을 이어 붙일 뿐이며, 어떤 배를 어디에 연결할 것인가라는 중차대한 문제를 제 외하고는 다른 일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 다. 그 후 나는 진화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진화론을 알게 된 이래 자연사의 이중성-특수성의 풍부함, 그리고 그 밑에 내재된 설명의 잠재적인 일관성-이 나를 매료시켰다. 진화론에 관해 많은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갖는 세 가 지 속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진화론은 현재 수준으로도 만족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확립되어 있지만, 앞으로도 불가사의한 현상이라는 귀중한 발굴물들을 얼마든지 내놓을 수 있을 만큼 미발달된 분야이기도 하기 때문에 아직도 풍부한 미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진화론은 시공을 뛰어넘는 수량적인 일반 법칙을 다루는 여러 과학 분야에서 역사의 특수성을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는 과학 분야들까지 포괄하는 연속체continuum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세계에는 추상적인 일반성(개체군의 성장이라든가 DNA 구조 등의 여러 가지 법칙)을 탐구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일반적인 것으 로는 환원할 수 없는 잡다한 특수성(예를 들면 티라노사우루스는 그 빈약 한 앞다리를 어떤 용도에 썼을까 등)을 밝혀내는 데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 들에게 공통의 광장을 마련해준다. 세 번째로 진화론은 우리 모두의 생존과 관계되는 문제를 다룬다. 다시 말해 우리들은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이런 물음 자체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의 문제이다. 우리가 '계보'에 관한 중대한 문제에 무관심할 수 있을까? 물론 거기에는 박테리아에서 흰긴수염고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중간에는 엄청난 숫자의 딱정벌레들의 세계도 있다. 현재 기록된 것만도 100만종 이상에 달하는 동물이 있으며, 제각기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내며, 또한 저마다의 귀중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여기에 실린 글은 생명의 기원에서 조르주 퀴비에의 뇌, 그리고 태어나기 전에 죽는 진드기에 대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현상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나는 다윈의 사상과 그 영향에 중점을 두면서 이 책에 실린 모든 글들을 진화론에 집중시키는 방식으로, 여러 글을 모아 놓은 책이 빠질 수 있는 일관성의 부재라는 문제점을 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전에 출간된 에세이집 '다윈 이후Ever Since Darwin'의 서문에서도 썼듯이 "나는 전문가이기는 하지만 대학자는 아니다. 내가 행성이나 정 치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은 그것들이 생물의 진화와 교차하는 지점에 국 한될 뿐이다." 나는 이 책에 실린 에세이들을 통일성 있는 전체로 구성하기 위해 총 8부로 정리해보았다. 판다와 거북, 아귀아목 물고기를 다루는 제1부는 진화라는 현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여기에서 나는 하나의 역설을 제기할 것이다. 그것은 진화론의 증거가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불완전성에 들어 있다는 역설이다. 제1부이후에는 세 겹 샌드위치식 구성이 이어진다. 요컨대 자연사의 진화적연구에서 중요한 주제에 관련되는 세 부(제2부의 다윈의 학설과 적응의의미, 제5부의 변화의 속도와 그 양식, 제 6부의 크기와 시간의 척도)와, 동물들과 그들의 역사의 특이성을 다룬 두 개의 부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세 겹 샌드위치의 내용물에 해당하는 두 개의 중간층(제3부와 제4부, 제6부와 제 7부)이 있다(샌드위치 비유를 좀더 사용해보자. 만약 이 샌드위 치를 더 세분하여 일곱 개의 부와 빵과 고기로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 다면 굳이 반대하지는 않겠다). 또한 나는 그 샌드위치를 이쑤시개로-모든 부를 관통하는 부차적인 주제로-찔러 지금까지 사람들이 편안하게 안주해왔던 것들에 자극을 줄 것이다. 왜 과학은 문화 속에 깊숙이 뿌리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가, 왜 다윈주의는 자연계에서 조화와 진보를 찾아내려는 희망에 부응할 수 없는가 등이 그런 문제이다. 그러나 이런 자극은 각기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문화적 편견에 대한 이해를 통해 과학이라는 것을 그 밖의 모든 형태의 창조성에서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친밀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간 활동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또한 우리들의 생명에 관한 의미를 자연계에서 수동적으로 읽어낼 수 있으리라는 덧없는 기대를 버릴 때, 우리들은 자신의 내부에서 그 의미를 찾게 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내가 '내추럴 히스토리natural history'지에 '이 생명관This View of Life' 이라는 제목으로 매월 연재한 칼럼을 조금 고 쳐 쓴 것이다. 그 중 몇 개의 글에는 '후기'를 덧붙였다. 테야르 드 샤 르댕이 필트다운 사기 사건에 관계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추가적인 논거 (10장), 96세가 되어서도 논쟁을 좋아한 J 할렌 브레츠의 편지(19장), 박테리아 자석의 설명에 관한 남반구에서 얻은 확증(30장)을 다룬 세 편 의 글에 후기를 덧붙였다. 나는 이 글들이 내가 생각하는 정도로 단명할 것이 아님을 설득해준 에드 바버 씨에게 감사하고 싶다. 또한 '내추럴 히스토리'지의 편집장 앨런 턴스 씨와 편집자 플로렌스 에델슈타인씨는 문장과 사고 방식을 알기 쉽게 고쳐 쓰기도 하고 적절한 제목을 붙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학계의 여러 지인들의 친절한 도움이 없었다면, 네 편의 에세이는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캐롤린 프류어 로반 씨는 다운 박사를 내게 소개 해주었고, 많이 알려지지 않은 그의 논문을 내게 보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게 자신의 견해를 들려주고, 자신의 미발표 원고를 보여주었다(15장). 에른스트 마이어 박사는 일찍부터 민속적 생물분류법의 중요성을 주장해왔고, 다수의 실례를 알고 있다(20장). 짐 케네디 씨는 커크패트릭의 저작을 내게 소개해주었다(22장).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그 저서를 감싸고 있는 침묵의 장막을 투과해서 올바른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리처드 프랑켈 박사는 물리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네 페이지 분량의 편지를 보내 매혹적인 박테리아의 자성의 실체를 명쾌히 설명해주었다(30장). 나는 동료들의 관대함에 많은 격려를 받았고, 또한 그 사실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미 기록된 모든 사실보다 아직 발표되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이 훨씬 무게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 밖에도 다윈 핀치(5장)의 실제 이야기를 들려주신 프랭크 살로웨이, 문헌 찾기, 뛰어난 견식, 그 리고 인내심 강한 설명으로 도와주신 다이안 폴, 마사 덴크라, 팀 화이 트, 앤디 놀, 칼 분쉬 등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 다행히도 내가 이 글들을 썼던 때는 진화론의 역사에서 상당한 진전 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데이터는 풍부하지만 착상이 빈곤하던 1910년 경의 고생물학의 상황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 이 시기에 연구할 수 있 다는 것이 굉장한 특전을 누리고 있는 셈이라고 생각한다. 진화론은 그 영향력과 설명 범위를 모든 방향으로 넓히고 있다. 오늘 날 우리들이 DNA의 기본적 구조, 발생학, 행동 연구 등 전혀 이질적 인 분야에서 종종 자극을 받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 점을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분자진화학은 놀랄 만큼 새로운 사고 방법(자연 선택설의 대안으로서의 중립설)을 제공해주고, 자연사 속에서 오래전부터 알려진 허다한 수수께끼를 해명한다는 양면에서 기대를 모으고 있는 완전히 성숙한 연구 분야로 수립되었다(24장 참조). 그와 더불어 삽입배열inserted sequence이나 도약유전자jumping gene 등의 발견은 진화적인 의미를 배태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새로운 종류의 유전학적 복 잡성을 표면화시켰다. 세 문자로 이루어진triplet 암호는 기계어에 지나지 않고, 그보다 높은 수준의 제어가 존재할 것이다. 만약 다세포 생물이 배15의 발생 과정의 복잡한 통합적 조정의 타이밍을 어떻게 조정하는지를 규명할 수 있다면, 발생생물학은 분자유전학과 자연사를 통일적인 생명과학으로 통합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혈연 선택 이론은 다윈의 이론을 사회 행동 영역으로 확대시켜 많은 수확을 기대하게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열렬한 주장자들이 과학적 설명에는 계층적 구조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그것이 적용되지 않는 인류 문화의 영역에까지(허용 한계를 넘는 유추를 동원해서) 확장하려 하는 것은 잘못 된 옹호라고 생각한다(7장과 8장을 참조). 그러나 다윈의 이론이 그 영토를 넓히고 있는 한편, 그 사고 방법 속 에서 중지된 많은 전제가 떨어져 나가거나, 또는 최소한 그 보편성을 잃고 있다. 과거 30년 동안 군림해왔던 다윈주의의 현대판인 '현대의 종합설modernsyntheis'은 국부 개체군 속에서의 적응적인 유전자 치 환의 모형을 채택하고 있으며 그 축적과 확대를 통해 생명의 전 역사 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작고, 국지적이고, 적응적인 조절이라는 경험적인 영역에서는 그 모형이 훌륭하게 작용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학명이 Biston betularia인 나방의 일부 개체군의 몸 색깔이 검게 변한 것은 공장 지대의 매연으로 검게 변한 나무 위에서 눈에 잘 띄지 않도록 선택된 반응으로 단 하나의 유전자 치환에 의해 일어났다. 그러나 새로운 종의 기원이 단지 더 많은 유전자와 더 큰 효과로 이 과정이 확대 연장되는 것에 불과한가? 생물의 주요 계통에서 나타나는 훨씬 더 거대한 진화적 경향이란 단지 연속되는 적응적 변화가 누적되 어가는 것에 불과할까? 근년 들어 많은 진화학자들(나 자신을 포함해서)이 이 '종합설'에 의 심을 품게 되면서, 여러 가지 수준에서의 진화적 변화가 여러 종류의 원인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계층적인 사고 방법을 주장하 게 되었다. 어떤 개체군에서 나타나는 소규모적인 조절은 순차적이고 적응적인 현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의 분화란 적응과는 관계가 없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다른 종과 생식 불가능한 관계를 확립시키는 주요 염색체 변화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진화적 경향이란 하나의 큰 개체군이 오랜 시기에 걸쳐 느린 속도로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기간 동안 정지해 있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는 본질적으로 정적인 종에 대한 어떤 높은 수준의 선택을 반영할 가능성이 크다. 현대의 종합설이 등장하기 전에는 많은 생물학자들이 자신들이 빠져 있는 혼란과 무기력한 상태를 표출했다. 