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영혼 다니엘 스틸 장편소설 1 한 줄기 햇살이 길다란 프랑스식 창문으로 비춰들자 집안의 모든 것들이 반짝거리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거의 완벽한 솜씨로 잘 새겨진 장미꽃과, 여인의 흉상이 새겨진 마호가니 장식물이 반들반들하게 윤이 날 정도로 곱게 손질되어 있었다. 방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길다란 탁자 또한 그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보물들로 말미암아 잘 드러나진 않았지만 최상의 품질인 것임에 틀림없었다.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 비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쟁반들, 레이스가 달린 테이블보, 최고급 크리스탈 식기 두 세트, 그리고 은으로 만들어진 양념통, 은촛대 14개가 그 탁자 위에 쌓여 있었다. 여봐란듯이 탁자 위에 진열되어 있는 그 값진 물건들은 모두 결혼 선물로 들어온 것들이었다. 테이블 한쪽 모서리에는 선물을 보낸 사람의 이름과 품목을 적을 수 있도록 그래서 나중에라도 신부가 시간이 나면 고맙다는 인사를 할 수 있도록 종이와 까만색 만년필 한 자루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녀 중의 한사람이 매일같이 그 물건들의 먼지를 털어내는 역할을 맡았으며, 하인의 우두머리가 은제품에서 그 집안의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윤이 나고 있는지를 검사했다. 결코 의식적으로 과시하려는 것 같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부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는 듯했다. 육중한 대문과 잘 손질된 울타리, 혹은 정원에 심어진 나무들과 마찬가지로 무겁게 드리워진 비단 커튼 또한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끌게 했다. 드리스콜의 그 저택은 마치 무슨 요새와도 같아 보였던 것이다. 한 여인의 목소리가 계단을 통해 홀 안으로 울려 퍼졌다. 뒤이어 조그만 히프와 늘씬한 다리, 그리고 어깨의 곡선이 유난히도 아름다운 젊고 키가 큰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비단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쪽두리를 얹은 그녀는 기껏해야 20대 초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선 드레스 자락의 부드러움 말고는 전혀 부드러움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몸을 꼿꼿이 세운 채, 선물 더미를 한번 죽 훑어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로 몇 걸음 더 다가가서 종이에 적힌 이름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스터, 튜더, 반 캠프, 스터링, 플러드, 왓슨, 크락커, 토빈...... 그들은 모두 샌프란시스코의, 캘리포니아의, 아니 이 나라의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유명한 이름들에 유명한 사람들, 게다가 하나같이 훌룡한 선물들이었지만, 그녀는 그다지 기쁘지도 않은 듯 담담한 표정으로 창가로 다가가서 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래왔듯이 정원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녀는 할머니가 해마다 봄이 오면 정원에 심곤 하던 현란한 색채를 머금은 튜울립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꽃 뿐만 아니라 정원 전체를 그녀는 몹시 아끼고 사랑했다. 그녀는 그날 하루 동안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며 천천히 숨을 한번 내쉰 다음 몸을 돌려 선물 더미가 쌓인 테이블을 힐끗 쳐다보았다. 확실히 훌륭한 선물들이었다. 그녀 역시, 마음만 먹으면 훌륭한 신부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오드리 드리스콜은 자신의 가느다란 팔목을 들어 올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다이아몬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조그만 루비가 다이아몬드 사이에 박힌 그 시계를 무척이나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그 집에는 세 명의 하녀와 청지기 한 명, 윗층의 침실들을 청소하는 하녀, 주람의 요리사와 그 조수, 정원사 두 명, 운전사 한 명, 이렇게 모두 열 명의 하인이 있었다. 오드리는 하와이에서 돌아온 이후 14년 동안 이 저택을 꾸려오고 있었다. 호놀룰루에서 양친이 세상을 떠났을 당시 오드리는 열한 살이었고, 여동생 아나벨은 일곱 살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은 여기 말고는 있을 곳이 없었던 것이다. 오드리는 그들이 이곳에 처음 도착했던 안개 낀 어느 날의 아침을 마음 속에 떠올려 보았다. 아나벨은 그때 그녀의 손을 붙잡고 겁에 질린 채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렸었다. 할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는 배 위에서 내내 멀미에 시달렸던 자신과 아나벨을 위해 가정부를 보내 주어 어려움을 덜어 주었지만 그로부터 십년 후엔 오히려 오드리 자신이 결국 독감으로 숨을 거둬버린 가정부 밀러 부인을 돌보아야만 했다. 하지만, 밀러 부인은 오드리에게 이런 훌륭한 고가를 꾸려 나가는 방법을 상세히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그녀의 할아버지가 간절히 원하던 바였고, 오드리 또한 밀러 부인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겨 두었던 덕분에 이 저택을 완벽하게 관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드리 드리스콜이 식당으로 들어가는 동안 텅 빈 방안에서는 드레스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밖에 들려 오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식탁에 혼자 걸터앉은 그녀는 의자 옆에 달려 있는 루비와 비취로 장식된 벨을 눌렀다. 그녀는 항상 여기서 아침 식사를 하곤 했지만, 그녀의 동생은 정갈한 아침상을 봐 오도록 하여 이층에서 아침을 먹었다. 금방 앞치마와 머리 수건을 두른 하녀가 나타나 언재나 그렇듯이 꿋꿋한 자세로 자리에 앉아 있는 그 젊은 여주인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부르셨어요. 드리스콜 아씨 ?" "아침 대신 커피 한 잔만 갖다 주겠어요. 매리?" "네, 드리스콜 아씨." 파란 눈 빛의 그녀에게서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드리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그녀를 잘 알고 있는 하인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하인들은 오드리를 무척 무서워하고 있었다. 이 매리라는 하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리는 오드리 나이 또래의 처녀였는데, 오드리에 대해서는 그녀의 매서운 손과 강한 고집, 그리고 거의 찾아보기 힘든 약간의 유우머 감각 정도 밖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는 오드리의 모든 것은 그 깊고 파란 눈동자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단지 드리스콜 아씨이며 노처녀일 뿐 이였다. 하인들은 모두 오드리를 아씨라고 불렀다. 아나벨은 대단한 미인이었는데, 에드워드 드리스콜은 항상 공공연히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니기도 했다. 그것은 그다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아나벨의 머리칼은 천사와도 같은 부드러운 금발이었는데 30년대에 한창 유행하던 푸석푸석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오드리는 아직도 그들의 양친이 보라보라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목숨을 잃고 난 후, 아나벨이 자신의 팔에 안겨 슬피 흐느끼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모험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던 사람이었고, 어머니 또한 남편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곤 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남편이 영영 자신을 버리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급기야 그녀는 바다 밑바닥까지 그를 쫓아 들어가고 만 것이다. 유해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그들이 탔던 배는 거센 태풍에 난파되었던 것이다. 어린 딸들은 세상에 홀로 버려졌다. 그들에게 남은 혈육이라곤 할아버지 한 분밖에 없었는데, 가련한 아나벨은 그 할아버지를 무척이나 무서워했었다. 할아버지가 한 번 쳐다보기라도 하면 아나벨은 겁에 질려 오드리의 손을 꼭 움켜쥐곤 했던 것이다. 오드리는 그때 생각을 하며 혼자 미소를 떠 올렸다. 여전히 그들에게 있어서 할아버지는 두려운 존재였고, 특히 아나벨에게는 더욱 그랬다. 하녀가 은 주전자를 가지고 와서 오드리에게 커피를 따라 주었다. 상아로 된 손잡이가 달린 그 주전자는 그녀의 부모가 물려 준 다른 보물들과 마찬가지로 호놀룰루에서부터 가져온 것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런 보물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따라서 어머니가 사들인 물건들의 대부분은 포장도 뜯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세계 각지를 돌아 다니는 것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값진 보물들보다는 여행 때 찍은 사진들을 정리해 놓은 앨범을 더욱더 소중히 여겼다. 오드리는 지금까지도 그 앨범들을 자기 방의 책꽂이에 꽂아 두고 있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괜히 잃어버린 외아들 생각만 자꾸 불러 일으키는 그 앨범들을 싫어했다. 그것들을 볼 때마다 '바보 같으니라구...' 이렇게 중얼거리기 일쑤였다. 할아버지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헛된 인생이었고, 그로 인해 어린 두 손녀만 자신이 떠맡게 되어 버린 셈이었다. 할아버지는 아나벨에게 자수와 바느질하는 법을 배우라고 권했고, 아나벨은 할아버지의 말씀에 충실히 따랐지만, 오드리에게는 어떤 요구를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바느질이나 그림에는 전혀 취미가 없었고 그렇다고 원예나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림이나 시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박물관이나 교향악 같은 것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었다. 오드리가 좋아했던 것은 사진이나 모험집, 혹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 들이었다. 그녀는 황당무계한 연설을 들으려고 쫓아다니기도 했고, 해변에 나가서 눈을 감고 바다 냄새를 맡으며 파도가 밀려 오는 태평양 저쪽 끝을 떠 올려 보기도 했다. 그리고 오드리는 할아버지를 위해 살림살이를 꾸려 나갔으며, 하인들을 훌륭하게 다스리기도 했고, 매주 할아버지가 볼 책들을 장만하는가 하면 할아버지의 재산을 불려 나가기 위해 애를 썼다. 아마도 그녀가 무슨 사업을 했더라면 커다란 재능을 발휘했을 테지만, 불행히도 그녀에게는 에드워드 드리스콜의 저택 말고는 꾸려갈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홍차 준비됐어, 매리?" 오드리는 시계를 보지 않고서도 8시 13분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곧 할아버지가 언제나 처럼 정장 차림으로 마치 출근할 사무실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아래층으로 내려올 것이다. 오드리를 화난 듯이 한두번 쳐다보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준비된 홍차를 마시고 신문을 본 다음 반숙한 계란 두 개와 토스트 한 조각을 먹고, 영국제 홍차를 한 잔 더 마시고 나서야 그녀에게 가벼운 아침 인사를 건넬 것이다. 할아버지의 존재를 거의 의식조차 하지 않는 오드리로서는 그러한 할아버지의 행동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열두살 때부터 할아버지의 신문을 읽기 시작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심각하게 할아버지와 함께 토론을 벌이곤 했다. 할아버지는 처음에는 단지 그런 오드리를 재미있어 했을 뿐이었으나, 차츰차츰 그녀가 꽤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스스로의 참신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의 열세 번째 생일날, 할아버지와 손녀는 최초의 정치적 의견 대립을 보였으며, 그 후로 일 주일 동안 오드리는 할아버지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부터 그녀를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 다음부터 그녀는 자신의 조간 신문을 따로 받아 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다시 오드리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했을 때, 그녀는 할아버지가 관심을 가지는 모든 분야에 걸쳐 토론을 벌이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국제 정치에서 조그만 동네 소식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친구들이 연 저녁 파티에 대해서까지 열심히 의견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의견의 일치를 보는 경우란 거의 없었고, 따라서 이것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먹는 것을 아나벨이 싫어하게 된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네, 준비되었어요." 회색 제복을 입은 하녀가 마치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잠시 후, 할아버지의 조심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먼지 한 점 없이 잘 손질된 구두가 보였다. 그는 식당으로 들어와 의자를 끌어당겨 자리에 앉아서는 오드리를 한번 힐끗 쳐다본 다음, 살며시 신문을 펼쳐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하녀가 따라 준 홍차를 역시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그때쯤이면 오드리는 자신의 구리 빛 머리칼 위에, 신문을 들고 있는 손등에 부딪혀 흩어지는 한 여름의 햇살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신문을 읽느라고 완전히 정신을 빼앗기고 있기 마련이었다. 잠시 동안 할아버지는 손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 보았으나, 오드리는 그것조차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잘 잤느냐?" 꼬박 30분이 지나고 나서야 할아버지의 말문이 열렸다. 단정히 손질 된 하안 수염은 말을 할 때도 거의 움직이지 않았고, 팔순 노인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파란 두 눈동자는 빚을 발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입을 열자마자 하녀가 튕기듯이 달려 왔다. 아나벨이 할아버지와 함께 식사하기를 꺼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녀도 할아버지의 식사 시중을 드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오직 오드리만이 할아버지의 무뚝뚝한 태도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할아버지가 미소를 띄우며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춰 주고, 매일 아침 그녀의 이름을 다정스럽게 불러 준다고 해도 오드리의 그런 태도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이다. 사실 에드워드 드리스콜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러주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자신의 부인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그렇게 불러 본 적이 없었지만, 그의 부인은 이미 20년 전에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에드워드는 그 이후로 더욱더 무뚝뚝해진 것 같았다. 그는 상당한 미남이었으며 훤칠한 키에 아직도 꼿꼿한 허리를 유지하고 있었고, 멋있는 하얌 수염과 머리칼, 딱 벌어진 어깨를 자랑하고 있었다. 걸음걸이 또한 조심스럽고 신중했으며, 타인으로 하여금 강인한 인상을 느끼게 하는 갈색 지팡이를 한 손에 들고 다녔다. "너도 신문을 보아서 알겠지만, 그자가 지명이 되었더구나. 바보 같으니라구!" 에드워드의 찌렁찌렁한 목소리가 식당 안에 울려 퍼지자 젊은 하녀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지만, 오드리는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채 파란 눈동자를 들어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관심을 가지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관심이 있고 말고 !" 마치 고함을 지르는 듯한 말투였다. "그자에게 기회가 돌아가서는 곤란하지. 후버가 다시 당선되어야 하니까 말이야. 그 바보같은 녀석 대신에 스미스를 지명해야만 했어." 에드워드는 시카고의 민주당 대회에서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지명되었다는 기사를 리프만의 칼럼에서 읽었던 것이었다. 그는 그 해의 미국 경제가 최악의 불경기에 빠져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버트 후버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에드워드는 그런 불경기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리고 온 나라에 굶주린 실업자들이 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후버를 훌룡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자신은 불경기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는지 헤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후버의 정책은 오드리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녀는 이번에는 민주당에 표를 던지려고 마음먹고 있었으며,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지명된 것에 대해 매우 흡족히 여기고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루즈벨트는 안돼. 그러니 괜히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아라." 에드워드 드리스콜은 신문을 덮으면서 정말로 화가 난 듯한 표정이 되었다. "될 거예요. 그는 틀림없이 될 거예요." 지금 현재 미국이 처해 있는 경제적인 위기를 생각해 보는 듯이 오드리의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정말로 심각한 불경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와 할아버지는 거기에 대한 이야기는 잘 꺼내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곧 후버의 정책적인 오류를 표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나벨은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든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오드리는 달랐다. 달라도 이만저만 다른 것이 아니었다. "할아버지," 오드리는 할아버지를 조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할아버지로부터 되돌아올 반응이 어떠할 것인지 까지도 충분히 계산에 넣고 하는 말이었다. "어떻게 할아버지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렇게 태연하게 말씀하실 수가 있어요? 올해 1932년에, 민주당 대회가 열리기 직전에 시카고와 수많은 은행들이 문을 닫았다구요. 온 나라에 실업자가 들끓고 기근이 거리를 휩쓸고 있잖아요? 어떻게 그런 사실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 버릴 수가 있단 말이에요?" "그건 그의 잘못이 아냐 !" 할아버지는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그의 두 눈은 더욱 빛나고 있었다. "그게 아니 라니까요 !" 오드리도 꽤 흥분한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말투는 무척 침착했다. "오드리 !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 오드리는 사과하지 않았다. 그래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손녀를 잘 알고 있었고, 손녀 또한 할아버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오드리는 할아버지의 정치적인 견해가 어떻든 간에 할아버지를 끔찍이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드워드가 험악한 눈초리로 오드리를 바라보자, 그녀는 할아버지를 향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당선될지 안 될지 지금 당장 할아버지와 내기를 할 수도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 평생 동안 공화당을 지지해 온 그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의 당선에 5 달러를 걸겠어요." 그러자 할아버지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렇게도 타일렀건만 아직도 그 트럭 운전수 같은 말투를 고치지 못했구나." 오드리는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귀에는 조그만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달려 있었다. 그녀가 차고 있는 시계와 마찬가지로 어머니가 물려 준 귀걸이였다. 오드리는 이 두 가지 물건을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녔다. "오늘은 뭐 하실 거예요. 할아버지?" 사실 에드워드가 별달리 하는 일은 없었다. 친구들을 만나거나 그가 자주 나가는 퍼시픽 유니온이라는 클럽에 가서 점심을 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후에는 집에 돌아와서 거의 매일같이 잠깐씩 낮잠을 자기도 했다. 한때 샌프란시스코에서 은행장을 지내기도 했지만, 10년 전에 정년퇴직하고 난 이후로는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함께 생활하는 두 손녀딸이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곧 그의 곁을 떠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아나벨인 이상, 며칠 전 친구에게도 이야기했듯이 그렇게 서운해서 못견딜 정도의 심정은 아니었다. 그녀는 세상이 인정한 미인이었지만, 오드리에게는 확고한 신념과 정신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드워드에게는 오드리가 필요했다. 그와 아나벨은 한번도 진정한 친구가 되어 본 적이 없었다. 그들 사이에는 항상 오드리가 서 있었고 그녀는 자신의 어린 동생을 보호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했다. 아나벨은 어머니가 오드리에게 물려 준 아기였고, 그래서 그녀는 결코 동생을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지 않았다. 지금 오드리는 동생을 위해서 성대한 결혼식을 계획하고 있는 중이었다. 에드워드 드리스콜과 오드리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클럽에나 나가 봐야겠다. 너와 네 동생은 오늘도 내 돈을 축내기 위해 랜소호프로 나갈 생각이겠지 ?" 할아버지는 돈이 다 떨어졌다고 엄살을 떨곤 했지만, 사실은 그 혹독한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할아버지의 모든 재산은 안전하게 투자되어 있어서 경기가 아무리 나빠도 조금의 타격도 받지 않게끔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돈을 아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구요." 오드리는 다정스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들이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아나벨에게는 아직도 사야 할 혼수감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메그린이 아나벨의 웨딩 드레스를 만들었다. 고대 프랑스식의 우아한 레이스와 조그만 진주로 장식되어 있는 그 드레스는 아나벨의 고운 얼굴과 잘 어울릴 듯했다. 그녀의 금 빛 머리칼에 씌워질 망사 역시 우아한 레이스가 달린 아름다운 것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오드리는 아나벨 만큼이나 아름다운 웨딩 드레스에 무척 흡족해 하고 있었다. 모든 준비는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결혼식은 앞으로 3주일 후에 세인트 루크의 성공회 성당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건 그렇고, 저녁 식사 때 하코트가 이리로 올 거래요." 오드리는 이런 이야기를 항상 아침에 할아버지한테 들려 주려고 했다. 사전에 아무런 말도 없이 낯 선 사람이, 아니 비단 낯설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식탁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 할아버지는 어김없이 호통을 치곤 했기 때문이었다. 장래의 손주 사위가 될 하코트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할아버지는 언제나 오드리를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다. 오드리라고 해서 전혀 질투심이 없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나벨은 스물한 살이었고, 오드리는 스물다섯 살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결혼 순서가 뒤바뀐 것처럼 보여졌던 것이다. 오드리는 항상 자신의 겉모습을 검소하게 보이고자 했다. 머리는 언제나 수수하게 뒤로 빗어 넘겼으며, 진한 마스카라나 립스틱으로 화장을 하지도 않았다. 멋을 부리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여러 청년들이 그녀에게 구혼을 해 오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오드리의 할아버지가 그들을 쫓아 버리곤 했었다. 오드리 자신도 그러한 할아버지의 행동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그들은 모두 현실에 안주하려는 냄새가 강하게 풍겨서 너무나 진부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때때로 오드리는 자신의 아버지와 같이 천부적으로 모험심을 타고 났거나 낯선 장소에 대한 동경을 끊임없이 품고 있는 남자를 그려보기도 했었지만, 그런 사람은 커녕 그와 비슷한 사람조차 아직 만나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하코트 역시 마찬가지였고, 따라서 동생의 남편으로는 적합할지 몰라도 자신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 사람 꽤 괜찮은 사람이더구나." 할아버지가 오드리를 보며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사실은 오드리가 동생보다 먼저 하코트를 만났다 하더라도, 흑은 그가 오드리를 한두 번 무도회에 데리고 간 적이 있더라도 결코 오드리는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 하고자 하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오드리는 그를 기꺼이 동생에게 양보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을 하건, 그런 자신에 대해서 전혀 후회같은 것은 없었다. 하코트는 결코 오드리의 영혼의 양식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은 못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나 할는지 조차 의문이었다. 그녀가 갈망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찍어 놓은, 흑은 아버지가 물려 준 너덜너덜한 앨범에 보관되어 있는 사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였다. 오드리의 마음속에는 그녀의 아버지와 같이 심오한 그 무엇인가가 깃들어 있었다. "하코트는 아나벨에게 딱 어울리는 좋은 남편이 될 거야." 할아버지는 항상 오드리를 놀리려는 듯, 혹은 그녀의 반응을 확인하려는 듯 그렇게 말하곤 했다. 할아버지는 아직도 오드리가 하코트를 동생에게 양보한 것은 커다란 실수를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를 여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니, 사실은 단 한 사람도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은 그녀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드리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만의 꿈을, 그리고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가슴속에 키워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때문에 그가 그렇게 좋은 남편이 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오드리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머금었다. "그 사람 역시 할아버지처럼 공화당을 지지하기 때문인가요?" 에드워드 드리스콜이 막 대답을 하려는 순간, 그들 뒤에서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들려 왔다. 파란 비단 옷과 크림색 레이스를 곱게 받쳐 입은 아나벨이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 헤어 스타일을 하고는 오드리를 원망스러운 눈 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언니보다는 조금 작은 키에,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와진 듯 손을 조그만 새의 날개처럼 흔들어대고 있었다. 오드리가 보기에 아나벨은 언제나 우아한 자태를 간직하고 있었다. 아나벨은 여러 가지 면에서 오드리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그래서인지 항상 침착하고 똑똑한 자신의 언니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자 했다. "아침부터 벌써 정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건가요?" 아나벨은 괴롭다는 듯이 손으로 눈을 가리며 말했다. 오드리는 웃고 있었다. 그들은 많은 시간을 정치적인 토론에 할애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저 즐기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그들은 서로 격렬한 논쟁을 나누면서 기운을 얻곤 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아나벨에게는 정말로 싸우는 것처럼 보여 무척 무서워했다. 아나벨은 사실 정치라는 주제 자체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벌이는 논쟁이 하잘 것 없는 정력의 낭비라고 생각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어젯 밤의 시카고 민주당 대회에서 후보로 지명되었단 말이야. 너도 그런 것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오드리는 그런 문제가 무척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나벨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언니를 가만히 올려다 보며 물었다. "왜?" "그분이 알 스미스와 존 가너를 물리쳤기 때문이지." 오드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아나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물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물은 것은 내가 왜 그런 것을 알고 있어야 하느냔 말야?" "왜냐하면, 그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지 !" 오드리의 두 눈에서 광채가 나기 시작했다. 좀처럼 그녀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오드리는 자신의 동생이 그렇게 멍청한 질문을 한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도 그런 걱정이 아무런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나벨은 자신의 얼굴과 옷 외에는 그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분은 우리나라의 다음 대통령이 될 분이란 말야, 아나벨. 그런 일에는 너도 좀 신경을 써야지." 그녀는 될 수 있는 대로 동생을 부드러운 태도로 대하려고 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꽤 격앙된 어조로 쏘아붙였다. 오드리는 항상 동생이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 췄으면 하고 바랐지만, 아나벨은 여전히 그렇지가 못했다. 그들이 서로 얼마나 판이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알면 깜짝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때때로 그들이 같은 부모의 자식이라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경우조차 있었다. "하코트는 여자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고 그랬어." 아나벨은 머리를 흔들며 반항적인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에드워드 드리스콜도 자신의 손녀딸을 눈부신 듯이 쳐다보았다. 정말로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뿐만 아니라 자기 엄마를 꼭 빼어 닮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드리는 그가 그렇게도 사랑하던 자기 아들과 비슷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나지만 않았더라도....>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들은 해마다 사모아에서 만주에 이르기까지 세상 어느 곳이든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그래서 좋을 것이 뭐가 있었단 말인가? "내가 생각하기에도," 아나벨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침부터 정치 이야기를 하면 소화에 지장이 있을 것 같다구." 오드리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 잠시 등을 돌려야만 했다. 에드워드 드리스콜은 정말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드리가 다시 몸을 돌렸을 때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 빛에는 아나벨에 대한 진한 사랑이 감추어져 있었다. "저녁 식사 때 다시 만나자. 하코트도 함께 말이야." 그는 교묘하게 그 자리를 피해 자신의 서재로 들어갔다. 오드리가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작년보다는 허리가 약간 굽은 듯 했지만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존심과 정력이 강한 노인이었다. 오드리는 자기 인생의 많은 부분을 그에게 빚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역시 그녀가 그의 집의 살림을 꾸려 주는 것이 필요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동생을 돌아다보았다. 아나벨 역시 살림살이에 관한 한 상당한 부분을 배울 필요가 있었지만, 그녀는 언니로부터 그러한 것들을 하나도 배우려 들지 않았다. 하코트가 말하기를 다른 것은 모두 자기가 책임을 질테니 아나벨은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는 일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일에만 신경을 쓰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하코트는 여자가 너무 많은 책임을 지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웨딩 드레스를 맞추러 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돼." 오드리는 할아버지의 서재에 문이 닫히자마자 아나벨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녀는 할아버지가 클럽으로 나가기 전에 잠시 혼자 서재에 앉아서 담배를 한 모금 피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아득히 먼 곳에 눈길을 두고 젊었던 시절을 회상해 보거나, 친구들로부터 온 편지를 읽고 오후에 답장을 쓰기 위해 머릿속으로 생각들을 정리해 보고 있을 것이었다. 동생의 결혼식 대 590명에 가까운 손님들을 맞아야 하고, 또한 모든 것을 언니에게 의존하고 있는 동생을 둔 오드리와는 대조적으로 에드워드는 거의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오늘은 시내에 나가고 싶지가 않아, 언니. 날씨가 너무 덥고 따가워서 골치가 아프단 말야." "그래? 나가기 전에 아스피린을 한알 먹으면 되잖아. 결혼식까지 3주밖에 안 남았어. 어제 들어 온 선물들은 다 살펴 봤니 ?" 그녀는 동생의 팔을 가볍게 잡아 끌고 홀로 데리고 나갔다. 긴 테이블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만 선물들이 쌓여 가고 있었다. "어휴, 세상에......" 아나벨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휴, 저 많은 사람들에게 언제 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 "저 예쁜 선물들을 좀 봐 ! 그런 불평을 하기 전에 먼저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지." 오드리는 아나벨의 언니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머니에 가까운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14년 동안 어머니 이상의 따뜻한 보살핌을 언니로부터 받아 온 터였다. 오드리는 동생 곁에 가까이 있을 수 있기 위해 대학도 근처의 밀즈에서 다녔다. 아나벨은 학문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오드리는 두뇌를, 아나벨은 미모를 타고 났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말로 오늘 꼭 시내에 나가야 하는 거야?" 그녀는 오드리를 바라보며 거의 애원조로 칭얼거려 보았지만, 오드리는 벌써 그녀를 2층으로 데리고 올라가 옷을 갈아 입으라고 다그치고 있었다. 10시 30분이 되어 그들의 외출 준비가 끝나자, 할아버지가 마련해 놓은 파란 팩카드 자동차를 운전사가 몰고 왔다. 마침 6월 첫째 주의 아름다운 여름 날씨가 펼쳐져 있었으며, 하늘은 그들이 하와이에서 보았던 하늘 만큼이나 파랗게 펼쳐져 있었다. "너도 그게 아직 기억나니, 아나벨?" 오드리는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면서 그녀에게 물어보았지만, 하얀 드레스에 그림같은 모자를 눌러 쓴 예쁜 아가씨는 말없이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녀가 조그만 소녀였을 시절의 기억들은 아버지가 소중하게 간직해 두었던 앨범 속의 사진들과는 달리 모두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오드리에게 과거를 떠 올리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은 그 앨범밖에 없었지만, 아나벨은 그것들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그 앨범들을 지루하고 낮설고 약간은 두렵기까지 한 것으로 생각해 오고 있었지만, 오드리의 경우에는 바로 그러한 점들 때문에 그 앨범들에 더 애착이 갔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 앨범 속에 들어 있는 중국의 산이나 일본의 강들을 찍은 사진을 보게 되면, 머나먼 이국 땅의 냄새를 아련히 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기모노를 입은 사람들이 우스광스럽게 생긴 조그만 손수레를 밀고 가는 모습이나 강 건너편에서 고기를 낚으며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그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당신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때때로 어린 시절의 오드리는 그 앨범들을 품에 안은 채 잠이 들기도 했었는데, 그런 날 밤이면 자신이 그런 이국 땅에 가 있는 꿈을 꾸게 마련이었다. 요즘은 그녀 스스로 비일상적이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장면을 사진에 담아 두기도 했다. "언니 ?" 차가 메리린의 가게 앞에 도착하자 아나벨이 이상하다는 듯이 오드리를 쳐다보았다. 오드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동생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시 그녀의 마음은 환상의 세계를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항상 무척 바쁘게 움직였고, 특히 요즘엔 아나벨의 결혼준비 때문에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방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나도 모르겠어." 오드리는 동생의 눈길을 피하며 겨우 대답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20년 전에 중국에서 찍었던 한 장의 사진을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것은 오드리가 유난히 좋아하던, 그녀의 아버지가 조그만 당나귀를 타고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다. "무척 행복해 보이던 걸." 아나벨이 천진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오드리는 미소를 머금은 채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동생에게로 돌리며 대답했다. "네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지, 아니면 결혼식 생각을 했거나....." 그녀가 아나벨을 따라 차에서 내리자, 길을 가던 행인들이 그들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 펙카드 자동차를 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전에 그런 차를 갖고 있었던 사람들도 이런 불경기하에서는 팔아 치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나벨은 가게로 들어서면서도 사람들의 그런 눈초리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드리는 아나벨을 따라 가게로 들어가면서 갑자기 묘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자신이 머나먼 어느 이국 땅에서, 아까 차안에서 생각했던 그 사진의 풍경 속에서부터 이 소름 끼치도록 이기적인 세상으로 이끌려 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무척이나 아름답고 값비싼 모자들, 실크 블라우스, 장갑들이 눈앞에서 스스로 춤을 추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자 갑자기 오드리는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살아나가야 할 인생에는 확실히 그런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한겨울에도 아이들에게 입힐 따뜻한 옷 한 벌 제대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고, 살아갈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거리를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 대학 등록금보다 더 비싼 사치스런 옷을 사기 위해 여기에 와 있는 것이다. "언니, 괜찮아?" 아나벨은 한참 동안이나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드리의 얼굴색이 병자로 보일 만큼이나 창백하다고 느꼈던 것이었다. "괜찮아, 여기가 좀 더워서 그런가 보지." 두 명의 가게 종업원이 그녀에게 냉수를 떠다 주기 위해서 달려갔다. 그들은 물을 떠 오며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수군거렸다. "안됐어. 언니가 동생의 결혼을 질투하고 있나 봐. 그녀는 노처녀니까." 물론, 오드리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였지만, 그런 이야기는 귀가 따갑도록 들어 오던 터였다. 이제는 그런 소리에도 패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날 저녁, 하코트 웨스터브룩 4세와 대화를 나누며 아나벨이 윗층에서 내려오기를, 그리고 할아버지가 클럽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릴 때에도 그런 심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날 따라 할아버지는 평소와는 달리 여지껏 돌아오지 않고 있었고, 아나벨 역시 예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얼른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오드리가 옆에 붙어서 이것저것 챙겨 주지 않으면 언제나 꾸물거리며 동작이 느렸다. "신혼여행 계획은 다 짰어요?" 그와 나눌 수 있는 이야기는 결혼에 대한 것 밖에 없을 것 같았다. 다른 사람과 함께 였더라면 민주당 후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었겠지만, 오드리는 여자가 남자에게 정치에 대한 화제를 꺼내는 것을 하코트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오드리는 갑자기 예전에 그와 함께 무도회에 갔을 때 어떤 얘기를 나누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음악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혹시 그는 그런 화제 역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웃음이 터지려고 했지만, 그가 신혼여행 계획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바람에 금방 진지한 얼굴 표정을 지어 야 했다. 먼저 기차를 타고 뉴욕으로 갔다가 비행기로 프랑스까지 날아간 다음, 칸느에서 며칠 머무르고 로마와 런던을 거쳐 배를 타고 돌아온다는 계획이었다. 약 두 달 동안의 그 계획은 제법 훌륭한 여행이 될 것으로 들리기는 했지만, 만약 오드리 자신이 계획을 짠다면 그것과는 약간 차이가 날 것 같았다. 그녀는 먼저 베니스를 여행하고, 다음에는 거기에서 이스탄불까지 오리엔트 특급열차를 이용하는 계획을 짜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오드리는 약간 과장된 동작으로 반갑게 달려나가 할아버지를 맞았다. 그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사나운 눈 및으로 하코트를 노려보았다. 미리 자기한데 알리지도 않고 손님을 불렀다는 이야기가 막 나오려는 찰나였다. 그런 눈치를 알아챈 오드리가 재빨리 할아버지에게로 다가가 그의 팔을 꼬집으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 밤에 하코트가 올 거라고 말씀드린 것 기억나시죠?"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그녀가 아침에 무슨 이야기를 한 것 같기도 하다는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그게 그 바보같은 루즈벨트 이야기를 하기 전이었나 후였나?" 그는 몹시 난처해 하는 표정이지만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코트가 놀란 표정을 짓자 오드리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뭔가 잘못 되었어요." "그렇긴 하지만 그다지 심각한 문제는 아닐세. 어차피 후버가 다시 당선될 거니까 말야." "저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의 열렬한 공화당 지지자가 나타난 것이다. 오드리는 언잖은 표정으로 그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그는 우리나라를 온통 다 망쳐 버릴 걸요."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아 !" 할아버지가 고함을 질렀으나, 마침 아나벨이 나타나는 바람에 잠시 그들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파란 실크 가운을 걸쳐 입은 아나벨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하코트가 완전히 넋을 잃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닐성 싶었다. 한참 동안이나 그러고 있던 그는 겨우 그녀에게서 눈을 떼고 오드리를 돌아보며 불만스러운 듯이 말했다. "루즈벨트에 대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물론이죠. 하지만 올해에 몰아친 이 최악의 경제위기에 대해서는 마땅히 후버가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어요?" 그녀는 확고한 신념이 깃든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아나벨이 그녀를 못마땅한 듯이 쳐다보더니 하코트의 팔을 쿡쿡 찌르는 것이었다. "오늘 밤에 또 정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겠죠?" 커다란 푸른 눈동자가 마치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빛나고 있었다. "물론이지." 역시 할아버지의 눈에서도 빚이 번뜩이고 있었다. 오드리는 아무래도 그가 오늘 클럽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그들의 대부분은 할아버지와 같이 공화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항상 남자들 사이의 대화가 여자들 사이의 대화보다는 훨씬 더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와는 심각한 이야기를 하려 들지 않는 하코트 같은 남자만 아니라면 말이다. 오드리는 아나벨처럼 저녁내내 웃고 떠드는 것도 꽤 피곤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코트가 떠날 무렵이 되어 그녀는 완전히 지쳐버렸지만, 아나벨은 천사처럼 사뿐히 이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것이었다. 오드리는 천천히 할아버지와 팔짱을 끼고 침실을 향해 올라갔다. 언제나 처럼 그는 위엄을 갖춘 그런 모습이었다. 그녀는 언잰가 할아버지를 닮은 남자를 만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젊었을 때의 사진을 보면 무척이나 세련되고 우아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고, 또한 그는 명랑한 심성과 강건한 사고력을 여지껏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사람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편안하기 까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행복하게는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드리와 노신사는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다. "혹시 후회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 오드리?" 오드리는 그가 그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 목소리에는 어떤 우락부락함이라든지 허세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가슴속에 무엇을 간직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녀가 하코트에 대해 딴 생각을 품고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이 편해질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무슨 후회 말인가요. 할아버지?" "흠.... 그 하코트라는 젊은이에 대해서 말이야, 네가 먼저 차지할 수도 있었잖아." 그는 누가 엿듣기라도 할까봐 두렵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그 사람은 너를 먼저 마음에 두었었어. 네가 아나벨보다 나이도 많고 더 좋은 신부감이 될 수도 있을 텐데. 그렇다고 아나벨이 나쁘다는 게 아니고 아직 어려서 말이지...." 그는 여전히 오드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드리는 할아버지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전 아직 결혼할 준비가 되지 않은 걸요.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은 아무래도 나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기도 하구요." "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냐?" 그는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어두운 홀에 그녀와 마주 서 있었다. 사실 그는 무척 피곤했지만, 지금 오드리와 나누고 있는 대화가 그로서는 무척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참고 있었던 것이다. 오드리는 할아버지의 질문을 되씹어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결혼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만은 틀림 없어요." 그렇지만 그런 자신의 생각을 할아버지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여행을 다니고 싶었던 것이다. 사진을 찍어서 아버지처럼 훌룡한 앨범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게 어떤 일이냐?" 그녀의 대답을 듣고 그는 무척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옛날 기억들이 자꾸만 떠올랐던 것이다. 똑같은 이야기를 하던 자신의 아들이 결국은 목숨을 잃고 말았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났다. "너 설마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 테지 ?" "그럼요. 할아버지." 설사 내심은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그녀는 할아버지를 안심시켜 드리고 싶었다. 할아버지에게서 많은 신세를 지고 있기도 했지만, 사실 그는 이제 완전히 나이든 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전 제가 뭘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는걸요. 하지만 하코트 웨스터브룩이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만은 알고 있어요. 적어도 그것만은 누가 뭐라해도 확실하게 알 수 있어요." 그는 만족스러워 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그렇다면 됐어." 그렇지 않다면 또 어떡할 것인가? 만약 그녀가 하코트를 원하고 있다면 말이다. 그녀는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며 그런 의문이 들었다. 잠시 후, 할아버지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드리는 자신의 방문 앞에 멍청히 서서 자기가 한 말을 되새겨 보았다. 그녀는 자기가 왜 그런 말들을 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말들이 결코 거짓은 아닌 것이다. 그녀는 무엇인가 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다. 어디엔가 가야만 할 곳이 있었다. 만나야 할 사람들도 있었다. 이름모를 산과 강, 냄새와 향기와 그리고 낮선 음식들...... 그녀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으면서 자기는 결코 하코트와 함께, 아니 세상의 그 누구와 함께 한 곳에 정착할 수는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영혼을 살찌우기 위해서는 더 커다란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할 것이었다. 멀지않아 자신은 아버지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길을 떠나게 될 것이다. 사진을 찍으면서 신비로운 기차를 타고 마치 시간을 거슬러가듯 아버지의 앨범 속으로 찾아 들어가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2 6월 21일 아침, 오드리는 아래층의 홀에 서서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며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깥에는 일찍부터 자동차가 대기하고 있었고, 성당에서도 이미 손님들이 모두 도착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할아버지도 그녀와 나란히 서서 지팡이로 마룻바닥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고, 집안 여기저기서 하인들이 몸을 숨기고 신부의 모습을 보기 위해 기웃거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아나벨이 아랫층으로 내려오자, 하얌 구름을 타고 앉은 천사같은 그녀의 모습에 모두들 기다린 보람이 있구나 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녀는 마치 공주나 아주 젊은 여왕같아 보였다. 기쁨으로 밝게 빛나는 커다란 눈동자와 조그만 상아로 장식핀, 잘록한 허리, 그리고 진주와 아름다운 레이스가 박힌 쪽두리를 얹은 금빛 머리칼을 자랑하며 마치 땅도 밟지 않는 듯한 걸음걸이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오드리는 비록 자기 동생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정말 아름답구나, 아나벨." 말로는 겨우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지만, 사실은 그 말보다 훨씬 더 아름다왔다. 웨딩 드레스도 그녀와 무척 잘 어울렸다. 오드리는 복숭아 빚이 감도는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녀의 짙은 금발과 멋진 조화를 이뤄 평소의 그녀보다 훨씬 아름답게 보였다. "언니도 무척 예뻐 보여 ......" 아나벨은 한번도 오드리가 예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로 아름다와 보였다. 오드리는 만족스러운 눈초리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던 아나벨이 이제 하코트의 아내가 되어 새로운 행복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녀에게는 잘 어울리는 일일 뿐만 아니라 그녀가 진심으로 원하고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제 예쁜 아내가 되어 그들의 보금자리에 정착하게 될 것이었다. '정착' 그 단어가 자꾸만 머릿 속을 맴돌자 오드리는 갑자기 오싹 소름이 끼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언제나 이 정착이란 단어를 가장 혐오해 왔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 말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받아 들여졌기 때문이었다. "아나벨, 행복하니?" 그녀는 동생의 눈치를 살피며 그렇게 물어보았다. 오랜 세월 동안 오드리는 그녀를 보살펴 왔었다. 그녀가 외출할 때면 항상 옷을 따뜻하게 입었는지 살펴 주었고, 잠자리에 들 때면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을 안고 잘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좋은 친구를 사귀고 있는지 어떤지, 외로움을 느끼고 있지나 않은지, 특히 그 가운데서도 그녀가 마음에 드는 학교를 다닐 수 있게 하려고 할아버지와 티격태격 신경전을 벌이면서까지 언니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배려를 다했던 것이다. 따라서 오드리는 그런 아나벨이 진정으로 행복해지기를 원했다. 오드리는 동생의 표정을 살펴보며, 그녀가 지금 하려 하는 결혼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애를 썼다. "너, 그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는 거지?" 아나벨의 웃음소리가 무슨 청명한 방울소리처럼 방안에 울려퍼졌다. 그녀는 하얀 웨딩 드레스를 차려 입은 자신의 모습을 벽에 걸려 있는 거울에 비춰보고 있었다. 자신이 보아도 정말 정신을 홀딱 빼앗길 것만 같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언니의 질문에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무언가 공허한 울림이 있었다. "물론 사랑해, 언니. 그 누구보다도 더......" "그래...." 아나벨의 그 말은 오드리가 보기에 커다란 발전인 듯 싶었다. 하지만 아나벨은 전혀 심각한 표정도 아니었고, 그저 재미있다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벌써 차를 타려고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아나벨?" 오드리는 갑자기 심한 위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과연 그녀는 지금 정당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 자신이 아나벨을 현재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것은 아닐까? 아나벨이 활짝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잠시 바라보고 있는 동안 오드리는 약간 마음이 놓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언니. 오늘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인 걸." 다시 잠시 동안 그들의 눈이 마주쳤다. 아나벨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오드리는 도저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아나벨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자신의 걱정이 지나쳤던 것이다. 오드리는 동생의 손을 힘있게 감싸 쥐었다. 그제사 아나벨의 눈빛이 심각하게 변했다. "언니를 그리워하게 될 거야." 오드리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뗘나간다는 것이 현실로 와닿지 않았다. 14년 동안이나 마치 자신의 딸이라도 되는 듯이 극진하게 보살펴 왔던 동생이, 이제 막 떠나가려 하고 있는 것이다. "버링젬은 여기서 그렇게 먼 곳도 아니잖아."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어느덧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쳐 동생을 가볍게 끌어 안았다. "사랑해, 아나벨. 넌 하코트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야." 아나벨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가만히 떼어놓고는 현관을 향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 물론 행복하게 살아야지." 할아버지의 롤스로이스 자동차에서 경적소리가 길게 들려오고 있었다. 아나벨이 조심스럽게 드레스를 추키면서 차에 올라타자 드레스 자락이 넓게 펴져 세 사람이 앉을 공간이 비좁을 지경이었다. "하객들을 하루 종일 성당에서 기다리게 할 거냐?" 할아버지가 가볍게 그들을 나무랐지만, 손녀딸의 아름다운 모습에 흐뭇해하는 빚이 역력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녀를 보니 26년 전의 한 신부가 그의 기억 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녀가 어쩌면 오히려 이 아이보다 더 예뻤을는지도 몰라. 그의 아들 로란드와 결혼했던...." 아나벨이 제 엄마를 어찌나 빼닮았던지 섬뜩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는 성당에 도착하자 오드리와 나란히 서서 아나벨이 기쁜 눈빛으로 하코트를 바라보는 모습을 보며,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옛날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동생의 결혼식을 지켜 보는 오드리의 뺨에는 한줄기 눈물이 천천히 흘러 내리고 있었다. 피로연이 끝날 무렵, 그녀는 할아버지가 아나벨과 함께 천천히 왈츠를 추는 모습을 지켜 보며 또 한번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가 평소에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 자신도 그런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듯이 한참이나 훌룡하게 왈츠를 추다가 결국 그녀를 그녀의 남편에게 물려주고 마는 것이었다. 춤추던 것을 멈추고 잠시 혼자 서 있던 에드워드가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갑자기 다시 아까처럼 한 나이 든 노인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오드리가 다가가서 그의 팔을 이끌며 말했다. "저랑 한번 추시겠어요. 할아버지?"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상대방에 대한 사랑을 서로 느낄 수가 있었다. 마치 아나벨이 떠난다는 사실로 인해 그들이 더욱더 친밀하게 결합되는 듯한 묘한 감정이 일었고, 마치 그들 둘이서 결혼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도장을 몇 바퀴 돌고 난 후, 그녀는 할아버지가 체력이 달린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팔을 이끌어 좌석으로 모시고 나왔다. 모든 하객들은 정말로 멋진 피로연이었다고 칭찬이 자자했고, 아나벨이 드디어 그곳을 떠날 때는 그들의 앞날을 축복하는 장미꽃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그들은 남은 하객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하며 연회장을 빠져 나갔고, 오드리도 할아버지와 함께 롤스로이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치 몇 년 만에 돌아오는 집처럼 썰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오드리는 여기저기 쫓아다니느라 완전히 지쳐 버린 몸을 서재의 벽난로 앞에 앉히고 멀리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정말 훌륭한 결혼식이었죠. 할아버지 ?" 그녀는 몰려오는 하품을 간신히 참아내며 할아버지가 따라 준 포도주를 한 모금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다른 손님들은 모두 식장에서 마음껏 샴페인을 마셨지만, 오드리는 거의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었다.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나니 피곤이 모두 가시는 듯한 기분이 들어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며 동생의 결혼식을 되새겨 보았다. 자기가 키우다시피 했던 그 조그맣던 소녀가 훌쩍 떠나 버렸다. 그녀와 하코트는 오늘 밤엔 마크 흡킨스 호텔에 머물고, 날이 새면 뉴욕행 기차를 탈 것이다. 거기서 곧바로 유럽으로 날아가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오드리는 그들을 전송하기 위해 기차역까지 나가겠다고 약속을 해 놓았다. 그렇게 약속을 한 것은 아무래도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떠나려고 하는 여행을 위해서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오드리가 생각하던 여행 일정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그들이 부러워졌다. 그녀는 혹시, 할아버지가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지나 않을까하는 두려움과 함께 죄책감이 들어 슬적 그를 돌아다보았다. 그렇게 강렬하게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별로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그녀를 완전히 압도해 버릴 수 있는 미지의 세계로 떠날 날이 있을 것만 같았다. 아버지의 앨범을 넘기며 환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 자신이 그 낡은 앨범 속에 나오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린 언젠가 함께 여행을 떠나야만 해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이야기가 입 밖으로 새어나오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영문을 모르고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행이라구? 어디로 말이냐?" 그들은 8월에 타혹 호수로 떠날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매년 그렇게 해왔었으니까. 하지만 에드워드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련히 다시 한번 로란드를 떠올리게 하는 그러한 말이었다. "1945년에 했던 것처럼 유럽 여행이나, 아니면 하와이로, 거기서 다시 동양으로 가는 거예요." 하는 말을 덧붙이고 싶었지만, 차마 입밖에 낼 수가 없었다. "왜 우리가 그런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거냐?" 그는 약간 화가 난 것 같았지만, 사실 그가 느낀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아나벨이 떠난 것 까지는 참을 수 있지만, 오드리마저 가버린다는 것은 생각도 하기 싫었다. 오드리가 없었다면 그녀의 예민한 감성과 사물을 인식하는 태도, 그리고 그들이 거의 20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벌여 온 그 신선한 논쟁이 없었다면, 그의 인생은 지금과는 판이하게 달라졌을 것이었다. "난 이제 너무 늙어서 그렇게 긴 여행은 할 수 없을 것 같구나." "그렇다면 뉴욕으로 가는 것은 어때요?" 오드리의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 대해 너무나 미안하다는 생각이 잠시 스쳐갔다. 그녀가 자신의 의사에 따라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렇게 많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의 학창시절의 친구들은 대부분 이미 결혼을 해서 아이도 두엇 낳았을 테고, 남편과 함께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지 갈 수도 있을 것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니 에드워드 드리스콜은 자꾸만 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한번도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난 적이 없으리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오드리는 그 동안 살림을 꾸리고 동행을 돌보느라고 너무나 바쁜 나날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는 오드리의 아름다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정말 그녀도 무척 예쁜 아이였다. 그는 나즈막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안될 게 뭐 있어.." 오드리는 잔뜩 기대에 부푼 눈길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가 한 말을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뭐가 말이에요?" 그는 당황해하는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귀찮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오드리는 그가 지금 무척 피곤한 상태에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아까 피로연에서 샴페인을 너무 많이 마신 것 일는 지도 몰랐다. 지금도 그는 꼬냑을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술에 취한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다. "뉴욕 쯤이야 안 될 것도 없다는 말씀이죠. 할아버지 ? 호수에 갔다와서, 한 9월 쯤이 좋겠네요." "왜 우리가 그런 여행을 가야 하는 거냐?" 하지만 그도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한때는 그도 젊은 시절이 있었고 아이를 가진 적도 있었다. 비록 그녀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지만 말이다. 여행에 미쳤던 것은 그의 외아들이었던 로란드였다. 어디서부터 그의 여행과 모험에 대한 동경이 싹텄는지는 오직 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의 그런 피가 오드리에게도 흐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것 때문에 그의 아들은 목숨을 잃고 말지 않았던가 ! 결코 오드리가 그런 전철을 밟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뉴욕은 도대체가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못 돼, 너무 멀기도 하고. 호수에나 한번 다녀오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오드리. 항상 그래 왔잖니." 에드워드 드리스콜은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결코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 나이로는 너무나 벅찬 하루였던 것이다. "그만 자러 올라가야겠구나. 너도 피곤할 테니 가서 쉬렴." 그는 그녀와 함께 계단을 올라가면서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평소에는 잘 하지 않던 짓이었다. 그날 밤, 그는 창가에 서서 오드리의 침실에 켜져 있는 불빛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오드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그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오드리가 침대 위에 걸터 앉아 허공을 바라보며 온세상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에드워드는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오드리는 환상을 좇고 있는 동안 할아버지도, 집도, 동생도, 결혼식도 모두 잊어버리고 있다가 마침내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는 몸을 일으켜 옷을 갈아 입었다. 잠시 후, 그녀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은 채, 다음 날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아나벨이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놓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들이 살 새 집을 구하고 페인트 칠도하고 가구도 장만해야 했으며,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모든 준비를 다 갖춰 놓아야 했다. 그녀는 어느새 잠이 들어 아나벨과 하코트의 꿈을 꾸었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멀리서 그녀를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돌아와, 오드리..... 돌아와> 하지만 그녀는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3 타호 호수가에 있는 여름 별장에서 3주일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오드리는 3월 말에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아나벨과 하코트를 위해 필요한 모든 준비를 갖춰 놓고 있었다. "당신 언니는 확실히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는 것 같군, 그렇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 날 아침, 하코트가 그렇게 말하자 아나벨은 아주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그가 혹시 언니에게 모든 일을 다 맡겼다고 화를 내지나 않을까 무척 걱정했었다. 오드리는 역시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 놓았고, 그도 그다지 불만스러워하는 것 같은 눈치는 아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시각에 드리스콜의 저택에서는 오드리의 할아버지가 자기가 먹을 계란이 너무 많이 익었다는 둥, 흥차가 맛이 없다는 둥 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벌써 몇 주일 동안이나 아침을 한 번도 맛있게 먹어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요리사를 채용했지만 오히려 먼저번 요리사보다 솜씨가 더 못하다고 오드리를 들볶았다. "좀 쓸만한 요리사를 구할 수 없냐?" 나더러 이런 형편없는 음식을 먹고 빨리 죽으라는 게냐.." 오드리는 할아버지의 그런 불평을 들으면서도 그저 웃기만 했다. 벌써 며칠째 그런 소리를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새로운 요리사를 구하고 있던 참이었던 것이다. 이미 그런 일에는 익숙해져 있었지만 그날 아침 신문을 보고는 또다시 그런 소동이 벌어지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단 3년 동안에 근로자들의 평균 주급이 28달러에서, 17달러 이하로 떨어겼고, 곳곳에서 기아가 속출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5천 개 이상의 은행이 문을 닫았으며 8천 개의 사업체가 파산했고, 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었다. 더우기 사태가 호전된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들을 어떻게 그리 태연하게 넘겨 버릴 수 있는지 전 이해할 수가 없어요. 할아버지." 그녀는 할아버지가 그러한 모든 상황들에도 분구하고 계속해서 하버트 후버를 옹호하고 있는 것에 그만 화가 나고 말았던 것이다. "네가 만약에 세상 돌아가는 일보다 우리 집안의 사정에 조금만 신경을 더 쓴다면 좀 더 유능한 요리사를 구할 수 있을 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혀 아침을 먹지 못하고 있어요. 그런 것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세요?" 그녀의 광기에 가까운 열정이 폭발하려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은근히 그러한 것들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이 나라는 곧 망하고 말거예요." "벌써 몇 년 동안이나 그래왔어, 오드리...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잖니, 더우기 우리나라만 그런 것도 아니지 않느냔 말이다." 그는 손가락으로 신문을 짚어가며 계속 말을 이었다. "여길 봐라. 독일도 영국도 엄청난 실업률에 허덕이고 있어. 그들도 다 마찬가지야. 그러니 어쩌란 말이냐? 나더러 앉아서 꺼이꺼이 울기라도 하란 말이냐?" 정말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한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적어도 할아버지는 보다 지혜롭게 투표하실 수 있었어요." "난 네가 말하는 그 지혜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단 말이다. 사실 선거 결과가 총 60퍼센트의 표를 차지한 루즈벨트의 승리로 나타났을 때 그는 거의 이성을 잃을 뻔했다.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오드리와 그는 며칠 동안이나 서로 으르렁거리기도 했었다. 아나벨과 하 코트가 저녁을 먹으러 찾아왔던 그날 밤도 그들이 논쟁을 그치지 않아서 참다 못한 아나벨 부부는 일찍 돌아가고 말았다. 아나벨은 언니와 할아버지의 정치적인 의견대립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투덜대면서도, 오드리에게 살짝 자신의 비밀을 털어 놓았다. 5월에 아기를 낳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오드리는 정말 기뻤다. 이제 자기도 머지않아 이모가 될 것이다. 그녀는 아직도 후버의 패배를 안타까와 하고 있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이층으로 올라가면서 갑자기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건성으로 넘기면서 그녀는 아나벨과 그녀의 아기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나벨은 21 살에 아기를 갖게 된다. 21 살에....> 그녀는 이미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드리 자신은 25살이나 되었으면서도 해놓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장마가 몰려오는 듯한 중압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재미있던 책도 갑자기 지겹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나벨의 뱃속에서 점점 아기가 커 갈수록 그녀는 울적함을 느낄 틈이 없을 정도로 바빠지기 시작했다. 아기가 입을 옷을 준비하랴, 아기의 방도 꾸미랴, 유모도 고용하랴,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아나벨 혼자서 그 일들을 다 해내기는 도저히 무리였던 것이다. 언제나 처럼 오드리가 그 모든 일을 다 처리해 주었다. 그들의 할아버지가 81번째 생일을 맞은 직후, 건강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아나벨과 새로 태어난 아기가 병원에서 두 주일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오드리는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오드리는 육아실에서 조그만 담요들을 개고 있었다. 그때 하코트가 갑자기 문 앞에 나타났다. "여기 있을 줄 알았오." 그의 눈빛이 오드리의 눈 속에 와 박혔다. 무언가 할 이야기가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서로 긴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오드리는 항상 그녀의 동생과 필요한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들이 지겹지도 않아요?" 그는 천천히 방안으로 걸어 들어왔고, 오드리는 담요 더미 위에 주저앉아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아뇨, 난 벌써 오랫동안 이런 일을 해왔는 걸요." "그래서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하겠다는 건가요?" 질문 자체도 이상했지만, 그의 목소리도 어딘지 야릇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향해 점점 다가오자 그녀는 이 사람이 술을 마신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어요. 그저 아나벨을 돌봐 주는 일이 즐거울 뿐이죠." "그래요?" 하코트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바로 오드리의 코 앞에 와서 멈취섰다. 그의 숨결이 오드리의 얼굴에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갑자기 그가 손을 뻗쳐 오드리를 어루만졌다. 그녀의 뺨을 타고 내려간 손가락이 잠시 입술에서 머무르더니,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려 하는 것이었다. 잠시 동안 그가 하는 짓이 하도 어이가 없어 가만히 있던 오드리는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피하면서 그를 떠다 밀었다. 하지만 그는 두 팔에 더욱 힘을 주고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으며 놓아 주지 않는 것이었다. "하코트, 무슨 짓이에요 !" "그렇게 얌전한 척하지 말아요. 당신은 이미 26년 동안이나 홀로 지내왔어. 평생 그렇게 숫처녀로 늙을 작정이오?" 그가 잡아당기는 머리카락보다도 그의 그 말이 더욱더 아프게 오드리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그의 완력이 그의 입술과 그녀의 입술을 포개어 놓았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하여 그를 밀어내고 화가 나서 쏘아 붙였다. "하코트, 미쳤어요? 당장 그만 두지 못해요 !" 그녀는 간신히 그의 손아귀를 빠져나와 본능적으로 반대편 벽에 몸을 기댔다. "내가 당신을 원하는 것이 미친 짓인가? 난 당신과 결혼할 수도 있었어." 그는 정말로 자기가 그랬어야만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드리가 아무리 거절하고 그녀의 그 빌어먹을 놈의 정치적 견해가 어떠하건, 그녀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얼마나 많은 교육을 받았건, 그는 그녀와 결혼했어야 했던 것이다. 그녀는 최소한 자신의 아내가 갖지 못한 살아있는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미 아나벨의 정신적 무능과 끝없이 계속되는 유치한 어리광에 지쳐 버렸던 것이다. 하코트가 원하고 있는 것은 어린애가 아니라 오드리와 같은 여인이었던 것이다. "뭔가 혼동하고 있는 것 같군요." 오드리는 날카롭게 하코트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은 내 동생과 결혼했어요. 결코 나와는 결혼할 수 없었을 거란 말이에요." "왜지 ? 나같은 놈에게 당신은 너무 과분하다는 말인가? 너무나 똑똑한 사람이라서?"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하코트, 당신은 어찌됐건 아나벨과 결혼을 했고 이제 잘생긴 아들까지 가졌어요. 망나니 같은 짓 그만두고 가장으로서의 체통을 지키세요." 다시 한번 그의 눈이 번뜩였다. 그녀에게 다가와 팔을 움켜잡으며 소리쳤다. "당신은 정말 지독한 바보야. 이 집안에는 우리 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딸 하인들도 모두 나가고 없단 말이야..." 순간적으로 그녀는 오싹하게 등골을 파고드는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비록 버릇없이 굴긴하지만 그녀를 해치거나, 후회할 짓은 하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결코 그런 짓을 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도 안 되었다. 그녀는 그의 팔을 겨우 뿌리치고 옷매무새를 고친 다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헨드백과 장갑을 집어들었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세요. 하코트. 그 누구에게도 말이에요." 그녀는 잔뜩 눈썹을 찌푸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한번만 더 이런 일이 다시 벌어진다면 그 즉시 당신의 아내와 아들을 우리 집으로 데려가 버리겠어요.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하세요." 그녀는 여전히 노기를 풀지 않은 채 그를 쏘아보며 문을 향해 걸어갔다. 오드리를 바라보는 그의 공허한 눈빛에서 많이는 아니지만 약간의 취기가 느껴졌다. 자신의 무분별한 행동을 전혀 의식하지 못할 상태는 아니었던 것이다. "아나벨은 아직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어." 하지만 자신의 아내의 언니인 이 여인은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본능적으로 그의 가슴을 파고 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감춰 놓은 채 엉뚱한 곳에 그 정열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리라. "아나벨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무능해. 당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을거야. 결국은 당신이 그녀를 항상 어린애처럼 다뤄왔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거지만." 오드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도 당신이 보다 친절하게 그녀를 대한다면 금방 나아질 수 있을거예요." 그는 옷장에 몸을 기댄 채 오드리를 바라보며, 혹시 이 여자가 방금 있었던 일을 자기 아내에게 다 이야기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는 사실 이미 몇달 전부터 아나벨에게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입만 열었다 하면 아기에 대한 이야기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아기를 보호해야 한다며 잠자리를 함께하는 것 까지도 거부했던 것이다. 그는 지난 몇 달 동안에 많은 것들을 배웠다. 친구들과 함께 보다 재미있는 인생을 살아나갈 수 있는 방법을 배웠던 것이다. 그는 오드리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드리, 당신은 그녀가 왜 그렇게 철부지인지 알고 있어? 당신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야. 당신은 그녀가 할 일을 모두 대신해 주었어. 모든 일을 당신은 지금까지도 그렇게 하고 있어, 그녀는 심지어 혼자서는 코도 풀 수 없을 지경이야.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일을 대신해 주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라구! 그녀는 언제나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기를 원하고 있어, 당신이 항상 그녀를 보살펴 왔기 때문이지. 이제 그녀는 나에게 그러한 것들을 요구하고 있어. 하지만 그런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당신은 사람이 아니야. 살림을 꾸려나가고 커튼을 주문하고 하인을 고용하는 일종의 기계라구!" 비록 듣기 거북한 이야기였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오드리는 부모가 죽고 난 이후로 자기가 생각해도 지나칠 정도로 아나벨을 어린애 다루듯 해왔다. 그녀도 몇 번 그런 걱정을 해본 기억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달리 어떤 방도가 있었겠는가? 스스로 모든 일을 처리하도록 내버려 두었어야 했을까?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는 오드리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고였다. 아나벨이 7살이었을 때 부모의 죽음을 맞은 그녀가 슬피 흐느끼던 모습이 아직도 오드리를 괴롭히고 있었다.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그녀가 몇 살이었는지 아세요?" 그녀는 눈물을 삼키며 마치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킬 수나 있다는 듯이,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이 허리를 펴고 눈물을 삼켰다. 하지만, 그녀가 아나벨을 불구자로 만들었다는 하코트의 말이 옳은 것이 아닐까? 그는 자신을 기계라고 표현했다. 과연 그것이 맞는 말인가? 그 이상의 인간성을 자신에게서 찾아볼 수는 없단 말인가? 모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보며 그렇게 느꼈을까? 그러한 번민에 빠진 그녀는 그가 바로 조금 전에 보여 준 행동에 대해서는 순간적으로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기계라는 말 한마디가 그녀의 뼈속까지 파고들어 사무친 것이었다. "당신 어머니는 이미 14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당신은 지금까지도 어머니의 역할을 하고 있어. 아나벨은 나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 심지어는 우리들의 아기를 위해서까지도 전혀 하는 일이 없어, 당신이 모두 대신 해주기 때문이야. 차라리 당신과 결혼하는 편이 훨씬 나을 뻔했어." 그녀를 바라보는 하코트의 눈에 다시 생기가 돌자, 그녀는 그의 손이 닿기 전에 얼른 방을 빠져나와 마루로 내려갔다. 다시금 그와 입씨름을 하거나 그의 말에 대답을 하기도 싫었다. 오드리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 현관문에까지 이르자, 그가 쫓아내려와 그녀를 불렀다. 그녀가 막 현관문을 열었을 때 다급하게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젠가 스스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날이 을 거야, 오드리. 언젠가 아나벨의 어머니 역할을 하는 것이 지겹다고 느껴지면, 그리고 당신의 할아버지를 보살피거나 집안 일을 꾸려나가는 것이 지겹다고 느껴지면 내게 연락해. 기다리고 있겠어." 오드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를 세워 둔 곳까지 한걸음에 달려갔다. 목구멍에까지 차올랐던 울음이 마침내 차가 출발하기 시작하자 폭발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도대체 그녀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할아버지와 아나벨을 돌보는 것이 과연 그 전부인가? 그녀 나이가 이미 스물 여섯이었지만, 자기 자신의 삶을 산 것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요즘에는 그렇게 좋아하던 사진을 찍을 시간마저 가질 수가 없었다. 몇 달 동안이나 카메라를 만져 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도 간절히 꿈꾸어 왔던 여행과 모험도 거의 잊어버린 채 지내왔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란 말인가? 자기는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할아버지가 앞으로도 15년, 혹은 20년을 더 산다면 어떻게 될까? 오드리의 고조부는 162살까지 살았고 증조부와 증조 할머니는 90살이 훨씬 넘는 수명을 누렸다고 들었었다. 그렇게 되었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 자기의 나이는 몇 살이나 먹을 것인가? 40대 후반은 족히 될 것이고, 이미 인생의 반이 부질없이 가버린 후일 것이다. 오드리는 세상에 태어난 후 처음으로 인생이 자기 곁을 그저 스쳐 지나가 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알지 못할 공포가 점점 눈덩이처럼 쌓여가더니, 마침내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할아버지가 하인들에게 지팡이를 흔들어대며 호통을 치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오자 거의 폭발할 지경이 되어 버렸다. 할아버지의 운전사가 오늘 오후 차를 몰고 오다가 가벼운 사고를 내자 그 자리에서 그를 해고시켜 버리고 차에서 내리게 한 뒤 직접 차를 몰고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차가 어쩐지 평소와는 다르게 세워져 있다 했더니 그런 일이 벌어졌던 모양이었다. 오드리가 들어서자 할아버지는 이제 그녀를 향해 지팡이를 휘둘러댔다. 무척이나 노한 모습이었다. "넌 도대체 어떻게 된 아이냐? 운전사 하나 제대로 데려오지 못하다니 !" 그 운전사는 이미 7년 동안이나 그 집에서 일하고 있었고, 바로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할아버지는 그에 대해 지극히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오드리는 참았던 눈물을 한꺼번에 터뜨리며 이층의 자기 방으로 미친듯이 뛰어 올라갔다. 아무래도 하코트의 이야기가 맞는 것 같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하인을 고용하고 살림을 꾸려나가는 그런 일 밖에는 없었다. 그녀의 꿈들은 외로이 내팽개쳐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침대에 쓰러져 하염없이 눈물을 홀렸다. 잠시 후 그녀의 할아버지가 올라와 그녀의 방문을 두들겼다. 그것 자체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도 그녀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오드리... 오드리.." 할아버지가 조심스럽게 방안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마치 어린 아이처럼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침대 위에서 일어나 앉았다. "얘야, 무슨 일이 있었니?" 그녀는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고개만 가로저으며 냉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하지만 그녀는 지금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저히 더 이상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이제야말로 하인이나 반숙한 달걀, 아나벨이나 그녀의 아들에게서 벗어나야 할 때였다. 너무 늦어 버리기 전에 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했다. "할아버지 ...."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그녀 몸속 어딘가에 숨겨져 있던 일련의 용기가 잔잔히 밀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에드워드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자신이 듣게 될 이야기가 층격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할아버지 ..." 차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목구멍을 넘어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할아버지, 전 떠나겠어요." 그는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녀의 말 뜻을 파악한 그는 의외로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그녀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오래 전에, 실로 오래 전에 똑같이 이 방에서, 똑같은 대화를 그의 아들과 나눈 적이 있었다. "어디로 가려고?" "저도 아직 모르겠어요. 생각을 해봐야죠. 하지만 단 몇 달 만이라도 유럽 쪽으로 가야겠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흐느낌에 가까왔다. 그는 순간적으로 두 눈을 감았다. 그는 그녀의 그 말 한마디가 자신을 죽게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마치 고통에 몸부림치는 듯한 동작으로 한 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는 그의 품속으로 쓰러질듯 안겨 들었고, 그는 힘주어 그녀를 껴안았다. 영원히 그렇게 그녀를 안고 있을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하지만 그녀는 그토록 열렬히 그의 곁을 떠나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기분이 어떨지 저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꼭 돌아올께요. 꼭이요. 아버지처럼 되지는 않겠어요." 그녀는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에 천천히 눈물이 고여 흐르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4 아나벨과 하코트, 그리고 할아버지가 기차역까지 오드리를 배웅하러 나왔다. 그녀는 여행의 모든 순간들을 빠짐없이 즐기기 위해 비행기 대신 기차로 동부지방까지 가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아나벨은 여전히 계속 수다를 떨고 있었고, 하코트는 뜨거운 시선으로 오드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오드리는 겉으로는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내심 오늘따라 이상하게 아침부터 계속 한마디도 말이 없는 할아버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홍차를 마시면서도 달다 쓰다 말이 없었고, 달걀에는 손도 대지 않았었다. 오드리가 할아버지를 위해 특별히 솜씨 좋은 새 요리사를 고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심지어 신문조차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무척 무겁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었다. 오드리는 홀로 남을 할아버지가 무척이나 걱정스러웠다. 그녀는 방을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자기가 살던 방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 훌쩍 떠나 버리는 것에 할아버지가 큰 층격을 받지나 않을까, 혹은 더욱 나쁠 경우 삶 자체를 포기해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그 또한 이제는 자신의 두 발로 인생을 지탱해야만 할 것이다. 더우기 그 기간이 단 몇 달 동안에 불과할 것 아닌가. 그저 그녀가 자유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고 이번 방랑길에서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느끼기에 충분할 정도의 기간이면 족할 것이다. "9월에는 돌아오겠어요. 할아버지. 아무리 늦어도 10월 증에는 꼭 돌아오겠어요. 맹세할께요." 할아버지는 공허한 눈길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똑같은 말을 아주 오랜 옛날에도 들었었다. 그러나 로란드는 결국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것이다. "저는 달라요. 할아비지." "그럴까 왜 ? 네가 무엇 때문에 다시 돌아오겠니, 오드리? 나에대한 책임감 때문에? 아니면 의무감? 그런 것 때문에 네가 돌아올 수 있겠니 ?" 에드워드의 말투는 비장하기조차 했다. 하지만 설사 그녀가 여행을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그는 결코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번 여행이 그녀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그녀를 위해서라면 자기가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그녀를 가게 내버려 두어야 하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에드워드는 어느 날 갑자기 그녀의 입에서 아버지의 발자취를 쫓아 그의 곁을 떠나겠다는 이야기가 나올까봐 항상 가슴을 졸이며 살아왔다. 그녀는 제 아버지를 너무나 빼닮았고, 그놈의 앨범을 너무나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그 앨범을 빈방에 내버려둔 반면, 그렇게도 아끼던 카메라를 메고 아버지가 못다 이룬 모험의 길을 떠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역에서 다시 한번 할아버지의 품에 안겨 그의 좌절이 얼마나 클 것인가를 생각하며 더욱 힘주어 그를 끌어 안았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문제를 스스로 되새기게 한 하코트가 말할 수 없이 증오스러웠다. 도대체 그의 어느 구석에 그런 권리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제 그녀는 당장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했다. 그녀에게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한 것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제는 할아버지나 아나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다. "할아버지, 사랑해요. 곧 돌아올께요. 약속해요." 그는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감싸쥐고 말없이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무뚝뚝하던 그의 모습은 이미 찾아볼 수 없었다. 의식 깊숙한 곳에 잠재되어 있던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이 이제 이별의 고통으로 표출되고 있을 뿐이었다. "몸조심 하거라. 오드리. 언제든지 준비가 되는 대로 돌아오렴. 우리 모두 너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의 차분한 목소리는 그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주는 듯했다. 비록 자기 자신에게도 자신있게 말할 수 없는 부분이긴 했지만, 그는 자신이 그녀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녀는 지난 15년 동안 자신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었고, 이제는 그녀 스스로의 자유를 누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마침내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에드워드는 조용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은 오드리가 모험길을 떠나는 테 있어서 가장 커다란 선물이었다. 하코트는 작별 인사를 하면서 아플 정도로 힘차게 그녀를 포옹해 주었으며, 아나벨은 이제 어린 윈스톤을 어떻게 길러야 하나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역시 하코트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오드리는 그들 모두를 위해서 너무나 많은 일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오드리의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오드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손을 흔들었다. 마침내 기차가 모퉁이를 돌아서자 그 사람들은 모두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시카고에 도착하기까지는 꼬박 이틀 밤과 낮이 걸렸다. 오드리는 갖고 간 소설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소파와 객실이 딸린 침대칸을 이용하고 있었다. 헤밍웨이의 '하오의 죽음'과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었는데 두 편 모두 그녀의 모험과 발견에 대한 열정을 고무시켜 주는 내용이었다. 오드리는 실로 오랜만에 차분히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자기 자신 이외에는 그 누구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식단을 짤 필요도 없고 하인을 혼낼 필요도, 식사 시간에 맞춰 옷을 갈아입을 필요도 없었다. 기차가 광활한 대지를 달리면 달릴수록 점점 더 따뜻해졌다. 그때는 6월 중순 경이었으며 기차가 마침내 시카고에 도착하자 오드리는 하얀 목면 원피스에 이번 여행을 위해 준비한 하얀 새 구두를 꺼내 신었다. 그것은 당시에 가장 유행하던 옷차림이었는데, 커다란 모자를 쓰고 갈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기차에서 내리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 아름다왔다. 그녀는 모든 짐을 다음 날 아침 뉴욕 램 기차를 타기 전까지 머무를 라 살래 호텔에 풀어 놓았다. 그녀는 갑자기 짜릿한 흥분이 엄습해 옴을 느꼈다. 그냥 거리 한 가운데서 실컷 웃어보고 싶었다. 가족들을 남겨 두고 떠나 온 아픔마저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그와 이야기를 나눌 때만이 그 아픔이 다시 되살아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그녀가 전화를 걸었을 때 할아버지는 예의 그 무뚝뚝한 말투로 전화를 받았으나, 그 무뚝뚝한 음성 뒤에는 진한 외로움이 깔려 있는 것을 역력히 느낄 수가 있었다. "누구냐?" 할아버지는 그녀의 전화에 대고 여전히 그 고함치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그녀는 호텔방의 창밖을 내다보며 잔잔한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저예요. 할아버지. 오드리예요." 하고 그녀가 되풀이했다. "벌써 저를 잊지는 않으셨겠죠?" "그래, 월터 윌첼 쇼를 듣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시차를 계산해 보았다.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는 자기가 전화 통 옆에 붙어 앉아 그녀로 부터 전화가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던 것이리라. "지금 어디에 가 있는 거냐?" "여긴 시카고예요. 라 살레 호텔이요." 그녀는 떠나기 전에 몇 번이나 그에게 자신의 여행 일정을 알려주었었지만, 벌써 다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거긴 어때 ? 형편없는 싸구려 호텔 아니냐?" "물론 아니죠. 할아버지."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며, 새삼스럽게도 그가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 집에서 너무나 먼 곳으로 와 보니 할아버지가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다. "여긴 루프 근처예요. 할아버지도 여기 와 보신 적이 있다고 그러셨잖아요."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뉴욕에는 언제 갈 작정이냐?" "내일 아침에요. 할아버지." "음, 그렇다면 반드시 객실이 딸린 침대차를 타도록 하여라. 그놈의 기차는 얼마나 지저분한지 말도 못하니 말이다." 그의 세심한 배려에 그녀는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물론이죠. 할아버지..." "좋아. 괜히 나돌아 다니면 안 돼." 그리고는 갑자기 너무나 애처로운, 거의 애원조에 가까운 목소리로 그가 다시 말했다. 도저히 에드워드 답지 않은 말투에 그녀는 마침내 눈물을 홀리고야 말았다. "뉴욕에 도착하면 다시 전화해 줄 수 있겠니?" "도착하자마자 전화부터 할께요."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오자 그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무언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사실 시카고에서 전화를 걸어 준 것만 해도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뉴욕에서는 어디에 머무를 작정이냐?" "플라자 호텔에요. 할아버지..." "음, 그래." 그리고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몸조심해라, 오드리" "그럼요. 할아버지. 약속 드릴께요. 할아버지도 몸조심하세요. 너무 늦게까지 계시지 말구요." "그 기차에선 특히 더 조심해야 해!" 다시 그게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객실에서 꼼짝도 하면 안돼 !" 그러나, 다음 날이 되자 오드리는 할아버지의 충고는 깨끗이 잊어 버리고 있었다. 특등 객차의 바에는 행복한 표정으로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어, 전혀 위험할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식당도 무척 깨끗했고, 깔끔한 웨이터들이 훌룡한 음식들을 날라다 주고 있었다. 그녀는 신혼 여행을 즐기고 있는 한 부부와 클리블랜드에서 오는 길이라는 무척 점잖아 보이는 한 변호사와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다. 변호사는 그녀에게 뉴욕에 도착하면 다시 만나자며 맨 역에서 호텔까지 그녀를 태워다 주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정중하게 그 제의를 사양했다. 뉴욕에 도착하자 그녀는 혼자 택시를 잡아타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차창에 바짝 몸을 붙이고는 마천루와 우스광스럽게 생긴 모자를 쓰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닥치는대로 찍어댔다. 그녀는 눈으로 본 것들을 카메라 렌즈로 포착하는 데에는 가히 천재적인 재질을 갖고 있었으며, 택시가 호텔에 도착한 줄도 모르고 사진 찍는데만 온 정신을 집증하고 있었다. 주차장에는 멋진 자동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요금을 지불하는 그녀를 운전사가 유심히 바라보더니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아가씨는 관광객이오, 아니면 사진작가요?" 그녀는 호텔 종업원에게 짐을 건네 주며 운전사의 질문에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둘 다예요." "뉴욕 관광을 하실 건가요?" 그가 다시 물었다. "그럼요." 그녀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한 시간 후에 이리로 와 주실 수 있겠어요?" 아름답고 화창한 오후였다. 실로 오랜만에 그녀에게는 시간이 남아 돌고 있었고 할 일이라고는 도시를 구경하는 것 밖에 없었다. 운전기사는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했고, 틀림없이 그 약속을 지켜 주었다. 한 시간 후에 그녀는 다시 택시를 타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세인트 존 성당을 구경했다. 할렘을 지나는 동안에는 두 꼬마 아가씨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그들의 사진을 찍기도 했다. 마치 천국과도 같은 하루, 천국과도 같은 여행, 천국과도 같은 순간 순간들이었다. 호텔로 돌아오자 그녀는 천국을 모두 구경한 듯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는 빌딩과 사람들과 할렘과 센트럴파크와 이스트 강과 허드슨 만과 조지 워싱턴 브리지와 월 스트리트를 찍느라고 6통의 필름을 썼다. 오드리는 그날 밤 생기에 넘치는 목소리로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건 후 21이라는 레스토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뉴욕에서는 가장 유명한 음식점 가운데 하나였으며 여자들이 혼자서 마음놓고 드나들 수 있는 몇 군데 안 되는 곳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오드리는 새까만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두 명의 남자가 접근해 왔지만 곧 웨이터가 재빨리 달려와 그들을 돌려 보내 주었다. 그녀는 배에 오르기 전에 사훌 동안 뉴욕에서 유익한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다. 가보고 싶었던 관광 명소들을 모조리 둘러보았고, 두 편의 영화까지 볼 수 있었다. 두 편 모두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조안 크로포드가 나오는 영화였다. 모두 1년 전에 나온 영화들이었지만, 오드리에게는 그런 영화들을 볼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하염없이 거리를 헤매며 수많은 가게들을 기웃거려 보았지만 1년 반 전에 문을 연 엘모로코에 가볼 수 없었던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아나벨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모든 실내장식이 얼룩말의 줄무늬 형태로 되어 있으며, 아름다운 선남선녀들이 밤새도록 춤추고 마시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오드리도 꼭 한 번 가보고 싶었지만 뉴욕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단 한 사람도 없어 감히 혼자서는 가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뉴욕에서 겪은 모든 이야기들을 아나벨에게 들려주고 싶어 전화를 걸었다. "언니는 얼마나 좋을까. 나도 언니따라 갈 걸 그랬나 봐." "모든 사람들이 멋진 모자와 화려한 옷들을 입고 다녀." 사실 모든 것이 다 캘리포니아보다 더 크고 더 밝고 더 흥미로왔다. "엘모로코에 가봤어?" 오드리는 웃으며 동생에게 대답했다. "가보긴? 어떻게 갈 수가 있겠니 ? 여긴 내가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었는데..." "그럴 듯하게 차려 입은 사람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 오드리는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도 물론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지만, 그건 작년과 같은 불경기 대의 이야기였다. "그건 그렇고, 거긴 별 일 없니 ?" 그녀는 다시금 어린 동생을 걱정하는 심정이 되어 물었다. 그녀가 보기에 아나벨은 여전히 어린애에 불과했다. 그녀는 자신의 새끼를 보호하려는 어미 호랑이처럼 잔뜩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아나벨은 아무 일도 없다고 언니를 안심시켰다. "우린 잘 지내. 언니가 없어서 좀 힘들긴 하지만 말야. 난 언니가 어떻게 그 많은 일들을 혼자서 다 해낼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 아나벨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지만, 오드리는 그런 그녀가 보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너도 잘 할 수 있어. 인내심을 가지렴.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다 배울 수는 없잖니." "그런데 하코트는 내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나봐." 그녀의 목소리는 수심에 가득 차 있었지만, 오드리는 미소를 지었다. "남자들은 그런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단다. 할아버지를 생각해봐." 오드리의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흘러 내리면서도 그녀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넌 지금도 잘 해 나가고 있어." 그것은 항상 그녀가 동생을 격려해주기 위해 하곤 하던 말이었다. "어린 윈스톤도 잘 키울 수 있을 거구." 그건 사실이었다. 아나벨은 마치 어린 소녀가 인형을 가지고 노는 기분으로 윈스톤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뭔가 실수라도 할까봐 걱정스러워 죽겠어, 언니." "그렇지 않을 거야. 넌 엄마니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오드리는 전화요금이 엄청나게 비싸다는 데 생각이 미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부모가 물려준 돈 가운데 5천 달러만을 갖고 집을 나섰고, 그 돈으로 모든 경비를 충당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만 끊어야겠구나, 아나벨. 배를 타기 전에 다시 전화할께." "그게 언젠데?" "이틀 후야!" 그녀는 자기가 배를 타는 것을 아나벨이 전혀 부러워하고 있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배만 탔다 하면 항상 심한 배멀미에 시달리곤 했던 것이다. "몸 조심하고, 아나벨. 할아버지에게도 안부 전하렴." "할아버지는 나한테 한번도 전화를 하지 않는걸." 하고 그녀가 불평하듯 말했다. "네가 걸면 되잖니." 오드리는 그런 동생이 은근히 얄미워졌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진화 한 통 자기 손으로 걸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항상 상대방이 먼저 접근해 오고 연락 오기만을 기다리곤 했었다. "할아버지는 이제 너를 필요로 하고 계실 거야." "알았어, 언니. 내가 전화할께, 엘모로코에 가게 되거든 꼭 알려줘야 해 !" 오드리는 혼자 미소를 지으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형제 지간에 어쩌면 그렇게도 다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 무척이나 재미 있었다. 자기가 짜놓은 유럽 여행 계획을 아나벨이 알면 얼마나 못마땅해 할까. 샤넬이나 파토우 같은 곳은 그녀의 계획에서는 쑥 빠져 있었다. 오드리에게는 잡아야 할 다른 물고기들이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 배에 도착하자마자 그녀의 심장은 마구 줄달음치기 시작했다. 모레타니아 혹의 4개의 굴뚝을 바라보는 순간,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꿈이 실현되려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앨범에대한 기억은 어느덧 저편으로 사라지고 오로지 그녀 자신의 여행, 그녀 자신의 모험, 그녀 자신의 계획만이 온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녀는 자신의 객실에 짐을 풀어놓고 갑판으로 나왔다. 그녀를 전송하러 나온 사람은 물론 아무도 없었지만, 항해가 시작되자 그녀는 갑판 위를 혼자 거닐어 보았다. 배가 항구로부터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고, 다른 승객들은 손수건과 색종이를 흔들며 전송나온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다른 모든 소음들을 삼켜 버리는 듯, 뱃고동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고, 오드리의 바로 옆자리에서는 한 젊은 부부가 서로 팔짱을 낀 채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인은 검은 머리칼과 커다란 푸른 눈, 우유빛 피부를 가졌으며 분홍색 신발을 신고 있었는데, 해변의 친구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팔에 무척 커다란 다이아몬드 팔찌를 하고 있는 것이 오드리의 눈에 들어왔다. 뱃고동 소리가 사라지자 그녀의 웃음소리와 함께 같이 있던 남자와 키스를 나누는 장면을 오드리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남자는 하얀 바지에 해군복을 본뜬 화려한 웃도리를 입고 있었다. 유쾌한 웃음소리를 퍼뜨리며 서로 팔짱을 끼고 갑판 위를 거니는 모습은 그저 보기에도 무척 아름다왔다. 오드리는 그들이 신혼여행을 떠나는 부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나중에 그들이 라운지에서 함께 샴페인을 마시는 것을 보았을 때 자기 생각이 거의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그날 밤, 식사를 하면서 내내 그들 부부를 유심히 지켜 보았다. 그 여자는 유난히 돋보이는 새하얀 이브닝 가운을 입고 있었고, 그녀의 남편은 까만 넥타이를 맨 모습이었다. 오드리 자신은 그때 회색 이브닝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바로 몇 달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산 그 옷이 갑자기 그렇게도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 신경쓰고 있을 시간이 전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식사를 마친 오드리는 조끼를 어깨에 걸치고 갑판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그녀는 아까 식사 때 본 그 부부를 다시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은 은은한 달빛 아래서 서로 손을 맞잡고 뜨거운 키스를 나누고 있는 증이었다. 오드리는 갑판 위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아 하늘에 걸린 달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예의 그 부부가 자기 옆을 지나길래 살며시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러자 그들 부부는 오드리가 앉은 의자 근처에 멈춰서더니 역시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혼자 여행을 하시나 보죠?" 여자 쪽에서 먼저 오드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는 파란 다이아몬드를 연상시킬 만큼, 실로 적당한 표현을 찾아낼 수 없을 정도의 대단한 미인이었다. "네, 그래요." 오드리는 갑자기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여행 도중에 새로 만나게 될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질문을 던질 것이었다. 막상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오드리는 약간 거북하고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난 바이올렛 호돈이라고 해요. 이쪽은 남편 제임스이구요." 오드리는 다이아몬드 팔찌와 커다란 에메랄드 반지를 낀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악수를 나누었다. "신혼 여행을 즐기시는 중인가요?" 오드리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지자 그들은 둘 다 폭소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보이나요?" 바이올렛은 생각만 해도 우습다는 듯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면 좋아. 여보, 당신 눈빛이 빨리 침대로 돌아가지 못해 안달을 하는 사람으로 보이나봐요." 다시 한 번 세 사람 모두 기분 좋게 웃어 젖힌 후, 바이올렛은 재빨리 사실을 털어놓았다. "사실, 우리는 결혼한지 벌써 6년이나 되었답니다. 집에는 아이가 두명이나 우릴 기다리고 있는 걸요. 휴가를 맞아서 보스톤에 사는 남편의 사촌을 만나러 온 것 뿐이에요. 나도 뉴욕에 한번 와보고 싶었구요. 당신도 뉴욕에서 오시는 길인가요?" 그녀의 세련된 말투와 우아한 외모에 오드리는 완전히 압도되어 마치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촌뜨기처럼 느껴졌다. "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오는 길이에요." 오드리의 대답을 들은 바이올렛 부인의 치켜뜨는 눈썹에서 재미있어 하는 표정을 역력히 읽을 수 있었다. 오드리보다 그다지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요? 원래 그곳에서 태어나셨나요?" 그녀는 질문하기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호기심 많은 성격인 모양이었다. 그녀의 남편이 재빨리 끼어들어 그런 그녀를 웃는 얼굴로 장난스럽게 나무랐다. "여보, 제발 그렇게 사람들을 귀찮게 하는 버릇을 좀 버려요!" 하지만 대체로 미국인들은 참을성이 많은 듯, 그녀의 그런 질문들에 기꺼이 대답해 주곤 했었다. "괜찮아요." 하고 오드리가 말했으나 바이올렛 부인은 정중하게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미안해요. 제임스 말이 옳아요. 난 아무래도 너무나 많은 질문을 하고 싶어 하는 나쁜 버릇이 있나봐요. 영국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나를 무례하기 짝이 없는 여자로 생각하곤 해요. 그런 면에서는 미국 사람들이 훨씬 더 관대한 것 같더군요." 그녀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하자 오드리도 그녀를 따라 웃었다. "괜찮아요. 저도 즐거운 걸요. 사실 저는 하와이에서 태어나서 11살 때 샌프란시스코로 옮겨 갔었어요. 거기가 우리 부모님의 고향이었죠." "참 재미있네요." 그녀는 정말로 오드리의 이야기에 마음이 끝리는 모양이었다. 오드리는 그제서야 아직 그들에게 자신의 소개조차 하지 않았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들 세 사람은 정식으로 인사를 하고 나서 제임스가 샴페인이나 한 잔 함께 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그 남자 역시 반짝이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넓직한 어깨, 그리고 흠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귀족적인 손을 가진 드물게 보이는 미남이었다. 오드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그에게 눈길이 가는 바람에 무척 애를 먹었으나, 사실 그들 부부가 함께 있는 것을 보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읕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던 것이다. 그들은 아름다운 외모와 번뜩이는 재치, 값비싼 보석들,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세련된 분위기 등등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유럽에는 자주 가는 편인가요?" 바이올렛 이 다시 질문을 하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제임스도 굳이 말리려 들지 않았다.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을 뿐이에요. 제가 18살 때, 할아버지와 함께였어요. 그때는 런던과 파리에 들렀다가 제네바의 온천에서 한 일주일 정도 보낸 후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갔었어요." "그땐 무척 지루했었겠네요. 그렇지 않았어요?" 바이올렛과 오드리는 함께 웃음을 지었으며, 제임스는 말없이 자기 아내를 지켜 보고 앉아 있었다. 아내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듯한 그를 지켜 보며 오드리는 갑자기 아나벨 생각이 떠올랐다. 결혼 생활이란 것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직접 눈으로 보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서로에 대해 타인이 아니라 서로 상대방을 아껴 주고 같은 대상을 보며 함께 기쁨을 누리는, 그러한 아름다운 모습이 그녀의 눈에 비춰졌던 것이다. 오드리는 이런 남자를 만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평생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바이올렛에 대해시 질투심을 느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들 둘이서 함께 있는 것만 보아도 오드리는 무척이나 즐거웠던 것이다. 바이올렛이 계속해서 수다를 떨었다. 오드리는 그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정말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즐거운 저녁 한 때를 보냈다. "유럽에서는 얼마나 머무를 예정입니까?" 제임스가 그들의 잔에 두병째 샴페인을 채우며 물었다. "여름이 끝날 때까지는 여행을 계속하게 될 것 같아요. 그때쯤 돌아가겠다고 할아버지와 약속을 했거든요. 참, 전 올해 81살 되신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어요." "무척 따분한 생활이겠군요." 제임스가 말했다. "그렇지도 않아요. 할아버지는 무척 훌룡한 분이에요. 할아버지와 나는 거의 매일같이 정치적인 주제를 놓고 논쟁을 별이곤 한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건강에도 좋죠. 나도 항상 바이올렛의 아버님과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죠. 무척 재미있기도하고 유익하기도 해요." 그들은 단 하루 사이에 이미 절친한 친구가 되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웃음을 지었다. "당신의 여행 계획을 좀 들려 주시겠어요?" "글쎄요. 먼저 런던에 들렀다가 파리로 갈 예정이에요. 거기서 자동차로 남 프랑스로 갈까 하는데." "자동차?" 그는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직접 운전을 하신다는 건가요. 아니면 운전사를...."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꼭 저희 할아버지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이래봬도 전 일류 운전사랍니다." "설마...." 제임스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바이올렛이 손을 내저으며 끼어들었다. "그 낡은 사고방식 좀 버리세요. 여자라고 운전하지 못하란 법이 어디 있어요?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실 거예요?"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오드리에게 돌리며 물었다. "아직 확실하진 않아요. 지금 생각 같아서는 리비에라에서 며칠 묵은 후에 자동차나 기차편으로 이태리를 가보고 싶어요. 로마, 플로렌스, 밀라노....." 그녀가 잠시 말을 머뭇거리자 그들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베니스에서 며칠 더 머무르고 싶어요. 거기서 기차를 타고 파리로 와서, 집으로 돌아가야죠." "그 모든 곳을 9월까지 다 둘러볼 수 있겠어요?" "할 수만 있다면 그 외에도 가보고 싶은 곳이 너무나 많은데 아무래도 시간이 없을 것 같아요. 스페인과 스위스, 오스트리아, 독일에까지도 가보고 싶지만....." 그녀는 인도, 일본, 중국 같은 곳 까지는 차마 입밖에 내지도 못하고 혼자 미소를 지었다. 온 세계가 다 그녀의 마음을 끌어 당기는 곳이었으며, 그것은 마치 야금야금 꼭지에서부터 씨까지 갉아먹고 싶은 거대한 사과와도 같은 것이었다. "내 생각에는 여름이 가기 전까지 그 절반도 가보지 못할 것 같군요." 제임스가 말했다. "그동안 내내 혼자서만 여행할 건가요?" 이번에는 바이올렛의 질문이었다. 오드리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대단한 용기로군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항상 이런 여행을 꿈꾸어 왔거든요. 나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아버지는 온 세상에 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어요. 마지막엔 결국 하와이에 눌러앉았지만 피지나 사모아, 보라보라 등을 늘 여행했어요. 그런 아버지의 피가 내 몸속에도 흐르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이런 여행을 꿈꾸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혼자서 사람들을 만나며 무언가를 하고.... 그런데 갑자기 정말로 내가 여기 와 있군요." 그녀는 즐거움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몰랐다. 바이올렛 부인이 팔을 내밀어 그녀를 가볍게 포옹해 주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재미있는 아가씨예요. 굉장히 용감하기도 하구요. 나 같으면 제임스 없이 혼자 그런 여행을 한다는 것은 아마 꿈도 꾸지 못할거예요." 제임스는 그녀를 바라보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제 슬슬 아내와 함께 잠자리에 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의 눈이 아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오드리도 제임스의 그런 눈치를 읽었다. "정말로 즐거운 저녁이었어요.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샴페인 잘 마셨어요." "내일도 함께 만나는 것이 어떨까요? 점심식사를 함께 하는 것도 좋겠네요." 바이올렛이 상냥하게 말했고 오드리도 동의했다. "그렇게하죠. 그럼 내일 뵙겠어요." 오드리는 그들을 남겨 두고 자신의 객실로 내려왔다. 그들과 함께 보낸 저녁 시간은 정말 즐거웠다. 오드리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바이올렛으로부터 그녀 자신은 28살이고 제임스는 33살이며, 역시 제임스라는 이름의 5살 난 아들과 3갈짜리 딸 알렉산드라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런던에 살고 있으며, 시골에도 저택을 갖고 있고, 케이프 탄 티베스라는 곳에서 여름을 보낸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무료함이나 권태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호화스런 생활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들에게서는 재미있고 신비스럽기까지 한 분위기가 풍겼으며, 그 다음날 함께 점심 식사를 한 이후로 그들 셋은 줄곧 함께 어울려 즐거운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다. 그들은 항상 붙어다니는 삼총사가 되어 함께 웃고 춤추고 떠들어댔다. 다른 승객들까지도 그들 덕분에 지루하지 않은 여행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오드리와 호돈 부부는 이제 뗄래야 뗄 수 없는 절친한 친구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드디어 영국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 밤, 그들은 언제나처럼 함께 모여 앞으로 헤어져야 한다는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리와 함께 케이프 안티베스로 가지 않겠어요?" 먼저 그런 제안을 내놓은 것은 바이올렛이었지만, 제임스도 그에 뒤질세라 열심히 오드리에게 권했다. "정말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겁니다. 대단한 인물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이니까요." 그들 가운데서도 머피스, 제랄드, 사라와는 절친한 교분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 때는 헤밍웨이도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여름을 보내기도 했고, 피츠제랄드는 단골손님이었으며 피카소, 도스 파소스 등의 인물들이 함께 어울리기도 했다. 호돈 부부는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듯 했다. "꼭 와야해요." 바이올렛은 오드리를 붙잡고 신신당부를 했다. "어차피 남 프랑스에 들릴 계획이라니, 거기서 며칠만 더 머무르도록 계획을 바꾸면 되잖아요." "그렇게 해요. 오드리." 제임스도 한몫 거들었다. "기다리고 있을께요. 우린 7월 2,3일 쯤 그곳에 갈 테니까 그때 꼭 오셔야 합니다." "그럴께요." 하고 오드리도 약속했다. 갑자기 그 해 여름이 더욱더 아름다와질 것만 같았다. 그녀 앞에는 이제 새로운 세상이 활짝 펼쳐져 있었다. 오드리의 머릿 속에는 닥쳐 올 황홀한 순간들에 대한 상상의 나래가 마음껏 펼쳐지고 있었고, 호돈 부부와 자신을 만나게 해준 행운의 별에 대해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5 런던에서의 하루 하루가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오드리는 제임스와 바이올렛이 특별히 소개한 클라리지 호텔에 투숙했었다. 원래 그녀는 코너트 호텔을 예약해 두었었는데 제임스가 거기보다는 클라리지 호텔이 더 좋다고 우기는 바람에 거처를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제임스가 특별히 그 호텔을 권한 것은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지만, 그의 소개 덕분에 오드리는 그 어디에서도 받아보지 못한 특별 대우를 받을 수가 있었다. 그녀는 그런 사실을 상세히 적어 아나벨에게 편지를 할까 하다가, 괜히 어린 동생이 질투를 느낄 것 같아 그만두었다. 샴페인의 강이 흐르고, 과일 바구니가 끝도 없이 널려져 있으며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향기로운 쵸콜렛이 조그만 은 쟁반에 가득 담겨져 있는, 문자 그대로의 지상낙원에서의 오후가 되면 오드리는 바이올렛 부인과 함께 쇼핑을 다니거나 밤마다 각종 파티에 참가하거나 연극을 보러 다녔을 뿐 아니라 롤스로이드를 타고 어디든지 갈 수가 있었다. 그들은 절친한 친구들을 오드리에게 소개해 주었으며, 오드리는 곧 그들의 아이들과도 아주 친해졌다. 또한 그들의 거대하면서도 우아한 멋을 풍기는 대 저택을 보고는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저택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조그만 궁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할 것 같았다. 거대한 저택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샌프란시스코에서도 그렇게 큰 집은 일찌기 보지 못했었다. 