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손수건 어윈 쇼 장편소설 - 차 례 - 제 1장 이상한 전화 제 2장 다섯 시간의 망각 제 3장 황금을 찾아오는 사냥개 제 4장 행운의 제비 뽑기 제 5장 추억의 항아리 제 6장 쓰레기 인간 제 7장 인공수정 제 8장 술병의 유령 제 9장 살인계 제10장 증언대 선서 제11장 개인적인 적 제12장 검은 천사 제13장 사업상 예상 되는 적 제14장 죽고 난 다음 제15장 공동묘지 제16장 동업자 제17장 지상 최대의 거짓말 제18장 병자의 이기심 제19장 중 환자실 증후군 제20장 슬픔의 빵 제21장 무덤의 안식 제22장 새 생명 옮긴이의 말 제 1장 이상한 전화 침실에 연결해 놓은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을 때, 그는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있는 중이었다. 꿈 속에서 그는 작은 소년이 되어 있었다. 소년은 아버지의 손을 꼬옥 잡고 밝은 가을 햇빚을 받으며 뉴헤이븐에 있는 예일 경기장 쪽으로 걸어 가고 있었다. 소년은 아버지를 따라 처음으로 축구경기를 보러 가고 있는 중이었다. "여보, 전화 좀 받아 보지 않겠어 ?" 그는 입안에서 중얼거렸다. 전화는 그의 아내, 실라가 누워 있는 쪽에 있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문득 자기 아내가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신음소리를 내며 뺏뺏한 몸을 꿈틀거려 침대 건너편으로 몸을 옮겼다. 데이블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시계의 야광 바늘이 빚을 발하면서 3시 30분 근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더듬더듬 건화를 찾아 수화기를 들어 올리며 괴롭다는 듯이 또다시 신음소리를 냈다. "데이몬." 전화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칠고 좀 쉰 듯한 목소리였다. 그는 누구의 목소리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여보세요?" "데이몬씨, 좋은 일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축하의 말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요." "뭐라구요?" 데이몬은 아직도 잠에서 덜 깨어난 듯 그의 말 소리는 흐리멍텅하였다. "누구시죠? 좋은 소식이라니 무얼 말입니까 ? " "곧 다 알게 될 거요, 로저씨." 전화에서는 계속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신문을 읽었소. 내가 당신에 관해서 알고 있는 것을 근거로 미루어 보아, 당신도 그 행운을 차지하려는 사람들 중에 틀림없이 끼어 있을 거요. 말하자면, 그런 소문이 널리 퍼져 있다는 얘기지." "이봐요 ! 도대채 지금이 몇 시인지나 알고 그러는 거요? 세벽 3시를 조금 지난 시각이란 말이오." "토요일 밤이쟎소? 당신은 지금 친구들과 집에서 축하연을 베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토요일 밤, 그리고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서 당신은축배를 드는 자리에 나도 초대를 해야지... '? "이봐요, 선생! 전화를 끊어 주시오. 잠 좀 잡시다.'' 그는 지친 듯이 말했다. "잠잘 시간은 얼마든지 있소, 로저씨. 당신은 지금 그 일과 관련을 맺으려고 하는 중이오." 그의 말투에는 몹시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뭐요?" 데이몬은 혹시 이것이 또 다른 꿈이 아닌가 싶어 어리둥절하면서 자기 머리를 혼들어 보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있는 거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 텐데, 로저씨.'' 이제 말투는 농담조가 아니라 협박조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잘로프스키요. 난 지금 시카고에서 전화를 절고 있소." "난 잘로프스키라는 이틈울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모르오. 그리고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시카고에 가본 적도 없소." 데이몬은 점점 화가 치밀어 올라 목소리가 날카로와졌다. "당신은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자는 사람을 깨워 놓고 뭘 하겠다는 거요? 당신이 전화를 끊지 않으면 내가 끊겠소." ''전화를 끊지 않는 편이 좋을 거요, 로저." 그 사나이가 겁을주며 한 마디 했다. "난 당신에게 꼭 할 말이 있으니까 말이오." "나는 당신과 말할 필요가 없소. 선생, 그만 잠이나 주무시지, 자, 이만 전화를 끊겠소." "로저, 당신이 후회할 그것도 몹시 후회할 일을..즉, 나 잘로프스키의 전화를 끊는 일 따위는 보고 싶지 않소. 나는 당신과 이야기 하고 싶다고 말했쟎소? 오늘 밤에 당신과 만나 이야기를하고 싶단 말이오." "나는 지금 시카고에 있는 게 아니오. 혹시 당신은 내 전화번호를 돌릴 때 그것도 보지 않은 모양이죠?"' 그는 이제는 완전히 잠에서 깨어났다. 비록 전화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 사나이에게 반격을 가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보세요,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오? 혹시 전화광은 아니오?" 그러자, 혹시 올 나이트 파티나 또는 술집에서 술이 만취되어 장난을 치는 친구 중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업상, 그에게는 몇몇 이상한 버릇을 가진 친구들이 주위에 있었다. "좋아요, 좋아 !" 그는 좀 더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직접 말하겠다는 일이 무엇이오?" "이건 나 자신을 위해서 말하는 게 아니오. 로저, 나는 이곳의 우두머리요. 그리고 나는 지금 시카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살고 있는 곳으로부터 겨우 두 블럭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소. 바로 8번가에 있단 말이오. 선생께서 잠옷을 벗으시고 옷을 좀 걸치고 나와, 당신이 있는 근처에서 만났으면 하는테 어떠시오? 이를 닦고 머리 손질을 하시는 데 10분 간의 시간 여유를 드리죠." 그 사나이는 나오지 않는 웃음을 억지로 짖어대듯 몇 번 소리내어 웃었다. "나는 당신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전혀 모르겠소, 잘로프스키씨." 데이몬이 대꾸했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데이몬이라는 사람과 할 일이 있다면, 그 데이몬이란 사람과 나를 착각한 것 아니오? 한밤중에 전화를 잘못 건 것이 아닌지 확인해 보시오." "잘로프스키라는 사람은 실수를 하는 법이 없소. 나는 바로 정확히 로저 데이몬씨한테 전화를 걸었고, 당신도 그것을 알고 있소. 당신은 10분 안에 나를 만나는 편이 좋을 거요. 만일 그렇지않으면..." 그 사나이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나서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로저씨, 당신이 원치 않는, 전혀 원치 않는 결과가 뒤따를 거요." ''개자식 같은 놈이로군 ! " 데이몬은 뱉아 버리듯이 말했다. "상스러운 말은 하지 맙시다. 그리고 전화를 끊기 전에 한 마디 마지막 경고를 해 두겠소. 이것은 생사에 관한 일이오. 당신이 죽고 사는 문제란 말이오." ''야, 이 새끼야! 넌 갱 영화를 보다못해 이젠 미쳐 버린게 아냐?" 하고 데이몬이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경고를 받았을 텐데, 로저. 나는 당신에게 다시 전화를 걸지 않을 거요." 데이몬은 수화기를 광, 하고 내려 놓으며, 그 밉살스러운 쉰 목소리를 끊어 버렸다. 그는 전화에 손을 댈 자세를 하고 침대에 누워 있었으나, 곧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가 일어나 앉았다. 이제는 다시 잠을 청해 보았자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리고 난 다음 눈을 눌렀다. 그의 손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는 떨고 있는 자신에 대해 화가치밀었다. 버몬트에 살고 있는 친정 어머니를 뵈러 가서, 이번 주말에 자기 아내가 집에 없었던 것이 다행한 일이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만일 아내가 있었다면 그 전화는 그녀를 놀라게 만들었읕 것이고 화가 난 아내는 의심을 품고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새벽 3시 반에 그런 협박 전화를 받느냐고 몇 시간 동안 자기를 심문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이는 자기 부부 사이에 흔히 있는 말다툼으로 번지고, 아내는 '당신의 유명한 괴벽' 또는 '당신의 과거' 따위의 말을 늘어 놓게 되었을 것이다. 본래 그녀는 조용한 여자였으나 비밀을 싫어했다. 그녀는 남편을 염려하거나 또는 남펀이 남몰래 어면 꾀로움이나 문제를 간직하고 있다고 느낄 때, 욕설을 퍼붓곤 했다. 그는 한밤중에 걸려온 전화에 관해서 그녀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녀가 돌아오기 전에 자신이 전화를 받기 위해 잠자리의 위치를 바꿔 놓은데 대한 변명의 구실을 찾아보았다. 그녀는 그것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게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가 전화를 받는 것을 싫어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의 두 번째 아내였다. 그는 첫번째 아내와는 1년도 채 함께 살지 않았고, 스물 네 살이 될 때까지 이혼하고서 혼자 살아 왔다. 그는 나이 사십이 되어서 재혼을 했다. 그가 두번째 결혼을 하고서 20년 이상의 세월이 훌렀다. 그의 아내 실라는 그들이 만나기 전까지의 그의 과거에 대하여 어면 역겨운 생각을 품고 있었고, 모두가 전적으로 그녀가 멋대로 생각하고 있는 일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보다 열다섯 살이나 젊었으며, 질투를 할 사람은 오히려 남자 쪽인 그 자신이어야만 했다. 결혼 생활에는 올바른 논리가 있을 수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심심풀이로 철없는 젊은아이들이 건화번호부에서 제멋대로 번호를 골라 전화를 걸고서는, 음란한 제안을 하거나 또는 불쾌한 협박을 하면서 뒷전에 있는 친구들과 낄낄대며 좋아하는 장난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젊은이의 목소리가 아니었고, 뒷전에서 낄낄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이 얘기를 아내 실라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 사나이는 다시 전화를 걸지 않겠다고 했다. 그 사나이가 다시 전화를 걸어 올 때까지라도 집안의 평화를 유지하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실라가 버몬트 친정집 방문을 재미있게 보내고, 즐거운 기분으로 돌아오기를 바랬다. "그 동안은.. 그 동안은, 무엇을 한담?"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불을 켰다. 방안은 썰렁하였다. 그는 따뜻한 겉옷을 걸치면서 잠옷이라고 하던 그 조롱하는 듯한 목소리를 생각하였다. 그는 거실로 갔다. 방은 어두웠다. 그는 최근에 재산을 좀 물려 받았지만, 그의 검소한 생활습관은 몸에 배어있었다. 그는 불을 모두 켜 놓았다. 방은 안락하였으나 좀 낡았고, 책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의 아파트는 상충에 있었고, 부유층이 살도록 개조되었지만 방은 모두 작은 편이었다. 그의 아내는 항상 그의 뒤를 따라 다니며 책을 치워 버리고 있었다. 그도 안 보는 책은 없애 버리겠다고 계속 약속은 하고 있지만, 책은 여전히 방안에 그대로 쌓여 있었다. 겉옷을 걸쳤지만 그는 여전히 추워서 몸을 약간 떨고 있었다. 그는 빳빳한 자세로 방안을 걸었다. 그는 이제 육십대 중반에 접어든 나이지만, 단단한 체격에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처럼 혈색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날씨와는 관계없이 2마일 떨어진 사무실을, 매일 모자없이 걸어서 출퇴근하고, 휴가에는 먼 길을 혼자서 하이킹을 다니고 있었다. 아마도 그 결과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다리를 따뜻하게 만드는 데에는 침대에서 내려와 30분이나 걸렸다. 그는 책장 맨 윗 칸에서 맨해턴 전화 번호부를 꺼내서 등불이 비치는 탁자 위에 내려 놓았다. 그가 필요에 따라서는 책을 읽을 때 안경을 착용했지만, 불빚이 밝을 때는 안경을 끼지 않고서도 전화 번호부에 기재되어 있는 인명과 전화 번호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는 전화 번호부의 D자 부분을 펼쳤다. 그리고는 자기 이름 데이몬 로저와 웨스트 10번가라고 씌어 있는 주소를 찾아 보았다. 맨해턴 구역에는 데이몬 로저는 단 한 사람밖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D자 부분에도 있었지만, 그곳에는 그레이 데이몬 가브리엘슨, 문예작품 특약내행 사무소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그레이는 데이몬이 아직 서른 살도 안 되었을 때, 데이몬을 동업자로 하고 사업을 시작했었다. 그레이가 죽은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그 노인에 대한 충성으로 데이몬은 그 업소의 이름을 바꾸지 않고 있었다. 충성은 특히 이와 같은 때에는 미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브리엘슨은 근래에 와서, 다른 입장에서 사업에 가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전화번호부를 덮고는 선반 위에 단정하게 올려 놓았다. 실라가 돌아 왔을 때, 아무런 트집잡힐 실마리를 남겨 놓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그녀에게 말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기회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는 벽에 붙여 놓은 데이블에서 독한 위스키와 소다수를 들어 술잔에 따라 안락의자에 몸을 묻고서는 천천히 마셨다. 술을 마셔 보았지만, 아침 3시 반에 일어난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결론을 내리는 데에는 아두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뉴욕에는 미치광이들이 많다고 그는 생각했다. 뉴욕 뿐만 아니라 미국에는 미치광이들이 들끓고 있다. 아니, 세계가 온통 미치광이로 꽉 차 있다. 길거리에는 제멋대로 사람을 살해하는 암살자들이 배회하고 있다. 그들은 대통령을, 교황을, 역에서 기다리고 있거나 교회에서 나오거나, 또는백화점에서 나오고 있는 사람들을 제멋대로 죽인다. 생사에 관한 문제라고 그 사나이는 말했었다. '당신의 생사에 관한 문제라고...' 만일 그 말이 전적으로 터무니없는 장난이 아니라면, 어면 낯선 자가 또는 자기를 알면서도 자기가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자가, 어딘가에서 자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는 이제 너무 지쳐서, 그런 자가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자기를 기다리고, 또한 무엇 때문에 이제까지 기다려 왔을까 하고 궁리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이것은 한밤중의 사색이었던 것이다.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잠을 다시 청하려고 침실로 돌아갈 때, 그는 거실의 불을 모두 켜 놓은 채 그 자리를 떴다. 제 2장 다섯 시간의 망각 발 소리에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 나타난 것은 또다시 그의 아버지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홀로 밝은 빚을 받으며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다정한 얼굴은 반짝이고 있었다. 아버지는 데이몬이 열 살쯤 되었을 때의 모습처럼 젊어 보였고, 임종이 가까왔을 때처럼 수척하고 지친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조각한 대리석 난간처럼 보이는 것애 기대어 서서 한 손을 흔들며 오라고 부르고 있었다. 다른 손에는 조그마한 얼룩말 장난감을 들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이들의 장난감을 만드는 사람이었으며, 값싸고 자질구레한 장신구 제조업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20년 전에 돌아가셨다. 이번에 울린 소리는 전화벨 소리가 아니었다. 교회에서 울리는 종소리였다. 일요일 아침이다. 하느님을 섬기고 예배를 드리도록 뉴욕 시의 사람들을 부르는 소리였다. 최고의 권력을 지닌 이 도시의 모든 충성스러운 사람들이여, 오라 ! 너희들 요사스런 간부 들이여, 착취자여, 주식 부정 매매업자들이여, 배심원 매수자들이여, 주정뱅이들이여, 마약 중독자들이여, 강도들이여, 살인자들이여, 위중자들이여, 남자를 꾀어서 바가지를 씌우는 여인들이여, 디스코 춤에 미친 자들이여, 소매치기들이여, 마라톤 선수들이여, 간수들이여, 무법자들이여, 거깃 교리를 믿는 자들과 이를 전도하는 자들이여, 모두와서 하느님을 숭배하라고부르는 소리였다. 데이몬은 침대에 누운 채 몸을 움직여 보았다. 그의 옆에 실라가 없는 것이 그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그는 밤중에 걸려 온 전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자기 손목시계를 보았다.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느 때 같으면 그는 일곱 시까지는 일어나 있었다. 그러나 자연은 그에게 친절을 베폴어서, 네 시부터 아홉 시까지 잠자도록 허락해 주신 것이다. 다섯 시간의 망각. 이것은 그에게 내려준 일요일의 선물이었다. 그는 잠자리에서 나왔다. 욕실로 가서 이를 닦고 샤워를 하는 대신에, 그는 맨발로 뚜벅뚜벅 거실로 발길을 옮겼다. 등불은 여전히 모두 켜져 있었다. 그는 현관 문으로 가서 현관 바닥에 무슨 전갈이라도 들어 있는 봉투라도 떨어져 있지는 않은가 하고 살펴 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자물쇠를 살펴 보았다. 자물쇠라고 해 보았자 보잘것 없는 간단한 것이었다. 아이들이라도 펜대만 있으면 열 수 있을 정도의 것이었다. 그가 오랫동안 뉴욕에서 샅아왔지만, 단 한번도 도둑을 맞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자물쇠에 관해서는 전혀 생각 해 본 적이 없었다. 이 건물이 세워졌을 때 달은 문은 목재였는데, 오래 되어서 낡을 대로 다 낡아 있었다. 건물은 언제쯤 세위졌을까? 1900년? 그보다도 전인 1890년? 그는 그 문을 철제 문으로 바꿔 달고 자물쇠도 튼튼하게, 밖을 내다 보는 구멍도 만들고, 체인도 달아 두고 싶었다. 그러나 아랫층에 문을 지켜주는 사람도 없었고, 아파트 각 세대로 연결되어 있는 부저가 고장이 나자 실라와 자신은 물론, 아파트에 세들어 있는 사람 모두가 현관문을 여는 버튼을 누르는 일에 무관심해지고 말았다. 그 버튼을 누르기 전에, 밑에 와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통화 장치는 고장이 난 지가 벌써 몇 년이 지났다. 데이몬이 알고 있는 바로는,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 사람 누구 하나 집주인에게 불평을 하면서 이것올 고쳐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처럼 천진난만한 사람들의 안전이 너무나도 소홀하게 여겨져 왔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손수 아침식사 준비를 하였다. 실라가 일요일에 집에 있을 때는, 그녀는 그에게 새로 짠 오렌지 쥬스에다 팬 케이크, 그리고 매이플 시렵을 바른 베이컨을 먹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는 커피 한 잔에 어제 먹다 남은 빵 한 조각으로 때워야만 했다. 그가 보통 일요일에 하는 행사는 색 달랐다. 그의 아내 실라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그는 밖에 나가서 선데이 타임즈 지를 두 부 사왔다. 왜냐하면 그와 아내 실라는 둘 다 일요일 지면에 나오는 낱말풀이를 서로 방해하지 않고 풀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이들 부부는 식당 양쪽 끝에 서로 마주보고 앉아서 조용히 아무 말도 없이, 신문을 뒤적이며 오전을 보냈다. 그 낱말풀이를 잉크로 써야만 그들 부부에게는 체면이 서는 일로 되어 있었다. 뉴스에 대한 의견, 광고, 칭찬, 비난 등을 가득히 담은 두 개의 큰 종이 뭉치는 일종의 터무니없는 어면 일을 뜻하고 있었지만, 낱말풀이는 조반을 보람있게 든 후 갖는 주말의 기쁨이었고, 한두 시간을 보내는 조용한 즐거움이었다. 그는 옷을 입고 희미하고 조용한 계단을 내려갔다. 이웃 사람들도 모두 늦잠을 자고 있는 듯하였다. 혹시 이웃 사람들 중에서도 한밤중에 전화를 받은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의 우펀함 속에는 아무런 쪽지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주머니를 만져 보고 열쇠가 있는가를 확인했다. 그래야만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거리로 통하는 작은 현관 계단을 밟고 밖으로 나섰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는 으스스하고 침침한 날씨였다. 금년에는 봄이 늦었다. 그는 거리를 아래 위로 살펴 보았다. 한 개의 가죽끈에 두 마리의 작은 개를 매고 가는 뚱뚱한 부인 한 사람과 유모차를 밀고 가는 젊은이 한 사람만이 일요일 아침 길의 교통을 이루고 있었다. 적어도 잠복해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잘은 모르지만, 훈련된 사람의 눈에는, 거리는 불길한 징조가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자신의 신경과민에 스스로 기분이 불쾌해진 것이다. 신문 판매점에서 신문을 한 부만 사느냐 또는 두 부를 사느냐를 결정하려고 그는 잠시 망설였다. 그는 주착없이 부피만 크고 무거운 신문에 난색을 표하며 늘 하듯이 신문 두 부를 집어 들었다. 실라가 버몬트에서 선데이 타임즈 지를 살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으나, 아내가 돌아와서 비록 낱말풀이를 할 시간은 없다 손 치더라도 자기가 없을 때에도 자기를 생각하고 낱말풀이 한 부를 남겨둔 것을 보고서는 고맙게 여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신문 제 일면을 보았다. 잘로프스키라는 이름은 없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의 실명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실제 이름은 스미스나 브라운인지도 모르고, 잘로프스키는 그의 가명이며, 내면에 그가 저지른 여러 가지 범행을 설명한 이야기가 실려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범인을 10 개 주의 경찰이 추격중에 있을 지도 모른다. 비록 그가 잘로프스키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가 꾸미고 있는 복수나 또는 법죄에 대해서는 그가 틀림없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데이몬은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데이몬은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며 아무런 의심을 품지 않은 채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아침은 이제 정상적인 일요일의 양상을 되찾았고 하늘을 뒤덮고 있던 구름이 잠시 벌어져 거리에 햇빚이 비치자, 그의 기분도 한결 가벼워지고 편안해져서 문으로 들어설 때는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식탁에 앉아 낱말풀이를 하기 시작하자, 문제가 너무나도 어려워서 가까스로 두서너 줄밖에는 풀 수가 없었다. 문제가 보통 때보다 더 어렵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신을 집중시킬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신문의 잡지 부문을 옆으로 던져 버리고, 베스트 셀러로 올라 온 서적들에 대한 서평란을 펼쳐 보았다. 제네비브 돌저의 <비가>가 올라와 있었다. 제목은 별것 아니었지만, 이 책이 12주 동안이나 연속으로 베스트 셀러로 올라 있었다. 데이몬은 그럴 수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이는 오직 올리버 가브리엘슨의 억지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올리버 가브리엘슨은 저자와 함께 일을 시작하여, 그 책을 팔도록 힘쓸 것에 동의했으며, 그들은 이 일로 인해서 회사와는 거의 손을 끊고 있었다. 올리버 가브리엘슨은 그의 보조역을 담당하고 있고, 그와는 거의 15년을 함께 일해 오고 있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책을 읽는 난독자였으나,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고, 색다른 내용을 담은 책에 대해서는 다소 남다른 견식을 가진 통찰력 있는 사람이었다. 올리버는 롱 아일랜드, 로스린 교외에서 개최된 파티에서 제네비브 돌저 부인과 만나게 되었다. 그곳은 일반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발견되는 그런 종류의 장소가 아니었다. 그 작가는 50대의 부인이었다. 그녀의 남펀은 작은 은행의 부 은행장이었다. 그녀는 네 아이의 어머니로서, 전에는 책을 써 본 적이 없었으나,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런일은 대부분 교외에서 살고 있는 가정주부가 생활의 권태에서 시작하는 일이라고 데이몬에게는 생각되었다. 이러한 소설은 아름다움과 육체, 그리고 남성에 대한 성욕을 이용하여 출세를 하지만, 마침내는 비극으로 끝을 내리는 가난한 소녀에 관한 단순한 환상인 것이다. 그것은 소설 중에서도 가장 오래 되고 케케묵은 종류의 것이었다. 그래서 데이몬은 왜 올리버가 그러한 작품에 열을 을리고 있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대체로 올리버와 그의 취향은 비슷하였다. 그러나 올리버가, "돈입니다. 이 책은 표지만 보아도 돈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번쯤은, 우리 힘으로 커다란 파이 한 조각을 먹어 봅시다"라고 말했을 때, 데이몬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올리버, 이 불쌍한 친구야. 자네는 너무 열심히 일하고 있거나, 아니면 너무 많이 파티에 나가고 있는 것 같아." 라고 데이몬이 꾸중했다. 그러나 사무실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리고 모두가 여름 휴가차 뉴욕을 벗어나는 한산한 철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 부인과 함께 일했었다. 그녀는 책을 적어도 세상에 내놓을 수 있도록 만들고, 매우 노골적인 정사 장면의 묘사와 놀랄 만큼 거칠은 말의 어조를 누그러뜨리고, 문법을 고치는 일에는 순순히 말을 들으면서 자기 고집을 내새우지 않았다. 그녀는 책의 제목을 제외한 모든 것에 관해서는 쉽게 납득을 해주었다. 그는 <비가>라는 책 제목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만한 제목이 되지 못한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끝내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았었다. 그도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말에 따랐다. 그녀의 훌륭한 점은, 그 책이 성공한 후에도 그녀는 그가 서글픈 예측을 한 데 대해 그를 전혀 비웃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모든 일에 비 직업적이었다. 관례상 대행업자의 수수료는 10퍼샌트였으나, 그녀는 전체 수입의 20퍼샌트를 그가 차지할 것을 주장했다. 반은 농담삼아, 그는 이처럼 터무니없는 관대한 행위는 절대 비밀로 해 줄 것과, 만일 이 말이 새상에 알려진다면, 그녀는 일생 동안 전국적으로 작가들의 조직에서 거절 당하는 위험이 있음을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이러한 소설은 그와 그의 옛 동업자 그레이가 전에 신경을 써 본 적이 없는 종류의 책이었다. 그들은 대개 젊은 작가를 발견하여, 좋은 평을 받아서 적당한 판매고를 올릴 수 있을 때까지 그 젊은 작가들을 뒷받침해 주는 일에 헌신해 왔었다. 때로는 그 작가들이 소설이나 극본을 완성할 때까지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까지 해주었다. 그러나 그들 두 사람 중 아무도 큰 돈을 벌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도와준 젊은 남녀들은 실망할 정도까지 평범한 소설가로 되어 버리거나, 마약 중독자나 알콜 중독자가 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헐리우드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는 제네비브 돌저 부인의 책에 거의 희망을 걸지 않고 있었다. 대여섯 출판사에서 연달아 그 책의 출판을 거절하였을 때, 그는 다소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는 로스랜에 있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서, 작은 출판사가 소량의 초판을 발행하기 위해 약소한 선금을 지불하고 이 책을 발행한다면, 그 책은 거의 팔릴 전망이 없다고 정중하게 유감의 뜻을 표하며, 말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이 책이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오르고, 1백만 달러의 매상 실적을 올렸으며, 또한 헐리우드에서는 영화를 제작하겠다고 하면서 제작권을 사가기도 하였다. 그의 몫으로 들어오는 수수료의 금액이 천문학적 숫자가 되었다. 처음으로 그의 이름이 신문에 올랐다. 그러자 그의 사무실은 유명하고 높은 댓가를 받는 작가들의 원고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들 작가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현재 거래하고 있는 대행업자에게는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는 이 사업에 오랜 생에를 바쳐 왔으나, 그러한 작가들과는 대부분이 전에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노름이란 결국 이길 승산이 있는 것을 따라 잡아야만 하는 거라구요." 올리버는 우쫄대며 말했다. 올리버는 자기 보수를 두 배로 올릴 것과, 그의 이름도 동업자로서 문에 건 간판에 올려야 한다고 요구했다. 데이몬은 올리버의 이 두 가지 요구사항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데 동의하고, 회사 이름을 그레이 데이몬 가브리엘슨으로 바꾸었다. 데이몬은 그에게 파티에는 좀 덜 참석하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올리버가 명색이 사무실이지 구차한 두 칸의 방에 지나지 않는 이곳에서 좀 더 화려하고 새로 흘러 들어오는 많은 고객들을 맞기에 적당한 장소로 사무실을 옮기자고 하였을 때는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이봐요, 로저씨." 올리버가 말했다. "누군가가 이곳에 들어와 보면, 혹시 우리가 아직도 깃털 펜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느냐고 물을 거라구요." "올리버." 데이몬이 타일렀다. "내 말 좀 들어 보게나. 지금까지 자네는 오랜 세월을 나와 함께 일해 왔지만, 나는 그렇게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네, 나는 전생애를 자네가 말하는 이 구차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 사무실에서 지내 왔고, 이곳에서는 재수도 좋았다네. 그래서 나는 아침에 일하러 이곳에 오는 것이 무척이나 기쁘거든, 나는 거물이 되고 싶은 욕망은 없네. 아마 요즘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그런 수준은 아닐는지 모르지만, 내 나틈대로 훌륭한 생활을 해 왔네. 나는 바다처럼 즐비하게 널려 있는 책상을 바라다보며, 그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내 대신 일하면서 누구를 고용하라, 누구를 해고하라, 사회보장과 연금 적립금을 지불하라, 그 밖의 여러 가지 일들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을 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 <비가>와 같은 경우는 어쩌다 우연히 한번 떨어진 벼락이야. 사실, 그런 일은 두번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네. 그 책이 진열되어 있는 책방 쇼윈도 앞을 지나갈 때는 나는 비굴해지거든. 그리고 매주 일요일마다 <타임즈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라있는 것을 보면, 나의 주말은 엉망이 되고말아. 나는 <비가> 판매량에 대한 인세 계산서에서 얻는 기뿜보다는, 무명의 젊은 작가가 쓴 원고에서 밭견하는 열 줄의 멋있는 글에서 더 많은 즐거움을 받아왔어. 여보게 친구, 자네로 말하자면 자네는 젊고, 요즘 젊은이들의 습성처럼 욕심이 좀 지나친 편이야." 이 말은 좀 정당하지가 않았다. 데이몬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말하고 싶은 요점을 밝히고 싶었던 것이다. 올리버 가브리엘슨은 그렇게 나이가 젊지는 않았다. 그는 지금 마흔에 가까운 나이였다. 그리고 데이몬처럼 점잖고 훌륭한 작품에 도움이 되는 일에 정성을 쏟고 있었다. 그가 자기 봉급을 인상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에도, 그는 거의 사과조로 말을 했었다. 데이몬은 만일 아내가 벌어오는 수입이 없다면, 올리버는 가까스로 굶주림을 면하는 수준의 생활밖에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데이몬은 또한 올리버가 종종 자기로부터 받는 것보다 훨신 더 많은 보수로 출판사의 편집인으로 일해 달라는 제의를 받고 있지만, 그는 이를 그가 데이몬으로부터 받는 비상용 휴대식량과도 같은 보수에 비하면, 그에게는 왕자의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되는 보수를 줄 여유있는 큰 출판사들의 방자한 상업주의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제의를 거절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무실로 굴러 들어오고 있는 예기치 않았던 돈의 물결이 잠시나마 그의 정신을 혼란에 빠뜨리게 하였던 것 같다. 게다가 이제 그가, 동업자로서 받는 몫의 돈은 그를 옷 입는 모양에서 점심을 식당에서 들게 하는 일까지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올리버는 뉴욕시 서부지역에 있는 지저분한 아파트에서 동부 60번가에 있는 작은 단독 주택으로 옮겼다. 데이몬은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올리버의 아내 도리스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녀는 지금까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이따금 밍크 코트로 옷치장을 하고서는 사무실에 나다났다. "올리버, 자네는 아직도 나이가 어려서 수수한 생활이 얼마나 마음 편한 일인가를 모르고 있네." 데이몬은 자신의 옛날 고용주였던 그레이씨가 부하직원에게 강의를 늘어 놓는 기회를 즐기듯이 이렇게 말을 늘어놓았다. "절도있는 목표와 심지어는 절도있는 세속적인 성공을 향유함에 있어서 인간이 교만해지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무덤 속에 몰아넣고 있는 일들이 자네에게 아무런 의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법이야. 나는 일생을 살아오는 동안 병을 앓아본 적도 없고, 고혈압으로 고생한 적도 없고,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본 적도 없어. 단 한번 병원에 입원한 적은 있지. 길을 건널 때 차에 부딪쳐서 다리에 상처를 입고 쓰러졌기 때문이었지." '나무를 두드리세요. 나무를 두드리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하고 올리버는 말했었다. 데이몬은 올리버가 자기의 설교를 고분고분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우리가 타지마할 영묘에 세들자고 제안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고 올리버가 말을 이었다. "우리가 각각 방 하나씩 갖고, 우편물을 취급하는 비서라도 한 사람 더 둘만한 곳을 빌린다고 해서 우리가 당장 망하는 것은 아니쟎아요? 그리고 요즘같이 전화가 수없이 걸려 오는 데도 불구하고 전화 한 대로 받는 것은 자만에 빠져 있는 거라구요. 바로 지난 주, 랜덤 하우스 출판사에 있는 한 친구는 통화를 하기 위해 이틀 동안이나 우리 전화번호를 돌렸다고 말하더군요. 그는 다음번에 우리와 연락할 일이 있으면, 아프리카 토인들이 쓰는 톰톰 북을 이용할 작정이라고 하더군요. 교환대를 하나 설치했다고 해서, 당신의 정신이 실용주의에 굴복했다고 모든 사람이 생각지는 않을 겁니다. 만일 우리가 6개월마다 한 번씩 유리창을 닦는다면 그것이 죄스러운 사치는 되지 않을 거구요. 여기서는 바깥 날씨가 어떤지 알고 싶어도 라디오를 들어야만 한다구요." "내가 없어지거든," 데이몬은 일부러 소리 높여 말했다. "자네 마음대로 록펠러 센터에 가서 한 층을 통째로 빌려, 접수계 여직원으로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희 당선자를채용해도좋네. 하지만, 내가 여기 있는 동안은, 우리 사업은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하겠네." 올리버는 흥, 하고 콧방뀌를 뀌었다. 그는 몸집이 작고 금발머리의 사나이었다. 그의 안색은 거의 색소 결핍증에 걸린 사람처럼 창백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그는 자세를 똑바로 하고 어깨는 군대식으로 펴고 다녔다. "당신이 없어지거든..." 하고 올리버가 말을 꺼냈다. "하지만, 당신은 1천 년 동안은 죽지 않을 거요." 그들은 매일 소매를 걷어 부치고 얼굴을 맞대고 일해 왔기 때문에 친구 사이처럼 되어 버려, 두 사람 사이에는 격식이라는 것이 없었다. "내가 거듭 말한 바와 같이," 레이몬이 한 마디 했다. ''가급적 빨리 은퇴하여, 이 사무실을 운영하느라고 읽을 시간이 없어서 못 읽은 모든 책을 읽어볼 생각이네." "그것도 두고 봐야 믿을 수 있겠죠." 올리버가 대꾸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자네의 그 궁전 같은 새 사무실로 자네를 절대로 찾아가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그리고 나는, 자네가 나에게 보내기로 계약한 제 4분기 수표를 수금하는 것으로 만족할 걸세. 또 자네가 도적 같은 회계사를 시켜 장부를 조작하지 않는 것으로 믿어 주기로 할 걸세." "바로 당신 눈앞에서 속일 것을 약속하지요." 하고 올리버도 질세라 대꾸했다. "물론 그러겠지." 데이몬은 이렇게 말하며 올리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자, 그 일은 이 정도로 그만 해 두세. 그리고 자네의 민감한 감수성에 양보하는 뜻에서, 내가 내 돈으로 사람을 사서 내일 유리창을 닦도록 시키겠네." 그들 두 사람은 함께 소리내어 웃고 나서는 각자의 일로 되돌아 갔다. 일요일을 알리는 교회 종소리는 아직도 울리고 있었다. 베스트 셀러 리스트가 실려 있는 서평란을 앞에 펼쳐 놓은 채, 사방에 난잡하게 흐트러져 있는 거실에 앉아서 그는 올리버와 주고 받은 대화, 그리고 ''돈 입니다. 은통 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라고 한, 올리버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올리버의 말이 옳았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데이몬은 또한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신문을 읽었소"라고 한 잘로프스키의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잘로프스키가 모르고 있었던 것은, 수입의 대부분이 장기간 동안 밀려온 부채를 지불하고, 실라의 소망과 자식 없는 삼촌이 유언으로 그녀에게 남겨 준, 코네티컷주의 올드 라임 롱 아일랜드 사운드에 있는 작은 집을 수리하는 데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 부부는 여름휴가를,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가끔 주말을 그곳에서 보내며, 집이 쓰러질 듯한 상태를 무시해 버리려고 하였었다. 이제 그 집은 지붕도 새로 갈았고, 배관시설도 새 것으로 갈아 끼웠고, 패인트칠도 끝나서 말끔해졌을 것이다. 데이몬이 은퇴할 때쯤에는 모든 준비가 다 될 것이다. 의도적인 공갈이나 협박과 같은 단순한 위협인 경우, 지루하고 따분한 날 어떤 신문기자가 기고란에 몇 줄 글을 쓰는 댓가를 요구하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데이몬은 생각했다. 그것이 그처럼 간단한 일이었을까 하고 그는 의심도 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단서였다. 그는 로스린의 전화번호를 돌렸다. '제네비브 부인." 그 부인이 직접 전화를 받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아침 타임즈 지를 보셨는지요?"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니겠어요?" 제네비브 부인이 말했다. 그녀는 마치 언제나 남편과 아이들에게 반박을 당하고나 있듯이, 작고 방어적인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매주 계속되다니 ! 정말 동화 같은 이야기예요 ! " 그보다도 적어도 알고 있어야 할 일이 있는데, 부인하고 데이몬은 말할까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부인은 모든 곳에서 독자들을 완전히 감동시켜 놓았어요." 페이퍼백으로 책을 찍어 팔기 시작하기 전만해도, 그는 자신이 직접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면 얼굴을 붉혔을 것이다. ''부인에게 물어보고 싶었는데요.. 혹시, 부인은 잘로프스키라고 하는 사람으로부터 진화를 받은 적은 없나요?" "잘로프스키라고요? 잘로프스키요? '' 제네비브 부인의 자신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억이 나지 않는테요. 요즘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계속 전화를 걸어와서요. 텔레비전, 라디오, 기자회견 등등.. 저의 남편은 건화 번호부에 실려 있지 않은 전화번호를 신청하겠다고 야단이라구요." 여기에 또 전화번호부에 실려 있지 않은 번호가 생기겠군, 하고 데이몬은 생각했다. 성공과 도피. 이것이 바로 미국식 생활방식이다. "잘로프스키라고요?" 제네비브 부인이 계속했다. ''왜 그러시죠 ? " "저에게 전화를 걸어왔었습니다. 그 책에 관해서 말입니다. 그 사람은 매우 막연한 말을 하더군요. 그는 다시 전화를 걸지 모른다고 했어요. 제 쟁각으로는, 아마 부인과 직접 거래를 하기를 바라는 것 같아요. 부인도 아시다시피, 저의 사무실에는 올리버와 저와 비서 세 사람밖에는 없쟎습니까? 부인 작품이 크게 히트를 치고 난후로는, 모든 요구사항을 제때에 처리하기가 힘들어 졌거든요. 몇몇 큰 사무실을 가진 곳은 이렇지가 않지만 말입니다. 사람들도 많고, 부서별로 모든 일이..." "알고 있어요, 제가 당신에게 가기 전에, 그들은 모두 저의 제안을 거절했어요." 이제 그녀의 목소리는 방어적이 아니고, 신랄하며 냉정해졌다. "그리고 평범한 예의조차도 보이지 않았어요. 당신과 올리버는, 제가 책을 쓴 후 처음으로. 만난 참다운 신사분이 었어요." ''출판은 신사의 사업이다 하고 왕년의 동업자인 그레이씨가 즐겨 되물이하던 말입니다만, 우리는 이 옛말을 명심하도록 애쓰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오래 전의 이야기이고 시대도 많이 변했죠. 하지만 예의는 어떤 자리에서든 올바르게 평가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그는 제네비브 돌저 부인에게 말을 할 때는 언제나 불펼함을 느꼈다. 자신의 말이 마치 풀을 먹여 다리미질을 한 것처럼 그의 귀에는 뺏뺏하게 들렸다. 일생을 그와같은 환경에서 살아온 그가 이 여인에게 정상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데 대해서 당황하기도 했다. 데이몬은 감정을 숨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칭찬하는 말이 되었든 경고의 말이 되었든 간에,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대행의 피인에게 말하는 것을, 그는 자신의 정책으로 삼았고, 또한 이를 자랑으로 여겼다. 만일 의뢰인들이 그의 비평하는 말에 새침을 때거나 화를 내거나, 또는 지나치게 방어적인 자세로 나오면, 그는 솔직하게 다른 대행업소와 거래하는 것이 더 좋을 거라고 말하곤 했다. 그것만이 그가 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는 의뢰인들 에게 설명하였다. 그런데 이 여인, 자기를 부자로 만들어 준 이 여인은, 마치 매시맬로유를 입 가득히 물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제가 당신의 도움이나 또는 제가 신세진 일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만은 알아 주세요." 제네비브 부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두 분께서 저에게 베풀어 주신 호의만은 제가 평생을 두고 잊지 않고 고맙게 여길 거예요." "그러실 거라고 믿습니다." 데이몬은 이렇게 말하며 생각해 보았다. 종종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작가들은 모두가, 때로는 창피스러운 듯이, 때로는 노발대발하며, 영화배우를 소개해주고 공항까지 리무진을 보내 마중 나오고, 몇 개월 전에 매진된 대히트 작품의 영화나 연극의 마지막 공연 입장권을 확보하고, 전국적인 델레비전 선전활동을 마련하며, 일류 음식점에 점심식사를 초대해 주는 큰 대행업자로 가버린 일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비밀 전화번호가 나오는 대로 꼭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로저씨, 당신한데 제일 먼저 알리게 될 거예요."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정이 가득 차 있는 것이 데이몬에게는 유감스러웠다. "참 그리고," 그는 그녀가 물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질문을 했다. "새 책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제내비브 부인은 한숨을 지었다. 그녀의 낮고 슬픈 음성이 전화를 통해 들려왔다. "오, 비참할 정도예요. 정말 쓸 수가 없군요. 한 장 쓰고 나서 다시 읽어보면, 완전히 형편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찢어 버리곤 해요. 그래서 울고 싶은 심정을 달래느라고 파이를 굽고 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녀의 말을 듣고 마음이 몹시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그가 말했다. "초보자는 언제나 그런 고통을 겪는 겁니다. 그러니 너무 긴장하지 마십시오. 서두를 필요는 없으니까요. 아시겠읍니까?" ''당신도 저와 함께 참을성을 배울 필요가 있게 될 거예요." ''나는 작가들이 딛고 지나가는 발판이 되는 데는 익숙해져 있답니다." 데이몬은 이 여인을 그 엄격하고 무서운 전문직에 종사하는 개업 작가로 받아들이려면, 그녀의 행운을 빌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작가들은 왔다가는 가버립니다. 그럼, 다시 축하의 말을 드립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 주십시오, 필요할 때는 전화주시는 것을 !" 그는 전화를 끊었다. 만일 재수가 좋으면, 그녀가 새 책을 완성할 때까지 1백 개의 파이를 굽게 될 것이고, 그때는 그가 사무실을 떠나 사운드 강가 올드라임에 있는 작은 집으로 은퇴한 지 오래일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 놓으며 적어도 잘로프스키라는 자가 그녀에게는 전화를 걸지 않았구나 하고 생각했다. 만일 그가 전화를 걸었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데이몬은 마음의 안정을 되찾지 못해 방안을 왔다갔다 하였다. 그는 주말을 이용해서 읽으려고 원고를 집에 가져 왔었다. 그는 원고를 끄집어 내어, 두세 페이지를 읽어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그에게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아서 옆으로 던져 버렸다. 데이몬은 침실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침대를 정돈하였다. 그가 결혼 한 후로는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제네비브부인은 파이를 구으며 마음을 달래고, 그는 침대를 정돈하면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앞으로 여섯 시간 동안은 실라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내가 없는 일요일은 무미건조한 것이었다. 그는 점심 시간이 될 때까지 밖에 나가산책하기로 작정했다. 그가 막 코트를 입으려고 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지치면 전화를 끊어 버리겠지 생각하고 전화 쪽으로는 한발짝도 옮기지 않은 채 전화를 바라보며 벨소리가 여섯 번까지 울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전화벨은 일곱번까지 울렸다. 그는 묵직하고 목쉰 소리가 울려나을 것을 기대하며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러나 전화는 그가 집으로 가지고 오긴 했지만, 우선 읽을 수 없게 된 원고를 맡긴 여인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혹 저의 원고를 다 읽어보셨나 해서요." 그 여인은 음성만은 일품이었다. 정중하고 음악적이었다. 그는 2년 전에 그녀와 잠시 로맨스를 즐긴 적이 있었다. 그의 아내 실라는 어떤 친구로부터 그 일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 여인이 남편의 환심을 사려고 꼬리를 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것은 실라의 상투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그때만은 그 빈말이 옳게 들어맞았었다. 그들이 두 번째 만난 다음, 그 여인은 그 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사실을 말씀드린다면, 당신은 제가 이제껏 만난 남성 중에서 가장 성적으로 매력있는 얼굴을 가지고 있어요, 당신이 방에 들어올 때는, 마치 투우가 경기장으로 들어오는 것 같아요." 그녀는 전에 스패인에 1년 동안 지낸 적이 있었고, 호밍웨이의 작품을 많이 읽은 탓인지, 그녀의 말은 이베리아 사람들의 말투가 많이 섞여 있었다. 만일 그녀가 성교에 관한 말을 사용했더라면, 그는 아마 그녀도, 또한 그녀의 원고에도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삼가했고, 그는 비록 자신을 그녀가 말한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압도당하고 말았다. 실제로는, 그는 자신이 방에 들어설 때, 자기는 비실비실 건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이처럼 창백한 회색의 눈을 가진 숫소를 아직까지 본 적도 없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어면 낯선 외국인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여인은 상당히 예쁘고, 또 상당히 지성적이었으며, 형편없는 작가도 아니었고, 몸도 매일 체육관에 나가 균형있게 잡고 있었다. 그런 여성은 남자를 여자의 잠자리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었다. 그의 나이는 지금 예순 안팎이다. 아직도 무덤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지는 않았다. 보기 드문 쓰라린 괴로움의 순간순간을 견디다 뭇해, 그의 아내 실라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여자에게 낭비하고 있는 거예요." 결혼생활이 그의 특유의 약점을 치유해 주지는 않았다. 성교는기분좋은 일이었으나, 그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읽어본 데까지는 마음에 들어." 하고 그가 말했다. 그는 침대에 알몸으로 누워있는 그녀를, 팽팽하고 탄력있는 그녀의 젖 가슴을,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다리를 그려 보았다. 그는 그녀를 점심식사를 같이 하자고 초대할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하였다. 누군가가 그를 궁지에 몰아 넣으려고 증거를 모으고 있다면, 그 증거가 될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아야지. "오늘 밤까지는 끝내려고 하고 있어. 내가 전화를 걸겠소." 그는 밖으로 나가 목적없이 그리니치 마을의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를 뒤따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대개 일요일에, 그와 실라는 둘 다 좋아하는 작은 이태리식 식당에서 늦으막이 점심을 들곤 하였다. 몇 년 전에 그곳에서 갱단의 한 사람이 총애 맞아 죽은 일도 있었다. 크림소스를 친 스파케티를 먹으며, 그들 부부는 함께 긴장을 풀고, 씁쓸한 이태리 포도주 한 병을 마시며 뒤로 남긴 일주일과 앞으로 맞이할 일주일의 긴장을 풀면서 아늑한 일요일 오후를 보내곤 하였다. 식당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어서, 그는 빈 자리가 나기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식당 주인은 보이지 않은 그의 아내의 안부를 물었다.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손님들의 떠드는 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외로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포도주를 반 병이나 마셨건만 울적한 기분은 좋아지지 않았다. 그는 식사를 하면서, 작은 이태리 식당에서 총에 맞아 쓰러지는 기분은 어떨까 하고 생각하였다. 제 3장 황금을 찾아오는 사냥개 점심을 먹고 돌아와 보니 그의 우편함에 종이 한 장이 절반은 구겨진 채 쑤셔 넣어져 있었다. 그는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 보았다. 종이에 손을 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그 종이 쪽지를 뽑아 들었다. 종이는 스케치 북에서 한 장 뜯어낸 것이었는데, 종이 위에는 진한 검은 연필로 몇 마디 전갈이 휘갈겨 씌어져 있었다. 그레고르가 써놓고 간 것이었다. '이곳을 지나던 길에 잠깐 들러서 초인종을 눌러 보았네. 문전 박대를 받고 발길을 돌리네, 우리를 피해 숨어 버렸나? 친구는 일요일엔 집에 있어야 하는 거야. 우리는 축하연을 열고 있는 중일세. 그 건에 관해서는 만나서 이야기하지. 우리는 우리의 기쁨을 동지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한밥중 전까지 이 글을 읽거든 우리에게로 오게나. 헝가리 스타일의 축하연을 베풀 예정일세. 술도 여자도, 그리고 딱딱한 소시지도 있을 걸세. 적어도 여자 하나와 소시지 하나는 자네 몫으로 돌아가겠지. 전위파 예술가로부터.' 그 쪽지를 읽으며 데이몬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면서 시계를 흘끗 쳐다보았다. 아직 3시도 안 되었다. 아내 실라는 6시까지는 집에 돌아오지 않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언제나 그레고르 코다르와 싹싹하고 재간있는 그의 아내를 만나는 것이 즐거웠다. 게다가 데이몬은 리허설을 가질 예정으로 있는 희곡 작품의 극작가를 대표하고 있었고, 그레고르가 이 연극의 무대장치를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레고르는 자신이 미국으로 귀화하는 과청을 설명하는 가운데에서, 1956년 소련군이 부다패스트를 쳐들어 왔을 때, 서방세계를 걸어서 떠나 뉴욕에 도착하기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걸었다고 그에게 말했었다. 언젠가 한번은 그래고르가 데이몬에게 그의 마음을 털어놓고 모두 말해준 적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러한 일은 인간에게는 좋지 않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 물어 보기도 했지. 나 그레고르 코다르는 인간인가 하고 말야. 나는 그 가부를 검토하고 조사해 보았다네. 나는 마침내 나도 인간이고, 비록 높은 계급에 속하는 인간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인간이라는 부류에는 속한다고 결정을 내렸다네." 그 당시 그레고르의 나이 스무 살, 돈 한푼 없는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이었으며, 그가 뉴욕에서 자리를 잡기까지는 그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는 그 무서운 고난을 겪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고국을 떠날 때, 가족을 두고 왔는지 아닌지에 관해서도 절대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레고르는 자신이 헝가리인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있었지만(언제나 이 잘못된 세기에 덜미를 잡힌 문명민족이 그들의 동포를 설명하는 방법처럼), 그는 그러한 것에 감상적은 아니었다. "중부 유렵은," 하고 그는 입을 열었다. 태평양 한 가운데에있는 산호초와도 같은 곳이야. 조수가 밀려 오면 보이지 않거든. 조수가 나가면 그곳에 있는 것이 보이지. 그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목숨을 걸고 항해를 하는 일 뿐이야. 내가 헝가리 포도주를 마시고 좀 취기가 돌 때에는 피와 바닷물의 뒷맛을 느끼는 것 같아." 넓은 이마에 드문드문 희끗희끗해지고 있는 점은 머리칼, 온화하고 고전적인 미소, 둥글며 편안하게 보이는 중년 남자의 배를 갖고 있는 그를 보고, 데이몬은 언젠가 그에게 재난을 예상하고 곰곰이 사색에 빠져 있는 부처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부드럽게 그리고 그의 특유한 억양을 붙여서 말하며, 깊이 파인 눈초리에는 조롱하는 빚이 반짝이고 있고, 입술은 살해 용이 아니라 벽 장식용으로 만들어 걸어 놓은 활처럼 양끝이 위로 올라가 있는, 그런 표정의 얼굴을 하고 있을 때에는 그가 하는 말은 하나도 심각하게 들어 주지 말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전국 화랑에 전시된 유화를 그리는 일 외에도, 브로드웨이 극장가에서 상영되는 많은 연극의 무대장치를 도맡아 해온 헌신적이고도 재능있는 예술가였다. 그레고르는 천천히 그리고 정성들여 그림을 그렸다. 그는 자신이 설치한 무대장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많은 무대장치 수고비를 거절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는 부자처럼 여유있는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가난한 대신에 친절한 친구가 많다는 것에 비유하여 농담을 하곤 하였다. 개척시대의 여인처럼 지친 얼굴을 한 몸집이 크고 수척하며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닌 여인, 그의 아내 에바는, 미네소타주에 살고 있는 스웨덴계 출신으로 무대의상 디자이너였다. 이 두 사람은 애정이 깊고 사회적으로도 매우 보람있는 부부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외에도, 매우 유익한 작업팀을 구성하고 있었다. 데이몬은 무슨 일로 그레고르가 축하연을 베풀고자 하는지 전혀 짐작이 가는 것은 없었지만, 이들 부부가 함께 일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개조한 허드슨 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크고 우뚝 솟은 화실에서 몇 시간 떠들고 대화를 나누는 편이, 기나긴 일요일 오후를 혼자서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것보다는 확실히 나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혹시 실라가 예정 시간보다 일찍 돌아오는 것을 생각해서, 자기가 그레고르의 집에 가 있으니 전화를 해 달라는 쪽지를 남겨 놓았다. 실라는 그들 부부를 좋아했다. 작년 여름에 그레고르 부부가 코네티컷으로 그들을 방문했을 때, 그레고르가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아내는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레고르는 그 작품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이젤에서 때지 않은 채 그의 화실에 남겨 두었기 때문에, 레이몬은 이따금씩 그림에 살짝 손을 대볼 수가 있었다. "부인, 문제는 부인이 고상하고, 얼굴에는 표정이 있고, 몸은 맵시가 있으며, 인격이 갖추어져 있고, 또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화가들이 고결함을 표현하려고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고결함이란 전혀 없어요.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고상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잡종개, 뉴질랜드 개, 황금을 찾아오는 사냥개, 아일랜드 세터종 개들 뿐입니다. 저한테 시간을 주세요. 저한테 시간만 주신다면, 저는 13세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15세기로 돌아간다는 것은 지하철을 잠깐 타고 가듯이 금세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고 그레고르는 실라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레고르는 데이몬을 얼싸안고 반겨 주었고, 에바는 그의 볼에 수줍은 키스를 하며 맞아주었다. 예술가의 복장은 그래야만 한다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그레고르는, 채크 무늬가 있는 플란낼 셔츠에 크고 밟은 오렌지색의 넥타이를 매고 혈렁한 코듀로이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는 또한 짙은 초콜렛 색의 트위드 저고리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아무리 더운 날씨에도 이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이것은 한때 그가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너무나도 춥고 떨었기 때문에, 따뜻함이란 그에게는 다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음을 말해 주는 듯하였다. 다른 화가들의 화실과는 달리, 전시용으로 걸려 있는 그레고르의 작품 견본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젤에 놓여 있는 실라의 초상화는 천으로 덮여 있고, 그가 그린 다른 캔버스는 모두 벽읕 향해 쌓여 있었다. "내가 어면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는, 내가 이미 그린 것을 다시 쳐다보기가 두려워. 내가 지쳤거나 또는 험한 길을 걷고 있을 때는, 그 길을 쉽게 빠져 나가려는 유혹을 받기가 쉽거든. 이것은 자신을 도용하는 일이라구. 밤늦게, 그날 할 일을 마치고 술에 취해 나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웃거나 또는 우는 거야. 그리고 나서는 그것들을 또다시 숨겨 놓는다네." 그레고르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이렇개 말한 적이 있었다. 큰 파티가 아님을 알고 데이몬은 안심하였다. 제임츠 프탱클린이라는 부부 한 쌍만이 참석하고 있었다. 데이몬은 전에 그레고르와 함께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로서, 메디슨 가에 화랑을 갖고 부부가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프행클린 부부는 반핵 뱃지를 달고 있었다. 데이몬은 핵무기를 반대하는 시위가 그날 있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떠올랐다. 또한 파티에는 젊었을 때, 남편과 이혼을 하고 골동품 가게를하고 있는, 약 예순 살쯤 되어 보이는 베티나 레이시라고하는 쾌활하고 멋진 여인이 끼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으며, 그레고르가 약속한 대로, 엷게 썰은 딱딱한 헝가리 소시지가 큰 쟁반 위에 당근을 곁들여 놓여 있었다. 서로 인사를 나눈 뒤, 그들은 서구식으로 크고 깨끗한 둥근 나무 테이블 주위에 각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이것은 무엇에 대한 축하연이지 ?" 하고 데이몬이 물었다. "때마침 잘 왔네, 나의 친구." 그레고르가 말했다. "우선 한잔하지." 그는 데이몬의 술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데이몬은 술병 딱지를 흘끗 쳐다보았다. 헝가리 포도주였다. 그가 한 모금 마셔 보았지만, 피와 바닷물의 맛은 나지 않았다. "다음은,'' 하고 그레고르가 말을 이었다. "베티나 여사께서 직접 자신에 관한 말씀을 하실 겁니다. 그 다음에 축하연을 시작할 겁니다. 베티나 여사 ?" 그는 골동품 가게를 하고 있는 여인을 향해 크게 몸짓을 하였다. 그바람에 그의 포도주가 약간 엎질러 졌다. "그레고르씨." 레이시 여사는 항의라도 하는 듯이 말했다. "당신은 그 이야기를 이미 들어서 다 알고 있으면서 왜 그러시오?" ''로저는 모르고 있어요." 그레고르가 반박하고 나셨다. "나는 로저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알고 싶어요. 로서는 현실적이고 정직한 사람이거든요. 나는 내가 이해이해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이든 로저의 의견을 중요시한답니다. 자, 시작하새요." "그럼 말씀드리겠어요." 하고 그 여인은 말하기 시작했다. 전적으로. 마지 못해서 말을 꺼내는 것만도 아닌 것 같았다. "제 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딸이 로마에서 공부하고 있다고 언젠가 한번 말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요...." "네, 그래요." 하고 데이몬이 맞장구를 쳤다. "딸 아이는 그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나오는 것에서, 제가 흥미를 느낄만한 가구라든가 옛날 은 제품 따위를 지켜보고 있어요. 지난 일요일에는 바로 로마시 교외에서 큰 골동품 박람회가 열렸답니다. 그 아이도 가보고 쓸 만한 물건을 찾아내서 저에게 알려 주겠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이틀 전에 자동차까지 세를 빌려 놓고서도 그곳에 가보지 못했다고, 그 사연을 적은 편지를 그 아이로부터 받았어요." 그녀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마치 가슴 아픈 이야기며, 그 말을 하자면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굳혀야만 한다는 것 같아 보였다. "딸 아이는 이렇게 적었어요. 일요일 아침에 눈을 뜨자, 미처 침대에서 나오기도 전에 무서운 불안, 공포 같은 것을 느꼈다고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어떤 진공 상태에 빠진 기분 같았다고 말했더군요. 그 아이는 아침 식사조차도 준비할 만큼 정신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고, 시외까지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야만 한다는 생각에 그만 울어 버렸대요. 딸애는 내내 혼자였고 자신이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답니다. 그 아이는 쉽게 눈물을 흘리는 아이가 아닌데 말예요. 그 아이는 어렸을 때도 좀처럼 울지 않았어요. 딸 아이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옷을 입는 데도 한 시간 이상이나 걸렸대요. 실제로 하루 종일 그렇지는 않았으나, 아침 내내 딸 아이로부터 사라지지 않는 불안감 때문에, 딸 아이는 자동차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는군요. 그래서 그 아이는 보르게세 정원의 양지 바른 곳에 앉아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다른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자기 숙소로 돌아와서 잠자리에 들었고, 세상 모르게 잠이 들어, 그 다음날 아침 까지 눈 한 번 뜨지 않았다는 거예요." 레이시 여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그런 날에 자신이 딸 아이를 위로해 주지 못했던 것에 죄의식이라도 느끼는 듯, 슬픈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딸 아이는 전날에 겪었던 괴로움도 가시고, 기분도 좋아지고 마음도 안정되었기 때문에 일하고 있는 도서관으로 가는 길에 아침 신문을 가지러 내려 갔대요. 그때 그 아이는 일면의 머리기사 제목을 보았나 봐요. 바로 박람회가 열리고 있었던 낡은 목조 건물에 무서운 화재가 났었고, 모든 문이 잠겨 있었기 때문에 3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었다지 않겠어요." 베티나 여사는 마치 그 이야기를 하는 데 기진맥진하였다는 듯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방안에 침묵이 흘렀다. "데이몬씨는 예감이라는 것을 믿고 계시나요?" 하고 프랭클린이 물었다. 프랭클린은 예의 바르고, 실무에 능한 사람이며, 상당량의 그림을 다루고 있었다. 그 사람의 말투에서 데이몬은, 그가 그 딸에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기를 바라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글쎄요." 데이몬은 그 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나타내고 싶었던 것 이상으로 놀라며 말했다. "물론, 심리학자 융과 그 다음의 심리학자인 아더 괴슬러는...." "하지만 그 사람들은 아직 아무것도 증명한 것이 없읍니다." 프행클린이 공박하고 나섰다. "그레고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나는 증명될 수 없는 것이라도 믿습니다." 그레고르가 대답했다. ''우리 모두 다시 한 잔 들어야 할 것 같군요." 그레고르가 차게 한 포도주 한 병을 다시 가지러 주방에 들어 갔을 때, 레이시 여사는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요. 그레고르씨의 파티에 흥을 깰 생각은 없었다구요. 어찌 되었든 간에 당연히 저는 남은 여생을 두고 이 일에 대해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거예요." 그녀가 말한 후 약간 불편한 침묵이 흘렀고, 휴일의 즐거운 기분이 잠시나마 깨어지는 듯하였다. "오늘 이 파티는 무엇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죠?" 하고 데이몬은 레이시 여사의 딸의 행동에 대한 골치 아픈 의미를 생각하기보다는, 대화의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려고 이렇게 물었다. ''우리는 공동으로 재단 보조금을 받게 되었다네." 그레고르가 말했다. "에바와 나말일세. 일 년 간 유럽에 가 있게 되었지. 문화의 원천지에 가서 우리의 재능을 새롭게 하다니, 얼마나 흐뭇한 일인가?'' 그는 싱글벙굴 웃으며 말했다. "박물관, 오페라, 성당, 푸짐한 저녁식사, 프랑스 포도주, 미국의 기계로 만들어 내는 음식보다는 훌륭하겠지. 미국은 풍요한 나라지만 있는 거라곤 석유회사, 의회 그리고 새로운 의료보험 제도 등 보조금은 무조건이란 단서가 붙고, 나는 석유 유정탑 그림이나, 또는 회사원들, 또는 그들의 부인의 초상화를 그릴 필요도 없고, 에바는 사교계에 처음 나가는 따님들의 의상을 디자인 할 필요도 없지. 우리는 일주일내로 출발하네, 왜 그러나, 로저 ?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군 그래." "물론, 자네를 위해서는 기쁘지." 데이몬이 말을 받았다. "하지만 난 자네가 내가 쓴 연극 각본을 보아 주었으면 하고 바랬었는데... 그 연극은 금년 가을에 무대에 올리기로 되어 있네. 자네가 관심을 가져주리라 생각했었지." ''무대장치는 한 세트이고, 등장인물은 두 사람이라면서 ? 내 말이 맞나?" 그레고르가 물었다. "세 사람이야. !" 데이몬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익스피어의 작퓸은 아마 삼사 십 명의 인플에다 장면이 스무 개는 될 걸세, "셰익스피어는 은행이나 노조를 취급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레고르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불쌍한 셰익스피어지. 귀중한 경험을 거부하였고, 또한 그런 자기 사상을 그의 작품에 나타내 주었지, 그렇지 않은가 로저?" "이것 봐, 뉴욕의 주장은 말라 비틀어진 허도처럼 줄어버렸어. 거리에서 넥타이를 내다 놓고 파는 행상인처럼 말야. 자네가직접 나서서 목수든지 그렇지 않으면 내부 장식가를 구해 봐. 연극이 시작될 때, 그 장치를 내게 설명해 줘. 나는 요술 피리를 관람하며 스카라 극장에 있을 거야. 무대에는 침실, 거리, 수많은 배역, 조각상, 지옥의 블이 있겠지. 만일 자네가 역으로 들어가는 기차, 성당, 궁전, 숲, 행진하는 군대, 군중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장면, 모두가 다른 이백여 벌의 의상이 필요로하는 연극을 찾았을 때 우리를 부르게.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미국에서 한 개의 무대장치 연극 그것도 정신병자 용 침대에 의사 한 명, 환자 한명, '제1막 - 의사선생님, 저는 괴로와요.' '제2막 - 의사선생님 저는 아직도 괴로와하고 있어요.' 끝! 이것이 연극이란 것일까?" 데이몬은 웃었다. "그레고르, 자네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좀 냉정하고 가혹해. 좋은 연극은 아직도 얼마든지 있다구." ''가뭄에 콩 나올 정도지." 그래고르는 침울하게 대꾸했다. "내가 자네를 위해 음악적인 것을 하나 찾아 주지." "그래." 그래고르가 대답했다. "일이 년 동안, 수천 장의 스캐치를 그리며 미친 듯이 날뛰고, 6개월 동안 캄보디아 전체 인구를 먹여 살릴 만큼의 돈을 쓰고, 하루 밤으로 끝내 버리는 거야. 나중에야 홍수가 나든 말든 알 바가 아니지. 그리고 다음 주는 단두대에 서는 신세가 되지. 그런데 나는 낭비로 참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 난 무엇 하나 버리지 않아. 실 한 올도 점, 하나 찍을 수 있는 물감이 든 튜브 하나라도 버릴 수가 없다구." ''또 시작이군, 그레고르." 데이몬은 부드렵게 말했다. ''자네하고는 말을 할 수가 없어. " 그레고르는 밝게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나의 친구인 자네처럼 현명하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플로렌스에서 그림 엽서를 보내겠네. 그동안 만일 자네가 일 년 동안 값싸고, 휼륭하고 큰 작업장을 원하는 예술가를 발견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을 내게 보내게. 그러나 그 사람은 나보다는 형편없는 화가라야 하네. 그 친구가 걸작을 만들기 위해 나의 위치를 이용하고 있는 것을 알고서야, 어찌 내가 마음놓고 유렵 여행을 즐길 수 있겠나? 하지만 이 사람 프탱클린이 화랑에서 전시하고 있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 중에서는 한 사람도 골라내서는 안 되네. 한 화폭에 선 두 개, 아크릴에 물감을 뿌린 배경 그것이 그림인가? 이곳에서 난 평범한 사람으로 있을 수 있지만, 신성을 모독하는 사람으로서는 있을수 없네." 그는 프행클런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왜 이러시나!" 프행클린이 한 마디 했다. 그러나 화를 내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당신 것도 전시했어." "몇 장이나 팔았지 ?" "한 장. " "홍! " 그레고르는 콧방귀를 뀌었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기하학을 숭배하도록 만들어 놓았어. 인간의 얼굴과 모습에 대한 그대로의 표현, 정열, 기쁨, 찬미를 망쳐 놓았어. 난 당신 화랑에서는 길잃은 개나 다름없다구." 이것은 분명 그레고르에게는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목소리는 언짧은 듯하였다. "여보, 제발 그만하세요." 에바가 끼어들었다. "최근 몇 년 간의 현대미술을 프랭클린씨 혼자서 책임지고 있는 것은 아니쟎아요?" ''그는 그와 같은 중죄를 너그렵게 봐주고 있어." 그레고르는 침통하게 말했다. "일 년에 15회의 전시회를 열고 있어. 저 달고 있는 뱃지를 보라니까." 프랭클린은 의식적으로 옷깃에 달고 있는 뱃지에 손을 가져갔다. "핵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 뭐 잘못된 거라도 있나?" 그는 방어적인 태도로 물었다. "나는 당신이 핵전쟁을 반대하는 것을 불평하지는 않아." 그래고르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 뱃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 뱃지가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지 알아? 나는 엄격하게 규명된 부류에 속해 있으며, 나는 듣고 또한 들은대로 행동한다라고 뱃지는 말하고 있어. 설사 핵전쟁이 두뇌의 절반을 잘라 없애 버린다는 것을 뜻한다 하더라도, 나는 적응하겠다고그 뱃지가 말하고 있다구." 그는 이제 완전히 흥분되어 있었다. 그는 지금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거리를 행진하고 다니면서...." "다음번에 시위가 있으면 우리와 함께 행진하도록 그대를 초대하겠네. 직접 경험해 보도록 말일세." 데이몬은 프랭클린이 이 화가의 공격에 당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지만, 프랭클린은 여전히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같은 수의 러시아인, 채코인, 헝가리아인, 동독 사람들, 폴란드 국민, 에스토니아 인들, 라트비아인, 큐바인들이 같은 뱃지를 달고 행진할 수 있게 한다면," 그레고르는 이러한 국민들의 이름을 나열하기에 숨이 가쁜 듯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나도 당신과 함께 행진을 하지. 그러고 있는 동안, 크레뮬린에서는 신문에서 미국인, 영국인, 프랑스인들이 행진하는 사진을 보고서는 좋아라고 웃음을 터뜨리며 아프가니스탄에 10만 군대를 또다시 파견하고, 비밀 지도에다가 미국의 파크 아베슈, 햇프톤츠, 비벌리 힐츠에 있는 최고급 주택을 표시해 두었다가, 그들이 쳐들어 와서는 인민 위원들이 살게 될 거야." '여보., 에바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그만 좀 헝가리 사람이 되세요. 이곳은 부다패스트가 아니라구요." "아무도 헝가리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지 않았어." 그레고르가 대꾸했다. "그리고 러시아 군대 탱크가 거리에 나타난 것을 보고 나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확실해." "그래서 그것이 어쨌다는 건가?" 프랭클린은 화를 내며 말했다. "우리들더러 당장에 폭탄이라도 떨어뜨리란 말인가?" 그레고르는 머리에 손을 얹고, 깊이 생각이라도 하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대답하기 전에 한 잔 해야겠어. 심각한 질문이니까." 그는 한 잔 가득히 포도주를 따르고서는, 쭉 들이키고 나서 잔을 내려 놓았다. ''누가 진격을 해오든, 우리가 앞으로 갖게 되는 핵전쟁은 반대야. 나는 포기해 버렸어. 이러나 저러나 인류는 앞으로 일어날 핵 전쟁을 기다리지 못해. 나는 한 가지 탈출구를 보고 있어. 일종의 핵무기지. 얼마 전에 사람들은 그 일로 법석을 떠는데 그 이유를 나는 모르겠어. 중성자 폭단. 3만 4천 개, 4만 개의 핵 탄두가 36초 만에 세계를, 남녀 노소를, 공중의 새들을, 바다의 고기를 전멸시키며 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남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지. 그러나 시인, 철학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발명한 중성자 폭탄, 틀림없이 예술가는 계산이 끝나면, 세계는 폭발하고 말 거라고 말하고 있어. 하지만 중성자 폭탄은 무엇인가를 남길 거야. 물론 모든 사람들을 죽여 없애 버리겠지만, 서 있는 건물, 성당, 박물관, 도서관, 조각, 책은 남게 되고, 살아 남은 이삼백여 명의 사람들, 아마존 강의 인디안, 북극의 에스키모인들이 다시 인간생환을 시작할 수 있을 거야. 너무나도 한심스러운 일은, 모든 사람들은 전부를 바라고 있어. 우리 인간이가면 건물도 가고, 책도, 그림도 다 가기를 바라거든. 당신이 내가 바라는 함대의 행진을 하면, 나도 당신과 함께 행진을 하겠네." "그레고르씨." 프랭클린 부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고 말했다. "당신은 아이가 없어요. 그러니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사실입니다." 그레고르는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에바와 저는 아이가 없습니다.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 하느님의 잘못입니다." 그레고르는 그의 아내 에바에게 몸을 기대었다. 에바는 언제나 가급적이면 남편 그레고르 바로 옆에 앉아서 그가 자기의 볼에 키스를 할 수 있게 하였다. 데이몬은 일어섰다. 오가는 대화가 그의 표정 이상으로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만일 최후의 폭발로 틀림없이 갈로프스키가 파멸되어 버린다는 것을 확인할 수만 있다면, 그는 이 일을 환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집에 가는 편이 낫겠어. 마누라 실라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고, 마누라도 아무도 없는 빈 집애 들어서기를 좋아하지 않거든." 데이몬은 집을 향해 걸어가면서, 이날 오후에 그래고르의 집으로 간 것이 잘한 일이었는지, 어떤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레고르 코다르 부부가 앞으로 1년 간 유럽에서 지내게 된 것이 부러웠다. 자신괴. 아내 실라 두 사람이 비행기표를 사가지고, 모든 책임, 계약, 사업, 협박을 뒤에 남겨 둔 채, 내일 당장에라도 파리나 로마로 떠나서, 모든 것을 잊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열두달을 즐길 수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고 생각했다. 데이몬은 예술가로서의 그와 같은 잇점이 부러웠다. 그리고 그 스튜디오의 분위기는 명랑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이끌어낼만한 것은 아니었다. 딸이 겪은 일에 관한 베티나 레이시 여사의 이야기는, 비록 그녀의 딸이 죽음을 면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그 끔찍스러운 죽음의 그림자로 말미암아 적어도 사람들의 마음을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익살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음침한 익살이라고나할 수 있는 중성자 폭단에 관한 그레고르의 농담도, 같은 시내의 모든 사람들처럼, 데이몬에게도 역시 가급적 억제하려 하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레고르의 쪽지를 발견하기 보다는, 그대로 바아로 들어가서 술이나 몇 잔 마시고, 델레비전으로 야구시합이나 보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고 데이몬은 생각했다. 제 4장 행운의 제비뽑기 저녁 일곱 시가 되어도 실라가 집에 돌아오지 않자, 로저 데이몬은 걱정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여섯 시까지는 돌아오겠다고 했으며,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로 거동이 빠른 것이 아내의 습관이기도 했다. 오전 중에 처가집으로 전화를 걸어서 해가 지기 전에 돌아와야 하며 여행을 하기 위해 그녀의 친구로부터 빌린 차를 돌려 주고, 그 차고에서 다섯 블럭이나 떨어진 집까지 어두운 황혼길을 혼자 걸어 오는 것이 싫다고 말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 그랬더라면 지난 며칠 동안에 동네에서 강도사건이 일어났었다는 것도 말할 수 있었을 것을 하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전혀 무관심하게 여길만한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덟 시가 되었을 때, 그는 거의 경찰에 전화를 걸 차비를 하고서 안절부절하며 집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자물쇠를 돌리는 열쇠소리가 들렸다. 그는 황급히 문으로 달려 가서 그녀가 작은 현관문으로 들어서자, 그녀를 꼭 껴안았다. 대개 그들 부부의 인사는 뺨에 가벼운 키스를 하는 정도였다. 그녀는 놀라서 그의 팔을 밀치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어머, 왜 이래요? 어떻게 되신 거 아네요?" ''당신이 늦었쟎아." 그는 그녀의 작은가방을 받아들며 말했다. "그래서 그런 거지 뭐. 그뿐이오." ''그렇다면 앞으로는 더 좀 자주 늦어야 되겠군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니까 그녀의 전체 얼굴 모습이 환하게 변하였다. 결혼한지 오랜 세월이 홀렀지만, 데이몬은 아내의 그런 얼굴이 몹시 좋았다. 말없이 조용히 있을 때는, 그녀의 얼굴은 심각하고 침울하며 이탈리아에 관한 그림 책에 나오는 농부의 아낙네들의 진지한 사진을 들여다보는 인상을 느끼게 하였다. 그녀의 그와 같은 미소가 미국을 회복시켰다고, 언젠가 한번 그녀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버몬트에서는 어땠소?" 하고 그가 물었다. ''어머니 한 분만 저에게 있다는 것이 다행이에요." 하고 실라가 말했다. "여기서는 어떻게 지냈어요?" "쓸쓸했어, 당신을 위해서 낱말풀이 한 부를 사두었지." "어머, 그래요?" 그녀는 코트를 벗어 던지며 말했다. "그것은 나중에 하게 보관해 두겠어요. 지금은 몸 좀 닦고 머리 손질을 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나서는 당신이 만든 술 한 잔 하고, 오붓한 식사를 할 수 있는 좋은 식당에라도 데려가 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머니는 지난번에 내가 그곳에 있을 때부터 채식주의자가 되어버렸어요. 식사에 일대 혁명이 일어나고 부엌에는 채소뿐이었다구요,"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천장에 켜져 있는 불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천장불은 좀처럼 켜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천장불이 지금 방안의 다른 불과 함께 켜져 있지 않은가? 그녀의 나이에는 머리 위에서 전기불이 비치는 것은 해롭다면서 켜지 않았다. "여기서 뭘하고 계셨지요? 플레이보이 지의 금년도 바니걸을 선발하는 사진회의라도 개최하고 있었나요?" ''전화번호를 찾고 있었어." 그는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는 천장불을 꺼 버렸다. "술을 들겠다는 건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나는 집에서 계란이나 통조림을 먹을까 했는데. 난 점심을 늦게 먹어서 별로 배가 고프지 않다구." 변명 비슷한 설명을 이미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내가 돌아오자마자, 식당으로 가는 도중에 골목길에서 어면 불길한 일이 그를 대기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집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이유를 말할 수는 없었다. "'여보, 뭘 그러세요? 일요일 저녁이쟎아요?" 하고 실라가 한마디 했다. 그는 모든 이야기를 그녀에게 말해 주려고 자리에 앉으려고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데이몬은 아내가 집에 돌아온 그 기분을 망쳐놓고 싶지 않았다. 그는 피할 수만 있다면 모든 이야기를 그녀에게 언제까지나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집에서 식사하기로 하지. 내가 곧 마실 걸 준비할 테니." 하고 데이몬이 말했다. 실라는 그의 눈치를 유심히 살폈다. 그도 아내의 그러한 눈치를 의식하고 있었다. 데이몬은 그것을 그녀의 '병원눈'이라고 불렀다. 그가 택시에 부딪쳐서 다리에 기브스를 하고 병원 침대에누워 있을 적에, 그녀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는 준 특실에 입원하고 있었는테, 비안샐라라고 하는 사람과 방을 같이 쓰고 있었다. 그 사람도 차에 치었는데 공교롭게도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있는 실라의 외삼촌 뻘 되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실라의 어머니, 즉 비안샐라의 누이에 대해서 다같이 절망적인 의견을 나누고 있었기 때문에 사이가 매우 가까와졌다. 두 사람은 공통적인 불행을 겪는 가운테 친구처럼 되어 버렸다. 몸집이 작고 가무잡잡한 미남형의 얼굴에 반백이 된 머리를 하고 있는 비안샐라는, 코네티컷주, 을드 라임에서 자동차 수리공장을 경영하고 있으며, 그의 조카딸을 단나러 일 년에 단 한 번씩 뉴욕에 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올드 라임에 있었더라면, 이런 일은 결코 당하지 않았을 거요. 어머니는 날더러 큰 도시에는 가지 말라고 경고하셨다오." 비안샐라는 엉덩이까지 한 기브스를 손끝으로 치면서 후회하는 듯 이렇게 투덜댔다. ''전 뉴욕에서 오랫동안 살았는데도 당신처럼 굴러 떨어졌쟎소?" 그들은 서로의 부주의를 말하면서 웃었다. 그둘 두 사람은 상처가 아물어서 이제는 웃을 여유조차 갖게 되었다. 실라는 매일 보육학교에서 일을 끝마친 후, 외삼촌을 방문하러 왔디.. 그리고 데이몬이 그녀의 병원눈을 발견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준 특실 입원실에서였다. 비안샐라는 그의 조카딸 실라가 방에 들어서면, 그때까지 그날이 그에게는 아무리 좋지 못한 날이었다 하더라도 언제나 쾌활하고 불평이 없었던 것처럼 꾸미려고 애썼다. 며칠 동안 비안샐라는 실제로 몸이 몹시 불편해서 데이몬의 침대 맞은 편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실라는 방에 들어와 한 번 둘러보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외삼촌, 이젠 저를 속이려고 하지 마세요. 오늘은 무엇이 잘못된 거죠? 간호원이 괴롭히던가요? 아니면, 의사 선생닌이 아프게 하던가요? 무엇 때문에 그러세요?" 실라는 늘 옳았다. 실라가 병실에 찾아왔던 3주 동안, 그녀는 어느 정도 데이몬의 마음도 읽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는 그의 시도는, 근엄한 눈을 가진 수수께끼 같은 멋장이 아가씨 때문에 무산되고 말았다. 그녀는 여러 차레에 걸쳐서 모든 것이 그에게는 편안치가 않으며, 사람들이 그가 잠을 이룰 수 있도록 조용해 주지 않으며, 기브스가 너무 조여든다고 의사에게 불평을 해도 무시 당하고 있다는 사실 등을 털어 놓게 만들었다. 실라는 의사와 간호원들한데 인심을 잃으면서도 당장에 치료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데이몬은 그녀가 외삼촌의 베개를 고쳐주고, 가지고 온 맛있는 음식을 먹도록 달래며, 또한 데이몬 자신에게도 함께 먹도록 강요하며, 가족에 관한 소식울 외삼촌에게 낮고 낭랑한 목소리로 위로하듯 말해 주고, 자기 어머니에 대한 매우 우스광스러운 일화 둥을 들려 줌으로써 외삼촌의 기분을 맞추어 주며, 자기가 보고 온 연극 이야기를 해주고, 보육학교의 어린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주는 모습을 바라봄으로써, 데이몬은 날마다 그녀의 문병을 학수고대하게 되었다. 데이몬의 친구들이 보내온 많은 꽃들을 꽃기 위하여 화병을 마런하는 것이 실라의 일과 처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문병이 우연하게도 데이몬이 아는 여자 문병객과 겹쳤을 때는, 성심 성의를 다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침착하게 예의를 갖추어 접대해 주었다. 그녀는 모든 일을 침착하고 올바르게 처리하였다. 뼈만 남고 고통에 시달린 노인, 비안샐라가, "그 아이가 열이 있는가를 보기 위해 손을 내 이마에 올려 놓으면 의사나 간호원, 주사 등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더 내 병을 고쳐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하면서 조카딸인 실라에 대해서 말하는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데이몬이 그주일 동안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사이에, 실라를 만나고 부터는 그가 이혼한 아내,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아가씨와 부인들은 이 실라 브랜취와 비교했을 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경박하고 마음이 변하기 쉬운 여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라 브랜취는 그녀의 처녀 시절의 이름이었다. 그는 비록 나이 차이는 있었지만(그 당시 그는 마흔이 념었고, 그녀는 21세였다), 만일 그녀가 좋다고만 한다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한 그녀의 감수성은 병원에서는 미덕으로 보였으나, 오랜 결혼 생활에서는 때로는 까다로와서 견디기 힘들 때도 있었다. 실라는 집에 도착하는 즉시로 이러한 것을 재빨리 눈치챘다. 그녀는 운전으로 못 쓰게 된 장갑을 벗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 몹시 기분이 언짧아 보여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아무 일도 없었어." 그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화를 내고 있는 듯하게 들렸다. 그러한 말투는 때때로 그녀의 질문을 중지 시키기도 하였다. "나는 온종일 원고를 읽으며 어디가 잘못되었고, 어떻게 그것을 고쳐야 하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오." "그일 말고 다른 일이 있어요." 그녀는 완강하게 말했다. 데이몬은 그녀의 그러한 완강함을 '농부의 옹고집'이라고 종종 말했다. "당신 전 부인과 점심을 함께 들었죠?" 그녀는 비난하는 듯한 어조였다. "그래서 당신이 그런 모습이라구요. 당신은 그 여자를 만나면, 마치 머리에서는 천둥소리가 나고 있는 것처럼 느끼면서 언제나 돌아오곤 해요. 무슨 일이죠? 그 여자가 또 돈을 요구 하던가요?'' "말해 두겠지만, 나는 나 혼자서 점심을 먹었고, 그 여자와 만난 지가 한 달이 넘었소." 그는 자신의 결백을 떳떳하게 주장하면서 진정으로 화를 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기뻤다. "그래요. 저녁식사를 하러 밖에 나가면, 당신 기분이 좋아지거나, 적어도 달라질 거예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잠시나마 논쟁을 끝냈다. "당신 오늘따라 참 예뻐 보이는데." 그는 진정으로 말했다. 비록 그녀는 패션 잡지에 사진을 실리기 위해 모빌 대행업자에 의해 선정된 적은 없다 하더라도, 그녀의 얼굴의 준엄하고 또렷한 선, 크고 검은 눈, 굵고 숱이 많은 검은 머리칼, 깎아 내린 듯한 어깨, 강하고 풍만한 올리브 피부색의 몸매는, 그가 판단하기로는 여성의 가치와 성격을 나타내는 기준이 되어은 지가 여러 해나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은 많은 여성들에게 불가항력적이나마 잠시 매력을 느껴 왔었다. 그리고 그는 이베리아인의 미모 때문에 많은 이베리아인 여성들과 쾌락을 즐기기도 하였다. 결혼 생활을 청산한 후, 즐거운 독신생활을 하는 기나긴 세월에 그는 두 가지를 누리며 살았다. 하나는, 일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욕이었다. 그의 두 번째 결혼 생활도 이 점에 있어서는 그에게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 주지 못하였다. 그는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종교에 관해서 생각해야안 했을 때는 그는 불가지론을 택했다. 하지만 성욕 자체가 죄일 때는 그는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함부로 하느님을 들먹이며 신성을 모독하거나, 위증을 하거나, 남의 물건을훔치거나, 또는 살생을하지 않았다. 그러나 때때로 그는 이웃 아낙네를 탐내곤 하였다. 