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특별한 이방인 저자명: 시드니 셀던 역자명: 민승남 출판사명: 고려원 특별한 이방인 시드니 셀던의 황홀한 글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된 '특별한 이방인'은 출간된지 여러 해가 지나도록 전세계 독자들의 찬사와 사랑을 받고 있는 그의 대표작이 다. 스타의 꿈을 신앙처럼 품고 자란 토비 템플은 서글픈 무명시절을 거쳐 코미디계 의 황제로 우뚝 선다. 그러나 정상의 외로움을 메울 길 없다. 이런 그의앞에 나 타난 운명의 여인 질 캐슬. 실패와 좌절을 거듭하던 끝에 단역 여배우로 전락한 그녀와의 만남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한과 야망의 인생을 살아온 남녀는 '황금의 콤비'를 이루고, 위선의 도시 할리우드를 상대로 복수극을 펼친다. 그러나 운명 은 그들에게 화려하고 행복한 시간을 그리 오래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불 어닥치는 무서운 회오리 바람, 그리고 파멸... 재기 번득이는 글솜씨로 독자를 사로잡는 언어의 마술사 시드니 셀던, 그는 이 작품으로 다시 한 번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선사 할 것이다. 이 책은 '거울 속의 나그네(원제 : A Stranger In The Mirror)'로 초역출간되 었으나 많은 독자들의 의견에 따라 '특별한 이방인'으로 개제하여 완역 출간합 니다. @FF 옮긴이의 말 애벌레들의 기둥, 그 덧없음과 아름다움 이야기의 마술사 시드니 셀던은 인간의 탐욕과 야망, 잔인성, 증오, 복수 등을 작품의 모티브로 삼아 그것들의 실체를 파헤쳐가는 과정을 통해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모색하는 작가이다. 입심좋은 이야기꾼'Storyteller'인 셀던의 글은 물흐 르듯 자연스럽고 유머와 재기가 번득여 독자들을 정신없이 빠져들게 하며 소설 읽기가 얼마나 재미난 것인인지를 실감하게 한다. '특별한 이방인'은 시드니 셀던의 황홀한 글솜씨가 유감없이 드러난 그의 대 표작으로 출간된 지 여러해가 지나도록 전세계 독자들의 찬사와 사랑을 받고 있 다. '야망의 사나이' 토비 템플과 '복수의 여신' 질 캐슬의 운명적인 만남과 사랑, 죽음을 그린 인생드라마인 이 작품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무능한 아버지와 여장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토비 템플은 어머니의 절대 적인 영향력 아래 스타의 꿈을 신앙처럼 품고 자라난다. 토비 템플에겐 천부적 인 연예인의 재능과 훨훨 타오르는 야망, 그리고 굳은 의지가 있다. 그러나 코미 디계의 정상에 우뚝 서겠다는 신념을 품고 세상에 뛰어든 그에게 인생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끝없는 좌절과 실패, 뼈를 깎는 외로움, 그리고 가난... 무명 코미디언의 처지 는 고달프기만 하다. 하지만, 재능있는 사람은 바위틈에서 피어나는 가녀린 꽃처 럼 모진 시련을 딛고 일어나 언젠가는 아름다운 꽃봉오리를 활짝 터뜨리는 법. 우리의 토비는 결국 스타가 된다. 코미디계의 황제, 할리우드의 주역이 되는 것 이다. 그런 그의 앞에 홀연히 나타난 운명의 여인 질 캐슬. 질 캐슬은 배우가 되려 는 꿈을 안고 할리우드에 왔지만 실패와 좌절만을 거듭하던 끝에 결국 영화 제 작진들에게 몸을 팔아 간신히 단역이나 따내는 창녀 신세로 전락한 한많은 여인 이다. 한과 야망의 인생을 살아온 두 남녀는 '황금의 커풀'을 이루고, 질 캐슬은 남 편 토비의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위선의 도시 할리우드를 상대로 피비린내 나 는 복수극을 펼친다. 그러나, 그러나... 운명은 그들의 화려하고 행복한 인생을 오래 허락하지 않는다. 토비와 질 부부에게 불어닥치는 무서운 회오리 바람, 그 리고 파멸... 이글을 옮기는 내내 트리나 포올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Hope for the Flowers)'에 나오는 애벌레들의 기둥을 생각했다. 정상에 이르려는 불타는 야망 으로 꿈틀꿈틀 서로를 짓밟고 위로위로 오르는 무수한 애벌레들이 만든 기둥, 그들은 정상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다만 거기 그들이 갈구하는 바로 그 것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으로 서로 밟고 밟히는 치열한 경쟁을 하며 위로 오른다. 그러나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다. 정상에 오른 애벌레들의 대화. "여기 정상엔 아무것도 없잖아!" "조용히 해, 이 바보야! 저 밑에서 듣잖아. 우린 저들이 올라오고 싶어하는 것 에 와 있는 거라구. 중요한 건 그거란 말야." 그들은 애써 절망과 허무함을 달래며 정상에 머물러 있다가 밑에서 차고 올라 오는 다른 애벌레들의 기세에 밀려 까마득한 기둥 아래로 떨어져 죽고만다. 아, 그 덧없음! 나는 토비와 질과 할리우드의 스타들의 인생에서 애벌레들의 기둥을 보았다. 자신의 본모습을 찾아가는 것이 인생의 의미일진대 신기루 같은 야망에 흘려 자 아를 잃고 빈 껍데기만 남은 그들. 그러나 그들의 서글프고 고달프고 현란하고 덧없는 인생이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움으로 남는 건 무슨 까닭일까? 1993년 12월 민승남 @FF 차례 옮긴이의 말 프롤로그 .11 제 1 부 내 새끼, 재주꾼 아슬아슬한 탄생 참담한 첫무대 변소순회 공연 이중 생활 운명의 땅, 할리우드 재능만 있다면 액터즈 웨스트 스타 탄생 꿈이 아닐까? 억지 결혼식 미치광이 집단 미운 아내 마르코 폴로 놀이 거장의 종말 노인들의 웃음 첫사랑 질 캐슬 제 2 부 대통령을 웃긴 토비 할리우드의 그늘 고독한 황제 포르노 연기 화끈한 엉덩이 거울 속의 얼굴 생애 최고의 배역 어긋나는 운명 황홀한 신혼여행 제 3 부 파멸의 악취 복수의 여신 당신을 위하여 출구 없는 지옥 악몽 지옥의 끝 검시 심리 장례식 특별한 이방인 @FF 프롤로그 1969년 11월의 어느 토요일 아침녘, 프랑스 르아브르 항으로 출항할 채비를 하며 뉴욕 항에 정박중이던 5만5천 톤급 호화 여객선 "브르따뉴 호" 선상에서 기괴하고 불가사의한 사건들이 잇달아 발생한다. 이 여객선의 수석항해사 끌로드 데사르는 브르따뉴 호를 "물샐틈 없는 함선" 이라고 자랑삼는 인물이다. 유능하고 철두철미 뱃사람인 데사르는 15년을 한결 같이 브르따뉴 호와 함께하며 효율적이고 신중한 지휘 솜씨를 발휘, 지금껏 오 점 하나 남기지 않았다. 브르따뉴 호가 프랑스 배라는 걸 감안한다면 그건 정말 이지 대단한 영예이다. 그런데 이날만큼은 악마들이 떼거리로 몰려들어 고약이 라도 부린 것일까? 저 프랑스인 항해사의 예민한 자존심에 그나마 조그만 위안 이 되었다면 나중에 브르따뉴 호 자체 경비팀은 물론 인터폴 미국 지국과 프랑 스 지국까지 총동원되어 이날의 해괴한 사건들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펼쳤지만 결국 아무 단서도 얻어내지 못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이 워낙 유명인들인지라 한동안 그 뉴스로 세상이 떠들 썩했으나 끝내 미스터리는 풀리지 않는다. 후에 대서양 횡단 호화 여객선 브르따뉴 호에서 은퇴하여 니스에 작은 술집을 낸 끌로드 데사르는 술손님들을 붙잡고 그 잊을 수 없는 11월의 어느 날에 대해 얘기하는 걸 낙으로 삼았다. 사건은 미국 대통령이 꽃다발을 보내오면서 시작되었다고 데사르는 술회하고 있다. 배가 출항하기 한 시간 전쯤의 일이었다. 관용 번호판을 단 검정색 리무진 한 대가 허드슨강 하구 92번 부두를 미끄러지듯 달려 올라왔다. 차가 멈추더니 짙 은 회색 양복을 입은 사내가 장미꽃 서른 여섯 송이로 만든 부케를 들고 내렸 다. 사내는 브르따뉴 호 트랩 발치로 걸어가 마침 근무중이던 항해사 알랭 사포 르와 몇 마디 주고 받았다. 이러 그 부케는 정중한 예를 갖추어 부갑판장 자넹 에게 전달되었고 자넹은 냉큼 끌로드 세사르에게 달려갔다. "일단 먼저 보고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이 꽃다발은 미국 대통 령이 템플 부인에게 보내온 것입니다." 질 템플. 지난해 뉴욕, 방콕, 파리, 레닌그라드 할 것 없이 전세계 신문 잡지들이 대서 특필하여 일약 세계적인 인물이 된 여인이다. 끌로드 데사르는 최근에 실시된 한 여론 조사에서 질 템플이 세계적으로 가장 추앙받는 여성의 한 사람으로 뽑 혔다는 기사를 읽었다. 또 요새 딸을 낳으면 질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유행 처럼 번지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미국 사람들은 영웅을 만들어 내어 요란스 럽게 떠받드는 걸 좋아한다. 질 템플도 그런 영웅이 된 것이다. 템플 부인의 위 대한 용기와 목숨을 건 싸움, 눈부신 승리, 그 뒤를 이은 허망한 패배는 전세계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것은 한마디로 위대한 러브 스토리, 아니 단순한 러 브 스토리의 차원을 넘어 그리스 고전극의 경지에 이른 한 편의 드라마였다. 끌로드 데사르는 미국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질 템플만은 예외였다. 그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템플 부인을 찬미하고 있었다. 질 템플은 데사르가 여성에게 바칠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받아 마땅한 여인이었다. 그래서 이 항해 가 템플 부인의 기억에 영원히 남도록 더더욱 정성을 다할 각오였다. 수석항해사는 질 템플 생각을 잠시 미뤄 두고 승객 명단에 대한 최종 점검에 들어갔다. 늘 그랬듯이 이번 항해에도 이른바 V.I.P. - 사실 데사르는 그런 말 자체를 싫어한다. 정말이지 미국인들이 사람의 중요성을 평가하는 기준은 야만 스럽기 짝이 없다 - 들이 다 모여 있다. 재벌 사업가 부인이 혼자 타고 있다. 데사르는 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승객 명 단에서 흑인 풋볼 스타 매트 엘리스의 이름을 찾는다. 그러면 그렇지, 그 이름을 발견하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칼리나 로카 상 원의원과 남미 출신 스트립걸이 나란히 붙은 객실을 쓰게 된 것도 자못 흥미롭 다. 두 커플 다 요즘 심심찮게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사람들이다. 데사르는 계속 해서 명단을 훑어 내려간다. 데이빗 캐년. 상당한 재력가. 전에도 브르따뉴 호를 탄 적이 있는 인물이다. 데사르가 기억하 는 데이빗 캐년은 상당한 미남이다. 잘 그을은 피부에 운동 선수처럼 날렵한 몸 매, 게다가 조용하고 호감 가는 사내다. 데사르는 데이빗 캐년의 이름 옆에 '선 장 테이블(Captain's Table의 약자 C.T.를 써넣는다. 클리프톤 로렌스. 마지막 순간에 예약을 했군 그래. 수석항해사 데사르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진 다. 이런 사람이 늘상 골치란 말야. 무슈 로렌스를 어떻게 예우해야 하는 거지? 로렌스의 전성 시대였다면 이런 고민은 필요치도 않았으리라. 당연히 C.T.에 앉 아 브르따뉴호에 탄 V.I.P.중의 V.I.P.들에게 스타들의 뒷 얘기를 들려주며 인기 를 한 몸에 누렸을 인물이니까. 직업이 연예계 대리인인 클리프톤 로렌스는 한 창 시절에는 거물급 스타들을 멋대로 주물렀던 사람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로렌 스의 전성 시대는 끝났다. 다른 때 같았으면 호사스러운 특실이 아니면 아예 배 에 오르지도 않았을 사람이 하갑판의 조촐한 객실을 예약했다. 아, 물론 그 정도 면 일류이긴 하지만... 신중한 끌로드 데사르는 나머지 승객 명단을 마저 검토한 뒤에 무슈 로렌스에 대한 예우 정도를 결정하기로 마음먹는다. 어느 작은 나라의 왕족, 유명 오페라 가수, 노벨상을 거절한 소련 소설가도 눈 에 띈다. 그때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인부 아뜨완이 들어왔다. "뭔가?" 아뜨완은 눈병이 났는지 진물이 질질 흐르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극장 문을 잠그라고 지시하셨나요?" 데사르가 이맛살을 찌푸린다. "엉뚱하게 그게 무슨 소린가?" "수석항해사님이 그렇게 지시하신 줄 알았어요. 아님 누가 그랬겠어요? 안에 아무 이상이 없는지 살피러 들어가려는데 문이 잠겼잖아요. 밖에서 들으니까 안 에서 누가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던데요." "항구에선 영화를 상영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 극장 문은 늘 열려 있고.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해 보지." 수석항해사의 목소리가 단호하다. 보통때 같았으면 득달같이 달려가 확인을 했겠지만 지금은 경황이 없다. 정오 출항에 맞추어 급히 처리해햐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미국에서 지출 한 돈의 액수가 셈이 안 맞고, 특실 하나가 실수로 이중 예약이 되었고, 몽떼뉴 선장이 주문한 결혼 선물이 다른 배로 잘못 배달되었다. 선장이 이 사실을 알면 길길이 뛸 것이다. 그런 중에도 데사르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배에 장치된 강력 터빈 네 대가 돌기 시작하는 낯익은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브르따뉴 호가 부두에서 벗어나 수로로 후진해 들어가는 움직임이 느껴진다. 데사르는 다시 정 신을 가다듬고 마지막 업무 처리에 열중한다. 반시간쯤 뒤에 갑판에서 일하는 급사 레오가 들어왔다. 데사르는 짜증 섞인 눈초리로 급사를 쳐다본다. "무슨 일인가, 레오?" "바쁘신데 죄송하지만 수석항해사님도 아셔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흐음?" 데사르는 선장 테이블의 좌석 배치에 골몰한 채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항해 기간 동안 선장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저녁 식사를 할 손님들 명단을 짜는 건 보통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원래 타고 나기를 사람 사귀는 데는 숙맥인 선장은 매일 저녁 승객들과 식사하는 걸 고역으로 여긴다. 그래서 선장 테이블의 좌석 배치를 담당한 데사르도 보통 신경을 써야 하는 게 아니다. "템플 부인 얘긴데요..." 데사르는 펜을 떨구고 번쩍 고개를 든다. 그의 작고 검은 눈에 긴장이 감돈다. "그런데?" "아까 부인 방을 지나치는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어요. 문을 닫아 놔서 잘 들 리지는 않았지만 부인이 "당신이 날 죽였어, 당신이 날 죽였어" 하고 소리를 지 르는 것 같았어요. 그 자리에서 끼여드는 건 실례가 될 거 같아서 이렇게 수석 항해사님께 보고드리러 온 거예요." 데사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네. 부인이 안전한지 가서 확인을 해봐야 되겠군." 데사르는 갑판 급사가 나가는 걸 물끄러미 쳐다보며 생각에 잠긴다. 마담 템 플 같은 고귀한 여인에게 해코지를 하는 자는 용서할 수 없다. 프랑스 사나이 데사르의 기사도가 부르르 떨치고 일어난다. 후다닥 제모를 쓰고는 - 경황중에 도 벽에 걸린 거울에 곁눈질을 하는 걸 잊지 않고 - 문 쪽으로 걸어간다. 그때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한다. 망설이다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데사르입니다." "끌로드..." 삼등 항해사 목소리다. "우라질, 빨리 누구 좀 극장으로 내려 보내세요. 걸레를 들고요. 극장이 피바다 예요." 데사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곧 보내지." 전화를 끊고 인부를 한 명 내려보낸 다음 선내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앙드레? 나 끌로드요. 지금 당신 도움이 필요한데... 아니, 아니, 배멀미가 아 니오. 피를 흘리고 있어요. 출혈이 심한지도 모르겠소... 알겠소. 고맙소." 끌로드는 불안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며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우선 질 템플의 방으로 향한다. 반쯤 갔을까, 또 하나의 사건과 맞닥뜨렸다. 그러니까 갑판에 막 다다랐을 즈음이었는데 배의 움직임이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바다 쪽으로 고개 를 돌려 보니 브르따뉴 호는 앰브로즈 등대선에 도착해 있었다. 거기서 수로 예 인선을 떨어뜨리고 망망대해로 나아갈 터이다. 그런데 배가 정지하려고 속도를 늦추고 있다.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하다. 데사르는 허겁지겁 난간으로 달려가 배 옆구리를 살폈다. 화물칸 해치에 수로 예인선 한 척이 붙어 서 있었고 선원 둘이 브르따뉴호에서 수하물을 꺼내 예인 선에 싣고 있다.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노라니 승객 한 사람이 예인선으로 건너가는 게 보인다. 얼결에 그것도 뒷모습만 스쳐 본 것이라 인상착의를 확인 하는 건 불가능했다. 승객이 그런 식으로 도망치듯 배를 뜨는 건 워낙 드문 일 인지라 수석항해사는 오싹하는 전율을 느낀다. 혹 질 템플에게 무슨일이...? 그녀 의 방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아무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더 세게 두드렸다. "템플 부인... 저는 수석항해사 끌로드 데사르입니다. 혹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아무 대답도 없다. 데사르의 머릿속에서 경보 장치가 급박하게 울려댄다. 이 배 안에서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났고 그 일은 분명 템플 부인과 관계가 있다. 불길하고 끔찍한 생각들이 앞다투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부인이 살해당했 거나 납치된 거야... 문고리를 잡고 돌려 보았다. 잠겨 있지 않다. 조심스럽게 천 천히 문을 열었다. 질 템플은 선실 저 끝에 서서 현창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다. 그녀의 냉랭하고 꼿꼿한 뒷모습에 데사르는 입이 얼어붙는다. 이대로 조용히 물 러갈 것인지 좀더 기다려 볼 것인지 우물쭈물 갈피를 못 잡고 어색하게 서 있는 데 돌연 상처 입은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처절하고 날카로운 비명이 선실을 채 운다. 부인의 형언할 수 ㅇ는 고뇌 앞에서 형편없이 무력해진 데사르는 조용히 문을 닫고 물러나온다. 그는 잠시 문밖에 지켜 서서 여인의 절규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후들후들 떨리는 무릎으로 주갑판에 위치한 극장으로 향한다. 극장 앞에서 인부 하나가 핏자국을 닦고 있다. 하느님 맙소사, 이번엔 또 무슨 일이지? 데사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극 장문을 열었다. 잠겨져 있지 않다. 육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초현대식의 웅장한 강당 안에 들어섰다. 텅 비어 있다. 자기도 모르게 영사실로 발걸음이 옮겨졌다. 문이 잠겨 있다. 이 배 안에서 영사실 열쇠를 갖고 있는 사람은 데사르와 영사 기사뿐이다. 그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모든 게 정상으로 보인 다. 35mn 영사가 두 대 놓여 있는 곳으로 다가가 만져 보았다. 영사기 한 대에 열기가 남아 있다. 데사르는 D 갑판 승무원실에서 영사 기사를 찾아냈지만 기사는 아무것도 모 른다고 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지름길을 택해 주방을 지났다. 주방장이 화가 머리끝 까지 올라 데사르를 붙잡는다. "이것 좀 보세요. 어떤 미친 놈이 이런 짓을 했는지!" 대리석 테이블 위에 아름다운 6단 웨딩 케이크가 놓여 있고 그 맨 꼭대기에 솜사탕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신랑 신부가 서 있다. 그 신부의 머리가 무참하게 으깨어져 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쪽 끼치면서 불길한 예감이 들더라구요." 이 대목에만 이르면 데사르가, 귀가 솔깃해서 듣고 있는 술손님들에게 버릇처 럼 되뇌이는 말이다. @ff 제 1 부 내 새끼, 재주꾼 1919년, 미시간의 디트로이트는 단연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산업 도시였다. 1차 세계 대전중 이 도시는 탱크와 트럭, 전투기들의 주 공급처로서 연합군을 승리로 이끄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윽고 세계를 장악하려던 훈족의 야욕이 분쇄되자 군수 물자를 만들어 내던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공장들은 재빨리 전열 을 재정비, 민간 자동차 생산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곧 이곳에서만 하루 4천대의 자동차를 생산해 내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산업이 때아닌 호황을 누리자 세계 각지에서 일자리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숙련 공이고 막노동꾼이고 할 것 없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이탈리아인, 독일인, 아일랜드인... 그 광경은 그야말로 인간 홍수를 방불케 했다. 그 새 이주민들 틈에 폴 템플라우스와 그의 처 프리다도 끼여 있었다. 폴은 원래 뮌헨에서 정육점 조수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프리다와 결혼하면서 적지 않은 지참금이 굴러 들어오자 뉴욕으로 이민을 와서 정육점을 열었다. 문 을 연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적자가 막심했다. 그래서 세인트 루이스, 보스턴 등 지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디트로이트에까지 흘러 들어오게 된 것이다. 가는 곳마 다 장사는 실패였다. 한창 호경기라 고기 먹는 사람들은 날로 느는데 폴 템플라 우스의 정육점은 어딜 가나 적자만 남겼다. 주인이란 자가 고기 보는 눈은 있으 되 장삿속이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 무능력자인 탓이었다. 사실 폴의 관심은 돈 보다는 시작 활동에 있었다. 그래서 허구한 날 앉아서 하는 짓이 시상을 떠올리 고 시의 운율을 맞추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시를 종이에 곱게 적어 신문사나 잡지사에 뻔질나게 보냈지만 그의 대작들을 알아주는 곳은 한군데도 없었다. 폴은 돈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한테나 마구 외상을 주었고 그 소문은 빨리도 퍼졌다. "돈은 없으되 최상품 고기를 먹고 싶은 자는 모두 폴 템플라우스에게로 가 라!" 폴의 처 프리다는 결혼할 때까지 숫처녀로 남아 있던 수수한 용모의 아가씨였 다. 폴이 부친에게 청혼을 해오자 그녀는 청혼을 받아 들이라고 아버지께 애원 했다. 그렇잖아도 박색인 딸을 평생 끼고 살게 될까 봐 노심초사하던 프리다의 부친은 선뜻 청혼을 받아들였다. 어디 그뿐인가, 사위가 딸을 데리고 신세계로 떠날 수 있도록 지참금까지 두둑이 챙겨 주었다. 수줍은 처녀 프리다는 신랑감에게 첫눈에 반했다. 시인을 직접 만나기는 난생 처음이었던 것이다. 폴은 가냘픈 체격에 지적인 인상을 풍겼지만 흐리멍덩한 근 시안에다 이마는 점점 벗겨져 가고 있었다. 그래도 프리다는 저 준수한 미남이 자기 남편이라는 꿈 같은 사실을 믿는 데 장장 몇 개월이 걸렸다. 그녀는 제 분 수를 잘 아는 여자였다. 자기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알 이 너무 굵어져 버린 감자처럼 두리뭉실한 몸매, 강렬한 푸른 눈동자를 빼면 볼 것 하나 없는 얼굴 사실 프리다처럼 아무 개성 없이 죄다 다른 사람의 것을 뜯 어다 붙여 놓은 것 같은 얼굴도 드물 것이다. 둥근 알뿌리 모양의 큼지막한 코 는 할아버지 코 그대로, 툭 튀어나온 짱구 이마는 아저씨 이마, 엄격한 인상을 풍기는 네모난 턱은 아버지 턱... 비록 용모는 그렇게 조물주의 실패작이어도 심성만큼은 아리땁고 순수했지만 사람들은 오로지 외모만을 보려 했다. 단 한 사람 폴을 빼고는. 오, 나의 폴! 순진한 프리다는 폴이 자기를 매력적인 신부감 으로 점찍은 이유가 지참금 때문이란 걸 꿈에도 알지 못했다. 당시 폴은 피가 뚝뚝 흐르는 고깃덩어리와 돼지머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 래서 못생긴 마누라의 지참금이라도 챙겨 자기 사업을 차려서 그 수입으로 오매 불망 꿈꾸어 온 시작에 몰두할 결심이었다. 프리다와 폴 부부는 잘츠부르크 외곽에 있는 어느 여관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여관으로 개조는 했지만 초원과 숲이 우거지고 아름다운 호수가 펼쳐진 그림 같 은 고성 이었다. 프리다는 머릿속에서 첫날밤의 광경을 골백번도 넘게 상상했 다. 신랑이 문을 잠근다. 이어 황홀한 포옹. 신랑은 신부를 품에 안은채 사랑의 말들을 속삭이며 옷을 벗겨 나간다. 뜨거운 키스. 신랑의 입술이 신부의 알몸을 더듬어 내려간다. 처녀 적에 몰래몰래 잡지에서 훔쳐보았던 장면들이 환상처럼 펼쳐진다. 신랑의 남성이 딱딱하게 곤두선다. 독일 국기처럼 자랑스럽게. 신랑 이 사랑스런 신부를 번쩍 안아서 침대로 간다. "아니, 폴 그이는 몸이 약하니까 그낭 걸어가는 편이 안전할지도 몰라." 그리고 가만히 침대에 내려놓는다. 신랑 의 달콤한 속삭임. "오오, 프리다, 당신의 알몸은 황홀하오. 말라깽이 아가씨들의 뼈만 앙상한 몸매는 상대도 될 수 없지. 당신은 성숙한 여인의 풍만한 육체를 지녔소." 그러나 현실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신랑이 문을 잠근 것까지는 좋았다. 거기 까지는 근사했다. 문제는 그 뒤부터였는데 상상했던 것과는 달라도 많이 달랐 다. 신부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폴은 후다닥 셔츠를 벗어 털 한 오라기 없이 매끈하고 앙상한 새가슴을 드러냈다. 다음엔 바지를 벗었는데 그의 가랑이 사이 에 매달린 건 새끼손가락만한 근육 덩어리였고 그나마 포피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니 프리다가 포르노 잡지에서 보았던 광경과는 사뭇 다를 수 밖에. 폴은 알몸으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신부를 기다렸다. 아무래도 신부 스스로 옷을 벗어야 할 모양이었다. 프리다는 천천히, 아주 감질나게 옷을 벗기 시작했 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뭐 크다고 좋은 건 아니지. 폴은 분명 황홀한 사랑을 해 줄 거야." 이윽고 신부는 떨리는 몸으로 신랑 옆에 누웠다. 이제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이 들려 오겠지, 잔뜩 기대를 하고 있는데 폴이 느닷 없이 위에 올라타 몇 차례 피스톤 운동을 하는가 싶더니 싱겁게 나가떨어졌다. 바짝 긴장한 신부가 채 쾌감을 느낄 겨를도 없이 첫날밤의 의식이 끝나버린 것 이다. 가뭄에 콩나듯 어쩌다 한 번씩 있었던 사랑 행위의 대상이 맨 뮌헨 거리 의 창녀들이었던 폴은 무심코 지갑에 손이 갔다가 나중에야 이제 돈을 낼 필요 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부턴 무료로 섹스를 하게 된 것이다. 폴이 곯아떨 어지고 나서도 한참이나 프리다는 말똥말똥 눈을 뜬 채 실망을 달래야 했다. " 그래, 뭐 밤에 하는 잠자리가 전부는 아니지. 나의 폴은 아주 멋진 남편이 될 거야." 그러나 그 희망마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혼 여행에서 돌아온 뒤 바로 프리다는 남편을 보다 현실적인 시각에서 보게 되었다. 독일의 전통적인 현모양처로 교육받고 자란 그녀는 묵묵히 남편에게 순 종했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알 건 다 알았다. 폴은 오로지 시에만 매달려 생계 를 소홀히 했으며 프리다는 그게 얼마나 심각한 병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늘상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무능한 남편을 그저 조용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폴이 우유부단한 사내라면 프리다는 의지의 여장부였고 폴이 돈 버는데는 숙맥 인데 반해 프리다는 장사 수완이 보통을 넘었다. 하지만 여자의 몸으로 어디 함 부로 나설 수 있으랴. 새색시는 그냥 손 놓고 앉아 가장이란 작자가 거액의 지 참금을 야금야금 까먹는 걸 말없이 견뎌냈다. 그러나 디트로이트로 이사할 무렵 그녀의 인내심도 동이 나고 말았다. 어느 날 프리다는 남편의 정육점으로 뚜벅 뚜벅 걸어 들어가 금전 등록기를 장악했다. 그리고는 첫 단계로 "외상 사절"이 라는 표지판을 내걸었다. 폴은 질색을 했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프리다는 고깃값을 올리고 광고를 시작했다. 광고지를 만들어 온 동네에 뿌렸다. 그러자 하룻밤 사이에 매상이 뛰었다. 바로 그때부터 프리다가 중요한 결정들을 내렸고 폴은 아내에게 묵묵히 순종해야 했다. 남편에 대한 거듭된 실망이 프리다를 폭 군으로 만든 것이다. 뒤늦게야 자기 능력을 발견하게 된 그녀는 집안의 경제권 을 움켜쥐고 남편을 떡 주무르듯 했다. 돈의 투자 방법이며 집 문제며 휴가 계 획, 심지어는 출산 계획까지 프리다 단독으로 결정을 내렸다. 어느 날 밤 프리다는 아기를 가져야겠다는 폭탄 선언과 함께 바로 행동 개시 에 들어갔다. 폴은 건강을 해칠까 저어하여 지나친 섹스를 삼가는 인물이었으나 불굴의 여인 프리다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자, 집어 넣어요." 프리다가 명령했다. "어떻게? 맘이 없는데." 프리다는 두말없이 남편의 쭈글쭈글하고 초라한 남근을 손으로 애무했다. 그 래도 별다른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입에 물고 빨기 시작했다. "맙소사! 프리다! 지금 뭐하는 거요?" 남편의 거센 항의에도 프리다는 아랑곳없었다. 이윽고 - 주인의 의지와는 관 계없이 - 남근이 빳빳하게 발기하자 프리다는 그걸 가랑이 사이에 끼우고 정액 이 분출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 밤이 석 달 가까이 계속되자 불쌍한 폴은 신경 쇠약에 걸리기 직전이었 다. 어느 날 프리다가 남편을 놓아주었다. 물론 그건 남편이 안돼서가 아니라 임신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폴은 딸을 원했고 프리다는 아들을 원했다. 그러 니 그들 부부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결국 프리다가 아들을 출산한 것이 전혀 놀랄 일이 못 되었다. 프리다는 고집을 부려 집에서 - 산파의 도움으로 - 아이를 낳았다. 출산은 시 종 순조로웠다. 그런데 침대에 눕혀 놓은 간난아기를 본 사람들은 저마다 입을 딱딱 벌렸다. 다른 부분은 다 정상적인데 고추가 보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도저 히 갓난아기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는 거대한 남성이 아기의 순결한 가랑이 사 이에 자랑스럽게 매달려 있었다... "그래, 아빠를 닮지 않았어." 프리다는 벅찬 자부심에 몸을 떨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프리다는 그 동네 시의원 이름을 따서 아기를 토비아스라고 이름지었다. 폴이 아들의 훈육을 맡겠노라고 선언했다. 그 집에서 가장의 위치가 아기나 보는 사 람으로까지 전락된 것이다. 프리다는 웃는 얼굴로 남편의 말을 들어주긴 했으나 아빠를 아기근처에 얼씬 도 못하게 했다. 결국 아들의 양육도 프리다 차지가 되었다. 그녀는 아들을 독 일식으로 엄격하게 키웠다. 다섯 살 적의 토비는 앙상한 몸, 거미처럼 가늘고 긴 다리, 무언가 갈망하는 듯한 얼굴, 엄마를 꼭 닮은 시리도록 푸른 눈을 가진 소년이었다. 토비는 엄마를 숭배하다시피 했고 늘 칭찬에 굶주렸다. 엄마의 평 퍼짐하고 푹신한 무ㅍ에 앉아 그 포근한 젖가슴에 얼굴을 비비는 순간을 너무도 갈구했다. 그러나 프리다는 밤낮없이 분주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 진 몸이니 까.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 토비를 제 아버지 같은 약골로는 키우지 않겠노라 다 짐하고 있었다. 그래서 만사에 완벽을 요구했다. 토비가 학교에 들어가자 그 바 쁜 중에도 직접 숙제를 감독했으며 어쩌다 아이가 문제를 풀지 못해 끙끙거리기 라도 하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자자, 토비, 소매를 걷어붙여!" 그리곤 아들이 그 문제를 풀어낼 때까지 꼬박 붙어 서서 지켜 보았다. 프리다 가 아들에게 엄격해질수록 토비는 엄마를 더더욱 사랑했다. 엄마에게 실망을 안 겨 주는 건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프리다는 아들을 강하게 키우기 위해 늘 칭찬에 인색하고 처벌은 엄격했다. 아들을 처음 팔에 안은 순간부터 그 녀는 장차 이 아이가 세상에 나아가 이름을 떨치리란 걸 예감했다. 그날이 언 제, 어떻게 도래할지는 모르지만 그 예감은 확고했다. 마치 하느님이 은밀히 귀 에 대고 속삭여 준 약속이라도 되는 듯이. 프리다는 아들이 채 말을 알아듣기도 전부터 그가 장차 위대한 인물이 될 인재임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래서 토비도 그걸 신앙처럼 믿고 자라나게 되었다. 자기가 왜, 그리고 어떻게 출세를 하게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머니 말씀은 항상 진리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린 토비에게는 널따란 부엌에서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 가 없었다. 토비가 숙제를 하고 있는 동안 엄마는 커다란 구식 스토브 앞에 서 서 요리를 한다. 프랑크푸르터"쇠고기와 돼지고기를 섞어 만든 비엔나 소시지의 일종"가 통째로 둥둥 떠 다니는 걸쭉한 검정콩 수프 - 아! 생각만 해도 군침이 절로 도는 그 구수한 냄새 - 커다란 접시에 푸짐하게 담은 소시지 구이, 가장자 리가 보풀처럼 인 노르스름하게 익은 감자 팬케이크. 엄마는 부엌 한 가운데 놓 인 대형 도마에서 그 투박하고 억센 손으로 밀가루 만죽을 하기도 한다, 그리하 여 눈송이 같은 밀가루들이 순식간에 먹음직스러운 자두 쿠키나 사과 쿠키로둔 갑하는 것이다. 토비는 일하는 엄마의 등뒤로 가만히 다가가 그 푸짐한 엉덩이 에 팔을 두르곤 했다. 그러먼 얼굴이 딱 엄마 허리께까지 왔다. 엄마의 사향 향 수 냄새가 요리 냄새에 뒤섞여 어린 코비의 금지된 성욕을 일깨웠다. 그 순간 토비는 엄마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후로도 평생 버터와 함께 굽는 향긋한 사과 쿠키 냄새만 맡으면 토비의 머릿속엔 어머니의 이미지가 생생하게 떠오르곤 했다. 그러니까 토비가 열두 살 먹었을 무렵이었다. 동네에 수다쟁이 더킨 부인이 살았는데 깡마른 얼굴에 검은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쉴 새 없이 혀를 놀리는 못 말리는 여자였다. 어느 날 오후, 더킨 부인이 토비네 집에 놀러와서 한참 수 다를 떨고 갔다. 그녀가 나가자 토비는 별생각 없이 익살스럽게 흉내를 냈는데 엄마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엄마가 그렇게 자지러지게 웃은 건 처음이었 다. 그때부터 토비는 기를 쓰고 엄마를 웃기려고 했다. 정육점에 오는 손님들이 나 학교 선생님들, 친구들 흉내를 기가 막히게 내었다. 신기하게도 엄마는 그때 마다 폭소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엄마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을 발견한 것이다. 학교에서도 재능이 눈에 띄어 "쓸모없는 데이빗"의 주연을 따내게 되었다. 연 국이 무대에 오르던 날 밤, 프리다는 객석 맨 앞줄에 앉아 아들의 뛰어난 연기 에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다. 무대에 선 아들을 보면서 그녀는 이제야 하느님이 약속을 지키시는구나 생각했다. 1930년대 초반 당시는 대공황이 서서히 고개를 들던 시기여서 전국의 극장들 이 빈 좌석을 채우느라 별별 묘안을 다 짜내고 있었다. 접시나 라디오를 경품으 로 나눠 주는가 하면 키노, 빙고 같은 흥겨운 게임판을 벌이기도 하고 관객들이 합창을 하고 올갠 주자가 반주를 하는 형식을 취하기도 했다. 또 아마추어 콘테스트도 열었다. 프리다는 매일 신문을 뒤적여 콘테스트가 열 리는 극장을 찾아냈다. 그리곤 토비를 데려가 무대에 세운 뒤 자기는 객석에 앉 아 아들이 앨 존슨, 제인스 캐그너, 에디 캔터 흉내를 내는 걸 보며 브라보를 외쳐댔다. "내 새끼! 아주 재주꾼이야!" 토비는 우승을 휩쓸다시피 했다. 이제 우리의 토비는 키는 훌쩍 컸으나 체격은 여전히 앙상했다. 아기 천사처 럼 귀여운 얼굴에 정직한 푸른 눈을 지닌 열성적인 소년. 누구나 토비를 보면 금방 "순수"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달려가서 포옥 감싸안고 싶은, 모진 인생살 이에서 보호해 주고 싶은 그런 아이였다. 모두들 토비를 좋아했고 토비의 연기 에 뜨거운 갈채를 보냈다. 이제야 토비는 어렴풋이나마 자기 운명을 알 것 같았 다. "그래, 난 스타가 될 거야. 첫째로 엄마를 위해, 둘째로 하느님을 위해." 열다섯에 들어서면서 토비는 성에 눈을 떴다. 그래서 몰래 목욕탕 문을 잠그 고 들어앉아 자위 행위에 몰입하곤 했지만 그걸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아무래 도 여자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어느 날 저녁, 토비는 어머니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에 같은 반 여학생의 언니 클라라 코너즈의 차를 얻어타게 되었다. 유부녀인 클라라는 풍만한 가슴을 지닌 금발 미녀였다. 그녀 옆에 앉아 있노라니 남근이 불끈 곤두섰다. 다급해진 토비 ㄴ 떨리는 손을 뻗어 클라라의 치마 속을 더듬어 들어갔다. 상대가 소리를 지르 면 얼른 손을 뺄 요량이었지만 클라라는 재미었어 하는 눈치였다. 용기를 얻은 토비는 바지 지퍼를 열고 발기한 남근을 꺼내 보였다. 클라라는 그 엄청난 크기 에 마음이 동한 나머지 이튿날 오후 애송이를 자기 침실로 초대했다. 그리하여 토비는 황홀한 여체를 알게 되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체험이었다. 여자 의 부드럽고 따스한 음부는 비누칠을 해서 미끈미끈한 손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 다. 어디 그뿐인가, 발기한 남근이 밀고 들어가자 팽팽하게 조여오며 벌떡벌떡 고동치기까지 했다. 클라라의 황홀한 신음 소리에 토비의 남근은 자꾸만 자꾸만 부풀었고 그 따스하고 촉촉한 둥지 속에서 거듭거듭 오르가즘에 도달했다. 어린 시절 내내 비정상적으로 큰 생식기 때문에 남모르게 고민을 해온 토비는 이제 그걸 대단한 자랑거리로 여기게 되었다. 클라라는 그런 아찔한 경험을 혼자만 간직하려는 얌체가 아니었기에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동네 아낙들 대여섯이 토 비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 뒤 2년에 걸처 토비는 같은 반 여학생 반 정도의 순결을 빼앗았다. 토비네 반 남학생들 중에는 풋볼 선수도 있고 준수한 미남도 있고 돈 많은 집 도련님도 있었지만, 그 방면에서 토비를 따를 자는 없었다. 그의 천진난만한 얼굴과 갈망 하는 듯한 푸른눈에 안 넘어갈 여학생이 없었으니까. 토비가 고등학교 졸업반, 그러니까 열여덟 살 때였다. 교장실에 불려가 보니 어머니가 근엄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열여섯 살짜리 천주교인 여학 생 에일린 헤네건이 질질 짜고 있었고 경사로 재직중인 에일린의 아버지가 제복 차림으로 와 있었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토비는 아차 싶었다. "토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에일린 양이 임신했어. 아이 아버지가 토비 너라고 하는구나. 에일린과 육체 관계를 가진 적이 있나?" 교장 선생님이 물었다. 토비는 입 안의 침이 바싹 말랐다. 그 순간 기억나는 건 황홀경을 헤매던 에 일린의 모습뿐이엇다. 그렇게 신음을 내지르며 더 해 달라고 보채더니만 결 국... "빨리 대답해, 이 개새끼야! 내 딸을 건드렸어?" 에일린의 아버지가 불호령을 내렸다. 토비는 슬쩍 어머니 얼굴을 훔쳐보았다. 어머니에게 이런 모욕을 안겨 드리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가슴 아팠다. "사랑하는 어머니 얼굴에 똥칠을 하고 말다니 이제 나한테 정나미가 다 떨어지셨을 거야." 하느님의 은총으로 기적이라고 내 려져 이 자리를 무사히 모면하게만 된다면 평생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살 결심이었다. 다시는 여자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당장 의사에게 달려가 거세를 하고... "토비, 이 여학생하고 무슨 일이 있었니?" 어머니가 차갑고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 토비는 침을 꼴깍 삼키고 심호흡을 크게 한 뒤에 웅얼웅얼 대답했다. "예, 어머니." "그럼 둘이 결혼해라." 어머니는 단호한 목소리로 그렇게 선언한 뒤 눈이 퉁퉁 부어 훌쩍거리고 있는 여학생에게 물었다. "네가 원하는 게 그거지?" "예에. 전 토비를 사랑해요." 에일린은 얼른 대꾸를 하고는 토비에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어른들이 하두 다그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경사인 에일린의 부친이 나섰다. "내 딸은 이제 겨우 열여섯이야. 이건 미성년자 강간이라구. 생각 같아선 평 생 감옥에서 썩게 하고 싶지만 모든 책임을 지고 내 딸과 결혼을 하겠다면..." 모두의 시선이 토비에게 쏠렸다. 토비는 다시 침을 꼴깍 삼킨 뒤 대답했다. "예. 저, 정말 죄송합니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토비로선 어머니를 가슴 아프게 해드린 것이 죄스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 이었다. "이제 에일린과 아기를 부양하려면 직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 빛나 는 미래와 야심에 찬 계획들을 모두 포기하고 평생 정육점에서 고기나 다루며 썩겠지." 집에 도착하자 어머니가 말했다. "위층으로 올라와라." 토비는 꾸중 들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어머니를 따라 위층 자기 방으로 들어 갔다. 어머니는 다짜고짜 여행가방을 꺼내더니 토비의 옷들을 챙겨넣기 시작했 다. 어리둥절해서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던 토비가 물었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나? 난 아무것도 안 한다. 네가 여기서 떠나는 거야." 어머니는 짐을 꾸리던 일손을 멈추고 아들을 바라보았다. "넌 그래 그 형편없는 계집애 때문에 네가 평생을 망치는 꼴을 이 엄마가 그 냥 두고 볼 줄 알았더냐? 네가 그애랑 같이 잤고 그애가 임신을 했다. 그건 두 가지 사실을 증명하지. 네가 인간이라는 것과 그 계집애가 멍청이라는 것! 아무 도 내 아들에게 결혼이라는 굴레를 씌울 순 없다, 암 여부가 있나. 토비, 넌 하 늘이 점지해 준 위인이야. 이제 뉴욕으로 가는 거다. 거기서 유명한 스타가 되 는 거야. 그런 다음에 나를 데리러 와라." 토비는 눈물을 참으려고 눈을 깜빡이며 어머니 품에 안겼다. 어머니가 그 넉 넉한 가슴으로 포옥 안아 주었다. 어머니 곁을 떠날 생각을 하니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며 더럭 겁이 났다. 그러나 한편으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는 설레임 에 뻐근한 흥분이 느껴졌다. "이제 연예계에 투신하는 거야. 유명인이 되는 거 라구. 스타가!" 어머니가 늘 말씀하시던 대로. 아슬아슬한 탄생 1939년의 뉴욕은 극장계의 본거지였다. 대공황은 막을 내렸다. 프랭클린 루스 벨트 대통령도 이제 두려울 건 두려움 그 자체밖에 없노라고, 미국은 지상에서 가장 번영된 국가를 이룰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실현되었다. 모두들 주 머니가 두둑해졌다. 브로드웨이에선 한꺼번에 서른 개의 쇼가 무대에 올려졌고 전부 대흥행이었다. 토비는 어머니가 준 백 달러를 들고 뉴욕에 도착했다. 반드시 유명인이 되어 큰 돈을 벌 각오가 단단히 되어 있었다. 그러면 어머니를 모셔 와서 호화로운 펜트하우스에서 사는 거다. 어머니는 매일밤 극장에와서 나의 코미디에 열광하 는 관객들을 지켜 볼 것이다. 그러나 우선 직업부터 구해야 한다. 토비는 브로 드웨이의 극장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뛰어난 기량과 디트로이트에서 아마추어 콘테스트 우승을 휩쓴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번번이 문전박대였다. 그렇게 직업을 찾아 발이 닳도록 뒤는 중간중간 몰래 극장이나 나이트클럽에 숨어 들어 가 유명 연예인들, 특히 코미디언들이 공연하는 모습을 지커 보았다. 거기서 저 유명한 벤 블루, 조 E. 루이스, 프랭크 페이를 볼 수 있었다. 토비는 자기가 언 젠가는 그들보다 훨씬 뛰어난 코미디언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돈이 다 떨어지자 할 수 없이 접시닦이 일을 시작했다. 그런 중에도 매주 - 전화 요금이 할인되는 일요일 오전을 택해 - 어머니께 문안 전화를 드렸다. 처 음 전화를 걸었을 때 어머니는 그가 떠나고난 뒤에 벌어진 소동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네가 그꼴을 봤어야 되는데. 여학생 아버지라는 경찰관이 밤마다 순찰차를 몰고 이리로 온단다. 우리 식구가 무슨 갱단이라도 되는 것 같다니까. 허구한 날 찾아와서 네가 어디 있는지 대라는 거야." "그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데요.?" 토비는 바짝 긴장을 했다. "사실대로 말했지. 내 아들놈은 한밤중에 좀도둑처럼 몰래 도망쳤다구. 내 손 에 걸리기만 하면 모가지를 비틀어 놓고 말겠다구." 토비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여름 동안 토비는 겨우겨우 일자리를 하나 얻을 수 있었다. "위대한 멀린"이 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마술사의 조수 자리였다. 구슬알처럼 작고 동그란 눈알이 유난히 반짝거리는 "위대한 멀린"은 순엉터리에 별재주도 없었다. 그들은 캐츠 킬의 이류 호텔들을 돌며 공연을 했는데 조수 토비의 주된 임무는 멀린의 스테 이션 왜건에서 무거운 장비들을 꺼내어 공연장까지 날랐다가 공연이 끝나면 다 시 차에 싣는 중노동과 흰토끼 여섯 마리, 카나리아 세 마리, 명주쥐 두 마리로 구성된 소품을 지키는 일이었다. 멀린이 소품들끼리 서로 먹고 먹히는 불상사를 우려했기에 토비는 청소도구함만한 방에서 동물들과 함께 생활해야 했다. 그래 서 그 여름의 기억은 머리가 다 멍멍할 정도로 지독한 동물들의 악취로 남았다. 마술용으로 만들어져 다루기도 쾌 까다롭고 우라지게 무거운 상자들을 나르랴, 틈만나면 도망치는 소품들을 쫓으랴 토비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정말이지 너무나 외롭고 절망적인 시절이었다. 그는 동물들의 배설물 냄새가 코를 찌르는 좁고 더러운 방에 홀로 멍하니 앉아,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이 렇게 세월만 보내다가 연예계에는 언제나 발을 들여놓지?" 하는 회의에 젖었다. 그러다가 마음을 가다듬고는 거울 앞에서 열심히 흉내 연습을 하기도 했는데 그 럴 때 관객이라곤 멀린의 냄새 나는 동물뿐이었다.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이었다. 여느 때처럼 일요일 오전에 집으로 전화를 걸 었는데 듯밖에도 아버지가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저토비예요. 잘 지내셨어요?_ 침묵. "여보세요? 아버지 저예요." "그래, 토비" 아버지의 심상치 않은 목소리가 왠지 섬뜩했다. "어머닌 어디 계세요?" "어젯밤에 병원에 실려 가셨다." 토비는 수화기가 바스러지도록 움켜쥐었다. "어머니한테 무슨 일이 있어요.?" "의사 말로는 심장마비라는구나." 아냐! 우리 어머니가 그럴 리가 없어! "괜찮으시겠죠, 그렇죠. 엄마가 괜찮다고 말 좀 해주세요!" 토비는 수화기에 대고 절규했다. 멀리서 전화선을 통해 아버지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네 어머닌... 몇 시간 전에 돌아가셨다." 그 말에 분출하는 용암처럼 토비를 덮쳐 왔다. 그 강렬한 열기에 온몸에 불이 붙어 마디마디가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아버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엄 마는 죽을 수 없어. 우린 약속했으니까. 꼭 유명해져서 엄마를 모셔 오기로 약 속했으니까. 호화로운 펜트하우스와 기사 딸린 리무진과 모피 코트와 다이아몬 드가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는데... 격결하게 쏟아져 나오는 서러운 흐느낌에 숨 조차 쉴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외쳐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토비! 토비" "곧 가겠어요. 장례식은 언제죠?" "내일이다. 하지만 오면 안 돼. 경찰이 널 기다리고 있어, 토비. 에일린이 곧 출산할 모양이더라. 그애 아버지가 너만 보면 죽이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어. 그러니 장례식에 오면 잡히고 말 거야." 그래서 토비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조차 하지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날은 종일 침대에서 뒹굴며 옛 추억에 잠겼다.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도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부엌에서 요리를 하며 넌 장차 위대한 인 물이 될 거라고 용기를 주던 어머니, 극장 맨 앞줄에 앉아, "내 새끼! 아주 재 주꾼이야!" 하고 목이 아프도록 외쳐대던 어머니. 아들이 익살맞게 흉내를 내거나 농담을 할라치면 자지러지게 웃으시던 모습. 여행 가방을 꾸리시며, "나중에 유명 스타가 되거든 나를 데리러 오거라" 하시 던 어머니. 토비는 슬픔에 젖어 맥없이 누워서는 혼자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내 이날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절대로. 1939년 8월 14일. 이날은 내 생애의 가장 중요한 날이 되리라." 정말로 그날은 토비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 되었다. 그건 어머니의 죽 음 때문이 아니라 뉴욕에서 천오백 마일 떨어진 텍사스 오데사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 때문이었다. 그 병원은 수수하고 우중충한 사층짜리 건물이었다. 건물 안에 토끼장처럼 다 닥다닥 붙은 방마다 제 기능이 있어 병을 진료하고 치료하고 때로는 환자가 죽 어 나가는 일들이 되풀이되어 일어났다. 의료 슈퍼마켓을 방불케 하는 그곳에는 별별 환자들이 다 있었다. 새벽 네 시, 고요한 죽음의 시간. 병원 스탭들도 내일의 힘겨운 전투를 위해 잠깐 휴식을 취할 때였다. 4번 수술실 산부인과 팀이 고전하고 있었다. 처음엔 순산으로 예상됐던 분만 이 갑자기 비상 사태로 돌입한 것이다. 산모는 친스키 부인. 태아가 모습을 드 러낼 때까지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친스키 부인은 한창 나이의 건강한 산모였 고 산부인과 의사들이 좋아하는 크고 실한 엉덩이를 갖고 있었다. 자궁 수축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아주 정상이었다. "둔위 분만." 담당 의사인 닥터 월슨이 말했다. 수술팀은 별로 긴장하지 않았다. 태아의 다 리나 엉덩이 부분이 먼저 나오는 둔위 분만은 전체 분만의 3퍼센트밖에 안 되는 희귀한 경우지만 보통 별어려움 없이 처리해 왔으니까. 둔위 분만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따로 도움이 필요없는 자연 둔위 분만, 의사가 거들어야 하는 보 조 둔위 분만, 태아가 산모의 자궁에 걸려 빠지지 않는 긴급 사태. 닥터 윌슨이 보기엔 가장 간단한 유형인 자연 둔위 분만이었다. 그는 만족스 러운 얼굴로 태아의 발과 조그만 다리가 나오는 걸 지켜 보았다. 또 한차례 수 축이 일어나자 이번엔 허벅지까지 보였다. "자, 다 돼갑니다. 한 번만 더 힘을 주세요." 닥터 윌슨이 산모에게 용기를 주었다. 친스키 부인은 힘껏 아기를 밀어냈다. 그런데 반응이 없었다. 닥터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다시 해보세요. 더 세게." 그래도 무반응. 닥터 윌슨은 태아의 다리를 잡고 살짝 당겨보았다. 전혀움직임이 없었다. 그 는 한 손을 좁은 산도로 밀어 넣어 자궁을 더듬었다. 이마에 구슬 같은 땀방울 이 맺혔다. 옆에 있던 간호사가 얼른 몸을 기울여 땀을 닦아 주었다. "문제가 생겼어." 닥터 윌슨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 말은 들은 친스키 부인이 물었다. "뭐가 잘못됐나요?" "아, 다 좋습니다." 닥터 윌슨은 손을 더 깊숙이 들이밀어 태아를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그래도 움직임이 없었다. 손으로 더듬어 보니 탯줄이 태아의 몸뚱어리와 엄마의 골반 사이에 눌려 있는 게 느껴졌다. 태아의 산소 공급이 차단되고 있는 것이다. "태아경!" 간호사가 날랜 동작으로 태아의 심박음을 듣기위해 특별히 고안된 청진기 태 아경을 산모의 배 위에 올려놓고 태아의 심장 박동에 귀기울였다. "30까지 떨어졌습니다. 부정맥 증상도 뚜렷합니다." 산모의 자궁 안으로 들어간 닥터 윌슨의 손가락이 마치 뇌에서 조종하는 원격 안테나처럼 탐색을 계속했다. "태아의 맥박이 끊겼어요. 반응이 없어요." 간호사가 급박하게 외쳤다. 태아는 엄마의 자궁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늦지는 않았다. 빨 리 꺼내기만 하면 살릴 방도는 있다. 남은 시간은 길어야 4분, 그 안에 꺼내기 만 하면 기도의 이물질을 제거하고 저 콩알만한 심장을 다시 뛰게 할 수 있으리 라. 그러나 4분이 경과하면 뇌손상이 치명적이라 가망이 없다. "시간을 재." 닥터 윌슨이 명령했다. 수술실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벽에 걸린 전자 시계에 박혔다. 막 12에 걸렸던 빨간 초침이 1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분만팀은 작업에 착수했다. 닥터 윌슨이 태아를 꺼내려고 애를 쓰는 동안 비 상 산소 탱크가 침대 발치로 옮겨졌다. 닥터 윌슨은 "브라하트법 Bracht maneuver"을 실시했다. 태아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서 산도를 넓히는 방법이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마침 처음으로 분만에 입회했던 간호 실습생은 그 끔찍한 광경에 울컥 구토증 을 일으키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수술실 문밖에 칼 친스키가 서 있었다. 그는 울퉁불퉁 굳은살이 박인 솥뚜껑 만한 손으로 초조하게 모자를 주물럭거리며 이제나저제나 아기가 태어나길 기다 리고 있었다. 이날은 그에게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 직업이 목수인 친스키는 일 찌감치 결혼해서 대가족을 이루어 다복하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은 소박한 사내였다. 이제 곧 첫아이가 태어난다는 생각을 하니 벅찬 감격과 흥분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는 아내를 너무너무 사랑했기에 그녀 없는 인생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막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간호 실습생이 문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어떻게 됐습니까?" 친스키는 득달같이 달려가서 붙잡고 물었다. 반은 얼이 빠진 간호 실습샐이 횡설수설 외쳤다. "주, 죽었어요. 죽었어요." 그리곤 엎어질 듯 화장실로 달려갔다. 친스키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그는 가슴을 움켜쥐고 헉헉거리기 시 작했다. 이윽고 응급실 요원들이 달려왔을 즈음, 친스키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한편, 수술실 안에서는 초를 다투는 분만 작업이 계속되고 있었다. 손을 집어 넣어 짓눌린 탯줄을 감지할 수는 있었으나 도저히 그걸 들어낼 방도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반쯤 나온 태아를 완력으로라도 끌어내고 싶었지만 그런 식으로 분 만된 태아는 십중팔구 목숨을 잃게 되어 있었다. 산모는 이제 가물거리는 정신 으로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힘주세요, 친스키 부인. 더 세게! 자자!"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닥터 윌슨은 흘낏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태아의 두뇌 에 혈액 순환이 멈춘 지 2분이 지났다. 