주말이 되자, 오드리는 런던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안타까왔으나, 몇 주일 후면 안티베스에서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을 수가 있었다. 바이올렛과 제임스가 같이 오지 않은 파리는 몹시 울적해 보였다. 오드리는 파토우에서 멋진 모자를 두 개 사서, 하나는 소포로 아나벨에게 보내주었다. 그녀는 또 안티베스에서 바이올렛과 제임스를 만날 때 입으려고 얼룩말 처럼 줄무늬가 쳐진 이브닝 가운을 하나 사기도 했다. 그때야 비로소 오드리는 난생 처음으로 완전한 독립감을 맛보았으며 자신이 무척 성장했다는 생각에 젖어볼 수도 있었다. 그녀는 그 누구의 질문에도 대답할 의무가 없었고, 아무것도 책임질 필요가 없었다. 몇시에 밥을 먹든, 몇 시에 자리에서 일어나건 아무도 간섭할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2주일 동안 완벽한 자유로움을 마음껏 만끽한 다음, 남 프랑스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녀는 제임스가 생각한 것처럼 운전에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조금씩 게을러지는 자신을 느꼈기 때문에 자동차 대신 기차를 이용하기로 생각을 바꾼 것이다. 니스에 도착해서 기차를 내려보니 어김없이 바이올렛과 제임스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벌써 검게 그을은 얼굴들이었으며, 아이들은 차 속에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드리는 차를 타고 달리는 동안 알렉산드라를 무릎 위에 앉히고 장난을 쳤고 제임스와 바이올렛이 갑자기 프랑스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는 바람에 모두들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행복과 흥분만이 가득한 여름이었으며, 그들의 인생에 두려움이나 근심이 끼어들 여지는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만 같았다. 오드리는 그들의 별장이 무척 마음에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날 밤 호든 부부를 찾아온 모든 사람들에게서도 따뜻한 우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예술가나 귀족 출신의 훌륭한 젊은이들이거나 프랑스인이고 로마에서 온 여인들 이었으며 그 가운데는 미국인도 상당수가 끼어 있었다. 오드리에게는 모든 것이 신비스럽게만 느껴졌으며, 그녀가 항상 꿈꾸어 오던 세상과 한 치도 빗나감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불과 한달 전까지만 해도 할아버지의 반숙한 계란이 너무 덜 익지나 않았나 하고 조마조마해 하며 살았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또한, 그녀는 그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그렇게도 세상 소식을 알고 싶어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무언가 더욱 많은 것을 바깥 세상을 접해볼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 자신이 그러한 세상의 일부가 되어 있었으며, 앞으로는 두번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 비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을 매일같이 호든 부부로부터 소개받고 있었던 것이다. 호든 부부는 그런 일에 무척이나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알고있는 모든 사람들은 대부분이 무슨 책을 썼거나, 공연을 했거나, 유명한 예술품을 창조해 내었거나, 이름있는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그저 평범한 인간들이 아니라 신비로운 역사의 순간들을 장식해 내는 조각가들이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그녀는 무언가 새로운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며, 자신의 아버지가 무엇을 위해 살았고, 또한 목숨을 바쳤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앨범들이 이제는 완전히 그녀 자신의 것으로 소화되어 새롭게 되 살아났다. 이것은 아버지의 인생이 아니라 바로 그녀 자신의 인생인 것이었으며, 그녀 또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사진을 찍어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오드리?"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바이올렛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허공만 바라보며 혼자 실없이 웃고 있는 걸 보니 뭔가 재미있는 생각이라도 하고 있었나 보죠 ?" "난 지금 얼마나 행복한가, 여기는 우리 집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진 곳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가을이 되어 집으로 돌아갈 생각만 하면 그렇게 심난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곳에 영원히 머무르고 싶었다. 하지만 결코 그럴 수는 없는 노릇, 언젠가는 그들 모두 집으로 돌아가야만 할 것이었다. "무척 마음에 드는 곳이죠. 그렇죠?" "네, 그래요." 오드리는 새까만 프랑스식 수영복을 입고 모래 위에 길게 누웠으며, 그녀의 옆에는 까만 머리칼에 하얀 수영복을 입은 바이올렛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들 둘은 무척 잘 어울리는 조화를 이루어 내고 있었다. 오드리가 제 3자였다면 틀림없이 카메라를 들이대고 싶어했을 장면이었다. 사실, 그녀는 끊임없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녀가 니스에서 자신의 사진들을 현상해 왔을 때, 사람들은 그걸 보고 모두 그녀의 사진술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었다. 심지어 피카소까지도 그녀의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놀란 눈으로 이렇게 말했었다. "훌룡한 재능을 가졌군요. 아까운 재질을 낭비하지 않도록 해요.." 그는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오드리에게 충고를 했고, 그런 충고를 들은 그녀는 적잖이 당혹스러워 했다. 그녀는 그저 즐기기 위해 사진을 찍을 뿐이었다. 한번도 그것이 낭비되어서는 안될 재능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충고해 주는 피카소의 어조에 감동을 받았다. 그녀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쉽사리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머무르는 것이 어때요?" 바이올렛이 물었다. "안티베스에 말인가요?" "아니, 유럽에 말이에요. 여기가 당신과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인 것 같아서요." 오드리의 눈동자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드리는 떠날 것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건 불공평한 일이에요." "누구에게 말인가요?" "주로 우리 할아버지에 대해서겠죠. 할아버지에게는 내가 꼭 필요하니까요." "그런 식으로 당신 자신의 인생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그다지 공평한 것 같지는 않은 걸요." 오드리는 차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난 할아버지를 사랑하니까요. 바이올렛." "하지만 당신 스스로의 인생은 어떡하구요? 영원히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을 것 아니예요.오드리." 바이올렛은 정말로 이상하다는 듯이 오드리를 쳐다보았다. "언젠가 결혼도 하고, 그래서 진정한 당신의 인생을 가져보고 싶지 않아요?" 바이올렛의 눈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제임스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었다. 그가 없는 인생이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난 그런 일은 정말로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인생이니까요. 그렇게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생기지 않는 걸요. 그건 나의 계획 가운데 포함되어 있지 않은 모양이에요." 그들은 서로 마주보며 미소를 짓고는 다시 모래 위에 드러누웠다. 그녀는 자신이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어쨌건 자유롭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었고 더우기 바로 그 1933년 여름 날 리비에라에서 그러한 자유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무얼 할 거예요. 오드리 ?" 바이올렛이 물었다. 그녀는 가끔 오드리가 걱정스러워질 때가 있었다. 그녀의 집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공허한 것이었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이올렛은 그녀를 런던에서 계속 머무르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드리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캘리포니아로 돌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나도 모르겠어요. 이전과 같은 생활이 계속되겠죠." 그녀는 어깨 너머로 바이올렛을 바라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생활도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 말은 바이올렛에게 보다는 차라리 자기 자신을 위안하기 위한 소리였다. "난 예전에도 그래왔으니까요. 할아버지의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면서 말이에요." 하지만, 오드리는 앞으로 자신의 생활이 결코 예전과 같아질 수는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항상 꿈꾸어 오던, 신비에 가득찬 사람들과 더불어 황금의 나날들을 보낸 후의 생활이 결코 그 이전과 같아질 수는 없으리라. 그리고 최소한 이 짧은 순간 만큼은 그녀 또한 그런 신비로운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활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것인가? 머지않아 모든 것은 그 막을 내리게 될 것이다. 오드리는 단 한 순간도 그러한 사실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한 생각들 때문에 마구 달음질쳐 가는 7월이 더욱더 소중하게 그녀의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이다. "당신이 얼마 동안이라도 더 머무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드리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하고 말을 꺼내는 오드리의 입에서 한숨소리가 먼저 새어나왔다. 그러나 그녀는 타오르는 태양을 올려다 보며 다짐하듯 힘있게 말을 이었다. "난 다음 주에는 이곳을 떠나야만해요. 내 계획대로 여행을 마칠 수 있으려면 말이에요. 이탈리아의 리비에라 해변으로 자동차를 몰고 떠나야죠." "정말로 그러고 싶은 거예요?" 바이올렛이 끝까지 물고 늘어지려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혀 그러고 싶진 않아요. 나머지 내 인생을 모조리 이곳에서 보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건 무척 비현실적인 이야기예요. 그러나 나는 차라리 현실 세계로 천천히 되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내가 언제 다시 유럽에 올 수 있을지는 오직 하느님만이 알고계실 거예요." 그녀의 할아버지가 어쨌든 자꾸만 더 젊어지지는 않을 것이고, 오직 하느님만이 언제 또다시 그녀가 그러한 자유를 구가할 수 있을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지난 번에 받은 아나벨의 편지에는 아무래도 두 번째 아이를 가진 것 같아 걱정스럽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아나벨은 그렇게 일찍 또 아기를 갖고 싶지는 않았지만 하코트가 꽤 강력하게 몰아붙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녀의 할아버지도 한 번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왔었다. 여전히 할아버지다운 내용이었다. 그녀는 편지를 읽으면서 마치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에 번지는 미소를 감출 길이 없었다. 루즈벨트에 대한 불평과 캘리포니아 지방의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가 편지의 주요 내용이었다. 그는 루즈벨트가 뉴딜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그렇게 철석같이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실질적으로 경제에 도움을 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맹렬히 그를 비판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오드리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 항상 루즈벨트를 표현할때면 너의 친구인 플랭클린 딜라노 루즈벨트라고 쓰고 있었고, '너의'라는 단어 밑에는 반드시 밑줄까지 그어놓고 있어 오드리의 웃음을 자아냈던 것이다. 할아버지를 생각하다 보니 다시 오드리의 입술에선 한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그녀는 바닷가를 걷고있는 제임스를 무심코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키가 훤칠하고 늘씬한 다른 남자와 함께 천천히 그녀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바이올렛이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활짝 웃는 얼굴로 오드리를 돌아다 보았다. 무척이나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저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오드리?" 오드리는 바이올렛이 그 남자를 보고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확실히 꽤 매력적인 용모를 갖추고 있긴 했지만, 그 해변을 드나드는 수 없이 많은 다른 남자들보다 특별나게 잘 생겼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저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여행가이자 탐험가인 찰스 파커스코트예요. 그런 사람 몰라요? 미국에서 많은 책들을 펴내기도 했는데...그의 어머니가 미국인이거든요." 오드리는 그녀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 역시 그의 이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매우 유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놀랐던 것은 단순히 그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 사람이 제임스와 함께 바닷가를 거닐고 있는 저 미남 청년보다는 훨씬 더 나이가 많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이올렛이 벌떡 일어나더니 번개같이 달려가 그의 품에 안기는 것이었다. "아이쿠, 여보! 결혼한 여자가 외간 남자한테 그런 식으로 인사 하는 법이 어딨어?" 제임스가 아내에게 농담인지 꾸지람인지 구별이 안 가는 소리를 한마디 던졌다. 찰스도 그녀의 그러한 행동에 몹시 황홀해하는 표정이 되었다. "무슨 소리예요. 제임스." 바이올렛은 여전히 그의 품에 매달린 채 남편을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찰스가 어떻게 외간 남자란 말이에요?" 그녀의 말에 찰스는 유감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바이올렛을 모래 위에 내려놓았다. "그럼 뭐야. 난 남자도 아니란 말인가요?" 그의 발음은 영국식보다는 미국식에 훨씬 더 가까왔다. 오드리는 그가 미국의 예일 대학을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그의 어머니의 가족과 함께 미국에서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인지 미국에 대해서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기도 했다. "난 당신을 우리 가족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어요." 바이올렛은 모래에 누워 그를 올려다 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오드리를 바라보다가, 억지로 바이올렛에게로 눈을 돌렸다. "어떻게 지냈어요. 바이올렛 부인?" "나야 항상 잘 지내죠. 게다가 당신까지 오셨으니 올 여름은 특히 더 즐겁게 보낼 수 있겠군요. 얼마나 머무를 거예요?" "한 일 주일 정도...." 그 또한 그들의 여름이 얼마나 호화스러운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전에도 자주 그들을 찾아 왔었고, 그때마다 그는 무척이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오드리는 그를 가까운 거리에서 자세히 들여다 보고는 그가 대단한 미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가 나이를 꽤 많이 먹은 사람일 거라고 상상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그가 젊은 나이에 이미 너무나 많은 것들을 성취해 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그의 신비로운 여행담 혹은 그녀의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그의 이국적인 외모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그는 새까만 머리칼과 부드러운 올리브 색의 얼굴빛, 커다랗고 짙은 갈색의 눈동자,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큰 키에 귀족적인 모습이었으며 오드리가 보기에는 전혀 영국인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찰스는 차라리 스페인이나 프랑스, 혹은 이태리에서 온 왕자처럼 보였다. 그는 파란색 수영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오드리는 그의 튼튼한 두 다리와 곧게 뻗은 팔, 그리고 제임스보다도 더 넓어 보이는 어깨를 볼 수 있었다. 제임스와 그는 마치 친형제처럼 보였다. 제임스가 그의 어깨를 붙잡고 장난스레 흔들며 말했다. "우리 집사람이 잠깐만이라도 입을 다물어 준다면, 자네에게 기꺼이 우리 친구를 소개하겠네. 이 아가씨는 캘리포니아에서 온 오드리 드리스콜이라는 아가씨일세." 찰스는 그의 커다란 두 눈으로 오드리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 아무리 차거운 여자라도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드리 또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억누르고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의 외모를 보고 정신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몹시 어려운 일이었지만, 오드리는 그가 쓴 책을 보았을 때도 큰 감동을 느꼈었다. 시간이 나면 그 책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눠보고 싶었다. 그들은 오후 늦게까지 함께 대화를 나누었고, 제임스와 찰스는 잠시 드라이브나 하고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다시 오드리와 바이올렛 둘만이 남게 되었다. "정말 잘 생기지 않았어요?" 바이올렛은 자기 친구가 무척이나 자랑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가득 머금고 오드리에게 물었다. "정말 그렇더군요." 오드리도 따라 웃었다. 그녀는 그의 웃는 얼굴이 자꾸만 떠오르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을 했었지만 멋진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외면적인 것은 기억에서 사라지고 단지 그의 부드러운 모습만이 남았다. "그는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들이 베란다에 앉아 제임스를 기다리는 동안 바이올렛이 샴페인을 따르며 오드리에게 말했다. 그들은 둘 다 검게 탄 피부에 하얀색 실크 가운을 받쳐 입고 있었다. 오드리의 머리카락이 헷빛에 비춰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그에게도 한번 한 적이 있었지만 그는 정말로 자기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요." 그녀는 구운 버섯 몇 조각을 입에 집어넣고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놀라운 일 아네요. 오드리? 가는 곳마다 여자들을 울리고 다닐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거든요." 오드리는 그의 그런 점에 마음이 끌렸다. 아니, 그보다도 그의 그런 착한 심성에 마음이 끌렸던 것이다. 그녀는 이미 그가 지은 책 두 권을 읽어보았는데, 그렇게 감동적일 수가 없었다. 그 분야의 작가들 가운데 오드리가 특히 좋아하던 사람은 니콜 스미드라는 탐험가 겸 작가였는데, 찰스도 그를 무척이나 존경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오드리는 찰스가 쟈바나 네팔, 인도에도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그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었다. "당신은 그런 곳에는 가볼 엄두도 못 내겠죠?" 오드리가 바이올렛을 놀려 주었다. "그런 곳에서 도대체 뭘 찾을 수 있다는 건지 난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그때 마침 제임스가 돌아왔다. "이 사람이 또 뭐라고 무례한 소리를 하지나 않았나요. 오드리 ?" 제임스가 샴페인 잔을 들며 오드리에게 말하고는 다시 자기 아내 쪽을 돌아다보았다. "오늘 밤엔 유난히 더 아름다우시군요. 바이올렛 부인. 항상 하안 옷만 입어도 좋겠군요." 그는 아내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한 다음, 버섯을 하나 집어먹고는 오드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드리로서는 그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게다가 찰스까지 가세했으니 그들은 정말로 즐거운 시간들을 보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날, 그들 네 사람은 저녁 늦게야 칸느의 조그만 레스토랑으로 가서 식사를 했다. 거기서 포도주를 진탕 마시고 한참 동안이나 수다를 떨던 그들은 다시 누군가가 연 파티에 참석해 새벽 2시까지 마음껏 놀았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른 파티 한 군데를 더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어느새 새벽 4시가 넘어 있었다. 그들은 이왕 그렇게 된 김에 일출이나 구경하자며 다시 베란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제임스는 그래도 양이 차지 않았던지 샴페인을 한 병 더 따서는 자기 혼자서 그걸 다 마셔 버렸다. 급기야 바이올렛 부인이 제일 먼저 소파에 누운 채로 곯아 떨어졌고, 혼자서 이상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던 제임스가 그녀를 안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나니 베란다에는 찰스와 오드리 둘 밖에 남지 않았다. 그들은 두 시간 후 수평선 너머로 태양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그렇게 앉아 있었다. 찰스가 그녀를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도대체 무엇이 당신을 여기까지 오도록 만들었을까요?" 그들은 두시간 가까이 서로 별 생각없이 이런저런 이야기, 예를 들어 그들이 둘다 좋아하는 여행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그들의 친구 제임스와 바이올렛에 대한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주고 받았다. 그러나 태양이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찰스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그는 도대체 오드리라는 이 여자가 어떤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던 것이다. 오드리 또한 똑같은 질문을 그에게 던져 보고 싶었다. 똑같은 때에, 똑같은 장소에 그들을 데려다 놓은 그들의 인연이란 것이 묘하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그녀는 가장 솔직한 자신의 심정을 그에게 털어 놓기로 작정했다. "전 벗어나고 싶었던 거예요." 그녀로서는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대답이 그것 밖에 없었다. "무엇으로부터 말입니까?" 막 솟아오르기 시작한 싱싱한 햇살이 그의 목소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벗어나고 싶어한 대상이 어떤 남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그녀는 꽤 나이 많은 노처녀였기 때문이었다. "누구로부터 였냐고 물었어야 했나요?" 그녀는 조용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런 것이 아니라 아마도 난 나 자신으로부터, 혹은 내가 나 스스로에게 지워놓은 어떤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걸 거예요." "어려운 이야기군요." 그의 눈이 단 한순간도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의 몸속에는 그녀의 입술을 느껴보고 싶은 욕망, 그녀의 길고도 우아한 목을 마음껏 애무해보고 싶은 욕망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마저 듣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억눌렀다. "때때론 아주 어려운 이야기일 수도 있어요."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내겐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할아버지가 한 분 계셔요. 나를 무척이나 필요로 하는 동생도 있구요." "어디가 아픈 모양이죠?" 그의 말에 오드리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아뇨. 왜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되었나요?" "당신이 무척이나 라는 단어를 하도 강하게 발음해서 그런가 봐요."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물결 속에 아나벨의 얼굴이 가만히 떠올랐고, 뒤이어 하코트가 한 말이 생각났다. '아나벨은 아직 무척 어리거든요....' 그녀는 다시 찰스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생각해보니, 그 애를 망쳐 놓은 건 바로 나였어요. 그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죠. 저와 제 동생이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내가 거의 동생을 키우다시피 했거든요." "참 이상하군요." 찰스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뭐가요?"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당신은 몇 살이었나요? 두 분 다 같은 시각에 돌아가셨나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왜 그렇게 갑자기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는 걸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그때 11살이었고 동생은 7살 밖에 되지 않았었어요. 하와이에서 였죠. 네, 그랬어요. 두분이 함께 바다에 나가셨다가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떠올리기조차 싫은 기억이었다. "우린 그 이후로 캘리포니아의 할아버지 댁에서 자랐어요. 그때부터 나는 그 집을 관리하기 시작했고, 동생에게는 어머니 역할을 하기했었죠. 그런데 아마도 동생의 남편이야기를 빌리자면, 그게 도가 지나쳤대나 봐요." 그녀는 가만히 찰스의 눈동자를 들여다 보았다. "그는 내 동생이 나의 도움 없이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게 된 것이 다 나 때문이라고 그러더군요. 어쩌면 그의 생각이 맞는지도 모르죠. 그는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낡은 커튼을 갈아치우거나 하인을 고용하는 일 밖에 없다고 말하더군요. 나 자신이 그런 그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아도...." 그녀의 두 눈에 갑자기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난 그의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난 당분간 집을 떠나 이곳에 오게 된 것이에요." 찰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해할 만하오." "그래요" 다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오드리의 눈가가 촉촉히 젖어 있었다. "어떻게 당신이 그런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내가 살아 온 인생도 당신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오. 내게는 할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빼놓고는 말입니다. 한때는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있었지만, 지금은 역시 떠나셨죠. 나의 부모님은 내가 17살 때, 그리고 내 동생이 12살이었을 때 사고로 세상을 떠나셨어요. 우린 한 1년 가까이 미국에서 아저씨, 아주머니와 함께 살았지만 그게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죠." 그는 말을 끊고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오드리의 손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 더 많은 힘이 들어갔다. "생활은 풍요로왔을지 모르지만,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너무나 우리를 이해하지 못했죠. 나에 대해서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모험심과 독립심이 너무나 강하다고 생각했고, 동생에 대해서는 반대로 그런 독립심이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어요. 동생은 부모님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고 건강 또한 무척 악화되어 있는 상태였어요. 내가 18살이 되던 해 우리는 그 친척 집을 뛰쳐나와서 영국으로 돌아갔어요. 하지만 내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찰스는 목이 메어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이었다. "동생은 미처 그 다음 해를 넘기지 못하고 14살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어요." 그는 마치 상처받은 한 마리 짐승처럼 공허한 눈빛으로 오드리를 바라보았다 . "나는 우리가 그냥 미국에 머물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어요. 그는 어쩌면 여기 이 자리에 함께 있었을는지도....." "그런 말씀 마세요. 찰스." 그녀의 손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그의 두 뺨을 가볍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런 일이 어디 당신 마음대로 될 수 있는 일인가요. 나도 항상 내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 무언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알게 모르게 지배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건 모두 어리석고 부질없는 생각이었어요." 찰스도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누구에겐가, 특히 그녀처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마음을 활짝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는 뭔가 따뜻한 공감대 같은 것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는 그녀를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이상하게 그녀에게 마음이 끌렸고, 지금은 그 느낌이 더욱 강했다. 갑자기 그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자신에 대해서,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잃어버린 동생에 대해서..." "그후부터 나는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대학에 진학하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존이 죽고 난 뒤로는 도저히 정신을 한군데로 집중시킬 수가 없더군요. 뭔가를 볼 때마다 동생의 얼굴이 아른거렸고 모든 사람들에게는 존 또래의 동생이 있는 것으로만 느껴졌어요. 길거리에 나와 노는 아이들이 모두 존같아 보이고... 난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을 내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릴 수 있는 곳으로 떠나 버리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난 네팔로 갔죠. 거기서 인도로, 다시 일본으로 가서 1년을 머물렀어요. 내가 21살이 되던 해 나는 첫번째 책을 출간하기에 이르렀죠." 찰스는 거의 한 시간만에 처음으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그후로 그것이 나의 생활이 되어 버렸고, 난 그러한 생활에 완전히 빠져 버리고 말았어요." 오드리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여행에 관한 한 그 누구보다도 전문가이시더군요." 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 놓았다는 사실에 커다란 감동을 느낌과 동시에 그의 아픔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만약 아나벨을 잃어버렸다면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다. 생각만 해도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는 것 같았다. "이번 여행은 내 인생의 전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그것이 마치 죄가 되기라도 하는 듯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죄라도 된다는 말씀인가요?" 아침 햇살이 그들을 구석구석 감싸주고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난 당신이 부러워요. 우리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온 세상을 마음껏 여행하는 꿈을 간직해 왔거든요."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는 겁니까?" "아나벨은 어떡하구요? 또 할아버지는?" "그들도 틀림없이 잘 살아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겠죠. 이번 여행도 그런 생각 덕분에 떠날 수 있었으니까요." "안티베스는 그다지 이국적인 냄새를 풍기는 곳은 아니잖아요?" "그건 그래요." 그들은 둘 다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내가 여기 와 있는 동안에도 내 할아버지와 동생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언젠가 더욱 모험이 가득한 세계로 여행할 기회가 생기겠죠." "당신은 지금 당장 그런 곳으로 떠나야 해요. 언젠가 결혼을 하고 나면 당신은 두번 다시 그런 기회를 잡을 수 없을 테니까."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게 그런 위험이 절박하게 다가올 리는 없을 테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내가 아직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나보죠? 그럴만한 비밀스런 이유가 말입니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예요. 그저 난 결혼할 타입의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뿐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방금 할아버지의 집을 15년 동안 꾸려 오고 있다고 했잖아요. 그 정도면 충분한 훈련을 쌓은 셈이 아닌가요?" "그건 그렇지만, 나는 할아버지와 결혼할 것은 아니니까요.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남자들 가운데는 내 마음을 사로잡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그건 또 무슨 이유죠?" 그는 그녀의 생각 하나 하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었다. 그가 지금까지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그런 여자였던 것이다. "남자들은 대부분 고루하기 짝이 없어요. 그들은 여자가 해야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에 너무나도 잘못된 선입견을 갖고 있어요. 여자들은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입밖에 내서 안 된다. 심지어는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이거든요. 여자는 차나 끓이고, 친구들과 어울려 점심이나 먹으러 다니면 된다는 식이죠. 더군다나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모두 금기로 되어 있어요. 정치, 여행, 심지어 사진 찍는 것 까지두요." "사진을 찍으시나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솜씨가 대단하겠군요."그는 자신있게 단정짓듯 말했다. "어떤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당신은 예리한 감수성과 지각력을 가지고 있어요. 훌룡한 사진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눈과 잘 균형잡힌 심성이 필요하니까요." "나한테서 그런 것들을 찾아볼 수 있다는 건가요?" 그녀는 자신에 대한 그의 분석에 놀라와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집에서는 모두들 나를 늙은 하녀라고 부르는 걸요." 그러자 그는 갑자기 화가 난 것 같았다. "그 집에는 바보들만 모여서 사는가 보군요. 주어진 틀에 맞지 않으면 아무도 그 사람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내게도 그런 문제들이 걸릴 때가 있죠. 난 그 누군가와 더불어 한 곳에 자리잡고 눌러앉고 싶은 생각은 눈꼽 만큼도 없답니다." 그녀는 그가 존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생은 너무나 짧고 부질없는 것이...... 난 그런 인생을 위선이란 허울로 둘러싸인 채 살고 싶지는 않아요." "그 위선이란 것은 무엇을 말하는 건가요?" 이번에는 오드리가 질문을 던졌다. "난 결코 한 곳에 쉽게 정착해 버릴 수 있는 성질의 사람은 아니예요. 내 핏속에는 끝없는 모험 정신이 흐르고 있어요.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해요. 하지만 그런 것들을 기꺼이 이해하고자 하는 여자는 거의 없죠. 처음에는 물론 이해하는 척 하지요. 그렇지만 그들은 머지않아 본성을 드러내고 말더군요. 그건 마치 사자를 새장 속에서 키우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나는 태어날 때부터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세계를 방랑하도록 운명지워진 사람이란 말입니다." 찰스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이미 그에게서 엄청난 매력을 느끼고 있었지만, 다음에 이어진 그의 말에 그녀는 더더욱 커다란 공감을 느꼈다. "나는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 또한 거의 해본 적이 없답니다. 일종의 부담으로 다가올 뿐이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최소한 두 셋 정도의 아이를 원하더군요" 그녀는 감히 이유를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로 인하여 금방 그런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존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로 나는 다른 그 누군가를 그토록 사랑할 수가 없었어요. 존은 내게 있어서 동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아들이었다고나 할까. 그런 그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 입니다." 찰스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지만 그는 부끄러워하거나 당황해하는 기색도 없이 계속해서 자신의 세계를 차분히 펼쳐 보였다. "난, 다시 그런 아픔을 맛볼 수는 없어요. 차라리 지금과 같은 생활에 머물러 있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할 것 같아요. 지금의 나는 무척 행복하니까 말입니다." 그는 어느새 뺨을 타고 흘러내려와 있는 눈물을 훔치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친구들이 보기에는 그런 내가 무척 안타까운 모양입니다. 바이올렛은 내게 여자 친구를 소게 해주지 못해서 항상 안달을 한답니다. 적어도 내가 이쪽 새상에 나와 있는 동안만은 그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아요." 그는 말을 끊고 잠시 망설이다가 쥐고 있던 오드리의 손을 톡톡 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어때요. 오드리? 언젠가 자리를 잡고 정착하지 않을 건가요?" 오드리는 그런 쪽은 아예 포기하고 있었고 전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물론 당신도 많은 것들을 포기하셔야 하겠지만, 나 역시 결혼이나 그런 관습적인 것들에 나 자신을 끼워 맞추고 싶지는 않아요." "그럼, 아이들은?" 그녀는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내겐 아나벨이 있으니까요." 그건 그녀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대답이었다. "이젠 아나벨의 아기도 있고 할아버지도 있잖아요. 나 자신의 아이는 필요없어요."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대신 살아 주는 그런 생활을 영원히 계속할 수는 없을 거예요. 당신은 그런 일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고 그것이 당신의 너무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에요." "당신이 어떻게 그걸 알 수 있죠?" 그는 이미 본능적으로 그녀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있는 듯했다. 사실, 그의 말이 틀린 것만도 아니었다. "당신은 당신 자신으로서 존재할 때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나라고 해서 그러지 말라는 법이 있나요?" "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살지만 당신은 그렇지가 못해, 그렇지 않나요?" 찰스의 목소리가 무척 부드러웠다. 그는 다시 한번 오드리의 손목을 고쳐 잡았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일, 해야할 일들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당신 말이 옳아요.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무것도 없어요. 적어도 지금은 말이에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이번 여름을 내게 주어진 선물로 받아들이고 때가 오면 돌아가는 것 밖에는 없어요." "그러면 그 후에는 어떻게 할 겁니까? 당신이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것은 당신 인생의 얼마 만큼을 차지하고 있는가요?" 그녀는 내뱉다시피 대답했다. "내 인생 전부예요. 어정쩡하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는 이미 존에게서부터 그러한 것을 배워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영혼의 밑바닥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지극히 두려운 것이었다. 그는 15년 동안이나 그런 생각들을 잊은 채 지내왔지만, 갑자기 그의 영혼을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오드리라는 여인이 여기 나타난 것이다. 이제서야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찰스는 지금까지 그녀를 찾아 온 것도 아니었고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는지 어떤지는 아직은 미지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녀는 솟아오르는 태양에 갈색 머리카락을 반짝이며 그의 눈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난 우리가 어떻게 해서 만날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난 이미 당신과 사랑에 빠져 비린 것만 같군요." 그녀는 너무나 갑작스런 그의 말에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난 글쎄요. 난 지금...." 그녀는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하코트, 아나벨, 할아버지.... 그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있었다. 세상을 보고 싶어하는 그녀의 갈망, 살아 있고자 자유롭고자 하는 그녀의 모든 욕구들, 또한 그러한 자신의 욕망들을 그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다는 아련한, 이미 포기해 버렸던 꿈들이 이제 너무도 갑자기, 그리고 너무도 우연히 찰스라는 존재와 숙명적으로 부딪히게 된 것이었다. "저 도 그래요.." 오드리는 몹시 당혹감을 느꼈다.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무력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그에게로 몸을 기대었고 그는 숨이 막힐 정도로 힘주어 그녀를 껴안았다. 찰스는 오드리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는 마치 이전에 그 어떤 여자와도 키스를 해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점점 그들의 키스가 강렬해 질수록 그녀는 마치 하늘 높이 자신의 가슴이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들은 하루 전까지만 해도 완전히 남남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서로 껴안은 채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서면서,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마련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의 앞으로의 생활이 결코 이전과는 같아질 수가 없게 될 것이었다. "오드리...." 그녀의 침실 문앞에 이르자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다시 한번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에겐 너무나도 많은 공통점이 있는 것 같군요." 찰스는 그녀같은 여자를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놀랍지 않아요?" 한편으로는 너무나 꿈같은 이야기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별로 공정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며칠만 지나고 나면 그녀는 두 번 다시 그를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안티베스에서 얼마나 계실 건가요?" 그녀는 겨우 용기를 내어 그렇게 물어보았다. "될 수 있는대로 오랫동안 있겠어요." 다시 한번 그들의 두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6 찰스는 계속 호돈부부와 함께 머무르며 나태와 쾌락 속에서 또 다른 일주일을 보내고 있었다. 그곳 안티베스에서 그들 네 사람은 어디를 가든 항상 붙어 다니며 즐거운 하루 하루를 보냈다. 또한 오드리와 찰스는 둘만의 시간을 자주 가질 수 있었다. 그녀가 어디론가 사진을 찍으러 가면, 찰스가 그녀를 따라가 사진 찍는 모습을 구경하곤 했다. 그들이 서로 알고 지내기 시작한 것이 불과 며칠밖에 안 되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던 것이다. 그녀는 그날도 '에제'의 조그만 산 동네에서 어떤 고가를 카메라에 담고 있었고, 그는 사랑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런 그녀를 지켜 보고있었다. 그는 그녀가 사진 찍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항상 어디를 가든 지니고 다니는 그 조그만 레이카 카메라를 얼마나 능숙하게 다루는지를 잘 알 수 있었다. "언젠가 기회가 오면 당신과 함께 책을 한 권 만들어 보고 싶은데 당신 생각은?" 그녀는 계속해서 두 장의 사진을 더 찍고는, 갑자기 몸을 돌려 그의 놀란 표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인가요. 찰스?" 그녀는 그가 그곳에 도착한 이후, 축복받은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보다 여성적이고, 보다 명랑해져서 이미 그녀의 눈빛은 예전과는 다른 눈빛이 되었다. 바이올렛은 제임스와 단 둘이 있을 때마다 오드리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제임스는 별일 아닐 거라고 가볍게 넘겨 버리곤 했지만 바이올렛은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찰스는 결코 결혼 같은 것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오랜 옛날부터 그렇게 이야기를 해오고 있었고, 사실 그의 경력에 비추어볼 때 결혼이라는 것과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제임스에게 조차도 찰스가 오드리의 매력에 흠뻑 취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바이올렛의 표현을 빌자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그녀와의 사랑에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진심으로하는 말이지. 당신의 사진 솜씨는 수준급 이상이야. 내 글보다도 당신의 사진이 훨씬 더 훌륭한 것 같아." "설마!" 그녀는 그의 겸손에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점심이나 먹을까요?" 발밑으로는 아련히 지중해가 내려다 보이고, 주위에는 온통 야생화가 만발해 있는 산기슭에서 그들은 바구니를 풀었다. 문자 그대로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 그곳에서 오드리는 자신의 카메라가 그 아름다운 광경을 제대로 포착해 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풀밭 위에 편안히 몸을 눕히고 팔꿈치로 머리를 괸 채 한 손에는 사과를 들고, 입가에 미소를 가득히 머금고 찰스를 올려다 보았다. "난 지금 너무너무 행복해요. 찰스." "정말?" 그 역시 흡족해 하는 표정이었다. "그 이유가 뭔지 생각해 보았어 ?" 그는 몸을 구부려 그녀의 코끝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나 역시 바로 지금이 내 전 인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한 순간이야." 그가 다시 그녀의 입술에 뜨거운 키스를 퍼붓자 그녀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가득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걱정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는 이렇게 물었다. "돌아가야 할 때가 오면 우린 어떻게 해야하죠?" 그녀는 서서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그들의 이 행복한 생활은 막을 내려야만 할 것이다. 그들은 둘 다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는 9월 14일에는 배를 타야만 해요." 그녀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책임감과 의무감, 아나벨은 두 번째 임신에 커다란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최근 편지에는 편지지 위에 떨어진 그녀의 눈물자국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오드리는 애초에 계획한 기간 동안 여행을 하는 것조차 죄스럽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늘이 두 조각이 나도 도저히 변경될 수 없는 계획인가?" "그렇진 않아요." 그녀의 입에서는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요." "왜 꼭 가야만 되는 거지?" "당신도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어요." "아니, 난 모르는걸." 찰스는 오드리의 결심이 얼마나 굳은 것인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는 요며칠 동안 차마 그녀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한 가지 생각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그 이야기를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인생은 두번 다시 예전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건 그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찰스...." 그녀는 그가 이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슬픈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웃고 마시고 파티에 참석하는 것으로 보냈지만, 오드리와 찰스는 그러한 간단한 소풍에서 서로의 영혼을 상대방에게 꺼내 보여 줄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왜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짓지, 오드리 ?" 그는 그녀 옆에 바짝 다가와 누웠고, 그의 따뜻한 체온이 오드리를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그녀는 지금까지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것들을 찰스에게서 느낄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그녀에게 일종의 부담감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근처에 피어 있던 연보라색 꽃잎으로 그녀의 귀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돌아가지 말라고 강요하진 마세요. 난 도저히 귀가를 늦출 수는 없으니까요." "이유가 뭘까?" "그건 공정하지 못한 일이라니까요." "누구에게 ?" "할아버지에게요. 난 내가 떠나올 때 할아버지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셨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요. 난 그런 할아버지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요." "그게 어떤 생각인데?" "내가 떠나올 때 할아버지는 어떤 환각에 빠져 있는 것 같았어요. 내가 혹시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나 않을까 두려우셨겠죠. 난 하지만 결코 그러지 않겠다고 할아버지에게 몇번씩이나 굳게 약속했어요. 그런 약속을 어길 수는 없단 말이에요." "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그는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을 더듬었고,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버지는 한 번 집을 뗘난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말이에요. 아버지는 할아버지께 틀림없이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했으면서도 운명이 그보다 휠씬 강했던 거예요. 아버진 두번 다시 돌아오지 못했어요.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 자신이 발견한 모험들에 완전히 빠져 버렸던 것이죠." 아버지의 기억을 더듬는 그녀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낭만적이면서도 과감한 분이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찰스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에겐 비슷한 점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것이 때때로 그녀를 당혹스럽게 했다. "그게 그렇게도 두려워, 오드리?" 찰스 자신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 역시 그와 똑같은 길의 인생을 지난 15년 동안 걸어온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찰스의 경우에는 그 어디에도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바이올렛이나 제임스 같은 친구들 외에는 정해진 시간에 돌아오지 않는다고 그를 책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가 떠날 때 소맷자락을 붙잡고 우는 이도 없었으며, 그가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 또한 없었다. 어떻게 보면 그는 그런 점에서 오드리가 부럽기도 했다. "난 그렇게는 도저히 할 수 없어요." 오드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 "당신 자신의 인생은? 당신 자신의 꿈들은 포기하겠다는 말인가, 오드리?" "그게 바로 제 꿈이에요." 그녀의 입가에는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단순한 꿈 이상의 것인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이 들려준 이야기와는 다르잖아." "그건 그래요!" 그녀는 바다 위로 태양이 솟아오를 때까지 서로의 이상과 인생과 그리고 자신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날 밤, 자기가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당신은 새로운 새계를 경험해 보고 싶다고 말했어." 그녀는 그들이 누워 있던 산기슭의 웅장한 아름다움을 자신의 품속에 끝어안으려는 듯이 두 팔을 마음껏 앞을 향해 뻗었다. "당신이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린 그때 네팔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고 생각되는데, 그렇지 ?" 그는 그녀의 마음을 약간은 무겁게, 부담스러운 방향으로 몰아 붙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호락호락 넘어갈 그녀는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할 수 있잖아요." 그러자 갑자기 그는 슬픈 표정이 되었다. "난 며칠 내로 이곳에서 떠나야 해, 오드리." 처음으로 듣는 그의 폭탄선언에 그녀는 심장이 멈춰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눈만 커다랗게 뜨고 그를 쳐다 보았다. 드디어 종말이 가까와져 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도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이렇게 빨리 닥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런던 타임즈에서 청탁받은 원고가 있거든." "지금 당장 가야 하나요?" "곧 가야지." "어디로 가시나요?" "난징, 상하이, 뻬이징....." "세상에..." 그녀는 커다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를 감싸고 있던 행복과 자유로운 대기가 그 한 순간에 모조리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그곳은 확실히 새로운 세상이겠군요. 그렇죠?" 그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신도 함께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그러고 싶어요." 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가 간다는 곳은 정말로 신비로운 세계가 될 것이다.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니까. 하지만 그것들이 그녀 인생의 일부를 차지할 수는 없는 노릇, 최소한 지금 당장은 도저히 그렇게 될 수는 없었다. "그런 여행에서라면 당신은 정말 훌륭한 사진을 쩍을 수 있을 거야.." 그는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슬픈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떠올랐다. "어디 사진뿐이겠어요 !" "당신은 언제 떠날 예정이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그들이 만났던 그 짧은 시간 동안 싹튼 서로의 사랑을 느끼며 그들은 타오르는 여름의 하늘 아래 두 손을 굳게 마주잡았다. "잘 모르겠어요. 먼저 이태리에서 몇 가지 할 일이 있고, 다음에는 베니스에서 오리엔트 특급 열차를 탈 예정이에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줄곧 눈을 감고 있었다. 찰스는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뺨을 타고 흘러 내리는 그녀의 두 줄기 눈물을 보고 말았다. 그녀는 눈을 뜨고 다시 그를 올려다 보았다. "당신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아.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이제 곧 지구의 반대편으로 떠나 가려 하고 있어." 그녀는 누웠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 부분에 관한 한 그녀는 어른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영원히 그를 차지할 수는 없는 운명에 놓였던 것이다. 결코 아무렇게나 판단을 내릴 시점이 아닌 것이다. "나중에 샌프란시스코로 오시지 않겠어요?" 그들은 서로 마주보며 미소를 나누었다. "단지 그것뿐이야? 아주 쉽게 말하는군." "그렇지 않아요." 이번에는 반대로 그녀가 그의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는 다시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갈께, 가서 장미 한송이를 입에 문 당신을 근사한 백마에 태워 내게로 데려오겠어." "멋져요 ! 찰스." "그래," 그는 그녀를 옆으로 끌어당겨 서로의 팔을 베고 잠시 풀밭위에 누워 있었다. 그들의 포옹이 점점 더 뜨거워지자 그녀는 현명하게 살며시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그녀의 의지를 무척이나 존중하고 있긴 했지만, 그의 전 생애를 통틀어 한 여인을 이토록 간절하게 원해 본 적은 일찌기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도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바이올렛과 제임스와 함께 있는 시간에는 억지로라도 쾌활한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샴페인 병 속에 빠진 듯한 하루 하루가 자꾸만 지나갔다. 오드리는 밤마다 그와 헤어져 자신의 침실로 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안타까웠지만, 결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바보스런 짓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평생 동안을 그런 바보 같은 것의 결과물을 안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찰스 또한 그렇게도 간절히 그녀를 원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그녀의 육체를 가지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이 너무나도 깊었던 것이다. "난 아무래도 냉수 마찰을 하거나 아니면 바다에 뛰어 들어가 수영이라도 해야겠어." 언젠가 파티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가 말했다. "난 당신 때문에 애가 타서 미칠 것만 같단 말야." 그녀는 본의 아니게 그의 애를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해요. 찰스."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사과 아닌 사과를 했고, 그는 자신의 팔을 그녀의 어깨에 둘러 그녀를 더욱 가까이 끌어 당겼다. "당신이 미안해 해야 할 일은 아니야. 어쨌건 나는 내 생애 최고의 나날을 보낼 수 있었고, 난 오히려 당신에게 감사를 해야 하겠지.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난 당신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간직할 거야." 찰스가 떠나기 전날 밤, 그들은 그들이 몇 주일 전에 처음으로 마주 앉았던 그날 밤처럼 태양이 솟아오르는 것을 지켜보며 베란다에 앉아 있었다. "정말 이상해. 그렇지 ?" 그는 심각한 눈빛으로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바이올렛과 제임스는 이미 오래 전에 잠자리를 찾아 이층으로 올라 갔지만, 찰스와 오드리는 차마 마지막 밤을 잠을 자며 헛되이 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치 내가 태어날 때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드니 말이야." "당신이 떠나 버리고 나면 내 삶은 너무나도 어색해질 것 같아요. 갑자기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겠죠." 그것은 그녀의 가장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는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와 모든 것을 함께 하고 싶다는 꿈을 버리지 못한 채 아쉬운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탁할 것이 하나 있어, 오드리. 재발 안 된다고 말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어."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큰 숨을 한번 들이쉬었다. "나와 함께 가겠어?" 그녀의 뛰던 심장이 일순간 멎어 버릴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심정이 그녀의 눈속에 열심히 나타나고 있었다. "이스탄불까지만 이라도 말이야, 그래도 당신은 시간 맞춰 런던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나는 9월 14일에는 베니스를 떠나야 하니까 당신은 14일에는 배를 탈 수가 있을거야."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한가닥 희망의 빚이 반짝이고 있었다. "오드리 !" 하지만 오드리의 고개는 이미 서서히 가로저어지고 있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찰스!" "도대체 왜 안 된다는 거지, 오드리 ? 우리가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 우리가 함께 해 온 그 모든 것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포기해 버릴 수가 있단 말이지 ?" 그는 정말로 화가 나서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들이 아침 햇살이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던 테라스 주위를 이리저리 거닐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안 된다는 말이 나올 수 있을까? 오드리, 당신 스스로를 한 번 생각해 봐. 우리들에 대해서도. 제발 부탁해 !" 그는 다시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그 애절한 표정에 오드리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최소한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생각이라도 해 보라구!" 그녀는 그와 함께 베니스로 간다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히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와 더불어 단 둘만이 남게 된다면 어떤 사태가 발생할 것인가. 관습 따위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되어 버릴 것이다. 안티베스에서도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지만, 그녀는 정말로 그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건 틀림없이 미친 짓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니스로 간다는 것은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는 밤새도록 그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마침내 태양이 솟아올랐을 때 그녀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결코 자신은 그와 함께 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그가 키스를 하는 바람에 미처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사이, 그가 먼저 입을 열어 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가 얼마나 짧은 인생을 살다 갔는지, 그리고 그 짧은 인생이 찰스 자신에게 있어서 얼마나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그런 이야기를 듣자 그녀는 갑자기 그 자신의 인생은 어떠한 것인가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는 지금 장 개석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일본에의해 침략의 위협 아래 놓여 있는 상하이에 대한 기사를 써야만 하는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그가 죽으면 어떻게 하나? 두번 다시 그를 볼 수 없다면>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가 다시 그녀에게 키스를 해왔을 때, 그녀는 그의 손이 천천히 자신의 허벅지 쪽으로 올라오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숨이 막힐 것 같았으며,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제발, 오드리, 나와 함께 이태리로 가요." 그녀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다 보았을 때, 그녀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절실하게 그것을 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의 뜻을, 아니 자기 자신의 뜻을 거역 할 수가 없었다. 오드리는 찰스가 그녀의 목에 키스를 하며 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했을 때, 이렇게 대답하고야 말았다. "베니스에서 당신을 만나겠어요." 그녀 자신도 스스로의 입에서 나온 그 말에 깜짝 놀랐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말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녀 역시 간절히 원하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보다 이성적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결국에 어떤 사태가 발생하고야 말 것인가? 그들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찰스가 기차에 오르기 전까지 단 이틀밖에는 없었다. 그들은 거기에 대해서는 바이올렛이나 제임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떠나던 날, 그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와 오래도록 키스를 나누었으며, 그녀 또한 그의 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가 가버리고 나자 바이올렛은 무척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오드리에게 물었다. "괜찮아, 오드리 ?" 바이올렛은 오드리가 눈물을 홀리며 주저앉고 말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 이렇게 물으며 그녀에게 독한 술을 한잔 가져다 주었다. 그녀가 그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가서 좀 쉬어야겠다며 조용히 자기 방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는 바이올렛도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오드리는 침대에 누워 찰스에 대해서, 그리고 찰스와 한 약속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었다. 그건 완전히 미친 짓 임에 틀림없었지만 그녀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9월 1 일 오후 6시, 산 마르코광장이 그들의 약속 장소였다. 그 이후로 일이 어떻게 되어갈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하느님뿐이리라. 하지만 오드리 자신도 단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알 수가 있었다. 자신은 그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는 것을 말이다. 7 그 다음주 역시 쏜살같이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찰스가 떠나고 난 후, 제임스의 동생이 그곳에 도착했고, 그 며칠 후에 바이올렛의 동생이 그들과 어울렸다. 어느덧 8월도 막바지에 접어 들었고, 그들 모두에게는 이제 머지않아 모든 것이 그 막을 내리게 되리라는 느낌이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오드리는 드디어 차를 몰고 그곳을 떠나야 할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그때까지 바이올렛이나 제임스에게 찰스가 떠나기 전에 그와 맺은 약속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그와의 약속을 취소해야만 하지 않을까, 자신이 하려는 행동이 완전히 이성에서 벗어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찰스를 만나지 않고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베니스로 가서 그를 만나야만 했다. 설사 만나서 다시 한 번 작별 인사를 하고 그를 위해 준비한 앨범만을 건네주고 돌아서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마침내, 오드리가 바이올렛과 제임스의 곁을 떠나는 날, 그들은 다시 한번 눈물잔치를 벌여야만 했다. 아이들과 헤어진다는 것이 오드리의 가슴을 더욱더 아프게 했다. 그녀는 알렉산드라를 위해 칸느에서 커다란 인형을 하나 샀고 아들 제임스 몫으로는 멋진 선원복 한 벌과 집에 있는 연못에 띄울 수 있는 장난감 배를 하나 사두었다. 바이올렛에게는 수정과 줄 마노가 박힌 브로치를, 제임스에게는 돔 패리그논 샴페인 한 상자를 각각 선물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한층 더 훌룡한 선물은 오드리가 그들의 모습을 찍어 놓은 사진들이었다. 갖가지 의상에 근사한 모자를 받쳐 쓴 바이올렛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은 사진과, 제임스가 찰스와 함께 바닷가를 거니는 장면도 있었고, 잔잔하게 깔린 황혼을 배경으로 제임스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운 눈길로 바이올렛을 바라보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그것들은 가버린 여름날들이 남겨 준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이었다. 오드리는 빌린 자동차에 오르기 전에 뭐라고 그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려고 했으나, 자신이 느꼈던 것들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다 마찬가지였다. "그 많은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감사합니다'라는 말 한마디 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지 모르겠군요." 그녀는 바이올렛과 따뜻한 이별의 포옹을 나누었고, 마침내는 둘 다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꼭 편지해야 해요 ! 틀림없이 약속했어요. 오드리 !" "할께요 ! 약속해요." 오드리는 다시 제임스를 껴안았다. 그들 부부는 런던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곳에서 며칠 더 머무를 예정이었다. 오드리는 자신의 두 뺨에 다정하게 입을 맞춰 주는 제임스가 마치 친오빠처럼 느껴졌다. 또한 그녀는 아나벨이 하코트가 아니라 바로 이 제임스 같은 남자와 결혼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아이들과 키스를 나눈 뒤,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한 채 차에 올랐다. 바이올렛은 다시금 복받쳐 오르는 아쉬움을 누르지 못하고 고개를 흔들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녀는 눈물을 홀리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작년에 하티 아주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이렇게 슬픈 일은 처음이에요." 그녀는 웃으며 코를 풀었다. "혼자서 운전할 수 있겠어요 위험할 텐데." "괜찮을 거예요." "당신은 자립정신이 너무 강한 것 같아 !" 그녀는 오드리와 찰스의 관계가 보다 심각한 것으로 발전하지 않은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그가 조금만 더 머물러 있다가 오드리를 이탈리아까지 태워다 주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는 자신의 일 때문에 그렇게 허등지둥 떠나 버렸던 것이다. 아무래도 제임스 말이 옳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찰스는 역시 결혼에 합당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오드리가 탄 차가 서서히 그들 곁을 떠나가고 있었다. "정말 한심한 일이군요 !" 오드리가 사라지고 나자 바이올렛은 제임스를 향해 고함치듯 말했다. "내가 그녀를 떠나 보낸 것은 아니지 않소. 내게 그렇게 고함지르지 말아요." 하고 그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쥐자, 그녀는 다시 한 번 코를 풀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뜻으로 한 이야기가 아니라 찰스 말이에요." "찰스가 왜 ?" 제임스가 영문을 몰라하며 되물었다. "그렇게 완벽한 아내감을 옆에다 두고도 못 알아보니 한심하지 뭐예요 !" "내가 말했잖아. 그는 결혼 같은 걸 할 사람이 아니라고." "내 말이 그 말이에요." 그녀는 정말로 안타까와하는 표정이었다. 제임스가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아, 그게 바로 당신 말이었군. 글쎄, 좌우간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너무 그렇게 괴로와하지 말아요. 그의 인생에는 애초부터 여자가 끼어 들 여지가 없었잖아. 그렇게 세상 천지를 돌아다니고, 유목민이나 낙타들과 함께 잠을 자고 하는 것들을 마다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어? 유목민 처녀가 아니라면 말이야." 하지만 여전히 바이올렛은 화가 풀리지 않은 표정이었다. "찰스는 바보 천치예요 !"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고." 갑자기 제임스도 말을 멈추고 아내를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당신은 오드리가 그런 것을 원하고 있었다고 생각해?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야." "난 그녀가 우리보다도 찰스의 그런 생활을 더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그녀 또한 찰스만큼이나 고집이 센 여자니까요. 그녀가 항상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할아버지와 그 말썽 많은 동생밖에는 없어요. 그 동생의 편지가 도착할 때마다 오드리는 하루 종일 우울해 하곤 했으니까요. 난 그녀가 찰스에게 뭔가를 기대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들 사이의 관계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 버린 것 같지는 않아요."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제임스는 항상 아내의 뛰어난 감각에 은근히 감탄하고 있었다. 그는 도저히 눈치도 채지 못한 부분을 아내가 감지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그녀가 찰스와 오드리에 대하여 무엇을 보았는지, 흑은 느꼈는지 궁금해졌던 것이다. 찰스는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으며, 오드리 또한 비록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함께 지내는 동안 커다란 애정을 느끼게 된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오드리가 떠나기 전에 무슨 언질이라도 주었어?" "아니요." 바이올렛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오드리와 찰스 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떠났지만, 난 오히려 바로 그 점 때문에 문제가 더욱 심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들이 둘 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 한마디도 말을 꺼내지 않은 것이 더욱더 이상하게 느껴진단 말이에요." 제임스는 마치 이 여자가 혹시 미친 것이 아닐까 하는 눈빛으로 바라 보고 있었다. "당신은 가끔 전혀 말도 되지 않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더군." 그는 몸을 굽혀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난 당신을 사랑해." "고마와요. 제임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마지막 남은 여름 햇살을 즐기기 위해 마련한,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의자에 등을 기댔다. 오드리는 해안을 따라 산레모, 라팔로, 포르토피노, 비아레지오 등을 거쳐 쭉 차를 몰다가, 거기서 해안선을 포기하고 육지 깊숙이 접어들어 피사와 엠폴리, 남 시에나, 페루지아, 스포래토, 비테르보를 거쳐 마침내 로마에 도착했다. 그러나 일단 로마에 도착하고 나자, 오드리는 그곳에서 구경하기로 계획했던 장소들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제임스와 바이올렛, 아이들, 그들 부부의 친구들 그리고 찰스밖에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길 잃은 한 마리 양처럼 성당과 박물관, 콜로시움, 카다콤 그리고 바티칸 등을 구경하며 혼자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녀는 이곳에 오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녀는 거기서 빌린 자동차를 포기하고 플로렌스행 기차를 집어 탔지만 그곳 또한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자기가 눈으로 보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성당과 박물관이 다 똑같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베니스에 가서 찰스를 다시 만나는 것밖에 없었다. 그녀가 드디어 베니스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을 때는 기차가 왜 그렇게도 더딘지 내려서 뛰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기차는 달리다 말고 수천번도 더 멈추는 것, 같았다. 게다가 한 번씩 기차가 멈출 때마다 수많은 인파들이 타고 내렸기 때문에 기차는 점점 더 연착이 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오드리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기차가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리란 것은 뻔한 사실이었고, 갑자기 그와의 약속을 광장으로 잡은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나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주 낭만적인 것처럼 들렸고, 그곳은 시간 맞춰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이태리 땅이라는 사실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었다. 기차는 8시가 약간 지난 시각에야 비로소 베니스 역에 도착했고, 하늘은 이미 붉은 오랜지 빚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오드리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이고 말았다. 그녀는 벌써 두 시간 이상이나 늦어 있었고, 지금 이 순간에 찰스가 어느 곳에 있을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찰스가 기다리다 지쳐 가버린 것만 같았다. 그들은 만약에 대비해서 호텔에다 약속을 정해 놓은것도 아니었다. 오드리 자신은 로마에서 그리티 호텔에 예약을 신청해 두었지만, 찰스가 어디에 머무를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심지어 그들이 다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조차 희박해 보였다. 그녀는 말할 수 없이 절망스러운 심정으로 사공이 곤돌라에 자신의 짐을 싣는 것을 바라보며 그에게 호텔 이름을 말해 주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갑자기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해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가는 길에 산 마르코 광장에 잠시 들려 볼 수 있을까요?" "산 마르코 광장이요?" 그녀는 여전히 절망에 빠져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는 이빨을 반쯤 드러내고 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는 오래 전부터 곤돌라 사공들이 써 왔던 커다란 모자를 쓰고, 튼튼한 두 다리로 몸을 지탱한 채 아름다운 보트를 저어 나갔다. 그녀는 곤돌라를 타고 지나가는 다른 관광객들과 다양한 형태의 지붕들에 장식된 모자이크가 저녁 햇살에 반사되어 금빛으로 반짝이는 모습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곳은 그녀가 지금까지 보아 온 관광지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배에서 내려 광장으로 달려갈 때 처럼 처절한 외로움을 느껴 본 것 또한 처음이었다. 그녀는 눈을 크게 치켜뜨고 카페에서 카페로 헤매고 다니며 찰스가 있을만한 곳을 샅샅이 다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갑자기 검은 머리칼에 영국식 레인 코트를 입은, 아주 낯익은 뒷 모습을 발견하고는 정신없이 달려가 보았지만 그는 다른 사람이었다. 30분이 지나고 나자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찰스는 오지도 않았거나, 아니면 왔다가 그냥 돌아가 버렸을 것이다. 그녀는 호텔로 돌아오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쏟아지는 눈물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고, 호텔의 짐꾼과 곤돌라 사공이 그녀의 짐들을 풀어놓자 그녀는 찢어질듯이 아픈 가슴을 안고 천천히 호텔로 들어섰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사람들이 모두 무엇인가 엄청나게 슬픈 일이 그녀에게 일어났으리라고 짐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객실은 지금까지 그녀가 투숙했던 어떤 호텔 방보다도 넓직했다. 큼직한 르네상스풍의 침대와 아름다운 골동품들, 대리석 탁자 등으로 장식된 훌륭한 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바보처럼 혼자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이미 9시가 넘은 시각에 찰스를 찾아 무작정 거리를 이잡듯이 헤매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호텔 카운터에다 파커 스코트라는 남자가 그 호텔에 투숙해 있지나 않나하고 물어 보았지만, 역시 대답은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를 찾기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기껏해야 다음날, 그가 있음 직한 일류 호텔들을 샅샅이 뒤져보거나, 그것도 안 되면 9월 3일에 기차역으로 나가서 다음 날 오스트리아에서 오리엔트 특급 열차와 연결되는 기차에 그가 오르기 전까지 그를 찾아내는 수 밖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여하튼 베니스에서 이틀이나 허송 세월을 보내야 한다는 것은 여간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방으로 주문한 저녁식사를 들면서, 일이 이렇게 된 것은 하늘이 내린 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뇌리를 스쳤다. 그를 베니스에서 다시 만나기로 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면 말이다. 그녀도 그것이 잘못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녀로서는 도저히 거역할 수가 없었던 약속이었고, 그 결과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녀가 마치 정신나간 사람처럼 혼자 앉아 찰스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다시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그저 식기를 가져가려는 호텔, 종업원이려니 생각하고 코를 풀며, "들어와요." 하고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문이 열리는 것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다가, 갑자기 숨이 막힐듯한 충격과 함께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기지 않은 채로 있던 문에서 찰스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오, 하느님. 당신이 어떻게.." 그녀는 터져버릴 것 같은 가슴을 간신히 억누르고 날으듯이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구를 만났을 때보다도 더욱더 커다란 기쁨이었다. 그 또한 마치 잃었던 아이를 다시 찾은 사람처럼 그녀를 힘껏 껴안았다. 그가 그토록 누군가를 열렬히 포옹한 것은 그의 동생 존이 죽고 난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가 너무나도 힘껏 그녀를 껴안았기 때문에 오드리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오, 찰스 !" 그녀는 너무나도 그녀답지 않게 그만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두 번 다시 당신을 만나지 못할 줄 알았어요." 찰스는 여전히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지 않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품에서 그렇게 쉽사리 도망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 오드리 ? 당신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 약간 놀라기는 했지만 모든 호텔에 다 연락을 취해 보고, 당신이 여기에 예약을 해두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어." 그녀는 존경의 눈초리로 그를 올려다보았고, 그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너무너무 두려웠어요. 난 생각하기를....." "내가 죽기라도 한 줄 알았나?" 그는 그녀의 붉게 충혈된 눈을 들여다보며 다시 한 번 그녀를 힘껏 껴안고 헝클어진 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난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야, 오드리. 괜찮아?" 그는 아름답게 꾸며진 방을 둘러보며 물었다. "나, 난...." 그녀는 비로소 얼굴에 웃음을 떠올렸다.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무척이나 젊은 아가씨처럼 보였다. "아주 훌륭한 방이죠?" "정말 그렇군."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그렇게 빨리 그녀를 찾아낸 것에 커다란 안도감을 느꼈다. 오드리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그녀를 찾으려고 별의별 생각을 다 해 보았던 것이다. "그렇게 놀라게 해서 정말 미안하오, 오드리. 로마에서 당신을 만났어야 하는 건데 웬 놈의 할 일이 그렇게도 많은지." 그는 외투를 벗어 의자 위에 던져 놓고, 그녀의 옆에 와 앉았다. 그녀는 다시금 냉정을 되찾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결코 당신을 만나지 않고는 이스탄불로 떠날 수 없었던 내 심정을 알아 주었으면 좋겠소." 그녀는 새로운 눈물을 흘리면서도 미소를 지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 그렇게도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나도 당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다음 번 배가 언제 있는지 알아보려고 까지 했는 걸요. 혹시 당신과 만날 날짜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해보았어요." 그녀는 눈물과 웃음이 뒤범벅된 얼굴로 팔을 들어 그의 목을 감싸안았다. "아, 찰스, 당신을 사랑해요." 그녀는 그 말을, 자신이 느낀 그 감정들을 그에게 들려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는 이미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그녀를 꼭 껴안고 기나긴 입맞춤을 나누었다. 이제 그들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이 누군가의 손님으로서 만나게 된 것도 아니었고, 더 이상 친구들의 눈을 의식할 필요도 없었으며, 그저 모든 것을 망각해 버려도 좋을 순간이었다. 찰스의 손이 천천히 오드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는 그 어떤 순간 보다도 그녀를 갖고 싶은 욕망에 불타고 있었고, 그것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 였다. "오, 찰스." 그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찰스가 그녀를 가만히 떼어놓고 일어서는 것이었다. "이제 난 가봐야겠지, 오드리?" 그는 자신의 말에 대한 그녀의 반응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지만, 오드리는 안티베스에서와는 달리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당신이 후회할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 그들 모두에게 있어서 그날 저녁은 무척이나 감동적이었다. 사실 찰스가 안티베스를 떠난 이후로, 그들은 둘 다 사고를 제대로 진전시킬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오드리는 이런 순간이 오기를 그토록 열렬히 기다려 왔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이 베니스로 온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스스로 그런 생각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두려웠지만, 어쨌건 그녀는 그런 생각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아가 그녀는 자신이 결코 후회하지 않으리란 것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날 이후부터 그녀는 그의 사람이 될 것이다. "싫어요. 가지 마세요 !" 그녀의 목소리는 몹시도 진지하고 침착하고 그리고 감각적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들어 그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온 몸이 그에 대한 욕망으로 불타오르게 하는데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다. "사랑해요. 찰스 !" 결국에는 모든 것이 그 말 한마디 만큼이나 간단한 것이었다. "정말로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그는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이며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리고 천천히 옆 방으로 건너갔다. 그가 등 뒤로 문을 닫자, 한 줄기 새어 들어오던 불빛마저 사라지고 은은한 달빛만이 온 방안을 감싸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과 눈과 입술을 볼 수 있었으며 다시 한번 부드러운 키스를 나누고는 어둠 속에서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몸을 조심스럽게 애무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그의 것이라는 사실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맨살에 와닿는 차거운 이불의 감촉에 몸을 떨며 등을 돌린 채 옷을 벗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 보았다. 찰스는 반대편에서부터 침대 속으로 들어와, 침대 중간쯤에서 오드리의 몸과 마주쳤다. 그는 팔을 뻗어 그녀를 부드럽게 껴안았고,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그에게 주었다. 그 역시 뜨거운 몸짓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을,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녀에게 바쳤다. 그 짧은 절정의 순간 이후로 그들 둘의 마음은 영원히 합쳐진 듯했으며, 그녀는 그의 품에 안긴 채 잠이 들었다. 이번에는 그들은 일출을 볼 수는 없었다. 다만 종루에서 들려 오는 은은한 종소리가 시간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8 그 둘이 베니스에서 함께 보낸 이틀 동안의 생활은 꿈속에서의 나날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데리고 도제스 궁전, 산타마리아 델라살루테, 커스텀스 하우스 등 이름 있는 관광지는 모두 둘러 보았으며, 곤돌라를 타고 탄식의 다리 밑을 지날 때 그는 그녀에게 한숨을 한 번 내쉬게 하고는 뜨거운 키스를 나누기도 했다. 찰스가 그렇게 하고 나면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말하자, 오드리는 그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그녀의 호텔방에서 보냈다. 그도 그녀와 같은 층에 조그만 방 하나를 빌려 놓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명목상에 불과했고 심지어 짐조차 그 방에 풀어 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이틀 밤, 이틀 낮을 마치 남편과 아내처럼 함께 살았고, 그런 이틀이 지나고 나자 오드리는 그가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에 또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녀 역시 같은 날 밤에 런던행 기차를 예약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탈 기차는 오스트리아 행이었던 것이다. 그는 거기서 오리엔트 특급으로 기차를 갈아타야 했다. 그녀는 그를 떠나보낼 생각에 너무도 참담한 심정이 되어, 그들이 함께 쓰던 커다란 대리석 욕조 속에 몸을 담그고, 마지막으로 그와 사랑을 나누었다. 그에게 또다시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갑자기 감정의 둑이 무너져 버린 듯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오드리. 제발, 제발 이러지 말아요." 그는 더 이상 그녀를 붙잡아 둘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와 함께 가자고 그녀에게 애원을 했고, 그녀는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계속해서 자신의 생각만을 강요하는 것은 너무나도 잔인한 일이었기에 그는 두번 다시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겠다고 그녀에게 약속했었다. "뻬이징에서 일이 끝나는 대로 가능한 한 빨리 샌프란시스코로 달려 가겠소." 그는 그녀를 힘껏 껴안아 주었지만, 그녀의 흐르는 눈물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바로 이 남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었고 이제 와서 그런 그를 떠나 보낸다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아픔이었다. 그녀는 이미 그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오드리의 온몸과 마음은 그가 떠난다는 생각에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라고는 전혀 주어져 있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이성을 되찾을 수 있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더 흘러야 했다. 찰스는 그녀가 옷을 입는 것을 도와 주며, 진주 목걸이와 귀걸이, 그리고 커다란 모자를 쓰는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 보고있었다. 그대로 시간이 멈춰 버릴 수만 있다면....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소중했던 순간이 끝나 가려 하고 있었다. 그는 지난 이틀 동안 오드리가 한번도 카메라에 손을 댄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형의 감정들 그리고 가슴 아픈 욕망들로 가득 찬 순간들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카메라에 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찰스에게나 오드리에게나 결코 잊을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그들은 호텔을 떠나면서 그리고 자신들의 짐이 곤돌라에, 실려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둘 다 똑같이 말할 수 없는 슬픔 속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호텔을 돌아보며 비통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난 두번 다시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아요. 찰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지?" 찰스는 그녀의 말에 깜짝 놀랐다. 혹시 자신이 그녀의 감정을 잘못 헤아리고 있던 것이 아닐까? "다시는 이곳이 이렇게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을 거예요. 지금 이대로의 소중한 기억을 영원히 내 마음속에 간직하고 싶어요." 찰스는 금방이라도 다시 울어 버릴 것처럼 눈물이 글썽이는 오드리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녀를 껴안아 곤돌라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 역시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할 것을 생각하니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터무니없게도 그 순간에 자신이 눈물을 참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그들은 역까지 가는 동안 길 잃은 두 어린 아이처럼 서로 계속 껴안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먼저 기차에 태워 주었다. 계획대로라면 그녀가 36분 먼저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짐꾼이 짐을 날라오는 것을 지켜 보며 그녀와 함께 그녀의 객실에 서 있었다. 둘 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재외하고는 아무런 할 이야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그녀에게는 지켜야 할 가족이 있었으며, 그들은 지금까지 그 어떤 사람들도 해보지 못한 사랑을 서로 나누었다. 그들은 둘 다 마침내 헤어져야 할 시간이 오고야 말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뺨을 타고 흘러 내리는 눈물을 감추며 마지막 작별의 키스를 나누는 순간, 그들은 두 눈을 감고 말았다. 찰스가 먼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 "사랑해, 오드리.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당신을 사랑할 거야." 그는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이스탄불까지 함께 가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런 말을 입밖에 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에게 또 다시 그런 것을 강요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불공평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그 말 대신 작별 인사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존의 죽음 이후 그에게 닥친 가장 커다란 아픔이었다. "내 온 마음을 다 바쳐 당신을 사랑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라리 흐느낌에 가까왔다. "몸조심 하세요."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의 품에 매달렸고, 그는 서둘러 그녀의 객실을 빠져 나와 기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그는 채 몇 발자욱도 가지 못하고 다시 돌아서 그녀의 창가로 달려왔다. 오드리는 급히 창문을 열고 몸을 내밀어 다시 한 번 키스를 나누었고, 그제서야 그들은 미소를 지었다. "뻬이징에 다녀와서 다시 봅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스스로도 인정 했듯이 몇 달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꼬박 반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찰스 자신도 중국에 얼마 동안이나 묶여 있게 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최소한 연말까지는 모든 일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당시의 일본과 중국의 적대적인 관계를 고려할 때 사태가 어떻게 진전될는지 도저히 짐작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편지할께, 오드리."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해본 적이 없는 약속이었고, 또 그 약속을 지킬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이스탄불 까지만 이라도 함께 가 줄 것을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렇지만 차마 그런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는 마지막 키스를 그녀에게 보낸 후 급히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플랫폼에 홀로 기대선 채 이렇게도 고통스러운 순간은 이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다시 맛볼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기차에 몸을 싣고 20분이 지나자 그녀가 탄 기차의 기적소리가 그의 아픈 가슴을 갈갈이 찢어놓듯 귓가에 들려 왔다. 찰스는 차라리 교수대 앞에 선 사형수처럼 두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그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댄 채 가버린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의 눈을 통해 보이는 그녀의 환상이 얼마나 절실했던지 마치 그녀가 자신의 객실 안에 함께 있는 듯, 그녀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고,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 오는 것만 같았다. "이제 눈을 떠도 돼요. 찰스 !" 그는 거의 온몸의 털이 곤두설 것만 같은 심정으로 손을 눈에서 때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한두 발자욱 앞에 오드리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고, 짐꾼 한 사람이 그녀의 짐을 그의 객실에 옮겨 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아니, 이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오드리 ! 심장이 뛰다 말고 얼어붙어 버릴 것 같아." 그는 신음소리인지 환성인지 모를 고함을 내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있는 힘을 다해 그녀를 품속에 끌어 안았다. 그의 키스가 얼마나 강렬하던지 그녀는 혓바닥이 뿌리까지 뽑혀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스탄불까지 당신과 함께 가기로 했어요." 그녀는 아까 돌아선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마음을 굳혔었다. 아직까지 그를 떠나보낼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또한 또다시 계획이 지연되지만 않는다면 14일에는 런던행 마우레타니아 호를 탈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만 된다면 대서양을 건너갈 다음 배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와 함께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설마 그동안 마음이 변하지는 않으셨겠죠?" 그녀는 이제 활짝 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바짝 고두선 자신의 신경을 가라앉히기 위해 독한 술이라도 한 잔 마시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물론이지." 찰스는 오드리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억센 팔로 그녀를 껴안았고, 그제서야 짐꾼도 정신을 가다듬고 밖으로 나가 주었다. "다시는 당신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 오드리. 내 남은 인생을 당신 없이 산다는 것은 이제 생각도 할래야 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어."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구혼을 하시는 건가요?" 그녀는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 당신 없는 인생은 상상할 수 없어. 오드리" 그것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오드리가 가족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찰스가 그의 경력을 포기하든지 둘 중의 하나는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나 그나 그렇게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그런 것을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아요. 지금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만을 행복하게 보내는 것이 더 급한 일 아니겠어요?" 그녀는 현명한 여인이었고, 이미 자신의 결론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녀는 찰스와 함께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하기로 이미 마음을 굳힌 것이다. 이스탄불까지만이라도 말이다. 어쩌면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른다. 더 두고봐야 하겠지만 말이다. 9 오드리와 찰스는 오스트리아까지 가는 동안 밤새도록 사랑을 나누었다. 다음날 아침 잠을 깬 오드리는 온통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커다란 눈으로 주위를 잠시 둘러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순간적으로 찰스와 함께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금방 모든 사실들이 기억 속에 되살아났다. 속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던 기차가 이윽고 멈추어 서자 오드리는 찰스의 어깨 너머로 창밖을 기웃거리다가 마침내 건너편 플랫폼에 서 있는 금빛 기차를 보게 되었다. "유럽 횡단 초특급 열차 국제선"이라고 불어로 적혀진 표지판을 보고는 오드리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녀가 그렇게도 오랜 세월 동안 수도 없이 이야기를 들어 온 바로 그 기차였던 것이다. 오드리의 할아버지도 그녀에게 그 기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이미 오래 전에 그 기차를 타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물려준 앨범 속에도 들어 있던 바로 그 기차 앞에 그녀가 와 있는 것이다. 그녀는 솟아오르는 감흥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 웅장한 기차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찰스, 저길 좀 봐요." 어린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하며 찰스를 깨우자 그는 부시시 눈을 뜨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잘 잤소, 오드리?" 찰스의 한 손이 오드리의 등을 애무하듯 어루만졌지만,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그런 그의 동작보다는 바깥의 풍경에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꽤 이른 시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기차에 오르고 있었다. 은행가인 듯한 신사들과 마치 영화배우처럼 옷을 차려 입은 부인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9월의 따뜻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은빛 여우 모피나 두꺼운 밍크 코트를 걸친 여인들도 있었고, 가느다란 체크 무늬가 쳐진 정장에 중절모자, 그리고 무거워 보이는 금빛 시계줄을 아랫배 근처에 늘어뜨린 남자들도 있었다. 오드리는 한참이나 넋을 잃고 그런 광경들을 바라보다가, 찰스를 밀어 젖히고 무언가를 정신없이 찾기 시작했다. 찰스는 그가 농담삼아 말한 것처럼 그저 단순한 기차일 뿐인 것을 가지고 그렇게 그녀가 법석을 떠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어이가 없어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오드리가 마침내 찾아낸 것은 자신의 레이카 카메라였다. 그녀는 카메라를 찾자마자 바깥 풍경들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저건 우연히 만들어진 단순한 기차가 아니라 바로 오리엔트 특급열차란 말이에요." 찰스는 웃음을 터뜨리며 순식간에 필름 반 통을 다 찍어 버린 그녀의 카메라를 건네 받아 땅에 내려놓으며 마치 굶주린 늑대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로 이게 당신이 나를 따라온 이유로군. 사진을 찍으려고 말이야." 그는 농담을 던지며 다시 그녀를 끝어 안았다. "어머나, 어쩜 그렇게도 잘 아세요? 그럼 당신은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뭔줄 알았었나요?" 그들은 킬킬대며 끝없는 키스를 나누었고, 그들의 웃음 소리가 사라질 즈음, 그들은 서로 한몸이 되어 새롭게 사랑의 동작들을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뜨거운 열정의 순간이 지나가자,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품에 안은 채 행복에 겨운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당신과 함께 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찰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오리엔트 특급열차에 올랐을 때, 오드리의 기쁨은 한층 더 커졌다. 객실과 식당 칸은 온통 아름다운 무늬가 아로새겨진 목재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들이 쓸 객실에는 비단 커튼이 달린 응접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실내 장식이 너무나 아름다왔다. 기차라기보다는 호화스런 저택의 응접실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고, 오드리는 다른 손님들이 모두 기차에 오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식사를 하면서 더욱더 입이 벌어졌다. 물론, 저녁 만찬보다는 작은 규모였지만 모든 격식과 절차를 완벽하게 갖춘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에는 짚시 음악가들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고, 산뜻하게 차려 입은 웨이터가 스테이크를 곁들인 전채, 숯불로 구운 연어 등을 정식 코스에 앞서 날라왔다. 무척이나 시장했던 오드리와 찰스가 그것들을 깨끗이 먹어치우고 나자 다시 푸짐한 케비어가 그들의 식탁에 놓여졌다. 찰스는 그런 요리들을 먹어 보더니 이 기차에는 냉장시설이 그 어느 음식점보다도 잘 갖춰져 있는 것이 틀림없다며 흡족해 했다. 그러한 냉장시설 덕분에 그들은 원하는 모든 음식들을 거의 맛볼 수 있었다. 네덜란드 소스를 듬뿍친 아스파라거스, 싱싱한 양고기, 잘 튀긴 새우 등등 나머지 요리들도 모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것 들이었다. 향긋한 비엔나 커피까지 한 잔 마시고 나자, 오드리는 뿌듯한 포만감에 사로잡혔고 찰스는 평소에는 잘 피우지 않던 담배까지 한 대 붙여 물었다. 오드리는 자신의 의자에 몸을 파묻고 앉아 찰스의 담배에서 피어 오르는 파란 연기와 승객들이 하나씩 하나씩 기차에 오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밍크코트에 회색 스웨터를 받쳐 입은 한 여인이 중절 모자를 쓰고 외알 안경을 낀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조그만 강아지 두 마리가 그들의 발꿈치께서 쿵쿵거리고 있었다. 그 뒤에는 빨간 실크 드레스를 입은 또 다른 여인이 서 있었는데, 그녀의 피부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매끈해 보였고 귀에는 커다란 루비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어딘지 정갈하지 못해 보이는 그녀는 기차에 오를 때 허벅지를 훤히 드러내 보이기도 했으며 가방과 트렁크를 잔뜩 두 손에 들고 있었다. 객실로 돌아 온 오드리는 커다란 소파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자신의 아버지가 남겨 놓은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찰스에게 들려주며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찰스와 함께 여행을 하니 마치 가장 절친한 친구와 함께 있는 듯하여 몸과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찰스와 오드리는 거의 모든 견해들이 서로 일치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배꼽을 잡고 웃기도 했는데, 그는 그녀가 아주 사소한 일에서도 커다란 기쁨을 느끼는 것을 보며 일종의 감동을 느꼈으며, 그녀는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을 갖고도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이스탄불에서의 하룻밤이 지나면 그때는 정말 오드리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벌써부터 안타까울 따름이었지만, 그 문제는 아직은 생각조차 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재 막 그들의 여행이 시작되었고 정말로 아직은 작별인사를 생각해야 할 시간이 아닌 것이었다. 바로 지금 시작했으니까. 그날 오후, 기차가 출발하기 전에 오드리는 샤워를 하고 칸느에서 바이올렛 부인과 함께 산 핑크빚 드레스를 곱게 차려 입었다. 찰스는 그녀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러한 그녀의 모습은 역시 아름다운 선남선녀들이 가득 찬 그 기차에서도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아 보였다. 그녀는 또한 진주귀걸이와 잘 어울리는 커다란 진주목걸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의 할머니가 쓰던 것을 그녀의 21번째 생일날 할아버지가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던 것이다. 오드리는 찰스와 함께 팔짱을 끼고 플랫폼을 거닐다가 낯선 제복을 차려 입은 한 무리의 남자들이 기차 출입구 근처에 지켜 서서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이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모습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들은 뭐죠?" 오드리가 잔뜩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묻자 찰스는 그들의 옷깃을 힐끗 쳐다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들의 제복은 그가 예전에 독일에서 봤던 것과 비슷해 보였다. "히틀러의 병사들 같구먼." "히틀러의 병사들이 여기까지요?" 그는 이미 7개월 전부터 독일의 총통이라고 불리고 있었지만, 여기는 오스트리아가 아닌가 ! "오스트리아에도 나찌들이 있어. 6월 달에 비엔나에서도 나찌들을 봤는걸. 비록 여기서는 그들이 제복을 입고 다니는 모습을 찾아보기가 무척 힘들기는 하지만 말이야. 오스트리아 총통인 돌푸스가 올 초에 자국 내에서 나찌의 제복을 입는 것을 전면 금지시켰기 때문이지. 그러한 조치에 머리 끝까지 화가 치민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방문하는 독일인들에게 엄청난 세금을 때려 버렸어. 덕분에 여기서 관광업을 하는 사람들이 폭싹 망하기도 했지만, 그러한 금지규정을 무시하는 나찌들도 더러 있는 모양이더군. 아마도 저기 있는 저 친구들은 어떤 임무를 수행하러 행차한 모양 같은데..." 오드리는 그들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호기심이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녀는 미국에 있을 때부터 히틀러에 대해 써 놓은 글들을 많이 읽었고 바이올렛과 제임스도 심심찮게 히틀러 이야기를 꺼내곤 했었다. 그들은 아무래도 히틀러를 약간은 위험스러운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마침 그 제복의 사나이들이 한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그 남자는 아내와 또 다른 한 명의 신사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인 것 같았는데, 그들 셋 모두 근사하게 차려 입은 중년들이었다. 두 사람 가운데 약간 더 키가 큰 남자가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의 나찌에게 무언가를 침착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나찌가 뭐라고 짧게 한마디 내뱉자 좀 더 키가 작고 나이 든 남자가 두 장의 여권을 내밀었다. 아마도 자신의 것 하나와 다른 하나는 아내의 것 인듯 했다. 오드리는 그런 모든 장면을 주의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나찌가 저 사람들에게 뭘 요구하고 있는 것 같아요. 찰스?" "신분증을 확인하고 있는 거겠지." 그는 간단히 대답하고는 그녀 앞에 놓인 잔에 마실 것을 따라주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이 두 나라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서 지나치게 신경들이 예민해서 그래. 하지만 우리들까지 귀찮게 굴진 않을 거야." 찰스는 어떻게 하든 오드리의 희망에 부푼 여행에 방해가 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고 싶었다. 찰스의 귀에도 나찌 정권에 대해 우려하는 이야기들이 그해 초부터 들려 오고 있었다. 그 정권이 독일을 위해서는 무언가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실제로도 훌륭한 도로를 건설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들의 지나치리만큼 폭력적인 유태인 감정에는 그로서도 별로 심기가 편치 못했었다. 그도 오드리를 따라 창밖으로 눈길을 주고 있다가 갑자기 나찌 증의 하나가 예의 그 키 작고 나이 든 남자의 멱살을 움켜쥐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플랫폼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랬고, 그의 아내 같아 보이는 여인은 찢어질 듯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찌들은 그 남자의 얼굴을 한 대 후려치고는 그가 보여 준 여권을 내팽개치더니 그의 아내와 다른 한 사람의 동행에게 뭐라고 한마디 내뱉은 다음, 아무런 절차도 필요없다는 듯 그 남자를 강제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친구와 아내 쪽을 바라보며 무슨 소리를 외치기도하고 나찌들에게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설명하려는 듯 반항하는 몸짓을 했으나, 그런 그의 노력은 모두 헛수고였다. "저 사람이 뭐라는 거예요? 뭐라고 그랬냔 말이에요?" 오드리는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이제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동행하던 다른 남자의 팔에 안겨 흐느끼고 있는 여인을 안타까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괜찮아, 오드리." 찰스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안심시키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 곧 풀려 나오게 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 하지만 그런 그의 말과는 달리, 그 사람들의 짐이 기차에서 내려졌으며, 남은 한 남자와 그 부인은 여전히 울면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세상에 !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견디지 못한 오드리가 바깥으로 뛰쳐 나가려다 마침 승무원 한 사람과 마주쳤다. "아까 그 남자분, 어떻게 된 거예요?"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지극히 냉담하기만 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녀와 똑같이 그 장면을 목격했을 테지만 모두들 한마디 말도 없이 제각기 자신의 발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부인." 그 승무원 역시 별일 아니라는 듯 그녀의 뒤로 찰스를 한번 흘낏 훔쳐 보고는 재빨리 대답했다. "사소한 범죄자 한 사람이 이 기차를 타려고 했을 뿐이에요." 하지만 그 사람은 전혀 범죄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은행가나 기업가 정도는 됨 직한 용모였던 것이다. 훌륭한 모자와 우아한 멋을 풍기던 양복의 차림새도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었으며, 그의 부인 또한 무척 값비싼 옷을 입고 있었다. "문제될 것은 전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그 승무원은 가버렸지만, 바로 몇 분 후에 오드리의 귀에는 누군가가 기차에 오르며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 특히 그 중에서도 하나의 단어가 보다 선명하게 귓전에 박혔다. 오드리는 당황한 눈빛으로 이번에는 찰스를 바라보았다. "당신도 들었죠? 방금 그 여인이 유태인이라고 그랬어요. 아까 그 남자를 말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요. 그렇죠?" "글쎄, 난 잘 모르겠는걸." 그는 그녀가 그 일에 자꾸만 신경을 쓰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들은 유태인이었어요. 끌려 간 그 남자는 유태인이 틀림없다구요. 세상에! 요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 이야기가 사실이었군요. 그렇죠? 오, 하느님. 찰스, 어쩌면 좋죠?"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팔을 어루만지며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어, 오드리. 그 일 때문에 우리들의 여행을 망쳐 버릴 수는 없잖아?" 그는 진심으로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또한 그의 말이 옳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들이 그 남자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말에 오드리의 눈꼬리가 치켜졌다. "그렇지만 그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친구들의 여행은 완전히 망가져 비렸어요. 그렇지 않나요?" 그녀는 찰스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만약 그들이 제임스와 바이올렛이었다면 어땠을까요? 만약에 그렇게 끌려 간 사람이 제임스였다면, 그래도 당신은 그냥 그렇게 내버려두었을 건가요. 아니면 무언가 대책을 세웠을 건가요?" "이것봐요. 오드리." 찰스의 얼굴에 언잖은 표정이 역력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건 문제가 다르지 않소. 물론 제임스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나도 가만히 있진 않았겠지. 하지만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를 위해 할 수 있었던 일은 전혀 없었어...딱 감고 잊어버려요." 그러나, 찰스라고 해서 그런 사건을 보고도 기분이 유쾌할 리는 없었다. 마침내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오드리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오드리, 아까의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어." 그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급기야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무서워요. 찰스. 왜 우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죠?" "밀려오는 파도를 혼자의 힘으로 막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지금 이 순간에도 추잡한 일들이 수없이 벌어지고 있을 테지만, 우린 그런 일에 말려들지 맙시다." "정말로 그렇게 해도 된다고 믿으세요." 그녀는 그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물론 나 혼자라면 결코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 거야. 하지만 당신에게 위험이 닥칠지도 모르는 일이라면 나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아. 만약 아까 그 상황에서 내가 무슨 행동을 취했다면, 꼼짝없이 나도 체포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을 게고, 그렇게 되었더라면 당신은 또 어떻게 되었겠어? 히틀러의 병사들은 여기서는 누구 못지않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이야, 우린 결코 그런 일에 개업할 입장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돼. 여긴 뉴욕이나 런던이 아니라구, 여긴 당신의 집과는 엄청나게 먼 곳이란 말이야." 그녀에게도 차츰차츰 그런 생각들이 미치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그 사건에 대한 생각마저 떨쳐 버린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우리가 괜히 초라해지는 것 같지 않으세요." 그도 그녀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그런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사람이 정말로 제임스였다면? 혹은 오드리였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는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 오드리를 더욱 가깝게 끌어당겼고, 그들은 서로의 품에서 안락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곧 그들의 가슴속에는 상대방에 대한 욕망들이 새롭게 꿈틀거리기 시작했으며, 차창 밖에 스쳐 지나가는 시골 풍경을 배경으로 소파 위에 누운 채 다시 한번 그러한 욕망들을 마음껏 키워 나갔다. 그런 다음에서야 비로소 마음의 평정을 되찾은 그들은 저녁식사를 위해 옷을 갈아 입었다. 자꾸만 일류 호텔에 투숙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기차 속에서 찰스는 오드리를 앞세워 식당차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 놓으며, 등이 많이 파인 오드리의 하안 드레스와 리비에라에서 햇볕에 검게 태운 오드리의 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저녁 식탁에서 또다시 플랫폼에서의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번에는 긴장감이 많이 해소되어 별로 심각한 어조들은 아니었다. "이곳 오스트리아에서는 그런 일들이 자주 벌어 지나요? 유태인이란 유태인은 모조리 체포하는 모양이죠? 웨이터가 그들의 포도주 잔을 다시 채워 주고 가자 오드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나도 확실히 모르겠어. 6월 쯤엔가 비엔나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어. 그보다 몇 달 전에는 베를린에서 그런 소문이 나돌고 있더군. 내가 보기에는 유태인을 모조리 체포한다기보다 그저 닥치는 대로 잡아 들이고 있는 것 같더군. 독일 정부는 유태인을 자기네들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나로서는 히틀러가 그리 미덥지 못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유태인에 대한 그런 생각들은 무척이나 애매모호한 해석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녀도 일말의 불안감을 씻어 내지 못한 채 그의 말에 동의했다. "제임스도 안티베스에서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어쨌거나 히틀러가 독일 전역을 군사 기지화하려 한다는 사실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인 것 같아요. 그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전쟁이 터지기 밖에 더 하겠어요? 왜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 걸까요." "우리들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지, 특히, 미국인들은 다 그런 것 같더군. 미국 사람들은 히틀러를 아주 대단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는 모양이야." "그런 걸 생각하면 자꾸만 걱정스러워져요." 오드리는 다시금 역에서 끌려 간 그 남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찰스도 담배를 붙여 무는 표정이 자못 심각해져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도 어쩌면 사치일지 모르겠어요." 체코슬로바키아를 거쳐 헝가리, 루마니아로 접어들수록 점점 더 그런 불길한 예감이 그들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했다. 이따금씩 기차가 멈출 때마다 어김없이 예의 그 제복을 입은 병사들이 나다니곤 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들이 모든 승객들을 샅샅이 조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없이 많은 승객들이 제각기 자신들의 밀폐된 객실 속에서 나름대로의 여행을 은밀히 즐기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차가 이스탄불에 가까와질수록 오드리의 얼굴에도 점점 슬픔의 그림자가 짙어져 갔다. 그날 밤, 기차가 잠시 정차한 사이에 플랫폼에 내려 마지막으로 산책을 하는 동안 오드리는 줄곧 눈물이 맺힌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베니스와 오리엔트 특급열차에서 보낸 짧은 시간들은 마치 신혼여행처럼 느껴졌다. "정말 믿을 수가 없어요. 찰스. 단 이틀에 불과한 순간들이었지만 마치 평생을 꿈 속에서 보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녀는 긴 한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이대로 끝내 버리기에는 너무나 안타깝지 않아요?" 찰스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두 손을 꼭 감싸쥐었다. 그들은 정치에 대하여, 그들이 읽은 책들에 대하여, 그의 여행과 그녀의 아버지의 모험들에 대하여, 그의 잃어버린 동생에 대하여, 심지어 아나벨과 하코트에 대해서 까지도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었지만, 그래도 뭔가 더 할 이야기들이 있을 것만 같았고, 뭔가 더 하고 싶은 일들이 있을 것만 같았다. 다음날이면 그들은 이스탄불에 도착할 것이고, 또 그 다음날이면 그녀를 홀로 런던으로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언제 또 다시 그들이 만날 수 있게 된단 말인가? 다시 기차에 오른 그들은, 희뿌옇게 내려 깔리는 어둠속을 스쳐 지나가는 차창 밖의 시골 풍경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양치기 소년이 한가로이 양떼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목가적인 풍경이 신선하게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했다. 오드리는 소리없이 내려 깔리는 어둠을 응시하며 찰스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자꾸만 아까 그 남자 생각이 나네요. 그 사람 지금쯤 어떻게 있을까요?" 하고 그녀를 바라보는 찰스의 표정은 무척이나 차분했다. "아마도 지금쯤은 이미 풀려 나서 다음 기차를 탔겠지.