그의 성욕은 강하고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그와같은욕망을 억제하려고 별로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급직이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신이나 또는 부모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젊었을 때는 정말 멋장이었다. 젊었을 때 멋장이로 보이는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그는 나이가 그의 외모에 냉혹한 흔적읕 남겨 놓은 지도 오래이건만, 여전히 쉽게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처신하였다. 데이몬은 자신의 성격의 이러한 면을 실라에게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여하튼, 실라는 여자들이 줄 서기라도 하듯이 줄줄이 그의 병실을 찾아와서 그에게 꽂을 꽃아 놓고 가는 것을 보았었다. 스페인에서 왔다는 여인은, 너무나도 무분별하게 행동하였기 때문에 실라는 화를 낸 직도 있었다. 사실 그녀의 분별없는 행동에는 데이몬 자신도 당황했었다. 그리하여 그는 기분 전환을 하기 위해 일에 몰두하였고, 그 여인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녀와 해어진 다음 몇년 동안은 그는 다른 여인과는 관계를 갖지 않았었다. 데이몬은 실라와 결혼하기 전이나 후에도, 그녀의 애정 문제에 관해서는 절대로 물어 보지도 않거니와 자신의 애정 문제에 대해서도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의 결혼 생활에 한때는 폭풍우가 몰아 닥치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그들은 다같이 행복하였고, 그가 오늘밤에 느졌던 것처럼 그녀가 문을 들어설 때는 언제나 마음이 들뜨는 것을 느껴왔다. 이기적이기는 하지만 그는 자기가 아내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서, 그녀보다는 자기가 먼저 죽게 된다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었다. 이제 아내 실라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 자기 앞에 서 있지 않는가 ! 그는 그녀를 다시 한번 껴안고, 그에게는 낮익은, 그러나 때로는 굳게 다물고 완강히 거부하는, 자신의 것에 비하면 너무나도 달콤한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에 키스를 하였다. "여보 !" 그는 여전히 그녀를 꼭 껴안은 채, 그녀의 귀에다 대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당신이 돌아와서 정말 기뻐. 이틀이 몇 세기나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구." 그녀는 또다시 미소를 지으며 마치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이 손 끝을 그의 입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는 그녀는 침실로 들어갔다. 그녀의 건는 모습은 몸을 뜩바로 세우고 흔들 거리지 않으며, 몸의 다른 부분은 움직여도 머리만은 고개를 높이 쳐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그러한 모습은 종종, 그가 뉴욕에 온 직후 좋아했고 연애를 하게 되었던 아가씨를 생각나게 했다. 그녀는 젊은 여배우였는데, 피부색은 실라처럼 가무잡잡했으며, 어머니는 이탈리아 여자였다. 실라도 그렇지만, 그 아가씨의 유전 인자 속 어딘가에는 머리에 무거운 물동이를 이고 햇빚이 내리 쪼이는 칼라브리아의 길을 걸어내려가고 있는 그 민족 특유의 여인상이 그대로 남아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녀의 이 름 은 앙뚜아네따 브래들리였는데, 그는 일 년 동안 그녀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는, 그녀도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둘은 결혼에 대한 이야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그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맨해턴에서 아파트 방을 함께 쓰고 있던 그의 친구, 모리스 피츠제랄드를 그녀는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둘은 동전 던지기를 해서 아파트와 애인을 차지하기로 결정했다. 그결과, 그는 그의 친구에게 지고 말았다. "행운의 제비뽑기였어 I " 데이몬이 짐을 꾸리기 시작하자, 피츠제랄드가 외쳐댔다. 얼마 후, 앙뚜아네따 브래들리와 모리스 피츠제랄드는 런던으로 떠나가 버렸다. 그후 두 사람은 런던에서 결혼을 하고, 영국에서 영주권을 얻게 되었다는 소식을 데이몬은 나중에 들었다. 그 후 50년 동안 데이몬은 그 두 사람 중 어느 한 사람도 만나 보지 못했지만, 앙뚜아네따의 걷는 모습과 '행운의 제비뽑기'라고 말했읕 적의 피츠제랄드의 모습만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주방에 가서 술에 넣을 얼음을 꺼내면서, 그는 그러한 생각을 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전챙 전과 전쟁 직후, 그가 배우로 일하면서 여전히 대스타가 되는 전환점을 기대하고 있었던 그의 초창기 시절을 회상해 보았다. 그는 형편없는 배우는 아니었다. 그래서 비교적 편안하게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을 정도의 배역은 맡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앞으로 언젠가는 영화가 아닌 어떤 다른 일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었다. 그의 생활을 일변시키고 만 것은, 바로 1940년대 말, 어떤 연극의 예행연습을 하고 있는 동안에 일어났던 일 때문이었다. 극작가를 대신해서 그레이씨가, 가끔 예행 연습장에 나왔었다. 데이몬이 무대에 설 필요가 없는 동안, 데이몬과 그레이 두 사람은 캄캄한 무대 뒤에서 속삭이며 대화를 나누는 것이 습관으로 되어 버렸다. 그레이씨는 데이몬에게 연습중인 연극애 관하여 의견을 물었다. 데이몬은 이 연극은 실패할 것이며, 그 이유는 이러 저러하다고,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솔직하게 모두 털어놓았다. 그레이는 깊은 인상을 받고나서는 자신은 처음부터 사업을 잘못 시작하였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만일 데이몬이 일자리를 원한다면, 데이몬을 위해서 사무실에 자리 하나를 비워 두겠다고 말했다. "자네는 그 연극에 대해서 나에게 정직하게 말해 주었네. 그리고 자네는 확실히 지성적이고 교육을 받은 젊은이야. 난 자네를 채용할 수 있어. 무대 위에서와 실제와는 전혀 사정이 다르지. 자네는 나를 믿고 있지 않지만, 자네가 결코 청중 한 사람도 얻을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거의 확신하고 있네. 만일 자네가 배우로 생애를 계속하려고 한다면, 실패자로서, 그리고 실의에 빠진 사람으로 생애를 끝마치고 말 거라고 나는 생각하네." 연극이 막을 내린 2주일 후, 데이몬은 그레이씨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주방애서 얼음을 가지고 나와. 두 개의 관에 술을 따르면서 데이몬은, 그레이씨의 말을 기억하고는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오늘 밤은, 이야기하는 태도로 보아, 그는 단 한 사람의 청중을 두고, 다시 한번 무때에 서 보고싶었을 것이다. 그는 될 수 있는대로 가장 훌륭한 연기를 연출해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연기는 향상되어 있지 않았다.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청중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 확실하였다. 실라와 올리버 가브리엘슨은 웨이터에게 점심 식사를 주문하였다. 두 사람은 시내 어느 식당에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실라가 이 식당을 택한 것은, 남편과 마주칠 염려가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올리버씨, 제가 어제 아침 일찍 그이가 출근하자마자, 댁으로 전화를 건 것은 제가 왜 올리버씨를 만나야만 하는지 이유를 그이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실라가 어제 정오에 점심을 함께 하자고 올리버에게 말했으나 그가 어길 수 없는 약속이 있어서 오늘로 정했던 것이다. "집사람은 의심하고 있습니다." 올리버가 말했다. "집사람은 여자가 아침식사 시간에 나와 만날 약속을 하려고 전화를 걸어 오는 일에는 익숙지 못하거든요. 집사람은 부인이 매우 아름답다고 말하더군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식탁 너머로 실라의 손을 매만졌다. "집사람은 가장 위험스런 여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항상 잠자리를 같이 할 어머니를 찾고 있다고 한답니다. 집사람은 부인을 부러워하며, 부인을 모방하려고 애쓰고 있어요. 작년부터 머리도 부인이 하고 있는 스타일로 바꾼 것을 보시지 않았읍니까 ?" "보았어요. 사실을 말하자면, 그런 헤어 스타일은 그 앳된 얼굴에는 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더군요." 하고 실라가 한 마디 했다. 그녀는 비록 마음에 그리는 화상을 더 정확하게 묘사한다 할지라도 무의미한 말을 추가하여 설명하지 않았다. 실라는 도리스 가브리엘슨 부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그녀는 올리버에게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한번은 집사람이 거울 앞에서 부인처럼 걷는 연습을하고 있는 걸 보았죠." 하고 올리버가 말했다. "그녀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을 거예요." 실라는 약간 당황하는 듯했다. ''그녀는 당나귀 채격이라구요. 제가 심술굿은 것을 용서해 주세요. 저는 그녀를 보면, 제가 너무 나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신경쓰지 마십시오. 집사람도 부인에 대해서는 종종 심술굿게 굽니다. 집사람은 오늘 아침에 부인이 저와 단둘이서 만나기를 바라는 것이 매우 이상하다더군요. 제가, 나도 무엇 때문인지 모른다고 하였더니, 아주 골을 내고 있었어요. 그리고는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 다 안다더군요. 집사람은 부인과 로지, 그리고 집사람과 나는 4인조가 아니라, 우리들 사이는 3인조 반이며, 그반이 자기 자신이라고 한답니다." "미안하게 되었네요." 하고 실라가 말했다. 올리버 가보리엘슨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집사람에게는 좋은 일이죠. 결혼 생활에서 필요한 긴장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니까 말입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하지만 이 사실을 그녀에게는 말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제 남편 로저에 관한 이야기이니까요." 하고 실라가 말을 꺼냈다. "저도 그럴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둘만 아는 것으로 하고 절대 비밀입니다. 제가 이틀 동안 어디를 좀 다녀왔어요. 그런데 제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어요. 그이는 매우 이상하게 행동했어요. 그이로서는 매우 특이한 행동이죠. 올리버씨는 그이가 어디를 가나 걸어서 가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계시죠?"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우리도 이제는 좀 더 큰 사무실로 옮길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제안하자, 뎨이몬씨는 곰처림 으르릉대면서 중용의 미덕에 관하여 일장 연설을 제게 했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저는 지금 어리벙병해요. 이틀 동안 집을 비우고 돌아왔더니 영 딴 사람이 되어 있쟎아요." 실라는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는 그이한테서 어떤 설명을 들으려고 했지만, 그이는 그저 시대의 흐름이고, 우리는 바보의 친당에서 살아오다가 갑자기 그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할 뿐이었어요. 저는 그이에게 그것은 말도 안 되며 그이를 믿을 수 없다고 말했지요. 물론 우리는 말다툼을 했고, 그 후 한밤중에 그이가 거실을 왔다갔다 하는 소리를 들었고, 집안의 불이란 불은 모두 켜둔 것을 보았어요. 보통 때 같으면 그이는 마치 누군가가 망치로 그이의 머리를 때린 것처럼 잠들곤 했거든요. 솔직이 말해서, 저는 걱정이 된다구요. 그이는 이성적인 사람인데, 이러한 일들은 모두가 메우 불합리해요. 올리버씨를 만나려고 한 이유는 혹시 올리버씨도 그이 에게서 이상한 점이라도 발견하셨나 물어보고 싶어서요." 올리버는 웨이터가 두 사람 앞에 접시를 놓을 동안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손올 만지작거리며 약간 조바심을 태우고 있었다. 그는 식탁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실라를 냉정하게 쳐다보았다. 그의 창백한 눈에서는 심각한 기미가 엿보였다. "네에." 그는 웨이터가 가버리자 입을 열었다. "그런 점이 보이더군요. 어제 아침, 사무실에 들어 서기가 바쁘게 데이몬씨는 주위를 돌아다니고, 계속 앞문의 자물쇠를 만지작거렸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늘 앞문을 열어두고 있쟎습니까? 우리 사무실에는 훔쳐갈 게 없쟎아요. 기껏해야 퇴짜 받은 원고가 쌓여 있을 뿐이니까. 그리고 나서는, 데이몬씨는 비서 월튼양에게 앞문 자물쇠를 바꾸고 작은 창문 하나는 은행에서 쓰는 방탄 유리로 갈아 끼우고, 통화를 할 수 있는 스피커 장치를 달도록 지시했읍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지금부터는 전화가 걸려 오더라도 월튼 양만이 전화를 받아서 누가 무슨 용건으로 걸었는지를 확인한 다음, 데이몬 씨와 저에게 부저를 누르기 전에는 수화기를 들지 말라구요. 제가 뭐 우리가 다이아몬드 사업을 하고 있는 줄 생각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건 그리 대단란 일이 아니야'라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시내 사무실에 침입하여, 점심 시간에 흔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비서를 강간한 일도 알고 있다더군요. 월튼양을 잘 아시죠? 그녀는 나이가 예순이 다 된대다가 체중이 약 백 파운드나 나갑니다. 그녀는 아마 그런 일이 있기를 바라고 있을 거라고 제가 말했지요. 그러자, '올리버, 자네의 성격에는 경박한 면이 있어. 그동안 내가 쭉 지켜보고 있었지만 말은 안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점이 못마땅해' 라고 말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저는 입을 다물어 버렸죠."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시지요?" 올리버는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 잘 모르겠는데요. 아마, 돈 때문일까요? 데이몬씨는 돈 문제에는 익숙하지 않거든요. 하지만 저는 20년만에 처음으로 대형 폭탄격인 책 하나를 우연히 만났다고 하더라도, 방탄 유리는 사지 않을 겁니다. 혹시 나이 탓은 아닐까요?" "사람은 이틀 만에 늙지는 않아요." 실라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혹시 그이에게 적이 될 만한 사람이라도 있나요?" "이 세상에 적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왜 그런 걸 물으시지요?" ''저는 왠지, 제가 없는 동안에 누군가에게 협박을 당하였고, 그이는 그것에 반항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우리가 하는 일에 관하여 다른 말은 다 할 수 없어도, 한 가지 일만은 확실합니다. 즉, 평화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작가들은 그들이 해밍웨이 같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사람을 죽이면서 돌아 다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명단에는 헤밍웨이 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물론, 메일러 같은 사람은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여러 명의 마누라 중 한 사람을 주머니 칼로 찔러 죽이기는 하였지만, 우리에게는 그 메일러 같은 사람도 없습니다." 올리버는 위로하듯이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실라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아마 일시적인 기분일 겁니다. 부인께서 집에 없으셨기 때문에 우울해져서,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일 거예요." "'전에는 이틀 이상이나 집을 비운 적도 있었다구요, 그래도 그 일 때문에 요새 속에서 살자고 제안을 하지는 않았어요." ''아마 지금까지 내색을 하지 않고 감추고 있었을 겁니다. 그것이 이번 이틀로 그 한계를 념어서고 만 거죠. 즉, 한 방울 한 방울 씩 떨어져 컵을 채우던 물이 그 두 방울의 물로 념쳐 흐르게 된 거갰죠." ''그런 문학적인 표현을 가지고 이 특별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어요." 실라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밖에 또 저에게 해주실 말씀은 없으세요?" 올리버는 주저하면서 접시 위의 음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한 가지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두 가지 있읍니다." ''그게 뭐죠?" 실라의 목소리는 거칠어졌다. "올리버씨, 저에게는 아무것도 숨기지 말고 말씀해 주세요," "글쎄요," 올리버는 마지 못해 말하는 듯하였다. ''아마 데이몬씨는 주말 내내 원고 하나를 잃기로 되어 있었을 겁니다. 그 원고는 현재까지 우리에게 행운올 가져다 준 어떤 여자가 쓴 것입니다. 데이몬씨는 언제나 원고를 빨리 읽어 치우는 일에는 매우 꼼꼼하고 빈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월요일 아침 데이몬씨는 그 원고를 제 책상 위에 내던지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하면서 저더러 읽고 나서 작품이 쓸만한지 아닌지를 말해 달라고 했읍니다. 그 작품은 완전히 사들일 만한 것으로 판명되자 좋다고 하면서 비록 그 작가와는 매년 자신이 계약을 해왔지만 저더러 거래를 취급하라고 했습니다. 아참, 제가 깜빡 잊고 뭐 마실 것을 주문하지 않았군요. 포도주 한 잔 하시겠습니까?" "술은 하지 않겠어요. 두 가지 일이라고 하셨죠. 그 두 번째 일은 무엇이지요?" 올리버는 불안해하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부인께서 이런 말을 들어도 좋을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제 남편을 도와야만 해요. 그리고 올리버씨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 둘 사이에 무슨 일을 감추고 있으면, 우리는 그이를 도울 수가 없어요. 두 번째 일이란 게 뭐죠?" "언젠가 한 번 저에게 말하기를, 때때로 부인을 보면 메디아가 생각난다고 말했는데.." 올리버는 말끝을 흐렸다. ''이제야 그 뜻을 알았습니다." ''저는 제 남편을 해치려는 사람은 누구이든 죽여 버리겠어요." 실라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 문제는 희랍 문학을 많이 읽어서 메디아가 누구인가를 알고 있음을 뽐내는 젊은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부인, 저는 부인의 친구입니다.!" 올리버는 기분이 상한 듯 말했다. "그리고 저는 또한 로저의 친구이기도 하며, 부인은 그렇다는 것을 알고 계시쟎습니까?" "그렇다는 것을 증명하세요." 실라는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두 번째 일은 뭐죠?" 올리버는 목에 무엇이라도 걸린 듯 기침을 하고는 물 반 컵을 마셨다. "두 번째 일은," 올리버는 물컵을 내려 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월튼양에게 시청에 전화를 걸어서 권총 휴대 허가증을 얻는 방법을 알아보라고 지시한 일 입니다." 실라는 눈을 감았다. "오, 하느님 !"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로저에게 무엇이라고 말할 작정이시죠?" 하고 올리버가 물었다. "저는 우리가 한 이야기를 그대로 그이에게 되풀이할 작정이에요." "로저는 저를 절대로 용서해 주지 않을 텐데요." ''너무나 안된 일이기는 하지만 어쩔수가 없어요." 하고 실라가 말했다. 제 5장 추억의 항아리 데이몬은 시계를 바라보며 조바심을 치고 있었다. 그는 전처인 엘레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한 시에 식당에서 만나자고 했었다. 시계는 한 시 이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매사에 느렸다. 그것이 그가 그녀와 이혼하게 된 여러 이유 중 하나였었다. 그러나 엘레인은 아직도 그 버릇을 고치지 않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다른 버릇도 고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하루에 담배 세 갑을 피우고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술을 마시며, 손에 돈만 쥐었다 하면 그 돈이 무슨 돈이 되었든 간에 노름을 하러 나갔다. 그녀의 몸에 배어 있는 담배와 알콜이 뒤범벅이 된 냄새는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의 뺨에 형식적인 키스 인사를 하는 것마저도 그에게는 큰 고역을 느끼게 했다. 엘레인의 옷차림은 북부 앱프른 고장의 여자 아이들이 아침에 비를 맞으며 학교에 가고 있는 모습처럼, 되는 대로였고, 하나도 단정한 데가 없었다. 이제는 나이가 예순이 되었고, 비대해진 몸을 가진 여인이 되었건만, 진바지에 사이즈가 두 단위나 더 큰 스웨터를 입고 식당에 나타날지도 몰랐다. 그녀가 처녀 때, 데이몬은 그녀가 일하고 있는 서점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젊은 여자로서 허영심이 없다는 것이 하나의 매력처럼 생각되었으나, 이제는 늙은 여인이 젊게 보이려고 일부러 꾸미는 것이었다. 데이몬이 그녀와 결혼했을 때는 그녀는 활발하고 장난기가 있는 조그마한 얼굴과 붉은 긴 머리칼을 한 귀여운 아가씨였다. 그녀는 영리하고 재치가 있었으며 마음씨도 너그렵고 인정도 많았다. 그러나 그녀의 돈에 대한 경박한 태도, 그리고 그녀 자신과 남편과 살림에 대한 게으름과 소홀함, 거기에 그녀의 세 가지 습관성 행위가 추가되어, 결국은 결혼 생활을 파국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그들은 결혼을 서둘러서 만난 지 열흘만에 식을 올렸다. 그들은 결혼하기 전에 함께 자지도 않았었다. 그들이 서로 성적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결국은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예기치 않았던, 그리고 까닭 모를 불행으로 되어 결혼생활은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혼은 우호적이었다. 육체적인 의무의 속박으로부터는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그 두 사람은 친구로서 남게 되었다. 문학에 대한 그녀의 취미는 자극적이고 믿을 만하였다. 그래서 그는 가끔 그녀에게 원고를 주어 읽게 하고, 그녀의 작품에 대한 소감을 들어보았다. 그녀의 충고는 대체로 도움이 되었었다. 그녀가 그에게 돈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3년 동안에 있었던 일로, 그녀의 두번째 남편이 죽고 난 후 부터였다. 엘레인의 남펀은 직업적인 도박사였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라스베가스에서, 또는 시골 근처의 경마장에서 보냈다. 따라서, 그녀의 생활도 달려가는 말의 속도와 바퀴가 돌아가는 데 따라 변했다. 때로는 고급스런 생활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행운이 계속되는 동안에 남편이 그에게 선물해 준 귀금속을 전당포에 잡혀야만 했었다. 데이몬은 인색한 사람은 아니었다. 책이 잘 되어 돈이 들어오기 전의 제한된 재산을 가지고 있을 때도, 만일 그녀에게 주는 돈이 술집과 마권업자 그리고 주사위 놀이에서 그녀보다 한 수 위인 노름꾼에게 들어가 없어지고 만다는 것을 몰랐더라면, 그녀가 요구하는 비교적 작은 액수의 돈을 아까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돈을 요구할 때마다 그는 우울한 얼굴로, 언잖은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왔고, 또한 실라의 불평 불만을 참고 견디어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일을 통해서 엘레인은 그를 즐겁게 해 주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데이몬은 그의 시계를 다시 보면서 그녀와의 대화가 즐거운 것이 되지 않을 거라고 우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데이몬은 그녀가 식당으로 들어와서 주위를 돌아보며 자기를 찾고 있는 것을 보았다. 머리는 짧개 자르고, 흰머리를 감추기 위하여 짙은 자홍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녀가 오늘은 점쟎은 곤색 드레스에 다 닳아 버린 뒤축 없는 가죽신 대신 하이힐 구두를 신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한결 다행이며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볼에 키스를 할 때, 그녀에게서 나는 냄새는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젊어지고 주름도 퍼져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도 한결 맑았다. "매우 건강해 보이는데." 그녀와 나란히 자리에 앉으며 데이몬이 말을 꺼냈다. "정말 처녀같이 보이는군.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달리 생각하진 말아요." ''승마를 좀 했거든요. 그 때문에 건강이 좋아지고 있어요. 새로 남자친구를 사귀었는데, 그 사람이 내 헌 옷가지를 불살라 없애 버리라고 하지 않겠어요?" "잘한 일이로군." 데이몬은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나이가 여든이 되더라도 여전히 새 남자 친구를 사궐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를 바라볼 수 있도록 자리에서 몸을 옆으로 돌렸다. "당신은 안색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행운이 따르지 않는 일이라도 생겼어요?" "내가 내 건강에 관해서 이야기하자고 당신읕 이곳에 오라고 한 건 아니오. 다른 일 때문이라구." "만일 내가 당신에게 빚진 돈 문제라면," 그녀는, 그가 그녀에게 준 돈은 선물이 아니라 빌리는 것이라고 늘 말해 왔었다. "아마 대부분의 금액은 그 남자친구로부터 짜낼 수 있을 거예요. 그 사람은 보급인이거든요." "보급인이라니, 무엇을 공급한단 말이오? 혹시 쓸모없는 여자들에게 옷이라도 공급하는 건 아니겠지 ?" 엘레인은 그의 조롱하는 말에 개의치 않고 조용히 웃었다. 그녀는 술에 취하면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는 누구를 막론하고 욕설을 퍼부었고 모욕을 주었다. "자동 도박기를 보급해요. 수입이 짭짤하다구요. 비록 몇몇 매우 특수한 신사들에게 사업상으로 저넉식사를 대접하기는 하지만." "바로 그때문이오." 데이몬이 그녀의 말을받았다. ''내가점심을 함께 하자고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오. 내가 당신을 알고 있는 한 당신은 도박에 대한 취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내 견해로는 당신은 특이한 신사들과 어울려 왔다구. 기수, 말 조련사, 도박군, 마권업자, 정보 제공자, 그리고 또 하느님만이 아는 사람들과 말야." "여자는 친구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구요." 엘레인은 위엄을 갖추고 말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나 당신이 집에 데리고 오던 벤리 제임즈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그 따분한 작가들보다는 훨씬 더 재미있어요. 만일 당신이 저에게 강의를 할 생각이라면, 당장 이곳을 나가 버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 버리려 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앉으라고 손짓을 하였다. "앉아요, 앉으라니까." 그는 그들의 식탁 앞에 서 있는 웨이터틀 쳐다보았다. "제게는 술 한 잔도 사주지 않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제 정신으로 있게 하기 위해서 계속 금주 운동을할 거예요?" ''내가 잊고 있었군. 무엇으로 들겠소?" "당신이 마시고 있는 건 뭐죠?" 그녀는 그의 접시 옆에 있는 작은 술잔을 가리켰다. "셰리야."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형편없는 술이로군요. 간장에는 지옥이에요. 얼음 물에 탄 보드카나 마실까요? 당신은 그것도 기억하고 있지 않나요?" ''너무 잘 알고 있지." 데이몬은 웨이터를 쳐다보며 말했다. "얼음탄 보드카 한 잔 가져와요." "선생님께는 셰리 한 잔 더 드릴까요?" 하고 웨이터가 물었다. 데이몬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난 이것이면 돼. 자, 식사주문이나 받아요." 그 식당은 프랑스 요리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엘레인은 메뉴는 쳐다보지도 않고, 후라이 양파를 곁들인 햄버거를 주문하였다. "여전히 쓰레기같은 음식을 드는구만. 그것도 알만하지..." "모든 미국 아가씨, 아니 내 나이 또래의 모든 미국 숙녀는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엘레인은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왜 당신 갑자기 평이 나쁜 제 친구들에게 관심을 갖는 거지요?" 데이몬은 크개 한번 숨을 내쉬고 나서 엘레인이 모든 말을 이해할 수 있도록 천천히 그리고 뚜렷하게 말하면서, 전화로 잘로프스키와 대화 한 내용을 그대로 되풀이해 들려 주었다. 웨이터가 보드카를 가지고 오자 그의 이야기는 잠시 중단되었다. 그 대화는 기억을 더듬어 이야기하기에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다. 엘레인의 얼굴은 이야기를 들어감에 따라 점점 더 심각해졌다. 그녀는 그가 이야기를 끝마칠 때까지 술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진을 단숨에 굴꺽 하고 삼켰다. ''정말 지긋지긋한 하룻 밤 이었겠네요. 당신 안색이 나쁜 것도 당연하죠. 그래, 당신은 잘로프스키라고 하는 사람을 알고 있어요?" "몰라, 당신은?" "저도 몰라요. 혹시 내 남자 친구인 프레디가 알고 있는지 물어볼게요. 하지만 별로 가능성이 있을 것 같지는 않네요." "당신 남자친구 프레디는 자동 도박기를 공급하고 있지 않을때는 혹시 공갈치는 일을 하지 않소?'" 엘레인은 거북해하는 눈치였다.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것은 사업에 관계되는 일에 한해서만 그래요." 그녀는 술잔을 비우며 마침 지나가는 웨이터에게 술 한 잔 더 가져오라는 표시로 술잔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물론 그이는 당신에 대해서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이에 관한 한, 그런 일은 모두 옛날에 있었던 일이라구요. 지금 그이가 알고 있는 기관원은 FBl 요원들이고, 읽는 것이라고는 경마에 관한 것 뿐이죠." "당신 종종 시카고에 가오?" "네, 이따금. 앨링톤에서 큰 경기가 벌어지거나 또는 사업여행 차 함께 가자고 하면 라스베가스로 가는 도중에 들르곤 해요." "물론 이 일은, 어면 놈이 장난치기 위해 한 것일지도 모르지." 엘레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저에게는 장난처럼 들리지 않는데요. 제가 당신에게 필요 이상으로 겁을 주고 싶지는 않지만, 제 추측으로는 심각한 일 같아요. 아주 심각한 문제라구요. 그 사람이 다시 전화를 걸면 당신은 어떻게 할 작정이세요?" "모르겠어. 난 혹시 당신이라면 어떤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생각 좀 해 봅시다." 그녀는 두번째 가져온 보드카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담배 연기를 손으로 날려 없애려는 시늉을 하였다. "저, 제가 살인범 담당 형사 한분을 알고 있는데, 내가 그분에게 말해서 당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 볼까요?" "그 살인범이라는 말이 기분 나쁜데." 하고 데이몬이 말했다. "미안해요.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형사라구요." "그 사람에게 말해주구료. 고맙소." ''나중에 전화로 그분의 말을 알려 드릴께요." ''사무실로 전화를 해요. 잘로프스키가 다시 전화를걸어 올 때, 마누라가 전화를 받게 되는 것은 원치 않으니까." "당신이 협박 전화를 받았다는 것을 부인애게 말하지 않았단 말예요?'] 데이몬은 아내에게 말하지 않은 것을 엘레인이 비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난 쓸데없이 그녀를 긴장시키게 하고 싶지 않다구." "쓸데 없이라니오? 맙소사 ! 당신이 위험하면 그녀도위험한 거예요. 그것도 모르세요? 만일 어떤 이유로 누군가가 당신 뒤를 밟고 있다면, 당신을 잡을수 없으면 그들이 무슨 일을 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소년단에 가입이라도 하는줄 아셨나요? 그들은그녀를 납치해 갈 거예요." "난 이런 일에 대해서는 당신만큼 아는 게 없어." 그는 그녀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그녀의 꾸지람 같은 비난의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제가 일 년에 몇 차례 라스베가스에 간다는 이유만으로, 제가 마치 마피아단 두목의 정부인 것처럼 취급해서 말하진 말아요. 그 정도는 상식에 관한 일이라구요." 그녀의 목소리는 다소 노기를 띠고 있었다. "당신 말이 옳다고 생각해." 그는 마지 못해 이렇게 말했다.''집사람에게도 이 이야기를 해 주어야겠어." 웨이터가 주문한 음식을 가지고 와서 데이블 위에 놓는 것을 바라보면서, 오늘 밤 집에서 벌어질 큰 일을 생각했다. "당신은 포도주를 드시겠지요?" 하고 엘레인이 물었다. "물론이지. 당신은 무엇으로 할 거요?" "무엇으로 하다니요?" "나는 낮에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쟎아." 하고 그가 말했다. 엘레인 곁에서 경건한 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이었다. "보졸레이(남 프랑스산 적색 포도주) 반 병만 줘요." 그녀는 웨이터에게 주문했다. 옛날에는 한 병을 주문하곤 했었다. 그녀의 주량도 점점 줄어가고 있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시카고에서 전화를 건 잘로프스키." 그녀는 햄버거에 케첩을 바르면서 거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사람의 모습이 어떠 했는지 생각나는 게 없어요?" "전화로 2, 3분간 이야기를 했을 뿐이야." 데이몬이 대꾸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상상해봤지. 나이는 41에서 5O세 가량, 몸집은 굵직하고 옷은 값 싸고 야한 것을 입고 교육은 별로 받았을 것 같지가 않아." "지금까지 그 문제에 대해서 무엇을 하였지요?" 하고 엘레인 이 물었다. "아직까지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구. 그렇지. 총을 휴대할 수 있는 허가를 신청해 놓고 있지." 엘레인은 얼굴울 찌푸렸다. "그것은 좋은 생각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아요. 로저, 만일 내가 당신이라면, 무엇을 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저 같으면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을 거예요." "어떤 종류의 목록을?" "이런저런 이유로 당신에게 원한을 품었던 사람들, 당신 사무실에 들어 왔다가 내좇긴 정신 이상자, 당신이 자기들을 속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당신으로부터 버림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여자들, 당신이 빨리 손을 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 여자들의 남편 이나 또는 남자친구들의 목록 말예요." 그녀는 히죽히죽 웃었다. 그러는 그녀의 얼굴은 순간적으로 또 다시 활기를 되찾아 젊어 보였다. "그것이 목록이 되는 거라구요. 그것을 보면서 거꾸로 추적해보는 거예요. 사람이란 어떤 일을 몇 년 동안이나 마음속에 꼭 품거든요. 그리고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신경질적으로 되어 버려요. 불운이 계속되면 책임을 전가시킬 사람을 찾거나, 보복에 관한 또는 버림받은 여인에 관한 영화를 보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른 일을 저지를지도 모르죠. 어떤 머리가 돈 작가가 당신에게 원고를 제시했는데, 당신은 읽어 보지도 않고서 거절한다는 내용의 글을 한 줄 써서 돌려 보냈는데 그후 당신이 <비가>라는 책을 읽고서 그 책을 베스트셀러로 부상시켜 놓은 것을 보면 그 작가는 자기 작품을 표절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예요. 나는 사실 당신과 가까이 지내오지는 않았지만, 당신의 절반의 노력도 들이지 않고서라도 그럴 듯한 목록은 작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단순히 기억나는 어떠한 사실 하나만을 단서로 삼으려고 하지 말아요. 그 따위에는 아무런 뜻도 없을지 몰라요. 그리고 당신이 형사에게 말할때도, 아, 그 형사의 이름은 슐터 경위예요. 당신 자신의 지금까지의 행위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그 사람은 무엇인가 단서를 얻으려고 할 뿐이니까요. 그와같은 암시는 당신이 생각지도 않았던 것에서도 얻을 수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이야기를 멈추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당신 부인에게도 과거의 일을 잘 생각해 보라고 하세요. 그녀는 미인이라고 들었는데, 젊었을 적에는 적어도 미인이었겠죠. 미인치고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슬픔으로 가득찬 추억의 항아리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적어도 과거에 한 번쯤은 정말 남자와 사권 적이 없는 여자를 나는 보지 못했어요. 그녀는 반은 이태리인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이태리 사람들이 말하기 싫어하는 어떤 다른 종류의 관계가 있는지를 당신은 모르고 있다구요. '' "'이봐요, 제발 이 문제에서 이태리에 관한 것만은 빼둡시다." 그녀의 외삼촌은 코네티컷에서 자동차 수리공장을 운영하고 있었어." 이것은 그들 사이에 오래 전부터 해온 싸움이었다. 엘레인은 엄격한 위스컨신 독일 혈통 출신이었다. 이것으로 비록 결혼 후에는 그렇지 않았다 할지라도 결혼 전의 그들의 순결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태리인, 그리스인, 유대인, 비행기 여승무원, 아일랜드인 그리고 스코틀랜드인들의 성격을 멸시할 만한 것으로 여기는 성향이 강했다. 만일 그녀가 전에 불가리아 사람이나 또는 외몽고인을 만났더라면, 그 사람 또한 그들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엘레인은 웨이터가 포도주를 따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 웨이터는 피부색이 검고, 지중해 쪽사람 모습을 하고 있었다. 데이몬은 그 웨이터가 엘레인의 공격의 대상물로 잡히지 않기를 바랬다. "그래요, 그녀의 외삼촌이 코네티컷에서 자동차 수리공장을 가지고 있었다곤 했지만," 엘래인은 웨이터가 가 버리자 다시 말하기 시작하다가 포도주 반잔을 꿀꺽 하고마셨다. "틀림없이 자동차 수리 공장 한번 본 적이 없는 다른 외삼촌도 여덟 명은 있을 거예요. 그리고 때때로 경찰에게 흥미를 갖게 하는 다른 것들을 많이 보았을 거라구요." "이 문제에서 이탈리아에 관한 것은 빼 놓으라고 말했쟎소?" "당신은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이제 그녀는 정면으로 맞대고 나섰다. "만일 당신이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내가 생각한 바를 말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쟎아요?'' "알았어, 알았다구. 내가그 리스트를 작성하지." 그는 지친 듯이 말했다. "그리고 당신이 그것을 보는 것과 동시에 당신 부인의 리스트도 잘 살펴보도록 해요." 엘레인이 말했다. ''그리고 그 일이 끝난 후에도, 두 사람이 여전히 결혼생활을 계속할 수 있기를 바래요. 꼭 !" 그녀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제발 조심하세요. 당신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세요. 저는 당신이 아무 탈도 없이 여전히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아야만 해요. 오늘 이렇게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이유야 어쨌든 간에 당신을 만나서 기뻐요. 병에 남아 있는 술을 위해서는 이것이 낭만적이고 향수에 젖은 점심 식사이며, 당신은 우리가 헤어졌기 때문에 30년 동안이나 가슬 아파해온 나의 영광스런 옛 애인이 되도록 건배를 합시다." 그녀는 직접 포도주를 또 한 잔 따르고 나서는 그를 향해 술잔을 쳐들었다. "자, 이제 남은 식사시간은 그 문제는 잊어버리고 우리가 다시 함께 자리한 것을 기뻐하며 서로를 죽이기를 바라지 말고 먹고 마실 수 있도록 합시다. 정직하게 한번 말씀해 보세요. 정말 당신은 제가 얼굴의 활기를 되찾았다고 생각하세요?" 제 6장 쓰레기 인간 그는 점심식사를 마친 후, 천천히 걸어서 사무실로 돌아가며 마음속으로 엘레인이 술을 마시며 그에게 한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에게는 주위의 사람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엘레인이 말한 것처럼, 그의 전 인생을 살아오며 알고 지내온 사람들의 이름을 생각해 보았으나, 머리 속에 정연하게 그리고 처리하기 쉽도록 목록을 가지런히 정리할 수가 없었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채는 안개와 혼란 속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그는 약간 구부정하고 몸집이 작은 노인이 안경을 끼고 목에 털이 달린 검은 코트를 입고서 그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알고 있는 사람 가운데 그린 코트를 입고 있는 사람은, 해리슨 그레이 한 사람 뿐이었다. "해리슨 씨 ! " 그는 빨리 그 사람에게로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그 사람은 발길을 멈추고 그의 인사에 어리둥절하면서 절반은 겁을 집어먹은 듯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 노인은 손을 등 뒤로 가져가며 이 렇게 말했다. "선생께서 잘못 보신 것 같구료. 내 이름은 죠지 올시다." 데이몬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눈을 껌벅껌벅하고 나서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혼들었다. "미안합니다." 그는 거의 더듬다시피 말했다. "선생님께서 저의 가장 친한 친구하고 너무나도 닮으셔서 그만.... 제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저도 모르겠읍니다. 그 사람은 죽고 없는데 말입니다." 그 노인은 의아한 눈으로 데이몬을 노려보며, 마치 데이몬의 입김에서 점심식사 하기 전에 든 마티니 술 냄새라도 맡아 보려는 듯 코를 쿵쿵거렸다. "보시다시피, 난 죽지 않았소." 그 노인은 화난 듯이 이렇게 말했다. "용서하십시오, 선생닙. 제가 대낮에 꿈을 꾸고 있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데이몬은 서투른 변명을 늘어놓았다. "최소한 그런 것 같소." 그 노인은 똑똑 떨어지는 어조로 말했다. "자, 그럼, 괜찮으시다면 제가 갈 수 있도록 길을 좀 비켜 주시겠소?" "물론이지요." 데이몬은 옆으로 비켜 서며 그 노인이 지나가자, 그는 머리를 다시 힘껏 흔들어 보았다. 그는 전신에서 식은 땀이 솟고 있음을 느꼈다. 데이몬은 매 발걸음마다 조심을 하고 길을 건널 때에는 속도를 내며 달리는 차에 세심한 주의를 하면서, 사무실 쪽으로 계속 걸어갔다. 그러나 43번가에 있는 그의 사무실 건물 입구에 이르자, 그는 멍하니 서서 들어가고 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데이몬은 건물로 들어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책상에 앉아 일하고 있는 월튼 양과 올리버 가브리엘슨을 마주보고, 여느 때와 다름없는 보통날의 오후인 척하며 그들이 자기를 의지하며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일을 처리해 나가게 할수가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죽은 사람을 불러 세우다니, 그는 그것을 생각하며 몸을 떨었다. 예전에는 종종 바로 이 시간이면, 다음 블럭에 있는 알곤퀸 바아에서 그레이씨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곤 했고, 종종 식당에서 그레이씨가 좋아하던 바아로 장소를 옮겨서 그래이씨가 좋아하던 점심식사 후의 브랜디를 여러 해 동안 조용히 마시곤 했었다. 거의 자동적으로 데이몬은 지금은 이름이 바뀌어 미국가라고 하는 6번가 쪽으로 발길을 옮겨, 44번가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알곤퀸 바아로 들어갔다. 그는 그례이씨가 죽은 후로는, 이곳을 거의 출입하지 않았었다. 데이몬은 이 바아를 좋아하였다. 그리고 그는 친구이며 동업자의 죽음이 어쩐지 이곳을 피하라는 신호같기도 한 이유를 구태여 파고들어 알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죽은 자는 그들의 요구를 주장할 권리가 있다고 그는 이 작고 낯익은 바아에서 자리에 앉으며 생각했다. 어느 한적한 오후에 새로 대화를 나누던 이 장소는, 아직까지도 그들을 위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바아 안에는 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바텐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그레이씨(이상하게도 그는 오랜 동안 친구로 사귀어 왔지만, 그를 세례명으로 보다는 그레이씨로 생각하였다)가 두보채트를 좋아하였음을 기억하고, 자신이 늘 마시는 스카치 대신에 꼬낙을 주문하였다. 그 향기는 그의 기억을 공격하듯이 자극하였고, 잠시 동안 그레이씨가 살아서 그의 옆에 와 있는 환상에 빠졌다. 환상에 나타난 그레이씨의 모습은 결코 기분 나쁜 모습이 아니었다. 추억은 슬픔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그가 그레이씨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기의 결혼 10주년 기념일을 죽하하는 장소에서였다. 그날, 그들은 데이몬의 아파트에서 조촐한 축하파티를 열고 있었다. 파티에는 그들이 특히 좋아하는 몇몇 대행 의뢰인과 데이몬의 옛 친구 마틴 크레웨즈가 참석하고 있었다. 마틴 크레웨츠도 전에 한때는 대행 의뢰인이었으나 헐리우드로 가버리고, 그곳에서 많은 보수를 받는 영화 대본 작가인 동시에 업무 지배인이 되어 있었다. 때마침 그는 회의 참석차 뉴욕에 와 있어서, 데이몬은 그 전날 전화로 그의 목소리를 듣고 몹시 기뻐했다. 두 사람은 좋은 친구였고 그는 정직하고 재능있는 사람이었는데, 데이몬에게는 언제나 좋은 말벗이 되어 주었다. 그는 오하이오주의 자기가 자라난 작은 마을을 소재로 두 편의 훌륭한 소설을 썼다. 그러나 그 두 작픔이 전혀 팔리지 않자, 그는 서부로 떠나면서 데이몬과 그레이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 되지라고 해 ! 난 손 들었어 난 이제 굶주리는 데 싫증이 났다구. 자네들 머리로 그 돌벽을 두드려 보는 회수도 한계가 있어야만 하지 않겠어 ?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일은 쓰는 것뿐이고, 만일 누군가 그 댓가를 나에게 지불해 주기를 바란다면, 하느님이 그와 함께 하기를 빌겠어. 나는 추잡한 것을 쓰지 않으려고 노럭하겠지만, 만일 그것이 그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나는 그들에게 주어야지," 데이몬이 그를 알고 지낼 때는, 그는 유머가 풍부하고 풍취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저녁식사 전에 술을 들면서 담소를 나누기 시작한 지 2∼3분도 못 되어 그 친구가 제작자나 감독, 영화 배우 등에 관한 따분한 어떤 이야기를 하며, 이따금씩 데이몬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거만하고 신경질적인 읏음으로 이야기를 중단시키며, 엄숙하고 점잔 빼는 허풍장이로 변해 버린 것을 보고는 데이몬은 슬퍼졌었다. 마틴 크레웨즈는 전에는 단단한 체격에, 약간 살이 찐 덥수룩 한 젊은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뼈까지 손질한 것 처럼 매끈하였다. 데이몬은 그가 적어도 하루에 두 시간씩 미용체조를 하며, 식사도 과일과 나무 열매 종류만 먹으면서 근육이 팽팽한 발레 무용가의 몸매를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머리는 인공 흑단 나무 색처럼, 기름을 발라 반짝거리고, 완전히 귀를 덮어 마치 호텔 종엽원 애들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검정색 자라목 스타일의 스웨터에 가슴에는 굵은 금 목걸이를 늘어뜨리고, 검정바지에 황갈색 웃도리를 걸치고 있었다. 오하이오주 작은 마을에서 온 소년의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방에 들어선 지 십 분이 되었을까 말까 하는 사이애 그는 이미 그곳에 모인 손님들에게 그가 방금 완성한 영화는 일곱 장의 비용이 들었으며, 다음 영화는 시네마스코프로 웅장한 것인데, 열장 정도로 완성되면 다행이라고 말했다. 데이몬은 일곱 장이 7백만 달러이며, 열 장은 1천만 달러라는 것을 깨닫는 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다른 손님보다 좀 늦게 온 그래이씨는 들어서자마자, 그에게 건 첫 마디 말로 마틴 크레웨즈에 대한 불만을 명백히 털어 놓았다. "어이구, 돌벽 크레웨즈가 너덜너덜 누더기 꼴이기는 하지만 충성스러운 군대에 인사를 드리러 마침내는 돌아왔군 그래 ! " 그때, 데이몬은 그 영화 대본작가를 파티에 초대한 것은 실수였음을 알았다. 그레이씨가 마치 박물관에서 그림을 좀더 잘 보기 위해서 뒷걸음질을 치듯, 크래웨즈를 자세히 뜯어보려고 몇 발자국 물려서면서, "그것이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제복인가?' 라고 말했을 때, 데이몬은 크레웨즈가 아무리 자주 뉴욕을 드나든다 하더라도, 다시는 자기에게 전화를 주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파티는그런 대로 즐거웠다. 마틴 크레웨즈는 레몬을 엷게 썰은 조각을 띄운 소다수 만을 마시고 있었고, 약간의 사라다와 실라가 담아 준 베이컨 구은 것을 씹고 있다가 일찍 자리를 뜨고 가버렸다. 데이몬 부부는 한 달 간의 유렵 관광 여행을 위해 다음 날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유럽을 다녀온 친구들은 빼놓아서는 안 될 장소를 말해 주기도 하였고, 유렵을 가보지 뭇한 친구들은 자기들은 여행하는 사람들이 참 부럽다고 했다. 그레이씨는 축하연설을 하는 도중에 데이몬에게는 가죽 표지로 된 일기장을 주면서 여행에서 느끼는 소감을 적으라고 하였고, 실라에게는 스웨드 가죽 케이스에 든 슬라이드 자를 주면서 미디와 센티미터를 야드와 인치로 환산하고, 외화와 달러와의 환율을 계산하는 데 쓰라고 하였다. 파티는 밤 늦게 끝났다. 그러나 데이몬은 그레이씨가 떠나기를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날 밤 세번째의 브랜디를 그에게 따라주면서 다른 손님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올 데니 잠시 있으라고 속삭였다. 실라는 마지막 짐을 꾸리기 위해 침실로 돌아왔다. 데이몬은 술 한 잔을 만들어 들고 와서 그레이씨가 앉아 있는소파 한 쪽 끝 옆 의자에 앉았다. "로저, 내가 마턴 크레웨즈에게 한 일에 대해서 자네에게 사과하겠네. 결국 그도 자네 손님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말일세.'' 하고 그레이가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는 거요? 데이몬이 한 마디 했다. '누욕에서 그런 옷차림으로 파티석상에 나오는 사람이라면, 그런 대접은 당연히 받아야죠. " "내가 내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던 거야.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영화 그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쟎아. 사실은 나도 영화를 좋아하고 있다구. 하지만, 마틴 크레웨즈와 같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 저처럼 자제심을 잃고 10년이 지나도록 그럴듯한 말 한마디 쓰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슬퍼지거든. 쓰레기, 쓰레기 인간이야. 우리 사무실을 거쳐 간 작가 중에는 내가 그곳에 가서 그곳에 있으라고 권한 작가도 있지.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개조하여 창작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는 것을 기쁘게 여길 것을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그들은 또한 보수를 받게 될 데지. 그렇다고 나는 어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돈에 대한 애착심을 과소평가하지는 않아. 어쨌든간에, 그말은 패배자에게 글을 쓰며 그들의 생에를 보내라고 명렁하는 말은 되지 않을 거야, 경험을 위해, 돈을 위해, 가서 영화한 편 만들어 보라고 내가 권한 사람도 있지. 왜냐하면 그들은 돌아와서 날 때부더 하기로 된 일을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브랜디를 조금씩 마셨다. ''그리고 크레웨즈의 경우는, 일종의 개인적인 실망에 관한 일이었지. 나는 그를 인격적으로 사람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였거든. 저 이퀴티 도서관에서 상연되는 연극 중에서 그의 단막극을 보고, 나는 그를 찾아내서 그가 소설가이지 극작가는 아니라고 말하였으며, 그가 첫 번째 작품을 쓰는 동안 만 일 년을 내가 재정적으로 도와 주었지. 그는 우리 사무실에 온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앞날이 기대되는 젊은이었어. 그런데 지금 그는 무엇이 되어 있는가? 헛간에서 의기양양하게 홰를 치는, 햇빚에 탄 숫 병아리야." 그레이씨의 입은 입맛이 씁쓸하다는 듯이 일그러졌다. ''아, 왜 내가 그 문제에 대해서 계속 말을 해야 하지 ? 우리가하는 일에 실망은 매일 아침 우편물과 함께 틀립없이 배달되는 물건인데 말일세." 그는 한동안 아무 말없이 술을 마시면서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사그라져가는 깜부기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직업에서뿐만 아니지, 예를 들면 내 아들 놈도...." 하고 그는 씁쓸히 말했다. "뭐라구요?" 데이몬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레이씨가 결혼한 적이 있다는 것과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그가 홀아비였다는 것은 데이몬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그가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 아들 말일세." 그레이씨는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는 곡물상을 하는데, 곡물 같은 것을 선불로 사고 있다네. 그는 전챙 중에 큰 돈을 벌었지. 그리고 전쟁 후에도 유렵과 아시아의 굶주린 수백 만의 사람들에게 밀을 팔기 전에, 시장의 곡가가 올라가기를 기다리고 있었거든. 그 애는 영리한 아이였어, 거의 천재에가까왔었지. 그 애의 전공 분야는 수학과 물리학이었지. 그 길로만 나갔다면, 그 애는 이 나라 어느 대학의 교수들 중에서도 혜성같은 존재가 될 수 있었을 거야. 그 아이는 그 무시무시한 결혼 생활에서 얻은 단 하나의 황금알 같은 선물이었지, 그런 아이가 갑자기 방향을 돌려서 장사를 시작하고 법과 시장의 운영 요령과 헛점을 이용하는 데에 재능을 발휘했던 거야. 그 애가 미국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자기의 노려으로 돈을 번 억만장자라고 신문에 나온 것을 나는 읽었지. '정치범 수용소의 보초와도 같은 차가운 마음을 가진 사나이' 그렇게 타임지에 씌어 있더군."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읽어 보지 못했는데요."하고 데이몬이 말했다. "내 친구들이 볼까 봐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지는 않았지." 그레이씨는 힘없이 읏었다. "나는 당신한테 아들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어요." "그 아이에 대해서 말하면 마음이 아파." "그레이씨는 부인에 관한 이야기도 별로 하지 않으시는데, 그것도 괴로운 화제인가 보죠?" "우리 집사람은 젊은 나이에 죽었다네." 그레이씨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계속했다. "그러니 큰 손실은 아니었지. 나는 부끄러움이 많았고 그녀는 유순하고 말을 잘 들었지. 그래서 그녀는 내가 그녀에게 키스를 하도록 한 첫 번째 여인이기도 했어, 내 생각으로는, 그녀는 이 지구 위에서 살며 공간을 차지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궁핍하고 곤욕스러워서 죽은 것 같아. 그녀는 이 세상에 태어날 적부터 자신의 참된 생명에는 한줄기 희미하게 깜박이는 불빚마저도 없었던 거야. 그녀에게 있는 것이란 노예 정신 뿐이었지. 내 아들이 현재와 같이 되어 버린 것도, 그 아이는 자기의 어머니를 보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어. 그 애는 늘상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 어머니와는 다르게 되겠다고 혼잣말을 했었거든. 그리고 그 아이는 나를 멸시하고 있었지. 우리가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그 아이가 말하는 어조에서 그와같은 멸시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았고, 아직까시도 들을 수 있다구. 그애는 내가 일생 동안 변변치 못한 음식을 먹으며 한쪽 구석에서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자기는 만족할 수 없다는 거야." 그레이씨는 몇 번 짧게 웃고 나서는 다시 계속하였다. "하긴, 나는 아직도 나의 구식 자리에 처박혀 있고, 그 아이는 미국에서 가장나이 어린 그리고 자수성가한 억만장자가 되었지." 그는 한숨을 내쉬고 서는 브렌디를 마시고 잔을 비웠다. 그는 데이몬을 쳐다보며 말했다. "딱 한 잔만 더 헤도 될까?" "물론이죠." 데이몬은 이렇게 대답하며 그의 잔을다시 채웠다. 그레이씨는 고개를 숙이고 꼬냑의 냄새를 맡았다. 데이몬은 그가 울고 있으며, 그것을 감추려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 !" 그는 여전히 고게를 숙인 채 말했다. "내가 나의 사생활에 대해서 개탄하려고 자네를 잠도 못자게 깨웠던 건 아닐세. 늙은이가 밤 늦게 브랜더를 좀 과음한 탓으로..." 그의 목소리가 차츰 희미해져갔다. "로저, 내가 가방을 좀 가져다 줄 수 있겠나?" 데이몬은 일부러 가방을 천천히 가져왔다. 그 동안에 그레이씨는 눈물을 거둘 수가 있었다. 데이몬은 그가 소리를 내며 코를 고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가방은 무거웠다. 데이몬은 그레이씨가 가방 속에 무엇을 넣어 가지고, 왜 파티 석상에 가방을 가져 왔는지 궁금했다. "아, 고마워." 그레이씨는 데이몬이 방으로 들어오자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방을 이리 주게나." 그는 들고 있던 브렌디 잔을 내려 놓고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그 가방에는 대개 퇴근 후 또는 주말에 읽으려고 집으로 가져가는 원고로 차 있었다. 그는 낡은 가죽과 찌그러진 자물쇠를 어루만지고 나서는 가방을 열고 작은 약병을 꺼냈다. 그레이씨는 약병을 흔들고 그것을 혀 밑으로 가져갔다. 데이몬은 그의 혈관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반점이 있는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브랜디를 마시면 가슴이 뛰거든." 마치 손님으로서 자신이 가져온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주인에게 실례가 된다는 것처럼, 그레이씨는 거의 사과하는 어조로 말했다. "의사가 경고를 주고 있지만, 사람은 전혀 나쁜 짓을 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거든."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활기를 띠었고, 그의 손도 경련을 멈추었다. "참 멋진 파티였네. 그리고 실라는 언제 보아도 가정을 멋지게 꾸려 나가신단 말씀이야. 10년 되었지 ? 세월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그는 법원 판사실에서 데이몬의 결혼을 증언했었다. "자네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서 잘 해왔어. 내가 좀 더 젊다면 나는 자네 두 사람을 질투할지도 모르지. 그리고 만일 내가 자네라면, 나는 이러한 결혼생활을 방해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할 걸세."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데이몬은 불안한 듯이 말했다. "요즘도 자네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사무실에 없는 오후면 전화가..," ''우리 두 사람은 이해하고 있어요. 말하자면, 묵계라고나 할까요?" 데이몬이 말을 받았다. "로저, 나는 자네를 꾸짖고 있는 것은 아닐세. 사실을 말하자면, 자네가 오후의 산책을 즐기고 있는 동안, 나는 자네를 대신해서 즐거움을 맛보고 있는 거지. 자네처럼 멋지고 활기찬 여자들 한테 추격을 받는다는것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상상하면서 말야. 그러다 보면 따분한 하루가 밝아지게 된다네. 그러나 자네는 이제는 더 이상 젊지가 않단 말일세. 불이 오래 가도록 이젠 불을 재로 덮어야만 하네. 자네는 오래 간직해야 할 귀중한 것을 가지고 있단 말일세...." "그레이씨가 지금 방금 말씀하신대로, 사람은 전혀 나쁜 일을 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데이몬은 대화의 분위기를 좀 더 가벼운 비행기에 태우려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나는 좀처럼 브렌디를 마시지 않거든요." 그레이씨도 함께 따라 웃었다. 그들은 마치 탈의실에서 남자의 못된 장난을 함께 했던 옛 친구들과도 같았다. "그래, 적어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도록은 해야지." 그레이씨가 한 마디 했다. 그리고는 그의 얼굴이 다시 심각해졌다. 그는 무릎 위에 을려놓고 있던 가방 뚜껑을 다시 열었다. 그는 두툼한 큰 마닐라지 봉투를 꺼냈다. "여보게, 로저." 그는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난 자네가 좀 수고를 해 주었으면 하네. 이 봉투 안에는 나의 오랜 세월에 걸친 노력, 즉 나의 평생의 희망이 들어 있다네. 즉 내가 쓴 작품 원고지." 그는 불안한 듯이 웃었다. "이것은 내가 방금 완성해 놓은 책이라네. 내가 평생을 두고 온, 그리고 그렇게 될 만한 한 권의 책이라네, 나는 젊었을 때 작가가 되고 싶었지. 나는 노력해 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어. 너무나도 많은 책을 읽었기 때문에 내가 쓴 것이 어떤 가치가 있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네. 그래서 나는 그 다음으로 가장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했었지. 나는 만일 자네가 원한다면, 훌륭한 작가들의 작품을 위해서 배의 역할, 수단, 유도체가 되고 싶다네. 여기저기서 나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자네는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내가 바라는 주안점이 아닐세.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서, 말에 몰두함에 따라 말하자면 오랫동안 관찰하고 비평하고 편집을 하다 보니, 내가 나의 여생을 이용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창조할 수 있을 정도로 지혜가 충분히 축적하였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이제 자네는 먼 여행길을 떠나네. 비가 와서 호텔 밖에 나갈 수 없는 날도 있겠지. 긴 기차 여행을 할 때도 있을 게고, 외국어를 듣는 데 싫증이 나는 밤도 있겠지. 자네가 돌아을 때까지 이것을 다 읽어 주었으면 하네. 자네 외에는 아무도, 심지어는 타이피스트까지도 이제까지 이것을 본 사람은 없네," 그레이씨는 깊은 숨을 한번 내쉬고는 마치 목에 감추어진 어떤 고통이라도 떨구어내듯 목에 손을 가져갔다. "만일 자네가 읽어 보고 좋다고 하면, 나는 이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줄 것이고, 쓸모없다고 한다면, 불살라 버릴 작정이네." 데이몬은 그 봉투를 받아들었다. 봉투 위에는 그레이씨의 깨끗하고 둥근 필적으로, '단독 항해 해리슨 그레이 작'이라고 씌어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읽어 보고 싶어서 못 견디겠읍니다." 하고 데이몬이 말했다. "제발, 적어도 이곳으로부터 2만 마일 떨어진 곳에 가거든 읽어 주게." 하고 그레이씨가 부탁했다. 여행은 그들이 바랬던 것 이상으로 값지고 즐거웠다. 그들은 아무런 예정도 없이 기분 내키는대로 발길이 닿는 대로 돌아다니며 하루를 함께 지낼 수 있다는 데 새로운 기쁨을 맛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젊은 한쌍의 연인처럼, 손을 마주잡고 새느 강변을, 티베르 강둑을, 유피찌 궁전을, 스위스 알프스의 산길을, 그레이트라군 운하 근처의 다리 위를 거닐었다. 그들은 차트래스 대성당 앞에 말없이 서 있기도 하였고 세인트 미첼 산 꼭대기까지 오르기도 하였다. 파리에서는 헨리 제임즈의 작품을, 로마에서는 러스진의 니스의 바위와 스땅달을 함께 읽었고, 안티베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식당에서 봄 빛을 쪼이며 패투치네 알 패스토와 리구리안 바다가 정면으로 바라다 보이는 테이블에 앉아 바다 요리를 함께 들기도 하였다. 만일 그레이씨의 원고가 아니었더라면 데이몬은 이보다 더 완벽한 휴가를 즐길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실라가 그레이씨가 쓴 것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 그는 훌륭하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그 원고는 그의 손에 죽어 있었다. 해리슨 그레이는 젊었을 때 부정기 화물선을 타고서 몇 개월 동안 남 태평양의 섬을 돌아다녔는데, 책은 소설형식으로 그 여행을 회상하며 쓴 것이었다. 문장은 <콘라드의 젊은이>의 따분한 시문같이 생각되었다. 그레이씨는 섬세하고 괴팍한 성질의 사람이었다. 그는 어면 말을 바꾸는 데 조화를 잘 이루었고 가공적인 인물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데 매우 예리하였으며, 결점과 과장된 문채를 찾아내는 데 날카롭고, 훌륭한 문학 작품을 친미하는 데 헌신적이었다. 그런 그레이씨가 자신의 책을 너무나도 따분하고 진부하게 그리고 재치없이 써 놓았기 때문에 데이몬은 영어의 문채가 지닌 음악적인 것이나 본연의 맛을 가지고 연결된 문장이란 하나도 없어 원고를 읽어 가면서 마음속으로 울고 싶을 정도였었다. 한 달의 휴가도 끝나 감에 따라 데이몬은 다소 걱정이 되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출근하는 즉시, 그의 사랑하는 옛 친구와 얼굴을 맞대야만 하며, 그에게 무어라고 말해야 좋을까 하고 생각하니 생각하는 것조차 끔찍하였다. 그러나 그레이씨는 그 일에 대해서도 신사답게 그리고 친절을 베풀어, 데이몬이 그와 같은 난처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구원의 손길을 뻗었다. 데이몬이 여행에서 돌아와서 첫 날에 그 원고를 가지고 출근하였을 때, 지금보다는 좀 더 날썬하고 쥐털같은 머리를 애교있게 단발을 하고 있던 월튼양이 울면서 그를 문에서 맞이하고는, 그레이씨가 지난 주애 돌아가셨지만, 유렵 어디에 있는 줄 몰라 연락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뉴욕은 이미 여름 날씨로 접어 들었으나, 데이몬은 거실에 불을 피워 놓고서 '단독 항해' 원고를 한장 한장 불태우고 있었다. 그것만이 그가 친구를 생각하며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런 모든 일을 회상하면서 데이몬은 바아의 목로 위에 놓여 있는 브랜디 술잔을 바라보고 단숨에 잔을 비운 후 바텐더에게 돈을 지불하고 데이몬은 호텔 밖으로 나왔다. 그날 그는 처음으로 오마일 걸리는 집까지 걸어가지 않았다. 그날 밤 아내에게 모든 일을 고백하고, 공포와 놀라움에 휩싸일 것을 생각하니, 그는 길가에서 죽고 없는 그의 친한 친구와 닮은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기분이 전혀 나지 않았다. 그는 지나가는 택시를 세위 타고, 아무 말없이 아랫 마을 쪽으로 사라저 버렸다. 제 7장 인공수정 다음 날 아침, 데이몬은 출근길에 아내 실라에게 잘 있으라는 인사 키스를 할 때, 그녀는 담담했으나 얼굴에는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난 밤은 사람의 진을 빼는 밤이었다. 일은 그가 문을 들어서자마자, "권총이라니,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라는 그녀의 물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신 피스톨에 관한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지 ?" 그는 반문하였지만 마음속으로는 비록 하루이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그녀를 그냥 내버려둔 데 대해서 미안함을 느졌다. "올리버씨와 함께 점심식사를 했어요, 그분도 나만큼 당신을 걱정하고 있더군요." "좋소" 데이몬이 입을 열었다. "앉아요, 우리 할 이야기가 있소 그것도 많이." 그리고 나서 그는 점심 때 엘레인에게 한 것과 똑같은 어조로, 한 밤 중에 걸려 온 전화에 관해서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그는 또한 전부는 아니지만, 대충 자기를 해치려고 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는 것에 관하여 엘레인이 말한 것을 말했다.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또한 그녀를 믿지 않고 있음을 느끼게 할까봐 두려워서 실리에게도 그와 같은 명단을 작성캐 하라는 엘레인의 충고는 삭제하였다. 다른 이유로 그가 오래 전에 관계가 있었고, 최근에 시카고에서 전화를 했으며, 가족이나 또는 그녀 자신이 폭행이나 또는 돈을 요구함으로써 보복을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 한 여인의 이름도 빼 놓았다. "여보,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오렌 시간에 걸쳐서 이리 저리 되풀이해서 의논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런 결정도 나오지 않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어떤 원한을 품고서 나를 통해 당신에게 보복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엘레인이 그렇게 제안합디까?" 하고 실라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 비슷한 말을 하더군." "그녀는 틀림없이 그랬을 거예요." 실라는 독살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또 돈을 요구하던가요?" "아니, 그녀에게는 지금 돈 있는 남자 친구가 생겼다더군." "작은 자비나마 하느님께 감사드릴 일이군요." 실라는 비꼬는 듯한 어조였다. "나의 적이라고 할 만한 사람을 생각 좀 해봅시다. 그렇지, 내가 맡고 있었던 반 아이들 중에 다섯 살 난 사내 아이가 있었어요. 작은 여자 아이를 울려서 10분 간 구석에 세워 놓았더니 나를 미워한다고 했어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이젠 제 미리도 지쳤고, 시간도 늦었으니, 그만하고 잠이나 잡시다. 아침이 되면 일이 좀 더 뚜렷하게 보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이제 아침이 되었고 여느 평일과 마찬가지로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었다. 실라는 걱정과 생각에 지친 표정을 지으며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 밑에 잡힌 주름살로 보아 그녀가 잠을 잘 이루지 못하였음을 그는 알 수 있었다. 그자신도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으며, 그런 상황에서도 또다시 장난감 말을 들고 그에게 오라고 손짓을 하면서 대리석 난간에서 있는 아버지의 꿈을 꾸었다. 데이몬과 실라는 문에서 머뭇거리며 또다시 키스를 하였다. 그녀는, ''조심해요." 라고 말하고 그는 ''물론이지." 라고 대답하고 나서 층계를 내려가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차가운 봄 바람이 불고 있었다. 다른 때라면 사무실까지는 온몸에 불끈 힘을 주고서 한참 걸아가야 할 날씨라고 생각하였겠지만, 오늘은 래인코트 속에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칼라를 올려 세워 귀까지 덮고서는, 몸이 따뜻해 지도록 될 수 있는대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그가 지나쳐 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이그러지고 적의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얼굴들을 통틀어 말한다면 모두가 중오심으로 가득차 있고, 모든 사람들이, 적어도 뉴욕에 살고 있는 사람 전체가 적으로 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사무실내의 분위기도 별로 나을 것이 없었다. 올리버가 들어오자 데이몬은 월튼양이 자기 이야기를 듣지 못하도록 방문을 닫았다. 그는 거칠고 큰 소리로 말했다. "언제 그렇게 수다장이가 되어 버렸나? 온 마을을 다 돌아다니며 수다를 떨고 다니다니. 사무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사무실 내에서만 하기로 서로 합의하고 있는 줄 알고 있었는데." "오, 부인께서 나와 점심식사를 했다고 했군요." 올리버가 말했다. "분명히 말하더군."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올리버는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데이몬은 그가 기분이 상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인께서는 버몬트에서 돌아온 후, 데이몬씨가 하는 행동에 어리둥절하고 계셨는데, 사실은 나도 그랬어요. 권총 문제만 해도 그렇죠. 데이몬씨는 다년간 총기 관리법을 부르짖어 왔어요. 그리고 의회에 제출하는 진정서에 당신이 서명한 것도 여러 차례 보아 왔구요." "그래서 내 마음이 변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데이몬의 목소리는 여전히 컸다. "그렇다고 그것이 내 등 뒤에시 내 말을 하고 다니는 변명은 될 수 없네." "이봐요, 로저씨. 사무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문제를 부인에게 말하는 것은 수다를 떨고 다니는 게 아니라구요." 올리버가 말했다. "이것이 사무실과 관계가 없는 문제라는 것을 어떻게 자네는 장담할 수 있지 ? 충분히 관계가 있을 수도 있는 문제야." 데이몬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지금부터 앞으로는 그 입 좀 다물고 다녔으면 하네." 올리버가 돌아서서 묵묵히 자기 책상으로 가자 데이몬은 생각하였다. 나를 공격하려는 또 하나의 표시라고. 그들은 오전 내내 서로 한마디 말도 주고 받지 않았다. 데이몬은 책상 주위에 흩어져 있는 서류를 초조하게 뒤적거리며 일하는 시늉을 할 뿐이었다. 그의 부저 소리가 울린 것은 11시가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데이몬 부인의 전화입니다." 미스 월튼이 말했다. 데이몬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실라는 집무중에 그에게 전화를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실라가 사무실로 전화를 할 때는 오후 다섯 시경이다. 그때 쯤이면 그가 퇴근 준비를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귀가길에 무엇을 사다 달라든가, 시내에 나와 있으면 사무실 근처에서 만나 술 한 잔 하고 저녁을 먹고 나서 영화관에 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묻곤 하였다. ''연결해 줘요." 데이몬이 지시했다. ''여보 ! " 실라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저에게 짐작이 갈만한 적에 관하여 당신이 말한 것을 생각해 보았어요." "당신이 구석에 세워 둔 그 꼬마 아이 말이오?" 데이몬이 말했다. "그 아이가 불량배가 되기라도 했나?" 좋지 못한 농담이었다. 그도 그 말을 하면서도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이 농담을 할 기분이라니 반갑군요. 하지만 나는 그렇지가 않아요." 실라의 목소리는 시무룩하였다. "미안하오." "마지막 학기에 있었던 일을 생각해 냈어요. 학교 주위를 배회하면서 아이들에게 과자를 주고 아이스크림을 사 줄 테니 함께 가자고 아이들에게 묻는 사람이 한 사람 있었어요. 때때로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데리러 오는 것이 늦읕 때가 있거든요. 다른 선생님들이나 저도 너무 바빠서 거리로 나가서 어머니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구요. 물론 아이들에게는 문에서 꼼짝 말고 서 있으라고 엄중히 타일러 두지요. 그러나 네 살이나 다섯 살짜리 아이들에게 말할 수 없는 것도 있다구요. 그런데, 그 사람이 신경쓰여서 어느 날 오후에 그 사람에게 가서 학교 앞을 왔다 갔다하며 아이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 사람은 나이는 약 30세 가량이고, 옷은 잘 입고 있었지만 언뜻 보기에 믿음이 가지 않았어요. 그 사람은 모욕을 당한 척하고서는, 자기는 직장에서 은퇴한 외로운 노인이며, 아이들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어린 아이들에게 과자 하나 주는 것이 무엇이 잘못된 일이냐며 화를 냈어요, 그 후, 그 사람은 전처럼 자주 오지는 않았지만 학교가 끝날 때 쯤 걸어서 지나가는 척하는 것을 가끔 보곤 했어요. 그래서, 나는 그 사실을 경관에게 말했거든요. 그 경관이 그를 발견하고서는 그에게 만일 또다시 학교 주위를 배회하면 험의자로 체포하겠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딱 한번 공교롭게도 바로집 앞 길에서 그를 만났어요. 그 사람은 나를 노려보면서, '이년아 ! 또 경찰에 가서 신고나 하시지' 라고 했거든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를 비웃어 주었고 그는 그냥 가버렸어요. 그리고 나서는 오늘 아침까지 그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러나 나는 지금 막 제 책상을 뒤지고 있다가, 그 경찰관이 이름을 써 준 종이 쪽지를 발견했어요. 당신 그것이 필요해요? 별로 소용이 되지는 않겠지만, 누가 또 알아요?" "이름이 뭐지 ?" ''맥베인이에요. 첫 이름은 적혀 있지 않군요.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인데, 가능성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녀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지. 고마워, 여보 !" ''일을 방해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이 알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좋고 말고." "오늘 아침 사무실은 어때요?" ''모든 일이 슬슬 잘 되어 가고 있소," "당신 올리버씨에게 고함치지는 않으셨겠죠?" 그녀는 염려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약간의 말 다툼이 있었지." 그는 자기에게 돌리고 있는 등을 쳐다보았다. 그의 등은 빳빳이 굳어져 있었다. 그가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으며, 대화의 내용이 무엇이라는 것을 올리버가 알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였다. "여보, 무슨 그런 실수를 !" 실라가 말했다. 그때 월튼양이 말을 건냈다. "데이몬씨, 슐터라는 분에게서 전화가 와 있습니다. 중요한 용건인데 공중 전화이기 때문에 기다릴 수가 없다고 하시는대요." "여보, 전화 끊어야겠어. 집에 좀 늦더라도 걱정말아요." 데이이 말했다. "당신의 하루를 밝게 해주는 마지막 소식. 오늘 아침에 그 꼬마 아이가 나를 사랑한다고 했어요." "모든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이 그랬단 말이지 ?" 데이몬의 말이 끝나자 실라가 수화기를 놓는 소리가 찰칵하고 들렸다. 그 순간, 월튼양이 바깥 방에서 구식의 조그마한 전화 조준 장치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슐터 형사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워서, 뎨이몬은 마치 손으로 거친 나무 껍질 위를 더듬는 기분을 맛보았다. "네에." ''스파맨 여사께서 전화를 하라고 해서요." "누구요?" ''엘레인 스파맨 부인 딸입니다." "오, 네. " 그는 스파맨이 엘레인의 두 번째 남편이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생각했을 때는 데이몬 부인으로서였다. "저는 지금 선생님 회사 근처에 와 있습니다. 곧 6번가의 선생님 회사 근처에 큰 샌드위치 바아로 가겠읍니다. 그리로 나오실 수 있으십니까?" "언제요?" "지금 곧 말입니다. 저는 그 근처에서 어떤 다른 사람들과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하고는 점심식사 전에 만나야만 하거든요." "10분 내에 그곳으로 가지요. 어떻게 제가 선생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슐터는 웃었다. "저는 그곳에서는 유일한 형사일 겁니다. 그리고 그런 티가 금방 나타날 겁니다. 어쨌든, 저는 회색 코트를 입고 있으며, 손에 월 스트리트 저널지를 들고 있겠읍니다." "알겠어요,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말은 아직 빠릅니다. 저는 아직도 선생을 위해 한 일이 없으니까요. 그럼, 10분 후에 만납시다." 데이몬은 잠시 앉아서 책상을 내려다 보며 살인범을 다루는 슐터 형사가 근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기분 나쁜 일에 종사하고 있으며, 그가 엘레인을 알게 된 것은 그의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였을까를 상상해 보았다. 그는 또한 월 스트리트 저널 지를 읽는 형사라면, 어떤 종류에 속하는 형사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데이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리버에게는 아무 말도 없이 옆 방으로 들어가 코트를 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미스 월튼에게 자기에게 오는 전화는 모두 메모를 해둘 것과, 그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가 꾸물대며 좀처럼 올라 오지 않아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버튼을 몇번이고 눌렀다. 슐터 형사가 10분이라고 못박아 말하는 것으로 보아 중요한 일이 있는 것같이 들렸다. 데이몬은 만일 11분쯤 되어서 도착한다면 슐터 형사는 가버리고 말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늦지 않았다. 그가 바아에 들어서자 회색 코트를 입은 건장한 사람이 혼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월 스트리트 저널 지를 읽고 있는 것이 보였다. ''슐터씨이신가요?" 하고 데이몬이 데이블로 다가서면서 물었다. 슐터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턱은 네모난 비석 같았고, 거무튀튀하고 억센 그루터기 같은 턱수염은 억세어서 면도날이 망가질 것 같았으며, 작고 푸른 눈은 영원히 인류에 대한 애정이나 신뢰를 잃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가 올려다볼 때 데이몬은 일제 사격준비를 하고 총탑에서 움직이고 있는 군함의 대포를 연상하였다. 이 사람이 이해하는 모든 것은 표리의 부동성이며, 효과적인 사격을 노리고 있다고 데이몬은 생각했다. ''앉으십시오." 하며 슐터는 신문을 조심스럽게 접어서 테이블 옆에 놓았다. 그는 데이몬에게 식사나 또는 술을 들지 않겠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는 겉치레 인사 같은 것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전화로 협박을 받았다고 스파앤 부인이 말하더군요." 하고 그가 말을 꺼냈다. 그의 말투로 보아, 모든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누구나 다 협박을 받고 있으며, 이것은 날씨처럼 생활 속에 있는 기정사실이고, 그런 일에 대해서는 설사 대책이 있다 할지라도 속수무책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데이몬은 일찌기 알고 있어야 할 일이었다고 하는 것 같았다. "엘레인 부인은 그 사람이 전화로 말한 골자를 나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선생께서 그것이 누구이며 그가 왜 그런 특별한 시간에 전화를 걸었을까 하는 짐작이 가지 않는 이상, 경찰에서는 별로 할 일이 없읍니다." "글쎄요. 저는 창작물 대행업을 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슐터 경위는 고개를 끄덕이며 군함의 대포 같은 눈을 약간 위로 치켜 올렸다. "스파앤 부인이 선생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저는 어느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작품으로 꽤 재미를 보았고 이 일은 출판업계에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으며, 저는 기자들과 인터뷰도 하여 제 자신도 신문에 실렸었답니다." 슐터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신문들이라는 것이 골칫거리를 만들어 냅니다. 내가 법정에서 증거물을 제시하기 전에 신문들이 사건의 비밀을 누설시켜 명백한 유죄판결 소송에 지고 말았던 적도 몇 번 있었지요. 그래서 이 사람은, 선생의 약점을 노려 협박하는 그의 입을 틀어막을 계책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 네에." "왜 그 사람이 선생을 나쁜 사람이라고 불렀을까요? 그 이 점에 대해서 짐작이 가는 것은 없습니까?" 슐터는차가운시선으로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데이몬은 그 형사가 자기의 얼굴에서, 몸짓에서, 얼굴 표정의 변화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살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전혀 짐작이 가는 것이 없소." 하고 데이몬이 대답했다. 그의 반짝이는 푸른 눈에는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아서, 자기의 말을 믿고 있는 것인지, 믿고 있지 않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잘로프스키라는 사람은 돈 액수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읍니까?" "없었읍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선생께서 나쁜 사람이 된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했다면서요?" "네." "댓가라고 해서 반드시 돈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수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도 그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슨 짐작이 가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꼭 그린 것은 아니지만." 하고 데이몬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슐터의 거칠고 명령적인 어조로 보아 심문을 끝낸 다음에 수갑을 채워서 경찰서로 끌고 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란 누구나 다 어떤 방법으로든 마음의 상처를 주었다거나, 또는 모욕을 주었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알고 있다는 뜻이지요." "한 가지 예를 들어 주시겠습니까? 선생 자신의 생활에서 일이났던 일 중에서 말입니다." "글쎄요, 정확히 제 자신의 생활에서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하고 데이몬이 말했다. "집사람이 오늘 아침 어떤 일을생각해 내고서 선생께서 전화를 주시기 전에 전화로 저에게 말했습니다." "선생의 부인이라고요?" 슐터 형사가 말했다. "스파맨 부인이 선생 부인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인께서는 무엇을 기억해 내셨는데요?" 슐터는 그의 시계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데이몬은 학교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던 사람, 실라가 경찰에 알린 것, 집 앞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그가 실라에게 욕설을 퍼부은 일 등에 관해서, 될 수 있는 한 간단하게 말했다. ''집사람은 책상 서랍에서 그사람의 이름이 적힌 종이 쪽지를 발견했읍니다. 맥베인이라고 하는 사람이죠. 그의 앞 이름은 씌어져 있지 않더랍니다." 슐터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것은 마치 그가 취급해야 할 사람들의 범죄자에 대한 무관심을 경멸이나 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부인께서는 불평을 고발하였고, 그 사람에게 경고를 주었다고하는 그 경찰관의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아마 십중팔구 집사람은 모르고 있을 겁니다." 데이몬은 죄송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 겅찰관의 뱃지 번호는요?" "물어는 보겠지만, 집사람이 그것을 적어 두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슐터는 초조한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안전 보호를 위해서는 경찰을 도울 필요가 있음을 배워서 알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집사람도 그렇고 저도 이전에는 경찰과 관계되는 일이라곤 없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이러한 법죄에 관한 일에는 전혀 아는 것이 없읍니다." 하고 데이몬은 초조한 빚을 보이며 말했다. ''언제나 시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슐터가 말했다. 그는 이 말을 마치 지금부터 데이몬과 그의 아내는 범죄 행위에 대해서 좀 더 전문적인 접근 태도를 취해야만 하는 일련의 사건이 기대된다는 것처럼 말했다. "좌우지간, 맥베인이라는 이름을 컴퓨터에 입력해서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를 보겠읍니다. 아마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르지요. " 그는 데이몬을 꾸짖기라도 하듯 노려보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 밖에 또 다른 것은 없나요?" 데이몬은 주저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약 두 달 전에, 인디애나주에 있는 게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데이몬이 입을 열었다. "어느 부인이 제 사무실로 전화를 했었지요. 저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저의 집사람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습니다. 선생께서도 이 건에 대해서는 입 밖에 내시지 않는다고 약속을 해주셔야 하겠읍니다." "데이몬씨, 선생은 지금 협박을 당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슐터는 냉정하게 말했다. "아무도 저를 협박하고 있지는 않아요." "최선은 다 하겠지만, 나는 아무런 약속도 드릴 수는 없읍니다. 하지만 만일 선생께서 안전보호를 원하신다면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식당 안은 무더웠다. 데이몬은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러나 그 형사는 그의 두터운 코트를 벗지도 않았고, 실내의 온도에는 아랑곳 하지 않았으며, 도시 기온의 극단적인 차이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이었다. 데이몬은 자기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를 혹시 근처의 데이블로 누군가가 앉아서 엿듣지나 않을까 하여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어떤 여자였습니다." 데이몬의 목소리는 낮게 떨어져서 거의 속삭이는 듯하였다. 슐터는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몸을 앞으로 기울여야만 했다. 비로소 헝사의 얼굴에는 홍미라기 보다는 거의 즐거움에 가까운 표정이 감돌았다. "그 여인은," 데이몬은 말을 계속하였다. "매우 젊고, 결혼한 여자입니다. 저는 그녀와 사랑을 한 적이 있어요. 그녀의 남편은 인디애나주 게리시의 모 고등학교의 축구 코치였습니다. 그녀는 뉴욕에 있는 부모를 만나보러 왔다가 저와 만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그녀가 임신을 하게 된 거예요. 바로 저 때문에 말입니다. 그들 부부 사이에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는 겁니다. 그녀가 저에게 말하기를, 그들은 아이를 가지려고 무진 애를 써 봤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녀는 낙태를 시키려고 하지 않았거든요. 그녀는 그 아이를 길러야 겠다면서, 그녀의 남편에게는 그 아이가 그의 아이라고 믿게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아하 !" 슐터는 만족한 듯 이렇게 말하였다. "선생은 나쁜 사람이었군요." "난 죄 의식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녀는 인공수정 대신에 나를 이용했던 거니까요, 그것 뿐이죠." "그것은 인공수정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지요." 이번에는 그 형사의 눈에서 즐거움의 빚이 번쩍였다. "그 여인의 이름을 제게 말씀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야만 되겠지요. 큘리아 래치 부인이라고 합니다." "그것과 어떤 관련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슐터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녀는 게리에 살고 있습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시카고에서 건다고 했죠.'' "게리는 시카고에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좀 더 들어 봅시다. 그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나요?" "그녀가 사무실로 펀지를 써 보냈읍니다." 데이몬은 눈을 감았다. 향수 냄새가 나는 푸른 편지지에 약간 글자가 뒤로 기울어진 필체로 쓴 편지가 다시 떠올랐다. 그는 두터운 종이에서 나는 향수 냄새 때문에 코를 찡그리고 편지를 읽었었다. "축하합니다. 