그 귀중한 2분. 닥터 윌슨은 고민에 사 로잡혔다. 4분이 경과한 뒤에 태아를 구해내게 되면 어떻게 한다지? 그냥 식물 인간으로 살게 해...? 아니면 차라리 고통없이 죽을 수 있도록...? 일단 그런 생각은 접어 두고 그는 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눈을 감고 자궁 내부를 천 천히 더듬어 가면서 그 안의 상항을 살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모리소 스멜리 바이트법(Mauriceau-Smellie-Veit maneuver)"을 동원해야 할 차례였다. 그것은 태아의 몸이 잘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복잡다단한 일련의 동작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태아의 몸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파이퍼 겸자!" 간호사가 재빨리 분만용 특수 겸자를 건넸다. 닥터 윌슨은 그것을 산도로 밀 어 넣어 태아의 머리를 감쌌다. 잠시 후 태아의 머리가 나왔다. 아기가 태어난 것이다. 새 생명이 태어나는 기적과 영광의 순간! 조용하고 어두운 엄마의 자궁에서 춥고 눈부신 바깥 세상으로 밀려난 것이 분하고 속상해 시뻘건 얼굴로 으앙 울 음을 터뜨리는 신비의 생명체. 그러나 이 아기는 울지 않았다. 푸르뎅뎅한 작은 몸뚱아리가 미동도 않고 누 워 있었다. 여아였다. 시간은? 1분하고도 30초가 남아 있었다. 오랜 경험을 갖춘 노련한 의사는 신 속하고 기계적인 처치에 들어갔다. 거즈로 감싼 손가락을 아기의 인두 후부에 집어 넣어 이물질을 제거했다. 후두강으로 산소가 들어가도록 하는 처치였다. 그런 다음 아기를 똑바로 눕혔다. 간호사가 전기 흡입 장치가 연결된 소형 후두 경을 건넸다. 닥터 윌슨이 그걸 제 위치에 설치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간호사는 스의치를 넣었다. 장치가 규칙적인 흡입음을 내기 시작했다. 닥터 윌슨은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20초가 남아 있었다. 맥박은 여전히 정지 상태. 15초... 14초... 맥박은 정지 상태. 이제 결단의 순간이 다가왔다. 뇌손상을 막기엔 너무 늦어 버렸는지도 모른 다. 그러나 이런 일은 아무도 결과를 정담할 수 없다. 닥터 윌슨은 식물 인간으 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너무도 많이 봐왔다. 몸은 성인이되 정신은 어린애만도 못한 불쌍한 생명체들. 10초 맥박이 없다. 한 가닥 희망도 없다. 5초. 이쯤에서 닥터 윌슨은 비장한 결단을 내렸다. 하느님도 이해하고 용서해 주시겠지. 이제 그는 아기의 목숨을 살려낼 수 없겠다고 선언하며 플러그를 뺄 참이었다. 그런 행동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닥터 윌슨은 마지 막으로 아기의 살갗을 만져보았다. 차갑고 축축했다. 3초. 닥터는 울고만 싶었다. 가엾은 것. 예쁜 공주님인데. 나중에 크면 아름다은 여인이 될 터인데. 이 아기가 살았다면 어떤 인생을 살게 되었을까?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까? 어쩌면 예술가나 교사, 아니면 회사 중역이 될지도 모른다. 부 자로 살까, 가난하게 살까? 행복할까, 불행할까? 1초. 맥박은 정지 상태. 타임 아웃. 닥터 윌슨은 스위치로 손을 가져갔다. 순간 기적이라고 일어난 것일까, 아기 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처음엔 약하고 불규칙한 경련이었던 것이 이내 강하 고 규칙적인 박동이 되었다. 분만팀은 일제히 환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닥터 윌 슨은 정신없이 벽에 걸린 시계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기는 폴란드 크라코프에 살고 계신 할머니의 이름을 따서 조세핀이라고 불 렸다. 조세핀 친스키. 가운데 이름은 없었다. 텍사스 오데사의 가난한 폴란드인 재봉사 딸에게 가운데 이름 같은 건 엄두도 못 낼 호사니까. 친스키 부인은 닥터 윌슨이 조세핀을 6주마다 한차례씩 꼭 진찰해야 한다고 우기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정기적으로 꼬박꼬박 검진을 받았지만 결 과는 항상 똑같았다. 정상. 이제 모든 건 시간이 말해 줄 터였다. 참담한 첫 무대 그 해 노동절을 기해 "위대한 멀린"의 캐츠킬 여름 공연은 막을 내렸고 멀린 이 일을 놓자 토비도 함께 실업자가 되었다. 이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었다. 하 지만 어디로 간다지? 토비는 거처도 일자리도 없는 무일푼 신세였다. 그러던 중 평소 안면이 있던 여자 관객이 자기와 아이들 셋을 시카고까지 태워다 주면 25 달러를 주마고 했다. 그래서 무작정 시카고로 출발했다. "위대한 멀린"과 그의 악취나는 소품들에겐 작별 인사조차 남기지 않고. 1939년의 시카고는 흥청망청 돈도 많고 단속도 느슨한 도시였다. 거기선 돈이 면 다 되었다. 그래서 제법 행세께나 하는 사람들은 여자고, 마약히고, 정치인 이고 할 것 없이 돈으로 다 사들였다. 나이트클럽도 수백 군데나 되었다. 그 많 은 업소들은 밤마다 별별 쇼를 다 선보였다. 토비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셰 빠 레"같이 호화찬란한 대형 나이트클럽에서 "러시 스트리트"에 모여 있는 작은 바 들까지 한군데도 빼놓지 않고 순례했다. 그러나 결과는 늘 똑같았다. 애송이 펑 크족을 무대에 세우려는 업소는 없었다. 이제 시간이 촉박했다. 어머니의 꿈을 이루기 시작할 때가 온 것이다. 벌써 열아홉이 다 되어가니까. 토비가 기웃거리던 클럽들 중에 "니 하이"란 업소가 있었다. 고정 출연진이라 곤 케케묵은 3인조 콤보"소규모 재즈 악단"와 빈털터리에 주정뱅이인 중년 코미 디언, 메리와 재리라는 자매 스트립 걸이 전부인 그저 그런 데였다. "페리 시스 터즈"로 통하는 메리와 제리는 신기하게도 진짜 친자매였는데 둘 다 이십대에 매력은 있으되 헤픈 싸구려 티를 물씬 풍겼다. 어느 날 토비가 혼자 술을 마시 고 있는데 제리가 옆에 와서 앉았다. 토비는 활짝 웃으며 정중하게 말을 걸었 다. "공연 멋지던데요." 흘낏 쳐다보니 동안의 촌스러운 애송이였다. 게다가 형편없이 초라한 옷차림 이란! 제리는 무관심하게 고개를 까딱하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런데 애송 이가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얼핏 불룩한 사타구니가 눈에 들어왔다. 제리는 자기도 모르게 천진난만한 얼굴의 젊은이를 올려다보며 감탄을 내질렀다. "어머나 세상에, 저거 진짜예요?" 토비는 능글맞게 웃으며 대꾸햇다. "그거야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겠죠." 이튿날 새벽 세 시경, 우리의 토비는 "페리 시스터즈"를 양 옆에 끼고 누워 있었다. 치밀한 계획이 세워졌다. 공연 한 시간 전, 제리가 "니 하이" 전속 코미디언을 살살 꼬여낸다. 노름이 라면 사족을 못 쓰는 작자를 "다이버지 애버뉴"의 한 아파트로 데려간다. 거기 선 벌써 노름판이 한창이다. 아니니다를까, 작자는 슬슬 구미가 동하는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잠깐만 있다 가자구." 30분 뒤, 눈이 홀랑 뒤집혀서 미친놈처럼 소리소리 질러대며 주사위를 굴리고 있는 작자를 남겨 놓고 제리 혼자 몰래 빠져나왔다. "8점패가 나가신다, 새끼들아!" 한심한 코미디언은 주사위가 한 번 구를 때마다 성공과 인기, 돈이 현란하게 펼쳐지는 환상의 세계에 푹 빠져 버렸다. 한편 "니 하이"에서는 토비가 말쑥한 차림으로 바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 공연 시간이 다 되도록 코미디언이 나타나지 않자 주인은 화가나서 길길이 날 뛰며 욕지거리를 퍼부어댔다. "그 개자식은 이제 끝난 거야. 다신 이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고 말겠어." 메리가 약삭빠르게 끼여들었다. "아유, 정말 속상하시겠다. 그치만 죽으라는 법은 없나 봐요. 운이 좋으셔. 저기 코미디언이 하나 앉아 있어요. 뉴욕에서 방금 도착했대요." "뭐라구? 어디?" 주인은 토비를 보고 나서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우라질,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잖아. 유모는 어디 두고 혼자 왔대?" "저 사람 대단해요." 제리의 그 말은 진심이었다. 지난밤에 몸소 확인을 했으니까. "한번 써 봐요. 손해볼 거 없잖아요." 메리도 거들고 나섰다. "손해볼 게 없다구? 손님이 다 끊기면 어쩌지?" 그러나 곧 어깨를 으쓱하더니 성큼성큼 토비가 앉아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래, 코미디를 한다구?" "예. 캐츠킬 공연을 끝내고 막 도착한 참이죠." 토비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주인이 찬찬히 뜯어보며 물었다. "몇 살인가?" "스물둘요." 거짓말이었다. "염병할, 좋아. 한 번 나가 봐. 괜히 나갔다가 망쳐 놓으면 넌 스물둘 먹을 때까지 살지도 못할 거야."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사나이 토비 템플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스 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 한가운데에 섰다. 밴드가 팡파르를 울려댔고 저기 관 객들이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앉아 있었다. 가슴이 뭉클한 나머지 목이 다 메었 다. 미지의 신비스런 끈으로 관객들과 하나로 묶여 있는 듯한 일체감이 느껴졌 다. 순간 어머니가 생각났다. 지금 어디에 계시든 이 모습을 꼭 봐주셨으면 싶 었다. 이윽고 팡파르가 멈췄다. 토비는 공연을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은 참 운이 좋으십니다. 저는 토비 템플입니다. 여러분 도아마 각자 이름이 있으실 거예요." 침묵. "새로 바뀐 시카고 마피아 두목 얘기 들어 보셨어요? 아, 글세 동성 연애자래 요. 그래서 요샌 마피아한테 걸리면 한바탕 화끈하게 놀고 죽인다지요." 웃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차갑고 적의 어린 시선으로 뚫어지게 쳐다보고만 있었다. 공포가 짐승의 날카로운 발톱처럼 가슴을 후벼 팠다. 토비는 땀에 흠뻑 젖었다. 관객들과의 신비스런 끈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래도 계속했다. "사실 저는 메인 주의 어느 극장에서 막 공연을 마치고 왔습니다. 그런데 극 장이 워낙 첩첩산중에 있다 보니 글쎄 지배인이 곰이지 뭡니까." 침묵. 관객들은 토비를 증오하고 있었다. "아니, 전 여기서 침묵의 집회가 열리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건 마치 침 몰한 "타이태닉 호"의 연예부장이라도 된 거 같군요.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서 있 으니까 트랩을 다 올라가서 보니 배가 온데간데없는 거 같은 기분이 듭니다." 관객들이 야유하기 시작했다. 공연이 시작된 지 채 2분도 안 돼서 클럽 주인 은 밴드에게 미친 듯이 신호를 보냈다. 밴드가 요란스러운 연주를 시작하자 토 비의 목소리는 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는 거기 그렇게 활짝 웃으며 서 있었다. 자꾸만 고이는 눈물로 눈알은 쓰라리고 수치심에, 수치심에... 토비는 관객들을 향해 목놓아 울부짖고 싶었다. 느닷없는 울부짖음이 친스키 부인을 깨웠다. 소름이 오싹 끼치는 날카로운 짐 승의 울부짓음이 한밤중의 정적을 찢어 놓았다. 친스키 부인은 벌떡 일어나 앉 아서야 그게 아기 울음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아기를 재워 놓은 옆방으로 허겁 지겁 달려가 보니 조세핀이 얼굴이 시퍼렇게 되어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병 원에서 인턴이 진정제를 놓자 아기는 다시 쌕쌕 잠이 들었다. 곧 닥터 윌슨이 달려와 정밀 검사를 실시했다. 아무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도 닥터는 불 안했다. 조세핀이 기적처럼 소생했을 때 보았던 벽시계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변소 순회 공연 1881년 이래 미국에서 인기를 한 몸에 누리던 보드빌"노래, 춤, 연극, 곡예 등 다양한 상연물로 구성된 연예 쇼"은 1932년 "팔레스 극장"이 문을 닫으면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동안 보드빌은 야심에 찬 신인 코미디언들에게 명실 공히 훈련의 터전이 되어 왔다. 그들 신예들은 야유나 일삼는 적대적인 관객들 앞에 자신을 내던져 한바탕 혈전을 치르며 기량을 갈고 닦았다. 그러다 제법 이 름을 얻게 되면 인기와 부를 찾아 떠나갔다. 에디 캔터, W.C. 필즈, 졸슨과 베 니, 애보트와 코스텔로, 제슬과 번즈, 막스 브라더즈가 다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렇듯 고정적인 수입이 보장되던 안식처 보드빌이 자취를 감추자 코미디언들은 밥줄을 찾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야 했다. 인기 코미디언들이야 라디오 쇼 에도 출연하고 대규모 업소에도 나가고 해서 밥벌이 걱정은 없었지만 토비 같은 무명 신인들에겐 얘기가 달랐다. 무명 코미디언들도 나이트클럽에서 공연은 할 수 있었지만 대우가 너무나 형편없었다. 그걸 흔히들 "변소순회 공연"이라고 불 렀다. 아니, 실상에 비하면 그 정도는 부드럽고 고상한 표현이었다. "변소 순회 공연"이란 전국의 지저분한 싸구려 술집을 돌며 공연을 하는 것인데, 떼로 몰려 와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켜며 스트립 댄서들에게 트림이나 해대고 코미디언들을 재미로 가지고 노는 순 야만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그런 업소의 분장실은 하나 같이 악취 나는 화장실이어서 상한 음식 냄새, 술 냄새, 오줌 지린내, 싸구려 향수 냄새가 진동했다. 그래도 그런 악취는 다 참을 만했다. 정말 진저리나는 건 공포의 냄새였다. 공연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흘리는 진땀 냄새. 게다가 화장실이 하도 더러워 여자 출연자들은 분장실 세면대 위에 쪼그리고 앉 아 오줌을 누었다. 출연료는 들쭉날쭉, 재수 옴붙은 날은 개밥 같은 저녁 식사 로 끝이었고 5달러도 좋고 10달러도 좋았다. 그러다 관객들의 반응이 괜찮았다 싶으면 15달러까지 받기도 했다. 토비 템플은 악착같이 "변소 순회 공연"을 돌며 많은 걸 체험하고 배웠다. 고 장마다 이름은 달라도 업소들은 다 그게 그거였다. 악취나는 분장실 하며 적대 적인 관객들 하며. 상스럽기 짝이 없는 이 관객들은 공연이 마음에 안 들면 맥 주병을 던지고 야유를 해대고 휙휙 휘파람을 불어대고 난리였다. 그렇게 판이 거칠긴 해도 토비에겐 좋은 학교였다. 야생마처럼 날뛰는 관객들의 비위를 맞추 며 난장판 속에서도 용케 공연을 끌어가는 갖가지 기술들을 확실하게 익혔으니 까. 제법 관록이 붙자 저기서 난동을 부리는 자가 술취한 관광객인지 아니면 맨 정신으로 훼방을 일삼는 깡패 나부랑인지 저절로 구분이 되었다. 한 번 주욱 훑 어만 보아도 어떤 자가 상습적인 야유꾼인지 척 알아보고는 슬금슬금 다가가 술 을 권한다든지 땀 좀 닦자며 그 테이블에 놓인 냅킨을 빌린다든지 해서 아예 시 작부터 작자의 입을 막는 작전에도 도가 텄다. 토비가 전전한 업소들은 이름도 다양했다. '레이크 캬메샤', '샤왕가 로지', '에이본', '와일드 우드', '뉴저지', '비나이 비리스', '선즈 오브 이태리', ' 무스 홀즈'. 그런 데를 돌며 계속 배워 나갔다. 레퍼토리도 다양했다. 당시 유행하는 대중 가요를 익살맞게 변곡해서 부르기 도 하고, 게이블, 그랜트, 보가트, 캐그니 같은 유명 연예인들 흉내도 내고, 인 기 코미디언들의 대본을 그대로 베껴 먹기도 했다. 사실 비싼 돈 내고 대본 작 가를 고용할 수 없는 무명 코미디언들은 다 그렇게 남의 것을 베껴 먹었고 그걸 자랑삼아 떠들어댔다. "이제부터 제리 레스터가 되겠습니다. "그 사람보다 제가 두배는 낫죠.", "자, 밀턴 베를로 들어갑니다.", "제가 레드 스켈톤 연기하는 거 좀 봐주세요"라고 하면서 말이다. 코미디에선 대본이 열쇠이기에 모두들 잘 나가는 대본들만 베꼈다. 이제 토비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시큰둥하고 뻣뻣하기 짝이 없는 관객의 얼굴에 저 갈망 어린 푸른 눈을 박고는 능청스럽게 입을 연다. "에스키모가 오줌 누는 거 보셨어요?" 그리곤 양손으로 바지 가랑이를 움켜쥐면 얼음 조각들이 뚝뚝 떨어진다. 어떤 날은 떡하니 터번을 쓰고 시트로 몸을 칭칭 감고는 무대에 선다. "나는 뱀 부리는 압둘." 목소리의 굴곡이 제법 근사하다. 그가 플루트를 불기 시작하면 대바구니에서 코브라가 나타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 진짜 코브라냐구? 천만에. 고무 호스를 그를듯하게 꾸며 거기 철사 줄을 매달아 끌고 당기고 하는 것이다. 그래도 그걸 무척 재미있어 하는 관객들 이 한둘쯤은 꼭 끼여 있었다. 관객들이 좋아한다면 난쟁이 연기도 하고 접시 돌리기도 불사했다. 말 그대로 닥치는 대로 다 했다. 별별 재기를 다 갖추었다. 객석에서 맥주병이 날아올 기세면 재빨리 다른 묘 기로 넘어가야 하니까. 그러나 어느 무대에 서든 공연 도중에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순회 공연을 다닐 때는 늘 버스편을 이용했다. 낯선 고장에 도착하면 제일 싸구려 호텔이나 하숙집에 짐을 풀고 공연을 할 업소들을 수소문했다. 나 이트클럽이나 바, 경마 도박장이 그의 무대였다. 구멍난 구두 밑창에는 판지를 깔고 세탁비를 아끼기 위해 꼬질꼬질 셔츠 칼라에 초크칠을 했다. 찾아가는 고 장마다 황량하고 음식도 고약했다. 그러나 정작 사나이 토비 템플을 좀먹어 들 어가는 건 외로움이었다. 그는 철저히 혼자였다. 이 넓은 세상, 저 무수한 사람 들 중에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드문드문 부 친에게 편지를 쓰긴 했지만 그건 애정보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다. 그래서 말상대 가 돼주고 이해해 주고 함께 꿈을 나눌 대상을 절실하게 원했다. 인기 연예인들이 아름답고 우아한 아가씨들과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고급 나이 트클럽에서 나와 번쩍거리는 리무진을 타고 떠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나도 언젠가는... 최악의 순간은 역시 공연이 실패했을 때였다. 공연 도중에 거센 야유를 받았 을 때, 채 시작하기도 전에 무대에서 쫓겨났을 때. 그런 순간이면 관객들이 미 웠다. 전부 죽이고 싶었다. 그건 단순히 한 번의 실패가 아니라 인생 전체의 실 패처럼 느껴졌다. 지옥의 맨 밑바닥까지 곤두박질친 기분이었다. 호텔방에 돌아 와서 혼자 울었다. 제발 저를 그냥 놔두십사, 무대에 대한 미칠 듯한 열정을 거 두어 주십사 하느님께 애원했다. "오, 하느님! 제가 구둣방이나 정육점에 취직하고 싶어하도록 해주십시오. 이 일이 아니면 아무 일이라도 좋습니다." 어머니가 틀렸다. 나는 선택된 인간이 아니다. 나는 절대 유명인이 될 수 없 다. 내일 당장 다른 일거리를 찾아야지.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직장 을 찾아 평범하게 살아가야지. 그러나 이튿날 밤이면 다시 무대에 서서 사나운 이리떼 같은 관객들을 상대로 남의 흉내를 내고 우스갯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토비는 관객들을 향해 순진하게 웃어 보이며 입을 열곤 했다. "오리 한 마리를 애지중지하는 남자가 있었더랍니다. 이 남자, 하루는 영화관 에까지 오리를 안고 갔지요. 그런데 매표원이 오리는 입장시킬 수 없다는 거예 요. 그래 어쩝니까. 슬쩍 구석으로 가서 바지 지퍼를 내리고 그 안에 오리를 집 어 넣었죠. 그리곤 유유히 표를 사갖고 영화관으로 들어간 겁니다. 한참 영화를 보고 있는데 이 오리란 놈이 갑갑해서 난리예요. 그래서 바지 지퍼를 열고 머리 만 밖으로 나오게 했죠. 이 남자 옆에는 어떤 부인이 앉아 있었어요. 그 옆에 남편이 앉았구요. 부인이 남편에게 소근댔어요. "랠프, 내 옆에 앉은 남자가 저기, 성기를 꺼내 놓고 있어요." 그래서 랠프가 물었죠. "당신한테 이상한 수작을 걸어?" "그렇진 않아요." "그럼 됐어. 신경 쓰지 말고 영화나 보구려." 잠시 후 다시 부인이 남편을 쿡쿡 찔렀어요. "랠프, 저 남자 성기가..." "그냥 무시하라고 했잖소." "그럴 수가 없어요. 그게 내 팝콘을 먹고 있단 말예요!" 우리의 토비는 샌프란시스코의 "스리 식스 파이브", 뉴욕의 "루디즈 레일", 톨레도의 "킨 와 로우즈" 무대에도 한 번씩 섰고 연관공 집회, 술집 자선행사, 볼링 잔치에서도 공연했다. 그렇게 배워 나갔다. "젬", "오데온", "엠파이어", "스타" 따위의 소규모 극장들에서 하루 네다섯 차례씩 공연하기도 했다. 그런 데서도 배울 건 있었다. 그렇게 갖가지 체험을 통해 많은 걸 배우면서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평생 이렇게 무명으로 "변소 순회 공연"만 다닐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때마침 그에 게도 전환의 계기가 왔다. 1941년 12월 초순의 어느 쌀쌀한 일요일 오후였다. 토비는 뉴욕 14번가에 있 는 "듀이 극장"에서 하루 다섯 차례 열리는 공연을 하고 있었다. 출연진은 모두 여덟이었는데 토비는 그들을 소개하는 사회자 역할까지 맡고 있었다. 첫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2회 공연 도중 일본인 가족 곡예단 "날으는 가나자와 일 가"를 소개하자 관객들이 야유를 해대기 시작했다. 토비는 얼른 무대 뒤로 빠져 나가서 물었다. "저 사람들 왜 저래요?" "아니, 아직 소식 못 들었수? 몇 시간 전에 일본놈들이 진주만을 습격했다 구." 무대 감독이 대꾸했다. "그래서 뭐 어떻단 말입니까? 곡예만 잘하면 되는 거지. 저것 보세요. 근사하 잖아요." 3회 공연에서 일본 곡예단이 등장할 차례가 되자 토비는 무대에 나가 이렇게 외쳤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제부터 여러분께 마닐라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마치고 막 도착한 "날으는 필리핀 일가"를 소개하게 됨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 다!" 그러나 곡예단이 무대에 등장하자 관객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그날 종일 토비 는 문제의 곡예단을 "행복한 하와이언들"로, "미친 몽고인들"로, "날으는 에스 키모"로 부지런히 둔갑시켰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어디 그뿐인가, 사 회자인 자기까지도 괜히 미움을 받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날 저녁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더니 집에 편지 한 장이 와 있다고 했다. "환영합니다"로 시작되는 그 편지는 미국 대통령이 보내온 것이었다. 그 6개월 후, 토비는 미육군에 합류 했다. 입대날은 골치가 하도 지끈거려 선서도 겨우겨우 했을 정도였다. 두통은 끔찍하게도 자주 찾아왔다. 그럴 때면 마치 거인의 손이 우악스럽게 머리통을 쥐어짜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어린 조세핀은 어머니가 걱정할까 봐 울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친스키 부인은 종교에 매달렸다. 남편의 죽음이 자기와 아기 때문이라고 믿으며 남몰래 죄책감에 시달려 온 그녀에게 종교는 구 원이었다. 어느 날 오후의 일이었다. 우연히 부흥회가 열리는 곳엘 들어갔는데 목사의 우레와 같은 호통이 귓전을 흔들었다. "여러분은 모두 죄악과 사악함에 물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징그러운 벌레를 불 속에 던지려 하듯 주님도 여러분을 지옥 구덩이에 던지려 하십니다. 당신, 당신, 당신들 모두 가느다란 실에 대롱대롱 매달린 신세입니다. 당장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의 진노가 지옥의 불처럼 활활 타오를 것입니다!" 친스키 부인은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니 까. "우리가 네 아빠를 죽인 건 주님께 벌을 받았기 때문이야." 친스키 부인은 조세핀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할 때부터 귀에 못이 박이 도록 그 말을 되풀이했다. 그리하여 어린 조세핀은 자기가 무언가 엄청난 죄를 저질렀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되었다. 조세핀은 자기가 구체적으로 어떤 잘 못을 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야 어머니께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빌수 있을 테니까. 이중 생활 입대하고 처음 얼마간 토비 템플에겐 전쟁이 악몽 같았다. 군대에서 그는 얼굴도 이름도 없는, 그저 군복 입은 수백만의 일련 번호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는 바로 조지아의 훈련소로 들어가 기초 훈련을 받은 뒤, 배를 타고 영국으 로 향했다. 거기서 서섹스의 어느 캠프에 배치되었다. 참다못한 토비는 하사관 에게 윗분을 좀 만나게 해 달라고 졸랐다. 겨우겨우 대위를 면담할 수 있었다. 샘 윈터즈 대위는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지적인 인상을 풍기는 서른 초반의 사내 였다. "그래, 무슨 일로 날 보자고 했나?" "대위님, 사실 저는 연예인입니다. 연예계에 몸담고 있죠. 민간인 이었을 때 그랬단 말씀입니다." 윈터즈 대위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구체적으로 뭘 할 수 있나?" "무엇이든 조금씩은 다할 줄 압니다. 흉내도 내고, 모창도 하고..." 그러다 대위의 눈빛을 보고는 머쓱해져서 흐지부지 말끝을 흐렸다. "그런 것들을 좀..." "어디서 활동했지?" 토비는 "변소 순회 공연"의 활약상을 주워섬기려다 소용없는 짓같아 그만 두 었다. 뉴욕이나 할리우드 같은 버젓한 무대가 아니면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 으니까. "그렇게 알려진 곳은 못 됩니다." 내가 괜히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하는 자조감이 밀려들었다. 이윽고 윈터즈 대위가 대답했다. "내 소관은 아니네만 내 힘써 보지." "감사합니다, 대위님." 토비는 정중히 경례를 붙이고 퇴장했다. 샘 윈터즈 대위는 토비가 나가고서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이 전쟁이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자원 입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방금 나간 토비 템플 같은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전쟁 때문에 희생되는 건 원치 않았 다. 만일 템플에게 정말로 재능이 있다면 조만간 그 진가가 발휘될 터였다. 재 능은 바위 틈에서 자라나는 연약한 꽃과 같아 어떤 고난이 있을지라고 결국 활 짝 피어나게 마련이니까.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자라는 좋은 직업을 팽개치고 전 쟁에 뛰어든 샘 위터즈는 "팬 - 퍼시픽 스튜디오"에서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을 여러 편 제작해 내면서 토비 템플 같은 야심에 찬 인재들을 숱하게 보아 왔다. 그들에게 가장 절실한 건 기회였다. 그날 오후 윈터즈 대위는 토비를 위해 비치 대령을 찾아갔다. "제 생각으론 템플 사병에게 오디션 기회를 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상당 히 재능이 있어 보입니다. 그렇게 재능 있는 병사를 연예 부대에 두면 군의 사 기 진작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비치 대령은 윈터즈 대위를 올려다보며 냉랭하게 대꾸했다. "맞는 말이오, 대위. 그 건에 대한 보고서를 올리시오." 곧 윈터즈 대위는 물러갔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직업 군인인 비치 대령은 윈터즈 대위 같은 민간인 출신 을 경멸했다. 군복 입고 지휘봉이나 들고 다닌다고 해서 아무나 군인이 되는 건 아니라는 게 그의 신조였다. 이윽고 윈터즈 대위가 토비 템플 건에 대한 보고서 를 올리자 대령은 자세히 읽어 보지도 않고 냅다 펜으로 죽죽 그어놓고 "불허" 라고 썼다. 그러고 나니 기분이 좀 누그러졌다. 토비에게 무엇보다도 아쉬운 건 관객의 부족이었다. 그래서 때와 장소를 가리 지 않고 기회만 생기면 농담과 익살을 늘어놓는 방법을 택했다. 황량한 들판에 서 함께 보초를 서는 전우 두엇 앞에서도 좋고, 관객 머리수가 제법 많은 군용 버스 안에서도 좋고, 취사반에서도 좋았다. 그저 관객이 웃어주고 박수만 쳐주 면 그만이었다. 한번은 레크레이션 강당에서 한창 익살을 부리고 있는데 샘 윈터즈 대위가 들 어왔다. 유심히 지켜 보고 서 있던 대위는 공연이 끝나자 토비에게 다가갔다. "템플, 미안하게 됐네. 특수 부대로의 전속 건이 잘 풀리지 않았어. 자넨 재 능이 있는 것 같군. 전쟁이 끝나고 할리우드에 올 일이 있으면 나를 찾게." 그리곤 씨익 웃으며 덧붙였다. "내가 다시 거기서 일자리를 잡는다면 말일세." 그 다음주에 토비네 대대는 전투에 투입되었다. 토비에게 그 전쟁의 기억은 무슨 무슨 전투가 아니라 코미디에 얽힌 이런 저 런 에피소드로 남았다. 셍로에서는 빙 크로스비의 레코드를 틀어 놓고 립싱크를 기가 막히게 해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고 아헨"독일"에서는 병원에 몰래 숨어 들 어가 두 시간씩이나 병실을 돌며 위문 공연을 하다가 간호사들에게 쫓겨났다. 토비는 그때 미군 하나가 자지러지게 웃다가 꿰맨 자리가 튿어진 걸 생각하면 두고두고 흐뭇해했다. 메스"프랑스"에서의 공연은 대실패였는데 아무래도 그건 나치 비행기들이 계속 출물하는 통에 모두들 신경이 날카로워서 그랬던 것 같았 다. 토비에게 전투는 부수적인 것이었다. 한 번은 독일 전투 지휘소를 포획한 용 맹을 인정받아 표창장을 받았는데 그건 사실 얼떨결에 일어난 일이었다. 존 웨 인 흉내를 내는 데 너무 열을 올린 나머지 무서운 줄도 모르고 적의 전투 지휘 소로 들이닥쳤던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건 연기였다. 셰르부르에서 전우 몇 명과 함께 매춘굴에 갔는 데 전우들이 위층에 올라가 볼일을 보는 동안 토비는 응접실에서 마담과 매춘부 둘을 앉혀 놓고 공연을 했다. 공연이 끝나자 그 사례로 마담이 직접 서비스를 해주었다. 그것이 바로 토비의 전쟁이었다. 그럭저럭 전쟁은 견딜 만했고 그 사이 세월 은 빨리도 흘러갔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토비는 스물다섯이 되었다. 그러나 겉모습은 입대 전이나 마찬가지였다. 귀여운 얼굴과 갈망을 담은 푸른 눈, 순진 하게만 보이는 인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전우들은 고향 생각에 한껏 부풀었다. 캔자스에서 새색시가 기 다리고 있다는 전우, 바욘에 부모님이 계신 전우, 세인트 루이스에서 사업을 계 속해야 할 전우. 그러나 토비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스타의 자 리밖에는. 토비는 할리우드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제 하느님도 약속을 지켜 주실 때였 다. "여러분은 주님을 아십니까? 예수님 얼굴을 본 적이 있습니까? 형제 자매여, 나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주님은 무릎 꿇고 참회 하는 사람에게만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회개할 줄 모르는 인간을 능멸하십니다. 지금 주님께선 사악한 영혼들을 겨냥해 진노의 불길이 활할 타오르는 활시위를 당기고 계십니다. 너희 사악한 영혼들이여, 주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의 화살이 너회의 가슴을 꿰뚫을 것이다! 형제 자매여, 늦기 전에 죄를 뉘우치고 주님의 은층을 받읍시다!" 조세핀은 금방이라도 불화살이 날아올 것만 같아 잔뜩 겁에 질린 눈초리로 텐 트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엄마의 손을 힘껏 움켜쥐었으나 엄마는 다른 데 정신 이 팔려 있었다. 엄마의 얼굴은 불꽃처럼 붉었고 두 눈은 광기로 번들거렸다. "주 찬양!" 신도단이 입을 모아 외쳤다. 친스키 부인은 오데사 변두리의 대형 텐트에서 밤마다 열리는 부흥회에 어린 조세핀을 꼭 데리고 다녔다. 목재로 만들어진 전도사의 연단은 높이가 6피트 "180센티미터"는 족히 되었고 그 앞에 죄인들을 끌어다 놓고 회개시키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부흥회장에 즐비하게 놓인 딱딱한 나무 벤치들에는 지옥과 저 주가 두려워 미친 듯이 찬송하고 절규하는 구원의 광신도들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여섯 살바기 계집애에게 그 광경은 한마디로 공포였다. 근본주의 자파, 홀리 롤러파, 성령 강림절파, 감리주의파, 재림파 등 어느 파 소속이든 조세핀의 눈에 비친 전도사들은 하나같이 지옥의 불과 저주를 뿜어냈다. "오, 너희 죄인들이여, 무릎을 꿇어라! 여호와 앞에서 두려움에 떨지어다. 너 희의 사악한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심케 했으며 이제 너희는 그분의 아버지 여호와의 진노를 받을 것이다! 자, 주위를 둘러보아라! 욕정으로 잉태된 저 죄 로 가득 찬 어린아이들의 얼굴을 보아라!" 어린 조세핀은 모두의 시선이 자기에게 쏠린 것 같아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확 확 달아올랐다. 조세핀은 끔찍한 두통이 주님의 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 서 밤마다 주님께 기도했다. 부디 저를 용서하시어 두통을 겨두어 주십사고. 조 세핀은 자기가 저지른 끔찍한 죄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내 주를 찬양하리라, 너희 주를 찬양하리라, 우리 모두 천국에 오르는 날 다 함께 주 찬양하리라." "술은 악마의 피요, 담배는 악마의 입김이요. 쾌락은 악마의 간음이다. 너희 는 사탄과 교통한 죄가 있는가? 그렇다면 영원히 저주받아 지옥불에 떨어지리 라. 이제 루시퍼가 너희를 찾아갈지니." 조세핀은 와들와들 떨며 정신없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악마가 잡아가지 못 하도록 나무 벤치를 꽉 움켜쥐었다. 신도단이 노래했다. "I want to get to Heaven, my long-sought rest "내 오래도록 염원해 온 안 식처 천국에 이르고 싶네." 그러면 어린 조세핀은 그걸 잘못 알아듣고 이렇게 따라불렀다. "I want to get to Heaven, with my long shot dress "내 길고 짧은 드레스를 입고 천국에 이르고 싶네"." 우레 같은 설교가 끝나면 기적의 시간이 이어졌다. 조세핀은 두렵고 신기한 마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절름발이, 불구자들이 더러는 절룩거리며 더러는 엎 드려 기어, 더러는 휠체어를 타고 연단 앞으로 줄지어 모여드는 광경을 지켜 보 았다. 전도사가 그들에게 손을 얹고 병을 낫게 하는 천국의 위력을 불어넣으면 그들은 지팡이와 목발을 집어 던지고 겅중겅중 뛰었다. 개중에는 미친 듯이 이 상한 말을 씨부리는 사람들도 있어 어린 조세핀을 두려움에 잦아들게 했다. 언제나 부흥회의 말미는 신도들에게 헌금함을 돌리는 것으로 장식되었다. "예수님이 지켜 보고 계세요. 예수님은 구두쇠를 미워하십니다." 그렇게 광란의 집회는 막을 내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린 조세핀의 가슴속엔 그 밤의 공포가 오래도록 남았다. 1946년경 텍사스 오데사에는 암갈색 석유 냄새가 진동했다. 오래전 인디언 원 주민들이 살 때는 그저 척박한 모래땅이었던 곳이 별안간 석유가 펑펑 쏟아지는 황금의 땅으로 둔갑했다. 그 무렵 오데사 주민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석유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 과 전혀 혜택을 보지 못한 지지리도 복이 없는 사람들. 석유 부자들은 박복한 가난뱅이들을 절대 깔보지 않았다. 하느님이 석유를 통해 전 텍사스인에게 주신 개인 전용 비행기와 캐딜락, 풀장, 수백 명씩 초대되는 샴페인 파티의 행운을 받지 못한 그들이 그저 안타깝고 안 됐을 뿐이었다. 어린 조세핀 친스키는 자기가 박복한 가난뱅이에 속한다는 걸 알지 못했다. 여섯 살의 조세핀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검은 머리, 그윽한 갈색 눈, 갸름한 얼굴을 지닌 아름다운 소녀였다. 재봉 솜씨가 뛰어난 조세핀의 엄마는 동네 귀부인들 옷을 도맡아서 지었다. 화사하고 하늘하늘한 옷감이 조세핀 네 엄마의 손을 거치면 눈부신 이브닝 드레 스로 둔갑하는 것이었다. 친스키 부인은 일감을 맡으러갈 때 늘 어린 조세핀을 달고 다녔고 석유 부자들은 가난뱅이의 딸을 자기 아이들 틈에서 놀게 하는 걸 무척 관대하고 민주적인 처사로 여기며 스스로 흡족해 했다. 조세핀은 폴란드인 의 자손이었지만 전혀 폴란드 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석유 부자들은 가 난뱅이 딸답지 않게 귀티가 흐르는 조세핀을 - 근본적으로 자기네 일원이 되게 해주지는 못할지언정 - 늘 융숭하게 대접해 주었다. 조세핀은 부잣집 아이들과 어울려 놀며 그 친구들의 자전거, 조랑말, 몇 백 달러짜리 고급 인형들을 갖고 놀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이중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낡아빠진 가구, 옥외수도, 아귀가 맞지 않아 삐그덕거리는 문으로 대표되는 초라한 판자집에서 의 궁상맞은 생활과 탁 트인 전원에 위치한 아름다운 식민지풍 저택에서의 호사 스런 생활. 시시 토핑이나 린디 퍼거슨 같은 석유 부자 친구 집에서 자게 되면 널찍한 손님용 침실을 혼자 차지했고 아침에 일어나면 하녀나 집사가 공손히 식 사를 들고 대령했다. 조세핀은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몰래 아래층으로 내려가 집안의 아름다운 물건들을 둘러보는 걸 좋아했다. 멋진 그림들, 집안의 머리글 자가 굵직굵직하게 새겨진 은식기들, 세월의 자취로 더욱 빛이 나는 골동품들. 조세핀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만져 보고 쓸어 보며 언젠가는 나도 이런 근사한 집에서 이런 아름다운 것들에 둘러싸여 살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렇듯 두 세계를 넘나들면서도 조세핀은 늘 외로웠다. 집에서는 집대로 엄마 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었고 부잣집 친구들 역시 마음의 위안을 주지 못 했다. 이제 엄마는 완전히 광신자가 되어 고통을 달게 받아들이다 못해 어린 딸 의 두통을 환영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부자 친구들에게 그런 고민을 내색할 수도 없었다. 언제나 밝고 천진하기만한 부자애들은 조세핀 역시 그러하기 바랐 으니까. 그리하여 조세핀은 모든 두려움을 속으로만 삭여야 했다. 조세핀이 일곱 번째 생일을 맞았을 무렵이었다. 브루베이커 백화점이 오데사 에서 제일 예쁜 어린이를 뽑는 사진 선발 대회를 열었다. 우승자에겐 본인 이름 이 새겨진 황금컵을 수여한다는 것이었다. 조세핀은 하루도 빠짐없이 백화점에 찾아가 진열장에 전시된 그 황금컵을 들여다보았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토록 탐 나는 물건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출품 사진은 반드시 백화점 내의 사진관에서 찍어야 한다는 조건이어서 엄마를 졸랐다. 엄마는 선발 대회에 나가는 걸 허락 치 않았다. "허영은 악마의 거울이다." 그것이 엄마의 단호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 는 법, 조세핀을 귀여워하던 어느 석유 부자 귀부인이 사진비를 대신 내주었다. 그 순간부터 조세핀에겐 황금컵이 자기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 아름다운 황금컵 이 자기 방 옷장 위에 곱게 놓여 있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매일매일 정성껏 닦아야지. 윤이 반짝반짝 나도록 말야." 드디어 결선에까지 오르자 조세핀은 너 무 흥분한 나머지 학교에도 못 갔다.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종일 침대에서 뒹굴 며 벅찬 행복에 울렁거리는 가슴을 달랬다. 저 우승컵은 조세핀이 난생 처음으 로 갖게 될 아름다운 물건이 될 터였다. 이튿날, 조세핀은 석유 부잣집 딸 티나 허드슨이 우승컵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티나는 조세핀 발꿈치에도 못 미치는 얼굴이었지만 아버지가 그 백화점 사장이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격렬한 두통이 찾아왔다. 그 까무러칠 듯한 고통 속에서 조세핀은 속으로 피를 토했다. 아름다운 황금컵을 탐낸 벌로 하느님이 무시무시 한 두통을 주는가 보았다. 그날 밤, 조세핀은 엄마가 들을까 무서워 베개에 얼 굴을 묻고 서럽게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티나 네 집에서 주말 초대를 해왔다. 가서보니 문제의 황금컵이 티나 방 벽난로 선반 위에 자랑스럽게 놓여 있었다. 조세핀은 오래도 록 그 컵을 바라보았다. 이튿날 조세핀은 가방 속에 몰래 황금컵을 숨겨 왔다. 티나 네 엄마가 들이닥 쳤을 때까지 그 컵은 가방 안에 고이 숨겨져 있었다. 엄마는 가느다란 초록 나뭇가지를 꺾어 와 종아리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러 나 조세핀은 엄마가 야속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황금컵을 단 몇 분 동안이나마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기쁨만으로도 회초리의 아픔쯤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운명의 땅, 할리우드 1946년 캘리포니아 할리우드, 세계적인 영화 도시인 이곳은 재주꾼, 야심가, 미인, 괴짜들을 끌어당기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야자수와 리타 헤이워드의 땅, 보편 정신의 성전, 하루 아침에 스타를 만들어내는 스타 제조장, 도박판, 매춘굴, 평범한 오렌지밭, 성지... 이렇듯 수백 개의 얼굴을 지닌 할리우드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광경으로 펼쳐지는 신비의 만화경이었다. 토비 템플에게 할리우드는 인생의 귀착지요, 운명의 땅이었다. 달랑 현금 삼 백달러를 들고 군용백을 어깨에 둘러메고 이 현란한 도시에 들어선 운명의 사나 이는 우선 커휴인거 가의 허름한 하숙집에 여장을 풀었다. 그나마 몇 푼 되지 않는 돈이 거덜나기 전에 재빨리 행동을 개시해야 했다. 토비는 할리우드의 생 리를 잘 알았다. 이곳은 허세를 부려야 통하는 도시였다. 그래서 처음으로 한 일이 "바인 스트리트"에 있는 신사 의류점에 들어가 근사한 의상을 한 벌 맞춘 것이었다. 그리고 나니 주머니에 남는 건 고작 이십 달러. 하지만 우리의 토비 는 당당하게 "할리우드 브라운 더비"로 들어섰다. 스타들이 즐겨 찾는 고급 레 스토랑이었다. 그 명성에 걸맞게 벽마다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들 캐리커처가 붙 어 있었다. 이곳에 들어서니 비로소 연예계의 힘찬 맥박이 느껴졌다. 레스토랑 여주인이 다가왔다. 아직 서른 고개를 넘지 않은 육감적인 몸매의 빨강 머리 미 녀였다. 미모의 여주인이 근사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뭘 도와드릴까요?" 토비는 끓어오르는 욕정을 이기지 못해 여자의 잘 익은 멜론 같은 유방을 움 켜잡았다. 여자가 얼굴이 사색이 되어 비명을 내재려는 찰나, 약삭빠른 토비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사죄의 말을 읊조렸다. "실례했습니다, 아가씨. 저는 앞을 못 보는 사람입니다." "아, 그러셨군요. 죄송해요." 여주인은 금세 동정 어린 얼굴이 되어 자기가 오해한 걸 사과했다. 그리곤 토 비의 팔을 잡고 테이블로 안내해서 앉히고 주문을 받아 갔다. 나중에 벽에 걸린 사진들을 들여다보다가 그녀에게 들키자 토비는 활짝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기적이예요! 눈이 보인다구요!" 그 구김살없는 익살에 여주인은 그냥 웃고 말았다. 토비는 저녁내내, 그리고 밤에 함께 잠자리에 들어서까지 저 마음 착한 여주인을 입이 아프도록 웃겨 주 었다. 토비는 할리우드를 떠들며 연예계에 가까이할 수 있는 일자리만 골라잡았다. 그중 하나가 스타들이 자주 드나드는 업소의 주차원 노릇이었다. 그는 유명인을 태운 차가 나타나면 득달같이 달려가 문을 열어 주며 환한 미소와 재치 있는 농 담을 던지곤 했다. 하지만 상대는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다. 하기야 스타가 무 엇이 답답해서 비천한 일개 주차원을 상대하랴. 토비는 아리따운 미녀들이 몸에 착 달라붙은 화려한 옷을 입고 차에서 내리는 걸 보며 속으로 중얼거리곤 했 다,. "이봐, 아가씨. 나중에 내가 대스타가 되면 저런 조무래기들은 다 팽개치고 죽자 살자 내 꽁무니만 따라다니겠지." 한동안 열심히 연예계의 대리인들을 찾아다니던 토비는 그게 순전히 시간 낭 비임을 깨닫게 되었다. 할리우드의 대리인들은 하나같이 스타에만 걸신이 들려 무명인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요는 일단 이름부터 날리는 거였다. 그러면 대리인은 자연히 붙게 되어 있었다. 당시 제일 잘 나가는 대리인은 클리프톤 로 렌스라는 자였는데 소문을 듣자 하니 거물급 스타들만 상대한다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저 거만한 클리프톤 로렌스를 내 대리인으로 두리라." 토비는 연예계의 성경으로 통하는 "데일리 버라이어티"와 "할리우드 리포터" 지를 정기 구독했다. 그러고 나니 자기도 연예계에 속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 다. 그 두 신문을 하도 열심히 읽어 연예계 소식에는 정통했다. 21세기 폭스 - "포레버 엠버"를 사들여 영화화. 감독은 오토 프레밍거. 애바 가드너 - 조지 래프트, 조르주 커트라이트와 함께 "휘슬 스탑"에 출연 예정. 워너 브라더즈 - "아버지와의 삶"을 사들여 영화화. 어느 날 토비는 눈이 번쩍 띄는 기사를 접했다. 영화 제작자 샘 윈터즈 - "팬 - 퍼시픽 스튜디오" 제작 담당 부사장에 임명. @ff 재능만 있다면 샘 윈터즈는 제대하고 바로 "팬 - 퍼시픽 스튜디오"에 복직했다. 그 여섯 달 뒤 전격적인 인사 교체가 있었는데 스튜디오 책임자가 해임되면서 샘이 - 새 사 람을 구할 때까지만 임시로 - 그 자리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 동안 실력을 인정받아 새 사람을 찾는 일은 중단되고 공식적으로 제작 담당 부사장에 임명되 었다. 스튜디오의 제작 관리란 것이 사실 멀쩡한 사람 노이로제, 위궤양 환자 만들기 십상인 고된 직업이었지만 샘은 그 일이 세상에서 제일 좋았다. 할리우드는 난폭한 미치광이 배우들이 우글거리는 스리 - 링 서커스 "세 군데 연기장에서 동시에 쇼를 할 수 있는 서커스"요, 얼간이들이 떼로 몰려들어 저 죽는 줄 모르고 딩가딩가 춤판을 벌이고 있는 지뢰밭이었다. 배우, 감독, 제작 자들은 너나없이 저만 아는 과대 망상증 환자에, 생전 누구한테 고마워할 줄도 모르는 사악하고 또 파괴적인 인간들이었다. 거러나 샘은 재능만을 보았다. 재 능만 있으면 아무리 개망나니라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재능이야말로 요술 열쇠 니까. 샘의 비서 루실 엘킨즈가 새로 개봉한 우편물들을 들고 들어왔다. 루실은 윗 분이 몇 사람씩 갈려 나가도 끄떡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유능한 전문 비서였 다. "클리프톤 로렌스 씨가 찾아왔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요." 샘은 로렌스를 좋아했다. 그에겐 품격이 있으니까. 언젠가 프레드 앨런이 이 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할리우드의 진실을 몽땅 합쳐 봐야 모기 배꼽만큼도 못하지. 거기 캐러웨이 열매 네 알과 대리인 심장 하나를 더 보태면 얼추 비슷해질까, 원..." 클리프톤 로렌스는 그래도 진실된 사나이였다. 그는 할리우드 연예계에서 가 히 전설적인 인물로 이 계통에서 이름께나 날리는 스타들을 거의 다 고객으로 확보하고 있었다. 로렌스는 개인 사무실을 차려 놓고 런던으로, 스위스로, 로마 로, 뉴욕으로 부지런히 쫓아다니며 고객들을 뒷바라지했다. 할리우드의 거물급 인사들은 모조리 친해 두었고, 할리우드 3대 스튜디오 제작 이사들이 매주 한 번씩 모여 벌이는 카드 게임에도 단골로 끼였다. 2년에 한 번꼴로 요트를 전세 내어 아름다운 모델들과 스튜디오 중역들을 함께 초청해 일주일간 "낚시 여행" 을 떠나는가 하면 말리부 해안에 완벽한 시설을 갖춘 별장을 사서 친구들이 마 음 내키면 언제라도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건 할리우드와 로렌스의 공생관 계 같은 거였고 모두들 그 혜택을 톡톡히 보았다. 문이 열리면서 고급 맞춤 양복으로 품위 있게 단정한 로렌스가 급히 걸어 들 어왔다. 그는 샘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공들여 다듬은 손을 내밀었다. "지나가는 길에 인사나 하고 가려고 잠깐 들렀지. 그래, 좀 어떤가?" "하루하루를 배에 비유한다면 오늘은 '타이태닉 호'라고나 할까요." 클리프톤 로렌스는 쯧쯧 혀를 찼다. "어젯밤 시사회에 대한 평을 좀 해주시죠." 샘이 부탁했다. "초반 20분 정도를 다시 손질하고 마지막 부분만 재촬영하면 대히트는 따놓은 당상이겠던걸." 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정곡을 찌르셨어요. 지금 바로 그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한테 팔 고객은 없습니까?" 로렌스는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미안하이. 내 고객들은 전부 일에 매여 있어." 사실이었다. 클리프톤 로렌스가 보유하고 있는 스타들과 감독들, 제작자들은 늘상 바쁘고 인기가 있었다. "그럼, 금요일 만찬 때 보세, 샘." 클리프톤은 작별 인사를 던지고 총총히 사라졌다. 인터콤에서 루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댈러스 버크 씨가 오셨습니다." "들여보내요." "그리고 멜 포스 씨가 좀 뵙자고 합니다. 급한 일이라고요." 멜 포스는 "팬 - 퍼시픽 스튜디오" 텔레비전 담당 책임자였다,. 샘은 책상에 놓인 달력에 눈길을 주며 말했다. "그럼 내일 아침 식사나 같이 하자고 전해요. 여덟시, "폴로 라운지"에서." 잠시 후, 루실은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윈터즈 부사장님 방입니다." 안녕하시오. 높은 분 지금 자리에 계신가요?"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실례지만, 전화 거신 분은 누구시죠?" "옛 친구 토비 템플이라고 전하시오. 군대에서 함께 있었소. 할리우드에 올 일이 있으면 꼭 찾아오라고 해서 이렇게 연락한 겁니다." "템플 씨, 부사장님은 지금 회의중입니다. 전화드리도록 할까요?" "좋습니다." 토비는 자기 연락처를 불러 주었다. 그러나 루실은 그 쪽지를 쓰레기통에 던 져 버렸다. 군대 친구라며 귀찮게 들러붙는 빈대들을 한 두 번 겪은 게 아니니 까. 댈러스 버크는 미국 영화계의 선구자격인 감독으로 영화 제작 강좌를 둔 대학 들은 모두 버크의 작품들을 교재로 썼다. 그의 초기 작품 대여섯 편은 "영화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었고 그가 만든 영화치고 눈부시고 혁신적이지 않은 작품 이 없었다. 이제 일흔하고도 막바지에 다다른 노장 버크는 기골이 장대하던 몸 집이 형편없이 쪼그라들어 옷을 입었다는 표현보다는 칭칭 감고 있다고 해야 더 어울릴 성싶었다. "어유, 이거 잘 오셨습니다." 샘은 노감독을 정중히 반겼다. "만나서 반갑네. 자네도 내 대리인 알지." 댈러스가 함께 온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요. 안녕하시오, 피터." 모두들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저에게 주실 아이디어가 있으시다구요?" 샘이 댈러스 버크에게 물었다. "아주 근사한 거지." 노감독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렸다. "이거 빨리 듣고 싶은데요. 말씀하세요." 댈러스 버크는 상체를 앞으로 쑥 빼고 얘기를 시작했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관심 갖는 게 뭘까? 사랑, 맞지? 내가 이야기하려는 사 랑은 사랑 중에서도 가장 성스러운 사랑이지.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자기 이야기에 취한 노감독의 목소리가 점점 고조되어 갔다. "배경은 롱아일랜드. 부잣집 비서로 일하는 열아홉 살짜리 아가씨를 주인공으 로 등장시키는 거야. 돈이 좀 들 거야. 세트장을 호화판으로 설치해야 하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상류층을 배경으로 한다 이거야. 이 집 주인 남자는 정통 귀족과 결혼해서 살고 있는 몸이지. 하지만 비서를 사랑하고 있어. 비서도 나이 많은 주인을 사랑하지." 샘은 이것이 "뒷골목"류일까 아니면 "사는 흉내"류일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게 뭐든 상관은 없었다. 무조건 노감독의 아이디어를 사줄 생각이니까. 댈러스 버크는 거의 이십 년 동안 일거리를 잡지 못했다. 그의 마지막 세 작품 이 비싸기만 우라지게 비싸고 순 구식에 흥행에도 대실패였던 것이다. 그렇게 그의 감독 인생은 영원히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시퍼렇게 살아 있는 몸이고 계속 일을 해야만 했다. 저축이 전혀 없으니까. "영화인 구호 시설"에서 방을 하나 줄 테니 들어오라고 했지만 노감독은 불같이 역정을 내며 그 자리에 서 거절했다. "너희 놈들의 동정은 필요없어!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못된 수작이야 수작 이. 나는 영화계의 거인이다, 이 피라미 새끼들아!" 옳은 말이었다. 그는 영화계의 전설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전설적인 존재도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아야 하니까. 샘은 제작자가 되자마자 대리인 한 사람을 시켜 댈러스 버크의 아이디어를 사 겠다고 전하도록 했다. 그때부터 매년 댈러스 버크는 도저히 써먹을 수 없는 스 토리를 들고 왔고 샘은 노인에게 1년을 거뜬히 생활하고도 남을 거액을 아이디 어료를 지불했다. 제작자 일을 팽개치고 전쟁에 뛰어들면서도 노감독에 대한 배 려가 계속되도록 조처를 취해 놓고 떠났다. "... 자, 그래서 그 아기는 자기 어머니가 누군지도 모른 채 자라나게 되는 거지. 어머니는 몰래 숨어서 딸을 지켜보며 살고. 아름다운 숙녀로 자라난 딸은 돈 많은 의사와 결혼하게 되지. 이 결혼식 장면을 아주 성대하게 처리해야 한다 구. 그런데 이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겠나, 샘? 들어보라구. 기가 막히니 까. 사람들이 어머니를 결혼식장에 못 들어오게 하는 거야! 그래서 어머니는 할 수 없이 뒷문으로 몰래 숨어 들어가 딸이 결혼하는 모습을 보게 되지. 이 장면 에 이르면 영화관이 울음바다가 될 걸세. 자 이런 얘기네. 어떤가?" '뒷골목'류도 '사는 흉내'류도 아닌 '스텔라 댈러스'류였다. 샘은 대리인을 흘낏 쳐다보았다. 대리인은 몸둘 바를 몰라 구두 코에 시선을 박고 있었다. "근사해요. 우리 스튜디오가 찾고 있던 바로 그겁니다." 샘은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늘어놓고는 대리인을 향해 말했다. "피터, 업무부에 전화해서 계약을 추진하시오. 내 미리 얘기해 놓겠소,." 대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아이디어료는 비싸게 쳐줘야 해. 안 그러면 "워너 브라더즈"에 넘길 테 니까. 다 자네 얼굴 봐서 이렇게 먼저 기회를 주는 거라구." 노감독이 큰소리를 쳤다. "그럼요, 감사합니다." 샘은 두 사내를 내보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에겐 이런 감상적인 일 에 회사돈을 낭비할 권리가 없었다. 그러나 영화 산업은 댈러스 버크 같은 노장 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들의 열정과 노고가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영화 산업 은 아예 존재하지도 못했을 테니까. 이튿날 오전 여덟시, 샘 위터즈는 '베벌리 힐즈 호텔'의 주랑식 포치에 차를 댔다. '폴로 라운지'에 들어서니 여기저기서 낯익은 얼굴들이 알은체를 했다. ' 폴로 라운지'는 할리우드 연예계 종사자들의 아지트로, 여기서 식사나 칵테일을 즐기며 이루어지는 계약이 사무실에서 정식으로 맺어지는 계약들보다 훨씬 많았 다. 멜포스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샘." 샘은 악수를 하고 포스 맞은편에 앉았다. 지금으로부터 8개월 전, 샘은 포스 를 "팬 - 퍼시픽 스튜디오" 텔레비전 담당 책임자로 채용했다. 연예계의 신생아 같은 존재인 텔레비전은 바야흐로 무서운 성장을 거듭하고 있어 일찍이 텔레비 전을 경시하던 스튜디오들도 이제 허겁지겁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웨이트리스가 주문을 받아가자 샘이 물었다. "그래, 좋은 소식이 뭐죠, 멜?" 멜 포스는 고개를 저었다. "좋은 소식은 없습니다. 문제가 생겼어요." 