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그런 일에 그렇게 마음쓰지 말아, 여긴 미국이 아니야, 오드리, 이곳은 낯선 일들이 자주 벌어지는 곳이니까. 당신이 어떻게 그런 일들에 일일이 관여할 수 있겠어 ?" 그것이 바로 그가 세계 각지를 돌아 다니며 쓴 기행문이 성공을 거둔 이유 증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는 전형적인 관찰자의 입장을 시종일관 고수했고, 결코 사건 자체에 휩쓸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찰스는 1932년,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공했을 때 마침 그곳에 있었다. 그는 그런 악조건에서도 마음대로 그 북새통 속을 드나들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의 원칙, 즉 자신의 눈으로 본 현실이 아무리 참혹하더라도 철저하게 제 3자의 입장을 유지하여 그 사건 자체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 덕분이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자신의 원칙을 그녀에게 설명해 주고 싶었다. "그것은 우리가 바로 그 순간에 현장에 있을 수 있었던 특권에 대한 대가라고 할 수 있겠지." "무척 어려운 일이겠군요. 그렇지 않던가요?" "때때로 그런 경우도 있었지.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 자신이 상처를 입게 되고 말아." 그는 한숨과 함께 말을 마치며 의자의 등 받이에 몸을 눕혔다. 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리엔트 특급열차에서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순간들이 서서히 지나가고 있었고, 이제 하루만 더 지나면 오드리는 서쪽을 향해, 그리고 자신은 동쪽을 향해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행을 위해 서로 등을 돌려야만 할 것이다. 언젠가 다시 그녀와 함께 그런 여행을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지만, 그런 이야기는 꺼낼 수조차 없었다. 그 대신에 그는 창밖의 밤 하늘을 바라보며, 이스탄불에서 보내게 될 달콤한 하루에 대해 생각을 해보려고 애썼다. "당신도 틀림없이 이스탄불이 마음에 들 거예요. 오드리. 정말 아름다운 곳이거든. 당신이 지금까지 가 본 그 어떤 곳보다도 더 마음에 들거요." 그녀에게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생활들을 보여 준다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그날 밤 저녁을 먹으면서 찰스는 자기가 보고 들은 것들을 열심히 오드리에게 들려주었다. 그들이 함께 이스탄불을 여행할 수 있는 기회는 아직 남아 있었다. 그들은 푸짐하게 저녁을 먹고 나서 그들의 객실로 돌아왔지만, 어딘지 모르게 비통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는 것은 그들 둘 다 느낄 수가 있었다. 그녀는 그런 분위기를 애써 떨쳐 버리려는 듯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즐거운가를 조잘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서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스탄불에 대한 희망찬 이야기들이 그들의 현실, 즉 바로 다음날이면 서로 제각기 각자의 방향을 향해서, 자기의 생활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헤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현실을 은폐시키고, 마치 그들이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다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했었다. 하지만 결국 오드리가 먼저 과감하게 이야기를 꺼냈고, 그런 그녀를 찰스는 언잖은 표정으로 말없이 지켜 보았다. "난 이제 당신이 없는 인생은 상상할 수조차 없을 것 같아요. 찰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슬픔이 깃든 목소리였다. "따지고 보면 짧은 시간을 함께 했을 뿐인데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마치 거기까지 여행을 오는 도중에 자신들도 모르는 어느 곳에선가 결혼식을 올려 버렸거나, 혹은 그들이 서로 몸을 섞었다는 사실이 그들을 도저히 떼어놓을 수 없는 일심동체로 만들어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물론, 하코트와 아나벨이 느꼈을 감정과는 다른 것이었다. 어찌 보면 제임스와 바이올렛이 서로 공유하고 있던 부분과는 비슷할는지도 몰랐다. 차라리 그들은 서로간에 엄청나게 값비싼 선물을 교환한 것은 아닐까? "나 역시 당신과 헤어지고 싶은 마음은 털끝 만치도 없어." 그는 그녀가 집으로 돌아간 이후에 어떤 생활을 하게 될지 무척 걱정스러웠다. 그들이 영원히 함께 여행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당신이 이러한 생활에서 얼마나 큰 만족을 느낄 수 있을지 자신있게 말할 수가 없어." 그는 그녀의 생각을 알고 싶다는 듯이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렇게 끝없이 방랑하는 생활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겠어 ?" 그녀와 함께 살아간다는 전제 자체도 그는 아직 확실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조만간 마음의 준비가 갖춰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는 안티베스를 떠나는 순간부터, 특히 기차를 타고 오던 며칠 사이에 끊임없이 그런 생각들을 해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가장 솔직한 심정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물론 그럴 수 있겠죠. 걱정해야 할 가족만 내게 없다면 말이에요." "당신은 당신 자신의 인생을 살 권리라고는 없어 ?" 그녀가 그런 식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은근히 화가 치밀었었다. 차라리 자신과 함께 여행하는 것이 싫다고 이야기한다면 이해할 수 있을는 지도 모르지만, 그런 식의 가족에 대한 책임이라는 이야기는 더 이상 듣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내겐 아직은 그럴 권리가 없어요. 찰스. 언젠간 그렇게 되겠지만 말이에요." "그 언젠가라는 것이 도대체 언제를 말하는 거요? 당신이 43살이 되어서 동생의 아이들을 모두 다 키워 놓고 난 다음인가? 그들이 언제 당신을 보내 줄 것 같아? 다음주에? 내년에? 아니면 10년 후에? 당신은 당신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거야, 오드리. 그들은 결코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 거야. 그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겠어? 그들에겐 당신이 가장 소중한 사람인데." 그는 이제는 노골적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그녀를 왜 그들이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녀가 그와 함께 머무르지 못하게 된다면 그건 전적으로 그들의 책임이었다. 결혼을 하지 않고 단순한 사랑의 감정만을 가지고 그와 함께 평생토록 여행을 할 수는 없다는 그녀의 말이 그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문제 때문에 도대체 어떤 차이가 생긴다는 거죠?" 그녀 역시 잔뜩 화가 난 목소리였다. 그들은 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다 되어간다는 사실 때문에 극히 신경이 날카로와져 있었고, 또한 객실 안에는 그들이 화를 낼 대상이 서로 상대방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당신은 언젠가 결혼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나요. 찰스?" 그녀는 그 점조차 확실하게 알 수가 없었고, 그 또한 그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안 될 이유라도 있소?" "그래서 안 될 이유라뇨? 그런 말이 대답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결혼을 결정할 권한을 가진 사람은 바로 당신이로군, 자신을 늙은 하녀라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도 전혀 억울한 줄도 모르는 바로 당신." "그게 어쨌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당신 뒤만 졸졸 쫓아 다니는 강아지라도 되었으면 좋겠어요? 바로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건가요? 난 결코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요." 그녀는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찰스는 험악한 표정으로 뚜벅뚜벅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의 두 어깨를 움켜잡았다. "당신은 여지껏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있나 보군, 내가 원하는 것은 당신과 함께 있는 거야. 나는 당신이 이스탄불을 떠나서 그 빌어먹을 놈의 배를 타지 않기를 원하고 있단 말이야. 이제 알겠어?" 그의 말 속에는 미래에 대한 약속도 제안도 맹세도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을 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그에게서 원하는 것도 틀림없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가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생각에는 계획이니 나름대로의 예측이니 하는 부분도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무작정 찰스가 좋았고, 그녀 역시 그와 함께 있고 싶을 따름이었다. 결코 영국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밖에 별다른 방법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 점을 다시 한번 그에게 설명하고 싶었다. "당신은 벌써 26살이야. 스스로의 인생을 결정할 만큼 성숙했으니, 이제 당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해야 하지 않겠어?"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오드리는 찰스의 팔에서 빠져 나와 자리에 앉았다. 찰스도 그녀를 따라 옆에 앉아서 그녀의 손을 다정히 붙잡았다. 그들의 분노는 이미 사그라지고 있었다. 화를 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점을 둘 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찰스, 당신이 만약 그렇게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었다면 당신 역시하고 싶은 일만을 하면서 살 수는 없었을 거예요. 인생이란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만은 아니잖아요?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는 말이에요." 그는 슬픈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도 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가 않았을 뿐이었다. "나도 때때로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하는 모양이오." 또다시 그의 뇌리를 뚫고 솟아 오른 존에 대한 생각이 어느새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의 심장읕 찌르고 있었다. "아마 당신의 말이 맞을는지도 모르겠어," 그런 생각들 때문에 이따금씩 그에게도 자신의 아이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까지 떠오르곤 했다. 누군가를 철저하게 자신에게 속박해 두고 싶은 욕망들, 반대로 누구에겐가 철저하게 얽매여 보고 싶다는 욕망들이 언뜻언뜻 나타나곤 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존을 생각하기만 하면 그 모든 것이 두려움에 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묘하게도 오드리를 자신에게 속박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오드리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차라리 애원이라 표현해야 할 만큼 애절한 심정이 서리고 있었다. "오드리, 나와 함께 중국으로 가지 않겠어?" 그녀는 그의 그 한마디에 너무나도 놀라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쳤어요? 내 가족들이 뭐라고 할지 상상이나 할 수 있으세요? 난 지금 이렇게 멀리까지 왔다는 사실조차 그들에게 말하지 않을 작정인 걸요. 사람들은 아마 나더러 정신이 나갔다고들 할 거요." 물론 그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할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모두들 그렇게 말할 것이었다. 물론 찰스가 그렇게도 그런 말은 듣기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중국이라니? "찰스, 말도 안돼요." "정말?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있고 싶어하는 것이 그렇게도 정신나간 생각이란 말인가?" 그의 눈이 뚫어지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차마 그 말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의 제안은 어쩌면 그녀가 그렇게도 애타게 듣고 싶어하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 어디에도 그의 그러한 제안을 따를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금년 말 쯤에는 요꼬하마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을 게요." "하지만 나의 가족들에게는 뭐라고 설명해야 하죠? 찰스, 난 할아버지와 약속을 했어요. 그분은 늙으신 분이에요. 그건 그로서는 도저히 견뎌내기 힘든 층격이 될 거예요." "그런 것은 따지고 싶지 않아, 오드리." 내 나이의 남자들은 충격이나 슬픔 때문에 죽지는 않을 거라는 말인가?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다시 거칠어졌다. 그는 갑자기 그 81살 먹은 노인을 향한 터무니없는 질투심을 느꼈다. "그렇게도 당신의 효도를 받고 있는 그 할아버지가 너무나 부럽구만." "난 당신에게도 충실해지고 싶어요." 그녀의 말투는 너무나 부드러웠다. "그렇다면 중국으로 가는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그리고 이스탄불에 도착하거든 내게 말해줘." "찰스...." 그녀는 그를 바라보고 있는 수 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불가능한 일 때문에 서로가 상처를 입을 수는 없었다. 또한 그녀는 결코 중국까지 갈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날 밤 잠자리에 들면서 수십 번도 더 그 생각을 떠올려 보았다. 그녀는 이스탄불에서 짧은 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이틀 낯과 하룻 밤, 그리고는 집을 향해 떠나야만 한다. 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녀는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다가 어느 새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밤새도록 꿈 속에서조차 오로지 찰스 밖에 나타나지를 않았다. 그녀는 그를 찾아 사방을 헤매고 다녔지만, 그 어디서도 그의 모습을 찾지 못하는, 그런 꿈이었다. 그녀는 눈물과 공포로 뒤범벅이 된 채 한밤중에 꿈에서 깨어났다. 그를 붙잡고 한없이 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가 곁에 있는 동안 그녀가 느낀 두려움이 얼마나 큰 것이었나를 그에게 설명하기가 두려웠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그는 더더욱 그녀를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점점 그녀의 마음속을 지배하고 있던 번민이 사라져 갔다. 그녀는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10 그들이 탄 기차는 드디어 이스탄불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찰스는 오드리가 이스탄불 근교의 그 아름다운 풍경들을 볼 수 있도록 아침 일찌기 그녀를 깨웠다. 그녀가 눈을 떠보니 금빛으로 물결치는 해안선이 기차와 나란히 달리고 있었고, 머리 위에선 이름모를 새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스탄불이라는 도시는 한쪽은 마르마다 해, 또 한쪽은 골든 호른 항구로 둘러싸여 있었고 황금빛 둠과 뾰죽탑이 솟아 있는 사원들은 오드리가 지금까지 보아 온 그 어떤 건물보다도 더욱 아름다왔다. 세라그리오 궁전과 토프카피 궁전이 시야에 들어오자 마치 옛 이슬람 왕국의 군주와 후궁들에 얽힌 재미난 전설들이 들려 오는 듯했다. 그 도시는 어느 한 부분도 환상적이지 않은 곳이 없는 것 같았고, 기차가 시르케끼 역으로 천천히 들어서자 오드리는 갑자기 물씬 풍겨 오는 동방의 분위기에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스탄불은 역시 그녀의 상상을 초월하는 아름다운 도시였고, 호텔로 가는 길에 찰스가 가리키는 이곳 저곳의 풍경들에 오드리는 그저 입이 벌어질 뿐이었다. 그리고,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수많은 사원과 시장들을 보고 오드리는 완전히 압도되어 버리는 바람에 잠시나마 그녀는 찰스와 헤어져야 한다는 고통마저도 까맣게 잊을 수가 있었다. 찰스는 쉴 새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대는 그녀를 간신히 호텔로 데려갈 수가 있었다. 찰스가 예약해 두었던 페라 팔레스 호텔은 세계 각지의 호텔들 가운데서도 그가 가장 좋아하던 호텔이었는데, 그들이 그곳에 도착하자 짐꾼들이 반갑게 달려 나와 그들의 짐을 운반해 주었다. 그는 넓은 거실을 통해 서로 연결되는 두 개의 방을 예약해 두었는데 그 방은 로코코풍으로 곱게 장식된 아름다운 방이었다. 호텔 로비도 그와 똑같은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다른 장소에서라면 섬뜩한 기분을 느끼게 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 그 모든 장식들이 그곳에서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이국적인 흥취를 잔뜩 풍겨 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너무나 새롭고 흥미로운 것들이라 그녀는 찰스를 따라 시장을 구경하는 동안 수백 장의 사진을 쉴 새 없이 찍어댔다. 물건을 팔려는 상인들의 표정, 꼬불꼬불한 골목, 시장에서 풍기는 냄새 등등 그 어느 것 하나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는 것이 없었다. 찰스도 좋아서 어쩔줄 몰라하는 그녀의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찰스가 이끄는 조그만 레스토랑으로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는데, 어찌된 셈인지 터키의 전통 음식조차 그녀의 입맛에 꼭 맞았다. 오드리는 그 무엇이든 금방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여행을 즐기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새로운 것들과 쉽사리 친숙해질 수 있었다. 그녀는 그러한 자신을 <방랑자의 삶>이라 표현했다. 그들은 손을 맞잡고 바닷가를 거닐며 도시로 통하는 입구를 말없이 바라다 보기도 했다. 하지만 호텔로 돌아오자 잠시 잊고 있던 슬픔이 다시 그녀를 짓눌러 오기 시작했으며, 아무리 사랑을 나누어도 예전과 같이 짜릿한 흥분은 찾을 길이 없었다. 코앞에 닥친 현실을 이제는 더 이상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다음날 아침 기차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이었고, 그들의 짧았지만 뜨거웠던 사랑도 어쩌면 영원히 그 막을 내려야 할는지도 몰랐다. 운명이 다시 한번 그들의 사랑에 친절을 베풀어 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뭔가 허전하기만 한 정사가 끝나자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에 조그만 동그라미를 그리며 입을 열었다. "언제 중국으로 떠나실 건가요?" 어차피 조만간 닥치고야 말 순간이었기에 도저히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제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너무 늦은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밤."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중국까지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몇 주일 걸리겠지. 기차를 제때 바꿔 탈 수만 있다면 조금은 단축될 수도 있을 테지만."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재미있겠네요." 그녀의 말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 대부분의 여자들 은 심지어 남자들조차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고들 하더구만. 무척이나 험한 여행이 될 거야." 어떻게 보면 그 여행에 오드리가 따라가겠다고 나서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잘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비록 그는 그러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생각을 해봐, 당신이 편안하게 마우레타니아에 올라 샴페인을 마시며 그럴 듯한 놈팽이와 춤을 추고 있는 동안.." 그는 그런 생각만하면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난 똥구멍까지 꽁꽁 얼어붙은 채 티벳의 어느 산골짜기를 헤매고 있을 거라구." 그녀는 이번에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난 결코 그 누구와도 춤추지 않을 거예요. 찰스." "그래, 그렇겠지." 그의 목소리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으며, 오직 슬픔만이 그의 두 눈에 가득 고여 있었다. "내겐 당신에게 그러지 말기를 기대할 권리조차 없어." "당신은 한 가지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어요." "뭘 ?" "내 스스로가 그러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거죠.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찰스." 그러고는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에 무언가 이상한 감정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우린 결혼을 하는 것이 낫겠어요. 이건 진심이에요." 그녀는 자신의 말에 그가 놀라지 않을까 두려웠지만, 그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 뜻밖에도 그의 대답은 너무나 엄숙하고 차분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새끼 손가락에 끼고 있던 금반지를 말없이 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 첫 글자가 새겨진 그 반지를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 주며 말했다. "오드리, 언제나 그 반지를 끼고 있어 주겠어?" 그녀는 뭐라고 말을 꺼낼 수도 없이 눈물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시 한 번 달콤함과 씁쓸함이 마구 뒤섞인 기묘한 사랑을 온 몸으로 표출하기 시작했고, 그러는 동안 그녀는 반지를 낀 왼쪽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쥐어 보았다. 앞으로 손가락이 잘라지지 않는 한 그 반지는 그녀의 손가락에서 빠지지 않을 것이다. 반지가 그녀의 손가락에 약간 크기는 했지만 쉽사리 빠져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또 한 번의 열정이 지나가고 일어나 앉았을 때 찰스가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말을 꺼냈지만, 오드리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를 바라 볼 뿐이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그래도 저녁은 먹어야지." 그녀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머릿속이 너무나 복잡해져서 밥 먹는 것 따위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등을 돌리고 한참이나 창밖을 바라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 뾰죽 탑과 시장과 사원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아름다운 이스탄불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 왔지만, 실상 그녀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었으며, 무언가 중대한 결론을 내리고자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를 그냥 내버려두고 있던 찰스는 조용히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져 보았지만, 다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 그녀의 비장하리 만큼 진지한 표정에 그만 질려 버리고 말았다. "오드리..." 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사람처럼 꼼짝도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선택할 것이 없었다. 그녀는 베니스에 있는 동안 그러한 결정을 내렸어야만 했다. 모든 것은 그때 이미 결정되어졌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이전일지도 모른다. "난 떠나지 않겠어요." 마치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죄수처럼 너무나도 담담한 말투였다. 그녀의 심정 또한 그 만큼이나 담담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운명지워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길일 뿐이었다. 그러한 그녀의 결정으로 인해 고통을 받을 가족들만 없다면, 그녀로서는 하등의 후회할 이유가 없는 결정이었다. 이번에는 찰스가 얼어붙어 버렸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지?" "당신과 함께 가겠다는 말이에요." 갑자기 그녀의 몸이 오그라붙은 듯 그렇게 작아 보일 수가 없었다. "중국에를?"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엄청난 사실에 어쩔 줄 몰라하며 되물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요. 오드리?" 그는 그녀가 틀림없이 후회하게 될 것만 같아 덜컥 겁이 났다. 일단 한번 여행을 시작하고 나면, 도중에 되돌아서기란 전혀 불가능한 길을 그녀가 함께 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어차피 상하이까지는 함께 가야만 할 것이고... 그건 결코 쉬운 여행이 아니란 점을 이미 몇 번이나 그녀에게 말해 오지 않았던가! "진심이에요." "할아버지는 어떡하고?" 그녀는 갑자기 이 남자가 자신을 귀찮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눈빛에서 그러한 표정을 읽은 듯 그는 재빨리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했다. "혹시 당신이 여행 도중에 생각이 바뀌지나 않을까 해서하는 소리야." "티벳 산꼭대기에서 말인가요?" 그녀는 눈물로 얼룩진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그래."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요. 할아버지께는 크리스마스 쯤에 돌아가겠다고 전화를 하겠어요. 중간에 할아버지의 편지를 받아 볼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찰스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난징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럴 만한 곳이 없어. 거기나 상하이에서는 편지를 받아 볼 수도 있겠지만 말이오. 내가 머무를 호텔 이름을 알려주면 내 앞으로 할아버지가 편지를 보낼 수 있겠지만..." 하지만 그는 곧 그게 별로 현명한 생각이 못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할아버지에게는 나를 여행 도중에 만난 여자라고 말해 두는 것이 더 나을 것 같군." 그는 자신의 생각이 무척 만족스러운 듯 빙긋이 이빨을 드러내고 미소를 지었다. "웃지 마세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하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오드리, 정말 진심이야? 정말로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건가? 나야 이 세상 끝까지 당신과 함께 간다 해도 잃을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지만 당신은 다르잖아. 당신이 가족들에 대해 지고 있는 책임이란 것이 당신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는 것인지 이제 나도 웬만큼은 이해할 수가 있어. 당신의 가족들, 할아버지, 아나벨..." "아마도 이제는 내 차례가 되지 않았을까요? 이번 한 번만이라도 말이에요. 하지만 이번 여행이 끝나면 난 다시 이전의 생활로 돌아갈 것이고, 아무도 나를 영원히 미워하게 되지는 않을 거예요."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럼 그 후에는? 그때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 만약 그녀가 지금 그의 곁을 떠날 수 없다면 중국에 도착했다 해서 그런 사정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건 아직 대답할 수가 없어요. 나도 아직 모르는 부분이니까요. 어차피 난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어요?" 그는 다시 슬픈 미소를 머금었다. "가끔 내가 유부녀와 연애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야." 그녀도 그의 말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가 없었다. "당신도 언젠가 지적했듯이, 난 당신처렴 완벽한 자유를 누리며 사는 사람이 못 되니까요." "아무래도 바로 그 점 때문에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 아마 당신마저 둥지 잃은 새처럼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처럼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을는 지도 몰라." 찰스는 오드리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미소를 지었고, 그녀는 그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의 감촉이 따스하게 느껴져 왔다. 그녀는 이제 그에게 또다시 약속을 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제야 비로소 자유를,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 오는 동안 처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마음껏 느낄 수가 있었다. 11 에드워드 드리스콜이 자신의 서재에 앉아 월터 윈첼 쇼를 듣고 있을 때 갑자기 요란스런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고 서재로 들어서는 하녀의 몸이 마치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는 예전보다 한층 더 성격이 괴팍스러워져 있었고, 자신의 시간을 방해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했다. "실례합니다. 주인님." 금방이라도 그녀의 무릎이 꺾여 앞으로 꼬꾸라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쓰고 있던 모자가 귀 옆으로 비스듬히 흘러 내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에드워드 드리스콜은 하녀의 모자가 비뚤어져 있는 것만 봐도 이만저만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요즘 들어서 무슨 일이든 누구에게나 화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마치 해가 떨어지기 전에 범인을 체포하려는 경찰관처럼, 뭔가 꼬투리 잡을 것이 없나 하고 집안을 어슬렁거리기가 일쑤였다. "실례합니다. 주인님." 처음 불렀을 때 전혀 그의 반응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다시 한번 용기를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 뭐야?" 그는 냅다 소리를 질러댔고, 하녀는 깜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섰다. "뭘 그러고 섰어 ? 어휴, 또 혈압이 오르는군." "전화가 왔습니다. 주인님." "이 시간에 전화는 무슨 얼어죽을 놈의 전화야, 안 받겠다고 그래!" 어차피 내게 전화할 사람도 없고, 설사 있다해도 이런 저녁 시간에 걸려오는 견화는 보나마나 뻔해." "장거리 전화라는데요." 순간적으로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혹시 오드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하녀를 쏘아보며 물었다. "도대체 어디라고 그러던가?" "터키의 이스탄불이랍니다. 주인님." "터키?" 말을 한다기 보다는 그녀의 얼굴에다 내팽개치는 식이었다. "난 거기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아마 잘못 걸렸겠지. 아니면 장난 전화거나. 끊어 버려! 괜히 쓸데없이 시간낭비하지 말란 말야." 만약, 전화가 프랑스에서 왔다고 했더라면, 그는 총알처럼 전화기로 달려갔을 것이다. 또는 이태리나 영국 정도만 되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드리가 로마에서 보낸 엽서를 얼마 전에 받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터키라니..... 그런데 갑자기 뭔가 불길한 예감이 그의 뇌리를 파고드는 바람에 그는 막 방을 나서려는 하녀를 불러 세웠다. "전화 끊기 전에 누구한테서 온 건지 확인해 봐."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1분도 못 되어 되돌아왔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래져 있었고, 모자는 아까보다도 더욱 비뚤어져 있었지만, 그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드리스콜 아가씨라는데요. 주인님. 터키에서요." 그는 지팡이도 잊어버린 채 전화가 놓여져 있는 조그만 방으로 날듯이 뛰어갔다. 너무 좁아서 앉기가 불편한 의자가 놓여 있고 말소리가 웅웅 울리는 조그만 방이었다. 하지만 그는 전화를 이용하는 동안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의자를 갈아치우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전화란 하루 종일 붙잡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용건만 간단히 끝내야 할 성질의 것이었다. 그는 누차 아나벨에게 그 점을 얘기했었지만, 전화통을 붙잡고 수다떠는 습성을 끝내 고치지 못하고 시집을 가버린 그녀였다. "여보세요?" 그는 이번에는 전화에다 대고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하도 잡음이 심해서 상대방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그는 너무나도 흥분한 나머지 자리에 앉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정말로 그의 혈압이 올라가지 않을까 걱정스러워진 하녀가 그의 옆에 바짝 붙어서서 그를 부축해 주었다. "드리스콜 씨입니까?" "그래, 그렇소 !" "터키에서 장거리 전화입니다." "그건 나도 알아, 바보 같으니라구! 그녀는 어딨소"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드리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온 몸에서 힘이 꽉 빠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할아버지예요? 제 말 들리세요?" "그래, 간신히 들린다. 오드리, 도대체 어딜 가 있는 거냐?" "여기 이스탄불이에요. 친구들과 함께 오리엔트 특급열차를 타고 왔어요." "이런 빌어먹을! 거긴 네가 있을 만한 곳이 못 돼. 집엔 언제 올 예정이냐?"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오드리 역시 무척이나 마음이 흔들려 찰스고 중국이고 다 때려치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크리스마스 때 까지는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요." 갑자기 저쪽에서 말이 뚝 끊어지기에 그녀는 전화가 끊어진 줄만 알았다. "할아버지 ? 할아비지?" 에드워드는 그 불편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고 하녀는 물을 가지러 뛰어 가야만 했다. 잿빛이 되어 버린 그의 표정을 보고 하녀는 뭔가 끔찍스런 사건이 터진 것이 아닌가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충격을 소화해 내기에 그는 이미 너무나 늙어 있었다. "거기서 도대체 뭘하고 있는거냐? 함께 여행하는 사람은 또 누구고?" "배를 타고 가다가 마음씨 좋은 부부를 만났거든요. 그들은 영국인인데, 프랑스에서도 그들과 함께 있었어요." 그녀는 자신이 그들과 함께 터키까지 왔다는 말을 할아버지가 믿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왜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러고 있는 거란 말이냐?" "물론 그분들은 언젠가 돌아가겠죠. 하지만 전 먼저 중국으로 가볼 작정이에요." "뭐라구?" 하녀가 그에게 물잔을 내밀었지만, 그는 그녀의 팔을 거칠게 밀어냈다. "미쳤니? 일본놈들이 벌써 만주를 침략한 지가 옛날이야. 당장 돌아오지 못해!" "할아버지, 약속할께요. 내겐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상하이와 뻬이징에만 가보고 돌아갈께요." 난징으로 가서 장개석을 만나 볼 작정이란 말은 아예 꺼내지도 않는 것이 할아버지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서 곧장 집으로 가는 배가 있대요." "당장 오리엔트 특급열차를 집어타고 파리로 도로 돌아갈 수 있겠지? 거기서 영국으로 건너면 2주일 후에는 집으로 돌아올 수가 있어, 오드리.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할 것 같지 않냐?" "할아버지, 제발...... 전 꼭 중국에 가보고 싶어요. 그리고 나서는 정말로 돌아갈께요. 하느님께 맹세하겠어요." 그렇게도 무뚝뚝한 그의 눈에도 어쩔 수 없이 눈물이 가득 고였다. "어쩌면 그렇게도 네 애비와 똑같으냐. 네 머릿속에는 도대체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르겠구나. 중국은 여자의 몸으로 갈만한 곳이 못돼 ! 중국인이 아닌 다음에야 그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란다. 그래, 그곳엔 어떻게 갈 작정이냐?" 그가 생각하기에는 그녀의 모든 계획들 자체가 미친 짓이나 다름 없었지만, 어쨌건 모든 것이 로란드의 경우와 너무나도 흡사했던 것이다. "기차를 타고 갈 생각이에요." "이스탄불에서 중국까지 기차로 가겠다구? 그게 얼마나 먼 거리인지 알기나 해?" "그럼요. 하지만 괜찮아요." "너랑 같이 여행한다는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믿을만 해?" "물론이죠. 약속드릴 수 있어요." "네가 언제 그놈의 약속들을 지켜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그는 끓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지만, 말소리조차 알아듣기 힘든 그 먼 곳에서 걸려온 전화통에다 대고 그러한 분노를 어떻게 표현할 방도가 없었다. 그녀가 전화를 연결하는 데 만도 8시간이나 걸리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괜찮으세요. 할아버지?" "난 괜찮다. 너만 이렇게 속을 썩이지 않는다면 말야." "아나벨은 어때요?" "걔는 또 애기를 가졌어. 3월에는 출산할 거야." "그렇군요. 전 그보다 훨씬 전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뭘 그래, 그냥 계속 여행이나 하며 돌아다니지." "할아버지, 죄송해요." "아냐, 죄송할 것 하나도 없다. 어차피 네 애비도 그랬으니까, 네가 바보란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제 거짓말장이까지 되지는 말아라. 전혀 미안해 할 필요 없어. 지금 너란 인간은 제 정신이 아니니까 말이다." "사랑해요. 할아버지." 그녀는 이젠 아주 엉엉 소리내어 울고 있었다. 그건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에게는 들리지가 않았다. "뭐라구?" "사랑해요. 할아버지." "안들려 !" 그녀는 할아버지의 심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젠 들리시죠? 사랑한다고 그랬어요. 곧 집으로 돌아갈께요. 할아버지. 중국에 도착하면 주소를 적어 보내겠어요." "아예 내 편질랑 기대하지도 말아라." "제가 있는 곳을 알려드리고 싶을 뿐이에요." "알았어." 그는 화난 목소리로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아나벨에게도 안부 전해 주세요." "몸조심 해, 오드리. 함께 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알겠어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도 건강 조심하세요." "그래야지.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냐." 그녀는 할아버지다운 그 말에 미소를 지으며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가 전화를 하는 동안 줄 곧 옆에 지켜서 있던 찰스가 전화를 끊고 다시 울음을 터뜨리는 그녀를 가만히 껴안았다. 그녀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이 무엇보다도 죄스러웠고, 전화를 끊고 난 후의 할아버지의 표정을 상상해 보니 더더욱 가슴이 저렸다. 에드워드는 전화가 놓여 있는 그 조그만 방의 벽을 한참이나 망연히 바라보고 앉아 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켜 서재로 돌아가려 했다. 단 20분 사이에 20년이나 더 늙어 보이는 모습으로 흔들리는 몸을 겨우 가누고 막 서재의 문을 열려는데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그는 온몸의 털이 다 곤두설 만큼 화가 치밀어올라 하녀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 이 시간에 남의 집 문을 두드리는 거야?" 마치 귀신이라도 만난 듯이 창백한 표정이 되어 버린 그를 쳐다 보며 하녀가 재빨리 문을 열어 아나벨과 하코트를 안으로 끌어 들였다. 그들은 저녁식사에 초대를 받았던 것이다. "여긴 뭐하러 왔어?" 할아버지가 다시 고함을 질러대자 아나벨도 은근히 화가 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로서는 여름 내내 그렇게 생활이 괴로울 수가 없었고, 더우기 할아버지가 한번씩 고함을 지를 때마다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저한테 소리치지 마세요.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오늘 저녁식사에 저희를 초대했잖아요. 기억나지 않으세요?" "그래, 난 기억 안 난다. 나 몰래 나와 그런 약속을 한 모양이구나." 그가 그렇게 말하며 아나벨을 노려보자 그녀는 정말로 등을 돌려 나가버릴 것 같은 눈치였지만, 하코트가 재빨리 그녀를 잡아 세우고 뭐라고 귓속말을 소근거렸다. "할아버지 말에 신경쓰지 말어. 그 나이쯤 되면 그럴 수도....." "내 등 뒤에서 소근대지들 말어. 무례한 것들 같으니라구! 아나벨, 금방 네 언니한테서 전화가 왔었는데,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돌아오지 않겠댄다." 그들이 식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 놓을 때 그는 그렇게 한마디만 내뱉고는 자리에 모두 앉을 때까지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몇 주일 후에는 돌아오겠다고 했었잖아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대요?" 아나벨은 오드리가 어떤 남자를 만나서 결혼이라도 해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덜컥 겁부터 났다. 그녀는 오드리가 돌아오기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엉망이 되어 버린 집안 살림을 잠시 오드리에게 맡겨 두고 하코트와 함께 휴가라도 다녀올 예정이었다. 유모나 요리사, 운전수를 새로 고용하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어린 윈스톤을 보살펴 주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오드리가 꼭 필요했다. 아나벨은 아무리 애를 써도 참신한 하인들을 찾아낼 수가 없었고, 혹 찾는다 하더라도 결코 그들의 집에 오래 머물러 있는 법이 없었다. 오드리가 반드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될 시기였던 것이다. "거기서 뭘하고 있대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죠? 파리예요. 런던이래요?" 잠시 동안 그는 세상 고민은 혼자 다 짊어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사실은 아나벨이 초조해 하는 것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아냐. 걔는 터키에 있어." 하코트가 아나벨 보다도 더 충격을 받은 표정이 되었다. "도대체 거기서 뭘 하고 있답니까?" "친구 몇과 함께 오리엔트 특급열차를 탔다는군. 이제 중국으로 갈 작정이래." "뭐라구요?" 아나벨과 하코트가 거의 동시에 소리를 질렀지만, 하코트는 금방 할아버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거기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에드워드 드리스콜이 보기에도 너무나 재빠른 반응이었다. "처형은 너무나도 제멋대로군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한번 상상해 보십시요. 그만한 나이의 여자가 혼자 중국을 여행하다니 ! 내가 근래에 들은 소식들 가운데 이렇게 이상스런 일은 처음입니다." "아냐, 그렇지 않아!" 에드워드 드리스콜의 주먹이 탁자를 내리쳤다. "우리집 지붕 아래서 자네가 내 손녀 딸을 그렇게 얘기한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야. 그딴 소리는 자네 자신에게나 하게. 아마도 그 애 엄지 발가락에 들어 있는 정신이 자네 온 몸에 들어있는 정신보다도 훨씬 더 풍부하고 건전할 걸세. 여기있는 아나벨 또한 결코 그 애를 따라갈 순 없어. 비록 내 손녀이긴 하지만 아나벨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아이에 불과하단 말이야. 그러니 두번 다시 내 앞에서 오드리를 그렇게 말하지 말게. 그런 소리나 하려면 식사고 뭐고 다 때려치워. 사실, 난 자네의 그 길쭉한 얼굴과 아나벨의 낑낑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소화가 안될 지경이야."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지팡이를 움켜쥐고는 뒤뚱거리며 서재로 들어가 문을 거칠게 닫아 버렸다. 그러자 아나벨은 울음을 터뜨리며 자기 물건들을 챙겨서는 하코트가 말릴 세도 없이 현관을 향해 뛰어갔다. 그녀는 버링햄의 집까지 가는 동안 내내 할아버지의 욕으로부터 자신을 막아 주지 못한 하코트의 나약함과 돌아오지 않는 오드리를 싸잡아 비난하며 눈물을 훌쩍이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이기적일 수가 있을까, 중국이라고? 언니는 내가 임신했을 때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 틀림없이 일부러 오지 않으려는 걸 거야.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언닌 옛날부터 나를 질투하고 있었어. 멀대같이 키만 커가지고는..." 하코트는 그런 식의 비난들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나벨을 집에다 데려다 주고는 곧 장 팔로 알토의 친구를 찾아갔다. 그는 그곳에 한 아가씨를 숨겨두고 여름 내내 아나벨 모르게 그녀와 지내왔던 것이다. 물론, 에드워드 드리스콜도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그는 아나벨과 하코트가 나가 버린 후에도 몇 시간이나 혼자 서재에 앉아 있었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오드리 뿐이었다. 하지만 가끔 로란드와 그녀의 모습이 뒤엉킨 채 그의 마음속에 떠오르기도 했다. 그녀는 지금 중국으로 가려 한다. 그는 그 점을 기억해냈다. <중국이라... 그녀는 로란드와 함께 일까, 아니면 혼자일까?....> 갑자기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도 오드리가 보고 싶다는 그의 생각만은 변함이 없었다. 12 이스탄불에서 상하이까지는 5천 마일이 넘는 거리였다. 찰스는 여행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만 한다면 한 14일 후에는 목적지에 가까이 갈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쓰기로 계약한 기사는 주로 난징에 자리를 잡은 장개석 정부에 대한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상하이와 뻬이징에는 몇 군데의 비무장지대가 있었다. 찰스는 기사 쓰는 것 외에 1928년 이래로 모습을 감춘 공산 혁명주의자들에 대한 자료도 수집하고 싶었다. 그는 이미 약간의 필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신분증명서류 또한 거의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도전하고자 하는 그 주제에 접근하기가 얼마나 어렵고 난감한 것인지는 설명이 필요 없을 지경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모습을 잘 드러내지도 않을 뿐더러 접촉하기도 쉽지 않겠지만, 장개석의 경우는 기꺼이 찰스를 만나 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물론 순간적으로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새로운 아이디어들도 나중에 충분히 그의 원고에 첨가 되어질 수가 있었다. 찰스는 항상 신중하게 노트를 기록해 나갔으며, 갖가지 서류와 노트가 가득 찬 조그만 가방을 어디를 가든지 들고 다녔다. 찰스는 그날 밤 늦게 터키의 수도인 안카라행 기차를 타고 가면서 오드리에게 자신의 계획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오드리는 그를 만나고 난 이후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전혀 과장되지 않은 느낌이기도 했다. 그녀는 안카라에서 기차를 갈아타면서 그런 생각이 더욱더 굳어졌고, 그들이 갈아탈 기차와 오리엔트 특급열차를 비교해보니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살아 있는 닭 두 마리와 조그만 염소 한 마리를 안고 있는 두 사람의 여인을 따라 기차에 오르면서 왠지 자꾸만 서먹서먹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들이 탄 기차는 밴 호수와 우미아 호수를 지나고, 몇 개의 산을 가로질러 테헤란에 도착했다. 테헤란 역은 수많은 사람들로 시끌벅적하게 붐비고 있었으며, 그런 생동감 넘치는 광경에 마음을 빼앗긴 오드리는 역시 예의 레이카 카메라를 쉴 새 없이 찍어댔다. 그동안에 찰스는 아프가니스탄 국경에서 약 백 마일 정도 떨어진 그 나라 북동쪽의 모샤드라는 도시로 갈 차표를 끊어왔다. 모샤드는 신성한 도시였고,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경건한 자세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테헤란 역에 나와 있는 모든 여인들은 무척 재미있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는 꽤 아름다운 여인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은 모두 오드리가 무척 수수한 옷을 입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황홀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꼬마 아가씨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로 다가와서 그녀의 갈색 머리칼을 만져보고는 까르르 웃으며 도망치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너무나 새로운 세상이었으며, 그녀 또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척이나 새로운 존재였다. 남들은 다 쓰고 다니는 베일로 얼굴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날 밤 내내 모샤드를 향해 달려갔으며, 다시 거기서 아프가니스탄 남부지방으로 달렸다. 카불로 이르는 길은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머나먼 여행길이었다. 그때 이미 그들은 2천 마일 이상을 여행한 셈이었고, 일주일 동안이나 기차 대신 자동차를 이용해야만 했다. 오드리는 자동차 여행이 너무나도 힘들어 다시 기차를 타지 못하면 미쳐 버릴 것 같았지만, 석양이 질 무렵이면 너무도 아름답고 평화로운 주위를 둘러보며 일찍이 맛보지 못한 행복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찰스와 오드리는 불타는 듯한 석양 아래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둘 다 몹시 지치고 피곤했을 뿐만 아니라 나흘 째 목욕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런 것에는 서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며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고, 그녀는 일 주일 동안 손도 대보지 못한 화장품 상자를 바라보며 낄낄거렸다.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딴판이지, 오드리 ?" 그는 슬며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녀가 아무리 여행을 좋아한다 하더라도 그 길은 너무나도 험하고 고달픈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추억에 남을 아름다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듯했으며, 체력 또한 무척이나 강해서 난자 파배트 패스에서 기차가 탈선되는 바람에 수십 마일을 걸어야 했을 때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도 여행을 위해 태어났다고 느껴지는 여자는 이 세상에 둘도 없을 것 같았다. "후회가 막심하지 않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아요."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히려 그런 험한 여행이야말로 그녀가 진정으로 바라고 있던 바였다. 마천루나 포장도로, 자동차 경적소리들은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의 숨결이 그대로 들려올 것만 같은 그런 아름다움을 그녀는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어느 이름 모를 호텔의 울퉁불퉁한 조그만 침대에 누워 얼핏 잠이 들었을 때, 찰스는 오드리의 손이 자신의 허벅지께를 조심스럽게 더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행복에 겨운 듯한 한숨소리와 함께 몸을 돌려 다시 한바탕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뜨거운 몸짓들을 시작했다. ''당신은 여기까지 와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오드리 ?" 한 번의 폭풍이 지나고 나자 찰스는 졸음이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들은 이미 이스탄불이나 게이프 안티베스에서의 호화스러운 생활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세계에서 살고 있었으며, 그들의 친구들 또한 아련한 꿈속에서처럼 희미한 기억밖에 남아있지 않았지만, 오드리는 텅빈 방에 조그만 침대 하나, 바깥의 새로운 세상들, 그것들을 하나하나 발견해 내는 기쁨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었다. 게다가 바로 옆에는 그녀가 그렇게도 온몸과 마음을 바쳐 사랑하는 남자가 있지 않은가! ''찰스?" 그들이 막 잠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을 무렵, 오드리는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나직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음?' ''내 인생에 이렇게 행복한 순간들은 정말 처음이에요." 그녀는 이미 수천 번도 더 그런 말을 했지만, 다시 한번 말해 두지 않고서는 도저히 잠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당신은 역시 미친 여자야, 이제 그만 좀 잡시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리다 다시 곯아 떨어졌다. 그들은 다음날 아침 6시까지는 일어나야 했던 것이다. 그들은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염소 젖 한 컵과 치즈 한 조각으로 배를 채운 후 다시 기차를 잡아타기 위해 허둥지둥 호텔을 뛰쳐나왔다. 이번에는 이슬라마바드를 거쳐 캐쉬미르까지 곧장 가야만 했다. 기차가 몹시 낡은 것이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즐거운 여행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라다크 패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다음날 새벽 4시가 되어 있었고, 오드리는 찰스의 품에 안긴 채 잠들어 있었다. 찰스는 그대까지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평화로운 분위기에 흠뻑 젖어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기차는 두 번 정차했었지만 그들은 기차를 내리지 않아도 되었고, 1만 8천 피트까지 고지대로 올라갔다가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마침내 티벳에 도착했을 때는 다음날 하루를 쉴 수 있기 위해서 다시 8백 마일을 더 가야만 했다. 찰스는 모든 여행 일정을 마치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찰스는 라다크 패스에서 티벳의 수도 라사까지 꼬박 이틀이 걸릴 거라고 예상했었지만, 막상 출발해 보니 사흘이 걸렸고, 라사에 도착했을 때는 그들 둘 다 완전히 기진맥진 해 있었다. 그들은 이미 열흘 동안을 길 위에서 보냈고 이제 상하이까지 3분의 2는 온 셈이었지만, 그때 생각으로는 죽어도 상하이에 도착하지 못할 것처럼 여겨졌다. 찰스는 자신이 항상 묵곤하던 산꼭대기의 여인숙으로 오드리를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는 오렌지색 장삼을 걸친 수도승들을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그런 곳에서라면. 신과 더욱 가까이 접촉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저 아래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외진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숨을 쉰다는 것 자체가 오드리로서는 너무나도 신비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녀는 창가에 지키고 서서 하염없이 바깥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도 이곳에 와본 적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녀는 나중에 쌀과 콩으로 준 스프만으로 준비된 간단한 식사를 하면서 찰스에게 그런 자신의 생각을 말해 보았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간단히 저녁을 먹었을 뿐인데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녀는 너무나도 배가 고팠던 나머지 자기가 지금 먹고 있는 것이 뭔지도 모르고 마구 먹어치웠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스프에 떠 있던 조그만 고기 조각들이 사실은 뱀이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런 사실을 뒤늦게 알려 주는 찰스를 향해 눈을 흘겨 주고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생각에 잠겨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때때로 나 스스로가 무척 놀라울 때가 있어요. 내가 그렇게도 소중히 아끼던 아버지의 앨범 속에, 이곳의 사진이 있었는지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걸요. 갑자기 그 앨범 속의 모든 사진들이 기억 저편으로 희미하게 사라져 버리고 눈앞의 현실만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내게 다가오고 있어요." 그녀는 때때로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히기도 했지만, 나중에 집으로 돌아가면 그들에게 모든 것을 자세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돌아갔을 때 가족들이 약간은 그녀를 욕할 지도 모른다는 찰스의 말이 어쩌면 옳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건 그들은 예전에 오드리에게 미루고 있던 일들을 스스로 해 나가고 있을 것이다. 찰스와 오드리가 다시 기차에 올라 떠날 때, 오드리의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들은 이번에는 아주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려야만 했다. 그들은 타슈에 산을 넘어 충킹까지 장장 1천마일을 가야했던 것이다. 그 여행은 낡아빠진 조그만 기차를 타고 30시간 이상을 달려야 했으며, 충킹에 도착할 때까지 기차를 한 번 갈아탔을 뿐 인데도 오드리는 갑자기 엄청난 변화를 느낄 수가 있었다. 훨씬 선선해진 날씨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생김새나 행동, 그리고 의상들이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오드리는 대부분의 남자들, 심지어 여자들까지도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으며, 몸집이 자그마한 노인들이 담배연기를 마구 뿜어대며 그녀와 찰스를 유심히 바라보는 눈길에 왠지 쑥스러움을 느꼈다. 그 사람들은 어쩐지 여행중에 만난 다른 지방의 사람들에게처럼 쉽사리 친근감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사진을 찍으면서도 그런 점들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그녀를 향해 호기심 어린 눈길을 주고 있었으며, 그녀와 찰스가 우한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을 때는 한 때의 아이들이 그녀에게로 몰려와서 그녀의 소매자락을 만져보기도 하는 등 법석을 떨다가도, 그녀가 미소를 지어 주면 모두들 잔뜩 몸을 움츠리고는 도망가 버리곤 하는 것이었다. 전날 밤 꼬박 기차 속에서 보내 완전히 지쳐 버린 그들은 기차를 갈아 타자마자 늘어지기 시작했다. 찰스는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가볍게 코까지 곯아가며 잠을 잤다. 같은 좌석에 앉은 다른 5명의 승객들은 아주 노골적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은 다른 어떤 곳 보다도 더욱 혼잡스러웠고, 모든 것이 더욱 바쁘게 돌아가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터키나 티벳에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뭔가 한층 더 원시적이고 자연적이고 이국적인가 하면 인구도 더욱 조밀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에 대한 호기심 어린 시선도 그 어느 곳보다 따가왔으며, 따라서 그녀는 찰스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그런 점들에 대해 마구 물어보았다. 그는 우선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더니 사지를 쭉 뻗고 기지개를 키려 했으나 기차 속이 워낙 좁아서 다리도 제대로 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기차가 역에 도착할 때마다 반가운 듯이 뛰어내려가 오드리와 함께 잠깐씩 다리를 펴곤 했다. 중킹에서 우한까지도 한나절이 꼬박 걸리는 꽤 먼 거리였다. 이번에는 오드리가 잠을 잤고 찰스는 노트에다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넣고 있었다. 난징에 도착하려면 아직 하루를 더 가야 했고, 찰스는 그곳에서 장개석을 만날 준비를 슬슬 시작해야 했던 것이다. 그에게 질문할 내용들도 정리를 해놓아야 했고, 나름대로 대화의 작전을 구상해야 했던 것이다. 그가 난징에 도착하자마자 장개석을 만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하지만 찰스가 가지고 가는 증명서들을 아무도 알아주려 하지 않거나 그가 쓴 책을 읽은 사람이 없다면 한 3주일 정도는 장개석을 만나기 위해 기다려야 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건 찰스는 그리 커다란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으며, 다만 상하이로 떠나기 전 까지 한 1주일 정도는 기꺼이 기다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는 상하이에서도 할 일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그곳을 무척 좋아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한에 도착하자마자 조그만 호텔로 들어가서 짐을 풀었다. 방이 3개 밖에 없는 조그만 여인숙이었지만 찰스는 전에도 한번 그곳에서 머무른 적이 있었다. 그 여인숙에서는 그렇게도 먼길을 온 여행객들에게 밥 한 그릇과 이름도 모를 차를 한 잔 대접할 뿐 이었다. 오드리는 그 밥그릇을 쓸쓸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다가 찰스를 향해 어깨를 으쓱하여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정말 처음으로 서양음식이 그리워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오드리는 누가 스테이크나 햄버거 한 조각만 준다면 자신의 오른팔까지도 기꺼이 떼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달콤한 쵸콜렛과 밀크 쉐이크 생각을 하니 잠자리에 드는 그녀의 뱃속에서 자꾸만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사탕 좀 남은 것 없어요?" 그녀는 잔뜩 기대를 걸고 찰스를 돌아다 보았다. 이태리를 떠날 때 가방 속에 넣어두었던 캔디를 언젠가 그녀에게 꺼내 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없는걸. 밥이나 좀 더 먹어보겠어 ? 주인에게 당신이 임산부라고 하면 그 정도는 줄 것 같은데." 그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지만 오드리가 두 팔을 내저었다. "세상에, 어찌면 그렇게도 머리가 잘 돌아가요. 파커스코트 씨? 그러지 않아도 살 수 있어요. 하지만 정말 배가 고프긴 고프군요." 그녀는 다시 애처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목과 가슴을 간지럽히며 애무하기 시작하자 그녀는 배고픔 따위는 금방 깨끗이 잊어버릴 수가 있었다. 오로지 그에 대한 욕망만이 뜨겁게 고개를 치켜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날 밤, 오랫동안 캄캄한 어둠 속에 누워 많은 이야기들을 속삭였다. 찰스가 그들이 앞으로 구경하게 될 도시들에 얽힌 전설과 간단한 역사를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사실 난징보다는 뻬이징이나 상하이에 훨씬 커다란 매력을 느꼈었다. "상하이는 정말 대단한 도시지. 영국인과 프랑스인, 러시아인, 요즘은 일본인까지 그곳을 드나들고 있어. 정말로 국제적인 도시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중국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도시이기도 하지. 내가 아는 도시들 가운데는 상하이만큼 거대한 도시는 없는 것 같아." 일본인들도 그 도시에 그렇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었다. 일본인들은 약 2년 전인 1932년 초에 그곳을 공격해서 잠시 점령한 적이 있었지만, 비무장지대는 거의 그 효력을 상실하고 있었고, 장개석은 이미 오래 전에 난징으로 후퇴해 있었다. 장개석은 일본군의 침략에 직면하여 공산주의자와의 싸움은 상대적으로 느슨해져 있었으며 모택동은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고 외곽 지역에 약간의 공산당 지도자들이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일본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에는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동맹관계가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사람들은 서서히 만주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 난징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을 때 오드리는 전신을 덮쳐 오는 짜릿한 흥분감을 맛볼 수가 있었다. 이제 몇 시간만 더 가면 그들의 목적지인 난징에 도착할 것이고, 상하이나 뻬이징도 코 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그들은 난징의 어느 호텔에서 잠을 잤고, 찰스는 그 전에 저녁 때쯤 해서 장개석의 거주지를 찾아, 신분증과 소개장을 내밀며 인터뷰를 요청했었다. 조지 버나드 쇼가 그해 봄, 상하이로 가는 도중에 그 호텔에 묵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오드리는 갑자기 다시 한 번 자신의 심장이 흥분으로 고동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드리는 자신이 본 모든 것과 북적대는 사람들, 그들의 옷차림, 심지어 냄새들까지도 사랑했다. 그들은 난징의 그 호텔에서는 푸짐한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그때야 비로소 찰스는 오드리가 옛날보다 살이 많이 빠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그의 직업과 그녀의 소망을 위해 2주일에 걸쳐 5천 마일 이상을 여행해 왔으며, 그녀는 그날 밤 드문드문 인력거와 자동차들이 지나갈 뿐인 한적한 호텔 앞의 도로를 산책하며 한 인간과 이렇게도 밀접히 생활하기는 예전에 없던 일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두번 다시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오드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어느 뒷골목을 거닐다가 희미한 불빛과 이상한 냄새가 새어나오는 조그만 집을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멈추고, 공기 중에 무겁게 드리워진 그 향기에 잔뜩 호기심이 일어 찰스에게 안으로 들어가 보자고 졸랐더니 그는 웃음부터 터뜨리며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냥 가는 게 좋을 것 갈은데, 오드리." 그의 얼굴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왜요?" 그녀는 무감각한 찰스에게 실망했다는 투로 날카롭게 되물었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의 순진함에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저긴 아편굴이야, 오드리." "그래요?" 그녀의 눈이 커지더니 더더욱 호기심에 불이 붙어 계속 들어가 보자고 조르는 것이었다. ''당신은 들어갈 수가 없어, 오드리. 나는 어떨지 모르지만 당신은 틀림없이 쫓겨나고 말걸?" "도대체 이유가 뭐죠? 그저 구경만 하는 것도 안 된단 말인가요?" 그녀는 서양의 바와 같은 형태를 상상하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젓는 것이었다. "여자들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걸." "어머나, 말도 안돼." 그녀는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하는 수 없이 산책을 계속해야만 했다. 찰스는 자기가 알고 있는 중국의 역사에 대해서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 중국의 예술과 문화적 유산들은 찰스가 알고 있는 그 어떤 나라의 것보다도 더욱 훌륭한 것들이었다. 찰스가 장 개석을 만날 수 있기까지는 예상대로 꼬박 일주일이 걸렸지만, 그들은 그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어서 오히려 그렇게 된 것이 다행스러웠다. 그들은 그 일주일 동안 여기저기 산책도 다니고 차를 빌어 드라이브도 즐기며 즐거운 시간들을 가졌다. 마침내, 그렇게 기다린 보람의 결과가 나타났다. 찰스는 원하던 인터뷰를 거의 완벽하게 끝낼 수 있었고, 그 인터뷰를 담은 기사는 커다란 성공을 거둘 것이 거의 확실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는 호텔에다 타자기를 한대 빌려다 놓고 인터뷰를 끝낸 그날 오후부터 즉각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오드리는 자기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일에 열중하고 있는 찰스를 바라보며 조용히 방 한구석으로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서 아나벨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동생에게 설명해 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그런 이야기들에 별로 흥미를 느낄 것 같지가 않았다. 그것은 그녀 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나벨 대신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써보려 했지만, 그것 역시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찰스는 그녀가 그곳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옆으로 불렀다. ''소리도 없이 언제 들어왔어?" 그녀는 몸을 굽혀 그의 목에 키스를 하며 대답했다. "당신이 너무 일에 열중해 있은 탓이겠죠. 인터뷰는 잘 됐나요?" "무척 만족스러운 인터뷰였어. 장개석, 그는 아직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틀림없이 실패할 것 같아. 소련은 모택동과 홍군을 지원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 장개석 자신은 승리할 수 있다고 장담하지만, 난 결코 그렇게 생각되지가 않아. 사실 그는 지금 모택동의 군대를 집중 공격하려 하고 있어." "그렇다면 기사에는 어떻게 쓰실 건가요? 장개석은 틀림없이 실패할 것이라고 쓸 건가요?" "그렇게 쓸 수야 없지. 어찌됐건 그건 내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하니까. 그가 말한 내용을 사실 그대로 공정하게 쓰려고 노력해야지. 그는 역시 약간의 비인간적인 면이 있기는 하지만 무척 재미있는 사람이더군. 당신이 그의 부인을 만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녀도 무척이나 아름답고 매력적이더군." 하지만 오드리는 그가 손문의 미망인을 인터뷰할 때 장개석의 부인 대신 그녀를 만나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녀는 오드리가 자신의 사진을 찍는 것도 허락해 주었고, 찰스는 그 사진을 타임즈에 게재하겠다고 약속했다. ''정말이에요?" 오드리는 그의 약속에 마음이 끌렸다. "물론이지, 당신의 사진 솜씨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아. 사실, 내가 함께 일해 본 전문 사진작가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걸." 찰스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이 심각해졌다. "그게 사실이라면 언젠가 당신과 내가 함께 일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자 찰스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대담했다. ''난 이미 우리가 그러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오드리는 정말로 그날 오후 손문의 미망인의 사진을 찍었다. 그녀는 그와 함께 무언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에 사로잡혔으며, 상하이에서도 그런 기회가 주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이 되었다. 그들은 그 다음날 짐을 꾸리고 상하이로 떠날 준비를 하였으며, 오드리는 찰스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고 해서 드디어 상하이를 보게 된다는 생각에 들떠 괜히 마음이 조급해져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들은 바로는 상하이는 사람들과 상업과 도박과 매춘과 이국적인 향취로 가득찬 도시였다. 터키에서 본 시장들이 더욱 동양적인 형태로 펼쳐져 있을 것 같았다. 오드리는 짐을 꾸리다 말고 다시 화장품 상자를 들여다보며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이건 어디다 갖다 버리든지 누구에게 쥐버리기라도 해야 할까봐요. 어쩌면 염소나 돼지 한 마리 쯤과 바꿀 수도 있지 않겠어요" 찰스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배에서는 어떻게 하려고?" 그건 정말 너무나도 아득한 먼 훗날의 일로만 생각되었다. "어디 넣어두는 것이 낳겠어, 오드리."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난 벌써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은 지도 오래 되었고, 다시 그럴 기회가 있을지 조차도 의문인걸요." 여기서 화장이란 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그녀는 이스탄불을 떠난 후로 매니큐어도 거들떠보지 않았고, 그녀가 아끼던 T자 무늬의 구두는 여행가방 맨 밑바닥에 쳐박혀져 있었다. 중국으로의 여행이 시작된 뒤로는 옷도 간편한 셔츠나 블라우스, 스커트 정도 밖에는 입어보지 않았다. 화려한 비단 드레스나 남 프랑스에서 입었던 수영복, 이브닝 가운들은 여기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들이었다. 가죽 코트를 입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색한 일이었다. 난징은 꽤 큰 도시이긴 했지만, 그곳 사람들은 화려한 의상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대부분 중국의 하층민들이 입는 제복같은 단조로운 옷을 입고 있었다. 오드리는 화려한 옷보다는 오히려 좀더 따뜻한 옷들이 필요했다. 어느새 공기가 선선해지고 있는 것을 보니 가을이 온 모양이었다. 집으로 돌아갈 즈음엔 날씨가 한층 더 추워질 것이다. 그들은 호텔 지배인이 소개해 준 레스토랑으로 가서 배불리 저녁을 먹고 돌아와 그날 밤을 호텔에서 보냈다. 사람들은 이제 모두 그녀를 파커 스코트 부인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심지어 호텔 데스크에 앉아 있는 사나이는 완전히 그들을 신혼여행 온 부부로 생각하고 있었고 단지 그녀가 아직 여권의 내용들을 변경할 시간을 갖지 못했을 뿐이라고 아예 단정을 내리고 있었다. "우리 이제 완전히 부부로 행세하는 것이 어떨까요. 찰스?" "당연한 얘기 아니오?" 사실 모든 사람들의 눈에 그들은 부부로 보였었고, 그러다 보니 그들조차 마치 스스로 정말 부부인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이었다. 찰스는 장개석에게 오드리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녀가 자신의 아내라고까지 말한 적이 있었다. 또한 가장 중요한 의미로 생각하더라도 그들은 실질적인 부부나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 그녀가 그를 누구보다도 믿었었기 때문에 스스로 여기까지 함께 올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다른 그 누구도 이처럼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다시 한번 진한 행복감을 맛보며 그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사랑해요. 찰스. 그 무엇보다도 당신을 사랑해요." 찰스는 그녀의 속삭임에 미소로 답하며 그녀의 갈색 머리칼을 이루만졌다. "나 또한 마찬가지요. 오드리." 13 오드리와 찰스는 난징을 출발하여 무려 7시간 동안이나 북적대는 만원 열차를 타고, 아무리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긴 여행을 해야만 했다. 찰스는 노트를 꺼내 뭔가 열심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고, 오드리는 찰스가 가져 은 책을 읽어 보려 했으나, 그보다는 기차 안의 다른 승객들을 지켜 보는 것이 훨씬 재미있었다. 기차가 상하이에 가까와지자 그녀는 창밖의 시골 풍경들을 유심히 바라보며 사진을 찍었다. 기차가 드디어 역에 도착했을 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가히 그녀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오드리는 플랫폼에 차고 넘치는 인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디론가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어디서 부턴가 도착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거지들, 거리를 헤매는 아이들, 매춘부들과 외국인들이 한데 얽혀 뭐라고 소리를 지르며 서로 떠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다가와 치맛자락을 붙잡고 애걸하는 아이들, 한쪽 팔이 잘려나간 추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아이들, 찰스를 향해 프랑스어로 무언가 외쳐대는 창녀들, 그밖에도 상당수의 영국인 여행객들이 서로 어울려 플랫폼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찰스가 복잡한 인파들 틈에서 길을 찾으려고 기를 쓰고 있는 바람에 그가 한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하고 큰소리로 되물었다. ''뭐라구요?" 그가 다시 뭐라고 말을 했지만 역시 알아들을 수가 없어 사람들 틈을 헤집고 겨우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뭐라고 그랬어요. 찰스?" ''상하이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했소." 그는 그녀를 돌아다보며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소리쳐 대답했다. 다행히도 그들은 어렵지 않게 그들의 짐을 날라 줄 짐꾼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역에서 빠져 나오자 마자 서둘러 택시를 집어 타고 찰스가 자주 이용하는 상하이 호텔로 갔다. 그 호텔에는 대부분 영국인과 미국인들이 투숙하고 있었고, 종업원들도 매우 친절했다. ''마치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군." 예약한 방으로 들어서며 찰스가 농담투로 말했다. 그들은 숙박명부에 아예 찰스 파커스코트 부부라고 기입했고, 오드리 역시 그 이름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녀는 찰스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다시 오드리 드리스콜이 되면 무척 어색할 것 같아요." 하고 농담을 던졌다. 정말, 아나벨이나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오드리 드리스콜이란 이름은 지금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다른 세상의 인물로만 여겨졌다. 오로지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만이 현실일 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너무나도 신비로운 상하이라는 도시, 그리고 창밖의 거리에 물결치는 인파들, 그것이었다. 그런 생각에 잠겨 창밖을 내려다보던 오드리는 몸을 돌려 다시 찰스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이 마주치자 불꽃이 튀었다. 찰스는 이제 그녀가 곁에 없는 인생이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지구의 반을 함께 여행하며 마침내 이곳에 도착했고 머지않아 다시 떠나가야 할 것이었지만, 그런 것은 아직 생각할 계제가 못 되었다. 그는 누군가와 더불어 한 곳에 정착한다는 것이 도저히 자신과는 걸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드리가 자신의 곁을 떠나간다는 것 또한 상상할 수 없었다. 어차피 지금 단계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밤이 되기 전에 조금이나마 상하이를 둘러보고 싶었기 때문에 서둘러 번갈아 목욕을 하고는 아랫층으로 뛰어내려와 다시 택시를 집어 탔다. 그들은 먼저 유럽식 상점과 건물들이 즐비한 거리를 돌아보고 다시 창녀와 거지와 외국인들이 북적대는 상하이 시내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수많은 이태리인, 프랑스인, 영국인, 미국인, 그리고 이제는 일본인까지 드나들고 있어 서양사람과 마주치는 것이 조금도 어색하지가 않았다. 밤이 되었어도 음식점과 도박장, 그리고 아편굴 등에는 여전히 불빛이 대낮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오드리가 기대했던 고대 중국의 장엄한 분위기를 찾아 볼 수 없었지만, 상하이는 마치 인간의 몸속에 혈액이 흐르는 듯한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오드리가 그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었던 그러한 분위기였다. 중국인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프랑스 요리로 든든하게 배를 채운 뒤 호텔로 천천히 걸어가는 동안 오드리는 계속해서 거리의 사람들을 바라보느라 온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고, 찰스는 그런 그녀의 순진스러움을 놀려댔다. 그곳은 확실히 그녀처럼 순진하기만 한 도시는 아니었다. 돈만 있으면 하지 못할 짓이 없었고 얻지 못할 것이 없는, 그런 곳이었던 것이다. "대단하지?" "정말 너무너무 놀라와요. 찰스. 항상 이런가요?" 사람들이 일년 내내 그만한 에너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물론이지. 때때로 나도 이곳이 얼마나 퇴폐적인가 하는 것을 깜빡 잊고 지내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현실을 인정하게 되곤하는 경우가 있어." 그곳은 그들이 여행 도중에 거쳐 온 티벳이나 아프가니스탄, 혹은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 느낄 수 있었던 정적인 분위기와는 너무나도 심한 대조를 이루는 곳이었다. "아버지가 여기 왔을 때도 이랬을까요? 궁금해요." "아마 마찬가지였겠지. 항상 이랬으니까. 요즘은 일본의 침략 때문에 약간 조용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별 차이는 없었을 거야." 그들은 호텔에 이르러 서로 손을 마주잡고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로비를 지나가고 있었다. 오드리는 계단 근치에 서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지나가는 자신과 찰스를 유심히 바라보는 한 노부부가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와 55세 정도의 여인이었는데, 그녀는 아주 맵시있게 우아한 옷을 차려 입었을 뿐만 아니라 곱게 빗어 넘긴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고, 귀에는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한, 첫눈에 봐도 대단한 귀부인임을 금방 알 수 있을 그런 여인이었다. 그녀가 오드리를 유심히 지켜 보더니 영국식 정장에다 품위있어 보이는 뿔테 안경을 낀 옆자리의 남자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건네는 것이었다. 그는 막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한 오드리를 바라보더니 자신의 부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조용히 뭔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마침내 여자 쪽에서 오드리를 불러 세웠다. ''드리스콜 양 아니에요?" 오드리는 깜짝 놀라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자신을 부른 쪽을 바라보았다. 그 부부가 오드리와 찰스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세상에. 어떻게 여길..." 그녀는 머리털이 쭈삣쭈삣 곤두설 만큼 깜짝 놀랐으나, 곧 침착을 되찾으려 애를 쓰면서 여전히 찰스의 손을 잡은 채 몇 발짝 계단을 내려왔다. 그녀는 찰스를 가리키며 그저 친구 찰스 파커스코트라고만 그들에게 소개했다. ''그래요?" 이번에는 상대방 여인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난 당신이 쓴 책은 하나도 빼지 않고 다 읽었답니다" "파커스코트 씨라구?" 그 할아버지도 관심을 보이며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네팔에서 쓴 책은 정말 훌륭하더군, 거기서 실제로 살아본 적도 있지 않소?" ''네, 한 3년 그곳에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이 나로서는 최초의 책이었습니다." "정말 좋은 책이었어." 그 와증에서도 그의 부인은 오드리와 찰스를 번갈아 돌아보며 궁금해 못견디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필립과 뮤리엘 브라운이라는 이름을 가진 오드리 할아버지의 친구들이었다. 뮤리엘은 적십자의 자원봉사대 위원장을 맡고 있는 꽤 수다스러운 여자였다. 1차대전 당시에는 프랑스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훈장을 타기까지 했었다. 첫번째 결혼에 실패한 후 필립과 재혼한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필립 브라운이 뮤리엘과 결혼한 것은 엄청난 행운이라고 입방아를 찧기도 했지만, 사람들의 입에 그런 소리가 그리 자주 오르내리지는 않았었다. 그만큼 그들은 확실히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만한 인물들이었다. 그는 오드리의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퍼시픽 유니온 클럽의 회원이었고 한때 보스톤 은행장을 지내기도 했었다. 그들은 거의 매년 동양의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곤 했었기 때문에 오드리는 정 기회가 닿지 않으면 그들 틈에 끼어서라도 동양을 여행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이제 그녀의 할아버지의 귀에 찰스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따라서 그녀는 무엇이든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았다. ''할아버지도 당신들이 여기 오실 거라는 말씀을 안 하시던데요" "일본에서 약 6주 가까이 머물렀는데 이곳 상하이와 홍콩을 잊을 수가 없어서 말야." 뮤리엘은 찰스를 바라보며 속으로 어쩌면 저렇게 잘 생겼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오드리가 여지껏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이 바로 이 남자 때문이었으리라고 혼자 단정을 내렸다. 그녀는 오드리가 그렇게 매력적인 여자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녀가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를 항상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터였다. 오드리는 그녀가 보기에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진 것 같았으며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있는 것 같았다. 오드리의 그런 활기 찬 모습과 반짝이는 눈동자는 그녀가 예전에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던 시절에는 찾아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하코트 웨스터브룩과 결혼한 얘 동생이 훨씬 더 예뻤었는데...> 하고 그녀는 혼자 생각했다. "여긴 친구들과 함께 온 거니?" 뮤리엘 브라운은 오드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의미있는 질문을 던졌고, 오드리는 자신의 서툰 연기에 스스로 얼굴이 붉어지지 않기를 기도하며 겨우 대답했다. "네. 런던에서부터 함께 온 친구들이 있는데, 오늘 밤엔 그들이 무척 바빠서 여기 파커스코트 씨가 친절하게도 그들 대신 저를 안내해 주고 있어요. 여긴 정말 매력적인 도시더군요.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될 수 있는대로 영악해 보이지 않는 순진한 인상을 주려고 애를 썼지만 아무래도 뮤리엘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자신의 서툰 연기에 넘어가 줄 것 같지 않았다. 불행히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럼 당신은 어디서 머무를 건가요. 파커스코트 씨 ?" 그건 정말 당혹스러운 질문이었고, 그는 오드리가 그들을 얼마나 떼어 버리고 싶어하는지 그때까지는 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난 항상 여기서 머무릅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호텔이거든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요." 하고 잽싸게 필립 브라운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는 찰스가 그 호텔을 좋아한다는 말에 커다란 자부심을 느꼈던 것이었다. 그는 그 호텔이 무척 마음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인이 그날 오후에 그 호텔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아 무척 기분이 상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파커스코트 같은 유명 인사가 그렇게 말했으니 이 호텔이 상하이에서 가장 훌륭한 호텔이란 것이 증명된 셈이었다. "난 오늘 그렇지 않아도 내 집사람에게....." 뮤리엘이 재빨리 그의 입을 막았다.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만나서 점심이라도 한 끼 같이 하는게 어떨까, 오드리? 물론 파커스코트 씨도 함께 오실 수 있다면 더욱 좋구요." "글쎄요. 말씀은 고맙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저희는 내일 늦어도 모레까지는 뻬이징으로 떠나야 하거든요. 게다가...." 그녀는 찰스를 향해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파커스코트씨는 기사를 쓰고 있는 중이라...." "그래요? 그래도 혹시 떠나기 전에 시간이 나면..." 뮤리엘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도 뻬이징으로 갈거예요?" 이건 확실히 뮤리엘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좋은 수다거리가 될 만한 사건이었다. 에드워드 드리스콜의 시집 안 간 손녀딸이 상하이에서 어떤 작가와 사랑을 나누고 있다. 뮤리엘은 입이 근질거려서 어떻게 고향의 친구들을 만날 때까지 기다리나 하는 것이 걱정이었다. 하지만 찰스는 오드리가 걱정한 대로 보기 좋게 그녀의 함정에 걸려들고 말았다. ''네, 그렇습니다. 타임즈에 기고할 원고를 쓰고 있는 중이거든요." "어머나, 재미있어라!" 뮤리엘은 환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그녀가 재미있어 하는 것은 오드리와 찰스가 같은 방에서 함께 잠을 자리라고 추측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오드리는 그녀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뮤리엘이 그렇게 머리를 돌릴 것은 너무도 뻔한 사실이었고, 따라서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할아버지의 귀에 그런 소리가 들어가지 않게 할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뮤리엘이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면 동네방네 그런 소문을 퍼뜨리고 다닐 것이라는 사실 또한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커스코트 씨는 난징에서 장개석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막 이곳에 도착했어요." 오드리는 자신이 찰스를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늙은 여우같은 뮤리엘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역시 필립 브라운은 그 한마디에 더욱 마음이 끌리는 모양이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 보며 오드리는 다시 찰스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당신은 이층까지 절 데려다 주는 수고를 않으셔도 되겠어요." 그녀는 다시 뮤리엘을 흘낏 훔쳐 보았다. "여긴 강도가 어찌나 많은지 잠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가 있어야죠. 내 친구들은 내가 마치 다섯 살짜리 아기나 되는 듯이 찰스에게 나를 부탁하고 나갔거든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찰스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제 브라운 씨가 있으니 걱정말고 나가서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세요." 그녀는 그 말을 할 때 마치 바깥에 그를 기다리는 여자가 한 스무 명 쯤은 있다는 어감을 풍기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러자 찰스는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더니, 이내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고 속으로 자신의 우둔함을 비웃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각본을 눈치 챈 찰스가 오드리의 연극을 도와 그녀와 악수를 나누고 브라운 부부와도 인사를 나눈 다음, 손을 흔들며 바깥으로 나가 버리자 뮤리엘은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무척이나 실망한 표정이 되었다. 어쩌면 자신이 엉터리 추측을 했을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자신의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오드리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들의 방은 각기 다른 층에 있었지만, 브라운 부부는 친절하게도 오드리를 그녀의 방문 앞까지 데려다 주었고, 오드리는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혼자 방으로 들어와 그들의 발자욱 소리가 멀어져 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자신의 연극을 어느 선까지 믿어줄지는 미지수였지만, 어쨌건 그녀로서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 셈이었다. 그녀는 할아버지 귀에 어떤 소문이 들어가게 될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브라운 부부가 자신들의 방으로 가면서 나눈 대화를 그녀가 들을 수 있었다면, 결코 마음을 놓을 형편이 못 된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으리라. "난 그 말을 한마디도 믿지 않아요." "뭘 말이오? 그가 장개석과 인터뷰했다는 말 말이오? 당신 미쳤구먼, 그 사람은 세계에서도 가장 유명한 여행가이자 작가..." 남편이나 아내나 모두 서로 상대방에 대해 못마땅한 표정들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가 지금 친구를 만나러 나간다는 것 말이에요. 그건 틀림없이 새빨간 거짓말일 게고, 그녀와 그는 오늘밤 저녁도 함께 먹었을 뿐만 아니라 분명히 잠자리도 함께 할 거예요. 틀림없다니까요." 방으로 들어서는 그녀의 눈은 한층 더 빚을 발하고 있었고, 필립은 무척이나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뮤리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렇게 지구의 정반대쪽에 와 있으면서까지도 남의 이야기를 쑤군대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그 애는 얌전한 아가씨야, 절대로 그럴리가 없어." 그는 그녀가 자신의 친구인 에드워드 드리스콜의 손녀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를 옹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모르는 말씀 마세요. 그녀는 노처녀예요. 하코트 웨스터브룩하고 결혼할 기회도 있었는데 동생에게 빼앗겨 버렸잖아요. 그 뒤로는 어디에서도 그녀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어요. 하는 일이라곤 그 노인네 시중드는 일밖에 없었으니까. 그런 그녀가 갑자기 여기 나타나서 아무도 자기를 아는 사람이 없을 줄로만 알고 마음껏 거드름을 피고 다니는 거예요." 그녀는 자신의 추리에 스스로 도취되어 한층 눈망울이 반짝거렸지만, 필립 브라운은 피곤한 듯이 양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그만해 둬요.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그들이 서로 약혼이라도 했는지, 아니면 무척이나 사랑하는 사인지.... 그저 친구지간인지 당신이 어떻게 안다고 그렇게 함부로 입을 놀리는 거요. 그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타락했으리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잖아." 필립은 때때로 어쩌면 아내가 그런 식으로만 생각을 진전시키는지 한심스러울 때가 있었으나, 더욱 한심스러운 것은 그런 그녀의 추측이 거의 빗나가는 경우가 없었다는 데 있었다. "필립, 당신은 너무 순진한 게 탈이에요. 그렇게도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내려가서 숙박부를 한번 찾아봐요. 그들이 한 방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대번에 드러나고 말 테니까요. 그들은 집에서 멀리 떠나왔으니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말이에요." 물론,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러나 오드리 역시 거기에 대비하여 카운터로 달려 내려가서 다른 층에 찰스의 방을 따로 하나 빌려 놓았던 것이다. 한 39분 가량이 지나자 찰스가 빙긋이 웃는 얼굴로 들어와서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카운터에서는 내가 당신에게 쫓겨났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그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길 건너 술집에서 술 한잔 마시고 오는 짧은 시간 동안에 그녀가 어떤 조치를 취해 놓았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몹시 바빴겠구려 ?" 오드리는 침대 끝에 걸터앉은 채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웃을 일이 아니에요. 찰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필이면 그들과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정말 싫어요." ''내가 왜 그런 것을 금방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 브라운 부인이란 여자는 별로 입이 무겁지 않은 것 같더군, 정말 그렇소?" ''어디 그뿐인가요. 그 할머니의 혀끝에는 독기가 묻어 있어요. 내가 당신과 함께 여행하고 있다는 소문이 머지않아 온 샌프란시스코에 파다하게 퍼질 테니 두고 보세요." 찰스도 그제서야 약간은 심각해지며 그녀 옆에 와 앉았다. ''정말 내가 다른 방으로 가 주었으면 좋겠소?" 그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었다. 그들에게 제각기 살아 나가야할 나름대로의 인생이 있다는 사실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고, 오로지 그들이 함께 있는 바로 그 순간만이 영원한 현실로 존재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또한 그녀에게 뭔가 해를 끼칠 수 있는 일은 결코 하고 싶지가 않았다. 특히 그것이 그가 그녀를 곁에서 보호해 줄 수 없는, 장래의 언젠가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라면 말이다. "정말 미안하오, 오드리. 여기까지 와서 당신이 아는 사람과 마주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소." 그녀는 그를 향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요즘은 세상이 한층 좁아진 것 같아요. 그리고 당신의 질문에 대답하자면, 물론 난 당신이 다른 방으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단지 그 늙은 여우를 어디 바닷속으로라도 던져 버리고 싶을 뿐이에요. 할아버지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면 말이에요. 하지만 그들 때문에 내 인생이 변할 수는 없죠. 그건 그렇게 커다란 문제가 아니니까요." ''언젠가는 커다란 문제가 될 수도 있지 않겠어 ? 당신이 나중에 집으로 돌아갔을 때..." 어쩐지 그의 목소리가 그다지 밝지는 못했다. 그녀에게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것이다. "난 당신이 상처를 입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나도 이 여행을 떠나올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이미 난 당신에게 내 운명을 걸었어요. 그게 정말로 두렵다면 난 당신을 따라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쯤은 집으로 가는 배를 타고 있겠죠. 하지만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인생인걸요."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몹시나 자랑스러운 듯한 말투였다. "그리고 당신은 누가 뭐라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 찰스 파커스코트예요. 설사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해도 그건 그들의 문제일 뿐이에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상, 남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지나치게 쓰지 않는 것 뿐이에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라는 말은 곧 찰스의 이름으로 다른 방을 빌었음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찰스는 말을 마친 그녀를 품에 안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그녀의 그런 점에 특히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옳다고 믿는 바를 밀고 나가는 그녀의 용기와 의지, 무엇보다도 그녀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는 그런 그녀를 존경하리 만큼 사랑했다. 물론 어느 누구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들은 그날 밤 서로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함께 잠자리에 들었고 더욱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오드리는 미소를 지으며 찰스에게 농담을 던졌다. "브라운 부인이 이런 장면을 직접 본다면 과연 뭐라고 할까요?" "그 여자는 질투심이 무척 강할 것 같더군!" 그 생각에 대해서는 오드리도 동감이었다. "브라운 씨는 여전히 <좋아, 몹시 훌륭하군> 할 것 같아요." 그날 밤 그들은 언제나처럼 서로를 꼭 껴안은 채 잠이 들었고, 오드리는 자면서 할아버지 꿈을 꾸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이 밝았을 때 그녀는 그 모든 걱정들을 떨쳐 버리기로 마음 먹었다. 어쨌건 그들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고, 최악의 경우에는 집으로 돌아가서 할아버지에게 찰스는 제임스와 바이올렛의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인데, 우연히 상하이에서 마주쳤을 뿐이라고 설명을 할 작정이었다. 오드리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할아버지를 위해서 거짓말을 할 마음의 준비를 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녀와 찰스가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 사이인지는 알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건 그를 놀라게 하고, 다시금 그녀를 잃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을 불러 일으킬 뿐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결코 할아버지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리라고 수 없이 다짐해 왔던 것이다. 그러한 걱정들 대신에 오드리는 다시금 아름다운 상하이의 풍경에 눈을 돌렸다. 그 도시 자체가 그녀를 놀라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오고가는 사람들 또한 그녀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곳엔 중국인뿐만 아니라 영국인, 프랑스인도 많이 있었고, 수많은 외국 기업체들이 그곳에 지사를 두고 있었다.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중국인과 잘 어울리려 하지 않지." 찰스의 설명이었다. ''그건 어리석은 짓이 아닐까요? 최소한 이곳 중국에 있는 한은 중국인과 가까워지려고 하는 것이 좋을 텐데요." 그도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사정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 보면 중국을 식민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대부분의 경우 여기가 중국 땅이라는 걸 인정하려 들지를 않더군. 중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인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어.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런 사람이 딱 하나 있긴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를 약간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그런 현실이지. 오히려 중국인들이 영어나 불어로 이야기를 해야하고, 또 외국인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어." "그건 차라리 일종의 거만이라고 표현해야겠군요. 그렇지 않아요?" 그녀로서는 중국어를 배우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당신 생각은 어때요. 찰스? 당신은 중국어도 몇 마디 할 줄 알잖아요. 중국어를 잘 알아들을 수도 있나요?" "악센트가 약간 틀리긴 하지만 그럭저럭 대화는 할 수 있지." 그는 웃으며 바지를 벗어 의자 위에 내던졌다. "특히 술을 많이 먹었을 때는.." 그는 성큼 다가와 그녀를 와락 껴안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처럼." 그는 마치 그녀의 목을 물어 뜯으려는 기세로 몇 마디 중국말을 지껄였고, 그들은 한데 엉켜 웃으며 침대 위로 쓰러졌다. ''바깥 세상의 저 퇴폐적인 분위기 때문에 나도 당신을 껴안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 오드리." 그는 계속해서 코로 그녀의 온몸을 부벼대며 말했다. 장장 5천 마일에 걸친 여행이 그들을 몹시도 지치게 만들었지만, 이제 그들은 서서히 피로에서 회복되고 있었다. 그들은 탐욕스럽게 서로를 껴안고 침대 위를 뒹굴었다. 환희의 순간들이 지나가고 그녀는 여전히 그의 품에 안긴채 한번 그의 이름을 나직히 불러 보고는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찰스 이외의 어떤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드리는 찰스와의 결혼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온 마음을 바친 유일한 남자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앞으로도 영원히, 그리고 언제든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두 개의 대륙에 걸쳐 사랑을 나누었으며, 그녀는 또한 그와 함께라면 이 세상 어디 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한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는 찰스는 상하이의 소음에 귀를 기울이며 눈을 감고 다시 한번 힘주어 그녀를 끌어 안았다. 14 상하이에서 1주일을 보낸 그들은 뻬이징으로 갔다. 그들은 칭타오 항구에서 배를 타고 상하이를 떠나 밀려오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아주 낭만적인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오드리는 찰스와 함께 밤새도록 사랑을 속삭이며 즐거운 시간들을 가졌지만 그렇게도 그녀에게 많은 놀라움을 안겨 주었던 상하이를 떠난다는 것이 왠지 무척이나 섭섭했다. 이제 뻬이징에서의 며칠 밤만 지나고 나면 그들은 이스탄불로 되돌아가는 기나긴 여행을 시작해야 할 것이고, 파리를 거쳐 런던에 도착하면 그는 일을 시작할 수가 있었다. 예정대로 연말까지는 기사가 마무리 지어질 것이다. 찰스는 여러 가지 해야 할 일도 많았고 정리해 두어야 할 생각들도 적지 않았지만, 머릿속에는 오로지 처음으로 맛보는 열정을 자신에게 불어넣어 준 여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그녀의 감정이나 사물을 보는 시각까지도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고, 그녀의 비단결 같은 피부와 갈색 머리카락, 그리고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 단 한순간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어느 것 하나 그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못 할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정말로 샌프란시스코로 와서 저희 할아버지를 만나 보시겠어요?" 그날 밤, 그의 귀에다 대고 그녀가 속삭였다. 언젠가 그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고, 이제 또다시 이별의 순간이 아른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그를 떠나 보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노릇이었지만 말이다. "갈 수만 있으면 가야지. 일이 모두 끝나고 나면....." 하지만 그는 사실 그녀와 함께 런던에서 살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는 기사를 쓰기 위해서는 어차피 런던으로 돌아가야만 했고, 그것이 끝나고 나면 다시 완전히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런던까지 함께 가자고 그녀를 졸라보았으나, 그녀로서는 그것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아시잖아요. 난 이제 돌아가서 할아버지를 모셔야해요. 3월이면 아나벨의 애기도 태어날 거구요." 그녀는 그것 때문에라도 돌아가야만 했다. "당신이 샌프란시스코로와서 기사를 쓰면 어떨까요? 그렇지 않으면 일이 끝나는 대로 그쪽으로 오시면 되잖아요?"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그의 일이라는 것이 몇 주일 이상이나 걸릴 것 같지는 않았고, 또한 그가 아무데서나 일을 할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기사가 끝나고 나면 다른 책을 또 한 권 써야해, 오드리.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할 수가 없다구." 그러한 생각들이 또 다시 그를 우울하게 했다. 그는 그녀와 자신을 떼어 놓는 일은 결코 하고 싶지 않았으나 이미 맺어 놓은 계약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계약만은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차라리 런던으로 돌아가서 출판사 측과 일정을 조정해 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테지만, 그런 것은 돌아가는 길에 보다 신증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었고, 아직까지는 그녀와 뻬이징에서 함께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뻬이징에 도착한 오드리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상하이에서의 타락과 부패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뻬이징은 그 자체가 바로 역사였다. 그들이 티안멘 광장에 도착하자, 오드리는 8백년 전부터 중국의 수도였던 그 도시를 바라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이 끓어오름을 느낄 수 있었고, 명, 청 두 왕조에 걸쳐 왕궁으로 명성을 떨쳤던 자금성의 금빛 지붕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 감격의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오드리는 그곳과 단 하나의 못도 사용하지 않고 완전히 나무로만 지어진 극락사라는 절을 구경하느라 시간이 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뻬이징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었는데 티안맨 광장에서도 무척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녀는 쉴새없이 걸음을 옮기며 또한 쉴새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는데, 나중에 아직까지도 카메라를 귀신붙은 상자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그들을 놀래키지 않기 위해 훨씬 더 신중하게 사진을 찍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장면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카메라에 담으려는 듯 열심히 셔터를 누르는 것이었다. 그녀는 상하이에서 필름을 충분히 사두었었는데, 뻬이징에서 그 많은 필름들을 다 써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뻬이징 시내를 벗어나 먼저 어느 황태후가 더위를 피하기 위해 지었다는 북쪽의 또다른 왕궁을 구경했다. 그곳에서 오드리가 가장 감명을 받은 것은 따스한 밤공기를 가르며 호수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유람선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명나라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왕릉들을 둘러보았는데, 왕릉의 중앙 벽면에는 여러 가지 형상의 동물들과 12명의 장군들의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그 규모의 강대함과 보는 이의 눈을 의심하게 하는 아름다움에 말문이 막힌 오드리는 다시 한번 눈물을 글썽이지 않을 수 없었고, 특히 만리장성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릴 정신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그들은 뻬이징에서 북서쪽으로 25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패다링에서 저 멀리 시계 너머로 사라져 버리는 끝없이 이어진 만리장성을 바라보았었다. 그것이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으며, 중국과 몽고를 둘로 나누며 1500마일 이상을 뻗어 있다는 사실에 그저 입이 벌어질 뿐이었다. 그 성은 이미 2천년 이상을 그렇게 말없이 서 있었으며, 그 성을 경비하는 병사를 태운 4마리의 말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폭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세계를 둘로 갈라놓을 듯 끝없이 이어진 만리장성의 연속성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오드리는 간신히 고개를 돌려 찰스를 바라보았다. "믿을 수가 없어요. 찰스. 이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그 어떤 것 보다도 더욱 감동적이에요." 그도 만리장성을 볼때마다 항상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오드리와 함께 그곳에 서 있으니 더더욱 커다란 의미가 되새겨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항상 그러한 의미를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사람을 여태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전에도 대여섯 번 이곳에 와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자신의 온 몸을 짓눌러오는 듯한 장엄한 역사를 직접 대하는 엄청난 감동을 느꼈었다. 오드리는 물론 그러한 그의 감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찰스는 만리장성에 몸을 기대고 서 있는 오드리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들은 마침내 커다란 아쉬움을 남긴 채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고, 밤공기를 가르는 기차가 그들을 뻬이징으로 데려다 주었다. "난 오늘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내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난 그 성을 내 기억 속에 소중히 간직할 거예요." 그녀는 자신을 그곳까지 데려가 준 찰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었으나, 아까의 감동에 아직도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아 제대로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을 그녀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사실 그와의 여행은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내었고, 거기에 비하면 프랑스에서 보낸 여름은 정말 보잘 것 없는 시간낭비에 불과했던 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뻬이징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온 오드리는 그와 나란히 침대에 누워 그런 자신의 느낌들을 얘기하고 싶어졌다. "한 인간의 인생에는 그러한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하고 있는 것 아니겠소. 안티베스 같은 곳이 있는가 하면 이런 곳도 있고. 때때로 난 인생의 그런 양면성의 균형을 즐기고 싶어질 때가 있소." 오드리의 이야기를 들은 찰스의 대답이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그런 찰스의 이야기는 자신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한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몸 속에는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으로 많은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었고, 특히 이곳 중국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던 것이다. 오드리는 그날밤, 자신을 사로잡은 그 엄청난 감동 때문에 쉽사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만리장성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2천년 이상 제자리를 지켜 온 돌맹이 하나하나가 모여 엄청난 역사를 말해 주고 있었으며, 그것은 영원히 그녀의 마음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감동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찰스가 몸을 뒤척이는 소리에 제정신이 들어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가 누웠다. 그는 잠결에도 그녀의 몸을 요구해 왔지만, 오드리는 무언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보고 싶은 곳이 있었던 것이다. 북쪽으로 좀더 올라가 하르삔을 돌아보는 것이 그녀의 소망이었다. 그녀는 언젠가 하르삔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아버지의 책이었다. ''하르삔에 가볼 수 없을까요?" 그녀는 캄캄한 방에서 찰스를 향해 속삭였다. 그녀의 기억 속에는 다시금 아버지의 앨범이 떠오르고 있었고, 그러자 그가 젊었을 때 하르삔에 가본 적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상하이보다도 하르삔을 훨씬 더 좋아했던 걸로 기억이 되었다. 그곳에 대한 그녀의 꿈은 이제 그녀의 아버지가 물려 준 또 하나의 유산이 되었던 것이다. "정말 가보고 싶어, 오드리?" 찰스는 별로 탐탁치 않아 하는 눈치였다. "곧 돌아가야 할 텐데." 그의 그 말 속에는 은연중에 그녀가 자신과 함께 런던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라는 어감이 함축되어 있었다. 사실 그녀가 좀더 빨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상하이에서 그를 혼자 런던으로 보내고 자신은 배로 태평양을 건너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까지도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당연히 그녀가 자신과 함께 런던으로 가 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하르삔으로 간다는 것은 그녀가 찰스와 함께 런던으로 돌아갈 시간적 여유를 빼앗는 결과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는 일정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고 싶지가 않았다.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은 걸." 하지만 그녀는 그런 그의 말에 커다란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언제 또다시 이곳에 올 기회를 갖게 될지 모르잖아요. 찰스. 하르삔은 내게 있어서 커다란 의미를 가진 곳이란 말이에요." ''이유가 뭐요? 단지 당신의 아버지가 그곳에 간적이 있다는 것 밖엔 없잖소. 오드리,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봅시다." 하지만 뜻밖에도 어느새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다는 것을 안 찰스는 더 이상 그녀를 실망시킬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될 수 있는 한 합리적으로 그곳에 가서는 안 될 이유를 그녀에게 설명하려고 애를 썼다. "그곳엔 지금쯤 몹시도 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을 거야. 3년 전 11월에 그곳에 가보았는데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어 있더군. 우린 추위에 대한 대책도 전혀 없는 상태잖아." 그의 이야기가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처럼 들릴 수 밖에 없는 오드리는 쉽사리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여기서 살 수도 있잖아요. 추워봤자 얼마나 춥겠어요. 찰스, 부탁이에요. 정말 꼭 한번 가보고 싶어요." 그녀의 눈은 아예 애원하는 눈빛이 되었다. 하르삔으로의 여행은 그녀에게 있어서 성지 순례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르삔은 여기서도 7백 마일이나 떨어진 곳이야, 오드리. 제발 다시 한번 생각해봐." 하지만 오드리는 전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우린 이미 거의 6천마일을 여행해 왔어요. 여기서 우리 집까지는 1만 1천 마일이나 되는 거리구요. 그런 걸 생각하면 7백 마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녀의 고집에 이미 발동이 걸린 것이었다. "당신도 꽤 이성적이지 못한 면이 있군, 오드리. 우린 내일 상하이로 돌아가야해." ''찰스, 제발." 찰스는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더 이상 거부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로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하르삔에서 하루 이상 머무르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대충 둘러볼 것을 둘러보고 곧장 되돌아와 다음날 아침에는 상하이를 향해 뻬이징을 떠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녀도 그의 계획에 동의했으며, 그들은 그날 오후, 따뜻한 옷가지들을 사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는 서양인의 체격에 맞는 옷을 구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상하이에서라면 좀더 쉽게 구할 수 있었겠지만, 바지가 너무 짧아 오드리의 몸에 맞지를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가죽 자켓과 스타킹은 잘 맞는 것으로 구할 수가 있었고, 장화는 하는 수 없이 남자용을 사 신어야 했다. 찰스는 이것저것 아무거나 껴입으면 된다며 별로 준비를 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그들은 일본인 소유의 동부철도를 따라 만주벌판을 가로지르는 700마일의 여행을 시작했다. 예정대로라면 18시간이 걸리는 거리였으나 도착하는 역마다 일본 병사들이 기차에 올라 이 잡듯이 수색을 벌이는 바람에 26시간 이상이 지나서야 겨우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진조우와 선양 등에서 예정보다 많은 시간을 잡아먹긴 했지만, 정오 경에는 하르삔 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제일 먼저 그들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아이들을 데리고 플랫폼에 서 있는 러시아 여인들과 눈속에 코를 처박고 뭔가를 찾고 있는 몇 마리의 개, 그리고 몇몇 만주인들이 모닥불 가에 모여 언 손을 녹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역시 찰스의 말이 옳았다. 그곳은 이미 모든 것이 얼어붙기 시작하고 있으며, 군데군데 눈이 쌓여 있기도 했다. 역을 빠져나온 그들의 눈에 그들을 호텔까지 데려다 줄 낡은 차 한 대가 들어왔을 때, 오드리는 너무나 반가와서 깡총깡총 뛰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찰스는 여전히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상하이를 거쳐 런던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그 부분에 대한 만큼은 오드리의 고집이 너무도 완고해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한 번 마음먹은 일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강한 집념을 그에게 보여 준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투숙하려 했던 호텔은 절반 이상의 방이 수리 중이라 나머지 방들이 모두 가득 차 있었다. 대신에 그들은 거실에 따뜻한 난로가 피워져 있는 아담한 호텔을 하나 찾아낼 수 있었다. 몇 달 동안이나 손님이 한 사람도 없었던 듯, 카운터에 앉아 있던 노인이 그들을 무척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난데없이 1952년에 그곳을 휩쓴 홍수에 대한 이야기를 주섬주섬 늘어놓으며 방을 안내해 주었고, 오드리는 언 손을 연신 부벼대면서도 행복에 겨운 표정으로 찰스를 바라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죠?" 찰스는 쓸쓸한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중국이라기 보다는 러시아 냄새가 더 많이 풍기는 것 같아요." 그들이 호텔까지 오는 동안에도 러시아 말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었고, 마을 주민의 대다수 역시 러시아인이었다. 러시아 국경에서 단 200마일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찰스의 얼굴에는 찝찝해 하는 표정이 여실했다. "다음에는 모스크바로 가자고 졸라대겠군." "천만에요. 찰스. 당신도 솔직히 인정하셔야죠. 중국까지 와서 여길 와 보지 않는다는 것은 창피스런 일이에요." 그곳은 정말 크리스마스 카드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지만, 찰스의 기분이 그렇게 밝을 수 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찰스는 손을 녹이라는 뜻으로 그녀에게 난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일은 틀림없이 뻬이징으로 돌아가야 해요. 알고 있지?" "그럼요. 그러니까 더 빨리 오늘 안으로 모든 것을 둘러봐야죠. 내 카메라 갖고 있죠?" 그는 필름을 새로 갈아 끼운 카메라를 그녀에게 건네주었고, 그녀는 쟈캣 주머니 속에 그것을 쑤셔 넣었다. 그 자캣도 그곳의 추위를 막아줄 만큼 따뜻하진 못했다. ''어디로 가지?" 찰스는 약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뭔가 나름대로 계획이 있을 것 같은데?"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다. 게다가 주인 아저씨로부터 후란이라는 곳이 가볼만 하다는 이야기도 귀담아 들어두었던 것이다. 그곳은 약 20마일 정도 떨어진 곳이었지만, 그들을 역에서 호텔까지 자동차를 빌리면 될 것 같았다. 그녀가 그런 생각들을 이야기하자 찰스는 다시금 얼굴을 찌푸렸다.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될까? 어차피 하루만에 끝내기는 너무나 먼 여행을 왔으니 말이오." 그녀는 실망한 듯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자캣을 집어들며 단호하게 말했다. "정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저녁 때까진 돌아올 테니까요." 오드리는 정말로 혼자서라도 가버릴 기세였다. "점심은 어떡하고?" 그는 마지못해 그녀를 따라 방을 나서면서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렸고, 그러자 부엌문에 서 있던 주인 아주머니가 그들에게 오라는 손짓을 했다. 덕분에 그들은 따뜻한 점심으로 배를 채울 수 있었으며, 차를 잡기 위해 바깥의 얼어붙은 공기 속으로 나왔을 때, 찰스의 기분도 약간은 누그러진 것 같았다. 잠시 후, 하르삔 거리를 지나며 중국어와 러시아어가 함께 씌어진 표지판을 바라보는 오드리의 얼굴에 활짝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곳은 동양적인 도시라기 보다는 유럽적인 냄새가 더 강하게 풍겼으며, 상하이에서와 마찬가지로 거리에서는 불어와 러시아어, 약간의 영어, 그리고 만주어와 광동 사투리가 잡다하게 사용되어지고 있었다. 오드리는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 특히 털모자와 우스광스러운 코트에 마음이 끌렸으며,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들이 고용한 운전사는 그들에게 미국 은행을 구경시켜 주고는 곧장 후란을 향해 차를 몰았으나, 도중에 길이 막힌 곳이 있어서 눈이 잔뜩 덮인 좁다란 길로 접어들었다. 그들이 하르삔을 떠난지 약 30분 가량이 되었을 때, 조그만 석조건물이 하나 나타났고, 그곳은 프랑스인이 세운 성당이라는 설명을 운전사가 막 들려 주고 있는데, 갑자기 앓은 비단옷 하나밖에 걸치지 않은 조그만 소녀 하나가 길 복판으로 뛰어들어 그들의 차를 멈취서게 했다. 그녀는 그 추운 날씨에 발에 맞지도 않는 파란 슬리퍼를 신고 있을 뿐이었고, 운전사에게 오드리와 찰스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로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려 했다. 그러면서 자꾸만 길 건너편의 목조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왜 그런대요?" 오드리는 뭔가 그 아이가 위기에 처해 있음을 직감하고 잔뜩 몸을 앞으로 내밀며 운전사에게 물어 보았다.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던 두 사람의 수녀를 강도들이 살해했대요. 강도들이 성당 안에 몸을 숨기려 했는데, 수녀들이 들어주지 않자 그런 짓을 한 모양입니다." 운전사가 더듬거리는 영어로 설명해 주는 동안 그 소녀는 계속해서 성당 쪽을 가리키며 뭐라고 얘기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 시체를 묻어 주긴 해야겠는데 원, 날씨가 너무 추워서 아이들을 돌봐 줄 사람도 없다는 군요." "다른 아이들은 어디 있대요?" 오드리는 초조한 듯이 질문을 해댔고 찰스는 말없이 오고가는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수녀들은 몇 명이나 있대요?" 운전사가 커다란 목소리로 다시 소녀에게 뭐라고 말을 던지자 그녀는 곧 대답을 해주었다. 운전사가 그녀의 대답을 통역해 주었지만, 찰스는 예기치 못한 이 사건에 말려드는 것에 크게 불만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죽은 두 사람의 수녀 밖에는 없대요. 다른 두 사람은 지난 달에 떠나 버렸다는군요. 그들은 상하이를 거쳐 일본으로 가버렸고, 다음 달이나 되어야 두 사람의 수녀가 더 올거랍니다. 그러니 지금은 수녀라곤 한 사람도 없는 셈이죠. 아이들만 있구요. 게다가 그 아이들은 모두 고아라는뎁쇼." "그런 아이들이 몇 명이나 된대요?" 운전사가 다시 통역을 해주었다. "모두 21명이래요. 그들 대부분은 무척 나이가 어린 애들이고, 그 중에서 여기 이 14살짜리 소녀와 11살 난 얘 동생이 가장 나이가 많답니다. 성당 안에는 수녀들의 시체가 그대로 내버려져 있는 모양이에요." 그 말을 들은 오드리가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도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려 하자, 찰스가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뭘 하려고 그러는 거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어요? 시체가 된 수녀들과 함께 그들을 홀로 내버려 두고 가버릴까요? 이것 봐요. 찰스. 우린 최소한 누군가가 이곳에 올 때까지 그들을 도와 주어야 해요." "오드리. 여기는 샌프란시스코나 뉴욕이 아냐. 여긴 중국하고도 만주란 말이야. 도처에 전쟁이 끊일 날이 없고 도적떼가 제 멋대로 활개를 치고 있으며, 이 나라에는 여기 말고도 고아와 굶어죽는 아이들이 수도 없이 많아. 그건 당신도 보다시피 수녀도 마찬가지야.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그녀는 분노에 불타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 보다가 그의 팔을 뿌리치고는 차에서 내려섰다. 그녀는 추위와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 소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영어할 줄 모르니?" 그녀는 조심스럽게 발음을 했지만 그 소녀는 그런 오드리를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갑자기 다시 성당 쪽을 가리키며 미친 듯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난 알아요. 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다 알고 있어요." 제기랄, 어떻게 하면 이 소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그러다가 갑자기 그녀는 그 수녀들이 프랑스인이었다는 운전사의 말이 생각났다. "불어는 할 수 있니?" 