여러 수준에서 제기된 진화의 메커니즘이 통일적 과학의 확립을 방해될 수 있을 정도로 서로 모순적 인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현대의 종합설이 등장한 이후, 진화란 다윈주의의 기본 개념인 국지적인 개체군 속에서의 점진적이고 적응적인 변화라는 사고 방식(사려 깊지 못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거의 정설로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는)이 확산되었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들은 지금 유전학자 베이트슨 시대의 무정부 상태와 현대의 종합설에서 비롯된 고정된 사고 방식 사이에서 풍부한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추구하고있는 것 같다. 현대의 종합설은 적절한 상황에서는 제대로 작동할 것이다. 그러나 돌연 변이와 선택이라는 다윈주의적인 여러 과정이 실은 진화 수준의 여러 계층적 구조 중에서 고차 영역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그 원인이 모두 동일하며, 따라서 다윈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단일한 보편 이론이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최저 수준의 현상을 대상으로 한 적응적인 유전자 치환 모형에 의해 그보다 높은 수준의 현상을 설명하는 것을 방해하는 메커니즘의 복수성multiplicity도 계산에 넣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복잡한 소동의 뿌리에는 도저히 단순화시킬 수 없는 자연계의 복잡성이 있다. 생물이란 생명계라는 당구대 위에서 예측할 수 있는 새 로운 위치로, 단순하고 또한 측정 가능한 외부 힘에 의해 움직여지는 당구공이 아니다. 또한 충분히 복잡한 계는 그만큼 큰 풍부함을 갖는 다. 생물은 끝없이 미묘한 방법으로 자기들의 미래를 구속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제1부의 여러 장을 참조). 그들의 형태상의 복잡성은 자연선택의 어떠한 압력이 최초의 구성에 관여했든 간에, 그 여러 가지 힘에 부수되는 여러 가지 기능을 수반하는 것이다(4장 참조). 지금까지 거의 밝혀지지 않은 배 발생의 복잡한 경로가 보증하는 것은 단순한 입력(예를 들면 발생 타이밍의 극히 작은 변화)이 출력(생물의 성체, 18장참조)의 놀라운 변화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찰스 다윈은 그의 명저를 끝맺으면서 이 풍부함을 표현하는 인상적인 비교를 하고 있다. 그는 행성의 운행처럼 훨씬 단순한 계와 그 결과로 나타나는 끝없이 정적인 주기적 운동을 생명계의 복잡성과 장구한 시간 에 걸쳐 일어나는 경탄스러을 정도로 예측 불가능한 변화와 비교하고 있다. 생명은 그 여러 가지 힘과 함께 처음에는 소수의 종류 또는 한 종류 로 시작되었으며, 이후 지구가 확고한 중력의 법칙에 따라 주기적인 운동을 계속하면서 처음의 극히 단순한 것으로부터 무한히 많은 종 류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하게 진화해왔고, 또한 지금도 진화하고 있 다는 이 생명 관에는 장엄한 무엇이 깃들여 있다. 제1부 완전과 불완전 제1장 판다의 엄지 영웅이 생애의 극정점에 올라 자신의 야망을 접는 일은 매우 드물다. 승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승리를 부르고 그러다가 결국은 파멸에 이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알렉산더 대왕은 더 이상 정복할 새로운 세계가 없 다는 사실을 한탄했고, 지나치게 영토 확장을 꾀했던 나폴레옹도 러시 아의 혹독한 겨울에 갇혀 스스로 운명을 결정지었다. 그러나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1859년)을 집필한 뒤로도 온갖 수단을 총동원해 자신의 자연 선택설을 선전하거나, 자신의 이론을 인류 진화에까지 연장 해석하지 않았다(그는 1871년이 되어서야 '인류의 기원'을 발간했다). '종의 기원' 이후 처음으로 발간된 그의 저서는 '영국과 외국의 난초과 식물이 곤충에 의해 수정되는 여러 가지 메커니즘에 대하여'(1862년) 였는데, 이 책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다윈은 여러 차례 자연사와 관련된 여러 가지 작은 주제들을 다루었 다. 그는 조개삿갓류의 분류법, 덩굴성 식물에 대한 책, 그리고 지렁이 에 의한 부식토형성에 대한 논문을 저술했다. 그래서 그는 별난 동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일관성도 없이 마구 써대는 구식 박물학자라느 니. 운좋게도 적시에 적절한 통찰력을 가지고 나타난 남자라느니 하는 별반 좋지 않은 평판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다윈에 관 한 면밀한 조사와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이런 유의 터무니없는 평 가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2장 참조) . 그전에는 어느 고명한 학자가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 많은 동료들 앞에서 다윈을 "몇 가지 개념 들을 적절히 짝지웠을 뿐... 대사상가라고는 할 수 없는 사람..."이 라고 평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다윈의 모든 저서들은 그가 평생에 걸쳐 구축한 장대 하고도 일관된 체계-진화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동시에 가장 우세한 매커니즘으로서 자연 선택을 옹호하는-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다윈이 난 자체를 연구한 것은 아니었다. 다윈의 모든 저서를 독파한 다는 엄청난 일을 해낸 캘리포니아 대학의 생물학자 마이클 기셀린은 '다윈적 방법의 승리'라는 저서에서, 난초과에 대한 연구는 진화를 주 장하는 다윈의 노력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다. 다윈은 난초과에 대한 책을 다음과 같은 진화에 대한 중요한 한 가지 전제로 시작한다. 자가 수분을 계속하는 것은 장기간의 생존이라는 목표를 위해서는 형편없는 전략이다. 자가 수분을 하게 되면 자손들은 동일한 부모 유전자밖에 갖을 수 없게 되며, 따라서 그 개체군이 환경 변화에 처 해 진화적인 유연성을 발휘할 만큼 충분한 변이성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암컷과 수컷의 생식 기관을 모두 갖추고 꽃을 피우는 식물 들은 일반적으로 이화 수분하는 메커니즘을 발달시킨다. 난 역시 마찬가지다. 이 식물은 곤충들과 계속해서 동맹 관계를 유지해왔다. 난초과는 우선 곤충을 유인한 다음 끈적끈적한 꽃가루를 곤충에 달라붙게 하여 다음에 방문하는 난의 자성 기관에 그 달라붙은 꽃 가루를 접촉시키게 한다는 놀랄 만큼 다양한 '장치'를 진화시켰다. 다윈의 책은 이러한 장치의 개요를 설명하는 식물판 동물 우화집인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중세의 동물 우화집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사실을 알려준다는 의도로 씌어졌다. 그 메시지는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매우 의미 있는 내용이다. 난은 보통의 꽃을 이루고 있는 일반적인 구 성 요소, 즉 원래는 전혀 다른 기능을 하던 부분들을 가지고 매우 복잡 한 장치들을 만들어냈다. 만약 이 아름다운 기계가 신이 자신의 지혜와 힘을 드러내기 위해 고안한 것이라면, 신은 원래 다른 목적에 맞도록 만들어진 부품들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난과의 꽃은 어떤 이상적인 기술자가 만들어낸 작품이 아니다. 그 식물은 이미 있던 구성 요소들을 이용해 임시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난꽃은 보통의 꽃에서 진화한 게 틀림없다. 여기서 하나의 역설이 성립할 수 있다. 이 책의 제1부를 구성하는 3 부작의 공통 주제는 다음과 같다. 우리들의 생물 교과서는 진화를 설명 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최고의 설계design에 해당하는 여러 가지 실례들 (나비가 말라 죽은 나뭇잎으로 위장하는 것. 벌레들이 새들의 공격을 피해 마치 독을 품은 듯이 의태하는 것 등)을 들기 좋아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인 설계는 진화를 논하기 위한 논거로는 그리 적절치 않다. 그러한 이상적인 설계는 전능한 조물주의 행동을 흉내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기묘한 배치라든가 이상한 해결 방법이야말로 진화를 입증할 수 있는 효과적인 소재이다. 현명한 신이라면 결코 택하지 않았을 경로 이지만 역사에 속박되어 어쩔 수 없이 진행되었던 자연의 과정을 추적 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 이런 사실을 다윈만큼 잘 이해한 사람도 없 었다. 미국의 생물학자 에른스트 마이어는, 다윈이 진화론을 주장하면서 최소한의 의미밖에 없는 생물체의 여러 부분이나 지리적 분포에 끊 임없이 관심을 집중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내가 자이언트 판다와 그 엄지손가락의 문제에 주목하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자이언트 판다는 식육목에 속하는 동물로서, 특이한 곰의 일종이다. 곰은 보통 식육목 가운데 잡식성을 보이는 동물이지만, 판다는 예외적으로 그 식성을 한쪽으로만 한정했다. 판다는 오직 대나무만 먹기 때문에 사실 식육목이라 이름 붙이기도 민망하다. 판다는 중국 서부의 산악 지방에 있는 깊은 대나무숲에서 서식한다. 그리고 포식자에게위협당하는 일도 없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하루에 10-12시간 가량 대나무나 우적우적 씹어먹으며 보낸다. 나는 어린 시절에 앤디 판다의 열렬한 팬이었다. 한번은 카운티 패어 (군county의 특정 지역에서 매년 한 차례식 열리는 장. 주로 농작물, 가축을 전시함/옮긴이)에서 우유병을 모두 쓰러뜨려 상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때 받은 판다 인형을 소중히 간직했다. 따라서 미국과 중국사이에 긴장이 완화되어 탁구 친선 경기가 벌어 지고, 이어서 두 마리의 판다가 워싱턴 동물원에 도착했을 때는 뛸 듯이 기뻤다. 나는 당장 동물원으로 달려가 외경스러운 시선으로 판다 들을 바라보았다. 판다들은 하품을 하기도 하고 기지개를 켜거나 느린 걸음으로 몇 발자국씩 걸어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 을 그들이 좋아하는 대나무를 먹는데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상반신을 세우고 앉아, 앞발을 사용해 능숙한 솜씨로 대나무 줄기를 잡고 잎을 뜯 어낸 뒤 새순만을 먹었다. 나는 판다의 뛰어난 재주에 감탄했다. 그리고 달리는 기능으로 환경에 적응해온 계통의 후손이 어떻게 그처럼 양손을 잘 쓸 수 있는지 의 문을 품게 되었다. 그들은 양손으로 대나무 줄기를 쥐고, 유연해 보이는 엄지손가락과 나머지 손가락들 사이로 줄기를 통과시켜 잎을 떼낸다. 그 모습에 나는 무척 당황했다. 일찍이 나는 엄지손가락을 다른 손가락과 맞댈 수 있는 능력이 인류를 번영할 수 있게 했던 특질 가운데하나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영장류의 선조에게서 나타난 이 중요한 유연성을 한층 향상시키면서 계속 유지시킨 반면, 대부분의 다른 포유류들은 손가락을 특수화시키는 과정에서 그것을 희생시켰다. 식육목에 속하는 동물은 달리고 찌르고 할퀴어댄다. 따라서 내가 키우 는 고양이는 심리적으로 나를 조종할 수는 있어도 혼자서 타자기를 치 거나 피아노를 연주하는 일은 절대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판다의 엄지손가락을 뺀 나머지 손가락의 숫자를 세어보 았다. 그 결과 나는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손가락은 네 개 가 아니라 다섯 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판다가 가지고 있는 '엄지손 가락'은 별개로 진화한 여섯 번째 손가락이란 말인가? 다행히도 자이언 트 판다에 대한 한 권의 바이블이 있다. 일찍이 시카고의 야생 자연사 박물관의 척추 동물 해부학 학장을 맡고 있던 D. 드와이트 데이비스가 쓴 특수 연구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현대의 진화적 비교해부학 분야에서 최대의 업적으로 꼽힐 만하다. 그리고 거기에는 일반인들이 판다에 관해 알고 싶어하는 이상 으로 상세한 내용들이 다루어져 있다. 물론 데이비스는 내가 품은 의문 에 대해서도 답해주고 있었다. 그는 판다의 엄지손가락이 해부학적으로는 실제 손가락이 아니라고 한다. 그 엄지손가락은 일반적으로 손목을 이루고 있는 작은 구성 요소 인 요골종자골(인대 또는 힘줄 속에 있는 작은 뼈/옮긴이)이라는 하나의 뼈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판다의 요골종자골은 매우 커다란 편 이며, 그 길이는 실제 손가락의 가운데 마디뼈와 같다. 이 종자골이 판다 앞발에 하나의 육지를 구성하며, 다섯 개의 손가락은 다른 하나의 육지 뼈대로 이루어졌다. 하나의 얕은 고랑이 이 두 개의 육지를 분리시키고 있고, 이 고랑이 대나무 줄기를 쥘 수 있는 통로 구실을 한다. 