이제 당신은 8파운드의 몸무게가 나가는 사내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그가 그 편지와 편지 봉투를 찢어 쓰래기통에 넣을 때 느꼈던 수치감과 의기양양함과 혼합된 감정이 되살아남을 느겼다. 그와 엘레인은 처음부터 그들의 결혼 생활이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 것을 감지하고, 임신을 피하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하였었다. 실라는 아이를 갖기를 원하였지만, 그들의 노력은 아무런 결과도 낳지 못하였다. 둘은 그것이 누구의 결점이라는 것을 알아내는 고통을 구태여 겪으려 하지 않았다. 그때, 그는 적어도 자기는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형인 데이비가 열 살 때 백혈병으로 죽은 이후로는 자신이 유일한 아이로서 자라온 그가, 비록 이름도 모르고 아마 그를 한 번도 못보게 될지도 모르지만 마침내 아들을 갖게 된 것이었다. 그의 핏줄은 계속 이어가게 될 것이다. 슐터 형사는 그에게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는 눈을 떴다. "그런데,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청천벽력 식으로 선생이 말한 것처럼 전화를 걸다니, 그것은 어찌된 일이지요? " "약 1년 전에도 그녀가 제게 편지를 써 보냈읍니다. 그녀가 그 아이를 테리고 뉴욕에 오니까, 자기와 그 아이를 만나 달라는 거였어요. 그녀는 저에게 안전하게 편지를 써 보낼 수 있는 곳으로 자기 친구의 주소를 알려주었읍니다." "선생은 그 아이를 보았나요?" "아니오. 저는 그녀에게 이것은 오래 전에 있었던 과거이며 이 이상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고 편지를 써 보냈지요." 데이몬이 설명했다. "실제로 저는 지금까지 이렇게 생각했읍니다. 저 자신 그 여인에 관해서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고, 그녀가 뉴욕에 와서는 여러 남자들과 잤을지도 모르며, 또한 그 아이도 다른 사람의 아이일지도 모른다고요. 그런데, 그녀가 전화를 걸었을 때, 그녀는 그동안 보관하고 감추어 두었던 제 편지가 그녀의 남편에게 발각되었다고 말했던 겁니다." 슐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바로, 어떤 일이든 절대로 적어 두어서는 안 된다는교훈이오. 말씀 계속하십시오, 전화로 그 여인이 그 밖의 또 무슨 말을 했읍니까?" ''그녀는 울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녀는 이야기하기가 어려웠던거죠. 그러나 제가 그녀의 이야기를 종합해본 결과, 그녀의 남편이 모든 사실을 말할 때까지 그녀를 때렸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또 말하기를, 그녀의 남펀이 나를 만나면 나를 녹초가 되게 만들어 놓겠다고 맹세했다나요,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 만일 내가 무사하려거든 내가 그 아이의 생활비와 교육비를 지불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했다더군요." "그래서 돈을 지불해 왔나요?" "그녀에게 1천 달러를 수표로 보냈지요." "그것이 잘못이었습니다.." 하고 슐터 형사가 말했다. "그 수표에는 당신의 이름과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었을 데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밖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데이몬은 지친듯이 말했다. 진실과 결과는 하나의 장난이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운동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 여자의 주소를 가지고 있음니까?" ''네." 데이몬은 주머니에서 작은 노트를 꺼내 주소를 적어서 그 페이지를 찢어 슐터 형사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게리 경찰서 형사 반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 여자의 남편을 조사해 달라고 하갰소." "그분에게는 신중을 기해 달리고 말씀해 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신중을 기하라고요?'' 슐터의 윗 입술이 삐죽거렸다. "그거야, 경찰서 형사 반장으로서는 사건을 찾아봐야 할 말인데요. 다음번에 그 잘로프스키라는 자가 또 전화를 걸어오면,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제가 어떻개 해야 한다는 것을 선생님께서 말해 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슐터는 잠시 생각하면서 식어서 싸늘해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렇지, 첫째로 선생 전화에 녹음 장치를 부착시켜 둘 것을 제안합니다. 그 다음, 그가 전화를 걸어 오면 다음날, 그 사람과 만날 약속을 하도록 하십시오, 그 다음에 어디서, 언제 그와 만나게 되는가를 저에게 알려주세요. 그러면 제가 그곳, 아니면 그 근처, 그가 나를 볼 수 없는 곳에 가 있도록 하겠습니다." "전번에는 10분내로 만나자고 했었습니다. 바로 집 모퉁이에서 다음번에도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러면, 선생에게 전화를 걸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슐터는 잇사이로 숨을 불어내며 휘파람 소리를 냈다. "그가 선생에게 말하는 것을 녹음할 수 있는 장치를 직접 달 수 있는 기구를 살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자료는 전자부품 가게에 가면 얼마든지 샅 수 있읍니다." 그는 시계를 쳐다보고 나서 커피 잔을 옆으로 밀쳐 놓았다. "저는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만일 선생깨서 줄리아 래치 부인과 같은 다른 멋진 지난날의 이야기가 있으면 생각해 두셨다가 다음번 만날 때를 위해서 이름과 날짜를 종이에 적어 두도록 하세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건장하고 몸집이 거대했다. 두터운 코트를 입고 있었으나 땀 한 방울 홀리지 않고 있었다. 그의 큰 머리에 비해 우스꽝스럽게 작게 보이는 좁은 챙의 진한 갈색 중절 모자를 썼다. "끝으로 한 가지." 데이몬이 일어서자 그가 덧붙여 말했다.''스파맨 부인이 말하기를 선생께서 권총 휴대 허가 신청을 고려하고 계신다던데요?" "그렇습니다." "데이몬씨, 지금 연세가 어떻게 되시지요?" "예순 다섯이오.'j "전에 다루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오. 한 평생 총이라곤 만져본 적도 없습니다." "'전쟁중에는 어디에 계셨나요?" "선원으로 있었지요. 그곳에서는 총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슐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총이란 이익보다는 해를 더 가져올 뿐입니다. 어찌 되었든 간에 현재로서는 거리에 너무나 많은 총이 나돌고 있어요. 선원으로 있었다구요?" 그의 말 소리에는 틀림없이 경멸하는 투가 섞여 있었다. "전투 지역에서 보낸 일수에 대해서는 과외 수당을 지급 받고요. 우리는 그것을 엷은 근무라고 부르곤 했지요." "전쟁에 참가했었나요?" "제 일선 해병대에 있었지요. 과외 수당도 받지 못하면서." 슐터가 말했다. ''그렇다면 나이가 매우 젊으시겠군요. 지금 몇이시오? 쉰이오?" "쉰 일곱이랍니다." 슐터가 대답했다. "열 일곱에 입대했었지요. 낭만적인 남 태평양에서 꽃다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저는 아직도 일 년에 두서너 번은 겁에 질려 새파래집니다. 자, 갈 길을 가야지. 나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저 다이어먼드 구역에 있는 미치광이 유태인들, 그들은 가방 속에 20만 달러 상당의 돌들을 넣어 가지고 다닌다니까요. 그들이야말로 등에 '나를 데려가 주오 !'라는 표시를 붙이고 다니는게 나을 겁니다. 그러고서도 살해되었다고 놀라고 있으니, 내가 그들이라면 47번가를 순찰하도록 이스라엘 군대에서 소대 병력을 고용할 겁니다. 오후에 할 일이 태산같아요. 죽은 두 사람의 가장 친한 친구들을 상세히 조사해야만 합니다." 그는 그 바보스럽게 보이는 작은 모자를 그의 대머리에 더 안전하게 고쳐 썼다. "제가 나간 후에도 일이 분쯤 이곳에 더 앉아 계세요. 우리가 함께 거리로 나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최선을 다해 주기 바랍니다. 악수도 없이 노 해병은 바아 입구 쪽으로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지나 밖으로 나갈 때 그는 마치 폭풍우 속의 선원처럼 몸을 흔들거렸다. 제 8장 술병의 유령 6번가 근처에 전자 제품을 파는 큰 가게가 있었다는 생각을 하고 데이몬은 6번가를 천천히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슐터 형사와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그는 육체적으로 상처를 입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매우 거친 안마를 받고 난 후에 느끼는 뻑적지근함과도 같았다. 슐터는 사실상, 문제 해결에 대한 해답을 주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문제만 일으켜 놓았고,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줄리아 래치에 관한 이야기를 그에게 해야만 했다는 것도 그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앞으로 긴 세월을 두고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문제를 가지고 과거를 비탄하며 괴로와 해야만 하는 것이다. 데이몬은 자기와 줄리아,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그날 밤을 생각해 보았다. 그날 밤, 그와 실라는 주로 책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 간 어느 작은 파티에 갔었다. 누군가가 줄리아는 결혼 전에 도서관의 사서였으며, 그녀가 뉴욕을 떠난 것을 서운하게 여진다는 말을 하였다. 그녀는 이따금 일반적인 문제를 화제로 삼는 대화에 참여하였을 뿐이었다. 비록 그녀가 별로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현대 작가들의 많은 작품을 읽었고, 비록 게리에 살고는 있다 하더라도 많은 잡지를 읽고 있으며, 뉴욕을 떠날 때 출판과 연극계 주변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들과도 서신 연락을 해왔기 때문에 그날 밤 화제에 오른 책을 모두 알고 있었다. 저작자에 관한 뒷 이야기에도 정통하고 있음이 확실하였다. 그녀는 가날프고 지친 듯하며 수줍어 하는 귀엽고 작은 여자였으며, 데이몬에게는 좋다든가 나쁘다든가 하는 어떤 뚜렷한 인상을 주지는 않았었다. 그 무렵, 데이몬은 실라와는 시련기를 겪고 있었다. 그의 사업은 형편없이 부진한 데다가 몇몇 쓸 만한 의뢰인이 다른 곳으로 떠나가 버렸기 때문에 그는 계속 술만 퍼마시고 있었다. 일 주일에 사 나흘 밤은 새벽 두세 시까지 죽이 맞는 친구들과 어울려서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시곤 하였다. 그는 때때로 아파트까지 비틀거리며 걸어와서 앞문 자물쇠의 열쇠 구멍을 찾느라고 한참 동안 더듬거리곤 했다. 그럴때마다 그는 발을 절어 변명을 해보였었다. 그러나 실라는 얼음처럼 냉정한 표정을 짓고 묵묵히 그가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들 부부는 그 파티 전날 밤까지 수 주일 동안 아무런 정사도 갖지 않고 있었다. 파티가 끝나 집에 돌아와서도 실라가 침대 옆 테이블 위에 있는 등불을 끄기까지 잘 자라는 말을 주고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는 음탕한 성적 충동을 느끼자, 굼틀하고 벌떡 일어섰다. 그는 그녀를 애무하려고 손을 그녀의 몸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그녀는 화를 내면서 그의 손을 뿌리쳤다. "또 술이 취했군요. 저는 술주정뱅이하고는 사랑을 할 수 없어요." 하고 그녀는 핀잔을 주었다. 데이몬은 무안을 당한 나머지 자기 연민에 빠져 멍하니 누워있었다. '제대로 되는 일이란 하나도 없어. 모든 것이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고 있어 이 결혼 생활도 오래 지속될 것 같지가 않아.' 하고 그는 생각하였다. 아침이 되었다. 그는 실라가 아침식사 준비를 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집을 나와 사무실로 가는 도중에 간이식당에 들러 조반을 메웠다.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전 날 밤에 마신 술의 취기가 아침까지 가지 않았다. 맑은 정신으로 그는 지난 몇 개월 동안의 일 들을 생각하고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 뿐만 아니라 실라의 잘못이기도 하다고 결정을 내렸다. 결혼 생활의 악화는 돈 때문에 싸움을 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었다. 그는 집에 돈을 거의 들여 놓지 않았고, 실라도 돈벌이라는 것이 없어서 청구서만 자꾸 쌓여 나갔다. 그때 물의를 일으키고 있던 준 도색 서적을 출판하여 부자가 된 평이 좋지 않은 출판업자 한 사람이 좀 더 품위있는 출판물을 개척하기 위해 자기 사무실에 와서 일해 달라는 제의를 해 왔다. 그가 약속한 돈은 상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속물이었고, 데이몬은 그와 같은 인간을 품위있는 출판업자로 만들려면 자기와 같은 사람이 열명 있어도 어려울것이라는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데이몬은 그의 제의를 거절했고, 또 그 이야기를 실라에게 말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었다. 그녀는 화가 났었고, 그래서 그에게 화풀이를 하였다. "아이고 이 답답한 서방님아, 당신은 지금까지 너무 다정다감했어요. 성실하다는 것은 다 훌륭한 일이에요. 그러나 그 성실이 청구서 한 장 해결해 주나 보세요? 만일 당신이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나같은 지독하고 당돌하고 사나운 여자와 살기 위해서는, 그리고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는 가장 천박하고 가장 흉한 일이라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아셔야 해요." "감상적으로 되지 말자구." "감상적인 것은 바로 당신이에요. 문학이라는 성화를 죽이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 바로 감상적이라는 거예요. 좋아요, 순수하고 깨끗하게 계세요. 그러면 로저 데이몬의 고결함에 대해서 세 사람의 격려와 갈채가 있을 태니. 나는 당신이 잠시 동안 이나마 모든 일을 나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바꾸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그 초라한 신전같은 사무실에 가서 파이프나 빨면서 엘리어트가 문으로 들어와 서명된 계약서로 당신에게 기름을 발라 주기를 기다려 보세요." "여보." 데이먼은 슬픈 듯이 실라를 불렀다. 한편, 그는 그레이씨가 마지막으로 아들과 나눈 대화, 그리고 그의 아들이 아버지 그레이씨에게 평생을 보잘것 없는 음식을 먹으며 한쪽 구석에서 사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고 말할 때의 아들의 경멸을 자기에게 들려 주었을 때에 느꼈던 감정에 사로잡히는 듯하여 당황하였다. ''당신은 당신답지 않은 말을 하는구료." "사랑하는 서방님께 내가 보장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있어요." 실라는 냉흑한 어조로 말했다. "가난이라는 것은 숙녀의 음성을 바꾸게 하는 틀림없는 확실한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을요." 그 이후로 그는 실라가 비꼬아 말하는 그 아이들과 함께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소란 속에 어떤 변명의 구실이 있을까마는, 모든 잘못을 전가할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정직한 사실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러한 모든 상황과 수 개월 동안 끈질기게 계속되는 실라의 고집 센 분노를 기억하면서, 데이몬은 그녀가 농부처럼 보였고 또한 농부처럼 행동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꼴은 보기 흉했다. 데이몬은 그것이 싫었다. 그는 상황이 끝에 가서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는 모르지만, 더 이상 이런 상태를 참고 견딜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였다. 그는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장부를 흩어 보며 전날 밤 실라가 자기의 손을 밀쳐 버린 일을 생각하고 분개하고 있었다. 그때 전화 벨이 울렸던 것이다. 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는 바로 큘리아 래치였다. 그녀가 자기 이름을 말할 때, 그는 그녀의 전화를 받은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려고 애썼다. "저는 어젯밤 선생님을 만나 뵌 것이 정말 멋진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읍니다. 선생님을 다시 만나 뵌다면 얼마나 더 멋진 일 일까요?" 하고 그녀가 말을 꺼냈다. "친절도 하십니다. 부인께서는, 아니, 저어... 래치 부인께서는." 데이몬은 말을 더듬고 있었다. "저는 오늘 아침, 일어나기 바로 전에 선생님에 대한 꿈을 꾸었어요." 그녀의 가벼운 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바로 10분 전이지만요." "그 꿈이 기분 좋은 꿈이었기를 바랍니다." 데이몬은 당황해서 책상에 앉아서 일하고 있는 올리버가 통화 내용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신경을 썼다. 그녀는 다시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요, 그 꿈은 매우 선정적이었다구요." "그거 좋은 소식이군요." ''그래서, 저는 생각해 봤어요. 제가 그 꿈을 잊어버리기 전에 선생님이 지금 곧 저의 방으로 오셔서 저를 사랑해 준다면, 뉴욕에서 저의 휴일을 끝마치는 멋진 방법이 되지 않을까 하고요," ''그럼 내가... 내가요?" 데이몬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것은 매우 유혹적인 말씀이시군요..." ''저는 볼덴 호텔에 묵고 있어요. 호텔은 동부 39번가에 있고 방은 6호실이에요. 문은 열려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데이몬은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 놓으면서 여러 주일 동안 금욕 생활을 하고 있는 그에게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여인의 속삭임이 그를 고통스러울 정도로 흥분시키고 있음을 깨달았다.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올리버가 물었다. ''누가 작별인사를 한 것뿐이야." 그는 자기 앞에 펼쳐져 있는 장부상에 기록되어 있는 긴박한 숫자를 들여다보며 오 분을 더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그는 동부 39번가로 가는 길을 건너 그를 위해 열려 있을 호텔 문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데이몬은 아직도 거의 11년의 세월이 흘러간 그 전화건과 점심 시간에 통행자들로 붐비는 6번가를 지나서 발길을 옮기고 있었던 그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잠자리에서의 줄리아 래치는 결코 가날프지도 않았고, 지쳐있지도 않았으며 수줍음도 없었다. 밤이 되기까지 그는 자기가 열여덟 살의 청년이었을 때, 하루 낮과 밤에 가졌던 성적 흥분보다도 더 격렬한 성적 쾌감의 절정을 맛 보았었다. 우연의 일치였는지 아니었는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그 일이 있은 후로는 운이 따르기 시작하여 그의 재정 상태가 갑자기 향상되었다. 전에 두 권의 책을 내놓았으나 전혀 반응이 좋지 않아 팔리지도 않고 있었던 고객 작가가, 두 달 동안이나 베스트 셀러 리스트에 오르는 소설을 가지고 나타났었다. 그리고 어느 신문기자가 모 영화배우와 함께 자서전을 공동으로 쓰는 계약을 잘 처리하여 엄청난 선금을 받게 되는 등 워쎄스터에 살고 있던 그의 고모가 돌아가시면서 유언으로 그에게 1만 달러를 남겨 주는 등 행운의 연속이었다. 이제 그는 더이상 술을 마실 필요가 없었다. 처음에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미심쩍게 여겼던 실라도 마침내는 옛날의 실라로 돌아와서 자기가 바가지를 긁은 일에 대해서 사과를 하였다. 그리고 더이상 그가 잠자리에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 필요도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제는 그녀 쪽에서 그에게 손을 내밀어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러한 일들을 돌이켜 보면서 데이븐은 그가 큘리아 래치의 방에 올라가던 날부터 지난 10년 동안이 그의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단정을 내렸다. 그러나 지난 3일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고는, 새로운 어둡고 추운 시기, 도청과 경계, 그리고 살인을 다루는 사람들이 관런되는 시기, 끓임없이 죽은 자가 나타남으로써 유도되는 수치스러운 기억의 시기가 그에게 시작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그날 오후에는 술에 취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이제는 회복되어 자기를 의지할 수 있는 부양자로 굳게 믿고 있는 실라가, 이러한 일을 저지른 자신을 용서해 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데이몬은 전자기구가 널려 있는 가게 앞에서 유리창 안을 들여다 보며 자연이 인류 앞에 내놓은 문제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문제를 슬기롭게 풀고 마침내는 소형 컴퓨터, 라디오와 카셋트 플레이어, 소형 텔레비전을 만들어 낸 인류의 무한한 재능에 감탄하고 있었다. 가게로 들어가기 전에 그는 집에 있는 전화에 부착할 메시지 기록용 기계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자기는 남의 일을 몰래 조사하는 채질이 아니기 때문에 남몰래 다른 사람들의 통화 내용을 도청하는 장치는 사지 않는 것이 정당한 일이라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러나 솔직이 말해서, 그는 미신적인 데가 있었다. 만일 소리까지 듣도록 선을 연결하면, 다음 번에 잘로프스키가 전화를 걸어왔을 때 그를 만나야만 될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러한 선을 연결하지 않으면 그와 대면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몬은 안으로 들어가서 점원 한 사람이 손님의 시중을 들고 있는 카운터 쪽으로 갔다. "아주 작고 가벼워서 여행할 때는 가방 속에 넣어가지고 다닐 수 있는 것을 사고 싶은데요." 옆 손님이 말하고 있었다. 데이몬은 그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전쟁 건에는 자기와 함께 연극 수업을 받았고, 선원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는 함께 배를 탄 친구로서 가장 가까운 사이였고, 몇 년 동안 같은 아파트를 썼던 사람, 모리스 피츠제랄드의 목소리였다. 데이몬이 연극을 포기하기로 결정했을 때 피츠제랄드는 이미 무대에서 자리를 잡고 꾸준히 배역을 받고 있었다. 비록 데이몬이 극장을 그만두고 냉정하게 헤어지기는 했지만 그들의 우정은 지속되어 왔었다. 그들의 우정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금이 가자 데이몬은 피츠제랄드와 자기와의 최근까지의 애인 앙뚜아네따 브래들리가 런던으로 떠나는 전날 저녁에 개최된 송별 파티에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아일렌드의 트위드 모자 밑에 그 낯익은 의기양양한 얼굴을 보자 냉정은 사라지고 옛날 배를 함께 타고 아파트 방을 함께 사용하던 시절의 따뜻한 우정이 되살아났다. 런던에서는 낭랑한 아일랜드 인 특유의 목소리와 어떤 역도 해낼 수 있는 능력 때문에 피츠제랄드는 믿을 만한 제 1의 주연급 배우로서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였었다. 그는 재능은 있었지만, 자기가 스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키가 작았고, 탄력있고 교활한 그의 얼굴은 웃음거리 연극에서의 희극 배우로나 쓸만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도 비참한 웃음을 지으며 말하였듯이, 다른 사람으로부터는 고사하고 심지어는 자기 어머니로부터도 잘 생겼다고 들어본 적이 없었다. 데이몬은 자기에게 등을 돌려대고 서 있는 그에게로 다가가 등을 툭툭 치면서 ''어이, 친구 ! "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온 몸이 쑤시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고, 동시에 그레이씨로 착각한 사람과 만났던 일을 생각하고는 무슨 말을 걸기 전에 그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진짜가 아닌 가짜 그레이씨와 같은 모습을 지닌 사람을 만나는 것은 일주일에 한 번으로도 충분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이 돌아서자, 데이몬은 그 사람이 바로 피츠제랄드였음을 알았다. 그가 알고 있었던 검은 머리와 주름살 없는 젊은이로서가 아니라, 모자 밑으로 흰 머리칼이 보이고 약간 탄듯한 얼굴에 자신과 비슷한 나이를 한 사람이었다. ''아니, 이럴 수가? 자네 로저 데이몬 아닌가 ! "하고 피츠제랄드가 소리쳤다. 심지어는 악수를 하면서도 데이몬은 혹시 귀신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기가 먼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으나 "고국에 돌아와서 무엇을 하고 있지 ?" 하고 데이몬은 곧 물었다. ''연극에 출연하고 있어. 내일 연습이 시작되지. 뉴욕에 돌아와서 이처럼 뒤에서 덜미를 잡힐 줄은 몰랐네. 이곳에 돌아온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자네와 마주치다니 과자 위에 당의를 입히는 것과 같군." 그는 데이몬을 정다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로저, 신수가 좋아보이는데 그래." "자네도 그런데." "이젠 많이 늙었지." 피츠제랄드는 모자를 벗고 머리를 매만졌다. "흰 머리도 생겼고 눈가에는 걱정의 주름살도 잡혔는 걸. 눈도 이제는 빚을 잃었고 순진성도 없어졌어. 그런데, 자네 머리는 예전이나 다름없으니 참 반가운 일일세." 그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자네는 조금도 늙은것 같지가 않아," 데이몬이 한마디 했다. 그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피츠제랄드는 데이몬보다 나이를 따지자면 적어도 6개월은 위였다. 그러나 피츠제랄드는 아직 쉰으로 밖에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 눈에 그렇게 보이는 거야. 그러나 실제로는 젊음의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일종의 필사적인 방법으로 기적적인 일을 하고 있어." "선생님." 아까부터 두 사람을 지켜보며 서 있던 점원이 이제는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선생님, 이 셋트로 하시겠습니까?" "그럽시다. 고마워요." 피츠제랄드는 신용 카드를 판매대 위로 던졌다. "자네는 이 마술집에서 무엇을 사려고 하나?'' "사는 게 아니라, 그냥 구경하고 있는 걸세." 데이몬은 왜 전화에다 메시지를 기록해 두는 장치가 필요한가를 피츠제랄드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 한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자네는 어떤가?" 피츠제랄드는 유감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쇼 제작자와 점심을 하기로 되어 있네. 이렇개 나팔을 블고 있을 때가 아니라네. 지금도 약속 시간이 이미 지났다네." "내일 밤은 어떤가? 우리집에서 저녁을 함께 하기로 하지. 집사람도 만나 보고." 피츠제랄드는 엘레인을 알고 있었고, 그녀와 헤어진 것을 축하하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데이몬이 두 번째 결혼할 때에는 그는 런던으로 가고 없었다. "그거 좋지. 몇 시, 어디서 ?" ''저녁 여덟 시. 우리집 주소를 적어 주지." 데이몬은 줄리아 래치의 주소를 적어 슐터에게 찢어준 작은 노트를 꺼내서 자기 주소를 적어 피츠제랄드에게 건네주었다. 그20샌트짜리 노트에는 친구와 적들의 주소와 이름이 적혀 있고, 셰익스피어가 적어 두었듯이, 시인의 작품도 적혀 있었다. "가기 전에 한 가지." 데이몬은 약간 망설이는 듯하다가 물었다. "앙뚜아네따도 이곳에 함께 와 있나?" 피츠제랄드는 이상한 눈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네." 그는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10 년 전이었지. 비행기가 아일렌드 바다에 추락하여 모두가 실종되어 버렸다네." "안됐군. 정말 안됐어." 데이몬은 애도의 뜻을 표하였다. 피츠제랄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말했다. "행운의 제비뽑기지. 나는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려고 하고 있고, 그것을 극복하였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는 그렇지가 못해." 그는 애써 웃으려고 하였다. "생각한다는 자체가 무의미한 걸세." 그는 자신의 비참함을 잊어버리고 쫓아 버리려는 듯이 약간 모호한 몸짓을 하였다. 그들은 함께 거리로 걸어나왔다. ''내일 밤 여덟 시에 만나세, 부인에게는 나는 무엇이든지 잘 먹는다고 전해 주게나." 피츠제랄드는 잽싸게 택시에 올라탔다. 데이몬은 멀어져가는 택시를 바라보다가 가게로 다시 들어가 조금 전에 들렀던 판매대로 가서 전화에 부착하는 메지지 기록장치를 샀다. 상자에 포장된 기계를 들고 그는 가장 가까운 바아로 들어가서 오후의 첫 술을 주문하고 나서는 피츠제랄드와 자기가 지난날 함께 하였던 즐거운 시절과 언짧았던 시절을 회상해 보았다. 그러한 시절 가운데는 도우니 음식점, 아니면 해롤드 바아에서 지냈던 긴 긴 밤도 있었다. 그곳에는 연극이 끝나면, 배우들이 모여들었다. 데이몬과 피츠제랄드는 함께 온 다른 사람과 오닐, 오댓츠, 사로안, 윌리엄즈, 밀러와 죠지 버나드 쇼의 다른 재능에 관해서 논쟁을 하곤 했었다.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피츠제랄드는 그들과 그 밖의 사람들의 작품에서 자기가 말하려고 하는 요점을 증명하는 말들을 인용하곤 했다. 연극의 스타일도 검토하여, 피츠제랄드는 집단 극장에서 예시한 바와 같이, 그 방법을 '뉴욕의 속삭임 학교'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아일랜드 사람이었는데 더블린에서 도선사가 되었고, 아들에게는 맑고 상쾌한 음악적인 음성을 유전으로 남겨주었다. 이 때문에 피츠제랄드가 조이스의 문장을 인용할 때, 그의 억양은 세익스피어 풍의 어조로 올라가거나, 또는 경쾌하게 노래하는 듯한 아일랜드인의 어조로 내려가곤 했었다. 피츠제랄드의 키는 작고 얼굴은 희극배우 같은 인상을 주었으나, 그는 언제나 여자들의 관심을 끌어서 주위에는 항상 두 서너 명의 여자들이 따라다녔고, 그들이 좋아하는 시와 훌륭한 독백 대사를 암송해 달라고 졸랐다. 피츠제랄드는 아무리 술에 취해 있을 때에도 조용하나마 열정을 갖고 또한 매우 깨끗한 목소리로 시를 노래하고 독백 대사를 외우곤 했었다. 또한 그는 요리를 잘 해서, 그의 아파트에서 성찬을 마련할 수 있는 여자를 고르는 위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현재 식사를 만들고 있는 여자보다 더 요리를 잘할 줄 아는 여자를 발견하면 전임자를 가차없이 해고하고 새로온 여자에게 '집사장'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다. 데이몬은 그와 함께 같은 아파트를 쓰고 있는 동안, 그가 갈아 치운 집사장의 수를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였다. 데이몬이 앙뚜아네따를 처음 아파트로 데리고 왔을 때, 피츠제랄드는 다짜고짜로, "요리를 할 줄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녀는 이상한 눈을 하고 데이몬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이상하게 생긴 사람은 누구지요?" "그 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어 줘야 된다구. 그 사람은 요리에 아주 열중하고 있는 자니까," 데이몬이 설명해 주었다. "제가 요리사처럼 보이나요?'' 앙뚜아네따가 물었다. "당신은 물거픔에서 솟아나온 여신처럼 보이는데, 그 거품은 초콜렛 무우스로 되어 있군요." 피츠제랄드가 대꾸했다. 앙뚜아네따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그 대답은 '노'예요. 저는 분명히 요리는 할 줄 몰라요. 그런데 댁은 무엇을 할 수 있지요?" "나는 톱과 매를, 그리고 달걀 요리와 설로인 스테이크 요리를 구별할 줄 압니다." 그는 데이몬을 돌아보고 말했다. ''그 밖에 또 내가 뭘 할 줄 알지 ?" "입 씨름, 늦잠, 그리고 예이츠의 시를 옳으면서 서까래의 나이테를 만드는 것이 있지." 데이몬이 한 마디 했다. "프렌더즈 필즈의 시를 아세요? 제가 열 살 때, 학교 강당에서 암송한 적이 있어요. 제가 암송을 끝마쳤을 때 사람들은 박수 갈채를 보내 주었답니다." "물론이죠." 피츠제랄드는 매스껍다는 듯이 말했다. 데이몬은 그녀가 농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요리를 할 줄 아느냐고 물은 데 대한 복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에 대해서 피츠제랄드와 농담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데이몬을 돌아보고 말했다. ''여보게 친구, 이 아가씨와는 결혼하지 말게." 그는 이 말을 한 이유가, 앙뚜아네따가 요리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혹은 자기가 프렌더즈 필즈의 시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는지는 데이몬에게 말하지 않았다. 데이몬은 바탠더에게 두 잔째 술을 주문하면서 결국은 피츠제랄드의 충고는 받아들인 셈이 되었구나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는 앙뚜아네따와는 결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앙뚜아네따를 집에 데리고 오기 전에 피츠제랄드는 아일랜드 시인에 대해서는 정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경고했어야만 했었다. 만일 그랬더라면 그녀는 웃음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피츠제랄드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되어 세 사람 사이에 별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피츠제랄드의 시에 대한 찬미는 윌리암 버틀러 예이츠의 시를 위해 간직되어 있었다. 경호선을 타고 대서양을 천천히 항해하고 있는 동안 그와 데이몬은 북서대양의 길고 큰 파도를 해치고 가는 자유 혹은 뱃머리에 서서 그 시인의 신들린 시를 옮곤 했었다. 그는 그들이 위험을 넘기고 바다가 고요할 때 그러한 밤을 특별히 맞기 위해, '비잔티움으로 가는 항해'라는 시를 암송했었다. 데이몬은 너무나도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지금 6번가에 있는 어느 바아에서도 피츠제랄드의 아일랜드 억양으로 속삭일 수 있었다. 그는 그 시를 자신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바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미친 사람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기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것은 늙은이를 위한 나라가 아니다. 서로 서로 팔짱을 끼고 있는 젊은이, 나무의 새들...... 저 연어들이 헤엄 치고 , 고등어가 떼지어 우굴거리는 바다. 물고기, 짐승, 또는 새들은 무엇이 생기고, 태어나고, 죽어도 긴긴 여름을 찬미한다. 그 육감적인 음악에 사로잡혀 모두 나이 먹지 않는 지성의 비석을 돌보지 않는다.' 피츠제랄드는 첫 절 마지막 부분에 와서는 소리없이 울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데이몬도 그러한 순간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눈에서도 눈물이 솟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피츠제랄드는 실제로 세익스피어의 시를 전부 외우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래서 보름달이 뜨는 밤에 호송선이 수평선 상에서 한 때의 늑대와 같은 잠수함들의 완전한 목표물로 뚜렷이 모습을 보이고 있을 때는, 그는 냉소에 가까운 용기를 가지고 햄릿의 독백을 암송하곤 했었다. <지구가 타이르듯 훈계는 혹독하도다. 저 많은 사람과 짐을 가진 군대를 보라. 아름답고 가날픈 왕자에 이끌려 간다. 숭고한 야심으로 부풀은 그의 정신은, 모든 운명에 파열과 불안을 드러내고, 보이지 않는 일에 얼굴을 찌푸린다. 달걀 껍질에도 견딜 수 없는 죽음과 위험. 위대하다는 것은 마땅히 크게 떠들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것. 그러나 하찮은 작은 일에 싸움을 찻아, 모든 사람을 잠자게 한다. 수치스럽게도, 나는 이만 명 의 사람들의 급사를 본다. 명성에 대한 환상과 계피를 위해 잠자리처럼 무덤으로 가며, 음모를 위해 싸움을 한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은 소송도 할 수 없고, 이는 무덤도 아니며, 살해된 자들을 은폐하는 것이 아닌가? 오, 이제부터는 나의 생각은 피로 물들거나, 또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 되리라.> 어느 날 밤 피츠제랄드가 이 독백을 암송한 직후, 호송 선단 중의 한 배가 어뢰를 맞고 침몰하였다. 그 배는 폭파되었는데 그들은 배가 침몰하면서 불길을 내뿜고 절망적인 기분 나쁜 연기가 기둥처럼 솟고 있음을 지켜보았다. 이것이 그들 중의 배 한 척이 파괴되는 것을 본 첫번째 경험이었다. 그 광경을 본, 피츠제랄드는 잠시 울더니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친구, 우리는 달걀 껍데기이며 오늘 밤 바다 위에 떠있고 바닷물 속 깊숙이 빠져 있는 모든 생각은 피로 물들어 있다네." 잠시 후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서 풍자적인 어조로 '템패스트<폭풍우>'라는 시를 옳었다. <다섯 길 물 속에 그대의 아버지가 누워 있고 뼈는 산호가 되었고, 두 눈은 진주가 되었내. 그의 모든 것은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으나, 바다로 하여금 부유하고, 진기한 것으로 바꾸어 놓도록 허락하였도다. 바다의 요정은 시간마다 조종을 딩동 하며 울린다. 들어라 ! 딩동하고 울리는 저 종소리 . 지금,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있다. 딩동댕.> 피츠제랄드는 그 시를 옮고 나서 잠시 묵묵히 있다가 말을 꺼냈다. ''셰익스피어는 모든 경우를 위해서 말을 남겼지. 나는 살아서도 절대로 햄릿의 연극은 하지 않겠어. 나는 아래로 내려가겠네. 우리 배가 어뢰를 맞아도 내게 와서 알리지 말게." 그들은 운이 좋아서 그들이 탄 배는 어뢰 공격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기뻐하며 뉴욕으로 돌아와 젊은 나이로, 또한 정력을 가지고 그들의 본업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그들이 아파트를 같이 쓰기로 결정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들은 대부분의 거리가 중고 자동차를 거래하는 사람들과 창고로 쓰여지고 있는 구역, 허드슨 강 근처에 있는 아파트를 하나 발견하였다. 산만하고 쓰러질 것만 같은 아파트였다. 그들은 전 거주자가 두고 간 허접쓰레기 같은 가구로 방을 꾸몄다. 곧 아파트는 책과 극장 포스터로 난장판이 되었지만, 들락날락하는 여자들이 정돈해주는 형편이었다. 데이몬처럼 그도 전쟁 전에 결혼을 하였으나 그의 아내로부터 자기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며 그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는 사연의 편지를 받았다. "정 떨어지는 이혼이었지. 법적인 관계는 내가 북 대서양 아이슬란드 근처 바다에 있을 때 레노에서 끓어졌지." 그는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으며, 이러한 상태의 아파트에서 3개월을 견디어 낸 한 여자가 그와 결혼하기를 원한다고 의사를 명백히 밝혔을 때, 그는 데이몬이 있는 앞에서 그가 전에 배역을 맡아 연기한, 영웅 풍자극을하면서 그녀를 설득하였다. "나는 여자들에게 속았고, 여자들로부터 사기를 당했고, 여자들로부터 거절을 당했으며, 여자에게 이혼을 당하였고, 여자로부터 발길로 차이고, 조롱당하고 농락을 당하였으며, 여자에게 거짓말을 당했고, 행동의 구속을 받았으며, 배반당해 왔소이다. 나와 여자와의 관계를 설명하자면 셰익스피어의 힘을 빌려야만 할 것 같소. 나는 정처없는 무어 사람이고, 멸시당하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덴마크 사람이고, 념어지지 않는 오뚜기이며, 미쳐 버린 리어왕, 거짓이 입증된 허풍선이 뚱보, 꽁지빠진 수탉입니다. 이것이 여성들이 나에게 바랄 수 있는 전부랍니다." 그 말을 하고 난 다음, 피츠제랄드는 그 여인의 이마에 정숙한 키스를 해주었다. "자, 이만하면 그 문제에 대해서 내가 느끼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조금은 생각이 들겠지요?" 그녀는 그가 생각했던 대로 웃음을 터뜨리고, 다시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그 후에도 그녀는 조용히 아무 말없이, 계속 다른 무리의 여자들과 함께 아파트를 출입하였다. 두 사람의 우정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피츠제랄드와 데이몬은 각자가 데리고 온 여자에게는 절대 손을 대지 않기로 묵계가 되어 있었다. 그러한 묵계는 데이몬의 앙뚜아네따와 함께 나타나기까지 잘 지켜져 왔었다. 그녀는 곧 그들 생활의 고정물이 되어 늘 붙어 있게 되었고, 일주일에도 세 번 또는 네 번은 데이몬과 잠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피츠제랄드가 요리하는 여자를 구하지 못할 때에는 간혹 두 사람의 식사를 준비하는 일까지 하개 되었다. 오후의 고요하고 한적한 뉴욕의 바아에서 잠수함의 공격 목표에서 벗어나서 다른 위험의 미끼가 될 염려도 없이 데이몬은 또 한 잔의 술을 주문하였다. "이번은 더블로 가져와요." 그는 바텐더에게 주문했다. 아침식사를 든 후로는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고 빈 속에 술을 마셨지만 위스키는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그는 잃어버린 원기왕성했던 시절과 피츠제랄드에게는 정말 어렵고 궁색하였던 시절을 회상해보면서 정신은 맑아지고 우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일을 끝마치고 아파트로 돌아오자, 데이몬은 무엇인가 일이 잘못되어 있음을 알았다. 날씨는 북극에 가까운 추위가 감도는 뉴욕의 겨울 저녁이었다. 그레이씨의 사무실에서 아파트까지 걸어 오자 추위는 뼈 속까지 스며들었다. 그래서 그는 한 잔의 술과 피츠제랄드가 피워놓았을 거라고 생각되는 따뜻한 불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방안에는 불도 없었고, 피츠제랄드는 불거진 눈으로 여전히 잠옷을 입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히 그가 하루종일 외출하지 않았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피츠제랄드는 손에 술잔을 들고 방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데이몬은 한눈에 그가 오후 내 내 술을 마시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무대에 서기 전에는 결코 하지 않던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날 밤에 무대에 서야만 했었다. 피츠제랄드는 데이몬이 방에 들어서자 깜짝 놀란 듯했다. "오."그는 술잔을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자네는 나를 현장에서 잡았군. 배우의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술에 취해서 출근한 다는 것을 !" "'왜 뭐 잘못된 거라도 있나, 모리스?" "잘못된 것은 바로 내가 더러운 놈이라는 거지, 만일 그것이 오늘, 그리고 이 시대에 잘못된 일이라고 고려할 수 있다면 나와 함께 한 잔 하세. 우리 두 사람은 오늘밤 술이 필요할 거야." ''막이 오를 시간이 세 시간도 채 남지 않았어." "난 잠 속에서도 그 돈을 가로채는 브로드웨이 잡동사니같은 짓은 해낼 수 있다구." 피츠제랄드는 경멸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나 없이도 막이 올라가게 하여 청중들에게 누가 빠졌는가를 추측하게 할 수도 있지." "모리스, 그만둬 ! 무슨 일 있었나?" "좋아, 아줌마 같은 이 사람아." 피츠제랄드는 술병과 얼음과 잔이 놓여 있는 테이블 쪽으로 다가갔다. "그럼, 내가 자네에게 술 한 잔 만들어 주지. 하녀들은 모두 도망쳐 버렸으니까. 그리고 그럴 때도 되었고. " 그가 데이몬을 위해 술을 만들고 자신의 것도 다시 만들려고 할 때, 그의 손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술병의 목이 유리잔 가에 쨍 하고 부딪쳤다. 위스키가 두 개의 잔에서 넘쳐 흐르자 그는 술잔을 들고 데이몬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데이몬은 잔을 받아 한 모금 마시고 나서는 자리에 앉았다. "다정한 친구야. 앉아야지. 이야기가 길어질지도 모르니까" ''좋아, 모리스. 무슨 일인가?" 하고 데이몬이 물었다. "앙뚜아네따에 관한 일이야." 피츠제랄드가 드디어 말을 꺼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앙뚜아네따와 자네의 다정한 친구 모리스 피츠제랄드, 옳게 말해서 개자식 같은 제랄드에 관한 이야기야." "자네가 그것을 설명할 필요는 없쟎아." 데이몬은 전쟁에서 살아 남아, 흥겨운 밤을 수없이 축하한, 자기 옆에 있는 자의 목을 잡아 조르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제하며 조용히 말했다. "자네는 짐작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피츠제랄드가 자기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있음을 나타내려고 애쓰고 있음을 데이몬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흔들거리는 희극배우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은 얕밉게 보였다. "아니, 나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 데이몬이 대꾸했다. "이 암흑 세계에 살고 있는 순진한 사람들에게 축복이 내리기를" 갑자기 피츠제랄드는 술잔을 불 없는 패치카로 던져 버렸다. 위스키는 바닥에 길개 꼬리를 끌 듯 자국을 남기고 유리잔은 페치카 뒷벽에 맞아 산산 조각이 나 버 렸다. "자네 두 사람 사이에 그런 관계가 계속된 지 얼마나 되었나?" 데이몬은 여전히 그의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그는 자세한 이야기나 또는 설명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다만 상기되어 있고 얄밉게 보이는 피츠제랄드의 얼굴을 제거해 버리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말이 자동적으로 흘러 나왔다. "한 달, 여자가 결심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지," ''말도 안 돼." 데이몬이 소리쳤다. "그녀는 금주 내내 나와 함께 잤고 어잿 밤에도 나하고 잤어. 그리고 자네는 옆방에서 잠을 잤쟎아?" ''아마, 그 반대였는지도 모르지. 여보게, 남자와 여자관계는 밀림의 짐승같은 거라구." "자네는 그녀와 결혼할 셈인가?" "아마, 머지않아서. 유감스러운 말이지만 전투 준비를 해야만 하네." 피츠제랄드가 말했다. 그는 자기가 데리고 온 식모 한 사람과 오랫동안 정을 통하고 있었다. 그녀는 진저리날 정도로 그에게 헌신적인 봉사를 해 왔었다. 그래서 데이몬은 전투 준비라는 것은 그녀에 대한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교회에 서둘러 갈 필요는 없어. 나는 끝내는 앙뚜아네따를 정직한 여자로 만들고 말 데니까." 피츠제랄드가 강조했다. "더러운 자식 !" 데이몬은 독살스럽게 욕을 해 주었다. "내가 처음부터 그렇다고 말했쟎아. 하지만, 이제 나는 그런 말을 듣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아. 제기랄, 내 술은 어디 갔어 ?" ''난로에 던져 버렸쟎아 !" ''오, 길잃고 해매고 바람마저도 비탄에 잠긴 스카치 술병의 유령이여, 이건 유명한 미국작가 토마스 월프의 작품에 나오는 말이지. '돌 하나, 잎새 한 잎, 발견되지 않는 문.' 이건 더 유명한 작가의 작품 속에 있는 말이지. 맹세코 나는 어떤 일도 결코 잊지 못해. 큰 부담이야. 나는 결코 다정한 친구 자네를 잊지 않을 거야." ''고맙군." 데이몬은 이렇게 한마디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지금 당장 짐을 싸가지고 여기서 나가겠네." 피츠제랄드는 그를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자네가 그럴 순 없어. 나갈 사람은 바로 나야." "나는 매음굴에서 살만큼 야만적인 놈은 아니야. 특히 창문에 비친 홍등이 무엇을 말하고 있음을 알고 난 이상에야..." "우리 둘 중 하나는 있어야만 해. 우리의 전세 계약이 아직도 일 년은 더 남아 있으니까." 하고 피츠제랄드가 말했다. 데이몬은 망설였다. 그는 다른 살만한 곳을 구할 돈도 없었고, 이 아파트의 전세 값을 절반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하지." 하고 피츠제랄드가 말을 꺼냈다. ''동전을 던져서 결정 짓기로 하세. 지는 자가 이곳에 머물러 살면서 셋돈 전액을 부담하는 거야." 데이몬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 "동전을 가지고 있나? 피츠제랄드가 물었다. 내 잔돈은 모두 내 방 테이블 위에 있어. 나는 잠시라도 자네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아서 그러네." "이봐, 모리스. 입이나 닥치고 있어 !" 데이몬은 이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동전을 찾았다. 그는 21센트짜리 동전 하나를 꺼냈다. "만일 자네가 나를 다정한 친구라고 부른다면, 난 자네 턱뼈를 박살내고 말 거야. 내가 던질 테니, 어느 쪽을 갖겠어 " "뒷면을 갖겠어." 데이몬은 돈을 던져 동전을 그의 손바닥에 받아들고 다른 손으로 10초 동안 동전을 덮어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난 후 그는 가리고 있던 손을 쳐들었다. 피츠제랄드는 몸을 숙여 동전을 들여다 보았다. 그는 낮게 뒷 소리를 내며 그의 숨을 내몰았다. "앞면이야. 내가 졌네. 내가 머물러 있지." 하고 그가 말했다. ''행운의 제비뽑기. 받아들이기 과히 나쁘지 않은 패배로군. 이거야말로 마치 8만 1천 명의 생명을 희생시킬 다음 침략 계획을 세울 때 세밀하고 신중한 배려를 하는 군대와도 같군. 로저, 미안하게 됐네." 데이몬은 동전을 피츠제랄드에게 내던졌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고 있었다. 동전은 그의 이마에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데이몬은 짐을 꾸리려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가 방에서 나오자 그는 피츠제랄드가 저넉 공연에 나갈 차비를 하느라고 샤워를 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한 사연을 지닌 앙뚜아네따도 이제는 다섯 길 깊이의 바다 속에 누워 있을 거라고 데이몬은 생각했다. 그는 술잔을 들고 바의 끝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때의 사람들이 들어와서 그의 옆 에 앉아 큰 소리로 탤레비전 쇼에 대해서 논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광고주를 대표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선전을 담당하거나 그 프로와 다소 관계가 되는 사람들이었다. '다섯 길 깊이의 물속' 하고 데이몬은 생각해 보았다. 아일렌드의 바다에는 산호가 있을까? 그는 그후 앙뚜아네따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었다. 그때 받은 상처가 치유된 지도 이젠 오래다. 그녀의 두 번에 걸친 도피는 여러 해가 지난 후 축복받은 여인, 사랑스러운 애인, 키크고 늠름한 동반자인 실라와 결혼하도록 데이몬 자신을 해방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 당시는 피츠제랄드도 데이몬도 모르고 있었지만, 어떤 뜻에서는 피츠제랄드가 데이몬에게 도움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 피츠제랄드와 앙뚜아네따를 위한 송별파디에 데이몬은 초대를 받았지만 참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전에 데이몬은 피츠제랄드로부터 펀지를 받았었다. 그 편지에서 옛 친구는 다음과 같은 사연을 적어 보냈었다. "나를 용서하게. 나는 자네를 형제처럼 사랑하고 있지만 이제는 그 핑계라는 말을 마음놓고 사용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네. 그러나 형제는 서로서로 어려운 문제로 괴롭히는 운명을 지니고 있는 거야. 카인을 생각해 보게나. 행복하길 비네. 그리고 우리가 다음에 만날 때는 서로 껴안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네." 그렇다. 바로 오늘 오후가 그들이 만났던, 그다음의 날이었다. 만일 데이몬이 그러한 제스처에 익숙한 사람이었다면 피츠제랄드는 틀림없이 그의 옛 겉 모양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친구를 얼싸하고 껴안았을 것이다. 그는 내일 밤 모리스가 저녁식사를 하러오면 그의 편지를 생각하면서 피츠제랄드를 껴안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제서야 위스키의 술기운이 오르기 시작하였다. 세상이 온통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무어라고 자신에게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비잔티움으로 가는 항해'의 시 첫째 귀절을 되풀이해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말이 더듬거리며 나오지 않았고, 가운데 줄은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바보처럼 낄낄대고 나서는 위엄을 갖추고서 바텐더에게 말했다. "계산서를 가져와요." 술에 취한 탓으로 피츠제랄드가 말한 것처럼 그는 전화용 매시지 기록 기계를 바아에 놓고 왔다. 그는 그 순간만은 잘로프스키나 또는 슐터 형사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피츠제랄드를 포옹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뉴욕 타임츠 지 일면에 피츠제랄드의 사진과 함께 기사가 실려 있었다. '모리스 피츠제랄드, 유명한 배우로서 40년 이상이나 미국 무대와 만년에는 연극 무대에서 활약해 왔으나 연극제작자 네이단 브라운씨와 오찬 중에 식당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쓰러졌음. 곧 구급차로 레녹스 힐 병원에 이송되었으나 도착 즉시 사망함.' 데이몬은 신문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창 밖의 길 건너 집을 멍하니 바라다가 고개를 숙이고 손을 눈으로 가져갔다. 아침식사 테이블에서 데이몬과 마주보고 앉아 있던 실라는 그의 얼굴의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이 몹시 잘못되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근심스러운 듯이 "당신 괜찮으세요? 당신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어요." 하고 말했다. "모리스가 어제 오후 나를 만나고난 다음 곧 죽었어." "어머나, 가엾어라 ! "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곁에 있는 신문을 집어들었다. 그녀는 일면 하단에 나와 있는 짧은 내용 기사를 읽었다. ''그분은 나이가 겨우 65세 쟎아요." ''내 나이 또래니까 갈 때도 되긴 되었지." 데이몬이 한마디 했다. "그런 말 마세요." 실라는 날카롭게 말했다. 데이몬은 억제할 수 없는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 울음을 참으려고 그는 소름끼치는 농담을 하였다. "그 친구 오늘 밤의 멋진 식사를 놓쳐 버렸군." 제 9장 살인계 그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맨 먼저 할 일은, 전날 자기가 화를 냈던 일에 대해 올리버에게 사과하는 일이었다. "그까짓 걸 가지고 뭘 그러세요? 사람은 누구나 때로는 약간의 화를 낼 권리가 있는 겁니다." 데이몬의 사과에 어리둥절하며 올리버가 말했다. "부인께서 너무나도 걱정하시는 것 같았고, 사실 나도 그랬어요.'' 그는 데이몬을 보고 어린애처럼 웃었다. ''약간의 화풀이는 기분 전환이 된다더군요." "그건 그렇고, 실라는 이제 모든 것을,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일은 모두 알고 있다네. 그러니 더 이상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을 매일 그녀에게 보고할 필요는 없네." 데이몬은 화를 내지 않으며 말했으나 올리버는 그 뜻을 이해하고 있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을 하든 이제부터는 침묵으로 일관하겠습니다. 하지만 제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고맙네. 내게 이젠 아무 일 없을 거야." 하고 데이몬이 말했다. 데이몬은 연극 제작자인 네이탄 브라운의 전화번호를 찾아서 그에게 건화를 걸었다. 그는 오랫동안 기다려야만 했다. 그가 자기 이름을 대자 교환원이 이렇게 말했다. "데이몬씨,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교환원은 어쩔줄을 몰라 하면서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음성이었다. "오늘 아침 이곳에는....온 세상사람들이 전화를 걸어 오고 있읍니다. 사무실이 온통 벌집을 쑤셔 놓은 것 같습니다. 브라운씨에게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수화기에서 몇 번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려 오더니, 브라운씨에게 연결이 되었다. ''그분이 말한 마지막 말은 선생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브라운이 말했다. "그분이 말하기를 '점심을 하러 오기 바로 직전에 멋진 옛 친구를 만났네. 이는 행운의 징조야. 로저 데이몬이라고하는 사람인데, 자네 그 사람을 아나?' 하고요, 그리고는 제가 대답도 하기 전에 의자에 앉은 채 갑자기 몸을 비틀기 시작했읍니다. 제가 미처 손을 뻗어 잡기도 전에 마룻바닥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식당은 갑자기 무덤처럼 조용해졌고, 웨이터 한 사람이 병원 구급차를 부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2, 3초밖에는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사이렌 소리를 들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순간에는 이상했읍니다. 제가 시간 감각을 잃었던 것 같아요. 구급대원이 할 수 있는 응급조치는 다 했지만 소용이 없었으며 그 사람들은 그를 즉시 싣고 가 버렸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큰 손실입니다... 그처럼 훌륭하고 재능있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장례식 준비는 누가 하고 있읍니까?" 사무실에서 주택가까지 걸어오는 도중에 데이몬은 자신의 과민된 신경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병원에서 사무실로 돌아와서 모든 것이 끝나자 틈을 내어 런던에 있는 그분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읍니다. 부인이 진화를 받더군요. 저는 그 부인이 그 사람의 안사람인지 누군지 몰라서 누구냐고 물었더니 가까운 친구이며, 모리스는 런던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것올 알고 있더군요. 제가 그녀의 이름을 적어 두었습니다. 제가 그것과 전화번호를 선생님께 알려 드리겠읍니다. 선생님께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기를 원하실지도 모르니까요." "제가 전화를 하지요. 그런 절차를 누가하고 계시지요?"하고 데이몬이 물었다. "제가 하고 있읍니다. 적어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일이 매우 복잡하군요." 브라운씨는 지쳐 보였으며 자신도 확실치 않은 듯한 말투였다. 브라운은 연극의 예행 연습을 처음부터 보고자 했으나 연습 마지막날 밤, 마지막 막이 끝나서 막이 내리고 있을 때 들어왔었다. ''그 사람의 시신을 보시고 싶으신지요? 시신은..." ''아뇨. 보고 싶지 않습니다." 데이몬은 이렇게 대답했다. 모리스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만도 그는 견디기 벅찬 일이었다. 데이몬은 싸늘하게 죽어 있는 실제적 사실과 대면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친구는 이제 하나의 긴 상자 속에 들어 있는 추억에 불과하였다. 그는 집을 비우고 있을 때 집을 지키며 전화를 받고 이제 그의 전 소유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며, 오래 전에 아일렌드 바다에 빠져 죽은 한 여인의 기억에 사로잡힐 남자와 살아온 여인에게로 홀로 여행길을 뗘나는 것은 조금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을 것이다. 듣고 싶지도 않은 죽은 사람의 과거 이야기를 이것저것 늘어 놓거나, 무심결에 내막을 털어 놓는 옛 미국인 친구가 나타나서 그러한 여인을 괴롭힌다는 것은 잔인한 일이 될 것이다. "그의 종교는 무엇이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하고 브라운이 묻고 있었다. "천주교입니다. 독실한 신자는 아닙니다. 그 친구가 성모 마리아의 처녀 수태설을 믿고 있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하고 데이몬이 대꾸했다. "요즘은 더더욱 그렇지요.'' 브라운은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 이후 신앙심이 쇠퇴한 것을 슬퍼하면서 한숨을 지었다.'' 하지만 병원에 있는 성직자에게 종부성사를 올려달라고 했읍니다. 혹시나 해서요." "나쁠 거야 없지요." 데이몬은 피츠제랄드가 전에 미사에 나간 적이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다. "일 주일이나 이 주일쯤 지나서 그의 추도식이라도 마련한다면 적당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그만 극장에서 종파와는 관계없이 말입니다. 그는 대부분의 무대 활동을 영국에서 했지만, 동료 배우들 사이에서는 매우 인기가 있었습니다. BCC에서는 세익스피어를 녹음하였고, 그 중 하나를 공연하여 사람들에게 찬사도 받고 있습니다. 옛친구로서 선생님께서는.....?'' "미안하지만, 저는 거절하겠읍니다." 데이몬이 말했다. 그는 아파트를 동전 던지기로 정할 때, 그날 저녁 피츠제랄드가 한 연설 같은 말이 기억에 떠올랐다. 피츠제랄드를 기념하기 위하여 종파를 떠나 모인 사람들이 그런 말을 듣는다면 기뻐할까하고 의아심을 품었다. "그분이 좋아하는 노래라든가 또는 시가 있었나요?" "내가 알고 있을 때는, '비잔티움으로 가는 항해'를 좋아했죠. 그후 그의 취미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데이몬씨께서 그것을 읽어 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아니에요. 어느 배우에게 시키세요. 만일 제가 그것을 읽는다면, 그 친구는 무덤에서 졸고 있을 겝니다." 브라운씨는 잠시 씁쓸하게 웃었다. "우리는 극장에서는 그러한 겸손에는 익숙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건 그렇고, 혹시 고객 중에 상연되기를 기다리며 제작자를 필요로 하는 총명하고 젊은 극작가는 없으신지요?" 어디까지나 빈틈없는 사업가였다. 죽은 친구가 바다를 건너 날아가기 위헤 비행기에 실리고 있는 이 마당에서도 흥행은 계속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등장 배우의 이름을 지우고 다음 경쟁 준비를 한다. "슬프게도 없군요." 하고 데이몬이 대답했다. 브라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연습을 시작한 연극의 제작을 중지해야만 할 것 같군요. 그분을 대신해서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요." 피츠제랄드의 비석에 새겨두기에 좋은 말이라고 데이몬은 생각했다. '이곳에 아무도 그를 대신할 수 없는, 모리스 피츠제랄드가 잠들다.' 라고. "련던에 있는 여자분의 전화번호를 지금 가지고 계십니까?" "여기 있어요." 브라운이 전화번호를 데이몬에게 알려주었다. 데이몬은 그것을 종이족지에 받아 적었다. "이곳과는 여섯 시간의 시차가 있습니다. 나는 그녀가 자고 있는 것을 깨웠지요. 내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도 아주 침착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더군요. 영국인의 무감각이라고나 할까요? 만일 제 처가 비슷한 환경에 처해 있었더라면 입고 있는 옷을 찢고 살을 드러냈을 겁니다. 습관과 민족의 성격이 다른 탓이겠지요. 그러나 슬픔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데이몬은 이 사람을 우연히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상연한 좋은 연극도 나쁜 연극도 보았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추도식이 있을 때 저에게도 알려 주십시오. 저도 그곳에 참석하고 싶군요." 하고 데이몬이 부탁했다. "물론이죠. 아뭏든 고맙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슬픈 날입니다." 하고 브라운이 말했다. 데이몬은 피로의 파도가 그에게 몰아져 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사무실 벽에 기대어 놓여 있는 부서진 가죽 소파를 그리운 듯이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레이씨가 근무하던 첫날부터 있었던 것으로, 회의할 때 사무실에 사람들이 두세 명 있었을 때만 사용되었다. 그 소파에 앉아서 어면 희망이 발언되었으며 어떤 실패를 확인하였던가? ''올리버, 우리에게 부저를 누르지 말라고 미스 월톤에게 말해 주겠소? 난 누워서 잠시 눈 좀 부쳐야만 할 것 같네." 하고 데이몬이 부탁했다. "네, 알겠읍니다." 하고 올리버가 대답했다. 그는 걱정하고 있는 듯하였다. 그 두 사람은 이제까지 한 번도 그 소파 위에 누워본 적이 없었다. "로저씨, 몸이 불펄하십니까?'' "약간 졸릴 뿐이야. 어제 밤에 잠을 설쳤거든." 올리버가 미스 월튼에게 말을 전하였다. 데이몬은 소파 위에 누위 다리를 뻗었다. 그는 곧 잠이 들었으나 펀안히 잠들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데이몬은 어지럽고 무서운 색정적인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그는 전에 누워본 적이 없는 큰 침대에서 젊고 관능적인 앙뚜아네따와, 음탕한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줄리아 래치와 함께 두 여자가 다 심술굿게 그를 마음껏 사랑하고 있었다. 모리스 피츠제랄드는 데이몬이 전날 전자제품 가게에서 본 옷을 입고 역시 그때의 표정을 지으며 손에 술잔을 들고 서서 그의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흘겨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데이몬의 아버지는 미소를 띠고 오라고 손짓하면서 금빚의 햇빚을 받으며 난간에 서 있었다. 눈올 떴을 때 데이몬은 육욕, 배반, 그리고 비난, 또한 그의 잠재의식이 잠깐 눈을 부친 사이에 불러일으킨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의 색욕의 엉킴의 환상에 시달려 소파에 드러눕기 전보다 더 피로함을 느꼈다. 올리버는 그의 책상에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거야 잠잤다고 할 수 없쟎아요. 무섭게 소리만 지르시고 있었으니까요." 하고 올리버가 한 마디 했다. "꿈을 꾸고 있었네." 데이몬은 일어나서 눈을 비비며 말했다. "오늘 밤엔 프로이트를 다시 읽어야겠는 걸." "마치 당신께서 울고 있는 것같이 들렸어요." ''나는 울고 있지 않았는데. 정반대였는테." 데이몬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 책상으로 갔다. 그의 다리는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그는 전화기 버튼을 누른 다음 수화기를 들며 전화가 오면 받겠다고 미스 월튼에게 말했다. "슐터라고 하는 분이 조금 전에 전화를 했는데 다른 전화를 받는 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이 전화를 걸어 달라고 하면서 전화번호를 남겨 놓았읍니다." 그녀가 데이몬에게 전화번호를 불러주자 데이몬은 그것을 받아 적었다. 적어도 슐터만은 꿈 속에 없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데이몬은 미스 월튼에게 그 번호에 전화를 걸어달라고 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다이얼을 돌렸다. 그는 왜 자기가 뉴욕 경찰에 근무하는 형사와 의논할 용무가 있을까 하고 미스 월튼이 생각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전화를 통해 '살인계입니다.' 라는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을때 그는 자기가 직접 전화를 건 것이 잘한 것임을 알았다. ''슐터 경위를 부탁합니다. 데이몬이라는 사람인데요, 경위님의 전화를 받았었읍니다." 데이몬은 그 남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데이몬씨 ?" 슐터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로 듣는 그의 목소리는 데이몬의 귀에는 잘로프스키의 말과 많이 닮아 있었다. "몇 가지 소식을 알려 드리겠읍니다. 우리가 맥베인씨에 관하여 컴퓨터로 조회해 보았더니, 맥베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선생님 댁 근처인 서부 브로드웨이에서 살고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아마 동일인 일 겁니다. 그 사람은 항상 아이들 주변을 배회하다가 맨해턴 공립학교의 어느 보육원 선생의 고발로 체포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의 몸을 수색하였더니 커다란 사냥용 칼을 다리에 숨겨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징역살이를 했나요?" "흉기를 감춰가지고 다녔다는 죄목으로 6개월의 집행유예 언도를 받았답니다. 그를 조사하여 만일 그 칼을 가지고 있음이 발견되면 그 기간을 복역하게 되겠지요." 하고 슐터가 설명해 주었다. ''고맙습니다. 경위님." 하고 데이몬이 말했다. "자, 제게는 무슨 소식이 없나요? 또 전화가 걸려오지는 않았읍니까?" "아뇨.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부탁한 명단은 작성했나요?"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선생이라면, 그것에 그렇게 시간을 잡아먹지는 않을 겁니다." "하루 이틀 내로 작성하도록 하겠소." 슐터는 데이몬이 명단을 하루 이틀 사이에 만든다는 것을 밑지 못하겠다는 듯이 투덜댔다. "내가 게리에 있는 친구에게 말해 두었읍니다. 그도...... 조사하고 있을 겁니다. 선생이 부탁하던 그 말이 무엇이었죠?" "신중을 기해 달라고 했습니다." "맞아요. 그래서 그에게는 그 일이 연방사건이 되지 않도록 조용히 일을 처리하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래치라는 사람이 축구 코치를 했기 때문에 본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은 인기도 좋고, 계속해서 세 번이나 우승을 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매우 가벼워집니다." 하고 데이몬이 말했다. 그 순간, 그는 실수를 하였음을 알았다. 왜냐하면 슐터가 전보다 더 큰 소리로 다시 투덜댔기 때문이었다. 그는 문제가 자신의 진문직을 행사하는 것과 관계되었을 때 풍자해서 말하는 것을 즐겁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데이몬은 깨달았다. "그런데, 내가 선생에게 사라고 말한 전자제품은 샀나요?" 하고 슐터 형사가 물었다. 그때 비로소 데이몬은 꾸러미를 전날 오후에 바아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네, 회답용 기계를 샀어요." 데이몬은 그것은 산 지 몇 시간 후에 사람이 붐비는 술집에 두고 왔다고 그 형사에게 말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그것을 어디에다 쓰겠다는 거요?" 슐터는 정떨어졌다는 듯이 말했다. ''잘로프스키라는 사람이 당신을 협박하거나 아니면 당신을 거리에서 총으로 쏘겠다고 하는 말을 남겨 놓을 것으로 선생은 생각하고 있는 겁니까?" "점원이 말하기를 전화의 통화를 녹음하는 기계는 전화를 건 사람에게 녹음된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를 발신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슨 소용이 되겠옵니까?" ''데이몬씨, 내가 한 가지 기뻐할 일은, 살인 사건에 있어서 선생은 제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좋아요. 그 엉터리 기계를 달아두고 무슨 일이 벌어지나 두고 봅시다. 명단이 작성되거든 전화를 걸어 주십시오." 전화에서 찰칵 하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났다. 아마도 슐터가 수화기를 광 하고 내려 놓았던 모양이다. 데이몬은 유심히 소파를 바라보더니 일어섰다. "잠깐 밖에 좀 나갔다 와야겠네. 내가 어제 술집에 무엇올 놓고 온 것이 지금 막 생각이 났어." 그는 올리버에게 이렇게 말했다. 밖으로 나오자 일단, 사무실 밖으로 나올 용무가 생겨서 소파에 대한 병적인 유혹과 데이몬이 보지 않고 있다고 생각할 때 이상하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몰래 동정을 살피고 있는 올리버의 눈을 벗어났다는 것이 데이몬은 기뻤다. 아직 오전 열한 시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술집은 근처의 헌신적인 주당들로 오전부터 벌써 붐비고 있었다. 바텐더는 전 날 그에게 시중을 들던 같은 사람이었다. 데이몬이 그에게 혹시 누가 전날 잊고서 두고간 꾸러미를 안에 들여 놓은적이 없느냐고 묻자 그 바텐더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앞 쪽 구석에서 손님에게 시중을 들고 있는 바텐더에게 소리쳤다. "이봐, 에더. 어제 꾸러미 하나 보지 않았나? 이 손님께서 여기 놓고 가셨다는데...."선생님, 그 때가 몇 시쯤이었습니까?" "네 시에서 다섯 시, 그쯤 되었을 거야." 하고 데이몬이 대답했다. 두번째 바덴더는 고게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들어 보지도 못했는데." ''들어 보지도 못했답니다." 그 바텐더는 마치 데이몬이 귀머거리라도 된 것처럼 말했다 ''미안합니다. 오늘도 한 잔 하시게요?" "그럴듯하게 들리는데." 데이몬이 말을 받았다. "무엇을 좋아하십니까?" 이제 그 바텐더는 데이몬이 손님으로 변한 것을 알자 직업적으로 공손해졌다. 데이몬은 자신이 바라는 것은, 이 바아를 떠나, 이 도시를 떠나, 죽은 사람 모두가 모르는 사람들이며 그들이 해변에 누위 수만 리 떨어져 사람이 가지 않았던 던 바다로부터 밀려 오는 파도 소리를 듣고 있는 머나먼 낯선 나라로 가고 싶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스카치와 소다수 !" 바텐더에게 말했다. 죽은 자들이 스스로 조용한 아침 술집에 그의 옆에 자리를 하였다. '신사 숙녀 여러분 무엇을 즐기시지요? 라워데츠의 샘에서 길러온 물을 탄 재크 다니엘 한잔? 앙뚜아네따는 운향초의 강렬한 향기를 곁들인 바맛물 한잔을? 모리스는 몇 조각의 과자와 맥주가 쏟아져 나오는 늙은 셰익스피어 모양의 물꼭지를? 그레이씨에게는 상인이 되어 버린 아들을 잊도록 시름을 잊게하는 약을 탄 꼬낙을 또 한잔? 래치 부인은 아직 인디애나 주 게리에 살면서 발길질을 하고 있지만 무덤 사이에서 꾸는 꿈에까지 침해하고 있으니 동부 39번가에서 육욕적인 아침을 맞기 위한 넥타 한잔, 아니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6번가에서 샴페인 한 잔을 드는게 어떨까?' 데이몬은 그런 환상에 당황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 생자의 나라로 돌아왔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칼을 지니고 있는 맥베인, 아침 식탁에서 커피를 따르고 있는 실라, 상기한 얼굴에 머리는 자홍색으로 물들이고 새로 사귄 남자친구와 함께 있는 엘레인, 파이를 구으면서 오븐 옆에 서 있는 돌저 부인, 살해된 유태인 사이를 오가며 지금 당장에라도 살해하려고 손에 총을 들고 어쩌면 바아로 걸어들어을지도 모르는, 이 물질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요구하고 있는 슐터... "스카치 한 잔 더 하실까, 데이몬씨 ?" 데이몬은 이 시간 이 장소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가장 합리적인 생각으로 여겨졌다. 스카치 한 잔을 더 가지고 오라고 주문했다. 바로 수 일 전만 하여도, 그는 그 나름대로 행복한 사람이었다. 육신은 건강하였고 결혼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으며, 가정은 아늑하고 편안했으며, 그의 전문 분야에서는 존경을 받아왔다. 날씨에 구애받음이 없이 밤이든 낮이든 언제든지 뉴욕의 거리를 아무런 두려움 없이 걸어다닐 수가 있었고, 길을 묻는 외에는 다른 일로 경찰과 이야기조차 할 필요가 없었고, 자신의 죽음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완숙되는 과정으로 기억되었고, 서로서로를 이어가는 불가피하고 영원한 리듬에 따라 움직이는 세대의 교채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이제는 밝은 대낮에도 허깨비에게 다가가 말을 물어 보고, 한때는 그가 사랑했던 여인이 10년 전에 깊은 바다의 바닥에 죽어 누위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때 자기를 형제라고 부르고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을 생각나게 하는 옛 친구를 만나서 감사와 화해의 악수를 나누며 저녁식사에 초대하였으나, 악수를 한 후 고급 식당에서 갑작스럽게 쓰러져 죽었기 때문에 저녁대접도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그는 감히 다시 사람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할 수 있겠는가? 모든 슬로트 머신을 없애고, 유등하고 있는 모든 10센트 은화를 회수하도록 명령할 수 있겠는가? 그는 자신에게 자신의 꿈을 검토하도록 명령할 수 있었던가? 그는 책, 연극, 온전하고 해를 끼치지 않는 소설의 대행업자에 불과하였던가? 아니면, 그는 무명의 작가의 미래를 예언하는 무서운 비결을 지닌 대행인이었던가? 그는 정신적인 음파 탐지기가 되어 무서운 도둑들에게는 꿈의 깊이를 측정하고, 오래 전에 난파된 배의 모습을 알아내고, 조소적이고 망상적인 메아리를 듣고서 고래인지 피라미 때인지 돌고래의 노래인지 인어의 목소리인지를 알아내지만, 모두가 말하는 것은 오직 조심하라는 말이었다. 그는 햄릿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나무라거나 또는 잠의 성벽에서 복수를 하라고 채찍질하는 것이 아니라 한 여름의 정오의 햇빚을 받으며 손에는 아이들의 장난감을 들고 그에게 오라고 손짓하며 서 있었다. 그는 고대의 그리스인이 아니었으며 율리시즈와 항해를 하지도 않았다. 적절한 장례식 놀이마저도, 빼앗긴 전우와 부모들의 영혼은 지하의 마지막 집에서 그에게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현세의 이성적인 인간으로서 우주의 최대 한계를 면밀히 조사한 같은 시대의 사람들처럼 도마뱀과 유인원의 후손이며, 원시적인 신으로부터 총애를 받거나 버림을 받은 적이 없는 인간이며, 자연 현상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을 하는 사람이고, 자신이 만지고 보고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을 믿거나 또는 알려진 한도 내에서 추론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자신은 북극의 안개로 뒤덮인 요술의 바다로 표류하고 있다고 느꼈다. 데이몬은 그레고르 코다르의 화실에서 있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당신은 인식론을 믿고 있소?" "나는 증명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나 다 믿소." 데이몬은 그가 사랑하였거나 그를 사랑하였던 사람들을 위하여 또는 다른 길로 가는 도중에 겨우 스쳐간 사람들을 위해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가에 서 있는 어떤 초자연적인 도로 표시판에 지나지 않았는가, 아니면 그는 벌을 받고 있었던가? 혹은 처벌의 도구이었던가? 그리고 만일 그가 그중 어느 것이거나 또는 그 전부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배신, 몇 시간의 우연한 간음, 서자의 출생 때문일까? 자기만족만 취하고 지구상 모든 대륙에서 겪고 있는 인류의 고통에 이기적으로 무관심한 탓일까? 그리스도가 죽은 후 20세기의 종말이 다가오는 동안 누가 규칙을 만들었고 그 규칙은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모든 것 중에 그에게 주는 말은 무엇이었을까? 누가 그것을 그에게 말할 수 있으며 어느 아내, 어느 친구, 어느 성직자, 어느 율법학자, 어느 방랑자가 그것을 그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그에게 그것은 이러한 것이다 하고 거친 일상 용어로 그 의혹을 풀이할 수 있는 살인계 형사가 있었을까? 그는 정말 알기를 원했을까? 그 또한 죽은 유태인 다이어먼드 상인처럼 자신의 등에 와서 나를 잡아 가오라는 표식을 달고 다녔을까? 제 10장 증언대 선서 바탠더가 그의 앞에 있는 술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그는 주문 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바텐더의 배려에 만족하였다. 데이몬은 술을 찔금찔금 마시면서 슐터 형사를 위해 어떤 종류의 명단을 만들어 놓아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어디서 시작한다지 ? 질서정연하게 작성해야 할 것이다. 그는 노트를 꺼내 왼 편 패이지에 직업상 예상되는 적이라고 적었다. 다음에 오른 편 패이지에는 개인적인 면에서 예상되는 적이라고 적었다. 이제 자기는 앞을 향해 전진하고 있으며 조직체가 완성되었고, 그레고르가 표현한 것처럼, 유형을 만들어 놓았다고 그는 만족스럽게 생각하였다. 데이몬은 술을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이제까지 누가 자기를 공공연하게 협박하였던가? 제 1 단계로 들어섰다. 그는 자신의 사고방식이 명확하고 논리적인데 대하여 만족하고 기뻐하였다. 첫번째 용의자. 데이몬은 눈을 감았다. 법정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문서에의한 명예 훼손 사건에서 증인으로 증언하기 위하여 법정에 출두한 적이 있었다. 진실, 모든 것이 진실이며, 사실 이외에 한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하느님이시여, 나를 도와 주소서. 하느님 자신도 몇 천 년 동안이나 중상과 모략을 당하셨다. 그 사람의 이름은 마챈돌프였다. 그는 한때 대행 의뢰인이었고 기분 나쁠 정도로 음침한 젊은이었으며, 온 세상 사람들을 적대시 하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데이몬은 마첸돌프가 쓴 첫번째 두 소설을 다루어, 그 두 작품이 출판되었다. 그 작품은 조잡하고 폭행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글이 거칠면서도 성실한 면이 있어서 무시해 버리기에는 아까왔다. 그리고 데이몬은, 가증스러운 미국 생활의 이면에 대한 마챈돌프의 보고는 마땅히 들어 두어야만 한다고 느꼈었다. 비록 보답은 없었지만, 그 사람은 옳게 행동해 왔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만을 대행한다면, 데이몬은 6개월내로 사무실을 문 닫아야만 했을 것이다. 데이몬이 전 날 밤 읽기를 끝마친 마챈돌프의 세 번째 소설의 원고가, 데이몬과 대행 의뢰인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처럼 책상 위에 놓여 있고, 의뢰인 마챈돌프는 그 원고를 음침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챈돌프가 아직도 그의 책을 계속 쓰고 있었을 때, 그는 데이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그 더러운 자들은 차츰 관심을 보이려고 할 겁니다. 만일 비평가라는 작자들이 태어날 때부터의 센스를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그들의 수중에 미국의 쎄라인이 있음을 인정할 거요." 그러나 데이몬은 그 책의 마지막 글을 읽었을 때,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도 마첸돌프를 미국의 쎄라인이나 또는 미국의 아무개 같은 존재로 환호성을 올리며 맞이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데이몬은 그에게 좋은 충고를 해 오던 터였다. 데이몬은 그에게 이 책은 출판하지 말라고 말했다. 소설이든 아니든, 주인공은 대중의 눈에 있었고, 그의 습성은 잘 알려져 있었다. 마챈돌프는 주인공을 완전히 표절하였다. 뉴욕 시티지를 읽는 사람이라면 그 인물이 누구인가를 첫 페이지부터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존 버클리였다. 마챈돌프는 무모하게도 그를 제임즈 버킨이라는 이름으로 대체하였다. 버클리는 대담한 부동산 업자로서, 맨해턴 중심가에 서너 개의 이름있는 사무실 건물을 세웠었다. 그는 순종 말을 기르는 마굿간을 소유하고 있었고, 한때는 영화배우였던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도 했었다. 버클리는 놀이를 뒷받침하는 천사처럼 물장난을 하였고, 때때로 매우 호화로운 통로에서 그의 아내를 팔에 껴안고, 그리고 여러 경마장에서는 활짝 웃으며, 어려운 경주에서 이긴 말의 목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며 카메라 앞에서 포츠를 취하기도 하였다. 마첸돌프는 무분별하게도, 마치 어떤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악마에게 파멸의 구렁 속에 몰리기라도 한 듯, 그의 책에서 주인공에게 버클리라는 사람의 직업, 마굿간, 영화배우의 아내, 극장에 투자하는 취미를 갖게 하였다. 그의 책에서, 마첸돌프는 주인공을 사악하고 불미스럽고 가증스러운 인물로 만들어 놓았다. 그의 책에서, 버킨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들도, 실제로 버클리의 활동 세계에서 움직이고 있는 실제 인물에서 뽑아 왔고, 버클리로서의 버킨은 선정적인 산문으로, 공중 변소에 써 놓은 낙서에서나 볼 수 있는 종류의 즉흥적이고 추잡한 내용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마첸돌프는 그의 첫 번째 책을 내놓기 전에는, 버클리씨 사무실에서 서기로 일했다. 그는 버클리에게 해고를 당했기 때문에, 그가 버클리를 모함하려고 하는 의도는, 글귀 마다에서 약동하고 있었다. 아마도 버클리라는 사람은 나쁜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데이몬은 개막을 축하하는 파티에서 그를 몇 차례 만났으나, 서로 거의 인사를 나누지 않았고, 그 사람을 평가할 만큼 충분히 알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성격의 묘사와 그의 여러 가지 취미에 대한 설명은 사실에 가까왔다. 그러나 마첸돌프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공연케 한 몇 가지 연극은 확실히 만들어 낸 것이고, 그나마도 무자비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판사도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작가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릴 것이 틀림없다고 데이몬은 생각하고 있었다. 만일 마첸돌프가 이 책을 출판하거니. 또는 주위에 있는 편집인에게 보이기만 하더라도 물의를 일으켜서 그는 큰 화를 입게 될 거라고 데이몬이 그에게 설명하고 있을 때, 그는 화난 표정을 지으며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래서 요는 그 책을 대행자의 이름으로는 내놓지 않겠다는 말이군요." 하고 마첸돌프가 말했다. "나는 그 책을 출판하고 싶지 않소. 내 얘기는 이것으로 끝이오." "당신은 내 책으로 돈을 많이 벌었쟎습니까?" "그다지 많이 벌지는 못했소. 약간밖에." 이에 앞서 마챈돌프가 쓴 두 권의 책은 다 제법 성공을 거두었었다. "그래서 당신은 나의 책 출판 대행을 거절한다는 거군요." ''그렇소. 이 책에 대해서는 대행하지 않겠소. 나는 수백만 달러를 배상하는 소송에는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으니까 말이오." 하고 데이몬이 말했다. "당신은 고자같은 겁장이군요." 마첸돌프는 좀 험구를 늘어 놓았다. "당신은 앞으로 내가 쓰는 책은 구경도 못할 거요. 여름 캠프에서 의사 놀이를 하는 바비와 존 따위의 어린이 책이나 다루고 있는 게 더 좋을 거요. 그것이 당신에게는 어울려요. 그리고 당신 시중이나 들고 밑이나 닦아주는 저 백번종 환자같은 심부름 꾼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조금만 더 젊었더라도 한 방 먹여 쓰러뜨렸을 거요. 당신의 계약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보여 주겠소." 하고 데이몬이 대들었다. 데이몬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서철이 들어 있는 캐비닛으로 다가가서 문을 열고 서류를 뒤져 합법화된 서류가 몇 가지 클립으로 끼워져 있는 문서를 끄집어냈다. 그동안 마첸돌프는 말없이 데이몬을 무서운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었다. "마첸돌프씨, 이것이 당신의 계약서요.'' 하고 데이몬이 말하면서 그 서류를 찢기 시작했다. 마첸돌프는 냉소적인 표정을지으며 데이몬을 지켜보고있었다. 데이몬의 손은 부들부들 떨고 있어서, 빳빳한 종이를 한번에 한장씩 찢는 것도 힘에 겨운 듯하였다. ''제기랄 ! 정신 똑똑히 차려요." 데이몬은 말하면서 서류뭉치를 마첸돌프 발 밑 마룻바닥에 내던져 버렸다. ''이젠, 이 사무실에서 꺼져 버려요." ''내 원고를 돌려 줘야지요." 하고 마첸돌프가 한 마디 했다. "여기 있잖소." 데이몬은 깨끗하게 묶은 두터운 종이더미를 그의 책상가로 밀어 부쳤다. "이것은 사무실 공기만 더렵힐 뿐이오." 마첸돌프는 자기 원고를 집어들고는 손으로 애무하듯이 원고의 커버를 어루만졌다. "흡혈귀 같은 상인 ! 10퍼센트, 그것은 당신에게는 큰 몫이오. 보잘 것 없는 돈에서 10퍼센트나 바라고 있으니. 이 책이 나오면, 난 당신을 비웃으면서 그 서평을 읽고 요트나 타고 있을 거요." ''만일 내가 당신 친구라면, 세상 사람들이 출판은 말할 것도 없고 읽기조차도 안 했으면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당신 친구가 아니니까 당신이 그것을 보이는 첫번째 출판사에서 받아들여 대대적으로 공개해 주기를 바라오. 왜냐하면 그것이 당신의 끝장이 될 테니까 말이오. 실례지안 나는 화장실에 가서 메스꺼움을 토해 버려야만 하겠소." 그는 사무실에 그를 남겨 놓고 나가 버렸다. 그러나 그는 방을 나가면서, 미스 월튼과 올리버 가브리엘슨이 혹시 마첸돌프라는 자가 마지막 보복으로 책상이나 책이 꽂혀 있는 서가를 엎어 버리려고나 하지 않을까 감시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 두었다. 올리버는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데이몬이 고객과 이야기 하는 동안, 고객에게 방에서 나가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제까지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라도...?" 하고 가브리엘슨이 물었다. 데이몬은 아무 말도 묻지 말라고 손을 저었다. 그는 정말 토해야만 했다. 그는 결코 자신의 메스꺼움을 비유해서 말한 것 만은 아니었다. 그는 빨리 사무실 밖으로 나와서 화장실로 달려갔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구역질이 목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그는 몸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부들부들 떨면서 헛구역질을 하였다. 그는 손과 얼굴을 씻고 양치질을 했다. 그가 사무실로 돌아오자 마첸돌프는 이미 가버렸고, 가브리엘슨은 자기 책상에 앉아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마첸돌프씨가 나갈 때, 마치 1백파운드의 못이라도 삼킨 표정이었습니다." 하고 가브리엘슨이 물었다. "그 자에게 못을 하나 하나 먹여 주고 싶었네. 할렐루야를 노래 하면서 고객 하나는 지워 버려." 하고 데이몬이 대꾸했다. 데이몬의 소원은 달성되었다. 마첸돌프가 그의 원고를 제시한 첫 번째 출판사는 아니었지만, 그 책이 줄판되었다. 마첸돌프의 다른 두 권의 책을 출판한 출판사의 고참 편집인이, 그와 같은 광경이 벌어진 2주일 후에 전화를 걸어서, 마첸돌프의 원고가 지금 자기 책상 위에 있다고 말하면서 데이몬에게 물었다.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어떻게 되어서 원고가 여느때 처럼 당신을 거쳐 오지 않았지요?" "그걸 왜 작가에게 묻지 않았소?" "물어 봤지요." "작가가 뭐라고 합디까?" "당신은 늙은 방귀 같은 사람이었으며, 당신과 마음이 맞지 않아서 당신과 손을 끊었다고 하더군요," 데이몬은 웃었다. "그 원고를 읽어 봤소?" "우리가 손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만일 소송이 벌어 진다면, 우리 보험금으로는 버클리씨가 청구할 수 있는 금액을 결코 감당해 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것은 고물을 긁어 모은 조잡품이더군요." 하고 그 편집자가 말했다. "내가 마첸돌프의 작품을 더 이상 취급하고 싶지 않다고 그에게 말한 두가지 이유가 바로 그거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그 사람은 매우 불쾌한 사람이라는 점이오." 하고 데이몬이 설명했다. "나도 흔자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으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전화를 했읍니다. 고맙습니다. 원고는 오늘 저녁 우편으로 돌려 보낼 겁니다." 그 편집자는 말을 마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 책은 6개월 후에, 한때 데이몬에게 자기를 위해 일해 달라고 유혹했던 도색잡지 출판업자에 의해서 출판되어 세상에 나왔다. 줄판이 발표되었을 때, 그둘은 제대로 서로 격에 맞는다고 데이몬은 만족하게 생각하였다. 그 책은 정규적인 비평가의 평을 거의 받지 뭇했지만, 만필란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널리 퍼져서 심상치 않는 주의를 끌게 되었다. 출판된 지 한 달 후, 버클리씨의 변호사는 1천만 달러의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마첸돌프와 출판사를 공동으로 결고 제기하였다. 그 이야기가 타임즈 지에 나오던 날, 데이몬과 올리버 가브리엘슨은 알곤 퀀 식당에서 조용히 축하의 점심을 들었다. 버클리의 변호사가 출판물 대행 의뢰인을 위해 법정에서 증인으로 설 것을 요구했을 때, 데이몬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기꺼이 중인으로 설 것을 승낙했다. 데이몬은 앙심을 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첸돌프의 행동은 사람들에게 보복심을 갖도록 만든다고 느꼈다. 그는 소송이 질질 끄는 동안 법정에서 오래 기다리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그에 앞서 불려온 다른 증인들의 증언이 매일 신문에 두드러지게 실렸기 때문이었다. 변호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이유를 가지고, 그의 증언을 마지막으로 돌려두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증언대에 서서 선서를 하였을 때, 재판은 종결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마첸돌프와 그의 출판업자가 그들의 변호인들과 함께 앉아 있는 태이블 쪽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피했다. 