그녀는 다시 불어로 물어보았다. 그녀는 학교에 다닐 때 불어를 조금 배웠었는데, 안티베스에 있는 동안 아주 능숙하게 불어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소녀는 여전히 성당 쪽을 가리키며, 더듬거리는 불어로 대답했다. 오드리는 그녀를 따라 성당 쪽으로 가면서 이제 자기가 도와줄 데니 걱정하지 말라고 소녀를 안심시켰지만, 막상 그들이 성당 안으로 들어섰을 때 까무러칠 만큼 놀라 버린 것은 오히려 그녀 자신이였다. 두 명의 수녀가 옷이 온통 다 찢겨진 채 누워 있었다. 도적들은 그녀들에게 욕까지 보인 후 무참히 살해한 것이 틀림없었다. 오드리는 그때 까지도 흥건히 피가 고여 있는 그 참혹한 광경에 정신이 희미해졌으나, 어느새 뒤따라온 찰스가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찰스의 얼굴 역시 핏기가 가신 창백한 모습이었으며,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찰스가 오드리와 그 소녀를 건물 밖으로 밀어냈다. "나가 있어요. 내가 가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 볼 테니까." 오드리가 재빨리 소녀의 팔을 붙잡고 등을 떼밀어 밖으로 데리고 나오려 했지만, 오히려 그 소녀가 오드리의 팔을 이끌고 다른 건물 쪽으로 데리고 갔다. 오드리는 그곳에서 아까보다 더 놀라운 광경을 보고 말았다. 그 건물의 문이 열리는 순간, 예쁘장한 중국 꼬마들의 얼굴이 일제히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개중에는 자그마한 소리로 흐느끼고 있는 아이도 있었지만 대부분 무척이나 불안하고 두려운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 너댓 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고, 예닐곱 살 되어 보이는 아이도 몇몇 있었으며, 아직 걸음마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갓난아이도 대여섯 명이나 끼어 있었다. 오드리는 이제 이 아이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14살짜리 소녀와 그녀의 동생이 그들 모두를 보샅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젠 수녀가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고,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마을에서 온 감리교 목사 한사람 밖에 없었지만, 그 목사마저도 몇 주일동안 먼 시골로 떠나 버렸던 것이었다. 오드리는 그 14살짜리 소녀에게 누구를 불러다 주면 좋겠느냐고 물어 보았지만, 소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역시 더듬거리는 불어로 그럴만한 사람이 없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 있겠지."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덧 20년 동안 할아버지의 집안 살림을 꾸려 온 사람의 목소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새로 올 수녀는 다음 달에야 도착할 것이라는 "11월, 11월...." 이라는 대답만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럼 그때까진 어떻게 할 거니?" 소녀는 빈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돌아서서 아이들을 보살피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 아이들이 뭔가 먹기나 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수녀들이 언제 살해되었는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었고, 두 명의 아이 말고는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 먹을 수 있을 만한 아이가 하나도 없을 것 같아 보였던 것이다. 오드리는 예상대로 그들이 그 전날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대답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배가 고프다고 칭얼대는 아이가 하나도 없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부엌이 어디니?" 소녀를 따라가니 조그만 부엌 하나가 나타났다. 몹시 낡고 초라한 부엌이었지만, 우유를 줄 수 있는 소 두 마리와 염소 한마리, 수많은 닭들이 있었고, 쌀과 말려 놓은 과일들도 꽤 많이 저장되어 있었다. 약간의 고기도 준비되어 있었고, 수녀들이 지난 가을에 만들어 놓은 듯한 통조림도 제법 있었다. 오드리는 되도록 빨리 계란을 풀고 빵을 구워 아이들에게 나눠 주었고, 치츠와 말린 살구를 찾아내어 아이들에게 먹였다. 아이들로서는 실로 오랜만에 먹어보는 푸짐한 식사였으며, 우유를 따라 주는 오드리의 모습을 모두들 커다란 눈망울로 우두커니 지켜 보고 있었다. 오드리는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제일 나이가 많은 두 소녀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너무나 커다란 충격을 받은 탓인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드리가 그들을 달래서 음식을 먹게 하자 그들은 머뭇거리며 조금씩 먹기 시작하면서, 둘이서 뭐라고 소곤대며 오드리를 바라보곤 했다. 그녀가 부엌을 청소하고 있을 때 찰스가 들어왔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창백했으며 바지와 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 "시체는 자루에 헛간 속에 던져 놓았소. 운전사가 경찰을 불러오겠다고 했으니 그들이 오면 시체는 치워 가겠지. 돌아가는 길에 하르삔에서 프랑스 영사와 어떻게 연락을 취해봅시다." 그는 몹시 지친 표정이었고, 오드리가 그에게 빵과 치즈를 말없이 건네 주었다. 그녀는 그를 위해 차도 한잔 끓이고 있었지만 그는 차보다도 독한 술을 원했다. 하다못해 브랜디라도 좋았겠지만 거기에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이들을 보살필 사람이 빨리 와야 할 텐데...." "지금은 아무도 그럴 사람이 없어요. 찰스, 두 명의 다른 수녀는 11월에나 도착할 거구요." 찰스는 가장 나이가 않은 두 명의 소녀를 가리키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당분간은 얘들이 아이들을 보살필 수 있겠지." "농담하시는거예요? 저 애는 이제 겨우 14살이고 한 아이는 11살 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들이 어떻게 19명의 아이들을 돌볼 수 있단 말이에요? 그들은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었어요." 찰스는 갑자기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요. 오드리?" 지지 않고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오드리의 눈매엔 이미 야무진 결의가 번득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와서 저 아이들을 보살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나도 그건 알고 있소.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지. 하지만 그 동안은 어쩔 작정이오." ''당신이 마을로 내려가서 영사를 만나보고 누군가를 보내달라고 얘기하세요." 그녀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지만 찰스는 그녀의 그런 목소리가 싫었다. 그녀가 어떻게 하려는 지를 분명히 짐작할 수 있었고, 그는 그녀의 그런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금방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내가 영사를 만나는 동안 당신은 어디에 있을려고?" ''여기서 아이들과 함께 있겠어요. 이 아이들을 이대로 내버려두고 떠날 수는 없잖아요. 찰스. 결코 그럴 순 없어요. 아이들을 한번 보세요. 두어 살 밖에 되지 않은 아기들이 대부분이란 말이에요."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거요. 오드리." 그는 들고 있던 접시를 내던지며 벌떡 일어났다. "당신,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이것봐요. 여긴 사방이 난리통이야. 일본군들이 진을 치고 있고 공산주의자들이 도처에서 날뛰고 있어. 당신은 미국인이고 나는 영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여기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은 아무것도 없잖아. 설사 프랑스 수녀가 도적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것이 사실이라해도 따지고 보면 그건 분명히 우리들 문제는 아니란 말이야. 역시 우린 애초부터 여기에 오는 것이 아니었어. 당신이 조금만 더 이성적으로 판단했더라면 우린 아마 지금쯤 상하이에 있을 거고 내일 아침이면 런던으로 떠날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찰스, 어쨌건 우린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좋건 싫건 하르삔이고, 돌봐 졸 사람이라곤 단 한 사람도 없는 21명의 고아들이 이곳에 있단 말이에요. 난 누군가가 나타나기 전까진 이곳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그냥 가버린다면 아이들은 모두 죽고 말거예요. 찰스, 그들은 먹을 것도 제대로 찾아 먹지 못하는 아기들이란 말이에요." "도대체 누가 당신에게 그런 사명을 주었단 말이오?" "누구냐구요? 그건 나도 몰라요. 세상에! 나더러 어떡하란 말이죠? 그냥 차로 되돌아가 그들은 깨끗이 잊어버릴까요?" ''그럴 수도 있어. 아까도 말했지만 중국에는 하루에도 굶어죽는 아이들이 수도 없이 많아, 인도에서, 티벳에서, 페르시아에서도 모두 인간이 파리 목숨처럼 죽어 나자빠지고 있단 말이오. 그런데 당신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그들을 모두 구해낼 수 있을 것 같은가?" ''물론 그럴 수는 없겠죠." 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에게 대들었다. 사실 그녀는 지난 며칠 동안 그런 아이들을 수도 없이 목격해 왔고, 그럴 때마다 찢어지도록 가슴이 아팠다. 오드리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그녀는 결코 그 아이들에게 등을 돌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누군가가 도착할 때 까지 만이라도 그들을 보살펴 주어야만 했다. 찰스로서는 그녀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셈이었으며, 그것이 오히려 그를 더욱 괴롭혔다. ''난 누군가가 올 때까지 여기 있겠어요. 당신은 하르삔으로 가서 영사를 만나 얘기를 하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그가 하르삔으로 간 동안 오드리는 졸려하는 애들을 재우고 배고파하는 아이들에게는 먹을 것을 더 가져다 주었으며 부엌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는 두 명의 꼬마들이 우유를 짜는 것을 지켜 보았다. 모든 것이 그런대로 잘 질서가 잡혀 있었다. 찰스가 6 시 경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몹시 반가왔으나, 차에서 내리는 그의 표정이 그리 밝지 못한 것을 보고 영사가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집안으로 들어와서는 거칠게 문을 닫더니 입을 꼭 다물고 오드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떻게 되었어요?" 그는 이미 그녀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오후 내내 난데없이 시체를 치우질 않나, 그 빌어먹을 놈의 영사라는 작자와 입씨름을 벌여야 하지 않나, 도대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작자는 가톨릭 교단 일에 자기네가 참여할 수는 없으며, 죽은 수녀들에 대해서도 책임질 수 없다고 딱 잡아떼더군. 내일이나 모레 쯤 시체를 치울 사람은 보내 주겠지만 고아들은 책임을 질 수가 없다더군. 그는 고아원을 해산시키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눈치였어." "해산이라구요?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들을 눈속으로 쫓아내서 굶겨 죽이라는 건가요?" 그녀가 찰스에게 그처럼 화를 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야?" "찰스,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해도 난 저 아이들을 내버려두고 떠날 수는 없어요." ''왜 그럴 수 없다는 거지?" 그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고함을 질러댔다. "당신은 떠나야 해, 오드리. 떠나야 한다구! 우린 집으로 돌아가야만 해. 난 기사를 써야하고, 당신은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잖아. 21명이나 되는 고아들을 데리고 하르삔에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빌어 먹을..." 그가 너무나 흥분해 있었기 때문에 오드리는 그날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키스를 했다. 순식간에 그녀의 분노가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그가 미운 것이 아니라 텅빈 고아원에 남은 21명의 고아가 불쌍했던 것 뿐이었다. "난 당신을 사랑해요. 찰스. 그리고 나 역시 이런 일에 말려들게 된 것이 그렇게 기쁘진 않아요. 하지만 그냥 못 본 체 떠나 버릴 수는 없잖아요. 우린 이 아이들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해요. 호텔 주인 아저씨에게 혹시 저 아이들을 보살펴 줄 사람이 없을지 물어보면 어떨까요?" 하지만, 그건 보나마나 별 희망이 없는 생각이었다. 그들이 말다툼을 벌이는 동안 아이들이 다가와서 그들을 말똥말똥 올려다보고 있었다. 찰스는 그녀가 그렇게 고집이 센 여자인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전혀 새로운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그럼 오늘밤을 여기서 지내자는 얘기요?" 그는 몹시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알 길이 없었으며, 프랑스 영사와의 논쟁에서도 결국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던 것이다. "왜 그런 것을 물어보나요. 찰스?" "내게 한가지 생각이 있어. 아이들을 맡길 만한 다른 교회를 찾아보는 거야. 하르삔에는 틀림없이 그런 교회가 있을 거야." 찰스는 어떻게 해서라도 상하이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는 그곳에 온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지만, 오드리는 다행히도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좋은 생각이군요. 찰스. 당신이 다녀오세요. 난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요. 당신이 누구를 데리고 온다면 우리도 떠날 수 있을 거예요. 아이들을 택시에 태워서 다른 교회로 데려다 줄 수도 있을 거구요." 이제, 그들이 그곳을 떠날수 있을지 없을지는 찰스가 21명의 고아를 기꺼이 받아 줄 교회를 찾아내는가 못 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필라델피아라면 또 몰라도 하르삔에서 그런 교회를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찰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하르삔으로 오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자신을 저주하며 뜨거운 차를 한 잔 마시고는 거리를 헤매어 볼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찰스가 나가 있는 동안 오드리는 아기들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밥을 지어 저녁을 차려 주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바로 하루 전에 그런 끔찍한 사고가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 사이에서 그리 큰 혼란스러움은 없었다. 나이가 많은 두 명의 소녀는 놀랍게도 아주 훌륭하게 아이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링훼이라는 가장 나이가 많은 그 소녀는 오드리에게 서툰 불어로 전날 밤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도적들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들도 수시로 산에서 내려와 성당에 숨으려고 했으며, 2년 전에 일본군이 쳐들어 왔을 때는 만주인들도 성당 안에서 난리를 피하곤 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물론 도적떼가 출몰하여 양민을 학살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링훼이가 계속해서 일본인이 자신의 부모와 3명의 동생들을 살해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녀의 동생 신유와 그녀가 가족 가운데서 살아 남은 전부였으며, 마침 수녀들이 그들을 이곳으로 데려와 키워 주었다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한 해 전에 그곳을 휩쓴 콜레라로 부모를 잃은 어린 고아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고아들이 리용이나 벨지움의 다른 고아원으로 옮겨갔고, 중국 남부에도 그 수녀들과 연결된 고아원이 있었지만 링훼이와 신유는 끝까지 하르삔을 떠나고 싶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애들이 많은 도움이 되니까 수녀들도 그냥 있도록 내버려 두었던 모양이었다. "혹시 하르삔에 그 수녀들의 친구가 있는 성당이 없을까?" 오드리가 한가닥 기대를 걸고 물어 보았지만, 링훼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르삔에는 수녀라고는 그녀들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마을에 있는 대부분의 교회는 아주 늙은 사람들이 운영하는 러시아 정교 교회라는 링훼이의 설명을 듣고 오드리는 찰스가 어떤 결과를 가지고 돌아오게 될지 대강 짐작할 수가 있었다. 역시 오드리의 추측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그날 밤 늦게 아이들이 모두 잠자리에 들고 난 다음에서야 지친 얼굴로 돌아온 찰스는 낙심한 눈초리로 오드리를 바라보았다. "아무 데도 없어, 오드리. 마을에 있는 교회란 교회는 다 찾아가 보았는데 말야. 심지어 우리가 머물렀던 여인숙 주인에게도 물어보았지. 그 수녀들은 여기서 바깥 세상과는 완전히 고립된 생활을 했었나봐. 아무도 무거운 짐을 떠맡으려 하지 않더군. 먹을 것도 귀한 데다가 사람들은 일본인과 공산주의자들을 무척이나 두려워하고 있어. 그저 자신의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살아가자는 생각들이지. 아이들을 돌보러 오거나 데려갈 사람은 아무도 없어. 온 동네를 다뒤져 봐도 말이야. 러시아 목사 한 사람은 아이들을 그냥 두고 가버리라고 하더군. 그들 스스로 살아갈 방도를 찾아나갈 거라고 말이지." 찰스는 오드리를 바라보며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그는 이제 어떻게 하면 그녀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인지가 그렇게 고민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 목사는 중국 땅에는 그렇게 내버려진 고아가 많이 있지만, 그들이 엄청난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이야기하더군." 그렇게 말하는 자신도 그건 무척이나 잔인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거리에는 내버려진 고아들이 지천이었다. 하지만 역시 오드리의 눈빛이 매섭게 번득이며 그를 쏘아보았다. "그래서 어떡하자는 거죠? 눈 속으로 내쫓아 버릴까요? 2살짜리 아기가 구걸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가요?" 비록 찰스 자신도 서너 살 밖에 안된 아이들이 구걸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으나, 그는 더 이상 그런 것들은 생각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오로지 이 얼어붙은 땅에 자신을 묶어 두고자 하는 운명의 줄을 어떻게든 끊어 버리고 싶을 따름이었다. 게다가 그는 그날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를 못해 더더욱 슬픈 표정으로 오드리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오드리." 그는 나무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처량하게 한숨을 내쉬었고, 오드리도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어 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었다. "애써 줘서 고마와요. 찰스." 정말로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의 모든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상하이로 가서 그들을 맡아 줄 사람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그랬다가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그땐 또 어떡할려고? 거리엔 버려진 고아들로 가득 차 있는걸. 당신도 직접 눈으로 보았잖아. 어차피 거기까지 가서 그들을 버리는 거나 여기서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겠어? 거긴 여기처럼 춥지는 않겠지만. 하지만 여기엔 그래도 머무를 집이 있고, 당분간은 음식도 충분하고, 또 그들에게 낮익은 곳이잖아?" 그외에도 21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1천 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기차로 여행한다는 것 자체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누가 누구와 함께 어디로 간다는 사실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신경을 쓴다면 왜 아이들을 보살펴 주지는 않죠?" 하지만 오드리는 곧 링훼이의 가족들을 일본인들이 어떻게 했는지를 기억해 내고는 온몸에 힘이 쫙 빠져버렸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아이들을 모두 죽여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녀도 그런 생각에 어찌 할 바를 몰라 찰스 옆에 주저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수녀들이 속해 있던 교단의 본부에 전보를 쳐보면 어떨까요? 어쩌면 누군가를 보내 줄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들이 빠른 시일 내 답장을 보내 준다는 보장만 되면 한 번 시도해 봄직한 일이겠군. 최소한 여기서 가까운 곳에 있는 누군가를 보내 줄 수도 있을 데니까 말이오." 다시 그의 눈에서 희망의 빚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에 역으로 가서 전보를 한번 보내 봅시다." 그들은 죽은 수녀들이 쓰던 조그만 침실의 책상서랍 속에서 어렵지 않게 리용에 있는 교단본부의 주소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곳은 성 미카엘 수도원이라는 곳이었고 주소와 함께 전화번호까지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잘 들리지도 않는 전화를 이용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전보 쪽이 더 효과적일 거라고 결정을 내리고 밤 늦게까지 촛불을 켜놓고 전보문을 작성했다. 그런 다음에서야 그들은 수녀들이 쓰던 좁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추위에 몸을 떨며 잠을 청했다. 물론 찰스는 그들의 문제가 조속히 해결되기를 기도했다. 다음날, 찰스는 오드리와 링훼이에 의해 힘들게 불어로 번역된 전보를 가지고 역으로 갔다. 비록 그렇게 훌륭한 문장은 되지 못했지만 꼭 필요한 이야기는 모두 씌어진 것이었다. 성 미카엘 수녀원 앞 유감스럽게도 중국 하르삔의 고아원에 있던 두명의 수녀가 도적들에 의해 피살됨. 고아원에 남은 24명의 고아들을 위한 즉각적인 구호가 필요함. 찰스는 자기가 누구라는 것도 설명하지 않고 하르삔 전신국의 이름과 함께 파커스코트라고만 서명을 했다. 그들은 이틀 동안 답신을 기다렸다. 그동안 오드리는 정성스럽게 아이들을 보살폈으며, 찰스는 초조한 듯 부엌 안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그는 답신이 올지 안 올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고, 만약 그 다음날까지 답신이 오지 않으면 오드리를 강제로 끌고서라도 역으로 데려갈 작정이었다. 마침내 답장이 오긴 했으나 그건 아무런 실질적인 도움도 줄 수 없는 내용일 뿐이었다. 찰스가 그 답장을 가지고 와서 오드리에게 보여 주었다. 당연히 그의 표정은 굳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찰스는 그 답신을 읽고는 절망에 빠져 주먹으로 벽을 두들겼다. 그도 그 정도의 불어는 해독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전보의 내용은, 일본에 있는 수녀들은 전염병에 걸려 움직일 수가 없었고, 성 미카엘 수녀원 소속의 다른 중국 고아원은 지난 6월 이후로 모두 폐쇄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월말에 사람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아직 그때까진 많은 시간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신의 은총이 깃들기를 기원한다고 덧붙였을 뿐이었다. 그는 다음날이라도 당장 오드리를 데리고 하르삔을 떠나고 싶었으나 무작정 그럴 수 만도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하죠. 찰스?" 그녀의 눈엔 근심이 가득했다. 그는 대답을 하기 전에 한숨부터 내쉬었다. 어차피 또다시 오드리와 격렬한 논쟁을 벌여야 하리라는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드리, 포기해!" 역시 그녀의 눈꼬리가 매섭게 치켜 올라갔지만, 그건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반응이었다. "무슨 의미죠?" "좋건 싫건 이젠 떠나야 한다는 말이야, 오드리. 아이들은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어. 당분간은 먹을 것도 충분히 있고, 반드시 누군가가 그들을 돕겠다고 나설 거야. 다른 수녀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한 달만 견디면 문제는 다 해결될 것 아냐" "만약, 수녀들의 도착이 늦어지면 어떻게 하죠? 아예 오지 않을 경우에는요? 다른 아이들처럼 길거리를 헤매다 죽어야 하나요?" "그렇게 되진 않을 거야!" 오드리는 턱을 앞으로 내밀고 자신있게 말했다. "나도 떠나지 않을거예요." 찰스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며칠 동안 그는 완전히 지쳐버린 것이다. "좀더 냉정하게 생각해 봐, 오드리. 우린 돌아가야 하잖아, 영원히 여기 묶여 빈들거릴 수는 없잖아?" "빈들거리자는 게 아니에요. 불쌍한 아이들을 보살피자는 것 뿐이라구요." "내가 말을 잘못했어, 미안해." 찰스의 목에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돌아가야해." "우리가 아니에요. 정 그렇다면 당신 혼자 가세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 오드리 드리스콜!" 그는 벌떡 일어 나 그녀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소리쳤다. "당신은 나와 함께 여기에 온 거라구." "난 아이들 곁을 떠나지 않아요." ''나이가 든 아이들이 나머지를 돌볼 수 있잖아." 그는 오드리의 무섭게 일그러진 표정에 기가 질려 겨우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옹고집에는 정말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일본인들이 점령하고 있는 만주 땅에 그녀를 홀로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두 명의 프랑스 수녀에게 일어났던 일을 생각만해도 온몸이 떨려왔던 것이다. "내 몸은 나 스스로 지킬 수 있어요." "그래? 언제부터 그랬지?" "난 항상 그래 왔어요. 난 내가 11살 나던 해부터 혼자 힘으로 자신을 지탱해왔어요. 찰스." "당신 미쳤어? 당신은 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미국의 도시에서, 그것도 부유한 할아버지의 집에서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살아왔어. 도대체 어떻게 공산주의자와 잔인한 일본인, 도적떼들이 들끓는 만주벌판에서 혼자 살아갈 수 있단 말이지? 당신이 죽건 살건 눈 하나 깜짝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찰스는 오드리의 터무니없는 생각에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상황을 감히 상상도 해본 적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모험심과 아버지가 물려준 그 사진 앨범들만 없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진 속에나 나오는 일이 아니라 엄연한 눈앞의 현실이었다. 그 수녀들은 머리가 잘려진 채 처참한 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오드리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지 말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오드리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아이들에 대한 생각밖에는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찰스에게로 돌아왔다. "어떻게 당신은 우리가 떠나가도 저 아이들이 생명을 유지할 거라고 생각할 수가 있죠" 오드리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녀는 이미 지난 며칠 동안에 아이들과 정이 들어 버렸던 것이다. 그들 가운데 두 아이는 서로 오드리의 무릎 위에 앉으려고 싸웠으며, 또 한 아이는 찰스와 링훼이가 그렇게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밤새도록 오드리의 침대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링훼이와 그녀의 동생 신유 또한 무척이나 다정하고 정이 끌리는 아이들이었다. 어떻게 이런 아이들을 외면하고 훌쩍 떠나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오드리, 나도 저 아이들을 내버려 두고 떠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우리는 떠나야 해. 생각해 봐, 온 나라에 슬픔과 배고픔과 집없는 아이들이 가득하다구. 그들을 모두 돌봐 줄 수는 없잖아?" 하지만 여기서는 사정이 달랐다. 최소한 오드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비록 이름은 다 외우지 못할지라도 그 아이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동생 아나벨을 하와이에서 버릴 수 없었듯이 그 아이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지난 몇 달 동안을 빼고는 13년 동안이나 아나벨을 품에 안고 길러왔던 것이다. "난 이 아이들 곁을 떠날 수 없어요. 찰스. 설사 수녀들이 오지 않아 한 달을 여기서 더 머무르게 될지라도 말이에요." 오드리의 침착한 말에 찰스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녀의 눈 속에는 진실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린아이도 아니었다. 아무데나 데리고 갈 수 있고 시키는 대로 따라하는 철없는 소녀도 아니었다.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의 성숙한 여인인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그를 두렵게 했다. 그녀가 굳이 중국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한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만 할 것인가? "반년이 지나도 그들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오드리? 그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잖아. 이곳의 열악한 정치적 조건들 때문에 그들이 아예 이 고아원을 포기해 버린다면, 당신은 여기서 몇 년을 더 묶여 있어야 할지 모르는 일이야." 그것은 오드리에게도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굳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그들의 조그만 얼굴과 귀여운 손을 뿌리치고 떠날 수는 없을 것이다. "난 내가 그런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은가요?" 그녀는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다소 과장된 어투로 말했지만, 찰스는 무언가 그들 사이를 갈라 놓는 운명의 장난이 조금씩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드리, 제발...." 그가 그녀를 품에 꼭 껴안았을 때, 그는 그녀가 떨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녀가 그곳에 혼자 남게 된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신까지 한달, 혹은 두달, 혹은 1년이 될지도 모르는 세월을 거기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찰스는 다음 몇 주 내에는 반드시 런던에 도착해야만 했다. 그는 이미 출발이 늦어진 것에 대해 몹시 초조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찌기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빠져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녀를 혼자 내버려 두고는 한 발짝도 그곳을 떠날 수 없었으며, 또한 그녀와 함께 그곳에 머무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자기 대신 그녀를 보낼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그 점을 그녀에게 집중적으로 설명하고자 했으며, 그녀도 그러한 그의 갈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벌써 떠났어야 했어, 오드리. 내 일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야. 당신도 역시 떠나지 않으면 안돼. 당신이 그렇게 입버릇처럼 얘기하던 책임감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지?" "지금 당장은 이것이 더 중요한 일이에요." 그러한 그녀의 말투가 다시 한번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녀는 왜 자신을 떠날 준비는 되어 있으면서도 아이들을 떠날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단 말인가.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는 슬픈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그런 것은 염두에도 두고 있지 않은 것 같군." "결코 그렇진 않아요." 그녀 또한 그의 말에 가슴이 아파왔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도 잘 알잖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가 천천히 다시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우린 서로에게 보다 솔직해져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우린 언젠가는 서로 헤어지고 말 거예요. 그리고 만약 당신이 여기서 나와 함께 머무를 수 없다면, 그 언젠가는 바로 지금이에요. 내가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 밖에 없어요. 내가 예전에 아나벨을 떠날 수 없었듯이, 그리고 당신이 손의 곁을 떠날 수 없었듯이 나도 지금 이 아이들 곁을 떠날 수는 없어요." 동생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완전히 할말을 잃고 말았다. 그녀의 입에서 그가 그렇게 사랑하던 동생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그가 몹시 아파한다는 것을 오드리는 알 수 있었다. "미안해요. 찰스.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려는 생각은 아니었어요. 단지..." 오드리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 보았다. ''지금 우리가 헤어진다는 것이 결코 우리의 사랑을 변화시키지는 못할 거예요. 다만 내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잠시 여기 머무른다는 것 밖에는 별 차이가 없지 않겠어요?" 그녀는 베니스나 이스탄불에서 그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결코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것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일종의 시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지금 당신과 결혼하겠다면 어떻게 하겠어, 오드리?" 그녀가 그 말에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니, 그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요?" 그녀는 몹시 당혹스러웠다. "그렇게 해서 당신과 함께 이곳을 떠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녀는 매우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이 결혼의 조건이 될 수는 없어요. 찰스."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하지만 그리고 나선 어떻게 하죠? 난 할아버지의 곁에서도 당분간은 떠날 수 없어요." ''지금의 당신은 전혀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데....."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이렇게 괴로운 순간은 처음이었다. "여긴 잠시 동안만 머무를 뿐이에요. 어차피 난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해요. 당신이 아예 샌프란시스코로 이사 오는 것을 신중하게 생각해 보세요." 그는 한숨을 내쉬며 잠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마침내 고개를 돌고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당신도 알다시피 난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내가 하는 일은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난 1년 가운데 10개월은 온 세상을 돌아다녀야만 해. 물론 당신이 나와 함께 다닐 수 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이상 우리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을 거야, 그렇지?" 하지만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너무나도 뜨겁게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데 있었다. 바로 지금이 그들의 관계에 있어 닥쳐 온 최초의 시련이었고, 그것은 결코 극복되어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다음 질문을 던지는 그녀의 목소리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내가 여기 머무른다 해도 나를 용서해 줄 수 있겠어요?" "그보다도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 것인가가 더 커다란 문제야. 난 당신을 혼자 이 만주 벌판에 내버려 둘 순 없어. 오드리. 난 결코 그럴 수 없어!" 그는 주먹으로 자신의 다른 한 손을 내리치며 말했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겠어? 난 당신을 사랑해. 결코 여기 혼자 내버려 둘 순 없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곳에 눌러앉을 수도 역시 없어. 나를 얽어 매고 있는 계약은 내게는 너무도 중요하단 말이야!" "이건 역시 아이들에게도 심각한 문제예요. 찰스. 우린 지금 그들의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다시 도적떼들이 몰려와서 저 아이들을 죽여 버리면 어떡하죠?" ''도적들은 고아를 죽이진 않을 거야." 하지만 그들은 최소한 중국에서는 결코 그렇게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그들을 해칠 수도 있어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알겠어요? 당신이 머무를 수 없다면 내 곁을 떠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이 처한 현실이에요. 하지만 찰스, 당신은 이것이 나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 하시겠어요? 난 성숙한 여인이에요. 내겐 스스로의 일을 판단할 능력과 권리까지도 있어요. 내가 베니스에서 혹은 이스탄불에서 당신을 따라 기차를 탔을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에요. 이번 역시 내 스스로 내린 결정일 뿐이에요. 난 나의 운명을 따르겠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로부터 등을 돌렸다. "난 단지....." 그녀는 마침내 복받쳐 오르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단지 내 운명이 당신과 같아지기를 원할 뿐이에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오드리의 눈에는 도저히 인간의 눈이라고 생각되어지지 않을 만큼 커다란 슬픔이 고여 있었다. "당신은 여기서 내 곁을 떠나야 해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말이에요." 하지만 찰스에게 가장 커다란 충격을 준 말은 바로 다음에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만약 이 아이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우리들의 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누군가가 우리 아이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면 말이에요." 그녀의 몸속에 이미 그들의 아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들을 한층 더 단단히 얽어 매었다. "당신이 만약 우리의 아기를 가졌다면, 결코 당신이 내 눈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머무르지 못하게 할 거야." 그의 말에 그녀는 뜻모를 미소를 살짝 머금었고, 그러자 그는 더욱 더 초조해져서 물었다. "언제 그럴 기회가 있기나 했던 거요?" 그는 이스탄불에서부터 거의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었지만 그녀는 항상 자신의 가임기와 불임기를 염두에 두고 있었고, 가임기라고 생각이 될 때는 결코 그와 몸을 섞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었다. 그들 둘 다 예기치 않는 아기가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투에서 그럴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진 않을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답했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 이 아이들이 꼭 우리들의 아이인 것만 같이 생각되곤 해요. 그래도 당신은 날더러 그들을 버리라고 얘기할 수 있겠어요?" 그는 그녀가 얼마나 이상주의적인가를 생각하며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동양이라는 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여긴 중국이야, 오드리. 이 아이들의 대부분은 아마도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거나 아니면 쌀 한 자루와 바꿔졌을 거야." 그런 생각들이 다시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으며, 그녀는 마치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억지로라도 부정하려는 듯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두번 다시 그들에게 그런 일이 생기게 할 순 없어요." "나 또한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어. 이제 우린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 "당신은 런던으로 돌아가세요. 찰스. 이런 상황이 생기기 전에 계획했던 것처럼 말이에요. 난 수녀들이 도착할 때까지만 여기 남아 있겠어요. 그 다음에는 상하이나 요꼬하마를 거쳐서 집으로 돌아가야죠. 그리고 운이 따른다면, 내가 집에 도착할 즈음에 당신이 잠시 샌프란시스코를 다녀갈 수도 있지 않겠어요." "무척 쉽게 쉽게 얘기하는군. 당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지?" 생각만 해도 그로서는 끔찍한 일이었다. "아무일도 없을 거예요. 하느님이 보살펴 주실 테니까요." 그녀가 그에게 종교적인 냄새가 풍기는 이야기를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자신도 누군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단 한 번 있었다. 그것은 그렇게도 그가 사랑하던 동생, 존에게 였다. 하지만.... ''그 하느님을 얼마나 믿어도 될지 모르겠군." "믿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무척 침착했다. "가족들은 어떡할 거야? 그들을 위해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지 않소?" 그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그녀를 설득해 보려 했지만 효과를 나타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운만 따라 준다면 연말 쯤에는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수녀들이 예정대로 11월에 도착하면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보낼 수도 있어요." "당신 정말 미쳤군. 당신의 생각들은 하나같이 너무도 비현실적이야. 여긴 뉴욕이 아니라 중국이란 말이야. 계획대로 진행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곳이란 말이야. 아까도 말했지만, 그 수녀들이 오는데 몇 달이 걸릴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구!" "그래도 할 수 없잖아요. 찰스." 그녀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이제 그와 입씨름하는 것도 완전히 지쳐 버린 상태였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찰스의 품에 안겨 그만 엉엉 울어 버리고 말았다. "오드리, 제발 난 당신을 사랑해." 그건 조금도 거짓말이 아니었지만, 그는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일과 책임을 위해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오드리, 제발. 다시 한번 생각해 봐. 나와 함께 돌아가...." ''그럴 순 없어요." 그녀는 퉁퉁 부어 오른 눈으로 찰스를 바라 보았고 그는 그런 그녀의 눈빛에서 흔들리지 않는 결심을 볼 수 있었다. "정말이야, 오드리 ?" 물론 그녀는 진심이었다. 그녀의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찰스는 꼬박 일주일 동안을 그곳에 머무르며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오드리를 설득해 보았지만 결국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돌보는 데 온 정성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링훼이와 신유는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찰스에게도 갓난아기들을 맡겨 놓고 자신은 우유를 짜거나 아이들의 식사를 준비하기도 했으며, 털장화와 염소가죽 모자를 쓰고 아이들과 함께 산책을 다녀오기도 했다. 수녀들은 아이들의 장갑까지 손수 짜 주었던 모양이다. 찰스는 그러한 오드리에게서 지극히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가 그녀를 만난 이후로 그녀가 그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돌보는 데 금방 익숙해졌으며, 그런 책임감을 조금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그는 그런 그녀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사실, 그는 그녀의 모든 면을 사랑하고 있었으며, 마침내 그녀를 떠나야 할 그날이 다가오는 것이 그렇게 두려울 수가 없었다. 그들이 함께 보낸 마지막 밤은 그들 둘 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날 밤이 새도록 뜨겁게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고, 마침내 차가운 아침 공기가 서서히 작은 방으로 밀려올 즈음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그는 결코 그녀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고, 그녀 또한 결코 혼자 남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그들에게는 제각기 하지 않으면 안 될 일들이 주어져 있었다. 찰스는 자신의 원고를 완성해 내기 위해 그곳을 떠나야 했고, 그녀는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그곳에 남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그 둘 모두에게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입히는 결정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리고 제각기 마음속으로 갈등과 후회를 한번쯤 느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둘 다 스스로의 결정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기보다는 차라리 슬픔이었다. 드디어 그날 아침, 오드리는 링훼이에게 잠시 아이들을 맡겨 놓고 찰스와 함께 역으로 나갔다. 그녀는 뻬이징에서 그와 함께 산 우스광스러운 옷을 입고 말없이 그의 곁에 서 있었으며 그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그런 그녀를 지켜 보고있었다. 마침내 기차가 천천히 역 구내로 들어왔을 때 그는 너무나도 목이 메여 말을 할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 기차는 그를 태우고 뻬이징을 향해 달릴 것이고, 그는 칭타오를 거쳐 상하이에 도착하면 그 즉시 서구를 향한 기나긴 여행길을 떠나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것 까지는 생각조차 할 여유가 없었으므로 단지 마지막 키스를 나눌 때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홀리는 그녀의 숨결이 얼굴에 와 닿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끝내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들이 서로 헤어진다는 사실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도 그가 없는 생활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랑해요. 찰스. 언제까지라도 사랑할 거예요." 그녀는 엄청난 무게로 자신의 작은 몸을 눌러 오는 슬픔에 말문마저 막혀 버렸다.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 말은 그녀가 듣기에도 공허한, 결코 기약없는 약속이었다. 그는 마치 심장이 멈춰버릴 것만 같았다. 결코 그녀를 여기 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결코.... 무장한 일본군 경비병 두 사람이 역 구내를 순찰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오드리를 내려다 보았다. "정말 나와 함께 가지 않겠어, 오드리? 다음 차를 타면 될 텐데." 그러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다. 그가 떠나는 것을 보지 않기 위해 그녀는 두 눈을 감아 버렸다. 그녀는 언제, 또다시 그를 만날 수 있을지 알 길이 없었다. 어쩌면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그런 불길한 예감은 찰스 역시 느낄 수가 있었다. "바이올렛과 제임스를 만나면 안부나 전해 주세요." 하지만 그는 그녀의 부탁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목구멍에까지 슬픔이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그녀를 껴안아 줄 수 있을 뿐이었다. 역장이 뭐라고 시끄럽게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일지는 너무나도 분명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엄청난 공포와 함께 그들이 함께 했던 아름다운 날들의 추억이 어지럽게 맴돌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정말로 자기 곁을 떠나간다는 것이 아직까지도 믿어지지 않았으나,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녀는 아이들 곁을 결코 떠날 수가 없었고, 비톡 그에게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그들로 인하여 자신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가 주어질 것이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뭐라고 분명한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지만, 그녀는 결코 그곳을 박차고 나와 그냥 떠나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너무나도 어리고 무기력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머무르는 대가로 너무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사랑하던 한 남자를 포기해야만 했으며, 이제 그녀를 떼어놓고 서둘러 기차를 향해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녀의 심장을 갈래갈래 찢어 놓고 있었다. 찰스는 기차가 막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난간에 선 채로 그녀의 한쪽 팔을 붙잡고 있었다. 그는 나중 일이야 어떻게 되든 그녀를 기차 속으로 끌어당기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도 간절했지만, 그녀는 선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손을 흔들어 줄 뿐이었다. 그 역시 난간을 붙잡고 선 채 한쪽 팔을 천천히 그녀에게 흔들어 주며 자신의 뺨을 흥건히 적시는 눈물과 함께, 그렇게 그녀의 곁을 떠나갔다. 15 하르삔의 날씨는 갈수록 혹독해져 갔고, 마침내 우유나 물을 밖에 내놓을 수 조차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밖에 내놓기가 무섭게 얼어 버리는 바람에 녹이지 않고서는 도저히 마실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린애들도 밖에 나가 노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오드리는 오기로 되어 있는 수녀들이 나타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가운데 11월도 보내고 12월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녀는 그녀의 인생에서 이처럼 혹독하게 추웠던 적은 없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찰스의 말이 옳았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그녀가 미국에서 익숙해져 있었던 그러한 생활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시간 개념이 확실하지 않았다. 예정된 시간, 혹은 제 시간에 이루어지는 일은 한가지도 없었던 것이다. 일본인들이 몇 차례 찾아와서 그녀의 여권을 검사하면서 얼마나 오랫동안 머무를 것이냐고 물어 보았었다. 그럴 때마다 오드리는 '수녀들이 도착할 때까지'라고 항상 똑같은 대답을 늘어놓곤 했다. 일본인들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오드리를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았으나, 그들 중 한 명은 유별스럽게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면서 링훼이를 음흉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친구가 일본어로 투박하게 쏘아붙이자 그 역시 발길을 돌렸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일본인들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는데, 오드리가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자 링훼이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붉어졌다. 오드리가 온 이후로 줄곧 그녀는 풍성하고 모양 없는 옷을 입고 지내 왔었는데, 문득 그녀가 성숙해질 대로 성숙해져서 여자티가 난다는 생각이 오드리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12월달에 접어들자, 링훼이는 수치심으로 인해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인 채, 오드리에게 비밀을 지켜 달라고 당부하면서 모든 걸 털어 놓았다. 비밀이란 오래 갈 수 없는 일이었다. 링훼이는 그 일본인에게 6월달인가 3월달에, 몸을 허락했었다고 말했다. 이것은 2월이나 3월이면 아이가 태어난다는 뜻이기도 했는데, 오드리는 거기에 대해 생각만 해도 한숨부터 나왔다. 그때 쯤이면 수녀들이 도착해서 자신은 이곳에 없게 되기를 막연히 기대할 도리 밖에 없었다. 오드리는 찰스가 떠난 후 두 달 사이에 그에게 편지를 이미 여섯 통도 더 보냈으며, 할아버지에게도 장문의 편지를 보내서 이렇게 오랫동안 외지에 머물러 있는 걸 관대히 보아 달라고 간청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면서, 어찌되었거나 자신을 이곳에 올 수 있게 해준 할아버지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오드리는 그것이 자신의 영혼이 굶주린 것이 무엇이든 지간에 그걸 충족시켜 주었다고 확신했다. 오드리는 다시는 집에서 멀리 떠나 있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편지를 쓰고 있는 동안에도 찰스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언제 다시 함께 지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페르시아와 티벳과 중국의 황량한 대륙을 함께 횡단했던 그 세 달간의 밀접한 관계로는 되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한 시간은 두번 다시 오지 않으리라고 확신하면서, 오드리는 자신이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걸 감사했다. 어떤 면에서는 그녀의 행동이 쇼킹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만일 누군가가 그런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는 영원히 매장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브라운 부부만 입을 다물어 준다면 아무도 모를 것이기에 희망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오드리는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브라운 부부에 대해서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찰스 생각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들 두 사람이 한 일에 대해서 단 한 순간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까지 사랑했던 사람은 찰스밖에 없다고 확신했으며, 지금 이 순간은 아무리 난감하더라도 그들 두 사람이 다시 결합하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혹독한 만주의 겨울 날씨 속에서도, 오드리는 찰스에 대한 생각만 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오드리는 아직 까지도 찰스의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있었다. 오드리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가까와졌다는 사실을 불과 이틀 전에 깨닫고서 처음에는 큰 충격을 받았으나,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다함께 모여 앉아 어린이들에게 캐롤송을 불러 주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노래를 알고 있는 것은 링훼이와 신유 밖에 없었고 그들이 알고 있는 노래들 또한 대부분 불어 가사로 되어 있었으나,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노래를 불러 주자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오드리는 그날 밤에 어린이들 모두를 잠자리에 눠여 주고 나서 따뜻한 키스와 부드러운 손길로 편안히 잠들게 했다. 그들 중 몇명의 어린이가 몇 주일째 기침을 심하게 하고 있었는데, 오드리는 약이라고는 구경조차 할 수 없고 난방 또한 시원치가 않아서 보통 걱정되는 게 아니었다. 오드리는 심하게 기침하는 두 아이를 그날 밤 늦게 자신의 침대로 데리고 왔다. 그 아이들은 계속해서 기침을 했으나, 오드리는 자신의 체온으로나마 그들을 따뜻하게 해주려고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으며 아침 무렵에 이르러서는 그 중 한 어린이의 상태가 한결 나아졌다. 다른 어린이는 충혈된 눈에 얼굴색이 몹시 좋지 않았고, 링훼이가 말을 걸어도 입을 꼭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링훼이는 곧 달려와서 그런 사실을 알렸다. 오드리에게 "시화의 상태가 아주 나쁜 것 같아요. 의사를 불러 올까요?" "그래, 그게 좋겠다." 오드리는 항상 링훼이의 도움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링훼이 역시 아직까지는 어른이라고 할 수 없었으나, 그녀의 동생과 어린이들, 그리고 이제는 오드리까지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고 있는 것 같았다. 링훼이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오드리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유일한 보물을 선사했다. 그것은 그녀의 어머니가 물려준 것으로 곱게 수놓은 손수건이었는데, 오드리는 그 선물을 받는 순간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격하여 링훼이를 꼭 껴안았다. 오드리는 자신이 머물러 있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찌되었거나 이제는 모른척 하고 등을 돌릴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오드리는 이곳의 어린이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왔고, 도움의 손길이 올 때 까지는 죽든 살든 그들과 운명을 함께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오드리는 지금 그녀 자신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얼굴색마저 창백하게 변해 있는 시화의 안위에 대해서만 모든 신경을 쏟고 있었다. 시화는 너무 열이 많아서 오드리가 이름을 불러도 듣지 못할 정도였다. 오드리는 시화의 이마를 물수건으로 계속 닦아 주면서, 신유가 의사와 함께 돌아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가는 길에 넘어지면 산모와 태아에게 무슨 해가 생길 것 같아서 링훼이 대신 신유를 보낸 것이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신유가 돌아왔는데, 이상하게 생긴 모자를 쓰고 수염을 길게 기른 조그마한 체구의 노인이 그녀와 동행하고 있었다. 노인은 오드리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투리로 말을 했는데, 신유와 링훼이는 감히 정면으로 그를 쳐다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계속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오드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고 물어 보자 두 사람 모두 울음을 터뜨렸다. "의원님 말씀으로는 시화가 오늘을 넘기지 못할 거래요." 그 정도는 오드리 자신이 봐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노인네가 의사로 통한다는 사실에 크게 격분했다. 오드리는 읍내에 나가 권위 있는 러시아인 의사를 찾아갈 결심을 하고서, 재킷을 걸치고 부츠를 신은 다음 서둘러서 눈 속으로 나셨다. 그러나, 막상 찾아갔을 때 그는 외출중이고 없었다. 때는 크리스마스였다. 오드리는 하녀에게 의사가 돌아오는 대로 고아원으로 찾아와 달라는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러시아인 의사는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그 무렵 중국 어린아이들의 죽음은 그 부모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에게든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던 것이다. 시화가 그녀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두었을 때 링훼이, 신유 그리고 오드리가 마치 자신의 자식을 잃은 것처럼 슬퍼하는 동안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철이 든 몇 명의 아이들만이 안타까와하며 함께 슬퍼했다. 그후 2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서 네 명의 어린아이가 더 목숨을 잃고 말았다. 오드리의 추측으로는 그 질병이 크루프-역주 : 어린아이의 인두와 후두에 생기는 병-로 보였다. 오드리는 아이들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어린이들의 숨통을 죄고 있는 심한 기침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방조차 제대로 따뜻하게 해줄 수가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이제 남은 아이들은 신유와 링훼이를 비롯해서 불과 16명에 불과 했는데 사실상 신유와 링훼이의 경우는 도움을 받는 입장이 아니라 주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고아원 원아는 모두 14명인 셈이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한결같이 불과 한 살도 되지 않은 갓난아기까지 포함해서 2명의 남자 아이와 3명의 여자 아이가 목숨을 잃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오드리는 자신의 팔에 안겨 어린아이가 죽어가는 동안 무정한 하느님에 대해서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으며, 그러는 가운데 링훼이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가 문득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버지를 일본인으로 둔 그 아이를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비단 그 아이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은 또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중국에서는 어린아이를 밀가루 한 푸대 정도만 받을 수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팔아 버린다. 사실상 링훼이도 따지고 보면 어린 소녀에 불과해서, 아홉 살이나 열 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링훼이는 조그마한 엉덩이에 몸은 전반적으로 약간 말라서 가날픈 편이었다. 그리고 작은 두 손은 앙증맞을 정도로 귀여웠으며, 오드리와 더욱 친해지고 난 다음부터 항상 입가에서 떠나지 않는 미소가 매력적이었다. 링훼이는 장난과 농담을 좋아했으며, 배가 고프거나 좋지 않은 일로 모두들 침울해 있을 때 항상 남을 즐겁게 해주었고, 오드리에게서 영어를 한마디라도 더 배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녀는 아무래도 언어를 배우는 데 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모양이었다. 수녀들에게서는 불어를 배웠고, 지금은 영어를 배우고 있으며, 중국 방언도 대여섯 가지 정도는 마음대로 구사했다. 게다가, 오드리는 일본인들이 다시 찾아왔을 때 링훼이가 일본어까지 할 줄 안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나 링훼이는 그것을 인정하기가 창피한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만일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그녀를 매국노로 취급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링훼이는 잠자리를 같이한 일본인 남자에게서 일본어를 배웠었다. 링훼이는 그 일본인을 봄에 만났었는데, 그 무렵 그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고아원에 자주 찾아왔었다고 했다. 링훼이는 그를 교회에서 만났는데 수녀들 또한 그를 좋아했었다. 그는 닭을 여러마리 선물했었는데, 아직까지 고아원에 남아 있는 염소 역시 그가 보내 준 선물이었다. 그는 열 아홉 살이었는데, 링훼이는 그가 진실로 그녀를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7월달에 그는 어디론가 보내지고 말았다. 그리고 아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10월에 떠나간 이후로 오드리가 찰스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하고 있듯이, 링훼이 역시 그가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를 뿐 아니라 소식도 전혀 듣지 못하고 있었다. 찰스가 떠난 지도 벌써 여러 달이 지났는데, 오드리는 편지가 배달되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쯤이면 편지가 올 때도 되지 않았을까 하고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받아 본 것이 할아버지의 편지였다. 할아버지는 그녀의 행동에 대해서 몹시 격분해서 집으로 돌아올 생각일랑 아예 하지도 말라고 노발대발하셨다. 사실상 할아버지는 오드리가 자신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까 봐서 그렇게까지 심한 표현은 쓰지 않았으나, 오드리는 편지를 읽는 동안 할아버지의 격분한 음성이 귓가에 들려 오는 것 같았다. 펜을 잡으며 손을 떠는 할아버지의 모습도 눈앞에 어른거렸다. 오드리는 할아버지의 필체가 휘갈겨져 있는 것이 건강 악화 때문이 아니라 분노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너무 격노해서 오드리는 피식하고 웃음마저 나올 지경이었다. 편지에 나타난 할아버지의 역정과 꾸지람은 집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으며, 오드리는 수녀들이 도착하는 대로 곧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약속하면서 수녀들이 올 날도 머지않았다고 말했다. 오드리는 크리스마스가 지난 다음에,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느냐고 프랑스에 다시 한 번 전보를 띄웠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회답이 없었다. 프랑스에서는 그녀가 너무 조급하게 군다고 생각하거나, 두 명의 수녀를 틀림없이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서 소식이 끊긴 게 분명했다. 사실, 오드리 본인부터 잘 알고 있듯이, 한겨울에 중국대륙을 횡단해서 오기란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오드리만 하더라도 이번에 만주에서 지내는 것만큼 혹독한 겨울을 보낸 것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드리는 혹독한 추위가 태아에 나쁜 영향을 끼칠까 봐서 링훼이가 밖으로 돌아다니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이제는 링훼이의 임신 사실이 더 이상 비밀도 아니었다. 그녀의 불어오른 배가 스스로 비밀을 폭로해 버린 셈이었으며, 그녀의 동생은 눈을 크게 뜨고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 보았다. 링훼이는 수녀들이 말했던 아기 예수처럼 자신과 아기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것이라고 신유에게 말했으며, 신유는 그 이야기를 듣고서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은 것 같았다. 후에 링훼이는 자신이 동생한테 그런 말을 한 것이 잘못한 것이냐고 물어 왔는데, 오드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링훼이, 언젠가는 동생도 그 이야기를 믿지 않으려고 할지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괜찮을 것 같구나." 링훼이와 오드리는 서로의 마음에 와닿는 미소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기는 했지만, 오드리는 한편으로 링훼이가 부럽기조차 했다. 그녀는 자신이 찰스의 아이를 갖지 못한 것이 서운하게 여겨질 때가 가끔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의 그녀의 생활은 너무나도 외따로이 떨어져 있었기에, 그녀가 살고 있었던 사회의 제반규범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았으며, 그녀는 찰스가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오드리는 밤마다 수녀의 침대에 누워 잠을 설치면서 생각해 보았다. 찰스와 함께 지낸 밤의 감미로운 시간들, 그리고 즐거웠던 하루하루와 유쾌했던 순간들, 끝이 없을 것 같았던 기차여행, 생소하고 신기하기만 했던 북경의 이모저모, 모든 것의 시발점이 되었던 오리엔트 특급열차에서의 황홀했던 시간들, 페라 팔라스에서의 뜨거웠던 정사, 그 모든 것이 지금은 너무나도 요원하게 여겨졌고, 오드리는 찰스 없이 지내는 매일 매일 가슴이 미어질 듯한 외로움을 느꼈다. 16 찰스는 오드리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보낸 편지를 그로부터 4주일 후에 받아 보았다. 찰스는 런던의 거실에 앉아 밤 늦게까지 오드리의 편지를 읽고 있었다. 벽난로에서는 장작이 타고 있었고, 손에는 브랜디 잔이 들려 있었다. 찰스는 시화의 죽음과 링훼이의 임신에 관한 부분을 몇번이나 되풀이해서 읽고난 후, 오드리 자신의 이야기를 읽어 내려갔다. <그 아이가 우리의 아이이기를 제가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 당신은 모르실 거예요. 그렇게 조심했던 제 자신이 그렇게 후회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기는 했지만, 찰스는 오드리의 심정을 정확히 읽을 수 있었다. 찰스 역시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수백 번도 더 후회했었다. 오드리를 억지로라도 함께 데리고 와서 결혼하지 못하고 그녀를 홀로 하르삔에 남겨 놓고 온 일이며, 게다가 그녀를 일본인들의 소굴에 남겨 놓고 온 일, 찰스는 하르삔을 떠나온 후 단 한 순간도 마음이 편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서, 찰스는 제임스에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말았다. 제임스는 찰스의 이야기를 듣고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인 걸. 바이올렛이 지난 여름 동안 두 사람 사이가 심상찮게 전개되었다고 말하길래 정신나간 소리라고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단 말이지?" 제임스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자네 아내의 말이 옳았네. 하지만 내가 자네라면 말이야 집에 가서 그런 얘기는 하지 않을걸세. 여자들이란 인정을 해주면 해줄수록 남자를 우습게 보기 때문에 그랬다가는 결혼생활이 아주 곤욕스러워질 걸세." 찰스는 바이올렛 부인을 부추켜 세워 줌으로써 제임스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려고 하면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드리를 혼자 남겨 놓고 떠나온 내가 어리석었어. 그녀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지나 않았는지, 생각만 해도 괴롭다네. 상하이를 떠나올 때부터 그런 생각이 들더군. 정말이지 내가 미친놈이었어." "자네에게는 자네 자신의 인생이 있잖은가, 찰스." 제임스는 항상 찰스에 대해서 동정하는 입장이었고, 클럽의 조용한 한쪽 구석에 앉아서 포트와인-역주"포르투갈 원산의 단맛 도는 포도주-을 함께 마시는 지금 이 순간은 특히 그러했다. ''자네가 고아들이나 돌보며 내년 한 해를 만주에서 보내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야.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오드리한테는 진짜 놀랬는 걸. 오드리가 그런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거든. 만일 자네가 오드리는 사진을 찍기 위해 그곳에 머물러 있다고 말했다면, 난 쉽게 믿었을 걸세. 그런데 이건 너무나도 뜻밖이야." 제임스는 친구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드리 어떤가? 고아들을 그렇게 돌봐 줄 정도라면 좋은 사람인 것 같지 않나?" "그 여잔 바보야, 바보!" 찰스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이올렛은 제임스를 통해서 그 이야기를 듣고 난 후 펄쩍 뛰었다. "어떻게 했다구요 얘?" 바이올렛이 너무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바람에 제임스는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오드리를 혼자 두고 떠나왔단 말인가요? 그것도 일본 식민지하인 만주에? 그사람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오드리도 한두 살 먹은 어린애는 아니잖아. 오드리는 스스로 결정을 내릴 권리가 있고, 그 권리를 행사해서 결정을 내렸을 뿐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오드리를 홀로 두고 떠나올 수 있죠? 그곳에 제일 처음 오드리를 데리고 간 사람은 찰스였잖아요. 그러니 오드리가 돌아올 때까지는 마땅히 함께 있어 줬어야죠." "정확히 말하면 하르삔에 가기로 한 건 오드리의 아이디어였어.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고아들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한 것도 역시 오드리였고." "그렇다면 또 몰라도...." 바이올렛은 제임스의 이야기에 수긍이 갔다. 그리고 성인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아이들 곁에 머물기로 한 오드리가 바로 성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찰스는 계약을 어기면서까지, 그리고 자신의 맡은 바 책임을 전부 내팽개치면서까지 중국 땅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어." 제임스는 찰스 본인이 변명을 늘어놓는 것보다도 더욱 완강하게 그를 변론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정작 찰스는 바이올렛의 말에 동의하면서, 오드리를 중국땅에 홀로 남겨 놓고 온 자신이야말로 가장 비열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찰스는 혼자 떠나온 자기자신이 걷잡을 수 없이 혐오스러웠다. 단 하루도 후회하지 않고 보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드리의 편지에서는 그를 원망하는 흔적이 단 한군데도 없었다. 크리스마스 때 보내온 편지는 특히 그러했다. 오드리의 편지는 사랑과 풋풋한 정이 넘처 흘렀으며 수녀들이 하루라도 빨리 도착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그곳에서 지낸지도 벌써 두 달이 넘었으니 오드리라고 집 생각이 안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찰스는 가능한 한 자주 오드리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그녀에게 할 말이 너무나도 없는 것 같았다. 작가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정도로 말문이 막혔다. <보고 싶은 오드리에게>라고 써놓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막막하기만 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될까? 미안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고 쓸까? 최근에 발표한 책이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쓸까? 봄에는 인도에, 그리고 가을에는 이집트에 초청받았는데.... 바이올렛과 제임스가 다음해 여름까지는 돌아오기를 원한다고 쓸까? 찰스는 고개를 저었다. 한결같이 어리석고 하찮게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보고 싶었다! 오드리가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찰스는 오드리를 떠나오던 날, 누군가가 자신의 몸에서 팔 하나를 떼어내 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이 떠나기 전에 오드리가 했던 말이 귓가에서 계속 맴돌았다. "이 아이들이 우리의 아이였다면,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그리고 또 링훼이의 임신에 대해 말하면서, 아이를 가진 사람이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면 좋겠다고 적었던 그녀의 편지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더욱더 참을 수 없는 것은, 그 역시 오드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찰스는 오드리에게 다시 청혼을 하거나 인도나 이집트에 함께 갈 것을 부탁해 보았자 무의미하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오드리는 갈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드리는 찰스가 생각하기에 그녀를 철두철미하게 이용해 먹고 있는 가족에게 돌아가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찰스는 자신의 아이를 길러 주고, 집안 일은 물론 자신을 위하여 오드리가 모든 일을 도맡아서 해주기를 바라는 아나벨을 언제부터인가 내심 미워하고 있었다. 오드리는 대체 언제쯤에 그녀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언제쯤이면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찰스는 이런 생각만 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고, 매일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코냑 한 병을 비웠다. 베니스와 남경과 상하이에서 함께 보낸 나날들..... 끝없이 계속되던 조그만 기차 여행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찰스는 옆 자리 빈 침대에 누워 외로움에 몸부림쳤다. 일과 그녀에 대한 생각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찰스는 더 이상 집 밖으로 돌아다니려고 하지 않았으며, 바이올렛은 그가 오드리를 하르삔에 홀로 남겨 놓고 떠나온 것에 대해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 자신이 싫은 소리를 하지 않더라도 찰스가 충분히 고통을 겪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찰스는 체중이 빠졌으며 눈도 휑하니 쑥 들어갔는데, 제임스는 옆에서 지켜 보기가 안타까울 정도였다. 마침내, 바이올렛이 오드리에게 직접 편지를 띄웠으며, 오드리는 찰스에 대한 사랑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의 편지를 받아들자 몹시 기뻤다. 오드리는 짬이 날 때마다 바이올렛에게 편지를 보냈으며, 찰스에게도 편지를 쓰기는 했으나 그 횟수가 많지는 않았다. 아니면, 찰스의 심정에 비해서 횟수가 적은 편이라고 말해야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바이올렛은 오드리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찰스에게 알려 주곤 했다. "뭐라고 하던가요?" 2월 중순 경, 바이올렛의 전화를 받고서 찰스가 침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편지를 보낼 무렵까지도 수녀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대요. 지금 쯤이면 도착했을지도 모르죠. 꼭 그렇게 됐어야 하는데... 불쌍한 오드리. 그녀는 정말이지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용감한 여인이에요." 바이올렛은 디너 파티를 열면서 찰스와 그의 걸출한 출판업자인 헨리 비어드슬리를 초대했다. 실의에 빠진 찰스를 위로해 주기 위해서 였다. 바이올렛은 비어드슬리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어드슬리는 탁월한 두뇌의 소유자로서 약간 거칠면서 예의범절이 그렇게 밝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비어드슬리는 파티석상에서 말재간이 뛰어났고, 제임스가 관료적인 친구들 가운데 참신한 인물을 초청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고 제안해서 그를 디너파티에 초대하기로 했다. 비어드슬리는 한술 더 떠서 자신의 딸인 샤롯트를 데리고 참석해도 괜찮겠느냐고 물어 오는 바람에 바이올렛과 제임스를 깜짝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샤롯트는 고전적 의미에서 볼 매 미인은 아니었으나, 20대 후반의 극히 세련된 아가씨로서 입고 다니는 옷 또한 최신 유행의 첨단을 걷는 것이었다. 성격도 밝고 그런대로 매력적인 아가씨였다. 샤롯트는 미국의 바자에서 대학을 다녀 미국 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왔는데, 이것이 그녀의 아버지 사업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했다. 비어드슬리는 샤롯트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는데, 바이올렛은 그녀가 아직까지도 아버지와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샤롯트는 자신이 스물 아홉 살이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았으며, 자기 아버지는 상처한 후 혼자 지내고 있다고 했다. "사실, 저는 법률학부에 다니기를 더 원했었는지도 몰라요." 바자에대한 바이올렛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찰스의 맞은편에 앉은 샤롯트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이올렛은 항상 미국의 대학을 동경해 왔었다. "하지만 저희 아버님께서 반대하셨어요. 집안에 또 한 명의 변호사가 생기는 걸 원치 않는다고 말씀하시면서요. 사실, 사장은 필요해도 변호사는 더 이상 필요없었거든요." 아버지와 딸은 서로 의기가 투합되는 미소를 교환했다. 비어드슬리가 딸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 주려 한다는 것은 출판계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으며, 찰스도 샤롯트를 전에 만나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거래는 대부분 그녀의 아버지를 통해서 이루어져 왔었고, 찰스가 그녀에게서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 것은 그날 밤이 처음이었다. 샤롯트는 아주 쾌활했으며 유쾌했고, 바이올렛이 보기에는 찰스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제발 그만하구려, 바이올렛." 제임스가 그날 밤 침실에서 옷을 갈아 입으며 난감한 표정으로 바이올렛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항상 얼토당토 찮은 로맨스를 상상해 내는 게 탈이라니까." ''제 말이 틀렸다는 말씀인가요? 이번에는 로맨스라는 말을 제가 사용하지도 않았잖아요." "그 말이 그 말이지 뭐." 제임스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이올렛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바이올렛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다. 남편과 아내라는 관계를 차치하고라도 그들은 지금까지 더할 수 없이 절친한 친구로 지내왔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저도 아직까지는 확신하지 못하겠어요. 하지만 내 생각에는요. 샤롯트는 얼음처럼 차갑지만 찰스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스물 아홉의 나이에 누구 못지않게 세련되고 돈도 많은 샤롯트에게 필요한 것은 적당한 남편감이에요. 찰스라면 그녀에게 이상적인 남편이 될 수 있을 거구요." "이런 사람 하고는.... 공연히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 설마, 그녀도 당신처럼 따지고 드는 성격은 아니겠지." "그렇게 큰소리 치지 말아요. 제임스." 바이올렛은 여간첩 마타하리처럼 제임스를 한번 살짝 흘겨보았다. 제임스는 프랑스제 향수 냄새를 풍기며 핑크빚 공단 실내복을 입고 침실로 들어가는 바이올렛을 지켜 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로부터 2주일 후, 제임스는 샤롯트 비어드슬리와 함께 식사하는 찰스를 발견하고서 혹시 바이올렛의 추측이 맞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다시 뵙게돼서 정말 반갑습니다. 샤롯트 양. 찰스, 그래 요즘은 지낼 만한가?" 제임스는 잠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점심식사를 함께 하기로 되어 있는 자신의 일행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견 제임스가 보기에 찰스는 마음이 편한 가운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날 다시 만나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 보자 찰스는 사업상의 만남이었다고 대답했다. "괜찮은 여자던데." 클럽의 벽난로 앞에 앉아 다리를 쭉 뻗으면서 제임스가 슬쩍 미끼를 던지자 찰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실없는 소리 하지 말아. 이 친구야. 그리고 자네 아내한테도 부질없는 추측 하지 말라고 해. 샤롯트는 자기 아버지를 대신해서 나의 계약문제를 다루기 시작했을 뿐이야. 비어드슬리가 체력의 한계를 느껴서 자신이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더군. 그리고 자네도 알다시피 내 일은 계약문제가 깨끗하면 깨끗할수록 좋아. 내가 보기에는 샤롯트와 계약문제를 협상한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다고 생각하네. 그 여자는 나의 매니저는 물론 다른 사람들하고도 잘 지내는 편이거든." 찰스는 샤롯트의 행동에 별다른 꿍꿍이 속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으며, 제임스는 바이올렛에게 이번에는 그녀의 추측이 틀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이올렛은 제임스의 말을 믿지 않으려고 했다. "원, 그렇게 어리석기는 내 분명히 얘기하건대, 찰스가 요즘 생각하는 건 오드리뿐이야. 오늘 그녀에게 편지 온 것 없어?" 그 무렵은 3월경이었는데, 모두들 오드리가 과연 하르삔을 떠날 수 있을지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오드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혹독한 추위가 계속되고 링훼이의 산달이 점차 다가오고 있는 동안, 벌써 몇 주일째 그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제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17 3월 중순, 오드리는 찰스와 함께 보냈던 시간들을 생각하며 하르삔의 침대에 누워 있다가, 아래쪽 주방에서 ''쿵" 하는 소리와 더불어 가벼운 충돌소리를 듣게 되었다. 오드리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귀를 기울였다. 혹시 공산주의자들이 주방에 숨으러 왔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언젠가 교회를 습격해서 수녀들을 살해했을 때 처럼 산적떼가 잠입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드리는 온몸의 근육이 긴장된 채 몇달 전에 링훼이가 준 총을 손으로 움켜잡았다. 오드리는 링훼이가 그 총을 어디서 얻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으나 굳이 물어 보지도 않았다. 지금은 총이라도 옆에 있는 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다시 한 번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곧 이어서 마치 누군가가 아래쪽에서 몹시 무거운 물건을 질질 끌고 가고 있는 듯한 소리가 들려 왔다. 이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방인이 집안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오드리는 몇달 전에 고쳐서 입기 시작한 묵직한 수녀용 잠옷을 걸치고서 발 뒤꿈치를 들고 방문을 나섰다. 바로 그 순간, 여섯 명의 원아들과 함께 쓰는 방에서 살금살금 걸어 나오는 링훼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링훼이의 몸은 만삭이 되어 감에 따라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는데 오드리는 굳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잠자코 다시 들어가 있으라고 손짓했다. 링훼이를 다치게 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아래층에 누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내려가는 동안 목 잘린 수녀들의 기억이 오드리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드리가 이곳에 온 이후로 공산당과의 큰 전투는 없었으나, 일본군은 계속해서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오드리가 알고 있는 것은 집안에 이방인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오드리는 총알을 장전하고 나서 누구를 만나든 방아쇠를 당길 만반의 준비를 갖춘 다음, 잔뜩 긴장을 하고서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어둠 속을 눈 하나 깜박거리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 가슴뛰는 소리가 귓가에 너무나도 크게 들려 오는 바람에, 오드리는 침입자의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해서 제때에 방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들려 옴과 동시에 오드리는 창문가에 드러난 그의 형체를 목격하게 되었다. 방아쇠를 손가락으로 거머쥔 채 오드리는 극히 한 순간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가 문득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으며 그를 지금 죽여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어둠 속에서 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오드리가 자신을 발견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가 자신을 수녀로 생각하고서 불어로 말하는 바람에 오드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치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듯한 가르릉거리는 목소리가 말했다. "해치지는 않겠소." 그는 오드리가 들어 본 적이 없는 이상한 말투로 말했으나, 한 마디 한 마디가 또박 또박했다. 그러나, 그가 과연 아무런 악의가 없는지 혹은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었다. "누구세요?" 오드리는 마치 심장이 정글의 북처럼 심하게 방망이질하는 가운데 어둠 속에 대고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가 어떤 대답을 할지는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장 장군이오." 이번에는 또렷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오드리는 그를 겨냥하고 있는 총구를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았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죠?" 오드리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부상을 당했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오드리는 계단을 마저 내려온 다음, 한 손으로는 여전히 총구를 그에게 겨눈 채 다른 손으로 초를 집어 들고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불을 붙였다. 오드리는 그에게 꼼짝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나서 초를 높이 치켜들었다. 몽고의 전통의상처럼 생긴 옷을 걸치고 있는 중간 정도의 키에 땅딸막한 몸집의 사나이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가 서 있는 주변에는 눈이 녹아 있었으며 희미한 촛불 아래 오드리는 문득 그의 어깨 위에 피범벅이 된 상처를 발견하게 되었다. 허리띠에는 큰 권총이 푹 꽂혀 있었고 큰 칼이 놓여 있었으며 한쪽 어깨에는 긴 총알집을 두르고 있었으나, 오드리에 대항해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하여 무기는 꺼내 들고 있지 않았다. 그는 다만 의심많은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면서, 성미카엘 수녀회 소속의 수녀냐고 물어 보았다. 오드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를 몰라서 한동안 망설이다가, 솔직히 대답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여전히 두려움에 떨며 그를 응시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위층에서 링훼이의 인기척이 들려 왔다. 오드리는 그가 링훼이를 발견하고서 몹쓸 짓을 할까 봐 순간적으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으나, 그는 그 누구에게도 몹쓸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초와 권총을 들고 있는 오드리만큼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오늘밤 여기서 머물러도 될까요?" 그가 불어로 물어 왔다. 오드리는 문득 그가 전에도 와 본 적이 있다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다음 말은 오드리의 그러한 느낌을 확신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지난번처럼 고기 저장실에 숨어 있으면 될 텐데요." 그는 호소의 눈길로 오드리를 바라보았다. 오드리는 그의 털모자에서 금실로 수를 놓은 둥근 고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록 핏자국으로 인해 다소 난잡하게 보이기는 했어도, 그는 오드리가 여지껏 보아온 대다수의 중국인들보다 훨씬 더 화려한 상의를 입고 있었다. 오드리는 그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서,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을 하기에 앞서 다시 한 번 질문을 해 보려고 생각했다. 원아들을 위험 속에 빠뜨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까 장군이라고 하셨는데 그게 정말인가요?' "나는 국민당군 소속의 장군으로서 한 지역을 책임맡고 있습니다." 그는 장개석 휘하의 장성으로서, 어디에선가 공산주의자들과 전투를 벌이다가 부상을 당한 모양이었다. 오드리는 그가 어느 지역의 장군일까 궁금한 생각이 들었으나, 지켜 보고 있는 동안 그가 모든 설명을 해 주었다. "나는 킹안 산맥 반대편의 바룬 우르타에서 왔습니다. 장개석 장군의 측근들을 만나러 오는 길이었는데, 도중에 그만 일본군과 부딪히고 말았어요. 교회에서 3명의 부하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여기에 머무르는 걸 당신이 거절하신다면, 부하들이 절 도와 줄 겁니다. 그러니 무서워하지 마세요." 그는 극히 공손했으며, 그의 불어 실력은 오드리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 같았다. 중국의 군인이 불어를 그토록 잘하다니 신기하게까지 여겨졌다. "수녀님들께서 전에 나를 이곳에 머무르게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이쪽으로 지나면서 두 번 이곳에 머물렀었죠. 하지만 당신이나 원아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내가 돌아가 주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하겠어요." 그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어깨의 상처 때문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이 이곳에 오는 걸 본 사람이 없었나요?" 오드리는 신유가 밑으로 내려와서 그녀의 뒤에 서서 지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오드리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다가서는 사람이 링훼이가 아니라 신유라는 사실을 깨닫고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신유에게 올라가라고 손짓을 하고 나서, 중국인 장군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고 했다. "우리가 들킨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마드모아젤." 그는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으며, 어깨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흘러 내리고 있었다. "당신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겠습니다. 밤이 깊어질 때까지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있으면 됩니다. 우리는 걸어서 이동하고 있으며, 우리 지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임무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중국인 장군 일행은 그 임무를 완수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오드리는 그를 머무르게 하기가 두려웠다. 혹시라도 일본군이 이 일을 알고서 보복을 해 오면 어떻게 할까? 이런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 누구의 침해도 받지 않아 왔으며, 오드리는 앞으로도 원아들을 위해서 고아원을 계속 안전하게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눈앞의 중국인 장군은 심한 부상으로 말미암아 휴식을 취하지 않고서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다. "무기를 내려놓으세요." "네? 뭐라고 하셨나요?" 그는 오드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깜짝 놀라면서 되물었다. 그때 신유가 다시 계단을 내려오는 바람에 오드리는 위로 올라가 있으라고 손짓을 했다.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했어요. 권총과 탄띠와 칼을 전부 내려놓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머무르게 할 수 없어요." 그는 무표정하게 오드리를 한동안 똑바로 응시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럼 당신이 나를 보호해 주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몰라요. 그러나 당신을 이곳에 머무르게 해서 우리 아이들이 해를 입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우리는 해를 끼치지 않을 겁니다. 부하들은 바깥 헛간에 숨어 있을 것이고, 만일 허락만 해주신다면 나는 이곳의 고기 저장실에 있겠습니다. 나는 한 지역을 관장하는 장군입니다. 마드모아젤. 따라서 나 역시 무례한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너무나도 예의바르게 나왔기 때문에 오드리는 마음을 놓을 수도 있을 것 같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경계를 풀 수는 없었다. 오드리가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순전히 그의 말을 통해서였기 때문이었다.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그가 산적일 수도 있고, 그녀와 원아들에게 해를 입히고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파렴치한 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던 것이다. ''내 말을 믿으셔도 됩니다. 당신과 원아들은 안전해요. 나는 힘을 회복할 수 있는 몇 시간 정도의 휴식을 취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는 권총과 칼을 내려놓은 후, 힘들게 몸을 움직여 탄띠마저 끌러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가 상의 밑에 또다른 권총과 소매 속에 날카로운 단도를 숨겨 놓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그 무기를 그녀에게 사용할 의사는 없는 것 같았다. 사실, 그는 자신을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 둘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던 것이다. "당신이 우리 아이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리라는 걸 어떻게 보장하죠?" "내 말을 믿으세요. 마드모아젤. 우리는 여러분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겁니다." "당신 부하들은요?" 오드리는 찰스와 함께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성당에서 목격했던 목 잘린 수녀들의 모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부하들한테는 내가 말해서 즉시 몸을 숨기라고 하겠습니다. 누구한테도 들키지 않을 겁니다. 분명히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말을 마치고 나서 그는 오드리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이상하고 재미있는 얼굴 표정에 눈이 작고 광대뼈가 튀어 나와 있었는데, 하르삔 주변의 중국인들이나 혹은 오드리가 남경, 북경 그리고 상하이 등지에서 본 다른 중국인들과는 전혀 다른 것 같았다. "우리는 이런 일에 익숙해져 있으니까요." '별로 익숙한 것 같지도 않은데 뭘...' 오드리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부상당한 것만 보아도 그걸 알 수 있지 않은가. ''상처를 감을 깨끗한 붕대가 필요하신가요?" 오드리는 그에게 무기에서 떨어지라고 말한 후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채 계단 옆에 서 있었다. 그는 벽을 따라서 주방의 한쪽 모퉁이로 몸을 옮겼으며, 오드리는 여전히 총구를 그에게 겨냥한 채 그의 총과 칼을 집어 들고서 계단쪽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그때였다. 그녀를 부르는 신유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신유는 뜻밖의 사태에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오드리는 곧 그곳으로 가겠다고 신유에게 대답하고 나서, 다시 중국인 장군에게 시선을 돌렸다. "깨끗한 천이 있으시다면....." 그가 머뭇거리면서 말문을 열었다. "아닙니다. 됐어요. 이거면 충분할 것 같군요." 중국인 장군은 상처를 싸맨 담요 조각을 가리켰다. 담요 조각은 피가 홍건히 배서 말이 아니었는데, 오드리는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 초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중국인 장군의 얼굴은 그렇게 매력이 없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드리는 그를 믿어도 괜찮을 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는 정직하고 솔직담백한 분위기가 풍겼다. "내게도 자식이 있습니다. 마드모아젤. 그리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전에도 이곳에 온 적이 있었구요. 이곳의 수녀님들은 나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나는 젊었을 때 그레노블에서 교육을 받았어요." 그가 이처럼 미개하고 불쾌한 곳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처럼 느껴졌으나, 오드리는 왠지 모르게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를 감을 수 있는 깨끗한 천과 약간의 먹을 것을 갖다 드리죠. 하지만 틀림없이 오늘밤에 떠나셔야만 해요." 오드리는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원아를 대할 때처럼 위엄있게 말했다. "내 말을 믿으세요. 부하들한테는 지금 말해 놓겠습니다." 오드리가 다시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그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리고 고아원과 기도실 사이에 있는 헛간을 향해서 다가가는 흐릿한 사람의 형체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드리는 그 틈을 이용하여 수건을 찢어서 붕대를 만들고 약간의 음식을 준비했다. 그가 다시 돌아오자 오드리는 주방 테이블을 말없이 가리켰다. 그리고 오드리가 녹차를 끓이고 있는 동안, 그는 힘없이 의자에 앉아서 그녀에게 감사하는 눈길을 보냈다. "고맙습니다." 그는 고기와 치즈를 정신없이 먹어 치웠다. 그러나 너무 지쳐서 붕대를 바꿀 힘조차 없는 것 같았다. 오드리는 너무 놀란 나머지 붕대를 대신 갈아 줄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그는 힘겹게 담요 조각을 풀어 상처 부위를 드러냈다. 칼에 깊이 찔린 듯, 그의 상처는 붉게 부풀어 올라 잔뜩 성이 나 있었다. 오드리가 물에 적신 수건을 건네 주자 그는 주머니에서 무슨 가루약이 든 양철통을 꺼내 흔들었다. 오드리는 옆에서 그걸 지켜 보고 있다가 너무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서, 그가 바라보고 있는 동안 상처 부위를 깨끗히 닦아내고 나서 그 위에 수건으로 만든 붕대를 다시 감아 주었다. "용감하시군요. 나를 믿어 주시다니. 수녀도 아니신 분이 이곳에는 어떻게 오시게 되었습니까?" 오드리는 처참하게 피살당한 수녀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서, 자신은 하르삔에 여행차 들른 길이었다고 말했다. 그녀와 함께 이곳에 찰스가 왔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상처부위에 붕대를 감아 주는 동안 그곳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드리는 중국인 장군에게서 어떤 투박스러운 매력과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남자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호랑이처럼 뛰어다니며 포악무도하게 살상을 저지르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나, 오드리에게 이야기하는 동안에는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었다. 그는 힘이 세고 얼굴 표정이 몹시 재미있었는데, 오드리는 그가 고기 지장실 쪽으로 잽싸게 다가가는 걸 지켜 보았다. 그가 오드리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는 고기 저장실의 위치와 그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오드리를 한번 더 쳐다보고 나서 조용히 고기 저장실 문을 닫았다. 오드리는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 보고 있다가 일종의 증거물로 남아 있는 피묻은 담요 조각과 물을 눈 위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눈을 더 퍼 와서 그위에 덮었다. 이제는 완벽했다. 아무런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중국인 장군이 사용했던 피묻은 담요 조각이 발견되려면 봄이 되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고, 그때는 이미 그가 고아원을 떠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일 것이었다. 오드리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신 유가 무서움에 떨며 사색된 얼굴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한테 가 보세요." 신유가 말문읕 열었다. "시간이 됐나 봐요. 하느님이 보내 주신 아기가 태어날 시간이.... 언니가 몹시 아파요. 너무 너무 아파요... 오드리 아줌마." 오드리는 중국인 장군의 무기와 자신의 총을 들고서 급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자기 방의 침대 밑에 무기들을 집어넣고 담요로 덮은 다음, 링훼이가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다른 아이들은 여전히 잠에 취해 있었으나 링훼이 만큼은 이를 악문 채 않은 담요를 움켜잡고서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두 눈은 두려움과 고통으로 잔뜩 질려 있었다. 오드리가 그녀의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링훼이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으나, 고통을 참기가 힘들다는 듯 온몸을 뒤틀면서 오드리의 손을 갑자기 꽉 움켜 잡았다. "괜찮아, 걱정하지 말아요. 그래, 이 아줌마 방으로 가자꾸나." 오드리는 링훼이를 두 팔로 안아 부축하며 자신의 침실 쪽으로 급히 걸어갔다. 신유에게는 다른 아이들 곁에 남아 있으라고 했다. 신유는 링훼이가 걱정되는지 그녀의 옆에 있으려고 했으나, 오드리는 링훼이가 겪어야 할 출산의 고통을 신유가 옆에서 지켜 보는 걸 원치 않았다. 지난 몇달 동안 오드리가 지켜 본 바에 의하면, 링훼이는 유달리 히프가 작았는데 그 때문에 보통 사람들 보다 아이 낳기가 훨씬 더 힘들 것이 분명했다. 오드리는 출산할 때가 되면 러시아인 의사를 불러오고 싶었으나 지난번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중국인 여자의 아이를 받기 위해서 왕진 올 의사는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링훼이 역시 다른 산모들과 다를 바 없이, 산파와 이 방면에 경험이 많은 동네 아낙네들의 도움을 받으며 아기를 낳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링훼이의 출산을 도와 줄 사람은 아무런 경험도 없는 오드리 한 사람밖에 없었다. 아기가 태어나는 것조차 본 적이 없는 오드리는 링훼이가 이를 악물고 진통으로 몸을 뒤트는 동안 그녀의 손을 잡고 옆에서 마음만 조일 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링훼이는 이를 악물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는데, 오드리는 차라리 그녀가 비명이라도 질러대면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았다. 다른 아이들이 하나 둘 잠에서 깨기 시작하자, 오드리는 신유에게 아침식사 준비를 하면서 그들을 돌봐 주라고 말했다. 오드리는 중국인 장군이 숨어 있는 곳에서 제발 모습을 나타내지 말아 달라고 속으로 빌고 있었다. 물론, 그런 걱정을 해야 될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드리는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링훼이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아침에 이르러 링훼이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까지 질러대면서, 의식마저 혼탁해졌는지 오드리의 손을 움켜잡고서 도와달라고 소리치며 몸을 뒤틀고 있었다. 링훼이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가슴 아프게 흐느껴 울었는데, 오드리는 죽기 전에 흐느껴 울던 시화의 모습이 문득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링훼이는 죽는 게 아니었고, 다만 일년 전에 관계를 맺었던 일본인 청년의 아기를 낳으려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오드리는 링훼이가 고통으로 몸부림치면서 자신의 불장난을 후회하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으나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진통을 시작한 지도 벌써 12시간이 훨씬 더 지났으나, 아무리 지켜보아도 아기의 머리는 밖으로 나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신유가 하루 종일 아이들을 보살펴 주고 나서 모두 잠자리에 들게 했다. 오드리의 일을 대신 한 셈이었다. 신유는 틈틈이 오드리의 침실을 찾아와서 이런저런 지시를 받고 링훼이를 살펴보았으나, 오드리는 그녀를 옆에 있지 못하도록 했다. 오드리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며, 링훼이는 차조차 마시지 않았다. 가끔 물 몇 모금을 마실 뿐, 링훼이는 식음을 전폐한 체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오드리 또한 기력이 완전히 탈진한 상태여서 뒷쪽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중국인 장군이 한밤중에 살그머니 그녀의 침실로 들어왔던 것이다. 오드리는 벽에 비친 그의 그림자를 발견하는 순간, 질겁을 할 정도로 놀랐다. 침대 밑에 숨겨둔 권총을 꺼내기에는 시간적인 여유가 너무나도 없었다. 오드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향해 몸을 돌렸으나, 그의 얼굴은 상당히 평화스러웠다. "겁내지 마세요." 그는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링훼이를 슬쩍 살펴보고 나서 다시 오드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곳의 원아인가요?" 오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링훼이의 비명은 그동안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벌써 19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이 애는 일본인한테 강간당했어요." 오드리는 링훼이가 자진해서 일본인과 잠자리를 같이했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그가 링훼이를 그냥 두지 않을 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짐승같은 놈들." 땀 냄새가 진동하는 오드리의 침실에서 중국인 장군이 말했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이나 진통이 계속되었건만 고통은 사그라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방안은 링훼이의 땀으로 인해 매퀘한 냄새만을 풍기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 보던 오드리는 한 시간 동안 링훼이와 더불어 흐느껴 울고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무력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기에 오드리가 자기자신에 대해서 느끼는 실망감은 더욱 더 컸을지도 모른다. 오드리가 주시하고 있는 동안, 중국인 장군은 링훼이를 한동안 쳐다보고만 있었다. "상당히 힘들어 하는군요." 중국인 장군은 마치 출산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투로 말했다. 오드리는 순간적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라서 망설였다. 비록 낮 시간 동안 고기 저장실에 숨어 있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는 했어도, 그를 믿어도 괜찮을 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겉보기처럼 실제로도 착한 사람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일어났던 것이다. "당신이 도착했던 어젯밤부터 계속 진통을 겪고 있어요. 거의 24시간 동안을 말이에요." 오드리는 자신의 목소리에서 절망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저토록 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링훼이를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옆에 앉아서 손을 잡아 주는 것을 제외하고, 사실상 그녀는 무용지물이었던 것이다. "아기의 머리가 보이던가요?" 오드리가 고개를 젓자 중국인 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 아가씨는 죽고, 말겠군." 그의 말투에서는 놀라와하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40여년을 살아오는 동안, 너무나도 많은 죽음과 전쟁과 폐허를 자신의 두 눈으로 목격해 왔었던 것이다. 어깨의 상처는 상당히 많이 회복되었고 그는 지난 밤보다 한결 생생해 보였으나, 오드리는 조금전에 그가 한 말에 대해서 상당히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걸 알 수 있죠?" 오드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이 아가씨의 얼굴에 씌어 있습니다. 내 아들녀석도 태어나는데 3일이 걸렸죠." 그의 눈과 입가에서는 진지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 아가씨는 갈수록 힘이 빠지고 있고, 게다가 나이까지 어리니...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입니다." "그럼 의사를 불러야 할까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어떤 의사도 오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설사 온다고 해도 도움이 될 수 없구요. 아기를 살릴 수 있으면 뭐 합니까. 일본인의 후레자식은 누구도 원치 않을 게 분명한데."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오드리는 중국인 장군이 혹시 링훼이가 죽도록 그냥 내버려 두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생각이 들어서 링훼이와 그를 번갈아 가면서 살펴 보았다.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을까요?" 오드리는 아기를 받는 것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아나벨이 아이를 낳은 후 출산할 때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이야기를 좀더 귀담아 들어 두지 않은 것이 보통 후회되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아나벨은 링훼이보다 훨씬 쉽게 산고를 치렀던 것 같았다. 아나벨은 진통을 줄이기 위해서 클로로포름-역주:일종의 마취제- 주사까지 병원에서 맞았었는데, 여기에는 그런 것도 없었던 것이다. 오드리는 자신이 추측해 왔던 장군의 이미지에 꼭 들어맞는다고 생각하면서 중국인 장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상황을 파악하면서 오드리가 모르는 여러가지 가능성들을 찾아보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절개를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오드리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끔찍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계속 귀를 기울였다. "깨끗한 칼만 있으면 됩니다. 사실 여자나 성직자가 이 일을 해야 되는데, 내가 보기에 당신은 어떻게 하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 같군요. 전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어요. 내 아내도 절개를 했었으니까요. 둘째 아이를 낳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살아났나요" 오드리가 알고 싶은 것은 그 사실 뿐이었다. 링훼이를 과연 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녀에게 이토록 많은 고통을 안겨다 주고 있는 출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것인가, 오드리의 관심사는 이것 뿐이었다. 신유가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오드리는 신유가 침실에서 중국인 장군을 발견하거나,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링훼이를 보게 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래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돌려 보냈다. ''네." 중국인 장군이 오드리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는 살아났습니다. 아이 역시 마찬가지였구요. 우리가 손만 빨리 쓰면 이 아가씨 역시 그렇게 될 겁니다. 우선, 태아를 밑으로 내려오게 할 필요가 있어요." 그는 링훼이에게 다가가서 몇 마디를 속삭이고 나더니 잠시 그녀의 솟아오른 배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태아의 위치를 손으로 더듬어 찾고 난 후, 링훼이의 진통이 다시 시작될 무렵에 갑자기 자신의 모든 체중을 실어서 그녀의 배를 눌렀다. 태아를 밑으로 내려보내서 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서였다. 링훼이는 비명을 질러대면서 격렬하게 반항을 했으나, 중국인 장군은 그 소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녀의 배를 계속 두 번 눌렀다. 오드리는 그러다가 링훼이가 죽게 되는 것은 아닐지 두려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는 다시 한번 링훼이의 배를 누르고나서 그녀에게 들여다 보라고 지시했다. 아기의 머리가 약간 밖으로 빠져나온 것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기의 검은 머리카락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오드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중국인 장군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아기의 머리가 보여요." 중국인 장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대신 링훼이의 배에 두 차례에 걸쳐서 압력을 더 가했다. 아기의 머리가 더 많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는 뒤로 물러나서 오드리를 바라보았다. "깨끗한 타월과 시트, 그리고 천이 펼요합니다." 오드리는 그 말을 아기가 곧 태어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타월을 두 손 가득히 받쳐들고 돌아왔을 때, 오드리는 중국인 장군이 소매 속에서 예리한 단도를 꺼내 드는 걸 발견하고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얼마나 달구어 졌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을 정도로 오랫동안 그 단도를 촛불 위에서 달구고 또 달구었다. 살균을 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오드리는 중국인 장군이 그녀에게 준 무기가 그가 소지하고 있던 무기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약속을 지켜 왔고, 만일 그녀를 도와서 링훼이를 구할 수만 있다면 그녀가 오히려 그에게 큰 빚을 지는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단도를 똑바로 치켜 들었으나, 오드리는 그가 단도를 어디에 들이댈지 알 수가 없었다. "아기의 머리가 얼마나 더 나오는지 지켜 봐 주새요." 중국인 장군이 오드리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가 압력을 가하지 않은 이후로는 아기의 머리는 밖으로 더 이상 나오지 않은 상태였고, 링훼이는 아기가 나오기 위해 몸부림을 치자 그 고통을 참지 못하고서 더욱 격렬하게 몸을 뒤틀었다. "다리를 잡고 계세요." 중국인 장군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근엄했든지 오드리는 한동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오드리는 그를 믿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그 이외에 달리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제외하고는 그녀를 도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오드리가 두려운 마음에서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을 보는 순간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아기의 머리가 잘 빠져나올 수 있게 절개를 할 생각입니다. 서둘러요. 단도가 차갑게 식게 해서는 안 되니까요." 오드리는 잠시 주저하다가 링훼이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등을 그녀의 머리 쪽으로 돌린 채 그녀의 두 다리를 있는 힘껏 잡았다. 그러나 링훼이는 거의 저항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반항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오드리가 지켜 보는 동안 중국인 장군의 단도를 쥔 손은 능숙하게 움직였다. 처음에는 피가 나오지 않았으나, 어느 한 순간, 타월을 받쳐 놓은 곳에 갑자기 엄청난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중국인 장군은 긴장된 목소리로, 아까 자신이 했던 것처럼 링훼이의 배를 누르라고 오드리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오드리가 당황한 나머지 머뭇거리자, 시간이 없었던지 소리까지 질렀다. 그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으나, 지금은 오드리와 함께 하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었다. 오드리는 숨을 멈추고서 있는 힘껏 링훼이의 배를 눌렀다. 그리고 중국인 장군은 다시 단도를 달구고 나서 더 깊이 칼을 들이댔다. 링훼이의 입에서 격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아기의 머리가 천천히 자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마가 밖으로 나왔고 오드리가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딱 벌리고 지켜 보고 있는 동안, 두 개의 조그마한 귀와 코, 입을 비롯해서 머리 전체가 밖으로 나왔다. 링훼이는 이제 신음소리 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엄청난 피를 흘렸을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참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이 극심해졌기 때문인지 링훼이는 자신의 핏줄인 계집아이가 세상에 나오는 동안 의식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중국인 장군은 갓 태어난 계집아이를 높이 받아들고서, 그 아이를 마치 자신이 낳기라도 했다는 듯 오드리를 향해서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들은 갓난아기를 담요에 눕힌 다음 깨끗한 타월로 몸을 말끔이 닦아 주었다. 오드리는 몸을 꿈틀거리며 울고 있는 갓난 아기를 지켜 보는 동안, 자신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실로 감격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한밤중부터 줄곧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중국인 장군은 링훼이와 그녀의 아기를 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링훼이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자못 심각했으며, 그는 자신이 단도로 만든 상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는 오드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자신이 우려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링훼이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생명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갓난아기는 살 수 있을지라도, 링훼이의 경우는 운이 아주 좋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죽음만이 기다릴 뿐이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짼 부분을 다시 꿰매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중국인 장군이 말을 하기가 무섭게 오드리는 신속히 움직였다. 그녀는 한 개 뿐인 바늘과 질기고 강한 흰 실을 가지고 와서 상처부위를 꿰매기에 앞서 그가 했던 것처럼 바늘 끝을 불에 달구었다. 상처를 꿰매는 일은 오드리가 여지껏 해본 일들 중에서 가장 힘들었으며, 한 바늘 한 바늘 꿰매 나갈 때마다 그녀는 링훼이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다. 링훼이가 죽는다면 너무나도 불공평할 것 같았다. 아니, 그런 일은 생각할 수 조차 없는 일이었다. 오드리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두 눈은 빨갛게 충혈되었으며, 상처 부위를 모두 꿰맸을 때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오드리는 차가운 물과 깨끗한 수건으로 링훼이의 전신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나서 중국인 장군이 갓난아기를 마치 자신의 자식인양 안고 있는 동안, 링훼이에게 여러 장의 담요를 덮어 주었다. 갓난아기는 곤히 잠들어 있었는데, 그들 중 그 아기가 일본인의 핏줄을 타고 났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사실에 대해서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그 갓난아기는 하나의 새로운 생명체였으며, 그들이 긴 시간 동안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서 생명을 구한 바로 그들의 자식이었던 것이다. "아주 잘 하셨습니다." 의식을 잃은 링훼이의 곁에 있는 오드리를 바라보면서 중국인 장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링훼이는 창백한 얼굴로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오드리는 그녀를 지켜 보다가 문득 불안한 생각이 들어서 중국인 장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색이 너무 창백한 것 같아요." "피를 너무 많이 흘렸으니까요." 중국인 장군 역시 어깨에서 많은 피를 흘리기는 했지만 그는 남자였고 전에도 피를 흘려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산모의 경우에는 문제가 달랐다. 그의 동생도 출산 도중 과잉 출혈로 인해 두 명의 아내를 잃었으나 두 명의 아들은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 특히 첫째 아들이 태어나던 때를 상기하면서 갓난아기를 내려다 보았다. 그때는 상당히 오래 전의 일로 그의 막내 아들은 열 여덟 살로서 장개석의 국민당 군과 함께 산중에 있지만, 새로운 생명체가 기존의 생명체에서 탄생될 수 있다는 경이로움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괜찮을까요?" 오드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어 보았다. 촛불이 거의 다 타들어 가서 깜박거렸지만 그냥 내버려 두었다. 새벽 햇살만으로도 앞이 충분히 보였던 것이다. "나도 모르겠습니다." 중국인 장군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갓난아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유를 먹일 수 없으면 우유라도 먹여야 할 것 같군요." 때마침 신유가 문 앞에 나타났다. 오드리는 그녀에게 원아를 시켜서 젖소의 젖을 짜오라고 시켰으나, 중국인 장군이 염소 젖이 갓난아기가 먹기에 더 나을 것 같다고 말해서 두 가지 젖을 모두 가지고 오라고 다시 지시했다. 오드리는 신유를 돌려보내고 나서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중국인 장군을 쳐다보았다. 그들에게는 갓난아기에게 젖을 먹일 만한 적당한 병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한동안 고심하다가, 옛날에 한 수녀가 끼었던 가죽장갑을 기적적으로 발견하게 되었다. 오드리는 주방의 곤로 위에서 가죽장갑을 끓는 물에 넣고 충분히 소독한 다음 그 장갑 속에 염소젖을 넣어 갓난아기에게 먹일 수 있었다. 갓난아기는 천진난만하게 그 젖을 다 먹고나서 잠이 들었다. 그러나 링훼이는 아직까지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드리는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 보는 동안, 링훼이가 산고를 견디지 못해 생명마저 위험한 지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국인 장군은 다시. 고기 저장실로 돌아갔다. 날이 이미 밝아서 길을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고기 저장실에 숨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오드리와 신유 밖에 없었다. 어둠이 깔려 중국인 장군이 침실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을 때도 오드리는 여전히 링훼이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갓난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아기가 태어난 이후로 단 한 차례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으며 숨조차 쉬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링훼이를 간호하면서 낮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그날 밤, 중국인 장군이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가죽장갑으로 얼르고 있는 동안, 오드리는 자신의 팔에 안겨서 마지막으로 나지막한 한숨을 한번 토하고 나서 숨을 거두는 링훼이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 보았다. 오드리는 링훼이가 숨을 거둔 후에도 오랫동안 그녀를 여전히 팔에 안은 채 그녀가 얼마나 좋은 소녀였으며 이제 어머니를 잃어버린 갓난아기가 앞으로 얼마나 험난한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오드리는 그녀 자신의 어머니와 링훼이의 갓난아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동안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아파왔다. 이 아이는 앞으로 얼마나 괴롭고 외로운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인가? 중국인과 일본인 모두에게서 경멸을 받으며, 쌀이나 콩이나 밀가루 같은 것으로 여자 아이들을 사고 파는 이 험난한 땅에서 홀로 살아가야 하다니..... 