판다의 엄지손가락은 그것을 보강하는 하나의 배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근육까지 겸비하게 되었다. 그 러나 이들 근육은 요골종자골과 마찬가지로 새로이 생겨난 것이 아니 다. 다윈이 연구한 난의 꽃 각 부분들처럼 이것들 역시 모두가 알고 있 는 일부 구조가 다른 기능을 하도록 바뀐 것이다. 요골종자골의 외전근(요골종자골을 실제 손가락에서 멀리 떨어지도록 잡아당기는 근육/옮긴이)에는 abductor pollicis longus('엄지손가락 의 긴 외전근' Pollicis는 pollex의 소유격으로 라틴어로 '엄지손가락'이라는 뜻이다)라는 길다란 명칭이 붙여졌다. 사실상 이 이름은 판다에게 썩 어 울리는 것이 아니다. 다른 식육목의 경우에 이 근육은 첫째 손가락, 그러니까 실제 엄지손가락에 붙어 있다. 반면 판다의 경우에는 더 짧은 근육 두 개가 요골종자골과 엄지손가락 사이에 뻗어 있다. 이 근육들이 '종자골 엄지손가락' 을 실제 손가락 쪽으로 끌어당기는 작용을 한다. 판다에게서 볼 수 있는 이렇듯 기묘한 배치가 어디에서 기원하는지 알기 위해 다른 식육목의 구조로부터 어떠한 단서를 얻어낼 수 있을까? 데이비스는 자이언트 판다와 가장 긴밀한 유연 관계를 맺고 있는 곰이나 미국너구리가 다른 식육목에 비해 앞발을 쓰는 능력이 훨씬 뛰 어나다고 지적한다. 과거에 대한 비유가 허용된다면, 판다는 그들의 선조 덕분에 음식물 섭취 능력을 한층 더 진화시키기 위해 앞발을 들어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보통 곰들도 구조상으로는 이미 요골종자골을 한층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식육목 동물에는 판다의 경우에 요골종자골을 움직였던 것 과 동일한 근육이 첫째 손가락, 즉 실제 엄지손가락의 뿌리 부분에 붙 어 있다. 보통 곰들의 경우에 '엄지손가락의 긴 외전근'은 두 개의 힘줄 로 끝난다. 그 중 하나는 대부분의 식육목에서와 마찬가지로 엄지손가락 뿌리에 붙어 있고, 다른 하나는 요골종자골에 붙어 있다. 이것들보다 짧은 두 개의 근육도 보통 곰에서는 부분적으로 요골종자골에 붙어있다. 데이비스는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다. "따라서 이 현저한 새로운기구(기능적으로 보면 하나의 새로운 손가락)를 조작하는 근육 체계는 판다와 가장 가까운 곰류에서 이미 보이는 상태와 별반 다르지 않다. 게다가 이 근육 체계에 생긴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종자골이 지나치게 성장한 결과 자동적으로 일어난 것이라 여겨진다." 판다의 종자골 엄지손가락은 뼈 한 개가 늘고 근육 체계의 배치가 대 폭적으로 전환하여 생성된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복잡한 구조이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그 장치 전체가 요골종자골 자체가 성장한 데 따른 기계적 반응으로 일어난 것이라 말한다. 근육은 커져버린 뼈가 그 근육 자체의 위치 부근에서 그것을 방해했기 때문에 전위된 셈이 된다. 또한 데이비스는 요골종자골의 확대는 단지 한 차례의 유전적 변화, 어 쩌면 성장의 타이밍과 속도에 영향을 주는 단 한 차례의 돌연 변이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판다의 뒷다리에는 앞발의 요골종자골에 상응해서-물론 앞발만큼은 아니지만-경측종자골이라는 뼈가 커져 있다. 그러나 경측종자골은 새 로운 '발가락'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경측종자 골은 크기가 커졌다는 사실 외에 아무런 쓸모도 없다. 데이비스에 따르면, 이 두 개의 뼈가 함께 성장하게 된 것은 한쪽만 성장하는 경우에 대한 자연 선택적 반응으로서, 단순한 유형의 유전적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손가락과 같이 여러 개가 똑같은 모습으로 발생하는 신체부분은 각 부분에 각기 다른 유전자가 별개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여러분 손의 엄지손가락을 '위한' 유전자나 발의 엄지발가락을 위한 유전자, 또는 여러분의 가운뎃손가락을 위한 유전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똑같은 모습으로 발생하는 부분은 전부 보조를 맞추어 발 육한다. 따라서 어느 한 가지 요소에 변화를 가져오는 선택은 그 밖의 다른 요소에도 그에 상응하는 변형을 가져온다. 엄지손가락을 크게 바 꾸면서 엄지발가락을 변형시키지 않는 것은 양쪽을 함께 성장시키는 것 보다 더욱 복잡한 유전적 메커니즘을 필요로 한다(전자의 경우에는 전체 적인 협조가 깨지고 엄지손가락만 강화되어 서로 연관된 구조들이 상호 증 대되는 것을 억누르게 된다.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단지 하나의 유전자가 그에 상응하는 손가락의 발육을 조절하는 영역에서 성장 속도를 증대시키 기만 하면 된다). 판다의 엄지손가락은 동물학적으로 말하자면 다윈이 연구한 난초과 꽃에 해당한다. 공학자가 생각해낸 아무리 뛰어난 해결책이라 해도 역 사에는 당해낼 수가 없다. 판다의 진짜 엄지손가락은 이미 다른 역할에 할당되어 있어 별도의 기능을 갖기에는 지나치게 특수화된 상태여서 물 건을 붙잡을 수 있도록 서로 마주 볼 수 있는 손가락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판다는 손에 있는 다른 부분을 활용해야만 했으며, 그래서 확대시킨 손목뼈를 사용했다. 이것은 조금 꼴사납긴 하지만, 그래도 훌륭하게 작동되는 해결책이었다. 종자골 엄지손가락은 기술자들의 대회에서 상을 탈 수 없는 수준이었다. 마이클 기젤린의 말마따나 그것은 임시 변통의 장치이지 특출나게 새로운 발명품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훌릉하게 작동하고 있으며,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것을 기반으로 구축되었기 때문에 한층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다윈의 난초에 관한 책에는 이와 비슷한 예가 무수히 등장한다. 예를 들어 습지에 자라는 에피팍티스Eplpactis라는 난은 입술꽃판(꽃잎이 커 진 것)을 함정으로 사용한다. 이 입술 모양의 꽃판은 두 부분으로 나누 어져 있다. 그 하나는 꽃의 기부 가까운 쪽에 꿀로 채워져 있는-곤충이 꽃을 찾아오는 목적은 이 꿀을 얻기 위해서다-큰 컵 모양의 부분이다. 꽃의 끝 쪽에 있는 또 다른 부분은 일종의 착륙장 형태로 이루 어져 있다. 곤충이 이 활주로에 내리면 그 무게에 눌려 이 부분이 내려 앉게 되고, 안에 들어 있는 꿀의 컵에 이르는 입구가 열리게 된다. 그리 하여 벌레는 컵 속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곤충이 컵 속으로 들어가면 활주로는 탄력을 받아 다시 위로 올라가게 되므로 결과적으로 벌레는 꿀의 컵 속에 갇히게 된다. 그 벌레는 이용할 수 있는 또 다른 출구, 즉 꽃가루덩어리에 닿지 않고서는 지날 수 없는 통로를 거쳐 밖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 이는 그야말로 놀라우리만큼 뛰어난 장치이지만, 그 모든 것은 보통의 꽃잎, 다시 말해 난초과 선조 식물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었던 일부분이 발달하여 형성된 것이다. 그 후 다윈은 다른 난초의 입술꽃판이 교잡 수정을 확실하게 할 수 있도록 일련의 정교한 장치를 진화시킨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 어 곤충이 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주등이를 꽃가루덩어리 주위로 우회 시킬 수밖에 없도록 복잡한 주름을 발달시킨 것도 있으며, 또 벌레를 꿀과 꽃가루 양쪽으로 이끌기 위해 깊은 통로나 이랑을 발달시킨 것도 있다 통로가 터널로 되어 있어서 꽃이 관 모양을 이루고 있는 경우도 간혹 있다. 이러한 적응 형태는 모두 난초 선조의 어느 단계에서는 보통 꽃잎으로부터 출발한 한 부분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렇지만 자연은 얼마 되지 않는 재료를 가지고도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다윈의 말마따나 난초과는 "하나의 꽃을 다른 식물체의 꽃가루로 수정시킨다는 오직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원의 낭비"를 과시하고 있는 셈이다. 생물 형태에 관한 다윈의 다음과 같은 비유는 진화라는 것이 이처럼 제한된 원료를 가지고 이만큼 다양하고 적절한 설계design의 세계를 만 들어낼 수 있다는 데 대한 그의 외경심을 반영하고 있다. 어느 한 기관이 무언가 특별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현재 어떤 목적을 위해 도움이 된다면 그것은 그 목적을 위해 특별히 고안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어떤 사람이 무언가 특별한 목적을 위해 기계를 만들 필요가 있을 때, 낡은 바퀴나 스프링, 활차 등을 그대로 사용해-약간의 변화만을 주고-기계를 만들어야 한다면, 이런 부품들을 조립해서 완성된 기계는 그 목적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자연계 전체에 걸쳐 모든 생물의 거의 모든 부분은 변화하는 조건에 맞추어 조금씩 여러 가지 목적에 이용되면서 아주 오래 전의 그리고 독특한 형태의 생물 기계들 속에서 훌륭하게 기능 해온 것이다. 어쩌면 바퀴나 활차를 조립한다는 비유가 만족스럽지 않을지도 모르 겠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의 몸이 얼마나 훌륭하게 작동하는지를 생각 해보라. 프랑스의 생물학자 프랑수아 자코브의 말을 빌리자면, 자연은 뛰어난 땜장이기는 하지만 성스러운 숙련공은 아니다. 과연 누가 이 두 가지 모범적인 기술의 우열을 가릴 수 있겠는가? 제2장 역사를 이야기해주는 의미 없는 징후들 말이란 현재의 의미가 그 어원에서 멀어졌을 경우, 그 말의 역사를 드 러내는 단서를 제공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emoluments'(봉급)라는 영어 단어는 각지의 'miller'(제분업자-이 말은 '갈아서 가루로 만든다' 는 의미의 라틴어 'molere'에서 유래한 것이다)에게 지불되는 보수에서 온 것이며, 'disaster'(재앙)이라는 말은 'evilstar'(불길한 별)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진화학자들은 언제나 말의 변화를 의미 심장한 유추를 제공해주는 비 옥한 밭이라 생각했다. 찰스 다윈은 인간의 맹장이나 수염고래 태아기 때의 이빨과 같이 흔적으로 남은 구조에 대해 진화론적으로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흔적 기관은, 어떤 단어의 철자 속에는 잔존하고 있지만 발음상으로는 필요없게 되어버린 문자-그러나 단어의 유래를 알기 위해서는 단서가 되는 문자-에 비유할 수 있다. " 다시 말해 생물과 언어는 모두 진화하는 것이다. 이 에세이는 이상한 사실들의 목록 뒤편에 숨어 있는 것을 탐구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의 방법, 과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지 만 그 의미가 올바로 인식되지 않은 특수한 방법에 관한 추상적인 이야 기이다. 예로부터 존재해온 전통적인 관념에 따르면 과학자는 언제나 실험과 논리에 의존한다. 횐 가운을 입은 한 중년 남자(대개가 남녀 차 별주의자이며, 내향적이고 과묵하고, 그러나 진리에 대한 열정에 불타고 있 거나, 아니면 혈기가 넘쳐흐르는 괴짜)가 플라스크 속에 두 종류의 화학 물질을 넣은 후 그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 가설, 예상, 실험, 그리고 해 답...이런 것들이 과학적 방법으로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과학 분야는 실제로 이렇지 않으며 이런 식으로 진 행되지도 않는다. 고생물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나는 역사를 복원시 키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역사란 일회적이며 지극히 복잡한 것이다. 그것은 플라스크 안에서 재현시킬 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다. 역사, 특히 인류의 연대기나 지질학적 연대기에도 기록돼 있지 않은 먼 옛날의 일, 직접 관찰할 수 없는 역사를 뒤쫓는 과학자들은 실험적 방법보다는 추론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역사 과정의 '현재에 나타난 결과'를 조사하여 선조대에서부터 오늘날까지 단어, 생물, 지형 등이 어떠한 경로를 거쳐왔는지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단 그 경로를 추적하고 나면 왜 역사가 그 경로를 거칠 수밖에 없었는지 여러 가지 원인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현재의 결과 로부터 과거 지나온 경로를 추론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경로가 존 재한다는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우리들은 어떻게 현재의 모습이 역사적 변화의 산물이지 영구 불변한 우주의 항구적인 부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가? 