샘은 잠자코 설명을 기다렸다. "아무래도 '특공대'를 도중하차시켜야겠어요." 샘은 깜짝 놀라 따졌다. "아니, 시청률이 그렇게 높은 프로를 왜 포기합니까? 그만한 인기 프로를 만 들어내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문제는 프로 자체가 아니라 잭 놀란이에요." 잭 놀란은 '특공대'의 주인공으로 하루아침에 스타덤에 오른 인물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샘은 단도직입적으로 얘기를 꺼내지 않고 늘 상대를 감질나게 만드는 맬 포스 가 갑자기 짜증스러웠다. "금주 '피크'지 보셨어요?" "난 그 잡지 안 봐요. 순 쓰레기니까." 이제야 멜 포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갔다. "그 잡지에서 잭 놀란을 깠구만!" "꼼짝없이 걸려들었어요. 그 머저리 새끼가 어여쁜 레이스 드레스를 걸치고 파티에 나타났다지 뭡니까. 그 모습이 찍혀서 잡지에 났어요." "얼마나 심각하오?" "최악이에요. 어제 방송국에서 전화가 열두 통도 넘게 걸려 왔어요. 광고주들 도 방송국측도 다 빠지겠대요. 자기가 동성 연애자란 걸 내놓고 떠들고 다니는 팔푼이랑 누가 일하고 싶겠어요." "동성 연애자는 아니오. 그냥 변태 성욕자일 뿐이지." 샘은 다음달 뉴욕에서 열릴 중역 회의에서 텔레비전의 성공을 강력하게 주장 할 생각으로 있었다. 그런데 포스가 전한 소식이 그걸 물거품으로 만든 것이다. '특공대'의 실패는 막대한 타격이니까. 빨리 손을 써야만 한다. 샘이 사무실에 돌아오자 루실이 메모 한 뭉치를 흔들며 말했다. "급한 순서대로 위로 올려놓았어요." "그건 나중에 보고 우선 IBC '국제 방송사' 윌리엄 헌트 좀 연결시켜 줘요." 2분 뒤, 샘은 IBC 사장과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윌리엄 헌트는 유능한 기 업 변호사로 시작해서 IBC 방송국 사장 자리까지 올라간 인물이었다. 샘은 텔레 비전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기에 헌트와는 업무상 접촉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그저 안면 정도만 익히고 있는 사이였지만 개인적으로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 다. 그런데 막상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진작 헌트를 잘 사귀어 놓지 못 한게 후회스러웠다. 이윽고 헌트가 연결되자 샘은 애써 느긋하고 태평한 목소리 를 냈다. "안녕하시오, 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오랜만이오, 샘." "너무 오랜만이죠. 빌, 우리 직업의 문제가 바로 그거 아닙니까. 너무 바빠서 자기 좋아하는 사람 만날 짬이 통 없는 거." "동감입니다." 샘은 문득 생각난 듯 얘기를 꺼냈다. "그건 그렇고, '피크'에 실린 그 엉터리 기사 보셨어요?" "물론 봤어요. 샘, 당신도 이미 아는 사실 아닌가요? 그래서 그 프로를 취소 시키려는 겁니다." 헌트의 목소리는 조용하면서도 단호했다. "빌, 잭 놀란이 함정에 빠진 거라면 어쩌겠소?" 전화선을 통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단한 상상력이시군요. 왜 작가가 되지 그러셨소?" "진담입니다. 내가 잭 놀란을 잘 알아요. 그 친구는 동성 연애자가 아닙니다. 그 사진은 가장 무도회에서 찍은 거예요. 여자 친구 생일 파티에 사람들을 재미 있게 해주려고 그렇게 꾸미고 나간 겁니다." 샘의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히 젖어 왔다. "난 도저히..." "내가 잭을 얼마나 신임하고 있는지 말씀드리지. 우리 스튜디오에서 내년에 제작하기로 되어 있는 대형 서부물 "라리도"에 주인공으로 전격 캐스팅했어요."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서 헌트가 제법 누그러진 목소리고 물었다. "샘, 그거 정말이죠?" "그럼요. 자그만치 3백만 달러의 예산이 잡힌 영화예요. 그런데 지금 잭 놀란 이 동성 연애자로 몰리면 우린 타격이 커요. 극장주들도 모두 고개를 돌려 버릴 겁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시오. 잭 놀란을 신임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도박 을 할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이제 빌 헌트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자자, 빌, '피크' 같은 저질 잡지를 믿고 재능 있는 배우를 매장 시킬 생각 은 없겠지요? 그 프로 좋잖아요, 안 그래요?" "아주 좋아하죠. 프로 자체는 기막히게 좋아요. 하지만 광고주들이..." "방송국은 당신 거예요. IBC에 광고를 내려는 광고주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잖습니까. 우리 스튜디오에선 히트 프로를 공급했어요. 그러니 괜히 다된 죽 에 코 빠뜨리지 맙시다." "글쎄..." "멜 포스가 다음 시즌 '특공대' 제작 기획 얘기 않던가요?" "아니..." "아마 깜짝 놀래 드리려고 그러는가 봅니다. 일단 우리 기획을 들어보시고 결 정은 그 다음에 내리세요! 화려한 특별 출연진에, 인기 대본 작가들에, 로케이 션에... 한마디로 걸작이에요.! '특공대'가 시청률 1위로 뛰어오르는 건 시간 문젭니다." 잠시 주저하는가 싶더니 빌 헌트가 말했다. "멜한테 전화 좀 해 달라고 하시오. 우리가 너무 과민 반응을 보였던 것 같군 요." "예, 그러지요." "샘, 내 입장을 이해하시죠. 난 누구한테든 해코지할 의도는 전혀 없는 사람 입니다." "아무렴요. 빌, 염려 말아요. 당신의 인품을 내가 잘 아는데 오해같은 걸 하 겠습니까? 이렇게 당신을 붙들고 사정하는 것도 다 당신 인품을 믿기 때문 아닙 니까. 진심은 통하게 마련이니까요." "고맙습니다." "다음주에 점심이나 같이 하는 게 어떻겠어요.? "좋죠. 내가 월요일에 전화하죠." 수화기를 내려놓은 샘은 진이 다 빠져서 멍청히 앉아 있었다. 잭 놀란은 사실 변태였다. 그러니 진작에 걸려들었어야 마땅할 일이었다. 이렇듯 샘의 미래는 온통 미치광이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사실 스튜디오 운영은 휘몰아치는 눈보라 를 뚫고 나이애가라 폭포 위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멀쩡한 정신으로는 이 짓 못 해먹지." 샘은 혼자 한탄했다. 그리곤 수화기를 돌고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곧 멜 포스와 연결되었다. " '특공대'는 계속합니다." "뭐라구요?" 포스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였다. "그렇게 됐소. 빨리 잭 놀란을 만나시오. 다시 한 번 그런 머저리 짓 하면 이 번엔 내가 직접 나서서 동성 연애자촌으로 쫓아 버리겠다고 전해요. 괜히 해보 는 말 아니오. 그렇게 남자가 그리우면 바나나나 갖고 놀라고 그래요." 그리곤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참, 아까 빌 헌트에게 약속한 새로운 제 작 기획에 대해 포스에게 귀뜀해 주는 걸 깜빡 잊었다. 게다가 '라리도'인지 뭔 지 하는 서부영화도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때 루실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지금 곧 '10번 무대'로 가보셔야겠어요. 누가 불을 질렀어요." 액터즈 웨스트 토비 템플은 그 뒤로도 몇 차례 더 샘 위터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중간에 떡 버티고 선 여비서가 영 말을 들어먹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포기하고는 일자리 를 찾아 나이트클럽과 스튜디오를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도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이듬해가 되자 밥벌이를 위해 아무 직업이나 잡아야 했다. 부동산 소개 업소에도 다녀보고, 보험 판매도 하고, 신사의류점 점원 노릇도 했다. 그리고 중간 중간 바나 싸구려 나이트클럽 무대에 섰다. 하지만 스튜디오를 뚫고 들어 갈 길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 식으로는 백 년을 뛰어도 안 돼. 그들이 자네를 찾아오게 하라구." 보다못한 친구 하나가 충고를 했다. "어떻게 말이지?" 토비가 냉소적으로 물었다. " '액터즈 웨스트'에 들어가." "연기 학교에?" "거긴 그냥 연기 학교가 아니야. 직접 공연도 한다니까.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마다 거기 졸업생들이 쫙 깔렸다구." '액터즈 웨스트'에선 프로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토비는 그곳에 첫걸음을 들 여놓는 순간, 그걸 느낄 수 있었다. 벽에 졸업생 사진들이 즐비하게 붙어 있었 는데 제법 잘 나가는 배우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금발의 접수계원이 물었다. "뭘 도와드릴까요?" "저는 토비 템플이라는 사람입니다. 등록을 하려구요." "연기 경험이 있으세요?" "그건 저, 아니오. 하지만..." 접수계원이 고개를 저었다. "미안합니다, 태너 여사님은 연기 경력이 없는 사람은 받지 않으세요." 토비는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농담하는 겁니까?" "아니에요. 그게 우리 규칙이에요. 여사님께서는..."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정말 내가 누군지 못 알아보겠냐는 거예요." 금발은 유심히 쳐다보며 대꾸했다. "네." 토비는 살며시 한숨을 내뿜었다. "세상, 참. 리랜드 헤이워드 말이 맞구먼. 할리우드에선 영국에서 활동하는 연예인들을 도통 모른다는 말이 사실이었어." 그리곤 미소를 머금으며 사과조로 말했다. "농담입니다. 난 아가씨가 나를 알 줄 알았거든요." 접수계원은 어리둥절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럼 전문적으로 활동한 경험이 있으신가요?" 토비가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요." 마침내 금발 접수계원은 등록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어디서, 어떤 연기를 하셨조?" "여기선 활동한 적이 없소만 지난 2년간 영국의 레퍼토리 극장 "전속 극단을 가지고 레퍼토리에 따라 공연하는 극장"에 섰지요." 금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우선 태너 여사님께 말씀드려 보죠." 안으로 들어간 금발은 몇 분 지나지 않아 금방 나왔다. "여사님께서 뵙겠답니다. 행운을 빌어요." 토비는 상냥한 접수계원에게 윙크를 하고는 심호흡을 길게 하며 태너 여사의 방으로 들어갔다. 앨리스 태너는 아름답고 귀족적인 얼굴을 가진 검은 머리 여인으로 나이는 토 비보다 10년쯤 위인 서른 중반으로 보였다. 책상에 앉아 있어 상체만 보이는데 도 몸매가 근사한 게 한눈에 느껴졌다. "아주 근사한 곳이야, 음." 토비는 흡족해 하면서 애교 있게 미소를 지었다. "저는 토비 템플입니다." 앨리스 태너가 일어나서 걸어왔다. 왼쪽 다리에 육중한 금속 브레이스를 대고 있었다. 토비는 오랜 세월 단련된 듯 익숙하게 절룩거리는 걸음걸리를 보고 단 박에 그녀가 소아마비임을 눈치챘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알은체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래, 우리 학교에 등록하고 싶다고요?" "아주 간절히요." "그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토비는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이유는 말입니다, 태너 여사님, 위낙 "액터즈 웨스트"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고 가는 곳마다 "액터즈 웨스트"의 무대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기 때문입니 다. 이 학교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여사님 자신도 잘 모르실 겁니다." 앨리스, 태너는 토비를 찬찬히 뜯어보며 입을 열었다. "나도 알고 있어요. 바로 그래서 엉터리들은 학교 문전에 얼씬도 못하게 하는 거죠." 토비는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으나 애써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러시겠죠. 여기 들어오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태너는 손에 든 등록 서류를 흘낏 보았다. "토비 템플." "아마 제 이름을 못 들어보셨을 겁니다. 왜냐면 제가 지난 몇 년 동안..." "영국에서 레퍼토리 공연을 했다 이거죠?" "그렇습니다." 앨리스 태너는 똑바로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템플 씨, 미국인은 영국 레퍼토리 극장에서 공연할 수 없어요. '영국 배우 조합'에서 금하고 있으니까요." 토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기 오기 전에 그 사실을 확인하셨다면 우리 둘 다 이런 난처한 상황은 피 할 수 있었을텐데, 정말 유감이에요. 죄송하지만 우리는 전문 탤런트만 뽑습니 다." 그녀는 자리로 돌아가려고 발걸음을 옮겼다. 면접은 끝난 것이다. "잠깐만요!" 토비는 허공을 가르는 채찍소리처럼 날카로운 외마디를 내질렀다. 태너가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그 순간 토비는 눈앞이 캄캄하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미래가 이 순간에 달려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지 금 눈앞에 서 있는 여자는 그가 원하는 모든 것, 그가 목숨 걸고 염원해 온 모 든 것을 얻기 위한 디딤돌이었다. 여기서 그냥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규칙적으로 재능을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좋아요, 저는 아직 무대 경험이 없습니다. 왠지 알아요? 당신 같은 사람들이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 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건 W.C. 필즈의 목소리였다. 앨리스 태너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토비는 그럴 짬을 주지 않았 다. 그는 지미 캐그니가 되어 저 가엾은 청년에게 기회를 한 번 주어 보라고 말 하고 있었다. 제임스 스튜어트의 목소리가 거들고 나섰고 클라크 게이블이 저 청년과 함께 일해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라고 했다. 그러자 캐리 그랜트의 목소 리가 저 청년 아주 재능이 있어 보인다고 했다. 갑자기 할리우드의 스타들이 떼 거리로 몰려들어 평소에 토비 템플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우스개를 마구 지껄 여대는 것이었다. 자포자기의 광란 상태에서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온 말들 이었다. 토비는 영원한 무명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며 말이라는 생명줄에 결사 적으로 매달려 있었다. 그 수렁에서 헤어날 길은 말밖에 없었다. 그는 땀에 흠 뻑 젖은 채 겅중겅중 뛰어다니며 미친 듯이 스타들 흉내를 냈다. 완전히 정신이 나가서 자기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만! 그만!" 이윽고 앨리스 테너가 외쳤다. 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 다. "그만 하라구요!" 숨이 턱 끝까지 차서 간신히 외치는 소리였다. 토비는 서서히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태너 여사가 손수건을 꺼내더니 눈물을 닦았다. "당신, 당신은 미쳤어요. 알아요?" 토비는 태너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결국 해내고 말았다는 벅찬 기쁨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맘에 드시죠, 예?" 앨리스 태너는 고개를 저으며 심호흡을 한 뒤 대꾸했다. "별로예요." 토비의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저 여자가 웃은 건 내 꼴이 우스 워서였구나. 내 코미디가 재이있어서 웃은 게 아니었어. 공연히 실없는 꼴만 보 이고 말았어. "그럼 뭐가 그렇게 우스워서 배를 잡고 웃은 겁니까?" 토비가 따지고 들었다. 앨리스 태너가 미소 지으며 조용히 대꾸했다. "당신이오. 이런 열광적인 공연은 처음이에요. 스타들도 모두 한 때는 그저 재능 있는 젊은이일 뿐이었어요. 당신은 다른 사람 흉내 낼 필요가 없어요. 천 성적으로 재능을 타고 난 사람이니까." 토비는 조금씩 화가 풀리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거예요. 해보겠어 요?" 토비는 행복에 겨워 씨익 웃어 보이며 말했다. "자, 이제부터 소매를 걷어붙이고 뛰어 봅시다." 토요일 오전이면 조세핀은 엄마를 도와 열심히 집안 청소를 했다. 그러다 정 오쯤 되면 시시와 몇몇 친구들이 소풍을 가자고 데리러 왔다. 친스키 부인은 조세핀이 석유 부자 아이들 틈에 끼여 긴 리무진을 타고 떠나 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아무래도 저러다 우리 조세핀한테 끔찍한 일이 생기고 말겠어. 부잣집 애들 과 저렇게 마냥 어울리도록 놔둘 수는 없어. 저애들은 모두 악마의 자식들이니 까." 그러자 조세핀에게 벌써 악마가 붙어 버린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일었다. "데미안 목사님께 의논을 해봐야겠어. 그분은 방법을 아실 거야." 스타 탄생 '액터즈 웨스트'는 기초반 '워크샵 그룹'과 상급반 '쇼케이스 그룹'으로 나뉘 어졌다. 물론 '쇼케이스 그룹'만 스튜디오의 스카우트 담당자들이 지켜 보는 앞 에서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토비는 일단 '워크샵 그룹'에 들어갔다. 앨리스 테너 말로는 거기서 육개월 내지 일년 정도 실력을 쌓아야 '쇼케이스 그룹'으로 편입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연기 수업은 그런대로 재미있었지만 박수와 웃음을 보내는 관객이라는 마법의 요소가 빠져서인지 늘 가슴 한켠이 썰렁했다. '액터즈 웨스트'에 입학하여 여러 주가 지나도록 앨리스 태너 교정과 얼굴을 마주할 기회는 별반 없었다. 그녀가 어쩌나 한 번씩 기초반 수업을 시찰하러 올 때나 학교 안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경우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토비는 그 이상 의 관계를 원하고 있었다. 그는 요즘 앨리스 태너 생각을 할 때가 많았다. 토비 의 눈에 비친 태너는 세련된 귀부인이었고 그 점이 그의 마음을 끌었다. 왠지 자기에겐 그런 여자가 필요할 것 같았다. 처음엔 그녀가 소아마비라는 점이 좀 걸렸지만 차츰차츰 오히려 그걸 성적 매력으로 느끼게 되었다. 언젠가 토비는 앨리스 태너를 찾아가 비평가들과 스카우트 담당자들 앞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쇼케이스 그룹'에 넣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아직은 준비가 안 됐어요." 그때 앨리스 태너가 한 대답이었다. 그때부터 토비는 그녀가 자신의 출세를 가로막는 방해자로 여겨졌다. "어떻게든 손을 써봐야 되겠어." 그는 태너의 방을 물러 나오며 속으로 결심했었다. '쇼케이스 그룹'이 시범 공연을 하는 밤이었다.. 토비는 같은 반 여학생 카렌 과 객석 가운데 쯤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카렌은 성격 배우를 지망하는 땅딸보 였는데 함께 연기 연습을 하면서 토비가 발견해 낸 그녀의 두 가지 비밀은, 첫 째 속옷을 입고 다니지 않는다는 점, 둘째 입냄새가 고약하다는 점이었다. 카렌 은 토비를 침대로 끌어들이고 싶어 별별 유혹을 다 해왔으나 토비는 모르는 체 의연히 버티고 있었다. "우라질, 저런 여자랑 잠자리에 드느니 차라리 돼지기름이 펄펄 끓는 통 속에 들어앉는 게 낫지." 그렇게 나란히 앉아 막이 오르길 기다리고 있는데 카렌이 잔뜩 흥분해서는 ' 로스엔젤레스 타임스', '헤럴드 익스프레스'지 비평가들이며 '20세기 폭스', 'MGM', '워너 브라더즈' 스카우트 담당자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토비는 자 꾸만 분통이 터졌다. 저들이 오늘의 주인공들을 보러 여기 와 앉았는데 자기는 객석에서 마네킹처럼 앉아만 있으니... 그는 지금이라도 무대에 뛰어 올라가 멋 진 코미디로 저들을 사로잡고 싶은 욕구가 불끈불끈 솟는 걸 애써 자제해야 했 다. 다른 관객들은 재미있게 공연을 지켜 보고 있었지만 토비는 자신의 미래를 거 머쥔 스타우트 담당자들이 바로 지척에 앉아 있다는 흥분 때문에 좌불안석이었 다. "그래, 액터즈 웨스트가 저들을 끌어들이는 미끼라면 어떻게든 그걸 이용해야 한다. 얼간이처럼 죽치고 앉아 육 개월을 기다릴 수는 없다. 아니, 단 육 주도 못 기다려!" 이튿날 아침 토비는 다시 앨리스 태너의 방으로 찾아갔다. "어젯밤 공연 어땠어요?" 태너가 물었다. "멋지더군요. 전부 실력들이 대단하더라구요." 그렇게 대답한 토비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어젯밤에야 비로소 제가 아직 준비가 덜 됐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죠." "모두들 당신보다 경험이 훨씬 많은 사람들이죠. 그것뿐이에요. 당신에겐 남 다른 개성이 있어요. 언젠가는 꼭 성공할 거예요.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세요." 토비는 한숨을 푹 쉬며 대꾸했다. "모르겠어요. 다 때려치우고 일찌감치 보험 판매원 노릇이나 하는게 나을 것 같기도 하구." 앨리스는 흠칫 놀라는 것 같았다. "그러면 안 돼요." 그래도 토비는 도리질을 쳤다. "어젯밤에 프로들의 공연을 보고 나니까, 글쎄요. 도저히 자신이 안 생겨요." "토비, 당신은 해낼 수 있어요. 다신 그런 소리 입밖에 내지 말아요." 토비는 앨리스의 목소리에서 기대하던 걸 찾아냈다. 지금 그 음성은 선생이 제자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여인이 남정네에게 사랑으로 용기를 주는 것이었 다. 토비는 내심 만족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기운이 축 처져서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이젠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저는 이 도시에서 외토리입니다. 마음을 툭 터놓 고 얘기할 친구 하나 없어요." "토비, 나한테 얘기해요. 내가 당신 친구가 돼주겠어요." 그 잠긴 듯한 목소리에 짙은 갈망이 배어 있었다. 토비는 푸른 눈동자에 온 세상의 경이감을 고스란히 담아 여인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윽고 두 사람의 눈 길이 뒤엉키자 그는 얼른 사무실 문을 잠갔다. 그리곤 여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여인의 손가락이 토비의 머리칼을 쓰다듬었 다. 은근한 손길로 치마를 걷어올리니 잔혹한 금속 브레이스에 갇힌 가엾은 허 벅지가 드러났다. 그 브레이스를 조심스럽게 벗겨내고 빨갛게 부어 오른 자국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입으로는 쉴 새 없이 달콤한 사랑의 말들을 속삭이며 여 인의 팬티를 끌어내렸다. 그리곤 저 촉촉한 속살을 향해 입술을 움직여 갔다. 둘이는 폭신한 가죽 소파로 자리를 옮겨 사랑을 나누었다. 그날 저녁으로 토비는 앨리스 태너와 동거에 들어갔다. 그날 밤 잠자리에서 토비는 앨리스 태너가 사랑을 갈망하는 외롭고 가련한 여 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사업가였던 부친은 그녀에게 한몫 단단히 떼어 주고는 그 뒤로 신경을 딱 끊었다. 앨리스는 영화에 미쳐 배우가 되기를 꿈꾸었지만 대학 재학중에 느닷없이 소아마비에 걸리는 바 람에 그 꿈을 포기해야 했다. 그 뒤로는 인생이 엉망이었다. 약혼까지 했던 남 자가 떠나갔고 겨우겨우 정신과 의사와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육 개월 만에 남 편이 자살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 쌓이고 쌓인 한을 토비 앞에 울컥울컥 게워내 고 나니 앨리스는 진이 다 빠진 상태에서도 말할 수 없이 평화롭고 흡족해졌다. 토비는 앨리스가 황홀경에 정신을 잃을 때까지 사랑을 해주었다. 그 거대한 남근을 삽입하고 천천히 엉덩이를 돌려 점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오, 내 사랑, 당신을 너무 사랑해. 오, 하느님, 너무 좋아!" 앨리스의 신음 소리가 방안에 메아리쳤다. 그러나 막상 학교 문제에 대해서는 앨리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다음번 '쇼케이스 그룹' 공연에 끼워 달라고, 스튜디오 배역 담당자들이나 높은 사람들에게 소개 좀 시켜 달라고 그토록 애걸을 했건만 앨리스는 단호하기만 했 다. "너무 서두르면 다치게 돼요. 첫인상이 가장 중요하니까. 첫눈에 마음에 차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를 주지 않는 게 그들이에요. 그러니 먼저 충분한 실력을 쌓 은 뒤에 나서야 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토비는 앨리스가 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울화 덩어리가 목 구멍까지 치미는 걸 꿀꺽 삼키고 억지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그러니까 내가 너무 서두른다 이거군요.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도 빨 리 성공하고 싶은데." "정말이에요? 오, 토비, 당신을 너무너무 사랑해요!" "사랑해요, 앨리스." 토비는 사랑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앨리스의 눈을 들여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이 방해꾼 계집을 함정에 빠뜨려야겠다고 작정하고 있었다. 그는 앨리스를 증오했고 그래서 가혹하게 굴었다. 이윽고 잠자리에 들자 토비는 귀부인 앨리스에게 창녀한테도 요구한 적이 없 는 온갖 치욕스러운 짓들을 강요했다. 그것은 남자가 여자에게 내릴 수 있는 가 장 혹독한 벌이었다. 마치 개를 훈련시키는 주인이 재가 새 기술을 터득하면 귀 여워해 주듯, 앨리스에게 치욕적인 행위들을 강요하면서 칭찬으로 용기를 북돋 워주었다. 그렇게 앨리스에게 수모를 줄수록 토비는 왠지 스스로가 굴욕스러워 졌다. 결국 앨리스를 벌하는 건 스스로를 벌하는 것이었다. 토비는 진작부터 작정해 둔 계획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걸 실천에 옮길 기 회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앨리스 태너가 돌아오는 금요일에 '워크샵 그룹' 공 연을 연다고 발표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상급반과 친지들 앞에서 하는 비공식 적인 공연이었다. 각자 자기 특기를 선보일 기회였기에 토비는 나름대로 대본을 준비해 혼자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공연 날 오전, 토비는 수업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뚱보 성격 배우 카렌에게 다 가갔다. "부탁 하나 해도 될까?" "그럼, 물론이지, 토비." 카렌의 목소리엔 놀라움과 열의가 담겨 있었다. 토비는 그녀의 입냄새를 피해 한걸음 물러섰다. "내 옛 친구한테 장난을 좀 쳐볼까 하는데 말야. 클리프톤 로렌스 비서한테 전화해서 샘 골드윌 비서라고 그러고 골드윌 씨가 오늘밤 공연에 꼭 참석해서 뛰어난 신인 코미디언의 출현을 봐 달라고 한다고 전해 주겠어? 티켓은 매표소 에 맡겨 두겠다고." 카렌이 빤히 쳐다보며 대꾸했다. "세상에, 태너 여사님이 아시면 내 머리털을 몽땅 뽑아 놓을 거야. 토비도 알 잖아, 여사님은 절대 '워크삽 그룹' 공연에 외부인을 들이지 않는다는 거." "날 믿어, 아무 일 없을 거야." 토비는 카렌의 팔을 잡고 은근하게 물었다. "이따가 오후에 약속 있어?" 카렌은 침을 꼴깍 삼켰다. 숨소리도 빨라졌다. "아니, 아무 약속도 없어." "그럼 우리 조용히 만나지." 그 세 시간 뒤 카렌은 황홀경에 취한 상태에서 전화를 걸었다. 강당은 '액터즈 웨스트' 학생들과 그들이 초청한 친지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 었으나 토비의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3번째 줄에 앉은 사내뿐이었다. 사실 토비 는 계략이 먹혀들지 않을까 봐 내심 무척 걱정했었다. 클리프톤 로렌스는 보통 영악한 자가 아닐 테니까. 그런데 그가 여기 와서 앉아 있는 것이다. 지금 무대에선 남녀 2인 1조가 '갈매기' 에서의 한 장면을 공연하고 있었다. 토비로선 그들이 클리프톤 로렌스를 몰아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이 윽고 조마조마하던 공연이 끝나고 두 배우는 절을 하고 퇴장했다. 이제 토비 차례였다. 언제 왔는지 앨리스가 가만히 다가와 격려의 말을 속삭 였다. "행운을 빌어요." 그러나 그의 행운이 객석에 앉아 있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고마워요, 앨리스." 토비는 잠시 무언의 기도를 올리고 어깨를 똑바로 펴고는 무대 위로 뛰어올라 가 객석을 향해 천진하게 웃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저는 토비 템플입니다. 이름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부모님이 우리 이름을 어떻게 짓는지 생각해 본 적 있으십니까? 순 엉터리죠. 제 어머니께 왜 제 이름을 토비라고 지었는지 여쭤 봤더니 뮈랬는지 아세요? 마 침 주위에 '토비 맥주잔'이 보여서 그냥 토비라고 지어 버렸다나요!" 관객들은 그의 우스개보다는 표정을 보고 웃었다. 무대에 선 토비는 너무나 천진하고 갈망에 찬 모습이어서 관객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우스개들은 거칠었으나 그건 별로 문제가 안 되었다. 그는 관객 들의 보호 본능을 일으켰고 그래서 박수와 웃음이 마구 쏟아졌다. 토비는 사랑 의 세례를 받고 기쁨과 행복감에 몸을 떨었다. 그는 에드워드 G. 로빈슨과 지미 배그니가 되어 있었다. 캐그니가 말한다. "이 더러운 쥐새끼 같은 놈! 지금 누구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야?" 로빈슨이 대꾸한다. "너한테, 이 건달놈아. 이 몸은 작은 시저님이시다. 내가 네 주인이야. 넌 아 무것도 아니라구. 내 말 알아들어?" "그래, 이 더러운 쥐새끼야. 너는 아무것도 아닌 것의 주인이야." 폭소. 관객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거기 험프리 보가트가 나타나 으르렁거린다. "이 건달놈, 네 놈 눈깔에 침을 뱉고 싶지만 입술이 이빨에 붙어 버려서 못 하겠다." 관객들은 배꼽을 쥐었다. 이번에는 피터 로레 목소리다. "조그만 여자 아이가 방안에서 그걸 갖고 노는 걸 보고 나는 흥분했어요. 너 무 흥분한 나머지 제정신이 아니었죠. 나도 모르게 그만 방안으로 살금살금 기 어 들어갔어요. 그리곤 줄을 힘껏 잡아당겼죠. 그런데 그만 여자 아이의 요요가 망가지고 말았어요." 요란한 웃음 소리. 토비는 신바람이 났다. 이제 막 로렐과 하디로 넘어가려는데 객석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느껴져 쳐다 보았다. 클리프톤 로렌스가 일어나서 나가고 있었다. 그 후로는 모든 것이 흐릿한 기억으로 남았다. 공연이 끝나자 앨리스 태너가 다시 쫓아왔다. "정말 잘했어요, 난 정말..." 토비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수도, 누가 자기 얼굴을 보는 걸 견뎌낼 수도 없었다. 혼자 있고 싶었다. 온몸을 갈가리 찢어발기는 이 고통을 감당해 내려면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어야 했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과 참담함. 가까스 로 얻은 기회를 망쳐 버리다니... 클리프톤 로렌스는 끝까지 보지도 않고 도중 에 나가 버렸다. 그는 최고만을 상대한 전문가이며 재능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 는 사내이다. 그런데 그 사람 눈에 들지 못한 것이다. 토비는 가슴을 저미는 아픔을 느꼈다. "바람 좀 쐬고 와야겠어요." 그가 앨리스에게 말했다. 토비는 '바인 스트리트'와 '가우어' 거리를 쏘다니며 '컬럼비아 픽처스', 'RKO', '파라마운트' 앞을 지나쳤다. 늦은 시각이라 영화사의 문들은 모두 잠겨 져 있었다. 할리우드 가를 걸으며 언덕 위에 우뚝 걸린 - 거대하고 현란한 - ' 할리우드 랜드' 간판을 올려다 보았다. 사실 할리우드 랜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음 속의 허상일 뿐이다. 스타에 눈이 뒤집혀 꾸역꾸역 모여드는 인파 가 품고 있는 헛된 꿈일 뿐이다. 할리우드는 기적이라는 현란한 약속으로 정상 적인 사람들을 발광하게 만들어 함정에 빠뜨린 뒤 철저히 망가뜨리는 사이렌의 노래 '사이렌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머리는 여자이고 몸통은 새였다는 바다의 정령으로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지나가는 항해자들을 홀려 난파당해 죽게 했다고 함'이다. 토비는 밤새 길거리를 헤매대다니며 자기 인생에 대해 생각했다. 스타에의 꿈 이 허망하게 무너지자 이제 뿌리 없는 인생이 되어 여기저기 떠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무대에 서서 사람들을 웃기는 것 이외엔 달리 가진 기술이 없는 그이고 보니 연예계를 포기한다면 지루하고 단조로운 밥벌이 수단에 매달려 평생을 답 답하고 한심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평범한 소시민의 일생. 새삼 '변소순회 공연'을 돌던 저 길고 쓸쓸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도시들을 돌며 감내해야 했던 뼈를 깎는 외로움, 하지만 박수와 웃음과 사랑을 주던 관객들. 토비는 울었다.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며 통곡했다. 토비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앨리스와 함께 살고 있는 흰 치장벽토칠을 한 방갈 로에 돌아왔다. 침실로 걸어 들어가니 앨리스가 자고 있었다. 그녀의 잠든 모습 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여자를 마법의 왕국으로 통하는 열쇠라고 여겼던 건 잘못이다. 이제 떠나 야지."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이제 겨우 스물일곱인데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토비는 기진맥진해서 소파에 벌렁 누웠다. 눈을 감고 있으려니 도시가 잠에서 깨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도시나 잠에서 깨어나는 소리는 한결같다. 그 래, 디트로이트로.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는 부엌에 서서 애플 파이를 만 들고 계셨다. 어머니의 육감적인 사향 냄새와 버터에 사과를 굽는 냄새가 진동 하며 그 신념에 찬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하느님은 네가 유명해지길 바라신다." 그는 넓은 무대에 홀로 서 있다.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는 강렬한 조명에 눈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대사가 생각나지 않는다. 어찌된 일인지 목이 꽉 잠겨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애간장이 다 녹는다. 객석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 린다. 강렬한 조명 속에서 가까스로 눈을 뜨고 보니 관객들이 무대로 달려오고 있다. 금방이라도 때려 죽일 기세다. 그들의 사랑은 증오로 바뀌었다. 그들이 그를 에워싸고 잡아 흔들며 입을 모아 외친다. "토비! 토비! 토비!" 토비는 소스라치게 놀라 잠이 깨었다. 입 안이 바짝 말라 텁텁했다. 앨리스 태너가 굽어보며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토비! 전화예요. 클리프톤 로렌스예요." 클리프톤 로렌스의 사무실은 '윌셔' 정남쪽 '베벌리 드라이브'의 어느 작고 우아한 건물에 들어 있었다. 정교하게 조각된 목재 벽면에는 프랑스 인상주의 회화작품들이 걸려 있었고 암록색 대리석 벽난로 앞에는 세련된 커피 테이블을 에워싸고 소파 하나와 골동품 의자들이 옹기종기 놓여져 있었다. 토비는 그런 풍경은 처음이었다. 늘씬한 빨강머리 여비서가 차를 따르며 물었다. "차는 어떻게 드시죠. 템플 씨?" "템플 씨라고!" "설탕 한 스푼요." "자, 드세요." 비서는 살짝 미소 짓고 퇴장했다. 토비는 지금 마시고 있는 차가 '포트넘'과 '메이슨' 산을 혼합하여 '아이리시 밸리크'에 우려낸 최고급품이란 건 몰랐지만 향미가 기막히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이 사무실의 모든 것이 근사했다. 특히 안락의자에 몸을 묻고 빤 히 쳐다보고 있는 저 작달막한 체구의 세련된 사나이는 눈이 부셨다. 클리프톤 로렌스는 토비가 생각했던 것보다 몸집은 작았지만 위엄과 품격을 후광처럼 뿜 어내고 있었다. "이렇게 불러 주셔서 어떻게 감사를 드려아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어제 무례하게 속인 건..." 클리프톤 로렌스는 고래를 뒤로 젖히고 껄껄 웃었다. "나를 속였다구? 이 사람아, 나는 어제 골드윈과 점심을 같이 했네. 어젯밤 거기 간 건 자네가 얼마나 재능이 있기에 그렇게 안달을 하는지 확인하고 싶어 서였어. 과연 훌륭하더군." "그렇지만 도중에 나가셨..." "이 친구야, 꼭 캐비아 한 단지를 다 먹어 봐야 그 맛을 아는가? 난 1분도 안 돼 자네 재능을 알아봤지." 토비는 가슴 가득 밀려드는 환희에 진저리를 쳤다. 저 캄캄한 절망의 밤이 지 나고 이제 눈부신 창공을 휠휠 날으며... "템플, 자네에게 가능성이 보여. 마침 신인을 한 명 키워 볼까 생각하던 참인 데 잘 만났네. 자넬 내 고객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네." 토비는 치솟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벌떡 일어나 목이 아프도록 외치고 싶었 다. "클리프톤 로렌스가 내 대리인이 된단다!" "...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네.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것. 난 제멋대 로 구는 자는 용납 못 해. 만일 한 번이라도 내 방침에 어긋난다면 그걸로 우리 관계는 끝이네. 알아 듣겠나?" 토비는 황급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선생님. 잘 알겠습니다." "자네가 우선 해야 할 일은 주제 파악이야." 그렇게 운을 땐 로렌스는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자네 연기는 형편없네. 아주 싸구려에 저질이야." 토비는 느닷없이 명치를 걷어차인 기분이었다. "클리프톤 로렌스가 나를 여기까지 불러들인 건 나를 키워 주기 위해서가 아 니라 못된 속임수에 대한 앙갚음을 하기 위해서였구나." 로렌스는 얘기를 계속했다. "어젯밤은 아마추어들의 무대였어. 자네도 아마추어고." 이제 그는 안락의자에서 일어나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자네가 지닌 장점이 무엇이고 앞으로 스타가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얘기하지." 토비는 붙박은 듯 꿈쩍도않고 앉아 듣고 있었다. "우선 대본 얘기부터 시작하지. 지금 것은 버터나 바르고 소금이나 쳐서 극장 로비에 앉아 팔아먹으면 딱 좋을 수준이네." "예. 사실 일부 저속한 내용도 있습니다만..." "둘째, 자네에겐 스타일이 없어." 토비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관객들은..." "다음, 무대 매너가 엉망이야. 꼭 훈재연어 같다니까." 토비는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그 마음을 읽었는지 로렌스가 다가와서 내려다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구제 불능이라면 내가 왜 자네를 여기까지 불러들였겠나? 자넨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무언가를 갖고 있어. 자네는 무대에서 관객들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네. 관객들은 자넬 좋아해. 그게 얼마나 대단한 힘인지 아나?" 토비는 길게 심호흡을 하고 느긋하게 뒤로 기대 앉았다. "모르겠습니다." "상상을 불허할 만큼이라고 해두지. 그러나 무대 매너를 익히고 좋은 대본만 갖추면 자넨 스타가 될 수 있어." 토비는 클리프톤 로렌스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따스한 햇살에 얼었던 몸을 녹이며 이제까지의 시간들이 바로 이 순간을 위한 것임을 직감했다. 어머니가 약속하신 대로 벌써 스타가 된 기분이었다. "연예인에게 성공의 열쇠는 바로 독특한 개성이지. 그건 돈을 주고 살 수도 없고 남의 걸 모방할 수도 없는 거야. 천부적인 것이지. 자넨 그걸 지니고 있는 행운아야." 로렌스는 피아제 금딱지 손목시계를 흘낏 보고는 계속했다. "이따 두시에 오핸론과 레인저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놓았네. 할리우드 최 고의 코미디 작가들이지. 정상급 코미디언들 대본만 도맡아서 써주는 사람들이 네." 토비는 갑자기 초조해졌다. "저, 사실 저는 지금 돈이..." 클리프톤 로렌스는 손짓으로 토비의 입을 막았다. "이봐 친구, 돈 걱정은 말아. 나중에 갚아도 되니까." 클리프톤 로렌스는 토비 템플이 나가고 나서도 한참이나 청년의 진실되고 솔 직한 푸른 눈과 순진한 얼굴을 생각하며 혼자 미소 짓고 있었다. 사실 그는 꽤 오랫동안 신인을 상대하지 않았다. 현재 그의 고객은 모두 정상급 스타들이고 스튜디오마다 서로 그들을 끌어다 쓰려고 야단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시들 해져 갔다. 모름지기 도전이 있어야 성취감이 따르는 법이니까. 클리프톤 로렌 스는 저 의욕적이고 흥미진진하던 초창기가 슬금슬금 그리워졌다. 그래서 택하 게 된 것이 바로 토비 템플이었다. 의욕만 앞섰지 거칠기 짝이 없는 시골뜨기 청년을 대스타로 키워내는 일은 새로운 도전이 될터였다. 이 도전은 실은 흥미 진진한 체험이 되리라. 클리프톤 로렌스는 토비 템플이 마음에 들었다. 정말로 아주 마음에 들었다. 토비는 오핸론과 레인저의 사무실이 있는 서부 로스앤젤레스 피코 가의 '20세 기 폭스 스튜디오'로 찾아갔다. 클리프톤 로렌스의 호화판 사무실 못지않게 사 치스러울 걸로 생각한 그들의 일터는 정작 소형 목조식 방갈로에 들어 있는 누 추한 공간이었다. 카디건을 걸친 중년의 추레한 비서가 안쪽 사무실로 안내했다. 사무실 벽지는 꾀죄죄한 연초록색이었고 장식이라곤 다 망가진 화살 던지기 과녁판과 마지막 세 글자가 한데 뭉개진 '미래 지향적 사고'라는 표지판뿐이었다. 부서진 베네치 아식 블라인드 사이로 걸러져 들어온 햇살 몇 줄기가 너덜너덜 헤져서 캔버스 마루가 군데군데 드러난 그리고 때가 꼬질꼬질한 갈색 카펫 위에서 뒹굴고 있었 다. 맞붙여 놓은 단 두 개뿐인 책상은 흠집투성이였고 그 위에는 종이와 연필, 식어빠진 커피잔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안녕하시오. 토비. 사무실이 난장판이라 미안합니다. 청소부가 마침 휴가중 이라서요." 오핸론이 먼저 나서서 맞았다. "나는 오핸론이오. 이쪽은 ... 에 ... ?" "레인저." "그래, 맞아. 이쪽은 레인저구요." 땅딸보 오핸론은 뿔테 안경을 끼고 있었고 왜소한 레인저는 연약한 인상을 풍 겼다. 둘 다 서른 초반에, 10년 가까이 한 팀을 이루어 코미디 작가로 필명을 날려온 사람들이었다. "두 분이 저를 위해 대본을 써줄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토비의 말에 오핸론과 레인저는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클리프톤 로렌스는 당신이 미국의 새로운 섹스 심볼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던데 어디 한 번 보여주시오. 지금 보여줄 수 있겠소?" "물론." 대답은 자신 있게 했지만 아까 클리프톤이 한 지적이 생각나 좀 기가 죽었다. 두 작가는 소파에 몸을 턱 하니 팔장을 끼고 기다렸다. "그럼 어디 해보시오." 오핸론이었다. 토비가 쳐다보며 물었다. "그냥 이렇게 말입니까?" "그럼 어떻게 할까요? 관현악단이라도 불러다 놓고 거창하게 소개부터 할까 요?" 레인저는 그렇게 대꾸하고는 오핸론에게 말했다. "음악 담당 부서에 전화 넣어." "이 개새끼들. 너희 놈들 둘 다 어디 두고 보자." 토비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짓거리를 보아 하니 저들의 속셈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처음부터 꼼짝못하게 기를 죽여 놓고는 클리프톤 로렌스에게 달려가 이 렇게 말할 게 뻔했다. "그 친구 도저히 안 되겠어요. 구제불능이더라구요." 그렇다면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토비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에보트 와 코스텔로"를 시작했다. "이봐, 루, 자넨 부끄럽지도 않나? 아주 백수건달이 다 됐구만. 왜 부지런히 직업을 구하지 않는 건가?" "난 직업이 있다구." "무슨 직업?" "직업을 구하는 직업." "그걸 직업이라고?" "아무렴. 그것 때문에 종일 바쁘고, 아침에 정시에 나가서 저녁때 정시에 퇴 근하니까." 두 작가는 토비를 찬찬히 뜯어보며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열심히 분석을 하더 니 시범 연기가 다 끝나기도 전에 토비는 싹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이러쿵저러쿵 떠들기 시작했다. "무대 매너가 엉망이야." "저 손 동작 좀 봐. 꼭 톱질을 하고 있는 것 같군. 저 친구한텐 나무꾼 대본 을 써주는 게 딱 좋겠어." "너무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어." "세상에, 뭐 저따위 대본이 다 있어 그래?" 토비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더 이상 저 미치광이들에게 수모를 당하 며 미련하게 버티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저런 작자들 머리에서 나오는 대본이 오죽하랴 싶기도 했다. 이윽고 토비는 분을 참지 못해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이 개새끼들아, 너희 따윈 필요없어!" 그리곤 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레인저가 영문을 몰라 후다닥 일어났다. "이봐! 대체 왜 그러는 거요?" 토비는 찬바람이 일어나도록 몸을 돌렸다. "그래, 당신들 생각엔 내가 왜 그러는 것 같소? 당신들...당신들..." 억장이 무너져 말도 안 나오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레인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오핸론에게 말했다. "우리가 저 친구 기분을 상하게 했나 봐." "저런!" 토비는 한숨을 푹 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봐요. 두 사람! 내 코미디가 맘에 안 든다면 그건 할 수 없는 일이지 만..." "우린 당신 코미디가 좋아요!" 오핸론이 외쳤다. ""당신이 아주 맘에 든다니까." 레인저도 거들고 나섰다. 토비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뭐요? 그렇지만 방금 당신들 태도가..." "토비, 당신도 자기 문제가 뭔지 알 거요. 당신은 너무 불안해 하고 있어. 자, 느긋해집시다. 아, 물론 당신은 앞으로 배워야 할 게 많아요. 당신이 밥 호 프라면 이 자리에 와 있겠소?" 레인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핸론이 톡 나섰다. "아니지. 왜냐면 지금 밥은 '카멜'에 가 있으니까." "골프 치러. 당신 골프 쳐요?" 레인저가 물었다. "아뇨." 두 작가는 뜻밖이라는 듯 다시 눈길을 교환했다. "요샌 온통 골프에 얽힌 우스개판인데." 오핸론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차차, 여기 커피 좀 들여와요." 수화기를 내려놓고 토비를 보며 물었다. "이 비좁은 바닥에 자칭 코미디언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시오?" 토비는 고개를 저었다. "정확한 숫자는 말할 수 없지. 어제 오후 여섯 시 현재 삼십칠억이천팔백만 명. 밀턴 베를의 형은 뺀 게 그거요. 보름달이 뜨면 그들은 스멀스멀 밖으로 기 어나오지. 그런데 진짜 정상급 코미디언은 대여섯 명뿐이요. 나머지는 무명으로 고생만 하다가 사라져 가는 거지. 코미디는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직업이오. 코 믹한 사람이건 코미디언이건 남을 웃기려면 등골이 빠지지." "뭐가 다릅니까?" "크게 다르지. 코믹한 사람은 웃음의 문을 여는 사람이고 코미디언은 문을 우 습게 여는 사람이니까." 이번에는 레인저가 나서서 물었다. "코미디언의 성패를 판가름하는게 뭔지 생각해 본 적 있소?" "대본이겠죠." 아첨 섞인 대꾸었다. "개소리!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신종우스개의 작가가 누군지 아쇼? 그리스 희 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 사실 우스개는 기본적으로 다 똑같아요. 조지 번즈 같 은 코미디언은 바로 앞서 공연한 사람과 똑같은 우스갯소리를 해도 우레와 같은 박수와 폭소를 자아내지. 왠지 아시오? 그만의 독특한 개성 때문이지." "클리프톤 로렌스도 똑같은 말을 했지." "개성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요. 개성을 갈고 닦아 그걸 자기만의 특성으로 만드는 거지. 호프를 예로 들어 봅시다. 만일 호프가 잭 베니식의 코미디를 하 면 맥주 깡통 세례나 받기 십상이지. 왜? 호프의 특징은 그게 아니니까. 관객들 이 그에게 원하는 건 밥 호프식 코미디니까. 호프가 무대로 걸어나오면 관객들 은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코미디를 기대하지. 그는 세련되고 약아빠진 대도시인 의 이미지를 지녔으니까. 잭 베니는 그 반대지. 그는 밥 호프처럼 일사천리로 지껄일 수는 없지만 그냥 2분간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것으로 관객들으 요절복 통하게 만드는 사람이거든. 막스 브라더즈도 각자의 개성을 갖고 있고 프레드 앨런도 독특한 코미디언이지. 토비, 당신 문제가 뭔지 알겠소? 당신은 모든 스 타들의 것은 조금씩조금씩 갖고 있소. 스타들 흉내는 다 낸다 이거요. 평생 싸 구려 클럽이나 전전하려면 차라리 그게 낫겠지. 그러나, 이 바닥에서 별을 따고 싶은 포부가 있으면 당신만의 개성을 발굴해 내야 해요. 떡하니 무대에만 오르 면 관객들이 당신 얼굴과 당신 코미디 스타일을 알 수 있도록. 알겠소?" "알았어요." 오핸론이 바톤을 받았다. "토비, 당신 재산이 뭔줄 아시오? 사랑스런 얼굴. 내가 클라크 게이블과 약혼 만 안 했으면 당신한테 죽자사자 매달렸을걸. 당신에겐 천진스러운 매력이 있어 요. 그걸 잘만 포장하면 한 밑천 잡을 거요." "여자들한테 인기도 대단할걸." 레인저가 거들고 나섰다. "당신은 성가대 맨 앞에 서서 혀 짧은 소리로 노래하는 꼬마 소년의 모습 그 대로야. 가사 내용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열심히 노래하는 그 모습은 더없이 귀엽고 깜찍하지. 아까 여기 들어오면서 우리한테 대본 작가냐고 물었지? 아니. 여긴 우스개를 파는 상점이 아니니까. 지금부터 우리가 할 일은 당신에게 자신 이 무얼 가졌으며 그걸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거요. 우린 당신에 게 맞는 개성을 심어줄 거요. 그래 어떻소?" 토비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기분좋게 씩 웃으며 대꾸했다. "자, 우리 소매를 걷어붙이고 같이 뛰어봅시다." 그날 이후로 토비는 매일 스튜디오에서 오핸론, 레인저와 점심을 함께 했다. '20세기 폭스'의 넓은 매점에는 스타들이 수두룩했다. 어떤 운좋은 날은 타이론 파워, 로레타 영, 베티 그레이블, 돈 아메치, 앨리스 훼이, 리처드 위드마크, 빅터 미처, 리츠 브라더즈를 한꺼번에 구경하기도 했다. 어떤 스타들은 매점 식 당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식당 홀에 연결된 중역용 식당에 앉 아 있기도 했다. 토비는 스타들을 구경하는 게 재미있었다. 그도 머지않아 스타 가 되어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주며 살게 될 테니까. 이제 막 스타의 길로 들어 선 토비는 스타 중의 북극성이 되기를 꿈꾸고 있었다. 토비가 클리프톤 로렌스에게 발탁된 사실을 알고 앨리스 태너는 뛸 듯이 기뻐 했다. "당신은 꼭 해낼 줄 알았어요. 당신이 정말 자랑스러워요." 토비는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 토비와 오핸론과 레인저는 토비에게 어떤 성격을 부여할 것인가에 대해 의논 하고 또 의논했다. "본인은 자기가 세상만사 우여곡절 다 겪어 인생에 도통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무슨 일만 벌였다 하면 실패하고 마는 사나이." 오핸론의 의견이었다. "직업은? 쥐뿔도 아는 게 없으면서 문맥도 안 통하는 어려운 말만 골라 쓰는 거?" 레인저도 나섰다. "이 사나이는 어머니와 함께 살아야 해. 어떤 여자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집을 떠나는 게 두려워 결혼을 못하고 있지. 그래서 약혼한지 벌써 5년째야." "10년이 더 재밌겠어." "맞아! 10년으로 하지. 이 어머니란 여자가 또 보통 골치가 아니지. 토비가 결혼할 결심만 굳히면 엄마는 꾀병으로 앓아 눕는 거야. '타임'지에서 매주 그 녀에게 전화를 걸어 의학계의 새 소식을 물을 정도지." 토비는 손발이 척척 맞는 두 전문가의 대화에 매료되어 멍하니 듣고만 있었 다. 진짜 실력을 갖춘 프로들과 일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고 과연 프로는 프 로다웠다. 게다가 자기가 주인공이 되고 보니 여간 즐거운 게 아니었다. 꼬박 3 주간의 산고 끝에 오핸론과 레인저는 토비의 첫 대본을 내놓았고 그 대본을 받 아든 토비는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근사했다. 토비가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자 두 작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수정 작업에 들어갔고 그 결과 더 훌륭한 대본을 얻을수 있었다. 이윽고 클리프톤 로렌스가 토비를 불렀다. "토요일 밤에 '볼링 볼'에서 데뷔 공연을 하게." '시로'나 '트로카드로' 같은 그럴듯한 클럽을 기대하고 있던 토비는 낙담해서 대리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볼링 볼'이 어딘데요?" "남부 '웨스턴 애비뉴'에 있는 조그만 클럽이지." 토비는 얼굴이 우거지상이 되었다. "한 번도 못 들어본 이름인데요." "그쪽에서도 자네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지. 그래서 거길 택한 거네. 그 무대 라면 실패해도 자넬 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 단, 클리프톤 로렌스를 빼고는. '볼링 볼'은 한마디로 쓰레기 더미였다. 정말이지 '쓰레기 더미'라는 표현만 큼 안성맞춤이 없었다. 그곳은 전국 방방곡곡에 흩어져 있는 수만 군데의 다른 싸구려 술집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토비는 "변소 순회 공연"을 돌며 그런 무대에 수없이 섰다. 그런 술집을 찾는 사람들은 거개가 중년의 막노동꾼들이었 다. 고된 하루 일을 끝내고 왁자지껄 몰려와 싸구려 위스키와 맥주를 퍼마시며 젖통이 훤히 드러나는 블라우스에 엉덩이까지 올라오는 미니스커트를 입은 웨이 트리스들에게 추파나 던지고 자기들끼리 음탕한 농담이나 주고 받는 거친 관객 들인 것이다. 홀 한쪽 끝에 마련된 작은 무대에서 구닥다리 악사 셋이 연주를 하고 있었다. 첫 무대는 동성연애자 가수가 정식했고 뒤를 이어 몸에 착 달라붙는 레오타드를 입은 곡예 무용가가 등장했으며 다음엔 잠에 취한 코브라를 몸에 감은 스트립 댄서가 나왔다. 토비는 클리프톤 로렌스, 오핸론, 레인저와 함께 뒤쪽의 테이블 하나를 차지 하고 앉아 쇼를 보면서 관객들의 반응을 살폈다. "싸구려 맥주파들이군." 토비가 경멸 어린 목소리로 내뱉었다. 클리프톤은 냉큼 반박을 하려다가 토비의 얼굴을 보고 그만두었다. 토비는 겁 을 먹고 있었다. 이런 무대에는 이골이 난 토비 템플이라는 걸 클리프톤이 모르 는 바는 아니었으나 이번 경우는 달랐다. 시험이니까. 클리프톤이 부드럽게 총고했다. "맥주파들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으면 삼페인파는 누워서 떡 먹기지. 토 비, 저들은 종일 등골 빠지게 일한 사람들이야. 그러니 잔돈푼이나마 그들이 내 는 돈값을 해줘야 해. 저들만 웃길 수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거저먹기야." 