링훼이를 덮어 주고 나서 갓난아기를 자신의 품에 꼭 껴안은 오드리의 눈에서는 두 줄기 눈물이 한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중국인 장군은 아랫층에서 차를 끓여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녘이 되자 오드리는 신유를 깨워서 링훼이의 죽음을 알렸다. 신유는 그 순간 걷잡을 수 없이 오열하면서 오드리의 품에 안겨 언제까지라도 떨어질 줄 몰랐다. 오드리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슬퍼하던 아나벨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신유의 슬픔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중국인 장군은 그들을 말없이 지켜 보았다. 그가 이곳에 머무른지도 벌써 이틀밤이 지났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떠나려고 할 때마다 꼭 무슨 일이 생겨서 그를 가지 못하게 막았다. 그는 다시 낮 시간 동안 숨어 있기 위해서 고기 저장실로 돌아가기 전에 오드리와 짤막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상당히 시간에 쫓기는 눈치였다. "오늘은 밤이 되면 떠나야만 합니다. 부하들 생각도 해줘야 하니까요." 오드리는 그동안 헛간으로 먹을 것을 갖다 주기는 했지만, 그의 부하들을 직접 보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고, 오드리는 그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다. 함께 고생을 하고 난 다음부터 그들 두 사람 사이에는 끈끈한 그 무엇인가가 존재하게 되었는데, 두 사람 모두 그 일로 인해 언제까지라도 서로를 잊지 못할 것만 같았다. "도와 주셔서 고마왔어요." 오드리는 중국인 장군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애틋한 애정의 눈길을 보냈다. "갓난아기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중국인 장군은 오드리에게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해서 짐짓 신기하게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많은 점에 있어서 유별난 구석이 많았고 그는 그녀가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확실하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토록 먼 곳에서 온 몸이건만, 자신이 맡게 된 책임을 너무나도 신중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신이 기르실 건가요?" 오드리는 너무도 뜻밖의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의 얼굴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곳 고아원에서 지내게 할 생각이에요. 이 아이 역시 다른 원아들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당신 자신은 어떻습니까? 태어나는 걸 지켜 본 사람으로서, 당신은 이 아이가 어떤 면에서는 당신의 아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그는 오드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오드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옳았다. 오드리는 아기가 태어난 후, 마치 자신의 일부분이 새롭게 이 세상에 나온 듯한 느낌을 받아 왔다. 링훼이의 죽음이 너무나도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기에 아기가 태어났어도 별다른 기쁨을 느끼지 못했을 뿐, 만일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오드리는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크나큰 기쁨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훗날 떠나시게 되면 이 아이를 함께 데리고 가서, 이 험난한 땅에서 구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국인 장군은 갓난아기를 그들 두 사람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서 태어나게 했던 만큼, 오드리가 중국을 떠날 때 아기를 내버려두고 가지 않기를 원하는 눈치였다. 오드리는 그렇게 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지막히 한숨을 쉬었다. "저 역시 중국을 떠날 때 이곳 아이들 모두를 데리고 가고 싶어요.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걸요. 수녀님들이 오시면 저는 가야만 해요." 오드리는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웬일인지 가슴속에서는 자신이 아이들과 그를 내팽개치려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기를 기아와 무지가 들끓는 이 험난한 땅에 내팽개치고 돌아가실 생각인가요? 만일 당신이 데리고만 가 준다면 이 아기는 다시없이 행복해질 수도 있는데 말씀입니다." 그의 눈빛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오드리는 마치 아주 오래 전부터 그를 알고 지내왔다는 듯, 결코 낯설지가 않은 사람이라는 듯, 그에게 빨려드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중국인 장군이 아니며, 그녀에게 낯익은 세계는 바로 이곳 밖에 없다는 그런 느낌까지 들었다. "나는 운이 좋아서 그레노블에 갈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중국인 장군은 오드리에게 서글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아기에게도 그런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오드리가 데리고 가지 않을 경우 갓난아기가 앞으로 어떤 나날을 보내야 할지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돌아왔잖아요?" ''그것은 나의 의무였으니까요. 하지만 이 아기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일본인의 피를 받고 태어난 아기는 아무도 원치 않을 거구요." 중국인 장군은 아기가 태어나는 바로 그 순간, 바로 그 차이점을 알아볼 수 있었다. 갓 태어난 아기였지만 순수한 중국인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인 트기라는 이유 때문에 이 아기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아기를 구해 주세요. 중국을 떠날 때 함께 데리고 가 주세요." 오드리는 중국인 장군이 그녀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링훼이의 죽음에 대한 충격이 아직까지도 가시지 않았고, 그녀에게는 비단 이 아기 뿐만이 아니라 다른 원아들에 대해서도 보살펴 주고 걱정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럼 다른 아이들은 어떡하구요?" "그 애들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냥 남겨 놓고 가셔도 되겠지만, 이 아기는 당신이 이곳에 오셨을 때 없었지 않습니까. 지금은 당신의 아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중국인 장군은 처음에는 구해 줄 마음이 없었지만 이제 그들의 아이가 되어 버린 어린 생명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었다. 오드리는 그날 하루 종일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지내는 동안, 그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으며 그녀 또한 아기에게 점점 더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지역 관공서에 링훼이의 죽음을 알려야, 할 필요가 있었으나, 오드리는 중국인 장군과 그의 부하들이 고아원 주변에 머물고 있는 동안은 그 사실을 알리기가 두려웠다. 그래서 링훼이의 시신을 담요로 싸서, 바깥 헛간 속에 집어 넣었다. 그 다음날 중국인 장군 일행이 떠나게 되면 그때 신고를 할 생각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정신없이 바빴다. 신유의 슬픔을 달래 주고, 갓난아기를 비롯해 다른 원아들의 뒷치닥거리를 하는 동안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오드리는 중국인 장군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졌는데, 다행히 너무나도 바빴던 관계로 그에 대한 생각을 잠시 잊어 버릴 수 있었다. 그날 밤, 원아들이 모두 잠자리에 들고난 후 중국인 장군이 오드리의 침실을 찾아와서 가볍게 노크했다. 그는 자신의 권총과 칼을 되돌려 받고 나서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앞의 외국인 여자를 언제부터인가 존경하고 있었으며, 그녀와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레노블에서 만났던 그 어떠한 여성보다도 더 아름다왔다. 그레노블 시절에는 자신과 같은 중국인에게만 마음이 끌렸었는데 참으로 이상한 변화였다. 상념에 빠져 있던 중국인 장군은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오드리의 말을 듣고서 정신읕 차렸다. 그는 두 손으로 오드리의 두 뺨을 가볍게 감쌌으며 오드리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부드러운 손길과 정이 듬뿍 담긴 그의 눈길을 대하고서 정신마저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오드리는 그를 두려워할 이유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다는 걸 그때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또한 그에게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끌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으나, 두사람 모두 이렇게 헤어질 수 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안녕히 계세요. 오드리 양.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아무리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도, 그에게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오드리와 관련이 없는 또 다른 세계이기도 했다. "어디로 가실 건데요?" 오드리의 눈빛 속에는 걱정과 관심, 그리고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산맥을 넘어서 바룬 우르타 지역으로 갈 겁니다. 언젠가 다시 이 길로 돌아올 날이 있겠지만, 그때 당신은 이미 당신의 나라로 돌아가고 난 다음이겠죠." 두 사람의 시선이 오랫동안 서로에게 고정되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리고 오드리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놀라울 정도로 중국인 장군에게 깊이 빠져 있었다. 이 순간에는 찰스의 기억마저 희미해져 버리고 말았다. "어깨 조심하세요. 장군님." 그는 오드리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나서, 그녀의 팔에 안긴 갓난아기를 내려다 보았다. 갓난아기는 그녀의 품에서 마치 어린 천사처럼 평화스럽게 곤히 잠들어 있었다. "우리의 아기를 잘 보살펴 주기 바랍니다." 그는 이렇게 속삭이고 나서 그녀의 두 뺨을 손으로 가볍게 어루만지며 사랑스런 눈길을 보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뗘나갔다. 눈을 밟고 떠나가는 그의 발자욱 소리도 점검 더 희미해져 가다가 이윽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드리는 갓난 아기를 가슴에 꼭 껴안은 채 그가 남기고 간 말들을 생각해 보았다. '우리의 아기를 잘 보살펴 주기 바랍니다. 우리의 아기를....' 오드리는 문득 그녀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강렬한 애정이 솟구쳐 올라오는 걸 느꼈다. 자신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는 갓난 아기에 대한 애정과 더불어 그 아기를 구해 준 중국인 장군에 대한 기억이 그녀의 전신을 싸고 돌았다. 오드리는 베개를 등에 받치고 누워 있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꿈을 꾸었다. 그녀의 할아비지, 갓난아기, 찰스, 그리고 중국인 장군에 대한 꿈을.... 18 마이 리가 생후 2개월 정도 되었을 때였다. 언젠가 오드리와 찰스를 역에서 고아원 앞까지 태워다 주었던 그 차가 다시 고아원을 찾아와서 무거워 보이는 진한 감청색 수녀복에 검은 망토를 걸치고 흰 코이프- 역자 주:두건의 일종-를 쓴 두 명의 수녀를 내려놓았다. 그들은 프랑스나 일본, 혹은 중국의 다른 고아원에서 온 것이 아니라 벨지움에서 온 수녀들로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그들이 출발했다는 전보가 한 달 전에 오드리 앞으로 배달되었으나, 그들이 언제 도착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두 명의 수녀는 고아원에 도착했을 때, 원아들을 보살피고 있는 사람이 자신들과 같은 수녀가 아니라 오드리라는 사실을 알고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에게 그간의 모든 상황을 설명해 주고 고아원 주변을 보여 주는 동안 오드리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남아 있는 열 여섯 명의 원아들에 대해서 일종의 소유욕 같은 걸 느꼈던 것이다. 그들은 이제 그녀의 자식들이나 다를 바 없었고, 특히 그녀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 나이 어린 원아들과 링훼이처럼 그녀를 존경하면서 따르는 신유, 그리고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불러 줄 때마다 방긋 미소를 짓는 마이 리의 경우에는 친모녀간 이상으로 정이 들어 있었다. 마이 리는 앙증맞을 정도로 귀엽고 극히 사교적이어서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오드리는 두 명의 수녀에게 자신이 어떻게 해서 이곳에 오게 되었는 지를 설명해 주었는데, 그들은 오드리의 헌신적인 봉사정신에 너무나도 감동한 나머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드리는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하다 이곳에 들르게 되었는데, 친구들은 7개월 전에 모두 영국으로 돌아가고 자신만이 이곳에 남게 되었다고 말했다. 오드리는 이제 마음대로 떠날 수 있는 홀가분한 몸이 되었으나, 혼자 떠나가기가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아이들을 남겨 놓고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중국어를 가르쳐 주기 시작했던 신유가 특히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오드리가 헤어지게 돼서 무척 유감이라고 말하자 신유는 슬픈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부모, 오빠들 그리고 언니를 비롯해서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잃었는데, 신유는 이제 자신의 수호천사 역할을 해주었던 오드리마저 잃게 되었던 것이다. "너에게는 마이 리가 있잖아." 그러나, 신유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면서 인상을 잔득 찌푸렸다. 그녀는 이제 열두 살이었는데, 오드리가 고아원에서 함께 지낸 지난 몇 개월 동안 몰라볼 정도로 성숙해져 있었다. "마이 리, 나쁜 계집애. 아주 나쁜 계집애!" "이게 무슨 소리야, 신유?" 오드리는 신유가 뜻밖의 반응을 보이자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되물었다. "마이 티는 중국인이 아니예요. 하느님이 보내 준 아기도 아니고. 그 애는 일본인이야. 그래서 언니가 죽게 된 거야. 일본인 아기를 낳았다고 벌을 받아서." "누가 너한테 그런 얘기를 하든?" 오드리는 그런 이야기를 할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는 데도 불구하고 신유가 그처럼 엄청난 이야기를 늘어놓자 이만저만 큰 쇼크를 받은 게 아니었다. 그러나 신유는 자신의 두 눈을 가리켰다. "내 눈에 보이는 걸요. 마이 리는 일본인이야, 그리고 언니가 좋아한 일본인 소년도 기억이 나..." 신유는 슬픈 표정을 지었으나, 그 슬픔은 자신을 속였던 언니 때문에 느끼는 것만은 아닌 듯 싶었다. "언니가 나한테 거짓말을 했어요. 마이 리는 하느님이 보내 주신 아기가 아닌데.." "아기들은 전부 하느님이 보내 주시는 거란다. 신유. 그리고 언니는 너를 굉장히 사랑했어요." 신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드리는 갓난아기가 일본인도 중국인도 아니기 때문에 사회의 온갖 멸시를 다 받게 될 것이라는 중국인 장군의 말이 생각났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게 된 마이 리가 영원히 외톨이가 될 수 밖에 없다는 현실을 생각해 보자 오드리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짐을 챙기며 떠날 채비를 하는 동안에도 그 생각은 그녀의 마음을 떠나지 않고 더욱더 무겁게 만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오후에 오드리는 두 통의 전보를 보내기 위해서 우체국으로 향했다. 우선 찰스에게 전보를 보내서 그녀는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으며 곧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갈 것이라고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전보를 받아보면 찰스도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오드리는 편지를 보내서 몇 주일씩 찰스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오드리가 찰스에게 보낸 전보 내용은 간단명료했다. '마침내 수녀 도착. 곧 하르삔을 떠나 요꼬하마 경유해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갈 예정임. 아무 문제 없음. 당신을 항상 사랑해요. 오드리.' 그리고, 할아버지에게도 거의 비슷한 내용의 전보를 보내 정확한 도착 날짜를 알게 되는 대로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틀 후, 오드리는 우체국 사환으로부터 한 통의 전보를 받아들고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너무나도 뜻밖의 전보였기 때문이었다. 오드리는 우체국 사환에게 수고한 대가로 동전 한닢을 건네 주었다. 뜻밖에 팁을 받게 된 우체국 사환이 희희낙락하면서 돌아가고 난 후, 오드리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어 전보용지를 꺼냈다. 그녀는 할아버지에 대한 소식이 적혀 있지나 않을까 해서 마음이 불안했다. 하르삔에 너무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자신도 모르게 긴장되었던 것이다. 한 순간,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고여 왔다. 오드리는 지켜보고 있던 수녀들에게 등을 돌리고 원아들까지 달래서 보내 버렸다. 잠시 후, 수녀 한 명이 그녀에게 다가와서 상냥하게 물었다. "아주 나쁜 소식인가 보죠. 오드리 양?" 오드리는 고개를 저으면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가운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예요. 그게 아니라... 처음에는 할아버지가 보내신 전보인 줄 알고 두려워했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전혀 다른 사람이 보내 온 전보예요. 그냥 놀랐을 따름입니다." 오드리는 참으려고 해도 자꾸만 터져나오는 눈물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너무 감격스럽기도 하구요." 전보는 찰스에게서 온 것이었다. 오드리는 침실로 들어가서 전보의 내용을 다시 혼자 읽어 보고 난 다음, 오랫동안 산책을 하며 생각에 잠겼다. 오드리는 그가 보낸 전보를 읽고서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찰스에게 곧 답장을 보내야 될 것만 같았으나 편지로 보내면 너무 늦을 것이 분명했다. 찰스는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답장을 받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런던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겠오? 당신과 의논해야 할 중대한 문제가 있오. 나와 결혼해 주지 않겠오? 당신을 사랑하는 찰스로부터.' 전보에는 오드리가 듣고 싶었던 말들이 전부 적혀 있었으나,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최소한 지금 당장은 불가능했다. 오드리는 할아버지가 보낸 편지들을 주의깊게 읽어 보았었다. 할아버지의 필체는 갈수록 떨리고 있었고, 갑자기 매우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분명히 크게 낙담하고서, 오드리가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더 이상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오드리는 이런 이유 때문에 무슨일이 있어도 런던을 경유해서 미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전보로 그런 말을 전하는 것은 너무 무례하고 건방진 일인 것 갈았으며 쉽지도 않은 일이었다. 찰스가 우선 그녀를 가능한 한 빨리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고 나서 결혼 문제는 그때 의논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오드리는 아나벨이 '하나'라고 이름을 지어 준 딸을 출산하기 전에 그녀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데 대해 몹시 격분하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나벨에게는 남편과 하인들, 그리고 사실상 별로 도움은 되지 않더라도 시어머니까지 옆에 있으니 부족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드리가 머물고 있던 고아원의 원아들에게는 보살펴 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아나벨은 천국 생활을 누리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아나벨은 그런 사실을 조금도 이해해 주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오드리가 그토록 걱정하는 것은 아나벨이 아니었다. 오드리가 신경을 쓰는 것은 바로 할아버지였으며, 그녀는 다음날 아침 찰스에게 전보를 띄우면서 그런 사실을 전달하려고 했다. '찰스, 저 역시 런던을 경유해서 가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할아버지가 지금 곧 저를 필요로 하세요. 따라서 샌프란시스코로 급히 돌아가야만 합니다. 저를 용서해 주시겠죠? 집에 도착하는 즉시 전화드릴께요. 당신의 청혼은 정말 근사했어요. 언제나 당신을 사랑하는 오드리로부터.' 전보 내용은 신통치 않은 답변인 것 같았으며, 오드리는 혹시 런던을 경유하지 않겠다고 해서 찰스가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까지 들었다. 그러나 오드리에게 지금은 다른 방도가 없었을 뿐더러 할아버지를 홀로 남게 하지 않으면서 가까운 장래에 자신이 결혼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을 찾을 수도 없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볼 때, 할아버지는 잠시 동안이라도 그녀가 집에 머물러 있기를 원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비록 찰스와 결혼하는 것이 최대의 희망이기는 했지만, 그처럼 곤욕스러운 선택을 해야 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혹은 더욱 고통스러울지도 모르는 다른 일들도 있었다. 함께 받아낸 갓난아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중국인 장군이 했던 말이 오드리의 귓가에서 계속 맴돌고 있었다. '...이 아이를 함께 데리고 가 주세요. 오드리 양....' 그러나, 오드리는 그 방법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오드리는 또한 신유까지 미극으로 함께 데리고 갈 생각을 했었으나, 그녀가 이야기를 꺼내기가 무섭게 신유는 질겁을 했다. 신유는 중국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것이라고는 하르삔과 그 주변지역 뿐이었다. 신유는 이곳에서 자기나라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싶어했다. 그리고 대다수의 아이들처럼 이제는 고아원 생활에도 익숙해져 있었다. 고아원에서의 생활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고아원 원아들에게 없는 것이라곤 아버지와 어머니 뿐이었다. 그리고 오드리는 지난 몇 개월 동안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더없이 훌룡한 어머니의 역할을 해줬었다. 수녀들은 고아들을 위해서 그처럼 헌신적으로 봉사한 오드리라면 틀림없이 축복받을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오드리는 상하이에 전보를 쳐서 상하이 호텔의 객실과 요꼬하마 행 프레지던트 쿨릿지 호의 선실을 각각 예약했다. 이제는 서둘러야만 했다. 벨지움 수녀들이 도착한 지도 벌써 2주일이 지났고 오드리는 짐을 전부 꾸린 상태였으며, 이제 하룻밤만 더 지나면 원아들과도 작별을 해야 했다.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겠어요. 오드리 드리스콜 양." 오드리가 떠나기 전날 밤 작별 파티가 열렸다. 원아들이 오드리를 위해서 노래를 불러 주었다. 그들은 두 명의 수녀들 중 나이가 더 젊은 수녀를 몹시 좋아했는데, 자기네들한테 엄격하게 대하는 다른 수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별로 마음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아주 친숙해진 오드리의 경우에는 전혀 어색하거나 머뭇거리는 기색이 없었다. 다음날 역에서 헤어지려면 모두에게 슬픈 일이 될 것이 분명했으나, 원아들은 모두 역에 나가서 오드리를 전송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드리는 두 명의 수녀에게 중국인 장군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혹시 그가 다시 찾아오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오드리는 마이 리의 아기 침대를 다른 원아들이 자는 방에 갖다 놓았다. 지금까지 그런 일은 한번도 없었으나, 이제는 용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다른 원아들의 방에서 함께 잠을 자다가 깰 경우, 수녀들이 마이 리의 울음소리를 듣고서 그 아이에게 염소 젖을 먹여 줄 수 있었다. 오드리는 그날 밤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마이 리의 울음 소리를 모른척 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다. 하지만 그녀는 마이 리가 자신을 찾으면서 그렇게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난 수 개월 동안 오드리는 밤낮으로 마이 리를 자신의 품에 안아서 키워 그리고 마이 리가 알고 있는 어머니라고는 오드리 뿐이었는데, 이제 그 어머니를 잃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밤새도록 잠을 설치면서 몸을 뒤척이는 오드리의 가슴은 미어질 것만 같았다. 그녀를 볼 때마다 방긋 미소를 지으면서 깜박 거리던 마이 리의 크고 검은 눈동자가 눈앞에서 자꾸만 어른거렸다. 그러다가 오드리는 마지막 용기를 내서 그 다음날 새벽 무렵에 마이 리의 침대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호기심이 잔뜩 서린 초롱초롱한 눈으로 마이 리가 그녀를 올려다 보는 순간 오드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오드리는 마이 리를 침대에서 들어올려 자신의 품에 꼭 껴안았다. 뺨을 타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이제 그녀는 이 갓난아기를 낳고 숨을 거두었던 깜찍한 소녀 이외에 다른 그 어느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링훼이 만큼 좋아했던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오드리는 마이 리를 안고 너무나도 깊은 상념에 빠져 있어서 수녀 한 명이 그녀 곁으로 조용히 다가서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수녀는 오드리가 오열하는 것을 한동안 지켜 보다가 그녀의 어깨 위에 조용히 손을 얹었다. "데리고 가세요. 오드리 양. 데리고 가세요. 당신은 결코 이 아기 곁을 떠날 수 없어요." "알고 있어요. 저도." 오드리는 힘겹게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나이 든 수녀를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수녀 또한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잔잔한 눈길로 오드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을 홀로 남겨 놓고. 떠나서는 안됩니다. 이 아기 또한 이곳에서는 살 수가 없을 겁니다. 항상 사람들의 온갖 멸시와 수모를 받으며 살아가야 할 거예요. 일본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중국인도 아니니까요. 마이 리는 당신의 마음속에서 언제까지라도 떠나지 않을 당신의 아이입니다. 중요한 건 바로 그것 밖에 없어요." "샌프란시스코에서도 과연 그럴까요?" 이것은 수녀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오드리 본인에게 제시하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오드리의 귓가에는 중국인 장군의 말 밖에 들리지 않았다. '떠나실 때 이 아기를 데리고 가세요. 떠나실 때 데리고 가세요....' "샌프란시스코에서도 이 아기가 귀염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오드리 양께서 보호해 주시면 됩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아나벨은? 그리고 하코트는?.... 게다가 찰스는? 과연 이해해 줄까? 그러나, 오드리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이 갓난아기 생각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수녀와 중국인 장군의 말이 옳았다. 그녀는 마이 리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건 불가능했던 것이다. 오드리는 마이 리를 꼭 껴안은 채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면서 수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되죠? 이 아기를 어떻게 하면 데려갈 수 있을까요?" 나이 든 수녀는 그녀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오드리가 자신이 여지껏 만나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놀랄만한 여인이라고 생각했으며 사실 또한 그러했다. "우리가 아기의 짐을 챙겨 놓겠어요. 염소 젖도 물론 충분히 준비해 놓겠습니다." "서류 같은 건 필요없을까요? 여권이라든지...." 오드리는 이제 두 시간 후면 떠나야 했다. 지금까지 그런 것에 대해서 생각해 오지 않았다가 갑자기 신유를 비롯한 모든 원아들을 데리고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걸 또 다른 한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이 리의 경우는 달랐다. 마이 리는 처음부터 그녀의 아이였고, 그녀가 만일 마이 리를 이곳에 남겨 놓고 떠난다면 그 누구도 그 아이를 사랑해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드리는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다시 한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마이 리가 이 고아원의 원아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저희가 만들어 드리겠어요. 떠나실 때 상하이의 출입국 관리들에게 그 서류를 제시하면 될 거예요. 그럼 무사히 통과하실 수 있어요. 고아를 붙잡아 두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고국에 돌아가셔서 이 아이를 양녀로 입양하시는 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이곳까지 오시는 동안은 여러 경계 지역을 넘어야 했기 때문에 힘드셨겠지만, 나갈 때는 한결 더 수월할 거예요." 수녀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 복잡할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으며, 짐을 챙기는 오드리의 손은 갑자기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그후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모두들 기차역에 모여 있었다. 눈물을 홀리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드리는 하르삔의 아메리컨 뱅크에 입금되어 있는 상당한 액수의 돈을 수녀들에게 넘겨 줬었다. 오드리는 그 돈이 고아들을 위해서 쓰여지기를 원했으며, 신유에게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꾼다면 함께 데리고 가겠다고 말했다. 원한다면 어느 때라도 그녀를 데리러 사람을 보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신유는 젊은 수녀의 손을 꼭 잡은 채 계속 흐느껴 울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이곳에 남아 있기를 원했던 것이다. 신유는 마이 리에게 작별의 키스조차 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다른 원아들이 오드리에게 모두 키스를 하고 나서야 자신도 그녀에게 작별의 키스를 했다. 오드리는 기차가 서서히 플랫폼을 벗어나고 있는 동안에도 마이 리를 꼭 껴안은 채 계속 오열하고 있었다. 오드리는 다시는 이곳에 돌아올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떠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8개월 동안 그토록 사랑하면서 보살펴 주었던 모든 어린이들.... 링훼이.....그리고 중국인 장군에 대한 잊지 못할 기억들.... 오드리는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잠들어 있는 마이 리를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마이 리를 품에 안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는 여행을 시작하면서 눈을 꼭 감은 채, 그녀가 떠나고 있는 사람들과 그녀가 돌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하나밖에 없는 인생에서 그들 두 세계를 어떻게 연결시켜야 할 것인지 혼란의 미로 속을 헤매면서... 19 오드리는 그 다음날 프래지던트 쿨릿지 호에 승선하기에 앞서 상하이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오드리는 그동안 하르삔에서 북경까지 온 다음, 북경에서 야간열차를 다고 상하이까지 곧장 왔다. 그녀는 이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일단 상하이에 도착하자 그녀의 머릿속에서 찰스에 대한 생각이 단 한순간도 떠나지 않았다. 오드리는 상하이에서 그들이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 떠올랐으며, 런던을 경유해서 갈 수 없다고 소식을 전한 자신의 전보에 대해서 답장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해야 될 다른 일들이 많았다. 수녀들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들이 마이 리의 출생에 관해서 작성해 준 서류는 지방 관리들로부터 아무런 이의도 제기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마이 리를 데리고 나가는 일에 대해서 오드리에게 하등의 문제도 재기하지 않았으며, 일본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드리는 일이 의외로 쉽게 풀려나가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며, 프래지던트 쿨릿지 호에 승선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무렵 거의 6월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집을 떠나온 지 정확히 1년이 지난 셈이었다. 오드리는 어떤 배로 도착할지 알려 주겠다고 미리 전보를 보냈었는데, 호놀룰루에 정박할 때 다시 소식을 보내 줄 생각이었다. 프래지던트 쿨릿지 호는 상하이를 떠난 지 이틀만에 제일 먼저 고베에 도착한 후 그곳에서 요코하마를 거쳐 호놀룰루로 직행했다. 마이 리와 함께 선실에서 지내는 동안, 오드리는 벌써 집에 다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승선한 이후로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으며, 마이 리와 함께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선실에서 보냈다. 그녀는 바람을 씌기 위해 갑판을 거닐면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가끔 잡담을 나누기도 했으나, 마이 리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기 위해 선실에서 식사를 했고 낮선 사람들에게 마이 리를 맡겨놓고 싶지도 않았다. 따라서 그녀의 여행은 처음부터 조용했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생각하면서 보냈다. 그녀는 여객선 도서관에 장서가 많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으며, 지난 일년 동안 읽지 못했던 콜드웰의 작은 묘지와 제임스 힐튼의 잃어버린 지평선과 피츠제럴드의 부드러운 밤의 손길 등과 같은 책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12일만에 하와이에 도착했다. 여객선은 그날밤 하와이에 정박하고 나서 다음날 아침에 다시 출발했는데, 그로부터 6일 후에 샌프란시스코 만에 진입하여 여객선이 엠바카데로에 입항하자 오드리는 마치 신기루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누가 나와 있을지 궁금해 하면서 부두 쪽을 바라보는 그녀의 가슴은 몹시 뛰고 있었다. 오드리는 호놀룰루에서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하려고 했었으나 통화가 되지 않아서 대신 전보를 보냈었다. 문득, 오드리는 낯익은 사람을 발견하고서 마침내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여객선이 정박 준비를 하는 동안, 은색 지팡이를 들고 부두에 홀로 서 있는 노신사의 모습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던 것이다. 오드리는 멀어서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눈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오드리와 직접 대면했을 때는 눈물이 말라 있었다. 오드리는 언제나 처럼 마이 리를 품에 안고서 떨리는 발걸음으로 트랩을 천천히 내려왔다. 마이 리는 포대기로 쌓여 있어서 옆 사람은 무슨 물건으로 행각할 정도였다. 오드리는 할아버지를 보는 순간, 눈물이 더욱 걷잡을 수 없게 터져 나왔다. 할아버지는 일년 전보다 훨씬 더 수척해 보였으나, 그는 오드리가 그토록 사랑해 왔던 할아버지임에 틀림없었다. 오드리는 할아버지에게 달려가서 그 품에 안기고 싶었으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그녀는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이 곁을 떠나 있는 동안 할아버지의 고통이 얼마나 대단했었을 지에 대해서 짐작할 수 있었으며, 할아버지가 과연 그녀를 용서해 줄 것인지 마음이 심히 불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어찌되었거나 할아버지는 그녀를 마중하러 나와 주었고, 이는 그녀를 용서해 주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와 달리 어찌되었든 할아버지의 곁으로 다시 돌아왔으니까 말이다. 오드리는 그처럼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진 빚을 그녀만이라도 갚고 싶었기에, 이처럼 집으로 돌아옴으로써 비록 귀중한 것을 잃기는 했지만 샌프란시스코로 곧장 직행했었다. 그녀는 사실상 런던을 경유하지 않겠다는 전보를 받아들고서 찰스가 무슨 생각을 했었을지 지금에 와서야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르삔에 남아 있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다음에는 런던을 거치지 않고 할아버지 곁으로 곧장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니 찰스가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그러나, 오드리는 트랩을 내려서서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이렇게 돌아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마이 리를 가슴에 안고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할아버지는 눈 한번 깜박거리지 않고 그녀를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녀가 다가서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드리가 걸음을 멈춘 후,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주시하기만 했다. 이윽고, 오드리가 입술을 가늘게 떨면서 할아버지의 목을 두 손으로 껴안았다. 때를 같이 해서 참았던 울음이 본격적으로 터지고 말았다. 할아버지가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거리는 동안에도 그녀는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오드리가 다시 뒤로 물러났을 때 할아버지의 눈시울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오드리를 내려다 보면서 처음에는 거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르삔에서 지내는 동안 쓸쓸한 밤이면 그녀 앞에 나타나곤 했던 할아버지의 근엄한 모습은 지금도 그대로였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다. 이 녀석아." "미안해요. 할아버지. 제가 너무 늦게 돌아와서. "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했다. 그러나 오드리가 보기에는 할아버지가 예전보다 지팡이에 몸을 더 의존하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시선이 오드리가 안고 있는 포대기에 머물렀다. "그게 대체 뭐냐?" 할아버지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그녀 쪽으로 지팡이를 흔들었다. 오드리는 어설프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할아버지가 조그마한 갓난아기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몸을 틀었다. 마이 리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 "마이 리라고 해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움찔하면서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읕 역력히 드러냈다. "이런 세상에.... 넌 역시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나 보구나." 할아버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오드리는 잠시나마 할아버지가 충격으로 쓰러지지나 않을까 해서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는 가문에 먹칠을 했어! 뮤리엘 브라운의 말이 맞았군. 처음에는 그 여자의 말을 믿지 않았었건만 피살당한 수녀와 버려진 고아들이 어떻고 저렇고 하더니 이게 말이나 될 법한 일이냐, 이게!" 오드리는 할아버지가 이처럼 격노하는 모습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말이 너무나도 뜻밖이어서 그녀는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마이 리가 그녀의 딸이라고 할아버지가 생각할 줄은 짐작조차 못했던 것이다. 오드리는 뮤리엘 브라운이라는 이름이 언급되는 것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브라운 부인이 할아버지께 그런 말을 했었나요?" 오드리 또한 분노로 인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네가 어떤 남자와 함께 여행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노골적으로 화를 내면서 오드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나는 그 여자한테 잘못 보았을 거라고 말했는데.... 넌 정말이지 염치도 없고 수치심도 모르는 아이로구나, 오드리. 이... 이 후레자식을 집으로 데리고 돌아오다니..." 할아버지는 다음 말을 이을 줄 모르고 입술만 떨고 있었고, 오드리는 할아버지가 얼마나 진노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어떻게 감히 이럴 수가 있어!" "제가 뭘 어떻게 했길래요? 이 아이를 사랑하는 것도 죄가 되나요. 할아버지? 아니예요. 이 아이는 제 아이가 아니란 말이에요. 고아원에서 제가 데리고 왔어요. 제가 중국에 남겨 놓고 데려오지 않았다면, 이 아이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목숨을 잃었거나 질병이나 굶주림으로 죽게 되었을 지도 몰라요. 아니면 나중에 창녀로 팔려나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구요. 이 아이는 일본인과 중국인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하지만 저는 이 아이를 사랑해요. 그래서 함께 온 거예요." 오드리는 다시 울음을 터뜨리면서 할아버지의 말에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 그랬었느냐..... 이 할애비가 모르고 있었구나." 할아버지의 두 눈에도 천천히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는 오드리의 얼굴에서 지금껏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맹목적인 사랑, 갓난아기에 대한 이타적인 사랑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오드리가 자신과 함께 살기 위해서 하와이에서 돌아왔을 때 느꼈던 그러한 감정을 지금 오드리에게서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이 할애비는 그런 것도 모르고..." 할아버지는 슬픔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는 오드리가 그를 잊어버리고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드리는 갓난아기와 함께 이렇게 돌아와 주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엉뚱한 생각을 했었으니..... 할아버지는 다시 오드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드리는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서 부끄러움 없이 너무나 당당하게 서 있었다. 할아버지의 마음은 언제나 그랬듯이 다시 오드리에게 기울었다. 할아버지는 오드리의 눈을 바라다보며 말했다. ''돌아와 줘서 고맙다. 오드리. 그리고 반갑구나." 오드리는 눈물을 글썽이며 미소를 지어 보이고 나서 할아버지 쪽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저도 그래요. 할아버지. 저도 그래요." 할아버지는 오드리의 어깨를 가볍게 껴안고서 차쪽으로 데리고 갔다. 오드리가 마이 리를 꼭 껴안고 먼저 탄 다음, 할아버지가 뒤이어 차에 올랐다. 할아버지는 부두에 롤스로이스 승용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는데, 운전기사가 오드리의 짐을 부지런히 챙기고 있었다. 세관은 이미 통과를 한 다음이었기 때문에 뒷치닥거리는 전부 그의 일이었던 것이다. 마이 리의 입국도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었으며, 오드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푹신한 쿠션에 등을 기대고서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100년은 더 흐른 것 같았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오드리가 지금 자기 옆에 앉아 있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기는 괜찮으냐?" 할아버지는 얼굴을 한번 들여다 보려고 하면서 자고 있는 마이 리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오드리는 할아버지가 그처럼 관심을 보이자 마음이 뭉클해졌다. "괜찮아요." 오드리는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몸을 기대어 할아버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순간, 그녀는 할아버지 특유의 체취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오드리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확인한 후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지 눈을 지긋이 감았다 뜨기까지 했다. ''그래, 이 아기를 왜 굳이 데려와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느냐?"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예요. 할아버지. 이 아기를 남겨 놓고는 떠나올 수가 없었어요. 중국에 남겨 놓았다면 모두들 이 아기를 죽이려고 했을 테니까요." 할아버지는 오드리의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마이 리가 가느다랗게 응얼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꿈지락 거리기 시작하자, 오드리는 그 모습을 할아버지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몸을 약간 뒤틀었다. 마이 리는 앙증맞을 정도로 귀여웠고,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할아버지는 한동안 넋을 잃고 마이 리를 내려다 보다가 오드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아이가 분명히 네 자식이 아니라는 게 확실한 거냐. 오드리?" 오드리는 아기를 낳고도 남을 정도로 오래 떨어져 있었고, 뮤리엘 브라운이 한 얘기도 있으니 할아버지는 아직까지 확신이 서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드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가 봐요. 차라리 내 아기였으면 좋겠는데." 할아버지가 그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라자 오드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 브라운 부인이 이야기 거리가 생겼다고 좋아할 것 같아서 그랬을 뿐이에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처음에는 그녀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한숨을 쉬면서 여객선을 지긋이 응시하다가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동안 나는 뮤리엘 브라운의 이야기가 옳다고 생각했었단다. 그 여자 얘기로는 상당히 유명한 작가라고 하던데...." 할아버지는 오드리의 반응을 찬찬히 살펴 보면서, 이상한 기미를 찾아 내려고 했다. "찰스 파커스코트라는 제 영국인 친구를 말씀하시는 모양이군요." 오드리는 찰스의 이름을 대면서 마음이 두근거렸으나, 할아버지가 지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찌되었거나 지금은 내색할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오드리는 다시 몸을 뒤로 젖히면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다시 갓난아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 아기의 이름이 뭐라고 했느냐?" 할아버지는 마이 리에게 푹 빠진 것 같았다. 나이가 거의 비슷한 아나벨의 딸보다 마이 리에게 더 마음이 끌리는 눈치였다. 아나벨의 딸은 하코트를 꼭 빼닮았고, 항상 울기만 했던 것이다. 오드리가 미소를 지었다. ''마이 리예요.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옆에 다시 앉아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고, 나아가서 링훼이의 아기를 안고 있다는 것은 더욱 믿어지지 않았다. "몰리?" 할아버지가 오드리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몰리라고 그랬느냐?" "아무래도 좋아요. 할아버지." 그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할아버지가 손을 내밀어 오드리의 탄탄한 손을 자신의 연약한 손으로 꼭 잡았다. 그는 벌써 여든 둘의 고령이었던 것이다. "다시는 이 할애비 곁을 떠나지 말아다오, 오드리." 할아버지는 짐짓 성을 내면서라도 이 말을 힘있게 하고 싶었으나, 마치 마음속으로 애원하는 말처럼 흘러나오고 말았다. 오드리는 할아버지의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할아버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약속드릴께요. 할아버지. 약속드릴께요." 오드리는 이 말을 하는 순간 만큼은 찰스에 대한 생각을 억지로라도 지워 버려야 했다. 20 "그녀가 뭘 어떻게 했다구요?" 바이올렛이 깜짝 놀라 제임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는 방금 해서는 안 되는 말인 줄을 알면서도 찰스가 너무나 불쌍한 것 같아 바이올렛에게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꺼내고 만 것이었다. "오드리가 그에게 등을 돌렸다나봐. 그가 그녀에게 결혼을 하자는 이야기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런던에 들려달라고 전보를 쳤는데 그녀로부터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답장이 돌아왔다는 거야." ''런던을 들릴 수 없다는 건가요. 그와 결혼을 하지 못하겠단 건가요?" 두 가지 모두인 모양이야. 정확하게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말이야. 게다가 그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는 워낙 취해 있었거든. 불쌍한 친구같으니라구. 몰골이 말이 아니었어.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수녀들이 그곳에 도착하는 대로 그녀가 자기 곁으로 돌아와 주리라는 희망을 굳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아. 그런데 일이 그렇게 되고 말았나 봐." ''하지만 그녀에겐 그 할아버지가 있잖아요. 아마 먼저 집으로 가서 할아버지를 만나봐야 하겠다고 생각한 건지도 모르잖아요." 바이올렛은 나름대로 문제를 제대로 파악한 것이었지만, 전날 밤 찰스의 이야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제임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임스는 전날 찰스가 몇 주일 동안이나 술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친구들로부터 전해 듣고는 바이올렛이 그녀의 어머니와 식사를 하게 내버려둔 채 찰스를 만나기 위해 뛰어갔었던 것이다. "찰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야. 그는 그녀에게 배신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 내가 보기에 그는 그들의 사랑이 아주 끝장나 버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 "세상에..." 바이올렛은 그러한 그의 생각이 오드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그녀를 만나러 미국으로 갈 것 같지는 않던가요?" "그럴 것 같지는 않아. 사실 내가 보기에도 그건 좀 어려울 것 같더군. 그가 인도에 대한 책을 쓰도록 이미 계약을 해 놓았기 때문에 조만간 인도로 떠나야 할거야." "그렇다면 그런 그의 뒤를 따라다닐 사람도 짐작이 가는군요." 그녀가 언잖은 표정으로 바라보자 제임스는 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이것 봐, 바이올렛. 샤롯트가 당신 마음에 별로 안 들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그녀는 무척 명랑하고 재미있는 아가씨야. 적어도 지금과 같은 상태의 찰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될 거라구." 샤롯트 자신도 바로 그런 점을 기대하고 있긴 했지만 바이올렛은 그런 생각에 별로 동의하고 싶지가 않았다. 샤롯트는 그 당시 무척 과감하게 찰스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아침 밥이나 과일 들을 사가지고 그의 아파트를 찾아가기도 했으며, 뜨거운 블랙커피를 끓여주며 그로하여금 자신에게 마음을 털어 놓게끔 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의 저서를 매개로 서로 친구가 되어 갔으며, 그는 남자친구를 대하는 것과 똑같은 태도로 샤롯트를 대했다. 그녀는 무척 이지적이고 분별력이 있는 여자였으며 사업에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함께 대화를 나누기에도 별 부담이 가지 않는 그런 여자였다. 오드리와는 전혀 다른 타입의 여자였던 것이다. ''그 무엇을 봐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녀뿐이야.." 찰스는 처음에는 지난날의 열정들을 잊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9개월 동안이나 오드리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고, 이제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버릴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샌프란시스코로 가지 않는 이상 그녀를 만나기는 불가능했지만, 그것은 그 자신에 의해 거부되어지고 있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라 사실 그에게는 그럴만한 시간이 주어져 있지도 않았다. 샤롯트와 그녀의 아버지는 그가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 인도로 직접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다 현실감 있는 책을 쓰기 위해서는 그가 지금 당장 인도를 향해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찰스는 가을에 이집트로 떠나기 전까지는 그런 작업들을 모두 끝내 놓아야 했다. 샤롯트는 그에게 아주 다양한 계획들을 요구하고 있었으며, 오드리를 만나기 위한 미국여행이 그 계획들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은 물론이었다. "잠시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훨씬 기분이 나아질 거예요." 샤롯트가 그에게 차를 끓여 따라 주며 진지하게 말을 꺼내자, 그는 환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따뜻하고 다정하면서도 예리한 감수성을 지닌 그녀가 당시의 그에게는 꼭 필요한 존재였다. 샤롯트는 그의 작업을 위한 모든 배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작가의 욕구가 어떠한 것인지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가 오로지 작품을 쓰는 일에만 신경을 집중시키기를 원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에게 필요한 마음의 평화와 평정을 회복시켜 주려고 무척 노력했다. 그녀는 만약 그가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갖기 원한다면 자신의 시골집을 이용하는 게 좋을 것이라는 권유를 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또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한번쯤 그렇게 해보는 것도 괜찮을 거예요. 찰스. 환경도 좀 바꿔보고 맑은 공기도 쐴 겸..." 그녀가 미소를 머금고 말하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자기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내가 그런 대접을 받을 만큼 한 게 있어야지." 그런 그녀가 자신을 버린 오드리와는 커다란 대조를 이루는 것 같았다. "당신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작가 가운데 한 분이에요. 따라서 당연히 그런 당신을 잘 보필해야 할 임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 아닐까요?" 심지어 그녀는 찰스를 그 산막까지 태워다 줄 자동차까지 보내주었다. 그는 혼자서도 운전할 수 있으니 운전사는 필요없다고 우겼지만 그녀는 그가 그런 일에까지 신경을 쓰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또한 막상 편안하게 뒷좌석에 앉아 차나 마시고 있으니 무척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또 다시 오드리에 대한 생각들이 밀물처럼 밀려오기 시작했고, 석양이 질 무렵 그는 그런 생각에 잠겨 혼자 쓸쓸하게 오랫동안 숲속을 거닐었다. 찰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오로지 하르삔에서 그녀와 함께 보낸 마지막 시간들이었다. 역시 그때 그도 그냥 눌러앉았어야 한 것이 아니던가, 지금 이 순간에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들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찰스는 어둠이 내리고 난 후에야 산막으로 천천히 돌아오며 자신이 직접 차를 몰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갑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너무도 간절했기 때문이다. 샤롯트의 의도는 충분히 납득 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곳에 머무른다는 것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틀 동안이나 혼자 그곳에 앉아 빈들거려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가 다음날 제임스와 바이올렛을 그곳으로 초대해 함께 놀아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산막의 문을 열었을 때, 벽난로에 불이 지펴져 있는 것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틀림없이 아까 자신이 나갈 때는 불이 없었는데 그동안에 누가 불을 피워 놓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의아해하며 막 거실로 들어서던 그는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찰스." 돌아다보니 우아한 회색빛 실크 드레스를 입은 샤롯트가 샴페인 잔을 들고 서 있었는데 마치 얼마전에 본 영화속의 주인공처럼 아름다왔다. 그는 활짝 웃는 얼굴로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여인이었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그녀에게서 찰스는 이전과는 색다른 감정이 뭉실뭉실 피어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이런 것도 나의 기분전환 속에 포함되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샤롯트!" 찰스는 샤롯트로부터 잔을 건네 받으며 앞으로 바짝다가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커다란 암갈색 눈동자에 금발을 가진 여인이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약간은 교활해 보이는 듯한 그런 눈빛의 여인이었다. "그건 그랬었죠." 그녀의 목소리는 무척 부드러웠다. ''당신이 어떻게 하고 있나 보려고 한 번 와본 것 뿐이에요." 하지만 그들은 둘 다 그것보다는 더 커다란 동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너무도 외롭게 지내왔고, 이제 오드리 생각에 괴로워 하기에도 지쳐 버렸던 것이다. 그들은 나란히 소파에 앉아 샴페인을 마시다가 커다란 침실로 자리를 옮겼다. 샤롯트가 먼저 그의 옷을 벗겨 주었으며 아주 능숙한 솜씨로 그의 몸 구석구석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술이 그의 허벅지를 살짝 깨물었을 때, 그는 이미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몸이 달아 있었으며, 마침내 서로의 몸과 마음이 완전히 일치된 순간 샤롯트는 기쁨의 신음 소리를 내뱉았다. 그러자 그는 더욱 힘차게 밤이 깊어질 때까지 그녀의 몸속에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녀는 탐욕스럽게 스스로 그의 몸을 자신에게로 끌어들였지만 사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그가 진심으로 원하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샤롯트가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오로지 단 한 가지 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찰스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그녀의 의도는 완전히 적중한 셈이었다. 그의 몸뚱아리가 그렇게 처절한 환희를 맛본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오드리와 함께 누렸던...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그녀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들의 사랑은 이미 끝나 버린 것이기 때문이었다. 21 오드리와 아나벨의 재회는 오드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일찍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에 대해 동생이 화를 내고 있으리라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그렇게도 증오에 가까운 분노를 키워가고 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지난해와는 달리 모든 것이 엄청나게 변해 있었다. 오드리의 예상을 훨씬 넘어선 변화가 그녀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팔로 알토에서의 하코트의 부정은 이미 꼬리를 잡혔고, 그후에 다시 아나벨의 가장 절친한 친구들과 염문을 흘리고 있었다. 따라서 그와 아나벨 사이의 반목과 불화가 이미 공공연한 것으로 표출되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나벨 자신도 남편의 불륜에 뒤질세라 정숙한 아내로서의 품위를 내던져 버린지 오래였고, 그런 이야기들을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오드리와 마주앉아 술까지 한잔 마셔가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지껄이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금주법이 폐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나벨 또한 친구들과 함께 레스토랑으로 몰려가서 점심식사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낙을 즐기고 있었다. 오드리는 그렇게 변해 버린 동생을 보고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언니 앞에서 술잔을 든 채 며칠 전에 자기가 함께 잔 남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나벨,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었던 것도 아닌데 말야. 하코트와의 불화가 그렇게도 심각한 상태라는 거니?" 아나벨이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커다란 충격이고 아픔이었다. 하코트는 누가 뭐라해도 아나벨이 스스로 선택한 그녀의 남편이었으며, 어쨌건 이미 두 명의 자식까지 거느린 부모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사태가 좀 정리되어야 할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 아나벨은 별 흥미 없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아나벨이 입고 있는 옷은 모두 최신 유행의 것들이었으며, 오드리가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 값비싼 것들 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하코트에대한 복수의 하나로 될 수 있는대로 그의 돈을 많이 씨 버리려고 노력했고, 오드리는 그녀가 그런 일에는 무척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애기는 어때?" "하루 종일 우는 게 일이지 뭐." 아나벨은 무언가 의미심장한 눈길로 오드리를 바라보았고, 오드리는 동생의 그런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런 그녀를 무턱대고 손가락질 할 수 만은 없는 노롯이었다. 아나벨은 불과 한 해 동안에 무척이나 타락하고 난잡한 여자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어린 시절의 순진한 모습은 흔적조차 없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오드리는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제 시간에 돌아와 너를 도와주지 못해 정말 미안하구나, 아나벨."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며, 그 말은 가슴속에서 부터 우러나는 진심이었지만, 아나벨은 그 말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정말 그럴까?" 그녀는 비웃는 듯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언니가 무척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더라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게 무슨 얘기니?" 동생의 목소리에 깃들어 있는 적대감이 다시 한번 그녀를 놀라게 했다. "뮤리엘 브라운 부인이 언니와 어느 놈팽이가 상하이에서 놀아나고 있는 것을 봤다고 하던데?" "그 여자가 그런 소문을 퍼뜨리고 다닐 줄 알았어." 오드리도 슬며시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게 사실이야?" 아나벨의 눈에서 생기가 돌고 있었다. 오드리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쨌건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어떤 놈팽이와 놀아난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있었을 뿐이었다. "아냐, 그렇지 않아," "하지만 그래도 뭔가 하기는 했을거 아냐, 난 고아들을 돌봤다는 얘기는 믿어지지 않는걸." ''아나벨, 내가 중국에서 한 일은 바로 그것이었어." "그래?" 아나벨은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오드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언니가 여기서 져야 할 책임들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들 모두를 버렸던 것 이라고 생각해. 언니는 언니가 돌아오기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에 대한 책임을 청산할 수 있게 되기를 원했던 거야. 불행히도 할아버지는 아직 멀쩡하게 살아 있고, 나 또한 마찬가지야. 만약, 언니 대신 내가 할아버지를 보살필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커다란 착각이라고!" 오드리는 방금 자신이 들은 이야기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아나벨,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작년 한 해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냐구? 내가 알고 있던 아나벨은 어디로 가버린거야?" 오드리는 그녀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서며 손이 올라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난 그만큼 성장한 거야." 아나벨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던 언니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대답했다. 그녀는 14년 동안 자신을 보살펴 준 언니가 계속해서 보살펴 줄 것을 원하고 있었지만, 오드리는 이제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제는 아나벨도 자신의 두 발로 모든 것을 굳건히 지탱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변해 버린 동생의 모습에 오싹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서서히 고급창녀로, 부도덕한 아내로, 형편없는 어머니로 타락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난 그런 것을 성장이라고 부르지는 않겠어, 그건 구역질이 날 만큼 타락했다는 이야기 밖에 안되는 행동이야. 아나벨, 네가 지금 어디를 향해가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 넌 너의 결혼생활을 파멸로 몰아넣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네 아이들의 인생까지도 완전히 망쳐버리고 있는 거야." "어쩌면 그렇게도 잘 알지? 언니는 영원히 처녀로 지낼 거야? 아니 이제는 이미 처녀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오드리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을 졸라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때 마침 할아버지가 걸어 들어오는 바람에 아나벨은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거실로 들어선 할아버지도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일부러 아나벨에게 몰리를 보았느냐고 말을 걸었다. "몰리가 누구예요?" 그녀는 영문을 몰라 오드리를 바라보았고, 오드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분노가 가득 찬 눈으로 역시 그녀를 쏘아보았다. "내 딸이야," "뭐라구?" 깜짝 놀란 아나벨이 비명을 지르다시피 내뱉은 한마디가 온 집안에 울려퍼졌고, 할아버지는 잔잔한 미소를 띠며 오드리를 향해 말했다. ''꼭 그렇게 표현해야 하는 거냐, 오드리?" "그 앤 정말 내 딸이에요." 할아버지와 동생을 번갈아 쳐다보는 오드리의 표정에는 뭔가 비장한 각오가 서려있는 듯했다. "그 앤 어디 있어요?" 아나벨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날듯이 이층에 있는 오드리의 방으로 뛰어가 보았더니 오드리가 자신의 침대 옆에 마련해 놓은 아기용 침대 속에 정말로 조그만 아기 하나가 잠들어 있는 것이었다. 아나벨은 다시 곧장 아래층으로 뛰어내려왔다. "정말 신기하군. 역시 뮤리엘 브라운의 말이 옳았어. 그 놈팽이란 작자가 중국사람이었나 보지!" 아나벨이 빈정대는 눈빛으로 오드리를 바라보았고, 오드리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뮤리엘 브라운의 말이 옳은 게 아냐, 아나벨. 마이 리는 내가 돌보고 있던 고아 가운데 한 아이일 뿐이야." ''그걸 어떻게 믿어." 그녀는 그렇게 잘난 척하던 언니도 별 수 없다는 생각에 저절로 웃음이 나올 만큼 통쾌해 하면서 거울을 보며 모자를 고쳐 썼다. ''왜 그렇게 갑자기 나를 미워하게 됐지, 아나벨? 내가 뭘 어떻게 했다고 그러는 거냐?" 오드리는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물었지만, 그녀의 동생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며 흘끗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언니는 날 버렸어. 그게 언니가 한 것이야. 언니는 나 뿐만 아니라 우리집과 아이들과 하인들, 그 모든 것에 등을 돌렸어. 언니는 우리들의 휴가계획도, 나의 인생도, 아니 심지어 나의 결혼까지도 무참히 짓밟아 놓은 거야." 아나벨이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나의 어떤 행동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거니?" "언니는 내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어느날 갑자기 훌쩍 떠나 버렸어. 그리곤 1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돌아오지 않았어. 내가 임신을 했고, 그래서 더욱더 언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눈도 깜짝하지 않았던 거야. 그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야." "그건 내게 무척 증요한 일이야, 아나벨." 오드리가 슬픈 목소리로 대답했고, 할아버지는 말없이 그런 그들을 지켜 보고 있었다. ''내가 이곳을 뗘났을 때, 그땐 동생이 있었어. 하지만 지금 그 동생은 이미 없어져 버렸어. 난 너와 내가 형제라기보다는 오히려 다정한 친구 사이에 가깝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나를 누구보다도 네가 더 잘 이해해 주리라고 믿었어. 방금 네가 말한 것들은 따지고 보면 내 책임이 아냐. 그건 네가 원래 해야만 하는 일들이었어." 하지만, 아나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떻게 내가 그런 생소한 일들을 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 ''그게 바로 문제의 핵심이야. 이제 네 스스로 너의 삶을 꾸려 나가는 것을 배워야 할 시기가 된 거야. 그게 바로 하코트가 너에게 원하는 것 이기도 해." "그 사람 얘기는 꺼내지도 마." 아나벨은 문을 향해 걸어가면서 힐끗 오드리를 노려 보았다. "그건 언니도 마찬가지야. 언니가 그동안 나를 모른 척 했으니, 나도 이제 언니에 대해 신경쓰지 않겠어." 그러면서 아나벨은 꽝하고 문을 닫으며 나가 버렸다. 오드리는 자기가 정말 그랬었는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며 이층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할아버지는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22 오드리는 처음 며칠 동안 완전히 이방인이 되어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가 떠나기 전에 할아버지를 위해 고용해 두었던 두 명의 하녀는 그동안에 벌써 떠나 버리고 없었고, 청지기도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러나, 오드리가 쉽사리 적응할 수 없었던 커다란 변화는 그녀의 집 안에서 뿐만 아니라 바깥 세상에서까지 일어나고 있어서 그녀를 당혹스럽게 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지난 1년 동안 다른 별에 가 있기라도 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모든 것이 급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드리는 하르삔에 머무르는 동안 아주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세상 소식 밖에는 접해 보지 못했었고, 더구나 미국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경제가 활발하게 돌아가기 시작하고 있었으며, 그녀가 돌아왔을 때 샌프란시스코에는 활기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할아버지는 여전히 루즈벨트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고, 그 루즈벨트의 정견 발표 형식인 노변한담을 쓰잘 데 없는 엉터리 짓이라고 비난하고 있었지만, 나라 전체가 보다 건강해진 점을 오드리가 지적할 때면, 할아버지는 그저 인상을 찌푸리며 '기다려봐!'하고 말할 뿐이었다. 그는 비록 뭐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곧 루즈벨트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생길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가 집에 도착한 다음날, 독일에서는 히틀러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고 있던 모든 반대파들이 제거된 나찌의 피의 숙청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다. 그 숙청에 관련된 사람의 수가 거의 1백 명에 이르렀고, 온 세계가 그들에 대한 나찌의 즉흥적인 처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7월 16일에는 미국에서 항만노동자들의 파업에 동조하는 전국적인 총파업이 발생했다. 그로부터 9일 후에는 오스트리아 총통 돌푸스가 피살되었으며, 베를린에서는 그 사건에 대한 일체의 관련설을 부인하고 나섰다. 8월 2일에는 독일의 대통령 힌덴부르그가 사망했고, 그로부터 2주일 후에 아돌프 히틀러가 자신의 총통이라는 직함을 그대로 가진 채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프랑스에는 에어 프랑스 항공사가 설립되어 있었고, 미국에는 미국항공과 콘티넨탈 항공이 이미 비행기를 띄우고 있었다. 비록 오리엔트 특급 열차만큼 화려하지는 못하지만 몇 개의 새로운 철도도 개통되어 있었다. 오드리는 그런 모든 사실과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었고, 그녀가 없는 동안 일어난 변화를 쫓아가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오드리 자신이 그동안에 많이 변해 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집에서의 편안한 생활에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었고, 샌프란시스코가 갑자기 너무나 좁은 시골 구석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아무데서고 다른 사람들의 옷맵시나 남편 혹은 파티 등에 대한 천박한 대화들을 쑤군거리고 있었고, 오드리 자신은 결코 그런 분위기에 휩쓸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녀는 겉치레나 허식같은 것으로 자신을 속이고 싶은 마음도 전혀 생기지 않았다. 그녀의 생각이 미치는 사람은 오로지 찰스 밖에는 없었지만, 그마저도 그녀가 보낸 두 장의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가 이따금씩 사교적인 모임에 얼굴을 내미는 것 말고는 그녀는 오로지 할아버지나 몰리와 함께 집에만 틀어박혀 있고자 했다. 할아버지도 처음에는 그런 그녀를 보고 단순히 오랜 여행에서 쌓인 피로 때문이려니 생각했지만, 7월이 그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을 때 부터 그는 좀더 세심하게 그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때 이미 그녀는 한 달 이상이나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으며 친구들도 전혀 만나지 않고 있었다. 그는 혹시 그녀가 여행중에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그 상대방이 제발 동양인이 아니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그도 간혹 아기가 걱정스러울 때가 있었지만 그애는 전혀 유럽과 아시아의 혼혈인 것 같지는 않았고, 완전히 동양적인 생김새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드리는 깨어 있을 때면 항상 방긋방긋 웃어대는 그 아기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려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그 아기를 몰리라고 불러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아기를 그녀의 딸이라고 생각하는 사실이 무척 놀라왔다. 소심한 세상 사람들은 오드리가 그런 불륜의 중국 아기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것 이라고 들 쑤군거리기도 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녀로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아기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런 것을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아나벨은 오드리가 그녀의 할아버지의 집에 머무르는 동안 두번 다시 그곳을 찾아오지 않았다. 할아버지 또한 아나벨과 오드리 사이의 불화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결코 그런 이야기를 입밖에 꺼내는 법이 없었다. 오드리 또한 그런 동생에게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오드리는 사람들을 이끌고 호수에 다녀올 일을 준비하느라고 무척이나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그 호숫가에서 몇 주일 쉬었다 오기를 원했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요즘 들어 부쩍 몸이 약해져서 조그만 일에도 쉽게 지쳐 버리곤 했다. 이미 82세의 노인이었고 생각만은 아직도 정정했지만 몸이 마음먹은 대로 잘 따라 주지 않는 것이 약간은 걱정스러웠다. 오드리가 돌아오고 난 이후에 그들이 처음으로 아침 식탁에 마주앉아 얼그레이 회사의 홍차를 놓고 팽팽하게 대립한 적이 있었다. 그때 오드리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기쁜 표정이 되어 말했었다. ''이렇게 할아버지랑 논쟁을 벌이니 저절로 옛날 생각이 나네요. 그렇죠?" 그녀는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할아버지와 루즈벨트에 대해서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것을 그때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다정스런 눈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지만 그 역시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넌 작년보다도 예리한 맛이 훨씬 덜해. 하지만 너처럼 온 세상을 돌아 다녔던 네 애비를 봐도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잘 알 수 있지. 비록 네 애비는 외국 아기를 집으로 데려올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말에 별다른 가시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따라서 그런 것을 알고 있는 오드리는 예전처럼 그의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는 할아버지가 자신의 곁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될 때면 몰리와 함께 장난을 치며 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아기가 옹아리하는 소리를 무척 좋아했으며, 한 번은 그애가 자기 이름을 불렀다며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몰리가 나더러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오드리! 틀림없이 들었단 말야. 얼마나 영리한 앤지 모른다구." 그러면서도 그는 오드리가 별로 현명치 못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고 결코 그애를 버리지 않겠다는 각오를 이야기할 때, 그는 오드리가 그 애를 집까지 데리고 온 것 뿐만이 아니라 미국 정부에서 그 아기의 국적을 인정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영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다.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그애를 키울 거예요. 할아버지." 하지만 그가 두려워하고 있던 것은 바로 그런 그녀의 각오였다. 호수에서 보낸 어느날 밤,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던 할아버지가 서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야. 설사 그렇게 된다손 치더라도 아마 너랑 결혼하려는 남자는 아무도 없을 거다. 사람들은 모두 그애를 네 딸로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게 그렇게도 두려워해야 할 일인가요?" 이제 그녀는 그런 말에 지쳐 버렸다. 그곳에서는 사람들의 모든 선입관과 그들의 이기주의, 그리고 온 동네에 떠돌아다니는 갖가지 소문들과 싸워야만 했던 것이다. 중국에 있을 때 도적떼나 홍수, 혹은 먹을 것이나 깨끗한 식수를 얻기 위해 했던 걱정들이 차라리 훨씬 마음 편한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한층 더 복잡하고 골치아픈 인생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드리는 이미 하르삔에서의 그 힘들었던 생활들, 그 무시무시한 공포, 시화와 다른 아이들이 숨을 거두었을 때의 그 무력감과 당혹, 링훼이에 대한 슬픔들은 서서히 잊어가고 있었고, 그녀의 기억 속에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은 그녀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그 조그만 얼굴들과 신유 밖에 없었다. 그 아이들이 모두들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마자 그 아이들이 필요한 것들을 구할 수 있도록 하르삔의 미국 은행으로 환어음을 보내긴 했으나 그것은 그들에게 아주 조그만 도움밖에는 되지 못할 것 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왜 그렇게 마이 리가 이곳에서 사는 것을 시기하고 있을까요?" "그건 몰리가 자기네들과 다르기 때문이겠지." 할아버지가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런 차이가 무척 두려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게야. 모든 사람들이 너처럼 활짝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난 그런 사람들로부터 마이 리를 지키겠어요. 할아버지." 그녀가 아나벨을 지켜 왔던 것처럼 힘이 닿는 데까지는 아기를 돌봐주고 싶었다. 할아버지는 뜻밖에도 그런 그녀의 손등을 두드려 주며 말했다. "넌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게야, 오드리. 나에게나 아나벨에게,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그래왔듯이 말이다. 넌 우리들 모두에게 무척이나 소중한 사람이야." 할아버지가 그녀에게 그런 식의 이야기를 해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오드리로서는 콧날이 시큰거리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넌 마음이 너무 넓어서 탈이다. 이제는 네 스스로를 생각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니, 오드리?" 그녀는 상쾌한 산등성이의 공기를 마음껏 들이쉬며 비로소 함빡 웃음을 머금었다. 그들은 혼들의자를 베란다에 내다놓고 앉아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도 이제 늙은 하인 같은 내가 걱정스럽다는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할아버지도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언젠가, 특히, 그 자신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스스로 원하는 삶을 마음껏 펼쳐 나갈 수 있는 그런 아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그녀의 그렇게도 넓은 마음과 고귀한 정신에 잘 어울릴만큼 훌룡한 남자가 그리 흔치 않았다. 그는 의자를 흔들거리며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한해 동안 그녀의 아름다움이 활짝 꽃핀 것 같았다. 그녀는 그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제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타올라 오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넌 무척 멋진 아이야. 언젠가는 너와 잘 어울리는 남자를 꼭 만나게 되겠지." 그녀는 그때 하마터면 찰스 이야기를 꺼낼 뻔 했으나 혹시라도 그것이 할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나 않을까 하여 그만 다시 삼켜 버리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이제 무척이나 늙은 노인이었고 결국 머지않아 그 기력을 다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자신이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 정도의 은혜는 그로부터 충분히 입고 있는 그녀였다. "그만 들어갈까요. 할아버지?" "그러자꾸나." 그는 오드리가 자신에게 얼마나 세심한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 호숫가는 오드리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매년 찾아갈 때마다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달러스가 그들을 따뜻하게 반겨 주었고, 드럼스와 알렌스도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오드리는 거의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한 번도 그들을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할아버지와 이제는 몰리가 되어 버린 마이 리와 함께 줄곧 집안에 쳐박혀 있었다. 아기는 이제 난 지 6개월 밖에 되지 않았지만, 거의 언제나 방글방글 미소를 짓는 귀여운 모습이었다. 마침 그날 뉴저지의 모로 캐슬에 화재가 발생한 사건이 터졌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엄청난 비극이었다. 오드리는 그 소식을 먼저 라디오를 통해서 알았고, 나중에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니 과연 엄청난 재앙이었음을 한 눈에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온 나라가 한번 더 발칵 뒤집어진 사건이 그로부터 2주일 후에 터졌다. 2년 전 린드버그 유괴 사건이 있었을 때 그 몸값을 받아냈던 리차드 하우프만이 체포되었던 것이다. 물론 유괴된 아이는 살해당했지만, 그 극적인 드라마는 모든 사람에게 영문도 모를 슬픔을 불러일으켰고, 하우프만에게 정말로 죄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아낼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관계기관에서는 그가 범인이라고 단정을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오드리와 할아버지는 그 사건에 대해서 서로 밀도 있는 토론을 나누었다. 그날 오후 오드리가 그 사건을 생각하며 몰리를 보살피고 있는데, 하인이 다가와서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고 일러 주었다. 그는 낯선 남자에게서 온 전화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눈치였고, 오드리는 몰리를 하녀에게 맡기고 전화를 받으러 갔다. ''여보세요?" 그녀는 전화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린드버그 사건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쩐지 예감이 이상해 약간 신경이 곤두섰다. "누구시죠?" 상대방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을 때, 오드리는 심장이 얼어붙어 버릴 것만 같았다. 바로 찰스에게서 온 전화였던 것이다. 23 "오드리 맞소?"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에 오드리의 가슴은 주체할 바를 모르고 마구 방망이질을 쳤다. 그녀는 간신히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야 겨우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네." 전화 속에 그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가깝게 들렸다. "어디에요?" 상대방이 누군지 물어볼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녀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그의 목소리만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매일 밤 꿈속에서 듣던 목소리가 이제 그녀의 귀에 생생하게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난 캘리포니아에 와 있어. 여긴 로스엔젤레스야." 예전보다 휠씬 더 많이 영국식 발음을 구사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에 대한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집에 돌아온 지는 얼마나 되었어?" 그녀가 하르삔에서 보낸 두 번의 전보 이후에 그들 사이에 연락이 끊어졌었다. 그녀가 그의 구혼을 거절한 이상 그로서는 그녀에게 더 이상 할 이야기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더욱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망설였던 것이다. 이틀 동안을 괴로와하면서 그는 전화를 해서는 안된다고 자신에게 몇 번도 더 다짐을 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달려들어가 전화기를 집어들고 교환수에게 그녀의 전화번호를 댔던 것이다. 오드리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의 손은 마치 마약중독자처럼 떨리고 있었고, 이제야 그렇게도 귀에 익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6월에 돌아왔어요." ''당신 할아버지는 어떠시지?" "그럭저럭 잘 지내세요. 지난 한 해 동안 많이 늙으시긴 했지만요." 그녀는 깊이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내가 돌아왔다고 그렇게 기뻐하실 수가 없었어요." 잠시 찰스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할아버지와 동생과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그녀와 함께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해 보았다. "동생은?" 오드리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앤 내가 없는 동안 별로 잘 지내지 못했었나 봐요. 사실...." 그녀는 적당한 표현을 찾기 위해 무척 고민했다. "그앤 많이 변했어요. 그다지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더군요." 그건 찰스에게는 크게 놀라운 소식이 아니었다. 그가 그녀에 대해 들은 이야기만 가지고서도 그녀가 그다지 현숙하거나 얌전한 여자가 못된다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어때요? 캘리포니아에서는 얼마나 계실 건가요?" ''며칠밖에 있지 못할 것 같아. 곧 뉴욕으로 가야 하거든. 내 책 가운데 하나를 영화로 만들어 보겠다더군. 무척 귀찮은 일이지만."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고 그의 잘생긴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당신도 그 영화에 출연하나요. 찰스?" 그는 그녀의 황당한 생각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천만에, 내가 어떻게 영화에 나가겠어?" "좌우지간 잘 됐군요."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녀가 보고싶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신은 어때? 요즘은 뭘 하며 지내고 있지?" 그런 식의 대화를 나누는 것이 무척이나 어색하고 이상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지구상의 어떤 인간들보다도 서로를 잘 알고 있었던 사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녀를 처음 만난 지가 이미 11개월이 넘어서고 있었다. "항상 살아온 그런 식으로 살고 있을 뿐이죠. 뭐. 할아버지와..." 하마터면 그녀의 입에서 마이 리라는 이름이 튀어나올 뻔했으나 찰스가 그 일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는 도로 삼켜 버렸다. 전화로 다 설명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가 그녀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동생은?" "그렇고 그렇죠. 뭐." 그것 역시 전화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찰스는 어쨌건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내 보려고 마음먹었다. "오드리" "네.?" 그녀는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오기를 원하고 있었나?" 그녀는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에게는 아니라고 대답할 힘이 없었다. 그녀는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를 만나보고 싶었었다. ''그럼요. 그 무엇보다도 간절히 원하고 있었어요." 그녀는 자신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당장 다 털어놓고 싶었다. "만날 수 있을까요?" "오늘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다 끝날 거야, 오늘 밤에는 비행기를 탈 수 있지. 당신이 시간이 될지 모르겠군." 그녀는 그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찰스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인생 모두를 바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력해 보죠." 그녀는 언제나처럼 약간의 농담기와 섹시한 냄새를 함께 풍기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에게는 샤롯트와 같은 여자에게서 느낄 수 있는 성적인 매력은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녀와 샤롯트는 역시 다른 차원의 여자였다. 샤롯트는 함께 즐기고 대화하고 일할 수 있는 성격의 여자였다. 그러나 오드리는.. 오드리는 그의 정신의 일부이자 육신의 일부였으며 그라는 존재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여자였던 것이다. "공항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그러고 싶으세요?" "그러면 좋을 것 같아서." "그럼 내가 공항으로 나가겠어요. 그리고 찰스" "고마와요." 그의 마음은 이미 오드리를 향해 달음질치고 있었고, 마치 소풍을 앞둔 국민학생처럼 잔뜩 부풀어 오른 기분이 되었다. 역시 전화하기를 무척이나 잘했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들 둘 다 다음날까지 기다린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지루했다. 그녀는 마이 리에게 예방주사를 맞히기 위해 할아버지와 함께 시내의 병원에 다녀온 다음, 그를 만나기 전에 미장원에라도 가서 머리를 좀 손질해 볼까 하고 생각도 해보았으나, 그건 아나벨 같은 여자나 하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고 말았다. 괜히 미장원까지 가서 수선을 부리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대신에 그녀는 새로 장만한 회색빛 드레스와 진주 목걸이로 치장을 했으며 머리는 어깨까지 길게 늘어뜨렸다. 그것이 찰스가 가장 좋아하던 헤어스타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고 그녀는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둔 채 공항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물론, 오드리의 손가락에는 그가 준 금반지가 끼어져 있었다. 그녀의 할아버지도 그 반지를 눈여겨 보기는 했지만 그녀에게 그 출처를 캐묻지는 않았었다. 그녀는 그가 탄 비행기가 도착하기 10분 전에 이미 공항에 도착해 있었고, 그와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순간을 생각하며 할 일 없이 공항 안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는 여지껏 하르삔에서 그를 태운 기차가 떠나던 순간의 그의 표정들, 그의 뺨 위로 흘러내리던 눈물들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때 갑자기 비행기의 도착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고, 그러자 오드리는 다시 걷잡을 수 없는 흥분상태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이 출입구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며 초조하게 서 있었다. 한무리의 남자들이 자신의 곁을 지나가는 것을 숨을 죽이며 지켜보고 있던 그녀의 눈에 드디어 찰스의 새까만 머리칼과 그의 그윽한 눈동자가 들어왔다. 그녀에게 쉴 새 없이 키스를 퍼붓던 그 입술도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넋을 잃고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그가 자신을 껴안고 뜨겁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찰스는 1년 전과 조금도 변함없이 그녀를 힘껏 껴안았으며 그들은 서로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잘 있었어?" 비로소 그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그녀를 바라보고 싱긋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찰스. 정말 잘 오셨어요." 하지만 무엇을 위해 잘 왔다는 것인가? 그녀의 인생을 위해서? 그가 얼마동안 머무를 수 있을 것인가? 하루? 이틀? 사흘? 그녀는 그를 만나자마자 다시 해어져야만 한다는 생각부터 떠오르기 시작했다. 찰스 역시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 듯 기쁜 얼굴의 한 구석에 희미한 어둠의 그림자를 남기며 그녀를 따라 차를 세워 둔 곳으로 갔다. 그가 가진 짐이라고는 레인코트 하나와 조그만 여행용 가방, 그리고 그가 항상 들고 다니던 그 서류 가방 밖에는 없었다. "영화는 어떻게 되었어요?" "나도 잘 모르겠어. 계약을 하기는 했는데 워낙에 괴팍한 사람들이라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더군." 그녀는 그의 말을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가 확실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것에도 그녀의 마음이 전혀 끌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그녀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여러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결부되어 있었다. "재미는 있던가요?" 먼저 차에 오른 그녀가 그를 위해 문을 열어 주자 그는 짐들을 뒷 좌석에 던져넣고 자신은 그녀의 옆자리로 와 앉았다. ''물론, 재미는 있지." 하지만 찰스에게는 오드리를 만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그 영화에 대한 계획에 동의한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 캘리포니아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은근히 기뻐하는 마음이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샤롯트에게는 완강하게 부인했었지만 말이다. 샤롯트는 그의 다른 모든 결함들은 눈감아 줄 수 있었지만, 오드리에 대한 이야기 만큼은 결코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샤롯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가 원했을 때 오드리는 그의 곁으로 와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에게 상기시켜 주곤 했었다. 그녀가 보기에 그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차를 주차장에서 빼내 시내를 향하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 보며 그녀와 샤롯트 사이에 얼마나 엄청난 차이가 있는지를 다시 한번 절실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오드리도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둘 다 한참 동안 서로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찰스." "무슨 이야기를?" 물론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항상 자신에게 무척이나 솔직한 모습을 보여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였고 그녀 역시 다시 한번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고자 했던 것이다. "전보 말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더 할 말이 남아 있어? 당신의 대답은 무척이나 명백했잖아." "그러나 내가 그런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렇게 명백한 것 일까요?" 그녀는 그가 정말로 자신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가끔 있었고, 또한 어떻게 보면 정말로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도 했다. ''작년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당신과 결혼을 하기 위해서 나는 무슨 짓이든 할 수가 있었어요. 하지만 난 또다시 할아버지의 곁을 떠나 런던으로 달려갈 수는 없었어요. 그땐 이미 1년 동안이나 할아버지를 모시지 못하고 있던 때였어요. 찰스. 할아버지는 이제 너무나 늙으셨어요." "난 당신의 그 희생정신을 이해할 수 없어." 그는 차창 밖을 내다보며 그 당시의 고통을 되새겨보고 있었다. "그때 이미 당신은 두 번째로 내게 등을 돌린 것이었어." 그러나 그녀는 그의 그 말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당신의 첫 번째 제안은 그다지 심각한 것이 아니었어요. 당신은 그때 그저 하르삔에서 나를 떠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런 제안을 했었던 것 뿐이잖아요." 그녀의 반박을 그도 굳이 부정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샤롯트가 알고 있는 것 보다도 훨씬 많은 부분이었다. 그녀는 샤롯트와는 다른 관점에서, 그의 다른 면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역시 오드리의 부드러움과 성실함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들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찰스는 그녀를 돌아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내가 만나본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고집이 센 여자였어, 오드리 드리스콜." 그녀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활짝 미소를 짓고는 다시 앞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 말은 칭찬인가요. 아니면 비난인가요?" 그는 웃음을 터뜨리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칭찬도 비난도 아니야. 사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 뿐이지." 그리고는 다시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로 심술굿은 여자야." 그는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지더니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그녀의 목에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난 당신의 그 전보를 받고 난 후로 한달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술만 마셨어. 한달 동안을!" 하지만 그때 그는 샤롯트라는 여인이 자신을 술통에서 끄집어내 주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그가 오드리에게 느꼈던 감정과 샤롯트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탄 차가 점점 도심에 가까와지자 오드리는 꽤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견디기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그 전보와 내가 하르삔에 혼자 남았던 것은 내 일생 동안 가장 어려웠던 결정이 될 거예요." "그렇게 어려울 건 없잖아. 당신은 한번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나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로 밀고 나가는 사람이니 결코 후회를 했을 것 같지도 않고." "진심으로 하는 얘기예요? 거기서 8개월을 보내고 나서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단 말인가요? 미쳤군요. 하지만 난 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해요. 비록 엄청난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그렇지 않을까요?' 차가 신호등에 걸려 멈춰 선 동안 그녀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녀는 그것을 통해 마이 리라는 커다란 보상도 받은 셈이었다. "그건 그렇고, 당신 오늘 어디서 묵으실 건가요?" "영화사에서 나를 위해 세인트 프란시스 호텔에 방을 예약해 두었다더군. 그게 어떤 호텔이지?" "아주 고급 호텔이에요." 그들은 둘 다 그리티나 페라 팔라스 같은 호텔이 금방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했지만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대신에 그는 신중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밤 저녁이나 함께 하지 않겠어, 오드리?"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달 동안이나 함께 먹고 자고 여행을 했던 그들이 그런 식으로 데이트를 해야한다는 것이 왠지 서먹서먹했다. 그땐 그렇게도 다정한 부부처럼 느껴졌었는데 이제는 안티베스에서 서로 치음 만난 시절로 되돌아가 있었던 것이다.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도 알 길이 없었다. 비록 그는 그녀가 여전히 자신의 반지를 끼고 있는 것을 보긴 했지만 말이다. "먼저 우리 집으로 와서 할아버지를 만나보는 것이 어떨까요?" "그게 좋겠군." 그는 느릿느릿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는 그녀를 자신에게서 뻬앗아간 사람을 한번 만나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를 호텔까지 태워다 주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가슴이 찢어지도록 저려왔다. 그녀는 자신이 다시 한번 그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막고 싶었다. 그는 여기서 단 며칠밖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밀려오는 감정의 홍수를 도저히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자꾸만 처음 그를 만난날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신문을 읽고 있다가 집으로 들어서는 그녀를 약간 찌푸린 표정으로 올려다 보았다. "어딜 갔다 오는 게냐, 오드리?" 잠시 그녀는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다가 사실대로 솔직히 밝히기로 마음을 먹었다. "공항에 친구를 만나러 나갔었어요." "그래?" 할아버지 얼굴에 주름살이 좀더 깊어졌다. "유럽에서 만났던 친구에요. 그 사람은 여기서 하루나 이틀 정도 머무를 작정이래요." ''그라고? 내가 아는 사람이냐?" "아뇨."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곧 알게 되실 거예요. 한시간 후에 이리로 오기로 했거든요. 할아버지를 만나뵙고 싶대요." ''바보같은 녀석이 또 하나 있구나." 그는 귀잖아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는 할아버지의 그런 작전에 말려들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친구를 이따금씩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때때로 그녀가 너무 집에만 쳐박혀 있는다고 조금씩 나무라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다지 밖에서 만나볼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찰스와 비교되어질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남자들은 모두 찰스에 비하면 형편없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찰스가 여기까지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그녀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이층으로 올라가 마이 리를 돌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꿰뚫어 본 듯 그녀의 할아버지가 여전히 신문을 들여다보며 그녀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그앤 오늘 새 이빨이 났어." "애기 말이에요?" "아니, 이층의 하녀말야." 오드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6개월이나 되었는데도, 이빨이 너무 늦게 나는 것 아니예요?" "윌리암스 부인이 그앤 발육이 무척 빠른 편이라고 하더구나." 윌리암스 부인은 그집에 새로 온 가정부였다. "자기 손자는 돐이 지났는 데도 여태 이빨이나 머리칼이 나지 않았대. 두고 보라구, 그앤 돐이 채 지나기 전에 걷기 시작할 테니까." 그녀는 자기가 데려온 아기를 할아버지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것 같아 가슴이 뿌듯해짐을 느꼈다. 그는 오히려 아나벨의 아이들보다도 몰리를 훨씬 더 예뻐했고, 이제는 그애가 중국인이라는 사실에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때때로 오드리와 함께 산책을 하며 손수 몰리를 태운 유모차를 밀어 주기까지 했었다. "조금 있다 내려올께요. 할아버지." 잠시 후 아랫층으로 내려온 그녀는 여태껏 사두기만 하고 한번도 입지 않았던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어깨가 넓게 패이고 등에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무늬가 새겨져 있는 화려한 실크 드레스였다. 그녀와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옷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녀가 옷과 머리에 그녀답지 않게 많은 정성을 들인 것을 보고 오기로 되어 있는 손님이 그녀에게 있어서 무척 중요한 사람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 사람 이름이 뭐라고 했지?" ''찰스 파커스코트예요. 그는 작가예요." "내가 그 이름을 전에 들어본 적이 있냐?" 그가 기억을 더듬느라 잔뜩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는데 마침 초인종이 울렸다. 오드리가 마루로 걸어나가는 동안 하녀가 열어 준 문으로 찰스가 막 들어서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새삼스럽게 깜짝 놀란 표정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옛날의 모든 추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났지만 그녀가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진 것은 처음인 듯 싶었다. "안녕, 오드리," 그는 다시 수줍은 소년이 되어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오드리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뺨에 키스를 하고는 그의 등을 밀어 거실로 데리고 갔다. "할아버지, 찰스 파커스코트예요. 이분이 저희 할아버지 에드워드 드리스콜이구요."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며 서로를 눈여겨 보았다. 둘 다 상대방으로부터 무척 호감이 가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찰스는 그녀를 런던으로 오지 못하게 했던 그 할아버지에 대해 항상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만나보니 그런 선입관은 말끔히 가시고 말았다. "안녕하셨읍니까?" "음, 그래, 그런데 내가 어떻게 자네 이름을 알게 됐지?" 그러면서 그는 옛날에 오드리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지, 아니면 그가 워낙에 유명한 사람이기 때문인지를 기억해 내려고 애써 보았지만,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두 가지 모두가 타당한 이유가 될 수 있었지만, 찰스는 그렇게 대답하기가 왠지 쑥스러웠다. "찰스는 훌륭한 기행문을 많이 저술한 유명한 작가예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번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말고도 어디선가 그런 이름을 들은 기억이 어렴풋이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오드리는 할아버지의 그런 표정을 읽으며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상하이에서 뮤리엘 브라운과 마주치고 난 후 그 여편네가 동네방네 그의 이름을 떠벌리고 다녔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할아버지가 그런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단지, 찰스가 워낙에 유명한 인물이거니 하며 넘어가 주기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할아버지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에게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남자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이번에 그 책들 가운데 하나를 영화로 만들게 되었대요. 캘리포니아에 온 것도 사실은 그 일 때문이래요." 하인이 마실 것을 내왔고, 찰스는 노신사와 별 부담감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찰스가 보기에 그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눈매가 매우 날카로와 보였고, 비록 찻잔을 집어드는 그의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긴 했지만, 서재를 구경시켜 주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의 모습에서 오드리가 말했던 것 정도로 노쇠한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그는 오드리가 자신과 결혼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괜히 애꿎은 할아버지를 핑계 삼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일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그런 의혹에 사로잡히기에는 그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그런 행각들을 머리에 떠올리며 오드리의 할아버지를 따라 서재로 들어가 보았더니 그가 평생에 걸쳐 사들인 수많은 책들이 책꽂이에 가득 꽂혀져 있었다. 찰스는 그 훌륭한 서재를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세히 둘러보니 온 집안이 아름다운 골동품과 값비싼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그녀의 아버지가 여행을 다니면서 수집한 것들이었고, 나머지는 그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것들이었다. 솔직한 얘기로 그는 그녀가 이렇게 훌륭한 집안의 손녀딸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던 것이다. ''정말 훌룡한 서재를 가지고 계시는군요." 그들이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을 때, 찰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그 할아버지가 무척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할아버지 역시 기분 좋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항상 오드리가 많은 남자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오지 않는 것이 불만스러웠었다. 때때로 찰스와 같은 젊은이를 만나는 것은 무척 유쾌한 일이었다. 그건 젊은 시절의 오드리의 아버지를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찰스의 모습이 정말로 젊은 시절의 로란드와 무척이나 비슷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자넨 내 아들을 무척 많이 닮았구먼. 오드리가 그런 이야기하지 않던가?" "아뇨, 그분이나 저나 여행을 몹시 좋아한다는 것 밖에는...." "바보같으니라구...." 일순 에드워드 드리스콜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찰스는 혹시 자신이 그의 아픈 기억을 되살리게 한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했다. 그러나 그는 금방 다시 고개를 들어 오드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오드리가 보기엔 그랬겠지. 자네도 얘가 중국까지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찰스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삼키며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만주의 하르삔이라는 곳에서 근 1년 동안이나 살다왔다네. 게다가 아기까지 데리고 왔으니." 오드리는 그 말을 들은 찰스가 너무나 놀라서 자리에서 굴러 떨어지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그의 얼굴이 그만치 창백해 졌으며, 오드리는 애가 달아 사실을 설명해 주려 했으나 할아버지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아 버렸다. "정말 귀여운 애라네. 우린 걔를 몰리라고 부르지." "그랬군요." 찰스는 입술마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오드리는 금방이라도 손을 뻗어 그를 껴안아 주고 싶었지만, 더듬거리며 사태의 진상을 밝히려 노력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앤 내가 있던 곳의 고아였어요. 정확하게는 그 고아들 증에서 나이가 든 여자애가 낳은 아이에요. 하지만 그녀는 출산하는 도중에 숨을 거두고 말았기 때문에..." "오드리! 손님에게 그렇게 자세히 늘어놓아 성가시게 할 필요는 없잖니." 그러자 오드리는 더 이상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찰스의 얼굴만 들여다 보고 있었다. ''한번 보시겠어요?" 찰스는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오드리가 너무나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하듯 말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럽시다." 그는 그녀를 따라 말없이 계단을 올라가다가 이층에 이르자 험악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일이 그렇게 되었었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사실을 진작 알려 주지 않고 나를 바보로 만드는 거요? 그앤 뭐요. 중국인의 피가 섞인 혼혈이오?" "네," "당신 할아버지 말이 옳군." 그녀의 침실 문 앞에 이르자 찰스는 이빨을 꽉 물고 그녀의 팔을 잡아채며 말했다. "당신은 아주 지독한 바보야. 어떻게 제 정신을 가지고 그런 것을 할 수가 있었지? 왜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그애를 어떻게 처리해 버리지 않은 거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가 있었지만, 굳이 그런 그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았겠어요? 애를 죽여 버렸어야 했나요? 난 이 아이를 사랑했기 때문에 집으로 데려온 거예요. 바보인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에요." 그녀가 방으로 들어가 아기를 안아 올리자 그 아기를 돌보고 있던 하녀가 재빨리 그 방에서 나가 주었다. 오드리의 품에 안긴 아기는 여전히 방실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애는 무척이나 귀여운 동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중국인이다 일본인이다 하기보다는 그저 무척 예쁜 애기일 뿐이었다. 하지만 찰스는 오드리와 애기의 얼굴을 차례로 들여다 보더니 깜짝 놀라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럼, 이 아이는....." 그는 자신이 무척이나 어리석었음을 깨달았으며 제멋대로 생각했던 가정이 완전히 빗나간 것을 알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가 런던에 오기를 거절했던 이유도 조금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그녀가 자기를 배반했다는 것만 빼고는 모든 것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졌다. "오드리, 미안하오. 이 애는 당신의 아기가 아니었구려. 내가 잠시 생각을 잘못..." 오드리가 언제나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는 링훼이의 아이예요. 그녀는 내가 떠나오기 전에 이 아이를 낳다가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어요. 얘의 아버지는 일본인 군인이었구요. 그래서 나는 더더욱 그곳을 떠날 수 없었던 거예요. 이제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겠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상황을 너무나 뚜렷하게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젠 알겠어, 왜 진작 그런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어?" "그럴려고 했지만 그 전보 이후에 당신이 답장을 해주지 않았었잖아요. 당신이 그 전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 수가 있었어야죠." 찰스는 오드리의 품에 안겨 행복한 듯이 미소를 짓고 있는 아기를 들여다 보며 말했다. "정말 예쁘게 생겼군. 몇 살이지?" "이제 딱 6개월 되었어요. 할아버지는 얘를 몰리라고 부르죠." 그들은 함께 미소를 지었다. 그 아기는 그들이 함께 중국에서 보낸 시간들을 상기시켜 주는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았다. 그가 손가락으로 아기의 포동포동하게 살찐 뺨을 어루만져 주자 아기는 그의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더니 새로 난 이빨에다 마구 부벼댈려고 하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귀여운 그녀의 모습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한 번 안아 보시겠어요?" 처음에 찰스는 잠시 망설이는 눈빛이었으나 오드리가 아기를 건네 주자 활짝 미소를 지으며 뭐라고 칭얼거리는 아기의 뺨에 가만히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아기에게서는 비누와 아기분 냄새가 풍기고 있었고 너무나도 깨끗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그 모습에서 찰스는 오드리가 집으로 돌아온 후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방을 둘러보니 오드리가 자신의 레이카 카메라로 찍어 놓은 아기의 사진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무척 귀엽지 않아요. 찰스?" 그들은 어느새 다시 친구가 되어 있었다. 찰스는 아기를 침대에 누이고 오드리와 함께 그 옆에 앉아서 꼼지락거리는 아기의 모습을 지켜 보았다. 그들은 예전에 느꼈던 서로에 대한 따뜻한 감정들을 이내 되찾을 수 있었으며, 그런 분위기 속에서 오드리는 용기를 내어 자신이 이따금씩 느꼈던 생각을 말해 보았다. "이 아기가 당신의 아이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 때가 있어요. 찰스. " ''정말 그랬으면 좋겠군." 그들의 눈이 마주쳤고, 그는 다시 그녀를 예전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사랑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다시 그녀의 할아버지에게로 돌아갔다. 그들이 할아버지에게 몰리의 귀여운 재롱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를 하자 그는 흡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찰스에게 마구 손녀딸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그 말을 들었더라면 몰리가 그의 친혈육이기나 한 줄로만 생각될 정도였다. ''그앤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애라네." 그리고는 다시 오드리를 향해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얘도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었지. 하지만 그건 한때에 불과했어..." 그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찰스는 할아버지에게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인사를 했다. 그들은 블루 팍스라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기로 예약을 해놓았었으나, 모두들 식사 따위는 어디서 하건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눈치였다. 그녀는 몰리가 태어난 일이라든가 몽고의 장군이 나타났던 일 등 그가 떠나고 난 후 하르삔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정말 운이 좋았군."이라고 말하면서 <..살해당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라는 말은 차마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 8개월을 돌이켜보면 난 무척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찰스. 난 잘 모르겠어요. 그 당시에는 그 일이 가장 중요하고 또 정당한 일처럼 보였었거든요. 그리고 그 대가로 몰리를 얻기도 했구요."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애기를 돌보고 있는 모습은 그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한때 그녀와 함께 그토록 절실하게 꿈꿔 왔던 일이 다시 생각났다. "지금은 어때, 오드리?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갈 작정이지?" "나도 잘은 모르겠어요. 어쨌건 이곳에 머물러야죠. 최소한 할아버지가 살아 계신 한은 말이에요." "당신 할아버지는 정말 훌륭하신 분이시더군." 그가 슬픈 표정으로 말하자 오드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내가 집으로 돌아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에요. 난 할아버지에게 엄청난 은혜를 입고 있거든요." "당신의 미래까지도 계속 그렇게 살아갈 건가, 오드리? 그건 그다지 합당한 것 같지 않은데." "어쨌건 현재는 그렇다는 거예요." "아나벨은? 그녀도 당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나?" "그앤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찰스는 그녀를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난 다행스럽게도 너무나 책임감이 강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던 거로군." 그는 양 손에 짐을 집어들며 말했다. "나와 잠시 함께 가줄 수 있겠어, 오드리?" "그 잠시가 얼마 동안인가요? 카멜에서처럼 1주일간인가요. 아니면 중국에서처럼 1년인가요?" 그녀의 말에 그들은 둘 다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비유가 너무나 적절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와 함께라면 이 세상 어디든 가지 못할 곳이 없을 것 같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단 몇일 이상은 집을 떠나 있을 수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난 다음에 쓸 책의 자료를 수집하느라 인도에 갔다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않아." "즐거운 여행이었겠군요." "이번에는 이집트로 갈 작정이야."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와 함께 가지 않겠어?" 그의 말에 그녀는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하고 싶었고, 그와 함께라면 어디든 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집트는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언제 떠나실 건가요?" "올해 말쯤이나 아니면 내년 봄이 될 것 같아. 내가 언제 떠나는가 하는 것이 문젠가?" 오드리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렇진 않겠죠. 하지만 나는 내가 다시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할아버지가 하루 종일 꼼짝도 않고 자리에만 앉아 계시는 장면을 상상할 수가 없어요." 오드리가 다시 그런 식의 말을 꺼내자 찰스는 슬며시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찰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요. 그리고 지금은 몰리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구요." ''몰리는 같이 데려가면 되잖아." 오드리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난 언제까지나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알고 있어요?" ''때때로 그 말을 믿기 힘든 경우도 있지." 그는 다시 의자에 앉아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늘밤 당장 내 부탁에 대답해 줄 것을 원하는 것도 아니야. 그저... 내년 봄에 이집트로 가는 것에 대해 신중히 생각을 해봐 주기를 원할 뿐이야. 그만큼 낭만적인 여행이 또 어디에 있겠어 ?"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소를 머금었다. "당신은 그 점을 강조해서는 안 돼요. 찰스. 그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일이니까요. 설사 오클라호마의 외양간이라 하더라도 당신만 곁에 있어 준다면 난 행복할 거예요." 그녀의 말에 찰스는 웃음을 터뜨렸고 갑자기 분위기가 휠씬 화기애애해졌다. 그들의 입술과 입술이 다시 만나고, 그들의 몸과 몸이 맞부딪히자 그녀는 다시 한번 환희의 세계로 이끌려 들어갔다. 다시금 그와 이렇게 가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뿐이었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찰스, 난 도저히 당신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게 되고 말 것 같아요. 