그는 증언을 하기 전에, 그 작가를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조용히 공정하게 아무런 적의도 품지 않고 이야기 하고 싶었다. 또한 만일 그 구역질나는 얼굴을 보면, 그가 늘 말하는 어조를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아 두렵기도 하였다. 법정 앞에 설 자격을 입증하는 예비 심문이 있은 후, 버클리의 변호인이 물었다. "데이몬씨, 증인은 마첸돌프씨의 출판물 대행인이었읍니다. 몇 년 동안이었나요?" "6 년입니다." "증인은 마첸돌프씨의 다른 두 권의 책을 판매하는 데 있어서 작가를 대행하였습니까?" "그렇습니다." "증인은 현재 작가를 대행하고 있지 않은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네." "증인은 어면 상황에서 작가와 해어지게 되었는지, 본 법정에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 책이 싫었읍니다.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밖에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까?" "본인은 증인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피고의 한 사람으로 본 법정에 출두하는 것을 원치 않았읍니다." 법정 안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재판관은 망치를 들고 한번 탕 하고 내리쳤다. "만일 증인이 마첸돌프씨와 유대를 계속 가졌다면, 증인이 피고의 한 사람으로 지명을 받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데이몬은 잠시 생각하였다. 그레이씨가 죽기 전에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가 머리에 떠올랐다. "만일 존이 그것을 알고 싶어 하신다면, 본인은 다른 사람을 중상하는 한 작가의 작품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될 테니까 말입니다." 데이몬은 그레이씨의 말을 이용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변호인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상대편 변호인에게 말했다. "귀하 측의 증인을..." 마첸돌프의 변호인은 지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데이몬은 증인석에서 내려왔다. 마첸돌프가 무엇인가를 쓰며 앉아 있는 테이블 앞을 지날 때, 마첸돌프는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는 증오심에 가득 찬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중얼댔다. "개자식 ! 네가 관에 마지막 못질을 했지 ? 꼭 복수를 하고 말테다." "떨리는구만." 데이몬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는 바아에서 세 잔째 술을 주문하였다. 그 일이 있은 지 벌써 3년도 더 되었는데, 법정은 버클리에게 4백만 달러의 배상을 받도록 판결을 내리고, 2백만 달러는 작가가, 나머지 2백만 달러는 출판사에서 부담하도록 판결내렸다. 법원은 마첸돌프의 전재산을 압류하고, 도색문학 출판사는 파산을 선고하였고 사업이 중지되었다. 나중에 그 출판업자는 더욱 더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여성 잡지의 광고 모집원으로 직업을 바꾸어 버렸다. 얼마 전에 데이몬은 그가 새로운 소설을 가지고 돌아다니지만, 아무도 손을 대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3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지만, 법정에서 ''개자식 ! 꼭 북수를 하고 말 테다." 라고 말한, 자신의 불리한 증언으로 직업을 잃었다고 당연히 생각하는 한 사나이는, 마땅히 직업 상의 적으로서 후보 명단에 포함되어야만 했다. 데이몬은 마챈돌프의 이름을 노트 왼쪽 페이지에 써 넣었다. 제 11장 개인적인 적 데이몬은 조심스럽게 바아 건너 편 쪽으로 눈길을 옮겼다. 바아 뒷편 벽에 따라 거울이 붙어 있었고, 그 거울 속에 자신의 모습이 비쳐 있었다. 그 거울은 오래 되어서 낡았고, 어두침침하고 색깔은 거의 검은 빛을 내고 있었다. 데이몬에게는 자신의 얻굴이 마치 걷히고 있는 침침한 안개 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멀리 떨어진 현실 속의 얼굴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만일 내가 술취하기를 원한다면 마음에 드는 술 집 한 군데를 더 가야만 한다고 데이몬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잔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나는 돈을 낭비해서는 안된다. 지금 가지고 있는 잔 돈 마저도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노트는 여전히 그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는 오른쪽 페이지를 내려다 보았다. 지면 상단에는 개인적인 면에서 예상되는적이라는 제목밖에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았다. 자신이 개인적으로 적을 만들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마첸돌프는 문제가 달랐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데이몬은 그에 대해서는 일 년 이상이나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기억이라는 것은 간사한 것이었고, 망각은 때때로 지난날의 고통과 잃어버린 기회에 대한 후회로부터 벗어나서 자기 자신을 방어하려는 하나의 수단이 되어주는 것이었다. 개인적인 적. 그는 강제로 지난날의 일들을 회상하면서 두 명의 이름, 즉 프랭크 아이스너와 괄호를 하고 멜라니를 적었다. 그는 멜라니를 약 1년 반 전에 만났었다. 그녀는 프록터라는 이름을 가진 연극 제작자의 비서였는데, 데이몬의 대행 의뢰인 중의 한 사람이 쓴, <헤렌을 위한 사과>라는 제목의 연극을 상연하기 위하여 제작자가 그의 변호사를 시켜 작성한 계약서를 가지고 데이몬의 사무실에 찾아왔었다. 그녀가 왔을 때는 늦은 오후였기 때문에 올리버 가브리엘슨과 미스 월튼은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고 난 직후였다. 그 아가씨가 들어왔을 때 데이몬은 사무실을 나가려고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젊고 예뻤으며 데이몬이 추측하기로는 나이가 스물 둘 아니면 셋, 머리는 진한 갈색에 앞머리 부분은 금색으로 웨이브 져 있었고 얼굴 빛은 햇빛을 쏘이며 오랬동안 해변 모래 사장에 누워서 시간을 보낸 듯 검개 타 있었다. 그녀의 눈빚도 역시 갈색이었지만 약간 다른 빚이 섞여서 이상야릇하고 보통과는 다르개 보였다. 그녀는 자기만이 이해하는 어떤 농담을 듣고, 마음속으로 웃고 있는 듯하기도 하였다. 데이몬은 전에 한 번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와 올리버는 연극에 대한 계약 조건을 논의하기 위해 프록터의 사무실에 찾아 갔었다. 두 사람이 함께 밖으로 나왔을 때 올리버는 이렇게 말하였다. "휴우 ! 그 아가씨 보셨어요? 거기에도 두통거리가 있더군요." ''그 아가씨 나에게는 별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리고 그녀의 상관도 그녀는 매우 유능하다고 말했다구." 올리버는 싱긋 웃었다. "로저씨, 당신도 이젠 늙었습니다.. 그녀의 사장나리께서는 그녀가 방안에 있을 때는 언제나 그녀로부터 눈을 때지 않았고 그녀가 일어서서 자기 방으로 돌아가면 그의 눈빚은 실제로는 당장이라도 그녀의 옷올 벗기려는 것 같았읍니다. 그의 혀는 문자 대로 입 밖으로 처져 나와 있고, 그의 표정은 욕구 불만의 종말에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미스 멜라니는 사무실 일에도 능률적이겠지만 잠자리에서는 틀림없이 더 능률적인 여자일 겁니다. 사실을 말한다면, 약 몇 분 후라면 저도 약간 욕구 불만을 일으키고 말거예요." ''자네 말처럼 나는 정말 늙었나 봐. 그녀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특별히 느끼지 못했거든." 하고 데이몬은 미소를 지으며 말 했다. 데이몬이 나가려고 코트를 입고 있을 때, 둘어 온 사람이 바로 그 아가씨였다. 올리버가 그녀에 대해서 말한 바도 있었고 이베리아 숙녀와 만난 후로는 깨져 버리고 그녀와 함께 한 후로는 복잡하지 않은 일부일처 주의에 빠졌었던 전 날의 습성이 되살아났기 때문에, 데이몬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바라보았던 것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 때문에 몹시 당황하였다고 한 올리버의 말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육체적인 색정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색정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요부같은 아가씨여, 그대의 기도 속에 나의 모든 죄악을 기억하게 하여라. 데이몬이 사무실 문을 잠그고 두 사람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저녁에 집에 갈 때, 나는 도중에 한 잔 하는 버릇이 있거든, 같이 한 잔 하겠소?" 하고 데이몬이 입을 때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는 듯이 눈에 기쁨의 빚을 띠고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멜라니의 표정에는 그와 같은 남자의 제안에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데이몬씨, 참 멋있을 것 같군요." 그녀는 수줍은 듯이 얌전을 빼며 말했다. "선생님께서 제게 물어 주시기를 바라고 있었는 걸요."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쉬어 있었는데 그 목소리는 그녀의 외모에 어울렸다. 그녀는 배우 학교에서나 또는 노래 선생에게도, 그처럼 작용해 왔을 것이라고 데이몬은 생각하였다. 데이몬이 일과를 마친 후 일차로 한 잔 하려고 늘 가는 곳은 아니지만 그녀를 데리고 들어간 알곤퀸 라운지에서 그는 자기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생님이 한 잔 하자고 저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바랬던 이유는 제가 선생님과 <애플>이라는 연극에 관해서 말씀을 나누고 싶어서 였어요." 그녀는 백 포도주를 찔끔찔끔 마시며 말했다. 연극의 제목을 줄여서 말하는 연극인들의 일반화된 기교를 씀으로써 그들이 같은 연극 전문인임을 나타내는 그녀의 재치있는 태도를 보고 데이몬은 미소를 지었다. "저는 사실은 비서가 아니에요. 제가 다른 연극을 할 때까지 공간이 생겼을 때만 프록터씨와 함께 일하고 있으니까요." 그녀는 마치 말이 목에서 억제할 수 없이 솟아 나오는 듯 작게, 그리고 빠르게 폭발하는 것처럼 말했다. "무대에 서 본 적 있소?" "네, 몇 번요. 실험극장, 이퀴티 도서관, 썸머 극장, 드라마 학교 제작소, 포던크 등에서요." 그녀의 목소리는 자신을 비웃는 투였다. "스타의 지위까지 오르려면 어쩔 수 없이 걸어가야 할 험한 길 아니겠어요? 선생님은 저를 본 적이 있나요?" "본 것 같지 않은데, 아가씨가 무대에 선 것을 보았다면 틀림없이 내가 기억하고 있었을 테지만." 그는 너무나도 솔직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달리 말할 줄을 몰랐다. "사람들은 싸디 극장 밖에 비석을 하나 세워야만 해요.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과 함께. 무명의 여배우에게라는 글을 써서 말예요." 그녀는 별로 슬퍼하는 기색도 없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출연한 마지막 연극은 중심가에서 였어요. <앤 플러스맨>이었죠." "나도 그 연극을 보았소. 하지만 첫머리 10분쯤 보다가 나와 버렸지." 데이몬은 이렇게 대꾸했다. 그는 그 연극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 연극은 개막되었지만 그와 실라가 그 연극을 보러간 날 밤 개막한 후 바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데이몬은 왜 자기가 밖으로 나오고 말았느냐에 대한 이유를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다. "아가씨는 그 후에 등장하였음에 틀림없군." ''제 2 막에서지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조금도 아쉬워할 것이 없었읍니다. 저는 제 2 막에서 어느 큰 장면을 맡고 있었거든요. 그러나 아무런 데뷔도 없었어요, 모든 비평가들은 막간에 가 버리고 말았으니까요." 그녀는 명랑하게 웃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냥 나가 버리셨어요. 만일 제가 계약에 서명만 하지 않았더라면 저도 그랬을 거예요." "나는 그날 저녁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소." 하고 데이몬이 말했다. 데이몬은 길더라는 제작자로부터 초대를 받았었다. 그는 그 제작자를 소문만으로 알고 있었고, 그 사람에 대한 평은 좋지가 않았었다. 길더는 콜로라도에 광산을 소유하고 있는 가정에서 태어난 매우 부유한 젊은이었다. 길더는 전에 몇 가지 쇼를 후원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었다. 그의 평판은 그의 재산이나 또는 그의 연극 경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길더는 어느 술집에서 젊은이를 연행하였고, 경찰이 그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그 젊은이를 무섭게 구다한 후 살인을 기도한 흉측스런 폭행죄로 구속되었었다. 그의 항변은 그 젊은이가 자기에게 동성연애를 제의해왔기 때문에 화가 나서 그 젊은이를 구타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는 빈틈없는 그리고 많은 보수를 받는 변호사가 있어서, 법정에 참석한 사람이 모두 그가 동성연애의 경향이 있고 적어도 깡패 기질이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무죄로 석방되었던 것이다. 신문 기사를 위한 인터뷰에서 길더는, 뉴욕 극장계의 제작자들을 소심하다느니, 소재의 선택을 잘못하였다느니, 무대에 상연을 위한 각색이 어떻다느니 하며 앞뒤를 가리지 않고 호되게 꾸짖곤 하였고 앞으로는 동업자 없이 자기 스스로 제작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앤 플러스 맨>은 그가 단독으로 제작한 첫 번째 작품으로서 데이몬의 아파트 근처에 있는 극장에서 상연되었는데 데이몬과 실라는 그날 저녁 별로 할 일도 없었기에 그 연극이 즐거움을 주리라는 기대보다는 호기심으로 초대권을 이용하여 막이 오르기 직전에 관람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데이몬과 실라는 무엇을 보겠다는 것에 대한 준비도 없었다. 연극의 내용은 성도착 환자와 그의 친구들에 관한 것이었다. 데이몬은 시대의 유행에 따라 동성연에 문제에 대해서는 중립적이었기에 가끔 가정생활에 방탕한 대행 의뢰인인 그의 고객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저녁 식사를 하곤 하였다. 따라서 비논리적인 즉흥적 언어와 노골적인 감정의 표시에 진저리를 내고 있을 정도였다. 제 1 막 중간쯤 되었을 때, 그는 일어나서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다 알고 있는 실라에게 말했다. ''자, 나갑시다. 저런 게 아니더라도 진절머리가 날 정도야. 순전히 추잡한 쓰레기로군 !" 데이몬과 실라는 무대 앞에 앉아 있었다. 데이몬은 큰 소리로 다른 사람들이 들을수 있도록 말하고나서 통로를 걸어 올라 왔으며, 그의 뒤에는 실라가 따라왔다. 그와 실라가 출구에 도착하기 전에 다른 부부도 그들의 본을 따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무대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치기까지 하였다. 길더는 극장 뒤에 서 있었다. 데이몬은 그를 신문에 난 사진과 프로그램 표지에 시인다운 포즈를 취하고 찍은 사진을 지나치며 보았으므로 그가 누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길더를 지나쳤다. 그 연극은 그날 밤을 마지막으로 단 한 번의 공연을 갖고서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저는 그렇게 사나운 사람을 보지 못했어요." 멜라니가 말했다. "그는 배역진에게 선생님이 고의적으로 그 연극을 망쳐 놓았다고 말했어요.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 개막 공연을 하던 밤에 참석한 청중들은 선생님이 누구이며 선생님이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였어요. 제 2막의 막이 올랐을 때에는 평론가 한 사람조차도 없었어요. 그이가 말하기를 선생님이 그렇게 한 이유는 선생님은 다락방의 여왕이며 무대에서 진실을 볼 수 없기 때문이라나요. 그리고 그이는 극장가에서 선생님을 매장시켜 선생님이 속해 있는 도랑이나 파도록 하겠다고 배역진에게 약속했어요." 그녀는 우습다는 듯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그이가 선생님을 망쳐 놓았나요?" "아가씨가 보고 있는 바와 같이 나는 아직도 알곤퀸 라운지에서 이렇게 예쁘고 젊은 숙녀에게 술을 살 여유를 갖고있지 않소. 그 사람이 온 시내에 나의 험담을 퍼뜨리며 다니고 두 번이나 내가 대행하는 연극을 상연시키려는 제작자에게 보다 비싼 값을 매겼지만, 그것을 상연하지 못했다는 소문을 들었지." 데이몬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가씨는 극장에서 제멋대로 자란 부잣집 아이들에게 기대를 걸은 모양이로구먼. 그러나 아무도 그를 진지하게 받아 들이지는 않아. 만일 내가 정말로 그 연극을 중단시킨 책임이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대중에게 봉사했다는 훈장을 받아야만 할 거요. 길더씨는 나에게는 아무런 관심거리도 되지 못하지. 그 사람은 나에게는 중요치 않아요. 자아, 화제를 바꿉시다. 좀 더 적절한 것으로. <애플>에 관해서 나에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 했었는데 ?" "선생님이 사무실에서 배역에 관해 말씀하고 계셨을 때...선생님은 헬렌이 어떻게 보여야 한다고 설명했어요? 그리고 그 여 주인공은 그 배역을 어떻게 해야만 한다고...." 그녀는 숨을 짧게 헐떡이며 말했다. "그래서 저는 저 멋진 분이 저를 설명하고 계시다고 생각했었어요." 데이몬은 또다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내가 잠재 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은 모양이지." 그는 약간 회롱하는 듯한 어조로 말하며 줄거워했다. "그래, 아가씨는 그 역의 심사에 관해서 프록터씨에게 말했던가요?" 그녀는 힘있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반짝이는 머리칼이 얼굴 주위에 흩어져 감겼다. ''프록터씨는 저를 두 가지 면에서 만 보고 있어요. 비서와 섹스 상대로 말예요." 그녀의 작고 고운 얼굴에 붉은 빚이 감돌았다. "그이는 타이프를 치는 저와 침대에 누워 있는 저를 상상할 수 있을 뿐이라구요." 멜라니는 천박스럽게 웃었다. 그녀의 웃음도 다소 자제력을 잃은 듯하였다. "뉴저지에는 절망만이 숨쉬고 있어요. 흑시 그이가 묻거든 말씀 좀 해 주세요." "그게 무슨 뜻이지 ?" "저는 한때 뉴저지 희망촌에서 썸머 공연에 출연한 적이 있었어요. 모든 일이 안 되는 쪽으로만 빗나가더군요. 그래서 새 연극의 리허설을 시작할 때마다 누군가가 '이름은 뉴저지 희망촌이지만 우리에게는 절망촌이야' 라고 말하곤 했어요. 그 하고 많은 일들 중에 한 번의 기회도 없다는 것을 말하는 저희들의 표현방법으로써 뉴저지의 절망을 쓰게 된 거라구요." 데이몬은 욕정에 대한 첫번째 자극이 전기에 오른 것처럼 짜릿하게 일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올리버에게 사무실을 닫으라고 하고 좀 더 일찍 퇴근했더라면 좋았을 걸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내일 올리버에게는 그대의 상사는 자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늙지 않았노라고 말해 줘야만 하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프록터씨는," 아가씨는 말을 계속하였다. "선생님의 취향과 경험을 높이 생각하고 있어요. 선생님이 연극 작품을 보내시면 만사를 제쳐놓고서 당장 그것을 읽어요. 만일 선생님이 저에 관한 말을 한 마디만 해 주시면 그분은 들으실 거예요." 말이 계속 숨돌릴 사이도 없이 굴러 나온다. 그녀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브래지어도 하지 않고 입고 있는 다이트한 캐시미아 스웨터 밑으로 보이는 그녀의 젖가슴의 유혹적인 모습을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데이몬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제삿상 접시에 담긴 푸짐한 공양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제서야 멜라니가 보는 앞에서 계약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프록터가 음탕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난처하기도 하고 해서 그와 같은 분위기에서 벗어나려고 그는 또 한 잔의 술을 주문하였다. 그 아가씨는 자기의 포도주를 굴꺽하고 마시고 나서는 또 한 잔을 주문하였다. 그녀는 포도주와 말하는 속도와 열정으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혹시나 주위에 지금의 자기를 보고 늙은이 로저 데이몬이 아기 침대를 강탈하고 있었다고 소문을 퍼뜨릴지도 모를, 알 만한 사람이 없는가 하고 호텔 라운지를 살펴 보았다.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이 없음을 알고 그는 약간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말야, 그 연극의 배역 결정은 아직도 먼 훗날의 얘기라구. 아직 감독도 결정되지 않았고 작가가 제 1 막을 전부 고쳐 써야만 하거든." "'저도 그것은 다 알고 있어요." 멜라니는 안달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선생님이 프록터씨의 귀에 한마디 말 만 속삭여 주시기를 저는 기다리겠어요." "제가 한 마디 충고를 하지요. 미스?" "멜라니라고 하세요." "멜라니, 내가 충고 한 마디 하지." 데이몬은 어버이가 아이에게 말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그 작품이 제작에 들어갈 때를 기다리는 동안 아가씨에게 주어지는 어떤 역할도 포기하지 말아요."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해볼 수 있는 기회뿐이라구요." 이제 그녀는 팔깡을 끼고 손으로는 팔을 잡고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놀라울이 만큼 힘있어 보였다. ''선생님께서는 그저 제안만 해 주세요." 그녀는 이마에 홀러내린 머리를 뒤로 쓸어올렸다. "자, 보세요." 그녀는 도전적으로 말하면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녀의 눈은 반짝반짝 빚나고 있었다. ''제가 선생님이 사무실에서 설명하셨던 그런 형의 여자인지 아닌지를요.'' 데이몬은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가 딸에게 하듯이 평범한 듣기 좋은 말을 하려고 애쓰며 부드렵게 말했다. "아가씨는 아름다워요." 괘종시계 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 왔다. "오, 시간이 꽤 되었군. 마누라가 걱정하고 있겠군 그래." 실라는 그가 여덟 시까지 돌아오기만 하면 몇 시에 돌아 오든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가 한두 시간 늦는다 하더라도 전화안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유혹적인 아가씨 앞에서는 자신이 아내 앞에서 사족을 못 쓰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그녀에게 다른 생각을 품기에는 딸처럼 너무 어리기 때문이었다. ''전 선생님 댁 근처에서 살고 있어요. 요 전날 사무실에 선생님이 다녀 가신 후 전화번호부를 찾아 보았어요."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웃음에는 또다시 광적이고 자제를 잃고 있는 듯한 것이 있었다. "함께 갈 수 있어요. 저는 서부 23번가에 살고 있다구요." "그래요?" 데이몬은 아가씨에게 한 잔 하자고 권한 것이 잘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대개 걸어가는데." ''저도 걷는 데는 이력이 났다구요."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못을 박듯이 말했다. "저는 뉴욕에서는 걷기로서는 가장 이름이 높다구요. 그리고 저는 하이힐을 신고 출근하지 않아요." "알았어요." 데이몬이 말했다. 그는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또한 그는 그녀가 저녁 6시 30분 이 시각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상에서 어떤 이상한 일이라도 하지나 않을까 하고 의심도 하였다. "그것이 아가씨 소원이라면 함께 걸어가도록 하지." "그것이 바로 제가 원하는 거예요. 저는 끈질진 계집애니까요, 안그래요?"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말하면서 싱긋 웃었다. 젊은 얼굴에 완전무결한 이가 하얗게 반짝였다. ''멜라니는 먼 길을 가야만 할 거야." 그는 웨이터에게 돈을 지불하면서 말했다. "극장 안에서나 그리고 극장 밖에서나." ''염려 없어요.'' 그녀가 대꾸했다. 멜라니는 데이몬에게 코트를 입혀주면서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그들은 호텔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손으로 그의 팔을 제것인 양 잡고 있었다. 저넉에 날씨가 험악해지더니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머리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고 아름답고 긴 다리에는 예펌 노루가죽 구두와 밝은 양말을 신고 있는 그러한 아가씨를 비를 맞히며 일 마일 이상이나 되는 길을 걸어가게 한다는 것은 새디스트 환자가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호텔 입구에서 잠시 기다리다가 이렇게 말했다. "걸어서 갈 수 없는 밤이로군." "저는 상관 없어요. 북풍이 불라면 불으라고 하고 하늘이 내려 앉으려면 내려 앉으라고 하지요 뭐." "스카프 같은 것을 가지고 있나?"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오늘 아침 일하러 나올 때는 햇빚이 쨍쨍 쬐고 있었다구요." "잡을수 있다면 택시를 타기로 하자구." 그는 이렇게 제안했다. 바로 그때 택시 한 대가 오더니 호텔 앞에 서고 한쌍의 부부가 내렸다. 멜라니는 데이몬의 팔을 놓고는 길을 뛰어 건너가서 택시에서 내린 남자 손님이 미처 문을 닫기 전에 택시가 44번가의 길 모퉁이를 도는 것을 보고 택시 ! 택시 ! 하고 외치며, 손을 흔들고 뒤좇아 오던 어느 부인이 오기도 전에 싸움이라도 하듯 열려있는 문을 꽉 잡았다. "힘들여 오셨지만 한발 늦었습니다. 부인." 멜라니는 그 여인이 숨을 헐떡이며 왔을 때, 승리자처럼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멜라니는 안타까운 듯이 데이몬을 쳐다보고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하였다. 데이몬은 비실비실 길을 건너왔다. 그는 택시에 올라 타며 부끄러운 듯이 그 부인에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부인." "요즘 젊은 것들은." 그 부인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야만인들이라구요. 그 말 버릇이 뭐예요?" 멜라니는 택시에 오르자 운전수에게 행선지를 말해 주었다. 그녀는 데이몬 옆에 아늑하게 자리를 잡고서는 그녀의 손을 그의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이것은 어떤 조짐인지도 몰라요." "어떤 조짐이라니 ?" ''비오는 밤에 뉴욕의 거리에서 일백만의 사람들이 택시를 잡으려고 뒤좆아 오는 데도 우리가 택시를 이렇게 잡았다는 것 말예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좋은 조짐일까, 아니면 나쁜 조짐일까?" ''좋은 조짐이지요, 물론." "그 가엾은 부인에게는 그다지 좋지도 않을 텐데." ''낡고 뭉뚝한 가방 같은 여자라구요," 멜라니는 자기 옆에 앉아 있는 사나이가 그 낡은 가방 같은 여인에 비하면 적어도 10년은 더 나이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채 냉정하게 말했다. "그런 여자는 어디를 간들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구요. 선생님은 미신을 믿나요? 조짐이라든가, 그와 같은 일에 대해서 말예요?" ''믿고 말고. 아침에 옷을 입을 때는 언제나 왼쪽 구두를 먼저 신고, 침대에서 나올 때는 왼쪽으로 내려오지. 내 나이에 말이지." 그는 피식 웃었다. "선생님은 그렇게 늙지 않았어요." ''이봐, 아가씨." 하고 데이몬이 말했다. "만일 어느날 아침 눈을 떳을 때 나처럼 뼈가 뼈걱거리는 것을 느낀다면 그런 소리는 하지 않을 거야." "데이몬씨, 제가 한 가지 말씀 드릴 게 있어요." 그녀는 그의 무릎을 쓰다듬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데이몬씨는 나이가 몇이든 간에 이 뉴욕에서는 가장 매력적인 남성 중의 한분이라구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선생님을 알고 있는 몇몇 부인들이 선생님께 관한 이야기를 제게 들려 준 것이 있는데 들어 보시겠어요?" "아니, 난 절대로 듣지 않겠어." 그가 실제로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사무실에서 느꼈던 화끈거림이 이제는 점점 더 커져서 경계를 요하는 선까지 올라와 있었다. "저는 선생님께 그 말을 하려던 참이었어요." 그녀는 요사스러우면서도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저처럼 무대 생활을 하고 있는 부류의 여자들이, 완전히 성숙한 여자들이 모여 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계세요? 그중 세 사람은 선생님께 관한 이야기를 아주 잘 보존하고 있더군요. 우리는 휴식시간에 모여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화제는 섹스 문제 여자들의 탈의실 이야기로 돌아가거든요." 하고 그녀는 미친 듯이 웃어댔다. "멜라니, 당장에 그 이야기를 중지해 주었으면 좋겠어." 데이몬은 있는 위엄을 다 갖추어 말했다. "점쟎은 척하지 마세요." 그녀는 그의 무릎에서 손을 때고 손가락 하나로 그의 무릎을 힘껏 찔렀다. "선생님께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저는그러한 솜씨가 믿어지지 않았어요. 그러나 선생님과 정사를 가졌던 여자 셋은 모두가 공교롭게도 솜씨가 정말 멋지다더군요." "이봐요 아가씨,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는 당황하며 말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싶지도 않아."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야기하는 방법으로 미루어 보아 그녀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로 하여금 지난날의 흐뭇한 순간을 다시 회상시키게 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든 여자들은," 멜라니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신들의 여러 애인들을 비교하며 평가하고 있었어요. 누가 가장 좋았고 누가 가장 형편 없었고, 그런 종류의 일들을 말예요. 만일 제가 그 여자들의 이름을 말한다면, 선생님은 그들이 판단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비교를 하였음을 알고 계실 거예요. 투표한 결과 그 제 일인자에 대해서는 전원의 의견이 일치하였다구요. 선생님이 이 고장에서는 압도적으로 최고인 것으로 판명되었어요." 그녀는 또 다시 웃었다. "그리고 가장 헝펀없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자신들의 남편이었답니다." 데이몬은 그녀의 웃음에 따라 함께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웃음을 멈추고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옛날에 있었던 일이라구." 그는 그 여인들이 누구였을까 하고 추측해 보았다. ''그때는 나도 나이도 젊었고 활동적이었거든." "그렇게 먼 옛날도 아니에요." 그녀는 그의 말을 가로채며 한마디 했다. "나이 타령은 그만두세요. 저의 현재의 애인은 쉰 살이라구요. 그이는 금융가에서 주식 중개인 노릇을 하고 있고 머리에는 백금판을 대고 있어요. 한국 전쟁에서 머리 상단부를 다쳤대요. 한국에서는 대단한 영웅이었대요. 훈장만 해도 상자로 한 상자나 되고 집안에는 전쟁터에서 가져온 종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요. 그러나 그이는 이제 영웅도 아니고 아무도 그에게 훈장을 달아 주지도 않아요. 때때로 그이는 자신이 적진 앞에 파놓은 참혹 속에 있는 것인지, 또는 도대체 한국에서 얻은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저를 그에게 잠입한 중공 군 쯤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이는 선생님보다도 더 머리가 쉬어 있다구요. 그렇지만 우리는 함께 매우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거든요." "그사람 이야기는 마치 어린 소녀의 꿈처럼 들리는군." 데이몬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저는 아버지에게 병적일 정도로 집착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것이 왠지 좋아요." 하고 멜라니가 말했다. "그래. 나는 딸에 대해 집착하지도 않지. 그리고 나는 그것이 좋아." 데이몬은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나는 그동안 마누라 이외에는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구." 그녀는 데이몬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손을 그의 코트 밑으로 넣어서 다리 위로 더듬어 올라왔다. "데이몬씨, 저는 지금 선생님께 구애를 하고 있는 중이라구요." 그녀는 아무런 감정도 나타내지 않은 채 단조롭개 말했다. 데이몬은 손으로 그녀의 팔을 꼭 잡았다. 그녀의 손은 더 이상 위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실은 매흑되기도 했지만 그녀의 퉁명스런 솔직함에 당황하기도 하였다. 데이몬이 당황한 것은 그가 연극계의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녀가 프록터에게 연극에서 배역을 주도록 귀띔을 해 주는 지렛대로서 기회를 잡으려고 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젊었을 때는 여자는 구애를 받을 때까지 기다렸는데." 그녀는 손을 더 이상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데이몬씨, 지금은 선생님의 시대가 아니라구요. 그리고 저는 숙녀가 아니거든요. 저는 제가 택하기를 좋아하지 선택되기는 원치 않아요. 제가 바라는 것은 우리가 오늘 밤을 시작으로 해서 길고 지루하며 낭만적인 관계를 가지려고 하는 거예요. 주말에 시골 여관으로 빠져나가서 비밀의 오후를.." "그거 매우 낭만적인데.. 비밀의 오후라." 데이욘은 비꼬듯 말했다. 그녀는 그러한 비 꼬임에는 개의치도 않았다. "시대의 풍토라구요. 데이몬씨는 실용주의적이고 동시에 낭만적이 될 수 있어요." 그녀는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시대의 풍조에 대항하지 마세요. 그리고 선생님이 전에는 선택을 당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은 저에게는 하지 마세요." 그에게 줄리아 래치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39번가 호델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자진해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 시대의 여자들은 적어도 그것만은 지키고 있었어. 즉 게임의 규칙을 말야. 그들은나로하여 먼저 제의하도록하는 아름다움이 있었어. 그리고 두 번째도 세 번째도 그랬었거든." "시대가 달라졌고 습관도 달라졌어요. 섹스 혁명이라는 말 들어 보셨나요?" 가로등이 밝은 빚을 그녀의 얼굴에 던졌다. 그녀는 젊고 아름답고 그리고 감정에 상처를 받기 쉬워 보였다. "늙은이가 평화롭게 갈 수 있도록 해 줘요.'' 그는 다정스럽게 말했다. "저는 선생님께 평화는 드리지 않겠어요." 그녀는 감상주의적인 것을 거부하며 또 다시 웃었다. 그녀는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어머, 집에 다 왔쟎아요." 마치 이 말이 신호이기도 하듯 그녀는 손을 그의 무릎 위에 얹고 그의 고개를 끌어 당기며 키스를 하였다. 그녀의 입술은 부드럽고 활기에 차 있었으며, 그녀의 체취는 향긋하였다. 키스는 오래 계속되었고 택시가 그녀의 집 앞에 멈추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녀는 그로부터 떨어졌다. 그녀는 자세를 바로 하고 코트를 똑바로 매만지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그녀가 언제나 띠고 있는 웃음으로 가득차 있었다. "마지막 기회예요. 들어 오시지 않겠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는 쓸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회하실 텐데요." ''틀림없이 그럴 거야."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사모님과 함께 집에서 오붓한 밤을 즐기세요. 사모님께는 선생님이 훌륭한 남편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을 거예요. 사모님은 다 아시고 계실 테니까요." 그녀는 택시에서 뛰어내려 집 밖의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자기 전용의 시대풍조를 만들어 낸 유연하고, 아름답고, 재빠른 산물. 그러나 데이몬 자신의 풍습은 그와는 다른 것이었다. 데이몬은 그녀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쓸쓸한 파도가 자신에게 밀려오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는 운건수에게 행선지를 일러주고 난 후 오랫동안 담배 연기에 절어 냄새가 배어 있는 인조가죽 시트에 몸을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데이몬은 휴식 시간에 멜라니 와 함께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으리라고 추측되는 세 명의 여자이름을 생각해 보았다. 그후 데이몬이 멜라니를 만난 것은 그가 일을 마치고 사무실에서 나오려고 할 때였다. 그녀는 그의 사무실 건물 로비에 서 있었다. 멜라니는 머리에 스카프를 쓰고 있었고, 그녀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어 무엇인가 걱정이 있는 듯하였다. 이번에는 그는 혹시 올리버가 지금의 그녀를 본다면, 그가 "맙소사 ! 그 아가씨를 보았나요?" 하고 감탄하며 말할 마음이 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데이몬씨, 선생님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선생님 혼자에게만 선생님에게 문제가 생겼어요. 함께 걸어가도 될까요?'' "물론이지." 그는 그녀의 팔을 잡고 거리로 나왔다. 자동적으로 그의 발걸음은 63번가 쪽으로 향했다. 태양의 마지막 빚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아름다운 봄날 저녁이었다. 주위에 오고가는 사람들은 그날 하루의 노동에서 해방되어 그들을 맞이해 줄 이 밤의 자유와 기대 속에서 자기만이 아는 기쁨에 념쳐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데이몬과 멜라니는 잠시 말없이 걸었다. 그녀는 몸을 움츠리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내게 문제가 생겼다니?" 하고 데이몬은 조용히 물었다. "제가 큰 일을 저질렀어요. 용서할 수 없는 일을요. 하지만, 선생님께서 저를 용서해 주시기를 바래요." 그녀는 겁에 질린 어린애 같았다. "무슨 큰 일을?" "저의 애인. 저.. 월 스트리트에서 주식 중개업을 한다는... 쉰 살 먹은 사람에 대해서 선생님에게 말씀 드렸쟎아요." "그랬지." "그 사람의 이름은 아이스너예요." "난 그런 사람 모르는데." 데이몬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 사람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지 ?" "그 사람이 선생님을 죽여 버린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관계가 있는 거지요." 데이몬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지금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절대로 농담이 아니에요." 하고 그녀가 대답했다. ''내가 보지도 못한 사람이 왜 나를 죽이겠다는 거지 ? " 데이몬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 사람은 미칠 정도로 질투가 많아요. 아마도 한국 전쟁 때 머리에 넣은 백금판 때문인지도 몰라요." "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아가씨에게 말이야..." 데이몬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선생님이 저와 함께 잤다고 제가 그에게 말했어요. 저는 선생님에게 미칠 것만 같았고 선생님은 저에게 미칠 것만 같았다고 그에게 말했어요." "무엇 때문에 그런 거짓말을 한 거지 ?" 데이몬은 화가 나서 쌀쌀하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 그의 목소리와 그의 얼굴 표정에는 그녀가 몸을 움츠리고 떨어지려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빚이 서려 있었다. 그는 그녀를 난폭하게 자기에게로 끌어당겼다. "그는 파티 석상에서 저의 얼굴을 때렸어요."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 사람은 제가 누군가와 놀아나고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스무 명도 넘는 사람들 앞에서 말예요." 그리고는 그녀의 목소리는 도전적이고 쌀쌀해졌다. "전 그런 일로 사람을 가 버리게는 하지 않아요. 어느 누구일지라도. 내가 그 사람을 해치고 싶으면 해치울 수 있어요. 선생님은 제 마음에 든 첫번째 남자라구요. 그이는 선생님이 누구이며 자기보다 더 늙었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칼의 방향을 돌린 거예요." "잘 됐군 !" 데이몬은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자, 아가씨가 해야할 일은 그 멍청이에게 돌아가서 아가씨가 거짓말을 했고, 우리는 서로 아무 관계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틀림없이 없을 거라고 모든 것을 설명하는 거야. 그러면 그는 총을 치워 버리고 월 스트리트로 돌아가게 되고 그 바보같은 짓도 중지하게 될 거야." "이젠 소용없게 됐어요."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전보다도 더 미쳐 버린 여자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젯밤에 지금까지 거짓말을 했다고 모든 것을 털어 놓고 말했지만, 그는 저를 믿지 않았어요. 그는 거실에 앉아서 한국에서 가져온 자동총에 기름칠만 하고 있었다구요." 데이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그는 엄한 어조로 말했다. "만일 그 자가 그렇게 마음 먹었다면, 오늘밤 그에게 이렇게 말해. 내가 내일 정오 정각에 아무 무기도 갖지 않고 새크스 앞길을 북쪽으로 걸어가고 있을 거라고. 병사들로 하여 총을 쏘게 하고 일을 끝내 버리라고 해.자, 이제 내 곁을 떠나서 다시는 가까이 오지 마 ! " 그는 분노의 표정을 짓고 냉정하게 말한 다음, 그녀의 팔을 떼어 놓고서는 집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는 다음날 정오에 드번가와 49번가가 교차되는 길 모퉁이에 도착하였다. 날씨는 포근하고 맑았다. 이웃 사무실 건물에서는 점심 식사를 하러 아가씨들이 나오고 있었으며, 번쩍이는 가게를 들어가고 나오는 여인들은 봄이 왔음을 확인하는 듯 모두가 밝은 색갈의 옷을 입고 있었다. 이곳은 한 사람의 남자가 총을 들고, 또 다른 한 사람의 남자는 사형 집행을 기다리며 서 있기에는 적합한 장소도 아니었고, 시간도 적합한 때가 아니었다. 데이몬은 그의 어개를 펴고서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한 블럭을 걸었다. 4분의 시간이 걸렸다. 아무도 그에게 다가와 말을 묻지 않았다. 총 소리도 없었다. 신파극이라고 그는 경멸하면서 생각하였다. 이것은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이며 환상적인 사랑의 불장난이며 그 미치광이 야심적인 젊은 여자는 매우 험대적이고 어른인 척하는 것이고, 머리에 금속판을 대고 있는 자는 그녀의 버릇을 고치기 위하여 여봐라는 듯이 총을 닦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63번가 쪽에 훌륭한 식당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방향을 그곳으로 돌려서 전전히 산책이라도 하듯 식당을 향해 걸어가며 따뜻한 햇빚과 화려하게 진열한 상점 쇼원도,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여인들의 옷의 밝은 색깔을 즐겼다. 그는 식당에서 혼자 포도주 한 병과 맛있고 비싼 점심식사를 들었다. 데이몬은 술잔이 비어 있음을 알고 도대채 어떻게 된 일일까하고 생각하였다. 그는 위스키를 또 한 잔 주문하였다. 그는 그날은 더 이상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저녁까지 버티려면 위스키가 도움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63번가에서 이야기를 한 후로는 그는 멜라니를 보지도 못하였고 소식도 듣지 못하였다. 그것도 이제는 일 년 이상이나 지난 과거 지사였다. 그는 또한 백금판을 머리에 박고 있고 총과 한 상자의 훈장을 가지고 있는 월 스트리트의 주식 중개인, 아이스너씨를 만나지도 못하였다. <헬렌을 위한 사과>라는 연극의 제작은 실패로 돌아가서 작가는 아직도 제 1 막을 다시 쓰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가 자기를 죽이겠다고 선언하였다면, 비록 그가 협박을 실천에 옮기려고 새크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일생을 두고 그와 같은 위협에서 면제된다고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허세를 부리는 그 어리석은 소년단의 행동은 다시 승리처럼 생각되었고 데이몬은 점심을 즐겼지만, 그 무기를 가진 자가 뉴욕 시의 번화가 사람들이 붐비는 한가운데에 정오의 햇빚 아래서 경쟁자를 사격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고쳐 먹고 때를 기다려 좀 더 사람들이 없는 기회를 노리면서 몇 달이고 몇 년이고 복수의 꿈을 키우며 기다리기로 결정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질투는 가장 영원한 감정이며 24시간에 타올랐다가 꺼져 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데이몬은 슐터 경위가 그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 주식 중개인도 개인적인 적 명단에 오를 만하며, 변덕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멜라니도 그와 함께 그 명단에 오를 만하다고 생각하였다. 어쨌든, 그녀도 전화를 걸어 볼 가치는 있었다. 그는 전화를 걸어 볼 생각으로 주머니에서 잔돈을 찾다가 그만 두었다. 그녀가 그를 협박하고 있다고 말한 사람이 아이스너씨 한 사람만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데이몬은 멜라니가 맨 플러스 맨이라는 연극의 개막 공연이 끝났을 때 배역진들에게 한 길더의 열변에 대해서 말하던 일이 생각났다. 길더는 데이몬 자신을 망쳐놓을 것을 약속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돈과 중상 모략으로 많은 해를 가했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좀 더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 자극을 그 당시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데이몬은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간단히 처리해 버렸다. 그렇게 한 것은 그의 잘못이었다.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입장에서는 아무리 보잘것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어떠한 실마리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살인 미수라는 중죄로 장기 복역을 할 뻔했던 좌절된 미치광이 갑부 젊은이는 돈의 힘을 믿고, 돈으로 암살자를 매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데이몬은 생각했다. 주머니에서 두 개의 10센트 은화를 찾아서 데이몬은 멜라니에게 전화를 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술잔을 목로 위에 내려 놓고 공중전화가 있는 살롱 뒷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그녀가 23번가에 살았고, 또한 택시에서 그의 입술에 닿은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의 촉감과 "저는 아버지에 병적으로 집착하며 그것이 좋아요." 하던 그녀의 말을 생각하고 맨해턴 전화 번호 부를 뒤적이면서 전화 번호를 찾아 보았다. 데이몬은 전화 번호를 돌렸으나 수화기를 통하여 기계 장치로 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돌리신 번호는 현재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10센트 은화를 회수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는 프록터씨의 사무실에 걸면 그 아가씨가 있는 곳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프록터씨는 눈으로 그녀의 옷을 벗기고 있다는 올리버의 말을 생각하고 그곳으로 전화를 걸어서 물어본다는 것은 남을 난처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녀는 제작자가 그녀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뉴저지의 절망이라고 말하였지만,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는 하느님만이 아는 일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배우 조합의 전화 번호를 찾아 보았다. 그녀는 조합 명단에 올라 있을지도 모르며, 그가 자기 이름을 대면 그들은 그가 극장과 관계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의 전화는 의심받지 않고 그녀의 전화 번호를 알려 줄지도 모른다고 데이몬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다이알을 돌리면서 이것이 전적으로 의심받지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요구한 안내에 연결되기까지 시간이 약간 걸렸으나 마침내 그가 아는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소피," 그는 몇 마디 인삿말을 교환한 뒤 이렇게 말했다. ''실은 멜라니라고 하는 여배우와 연결되었으면 하는데, 내게 오는 어떤 작가가 쓰고 있는 연극에 그녀를 써봤으면 해서." 하고 그는 거짓말을 하였다. "그래요...?" 얼마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3개월 전에 시카고에서 죽었어요. 그녀는 재 공연차 여행중이었는데, 자동차 사고를 당했어요. 술취한 어느 남자 배우가 운전을 했는데 길이 미끄러웠다나 봐요. 미안해요. 불쌍하지 뭐예요. 그녀는 영리하고 젊어서 장래가 촉망된 아가씨였는데요. 정말 안 됐어요. 그 아가씨, 데이몬씨의 친구였나요?" "그렇치는 않아요." 하고 데이몬은 말했다. 그는 전화를 끊었다. 제 12장 검은 천사 그는 살롱 안으로 들어갔다. 엎질러진 맥주, 잎담배, 담배꽁초 냄새가 물씬 풍기고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의 얼굴이 걱정스러운 듯이 그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게 해 ! 그 사람 목이 부러질지도 모르겠어." 잠시 기절했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들에게 사과를 하려 했으나 입에서 말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제서야 그는 생각이 났다. 그가 공중 전화에서 술잔과 그냥 놓아둔 노트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을 때, 두 사람이 그의 옆에서 서로 고함을 치고 있었다. 돈 문제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때, 두 사람 중 키가 조금 작고 찌든 원숭이와 같은 얼굴을 한 사나이가 목로에서 맥주병 하나를 집어 들고 다른 한 사람에게 휘둘러댔다. 그는 슬쩍 몸을 수그려 피하면서 "도둑놈 !'' 하고 외치며 데이몬 옆으로 물러서며 머리를 감쌌다. ''자, 자, 그만들 하십시오." 데이몬은 이렇게 말하면서 싸움을 말리려고 맥주병을 든 사람의 팔을 본능적으로 붙잡았다. 그러나 데이몬은 그의 팔을 놓쳐 버렸다. 그러자 그 사나이는 미친 듯이 병을 휘둘러대는 바람에 데이몬의 이마를 정통으로 후려치고 말았다. 그 순간, 데이몬은 목로 위에 쓰러지면서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 후, 그는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마룻바닥에 누워 버리고 만 것 임에 틀림없었다. 미적지근하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눈으로 그리고 입으로 떨어졌다. 맛이 소금처럼 짭짤했다. 데이몬은 일어나 앉았다. 그를 내려다 보고 있는 얼굴들이 낡은 생철 전장을 배경으로 너울거렸다. "괜찮습니다." 그는 목쉰 소리로 말하면서 눈가와 입을 훔치고 나서는 손을 쳐다보았다. 손에 묻은 피를 보면서 그는 의식을 잃은 듯 이렇게 말했다. "새끼 양의 피로군. 조심들 하지 않으면.." 그는 점심식사 전에 조용히 술 한 잔 하려고 방금 바아로 들어 온 이 모든 낯선 사람들의 주목을 집중시키고 있는데 대해서 당황하고 있었다. 소란을 피우는 것을 싫어하는 그가 연극의 주인공이나 된 듯하였고, 또한 소란의 희생자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그가 일어나도록 도와 주었다. 데이몬은 다시 쓰러지지 않으려고 목로를꼭 붙잡았다. 노트가 녹물에 젖은 것처럼 검붉게 얼룩져 있음을 그는 보았다. 새끼 양의 피는 종이를 더렵혀 놓았고, 그의 생명의 본질적인 요소가 되는 물질은 제물의 제단 위에 놓여 있었다. 수풀 속에 있는 숫양과도 같이. "이봐요, 친구 !" 하고 바텐더가 말했다. "첫째로 알아둘 일은, 술집에서 주먹다짐이 시작될 때에는 레프리가 되지 말라는 겁니다." 데이몬은 힘없이 웃었다. "기억해 두겠소. 나를 이 모양으로 만든 사람은 어디 있소?" "두 사람 다 가버린 지가 오래 됐어요. 존경할 만한 신사들이지요." 바텐더가 대답했다. 말투가 체념한 것 같은 어조였다. "손님을 때린 그 사람은 도망치기 전에, '미안하오. 실은, 같이 온 다른 자를 죽여 버리려고 했었는데'라는 말만 남겨 놓았어요." "두 사람 모두 옷은 번드르르하게 입고 있더군요. 요즈음은 아무말도 할 수 없는 세상이지요." 한 여인이 주방에서 응급 약 상자를 가지고 달려 왔다. "손님, 앉으시는 게 좋겠어요. 제가 상처를 닦아드릴께요." 하고 그 여인이 말했다. 여인의 부축을 받고 의자에 가기 전에 바아 뒷쪽에 있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몰골을 한 번 쳐다보았다. 자기와 똑같이 생긴 유령이 자기를 되받아 노려 보고있었다. 거울은 너무나도 침침하여 피는 볼 수가 없었다. 데이몬은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 여인은 젖은 천으로 이마를 닦아내기 시작하였다. 상처를건드릴 때마다 쑤시고 아팠다. 사람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도 이젠 줄어 들고, 술꾼들은 각자 자기 술잔으로 되돌아 갔다. "상처는 그다지 심한 것 같지는 않군요.'' 하고 여인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뚱뚱한 흑인 여자였으며 몸에서는 튀김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의 상처를 돌볼 때의 손놀림은 정확했고 섬세하였다. 데이몬은 병원에서의 실라의 손놀림이 문득 생각났다. "병이 깨지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었어요. 기분은 어떠세요?" 하고 여인이 물었다. "좋아요." 데이몬이 대답했다. 특별히 느낀 것은 없었지만, 다만 방이 계속 파도 속에서 출렁대며 뗘다니고 있는 것 같았고, 그의 귓가에서 나는 낮은 윙윙거리는 소리를 깨고 '시카고'라는 말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 들려오는 듯하였다. 데이몬은 이제까지 얻어맞고서 쓰러진 적이 없었다. 그는 기절해 쓰러지는 기분이 불쾌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제 보니 기절한다는 것은 마치 매우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기분도 불쾌한 것은 아니었다. 기분이 나쁘기는 커녕 오히려 행복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우선 그의 이마와 눈, 그리고 입을 깨끗이 닦아 주는 부드러운 손길이 고맙다고 느꼈다. "곧 좋아질 거예요." 그 여인은 조그맣게 댄 붕대를 반창고로 고정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옷에 묻은 피는 저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네요, 집에 가시기 전에 부인께 전화를 걸어서 미리 알려 두세요." "부인이 맘에 드는군. 우리집에 데려 가고 싶은데." 하고 데이몬이 농담을 했다. 여인은 낭랑하게 사방에 울려 퍼질듯한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런 말씀은 정말 오래간만에 들어보네요. 손님보다 더 많이 다친 사람도 몇 분 보살펴 주었지만 말예요, 자, 손님은 여기 앉아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좀 쉬세요." 데이몬은 일어섰다. 만일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으면 다시는 못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서 그는 비틀거리지 않으려고 했다. "내 잔을 비워야지." 그는 자신이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여인은 그를 동정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가 만약 손님 같은 연세라면, 젊은 사람들끼리 싸우도록 내버려 두었을 거예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붕대와 반창고 등을 응급 약품 상자 속에 주워 담았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저는 주방에 있으니까요. 제 이름은 발레스카라고 해요." "발레스카라고......" 그는 그 여인의 이름을 발음해 보았다.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데이몬은 그 이름의 본은 뭘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부인은 나의 천사, 나의 검은 천사요. 집사람도 당신과 같은 손을 가지고 있다오. 감사의 뜻을 표해도 될까요?" 그는 허리를 굽혀 희어져 가고 있는 머리 밑에 있는 넓적하고 주름살 없는 이마에 키스를 하였다. 그녀는 또다시 사방으로 울려 퍼지는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저는 손이나 천사의 역할에 대해서는 몰라요. 그러나 검다는 것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요." 라고 말하며 그녀는 주방으로 돌아 갔다. 데이몬은 자기 주위를 준엄한 표정으로 돌아보며 바아의 다른 손님들이 자기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못하게 하였다. 그에게 가장 가까이에 앉아 있는 손님들은 불안한 듯이 고개를 돌리고 술을 들이키는 척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흑인 여자가 말한 젊은이들의 싸움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뉴욕의 관례를 무시한 늙은이에 대해서 등을 돌리고, 동정도 농담도 없는 사람들을 위협적인 눈으로 노려보며 생각해 보았다.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자기가 서 있던 장소 곧처에는 다른 술꾼들이 자리를 피해 깨끗하게 없어 졌다는 것을 알았다. 데이몬은 매우 침착하게 자기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목로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그의 술잔과 그의 노트가 피에 얼룩져 여전히 펼쳐진 채 그대로 있었다. 그는 자기 술은 이런 소동을 겪는 바람에 손도 대지 않은채 그대로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술에 띄운 얼음은 이미 다 녹아서 첫 모금 부터 맹탕인 얼음물 같았다. "바덴더, 여기 한 잔 더 !"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바덴더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한 마디 했다. "손님, 괜잖으세요? 충격을 받으셔서 머리가 몹시 아프실 텐데." ''블랙 앤 화이트로 한 잔만 줘요." 하고 데이몬이 주문했다. 바텐더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손님 머리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바텐더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는 컵에 위스키를 따르고 얼음과 작은 소다수 한 병을 데이몬 앞에 내놓았다. 데이몬은 천전히 마셨다. 그러자 그는 힘이 되살아 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스카치의 수혈이 생명을 떠받쳐 주는 듯 하였다. 데이몬은 술잔을 들고 이제부터 앞으로 자기는 매일 술을 마시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노트의 피를 닦았다. 마첸돌프, 멜라니, 아이스너씨의 이름이 굳어진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가 계산서를 청구하자 바텐더가 말했다. "손님, 술값은 저의 가게 부담으로 하겠습니다." "정 그렇다면 좋을대로 하게나, 고맙소." 데이몬은 칼라와 웃도리에 묻은 검붉은 핏자국과 바아에 있는 사람들의 곁눈질을 의식하면서 천천히 문 밖으로 걸어 나왔다. 빈 택시를 잡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가 길가에 서서 멈춰주지 않는 차에 손을 흔들고 있을 때, 열두 살 가량의 어린 소년이 달리는 차를 이리저리 피하면서 길을 뛰어 건너가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그는 깜짝 놀라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 소년은 야구 외야수의 글러브를 들고 있었다. 데이몬은 자기가 저 소년만한 나이 또래였을 때 야구 놀이를 하고 돌아오는 모습을 아버지가 찍어준 스냅사진이 문득 생각났다. 외야수가 서 있는 잔디를 깎아서 신선한 풀냄 새가 났었다. 그 소년은 모자도 쓰지 않았고, 겁없이 달려오는 차를 보고 웃고 있었다. 그 애는 흑인 소년이었는데 체격은 데이몬이 그만한 나이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호리호리하고 단단하였다. 잠시 순간적이기는 하였으나, 데이몬은 자기 사진이 살아서 되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데이몬은 소년을 향해 사납게 달려 내려 오고 있는 택시 한 대를 발견하고서 그 소년을 구하려고 몸을 움직이려는 챨나였다. 바로 때를 맞추어 그 소년은 안전하게 인도로 올라 서더니 몸을 돌려서 운전수를 보고 그의 코를 엄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 같았으면 머리가 혼돈되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데이몬은 생각했다. 데이몬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저 나이였을 때는 자기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되는, 생글거리며 낯익은, 그리고 뻔뻔스러운 어린애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가 집에 도착했을 때, 실라가 집에 없음을 알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때때로 그녀는 점심을 먹으러 보육원에서 집으로 오곤 했다. 그녀가 그를 보기 전에 옷을 갈아 입을 시간이 있을 것 같았다. 데이몬은 욕실로 들어가 자기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바람과 햇볕에 탄 붉은 피부 아래, 푸른기가 도는 것이 엿보이고, 그의 눈 밑에는 거의 활기가 없는 이상한 흰 반점이 돋아나 있었다. 그러자 그는 외야수의 야구 굴러브를 들고 택시를 교묘하게 빠져 나가던 소년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거실로 들어가 몇 년 동안 쳐다보지도 않았던 옛날 앨범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와 실라는 카메라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친구들이 그의 사진을 찍었을 때, 그는 자기 얼굴에 나타난 주름살에 놀라기도 하였다. 친구들이 그를 찍은 사진을 건네주면 그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서는 그 자리에서 찢어 버렸다. 늙는다는 것은, 정확하게 매년 진행하는 과정을 계속 기록해 두는 것도 없는, 그저 슬프기만 한 몰락이었다. 데이몬은 오래된 뉴요커지를 묶어 쌓아둔 더미 밑에서 그 앨범을 찾아냈다. 쌓아둔 신문 더미에는 오래 전에 잊어버린 이야기와 논평, 우아한 산문, 명쾌한 소설, 점쟎은 전기, 재치있는 만평, 책과 희곡에 대한 평들이 담겨 있었다. 그는 이러한 신문이나 잡지를 꺼내서 다시 읽어 보지도 않았으며, 그렇게 하게 될 것 같지도 않았지만, 책으로 꽉 찬 길쭉한 서가 아래의 선반에 여전히 단정하게 쌓아 놓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수필이나 소설을 다시 읽기가 두려워지는 것 같았다. 만일 그럴 경우, 지난날의 더 즐거웠던 시절, 사라져 버린 지금 이 세상에 없는 옛 친구들, 의뢰인의 작품을 제시하던 잡지 편집인들, 이제는 그의 생활에서 사라진지 오래된 가장 지성적이고 예의바른 사람들이 또 다시 생각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러한 잡지를 묶은 꾸러미를 그리운 듯이, 그리고 유감스러운 듯이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바로 이 기나진 세월에 걸친 노고와 성공과 실패에 대한 감명적인 종이 기념물 밑에 깔려 있는 사진첩을 끄집어냈다. "저는 종이 저장자와 결혼을 했어요." 실라는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우리가 산더미 같은 인쇄물에 파묻히기 전에 나는 어느 날 이곳에서 서성거리다가 당신이 일하러 나간 사이에 당신이 모아 놓은 잡동사니를 치우다가 파묻혀 버리고 말 거예요." 데이몬은 사진 첩의 먼지를 털어서 밝은 창문 앞에 놓여 있는 책상 위에 놓고 앨범을 펼쳤다. 그는 가까스로 열두 살 때 찍은 스냅사진을 찾아냈다. 그는 사진을 아무렇게나 넣어둔 큰 봉투에서 꺼내 가지고 이리저리 놓아 보았다. 그는 병원에서 퇴원한 후 기브스한 다리 때문에 집에만 있었고 실라와는 결혼도 하지 않았을 적이었는데, 그때 결혼을 하기 전에 아파트를 정리하려던 참이었다. 그것은 20년도 더 지난 일이었는데, 그 후로는 앨범을 본 기억이 없었다. 데이몬은 낡고 금이 간 사진첩의 패이지를 한장 한장 넘겼다. 소년 티가 나고 건장한 모습을 띤 아버지의 사진, 20세기 풍의 짧은 단발머리를 한 어머니의 사진도 있었다. 배 갑판 난간에 기대고 찍은 모리스 피츠제랄드와 자신의 사진도 있었다. 비록 선원 작업복과 선원용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피츠제랄드는 활짝 웃고 있었고 활기차 보였다. '다섯 길 깊이'라는 시를 옮던 피츠제랄드의 목소리, 호송선단에 속했던 옆 배가 가라앉을 때 데이몬에게 씁쓸한 어조로, '우리는 계란껍질이야. 우리 배가 어뢰를 맞아도 나에게는 알리지 마.' 하며 비통해 하던 피츠제랄드가 머리에 떠올랐다. 데이몬은 몇 장을 넘기다가 실라의 사진을 보고 손을 멈췄다. 어느 여름날, 결혼 직전에 존츠 비취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몸에 찰싹 달라 붙는 검정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있는 실라의 모습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왔다. 데이몬은 한숨을 내쉬며 그 사진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후, 그 패이지를 넘기자, 그가 찾고 있던 바로 자신의 사진이 나왔다. 데이몬은 조심스럽게 그리고 자세히 그 스냅 사진을 살펴보았다. 자기가 끼고 있는 외야수의 글러브는 작았고, 지금 사용하고 있는 큰 거미집 모양의 미트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밖에는 사진에서 보는 소년과 6번가에서 본 소년과는 쌍동이 같아 보였다. 데이몬은 자기가 정말 그 소년을 보았는지, 또는 머리를 얻어 맞은 뒤라서 기억의 착각으로 일종의 환상을 본 것은 아니었는지 곰곰이 생각하며 그 스냅사진을 살펴보았다. 그 바덴더는 마지막 술이 그에게 자극을 줄지 모른다고 경고하였는데, 그의 말이 옳았는지도 몰랐다. 그는 앨범을 닫고 일어나서 다시 사진첩을 가져다 잡지 꾸러미 밑에 두었다. 적어도 당분간은 과거는 인쇄물 더미 아래 묻혀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침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 입었다. 옷을 갈아 입은 다음, 아랫층으로 내려가서 그가 입고 있었던 피묻은 셔츠와 넥타이는 쓰레기통 속에 쑤셔 넣고, 바지와 웃도리는 드라이 크리닝을 시키기 위해 세탁소로 가져갔다. 그는 바아에서 있었던 싸움에 관해서 실라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마에 붙인 붕대는 작은 것이었으므로, 그가 사무실에서 의자에서 일어나다가 책상 위 스탠드에 머리를 부딪쳐서 미스 월튼이 상처를 치료한 것이라고 말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데이몬이 세탁소에서 돌아왔을 때, 시장기가 도는 것을 느껴 점심으로 먹을 만한 것이 없나 하고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그러나 곧 그는 일과중에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일, 다시 말해서 대낮에 집에 왔다는 증거를 남긴다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절대로 필요한 것 말고는, 실라에게 설명을 늘어 놓는 번거러움을 피하고 싶었다. 그가 막 밖으로 나오려 할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대낮에, 이런 시간에, 그와 실라의 일과표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파트에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 까닭이 없쟎은가? 그는 온 몸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발 끝으로 벽 난로 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가서 도구를 걸어 놓는 스탠드에서 불쑤시게를 집어 들었다. 또다시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계속 나더니 초인종을 울리기 시작하였고, 마치 문 밖에서 누군가가 초인종의 버튼에 몸을 기대고 서 있기라도 한 듯 계속해서 벨소리가 울렸다. 데이몬은 쇠로 된 불쑤시게를 꼭 쥐고서 마치 벽난로를 청소하다가 놓고 오는 것을 잊고 무심코 그대로 들고 나온 것처럼 보이려는 듯, 손에 든 불꼬챙이를 흔들거리며 소리쳤다. "지금 나가요." 그는 다가가서 문을 열었다. 작업복을 입은 몸집이 큰 사나이가 문에 서 있었다. "방해를 해서 죄송합니다. 선생님." 하고 그 사나이가 말했다. "하지만 부인께서 집 주인에게 전화로 정문과 통화하는 인터폰이 고장났다고 하셨기에." ''네, 그래요?" 데이몬이 말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불쑤시게를 꼭 잡고 있었다. ''그것을 고치고 있는 중입니다. 저의 동업자와 저와 둘이서요. 그것이 작동되나 안 되나 시험 좀 해보고 싶어서요.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 사나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저의 단추를 눌렀다. 그리고 나서는 인터폰의 스위치를 올려 놓았다. ''여보세요?" 한 사나이의 목소리가 인터폰을 통해 들려 오더니, 공포 영화처럼 방안에 메아리치는 유령의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버디, 지금 데이몬씨의 아파트에서 말하고 있는데, 내 말 잘 들리나?" 하고 그 전공이 물었다. "로저 !" 하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데이몬은 처음으로 의사 전달을 큰 소리로 명확하게 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현대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는 그의 첫 이름이 사용되고 있는 데 대해 깜짝 놀랐다. "됐어 ! 곧 내려가지 ! 우리도 점심을 먹어야 하니까." 하고 전공이 대꾸했다. 그는 데이몬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젠 됐읍니다. 이제부터는 이것을 사용하여 건물내의 누구와도이야기 할 수 있읍니다. 선생님께서는 불청객으로 놀라셨을 테지만 말입니다." "수고 많았소." 하고 데이몬은 주머니를 뒤져 2달러를 꺼내 전공에게 주면서 말했다. "자, 술이라도 한 잔씩 하시오." 그 사나이는 돈을 받으며 싱긋 웃었다. "사모님께서 청소하는 여자가 있을 거라고 하셔서 오늘 아침에 올 예정이었습니다만, 우리가 늦게 온 게 다행이군요. 청소 아줌마에게 술 값을 받을 수야 없으니까요. 여기로...." 그 전공은 지갑에서 딱딱한 카드를 뽑았다. "혹시 전기 고치는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전화를 주십시오. 즉각 달려 오겠습니다." "고맙소. 점심 맛있게 드시구료." 데이몬이 말했다. 그 사나이가 가버리자 데이몬은 손에 든 카드를 보았다. '아크메 전기기구'라고 씌어져 있었다. 데이몬은 불쑤시게를 원 위치에 도로 갖다 놓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옷을 갈아 입으려고 주머니를 비우면서 노트를 침실 화장대 위에 놓아 둔 것이 문득 생각 났다. 다시 들어가 보니, 핏자국은 완전히 말라 있었다. 그는 그 노트를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명단은 아직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 더구나 이것을 실라의 눈에 띄는 곳에 버려둘 수는 없었다. 데이몬은 아파트 밖으로 나와서 두 개의 열쇠로 문을 잠갔다. 하나는 전부터 있었던 헌 자물쇠였고, 두 번째는 아내가 올리버 가브리엘슨과 점심을 같이 한 직후에 설치한 방범용으로 보이는 새 자물쇠였다. 실라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으나 새로 설치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철문에 빗장을 거는 걸 싫어했다. ''저는 어느 미치광이 한 사람의 전화 때문에 마치 건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만일 누구든지 이 이상 나온다면 그런 자를 처리하는 어면 방법을 생각해낼 거예요." 하고 아내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시칠리 사람들의 전형적인 분노를 드러내며 말했다. 데이몬은 그 말을 생각하며 싱긋 웃었다. 쇠꼬챙이를 손에 들고 노크 소리에 대답한 사람이 실라가 아니었다는 것은, 전공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공은 그 순간 골통이 박살난 채 현관 바닥에 편안히 누워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데이몬은 계속 해서 눈은 보도 블록을 바라보며 시내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서 살아있든 죽었든, 젊은이든 노인이든,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쳐다보고싶지 않았다. 데이몬은 사무실로 곧장 가지 않았다. 급히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 전의 전자 제품을 파는 가게로 갔다. 점원은 데이몬을 알아보았고, 데이몬이 전화 회신용 기계를 요구하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손님께서는 어제 하나 사가시지 않았습니까?" 하고 점원이 물었다. "그렇소." "뭐 잘못된 점이라도 있습니까? 잘못된 점이 있으면 반품을 하셔도 됩니다." "잘못된 점은 없고, 술집에서 잊어 먹었을 뿐이오." "저런 ! 그거 참 안됐읍니다." 점원은 한참 동안 데이몬의 이마에 부친 붕대와 반창고를 바라보더니, 기계 하나를 또 내놓았다. "36달러 80센트입니다." 하고 점원이 말했다. 데이몬은 크레디트 카드를 점원에게 내놓고 쪽지에 서명을 하였다. 점원이 포장을 할 때, 데이몬은 값비싼 사치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번에는 술집으로 가지 않았다. 적어도 그날만은 술을 마시지 않기로 하였다. 그는 사무실로 갔다. 미스 월튼과 올리버는 의아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으나, 그는 장시간 사무실을 비운 데 대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로저씨, 그게 뭡니까?" 올리버는 자기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지혜의 충돌이야." 데이몬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는 자기 책상에 앉아서 미스 월튼이 갖다 놓은 두 개의 계약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날 밤, 저녁식사 전에 그와 실라는 침실로 연결된 전화줄을 끊고서 거실에 있는 전화에 회신용 기계장치롤 부착하였다. 실라는 필요한 공식적인 말을 녹음하였다. '데이몬씨 부부는 지금 집에 없습니다. 혹시 전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삐삐 하는 신호를 기다리셨다가 성함과 전화번호를 말씀해주새요. 전갈의 녹음은 36초 동안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그 녹음이 알아 들을 수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실라가 단추를 눌렀을 때, 이 부부는 불안한 시선으로서로를 바라다 보았다. 서로 말은 없었지만, 이 기계가 그들의 생활의 침해, 현실에대한 조건부 굴북, 즉 잘로프스키라는 자가 존재하며, 그자의 협박을 무시할 수 없다는 강박감을 인정한다는 사실임을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현대의 경이적 사건이에요." 실라는 테이프를 다시 돌리면서 비꼬듯이 말했다. "우리는 이런 것도 없이 이제까지 어떻게 살았죠? 자, 저녁이나 듭시다." 실라는 식사 준비를 하고 저녁상을 차렸다. 그러나 데이몬은 이렇게 말했다. "저녁은 밖에 나가서 먹고 싶어졌어. 그건 내일 먹기로 합시다." 그가 덧붙여 말하지 않은 것은, 만일 그들이 집에 있으면 그날 밤은 대부분의 시간을 불안한 듯이 그 기계를 바라보며 앉아 있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당신 정말 그럴 기분이 나세요?" 하고 실라가 물었다. 그녀는 그의 이마에 부친 붕대에 대한 설명을 시인하고 받아들였지만, 집에 와서 아스피린 두 알을 먹는 것을 보았다. "이젠 머리가 아프지 않으세요?" "다 나았어" 하고 데이몬이 대답했다. 그는 절대로 약을 먹지 않았었다. 그래서 청소 아주머니가 주방 캐비닛 병 뒤에 집어 넣은 아스피린 약병을 찾느라고 두 사람은 주방을 모조리 뒤져야만 했었다. "그리고 또 저녁을 먹고서는 영화관에 갔으면 하오. <브레이커 모란트>가 이 근처에서 상연되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 그 영화를 본 사람은 모두들 그 영화를 최고라고 평하고 있더군." 하고 데이몬이 중얼 거렸다. 저녁 식사와 영화구경, 그리고 그 후 바아에 가서 술 한두 잔 하면, 그들은 거의 새벽 한시 까지는밖에서 시간을 보낼 수있었다. 그 여섯, 일곱 시간이나마 그들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가상적인 인물의 문제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은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실라는 데이몬과 단 둘이서 외식을 할 때는 늘 그러하듯이 기분이 최고로 좋았고, 쾌활하며 보육원에서 있었던 어린애들과 어머니들의 재미있는 일화로 꽃을 피웠다. 그들이 영화가 상연되기 직전에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에는 두 사람의 기분은 매우 좋은 편이었다. 영화는 그가 앞서 말한 그대로 였으며, 이들 부부는 마치 특권이 있고 경외심에 찬 두 어린이들처럼 넋을 잃고 구경하였다. 데이몬은 걸작품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몬은 웬만한 영화를 보아도 그렇게 말하거나 생각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사람들로 꽉 찬 극장 안에서 숨막힐 듯한 긴장의 적막이 흐르고 있음을 보고, 그의 생각이 다른 청중들의 생각과 일치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가 끝나자 관중들은 박수 갈채를 보냈다. 데이몬은 일찌기 근처 영화관에서 정기적으로 상연되는 영화를 보고 이와 같은 일이 있었던 일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었다. 이제까지 극장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지 못한 실라는, 두명의 병사가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배경으로 넓은 들에서 의자에 앉아 사격 분대에 의해 총살을 당하는 마지막 장면에 소리내어 울고 있었다. 데이몬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이 얼마나 영광된 것이며, 또한 그러한 재능이 얼마 만큼 잘못 사용되고 있는가를 절감하였다. 이 영화는 두 사람의 군인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 독직의 과정, 무자비한 정치적 목적, 그리고 맹목적이면서도 전 인류에게 파급되어 있는 인종간의 악의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데이몬은 주위 사람들의 의기양양 함과 감사하는 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비록 극장 안에 있는 구경꾼들 중에서 '작위적 경험'이라는 말을 들어 보거나, 읽어본 사람은 불과 몇 명에 불과하겠지만, 연민과 공포를 통해 실제로 감정의 정화를 일으켰다고 데이몬은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보고나서 가까운 술집에 가서 첫 모금의 술을 마시면서 데이몬은, 방금 보고 온 영화를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생각해 보았다. 비록 영화는 장엄하였지만 적어도 자신에게는 그러한 영화를 볼만한 밤은 아니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물론 죽음 앞에서도 단련된 군인의 위엄을 갖추고 조용히 그리고 용감하게 죽어간 두 배우는, 최후의 한 장면, 그리고 감독의컷이라는 말과 함께 쓰러진 곳에서 일어섰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웃으며 농담을 하고 최고의 기분으로 축하주를 마시러 그곳을 떠났고, 다음날 촬영을 위해 준비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어떤 농담을 준비해야 하고, 내일을 위해 준비 할 것은 무엇이며, 어느 감독이 가까이에서 컷을 외쳐서 연기를 끝나게 해줄까? 지난 이틀 동안, 자신은 죽음 속에, 또한 죽음에 대한 생각 속에 깊이 빠져 있었다고 데이몬은 느꼈다. 그에게 협박을 한 잘로프스키, 죠지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헤리슨 그레이, 앙뚜아네따와 모리스 피츠제랄드, 중성자 폭탄 이야기를 하던 그래고르, 술취한 운전수의 희생물이 된 멜라니, 모두가 그러하였다. 걸작품이든 아니든 간에, 만일 그가 아무도 죽지 않고 막이 내릴 때 울려 퍼지는 소리로 행복하게 끝을 맺는 어떤 어리석은 음악 코미디의 표를 샀더라면, 그는 좀 더 기분좋게 시간을 보냈을지도 몰랐는데... 데이몬은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피묻은 노트를 만져 보았다. 그것은 바로 현실이었다. 그의 주머니 속에는 공포는 있었지만, 연민도 작위적 경험도 없었다. 실라 또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는 실라의 생각도 자기 생각과 비슷하리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데이몬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올 잡았다.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쥐고 웃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집에 도착하였을 때는 한 시가 넘어 있었다. 마치 자석에라도 끌리듯이 그들의 눈이 전화 회신용 장치로 쏠렸다. "자, 잠자리에 듭시다. 그런 것은내일 아침까지 내버려 둬요"하고 실라가 말했다. 길고도 따분한 하루였다. 데이몬은 실라의 따뜻하고 보드라운 살이 자기 살에 와 닿자 요람에 흔들리 듯 곧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잠들기 직전에, "실라는 방패야." 하고 혼자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그는 꿈 속에서 시달리며 괴로와했다. 그는 꿈에서 깨어나려 애썼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데이몬은 평화롭게 잠자고 있는 실라에게서 조심스럽게 떨어져 침대 밖으로 나왔다. 그는 털로 된 웃옷을 걸치고 맨발로 거실로 걸어갔다. 불을 켜지 않고 창 앞의 책상에 앉아 텅 빈 거리를 내려다 보았다. 책상 위의 시계는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꿈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그는 장례식 복장을 하고 있었다.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곤색 사아지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소매 끝의 단추가 실이 풀어져서 떨어질 것만 같았다. 단추를 잃지 않도록 매어 두려고 단추를 잡아 당겼다. 단추는 떨어지지 않고, 그 대신 소매가 몽땅 떨어지며 팔꿈치까지 내려왔다. 꿈 속에선 그것이 약간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하였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꿈에서 깨어난 지금은 도저히 재미있다고 느낄 수는 없었다. 서글픈 감정에 사로 잡히자, 데이몬은 모리스 피츠제랄드와 런던의 아파트에서 전화를 받은 여인의 반응에 대하여 전화로 이야기 하던 극작가 네이탄 브라운의 생각이 떠올랐다. 데이몬은 몸을 떨었다. 잠이란 셰익스피어가 묘사한 것처럼 걱정에서 풀린 옷소매를 짜는 것은 아니었다. 그 꿈을 꾼 다음, 곧 나타난 또 다른 꿈은 영화에서의 빠른 용암 화면처럼 더욱 더 어리둥절하고 수수께끼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 꿈은 아주 정상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지갑을 잃어버리고, 그가 알지 못하는 큰 집을 온통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때 그는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아버지와 마주쳤다. 그의 아버지는 젊고 원기왕성하였다. 그리고 나이도 그의 현재의 나이와 같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은 그 꿈에서는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와 함께 죽은 형 데이비가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었을 때의 열 살 난 소년의 모습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어른이 되어 있었고, 그것도 코트를 입고, 수염을 깎은 푸릇푸릇한 턱에 우스광스러울 정도로 작은 모자를 쓴 슐터 경위로 변해 있었다. 그는 지갑을 잃었으며 그가 사야만 할 어떤 물건이 있는데 돈이 필요하다고 설명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웃으면서 계속 계단을 내려오면서 태평스럽게 어깨 너머로 슐터 경위에게 말하고 있었다. "데이비, 저 아이에게 몇 푼 주거라." 슐터는 그의 주머니에서 작은 플라스틱 제품을 꺼내서 데이몬에게 주었다. ''그 속에 잔돈이 좀 들어 있어." 하고 말하고 나서 아버지를 따라갔다. 데이몬은 그 특수한 잔돈 배출기를 바라보았으나, 안에 돈이 나오는 돈 구멍이나 또는 나오게 하는 손잡이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데이몬은 아버지와 슐터의 뒤를 뛰어 쫓아 가며 기계 속에는 그가 필요한 것을 살 만큼 돈도 들어 있지 않고, 돈을 꺼낼 방법도 없다고 외쳐댔다. 그의 아버지와 슐터는 길가에 쌓아올린 둑을 올라가고 있었으나 아무도 뒤돌아보지 않았으며 데이몬은 그들을 따라가려고 애를 써도 계속 미끄러져서 제자리 걸음만 할 뿐이고 그의 외치는소리는 절망적으로 자신의 귀에만 메아리치고 있었다. 데이몬은 그때 거의 잠에서 깨어나는 듯 했으나, 마치 그에게는 낯선 물질 속의 깊은 곳에서 멀리 머리 위에 비치는 빚을 향해 헤엄쳐 올라오다가 다시 깊숙이 가라앉는 듯이 그는 잠들고 말았다. 그후 얼마 동안, 그는 조용히 잠들어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그 다음에 꾼 꿈은, 전에 꾼 두 가지 꿈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꿈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기억할 수는 없었으나, 그는 갑자기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그것도 어느 상처 한 부위에서가 아니라 그의 몸 전체 부위, 즉 이마, 가슴, 배, 성기, 무릎, 발목, 발바닥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을 의식하였다. 그 꿈은 너무나도 생생하여 잠에서 깨자마자 즉시 손으로 피로 찜질을 하고 있는 듯한 몸을 머리부터 몸 전체를 더듬어 보았다. 그의 손은 맹송맹송하였다. 데이몬은 한참동안 꼼짝 못하고 침대에 누워서 실라가 평화스럽게 쉬는 숨소리를 들으며, 어떻게 이와 같은 소동이 바로 옆에서 일어나고 있는데도 그녀는 계속 잠잘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사전 인식을 믿고 있을까? 그렇다면 사전 인식이란 무엇일까? 그 후 데이몬은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왜냐하면 그는 그날 밤은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침 일곱 시까지 그대로 여전히 앉아 있었다. 실라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자명종이 일곱 시를 알리는 벨소리를 울렸고, 실라가 욕실로 가는 소리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잠시 후, 실라는 하품을 하며 푸른 욕의를 걸치고 나타났다. 그녀는 그에게로 다가와서 그의 이마에 키스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안녕히 무무셨어요? 일어 나신지 오래 되셨나 보죠?" "조금 전에 일어났어." 하고 그는 거짓말을 하였다. "잠은 편안히 주무셨어요?" "응." 두 사람은 책상 위의 전화기에 부착된 회신용 기계장치를 쳐다 보았다. ''자, 누가 전화를 걸었는지 알아보는 게 좋겠어요." 하고 말하며 실라는 불안한 듯이 데이몬을 바라다보았다. "좋을지도 모르지."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한 마디 했다. 실라는 기계의 스위치를 눌렀다. 기계는 그녀가 녹음한 목소리를 되풀이 하였다. 그러자 녹음을 알리는 신호가 삐삐 하고 나더니,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데이몬은 단 한 번밖에는 듣지 못한 목소리였으나, 금방 알아 차릴 수 있는 목소리였다. ''이 사람은 잘로프스키입니다. 데이몬 부인. 전하는 말은 제가 데이몬씨를 미행하고 있다고 부인 남펀에게 전하십시오." 실라는 스위치를 꺼 버렸다. "신기한 발명품이로군요, 그렇지 않아요? 여보, 당신 무엇을 드시겠어요? 베이컨과 달걀로 하시겠어요?" ''베이컨과 달걀로 들겠소." 하고 데이몬이 대답했다. 제 13장 사업상 예상 되는 적 "출근 전에 통화할 수 있을까 해서 이렇게 일찍 전화하는 거예요." 실라는 전화로 올리버 가브리엘슨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함께 점심식사를 한 지 일 주일도 더 되었다. "거기 지금 당신 부인 있나요?" ''아침에 먹을 새로 구워나온 빵을 산다고 밖에 나갔습니다." 하고 올리버가 대답했다. "마침 잘 됐군요. 저도 이야기할 것이 있어서 보육원으로 전화를 걸까 하던 참이었는데 말입니다." ''함께 점심식사를 할 수 있을까요?" "어디든지 말씀만 하세요." "전과 같은 장소에서, 1시에 !" "그리로 나가겠습니다." 하고 올리버가 대답했다. 보육원에서 몇 블럭 떨어지지 않은 식당에 실라가 도착하였을 때는, 올리버는 미리 와서 그녀를기다리고 있었다. 그는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뺨에 키스를 하고 뒤로 물러나서 그녀를 유심히 바라 보았다. "알고 있어요, 다 알고 있어요. 제 꼴이 말이 아니라는 것을." 하고 그녀가 말했다. "신수가 말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작은 데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앉으면서 올리버가 말했다. ''부인의 보통 수준도 안 된다고나 할까요?" ''험난한 일주일이었어요." 하고 실라가 대꾸했다. "짐작이 갑니다. 저도 사무실에서는 살 얼음을 딛고 있는 심정입니다." "어째서요?" 하고 실라가 물었다. 여 종업원이 다가와서 식사 주문을 받았다. 여종업원이 가자 실라가 다시 물었다. "어째서냐구요?" "뭐라고 할까요, 마술에 걸런 사람처럼 책상에 앉아 있더군요. 올리버가 아침에 출근해도 인사 한 마디 하지 않습니다." 하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진 앨범같은 것을 사무실에 가지고 와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보고 몇 차례나 꺼내서 펼쳐 놓고는 한 페이지를 몇 시간 동안 있는 거예요. 한번은 메모를 가지고 데이몬씨의 책상으로 갔더니, 마치 제가 군대의 기밀이라도 훔치려고 온 것처럼 손으로 그것을 가리고 말더군요. 혹시 그분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생각나는 건 없으십니까?" ''몇 년 동안 집에서 사진첩은 보지를 못했는데요." 하고 실라가 대답했다. "사진을 보고 있지 않을 때에는," 올리버는 계속하었다. ''그 앨범을 책상 밑 서랍에 넣고는 하나밖에 없는 열쇠로 잠궈 놓고서 편지, 계산서, 어떤 종이 쪽지 같은 것 하나를 내놓고 그것을 들여다보더군요. 보통 때 같으면 일주일에 두세 번은 저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셨는데 일 주일 전 월요일부터는 한 시쯤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혼자 나가 버리고는 그만입니다. 일을 마치고 한잔 하는 일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퇴근할때 잘 가라는 인사라도 하면, 그것은 아주 재수가 좋은 겁니다. 그리고 낮에도 질문을 하면 오랫동안 대답을 안 하거나 듣지 못한 것 같기도 하여 다시 물으면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럽 사람을 멍하니 쳐다봅니다." 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서는 저에게도 마찬가지예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나시는 것은 없으세요?" "없는데요." "잘로프스키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으세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좋아요. 도움이 되시려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셔야만 해요." 실라는 체념한 듯 말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열흘 전, 제가 주말에 집에 없을 때부터 시작되었어요. 