그때 구닥다리 사회자가 토비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서 혼을 쏙 뽑아놓으라구, 호랑이!" 오핸론이 격려했다. 토비는 무대에 올라섰다. 토비는 맹수에게 잡혀 먹힐까 봐 잔뜩 경계하고 있는 연약한 동물처럼 겁에 질려 뻣뻣이 긴장한 채 무대에 섰다. 그의 눈에 비친 관객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머리 백 개씩 달린 괴물이었다. 그 괴물을 웃겨야 한다. 토비는 비장하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기도했다. "제발 웃어 주시오." 이윽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웃어주는 이도 없었다. 토비는 이마 에 진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코미디가 먹혀들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미소를 버 리지 않고 큰소리로 열심히 떠들었다. 객석이 하도 소란스러워 있는 대로 소리 를 질러야 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손님들의 관심을 끌 수가 없었다. 저들은 아 까 그 벌거벗은 스트립 걸이 다시 나오길 바라고 있었다. 하나같이 시시껄렁하 고 우습지도 않은 잡소리나 열심히 떠들어대는 엉터리 코미디언은 이제 신물이 나도록 봐서 전혀 흥미가 없으니까. 토비는 손님들의 무관심에도 아랑곳없이 이 야기를 계속했다. 사실 거기 그렇게 서서 달리 어찌할 방도가 있으랴. 흘낏 뒤 쪽을 보니 클리프톤 로렌스와 작가 친구들이 사뭇 걱정스런 얼굴로 지켜 보고 있었다. 토비는 계속했다. 홀 안에 관객은 한 사람도 없었다. 자기들끼리 더러운 인생 한탄하기에 바쁜 술손님들뿐이었다. 그들에게 무대에 선 토비 템플은 아예 존재 하지도 않았다. 토비는 두려움에 목구멍이 바싹 타들어가 이제 소리를 내기조차 힘겨웠다. 곁눈질로 보니 지배인이 밴드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제 귀가 멍 멍하도록 요란한 음악 소리와 함께 토비 템플이라는 플러그는 뽑혀질 참이었다. 모든 게 끝났다. 손바닥이 땀으로 질펀했고 우라질놈의 방광이 그만... 뜨거운 오줌 줄기가 바짓가랑이 속으로 질금질금 흘러내렸다. 이제 우리의 토비는 혼이 빠져서 아무 말이나 막 주워담고 있었다. 차마 클리프톤 로렌스와 작가들을 쳐 다볼 수가 없었다. 수치심에 온몸이 잦아들었다. 지배인이 악사들에게 무슨 얘 긴가를 하고 있었다. 악사들이 토비 쪽을 흘낏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토비는 이 악몽 같은 순간이 어서 끝나길 기원하며 미친 듯 지껄여댔다. 무대가 두 쪽 으로갈라져서 그 속으로 숨어 버리고만 싶었다. 무대 바로 앞 테이블에 앉은 중년 여자 하나가 토비의 우스개에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에 앉은 손님도 귀를 기울였다. 토비는 광란 상태에서 쉴 새 없이 혀를 움직였다. 그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 전부가 웃고 있었다. 그리고 옆 테이블, 옆 테이블... 시끌벅적하던 잡담 소리가 사나브로 잦아들었다. 모두들 토비의 코미디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웃음소리가 점점 길어지고 규칙적이 되어갔다. 그리고 커져 갔다. 이제 소란스러운 술손님들은 간데없고 예의바른 관객들이 홀을 꽉 메우고 있었다. 토비가 해낸 것이다. "우라질! 내가 해낸 거라구!" 이제 싸구려 술집에서 맥주나 퍼마시는 속물들을 앞에 놓고 공연하고 있다는 것 따위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들이 웃고 있다는 거였다. 관객 들의 반응은 물결 모양 번져 나갔다. 처음엔 그냥 웃기만 하던 관객들이 이제 배를 움켜쥐고 몸을 뒤꼬고 난리였다. 순 싸구려 인생들인 그들에게 이런 요절 복통할 코미디는 처음이었다. 박수 갈채에 환호에, 그 작고 초라한 술집은 흥분 으로 갈가리 찢겼다. 그들은 스타 탄생을 목격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그 사 실을 몰랐지만 클리프톤 로렌스와 오핸론, 레인저는 알고 있었다. 토비 템플도 알고 있었다. 마침내 하느님이 강림하신 것이다. 데미안 목사는 조세핀의 얼굴에 대고 활활 타오르는 햇불을 흔들어대며 외쳤 다. "오 전능하신 주님, 이 죄 많은 어린양 안에 숨어 있는 악마를 태워 없애 주 소서." 그러자 신도단이 우르릉 외쳤다. "아멘!" 어린 조세핀은 뜨거운 혓바닥으로 게걸스럽게 얼굴을 ㅎ는 불길에 질겁하고 있었다. 데미안 목사가 다시 외쳤다. "이 죄인이 악마를 몰아내도록 도와주소서, 오 주님. 저희도 악마를 끌어내어 불태울 수 있도록 기도하겠나이다. 악마를 물에 빠져 죽게 하겠나이다." 별안간 목사의 두 손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찬물이 가득 담긴 나무통에 조세핀 의 얼굴을 처박았다. 신도단이 입을 모아 주님을 찬송하며 도우심을 간청하는 소리가 밤공기를 찢었다. 조세핀은 목사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치며 물을 꼴깍꼴깍 들이켰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이 가물가물한데 목사가 손을 놓아주며 선언했다. "사랑의 예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자비로우신 은총으로 아이가 구원받았 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우레와 같은 환희의 송가가 이어지며 신도단은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올렸다. 그러나 당사자인 조세핀은 더더욱 기승을 부리는 두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꿈이 아닐까? "라스베이거스 출연 계약이 한 건 성사됐네. 자네 연기 지도는 딕랜드리에게 부탁해 놨어. 이 업계 최고의 연기 감독이지." 로렌스가 토비에게 말했다. "근사한데요! 어느 호텔요? '플래밍고'? '선더버드' ?" "오아시스." "오아시스 라구요?" 토비는 농담이겠지 싶어 대리인 클리프의 표정을 살폈다. "한 번도 못 들어본…." "알아. 한 번도 못 들어본 호텔이라 이거지. 그쪽에서도 자네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피차 공평하지 뭘 그래? 사실, 오아시스 도 내 말만 믿고 계약에 응한 거야. 자넬 뛰어난 코미디언이라고 소개했거든." 클리프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토비는 라스베가스로 떠나기 직전에야 앨리스 테너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 "당신이 대스타가 될 줄 알았어요. 이제 당신 시대가 온 거예요. 모두들 당신을 좋아할 거예요, 내 사랑." 앨리스는 감격에 찬 포옹을 하며 한껏 들뜬 목소리로 믈었다. "우리 언제 떠나는 거죠? 가만있자, 젊은 코미디 천재가 첫 무대에 서는 날 나는 뭘 입고 가지?" 토비는 슬프게 고개를 저었다. "앨리스, 당신을 함께 데려가고 싶지만 밤낮없이 연습에 매달려야해요." 앨리스는 실망을 감추려고 애쓰며 더 힘차게 포옹했다. "알겠어요, 얼마나 걸릴 거 같아요?" "아직은 몰라요. 당신도 아다시피 이건 첫 출연 계약이니까." 순간 앨리스는 불길한 예감이 예리한 비수처럼 가슴에 꽂히는 걸 느꼈으나 부 질없는 걱정이라고 도리질을 쳤다. "도착하는 대로 전화해야 돼요." 토비는 작별의 키스를 던지고 나풀나풀 퇴장했다.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는 토비 템플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도시 같 았다. 첫인상부터가 그랬다. 라스베이거스엔 토비의 가슴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열정에 감응하는 역동적인 에너지와 맥동이 있었다. 오헨론, 레인지와 함께 비행기편으로 공항에 도착하니 '오아시스 호텔'에서 보낸 리무진이 대기하 고 있었다. 그것은 바야흐로 그의 앞에 펼쳐질 경이로운 세계의 첫경험이었다. 호화판 검정 리무진에 올라 타 푹신한 좌석에 몸을 묻고 있으려니 기사가 정중 하게 물었다. "비행기 여행은 즐거우셨습니까, 템플 씨?" "성공할 사람의 냄새를 가장 먼저 맡는 건 언제나 이런 하찮은 시중꾼들이 지." 토비는 그런 생각에 더욱 흡족해졌다. "비행기 여행이란 게 늘상 지루하지 뭐." 그의 시큰둥한 대꾸였다. 오핸론과 레인지가 미소를 주고받자 토비는 그들에게 씩 웃어 주었다. 그들이 너무도 가깝게 느껴졌다. 어느새 토비와 오헨론, 레인저는 하나로 똘똘 뭉쳐 연 예계 최고의 팀을 이루고 있었다. '오아시스'는 사실 라스베이거스의 특급 호텔들과는 상대가 못되었다. 리무진 을 타고 들어가면서 바라본 호탤 건물은 '플레밍고'나 '선더버드'처럼 웅장하지 도, 화려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거기 토비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것이 있 었다. 다름아닌 호텔 전면의 대형 돌출 차양이었다. 토비는 자기 이름이 너무도 거대하고 현란해 보였다. 이 세상에 서 저 광경만 큼 아름다운 건 없었다. "저것 좀 봐요!" 토비가 경이감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오헨론이 흘낏 올려다보더니 대꾸했다. "우와! 죽이는데. 릴리 윌리스! " 그리곤 낄낄 웃으며 덧붙였다. "신경쓰지 말게, 토비. 첫 공연이 끝나면 자네 이름이 위로 올라갈 테니." '오아시스' 호텔 지배인 파커가 반색을 하며 쪼르르 달려나왔다. 안색이 누르께한 이 중년의 사내는 몸소 토비를 객실로 안내하며 갖은 아양을 다 떨었다. "템플 씨, 이렇게 저희 호텔을 찾아 주셔서 저희로선 무한한 영광 입니다. 불편하신 점이나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라도... 전화로 불러주 십시오, 예." 토비는 이런 분에 넘치는 환대가 클리프톤 로렌스 때문이란 걸알고 있었다. 저 신화적인 대리인이 이런 호텔에 자기 고객을 출연시킨 건 처음 있는 일이니 까, 이제 '오아시스'는 로렌스의 진짜 스타들까지 끌어들일 야무진 궁리를 짜내 고 있을 터였다. 호화판 객실에는 침실이 넷, 널찍한 거실 하나, 부엌, 바, 테라스가 딸려 있 었다. 거실 탁자 위에 갖은 종류의 고급 술과 꽃, 신선한 과일과 치즈가 담긴 유리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귀빈을 위한 호텔측의 서비스였다. "템플 씨, 방이 마음에 드시길 바랍니다." 토비는 객실을 휘휘 둘러보며 바퀴벌레들이 우글거리던 누추한 싸구려 호텔방 을 떠올렸다. "예. 좋군요." "랜드리 씨는 한 시간 전에 체크 인 하셨습니다. 3시부터 리허설을 하실수 있 도록 '미라지 룸'을 치워 놓겠습니다." "고맙소." "필요한 게 있으시면 꼭 불러 주십시오, 예" 지배인은 공손히 절을 하고 나갔다. 토비는 한동안 그대로 서서 호사스런 분위기에 흠뻑 취했다. 이제 평생을 이 런 곳에서 살게 될 터였다. 돈과 여자, 박수 갈채를 한몸에 누리면서. 특히 박 수 갈채, 관객들의 사랑이야말로 그의 마음의 양식이었다. 그것만 있으면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치 않았다. 딕 랜드리는 20대 후반의 뼈만 앙상한 사내로 대머리에 길고 우아한 다리를 갖고 있었다. 브로드웨이의 거리에서 집시로 떠돌다가 합창단을 거쳐 리드댄서, 안무가, 급기야는 감독으로 발돋움한 그는 관객들이 무얼 원하는지 쪽집게처럼 집어내는 예리한 감각의 소유자였다. 엉터리를 뛰어난 연기자로 둔갑시키는 재 주는 없었지만 그럴듯해 보이게 포장하는 기술은 있었고 뛰어난 연기자를 만나 면 관객들의 혼을 쏙 빼놓는 연기를 이끌어냈다. 열흘 전만 하더라도 랜드리는 토비 템플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몸이 열이라도 모자랄 정 도로 바쁜 일정을 쪼개어 템플의 연기 지도를 위해 라스베이거스까지 날아오게 된 건 순전히 클리프톤 로렌스의 입김 때문이었다. 떠돌이 집시를 지금의 랜드 리로 만들어 준 사람이 바로 클리프톤이니까. 딕 랜드리는 토비 템플을 만나고 채 15분도 되지 않아 그의 재능을 알아보았 다. 랜드리는 토비의 코미디를 지켜 보며 배를 잡고 웃었는데 사실 그가 르렇게 폭소를 터뜨리는 건 좀체로 없는 일이었다. 우스개 내용보다는 그럴 전달하는 표정 연기가 기가 막혔다. 토비의 얼굴은 가련하리만큼 진지해서 가슴이 다 뭉 클할 지경이었다. 토비 템플, 그는 하늘이 무너질까 봐 잔뜩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사랑스런 애송 이였다. 당장 무대 위로 달려올라가 따스하게 품어 주며 아무 일 없을 테니 마 음놓으라고 속삭이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일으키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토비가 시범 연기를 마치자 랜드리는 박수를 자제하며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좋아요, 아주 좋아." 랜드리가 열띤 목소리로 칭찬했다. "고맙습니다. 클리프 말로는 당신이 내 코미디를 빛내 줄 거라고 하더군요." "노력해 보겠소. 첫째로 당신이 배워야 할 건 자신의 재능을 다양화하는 거 요. 무대에 버티고 서서 우스개 말만 하면 당신은 그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어 요. 노래 한 곡 해보시오." 토비는 씩 웃으며 대꾸했다. "어디 가서 카나리아 한 마리 빌립시다. 난 노래에 소질 없어요." "한번 해봐요." 토비는 시키는 대로 했다. 랜드리는 흡족한 표정이었다. "목소리는 별로지만 귀는 제대로 뚫렸소. 적당한 노래만 준비되면 시나트라 모창이 가능할 거요. 작곡가한테 부탁해서 특별히 한번 만들어 봅시다. 다른 사 람들도 다 하는 판에 박힌 노래는 안 돼요. 자, 이번에는 몸동작 좀 보여주시 오." 토비는 시키는 대로 했다. 유심히 지켜보던 랜드리가 평했다. "그런대로 쓸 만해. 댄서의 소질은 안 보이지만 내 비슷하게는 만들어 드리 지." "뭐라구요?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들은 지천이지 않소?" "코미디어들도 마찬가지요. 당신을 명실상부한 연예인으로 만들어 주겠소." 토비는 씩 웃으며 말해다. "자, 그럼 소매를 걷어붙이고 열심히 뛰어 봅시다." 그들은 행동을 개시했다. 오헨론과 레인저도 리허설마다 빠짐없이 참석해서 대본을 수정하기도 하고 새 대본을 만들기도 했다. 랜드리는 토비를 숨도 못 쉬 게 몰아붙였다. 정말로 호된 연습이었다. 토비는 온몸의 뼈 마디마디가 쑤실 때까지 강행군을 계속했고 그 결과 체중이 2 킬로나 줄어 한결 단정하고 강건한 이미지를 풍겼다. 노래 연습도 날마다 했는데 얼마나 열심히 불러댔던지 잠이 들어서도 노래를 부 를 지경이었다. 새 대본과 노래들이 착착 준비되었고 토비는 그것들을 소화해 내기 위해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앨리스 태너에게서 전화가 왔었다는 메모가 매일같이 올라왔다. 그러나 토비는 그녀를 증오하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끌어주기는커녕 아직 준비 가 안 됐다고 길을 막던 여자니까. 준비가 안 됐는데 이렇게 잘 나갈 수 있어? 토비는 에라, 메모지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앨리스 의 전화는 뚝 끊겼다. 그러나 리허설은 계속됐다. 공연 날짜가 불쑥 다가왔다. 이날 밤 하늘에는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예고하는 서기가 감돈다. 마치 전세 계 연예계에 텔레파시가 통한 듯하다. 신비한 마술의 함이 작용하여 스타 탄생 의 소식을 런던으로, 파리로, 뉴욕으로, 시드니로, 극장이 있는 곳이면 어느 곳 으로든 삽시간에 퍼져 나간다. 토비 템플이 '오아시스 호텔' 무대에 오르고 5분이 흐르자 새로운 별로 지평 선 위로 떠올랐다는 소문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다. 클리프톤 로렌스가 바쁜 시간을 쪼개 토비의 데뷔 무대를 보러와주었다. 토비 는 흐뭇했다. 천하의 대리인이 기라성 같은 스타 고객들을 다 제쳐두고 그를 위 해 달려와 주었으니까. 공연이 끝나자 토비와 클리프톤은 호텔 안의 심야 커피 숍으로 들어갔다. "아까 그 명사들 다 보셨어요? 그 사람들이 나중에 분장실로 우르르 몰려드는 데 너무 흥분해서 까무라칠 뻔했다구요." 클리프톤은 토비의 열성에 미소를 머금었다. 인기고 뭐고 다 시들해 하는 닳 아빠진 스타들만 상대하다가 토비를 보니 마음이 유쾌해졌다. 토비는 고양이 새 끼였다. 사람스런 푸른 눈의 고양이 새끼. "재능은 한눈에 드러나는 법이지. '오아시스'도 예외는 아니더군. 자네와 재 계약을 맺고 싶어하네. 주당 650에서 1000달러로 올려 주겠다네." 토비는 놀라서 커피 커피 스푼을 떨어뜨렸다. "일주일에 1000요? 근사해요, 클리프!" "선더버드와 엘 란초우에서도 척후병들을 보내왔더군." "벌써요?" 토비는 신바람이 났다. "너무 좋아서 오줌 질질 쌀 거 없네. 기껏해야 호텔 라운지 무대니까. 토비, 이 바닥에서 오랫동안 내려오는 얘기가 하나 있지. 내눈에 너는 스타다, 네 눈 에도 너는 스타다. 그러나 스타에게도 네가 스타로 보일까?" 클리프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뉴욕으로 돌아가야 하네. 내일 런던 출장이 있거든." "런던요? 언제 오시죠?" "몇 주 걸릴 거야." 클리프톤은 선 채로 몸을 굽혀 속삭였다. "잘 듣게, 젊은 친구. 여기서 2주 더 있게 될 거야. 여길 학교라고 생각하게. 매일 무대에 오를 때마다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까 연구를 하라구. 오헨론과 레 인지에게 여기 계속 남도록 부탁해 놓았네. 그들이 밤낮없이 같이 뛰어 줄 거 야. 그들을 잘 이용해 봐 랜드리도 주말에 다시 들를 거야." "알아습니다. 감사합니다. 클리프." "아, 깜박 잊을 뻔했군." 클리프톤 로렌스는 주머니에서 선물 꾸러미 하나를 꺼내 토비에 게 건넸다. 포장을 풀어 보니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커프스 단추기 들어 있었다. 별 모양 이었다. 토비는 시간이 날 때마다 호텔 뒤편에 있는 대형 풀장에서 휴식을 즐겼다. 호 텔에서 정기 공연을 하는 쇼걸들이 스물다섯 명이나 있어 언제 내려가도 수영복 을 입은 미녀들이 여남은 명은 누워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따가운 정오의 햇살 아래서 그들은 마치 만개한 꽃들 같았고 누구 하나 빠지는 용모가 없었다. 토비야 원래 여자들한테 인기가 좋았지만 그래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곳 쇼걸들에게 토비 템플은 스타였다. 호텔 밖에서야 어찌되었든 이곳 무대에선 최 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으니까. 그래서 서로 토비의 침실을 점령하려고 야단법석 이었다. 그 2주일은 토비에게 천국 같았다. 해가 중천에 떠서야 잠에서 깨어 어슬렁어 슬렁 식당으로 간다. 거기서 아침 식사를 하며 몰려드는 손님들에게 사인을 해 준다. 그리고 한두 시간 정도의 리허설. 리허설이 끝나면 풀장에 내려가 늘씬한 미녀를 한둘 골라잡아 자기방으로 가서 오후의 정사를 즐긴다. 토비는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름아니라 쇼갈들에겐 사타구니 음모의 숲이 없다는 것이었다. 쇼걸들은 노출이 심한 복장으로 무대에 서야 하 기 때문에 싫어도 울며 겨자먹기로 음모를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생각 해낸 묘안이 둔덕 한 가운데에만길쭉하게 털을 남겨 놓는 거였는데 막상 그렇게 하고 보니 남자들이 아주 좋아하더라는 것이었다. 쇼걸 하나가 토비에게 고백한 사연은 이러했다. "그건 성욕을 돋구는 최음제 같은 거죠. 꽉 조이는 랫도리를 입고 몇 시간씩 무대에 서다보면 하나같이 사나운 색녀가 되게 마련이까." 토비는 굳이 그들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베이비'나 '하니'면 다 통하니까. 토비에게 그들은 육감적인 허벅지와 입술, 갈망하는 몸뚱어리들일 뿐이었다. '오아시스 호텔' 공연 마지막 주의 어느 날 누군가 토비를 찾았다. 막 첫 무대 를 끝내고 분장실에서 화장을 지우고 있는데 식당 지배인이 들어와 은밀한 목소 리로 전했다. "앨 카루소 씨가 뵙자는군요." 앨 카루소는 라스베이거스의 소문난 거물이었다. 호텔 하나를 직접 소유하고 있었고 떠도는 소문으로는 그 외에는 두세 군데 호텔에 지분이 있다고 했다. 갱 두목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그런 토비가 신경쓸 문제가 아니 었다. 중요한 건 앨 카루소가 그의 코미디를 마음에 들어한다는 것이고 잘하면 평생 라스베이거스에서 돈방석에서 앉아 생활할 수 있었다. 토비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카루소가 기다리고 있다는 식당으로 달려갔다. 앨 카루소, 그는 쉰 가량의 땅딸보로 백발과 반짝반짝 빛나는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 툭 튀어나온 올챙이배의 소유자였다. 토비는 첫눈에 산타클로스의 그림 을 떠올렸다. 토비가 다가가자 카루소는 일어나서 따스한 미소와 함께 손을 내 밀었다. "내가 앨 카루소요. 토비, 자네에 대한 내 느낌을 말하고 싶어서 이렇게 불렀 지. 의자 하나 끌어다 앉아요." 카루소의 테이블에는 검정 양복 차림의 사내 둘이 함께 앉아 있었다. 둘 다 뚱한 얼굴로 코카콜라만 홀짝거리고 있을 뿐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인사 소개 같은 것도 없었다. 늘 첫 무대가 끝나서야 저녁을 먹는 토비의 위장은 밥 을 달라고 아우성이었지만 카루소가 막 식사를 끝낸 것 같고 또 어려운 분 앞에 서 먹는 얘기를 꺼내기도 뭣해서 그냥 참기로 했다. "이봐, 공연이 훌륭하더군. 정말 맘에 들었어." 카루소는 장난기 가득한 갈색 눈을 빛내면서 환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카루소 씨. 그렇게 봐주셨다니 정말 기쁩니다." 토비가 행복한 목소리로 답례했다. "그냥 앨이라고 부르게." "예, 저 애... 앨." "토비, 자넨 장래성이 있다. 내 이 바닥에서 반짝 스타들을 여럿 보았지만 진 짜 재능 있는 사람들은 오래가는 법이지. 자넨 재능이있어." 토비는 충만한 기쁨으로 가슴이 뜨거워자는 걸 느꼈다. 출연 계약 건이라면 클리프톤 로렌스를 만나 얘기해 보라는 말을 할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자기가 직접 계약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카루소가 나한테 홀딱 반한 건 같으니 클리프보다는 내가 흥정을 하는 게 낫 겠어." 일단 앨 카루소가 먼저 제안을 해오면 빡빡하게 흥정를 벌일 작정이었다. "오줌을 질금 질금 쌀 뻔했다니까. 특히 그 원숭이 얘기는 내가 들은 코미디 중에 제일 웃겼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기쁩니다." 토비가 진실된 어조로 사례했다. 땅달보 산타클로스의 두 눈은 너무 웃어서 눈물이 다 글썽글썽했다. 그는 흰 실크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치면 두 호위병에게 물었다. "내가 이 친구 재미있다고 했지?" 두 호위병은 고개를 끄덕였다. "토비, 왜 보자고 했는지 용건을 말하겠네." 바야흐로 일류의 길로 들어서려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클리프톤 로렌스는 지금 유럽에서 한물간 스타들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다. 이 자리에 앉아 떠오르는 별을 보살펴야 할 사람이 말이다. 그래, 근사한 계약 을 따내어 로렌스를 깜짝 놀라게 해주는 거다. 토비는 상체를 앞으로 내밀로 애교 있게 미소를 지었다. "듣고 있습니다. 앨" "밀리가 자넬 사랑한다더군." 토비는 뜬름없이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눈만 껌벅거렸다. 카루소가 빤히 쳐 다보고 있었다. "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뭐라고 하셨습니까?" 토비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앨 카루소는 따스하게 웃었다. "밀리가 자넬 사랑해. 나한테 그렇게 말하더군." 밀리? 그게 누구지? 카루소의 아내? 아니면, 딸? 친절한 앨 카루소는 그가 묻기도 전에 설명해 주었다. "밀리는 좋은 아가씨지. 3,4년 내가 옆에 두고 있었거든." 그리곤 두 호위병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4년이지?" 두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앨 카루소는 다시 토비에게 시선을 주고 얘기를 계속했다. "토비, 나는 그앨 사랑하네. 사실 홀딱 빠져 있지." 토비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카루소 씨..." 앨 카루소가 잠자코 계속했다. "밀리와 나 사이에 약조가 하나 있어. 나는 밀리와 마누라 외엔 절대 바람 피 지 않는다는 거, 밀리는 절대 날 속이지 않는다는거." 그러면서 다시 환하게 웃어 보였는데 토비는 저 귀염성 있는 미소 이면에 번 득이는 무언가를 보고 오싹하는 전율을 느꼈다. "카루소 씨 ..." "토비, 이거 아니? 자네가 밀리와 바람을 핀 첫 사내야." 그리곤 또 두 호위병에게 확인했다. "그게 틀림없는 사실이지?" 사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에 맹세컨대 밀리가 사장님 여자 친구란 건 몰랐습니다. 그런 사실을 알 았다면 절대 건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카 루소 ..." 산타클로스가 환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앨. 앨이라고 부르라니까." "앨." 목이 꽉 잠겨 쉰 목소리가 나왔다. 이제 손바닥에도 땀이 흥건했다. "앨, 앞으로... 앞으로 다신 만나지 않겠습니다. 절대로요. 믿어주세요. 전..." 카루소가 똑바로 쳐다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이봐! 자네 내 얘기 안 듣고 있군." 토비는 침을 꼴각 삼켰다. "아닙니다, 아녜요, 듣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다 알아들었습니다 그리 고 앞으로 걱정하지 않으셔도..." "그애가 자넬 사랑한다니까. 그애가 자넬 원한다면 난 그애에게 자넬 주고 싶 네. 나는 그애가 행복하길 원하니까. 알겠나?" "저는..." 토비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조금 저까지만 해도 카루소가 복수를 하러 찾아 온 줄 알고 진땀이 바작바작 났는데 그게 아니라 여자친구를 양보하겠다는 것이 었다. 토비는 안도감에 하마터면 소리내어 웃을 뻔했다. "그럼요, 앨. 바라시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밀리가 원하는 건 다 해줄 거지?" "예, 물론입니다." "자네가 착한 사람이란 건 내 진작에 알아봤지." 앨 카루소는 또 두 호위병에게 확인을 시켰다. "내가 토비 템플이 착한 사람이라고 말했지, 그렇지?" 두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콜라를 홀짝거렸다. 앨 카루소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두 호위병은 부리나케 몸을 일으켜 그의 양 옆에 섰다. "내가 직접 결혼식을 지휘하겠네. '모로코 호텔' 대형 연회실에서 성대하게 치러야지. 자넨 쓸데없는 신경 쓸 거 없네. 준비는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까." 토비에겐 그 말이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희미하게 다가왔다. 도저히 생시 같지가 않아 멍하기만 할 뿐이었다. "잠깐만요, 저는..." 이윽고 정신을 차린 토비가 저항을 시작했다. 그러나 카루소는 말도 못 꺼내게 토비의 어깨에 쇳덩리 같은 손을 척 올려놓 았다. "자넨 행운아야. 무슨 말인가 하면, 밀리가 둘이 정말 사랑하는 사이라고 얘 기 하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자네가 아무 사람도 없이 밀리를 서푼짜리 창녀처 럼 데리고 논 거였다면 결과가 딴판이 되었을 거란 얘기야. 알아듣겠어?" 토비는 자기도 모르게 두 검정 양복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거렸 다. "여기 공연이 토요일 밤에 끝나니까 결혼식은 일요일에 치르도록하지." 토비는 목구멍이 바싹 타들어가 쉰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저... 사실은, 앨, 다른 출연 계약이 좀..." "그건 뒤로 미루면 돼. 밀리의 웨딩드레스는 내 손으로 직접 골라줄 참이네. 그럼 잘 쉬게, 토비." 토비는 세 사나이가 뒤에도 한참이나 얼이 다 빠져서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 었다. 사실 그는 밀리가 어떤 계집앤지 기억조차 없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토비의 공포는 논녹듯 사라졌다. 워낙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그때는 간이 콩알만해져서 벌벌 떨었지만 갱단이 무법자처럼 날뛰던 시 대는 이미 지나갔으니까. 지금 세상에 누가 억지 결혼을 강요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앨 카루소는 저질 깡패가 아니라 어엿한 호텔 사장님이다. 어젯밤 당한 일을 곱씹어 생각할수록 새록새록 우스웠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일을 우스개 소재로 써먹을 수 있겠다 싶었다. 사실은 전혀 겁나지 않았지만 관객들에게 얘 기할 때는 질겁했던 것처럼 꾸미는 거다. 대충 다음과 같은 대본이 나오겠지. "식당에 떡하니 들어섰더니만 카루소가 고릴라 여섯 마리를 거느리고 앉아 있 지 뭡니까. 아, 진짜 고릴라는 아니고 고릴라처럼 우락부락한 사내들이었다. 이 거죠. 전부 총을 차고 있는 거 같았어요..." 그래, 그거야! 이거 잘하면 히트치겠는걸. 토비는 그 주 내내 풀장과 카지노에는 얼씬도 하지 않고 그 좋아하던 여자들 도 피했다. 앨 카루소가 겁나는 건 아니지만 쓸데없이 모험을 할 필요는 없으니 까. 그는 일요일 정오 비행기로 라스베이거스를 뜰 계획을 세웠다. 토요일 밤에 호텔 뒷문으로 렌트카를 불러 슬그머니 호텔을 빠져나가야지. 마지막 무대에 서 기 전에 짐을 다꾸려 놓고 공연이 끝나자마자 로스엔젤레스로 튀는 거야. 그리 고 당분간은 라스베이거스를 피해야겠지. 앨 카루소가 계속 귀찮게 굴면 클리프 톤 로렌를 대신 내세워 일을 처리하는 거야. 토비의 마지막 공연은 최고였다. 난생 처음으로 기립 박수까지 받았으니까. 토비는 무대에 우뚝 서서 객석으로부텨 밀려오는 사랑의 물결을 느끼면 따스하 고 부드러운 행복감을 마음껏 탐닉했다. 잠시 후,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성화에 못 이겨 한차례 앙코르 공연을하고 사정사정해서 무대를 내려온 뒤 급히 객실로 올라갔다. 그는 순식간에 스타가 되어 있었다. 웨이스트리스나 불구자 따위를 상대하던 올챙이가 감히 앨 카루소의 정부를 농락했으니... 이제 미녀들이 줄줄 이 따르고, 관객들이 환호하고, 일류 호텔들이 손을 벌리고 있다. 결국 해낸 것 이다. 그러나 이건 시작일 뿐이다. 토비는 주머니에서 객실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안에 들어서니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친구" 토비는 느릿느릿 방안으로 들어섰다. 앨 카루소와 두 친구가 와있었다. 오싹 하는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분위기를 보아 하니 지레 떨기부터 할 건 없었다. 카루소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토비, 오늘밤 근사했어, 자네 정말 대단해." 서서히 긴장이 풀렸다. "관객들이 훌륭했죠." 카루소의 갈색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토비, 자네가 훌륭한 관객을 만든 거지. 전에도 말했잖나. 자넨 재능이 있다 고." "감사합니다, 앨." 속으론 저들이 빨리 나가 줬으면 싶어서 안달이 났다. 그래야 계획대로 줄행 랑을 놓을 수 있으니까. "자네 아주 열심히더군." 앨 카루소는 다시 버릇처럼 두 보좌관을 보며 확인했다.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 친구는 처음 본다고 내가 말했었지?" 두 사내는 고개 를 끄덕였다. "이봐, 자네가 통 연락을 안 하니까 밀리가 야단이야. 그래서 내말했지. 자네 가 워낙 열심히 일에 매달리는 친구라서 그런 거라구." "맞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앨." 토비가 얼른 맞장구를 쳤다. 앨을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그런데 한 가지 이해 못 할 일이 있어. 결혼식이 몇 신지 묻는 전화도 한 통 없었잖아." "아침에 전화드리려고 했습니다." 앨 카루소는 웃으면서 비난조로 말했다. "LA.에서?" 토비는 다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제 카루소는 노골적으로 꾸짖었다. "저기 짐도 싸놨잖아." 그리곤 장난스럽게 토비의 볼을 꼬집으며 덧붙였다. "내 말했었지, 밀리를 슬프게 하는 놈은 다 죽여 버리겠다고." "잠깐만요! 하늘에 맹세코 저는..." "토비, 자넨 마음씨는 좋은데 어리석어. 천재들은 다들 좀 그런가봐, 엉?" 토비는 말문이 막혀 우두망찰 저 환하게 미소 짓는 토실토실한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앨 카루소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널 믿게. 난 자네 친구야. 자네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내가 막아주 지. 나의 밀리를 위해서. 그러나 자네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 까? 자네 고집 센 노새를 어떻게 다루는지 아나?" 토비는 그저 고개만 저었다. "첫째, 두께 2인치, 길이 4인치짜리 각목으로 대갈통을 후려갈기는 거야." 우리의 토비는 공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자네 왼손잡인가, 바른손잡인가?" "예?... 바른손요." 카루소는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두 호위병을 향해 명령했다. "분질러 버려." 두 사내가 어디에 숨기고 왔는지 갑자기 자동차 바퀴에 감는 쇠사슬을 꺼내들 고 다가왔다. 토비는 꼼짝못하고 서서 온몸을 사시나무 떨둣 했다. "이런 맙소사, 이러지 말아요." 그건 너무나도 맥아리 없는 저항이었다. 사내 하나가 그의 명치에 무서운 일격을 가했다. 다음 순간, 쇠사슬이 오른팔 을 갈려 뼈가 바스라지면서 격렬한 통증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토비는 비명을 내지르려 했지만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눈물로 흐릿해진 시선을 드니 앨 카루소가 웃는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정신이 드나?" 너무나도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토비는 고통 속에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카루소는 부하들에게 다음 명령을 내렸다. "바지 지퍼를 열어." 부하 하나가 토비의 바지 지퍼를 내렸다. 그리곤 쇠사슬로 툭 쳐서 남근을 밖 으로 내놓았다. 카루소는 잠시 묵묵히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토니, 자넨 행운아야. 대단한 물건을 가졌어" 토비는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맛보는 격렬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목쉰 소리로 꺽꺽거렸다. "오, 하느님... 제발... 이러지 말아요... 제발..." "자넬 해칠 생각은 없어. 밀리한테 잘해 주기만 하면 자넨 내 친구야. 만약 자네가 밀리를 괴롭히거나 불행하게 만든다는 소문이 내귀에 들려오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 그가 구두코로 토비의 부러진 팔을 콕콕 찌르자 토비는 몸을 비틀며 비명을 질렀다. "이제 서로를 이해하게 돼서 기쁘네. 결혼식은 오후 1시야." 정신이 가물거려 카루소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했다. 그러나 예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안 돼요. 팔 때문에..." "그건 걱정 말게. 지금 의사가 이리로 오고 있는 중이니까. 부러진 팔을 맞춰 주고 진통제도 줄 거야. 내일 이 친구들이 자넬 데리러 올 걸세. 준비하고 있 게, 엉?" 토비는 하릴없이 누워 산타클로스의 웃는 얼굴만 올려다 보고 있었다. 이건 악몽이가. 생시라면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카루소의 구둣발이 다시 다친 팔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그, 그럼요. 준비하고 있겠어요." 토비는 그렇게 신음하고 내뱉고 의식을 잃었다. @ff 억지 결혼식 '모로코 호텔' 연회실에서 예식과 피로연이 함께 열렸다. 라스베이거스 사람 절반은 거기 모인 것 같았다. 연예인들, 호텔 사장들, 쇼걸들... 그 한가운데 앨 카루소가 앉아 있었다. 그와 한 테이블에 앉은 스물댓 명의 친구들은 보수적 인 차림의 조용한 사람들로 거의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식장은 눈이 휘둥그레 질 만큼 호화판이었다. 지천으로 널린 아름다운 꽃에, 진수성찬으로 차린 뷔페 에, 샴페인이 흘러넘치는 분수대 두 개, 좌석마다 돌며 멋진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들... 모두 앨 카루소가 각별히 신경써서 준비한 것이었다. 하객들은 실수로 계단에서 넘어져 팔에 깁스를 하고 나오는 신랑에게 측은한 눈길을 보내면서도, 신랑 신부가 그림같이 어울리고 예식도 너무 근사해 하나같 이 흐뭇하고 부러워하는 표정이었다. 토비는 의사가 준 독한 마취제 때문에 정신이 가물거려서 결혼식 내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다. 그러다 약효가 떨어지면서 다시 통증이 기승을 부 리기 시작하자 분노와 증오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객들에게 이 기가 막힌 폭력의 진상을 낱낱이 폭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토비는 저 건너편에 있는 신부에게 눈길을 주었다. 이제야 밀리가 누군지 기 억났다. 밀리는 황금색 머리칼과 수려한 용모를 지닌 이십대의 아름다운 아가씨 였다. 그녀는 토비가 공연할 때마다 유난히 요란하게 웃으며 늘 주위에서 알짱 거렸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침실로 이끌었더니 뜻밖에도 싫다고 빼는 것이었다. 여간해서 여자에게 거절당해 본 일이 없는 토비는 더더욱 구미가 당겼다. "난 아가씨한테 홀딱 반했다구. 아가씬 내가 안 좋아?" 토비는 공연히 몸이 달아 싫다는 밀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물론 좋아요. 그치만 난 남자 친구가 있어요." 왜 그때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던고! 그날 밤 토비는 술이나 한잔하자고 살살 꼬셔서 기어코 밀리를 객실로 데리고 올라가 우스개와 익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곤 밀리가 웃느라고 혼이 쏙 빠진 틈을 타서 슬금슬금 옷을 다 벗겨버렸다. 밀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안 된다 고 애걸했다. "토비, 이러지 말아요. 이럼 안 돼요. 내 남자 친구가 화낼 거예요." "남자 친구는 잊어버려. 그치는 내가 나중에 손봐 줄 테니까. 이제 아가씬 내 거야." 그들은 밤새도록 미친 듯이 사랑을 나누었다. 그런데 잠깐 눈을 붙였다가 아 침에 깨어보니 밀리가 누운 채로 훌쩍거리고 있었다. 토비는 뭉클 애잔한 마음 이 일어 그녀를 품에 안고 다독거렸다. "이봐, 내 사랑, 왜 그래? 나랑 같이 있는 게 싫어?" "좋아요. 그치만..." "자자, 그만그만, 뚝 그쳐요. 당신을 사랑해." 밀리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토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토비, 그게 정말이에요? 진심이세요?" "아, 그렇잖구." 그거야 물론 순간적인 감정이었다. 토비가 샤워를 끝내고 젖은 모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자기 주제곡을 흥얼거리 면서 욕실에서 나오자 밀리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행복하게 웃으며 말했 다. "있잖아요, 토비, 난 당신한테 첫눈에 반했던 거 같아요." "우와, 근사한데. 자, 그럼 아침이나 시켜 먹자구."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하룻밤 재미로 끼고 잔 계집 때문에 앞으로 평생을 죽쑤게 되어 버린 것이다. 눈부신 웨딩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신부가 화사하게 웃으며 신랑을 향해 다 가갔다. 그러나 오늘의 신랑은 우두커니 서서 지지리도 복이 없는 자기 인생과 툭하면 사고나 저지르는 남근과 생일을 저주라고 있었다. 리무진 앞좌석에 앉은 사내가 끼득끼득 웃으며 감탄조로 말했다. "하여튼 사장님은 아무도 못 당한다니까요. 그 불쌍한 새끼 아직도 어리벙벙 할 거예요." 카루소는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일이 제대로 풀린 것이다. 극성스러운 마누라가 밀리와의 관계를 눈치채자 그러잖아도 저 금발 쇼걸을 떼버릴 궁리로 골머리를 앓던 중이었는데 때마침 토비가 나타나 주었으니... "놈이 밀리한테 잘하는지 계속 감시하라구." 카루소의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토비와 밀리는 '베네딕트 캐년'의 작은 집에서 신접 살림을 시작했다. 애초에 결혼에 마음이 없었던 토비는 틈만 나면 헤어질 궁리만 했다. 고의적으로 아내 를 비참하게 만들어 그녀 쪽에서 먼저 이혼을 요구해 오도록 만들 수도 있고, 다른 사내와 놀아났다는 누명을 씌워 이혼을 요구할 수도 있다. 아니면 카루소 가 어떻게 나오든 그냥 훌쩍 떠나 버려? 하지만 딕 랜드리한테 앨 카루소에 대 한 얘기를 듣자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몇 주쯤 뒤에 토비와 랜드리는 '벨 에어 호텔'에서 만나 점 심을 함께 했다. 그때 랜드리가 불쑥 물었다. "앨 카루소에 대해서 제대로 알기는 하는 거유?" "왜요?" 토비는 빤히 쳐다보며 반문했다. "토비, 그자와 어울리지 말아요. 살인마니까.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는 떠 도는 소문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이오. 카루소 부하 하나가 수녀원에서 갓나 온 열아홉 먹은 처녀랑 결혼을 했지. 그런데 일년쯤 뒤에 아내가 딴 사내랑 바 람을 피우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 그래서 앨한테 그 애길 했대요." 토비는 랜드리에게 시선을 박고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죠?" "카루소 부하들이 정육점에서 쓰는 고기칼을 들고 가서 그 사내거시기를 싹둑 잘라 버렸다오. 그리고는 그걸 가솔린에 푹 담갔다가 사내가 보고 있는 앞에서 불에 태웠대요. 사내는 출혈이 심해 목숨까지 잃었구." 순간 토비는 카루소가 바지 지퍼를 열어 겁을 주던 광경이 떠올라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방금 먹은 음식을 다 게워낼 듯 속도 미식거렸다. 이제 그는 결혼의 덫에서 빠져나갈 길이 전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열 살이 된 조세핀은 비로소 빠져나갈 길을 발견했다. 그것은 엄마의 벌과, 지옥불가 저주에 대한 끊임없는 협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 었다. 그 세계는 신비와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조세핀은 어두컴컴한 영 화관 안에 몇 시간이고 죽치고 앉아 스크린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화려한 인물 들을 바라보았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아름다운 저택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어린 조세핀은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 다. 나도 언젠가는 할리우드에 가서 저들처럼 살 테야. 그러기 위해선 엄마의 이해가 필요했다. 조세핀 엄마는 영화란 죄다 악마의 생각을 담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조세 핀은 동네 아기를 보아 주고 받은 돈으로 몰래 영화관에 다녀야 했다. 오늘 상 영된는 영화는 사랑 이야기였다. 조세핀은 잔뜩 기대감에 차서 목을 길게 빼고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먼저 자막이 나오기 시작했다. 미치광이 집단 샘 윈터즈는 이따금 자신이 영화 스튜디오의 책임자가 아니라 미치광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날뛰는 정신병원 원장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하였다. 요즘 같은 때가 바로 그랬다. 정말이지 골치 아픈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간밤에 또 스 튜디오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번으로 네 번째였다. 게다가 "마이 맨 프라이데 이"의 주인공이 하늘 같은 광고주님을 모욕해서 그 프로 자체가 도중하차할 위 험에까지 이르렀다. 또 천재감독 버트 파이어스톤이 무려 5백만 달러를 쏟아부 은 작품을 도중에 포기해 버렸고 테시 브랜드는 촬영 날짜가 코앞에 닥친 영화 를 못하겠다고 버티고 있었다. 샘은 소방대장과 스튜디오 회계 검사관을 불러놓고 앉아 있었다. "간밤 화재 사건 피해는 얼마나 심각하오?" 샘이 회계 검사관에게 물었다. "세트 전체를 못쓰게 됐습니다. 15번 무대는 완전히 다시 만들어야하고 16번 무대는 보수 작업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공사 기간이 3개월 필요할 겁 니다." "3개월은 기다릴 수 없소. 골드윈에 전화해서 거기 세트를 빌려씁시다. 이번 주말을 이용해 새 세트를 만들고, 인부들을 총동원해요." 샘 그렇게 지시하고 나서 배우 조지 밴크로프트를 닮은 레일리 소방대장을 돌 아보았다. "윈터즈 씨, 아무래도 이 스튜디오에 앙심을 품은 자가 있는 것같습니다. 네 건의 화재가 모두 고의적인 방화가 분명해요. 불평분자가 없는지 알아보셨습니 까?" 불평분자라면 최근에 강제로 해고된 사람이나 인사에 불만이 있는 직원일 터 였다. "인사 기록불를 두 번씩이나 확인해 봤어요. 도데체 그럴 만한 사람이 없습니 다." "방화범이 누군지는 몰라도 스튜디오 사정을 소상히 알고 있는 잡니다. 내부 에 미리 시한 장치를 해놓고 저지른 방화입니다. 전기공일 수도 있고 기계 기술 자일 가능성도 있어요." "고맙습니다. 참고하죠." "타히티에서 로저 탭 씨 전화입니다." "연결해 줘요." 탭은 현재 타히티에서 해외 촬영중인 텔레비젼 연속물 "마이 맨프라이데이"의 프로듀서였다. "무슨 일이오?" 전화가 연결되자 샘이 대뜸 물었다. "샘, 이 얘기 들으면 기절할 겁니다. 우리 프로 광고주 회사 필립헬러 회장이 가족동반으로 여기 놀러 왔어요. 어제 오후에 촬영을하고 있는데 쵤영장에 나타 났더라구요. 그런데 주인공 토니 플레치가 그분들한테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어쨌는데요?" "여기서 당장 꺼지라고 했다니까요." "이런 우라질!" "내 말이 그 말입니다. 헬러가 화가 머리 끝가지 올라 당장 프로를 중단시키 겠대요." "당장 헬러한테 달려가소 손바닥이 닳도록 빌어요. 샘은, "이봐, 이 미친놈 아..."로 시작해 다음과 같이 끝을 맺었다. "이봐, 나도 자네를 좋아해. 내 여기 급한 일이 대충 정리되면 그리로 한번 가지. 토니, 제발 부탁인데 헬러 부인하고 바람 피면 안돼!" 다음 골칫거리는 '팬 - 퍼시픽 스튜디오'를 파산시키기 일보 직전인 젊은 천 재 감독 버트 파이어스톤이었다. 그가 감독을 맡고 있는 영화 '언제나 내일은 있다'는 촬영 개시 백일하고도 열흘이 지났고 이미 백만 달러 이상의 예산을 쏟 아부었다. 그런데 갑자기 버트 파이어스톤이 촬영을 중지하는 바람에 영화에 투 입된 스타들과 자그마치 백오십 명의 엑스트라들이 손놓고 앉아 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올해로 서른인 버트 파이어스톤은 시카고에서 제법 잘 나가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만들다가 영화가 좋다고 무작정 할리우드로 뛰어든 괴짜였다. 그의 첫 세 작품은 그저 그런 정도였으나 네 번째 영화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리 하여 파이어스톤은 하루아침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다. 샘은 그와 처음 만났던 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파이어스톤은 수염도 안 난 열다섯 애송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색은 창백했고 검정 뿔테 안경 속에 조그만 분 홍색 눈동자가 숨어 있었다. 샘은 혈혈단신으로 할리우드에 건너온 외롭고 수줍 은 청년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래서 평소의 그답지 않게 '언제나 내일은 있다' 이야기를 꺼냈을 때 파이어스톤은 황송해서 몸둘 바를 몰랐다. 그러면서 한번 열심히 배워 보겠노라고 맹세 했다. 샘이 하는 말이면 무조건 수긍하는 눈치였 다. 일단 자기에게 작품을 맡겨만 주면 '윈터즈 부사장님'의 탁월한 견해에 그 대로 따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계약 이전의 얘기였다. 일단 계약이 이루어지자 파이어스톤은 알 베르트 슈바이처를 닮은 아돌프 히틀러로 돌변했다. 사과알처럼 붉은 뺨을 지닌 순진한 소년이 하루아침에 살인마가 되어 버린 것 이다. 일단 칼자루를 잡자 파이어스톤은 제멋대로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샘의 배역 제안을 철저히 무시했고 이미 샘의 결재가 떨어진 훌륭한 대본을 완전히 뜯어고쳐야 된다고 고집을 부렸으며 결정이 다 된 촬영지를 거의 모두 바꿨다. 샘은 당장 그를 내치고 싶었지만 뉴욕 본사에서 참고 기다려 보자고 했다. '팬 - 퍼시픽' 사장 루돌프 허저손이 파이어스톤의 네 번째 영화가 벌어들인 거액에 단단히 최면이 걸렸던 것이다. 샘은 본사의 지시를 거역할 수 없어 그냥 손놓고 앉아 있었다. 파이어스톤은 갈수록 더 방자해졌다. 제작 회의 때면 조용히 앉아 노련한 스 튜디오 각 부서 책임자들의 이러저러한 의견들을 듣고 있다가 마지막에는 한 사 람씩 차례로 난도질을 했다. 샘은 이를 갈면서도 묵묵히 견뎠다. 얼마 안 가 파 이어스톤은 "황제"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본인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시카고 에서온 꼴보기 싫은 애송이"라고도 불렸다. 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 새끼는 암수 한 몸이야. 그래서 제가 저한테 씨를 뿌려 머리 둘 달린 괴 물을 낳을 거라구." 그 파이어스톤이 느닷없이 촬영을 중단해 버린 것이다. 샘은 기술부 부장 데블린 켈리를 찾아갔다. "이유가 뭔가?" "그 꼴보기 싫은 애송이가..." "파이어스톤 감독이라고 불러요." "죄송합니다. 파니어스톤 감독이 성 세트를 준비해 달라고 했었죠. 직접 스케 치를 해서 보여주면서 말입니다. 부사장님도 결재를 하셨구요." "그랬지 그런데 무슨 일이오?" "그 새끼가 요구한 그대로 세트를 만들어 줬지요. 그런데 어제 한번 떡 보고 나더니 그 세트가 필요없대요. 50만 달러를 들여서 겨우..." "내가 직접 얘기해 보지." 버트 파이어스톤은 23번 무대 뒤편에서 스탭들과 농구를 하고 있었다. 땅에 라인도 그려 놓고 농구대도 양쪽에 갖다놓고 제법 모양이 그럴싸했다. 샘은 잠시 우두커니 서서 그 꼴을 지켜 보았다. 저들이 농구를 하며 노닥거리 는 동안 시간당 스튜디오 경비 이천 달러씩이 낭비되고 있었다. "버트!" 고개를 돌린 파이어스톤은 샘을 보고는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때 공 이 오자 턱 받아 드리블해서 들어가더니 페인트 모션을 했다가 바구니에 집어 넣었다. 그리곤 샘에게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버트 파이어스톤의 환하게 웃는 동안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혹시 저자가 정신 병자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천재일지는 몰라도 미친 놈이 분명 하다. 그런 자의 손에 5백만 달러를 쥐어 줬으니... "새로 만든 세트에 문제가 있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인지 해결부터 하세." 버트 파이어스톤은 태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해결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샘. 그 세트는 안 돼요." 샘은 부아가 치밀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자네가 주문한 그대로 만들어 줬는데. 자네가 직 접 스케체까지 했잖아. 그런데 안 된다니. 뭐가 잘못 됐는지 말하게." 파이어스톤은 빤히 쳐다보며 눈을 껌벅거렸다. "글세, 잘못된 건 없다니까요. 그냥 제 마음이 변한 겁니다. 성은 필요없어 요. 그건 적절한 배경이 못 된다구요. 무슨 소린지 아세요? 엘렌과 마이크가 타 고 떠날 때의 갑판에 찾아가 작별을 나누는 걸로 처리하고 싶어요." 샘은 기가 막혔다. "버트, 우린 배가 없어." 버트 파이어스톤은 기지개를 켜며 히물히물 웃었다. "샘, 하나 만들어 주세요." 잠시 후 샘은 루돌프 허저손 사장과 장거리 전화를 하고 있었다. "그래그래, 나도 분통이 터져 미치겠군. 하지만 샘, 지금 그를 쫓아낼 순 없 어. 이미 너무 진척이 많이 됐다구. 게다가 다른 쓸 만한 인재도 없잖은가. 버 트 파이어스톤은 우리의 스타야." "지금 예산이 얼마나 초과됐는지..." "알아, 알아. 골드윈이 이런 말을 했었지. "내 저 개새끼는 절대 안 쓸 거야. 지금은 필요하니까 할 수 없이 그냥 보고 있지만." 일단 이 영화는 끝마쳐야 해." "그건 실수하는 겁니다. 더 이상 눈감아 주면 안 됩니다." 그래도 샘은 고집을 꺽으려 들지 않았다. "샘, 파이어스톤이 지금까지 찍어 놓은 게 마음에 안 드나?" 샘은 정직하게 대답했다. "지금까지는 아주 좋습니다." "그럼 배를 만들어 줘." 결국 배 세트는 열흘 만에 완성되었고 버트 파이어스톤은 "언제나 내일은 있 다." 촬영을 속개했다. 그리하여 그 해 최고의 흥행작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 다음 골칫거리는 테시 브랜드였다. 테시는 미국 최고의 여가수였다. 샘 윈터즈가 그녀에게서 세 편의 영화 출연 계 약을 따냈을 때는 할리우드가 발칵 뒤집혔었다. 다른 스튜디오들이 테시의 대리 인에게 열심히 포섭 작전을 펴는 동안 샘은 조용히 뉴욕으로 날아가 테시의 쇼 를 관람하고 나서 그녀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그 저녁 초대는 이튿날 아침 7 시까지 계속 되었다. 테시 브랜드는 샘이 만난 여자들 중에서 제일 못생겼지만 재능은 가장 뛰어났 다. 물론 중요한 건 외모가 아니라 재능이었다. 브루클린 거리의 가난한 재단사 를 아버지로 둔 케시는 평생 정식 음악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녀가 무대에 올라 서까래를 들썩거리게 하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관객들은 열광했다. 원래 테시는 겨우 6주 공연으로 막을 내린 브로드웨이의 어 느 시시껄렁한 뮤지컬 대역을 맡고 있었다. 마지막 공연날 이 뮤지컬의 여배우 한 명이 아파서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그날 데뷔 무대에 선 테시 브랜드는 객석에 드문드문 앉은 몇안 되는 관객들을 위해 목이 터지도 록 열심히 노래했다. 그런데 그 관객들 틈에 브로드웨이 뮤지컬 제작자 폴 배릭 이 끼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다음 작품에 테시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 테시 는 그저 그런 작품을 대히트작으로 만들었다. 비평가들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 하여 못생긴 여가수 테시 브랜드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칭송했다. 테시는 첫 독 집 레코드를 녹음했다. 그 레코드는 하루아침에 인기 순위 1위에 올랐다. 그래 서 앨범을 내놓았는데 첫 달에 무려 이 백만 장이 나갔다. 이제 그녀는 무엇이 든 만지기만 하면 금덩이가 되는 황금 손을 가진 마이더스 여왕이 되었다. 브로 드웨이의 뮤지컬 제작자들과 할리우드에서도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못난 얼굴을 보고 약간 주춤하신 했지만 그렇다고 굴러다니는 돈덩어리를 그냥 포기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샘은 테시 브랜드와 만나 채 5분도 지나기 전에 그녀를 다루는 법을 터득했 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테시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걱정스러운 건 영화관의 대형 스크린에 내 얼굴이 어떻게 비칠지예요. 난 사 실 그냥 실물 크기로도 얼굴이 박색이거든요, 안 그래요? 스튜디오마다 내 얼굴 을 예쁘게 찍어 주겠다고 약속하지만 난 그 말 안 믿어요." "맞는 말이에요." 샘이 그렇게 맞장구를 치자 테시는 뜻밖이라는 듯 빤히 쳐다보았다. "테시, 얼굴을 뜯어고치는 실수는 저지르지 말아요. 그러면 자신을 망치게 되 니까." "예?" "대니 토마스가 "MGM"과 출연 계약을 했을 때, 거기서 대니에게 코 성형을 좀 하라고 권했지요. 