만약 어느날 당신이 누군가와 결혼이라도 해 버린다면 그건 내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될 거예요." ''그걸 막는 방법들이 있지." 하고 그는 그녀의 귀에다 대고 심각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그들의 옷이 벗겨져 마룻바닥에 던져지고, 다시 그녀가 그의 가슴을 파고들자 그들은 아무런 생각도 머리에 떠올릴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지금까지 찰스없이 살아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찰스 또한 그녀와 헤어져 있던 동안의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공허한 것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그의 품에서 빠져 나왔을 때 침대 옆에 놓여져 있던 찰스의 시계는 이미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난 집에 가야 해요." 몇달 동안 서로 부부행세를 하며 지냈던 중국과는 사정이 달랐던 것이다. 그곳은 허위와 가식이 가득한 도시였고, 그러한 분위기 자체가 그들에게는 무척이나 생소한 것으로 느껴졌다. 찰스는 그녀가 옷을 입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자신도 옷을 입고는 그녀를 택시로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찰스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키스를 했고, 그녀가 열쇠로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 보았다. 잠시 후 이층의 그녀 방에 환하게 불이 켜지더니, 커튼을 젖히고 그녀가 손을 흔들어 주는 것이 보였다. 그는 무척이나 외로운 마음으로 호텔로 돌아왔다. 침대에서는 그때까지도 그녀의 체취가 풍기고 있었고, 베개 위에 떨어져 있는 그녀의 길다란 갈색머리 한 가닥이 자신에게 남겨진 선물인 것처럼 여겨졌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다시 그녀를 데려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음날 오후가 되어서야 다시 만날 수 있었고, 그의 호텔로 조심스럽게 들어간 그녀는 밤 10시까지 그곳에서 찰스와 함께 있었다. 그녀는 그와 함께 있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지만 그날 밤 그의 눈동자에는 무언가 무척 심각한 표정이 어려 있었다. "왜 그래요. 찰스?"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당신에게 할 이야기가 좀 있어." ''그것도 그리 나쁘진 않겠군요." 그녀가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는 몹시 초조한 듯이 벌떡 일어나 방안을 왔다갔다 하며 서성대더니 마침내 다시 자리에 앉아서 그녀의 파란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 보는 것이었다. "난 내일 오후 뉴욕으로 가야해." 그 한마디가 마치 날카로운 비수처럼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래서요?" "미국 출판업자 한 사람과 함께 무슨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데 한 1주일 쯤 걸릴 것 같아." 그녀는 혹시 그가 뉴욕까지 함께 가자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했지만, 막상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그것보다도 훨씬 더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난 이제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거야.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나갈 수는 없잖아, 오드리.... 당신과 헤어져 살았던 지난 한해가 내게는 존이 죽고 난 이후로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었어." 그는 솔직하게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이제 또다시 난 당신 곁을 떠나려 하고 있어.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가슴 아픈 이별이 되풀이 되어야 하는 거지?" 그녀는 그래서는 안 될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고 싶었다. 당분간, 적어도 그녀가 자신의 할아버지를 떠나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만이라도 왜 이러한 만남들이 지속될 수 없다는 말인가. 오드리는 먼저 자신에게 그러한 질문을 던져 보았다. 결코 쉽게 결론 내릴 수 있는 질문은 아니었다. "난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 그래서 당신을 영국으로 데려가고 싶은거야. 나도 그러기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걸리리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한달이나 두달 쯤, 어쨌건 난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 오드리. 내 모든 것을 다 바칠 수도 있을 만큼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야." 그가 한 말은 그녀 자신이 항상 꿈꾸어 오던 소망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녀가 일찌기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는 오직 그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도대체 왜 그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조금만 더 기다려 주지 않으려 하는 것일까? 순식간에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고, 그녀는 긴 갈색머리를 흔들며 자신의 손가락으로 찰스의 뺨을 어루만졌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당신은 모르시나요. 찰스? 내가 얼마나 간절히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르시겠어요?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어요. 그럴 수가 없단 말이에요!"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서는 공허한 눈길로 아득히 내려다 보이는 유니언 스퀘어를 바라보았다. "난 할아버지의 곁을 떠날 수가 없어요. 그런 내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시겠어요?" "당신은 정말로 할아버지가 그것을 원하고 있다고 생각해 ? 내가 보기에 당신 할아버지는 그렇게 이성적이지 못한 사람이 아니오, 오드리 그 할아버지를 위해서 당신 자신의 인생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할아버지의 심장은 갈래갈래 찢어져 버리고 말거예요." ''그럼 내 심장은 그렇게 되어도 좋다는 말인가?" 찰스의 목소리는 무척 부드럽고 차분했지만 그의 눈엔 눈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그에게 차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사랑해요. 찰스," 그녀의 눈이 제발 자신을 좀 이해해 달라고 그에게 애원하고 있었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그건 우리 둘 모두를 죽여 버리고 말거야. 나와 결혼해 주겠어?" 그녀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결코 들려 줄 수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감수하지 않을 수 없는 희생이었다. 하르삔에서의 8개월과 마찬가지로.... "오드리, 대답해 줘." 그는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일어서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것은 자신이 이렇게 애원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인상을 풍기게 하는 비장한 표정이었다. "오드리?" "찰스, 난.... 지금은 그럴 수 없어요." ''그러면 언제 그럴 수 있다는 거야? 다음달에? 내년에? 난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는 결코 그 누구와도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 이제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에게 다 줄 수도 있어. 나의 인생, 나의 집, 나의 진실, 그 모든 것을 말이야. 하지만 난 또다시 10년을 기다릴 수는 없어. 당신의 할아버지가 죽기를 기다리면서 나와 당신의 인생을 허비할 수는 없지 않겠어 ? 어떻게 보면 할아버지가 오히려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지도 몰라. 내가 직접 할아버지에게 그런 말씀을 드려 볼까? 난 기꺼이 말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찰스. 할아버지는 틀림없이 나를 가도록 내버려 둘 거예요. 하지만 그러고 나서 그는 죽어 버릴 거예요. 할아버지가 가진 것은 오로지 나밖에 없으니까요." ''내게도 오직 당신 밖에는 없어." "당신은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유일한 남자예요." "그렇다면, 나와 결혼합시다." 그녀는 공허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서 있다가 고개를 흔들며 풀썩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찰스, 난 그럴 수 없어요." 그러자 이번에는 찰스가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창가로 다가갔다. "그렇다면 내가 떠나 버리고 난 후 우리들의 모든 관계는 끝나 버릴거야. 두 번 다시 당신을 만나지 않겠어. 난 당신과 이런 식의 게임을 하자는 것이 아니었어." ''이건 게임이 아니예요. 찰스. 이건 나의 인생이에요. 당신의 인생이기도 하구요. 그런 식으로 나를 몰아 붙이기 전에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요." 그녀는 그의 등에다 대고 애타는 심정으로 부르짖었지만 그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속에는 말할 수 없는 슬픔이 그렁거리고 있었다. ''내 인생에서 당신이 떠나 버리고 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이 무엇이겠어? 공허함? 부질없는 약속들? 거짓말? 당신은 몰리의 아버지가 나였으면 좋겠다고 했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요. 하지만 우린 결코 그런 아기를 가질 수도 없고 그런 아기를 가져서도 안돼. 내가 원하는 것은 진짜 생활, 진짜 아내, 진짜 아이와 함께 살고 싶다는 거야. 제임스와 바이올렛 처럼.." 찰스의 그 말에는 전혀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살아요." ''그래서 뭘 어떻게 하란 말이지? 지방 신문사에 취직을 할까? 신발 장사를 하나? 난 여행작가야, 오드리. 당신도 내 인생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잖아. 그냥 여기에 자리를 잡고 눌러 앉아서는 할 일을 할 수가 없어. 우리들 중에 한 사람은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되고 이번에는 당신이 그렇게 해야 할 차례야. 당신은 나와 함께 가야 한다구!" "찰스, 난 그럴 수 없어요." 오드리는 목이 매여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봐, 오드리. 난 4시까지 여기에 있을 거야. 비행기가 6시에 출발하니까." 채 24시간이 못 되는 동안 그렇게 커다란 마음의 변화가 있을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을 거예요." ''난 우리들 모두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야. 당신은 마음을 정하지 않으면 안돼." ''당신은 마치 내가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투로 말씀하시는군요. 틀림없이 내게는 이곳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그렇다면 당신이 나에 대해서 할 일이 뭐라고 생각해? 당신 자신과 그 아기를 위해서는? 제발,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말고 당신이 원하는 것들을 해나가야 하지 않겠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당신과의 결혼이에요." ''그렇다면 두말 말고 함께 가야지. 아니면 최소한 곧 오겠다는 약속이라도 해줘." "난 그것도 약속할 수가 없어요."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자신이 지금 처해 있는 이 모순된 상황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난 지금 당신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가 없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곳으로 오기 전부터 이러한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나 버린 것이다. 그녀가 결혼을 약속해 주지 않는다면 그녀에 대한 모든 추억들을 기억의 저편으로 접어 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의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속에서 그들은 둘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의 집 앞에 택시가 도착하자 그는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작별의 키스를 나누었다. "내가 너무 잔인하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요. 하지만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우린 깨끗이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 아니겠어? 우리 모두를 위해서..." "그래야 하는 이유가 뭐죠?"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수가 없었다. "왜 지금 이 순간에 그런 결정을 내려야 하는 거죠? 당신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건가요?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가능성이 갑자기 그녀의 머리에 떠올랐으나 그는 역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당신 없이는 살 수가 없기 때문에 하는 소리야. 어차피 함께 살 수 없다면 차라리 난 조금이라도 일찍 혼자 사는 생활에 익숙해져야 하지 않겠어. 지금 당장부터라도." "말도 안 돼요." 그녀는 하르삔에서 그의 결혼 제의를 거부하는 전보를 보낸 후 그로부터 일체의 소식이 끊어졌을 때부터 그런 그의 생각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내가 져야만 하는 책임을 생각해 봐요." "그런 것 저런 것 다 따지다 보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 오드리. 이제 한가지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된 거라구." 그녀는 슬픔에 찌든 초라한 고개를 가로저으며 택시에서 내렸다. 그가 그녀를 따라 내려서는 그녀 집 대문 앞에서 다시 한번 작별의 키스를 나누었다. "사랑해." "나 역시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잠든 아기를 가만히 껴안아 보았다. 따뜻한 체온이 그녀에게로 전해져 왔고, 가녀린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찰스가 말한 한마디 한마디를 되새겨 보았다. 그가 그 모든 것을 바로 지금 한순간에 원하고 있는 것은 도저히 무리한 일일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아침 식탁에 앉아서 까지도 넋을 잃고 앞에 놓인 그릇들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푸석푸석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할아버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젯밤에 너무 많이 마신 것 아니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소를 띄워 보려고 노력했다. "그럼 어디가 아픈 게냐?" ''약간 피곤할 뿐이에요." 그러자 갑자기 할아버지가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너 그사람을 무척 좋아하는 모양이더구나." "그는 좋은 친구예요." "그게 무슨 소리냐?" '사실은...' 하고 그녀는 말을 꺼내려다 말고 어색한 미소와 함께 도로 집어 삼키고 말았다. "차라리 말씀드리지 않는 게 낫겠어요." "왜지?"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가슴이 아프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도 꺼내지 않았다. "우린 그저 친구 사이일 뿐이에요. 할아버지." "그렇게 단순한 관계일 것 같지만은 않더구나, 최소한 그의 쪽에서는 말이야. 내 쪽에서 안달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그렇게 낙타나 코끼리를 집어 타고 온 세상을 돌아다니는 사람과 함께 사는 여자는 얼마나 피곤하겠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구나." 그녀는 그런 할아버지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난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걸요." ''그것 뿐만 아니라 자식에게도 별로 좋지 않겠지." 그리고 그 자신에게도 바람직하지는 않은 일일 것이다. 오드리는 할아버지가 그것 역시 생각에 넣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럴만한 권리가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이제 83살이 가까와지고 있었고, 그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녀도 그러한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심각하지 않아요. 할아버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니까요." 하지만 그로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눈빛에서 충분히 그러한 심정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러자 그녀는 또다시 엄청난 무게로 자신을 짓눌러 오는 중압감을 느끼며 12시에 찰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들은 그날 시내에서 함께 점심을 먹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들이 레스토랑에서 마주쳤을 때 너무나 초췌한 서로의 모습에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둘 다 머릿속이 너무나도 복잡했던 것이다. 그들은 잠시 서로 잡담을 나누었다. 물론 식사도 아직 주문하지 않은 채였다. ''어떻게 됐어?" 그녀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라는 생각에 그의 눈을 바라다 보았으나 도저히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대답을 아시잖아요. 찰스. 당신을 사랑해요. 하지만 결혼은 할 수 없어요. 지금 당장은 말이에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결정을 내렸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어. 그건 할아버지 때문인가?"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미안해, 오드리." 그는 그녀의 손을 한번 잡았다 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드시 점심을 먹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렇지? 조금만 서두르면 서너 시 쯤에 비행기에 오를 수도 있을 것 같군." 모든 것이 너무도 빨리 그녀의 앞을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의 눈빛 속에는 감취진 분노와 상처, 그리고 복수심이 깃들어 있는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의 뒤를 따라 식당을 나왔다 싶었는데 어느새 자신의 집앞에까지 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찰스가 택시 옆에 기대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픈 상처가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그를 향해 그녀는 작별의 키스를 나누기 위해 한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찰스는 오히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한 손을 들어 그녀의 동작을 제지했다. 그는 머리를 한번 설레설레 흔들고는 곧장 택시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안녕.." 하고 나지막히 중얼거렸을 뿐이다. 그러자, 그녀가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가 탄 택시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모든 추억들, 모든 순간들과 함께 그녀가 그렇게도 사랑하던 사람은 가 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영원히... 24 오드리는 할아버지의 저택에 들어서서 하인이 조용히 문을 닫는 걸 바라보고 있는 동안, 윗층 홀 쪽이 왠지 시끄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층계 밑에 놓여 있는 트렁크와 짐꾸러미들도 낯선 것들이었다. 그러고 있는 한순간, 오드리는 서재 입구 쪽에서 아나벨이 자신을 지켜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오드리가 집에 돌아와서 불쾌한 대면을 하고 난 그날 이후 그들 두 사람이 다시 맞부딪치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드리는 아나벨이 무엇 때문에 그곳에 서 있는지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한동안 지켜 보고만 있었다. 처음에는 짐을 꾸려서 어디 여행이라도 떠나려고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었으나, 오드리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순간적으로 깨닫고서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다. ''뭐가 잘못됐니?" ''하코트가 떠나 버렸어." 오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더 이상 충격을 받지는 않았으나, 아나벨의 행동이 궁금하게 여겨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오드리는 아나벨에 대해서 여전히 크게 실망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여기서 뭘 하는 거니?" 오드리의 어조는 아나벨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서글픈 빛깔의 여운을 길게 남겼다. "버링젬에 있고 싶지가 않았어. 그곳이 싫어.." "그럼 호텔이나 찾아갈 것이지, 이곳에는 왜 왔니?" 오드리가 독설을 늘어놓자 아나벨은 소스라치게 놀라는 눈치였다. "이곳은 언니 집이기도 하지만 내 집이기도 해." "이곳에 머물러도 괜찮겠느냐고 할아버지께 여쭤보기는 했어?"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가 집안에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깨닫지 못했었다. "아나벨은 내게 단 한마디 상의도 하지 않았어. 아나벨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겠니?" 오드리와 아나벨은 어렸을 때처럼 해서는 안될 일을 하다가 할아버지에게 들켜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드리는 자신이 혹시 아나벨을 너무 혹독하게 대하지나 않았나 해서 걱정이 되었고, 아나벨은 그냥 찾아올 것이 아니라 사전에 전화라도 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오.. 오늘 아침에 전화를 드리려고 했어요. 할아버지. 하지만...." ''이제는 거짓말까지 하는구나." 할아버지는 심히 불쾌한 표정으로 아나벨을 쳐다보았다. "사람이 거짓말을 하지 않을 최소한의 예절은 갖추어야지. 네 남편은 지금 어디 있는 게냐?" "모르겠어요. 친구들과 함께 호수에 갔나 봐요." "그래서 넌 남편을 버리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냐?" ''그게 아니라...." 홀에서 모든 걸 설명하기란 보통 계면쩍은 일이 아니었으나, 할아버지는 그녀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말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이가 이혼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남편 뜻에 그렇게 순순히 따르다니, 퍽도 훌룡한 아내로구나. 네가 그럴 의무까지는 없다는 걸 알고 있니?" 아나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는...." "집에서 나오고 싶었다는 거냐?" 할아버지는 정곡을 찌르는 말만을 늘어놓고 있었고, 아나벨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다. 무슨 얘긴지. 참 편리하기도 하구나. 일이 그렇게 저렇게 되어 버려서, 이 할애비와 언니한테 오게 되었다는 거냐, 아나벨?" 아나벨은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어? 이 할애비의 집에 있는 하인들 때문에 이곳에서는 지내기가 편하다든지, 아니면 언니가 네 자식들을 너무나도 잘 돌봐 주기 때문이라든지, 뭐 그런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니냐?" 할아버지는 아나벨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오드리는 안절부절 못하는 그녀를 보고서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저는 그냥, 잠시 머물까 생각하고서...." "잠시라면 얼마 동안을 말하는 게냐, 아나벨? 일주일? 이주일? 아니면, 그것보다 덜 머무를 생각이냐?" 할아버지가 아나벨을 완전히 떡 주무르듯이 하고 있어서, 오드리는 그녀가 측은하게 생각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진짜 측은하게 여긴 것은 아니고, 단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아나벨은 이제 동정해 줄 여지조차 없었던 것이다. 아나벨은 너무 몰인정했고 버릇이 없었으며, 술을 너무 많이 마셨고, 노골적으로 사악한 행동을 하는 경우까지 종종 있었다. "그래, 이곳에서 얼마나 머무를 생각이냐?" ''마땅한 거치가 생길 때까지 머무르면 안 될까요?" "내게 묻지 말고 네 생각을 얘기하라니까. 아뭏든, 그렇다면 좋다. 네가 마땅한 거처를 발견할 때까지 이곳에 머물도록 허락해 주마. 하지만 반드시 그때까지만 머물 수 있다는 걸 명심하거라." 할아버지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오드리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득의만만해 하는 아나벨의 모습이 그의 시선에 함께 들어왔다. "그리고 네 언니를 공연히 못살게 굴어서도 안 된다." 할아버지의 이 말은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었으나, 오드리와 아나벨이 공연히라는 말을 서로 다르게 해석한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그후 채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아나벨은 솜씨 좋게 두 아이를 오드리의 방에 집어넣고서 그곳에서 놀라고 했다. 윈스톤은 오드리의 책을 전부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려고 했고, 아나벨은 심지어 하나를 몰리의 유아용 침대에 눕혀 놓기까지 했다. 그러다 몰리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침입자의 발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리게 하자, 아나벨은 당장에라도 몰리를 잡아먹을 것처럼 날뛰었다. "이 쥐새끼 같은 중국 트기년이!" 아나벨이 욕설을 퍼부어댔다. 바로 그 순간, 아무런 예고도 없이 오드리의 손이 아나벨의 뺨을 후려 갈겼다. 정확히 얼굴을 가른 단 한번의 통렬한 강타였다. 오드리는 그 순간 마음까지 후련해 지는 것 같았으며, 아나벨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주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나벨은 따귀를 한 대 얻어맞고 나서 잠잠해지기는 했으나, 오드리는 다섯 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침실 문을 닫고 휴식을 취하면서 찰스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찰스를 만났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고,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동안 눈물이 베개를 적셨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거기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와, 자신은 이제 할아버지와 아나벨의 굴레에 영원히 갇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되자, 오드리는 자신이 잃어버린 남자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그가 영원히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지울 수 없어 마침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에 식사를 하기 위해서 아랫층에 내려갔을 때 그녀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으나, 아무도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혼자만의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고, 아나벨은 하코트의 험담을 늘어놓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식사가 끝나고 디저트가 나왔을 무렵, 오드리는 속이 메슥거리며 몸까지 이상해진 것 같았다. 그후, 몇 개월 동안은 악몽과도 같은 시간들이었다. 아나벨이 고용한 유모들은 불과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서 모두들 떠나 버렸다. 그들은 아나벨을 역겹게 느끼며 혐오했고, 그녀의 아이들 또한 결코 귀엽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하인들은 아나벨 가족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귀잖은 일들이 더욱 많아지게 되자 한결같이 눈살을 찌푸렸으며, 아나벨은 오드리에게 아이들을 맡겨놓고 밖으로 나돌아 다니기에 바빴다. 할아버지조차 이제는 싫증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 같았으며, 불과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그토록 귀여워해 주었던 몰리에게도 점점 더 흥미를 잃어 가고 있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그에게 기쁨을 안겨다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드리는 자신의 힘으로도 할아버지의 원기를 북돋아 줄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오드리도 또한 날마다 질질 끝려가다시피 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고, 그녀가 조금이라도 위안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은 몰리 밖에 없었다. 오드리는 찰스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찰스에게 몇 번인가 편지를 보내려고 했었으나, 그때마다 편지를 쓰다말고 찢어 버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달라질 것 역시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할아버지의 기력이 점점 더 떨어지는 것 같아서 오드리는 더욱더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할아버지는 정치에 관해서도 관심을 쏟지 않았으며, 신문도 읽지 않았고, 클럽에 나가서 식사를 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오드리는 아나벨에게 몇번인가 그런 얘기를 했었으나, 아나벨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녀는 자기 친구들이나 독신 남자들과 어울려서 밖으로 나돌아 다니기에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오페라 공연을 보러 다니고, 일류 레스토랑이나 댄스 파티 같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할아버지와 오드리와 심지어는 그녀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건 너무하잖니, 아나벨." 크리스마스 이브날까지 아나벨이 친구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려고 하면서 할아버지와 함께 식사조차 하지 않으려고 하자, 오드리는 마침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와 최소한 한 시간 정도는 함께 지낼 수 있잖아." 그녀의 목소리에는 예전에 찾아볼 수 없던 독기가 서려 있었다. ''할아버지는 널 지탱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돼." "뭐라구? 할아버지는 아무도 지탱해 주지 않아. 그가 지탱시켜 주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언니라구. 언니가 항상 할아버지와 함께 있잖아. 언니는 그것 밖에는 하는 일이 없으니까 말야." 그녀는 도리어 언니에게 모욕만 줄 뿐이었다. 아나벨은 언제나 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이라고 해서 그래서는 안된다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했다. 오드리는 어차피 늙은 하녀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오드리를 원하는 남자는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스스로 그 바보같은 중국 애기를 떠맡겠다고 나선 것이다. 아나벨은 그 아기가 오드리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드리는 그러한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마이 리를 마치 친자식처럼 사랑했고, 주위에 떠돌아 다니는 소문들에는 귀도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오드리는 오로지 아나벨이 점점 더 타락의 너울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 안타까왔을 뿐이었지만 아무리 충고하고 심지어 애원까지 해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나벨은 하루하루를 형편없는 사내들이나 독한 술로 덧없이 보내 버리고 있었으며, 이제 오드리도 그런 그녀를 어떻게든 변화시켜 보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이미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해 있었으며, 오드리는 마이 리를 보살피는 데 많은 신경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나벨이 살아가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말할 수 없이 가슴이 아프긴 했지만 오드리가 그런 아나벨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고, 이제는 어차피 아나벨은 그런 애였으니까 하는 식으로 완전히 체념해 버리고 말았다. 술과 무절제한 생활이 그녀를 하루가 다르게 망쳐 놓고 있었다. 하코트가 가끔 그 집에 나타나서 아나벨과 그녀의 변호사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부어 댔지만, 그녀의 할아버지는 하인들에게 더 이상 그를 집안으로 들여 놓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 두었다. 그는 언제나 잔뜩 술을 먹고 찾아와서는 아나벨과 함께 추태를 보이곤 했고, 그녀의 할아버지는 더 이상 전등이나 값비싼 골동품들이 깨져 나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할아버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딘가 그 애가 살 집을 따로 하나 마련해 줘야겠다." 그는 지친 듯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난 이제 그런 걱정들을 하며 살기에는 너무나 늙었다. 이제 그 꼴을 보지 않아도 될 날이 얼마 멀지않은 것 같구나. 내가 죽고 나면 너희들 둘이서 이 집을 물려받게 될 테지만, 너희들 생활이나 아이들을 키우는 데 크게 부족하진 않을 게야." 할아버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타호 호숫가의 저택도 그들이 공동으로 물려받게 되겠지만, 오드리는 아나벨과 함께 산다는 것은 생각 조차 하기 싫었기 때문에 어디론가 훌쩍 떠나서 혼자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할아버지에게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왜 벌써 그런 말씀을 하시냐고 눈을 흘기긴 했지만 아무래도 그의 말이 옳은 것 같아 어쩐지 불안했다. 할아버지는 지난 몇 달 사이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었으며 하루 종일 잠에 빠져 있었다. 이제는 산책을 가려면 그를 억지로 깨우지 않으면 안되었고, 저녁 식사 전이나 늦은 오후 쯤에 오드리가 몰리를 데리고 그의 방으로 들어가 보면 여전히 잠을 자고 있기가 일쑤였다. 마이 리는 이제 막 걸음마를 배워서 뒤뚱거리며 온 방안을 걸어 다녔다. 머리칼은 여전히 위로 치켜져 있었으며 커다란 두 눈이 항상 즐거운 듯 반짝거렸다. 오드리는 크리스마스 이브날 그녀에게 빨간색 비단 웃도리와 하얀 스타킹을 신기고, 발에는 까만색 가죽 신발을 신겨 주었다. 자기가 태어난 하르삔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도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는 그녀를 자랑스러운 듯 바라보면서 오드리는 할아버지의 품에 그녀를 안겨 주었다. 어린 하나는 이미 자신의 침대에서 잠들어 있었고, 윈스톤은 크리스탈 꽃병을 하나 깨먹고는 할아버지에게 실컷 꾸중을 들은 후 하녀의 손에 이끌려 이층으로 올라가 있었다. 다른 두 아이에게는 아직 유모가 없었기 때문에 오드리가 항상 그들 모두를 돌봐주어야 했다. 아나벨이 아이들 근처에서 얼씬거리지도 않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무릎 위에 몰리를 앉혀 놓고 오드리를 바라보았다. "네 동생은 오늘 밤에 또 어딜 나가니, 오드리?" "스탄톤스에 저녁 식사하러 간 것 같아요." "그렇게 허구헌 날 쓰잘 데 없이 싸돌아 다니기만 하니..." 할아버지는 빈정대듯 말하고는 다시 오드리를 바라보았다. "너도 매일같이 애들 뒷치닥거리나 하고 있을 게 아니라 네 스스로의 인생을 위해 뭔가 다른 일을 찾아야하지 않겠냐, 오드리." "아나벨도 언젠가 정신을 차리겠죠. 뭐, 할아버지." 하지만 그녀 스스로도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기는 했지만, 그로 인해 집안에 어떤 문제가 생기는 것은 결코 원치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할아버지는 무척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다. 요즘에는 초인종 소리나 전화벨 소리, 심지어 바깥의 차 소리까지도 그의 분노를 자아내곤 했으며, 서서히 귀가 어두워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고 불평을 늘어놓곤했다. 갑자기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이 그를 더욱더 혼란스럽게 했던 것이다. 오드리는 그가 안정을 되찾을 수 있게 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았다. 요즘은 예전보다 경기가 좋아겼기 때문인지 집안에서 일할 사람을 구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졌다. 사람들은 마치 길들여진 가축처럼 집안 일을 하기 보다는 공장이나 가게에서 일하는 것을 훨씬 더 좋아했다. 따라서 오드리는 손수 집안을 청소하거나 카페트를 쓸어야 하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졌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이브 날 거실에 난로를 피워 놓고 파란색 이브닝 가운을 입고 앉아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그런 상태가 호전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옆에서는 할아버지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아기는 이층으로 자러 보냈다. 오드리는 한참 동안을 그렇게 앉아 포도주를 한 모금씩 마시며 작년 이맘 때를 생각해 보고 있었다. 작년 이맘 때, 그녀는 하르삔의 고아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소리 높여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다시 찰스가 기억 속에 떠올랐고, 그가 벌써 이집트로 갔을지 어떨지 궁금해졌다. 그런 생각만 해도 오드리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으나 이미 모든 것은 끝나 버린 후였다. 그녀는 이미 몇 달 전에 그의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내어 조심스럽게 보석함 속에 넣어 두었었다. 제임스와 바이올렛으로부터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아보기는 했지만, 찰스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씌어 있지 않았다. 1935년에 다시 오드리를 만나고 싶다며 오는 여름에도 안티베스로 놀러 오라는 이야기가 씌여 있을 뿐이었다. 그녀로서도 그것은 더할 수 없이 반가운 제안이었으나 할아버지의 기력이 점점 더 쇠진해 가는 이 시점에서는 그의 곁을 떠나 어디론가 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3월 15일, 마이 리는 첫 돐을 맞았고, 이틀 후에 에드워드 드리스콜은 뇌졸증으로 쓰러져 심한 언어장애와 함께 좌반신을 완전히 쓰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그는 자리에 누운 채 처량한 눈빛으로 자신을 간호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방안을 다니는 오드리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오드리가 아나벨에게 할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전하는 데는 꼬박 이틀이 걸렸다. 그녀는 일주일 예정으로 로스앤젤레스를 여행하는 중이었고, 아무리 전화를 해보아도 예약해 둔 호텔에서는 아예 잠도 자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이틀 만에야 겨우 그녀와 통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드리는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네 아이들에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언니가 있잖아." 성실한 오드리가 그런 일이 생겼으면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하고 그들을 보살필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오드리는 너무나 화가나서 그녀가 눈앞에 있었더라면 예전처럼 뺨이라도 한대 후려갈겼을 것 같았다. 아나벨은 미혼이건 기혼이건 남자라면 가리지 않고 마구 추문을 뿌리고 다니는 바람에 온 나라에 그녀의 소문이 퍼질 지경이었고, 그런 그녀에 뒤질세라 하코트 또한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의 아내와 함께 맺은 불륜의 정으로 말미암아 거의 매일같이 지방신문의 가십란에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틀 전에 할아버지가 쓰러지셨어, 빨리 좀 와봐." ''왜?" 오드리는 동생의 대답을 들으면서 온 몸이 빳빳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왜냐구? 왜냐하면 할아버지는 지금 병든 노인이고,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기 때문이야. 그는 너를 지금까지 키워 준 분이고 따라서 당연히 네게는 그런 은혜에 보답할 의무가 있는 것 아니니? 그럼 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단 말이니?" 아나벨은 오드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이기적인 사람이었고, 이제는 그런 그녀가 혐오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잖아. 더우기 난 환자의 방 주위에서 얼씬대는 걸 무척 싫어하잖아." 오드리는 윈스톤이 천연두에 걸려서 그게 하나와 몰리에게까지 전염되었던 경우가 있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그때도 아나벨은 그들 셋을 모두 오드리에게 떠맡기고 자신은 산타 바바라로 여행을 떠나 버렸었다. 그리고도 아이들이 궁금하지도 않은 듯 전화 한통 하지 않았던 그녀였다. "당장 돌아오지 못하겠니!" 오드리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왔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창녀처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돌아다닐 게 아니라 오늘밤 당장 돌아오란 말이야! 알아 듣겠어?" ''내게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마, 간사한 여우같으니라구!" 오드리는 동생의 목소리에 묻어 있는 독기 때문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들 사이에는 더 이상 한때 자매였다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를 않았던 것이다. "난 내가 돌아가고 싶어지면 언제든 돌아갈테니 걱정하지마!" 무엇을 하러 돌아오겠다는 말인가? 상속을 받기 위해서?... 그러나, 오드리는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결코 아나벨과 한 집에서 같이 살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면 그녀 또한 어디론가 떠나가야 할 것이다. 이제 그 집 뿐만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 그 어디에도 그녀를 붙들어 둘 수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아나벨에게 빚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반평생을 동생에게 바쳤고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줄 것이 없는 것이다. 이제 아나벨은 자신의 일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할 때가 된 것이다. 오드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 아나벨, 언제든지 너 좋을 때 돌아와라." 그것으로 그녀의 한 시대는 그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녀는 전화를 끊으면서 마치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듯한 느낌을 맛보았다. 25 그녀의 할아버지는 7월 초까지 그런 상태로 목숨을 부지하였으나 마침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오드리는 할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가볍게 입을 맞추며 치켜 떠진 눈을 가만히 감겨 주었다. 오드리는 미처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을 하지 못하면서도 할아버지의 죽음이 하늘의 은총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 역시 한때는 무척이나 억세고 자신만만한 사나이였으나, 쓸모 없게 되어 버린 병든 육신에 갇힌 허황된 마음과 한 치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혀를 가진 채 벙어리가 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이 세상의 어떤 감옥에 갇힌 것 보다도 더욱더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할아버지도 맘껏 자유를 누려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는 인생살이와 병마에 찌들대로 찌든 여든 세 살의 노인이었던 것이다. 오드리는 무거운 마음으로 모든 장례절차를 지켜 보았다. 한 번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그렇게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할 줄은 미처 짐작하지 못했었다. 장례식 날은 아나벨도 꽤 엄숙해 보였으나, 아니나 다를까 유언장을 읽어 보더니 기쁜 듯이 미소를 가득 머금으며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피워 무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들 두 자매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유산을 물려주었던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와 믹스 베이, 그리고 타호 호수에 각각 저택이 있었으며, 그들이 조금만 신경을 쓰면 평생을 먹고 살아도 남을 만한 견실한 주식투자가 있었다. 오드리는 특히 '나의 증손녀 몰리 드리스콜.' 이라고 표현해 놓은 마이 리를 위해 따로 조그마한 유산을 남겨 놓았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콧날이 시큰해 졌다. 유언장에는 그들이 저택에 대한 상대방의 권리를 사들일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함께 살 수도 있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오드리는 전혀 아나벨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 다음 몇 주일 동안 오드리는 차분한 마음으로 자신의 짐들을 꾸려서 지하실의 상자 속에 차곡차곡 집어 넣었다. 그 중에는 이미 마이 리가 너무 커져서 입을 수 없게 된 옷들과 여행용 트렁크, 그리고 심지어는 그녀 아버지의 앨범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녀는 그것들을 모두 파손되지 않게 사이 사이에 종이를 집어 넣어서 조심스럽게 상자 속에 넣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단 몇 개의 트렁크 뿐이었으며, 몇 달 동안 우선 유럽을 여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다음의 일은 유럽에서 다시 천천히 생각해 볼 계획이었다. 그녀는 물론 바이올렛이나 제임스도 만나고 싶었지만 그들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은 찰스를 만나는 일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찰스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제 누구 못지않게 자유로운 몸이 되었으며 마이 리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예전처럼 걸릴 것이 없었다. 오드리는 지난 9월 찰스가 샌프란시스코를 다녀간 이후로는 한 번도 그로부터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직도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 그의 구혼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왔다. 이제는 그가 자신을 만나 주려고나 할지 조차 의문스러웠다. 하지만, 오드리는 결코 그가 자신을 피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따라서 오드리의 이번 유럽 여행의 가장 커다란 동기는 찰스를 만나는 것이었다. 그녀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이런저런 잡다한 일들은 7월 말경에 대충 마무리가 되었다. 할아버지가 남겨 놓은 유산 처리문제와 다른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다 정리가 되자, 마침내 그녀는 마음을 먹고 어느날 아침 아나벨과 마주 앉았다. 아나벨은 마침 외출을 하려던 참인지 옷을 차려입고 있었는데, 오드리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입술의 연지가 너무 진하게 칠해졌다는 생각을 얼핏 해냈다. 침대 위에는 옷가지가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고, 그녀는 머리를 위로 말아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그때 당시에 마리네 디트리히의 스타일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었고, 그러한 그녀의 패션은 유럽에서 디트리히가 불러일으킨 것 만큼이나 커다란 선풍을 샌프란시스코에 일으키고 있었다. "바지를 입으니 더 예뻐 보이는구나." 오드리가 동생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자리에 앉자 아나벨은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할아버지가 죽고 난 이후로 거의 이야기를 나누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아나벨은 자신의 언니가 또 일장 훈시를 늘어놓으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난 곧 외출해야 돼." 아나벨은 오드리의 눈을 피하며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경대 위에 놓여진 핑크빛 재떨이에서는 담배가 타고 있었다. 옆방에서는 윈스톤과 하나가 몰리와 함께 놀다가 장난감 때문에 서로 다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무척 개구장이들이긴 했지만 몰리와는 서로 잘 어울려 놀았다. 아마도 그 집을 떠나면 몰리는 윈스톤과 하나를 무척 그리워하리라. "네 시간을 많이 뺏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마, 아나벨." 수수한 검정색 비단 드레스를 입은 오드리는 실제보다도 훨씬 나이가 들어 보였다. 오드리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애도하는 뜻으로 검정색 옷을 주로 입곤 했지만, 아나벨은 이미 할아버지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린 듯했다. "며칠 내에 유럽으로 떠나려고 해. 네가 미리 알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말야." ''뭐라구?" 아나벨의 깜짝 놀라는 모습이 오히려 오드리에게는 이상하게 보였다. 그들은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거의 마주치는 일조차 없었으며 어쩌다가 서로 대면하는 경우가 있어도 도리어 기분만 상할 뿐이었다. "언제 그런 결정을 내렸어?" 아나벨은 한쪽 눈에 화장을 하다 말고 의자 위로 털썩 주저앉으며 차분히 미소를 짓고 있는 오드리를 바라보았다. "몇 주 전에 그렇게 마음을 먹었어. 이 집은 우리가 함께 살기에는 방이 너무 부족하잖아, 아나벨. 게다가 난 이제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을 이유도 없어졌고. 난 할아버지 때문에 여기 머물러 있었는데 이젠 돌아가셨으니 말이야." ''그럼 난 어떡하구?" 오드리는 뻔뻔스럽게도 아직 누군가가 자신을 돌봐 주기를 기대하는 아나벨을 혐오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내 아이들은 어떡하지? 누가 이 집을 꾸려나간단 말야?" 그건 맞는 말이었다. 오드리는 아나벨의 겁에 질린 표정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이제 그건 모두 네가 할 일이야, 아나벨. 내가 18년 동안 그 일들을 해 왔으니 이제 네 차례가 된 것 뿐이야." 11살 때부터 할아버지의 집안살림을 도맡아 왔던 그녀가 이제 29살이 된 것이다. 그보다도 10개월 전에 아나벨이 그 집으로 옮겨 온 뒤로 줄곧 오드리가 그녀의 아이들까지 돌봐 왔으니, 이제 아나벨이 스스로 그들을 돌봐야 할 때도 된 것이다. "이제 그건 모두 네가 할 일들이야." 오드리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잔잔하면서 냉담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오드리는 아직까지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공백을 메울 길이 없어 몹시 마음이 허전했으며, 이층에서 계단을 내려 설 때마다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리곤 했다. 마치 당장에라도 신문에서 읽은 기사 내용을 외쳐대며 들어설 것만 같았다. "그럼 어디로 갈 거야?" 아나벨은 무척이나 겁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우선 영국부터 들렀다가 남프랑스로 갈 생각이야. 그 다음은 천천히 더 생각해 봐야지." "그럼, 집에는 언제 돌아오지?" ''아직 잘 모르겠어. 아마 최소한 몇 달 안에는 돌아오기 힘들 것 같아. 서둘러 돌아올 이유가 하나도 없으니까 말야," "안돼!" 아나벨은 탁자 위에 빗을 내던지며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그렇게도 쉽게 나를 버리고 가버릴 수가 있어?" 오드리는 자기보다 약간 키가 작은 동생을 지긋이 내려다 보았다. 아나벨은 키만 작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오드리에게 훨씬 뒤떨어지고 있었다. "네가 그렇게 나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있는 줄은 몰랐구나."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우린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잖아. 안그래, 아나벨?"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눈매에는 슬픈 빚이 역력했다. 결코 동생과의 문제를 그런 식으로 매듭짓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이상 그들 사이를 묶어 줄 수 있는 끈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오로지 서로에 대한 불신과 반목, 그리고 껄끄러운 감정만이 가득 남아있었던 것이다. "왜 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지?" 아나벨은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으며 눈물로 얼룩진 화장이 보기 흉하게 온 얼굴에 번져 흘렀다. 그녀는 초라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으며 오드리를 올려다 보았다. "언니는 날 미워해, 그렇지?" "아냐, 그렇지 않아." "언니는 여태 결혼을 하지 못해서 내게 질투를 느끼고 있는 거야." 오드리는 향수 냄새와 담배 연기가 자욱한 아나벨의 방에서 갑자기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하코트 같은 남편을 얻고 싶다는 생각은 정말 꿈속에서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이라곤 오로지 찰스 밖에 없었던 것이다. "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구나, 아나벨. 난 너를 눈꼽만치도 시기하지 않아. 오히려 난 진심으로 네가 언젠가 다시 결혼할 수 있기를 바래. 물론 이번에는 좀더 현명하게 상대를 선택해야겠지만 말야." 그러나, 말을 해놓고 보니 아나벨의 취향이나 거친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그건 몹시 어려운 일일 듯 했다. "지금이 바로 내가 떠나야 할 시간인 것 같아. 난 아무래도 아버지를 많이 닮은 것 같거든. 항상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으니 말이야." 하지만 그녀는 찰스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그럼 난 어떻게 아이들을 키워야 하지?" 아나벨이 여전히 흐느끼며 물었다. "유모를 한 사람 고용하면 되잖아." ''아무도 붙어 있으려 하질 않는걸." 오드리도 미안한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냥 눌러앉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아나벨 자신에게도 아이들을 스스로 돌보면서 변화의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는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오드리는 몰리와 단 둘이 지낼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몰리는 이제 몇 마디씩 말을 배우기 시작하고 있었으며, 그런 몰리와 함께 있는 순간이 그녀에게는 가장 기쁜 시간들이었다. 오드리는 아나벨을 내려다 보면서 한참 그냥 서 있다가 비로소 말을 꺼냈다. "미안해, 아나벨...." "내 방에서 나가!" 아나벨은 빗을 집어 던지며 오드리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내 집에서 썩 나가 버리란 말야.." 조용히 방문을 닫고 걸어 나오는 오드리의 등 뒤로 유리잔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로부터 나흘 후, 오드리는 가방을 다 챙기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방을 한번 둘러보았다. 후회는 없었다. 비록 전날 밤 아나벨이 그녀의 방으로 찾아와 다시 한번 눈물을 홀리며 가지 말라고 애원을 했지만, 그녀는 잠시도 더 머뭇거리고 싶지가 않았다. 오드리가 떠난다는 것을 알고 두 명의 하녀가 그 집을 떠나 버렸으며 요리사와 청지기도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직후에 그 집을 나갔었다. 오드리 뿐만 아니라 아나벨에게도 이제는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할 시기였으며, 더우기 아나벨에게는 그녀가 태어난 후 처음으로 스스로를 지탱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시기가 온 것이다. 오드리는 짐꾸러미를 마루에 내다놓으며 앞으로 아나벨이 어떻게 살아갈지 조금은 불안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또한 집안을 한바퀴 둘러보며 언제 또다시 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설사 돌아올 수 있다 하더라도 그때는 이미 지금과는 전혀 딴판으로 변해 있겠지... 아나벨이 살림살이를 시작하고 나면 틀림없이 집안을 거칠게 다뤄 모든 걸 다 팔아 버리거나 갖다 버리고 다시 장식을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드리가 떠날 때, 아나벨은 나와서 작별인사조차 하지 않았으며 아이들은 모두 그때까지 자고 있었다. 오드리는 조용히 마이 리에게 옷을 입히고 부엌으로 내려가서 아침을 먹었으며 운전기사가 짐과 함께 그들을 공항까지 태워다 주었다. 그녀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기차 대신 비행기를 이용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그곳에 도착하면 '노르만디'라는 이름의 호화로운 여객선을 탈 작정이었다. 그녀는 물론 찰스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며, 런던에 도착하는 즉시 그에게 전화를 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찰스가 아직도 그녀에 대한 분노를 풀지 않고 있거나, 마음의 상처를 다스리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찌됐건 시도는 해보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찰스는 그녀가 세상에 태어나서 그토록 커다란 사랑을 느꼈던 유일한 남자이기 때문이었다. 오드리는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모든 하인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으며, 한 손에는 몰리를 안고, 다른 한 손에는 화장품 케이스를 든 채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그 화장품 케이스는 그녀가 중국에 갈때 들고 갔던 바로 그것이었으며 그래서 중국으로 갈 때의 그 끝없이 이어지던 기차여행과 그 가방을 내버리거나 닭과 바꿔 먹자고 했던 말을 기억해 내고는 혼자 미소를 지었다. 오드리는 더더욱 찰스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뉴욕까지의 긴 여행이 그녀의 복잡다단한 상념과 함께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오드리는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미련도 없었고, 뉴욕에 도착하자, 그녀가 2년 전에 '모레타니아' 호를 타고 가면서 제임스와 바이올렛을 처음 만났던 순간이 눈앞에 떠올랐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그다지 오드리의 마음을 끌어당길 만한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으며, 그 여객선이 모든 면에서 하나도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마이 리와 함께 보내거나 마이 리가 근처에서 혼자 놀고 있는 동안 갑판의 의자 위에 앉아 책을 읽었으며, 식사도 대부분 자신의 객실에서 했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오는 동안 별로 낯이 익지도 않은 하녀에게 마이 리를 맡겨 두는 것도 불안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는 고독한 순간 순간들을 혼자 음미할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커다란 기쁨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오드리는 그대까지도 거의 언제나 검은 옷만을 입고 있었으며, 찰스를 만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려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오드리는 찰스의 결혼 제의를 거절한 이후로 한번도 그를 만나지 못했으며, 그때 일만 생각하면 또다시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갈은 아픔이 밀려오곤 했다. 마침내, 그녀를 태운 배가 사우덤프턴에 도착하자 그녀의 마음은 나를듯이 가벼워졌다. 이제 그녀는 불과 몇 시간 후면 런던에 도착할 것이고,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클라리지 호텔에 숙소를 정한 다음, 전화를 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처음에 전화를 걸었을 때, 찰스는 마침 나가고 없었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그리 늦지 않은 오후 시간일 뿐이었으니 어디를 잠시 나갔거나 아니면 며칠 동안 집을 비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다음날까지 찰스에게 전화연락이 되지 않는다면 그의 아파트로 메모를 보내거나 안티베스에 가 있는 바이올렛이나 제임스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찰스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겠느냐고 물어볼 작정이었다. 오드리가 다음날 밤 늦게 전화를 걸어 바이올렛과 통화를 할 수는 있었으나 전화선이 나쁜지 거의 말을 알아들을 수조차 없는 지경이었다. "바이올렛이에요? 내 말 들려요? 나 오드리예요. 오드리 드리스콜이요..." "뭐라구요? 뭐라고 그랬어요?" "어디에 와 있는 거냐고 물었어요." 상대방의 말소리가 들렸다가 안 들렸다가 하는 바람에 오드리는 거의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여기 런던이에요." "런던 어디에서 머무르고 있는 거예요?" "클라리지 호텔이요." "어디라구요?.. 그건...... 그렇고.... 언제... 도착을......?" 제임스와 바이올렛은 7월 달부터 안티베스에 가 있는 중이었고, 오드리는 어렵지 않게 그들이 어떤 생활을 하며 즐기고 있을지를 상상할 수 있었다. "아마 이번 주말 쯤에는 그곳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뭐라구요?" "이번 주말이요." "참 잘 됐군요. 그래,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나야 잘 지냈죠." 그녀는 아직 말하지 않고 있던 몰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었으나 전화상태로 그런 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다. "당신이나 제임스는 어때요? 애들은 요?" "우리도 다 잘 지내고 있어요." 이번에는 전화가 아주 끊어져 버렸고, 오드리는 간신히 무슨 식인가 하는 소리만 들을 수가 있었다. "뭐라구요.." 전화가.. 통... 안 들려요......" "우린 막.... 식에서.... 돌아왔.." 오드리는 전화통을 부숴 버리고 싶을 만큼 화가 치밀었다. 도저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디서 돌아왔다구요?" 갑자기 태양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가시듯 연결상태가 말짱해졌고 그래서 오드리는 마침내 바이올렛의 이야기를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찰스의 결혼식에서요." ''뭐라구요?" 그녀는 마치 뒷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정신이 혼미해 짐을 느꼈다. "우린.. 지금 막.... 찰스의 결혼식에..다녀오는.. 길이에요. 무척 멋진...." <오, 주여....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제발 주여.... 제발 찰스가 아니기를.. 나..... 난.... 아...> 결정타를 얻어맞은 권투 선수처럼 아찔해 지면서 그녀는 순간적으로 말이 꽉 막혀 버렸다. "오드리, 듣고 있어요?... 오드리, 오드리?" "네.... 누구와 결혼을 했나요?" 하지만 그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샤롯트 비어드슬리라고... 찰스가 계약을 맺고 있는 출판업자의 딸이에요.. 그 아가씨가 지난 2년 동안 찰스를 따라 이집트까지 쫓아다니며 붙잡고 늘어졌다는 것을 도저히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제임스는 결코 그런 관계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면서, 샤롯트가 찰스를 좀더 잘 알게 되면 금방 제풀에 지쳐 버릴 것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결국 일이 그렇게 되자 찰스가 왜 그녀와의 결혼을 마음먹게 되었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바이올렛은 어느정도 그 이유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햄프셔에서 결혼식을 올렸어요. 우린 거기 참석했다가 막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오드리는 왈칵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어 한동안 말없이 수화기만 붙들고 있었다. "잘됐군요...." 오드리의 목소리에는 너무나도 힘이 없어서 바이올렛은 그것이 단지 전화의 연결상태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여긴 언제 올래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난..." 오드리는 갑자기 자기가 무엇 때문에 런던까지 달려왔던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필요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찰스와 통화를 할 수 없었던 이유가 너무나도 명백하게 드러났다. 오드리는 만약 이제는 샤롯트 파커스코트가 되어 있을 그 샤롯트라는 여자가 자신의 전화를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갑자기 오드리는 한시라도 빨리 런던을 떠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내일쯤 가면 어떨까요? 너무 이르지 않겠어요?" 그녀는 방 한구석에서 혼자 놀고 있는 몰리를 바라보며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르긴요! 좋고 말고요. 오드리! 비행기로 오겠어요?" 오드리는 이제 서둘러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기차를 타고 갈께요. 그리고 바이올렛..... 내 딸을 데리고 가겠어요." "누구?" 다시 잡음이 커지기 시작했다. "내 딸이요!" 오드리는 고함치듯 소리를 질렀다. "언제 도착할 지나 알려줘요. 누구를 데려오건 그건 상관이 없으니까요. 방은 많이 있잖아요." ''고마와요." 작별 인사를 하는 오드리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럼 내일 만나요." "우리가 역으로 마중을 나갈께요." "고마와요." 전화를 끊은 오드리는 넋을 잃고 허공만을 바라보며 방금 들은 이야기들을 생각해 보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바로 그 찰스를 만나러 여기까지 달려왔었고,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그리워하며 사랑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런 찰스가 이제 샤롯트라는 이름의 여인과 결혼을 했다는 것이었다. 26 기차는 정확하게 다음날 아침 8시 43분에 안티베스 역에 도착했다. 오드리는 2년 전 안티베스를 떠나기 직전에 사 두었던 하늘색 린넬 드레스를 입고 창가에 앉아 있었고 분홍색 목면 드레스에 하얀 조끼를 받쳐 입고 분홍색 모자를 머리에 쓴 마이 리는 마치 작은 천사와도 같이 곱고 아름다왔다. 오드리의 무릎 위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던 마이 리의 얼굴은 신기해 하는 표정으로 가득했다. 오드리도 두리번 거리며 제임스와 바이올렛을 찾아보았지만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드리와 몰리가 기차에서 내려 짐꾼에게 짐을 맡기고 플랫폼을 빠져나오려 할 즈음에야 제임스 부부가 나타났다. 그들은 여전히 조금도 변한 것 같지 않았다. 속이 비치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목에는 빨간색 스카프를 둘렀으며 콩알만한 진주 목걸이를 주렁주렁 메단 바이올렛은 오히려 2년 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와진 것 같았다. 또한 제임스는 하얀 셔츠에 하얀 바지를 입었는데 얼핏 보기에는 영국인이라기 보다 프랑스인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바이올렛이 먼저 오드리를 발견하고 마구 달려오다가 그녀의 팔에 안겨 있는 몰리를 발견하고는 눈이 동그래져서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 것이었다. 바이올렛은 너무나도 예쁜 몰리를 황홀한 듯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나!" 그녀는 궁금해 죽겠다는 눈치로 오드리를 바라보았다. "얘가 누구예요?" 바이올렛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호기심이 가득찬 말투로 물었다. 그러는 동안 제임스는 짐꾼에게 오드리의 짐을 어디로 옳겨 놓으라는 지시를 하고 있었다. 오드리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어제 전화로 얘기를 할려고 했는데 전화가 그 모양이라.... 얘는 내 딸, 몰리예요." "세상에..." 바이올렛은 장난스러운 눈초리로 오드리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흔들어 댔다. "중국에서 그런 일이 있었구나. 정말, 예쁜 아기네요." 바이울렛은 부드러운 머리칼을 휘날리며 한발 더 오드리를 향해 다가섰다. "그런데, 얘 아빠는 누구예요?" ''사실은 나도 그걸 잘 몰라요." 오드리의 뚱딴지 같은 대답에 바이올렛의 눈이 더욱더 커졌다. "아무래도 일본군 병사인 것 같긴 한데." 바이올렛은 입술을 오므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 말은 아무에게도 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차라리 유명한 철학자나 정치가, 혹은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누군가가 이 아기의 아빠라고 말하세요." "그런데 얘는 누구지?" 그제서야 제임스가 그들에게로 다가와서 오드리를 따뜻하게 껴안으며 뺨에 살짝 키스를 하고는 아기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바이올렛이 오드리 대신 재빨리 대답했다. "예쁘죠. 제임스? 오드리의 중국인 아기예요." 오드리는 그녀의 표현에 웃음을 터뜨리며 체통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장난이 너무 심해지기 전에 사실을 밝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비록 제임스나 바이올렛이나 아무도 그녀가 중국인 아기를 낳았다는 사실에 대해 그다지 놀라는 기색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들 부부의 개방적인 심성에 새삼스럽게 약간의 흥분까지도 느끼게 된 오드리는 이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있을 것인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사실 얘 어머니는 내가 중국의 고아원에 있는 동안 거기서 죽었어요. 그래서 내가 마이 리를 집으로 데려와서 대신 키웠죠." 제임스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오드리를 차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데려갔고, 바이올렛은 몰리를 얼르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당신 할아버지가 몹시 흐뭇해 하셨겠군." 맨 처음에 자신의 할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였나를 생각하며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후에는 몰리에게 얼마나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가 그의 유언장에 씌여있던 나의 증손녀 몰리 드리스콜이라는 표현도 다시 한번 떠올랐다. 오드리는 그때 정말로 커다란 감동을 느꼈었다. "할아버지는 얘를 무척 애지중지하셨어요." 그들이 모두 찰스의 메르세데스에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바이올렛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찰스는 지난 9월에 당신을 만나고 온 후에도 우리에게 그런 이야기는 한번도 하지 않았어요. 어쩌면 그럴까?" 바이올렛은 제임스를 바라보며 함께 웃음을 터뜨렸지만 오드리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그녀는 찰스라는 이름이 그들의 입에서 나올 때마다 오싹오싹 소름이 끼쳤으며, 제발 그의 결혼식에 대한 이야기만은 꺼내 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결국 언젠가는 최소한 찰스가 누구와 결혼을 했으며 또 왜 했는가 정도는 알아야 할 것이었고, 알고 싶어질 것이다. 무언가 깊은 사연이 있을 것만 같았다. 단순히 그가 작년 한해 동안 다른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그래서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절대로 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드리가 알고 있는 찰스는 적어도 그런 남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찰스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제임스와 바이올렛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그들을 태운 차가 저택에 도착하자 오드리는 2년 전과 조금도 변한 것이 없는 그 아름다움에 정신을 빼앗겼다. 바이올렛은 오드리가 예전에 쓰던 바로 그 방을 다시 내주었다. 한가롭기만 한 지중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이 무척 좋은 방이었다. 바이올렛은 심지어 마이 리가 오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으면서도 따로 아기를 위해 방을 하나 마련해 주기까지 했다. 마침내 오드리는 그날 오후 테라스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면서 바이올렛에게 찰스가 결혼한 여자에 대해 물어보았다. 오드리는 그 여자에 대한 무언가를 알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마침 그때 제임스는 안에서 저녁식사 때 마실 포도주 상자를 뜯고 있었기 때문에 오드리와 바이올렛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가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났을 때도 찰스는 여자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오드리는 머뭇거리며 겨우 그렇게 운을 뗀 것이었다. 상대가 아무리 절친한 바이올렛이라 해도 자신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였기 때문이었다. ''샤롯트는 지금까지 2년 동안이나 줄 곧 찰스의 꽁무니만 따라다닌 여자예요." 바이올렛은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오드리의 눈치를 살펴 가며 말을 꺼냈지만 수심이 가득 찬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고개를 돌려 먼 바다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바이올렛은 가만히 오드리의 손을 잡아쥐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제 찰스를 사랑하고 있지 않아요. 그렇죠?" 바이올렛이 어떻게 생각하건 이제 더 이상 숨기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다. 오드리는 고통과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는 눈을 들어 바이올렛을 바라보았다. "아, 오드리, 정말 미안해요. 전화에 대고 그렇게 앞뒤도 없이 불쑥 내뱉는 게 아니었는데.. 난 당신들의 사랑이 완전히 끝나 버렸다고 생각했었어요. 찰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돌아오더니 그렇게 딱 잘라 말하더군요." 오드리는 애절하리만큼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바이올렛을 바라보았다. "그가 뭐라고 하던가요?" "이제 다 끝났다는 말 밖에는 긴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당신은 샌프란시스코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자기 또한 자신의 인생을 버릴 수가 없다구요. 그의 결혼은 어쩌면 당신에 대한 일종의 반발일지도 모르겠어요." 오드리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바이올렛의 말을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찰스는 그때 자기와 결혼하자고 다시 한번 내게 애원했었어요. 하지만 바이올렛... 난 그럴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 내가 그때 할아버지의 곁을 떠날 수 있었겠어요? 결코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그래서 난 찰스에게 당분간 샌프란시스코에서 함께 살자고 얘기했었죠. 하지만 물론 그 역시 그럴 수는 없었겠죠. 우린 둘 다 우리들의 책임 속에 묻혀버린 것이 였어요." "그래서 그는 잔뜩 화가 난 채 샌프란시스코를 떠났겠죠." 바이올렛도 오드리 만큼이나 찰스를 잘 알고 있었다. "몹시 화를 내더군요. 물론 화가난 것 만큼이나 가슴도 아팠겠죠. 하지만 그는 결국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말았어요." "오드리, 당신은 찰스가 자신의 동생이 죽고 난 후로는 단 한번도 책임감 같은 것을 느껴본 적이 없는 남자라는 사실을 염두해 둬야 해요. 하지만 찰스는 그때 당신과 헤어진 아픔 때문에 아직까지도 여행을 다닐 엄두를 못내고 있어요. 당신이 그런 사실을 알면 결코 마음이 편치는 못하겠죠. 찰스 역시 그건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상식적으로 생각한다 하더라도 말이에요. 놀라운 일은 당신 역시 찰스 만큼이나 여기저기 돌아다니길 좋아한다는 사실이에요." 오드리는 미소를 지으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제임스가 식당에서 포도주 잔을 손에 든 채 한 폭의 초상화처럼 아름다운 오드리와 바이올렛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들 사이에는 무한한 신뢰가 교환되고 있는 것 같았으며, 그래서 더더욱 제임스는 그들의 대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에요." 하고 바이올렛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녀는 오드리에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찰스에게 까지도 그런 이야기를 해본 적이 있었지만, 찰스는 그런 바이올렛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었다. "내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여자가 찰스를 사랑하는 것 같지 않기 때문에 하는 말이에요. 그녀는 찰스를 원하고 있었던 것 뿐이에요. 아, 그래요. 마치 획득하지 않으면 안될 그 무엇처럼, 혹은 반드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될 산꼭대기에 오르는 것처럼 그렇게 그녀는 찰스를 절실하게 원했을 뿐이에요. 그녀는 아마도 찰스와의 결혼을 하나의 성취라고 생각할 거예요." 오드리는 바이올렛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새겨 듣고 있었다. "하지만 찰스가 그 여자를 사랑했다는 사실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잖아요." 오드리는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않은 채 코를 한번 풀고는 손수건으로 눈두덩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바이올렛 같은 친구가 옆에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오드리는 누군가를 붙잡고 하소연이라도 한번 해야 약간은 속이 편안해질 것 같았던 것이다. 바이올렛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스러져 가는 태양을 바라보며 앉아있던 의자 속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사실, 난 찰스가 그랬으리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아요. 스스로 자신에게 샤롯트를 사랑하도록 강요한 것이겠죠. 한편으로는 그 여자가 찰스의 생활을 훨씬 더 편하게 해 주는 것도 사실일 거예요. 구두끈 매주는 일이라면 모를까, 그 외에는 찰스를 위해서 하지 않는 일이 없으니까요. 그건 정말 옆에서 보기에도 역겨운 일이에요." "그렇지만 그 반면에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까지는 한 치도 그에게 양보하려 하지 않았으니..." "그런 당신을 욕할 사람은 아마 없을 거예요." 바이올렛은 아직까지도 찰스가 샤롯트 비어드슬리와 결혼한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바이올렛은 찰스의 결혼식장에서 펑펑 눈물을 쏟기도 했었지만 그건 물론 기뻐서 나오는 눈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제임스는 혹시라도 찰스와의 우정에 금이 갈지도 모르니 너무 공공연히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니지는 말라고 충고하기도 했었다. 제임스는 어찌됐건 샤롯트를 옹호하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자기가 아니면 아무도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샤롯트라는 여자가 무척 아름다운 여자인가요?" 오드리는 엄마 잃은 아이 같은 표정으로 물었고, 바이올렛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렇진 않아요. 아름답다기보다는 메력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군요. 샤롯트는 항상 최신 유행의 최고급 옷만을 입고 다니는 여자에요. 물론 그 옷 값만 해도 엄청난 돈이 들어가겠죠. 내 생각에는 그녀의 아버지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버릇없이 자란 것 같아요. 어차피 엄청난 부자이긴 하겠지만 말이에요." 바이올렛의 말투는 격렬한 비난조로 들렸지만, 물론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은 샤롯트가 비록 돈은 많을지 모르지만 훌룡한 가문의 여자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오드리에게 그렇게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찰스는 샤롯트가 사업에는 탁월한 재능을 지닌 여자래요. 찰스의 책을 전담해서 출판하는 사람도 바로 그녀고, 얼마 전에는 찰스의 소설 두 권에 대한 영화 제작권까지 팔아 먹었대요. 찰스로서는 물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죠." "그 여자가 찰스에게 많은 도움이 되겠군요." 그러면서 오드리는 가장 절실하게 알고 싶었던 한마디를 바이올렛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지금 행복해 하나요." 바이올렛은 그 질문을 한참 동안이나 곰곰히 생각해 보더니 오드리를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아뇨, 그렇지 않아요. 물론 자기는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오드리 당신에게 솔직히 털어 놓는다면 난 그의 말은 믿지 않아요.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제임스가 알면 날 가만 두지 않겠지만, 내 생각이 그런 걸 어떡해요. 찰스는 샤롯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에게 까지 속이고 있는 거예요. 찰스는 어쨌건 결혼을 하기로 마음은 먹었는데, 마침 샤롯트가 나타나서 꼬리를 흔들어 대니 스스로 이 정도면 되겠다고 자신을 위로해 버린 거예요. 하지만 그들 사이에 기쁨이 있을 리 없고 불꽃 튀는 정열이나 가슴벅찬 흥분 또한 찾아볼 길이 없었겠죠. 내가 이해하기로는 당신과 함께 있을 때 느꼈던 그런 감동은 찰스에게 전혀 없었어요. 찰스가 당신 이야기를 할 때면 마치 천국에 올라가 꿈을 꾸고 있는 듯한 표정이 되곤 했어요." 오드리나 바이올렛이나 모두 오드리가 하르삔을 떠나지 않겠다고 우겼던 그 시절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찰스의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어요. 심지어 반쯤은 죽어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니까요. 열정이 식어 버린 거예요. 비록 그 자신은 항상 즐거워 죽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는 있지만,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그게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거예요. 난 그것이 바로 찰스의 웃는 얼굴 뒤에 숨겨진 진실이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샤롯트 비어드슬리는 꽤나 까다로운 여자거든요. 그녀가 지금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있던 것에는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한번 목적한 바를 그대로 밀고 나가는 여자예요. 먼저 사회에서 관록을 쌓기를 원했고, 이제 어느 정도 그것이 달성되고 나니까 남편을 얻어야 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얻었죠. 하지만 이제 샤롯트가 어떻게 할지는 나도 아직 모르겠어요. 결국은 찰스를 끈으로 묶어 꼭둑각시처럼 움직이게 하고 말거고, 찰스는 그러한 것을 단 한순간도 참아내지 못할 거예요. 샤롯트는 찰스를 책이나 영화를 만드는 공장으로 집어 넣어서 엄청난 돈을 벌게 하고 싶어 하겠죠. 오직 그런 일에 밖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 여자나까...샤롯트는 결코 당신이나 찰스처럼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향기를 느끼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방랑의 영혼들을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요." "무슨 사진을 찍는다구?" 그제서야 더 이상 참지 못한 제임스가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내굴리며 아내를 바라보았다. 제임스는 바이올렛에게 절대로 오드리와 찰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다짐을 했었다. 옛 상처를 괜히 파헤칠 필요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제임스도 찰스가 아직 그런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찰스처럼 오드리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찰스와 오드리가 함께 나누었던 사랑이 그들 둘 모두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리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제임스는 그들의 사랑이 끝까지 유지되지 못한 것이 유감이라면 유감이었다. 제임스와 바이올렛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공통점이 있는 반면에 샤롯트는 전혀 그렇지 못한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제임스가 끼어들자 바이올렛도 오드리도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이올렛이 아까 말한 한마디 한마디가 오드리의 가슴 깊은 곳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오드리는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고, 자신은 더 이상 찰스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찰스는 이제 아내를 가진 몸이라고 되뇌이며 자신을 달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찰스가 결혼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오드리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온몸과 마음을 바쳐 끝없이 사랑을 나누었던 오리엔트 특급열차에서의 추억들, 티벳의 산꼭대기로 솟아오르던 태양을 바라보던 신비로움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오드리는 그런 추억들을 간직할 수 있었다는 것이 더없이 다행스러웠다. 그것이 없었더라면 오드리에겐 더듬어 볼 기억조차 없었을 것이다. 오드리는 자꾸만 샤롯트가 찰스의 생활을 편하게 해줄 거라는 바이올렛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꼬리를 흔들며 찰스 앞에 나타난 샤롯트.... 그것이 결혼의 합한 이유가 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만약, 오드리가 그런 식으로 찰스의 구혼을 거절하지만 않았더라면 결코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드리는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찰스를 생각하며, 그가 무엇 때문에 샤롯트와 결혼했는가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거리도 될 수 없다며 고개를 내저어 보았다. 어쨌건 그는 결혼을 했다. 그리고 이제 오드리는 찰스를 잊어야만 했다. 안티베스에서 꼬박 1주일 동안을 찰스의 기억을 떨쳐 버리려고 부질없는 노력을 되풀이하던 오드리는 그곳을 찾아온 왈리 심프슨과 웨일즈의 왕자인 에드워드를 만나고서는 크게 그들에게 마음이 끌렸다. 제임스는 에드워드와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그들을 오드리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제임스는 오드리와 심프슨 부인이 다같이 미국인이었기 때문에 많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비록 심프슨 부인은 오드리와 악수를 나누었을 뿐 별 말이 없었지만, 오드리는 무엇보다도 그녀의 화려하기 그지없는 옷차림에 눈이 휘둥그래졌던 것이다. 심프슨 부인은 마치 패션잡지의 표지에서 막 걸어나온 사람처럼 보일 만큼 린넬 드레스와 잘 손질된 머리, 조그만 모자, 그리고 아름다운 진주 목걸이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에드워드 왕자 또한 드물게 보는 미남이었으며, 오드리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 아픈 마음을 달래는 데 커다란 위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오드리는 바이올렛과 오랜 시간에 걸쳐 심프슨 부인과 에드워드의 스캔들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심프슨 부인은 물론 이혼 경험이 있는 여자였으며, 모두들 왕자가 그녀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심프슨 부인 역시 머피스와의 재회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지만, 바로 그 해에 그들을 덮친 비극이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두번 다시 그들을 만나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아들 바오드를 척추마비라는 병 때문에 잃어버렸고, 둘째 아들 패트릭은 결핵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화려했던 그들의 생활에 갑자기 불행의 먹구름이 밀려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또 다른 한 쌍의 부부가 제임스의 저택에 도착함으로써 밀려나 버리고 말았다. 그 부부는 바이올렛과 제임스의 훌륭한 친구들이었고 여자 쪽은 바로네스 워슐라 폰 만이라는 이름의 바이올렛 국민학교 동창이었는데 바로 며칠 전에 칼 로젠이라는 경제학자와 결혼을 했던 것이었다. 그녀는 요즘 그저 워슐라 로젠, 혹은 우쉬라고 불리고 있었다. 우쉬는 금발머리에 시원스런 초록색 눈동자, 그리고 주근깨와 보조개가 매력적인 여자였으며 뮌핸에 있는 자신의 친구나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재미나게 들려주곤 했다. 로젠 부부는 아주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며, 특히 우쉬는 그녀의 독특한 독일식 영어 발음으로 자신은 매년 여름을 안티베스에서 보내곤 했으며 지금은 신혼여행을 즐기고 있는 중이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들은 비엔나와 파리를 들러 이곳에 도착했으며, 9월에는 베니스와 로마를 거쳐 칼이 살고 있는 베를린으로 돌아갈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우쉬의 아버지는 그들에게 커다란 저택을 한 채 사 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며, 칼이 유태인이라는 사실에 약간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 당시에 독일에서는 유태인 문제로 작은 소란이 있었고, 그레서 더더욱 우쉬의 아버지는 우쉬에게 혹 나찌의 핵심 인물들을 만나더라도 절대 그들의 귀에 거슬릴 소리는 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했다는 것이었다. 우쉬는 비록 그곳 남프랑스에서나 큰소리로 떠들어댈 수 있는 이야기였지만 강경한 반 나찌주의자였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일정한 지위에 올라 있는 유태인들까지 히틀러가 귀찮게 굴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칼은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고 몇 권의 책을 직접 저술했을 뿐만 아니라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까지 맡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독일에서는 무척 중요한 인물이었다. 칼은 특히 샴페인이 한 잔 들어가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으며, 그들 다섯은 항상 한패가 되어 무척 즐거운 시간들을 가질 수가 있었다. 오드리 역시 약간은 맺혔던 마음이 풀리고 기분도 나아졌으며 8월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살갖을 태워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오드리는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찰스와 함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런던에서 몇 달을 지내려고 생각했었으나 그건 이제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우리와 함께 베니스로 가요." 함께 테라스에 누워 햇볕을 쬐고 있던 우쉬가 불쑥 말을 꺼냈다. 칼의 커다란 밀짚 모자를 머리에 쓴 우쉬의 모습이 무척 아름다와 보였다. 하지만 오드리는 난데없는 우쉬의 제안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당신의 신혼여행에 함께 가자구요? 칼이 무척 기뻐하겠군요." "그래요. 그도 아마 무척 기뻐할 거예요." 갑자기 문쪽에서 칼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그들에게로 다가와 우쉬의 의자 팔걸이에 걸터앉는 것이었다. "함께 갑시다. 오드리." "난 그럴 수 없어 요. 칼." "이유가 뭐요?" "당신들 단 둘만의 시간을 방해할 순 없잖아요. 명색이 신혼여행인데 말이에요." 칼은 몸을 앞으로 구부리며 모두에게 들릴만큼 큰소리로 말했다. "우린 삼각 관계를 무척 좋아해, 안 그렇소?" "아뇨." 오드리는 칼의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다가 우연히 저택 안으로 미끌어져 들어온 자동차에서 두 사람이 내려서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남자는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함께 온 여자는 무척 화려한 드레스를 곱게 차려 입고 있었으며 키도 크고 날씬한 모습이었다. 바이올렛이 정원으로 내려가 그들과 영어로 인사를 주고 받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으며, 하인 한 사람이 쪼르르 달려나와 그들의 짐을 집안으로 들여놓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이올렛은 더 올 손님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고, 따라서 오드리는 그들에게 몰리의 방을 내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올렛은 전혀 예기치 못한 손님이 들이닥쳐도 항상 그들을 따뜻하게 반겨 주곤 했기 때문이었다. "저 사람들, 누군지 알아요?" 우쉬가 오드리를 향해 물었지만 오드리라고 알 리가 없었다. "둘 다 모르는 사람인 걸요." 그러자 우쉬는 자신의 새로운 친구인 오드리를 향해 밝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을 만나게 되어서 정말 기뻐요. 오드리. 몰리도 마찬가지구요." 우쉬도 곧 아기를 낳게 되기를 원하고 있었고, 남편과 함께 임신을 하기 위해 무척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6명의 자녀를 갖기로 합의를 봐 두었으며, 가능한 한 빨리 첫 아기를 가지고 싶어했다. 우쉬는 31살로 바이올렛과 동갑이었고, 35살의 칼은 제임스와 나이가 같았다. 오드리는 스물 아홉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들 다섯이 모이면 항상 어린애 취급을 받곤 했다. 로젠 부부와 오드리가 그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바이올렛이 커다란 향수병을 들고 들어와 무척 근심스런 표정으로 오드리 쪽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우쉬가 그런 바이올렛을 먼저 발견했지만 오드리는 과일 쥬스를 따르느라고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오드리가 여전히 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새로 온 손님들이 마침 베란다로 들어서고 있었다. 멋있게 옷을 차려 입은 그 영국 여인의 뒤를 따라 베란다로 들어서던 남자는 오드리를 보자 놀라는 빚이 얼굴에 역력히 드러났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눈치첼 수 있었지만 등을 돌리고 있던 오드리 자신만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람들의 표정에서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느낀 오드리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서 있던 그 자리에 온몸이 얼어붙어 버림과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유리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바닥에 떨어진 유리잔은 박살이 나면서 아무것도 신고 있지 않던 오드리의 발을 찢어 놓고 말았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오드리를 향해 달려왔고, 칼은 오드리의 발에서 뿜어나오는 피를 멈추게 하기 위해 하얀 냅킨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오드리는 그런 경황중에도 바이올렛의 냅킨을 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누군가 가서 자신의 수건을 가져다 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오드리. 급한데 아무려면 어떻다고..." 오드리는 하는 수 없이 칼로 부터 냅킨을 건네 받아 자기 손으로 직접 상처를 닦아냈다. 그런 가벼운 소동으로 말미암아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제각기 놀란 표정으로 뭐라고들 쑤군거리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마침내 찰스와 오드리의 눈이 엉겁결에 마주치고 말았다. 어쨌건 영원히 피할 수 있는 대면은 아니었던 것이다. 바이올렛은 찰스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오드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의 심정이 어떠할지를 가늠해 보았다. "안녕하세요. 찰스. 소란을 피워서 미안해요. 평소엔 이렇게 방정맞은 여자가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오드리는 미소를 짓기는 했지만 찰스와 그의 아내를 바라보며 온몸이 떨려옴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누구도 감히 오드리와 샤롯트를 서로 소개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고통스럽기까지 한 강한 자성이 감돌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뵙겠어요. 오드리 드리스콜이라고 해요." 오드리가 먼저 손을 내밀자 그 젊은 여인은 오드리를 한번 힐끗 훑어보더니 그녀의 손을 마주 잡고 흔드는 것이었다. 오드리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매에는 따뜻함이 라곤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난, 샤롯트 파커스코트예요. 처음 뵙겠어요." "자, 여러분. 이곳을 치울 동안 잠시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테라스엔 온통 유리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고, 바이올렛이 초조한 듯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모두들 신발을 신으세요." 바이올렛은 사람들을 모두 안으로 몰아넣었고, 오드리가 큰소리로 혼란을 일으켜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이유를 알고 있었으며, 우쉬까지도 그 남자의 등장이 오드리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겨 주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칼의 부축을 받아가며 안으로 절름거리면서 들어가는 오드리의 얼굴에선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칼이 오드리를 그녀의 방까지 부축해 주었으며, 오드리는 상처를 씻어내고 붕대를 감았다. 잠시 후에, 바이올렛이 두 손을 마구 부벼대며 어쩔 줄 몰라하면서 오드리의 방으로 들어왔다. "오드리, 어쩌면 좋지.. 내 말을 믿어 줘요. 정말 찰스가 그렇게 불쑥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괜찮아요. 바이올렛. 어차피 조만간 한번은 마주쳤어야 할 일이었던 걸요." "하지만, 하필이면 여기서... 당신은 찰스를 잊기 위해서 여기에 온거잖아요." ''어쩌면 찰스 파커스코트라는 열병의 예방주사를 맞은 셈이 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차라리 잘 됐어요." 그러면서 오드리는 다시 한번 발의 상처를 매만지며 우울한 눈빛으로 바이올렛을 올려다보았다. "샤롯트라는 그 여자, 무척 예쁘더군요. 바이올렛. 이제 찰스가 그녀와 결혼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아요." 바이올렛은 두 손을 내저으며 오드리의 말을 가로막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오드리. 외모로 따진다면 샤롯트는 당신의 10분의 1도 따라오지 못해요. 성격 또한 차겁기 이를 데 없어 마치 얼음장 같다구요." 불과 몇 분 전에 샤롯트를 처음 봤던 오드리조차 그녀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무척 사무적이고 냉정해 보였던 것이다. "그 사람들은 오늘밤만 머물렀다가 떠날 거예요. 찰스에게 말해 두었거든요. 그런 식으로 당신을 불편하게 할 수는 없잖아요." "무슨 소리예요. 바이올렛. 그렇지 않아도 여행을 좀 하고 싶던 참이었어요. 게다가 우쉬와 칼도 나더러 이태리까지 함께 가자고 제안하더군요." 오드리는 괜히 폐를 끼칠 것 같아 우쉬나 칼과 함께 떠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으나 여기 계속 머물러 있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쪽이 더 나을 것 같았고, 그들과 함께 뗘난다고 펑계거리만 만들어 놓은 다음 하루나 이틀 쯤 후에 헤어질 생각이었다. 그만큼 오드리는 찰스나 샤롯트와 함께 있기가 거북했던 것이다. "오드리, 재발..... 찰스는 샤롯트와 함께 내일이면 여길 뗘날 거예요. 맹세할 수 있어요." 바이올렛은 들고 있던 잔을 떨어뜨려 발을 다칠만큼이나 컸던 오드리의 고통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 보다도 찰스를 처음 보는 순간의 오드리의 표정이 더욱더 바이올렛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보는 사람의 숨까지 막혀 버리게 할 것만 같은, 고통과 절망으로 뒤범벅된 그런 표정 이 였던 것이다. 오드리의 당혹스러워 하는 심정이 얼굴 표정에 그대로 씌여져 있었으며 찰스라고 해서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불행하게도 샤롯트까지 그것을 눈치채고 있었고, 오드리와 바이올렛이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테라스에서는 샤롯트가 낮은 목소리로 찰스에게 말을 꺼내고 있었다. "당신, 그 여자가 여기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었잖아요." 샤롯트도 대번에 오드리가 누군지 짐작을 할 수가 있었으며, 한때 찰스와 오드리가 어떤 사이였기에 그렇게 당혹스러워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일었다. 샤롯트는 이미 한해 전에 찰스가 샌프란시스코를 다녀왔을 때부터 그런 눈치를 채고 있었으며, 따라서 찰스의 마음을 자신에게로 돌려 놓는데 그것들을 충분히 이용했던 것이다. 샤롯트는 그런 기억이 이제 다시 찰스의 머릿속에 떠오른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샤롯트는 결국 찰스를 획득했고, 이제는 그를 지킬 차례였던 것이다. ''나도 전혀 몰랐소." 찰스와 샤롯트의 눈이 마주쳐 한 순간 불똥이 튀었다. "그녀가 여기 와 있으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소." 찰스 자신도 오드리가 어떻게 할아버지를 샌프란시스코에 남겨 둔 채 여기 와 있을 수 있었는지 궁금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우린 호텔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때 찰스의 표정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난 결코 그녀로부터 도망치진 않겠어, 샤롯트." "나 또한 절대로 그 여자와 한 지붕 밑에서 함께 지낼 수는 없어요." 샤롯트의 눈동자는 마치 새까만 두 개의 바위처럼 조금의 흔들림도 찾아볼 수 없었고, 꼭 다문 이빨사이로 단호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내 신경을 건드리는 일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을 걸요." 찰스는 그녀를 바라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샤롯트는 7개월 후에는 아기를 낳을 몸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찰스의 머릿속에서 오드리에 대한 미련을 지워 버릴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무기였다. 그렇지만 찰스는 결코 지금 이 순간에 오드리의 속을 뒤집어 놓는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문제는 우리 오늘 밤에 천천히 생각해 봅시다. 여기서 그냥 머무르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면 내일 호텔로 가면 되잖소. 약속해. 만약 우리가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게 된다면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생각할 거고, 제임스와 바이올렛도 괜히 마음이 불편해질 것 아니겠소." 샤롯트도 그런 찰스를 억지로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저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볼 뿐이었다. 그 눈빛은 몇 분 후 오드리가 눈부시도록 새하얀 린넬 바지를 입고 자신의 방에서 걸어나오자 더욱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찰스는 오드리의 검게 탄 피부와 갈색머리가 눈처럼 하얀 옷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그렇게 아름다운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다는 생각을 하며 마실 것을 한 잔 더 가지러 홀로 걸어 들어갔다. 아무래도 샤롯트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확실히 너무나 불편한 분위기였던 것이다. 오드리는 그날 오후 내내 우쉬와 칼과 함께 쇼핑을 한다며 나가 있었고, 돌아오자마자 몰리를 안고 부엌으로 가서 밥을 먹였다. 바이올렛의 하녀들은 하나같이 그 귀여운 꼬마 아가씨를 무척이나 예뻐했으며, 그래서 언제든지 몰리를 돌봐 줄 사람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오드리는 거의 언제나 몰리를 스스로 돌보려고 했다. 오드리는 손수 몰리에게 밥을 먹이고 함께 장난도 치는 등 예전의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훨씬 더 마음이 편했다. 이제 오드리의 인생에 있어서 유일한 희망은 몰리 밖에 없었으며, 그것은 앞으로도 결코 변함이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 찰스와 함께 머무른다는 것은 차라리 고문을 받는 것 보다도 더한 고통이었으며, 그날 밤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내려가기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오드리는 바이올렛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샤롯트에게서 커다란 경쟁심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옷에 더할 나위 없이 세련된 샤롯트 옆에 앉아 있으려니 오드리는 자꾸만 자신이 초라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샤롯트는 쓸데없이 자신이 가진 돈과 권력을 뽐내려 하는 냄새를 풍기는 여자였다. 만약 오드리가 조금이나마 사악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었더라면 찰스가 어떻게 그런 여자와....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샤롯트는 확실히 남자들의 관심을 끌만한 여자이기는 했던 것이다. "오늘 밤엔 유난히 더 예뻐 보이는군요. 오드리." 제임스가 파란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오드리에게 칭찬의 말을 던졌다. 제임스는 오드리가 몸을 지탱시킬 수 있는 힘 있는 팔이 필요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손수 오드리를 부축해서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바이올렛은 오드리를 될 수 있는 대로 찰스와 멀리 떨어진 곳에 앉혔으며 몇 사람의 친구들을 그들의 저녁식사에 더 초대해 놓고 있었다. 바이올렛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아 찰스와 오드리가 함께 마주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 바이올렛의 배려 덕분인지 모두들 즐거운 저녁 한 때를 보낼 수가 있었다. 오드리와 바이올렛 부부만이 그녀의 아픈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 뿐이었다. 그밖에는 아무도 그들에게 신경을 쓰려 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매로 계속 찰스를 감시하며 마치 오드리에게 찰스가 어떤 사람과 결혼했는지를 과시하려는 듯 저녁 내내 매력과 재치를 잃지 않으려고 유난히 애를 먹는 샤롯트만 제외하고는 말이다. "당신은 어때요?" 샤롯트가 식사중의 정막을 뚫고 오드리에게 물었다. 오드리는 미소를 지으며 무척이나 침착하게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기 때문에 아무도 오드리의 손이 몹시 떨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난, 내 딸을 돌보고 있어요." "몹시 훌룡하군요." 샤롯트도 미소를 지었다. 모든 사람들은 샤롯트가 머지 않아 비어드슬리 출판사의 경영자가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신의 사진 솜씨도 자랑해야죠. 오드리." 바이올렛이 식탁 반대편 끝에서 큰소리로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얼마나 멋있는 사진을 찍는다구요." 바이올렛은 언잖은 표정을 숨기려 하지도 않고 샤롯트를 바라보았으며, 찰스는 말없이 자신의 밥그릇만 내려다 보고 있었다. 찰스와 오드리는 다같이 런던 타임즈에 게재됐던 오드리의 사진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드리가 그렇게 기뻐했던 손문의 사진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다시 홍수가 터지듯 여기저기서 대화가 이어지기 시작했고, 더 이상의 직접적인 갈등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드리는 그렇게 부담스러운 저녁식사는 처음이라는 생각을 하며 다른 사람들이 안에서 무슨 게임인가를 하고 있는 동안 맑은 공기를 마시기 위해 혼자 테라스를 거닐었다. 바이올렛과 제임스는 워낙에 손님들과 게임을 하기 좋아하는 성격이었고, 평생을 파티로 자란 샤롯트도 그 자리에서 빠지려 들지 않았다. 오드리는 고개를 뒤로 젖혀 얼굴 가득히 달빚을 받으며 눈을 감고 등나무 의자에 가만히 몸을 기댄 채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잠시 후, 그런 그녀의 등 뒤로 나직한 찰스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 순간 오드리는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몸이 공중으로 솟구칠 것만 같았다. "당신도 마음이 편하진 않지. 오드리?" 오드리는 눈을 뜨고 처음엔 미처 그의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잔잔하면서도 차거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오지 말았어야 할 걸 그랬나봐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당신의 친구니까 말이에요." 오드리의 두 눈엔 슬픔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찰스 또한 굳이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도 물론 이곳에 올 자격이 있는 사람인걸." 찰스는 혹시 샤롯트가 그들의 대화 장면을 보게 되지나 않을까 약간 초조해 하고 있었다. 샤롯트는 찰스가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게 내버려 둘 테지만, 오드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은 참지 못할 것이다. 샤롯트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기 전에 바이올렛에게 전화를 걸어봤어야 하는 건데. 당신이 여기와 있을 줄은 꿈에도..." 찰스는 오드리를 바라보며 예전에 느꼈던 분노를 되새기려 노력해 보았지만, 어느새 그러한 분노는 봄눈 녹듯 사라져 버리고 슬픔만이 가득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7월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저런, 안됐구려." 그건 진심이었다. 찰스는 오드리가 그 할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드리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자 찰스는 가장 물어보기 두려운 질문을 그녀에게 던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요?" 오드리는 큰 숨을 들이쉬며 간신히 대답했다. "제임스와 바이올렛을 만날려고...." 찰스는 달빚에 부딪쳐 은빛으로 반짝이는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작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돌아왔을 때 난 반쯤은 아주 미쳐 있었소." 오드리는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그러기엔 너무 늦었던 것이다. 어찌 됐건 그건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늦어도 이만저만 늦은 게 아니였던 것이다. "그런 설명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래?" 찰스는 약간 술을 마신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다 뱉아내거나, 오드리가 덜 예쁘게 보인다거나 할 정도로 많이 취한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 말만은 해 두어야 할 것 같군. 런던으로 돌아오고 난 후로 난 두번 다시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았어. 얼마 동안은 당신을 증오하기까지 했었으니까. 반면에 샤롯트는 무척 친절하게 나를 대해 주었지. 내 상처받은 마음에 향유를 발라주었어. 그녀는 내 일을 도와주었으며, 술 취한 나를 달래주었어. 그녀는 항상 내 곁에 있어 주었고 나를 따라 인도에까지...다음엔 이집트까지도 함께 가 주었어. 내가 책 한 권을 끝낼 6달 동안이나." 오드리는 밤이라 보이진 않았지만 틀림없이 그의 눈엔 눈물이 고여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샤롯트는 정말이지 대단한 여자였어." 찰스는 마치 사과하는 투로 말을 하고 있었지만, 오드리는 그 사과가 자신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샤롯트를 향한 것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래 난 샤롯트를 좋아하게 되었어. 무척이나 좋아한 것이 사실이야." 다시 오드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 찰스의 표정을 보니 생각보다 많은 술을 마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될 수는 없었다. ''오드리, 그러나 문제는.... 난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야." 오드리는 그의 말에 충격을 받고 몸을 약간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정말로 찰스가 하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자신과 샤롯트를 둘 다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찰스는 오드리가 뭐라고 말을 꺼낼 기회도 주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난 결혼하기 전에 샤롯트에게 그 점을 분명히 얘기해 주었지.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척 하기는 싫었기 때문에...." 찰스의 목소리는 무척 부드러웠지만 오드리는 목구멍으로 뭔가 뜨거운 덩어리가 치밀어오름을 느끼고 있었다. "혹은 그럴만한 용기가 내게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샤롯트는 그런 것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대답하더군. 그녀는 나에게서 커다란 열정이나 숭고한 사랑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성실한 우정을 원하고 있을 뿐이었어. 물론 우리는 서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지. 난 그녀를 좋아하니까......" 찰스는 혼자 중얼거리듯 계속 그런 말만을 되풀이하고 있었고, 오드리는 그가 한 말에, 아니 그가 한 행동에 커다란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건 틀림없는 일종의 광기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샤롯트와 결혼을 했단 말인가? 하지만 찰스는 스스로 오드리의 그런 의문에 대답을 주었다. "난, 그녀와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건 그것만으로 결혼을 결정할 순 없는 문제니까. 당신이나 나나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찰스는 몹시 괴로와 하고 있었지만, 오드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 섰다. 그녀는 그곳에 앉아서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찰스의 이야기를 도저히 더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건 그가 결혼을 했다는 사실보다도 훨씬 더 잔인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샤롯트는 우리가 이집트에 가 있는 동안에 임신을 하고 말았어. 빌어먹을.... 그건 내게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과도 같은 것이었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오드리의 심장은 아프다 못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이제 겨우 임신한지 두 달 반 밖에는 되지 않았어. 아직 겉으로는 눈에 띄지도 않지. 물론 아무도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도 없고.... 하지만 샤롯트는 끝까지 낙태 수술을 거부했어." 너무나도 사랑했던 여인을 바라보고 있는 찰스의 눈은 엄청난 고통으로 찌들어 있었고, 마침내 오드리도 더 이상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린 아이를 가지게 되었어. 하지만 우린 계속해서 성실한 친구 사이로 남을 거야." 찰스는 공허한 눈길을 돌려 다시 밤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샤롯트는 내 책이 엄청난 성공을 거둘 수 있게 해 줄 거야." 그의 목소리는 이제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아이를 가지게 된 것이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모르지.." 찰스는 손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말을 마친 그는 갑자기 오드리가 서있는 곳을 향해 두어 걸음 다가서더니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오드리의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있었다. "그 이유를 알아줬으면 좋겠어, 오드리. 내가 얼마만큼 화가 났었건 간에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었는지를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어." 오드리의 뺨을 타고 두 줄기 눈물이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찰스는 그녀를 향해 몸을 구부려 뜨거운 입맞춤만을 남겨놓은 채 한마디 말도 없이 파티가 열리고 있는 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27 다음 며칠 동안, 시간이 흐를수록 그 분위기는 더욱더 어색해져 갔다. 찰스와 그의 새 신부는 도착한 다음날부터 전혀 그곳을 떠나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고, 바이올렛이 그렇게 눈치를 주었는데도 찰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떠나기는 커녕 오히려 그는 오드리의 동작 하나하나를 유심히 지켜 보고 있었고, 그런 그를 샤롯트 또한 지켜 보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불편한 관계가 아닐 수 없었고, 따라서 오드리는 결코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먹어야 했다. 그녀는 틈만 나면 몰리를 데리고 바닥가로 나가곤 했으며 칼이나 우쉬와 함께 해변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기도 했다. 바이올렛과 함께 시내에 쇼핑을 나갈 때를 빼고는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들은 피곤하다는 것을 핑계삼아 자신의 방안에 틀어박혀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그리 오래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들이 도착한 다음부터는 한시라도 빨리 그곳을 떠나고 싶어 애를 태웠다. 그것은 단지 바이올렛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것 뿐이었다. 오드리는 될 수 있는 한 찰스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그 또한 그들이 도착한 첫날밤 이후로 그녀에게 접근해 오지 않았다. 그들 둘다 마음의 상처를 치료할 여유가 필요했던 것이다. 오드리는 마침내 우쉬와 칼과 함께 가기로 약속을 했고, 그들이 떠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찰스나 샤롯트와 한 지붕 밑에서 함께 지낸다는 긴장감만 풀어질 수 있다면 그녀의 목적지는 그 어디가 되더라도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오드리는 샤롯트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려고 무던히 노력하고 있었다. 샤롯트는 그의 아기를 가졌다. 그런데 자신은 그렇지를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아기는 제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흐르더라도 오직 몰리 밖에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중국에서 그 애를 데리고 왔나 보죠?" 몰리가 제임스와 함께 모래로 떡을 만들고 있는 것을 지켜 보고 있던 오드리는 자기 바로 뒤에 샤롯트가 서 있는 것을 깨닫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와 마주보고 있으려니 오드리는 제대로 숨을 쉴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화장을 한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으며, 아름다운 드레스와 그 옷에 잘 어울리는 멋진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녀의 구석구석이 오드리를 압도했다. 그녀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찰스와 결혼한 여자인 것이다. "네, 그래요" 그녀는 샤롯트가 무엇을 물어보았는지 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들 둘이서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눈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하르삔에서 마이 리를 데려왔어요. 거기서 8개월 동안 살았던 적이있거든요." ''알고 있어요." 그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오드리가 잠시 말없이 앉아 있자 그녀는 황당하리만큼 날카로운 질문으로 오드리의 아픈 곳을 들쑤셔 놓는 것이었다. "당신은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렇죠?" "난..." 그녀는 갑자기 너무나 갑작스럽고 놀라운 질문을 받고는 미처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쩔쩔 매고 있었다. "난, 우리가 영원히 친구 사이로 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런 종류의 기억을 쉽게 잊어버릴 수는 없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변하겠죠." 그녀로서는 그런 대답 말고는 떠오르지를 않았다. "그래요. 그 말은 맞아요. 시간이 흐르면 변하겠죠. 당신이 그걸 이해하고 있다니 정말 다행이군요." 무척이나 날카로운 말투였다. "찰스의 앞에는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요. 비록 그 자신은 아직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요. 머지않아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논픽션 작가가 될 거예요." 그러나, 오드리는 그것이 찰스에게 있어서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찰스는 자신의 성공을 항상 상쾌한 놀라움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고 있었고, 그것보다는 오히려 여행이나 모험, 혹은 그러한 정신들에 더욱 커다란 가치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샤롯트는 바로 그러한 부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찰스에게는 자신을 도와 줄 수 있는 여자가 필요해요." 오드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간신히 눈물을 참으며 오드리는 찰스를 획득한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찰스에게는 그런 명예보다는 아기가 훨씬 더 중요할 거예요." 샤롯트는 순간 무척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찰스가 그런 이야기를 하던가요?" 불쾌하다는 듯한 샤롯트의 질문에 오드리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얼마 전에 말해 주었어요. 무척 즐거워 하더군요." 하고 오드리는 거짓말을 했다. "당신도 무척 행복하시겠군요." 마침내 눈꺼풀을 비집고 눈물이 흘러내리려 하고 있었다. 샤롯트는 역시 찰스가 오드리에게 아기에 대해서 털어 놓았다는 사실이 몹시 신경에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어쨌건 당신에겐 찰스에 대한 권리가 없어요."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바로 샤롯트가 오드리에 대한 커다란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도대체 그 어떤 여자가 찰스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샤롯트는 찰스가 어떤 남자인지 조차도 모르고 있다. 그녀는 낙태를 거부함으로써 거의 강제로 찰스와의 결혼을 성사시킨 것이다. 오드리는 샤롯트가 낙태를 거부한 것이 찰스나 태어날 아기에 대한 사랑 때문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바로 그 순간에 제임스가 온통 모래를 뒤집어 쓴 몰리를 데리고 다가오는 바람에 샤롯트와 오드리의 대면은 자연스럽게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날 오후, 오드리는 로젠 부부와 함께 드라이브를 나갔다. 도중에 우쉬가 미소를 머금으며 오드리를 향해 말을 꺼냈다. "우린 내일 떠날 생각이에요. 같이 가겠어요?" 오드리는 그들과 함께 가는 것이 무척 부담스러웠지만 안티베스를 웃으며 떠날 수 있는 구실은 오로지 그것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린 산레모로 갈 거예요." 산레모는 그리 멀지는 않은 곳이었지만 안티베스와는 아주 다른 분위기의 도시였으며 이태리적인 향취가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번에는 칼이 오드리를 돌아보며 다시 물었다. "가겠어요?" 오드리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게 좋겠군요. 하지만 며칠만 머무르고 곧 두 분만이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해드리겠어요. 런던으로 돌아가기 전에 일 주일이나 이 주일 정도 로마에 들러 볼 작정이거든요." 그 후엔 어디로 갈지 아직 뚜렷한 계획이 없었다. 그녀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버린 데다가 그렇다고 서둘러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우리와 함께 베니스로 가는 것은 어떻겠소?" 베니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하지만 오드리의 머릿속엔 거기서 찰스와 함께 머물렀던 이틀 동안이 불현듯 떠오르고 있었다. "글쎄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 걸요." 오드리는 베니스로 간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당신들의 신혼여행에 이 늙은 하녀가 그렇게 오랫동안 끼어 있어서야 되겠어요?" 오드리의 말에 로젠 부부는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늙은 하녀를 보고 있는 셈이군!" 칼과 오드리가 계속 웃으며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우쉬는 전혀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우쉬와 칼은 누구보다도 행복했으며, 서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들은 결혼하기 6년 전부터 서로 사랑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베니스로 가는 문제는 산레모에서 생각해 봅시다." "생각할 게 뭐 있나요." 하지만 오드리는 그들과 함께 산레모로 가는 것에 찬성했다. 그 다음날 그곳을 떠나기가 훨씬 쉬워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드리는 드라이브를 마치고 돌아오자 바이올렛에게 내일 떠나겠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랬더니 바이올렛은 로젠 부부와 오드리가 한꺼번에 떠나 버리는 것이 못내 섭섭한 듯 찰스를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 그날 밤, 바이올렛은 제임스에게 찰스가 손님들을 다 쫓아 버린다고 마구 불명을 늘어 놓았다. "찰스가 내쫓은 사람은 오드리밖에 없어, 바이올렛. 칼과 우쉬는 그렇지 않아도 떠나려던 참이었고 오드리도 마침 그들과 같이 갈 수 있어 오히려 잘 된 셈이지, 뭐. 오드리는 아마 언젠가 베를린으로 그들을 만나러 가게 될 거야. 우쉬도 그런 즐거운 파티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찰스는 아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해 주었고, 그런 제임스의 말에 바이올렛도 귀가 솔깃해졌다. 베를린으로 여행을 한다는 것은 무척 기발한 생각이었고 그들 모두 함께 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바이올렛은 다음날 아침, 샤롯트와 몰리만 빼고 모두들 한데 모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런 생각을 털어놓았다. 샤롯트는 그때까지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고, 몰리는 오드리가 아침을 먹는 동안 알렉산드라 유모가 돌봐주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몰리를 조그만 인형처럼 귀여워했고, 특히 그 중에서도 알렉산드라가 몰리를 제일 좋아했다. "그건 제임스가 생각해 낸 거예요." 