다윈이 직면했던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에 반대하는 창조론자들 은 생물 각각의 종튼이 처음 창조된 이래 변화하지 않고 처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윈은 현생종 이 역사의 산물이라는 것을 어떻게 입증했을까? 우리들은 그가 진화의 가장 인상적인 결과, 즉 환경에 대한 생물의 복잡하고 완벽한 적응 사례-예를 들어 죽은 나뭇잎처럼 보이는 나비, 나뭇가지와 혼동을 일으키는 알락해오라기, 하늘을 나는 갈매기나 바닷속의 참치와 같은 훌륭한 공학적 설계-에 가장 먼저 눈을 돌렸으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다윈은 정반대의 일을 했다. 그는 기이한 것이 나 불완전한 것을 찾았다. 갈매기는 '설계상의 경이'이라고 간주할 만한 생물이었다. 진화를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 그 날개의 공학적 설계 는 자연 선택의 뛰어난 조형력을 반영한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완전함으로는 진화를 입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완전한 것은 역사를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생물체가 갖는 설계상의 완전함은, 그 완전 무결한 공학적 설계 속에서 신이라는 조형자의 개입을 찾 아왔던 창조론자들이 예로부터 즐겨 주장했던 논거였다. 공기역학적 경 이인 새의 날개는 오늘날 우리 눈에 보이는 모습 그대로 (신에 의해) 창 조되었다는 것이 창조론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다윈은 만약 생물이 역사를 가지고 있다면 선조 여러 단계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재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과거의 흔적-무용한 것, 기묘한 것, 특이한 것, 불균형한 것 등-은 역사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징후인 것이다. 그것들은 세계가 지금의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입증해준다. 만약 역사에 끝이 있고 세계가 완성될 수 있다면 그런 흔적들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금전상의 보수를 의미하는 단어에 과거 곡물이나 곡식 찧는 일과의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왜 그 철자에 지금은 사라져버린 그 직업이 반 영되겠는가? 만약 고래의 선조가 실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이를 갖고 있었고 또 그 이들이 해롭지 않은 어느 한 시기에 흔적 기관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새끼 때 어미의 자궁 속에서는 이가 있지만 태어나자마자 이를 몸 속으로 흡수하여 없애버리고 평생 동안 고래수염이라는 필터로 크릴새우를 걸러 먹어야만 하는 고래의 생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거의 모든 생물이 흔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큼 다윈을 기쁘 게 한 진화의 증거는 없었다. 그는 이에 대해 "필요없음이라고 각인된. 바로 이 기묘한 상태에 놓인 부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변형을 수반하는 유래에 관한 나의 견해, 다시 말해 흔적 기관의 기원에 대한 나의 견해는 간단하다. " 그것은 그 생물의 선조 생물의 몸에서는 기능을 했지만 지금은 해부학적으로 아무런 쓸모도 없는 잔존물이다. 여기서 일반적인 사항이 흔적 기관과 생물학을 뛰어넘어 역사적 과학 모든 영역으로까지 확산된다. 이 3부작의 첫번째 에세이는 동일한 주제 를 각기 다른 맥락에서 다루고 있다. 판다의 '엄지손가락'이 진화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꼴사나운 모양을 하고 손목의 요골종자골이라는 이상한 부분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실제의 엄지손가락은 선조에서와 마찬가지로 식육목 동물이 달리거나 할퀼 때 사용하는 손가락으로서의 역할에 적합했다. 따라서 엄지손가락은 초식성으로 변한 자손에게 다른 손가락과 마주보고 대나무를 잡는 손가락으로 변형될 수 없었다. 지난 주에 나는 생물학과는 전혀 관계없는 문제에 몰두했다. 'veteran'(베테랑)과 'veterinarian'(수의사)라는 전혀 의미가 다른 두 개의 단어가 모두 'old'에 해당하는 라틴어 단어 'vetus'라는 공통된 어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게 된 것이다. 이 경우에도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계보학적인 접근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veteran'이라는 말은 별 문제가 없다. 그 어원과 현재의 의미가 일치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말에는 역사에 대한 암시가 없다. 그보다는 'veterinarian' 쪽이 더 흥미롭다. 도시인들은 'vet'(수의사)라는 말을 그들이 애완용으로 기르는 개나 고양이의 하인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 다. 나는 수의사가 원래는 농장이나 목장의 동물을 치료하곤 했다-그 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내 뉴욕 시민풍의 편협함을 용 서하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vet'와 'vetus'라는 단어는 '짐 나르는 동물'이라는 개념을 통해 서로 연결된다. 요컨대 "무거운 짐을 지고도 견딜 수 있다"라는 의미의 'old'(노련함)인 것이다. 가축은 라틴어로 'veterinae'이다. 역사적 과학이 갖는 이 같은 일반 원칙은 지구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판구조론(지구 표층부를 구성하는 암판이 수평 방향으로 이동하여 갖가지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고 하는 이론/옮긴이)이 수립되자 과학자들 은 지구 표면의 역사를 다시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2억 2천 5백만 년 훨씬 이전에 몇 개의 대륙이 합쳐져 형성되었던 하나의 초대륙 '판게아Pangaea'가 지난 2억 년 동안 여러 조각으로 쪼개져 지금처럼 여러 대륙으로 흩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의 기묘함을 통해 오래 전의 역사를 추측해볼 수 있다면, 우리는 오늘날의 동물들에서 나타나는 불가사의한 현상이 먼 옛날의 대륙 위치에 대한 적응에서 유용성을 가지는지 여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해야 할 것이다. 자연사 최대의 수수께끼와 경이로움 가운데 하나가 여러 동물들의 장거리 이동과 회유 경로이다. 이처럼 긴 이동 경로 가운데 일부는 계절에 따라 생존에 적합한 기후대를 찾는 간단한 경로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 다. 예를 들어 매년 겨울이면 추위를 피해 몸집이 큰 많은 포유류 동물 들이 금속제 새에 올라타 플로리다 주로 이동하는 현상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가까운 곳에 적당한 장소가 얼마든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섭식지feeding ground에서 특정한 번식장breeding ground으로- 놀랄 만큼 정확하게 수천 마일을 이동하는 동물도 있다. 이처럼 특이한 이동 경로를 먼 옛날의 대륙 배치도에서 본다면 훨씬 거리가 짧게 느껴지고 또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바다거북의 이동에 대한 세계적 전문가이자 플로리다 대학의 교수인 아르키 카는 그 같은 주장을 제기했다. 바다거북 켈로니아 미다스 Chelonia mydas의 한 개체군은 대서양 중부에 있는 절해의 고도 어센션 섬에 상륙해 번식하고 있다. 오랜 옛날에는 수프를 만드는 런던의 요리사나 식료품 보급를 위해 잠깐 이 섬에 들렀던 군함의 승무원들이 바다거북을 앞다투어 잡아갔다. 카는 꼬리표를 달아놓은 이 섬의 거북들이 무려 2천 마일이나 떨어진 번식장까지 이동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켈로니아 미다스는 '섭식지로 이용하던 해안에서 수백 마일 이상 떨어진 바늘 끝과 같은 육지' , '대양 한가운데 간신히 머리를 내민 첨탑' 위에서 번식하기 위해 브라질 해안으로부터 무려 2천 마일을 여행한 것이다. 카의 발견이 있기 전에 과연 누가 그런 사실을 꿈에라도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바다거북이 섭식과 번식을 별개의 장소에서 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안전하고 물이 얕은 '목장'에서 해초를 먹지만, 번식을 하기 위해서는 모래 사장이 넓게 펼쳐진 노출된 해양, 그리고 가능하다 면 포식자가 없는 섬의 해안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얼핏 보기에 적당할 것 같은 다른 번식장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대양 한가운데 까지 무려 2천 마일이나 여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같은 종으로서 코스타리카 카리브 해 연안에서 번식하는 큰 개체군도 있다.) 카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만약 바다거북들이 실제로 이동한다는 사실이 그처럼 분명치만 않다면 거북들이 이 항해에 따르는 온갖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가히 믿기지 않을 정도다." 카는 이 기나긴 여행이 훨씬 더 이해하기 쉬운 어떤 것의 연장일지도 모른다고 추론한다. 다시 말해 대서양이 비교적 최근에 분리된 두 대륙 사이에 놓인 하나의 웅덩이에 불과했던 시기에는 대서양 한가운데의 섬 까지 헤엄치는 것이 아주 쉬운 일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남아메리 카와 아프리카는 켈로니아의 조상들이 이미 그 지역에 서식하고 있던 8 천만 년 전에 두 개로 갈라졌다. 어센션 섬은 새로운 해저가 지구 내부로부터 솟아 올라오는 허리띠 모양의 지대인 대서양 중앙 해령에 위치해 있다. 땅 밑의 끓어오르는 물질은 때때로 하나의 섬을 이를 수 있을 만큼 높게 부풀어 오르기도 한다. 아이슬란드는 대서양 중앙 해령에 형성된 가장 큰 섬이며, 어센션 섬 도 같은 과정의 축소판이다. 해령의 한쪽에 섬이 생성되면 그 섬들은 밑에서 솟아올라 바깥쪽으로 퍼지는 새로운 물질들로 인해 중앙부로부 터 멀리 밀려나게 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해령에서 멀리 떨어진 섬일 수록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섬은 점차 침식되어 작아지다가 종국에는 수면 밑으로 내려가 해산이 되기도 한다. 섬이 활동중인 해령에서 멀어지면서 새로운 재료 물질의 공급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섬은 산호를 비롯한 그 밖의 생물로 된 외피가 두터워져 계속 보존되고 쌓이지 않는 한 파도에 침식되어 결국 해수면 아래쪽으로 가라앉게 될 것이다(또한 이러한 섬은 높은 해령에서 대양의 심부로 향하는 내리막 사 면을 이동하면서 차츰 수면 아래로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한 주장의 근거로서 카는 '어센션 섬의 바다거북의 선조'가 백악 기 후기에는 브라질 해안에서부터 대서양 중앙 해령 위쪽에 있던 어센 션 섬까지의 짧은 거리를 헤엄쳐 건넜다는 설을 제안했다. 그 후 이 섬 이 점차 이동하여 가라앉게 되고, 또 하나의 새로운 섬이 그 해령 위에 나타나자 바다거북은 그곳까지 좀더 먼 거리를 헤엄치게 되었다는 것이 다. 이러한 과정이 계속되어, 매일 조금씩 조깅 거리를 넓히던 사람이 결국 마라토너가 되는 것처럼 거북들도 2천 마일에 달하는 여정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이 역사적인 가설로는 바다거북들이 어떻게 푸른 바다 위에 흩어져 있는 점과 같은 작은 섬을 찾아낼 수 있는지에 대한 또 다른 매혹적인 문제까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갓 부화된 어린 새끼거북들이 적도 해류를 타고 브라질까지 표류해서 올 수는 있다 해도 어떻게 섬까지 되돌아 갈 수 있는 것일까? 카의 상상력에 따르면, 바다거북들은 어떤 천체에서 항로의 단서를 찾아 어센션 섬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자신들의 그 항적을 찾아냈을 때 물의 특징-맛? 냄새?-을 기억해내고는 마침내 섬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라 한다). 