대니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계약을 취소했어요. 왜냐면 그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팔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당신도 마찬 가지에요. 당신이 팔아야 할건 테시 브랜드 자신이지 성형 미인이 아닙니다." "이제야 얘기가 통하는 사람들 만났군요. 당신은 제대로 된 사람이에요. 결혼 하셨어요?" "아니오." "그럼 여기저기서 바람피우고 다니세요?" 샘은 웃으며 대꾸했다. "가수와는 바람피운 적 없어요. 음아가에 대한 안목이 없어 놔서." "안목 같은 건 필요없어요. 당신이 맘에 들어요." "나와 함께 영화 몇 편 제작할 수 있을 만큼요?" 테시는 빤히 쳐다보며 대답했다. "예." "좋습니다. 당신 대리인과 계약 작업을 하죠." 테시가 샘의 손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정말로 바람 안 피워요?" 테시 브랜드가 주연한 두 영화는 대히트였다. 테시는 첫번째 영화로 아카데미 상 후보에 올랐고 두 번째 영화로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세계 각지에서 테시가 출연하는 영화를 보려는 인파가 영화관 앞에 장사진을 쳤다. 테시는 만능이었 다. 코믹 연기도 제법 잘 해냈고 노래는 따를 자가 없었으며 연기력도 좋았다. 그녀의 못생긴 얼굴은 뜻밖에도 큰 재산이 되었다. 열등감에 시달리던 모든 수 수하고 외로운 여자들이 테시 브랜드를 통해 대리 만족을 얻으면서 그녀를 뜨겁 게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테시는 첫번째 영화의 상대역과 결혼했다가 재촬영이 끝나자 바로 이혼하고 두 번째 영화의 상대역과 다시 결혼했다. 그 결혼 역시 깨지기 직전이라는 소문 이 파다했으나 샘은 할리우드의 스캔들이 신물나기도 하고 또 자기랑 아무 상관 없는 문제라고 생각해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샘은 테시의 대리인 배리 허먼과 통화하고 있었다. "배리, 무슨 일입니까?" "테시가 출연하는 새 영화 말인데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가 봅니다." 샘은 부아가 치밀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제작자, 감독, 대본까지 다 좋다고 해놓고서. 세트장도 다 마련됐고 이제 촬영 개시만 하면 돼요. 지금 와서 빠질 순 없어요. 만일..." "빠지겠다는 게 아녜요." 샘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그럼 도데체 원하는 게 뭡니까?" "제작자를 다른 사람으로 바꿨으면 해요." "뭐요?" 샘은 수화기에 대고 버럭 소리쳤다. "랠프 대스틴은 테시를 이해하지 못해요." "대스틴은 이 업계 최고의 제작자예요. 그녀한테 대스틴을 만난게 행운이라구 요." "샘, 그건 나도 잘 압니다. 둘 사이에 살이 꼈는지 그냥 싫다는 걸 어쩝니까. 제작자가 안바뀌면 영화 안 찍겠대요." "배리, 이미 계약이 된 거예요." "그건 우리도 알지요. 제발 오해 말아요. 테시도 계약을 깨고 싶은 마음은 눈 곱만치도 없어요. 어쩔 수 없어서 이러는 거예요. 테시는 기분이 맞지 않으면 아주 신경질적이 돼서 대사도 제대로 못해요." "다시 전화하죠." 샘은 야멸차게 내뱉고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염병할 계집! 지금에 와서 대스틴을 쫓아 내라는게 무슨 당치도 않은 주문인 가. 침실로 유혹했는데 대스틴이 응하지 않았다든가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에 저러는 게 분명하다. 샘은 루실에게 지시했다. "랠프 대스틴 좀 불러 줘요." 랠프 대스틴은 쉰 줄의 온화한 사내였다. 원래는 작가로 시작했다가 감독이 된 인물로 그의 영화엔 심미안과 매력이 있었다. "랠프,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지..." 대스틴이 손을 들며 말을 끊었다. "샘, 굳이 변명할 필요 없어요. 그러잖아도 그만둔다는 얘기하러 온 거니까." "이게 도데체 무슨 일입니까?" 대스틴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대꾸했다. "우리의 스타께서 또 몸이 근질근질해서 시원하게 긁어 줄 사람이 필요한가 봅니다." "그럼 테시가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새 제작자가 있단 말예요?" "이런, 세상에... 도데체 어디 갔다 왔어요, 화성에? 신문 가십란도 안 읽고 살아요?" "꼭 읽어야할 경우가 아니면 안 읽어요. 그래 도데체 그자가 누굽니까?" "그자라고 할 수는 없지요." "뭐라구요?" "테시의 의상 담당 디자이너예요. 바바라 카터라고." "그게 정말이에요?" "지금 이 바닥에서 그걸 모르는 사람은 샘 당신뿐이에요." 샘은 고개를 저었다. "테시가 동성연예자인 줄은 몰랐는데." "샘, 인생은 셀프 서비스 식당이고 테시는 굶주린 여자예요." "난 4백만 달러짜리 영화에 우라질 여자 의상 디자이너를 끌어다 붙일 수 없 어요." 대스틴이 씩 웃으며 말했다. "샘, 금방 그 말 실수예요." "뭐가요?" "지금 테시가 소리 높여 부르짖는 바가 이 업계에 여성에 대한 차별이 너무 심하다는 거예요. 우리의 스타가 여권운동가가 됐다는 거 몰랐어요?" "아무튼 난 못합니다." "그거야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문제가 아니지만 충고 한마디 하자면 이 영화 를 만드는 길은 그 방법밖에 없어요." 샘은 배리 허먼에게 다시 전화했다. "랠프 대스틴이 빠졌다고 테시에게 전해요." "테시가 기뻐할 겁니다." 샘은 이를 갈며 물었다. "혹시 테시가 따로 점찍어 둔 제작가가 있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요. 테시가 아주 재능 있고 의욕에 찬 젊은 아가씨 한 사람을 발견했어요. 샘, 당신의 뛰어난 지도를 받으며..." "마음에도 없는 아부는 그만두고, 그 여자아니면 안 돼요.?" "샘, 아무래도 그런 것 같소. 미안해요." 바바라 카너는 예쁜 얼굴과 날씬한 몸매를 지닌 지극히 여성스러운 아가씨였 다. 샘이 빤히 쳐다보고 있는 동안 그녀는 가죽 소파에 앉아 잘 빠진 다리를 우 아하게 꼬았다. 말을 시켜 보니 목소리가 약간 허스키한 것도 같았는데 그건 동 성연애자라는 선입견 때문에 지레 그렇게 들린 것일 수도 있었다. 바바라 카터 는 부드러운 회색 눈으로 샘을 찬찬히 뜯어보며 입을 열었다. "어쩌다 보니 제가 곤란한 입장에 서게 된 거 같아요. 윈터즈 부사장님. 저 때문에 다른 사람이 밀려나는 건 절대 제가 바라던 바가 아녜요. 그런데..." 자기도 어쩔 수 없었다는 표시로 두 손을 올려 보인다. "...브랜드 여사가 저 아니면 영화를 찍을 수 없다고 우기는 바람에 그만 이 렇게 되고 말았어요. 제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으세요?" 샘은 여자가 얼굴도 못 들게 면박을 주고 싶은 걸 꾹 참고 말했다. "이 계통에 경험이 있습니까? 의상 디자이너 말고 말이오." "극장 안내인도 해봤어요. 덕분에 영화를 아주 많이 봤구요." 죽이는군! "브랜드 여사가 당신에게 영화 제작을 맡겨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뭐죠?" 그 얘기가 나오기가 무섭게 바바라 카터는 물을 만난 고기처럼 기운이 넘쳤 다. "테시하고 저는 이 영화에 대해 얘기를 많이 했어요." 이제 "브랜드여사"라고도 안 부르는군. "대본을 봤더니 잘못된 부분이 많더군요. 그래서 테시한테 그런 얘기를 했더 니 자기도 동감이라고 하더군요." "그럼 흥행작을 대여섯편이나 만들었고 아카데미상까지 받은 작가보다 카터 양이 영화 대본에 대해 더 잘 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 그런 말씀이 아녜요, 윈터즈 부사장님. 그분보다 제가 여자에 대해 더 잘 안다는 거죠." 바바라의 회색 눈동자와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여자들 얘기를 늘 남자들이 쓰는 게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여자들 감 정은 여자만이 알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샘은 머리 싸움이라면 진저리가 났다. 싫지만 별수없이 그녀를 써야 했다. 어 떻게 해서든 영화를 만들어내는 게 스튜디오 제작 담당자의 직무니까. 테시 브 랜드가 애완 동물로 기르고 있는 다람쥐를 제작자 자리에 앉히고 싶어한다면 그 날부터 도토리를 사 날라야 하는 것이 샘의 처지였다. 테시 브랜드가 출연하는 영화는 2천에서 3천만 달러를 쉽게 벌어들일 수 있었다. 게다가 바바라 카터가 끼여든다 해도 영화를 망칠 일은 없었다. 이미 촬영이 임박해서 대대적으로 뜯 어고치는 건 아예 불가능하니까. 샘은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직접 만나 보니 아주 믿음직스럽군요. 일을 주겠소. 축하해요." 이튿날 아침, '할리우드 리포터'와 '데일리 버라이어티'는 1면에 바바라 카터 가 테시 브랜드의 새영화 제작자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대문짝만하게 실었다. 샘은 신문을 홱 구겨서 쓰레기통에 처박으려다 맨 하단의 토막 기사를 보고 얼 른 다시 펼쳤다. "토비 템플, 타호 호텔 라운지 공연 계약 체결." 토비 템플. 샘은 군복 차림의 저 열정적인 젊은 코미디언을 생각하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리곤 템플이 할리우드에서 공여하게 되면 한번 찾아가 보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왜 토비 템플이 이제껏 한 번도 연락이 없었지?" 미운 아내 토비 템플은 공교롭게도 미운 아내 덕에 스타덤에 오를 수 있었다. 사실 결혼 전까지만 해도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수십 명의 신인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 다. 그런데 결혼 이후 토비 템플의 코미디에 '증오'라는 새로운 요소가 부가되 었다. 그건 원치 않았던 결혼과 아내에 대한 맹렬한 증오심 때문이었다. 토비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밀리는 아주 착하고 헌신적인 아내였다. 남편을 뜨겁게 사랑했고 남편이 기뻐할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우선 밀리는 '베네딕 트 캐년'의 집을 아름답게 꾸몄다. 그러나 밀리가 그렇게 정성을 쏟을수록 토비 의 증오는 더해만 갔다. 하지만 밀리가 앨 카루소에게 울면서 전화로 하소연하 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겉으로는 좀스러울 정도로 정중하게 대했다. 그때 호텔방에서 쇠사슬로 팔을 얻어맞고 격렬한 고통에 몸부림치던 일과 앨 카루소 의 무서운 얼굴을 목숨이 붙어 있는 한은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토비는 아내에 대한 증오를 관객들에게 쏟아부었다. 그가 무대에 서 있는 동 안 접시를 달그락거리거나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거나 감히 잡답을 하는 관객은 즉석에서 무자비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크게 죄도 없는 관객에게 그렇게 호 된 공격을 퍼부어도 토비의 표정이 워낙 악의없고 순수했기에 사람들은 오줌을 질금질금 싸도록 웃어댔다. 천진스럽고 정직한 얼굴과 날카롭고 가차없는 혀가 환상의 조화를 이루어 토비의 인기는 날로 치솟았다. 관객들에게 아무리 무례한 공격을 퍼부어도 절대 노여움을 사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토비 템플의 잔인한 공격을 받는 걸 영광으로까지 여겼다. 그의 쏟아져 나오는 독설은 그저 우스개일뿐 진의는 절대 아니라는 확신에서였다. 그리하여 그저 유명한 신인이 었던 토비 템플은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코미디언으로 급부상했다. 유럽에서 돌아온 클리프톤 로렌스는 토비가 쇼걸과 결혼한 걸 알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었다. 그가 생각했던 토비가 할 짓이라곤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 래서 어떻게 된 거냐고 따져 묻자 토비는 똑바로 쳐다보며 대꾸했다. "뭐가 어떻다고 그러세요, 클리프? 밀리를 만났고 둘이 사랑에 빠졌고 그래서 결혼하게 된 건데." 그 목소리에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클리프톤은 전 혀 예상치 못했던 토비의 태도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 인가가 하늘 높은 줄을 모르는구만. 방금 라스베이거스 '선더버드 호텔 '과 4주 계약을 체결했네. 자그마치 주당 2천 달러야." "순회 공연은 어쩌구요?" "그건 포기하게. 라스베이거스 수입이 열 배는 넘으니까. 게다가 관객들도 수 준급이고." "베이거스 계약을 취소하세요. 순회 공연을 계속하겠어요." 클리프톤은 깜짝 놀라서 쳐다보며 반박했다. "하지만 라스베이거스가..." "순회 공연을 하겠어요." 토비의 단호한 목소리엔 단순한 오만이나 신경질과는 차원이 다른, 짙은 분노 가 배어 있었다. 잘 절제된 뜨거운 분노. 더욱더 놀라운 건 전보다 한층 온화하고 앳되어진 얼굴에서 그런 엄청난 분노 가 발산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토비는 쉬지 않고 여행길에 올랐다. 결혼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는 길은 그뿐이었으니까. 전국 각지의 나이트 클럽, 극장, 강당을 돌며 공연했고 그런 계약이 다 동이 나면 클리프톤 로렌스를 들볶아 대학 축제무대에 까지 섰 다. 밀리에게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디든 좋았다. 몸이 달아서 쫓아다니는 어여쁜 아가씨들과 동침할 기회는 셀 수 없이 많았 다. 그건 어느 고장엘 가나 매한가지였다. 미녀들이 그의 분장실이나 호텔 로비 에 잠복해 있다가 극성스럽게 매달렸다. 그러나 토비는 절대 여자를 잠자리에 들이지 않았다. 딕 랜드리한테서 들은, 바람피운 남자의 성기를 도려내어 불에 태운 얘기와 앨 카루소가 한 말, '정말 대단한 물건을 가졌군...' 자넬 해치진 않을 거야. 자넨 내 친구니까. 밀리한테 잘만 해주면..." 이 한시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어서였다. 그리하여 토비는 여자들을 모두 거절했다. "난 아내를 사랑해요." 그가 여자들에게 수줍게 던지는 변명이었다. 여자들은 그 말을 곧이듣고 더욱 토비를 애모했다. 그리고 그 소문은 - 토비가 의도 했던 대로 - 빠르게 퍼져 나 갔다. "토비 템플은 절대 바람을 피우지 않아. 그는 정말 충실한 남편이야." 그래도 관능미가 물씬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여자들이 여전히 꽁무니를 따라다 녔고 토비가 거절할수록 더욱 그를 목말라 했다. 이제 토비는 여자에 너무 굶주 린 나머지 말못할 고통을 속으로만 삭여야했다. 어떤 때는 사타구니가 뻐근해서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다시 자위 행위를 시작했다. 혼자 수 음을 하면서 저밖에 나래비로 서서 기다리고 있는 요염한 미녀들을 생각했다 그 러면서 자신의 더러운 팔자를 저주했다. 그렇게 늘 섹스에 굶주렸기에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순회 공연 에서 돌아오면 밀리 역시 잔뜩 굶주려서는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 나 토비는 아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성에 대한 갈망을 깨끗이 잊곤했다. 아내 는 그의 적이었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경멸하는 대상이었다. 그녀와 억지로 동 침을 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앨 카루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토비 는 늘 침대에서 밀리에게 가혹했다. 그녀의 목구멍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터져 나올 때까지 잔인하게 쑤시고 들어갔다. 밀리가 신음소리를 내면 그게 쾌감 때 문인 줄 착각하는 체하며 더 무섭게 밀고 들어갔다. 이윽고 그 맹렬한 분노가 절정에 이르면 독기 어린 정액이 그녀의 몸 안에서 폭발하곤 했다. 그건 사랑 행위가 아니었다. 증오의 행위였다. 1950년 6월, 북한이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밀고 내려오자 트루먼 대통령은 한 국 파병을 명령했다. 당사자들에겐 그 전쟁이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지만 토비에 겐 최고의 축복이이었다. 그 해 12월 초순경이었다. '테일리 버라이어티'지에 밥 호프가 크리스마스를 맞아 서울 위문 공연을 떠났다는 소식이 실렸다. 그 소식을 접히고 채 30초도 되지 않아 토비는 클리프톤 로렌스와 통화를 했다. "클리프, 그 공연자에 저를 넣어 주세요." "뭣땜에? 이제 자넨 서른이 다됐어. 이 친구야, 내 말 듣게, 그런 공연은 재 미도 없고..." "재미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요. 우리 형제들이 거기서 목숨을 내놓고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 용감한 젊은이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싶은 겁니다." 토비가 수화기에 대고 냅다 소리쳤다. 토비 템플에게서 전혀 새로운 일면을 발견한 클리프톤은 가슴이 뭉클하면서 몹시 흐뭇해졌다. "좋았어. 자네 뜻이 정 그렇다면, 내 힘써 보지." 그로부터 한 시간 뒤 클리프톤이 전화를 했다. "밥과 통화했네. 자네가 함께 가고 싶어한다고 했더니 아주 기뻐 하더군. 하 지만 언제라도 마음이 바뀌면..."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토비는 호기 있게 대꾸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클리프톤 로렌스는 통화가 끝나고도 한참이나 토비 생각에 마음이 흐뭇했다. 토비가 자랑스러웠다. 그런 훌륭한 젊은이의 대리인이 된 것이 못내 기뻤고 토 비를 스타로 키워낸 것이 가슴 뿌듯했다. 토비는 대구와 부산, 전주를 돌며 공연을 가져다. 병사들의 웃음이 그에게 위 안을 주었거 이제 밀리 생각은 차츰 희미해져 갔다. 크리스마스 위문 공연이 끝나자 곧장 귀국하지 않고 괌으로 향했다. 그곳 병 사들도 토비를 무척 좋아했다. 다음엔 도쿄로 가서 육군병원에 누워 있는 부상 병들을 위문했다. 그리곤 마지못해 집으로 돌아왔다. 해가 바뀌어 어느덧 4월이 되었다. 10주 동안 중서부 지방에서 순회 공연을 하고 돌아오는데 밀리가 공항까지 마중나와 있었다. 얼굴울 보자마자 그녀는 폭 탄 선언부터 했다. "여보오. 아기가 생겼어요!" 토비는 기가 막혀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밀리는 남편이 너무 기뻐서 그러 는 줄로 착각하고 잔뜩 들뜬 목소리고 떠들기 시작했다. "근사하지 않아요? 이제 당신 공연 떠나면 아기랑 둘이 있음 돼요. 아들이었 음 좋겠어요. 당신이 야구장에도 데려가고..." 토비는 아내가 마구 쏟아내는 소갈머리 없는 말들이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희미하게 웅웅거라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엔 언젠가 이 결혼에서 벗어날 날이 오리란 실날 같은 희망 을 갖고 있었는데 이젠 다 끝장이었다. 아이까지 생기면 밀리는 영원히 놓아주 지 않을 터였다. 지난 2년간의 결혼 생활도 영겁처럼 지루하고 끕찍했는데 이젠 둘 중 하나가 눈을 감는 날까지... 출산 에정일은 크리스마스경이었다. 그때쯤 괌 위문 공연을 떠나기로 이미 다 일정이 잡혔는데 문제는 앨 카루소한테 어떻게 허락을 구하느냐였다. 방법은 단 한 가지, 직접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라스베이거스로 전화를했다. 즉시 카루소의 명랑하고 친근한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날아왔다. "여이, 친구. 이렇게 목소리를 들으니 반갑구만." "저도 반갑습니다, 앨" "곧 아빠가 된다구, 진짜 신나겠구먼." "그냥 신나는 정도가 아니죠." 토비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그렇게 대꾸하고는 몹시 난감한 어조로 운을 떼었 다.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이렇게 전화했습니다. 앨, 예정일이 크리스마슨데 말 입니다..." 이 대목에서 특히 조심스러워야 한다. "이거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밀리 곁에 있어 줘야 되는데 한국과 괌으로 위문 공연을 가야한다고 하니..." 긴 침묵. "그거 아주 난처하게 됐군." "우리 병사들을 실망 시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밀리를 실망시킬 수도 없고." "그래, 그러게 말야." 다시 긴 침묵. "내 생각을 말하겠네. 우린 모두 선량한 미국인이야, 그렇지? 지금 병사들은 우리를 위해 싸우고 있는 거구, 맞지?" 토비는 긴장이 한꺼번에 플리는 걸 느꼈다. "그야 그렇죠. 하지만..." "밀리는 괜찮을 걸세. 여자들은 아주아주 오래 전부터 아기를 낳아 왔거든. 한국으로 떠나게." 그리고 6주가 지난 어느 날, 정확히 말하면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부산에서 우레 같은 박수 갈채를 받으며 무대를 내려서는데 누가 전보 한 장을 건넸다. 내용인즉, 밀리가 아기를 낳다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죽어서 나온 아기는 아들이었다. 이제 토비는 자유인이 된 것이다. 마르코 폴로 놀이 1952년 8월 14일은 조세핀 친스키의 열세 번째 생일이었다. 마침 조세핀과 생 일이 겹친 매리 루 캐년이 생일 파티에 초대했다. 그런데 엄마가 부득부득 못 가게 말렸다. "그들은 모두 사악한 인간들이야. 그러니 집에서 성경 공부나 하는 게 좋겠 다." 조세핀은 추호도 그럴 마음이 없었다. 친구들이 사악하다고 생각 되지도 않았 다. 엄마의 잘못된 믿음을 고쳐 주고 싶었지만 도저히 방도가 없어 갑갑하기만 했다. 조세핀 엄마가 집을 비우자마자 동네 아기를 보아 주고 번 돈 5달러를 들 고 시내로 달려가 예쁜 흰색 수영복을 샀다. 그리곤 매리 루의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왠지 멋진 하루가 될 것 같았다. 매리 루 캐년의 집은 석유 부자들 저택 가운데에서도 가장 아름다웠다. 집 안 엔 진귀한 골동품들과 고급 벽걸이 장식, 아름다운 그림들이 즐비했고 바깥엔 손님용 별채들, 마구간, 테니스 코트, 임시활주로, 수영장이 구비되어 있었다. 수영장은 두 개였는데 넓고 호사스러운 것은 가족들과 손님용이었고 뒤꼍에 따 로 마련된 작은 풀은 하인용이었다. 매리 루에겐 데이빗이란 오빠가 있었는데 조세핀은 남몰래 데이빗을 좋아하고 있었다. 데이빗은 죠세핀이 만나 본 남학생 중에 제일 미남이었다. 훌쩍 큰 키, 픗볼 선수의 넓은 어깨, 장난기 가득한 회색 눈. 데이빗은 "올 아메리카" 팀 하 프백에다 수재들만 받는 로즈 장학생이기도 했다. 데이빗 위로 베스라는 누나가 있었는데 조세핀이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다. 파티장에서 조세핀은 혹시나 해서 두리번거렸지만 데이빗은 눈에 띄지 않았 다. 전에 몇 번 데이빗이 다가와 말을 건넨 적이 있었는데 조세핀은 그때마다 얼굴이 빨개져서 벙어리처럼 아무 말 못하고 서 있기만 했었다. 파티는 떠들썩했다. 매리 루 또래의 아이들 열 넷이 테라스에 모여 쇠고기 바 비큐, 치킨, 칠리, 토마토 샐러드, 레모네이드를 실컷 먹으며 재미나게 놀았다. 그러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오늘의 두 주인공 매리 루와 조세핀이 친구들에게 둘 러싸여 선물 꾸러미들을 풀었다. "우리 수영하러 가자." 매리 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르르 탈의실로 뛰어갔다. 조세핀은 새 수영복으로 갈아 입으며 짜릿한 행복감을 맛보았다. 평생 이렇게 기쁘고 즐거운 날은 처음이었다. 조세핀은 부자 친구들과 한데 어울려 아름다운 인생을 만끽하 고 있었다. 여기에 사악한 것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었다. 조세핀은 이 순간 시간 이 그대로 정지해 버려 오늘이 영원히 계속되길 바랐다.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조세핀이 환한 햇살 속으로 나왔다. 수영장쪽으로 걸어 가노라니 친구들의 시선이 온몸에 느껴졌다. 여자애들은 부러워 죽겠다는 눈길 이었고 남자애들은 괜히 쑥스러워 흘금거리고 있었다. 지난 몇 달 사이 조세핀 의 몸은 눈에 띄게 성숙해졌다. 제법 풍만하고 팽팽한 젖가슴과 육감적인 엉덩 이의 굴곡이 수영복 위로 그대로 드러났다. 조세핀은 친구들과 어울려 물 속으 로 뛰어들었다. "우리 마르코 폴로 놀이하자." 누군가 외쳤다. 조세핀이 좋아하는 놀이였다. 조세핀은 눈을 꼭 감고 따스한 물살을 헤치고 다니는 게 즐거웠다. 눈을 감은 술래가 "마르코!"하고 외치면 모두들 "폴로!" 하고 대답했다. 그럼 술래는 대답 소리를 듣고 쫓아간다. 술래에게 잡히는 사람 이 다음 술래가 된다. 놀이가 시작되었다. 시시 토핑이 술래였다. 시시는 짝사랑하는 남자애 밥 잭 슨을 쫓아갔으나 놓쳐 버리고 대신 조세핀을 잡았다. 술래가 된 조세핀은 눈을 감고 물장구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르코!" 조세핀이 외쳤다. 그러자, "폴로!" 합창소리. 조세핀은 소리나는 곳을 덮쳤으나 아무도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조세핀은 오늘이 영원하길 바라듯 이 놀이도 영원히 계속되길 원하고 있었다. 조세핀은 가만히 서서 물장구 소리, 낄낄거리는 웃음 소리, 소근거리는 소리 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팔을 앞으로 내밀고 자꾸만 나아갔다. 그러나 계단 발치에 다달았다. 자기가 내는 물소리에 방해받지 않으려고 계단 위로 올라섰 다. "마르코!" 그런데 대답이 없었다. "마르코!" 참묵. 마치 따스한 물의 사막에 홀로 내팽개쳐진 기분이었다. "애들이 장난을 치고 있구나." 아무 대답도 하지 말자고 저희들끼리 짠 모양이었다. 조세핀은 빙그레 웃으며 살며시 눈을 떴다. 자기 혼자 계단에 서 있었다. 왠지 느낌이 이상해서 아래로 시선을 떨군 순 간, 흰 수영복 밑부분이 붉게 물들어 있고 가랑이 사이로 핏방울이 또르륵또르 륵굴러 떨어지는 게 보였다. 친구들은 모두 밖으로 나가서 빤히 쳐다보고 있었 다. 조세핀은 겁에 질린 얼굴로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나... 난..." 하지만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너무 부끄러워 얼른 물 속으로 내려섰다. "우린 수영장에서 그거 안 해." 매리 루였다. "폴란드 촌뜨기들은 하지." 누군가 낄낄거리며 놀렸다. "우리 샤워나 하러 가자." "그래애, 더러워 죽겠다." "저런 데서 누가 수영하니?" 조세핀은 눈을 감고 서서 친구들이 탈의실로 우르르 몰려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눈을 질끈 감은 채 가랑이를 한껏 오므리고 그냥 그대로 서 있었다. 전 혀 뜻하지 않게 시작된 초경이었다. 조세핀은 그렇게 서서 친구들이 다시 돌아 와 놀려서 미안하다고, 우린 네 친구라고, 오늘의 행복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라고 말해 주길 기다렸다. "친구들이 와서 놀이를 계속하자고 하겠지." "마르코!" 조세핀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그러나 슬픈 메아리만이 오후의 햇살 속 으로 흩어졌다. "얼마나 더 이렇게 눈을 감고 서서 긷려야 하는 걸까?" "우린 수영장에서 그거 안 해." "폴란드 촌뜨기들은 하지." 관자놀이가 사납게 벌떡거리기 시작했다. 두통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생리통까 지 겹쳐 속이 미식거리면서 배가 쥐어짜듯 아팠다. 그러나 조세핀은 눈을 뜰 수 도, 다리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친구들이 돌아와 다 장난이었다고 말할 때까지 그대로 서서 기다려야만 할것 같았다. 이윽고 위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친구들이 돌아오는 모양이 었다. 조세핀은 눈을 떴다. 매리 루이 오빠 데이밋이 테리천 목욕 가운을 들고 서 있었다. "내가 대신 사과할게." 데이빗이 가운을 건네며 말했다. "자, 나와서 이거 입어." 그러나 조세핀은 다시 눈을 감고 그냥 꼿꼿하게 서 있었다. 이대로 죽어버리 고만 싶었다. 거장의 종말 샘 윈터즈는 바야흐로 호시절을 맞고 있었다. 우선 테시 브랜드의 세 번째 영 화 러시 필름이 나왔는데 근사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주인공께서 자기 결정이 옳았음을 증명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 열연한 덕이었지만 속사정이야 어쨌든 바바라 카터는 올해 최고의 신인 제작자로 부상할 터였다. 아무래도 올해의 의 상 디자이너들의 해인가 보았다. '팬 - 퍼시픽'에서 만들어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들도 모두 잘 나가고 있었 다. 그중에서도 문제의 "마이 맨 프라이데이"는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여 해당 방송국측에서 새로 5년 계약을 체결하자는 제안이 왔다. 샘이 막 점심을 먹으로 나가려는데 루실이 황급히 들어오며 말했다. "소품실에서 불을 지르려는 자를 붙잡았대요. 지금 이리로 데려오고 있어요." 방화범은 샘 맞은편에 묵묵히 앉아 있었고 스튜디오 경비원 둘이 그 뒤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방화범의 눈이 증오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샘은 아직도 충격 에 벗어나지 못한 채 따져 물었다. "왜죠? 도데체... 왜?" 댈러스 버크가 대꾸했다. "네 놈의 그 잘난 동정은 원치 않기 때문이야. 난 너와 이 스튜디오, 이 더러 운 바닥을 증오해. 영화 산업을 일으킨 건 바로 나란 말이다, 이 개새끼야. 이 구질구질한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절반은 내도움이 컸어. 모두들 내 덕분에 돈을 벌었다구. 그런데 왜 영화감독 일은 주지 않고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나 사주는 체하는 거지? 샘, 내가 전화번호부 책을 그대로 베껴서 갖다줘도 자넨 그걸 덥 석 사겠지? 난 그 따위 썩어빠진 호의는 필요없어. 일거리를 원한다구. 이 자식 아, 넌 나를 실패의 구렁텅이로 빠뜨렸어. 절대 용서치 않을 거야." 샘은 댈러스 버크가 끌려가고 나서도 한참이나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의자에 꼼짝도 않고 앉아서 댈러스 감독의 훌륭한 영화들과 그가 영화사에 남긴 발자취 를 생각했다. 다른 업계 같았으면 영웅으로 떠받들어지고, 협회 회장직에 추대 되고, 두둑한 연금을 받고 명예 은퇴하였을 인물이었다. 그러나 현란하고 눈부신 우리의 연예계는 달랐다. 노인들의 웃음 1950년대 초반 내내 토비 템플은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고 있었다. 시카고의 ' 셰 파레', 필라델피아의 '라틴 카지노', 뉴욕의 '코파카바나' 같은 일류 나이트 클럽에서 공연도 하고 불우한 어린이나 불치병 환자들을 위한 자선 공연도 여러 차례 가졌다. 그렇게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대에 서 있었다. 토비에게 관 객은 생명줄이나 한가지였고 관객들의 박수와 사랑이 그를 살아 숨쉬게 했다. 연예계에 온전히 자신을 던진 것이었다. 당시 세계에서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터졌지만 토비에게 그것들은 단지 코미디 소재에 불과했다. 1951년 맥아더 장군이 물러나면서, '노장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 이다' 'Old soldier don't die, they just fade away''라는 명언을 남기자 토비 는 'die'를 동음이어인 'dye, 염색하다로'로, 'fade away'를 '사라지다'가 아닌 '색이 바래다'로 바꿔, "우와! 우리도 그 세탁소 써야겠네요"라고 익살을 떨었 다. 1952년 수소 폭탄이 떨어지자 토비의 반응은 이러했다. "그건 아무것도 아녜요. 제가 애틀랜타에서 첫 무대에 섰을 때에 비하면 말입 니다." 당시 상원의읜직에 있던 닉슨이 "체커" 연설을 하자 토비는 이렇게 익살을 부 렸다. "당장 그를 찍겠어요. 닉슨 말고 체커요."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스탈린이 사망하고 지대지 전술미사일 데비 크로켓이 등장하고 몽고메리에서는 버스 안 타기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모든 사건들이 토비에겐 코미디 소재가 되었다. 토비가 어린애처럼 천진스런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결정적인 우스갯소리 를 던질라치면 관객들은 폭소를 터뜨리곤 했다. 토비의 인생은 한마디로 코미디의 연속이었다. "... 아, 그러니까 그 사람이 이러는 거예요, "잠깐, 같이 가자구, 모자 좀 쓰구"..." "... 솔직히 어찌나 군침이 돌던지 그 자리에서 다 먹어 치웠지 뭡니까!" "... 거긴 과자가게지만 사람들 말로는..." "... 저는 사립 탐정이 될 걸 그랬나 봐요..." "... 겨우겨우 시간에 맞춰 달려갔더니 배가 안 보여요, 그래서..." "운이 좋았지요. 왜냐면..." 그의 입에서 우스개가 나올 때마다 관객들은 자지러졌다. 관객들은 토비를 사 랑했고 토비는 게걸스럽게 그 사랑을 먹으며 높이높이 올라갔다. 그런데도 늘 가슴 한켠에는 이유 모를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리 많 은 사랑을 받아도 늘 허기가 졌다. 어딘가에 지금보다 더 나은 무대와 더 열광 적인 관객, 더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있는데 그걸 놓치고 있는 듯한 안타까움에 한 순간도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와이셔츠 갈아입듯 자주 여자를 갈아치 웠다. 밀리와의 뼈아픈 실수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옛날 '변소 순회 공 연'을 돌 때 인기 코미디언들이 아름다운 여자들을 거느리고 사치스런 리무진에 올라타던 모습을 부러워했던 게 생각나서 똑같이 해보았지만 외롭기는 무명 시 절이나 매한가지였다. 누가 이런 말을 했었지. "저 산 너머에 행복이 있다기에 올라보니 아무것도 없더라." 토비는 코미디의 일인자가 되기 위해 몸바쳐 노력했다. 언젠가 정상의 자리에 서게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단 하나 아쉬움이라면 어머니가 살아서 당신의 예언이 맞아떨어지는 걸 지켜 보지 못하신다는 거였다. 이제 남은 혈육은 아버지뿐이었다. 토비의 부친이 기거하는 디트로이트의 양로원은 지은 지 백년은 되었음직한 추레한 벽돌 건물이었다. 그 안으로 들어서면 노, 병, 사의 들쩍지근한 악취가 확 끼쳐 왔다. 심장 발작으로 식물인간이 되다시피 한 토비 템플의 부친은 맥아리 없이 누워 멍한 시선을 허공에 박고 아들이 찾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토비는 더러운 초록색 카펫이 깔린 양로원 응접실에서 간호사들과 노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토비, 지난주에 '해럴든 합슨 쇼'에 나온 거 봤네. 자네 정말 대단했어. 그 런데 어떻게 그렇게 재치 있는 말들을 잘 생각해내나?" "작가들 아이디어죠." 토비의 겸손에도 모두들 와아 웃었다. 남자 간호사가 토비의 부친을 휠체어에 태우고 들어왔다. 노인은 깔끔하게 면 도를 하고 머리도 단정하게 빗어 넘기고 제일 좋은 곳을 입고 있었다. "우리 멋쟁이 아버지!" 토비의 탄성에 모두들 시기와 부러움이 반반씩 섞인 눈초리로 복많은 노인네 폴을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유명한 아들을 둔 폴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토비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꼭 껴안았다. "아버지, 오늘은 누굴 골탕먹일까요?" 폴이 자기를 데려온 남자 간호사를 가리켰다. "휠체어에 타야 할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저 친구 같은데요." 모두들 배를 잡고 웃으면서도 나중에 친구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그 우스개를 머릿속에 챙겨두느라 바빴다. 그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입이 닳도록 그 얘기를 하고 또 할 터였다. "저번에 토비 템플을 만났는데 말야... 토비가 자네처럼 이렇게 내 옆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니까... 그리고 코미디를 하는데..." 토비는 그 외로운 노인들에게 둘러싸야 한참 너스레를 떨었다. 모두들 좋다고 난리였다. 토비의 우스개는 노인들의 성생활, 건강, 자식 문제를 소재로 하고 있었고 양로원의 노인들은 오랜만에 자기들의 서글픈 처지를 유쾌한 웃음거리로 삼을 수가 있었다. 이윽고 토비가 구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이 자리를 뜨기가 아쉽군요, 여러분은 제가 만난 관객들중에서 최고 예요..." 노인들은 이 얘기도 꼭꼭 기억해 두리라. "... 죄송합니다만, 아버님과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아버님이 새 코 미디 소재를 몇 가지 제공해 주기로 하셨거든요." 노인들은 다시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며 경탄의 눈빛으로 토비 템플을 바라보 았다. 토비는 비좁은 면회실에 부친과 단둘이만 남게 되었다. 이 방에서조차 죽음의 냄새가 났다. "하기야 양로원은 죽음의 장소니까." 이곳엔 늙고 병들어 쓸모없게 된 폐품 부모들이 수용된다. 죽음을 코앞에 둔 노인들은 집안에서 골방으로 밀려나 갖은 구박과 천대를 다 받다가 이윽고는 자 식들이나 조카들의 손에 이끌려 양로원으로까지 오게 되는 것이다. "저희 말을 믿으세요. 이게 다 아버지"혹은 어머니, 혹은 조지 아저씨, 혹은 베스 아주머니"를 위한 거예요. 양로원에 가면 친구들이 많이 생기니까 외롭지 않을 거예요. 새 친구들과 새 인생을 시작하는 거죠.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그러나 속마음이야 어디 그런가? "양로원에 가서 다른 쓸모없는 노인네들과 더불어 인생을 마치세요. 식탁에서 침이나 질질 흘리고,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애들이나 성가시게 하고, 침대 에 오줌이나 싸고... 이젠 지긋지긋해서 더 못 참는다구요!" 그렇게 보면 차라리 에스키모들이 솔직해서 좋다. 부모가 늙어 쓸모없어지면 두말없이 얼음 속에 내다 버리는 게 그들이니까. "이렇게 와줘서 정말 좋구나. 너랑 할 얘기가 많아. 참, 기쁜 소식이 있단다. 옆방 아트 레일 리가 어제 죽었어." 폴이 잘 돌아가지도 않는 혀로 느릿느릿 말했다. "그게 좋은 소식이에요?" 토비는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이제 내가 그 방으로 옮길 수 있게 됐거든. 거긴 독실이야." 노인네들의 관심은 순 그런 종류이다. 마지막 남은 여생을 조금이라도 더 안 락하게 보내기 위해 추악하게 서로 할퀴고 다투는 것. 토비가 보기엔 차라리 죽 어 버리는 게 본인을 위해서도 나을 듯 싶은 처참한 지경의 노인들도 악착같이 삶에 매달렸다. "도르셋 할아버지,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아흔다섯 번째 생일을 맞는 감회가 어떠신지요?... 아, 그거야 죽는 것보단 한결 낫지." 이제 토비가 일어서야 할 시간이 되었다. "금방 또 찾아뵐게요." 토비는 그렇게 약속하고 아버지께 용돈을 쥐어 드리고 양로원 고용인들 모두 에게 두둑하게 팁을 건네 주었다. "아버지, 몸조심하고 건강하게 계셔야 해요, 알겠죠? 아버지가 안계시면 공연 이 안 되니까요." 토비는 양로원을 나서는 순간 그 안에 대한 기억을 깡그리 잊었다. 그의 머릿 속엔 저녁때 할 공연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양로원 식구들은 그 뒤 몇 주일 동안 토비 얘기만 하고 있었다. 첫사랑 이제 열일곱이 된 조세핀 친스키는 텍사스 오데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 였다. 알맞게 그을은 황금빛 살결, 환한 햇살 아래선 다갈색을 띠는 긴 검은 머 리, 황금 알갱이가 흩뿌려진 듯 그윽한 갈색눈, 공처럼 둥글고 팽팽한 가슴, 개 미 허리처럼 잘록한 허리, 풍만한 엉덩이, 길고 늘씬한 다리. 이제 조세핀은 석유 부잣집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자기와 처지가 비슷한 가난뱅이 아이들과 어울렸다. 방과후엔 오데사의 유명 드라이브인 - 자동차에 탄 채로 들어가는 - 식당 '골든 데릭'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했다. 매리 루나 시 시 토핑 같은 옛 친구들이 이따금 남자 친구를 데리고 들르곤 했는데 조세핀은 언제나 그들을 정중하게 맞았지만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친구가 아니었다. 조세핀은 쉬임 없이 무언가를 갈구했다. 그 대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지 는 못했으되 그것을 향한 뜨거운 욕망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 추악한 고 장을 뜨고 싶었지만 어딜 가서 무얼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오래 하면 지긋지긋한 두통이 찾아오곤 하였다. 조세핀은 여러 남자들과 데이트를 했다. 그중에서 어머니가 좋아하는 사람은 워렌 호프만이었다. "워렌은 훌륭한 신랑감이야. 교회에도 열심히 다니고, 연관공으로 돈도 잘 벌 고, 또 너라면 사족을 못 쓰잖니." "그는 스물다섯이나 됐고 또 너무 뚱뚱해요." 어머니는 조세핀을 빤히 쳐다보며 대꾸했다. 가난한 폴란드 처녀한테는 백마 탄 기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 텍사스 땅에 서도 그렇고 세상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야. 그러니 바보 같은 생각은 그만 해 라." 조세핀은 일주일에 한 번씩 워렌 호프만과 함께 영화관에 갔다. 캄캄한 영화 관 안에서 워렌은 시종 울퉁불퉁 굳은살이 박이고 땀이 축축하게 밴 솥뚜껑만한 손으로 조세핀의 손을 주물럭거렸다. 그러나 조세핀은 영화에 정신이 팔려 그런 건 거의 의식하지도 못했다.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세계는 어릴 적 석유 부자 아이들과 한데 어울려 나눈 아름다움과 행복의 연장이었고 꿈속에서나 그려봄 직한 환상의 세계였다. 조세핀의 의식 깊은 곳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할리 우드에 대한 동경이 싹트고 있었다. 그녀가 갈망하는 모든 것, 아름다움, 즐거 움, 웃음, 행복이 모두 그 속에 있는 듯했다. 그런 인생을 누리려면 부잣집 도 련님과 결혼하는 방법밖에 없었는데 슬프게도 부잣집 도련님들은 다 부잣집 아 가씨들 차지가 되었다. 한 사람을 빼고는. 데이빗 캐년. 조세핀은 데이빗 생각을 많이 했다. 오래 전에 매리 루네 집에 놀러갔다가 데이빗의 사진을 한 장 훔쳤었다. 조세핀은 그걸 장농 속에 숨겨 놓 고 기분이 울적할 때마다 꺼내 봤다. 그러면 수영장에서, "내가 대신 사과할게" 라고 말하던 데이빗의 모습이 생각나면서 울적함은 눈 녹듯 사라지고 따스한 온 기가 가슴을 적셔왔다. 데이빗이 수영장에 테리천 가운을 들고 나타난 그 끔찍 했던 날 이후 조세핀은 딱 한 번 그를 볼 수 있었다. 데이빗은 가족들과 함께 차에 타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영국 옥스퍼드로 떠나기 위해 기차역으로 가던 중이었다. 그게 4년 전인 1952년 일이었다. 데이빗은 여름방학이나 크리스 마스 때면 꼬박꼬박 집에 돌아왔으나 둘이 얼굴을 마주할 기회는 없었다. 조세 핀은 다른 여자애들이 데이빗 얘기를 하는 걸 여러 번 들었다. 그는 부친이 물 려준 재산말고도 할머니가 남긴 5백만 달러의 신탁금까지 있는 일등 신랑감이었 다. 그러나 가난한 폴란드인 재봉사 딸에게는 오로지 못할 나무였다. 조세핀은 데이빗 캐년이 영국에서 돌아온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7월의 어느 토요일 저녁, 조세핀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골든 데릭'에서 일하고 있었다. 종일 폭염이 기승을 부리자 오데사 주민 절반은 '골든 데릭'으로 달려와 레모네 이드와 아이스크림과 소다수로 더위를 달랬고, 덕분에 조세핀은 눈코 뜰 새 없 이 바빴다. 네온등이 켜진 드라이브인 레스토랑으로 줄지어 들어서는 차량들이 마치 초현실 세계의 연못 기슭에 주욱 둘러앉은 철갑 동물들처럼 보였다. 조세 핀은 백만 번째 주문쯤 되었음직한 치즈버그와 콜라를 날라다 주고 주문서를 들 고 방금 도착한 흰색 스포츠 카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주문하시겠어요?" 조세핀은 쾌활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 오랜만이야." 전혀 뜻하지 못했던 데이빗 캐년의 목소리에 조세핀의 가슴은 쿵쾅거리기 시 시작했다. 데이빗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아니 더 멋있어진 것 같았다. 타지 생활로 자연스럽게 몸에 밴 원숙함과 자신감이 그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시시 토핑이 데이빗 옆에 새초롬하게 앉아 있었는데 고급 실크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입은 모습이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시시가 말했다. "안녕, 조시. 이렇게 무더운 날 힘들게 일해서 되겠니?" 마치 조세핀이 일부러 데이빗 캐년 같은 남자 친구와 함께 냉방 장치가 잘된 극장에 가거나 스포츠 카를 타고 신나게 드라이브하는 호사를 마다하고 궁상맞 게 식당에서 일하고 있기라도 한 듯한 말투였다. 조세핀은 조용히 대꾸했다. "여기도 시원해." 데이빗이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들이 떠나고 난 뒤에도 조세핀은 데이빗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아 까 데이빗이 했던 말들을 차근차근 되씹어 보았다. "안녕, 오랜만이야... 난 돼지고기와 루트 비어"뿌리 즙에서 짜낸 탄산수의 일종"로 하지, 커피랑 함께. 무더운 밤에는 찬 음료가 오히려 안 좋거든... 여 기서 일하는 건 어때?... 자, 계산하지... 잔돈은 필요없어... 조세핀, 다시 만 나서 반가웠어." 시시가 옆에 앉아 있어 내놓고 표현은 못했지만 혹시 은근한 관심의 표시나 숨겨진 뜻은 없었는지 열심히 곱씹어 보았으나 그런건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이 름을 기억해 준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주방 싱크대 앞에 넋놓고 서서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는데 멕시코 인 주방장 파코가 다가와 물었다. "무슨 걱정 있어, 조시?" 눈에 근심이 가득한데." 조세핀은 파코가 좋았다. 파코는 눈망울이 검고 홀쭉한 스물 후반의 젊은이로 성격이 쾌활해서 아무리 분위기가 심각해도 슬쩍슬쩍 농담을 던져 주위 사람들 을 웃게 하곤 했다. "누군데?" 조세핀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녜요, 파코." "그럼 어서 서둘러. 밖에 배고픈 차가 여섯 대씩이나 기다리고 있거든." 이튿날 아침 데이빗이 전화를 했다. 조세핀은 수화기를 들기도 전에 그게 데 이빗의 전화임을 직감했다. 간밤에 데이빗 생각에 잠을 설친 그녀는 이 전화도 뒤숭숭한 꿈의 연속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데이빗의 첫 마디는 이러했다. "내가 없는 동안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했더군." 조세핀은 행복에 겨워 졸도할 것만 같았다. 그날 밤 둘은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조세핀은 데이빗이 가난하고 천한 아가 씨와의 데이트를 부끄러워해 아무도 모르는 변두리 작은 레스토랑으로 데려갈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친구들이 우글거리는 단골 클럽으로 갔다. 그리하여 조세 핀은 데이빗 친구들 모두와 인사를 하게 되었다. 데이빗은 조세핀은 부끄러워하 기는커녕 오히려 아주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조세핀은 그런 데이빗을 사랑하 지 않을 수 없었다. 준수한 용모, 신사다운 태도, 따스한 마음씨, 그의 옆에 있 으면 가슴이 터질 듯 행복했다. 조세핀에게 데이빗 캐년처럼 멋진 남자는 없었 다. 그들은 날마다 조세핀이 일을 끝내면 데이트를 했다. 사실 또래들보다 조숙했 던 조세핀은 열네 살때부터 남자들이 지겹게 따랐다. 데이트를 허락하면 남자들 은 하나같이 그녀를 껴안거나, 가슴을 만지거나, 스커트 속으로 손을 집어 넣으 려 했는데 그때마다 조세핀은 질색을 해서 뿌리쳤다. 그러나 데이빗 캐년은 달랐다. 이따금 그가 어깨에 팔을 두르거나 은근하게 몸을 만지면 조세핀은 온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어쩌 다 데이빗을 만나지 못하는 날은 종일 데이빗 생각에 아무것도 못했다. 이제 조세핀은 자기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게 몇 주가 흐르자 그들은 점점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하게 되었고 서로 뜨겁게 사랑하 는 사이가 되었다. 조세핀에게 그것은 기적이었다. 데이빗은 자기 고민이나 가족 문제를 조세핀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어머닌 내가 사업을 이어받길 원하시지만 난 정말로 평생 그 일을 하고 싶은 지 어쩐지 확신이 서지 않아." 캐년 가문은 석유가 펑펑 쏟아지는 유정과 정유소 말고도 남서부에서 내노라 하는 방대한 젖소 목장과 호텔 체인 하나, 은행 몇 군데, 대형 보험 회사 하나 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럼 어머니께 싫다고 말씀드리면 안 돼요?" 데이빗은 한숨지으며 대꾸했다. "넌 우리 어머니를 몰라서 그래." 조세핀도 데이빗의 어머니를 알고 있었다. 그렇게 작고 가냘픈 몸에서 어떻게 데이빗 같은 거구가 나왔을까 싶을 정도로 캐년 부인은 조그많고 병약한 여인이 었다. 자식을 셋 두었는데 임신 때마다 죽을 고생을 했고 특히 막내 매리 루를 낳고는 심장 발작까지 일으켰다. 캐년 부인은 자식들에게 그 사실을 누누이 강 조했고 세 자녀들은 엄마가 목숨까지 내걸고 자기들을 낳아 키웠다는 믿음을 신 앙처럼 가슴에 품고 자라났다. 그리하여 집안에서 부인의 권위는 하늘을 찔렀고 그녀는 그 권위를 멋대로 휘둘렀다. 데이빗은 조세핀에게 이렇게 토로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지만 어머니를 상심시켜 드릴 수는 없어. 사 실은 말야, 닥터 영 말이 어머닌 오래 못 사신대." 어느 날 밤, 조세핀은 데이빗에게 할리우드에 가서 스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데이빗은 정색을 하고 조용히 말했다. "널 보내지 않겠어." 조세핀의 가슴이 아프도록 뛰고 있었다. 만남의 횟수가 더해 갈수록 둘이는 새록새록 더 정이 들었다. 데이빗은 조세핀의 출신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속물 근성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청년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날 밤의 사건은 조 세핀에게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날 밤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데이빗은 밖에 차를 세워 놓고 조세핀의 근무 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조세핀은 좁은 주방에서 파코와 함게 부지런히 그 릇들을 치웠다. "또 데이튼가 봐, 응?" 파코가 물었다. 조세핀이 미소를 머금으며 되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조시 얼굴이 크리스마스 때처럼 환하거든. 남자 친구한테 내가 복많은 남자 라 그러더라고 전해." "그러죠." 조세핀은 기분이 좋아져서 파코의 뺨에 입을 맞췄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요란한 자동차 엔진 소리와 함께 끼이익 타이어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얼른 돌아보니 데이빗의 흰색 스포츠카가 다른 차 펜더를 박고 쏜살같이 드라이브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조세핀은 영문을 몰라 우두망찰 서서 자동차 미등이 어둠 속으로 명멸해 가는 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새벽 3시쯤 되었을까, 잠을 이루지 못해 뒤척이고 있는데 집 앞에 자동차 서 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세핀은 후다닥 뛰쳐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데이빗 이 운전대를 잡고 앉아 있었는데 몹시 취한 것 같았다. 조세핀은 얼른 가운을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갔다. "타." 데이빗이 명령했다. 조세핀은 자동차 문을 열고 들어가 데이빗 옆자리에 앉았다. 한참이나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데이빗이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는데 그건 비단 위스키 의 취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의 몸뚱어리에는 거친 분노가 폭풍처럼 일고 있 었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그 분노가 짙게 배어 나왔다. "넌 내 소유물은 아냐. 그러니 너 좋은 대로 뭐든 할 수 있어. 그렇지만 내가 보는 앞에서 우라질 멕시코 놈들과 키스하는 일은 없었으면 해. 알겠어?" 조세핀은 너무 놀라서 멍하니 데이빗 얼굴만 쳐다보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 다. "내가 파코에게 키스를 했던 건, 파코가 기분좋은 말을 해줬기 때문이에요. 우린 친구예요." 데이빗은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진정시키느라 길게 심호흡을 했다. "이제껏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 한 가지를 얘기하겠어." 조세핀은 데이빗 입에서 어떤 얘기가 나올까 궁금해 하며 잠자코 기다렸다. "나한테 누나가 하나 있었어. 베스라고. 나... 난 누나를 몹시 사랑했어." 조세핀도 매리 루와 놀면서 몇 번 본 적이 있었기에 베스의 모습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베스는 아름다운 금발과 백옥처럼 흰살결을 지닌 미녀였다. 그러니까 조세핀이 여덟 살 때 베스는 저 세상으로 떠났다. 그때 데이빗은 열다 섯이었을 것이다. "베스가 죽었을 때 생각이 나요." 조세핀이 말했다. 그러자 데이빗은 충격적인 비밀을 털어놓았다. "베스 누나는 살아 있어." "하지만, 난... 그리고 모두들..." "누난 지금 정신병원에 있어." 데이빗은 조세핀의 얼굴을 바라보며 시체 같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누난 우리 집에서 일하던 멕시코 인 정원사에게 강간당했어. 누나의 침실은 복도를 사이로 내 방 바로 맞은편에 있었지. 누나의 비명을 듣고 뛰어 들어갔더 니 놈이 누나의 잠옷을 찢고 누나 위에 올라타서..." 데이빗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놈과 맞붙어 싸우고 있는데 어머니가 들어오셔서 경찰을 불렀어. 경 찰이 놈을 체포해 갔지. 놈은 그날 밤 구치소에서 자살했어. 그 충격으로 베스 누나는 실성하고 말았지. 그 뒤로 영영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어. 조시, 넌 내가 누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를거야. 누나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 그 일이 있은 뒤부터는 난... 난... 난..." 조세핀은 데이빗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데이빗, 정말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사실대로 말해 줘서 고마워요." 그 사건 이후 둘 사이는 더욱 가까워져서 이제 서로 비밀이 없게되었다. 조세 핀이 어머니가 광신도라는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데이빗은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아저씨 중에도 그런 분이 한 분 계셨지. 지금은 티벳의 어느 수도원에 계셔."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데이빗이 자못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난 다음달이면 스물네 살이 돼. 우리 캐년 가문의 남자들은 스물 네 살 이전 에 결혼하는 게 오랜 전통이야." 조세핀은 가슴이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이튿날 저녁, 데이빗은 '글로브 극장'표 두 장을 사들고 왔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꾸었다. "연극 구경은 그만두자. 