바이올렛이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킬킬대며 말했다. "신혼 부부가 자리를 잡고 나면 우리 모두 베를린으로 가는 거예요. 정말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바이에리새트 호텔에 짐을 풀어 놓고 다같이 오페라를 보러 가면 어떨까요?" 바이올렛은 베를린에서 오페라를 감상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사실 오페라라면 베를린만이 아니라 어디든 쫓아갈 정도였으며, 그에 못지않게 파티도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쉬 또한 바이올렛의 제안에 무척 기뻐했다. "그럼 우린 무도회를 열 수도 있겠죠. 칼?" 우쉬는 생각만 해도 즐거운 듯 두 눈을 반짝이며 바이올렛을 바라보았다. "호텔에서 머무를 필요없이 우리집에서 함께 있으면 되잖아요. 물론 당신두요." 하며 오드리도 돌아보는 것이었다.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잔뜩 기대에 부풀어 베를린 여행에 대한 계획들을 서로 이야기하며 어수선한 분위기를 만들었고, 찰스도 자기가 마지막으로 베를린에 갔던 때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재미나게 들려 주기 시작했다. 찰스는 심지어 오드리와 함께 중국을 여행한 이야기까지 마구 떠벌리며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찰스와 오드리가 예전에 연인 사이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들 여름 휴가를 마감하는 멋진 추억을 간직하려는 듯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고, 때문에 아무도 샤롯트가 식당으로 들어서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샤롯트는 그리 크지도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으나 오드리는 그녀의 갑작스런 목소리에 뼈속까지 얼어 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찰스 또한 금방 입을 꽉 다물어 버렸다. "베를린엔 언제쯤 가게 되나요?" 그 한마디로 사람들은 모두 샤롯트가 베를린 여행을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샤롯트는 다시 찰스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당신이 베를린에서 독일 출판업자를 만나 주기를 원하고 있었어요." 샤롯트는 그해 연말까지 찰스의 책을 7개 국어로 번역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샤롯트의 마스터 플랜의 일부였던 것이다. 샤롯트는 오로지 그런 이야기를 나눌 때만 생기가 도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우린 사업과 즐거운 여행을 멋있게 결부시킬 수 있겠네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즐거움은 모두 샤롯트가 나타나자 시들어져 버린 것 같았다. 그런 어색한 침묵을 깨뜨리기 위해서 바이올렛이 칼과 함께 다음주의 여행계획들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칼의 입에서 베니스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찰스는 순간적으로 오드리를 보았으나, 그녀는 그의 눈길을 피하여 냅킨을 펼치며 수선을 떨었다. 로젠 부부는 신혼여행의 마지막 주를 베니스에서 보낼 예정이었으며 그 다음에 칼은 9월 말까지 베를린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야 칼은 다시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고, 우쉬 또한 사교모임에 참석할 수 있을 것이다. 로젠 부부와 함께 몰리를 품에 안은 오드리가 아랫층으로 내려왔다. 오드리는 한 번도 자신의 아기를 낳아 본 경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는 곳마다 몰리를 데리고 다니며 능숙한 솜씨로 보살피곤 하는 것이었다. 몰리 또한 언제나 그 방실거리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즐거워했다. 마치 그 여행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몸조심 하세요. 오드리." 하고 바이올렛이 작별인사를 건냈다. "런던에 도착하는 대로 꼭 전화해야 해요. 우리도 조만간 런던으로 돌아갈테니 그때부턴 우리집에서 머무르게 말이에요." 바이올렛은 다시 한번 오드리를 따스하게 포옹하며 말했다. 제임스도 그녀와 작별 키스를 나누었고, 뒤에 남은 모든 사람들이 그녀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인사를 건냈다. 그러다가 오드리는 너무나도 슬픈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찰스를 발견하고는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눈물을 홀려야 했다. 그녀는 그곳을 떠날 때 차라리 찰스와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으나, 어느새 그는 자신의 방에서 걸어나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별을 고하고 있는 것이었다. "잘 있어요. 찰스." 오드리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버렸음을 다시 한번 자신에게 상기시켰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기대를 더 이상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어도 안되었다. 둘다 결코 그런 일은 없으리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 대신 베니스에도 내 안부를 전해 주시오." 찰스의 그 한마디에는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었다. 아직도 오드리를 사랑하고 있음과 그 모든 옛 추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음이... 하지만 오드리는 몰리를 더욱더 힘주어 껴안으며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난, 베니스에 가지 않아요. 거긴 우쉬와 칼이 갈 거예요." 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모든 것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도 두번 다시 베니스에 가고 싶지가 않았으니 말이다. 너무나도 가슴이 아플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언젠가 런던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오드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잠시 후 그녀는 다시 한번 바이올렛과 제임스에게 작별 키스를 나누었고, 그녀가 차에 오르자 로젠 부부와 함께 순식간에 찰스의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28 ''기분은 좀 어때요. 샤롯트?" 찰스는 오드리가 자신의 곁에서 떠나고 말자 샤롯트에게서 그녀와 같은 감정을 느껴 보려고 노력을 했지만 그건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었다. 찰스는 하는 수 없이 샤롯트의 뱃속에든 아기가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의 아기라는 생각을 다시 떠올려 위안을 삼으려 해보았으나 아직 그것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겉으로는 표시도 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샤롯트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그다지 자주 내세우려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때때로 그들 둘 다 그런 사실을 잊어버리는 경우 조차 있었으나, 찰스는 그녀가 비록 오드리는 아니지만 바로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될 수 있는 대로 친절한 태도로 샤롯트를 대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안티베스의 저택은 로젠 부부와 오드리가 떠나 버리고 나자 마치 무덤 속 같이 변해 버렸다. 찰스와 제임스는 함께 오랫동안 바닷가를 거닐기도 했지만 찰스는 자신의 속마음을 쉽사리 털어 놓으려 하지 않았다. 바이올렛 또한 샤롯트를 보다 잘 이해하려고 무척 노력해 보았지만, 여전히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의 탐탁치 않았던 감정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샤롯트에게서는 여자다운 부드러움이나 따스함 같은 것은 찾아볼 길이 없었다. 따라서 바이올렛은 찰스가 어떻게 그런 여자와 함께 살 수 있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단순히 지적이라는 것만 가지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찰스는 차라리 남자와 결혼하는 게 나을 뻔 했나봐요." 바이올렛이 그날밤 잠자리에 누운 채 은밀히 제임스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도대체 어떻게 찰스가 그런 여자와 결혼을 했을까?" "샤롯트는 찰스의 아기를 가졌어." 언젠가 찰스가 제임스에게 그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것이다. "세상에!" 바이올렛은 깜짝 놀라 제임스를 바라보며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불쌍한 찰스... 그것이 찰스가 그녀와 결혼한 이유일까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물론, 찰스 자신은 그렇게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하지만 당신은 너무 함부로 아무렇게나 얘기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제임스는 자신의 인생이 찰스보다는 덜 복잡해 다행스럽다는 듯이 아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샤롯트가 아이를 지워버렸다면 찰스의 마음이 약간은 더 편안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샤롯트는 가톨릭 신자라서...." "그래요?" 바이올렛은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일요일에 성당에도 가지 안잖아요?" 제임스와 바이올렛은 모두 성공회 신자였고 그들의 주변 인물 중에서 가톨릭 신자는 무척 드물었다. "샤롯트도 그리 기분이 상쾌하진 않겠지만, 어찌 됐건 그건 사실이고 이제 머지않아 우리 찰스는 아빠가 될거요." "찰스가 흡족해 하던가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솔직히 말하면, 그는 아직 약간은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사실 당신도 알다시피 찰스는 샤롯트를 좋아해. 그들은 얼마 전부터 육체적인 관계를 가지기 시작했고, 게다가 샤롯트는 그를 따라 카이로까지 쫓아갔으니... 난 단지 그런 찰스의 마음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야. 찰스는 어쩌면 오드리를 더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정말 안타까운 일이군요. 불쌍한 찰스.... 불쌍한 오드리..." 바이올렛은 제임스를 바라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샤롯트의 임신은 의도적인 것임에 틀림없어요." 제임스는 호기심이 가득 찬 바이올렛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샤롯트가 임신한 것은 훨씬 전의 일이야. 물론, 그녀가 그런 여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샤롯트는 너무 사무적인 여자라 그런 간계를 생각해 내진 못했을 거야." "그걸 누가 알아요? 샤롯트는 찰스의 명성을 높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시피 해요. 결국, 그를 꼭둑각시처럼 마음대로 조종해 보겠다는 속셈이죠. 게다가 찰스가 그렇게 빼어난 미남이니 샤롯트는 틀림없이 그를 손아귀에 넣고 싶어 했을 거예요. 그렇지 않았으면 결코 찰스와 결혼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세상에, 당신 그렇게 사악한 마음을 가진 여자였군. 그렇다면 당신이 나와 결혼한 이유는 뭐지? 그것도 마음대로 나를 조종하기 위해서 였나?" "물론이죠." 바이올렛의 두 눈은 행복으로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난 그렇게 추잡한 술수를 이용하진 않았단 말이에요." 제임스는 기억을 더듬느라 잠시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난 당신이.... 당신은 2년 가까이나 그렇게도 내 속을 태웠잖아, 자기가 무슨 성처녀라도 된다고...." 그 시절의 기억을 더듬고 있는 바이올렛의 허벅지 사이로 제임스의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제임스의 뜨거운 애무는 바이올렛과 자신의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오드리나 찰스에 대한 상념들을 말끔히 지워 버렸다. 29 오드리가 로젠 부부와 함께 산레모에서 보낸 며칠은 무척 편안하고 즐겁게 지나갔다. 그래서 오드리는 안티베스에서 찰스 부부와 함께 있어야 했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훨씬 마음이 가벼워진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녀는 제임스와 바이올렛이 무척 그리워지긴 했지만 안티베스를 떠나올 수 있었던 것이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또한 산레모는 이미 여름이 다 끝나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척 재미있는 도시였던 것이다. 오드리는 그곳에서 로젠 부부와 헤어져 기차를 타고 이태리 여행을 계속할 생각이었지만, 우쉬나 칼이나 모두 적어도 밀라노까지만이라도 함께 가자고 너무나 간절히 만류하는 바람에 생각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드리는 밀라노에서는 정말로 베니스로 갈 그들 부부와 헤어져 로마로 갈 예정이었지만, 그동안에 밀라노에서 칼의 친구들과 함께 일찌기 한번도 본 일이 없는 화려한 궁전에서 머무르며 너무나도 멋진 시간들을 보낼 수가 있었다. 그 궁전의 벽에는 온통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으며, 박물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성 싶은 골동품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고, 르노와르에서부터 고야나 다빈치에 이르기까지 없는 그림들이 없을 지경이었다. 오드리 일행을 초대한 사람은 다름 아닌 황태자와 그의 아내였는데, 오드리는 매일 밤, 동녘 하늘이 뿌옇게 밝아올 때까지 마음껏 즐길 수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취할 때까지 포도주를 마시며 모든 파티에 참석했으며 심지어 그들을 위한 조그만 무도회까지 열려 자그마치 300명이나 되는 손님들과 함께 신나게 춤을 추기도 했다. 마침내 즐거웠던 시간들이 지나고 밀라노를 떠나야 할 순간이 되자, 그들은 모두 아쉬운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오드리가 제일 가슴 아파했다. 오드리는 어느날 몰리와 함께 아침을 먹으며 은근히 지루하기만 할 로마 여행이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좀더 일찍 런던으로 돌아갈 생각도 해보았고,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사실에 남몰래 한숨을 짓기도 했다. 어쩌면 바이올렛이 잠시 파리까지의 짧은 여행에 동참해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 아침 우쉬와 칼이 다시 한번 베니스까지 함께 가자고 애원하다시피 졸라대기 시작했다. 만약 정말로 그들이 둘만의 시간을 갖기 원한다면 기꺼이 오드리를 보내 주었을 테지만 결코 그러고 싶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이대로 가버리고 나면 우린 정말이지 외로와서 견딜 수가 없을 거예요." 그들이 특히 오드리를 붙잡고 싶어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몰리 때문이었다. 우쉬는 몰리를 안아 들고 자신은 결코 이렇게 예쁜 딸을 가질 수 없을 거라고 엄살을 떨어 오드리와 칼을 웃기기도 했었다. "내가 생각해도 그럴 것 같아, 우쉬." 하고 칼도 농담을 던졌다. "당신은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면 안되요. 알겠어요." 칼이 엄숙하게 프로이센 국왕처럼 말하려 했으나 단지 장난스러운 꼬마처럼 보였을 뿐이다. 칼은 제임스나 찰스와는 또 색다른 맛을 풍기는 미남형의 남자였고, 셈족 특유의 이국적인 인상이었기 때문에 오드리는 우쉬가 그를 미남이라고 생각했던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오드리는 자신도 그런 짝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바이올렛과 제임스, 우쉬와 칼, 모두들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인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오드리는 그런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혼자서 생활해야 하는 아픔을 서서히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폴리가 있었을 때는 자신이 뭘 하며 살았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함께 가겠소?" 로젠 부부는 잔뜩 기대에 부푼 눈으로 오드리를 응시하고 있었고, 오드리는 더 이상 도저히 그들의 권유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정말 그렇게 간절히 원하신다면 긴 이야기는 하지 않겠지만, 베니스는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곳이에요. 어떻게 내가 그런 곳을 여행하는 두 분 사이에 끼어들 수 있겠어요." 우쉬와 칼은 서로들 눈짓을 해가며 킥킥대고 웃음을 터뜨리더니 마치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털어놓듯 손가락까지 입술에 갖다대며 나직히 말하는 것이었다. "우린 사실 작년에 거기를 다녀왔어요." 그 말에 그들 셋은 모두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렸다. 베니스는 찰스와의 사랑이 시작되었던 바로 그곳이었다. 오드리는 로젠 부부와 함께 베니스로 간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찰스와의 지난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면, 그녀는 도저히 아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을 것이었다. "이제 함께 가겠어요?" 우쉬는 기대에 가득 찬 눈길로 다시 한번 오드리를 졸랐고, 마침내 그녀도 두 손을 내젓고 말았다. 도저히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즐겁기도 했고, 이제는 그들의 신혼여행을 방해한다는 죄책감도 조금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좋아요. 정 그렇다면 함께 가죠." 그들 사이에 기쁨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그런 유쾌한 기분은 다음 날까지 계속 이어졌다. 베니스 역에 도착한 그들은 곤돌라에 올라 사공이 목청을 높혀 불러 주는 세레나데에 귀를 기울이며 그리티 궁전으로 향했다. 전에 베니스를 와본 적이 있느냐는 사공의 질문에 그들 셋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자 사공은 그들을 탄식의 다리 밑으로 데려다 주었다. 우쉬와 칼은 그 다리 밑을 지날 때 눈을 감고 숨을 멈추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사공의 말을 듣고, 서로 손을 맞잡은 채 그 말에 따랐지만, 오드리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몰리를 내려다 보았을 뿐이었다. 그녀에게는 그렇게 간절히 빌고 싶은 소원도 없었고, 오로지 찰스의 기억을 떨쳐 버리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을 뿐이었다. 오드리는 베니스의 공기를 숨쉬고 있는 것 자체가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으며, 너무나도 다정스런 칼과 우쉬를 보고 있노라면 더욱더 외로움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반면에 오드리는 베니스로 다시 돌아오는 아픔을 참아낼 수만 있다면 다른 어떤 아픔도 견딜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쉬와 칼은 너무나도 친절하게 오드리를 대해 주었고,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오드리는 결국 우쉬에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말았다. 누군가와 자신의 감정을 나누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오드리는 찰스와 함께 중국을 여행했던 일이며 하르삔에 혼자 남게 되었던 이유, 샌프란시스코를 찾아온 찰스..... 그리고 결국은 샤롯트와 결혼을 하게 되기까지의 사연들의 모든 것을 시원하게 우쉬에게 털어놓았다. "그런 찰스를 안티베스에서 마주쳤으니....." 우쉬는 그때 오드리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를 비로소 이해할 수가 있었고, 따라서 베니스까지 그녀를 억지로 끌고오다시피 한 것이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도 칼에게 찰스가 그녀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우쉬는 샤롯트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꽤 빼어난 여자란 것은 사실이고, 칼도 찰스가 그녀를 좋아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샤롯트는 심장을 가진 여자가 아니예요. 그렇지 않아요. 오드리?" 우쉬의 어딘지 어색한 영어가 오드리의 미소를 자아내게 했다. "어쨌건 찰스는 샤롯트와 결혼했어요. 우쉬." "그에게도 무척 힘든 결정이었을 거예요." 오드리도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제, 오드리는 찰스를 잊어야만 했던 것이다. "누군가 다른 남자를 만날 수 있겠죠." 우쉬는 칼의 친구이자 역시 대학교수인 남자 한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린아이 2명을 거느린 홀아비였는데 나이는 40세였고, 바이올렛이 찰스를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쉬도 그를 무척 좋아하고 있었다. "꼭 베를린으로 놀러오세요." 우쉬는 오드리가 눈치를 챌까봐 일단 그렇게만 말해 두고 말았다. 그들은 베니스에서 박물관과 성당을 구경하고 유리공장도 돌아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오드리는 그런 생활 속에서 마침내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찰스의 상념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가 있었다. 따라서 오드리는 우쉬와 속마음을 털어놓고 지낼 수 있는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베니스를 떠나기 전날 밤, 칼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오드리를 돌아보았다. 그는 이 새로운 미국인 친구, 그리고 몰리에게 어느새 듬북 정이 들었던 것이다. "우리와 함께 독일에 가는 것이 어떻겠소?" 오드리도 그를 따라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그만하면 저랑 오랜 시간을 함께 한 것이 아닐까요. 칼? 정말 삼각관계를 만들어 낼 작정이신가요?" 오드리는 다시 그의 아내를 돌아보았다. "아마 내가 없어져 버리고 나면 훨씬 더 즐거울 텐데요." 오드리는 그 다음날 런던을 향해 떠날 생각이었고, 칼과 우쉬는 우쉬가 그렇게 정성들여 꾸며 놓은 베를린의 새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물론 칼은 다시 교단에 서게될 것이고... "당신이 함께 가 준다면 내가 강의를 나가고 없는 동안 우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거요. 제임스와 바이올렛이 벌써 런던으로 돌아갔을 리도 없으니까 말이오." 칼은 오드리가 그들과 함께 머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없으면 당신도 무척 외로울게요." 칼은 항상 오드리를 염려해 주고 있었다. 오드리도 그런 그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동안의 여행이 무척 즐거운 것이기도 했던 만큼 은근히 그들과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정말 폐를 끼치고 싶진 않은데...." 그건 정말 오드리의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칼과 우쉬는 적어도 1,2주일 동안이라도 베를린에 함께 있자고 막무가내로 우기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오드리의 마음이 기울어졌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모두 상쾌한 기분으로 베니스를 출발했고, 베니스가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드리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그들을 태운 기차는 예전에 오드리가 찰스와 함께 밟았던 경로를 되풀이하여 오리엔트 특급열차와 연결되었지만 이번에는 동방이 아니라 찰쯔부르그를 거쳐 뮌핸을 향해 달렸다. 우쉬는 기차가 뭔헨에서 한 시간 가량 밖에 머물지 않는다며, 자신의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할 수 없는 것을 못내 서운해 했다. 한 시간만에 그녀의 부모가 살고 있는 집까지 다녀올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적어도 잠시 전화 통화를 할 수 있거나 그것도 안 되면 로젠하임에서 전보라도 보낼 수 있으리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기차가 마침내 이태리를 완전히 벗어나고 오스트리아를 가로질러 독일로 접근해 갈 무렵에 몰리는 잠들어 있었고 우쉬와 캉, 그리고 오드리는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샴페인과 캐비어를 주문했을 즈음 기차의 속도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와동시에 창밖의 플랫폼에서 군인들과 제복을 입은 장교들이 역무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었다. 역무원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치켜 올리며 군인들을 기차 안으로 들여보냈고, 그러자 우쉬는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칼을 바라보았다. "왜들 저럴까요?" "히틀러의 졸병들이겠지." 칼의 목소리는 그들을 조소하는 듯 하면서도 무척 부드러웠다. 그는 애초부터 히틀러를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고, 아리안인들에 대한 그의 연설을 몹시 싫어했지만, 칼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는 데는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같은 대학에 있던 몇몇 다른 교수들은 한해 전에 이미 약간의 곤욕을 치르기도 했고, 나찌들은 조금만 자신들의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하는 지식인들에게 어김없이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었던 것이다. 따라서 칼은 우쉬와 둘이 있을 때, 흑은 남프랑스에서 제임스나 바이올렛과 함께 있을 때만 빼고는 항상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캐비어를 든 웨이터의 뒤를 이어 곧바로 나찌의 군인들이 그들의 객실로 들이 닥쳤을 때에도 그의 얼굴엔 그다지 긴장하는 빚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여권 좀 보여 주실까요?" 군인이 호화스러운 객실을 못마땅한 듯이 둘러보며 말했다. 칼이 그들 셋의 여권을 모두 건네주자, 그 군인은 제일 먼저 오드리의 여권을 들여다보았다. "미국인이오?" "네," 오드리가 약간 당황한 듯이 대답하며 미소를 짓자, 군인은 잠들어 있는 아기를 들여다 보았다. "이 아이는 누구 아이요?" "내 딸이에요." 오드리가 재빨리 대답했다. 그녀는 항상 몰리의 입양 서류를 가지고 다녔지만, 그게 별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역시 군인은 무뚝뚝한 동작으로 오드리의 여권을 되돌려 주고는 다시 로젠부부의 여권을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이름이 서로 틀리는군요. 친구 사이인가요?" 군인의 눈동자에서는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칼이 재빨리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린 지금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입니다. 떠나기 전에 여권을 변경할 시간이 없었을 뿐이오." 군인은 알겠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지만, 오드리는 그가 칼을 쳐다보는 눈초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군인은 칼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물었다. "당신, 유태인이군. 그렇지 않소?" 오드리는 그 무례한 말투에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칼을 돌아보았다. 칼의 얼굴은 약간 굳어 있긴 했지만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렇소."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당신의 아내는 유태인이 아니고, 그것도 맞소?" 그는 우쉬의 이름 가운데 폰이라는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러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그들의 여권을 가진 채 객실에서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오드리는 왜 여권을 돌려 주지 않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무서워서 그럴 수가 없었다. "지난 두 달 동안 신경이 더욱 예민해진 모양이군." 칼은 귀찮아 하는 표정이 역력했고 우쉬가 재빨리 그의 손을 잡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칼. 그 군인녀석 캐비어와 샴페인이 먹고싶어 그러는 모양이죠?" 하지만, 다음 순간 아까 그 군인이 두 명의 장교를 데리고 되돌아왔다. 그들은 곧바로 우쉬 옆에 앉아 있는 칼을 향해 다가섰다. "당신 뉴렘베르그 판결을 알고 있소?" 뺨에 날카로운 흉터 자욱이 있는 키 큰 장교가 칼에게 물었다. 그의 옷깃에는 SS라는 표지가 달려 있었고, 강철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칼을 쏘아보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칼은 무척 침착했다. "난 그런 것 모르오." 칼의 손을 꼭 쥐고 있는 우쉬의 손바닥에 축축하게 진땀이 나고 있었고, 칼의 손도 비로소 약간씩 떨리기 시작했다. "일 주일 전에 뉴렘베르그에서 의회가 열렸는데, 아리안과 교분을 갖고 있는 유태인은 사형애 처한다는 법률이 통과되었소." 우쉬와 칼, 그리고 오드리는 그 장교의 말에 깜짝 놀라 할 말을 잃었다. 칼도 무척 당황하는 눈치였다. "농담하지 마시오." 칼을 바라보는 장교의 눈초리가 한층 매서워졌다. "총통 각하는 결코 농담을 하지 않소." 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 사람이 바로 내 아내요." "그걸로 죄가 면해지지는 않소." 장교는 발뒤꿈치를 서로 부딪쳐 소리를 내며 칼을 바라보았다. "우리와 함께 가 주셔야겠소, 로젠 씨. 당신을 체포합니다.: 장교는 고의적으로 그에게 박사라는 직함을 생략하고 말했다. 그들이 모두 너무나 커다란 충격에 꼼짝도 못하고 있는 동안, 두 명의 병사가 달려들어 칼의 팔을 움켜잡았고, 그러자 우쉬는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칼을 잡고 늘어졌다. 칼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돌려 오드리를 쳐다보며 우쉬를 잘 보살펴 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칼로서도 도저히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냥 그대로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오드리 또한 우쉬의 손을 꼭 붙들고 겁에 질린 눈으로 끌려가는 칼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제정신을 차린 오드리는 짐꾼들에게 자기네의 짐을 내려놓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기차에서 내려 칼이 어디로 끌려가는지라도 봐 두어야만 했던 것이다. 오드리는 거의 이성을 잃은 우쉬를 달래가며 짐꾼에게 더듬거리는 독일어로 택시를 좀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오드리는 반강제로 택시가 도착할 때까지 우쉬를 가방 위에 앉혀 놓았으나, 이번에는 어수선한 주위 환경에 놀라 잠을 깬 몰리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기차가 떠나 버리고 그들만이 홀로 역에 남게 되자 오드리의 가슴이 두려움으로 심하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칼이 까만 차에 실려 가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우쉬는 오드리에게 매달려 주체할 줄을 모르고 계속 울음을 터뜨렸다. "칼을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오, 주여.... 칼을 어디로...." "곧 알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마치 무시무시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리안과 친분을 가진 유태인은 사형에 처한다!> 모두들 미쳐 버린 것 같았다. 택시가 도착하자 그들은 일단 호텔로 달려가서 로비에 짐을 모두 내려놓고 전화부터 찾았다. 우쉬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던 것이다. 우쉬는 다이얼을 돌리는 동안 약간 냉정을 되찾은 것 같았지만, 자신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다시 이성을 잃고 말았다. 오드리가 대신 어떤 사태가 벌어졌는 지를 설명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어떻게 됐다구? 그는 지금 어디 있느냐?" "우리도 아직 모르겠어요. 아버지께 먼저 전화를 하고 난 다음, 경찰서로 연락해 볼 생각이었어요." "그곳에 그대로 있어라!" 우쉬의 아버지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내뱉고는 자신이 어디 몇 군데 알아보고 다시 연락을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오드리는 그의 전화를 기다리는 동안 우쉬를 호텔 객실의 조그만 침대에 눕혀 놓았다. 우쉬는 거기 누워서도 계속 미친 듯이 흐느끼고 있었고 오드리가 냉수를 한잔 가져다 주자 단숨에 마셔 버리고는 초조한 눈빛으로 오드리를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아, 하느님... 그들이 칼을 죽여 버리면 어떻게 하지? 하느님...." 우쉬는 겁먹은 아이가 엄마 품에 매달리듯 오드리를 꼭 붙잡고 있었으며, 다시 연락해 주겠다던 우쉬 아버지의 전화는 영원히 걸려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마침내, 전화벨이 울리고 뮌핸에서 온 전화라는 교환수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베이론 폰 만은 자신의 딸 대신 오드리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다. 그는 차마 자신의 딸에게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오드리에게 들려 주었다. "그놈들은 지난 주에만도 뮌핸에서 칼과 꼭 같은 죄명으로 12명이나 처형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들은 모두 노동자나 상인, 빈민 등 공산주의자들이 노리고 있는 계층의 사람들이었고, 물론 칼과 같은 신분에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답니다. 우리도 그에게까지 이런 화가 미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지 뭡니까." 하지만 이미 그런 일이 벌어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칼이 무사히 석방되지 않으면 어떡하지? 오드리는 두려움에 몸을 떨며, 우쉬의 아버지가 한 이야기를 도저히 믿고 싶지 않았다. "칼이 지금 어디 있는지는 알아내셨나요?" "아직 못 알아냈오. 하지만 나찌의 최고사령부에 아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 사람이 곧 내게 연락을 해줄 게요. 우쉬는 좀 어떻소?" 오드리는 어깨 너머로 우쉬를 힐끗 돌아보았다. 여전히 침대에 누운 채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너무나도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별로 좋은 것 같지는 않아요." 그렇게 밖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내가 당장 로젠하임으로 달려가겠다고 전해 줘요." "그러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하지만 그가 온다고 해서 별 뾰족한 수가 생기지도 않았고, 하루 종일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가 없었다. 우쉬가 경찰서로 달려가 하루 종일 칼을 만나게 해달라고 그렇게 애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칼은 독일 정부에 대해 커다란 죄를 범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우쉬는 더욱더 신경이 날카로와져 경찰관들에게 달려가 그들을 물어 뜯기라도 할 기세였지만, 오드리가 간신히 그녀를 떼어 말려 호텔로 데려올 수가 있었다. 오드리는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호텔로 달려온 우쉬의 아버지와 함께 칼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지난 주에 칼과 똑같은 죄명으로 사형을 당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우울한 표정으로 오드리의 질문에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오. 수용소로 보내질 지도 모르지. 요즘 들어 수많은 유태인들이 수용소로 보내지고 있으니 말이오." 그는 자신의 무능함에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그놈들은 못하는 짓이 없으니까." 그것은 사실이었다. 우쉬의 아버지인 베이론 폰 만 장군은 칼에게 자신이 아무런 도움도 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해 9월15일에 통과된 뉴렘베르그 법률에 따르자면 칼 로젠은 마땅히 사형감이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오드리와 우쉬가 기다리고 있는 호텔로 돌아온 베이론은 아무런 좋은 소식도 가져 오지 못했다. "오늘밤에 칼을 어디론가 데려갈 모양이더군. 어딘지는 잘 모르겠지만 담당 장교가 내일 우리에게 알려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기다려야지 뭐. 내일은 거기부터 가봐야 할테니 말이다." "칼을 어디로 데려간다고 그래요?" 우쉬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쾌활하게 웃고 있던 여자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초췌해져 있었다. 머리는 온통 산발이 되어 있었으며 화장도 다 지워져 눈물자국만이 남아 있었고 심지어 옷에까지 눈물에 씻겨 떨어진 마스카라로 얼룩이 져 있었다. 하지만 우쉬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칼을 어디로 데려간다구요?" "곧 알 수 있을 게야, 우쉬.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우쉬는 다시 아버지의 품속으로 맥없이 쓰러졌고, 그 또한 사위한테 닥친 엄청난 재앙에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결혼을 시키지 말것을 하는 후회가 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칼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었으며, 따라서 다음날 곧장 경찰서로 달려간 그는 칼이 운테르하칭 경찰서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들이 자동차로 그곳까지 달려가는 동안 계속 흐느끼고 있는 우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심지어 오드리의 품에 안긴 몰리까지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운테르하칭에 도착한 그들은 호텔에도 들리지 않고 곧장 경찰서로 차를 몰았다. 그들은 경찰서에 도착하자마자 쇠사슬에 묶인 칼이 트럭에 실려지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한발만 늦었더라면 그것조차 보지 못할 뻔 했던 것이다. 우쉬가 다시 비명을 내지르며 그를 향해 달려갔고, 오드리는 그녀의 비명소리에 놀라 다시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몰리를 더욱 힘주어 껴안았다. 우쉬가 칼에게 거의 가 닿았을 무렵, 그녀의 뒤를 쫓아가던 그녀의 아버지가 겨우 그녀를 붙잡을 수 있었고, 군인들이 칼에게 몽둥이를 휘둘러대며 트럭 속으로 밀어넣는 것이었다. "난 괜찮아...난 괜찮아...." 칼의 외침을 겁에 질린 우쉬가 듣고 있는 동안 트럭의 문이 닫혀 버렸다. 칼은 전혀 며칠 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옷은 다 찢어져 너덜너덜했으며 얼굴과 머리는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우쉬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 계속 흐느껴 울고 있었으며, 잠시 후 칼을 태운 트럭이 떠나 버리고 나자 애타게 사태의 추이를 묻는 그들에게 주어진 대답은 이제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 뿐이었다. 베이론은 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뮌핸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 밖에 없다고 우쉬를 설득했다. 운테르하칭에 더 이상 머물러 봤자 아무런 소득이 없을 뿐더러 뭔헨에 돌아가 있어야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뭔헨을 향해 차를 몰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우쉬는 다시 자신의 어머니의 품에 안겨 통곡을 했다. 오드리는 우선 몰리에게 밥을 먹이고 따뜻한 물로 목욕을 시킨 다음 침대에 뉘여 재우고, 자신은 혼자 빈방에 앉아 칼의 소식이 들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건은 그들 모두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들이 칼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그날 밤 늦게 오드리의 방에 불이 켜 있는 것을 본 우쉬의 아버지가 위스키나 한 잔 하자며 그녀를 자신의 서재로 불렀다. 그들은 새로 만들어진 법률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우쉬의 아버지는 심지어 자기 집에서까지도 마음놓고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독일에서는 가족들 사이에서도 서로에 대한 불신이 싹트고 있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날 밤 한통의 전화를 더 걸어보았으나 역시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그로부더 이틀이 지나고 난 후에야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우쉬의 아버지는 먼저 칼의 부모들에게 조심스럽게 그 소식을 전하고는 얼굴을 감싸쥐고 눈물을 흘렸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베이론은 이층으로 올라가 먼저 자신의 아내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방문을 걸어 잠그고 슬픔에 잠겨 있는 우쉬를 찾아갔다. 그녀는 여전히 너무나 엄청난 고통에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서는 부모의 얼굴을 보더니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하는지 정확하게 눈치를 채는 것이었다. 오드리는 자신의 방에 앉은 채 길게 울려 퍼지는 우쉬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 마침내 칼은 처형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처형이 아니라 히틀러에 의한 살인이었다. 오드리는 오랫동안 넋을 잃고 칼의 소탈했던 웃음 소리와 따뜻했던 눈동자를 생각해 보았다. 그제서야 오드리는 난생 처음으로 사랑이란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 인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우쉬는 더 이상 신부가 아니라 어느 새 과부가 되어 있었다. 칼은 영원히 그녀의 곁을 떠나 버린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라도 그런 일은 벌어질 수 있었다. 오드리는 갑자기 자신과 찰스는 얼마나 운이 좋았었던가, 하지만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하여 헛되이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찰스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생각들이 스쳐갔다. 하지만 막상 우쉬를 마주 대하니 오드리는 아무런 말도 해 줄수가 없었다. 단지 우쉬를 부등켜 안고 실컷 눈물을 흘리게 내버려둘 뿐이었다. 우쉬는 듣는 이의 애간장까지 녹여 버릴 듯한 애절한 목소리로 흐느끼고 있었으며, 오드리는 그런 그녀를 들여다보며 그녀가 다시는 예전의 우쉬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느꼈다. 30 다음날 아침, 6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안티베스에 있는 제임스의 저택에서는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먼저 잠을 깬 제임스가 바이올렛의 머리맡을 더듬어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지금 몇 시예요?" 바이올렛도 잠이 깨 졸린 눈을 부비며 중얼거렸다. 막 태양이 떠오르려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밤새도록 샴페인을 마시느라 이제 겨우 잠자리에 든지 2시간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찰스와 샤롯트는 여전히 그곳에서 머무르고 있었고, 바이올렛은 샤롯트가 예전보다 더 못마땅해져서 아예 그녀에게 신경도 쓰지 않고 지내던 중이었다. 바이올렛은 도대체 누가 그런 시간에 전화를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으며, 제임스는 몸을 꼿꼿이 세운 채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전화를 받고 있었다. "그래요? 알았소." 그리고는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제임스가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 "오드리? 무슨 일이오?" 수화기에서 오드리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자 제임스는 무언가 잘못되었어도 크게 잘못된 일이 터졌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사고라도 난 거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바이올렛의 심장이 털썩 내려앉았다. 그녀는 오드리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제임스의 팔을 붙들었다. "아, 하느님. 그럴 수가...." 제임스는 잔뜩 겁에 질려 있는 바이올렛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제임스? 오드리가 어떻게 됐대요?" 제임스는 손을 흔들어 바이올렛의 입을 막은 후, 다시 통화를 계속했다. 전화 상태가 별로 썩 좋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드리도 무척 당황하고 있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드리는 누구에겐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전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오로지 제임스와 바이올렛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그녀는 좀 어떻소?" "아, 제임스..." 바이올렛이 드디어 울음을 터뜨렸다. 몰리에게 사고가 생겼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제임스는 그런 바이올렛의 손을 꼭 붙들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직히 말해 주었다. "몰리에게 일이 생긴 것이 아니야...." "아니라구요?" 바이올렛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럼 누구란 말인가? "당신은 지금 어디 있는 거요? 이리 되돌아오겠소? 우린 며칠 안 있으면 집으로 돌아갈 거요. 여기로 돌아오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오드리... 좋아요. 그럼, 그렇게 해요. 런던에 있는 우리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요. 참, 그리고 거기 전화번호를 좀 알려줘요. 잠을 좀 자 두는게 어떻겠소? 우리가 몇 시간 후에 전화를 하겠어요. 지금 바이올렛과 이야기를 하고 싶소?" 제임스는 아내를 돌아다 보며 수화기를 건네 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알았소. 내가 그렇게 전해주리다. 그리고 오드리..." 제임스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고, 목소리도 많이 잠겨 있었다. "그녀에게도 우리가 슬퍼하더라는 이야기를 전해 주시겠소?" 전화를 끊고나자 제임스는 말없이 아내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난감해 하던 제임스는 한숨을 내쉬며 냉정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그놈들이 칼을 죽였대." 제임스의 말에 바이올렛은 깜짝 놀라 제임스를 바라다 보았다. "세상에.. 제임스! 누가 칼을 죽였단 말이에요? 우쉬는 어떻게 하고 있대요? 아, 그럴 수가...." 바이올렛은 다시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고, 제임스가 그녀의 어깨를 끌어 안았다. "나찌놈들이지 누구겠어. 기차에서 곧장 끌어내어 밧줄로 꽁꽁 묶어서는 총살시켜 버렸다는군, 아리안과 교분을 맺은 유태인은 무조건 처형한다는 법률이 통과되었나봐, 그런 이야기 들어본 적이 있어? 완전히 미친 놈들이야." 하지만 그들이 미쳤다는 사실보다도 그런 그들에 의해 칼 로젠이 처형되었다는 것이 더욱더 가슴 아픈 일이었다. "아, 하느님!" 바이올렛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그것 밖에 없었다. 제임스는 자신의 품에 안겨 흐느끼는 바이올렛과 함께 아랫층으로 내려가 커피를 마시며 8시에 찰스가 내려올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찰스는 술이 좀 덜 깬 것 같기도 했지만 제임스와 바이올렛을 바라보는 순간 역시 무언가 사고가 생겼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까 6시 쯤에 전화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제임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바이올렛이 다시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아니, 무슨 일이오, 바이올렛?" 그녀의 옆자리에 주저앉는 찰스에게 제임스가 칼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찰스가 제임스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조용하던 방안에 찰스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퍼겼다. "그렇게도 행복해 하더니....그렇게도 서로 사랑하더니....완전히 미친 놈들이군." "그래, 미쳤어." "우쉬는 괜찮다던가?" "어떻게 괜찮을 수 있겠나? 그놈들이 우쉬까지 건들진 않았겠지만 말이야. 지금 뮌핸의 친정집에 가 있다는군. 오드리도 그녀와 함께 있대." "아니, 그녀는 또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게야?" 찰스의 가슴이 많이 아픈 모양이었다. 오드리가 그렇게 무시무시한 사건의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것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것이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그들 부부와 함께 여행을 계속하고 있었겠지." "오드리는 괜찮던가?" ''그녀도 무척 당황해 하더군. 그럴만도 하지. 몇 시간 후에 우리가 전화를 하기로 했네." 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잔에다 위스키를 가득 따라 와서는 제임스에게도 한 잔을 내밀었다. 술을 마시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지만, 둘 다 한 잔씩 마시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 화려한 흰색 가운을 걸친 샤롯트가 나타났다. ''꼭두새벽부터 웬 일이에요?" 역시 샤롯트는 마치 앞에 책상이라도 놓여 있는 듯 지극히 사무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찰스가 독한 술을 한모금 마시며 별로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찌가 칼 로젠을 죽였다는군." "어머나, 끔찍해라!" 샤롯트도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고, 그들 네 사람은 두 시간에 걸쳐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샤롯트는 독일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 무척 명쾌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인물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런 것들이 아무런 문제도 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죽은 칼이 되살아날 수는 결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바이올렛과 제임스가 그날 오후에 다시 오드리에게 전화를 하자 오드리는 그날 밤에 런던으로 떠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나찌는 칼의 유해마저 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장례식이라는 절차를 밟을 수도 없었고, 우쉬는 가족들을 떠나 혼자서 어디론가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우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고, 따라서 조용히 사라져 주는 것만이 가장 나은 방법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드리는 그 다음날 런던에 도착하는 대로 제임스와 바이올렛에게 전화를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안티베스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드리의 목소리에도 생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무척이나 조용하고 슬픈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으며 바이올렛과 제임스는 해변을 따라 오랫동안 산책을 했다. 찰스 또한 베란다에 말없이 나와 앉아 있었는데, 샤롯트만이 자신의 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저녁 때가 되자 그들은 다시 하나 둘씩 한군데로 모이기 시작했는데, 바이올렛은 샤롯트의 안색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거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었다. "괜찮아요?" 바이올렛은 임신 초기의 기분이 얼마나 불쾌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약간은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샤롯트는 그녀의 말에 엷은 미소를 짓기는 했지만, 그런다고 하루 종일 느끼고 있던 우울함이 그녀의 표정에서 완전히 가셔질 수는 없었다. "난 괜찮아요. 아무래도 음식을 약간 잘못 먹은 것 같아요." 샤롯트는 그날 오후 내내 축 늘어져 있었고, 찰스는 무언가를 가지러 방에 들어갔다가 그녀가 화장실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진심으로 미안한 생각이 들었었다. 그래서 그는 홍차를 한잔 끓여다가 가져다 주었지만 그것마저 도로 다 토해 내는 것이었다. 찰스는 은근히 그녀가 아기를 낳을 때까지 내내 저런 상태에 있어야 하는가 하고 걱정스러워졌다. 바이올렛이 샤롯트를 바라보며 가엾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음식때문이 아닐 거예요. 샤롯트. 나도 임신한 후 처음 서너 달까지는 그런 고통을 겪었었으니까요. 마른 토스트나 홍차를 먹으면 효과를 보는 수도 있지만, 그리 크게 믿을 건 못 되던군요." ''난 결코 그런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샤롯트는 바이올렛이 자신의 임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저으기 당황하는 눈치였다. 샤롯트는 그날 저녁 식사를 거의 입에도 대지 않은 채 곧장 잠자리로 들어갔고, 바이올렛과 제임스는 가능한 한 빨리 런던으로 돌아가서 오드리를 만나야겠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도 곧 돌아가야겠군. 샤롯트도 그렇고, 나도 계속 책을 써야하니 말야." 그들은 워낙에 신혼여행으로 아프리카를 여행할 생각이었으나 그것이 그들의 사업 스캐줄과 맞지가 않는 바람에 대신 남 프랑스에서 몇 주일 쉬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둘 다 해야 할 일들이 꽤 급해졌던 것이다. 더구나 칼이 죽었다는 소식이 그들의 여름 휴가에 종지부를 찍었으니, 이제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던 것이다. 찰스는 그런 것들 보다도 샤롯트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졌다는 사실이 걱정스러워 제임스와 잠시 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다음 곧장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방문을 여는 순간 찰스는 샤롯트가 욕실 바닥에 엎드린 채 몹시 신음하고 있는 장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찰스...." 샤롯트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찰스, 너무나 고통스러워요....." 찰스는 순간적으로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직감하고 바이올렛에게 달려가려고 했으나 샤롯트는 손을 내저어 그를 만류하며 자신의 오른쪽 복부를 가리켰다. "여기예요." "의사를 불러올까?" 찰스는 덜컥 겁이 났다. 그는 샤롯트의 대답도 듣지 않고 번개같이 방을 뛰어나가 제임스와 바이올렛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네?" 바이올렛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찰스는 근심이 가득 찬 얼굴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들은 칼과 우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찰스,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샤롯트가 무척 아픈가봐요. 아파 죽겠다는데......" 찰스는 바이올렛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그런 일에 대해선 아무것도 아는 게 없으니.... 의사를 불러야겠어. 당장 병원으로 옮겨야 할 것 같은데..."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이올렛은 가운 자락을 휘날리며 방을 뛰쳐 나갔고, 찰스는 제임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야 했을 텐데... 난 때때로 샤롯트가 임신중이라는 사실을 깜박 잊고서는..." 찰스는 초조한 손길로 흩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바이올렛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이올렛은 조금 후 방으로 돌아와서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페롤트 선생님을 부르는 게 좋겠어요." "아기가 어떻게 잘못 된거 아니오?" 찰스는 일종의 죄책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샤롯트를 앞에 놓고 그런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언제나처럼 그렇게 강하기만 한 줄 알고. "아직도 많이 고통스러워 해요?" 바이올렛이 무슨 죄나 지은 것처럼 미안해 하며 찰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찰스. 여자들은 때때로 엄살을 많이 떠는 수가 있거든요. 일단 병원으로 옮겨 봐요. 내일쯤이면 금방 괜찮아 질거예요." 하지만 찰스는 바이올렛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모든 것을 토해내며 괴로와하는 샤롯트에게 담요를 씌워 차에 태우고는 제임스가 운전읕 했다. 바이올렛이 옆자리에 앉아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고 있었고, 찰스는 운전석 옆에 앉은 채 계속 그녀만을 돌아다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이 고통스러워 하는 샤롯트를 보며 찰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예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찰스의 전혀 새로운 모습이었다. 제임스는 전속력으로 차를 몰았지만 찰스는 좀더 빨리 갈 수 없냐고 그를 재촉했고, 그들이 칸느의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두 명의 남자 간호원이 달려와 샤롯트를 들것에 싣고는 병원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허겁지겁 쫓아 들어가보니 이미 페롤트 박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호원이 샤롯트의 맥박과 혈압을 재는 동안 페롤트 박사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고, 그 옆에서는 찰스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의사가 샤롯트의 상태를 진단하는 데는 채 2분도 걸리지 않았으며, 곧장 찰스를 향해 돌아서며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었다. "맹장염입니다. 이미 맹장이 파열되었거나 적어도 그와 유사한 상태인 것 같군요. 당장 수술을 해야겠습니다." 찰스는 약간은 안심이 되었으나 여전히 걱정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아기는 유산이 되는 건가요?" 의사는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 "임신 중인가요?" 찰스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았습니다. 최선은 다해 보겠지만 아기를 살리기는 힘들 것 같군요." 대번에 찰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뭏든 최선을 다해 보겠읍니다." 의사는 그 한마디만을 남기고 어디론가 샤롯트를 데리고 찰스는 제임스와 바이올렛과 함께 대기실에 앉아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지루하고 초조한 3시간이 지나자 의사가 다시 나타났다. 대기실로 들어서는 의사의 침울한 표정에 그들은 모두 간이 덜컥 내려 앉았다. 순간적으로 찰스의 머릿속에는 혹시 샤롯트가 죽은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부인은 괜찮습니다." 의사는 찰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맹장이 파열되긴 했지만 그런 것쯤은 금방 고칠 수가 있습니다. 3,4주 정도 입원해 있으면 완전히 회복될 겁니다." 찰스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의사는 아직 찰스가 가장 알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이 없었다. 찰스는 깊은 숨을 들이쉬며 의사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어떻게 됐죠?" 의사는 바이올렛과 제임스가 있는 앞에서 이야기를 꺼내기가 곤란한 듯 찰스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과 조용히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찰스는 의사의 그 말을 아기가 최악의 상태로 빠져 버렸다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 아기가 자기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생각하자 가슴이 메이는 것 같았다. 아기는 그때까지 찰스에게 남아 있던 유일한 희망이었던 것이다. 찰스는 바이올렛과 제임스를 그곳에 남겨 놓은 채 의사를 따라 또 다른 대기실로 들어갔다. 의사가 그에게 의자를 권하며 앉으라는 눈짓을 했다. "몇 가지 개인적인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네, 좋습니다." 하지만 의사는 아직까지도 아기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고, 찰스는 그런 그에게 대답을 재촉하기가 두려웠다. 어쩌면 샤롯트에게 무슨 합병증이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결국엔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될지도 몰랐다. 찰스는 마음 속으로 모든 가능성을 더듬으며 의사의 대답을 기다렸다. "부인과 결혼한 지가 얼마나 되셨읍니까?" 찰스는 아기만 살릴 수 있다면 의사에게 모든 얘기를 다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기는 그만큼 그에게 소중한 존재였다. 그 아기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희생한 찰스였던 것이 다. "결혼한 지는 약 4주 정도 밖에 안 됐지만 석달 전에 이집트에서 임신을 했읍니다." 의사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럼 임신한 지가 그것보다 더 오래 되었단 말입니까?" 그것 또한 찰스에게는 무척 걱정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의사는 여전히 안타까운 표정으로 찰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당신의 사생활에 관여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지만, 아무래도 약간의 오해가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부인은 임신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5년 전에 자궁절제 수술을 받았다고 자신의 입으로도 털어놓더군요. 난 당신이 한 이야기 때문에 모든 검사를 다 해보았으나 어디에도 아기는 없었어요. 자궁이 없는데 어떻게 임신을 할 수가 있겠읍니까. 앞으로도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을 겁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찰스는 의사의 그 말이 커다란 망치가 되어 자신의 뒷통수를 후려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틀림없나요?" 찰스의 목소리는 침울, 그 자체였다. "물론입니다. 부인이 직접 당신에게 이야기할 겝니다. 아마도 자신이 임신할 수 없는 몸이란 사실을 당신에게 알리기가 두려웠나 봅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당신도 부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양자라는 것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의사는 팔을 뻗쳐 찰스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끄떡일 뿐 뭐라고 할 이야기가 없었다. "고맙습니다. 말씀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찰스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샤롯트가 거짓말을 한 것이다. 거짓말을.. 모든 것이 다 거짓말이었다. 찰스는 오히려 항상 그녀의 몸을 먼저 요구한 것이 자신이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을 느껴 왔었다. 게다가 샤롯트는 낙태를 거부했고, 그런 그녀를 얼마나 높이 보았던가.... 손을 닮은 아기가 태어날 것이었다. 그런데 영원히 아기를 가질 수 없다니... 샤롯트가 그런 거짓말을 하다니... 찰스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제임스와 바이올렛이 기다리고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부인을 만나보시겠어요?" 젊은 간호원 하나가 찰스를 향해 말했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부인이 막 깨어나셨어요. 잠시 만나보셔도 될텐데....." 그러나, 찰스는 간호원을 못본 체 그냥 지나쳐서는 병원 바깥으로 먼저 나가 바이올렛과 제임스를 기다렸다. 바이올렛은 크게 한숨을 들이쉬는 찰스의 뒷모습을 보고는 그에게 무언가 엄청난 일이 생겼나보다. 아니 결국 샤롯트의 아기가 유산되고 말았나보다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찰스?" "아무 소리도 하지 말아.. 제발." "찰스.." 찰스는 바이올렛을 향해 몸을 돌리며 그녀의 팔을 와락 움켜 잡았다. "바이올렛, 제발 말 시키지 말아요!" 바이올렛은 그가 울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으나, 그 눈물이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분노의 눈물처럼 보이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샤롯트가 내게 어떤 짓을 했는지 알겠오?" 찰스는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샤롯트는 내게 거짓말을 했어! 아기? 흥, 아기는 무슨 아기! 샤롯트는 이미 5년 전에 자궁 절제를 한 몸이라는군. 절대 임신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오." 제임스와 바이올렛은 영문을 몰라 찰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사실이에요?" 바이올렛은 불쌍한 오드리를 생각하며 치를 떨었다. "물론." "끔찍한 일이군." 제임스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세워 둔 자동차에 올라탔다. "가자구. 한 잔 해야겠어." 하지만 그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한잔이 아니라 밤을 꼬박 새워 술을 마셨고, 찰스는 다음 날 정오까지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다. 12시가 넘어서야 겨우 일어난 찰스는 목욕을 하고 면도를 한 다음 곧장 샤롯트의 병실로 갔다. 찰스가 우울한 표정으로 샤롯트를 내려다보자 그녀는 찰스의 그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잘 알 수 있었다. "미안해요. 찰스. 당신과 결혼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요." 샤롯트의 그 말은 진심이었지만, 그게 진심이라고 해서 뭐가 달라질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난 당신을 아주 유명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난 그런 것에는 털끝 만큼도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야. 그걸 여태 모르고 있었나?" "그땐 정말 몰랐어요. 지금은 약간 알 것 같기도 하지만요. 그렇지만 당신의 그런 생각은 잘못 된 거예요.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에요. 국제적으로..." 마치 찰스를 왕으로 만들어 줄 수도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래서 당신은 뭘 어쩌겠단 건가 그게 그렇게도 중요한 건가?" 샤롯트는 찰스의 몸에 끈을 달아 꼭둑각시처럼 조종하고 싶었던 것이다. "당신같은 사람은 소중한 화초처럼 보살펴져야 해요." 샤롯트는 얼굴에 미소를 띄워 보려 했지만 수술한 후의 고통이 아직 채 가시지 않았기 때문인지 묘하게 찡그린 듯한 표정이 되었을 뿐이었다. "당신에게 아기가 그렇게도 소중한 건가요. 찰스?" 하지만 샤롯트는 찰스가 몰리나 알렉산드라를 안고 즐거워 하던 표정을 떠올리며 스스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었다. "아이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잖아요. 찰스. 당신에겐 할 일들이 있어요. 우린 서로를 의지하면서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그런 생활에서 내게 남는 것은 허무 뿐이야." 찰스는 슬픈 눈빛으로 샤롯트를 바라보았다. 인생이나, 혹은 찰스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여자가 바로 샤롯트였던 것이다. "난, 일 이 주일 후에 당신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다음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생각했어." 샤롯트는 찰스의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몰라 그저 슬픈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샤롯트에게 있어서 찰스는 너무나도 가지고 싶었던 값비싼 다이아몬드였다. "하지만 난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아. 난 당신 곁을 떠나겠어. 이제 연극은 끝났어. 우린 이제 분장을 지우고 각자의 삶으로 되돌아갈 때가 된 거야. 당신은 당신의 집으로, 나는 내 집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돌아 가사는 거야. 물론 난 두번 다시 당신을 만나지 않겠어." "왜.... 왜 그래야만 하는 거죠?" 샤롯트는 아픈 몸을 일으켜 찰스의 손을 잡으려 안간힘을 다해 보았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이가 없다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문제인가요?" "난 아이 없이도 살 수 있어. 하지만 거짓말장이와 함께 살 수는 없어. 당신은 아이를 미끼로 나를 결혼이라는 함정에 빠뜨려 버린 거야. 물론 당신은 그 수 많은 재산의 일부처럼, 나를 소유하고 싶겠지. 하지만 결코 나를 돈으로 사거나 새장 속에 넣어 가둘 수는 없을 거야. 우리들 사이에 싹터 오르고 있던 유일한 희망은 바로 그 아이였어. 하지만 이제 그것이 거짓이었음을 알게 되었지. 내가 당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으니 지금쯤 아마 이리로 달려오고 있을게요. 그가 도착할 때 까지는 기다려 주겠어. 하지만 그가 도착하는 즉시 난 바이올렛과 제임스와 함께 이곳을 떠날 거야. 당신이 퇴원하고 난 후에 안티베스에 계속 머무르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고 바이올렛이 허락해 주었으니 마음대로 해도 좋아. 당신 아버지에게는 직접 당신 입으로 사태를 설명해 주기 바라겠어. 당신을 고의적으로 괴롭힐 마음은 전혀 없지만, 더이상 당신과 함께 살기는 싫어. 언젠가 당신은 내게 감사하는 마음이 될 때가 올거야." 말을 마친 찰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거리로 뛰쳐나와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이제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샤롯트라는 여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갑자기 우쉬와 칼, 그리고 그들이 함께 나누었던 숭고한 사랑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역시 그러한 사랑을 함께 나누었던 오드리가 가슴에 사무치도록 그리워졌다. 지금 당장에라도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안티베스의 저택으로 돌아온 찰스는 이미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몇 시에 떠날 거예요?" 바이올렛이 놀란 눈으로 그런 찰스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샤롯트의 아버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건가요?" "그는 오늘 밤에는 도착할 게고, 칸느의 칼톤 호텔에서 머물 것 아니오." "난 내일 4시 기차를 탈려고 생각중이에요." 그러면서 바이올렛은 갑자기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취 속삭였다. "그건 그렇고, 오드리가 다시 전화를 했었는데, 지금 막 런던에 도착했다고 하더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찰스의 눈이 바이올렛에게 붙박혀 있었다. "당신에게 안부 전해달라고 하던걸요." 찰스는 그 뒤로 샤롯트를 다시 만나지 않았고, 칼톤 호텔에 도착한 그녀의 아버지와 전화로만 이야기를 나누었다. 찰스는 간단하게 그 통화를 끝냈고 자세한 이야기는 하나도 들려주지 않았다. 그건 샤롯트가 할 일이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한 결과이니 말이다. 찰스 자신이 할 일은 이제 오드리를 다시 만나는 것 뿐이었다. 오드리가 그를 다시 만나기를 거부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었지만, 찰스는 만약 그렇다 해도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모조리 털어놓고 그녀의 마음을 돌려볼 작정이었다. 31 찰스와 바이올렛, 그리고 제임스는 아이들과 유모를 데리고 런던행 밤차에 몸을 실었다. 대부분의 하인들은 안티베스에 남았다. 그들은 모두 프랑스인이었고, 바이올렛은 청지기와 가정부만을 매년 런던에서부터 데리고 가곤 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먼저 런던을 향해 출발했었기 때문에 제임스와 바이올렛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제임스 부부가 긴 여행 끝에 런던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잠시 들어가시지 않겠어요. 찰스?" 바이올렛이 알랙산드라의 손을 붙잡은 채 물었다. 찰스가 잠시 머뭇거리는 표정을 짓자 바이올렛은 미소를 머금었다. 찰스는 지난 이틀 동안 커다란 충격으로 고통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훨씬 더 젊어진 것처럼 보였다. 찰스와 바이올렛은 기차를 타고 오면서 제임스가 잠든 사이에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때 찰스는 자신이 얼마나 아이를 원하고 있었나를 바이올렛에게 솔직이 털어놓았다. 바이올렛은 그런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렇게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던 찰스가 이제는 어디엔가 얽매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내심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물론 샤롯트도 이혼에 동의하겠죠?" 바이올렛은 이제 샤롯트가 웬만큼 정신을 차렸으리라고 생각한 것이었지만, 찰스는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샤롯트는 가톨릭 신자요." 바이올렛은 그 말에 깜짝 놀랬다. "하지만 그건 낙태를 거부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었잖아요. 그걸 가지고 이혼까지 거부할 수가 있을까요? 샤롯트는 당신과 결혼하기 위해 사기를 친 거란 말이에요." "그건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샤롯트는 결코 나와 이혼하려하지 않을 게요. 그녀는 아직까지도 자기가 나의 명성을 위해 커다란 기여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소." 샤롯트는 정말로 자신의 건강이 회복될 동안 다시 한번 신중히 생각해 주길 원하고 있었고, 몇 주 후에 런던으로 돌아오면 다시 찰스를 만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찰스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샤롯트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그는 마지못해 제임스의 집으로 들어서면서 당장에라도 오드리가 자신에게로 달려와 주길 기대하는 듯 천천히 집안을 둘러보았다. "오드리는 나가고 없나보네." 바이올렛이 찰스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나직이 속삭였고, 괜히 무안해진 찰스가 어색한 미소를 짓는 순간 바로 등 뒤에서 오드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찰스가 뒤를 돌아다 보니, 여름 내내 햇빚에 그을린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백지장처럼 창백한 표정의 오드리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오드리는 런던으로 돌아온 후에도 줄곧 칼과 우쉬에 대한 생각들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단을 내려온 오드리는 바이올렛과 제임스, 그리고 아이들과 차례로 키스를 나눈 다음, 마지막으로 슬픔이 가득한 눈을 들어 찰스를 바라 보았다. "안녕하셨어요. 찰스. 여행은 어땠어요?" "그럭저럭 괜찮았소." 찰스는 마치 국민학교 아이처럼 수줍어하며 대답했다. "당신은 좀 어떻소?" 찰스가 오드리를 향해 몇 걸음 다가서자 바이올렛은 순간적으로 혹시나 그가 오드리에게 키스를 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오드리 역시 그렇게 생각했음인지 뒤로 몇 발짝 물러서며 주춤했다. 그러자 갑자기 홀 안의 분위기가 어색하게 굳어져 버렸다. 바이올렛은 모자를 벗으며 아이들을 2층으로 올려 보내고 자연스럽게 차나 한 잔 마시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물론 그때까지 오드리는 찰스와 샤롯트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모두 서재로 들어가 자리에 앉자, 먼저 바이올렛이 요리사에게 차를 부탁해야 겠다며 자리를 떴고, 잠시 후 제임스까지 청지기에게 일러 둘 말이 있다고 슬며시 나가 버렸다. 오드리는 찰스와 단 둘이 남게 되었음을 알고 무척이나 어색해졌다. 그런 고통은 안티베스에서 겪은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드리는 은근히 칼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내며 대화의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 마저 엄청난 공포가 되살아나서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정말...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무서운 광경이었어요." 오드리는 나찌 병사들이 칼의 팔을 움켜잡던 광경, 찢어질 듯 울려 퍼지던 우쉬의 비명 소리.... 그리고 온통 피범벅이 된 칼의 얼굴 모습들을 한시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아, 찰스..." 오드리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눈을 감고 큰 숨을 들이마셨다. 그 순간, 갑자기 오드리는 자신의 머리칼에 와닿는 그 낮익은 찰스의 손길을 느낄 수가 있었다. "잊어버려요." 찰스의 목소리는 말할 수 없이 부드러웠다. "잊어버리라뇨? 어떻게 그걸 잊을 수 있단 말이에요?" "물론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당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시간이 흐르면 차차 잊혀지게 될 거야." 찰스는 불타는 듯한 눈길로 오드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지만 적어도 대부분의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주니까." 그의 말은 차라리 속삭임에 가까왔다. "이런 이야기는 별로 어울리지 않지만..." 찰스는 큰 숨을 들이쉬며 말을 이었다. "안티베스에서 샤롯트와 헤어졌어." 오드리는 찰스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곧 돌아온대요?" 찰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아니라 샤롯트와 영원히 헤어지겠다는 소리야. 이혼할 생각이야." "무슨 소리에요. 찰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샤롯트는 아기에 대해서 내게 거짓말을 했어." "당신의 아기가 아니더란 말인가요?" "누구의 아기도 아니었어. 샤롯트는 임신을 하지 않았던 거야." "그래요? 혹시 유산이 된 것 아닐까요?" 오드리는 그런 거짓말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찰스는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맹장염에 걸렸을 때 나는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가서 수술을 맡을 의사에게 지금 임신중이니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었지." 찰스의 입가에는 쓰디쓴 미소가 담겨져 있었다. "그 의사는 나를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했을까. 샤롯트는 이미 몇 년 전에 자궁절제 수술을 받았다더군. 샤롯트 자신도 그 다음날에야 내게 사실을 고백하더군. 그녀는 목적에 의해 수단이 정당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난 그걸 참을 수가 없었어. 내가 그녀와의 결혼에서 원하고 있던 것은 오직 아이밖에 없었으니까 말이야." 오드리는 찰스의 이야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녀가 놀란 것은 찰스가 아기를 원한다는 대목 때문이 아니었다. "샤롯트도 이혼에 동의할까요?" "지금 당장은 거부하겠지만 결국 그러지 않을 수 없을 거야. 다른 방도가 없으니까, 내가 그녀와 결혼한 이유는 오로지 그 아기 때문이었고, 결혼하기 전에도 난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혔었어." 오드리는 다시 비극적인 결말을 보고야 만 칼과 우쉬의 사랑을 생각하며 찰스를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찰스..." 오드리의 눈에는 다시 예전과 같은 부드러움이 깃들어 있었고, 찰스는 이틀만에 처음으로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다. "나를 용서해 줄 수 있겠어, 오드리?" 찰스는 오드리의 손을 꼭 감싸쥔 채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맞추었지만, 이번에는 오드리도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용서할 것이 뭐 있나요. 찰스. 난 당신이 그렇게 절실하게 나를 필요로 할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했던 걸요." "나도 이제 조금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당신을 이해할 것 같아. 그때 나는 정말 화가 났었고, 샤롯트가 그런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 또한 사실이야. 난 당신을 잊어버리려고 무척이나 노력했었지." 오드리도 고게는 끄덕였지만 한편으로 샤롯트가 결코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짐작할 수 있었다. "샤롯트에게는 뭐라고 말했나요?"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고 했어, 영원히." 찰스와 오드리는 이제 예전에 중국을 여행하던 시절보다 훨씬 더 커다란 동질감을 서로에게서 확인할 수 있었다. 찰스는 기쁨에 겨운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오드리를 끌어당겨 길고도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바이올렛이 방으로 들어서다가 그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어머나... 미안해요...." 바이올렛은 흡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도로 나가려고 등을 돌렸지만, 오드리가 그런 그녀를 불러 세웠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괜찮아요. 바이올렛." 찰스가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오드리가 지금 막 나들 고문하고 있던 중이었어요. 내가 오드리를 괴롭히던 것이 아니라." "당연히 그래야죠." 바이올렛은 금방 환하게 웃는 표정이 되었다. "불쌍한 오드리를 그렇게 괴롭혔으니 이제 당신이 따끔한 맛을 좀 봐야해요." "불쌍한 오드리라구? 아니, 바이올렛. 내 생각도 좀 해 쥐야지. 내가 샤롯트와 같이 살면서 뭐 그리 대단한 재미라도 봤는지 아시오?" 오드리의 입가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소가 떠올랐다. 몇 시간 전 까지만 해도 영원히 풀릴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커다란 한을 갑자기 이렇게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오드리는 그런 생각을 하며 꽤 심각한 표정으로 찰스를 바라보았다. "이제 정말 다 끝난 거예요. 찰스?" "물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야. 필요하다면 비어드슬리와의 계약관계까지 깨끗이 청산해 버리겠어." "비어드슬리가 그렇게 호락호락 물러설까?" 제임스가 포도주 병을 들고 불쑥 들어서며 말했다. 바이올렛과 오드리는 포도주 잔을 받아들었고, 찰스는 좀더 독한 술을 마시고 싶어했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몰랐지만,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커다란 자유를 마음껏 자축하고 싶었던 것이다. 갑자기 이렇게 살아서 숨쉬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터무니없게도 그 모든 것이 칼과 우쉬가 그들에게 남겨 준 선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제임스와 바이올렛이 잠자리로 먼저 들어가 버린 다음, 찰스와 오드리는 어두워진 서재에 불을 피워 놓고 칼과 우쉬, 그리고 오드리의 할아버지에 대한 지난 추억들을 더듬어 보았다. "인생이란 정말 너무나도 짧은 거야. 잃어버리기 전에는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 "성공적인 인생의 비결이란 아무래도 닥쳐오는 순간들을 성실하게 대하는 것 뿐인 것 같아요. 칼이 그렇게 될 줄 누가 짐작이라도 했겠어요?" 찰스는 오드리를 더욱더 힘주어 껴안았다. "오드리. 샤롯트와의 문제가 정리되고 나면 나와 결혼해 주겠어?" 이말은 그날 하루 종일 찰스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생각이었다. "오래 전에 그렇게 했더라면 우린 둘 다 상처를 훨씬 줄일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찰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사 그는 오드리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당신은 결코 그때 나와 결혼할 수 없는 처지였다는 걸 이제는 이해할 수 있어. 자, 지난 일은 잊어버리고, 내 질문에 대답해 줘." "결혼하겠어요." 오드리의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찰스는 다시 한번 열정적인 키스를 그녀의 입술에 퍼부었다. 32 샤롯트 문제는 찰스가 예상했던 것처럼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는 않았다. 10월 초에 런던으로 돌아온 샤롯트는 강력하게 이혼을 거부하고 나서는 것이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종교적인 이유가 주된 것이었지만, 결혼식 때 말고는 성당에 가는 샤롯트를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찰스로서는 결코 그런 이유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찰스는 샤롯트가 이혼을 거부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제임스와 바이올렛, 그리고 오드리는 그 이유를 너무나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샤롯트는 찰스와의 결혼으로 말미암아 획득할 수 있는 훌룡한 가문이라는 위엄, 그리고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의 아내라는 사회적 지위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샤롯트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의 이름이자, 당신의 아내로서 가질 수 있는 사회적인 인정이에요." "좋아, 정 그렇다면 내 이름을 계속 써먹을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하지만 당시 어디서나 샤롯트 파커스코트라는 이름으로 행세하고 있던 그녀는 심지어 찰스가 자신의 저작에 대한 영화권까지 포기하겠다고 해도 여전히 막무가내로 비티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찰스는 샤롯트의 아버지를 만나 얘기해 보았지만, 그 역시 딸 만큼이나 완고하기는 마찬가지 였다.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무엇 때문에 명목 뿐인 결혼상태를 유지해야 된다는 거죠?" "샤롯트는 자네가 곧 돌아올 것으로 생각하고 있네. 어차피 찰스, 자네가 성공을 거둘려면 그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나." 하지만 그건 그들의 문제일 뿐이었다. "나 스스로도 샤롯트에게 그렇게 고집만 부리지 말고 신중히 생각해 보라는 얘기도 했었네만, 자네가 아니면 그 누구와도 함께 살 수 없다는 걸 어떡하겠나? 그런 일 때문에 우리 사업계획을 변경시킬 수도 없고 말이야. " 찰스와 그들의 계약기간은 앞으로도 5년이나 남아 있었다. "앞으로 내가 샤롯트와 함께 일하리라는 생각은 아예 않는게 좋을 겁니다." "그애는 자네가 자기 곁을 떠난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네만, 혹시 예전에 사랑을 나누었던 그 여자 때문에 그런 건 아닌가?" "이번 일은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읍니다. 샤롯트와 나 사이의 오해가 문제되었을 뿐이죠." 오해란 곧 거짓말, 사기, 기만의 다른 표현이었다. 찰스는 아직도 그것만 생각하면 샤롯트를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샤롯트가 직접 얘기할 겁니다." 그때까지 오드리는 제임스의 집에 계속 머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싫었을 뿐만 아니라 찰스가 그녀를 만나러 들락거리기에도 왠지 어색해서 오드리는 당분간 방을 하나 얻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도 하루 종일 자신과 몰리, 그리고 하녀 한 사람이 살 수 있을 만한 집을 구하기 위해 돌아다녔던 오드리가 찰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자, 찰스는 뜻밖에도 그리 기뻐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내 생각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죠?" "천만에! 당신이 런던에 사는 것을 내가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 찰스는 이제 오드리가 서둘러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커다란 만족을 느끼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공식적으로도 샤롯트와의 관계를 청산하는 일에 더욱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그때까지도 별달리 뚜렷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 오드리." 하지만 찰스는 그녀가 자신의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짐작할 수가 없어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다. "우리집에 안 쓰는 방이 몇 개 있는데 말이오, 다행스럽게도 나랑 같이 살려고 하는 사람이 었거든." 오드리는 웃음부터 터뜨리며 말했다. "그래서, 제게 방을 세놓겠다는 말인가요?" 찰스 역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한때 중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서로의 품에 안겨 잠이 들고 일이나 보면 그때까지도 나란히 침대 위에 함께 누워 있는, 그런 생활읕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집으로 이사를 오는 것이 어떻겠어, 오드리. 방이야 많이 있으니 몰리와 하녀가 지내기에도 별 불편은 없겠지만, 혹시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집을 구해볼 수도 있겠지." 오드리를 바라보는 찰스의 얼굴이 기쁨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곧 그들은 제임스의 집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집을 하나 얻기로 합의를 보았다. "내가 얼마나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하는지 알고 있지? 이건 샤롯트와의 이혼이 성립될 때 까지 만이요. 그게 언제가 되더라도 이해할 수 있겠어?" "그럼요. 찰스." 오드리는 결혼이란 절차야 어찌됐건, 그렇게 커다란 행복을 느끼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벌써부터 찰스와 한집에서 같이 생활할 날이 손꼽아 기다려지는 것이었다. 33 찰스와 오드리는 그 후로 어디를 가든지 늘 함께 붙어 다녔다. 찰스는 모든 친구들에게 오드리를 소개했고, 그들은 모두 쌍수를 들어 오드리를 환영했다. 파티에 참석하거나 오페라 구경을 다닐 때, 혹은 무도회에도 언제나 찰스의 곁에는 오드리가 따르고 있었지만, 샤롯트가 계속해서 샤롯트 파커스코트로 행세하는 것이 그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런 채로 그들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무렵, 제임스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마련한 새 집으로 이사를 갔다. 그 무렵, 영국에서는 조지 국왕이 서거하고, 대신 41세의 미남자인 에드워드 8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오드리는 그가 바로 몇 달 전에 안티베스에서 직접 만났던 적이 있는 그 사람이란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가 이제 영국의 왕이 되었던 것이다. 오드리는 그와 심프슨 부인과의 사랑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왕자였던 시절엔 혹시 가능했을지 몰라도, 이제 일국의 왕이 된 그에게 영국 사람들은 이혼녀와 의 비정상적인 사랑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음해 봄, 히틀러가 라인강 연안으로의 침공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찰스와 오드리는 우쉬에 대한 생각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동안 몇 번이나 편지를 했었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그래서 마침내 우쉬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보았던 것이다. "우쉬는 지금 오스트리아의 수녀원에 있다오." 우쉬 아버지의 늙고 지친 목소리가 찰스와 오드리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오드리는 우쉬의 주소만이라도 알고 싶었으나, 완전히 외부와 차단된 수녀원에서 편지를 주고받는 것은 물론 부모의 면회까지도 금지되어 있다는 설명에 부질없이 눈물만을 쏟았을 뿐이었다. 오드리는 그날 오후 몰리를 데리고 공원을 거닐면서 우쉬의 생각이 밀어 닥쳐와 그녀에 대한 생각을 도저히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아이를 6명이나 낳겠다며 행복해 하던 그녀가... 이제는 수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칼에대한 우쉬의 사랑이 그렇게도 컸던 만큼, 칼이 없는 삶은 우쉬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했던 것이다. 갑자기, 오드리의 머릿속에는 이제 자신의 모든 인생이 되어 버린 찰스와 몰리가 떠올랐다. 그들이 어디론가 훌쩍 떠나 버린다면 오드리 자신은 단 한시도 살아가지 못할 것만 같았다. 오드리는 찰스 뿐만 아니라 몰리도 친자식 이상으로 아끼고 사랑했다. 몰리의 사진만도 이미 수백 장을 찍었다. 그리고 찰스는 새로운 저술을 막 시작하고 있는 참이었다. 찰스는 이제 샤롯트를 새까맣게 잊어버릴 만큼 오로지 오드리만을 사랑하고 있었고, 그에 못지않게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기 시작하는 몰리를 사랑하고 있었다. 오드리와 찰스가 자신의 생활들을 정착시켜 나가는 동안 세월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급변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여전히 굶주린 늑대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으며, 그 해 가을에는 로마와 베를린 사이에 협정이 맺어졌다. 11월에는 러시아를 견제하는 독일과 일본의 협정이 맺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사건은 그 해 12월에 발생했다. 12월 10일, 부엌에서 무심코 라디오를 듣고 있던 오드리의 귓가에 에드워드 국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 없이 국왕으로서 나의 임무롤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오드리는 사랑을 위해 하나의 왕국을 포기하는 한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었다. 그 방송을 듣는 순간 오드리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 인가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으며, 차라리 심프슨 부인과의 사랑을 선택해 국왕이란 지위를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그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 이었을 까를 생각하니 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오드리의 몸은 찢어질 듯 아파왔다. 그에 비하면 찰스와 그녀가 겪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만 느껴졌던 것이다. 방송이 끝난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오드리는 부엌에 선 채 혼자 놀고있는 몰리를 바라보며 자신은 이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34 샤롯트는 1년 반이 지난 그때까지도 오드리와 찰스의 관계가 완전한 합법성을 획득하는 데 방해가 되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런 것에는 더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한 제약을 생활의 일부로써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오드리는 자신의 사진 때문에 너무나 바빠서 그 일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찰스의 끊임없는 격려에 힘을 얻은 오드리는 화랑을 빌어 사진 전시회를 갖기까지 했다. 물론 그 전시회에는 그동안 오드리가 찍은 수많은 추상작품이나 인물작품을 비롯해 손문의 미망인, 그리고 몰리를 모델로 한 작품들까지 출품되었다. 찰스는 그런 오드리를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으며, 그들 둘의 작업은 그야말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보였다. 찰스와 호흡을 같이 할 사진작가로서 오드리는 전혀 손색없는 재능을 갖추고 있었으며, 그런 사실이 다시 샤롯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여태 그 여자에게 매달려 있나요. 찰스?" 언젠가 사무실에서 찰스를 만난 샤롯트가 다시 말을 꺼냈다. 찰스는 그녀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그 사무실로 갔었던 것인데 엉뚱하게도 샤롯트가 나타난 것이다. "당신이 나에게 매달리는 것과 똑같은 것 아니겠소?" 찰스는 샤롯트만 보면 왠지 부화가 돋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샤롯트가 이혼에 합의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훨씬 더 초조해 한 것은 오드리가 아니라 찰스였다. 오드리는 그런대로 현실에 만족하고 있었지만 찰스는 아기를 갖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직도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겠소, 샤롯트?" 끊임없이 반복되던 싸움이었지만, 찰스는 샤롯트가 그렇게 완고하게 나오는 이유를 그때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물론 사람들 사이에 구구한 설명이 나돌고 있긴 했지만, 찰스는 그러한 대답들에 결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샤롯트 자신만이 그 해답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난 결코 이혼에 동의할 수 없어요. 찰스." 샤롯트는 차가운 눈빛으로 다시 한번 힘주어 말하며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당신은 지금 세월을 낭비하고 있는 거예요." "세월을 낭비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야!" 금방이라도 달려가 머리채를 휘어잡을 듯한 기세로 찰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샤롯트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오드리의 동생 아나벨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재혼을 했다는 것이었다. 아나벨이 이번에 재혼한 남자는 전문 도박사였다. 찰스는 그런 남자와도 마음대로 결혼할 수 있는 아나벨과 자신을 비교해 보니 더더욱 화가 치밀었던 것이었다. 찰스는 그 해 여름 런던에 들린 아나벨과 그녀의 새 남편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한 형제이면서도 오드리와 그렇게 대조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나벨은 오드리가 샌프란시스코를 떠나온 이후로 한층 더 타락한 것 같았다. 오드리조차 그런 동생을 대하기를 꺼려했다. 형제라기보다는 전혀 모르던 타인끼리 만난 것만 같았다. 그러한 아나벨이 런던을 떠났을 때 오드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나벨은 오드리에게 앞으로 영원히 찰스와 함께 살건지 어떤지를 물어 보았었다. "찰스는 지금 이혼 절차를 밟을 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야."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담?" 아나벨은 거만한 동작으로 담배 연기를 뿜어대며 내뱉었다. 마치 오드리는 타락한 창녀고, 자기는 정숙한 마나님이라도 되는 듯한 말투였다. "그럴 수도 있지." "글쎄, 언니는 자신이 결코 더 젊어질 수는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 줘야겠어." 오드리는 피곤한 눈길로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았다. 오드리는 예전의 앳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아나벨에게서 말할 수 없는 서글픔을 느꼈다. 오히려 아나벨에게서는 자꾸만 천박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아나벨은 마치 완전한 타인으로만 느껴져요." 오드리는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찰스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줄 곧 내 손으로 키우다시피 하면서 지켜 봐 온 아이인데도 말이에요." 이제는 거리의 몸파는 여자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아나벨이었지만 더욱 재미있는 것은 오히려 그런 아나벨이 오드리를 부정한 여자로 본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것은 찰스와의 동거 때문이었다. "이번 결혼도 오래 갈 것 같지 않아요." 찰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오드리는 심지어 바이올렛과 제임스에게도 아나벨을 소개하지 않았다. 동생이라고 내세우기가 창피했던 것이다. 그런 아나벨이 그 뚱뚱하고 담배냄새에 찌든 남자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할아버지의 저택에서 함께 살 거라는 생각을 하니 왠지 속이 거북했다. 할아버지가 그런 모습을 보았더라면 아마 기절 초풍을 하며 뒤로 자빠졌을 것이었다. 이제 두번 다시는 볼 수 없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오드리는 마침내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제 오드리는 할아버지 대신 찰스와 정치적인 문제들을 놓고 토론을 벌이곤 했다. 그해 여름, 중국을 침략한 일본에 대해서도 그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에는 중국의 전 국토에 전쟁이 확산되어 수천의 무고한 시민들이 생명을 잃는가 하면 뻬이징과 텐진이 일본의 수중으로 떨어지기도 했었다. 그런 소식을 접하자 오드리는 찰스와 함께 중국에서 보냈던 평화로운 시간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모든 것이 이제 파괴되어 버렸으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마이 리를 데리고 온 것이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신유를 비롯한 다른 아이들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며, 혹시 수녀들이 그들을 모두 프랑스로 데려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 해 여름인 1937년 7월에 독일에서는 강제 수용소가 문을 열었고, 그와 동시에 독일의 모든 유태인들이 철저히 사회에서 고립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들은 극장이나 도서관 등 일체의 공공시설의 이용이 금지되었고, 7월 16일부터는 모든 유태인은 옷에 노란 딱지를 달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런저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오드리와 찰스의 몸속에는 칼과 우쉬에 대한 추억들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것이었다. 칼의 죽음을 계기로 찰스와 오드리가 더욱 단단히 묶어질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기묘한 인연이라면 인연이었다. 유태인이라는 말, 아니 나중에는 독일이라는 말만 들어도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칼의 생각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어인 2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세월은 저 혼자서만 멋대로 줄달음치고 있었으며,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혼란과 전쟁을 향해 내닫고 있었던 것이다. 12월에는 독일과 이태리가 국제연맹에서 탈퇴해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비극의 서곡에 불과할 뿐이었다. 1938년 3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넘보기 시작했을 때, 오드리와 찰스는 더욱더 충격을 받았다. 오스트리아에 거주하는 독일인이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합병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다시 한번 오스트리아의 수녀원에 가 있다던 우쉬가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었으며, 하르삔에서 처참하게 죽음을 당한 두 명의 수녀가 자꾸만 머리에 아른거렸다. 온 세상이 혼란에 빠져 흔들거리고 있었으며, 그 와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건 오로지 찰스와 오드리 사이의 변함 없는 사랑 뿐이었다. 다시 그 해가 저물어 갈 무렵, 어느새 찰스와 오드리가 함께 살기 시작한 지 3주년을 맞았다. 제임스와 바이올렛은 비록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그들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는 조그만 파티를 마련해 주었다. 밤새 즐겁게 먹고 마신 오드리는 다음날 새벽 4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면서 이제 정말로 더 이상 바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단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찰스의 아기를 갖고 싶은 욕망이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어린 몰리에게 모든 사랑을 쏟아 부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해, 모든 사람들을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움직임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뮌핸 협정이 체결된 후, 유럽은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었지만, 여전히 공포는 근절되지 않고 있었다. 마치 아무도 멈추게 할 수 없는 거대한 괴물처럼 아주 숨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잠시 파묻혀 있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히틀러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스페인에서는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가 버린 시민전쟁이 겨우 그 비극의 막을 내리고 있었다. 전쟁을 알리는 힘찬 북소리가 도처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은 먼저 보해미아와 모라비아(채코슬로바키이이 중부지방)를 점령했으며, 러시아와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어 놓으니 독일과 러시아가 다 같이 엄청난 새력으로 커져 버리고 말았다. 마침내 9월 1일, 히틀러는 전세계의 경악을 조롱하듯 폴랜드 침공을 명령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이틀 후인 9월 3일, 영국은 대독 선전포고를 발표했으며, 처칠이 영국 해군의 제독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2주일이 채 지나기 전에 독일의 보트가 영국 함대를 무참히 부숴 버렸으며, 오드리와 찰스는 시시각각으로 쏟아지는 놀라운 뉴스들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찰스는 오드리를 미국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신중히 검토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 유럽이 자신들의 안식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앞을 다투어 미국으로 돌아가려고 법석을 떨고 있었다. 미국 대사관에서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여권을 발급해 주고 있었고, 찰스 또한 오드리가 원한다면 몰리와 함께 당분간이라도 미국으로 돌려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오드리는 오히려 너무나도 침착하고 힘있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여기가 바로 내 집이에요. 찰스." "농담이 아니야, 오드리.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는 것도 아닌데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를 전쟁터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잖아." "난 당신과 함께 여기 있겠어요." 찰스는 그제사 오드리의 두 손을 굳게 마주잡았다. 그들은 이미 6년 동안이나 서로에 대한 사랑을 태워 온 셈이었다. 서류상의 결혼이야 어찌 됐건, 혹은 친자식이야 있건 없건 그들은 꽤 긴 세월을 서로 마주보며 살아 온 것이다. 오드리는 몰리와 찰스만 곁에 있어 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설사 런던의 하늘 위에 히틀러의 폭격기가 몰려오고 온 도시가 불바다로 변한다 할지라도 오드리는 찰스의 손을 맞잡고 꿋꿋이 서 있을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찰스는 이미 제임스와 마찬가지로 지원병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오드리의 심정을 확인하고는 더할 나위 없이 흐뭇해 했다. 제임스는 조종사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반면, 찰스는 내무성 산하의 정보국 쪽에서 일하고 싶어했다. 저널리스트로서의 그의 경력은 그런 종류의 임무를 수행하기에 완벽한 조건이 될 수 있었던 것이 다. 마침내 바르샤바가 함락된 날, 전 유럽의 화려했던 정신이 암흑의 나락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이틀 후 폴랜드는 마치 굶주린 늑대의 수중에 떨어진 새끼 양처럼 독일과 러시아에 의해 두 조각으로 분할되었다. 바로 그날, 찰스는 그렇게도 손꼽아 기다리던 내무성으로부터의 연락을 받게 되었다. 며칠 내로 그를 소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찰스는 드디어 자신도 무언가 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찰스는 그당시 영국이 프랑스를 돕기 위해 파견한 18만 8천 명의 지원병 가운데 자신이 포함되어 있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가 공식적인 종군 특파원이 되어 자유롭게 군기관을 드나들며 임무를 기다릴 수 있게 되기 까지는 2개월이 더 지나야만 했다. 그동안 찰스는 이미 영국 공군에 소속되어 눈부신 활약을 보이고 있는 제임스와 적십자의 운전요원으로 지원한 바이올렛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드디어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무너진지 3개월, 그리고 파리가 함락되기 2주일 전에 내무성으로부터 찰스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날 밤, 전화를 받고 나갔다 들어오는 찰스의 표정에서 오드리는 마침내 무슨 일이 생기고야 말았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었다. "어떻게 되었어요. 찰스?" 오드리가 현관으로 들어서는 찰스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별 것 아냐. 당신은 뭐하고 지냈소?" 오드리는 그날 오후에 현상한 사진들을 찰스에게 보여 주며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약간은 슬픈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언제 듣기 싫은 소식을 말해 줄거예요?" "왜 듣기 싫을 거라고 생각을 했지, 오드리?" 하지만 그것은 불필요한 질문이었다. 찰스 자신도 똑같은 사실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너무나도 흡족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오드리와 헤어지지 않으면 안되는 아픔을 주었던 것이다. "오늘 뉴스 들었소?" 오드리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라디오를 켜기만 하면 쏟아져 나오는 한결같이 암울한 소식들에 지쳐 버린 오드리는 그날은 아예 라디오를 켜지도 않았었다. 또 한가지 그녀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은 전쟁에 대한 미국의 태도였다. 미국은 그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은 자기네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뒷짐을 지고 구경만 하면서 여지껏 참전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드리는 미국의 옷자락이라도 잡아끌어 연합국에 가담시키고 싶었지만, 이제는 차라리 자신이 미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드리는 두려움이 가득한 눈을 들어 찰스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벌어겼나요?" "우린 오늘 오랑에 있는 프랑스 함대를 격침시켰어." "거긴 알제리아 아니예요?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더 이상 우리의 동맹이 아니기 때문이지. 그 함대는 이미 독일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그래서, 우리 쪽에서는 그 군함들을 고스란히 적의 손에 넘겨 줄 수가 없었던 거야. 물론 우리는 그 작전에 반대했지만 결국 그 함대는 물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어." "많은 사람들이 또 죽었겠군요." 오드리는 이제 여기저기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완전히 지쳐 있었다. "한 천명 쯤 되겠지." 찰스와 오드리의 눈이 마주쳤다. "그래서 내무성에서는 내가 그곳으로 가주길 원하고 있어, 오드리." "알제리아로 말이에요?" 오드리는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 짐을 느꼈다. "먼저 오랑 함대의 상황을 보고하고, 그 다음에는 당분간 카이로로 가야 할 것 같아. 이제 이집트에 사건들이 터지기 시작했다는 거야." 6일 전에 뭇솔리니가 이집트 침공을 시사했었고, 따라서 영국에서는 더 많은 특파원을 그곳으로 보내려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찰스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 오드리의 표정을 보자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 오드리." 오드리는 두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을 감추기 위해 등을 돌렸다. 이것이 바로 전쟁에 뛰어드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미국이 그렇게 참전을 거부하는 이유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찰스의 숨결이 바로 등 뒤에서 느껴지더니, 천천히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두 뺨에 따스하게 다가옴을 알 수 있었다.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야." "이것이 바로 당신이 그렇게도 원하던 것이었군요. 찰스." 그 위험한 전쟁 통 속으로 찰스가 뛰어든다는 생각을 하니 오드리는 마음 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금방 아파올 것만 같았다. "언제쯤 돌아올 수 있을까요?" "나도 아직 모르겠어. 그건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가에 달려 있겠지. 하지만 특파원이란 보병처럼 그렇게 위험한 것만은 아니니까 그렇게...." 오드리는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 생길지 당신이 어떻게 짐작할 수 있겠어요? 도대체 가만히 집에 있으면 안되는 이유가 뭐죠?" "집에 앉아서 뜨게질이나 하라는 거야, 오드리? 난 나가서 그런 일을 해야 해. 제임스를 봐. 지난 6개월 동안 독일 전역에 폭탄을 떨어뜨리고도 멀쩡하잖아." "그건 제임스가 운이 좋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가 지금 전사라도 한다면 바이올렛과 아이들은 어떻게 되겠어요?: 오드리는 눈물을 터뜨리며 찰스에게 매달렸다. 그녀가 그런 식의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오드리는 지금 이 순간에 찰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녀 자신도 그 이틀 전에야 비로소 자기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결코 찰스에게 그런 소식을 알려 줄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곧 돌아오겠어, 오드리. 약속할 수 있어. 난 카이로에서 아무런 일 없이 안전하게...." 갑자기 오드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지난번에 카이로에 갔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 봐요." 그녀의 말뜻을 금방 알아차린 찰스도 웃음을 지었다. "두번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찰스는 환하게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그것을 오드리가 자신의 손가락으로 단단히 감아쥐었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잖아. 당신 스스로 자신의 몸을 보살피겠다는 약속도 해 쥐야지. 곧 돌아와서 당신을 내 손으로 보살피겠어." "그러시리라고 믿어요." 그는 오드리가 홀몸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다음날 찰스는 훌쩍 오드리의 곁을 떠나 버렸다. 찰스는 떠나면서 한 두 달 정도는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이야기를 남겼고, 오드리는 몰리와 자신의 몸을 잘 간수할 뿐 아니라 매일 편지를 쓰겠다고 약속했다. 찰스가 뗘나고 난 후, 오드리는 텅빈 거실에 홀로 앉아 뱃속에 든 새로운 아기를 생각해 보고 있었다. 오드리는 그가 떠나기 전에 아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어야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역시 그건 그리 바람직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샤롯트는 임신을 하지 않았으면서도 임신을 했다고 거짓말을 했었는데 자신은 임신을 하고도 말을 못하니 그렇게도 답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공포와 두려움이 엄청난 무게로 오드리를 짓눌러 오기 시작했다. 만약 찰스가 죽는다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공포가 새삼스럽게 밀려오는 것이었다. 오드리는 그날 밤, 바이올렛의 집으로 가서 그녀와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겨우 조금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이들이 모두 이층에서 놀고 있는 동안 오드리는 바이올렛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그걸 참아냈어요. 바이올렛?" 그때까지도 오드리의 눈속에는 근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뭘?" 바이올렛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오드리에게 되물었다. "공습이요? 난 사람들이 모두 그런 일에는 익숙해져 있는 줄 알았는데....." 아이들은 확실히 금방 공습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밖에서는 마구 폭탄이 떨어지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방공호 속에서 서로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아이들이 그런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은 가장 커다란 불행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드리는 그런 바이올렛의 대답에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공습이 아니라... 걱정 말이에요. 제임스가 걱정되어 아무 일도 할 수 없지 않아요?" 바이올렛은 이번에는 미소를 짓지 않았다. "왜 걱정이 안 되겠어요. 한 순간도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걸요. 하지만 우리에겐 달리 선택의 길이 없잖아요." 오드리의 눈에 금방 다시 눈물이 맺혔다. 누구에겐가 자신만의 비밀을 털어놓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바이올렛이 따뜻하게 그런 오드리의 어깨를 어루만저 주자, 오드리는 마침내 가슴속에 쌓였던 고민을 털어놓고 말았다. "아, 바이올렛. 난 아기를 가졌어요. 찰스는 아직 그것도 모르고 있단 말이에요. 떠나기 전에 말을 해 줄려고 했는데 괜히 걱정만 끼칠 것 같아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요." 오드리는 흐느끼고 있었다. "만약 찰스에게 ...." "그만 해요!" 바이올렛이 더욱 힘주어 오드리를 껴안았다. 오드리가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은 바이올렛에게 반은 기쁨, 그리고 나머지 반은 걱정으로 와 닿았다. 여자가 임신을 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시기였던 것이다. 더구나 남편마저 전쟁터로 떠나보낸 마당에.... 하지만 바이올렛은 찰스가 얼마나 간절히 자신의 아기를 원하고 있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오드리를 향해 미소를 띄워 줄 수 있었다. ''정말 반가운 소식이네요. 오드리. 이제 더욱더 건강관리 철저히 하고 마음을 편하게 가질려고 노력해야겠어요." 하지만 그들은 둘 다 매일 밤 계속되는 공습을 생각하고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찰스가 떠나기 전에 이야기를 해 줬어야 했던 것 아닐까요?" 바이올렛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 했어요. 오드리. 만약 당신이 그런 이야기를 했더라면 찰스는 걱정 때문에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을 거예요. 나도 제임스가 걱정할 만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걸요. 그래야지 비행기를 조종하는 일에만 온 신경을 기울일 수 있을 테고, 일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올 것 아니예요. 그들의 정신을 흐트러지게 하는 것은 금물이니까요." 바이올렛은 그들이 그렇게 정신이 산만해지는 순간,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끝내는 그대로 삼켜 버리고 말았다. 오드리는 바이올렛에게 모든 것을 다 얘기하고 나니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바이올렛은 오드리가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찰스가 다시 샤롯트에게 강력하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의문이 앞서는 것이었다. 찰스가 떠나기 전에 그런 것을 물어볼 시간이 없었던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바이올렛은 최근에 샤롯트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이올렛은 괜히 그런 이야기를 꺼내 오드리를 당혹스럽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바이올렛과 몰리를 안은 오드리가 막 작별인사를 나누려는 무렵, 또다시 공습을 알리는 사이랜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고, 그러자 바이올렛은 정말로 익숙한 동작으로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방공호로 피신하는 것이었다. 그 공습으로 말미암아 오드리의 가슴속엔 태어날 아기를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겠다는 새로운 각오가 피어올랐다. "당신에게 이야기 하기를 참 잘한 것 같아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두 여인은 사방으로 폭탄이 떨어지는 도시의 조그만 방공호 속에 앉은 채 굳게 두손을 마주 잡았다. 35 그로부터 약 1주일 후, 오드리가 바이올렛을 찾아갔을때 바이올렛은 무척이나 근심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임스가 소속된 영국 공군이 독일 본토를 야간폭격하는 임무를 맡았다는 것이다. 제임스가 그런 위험한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데 자신은 가만히 앉아 천정만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이올렛은 피가 마르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으며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고 있었다. "별 일 없을거예요. 바이올렛. 제임스는 훌륭한 조종사이잖아요." 오드리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바이올렛을 위로했다. "난 제임스 없이는 하루도 못살아요. 오드리." 그 무렵 오드리는 뱃속에 든 아기에게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3월에 찰스가 돌아와서 그런 사실을 알면 얼마나 기뻐할까 하고 생각하니 밤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아직은 임신 2개월 밖에 되지 않아 겉으로는 아무런 표시도 나지 않았지만, 왠지 아랫배가 예전보다 좀더 둥그스름해진 것 같았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금방 피곤해지는 것이 약간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건 임신 때문이라기보다 잠을 자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았다. 거의 매일 밤을 방공호 속에서 보내야 하는 날이 점점 더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사실 오드리의 이웃 가운데서도 집이 파괴되거나 부상을 당하는 경우가 셀 수도 없이 많이 생기고 있었던 것이다. "몸 관리에 좀더 신경을 써야겠어요. 오드리. 찰스가 이런 모습을 본다면 아마 깜짝 놀랄 거예요." "내 꼴이 그렇게도 형편없나요?" 지난 며칠 동안 오드리는 속이 메슥거리는 정도가 훨씬 심해졌으며, 게다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혈색이 좋을리 가 없었다. "무척 피곤해 보여요." 하지만 오드리는 다가올 3월만 생각하면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생각에 오드리는 혼자 미소를 지으며 바이올렛에게 물어 보았다. "애기를 낳을 때의 고통이 정말 그렇게도 심한가요?" "그런 것만도 아니예요. 물론 사람들은 모두들 잔뜩 겁을 먹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에요." 오드리는 바이올렛의 그런 대답이 쉽게 믿어지지는 않았지만, 아기를 가질 수만 있다면야 그런 고통쯤은 충분히 견뎌낼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아직도 아기를 낳으려면 6개월이란 긴 시간이 남아있지 않은가! 잠시 오드리의 머릿속에 링 훼이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애써 그런 생각들을 떨쳐 버리려는 듯 바이올렛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정말로 고통은 순간적인 거예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느덧 일이 끝나서 당신 품에 예쁜 아기가 안겨져 있을 거예요." 오드리는 새 생명의 탄생이라는 비밀을 고이 간직한 채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날 밤 런던 시내에는 사상 최악의 대공습이 감행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며 새벽녁까지 방공호 속에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바로 그 다음날, 바이올렛이 오드리를 찾아왔다. "아무래도 아이들을 어디론가 피난시켜야겠어요. 오드리. 당신 생각은 어때요?" "앞으로 상황이 더 나빠질 것 같아요?" "그거야 알 수 없죠. 하지만 만약에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 일을 어떻게 하겠어요." 이미 수 많은 런던 시민이 목숨을 잃고 있는 상황이었다. 오드리는 찰스가 옆에 있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먼저 생각해 보았다. "지금 당장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바이올렛." 바이올렛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을 멀리 떠나보내기는 싫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바이올렛은 적십자의 자원봉사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시골에서 머무를 수는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오드리도 그런 바이올렛과 함께 무언가 일을 해볼까 생각도 했었으나 아무래도 임신 2개월의 몸으로는 도저히 무리일 것 같았다. 대신에 오드리는 골목 골목을 돌아다니며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를 적나라하게 카메라에 담느라 무척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의 집에 마련해 놓은 암실에는 이미 수백 장의 사진들이 현상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주 안으로 아이들을 피난시키기로 해요." "그럼 우리는 어떡할까요. 오드리?" "난 여기 좀더 있어야겠어요. 벌여 놓은 일들은 마무리를 지어야죠." "좋아요. 내가 시골의 시아버님께 전화를 해 둘 데니까 이번 토요일에 아이들을 데려다 놓기로 해요." "그래요." 토요일이 되자, 마침 제임스가 전쟁 전에 사 둔 커다란 자동차가 있어 그 차에 아이들과 아이들을 돌봐 줄 가정부, 그리고 필요한 짐을 몇가지 싣고 바이올렛이 직접 차를 몰았다. 덜컹대는 시골길을 세시간 쯤 달려가니 놀랍게도 모든 것이 너무나도 평화롭고 아름답게 보이는 제임스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커다란 저택이 나타났다. 오드리는 몰리를 그렇게 안전한 곳으로 데려오길 정말 잘했다고 흐뭇해 하며 곧장 바이올렛과 함께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오는 도중에 갑자기 자동차의 타이어가 펑크나는 바람에 두 여인은 그걸 갈아 끼우느라고 젖먹은 힘까지 다 짜내어야 했다. 물론, 바이올렛은 오드리가 지나치게 무리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지만, 몇 시간에 걸쳐 간신히 타이어를 갈아 끼우고 나서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공습경보가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길거리에 자동차를 세워 두고 가장 가까운 방공호를 향해 달려가는 그들의 머리 위로 마구 폭탄이 떨어졌지만, 용케도 그들은 별 상처 없이 그날 밤 늦게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드리는 완전히 지쳐버린 몸을 이끌고 겨우 침대에 잠시 누웠다가 1시간 39분 후에 다시 울려오는 사이렌 소리에 허겁지겁 방공호 속으로 뛰어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곳은 바이올렛과 오드리가 항상 만나곤 하던 방공호였는데 오드리가 아무리 두리번 거리며 살펴 보아도 바이올렛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머리에 스카프를 뒤집어 쓴 채 제임스의 낡은 코트를 걸치고 한쪽 구석에서 곯아 떨어져 있는 바이올렛을 찾아낼 수 있었다. 피곤에 지친 바이올렛을 깨우고 싶지 않아 조용히 그 옆에 쪼그리고 앉은 오드리는 잠시 후 갑자기 허리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심한 통증을 느끼고는 기겁을 했다. 아까 타이어를 갈아 끼우느라 너무 무리를 해서 그런 것이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리려고 했으나, 새벽녘에 방공호를 나서던 오드리는 이제 다리에까지 번진 통증을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어 걷기조차 힘든 상태가 되어 버렸다. "허리가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오드리는 바이올렛의 집까지 걸어오는 데도 혼신의 힘을 다 기울여야 했다. "언제부터 그랬어요?" "글쎄요. 