새벽 네 시경, 그이가 잠을 자고 있을 때 전화가 걸려 왔대요. 누군지는 모르지만 잘로프스키라고 하면서 그이를 협박했대요. 시카고에서 왔으며 그이 더러 나쁜 사람이라면서 그러기에 그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했다나 봐요. 자기가 그이를 우리 동네 길 모퉁이에서 기다리고 있다면서 생사에 관한 문제라고 했대요." "그렇 수가?" 하고 올리버는 놀랐다. 그의 창백한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래서 로저씨는 갔었나요?" "아뇨. 그이는 전화를 그대로 끊었대요. 그후부터 그이가 매우 이상하다는 것은 지난 번 점심 식사를 할 적에 제가 말씀드렸고 올리버씨는 총에 관해서 말씀하셨쟎아요." "제가 알기로는 총 만큼은 아직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신청서가 아직도 책상에 그대로 있으니까요, 그 잘로프스키라는 자로부터 그 다음에 또 다시 전화가 왔습니까?" "단 한 번, 4일 전의 밤이었어요. 회신장치에 전갈을 남겨 두었더군요." 하고 실라가 대답했다. "댁에 회신 장치가 있는지는 미처 몰랐는데요." 하고 올리버가 놀라며 말했다. "그래요. 장치해둔 게 하나 있어요." 실라는 전갈 내용을 말해 주었다. 그들이 주문한 음식을 여종업원이 날라와서 테이블 위에 차려 놓는 동안 그 둘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여종업원이 가버리자 올리버가 입을 열었다. "제가 한밤중에 그런 전화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틀림없이 그렇게 유별난 행동을 했을 겁니다. 혹시 그것이 누구인지 짐작 가는 곳은 없으세요? 그리고 왜 그 자가 그런 전화를 걸었을까요?" "전혀 모르겠습니다.." 하고 실라가 말했다. "만일 그이가 의심가는 곳이 있더라도 그이는 저에게 말씀하시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올리버씨와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공개되지 않은 어떤 비밀이 있는 게 틀림없어요." 그녀는 빵 한 조각을 집어들고 어찌할 바를 모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이는 매우 호감이 가는 사람이라구요. 그이는 어디를 가나 방안으로 들어서면 사람들은 그를 언제나 반갑게 맞아들여요. 물론, 제가 들어보지 못한 여자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지금도 그이는 좀 늙기는 하였지만. 그이는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고 대신 성적으로 발산시키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이 바로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라구요. 제가 그이를 병원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온통 붕대를 감고 자리에 누워 있기는 하였지만 그것을 느꼈어요. 그이는 어디를 가나 여자들이 주위에 몰려든단 말예요. 하지만 그이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때때로 그것을 이용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어요, 물론 저는 그것을 다 알고 있었어요. 올리버씨도 틀림없이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올리버는 웃으려고 했지만 그의 표정은 미소라기보다는 오히려 병자가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것과도 같았다. "그렇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분은 그러한 제안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거절하는 편이었습니다." "칭찬치고는 가날프군요." 하고 실라가 한 마디 했다. ''어쨌든 저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화해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적어도 지난 몇 년 동안은 그러한 문제는 없었거든요. 저는 그 전화는 아무 뜻도 없으며, 어느 괴짜가 전화번호부에서 멋대로 전화번호를 골라서 장난 전화를 건 거라고 그이를 납득시키려고 애쓰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잘 안 되는군요. 지난날 어디에선가 무슨 일이 있었고 누군가가 그이를 해치려고 하고 있으며, 그이는 그것을 알고 있어요. 그러기에 그이가 저러고 있는 거예요." 그녀는 식욕이 나지 않는 듯 음식을 포크로 쿡쿡 찌르고 있었다. "저는 올리버씨께서는 제가 모르는 일, 제가 만나보지도 못했거나 또는 생각조차 못한 적을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올리버는 불안한 듯이 몸을 비틀었다. "글쎄요." 하고 그가 말했다. "오전 내내 외출하셨다가 늦게 점심 식사 후에 사무실에 오셨읍니다. 얼굴은 창백하고 이마에는 붕대를 감고 말입니다. 제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자 시치미를 잡아 떼더군요. 그래서 저는 누군가가 데이몬씨를 때렸을 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였으나, 제가 상관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실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저한데는 거짓말을 했어요. 책상 스탠드에 부딪쳤는데 미스 월튼이 치료를 해 주었다고요." "사무실에는 붕대같은 것은 없습니다.." 하고 올리버가 설명했다. "그날 오후, 점심 시간도 패 오래 지난 후 돌아왔을 때 아침에 입고 있던 옷과는 다른 옷을 입고 사무실에 돌아왔습니다." "어제 바로 그 옷을 받았어요." 실라가 말했다. "제가 맡겨 놓았던 스웨터를 찾으러 세탁소에 갔더니 세탁소 사람이 지난 주에 제 남편이 맡겨 놓은 읏도리와 바지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이는 그러한 일은 늘 제게 맡겼거든요. 그분이 세탁소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녀는 올리버를 날카롭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밖에, 또 다른 일은 없었나요?" 올리버는 머뭇머뭇하더니 드디어 말을 꺼냈다. "저는 로저씨를 배신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분이 부인께 자기 생각을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저도 고자질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하고 실라는 준엄하게 따지고 들었다. ''만일 그이가 자기 스스로 도울 수 없다면 그이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우리밖에는 없쟎아요?" 올리버는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그건 부인 말씀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래요, 이틀 전이었습니다. 데이몬씨가 점심을 먹으러 나가셨기에 제가 서부 쪽에 있는 고객으로부터 온 펀지를 받았는데, 저더러 회답을 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것은 데이몬씨 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편지가 데이몬씨 앞으로 왔을 때는 그분은 언제나 자신이 직접 즉시 답장을 쓰곤 했거든요. 그러나 요즘 며칠 동안은.." 올리버는말을 끝맺지 않고 다음 말로 옮겼다. "그리고 보통 때 같으면 데이몬씨는 자기 책상을 회계 문서처럼 깨끗하게 정리 정돈 해두었는데요. 그러나 지금은 엉망진창입니다. 서류는 사방에 흩어져 있고 주소를 적은 쪽지는 여기저기 널려 있으며, 공적 문서는 싸인도 않은 채 그저 이것저것 뒤범벅이 되어 있읍니다. 한 가지 서류를 찾으려면 책상을 다 뒤져야만 해요. 제가 그 편지를 찾아야만 했는데, 그것을 찾아 뽑아 들었더니 그 밑에 노트 한 권 펼쳐져 있지 않겠어요? 저는 데이몬씨가 아침 내내 들여다보고 있다가, 혹시 화가 치밀어서 제쳐놓은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올리버는 불안스러운 듯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부인, 만일 데이몬씨가 이것을 부인이 알고 있어야만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데이몬씨가 직접 부인께 말씀드릴 겁니다." "올리버씨, 당신도 결혼한 지 10여 년이나 지났쟎아요. 그런데 아직도 결혼 생활에 대해서 모르고 계시는군요. 어떤 종류의 노트이지요?" "데이몬씨가 항상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노트입니다." 올리버는 마지 못해 털어놓았다. "기억해 둬야 할 일, 잡지 원고에 대한 견해, 주소 등등을 적어두는 노트 말입니다. 그런데 그 노트가 펼쳐져 있었는데 펼쳐저 있는 페이지에는 주소도 메모도 없었어요." 그는 앞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자신을 좀 더 무장시키려는 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한쪽에는 사업상 예상되는 적이라고 써 놓았고, 다른 쪽에는 개인적으로 예상되는 적이라고 써 놓고서는 각 난 밑에 몇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더군요." "그 이름들의 주인공은 누구던가요?" "사업상이라는 난에 씌어 있는 이름 중 하나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마첸돌프였어요. 부인도 기억하시지요. 로저씨가 명예 훼손 사건 때 그의 반대 증인으로 증언한 일 말입니다." "로저란 분은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면 자기 어머니의 반대 증언도 서슴없이 할 사람이니까요. 그 밖에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 없던가요?" "알 수가 없었읍니다." "왜요?" "핏자국이 말라 붙어 있어서요." 라고 올리버가 대답했다. 올리버의 마지막 말의 반향음은 그들 사이에 메아리치는 듯하였다. 두 사람은 불안한 듯 잠시 말을 멈추고 있었다. 실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말할 것이 더 있을 것 같기도 하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올리버씨는?" "더 많이 있습니다." 하고 올리버가 말했다. 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손을 들고 올리버의 말을 중지시켰다. 왜냐하면 실라는 어떤 부인이 작은 소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면서 그들의 태이블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데이몬 부인 !" 그 부인이 말했다. "부인께서는 제가 알고 있는 식당을 알고 계시는군요. 부인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필리스 야 !" 그녀는 맏 아이의 손을 잡아 끌며, "데이몬 부인께 인사를 해야지.'' "아침 내내 같이 있었어. 인사는 벌써 했는 걸." 실라는 웃으며 일어나서 소개 받기를 기다리는 올리버를 보고 말했다. "필리스는 보육원 학생이에요. 성적이 가장 우수한 학생 중 한 아이랍니다. 그렇지, 필리스?" "우리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하고 필리스는 말하면서 자기 엄마를 흘겨보았다. ''필리스, 어째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엄마 때문이에요." 실라는 또 한번 웃었다. 그리고 나서는 올리버를 그 부인에게 소개시켰다. 그 부인의 이름은 게이네스였다. 소개가 끝나자, 게이네스 부인은 딸 아이의 손을 끌고 발길을 옮기더니 다시 돌아보며 말했다. "요전날 밤에는 부인을 보지 못해 매우 섭섭했어요. 제 남편에게 소개해 드리고 싶었는데요." ''거기가 어디였지요?" 하고 실라가 물었다. "음악회에서 말입니다. 휴식 시간에 데이몬씨는 만나 뵈었어요. 부인께서는 화장을 고치러 가셨나 했지요." "어느 요일 밤이었던가요?" 하고 실라가 물었다. "금요일이었어요. 모짜르트의 진혼곡을 연주하던 날입니다. 정말 훌륭했어요." "훌륭했어요." 하고 실라도 따라 말했다. "필리스, 데이몬 부인께 작별인사를 얌전하게 하렴." ''내일 아침 부인을 만날 탠데." 하고 소녀는 말했다. ''필리스," 실라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거야 너무 격식을 차린 인사가 아니겠어 ? "나는 전에도 보아서 다 알고 있어요." 게이네스 부인은 절망적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이들의 논리예요. 가브리엘슨씨,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끌고 식당 반대편 테이블로 갔다. ''똑똑한 여자 아이예요." 실라는 다시 올리버에게 향했다. "저 애가 자기 엄마처럼 되지 않기를 바래요." 잠시 후, 올리버가 말을 꺼냈다. '저 부인에게 '훌륭했어요' 라고 말하는 부인의 태도가 좀 이상하더군요." "그랬어요?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왜냐하면, 저는 금요일 밤에 음악회에 가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로저 그 양반도 자기가 음악회에 갔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구요, 그이는 전화로 손님 한분과 저녁을 함께 하고 리허설을 보러 간다고 했거든요." "그렇다면, 로저씨는 모든 일을 그런 식으로 처리하려고 하시는 걸까요?" "아마, 어쩌면 모짜르트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하고실라가 대답했다. "그것이 부인에게 꾸며낼 이야기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겁니까? 음악회는 다른 여자와 밀회를 할 만한 것도 아니쟎습니까?" "이 특별 음악회는," 실라가 전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밀회의 약속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요. 모짜르트의 마지막 작품인 진혼곡은 발세크스투파흐 백작이 죽은 아내를 추도하는 미사에서 노래하기로 계약되었던 거라구요." 실라의 목소리는 점점 가는 속삭임으로 가라앉았다. ''디에스 이레 라끄리모사. 이것도 일종의 밀회지요. 별로 관심은 없었지만 로저는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올리버는 그의 손을 얼굴로 가져다가 눈을 가렸다. ''참 재수 없군요, 저질 여자를 하필이면 여기서 만나다니 !" 하고 올리버는 중얼거렸다. 실라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저 여자는 이웃에 사는데 보육원과는 가까운 곳이어서 아마 너무 게을러서 그런지 점심을 요리하지 않아요. 어쨌든 밀회는 언제나 끝에 가서는 이렇게 저렇게 발각되기 마련이니까요." 그녀는 웨이트레스를 오라고 손짓했다. "술 한잔 대접해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저는 칼바도스로 하겠어요." 그녀는 올리버에게 말했다. "저에게도 애인이 있었지요. 그 사람은 전쟁 중에 노르만디에서 싸웠어요. 그 사람이 나에게 칼바도스를 알려 주었어요. 그이는 캡틴 컵에 칼바도스를 가득 채워 마시곤 했는데 그래야만 전쟁을 견뎌낼 수 있다더군요. 무엇으로 드시겠어요?'' "같은 것으로." 하고 올리버가 말했다. "칼바도스 두 잔." 하고 실라는 웨이트레스에게 주문했다. 커피를 마시고 기다리고 있자 웨이트레스가 술 두 잔을 가져왔다. "건배합시다 !" 웨이트레스가 가자, 실라는 술잔을 들며 이렇게 말했다. ''만일 로저가 적의 명단을 작성하고 계시다면 우리 자신의 것을 만드는 것도 좋은 생각일지 모르겠네요. 핏 자국과는상관없이 말예요." 그녀는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저에게도 한 사람 해당자가 있어요. 가족 중에 언니의 아들인 조카죠. 이름은 지안루카 치아카라고 해요, 조카는 월남전에서 고생하다가 심한 부상을 당했어요. 돌아왔을 때는 마약 중독자였어요. 조카의 아버지는 그를 집 밖으로 좇아내었고, 그래서 마약을 끊으려고 병원으로 찾아갔어요. 일 년 이상 병원에 입원해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조카가 우리집에 나타난 거예요. 조카는 마약을 끊었다고 맹세하면서 직업을 찾는 동안 머물 곳이 필요한데 돈 한푼도 없다는 거였어요. 저는 그 문제를 그이와 의논했으나 우리도 재정적으로 곤란을 당하고 있을 때였거든요. 우리는 조카에게 호텔 숙박비를 대줄 여유가 없었다구요. 그래서 로저는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우리와 함께 지내도록 하자고 제안했어요.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죠. 왜냐하면, 우리집 빈 방에는 침대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저 소파 하나가 있을 뿐이었죠. 그 방은 그이가 집에서 할 일이 있거나 또는 편지 같은 것을 써야 할 때 사용하던 방이었죠." "지안루카는 소파에서 자야만 했어요. 조카는 집 근처에서만 늘 돌아다니는 것이 기분이 좋지는 않았겠지만 처음 2주 동안은 그런대로 잘 지냈습니다. 조카는 침울하였고 늘 지저분한 청년이었으며 이 세상에 대해서 늘 불평을 늘어놓곤 했어요. 조카는 화물수송 서기로 일자리를 얻었지만 조장과 말다툼을 하다가 몽키 렌치로 조장을 때려서 해고를 당하고 말았어요." 실라는 지안루카의 출현이 그들의 결혼생활에 끼친 정신적인 고통과 강박감을 회상하면서 슬픈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 후부터는 조카는 직장을 구하는 것도 중단하고 길거리에서 망나니짓을 하고 지냈던 것 같아요. 저는 조카가 또 다시 마약 주사를 맞기 시작하였다고 의심했고, 로저도 역시 의심했던 것 같았어요. 그 이후로 아파트에서 물건이 없어지기 시작했어요. 커피 포트, 도자기 골동품, 그레이씨가 결혼선물로 준 은 쟁반, 상아 손잡이가 달린 조각 칼....기타 물건들이 하나하나 없어졌던 거예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로저는 한동안 물건이 없어지는 것을 모르고 계셨지요. 형편이 여의치 못한 때라 저는 제 조카 아이가 용돈에 눈이 멀어서 우리들의 재산을 훔친다는 이야기를 할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입장이 곤란하셨겠군요, 부인." 하고 올리버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입장이 곤란한 것은 어디 저 뿐이었겠어요? 지안루카 자신도 그랬을 거예요. 남편도 그렇고." "로저씨가 알고 나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어느날 밤이었어요." 실라는 지금까지의 어조를 바꾸어 명쾌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며 말했다. "무서운 언쟁이 벌어졌죠. 지안루카는 자기 어머니의 목을 걸고서라도 자기는 마약주사를 맞지 않았고 자기는 평생 동안 한번도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고 우기고 있었지요. 로저는 그에게 당장 집에서 나가라고 소리치면서 만일 나가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 하겠다고 얼러 댔어요. 지안루카는 나가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는 거실 소파에 누워서 팔짱을 낀 재 움직이려 하지 않았던 거죠. 그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어요. 그이는 소파로 다가가서 지안루카를 움켜 잡고서는 몸을 번찍 들어 올렸어요. 조카는 너무나도 말라서 어린애라도 그를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였고, 그 양반은 제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힘이 센 분이었죠." "화가 나면 물 불을 가리지 않는 분이라구요. '문 열엇 !' 그이는 발버둥치는 조카를 안은 채 저에게 소리쳤어요. 제가 문을 열자 로저는 그 아이를 계단으로 들고 가서는 층계 아래로 집어 던지고 말았어요. 조카는 다치지는 않았지만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지요. 계단 반 쯤 굴러 떨어지고 나서야 그 아인 겨우 일어섰습니다. 일어나자 조카는 그이에게 주먹을 휘두르면서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지요. '내가 이 복수를 꼭 하고 말 겁니다. 이 피 눈물도 없고 고약하기 짝이 없는 개같은 늙은이와 거짓말장이, 기니아 토인같은 늙은이와 거짓말장이, 기니아 토인같은 뚱뚱보 여편네야 !' 가정집 저녁식탁 주위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대화치고는 너무 했어요." 그녀는 한심스러운 듯 웃었다. ''그이는 조카를 죽일 것만 같았어요. 말리는 저를 질질 끌면서 조카를 쫓아 계단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하자 조카는 겁이 났던 모양인지 기겁을 하고 달아나 버렸어요. 그것으로 언쟁은 끝났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읍니까?" 하고 올리버가 물었다. ''그것으로 끝이 났던 거죠. 우리는 다시는 그 아이를 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2,3개월이 지난 후 그 애 어머니가 전화로 울면서 말하더군요. 브룡크스에서 어느 숙녀의 핸드백을 탈취하려고 커다란 칼로 위협하다가 체포되었다고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숙녀는 여순경이었대요. 조카는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더군요. 그 칼도 아마 우리 주방에서 가져간 걸 거예요. 어쨌든 2,3년도 몇 개월 전에 만료되었으니 조카는 석방되었겠지요. 그 아이도 개인적인 적 명단에 오를만 하다고 생각되는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가 채포되었다는 이야기를 로저에게 하셨나요?" 하고 올리버가 물었다. "아뇨. 제가 잘못한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과거의 나쁜 기억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오늘 밤에 그이에게 이야기하겠어요."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전화의 응답장치를 끊어 버리라고 말할 작정이에요. 다음엔 잘로프스키라는 자가 그이와 만나자고 날짜와 시간을 알리는 전화를 걸어 올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이는 용감한 사람이라서 자신이 당면한 일을 정확히 알고 있으면 처리해 나가거든요. 이러한 방법으로는 그이는 허공 상태에 있는 샘이죠. 그러니 자연히 그이는 모든 장소에서 위협을 느끼고 어디로 돌아 갈지를 모르니 그이가 말라죽고 있는 거예요. 제가 모르는 척하지만 그이는 자면서도 마치 꿈 속에서 그림자와 싸우기라도 하듯 몸부림치고 있어요. 매일 밤 거의 절반은 앉아서 밤을 지새우고 있다구요." ''그분의 표정에도 밤잠을 설치고 있는 것 같은 기색이 나타나기 시작했읍니다." 올리버가 말했다. "그분이 그렇게 긴장하고 지쳐 있는 모습을 이제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일은 밀려 쌓이고 있는데 손도 대지 않고 있어요.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늦어진 부분을 잡아 올리려고 애는 쓰지만, 저야 일개 사병에 지나지 않고 장교는 아니쟎습니까? 정말 어떤 결정을 내릴 일이 있을 때는 그것을 결정할 사람은 그 분밖에는 없어요. 하지만..." 그는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짓는다. "부인께서 말씀하시는 종류의 모험, 어떤 사람이 없는 곳, 어두운 곳에서 누가 되었든 간에 혼자서 만나는 것을 그분이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이는 혼자가 아니에요." 실라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그이와 함께 가겠어요." "부인." 올리버는 항의하듯 말했다. ''상대는 살인범일 수도 있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자를 찾아낼 거예요. 자, 혹시 짐작이 가는 사람은 없으세요?" "별로 도움이 될 것은 없습니다." 올리버가설명하기 시작했다. "역시 마첸돌프라고 할까요. 그는 난폭하였고 한 마리의 들개처럼 자랐거든요. 만일 우리가 작품을 쓰는 방법으로 어떤 것을 판단할 수 있다면 그곳에는 가공스러운 폭력이 난무할 겁니다." "그 밖에는...." 그는 입을 꼭 다물고 심각한 어린애와 같은 표정을 지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 밖에 제가 생각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은 질레스피입니다." "그것 참 놀라운 생각이군요. 로저는 그 사람을 높이 평가하던데요." 하고 실라가 말했다. "그가 첫 작품을 쓰고 난 후엔 그를 높이 평가했지요." 하고 올리버가 설명했다. ''그후, 그는 자신의 요람을 떠나 버렸어요. 조울증 환자, 과대망상증 환자, 정신분열증 환자, 뭐라고 불러도 좋아요. 그는 그런 사람이었죠. 그가 두번째 작품을 가지고 왔을 때 로저씨는 그것을 어떤 미치광이 연극이라고 생각했어요. 로저씨는 그 말을 그 자에게 하기 전에 저더러도 그것을 읽어 보라고 했읍니다. 그 작품은 3백 패이지의 종이를 묶어놓은 횡설수설이었어요. 전혀 뜻이 통하지 않더군요. 그 자가 그 책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러 들어 왔을 때, 그는 완전히 정신이 돌아 있었어요. 그 자는 정신이상 중세에 걸려 있었어요. 그는 계속 웃으면서 사무실을 왔다갔다 하면서 팔을 혼들고 그 책이 조이스 이래로 최대의 걸작이며 그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타게 될 것이 틀림없다고 외치고 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러자 우리 두 사람 중 누가 이야기도 하기 전에 자기는 FBI와 CIA 그리고 소련인과 유태인들에게 좇기고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는 원자단 비밀을 가지고 있고, 그들은 이것을 자기에게서 빼앗아가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 시작했읍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불리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자기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친구들을 많이 갖고 있고 그들은 자기를 해치려는 거대한 음모에 관련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는 그들이 누구인가를 알고 있으며, 그들이 심판을 받을 날이 곧 다가온다는 거지요. 그러나 그날이 오기까지 사람들은 자기 아내를 자기에게 적대시하도록 만들 것이며, 아내는 자기를 정신병원에 보내려고 하고, 그렇게 할 수 없게 되면 두 아이를 데리고 도망쳐 버릴 거라는 겁니다. 훗날 언젠가는 말예요... 휴우 !" "정말 어처구니 없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군요." 실라가 한마디 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종족들이에요. 우리는 날마다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어요. 로저가 쓰레기 같은 아이를 계단 밑으로 내던져 버리고 난 다음, 목욕을 하고 저녁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가고, 음악회에 가고, 베토벤의 음악을 듣고, 연극을 줄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애 신문을 사고, 인도에서의 대학살, 레바논의 공습, 여러명의 사망자를 낸 비행기 사고에 관해서 외치는 기사 제목만 뚫어 본 다음 아침식사 때 읽으려고 옆으로 던져 놓는 것과 같은 장면을 연출하며 살고 있다구요. 우리는 사랑을 하고 코를 골며 잠자고, 은행 잔고를 걱정하며 투표의 등록일을 잊으며 휴일을 지내기 위해 준비를 하고...." 그녀는 마치 재미없는 그녀의 모든 휴일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데, 그 불쌍한 미친 사람과 그의 원고는어떻게 했나요?" "어떻게 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하고 올리버가 반문했다. "그 일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당신과 로저가 처리한 그대로 겠죠, 뭐. " 실라는 지친 듯이 말했다. "우리는 그를 진정시켜 보려고 했읍니다. 우리는 그에게 그의 책을 읽었지만 이것을 출판사에 보이기 전에 다소 수정 작업이 필요하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죠." 올리버는 칼바도스 술잔을 불빚이 밝은 곳으로 들어 올리면서 곁눈으로 술잔을 들여다 보았다. "질레스피는 우리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였읍니다. 그는 우리들을 불쌍한 세속적인 친구라고 하면서 우리가 그의 책을 이해 못하는 것도 당연하고, 이 책은 앞으로 수세기 후의 세계에 살지도 모르는 좀 더 심세하고, 좀 더 감각이 예민한 사람들을 위해 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상, 그는 우리가 이 책을 이해하지 못 함을 기뻐했읍니다. 만일 우리가 이 책을 이해했다면 그는 이 작품이 실패하였음을 알게 될 테니까요. 그는 우리가 여러 차례 죽고 새로운 현실에 다시 여러 차례 되돌아왔을 때 이해하개 될 거라고 말했어요. 이 말에 모두 소리내어 크게 웃었지요. 그는 말하기를, 자기는 우리들을 존경하며 우리는 자기의 승천을 알리는 사자이므로 신의 영감을 받은 자기의 출판 업자인 찰스 버나드에게 자기 원고를 전달해 달라고 하면서 우리는 후손에 전할 문학 연대기에 기록될 거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난 다음, 그는 그 책 속에 있는 시 한 편을 낭독하더군요." "그이는 이런 말을 저한테는 일언 반구도 하지 않았어요." 하고 실라가 말했다. "로저씨는 그것에 관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더러도 절대 침묵을 지킬 것을 맹세시켰지요. 데이몬씨는 그 사람이 완전히 돌아 버렸다는 말을 퍼뜨려서 그 사람의 곤경을 더 심각하게 만들기를 원치 않았던 겁니다. 게가 이말을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도 이것이 처음입니다." "그이는 질레스피 그 사람에게 직접 뭐라고 하셨어요?"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어요?" 올리버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데이몬씨는 자기가 다음 날 아침 직접 원고를 출판사에 전달하겠노라고 했어요, 그리고 나선 아주 친절하게 혹시 질레스피가 정신병 의사와 이야기를 좀 해보면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어요. 그랬더니, 그 사람은 데이몬씨를 의아해 하며 쳐다보더군요. 정신병 의사들은 자기를 좇고 있는 자들과 동맹을 맺어 작가의 머리를 파헤쳐 놓고는 빈 두골만 남겨 놓는다고 말하더군요. 그리고나서 그는 왼손에 찬 시계를 보고 또 오른 손에 찬 시계를 보더니, 세 번째는 주머니에서 시계를 또 하나 꺼내 보이며 마치 큰 비밀을 누설하기라도 하듯이 우리에게 속삭였읍니다. 하나는 워싱턴의 시간이고 또 하나는 모스크바의 시간, 하나는 예루살렘의 시간이라고 한번 눈짓을 하고나서 말하더군요. 가야할시간이라고 하더니, 걷는다기 보다는 춤을 추듯이 사무실을 나가 버렸습니다." "로저는 다음날 아침, 그 원고를 버나드씨에게 전했나요?" 하고 실라가 물었다. "전했지요. 그분은 아무리 미치광이라 할지라도 약속은 꼭 지키시니까요." 버나드가 그 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데이몬에게 묻자 로저는 아무 의견도 없으니 직접 읽어 보게 하고 말했었다. 이틀 후 버나드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책이 내용을 해아릴 수 없고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버나드씨는 점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이상 더 나쁘게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음 날 아침 특별 인편으로 그 책을 돌려받았다. 질레스피는 몇 개의 안전한 거처를 마련해 두고 한 집에서 절대로 이틀 밤을 자지 않는다고 하였기에 어디에서 그가 살고 있는지를 몰랐다. 데이몬과 올리버는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마침내 질레스피가 사무실에 나타났다. 비오는 날이었다. 그는 모자도 코트도 없이 돌아다니고 있었으며, 마치 바다 밑바닥에서 끌어 올린 것처럼 보였다. 그는 선금을 받으러 왔다고 말했다. 로저는 그에게 선금을 지급할 것이 없으며 그 원고는 반환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그는 처음에는 모든 말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눈은 가지고 있지만 볼 줄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는 그는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버나드는 가면을 쓴 친구이고 자기는 그를 잘못 판단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로저마저도 오해하게 되었다. 음모는 많은 악의 뿌리가 있어서 늘 뻗어 나가지만 심판의 날에 그 나무는 도끼에 찍혀 쓰러지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의 말이 갑자기 어떤 의미에선 성서에 있는 말을 인용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였다. "그는 찢어진 상자에 든 원고를 들고 나가 버렸죠. 비는 그가 들어 올 때보다 더 심하게 내리고 있었어요. 억수같이 퍼붓는 빗속을 두 블럭도 가지 못해, 상자 속의 원고는 다 젖어서 읽을 수 없게 되어 버렸을 겁니다." 올리버는 칼바도스를 단숨에 들이켰다. "한 잔 더 하시겠어요?" 하고 그는 실라에게 물었다. "그만 하겠어요." 하고 실라는 대답하고 나서 이렇게 물었다. "그것이 질레스피씨와의 역사 이야기의 끝입니까?"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올리버가 말했다. "약 일 주일이 지난 후, 그는 사무실에 다시 찾아와서 또다시 선금 지불을 요구했어요. 우리가 전번에 본 후로는 면도도 하지 않았고 잠은 공원 벤치에서 그리고 간이 숙박소에서 잔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옷은 더럽고 구김살이 수없이 생겨 있었으니까요. 다행히 로저씨는 외출하여 안 계셨기에 선금은 모른다고 했지요. 그러자, 그는 저에게 다음 번에 자기가 올 때는 이 자리에 얌전히 있는 것이 좋을 거라고 로저 데이몬에게 전하라고 하더군요. 그때가 언제냐고 물었더니, 책이 자기에게 명령을 내릴 때라고 하면서 나가 버렸어요. 그러나 그는 당시 어디에 거처가 있는지는 모르나 집으로 가지는 않았어요. 그는 버나드의 사무실로 가서 버나드씨에게 선금을 요구하였습니다. 버나드가 지급할 선금이 없다고 말하자, 그는 권총을 꺼내 들고 이리저리 휘두르기 시작하면서 협박조로 온갖 종류의 노래 후렴과 그의 책의 인용구를 외치더라고 버나드씨가 제게 말하더군요. 다행히도 비서 한 사람이 그 광경을 보고 경찰을 불렀대요. 경찰이 오자 질래스피는 그들을 비웃으며 권총울 경찰에게 던져 버렸답니다. 권총은 아이들의 장난감 이었대요. 경찰은 그를 정신 감정을 하러 벨레뷰로 연행했으나 그는 그곳에서 아주 온전한 정신으로 매우 조리있게, 그리고 매우 얌전한 행동을 하여 며칠 후 그곳에서 석방되었다더군요. 그리고 나서는 우리는 다시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소식을 듣지도 못했어요." 실라는 괴로운 듯이 눈을 감았다. "저는 질레스피씨가 지금 어디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조차 하기 싫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올리버는 쓸쓸히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다음번에 그가 사무실에 오면 그의 주머니 속에 든 권총이 장난감 권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겁니다." 제 14장 죽고 난 다음 점심식사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왔을 때 한 통의 전보가 실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몬트의 실라 어머니를 담당하고 있는 주치의 한테서 온 전보였다. 전보 내용은 실라의 어머니가 위독한 상태라는 것이었다. 실라의 어머니는 뇌일혈을 앓고 있었는데, 현재 버링톤의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했다. 실라는 데이몬의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으나, 데이몬이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간 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미스 월튼이 말했다. 막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 순간, 미스 월튼은 지금 가브리엘슨이 문을 열고 사무실로 들어오고 있다고 전해 주었다. "가브리엘슨씨를 바꿔 드릴까요?" 미스 월튼이 실라에게 물었다. "그렇게 해줘요." 곧 이어 올리버의 목소리가 들렸다. 실라는 전보 내용에 관해서 설명을 해주고 난 다음, 로저에게 아파트로 전화해 달라는 말을 전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실라는 앨리게니 항공편으로 버몬트로 출발하기에 앞서 아파트로 돌아가서 간단히 짐을 챙길 생각이었다. 공항으로 가기 전까지 연락이 없으면 로저에게 쪽지를 남겨 놓겠다고 말을 하고 나서, 실라는 잠시 머뭇거렸다. ''올리버...." 실라는 난처한 기색을 표명하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신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지만, 하필이면 이런 때 로저를 홀로 놔두고 떠나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려요. 며칠이나 있을지는 가봐야 알겠지만, 그동안 로저를 잠시 당신 집에 기거하도록 해 주시겠어요? 로저를 아파트에 혼자 있게 하고 싶지 않아요. 특히 밤에는 로저 혼자 있어서는 안될 것 같아요. 호텔에 가 있으면 좋을 텐데, 로저는 호텔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당신이 괜잖으시다면.." "알겠습니다." 가브리엘슨은 실라의 부탁을 쾌히 승낙했다. ''데이몬씨에게 말을 해 보도록 하죠. 하지만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데이몬씨는 요즘 제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아요. 하떻든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당신이 돌아 올 때까지 우리집에 와서 지내든지, 아니면 내가 아파트로 가서 지내겠다고 데이몬씨에게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고마워요, 올리버. 꼭 좀 그렇게 해주세요." "버몬트에 가시는 일이 잘 되기를 빌겠습니다." "고마워요." 실라는 전화를 끊은 뒤 택시를 타고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전화 자동 응답 장치(사람이 없을 때 걸려온 전화의 내용을 녹음 해두었다가 나중에 알려주는 장치)의 스위치를 눌렀다. 아무런 내용도 녹음되어 있지 않았디. 실라는 전화자동 웅답장치를 끄고 나서 간단하게 짐을 챙겼다. 실라는 기다릴 수 있는 데까지 기다려 보다가, 급히 쪽지를 한장 적어 현관 반대 편의 조그만 테이블 위에 올려 놓은 다음, 계단을 내려와서 택시를 잡아 다고 공항을 향해 줄발했다. 데이몬은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식당에서 혼자 점심 식사를 했다. 오늘 오후에는 공연히 아는 사람을 만나서 말을 주고 받기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데이몬은 간밤에 꾼 꿈 때문에 머리 속이 복잡해 죽을 지경이었다. 요즘 들어서 그런 꿈을 자꾸만 꾸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혼자 조용히 생각해 보고 싶었다. 꿈 속에서, 데이몬은 실라와 함께 큰 파티에 참석해서 수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다. 그러나 데이몬과 낮익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식사는 부패 행식으로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두들 접시를 들고 돌아다니면서 자기 마음에 드는 음식을 골라 먹었다. 음식은 정성이 깃들어 있었으며 종류가 다양했고 맛도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갑자기 데이몬의 아버지가 나타났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꿈 속에서 본 모습과는 달리, 얼굴에서는 미소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나이도 지난번. 꿈속에서 보았을 때 보다 더 들어 보였다. 데이몬의 아버지는 몸이 야위어 있었고 얼굴에는 비웃는 듯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데이몬은 파티 석상에서 자기 아버지를 발견하는 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버지는 지금 감옥에 있어야 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데이몬은 자기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감옥에 투옥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서 출옥하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물어 보았다. "어떻게 나오시게 됐습니까?" "어제 120명이 사면되었는데, 그 중에 나도 포함됐다." 데이몬의 아버지는 말을 마친 후, 불쾌한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서는 실라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 아직도 나를 남편으로 생각하고 있소?" ''물론이에요. 저는 아직까지 당신의 아내인 걸요." ''근데 왜 이 따위 더러운 음식을 먹고 있는 거야?" 데이몬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면서 실라의 접시를 신경질적으로 잡아챘다. 그리고 나서는 음식 대부분을 바닥에 쏟아 버렸다. 꿈은 아마도 계속 되었겠지만, 데이몬은 여기까지 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시끄러운 식당에 혼자 앉아서 어지러운 머리 속을 정리하며 데이몬은 무엇 때문에 그런 꿈을 꾸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데이몬의 아버지는 결코 죄를 지은 적이 없었으며 언제나 아들을 사랑했고, 데이몬이 실라를 만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또한 자기 아들의 여자 친구들 중에서 그 누구에게도 싫은 인상을 주지 않을 정도로 세련되고 품위있는 사람이었다. 죽고 난 다음, 육신이 부패 됨에 따라 영혼마저 계속해서 부패 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아니면 바로 로저 데이몬 자기 자신이 잠을 자는 동안, 잠재 의식 속에서 자기 아버지의 이미지를 다정 다감하고 온화한 사람으로부터 불만스럽고 퉁명스러운 사람으로 변형시켜 버림으로써 항상 미소짓고 다정했인 그 혼백을 뿌리치려고 했던 것일까? 그리고 120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데이몬은 테이블 위에 팔 꿈치를 올린 채 눈을 감고 두 손으로 다시 눈을 가리고난 뒤, 식당의 다른 형상들을 지워 버리려고 했다. 한동안 깊은 명상에 잠겨 있던 데이은 식당 여자 종업원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다른 걸 더 시키시겠어요, 선생님?" "아니오, 그만 됐소이다." 데이몬이 손을 저으면서 이렇개 말했다. "계산서를 갖다 줘요." 데이몬은 계산을 하고 나서 지폐 한 장을 동전으로 바꿔 달라고 했다. 전화를 걸어야 할 데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무실에서는 전화를 걸고 싶지가 않았다. 슐터 경위에게 건화를 할 생각이었는데, 그 통화 내용을 올리버가 듣게 하고 싫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이몬은 팁을 건네주고나서 전화를 걸기 위해 식당 밖으로 나왔다. 데이몬은 그날 아침 식사 전에 실라와 함께 잘로프스키의 목소리를 들은 이후, 슐터 경위와 통화를 하려고 매일 전화를 걸었지만 그때마다 수사과 강력계의 형사가 대신 전화를 받았었다. ''슐터 경위님은 지금 안계십니다만, 무슨 일로 그러시나요?" 강력계 형사는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그럼 언제쯤 돌아오실지 알 수 있을까요?" "글쎄요,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성함을 가르쳐 주시면 나중에라도 제가 경위님께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아요. 제가 나중에 다시 전화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슐터 경위에게 전화를 걸 때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데이몬은 근처에 있는 한 바아로 들어갔다. 위스키를 한 잔 시켜서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려 놓은 후, 공중 전화 박스가 있는 한쪽 구석으로 걸어 갔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 전화를 걸자마자 강력계의 형사가 즉시 슐터 경위를 바꿔 주었던 것이다. "슐터 경위입니다." 낮익은 슐터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 경위님." 데이몬은 반색을 표명하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2, 3일 전에도 전화를 드렸습니다만..." ''사건이 하나 터져서 잠시 출장을 다녀왔읍니다. 뭐 새로운 일이라도 생기셨나요?" 데이몬은 그간의 사정을 슐터 경위에게 설명해 주었다. "으흠, 삼일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그 이후로는 아무 일도 없었나요?" "없어요. 단 한 마디도 없었읍니다." "그렇다면 그놈이 장난치는 게 싫증이 났는지도 모르겠군요." 슐터 경위는 가볍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지금까지 선생님을 그만큼 괴롭혔으면 됐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아마 지금쯤은 다른 사람한데 거짓 협박 진화를 걸고 있을지도 모르죠, 제가 생각하기로는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만." 데이몬은 슐터 경위가 이번 사건에 지겨워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상태로선 제가 도와 드릴 수 있는 건 더 이상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지역 경찰관구에 가셔서 협박 전화가 자꾸 걸려온다고 한 번 신고를 해보세요. 큰 도움이 될지는 의문입니다마는, 혹시 모르니까 신고를 접수시켜 놓으시기 바랍니다. 뉴욕에서는 그런 전화가 하루에도 수천 통이 넘게 걸려오니... 리스트는 전부 작성하셨나요?" "지금 작성하고 있는 중입니다." 숙제를 하지 않고 학교에 갔다가 수업 시간에 지적을 당한 국민 학생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데이몬은 슐터 경위의 질문에 대답했다. ''새로운 일이 발생하면, 그때 다시 전화를 하세요." 슐터 경위는 전화를 끊으려고 하다가 다시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급히 말을 이어 나갔다. "아 참, 그런데 말씀이죠. 그 맥베인이라는 사람을 조사해 봤습니다 마는, 의심할 만한 점이 하나도 없었읍니다. 이웃사람들 말에 의하면 맥베인은 근 일 년 동안 외출을 한 적이 없었답니다. 그리고 집 안에는 스데이크를 자를 만한 칼 한자루 없었구요." ''고맙습니다. 경위님." 데이몬이 감사의 말을 했지만, 그때는 이미 슐터 경위가 전화를 끊은 다음이었다. 데이몬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위스키를 반 잔 정도 마신 다음, 계산을 하고 바탠더에게 팁을 푸짐하게 집어 줬다. '바텐더가 갑자기 적으로 돌변할지도 모르쟎아...' 데이몬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술값을 계산하기는 했지만, 아직 사무실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데이몬은 지난 며칠 동안 심히 불쾌했었다. 미스 월튼에게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했고, 자기 책상과 올리버 가브리엘슨의 책상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침묵의 벽을 쌓았으며, 자기가 싫어 한다는 것을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낯선 사람의 전화를 연결시켰다고 미스 월튼을 심하게 꾸짖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는 앞으로 실라와 슐터에게 걸려오는 전화만 받을 생각이니까 차질없이 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사무실 분위기는 모든 것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었다. 올리버와 미스 월튼은 조용 조용 얘기를 나누었다. 데이몬이 밖에 나갔다가 다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면, 착 가라앉은 분위기가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것 같았으며, 올리버와 미스 월튼은 아예 입을 꽉 다물어 버렸다. 자리에 앉아서 남은 위스키를 바라보는 데이몬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했다. 공연히 자신의 일 때문에 올리버와 미스 월튼까지 침울하게 만들어 버린 자기 자신이 부끄러웠다. 위스키가 아직 반 정도 남아 있었지만 마실 생각은 없었다. 불현듯 데이몬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미스 월튼과 올리버에게 줄 선물을 사서 화해 수단으로 사용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선물 선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앞으로는 좀 더 친구답게 처신하겠다는 약속의 의미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신뢰하는 사람들을 기쁘게 해 줄 선물을 고르면서 쇼핑을 한다는 것은 자기 동정을 위한 훌륭한 처방약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실라에게도 선물을 하나 사주어야 될 것 같았다. 데이몬은 거리로 나왔다. 거리는 아까 바아로 들어가기 전보다 훨씬 더 심해진 것 같았다. 데이몬은 토요일 밤에 전화를 받은 이후로 그 어느 때보다도 기분이 좋아진 상태였다. 먼저, 미스 월튼의 선물을 고를 생각이었다. 불쌍한 여인, 미스 월튼은 몸집이 너무 비대해서 매력이라고는 찾아 보기가 힘들었고, 데이몬은 지금까지 미스 월튼의 몸에 달린 보석을 본 것은 기껏해야 언제나 목에 걸고 다니는 조그마한 황금 십자가가 고작이었다. 데이몬은 삭스 백화점에 미스 월튼을 기쁘게 해줄 물건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건을 제대로 고르기 위해서는 우선 친절하고 동정적인 여자 판매원을 만나야 될 것 같았다. 데이몬은 백화점 쪽으로 걸어가면서 손가락 마디를 뚝하고 꺾었다. 어떤 선물을 사야 될 것인지 대충 감이 잡혔다. 미스 월튼은 사무실에서 항상 오돌오돌 떨면서 지냈다. 데이몬과 올리버는 신선한 공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일을 할 때면 언제나 창문을 활짝 열어 두고서 얼어 죽지 않을 만큼 사무실 공기를 차게 해 두었다. 그러나 미스 월튼은 찬 공기가 결코 달갑지 않은 것 같았다. 미스 월튼은 올리버와 데이몬의 뉴욕 날씨에 대한 별난 취향을 심히 못마땅해 하면서(그러나 불평을 겉으로 드러낸 적은 거의 없었다), 항상 두터운 스웨터를 입고 일했다. 미스 월튼은 또한 에어콘이 가동될 때면 여름에도 그 스웨터를 겉옷으로 입었다. 데이몬이 기억하는 한, 그 스웨터는 미스 월튼이 직접 손으로 뜬 우중충한 적갈색 가디간(앞이 트인 털 스웨터)이었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는 미스 월튼의 단벌 방한복이었다. 데이몬의 사무실에서 일을 하게 되는 동안, 미스 월튼은 몸집이 놀라울 정도로 비대해졌기 때문에 자신의 큰 몸집에 맞게 새로운 스웨터를 계속 뜨기는 뜬 것 같은데, 어찌된 일인지 스타일이나 색깥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마치 처음의 스웨터가 조금 더 커진 것 같았다. 데이몬은 미스 월튼에게 가디간 스웨터를 선물하기로 결심했다. 미스 월튼이 가디간 스웨터를 좋아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색깔은 좀 더 밝은 것으로 고를 생각이었다. 데이몬은 만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늙은이의 머리가 이제서야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잘로프스키 문제와는 별도로 데이몬이 어떤 결정을 내린 것은 10일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백화점의 여성 코너에는 비교적 사람이 많은 편이었지만, 모두들 조용하게 쇼핑을 했다. 점심 시간에 식당에서 본 여자들의 모습과는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데이몬은 여성 의류 전문코너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늘씬하게 생긴 젊은 흑인 여자가 데이몬을 반겨주었다. "어떤 사이즈를 원하시나요?" 데이몬이 찾고 있는 스웨터에 관해서 대충 설명을 듣고 난 여자 판매원이 물었다. 순간, 데이몬은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데이몬은 실라가 입은 코트의 사이즈에 관해서는 알고 있었다. 실라는 몸집이 큰 편이었는데 47사이즈의 코트를 입었다. 그러나 미스 월튼의 경우에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비록 키는 작았지만 최소한 실라보다 두 배나 큰 사이즈의 옷을 입어야만 될 것 같았다. 데이몬은 여성 의류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었지만, 사이즈 84의 옷을 달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글쎄요..." 데이몬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모르겠는데.." 데이몬은 미스 월튼의 체구를 설명하기 위해서 손을 가슴으로 가져갔다. "아마 몸집이 이 정도는 될 거요. 그러니까 큰 여자 둘을 합쳐 놓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여자 판매원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데이몬도 덩달아서 오래간만애 환하게 웃었다. 물건을 사고 판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었다. 피부 색깔을 초월헤서 같은 인간끼리의 거래였던 것이다. "죄송합니다만, 여기는 그렇게 큰 스웨터가 없어요. 남성 코너로 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고맙소." 데이몬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백화점 점원을 고용한 사람은 그 누구든지 간에 박수갈채를 받아야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데이몬은 남자가 입기에도 큰 옅은청색 스웨터를 하나 골랐다. 너무 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맞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가지고 오면 바꾸어 주겠다고 판매원이 보증했기 때문에 그 스웨터를 사기로 했다. 데이몬은 값이 너무 비싸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지금은 돈 따위에 대해서 신경 쓸 기분이 아니었다. 게다가 삭스 백화점의 크레디트 카드로 지불했으니까 지금 당장 현금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최소한 월 말까지는 속이 쓰리지 않아도 좋았던 것이다. 남성 코너를 둘러 보는 동안, 데이몬은 올리버에게 줄 선물도 찾아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몬은 실라가 크리스마스 때 올리버에게 스키 스웨터를 사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올리버의 사이즈는 대충 알고 있었다. 데이몬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남성 코너를 둘러 보면서 쇼펑을 하는 여유를 만끽했다. 여자들이 쇼핑을 가기 위해 안달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서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데이몬은 버튼이 달린 파반찌, 플한빌 블레이저를 한 벌 골라서 선물 포장을 해 달라고 말했다. 올리버에게는 이 선물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선생님 옷도 한 벌 장만하실 의양은 없으신가요?" 판매원이 포장을 하면서 년지시 물었다. 데이몬은 잠시 망설이다가, 사지 못할 이유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오후에는 모두들 기가막힌 아이디어를 내놓는 것 같았다. ''그래, 어떤 옷이 좋겠소?" "저희 백화점에서는 이번에 골댄 자캣 코너를 신설했습니다. 이번 주가 전시 기간이죠. 골댄 자캣은 평생 동안 입어도 끄덕없답니다. 시골 생활에 아주 적합한 옷이에요." ''좋아요. 어더 한번 보도록 합시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후에는 시골에서 지낼 예정인데." 은퇴를 한 후, 코네티컷의 시골에서 생활하기로 마음 먹었던 지금까지의 생각이 갑자기 현실로 바뀌어 버린 것 같았다. '노후 대책'은 훌륭한 생각이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선생님.'' 판매원은 자켓 코너로 데이몬을 데리고 갔다. "사이즈가 얼마나 되시나요? 제가 보기에는 한 46정도 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겠소."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그가 말했다. 오늘 오후는 점점 더 유쾌해지고 있었다. ''아마 50 정도는 될 거요." 판매원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곧 다른 자캣을 집어 들었다. "그럼 이 자캣을 한 번 입어 보세요, 선생님." 데이몬의 몸에 잘 들어 맞았다. "보기와는 달리 몸집이 상당히 크신 편이로군요." 판매원이 말했다. "슬픈 현실이지.. 이 옷을 좀 배달해 줄 수 있겠소?" 데이몬이 말하면서 집 주소를 적어 판매원에게 건네주었다. "아 참, 배달은 아침에 해줘요. 그때 파출부 아줌마가 집에 있을 테니까 말이오. 내가 얘기를 해두겠소." 데이몬은 지갑에서 다시 한번 크레디트 카드를 꺼냈다. 자캣은 올리버와 미스 월튼의 옷값을 합친 것보다도 비쌌으나, 지난 6년 동안 새옷을 한 벌도 사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수롭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플레이션이 원흉이었다. 인폴레이션이. 문득 지갑을 유심히 바라본 순간, 낡고 쭈글쭈글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죽 제품을 파는 곳은 어디에 있소?" "아랫 층에 있읍니다." 가벼운 콧노래를 부르면서 데이몬은 아랫 층 가죽 제품 코너로 내리가서 돼지가죽 지갑을 한 개 샀다. 역시 인플래이션 탓인지 가죽 제품의 값도 예전에 비해서 놀라울 정도로 비쌌다. 그러나 데이몬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선물 포장을 해드릴까요?" 하고 판매원이 물어왔다. "아니오, 그럴 필요었어요. 이 지갑은 내가 쓸것이니까. 그냥 주머니에 넣고 가면 되요, 신경쓰지 마시구료." 데이몬은 지갑들이 전시되어 있는 유리 위에 지금까지 써온 지갑을 올려 놓고 안에 들은 것을 모두 다 꺼내 놓았다. 크레디트 카드, 운전 면허증, 사회보장 카드, 지폐 몇 장을 비릇해서 데이몬이 미국의 시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증명서가 진열관 위에 쭉 펼쳐졌다. 데이몬은 그것들을 모두 새로운 지갑 속에 조심스럽게 챙겨 넣은 다음, 지갑을 안쪽 호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데이몬이 등을 돌리고 막 자리를 뜨려고 할 순간, 판매원이 넌지시 물어보았다. ''저, 선생님.....이 낡은 지갑은 어떻게 하죠?" 판매원은 쭈글쭈귤하고 낡은 지갑을 들어 보였다. "그냥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시구료.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으니까." 데이몬이 약간 거만한 투로 이렇게 말했다. 문둑 실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실라는 언제든지 가사에 관한 결정을 내릴 때면 두 사람의 합의를 해야 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숟가락 하나를 없에 버리더라도 서로 의견 교환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예외는 있는 법, 낡은 지갑을 없에 버렸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모피 제품 코너는 어디 있소?" 판매원의 설명을 듣고 난 다음, 데이몬은 미스 월튼과 올리버에게 줄 선물 꾸러미를 들고서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다. 로저 데이몬, 세계분쟁을 종식시킬 평화의 사도였으며 삭스 백화점에 기쁨을 안겨다 주는 신의 메신저였다. 모피 제품 코너에서 데이몬을 반겨준 여자 판매원은 머리를 보기 좋개 묶은 신선한 분위기의 여자였다. 그녀는 지금은 봄 시즌을 겨냥한 판매 활동을 벌이고 있기 때문에 제품이 거의 다 떨어 졌다고 사과를 하고 난 다음, 괜찮다면 남은 제품을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계절은 데이몬에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실라는 앞으로도 겨울을 몇 차례나 더 넘겨야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데이몬은 일요 판 타임즈 지에서 스포츠 용 모피 제품에 대한 광고를 본 적이 있었다. 실라도 어느 정도스포츠 용품의 분위기가 풍기는 것은 싫어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사육한 밍크의 털로 만든 제품이에요." 곱상하게 생긴 여자 판매원이 데이몬에게 코트를 한 벌 보여주면서 말했다. 밸트와 어깨 목도리가 달린, 무릎까지 오는 밍크 코트였다. 데이몬은 이런 코트를 입고 할 수 있는 스포츠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물어 보지는 않았다. 또한 목장에서 밍크가 어떤 운동을 주로 했는지도 물어 보지 않았다. 밍크는 결코 위험한 동물이 아니었다. 데이몬은 곱상하게 생진 여자 판매원이 실라와 거의 비슷한 몸매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코트를 한 번 입어 보시겠소? 옷 맵시를 살펴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데이몬은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 집 사람하고 거의 비슷한 체격인 것 같아요. 신장도 그렇고... 게다가 몸매도 거의 비슷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여자 판매원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한 마더 덧붙였다. "물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도 똑같구요." 데이몬은 실라의 머리 색깔이 밍크 코트와 더욱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으려면, 이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여자 판매원은 밍크 코트를 걸친 다음, 패션 모델처럼 한 바퀴 빙 돌아 보았다. 어깨 목도리를 귀 있는 데까지 올리고는 양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나비 날개처럼 앞을 펼쳐 보이기도 했다. ''그걸 사도록 하겠소." 데이몬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여자 판매원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한번 갸우뚱하면서 데이몬을 쳐다 보았다. "다른 코트는 보시지도 않구요? 그리고 가격도 물어 보지 않으시고, 이 코트를 사시겠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소." 데이몬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시간이 별로 없어서..." "알겠읍니다. 금방 포장해 드릴께요.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여자 판매원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오후에는 입씨름하고 싶지가 않았다. 데이몬은 마침내 쾌활한 미국인의 기질을 되찾았고 탐욕스러운 소비자가 되어 있었다. 데이몬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이것도 사고, 저것도사고... '까짓 것 골치 아픈 일 들 일랑 모조리 잊어 버리는 거야.' 데이몬은 전형적인 미국인이 늘 그러하듯이, 가격을 물어 보지도 않은채 크레디트 카드를 제시하고나서 사인을 한 다음, 내일 아침 9시에서 12시 사이에 배달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데이몬은 백화점 밖으로 걸어 나오면서 사무실로 가서 미스 월튼과 올리버에게 선물을 건네줄까 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으나 그만두기로 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고, 탐탁치 않게만 여겨왔던 돈 쓰는 재미가 지금의 데이몬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오후는 젊음이 넘쳐 흘렀고, 모두가 데이몬의 크래디트 카드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데이몬은 '탐욕의 계절'이라는 말을 떠올리면서 경괘한 발걸음으로 걸어다녔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기쁨 ! 모든 것이 살아서 숨쉬고 있었다. 데이몬은 큰 소리로 낄낄거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가끔 데이몬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으나, 그는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은 4월 초순. 자기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재간이 없는 문제들 때문에, 데이몬은 계절을 조금 앞당겨서 살고 있을 뿐이었다. 자, 이젠 어디로 간담? 이번에는 또 무엇을 살까? 잠깐 생각을 해보았다. 가슴속에서 울려 퍼지는 경패한 맬로디가 데이몬을 대신해서 결정을 내려주었다. 데이몬은 방향을 바꾸어 매디슨 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매디슨 가 한쪽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큰 음악가게, 한동안 음악으로 황량해진 마음을 달래다가 카탈로그를 살펴 보았다. 얼마 동안이나 가게에서 죽치고 있었는지 알 길은 없었지만, 데이몬이 원하는 래코드 이름을 들먹거릴 때마다 점원은 점점 더 붙임성 있게 시중을 들어 주었다. 의지를 가진 미국인. 음악의 귀신 베토벤, 격렬한 건반 위의 마술사 쇼팽, 러시아를 지독하게도 혐오하는폴란드인 모짜르트, 막힘 없는 흐름 리스트, 어둠에 쌓인 수사학적인 멜로디의 창조자 브라암스, 중세 유럽의 심오하고도 거창한 숨결 리처드 스트라우스, 잃어버린 비 엔나의 세계 포울킨크, 경쾌하면서도 가벼운 멜로디의 대명사인 동시에 항상 자기 작품을 천대시했던 인물 엘가, 아이브즈, 20세기의 친재 거시원, 뉴욕의 우울한 거리를 노래한 작곡가 코플랜드, 아팔라치 춤곡, 서구식 리듬, 멕시코의 열광적인 마야 리듬 쇼스다코비치, 스트라빈스키, 이들이 러시아의 영혼일까? 래닌이나 톨스토이에게 물어 볼 문제.... 데이몬이 원하는 레코드의 이름은 갈수록 늘어만 갔고, 점원은 더욱 더 희색이 만연해졌다. 위대한 독주가나 독창자의 음반도 몇 장 정도는 갖추어야 될 필요가 있다. 아더 루빈슈타인을 비롯해서 캐이살츠, 스턴, 슈나벨 그리고 플라맹고의 세고비아, 호로비츠는 물론 캐이살츠에 필적할 만한 로스트로비치...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오페라를 빼놓을 수는 없는 문제. 베르디의 춘희부터 시작해서... 가만, 생각나는 오패라가 별로 없구만. 나중에 우리 집사람과 함께 들러서 다시 사도록 하지. 바그너는 별로 마음에 안 드니까 빼줄 수 있겠나, 젊은이 ? 아참, 번슈타인, 카라안, 토스카니니 같은 훌륭한 지휘자를 그냥 지나칠 뻔했군. 그 사람들 음반도 함깨 넣어 주게나. 자네는 요즘 젊은이들 답지 않게 매우 감각이 예민한 것 같구만. 자네라면 훌륭한 음반을 추천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하루에 이 정도 음반을 샀으면 충분한 것 같기도 한데, 거실에 클래식 음안만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으면 좀 고리타분하게 보이겠지 ? 어디, 최근에 나온 음반을 몇 장 보여 주겠나? 데이몬은 최신 음악도 몇 곡 들어 보았다. 가만, 기계가 구식이면 이런 훌룽한 음악들의 진가가 제대로 발휘될 수 없겠지 ? 새로 나온 음향기기를 한 번 보여 주게나. 으흠, 이건 일본에서 나온 오디오라구 ? 역시 오디오는 일본에서 나온 게 최고야. 데이몬은 마치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직접 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디오를 통해서 흘러 나오는 소리는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데이몬은 코네티컷의 시골 집에서 골덴 자켓을 입고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서 음악을 듣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해는 유리창에 걸려 마지막 찬란한 햇살을 공간 가득히 채우고, 웅장하면서도 감미로운 맬로디가 허공을 떠다니는 오후 한때의 시골 풍경.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데이몬은 즉석에서 오디오를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데이몬이 구업한 오디오는 결코 값이 싼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싼 편도 아니었다. 데이몬은 수표를 점원에게 끊어 주었다. 그까짓 숫자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데이몬은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내일 아침까지 배달을 해 달라고 부탁하고 나서, 극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왔다. 음악가게 밖으로 나온 데이몬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해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고, 시간은 벌써 6시가 지난 늦은 시각이었다. 뉴욕은 인파가 끊이지 않는 수백 개의 그랜드 캐년을 합쳐 놓은 것 같았다. 죽어가는 별, 대양이 뉴저지의 메도우랜츠로 기울어질 무렵, 큰 상점은 이미 문을 닫고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년에 싫증나도록 듣고 싶은 음악을 고르는 동안, 데이몬은 코네티컷에서 읽을 만한 책을 몇 권 구입하는 게 좋겠다고 느꼈다. 말년을 의미있게 보내려면 음악만으로는 부족했다. 지금까지 생활에 좇겨 읽을 수 없었던 좋은 책들도 준비해 놓아야만 될 것 같았다. 물론, 나중에 오늘의 일을 후회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기분대로라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먼 홋날의 일을 걱정하기보다는 지금 당장의 기분에 충실하는 것이 더욱 의미있는 것 같았다. 다행히도 밤새도록 문을 열어 두는 큰 서점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데이몬이 뉴욕에 처음 왔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뉴욕은 독서광들의 도시인 것 같았다. 어느 곳을 가든지 서점이 있었다.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서점 문을 열고 들어가서 찾고 있는 책을 말하면, 안경 낀 늙은 점원이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을 한 뒤 10분 정도쯤 지나서 낡을 대로 낡은 책을 들고 나오곤 했었다. 그 중에는 희귀한 책도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가버리고, 한낱 향수로 변해 버렸다. 뒷 강물이 앞 강물을 밀어내는 법, 데이몬은 잠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뒤돌아 볼 필요는 없다. 앞만 보고, 앞만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각 세대는 나름대로의 요구사항이 있기 마런이다. 작년의 베스트셀러가 이미 휴지로 변해 버린 지 오래라고 침통해 할 필요도 없다. 흐름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죽은 스코르 피츠제랄드의 책에 대해서 큰 애착을 갖는다고 해서, 시대의 흐름을 바꿔 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간혹 보물을 찾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데이몬은 5번가를 따라 걸어가면서 마음속으로 구입해야 될 책을 생각해 보았다. 구입해야 될 책은 엄청나게 많았다. 건널목을 건너기 전에, 신호등에 걸려 잠시 서 있는 동안 데이몬은 오늘 오후에 자신이 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되새겨 보았다. 데이몬은 자기 주변에 물건의 벽을 쌓고 있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물건의 벽을 한층 한층 쌓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몇 해 동안 추운 겨울의 찬바람에서 실라를 지켜줄 밍크 코트, 따뜻한 분위기에서 마음놓고 일할 수 있도록 해줄 미스 월튼의 스웨터, 롱 아일랜드에서 지내는 동안 올리버의 품위를 높여 줄 블래이저, 코네티컷의 시골 생활에서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을 골덴 자캣을 비릇해서 몇 년을 두고 들어도 다 못 들을 만큼 방대한 분량의 레코드판과 탁월한 오디오... 게다가, 자신의 정신세계를 살찌워 줄 책까지 구비하게 되면 수십 년 동안 조용한 오후 한때와 저녁을 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데이몬은 지금 잘로프스키라는 괴 인믈에 의해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으며, 마치 자신의 미래를 4월의 오후 한때 몇 시간에 용축시켜서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데이몬은 잘로프스키가 자신의 돈을 움켜 쥐려고 협박하고 있지만, 오늘 하루 쓴 돈을 빼고 나면 기껏해야 몇 푼 정도밖에 건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미소를 짓기도 했다. 서점을 향해서 걸어가는 동안, 데이몬은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가볍게 느껴졌다. 데이몬은 비록 집에 있는 델레비전이 구식인데다가 화면이 찌그러드는 경우가 많았고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텔레비전을 새로 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텔레비전은 자신의 미래에서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데이몬은 코네티컷으로 이사갈 때, 지금 가지고 있는 텔레비전을 적십자에 기증할 생각이었다. 데이몬은 서점에 들어간 후, 제일 먼저 올리버 가브리엘슨이 블레이저를 입고 파티에 참가하지 않을 때 틈틈이 읽으라고 예이츠의 시집을 한 권도 빼놓지 않고 전부 구입했다. 굳이 예이츠를 선택한 것은 모리스 피츠제랄드의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데이몬은 미스 월튼에게 선물할 책에 대해서는 언뜻 감이 잡히는 게 없어서 잠시 머뭇거렸다. 털 스웨터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데이몬은 미스 월튼에게 선사할 책으로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을 골랐다. 황량한 뉴욕의 밤을 홀로 보내기에는 디킨슨의 시집이 가장 적격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더킨슨의 시는 흔들리는 영혼을 불잡아 줄 힘이 있는 것 같았다. 데이몬은 자기가 읽을 책으로는 제일 먼저 옥스포드 영어 사전 두 권을 주문했다. 모든 것이 변화하는 격변의 시기에서, 그나마 자신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으리라고 생각되는 것은 영어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데이몬은 굵은 글씨로 펀집된 킹 제임즈 성경을 한권 주문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성경책은 낡고 제본이 엉망이었을 뿐더러 색깔이 누렇게 퇴색되어 있었다. 게다가 활자가 너무 작아서 갈수록 보기가 힘들어져 갔다. 그리고 나서는 생각나는 대로 책을주문했다. 돈키호테, 랄프 월도 에머슨의 수필집, 밀턴의 실락원, 니콜라스 니클바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오테거의 대중의 혁명을 비롯해서 프리맨의 두터운 로버트 리 전기와 앙드레 말로의 작품을 전부 주문하고 나서 휴고와 림바우드의 작품 집을 주문했다. 프랑스어로 된 책도 몇 권 주문했다. 대학 시절을 회상하면서 새로운 언어와 접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해변의 기후가 참아내기 힘들어 실라와 함께 겨울 여행을 뗘나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 그 때를 대비해서 외국 풍물과 친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바스웰의 런던 일기도 그런 의미에서 구입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휴고와 림바우드의 책을 제외하고는, 도서관에서 빌어 본 적이 있거나 아니면 꼭 돌려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친구들이 빌려 갔다가 영영 돌려주지 않은 책을 주문했다. 과거의 유산을 수집해야 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옆에서 기다리고 서 있는 점원에게 데이몬이 건네준 리스트에는 마침내 백 권 이상의 책 제목이 적히게 되었다. 그리이스 희곡에서 솔 벨로우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책 제목은 모두 적어 놓은 것 같았다. 그래도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내일 다시 와서 책을 주문하도록 하지, 데이몬은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생각나는대로 책을 몇 권 더 주문했다. 기왕에 내키기 시작한 기분이라면 마음껏 내보고 싶었다. 고마운 제네비브 돌저 부인. 돌저 부인의 비가가 히트 되는 바람에 오늘 오후의 이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하늘이여 돌저 부인이 구운 파이가 몽땅 못 먹게 되도록 굽어 살펴주소서. 잘로프스키 녀석이 무어라고 협박해 오든지 간에 내가 무일푼이 되어 버리면 그만이쟎아? 돈이 없다는데 어쩔 도리 있을라구...... 잠시 후면 자기 책이 될 리스트에 적힌 책 제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데이몬은 전화 자동 응답 장치를 자신이 직접 켜 보고 전화도 직접 받고, 다음번에 전화가 걸려오면 잘로프스키와 직접 만나자고 냉정한 목소리로 대답하리라고 결심했다. 그까짓, 장소나 시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이번에 다시 한번 전화가 걸려오면, 용감하게 나가서 직접 만나볼 생각이었다. 오늘 오후에 자신을 보호해 줄 부적을 샀으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았다. 데이몬은 그것이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고 거기에 따라서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데이몬은 올리버와 미스 월튼에게 줄 책들은 따로 포장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머지 책들은 물건을 보관해 두는 지하실에 잠시 쌓아 둘 생각이었다. 코네티컷에 가기 전까지는 지하실에 보관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공연히 거실 같은 곳에 쌓아 두면 실라가 암담한 표정을 지으면서 푸념을 늘어 놓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책들을 생각하면서 서점 밖으로 나와서 집으로 가려고 방향을 바꾸는 순간, 데이몬은 지금까지 오후 한 나절을 영혼을 위해서 보냈을 뿐, 육신은 무시해 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온갖 주류가 골고루 구비되어 있는 매디슨 가의 한 주류 판매점이 떠올랐다. 그곳은 뉴욕에서 가장 다양한 주류를 갖추어 놓고 있었기 때문에 데이몬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했다. 데이몬은 판매점이 문을 닫기 전에 도착하려고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주류 판매점 진열대에는 온갖 술 들이 골고루 갖추어저 있었다. 데이몬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술 이름을 살펴 보았다. 꼬낙, 위스키, 진, 보드카, 삼페인... 술 이름도 많고 종류도 많았다. 이보게 젊은이, 내 주문을 받게나. 이 술 한 병하고 저 술도 한 병 주게. 그리고 백 포도주는 세 병으로 하지. 최소한 8년 정도가 지나야만 지금 주문한 술들을 마실 수가 있을 게야. 이곳 뉴욕에 있는 내 아파트에는 술들을 보관해 둘 만한 지하실이 없어. 그러니 내가 찾으러 올 때까지 이곳 창고에서 보관해 주면 좋겠네. 조만간에 코네디컷으로 이사갈 생각인데, 그곳에는 아주 훌륭한 지하실이 있지. 으흠, 그렇게 먼 곳으로 술읕 운반하려면 힘들 것 같다구? 걱정할 필요 없네. 때가 되면 말이야, 나는 큰 트럭으로 무지무지하게 많은 책과 함께 술을 운반할 생각이거든. 문제될 건 없다고 보네. 그리고 냉장고에 샴패인이 있는 것 같은데, 덤으로 두 병만 싸주게나. 그건 지금 가지고 갈 생각이니까. 데이몬은 2,673 달러 40센트 수표를 거리낌없이 끊어주고 나서 주류 판매점 밖으로 나왔다. 올리버와 미스 월튼에게 줄 선물 꾸러미에 샴패인 두 병까지 첨가시키니, 제법 묵직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이미 사무실 문을 닫았을 태니까 올리버와 미스 월튼에게는 내일 아침에 선물을 건네줄 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짐을 이렇게 많이 든 상태로 걸어 가노라면 몸이 금방 지쳐 버릴 것 같아서 데이몬은 택시를 탔다. 집에 도착해서 마개를 딸 때까지 삼페인이 차가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데이몬은 실라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지만 아무런 웅답도 없었다. 현관 불이 켜져 있었기 때문에 데이몬은 짐을 내려놓고 주위를 살펴 보았다. 테이블 위에는 실라가 적어 놓은 쪽지가 놓여 있었다. 데이몬은 쪽지를 집어 들고 천친히 잃어 내려갔다. <로저, 어머니가 지금 뇌일혈로 위독한 상태라는 전보를 받았어요. 지금 어머니가 입원해 계신 버링톤의 병원으로 떠나는 길이에요. 사무실로 전화를 했지만, 4시까지 당신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비행기 시간 때문에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어요. 제가 돌아을 때까지 올리버는 당신이 자기 집에 와서 계셨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게 불펀하다면, 올리버가 아파트에 와시 당신과 함께 지내겠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공연히 고집부리지 마시구요. 그리고 병원으로는 오지 않으셔도 돼요. 건강했을 때도 당신을 보지 않으려고 했던 어머니가, 병석에 누운 자리에서 당신을 반겨줄 리가 만무하니까요. 게다가, 동생 내외까지 연락을 했으니까 병원으로 곧 달려올 거예요. 당신이 동생 내외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공연히 마주쳐서 좋은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다른 친척들도 오기로 했으니까, 병원에는 오지 말도록 하세요. 버링톤의 할리데이 인에 머무를 예정이니, 거기로 전화해 주세요.당신 소식을 기다리겠어요.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당신을 사랑해요. 실라로부터> 데이몬은 천천히 쪽지를 내려 놓았다. 오후 내내 좋기만 했던 기분이 일 순간에 확 일그러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자기가 술 취한 석유 업자처럼 돈을 흥청망청 쓰면서 돌아다니는 동안, 실라가 그토록 자기를 필요로 했는데 자기는 그곁에 없었다니,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데이몬은 장모를 좋아하지 않았고 장모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장모가 죽는다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데이몬은 사실 누구든지 죽지 않기를 희망했다. 특히 이번주에 실라가 죽음에 임박한 사람 곁에 있어야 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데이몬은 거실로 들어가서 불을 켰다. 전화 자동 응답 장치를 발견한 순간, 데이몬은 아까 한 결심이 생각났다. 데이몬은 침울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전화기를 노려 보았다. 과감하게도 전화 벨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전화 벨은 아무리 기다려도 울리지 않았다. 데이몬은 허리를 굽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데이몬은 버몬트 전화국에 전화를 걸어서 버링톤의 할리데이 인 전화번호를 물어 보았다. 자기 어머니의 회복을 기다리면서 묵을 만한 호텔치고는 할리데이 (휴일이라는 뜻)란 이름은 결코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았다. 과거에는 지명이 그럴 듯한 것이 많았다. 툼스토운(묘비라는 뜻), 죽음의 계곡, 홍하의 골짜기 등 모두들 고심을 해서 이름을 붙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언어도 점점 퇴색되어 가는 것 같았다. 전화를 받은 실라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실라는 병원에 갔다가 조금 전에 호텔로 돌아와서 숙박 계약을 마친 후 잠시 쉬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병환은 차도가 없다고 했다. "어찌 되었거나, 어머니는 왼쪽 뇌가 마비되셨기 때문에 말을 할 수가 없대요. 나를 알아 보실지도 의문이에요. 채식주의를 해서 뇌일혈을 갖게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마새요." 실라는 씁쓸하게 웃었다. "실라, 내가 정말 거기에 가지 않아도 괜찮겠소?" "괜찮아요." 실라가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올리버와 통화하셨나요." "아직 못했소. 조금 전에 돌아왔거든." "올리버에게 전화하실 거예요?" ''해 볼 생각이야." "오늘 밤 아파트에서 혼자 보내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걱정하지 말아요. 내 약속하리다.'' "로저..'' 실라가 잠시 머뭇거렸다. "왜 그러는 거요?"' "오늘 올리버와 점심을 함께 했었는데요.." 실라는 다음 말을 어떻게 이어 나가야 될지 모르겠다는 듯, 잠시 머뭇거렸다. "근데 ?" 데이몬은 실라와 올리버가 점심식사를 하면서 자기 얘기를 나누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올리버는 우연히 당신 노트를 보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실라가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당신 책상에 펼쳐져 있어서 우연히 보게 된 거래요." "그래서?" 데이몬은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올리버와 데이몬은 왔다갔다 하면서 상대방의 책상을 우연히 보게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노트의 펼쳐진 부분에서 당신이 적어 놓은... 개인적으로 원한을 샀을 만한 사람들과 직업상 원한 관계를 맺게 되었을지도 모를 사람들의 이름을 보게 되었대요. 올리버는 그 중에서 마켄돌프라는 이름외에 기억하지 못했어요. 당신이 왜 그런 이름들을 적기 시작했는지 짐작은 가지만..." "나중에 자세한 설명을 해줄 태니까 너무 마음쓰지 말아요." 데이몬은 부드러운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요, 올리버와 저도 나름대로 명단을 작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에요. 전화로 이린 말씀드리고싶지는 않지만, 혹시 어떻게 될지 몰라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의심이 갈 만한 사람들의 이름은 모두 적 어 놓은 것 같소." 전화를 늦게 한 데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면서 데이몬이 말했다. "당신이나 올리버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기에.." "지안루카를 생각해 보셨나요?" 실라가 데이몬의 말을 가로 막으면서 물어 보았다. ''그 사람 어머니가 병원에 왔길래 물어 봤더니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요. 모두들 지안루카는 죽은 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지안루카가 혹시라도 모습을 나타내게 되면 조심 하도록 하겠소."전화를 그만 끊으려고 데이몬이 말했다. "한 가지 더 있어요." 실라가 막무가내로 계속 밀고 나갔다. "올리버가 질레스피라는 남자에 대해서 말해 췄어요. 그 사람은 소문에 미쳤다고 하던데.." "질레스피는 그 이후로 모습을 나타낸 적이 한 번도 없었소." 로저 데이몬은 짜증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사실, 나는 당신이나 올리버가 생각해 넨 사람들 중에서, 또는 내가 생각해 낸 사람들 중에서는 의심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보고 있소.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인물이 그런 짓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지. 누가 알겠소, 전혀 모르는 사람이..." 데이몬은 여기서 잠시 머뭇거렸다. ''글쎄, 말로 하기가 좀 힘들구료. 좌우지간.. 영원히 찾아낼 수도 없는 그런 사람이 악의를 품고 나를 골탕 먹이려는 거라면, 우리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지 않겠소? 실라..." 데이몬은 더욱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렇쟎아도 걱정이 태산 같을 텐데, 여기에 관해서는 잠시 잊어버리도록 해요. 내 말 알겠소?" "좋아요. 오늘밤 혼자 지내지 않겠다고 다시 한번 약속해 주세요." "악속하지. 그리고" ''그리구요?" 신라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잔뜩 서려 있었다. 그리고라는 말 다음에 이어질 내용이 끔찍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같았다. "당신을 사랑하오." 하고 데이몬이 말했다. "세상에, 로저.." 실라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꼭 그렇게 저를 울리고 싶으세요? 안녕히 주무세요, 여보. 몸조심 하시구요. '' 데이몬은 수화기를 내려 놓은 다음, 눈을 감고 잠시 장모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장모는 병석에 누위 있으면서까지도 데이몬을 싫어 했었다. 지금까지 데이몬을 사위로 생각해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막상 죽게 되었다니, 데이몬은 왠지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4월은 역시 잔인한 달, 데이몬과 실라에게는 결코 달갑지 않은 4월이었다. 잘로프스키의 협박 전화에다가 신라의 어머니까지 몸져 눕개 되었으니, 이제는 세 번째의 불행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할 때였다. 두 번째 불행이 닥쳐왔는데 세 번째 불행이 닥쳐오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또한 네 번째, 다섯 번째 불행이 닥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으니. 데이몬은 눈을 뜨고, 불길한 생각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 머리를 흔들었다. 병원에 오지 못하도록 한 실라가 어찌 생각하면 고맙기도 했다. 자기 가족의 불행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한 것이 실라의 입장에서는 데이몬을 생각해서였다. 싫어하는 사람들끼리 부딪쳐 보았자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데이몬은 전쟁 직후, 뉴헤이본의 병원에서 숨을 거둔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데이몬의 손을 잡으려고 허공을 헤매던 아버지의 힘없는 손놀림, 그것으로 데이몬의 가족을 지탱해 왔던 마지막 끈은 끊어져 버렸던 것이다. 실라가 가족 방문 길에 있다면, 자신도 지금 자기 가족을 찾아가 보는 것이 좋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몬은 올리버 가브리엘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상에, 지금까지 도대체 어디에 계셨습니까?" 올리버는 데이몬의 목소리를 확인하는 즉시, 근심스러운 어조로 물어보았다. ''그냥 좀 돌아 다녔네."하고 데이몬이 말했다. "기분도 울적하고 해서 말이야." ''사모님의 어머님께서 위독하시다는 것은 알고 계시나요?" "음. 방금 전에 실라와 통화를 했네. 더 악화되지는 않았다고 하더군. 불행 중 다행이지." "저희 집으로 오시겠어요? 아니면 제가 그쪽으로 갈까요? 선생님 편한대로 하세요." "둘 다 거절하겠네." "네 ?" 올리버는 깜짝 놀라면서 애원하는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로저, 설마 오늘밤 혼자 지내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아파트에서 흔자 지내지는 않을 데니까." 데이몬이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한 2, 3일 동안 뉴욕을 떠나 있을 생각이네." "어디로 가실 건지 제가 알면 안 될까요?" ''걱정하지 말고, 사무실 운영이나 신경써서 해 주기 바라네. 다시 연락하겠네." 이렇게 말을 하고 나서 데이몬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블레이저 선물을 전해 주려면 며칠 더 있어야만 될 것 같았다. 제 15장 공동 묘지 데이몬은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포드 역 바로 옆에 있는 모텔에서 공동묘지로 곧장 걸어갔다. 공동묘지는 뉴욕, 뉴헤이븐 그리고 하트포드의 철로가 교차하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뒷 쪽은 중심가와 접해 있기도 했다. 관리는 비교적 훌륭하게 유지되고 있었지만, 상업과 운송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는 입지 조건 때문에 공동묘지는 도시의 이미지를 다소 손상시키기도 했으나 노골적으로 불평을 털어놓는 주민은 거의 없었다. 데이몬이아버지의 장례식 때 와 본 이후로, 지역 주민의 수는 상당히 늘어나 있었다. 데이몬 일가의 묘지에는 이미 묘비가 세 개나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무덤이 한 개 더 들어설 만한 공터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곳은 로저 데이몬 자신을 위한 곳이었다. 데이몬의 아버지는 생각이 깊고 가족을 사랑했던 사람이었기에 가족이 모두 한 자리에 묻히기를 원했던 것이다. 데이몬은 세 개의 무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데이비가 묻힌 무덤에는 4월의 싱싱한 풀잎들이 돋아나 있었다. 데이몬은 어머니의 장례식 때는 참석을 하지 못했었다. 당시 바다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이비의 장례식 때는 어린 나이에 충격을 받는다고 어머니, 아버지가 데이몬을 참석시키지 않았었다. 결국, 데이몬이 가족의 장례식 때 참가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뿐이었다. 공동묘지에는 그 밖의 일가 친척은 묻혀 있지 않았다. 