우리 둘의 앞날에 대해 얘기해야 되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조세핀은 오랜 세월 간직해 온 꿈이 이제야 이루어지나 보 다 생각했다. 사랑과 갈망으로 활활 타오르는 데이빗의 뜨거운 눈길이 그걸 확 신케 했다. "그럼 듀이 호수로 드라이브 가요." 조세핀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프로포즈를 받아 나중에 자식들에게 두 고두고 그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이 아름다운 밤의 한 순간 한 순간을 영원 히 기억하고 싶었다. 듀이 호수는 오데사에서 40마일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작은 호수였다. 별이 총총한 아름다운 밤하늘에 반달에서 보름달로 차가는 철월이 휘영청 떠 있 었다. 잔잔한 수면 위에서 별들이 춤추었고 밤공기는 미세하고 은밀한 곤충 세 계의 신비로운 소음들로 가득했다. 저 소우주 속에서 수백만의 작은 생물들이 서로 사랑하고, 먹고, 먹히고, 태어나고, 죽어가고 있으리라. 조세핀과 데이빗은 아무 말 없이 차 안에 앉아 밤의 소리들에 귀기울였다. 운 전석에 앉은 데이빗의 준수한 얼굴이 진지하고 심각해 보였다. 조세핀은 그 모 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애간장이 다 녹아들었다. 무엇으로 이 뜨거운 사랑을 전할 수 있을까? 아,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데이빗, 우리 수영해요." "수영복을 안 가져왔는데." "상관없어요." 조세핀은 데이빗이 뭐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차문을 열고 나가 호숫가로 달렸다. 옷을 벗고 있는데 데이빗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조세핀은 따스한 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데이빗도 곧 따라 들어왔다. "조시..." 조세핀은 갈망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몸뚱어리를 데이빗의 품에 던졌다. 물 속 에서 그렇게 부둥켜안고 있노라니 사타구니에 데이빗의 딱딱하고 뜨거운 남성이 밀착되어 오는 게 느껴졌다. "이러면 안 돼, 조시." 갈망으로 목구멍이 바싹 타들어가 잔뜩 갈라진 목소리였다. 조세핀은 데이빗의 흥분한 남성을 애무하며 용기를 주었다. "괜찮아요, 데이빗. 괜찮아요." 그들은 다시 기슭으로 올라왔다. 이윽고 데이빗이 조세핀의 몸안으로 들어온 순간 그들은 별과 대지와 벨벳의 밤에 녹아들었다. 격정의 회오리가 지나간 뒤에도 그들은 한참이나 서로 껴안고 누워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둘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며 그곳을 떠났다. 데이빗 이 집까지 바래다 주고 간 뒤 조세핀은 금세 그가 프로포즈를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으나 이제 아무 상관 없었다. 둘이는 결혼식보다 더 끈끈한 의식으로 맺 어졌으니까. 프로포즈는 내일 하겠지. 조세핀은 이튿날 정오까지 내처 잤다. 그리곤 환한 얼굴로 일어났다. 어머니 가 아름답지만 낡은 웨딩드레스를 들고 침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빨리 일어나라. "브리베이커 상점"에 가서 튈"그물 모양의 얇고 질긴 비단" 12마만 끊어와. 토핑 부인이 옛날에 입었던 웨딩드레스를 가져오셨구나. 토요일 까지 시시 드레스를 만들어야 해. 시시와 데이빗 캐년이 결혼한다는구나." 데이빗 캐년은 조세핀을 집까지 데려다 주고 바로 어머니 방으로 갔다. 젊은 시절엔 절세 미인이었던 캐년 부인은 오랜 병치레로 형편없이 쪼그라든 몸뚱어 리를 침대에 의지하고 있었다. 어스레하게 등이 밝혀진 침실로 들어서니 어머니가 눈을 떴다. 아들을 보자 부인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내 아들이구나. 늦게까지 안 잤구나." "조세핀하고 데이트했어요, 어머니." 부인은 아무 말 없이 이지적인 회색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조세핀과 결혼하겠어요." 부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데이빗, 네가 그런 실수를 저지르도록 놔둘 순 없다." "어머닌 조세핀을 잘 모르세요. 그앤..." "그애가 사랑스러운 아가씨란 건 나도 잘 안다. 그러나 캐년 가의 며느리감으 로 어울리지 않아. 시시 토핑이라면 널 행복하게 해줄 거다. 네가 시시와 결혼 해 준다면 나 또한 기쁘겠구나." 데이빗은 어머니의 가냘픈 손목을 잡고 애원했다. "전 어머니를 몹시 사랑해요. 하지만 저 혼자서도 결정을 내릴 수 있어요." "정말 그럴까? 넌 네가 늘 옳은 일만 한다고 생각하니?" 온화한 목소리였다. 데이빗은 어머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데이빗, 넌 이 엄마가 마음 푹 놓을 수 있게 늘 바른 행동만 해왔니? 한 번 도 이성을 잃은 적이 없어? 끔찍한 실수를..." 데이빗은 거칠게 어머니의 손을 뿌리쳤다. "아들아, 넌 항상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아니?" 부인의 목소리는 꽃잎처럼 부드러웠다. "어머니, 제발!" "데이빗, 이제 그만하면 말썽은 충분하다. 더 이상 이 에미 힘들게 마라. 나 도 더는 못 견디겠다." 데이빗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어머니 그건... 그땐 저도 어쩔 수 없이..." "넌 이제 어른이 다 돼서 밖으로 빼돌릴 수도 없어. 그러니 어른답게 처신해 라." 데이빗이 고통스런 음성으로 애원했다. "저... 전 조세핀을 사랑해요..." 캐년 부인이 가슴을 움켜쥐고 헐떡거리기 시작하자 데이빗은 허둥지둥 의사를 불렀다. 나중에 의사는 말했다. "데이빗, 안된 일이지만 어머닌 오래 못 사시겠다." 데이빗은 비장한 결심을 하고 시시 토핑을 찾아갔다. "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 그런데 우리 어머닌 시시 너와 내가..."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런 청을 하는 건 도리가 아니지만, 그러니까 말야,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 실 때까지만 결혼해서 살다가... 나중에 이혼해 줄 수 있겠어?" 시시는 빤히 쳐다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데이빗이 정 그렇게 원한다면요." 데이빗은 천근 만근의 무게로 어깨를 찍어누르던 짐을 벗어 던진 기분이었다. "고마워, 시시. 어떻게 고맙다는 인사를..." 시시는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옛 친구 좋다는 게 뭐예요?" 데이빗이 나가자마자 시시 토핑은 캐년 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님, 모든 일이 잘됐어요." 데이빗 캐년은 조세핀이 이미 시시와의 결혼 소식을 들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채 조세핀 집으로 향했다. 친스키 부인이 문을 열었다. "조세핀 좀 만나러 왔습니다." 친스키 부인은 적의와 승리감으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길로 쏘아보았다. "우리 주 에수님은 사악한 무리들을 물리치실 것이며 사악한 무리들은 영원히 지옥에 떨어질 것이로다." 데이빗은 참을성 있게 다시 말했다. "조세핀 좀 만나고 싶은데요." "그앤 떠났어. 떠나 버렸다구!" 질 캐슬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쓴 오데사 - 엘 파소 - 샌 버나디노 - 로스앤젤레스 행 그레이하운드 버스가 할리우드 바인 스트리트 정류장에 멈춰섰다. 아침 7시였 다. 이틀 동안 계속된 천오맥 마일의 여행에서 조세핀 친스키는 질 캐슬로 새롭 게 태어나 있었다. 겉모습은 변함이 없었지만 내면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제 그녀는 웃음을 잃은 여자였다. 데이빗의 결혼 소식을 듣는 순간, 조세핀은 어디로든 도망쳐야한다고 생각했 다. 그래서 정신없이 여행 가방을 꾸렸다. 어디로 가서 무얼 해야 할지 작정도 서지 않은 채였다. 그저 어서 거길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방을 나오는데 벽에 붙은 영화 스타들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목적 지를 알 것 같았다. 그로부터 2시간 뒤, 조세핀은 할리우드행 버스에 타고 있었 다. 버스가 그녀의 새로운 운명을 향해 내닫는 사이 오데사의 기억도 점점 희미 해져 갔다. 걸핏하면 들짐승처럼 날뛰는 끔찍한 두통도 잊고 싶었다. 그 두통은 부흥회 목사가 아닌 의사의 손에 맡겨졌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상 관없다. 과거의 모든 기억들과 함께 두통까지도 씻은 듯 사라지게 될 테니까. 이제부터 내 인생은 아름답고 멋질 것이다. 조세핀 친스키는 죽었으니까. 질 캐슬이여 영원하라! @ff 제2부 대통령을 웃긴 토비 토비 템플은 서로 별 상관도 없는 세 가지 행운 - 친권 소송과 맹장염과 미국 대통령--덕에 슈퍼스타가 되었다. "워싱턴 기자 클럽" 연레 만찬장에 대통령이 내빈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이 만찬회는 매년 부통령과 상원의원들, 각료들, 사법부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석 하는 권위 있는 행사인지라 해마다 국제적인 매스컴들이 취재에 열을 올렸고 사 회자 자리도 대단한 영예였다. 올해에는 미국 최고의 코미디언이 사회자로 뽑혔 는데 출연 계약이 이루어지고 일주일쯤 지나서 해외로 줄행랑을쳐버렸다. 열다 섯 살 소녀가 그의 아이를 낳았다고 친권 소송을 걸어오자 변호사가 잠잠해 질 때까지 숨는 게 상책이라고 충고했던 것이다. 그래서 행사 준비위원회는 영화배 우겸 텔레비젼 연기자로 활약중인 한 스타를 사회장에 임명했다. 그 스타는 행 사 하루 전날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런데 다음날, 그러니까 행사 당일 갑자기 맹장이 터져 병원으로 실려가게 되었다. 이제 행사 시작 여섯 시간 전이었다. 준비 위원회는 잔뜩 몸이 달아 정신없이 사회자 후보 명단을 훑어 내려갔다. 공교롭게도 모두들 스케줄 때문에 몸을 뺄 수 없거나. 아니면 너무 먼 곳에 있어 제시간에 워싱턴에 댈 수가 없었다. 그렇 게 한 사람씩 지워 내려가다보니 후보자 명단 끄트머리깨에 겨우 올라 있던 토 비 템플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준비 위원 하나가 머리채를 흔들며 말했다. "템플은 밤무대 코미디언에요. 너무 거칠고 조잡해요. 괜히 그런 자를 사회자 로 세웠다가 대통령께 무례한 상소리나 지껄여대면 어쩝니까." "대본을 좀 다듬게 하면 괜찮을 겁니다." 다른 위원이 반기를 들었다. 그러자 결정권을 쥔 위원회 의장이 나서서 좌중 을 둘러보며 말했다. "토비 템플의 결정적인 장점을 말하겠소. 그는 지금 뉴욕에 있기 때문에 한 시간 내로 달려올 수 있어요. 우라질 만찬회가 바로 코앞에 닥쳤어요!" 행사 준비 위원회가 토비 템플을 영예의 사회자로 선택하게 된 경위는 바로 그러했다. 토비는 만찬장을 가득 메운 기라성 같은 인사들을 둘러보며 오늘밤 여기 폭탄 이라도 떨어지면 미국 대통령은 영락없이 꽁지 빠진 닭 신세겠구나 하고 생각했 다. 그만큼 미국 행정부의 주요 인물들이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귀빈용 연단에 놓인 일등 테이블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었고 경호원 대여섯 명이 그 뒤에 버티고 서 있었다. 모두들 행사 막바지 준비에 여념이 없 어 토비를 대통령에게 인사 소개시키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래도 토비는 괘념치 않았다. "이제 대통령은 나를 알게 될 거야." 아까 행사 준비 위원회 의장 다우니와 조용히 만났을 때 다우니는 이렇게 말 했었다. "토비, 우린 자네 코미디를 좋아하네. 자네의 인신공격형 코미디는 사람들 배 꼽을 빼놓지. 그러나..." 다우니는 잠시 뜸을 들이며 헛기침을 했다. "오늘 밤의 관객들은 함부로 하면 안 되는 사람들이네. 이런 말 오해는 말게. 그분들이 속이 좁아 유머를 받아들이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늘 밤 여기서 벌어지 는 모든 일들이 지구촌 구석구석으로 전해질 것이기 때문일세. 그러니 미국 대 통령과 국회의원들을 조롱하는 언사는 피해야 하네. 요컨대, 관객들을 웃기긴 하되 개인적인 인신공격은 삼가도록 하게." "걱정 마십시오." 토비는 웃으면서 다우니를 안심시켰다. 식사가 끝나고 웨이터들이 테이블을 치우자 다우니가 마이크 앞에 섰다. "대통령 각하, 그리고 내빈 여러분, 지금부터 이 자리를 이끌어 갈 사회자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촉망받는 신예 코미디언 토비 템플 씨입니다!" 토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 앞으로 걸어가는 동안 관객들은 형식적인 박 수를 보냈다. 토비는 관객들을 한 번 휘둘러보고 대통령을 향해 돌아섰다. 대통령은 단순 소박한 인물로 늘상 다음과 같이 부르짖고 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 대 인간의 만남입니다. 이제 우리는 컴퓨터에 의 존하던 기존의 외교 방식을 과감히 탈피, 우리의 직감을 믿어야 합니다. 나는 해외 열강의 우두머리들과 앉은 자리에서도 직감으로 협상하는 걸 좋아합니다." 당시 그 말은 미 전역에서 유행어가 되기까지 했었다. 토비는 대통령을 바라보며 자부심에 목이 메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대통령 각하, 오늘의 이 감격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요. 전세계 전파망을 꽁무니에 달고 다니는 위대한 분과 한자리에 서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일순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대통령에게 이 무슨 상스러운 소리 란 말인가! 모두들 충격으로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그 침묵 속에서 대통령이 껄껄 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여기저기서 폭소와 박수 갈채가 터져나왔다. 그때부터 토비는 훨훨 날았다. 상원의원이며, 대법원장이며, 기자 단이며 하나같이 토비의 신랄한 공격을 받고도 좋다고 웃어댔다. 토비의 공격이 그저 우스개일 뿐이라는 걸 알기에 그들은 눈물을 질금질금 짜내면서까지 웃고 또 웃었다. 토비의 천진스런 얼굴은 그 효과를 더욱 고조시켰다. 그 자리엔 외 국 장관들도 더러 있었는데 토비가 그들 나라 말로 엉터리이긴 하지만 너무나 진짜 같은 발음으로 익살을 떨자 박장대소를 했다. 토비 템플은 막강한 권력자 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어지럼증이 일도록 비행기를 태웠다 하는 백치 광대였고 모두들 그의 익살에 넋을 잃었다. 토비를 기립 박수를 받았다. 대통령이 다가오더니 말했다. "휼륭했어요., 아주 훌륭했어. 토비, 월요일 밤에 백악관에서 작은 만찬회가 있는데 자네가 와주겠다면..." 이튿날 신문들은 앞다투어 토비 템플의 이야기를 실었고 그의 우스개가 여기 저기에 인용되었다. 백악관 만찬회에서 사회를 맡은 토비는 거기서 더 크게 히 트를 쳤다. 순식간에 지구촌 곳곳에서 초대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하여 토비 는 런던 팔라듐에서, 여왕을 위한 연회에서, 국제 에술 위원회 자선 공연에서 진가를 십분 발휘했다. 미국 대통령과 골프도 자주 치고 백악관 디너 파티에도 여러 번 초대되었다. 토비는 국회의원들과 주지사들, 미국 유수의 기업가들을 만났고 그들을 사정없이 공격했다. 그들은 토비의 공격이 거셀수록 더 토비에게 매료되었다. 그들은 자기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토비를 초대해서 토비의 날카롭 고 재치 있는 혀가 손님들을 공격하는 걸 즐겼다. 그리하여 선민 의식이 강한 미국 상류층 교양인들 사이에선 토비와의 친분이 권위의 척도가 되기에까지 이 르렀다. 토비는 곧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초대의 홍수에 행복한 비명을 내 질렀다. 클리프톤 로렌스도 토비 못지않게 흥분하고 있었는데 그건 비단 비즈니 스나 돈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는 어느새 토비를 친자식처럼 각별하게 여기고 있었다. 근래 몇 년 클리프톤은 고객들 중에서 토비에게 가장 신경을 많이 써왔 는데 과연 그 보람이 있었다. 토비는 쉬임없이 재능을 갈고 닦아 다이아몬드처 럼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게다가 인기만 치솟으면 오만방자해지는 다른 스타들 이 무색해지도록 변함없이 마음 씀씀이가 넓고 남에게 감사할 줄 알았다. "토비, 베이거스의 일류 호텔들이 자넬 잡고 싶어 야단이네. 출연료는 얼마라 도 좋다는 거야. 자네와 장기 계약을 맺고 싶어해. 지금 내 책상 위에는 '폭스 ', '유니버설', '팬 - 퍼시픽'에서 보내온 대본들이 잔뜩 쌓여 있네. 자넨 아무 역할이나 고를 수 있어. 유럽 여행을 즐기면서 특별 출연을 할 수도 있고 자네 이름으로 된 텔레비전 쇼를 맡을 수도 있네. 방송국마다 자넬 원하고 있지. 쇼 를 진행하면서 동시에 베이거스에서 공연도 하고 일년에 한 작품 정도는 영화를 찍을 수도 있네." "내 이름으로 텔레비전 쇼를 진행하면 출연료가 얼마나 되죠, 클리프?" "일주일에 한 시간 버라이어티 쇼를 진행하는데 만 달러까지 받아낼 수 있어. 그렇게 2년 계약, 아니 3년 계약도 가능해. 자넬 그만큼 절실히 원하니까." 토비는 카우치에 떡 기대 앉아 승리감에 도취했다. 쇼 한 번에 만달러씩이라, 일년이면 40번의 쇼를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게다가 3년 계약이면 백만 달러가 넘는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다. 그냥 입만 나불거려서 말이다! 토비는 클리프톤 을 바라보았다. 저 작달막한 대리인은 겉으론 태연한 체하고 있지만 속으론 텔 레비전 계약을 맺었으면 해서 안달이 날 것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그냥 가만 히 앉아서 토비의 재능과 땀으로 벌어들인 돈에서 십이만 달러를 수수료로 챙겨 먹을 수 있는데 말이다. 클리프톤은 평생 더럽고 누추한 클럽에서 엉덩이가 닳 도록 일할 필요도, 술 취한 관객들의 야유와 맥주 깡통 사례를 받는 일도, 싸구 려 창녀들에게 임질이 옮아 돌팔이 의사를 찾아간 일도 없었다. 그가 어찌 바퀴 벌레가 득실거리는 여관방과 기름기 많은 음식과 밤새 털털거리는 버스를 타고 변소 순회 공연을 도는 고달픔을 알겠는가? 절대 모르리라. 어느 비평가가 토비 를 벼락 스타라고 했을 때 토비는 껄걸 웃었었다. "텔레비전 쇼를 하죠." 이윽고 토비가 말했다. 6주 뒤, '컨솔리데이티드 방송국'과 출연 계약이 맺어졌다. "방송국에서 스튜디오 한군데와 공동으로 투자하고 싶어하더군. 내 생각에도 좋을 것 같네. 그럼 자연스럽게 영화 계약을 할 기회도 생길 테니." 클리프톤 로렌스가 말했다. "어떤 스튜디오요?" "팬-퍼시픽." 토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샘 윈터즈?" "맞았네. 샘은 이 바닥에서 최고의 두뇌를 지녔지. 게다가 자네한테 딱 맞는 영화 대본도 갖고 있고 '서부에 간 사나이'라고." "윈터즈와 군대에 같이 있었죠. 좋아요. 윈터즈는 나한테 빚이 있어요. 그 개 자식을 한번 멋지게 등쳐 봐요! 클리프톤 로렌스와 샘 윈터즈는 '팬 - 퍼시픽 스튜디오' 체육관 한증탕에 앉 아 유칼립투스향이 나는 뜨끈뜨끈한 김을 쐬고 있었다. "이런 게 바로 인생이지. 돈 싫다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작달막한 대리인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샘은 빙긋 웃었다. "클리프, 왜 진작 그런 얘기 안 했어요?" "자네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네." "듣자 하니 토비 템플이 '컨솔리데이티드 방송국'과 계약을 맺었다더군요." "그래 엄청난 계약이지. 그 방송국에서 그런 거액의 계약은 이번이 처음일 거 야." "제작비는 어디서 대기로 했습니까?" "왜?" "흥미가 동해서요. 우리 스튜디오와 손을 잡으면 거기 영화 출연계약 하나를 끼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잖아도 아직 공식 발표는 하지 않았지만 '서부에 간 사나이'라는 코미디물을 사들였는데 토비가 적격이에요." 클리프톤 로렌스는 잔뜩 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염병할! 샘,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군. 벌써 MGM과 흥정을 끝냈거 든." "계약이 끝난 건 아니죠?" "계약서에 서명만 안 했다 뿐이지 이미 구두로 다..." 20분 뒤 클리프톤 로렌스는 아주 파격적인 조건으로 '팬 - 퍼시픽'이 '토비 템플 쇼'를 제작하고 토비가 '서부에 간 사나이'에 주연으로 출연한다는 내용의 계약을 맺었다. 한증탕의 살인적인 열기만 아니었더라면 흥정은 한참이나 더 계 속되었을 것이다. 계약 조건 중 하나는 토비 템플이 연습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역 을 세워 게스트들과 입을 맞추게 한 다음 토비는 마지막 리허설과 녹화에만 참 석하기로 했다. 그건 신선하고 흥미로운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서려는 전략이었 다. 1956년 9월의 어느 오후, 토비는 바인 스트리트에 위치한 녹화장으로 뚜벅뚜 벅 걸어 들어가 객석에 떡하니 앉아서는 리허설을 지켜 봤다. 리허설이 끝나자 대역 대신 토비가 카메라 앞에 섰다. 그러자 녹화장 안이 금세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드디어 재기가 번득이고 생동감이 넘치는 한 편의 쇼가 완성되었다. 밤 이 되어 그 쇼가 텔레비전 전파를 타자 4백만 시청자들이 지켜 보았다. 마치 텔 레비전이 토비 템플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클로즈업된 토비의 얼굴은 실 물보다 훨씬 사랑스러웠고 모두들 그 프로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토비 템플 쇼'는 닐슨 시청률 조사에서 일약 1위에 뛰어올랐고 그 자리를 계속 고수 했다. 이제 토비 템플은 스타가 아니었다. 슈퍼스타가 된 것이다. 할리우드의 그늘 할리우드는 질 캐슬이 꿈꾸어 오던 모습보다 훨씬 휘황찬란했다. 질은 시내 관광을 돌며 스타들의 저택을 구경했다. 언젠가는 그녀도 벨 에어나 베벌리 힐 즈 같은 곳에 꿈 같은 저택을 갖게 될 터였다. 그때까지 당분간은 낡은 셋집에 들기로 했다. 질의 새 보금자리는 원래도 볼품없었던 2층짜리 목조 건물을 작은 방 열두 칸짜리 셋집으로 개조하여 아주 흉칙한 꼴이 되고 만 집이었다. 덕분에 방세는 싸서 저축한 돈 2백 달러로 오래 버틸 수가 있는 데다 할리우드 심장부 바인 스트리트와 지척인 브론슨에 위치하고 있어 영화 스튜디오들에 드나들기도 수월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집이 마음에 드는 건 여남은 명의 세입자들이 하나같이 질처럼 영화에 뜻을 품고 찾아든 이들이거나, 엑스트라 혹은 단역 배우로 활동 중인 사람들, 아니면 영화 바닥에서 은퇴한 이들이라는 점이었다. 영화계에서 은퇴한 이 집 터줏대감들은, 여자들은 누르께하게 변색된 화장가운 바람에 머리 에는 헤어 컬을 주렁주렁 매달고, 남자들은 낡아서 보풀이 있는 양복에 다 떨어 진 구두를 신고 유령처럼 집 안을 배회했다. 그들은 늙었다기보다는 폐품처럼 보였다. 이 집에는 온통 부서지고 뒤틀린 가구들이 놓인 거실이 하나 있었는데 저녁때만 되면 모두 이곳에 모여 수다를 떨었다. 모두들 신참인 질에게 한마디 씩 충고를 했지만 서로의 주장이 다 틀렸다. "영화에 발을 들이려면 AD 하나를 잡아서 꼬셔 놔야 해." 최근에 텔레비전 시리즈물에서 떨려나 우거지상을 하고 다니는 여배우의 조언 이었다. "AD가 뭔데요?" 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조감독 말야. 숩 'supe 임시 고용 배우 super'의 약어들을 뽑는 사람이 바로 AD거든." 몰라도 너무 모르는 질이 한심하고 측은하다는 듯한 어조였다. 질은 잔뜩 주눅이 들어 차마 "숩"이 뭐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바람둥이 배역 감독을 꿰는 게 최고야. AD야 자기 작 품에밖에 넣어 줄 수 없지만 배역 감독은 여러 영화의 배역을 결정하거든." 여든은 되었음 직한, 이가 몽땅 빠진 할망구가 끼여들었다. "그야 그렇죠. 그 작자들 대부분이 동성연애자라서 문제지." 대머리 성격 배우가 말을 받았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일단 출연만 하면 되는 거지." 작가의 꿈을 불태우고 있는 열성적인 안경잡이 청년이 나섰다. 짙은 용기를 내어 자기 의견을 말했다. "엑스트라로 시작하는 건 어떨까요? 센트럴 캐스팅에..." "포기해요. 센트럴 캐스팅 지원자 명단은 이미 다 찼으니가. 게다가 특기자가 아니면 받아 주지도 않아요." "저어... 죄송하지만, 특기자가 뭔데요?" "그러니까 이를테면 손발이 잘려나간 사람들은 33에서 58달러를 받지. 정상인 들은 21에서 50인데 말야. 멋진 야회복을 가졌거나 말을 탈 줄 알면 28에서 33 달러, 도박장에서 카드패를 돌릴 줄 알아도 28에서 33을 받구. 축구나 야구를 잘하면 33에서 58달러, 손발 잘려나간 사람들과 같지. 낙타나 코끼리를 탈 줄 알면 55에서 94달러. 내 충고하겠는데, 엑스트라로 뛰어들 생각은 일찌감치 버 려요. 단역 배우 자리를 뚫어 봐." "엑스트라와 단역 배우가 어떻게 다른지 잘 모르겠어요." 질이 솔직하게 고백했다. "단역 배우는 대사가 한 줄이라도 있지. 그러나 엑스트라는 말을 하면 안 돼. 단, 옴니 omni는 빼고 말야." "뭐요?" "옴니... 시끌시끌 떠드는 소리나 웃음소리 같은 배경음을 내는 사람들 말 야." "우선 해야 할 일은 대리인을 잡는 거지"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스크린 액터'에 명단이 다 나와 있어. '스크린 액터'는 '영화배우 조합'에 서 나오는 잡지야. 내 방에 한 권 있는데 갖고 올게." 모두들 머리를 맞대고 '스크린 액터'에 나오는 대리인 명단에서 질의 대리인 감을 찾았다. 이름난 대리인들은 아예 받아 주지도 않을거라는 의견이 압도적이 어서, 우선 피라미 대리인 열두엇을 뽑았다. 질은 그 명단을 들고 한 군데씩 찾아다녔다. 그러나 여섯 번째까지는 말 붙 일 기회도 주지 않았다. 이윽고 일곱 번째 대리인을 찾아갔는데 마침 그가 막 사무실을 나서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전 대리인을 구하고 있는데요." 일곱 번째 대리인은 잠시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럼 포트폴리오나 봅시다." 질이 맹한 얼굴로 되물었다. "뭐라고 하셨어요?" "보아 하니 이제 막 상경한 모양이구만. 여기선 그거 없으면 안통해요. 가서 여러 포즈로 사진을 찍어요. 젖통과 엉덩이가 드러나는 섹시한 걸로." 질은 '데이빗 셀즈닉 스튜디오' 근방의 컬버 시티 사진관에서 35달러를 내고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사진을 찍고 일주일 뒤에 찾으러 가서 보니, 썩 마음에 들었다. 사진 속의 질 캐슬은 아름다웠다. 시름에 잠긴 표정, 성난 표정, 사랑 스런 표정, 요염한 표정 등. 그녀의 모든 표정이 거기 담겨 있었다. 사진관 직 원이 그 사진들을 - 마음대로 뺐다 끼웠다 할 수 있는 - 루스리프식 셀로판 종 이에 담아 멋진 포트폴리오로 묶어 주었다. "여기 맨 앞에다 아가씨의 출연 작품들을 기록하면 돼요." 출연 작품, 그것이 다음 단계였다. 그로부터 2주 동안 질은 명단에 있는 모든 대리인을 찾아갔지만 아무도 그녀 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중 하나가 이런 말을 했다. "어제 왔던 아가씨로군." 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래, 어제 그 아가씨랑 똑같이 생겼는데. 그게 바로 문제야. 찾아오는 아가 씨들마다 하나같이 엘리자베스 테일러나 라나 터너, 아니면 애바 가드너를 닮았 거든. 여기 할리우드가 아닌 다른 곳에서 다른 직업을 찾는 거라면 서로들 아가 씰 끌어가려 할 거야. 아가씬 예쁘고 섹시하거든. 몸매도 근사하구. 그렇지만 여기선 미모가 너무 흔해. 전세계에서 아름다운 아가씨들은 다 이리로 몰려들거 든. 모두들 고향에선 날리던 미인들이지. 고등학교 때 학예회 연극에서 주연을 하고 미인 대회에서 1등을 하고 남자 친구는 너야말로 스타감이라고 잔뜩 바람 을 넣고... 그렇게 수천 명식 모여드는데 맨 그 얼굴이 그 얼굴이야. 이봐 아가 씨, 아가씬 어제 여기 왔었다구, 그렇다니까." 세입자들은 질에게 다시 대리인 명단을 만들어 주었다. 전에 명단에 올랐던 대리인들보다 싸구려라서 하나같이 사무실도 형편없고 위치도 빈민가에 있었지 만,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우린 출연 경력이 없는 사람은 받지 않아요. 아가씬 상당한 미인이고 가르보 이상 가는 명배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초보자를 키울 여력이 없거든. 그 러니 일단 영화에 얼굴을 내밀고 나서 다시 찾아와요." "이렇게 아무도 받아 주지 않는데 어떻게 출연을 하죠?" "맞아. 그게 문제지. 복이 터져야지." 질은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대리인을 찾아갔다. 할리우드 가의 '메이플라워 커피숍'에서 우연히 합석하게 된 여자가 소개한 대리인이었다. '더닝 대리인 사 무실'은 변두리 주택가의 어느 조그만 방갈로에 있었다. 질이 미리 전화를 걸어 언제쯤 찾아가면 되겠냐고 묻자 전화를 받은 여자가 여섯 시쯤 오라고 했었다. 질은 한때 누구 네집 응접실이었다가 사무실로 개조한 듯한 비좁은 공간에 들 어섰다. 사무실에는 서류 뭉치가 아무렇게나 흐트러져있는 흠집투성이의 낡은 책상 하나와 외과 수술용 흰 테이프로 여기저기 찢어진 곳을 붙인 인조가죽 카 우치 하나, 그리고 등나무 의자 세 개가 있었다. 얼굴에 마마 자국이 난 거구의 여자가 안쪽 방에서 나오며 물었다. "어떻게 오셨나요?" "전 질 캐슬이에요. 미스터 더닝과 약속이 있어서 왔습니다." "미스 더닝. 바로 나예요." 여자가 말했다. "어머, 죄송합니다, 전..." 여자는 상냥하게 웃으며 괜찮다고, 상관없다고 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상관이 있다구." 질의 몸이 갑작스런 흥분으로 부르르 떨렸다. "왜 진작 이런 기회가 오지 않았을까? 여자 대리인! 산전수전 다 겪은 여자 대리인이라면 이해심이 넓을 것이다. 그 따스한 모성애로 가련한 어린 아가씨를 포근하게 감싸줄 것이다. 남자보다는 같은 여자가 내 마음을 더 잘 헤아려 줄 거야." "그래, 포트폴리오를 가져왔군요. 어디 좀 볼까요?" 미스 더닝이 말했다. "그럼요." 질은 얼른 사진첩을 넘겨 주었다. 여자는 의자에 앉아 포트폴리오를 한 장씩 넘겨 보며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 를 끄덕거렸다. "카메라를 잘 받는군요." 질은 감개무량해서 말문이 다 막혔다. "감사합니다." 대리인은 질의 수영복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몸매가 아주 좋군요. 그게 중요하지요. 어디 출신이에요?" "텍사스요, 텍사스 오데사." "질, 할리우드에 온 지는 얼마나 됐어요?" "두 달쯤요." "그래, 대리인을 몇이나 찾아가 봤어요?" 질은 잠시 거짓말을 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지만 상대의 눈동자에 동정과 이해 심이 가득한지라 솔직하게 대답했다. "한 30명쯤요." 대리인이 픽 웃었다. "그러다 결국 로즈 더닝에게까지 왔군요. 그렇지만 여기가 밑바닥은 아니에 요. 난 MCA나 윌리엄 모리슨 정도는 못 되지만 적어도 내 고객에게 일거리가 끊 기게는 안 하니까." "전 아직 연기 경험이 없습니다." 여자는 별로 놀라지도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험이 있다면 MCA나 윌리엄 모리슨에게로 갔겠죠. 나는 간이 정거장인 셈이 에요. 재능 있는 신인들을 키워 놓으면 거물급 대리인들이 싹 낚아채 가버리 죠." 질은 실로 몇 주 만에 처음으로 희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럼, 저... 제 대리인이 되어 주실 생각이 있으세요?" 여자는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내 고객들 중에는 아가씨 얼굴 반도 못 따라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아가씨 정도면 일거리를 줄 수 있어요. 그래야 아가씨도 경력이 생기겠죠, 안 그래요?" 질은 그저 감지덕지할 따름이었다. "이 저주받을 도시의 문제점은 아가씨 같은 초보자에게 도대체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거예요. 스튜디오마다 쓸 만한 신인이 없다고 죽는 소리를 하면서도 정작 담을 높이 쌓아 놓고 아무도 들이려 하지 않죠. 자, 우리 그들에게 본때를 보여줍시다. 아가씨라면 세 가지 정도 맞는 작품이 있어요. 주간 연속극이나 토 비 템플 영화나 테시 브랜드의 새 영화." 질은 머리가 핑핑 돌았다. "그렇지만 그들이 절..." "내 추천만 있으면 돼요. 난 쓸 만한 고객이 아니면 절대 추천을 하지 않기 때문에 모두들 날 신용하지요. 물론 알고 있겠지만 그냥 단역이에요.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니까." "어떻게 고맙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여기 그 주간 연속극 대본이 있을 거예요." 로즈 더닝은 쿵 소리를 내며 거구를 의자에서 일으켜 안쪽 방으로 향하며 질 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안쪽 방은 구석 창문 밑에 더블 베드가 놓인 침실로 침대 맞은편 구석에 철제 캐비닛이 하나 있었다. 로즈 더닝은 캐비닛 서럽에서 대본을 꺼내어 질에게 건 넸다. "자, 여기 있어요. 이 연속극의 배역 감독이 내 친한 친구예요. 여기서 잘만 하면 일을 계속 맡을 수 있을 거예요." "잘하겠어요." 질이 열 띠게 대꾸했다. 대리인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연하지. 난 꼬챙이에 꿴 통돼지구이를 추천하진 않으니까, 한 번 읽어 볼 래요?" "예, 예." 대리인은 대본은 펼치더니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이 장면을 읽어 봅시다." 질은 대리인 옆에 나란히 앉아 대본을 보았다. "아가씬 나탈리 역이에요. 나탈리는 실수로 약골과 결혼한 돈많은 여자죠. 그 래서 이혼을 하려 하지만 남편이 듣지 않아요. 자, 여기부터 들어갑시다." 질은 재빨리 그 장면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하루, 아니 단 한 시간이라도 연 습할 시간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구세주 같은 대리인에게 좋은 인 상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준비됐어요?" "예... 예." 질은 눈을 감고 나탈리가 되려고 애썼다. 돈많은 여자. 어릴 적 보았던 석유 부잣집 귀부인들 같은 여자겠지. 자기가 누리고 있는 호사를 당연시 여기고 가 난한 하인들이 자기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여자. 시시 토 핑류의 여자. 이윽고 질은 눈을 뜨고 대본을 보며 읽기 시작했다. "피터, 얘기 좀 해요." "이따가 하면 안 되겠소?" 로즈 더닝이 상대역을 맡아 주었다. "아뇨,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어요. 오늘 오후에 리노행 비행기를 탈 거예 요." "겨우 그거요?" "아뇨. 피터, 난 지난 5년 동안 그 비행기를 타려고 했어요. 이젠 정말로 떠 날 거예요." 로즈 더닝의 손이 질의 허벅지를 톡톡 쳤다. "아주 좋아요. 계속 읽어 봐요." 로즈 더닝은 손을 치우지 않은 채 질을 재촉했다. "당신 문제가 뭔지 알아요? 아직 철이 들지 않았다는 거예요.. 당신은 아직도 어린애처럼 게임이나 즐기며 살고 있어요. 이제부턴 당신 혼자 게임을 즐기세 요." 로즈 더닝의 손이 질의 허벅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질은 당황했다. "좋아요. 계속해요." "나... 난 다신 당신과 만나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연락하지 말아요. 알겠어 요?" 허벅지의 손길이 빨라지는가 싶더니 사타구니를 향해 더듬어 올라오기 시작했 다. 질은 대본을 내려놓고 로즈 더닝을 바라보았다. 대리인은 얼굴이 붉게 상기 된 채 흐리멍텅한 눈을 하고 쉰 목소리로 애원했다. "계속 읽어요." "저... 전 안 돼요. 저..." 이윽고 로즈 더닝의 손이 질의 사타구니께를 더듬고 있었다. "이건 무드를 조성하기 위한 거야. 영화는 섹스 싸움이거든. 아가씨 안에 있 는 섹스를 느끼고 싶어." "안 돼요!" 질은 부들부들 떨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로즈 더닝의 입꼬리에서 침이 뚝뚝 떨어졌다. "나한테 잘해 줘야지 나도 아가씨한테 잘해 주지. 이리 와, 예쁜이." 사뭇 애원조였다. 로즈 더닝이 팔을 뻗어 잡으려는 순간 질은 한달음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밖에 나와서 웩웩 토했다. 속의 것을 다 토해내어 뱃속이 편안해 진 후에도 기분은 말할 수 없이 참담했다. 다시 두통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래선 안 돼. 두통은 나를 떠났어. 두통은 조세핀 친스키 거야." 그렇게 15개월이 흐르는 동안 질 캐슬은 연예계 주변을 맴돌며 호시탐탐 그곳 에 발을 들어놓을 기회를 찾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 '잔존자들'의 어엿한 일원 이 되었다. "잔존자들"은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이런저런 임시직을 전전하며 하염없이 기회를 기다렸으며 그 기다림이 10년, 15년 계속되어도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원시 시대의 부족들이 불가에 둘러앉아 부족의 용맹스런 행위들을 낱낱이 이 야기하듯 "잔존자들"도 슈업즈 약국에 모여 식어가는 커피잔을 어루만지며 연예 계의 영웅담과 가십들을 지칠 줄 모르고 늘어놓았다. 그들은 엄연히 연예계 바 깥에 있었지만 그 심장부에 존재하고 있기도 하였다. 어느 스타가 밀려나게 될 지, 어느 제작자가 어느 감독과 동성연애를 하는지, 어느 방송국 사장이 쫓겨나 게 될지를 귀신같이 알았다. "잔존자들"의 정글북이 덩덩덩 울리면 연예계에서 가장 따끈따끈한 소식들이 뜨르르 퍼져나갔다. 연예계는 정글이었다. '잔존자들 '은 연예계의 실상을 잘 알았기에 결코 무지개빛 환상을 품지 않았다. 그들의 환상은 연예계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언젠가는 높은 벽과 좁은 문 을 뚫고 스튜디오 안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이엇다. 그들은 모두 에술가 이며 선택된 인간이었다. 할리우드는 그들의 여리고"성서에 나오는 팔레스타인 의 옛 도시"이며 여호수아가 황금 나팔을 불면 육중한 성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저항하던 적군이 그들 앞에 무릎을 꿇을 터였다. 아, 그리고 샘 윈터즈가 마법 의 지팡이를 흔들면 그들은 은실로 짠 의상을 걸치고 대중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영화 스타가 되어 있을 터였다. "슈업즈"의 커피는 금세 취기가 오르는 성 찬용 포도주요, "잔존자들"은 마음의 평안을 찾아 떼지어 모여들어 곧 이루어지 게 될 화려한 꿈으로 서로의 가슴에 온기를 주는 미래의 사도들이었다. 누구나 몇 다리 건너고 건너서 영화계에 줄이 하나쯤은 있었고 그 줄에게서 이미 힘써 보겠다는 언질을 받아 둔 터라 언제 어떻게 갑자기 꿈이 현실이 될지 몰랐다. 그러나 기다리는 동안은 슈퍼마켓 점원으로, 주차원으로, 보조 미용사로, 세 차 담당으로 일해야만 했다. 그들은 서로 그렇게 의지해 살면서 끼리끼리 결혼 하고 이혼하고 세월을 까먹었다. 그러면서 자꾸만 늘어가는 주름살을, 희끗희끗 해 가는 머리를, 아침 화장 시간이 족히 30분은 더 늘었다는 걸 까맣게 의식하 지 못했다. 그들은 한 번 사용되어 보지도 못하고 폐품 신세가 되었다. 채 무르 익을 사이도 없이 시든 그들, 이제 그들은 어떻게 손써 볼 여지도 없이 팍삭 늙 어 아이를 가질 수도, 평생 그토록 염원해 오던 멋진 아가씨 역할을 맡을 수도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저절로 성격 배우 지망생으로 물러나지만 그래도 꿈은 버리 지 않았다. '잔존자들' 중에 얼굴이 반반하고 싱싱한 아가씨들은 이른바 '침대 매트리스 값'으로 연명했다. "침대에 잠깐 누웠다 일어나면 20달러가 그냥 생기는데 뭣하러 종일 등골 빠 지게 일해? 대리인한테서 연락이 올 때까지 잠깐만 이짓 하는 거야." 그러나 질은 그런 데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관심은 오롯이 영화일에 쏠려 있 었다. 가난한 폴란드 출신 아가씨는 데이빗 캐년과 결혼할 수 없다. 이제야 그 걸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영화 스타 질 캐슬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영화 스타 의 꿈을 이루지 못하면 도로 조세핀 친스키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질은 '잔존자들'의 일원인 해리엇 마커스를 통해 드디어 영화에 첫 데뷔를 하 게 되었다. 해리엇의 팔촌뻘 되는 사람의 전처의 오빠가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서 찍고 있는 텔레비전 메디컬 드라마 'medical drama'의 조감독 보조로 일하고 있어서 어렵게 어렵게 성사가 된 것이었다. 대사는 단 한 줄, 출연료는 고작 57 달러, 그걸 다 받는 것도 아니고 사회 보장 연금과 원천세, 영화 구호 기금을 공제했다. 질은 간호사 역할을 맡았다. 대본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간호사로 분한 질이 병실에서 환자의 맥박을 재고 있는데 의사가 들어온다. 의사: "환자는 좀 어떤가, 간호사?" 간호사: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요, 선생님." 그게 다였다. 질은 월요일 오후에 달랑 한 페이지뿐인 복사본 대본을 받았다. 이튿날 아침 6시에 분장을 해야 되니까 시간에 맞춰 오라는 것이었다. 질은 그 신을 백번도 넘게 연습했다. 기왕이면 대본 전체를 다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고작 한 페이지로 어떻게 간호사역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단 말인가? 질은 그 간호사 가 어떤 인물인지 분석해 보려고 무척 고심했다. 유부녀일까, 독신녀일까? 어쩌 면 그 의사와 비밀스러운 사랑을 나누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둘사이에 모종 의 관계가 있었다가 헤어진 건지도 몰라. 환자에겐 어떤 감정을 갖고 있을까? 환자의 죽음을 애통해 하고 있을까? 아니면 은근히 바라고 있을까?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요, 선생님." 잔뜩 근심 어린 음성이었다.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요, 선생님." 겁에 질린 급박한 음성이었다. 환자가 죽어가고 있으니까.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요, 선생님." 비난하는 음성. 이게 다 의사의 잘못이다. 그가 환자를 팽개쳐 두고 정부와 자러 가지 않았다면... 질은 너무 마음이 들뜬 나머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한잠도 못 잤는데도 새벽녘에 스튜디오 향하는 길은 졸리기는커녕 하늘로훨훨 날아오를 듯 가벼웠 다. 해리엇에게 빌린 차를 몰고 유니버설 스튜디오 정문에 도착했을 즈음, 사위 는 아직도 어둑어둑했다. 질이 자기 이름을 대자 수위는 명부를 확인해 보더니 들어가라고 손짓을 했다. "7번 무대로 가요. 두 블록 더 가서 우회전하면 됩니다." "내 이름이 명부에 올라 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나를 받아들인 거야." 정말이지 꿈만 같았다. 질은 촬영장을 향해 달리면서 감독과 자기 역할에 대 해 얘기를 좀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감독이 원하는 어떤 성격이든 다 소화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질은 대형 주차장에 차를 대고 7번 무대로 갔 다. 촬영장은 조명과 전기 장비들을 이리저리 옮기고 카메라를 설치하고 - 질은 알아듣지도 못할 전문 용어로 - 고래고래 소리를 질리대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 다. "... 여기 스크림 (올이 굵은 평직 무명이나 린네르로 만든 영화배경막) 하나 줘"... 베이비 (가까운 거리에서 좁은 범위를 비치는 조명) 꺼..." 질은 거기 우두커니 서서 영화계의 소리와 냄새와 모습에 흠뻑 취했다. 이곳 이야말로 그녀의 세계요, 미래였다. 어떻게 해서든 감독 눈에 띄면, 감독에게 재능을 인정받으면 이제 앞길이 훤하게 열리게 될 것이다. 조감독 보조가 질을 비롯한 여남은 명의 배우들을 분장실로 몰고갔다. 거기서 질은 간호사 의상을 입고 다시 촬영장으로 나와 다른 단역 배우들과 함께 한쪽 구석에 서서 기다렸다. 이윽고 차례가 오자 조감독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질 은 서둘러 병실 세트로 올라갔다. 감독이 카메라 옆에 서서 주연 배우와 얘기하 고 있었다. 이 드라마의 주연 배우 로드 핸슨은 지혜와 덕망을 한 몸에 갖춘 의 사역을 맡고 있었다. "차라리 우리 집에서 키우는 독일산 세퍼드가 써도 이 엉터리 대본보단 낫겠 소. 우라질, 왜 이렇게 내 인물 성격이 희미한 겁니까?" "로드, 이 드라마가 전파를 탄 지도 벌써 5년이야. 더 욕심 부리지 말게 시청 자들은 지금의 자네 모습을 좋아해." 카메라맨이 감독에게 다가와서 보고했다. "감독님, 준비됐습니다." "고맙네, 핼." 감독은 다시 로드 핸슨을 보며 말했다. "자, 지금 갈 수 있겠지? 얘기는 이따 다시 하세." "우라질, 빨리 이 스튜디오랑 손을 끊어야지, 원." 핸슨은 불퉁거리며 저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질은 이제 혼자 서 있는 감독을 향해 돌아섰다. 지금이야말로 그녀가 맡은 역 의 인물 성격에 대해 토론할 절호의 기회였다. 감독의 고충을 다 들어주고, 감 독 의도대로 내가 맡은 신을 최대한 멋지게 연기해야지. 질은 감독에게 따스하 고 상냥한 미소를 보내며 입을 열었다. "전 질 캐슬이에요. 간호사 역을 맡고 있죠. 간호사를 흥미 있는 인물로 부각 시키는 아이디어를..." 감독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가서 병상 옆에 서요." 그리곤 카메라맨에게 걸어가 버렸다. 질은 우두망찰 감독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해리엇의 팔촌뻘 되는 사람의 전처의 오빠인 조감독 보조가 허겁지겁 달려와 조그만 소리로 속삭였다. "맙소사, 감독 말 못 들었어요? 빨리 병상 옆에 가서 서요!" "전 그냥..." "기회를 망치지지 말아요. 어서 가라구!" 조감독 보조가 열을 내며 속삭였다. 질은 환자의 병상을 향해 걸어갔다. "좋았어. 자, 이제 갑시다. 감독님, 리허설 한 번 하고 갈까요?" 조감독이었다. "이런 신에 리허설은 무슨, 그냥 가." "자. 그럼 신호 밸 주세요. 전원, 준비. 멋지게 끝냅시다. 갑니다." 질은 방금 울린 벨 소리가 도저히 믿기질 않았다. 연기에 들어가기 전에 감독 과 인물 성격에 대한 얘기를 해야 했기에 두리번두리번 감독을 찾았다. "액션!" 그 소리와 함께 모두의 시선이 질에게 쏠렸다.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카메라 맨들에게 요청해도 될까 어쩔까 머뭇거리고 있는데 감독이 소리쳤다. "염병할! 간호사! 여긴 영안실이 아냐. 병실이라구. 환자가 기다리다 늙어 죽 기 전에 빨리 맥박을 재란 말야!" 질은 초조한 시선으로 자신에게 쏟아 부어지고 있는 눈부신 조명들을 둘러보 았다. 심호흡을 한 번 길게 하고는 환자의 팔을 잡고 맥박을 쟀다. 감독이 정 그렇게 나온다면 내가 단독으로라도 이 신을 해석해야 한다. 이 환자는 의사의 부친이다. 둘은 심하게 다투었다. 그러던 중 부친이 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실려 왔고 의사는 지금 막 연락을 받고 달려오는 길이다. 질은 고개를 들고 로드 핸 슨이 다가오고 있는 걸 지켜 보았다. 그가 다가와서 물었다. "환자는 좀 어떤가, 간호사?" 질은 의사의 눈동자에서 근심을 읽었다. 진실을 말해야 한다. 그의 부친이 죽 어가고 있다고, 선생님은 부친께 잘못을 빌 겨를도 없이 부친을 잃게 될 것이라 고. 그러나 단도직업적으로 말했다간 의사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감독이 소리를 질러댔다. "컷! 컷! 컷! 빌어먹을, 저 멍청이는 대사 한 줄도 못해. 대사를 까먹었다구. 어디서 저런 여자를 데려왔어? 전화번호부에서?" 질은 당황해서 몸둘 바를 모르며 고함소리가 들려오는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저... 전 대사를 잊어먹지 않았어요. 전 그저... 몹시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래, 대사를 알고 계시다고. 그럼 제발 부탁인데 지금 대사를좀 해주시겠습 니까? 왜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는 거야? 그 시간이면 기차 시동을 걸었겠네. 의사가 물으면 즉각 대답하라구, 알겠어?" "전 다만 말예요..." "다시 갑시다. 지금 당장. 벨 울려요." "벨 울렸습니다. 자 갑니다." "액션." 질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진정으로 이 신에 신경 쓰는 사람은 자기뿐인 것만 같았다. 아름다운 신을 연기해 내고 싶었던 거였는데. 강 렬한 조명에 머리가 어질어질했고 겨드랑이에 땀이 차서 새하얀 간호사복을 더 럽히고 있었다. "액션! 간호사!" 질은 환자의 맥박을 재기 시작했다. 여기서 또 실수를 하면 다시는 기회를 얻 지 못하리라. 질은 함게 사는 세입자들과 해리엇의 경고를 생각했다. 의사가 다가와서 물었다. "환자는 좀 어떤가, 간호사?" 이제 난 그들과 어울리지도 못할 거야. 난 웃음거리가 되고 말 거야. 할리우 드는 좁은 바닥이라 소문이 금세 퍼질 테니까.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요, 선생님." 이제 다른 스튜디오에서도 날 쓰지 않겠지. 이게 내 마지막 영화가 될 거야. 이제 다 끝이야. 끝장이야. "지금부터 이 환자에게 각별히 신경을 쓰세요." 의사가 말했다. "좋았어! 컷!"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드어 세트를 치우고 다음 세트를 준비하느라 부산을 떨 었지만 질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드디어 첫연기가 끝났다. 그러나 질 은 그걸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다니. 감독한테 가서 고맙다는 인사를 챙겨야 할까 어쩔까 생각하며 둘러보니 감독은 무대 저쪽 끝에 서 사람들의 무리에 묻혀 있었다. 조감독 보조가 다가와서 팔을 잡으며 말했다. "잘했어요. 다음번엔 대사를 꼭 외고 와야 돼." 그렇게 질은 영화에 데뷔했다. "이제부턴 일거리가 끊임없이 들어올 거야." 그로부터 13개월이 흐른 뒤에야 질은 'MGM'에서 단역을 하나 맡을 수 있었다. 그동안 정말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에이본 화장품 외판원, 음료수 판매원, 택 시 기사... 돈이 자꾸만 줄어들자 질은 해리엇 마카스와 아파트를 같이 쓰기로 했다. 침 실이 둘인 아파트를 얻어 하나씩 차지했는데 해리엇은 침대를 너무 혹사시키고 있었다. 검은 단발머리와 검은 눈동자, 마른 듯한 몸매가 매력적인 해리엇은 시 내 백화점에서 모델로 일하고 있었고 유머감각이 풍부했다. "호보큰 출신들은 다 유머감각이 뛰어나지." 그녀가 질에게 한 말이었다. 질은 처음엔 해리엇의 차갑고 거만한 모습에 좀 기가 죽었지만 곧 그게 처세 를 위한 가면임을 알게 되었다. 속을 알고 보면 해리엇은 정도 많고 겁도 많은 여자였다. 그녀는 끊임없이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다. 처음 만났을 때 해리엇은 질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언제 랠프를 소개시켜 줄게. 우린 다음달에 결혼할 거야." 그러나 일주일 뒤, 랠프는 해리엇의 자동차와 함께 종적을 감추었다. 랠프가 떠나고 채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해리엇은 토니를 만났다. 무슨 수출 입 회사에 몸담고 있다는 그에게 해리엇은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다. "토니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야." 해리엇이 질에게 말했다. 그러나 해리엇과는 달리 토니의 목숨을 하찮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던지 한 달 쯤 뒤였을까 그는 사과로 재갈이 물린 채 로스앤젤레스 강에서 익사체로 발 견되었다. 알렉스가 해리엇의 다음 연인이 되었다. "난 평생 그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이야." 해리엇은 질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알렉스는 미남이었다. 늘 비싼 옷만 입고 번쩍거리는 스포츠카를 몰고 다녔 다. 그리고 날이면 날마다 자동차 경주장에서 살았다. 그들의 로맨스는 해리엇 이 빈털털이가 되면서 끝장이 났다. 보다못한 질이 왜 그렇게 남자들을 모르냐 고 화를 냈다. "난 어쩔 수가 없어. 왜 그런지 모르겠어. 불쌍한 남자들만 보면 마음이 끌 려. 모성 본능 때문인가 봐." 그리곤 씨익 웃으며 덧붙였다. "우리 엄마는 백치였지." 질은 해리엇의 약혼자들이 수도 없이 바뀌는 걸 지켜보며 살았다. 닉, 바비, 존, 레이먼드... 이제 더 이상 그들 이름을 외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몇 개월을 함께 살았을까, 어느 날 갑자기 해리엇이 임신을 했다고 선 언했다. "레오나드 아이 같아. 그렇지만 확실친 않아. 캄캄한 데서는 맨 그 얼굴이 그 얼굴 같으니까." "레오나드는 어디 있지?" "오마하나 오키나와에 있을 거야. 난 지리엔 젬병이거든." "그래, 앞으로 어쩔 거야?" "아기를 낳아야지." 해리엇은 몸이 워낙 가냘퍼서 몇 주일도 안 돼 임신한 표가 났고 결국 모델일 을 포기해야 했다. 질은 해리엇을 먹여 살리기 위해 슈퍼마켓에 나가 일했다. 어느 오후, 퇴근해서 돌아와 보니 쪽지가 한 장 기다리고 있었다. 해리엇 필 체였다. "난 늘 내 고향 호보큰에서 아기를 낳고 싶었어. 그래서 가족들이 있는 곳으 로 돌아간다. 분명 멋진 남자가 거기서 날 기다리고 있을거야. 그동안 고마웠 어. 수녀가 된 해리엇." 아파트는 하루아침에 고적한 장소로 탈바꿈했다. 고독한 황제 토비 템플은 성공에 한껏 취해 있었다. 마흔둘에 세상을 손아귀에 쥔 그는 왕 들과 농담을 하고 대통령들과 골프를 즐기는 몸이었다. 토비를 사랑하는 수백반 의 소시민 팬들은 그가 진정 자기들에게 속해 있다는 걸 알기에 그를 챔피언으 로 떠받들었다. 토비의 날카로운 혀가 막강한 권력자들을 여지없이 박살내는 걸 보며 더할 수 없이 즐거워했다. 그들은 토비가 자기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믿 어 의심치 않으며 토비를 열렬히 사랑했다. 토비는 인터뷰 때마다 어머니 얘기를 해서 그녀를 마치 무슨 성인처럼 만들었 다. 어머니와 성공을 나누는 길은 그것뿐이니까. 토비는 '벨 - 에어'에 아름다운 저택을 사들였다. 튜더식으로 건조된 그 저택 에는 침실 여덟 개와 웅장한 계단, 영국에서 들여온 수공예 장식판자, 극장, 게 임룸, 포도주 보관 창고, 넓은 풀장, 하인들이 거처하는 별채, 손님용 사랑채 두 채가 마련되어 있었다. 팜 스프링즈에도 호화판 저택을 사들였고, 온갖 종류 의 경주마도 샀다. 3인조 들러리 배우를 고용하여 그들을 '맥'이라 불렀는데 ' 맥'들은 토비라면 껌벅 죽었다. 그들 3인조는 토비의 심부름도 하고, 기사 노릇 도 하고, 여자들도 붙여 주고, 여행도 함게 하고, 마사지도 해 주었다. 주인이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다 했다. 그들은 국가적인 광대의 광대들이었다. 토비는 비서를 넷 두고 있었는데 그중 둘은 매일 폭주하는 팬 레터를 처리하는 일만 담 당했다. 토비의 개인 비서는 셰리라는 스물두 살의 금발 미녀였는데 한마디로 요염 덩어리였다. 토비는 서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그녀에게 미니 스커트에 노팬티 바람으로 다니도록 했다. 토비의 첫 영화는 첫날부터 대히트였다. 샘 윈터즈와 글리프톤 로렌스도 극장 에 나타났다. 영화가 끝나고 모두들 뒤풀이를 하러 '체이슨즈'로 몰려갔다. '팬 - 퍼시픽'과 정식 계약이 이루어지고 샘과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었을 때 토비는 이렇게 말했었다. "그때 내 전화를 받았더라면 훨씬 싼값에 계약을 할 수 있었을거요." 그리곤 샘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내가 복이 지지리도 없구만." 샘은 구슬픈 어조로 그렇게 받았었다. 이제 그들은 '체이슨즈'에 둘러앉아 있었다. 샘이 클리프톤 로렌스에게 말했다. "계약 조건으로 내 팔과 다리를 한짝씩 요구하지만 않는다면 토비와 3편의 영 화 제작 계약을 새로 맺고 싶은데요." "팔 한짝만 떼어가지. 내일 아침에 내가 전화함세." 대리인은 그렇게 대꾸하고 시계를 보며 덧붙였다. "지금은 볼일이 있어서." "어디 가는데요?" 토비가 물었다. "다른 고객과 약속이 있네. 자네만 내 고객은 아니라구." 토비는 묘한 눈초리로 쳐다보며 대꾸했다. "물론 그러시겠죠." 이튿날 조간들은 토비의 영화 얘기로 떠들썩했다. 비평가들은 입을 모아 토비 템플이 텔레비전뿐만 아니라 영화에서도 스타로 떠오를 것임을 장담했다. 토비는 그 평들을 빠짐없이 읽고 나서 클리프톤 로렌스에게 전화했다. "축하하네, 이 친구. 자네 오늘 아침 '리포터'와 '버라이어티'읽어 봤나? 영 화평들이 무슨 연애편지 같더군." "그래요. 