카의 가설은 특이한 사례를 통해 역사를 재구성한 뛰어난 본보기이 다. 나 자신도 이 가설을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내가 어 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상식적인 난점 때문이 아니다. 상식적인 난점이 이 가설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들은 항상 새로운 섬이 제시간에 나타나 오래된 섬을 교체시킨다는-그 과정에서 하나의 섬만 발생하지 않아도 '설명' 체계 전부가 무너질 수 있는-가설을 믿을 수 있을까? 또 과연 새로운 섬이 거북에게 잘 발견될 수 있도록 '그들의 진로상에' 나타날 수 있었을까? 어센션 섬 자체의 나이도 7백만 년이 채 되지 않는다. 사실 나는 이런 문제점보다 이론상의 결함이 더욱 마음에 걸린다. 켈 로니아 미다스라는 종 전체가 어센션 섬으로 이동했거나, 또는 그것과 유연 관계가 가까운 종 한 무리가 이 여행을 한 것이라면 나는 별로 이 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행동이라는 것은 형태와 마찬가 지로 기원이 오래된 것이며 자손에게도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켈로니아 미다스는 전세계 바다 구석구석에 번식하고 있다. 어센션 섬의 바다거북은 수많은 번식 개체군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이 번식군의 먼 옛날 선조는 2억 년 전에 웅덩이처럼 작았던 대서양에서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켈로니아속에 대한 기록은 1천 5백만 년 전까지밖에 없다. 아마도 켈로니아 미다스라는 종은 그보다 훨씬 오래되지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다소 불완전하긴 하지만 우리는 화석 자료를 통해 1천만 년 이상 살아 남았던 척추 동물의 종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카는 초기 어센션 섬에 헤엄쳐 닿았던 거북이 켈로니아 미다스의 먼 선조격-적 어도 다른 속에 속하는-이었다고 생각했다. 몇 차례 종분화가 일어난 결과, 이 백악기의 선조는 현재의 바다거북과 유연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카의 가설이 옳다고 가정하고 그러한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한번 생각해보자. 선조 종은 틀림없이 몇 개의 번식 개체군으로 분리되었을 테고, 그 중 하나만이 원래의 어센션 섬으로 건너갔을 것이다. 이 종은 그 후 밝혀지지 않은 여러 진화적 단계를 거쳐 새로운 종으로 진화하여 결국 켈로니아 미다스와 유연 관계가 멀어졌을 것이 다. 어센션 섬의 개체군은 다른 격리된 개체군들과 보조를 맞춰 하나의 종에서 다른 종으로 변화하면서 매 단계마다 각기 독자적인 완전성을 갖 추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진화는 이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 다. 새로운 종은 격리된 작은 개체군에서 시작하여 이후 확산돼나가는 것이다. 넓은 범위에 걸쳐 흩어져 있고, 격리된 동일 종의 아 개체군 들은 한 종에서 다음 종으로 병행하여 진화하지 않는다. 만약 특정 개 체군들이 서로 격리되어 번식하는 계통이라면, 과연 모든 개체군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진화하고, 새로운 종이라 부를 만큼 완전히 다른 종으 로 변화할 수 있도록 상호 교잡할 가능성이 있겠는가? 다른 종류와 마찬가지로 켈로니아 미다스는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가 지금과는 달리 서로 가까웠던 과거 1천만 년 이내의 한 시기에 작은 지역에서 발생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륙 이동설이 유행하기 전인 1965년에 카는 다른 설명을 시도했다 내게는 이것이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들렸다. 그 가설은 어센션 섬의 개 체군이 켈로니아 미다스라는 종이 진화한 후에 나타났다고 설명하기 때 문이다. 그는 이 섬의 개체군 선조가 적도 해류를 타고 표류하다가 서 아프리카에서 우연히 어센션 섬에 도착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카는 서 아프리카의 레프도켈리스 올리바케아Lepidochelys olivacea라는 꼬마바다거 북도 이 경로를 따라 남아메리카 해안으로 이주했다고 주장한다). 그 후 갓 부화된 새끼바다거북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동일한 해류를 타고 브라질로 이동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다시 어센션 섬으로 되돌아오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북의 이동 메커니즘은 지극히 불가사 의한 것이어서, 새끼거북은 이전 세대로부터 유전 정보를 물려받지 않 는다 해도 자신이 태어난 장소를 기억할 수 있도록 각인imprint되는 것 은 가능하다. 나는 학자들 사이에 대륙 이동설이 확실한 사실로 받아들여졌다는 것 이 카의 생각을 바꾸게 한 유일한 요인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카는 자신의 가설이 일반적으로 과학자들이 선호하는 설명의 기본 양식을 몇 가지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지지하고 있다고 암시한다 (나의 전통타파적 사고 방식으로 보면 부정확한 생각이지만) 카의 새로운 가설에 의하면, 특이한 어센션 경로는 알기 쉽고 예측 가능한 방법으로 조금씩 조금씩 발전한 셈이다. 과거에 그는 그러한 변화가 돌연한 사건이었고 우연의 지배를 받는 예측 불가능한 역사의 변덕이라고 보았다. 진화학자들에게는 규칙성을 중히 여기고 점진적인 학설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서양적인 사고 전통에서 오는 뿌리 깊은 편견 일 뿐이지 자연 방식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5 장 참조). 그리고 카의 새로운 학설을 전통적인 철학에 근거한 대담한 가설이라고 간주하고자 한다. 나는 그의 가설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창의성과 노력, 방법에 대해서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는 특이한 것을 변화의 신호로 사용한다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원칙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다. 거북 이야기는 역사적 과학의 또 다른 측면-이번에는 설명의 원리가 아닌 좌절의 문제-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결과가 원인을 밝혀내기란 좀처럼 힘들다. 우리가 화석이나 인간의 연대기와 같은 직접적인 증거를 갖고 있지 않을 때, 또 현재 나타난 결과만을 토대로 그 진행과정을 추론하지 않으면 안 될 때 대개 우리는 벽에 부딪쳐 포기하거나, 아니면 심도 깊게 고찰할 수 있었던 것을 막연한 가능성으로 축소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많은 길이 무수한 로마로 통하기 때문이다. 이번 게임은 바다거북의 승리이다. 그래서 안 될 이유가 있는가? 포르투갈 선원들이 아프리카 해안을 끼고 항해하고 있을 때 켈로니아 미다스는 대양 한가운데 어느 한 점을 향해 곧장 헤엄치고 있었다. 뛰어난 과학자들이 몇 세기에 걸쳐 항해 도구를 개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 고 있는 동안 이 바다거북은 넓은 하늘을 쳐다보며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제3장 이중의 어려움 자연은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왔던 것 이상으로 영국의 수필가 아이작 월턴을 미숙한 아마추어 낚시꾼으로 지목한다. 테드 월리엄스가 나타나 기 전까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낚시꾼이었던 아이작은 1654년 자신을 매혹시키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내가 가진 것은 모조 다랑어‥‥‥매우 교묘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것은 급류 속에서 아무리 날카로운 눈을 가진 뱀장어라도 속일 수 있다네 ." 나는 이전에 발간한 '다윈 이후'라는 책의 한 장에서 민물조개의 일종인 람프실리스Lampsilis가 몸체 뒷부분에 미끼 '물고기'를 달고 다 닌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눈을 의심할 정도로 감쪽같이 위장된 이 미끼는 유선형 '몸통'을 가지고 있고, 옆쪽으로는 목표물을 더 잘 유인하기 위해 지느러미와 꼬리 모양을 한 플랩(flap 너풀너풀한 돌출물/옮긴이)을 달고 있으며, 눈 무늬까지 흉내내고 있다. 플랩은 마치 작은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는 듯 율동적인 운동을 한다. 이 '물고기'는 그 조개의 난낭(몸통)과 외피(지느러미와 꼬리)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 미끼에 진짜 물고기가 꼬이면 어미조개는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그 물고기를 향해 난낭에서 유생을 발사한다. 그러면 람프실리스의 유생들은 물고기의 아가미에 붙어 기생 동물로 자라난다. 따라서 이 미끼는 매우 유용한 장치인 셈이다. 나는 최근 그런 생물이 람프실리스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몹시 놀랐다. 어류학자인 테드 피치와 데이비드 그로베커는 필리핀산 앵글 러피시(아귀아목 물고기의 일종/옮긴이)의 표본 한 마리를 발견했다. 그것은 야외에서 대담한 모험을 한 결과 얻어낸 것이 아니라 종종 풍부 하고 새로운 과학적 지식의 원천이 되는 유리 수조를 갖춘 한 마을의 소매점에서 산 것이었다(때로는 남자다움보다는 예리한 주의력 쪽이 신기 한 발견을 할 수 있게 하는 덕목이 되기도 한다). 앵글러피시는 이 미끼를 이용해 자기의 유생을 다른 물고기에게 실어 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먹이를 낚시로 건져 올리기도 한다. 그들의 등지느러미 맨 끝부분에는 등지느러미의 가시가 기묘하게 변형돼 있고, 그 가시 끝에는 매우 독특한 미끼가 달려 있다. 빛이 닿지 않는 암흑 세계에 사는 심해종 가운데는 자체 조명 을 사용해서 낚시를 하는 생물들도 있다. 그들은 자신의 미끼에 인광 박테리아를 기생시킨다. 얕은 물에 사는 종은 화려한 색깔과 울퉁불퉁 한 몸체를 가지고 있어서, 얼핏 보기에는 해면이나 해초에 덮힌 바위처 럼 보인다. 그들은 물밑에 달라붙어서 입 가까운 곳에 있는 가짜 '미끼' 를 물결치거나 흔들어댄다. 이 '미끼'는 종에 따라 다르지만, 연충류나 갑각류를 비롯해 바다에 사는 여러 종류의 무척추 동물들에게는-때로는 불완전하지만-비슷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피치와 그로베커가 발견한 앵글러피시에는 람프실리스 뒤쪽에 붙어 있는 미끼와 완전히 동일하며 매우 인상적인 물고기 형태의 '미 끼'가 발달해 있었다. 이것은 이런 유의 미끼로는 최고라 할 만하다(이 들 두 사람의 논문에는 '완전한 낚시꾼'이라는 적절한 표제가 붙어 있으며 책머리에는 앞서 언급했던 원턴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이 절묘한 속임수는 매우 정확한 위치에 마치 눈처럼 보이는 무늬까지 찍어놓고 있다. 게다가 몸통 아래쪽에는 가슴지느러미와 배지느러미를 나타내는 가느다란 실이 달려 있고, 등이 연장되어 등지느러미와 꼬리지느 러미와 흡사한 모습으로 발달했다. 심지어 아무리 보아도 영락없는 꼬리 비슷한 것이 뒤쪽의 돌출부에서 이어져 나와 있다. 피치와 그로베커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이 "미끼"는 필리핀 해역에는 얼마든지 있다. 농어류의 어떤 과에 분류해 넣어도 좋을 만큼 물고기의 정확한 복제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앵글러피시는 때때로 그 미끼를 수중에서 미세하게 물결치게 해서 "마치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의 좌우 방향에 나타나는 물결을 닮게"하기까지 한다. 이매패(두 장의 조가비를 갖는 식용 조개/옮긴이)와 어류 일부 종에 거 의 동일하게 나타나는 이러한 계략들은 언뜻 보기에는 다윈적인 진화를 뒷받침해주는 실례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만약 자연 선택이 이처럼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라도 해낼 수 있을 것 이다. 그러나 앞선 두 장에서 다룬 주제를 계속하면서 이 3부작을 끝내 겠지만, 완전성이라는 것은 진화론자나 창조론자에게 모두 같은 의미를 갖는다. 성경 시편의 저자는 이렇게 노래 부르지 않았는가? "하늘은 신 의 영광을 나타내고, 창공은 그의 뛰어난 손재주를 드러낸다." 