데이몬의 아버지가 젊없을 때 오하이오에서 포드 역으로 이사를 왔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가족의 무덤을 찾아온 지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무엇 때문에 오늘 아침에 다시 찾아오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게 될 경우, 데이몬은 달리 대답할 말이 없었다. 데이몬은 오늘 아침 이곳을 찾게 된 것은 요즘에 와서 매일같이 꾸게 되는 꿈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매일 밤 아버지의 혼령이 꿈 속에 나타나게 되면, 데이몬의 나이 또래는 죽음과 영원한 휴식처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는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실라와 전화 통화를 하고 난 뒤, 어제, 밤 차를 빌어서 포드 역으로 달려오게 된 것은 거의 본능적이면서도 무의식적인 충동에서 비롯되었다. 지금, 자신이 한때 사랑했던 가족들의 무덤 앞에서 경의를 표하는 동안, 데이몬은 긴장감과 고독감이 해소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펀으로는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한 느낌은 결코 서글픈 감상이 아니었다. 남쪽에서 뉴헤이븐 쪽으로 가는 기차소리나, 근처 묘지터에서 2명의 인부가 새로운 무덤을 파면서 주고 받는 대화도 데이몬의 그러한 느낌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항상 자기 곁에 있었던 3명의 착한 사람들. 근면하고 항상 미소를 잃지 않았던 아버지, 어느 때라도 믿고 의지할 수 있었던 어머니, 제대로 피어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만 했던 데이비. 가족, 가족... 그는 뉴욕에서 자신의 유일한 혈육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이곳으로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덤이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지, 손이라도 다시 한번 만져볼 수 있다면 여한이 없을 가족들이 펀히 쉬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 보고 싶었다. 데이몬은 모짜르트의 연미곡을 듣고 난 다음날, 미사 성구를 찾아 본 적이 있었다. 기억력이 탁월했고 학교 때 배운 라틴어 실력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데이몬은 그 중 첫 번째 귀절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데이몬은 가족의 묘비를 바라보면서 그 귀절을 나지막이 암송했다. 이퀴엠 에때르남 도나 에이스, 도미네, 엣 룩스 빼르빼뚜아 루체아 에이스..(주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빚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데이몬은 연미사곡 중에서 반복되는 처음 세 줄은 생략하고 나서 마지막 두 귀절을 엄숙한 목소리로 낭송했다. "주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명했듯이 그대의 아버지와 그대의 어머니를 공경할 것이니, 이는 그대의 생이 연장될 것이요, 그대의 앞길이 순탄할 것이로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다른 사람의 손에 가족을 맡겨 두었다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데이몬은 공동묘지 밖으로 걸어 나와서 근처에 있는 꽃집으로 향했다. 데이몬은 활짝 핀 휜 백합 몇 송이를 사들고서 다시 가족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서는 세 개의 묘비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 놓았다. "하늘에 계신 영혼이여, 편히 쉬소서..." 하고 데이몬은 속으로 기도했다. "그리고 불쌍한 이 몸을 보살펴 주옵소서. 그대의 앞길이 순탄할 것이로다." 가장 경건한 자리에서도 이기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데이몬은 마지막으로 묘지 주변을 둘러 보고 나서, 공동 묘지를 떠나 시내 쪽으로 서서히 차를 몰았다. 과거의 상념에 젖어 들기 시작한 데이몬은, 어린 시절 자신이 뛰놀던 곳을 찾아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데이몬은 이미 옛 추억을 그리워하며, 가물거리는 기억을 따라 무엇인가를 정리하고 싶은 노인의 심정이 되어 있었다. '흐름에 실려 인식하지 못하고 보내 버린 지난날 들....' 데이몬은 대학에 진학하기 전 18년 동안 살아 오다가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머무른 적이 없었던 자신의 생가를 찾아가 보리라고 결심했다. 자신이 다녔던 고등학교도 둘러 볼 생각이었다. 라틴어 수업 시간, 영어 선생님이 큰 소리로 읽어 주었던 워즈워드의 주옥 같은 문장들, 처음으로 여학생과 함께 춤을 추었던 무도회, 상쾌한 10월의 오후에 학교 미식축구 팀을 응원했던 운동장, 지난날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전화 번호부를 찾아 보면, 지금까지 그곳에서 살고 있는 잊혀졌던 옛 동창들을 혹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 옛 친구들...' 이제는 살아있는, 또는 아직까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려야 할 때라고 데이몬은 생각했다. 데이몬은 모텔 쪽으로 차를 몰았다. 모텔에 도착한 다음, 아침식사를 뒤로 미루고서 데이몬은 우선 버링톤의 할리데이 인에 있는 실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실라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침울했다. "어머니는 아직까지 별 차도가 없어요. 의사들 말로는 그게 좋은 징조라고 하는데, 의사들이란 원래..." 실라는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상태로는 의사들 말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달리 방도가 없쟎아요? 의사들이 괜찮다니까, 일단은 믿고 있는 중이에요. 설사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죠 뭐, 그렇다고 해서 의사들을 탓할수도 없으니까요. 근데, 당신은 어때요? 별일 없으세요?" "응, 괜찮아." "올리버와 함께 계시나요?" "아냐, 나 혼자 있어. 어젯 밤에 포드 역으로 왔소. 지금 그 근처에 있는 한 모델에 묵고 있는 중이야. 며칠만이라도 뉴욕을 벗어나 있으면 좀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기에 와 있는 거요." "포드 역이라구요?" 실라는 거의 힐책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하필이면 왜 거기에 가셨죠? 그렇지 않아도 우울하실 텐테." ''오늘 아침은 아주 보람이 있었소. 정말이야. 이곳에 찾아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정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실라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기색을 나타냈다. "여보.... 학교 일 때문에 저는 며칠 있으면 뉴욕으로 돌아가야 해요. 지금 계신 곳에서 그대로 계시든지, 아니면 마음 내키는 곳을 둘러 보도록 하세요. 제가 돌아갈 때까지는 뉴욕으로 가시지 말구요. 제 생각 같아서는.... 부활절 휴가가 시작되니까, 그때 올드 라임으로 가서 한 10일 동안 인적없는 곳에서 휴식을 취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린 휴가 기간을 함께 보낼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어머니 병세가 악화되더라도 버팅톤과 을드 라임은 별로 떨어져 있지 않으니까 괜찮을 것 같아요. 당신 생각은 어뗘세요? 마음에 드시나요?" "글쎄.." 데이몬은 사무실 일이 밀렸다는 얘기를 꺼내려고 했으나, 실라가 말을 가로막았다.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세요. 지금 결정하실 필요는 없으니까요." 실라는 자기 주장을 계속 밀고 나갔다. "내일 아침에 다시 전화 주세요. 그리고 그 문제에 관해서는 내일 의논하도록 해요. 10시 전까지 병원에 도착하겠다고 의사와 약속을 해 놓았어요. 여보, 제밭 몸조심 하세요. 그리고 불안해하지 마시구요." 데이몬은 우선 자기가 태어나서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살았던 고향 집을 향해서 차를 몰았다. 낯익은 거리로 접어들게 됨에 따라, 데이몬은 속력을 늦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낡은 웨인슈타인 저택이 시야에 들어왔다. 앞에 잔디밭이 가지런히 손질되어 있는 다른 집들처럼, 웨인슈타인 저택도 안락한 베린다와 빅토리아 시대의 당초 무늬로 치장된, 품위 있는 구식 저택이었다. 그러나 데이몬에게는 유달리 감회가 깊은 저택이기도 했다. 데이몬과 동갑인 맨프레드 웨인슈타인은 10세 때부터 각자 다른 대학으로 진학할 때까지 데이몬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맨프레드는 그 근처에서 운동 신경이 가장 뛰어난 소년이었으며, 고등학교 시절에는 야구팀 최고의 선수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었다. 맨프레드는 얼굴이 통통한 편이었그 머리결은 다소 거칠었으며 들 창코에 불그스레한 안색을 지녔었다. 성격은 온순한 편이었다. 목소리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크고 무게가 있었는데, 시합 도중 관중들의 환호성애도 불구하고 피처를 격려하는 맨프레드의 목소리가 똑똑하게 들릴 정도였다. 맨프레드는 독서에 취미가 있어서 뒤마와 잭 런던의 작품을 주로 읽었으며 공부에도 신경을 쓰는 편이었지만, 야구 선수로서의 자질을 높이기 위해 거의 광적으로 노력했었다. 좋은 친구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데이몬은 비록 운동을 잘하지는 뭇했지만 오후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서 맨프레드의 수비 연습을 도와 주기 위해 땅 볼을 쳐주곤 했었다. 맨프레드는 데이몬이 쳐서 보내는 볼을 기진맥진해질 때가지 받아내는 연습을 했다. 두 사람은 땅거미가 질 때까지 운동장에 남아서 연습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데이몬의 친구들 중에서, 장차, 큰 리그로 진출할 사람은 맨프레드 밖에 없다고 여겨졌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데이몬은 내셔널 리그나 아메리칸 리그에 관한 신문의 스포츠 기사에서 맨프레드의 이름을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것 같았다. 데이몬은 그동안 맨프레드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맨프레드는 뉴헤이븐의 아놀드 대학에 진학했었다. 맨프레드는 그곳에서 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배우가 되어 브로드웨이를 강타해 보겠다고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음 먹어온 데이몬은, 유명한 연극 배우를 많이 배출한 카네기 대학으로 진학했다. 여름 시즌 때는, 뉴잉글랜드 대학에서 선수들을 선발하여 진행되는 케이프코드 리그에서 맨프레드는 여전히 선수로 활약한 반면 데이몬은 여름철 지방 순회 공연을 떠나는 여러 극단에서 일거리를 얻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맨프레드는 해군에 지원을 했고 데이몬은 가족의 경제사정이 이미 악화될대로 악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선을 타기로 결심했다. 데이몬이 선원 봉급으로 받는 돈이 어머니, 아버지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포드 역으로 돌아왔을 때, 데이몬은 맨프레드가 오끼나와에서 큰 부상을 입어 해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울 건해 들은 적이 있었다. 웨인슈타인 저택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차를 몰고 가는 동안, 데이몬은 절친했던 어린 시절의 친구를 시간과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그동안 잊고 지내온 것이 못내 후회스럽게 여겨졌다. 데이몬은 맨프레드가 그동안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나아가서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었으며, 우연히 거리에서 마주치게 될 경우 서로 알아볼 수 있을는지도 자신할 수 없었다. 데이몬이 과거에 웨인슈타인 저택의 사람들 중에서 관심을 가졌던 인뮬은 맨프레드 뿐만이 아니었다. 맨프레드 보다 한 살이 더 많은 엘지는 맨프레드의 누나인 동시에, 데이몬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잠자리를 같이 한 여인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이성간의 정을 맺었을 때, 엘지는 18세, 그리고 데이몬은 17세였다. 엘지는 실선한 얼굴에 금발이었으며, 눈은 파란 색이었고 맨프레드처럼 얼굴이 약간 통통한 편이었으나 그 점이 엘지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해주었다. 엘지는 부끄러움이 많고 낭만적인 소녀였으며, 약간 긴 듯한 코는 이국적인 분위기와 완고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었고 실제 나이보다 더 성숙해 보였다. 그녀는 또한 최상위권에 드는 모범 학생이었고 언제나 책을 손에서 놓는 법이 없었으며 자신의 전략 과목인 역사 시험을 치를 때면, 자기 동생인 맨프레드와 데이몬을 도와 주기도 했었다. 엘지는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에 진학하여 유렵을 여행하면서, 그동안 책에서만 읽은 에이진 코트와 황금의 벌판, 나폴레옹의 격전지를 비롯해서 헤리 4세가 스패인의 공주와 결혼을 했고 벨라스캐스(이탈리아의 화가)가 숨을 거둔 곳이기도 한 상주앙의 성당을 찾아가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데이몬에게 한 적이 있었다. 데이몬은 10세 때부터 엘지에게 홀딱 반해 있었는테, 엘지가 생전 처음으로 키스를 해주고 나중에는 자기 몸까지 허락했을 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었다. 데이몬과 마찬가지로, 엘지도 이성 경험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정사는 서투르기 짝이 없었고 오래 가지도 못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금방 깨지게 된 이유는, 부모님이 언제 돌아 오실지를 몰라서 데이몬의 방에서 두 번째 관계를 급히 갖고 난 이후로, 경험없고 부끄러움이 많았던 데이몬이 엉뚱하게도 그녀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서 임신할 경우 어떻게 하겠느냐는 멍청한 질문을 했기 때문이었다. ''임신하면 난 죽어 버릴 거야."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었다. 데이몬은 그 말에 그만 주눅이 들어 그녀와의 관계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지난 일들을 생각하면서, 데이몬은 자신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미국 전역을 강타한 변화의 물결이 풍습과 규범을 엄청나게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성 윤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록 데이몬 자신에게는 자식이 없었지만, 10대 자녀를 둔 친구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세상이 너무나도 변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데이몬은 아직 투표권도 행사하지 못할 정도로 나이가 어린 남자 아들이 부모가 집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여자 친구를 주말 같은 때 집으로 데리고 와서 함께 지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딸 아이가 열 다섯 살이 되면,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 피임 약 복용을 권고 한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었다. 데이몬은 변화의 물결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또는 나쁜 방향으로 흩러가고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러한 변화의 물결 때문에 사랑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변할지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임신했다고 해서 죽어 버리겠다는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순진한 18세 된 소녀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그녀의 말에 충격을 받은 데이몬은 그 이후로 다시는 그녀의 몸에 손대지 않았다. 그리고 데이몬보다 일 년 먼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녀가 보스톤의 어느 대학으로 진학한 이후로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맨프레드는 자신의 가장 절친한 친구와 자기 누나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에 관해서 알고 있다는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 데이몬은 지금 자기 집 만큼이나 속속들이 알고 있는 웨인슈타인 저택을 천천히 지나가면서, 그 당시 맨프레드가 알고 있었으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로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가는 뉴욕의 거리 모습과 환경에 익숙해져 있던 데이몬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고 여전히 평화스럽기만한 거리 풍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과거 1백년 전 모습이 지금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앞으로도 1백 년간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유일하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것은 데이몬이 마지막으로 이곳에 왔을 때보다 길모퉁이의 나무들이 엄청나게 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가 쪽으로 가까이 접근하게 되면서 부터, 데이몬은 나무들이 지금까지 자신의 기억에 남아 있는 크기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은 아버지 장례식 때 와서 보았던 것보다 섹깔이 약간 퇴색되어 있을 뿐,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데이몬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고향집을 물려 받았지만, 그 집을 저당 잡히고 아버지가 빌어 쓴 부채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당시 뉴욕의 연극계에서 기반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던 데이몬은 집을 세놓아도 연간 이자를 감당해내지 못할 것 같아서 집을 매각 처분해 버렸다. 다행히, 집을 팔아서 생긴 돈으로 아버지의 남은 부채를 청산할 수가 있었다. 데이몬의 아버지가 세상을 뜨기 전, 몇 년 간은 병든 노인이 버티어 나가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새월이었다. 근처 뉴헤이븐(데이몬의 아버지는 오랫동안 날마다 여기까지 통근했었다)에서 장난감 제조업을 했던 데이몬의 아버지는 쓰러져 가는 공장을 살리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결과는 부채만 늘여 놓고 말았다. 데이몬은 차를 세우고서 밖으로 나와 고향집을 바라보았다. 잔디는 손질이 잘 되어 있었고, 현관에는 유모차와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데이몬은 2년마다 아버지를 도와서 새 패인트로 집안 구석구석은 물론, 아버지 자신이 설계한 장난감들을 직접 만들었던 창고까지 다시 칠했었다. 비록 아버지가 임종 직전, 자신은 한 평생을 양철 조각만 만지작 거리다가 무의미하게 흘려 보냈다고 말했지만, 데이몬은 아버지가 창고에서 휘파람을 불며 흥겹게 장난감을 만들던 모습이 영원히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집안 내부는 정원과 외관의 경우처럼 언제나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데이몬의 어머니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부지런한 가정주부였다. 비록 일주일에 3일 동안은 뉴헤이븐의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출근해서 장부 정리와 송장 검사 그리고 편지를 발송하는 일을 했지만, 항상 집안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정돈해 놓고 생활했었다. 먼지 하나 찾아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데이몬은 책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는 자신의 지금 모습을 어머니가 보았더라면 아마 기겁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는 그토록 정리를 잘해 놓고 지내셨는데, 당신의 자식은 대학 시절부터 어지럽히는 데 천부적인 재질을 키워 왔으니.... 데이몬은 현관문을 노크하고 들어가서 인사를 하고 난 다음, 지금은 누가 살고 있는지 그리고 집안은 어떻게 변했는지 알아 보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향수는 매저키즘(자기 학대를 통해 쾌락을 얻는 정신이상)으로 너무나도 쉽게 용해될 수 있었으나 데이몬은 매저키스트가 아니었다. 데이몬이 다시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는 순간, 현관문이 열리면서 한 소년이 걸어 나왔다. 그 소년은 골덴 바지와 스웨터를 입고 있었으며, 손에는 야구 글러브를 들고 있었다. 데이몬은 그 소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6번가를 지나 가면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년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앨범에 있는 자신의 어릴 적 모습과 닮은 소년일 수도 있었다. 소년은 현관 앞에 있던 자전거에 올라 탄 후, 차를 세워두고 있는 데이몬을 이상하다는 듯이 한 번 쳐다보고 나서는 패달을 밟았다. 데이몬은 자신의 경박한 생각을 탓하면서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시간과 기억이 지금 자기를 회롱하는 것만 같았다. 데이몬은 시동을 걸고 차를 돌려서 아까 온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다시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 토마스 울프가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프도 나중에는 다시 고향에 돌아갔었다. 비록 죽은 다음이었지만. 언제든지 고향에는 다시 갈 수가 있지만, 가지 않는 것이 더욱 현명했다. 천천히 차를 몰면서, 데이몬은 자기 나이 또래의 한 남자가 웨인슈타인 저택 앞에서 꽃을 다듬고 있는 걸 발견했다. 머리는 약간 반백이 다 되어 있었고, 통통했던 두 볼에는 기름기가 흘렀지만, 데이몬은 20 야드의 거리에서도 그를 알아 볼 수 있었다. 바로 맨프레드 웨인슈타인이었다. 데이몬은 브레이크를 밟기 전에 잠시 망설였다. 그토록 오랫동안 만나 보지 못했었는데, 과연 무슨 얘기를 주고 받을 수 있을까? 어린 시절 두 소년을 함께 결속시켜 주었던 무언의 약조를 반백이 된 지금, 서로 배반해 버린 것은 아닐까? 서로 마주 대하게 되는 순간, 당황하고 부끄러워하고 실망하게 되지 않을까? 두 사람은 고등학교 졸업식 후 각자의 길로 가기 위해서 헤어 졌었다. "시간 나면 찾아 가 볼께. 연락해. 행운을 빈다." "으흠." 표면적으로는 일시적인 헤어짐 같았던 이별이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영원으로 변해 버렸다. 그 깊이조차 헤아릴 수 없는 영원한 이별로.. 데이몬은 브레이크 위에 올려 놓았던 발을 서서히 때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는 액셀레이터를 밟으려고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이게 누구야 !" 맨프레드 웨인슈타인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맨프레드는 손에 가위를 든 채, 큰 걸음으로 데이몬의 차를 향해서 걸어왔다. "로저 데이몬 !" 데이몬은 차 밖으로 걸어 나왔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다가, 얼간이처럼 이빨을 드러내 보이면서 씨익 웃었다. 그리고 나서는 악수를 했다. 웨인슈타인은 들고 있던 가위를 내려놓고서 데이몬을 힘차게 껴안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헤어지기 전까지는 서로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행동이었다. "이 친구야, 그래 어쩐 일인가?" 맨프레드가 물었다. ''자네를 만나러 왔지." "그놈의 거짓말하는 버릇은 아직도 버리지 못했구만." 맨프레드가 껄껄거리면서 말했다. 맨프레드의 목소리는 아직까지도 굵고 성량이 풍부했다.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어린 시절 친구를 반기는 맨프레드의 큰 목소리에 한 번쯤은 시선을 돌려 쳐다보고 지나 갔을 정도였다. "마침 난로 위에 커피 물을 올려 놓았네. 자, 안으로 들어가세. 허허,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자네를 다시 만날 수 있다니." 맨프레드와 데이몬은 웨인슈타인 저택의 주방에 있는, 윤이 반질반질 나는 나무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항상 파란색 앞 치마를 두르고 있었던, 키가 크고 뚱뚱했던 맨프레드의 어머니가이 테이블에서, 야구를 하고 오후 늦게 어린 맨프레드와 데이몬이 집으로 돌아오면 우유와 과자를 준비해 두었다가 꺼내주곤 했었다. 맨프레드는 난로 위에 올려져 있던 주전자에서 컵에 물을 부어 커피 두 잔을 탔다. 맨프레드는 혼자 살았다. 맨프레드가 전쟁 후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일해 왔던 의류점은 아버지가 팔아 치웠다고 했다. 데이몬은 맨프레드의 지난 얘기를 듣다가 잠시 말을 가로 막았다. "자네가 넥타이와 옷가지를 팔았다니, 믿을 수가 없구만. 나는 자네가 야구선수가 되리라고 생각했었는데." "나도 그렇게 될 줄 알았지." 맨프레드의 목소리에는 후회하는 기색이 잔뜩 서려 있었다. "브루뮬린 다저스와 레드 삭스의 스카웃 제안을 받기도 했으니까 말이야. 근데, 스카읏 교섭이 마무리되려는 순간에 그만 어리석은 짓을 하고 말았다네." "그건 자네답지 않군." ''휴우, 자내는 그렇게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동안 내가 저지른 실수를 한군데 모아 놓으면 고층 빌딩을 짓고도 남을 정도라네. 지난 다음에는 모두들 이런 푸념을 늘어 놓겠지만." "도대채 어떤 실수를 저질렀기에 그러나?" "아놀드 대학에서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 시즌 게임을 하고 있었을 때였지. 우리 팀이 이기고 있었는데 게임이 소강 상태였기 때문에 모두들 낙승을 기대하고 있었다네, 게임은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공연히 무리할 필요가 없었는데, 이 무식한 놈이 무리를 해 버리고 말았던 거야. 오른쪽으로 타구가 날아왔는데 1루수가 잡기에는 너무 먼 것 같아서 내가 잡으려고 몸을 날렸지. 그런데 공을 잡는 순간 몸의 균형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1루에 송구하기가 어렵게 됐어. 송구거리가 너무 멀었던 거지. 까짓것 내야 안타로 처리해 버린다고 해서 문제될 건 하나도 없었는데, 내가 그만 바보짓을 하고 말았다네. 무리인 줄 알면서도, 중심이 불안한 상태에서 1루 쪽으로 공을 송구해 버리고 말았던 거야. 공이 손에서 떨어졌다고 느끼는 순간, 어깨에서 뚝하는 소리가 들려 오더군. 그걸로 모든 것이 끝장 나 버렸어. 단일초 만에.."' 맨프레드는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한숨을 내쉬었다. "팔 병신을 누가 쓰려고 하겠나? 그래서 월드 시리즈에서는 뛰어 보지도 못하고, 자네가 말한 것처럼 넥타이와 옷가지를 파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 우리 아버님 말씀처럼 우선은 먹고 살아야 했거든. 우리 아버님은 현명한 말이 머리 속에 팍차 있는 분이시지. " 맨프레드는 씨익 웃어 보었다. "어찌 되었거나, 지금까지 살아 계시니 고마운 일이지. 어머님은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아버님은 아흔이신데도 아직까지 정정하시다네. 지금 마이에미에서 혼자 살고 계시지. 나는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에 결혼을 했다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마누라 하나는 잘 얻었던 것 같아. 바가지를 긁는 법이 없었거든. 아주 괜찮은 여자였어. 자식새끼도 둘씩이나 낳아주었지. 지금은 둘다 캘리포니아에서 일하고 있다네. 이거 공연히 내이야기만 늘어 놓고 말았구만." 맨프레드는 약간 퉁명스럽게 말했다. "벌써 몇 년 동안 뉴헤이븐에서의 그 일 초에 관한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는데.... 자네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네. 신문에 난 자네 기사를 읽었지. 상류 생활을 하고 있다구?" "그렇지는 않아. 그냥 먹고 지낼만한 정도지." 데이몬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말을 이어 나갔다. "재혼을 해서 지금은 아내와 둘이 지내고 있네. 이번에는 괜찮은 여자를 얻은 것 같아. 한 번 실패를 하고 나서 신중하게 고른 여자지. 자식은 없네." 데이몬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문득 줄리아 래치를 기억해내고서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없어, 내가 알고 있는 한." "기사를 읽고 나서 자네를 찾아가 보았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좋았지. 옛 우정을 생각해서 말이야." "옛 우정이라... 그렇지, 자네와 나는 특히 절친한 사이였으니까." 맨프레드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말을 이어 나갔다. "자네가 춘부장 장례식 때 이곳에 와서 내 소식을 묻더라는 얘기를 듣고 자네에게 펀지를 하려고 했었지만, 먹고 살기가 바빠서 짬이 나지 않았어. 미안하게 됐네." "병원에는 얼마나 입원해 있었나?" "2년." "2년씩이나?" ''그리 나쁘지는 않았어. 내게 총을 쏘아대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일단은 마음이 편했으니까. 별로 할일이 없어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면서 하루 하루 지내다 보니까, 어떻게 2년이 흘러 갔더군." 데이몬은 맨프레드가 늙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마의 주름살이 유난히도 굵어 보였다. ''그 빌어먹을 놈의 전쟁이..." 맨프레드는 비참한 표정을 지었다. "진주만 공격이 있고 나서 일주일 만에 나는 해군에 자원 입대를 했었다네. 당시 뉴헤이븐의 아버님 의류점에서 옷을 팔고 있었는데, 독일놈들이 총부리를 미국에 겨누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지. 입대하고 나서도 내가 부상을 입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었고." 맨프레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독일놈들은 한 놈도 보지 못했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땅딸막한 황인종들밖에 없더군. 악바리 같은 놈들이었지..." 맨프레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결국은 독일놈 대신 일본놈들 하고 싸운 거야. 유태인을 죽인 원흉은 독일놈들이었는데 말일세." 맨프레드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세상 일이라는게 다 그렇게 얼키고 설키는 모양일세. 나는 포병 상사였었는데, 갑자기 쿵 하더니 눈을 떠보니까 병원이더군. 덕분에 훈장은 하나 받았지. 죽지 않고 살아났다고 준 모양이야." 맨프레드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병원에서 막상 퇴원을 하고 나니까 먹고 살 일이 걱정되더군. 하지만 다른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싶지는 않았어. 그때 같은 부대에 있었던 한 친구가 뉴해이븐 경찰서의 경찰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 권유로 경찰관이 되었지. 그다지 나쁜 생활은 아니었네. 경찰관으로 근무한다는 것이 내게는 각별한 의미가 있었거든. 조지 워싱턴이나 퇴역 장군처럼 보이고 싶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야. 나는 우리들 모두가 나름대로 조국을 위해서 투쟁하고 있다고 생각하네. 내 말이 감상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어면 의무감을 느껴야 될 것 같아. 법이 없다면 이 나라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버릴 걸세. 대낮 노상 강도, 우익과 좌익간의 정치적인 암투, 암살, 방화.... 어디 그뿐인가? 아파치 인디안들이 말을 타고 달리듯이 마구 속력을 내다가는 한번 쾅 하면 자동차와 함께 서너 명 정도는 천당으로 직행하기가 십상이지." 맨프레드는 점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한때 교통계에서 근무할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네. 시내에서 시속 99마일로 달리는 자동차를 세운 다음, 코네티컷 주의 제한 속도는 시속 55마일이라고 일러주는 것이 내 임무였는데, 글쎄 백이면 백 모두가 똥 씹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 보더구만. 마치 내가 후레 자식이라고 욕설을 퍼붓기라도 했다는 듯이 말이야. 미국에서 불 명예 스럽게도 교통 사고율을 제일 낮게 만들어서 주의 명예를 손상시킨 주지사를 찾아가서 두들겨 패주겠다는 기세였어." 맨프레드는 실소를 터뜨렸다. "내 말이 고리타분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네만, 법을 믿지 못하고서는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다네. 개중에는 썩어빠진 경찰관들도 상당히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본 이념이 바뀌는 것은 아닐세. 하떻든, 경찰관 직은 내 맘에 들었어. 총과 거칠은 사람들 주변에서 지내는 것이 익숙해져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 맨프레드의 말은 거의 자기변명조로 바뀌었다. "어찌 되었거나, 지금은 5년 전에 퇴직해서 연금을 받아 먹고있네. 수사과 경위로 그만둬서 그런지 연금이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야. 요즘은 그냥 왔다갔다 하면서 지낸다네. 정원 손질도 하고 골프도 치고 리틀 리그의 심판도 봐주면서 지내지. 어떤 때는 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야구팀 숫스탑에게 이런 저런 식으로 수비를 하고 송구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코치도 해주고 있네. 가끔 캘리포니아에 있는 애들을 찾아가 보기도 하구. 하지만 기껏해야 집 근처에서 왔다갔다 하는 게 대부분일세. 캘리포니아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거든. 나는 이곳이 좋아. 내가 지금 껏 알고 지내온 유일한 고향이기에 여기를 뗘나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네." 맨프레드는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끌끌, 이게 바로 맨프레드 웨인슈타인의 2분 인생일세. 어떤가, 로저 ? 이만하면 한 권의 책으로 줄판해도 될 것 같지 않은가?" ''자네 말대로 글을 써서 책을 만들어 냈다가는 그 출판사는 며칠 못 가서 문을 닫아야 할 걸세." 맨프레드가 유쾌하다는 듯이 껄껄거리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자네를 항상 좋아했던 이유 중에서 한 가지는 바로 그 독설적인 말투 때문이었지. 언제나 기를 팍 꺾어서, 잘난 체 좀 하려고 했던 나를 묵사발 만들어 버리는그놈의 말버릇 말이야. 2학년 때 시즌 타율이 3할 8푼 6리나 되었는데도, 나는 자네 앞에서 만큼은 자랑할 생각도 하지 못했었지. 껄껄껄.. 자네가 하나도 변하지 않은 걸 보니 정말 기쁘구만."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도 해군에 있다가 경찰관이 된 사람이 한 명 있다네." 데이몬은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지금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온화한 할아버지처럼 생긴 맨프레드의 얼굴 위로 딱딱하고 거친 성격의 슐터 경위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데이몬은 자신이 거의 무의식 중에 두사람을 서로 비교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슐터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야." 맨프레드가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이라면 나도 얘기를 들어서 알고 있네. 사건 관계로 몇 번 접촉을 한 적이 있었거든. 아마 뉴욕 경시청의 강력계에 있을 걸." ''맞아, 바로 그 사람일세.'' "강력계 형사한태 자네가 도대채 무슨 볼일이 있단 말인가?" "얘기를 하자면 길어." 하고 데이몬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시간이 많은데, 까짓것 아무리 길면 어떤가? 적어도 내게는 시간이 많네만." 맨프레드의 눈에 날카로운 빚이 스치고 지나갔다. 데이몬은 잠시나마 포병 상사, 대도시 경찰서 수사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맨프레드 웨인슈다인이 사건을 담당했을 때는 결코 만만치 않았으리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모습이었다. "글쎄,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데이몬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모든 건 새벽에 전화가 걸려 오면서 시작이 되었다네." 데이몬은 계속해서 잘로프스키의 협박 내용과 전화 자동 응답 장치에 녹음된 전달 사항에서부터 슐터 경위와의 대화, 용의자 리스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러나 꿈 얘기와 오래 전에 죽었던 사람을 우연히 거리에서 만났던 사실, 6번가에서 야구 글러브를 건 소년을 만났는데 그 후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시 이곳에서 똑같은 소년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맨프레드는 마치 무슨 단서라도 잡으려는 듯, 데이몬의 이야기를 신중하게 들었다. 데이몬은 맨프레드와 슐터 경위가 비록 외관상으로는 큰 차이가 있지만, 정신적인 면에서는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문제 파악. 맨프레드는 지금 문제 파악에 열을 올리는 현직 수사관 같았다. "사실, 집사람과 내가 용의자로 떠올린 인물들은 그렇게까지 심하게 위협을 할 만한 사람들이 아닐세. 나를 조금은 괴롭혀 주고 싶을 정도로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문제될 정도는 아니야. 지금까지 슐터 경위에게 제출할 용의자 명단을 작성하려고 고심해 보았지만 주목할 만한 사람은 없었어. 지금의 내 솔직한 심정은, 모든 개 뜬구름 잡기 같다네." 데이몬은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전화 번호부에서 아무 이름이나 고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지금이 20세기가 아니라면, 종교에 희망을 걸고 교황에게 부탁이라도 해 보련만. 이건 마치 사막에서 쌀 한 톨 찾기 식이니..'' "그래, 자네 심정은 어면가?" 맨프레드가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물어 보았다. ''자네 생각을 듣고 싶군." 데이몬은 첫번째 전화를 받고 난 이후로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서는 잠시 망설였다. "나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네." "그건 너무 간단한 대답이야.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뉴욕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냐는 것일세." 맨프레드가 재차 물어 왔다. "나는 결심했네. 다음에 전화가 걸려오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직접 만나 보기로. 죽든 살든, 일단 한번 부딪쳐 볼 생각이야." "슐터에게 그런 얘기를 했나?" "아직 안 했네." "얘기할 생각인가?" "음." "자네가 그런 얘기를 하면 슐터 경위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 미리 듣고 싶은 생각 없나?'' 맨프레드의 목소리가 다소 거칠어져 있었다. ''슐터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거야. '미치셨군요. 그 놈이 어떤 놈이든지 간에 무기를 갖고 있을 겁니다. 근데 직접 만나 보시겠다구요? 운이 좋으면, 그 놈이 선생님을 납치한 후 외딴 곳에 감금해 두고서 요구 금액을 누군가가 가지고 올 때까지 기다려 줄지도 모르겠군요, 그 놈이 원하는 것이 돈일 경우에 말씀입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지 소식도 못 들으셨나요? 단돈 일 달러나 동전 몇 푼을 탈취하려고, 담배 한 갑을 얻으려고, 서로 칼로 찌르고 총을 쏘아대는 세상이랍니다. 지금은 사람 한 명 죽이는데 거창한 이유는 필요 없다는 겁니다.' 내 얘기 듣고 있나? 슐터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걸세." "무슨 수를 쓰든지 간에 이번 일은 마무리 지어야 되겠어." 데이몬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정말이지 미칠 것만 같아. 지금 폐허가 되어서 귀신들이 활개치는 유령의 집에서 살고 있는 심정이라네. 누군가가 내 인형을 만들어 놓고서는 주문을 외우며 바늘로 콕콕 쑤셔대는 것만 같아." 맨프레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데이몬의 잔과 자기 잔에 커피를 더 따라 부었다. 맨프레드는 주전자를 다시 난로 위에 올려놓고 나서 설탕을 탔다. 빈 집에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맨프레드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을 응시하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가끔 눈쌀을 찌푸리면서 어떤 복잡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 고심하는 듯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맨프레드는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면서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데이몬은 말없이 맨프레드를 지켜 보았다. 공연히 옛친구를 자기 문제에 끌어들였다는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생존에 관한 문제를 그토록 심각하개 생각해주는 맨프레드가 고맙기도 했다. 전직 경찰관 친구를 두었다는 것이 내심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마침내 맨프레드가 말문을 열었다. 맨프레드의 목소리는 시원스러우면서도 위엄이 서려 있었다. "안돼, 안될 것 같아." 맨프레드는 강경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자네 혼자서 그 놈을 만나서는 절대로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하도록 하세. 자네와 내가 함께 뉴욕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리고 나서는 둘이 함께 지내면 자네의 불안감이 어느 정도 해소 될지 모르지 않겠나? 항상 같이 지내는 거야." "하지만." 데이몬이 거부하려는 기미를 보였다.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그 사람이 언제 다시 전화를 결어 올지 알 수가 없으니까 하는 말일세. 몇 주일, 몇 달, 아니 영원히 걸려오지 않을지도 몰라. 자네를 정든 이곳에서 떠나게 하고 싶지는 않네, 공연히 내 문제로 인해서 위험에 처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 ''별 신경을 다 쓰는구만.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네." "게다가,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별로 크지가 않아. 집 사람과 나는 더블 베드를 사용하고 있네. 자네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잠자리라고는, 내가 작업실로 쓰고 있는 조그만 객실의 스카우치(소파처럼 생긴 긴 의자. 침대로 사용할 수도 있음) 뿐이야." ''그보다 더 불편한 땅바닥에서 잔 적도 있으니까 걱정 말게. 그리고 자네의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내가 어떻게 모른 척 할 수가 있겠는가? 고등학교 시절 오후 늦게까지 남아서 나를 위해 땅 볼을 쳐 준 그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어." "으흠, 은헤라고?" 데이몬은 약간 아이러니칼하게 맨프레드의 말을 받아 넘겼다. "그렇지만, 그때는 내가 엉뚱한 방향으로 볼을 친다고 해도 자네가 살해 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어." "커피나 들게나." 맨프레드는 갑자기 엉뚱한 말을 꺼냈다. "이런, 벌써 차가와지고 있군." 맨프레드는 이렇개 말하면서 자기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나는 여기에서 할일이 없네. 그리고 또 한 명의 후레 자식을 잡아들인다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어." 맨프레드는 선물을 받아든 아이처럼 환하게 웃어 보였다. "재미있을 거야, 그 놈이 이상한 짓을 하면, 나에게도 권총이 있으니까 대처해 나갈 수도 있고." 맨프레드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어떤 일이 터지기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그래, 이젠 이놈의 집구석에서 훌훌 털고 일어날 때가 된 거야. 벌써 한 십 년은 젊어진 것 같네, 자네 집 사람에게 전화를 해서 손님이 한 명 간다고 얘기하는 게 어떤가? 그렇군, 제수씨를 만나볼 때도 됐지." "알겠네, 알겠어." 데이몬은. 맨프레드를 설득시키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네가 꼭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고 싶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네. 나에겐 손해될 것이 없으니까." "언제 뉴욕으로 갈 작정인가?" 맨프레드가 물어 보았다. "여기서 볼 용무가 아직까지 남아 있나?" "아니, 없어. 볼일은 다 본 셈이야." 데이몬은 가족의 묘지에 흰 백합을 놓아 둔 생각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은 그냥 옛 생각이 나서 이곳을 둘러 보다가 우연히 자네와 만나게 된 걸세."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는지도 모르지." 맨프레드가 씨익 웃어 보였다. "자, 그럼 면도를 하고 옷도 말끔하게 차려 입어야지. 권총에 기름칠도 하고. 묵고 있는 모텔의 숙박료는 계산했나?" "아직까지 안 했네." "한 시간 정도 지나서 다시 이곳으로 오면, 준비를 다 끝내 놓겠네. 돌아오는 길을 확실히 알 수 있겠나?'' "잃어버리면, 길을 물어 보도록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게." 데이몬은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잠시 생각을 한 뒤 약간 어두운 기색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권총이 진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여기는 영국이 아닐세, 로저. 미국에서는 모든 경찰관들이 무기를 사용해. 무기를 24시간 집안에만 처박아 두면, 거리는 온통 무법자 천지가 되어 버리고 말 걸세." ''자네 지금까지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있나?" 데이몬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공연한 질문을 했다고 후회했다. "나는 해군에 있었네, 로저. 우리는 탁구나 하려고 해군에 입대했던 것이 아닐세." 맨프레드는 흥미롭다는 듯이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내 말은, 시민 생활을 하면서 사람을 죽인 적이 있느냐는 것 일세." ''경찰관에게 시민 생활 같은 것은 없다네. 두명. 자네가 말하는 시민 생활을 하면서 두 명을 죽였어. 하지만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네. 마땅히 죽어 없어져야 할 쓰레기 같은 놈들이었으니까. 그놈들을 죽인 공로로 훈장까지 받았지. 걱정하지는 말게.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총을 쏘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가급적이면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여 보도록 하겠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놓이는군. 그리고 자네가 내 편이라는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든든하기도 하구." 데이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맨프레드도 뒤 따라서 일어났다. "여보게, 맨프레드." 데이몬이 약간 주저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자네에게 오래 전부터 물어 보고 싶었던 것이 한 가지 있네." "뭔데 그러나? 말해 보게." 맨프레드는 얼핏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읏거렸다. "자네 누이 엘지는 어떻게 됐나?" ''죽었어." 맨프레드는 덤덤하게 말했다. "누이는 종교를 바꾸어 크리스찬 사이언스 교도가 되었다네. 교리 때문에 병원에 가기를 거부하다가, 결국은 16년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지. 더 물어 보고 싶은 게 있나?" 맨프레드는 담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니, 없네.'' 데이몬은 꿈 속에 나타날 혼백이 또 하나 늘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에는 갔었나?" "유럽 ? 누이에게는 꿈 같은 얘기였다네. 2주일 이상 직장에 다녀 본 적이 없는 보스톤의 한 놈팡이와 결혼을 해서는 평생 고생만 하다가 저 세상으로 갔지. 누이가 직장에 다녀서 그 놈을 먹여 살렸다네. 그놈은 정신이 좀 어떻게 된 작자였는데, 무신론을 들먹거리면서 유태인들을 아주 우습게 보는 놈이었어. 그 빌어먹을 놈을 죽도록 패주고 싶었지만, 누이가 말리는 바람에 그럴 수도 없었지. 그때 이빨을 다 뽑아 버렸어야 하는 건데. 누이가 크리스찬 사이언스로 개종한 것도 다 그놈 때문인 것 같아. 그 망할놈의 자식은 아직까지도 두 눈이 싯퍼렇게 살아 있다네. 그러고 보면 세상이 참 불공평해. 일전에 소식을 듣자 하니, 그놈이 이상한 집단을 만들고 있다고 하더군. 일단 빠져들게 되면, 신을 믿지 않게 되는 그런 집단 말일세, 자네는 어떤가, 로저 ? 자네도 흔들리고 있나?" 맨프레드가 도전적인 어투로 물어 보았다. "36 대 30일세." ''그런대로 양호한 편이로군." 맨프레드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종교를 바꾸려면, 가톨릭을 택하겠네. 가톨릭은 죄인을 용서해 주거든. 그래서 누이가 종교를 바꾸겠다고 했을 때, 기왕이면 가톨릭으로 돌아서라고 주장했었다네. 천주교는 역사가 깊고 체계가 갖추어져 있을 뿐더러 최소한 성가가 성스럽지 않겠나?" 맨프레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와 누이가 무엇 때문에 깨지게 된 건가? 나는 두 사람이 맺어지리라고 생각했었는데." ''말하지 않는 편이 낫겠네." 18세 때, 엘지가 데이몬과의 정사로 인해서 임신을 하게 될 경우에는 죽어 버리겠다고 위협했었다는 이야기를 신앙심 깊은 맨프레드에게 차마 해 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휴우, 어떻게 보면 자네가 골칫덩어리를 떠맡게 되지 않아서 다행인지도 모르겠구만. 누이는 정말이지 어리석은 여자였다네. 어리석은 구석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어. 이제 그만 가 보게. 조심해서 운전하도록 해. 공연히 목뼈 부러뜨려서 병원 신세 지는 것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말이야. 차있는 데까지 배웅해 주겠네." 두 사람은 햇살이 내리 비치는 밖으로 나왔다. 데이몬은 차 시동을 걸기 전에 맨프레드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굵은 주름살과 함께 고뇌와 거칠음이 뚜렷이 새겨져 있었으나, 차가운 푸른색 두 눈만큼은 깨끗하기 그지 없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자네는 조용하고 온화했었어. 자네가 싸움을 하는 것조차 나는 본 적이 없었네, 그런 자네가 그토록 완고하면서도 강인한 사람으로 변하리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거야." 맨프레드가 이빨을 드러내면서 씨익 하고 웃어 보였다. "나는 짐작했었지." 하고 맨프레드가 말했다. 제 I6장 동업자 모델로 돌아와서 데이몬은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올리버를 불러냈다. "어디죠?" 올리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올리버는 걱정스러울 때면 지금과 같이 소리 높여 투정하곤 했다. "뉴욕에서 가까운 곳이야." 데이몬이 대답했다.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까 점심을 먹고 나서 곧 가겠네." "장모님은 어떠시답니까?" "여전해. 실라는 수요일까지 버링톤에 있어야 할 것 같아." "오늘밤 저희 집에 오셔서 지내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제가 선생님 계신 곳으로 찾아가면 어떻겠어요?" "그럴 필요없네." "선생님," 올리버가 나무라듯이 얘기했다. "사모님이 저를 원망하실 겁니다. 나 때문에 두 분의 기분이 상하게 됐다고 생각할 거예요. 사모님께서는 나한데 욕을 하고 계실 겁니다." "집 사람은 딴 생각할 겨를이 없어. 누구를 비난하지도 않을 거야. 친구 한 사람이 나하고 같이 뉴욕으로 갈 걸세. 나하고 같이 있게 될 거야." "설마, 지금 거짓말하고 계신 건 아니겠죠?" "내가 언제 거짓말을 한 적이 있나?" "가끔 있었죠." 올리버가 말했다. 데이몬은 소리내어 웃었다. "이번은 그렇지 않아." "학생감한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자기한테 전화를 해달라고 했어요. 중요한 문제라고 하더군요. 주말 이전에 결정을 내려야 한답니다." "내가 오늘 오후에 전화하겠다고 얘기해 줘, 걱정하지 말고." "그렇게 하죠." 올리버가 힘없이 대답했다. 데이몬은 전화를 끊은 뒤 짐을 모두 꾸렸다. 계산을 치르고 나서는 맨프레드의 집 쪽으로 차를 몰았다. 맨프레드와 함께 뉴욕으로 갈 생각이었다. 맨프레드와 함께 아파트에 돌아온 데이몬은 깜짝 놀랐다. 상자와 짐꾸러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자들 속에는 책과 레코드가 들어 있었고 짐꾸러미 속에는 실라에게 줄 밍크 코트와 올리버와 미스 월튼에게 줄 선물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데이몬이 입으려고 산 골댄 자켓도 들어 있었다. 샴패인도 두 병이나 놓여 있었는데 지금은 차갑지 않았다. 데이몬은 쇼핑을 하느라고 법석대던 일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 이러한 잡동사니들을 치워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여보게," 맨프레드가 말했다. "이게 대채 무슨 일인가? 크리스마스 날 아침이라도 된 건가?" "어제 물건들을 좀 샀어." 데이몬이 대답했다. 데이몬은 대답을 하고서 어제였던가... 몇 달이나 지난 것 같다는 생각아들었다. "몇 가지의 생활 필수품들일세. 책하고 레코드를 좀 샀지." "저 속엔 뭐가 들었나?" 맨프레드가 커다란 상자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그 속엔 오디오가 들어 있을 거야. 오디오도 주문했었거든."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핵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선가?" 데이몬이 소리내어 웃었다.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야. 전부 올드 라임에 있는 우리들의 보금자리로 가져가려고 구입한 것들일세." 데이몬은 이미 올드 라임에 대해서 맨프레드에게 얘기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실라를 만나지 못한 까닭에 대해서도 얘기해 주었다. ''내가 숲속에서 은거 생활을 하는 동안 대 도시의 문명 생활을 맛보기 위해서지." "대 도시의 문명 생활이 훨씬 더 견딜만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맨프레드가 냉담하게 말했다. "모든 게 잘 되어간다면 말일세." 두 사람은 거실로 들어갔다. 맨프레드는 유심히 주위를 둘러 보았다. 잠시 후 데이몬이 작업실로 이용하고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섰다. "자네가 기거하게 될 방일세. 자네 마음에 들지 모르겠군." 데이몬은 카우치를 가리켰다. 길이가 좀 짧았다. "내 키가 더 자라지 않은 게 다행이로군.'' 맨프레드가 말했다. ''내 키에 꼭 맞겠는 걸. 그런데 미리 말해 두겠네만, 난 코를 고는 버릇이 있어." "방문을 닫고 잘 거니까..." "우리 집사람은 내 코고는 소리가 30마일 밖에서도 들린다고 말하곤 했었다네. 문을 닫는다고 해서 별로 도움이 안 될 걸세." 맨프레드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데 정면 현관 입구의 출문에는 자물쇠가 두 개나 있더군. 윗쪽에 것은 새 것이던데, 최근에 새로 달은 건가?" "첫번 째 전화가 걸려 오고 나서 달은 거야." "몇 사람이나 열쇠를 갖고 있나?" "실라하고 나, 그리고 일하는 아줌마가 갖고 있네만." "그 일하는 아줌마하고 얘기를 나뉘 봤으면 좋겠구만." 데이몬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몸집이 큰 흑인 여자일세. 남성에 버금갈 정도로 목소리는 아주 저음이지. 할렘에 있는 교회의 성가대에서 노래를 들으러 몇 번 그 교회에 가본 적이 있다네. 벌써 13년 동안이나 우리집에서 일해오고 있어. 우리 부부는 아무데나 돈을 놔두는 버릇이 있다네. 보석들도 마친가지야. 하지만 누가 손을 대본 일이 한 번도 없었어. 그녀가 잘못하는 일이 있다면 감기에 걸렸을 때 이상한 목소리를 낸다는 것뿐이야." ''알겠네." 맨프레드가 말했다. "베이스 목소리를 가진 여자 이야기는 그만 두기로 하세. 하지만 자물쇠를 너무 믿어서는 안 돼." "물론이지. 그래서 자네가 이곳에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네. 내가 잠을 잘 수 없게 될 지라도 말이야." 바로 그때 전화 벨이 울렸다. 두 대의 전화가 동시에 울려댔다. 한대는 침실에 있었고 또 한대는 거실에 있었다. 맨프레드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자네가 받을 텐가?" "물론이지. 이상하군, 마벨에 있는 친구는 오후에 전화를 걸지 않는데." 실라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 "포드 역에 있는 모텔에 전화를 했었어요. 그런데 당신이 모텔을 나갔다고 하더군요. 지금쯤 집에 계시리라고 생각했죠. 올리비가 당신과 함께 있나요?" "아니," "아파트에 혼자 계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쟎아요.'' 실라가 데이몬을 다그쳤다. "혼자 있는 게 아냐. 옛친구와 함께 있어. 맨프레드 웨인슈타인이라고, 아마 당신도 알고 있을 거야. 포드 역에서 살고 있지. 내가 당신한데 얘기한 적이 있었쟎아, 우리는 고등학교 동창이야. 지금은 수사관 일을 그만 두고 집에서 지내고 있는데, 거머리처럼 나와 함께 지내고 싶다는 거야. 옛날을 회고하면서 말이지, 그리고 그는 지금 중무장을 하고 있어." 데이몬이 쾌활하게 말했다. 마치 어깨에 38구경 피스톨을 매고 있는 손님을 흥미롭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 지금 그 얘기 꾸며내신 건 아니겠죠?" 실라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저를 안심시키려고 말이에요." "그럼 당신이 직접 그 친구하고 애기를 나눠 보구료. 맨프레드하고 말이야." 데이몬이 맨프레드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여보게, 이리 와서 우리 집 사람하고 통화를 해보게." "안녕하십니까?" 맨프레드가 전화를 바꿨다. 맨프레드의 목소리는 평상시처럼 크게 울려 퍼졌다. "이렇게 불쑥 찾아뵙게 돼서 죄송합니다." 만일 맨프레드의 목소리가 실라의 귀에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면 실라가 놀라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고 데이몬은 생각했다. 맨프레드의 목소리는 마치 2백 20파운드의 몸집을 지닌 저음 가수의 목소리 같았다. 맨프레드가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데이몬은 바로 옆에서 있었기 때문에 실라의 걱정스러운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다. 비록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부인." 맨프레드가 말했다. "로저는 지금 어머니 품속에 있는 갓난 아이처럼 안전하니까요. 가까운 시일내에 부인을 뵙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맨프레드는 수화기를 데이몬에게 념겨주었다. "자네한태 할 이야기가 있다는군." "로저," 실라가 말했다. "웨인슈타인씨가 당신을 보살펴 주겠다고 제의한 것은 아주 잘된 일이에요. 지금 당장 그리로 가서 만나 보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어머니 때문이에요. 의사들 얘기로는 혼수 상태에 빠져 있다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수요일 날 훌륭한 전문의 한 분이 보스톤에서 올라 온다고 했으니까 그 전문의가 어머니를 진찰해 볼 때까지는 여기에 남아 있어야 될 것 같아요. 학교에 전화를 했어요. 내가 없어도 모든 일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하더군요. 만약 당신의 경우라도 좋아하게 될 거예요. 자신이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씀이에요." 실라는 아이러니컬한 웃음소리를 냈다. ''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야." "그럼 저의 경우엔 어떨까요? 당신도 내게는 없어서는 안 될 분이에요." 실라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웨인슈타인씨가 무모한 일을 저지르지는 않겠죠?" "맨프레드는 매우조심성 있는 사람이야. 내가 그걸 장담하지." 데이몬이 농담조로 말했다. "그리고 맨프레드는 전혀 늙지가 않았어. 나 때문에 너무 신경쓰지 말아요. 맨프레드의 말처럼 나는 어머니의 품속에 있는 갓난 아이처럼 안전하게 잘 있으니까." ''그 말을 믿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실라가 심란하게 말했다. "아뭏든, 그 친구 분하고 취하도록 술을 잡수시지는 마세요." "맨프레드는 커피밖에 안 마셔." "커피도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세요." 다소 가련한 농담이었다. "그리고 당신은 유태인 어머니처럼 행동하지 않길 바라오." 데이몬이 더욱 서글픈 농담을 했다. 실라가 웃었다. 하지만 별로 확신에 넘쳐 있지는 않았다. "그럼 몸 조심하세요." 실라가 말했다. "그리고 자주 전화하세요. 여기는 지금 어둠속에서 한 줄기 광선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어요." "보스톤에서 오는 전문의가 당신의 어머니한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태에요. 최악의 상태는 지금과 같이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만 계시는 것이겠죠. 몇 달 몇 년이든지 간에..." 실라는 풀이 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 되면 겁나는 일이죠. 어머니 병실에 들어 가기가 겁나요. 어머니에 대해서 아름다운 젊은 여인의 모습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이곳엔 비가 오고 있어요. 뉴욕의 날씨는 어때요 ?" "맑은 날씨인 걸. 안개가 약간 끼기는 했지만." "친구분하고 즐겁게 지내세요. 당신이 친구를 만났다니 정말 기뻐요. 친구분에게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제가 큰 소리로 분명하게 말하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전해 주세요. 한 가지 더 있어요. 그가 총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기를 바란다고 전해주새요." "그렇게 하지." "그만 전화를 끊어야 겠어요. 지금 병원에 있는 공중전화를 이용하고 있거든요. 어떤 아가씨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어요." 실라는 어린애같이 수화기에 대고 키스하는 시늉을 했다. 데이몬은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버링톤에선 모든 일이 별로 잘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보지?" 맨프레드가 말했다. 맨프레드는 데이몬의 얼굴 표정을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데이몬이 통화를 할 때부터 그렇게 했다. "불쌍한 늙은이." 데이몬이 말했다. 실라의 어머니는 데이몬 보다 몇 살밖에 많지 않았다. 불쌍한 늙은이라는 말은 그녀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동시에 뇌까린 말이었다. "이잰 뭘 하겠나? 자네가 홀에 있는 저 물건들을 치운다면 내가 도와주겠네. 그리고 내가 그 오디오를 설치해 주도록 하지. 나머지 물건들도 정리해야 되겠군. 자네는 어릴 적부터 그런 일엔 서툴렀지." "난 변하지 않았어, 그대로야." 데이몬이 말했다. "집 사람은 나 혼자서 전구도 끼우지 못하게 할 정도야. 하지만 지금 나는 배가 고픈 걸. 점심을 좀 먹어야겠어." 데이몬은 아침 일찍 식사를 했었는데, 지금은 한 시가 지나 있었다. ''그리고 나서 차를 몰고 시내로 가서 해르츠 렌트카 회사에 차를 돌려 주어야 되겠어. 그 다음에는 사무실로 가는 게 좋겠군. 나는 며칠 동안 결근을 했었거든, 아마 일거리들이 내 책상 위에 잔뜩 쌓여 있을 거야." ''좋아." 맨프레드가 말했다. ''나도 배가 고프군. 그리고 자네 사무실이 어떻게 생겼나 구경도 하고 싶구. 자네 동업자하고도 얘기를 좀 나누고 싶네, 너무 기대하지는 말게. 나는 내 동업자를 신경과민으로 만들었을 뿐이니까." 데이몬은 지난 몇 주일 동안의 자기 행동에 대해서 부끄렵게 생각했다. ''나는 사무실 주위를 맴돌면서 멍청이같은 짓만 해왔어. 그 사람은 수줍음이 많고 학자처럼 생긴 젊은이야. 그리고 나를 무척 좋아하고 있지. 그는 내가 잘못 될까 봐 걱정하고 있어." "걱정하지 말게. 일이 크게 어긋나는 건 아니니까."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맨프레드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어쨌든 아직까지는 괜잖쟎아." 함깨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에 도착해서 데이몬은 맨프레드를 올리버와 미스 월튼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데이몬은 <비가>가성공을 거두고 나서부터 밀려드는 원고가 갑절 이상이나 늘었기 때문에 맨프레드가 원고들을 살펴봐 줄 것이라고 말했다. 맨프레드는 분위기에 맞추기 위해서 잠시 동안 독서를 했다. 데이몬은 자기의 얘기가 다소 이상하게 들렸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올리버와 미스 월튼에게 맨프레드가 수사관 생활을 해왔다고 알리는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간단한 소개가 끝나자 데이몬은 미스 월튼과 올리버에게 각각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지난 며칠 동안 함깨 지낼 수 없었기 때문에 주는 선물이야. 공백을 메우는 방법으로써 말이지." 미스 월튼은 눈물을 참으려고 애썼다. 선물 상자를 열자 털 스웨터가 나왔다. 미스 월튼은 부끄러운 듯이 데이몬에게 키스를 했다. 미스 월튼의 턱이 약간 떨렸다. 데이몬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그녀에게 보너스를 지급했을 때도 그런 적이 있었다. "제가 입고 있는 스웨터가 보기에 흉하다는 것을 알고 이런 선물을 해주시다니 정말 고마워요." 미스 월튼은 성가신 듯이 입고 있는 스웨터를 벗어 버렸다. 그것은 거의 10년 동안이나 그녀가 매일 입고 지냈던 손으로 짠 우중충한 색깔의 가디간 스웨터였는데 통이 아주 컸다. 미스 월튼은 스웨터를 휴지통 속에 집어 던지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안녕, 영원히 안녕. 불쌍한 누더기야." 올리버는 데이몬이 함께 준 블레이저 선물 상자를 쳐다보기 전에 예이츠의 시집에 들어있는 포장지를 뜯었다. 데이몬은 그 모습을 흥미있게 지켜보았다. 시집들이 나오자 올리버는 질책하는 듯한 눈초리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그는 <예이츠 시집>이라는 책 제목을 보았던 것이다. ''로저." 올리버가 말했다. "제가 예이츠 시집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셨나요?" "자네가 그 책을 찾기만 하면 10달러를 주겠네. 어떤 사람이 그책을 슬쩍 가져가서 자네한테 돌려주지 않았을 거야." 올리버가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해보니 오랫동안 그 책을 보지 못한 것 같군요." 올리버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커다란 상자를 열고는 플란빌 블레이저를 꺼내서 입었다. 여러 각도에서 옷 맵시를 살펴 보았다. 블레이저는 올리버에게 꼭 들어 맞았다. 올리버는 다시 그 옷을 벗어서 옷장 속에 조심스럽게 걸었다. ''주말에 입기에는 너무 화려한 옷인데요." 올리버가 말했다. "로저, 너무나 사치스러위요. 하지만, 멋있읍니다. 돈이 꽤 들었겠는데요.'' 올리버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마와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은 올리버가 눈물을 글썽이지 않을까 해서 걱정스러웠다. "집사람이 질투를 하겠는데요. 집사람에게도 이런 옷을 사다 주어야겠군요." "그럴 필요 없네. 내가 자네 부인에게도 그런 옷을 한 벌 사 주도록 하지." 데이몬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자네에게 잘해주지 못해서 자네는 요즘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을 거야. 그 옷이 내가 보내는 평화의 상징이라고 그녀에게 전해주게. 자, 이젠 다시 일을 시작해볼까." 데이몬은 많은 원고지 뭉치들을 분류하면서 지금까지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의 소설을 골라냈다. 그 것은 1천 2백 매 가량 되는 소설이었다. 데이몬은 그 소설 원고를 맨프레드에게 건네주었다. 맨프레드는 이미 안락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서 편히 쉬고 있었다. 맨프레드는 출입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보게," 데이몬이 말했다. ''이 원고가 나머지 오후 시간을 정신없이 만들어 줄 걸세." 데이몬은 자캣을 벗어서 옷 걸이에 걸고나서는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았다. 데이몬은 맨프레드가 아직도 자캣을 입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올리버가 이상하게 여기지 않기를 바랬다. 맨프레드가 화장실에 가려고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되자 올리버가 데이몬의 책상 앞으로 다가와서 미스 월튼이 들을 수 없도록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서 저런 사람을 데리고 오셨읍니까?" "그는 나의 오렌 친구야." 데이몬이 말했다. ''영 문학을 전공한 친구지. 범죄 소설에 조예가 깊어." ''문학가 타입으로는 보이지 않던데요."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야. 요즘은 문학가 타입도 가지가지 이니까." "그 사람에게 급료는 얼마나 지불합니까?" 올리버는 말끝마다 동업자로서의 태도를 취하려고 애썼다. ''한 푼도 주지 않을 거야." 데이몬이 분명하게 대답했다. "우선은 어떻게 일하는지 지켜볼 생각이네. 최종 결정을 내릴 때까지는 내 호주머니에서 한 푼도 지급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게." 올리버가 이의를 제기하려고 했으나 데이몬이 말을 가로막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당해. 며칠 동안 모든 일을 소흘히 하다 보니까 일거리가 쌓여 있군. 쉿, 그가 오는군." 업무시간이 끝나기 바로 직전 전화 벨이 울렸다. 슐터가 걸어 온 전화였다. "선생님께 알려드릴 소식이 있습니다. 10분 후에 절 만나 주시겠어요? 지난번과 같은 장소에서 뵙도록 하죠." 데이몬은 슐터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다. "알겠읍니다. 그런데 경위님만 괜찮으시다면 친구 한 명을 데리고 가고 싶습니다만.'' "그가 비밀을 지킬 수 있을까요?" ''그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10분 후에 뵙겠습니다.." 슐터가 전화를 끊었다. 슐터는 전번과 똑같은 코트를 입고 바아에 앉아 있었는데, 코트 깃을 세우고 있었으며 불길하고 위협적인 모습을 한 채 우스광스러운 작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데이몬이 맨프레드와 함께 바아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슐터는 일어나서 그들을 맞으려 하거나 데이몬이 맨프레드를 소개했을 때 악수를 청하지도 않았다. 슐터는 단지 툴툴거리면서 불평을 하며 커피를 들이키고 있었다. 여자 종업원이 다가오자 맨프레드는 커피를 주문했다. 데이몬은 맥주 한 병을 시켰다. 데이몬은 슐터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적마다 갈증을 느끼곤 했었다. "이 친구는 직업 상으로 경위님을 잘 알고 있읍니다." 데이몬이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오?" 슐터가 의심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직업상이라니?" "이 친구는 뉴 헤이븐 경찰서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은퇴를 했죠. 저하고는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사이입니다. 이번에 나와 함께 지내려고 뉴욕으로 온 겁니다. 우리의 문제가 해결 될 때까지요. 말하자면, 이 친구는 나의 경호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슐터 경위는 새로운 관심을 가지고 맨프레드를 쳐다보았다. 맨프레드는 바아를 둘러보고 있었는데, 눈초리가 기민했으며 무엇하나 놓치지 않는 것 같았다. 다른 손님들과 여자 종업원의 일거 일동을 주시하며 바텐더의 모든 동작들도 세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총을 갖고 계신가요?" 슐터가 물었다. "가지고 있습니다." 맨프레드가 슐터를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맨프레드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총을 소지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뉴 헤이븐 경찰서에 근무할 때부터 갖고 있었던 총입니다." "제가 뉴 헤이븐 경찰서에 당신의 신원 조회를 해봐도 괜찮겠읍니까?" "물론이오." 맨프레드가 대답했다. "이름은 맨프레드 웨인슈타인입니다." "맨프레드라는 이름의 형사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었는데...." 슐터가 말했다. "항상 새로운게 있기 마련이죠." 맨프레드가 더욱 미소를 띠면서 대답했다. "그런데..." 데이몬이 마침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서 슐터에게 물어 보았다. "새로운 소식이란 무엇입니까?" 슐터는 여자 종업원이 커피와 맥주를 탁자 위에 올려 놓을 때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여자 종업원이 사라지자 슐터가 말 문을 열었다. "래치 가족에 대한 얘기입니다. 래치 부인이 이틀 전에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군요." "그럴 수가.." 데이몬이 소리를 질렸다. 슐터와 전화 통화를 할 때 느꼈던 우려가 확인된 셈이었다. 잘로프스키한테 첫 전화가 걸려온 이후로 연못 속에 던진 돌 마냥 끝없는 재난의 파문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데이몬이 그러한 파문의 중심이 되었던 셈이다. "래치 부인이 발가벗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사람들이 발견했답니다." 슐터가 말했다. "래치 부인은 거의 일 년 동안이나 정신과 의사의 치료를 받아 왔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담당 의사의 얘기로는 정신 분열증에 걸려 있다고 하더군요. 선생님께서도 알아두셔야 할 것 같아서 알려드리는 겁니다." ''고맙습니다." 데이몬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그 의사의 말로는 래치 부인이 자기 남편에게 누가 그 아이의 아버지인지 전혀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래치 부인이 입을 꽉 다물고 있답니다. 그래서 이웃 사람들의 얘기로는 래치씨가 그 아이에 대해서 몹시 염려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알려주신 데 대해서 거듭 감사드립니다." 맨프레드는 당황해하는 것 같았다. ''래치 부인이 누구지 ? 로저, 그 여인이 이번 일과. 도대채 무슨 관계가 있는 건가?" "나증에 얘기해 주겠네." 데이몬이 말했다. "뭐 새로운 소식은 없나요?'' 슐터가 물었다. ''이젠 그런 전화가 더 이상 걸려오지 않나요?" 데이몬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 없습니다. 전화도 없구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사모님을 잠시 밖에서 지내도록 했으면 좋겠읍니다 만." 슐터의 말은 충고라기보다는 일종의 명령에 가까왔다. "집 사람은 지금 뉴욕에 없습니다." ''당분간 계속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슐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서는 괴상하게 생긴 모자를 깊숙이 눌러 썼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읍니다." 슐터가 맨프레드에게 말했다. 슐터의 목소리에는 악의가 다소 섞여 있었다. "권총을 꺼내서 다리에 쏘지 않기를 바라겠습니다." "노력하리다." 맨프레드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실수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슐터가 차가운 눈초리로 내려다 보았다. "당신에게 행운이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맥주를 다 마시고 나서 무슨 일이 생기거든 나한테 전화를 주세요." 데이몬과 맨프레드는 멋있게 생긴 형사가 출입문을 통해 거리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주 싹싹한 친구 같군." 맨프레드가 말했다. "그런데 뉴 해이븐 경찰서를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군. 자, 이제 레치 부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겠나?" 데이몬은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맨프레드는 아무 말없이 데이몬의 말을 듣고 있었다. 데이몬은 자기 친구의 얼굴 표정이 점점 더 굳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내 데이몬이 이야기를 마치자 맨프레드가 말문을 열었다. "자네는 어른이 되어서도 바보같은 짓을 했구만. 래치 가족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해주도록 하게. 래치 부인이 자기의 담당의사 한테만 얘기를 했다는 사실이 자네에겐 행운일새.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의 남편이 자네한테 총을 겨눈다고 해도 난 그를 나무라지 않을 걸세." "빌어먹을 !" 데이몬이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 보이면서 말했다. "자네는 한적한 오후에 계집년하고 시시덕거린 적이 없었나? 설마 그런 적이 없다고 대답하지는 못하겠지?" "그래도 나는 조심성이 있어. 사생아를 낳은 적은 없단 말야. 그리고 다른 남자의 성을 가진 자식을 가져본 적도 없고." "잘 했군, 잘 했어." 데이몬이 비양거리는 투로 말했다. "언제 성당에 가거들랑 내 영혼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 좀 해주게." "알았어. 이제 그만 진정하게." 맨프레드가 말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수야 있겠나. 지금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대책을 세우는 거야." ''맞아." 데이몬이 말했다. 약간 진정된 기분이었다. "자네가 생각하기에는 이 일이 그녀 남편에게 마지막 지푸라기인 것 같나?" 맨프레드가 질문을 던졌다. "아내는 정신병원에 갇혀 있고 신문지상에는 자네 얼굴이 실릴테지. 자네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며 얼마나 많은 돈을 긁어 모았는가에 대한 기사가 실리게 될 거야." ''가만, 그 사람한데 전화를 하는 게 좋겠군." "무엇 때문에?" 맨프레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한데 사실대로 말해야겠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을 한번 시험해보는 습성이 있단 말이야. 가령 나같은 사람이 그렇지." "그게 바로 양심 회복 습성이라는 거야." 맨프레드가 성급하게 말했다. "도대체 자네 왜 그러는 거야? 이교도를 위한 그리스도의 속 죄일이라도 도래했나? 그녀의 남펀이 자네를 암살할 만한 이유를 발견했더라면 벌써 열 번 이상 자네에게 총질을 했었을 걸세. 자네가 그에게 전화로 고백했다면 아마 그렇게 됐을 거야. 그런데 실은 그 사람도 지금 고민중이거든. 자네의 그 자기 중심적인 관념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모든 것을 한번 털어 놓아 보게. 그렇게 되면 그녀의 남편으로 하여금 불호령이 떨어지게 만드는 꼴이 될 걸세. 하옇든 자네의 얘기대로라면 그녀는 스무 살이 넘었고 과거의 자기 행동에 대해서 알고 있을 거야. 과거에 자네말고도 열이 넘는 녀석들이 집적거리지 않았다고 어떻게 장담할 텐가?" ''물론 장담할 수 있지." 데이몬이 말했다. "그건 확률의 문제이니까 말이야." "아냐, 그건 막연한 확률 문제가 아니야. 그녀는 지금 얼이 빠져 있지만 11년 전에는 똑똑한 여자였단 말일세. 자네는 슐터에게 나를 자네의 경호원이라고 말했지 ? 그런데 아무래도 내가 자네의 지능 관리인이 되어 줘야겠는 걸." 데이몬은 맨프레드가 너무 열심히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그만 마음이 흔들렸다. 또한 자기의 양심에 대해서 조롱하는 말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 어릴 적 친구인 맨프레드가 자기를 헐뜯는 사람의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잠시 맨프레드와 마주쳤던 일이 후회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자낸 경찰관다운 소리를 하는군." 데이몬이 말했다. "만약 그런 죄목이 법령 집에 나와 있지 않다면 생각을 바꿔 주게. 그 일이 자네 코 앞에서 일어나지 않는 이상 말일세." "내가 경찰관같은 소리를 한다는 얘기는 일리가 있어. 그런데, 경찰관은 성가신 문제 따위를 일으키진 않는단 말씀이야. 만일 자네의 양심이 자네를 괴롭히거든 어떤 고아원에다가 적선이나 해두게. 그렇지 않으려면 성당에 가서 죄를 고백하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겠다고 기도를 하든지. 그리고 나서 10달러 지폐를 현금통에 넣는 거야." 맨프레드의 말 속에는 이미 어렸을 적의 우정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가지 더 첨가해 두지. 자네 아내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녀를 집으로 불러 들이면 어떻겠나? 그렇게 되면, 자네 가족의 재회를 지켜보는 내 마음이 흡족해 질지도 모르쟎아? 이것봐 로저, 자네는 좀 철이 들어야겠어. 자네는 사실 너무 깊이 생각하는 못된 버릇이 있어. 이제는 그 따위 구덩이를 그만 좀 파게나." "자네 목소리가 너무 커." 데이몬이 말했다.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쟎아. 왜 자네가 고함을 지르는가 해서 말이야. 아마 집사람이 알아야 할 때가 오겠지. 아내에게는 그때가서 내 이야기를 털어놓겠네." "제발 그따위 얘기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만약 자네가 굳이 모든 사실을 털어 놓는다면 나는 맹세코 그 자리를 피할 걸세." 데이몬과 맨프레드는 재빨리 깊어가는 어둠속을 뚫고 거리를 활보했다. 어느 누구도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14번가에 이르렀을 때 데이몬의 마음이 비로소 가라앉게 되었다. 데이몬은 곁눈질로 맨프레드를 쳐다보았다. 맨프레드는 고집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뭇하고 있었다. "여보게, 솟스탑 양반," 데이몬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휴전하는 게 어떤가?" 그러나 맨프레드의 얼굴 표정은 한동안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는 이를 드러내고 히죽 웃었다. ''물론이야, 휴전하도록 하지." 맨프레드는 손을 뻗어서 데이몬의 팔을 톡톡 두들겼다.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맨프레드가 데이몬을 거들어서 책을 아래층 지하실에다 갖다 놓았다. 그리고 레코드도 정리했다. 데이몬은 실라의 밍크 코트를 벽장 속에다 걸었고, 맨프레드는 오디오 장치들을 조작해서 안테나와 전선 줄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일을 마치는 데는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았다. 데이몬은 마실 것을 준비해서 천전히 마시기 시작했다. 레코드 한 장이 이미 오디오 속에 넣어졌다. 베토벤의 3중주 협주곡이 흘러 나왔다. 음악이 흐르는 도중에 전화 벨 소리가 났다. 데이몬의 표정이 굳어졌다. "받아 보게." 맨프레드가 말했다. 데이몬은 마시고 있던 컵을 내려놓고 전화기 있는 곳으로 다가 갔다. 그러나 손이 전화기 위에서 멈추고 말았다. 한동안 망설이다가 데이몬은 마침내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올리버입니다. <예이츠 시집>에 관해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선생님 말씀이 옳았읍니다." 올리버는 웃음을 터뜨렸다. ''저는 집안을 샅샅이 뒤졌어요. 그러나 <예이츠 시집>은 안 보였읍니다. 정말 선생님께 탄복했어요. 월요일 날 뵙죠. 즐거운 주말을 보내세요. 우린 아침에 헨프톤으로 갈 겁니다. 플란빌 블레이저 착복식을 하기 위해셔죠." 맨프레드가 데이몬올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데이몬이 수화기를 내려놓자 맨프레드가 물었다. :좋은 소식인가?" "올리버 가브리엘슨한테서 온 전화였어. 책에 관한 얘기야." "여보게, 로저." 맨프레드가 말했다. "나는 전화를 받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게나. 그놈이 전화를 걸었는데, 내가 전화를 받았다면 어떻게 되겠나? 그놈에게 이집에 자네말고 또 한 명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셈이 되는 거지." ''딴은 그렇군." "그리고 침실에 연결되어 있는 전화도 받지 않겠네. 수화기 드는 소리를 두 번씩이나 낸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거든." ''자네 말을 듣고 보니 진짜 그런 것 같군." 맨프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지금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는 셈이지." ''머리가 둔한 편은 아니니까 그 일도 금방 배우게 될 걸세." "나는 자네가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네. 예를 들어, 모든 사람들과 모든 일들에 대해서 항상 의심하는 태도를 취한다든가 하는 것은 좋지 않아. 주방이 어디에 있나? 내가 저녁 식사를 요리해 줄까? 나는 집 사람이 죽고나서 매우 훌룽한 요리사가 되었다네." "이 집안에는 요리할 만한게 아무것도 없을 거야. 그리고 나는 자네를 귀한 손님으로 모시고 싶어. 훌륭한 프랑스 요리를 대접하고 싶네. 경찰관이 만든 요리가 아니고 말야." "그럼 조용히 따라 가도록 하지. 기왕이면 댄서들도 있었으면 좋겠군." 데이몬과 맨프레드가 간 곳에는 댄서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맨프레드는 양파 스프 한 그릇과 머천 드봉 스테이크 한 접시를 맛있게 비웠다. 웨이터가 음식을 날라오면서 맨프레드에게 경멸적인 시선을 보냈다. 식탁에 앉자마자 맨프레드가 블랙 커피를 시켰었는데 곧 이어 스데이크와 함께 마실 커피 한 잔을 또 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켈리포니아 산 붉은 포도주 반병을 시켰을 뿐이었다. 맨프레드는 굉장히 먹어댔다. 음식에 곁들여서 빵을 다섯 조각이나 먹었고 프렌치 프라이를 마구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에는 애플파이가 든 아이스크림과 커피를 또 한 잔 들이키면서 저녁식사를 마무리 짓고 있었다. 맨프레드는 등을 의자 등받이에 느긋하게 기대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젊었을 때는 식욕이 왕성했어. 하지만 식당차의 간이 음식점에서 밖에는 식사할 수 없었다네. 돈이 없었기 때문이지. 지금도 그때같이 식욕이 좋다면 이까짓 음식들은 단번에 해치울 수가 있었을 거야. 나는 이런 식으로 일이 돌아가기만 한다면 내가 아흔 살이 되어서야 그 녀석이 나타난다고 해도 상관치 않겠네. 로저, 그런데.." 맨프레드의 목소리는 다소 감상적으로 바뀌었다. 그 때문에 커다란 음성도 낮아졌다. "우리는 정말 다정한 친구였지. 여러 해 동안 말일세..." 맨프레드는 지난 수십 년 간의 세월을 포옹이라도 하려는 듯이 자기의 두 손을 둥굴게 벌렸다. "그토록 오랫동안 헤어져 있다가 우리 두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만나자 마자 불길한 일이 터지지 않을까 하고 걱정해야 된다니, 세상 참..." "그건 인간들이 자신의 가치를 똑바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일 것일세." 데이몬이 침울하게 대답했다. 그날 밤 맨프레드는 미리 예고했듯이 코를 엄청나게 골아댔다. 맨프레드는 크레센도(음악용어로서 점점 세게라는 뜻)와 디크리센도(음악용어로서, 점점 약하게라는 뜻)를 규칙적으로 반복하면서 코를 골았다. 하지만 데이몬은 뒤척이지 않고서도 잠을 잘 수가 있었다. 다음날이 토요일이었고 일을 쉬는 날이었기 때문에 자명종 시계가 없이도 잠을 잘 수가 있었다. 데이몬은 거의 10시 경까지 잠을 잤다. 옛날에 상선을 타고 대양을 누렸을 때 이후로 가장 잠을 많이 잔 편이었다. 제 17장 지상 최대의 거짓말 주말은 유쾌하게 지나갔다. 맨프레드는 영화광이었는데 특히 범죄에 관한 영화를 좋아했으며, 극중에서 가장 심각한 순간이 전개되는 동안에도 큰 소리로 웃어댔다. 수사관들이 용의자를 조사하고 문제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미궁에서 헤메는 과정이 너무나도 복잡해서 다른 사람들은 쉽게 이해를 할 수가 없었으나, 신통하게도 맨프레드는 정확한 흐름을 파악하면서 영화를 감상했다. 영화 중간 중간에 맨프레드는 자신이 경찰관으로 근무했을 당시 겪었던 경험을 데이몬에게 들려 주기도 했다. 데이몬은 단 이틀 만에, 뉴헤이븐이 예일 대학교가 있는 곳으로만 알고 있었다가 맨프레드의 입을 통해 구석구석까지 완벽하게 파악하게 되었다. 데이몬은 이틀간의 주말을 즐겁개 보냈으며 웨인슈타인 저택을 지나 가다가 정원 손질을 하고 있던 맨프레드와 만나게 된 것올 후회하지 않게 되었다. 컨디션도 그 어느 때보다 좋아졌다. 일요일 밤, 맨프레드는 자신이 직접 저녁 준비를 하겠다고 주장하면서 삶아서 짓이긴 감자와 청완두, 고기 국물로 미국식 포트 로우스트(남비에 넣고 볶은 고기 요리)를 만들었다. 디저트로는 애플 파이를 만들 예정이라고 했다. 허리에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는 걷어 올리고서 맨프레드는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털이 난 굳세게 생긴 팥뚝을 드러내놓고 가슴에는 권총 멜빵을 찬 채 왔다 갔다 하는 맨프레드의 모습은 조그마한 주방에 비해서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맨프레드는 정말이지 경험이 풍부한 요리사 같았다. 데이몬은 주방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아파트를 진동하는 향긋한 냄새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맨프레드가 뚱한 표정으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나?" 하고 맨프레드가 물었다. "자네 모습이 아주 재미있구만." 데이몬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슬쩍 칭찬을 해주었다. ''이거 정말이지 벌써부터 군침이 도는 걸." "칭찬은 아직 일러." 맨프레드는 데이몬의 칭찬을 능청스럽게 받아넘겼다. "먹어 봐야 맛을 알지. 먹어 보고 나서 놀라지나 말게.'' 식사를 한 후 맨프레드와 데이몬은 워싱턴 광장 근처에 있는 한 바아로 들어갔다. 바아의 조명은 약간 어두웠으나그런 대로 아늑한 편이었다. 멀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둠 속에 묻혀 있었으나, 근처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분명히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의 밝기였다. 바아의 한쪽 구석 선반 위에는 공중전화가 놓여 있었는데, 그 근방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하지만 전화 거는 사람의 목소리가 맨프레드와 데이몬이 앉아 있는 곳까지는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신경을 자극하지는 않았다. 바아 주인인 토니 세나글리아고는 조용한 분위기에서 손님들이 술을 마실 수 있도록 많은 신경을 썼다. 실내 공간은 은은한 조명으로 조용한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가급적이면 불 필요한 소리를 제거하려고 했다. 토니는 자기 바아를 찾아오는 최고의 손님들이 묵묵히 술을 마시거나 친구들과 조용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누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토니의 바아는 여자나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서 찾아가는 술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토니는 여자 손님들에게도 각별한 신경을 썼다. 동행이 있든 없든 간에 토니는 자기 바아를 찾아오는 여자 손님에게 테이블을 하나 마런해 주었다. 여자 손님들이 바아에 앉거나 서서 술을 마시겠다고 주장할 경우에는 "그렇게 해서 안 된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라고 말하면서 손님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바텐더에게 여자 손님들을 극진히 대접하라는 주의를 주기도 했다. 