세상은 맛있는 녹색 치즈 천지고 나는 몸집이 고양이만 한 쥐예요. 이보다 신나는 일이 있겠어요?" "토니, 내 말했었지, 언젠가 자넨 세상을 손아귀에 넣을 거라고. 지금 내 예 언이 맞아떨어졌네. 세상은 자네 거야." 대리인의 목소리가 만족감으로 떨리고 있었다. "클리프, 할말이 있어요. 이리로 좀 오실래요?" "그러지. 오후 다섯 시가 넘으면 시간이..." "지금 당장요." 잠시 주저하는 기색을 보인 뒤 클리프톤이 입을 열었다. "약속이 좀 있어서..." "아, 그렇게 바쁘시면 그만두세요." 토비는 그렇게 말하고 다짜고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1분 뒤, 클리프톤 로렌스의 비서한테서 전화가 왔다. "지금 로렌스 씨가 그리로 가고 계십니다." 클리프톤 로렌스는 토비의 집 카우치에 앉아 있었다. "이 사람, 토비, 내가 자네한테 제일 신경쓰고 있다는 거 알잖나. 오늘 자네 가 날 보자고 할 줄은 정말 몰랐네. 그럴 줄 알았으면 다른 약속은 정하지도 않 았지." 토비는 대리인이 진땀을 빼고 있는 꼴을 가만히 지켜 보고 앉아 있었다. 클리프톤이 헛기침을 해서 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이보게! 자넨 내가 가장 아끼는 고객이야. 그걸 모르겠나?" "암, 그건 진실이지, 진실이구말구, 내가 토비 템플을 만들었어. 토비는 내 창조물이라구. 토비 못지않게 나도 그의 성공을 기뻐하고 있어." 클리프톤은 속으로 생각했다. 토비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게 정말이세요. 클리프?" 스마트하게 치장한 대리인의 몸이 비로소 긴장을 푸는 게 토비 눈에도 똑똑히 들어ㅎ다. "어쩐지 자꾸 회의가 생겨서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선생님은 고객들이 너무 많아서 이따금은 나한테 충분히 신경을 못 쓰는 거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렇지 않아. 다른 고객들보다 자네한테..." "클리프, 내 일만 맡아 주세요." 클리프톤은 미소를 머금고 대꾸했다. "농담이겠지." "아뇨, 농담 아닙니다." 클리프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나는 단독 대리인을 둘 정도의 위치에 섰어요. 나 말고 여남은명의 고객들을 더 보살펴야 하는 그런 대리인이 아니라 오로지 내 일에만 성의 다하는 그런 대 리인 말입니다. 클리프,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아세요? 이건 무슨 그룹 섹스 같아요. 한 사람이 욕구를 만족시키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잔뜩 발기한 채 기다 리고 있어야되는." 클리프톤은 토비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술 한잔씩 하세." 토비가 술을 가지러 바로 간 사이 클리프톤은 깊은 사념에 잠겼다. 그는 진짜 문제가 뭔지 알고 있었다. 문제는 토비의 자만 내지는 허영심이었다. 그건 외로움에서 기인했다. 토비는 클리프톤이 아는 그 누구보다도 외로운 인 간이었다. 클리프톤은 토비가 여자들을 몇십 명씩 사고, 선물 공세로 친구들을 끌어모으는 걸 지켜보아 왔다. 토비와 함께하는 자리에서는 아무도 계산서를 집 어 들 필요가 없었다. 한번은 연주자 한 사람이 토비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토비, 당신은 사랑을 돈으로 살 필요가 없어요. 모두들 당신을 사랑하니까 요." 토비는 눈을 찡긋해 보이며 대꾸했다. "그래도 모험을 걸 순 없지." 그 뒤 그 연주자는 토비의 쇼에서 떨려났다. 토비는 모두의 모두를 원했으며 그런 게걸스런 욕구는 결코 충족될 줄을 몰랐 다. 클리프톤은 토비가 한꺼번에 여섯 명의 아가씨들과 동침한 적이 있다는 사실 도 알고 있었다. 그건 가슴속의 공허함을 채우려는 몸부림 같은 거였으리라. 그 러나 그런다고 외로움을 잊을 순 없다. 토비에게 필요한 건 진실한 사랑을 나눌 단 한 사람의 여자이니까. 그런데도 아직 그런 여자를 찾지 못하고 숫자 게임이 나 즐기고 있는 것이다. 토비는 늘 주위에 사람들이 득실거리지 않으면 배겨내질 못했다. 외로움. 그 외로움을 잊는 순간은 관객 앞에 서서 뜨거운 갈채와 사랑을 받을 때뿐이었다. "사실은 아주 간단한 문제인데 말야." 클리프톤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토비는 무대에서 내려오면 늘 사람들의 무리를 끌고 다녔다. 그의 주위에는 늘 연주자들, 들러리 배우들, 작가들, 쇼걸들, 한물간 코미디언들이 우글거렸 다. 이제 토비는 클리프톤 로렌스를 원하고 있었다. 그의 모두를. 클리프톤은 여남은 명의 고객을 두고 있었지만 그들 수입을 몽땅합쳐도 토비 혼자 나이트 클럽, 텔레비전, 영화 등에서 벌어들이는 상당한 액수와 별 차이가 없었다. 그렇지만 클리프톤은 돈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다. 진정 토비 템플을 사 랑하기 때문에, 토비가 그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어려운 용단을 내렸다. 사실 그도 토비가 필요했다. 토비를 만나기 전에 그의 인생은 얼마나 무미건조했던 가. 한동안 새로운 도전이라곤 없이 옛 성공의 힘을 빌어 무사안일하게 살아왔 었다. 토비가 돌풍처럼 몰고 온 흥분과 웃음, 둘 사이의 깊은 우정 - 클리프톤 로렌스가 진정 귀하게 여기고 포기하지 못하는건 바로 그것이었다. 토비가 술 두 잔을 만들어 오자 클리프톤은 잔을 높이 치켜 올리며 외쳤다. "우리 둘을 위하여!" 바야흐로 성공과 웃음과 파티의 시절을 맞은 토비는 늘 재기가 번득였다. 사 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그에게서 우스개를 기대했다. 배우라면 셰익스피어나 버 나드 쇼나 몰리에르 같은 극작가들을 등에 업을 수 있고, 가수라면 거슈인이나 로저스 앤드 하트나, 코울 포터같은 작곡가들에게 의지할 수 있겠지만 코미디언 은 어디 그런가, 오로지 자기 재치에 의존해야 한다. 토비 템플의 즉흥 연기는 할리우드에서 아주 유명했다. 어느 고령의 스튜디오 창업자를 위한 파티에서 누군가 토비에게 물었다. "그분 연세가 아흔하나라는 게 사실이에요?" 토비가 대답했다. "그럼요. 백살이 꽉 차면 둘로 쪼개서 다시 쉰으로 만든다던데요." 어느 디너 파티에서였다. 스타들의 수술을 도맡다시피 하는 어떤 유명한 외과 의사가 코미디언들을 앞에 놓고 길고 지루한 우스개를 늘어놓았다. 토비가 나서서 애원했다. "선생님, 그렇게 웃기면 우린 뭐해 먹고 삽니까? 제발 좀 살려 주세요!" 어느 날은 영화 촬영에 쓸 소품으로 스튜디오에 사자를 몇 마리 끌고 왔다가 다시 트럭에 싣고 있는데 그것을 본 토비가 익살을 떨었다. "아이구, 점잖은 문명인들께서 여기까지 왕림을 다 해주셨구만. 잠깐, 10분만 더 있다 가요!" 토비의 장난질은 가히 전설적이었다. 그의 친구 중에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있었는데 작은 수술을 받고 병원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젊고 아름다운 수녀가 그의 병실에 들렀다. 수녀는 그의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아주 좋군요. 열도 없고, 피부가 부드러워요." "고맙습니다. 수녀님." 수녀는 몸을 구부려 그의 베개를 똑바로 해주었다. 그 바람에 젖가슴이 환자 의 얼굴을 스쳤고 저 가엾은 사내는 자기도 모르게 아랫도리가 불끈 일어났다. 수녀는 이제 담요를 똑바로 덮어 주고 있었다. "어머나 이게 뭐예요?" 수녀는 환자의 사타구니가 불룩한 걸 보고 담요를 젖혔다. "이...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수녀님. 저도 모르게..." 환자가 더듬더듬 용서를 구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정말 대단한 물건을 가지셨네요." 수녀는 그렇게 말한 뒤 환자의 품에 몸을 던졌다. 그로부터 6개월이 흐른 뒤에야 그 천주교인은 토비가 매춘부를 수녀로 분장시 켜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은 또 이런 일이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내릴 때가 되자, 토비 는 평소에 눈꼴 사납게 여기던 어느 거만한 방송국 중역에게 말했다. "그런데, 윌, 어쩌다 그렇게 도덕성 시비에 휘말리게 됐어요, 그래?" 뭐라고 변명할 사이도 없이 토비가 내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그 중역은 내릴 때까지 함께 탔던 대여섯 명의 승객들에게 경계 어린 눈초리를 받아야 했 다. 팬 - 퍼시픽과 새 계약을 체결할 시기가 오자 토비는 훈련된 표범 한 마리를 스튜디오로 데려오게 했다. 그리곤 샘이 한창 회의를 하고 있는 중에 사무실 문 을 벌컥 열었다. "내 대리인이 당신하고 얘기를 하고 싶어하던데요." 그리곤 표범을 안으로 몰아넣고 밖에서 문을 닫아 버렸다. 나중에 토비는 신바람이 나서 그 얘기를 떠들고 다녔다. "그 사무실에 있던 세 사람이 하마터면 심장 발작을 일으킬 뻔했고 표법이 싸 놓은 똥 냄새가 빠지는 데 족히 한 달은 걸렸다더군. 토비는 오핸론과 레인지 밑에 10명의 작가를 두었는데 늘 그들의 대본이 마땅 치 않다고 불평을 했다. 한번은 매춘부를 작가 팀에 넣었는데 작가들이 일할 생 각은 않고 침실에만 붙어 살아서 할 수 없이 그녀를 해고해야만 했다. 어느 날 은 거리의 오르간 연주자와 그가 부리는 원숭이를 스토리 회의 장소에 데려오기 도 했다. 오핸론과 레인저를 비롯한 작가들은 심한 모욕감을 느꼈지만 평범한 대본을 황금으로 둔갑시키는 토비였기에 그 정도의 수모는 달게 참았다. 토비는 최고의 코미디인이니까. 토비는 통이 크기로도 유명했다. 고용인들이나 친구들에게 금딱지 시계며, 고 급 라이터며, 비싼 의상이며, 유럽 여행권이며 아낌없이 풀었다. 늘 엄청난 액 수의 지폐를 지니고 다니며 현금으로 물건값을 치렀다. 롤스로이스 두 대를 그 렇게 샀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토비는 한마디로 물주였다. 금요일이면 연예계 에서 빌어먹고 사는 빈대 여남은 명이 그의 집 앞에 줄을 섰다. 한번은 꼬박꼬 박 그 행렬에 참가하는 어떤 사람에게 토비가 물었다. "아니, 오늘은 왜 왔어요? 신문에 보니까 영화일을 하나 맡았다고 나왔던데." 사내가 빤히 쳐다보며 대꾸했다. "이것도 직업인데 해고하려면 2주는 말미를 주셔야지." 할리우드엔 토비의 이야기들이 무수히 떠돌았고 대부분이 실화들이었다. 어느 날은 작가 하나가 스토리 희의에 늦었다. 토비가 그런 행동을 절대 용서하지 낳 는다는 걸 그 작가도 알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아침에 우리 아이가 교통 사고를 당해서 그만..." 토비는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아이디어는 생각해 왔나?"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토비의 잔혹함에 진저리를 쳤다. 회의가 끝난 뒤 작가 하나가 오핸론에게 말했다. "그런 냉혈한은 처음 봐요. 우리 몸에 불이 붙으면 그 개자식은 우리한테 물 을 팔아먹으려고 할 거예요." 토비는 미국 최고의 뇌 전문의를 비행기로 모셔와 다친 아이를 치료하게 하고 병원비 일체를 대신 부담했다. 그리곤 아이 아빠를 윽박질렀다. "이 일에 대해 발설하면 자넨 그날로 해고야." 일이야말로 토비에게 외로움을 잊게 하고 진정한 기쁨을 주는 유일한 축목이 었다. 쇼가 성황리에 끝나면 토비는 세상 누구보다도 유쾌하고 넉넉했지만 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악마로 돌변하여 옆에 있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공격했다. 토비는 소유욕 또한 강했다. 한번은 스토리 회의석상에서 레인저의 머리를 양 손으로 잡고 이렇게 선언했다. "이건 내 거야. 내 머리라구." 토비는 작가들을 맹렬히 증오했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토비는 자기가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 자체를 견딜 수 없어했던 것이다. 그래서 작가들을 마구 대했다. 월급날이면 수표로 종이 비행기를 접어 작가들에 게 날리곤 하였다. 한번은 작가 하나가 선탠을 하고 오자 그를 즉각 해고시켰 다. "왜 그를 해고시켰소? 재능이 뛰어난 작가인데." 오핸론이 물었다. "성실히 일하는 사람은 선탠을 할 여유가 없지." 새로 들어온 작가 하나가 어머니에 관한 우스개를 들고 왔는데 그 역시 당장 해고되었다. 토비의 쇼에 초대된 게스트가 농담을 잘해서 큰 웃음을 받으면 토비는 이렇게 외쳤다. "당신 아주 대단해요! 앞으로 우리 쇼에 매주 나오쇼." 그리곤 PD를 향해 말했다. "내 말 들었지요?" 그건 다시는 그 게스트를 초대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토비는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는 인물이었다. 다른 코미디언들이 성공을 거두 면 끔찍히 질투를 하면서도 이따금 엉뚱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그는 리허설을 마치고 나가다가 분장실에서 한물간 코미디 스타 비니 터켈을 보았다. 이미 오래 전부터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비니는 최근 어느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진지한 역을 맡게 되었고 은근히 이것을 컴백의 기회로 삼으려 했다. 그런데 토비가 보니, 비니는 분장실 카우치에 앉아 고주망태가 되어 있었다. 마 침 그 프로그램 담당 PD가 지나가다가 토비를 보고 말했다. "토비, 그냥 놔둬요. 비니는 끝났어." "무슨 일인데요?" "비니의 트레이드마크가 원래 떨리는 고성이었잖소. 리허설을 하는데 비니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면 모두 웃기 시작하는 거야. 그래서 저 친구 잔뜩 낙담 한 거지." "원래 그 역이 비니를 위한 거였잖소, 안 그래요?" 토비가 물었다. PD는 어깨를 으쓱 올려 보이며 대꾸했다. "사실 모든 역이 모든 배우를 위한 거지." 토비는 비니 터켈을 집으로 데려가 열심히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이 역이야말로 당신 평생 최고의 역이에요. 그걸 포기할 작정입니까?" 늙은 코미디 스타는 절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벌써 끝난 일이네. 토비. 난 아무래도 안 되겠어." "누가 안 된다고 해요? 당신은 세상 누구보다도 그 역을 잘 해낼거라구요." "모두들 나를 보고 웃었어." "물론 그랬죠. 왜 그랬는지 알아요? 평생 당신은 웃기는 역할만 해왔으니까 요. 그래서 모두들 당신에게서 우스꽝스런 연기를 기대하죠. 하지만 신경쓰지 말고 그대로 열심히 노력하면 사람들의 편견을 꺾을 수 있어요. 반드시 성공한 다구요." 토비는 바쁜 와중에도 그날 오후 내내 비니 터켈을 어르고 달랬다. 그리하여 마침내 담당 PD의 집으로 다음과 같은 전화를 걸게 되었다. "터켈은 이제 괜찮아요. 그러니 염려 말아요." "상관없어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교체했으니까." PD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다시 비니로 교체해요. 기회를 줬으면 일단 한 번은 찍어 봐야지." "토비, 모험을 걸 수는 없소. 비니가 또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명심하시오. 비니에게 기회를 줘요. 마지막 리허설 때도 그의 연기가 마음에 차지 않으면 내가 대신 그 역을 맡겠소." 잠시 침묵이 흐른 뒤 PD가 외쳤다. "이봐요! 농담 아니겠지요?" "맹세하겠소." "그럼 얘기 끝난 거요. 내일 오전 9시에 리허설이 있으니까 바니한테 시간 맞 춰서 나오라고 해요." PD는 혹시 토비가 딴소리라도 할까 봐 얼른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해서 비니는 다시 무대에 서게 되었고 그 프로는 전파를 타자마자 대 히트를 쳤다. 비평가들은 그게 다 비니 터켈의 열연 덕이라고 입을 모았다. 비 니는 텔레비전 부문의 모든 상을 휩쓸었고 일약 드라마 연기의 일인자로 떠올랐 다. 비니는 토비에게 감사의 뜻으로 비싼 선물을 사보냈다. 하지만 토비 템플은 쪽지와 함께 그 선물을 돌려보냈다. "그건 내 덕이 아니에요. 당신이 해낸 겁니다." 그게 바로 토비 템플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비니 터켈은 '토비 템플 쇼'의 파트 하나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그만 오만방자해진 비니가 토비의 말허리를 자르는 실수를 범했다. 그때 부터 토비는 비니 터켈을 철저히 짓밟았고 4천만 시청자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온갖 수모를 다 주었다. 토비 템플은 그런 사람이기도 했다. 누가 오핸론에게 토비 템플이 진짜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이런 대답이 나왔 다. "찰리 채플린이 백만장자를 만나는 그 영화 기억나요? 그 백만장자는 취했을 때는 채플린의 친구지만 술이 깨면 폭군이 되어 채플린의 엉덩이를 걷어차서 내 쫓지요. 그게 바로 토비 템플이에요. 술부분만 빼면." 한번은 방송국 중역진과 회의를 하는데 햇병아리 중역 하나가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나중에 회의가 끝나자 토비가 클리프톤 로렌스에게 말했다. "그 사람이 날 좋아하지 않나 봐요." "누가?" "회의에 참석했던 그 햇병아리 말예요."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인물인데." "나한테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어요. 날 좋아하지 않나 봐요." 꽤나 심각한 음성이었다. 클리프톤 로렌스는 그 일로 종일 속을 끓이는 토비를 보다못해 그 햇병아리 중역의 연락처를 수소문했다. 한밤중에야 연락이 닿자 클리프톤은 영문을 몰라 어리벙벙해 있는 그에게 다짜고짜 캐물었다. "혹시 토비 템플한테 무슨 유감 있소?" "내가요? 난 그가 세상에서 제일 웃기는 코미디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 다.!" "그럼 부탁 좀 합시다. 토비한테 전화해서 그 얘기를 해줘요." "뭐라구요?" "토비한테 전화해서 좋아한다고 말해 주라구." "글쎄요, 알았어요. 날이 밝는 대로 전화하죠." "지금 해요." "지금은 새벽 3시예요!" "상관없어요. 토비가 기다리고 있소." 과연 신호가 가자마자 토비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햇병아리 중역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말했다. "저... 난 그저 당신이 위대한 인물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고맙소, 친구." 토비는 짤막하게 대꾸하고 전화를 끊었다. 토비의 수행단은 점점 불어갔다. 이따금 그는 한밤중에 느닷없이 전화로 친그 들을 불러모아 카드놀이를 하기도 하고, 오핸론과 레인저를 깨워 한밤의 스토리 회의를 소집하기도 했다. 3인의 '맥'과 클리프톤 로렌스와 신인 여배우 몇 명과 빈대들을 불러 앉혀 놓고 밤새 집 안에서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북적댈수록 토비의 외로움은 깊어만 갔다. 포로노 연기 1963년 11월, 어느덧 화사한 햇살은 꼬리를 감추고 성글고 온기 없는 겨울빛 이 대지를 비추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면 자욱한 안개 속에서 제법 한기가 옷깃 을 스몄고 첫 겨울비가 내린 지도 오래였다. 질 캐슬은 여전히 아침마다 '슈업즈 약국'에 들렀지만 늘 그 얘기가 그 애기 인 '잔존자들'의 모임에 차츰 희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누가 잘못되면 신 바람을 냈고 잘되면 깎아 내리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들이 가장 즐기는 화제는 누가 무슨 역에서 무슨 무슨 이유로 떨려났다는 애기였고, 그런 얘기만 나오면 그렇게 고소해할 수가 없었다. 그건 이를테면 실패자들의 비가였고 질 캐슬은 자기도 저들처럼 비참한 지경이 되면 어쩌나 속으로 애가 탔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성공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잔존자들"의 낯익은 얼굴들을 바라보고 있노 라면 저들도 나 같은 신념을 갖고 있겠지 하는 생각에 그만 맥이 풀렸다. 우리 들 모두가 전혀 현실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는 거라면? 모두들 이루지 못할 꿈을 붙잡고 세월만 허송하고 있는 거라면? 그런 생각만 하면 정말이지 견딜 수 가 없었다. 질은 어느새 '잔존자들'의 고민을 도맡아 들어주는 대모가 되었다. 그들이 찾 아와 고충을 호소하면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애썼다. 때로는 충고 한마디가, 때 로는 돈 몇 푼이, 때로는 1, 2주 동안의 잠자리가 그녀의 처방이었다. 워낙 스타의 꿈에 집착하다 보니 데이트는 꿈도 못 꿨고 또 마음에 차는 남자 도 없었다. 돈이 생기면 자기가 영화 배우로 성공하고 있다고 잔뜩 거짓말을 늘어놓는 장 문의 편지를 동봉해 어머니께 부쳤다. 처음에는 무조건 회개하고 하느님의 신부 가 되라고 윽박지르는 회신을 보내던 어머니도 차츰 그래도 영화 일거리가 늘어 나 송금 액수가 커지자 딸이 배우가 된 것에 억지로나마 긍지를 갖는 것 같았 다. 그래서 배우를 포기하라는 말은 뚝 끊기고, 대신 종교 영화에 출연해야 한다 는 압력만 넣었다. "우리 집안이 얼마나 독실한 기독교 가문인지 얘기하면 감독도 너한테 종교적 인 역을 줄거야." 친키스 부인의 편지 내용이었다. "오데사는 좁은 바닥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여전히 석유 부자들의 옷 짓는 일 을 하고 있다. 당연히 어머니 입에서 내 얘기가 흘러 나갔을 것이고 곧 데이빗 캐넌의 귀에도 내가 배우로 성공했다는 얘기가 들어갈 것이다." 그런 생각에 질은 유명한 스타들의 애칭을 들먹여 가며 자기가 얼마나 잘 나 가고 있는지를 화려하게 각색해서 어머니께 보고했다. 단역 배우들은 사진사한 테 부탁해서 어쩌다 스타 옆에 서게 될 때를 포착, 그럴듯하게 스냅 사진을 찍 게 하는 수법을 많이 쓰는데 질도 그런 방법을 동원하여 스타와 나란히 찍은 사 진을 확보했다. 사진사가 2장씩을 뽑아 주면 한 장은 어머니께 부치고 나머지 한 장은 자기가 간직했다. 그녀의 편지 내용을 보면 질 케슬은 머지않아 스타덤 에 오를 유명한 배우였다. 겨울이라야 눈이라곤 구경도 할 수 없는 남 캘리포니아에는 크리스마스를 앞 두고 이색적이 풍경이 펼쳐진다. 크리스마스 3주 전 산타클로스 퍼레이드가 할 리우드 가를 행진하고, 그때부터 크리스마스이브까지 매일 밤 산타클로스를 태 운 썰매가 시내를 달리는 것이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복하는 마음이야 할리 우드 시민들도 눈이 펑펑 쏟아져서 멋진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북쪽 지방 사람들 못지않으니까. 섭씨 30도를 오르내리는 푹푹 찌는 날씨에 집집마다 차들 마다 어울리지도 않는 '루돌프 사슴코',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캐롤이 터져 나온다고 해서 이곳 사람들은 이상한 눈으로 볼 수는 없는 일이다. 화이트 크리 스마스에의 미련을 쉽게 떨쳐 버리지 못해서 그러는 것일 뿐이니까. 그러나 하 늘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내려주지 않으므로 이들은 스스로 즐거움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 거리엔 크리스마스 전구들이 형형색색으로 빛나고 군데군데 플라 스틱 크리스마스 트리들과 혼응지로 만든 산타클로스와 썰매와 루돌프가 장식된 다. 할리우드의 스타들과 성격배우들은 모두들 산타클로스 퍼레이드에 끼고 싶 어하는데 그건 길가에 나래비로 서서 퍼레이드를 구경하는 수천 인파에게 명절 기분을 한껏 높여주고 싶은 갸륵한 취지에서가 아니라 이 퍼레이드가 텔레비젼 전파를 타고 전국에 얼굴이 나갈 것이 때문이다. 질 캐슬은 길모퉁이에 홀로 서서 장식 수레의 긴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나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레에 탄 스타들이 길가에 서서 박수를 치 는 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올해의 퍼레이드 그랜드 마샬은 토비 템플이었다. 그를 태운 장식 수레가 지나가자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 다. 질은 토비의 환하게 미소 짓는 재기 넘치는 얼굴을 언뜻 보았고 수레는 곧 지나갔다. 할리우드 고등학교 밴드가 연주를 하며 지나갔고 프리메이슨 수레와 해군 군 악대가 그 뒤를 이었다. 그 다음엔 카우보이 복장의 말 탄 사람들, 구세군 밴 드, 미스틱 슈라인 단원들이 차례로 모습을 보였다. 다음엔 깃발과 가느다란 리 본을 든 합창단, 꽃으로 동물과 새 모양을 꾸민 '노트즈 베리 농장' 수레가 따 랐고 소방 펌프, 광대, 재즈 밴드들이 뒤를 이었다. 그 광경은 크리스마스 정신 과 좀 거리가 있을진 몰라도 할리우드만의 이색적인 풍습임엔 틀림없었다. 수레에 탄 성격배우들 중엔 질과 안면이 있는 사람들도 몇 있었다. 그 중 하 나가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외쳤다. "안녕, 질! 요즘 어때?" 주위 사람들이 부러움 섞인 시선을 보내자 질은 자부심에 흐뭇해졌다. 모두들 이제 내가 연예계의 일원이라는 걸 알아챘겠지. 옆에 서 있던 사내가 굵직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 왔다. "실례합니다. 혹시 배우세요?" 스물 중반쯤 됨 직한 키가 훌쩍 크고 잘생긴 금발 청년이었다. 선탠을 한 얼 굴색은 건강미가 넘쳐 보였고 치아가 시리도록 희고 가지런했다. 낡은 진 상하 의에 팔꿈치에 가죽을 댄 청색 트위드 재킷차림이었다. "예." "나두요." 청년은 씩익 웃으며 말했다. "고생 좀 하고 있지요." 질도 자기를 가리키며 대꾸했다. "마찬가지죠." 청년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커피 한잔 사도 되겠어요?" 앨런 프레스턴이라는 그 청년은 설트 레이크 시티 출신이며 부친이 모르몬 교 회 장로라고 했다. "그래서 너무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났어요." 그가 질에게 털어놓았다. "이런 천생연분이 다 있나. 가정 환경이 아주 똑같았잖아." 질은 혼자 그렇게 생각했다. "난 그래도 뛰어난 배우인데, 이 바닥이 워낙 버티기가 힘들어요. 고향에선 모두들 나서서 뒤를 밀어 주지만 여기선 모두들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것 같다니 까." 그들은 커피숍이 문을 닫을 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웠고 금세 오랜 친 구처럼 가까워졌다. "우리 집에 같이 갈래요?" 앨런의 제안에 질은 별 망설임 없이 응했다. "좋아요." 앨런 프리스턴은 할리우드 보울에서 두 볼록 떨어진 하일랜드 애버뉴의 어느 셋집, 그것도 허름한 뒷방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이 집은 인간 쓰레기장이라고 부르면 적격이죠. 여기 어떤 인간들이 살고 있 는지 알아요? 연예계에서 한몫 해보겠다는 야무진 꿈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괴짜들이죠." "우리랑 같군요." 질은 속으로 대꾸했다. 앨런의 방에는 가구라곤 침대와 장농, 의자, 흔들거리는 작은 테이블 하나가 전부였다. "궁전으로 들어갈 때까지 당부간만 묵고 있는 거예요." 앨런이 말했다. "나도 그래요." 질이 웃으며 대꾸했다. 앨런이 포올을 하려 하자 질은 잔뜩 긴장해서는 애원했다. "제발, 이러지 말아요" 앨런은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조용히 대꾸했다. "알았어요." 질은 갑자기 당황스러워졌다. 그런데 내가 지금 이 남자 방에서 뭘 하는 거 지? 그녀는 자기가 왜 이런 경솔한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알고 있었다. 너무 외 롭기 때문이었다. 질은 간절히 누군가를 원하고 있었다. 함께 얘기를 나눌 친 구, 따스하게 안아 줄 남자, 미래에 대한 확신과 용기를 줄 동반자, 남자의 품 에 안긴지도 정말 오래되었다. 데이빗 캐년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세 계, 다른 삶 속의 사람이다. 데이빗을 원하는 마음이 너무도 간절하여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잠시 후, 앨런 프리스턴이 다시 포옹을 해오자 질은 그에게 자신 을 맡겨 버렸다. 눈을 꼭 감고 데이빗을 생각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남자는 데이빗이야. 그 남자가 키스를 해오면 질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둘이 는 사랑을 나눴다. 질은 그남 밤을 앨런과 보냈고 며칠 뒤 앨런이 그녀의 작은 아파트로 돌아왔 다. 앨런 프레스턴은 질이 이제껏 만난 남자들 중에 가장 단순한 사내였다. 만사 태평에, 내일은 전혀 걱정하지 않고 대충대충 세월을 보냈다. 그런 식으로 살아 서야 되겠냐고 질이 충고를 하면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봐, '사마라의 약속' 생각나? 닥칠 일은 어차피 닥치게 돼 있어. 운명이 스스로 찾아온다구. 굳이 힘들여 찾아나설 거 없어." 질이 일자리를 구하러 나가도 앨런은 한낮까지 침대에서 뒹굴었다. 질이 돌아 와서 보면 그는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거나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고 있 었다. 돈이라곤 땡전 한푼 벌어 오지 않았다. "넌 얼간이야. 그치는 너한테 빌붙어서 네 침대와 음식과 술만 축내고 있는 거라구. 쫓아내 버려." 질의 여자 친구 하나가 말했다. 질은 그 충고에 따르지 않았다. 이제야 비로소 해리엇을 이해할 것 같았다. 사랑하지도 않는, 아니 증오하는 사내들에게 죽기 살기로 매달리던 친구들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그건 홀로 남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질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크리스마스가 며칠 뒤인데 주머니엔 겨우 푼돈 몇 달러뿐이고 어머니께 크리스미스 선물은 꼭 보내야만 했다. 그런데 기특하게 도 앨런이 그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어느 날 앨런은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아침 일찍 나갔다가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말했다. "일자리를 얻었어." "무슨 일인데?" "물론 연기 일이지. 우린 배우잖아, 안 그래?" 질은 희망에 불타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야?" "물론이지. 우연히 감독하는 친구를 만났어. 마침 그 친구가 내일 부터 촬영 을 시작한다는 거야. 우리 둘한테 맡길 역이 있대. 하루 일해서 백 달러씩 버는 거야." "우와, 굉장한데! 백 달러라!" 질은 환성을 내질렀다. 그 돈이면 어머니께 예쁜 영국산 모직 코트를 한 벌 사드리고 고급 가죽 핸드 백도 하나 살 수 있으리라. "그런데 그 친구 개인이 만드는 영화라 어느 집 차고를 빌어서 촬영한다나 봐." "우리야 손해볼 거 없지, 뭐. 연기만 하면 되니까." 질이 냉큼 대꾸했다. 촬영을 한다는 차고는, 한 세 대가 지나는 동안 배타적인 상류지구에서 중산 층 거주지로 둔갑한 로스엔젤레스의 남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작달막하고 얼굴이 까무잡잡한 사내가 문을 열어 주며 앨런의 손을 잡아 흔들 었다. "해냈구만, 친구. 아주좋아." 사낵는 질을 보더니 만족스럽다는 듯 휘파람소리를 냈다. "자네 말 그대로 아주 미안이야." 앨런이 둘을 소개시켰다. "질, 이 친구는 피터 테라글리오야. 이쪽은 질 캐슬." "처음 뵙겠습니다!" 질이 상냥하게 인사했다. "피터는 감독이야." "감독에, 제작자에, 보조 일꾼이기도 하지요. 나 혼자 다하니까. 자, 들어와 요." 피터는 그들을 이끌고 텅 빈 차고로 들어갔다. 복도를 돌아가니 한때 하인들 거처로 사용되었던 침실 두 개가 보였다. 침실 하나의 문이 열려 있어서 가까이 다가서니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간에서 안을 들여바 본 질 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방 한 가운데에 놓인 침대에 벌거숭이 넷이 뒤엉켜 있었 던 것이다. 사내, 멕시코인 사내, 백인 여자, 흑인 여자. 카메라맨이 조명을 설 치하는 동안 여자 하나가 멕시코 사내의 성기를 입으로 빠는 연습을 하다가 숨 이 차서 헐떡거리며 말했다. "자자, 얼른, 얼른 발기해라." 질은 졸도해 넘어질 것 같았다. 문간에서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려는데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맥없이 허물어졌다. 곁에 섰던 앨런이 얼른 부축해 주었다. "괜찮아?" 질은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파 왔고 뱃속을 칼로 휘젓는 것만 같았다. "여기 기다려." 앨런은 어디론가 뛰어가더니 금세 빨간 알약이 든 약병과 보드카를 들고 나타 났다. 그가 알약 두 알을 꺼내 건네며 말했다. "이걸 먹으면 기분이 나아질 거야." 질은 잠자코 시키는 대로 했다. "여기." 앨런이 알약을 한 알 더 건넸다. 그것도 보드카와 함께 삼켰다. "잠깐 눕는 데 좋겠어." 앨런은 질을 비어 있는 침실로 데려가 눕혔다. 약기운이 돌기 시작하는지 비 분이 나아지고 있었다. 목구멍까지 치솟던 쓰디쓴 담즙도 이제 올라오지 않았 다. 그렇게 15분쯤 누워 있으려니 두통도 약해져 갔다. 앨런이 약 한 알을 더 건 넸다. 질은 아무 생각 없이 받아먹었다. 그리고 보드카를 들이켰다. 그저 통증 이 가신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앨런이 자꾸만 침대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가만히 좀 앉아 있어." 질이 말했다. "난 가만히 있다구." 질은 너무 우스워 깔깔거리고 웃기 시각했다. 너무 웃어서 눈물 두 줄기가 뺨 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그 약이 무슨 약인데?" "두통을 가라앉히는 약이야." 테라글리오가 빼꼼 들여다보며 말했다. "좀 어때요? 다들 기분좋아요?" "다들 기분좋아요." 질이 응얼응얼 대답했다. 테라글라오는 앨런을 바라보며 그개를 끄덕였다. "5분 남았어" 그리곤 부리나케 어디론지 가버렸다. 앨런이 질의 가슴과 허벅지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이 스커트를 젖 히고 사타구니께로 더듬어 들어갔다. 질은 생전 처음 맛보는 신비한 쾌감에 몸 을 떨며 뜨겁게 달아올랐다. "사랑하는 질, 너한테 나쁜 짓을 강요하진 않겠어. 그냥 나랑 사랑만 하면 되 는 거야. 어차피 늘 하는 거잖아. 이번엔 돈을 받고 하는 거라구. 2백 달러. 다 네 거야." 질은 도리질을 치려 했지만 몸이 축축 늘어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어." 그녀는 희미하게 대꾸했다. "왜?" 질은 정신을 차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왜냐면... 난 스타가 될 거니까. 포르노를 찍으면 안 돼." "나랑 사랑하는 게 싫어?" "아니, 그건 아냐. 널 사랑해 데이빗." 앨런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냥 씩 웃으며 살살 구슬렸다. "그럼, 내 사랑. 널 사랑해. 자, 이리와." 앨런은 질을 침대에 안아 올렸다. 질은 마치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복도로 나와 촬영이 진행되고 있는 침실로 들어갔다. "좋아, 아까 그 세트 그대로야. 여기 막 신선한 피가 도착했다구." "침대 시트를 갈까요?" 조수 하나가 물었다. "자넨 여기가 MGM이라고 되는 줄 알아?" 테라글리오가 조수에게 쏘아붙였다. 질은 앨런에게 매달리며 말했다. "데이빗 여기 사람들이 있어." "다들 갈거야." 앨런은 그렇게 대꾸하고 알약 한 알을 더 먹였다. 그 약 역시 보드카로 삼켰 다. 그때부터 모든 게 몽롱했다. 데이빗이 옷을 벗기면서 달콤한 사랑의 말을 속삭였다. 둘은 침대에 들었다. 데이빗의 자신이 다가왔다. 곧이어 불이 환하게 밝혀지고 질은 눈이 부셔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이걸 입에 물어." 데이빗의 음성이었다. "그래." 질은 그걸 사랑스럽게 애무하다가 입에 물고 빨기 시작했다. 방안에 있던 누 군가가 무슨 말을 하자 데이빗이 비켜났고 누군가 그녀의 얼굴을 저명에 갖다 댔다. 그러더니 다시 벌렁 눕게 한 뒤 다시 데이빗이 와서 그녀의 몸 안으로 들 어왔다. 둘이 그렇게 사랑을 나누고 있는데 또 누군가의 성기가 그녀의 입 속으 로 들어왔다. 질은 데이빗이 너무너무 좋았다. 다만 눈부신 빛과 주위에서 수군 거리는 소리가 신경에 거슬릴 뿐이었다. 데이빗에게 저들을 내쫓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짜릿한 황홀경에 취해 입술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자꾸만자꾸만 오 르가슴이 거듭되고 이대로 가다간 쾌감으로 몸뚱어리가 산산조각 나버릴 것 같 았다. 데이빗은 돌아왔어. 우린 결혼한 거야. 지금 근사한 신혼을 즐기고 있는 거야. "데이빗..." 눈꺼풀을 드니 멕시코인 남자가 위에 올라타서는 혀로 그녀의 몸을 핥아 내려 가고 있었다. 데이빗은 어디 갔냐고 묻고 싶었지만 도저히 말을 뱉어낼 수가 없 었다. 사내가 애무를 계속하는 동안 질은 눈을 감고 있었다. 다시 눈을 떠보니 사내는 빨강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로 둔갑해 있었다. 여자의 커다란 가슴이 질의 배에 닿았다. 여자가 혀로 무슨 짓인가 하고 있었다. 질은 다시 눈을 감고 무의식의 늪으로 떨어져 내렸다. 두 사내는 침대에 누운 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여자 괜찮겠지?" 테라글리오가 물었다. "그럼." 앨런이 대꾸했다. "자넨 정말 수완이 대단해. 이 여자 근사해. 기금껏 데려온 여자들 중에 최고 로 예뻐." 테라글리오의 음성은 사뭇 경탄조였다. "그 정도야 기본이지." 앨런은 그렇게 대꾸하며 손을 내밀었다. 테라글리오는 주머니에서 지폐 한 뭉치를 꺼내서는 두 장을 세어 앨런의 손에 얹었다. "여기 있네. 조촐하게 크리스마스 디너 파티를 열 건데 참석하겠나? 스텔라도 자넬 보면 반가워할 거야." "안 돼. 크리스마스는 마누라랑 새끼들이랑 보내야지. 다음 비행기로 플로리 다로 갈 거야." "이번 작품은 그림이 죽여 주겠어." 테라글리오가 의식이 없는 질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저 여자 이름은 뭐라고 내보내지?" 앨런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본명을 그대로 쓰는 게 어떨까? 조세핀 친스키. 오데사에서 그 영화가 상영 되면 저 여자 고향 친구들 아주 난리가 나겠군." 화끈한 엉덩이 세월이 약이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세월은 젊음을 짓밟고 죽이는 우리 들의 적이다. 질의 몸부림에도 아랑곳없이 계절은 자꾸만 바뀌었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스타를 꿈꾸는 아가씨들이 우르르 할리우드로 쏟아져 들어왔다. 오토바 이를 얻어 타고,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한때 질이 그랬듯이 그들은 모두 열여덟 꽃다운 나이였다. 늘씬하고 긴 다리, 유연한 몸매, 굳이 모자가 필요치 않은 싱싱하고 활기찬 얼굴, 눈부시게 환한 미소, 그렇게 새 경쟁자들이 모습을 나타낼 때마다 질은 어김없이 한 살씩 더 먹었다.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들여다 보니 그때는 이미 1964년, 그녀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처음엔 포르노 영화를 찍었다는 사실에 무척 겁을 먹었었다. 그 영화가 배역 감독들 눈에 띄는 날이면 영원히 배우에서 제명될 것 같아 어지간히도 마음을 졸였다. 그러나 몇 주가 흐르고 몇 개월이 지나자 조금씩 두려움도 희미해져 갔 다. 질 캐슬은 세월과 함께 변하고 있었다. 마치 나무에 나이테가 그려지듯, 한 해 두해가 흐르면서 그녀에겐 강인함의 관록이 붙어 갔다. 질은 자기에게 기회 를 주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지키지도 않은 약속을 되풀이하는 사람들을 증오 하기 시작했다. 질은 따분하고 보람도 없는 직업들을 전전했다. 비서, 접수계원, 출장 요리 사, 아기 돌보기, 모델, 웨이트리스, 전화 교환원, 판매원... "연락"이 올 때까 지, 그때가지만 어떻게든 버틸 생각이었다. 그러나 끝내 "연락"은 오지 않았다. 질의 상심은 자꾸만 깊어 갔다. 이따금 단역을 맡긴 했지만 도무지 그게 기회로 연결되지를 않았다. 질은 거울을 보며 세월의 전갈을 읽었다. "서둘러!"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세월의 자취들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녀의 얼굴은 여전히, 7년이라는 영겁 같은 세월이 흐르기 이전, 그러니까 할리 우드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싱싱한 젊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싱싱하 던 얼굴에 어느새 눈가에 잔주름이 생겼고 양쪽 코 끝에서 턱으로 내려오는 선 의 윤곽도 뚜렷해졌다. 그 변화야말로 성공에 눈이 어두워 헛되이 흘려보낸 세 월의 경계경 보이며 그 무수하고 지긋지긋한 작은 실패들의 기념품이었다. "서둘러, 질, 서둘러!" 마침내 지름길을 택할 때가 된 것이다. "폭스" 영화사의 열여덟 살짜리 조감독 프레드 캐퍼가 몸을 허락하면 좋은 역 을 주마고 제안해 와서 질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점심 시간에 스튜디오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다. "난 30분밖에 시간이 없어. 가만있자, 조요한 방이 어디 있더라?" 프레드 캐퍼는 이마에 주름을 잔뜩 모으고 깊은 생각에 빠지더니 이내 얼굴이 환해지며 말했다. "더빙룸이 좋겠어. 가자구." 더빙룸은 모든 사운드 트랙을 하나의 릴에 모아 놓은 작업이 진행되는 방음장 치가 잘된 작은 영사실이었다. 프레드 캐퍼는 가구라곤 없는 방안을 둘러보고는 거칠게 내ㅂ었다. "우라질! 여기 작은 카우치가 하나 있었는데." 그러더니 손목시계를 흘낏 보고는 덧붙였다. "그래도 해야지. 자, 옷을 벗어요. 앞으로 20분 안에 더빙 담당자들이 들이닥 칠 테니까." 질은 마치 창녀가 된 듯한 기분으로 잠시 조감독을 바라보았다. 그가 혐오스 러웠다. 그러나 그런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방식대로 성공의 문을 두 드렸지만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으니 이제 그들의 방식을 따를 수밖 에. 질은 드레스와 팬티를 벗었다. 캐퍼는 옷을 벗는 것도 귀찮다는 둣 바지 지 퍼만 열고 발기된 성기를 내놓았다. 그리곤 질을 쳐다보며 능글맞게 웃었다. "엉덩이가 근사하군. 엎드려." 질은 잠시 주저하다가 손바닥으로 몸을 받치고 엎드렸다. 캐퍼가 다가와 그녀 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다음 순간, 성기 끝이 항문으로 밀고 들어오는 게 느 껴졌다. "잠깐! 거긴 안 돼! 나…난…." "나를 위해 신음소리를 내줘, 응?" 캐퍼가 무지막하게 성기를 쑤셔 넣자 질은 살이 찢기는 아픔에 진저리를 쳤 다. 질이 고통의 신음을 내지를 때마다 캐퍼는 더 깊숙이, 더 세게 밀고 들어왔 다. 질은 빠져 나가려고 미친 듯 몸부림 끝에 그만 균형을 잃고 말았다. 몸의 균형을 잡으려고 엉겁결에 팔을 뻗었는데 손가락이 그만 웃음소리 기계의 버튼 을 누르고 말았다. 기계에서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질은 불에 데이는 듯한 통증을 견디지 못해 마구 몸을 뒤틀면서 손바닥으로 기께를 내리쳤다. 여자가 킥킥거리는 소리, 몇몇이 박장대소하는 소리, 계집아이가 낄 낄거리는 소리, 수백 명이 한꺼번에 와와 웃는 소리... 온갖 웃음소리의 메아리 가 질의 고통에 찬 신음과 어우러져 히스테리컬하게 방안에 울려 퍼졌다. 이윽고 사정이 끝나자 질의 몸 안으로 뚤고 들어왔던 사내의 살덩어리가 빠져 나갔다. 그와 함께 그 요란하던 웃음 소리들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질은 눈을 질끈 감고 꼼짝도 않고 엎드려서 고통과 싸웠다. 겨우겨우 고통을 수습하고 일 어나 돌아보니 프레드 캐퍼는 바지 지퍼를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주 끝내줬어. 신음소리 정말 죽이더군." 질은 저자가 열아홉이 되면 어떤 짐승으로 변할까 생각했다. 피를 흘리고 있는 걸 본 캐퍼가 말했다. "가서 씻고 12번 무대로 와. 오늘 오후부터 당장 일하는 거야." 처음이 고통스러웠지만 그 다음은 쉬었다. 이제 질은 모든 스튜디오에서 정규 적으로 일하게 되었다. "워드 브라더스", "MGM", "유니버설", "컬럼비아", "폭 스" 등등. 아니, "디즈니"는 제외다 거기엔 섹스가 없으니까. 질이 침대에서 하는 연기는 한마디로 환상적이었다. 그녀는 마치 실제 영화를 찍듯 세심하게 준비를 갖추어 기교적으로 그 일을 해내었다. 동방의 호색 문학 서를 탐독하고 "샌타 모니카 가"의 섹스숍에서 미약이나 최음제 따위를 사들였 다. 어느 스튜디어스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동양에서 구해 온 윈터그린향이 살작 풍기는 특수 로숀도 갖고 있었다. 질은 천천히 아주 육감적으로 마사지하는 법 도 배웠다. "거기 누워서 내가 당신 몸에 무얼 하는지 생각해 봐요." 그녀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이곤 했다. 손가락에 로숀을 듬뿍 묻혀서 사내의 가슴부터 시작해서 배로, 사타구니로 부 드럽게 원을 그리듯 맛사지해 내려갔다. "눈을 감고 즐기세요." 나비의 날개처럼 가벼운 그녀의 손가락이 사내의 몸을 애무해 내려갔다. 이윽 고 사내가 발기하기 시작하면 성기를 양손에 감싸쥐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다가 사내가 쾌감에 몸을 비틀 때까지 혓바닥으로 핥아 내려갔다. 그 과정이 끝나면 사내를 엎어 놓고 상체부터 다시 애무를 시작했다. 사내의 성기가 오그라들면 귀두 부분을 질 안에 살짝 넣고 조금씩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러면 성기가 딱딱하게 부풀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사내들에게 절정에 도달하는 법과 오르가슴 작전에 멈췄다가 다시 절정까지 갔다가 멈췄다. 하기를 거듭하는 방법 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면 마침내는 극도의 황홀경 속에서 사정을 하게 된다. 사내들은 한바탕 즐기고 나서 옷을 입고 떠났다. 아무도 질 캐슬에게 섹스의 가 장 아름다운 마지막 5분, 격정이 휩쓸고 간 후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겨 조용히 행복을 음미하는 평화의 오아시스를 선사하지 않았다. 질에게 주어지는 배역들은 그녀가 그 사내들 - 배역감독, 조감독, 감독, 제작 자들 - 에게 주는 쾌락에 비하면 사실 너무나 약소했다. 질은 하리우드 전역에 서 "화끈한 엉덩이"로 통했고 모두들 그녀에게 군침을 흘렸다. 질은 아낌없이 주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거듭될수록 자존심과 사랑은 줄어들고 증오와 상심만 이 깊어 갔다. 언제, 어떻게 그런 날이 도래할지는 모르나 이 도시는 질 캐슬에게 대가를 톡 톡히 치르게 할 것임을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는 동안, 질은 몇십 편의 영화, 텔레비젼 쇼, 광고에 출 연할 수 있었다. 비서로 나와서 "좋은 아침이예요, 스티븐스 사장님" 하고 인사 하기도 하고, 아기 돌보는 이로 출연해 "두분 걱정 마시고 재미있게 놀다 오세 요. 얘들은 제가 보다가 재울께요." 하고 말하기도 하고, 엘리베이터 걸이 되어 "다음은 6층입니다" 하고 알리기도 하고 스키복을 입고 광고에 나와 "제 친구들 은 모두 데인티 제품을 쓰죠"하고 애교를 떨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방인이 었다. 질은 평생을 그렇게 허송 세월해야 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 었다. 1966년, 모친이 세상을 떠났다. 질은 장례식을 치르러 오데사로 늦은 오후에 치러진 장례식에 모인 사람은 여남은 명뿐이었고 어머니가 평생 옷을 지어 바친 귀부인들은 한 사람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문상객이라곤 교회 사람들과 세상 의 종말을 부르짖는 부흥회 전도사들이 고작이었다. 질은 새삼 그 무시무시했던 부흥회의 밤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속에서 작으나마 위안을 찾으셨 고 부흥회를 통해 당신을 무던히도 괴롭히던 악귀들을 몰아내셨다. 낯익은 목소리가 조용히 인사를 건냈다. "안녕, 조세핀." 데이빗이었다.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동안의 헤어짐이 무색하리 만큼 친숙하고 가깝게 느껴졌다. 들은 여전히 뜨겁게 사랑하는 연인 사이였다. 데이빗 얼굴에도 세월의 흔적은 남아 구레나룻이 희끗희끗했으나 그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데이빗, 그녀의 데이빗이었다. 하지만 왠지 서먹서먹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정말 안됐어." 데이빗이 말했다. "고마워요, 데이빗." 마치 둘이 무대에 서서 대사를 외고 있는 것 같았다. "할말이 있어. 오늘 밤 만나 주겠어?" 데이빗의 목소리에 절박한 애원이 담겨 있었다. 질은 둘이 함께 했던 마지막 밤과 언약의 꿈들을 생각했다. "좋아요, 데이빗." "그 연못 어때? 차 갖고 왔어?" 질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이따 한 시간 뒤에 거기서 만나." 데이빗이 집에 돌아왔을 때 시시는 벌거벗은 채 거울 앞에 서서 디너 파티에 입고 나갈 드레스를 고르고 있었다. 데이빗은 침실로 걸어 들어가서 아내의 모 습을 바라보았다. 아내에겐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터라 철저하게 냉정한 눈으로 그녀를 평가할 수 있었다. 아내는 아름다웠다. 다이어트와 운동으로 열 심히 몸매를 가꾸며 사는 여자니까 시시는 아름다운 몸뚱어리를 제일로 가는 재 산으로 여겼고 골프 코치와, 스키 선생과, 비행기 조종 강사와 마구 놀아났다. 데이빗은 그런 아내를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시시와 잠자리를 따로 하기 시작 한 지 꽤 오래니까. 결혼 초에 데이빗은 정말로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시시가 이혼을 해주리라 믿 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어머니는 건강하게 장수할 기세였다. 데이빗은 자기가 속은 건지 아니면 기적이 일어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결혼하고 1년쯤 뒤에 데이빗은 시시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이제 이혼 얘기를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이혼이라뇨?" 그 대꾸에 데이빗이 놀란 표정을 짓자 시시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여보, 나는 데이빗 캐년의 부인 자리가 좋아요. 아니, 내가 정말로 그 폴란 드 창녀 기집애를 위해 당신을 포기할 줄 알았단 말예요?" 데이빗은 아내의 뺨을 갈겼다. 이튿날로 변호사를 찾아가 이혼 수속을 밟아 달라고 했다. "이혼 수속을 해줄 수는 있어요. 하지만 시시가 이혼을 원치 않는다면 엄청난 위자료를 지불하게 될 거예요." 변호사가 우려의 뜻을 비쳤다. "그래도 하겠소." 시시는 아혼 서류를 받자마자 데이빗의 욕실로 들어가 안에서 문을 걸고 치사 량의 수면제를 삼켰다. 하인 둘까지 동원해서 욕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이미 축 늘어진 그녀의 몸을 부랴부랴 병원으로 옮겼다. 꼬박 이틀 동안 사경을 헤매다 가 깨어난 시시는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요, 데이빗. 난 당신 없이는 살고 싶지 않아요. 단지 그거예요." 데이빗은 이튿날 이혼 소송을 취하했다. 그게 벌써 10년 가까이 된 일이고 그 후로 데이빗의 결혼은 불편한 휴전 관계 를 지속해 오고 있었다. 마침내 캐년가의 전재산을 물려받은 데이빗은 일에만 파묻혀 지냈다. 사업상 방문하는 도시마다 정부를 두고 육신의 위안을 찾았으나 결코 조세핀을 잊을 수 없었기에 마음은 늘 공허했다. 데이빗은 조세핀이 자기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한편으 론 그걸 확인하고 싶으면서도 문득문득 두려움이 앞서기도 했다. 그녀가 자기를 증오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기도 했다. 그녀가 자기를 증오하고 있다는 두려움. 조세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조세핀을 만나러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그녀와 마주친 순간, 데이빗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 오랜 이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둘의 사랑은 변함없이 뜨겁고 간절했다. "할말이 있어...오늘 밤 만나 주겠어...?" "좋아요 데이빗..." "그 호수에서." 시시는 거울에 비친 남편의 모습을 보고 돌아서며 말했다. "데이빗, 서둘러 준비하세요. 이러다 파티에 늦겠어요." "난 조세핀을 만나러 가야 해. 그녀만 받아 준다면 그녀와 결혼할거야. 이제 이 우습지도 않은 연극은 막을 내려야 해 때라고 생각해, 안 그래?" 시시는 알몸인 채로 서서 빤히 데이빗을 쳐다보았다. "우선 옷 좀 입구요." 데이빗은 고개를 끄덕이고 방에서 나갔다. 넓은 응접실로 가서 아내와의 격돌 을 각오하며 초초하게 서성거렸다. 이제 세월의 흐름도 흐를만큼 흘렸으니 시시 도 빈 껍데기뿐인 결혼 생활을 계속하고 싶어하진 않을 것인다. 그녀가 요구하 는 건 다 주리라, 무엇이든…. 그때 갑자기 요란한 엔진 소리와 함께 끼이익 타이어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 다. 얼른 현관으로 달려가 내다보니 시시의 자동차가 막 고속도로를 향해 내닫 고 있었다. 데이빗은 부리나케 자기 차로 달려가 시동을 걸고 아내의 뒤를 따랐 다. 고속도로에 도착해 보니 시시의 차가 막 시야에서 사라지는 참이었다. 데이빗 은 거푸 엑셀을 밟아댔다. 시시의 마세라티는 그의 롤스로이스보다 빠른 차였 다. 속도계 바늘이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70... 80... 90.시시의 차가 시야에 서 사라졌다. 100... 110... 그래도 보이지 않았다. 야트막한 언덕길 꼭대기에 이르니 저만치 마세라티가 커브길을 돌고 있는 모 습이 장난감 차처럼 조그맣게 보였다. 순간, 마세라티는 과속과 감작스런 회전 의 힘에 못 이겨 한쪽으로 기울었고 바퀴들이 도로와의 점착마찰을 갖기 위해 갑자기 노격을 들이받고 석궁처럼 공중에 솟아올랐다가 들판을 데굴데굴 굴렀 다. 데이빗은 가스 탱크가 폭발하기 직전에 시시의 축 늘어진 몸뚱어리를 차에서 빼냈다. 수술실에서 시시의 수술을 집도한 의사가 나와 데이빗에게 결과를 알려 준 시 각은 새벽 여섯시였다. "살아날 겁니다." 질은 일몰 직전에 호숫가에 도착했다. 기슭에 이르러 자동차 시동을 끄고 바 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처럼 행복했던 순간을 없었지." 그러나 이내 생각을 고쳤다. "아니, 이제부터 여기서 데이빗과 함께 더 행복한 시간을 보낼 거야." 데이빗의 따스한 품을 추억하노라니 그리움이 숨이 막혔다. 이제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던 운명의 장난은 끝났다. 데이빗을 보는 순간 그걸 예감했다. 그는 아 직도 나를 사랑한다. 그렇다. 질은 피덩어리 같은 태양이 더디게 수평선 아래로 사라지고 사위에 깔리는 광 경을 지켜 보았다. 데이빗이 빨리 와주었으면 하느 마음이 간절했다. 한 시간, 두 시간이 흐르자 제법 밤기온이 싸늘해졌다. 질은 자동차 안에 꼼 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밤하늘을 둥실둥실 떠가고 있었 다. 호숫가 세계의 밤의 소리에 귀기울이며 그녀는 연신 중얼거렸다. "데이빗은 온다." 질은 밤새 그렇게 앉아 기다리다가 동틀 무렵 자동차 시동을 걸고 할리우드의 집을 향해 달렸다. @ff 거울 속의 얼굴 질은 화장대 앞에 앉아 꼼꼼히 얼굴을 살피다가 눈가에 보일락말락 그려진 주 름을 보고 이내 상을 찡그렸다. "이건 불공평해, 남자들은 나이에 신경 쓸 필요도 없잖아. 백발이 돼도, 배가 올챙이처럼 튀어나와도, 얼굴이 주름투성이가 돼도 누구하나 뭐라는 사람이 없 으니까. 그런데 여자는 잔주름 하나만 생겨도..." 질은 화장을 시작했다. 할리우드 최고의 메이컵 아티스트 밥 시퍼에게 몇 가 지 화장 기술을 배워 두었다. 우선 평소에 사용하던 파우더 베이스 대신 팬스틱 베이스를 발랐다. 파우더는 피부를 건조하게 만들지만 팬스틱은 촉촉한 상태로 유지시켜 준다는 걸 알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은 눈화장. 눈꺼풀 아랫부분에 다 른 부분보다 3,4단계 옅은 색을 칠했다. 그래야 부드러운 느낌을 주니까. 눈가 에 생동감을 주기 위해 아이새도우를 살짝 칠하고 조심스럽게 가짜 속눈썹을 달 고는 45도 각도로 바깥쪽으로 구부렸다. 진짜 속눈썹 위에 듀오 접착제를 바르 고 가짜 속눈썹을 거기 붙이니 눈이 휠씬 커보였다. 동그란 눈을 창출하기 위해 아랫 눈꺼풀 속눈썹 바로 밑으로 아이라인을 그렸다. 그런 다음 립스틱을 바르 고 그 위에 파우더를 찍어 바른 뒤 다시 립스틱을 덧발랐다. 다음엔 양볼에 발 그레한 볼터치를 하고, 눈가의 잔주름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 부분을 피해가며 얼굴 전체에 파우더를 발랐다. 