앞의 두 장에서는 불완전성이라는 것이 진화를 입증해주는 열쇠 구실을 한다고 했지만, 이 장에서는 완전성에 대해 다윈주의가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그런데 완전성보다 더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유연 관계가 아주 먼 다른 종 동물에게서 동일한 완전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매패의 뒤쪽에 달린 물고기, 앵글러퍼시의 코 앞에 달린 또 다른 물고기-전자는 난낭과 외피로부터 진화한 것이고, 후자는 등지 느러미의 가시에서 진화했다는 사실-가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든다. 물론 진화론적으로 각 '물고기'의 기원을 논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람프실리스에 관해서는 실제로 그럴듯한 중간 단계들을 확인할 수도 있다. 앵글러피시 등지느러미에 달린 가시가 '미끼'로 기능한다는 것은 판다의 엄지손가락이나 난초의 입술꽃판에서 일어난 진화를 강력 하게 이야기해주고 있다. 즉 하나의 부품을 임시 방편으로 유용한다는 원리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1장 참조) . 그러나 다윈주의자들은 진화를 입증하는 것 이상의 연구를 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임의적인 변이와 자연 선택이라는 기본 메커니즘을 진화적 변화의 근본 원인으로서 옹호할 책임이 있다. 반 다윈주의적 진화론자들은, 진화는 계획되지 않고 특정 목표를 갖 지 않는다고 한 다윈적인 중심 개념에 맞서서 별개의 계통에서 나타나 는 매우 유사한 적응 형태의 '반복적인' 발생을 항상 선호해왔다. 만일 서로 다른 생물체들이 반복적으로 매우 흡사한 방법으로 수렴 (계통이 다른 생물이 점점 서로 닮은 형질을 나타내며 진화하는 일/옮긴이) 한다면, 이것은 특정한 변화의 방향이 미리 설정돼 있는 것이지 임의적인 변이속에 일어나는 자연 선택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해주는 것이 아닐까? 또한 반복해서 나타나는 형태 자체를 그것에 이르는 무수한 진화적 사건의 요인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예를 들어 아서 커스틀러는 최근에 발간된 여섯 권의 저서에서 다윈주의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잘못된 캠페인을 전개했다. 커스틀러는 진화를 특정 방향으로만 제한하고, 자연 선택의 영향력을 무시하도록 하는 어떤 지시력ordering force을 찾아내고자 했다. 유연 관계가 먼 서로 다른 계통에서 반복적으로 우수한 설계가 진화한다는 사실 이 바로 그가 의지하는 보루인 셈이다. 그는 여러 차례 늑대와 '태즈메 이니아산 주머니늑대'의 동일하게 생긴 두개골을 예로 들었다(이 유대목 육식 동물은 늑대와 비슷하지만 계통학적으로는 웜뱃(작은 곰과 비슷하게 생긴 오스트레일리아산 유대 동물/옮긴이), 캥거루, 코알라 등과 훨씬 가깝 다). 가장 최근의 저서 '야누스Janus'에서 커스틀러는 이렇게 쓰고 있 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선택이 아니라 임의적인 변이에 의해 일어 난 늑대라는 단일 종의 진화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어떤 어려움을 안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섬과 대륙에서 각기 독자적으로 두 차례 일 으킨과는 것은 기적을 제곱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에 대한 다윈적인 반응은 부정과 화해 양쪽을 모두 포함한다. 첫째, 부정적인 반응: 고도로 수렴된 여러 개체군들이 대개 동일한 형태를 띤다는 주장은 결코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1931년에 죽은 벨 기에 출신의 뛰어난 고생물학자 루이 돌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잘못 이 해된 '진화 불가역의 법칙' (돌로의 법칙이라고도 불린다)이라는 원칙을 수립했다.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과학자들 가운데는 돌로가 진화란 오로지 앞을 향해 전진할 뿐이며 절대 뒷걸음질을 용납하지 않는 지향력directing force이라 주장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돌로를, 자연 선택이 자연의 질서를 구성하는 요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비다윈주의자의 한 사람에 포함시키기까지 했다. 그러나 실제로 돌로는 수렴 진화convergent evolution(서로 다른 계 통에 동일한 적응 형태가 일어나는 현상)에 흥미를 보인 다윈주의자였다. 그는 기본적인 확률론으로 보더라도 수렴을 통해 완전히 유사한 상태에 까지 이르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생물은 결코 자신의 과거 흔적을 지을 수 없다. 물론 계통이 서로 다른 생물이 공통된 생활양식에 적응해가면서 외면적으로 유사성을 띠게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생물체는 수많은 복잡하고 독립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전부가 완전히 똑같은 결과를 얻기 위해 두 차례 진화할 가능성은 전혀없다. 진화는 거꾸로 돌릴 수 없다. 선조의 징후는 언제나 보존되며, 수렴은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여도 항상 표면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가장 경탄스러운 수렴의 예로 꼽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것은 바로 어룡이다. 육생 선조에서 파생한 이 바닷속 파충류는 어류에 흡사하게 수렴해서 매우 효율적인 유체 역학적 설계의 등지느러미와 꼬리를 그야말로 적절한 위치에 발달시키고 있다. 이러한 구조가 그토록 주의를 끄는 것은 그것들이 원래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무에서 진화했기 때문이다(선조인 육생 파충류는 등에 아무런 융기도 없었고, 꼬리에는 지느러미로 발달할 수 있는 어떠한 징후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룡은 전체 설계나 복잡한 세부 구조에서 물고기와는 사뭇 다르다(예를 들어 어룡의 등뼈가 꼬리 아래 안쪽으로 뻗어 있는 데 비해 꼬리 척추를 갖는 어류의 등뼈는 어깨뼈 속으로 뻗어 있다). 어룡은 폐를 가지고 있어서 수면에서 호흡할 수 있으며, 지느러미가 아니라 변 형된 발의 뼈를 골격으로 하는 지느러미 모양의 발을 가지고 있어서 여전히 파충류에 속한다. 커스틀러의 육식 동물도 같은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태반 늑대도 유 대목 '늑대'와 마찬가지로 사냥을 하는 데 효율적으로 설계돼 있지만, 전문가라면 그들의 두개골을 착각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외면적 인 형태와 기능이 서로 수렴한다고 해서 유대목 특유의 몇 가지 작은 특징이 지워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설명: 다윈주의는 커스틀러가 생각한 것처럼 변덕스러운 변화 이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임의적인 돌연 변이가 변화의 원료일지는 모 른다. 그러나 다윈주의는 자연 선택이라는 매체를 통해 대부분 변이체 들이 배격되는 한편 국지적인 환경에 대해 적응을 강화한 소수 변이체 들이 이전보다 훨씬 우수한 설계를 형성해간다고 주장하고 있다. 강한 수렴이 일어나는 근본 원인은 생활을 유지하는 일부 방법이 (그 방법들이 기능하는) 모든 생물체에 동일한 형태와 기능이라는 기준을 부 과하기 때문이다. 육식성 포유류는 부지런히 달리고 먹이를 사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먹이를 찢어서 삼키기 때문에 먹이를 잘게 으 깨는 데 사용되는 어금니가 필요하지 않다. 태반 늑대와 유대목 늑대는 모두 지속적으로 질주하는 데 유리한 구조를 가지며, 날카롭고 뽀족한 긴 송곳니와 퇴화한 어금니를 가지고 있다. 육생 척추 동물은 네 다리를 이용해 앞으로 나아가며, 균형을 잡기 위해 꼬리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물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는 지느러미로 균형을 잡으며 꼬리로 물을 뒤쪽으로 쳐 밀어내 추진력을 얻기도 한다. 물고기처럼 생활하는 어룡류는 (나중에 고래에서 일어난 것처럼) 폭이 넓은 추진형 꼬리를 진화시켰다. 그러나 고래의 수평 꼬리는 상하로 물을 치는 데 비해 어류나 어룡류의 수직 꼬리는 좌우 방향으로 움직인다. 오늘날까지도 판을 거듭해 출판되면서 항상 현대적 의미를 잃지 않고 있는 『성장과 형태에 관해서』라는 저서를 웬트워스 톰프슨이 처음 발간 한 것은 1942년이었다. 지금까지 그만큼 뛰어난 언변으로 정교한 설계 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생물학적 주제를 논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과대 선전이나 과장을 일체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피터 메더워 경은 이 책을 "영어로 기술된 모든 과학 간행물 가운데 타의 추종을 불 허하는 가장 훌륭한 문학 작품"이라고 평하고 있다. 동물학자이자 수학 자며 고전학자이자 산문 문장가인 톰프슨은 나이를 먹은 후에야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고 방식은 너무도 파격적이어서 권위주의적인 런던 대학이나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는 교수 자리를 얻지 못하고, 나머지 전생애를 스코틀랜드의 한 작은 대학에서 끝내야만 했다. 톰프슨은 공상가를 넘어 탁월한 반동주의자였다. 그는 피타고라스에 깊이 경도되었으며, 그리스 기하학자로서 연구하기도 했다 그는 자연 물 속에 반복적으로 구현되는 이상적 세계의 추상적인 형태를 찾아내는 데 지고의 기쁨을 느꼈다. 벌집이나 일부 거북의 등껍질에서 반복적인 정육각형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솔방울이나 해바라기꽃-그리고 줄기에 잎이 나는 방식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에 나타나는 나선의 수가 피보나치 수열Fibonacci series을 따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공통되는 한 점에서 방사하는 나선들의 체계는 왼감기나 오른감기의 형태로 나타난다. 왼감기와 오른감기의 나선 수는 같지 않고, 피보나치 수열에서 연속하는 두 개의 수로 나타난다. 피보나치 수열이란, 이웃하는 두 개의 정수의 합으로 이루어지는 수열을 뜻한다. 즉 1, 1, 2, 3, 5, 8, 13, 21등이 그 수열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솔방울은 13개의 왼감기 나선과 21개의 오른감기 나선을 가질 수 있다.) 수많은 권패류의 껍질, 숫양의 뿔, 빛을 향해 날아가는 나방의 궤적이 대수 나선logarithmic spiral이라 불리는 곡선을 이루는 까닭은 무엇인가? 톰프슨의 대답은 매번 동일하다. 즉 이러한 추상적인 형태들이 최상의 해결책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들은 적응에 이르는 최선의 길,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종이지만 동일하게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삼각형, 평행사변형, 육각형은 빈틈없고 완전하게 공간을 채우는 유일한 평면 도형이다. 그 가운데 육각형이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은 그것이 원에 가깝고 지지벽의 역할을 하면서도 내부의 넓이를 극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벌집을 예로 들자면, 육각형은 가장 많은 양의 꿀을 저장하기 위한 최소의 구조물이다). 피보나치 패턴은 이용할 수 있는 최고 넓이의 공간 속에 한 차례에 하나씩, 최정점에 새로운 하나를 덧붙임 으로써 형성된 방사형 나선 체계에서는 자동적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대수 나선은 크기가 커지더라도 그 형태가 변하지 않는 유일한 곡선이다. 나는 톰프슨이 제기한 이러한 추상적인 형태를 최적 의 적응 형태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좋은' 형태가 종종 이처럼 단순한 수량적 규칙성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좀더 큰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해서는 단지 무지와 경이를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지금까지 나는 반복되는 완전성 이라는 문제에 대한 쟁점의 절반밖에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는 그 동안 '왜'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다. 