토니는 쓸개도 없는 남자 새끼라고 불리워지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개의치 않았으며 데이몬은 토니의 그러한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토니는 굉장한 독서광이었으며 자기가 옛날에 학사 주점을 운영했을 때는 수많은 문인, 학생들과 교류를 가졌었다고 자랑을 늘어 놓기도 했다. 데이몬은 눈에 뛸 만큼 탁월한 작품이 사무실에 들어오면, 토니에게 그 사본을 한부 건네 주고 나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괜찮은 곳이군." 바아의 높은 의자에 앉으면서 맨프레드가 이렇게 말했다. 맨프레드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 보았다. "무얼 들겠나?" 데이몬이 맨프레드에게 물어 보았다. 맨프레드는 극히 이례적으로 맥주를 시켰다. 데이몬이 스카치 소다를 마시는 것을 지켜 보면서, 맨프레드는 자신도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난 뒤 이렇게 말했다. "맥주 한 잔마셨다고 해서 죽지는 않겠지. 의사들은 술한 숟가락만 마셔도 알콜 중독 증세가 다시 도질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말이야." "자네가?" 데이몬이 깜짝 놀라면서 물어보았다. "자네가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단 말인가?" "한때는 24시간 술에 취해서 정신을 못 차렸던 적도 있었네." 맨프레드는 우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다 집 사람을 태우고 운전을 하던 중 나무를 들이 받은 다음부터는 술을 끊었지. 그게 8년 전이었네. 우리 어머니가 집안 구석구석에 술병을 감추어 두고 몰래 음주를 했었다는 걸 알고 있었나?" "아니. 오늘 자네한테 처음 듣는 이야기일세." "끌끌, 어머니는 지독히도 술을 좋아하셨었다네." 데이몬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어린 시절 맨프래드와 데이몬에게 우유와 과자를 주었던, 항상 파란색 앞치마를 두르고 지냈던 그토록 현모양처 같았던 여인이었건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머물렀던 고향은 데이몬이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깨끗하지는 않았다. 금요일 저녁에 서로 의견 충돌을 일으키고 난 이후로 데이몬과 맨프레드는 줄리아 래치와 그녀의 아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데이몬은, 맨프레드가 자신이 그 말다툼에서 이겼으며 데이몬이 줄리아 래치의 남편에게 비밀을 털어놓겠다는 생각을 포기했다고 확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맨프레드는 분명히 말다툼에서 지는 것에는 익숙하지가 않은 사람이었다. "음주는 말이야..." 맨프레드가 말을 이어 나갔다. "자전거 타기하고 똑같다네. 아무리 오랫동안 손을 끊었다고 하더라도, 결코 잊어버리는 법이 없지. 자전거를 배우고 나서 한 몇 년 동안 안 탔다고 해서 자전거를 못 타는 경우란 없거든. 음주도 똑같아." 맨프레드는 맥주 잔을 다 비우고 나서 또 한잔을 주문했다. "내가 한 잔을 더 주문하거들랑 내 팔을 분질러 버려도 좋아." "이제서야 자네가 인간답게 보이는군. 마침내 약점을 드러냈으니까 말일세." "약점이 인간적인 것이라면," 맨프레드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어 나갔다. "나만큼 인간적인 사람도 없을 걸세. 암, 그렇고 말고." 맨프레드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이야기의 화제를 얼렁뚱땅 돌려 버렸다. "근데 말이야. 아무래도올리버 가브리엘슨, 그 친구가 우리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가 미스 월튼과 이야기를 하려고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올리버가 왜 자캣을 벗지 않느냐고 내게 물어보더군. 사무실이 따뜻하니까 자켓을 벗고 있으면 훨신 좋을 텐데 왜 입고 있느냐는 질문이었지. 그리고 내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올리버는 내 어깨 밑에 불룩 튀어나온 부분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네. 그리고 내가 어느 대학교에서 영문학 학위를 받았느냐고 물어보더군." "그래, 자네는 뭐라고 대답했나?" "오클라호마에 있는 대학교 이름을 아무렇게나 하나 지어냈지. 올리버가 다시 물어볼 경우에 대비해서 그 이름을 기억해 두어야겠어. 버트남 크리스찬 대학교. 어때 ? 그럴 듯한 것 같지 않아? 버트남은 내가 해군에 있었을 때 모시고 있었던 상관의 이름일세. 갑자기 대답하려니까 생각나는 것이 그 사람 이름이더군.'' 데이몬이 웃음을 터뜨렸다. "올리버의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 그 이름을 찾아 보려고 할지도 모르지. 올리버가 그런 대학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오면, 그때는 어떻게 할 작정인가?" "제 2차 세계대전 동안에 패교 조치했다고 말하면 돼지." "올리버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올리버도 알고 보면 패 똑똑한 편이니까. 상황 판단도 잘하고. 이번 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 집사람이 올리버에게 의뢰를 한 적도 있었거든." 맨프레드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데이몬, 나는 자네의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하겠네. 일종의 강박 관념 때문에 그러는 건가? 툭 하면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주장하니... 자네 알고 있어야 될 필요성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 "있지. 원폭을 만들면서 맨해턴 프로젝트에서 사용한 말이 아닌가. 아마 일을 하는 데 필요한 것만 사람들에게 얘기해주고 그 이상은 말해주지 말라는 뜻이지." "맞아. 아주 훌륭한 논리라고 볼 수 있지. 모든 것에 적용되는 말이야. 정부, 기업체, 결혼생활... 적용되지 않는 곳이 없어. 근데, 자네는 인디애나의 그 미친 여자와 자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제수씨가 알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지금 알아서는 안 되지." "지금 알아서는 안 되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영원히 알아서는 안 돼. 자네는 내게 지금의 결혼 생활이 아주 만족스럽다고 얘기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그 행복한 결혼생활을 깨뜨리려는 것은 또 무슨 심보인가?" "잠깐만, 그 얘기는 이쯤에서 그만두도록 하세." 하고 데이몬이 말했다. "하지만, 결혼 얘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네만, 자네는 왜 재혼을 하지 않았나?" "나는 일편단심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군." 맨프레드가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이 거짓일지도 모르지. 결혼은." 맨프레드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 나서 말을 이어 나갔다. "나하고 결혼하려는 여자가 누가 있겠나? 아이오 지마의 해수욕장처럼 생긴 얼굴에다가,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고 지낼 정도의 연금으로 생활하는 비계덩어리 전직 경찰관과 결혼을 하려는 여자가 누가 있겠느냐는 말일세. 자네는 어떤 여자가 나에게 시집 오리라고 생각하나? 만나는 남자들마다 퇴짜를 놓은 노처녀 학교 선생이나, 비슷한 취미를 가진 동반자를 구한다고 잡지의 독자란에 편지를 띄우고 있는 유방이 허리까지 축 처지고 검은 머리카락보다는 흰 머리카락이 더 많은 과부, 아니면 자식새끼가 주렁주렁 달린 돈 없는 이혼녀와 내가 결혼하기를 바라고 있는 건가 자네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소리야, 암그렇고 말고." 맨프레드는 남아 있던 맥주를 단숨에 다 들이켰다. "나는 존중하는 것이 딱 두 가지가 있다네. 바로 섹스와 나 자신이지. 만일 재혼을 하게 된다면, 존중하는 그 두 가지와 영원히 이별하게 될지도 몰라." 맨프레드는 자기 앞에 있는 빈 잔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유태교에서는 아내가 죽게 될 경우, 남편은 자기 아내의 언니나 여동생과 결혼을 해야 된다고 규경해 놓고 있지. 나는 집사람을 무지무지하게 사랑했기 때문에 집사람의 언니나 여동생과 결혼을 하라고 한다면, 전혀 개의치 않고 순순히 응했을 걸세."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나?" "우리 집사람에게는 언니나 여동생이 없었기 때문이지." 맨프레드는 마치 자기가 한 농담을 즐기고 있는 허심탄회한 코미디언처럼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데이몬은 맨프레드의 웃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이렇게 물어 보았다. "자네는 유태교 교리대로 생활하고 있나?'' 데이몬은 웨인슈타인 저택에서 그런 분위기를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 맨프레드는 금방 정색을 하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돼지고기를 먹고, 유대 교회에 들어가 본 것은 범인을 체포하러 갔을 때 뿐이었네. 하지만, 싫든 좋든 간에 내가 유태인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나는 성경을 읽기는 했지만.." 데이몬은 잠시 말을 멈추고서 고개를 저었다. "실천을 하지는 못하고 있네. 하지만 누구라도 다 그러할 거야. 종교는 말이지." 맨프레드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힌하기가 무척이나 힘든 모양이었다. ''마치 신비를 감추고 있는 크고 둥근 주름과도 같아." 맨프레드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공을 잡으려는 듯 두 팔을 벌렸다. "위성이나 태양계처럼 거대해서 그 지름을 측정하려면 광년을 사용해야 될 그러한 구름 덩어리라고 볼 수 있지. 그리고 모든 종교는 그 구름 덩어리의 바깥에서 빙빙 맴돌고 있는 거야. 그래서 모두 눈 깜짝할 사이에 각기 다른 부분만을 보게 되는 것이라네. 구름덩어리의 한가운데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지는 못하고서 말이야. 우리 누이와 결혼했던 그 빌어먹을 놈의 무신론자는 그래서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네. 모든 종교는 인류를 현혹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모두들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종교는 지상최대의 거짓말을 늘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상최대의 거짓말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겠나? 바로 인간 영혼의 불멸성일세. 맨프레드는 지금까지 마신 맥주가 뱃속에서 갑자기 시큼해지기라도 하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 빌어먹을 놈은 한 방 먹여 주고 싶을 정도로 자신만만했다네. 내가 참을 수 없는 점은, 숫자나 현실 경험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확신을 한다는 것일세. 얼토당토 않는 것들이 판치는 세상이라고나 할까?" 맨프레드는 빈 잔을 만지작거렸다. "현혹! 그렇게 나쁜 말이 아닐 수도 있지. 하지만 나이를 먹다 보니까 현혹이라는 말이 우습게만 여겨지더군. 나를 현혹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네. 나는 내가 죽게 되리라는 사실에 현혹되지 않아. 자네가 죽게 된다고 해도 마찬가지일세. 아내의 죽음도 그렇고. 그리고 내게 불멸의 영혼이 있다는 사실이 진짜 드러나게 되면, 그것이 내게는 최악의 형벌이 될 걸세. 나는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려퍼지게 될 때 신의 법정에 출두하고 싶지가 않아. 언젠가 내가 자네에게 말했던 용서의 경우에는, 글쎄... 그 개념은 사용될 수가 있을 거야.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15년 전에 바보 같은 짓을 했던 나 자신을 용서하지 않고 있다네. 휴우..." 맨프레드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소리를 지껄여대다니, 술이 부족한 모양이군." 맨프레드는 바텐더에게 맥주 한 잔을 더 주문했다. "로저, 다시 한 잔을 더 주문하게 되면 내 팔을 부러뜨려도 좋다고 했던 약속을 연기해야 되겠네. 이 잔 말고 또 한잔을 시키게 되면 그때 부러뜨리도록 하게." 맨프레드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음에 슐터를 만나게 되면, 어떤 것에 현혹되느냐고 한번 물어 보게나. 미안하이,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맨프레드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 나서 말을 이어 나갔다. "너무 오랫동안 혼자서 살아오다 보니,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못 된 버릇이 생겼어." "나는 결혼을 해서 혼자 살고 있지는 않지만," 데이몬이 말했다. "가끔 신나게 떠들어대는 버릇이 나에게도 있어. 로날드 레이건이나 브로드웨이의 연극계에 관한 얘기를 내가 늘어놓기 시작하면 자네 귀가 모르긴 해도 꽤나 피곤하게 될 거야." 데이몬은 맨프레드의 우울한 심정을 달래주기 위해서 가볍게 농담을 해 보았지만, 맨프레드의 얼굴에서 우울한 기색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놈의 세상은..." 맨프레드는 푸념을 늘어놓다 말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서는 말문을 닫아 버렸다. 적어도 오늘 저녁만큼, 수많은 세상의 악을 자기의 능력으로는 제대로 묘사할 수가 없다는 데도였다. 맨프레드는 고개를 돌려 잠시 텔레비전의 화면을 주시했다. 한 맥주 회사의 광고가 방영되고 있었다. 그 광고의 내용은, 석유 탐사를 하는 근로자들이 땀을 뻘뻘 홀리면서 팔뚝을 걷어 붙인 채 일을 하다가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질 무렵 맥주로 갈증을 해소한 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텔레비전에서 술마시는 장면을 방영하지 못하도록 규제해 놓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술마시는 장면은 안 나오고 거품이 흘러 념치는 맥주 잔만 화면에 나타났다. ''빌어먹을 놈들..." 짜증스런 목소리로 맨프레드가 말했다. "저 따위를 선전이라고 내 보내다니, 한심한 놈의 새끼들..." 맨프레드는 남아 있던 맥주를 단숨에 죽 들이켰다. "로저, 여기서 나가세." 맨프레드와 데이몬이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는 거의 한 밤중이었다. 맨프레드는 계속해서 하품을 했다. 맨프레드는 자기가 묵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오늘 밤은 내가 너무 실수를 많이 한 것 같으이. 미안하네. 아침이 되면 괜찮을 거야. 잘 자게, 친구." 데이몬이 자기 침대로 올라가서 불을 껏을 땐, 이미 맨프레드의 코고는 소리가 아파트를 진동하고 있었다. 데이몬은 전화벨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데이몬은 깊은 잠 속에 빠져 있다가, 표면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찰흙같은 물을 헤쳐나가며 헤엄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데이몬은 돌아누워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맨프레드의 코고는 소리가 언제부터인지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침대 옆에 놓아 둔 야광 시계는 3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데이몬?" 데이몬은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깨닫고서 잠이 확 달아났다. ''잘로프스키요. 당신을 만나고 싶소이다. 10분, 10분 내에 이곳으로 오시오. 나는 지금 당신의 아파트 근처에 와 있소." "잠간만." 데이몬이 잘로프스키의 말로 가로막았다. "나는 아직까지 잠이 덜 깬 상태요." 바로 그때, 침실 문이 열리면서 맨프레드가 잠옷바람으로 나타났다. "내 말 잘 들으시오." 잘로프스키가 단도직입 적으로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겠지만, 나는 정확히 10분 동안 기다리겠소. 장소는 워싱턴 뮤츠.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는 당신도 알고 있을 것 같소만." "알고 있소." "다소 심각한 대화를 나누기에는 딱 좋은 어둡고 조용한 장소요. 자기 신상을 염려한다면, 공연히 허튼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다시 한번 경고를 해 두지만..." "경고는 이미 충분히 받았으니까, 이젠 그만뒀으면 좋겠소." 잘로프스키가 전화를 끊었다. "바로 그놈이야." 전화기를 원래 있던 대로 갖다 놓으면서 데이몬이 말했다. "짐작하고 있었네." "지금 워싱턴 뮤츠에 있다는군. 오늘밤 바아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리가 지나왔던 곳일세. 워싱턴 광장 조금 못 미쳐서 있지. 뒷쪽에 보행자 출구가 몇 개 더 있고 말일세" "자네 뒤를 따라가도록 하지." 하고 맨프레드가 말했다. "한 칠 팔십 야드 정도 떨어져서 말일세." ''그놈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잠시 얘기를 나눌 시간을 주게." 데이몬이 옷을 입으면서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말게나. 나는 자네가 위급할 때 나타날 테니까." "그래, 지금 기분이 어떤가? 초조한가?" ''별로 그렇지는 않아. 호기심을 느끼고 있을 뿐이야." ''좋아." 맨프레드는 옷을 같아 입기 위해서 자기 방으로 걸어갔다. 데이몬과 맨프레드는 따로 따로 아파트를 나섰다. 맨프레드는 데이몬이 나간 후 약 일 분 동안 계단에서 기다리다가 밖으로 나와서, 데이몬이 63번가로 꺾어지는 순간부터 뒤따라가기 시작했다. 거리에서는 사람을 찾아 보기가 힘들었다. 가끔 자동차가 옆을 지나갔으며, 데이몬은 근처에서 두 사람 밖에 보지 못했다. 그들은 술이 잔뜩 취해서 서로 어깨동무를 한 채 목 쉰 소리로 노래를 불러대면서 시내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데이몬은 그들이 군가틀 부르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서 군대 생활을 함께한 사이라고 생각했다. 데이몬은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머리속은 맑기만 했고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데이몬은 맨프레드가 따라오는 지를 알아보려고 뒤를 돌아 다보지는 않았다. 맨프레드는 워싱턴 뮤즈의 입구에 도착해서 걸음을 멈추었다. 워싱턴 뮤즈는 거리라기 보다는 차라리 골목길이라고 불리워지는게 어울릴 정도로 협소한 거리였다. 워싱턴 뮤즈의 입구 쪽에 있는 건물의 유리창을 통해서 홀러 나오는 단 하나의 불빚을 제외하고는 주변이 온통 암흑 천지였다. 데이몬은 1백 야드 길이의 워싱턴 뮤즈 거리에서 움직이는 물체를 전혀 발견할 수가 없었다. 데이몬은 반대 쪽 입구가 있는 가운데로 천친히 걸음을 옮겼다. 주정꾼 두 명의 노래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그들도 워싱턴 뮤즈의 입구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 같았다. 데이몬은 혹시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집이 워싱턴 뮤즈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데이몬이 마지막 집에서 20야드 정도 떨어진 곳까지 걸어 갔을때, 어둠 속에서 그림자보다 조금 더 시꺼먼 물체가 한 쪽에 붙어 서 있다가 약간 움직였다. ''좋소." 낮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서 멈추시오." 데이몬은 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신장과 체격은 어느 정도 추측할 수가 있었다. ''마침내, 마침내 만났구만." 데이몬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오?" "재미있는 일은 아니라고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시꺼먼 물체가 데이몬 쪽으로 다가왔다. ''좌우지간, 내가 여기에 오지 않았소. 혼자서." 데이몬은 맨프레드의 모습이 보이는지 뒤를 돌아다 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저 사람들은 당신 친구요?" "저 사람들이라니, 도대체 누굴 말하는 거요?" "노래 부르고 있는 저 사람들 말이오." "나하고는 상관없는 사람들이오. 아까 지나오다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술 취한 사람들 같습디다." "그 따위 트릭에 내가 넘어가리라고 생각했었소? 주정꾼 이라... 그건 어디서 배운 수법이오?" 노래 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려 왔다. 데이몬은 소리가 들려 오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까 마주친 적이 있었던 그 두 사람이 워싱턴 뮤즈의 업구에 멈춰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어느 한 순간, 벽 쪽에 붙어 있던 시꺼먼 물체가 입구로 걸어 오다가 건물의 유리창에서 흘러나오는 불빚에 그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바로 맨프레드였다. "빌어먹을 !" 잘로프스키는 순간적으로 욕설을 퍼부으면서 데이몬을 거칠게 밀었다. 그바람에 데이몬은 몸의 중심을 잃고서 잠시 휘청거렸다. 잘로프스키의 권총이 불을 뿜는 순간, 엄청난 총성이 들려 옴과 동시에 데이몬은 맨프레드가 쓰러지는 걸 보았다. 데이몬은 잘로프스키를 향해 몸을 날렸다. 잘로프스키는 뜻밖의 기습에 몸을 휘청거리면서 다시 한 발을 발사했다.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노래를 부르던 두 사람 중에서 한 명이 도로 위에 고꾸라졌다. 동시에 데이몬과 잘로프스키가 몸을 엎치락거리고 있는 곳과 마주 보고 있는 집의 불이 환하게 켜졌다. 잘로프스키는 놀라울 정도로 힘이 세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데이몬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데이몬은 불빚 때문에 잘로프스키의 얼굴을 희미하게나마 쳐다볼 수 있었다. 잘로프스키는 숨을 헐떡거렸다. "'이 늙은 당나귀 같은 새끼 !" 잘로프스키가 욕설을 퍼부었다. ''오늘 있었던 일은 반드시 보복을 해주마 !" 데이몬은 워싱턴 뮤츠의 입구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겨우 3피트 정도 뛰어갔을 때, 또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그러나 이번에는데이몬의 앞쪽에서 들려왔다.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채 맨프레드가 총을 쏘았던 것이다. 데이몬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 보았다. 잘로프스키가 워심턴 뮤즈의 반대 편 입구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잘로프스키는 오른쪽 팔을 거머쥔 채 약간 비틀거렸으나 행동은 몹시 신속했다. 잘로프스키는 눈깜짝할 사이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데이몬은 맨프레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맨프레드는 땅바닥에 길게 누운 채 피를 홀리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제 18장 병자의 이기심 "들어가 보시지요." 하고 의사가 말했다. ''웨인슈타인씨가 의식을 회복하고 당신을 찾고 있읍니다. 그렇지만 오래 계시면 안됩니다." 데이몬은 슐터 경위와 함께 웨인슈타인과 잘로프스키의 두 번째 총탄에 맞은 술취한 사람이 실려 들어온 병원의 중 환자실과 같은 층에 있는 작은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정말 그날은 기나긴 하루였다. 총격은 새벽 3시 36분 조금 지나서 일어났고, 지금은 오후 7시였다. 맨프레드가 수술을 받고 있는 동안 처음에는 다른 형사들이 데이몬을 심문했으나 나중에 슐터가 와서 심문을 인계받았다. 다행스럽게도 경찰이 신문 기자들을 몽땅 병원 밖으로 몰아냈으나, 데이몬은 신문의 첫 장에 어떻게 기사가 실릴지 능히 상상할 수가 있었다. 그는 실라와 1시까지 통화를 할 수가 없었으나 연락을 받고 그녀는 버몬트에서 오고 있는 중이며 당장에라도 도착할 것이었다. 슐터는 놀랄 만쿰 친절했고 데이몬을 위해 샌드위치와 커피를 시켜다 주겠다고 고집했다. 그는 데이몬에게 총격 사건에 관련된 모든 사람의 모든 행동을 묘사하도록 되풀이해서 질문했다. 잘로프스키가 사용한 총이 발견된 문 앞과 웨이버리 프레스의 모퉁이의 한 지점에서 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슐터가 데이몬에게 말했다. 한 목격자는 한 사나이가 그곳에 주차해 놓았던 자동차에 뛰어 올라 차를 몰고 떠나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불행하게도 그 목격자는 자동차의 번호를 확인하지 못했다. 더욱 불행한 것은 데이몬이 범인의 인상을 중키에 뚱뚱한 체구를 하고 힘이 세어 보이더라고 밖에는 증언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범인은 총을 맞고 비틀거리면서 거의 넘어질 뻔했으나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허우적거리며 사라졌다. 총알은 그의 바른쪽 옆구리나 바른 팔을 관통 했음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총을 바른손에 들고 있었고, 총을 맞은 직후에 총을 떨어뜨렸기 때문이었다. "놈은 심한 총상을 입었으니까 그다지 멀리 도망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하고 슐터가 말했다. "머지않아서 놈은 의사의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놈이 진찰실이나 병원을 나간 지 10분 이내에 우리는 놈을 체포할 수가 있을 겁니다." "일이 잘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하고 데이몬이 말했다. "그리고 내일도 잘 되기를." 하지만 그는 슐터 만큼 확신을 갖지는 못했다. 맨프레드는 무릎에 총을 맞았는데 중상이었다. 맨프레드는 갑자기 많은 피를 흘렸는데 그 상태에서 발포를 하고 흔들리는 희미한 불빚에서 범인을 명중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에 슐터는 놀라고 있었다. 슐터는 워싱턴 뮤즈의 5번가 입구에서 군가를 부르고 있던 사나이의 죽음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잊어버렸다. 그 따위 사건은 뉴욕에서 매일처럼 일어나는 흔해 빠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슐터의 말을 빌면 평균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었다. 슐터가 방관자들을 위험에 몰아 넣어도 되는 인종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데이몬은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슐터가 타인의 생명을 판단하는 기준이 그 자신과는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경우를 볼 때, 지난 2주일 간의 평균적인 사건은 이미 그 평균치를 훨씬 초과하고 있었다. 데이몬이 잘로프스키와의 약속 장소로 가던 중이더라도 새벽 길에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사람을 보았다면 어떤 조처를 취했어야만 했다. 한밤중에 63번가에서 주정을 하던 인간이 그 속에 포함 될는지는 모르나 슐터의 통계 숫자는 데이몬의 리스트에 있는 다른 피해자들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았다. 즉 모리스 피츠제랄드, 멜라니, 엘지 웨인슈타인, 줄리아 래치, 그리고 실라의 모친, 또 맨프레드 웨인슈타인 자신 등.... ,데이몬은 자신이 신경 과민이고 병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만일 누군가가 로저 데이몬과 어떤 연관이라도 있으면 그 자리에서 당장 살해당하거나 지난 2주일 동안에 살해당할 수도 있었다는 느낌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저격당한 사나이의 신원이 밝혀졌다. 그의 이름은 브라이언트였고 오클라호마의 회사로부터 뉴욕으로 보험 회사의 간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왔었다. 데이몬은 감당할 수 있는 손실에 관한 모리스 피츠제랄드의 연설을 기억하고, 슐터가 불행한 브라이언트씨를 그 속에 포함시킬 것인가 하고 궁금해 했다. 맨프레드는 병원 침대 위에 창백한 얼굴로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의 팔에는 수혈 튜브가 꽃혀 있었다. 그의 볼은 움푹 파였고 시트 밑의 생기없는 육체도 오그라든 것처럼 보였으나, 안 쪽 깊숙이 박힌 눈은 긴장해 있었다. 방안에 환자는 그 하나 뿐이었다. "몸은 어면가?" 데이몬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숨은 쉬고 있네." 하고 맨프레드가 가느다란 소리로 말했다. "의사가 그러는데 곧 괜쟎아지리라고 하더군." ''틀림없이 그 얘기를 모든 여자 애들에게도 했겠지." 맨프레드가 애써 웃어 보이려고 했다. "어쨌든 두 달 가량이면 걸을 수 있게 된다니까." 하고 데이몬이 말했다. "걸어서 어디를 갈 수 있겠나?" 하고 맨프레드가 물었다. "그건 그렇고 자네는 어떤가?" "나는 괜찮네." 데이몬이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아." ''억세게 운이 좋군 그래." 밴프레드가 데이몬의 손을 잡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손에 힘이 없었다. "나는 자네 걱정을 했네, 놈은 도망쳤겠지, 응? 흐음, 자네 말대로야. 슐터는 멀리 못갔을 거라고 했네. 자네가 그를 관통시켰으니까 도망치기도 힘들었을 거야." "놈을 단방에 쓰러뜨려야 했는데, 그놈의 세 번째 맥주 때문에 그만..." 맨프레드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게다가 자네가 내게로 뛰어오는 통에 놈이 가려서 두 방째는 쏘지 못했어. 그 다음에 아마 기절했나 보지. 나같은 놈이 경호원이라니, 서툴기는..." "어쨌든", 데이몬이 말했다. "자네가 내 목숨을 구해준 거야. 그래서 위안이 된다면 말일세." "위안이 되네." 웃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창백한 입술에 떠올랐다. "내 뒤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던 사람 중의 하나가 비명을 질렀는데, 그도 총에 맞았나?" "그는 죽었다네." "어이구, 하느님 맙소사 !" 맨프레드가 신음소리를 냈다. ''무엇인가 알아낸 것이라도 있나? 대채 그놈은 누군가?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했을까?" "아무것도 몰라." 하고 데이몬이 대답했다. "놈은 의심하고 있었어. 노래를 하고 있던 두 사람이 나를 엄호하는 줄로 생각했던 모양이야. 그러자 그때 자네를 보게 된 거지." "항상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게 마련일세." 맨프레드가 목쉰 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은 파티에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운 나쁘게 그곳에 온 거야. 자네는 운이 좋았어." 맨프레드가 손을 데이몬의 손에서 빼냈다. "미안하네.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어. 약을 너무 많이 먹어서 두 주일 가량은 나를 이렇게 잡아둘 모양일세. 하옇든 몸 조심하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나는.." 맨프레드는 눈을 감고 약기운에 못이겨 잠이 들었다. 데이몬은 긴장으로 숨을 죽인 듯한 분위기의 중 환자실을 벗어나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다른 방의 열려진 문앞을 지나며 산소 마스크를 쓰고 기괴하게 붕대를 감은 환자들의 삶과 죽음을 그려내는 맥박이 나타나는 스크린을 웅시하고 있는 간호원들을 보았다. 그는 중환자실의 인간의 구원된 파편을 보며 이곳은사망을 장사로 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실라가 올리버와 함께 이전보다 더욱 창백한 얼굴로 데이몬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버몬트를 출발하기 전에 올리버를 전화로 불러 그를 공항까지 마중나오게 했다. 그녀의 가방이 발치에 놓여 있었고 불안의 빚이 그녀의 얼굴에 깊이 박혀 있었다. 데이몬이 방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말없이 팔을 둘러 그를 안았다. 그들이 그날 밤 맨프레드를 위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데이몬은 피로에 지친 나머지 비틀거렸다. 그래서 그는 올리버가 실라에게 권하는 대로 그의 아파트에 머물기로 하고 의사에게 밤새 급한 일이 생기면 올리버의 아파트로 연락해달라고 부탁을 한 다음, 그들은 정문에 대기하고 있는 신문 기자들을 피해 슐터를 따라 뒷문으로 가는 좁은 낭하를 걸어갔다. 슐터는 이제 한사람의 사망자와 두 사람의 부상자라는 증거를 확보했기 때문에 데이몬의 문제를 귀찮아 하던 태도는 보호자적인 열망으로 변했다. 따라서 뉴욕에서 하루밤에 만통에 이르는 음란 전화를 거는 변태 성욕자들에 대한 언급은 없어졌다. 그는 올리버의 아파트까지 동행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면서 택시에 올라탔다. 그리고 데이몬이 마치 환자나 되는 듯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 주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슐터가 아파트의 정문 앞에서 헤어질 때 말했다. ''내 도움이 필요하거나 내가 꼭 알아야 될 일이 있으면, 전화를 주십시오. 2, 3일 동안은 정리해야 할 조서들이 있어서 바쁘긴 하지만 대수로운 것은 아닙니다. 누구도 이번 일을 연방 관할 사건으로 넘기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는 실라를 보고, "데이몬 부인, 부군을 잘 보살피세요. 그분은 무척 용감한 분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특히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라고 말한 다음 슐터는 괴상하게 생긴 모자를 들어 보이고 택시를 다시 타고는 가버렸다. 도리스 가브리엘슨은 작은 몸집에 정직해 보이는 금발의 여인으로, 말의 억양이 너무 높아서 문장의 끝에 가서는 거의 숨이 막힐 정도였다. 그녀의 친절은 어떤 경우엔 데이몬을 오히려 곤혹스럽게 만들었으나, 그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그녀의 진심으로부터의 우려와 그녀의 애정에 찬 따뜻한 환영은 데이몬을 더없이 기쁘게 했다. 접객용 침실에는 그들을 위해 꽃들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모든 신문들은 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재치있게 치워져 있었다. 도리스는 찬 고기와 치즈와 감자 샐러드를 식탁에 차려놓고 식사 전에 데이몬에게 소다수가 적게 들어간 스카치를 주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도 술을 권하고 자신도 한 잔 따라서는 마시기 전에 잔을 들고 말했다."모든 일이 잘 되기를. 그리고 웨인슈타인씨의 건강을 위해서 !" ''아멘" 하고 올리버가 말했다. 스카치는 데이몬의 목을 내려갈 때 타는 듯한 강렬한 자극을 주었고 불과 일이 분 안에 효과가 즉시 나타났다. 그것은 격리감과 몽상적인 유쾌한 감각과, 안락하고 편안한 느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는 감각과, 남의 안전한 손 안에 있다는 신뢰감,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결정을 내릴 필요성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등의 안도감 같은 것이었다. 그는 배가 고프지는 않았으나 양순한 어린애처럼 의무적으로 식사를 했고, 도리스가 따라준 찬 맥주를 목마른 사람처럼 들이켰다. 식사가 끝나자 데이몬이 말했다. "실례해야겠읍니다. 완전히 지쳤어. 잠깐이라도 누워야겠소." "그렇게 하세요." 하고 도리스가 말했다. 실라가 침실로 따라 들어와서 데이몬이 침대에 걸터 앉자 구두를 벗겨주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병원에서 그를 포옹한 이후로 거의 말을 하지 않았었다. 그것은 마치 그녀의 몇 마디 말이 지금까지 그녀의 내부에 잠가둔 감정의 분류를 풀어 헤칠까 봐 겁을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여보, 푹 쉬어요." 실라가 데이몬에게 담요를 덮어준 뒤 말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세요, 당신은 훌륭한 친구들을 많이 갖고 있으니까. 나는 올리버와 함께 집으로가서 당신이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오겠어요." 데이몬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고 입으로 가지고 가서 키스를 했다. 그녀의 온몸이 마치 하나의 통곡으로 찢어지듯이 경련했으나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실라는 몸을 기울여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잘 자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불을 끈 뒤 방을 나갔다. 데이몬은 눈을 감고 거의 동시에 탈진한 채 꿈도 없는 깊은 잠으로 빠져들어갔다. 잠을 깨고 나서 데이몬은 한동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몰랐으나, 침대 옆에서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실라의 모습을 열려진 방문 사이로 비쳐드는 불빚을 통해 볼 수가 있었다. 아파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구역질을 하고 싶었다. 가슴 한복판에서 타오르는 듯한 감각이 위로 치밀고 올라왔다. 그는 토하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침대로부터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안 되겠어." 데이몬이 혀가 마비된 것처럼 말했다. 그의 혀는 아직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를 않았다. "토해야 될 것만 같아." 실라가 침대에서 그를 부축해 내려 화장실로 데리고 갔다. 화장실 문이 열리고 불이 켜졌다. 그는 실라에게 돌아 가라는 손짓을 하고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데이몬은 저녁식사의 대부분을 토해냈을 뿐 아니라 하루 종일 먹은 샌드위치와 커피의 대부분도 토해냈다. 그는 입을 물로 가셔 내고 실라가 갖다 놓은 세면대 위의 칫솔과 치약으로 이를 닦은 뒤 찬 물로 세수를 했다. 기분이 훨씬 나아져서 그는 침실로 돌아왔다. ''감자 샐러드가 좋지 않았던 것 같아.'' 데이몬이 실라에게 말했다. 실라가 씁쓸한 듯이 웃었다. "살인사건은 어떻구요?" 그도 무심결에 웃었다. ''몇 시나 됐을까?" 하고 그가 물었다. "새벽 2시 36분이에요." "옷을 벗어야겠군, 당신도." 옷을 벗자 퀴퀴한 땀 냄새와 공포와 병원의 집요한 약 냄새가 데이몬의 코를 엄습했다. 그는 입고 있던 모든 옷을 열려진 창 밑에 벗어 던지고 발가벗은 채 침대로 들어갔다. 침실의 트윈 베드는 데이몬 부부의 아파트를 자주 방문해서 그들 부부가 한 침대에서 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도리스에 의해서 한데 합쳐져 있는 것을 그는 알 수 있었다. 갑자기 그는 거의 믿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섹스를 하고 싶은 강렬한 욕정을 느끼고는 실라가 욕실에서 나이트 가운을 입고 나오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그 옷을 벗지 그래. 이리로 가까이 와줘." 그들은 다음날 아침 잠을 잘 때까지 다른 한쪽의 침대를 쓰지 않았다. 데이몬은 일 주일 동안 가브리엘슨의 아파트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신문 기자나 낯선 사람과 만나고 전화에 응답하고 계약서를 읽는 일을 해낼 것 같지가 않아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며 그곳에 눌러 있기로 혼자 작정했다. 보육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실라는 매일 병원으로 웨인슈타인을 방문하고는 그의 회복에 대한 고무적인 뉴스를 가지고 저녁마다 돌아왔다. 올리버가 사무실 일을 돌보고 있었는데 그는 데이몬을 아는 사람들이 매일 전화를 걸어와서 그의 상태를 묻고 안부를 전하더라는 말 이외에는 사무실 일에 대해서는 전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누가 데이몬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오면 모두에게 전혀 알 수가 없다고 충실하게 거짓말을 계속했다. ''놀랄만한 일이더군요." 하고 올리버가 말했다. ''뉴욕에서 잠적하기가 이렇게 쉬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데이몬의 눈에는 요 며칠 사이에 그가 눈에 띄게 나이를 먹은 것처럼 생각되었다. 데이몬은 올리버의 블롱드 머리에 흰머리가 섞인 것을 본 것 같았다. 아파트에는 아무도 신문을 가져오지 않았다. 데이몬은 그것이 기뻤다. 그는물론자신의 기분이 전환되기를 희망하고 있었지만, 당분간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싶은 흥미가 없었다. 최근에 대통령이 무슨 말을 했는지, 어느 나라에서 새로운 혁명이 발생했는지, CIA는 무슨 새로운 죄목으로 비난을 받는지, 브로드웨이와 오프 브로드웨이에선 무슨 연극이 공연되는지, 어떻게 금리가 인상되었는지, 그 전날 아침에 누가 죽었는지..등등. 다행히도 야구 시즌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일종의 담백한 열의를 갖고 어느 특정한 팀을 응원하는 법도 없이 시간에 맞추어 게임을 지켜보았다. 데이몬은 그토록 민첩하고 젊음에 념치는 플레이와 미국적인 활력의 무수한 증거들을 조그만 화면에서 보고는 만족해 했다. 그리고 뉴스가 시작되면 텔레비전을 껐다. 집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역시 세상 일에 관심이 없는 체 해보였다. 그리고 그들도 절대 텔레비전을 경솔하게 켜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배려를 병든 어린애처럼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야구 중계를 보지 않을 때면 그는 몇 시간이고 앞에 책을 퍼놓고 앉아 있었으나, 페이지를 념기는 일은 결코 없었다. 도리스도 처음에는 애써 쾌활하고 명랑하고 다정한 체하려고 노력했으나, 데이몬이 흔자 있고 싶어하고 조용히 그녀의 집에서 은둔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곧 알아차리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다른 사람들이 출근하고 나면 낮에는 그가 혼자서 먹을 수 있게 도리스는 그의 식사를 쟁반에 얹어 가져왔다. 그녀는 점심이나 저녁에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 일은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그녀 자신이 메뉴를 정해서는 챙반에 장미 한송이가 꽃힌 꽃병과 포도주 반 병을 곁들여 가져오곤 했다. 처음 2, 3일 동안은 포도주를 두서너 잔 마셨으나, 위에 쓰라린 통증을 느낀 다음부터는 포도주 병에 손을 대지 않았다. 데이몬은 그러한 정신적인 위화감으로 생각되는 증상에 대해서는 도리스나 실라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올리버가 거실에 있는 작은 바아에 데이몬이 좋아하는 위스키를 갖다 놓았지만 그는 술병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실라는 그의 갑작스러운 금주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밤이나 매일 오후에 취하는 낮잠을 자는 중에 꿈을 꾸는 지는 알 수가 없었으나, 깼을 때 기억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매일 밤 좁은 침대에서 한겨울에 형제의 품에서 따뜻함을 구하는 동물처럼 실라를 품에 안고 잤다. 일주일이 지난 뒤 물론 목발과 기브스를 낀 채이긴 했지만, 웨인슈타인이 두 달 가량이면 퇴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실라가 말했다. 그녀는 매일 그와 만나서 얘기를 나누는 동안 웨인슈타인과 매우 친해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텅 빈 커다란 집에서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 없이 혼자서 살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를 애처로와했다. 실라는 그가 퇴원할 때 데이몬과 함께 올드 라임에 있는 그의 집에 같이 가겠노라고 말했다. 그곳에서 그는 회복할 때까지 요양할 수가 있고 데이몬은 그곳에서 친구들의 질문과 동정과 사무실의 번잡한 업무를 피할 수가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웨인슈타인이 그 제의를 거절했다고 그녀는 데이몬에게 말했다. 그는 몇 년 동안을 혼자서 살아왔으며 데이몬을 보호하는 임무를 그토록 비참하게 실패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부담이 되기는 싫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라는 그에게 그 임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잘로프스키의 친구들이 그에게 복수를 하러 올 경우애 대해서, 또한 살아있든 죽었든 잘로프스키는 더 이상 해를 끼칠 수 없는 상태에 있을 것이라는 슐터의 확인에도 불구하고, 잘로프스키가 나타날 경우에 대비해서 웨인슈타인은 그의 총을 휴대하고 있어야 했다. 실라는 그녀의 계획을 데이몬이 동의하는지 반대하는지에 대해서 묻지 않았고, 데이몬도 질문이나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는 실라의 어머니가 어떠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는 병자의 이기심이라는 껍질 속에 자신을 은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언잰가 자기 인생의 고삐를 다시 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 시기는 아직 아니었다. 실라는 민감하게도 밀폐된 무기력 상태에서 그를 억지로 끄집어 내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으며 그를 격려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신경은 산산조각이 났고 갈기갈기 찢겼다는 것을 그는 느끼고 있었고, 아마 그녀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데이몬은 정적에 덮인 낮과 암흑의 밤에 그를 괴롭히는 유령들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의 다양한 죽은 자들과 부상자의 유령으로부터.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유쾌하고 침착하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그것이 헛된 노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한 마디의 우연한 말이 눈물과 분노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그 혼자만이 알고 있었다. 데이몬은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다는 느낌과 악마의 예감,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은 미래의 파멸과 파국에 대한 신비하고 냉소적인 전주곡이고 암시라는 공포의 감정에 의해 쫓기고 있다는 것을 실라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데이몬은 먹는 소량의 식사를 소화하지 못해서 요즘은 그가 식사 후에 더욱 자주 토한다는 사실도 실라에게는 애기하지 않았다. 그의 주변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떨어져 있으려는 거의 신앙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도리스도, 그의 하숙생이 그가 경험한 충격의 영향보다는 식사 때문에 훨씬 더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한 번에 한 가지씩 해결하자고 데이몬은 귀찮은 듯이 생각했다. 내가 이 아파트를 떠날 만큼 기운을 차리게 되면, 아무도 모르게 의사를 찾아가서 피와 뼈가 모조리 썩어가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결국은 나도 의학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는 것을 털어 놓자. 그것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 빨리 일어났기 때문에 침묵할 기회도 없었다. 총격 사건이 있은 뒤 8일째 되는 날 아침, 그는 위에 심한 통증을 느껴 일찍 잠이 깨었다. 실라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기어 내려와 몸을 구부린 채 주먹으로 념어지지 않게 마룻바닥을 짚으며 욕실로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는 거의 굴러 들어가다시피 해서 욕실로 들어갔으나 문을 닫을 힘도 의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실라의 손이 그의 이마에 와 낳았을 때도, 그녀가 그를 부축하여 세우며 말할 때도 그는 그녀를 져다보지 않았다. "이제 괜찮아요. 여보, 제가 있어요." 곧장 올리버가 욕실로 달려 왔다. 데이몬은 발가벗은 몸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실라가 옷을 입었는지 궁금했으나 그것을 쳐다보고 확인할 힘이 없었다. 올리버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텅 빈 낭하에 울려 퍼지는 것처럼 들렸다. "담당 의사의 전화 번호가 몇 번이지요?" 실라의 목소리도 마찬가지로 거의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그이는 담당의사가 없어요," 데이몬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20년 전의 불평을 들을 수 있었다. "내 담당의사는 산부인과 의사이고." 그 말이 데이몬에게는 아주 우스광스럽게 들렸다. 그는 변기에 몸을 구부린 채 낄낄거리고 웃었다. "우리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하고 올리버가 말했다. "그가 여행이나 떠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그럴 필요는 없네." 데이몬은 갑자기 고통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목의 발작도 가라 앉았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그는 몸을 똑바로 일으켜 세우고 욕실 문에 걸려 있는 가운을 입었다. "위가 약간 뒤틀렸을 뿐인 걸." 데이몬은 실라를 보고 그녀가 가운을 걸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과 입의 표정이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좀 누워서 한잠 자야겠어." "그렇게 강한 체하지 마세요." 실라가 그의 팔을 끼고 침대로 부축해 가며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침대에 눕자 그는 근육이 이완되며 위의 고통이 녹아 내리는 것을 느꼈다. 데이몬은 근심스러운 듯이 내려다 보고 있는 실라와 올리버에게 걱정 말라는 듯이 웃어 보였다. "다 나았어," 하고 그가 말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지금 무척 배가 고프다구. 오렌지 쥬스와 토스트와 커피를 부탁해도 될까?" 의사는 키가 크고 회색빚 머리를 한 핸섬한 노인으로, 브리처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환자에게 신뢰감을 갖게 하는 근엄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브리처 박사는 증세가 심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면 됩니다." 하고 그가 말했다. "며칠 동안 약간의 다이어트를 하고 식사 전에는 마아록스를 드세요. 걱정할 것은 없읍니다." 그때 그는 병을 두려워하는 것은 오랜 뉴욕에서의 개업 기간 중에 그가 부딪친 최악의 증상의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는 얼굴을 해 보였다. ''그것만 지키면 곧 회복됩니다.'' 데이몬은 올리버가 무작정 병원으로 끌고 가서 검사를 하네 사진을 찍네 하는 젊은 풋나기 의사를 데려오지 않고 양식 있는 연로한 일반의를 데려온 것에 감사했다. 데이몬은 의사에게도 깊은 사의를 표하고 실라의 눈이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불신의 의사를 나타내는 것을 무시하고, 지금 이 순간에는 지난 몇 달 등안 보다 기분이 훨씬 좋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의 증상이 별것이 아니라는 의사의 보증과 그가 처방해 준 치료의 용이함에 안심을 느낀 데이몬은, 그의 영혼을 뒤덮고 있던 검은 구름이 아침 햇살에 녹는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을 또렷이 느꼈다. 그리고 데이몬은 우울증에 사로잡혀 있는 현재의 자신의 상태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다는 생각조차 가졌다. 또한 올리버의 힌신적이기는 하나 무 경험한 손아귀에 들어 있는 자신의 사업이 더 이상 망쳐지기 전에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초조감마저 들었다. 의사가 돌아갈 때 문까지 쫓아나갔던 실라가 돌아왔을 때, 그녀의 얼굴은 이전보다 훨신 더 심각했다. "당신은 마치 어린애같이 구는군요." 그녀가 데이몬에게 말했다. "공원에서 코를 한대 얻어 맞은 어린애가 온 사방에 피를 흘리고 다니며 아무렇지도 않다고 우기는 것과 똑같아요. 당신이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어요? 당신은 수염을 깎을 때 이외에는 거울조차 본 일이 없으면서. 당신은 아마 의사를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당신의 아내를 속일 수는 없어요. 당신이 아프다면 한시라도 빨리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당신은 환자라구요. 당신이 무슨 짓을 해도 나는 못 속여요. 오늘 저녁에 내가 직장에서 돌아온 다음에 그 문제는 차분히 의논해 봅시다." 검은 눈에 하나 가득 노기를 담고 그녀는 나가면서 문을'꽝'하고 닫았다. 데이몬은 다시 베개에 머리를 올려 놓으면서 '대단한 여자로군' 하고 중얼거렸다. 옳은 일이든 그른 일이든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저녁 실라가 돌아왔을 때, 그들은 그의 증상에 관해 말읕 하지 않았다. 실라는 마치 몇 시간을 계속 울다 온 것처럼 발갛고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레고르 코다르가 그들의 아파트에 전화를 걸다 못해 보육원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에바 코다르가 로마에서 은행 앞을 지나가다가 주차해 놓은 자동차에 장치해 놓은 폭탄이 폭발하는 통에 그날 아침에 죽었다는 것이었다. 매장할 만한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고 그레고르가 실라에게 말했다. 그날 밤 침대에서 실라를 안고 수면제의 자비로운 힘을 빌어서 무의식 상태에 빠진 데이몬은 슐터 경위의 평균적인 사건에 대해 생각했다. 경위는 그의 통계에 로마를 포함시킬 것을 잊고 있었다. 어두운 방에서 실라를 껴안고 데이몬은 처음으로 자신을 눈물에 맡겼다. 왜 그 상냥하고 단순하기만 한 여인에게는 경고가 발해지지 않았을까? 그는 친구와 자신을 위해 자책의 지옥을 맛 보았다. 제 19장 중환자실 증후군 데이몬은 그레고르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벌써 3장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네 장째를 시도하고 있었다. 머리는 멍하게 무감각하고 골마다 막혀 버리고, 지각은 흐려서 안개에 뒤덮여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펀지지를 내려다 보면서 로마에서 일어난 일에 관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로써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네 장째 마저 구겨 버리려는 참인데 응접실 문을 주저하면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 와요." 하고 그가 말했다.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로저." 도리스가 말했다. "브리처 박사께서 전화로 선생님께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해서.." "고맙습니다." 하고 데이몬은 말하면서 그녀를 따라 현관으로 나왔다. 전화기는 테이블 위에 있었다. 그녀가 현관에서 나가 버렸으므로 마음 놓고 박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데이몬은 지금 시각이 겨우 아침 열 시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도리스가 스커트와 스웨터로 정장하고 머리도 단정히 손질을 했으며 화장도 약간하고 있었음을 생각했다. 자기와 실라가 가브리엘슨의 아파트로 온 이래 그는 도리스가 헐거운 잠옷을 입고 있거나 또는 머리를 풀어 해치고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데이몬은 이처럼 이른 아침부터 단정하게 옷차림을 하게 된 것은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한 주부가 편안하기만 바라고 집안 살림을 엉망으로 해 왔던 일을 방해하고 있다고는 느끼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그와같은 솜씨에 대해서 그녀에게 훗날 언젠가 보상을 해 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수화기를 들고 이렇게 말했다. ''브리처 박사님." ''데이몬 씨" 하고 의사가 말했다. "밤새도록 선생님의 병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병의 원인이 될지도 모르는 모든 증세를 말씀하고 계시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예를 들면 토했을 때 검은 것이 좀 섞여 나오던가요?" 데이몬은 잠시 망설였다. 사실이었다. 한두 번 검은 점이 있는 것을 보았지만, 커피를 마시고 있었기 때문에 커피의 색이 번진 탓으로 돌렸었다. "꼭 그렇지는 않은데요." 하고 데이몬이 대답했다. 에바 코다르에게 일이 있은 후, 몸이 이상하게 말을 듣지 않는다고 걱정한 것은 대수롭지 않은 가벼운 증상으로 여겼었다. "데이몬씨, 제 말을 들어 보세요." 하고 의사가 말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지도 모릅니다. 제 말이 호들갑을 떠는 늙은 식모의 잔소리로나 여겨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흔히 선생처럼 평생을 아주 건강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잠시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리려고 증세를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어, 의사 선생님." 하고 데이몬이 말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선생님이 말씀한 그런 종류의 이 물질을 본 것 같습니다. 네, 두서너 번 별로 많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지금 저는 전혀 감각이 없읍니다." 데이몬은 브리처 박사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의사라 할지라도 자기의 말을 정확하게 추측할 수 없다고 여겼다. ''모두를 위해서," 브리처 박사가 말했다. "그리고 특히 선생 자신을 위해서, 선생은 내가 할 수 있는 이상으로 철저한 종합 검진을 받으셔야만 합니다. 보일스톤 종합 병원의 진판델 박사와는 제가 약속을 해 두겠습니다. 그분은 시내에서는 가장 훌륭한 진단 전문의입니다. 그분이 선생을 진단하고 난 다음에라야 비로소 나도 확신을 가질 수 있읍니다." "공연히 소동을 벌이는 것 같군요." 데이몬은 말을 멈추었다. 갑작스러운 진통, 뱃속에서 어떤 뜨거운 것이 뭉클하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곧 아픔이 가셨다. "저, 선생님,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분을 만나뵙겠읍니다." "진판델 박사를 찾아가는 시간은 제 비서가 선생에게 연락해 줄 겁니다. 만일 그가 아무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내리면, 저는 물론 선생과 선생 부인께서도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럴만한 시간의 보람이 있겠지요." " 고맙습니다. 선생님." 데이몬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그는 응접실로 돌아가서 그레고르에게 보내는 펀지를 쓰던 작은 책상 머리에 가 앉았다. 그는 가까스로 종이에 두서너 마디의 말을 쓰기 시작하다가 써 놓은 글자가 삐뚤빼뚤하여 거의 읽을 수 없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는 책상 위에 팔굼치를 괴고 손으로 머리를 움켜쥔 채 눈을 감았다. 다음날 아침, 데이몬은 맨해턴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는 보일스톤 종합병원에 찾아갔다. 병원은 그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사방으로 널려 있고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모든 병상이 하늘 높이 치솟아 있는 돌벽 안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근처는 말할 것도 없고, 거리에는 이러저러한 병으로 괴로와 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데이몬은 진판델 박사의 의무실에 들어서면서 좀 바보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24시간 이상 아무런 병세의 발작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진판델 박사와의 약속을 취소하려고 마음먹고 실라에게 그 말을 했을 때, 그녀의 얼굴에서 무서운 표정을 보고 자기가 의사의 검사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고집하는 한,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올리버 또한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로스엔젤레스 시다즈 시나이 병원에 외과 의사로 있는 형에게 전화를 걸어서, 진판델 박사에대한 브리처 박사의 높은 평가를 확인해 주었다. 진판델 박사는 몸집이 작고 살결이 희고 혈색이 좋으며, 콧날이 날카롭고 정열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숨어서 보이지 않는 질병의 밀림 속에서 질병을 찾아내는 무자비하고도 지칠 줄 모르는 추격자였다. 그의 질문은 철저하였다. 진통이 일어나는 시간 간격은? 구토로 각혈이 나오지는 않는지 ? 장의 활동은? 홍역은 몇 살 때 했는가? 어머니의 사망 원인은? 아버지는? 간염을 앓은 적이 있는가? 패니실린 부작용은 없는가? 하룻밤 사이에 몇 차례나 소변을 보는가? 매독에 걸린 적이 있는지? 임질에 ? 계단에 오를 때 숨이 가쁜지? 최근에 체중이 줄거나 늘어난 적이 있는지? 일 주일에 몇 번이나 성교를 하는지? 한 달에는 몇 번이나? 어떤 종류의 수술을 받았는지? 일 년에 한 차례씩 의사의 진단을 받고 있는지? 이 병원에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의사를 찾아가 본 것은 언제였는지? 의사의 눈썹이 놀랐다는 듯 그리고 좋은 일은 못 된다는 듯 올라갔다. 진판델 박사는 손에 쥔 펜을 빨리 움직이면서 메꾸고 있던 차트에 글씨를 써 넣었다. 의료보험에 들어 있고, 보험 혜택을 받고 있는지? 언제부터 진통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 상황을 설명하라고 했다. 식성은 어뗘한가? 신 음식, 그러니까 피클, 치리, 파스트라미 같은 것을 좋아하는지? 술은 어떤 종류의 술을 드는지 설명하라고 의사는 말하였다. "보통 정도입 니다." 진판델 박사는 데이몬의 이같은 설명에, 아침에 눈 뜨기가 무섭게 자극성 있는 술을 큰 잔으로 가득히 마셔대는 주정뱅이로 부터 알콜 중독으로 섬망증에 걸려 입원가료 중에 있는 환자, 그리고 점심 시간에 브랜디 석 잔을 하고서도 다섯 잔의 마티니를 들기 때문에 직장에서 해고 당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부터 얘기를 듣고 있는 처지라 지친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데이몬씨, 선생의 보통 정도는 어느 정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녁 식사 전에 스카치 두 서너 잔 하고, 식사를 하면서 포도주 반 병, 이따금씩 친구들과 어울려서 한 잔 마시기도 하지요." 의사의 입술이 비뚤어지면서 글씨를 쓰는 손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다. 후에 데이몬은 진판델 박사가 술에 만취되어 도랑에 쓰러져 누워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둔 외아들로서, 술이라면 무엇이든 철저하게 미워했기 때문에 훌륭한 포도주의 재료가 되는 포도 이름을 설명하는 듯한 자신의 이름을 멸시할 정도로 절대 금주주의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 계속합시다. 선생은 최근 어떤 특별한 강박감을 받은 적은 없읍니까?" 데이몬은 잠시 주지했다. 데이몬은 혹시 내과를 진단하는 훌륭한 전문의사라면, 사람을 죽이거나 가장 친한 친구의 부인을 죽이기 위해서 총을 쏘아대는 일이 결국은 의부적인 질병이 되며 특별한 강박감으로서 설명할 가치가 있다고 말하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네, 있습니다.." 데이몬은 이 훌륭한 박사께서는 그 문제를 그냥 넘기기를 기대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육체적인 것입니까? 정신적인 것 입니까?" 이 훌륭한 의사께서도 그 문제를 그냥 넘기지 않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데이몬은 알 수 있었다. "두 가지 경우에 다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만," 데이몬이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가 않군요." 데이몬은 어둡고 좁은 워싱턴 뮤즈에서 잘로프스키의 총을 맞고 맨프레드와 그 술취한 사람이 보도에 쓰러지면서 비명을 지르던 그 순간을 다시 상기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 사건은 신문에 자세히 보도 되었읍니다." ''제가 너무 바빠서 신문을 자세히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진판델 박사는 입술을 동그랗게 오무리면서 자신의 직무에 만족하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제게는 큰 스트레스입니다." 데이몬이 말했다. 진판델 박사는 자신이 기록한 것을 다시 한번 읽어 보면서 차트를 재빨리 살펴 보았다. 더 이상 질문할 것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데이몬은 아직도 그가 물어볼 질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정신상태는 어떤가? 죄를 지은 적이 있는가? 형이 죽었을 때 슬픔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린이답게 이제 외아들이고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건부 받을 수 있다는 기쁨의 감정을 함께 느끼지는 않았는가? 당신은 꿈과 운명과 초 자연적인 것을 믿고 있는가? 자신이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몇 살에 죽었으면 좋겠다고생각하는가? 당신은 소득세를 속여서 신고하는가? 돈에 대해서 걱정하는가? 핵 전쟁이 일어 난다면 어디서 일어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가? 전쟁에서 부상을 당한 적이 없다고 했는데, 그것이 사실인가? 당신이 생각하기에는 하느님이 존재하는 것 같은가? 만일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다면 로마거리에서의 애바 코다르의 죽음이 인류에 대한 하느님이 짜놓은 계획의 일부였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장차 일어날 사건은 실제로 터지기 전에 그 그림자를 던진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완전한 벌거숭이 상태가 아니라, 길게 늘어진 영광의 구름에 휩싸여 이 세상에 온다라고 한 시인의 의견에 동의하는가?.. 진판델 박사가 인상을 찌푸리고 코를 실룩거리며 눈을 레이다 탐지기처럼 번득이면서 자기가 쓴 것을 뚫어 보고 있는 모습을 데이몬은 유심히 바라보았다. 진판델 박사는 데이몬의 대답이 자신의 훈런된 전문적인 마음에 비추어 볼 때 만족스럽지 않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사실상, 현재로서는 매우 건강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데이몬이 말했다. 의사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전에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께서 생각하는 것만큼 가벼운 상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확실하게 말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X-레이, CAT정밀 검사, 심전도 측정, 혈액 검사를 비롯해서 담낭, 페, 신장, 소변 및 대변 검사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검사를 하고 6일 동안 세밀하게 조사해 보는 겁니다. X-레이와 검사 결과를 외과 전문의에게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외과의사요?" 데이몬은 갑자기 입안이 바싹 말라 버리는 것 같았다. "무엇 때문에 제가 외과의사의 진찰까지 받아야 합니까?" "언제든지 모든 것을 안전하게 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진판델 박사는 그럴 듯하게 말했다. "말하자면, 모든 길을 전부 지나가 보자는 겁니다. 기계와 진단 기술이 진보되어 있기는 하지만, 때로 우리가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구름 속까지라도 들어가 보는 것업니다." 어쨌든, 지금 진판델 박사가 호미로 해야 될 일을 미루게 되면 나중엔 가래로 처리해야 된다고는 말하지 않는구나 하고 데이몬은 생각했다. "제가 선생을 놀라게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진판델 박사는 위로하려는 듯 이렇게 말했다. "말하자면, 외과의사는 예비로 해 두려는 것일 뿐 입니다." 만일 진판델 박사가 '말하자면'이라는 말을 다시 한번 한다면, 이 사무실에서 나가 버리고 말겠다고 데이몬은 생각했다. "믿을 만한 외과 의사를 알고 있습니까?" 진판델 박사는 이렇게 물어 보면서 이름을 적으려고 연필을 들었다. ''없는데요." 데이몬은 지금까지 자신의 직업상 유동성이 많아서 개인적인 단골 의사와 같은 중요한 문화적 액세서리를 소홀히 하였음을 시인하는데 다소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제가 로가드 박사를 추전해 드리죠." 진판델 박사가 말했다. "그 사람은 자기 분야에서는 뛰어났으며, 이 병원에서도 수술을 합니다. 선생의 생각엔 그 사람을 개입시키는 것이 어떠신지요?" "저야 선생님의 처분에 따라야죠." 데이몬은 공손히 말하면서 이곳은 뛰어난 사람들로 홍수가 날 지경이로군 하고 생각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내일 정오에 병원으로 와 주시겠읍니까?" "언제라도 좋습니다." "특실을 원하십니까?" "네." <비가>의 덕을 단단히 보는구나 하고 데이몬은 생각했다. 그 책이 출판되기 전이었다면 아마도 가장 값 싼 병실을 요구했을지도 모른다. 돈이 많아서 나쁠 것은 없는 것 같았다. 돈이 없었다면 아무 증인도 없이 고통을 겪으며 자기가 들은 신음소리는 자신의 신음 소리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끝나 버렸을지도 몰랐다. "최소한 6일 정도는 입원하실 준비를 하세요." 진판델 박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면담은 끝이 났다. 데이몬도 몸을 일으키면서 진판델 박사에게 악수를 청했다. 진판델 박사의 손을 잡는 순간, 데이몬은 의사의 손아귀의 힘에 놀랐다. 마치 그의 손은 전기가 통하고 있는 전선이 팔에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짜릿짜릿했다. 데이몬이 진판델 박사를 좀 더 잘 알게 되면 그의 사무실을 떠날 때 쯤 되어서는 자신의 건강을 의사에게 물어 볼 질문이 많게 될 것이라고 데이몬은 생각했다. 닷새가 지난 후, 데이몬은 다음 날 아침 아홉 시에 수술할 준비를 갖추고서 안락하고 기분 좋은 특실에 입원했다. 수술할 부위는 외과의사와 진판델 박사가 십중팔구는 장 궤양이라고 합의 진단을 내린 곳이었다. 검사 결과는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진판델 박사의 예감이 적중했던 것이다. 박사와 외과 의사는 수술을 연기할 경우, 그로인한 결과는 치명적인 것이 된다고 경고했다. 올리버는 다시 전화를 걸어서 와과 의사 로가드 박사가 매우 이름 난 의사라는 것을 확인했다. 올리버가 이 말을 데이몬에게 했을 때 데이몬은 심술굿은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아픈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 자기 말을 기억하고 있느냐고 올리버에게 물어 보았다. ''나는 한 가지 교훈을 배웠어." 데이몬이 말했다. "하느님은 자랑을 좋아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데이몬은 침착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고 애썼으나, 생각과는 달리 겁에 질려 있었으며 그러한 자신의 감정을 싫어하고 있었다. 데이몬은 모두 그 빌어먹을 놈의 전화가 있은 후 이런 결과가 빚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로가드 박사는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는데, 육중한 몸에 뺨은 장미꽃처럼 불그스레 했으며, 진주빚 나는 회색 옷을 입고 병실로 들어왔다. 서서히 흐르는 넓은 미시시피강을 연상시키는 사나이였다. 그의 동작은 조심스러웠고 가톨릭 교인다운 데가 있었다. 말은 서두르지 않고 신중하게 했다. 그의 손은 부드럽고 통통해서 유명한 외과의사에게서 기대되는 손은 아니었다. 로가드 박사는 침대 옆에 놓여 있는 딱딱한 의자에 앉았다. ' '제가 수술에 대해서 부인께 설명해 드렸습니다. 부인께서도 저하고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더군요. 따라서 모든 것이 잘 되리라고 믿습니다. 선생을 검사한 마취 의사도 별로 큰 어려움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선생께서 여기를 떠나 수술실로 가신 후 네 시간 또는 다섯 시간 정도가 지나면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에서 나와 이 방으로 다시 돌아 오시게 될 것입니다." 로가드 박사는 이와같은 말을 모두 마치 어느 교과서에서 배워 천번이라도, 필요에 따라서는 자신의 죽음의 자리에서도 되풀이 할 수 있다는 듯이 암송하였다. "제게 물어 보실 말씀이 계시다면 최선을 다해서 기꺼이 대답해 드리겠읍니다." "좋습니다." 데이몬이 말했다. "한가지 질문이 있어요. 제가 언제쯤이면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요?" 대양의 넓은 표면을 평온하게 쓸며 다가오는 잔 물결처럼 성숙한 소녀의 활처럼 생긴 입술에 서글픈 미소가 살며시 나타났다. 의사가 건강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자기 생명의 대부분을 바쳐 가면서까지 정성을 다해서 치료를 해도, 환자들은 언제나 날아갈 기회만 있으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의사 곁을 떠나려고 애타게 갈망한다. 그 심정을 새삼 헤아리고 있는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로가드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글쎄요, 그 질문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가 없겠군요. 12일에서 13일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모든 것은 선생의 회복력에 달려 있읍니다. 또 다른 질문이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로가드 박사는 몸을 일으키고 나서 두둑한 배 위로 양복 조끼를 바르게 했다. ''오늘 오후 다섯 시 이후에는 아무것도 잡수시지 마세요. 담당 의무원이 와서 가슴의 털을 깎고 난 다음 오늘 저녁에 관장제를 줄 겁니다. 밤에는 조용히 주무시게 될 겁니다. 아침이 되면 이 방을 떠나기에 앞서 간호원이 주사를 놓아 줄 겁니다. 그러면 선생께서는 엘리베이터로 가시기 전에 잠이 드실 겁니다. 오늘 밤은 편안히 주무시길 바라겠읍니다." 로가드 박사가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할 때, 실라가 들어왔다. 실라는 커피를 한 잔 마시려고 아랫층 식당에 갔다 오는 길이었다. 데이몬은 마음속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 실라는 오후에 여섯 잔의 커피를 마셨다. 보통 때 같으면 아침 식사 때 커피 한 잔 마시는 것으로 하루를 지내곤 했었는데, 이것은 실라 자신도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시였다. 실라의 얼굴은 조용하고 태연했으며, 머리는 단정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실라가 로가드 박사를 보고 미소를 짓자, 로가드 박사는 고개를 약간 숙이면서 답례를 했다. "선생님의 기분을 직접 확인하려고 잠깐 들러 봤읍니다, 부인. 기분이 매우 좋으시다니 다행입니다." ''부상을 당해 보지 못한 사람은 흉터를 비웃는 법이지." 데이몬이 가볍게 말했다. 구경꾼에 대한 공연한 허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맨프레드 웨인슈다인이 야구를 했을 때 말했던 것처럼 인기를 노리는 몸짓에 불과했다. ''이것이 나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오." "선생은 운이 좋으십니다." 로가드 박사가 말했다. "제 자신만 해도 지난 15년 동안 큰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았으니까요." "그렇다면, 선생은 움직이는 선전 광고의 역할을 하고 계시는 거군요." 데이몬은 집도하는 의사에게 약간 아첨 비슷한 말을 했다. 로가드 박사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저는 너무 뚱뚱해요. 술도 안 마시고, 음식도 거의 먹지 않는데도 너무 뚱뚱하단 말씀이에요." 로가드 박사는 당당하게 방을 나가 버렸다. "지금까지 로가드 박사가 한 말 중에서 가장 인간다운 말이로군. 자기가 뚱뚱하다고 고백한 것이 말이야."라고 데이몬이 말했다. ''당신 괜찮으세요?'' 실라는 바짝 다가서면서 데이몬을 열심히 내려다 보았다. ''음, 아주 좋아. 대낮에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약간 바보스럽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이 병원은 50년 이상이나 되는 역사를 갖고 있어요." 실라가 말했다. "단 5일 만에 그 사람들의 판에 박힌 일을 고치려고 하지는 마세요. 맨프레드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아주 바쁜 모양이에요. 병원을 온통 뛰어 다니더니 벌써 마리화나 일당을 찾았어요. 그리고 스물 두 살 먹은 간호원을 어떻게 유혹했는지 결혼까지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더군요. 당신이 퇴원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퇴원 할 거라면서 내기를 하자는 말도 했어요. 당신이 유리하도록 8대2로 봐 준다고 했어요." 데이몬이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아마도 우리는 퇴원 파티를 함께 열게 되겠군." ''누가 먼저 퇴원을 하든지 간에, 적어도 목발을 버릴 때까지는 우리와 함께 같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당신 손에 두 사람의 노인네가 매달리게 되었군. 당신 일을 도와줄 만한 경험있는 간호원 한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 어떨까?" "두 분이 마음놓고 비틀거리셔도 괜쟎아요." 실라가 딱 잘라서 말했다. "저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아요. 저를 알고 계시쟎아요. 제가 고장난 것은 고장난 것끼리 잘 맞춘다는 것을요." ''그건 사실이지." 데이몬이 손을 뻗어 실라의 손을 잡았다. ''당신 손을 이렇게 잡고 있으면 어떤 불행도 나에게는 닥쳐올 수 없다는 느낌이 들어." 뎨이몬은 갑자기 뱃속에서 진통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고서 무심결에 실라의 손을 꼭 쥐었다. "왜 그래요?" 실라가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데이몬은 미소를 지으려고 애를 썼다. ''도리스가 요리한 감자 사라다가 마지막으로 꿈틀거리는 모양이군." 데이몬은 시간이 좀 빨리 지나 갔으면, 그리고 의사가 약속한 진정제의 작용이 빨리 효과를 나타냈으면 하고 바랬다. 생전 처음으로 의식을 잃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정오가 지났다. 올리버와 실라는 여전히 입원실 특실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데이몬이 아침 일곱 시에 마지막으로 힘없이 손을 흔들면서 실려 나갈 때부터 그곳에 있었다. 이제는 모든 이야깃거리가 다 떨어져서 할말도 없다는 듯, 그들은 묵묵히 앉아서 복도를 따라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릴 때마다 진장하고 또 건장했다. 데이몬과 결혼하면서 담배를 끊어 버린 실라는 말보로 담배 한갑을 다 피위 버렸다. 문은 열어 두었지만 여전히 담배 연기가 실내에 자욱하였다. 로가드 박사도 진판델 박사도 수술이 끝나는 대로 와서 실라에게 말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다섯 시간이 지났으나두 사람 중 아무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때 로가드 박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아직도 녹색 수술복과 모자를 하고 가제 마스크는 이마 위로 밀어 올려 놓은 모습이었다. 로가드 박사는 지쳐 있었고 표정은 심각했다. "그이는 어디 있죠?" 실라는 다그치듯이 물었다. "그이는 어때요? 왜 이렇게 늦었나요?" 실라의 목소리는 거칠었으며 보통 때의 아름답고상냥한 목소리는 흔적도 없었다. "지금쯤은 그이가 이리로 올 거라고 하셨쟎아요." "죄송합니다. 부인." 로가드 박사가 말했다. "그분은 지금 중 환자실에 있습니다. 데이몬씨는 지금 상태가 굉장히 좋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수술이 생각 이상으로 매우 광 범위했습니다." 로가드 박사는 지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제발 진정하세요, 부인. 합병증이 있었습니다. 궤양은 구멍이 뚫릴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구요. 구멍이 뚫린 주위 조직에까지 광 범위하게 파급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두 제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 오려면, 데이몬씨는 며칠 동안 고통으로 시달리면서 비명을 지르고 지내셔야 될 것 같습니다..." "그이는 비명같은 것을 지를 분이 아니에요." ''의학적 기준에 따르자면," 로가드 박사가 말했다. "자신을 너무 억제한다는 것은 결코 좋지 않습니다. 진작에 수술을 했었다면 그러한 합병증은 피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너무 많은 피를 흘렸어요.. 너무나도 많이...." 로가드 박사는 시선을 피하면서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이어 나갔다. "정확하게 볼 수가 없었어요.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데이몬씨는 지금 모든 생명 유지 장치, 인공 호흡기, 수혈에 의존하고 있읍니다... 저는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진판델 박사와 수술에 입회한 다른 의사들과 상의를 해야 합니다. 출혈이 다시 시작된 것 같아요. 우리로서는 그 출혈이 스스로 멈춰 주기를 바랄 수 밖에는 없습니다." "만일 그 출혈이 멈추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실라는 거의 악에 받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저희들이 상의를 해야 되겠다는 겁니다. 데이몬씨가 수술실에서 또 한 차례의 수술을 견디어 낼 수 있을지 확실치가 않아요. 우리는 어떤 방법을 선택해야 할지 그것을 의논할 생각입니다. 수혈로 충분했으면 좋겠읍니다만... 아뭏든, 계속 하고 있읍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수혈을 했죠? 올리버가 물었다. "열 두 병입니다." ''맙소사." 올리버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수혈을 하고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필요합니다. 혈압이 급진적으로 떨어졌어요. 위험을 무릅쓰는 방법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셔야만 합니다.'' "저는 의학에 대해서는 별로 알지 못합니다." 올리버의 목소리도 실라만큼 적의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저의 형님이 로스엔젤레스의 시다즈 시나이 병원에 외과 의사로 있읍니다. 형님에게서 언젠가 다량 수혈이 매우 위험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로가드 박사가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로가드 박사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성직자 같은 확실성은 온데간데 없어져 버렸다. "선생의 형님되시는 분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오늘 이곳에 계신다면, 그분 역시 우리가 취하고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자, 그럼 이만 가봐야겠읍니다. 모두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로가드 박사가 문으로 걸어 나갔다. "그이를 보고 싶어요." 실라는 손을 뻗어서 의사의 팔을 꽉 잡았다. "지금은 안 됩니다. 부인." 로가드는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바깥 주인께서는 지금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오후쯤이나 되어 중 환자실로 오신다면... 저로서는 아무 약속도 할 수 없읍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의사의 말은 막연하였다. ''너무나도 자주 있는 일이죠. 한 가지 일을 찾으러 들어 갔다가 다른 것을 찾게 되지요. 그러다 보니 출혈이 많아지고... 진판빌 박사도 내려오셔서 진전 상황을 지켜 보실 겁니다." "그이는 지금 의식이 있읍니까?" 로가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분명히 말하기가 어렵군요."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나가 버렸다. 올리버는 실라를 팔로 감싸주었다. "데이몬씨는 완쾌될 겁니다. 저는 그것을 알고 있어요. 데이몬 씨는 강한 분이시니까요." "바깥 주인은 중 환자입니다. 정말 중한 환자라구요." 실라는 로가드의 말을 흉내내며 한결 같은목소리로 말했다. "의사들의 딱딱하고 까다로운 표현 방식이에요. 쉽게 풀이해서, 당신 남편이 죽어가고 있으니 그 순간을 대비하고 있어라. 그것도 곧이라는 뜻이에요." "자, 자아." 올리버는 실라를 가까이 끌어 당기고 서 실라의 이마에 키스를 하며 말했다. "제가 형님께 전화를 걸어 보겠어요. 누가 뭐라고 해도 형님은 할 수 있으실 겁니다." "3천 마일이나 멀리 떨어져 있쟎아요." 실라는 말했다. "저에게는 모든 것이 3천 마일 밖에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데이몬은 깨어났다. 아니 깨어 났다고 그 자신은 생각하였다. 그는 아무런 진통도 느끼지 않았다. 이제 진통은 끝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제 자신은 회복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자신은 자리에 누워 있지를 않고 있었다. 막이 오른 무대 뒷면에는 하얀 막이 쳐져 있었다. 그는 혼자였다. 적어도 자기 혼자만이 방안에 남아 있지 않은가? 그는 자신이 앉아 있는지, 서 있는지, 아니면 누워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막이 등불로 밝혀지자 하나의 영상이 막에 나타났다. 진주빚이 나는 회색 옷을 입고 미소를 짓고 있는 의사 로가드의 영상이었다. 그밑에 '로저 데이몬의 죽음을 당하여 의사 알렉산더 로가드 증정'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데이몬은 몹시 화가 치밀었다. "저것은 야비한 생각과도 같은 농담이야." 라고 그는 말했다. 아니, 생각하였다. 아니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 다음 그는, 작은 무대 전면 바닥 위에 약간 비스듬히 누워있다는 것을 의식하였다. 그러자 그때 켜 있던 등불이 막에서 꺼졌다. 그의 옆에는 모리스 피츠제랄드가 같은 각도로 누워 있었다. 그들은 정상적인 크기가 아니라, 길게 늘어져 있었다. 두 사람 다 젊었고 다같이 잠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심각해."하고 데이몬은 좀 이상스런 투로 속삭였다. "술이 하나도 없군." 그러자 그는 어떤 시체의 다리가 왼쪽 무대 입구에서 불쑥 나오는 것을 의식하였다. 그 송장의 발가락은 검고 부풀어서 마치 혈액 순환을 차단시키려고 오랫동안 밑 부분을 철사로 꽁꽁 묶어 놓아둔 것 같이 보였다. 발 하나는 발등에 입을 딱 벌린 검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데이몬은 이것이 발을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 난 상처를 그대로 지닌 채 그곳에 누워 있는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았다. 그는 그리스도였고, 그리스도는 바로 그 자신이며, 땅 속에 묻힐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몸을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의사 로가드가 여전히 진주빚 회색 양복을 입고 무대 입구로부터 나와서 그 검게 변색된 발과 충혈된 발가락을 만지며 말했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 발가락은 노아의 홍수가 있기 전의 물로 얼어 붙었으니 그 자채는 얼지 않더라도 이것이 닿는 것은 모두 얼음으로 변해 버릴 거요." "그이가 저를 알아본 것 같아요." 실라는 올리버에게 말했다. 그들은 중 환자실에 있는 작은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예쁜 플란빌 옷을 입은 작고 회색 머리를 한 어떤 여인이 그들 맞은편에서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실라는 저녁 여덟 시가 될 무렵 3분 동안 데이몬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이는 눈을 뜨고 있었으며 제게 윙크를 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어요. 그 여러 개의 고무 호스 때문에, 특히 두 개가 목구멍 아래로 들어가 있었으니 말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을 거예요. 아직까지도 수혈을 하고 있었어요. 피가 그이 가슴과 복부에 축적되어 그곳이 보통 때보다 두 배나 부풀어 올랐으며, 매 분마다 점점 더 커지고 있었어요. 그것이 패를 압박하고 있어서 숨쉬기가 곤란해지니까 산소 호흡을 시키고 있는 거예요." 그녀는 마치 사친회 모임에서 무미건조한 연차 보고서를 낭독하듯 힘없이 말했다. ''피가 발까지는 돌지 않아서 발이 대리석처럼 차디 차더군요. 간호원을 시켜 따뜻한 담요로 발을 감싸주게 했어요. 그 정도는 그들 스스로가 생각해서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누구 한사람 격려의 말 한 마디 해 주지 않더군요. 진판델 박사는 그저 '당신 남편은 중 환자입니다.' 라는 말만 되풀이하고요. 그분도 의사들이 동맥을 하나 절단한 것 같다고 시인하지 않겠어요? 그분이 그 말을 저한데 할 때까지는 병원 의사들은 과 출혈이라고만 계속 말하고 있었다구요. 각기 그들 분야에서 유명하다는 자들이 말예요." 그녀는 맹렬하게 비난을 퍼부었다. 지금 데이몬은 배를 타고 있었다. 그는 커다란 엔진이 쿵쿵대며 돌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그는 사람들이 배를 타고 따뜻한 태평양 바다 어딘가에서, 아마도 인도네시아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 같은 데에 와서 그레이씨의 감독 아래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레이씨만이 그곳에 없었다. 그가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신비에 싸인 인도네시아. 데이몬은 그레이씨 없이 영화 촬영을 계속해야만 했다. 데이몬은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하얀 코트를 입은 한 사람이 무선 송신기를 조작하고 있었다. 그 사나이는 갈색의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젊은이었는데 얼굴은 친절하게 보였다. "그레이씨가 부재 중에는."하고 데이몬은 그 사나이에게 말했다. ''그 영화는 내가 맡아서 촬영하겠네. 나는 자네에게 배를 달리게 하는 일을 맡기고 싶네." 수염을 기른 그 사나이는 화를 내며 말했다. ''저는 다른 일을 해야 됩니다." 날씬한 몸매를 가진 매우 귀여운 유렵 아가씨가 방을 지나갔다. 그녀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남자용 셔츠를 겉으로 내놓은채 걸쳐서 옷자락이 바람에 펼럭이고 있었다. 데이몬은 그녀가 그 영화의 스타가 될 예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영화에서 노래를 부르기로 되어 있었지만, 말할 때의 목소리는 귀에 거슬려 마치 까마귀 우는 소리와 같았다. 데이몬은 그녀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는 기겁을 하였다. ''자네는 저 아가씨의 목소리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 될 걸세." 데이몬은 수염이 덥수룩한 사나이에게 말했다. "저를 좀 내버려 둬요. 제가 바쁘다는 걸 모르세요." 하고 그는 화를 내며 말했다. "제가 형님께 전화를 했습니다." 하고 올리버가 말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실라는 특실 입원실에서 갔었고, 올리버는 대기실 소파에서 잠을 잤다. 의사들은 누구나 그들을 지나칠 적마다 귀찮아하는 듯하였다. ''형님은 출혈이 발생하는 곳을 알기 위해 아테리오그램을 동맥에 넣어 보았느냐고 물었어요. 그것을 해 보았나요?" 실라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좌우간 부인께서 의사들에게 제안해 보라고 형님께서 말씀하시더군요. 그것이 무엇인지 부인은 아시고 계십니까?" 하고 올리버가 물었다. "몰라요." "저도 모르겠군요." 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보지요. 어떤 효과가 있는지 저는 모르겠지만 말예요. 의사들은 그이를 포기한 것 같아요. 그 사람들은 그저 치료하는 시늉만 하고 있어요. 그래도 고마운 것은 간호원들 뿐이에요. 간호원들은 잠시도 그이를 혼자 두지 않아요. 당직 간호원이 말하기를 적혈구를 전혀 만들어 내지 못하고 그 기준이 위험 지점까지 내려가고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숨을 제대로 못 쉬고 있었구요. 의사들은 그이가 지금 패렴을 앓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호스로 계속 가래를 뽑아 내고 있어요. 