여기저기 방공호를 쫓아다니다보니 피곤해져서 그런가봐요." 오드리의 얼굴은 완전히 백지장같았다. "들어가서 차나 한 잔 마시고 잠시 쉬어가는 게 어떨까요?" 그것은 모든 문제의 영국식 해결책이었다. 오드리도 도저히 자신의 집까지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기꺼이 바이올렛의 집으로 들어가 서재의 편안한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잠시 휴식을 취해 보았다.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차를 가지고 서재로 돌아온 바이올렛은 살이 훌쭉하게 빠져 버린 오드리를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물었다. "허리는 좀 어때요?" "이젠 괜찮은 것 같아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전혀 괜찮지가 않았다. 여전히 허리가 말도 못하게 쑤셔왔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아랫배 근처까지 통증이 번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오늘 안으로 의사에게 보여야겠어요. 오드리. 정기검진은 얼마나 남았어요?" "몇 주일 더 남았어요." 오드리는 이제 임신 3개월 째로 접어들면서 예전에 입던 스커트의 지퍼 조차 마음대로 올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조금씩 불러오는 자신의 배를 바라보며 오드리는 찰스가 북아프리카에서 돌아올 때 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난 괜찮아요. 바이올렛. 정말예요." 하지만 오드리는 무심코 욕실에서 자신의 속옷을 들여다 보다가 여기저기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바이올렛에게 달려가 물어보았다. "당신도 그런 적이 있었나요?" 바이올렛은 솔직하게 머리를 가로저었지만 누구에게선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긴 했다. "별 일은 없을 거예요. 오드리. 하지만 일단 진찰을 받아보는 것이 좋겠어요." 그들이 단골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의사는 오드리를 데리고 직접 병원으로 와보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오드리를 진찰해 본 의사는 별로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어디 특별히 아픈 곳은 없으신가요. 부인?" "아뇨. 참, 아까부터 허리가 몹시 쑤시기 시작했었어요." "집에서 꼼짝 말고 쉬도록 하세요. 오드리 부인. 물론 공습이 있을 때만 빼고는 절대 침대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됩니다." 오드리는 그러겠노라고 약속을 하고 다시 바이올렛의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는데도 출혈이 계속되었고 다시 그 빌어먹을 놈의 공습 때문에 거의 기다시피하여 방공호를 몇 차례 다녀오고 났더니, 사흘이 지나자 갑자기 아랫배에 엄청난 통증이 되살아나면서 오드리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괜찮아요. 오드리?" 곁에 있던 바이올렛이 깜짝 놀라 달려왔다. "나도 모르겠어요. 나, 난......" 오드리는 말도 제대로 할 수가 없어 담요를 물어 뜯으며 간신히 내뱉었다. "아...바이올렛. 의사를 좀....." "출혈이 심해요?" 바이올렛은 의사의 질문에 대비해 담요를 들춰 보고는 시트에 흥건히 고여 있는 피를 보고 뒤로 까무라칠 정도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별 일 없을 거예요. 오드리. 꼼짝 말고 누워 있어요. 곧 돌아올께." 바이올렛이 다급한 목소리로 병원에 전화를 걸었더니, 즉시 환자를 데리고 오라는 의사의 대답이 떨어졌다. 바이올렛은 고통을 못이겨 울음을 터뜨리고만 오드리를 담요로 감싸서 하인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서둘러 차에 싣고는 전속력으로 병원을 향해 달렸다. 오드리로서는 난생 처음 겪어보는 고통이었다. 자꾸만 몰리를 낳다가 숨을 거둔 링훼이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마치 오드리의 작은 몸뚱이 위로 육중한 기차가 지나가는 것만 같은 고통이었다. 병원에 도착할 쯤에는 오드리는 거의 의식을 잃은 상태였고, 간호원 두 명이 달려나와 황급히 들것으로 오드리를 병원 안으로 옮겨갔다. 의사의 진찰을 받는 동안에도 계속 비명과 신음을 참지 못하는 오드리의 처절한 모습을 바이올렛은 차마 곁에서 지켜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오드리를 대강 살펴본 의사가 나직히 바이올렛에게 속삭였다. "부인은 지금 아이를 사산하고 있는 중이오." "고통을 좀 줄여 줄 수는 없을까요?" "안타깝게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부인. 하지만 통증이 별로 오래 가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오드리의 손을 쥐고 있는 바이올렛에게는 그녀의 고통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보였고, 자그마치 5시간이 지나서야 이미 완전히 아기의 형태를 띤 태아가 오드리의 몸 밖으로 빠져나왔다. 바이올렛은 도저히 눈을 뜨고 지켜 볼 수 없는 그 처절한 광경에 고개를 돌리며, 이제는 고통 때문만은 아닐 오드리의 나지막한 흐느낌 소리를 들었다. 그 후로 바이올렛은 한시도 오드리의 곁을 떠나지 않고 눈물을 흘려가며 그녀를 간호했다. 이틀이 지나서야 간신히 오드리는 바이올렛을 바라볼 수 있었다. "고마와요. 바이올렛. 당신이 아니었더라면 난 아마 죽고 말았을 거예요." "무슨 소리예요. 당신은 정말 초인적인 용기로 그 고통을 이겨낸 거예요." 바이올렛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이며, 오드리의 손을 따스하게 잡았다. "어떡하죠. 오드리, 그렇게도 아기를 원하더니...." 오드리는 말 없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차라리 자신만이라도 살아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정말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 것 같은 생각이 자꾸만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틀림없이 곧 다른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거예요. 한 열 명쯤 말이에요." "무서워요. 바이올렛." 오드리는 이미 숨이 끊어진 태아가 자신의 몸 밖으로 나오는 순간 거의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 처참한 광경을 똑똑히 보고 말았던 것이다. 오드리는 찰스의 따뜻한 품속에 안겨 마음껏 울고 싶었지만 바이올렛이 곁에 있어 주는 것만 해도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바이올렛은 마치 어머니와도 같이 오드리를 극진하게 보살펴 주었던 것이다. 꼭 한 달이 지나서야 오드리는 겨우 혼자서 옷을 입을 수 있을 정도로까지 회복되었다. 그 동안 찰스로부터 몇 번 편지가 오기는 했었지만, 오드리는 그가 보고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도 찰스는 오드리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임스가 잠시 집에 들렸을 때 바이올렛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제임스는 찰스가 없는 동안 오드리를 훌륭하게 보살펴 준 바이올렛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워 보였다. "오드리는 물론이지만 당신도 정말 고생이 많았겠소, 바이올렛." "불쌍한 찰스..." 바이올렛은 찰스가 아무것도 모른 채 떠났다는 이야기를 깜박 잊고 제임스에게 들려주지 않았다. "그렇게도 아이를 갖고 싶어 했는데 말이에요." 바이올렛은 갑자기 아직 오드리에게는 들려주지 않았던 그 이상한 소문이 생각났다. "그런데 말이에요. 제임스. 그녀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떠돌고 있어요." "샤롯트 말야? 드디어 찰스와 이혼하겠데? 진작 그러지 않고서..." "이제서야 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샤롯트는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찰스와의 결혼관계를 유지하려고 그렇게 기를 쓰고 있는 거예요." 제임스가 호기심이 가득 찬 눈으로 되물었다. "그래? 그게 뭔데?" "샤롯트는 레즈비언이래요." "샤롯트가? 누가 그래?" 역시 제임스는 대번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엘리자베드 윌리암 스트롱이라고 이 동네에서 가장 정통한 소식통이에요. 그러지 않아도 처음에는 나도 그 말을 믿지 않았었는데.... 세상에, 내가 직접 봤다니까요. 몇 주일 전에 킬데어 장군의 차를 운전하다가 샤롯트가 어떤 눈부시게 멋있는 청년과 함께 거리를 걷고 있는 것을 보게 된 거예요. 마침 장군이 가게로 들어간 동안 차를 세우고 유심히 그들을 바라 보았는데, 알고 보니 남자가 아니라 여자지 뭐예요?" 바이올렛은 얼굴까지 붉혀 가며 열심히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서로 키스까지 하던 걸요... 그냥 뺨에다 가볍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뜨겁게 키스를 나누더라니까요...." 바이올렛이 말을 마치자 제임스도 제법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다음주에 찰스를 만나서 얘기를... 해 줘야 되나?" "무슨 소리예요. 당연히 해 줘야죠. 샤롯트를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잖아요." 말을 하다 말고 바이올렛이 갑자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당신이 어디서 다음 주에 찰스를 만난다는 거예요? 찰스가 돌아온대요?" 하루 전에 오드리가 받은 편지에도 그런 이야기는 없었던 것이다. "그게 아니라 내가 한 2주일 정도 카이로를 다녀오게 됐어." "위험한 일을 하게 된 것 아니예요?" "그냥 잠시 쉬었다 오는 셈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렇다면. 오드리가 뭐 찰스에게 전할 것이 없는지 물어봐야겠군요." "나의 사랑이나 전해주세요." 오드리는 오히려 너무나 담담하게 그렇게만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찰스를 만나서 멋도 모르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다 말해 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다 마치고 나서야 제임스는 찰스의 두 눈에 가득 고여 있는 눈물을 발견한 것이다. "아니, 자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나? 미안허이. 다 알고 있는 줄 알고...." 제임스는 당연히 오드리가 찰스에게 자신의 임신을 밝혔으리라 생각하고, 그냥 임신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걸로 생각하는 것 보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편이 좋으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왜 오드리가 내게 그런 말을 해 주지 않았을까?" 찰스의 표정에는 처절한 아픔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자네가 걱정할까봐 그랬겠지.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회복되었더군." 제임스는 바이올렛과 똑같은 이야기를 찰스에게 되풀이했다. "틀림없이 다시 다른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걸세." 찰스도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이미 그의 가슴속에는 커다란 상처가 남겨져 있었다. "무척이나 고생을 많이 했겠군." 제임스는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는 찰스를 바라보며 지금부터라도 거짓말을 해야하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러기엔 이미 너무 늦은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제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올렛이 옆에서 지켜 보기에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더군. 하지만 오드리는 정말 잘 견뎌냈어. 지난 주에 내 눈으로 직접 보았을 때도 완전히 회복된 것 같더군. 약간 창백해 보이고 살이 빠지긴 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었네." 하지만 찰스의 얼굴에 드리워진 번민의 그림자는 끝내 가셔지지 않았다. 그는 한 시간 동안에 무려 7잔의 위스키를 안주도 없이 들이켰고, 제임스는 그런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결국 밤이 깊어서야 제임스는 찰스를 들쳐업고 방으로 겨우 데려왔다. 이제 바이올렛에게 들은 샤롯트 얘기를 들려 줄 차례였지만, 그것은 찰스가 정신을 차리고 난 후에도 충분히 얘기해 줄 수 있었다. 어차피 제임스는 카이로에서 2주일 이상 머무를 것이고, 그 동안 런던에 떠돌고 있는 소문들을 찰스에게 들려줄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데니까. 36 제임스는 2주일 후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는 찰스와 오드리가 유산한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오드리 자신의 입으로 그런 사실을 찰스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도록 내버려 둘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임스는 샤롯트의 소문에 대해서는 찰스에게 자신이 들은 그대로 소상하게 털어 놓았고, 그러자 찰스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무척이나 흥분을 하며 당장 달려가 그녀를 혼내 주고 싶어했다. 만약, 이번에도 샤롯트가 이혼에 합의하지 않는다면 그녀의 아버지에게 모든 사실을 알리겠노라고 으름장을 놓을 작정이었다. 찰스는 그런 생각만 해도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카이로에서 돌아온 제임스가 비행기로 되돌아가자 바이올렛은 다시 혼자 남게 되었다. 그 동안 오드리와 바이올렛은 몇 번인가 시골로 아이들을 보러 가곤 했는데, 그들이 마지막으로 시골을 다녀오는 차 속에서 오드리가 바이올렛에게 두꺼운 서류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새로 찍은 사진들인가요?" "아뇨. 그 속에 내 의지가 담겨 있어요." 오드리는 바이올렛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찰스가 돌아올 때까지 만이라도 몰리를 좀 봐주시겠어요? 우리 둘다 잘못 되는 경우가 생기면..." 바이올렛이 오드리의 말에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드리는 그때까지도 아기를 잃어버리고만 사실을 못내 안타까와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거예요." 오드리는 바이올렛에게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놓기로 작정했다. "나를 사진기자로 파견해 달라고 내무성에 신청했었어요. 사실 그건 꽤 오래 되었죠. 그 일이 있고 난 직후였으니까요. 내가 그 사람들 마음에 들었는지, 내일 밤에 떠나라는 연락이 왔어요." 오드리는 바이올렛과 헤어진다는 것이 무척 서운했지만, 그 대신 찰스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오드리를 자꾸만 끌어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카이로로 보내 주겠대요. 내가 북아프리카에서 근무하기를 희망했거든요." "찰스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나요?" 오드리는 싱끗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모르고 있겠죠. 곧 알게 되겠지만 말예요. 난 찰스와 정식으로 함께 일하고 싶어요. 내무성의 그 담당 직원이 우리가 예전부터 함께 일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거든요. 오히려 아주 기발한 착상이라고 생각하는 눈치던 걸요." "다들 미쳤군, 당신은 여자예요.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나 알고 있어요?" 오드리는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매일같이 폭탄이 비오듯 쏟아지는 런던보다는 안전하겠죠." 제임스는 계속 바이올렛에게 시골로 내려가서 아이들과 함께 있으라고 말하곤 했었지만, 이제 오드리마저 떠나 버린다면 정말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미안해요. 바이올렛." 오드리는 마치 자신이 바이올렛을 배신이라도 한 것처럼 진심으로 미안해 했다. "찰스가 없으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 오드리의 커다란 눈망울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고, 바이올렛이 그런 오드리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안았다. "당신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여자예요. 오드리." 하지만 오드리가 얼마나 찰스를 사랑하는지는 누구보다도 바이올렛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바이올렛도 제임스를 그에 못지않게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오드리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생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오드리와 찰스는 일심동체라는 말이 하나도 과장이 아닐 만큼, 이 세상 그 어떤 연인들보다도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을까요?" 오드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군용 비행기를 타게 될 거예요. 당신도 그 사람들이 얼마나 보안에 신경을 곤두세우는지 잘 알잖아요." 바이올렛은 어쩔 수 없이 미소를 머금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었다. 전쟁은 그들 모두의 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바이올렛은 설사 이 전쟁이 끝난다 해도 모두가 옛날처럼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다음날 오후, 모든 준비를 마친 오드리는 텅 빈 집에 열쇠만 채운 채 대문을 나섰다. 그녀는 공항의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짜릿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조그만 기차를 타고 티벳의 산꼭대기를 오를 때, 혹은 상하이나 뻬이징의 거리를 돌아다닐 때 이후로 처음 느끼는 감동이었다. 오드리는 항상 꿈속에서 그려 오던 새로운 세상을 향해, 그리고 이세상 누구보다도 더욱더 사랑하는 한 남자를 찾아, 다시 길을 떠난 것이다. 37 오드리를 태운 더글라스기는 다음날 아침 6시 카이로 공항에 도착했다. 함께 탑승한 군인들이 착륙 준비를 하며 서로 농담을 주고받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를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런던에서부터 줄곧 오드리를 주의깊게 지켜 보고 있던 한 군인이 마침내 말을 걸어왔다. "어디에 머무를 작정이오?" 그 군인은 바지 속에 숨겨진 오드리의 다리가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오드리는 회색 트위드 바지에 스웨터를 입고 있었고, 그 위에 찰스가 입던 낡은 가죽 잠바를 걸쳐 입고 있었다. 게다가 혹시 자갈 밭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긴 부츠까지 신었으니 오드리 스스로도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광스러울 것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던 것이다. 오드리는 그 젊은 군인에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 주었다. "세퍼드 호텔에 묵을 생각이에요." 물론 그곳은 찰스가 머무르고 있는 호텔이었고, 지난번에 카이로를 다녀간 제임스 역시 그 호텔에 머물렀다는 이야기를 들은 곳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가끔 마주칠 기회가 있겠군요." 그 군인이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오드리는 이번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군인의 속셈을 짐작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 순간 오드리의 머릿속에는 이제 잠시 후면 찰스를 만나게 된다는 생각만이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찰스를 만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수천 가지는 될 것 같았지만, 일 단 그를 찾아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마침, 군용 짚차 한 대가 태워다 주겠다며 오드리 앞에 섰다. 오드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그 차를 탔으나 양쪽에 진한 콧수염을 기른 호주인과,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험담을 계속해서 늘어놓는 빨간머리의 남아프리카인이 올라타는 바람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드리는 어차피 여기는 교전 지역이니 빨리 그런 것들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드리는 그래도 이런 상황이 런던에서 매일 밤 방공호에 쪼그려 앉은 채, 아직도 우리집이 무사히 남아 있을까라는 걱정을 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 같았다. "당신은 뭘 하러 여기까지 온거요. 아가씨?" 호주인이 먼저 오드리에게 말을 걸었다. "애인을 만나러 온 거요?" 그는 오드리의 짐과 목에 걸고 있는 두 대의 카메라를 힐끗 쳐다보며 농담을 걸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오드리는 미소를 지으며 천연덕스럽게 그의 짓굿은 농담을 받아 넘겼다. "아니면, 새 애인을 만들어 볼 수도 있단 말이오?" 다시 남아프리카인이 끼어들었다. "나도 그것 때문에 지원을 했다우." 오드리가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내 친구가 여기 와 있어요. 그이는 종군 기자예요." 오드리는 실망한 빚을 감추지 못하는 군인들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양과 염소가 멋대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카이로는 역시 이국적인 향취를 물씬 풍기는 도시였다. 길거리에는 인도인을 비롯하여 뉴질랜드, 호주, 남아프리카, 프랑스,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등등 새계 각지에서 연합군에 가담하기 위해 달려온 군인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갑자기, 7년 전에 찰스와 함께 지구의 절반을 함께 여행하던 추억이 되살아나며, 자기가 어떻게 그동안 샌프란시스코와 런던에서의 생활에 안주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바로 오드리가 꿈에도 못잊어 하던 신비로운 향기와 약속이 가득한 그런 여행이었던 것이다. "내 사진 한장 찍고 싶지 않소?" 두 마리의 낙타가 길 앞을 가로막는 바람에 잠시 차가 멈춘 동안 호주인이 다시 말을 걸었다. "당신은 미국인 같은데?" 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이번에는 남아프리카인이 물었다. "맞아요." "그전에도 집에서 이렇게 멀리까지 와 본 적이 있소?" 오드리는 황당한 질문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난 몇 년 전에 중국에서 1년 동안 산 적도 있고, 지금까지 런던에서 살고 있는 걸요." 남아프리카인은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이 되었으며, 차안에 같이 타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오드리의 그런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지는 모양이었다. "중국 어디서 살았었소?" "만주, 하르삔에서요. 난 일본군 점령하의 그곳에서 고아원을 운영 했었어요." 영국인 운전병조차 오드리의 말에 탄성을 내질렀다. "그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그때, 남편은 뭐라고 하던가요?" 모두가 물어보고 싶어하던 질문을 누군가가 오드리에게 던졌다. "불행하게도 내겐 남편이 없는 걸요." 오드리는 그들을 모두 깜짝 놀래켜 주려고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그런 사람들과 어울려 생활하려면. 미리 그들과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겐 너무나 예쁜 중국인 딸이 있어요." 모두들 예상대로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운전병만은 백 미러로 오드리를 힐끗 훔쳐보며 싱긋이 웃는 것이었다. "하르삔에서 데려온 고아로군요." 오드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그가 덧붙여 물었다. "정말, 장한 일을 했군요. 지금 몇 살이나 됐어요?" "이제 여섯 살이에요." 오드리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직접 찍은 몰리의 사진을 보여 주었더니, 모두들 그 사진을 돌려보며 어쩌면 이렇게도 예쁘냐고 혀를 내두르는 것이었다. 마침내 자동차가 세퍼드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들 모두가 서로에게 친근한 정을 느낄 수가 있게 되었다. 그 군인들과 함께 호텔로 들어선 오드리는 먼저 데스크로 가서 찰스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종업원은 객실의 열쇠들을 체크해 보더니 찰스는 지금 그 호텔 안에 없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잠시 나간 건가요. 아니면 아주 이 호텔을 떠난 건가요?" "아마 오후에는 들어오실 겁니다. 부인." 오드리는 그의 대답에 안심을 하고는 테라스로 나가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름다운 시가지는 각기 다른 군복을 입은 군인들만 아니라면 도저히 전쟁터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낭만적이었다. 중동과 아프리카의 작전 본부가 들어선 카이로는 모든 군사 활동의 중심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저런 상념에 잠겨 찰스를 기다리며 몇 시간 동안이나 테라스에 앉아 있던 오드리는 마침내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졸았을까, 누군가가 거칠게 자신의 팔을 잡아 흔드는 바람에 잠이 깬 오드리는 잠시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지를 잊어버리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어느새 지평선 너머로 뉘엿뉘엿 해가 기울고 있었고, 겨우 정신을 차린 오드리의 눈에 너무나도 낯익은 한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게 누군지를 깨닫는 순간 오드리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니, 찰스. 당신 턱수염을 길렀군요!" 하지만 역시 예상했던 대로 찰스의 두 눈은 반가움 보다는 노여움으로 번득이고 있었다. "도대체 뭘 하러 여기까지 좇아온 거요?" 테라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여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찰스가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우스광스럽기 짝이 없는 옷차림으로 목에는 카메라를 둘러맨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오드리의 모습이었다. 오드리를 발견한 순간, 기쁨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한마디 말도 없이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교전지역으로 찾아온 오드리의 철부지 같은 행동에 분노가 치밀이 오른 것이었다. 찰스는 오드리를 당장 런던으로 다시 되돌려 보내고 싶었다. "난, 당신을 보러 여기까지 찾아 왔어요. 찰스." 오드리는 찰스가 그렇게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고, 또한 그런 그에게 자신의 심정을 이해시킬 자신도 있었다. 찰스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는데 혼자 런던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반갑다는 인사도 하지 않을 건가요?" 오드리는 오히려 그의 화난 모습에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고 해서 간신히 참았다. "턱수염이 무척 멋있네요. 찰스." 찰스는 몸까지 부들부들 떨면서 눈을 부라렸다. "짐을 풀 생각조차 하지마, 오드리! 내일 아침 첫 비행기로 당장 이곳을 떠나란 말야, 도대체 어쩔려고 여기까지 쫓아온 거야?" "내무성 직원에게 난 사진작가고, 당신과 함께 오랫동안 일해 왔다고 말했더니 이곳으로 보내 주던 걸요." 오드리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뭐라구? 그 멍청이 같은 놈들이 그 말에 넘어간 게로군...." 찰스는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까지 벗어 내던지며 법석을 피웠다. "비록, 오늘 밤만 자고 떠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의 만남을 스스로 자축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요?" 오드리가 언제나 찰스의 마음을 사로잡던 그 눈길로 찰스를 바라보자 그는 그만 일그러진 표정으로 털썩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오드리의 옹고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찰스였다. 설사 그녀가 다음날 아침에 틀림없이 떠나겠다고 하더라도, 그건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사실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몰리의 사랑을 가져왔어요." "몰리는 어떻게 지내고 있소?" 찰스의 눈빛은 많이 누그러졌지만 그는 결코 방심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었다. "잘 있어요. 제임스의 아버지의 저택에서 알렉산드라와 제임스 2세와 함께 즐겁게 놀고 있죠." 오드리와 찰스 사이에 처음으로 미소가 오고갔다. 하지만 찰스는 여전히 오드리를 카이로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비록 아기를 유산하고 난 후, 오드리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는 이렇게 그녀를 직접 만나보는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오드리. 당신은 내가 런던을 떠나기 전에 무언가 해 주지 않은 이야기가 있었어, 그렇지?" 오드리의 가슴이 갑자기 두근거렸다. 그런 사실을 발설한 범인이 바로 제임스라는 사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왜, 그런 이야기를 내게 해 주지 않았지?" 금방 오드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당신이 걱정할까봐 그랬죠. 뭐." 미처 다른 이야기를 꺼낼 겨를도 없이 찰스가 와락 오드리를 껴안았고, 오랜만에 찰스의 따뜻한 품에 안긴 오드리는 마음 놓고 눈물을 터뜨릴 수 있었다. "미안해요. 찰스. 모든 것이 다 내 잘못이었어요." 오드리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지만, 찰스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그게 어찌 당신 잘못이겠소, 오드리. 미안한 건 오히려 나야. 하지만 틀림없이 다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거야. 약속할 수 있어." 찰스 자신도 축축하게 눈물 젖은 눈으로 겨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다음번에는 꼭 나에게 먼저 알려 줘야 해." 오드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수건을 꺼내 코를 풀었다. "무척 진통이 심했다면서? 지금은 좀 어때?" 오드리도 차마 그 끔찍했던 고통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젠 멀쩡해요. 바이올렛이 나 때문에 너무너무 고생이 많았죠." "그랬겠지...." 찰스는 부드러운 손길로 오드리의 얼굴을 받쳐들고는 가볍게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미안해, 오드리. 그럴 때 내가 당신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당신이 있었더라도 별 도움을 주지는 못했을 거예요. 그보다도 당신과 몰리마저 곁에 없으니 견딜 수가 있어야죠... 이렇게 달려올 수밖에 없었던 제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오드리의 짐을 들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러다가 방문 앞에 까지 이르자 찰스는 갑자기 오드리를 번쩍 안아 올려 문지방을 넘어서 조심스럽게 그녀를 침대 위에 내려놓는 것이었다. "미래의 파커스코트 부인, 내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찰스가 짓굿은 미소를 머금자, 오드리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물었다. "무슨 새로운 소식이라도 들었었어요? 샤롯트를 만난 것 아니예요?" 찰스가 여전히 미소를 띤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소리! 하지만 제임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더군. 그런 소문 못 들었어?" 오드리는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무척이나 관심을 가질만한 일인데." "뭔데 그래요?" 오드리가 잔뜩 애가 다서 묻자 찰스는 더욱더 입이 크게 벌어지는 것이었다. "그 고상한 숙녀에게 별로 고상치 못한 취미가 있었나 봐. 그녀는 여자를 더 좋아한다더군." "레즈비언이란 말이에요?" "바로 그거야, 샤롯트가 어느 뒷골목에서 어떤 여자와 키스를 하는 장면을 바이올렛이 직접 보았다니 틀림없는 사실이겠지. 왜 그런 이야기를 당신에게 들려주지 않았을까?" "그거야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그건 그렇다 치고 샤롯트가 레즈비언이라니, 정말 놀라운 사실이군요. 그래, 어떻게 하실 작정이에요?" "샤롯트가 다시 한번 이혼을 거절한다면 런던 타임즈에 대문짝만하게 광고를 낼 생각인데, 어때?" 그들은 둘 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웃음을 터뜨렸고, 잠시 후 함께 침대 위에 어우러진 그들은 모든 잡념을 잊을 수 있었다. 샤롯트도, 제임스도, 모든 상념들을 떨쳐 버린 채 재회의 기쁨만을 뜨겁게, 온몸으로 확인하는 절차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38 다음날 아침, 찰스의 표정이 다시 굳어지기 시작했다. 오드리가 카이로에 계속 머무른다고 생각하니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던 것이다. "여긴 고전 지역이야, 오드리. 뭇솔리니가 이집트를 침략하기 시작했다구." 하지만 오드리는 오히려 웃음을 터뜨리며 찰스의 손을 꼭 잡았다. "당신도 이태리 사람들의 성격을 잘 아시잖아요. 아마 이렇게 멀리까지 오려면 몇 년은 걸릴 걸요." 오드리는 정말로 이집트를 떠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도 이태리군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고, 카이로 시내는 도리어 축제라도 맞은 양 들뜬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동안 오드리는 그 지방의 많은 군인들이나 찰스의 동료 기자들과 무척 친해져 있었다. 일이 그렇게 되고 보니 찰스도 더 이상은 오드리의 등을 떠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비리고 말았다. 모든 것이 너무나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어 오드리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몰리를 보러 잠시 영국에 다녀오려는 생각까지 해보았으나, 일단 떠나고 나면 찰스가 다시 돌아오도록 내버려둘 것 같지가 않았고, 바이올렛의 편지에 몰리가 너무너무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도 있고 해서 그냥 계속 카이로에 머무르기로 했던 것이다. 그해 12월, 이태리에 대해서 심각하게 검토해 본 영국군은 그들을 일단 리비아에서 몰아내야겠다고 결정을 내렸으며, 그 결과 1941년 1월21일에 토브룩을 점령했고, 2월 17일에는 이태리로부터 항복을 받아 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당시 그것보다도 훨씬 재미있는 소문이 카이로에 떠돌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태리가 순순히 리비아에서 손을 뗀 것에 불만을 가진 독일이 독일군 병사들을 지휘할 사령관을 특파한다는 것이었다. 토브룩이 함락될 즈음에 이미 그런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었지만, 영국군 최고 사령부에서 조차도 그가 누군인지 모르고 있었다. 이태리가 백기를 내건 이틀 후에 영국군의 지휘관인 와벨 장군이 초대한 저녁 식사에 다녀온 찰스는 어딘지 모르게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장군이 독일군 사령관에 대해서 무슨 얘기 않던가요? 누군지 알아냈대요?" 그때쯤, 카이로에서는 두 사람만 모이면 그런 얘기를 주고 받았던 것이다. "아니, 아직 몰라." 찰스는 옷을 갈아 입으며 애써 오드리의 눈을 피하려 했다. 그가 지금 오드리에게 해 줘야 할 이야기는 며칠 동안 다녀올 곳이 있다는 얘기였고, 그곳이 어딘지는 결코 말해 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드리는 눈치가 너무나도 빠른 여자였다. 어느새 침대 끝에 걸터 앉은 채 찰스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 발등에 뭔가 불똥이 떨어졌어요. 파커스코트 씨. 그게 뭐죠?" "무슨 소리야, 오드리. 피곤해 죽겠으니 오늘 밤엔 그냥 잡시다. 내가 뭔가 알고 있다면 왜 당신에게 얘기해 주지 않겠어?" 찰스는 애써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먼저 침대 속에 들어가 등을 돌리고 드러누웠다. 하지만 오드리는 그날 따라 유난히 몸이 달아, 계속해서 돌아누운 찰스를 집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찰스는 오드리에게 뭐라고 얘기를 해야 하나 하는 걱정에 사로잡혀 전혀 아무런 충동도 느낄 수가 없었다. "오늘 밤엔 무척이나 냉냉하네요. 찰스." 오드리가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자 마침내 찰스는 돌아 눕고 말았다. "잠 좀 잡시다. 오드리." 찰스는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나가야 했지만, 지금은 오드리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 줄 기분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난 당신이 내게 숨기고 있는 것을 알고 싶어요. 오늘 밤에 어떤 여자와 사랑에 빠지기라도 했나요?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찰스?" 오드리는 팔꿈치를 세워 머리를 받치고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당신은 스파이 노릇하긴 틀렸어요. 거짓말을 하면 금방 눈치 챌 수가 있거든요."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해, 오드리." 하지만 찰스는 그녀의 말에 오싹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난 당신에게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 없어." "그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니예요. 하지만 당신은 거짓말을 할 때는 코끝이 하얗게 되는 걸요. 피노키오의 코가 길어지는 것과 같은 원리죠." 찰스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더 이상 오드리에게는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음을 깨달았다. 얘기를 해 주지 않으면 밤새도록 한 잠도 못자게 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마타하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난 며칠 동안 다녀올 곳이 있소. 하지만 그곳이 어딘지는 말해 줄 수가 없어. 그러니 더 이상 묻지 말아 줘. " "찰스!" 오드리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벌떡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 "그렇다면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이 사실이잖아요." 찰스는 이제 완전히 지쳐 버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거짓말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그게 무슨 소리였죠?" "말했잖아, 오드리. 밝힐 수 없다고 말야. 그건 일급 비밀이야." 일급 비밀이란 말에 오드리는 잠시 멈칫거렸다. "위험한 일인가요?" "아냐." 찰스는 오드리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왜 말할 수 없다는 거죠?" "와벨 장군과 잠시 여행을 다녀오는 것 뿐이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더 이상은 말할 수가 없어." "그게 전부인가요?" "오드리...... 더 이상은 말할 수가 없어. 이건 남자들 사이의 명예가 걸린 일이라구." 찰스는 오드리의 입을 막기 위해 키스를 퍼부으며 맹렬하게 돌진해 들어갔다. 한동안의 정열적인 육체의 향연이 끝나고 나자, 역시 오드리는 졸린 듯이 눈을 부비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며칠이나 걸릴 것 같아요?" "이 삼일이면 돼. 아무에게도 이런 얘기하면 안돼." 찰스는 금방 잠이 들어 버린 오드리를 만족한 듯이 바라보았다. 역시 자신은 오드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무능한 스파이는 아닌 것 같았다. 단지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 주기만 기도할 따름이었다. 39 다음날 아침, 찰스가 옷을 갈아입고 있는 동안 커피를 마시며 카메라에 필름을 넣고 있던 오드리는 얼핏 찰스의 서랍을 들여다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 여권이 왜 저기에 들어 있는 거죠?" 오드리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서 항상 여권을 카메라 가방 속에 넣어 다니고 있었다. 미국이 그때까지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오드리는 엄연한 중립국 국민이었고, 그것 때문에 덕을 보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었던 것이다. 오드리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서랍을 향해 몇 발짝 다가섰으나, 찰스가 재빨리 달려와 그녀를 가로막고는 차를 한 잔 더 갖다 달라고 말을 돌리는 것이었다. "저건 내 여권 아니예요?" 찰스는 오드리를 카이로에 머무르게 내버려 두었던 자신을 저주했다. 오드리는 정말 너무나 눈치가 빠른 것이 탈이었다. 찰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냐, 오드리." "그럼, 누구 거죠?"오드리는 비로소 사태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갑자기 찰스가 내무성의 정보국 소속이라는 사실이 커다랗게 부각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전히 오드리를 바라보고 있던 찰스는 이 세상 아무도 믿을 수 없다 하더라도 오드리만은 믿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드리가 한마디라도 잘못 이야기하게 되면 자신의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찰스는 오드리를 신뢰하는 것이 그다지 커다란 잘못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건 내 여권이야." 오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건 생각도 못했어요. 이름도 가명인가요?" 오드리는 찰스가 영국의 첩보활동에 얼마나 깊숙이 관련되어 있는지 궁금해졌다. 찰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어머니가 미국인이었기 때문에 쉽게 이 여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지." 단지 그가 몇 차례 출입국 절차를 거쳤다는 기록만 위조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것만으로 찰스는 세게 각지를 돌아다니는 미국인 저널리스트가 될 수 있었고, 더우기 그는 오드리도 깜짝 놀랄 만큼 능숙하게 미국식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 일은 꽤 중요한 것인가 보죠?" 찰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따라가도 되나요?" "아니, 절대로 그럴 수는 없어." "그럼, 어디로 가게 되는지는 물어봐도 되나요?" 거기서 찰스는 첫번째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트리폴리." 오드리는 대번에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만 것이다. "세상에, 바로 그 일이었군요..." 찰스는 독일군 사령관이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임무를 맡아 미국인 신문기자로 행세할 참이었다. 일이 끝나고 나면 돌아와 와벨 장군에게 보고를 올려야 했다. "찰스, 당신은 나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안 돼요!" 오드리가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듯이 소리쳤다. "사진을 찍어야 할 것 아니예요." 찰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사진은 나도 찍을 수 있어. 오드리, 당신은 아무데도 못 가." "당신이 데려가지 않는다면 혼자서라도 가겠어요." "당신 미쳤어?" "우리가 가짜라는 걸 누가 알 수 있겠어요? 당신이 사진사, 그것도 여자 사진사를 데리고 다닌다면 훨씬 의심을 적게 받을 수도 있을 거예요. 아무도 당신을 의심하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 "도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이게 무슨 사진 경연 대회에나 나가는 일인줄 알아? 이건 목숨이 열 개 있어도 모자랄, 엄청난 위험이 따르는 일이라구! 난 사이드 항구에서 조그만 고깃배를 타고 트리폴리로 숨어 들어가야해. 이태리 병사의 눈에 띄기만 하면 우린 순식간에 벌집이 되고 말아." 오드리는 눈물이 글썽글썽 해져서 찰스의 품에 안겼다. "날 여기 혼자 내버려두지 말아요. 당신 없이는 난 단 한 순간도 살 수가 없어요. 찰스, 그게 내 운명인 걸요. 제발 혼자 떠나지 말아요." 찰스는 찢어질 듯이 아파오는 심정을 겨우 억누르며 오드리를 바라 보았다. "난 당신을 그런 위험 속으로 데려갈 순 없어!" 말할 것도 없이 그만큼 오드리를 사랑하기 때문이었지만,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든 오드리는 정말로 화가 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예요. 지난 7월, 나는 이 세상 어디에서라도 당신과 함께 있으리라고 결심했어요. 물론 그 결심은 지금도 변함이 없구요. 당신이 나를 데리고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국은 트리폴리에서 나를 만나게 되고 말 거예요. 짚차를 하나 구해서 손수 운전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에요." 갑자기 찰스는 정말로 오드리가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여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찰스는 오드리의 팔을 움켜 쥐고 거칠게 흔들어댔다. "제발 정신 좀 차려, 오드리. 여기서 그냥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야." 다시 한번 고집스럽게 오드리가 고개를 가로젓자, 찰스도 마침내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정말 못 당하겠군. 하지만 그 대신 당신의 일거일동에 당신 목숨 뿐만 아니라 내 목숨까지 달려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단 한 순간도 긴장을 풀어서는 안돼." "물론이죠. 약속하겠어요." 비로소 오드리는 활짝 웃는 얼굴이 되어 자신있게 대답했고, 찰스도 하는 수 없이 미소를 지었다. 40 카이로에서 자동차로 3시간 남짓 달렸을 때에야 비로소 사이드 항구가 나타났고, 약속대로 고깃배 한 척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찰스는 오드리에게 USA라는 표시가 있으면 무엇이라도 좋으니 겉옷에 달라고 지시를 했다. 베이다, 뱅가지, 알 아길라를 거쳐 트리폴리로 접근해 가는 동안 오드리는 배멀미로 큰 애를 먹어야 했다. 하지만 트리폴리 항구로 그들이 탄 배가 미끄러져 들어가자 주위는 온통 이태리와 독일의 군함들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곳곳에서 적군의 제복이 눈에 띄는 바람에 오드리는 배멀미 따위를 할 여유조차 없어졌다. 이제 가짜 여권을 가지고 적진의 한 가운데로 뛰어든 셈이었으며, 아차 하는 순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그런 급박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들을 트리폴리에 내려 준 고깃배는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가 버렸다. 돌아올 때는 알아서 재주껏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오드리는 제발 육로를 통해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찰스를 따라 복잡한 항구를 빠져나왔다. 어렵지 않게 택시를 잡아 타고 미네르바 호텔까지 간 그들은 방을 두개 잡아 놓고 바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들은 잠시 나지막한 목소리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오드리가 찰스를 걱정스레 올려다 보며 조용히 물었다. "곧 우리가 원하는 정보를 들을 수 있을 거야. 여기서는 모든 사람들이 그 일에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오드리도 찰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그렇게 빨리 정보를 알아낼 수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다음날, 그 빠에서 어떤 이태리 사람 둘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찰스와 오드리가 도착한 바로 그날 밤에 독일군 사령관도 그곳에 도착해서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호텔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태리 사람들도 사령관의 이름은 모르고 있었지만,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거물이라며 오드리와 찰스를 향해 웃음을 지어보이는 것이었다. "영국 친구들, 이제 혼줄 깨나 나게 생겼어!" 찰스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곳을 빠져 나왔다. 하지만 찰스는 여전히 그 장군의 이름은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이제 그것을 알아내야 할 차례였다. 찰스와 오드리는 과감하게 그 장군이 머물고 있다는 호텔의 빠로 들어가 보았다. 그곳에는 이태리군과 독일군이 서로 어울려 활기차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찰스는 자리를 잡고 앉아 술을 주문하며 오드리에게도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두 명의 독일 병사가 오드리를 보고 음흉스런 미소를 던졌을 뿐 아무도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진땀을 느끼며 찰스와 오드리가 한 시간 남짓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으려니까 갑자기 수십 명의 독일군 장교가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그들의 한 가운데에는 유난히 단단해 보이는 체구에 파란 눈을 가진 장교가 한 사람 섞여 있었는데, 군인다운 절도 있는 동작으로 마치 부하들을 사열하듯 빠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찬찬히 둘러보는 것이었다. 그가 바로 새로 부임해 온 문제의 사령관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군화 소리를 철컥거려 가며 부관들이 그를 빠 안의 사람들에게 소개하자 이태리 병사들까지도 깜짝 놀라는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오드리가 보기에 그는 오만불손한 장군님이라기 보다는 제법 이지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오드리는 그를 바라보면서 옆에 앉은 찰스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가 마침내 재빠른 발걸음으로 빠에서 나가 버리자, 오드리는 조심스럽게 찰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누군지 알겠어요?" 오드리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어보자 찰스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찰스는 그 사령관의 얼굴이 아주 낯이 익은 것 같아, 어디서 사진이라도 본 것이 아닌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별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야겠어. 여기선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말이야." 역시 찰스는 자신읕 공공연히 비웃는 듯한 말투의 한 젊은 독일군 장교를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미국인이로군! 독일에서 제일 위대한 장군의 이름을 여태 모르고 있다니!" 그 장교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설레실레 흔들어 가며 자신있게 말하는 것이었다. "롬멜 장군이지 누구겠소!" 찰스의 임무는 성공적으로 끝난 셈이었다. 오드리조차 환호성을 내지르며 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간신히 감정을 억누르고 서둘러 자기네 호텔로 돌아왔다. 그들은 저녁을 먹자마자 곧장 카이로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건 정말 누워서 떡 먹는 것보다 더 쉬울 듯했다. 하지만 오드리는 사령관의 이름만 알아낸 것 가지고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를 직접 인터뷰해 보는 것이 어떻겠어요?" 저녁을 먹고나서 오드리가 다시 엉뚱한 제안을 하자 찰스는 깜짝 놀라 펄쩍 뛰는 것이었다. "미쳤어? 들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뭘 들켜요? 우린 미국인이에요. 당신은 기자고 난 사진작가란 말이에요. 가서 시치미 딱 떼고 물어보는 거예요. 좋은 생각이지 않아요?" 오드리의 눈은 희망에 부풀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오드리는 그녀 특유의 모험 정신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찰스는 생각만 해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오드리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고, 잘만 하면 엄청난 수확을 거둘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은 그날 밤, 커피를 마시며 롬멜을 인터뷰할 계획을 세워 보았다. 다음날이 되자 찰스와 오드리는 계획대로 롬멜이 투숙하고 있는 호텔을 찾아가 두근거리는 심장을 겨우 억누르고 롬멜과의 면담을 요청하는 메모를 호텔 카운터에 전해 주었다. 롬멜의 손에까지 그 쪽지가 들어 가려면 몇몇 부관들의 손을 거쳐야 하겠지만, 어차피 거기에는 트리폴리에와 있는 두 명의 미국인 기자인데, 롬멜 장군을 만날 수만 있다면 또다시 그런 영광이 없겠다는 이야기 밖에는 씌여 있지 않았다. 그 쪽지를 전해 받은 사람은 4시 쯤에 다시 한번 와 보라는 말 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들이 그 시간에 다시 찾아갔더니 이번에는 파란 눈의 젊은 독일군 장교 한 사람이 그들을 찬찬히 살펴보며, 혹시 전에 롬멜 장군을 만난 적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아뇨, 없어요." 오드리가 태연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어요. 우린 미국의 몇 개 신문사와 잡지사에 기사를 기고하고 있는데, 아프리카 군단의 새로운 사령관을 미국에 소개 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대단한 선풍을 불러 일으킬 거예요." 오드리가 다시 한번 애교스럽게 웃어 주자 그 독일 장교는 별 멍청한 여자도 다있군, 하는 표정이 되었다. "내일 아침 10시에 가부를 알려 주겠소, 아가씨." 그러자 찰스와 오드리는 여전히 태연스럽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그 호텔을 빠져나왔다. "우리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오드리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찰스에게 물었다. "글쎄, 별로 그런 것 같진 않은 걸." 그들은 나직이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호텔로 돌아왔다. 찰스는 계속해서 롬멜을 직접 인터뷰 하겠다는 생각이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밤에는 뭘 하고 싶어?" 찰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오드리에게 물었다. "기도나 해야죠." 그들은 함께 저녁을 먹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드디어 다음날 아침이 되자 그들은 정각 10시를 기다려 다시 롬멜의 호텔로 가 보았다. 데스크에 앉아 있던 어제의 그 부관이 호텔로 들어서는 찰스와 오드리를 여전히 조심스럽게 보더니, 찰스에게 봉투에 넣어진 편지 한 장을 건네주는 것이었다. 찰스가 그 편지를 뜯어보니, 타이프로 그 호텔 이름과 <13:00> 이라는 글만 간단히 찍혀 있었다. "맙소사, 우린 드디어 해냈어!" 찰스는 애써 흥분을 감추며 오드리와 함께 비록 조금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빠로 들어가 맥주 두 잔을 시키고 편지를 오드리에게 보여주었다. "1시까지 뭘 해야 돼죠?" 오드리는 결혼식을 앞둔 새 신부처럼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찰스는 인터뷰 때 쓸 노트를 이미 준비해 놓았었고 오드리는 항상 카메라를 가지고 다녔으니 특별히 준비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남은 세 시간 동안 이리저리 거리를 쏘다니며 롬멜에게 질문 할 내용들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롬멜을 직접 만나게 되는 그 순간까지 아무런 질문도 준비되어 있지를 못했다. 롬멜이 작전 본부로 사용하고 있던 방은 약간은 사치스럽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고, 가까이서 본 롬멜의 외모는 첫눈에 보기에도 무척 주요한 인물이라는 냄새를 풍길 만큼 인상적이었다. 롬멜은 불타는 듯한 파란 눈을 가졌으며, 뜻밖에도 정겹기 그지없는 따스한 미소로 찰스와 오드리를 맞아주었다.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미국 대통령을 칭찬하는 이야기를 늘어 놓으며 전쟁이 나기 전에 자신도 직접 미국에 가본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오드리가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한 수수한 여자의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는 시늉을 하자 롬멜이 금방 알아채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내 아내, 루시요." 그의 그 짧은 대답 속에서도 그가 무척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리저리 하여 가짜 미국인 기자와 롬멜 장군 사이의 대화는 순조롭게 풀려 나갔다. 오드리조차 롬멜이 얼마나 상대하기 쉬운 사람인가를 알고는 의아해 했다. 롬멜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전쟁 전의 독일과, 위대한 총통 각하에 대해서 차분히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 찰스는 재빠르게 그의 이야기들을 메모해 나갔다. 롬멜은 아프리카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으며, 자신의 아프리카 사단이 곧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게 될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롬멜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오드리의 카메라를 집어드는 것이었다. 오드리는 혹시 그가 자신의 카메라에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이 아닌가 하고 잔뜩 긴장했지만, 롬멜의 대답은 터무니없이 싱거운 것이었다. "내 것과 똑 같은걸, 렌즈만 조금 다를 뿐인데." 하며 롬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카메라를 한번 보시겠소?" 오드리는 정말 자기 것과 똑같은 롬멜의 카메라를 들여다 보며 사진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롬멜도 사진찍기를 무척 좋아한다는 것을 그 대화 결과 금방 알 수 있었다. 롬멜은 사진을 몇 장 찍고 싶다는 오드리의 제의도 선선히 받아들여 주었다. 장장 두 시간에 걸친 인터뷰가 끝날 즈음이 되자 롬멜은 찰스와 오드리의 손을 따스하게 잡아주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머지않아 아프리카로부터 좋은 소식을 듣게 될거요." "틀림없이 그렇게 되길 빌겠어요." 오드리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자기도 모르게 그런 대답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롬멜은 그들의 적이었고, 결국 칼 로젠을 죽인 장본인인 것이었다. 호텔로 돌아온 오드리와 찰스는 완벽한 성공을 스스로 자축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런 말을하긴 싫었지만, 어쩐지 그가 마음에 들더군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어." 찰스도 롬멜이 그렇게 솔직담백한 사람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비록 아프리카 사단에 대한 계획을 직접적으로 얘기해 주진 않았지만, 롬멜은 무척 성실한 자세로 그들의 질문에 답해 주었었고, 그 인터뷰만을 놓고 생각한다면 결코 롬멜이란 인간을 미워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롬멜은 자신의 아내와 군대와 그리고 카메라에 커다란 애착을 가지고 있었고, 찰스는 심지어 영국군이 그런 그를 당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잠시 후, 찰스와 오드리는 짐을 챙기고 숙박료를 지불한 다음 곧장 항구로 나갔다. 육로로 카이로까지 돌아가는 것은 역시 너무나 위험한 일이라고 판단한 찰스는 그들이 타고 온 것과 같은 조그만 보트를 빌어 볼 생각이었다. 비록 엄청난 보수를 치뤄야 하긴 했지만, 그다지 어렵지 않게 알렉산드리아까지 그들을 태워 주겠다는 보트를 찾아 낼 수 있었다. 찰스는 혹시 롬멜이 그들에게 미행을 붙이지나 않았을까 약간 걱정이 되긴 했지만, 설사 그랬다 치더라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뉴스를 취재하는 미국 기자가 이집트로 간다고 해서 그리 크게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오히려 롬멜은 오드리처럼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이렇게 멀리까지, 특히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지역까지 온 것에 대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던 것이다. 오드리는 롬멜이 적군의 사령관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만큼, 그의 진솔한 태도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롬멜은 직접 선두에 나서서 병사들을 독려하는 그런 타입의 사령관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롬멜이 수 천대의 탱크를 북아프리카에 집결시킬 거라는 이야기를 주고 받기도 했었다. 찰스와 오드리가 알랙산드리아까지 돌아오는 데는 꼬박 사흘이 걸렸고, 거기서부터는 아군의 군용 짚차를 빌어다고 카이로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마침내 그들이 세퍼드 호텔로 돌아왔을 때 오드리는 찰스의 목을 껴안고 기쁨에 넘쳐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해냈어요! 해냈단 말예요." 그들은 간단히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곧장 와벨 장군을 만나러 갔다. 모든 것이 참말이지 꿈만 같았다. 그들 자신도 롬멜과 직접 인터뷰를 하고 왔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와벨 장군이 매일 오후 골프를 즐기던 스포츠 클럽을 향해 차를 몰았다. 와벨은 처음에는 반갑게 뛰어나와 찰스를 맞았지만, 찰스가 오드리를 소개하며 트리폴리까지 함께 다녀왔다고 하자 금방 안색이 시뻘겋게 변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오드리가 재빨리 두 통의 필름을 와벨에게 건네주며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아마 이것들을 보시고 나면 마음이 변하실 거예요. 장군님." 와벨은 잠시 오드리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찰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네에게 같이 일하는 동지가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찰스는 '저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라는 이야기가 나올 뻔 했으나 간신히 도로 삼켜 버렸다. 어쨌든 와벨은 그들을 데리고 집무실로 들어가서는 안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다시 한번 찰스의 경솔한 행동을 나무라는 것이었다. "살아나올 수 있었다니 정말 운이 좋았군." 아주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였다. "정보를 얻어냈습니다. 장군님." 찰스가 자신 있게 말을 꺼내자 잠시 동안 방안에 칼로 북 잡아찢을 수도 있을 듯한 침묵이 흘렀다. "누구던가?" "롬멜 장군이었습니다." 와벨의 얼굴에 천천히, 아주 천천히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래? 자네가 직접 보았나? 롬멜이 틀림없던가?" 오드리는 딴전을 피우면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 장군님." 찰스도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여전히 자신 있게 대답했다. "우린 롬멜과 인터뷰까지 했습니다. 장군님." "뭘 했다구?" 와벨의 얼굴이 이번에는 하얗게 변하는 듯 하더니 빨리 이야기를 해보라고 법석을 떠는 것이었다. "그건 사실 여기 드리스콜 양의 발상이었습니다. 우린 미국인 기자로 가장하고 롬멜이 묵고 있는 호텔에서 직접 그와 인터뷰를 한 것입니다." 와벨은 그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오드리가 건네 준 필름을 소중하게 집어드는 것이었다. 마치 그것이 날아가 버릴까 걱정스럽다는 듯이... "그래서 바로 이 필름이 롬멜을 찍은 사진이란 말인가?" 와벨은 자기 앞에 서 있는 황당하리만큼 용감한 두 사람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찰스는 만족스러운 듯 오드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사실 그 사진도 드리스콜 양이 찍은 것이죠." "롬멜과의 인터뷰 내용을 메모해 두었나?" "물론입니다. 장군님." 와벨 장군은 잠시 넋을 잃고 그들을 바라보더니, 먼저 찰스의 손을, 그 다음에는 오드리의 손을 힘차게 잡아 흔들며 말하는 것이었다. "자네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로구먼." 그러면서 와벨은,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오드리와 함께 자신의 집무실로 와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것이었다. 찰스가 미리 롬멜의 구체적인 계획에 대해서는 입수한 정보가 없음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와벨은 롬멜이 지껄인 말 가운데 단 한 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아했다. 당장 그날 밤에 사진부터 뽑아 볼 작정이었다. 와벨은 골프 클럽을 황급히 빠져 나가면서 다시 한번 찰스와 오드리의 손을 잡아주며 술이라도 한 잔 같이 하자고 제의했으나 그들은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호텔로 돌아와 테라스의 흔들 의자에 앉아서 친구들과 함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시시껄렁한 농담들을 주고 받았다. 41 영국군은 롬멜이 다시 트리폴리의 군대를 재편성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의 아프리카 사단이 언제든지 출전할 수 있는 채비를 갖춘 것이다. 롬멜은 비록 적군의 사령관이기는 했지만 영국군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 뛰어난 지략과 통솔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오드리가 찍은 롬멜의 사진은 이미 영국군들 사이에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독일군 최고사령관의 모습을 그렇게 생생하게 담은 사진은 일찌기 찾아볼 수 없었기 대문이었다. 와벨 장군기 오드리에게 이렇게 농담을 던질 정도였다. "그 사진을 롬멜의 마누라에게 보내 주지 못하는 게 유감이야.. 사진이 그렇게 잘 나왔는데 말야...." 트리폴리에서 병력을 재 정비한 지 12일 만에 롬멜은 자신의 탱크 부대를 이끌고 알-아길라로 진격하기 시작했고, 영국은 북동쪽으로 무려 30마일을 퇴각해야만 했다. 그 승리를 기점으로 번개 같은 기습작전을 구사하는 롬멜은 연전연승을 거두며 4월 10일에는 마침내 토브룩 탈환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도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토브룩만은 사수해야 한다며 악착같이 버티기 시작한 것이다. 카이로에서 그런 소식을 듣고 있던 찰스와 오드리는 아무래도 롬멜의 우세를 점치지 않을 수 없었다. 롬멜은 다른 지휘관들과는 달리 직접 자신의 탱크에 올라 병사들의 최선두에서 그들을 독전하는 장군이었고, 한 번의 전투가 끝나면 곧장 자신의 비행기를 타고 직접 온 지역을 정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롬멜과의 전투는 적어도 몇 달 정도 계속될 것 같았고, 그동안에 찰스도 와벨 장군의 명령을 받고 한참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토브룩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때, 찰스는 토브룩을 사수하려는 영국군과 그곳을 빼앗으려는 롬멜 휘하의 독일인 사이에 엄청난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서로 교환되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날씨까지 전세에 커다란 악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따뜻한 겨울철이 지나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진흙 속에 파묻힌 탱크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으며, 그런 우기가 끝나고 건기가 시작되자 눈도 뜰 수 없을 정도의 모래폭풍이 불어 닥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병사들이 쓰고 있던 철모는 물론, 약간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자면 군용 트럭까지도 날려 버릴 듯한 엄청난 위력의 폭풍이 쉴 새 없이 몰아쳤다. 한 번 길을 잃고 사막에 버려진 병사들이 목숨을 건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왔다. 사실 4월 초에는 6명의 영국 장교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독일군 막사로 기어들어가는 바람에 고스란히 포로가 되어 버린 사례까지 생기곤 했다. 롬멜과 그의 아프리카 사단이 알랙산드리아 외곽 60마일까지 접근했을 무렵, 찰스는 그 지긋지긋한 토브룩을 떠나 간신히 카이로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여전히 세퍼드 호텔의 테라스에 앉아 이제나 저제나 찰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오드리는, 구레나룻을 길게 기른 찰스가 불쑥 눈앞에 나타나자 넘치는 기쁨을 참을 길이 없어 정신없이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내가 없는 동안 뭘하며 지냈어, 오드리?" "당신을 기다렸죠." 오드리는 기쁨에 겨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얼마나 걱정했다구요." ''나는 불사신이야, 오드리. 무적의 영국함대처럼 말야." 하지만, 그 당시에 '무적의 영국함대'는 독일의 U보트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있었다. 억센 팔로 오드리를 휘감아 안고 자신의 객실로 올라간 찰스는 그날 밤, 두번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영국은 1941년 6월, 대반격을 시작했지만, 와벨 장군의 작전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 버렸다. 영국은 그 책임을 물어 와벨 장군을 소환하고 대신 커닝헴 장군을 북아프리카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풍지박산이 되어 버린 병력을 재정비하여 다시 롬멜과 맞설 정도의 힘을 기르는 데는 무려 4개월이라는 기간을 소비해야 했다. 드디어 11월 18일, 포트 마달레나에서 롬멜과 마주친 커닝헴 장군은 역시 단 1주일 만에 와벨 장군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자 영국은 즉시 커닝햄마저 소환시켜 버렸고, 롬멜은 다시 토브룩을 완전히 포위해 이번만은 기필코 성공한다는 집념으로 총공세를 시작했다. 그러자 찰스는 그 중요한 일전을 더 이상 세퍼드 호텔의 테라스에 앉아서 보고할 수는 없음을 깨닫고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기 위해 서둘러 짐을 꾸렸다. "당신 혹시 다시 토브룩으로 들어가시려는 것 아니예요?" 오드리의 눈이 두려움으로 일그러졌다. 이미 천명 이상의 병력이 그 전투에서 희생되었던 것이다. "꼭 가야 하나요?" 오드리의 흐느낌이 조용한 방안에 울려 퍼졌다. "가야 해, 오드리. 내가 여기까지 와 있는 이유가 뭔데." "하지만, 지난 봄부터 전투가 계속 되고 있는 토브룩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어요. 게다가 당신은 이미 지난번에 한번 다녀 온 적이 있잖아요?" 찰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당신도 내가 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잖아, 오드리?" "왜, 꼭 당신이 가야 하나요? 여긴 다른 기자도 수백 명이나 우글거리고 있잖아요. 무슨 특별한 첩보 활동도 아닌데 아무나 가면 어때요?" "하지만, 그 아무는 바로 나야." 찰스는 다정스럽게 오드리의 손을 잡아 주며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오드리. 며칠 후면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당신이 포로가 되어 버리면 어떡하죠?" 오드리는 갑자기 겁이 났다. 웬지 이번만은 결코 찰스를 토브룩으로 보내서는 안 된다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를 포로로 잡을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 오드리." 그러나 오드리의 눈엔 어느새 이슬이 맺혀 있었다. 전에도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찰스는 그날 밤 오드리가 잠든 사이에 토브룩을 향해 출발했다. 물론 토브룩까지 들어가기도 힘들었지만, 후방에서 전황을 상세히 보고하기란 더욱 힘들었다. 하지만 찰스는 열심히 정보를 수집하고 또 보고했다. 찰스가 토브룩에 도착한 지 4일째 되는 날이었다. 어떤 부상병에게 수통에 남아 있던 물을 먹여 주려고 등을 돌리는 순간, 찰스는 갑자기 쾅 하는 굉음이 들리면서 자신의 몸이 공중으로 높이 솟구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뒤이어 온몸에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고, 사람들이 뭐라고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으며 찰스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 후로는 모든 것이 그저 캄캄해지면서 이따끔씩 맹렬한 추위를, 다음에는 반대로 엄청난 더위를 느끼며 며칠인가를 혼수상태에서 해매다가 문득 눈을 떠 보니 자신은 어떤 낯선 텐트 속에 누워 있었다. 찰스는 갑자기 토브룩 근방에 유목민이 더러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음을 생각해 내었다. 그는 그들에게 사로잡힌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다. 아니면 최악의 경우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면서 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 뒤로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몇 년의 세월이 흐른 것만 같았다. 어느날 찰스는 비로소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음을 느꼈다. 오드리의 목소리 같기도 했지만, 찰스는 자신의 등과 다리에 엄청난 통증이 있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확실하게 알 수가 없었다. "찰스?....찰스..." 찰스가 온몸의 힘을 모아 간신히 눈을 떠 보니 오드리가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곳은 카이로의 영국 병원이었고, 주위에는 온통 부상병들의 신음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비로소 자신도 그들 가운데 하나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젠 괜찮아요. 찰스. 여긴 안전한 곳...." 찰스가 어느 정도 의식을 회복하고 오드리로부터 그간의 경과를 들을 수 있기까지는 그로부터도 며칠이 더 걸렸다. 찰스는 그 부상병에게 물을 건네 주는 순간 포탄 파편에 맞았던 것이다. "걸을 수 있을까?" 찰스가 병원의 침대 위에 누운 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오드리에게 물었다. "그럼요... 하지만 당분간 앉을 수는 없을 걸요." 오드리가 웃으며 대답하자, 찰스는 비로소 자신이 어디를 다쳤는지를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재미있어 할지도 모르겠지만, 찰스 자신에게는 결코 웃을 일이 아니었다. 그는 엉덩이에 부상을 입었던 것이다. "전투는 어떻게 됐소?" ''우리가 크게 이겼어요. 롬멜은 어제 퇴각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터졌다. 오드리는 진통제 때문에 정신이 몽롱한 찰스가 의식을 차릴 수 있도록 우선 그 사건부터 얘기해 주었다. "일본이 어제 진주만을 폭격했어요." 오드리의 말투가 어찌나 심각한지 찰스는 정신을 집중시키기 위해 애써 보았다. "그게 어디 있는 건데?" "하와이에요." 찰스는 그때까지도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한 사건인지 감을 잡지 못했으나, 오드리가 재빨리 설명을 해주었다. "이제 미국도 이 전쟁에 뛰어든 거예요. 루즈벨트 대통령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거든요. 루즈벨트 대통령은 어제를 일컬어 '치욕의 날'이라고 표현했어요. 하와이는 오드리가 태어난 곳인 만큼 일본의 진주만 폭격은 남다른 의미를 그녀에게 주는 것이었지만, 찰스는 약기운을 못이겨 다시 잠 속으로 빠져 들고 말았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찰스는 제정신으로 돌아와 오드리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럼, 이제 당신도 정식으로 우리 편이 된 셈이군." 오드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받았다. "난 항상 당신네 편이었어요." "당신은 그랬었지. 하지만, 당신 나라 사람들은 그러지를 못했단 말씀이야. 지난 9월에 린드버그가 연설했던 내용을 생각해 봐. 미국은 결코 참전하지 말라구? 이제 자기네 뒷마당에 폭탄이 떨어지니까 루즈벨트도 겨우 정신을 차린 거야." 며칠 후, 찰스의 몸이 비행기를 탈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자 그들은 런던으로 돌아갔다. 찰스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북아프리카에서 머물고 싶어했지만, 이미 크리스마스를 제임스의 시골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보내기로 약속했었고, 그곳의 시골 공기가 자신의 상처 회복에도 도움을 줄 것 같아 마지못해 비행기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비행기에 오르고 보니 찰스는 바이올렛과 제임스, 몰리를 만날 생각에 잔뜩 기분이 부풀었고, 그래서 웃는 얼굴로 오드리를 돌아다 보았다. 그는 그제서야 그녀의 안색이 무척이나 창백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몇 주일 동안이나 문 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자신을 간호했기 때문인지 안티베스에서 검게 탔던 얼굴은 간 곳이 없고 백지장처럼 새하얀 혈색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신 언제부터 안색이 그렇게 됐어?" "내 안색이 어때서요?" 오드리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땠지만, 이제야말로 오랫동안 숨겨 왔던 비밀을 털어 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차피 이제 안전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니 말이다. "무척 창백하군. 어디 아픈 것 아냐?" 오드리는 즐거운 듯 미소를 지었다. "난 멀쩡해요... 그것만 생각하면...." "뭘 생각해?" "임신한지 벌써 석 달째가 되었다는 사실...." "뭐라고? 찰스는 깜짝 놀라 펄쩍 뛸듯이 대들었다. "당신 또 내게 미리 말해 주지 않았어! 그렇다면 지금쯤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할 것 아냐." 찰스도 오드리도 지난번의 유산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이로의 병원에서 진찰을 받아 본 결과, 이번만은 틀림없을 거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어떡하려구 그래?" 그러나 찰스의 충격과 분노는 이미 더할 수 없는 기쁨으로 용해되고 있었다. 찰스는 벌써부터 오드리의 배에다 가만히 한 손을 올려놓고 환히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 놈이 꼼지락거리는 걸 느낄 수 있어?" "왜 놈일 거라고 생각해요?" 먼젓번에 유산된 아기가 아들이긴 했었지만, 오드리는 그런 생각은 떠올리기도 싫었다. "몰리에겐 남동생이 필요하니까 그렇지." 그들은 서로 마주보며 다정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비행기가 런던에 도착하자 그들은 서둘러 밤차를 타고 제임스의 시골집으로 달려갔다. 여느때처럼 바이올렛이 그들을 따뜻하게 반겨 주었고 오드리는 제일 먼저 몰리에게 달려가 그녀를 힘주어 품에 안고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몰리는 찰스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더니 쪼르르 그의 품으로 달려가 안기며 마구 뽀뽀를 해대는 것이었다. 역시 집이란 좋은 곳이었다. 게다가 이미 오드리의 임신까지 알고 있는 찰스로서는 비록 자신의 집은 아니었지만 돌아올 집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렇게도 흐뭇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 42 찰스는 몰리와 바이올렛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기뻤지만, 혼자서 여행을 할 수 있을 만큼 몸이 회복되자, 그는 런던을 다녀오겠다고 나셨다. "런던엔 왜 가요? 할 일도 없으면서." 이미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도 정상적이 아닌 마당에 오드리는 단 한 순간도 찰스와 헤어져 있고 싶지가 않았다. "어디를 가시려고 그래요. 찰스?" "그냥 볼 일이 좀 있다니까. 그것뿐이야." 찰스는 샤롯트를 직접 만나 결판을 내기 전까지는 아무에게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바이올렛, 오드리를 꼼짝도 못하게 가만히 앉혀둬요. 아무것도 시켜서는 안 돼요." "알았어요." 바이올렛은 또다시 불행한 사태가 생기지만 않는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찰스는 오드리의 걱정스러운 눈초리를 뒤로한 채 런던행 기차에 올랐다. 여행 도중 그는 샤롯트를 만나면 어떻게 얘기를 풀어야 하나 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아직도 기차 여행을 하기엔 약간 불편한 몸이었지만, 그럭저럭 참아 낼 수 있었다. 런던에 도착한 찰스는 곧장 택시를 집어타고 샤롯트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목발을 짚은 찰스가 낯익은 사무실로 들어서자 비서실에 앉아 있던 아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샤롯트를 만나고 싶다고 하자 이름을 묻는 것이었다. "남편이 찾아왔다고 전해 주시오." 찰스는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일찌기 샤롯트에게 남편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던 그 비서 아가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얼굴이 시뻘개져서 나온 그녀는 파커스코트 부인이 지금 몹시 바쁘니까 다음에 미리 전화를 하고 오면 대단히 고맙겠다고 말했다. "물론 그러시겠지." 찰스가 빈정대듯이 내뱉고는 서슴없이 샤롯트의 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비서는 완전히 사색이 되어 버렸다. "안 돼요...안....돼.." 그러나 찰스는 이미 방문을 열고 들어서서는 샤롯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찰스?" 샤롯트는 자신의 책상 뒤에 앉아서 그녀 특유의 차가운 눈초리로 먼저 찰스가 짚고 있는 목발을 힐끗 훔쳐 보았다. "다치셨어요?" "당신 덕분에 조금 다쳤지." "난 당신이 다치기를 바란 적이 한 번도 없는 걸요." "글쎄, 과연 그랬을까?" 찰스는 천천히 샤롯트를 향해 다가서서 앞에 놓여 있던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할 얘기가 좀 있어서 왔소." 샤롯트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내뱉었다. "또 그 얘기라면 꺼낼 필요도 없을 걸요. 책 문제라면 또 모르지만 말이에요." "책 이야기를 당신과 할 이유가 없잖아. 난 바로 그 이혼 문제를 얘기하러 온 거야.' "괜히 시간낭비하지 말아요. 찰스. 난 거기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없으니까." "그래?" 찰스가 익살스럽게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당신 친구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텐데? 당신이 유부녀라는 걸 알면 말야?" 샤롯트의 눈꼬리가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친구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죠?"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난 당신이 동성연애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감추기 위해 무척이나 애쓰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찰스가 하도 통쾌해서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는 동안, 샤롯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치 칠면조처럼 얼굴색을 마구 변화시키고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 이제 아예 그 쥐새끼 같은 여자랑 짜구서 그런 식으로 날 모략하려 드는군요?" "천만에." 찰스는 여전히 침착했다.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닌 걸 가지고 왜 그래? 난 당신이 그런 것 쯤은 순순히 시인할 줄 알았는데?" "내 사무실에서 당장 나가!" 샤롯트가 다시 벌떡 일어나서 문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지만 찰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럴 순 없지, 샤롯트. 난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작정이니까." "무슨 근거로?" 이미 샤롯트는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순간을 포착한 찰스는 예전에 샤롯트가 자신에게 한 것보다 훨씬 더 큰 거짓말로 결정타를 먹였다. "불행스럽게도 내겐 너무나 뚜렷한 증거가 있어. 난 지난 한 해 동안 줄곧 당신 뒤를 밟아 다녔거든.... 그 결과는 당신 상상에 맡기겠어." "더러운 놈!" 샤롯트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찰스에게 달려 들었으나, 찰스는 오히려 그녀의 팔을 힘껏 움켜잡아 버렸다. 샤롯트는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으나 찰스는 그런 그녀에게 전혀 미안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샤롯트, 괴로와할 것 없어. 문제는 간단하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이혼 밖에 없어. 지금 당장 말야!" "이유가 뭐죠?" "그건 당신이 신경쓸 바가 아니지. 하지만, 끝내 당신이 협조해 주지 않는다면, 난 기꺼이 내가 수집한 자료들을 당신 아버지에게 보여 줄 수 밖에 없어, 그런 다음엔 물론 런던 시내에 온통 소문을 퍼뜨려야겠지." 갑자기 샤롯트는 바람빠진 풍선처럼 맥없이 의자 위에 주저앉았다. "똥개만도 못한 인간 같으니!" 샤롯트가 최후의 발악인 양 다시 한번 욕을 퍼부었지만, 찰스는 오히려 너무나 담담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목발을 집어들었다. "내 말 알아들었지? 이제 변호사를 불러도 될까?" "생각을 좀 해...." 하지만 샤롯트는 이미 더 이상 생각할 것도 할 말도 없었다. "정 그렇다면 내일 아침까지 시간을 주지. 그때까지 결판이 나지 않으면... 하는 수 없지. 당신 아버지를 만나 보는 수 밖에..." "당장 꺼져 버려!" 샤롯트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기꺼이 꺼져주지." 찰스는 1년 반 동안이나 비워 두었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다음날 오후에 내려가겠다고 오드리에게 전화를 건 다음, 상쾌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한 잠 늘어지게 자다보니 갑자기 공습 경보가 울려 퍼졌고, 찰스가 방공호에 대피해 있는 동안 엄청난 양의 폭탄이 마치 비오듯 런던시내로 집중투하되었다. 찰스는 바로 근처에서 들려 오는 굉음만으로도 그날밤 수 많은 인명피해가 났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공습이 끝나고 올라와 보니 찰스의 집 유리창도 몇 장이나 깨져 있었다. 찰스는 깨진 유리 조각을 대중 치우고 목욕을 한 다음 샤롯트를 만나러 갔다. 여전히 어제의 그 비서가 사무실로 들어서는 찰스를 날카롭게 쏘아 보고 있었다. "파커스코트 부인이 날 기다리고 있을 거요." 찰스가 자신있게 말했지만 비서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인은 당신을 만날 수 없어요." "나도 알고 있소." 찰스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문 쪽으로 다가가자 그녀는 황급히 달려와서 찰스를 가로막는 것이었다. "지금은 들어가실 수 없어요. 핸리 비어드슬리 씨가 안에 계십니다." "괜찮아, 내 장인 어른인데 뭐?" 찰스는 샤롯트의 아버지까지 와 있다면 오히려 생각보다 쉽게 문제가 풀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찰스는 어제 자신이 말한 자료가 거짓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그럴 듯한 손가방까지 하나 들고 있었다. 하지만, 찰스가 샤롯트의 사무실로 들어섰을 때, 전혀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샤롯트는 간 곳이 없고, 그녀의 아버지만이 절망에 빠진 듯이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그녀의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찰스는 너무도 뜻밖이라 겨우 그렇게만 인사를 건냈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비어드슬리의 눈엔 끝간 데를 알 수 없을 듯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샤롯트가 자낼 만날 약속을 해 둔지는 몰랐는데..." 그는 공허한 눈길로 달력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디 아프답니까?" "아직 모르고 있단 말인가?" 비어드슬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대답했다. "샤롯트는 어젯 밤 공습 때 죽었다네. 그 망할 놈의 개가 집 밖으로 뛰쳐 나가는 바람에 쫓아나갔다가 그만...." 비어드슬리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찰스는 갑자기 초라하게 울고 있는 그 노인이 불쌍해졌다. "최선을 다 해 병원으로 옮겼네만.... 결국, 오늘 아침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찰스가 말끝을 흐리자 비어드슬리는 젖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자네는 웬일인가? 요즘엔 샤롯트와 할 이야기도 없는 것 같더니?" "이젠 의미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찰스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그 상황에서 당신 따님을 협박하러 왔습니다라는 말은 도저히 할 수 가 없었다. 한때 자신이 좋아했던 적도 있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자, 찰스는 당장이라도 그곳에서 뛰쳐 나가고 싶었다. "죄송합니다. 혹시 제가 도와 드릴 일이라도?" 비어드슬리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도 잊은 양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찰스를 마냥 바라보는 것이었다. "자네와 그 아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네만, 샤롯트는 항상 모든 게 자기 탓이라고 하더구먼.." "면목 없습니다." 일이 그렇게 되고만 이상 뭐라고 더 할 말이 없었다. "비서 아가씨에게 전화번호를 적어 두고 가겠으니 필요하시면 불러 주십시오." 허둥지둥 사무실을 빠져 나온 찰스는 곧장 기차를 타고 시골로 돌아갔다. 제임스의 저택에 도착한 찰스는 조용히 거실로 들어서며 샤롯트와 결혼식을 올리던 순간 순간들을 되새겨 보았다. 그것은 비록 쓸데없는 생각이었지만, 늙은 비어드슬리의 가련한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찰스예요?" 바이올렛이 앞치마를 두른 채 서재에서 반갑게 달려 나왔다. "아이들이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고 있어요." 하지만 곧 그녀는 찰스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오, 피곤해서 그런가 봐요." "차 한 잔 드시겠어요?" 바이올렛을 따라 부엌으로 들어가던 찰스는 오드리와 부딪쳤다. 오드리 역시 찰스의 눈만 보고도 무슨 일이 있었음을 금방 알아차렸다. "왜 그래요. 찰스?" "뭘?" "피곤해 보여요." "응, 피곤한 건 사실이야." 찰스는 의자에 주저앉으며 목발을 흔들어 보였다. "언제나 목발 신세를 면할까!" 목발을 던져 버리려면 아직도 몇 달은 더 기다려야 했다. 한편으로 오드리는 그게 무척 다행스럽기도 했다. 적어도 아기를 낳을 때까지는 목발을 짚고 전쟁터로 달려 가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당장의 문제는 그게 아니란 것을 오드리는 잘 알고 있었다. "뭘 숨기고 있는 거죠. 찰스?" 찰스는 오드리의 직감에 혀를 내두르며 이야기를 털어 놓기로 작정했다. 바이올렛은 다시 아이들을 돌보느라 부산을 떨고 있었다. "샤롯트가 어젯 밤에 죽었어." 오드리는 너무도 뜻밖의 일이라 잠시 멈칫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어제 그녀를 만나러 갔었어." "왜요?" "왜긴 왜야, 이혼 문제를 해결하러 갔던 거지." "샤롯트는 뭐라고 하던가요?" 오드리는 아직도 그 충격적인 소식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계속 질문을 던졌다. "생각해 보겠다고 하더군. 생각해 보나마나 뻔한 일이었지만. 그래서 오늘 아침에 다시 사무실로 가 봤더니 그녀의 아버지가 거기에 앉아 있더군...." 오드리는 찰스가 커다란 죄책감에 빠져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하지만, 찰스로서도 다른 방도가 없는 일이지 않았는가, 하필이면 그날 밤에 샤롯트가 죽을 거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 노인네가 불쌍하더군....." 오드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요. 찰스... 어쩔 수 없잖아요." 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결과는 마찬가지야. 잔인한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모르지... 이제 다 잊어버리고 당장 결혼하자구!" "그래도 될까요?" "무슨 소리야? 이제 와서 샤롯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앉아 있을 수도 없잖아? 어차피 샤롯트는 내 인생을 망치려고 별 짓을 다한 여자인데...." 비록 전혀 그녀의 죽음에 대한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때, 결혼하겠어?" "물론 그래야죠." "그럼, 언제하지?" 찰스는 더 이상 단 한 순간도 머뭇거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건, 내일이건, 다음주건 언제든지 당신이 원하는 때라면...." 그들은 제임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마침내 크리스마스 다음날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하객이라곤 집안 식구들 밖에 없었고, 오드리는 이미 불룩해진 배를 감추기 위해 바이올렛의 헐렁한 드레스를 빌려 입어야만 했다. 비록 조촐했지만 그들 모두에게 커다란 의미를 던져 주었던 결혼식이었다. 그날 밤이 되자, 오드리와 찰스는 나란히 침대에 누워 자신들이 걸어 온 머나먼 길을 천천히 되새겨보았다. 런던의 공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평화스럽기 그지없는 달빛을 바라보며 찰스와 오드리는 끝없이 이야기를, 그리고 사랑을 나누었다. "당신 또 떠나실 거예요?" "물론 여기 있을 수 있을 때까지는 있어야지. 하지만, 조만간 높은 양반들이 나를 카이로나 어디로 보낼 것 같아." 찰스도 임신한 아내를 혼자 내버려두고 떠나고 싶진 않았지만, 다행히 아기가 태어날 때쯤이면 자신의 몸도 완전히 회복될 것 같았다. "아기가 태어나면 뭐라고 부르지?" "에드워드가 어때요? 우리 할아버지 이름을 따서 말이에요." 찰스가 생각해도 그럴 듯한 것 같았다. "그것도 괜찮겠군. 거기다가 안토니라는 이름도 넣도록 하지. 에드워드 안토니 파커스코트, 어때?" "에드워드 안토니 찰스...." 오드리는 행복에 겨운 듯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리다가 찰스의 품에 안긴 채 잠이 들었다. 43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하루하루 세월이 흐르면서 오드리의 몸은 점점 더 무거워져 갔고, 찰스의 건강은 차츰 회복되어갔다. 이번에는 뱃속의 아기도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는 것 갈았고, 봄이 되자 이미 오드리의 배는 웬만한 산만큼이나 불러 올라 입을 옷을 구하기 힘들 지경이 되어버렸다. 이쁘게 자라난 몰리까지도 그해 여름이면 태어날 자기 동생에게 잔뜩 기대를 걸고 있었다. "아기가 어떻게 나와, 엄마? 정원 속으로 똑 떨어질 건가?" "글쎄, 그렇진 않겠지.... 아빠와 함께 병원으로 가서 낳게 될 거야." "음....." 몰리는 손가락을 입에 넣고 무언가 곰곰히 생각하는 듯했다. "아기가 나오면 아빠는 또 싸우러 가신대?" 몰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오드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힘주어 몰리를 껴안았다. "그래, 그러실 거야. 제임스 아저씨처럼 말야." "엄마도?" 이번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난 너와 아기와 함께 여기 있을 거야." 몰리는 그 대답에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몰리는 찰스나 오드리가 없어도 항상 잘 놀았지만, 그래도 함께 집에 있는 게 훨씬 더 좋았던 것이다. 그러자, 오드리는 갑자기 알렉산드라와 제임스 2세가 얼마나 아빠를 보고 싶어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찰스가 제임스 대신 자주 그 아이들과 놀아 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따금씩 제임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기쁨까지 대신해 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부활절이 돌아오자, 제임스가 잠시 집에 다녀갔고, 오드리는 이미 임신 6개월을 넘어서서 거대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커져 버린 배를 안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런 그녀의 배를 만져 보며 찰스는 혹시 쌍둥이가 아니냐며 짓굿은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바깥에서는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순조롭고 평화스럽게 진행되어 갔다. 단지 아나벨에게서 날아온 한 장의 편지가 약간 오드리의 마음을 무겁게 했을 뿐이었다. 직업 도박사라던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이 태평양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오드리는 동생을 위로하는 장문의 답장을 써 보냈다. 그러나 그로부터 꼭 2주일 만에 되돌아온 아나벨의 답장에는 샌디에고에서 해군 장교와 다시 재혼을 했다는 웃지 못할 내용이 씌어 있었다. "같은 부모를 가진 한 형제인데도 어쩌면 이렇게도 서로 다를 수 있을까요?" 정원의 커다란 나무 밑 잔디밭에 기대앉은 오드리가 자신의 머리칼을 어루만져 주고 있는 찰스를 향해 정말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찰스라고 헤서 그 이유를 알 리가 없었다. 그때 마침 거실 안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려 찰스와 오드리는 나란히 손을 잡고 함께 집안으로 들어섰다. 바이올렛은 그녀의 시아버지와 함께 장을 보러 나가 있었고, 아이들은 모두 이층에서 저희들끼리 놀고 있었던 것이다. "네?....네...아뇨, 난 찰스 파커스코트요. 뭐라고 전하면 되죠?"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르다 찰스는 힐끗 오드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틀림없소?" 갑자기 찰스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가라앉고 있었다. "뭔가 잘못된 거 아니오? 언제쯤이면 알 수 있대요?....알았소......다시 연락해 주시오." 전화를 끊은 찰스는 한동안 꼼짝도 않고 오드리를 바라 보고만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찰스의 눈동자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찰스.... 무슨 일이에요?" 하지만, 오드리는 이미 찰스가 수화기를 집어드는 순간부터 어렴풋이나마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제임스였다. "무슨 일이죠?" "제임스의 비행기가 퀘른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 추락했대. 죽었는지 아니면 포로가 되었는지는 아직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는군. 다시 연락을 해 주겠대. 아직 귀국하지 않은 비행기가 몇 기 있다는군." "틀림 없대요?" 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임스의 비행기가 추락하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는 거야." "세상에..." 오드리는 배를 움켜쥐고 털썩 주저 앉았다. 두 시간 후, 막 바이올렛이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찰스가 재빨리 그녀에 앞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역시 침울한 목소리로 통화를 끝낸 찰스가 오드리와 바이올렛을 둘러보며 말을 꺼냈다. "우리, 잠깐 앉읍시다." 바이올렛의 표정이 금방 돌처럼 굳어졌다. "무슨 일이에요. 찰스?" 찰스는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고 있는 바이올렛을 식당으로 데리고 가 자리에 앉혔다. "알고 있는 대로 모두 말하겠소, 바이올렛. 제임스의 비행기가 독일을 폭격하고 난 후 되돌아오던 길에 추락했답니다.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는 프랑스 지방에 떨어졌을 확률이 크대요. 아직은 아무도 그가 죽었는지 어떤지는 모르고 있대요. 제임스가 추락하는 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틀림없이 그가 탈출했을 거라고 말하긴 했소......" 바이올렛의 신음 소리가 식당 안에 퍼져 갔다. "언제 그랬대요?" "오늘 새벽에..." "지금쯤 제임스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을까요?" "글쎄.... 그걸 알아내는 데 얼마나 걸릴 지 조차 아무도 알 수 없소. 우린 그저 살아 오기를 기다리며 기도나 하는 수 밖에 없소." 그러나, 아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 더욱 끔찍한 일이었다. 바이올렛은 생각보다 담담한 표정으로 아이들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아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밖으로 뛰쳐 나갔고, 알랙산드라는 바이올렛의 품에 안긴 채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한없이 흐느껴 울고 있었다. 밤이 되어 아이들을 모두 잠자리로 올려 보내고 난 후, 바이올렛은 완전히 절망에 빠져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오드리가 그녀의 손을 따사롭게 잡아 주었지만, 그것으로 바이올렛의 커다란 슬픔을 없애 줄 수는 없었다. "난, 아직까지도 제임스가 금방이라도 웃으며 들어설 것만 같아요 무척이나 어리석은 희망이겠죠?" 오드리는 뭐라고 위로의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프랑스 사람들이 제임스를 구했을지도 몰라요. 제임스는 불어도 잘 하잖아요..."하지만..." 오드리는 말꼬리를 흐리며 호든 경에게 브랜디나 한 잔 가져다 드려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제임스의 소식을 알려줄 전화벨 소리를 기다리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모두들 침울한 마음으로 잠자리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 날밤 전화는 두번 다시 울리지 않았다. 44 오드리는 임신 말기가 되어, 더욱더 힘들어 졌지만 찰스의 건강은 점점 회복되어 갔다. 특히 제임스가 그런 사고를 당하고 나자 한시바삐 전쟁터로 달려가고 싶어 좀이 쑤시는 모양이었다. 바이올렛도 걱정했던 것 보다는 훨씬 강한 일면을 보여 주었지만, 항상 제임스가 어딘가에 살아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그녀 자신도 박살이나 버린 비행기 속에서 제임스가 살아 남았으리라고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 인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6월이 되자 오드리의 거동은 숨쉬기 조차 힘들어 졌으며, 출산 예정일이 2주가 지났는 데도 아기는 여전히 태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의사는 더러 그런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니라며 계속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수면을 충분히 취할 것이며, 오랫동안 산책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 하지만, 오드리에게는 그것 두 가지 모두가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어쩌다가 찰스와 바이올렛이 거의 반강제로 오드리를 데리고 산책을 할라치면 오드리는 더 이상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며 엄살을 떨곤 했다. "이렇게 멀리까지 나를 끌고 와서 도대체 어떡하겠다는 거예요? 나를 도로 집으로 데려 가려면 트럭을 한 대 끌고 와야 할 걸요." "트럭도 엄청나게 큰 트럭이어야 되겠구먼." 찰스가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오드리는 엄살이 아니라 정말로 죽을 지경이었다. 겨우 집으로 돌아오니 등줄기가 말도 못하게 쑤셔 왔고, 약간 감기 기운까지 있는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소화도 통 안 되고.... 허리가 쑤셔서..." 오드리가 바이올렛에게 넋두리를 늘어놓자 그녀는 곧 찰스에게 그런 사실을 알렸다. "그럼, 진통이 시작된 거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바이올렛은 미소를 짓는 듯 했지만, 제임스에게 사고가 생기고 난 후로는 한 번도 밝게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경계 경보를 발견했을 뿐이에요." "드디어 때가 된 모양이군." 그러나 그날 밤에도 오드리는 1시까지 잠을 자지 않고 이런저런 허드랫 일을 했다. 찰스는 벌써 곯아 떨어졌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아 이리저리 방안을 오가다가 허리뿐만 아니라 아예 전신이 따끔따끔 쑤셔 오는 걸 느끼고는 따뜻한 물로 목욕이나 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욕조에 몸을 담그는 그 순간 드디어 엄청난 진통이 시작되었다. 오드리는 책에서 나오듯이 천천히 진통이 시작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순식간에 엄청난 고통이 밀어닥친 것이었다. 타올로 몸을 가리고 간신히 욕조에서 빠져 나은 오드리는 곧장 잠든 찰스를 흔들어 깨웠다. 갑자기 지난번 유산 때의 엄청난 고통이 되살아 나며 덜컥 겁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찰스, 진통이 시작되나봐요.. 무서워 죽겠어요." "무서워할 것 없어. 거기 꼼짝 말고 앉아 있어요. 내가 옷을 입고 당신도 입혀 줄 테니까." 그러나 찰스가 채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오드리는 찰스의 팔을 움켜 잡으며 자지러질 듯이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아... 찰스..... 으악......" 찰스는 깜짝 놀라서 오드리를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혀 놓고는 먼저 바이올렛에게 도움을 요청한 다음, 곧장 달려가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의사는 자다가 일어난 듯 졸린 목소리로 당장 환자를 병원으로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찰스가 서둘러 방으로 돌아와 보니, 오드리는 바이올렛의 손을 움켜잡은 채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대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병원으로 옮겨야겠소." 찰스는 바이올렛을 향해 다급히 내뱉고는 대충 옷을 주워 입고 먼저 내려가 차에 시동을 걸어 두려했다. 그러나 오드리는 고개를 내저으며 찰스를 방에서 나가지 못하게 붙잡는 것이었다. "안 돼요... 가지 말아요... 난 못 가요......" 바이올렛도 오드리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래요. 병원으로 옮길 시간이 없을 것 같아요. 다시 의사에게 진화를 걸어서 상황을 정확하게 일러 주면 곧장 이리로 달려올 거예요." "그러면 집에서 아기를 낳는단 말이오?" 찰스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해서, 될 수 있으면 오드리를 병원으로 옮기고 싶었지만, 다시 오드리의 비명이 시작되자 더이상 생각하고 말고 할 여유도 없이 곧장 병원으로 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의사도 고개를 끄덕이며 즉시 달려오겠다고 약속했다. 정말로 15분도 채 안 돼서 의사가 도착했을 즈음에는, 오드리의 얼굴이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양 손으로 찰스와 바이올렛을 꽉 붙잡은 그녀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온몸을 뒤틀고 있었다. 조용히 방으로 들어선 의사는 역시 의사답게 침착한 목소리로 오드리를 향해 외쳤다. "내 말 잘 들어요. 곧 당신의 아기가 태어날 거요. 내 말 들어요. 먼저 크게 숨을 한번 들이쉬고...." 의사가 큰소리로 고함을 지르자 찰스는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오드리는 그 와중에도 의사의 지시에 따르려고 무척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이제 다 돼 갑니다." 의사가 찰스를 돌아보며 조용히 속삭이고는 다시 오드리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드리는 이제 의사의 말이 귀에 들어 오지도 않는 듯 찰스가 어깨를 누르고 있는데도 온 몸을 비틀어 대며 계속해서 비명과 신음 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오드리가 유난히 처절한 비명 소리를 내지르자, 의사가 오드리에게 바짝 다가서며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는 것이었다. 찰스의 눈에선 어느새 눈물이 마구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랜 진통 끝에 드디어 아기의 머리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곧이어 커다란 울음 소리가 온 방안에 울려 퍼졌다. "아, 오드리.... 아들이야." 새로 태어난 아기와 산모뿐만 아니라, 옆에서 지켜 보고 있던 찰스와 바이올렛까지도 일제히 울음을 터뜨렸다. 바이올렛은 하나의 새 생명이 태어나는 장면이 그렇게도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리라고는 일찌기 생각하지 못했었다. 한 시간이 지나자, 오드리는 흐트러졌던 머리를 곱게 빗고, 새 아기를 가슴에 꼭 껴안은 채 이미 깨끗하게 치워진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찰스는 그 곁에 앉아 흡족한 눈초리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던 아들이란 말인가? 아기는 오드리처럼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이 조금 자라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찰스 자신을 닮은 것 같았다. 바이올렛은 너무나도 행복해 하는 그들을 지켜 보고 있으려니 새삼스럽게 제임스 생각이 울컥 솟아올라 차마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힘없이 밖으로 나와보니, 벌써 새벽 6시가 넘어 있어 막 찬란한 태양이 솟아오르기 시작하고 있었고, 정원의 나무 위에는 새들이 즐겁게 지저귀며 화창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천천히 부엌문을 나시며 왠지 허전한 마음으로 정원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의사의 자동차가 천천히 저택을 빠져 나가고 있었으며 대신 낯선 차 한대가 집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침부터 누가 찾아오는 것일까 하며 무심코 그 차를 지켜 보고 있던 바이올렛은 갑자기 숨이 딱 멎어 비리는 것 같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이럴 수가....?> 바이올렛이 길게 비명 소리를 내질렀고,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찰스가 또 무슨 일인가 하고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왔다. 열려진 부엌 문을 통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는 바이올렛의 모습이 보였고, 저쪽 맞은편 자동차 앞에서 웃는 모습으로 서 있는 사람은 틀림없는 제임스였다. 3개월 동안이나 바이올렛이 꿈에도 못잊어 하던 제임스가 드디어 살아 돌아온 것이다. 한쪽 팔을 잃긴 했지만, 그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찰스는 잠시 넋을 잃고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서 있다가 갑자기 번개처럼 몸을 돌려 오드리를 향해 달려갔다. 뭔가 바깥의 심상찮은 공기를 알아차린 오드리가 침대 위에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찰스, 무슨 일이에요?" 찰스는 뭐라고 이 감격을 표현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그렇게도 기다리던 자신의 아들과 이 세상에서 가장 절친하고도 오랜 친구가 같은 날 돌아 온 것이었다. "제임스.. 제임스가 돌아왔어." 오드리도 아기를 품에 안은 채 머리를 뒤로 젖히고 울음부터 터뜨렸다. 드디어 그들의 기도에 응답이 온 것이다. 제임스가 살아 있었다니 "그리고 이렇게 집으로 돌아오다니....." "주여, 감사합니다." 오드리는 팔을 뻗어 찰스의 손을 부여잡고는 그들 앞에 쏟아진 엄청난 축복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잠시 후, 제임스가 그들의 방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하지만 아무도 감히 입을 열어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눈물과 웃음과, 그리고 잠시 후 기뻐 날뛰며 뛰어 내려온 아이들의 환호성이 있을 뿐이었다. 그 누구도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감격의 날이었다. 찰스와 오드리는 자신들의 첫 아기의 이름을 약간 더 길게 부르기로 간단히 합의를 보았다. < 제임스 에드워드 안토니 찰스 파커스고트 > 45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자 찰스는 완전히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보고를 내무성에 낼 수 있었다. 때때로 상처가 조금씩 쑤시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정도로는 찰스를 더 이상 집에 붙잡아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8개월 가까이나 집안에 틀어 박혀 있었으니 도저히 몸이 근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즈음 내무성에시도 찰스를 위한 새로운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역시 같은 북아프리카이긴 했지만 이번에는 찰스를 카사블랑카로 파견하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오드리는 그런 찰스에게서 심한 질투심을 느꼈다. 찰스 앞에 펄쳐질 새로운 모험에 대한 질투였다. 그리고 찰스가 옆에 없는 자신의 생활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찰스가 떠나기 전에 오드리에게 털어 놓은 대로, 그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임무가 주어졌다. 여전히 특파원의 자격이긴 했지만, '횃불 작전'이라고 불리우는 모종의 작전에 관련된 비밀임무를 맡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지중해를 장악하기 위해 그해 가을, 북아프리카에 연합군병력을 상륙시키기 위한 미국과 영국의 연합작전이었다. 찰스가 원하고 있던 것은 바로 그런 종류의 일이었다. 아이젠하워 장군과도 직접 만나 볼 기회가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찰스는 작전을 감행하기 이전의 사전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카사블랑카로 떠났다. 카사블랑카는 이집트와는 달리 연합군 측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고, 비록 비조직적 형태를 띠긴 했지만 독일군과 영국군, 미군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 정보를 상대방에게 팔아 먹기에 급급했으며 도처에서 마약이 거래되고 있었다. 그 당시 독일군은 동쪽으로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카사블랑카 상륙 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이 아주 높은 듯했다. 반면에, 이제 오드리는 아기와 함께 항상 집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물론 예전에 바이올렛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가 제임스와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마련해 주어야 했지만 말이다. 오드리와 바이올렛의 역할이 완전히 역전되어 버렸던 것이다. 제임스와 바이올렛이 드라이브를 즐기러 가거나 산책하러 나가고 나면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항상 오드리의 차지가 되었다. 또한 오드리는 찰스에게서 온 편지를 제임스와 바이올렛에게 보여 주기도 했다. 그의 편지를 보니 카사블랑카는 무척이나 환상적인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으며, 찰스 또한 그곳에서의 생활에 극히 만족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상륙작전이 찰스에 의해 좌지우지될 만큼 그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자세한 상황을 편지에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오드리는 그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드디어 1952년 11월 17일과 18일에 걸쳐 연합군이 카사블랑카, 오란, 그리고 알제리에 동시상륙이 성공하자 그때까지도 이집트와 리비아에 정신을 팔고 있던 독일군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영국군과 비시 정부의 유격대 사이에 조그마한 충돌이 있기는 했지만 영국은 쉽게 그들을 격퇴시킬 수 있었고, 아이젠하워의 병사들도 머지않아 확고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다. 다음해 1월에는 처칠과 루즈벨트, 그리고 지로드장군과 드가울 등이 카사블랑카에 모여 회담을 가진 결과 북아프리카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아이젠하워 장군이 임명되었고, 그 회담 직후 트리폴리가 다시 영국군의 수중에 넘어왔다. 찰스는 끊임없이 그런 상황들을 적어 오드리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러면 오드리는 그걸 가지고 제임스나 바이올렛과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즈음 오드리가 입을 열기만 하면 북아프리카와 거기서 일하고 있는 찰스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오드리는 찰스가 몹시도 그리운가 봐요." 바이올렛이 어느날 저녁 제임스에게 속삭였다. 바이올렛 자신도 오드리가 얼마나 괴로와하고 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었지만, 찰스는 최소한 그때까지는 안전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그의 편지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해 본다면 그다지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즈음 제임스는 다시 사무직에 지원하려고 생각하고 있었고, 바이올렛은 그런 제임스와 함께 런던으로 돌아가는 것을 검토해 보고 있었다. 물론 아이들이야 오드리가 있으니 그냥 남겨 두어도 될 것이다. 바이올렛은 제임스가 돌아오자 다시 예전의 활발하고 쾌활한 모습을 되찾긴 했으나, 아직도 눈가에는 그 엄청난 번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죽었으리라고 생각했던 제임스를 기다리며 생긴 상처였다. 제임스가 어떻게 프랑스에서부터 살아 돌아올 수 있었나를 얘기할 때는 모두들 커다란 감동을 받았었다. 그리고 그가 한쪽 팔을 잃을 때의 이야기는 더욱더 처참한 것이었다. 프로방스의 어느 농가의 헛간에서 무려 18일 동안이나 사경을 헤댔다는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에드워드의 첫번째 생일이 다가오자 오드리는 찰스가 며칠 만이라도 집에 다녀가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다음과 같은 짤막한 전보 한 통이 날아왔을 뿐이었다. '최선을 다해서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돌아가겠소. 지금 당장 달려갈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오. 건강 조심하고, 내가 언제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잊지 마시오. 찰스로부터.' l 하지만 그것만을 가지고 만족할 수 있을 오드리가 아니었다. 이제 에드워드만 빼고는 알렉산드라나 제임스 2세, 그리고 몰리까지도 어느정도 성장하여 그다지 많은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에드워드도 유모나 호든 경의 보살핌만으로 아무런 부족없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어느날 밤, 이미 런던으로 돌아가 있던 제임스와 바이올렛을 찾아간 오드리는 그들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당신, 뭔가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 같은데, 내 생각이 틀렸나?" 제임스가 오드리 자신도 채 정리해 내지 못한 심정을 꿰뚫어 보고 먼저 말을 꺼냈다. "아직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 걸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오드리는 이미 북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지 일년 반이 지났었고, 슬슬 온몸에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역시 제임스의 말이 결과적으로는 옳은 것이 되고 말았다. 오드리는 당장 그 다음날로 내무성으로 찾아가 자신의 상황을 설명한 것이었다. 오드리가 그들을 설득시키는 데에는 그리 많은 노력이 필요치 않았다. 그녀에게는 이미 예전에 카이로에서 사람들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엄청난 수확을 거두었던 경력도 있었고, 또한 북아프리카에서도 여러모로 오드리와 같은 재능을 가진 사람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내무성에서는 며칠 내로 다시 연락을 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고, 제임스의 집에서 초조하게 그 연락을 기다리고 있던 오드리는 마침내 걸려 온 전화를 받고는 기쁨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날밤으로 기차를 타고 시골로 내려 가면서, 오드리는 과연 자신이 지금 올바른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지 어떤지를 확신할 수가 없었다. 에드워드와 몰리까지도 아직은 오드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찰스와 함께 있고 싶다는 욕망이 오드리에게는 훨씬 더 강했다. 아뭏든 아이들은 모두 안전하게 자랄 수가 있을 것이며, 오드리 자신도 언제든지 필요한 시기에 돌아올 수가 있을 것이었다. 집으로 들어서면서 제임스 2세와 레슬링을 하고 있는 몰리를 바라보는 순간, 오드리는 몰리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였다. 마침내 몰리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때때로 링훼이를 생각나게 하는 그녀의 비단결처럼 고운 검은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며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이번에는 옛날처럼 그렇게 오래 있지 않을 거야." "0아빠가 또 다치셨대?" 몰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오드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냐, 몰리. 아빠는 잘 계셔. 하지만 내가 가야지 아빠가 외롭지 않을 것 아니니." 하지만 그것은 오드리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방랑벽이었다. 어느날 에드워드도 똑같이 온 세계를 쉬지 않고 돌아 다니고 싶어하게 될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난 여기에 있고도 싶어. 때때로 사람은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할지 잘 알 수 없는 경우가 있잖아." 몰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몰리는 9살이 되어 있었고 비록 엄마가 어디론가 떠나가는 것이 싫기는 했지만 그래도 엄마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대충 알 것 같기도 했던 것이다. 오드리는 아직은 어린 몰리와 헤어진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바로 그 다음날 에드워드가 걸음마를 시작하는 것을 봤을 때는 더더욱 가슴이 아팠다. 그날 밤, 오드리는 몰리까지도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호든 경과 함께 차를 마시면서 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만약 자신이 그들의 곁을 떠나게 된다면 누구하나 그립지 않을 사람이 없겠지만, 지금 당장은 찰스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진실이 이끄는 곳으로 찾아가야지, 오드리." 호든 경이 나직히 얘기했다. 그는 여러 면으로 오드리 자신의 할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노인이었다. "때때로 그런 결정을 내리기가 무척 어려운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여기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싶기도 한 반면, 그곳으로 달려가 찰스와 함께 있고 싶기도 하거든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아이들은 내가 잘 보살펴 주겠다고 약속하지." 호든 경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인자하게 말했다. "물론 그래 주시리라고 믿지만..." 그 모든 갈등들에도 불구하고 오드리는 떠날 수 밖에 없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그 어느 때보다 힘든 결정이었다. 며칠 후, 안고 있던 에드워드를 호든 경에게 건네 주고 몰리와 마지막 포옹을 나누는 순간, 오드리의 가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저려왔다. 역까지 바래다 주겠다는 그들을 겨우 만류하고 자동차에 오른 오드리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마구 차를 따라 달리며 손을 흔들어 주는 몰리의 모습이 아련히 눈에 들어 왔다. 46 런던에 도착한 오드리는 비행기 시간이 워낙 빡빡해 아주 잠깐동안 밖에 바이올렛을 만나지 못했다. 바이올렛이 공군기지 입구까지 오드리를 태워 주고는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애써 미소지으며 오드리를 꼭 껴안아 주었다. :몸조심해요. 오드리. 꼭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야 해요." "걱정 마세요. 제임스에게도 안부 전해 주시구요." 오드리와 바이올렛은 이미 오래 전부터 친형제 이상으로 깊은 정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오드리에게는 찰스의 곁으로 가야만 한다는 욕망이 어느새 당위의 차원으로 승화되어 강하게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정말 대단한 여자예요. 존경스럽기까지 하다니까요." "뭐가요?" "그 용기 말이에요. 아뭏든 아이들 걱정일랑 조금도 말고 잘 다녀오기나 해요." 그것은 오드리에게는 무엇보다도 반가운 소리였다. 다시 한번 작별의 포옹을 나눈 오드리가 비행기에 오르자 곧 비행기는 카사블랑카를 향해 이륙을 시작했다. 오드리는 갑자기 예전에 카이로로 찰스를 찾아갔을 때가 생각났다. 이번에도 역시 찰스는 오드리가 불쑥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마침내, 낡은 비행기가 덜컹대며 거칠게 활주로로 내려앉자, 오드리는 거의 1년 만에 만나게 될 찰스를 생각하며 마냥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이었다. 찰스가 카사블랑카까지 날아 온 자신을 보면 뭐라고 할지 궁금했다. 틀림없이 아이까지 낳은 여자가 거기까지 쫓아 왔다고 처음에는 무척 화를 낼 것이다. 카메라를 움켜 쥐고 비행기를 내려서니 카사불랑카는 확실히 카이로와는 자못 다른 분위기였다. 곳곳의 사원과 시장들이 오히려 이스탄불과 비슷한 냄새를 풍겼다. 하지만 여전히 오드리가 꿈에도 못잊어 하던 이방의 냄새가 강하게 느껴졌으며,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그 모든 풍경 앞에 들이댔다. 단번에 수십 장의 사진을 찍고 나서야 오드리는 대기중에 떠도는 낮선 향기들을 마음껏 들이 마시며 역시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을 받으며 오드리는 천천히 찰스가 머물고 있는 호텔을 찾아갔다. 카운터에다 찰스의 이름을 댔더니, 그 사람은 찰스를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재빨리 대답하는 것이었다. "지금 바아에 계십니다." 오드리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으며 바아를 향해 계단을 내려갔다. 갑자기 수많은 상념들이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베니스에서 찰스를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만났던 일.... 거기서 이스탄불까지 오리엔트 특급 열차... 그리고 상하이와 뻬이징... 하르삔에서의 눈물겨운 작별....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재회.... 다시 안티베스와 런던.... 그리고 카이로.... 그들은 손에 손을 맞잡고 마음껏 가슴 속의 열정을 불태우며 온 세계를 돌아다닌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또다시 오드리는 찰스가 앉아 있는 바로 뒤에까지 와서 서 있는 것이었다. 오드리는 가만히 손가락 끝으로 찰스의 목덜미를 눌러 보았다. "제가 한 잔 살까요?" 찰스가 마치 귀신이라도 만난 듯이 깜짝 놀라 펄쩍 뛰며 분노와 기쁨이 한데 어우러진 표정으로 오드리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런, 세상에...... 어떻게 또 여기까지...." 하지만 찰스는 그리 불쾌한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기를 돌봐야 할 오드리를 부를 용기가 없어 안달을 하고 있었던 찰스였다. "당신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려구요.... 당신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죠." 찰스는 대답에 앞서 이미 입이 함박처럼 벌어져 있었다. "집에는 모두들 별일 없소?" 오드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찰스는 웨이터를 불러 샴페인부터 한 병 주문했다. "모두들 당신에게 안부 전해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찰스는 의자를 끌어당겨 오드리를 자신의 옆자리에 앉게 했다. 오드리는 잠시도 찰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으며, 웨이터가 샴페인을 가득히 잔에 따라 주고 가자, 찰스는 1년동안이나 억눌러 왔던 열정을 한꺼번에 폭발시키려는 듯 뜨거운 키스를 오드리의 입술에 퍼부었다. 그런 다음 찰스는 미소를 가득 떠올리며 자신의 잔을 집어 들었다. "당신을 내게 돌려 보내 준 우리들의 방황하는 영혼을 위해." 찰스가 부드러운 눈길로 오드리를 바라보자 오드리도 자신의 잔을 들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들 자신을 위해, 찰스." "아멘." 찰스는 다시 한번 몸을 구부려 오드리와의 끝없는 입맞춤을 시작했다. < 종....> 옮기고 나서 이 책은 우리 나라에서도 이미 소개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약속' 및 '버브 체인지'의 작가인 다니엘 스틸의 최신작 '방랑벽'의 완역본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 책의 제목을 역자 및 줄판사와의 상의하에 '방황하는 영혼'으로 했음을 밝혀 두는 바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20번째 장편소설로, 영미권에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연애소설의 진수로 인정받아 현재 '뉴욕 타임즈 북 리뷰'지에 15주째 베스트 셀러 1위를 마크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방황하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왜 그럴까? 도대체 인간은 영혼과 육체가 결합된 복합체이기 때문이라고 역자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선과 악이 동거하는 집이기에 항상 갈등을 느끼고, 따라서 불안해지는 것이다. 이럴 때 인간은 어디론가 멀리 훌쩍 떠나고 싶어지는 것이 아닐까? 방황하는 영혼 작가는 주인공 오드리를 통해서, 사랑과 실연, 방황과 방랑, 여자로서의 갈등과 번민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현실감 넘치는 필치로 그려 나가고 있다. 작품 첫머리부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라고 강조하고 싶다. 소설은 팩션(사실)이 아니라 픽션(허구)인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거짓말이다. 소설은 그런데 거짓말인 줄 뻔히 알면서도 소설을 읽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거기에는 감동과 재미, 즉 읽는 재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우선 재미있어야 한다. 그리고 읽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주어야 한다. 여기다 한가지 더 덧붙인다면, 내용에 있어서 그 속도감, 즉 스릴이 넘치고 사건 전개가 빨라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요건을 갖춘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인간은 영원한 방랑자인지도 모른다. 여러분도 이 작품을 읽고 진정한 의미의 방랑자가 되기를 바란다. 끝으로 이 졸고를 쾌히 빚 보게 해주신 전예원 사장님께 심심한 사의를 표하며, 귀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바이다. 더불어 편집부 여러분께 고마움을 전한다. 옮긴이 정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