나는 수렴이라는 것이 서로 다른 두 종의 복잡한 생물을 완전히 동일하게 만 드는-그것은 다윈적인 진화 과정을 무리하게 작용시킨 것이다-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매우 흡사하게 일어나는 반복이라는 문제를, 극히 제한적인 해결 방법밖에 없는 공통의 문제에 대한 최적의 적응으로써 설명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람프실리스나 앵글러피시의 미끼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미끼는 어떻게 발생하였을까? 최종적으로 나타난 적응 형태가 아무리 복잡하고 특이한 것이라도 서로 다른 기능을 갖는 평범한 부분으로부터 진화한 경우 그 문제는 특히 난해해진다. 가령 앵글러피시의 물고기 비슷한 미끼가 현재와 같이 정교한 의태를 하는 데에 연속되는 5백 회의 변형이 필요했다면 그 과정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그리고 최종 목표를 인식하고 있는 어떤 비다윈적인 힘이 그것을 추진한 것이 아니라면, 그러한 변형이 잇달아 계속된 까닭은 무엇인가? 단지 한 단계의 변형만으로 무슨 이득이 있는가? 5백분의 1의 변형만으로도 궁극적인 목표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을까? 이에 대한 톰프슨의 대답은 조금 과장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본질은 예언적인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생물체는 그것에 가해지는 여러 가지 물리적 힘에 의해 그 형태가 형성된다고 한다. 요컨대 최적 조건에 있 는 형태는 적절한 여러 가지 물리적 힘에 영향받는 가소성 물질 의 자연적인 상태 그 자체라는 것이다. 생물은 여러 가지 물리적 힘의 체제가 변할 때 하나의 최적 상태에서 다른 최적 상태로 갑작스럽게 도약한다. 지금 우리들은 여러 가지 물리적 힘들이 너무 약해서 형태를 직접 형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대신 자연 선택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그러나 선택이 느리고 지속적인 방식으로밖에 작용할 수 없다면, 다시 말해 어떤 복잡한 적응 형태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한 걸음씩 누적적으로밖에 작용할 수 없다면 우리들은 다시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나는 한 가지 해답이, 여러 가지 물리적 힘이 생물체를 직접 형성시킨다는 아직 입증되지 않은 주장 뒤에, 즉 톰프슨의 통찰의 본질 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복잡한 형태는 몇 가지 생성 요인의 훨씬 단순한-종종 대단히 단순한-체계에 의해 완성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생물을 이루는 여러 부분들은 성장 과정에서 복잡하게 연결되고, 그 속에 어떤 변화가 그 생물체 전체로 퍼져 나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그 생물체 전체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 시카고에 있는 필드 자연사 박 물관의 데이비드 라우프는 톰프슨의 통찰을 현대의 컴퓨터에 응용시켜 모든 권패들-앵무조개에서 이매패, 달팽이에 이르는 생물들-이 세 가지 단순한 성장 경사gradient를 여러 가지로 바꾸어냄으로써 형성되 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라우프의 프로그램을 사용해 세 가지 경사 가운데 두 개를 수정하면 한 마리의 보통 권패를 보통 달팽이로 바꿀 수 있다. 실제로 믿건 안 믿건 간에 현존하는 달팽이과의 어느 한 속은 보통 이매패의 것과 흡사한 두 장의 껍질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 매우 흥미로운 클로즈업 영화(근접 촬영으로 상을 확대시킨 영화/옮긴이)에서 달팽이의 머리가 두 장의 껍질 사이를 뚫고 나오는 것을 보고 너무 놀라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한 경험이 있다. 진화의 징후로서 완전성과 불완전성의 문제를 다룬 나의 3부작은 이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실은 이 모든 장은 판다의 '엄지손가락'과 연관되는 논의를 연장한 것이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이런저런 샛길 로 빠지기도 하고 엉뚱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까지 서술한 세 장의 유일하고 구체적인 목표는 바로 판다의 엄지다. 하나의 손목뼈로 이루어졌고, 역사의 징후로서는 다소 불완전한 이 엄지손가락은 아쉬운 대로 쓸 만한 몇몇 부분에서 발생되었다. 드와이트 데이비스는, 만일 자연 선택이 무수한 단계를 거쳐 서서히 곰을 판다로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무력한 것이 아닌가 하는 딜레마에 부딪쳤다. 그래서 그는 문제를 단순한 생성 요인의 체계로 축소시키는 톰프슨의 해 결 방법을 옹호했다. 아울러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근육이나 신경을 모두 갖춘 엄지손가락이라는 복잡한 장치는 요골종자골이 단순히 확대하는 과정에서 자동적으로 생겨났다고 한다. 더욱이 그는 머리뼈 형태에서 나타난 복잡한 변화가-잡식성에서 대나무만을 먹는 식성으로 변한 것-한두 가지 근본적인 변화로 인해 나타났을 거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극소수의(아마 6개 이하) 유전적 메커니즘이 곰속에서 자이언트 판다 속으로 적응적 이행해가는 데 관여했다. 이러한 메커니즘 작용은 대부분 확실하게 인정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밑에 내재하는 변화의 유전적 연속성-다윈설의 본질적인 가정-에서 그 결과의 잠재적이고 일시적인 변화-즉 그것의 결과로 나타난 복잡하고 성숙한 생물체-로 이행할 수 있게 된 것이 다. 복잡한 체계 내에서는 입력input이 비록 유연하게 이어진다 해도 그 출력output이 일시적인 변화로 나타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 문제, 그리고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을 이해하려는 탐 구라는 근본적인 역설과 맞닥뜨린다. 이보다 낮은 구조적 복잡성 수준에서는 이러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두뇌가 진화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 정도의 복잡성 수준에서, 우리는 우리의 두뇌가 고안해내기 좋아하는 단순한 답으로 그 해답을 찾아낸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제2부 다윈적 세계 제4장 자연 선택과 인간의 뇌-다윈과 월리스의 논쟁 샤르트르 대성당의 남쪽 수랑(십자형 교회당의 양쪽 날개부/옮긴이)에는 중세에 만들어진 스테인드 글라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창문이 하나 있다. 거기에는 네 사람의 사도들이 구약 성서에 나오는 네 사람의 예언자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장이로 묘사되어 있다. 1961년 당시 매우 우쭐거리는 대학생이었던 나는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해 그 창문을 쳐다본 순간 곧바로 뉴턴의 유명한 구절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뉴턴의 말이 독창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내고는 마치 대발견이라도 한 양 기분이 들떴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세상 풍파에 찌들어 그전 같은 의기 양양함을 상 실한 나는 컬럼비아 대학의 한 저명한 과학사회학자 로버트 K. 머튼이 뉴턴 이전에 이러한 비유가 사용된 용례를 무려 책 한 권에 달하는 분 량으로 수집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책에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라는 매우 적절한 제목이 붙어 있었다. 머튼은 이 명문구를 1126년 당시의 샤르트르의 베르나르까지 추적해 올라가서, 저 장대한 남쪽 수랑에 있는 창문-성 베르나르의 사후에 설치되었다-은 그의 비유를 스테인드 글라스 속에 담아내려는 시도를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의 말을 인용했다. 머튼은 중세로부터 르네상스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지식인 사회를 제멋대로 희롱하면서 그 책을 능란한 솜씨로 완성했지만, 그 속에는 그 의 진지한 주장이 들어 있었다. 머튼은 자연과학상의 '복수의 발견 multiple discoveries'을 연구하는 데 평생의 대부분을 바쳤다. 그에 따 르면, 중요한 생각은 대체로 한 사람 이상에게 떠오르는 법이며 거의 동시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위대한 과학자들은 각자의 문화로부터 유리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깊이 묻혀 있다고 한다. 뛰어난 개념들은 대부분 '공중을 떠돌고' 있어서 여러 과학자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각자의 포획을 위한 그물을 휘두르고 있다는 것이다. 머튼이 이야기하는 '복수의 발견' 가운데 가장 유명한 예는 나 자신 이 연구하고 있는 진화생물학 분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미 잘 알려 진 사실이니 여기서는 간략하게 소개하기로 하겠다. 다윈은 1838년에 독자적으로 자연 선택설을 수립했고, 그 이론을 1842년과 1844년에 두 편의 발간되지 않은 초고에서 처음으로 개진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혁명적인 내용을 그대로 발표하는 데는 두려움을 느꼈다. 결국 그는 무려 15년 동안이나 애태우고, 방황하고, 기다리고, 심사 숙고하고, 자료 수집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는 친한 친구들의 부추김에 힘입어 '종의 기원'의 네 배에 달하는 엄 청난 분량의 대작을 쓰기 위해 자신의 노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1858년에 다윈은 자기보다 훨씬 젊은 박물학자 알프레드 러셀 월리 스로부터 편지와 함께 동봉된 한 편의 원고를 받았다. 월리스는 말레이군도의 한 섬에서 말란리아에 걸려 누워 있는 동안 자연 선택설을 독자적으로 구축한 인물이었다. 다윈은 월리스의 이론이 세부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이론과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놀랐다. 더구나 월리스는 같은 비 생물학적 근거-맬서스의 '인구론'-에서 착상을 얻었다고 쓰기까지 하고 있었다. 이에 몹시 불안해진 다윈은 도량이 큰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 자신의 정당한 선취권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려 했다. 그리고 지질학자 라이엘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월리스나 그 밖의 다른 누구에게 비천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비쳐지느니 차라리 나의 책을 모두 불살라버리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암시를 덧붙이고 있다. "혹시 명예를 지키면서 내 이론을 발표할 수 있기만 하다면, 나는 월리스가 나의 전반적 결론과 동일한 논문을 보내왔기 때문에... 내가 이 초고를 발표하게 되었다고 쓸 작정 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라이엘과 식물학자인 후커는 덫에 걸려들어 다윈을 구원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다윈이 성홍열로 어린 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겨 집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그들은 다윈의 1844년 에세 이의 발췌분과 월리스의 원고를 함께 실은 공동 집필 논문을 런던의 '린네학회'에 보냈다. 이듬해 다윈은 그보다 훨씬 긴 저술을 필사적으로 편집하고 고쳐 쓴 요약분, 즉 '종의 기원'을 출간했다. 이로써 월리스는 빛을 잃었다. 역사상 월리스는 항상 다윈의 이름 뒤에 따라 나오는 '그림자'였을 뿐이다. 다윈은 자신보다 훨씬 젊은 동료 학자에게 공적으로도 사적으 로도 항상 친절하고 관대하게 대했다. 그는 1870년에 월리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우리 두 사람이 어떤 의미에서는 라이벌이면서도, 서 로에 대해 한 번도 질투심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을 돌이켜 생각하면 서 귀하께서도 만족했으면 합니다. 