그이는 눈을 뜨고는 있지만, 저를 알아 보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잠시 후 진판델 박사가 들어왔다. 그의 눈은 수면 부족으로 충혈되어 있었고, 그의 코는 신경질 적으로 실룩거리고 있었다. "부인."하고 그가 말을 꺼냈다. "부인께서는 좀 쉬셔야겠읍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희들은 부인마저도 병 치료를 해야만 될 것 같군요. 부인이 이토록 자신의 몸을 지치게 한다고 해도, 바깥 주인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아직도 출혈을 하고 있나요?'' 그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실라가 물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아테리오그램을 시도해 보시지는 않을 작정이세요?" 진판델 박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것에 관해서 알고 계십니까, 부인 ?" "아무것도 몰라요." "다른 의사에게 의논을 하시고 계신 모양이군요." 진판델 박사의 말투는 비난조였다. ''물론이지요. 만일에 누구라도 한 분이 제 남펀의 생명을 구해 주기만 할 수 있다면 1천 명의 다른 의사들에게라도 말할 겁니다." "사실은" 진판델 박사는 멋적어하면서 말했다. "우리는 오늘 아침, 그 방법을 시도해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유치원 선생처럼 좀 더 성의를 표하는 그러면서도 아는 채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것은 서해부와 뇨도관에 있는 동맥에 바늘을 넣어서 그것을 통해 의심되는 조직까지 삽입시키는 과정입니다. 필요하면 대조 물질, 일종의 물감을 도입하게 되죠. 그 물질이 문제의 본원까지 완전히 흘러 들어가게 한 다음에 X-레이 사진을 찍게 됩니다. 그리하여 문제가 있는 곳을 발견하게 되지요. 그렇게 된 다음에는 작은 아교 알약을 뇨도관을 통해 동맥으로, 두세 알, 경우에 따라 압력으로 불어 넣게 됩니다. 운이 좋으면 그 알약이 혈관의 파열을 차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읍니다. 만일 출혈이 멎는다면 그것이 영구적인가를 보기 위해 6일을 기다려 봐야 합니다. 이제 모든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셨읍니까, 부인 ?" "네, 고맙습니다." ''저는 환자나 또는 환자의 사랑하는 가족들을 현혹시키기를 좋아하는 의사는 아닙니다. 때에 따라서는 아무리 사태가 긴박하다 할지라도 언제나 현재 나타나고 있는 그대로 저는 믿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실라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제가 아는대로 빨리 그 결과를 알려 드리지요. 그둥안 제 충고대로 좀 쉬심시오." "거듭 감사드립니다." 진판델 박사는 황급히 방을 나갔다. 그는 마치 둘러 보기로 되어 있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큰 지역 내에 덮여 있는 죽음과 발 걸음만이라도 보조를 맞추려는 듯 병원 내를 겅충겅충 뛰며 돌아다녔다. ''저더러 말하라고 한다면 저 의사는 고집불통이고 멍청이오." 하고 올리버가 한 마디 했다. "그러면서도 대단한 의사인 척하는군요." "그래요." 실라는 긍정하듯이 대꾸했다. "그래도 다른 사람 대신에 그가 수술하였으면 했다구요." 데이몬은 건물 꼭대기 둥근 친장의 돌로 된 방안에 있었다. 이제 그는 병원의 어느 특별 장소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누워 있는 맞은편에는 밟게 불을 켜놓은 큰 방이 있었고, 그곳에서 간호원들과 그들의 친구들이 파티를 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서로 즐겁게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몇 개의 카세트 녹음기에서는 계속 장례식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느 젊은 의사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발견입니다. 제가 오늘 그것을 찾아냈어요. 저 음악은 벨기에의 앨버트 공자의 장례식에서 연주된 겁니다. 저 곡의 값이 엄청나다구요. 그렇지만 그만한 값어치가 있었어요." ''저놈의 음악 좀 꺼 버리라고해요 ! " 데이몬이 소리쳤다. 아니 실라에게 말했다고 생각했다. 실라는 살며시 들어와서, 그가 의식하고 있지 않은 사이에,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와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같은 방에는 그와 함께 어느 늙은이가 있었다. 왕년의 권투 선수처럼 보이는 수병의 셔츠를 입은 근육이 울퉁불퉁한 젊은 흑인이 그 노인의 가슴과 복부를 맹렬히 주먹질하고 있었다. 데이몬은 그 노인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실제로 죽어 버렸다. 데이몬은 자기가 다음 차례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손이 침대 양쪽에 묶여 있어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노인의 시체가 실려 나가자, 그 흑인은 자기에게로 돌아서며 수병 셔츠 밖으로 나온 맨살의 근육이 튀어나온 팔로 데이몬을 사정없이 치기 시작하였다. 때때로 그 흑인은 데이몬을 치기를 멈추고서 구식 면도기를 가지고 면도를 하기도 했다. 매번 내려칠 때마다 그는 데이몬의 얼굴에 접착 테이프를 붙이고, 그 위에다 볼펜으로 날짜와 시간을 써 넣었다. 그리고 나서는 그는 또 다시 데이몬을 때리기 시작하였다. 데이몬은 고함을 치는 것조차 거부하고 그 흑인에게 살해되는 것을 기다리며 조용히 체념하고 있었다. 그러나 데이몬이 누워 있는 맞은 편 환하게 불 밝힌 방안에선 한바탕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파티를 하기에는 늦었어. 내일까지 그 사람을 어딘가에 치워 두자구." 데이몬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으며,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모두 즐겁게 이야기하며 가버렸다. 데이몬은 혼자 남게 되었는데, 블 빚 만이 눈이 따갑도록 밝게 비치고 있었다. 실라가 또 다시 그에게로 다가왔다. "여보, 나를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 줘요." 하고 그가 말했다. 그러나 그는 소리가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보." 실라가 말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이 방에서 죽기위해 엄청난 돈을 지불하고 있어요." "적어도," 데이몬은 소리없이 말했다. "저 흑인 만이라도 내게서 없애 줘. 그자는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구. 사람들은 모두 나를 죽이려고 해요. 경찰에 연락해 줘. 올리버에게 타임츠지에 전화를 걸라고 해줘요. 그는 신문사에 있는 사람들을 다 알고 있단 말이오. 그리고 당신도 빠져 나가요. 그들은 당신도 죽이려고 할거요." 실라가 나가 버리자 그는 잠을 자려고 하였다. 그러나 눈에 비치는 밝은 불빚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벽에는 큰 시계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시계는 반대 방향으로 빨리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문자판에 바늘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시간에 대해서도 나를 우롱하고, 나로 하여금 밤과 낮을 구별하지 못하게 하고 있어, 하고 데이몬은 생각했다. 이것이야말로 매우 세련된 고문이었다. ''그이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실라는올리버에게 말했다. "하지만 어쨌든 펜과 종이를 원한다는 것을 제게 알려 주었어요. 약간이나마 아데리오그램이 작용하나봐요. 지금은 약간 기운을 차린 것 같기도 하고요. 그이는 손에 팬을 쥐고 무엇인가를 쓰더군요. 무슨 말을 썼는지 거의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이는 그 흑인 남자 간호원이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흑인은 폐에 집결되는 물질을 제거하여 사이폰으로 빨아 올려서, 로저가 숨을 쉴 수 있도록 가슴을 쾅쾅 치는 일울 지시에 따라 하고 있을 뿐인데 말예요. 그러나 거의 제 정신이 아닌 사람에게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요? 그이는 제가 알기로는 조금도 인종 차별을 하지 않는 사람인데 우리 모두 마음한 구석에는 불합리하지만 그런 감정이 있는 것 같아요..." 그녀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쨌든 중 환자실 담당 의사에게 그 흑인을 그이 한테서 멀리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현재로서는 그이 에게는 염려되는 일이 아주 많아요. 이제서야 그들은 첫째 날에 26시간의 수혈을 했다는 것을 털어 놓더군요. 무엇이 그를 계속 살아 있게 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어요. 그의 신장은 막혀 버렸어요. 의사들은 그이에게 여막 분석기를 달기 위해 션트를 주문하였어요. 그런데 그 수술을 할 의사들이 내일 아침까지는 수술을 시작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목에서 곧 호스를 뽑아내고 성대가 못 쓰게 되지 않도록 기관 절대 수술을 해야만 한대요. 그것이 첫 번째로 맞는 희망적인 징조라더군요." 실라의 말투는 몹시 비꼬는 것처럼 들렸다. "그이가 살아날 가망이 있다고 생각하고, 일이 그렇게 돌아 간다면, 그이가 말할 수 있기를 바라는 거지요. 그러나 그 수술을 하는 전문의가 월요일까지는 올 수 없으며, 지금부터 나홀이나 더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너무 늦을지도 모른대요. 이렇게 큰 병원에서 당장에 그 수술을 하는 의사 하나 구할 수 없다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사람이 고깃덩어리가 목에 걸려 숨이 막혀가고 있는데, 식당 마룻바닥에서 맨 나이프를 가지고 수술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신문에 나와 있던데, 모든 게 다그 식이에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수술 명칭조차도 합의가 되지 않았대요. 어떤 의사는 트래커오토미라고도 하고, 다른 의사는 트래키오스토미라고 부르기도 하고요." 실라는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명칭은 중요한 거죠, 단수의 731자를 붙이는 것과 빼는 것은 말의 전체 뜻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이제 와서 생각하니 젊었을 때 아동 심리학을 공부하는 대신에 의학을 전공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후회가 되는군요. 그랬더라면 아마 이 무섭고 보기 흉한 병원과 싸울 수 있었을 덴데." 올리버는 이 말이 끝날 때까지 내내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는 여러 차례 데이몬을 보려고 안에 들어갔다 나왔고, 젊은 의사와 동정적인 간호원들과도 이야기 해 보았다. 올리버는 데이몬의 모습에 놀라고 있었지만, 데이몬은 이제는 위험한 고비를 넘겼으니 아마도 결과적으로는 회복도 빠를 것이라고 그에게 말해준 의사와 간호원들의 말을 믿는 방향으로 쏠리고 있었다. 올리버는 매일같이 형님에게 전화를 걸어 데이몬이 받고 있는 치료를 그가 설명할 수 있는 데까지 상세하게 알리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도 그와같은 이야기를 하였을 때 올리버의 형님은 의사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느냐고 확인하였다. 그는 실라가 점점 몸이 쇠약해져가고 있음을 느꼈다. 신체적으로도 실라는 이미 체중이 많이 줄어든 것 같았고, 예전의 반짝이던 검은 머리칼은 길게 광채를 잃고 흩어져 있었으며, 얼굴은 야위고 신경만이 날카롭게 곤두 서 있는 듯하였다. 그녀는 언제나 간단하게 그리고 자신있게 말하는 여자였었다. 그러나 지금의 두서없고 공격적인 말은 마치 그녀 자신의 성격이 날선 톱니 같은, 자신도 억제할 수 없는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지고 있는 것처럼 섬뜩하게 들렸다. 올리버는 용기를 내어 실라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데이몬을 위해서, 몇 일 동안 병원 밖으로 나가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제의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중환자실의 분위기는 데이몬은 물론 실라까지도 박살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차마 그런 제안을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올리버는 만일 자기가 그런 말을 하면, 실라는 자기가 도피와 배반을 부추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여겨졌다. 실라는 거의 밤낮을 대기실에서 보내며 때로는 의자에 앉은 채 졸기도 하고, 깜짝 놀라 잠을 깨고 서는 데이몬이 혹시 그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는가 하여 중 환자실로 달려 가곤 했다. 그리고 데이몬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세계와 유일한 연결체가 바로 실라밖에는 없었다. 왜냐하면 데이몬이 종이 위에 긁적거려 놓은 글자를 해득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실라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데이몬은 머리맡에 놓아둔 노란 메모지에 계속'물'이라는 말을 쓰고 있었다. 의사와 간호원은 데이몬이 정액 주사로 필요한 액체를 흡수하고 있으며 목으로부터 위까지 통하는 호스로 하루에 공급하기로 되어 있는 영양분을 가루로 주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데이몬은 물을 마시지 말라고 금지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입으로 섭취하는 것은 모두가 곧바로 과로하고 경련을 일으키는 폐에 미끄러져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의사들이 소량의 차가운 첼리를 먹여 보려고 했으나 즉시 올라와서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정경을 보다 못한 실라는 레몬을 사와 글리세린이 흠뻑 젖은 소독면에 즙을 짜서 데이몬의 바싹 마른 입술을 닦아 주었다. 데이몬은 마치 과일이 주는 약간의 신선미가 순간적이기는 하지만 그의 갈증을 가라앉히는 느낌이라도 주는 듯 입맛을 다지며 감사의 미소를 지었다. 아니, 지으려고 하였다. "일단 병원에서 퇴원하면 이러한 일들은 모두 잊어버릴 거예요."라고 간호원들이 위로의 말을 찾으며 말했다. "고문이래요." 실라는 올리버가 한 말을 듣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이가 어떤 다른 말을 쓰기 전에는 '고문'이라는 한 마디 말만 계속 써요." 그녀는 헨드 백에서 커다란 노란 종이를 접은 쪽지를 꺼내서 구불구불 거의 읽을 수 없는 글자를 읽었다. 그려놓은 글자는 올리버에게는 모래 위를 멋대로 걸어다닌 새 발자국처럼 보였다. "여기를 나가야 해. 나가야 해. 번호사에게 전화를 오, 그래 올리버, 번호를 알아줘. 영장, 감옥." "누구나 다 그런다고 간호원들이 말하고 있더군요." 하고 올리버가 말했다. "간호원들은 그 증세에 대하여 이름까지 붙이고 있더군요. 중 환자실 증후군이라고 말입니다." ''간호원들이 당신을 속이고 있는 거예요. 그들은 당신이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알겠어요? 당신은 그 아이들과 함게 커피를 마시고, 센드위치를 먹으러 밖에 나가고 싶죠? 어쨌든, 당신은 누구 편을 들고 있는 거죠?" "제발 그런 말 마십시오, 부인." 올리버는 지친 듯이 말했다. "올리버씨, 미안해요. 용서하세요. 요즘에는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실라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 잊어버립시다." 올리버는 실라의 손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의사 한 사람이 그들 앞을 지나갔다. 실라는 한 가닥 희망을 품고 그를 바라보았다. 의사는 그녀를 본채 만채 옆에 붙은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 방에서는 스탭들이 모여서 사례를 토의하고 강의를 듣곤 하였다. ''그이는 해골처럼 보이기 시작해요." 하고 실라가 말했다. "그이의 광대뼈를 좀 보세요. 올리버씨, 한 사람의 팔, 그렇게도 힘센 팔도 저렇게 빨리 시들 수가 있나요? 그이는 하루에 몇 파운드씩이나 체중이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아요. 마치 그이가 내 눈앞에서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는 것만 같아요." 제 20장 슬픔의 빵 데이욘은 네 명의 가면을 쓴 사나이들에 의해 동굴 안으로 운반 되어졌다. 한 마디의 말도 속삭여지지는 않았으나 네 사람의 두목이 바로 잘로프스키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동굴 안은 전장이 높았고 넓었으며, 어두컴컴했고 뻐죽삐죽 바위가 나와 있었다. 데이몬은 꼼짝도 할 수 없었으나 일단 동굴 안에 들어가자 그를 기다리고 있는 조각된 석관을 볼 수 있었다. 그외 데이몬은 자기 혼자서만 매장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벽에 기대어 서서,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큰 키에 여왕답게 의연히 서서 흐늘흐늘한 장미색 가운에 몸을 감씬 채 머리칼을 어깨에까지 늘어뜨리고 엷은 자주빚 광선에 모습을 드러내놓고 있는 것은, 죽어서 끗끗이 굳은 그의 아내였다. 다만 그는 그녀의 이름을 기억할 수가 없었다. 코패리아가 그가 생각해낼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이었는데, 그는 초조해서 자꾸만 되폴이해서 중얼거렸다. 다음에 코낼리아로 변했으나 그것 역시 틀렸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때 데이몬은 손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그 통증이 그를 께우거나 거의 깨울 뻔했다. 그러자 동굴과 키가 큰 엷은 자주빚에 비친 물체가 사라지고, 그제거야 아내의 이름이 실라라는 것과 그녀는 살아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는 검사를 하기 위해 손에서 피를 뽑으려 하고 있는 서툰 의사에게 감사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이 그의 꿈을 중단시켰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아직도 항해를 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배의 선장으로 임명하려고 노력하던 축 늘어진 수염을 가진 의사였다. 다만 지금 데이몬은 갑판 사이를 오르내릴 수 있는 자유가 없이 하계에 유계당해 대부분의 시간을 양손이 묶인 채로 있었다. 뒷쪽으로 빨리 돌아가는 사발 시계가 아직도 보였다. 그것은 그가 잠들지 못하도록 속이기 위해 고안된 음험한 장치였다. 그는 '잠들다'라는 단어를 똑뜩하게 황색 메모지에 쓸 수 있도록 익혔다. 그를 고문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 누구든 간에 그것이 최우선이었다. 그를 못 자게 만드는 것이. 휘황찬란한 네온 사인이 줄곧 그의 눈을 비쳐대고 있었다. 그는 언제 햇빛을 보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들은 쉴새없이 피를 넣거나 뽑아가기 위해 그를 찔러댔다. 그의 혈관은 구멍투성이가 되었고, 대부분의 의사들은 그들의 주사 바늘을 꽃을 적당한 장소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의, 팔과 손과 발은 끊임없는 시도때문에 검붉게 변색되었다. 그리고 그는 진심으로부터 닥터 진판델을 저주했다. 왜냐하면 나타날 때마다 그는 수혈 아니면 혈액 견본을 당했기 때문이다. 당번이면 누구나가 서툰 솜씨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에게서 피를 뽑아가거나 수혈 바늘을 꽂을 권리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는 그의 고갈되고 깊이 숨어 버린 혈관을 본능적인 손길로 단 한 번에 찾아내는 사람들에게 애처로운 감사의 념을 갖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그는 그 사람들이나 그들의 이름을 기억할 수는 없었다. 여러 분야의 의사들로 구성된 일단이 그에게 흥미를 느낀 듯이 보였다. 그들은 각기 모호한 의학의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배속된 의사들이었다. 그의 폐를 위한 의사, 그의 신장을 위한 의사, 그리고 기관 절개 수술을 받은 그 장소에 튜브를 꼿는 의사. 데이몬은 뇨도관을 통해 소변을 누었고, 설사 때문에 환자용 변기와 씨름을 했다. 그는 발가 벗겨지고 노출되어지고 마치 정육점의 고기 조각처럼 다루어졌다. 그리고 계속적인 굴욕 상태에서 살았다. 그것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간호원들은 그의 페를 가로막고 있는 틈새로 기침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차례로 돌아가며 그의 가슴을 펑펑 내리쳤다. 흑인은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데이몬은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그가 낭하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데이몬은 실라에게 다시 한번 그에 관해 경고했고, 너무 늦기 전에 경찰을 불러오라는 호소조의 문장을 그녀에게 썼다. 그리고 어느날, 밤이던가, 그는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와져 오는 소리를 듣고 아내에게 준 그의 메모가 드디어 도달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느꼈다. 데이몬은 의사와 간호원들이 흑인 한 사람만 남겨놓고 모두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 흑인은 방으로 들어와 그를 내려다 보았다. ''그 친구들은 내가 여기 남아서 당신을 두드려 줄줄 알고 있겠지만, 잘못 생각한 거지. 그리고 당신이 여기서 도망치려고 생각한다면 당신도 역시 잘못 생각한 거요." 데이몬은 그때 흑인이 잘로프스키가 시작한 일을 끝내기 위해 잘로프스키가 병원에 잠복시켜 놓은 하수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흑인은 그의 가슴에 올라앉아 데이몬의 바로 입 앞에 다이나마이트를 담은 전선 상자를 놓고 장치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문을 통과하게 되면." 하고 흑인이 말했다. "이것이 폭발하게 되지. 물론 당신까지도." 데이몬은 얼음처럼 냉정했다. 오히려 그토록 빨리 죽을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장치를 끝내자 흑인은 데이몬의 가슴에서 뛰어내려 사라져 버렸다. 데이몬은 갑자기 조용해진 방에 혼자 남겨졌다. 불들도 처음으로 거의 완전히 꺼지고 사이렌 소리는 점점 더 가까와져 왔다. 그리고는 차츰 작아지기 시작하더니 다시 방 안은 완전한 정적에 휩싸였다. 모두들 나를 버렸구나. 모두들 나를 버렸어. 하고 데이몬은 생각했다. 실라가 그를 배반한 것이다. 그를 믿지 않은 것이다. 그는 어둠 속에 누워 폭탄이 터지지 않는 것을 원망하며 기다렸다. 몸은 묶여 있고 소리칠 수도 없는 데이몬은, 그의 방의 열려진 문 앞을 쉴새없이 지나다니는 간호원들과 의사들에게 무언가 마실 것을 달라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 끊임 없이 신음소리를 내보았다가, 눈으로 주의를 끌려고 해 보았다가, 그의 손가락을 힘 없이 꿈틀거려 보기도 했다. 그들은 그가 교회 문 앞에 앉아 있는 거지나 되는 듯이 지나쳐 갔다. 그들은 마치 결혼식이나 세례식에 가려는 것처럼 서두르고 있었다. 데이몬은 계속 인공 호흡 장치를 사용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의사들이 바이러스성 폐렴이라고 진단을 내리고 또 다른 의사들은 단순한 울혈이나 페기능 저하라고 부르는 증세를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데이몬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의 치료 노력에 대해서 극히 냉정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닥터 로가드가 모처럼 그를 왕진했을 때 메모지에 다음과 같이 써 보였다. "나는 죽습니까?" 닥터 로가드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모두는 어차피 죽습니다." 데이몬은 그에게서 경멸하는 듯이 고개를 돌리려고 했으나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데이몬이 보기에 전적으로 그에게서 물을 빼앗아 가기 위한 직무를 맡은 의사가 있는 듯했다. 그는 지저분한 블롱드 수염을 기르고 매우 긴 블롱드 머리칼과, 음험한 광적인 눈을하고 있었다. 그는 헐렁한 흰 가운을 치렁치렁 꽁무니에 끌고 들락날락거렸다. 그는 페르시아 융단과 관계있는 수수께끼 같은 직업에 매달려 있었다. 그는 데이몬으로 하여금 융단에 그려 있는 인물과 같이 포즈를 취하게 하고,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었다. 데이몬은 희미하게 보이는 유적과 묘지의 벽과, 무자비한 햇빚과, 대낮의 태양이 수면에 작열하듯이 반사하는 호수로 둘러싸인 작은 섬의 벌거벗은 나무 밑의 불타는 듯한 모래 위에 묶여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마치 마술처럼 순식간에 옮겨 다녔다. 한편에서는 데이몬이 지금은 마술사라고 믿고 있고, 또한 구깃구깃한 제복을 입은 깡마른 간호원을 항상 데리고 다니는 의사가 유쾌한 듯이 콧노래를 흥얼거리여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데이몬은 그와 대화를 나눌 기회를 만들려고 했고 마술사는 애기하기를 꺼리기는커녕 자주 유쾌하게 응했다. "정확하게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요?" 하고 데이몬이 언젠가 물었다. "내가 일을 끝냈을 때 알게 될 겁니다." 하고 마술사가 말했다. "굳이 알고 싣다면 나는 사진 콘데스트에 나갈 생각이오. 여행 잡지사가 내 융단의 영혼과 디자인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몽타지 사진에 대해 현상을 걸었소. 당신도 다른 사람들저럼 물에 대한 불평만 하지 말고, 협력하는 법을 배워야 할 거요." 그것은 마술사가 나 이외의 다른 존재를 장악하고 있다는 첫 번께 암시였다. "모두들 불평을 중단할 것 입니다." 하고 데이몬이 말했다. "그들이 원하는 만큼 당신이 물을 마시게 해 준다면 말이오." 마술사가 읏었다. "좋소. 아침 10시부터 정오까지 모두들 물을 실컷 마시게 해 주겠소. 내 말을 잘 들으시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들은 다시 물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게 될 거요." 그는 그의 나무에서 데이몬을 풀어주고 그가 호숫가로 달려가 차가운 물에 얼굴을 처박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웃었다. 두 시 정각에 마술사는 그를 다시 나무에 묶었다. 데이몬은 이전보다 더 목이 말랐다. 그의 주위에서 '물 ! 물 !' 하는 아우성 소리가 들렸다. 그 아우성 소리에 섞인 마술사의 웃음 소리를 데이몬은 들을 수 있었다. 실라는 닥터 진판델의 바깥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며칠 동안 갈아 입을 생각도 하지 않던 구겨진 스웨터와 스커트를 말쑥한 새 옷으로 갈아 입고 있었다. 실라는 앞으로 벌어질 대화에 대비해서 침착하고 차분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진판델 박사의 비서가 말했다. "들어가 보세요." 실라는 스커트의 주름을 펴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안 쪽 진료실로 걸어들어 갔다. 그곳에서는 닥터 진판델이 방금 나간 환자의 차트를 책상 위에 펼쳐놓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다. 실라는 그가 병원에 새벽에 출근하고 대개 밤 11시까지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판델 박사는 아내와 두 아이들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녀는 그들을 본 적도 없고 그의 책상 위에서 가족 사진을 본 적도 없지만, 실라는 그들에 대해 동정을 느꼈다. "그는 의술의 미치광이입니다." 하고 올리버가 말한 적이 있지만, 실라도 그러한 의견에는 공감을 느끼고 있었다. 진판델 박사는 그녀를 쳐다보고 잠깐 웃어 보였다.''앉으세요." 하고 그가 말했다. ''우리가 서로 애기할 시간을 갖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을 아시겠지요?" "알고 있습니다." 하고 실라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 생각이 틀렸기를 바랍니다." 진판델 박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몬 부인, 나는 그를 중 환자실에서 나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의 남편은 아직도 중 환자이니까요. 그분의 상태는 매우 유동적입니다. 부인도 알다시피 나는 환자나 환자의 가족들에게 거것말을 하거나 숨기거나 하지를 않습니다. 사실 중환자실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는 환자들은 심한 정신적인 우울중에 빠지는 경향이 있읍니다. 그러나 부인의 남편의 경우, 우리가 먼저 구해야 될 것은 그분의 육채입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직업적인 원칙과 직업적인 경험을 갖고 있답니다." ''저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의사 선생님." 실라가 될 수 있는대로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하지만 저도 그이와 오랜 세월을 같이 살았기 때문에 그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있어요, 그이는 현재 자기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읍니다. 그이는 뼈와 살만 남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체중을 잃고 있어요. 그리고도 매일 몇 파운드씩 체중이 줄어들고 있어요. 그이는 먹기를 거부하고 있다구요." "내가 처방해 준 분말을 우유에 타셔서..." "저도 그 처방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요. 선생님은 처방을 해 주었지만, 그이는 한 모금만 마시고는 벽 쪽으로 얼굴을 돌려 버려요. 저는 그이 에게 과자와, 연어와, 캐비아와 스프와 과일들을 가져다 주었어요. 그런데 그이가 먹은 것은 파인애플 쥬스 뿐입니다. 파인애플 쥬스로 얼마 동안이나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이는 치명적인 무기력 상태에 있어요. 그이는 죽을 구실을 찾고 있는 거라구요." "너무 과장하시는 것 같군요, 데이몬 부인." "죽어가는 사람들과 죽음의 기계와 장치로 둘러 싸여 있는 빌어먹을 놈의 중 환자실에서 그이를 빼내어 그이의 병실로 돌려 보내고 싶을 뿐이에요. 그이를 자유롭게 움직이게 하고 어떤 변화를 주고 싶어요. 그이는 우리 안에 갇힌 맹수 같아요. 쇠철장 안에서 먹기를 거부하고 누워서 죽기를 기다리는 맹수 같다구요." "남편을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진판델 박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분은 인공 호흡장치와 산소통과 모니터가 필요합니다. 그분의 심장과 맥박과 혈압. 그분의 적혈구는 계속 위험스럽게 낮아지고 있습니다. 언제 위독한 상태가 닥칠지 모릅니다. 그분은 매 순간 순간의 관찰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중 환자 실 만이 그런 설비가 되어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우리들이 그분의 생명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데이몬 부인." "저도 마찬가지예요." 하고 실라가 말했다. "하지만 그이가 지금 있는 곳에서는 그 생명을 포기하고 있다구요." "부인의 두려움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판델 박사가 차분하게 말했다. "부인의 견해는 다분히 주관적인 견해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치스러운 짓을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근거에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들을 믿고 맡겨 주셔야 합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실라는 딱 잘라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진료실을 걸어 나갔다. 올리버가 언제나처럼 일을 끝내고 저녁 때 중환자 대기실에 갔을 때, 그는 실라가 그 전 날 밤에 헤어질 때보다 훨신 더 초췌해져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무슨 일입니까?''하고 그가 물었다. "할 얘기가 있어요." 실라가 주위를 돌아다 보았다. 방 안에는 두 사람의 다른 방문자가 있었고, 중환자실의 주임 의사가 그 중의 한 사람과 방 구석에서 무엇인가 심각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여기서는 말하고 싶지 않아요. 밖에 나가서 커피나 한 잔 하실까요?" "병세가 더 악화되었습니까?'' 하고올리버가 긴장해서 물었다. "그이는 매일 매일 악화되고 있어요." 실라는 그렇게만 말하고 그들이 가끔 가는 병원 근처의 조그만 카페의 테이블에 앉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곳은 간호원들이 휴식 시간을 이용해서 자주 이용하는 곳이었다. 입구 근처에 세 명의 간호원이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어서, 그들은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무슨 일입니까?" 하고 올리버가 다시 물었다. 그의 얼굴도 총격 사건 이후에 초췌해졌으나, 지금은 긴장으로 팽팽해져 있었다. 그는 군중 속에서 어머니를 잃고 금시라도 울음을 터뜨리려고 하는 소년처럼 보였다. ''무언가 심상치를 않아요." 실라가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리고는 진판델 박사와의 대화 내용을 얘기했다. "로저는 매일 악화되고 있어요." 하고 그녀가 덧붙여 말했다.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런데도 의사는 막무가내라구요. 내 말을 듣는 척은 하지만, 듣지도 않는 거라구요. 좋은 생각이 없으새요 ?" 올리버의 얼굴이 불안으로 일그러졌다. "글쎄요.." 그가 한참 만에 말했다. ''당신을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무슨 일인데요 ?" "이건 상상에 불과합니다마는.." 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올리버씨, 말을해 봐요." 실라가 못 참겠다는 듯이 재촉했다. ''우물쭈물하지 말고 말해 보라니까요." "그들은 책임을 분산시키려 들고 있읍니다." "누가 책인을 분산시킨다는 말이죠? 무슨 잭임을?" 실라가 언성을 높였다. ''모두들 말입니다. 의사들 말이지요. 누구에게나 함부로 얘기해서는 안 되는 얘기입 니다마는. " "수수께끼 같은 얘기는 그만두세요, 올리버씨, 제발....." "패니라는 예쁘게 생긴 블롱드 머리의 간호원을 아세요?" "네, 알아요." "그녀와 두어 번 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읍니다." 올리버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녀는 굉장히 지적입니다. 또한 매우 매력적이기도 하구요." "그런 설명은 필요 없어요." 실라가 난폭하게 말을 가로막았다. "계속해 보세요." ''로저가 당신에게 변호사를 고용하라고 언젠가 편지를 쓴 것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물론이지요. 기억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누군가가 그것을 당신에게 전달되기 전에 잃었습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의사가 그걸 읽었어요. 그들은 당신과 로저가 로가드와 병원과 모든 의사들을 부정 의료 행위로 고소할 생각으로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수 백만 달러의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읍니다." "로저는 평생에 누구도 고소해 본 적이 없어요. 그이는 신문에서 그런 소송에 관한 기사를 읽을 때마다 화를 내곤 했다구요. 그이는 저한테 그런 것은 미국의 의사들을 망치는 것이라고 말했어요." "당신이야 알고 있겠지요." 올리버가 말했다. "나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릅니다. 적어도 패니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겁을 집어먹고 있어요. 또 한 가지 패니가 저한테 한 말이 있읍니다." "무엇을요?" 올리버는 아무도 그의 말을 엿듣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주위를 돌아다 보았다. "그들이 수술이 끝난 뒤 그를 중 환자실로 데려 왔을 때 당직하던 의사가 말했답니다. '로가드의 엉터리 의술이 또 한 사람 잡았군'하고요." "하느닙 맙소사!" 실라가 신음소리를 내며 비난하듯이 ''당신 형님께서 로가드 박사는 미국에서 제일 가는 의사라고 말했다면서요?" "미안합니다." 올리버가 사과하듯이 말했다. "만일 그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것은 정당한 것일 겁니다. 만일 형님이 로가드가 미국 최고의 의사라고 했다면,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얘기일 것입니다. 아마 로가드가 한때는 유능했는지도 모르지요. 아마 한번도 유명해 본 적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올리버는 어깨를 흠칫해 보였다. "명성이란 다 그런 것입니다. 더구나 의사들의 세계는 패쇄된 사회입니다. 좀더 온건하게 표현하자면, 그들은 서로를 비난하는 습관이 없습니다.. 패니가 또 한 가지 말한 것이 있읍니다. 중 환자실에 보낸 수술 기록의 맨 꼭대기에 세 글자가 씌어져 있었답니다." 그는 망설였다.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군요, 실라." "세 글자라니오?" "SCYA." 하고 올리버가 말했다. "그 글자가 무슨 뜻이지요?" 하고 실라가 눈썹을 찡그렸다. "패니의 말에 의하면 '실수를 숨기라'는 뜻이랍니다." 올리버가 무거운 짐이라도 벗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중대한 실수를 범한 것을 알고 관계된 의사 전부에게 경고를 내리고 그것을 은폐하라는 암호입니다." 실라는 눈을 감고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얼굴에서 손을 내렸을 때 그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더러운 놈들 !" 그녀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돼지 같은 놈들!" "그런 말을 함부로 하지는 마세요, 아셨어요?" 올리버가 긴장해서 말했다. "만일 패니에게서 그 말이 새어나왔다는 것을 알면 그들은 그녀를 당장 쫓아낼 것입니다." "패니에 대해 걱정할 것은 없어요. 나는 내 방식대로 처리할 테니까요. 로저는 내일 중 환자실에서 나오게 될 거예요. 왜 진작 그런 말을 저한테 해 주시지 않았지요?" "말해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읍니까? 그들은 겁에 질려 있어요. 그들을 공격해 보았자 로저씨한대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올리버씨, 나는 오늘 밤에 다시 병원에는 돌아올 수가 없어요. 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군요. 오늘 밤에 아름다운 패니와 데이트가 없다면 오늘 밤 나와 만나 주세요." 올리버가 다시 얼굴을 붉혔다. "우리는 우연히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답니다. 그녀는 당직이 끝나서 퇴근하는 길이었지요. 마침 저녁식사 시간이라.." "내게 사과할 건 없어요." 실라가 웃으며 말했다. ''로저가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해서 가끔 데이트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올라 가서 만일 로저가 깨어 있으면 오늘 밤에는 당신과 함께 식사하기로 했다고 말을 전해 주세요. 그이는 이해해 줄 거예요. 한 블럭 가량 내려가면 살롱이 하나 있어요. 그곳의 바아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께요. 만일 내가 취해 있더라도 놀라지는 마세요." 진판델 박사가 다음날 아침 6시에 언제나 처럼 병실을 찾아왔을 때, 실라는 창문 옆에 있는 조그마한 안락 의자에 앉아서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판델 박사는 항상 그렇듯이 아침에는 쾌활하고 생기가 념쳐 홀렸다. 진판델 박사는 침대 밑에 놓여진 간호원의 차트를 보고 나서 데이몬의 맨발을 세밀히 만져 보았다. 데이몬의 발가락은 이제 거무 튀튀한 색이 아니었다. 진판델 박사는 데이몬에게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매일 아침 새벽에 찾아와서 또 하루의 고통스럽고 끝이 없는 일과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진판델 박사가 데이몬은 역겹게 느껴졌다. "화장실 변기통에 처박혀 있는 기분이오." 진판델 박사는 데이몬의 대답에 미소를 지었다. 마치 그러한 대답을 데이몬이 회복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징표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발가락이 아직도 차갑습니다." 진판델 박사는 데이몬의 발가락을 다시 한번 만져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혈액 순환이 제대로 안 되기 때문에 그럴 겁니다. 잠시 후에 사람을 한 명 보내겠습니다. 혈액 채취를 해서 검사를 해 보도록 합시다." 데이몬이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인간의 혈관이 어디에 자리잡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을 보내 줄 수는 없겠소? 당신이 지금까지 보낸 사람들은 겨우 피 몇 방울을 체취하려고 열 차레 이상이나 계속해서 푹푹 찔러대니 견딜 수가 없어요." "선생의 혈관은...." 하고 진판델 박사가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의 혈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누차 말씀을 드렸으니까요." 진판델 박사는 차트에 무어라고 긁적거리고 나서 침대 밑에 내려 놓은 뒤, 병실에서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진판델 박사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그가 병실에 있을 때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실라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문을 열었다. "선생님과 잠시 말씀을 나누고 싶어요." 실라가 진판델 박사에게 말을 거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밖에서요." 실라는 진판델 박사를 따라서 복도로 나갔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진판델 박사가 말했다. "언제나 스케줄이 밀려 있어서..." "그이를 특실로 옮기고 싶어요. 오늘 당장에 옮겨 주세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이미 설명해 드렸듯이......" "그이 병실을 바꾸어 주지 않으면, 병원을 옮겨 버리고 말겠어요." 실라의 목소리는 지극히 담담했다. "정말이에요. 변호사를 찾아가서 필요한 조치를 취해 놓을 거예요." 진판델 박사는 변호사라는 말을 듣는 순간, 얼굴 근육이 악간 경련했다. "알아 보도록 하겠읍니다." 진판델 박사가 말했다. "알아 보는 것 만으로는 안 돼요. 오늘 오후 3시까지는 그이를 특실로 옮겨 주셔야 돼요." ''부인.." 진판델 박사가 다소 뚱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부인께서는 지금 제가 지금까지 준수해 온 의사로서의 의무에 역행되는 일을 하도록 촉구하고 계십니다. 간호원들의 고심에 현혹되셔서 불가능한 요구만 하신다면, 그건 정말이지 곤란합니다. 변호사 문제만 해도.." "오늘 오후 3시 까지예요." 실라는 딱 잘라서 말한 뒤 병실로 돌아왔다. 그날 아침 데이몬은 마지막으로 환각에 빠져 있었다. 그에게는 설명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데이몬은 마음대로 배 주위를 돌아 다녀도 좋다는 허락이 있었다. 배 자체는 바뀌어 있었다. 이제 배는 지저분한 화물선이 아니었다. 그러나 흰색으로 칠해진 배는 승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배가 곧 입항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짐을 꾸리고 작별인사 하기에 분주하였다. 이야기를 들은 바는 없으나, 그 항구가 시애틀이라는 것을 데이몬은 알고 있었다. 데이몬은 또한 모든 사람들은 육지로 상륙을 하지만, 자신만은 배에서 내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배는 커다란 고동 소리와 함께 닻을 내리고 정박하였다. 누구인가를 한 사람 한 사람 알게 되었고, 이제는 가망성 없는 사랑을 품어 왔음을 깨닫게 된 간호원들이 그의 앞을 지나갔다. 이제 간호원들은 흰 옷을 입지 않았고, 매력적인 여행복을 갖가지 색으로 갈아 입고 머리도 새로 단장하였으며, 얼굴에는 공들여 화장을 하고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서 갑판 위를 다각다각 소리내며 걷고 있었다. 그들은 데이몬을 보고서는 다정하게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오직 한 사람의 간호원만이 발길을 멈추고서 데이몬에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녀는 모든 간호원 중에서도 가장 예쁜 간호원이었는데, 모두들 그녀를 패니라고 불렀다. 진한 푸른 색으로 눈화장을 한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고여 그 천사와 같은 아름다운 얼굴로 홀러 내렸다. "왜 울고 있지 ?" 하고 데이몬은 동정하면서 물었다. "저는 올리버 가브리엘슨을 사랑하고 있어요." 하고 그녀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분도 저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분은 이미 결혼한 분이라구요." "오, 패니." 데이몬이 말했다. "패니는 울기 위해 태어났나 보군. 늘 울고 있으니." "저도 알고 있어요." 패니는 훌쩍이며 말했다. 그리고는 그에게 키스를 해주었다. 그녀의 입술은 축축하고 부드러웠다. 그녀는 가방을 들고 널빤지를 딛고 육지로 내려갔다. 그러자 소처럼 굵은 목을 가진 의사가 '버지니아 대학'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는 지퍼가 달린 잠바를 입고, 데이몬 앞에서 발길을 멈추어 섰다. "자, 잘 있어요. 영감님." 하고 의사는 친절하게 말을 건냈다. "육지에서 가져다 드릴 뭐 부탁할 만한 것이라도 있읍니까?" 데이몬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코카콜라와 얼음을 좀 갖다 주세요." 하고 그가 말했다. "그렇게 하지요." 의사는 말하면서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그의 손아귀는 강철처럼 힘이 세었다. 그 의사 역시 널빤지를 딛고 상륙하자, 그 거대한 배에는 데이몬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 그날 오후 데이몬은 특실로 옮겨졌다. 데이몬은 어떻게, 또한 왜 이렇게 된 건지 실라에게 묻지도 않았고, 실라 역시 데이몬에게 말해 주지도 않았다. 그 특실에는 개인용 샤워와 화장실이 있었다. 데이몬은 보행기의 도움 없이는 서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보행기에 이용하여 화장실로 가서 무아경에 가까운 감정에 빠져 변기 위에 앉아 있었다. 용변을 마친 후 데이몬은 몸을 일으켜 보행기를 의지하고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들여다 보았다. 그가 중 환자실을 떠나기 전에 병원 이발사가 와서 면도를 해주었다. 그의 얼굴의 윤곽은 완전히 딴 판이었다. 거울로 들여다 보는 얼굴은 그가 전에는 보지 못한 낯선 얼굴이었다. 창백한 얼굴, 날카롭게 튀어나은 뼈에 빳빳하게 풀을 먹인듯한 피부, 움푹 패인 눈에는 아무런 광채도 없었다. 죽은 사람의 눈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어색한 솜씨로 아주 조심스럽게 보행기를 움직여 가까스로 방으로 돌아왔다. 실라와 간호원이 그를 부추기고 다리를 들어 올려 데이몬을 침대에 눕혔다. 왜냐하면 데이몬은 스스로 그렇게 할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방안에 시계가 없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 "제가 타임즈 신문을 가져 왔어요. 보실 거예요?" 하고 실라가 말했다.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신문을 펼쳐 들었다. 날짜는 그에게는 아무래도 좋았다. 오히려 말이 산스크리트어였더라면 더 나을 뻔했다. 그는 신문을 침대 커버 위에 내려 놓았다. 데이몬은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하였다. 간호원은 호스를 가져다가 목 아래 기관 절개를 한 구멍을 통해 페로 집어 넣고서, 폐에서 오물을 배출시키는 압축기의 스위치를 눌렀다. 윌라는 아이스크림과 달걀이 듬북 들은 초콜렛 밀크 쉐이크를 그에게 가져왔다. 데이몬은 어렸을 때 밀크 쉐이크를 미친 듯이 좋아했었다. 그러나 한두 모금 마시더니 옆으로 밀어 놓았다. 실라는 그가 밀크 쉐이크 조차도 거절하는 것을 걱정스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어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로서는 더 이상 마실 수가 없었다. 가슴과 배에 감은 붕대가 제거 되었으나 데이몬은 그 상처를 보고 싶지도 않았다. 간혹호은 하루에도 네 번 내지 다섯 번 붕대를 갈아 주고 엉덩이에 남아 있는 커다란 욕창을 씻고 소독해 주었다. 그 욕창은 이제까지 거의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항생 물질의 정액주사나 수혈 때의 주사바늘을 꽂고 있는 것만큼 견딜수 없는 고통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데이몬은 그의 모든 환상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가 실제로 살아서 겪은 일인지, 또는 단순히 꿈을 꾼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그러한 일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때때로 그러한 일이 있기 전에 죽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고, 또한 자신이 살아서 병원을 나갈 수 없으며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동안 이러한 고민을 연장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데이몬은 매번 여덟 시간씩 3교대로 자기 옆을 떠나지 않고 자기를 침대에서 내려주고 나서 처음에는 보행기로, 다음에는 지팡이로, 매일 몇 차례식 조금씩 걷도록 해주는 실라와 간호원들을 괴롭히는 일에 대하여 자기 자신을 원망하였다. 그는 음식을 먹으려고 에써 보았지만, 모든 음식이 입 안에서는 건조한 양털 같아서 억지로 씹다가는 내뱉아 버렸다. 낮 당번 간호원은 매일 아침 그의 몸무게를 달았다.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는 몸무게가 138파운드 나간다는 것을 알았다. 날짜는 하루하루 지나가건만 1파운드도 늘지도 줄지도 않았다. 그가 병원에 일원할 때는 175파운드였었다. 진판델 박사는 장치가 불가능하다고 실라에게 말했지만, 인공 호흡 창치가 방안에 설치되었다. 실라는 병동 의무실에 있는 수 간호원에게 찾아 갔다. 수 간호원은 전에 친구였던 나이가 많은 아일랜드 여자였다. 실라가 진판델 박사가 한 말을 전하자, 그 간호원은 콧방귀를 뀌더니 36분내로 필요한 장비를 설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데이몬은 인공 호흡기와 산소 마스크를 싫어했으며, 그러한 장치가 그에게 부착될 때는 질식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산소 마스크를 벗어 버리는 일은 삼가하도록 되어 있었다. 올리버는 병실을 들락날락하며 데이몬의 기운을 돋구려고 애썼다. 올리버는 사무실 일이 잘 되어 나가고 있다고 그에게 말했으나, 데이몬은 그의 말을 막아 버렸다. 올리버가 계약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올리버, 집어 치우게." 하고 데이몬이 소리쳤다. 데이몬이 기억하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은, 그 예쁜 간호원 패니가 꿈 속에서 배가 항구에 정박하여 작별을 할 때 울고 있었다는 일이었다. "올리버, 자네는 패니와 결혼할 셈인가?'' 하고 데이몬이 물었다. 올리버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자네에게 경고하겠네.'' 데이몬이 말을 이었다. 꿈은 현실로 구채화되었다. "도리스는 자네에게는 훌륭한 아내야, 그리고 그녀는 승자라구. 패니는 비록 예쁘지만 그녀는 이 세상에서는 영원한 패배자야. 만일 자네가 패니와 결혼한다면, 자네는 평생 동안 슬픔의 빵을 먹게 될 걸세." 죽어가는 사람은 마지막으로 정직한 말을 할 권리가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제 21장 무덤의 안식 실라가 정성들여서 준비한 음식과 밀크 쉐이크를 아무리 열심히 먹고 마셔도, 데이몬은 빠진 체중을 다시 회복할 수가 없었으며 몇 발자국만 걸어도 그날 하루 종일 힘이 없어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느껴 온 긴장감과 절망감은 완전히 해소되었다. 지금의 데이몬은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으며,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간에 순순히 흘러가는 흐름에 몸을 맡겼다. 죽음은 너무나도 친숙해져서 데이몬을 놀라게 하지 못했다. 데이몬은 의사와 간호원들이 자기를 혼자 내버려 두기만 한다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펀안히 죽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신이 죽고난 이후로 경이적인 현대 의학에 의해서 다시 소생되었다는 환각을 느끼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렇게 되면 무덤의 안식이라는 말이 조롱의 대상이 될 것이 분명했다. 예순 다섯이면 이 세상을 하직하기에 그렇게 나쁜 나이는 아니었다. 데이몬은 자기가 알고 있는한 사람이 헐리우드에서 타당한 이유로 자살을 했을 때, '죽을 때'라는 말을 실라에게 한 적이 있었다. 목구멍으로 연결된 튜브의 구멍을 손가락으로 만지작 거리며 숨을 깊이 들이키라는 레바인 박사의 말을 기억해내고서는, 데이몬은 자신이 진짜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냐고 실라에게 물어보았다. "그렇지 않아요." 실라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데이몬은 아무리 중대한 이유가 있더라도 실라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신은 결코 죽은 적이 없었어요. 끔찍한 생각일랑 하지 마세요." 데이몬이 환자 치료에 일가견이 있는 유일한 의사라고 지금까지 생각해 온 레바인 박사가 불쑥 병실 문을 밀고 들어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이젠 선생께서 말을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사전에 아무런 이야기도 없다가, 레바인 박사는 데이몬의 목에 연결해 둔 튜브를 제거해 버렸다. 그리고 나서는 역시 무관심한 어조로 말했다. "자, 입을 열고 말을 해 보세요." 데이몬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 한동안 레바인 박사를 지겨보았다. 너무나도 불시에 모든 일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데이몬은 숨을 한 번 깊이 들이마시고 나서, 원래 목소리대로 말했다. ''우리의 조상이 아메리가 대륙에 처음으로 이주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됐읍니다. 그만하세요." 레바인 박사가 투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바인 박사는 데이몬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이젠 선생과 더 이상 만나게 될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다음에 말문을 여실 때는 좀 더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레바인 박사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병실을 나갔다. 한동안 잃어버렸던 말을 되찾게 된 데이몬은 수술을 죽 지켜본 실라와 간호원에게 맨 먼저 말을 걸었다. "무슨 놈의 방이 이렇게 더워. 에어콘 좀 틀어요, 에어콘 좀." 데이몬은 지금까지 불운의 배우 생활을 했던 때를 제외하고, 평생을 원고 뭉치와 더불어서 남의 말만 들으면서 생활해 왔지만, 언어가 인간과 동물을 구분짓는 척도가 된다는 거짓말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병실은 온통 친구, 고객, 프로듀서, 편집인 등을 비롯해서 데이몬과 안면있는 사람들이 보내온 선물과 꽃으로 발디딜 틈도 없게 되었다. 게다가, 하루에도 병문안을 오겠다는 전화가 10통 이상이나 걸려왔기 때문에, 데이몬은 병실의 전화기를 떼어 버리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데이몬은 전화를 받지 않겠다고 한사코 우겼으며, 실라가 올리버와 맨프레드 웨인슈타인의 전화를 제외하고는 모두 데이몬과 연결시켜 주지 않고 중간에서 끊어 버렸다. 다리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고 나자 맨프레드가 목발을 짚은 채 힘겹게 데이몬을 찾아왔다. 맨프레드는 핼쓱해 있었으며, 두 뺨도 옛날처럼 불그스레 하지도 않았으나, 아직까지 죽을때가 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맨프레드는 말을 조심스럽게 하는 친구가 아니었다. 데이몬의 홀쭉해진 얼굴을 내려다 보면서 맨프레드가 불쑥 이런 말을 던졌다. "로저, 이 엉터리 같은 친구야, 한 방도 안 맞았으면서 이게 무슨 꼴인가? 나원 참, 기가 막혀서..." "왜 그래, 이 친구야, 나도 주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맞았다구." 데이몬이 즉각 응수했다. "그건 그렇고, 그 꼴사나운 목발은 언제 쯤 태워 버릴 수 있나?" 맨프레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데이몬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17년 전 역전 주자를 3루에 놓고 타석에 나갔다가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하고 벤치로 돌아오던 맨프레드의 얼굴 표정을 뗘올렸다. 맨프레드는 자기 아들을 만나러 캘리포니아로 갈 예정이지만, 데이몬이 퇴원했다는 소식을 듣는 즉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맨프레드는 무지무지하게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뉴욕 경시청이 맨프레드가 코네티컷의 권총 소지증만 가지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서 총을 압수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맨프레드가 욕설을 퍼부어댔다. "옛 친구가 살해되지 않도록 지켜 주려고 했다고 감방에 처넣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 맨프레드는 슐터와 몇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잘로프스키는 흔적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권총은 아무런 단서도 되지 못했다. 슐터는 잘로프스키가 생각보다 더욱 심한 상처를 입고 고생하다가 목숨을 잃고서는 동료 마피아 단원의 손에 의해 땅에 묻혔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반면, 맨프레드는 잘로프스키가 북미나 시칠리, 또는 이스라엘 같은 곳으로 도망쳤으리라고 생각했다. 맨프레드는 모든 조직 범죄가 이탈리아인이나 큐바인, 또는 유대인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며 잘로프스키는 본명이 무엇이든지 간에 범죄 단체의 일개 하수인에 불과하다고 추측했다. "잘 있게, 로저." 맨프레드는 떠나기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 "이 염병할 놈의 무릎이 완치된 모습을 자네에게 꼭 보여주겠네." 그러나, 데이몬은 맨프레드의 얼굴 표정에서 그가 다시는 못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올리버는 제네비 돌저 부인을 한 번 만나봐 달라고 데이몬에게 부탁했다. 돌저 부인은 그동안 일주일에 두 번씩 데이몬의 병실에 큰 꽃다발을 보내왔으며 파이 굽는 것을 기적적으로 포기하고서는, 데이몬이 입원해 있는 동안 신작 소설을 완성했다고 전해왔다. 계약 출판사에서는 돌저 부인의 원고료를 네 배로 올려 주었으며, 올리버는 현재 패이퍼 백 출판사를 비롯해서 영화까지 만들기 위해 영화사와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올리버의 말에 의하면, 돌저 부인은 최소한 한 번만이라도 만나서 데이몬에게 감사의 말을 하고 싶다고 우겨댔다. "더 늦기 전에 만나보고 싶다는 건.." 데이몬은 올리버의 말을 전해 들으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돌저 부인은 선생님을 무지무지하게 사랑하고 있다고 했읍니다." 올리버가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돌저 부인은 지금까지 자신이 진짜 여자라고 느끼게 해준 사람은 선생님밖에 없었다고 했읍니다." 데이몬은 신음하는 듯한 소리를 냈지만, 만나보겠다고 말했다. 데이몬이 생각하기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았다. 제네비브 돌저 부인이 없었다면, 밤낮으로 간호원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특실에 입원해 있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주일에 1백 달러씩이나 주고 진판델 박사 같은 의사의 진찰을 받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좋아, 만나보도록 하지." 데이몬이 말했다. ''하지만, 면회 시간은 딱 10분간이라고 돌저 부인에게 전해 주게. 그리고 내가 몸이 너무 허약해서 사랑한다는 말은 들읕 수가 없다는 것도 아울러서 전해 주게나." 그러나 제네비브 돌저 부인의 애정 공세를 감당해 내기도 전에, 데이몬은 또 한 명의 여자 손님을 처리해야만 했다. "그리고, 당신의 전처인 엘레인이라는 여자가 어제 두번씩이나 전화를 했어요." 실라가 말했다. 실라는 일층 접수 창구에 갔다가 조금 전에 돌아와 있었다. 데이몬이 병실에서 전화를 없애 버린 이후로, 실라와 데이몬에게 오는 편지를 비롯해서 기타 다른 전달 사항은 접수 창구에서 받아 놓고 있었다. "그 여자는 당신을 반드시 만나 보아야 한다고 말했어요." "스파맨. 엘레인은 스파맨이라는 남자와 재혼을 했었지. 비록 오래 전에 다시 이혼을 하기는 했지만..." "뭐라고 얘기하죠?" 실라는 지금까지 엘레인을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고, 데이몬도 실라가 엘레인을 지금 만나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머지않아 죽을지도 모르는 이 시점에서 엘레인을 다시 한번 만나보는 것도 괜잖으리라고 생각했다. 엘레인은 한때나마 데이몬이 사랑한다고 생각했었던 여인이었다. 그리고 짧은 순간이나마 두 사람은 젊었을 때 행복한 나날을 보내기도 했었다. 데이몬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엘레인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할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았다. 게다가, 엘레인이 지금 사귀고 있는 도박사 친구는 발이 굉장히 넓었기 때문에, 잘로프스키에 관해서 단서가 될 만한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엘레인이 데이몬과 개인적으로 만나서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마땅히 들어주어야 할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엘레인은 어떻게 해서든지 항상 데이몬을 즐겁게 해주었다. 어떤 때는 하도 기가 막히는 말을 하는 바람에 같쟎아서 웃는 경우도 있었지만.... ''내가 만나보고 싶어한다고 전해 주구료." 하고 데이몬이 말했다. 데이몬은 자신의 대답이 실라의 마음에 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아내의 일시적인 불쾌감 때문에 자신의 과거를 부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실라가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으나, 바로 그 순간 폐병 전문의 중에서 한 명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의사는 거의 매일같이 데이몬의 병실을 찾아왔다. 폐병 전문의는 데이몬을 먼 발치에서 쳐다 보면서 직업적인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간호원에게 훨채어를 밀어 달라고 해서 태라스로 나가서 신선한 공기를 좀 씌도록 하세요." 의사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병실을 나갔다. 데이몬은 그 의사 에게도 엄청난 액수의 돈을 지불하고 있었지만, 한 번도 충고를 받아들인 적은 없었다. 뉴욕의 스모그와 자동차 매연을 몇 모금 더 마셨다고 해서 이미 나빠진 폐가 더 이상 나빠질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엘레인이 다음날 오후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데이몬은 엘레인과 만나보겠다는 말을 함으로써 실라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을 후회했다. 엘레인은 아래 위로 검은 옷을 입고 있었으며 얼굴에서는 화장기를 하나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엘레인의 달라진 외모도 검은 상복과 우울한 표정 때문에 그 빚을 잃고 있었다. 실라는 스파맨 부인이라는 여자가 찾아 왔다고 일층 간호원이 알려주는 순간, 슬쩍 자리를 피했다. "불쌍한 양반.." 엘레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데이몬의 이마에 키스를 하려고 몸을 굽혔다. 그러나 데이몬은 고걔를 옆으로 돌려 버렸다. "진작 찾아 왔어야 되는 건데, 얼마 전에서야 소식을 들었어요. 그동안 라스베가스와 낫소에서 지내다가 뉴욕에는 이틀 전에 돌아 왔거든요. 세상에, 어쩌다 이런 일이..." ''엘레인." 데이몬이 엘레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 옷을 입고 있는 당신의 모습이 꼭 뭐 같은지 알겠소? 까마귀같아, 까마귀. 기를 팍 꺾어 놓는구만. 집으로 돌아가서 비키니 차림이나 아니면 좀 더 기분좋은 옷으로 갈아 입고 오는게 어떻겠소?" ''당신 눈에 경솔한 여자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엘레인은 마음의 상처를 입은 듯,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경솔한 정도가 아니라 천박해, 천박하다구.'' 데이몬이 신경질 적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도 충고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다행으로 여기라구." "저는 환자들의 습성에 대해서 알고 있어요. 환자들이란 원래 고통을 겪을 때면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투정을 부리기 마련이죠." "나는 지금 아프지가 않아." 데이몬이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당신이 나의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구." "당신한데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아요." 엘레인이 다소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이 옷이 당신 기분을 상하게 한다면, 밖에 나가서 코트를 입고 오겠어요. 코트는 검은 색이 아니니까요." "그래, 그래, 가서 그 코트라도 입고 와." 데이몬이 말했다. 혼자 남게 되면 죽기가 훨씬 더 쉽겠지, 데이몬은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금방 돌아을께요." 엘레인이 병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검은 색 스타킹을 신은 두 다리가 곧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다시 병실 문을 열고 들어셨을 때, 엘레인은 밝은 오렌지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이젠 조금 더 나은 것 같아요?" "음, 훨씬 좋군." "당신은 항상 경망스러운 기질이 있어요." 엘레인이 코트의 깃을 똑바로 하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도 저는 지금 같은 순간에는..." 엘레인은 말을 끝맺지 않았다. ''엘레인, 당신만 괜찮다면 나는 지금 같은 순간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말을 하고 싶지가 않소." "오늘 아침 이곳에 오기 전에 당신을 위해서 기도했어요." ''당신의 기도가 하느님의 귀에 들어 갔으면 좋겠군." "성 패트릭 성당에 갔었어요." 엘레인은 자신이 훌륭한 담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그런 여자였다. 엘레인의 그러한 성격은 지금의 이 한 마디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당신은 가톨릭 신자도 아니로구만." " 가톨릭 신자들도 하느님은 믿어요." 엘레인은,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전 그리스도 교회의 옹호자같았다. 데이몬은 만일 모든 사람들이 엘레인과 같이 신에 대해서 이랬다 저랬다 한다면, 종교 전쟁은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들 그렇게 말하더군." 데이몬이 말했다. "당신에게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소. 혹시 그 남자 친구하고 여행하면서... 에, 내 문제에 관한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소?" "없었어요." 하고 엘레인이 딱 잘라서 말했다. "그렇다면 좋아..." 그는 자리에 누워 두 눈을 감았다. "엘레인, 나는 지금 무지무지하게 피곤해 죽겠소. 이렇게 병 문안을 와 줘서 정말 고마운데, 이젠 낮잠을 좀 자는 게 좋을 것 같소." ''로저" 엘레인이 잠시 머뭇거렸다. 엘레인은 머뭇거리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무엇인가 긴히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았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물어보고 싶은 게 뭐요?" 데이몬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이렇게 물어 보았다. 더 이상 오렌지색 코트를 보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결혼 첫 해에 제가 당신 생일 날 드린 사진을 기억하고 계시나요?" "우리가 부부로 지낸 것은 그 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 데이몬은 아직까지도 눈을 뜨지 않았다. ''해변에서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 말예요. 제가 확대해서 사진틀에 넣어 드렸었는데, 기억 나세요?" "기억하오." "당신은 그 당시 너무다도 멋있고 젊었어요. 저는 그 사진을 보면 생각나는 것이 많답니다. 그 사진을 갖고 싶어요. 찾아주실 수 있겠어요?" "유언장에 그 사진을 당신에게 준다고 적어 놓도록 하지." 엘레인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데이몬은 혹시 엘레인이 가짜로 훌쩍거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두눈을 떴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내리고 있었다. 진짜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게 아니었어요, 로저." 엘레인은 울먹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미안, 미안. 당신에게 그 사진을 갖다 주겠소." 데이몬은 이렇게 말하면서, 엘레인의 손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제발 건강하세요, 로저." 떨리는 목소리로 엘레인이 말했다. "당신이 다시는 저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해도, 저는 당신이 가까운 곳에서 행복하게 지내시기를 바라겠어요. 연락도 좀 주시구요." "그렇게 하도록 하지." 데이몬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데이몬은 말을 마치고 나서 다시 두 눈을 감았다. 몇 분 후에 눈을 다시 떴을 때는, 엘레인은 이미 병실 안에 없었다. 다음날, 간호원이 병실로 들어 와서는 돌저 부인이라는 여자가 접수 창구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을 때, 데이몬은 돌저 부인을 들여 보내라고 말했다. 그러나 돌저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간호원이 병실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여류작가 돌저 부인이 병실로 들어오는 순간, 데이몬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리숙하던 가정 주부로서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대신에 단정하게 머리 손질을 하고 우아하면서도 품위있는 복장을 한 세련된 여인이 지금 데이몬의 시야에 들어 왔기 때문이었다. 돌저 부인은 파리에서 온 여인처럼 새련된 초록색 트위드를 걸치고 있었으며, 손에는 악어 가죽으로 된 초록색 핸드백을 들고 있었는데, 옷과 핸드백이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돌저 부인은 데이몬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한 20파운드 정도는 체중이 빠진 것 같았다. 그러나 돌저 부인의 목소리 만큼은 예전과 다름없이 부드렵고 끈적끈적했다. "오, 로저씨" 돌저 부인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매일같이 병원에 전화를 걸었었는데, 당신이 중태라고 하면서 면회를 허락해 주지 않더군요." "이젠 괜쟎아요. 오늘은 정말이지 아름다운 것 같소, 부인." "무리를 해서 살을 좀 뺐어요." 돌저 부인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다이어트도 하고 헬스 클럽에도 다녔어요. 보그 지도 읽기 시작했구요. 그리고 최소한 원고를 10매 이상 쓰기 전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기로 했어요, 정말이지 당신과 올리버씨에게 어떻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올리버는 제 새로운 작품 인 '카빈짜'일을 너무나도 잘 해 주고 있어요. 하지만..." 돌저 부인은 급히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신 같은 분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거예요." "조만간에 부인의 새로운 작품을 읽어 보도록 하겠소." "하지만, 그 전에 우선 건강을 회복하셔야죠. 중요한 건 당신이 하루 빨리 건강해지는 거에요. 당신에게 드리려고 조그만 선물을 가지고 왔어요." 트위드를 입고 악어 가죽으로 된 헨드백을 들고 있을 뿐더러 체중이 20파운드나 빠졌는데도, 돌저 부인은 여전히 수줍어 하면서 선물 얘기를 꺼냈다. 돌저 부인은 병실에 들어올 때 가지고 온 제과점 박스를 열었다. "저는 병원 음식이 얼마나 형편 없는지 알고 있어요. 그래서 파이를 좀 구워 가지고 왔어요. 애플 파이에요. 애플 파이 좋아하시나요?" 돌저 부인이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물론이오." 데이몬은 지금까지 거의 두 달 동안 고체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접시하고 나이프와 포크를 좀 갖다 주시겠어요?" 하고 돌저 부인이 간호원에게 부탁했다. "이분이 파이 잡수시는 걸 제 눈으로 보고 싶어서 그래요." 간호원은 데이몬의 눈치를 살폈다.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 번 넘겨 보지 뭐, 하고 데이몬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잠시 후 간호원이 접시하고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다시 병실로 들어왔다. 돌저 부인은 파이를 여러 갈래로 잘랐다. "맛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돌저 부인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파이는 굽고 나서도 자신을 할 수가 없어요. 실제로 먹어 보기 전까지는 그 맛을 알 수가 없거든요." 데이몬은 접시를 받아 들었다. ''으흠, 맛있어 보이는군." 데이몬은 파이를 먹어야만 될 운명의 시간을 잠시 미루기 위해 칭찬을 늘어 놓았다. "파이를 맛있게 보이게 하기는 쉬워요. 하지만, 파이의 경우에는, 보기도 좋아야 되겠지만, 맛도 중요해요. 빚좋은 게살구나되지 않았는지..." 데이몬은 숨을 한 번 깊이 들이마시고나서 가장 조그마한 파이 한 조각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나서는 입안으로 집어 넣고서 마구 씹어대기 시작했다. 이윽고 꿀꺽 삼켰다. 식도를 타고 무엇인가 죽 내려갔다. 정말 맛이 좋았다. 지금까지 데이몬이 느껴 온 맛은 기껏해야 파인애플 쥬스였다. 데이몬은 일단 자신감이 생기자, 더 큰 파이 조각을 입 안에 집어넣었다. 데이몬을 지켜보는 돌저 부인의 표정은 희열이 넘쳐 흘렀다. 데이몬은 두 번째 파이 조각도 꿀꺽 하고 삼켰다. "세상에 !" 수 주일 동안 데이몬의 식도로 수많은 종류의 음식을 내려가게 하려고 시도했다가 실패만 거듭한 간호원이 탄성을 발했다. 갑자기 제네비브 돌저 부인이 사랑스러워지기 시작한 데이몬은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또 한 조각을 먹어 보도록 하지, 정말 맛있는데." 돌저 부인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파이 조각을 하나 더 잘라 주었다. "메드포드 양." 데이몬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간호원에게 말했다. "내일 내 체중을 달아 보면 최소한 2파운드 정도는 불어 났을거요." 메드포드는 데이몬의 말을 믿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그날 아침 데이몬의 채중은 138 파운드였다. 돌저 부인은 떠날 채비를 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병실 문을 열면서 돌저 부인이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라도 좋으니까 제게 부탁을 하세요, 로저씨. 그럼, 몸조심 하세요." 애플 파이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은 데이몬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비록 메드포드가 다음날 아침 데이몬의 체중을 쟀을 때,몸무게는 여전히 138파운드였지만... 제 22장 새 생명 "선생님!" 실라는 지금 진판델 박사의 방에 앉아 있었다. 진판델 박사는 연필을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면서 실라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다소 침착하지 못한 태도였다. "선생님,'' 실라가 말을 이어 나갔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그이에게 음식을 먹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아요. 그이는 일주일 전에 한 친구가 가저 온 애플 파이를 먹은 적이 있어요. 바로 그거예요. 물이나 우유를 섞은, 가루약처럼 생긴 병원 측의 분말 음식으로는 그이의 식욕을 돋굴 수가 없다는 말씀이에요." "병원에서 제공하는 분말 음식은 데이몬씨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고 있읍니다." 진판델 박사가 실라의 말을 반박하고 나섰다. "거기에는 모든 비타민, 단백질, 미네랄.." 실라가 진판델 박사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 분말음식은 그이의 생명을 유지 시켜 주지 못하고 있어요. 그이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시킬 마음이 없다는 말씀이에요. 하루에 반컵 정도 그 분말 음식을 먹게 할 수 있다면 다행이죠. 그이는 분말 음식을 싫어해요. 집에 가고 싶어 한다는 말씀이에요. 그이를 퇴원시켜 주세요. 그래야지만 그이의 생명이 유지될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책임질 수가 없습니다." "제가 책임지겠어요." 실라는 지금까지 억눌러왔던 분노를 폭발시키면서 강경하게 나갔다. "필요하다면 그이의 변호사를 만나서 법적 조치를 취하겠어요. 그이를 제가 돌볼 수 있도록 말씀이에요." 실라는 변호사를 들먹거려서 진판델 박사의 고집을 꺾은 적이 있었다. "부인은 지금 남편의 생명을 단축시키려는 위험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진판델 박사가 이런 말을 하기는 했지만, 로라는 그의 고집이 꺾였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무리 위험한 시도라고 할지라도, 나는 내 생각대로 하고 말겠어요." "휴우, 우선은 종합 검사를 해 보아야 될 겁니다." :3일 간의 여유를 드리겠어요. 3일 안에 모든 검사를 끝마쳐 주세요." 실라의 어투에서 고상함이나 부드러움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오로지 적대감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실라의 마지막 한 마디는 승자와 패자의 구분을 명확하게 해주었다. 데이몬은 아무런 불평이나 흥미를 내색하지 않은채, X레이와 CAT정밀점사를 비롯해서 혈액 및 소변 검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검사를 묵묵히 받았다. 실라가 진판델 박사와 나눈 이야기를 데이몬에게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데이몬은 아직 아무런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살아서는 퇴원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에 굴복하고 있는 상태였다. 데이몬은 아직까지도 뉴욕 타임즈 지를 읽고 이해하기가 힘들었으며, 구역질을 하지 않고 받아 넘기는 유일한 자양물은 찬 파인 애플 쥬스 뿐이었다. 데이몬의 정신은 항상 왔다 갔다 하는 상태였다. 실라가 캘리포니아의 맨프레드 웨인슈타인에 대한 얘기를 듣고 전해주었을 때는, 흐느껴 울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었다. "그 친구는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어." 마치 선수로 활약할 때 긴 승구를 함으로써 팔을 못 쓰게 된 것이 마치 데이몬 자신의 잘못이었던 것처럼 안스러워 했다. 데이몬은 초록색 옷을 입은 여자가 병실로 들어와서 애플 파이를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 여자의 이름은 기억할 수가 없었다. 메드포드 간호원이 데이몬을 걷게 하려고 갖은 에를 다 썼지만 데이몬은 목발을 짚고 복도로 걸어 나갔다가도 일단 복도 끝에 있는 유리창에 도착해서 밖을 내려다 보게 되면 더 이상 걸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걸어야 건강해진다는 메드포드 간호원의 충고는 가장 듣기 싫은 잔소리 처럼 생각되었다. 데이몬은 이틀 동안 종합 검사를 받고 난 후, 의사들이 고무적인 이야기를 하더라는 실라의 말을 듣게 되었을 때는 표정이 약간 밟아졌다. 실라는 미신 때문에, 종합 검사를 받아야만 되는 이유에 대해서 데이몬에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테이몬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퇴원해도 좋다는 사실이 확정되는 최후의 순간까지 실라는 잠자코 기다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데이몬에게 낭보를 전해주게 된 것은 엉뚱하게도 메드포드 간호원이었다. ''오늘 아침 신문에 선생님 기사가 실렸어요." 야근 간호원과 교대하기 위해 병실로 들어오면서 메드포드 간호원이 말했다. 메드포드 간호원은 데일리 뉴스 지를 흔들어 보였다. "여기 이 칼럼에 실려 있어요. 내용은 대부분 선생님의 문예 작품 알선 대행소 덕택에 수백만 달러를 벌게 된 어떤 여류 작가에 관한 것이에요." "아침 8시 이전에는 어떤 기사를 읽든지 간에 믿지 않는 것이 좋아." 하고 데이몬이 말했다. 데이몬은 언제나처럼 새벽 6시에 들어선 진판델 박사의 굳은 표정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있는 중이었다. ''선생님이 총격사건에서 부상을 당한 후 큰 고통을 겪다가 오늘 퇴원 할 예정이라고 씌어 있는데요. 신문에서는 선생님이 그때 부상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로가드 박사에대한 언급은 없어요." 메드포드 간호원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이해할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읽어 보시겠어요?" "아니오, 괜찮소." 데이몬이 메드포드 간호원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런 동화같은 예기는 흥미 없거든.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런 허무맹랑한 얘기가 신문에 실리게 되었지 ?" ''지금까지 제가 근무했던 병원들 중에서 신문사와 연줄이 닿아있지 않은 곳은 하나도 없었어요. 이곳도 물론 예외는 아니구요." "내가 오늘 퇴원할 거라고 당신에게 말한 사람이 있었소?" "없었어요. 선생님의 퇴원에 관한 얘기는 단 한마디도 듣지 못했어요." "그럼 잠이나 다시 자야 되겠군.''하고 데이몬이 말했다. "우리 아버지와 함께 미식 축구 구경을 가는 멋진, 꿈을 꾸고 있었거든." 데이몬이 자기가 퇴원한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흐느껴 울기 시작한 것은, 실라가 옷가지를 가지고 와서 데이몬의 옷을 갈아 입히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때서야 비로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올리버가 밑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차를 한대 빌렸대요."실라가 말했다. "우린 올드 라임의 그 집으로 갈거예요. 당신을 3층이나 되는 아파트로 데리고 갈 수도 없고, 올리버나 제가 당신을 운반할 수도 없기 때문이에요." 데이몬은 자기 발로 걸어서 병실을 나서고 싶었고 그렇게 할 수 있을만큼 건강해 졌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훨체어를 타지 않겠다고 했으나, 메드포드 간호원은 데이몬을 훨체어에 태워 병원의 비상구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막무가내로 우겨댔다. 밖은 따뜻하고 햇빚 찬린한 봄 날이었다. 데이몬은 훨체어에 실려 밖으로 나온 다음, 심 호흡을 하고서는 천천히 일어섰다. 미소를 지으며 렌트 카 옆에 서 있는 올리버의 모습이 보였다. 데이몬은 병원에서 제공해 준 지팡이를 유괘하게 흔들어 댔다. 모든 것이 또렷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올리버, 완연히 드러난 나무들의 새 눈, 지팡이를 흔들고 있는 자신의 손을 비롯해 모든 것이.. 데이몬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바깥 세상의 밝은 색깔들이 눈을 부시게 했지만,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뒤에서는 메드포드 간호원이 데이몬의 항문 근처에 난 욕창에 대해서 실라에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데이몬은 올리버가 서 있는 곳을 향해서 혼자 힘으로 걸어가 보았다. 바로 그 순간, 올리버의 렌트카 옆에 세워둔 차 뒤에서 자캣을 입은 한 사나이가 불쑥 튀어나왔다. 데이몬은 그 사람의 얼굴을 본 순간, 그가 누구라는 것을 거의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떻게 그 사람을 알고 있는지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자캣을 입은 남자는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바로 권총이었다. 그는 데이몬을 겨냥하고 있었다. "마침내, 뿌연 안개가 걷히고 모든 것이 확연히 드러나겠군." 데이몬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믿기지 않을 정도의 안도감을 느꼈다. 총성이 울려 퍼졌다. 데이몬은 걸음을 멈췄다.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나서, 차 문을 열어 둔 채 올리버가 서 있는 곳에서 몇 피트 정도 떨어진 도로 위로 한 사람이 무너지듯이 쓰러졌다. 슐터 경위가 어디에선가 손에 총을 들고 모습을 나타냈다. 두명의 덩지 큰 남자들이 역시 총을 들고 슐터와 함께 나타났다. 데이몬은 슐터와 다른 두 명의 남자가 길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조사하고 있는 곳으로 침착하게 걸음을 옮겼다. 슐터는 무릎을 꿇고 쓰러진 남자의 가슴에 귀를 갖다 대고 소리를 듣고 나서 몸을 일으켰다. "죽었군." 슐터가 말했다. ''그 빌어먹을 놈의 신문들이 쓸데없는 기사를 싣는 바람에, 이놈이 나타날 거라고 짐작했었지." 슐터의 표정은 기쁨으로 인해서 환하기 그지 없었다. 마치 벽 난로 위에 걸어두면 기가막힌 전리품이 될 인상적인 뿔을 가진 큰 사슴을 쓰러뜨린 사냥꾼의 표정과도 같았다. "이놈을 알고 있소?" 데이몬은 온통 피투성이가 된 자캣을 입고 있는 시체를 내려다 보았다. 얼굴은 편안하기 그지 없었다. 데이몬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데이몬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겠군." 데이몬은 자기를 부축하고 있는 실라를 바라보면서 이상한 말을 했다. "결국은 자기 말도 전달하지 못한 채..." 데이몬은 올드 라임의 정원에 앉아서 사운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은 황혼 무렵, 햇살이 해안을 따라서 반짝이기 시작했으며 수면은 이미 시꺼먼 색으로 변해 있었다. 집안에서는 실라가 콧노래를 부르며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데이몬은 저녁식사를 잔뜩 기대하면서 기다렸다. 아침, 점심, 저녁 이외에도 실라는 오전 11시와 오후3시 그리고 물 위에 떠서 바람에 흔들거리는 보트처럼 삐그덕거리는 낡은 집에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애그노그(달걀, 우유, 설탕올 섞은 것에 포도주 나 브랜디 따위를 넣은 음료)를 만들어 주었다. 데이몬은 2주일만에 채중이 10파운드나 불었으며 지팡이가 없어도 정원을 돌아 다닐 수가 있었다. 슐터가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아주 지랄같이 돼 버렸읍니다." 슐터는 이렇게 말했었다. "그놈의 신원을 확인할 길이 없어요. 면허증이나 크레디트 카드 같은 것도 없으니, 그야말로 난감합니다. 게다가, 연고자도 없어요. 그리고 권총은, 어떤 군인이 전쟁이 끝난 후 가지고 온 것 같은 구식 스타일의 독일제 58구경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한 20명 정도의 손은 거쳤을 겁니다. 우리가 알아 낸 것은 이게 전부예요. 그 밖의 것은 도통 알아낼 수가 없어요." 슐터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겠어요. 떠돌아 다니던 놈인지, 아니면 어떤 범죄 단체의 일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수수께끼 같은 놈입니다." 슐터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었다. "온 곳을 알 수가 없다......" 하고 데이몬은 황흔 무렵의 정원에 앉아 이렇게 중얼거렸다. 데이몬은 자신이 병원에서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었던 것과 차 뒷쪽에서 총을 들고 불쑥 튀어나온 그 남자를 본 순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기억이 났다. 실라가 앞치마를 두르고서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손에는 두 잔의 위스키 소다를 들고 있었다. 한 잔은 데이몬, 다른 한 잔은 실라 자신의 것이었다. 데이몬은 실라가 자기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면서 건네주는 술 잔을 받아들었다. 두 사람은 어둠 속에 잠기고 있는 사운드 쪽을 바라보았다. 데이몬은 실라의 손을 잡았다. "구세주." 데이몬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내 생명을 구해 주었어. 새 생명을 준 거지." 옮긴이의 말 어원 쇼는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야망의 계절>로 이미 널리 알려진 작가이다. 그는 85년 5월 16일 밤에 스위스 다보스의 한 병원에서 심장질환으로 서거하였다. 그의 나이 71세였다. 그리고 이 작품은 1982년에 발표한 그의 마지막 작품이며 동시에 유고작으로서, 역자는 크나 큰 애착을 가지고 번역에 착수하였다. 그는 1913년 그월 17일에 뉴욕에서 출생하여 자라난 유태계 극작가, 그리고 <젊은 사자들>을 발표하여 일약 미국의 대표적인 장편 작가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브루클린 대학 시절부터 파란만장한 일생이 되기 시작한다. 미적분법 낙제로 인하여 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화장품 공장, 가구점, 백화점 등을 전전하며 학자금을 벌어 다시 대학에 등록을 한다. 그리고 나서도 가정교사, 학교도서관, 원고 타이핑, 논문 대필 등을 하여 학자금을 벌면서 공부를 하였다. 졸업 후 라디오 대본을 쓰는 일로 생계를 유지해 왔다. 1942년에 육군에 입대 아프리카와 유럽을 전전하였고, 전후에는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살다가 1976년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1948년에 처녀작 장편 <젊은 사자들)을 발표하자마자 즉시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1958년에는 영화화되었다. 여기 소개하는 어원 쇼의 최후의 작품<천사의 손수건>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 너와 나와의 관계 속에 서로 뒤얽혀 살아가고 있는 한 인간의 일상을 적나라하게 파헤치면서, 그 인간의 고뇌와 기쁨, 과거에 대한 회한, 미래에 대한 소망,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감 등을 어원 쇼답게 픽션화시키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작가 자신의 전 인생을 총 결산하고 있는 작품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주인공 데이몬은 어느 날 아침에, 비몽사몽 간에 한 통의 낯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진화를 받는다. 이 괴 전화야말로 주인공 자신에게는 크나 큰 충격과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어느 누가 이런 전화를 받지 않으라 장담할 수 있겠는가? 어느 누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타인에게 좀 억울하거나 원한 맺힐 일을 한 번도 베푼 적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작품의 스토리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독자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라고 역 자는 확신한다. 인생, 삶, 사랑, 고뇌, 결혼, 섹스, 우정, 사업..이러한 모든 단어에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재 음미할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이라 믿는다. 역자는 번역하면서 정말 수 많은 감격과 감동의 눈물을 흘렸음을 부기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