제 생애에 그보다 더 만족스러운 일 은 없습니다." 이 편지에 대한 답변에서 월리스도 시종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 1864년 그는 다윈에게 이런 글을 보냈다. "저는 자연 선택설이 오직 선생님 연구의 소산이라고 주장할 것이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입니다. 제가 그 주제에 대해 깨달음을 얻기 훨씬 전부터 선생님은 이미 저로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세부에 걸쳐 그 이론을 정립하셨습니다. 제 논문은 어느 누구도 설득시킬 수 없었거나, 또는 단지 기발한 공상이라는 관심 이상의 평가를 받지 못했을 겁니다. 반면 선생님의 저서는 박물학 연구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고, 오늘날 최고 지성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순수한 호의와 상호 지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 간에 나타난 진 화론의 근본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를 드러나지 않게 했다. 자연 선택 은 진화적 변화의 요인으로서 얼마나 독점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가? 생물의 특성은 모두 적응이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는가? 월리스가 다윈에게 종속된 분신의 역할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통념은 마치 정설처럼 받아들여져, 이들 두 사람이 여러 가지 이론적인 문제를 두고 사사건건 의견을 달리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진화론 연구자들 가운데서도 별 로 없다. 따라서 많은 평자들은 뒤늦게야 그들의 의견 불일치가 기록으로 남아 있는 특수한 영역, 즉 인간 지능의 기원에 대한 문제에서 이것을 논의하고 있다. 그것은 자연 선택의 힘에 관한 더 보편적인 견해 차이라는 폭넓은 배경 속에 이 논쟁을 올바로 자리매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묘하고 파악하기 어려운 개념들이 융통성 없는 절대적 용어로 표현 되고 나면 이들 대부분이 시시해지거나 비속해지는 경우가 많다. 마르 크스는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임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주장이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라고 왜곡되는 데 맞서 논쟁해야만 했다. 다윈은 자신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극단적인 사고 방식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살던 시대에도, 오늘날에도 '다윈주의'는 모든 진화적 변화를 자연 선택의 산물로 보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윈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이름이 잘못 거론된 데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는 '종의 기원'의 최종판(1872년)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최근 들어 나의 결론이 현저히 잘못 이해되고, 또한 내가 종의 변화를 오로지 자연 선택의 결 과로 돌리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으니, 이 책의 초판 및 이후 판 에서 -즉 서문의 말미에-써놓았던 다음과 같은 분명한 입장을 여기에 서 다시 한 번 강조해도 될 것 같다. '나는 자연 선택은 변화의 주요 수단이기는 하지만 유일한 수단은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입장 표명도 별 효과가 없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오해의 힘, 그것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에는 소수의 엄격한 선택설 옹호자들-잘못 사용된 이름의 '다윈주의자들'-이 있었다.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가 그 리더격 이었다. 이들은 모든 진화적 변화의 원인을 자연 선택으로 돌렸다. 그 들은 모든 형태 특정 기관의 기능, 특정 행동들을 전부 더 나은 '생 물이 되려는 선택(적응)의 산물로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자연계의 '정의'에 대한 신념, 즉 모든 생물이 나름대로 환경에 절묘하게 적응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비로운 신성을 자연 선택이라는 전능한 힘으로 대체시킴으로써 어떤'의미에서는 자연계의 조화라는 창조론적 관념을 재도입한 셈이다. 이와 반대로 다윈은 시종 일관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우주를 있는 그대로 보았던 다원론자였다. 그는 적응이나 조화를 중시했다. 자연 선택이 진화의 여러 가지 힘 가운 데 가장 우월한 힘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 밖의 과정도 함께 진행된다. 생물들은 적응 구조를 지니지 않고 생존에 직접 도움을 주지 않는 특성이라 해도 나타낼 수 있다. 다윈은 비적응적 변 화로 이어지는 두 가지 원리를 강조했다. 1. 생물은 여러 가지 특성을 고루 갖춘 통합체이므로 적응적 변화 일부가 그 밖의 특성들에 비적응적 변화를 가져오는 경우가 더러 있다(다윈의 표현대로라면 '성장의 상호관계'). 2. 선택의 영향을 받아 특정 역할을 하도록 생겨난 기관은 그 구조에 부수하는 결과로서 선택받지 않은 그 밖의 다른 기능도 함께 수행할 수 있다. 월리스는 1867년 초에 발표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경직된 초선택 주의적인 논조로-스스로 표현한 것에 따르면 '순수 다윈주의'로-그 것을 "자연 선택설로부터 오는 필연적인 추론"이라고 일컬었다. 생물체의 선택이라는 명백한 사실도, 특별한 기관도, 특징적인 형태 나 무늬도, 본능이나 습관의 특이성도, 종 또는 종 그룹 사이의 관 계도 그것들을 가진 개체 또는 종족에게 현재 유용하거나 또는 과거 에 유용하지 않았다면 그 어느 것 하나 결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훗날 그는, 생물체의 어떤 특징이 쓸모없어 보이는 것은 단지 우리들 지식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반영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주장이었다. 왜냐하면 이 주장에 의해 유용성의 원리가 반증을 허 용치 않는 '선험적'인 무엇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기관에 대해 그 '무용성'을 단언하는 것은... 사실의 언명이 아니며, 또 사실의 언명일 수도 없다. 그것은 그저 그 목적이나 기원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 다윈이 월리스와 벌인 공적,사적 논쟁은 모두 자연 선택의 힘에 대한 서로의 다른 평가와 관련된 것이었다. 우선 두 사람은 '성 선택 sexual selection'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성 선택은 보통의 '생존 투쟁(음식 섭취와 방어에서 우선적으로 나타나는)'을 하는 데는 적절치 않거나 심지어 해로워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것은 성공적인 짝짓기를 위한 장치-예를 들어 사슴의 정교한 뿔이나 공작의 꼬리 깃털 등-로서 해석될 수 있다. 다윈은 두 가지의 성 선택을 제안한다. 하나는 암컷에 접근하기 위한 수컷끼리의 경쟁, 다른 하나는 암컷 자신에 의한 수컷의 선택이다. 그는 현대 인류의 인종 분화를 각 민족마다 서로 다른 미를 기준에 따라 성 선택을 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진화에대한 그의 저서 '인류의 기원'(1871년)은 실은 두 개의 저작, 동물계 전체의 성 선택에 관한 긴 논문과 성 선택에 기초한 인간의 기원에 대한 그보다 짧은 논문을 한데 묶은 것이었다). 사실 성 선택이라는 개념은 자연 선택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성 선택이 바로 생식의 성공에 차이가 생긴다는 다윈적인 필연성 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경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월리스는 세 가지 이유로 성 선택 이론에 찬성하지 않았다. 첫째, 성 선택은 자연 선택을 단지 교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생존 자체를 위한 싸움으로 보는 19세기식 사고 방식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이다. 둘째, 동물의 '의지' , 특히 암컷이 수컷을 선택한다는 개념에 지나치게 중점을 두었다는 단점이 있다. 셋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성 선택적 관점에 따르면. 설령 실질적으로는 별 해로움을 주지 않는다 해도 잘 설계된 기계인 생물 체의 작동과 관련이 없는 중요한 특징이 수없이 발달했다는 사실을 인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월리스는, 동물을 자연 선택의 순수하게 물질적인 힘이 만들어낸 절묘한 작품이라 생각했던 자신의 견해에 이 성 선택이 위협을 준다고 느낀 것이다(실제로 다윈은 인종 사이에 수많은 차이점이 나타나는 것은 바람직한 설계에 기반한 생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단지 여러 인종 사이에 미에 대한 기준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적응적인 측면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주장했다. 월리스는 수컷끼리의 상호 투쟁이라는 성 선택을 생존을 위해 격투를 벌이는 자연 선택에 대한 자신의 개념과 상당히 가까운 은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암컷이 수컷을 선택한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이었으며, 거기서 생기는 특징을 모두 자연 선택의 적응작용이라고 억측 해석을 내려 다윈을 커다란 곤경에 빠뜨렸다). '인류의 기원'을 준비하던 1870년에 다윈은 월리스에게 보낸 한 편지 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저는 당신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데 대해 무척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저는 그것이 무섭고, 그 때문에 언제나 스스로를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이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일은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닌 가 하는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월리스의 이견을 이해하려 애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친구가 가지고 있는 자연 선택에 대한 진지한 확신을 어떻게든 받아들이려 했다. 그는 또 월리스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당신은 제가 지금 자기 방어와 성 선택에 관해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우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기꺼이 당신의 견해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가 저녁에는 다시 과거의 입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무래도 그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 선택을 둘러싼 이 논쟁은 가장 감정적이고 논쟁의 여지가 많았던 문제, 즉 인간의 기원에 관한 훨씬 심각하고 널리 알려진 견해 차이로 이어지는 서곡에 지나지 않았다. 월리스는 초선택주의자였고, 생물 형태의 모든 미묘한 차이에 내재하는 자연 선택의 작용을 인정하 려 하지 않았던 다윈을 힐난했지만, 인간 뇌의 문제에 이르러 갑자기 이 힐난을 멈추어버린 것이었다. 월리스는 우리들의 지성이나 도덕성은 자연 선택의 산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연 선택이 진화의 유일한 길이니 생물의 개량 중에서 가장 새롭고 가장 위대한 것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좀더 강한 어떤 힘 -분명히 말하면 신-이 개입하는 것이 틀림없는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