그리곤 뒤로 물러나 앉아 화장의 효과를 감상했다. 아름다웠다. 언젠가는 그 녀도 테이프 속임수 덕을 보아야겠지만 다행히 아직 그정도 나이는 아니었다. 질은 테이플 속임수 덕을 보고 있는 나이든 여배우들을 몇 명 알고 있었다. 그 들은 스카치 테이프를 잘게 찢어서 머리선 아래 부분에 붙이는데, 그건 굳이 돈 들여 힘든 주름살 제거 수술을 하지 않고도 얼굴 피부를 팽팽하게 당겨 주름살 이 보이지 않게 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늘어진 가슴에도 효과를 볼 수 있다. 얼굴과 똑같은 방식으로 테이프 조각을 붙이면 가슴이 팽팽해지는 일시적인 효 과를 볼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질의 가슴은 아직 팽팽하다. 질은 매끄러운 갈색 머리를 빗고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거울을 본 뒤 손목 시계를 보았다. 이런, 시둘러야겠군. "토비 템플 쇼" 인터뷰가 있는 날이었다. 애타는 구애작전 토비 쇼의 배역감독 에디 베리건은 유부남이며서도 일주일에 사흘씩 친구의 아파트에서 은밀히 오후의 정사를 즐기곤 했다. 사흘 중 하루는 정부를 데려왔 고 나머지 이틀은 여배우들을 돌아가며 끌어들였다. 벌써부터 친구들에게서 질이 화끈한 여자라는 소문을 들은 에디는 군침을 흘 리며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쇼의 한 파트에 그녀게게 적당한 배역이 나왔다. 그 역이 요구하는 건 섹시한 용모뿐이었고 대사 몇 마디만 던지고 퇴장 하면 끝이었다. 질에게 대사를 읽혀 보았더니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케이트 햅번 정도의 명 연기는 못 되지만 사실 그런 명연기가 필요치도 않았다. "배역을 주지." "고마워요, 에디." "여기 대본 있어. 리허설은 내일 아침이야. 열시 정각. 대사 다외고 시간 맞 춰 나오라구." "물론이죠." 질은 그렇게 대답하고 에디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에... 이따 오후에 같이 커피나 한잔 하는 게 어떻겠어?" 질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친구가 95번가에 아파트를 하나 갖고 있는데, 앨러턴 아파트리고." "어딘지 알아요." "6D호야. 3시에 만나자구." 리허설은 순조로웠다. 이번 쇼도 성공적이 될 터였다. 이번 쇼의 초대 손님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화려한 무용단, 인기 록 그룸, 눈앞에 보이는 긴 뭐든 사라 지게 할 수 있는 마술사, 그리고 정상급 가수였다. 리허설에 빠진 사람은 토비 템프뿐이었다. 질은 토비가 눈에 띄지 않는 게 궁금해서 에디 베리건에게 물었 다. "토비는 몸이 어디아픈가요?" 에디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아프긴 개코가 아파? 조무라기들이 땀 흘려 연습하는 동안 위대하신 토비 탬 플은 빈둥빈둥 노는 거지. 토요일 녹화 때나 나타날 거야." 토요일 아침, 토비 탬플은 황제처럼 위풍당당하게 스튜디오로 걸어 들어왔다. 질은 무대 구석에서 오늘의 주인공이 3인조 들러리 배우와 클리프톤 로렌스, 한 물간 코미디언 두어 명을 거느리고 입장하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정말이지 눈 꼴사나운 광경이었다. 질은 토비 탬플의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그는 할리우드의 얼굴이 반반하다 싶은 여배우들은 다 가져 봤다고 떠벌 리고 다니는 병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인간이었다. 일찍이 그를 거절한 여자는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오, 그래, 당신이 위대하신 토비 템플이라는 건 나도 알지." 질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작달막하고 신경질적인 감독 해리 더킨이 토비에게 출연진을 일일이 소개했 다. 할리우드 바닥이 워낙 좁은지라 거의 토비가 아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질 캐슬은 처음이었다. 베이지색 린네르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차가우면서도 우아 한 인상을 풍기는 미녀였다. "아가씬 어떤 역을 맡았지?" 토비가 물었다. "우주비행사 촌극에 출연합니다, 미스터 템플." 토비는 따스한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내 친구들은 모두들 나를 그냥 토비라고 부르지." 이윽고 최종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오늘의 리허설은 특히 눈부셨는데 눈치 빠 른 더킨 감독은 그 이유를 금세 알아챘다. 토비가 질은 의식해서 자기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이다. 이미 쇼에 출연한 모든 아가씨들이 잠자리에 끌여들인 토비는 참신한 질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특히 질이 등장한 파트가 이번 쇼의 절정을 이루었다. 토비는 질 에게 대사를 몇 줄 더 주고 코믹 연기를 보일 기회까지 선사했다. 리허설이 끝 나자 토비가 다가와서 말했다. "내 분장실에 가서 술이나 한잔 할까?" "고맙지만 전 술 안 마셔요." 질은 상냔한 웃음을 보이고 총총히 사라져 갔다. 마침 배역감독과 데이트 약 속이 있었던 것이다. 토비 템플이 이 바닥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대스타란 건 알지만 일거리를 끊이지 않고 얻으려면 배역감독이 훨씬 중요한 존재였다. 그날 저녁 녹화 작업을 했는데 이제까지 만들어진 토비의 쇼 중에서 최고였 다. "또 성공이야. 특히 우주비행사 촌극은 아주 일품이고." 클리프톤이 토비에게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요. 그 햇병아리가 맘에 들어요. 그 여자에겐 무언가가 있어요." "예쁘더군." 매주 참신한 얼굴이 선을 보이면 토비는 그 여자에겐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며 침실로 데려갔다. 그러나 일단 잠자리를 같이 하고 나면 그뿐이었다. "클리프, 오늘 저녁 식사 때 그 여자를 초대해요." 그것은 부탁이라기보다는 명령이었다. 몇 년 전만 같았어도 그런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면박을 주었겠지만 이젠 그럴 수가 없었다. 토비가 명령을 내리 면 다소곳이 그 명에 따라야 하느 것이 클리프톤의 처지였다. 이곳은 토비의 왕 국이고 황제인 토비의 눈에 거슬리는 날엔 당장 추방이니까. "물론이지, 토비. 내가 다 알아서 하겠네." 클리프톤은 쇼의 여자 출연자들이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하는 여자 분장실로 향했다. 건성으로 한 번 노크를 하고는 들어오라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여남은 명의 아가씨들이 가지각색의 속옷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고 잇었 다. 그들은 남자가 들어왔는데도 그냥 태연하게 하던 일을 계속하며 인사말을 던졌다. 질은 화장을 다 지우고 막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클리프톤은 그 녀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오늘 아주 잘했어." 질은 아무 관심 없이 거울 속에서 흘낏 쳐다보고는 대꾸했다. "고마워요." 예전 같았으면 클리프톤 로렌스와 가까이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도 까무러치게 흥분했을 것이다. 할리우드의 모든 열쇠를 한손에 쥐고 있던 그 였으니까. 그러나 이제 그가 토비 템플의 들러리로 전락해 버렸다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좋은 소식이 있어. 미스터 템플이 아가씨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겠대." 질은 손끝으로 머리를 살짝 헝클어뜨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미안하지만 피곤해서 안 되겠다고 전해 주세요. 가서 좀 자야겠어요." 그리곤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날 밤의 만찬은 처참했다. 토비와 클리프톤 로렌스, 더킨 감독이 "라 루스" 레스토랑 특석에 앉아 있었다.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자 더킨이 쇼걸을 몇 명 부르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토비는 불같이 화를 내며 거절했다. 레스토랑 지배인이 와서 물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미스터 템플?" 토비는 클리프톤을 가르키며 대답했다. "그럽시다. 저 얼간이한테 혓바닥 하나 갖다 주시오." 모두들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웃음을 터뜨리자 클리프톤도 억지로 같이 웃었 다. 토비의 날카로운 질책이 그 웃음을 박살냈다. "여자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그런 간단한 일도 제대로 못해요? 누가 여자한 테 겁을 줘서 쫓아 버리라고 했어요?" "피곤하다고..." "할리우드에서 피곤하다고 내 저녁 초대를 거절할 여자는 없어요." 뭔가 그 여자의 기분을 거슬리는 말을 한 게 분명하다구요." 토비가 언성을 높이는 바람에 옆 테이블의 손님들이 쳐다보았다. 토비는 그 들에게 특유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내며 설명했다. "우린 고별 만찬을 하고 있지요." 그리곤 클리프톤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이분이 동물원에 뇌를 기증했거든요." 옆 테이블 손님들이 와아 웃음을 터뜨렸다. 클리프톤을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테이블 아래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분이 얼마나 멍청한지 아십니까?" 토비는 신바람이 나서 옆 테이블 사람들에게 계속 지껄여댔다. "폴란드에서는 모두들 이분에 대한 농담을 할 정도라니까요."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클리프톤은 벌떡 일어나 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없었다. 더킨도 어쩔 줄 몰라 하고는 있었으나 섣불리 끼여들어 공연히 자 기까지 미움을 받을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이제 그들 테이블 근처의 손님 들이 모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토비는 더욱 목청을 높이며 매력적인 미소 를 흘렸다. "여기 이분 클리프톤 로렌스는 태어날 때부터 바보였지요. 그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한바탕 싸움을 했다더군요. 또 이분의 어머니는 아기가 바뀌었다고 주 장했대요."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날 저녁 자리는 그 정도로 끝났지만 내일이면 클리프톤 로렌스의 이야기가 할리우드 전역에 퍼져나갈 터였다. 클리프톤 로렌스는 밤에 침대에 누워도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토비 가 그런 모욕을 주는 걸 왜 묵묵히 참았는지 자문했다. 대답은 간단했다. 돈 때 문이었다. 클리프톤이 토비 템플을 통해 벌어들이는 돈은 연간 25만 달러가 넘 었다. 그는 저축 한푼 하지 않고 그 돈을 펑펑 쓰며 사치스럽게 살고 있었다. 이제 다른 고객들도 다 떠나 보냈으니 죽자 사자 토비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 다. 문제는 바로 그거였다. 진작부터 그걸 알고 있는 토비는 옴쭉달짝 못하는 클리프톤을 상대로 피비린내 나는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 찌감치 떠나는 건데.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는 걸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클리프톤이 스스로 제 무덤을 파게 된 건, 따지고 보면 토비에 대한 애정 때 문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토비를 사랑했다. 그는 토비가 사람들을 어떻게 매장 하는지 옆에서 지켜 보았다. 토비를 사랑하게 된 무수한 여자들, 그와 경쟁을 벌이려던 코미디언들, 그를 혹평한 비평가들이 토비의 무자비한 손에 의해 처참 하게 몰락해 갔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남의 얘기였다. 클리프톤으로선 토 비가 자기에게 등을 돌린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둘은 너무나 가까우니 까. 토비에게 너무나 많은 걸 주었으니까. 그러나 슬슬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보통때 같았으면 질 캐슬에게 두 번 다시 눈길을 주지 않았을 토비였지만 그 는 도무지 거절당하는 데 익숙하지 못했다. 질의 거절이 자극제가 되었다. 그래 서 다시 저녁 초대를 했다. 이번에도 질이 거절하자 토비는 상대가 멍청한 게임 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단정하고 그냥 잊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아무래 도 납득이 안 가는 점은 질이 정말로 게임을 벌이는 거라면 저토록 철저하게 무 관심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토비는 여자들의 심리를 잘 알았다. 아니, 이건 게임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에게 흥미가 없다는 얘기였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 자 토비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대로 그녀를 마음속에서 지워 버린다 느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에디 베리건을 불러 질 캐슬을 다시 쇼에 출연시키는 좋겠다고 말했 다. 에디는 당장 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웨스턴"에서 단역을 맡았기 때 문에 시간을 낼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토비는 에디에게서 그런 내용을 보고받 고는 불같이 화를 냈다. "지금 하는 일을 당장 취소하라고 그래. 우리가 출연료를 더 주겠다고. 우라 질, 인기 1위의 쇼 출연을 거절하다니, 그 여자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에디는 다시 질에게 전화를 걸어 그 얘기를 고스란히 전했다. "질 토비가 진심으로 원하고 있어. 그러니 어떻게 안 되겠어?" "미안해요. 지금 "유니버설"에서 단역을 맡아 일하고 있어서 도저히 몸을 뺄 수가 없어요." 질은 아예 그런 행동은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스튜디어와의 계약을 어기고 중간에 다른 데로 옮겼다간 할리우드에서 절대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질 에게 토비 템플은 하루 일거리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이튿날 밤, 저 위대한 코 미디계의 황제가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전화선을 통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따스하고 매력적이었다. "질? 나는 당신의 늙고 보잘 것 없는 동료 토비예요." "안녕하세요. 미스터 템플." "아아, 그 "미스터"는 좀 빼요." 질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혹시 야구 좋아해요? 사실은 야구장 특석 표가…." "나뇨, 안 좋아해요?" "나도 그래요"" 토비는 껄걸 웃으며 받았다. "그냥 해본 말이었지. 토요일 밤에 나와 저녁 같이 하는 거 어때요? 파리 최 고의 레스토랑 "맥심"에서 주방장을 훔쳐 왔는데…." "죄송하지만 데이트 약속이 있어서 안 되겠어요, 미스터 템플." 전혀 관심없다는 목소리였다. 토비는 수화기를 꽉 움켜쥐었다. "언제쯤 시간이 나지?" "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 데이트는 잘 안 해요. 아무튼 초대해 주셔서 감 사합니다." 그리곤 전화가 뚝 끊겼다. 감히 단역배우 주제에 토비 템플의 전화를 일방적 으로 끊어 버린 것이다! 이 염병할 계집! 토비 템플과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일 년, 아니 평생이라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여자들이 늘어서 있는데 저 멍청한 계집은 막무가내로 싫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힌 토비는 공연히 애꿎은 주위 사람들만 들볶았다. 도대체 무엇 하나 마음에 차는 게 없다는 거였다. 대본은 개똥 같고, 감독은 얼간이고, 음악은 졸작이고, 배우 들도 하나같이 엉터리고... 이윽고 에디 베리건이 다시 토비의 분장실로 불려갔 다. "자네, 질 캐슬에 대해 뭐 아는 거 있나?" 토비가 물었다. "전혀 모릅니다." 에디는 얼른 대꾸했다. 그는 얼간이가 아니었다. 토비가 질 캐슬에게 몸이 달 아 있다는 건 쇼 제작진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었고,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 문제에 개입하는 건 결코 현명한 처사가 못되었다. "헤픈 여자야?" "그렇진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제가 진작에 알았겠죠." 에디는 단호하게 대담했다. "그럼 그 여자에 대해서 조사해 봐. 남자친구가 있는지, 매일 어딜 가서 무얼 하는지. 내 말 알아듣겠지?" "예 선생님." 이튿날 새벽 3시, 에디는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그래 뭐 좀 알아낸 게 잇나?" 에디는 쏟아지는 잠과 힘겨루기를 하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도대체 누군데 이런 새벽에…." 그러다 비로소 목소리의 주인공을 간파하고 황급히 보고했다. "예 건강 진단서를 떼받더니 아무 이상 없었습니다. "누가 우라질 건강 진단서를 떼보랬어? 애인이 따로 있던가?" "아뇨 없습니다. 제 친구들에게 다 수소문해서 알아봤는데 모두 질을 좋아하 더군요. 모범적인 배우라고요." 어떻게든 상대에게 확신을 주어야 한다는 초조감에 에디는 빠르게 지껄였다. 질이 그와 잤다는 사실을 토비 템플이 알게 되면 에디는 당장 모가지였다. 당연 하지, 자기를 거절한 여자가 에디 같은 조무라기와 어울렸다는 사실을 용납할 토비가 아니니까. 에디는 질과 놀아난 적이 있는 동료 배역감독들에게 그런 사 실을 귀뜸해 놓았다. 모두들 토비 템플의 적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는지라 비밀 을 지킬 것을 약속했다. "그녀는 몸을 함부로 굴리지 않는답니다." 그러자 토비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알겠군. 좀 엉뚱한 데가 있는 아가씨인 모양이야, 음?"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에디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이봐! 내가 잠자는 걸 깨운 건 아니지?" 아뇨,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미스터 템플." 그때부터 에디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에 빠졌다. 이러다 만일 사실이 들 통나면 어쩌지? 이곳은 토비 템플의 왕국이니까. 토비와 클리프톤 로렌스는 힐크레스트 컨트리 클럽에서 점심을 함께 하고 있 었다. "힐크레스트"는 로스엔젤레스의 몇몇 인류 컨트리 클럽들이 유태인들을 받아 주지 않아서 생긴 클럽이었다. 그런 클럽들의 유태인 차별은 정도가 좀 지 나쳐서,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10살짜리 멜린다라는 소녀가 비유태인 친구 와 함께 어느 클럽 수영장에서 놀다가 ㅉ겨났다. 그 얘기를 들은 멜린다의 아버 지는 클럽 지배인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봐요, 내 딸은 반만 유태인이요. 그러니 허리까지는 물 속에 들어가도 되 는 거 아니요?" 그런 일련의 사건들이 있은 후, 골프와 테니스와 진 러미"카드게임의 일종", 그리고 반유태주의자들을 골탕먹이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는 몇몇 부유한 유대 인들이 모여 힐크레스트 컨트리 클럽을 만들고 유대인들에게만 지분을 팔앗다. 베벌리 힐즈 심장부에서 지척에 위치한 아름다운 공원 안에 지어진 "힐크레스트 "는 순식간에 최고의 뷔폐요리와 최상의 교제를 제공하는 명소로 부각되었다. 그러자 돈 많은 비유대인들이 지분을 좀 나누자고 아우성을 쳐댔고 "힐크레스트 " 주주들은 몇몇 비유대인들을 주주로 받아들이는 관대한 처사를 행하였다. 토비는 "힐크레스트"에 오면 언제나 할리우드 재담꾼들이 모여 앉아 농담을 주고받는 코미디언 테이블에 앉곤 했지만 오늘은 사정이 좀 달랐다. 그는 클리 프톤을 구석 테이블로 이끌었다. "클리프 상의할 일이 있어요." 클리프톤은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토비가 그에게 상의를 해온 지도 오래 전이었던 것이다. "그래, 그러게." "그 여자 얘기예요." 클리프톤은 토비가 무슨 얘기를 꺼내려고 하는지 짐작이 갔다. 이제 할리우드 사람들 절반은 아는 얘기니까. 요즘 할리우드에서 떠도는 가장 신바람나는 루머가 바로 그거였고 어떤 칼럼니스트가 그 얘기를 - 물론 당사자 들의 이름은 쏙 빼고 - 신문 칼럼에 싣기도 했었다. 토비는 그 칼럼을 읽으며 자기 얘기인 줄도 모르고 이렇게 말했었다. "도대체 그 얼빠진 자식이 누구냐?" 지금 위대한 황제는 한사코 싫다는 여자에게 단단히 홀렸다. 클리프톤 로렌스 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질 캐슬 말예요. 기억나요? 우리 쇼에 나왔던 여자요." "아, 그럼 아주 매력적인 아가씨지. 그런데 왜 그러나?" "나도 뭐가 뭔지 통 모르겠어요. 그 여자, 악감정이 있나봐요. 데이트 신청을 하면 번번히 거절하거든요. 그래서 요즘 내 꼴이 말이 아니에요." 클리프톤이 얼른 끼여들었다. "그럼 데이트 신청을 그만두지 그러나?" "그건 말도 안돼요. 그럴 수 없어요. 솔직히 클리프한테만 하는 얘긴데, 내 평생에 그렇게 간절히 여자를 원해 본 적이 없어요. 이제 아주 노이로제가 되다 시피 해서 다른 일을 생각할 수도 없어요." 그러더니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덧붙엿다. "요즘은 완전히 제정신이 아예요. 클리프 당시도 몇 번 그런 경험이 있었잖아 요. 어떡하면 좋겠어요?" 순간 클리프톤은 진실을 밝히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토비가 자나 깨나 그리는 꿈의 여인이 하루 일자리를 위해 할리우드의 배역감독들에게 몸을 팔고 다닌다는 사실을 어찌 폭로한단 말인가. 토비의 대리 인으로 계속 일하려면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네, 그녀가 연기 일에 열심인가?" "예 야심이 대단해요." "좋았어. 그러면 그녀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초대를 하게." "무슨 뜻이죠?" "자네 집에서 파티를 열게." "방금 말했잖아요, 그녀는 거절을…." "끝까지 들어 보게. 그녀가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초대하는거야. 스튜디 오 간부들, 제작자들, 감독들, 그녀가 정말로 배우가 되는 게 꿈이라면 그런 사 람들을 만나고 싶어 안달을 할 거야." 토비는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안녕, 질." "누구시죠?" 전 미국인이 다 아는 목소리를, 누구냐고? "토비, 토비 템플." "아, 예." 아무런 의미 없는 음성이었다. "이봐, 질, 돌아오는 수요일 밤에 우리 집에서 작은 디너 파티를 열기로 했는 데..." 저쪽에서 거절의 말을 시작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토비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 다. ??"팬-퍼시픽" 샘 원터즈 부사장과 다른 스튜디오 사장들도 몇 부르고 제작자 들과 감독들도 초대할 거야. 그들을 알아두는 게 질한테도 도움이 될 것 같아 서. 시간을 낼 수 있겠어?"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질 캐슬이 대꾸했다. "수요일 밤이면 시간 있어요. 고마워요, 토비." 당사자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 만남은 둘을 하나로 묶는 운명의 끈이 되었 다. 테라스에서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하는 동안 제복 입은 웨이터들이 오르되브르 와 샴폐인이 담긴 쟁반을 들고 분주히 움직였다. 약속 시간보다 45분 늦게 질이 도착하자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토비는 부리나케 달려나가 맞아들였다. 질은 심플한 흰색 실크드레스 차림에 검은 머리 를 어깨 위로 우아하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토비는 그 황홀한 미모에 넋을 잃어 한시도 그녀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질도 자기의 모슴이 아름답다는 걸 알 고 있었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몸치장을 하고 나왔으니까. "여기 질에게 소개시켜 줄 사람들이 아주 많아." 토비는 질의 손목을 이끌고 넓은 응접실을 가로질러 파티장으로 향했다. 질은 파티장 입구에 멈취 서서 손님들을 바라보았다. 거의가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 타임", "라이프", "뉴스위크", "패리스매치", "OGGI"나 영화 스크린에서 숱하게 보았던 얼굴들.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할리우드요, 저들이 바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질은 할리우드의 주인공들과 만나 환담하는 오늘의 이 순간을 수천 번도 넘게 꿈꾸어 왔다. 이제 비로소 그 꿈이 이루어지고 보니 도무지 현실 같 지가 않았다. 토비가 샴폐인 한잔을 건네더니 팔을 잡고 사람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있는 한 남자에게러 데려갔다. "샘, 질 캐슬을 소개하겠소." 샘이 돌아보며 상냥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시오, 질 캐슬." "질, 이쪽은 샘 윈터즈. 팬 - 퍼시픽 스튜디오의 대추장이지." "저도 미스터 원터즈가 누구신지 알아요." 질이 대꾸했다. "샘, 질은 배우예요. 아주 재능 있는 배우지. 그녀를 써봐요. 당신네 누추한 스튜디오에 격조를 더해 줄 테니까." "명심하지요." 샘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토비는 질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자, 이리와요. 여기 사람들을 소개시켜 줄 테니까." 그날 밤 질은 스튜디오 사장 셋과 주요 제작자들 대여섯,감독 셋을 위시하여 작가들과 칼럼니스트들, 기라성 같은 스타들을 소개받았다. 이윽고 식사가 시작 되자 그녀는 토비의 오른편에 앉아서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얘기들을 들으며 처 음으로 명실상부한 연예계의 일원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대작의 문제는 뭐냐 라면, 차칫 흥행에 실패할 경우 스튜디오 기둥 뿌리 가 흔들린다는 거지. 지금 "폭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성공에 운명을 걸고 있는 셈이지." "...빌리 윌더가 만든 새 영화 봤어요? 굉장하더군!" "그래요? 난 그가 브래킷과 손잡고 일 때의 작품들이 더 좋던데. 브래킷은 격 조가 있거든." "빌리는 재능이 있지." "...그래서 지난 주에 펙한테 미스터리물 대본을 보냈더니 아주 맘에 들어하 더군. 하루 이틀 내로 확답을 주겠다고 말야." "...아주 골치 아파 죽겠어. 영화 제작비를 2장 정도로 예산해서 결재까지 맡 아 놓으면 인플레이션이다, 출연료 인상 데모다 해서 3,4장으로 껑충 뛰니 말 야." "한 장이 백만이겠지. 그럼 3,4백만 달러!" 질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문득 슈업즈 약국에 모여 앉아 여기저기서 귀동양으로 얻어들은 단편적인 정 보들을 지칠 줄 모르고 게걸스럽게 나누어 먹곤 하는 "잔존자들"의 모임이 생각 났다. 아니, 진정한 의미의 잔존자들은 그들이 아니라 오늘 밤 여기에 모인 사 람들이다. 할리우드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 이들은 질에게 기회를 주기를 거절하고 그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문을 걸어 잠그었던 사람들이다. 조금만 신경써 주면 질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 꿔 놓을 수도 있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단 5분도 할애하려 들지 않았다. 질 캐슬 은 요즘 새 뮤지컬 영화가 히트를 쳐서 기고만장해 있는 어느 제작자를 쳐다보 았다. 그는 질에게 인터뷰 기회조차 주지 않았었다. 테이블 저쪽 끝에 앉은 유명 코미디 영화 감독이 최근에 찍은 영화의 주인공 과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그 역시 질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었다. 샘 윈터즈가 다른 스튜디오 사장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질은 윈터즈에게 자기 가 출연하는 텔레비젼 프로그램을 좀 봐주십사 전보를 보냈지만 회신조차 없었 다. 저들이 범한 무례와 멸시는 반드시 응징될 것이다. 이 도시에서 질 캐슬을 모 욕한 모든 인간들은 그 대가를 치르고야 말리라. 지금 당장은 저들에게 아무런 존재도 못 되지만 언젠가는, 언젠가는 내 앞에 무릎을 꿇는 날이 오고야 말리 라. 식탁에 오른 음식들은 최고급이었지만 질은 음식 맛을 음미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식사가 끝나자 토비가 일어서며 말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서두르는 게 좋겠어." 그는 질의 팔을 잡고 영화가 상영될 대형 영사실로 안내했다. 영사실은 60명 정도가 편안히 영화 감상을 할 수 있도록 카우치와 안락의자들 로 꾸며져 았었다. 한쪽 입구에는 사탕을 수북히 쌓아 놓은 캐비닛이, 맞은편 입구에는 팝콘 기계가 놓여 있었다. 토비는 질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그의 눈길이 스크 린보다는 자신에게 더 오래 머문다는 것을 질도 눈치챘다. 영화가 끝나고 환하 게 불이 밝혀지자 커피와 케이크가 들어왔다. 그렇게 반시간쯤 지나자 손님들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다. 모두들 바쁜 내일이 있는 사람들이니까. 토비가 현관에서 샘 윈터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있는데 질이 코트를 입으며 걸어나왔다. "어디 가지? 내가 집까지 바래다 줄 건데." "저도 차 갖고 왔어요. 초대해 주셔서 고마워요. 정말 멋진 밤이었어요, 토 비." 질은 상냥하게 대꾸했다. 토비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 우두커니 서서 질이 차를 타고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고심해서 세워 놓은 신나는 계획들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파티가 끝나면 질을 위층 침실로 데리고 올라가 아름다운 음악을 틀어 놓고 낭 만적인 밤을 보낼 꿈에 한껏 부풀어 있었는데... "오늘 밤 여기에 온 여자들은 모두 내 침소에 들고 싶어 안달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조무라기 단역배우가 아닌 어엿한 스타들이 아난가! 질 캐슬은 자기가 누구를 거절하는지도 모르고 있는 백치다." 토비는 이제 그녀를 단념하기로 마음먹었다. 두 번 다시 말도 붙이지 않으리 라. 이튿날 아침 9시, 토비는 질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자동응답기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질 캐슬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지금 부재중이오니 성함과 전화번호 를 남기시면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신호음이 들릴때까지 잠시 기다려 주십 시오. 감사합니다." 잠시 후 날카로운 신호음이 들렸다. 토비는 수화기를 꽉 움켜쥐고 있다가 아무 메시지도 남기지 않고 거칠게 내려 놓았다. 그는 응답기에 대고 지껄이는 걸 미친 짓이라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잠 시 후, 토비는 다시 다이얼을 돌리고 있었다. 다시 녹음된 목소리가 흘러나왔 다. "질, 당신 목소리는 할리우드에서 제일 예뻐. 상품으로 써먹어도 되겠어. 난 파티에 와서 먹기만 하고 달아나는 여자들은 두 번 다시 상대하지 않지만 당신 에게만은 예외로 하기로 했지. 오늘 저녁에…?" 전화가 끊겼다. 염병할 테이프에 대고 너무 오래 지껄여댄 것이다. 토비가 바 보가 된 기분을 느끼며 어쩔 줄 몰라 몸이 얼어붙었다. 다시 전화를 건다는 게 말할 수 없이 분통 터졌지만 잠자코 또 다이얼을 돌렸다. 이번이 세 번째였다. "엄격한 랍비님이 또 중간에 말을 자르기 전에 얼른 얘기해야지. 오늘 밤 저 녁 식사 어때? 연락 기다릴게." 토비가 자기 전화번호를 남기고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종일 눈이 빠지게 기다렸지만 질에게선 아무 연락도 없었다. 그렇게 저녁 7시 가 되자 토비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지옥에나 가라. 이게 마지막이야. 이젠 끝난 거야." 이번엔 마음의 결심이 확고했다. 그는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꺼내 들고 한 여자씩 짚어나갔다. 그러나 도통 구미가 당기는 여자가 없었다. 생애 최고의 배역 질은 평생 이렇게 근사한 역할은 처음이었다. 맘만 먹으면 할리우드 미녀들을 다 가질 수 있는 토비 템플이 왜 자기한테 이 렇게 매달리는지 도무지 알 수도, 또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중요한 건 그가 죽자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며칠 동안 질은 그날 밤의 멋진 파티와 거기 모였던 대단한 인물들이 토비에게 절절 매던 광경을 머릿속에서 떨쳐내지 못했 다. 모두들 토비가 원하면 간이라도 빼서 바칠 기세였다. 그렇다면 토비를 이용 해서 어떻게든 길을 뚫어야 한다. 아주 영리하게 굴어야 해. 소문을 듣자 하니 토비는 일단 한 번 자고 나면 다시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그 가 즐기는 건 오로지 도전 그 자체야. 질은 과연 토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고심을 거듭했다. 토비는 매일같이 전화로 데이트 신청을 해왔다. 그렇게 일주일을 버티던 질은 마침내 저녁 초대에 응하기로 했다. 그날 토비가 하도 좋아해서 주변 사람들이 다 눈치를 챘을 정도였다. "정말 사랑이라는 괴물이 존재한다면 말예요, 난 사랑에 빠진 거예요. 질만 생각하면 저절로 발기가 된다니까요." 토비는 클리프톤에게 그렇게 고백하고는 멋쩍에 웃으며 돗붙였다. "클리프도 아다시피 내가 발기를 하면 할리우드 가에 붙은 광고지처럼 금방 표시가 나잖아요." 마침내 첫 데이트 날이 되었다. 토비는 아파트로 질을 데리러 가서는 "체이슨 즈"에 테이블을 예약해 놓았다고 말했다. 거기가 최고급 레스토랑이니까. "그래요?" 질의 음성에 실망이 어려 있었다. 토비가 뜻밖의 반응에 눈을 껌박이며 물었다. "가고 싶은데가 따로 있나?" 토요일 밤이라 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토비는 어디든 자신있었다. "페 레노스" "엠베스더" "더비"… "말만 해." 질은 주저하다가 말했다. "웃으실 거예요." "아니, 안 웃어." "토미스." 토비는 풀장 가장자리에 누워 들러리 배우에게 마사지를 받고 있었고 클리프 톤 로렌스가 옆에서 지켜 보고 앉아 있었다. "내 말이 믿기지 않을 거예요. 그 좁아 터진 햄버거집에서 장장 20분이나 줄 을 서서 햄버거를 샀다니까요. 그 우라질 "토미스"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로스 엔젤레스 다운타운이에요. 로스엔젤레스 다운타운에 가는 사람들은 멕시코인 노 동자들밖에 없어요. 질은 제 정신이 아니예요. 고급 프랑스산 샴페인을 곁들인 한 백 달러쯤 하는 요리를 사려고 했는데 고작 2달러 40센트 들었어요. 다음 코 스로 "핍스"에 데려가 주겠다고 했더니 거긴 싫다면서 어디로 간 줄 알아요? 샌 타 모니카 해변을 거닐었어요. 그 바람에 구찌 신발에 모래만 잔뜩 들어갔지 뭡 니까. 한밤중에 그 해변을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하마터면 스쿠버 다이버 들에게 뒤에서 목을 졸릴 뻔했지요, 뭐." 토비는 머리채를 흔들며 사뭇 감탄조로 말을 이었다. "질 캐슬. 그녀가 그렇다는 게 믿어지세요?" "아니." 클리프톤이 흥미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중에 우리 집에 와서 가볍게 한잔하자고 했더니 거절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녀의 집에서 신세를 지면 되겠구나 했죠, 안 그래요?" "맞아." "그런데 틀렸어요. 아예 집 안에 들이지도 않더라구요. 겨우 뺨에 키스 한 번 받고 쓸쓸히 혼자 집안에 들이지도 않더라구요. 겨우 뺨에 키스 한 번 받고 쓸 쓸히 혼자 집으로 돌아왔어요. 아니, 찰리 채플린의 후예가 그 무슨 창피한 꼴 입니까, 그래?" "다시 만날 건가?" "그게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예요? 당연히 만나야지!" 그 뒤 토비와 질은 거의 매일 밤 만났다. 어쩌다 질이 너무 바빠서 만날 수 없겠다고 전화를 하면 토비는 절망했다. 그는 하루에도 열 두 번씩 질에게 전화 를 해댔다. 토비는 질을 호화판 레스토랑들과 고급 클럽에 데리고 갔고 질은 그 보답으로 자기 수준에 맞는 허름한 싸구려 레스토랑이나 샌타모니카의 해안 산책로 같은 곳으로 초대했다. 토비는 질과 함께라면 어디를 가도 상관없었다. 질 캐슬은 토비의 외로움을 잊게 하는 유일한 여자였다. 이제는 오히려 토비 쪽에서 질과의 잠자리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잠자리를 같이 하고 나면 다른 여자들처럼 시들해질지도 모르니까. 그러던 어느 날 밤 질 이 살짝 굿나잇 키스를 하는 사이, 토비는 그녀의 사타구니를 더듬으며 말했다. "오, 질, 지금 당신을 갖지 못하면 난 미쳐 버릴거야." 질은 그 손을 치우며 차갑게 대꾸했다. "당신이 원하는 게 그런 거라면 나가서 돈으로 사세요. 20달러면 충분하니 까." 그리곤 매몰차게 문을 닫아 버렸다. 그러나 막상 문을 닫고는 한참이나 문에 기대어 떨고 서 있었다. 내가 너무 지나치게 군 게 아닐까? 토비가 영영 떠나 버리면 어쩌지? 질은 이런저런 근심 에 그날 밤을 하얗게 지샜다. 이튿날 토비가 다이아몬드 팔찌를 선물로 보내오자 그제서야 질은 안심했다. 그녀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메모 한 장과 함께 그 선물을 돌려보냈다. "아무튼 고마워요. 당신 덕분에 기분이 아주 좋아요." "무려 3천 달러짜린데, 그걸 돌려보냈다구요!" 토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채를 흔들며 자랑스럽게 클리프톤에게 떠벌렸 다. "도대체 그 여자, 어떤 여자 같아요?" 클리프톤은 진실을 말하고 싶어 입이 간질거리는 걸 꾹 참고 아부 섞인 칭찬 을 했다. "정말 특별한 아가씨로군." "특별하고말구요! 이 도시의 여자들은 한푼이라도 움켜쥐려고 눈알이 시뻘건 데 질은 그렇지가 않아요. 그렇게 재물 욕심이 없는 여자는 처음봐요. 그런 여 자한테 홀딱 빠진 나를 나무랄 수 있겠어요?" "아니지." 클리프톤은 그렇게 대답해 놓고도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 으면 진작 그녀의 정체를 밝히는 건데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이 아닐까? "클리프, 질의 대리인이 되고 싶다면 그건 반대하지 않겠어요. 내 장담하건대 그녀는 대스타가 될 거예요." 클리프톤은 교묘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발뺌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네, 토비. 난 슈퍼스타 하나만으로 족해." 그리곤 껄걸 웃었다. 그날 밤 토비는 질에게 그 얘기를 고스란히 전했다. 한 번 거절을 당한 뒤부터 토비는 두 번 다시 잠자리를 요구하지 않았다. 사 실 그는 내심으로 질이 자기와의 잠자리를 거절한 걸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 다. 이제껏 그와 잠자리를 같이 했던 여자들은 하나같이 자존심도 없는 뱅충이 들이었다. 그러나 질은 달랐다. 토비가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그 자리에 서 그걸 지적했다. 어느날 밤, 토비는 자꾸만 사인을 해 달라고 조르는 사내들 를 혹독하게 꾸짖어서 쫓아 버렸다. 그걸 지켜 보던 질이 조용히 말했다. "토비, 무대에 서서 사람들을 공격하는 건 좋아요. 웃음을 위한거니까. 그렇 지만 아까 그런 행동은 상대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거예요." 토비는 예의 그 사내에게로 가서 정중하게 사과했다. 질이 과음은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하자 술을 줄였고, 의상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자 즉각 재단사를 바꿨다. 다른 사람이라면 입에 담지도 못하게 했을 날카로 운 비난도 질의 입에서 나오면 순순히 받아들였다. 평생 질처럼 토비 템플을 좌 지우지한 사람은 없었다. 아, 물론 그의 어머니는 제외하고. 질은 일체 토비에게서 돈이나 값비싼 선물을 받지 않았지만 토비는 그녀가 곤 궁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고결하고 용기 잇는 태도가 토비는 그렇게 자 랑스러울 수 없엇다. 어느 날 밤, 질이 자기 방에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 거실에 서 기다리고 있는데 청구서들을 주머니에 넣고는 이튿날 클리프톤을 시켜 대신 지불하게 했다. 그 일을 하고 나니 가슴이 뿌듯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질에게 더 큰 것을, 더 중요한 것을 해주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그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샘, 내가 선심 하나 쓰지요!" "선물을 들고 오는 스타들을 조심하라!" 샘 윈터즈는 쓴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요즘 켈리 영화의 주연 여배우감을 찾느라 정신없다면서요? 내가 적당한 인 물을 소개해 주겠소." 토비가 말했다. "내가 아는 사람이오!" "전에 우리 집에서 만난 적이 있어요. 질 캐슬이라고." 샘은 질을 기억하고 있었다. 근사한 몸매와 아름다운 얼굴을 지닌 검은머리 아가씨. 그러나 켈러 영화의 십대 소녀 역할을 하기엔 너무 늙었다. 하지만 토 비 템플이 저렇게 우기는데 그래도 테스트는 해줘야지. "이따 오후에 이리로 오라고 하시오." 샘은 질 캐슬의 테스트에 무척 신경을 썼다. 스튜디오 내에서 가장 실력 있는 카메라맨에게 카메라 테스트를 시켰고, 켈러 감독에게 직접 연기 테스트를 지시 했다. 이튿날 러시 필름을 보니 예상했던 대로 그 역을 하기엔 너무 나이가 들어 보 였다. 게다가 미모와 연기력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지만 스크린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부족했다. 샘은 토비에게 전화를 걸었다. "토비, 오늘 아침에 질의 테스트 결과를 봤어요. 카메라도 잘 받고 연기력도 그 정도면 준수하지만 주연감은 안 왜요. 조연으로 활동하면 그런대로 성공하겠 지만 스타의 꿈을 갖고 있다면 진작에 생각을 바꾸는 게 좋을 거요." 그날 밤, 토비는 할리우드에 막 도착한 어느 저명한 영국인 감독이 여는 디너 파티에 데려가기 위해 질의 아파트로 갔다. 질은 몸치장을 끝내고 기다리고 있 었다. 하지만 토비의 얼굴을 보는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눈치챘다. "제 테스트 결과가 나온 모양이군요." 토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샘 윈터즈와 통화했어." 그는 되도록이면 충격을 줄이려고 애쓰면서 통화 내용을 얘기해 주었다. 질은 아무 말없이 듣고 있었다. "나한테 꼭 맞는 역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백화점 쇼원도에 놓여져 있던 황금컵이 생각났다. 질은 그때 어린 소녀 조세핀이 느꼈던 갈망과 상실감과 절망을 지금 고스란히 다시 겪고 있었 다. 토비가 말했다. "이봐,질, 너무 걱정하지 마. 원터즈가 잘 몰라서 한 말이니까." 아니, 윈터즈는 최고의 전문가이다. 이제 스타의 꿈은 사라진 것이다. 그동안 의 노고와 고통과 희망이 다 부질없는 짓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머니가 옳았 다. 진노의 하나님이 나를 벌하시는 것이다.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토록 가혹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가? 부흥회 전도사의 고함소리가 쩌렁쩌렁 귓 전에 울렸다. "저 어린 소녀가 보이는가? 저 아이는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의 불구 덩이에 떨어질 것이다." 꿈과 사랑을 안고 이 도시를 찾아온 그녀를 이 도시는 철저히 짓밟았다. 질은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슬픔을 가누지 못해 자기도 모르게 토비에게 매달려 흐느꼈다. "쉬이! 괜찮아." 토비가 따스하게 껴안아 주며 다독거리자 질은 설움이 복받쳐 더욱 거세게 흐 느꼈다. 질은 그렇게 토비의 품에 매달려 자기가 태어날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야 기, 황금컵 이야기, 부흥회 이야기, 두통과 신에 대한 공포로 지새운 무수한 밤 들의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배우가 되기위해 시련의 나날들을 참고 견뎠지만 실패만을 거듭했던 이야기. 그러나 남자들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런 얘기를 해 서는 안 될 것 같은 육감이 작용해서였다. 이제 질은 토비와 줄다리기 게임을 포기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 적나라하게 드러난 연약함이 토비의 심금을 울렸다. 토비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질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봐, 당신의 팔자가 기구하다고 생각한다면 내 얘기를 들려주지. 우리 아버 지는 정육점 주인이었고..." 그들은 새벽 3시까지 이야기를 계속했다. 토비는 난생 처음으로 여자를 자기 와 동등한 인격체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질을 이해했다. 어찌 안 그럴 수가 있 는가, 그녀는 바로 그 자신인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사랑 행위를 시작했다. 부드럽고 공감 어린 다 독거림이 서서히 관능적이고 동물적이 욕망으로 변해갔다. 둘은 부둥켜안고 탐 욕스럽게 키스했다. 토비의 발기한 남성이 질의 몸뚱아리에 느껴졌다. 질은 그 남성을 뜨겁게 원하고 있었다. 둘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서둘러 벌거숭이가 되 어 바닥에 누웠다. 토비가 밀고 들어오자 질은 그 가공할 크기에 신음을 내질렀 다. 그 소리에 토비가 주춤하자 질은 무서운 기세로 그를 끌어당겼다. 토비는 그녀의 몸을 쾌감으로 채워 주었다. 처음엔 부드럽고 은근하던 줄다리기가 점점 팽팽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미친 둣 회오리가 몰아쳤다. 그것은 황홀경이요, 극 도의 광희이며, 짐승의 짝짓기였다. "토비, 사랑해 줘요, 사랑해 둬요! 사랑해 둬요!" 질의 아득한 신음 소리와 함께 폭발하는 쾌감 속에서 그들은 온전한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밤새도록 사랑하고 얘기하고 웃었다. 마치 둘이 영원히 하나였던 듯 싶었다. 오늘 밤이 있기 전까지는 질을 향한 마음이 단순히 관심 정도였다면, 이제 토 비는 그녀에게 미치고 말았다. 그는 질의 알몸을 보듬어 안고 가만히 누워 혼자 생각했다. "이런 게 바로 사랑이구나." 살며시 바리보니 땀에 젖고 헝클어진 질의 모습이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워 보였다. 이런 사랑은 처음이었다.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 그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질은 토비를 꼭 껴안으며 대꾸했다. "오, 그래요 토비." 그녀도 토비를 사랑했고 그와 결혼하고 싶었다. 그러나 채 몇 시간이 흐로기도 전에, 왜 진작에 이런 행운이 찾아와 주지 않 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고개를 들었다. 지난 시절 그녀는 토비의 힘이 너무나 절 실했었다. 자신을 이용하고, 모욕하고 아프게 한 모든 인간들에게 그대로 갚아 주고 싶었었다. 복수! 복수를 하고 싶었었다. 이제야 그날이 도래한 것이다. 어긋나는 운명 클리프톤 로렌스는 고민에 빠졌다. 어찌 보면 일이 여기까지 온건 다 자기 탓 이었다. 토비가 막 폭탄 선언을 해온 것이다. "클리프, 오늘 아침에 질에게 구혼했어요. 그녀가 좋다고 했고. 난 지금 열여 섯 소년처럼 들떠 있어요." 클리프톤은 충격을 감추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 일은 극도의 조심성을 갖고 대처해야 한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창녀 계집이 토비 템플과 결혼하도 록 놔둘 수는 없다. 결혼 발표가 나자마자 할리우드의 불알 찬 사내는 다 기어 나와 저 여자는 내가 먼저 가졌다고 나발을 불어댈 테니까. 아직까지 토비가 질 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한 건 가히 기적적인 일이며 그 기적은 영원할 수 없다. 진실이 밝혀지면 토비는 살인마로 둔갑할 것이다. 애꿎은 주위 사람들을 채찍질 할 것이며 이 일을 수수방관한 모든 사람들을 징벌할 것이다. 당연히 그 첫 번 째 희생자는 클리프톤 로렌스가 될 것이다. 그러니 이 결혼은 절대 안 된다. 클 리프톤은 토비와 질의 나이 차가 20년이나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다가 그건 통 하지 않을 것 같아 그만 두었다. 그래서 토비를 찬찬히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 을 꺼냈다. "세상 만사가 서둘러서 좋을 건 없네. 사람의 인물 됨됨이를 알려면 오래 사 귀어 봐야 하는 걸세. 혹시 아나, 중간에 마음이 바뀌어..." 토비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도리질을 쳤다. 클리프가 신랑 들러리가 돼주세요. 결혼식은 여기서 올리는 게 좋겠어요, 아 니면 베이거스로 가서 하는 게 좋겠어요?" 클리프톤은 토비를 말리는 건 시간 낭비임을 깨달았다. 이 재난을 사전에 막 는 길은 하나뿐이다. 질을 말리는 거다. 그날 오후, 클리프톤은 질에게 전화를 걸어 사무실로 좀 나와 달라고 부탁했 다. 약속한 시간보다 1시간 늦게야 도착한 질은 호들갑스럽게 뺨에 키스를 하고 카우치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시간이 별로 없어요. 토비를 만나러 가야 하거든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클리프톤은 질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그동안 많이 변해 있었다. 몇 달 전 처 음 만났던 그 모습과는 사뭇 달리,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그래, 이런 여자들은 전에도 몇 번 다루어 본 경험이 있지. "질, 내 단도직업적으로 말하지. 질은 토비와 어울리지 않아. 그러니 이 할리 우드를 떠나 줬으면 좋겠어." 클리프톤은 책상서랍에서 흰 봉투 하나를 꺼내어 건넸다. "여기 현금 5천 달러를 넣었어. 이 돈이면 어디든 가서 자리잡을 수 있을 거 야." 질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잠시 멍하니 쳐다보더니 이내 카우치에 등을 기대고 웃기 시작했다. "농담이 아냐. 아가씨가 이 사내 저 사내와 잠자리를 같이 한 걸 토비가 알면 결혼을 할 것 같아?" 질은 한참이나 클리프톤을 노려보았다. 그게 다 누구 탓인지 아냐고, 다 당신 같은 인간들 탓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클리프톤 같은 기득권자들이 아예 기회 조차 주지 않았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택한 길이 아니었던가. 질의 육체와 자 존심과 영혼을 빼앗은 건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말을 해도 클리프톤 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감히 토비한테는 그런 말을 입에 담지도 못하면서 나 를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질은 아무 말 없이 발딱 일어나서 또각또각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로부터 한 시간 뒤, 클리프톤은 토비의 전화를 받았다. 일찍이 그는 그렇게 흥분한 토비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클리프, 당신이 질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고마워요. 질이 당신을 만나고 오더니 지금 당장 결혼하겠다고 우기는군. 우리는 지금 라스베 이거스로 결혼식을 올리러 떠납니다!" 리어 제트기 한 대가 로스엔젤레스를 35마일 남겨 놓은 상공에서 시속 250노 트로 날고 있었다. 제트기 안에 탄 데이빗 캐년은 로스엔젤레스 공항 관제탑에 신호를 보내어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 그는 지금 신바람이 나서 질에게로 가고 있었다. 시시는 자동차 사고로 입은 부상에서 거의 회복되었으나 얼굴이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데이빗은 그녀를 브라질에 있는 세계 최고의 성형외과 의사에게 보냈다. 그곳에 도착하여 장장 6주 동안 시시는 편지마다 담당의에 대한 칭찬을 잔뜩 늘어놓았다. 지금으로부터 24시간 전, 시시가 전화를 걸어 왔는데 미국으로 돌아오지 않겠 다는 것이었다. 거기서 사랑에 빠졌다고…. 데이빗은 이 기막힌 행운이 믿기질 않았다. "그거 그거 참, 잘됐군. 그 의사와 행복하게 잘살기를 바라오." 그가 흥분을 가누지 못해 더듬거리며 인사치레를 하자 시시가 얼른 대꾸했다. "아니예요, 의사가 아니예요. 여기서 조그만 플랜테이션 농장을 갖고 있는 사 람이예요. 데이빗 당신과 똑같이 생겼어요.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그는 나를 사랑한다는 거죠." 데이빗은 무전기에서 들리는 신호음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리어 스리 알파 파파, 여기는 로스엔젤레스 관제탑이다. 25번 좌측 활주로를 이용하라. 바로 뒤에 유나이티드 707이 착륙할 것이다. 착륙시 우측 램프 쪽으 로 활주하기 바란다." "알았다." 데이빗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하강을 시작했다. 나는 질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청혼을 하리라. 공항에서 신문 가판대 옆을 지나는데 굵은 머릿가사가 눈에 들어왔다. "토비 템플, 여배우와 결혼." 데이빗은 그 기사를 거푸 두 차례나 읽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꼬박 사흘 낮 사흘 밤을 술에 절어서 보낸 그는 다시 텍사스로 돌아갔다. 황홀한 신혼여행 그건 정말이지 소설 속에나 나올 법한 신홍여행이었다. 전용 제트기를 타고 멕시코로 날아간 토비와 질은 그림 같은 휴양지들을 돌며 정글과 해변의 정취를 마음껏 즐겼다. 그들 행복한 신혼부부의 보금자리는 곱디 고운 선인장꽃, 히비스커스, 부겐빌레아 '분꽃과의 관상용 덩굴 식물' 가 다투 어 핀 아름다운 별장이었는데 밤이면 이국적인 새들의 울음 소리가 세레나데처 럼 울려 퍼졌다. 거기서 정글탐험, 요트, 파티를 즐기며 꼬박 열흘을 머물렀다. 저녁때면 식도락가 요리사가 준비한 진수성찬이 혀를 즐겁게 했고, 거울처럼 맑 은 물이 찰랑거리는 풀장에 첨벙 뛰어들기도 했다. 질은 '플라자'의 화려한 부 띠끄들을 돌며 쇼핑을 즐겼다. 그들은 멕시코에서 프랑스 비아리츠로 날아갔다. 그곳에서는, 나폴레옹 3세가 유진 왕비를 위해 지었다는 호화로운 궁전 '르오텔디 팔레'에 묵었다. 신혼부부 는 카지노에서 노름도 하고, 투우장에도 가고, 낚시도 했다. 그리고 밤새도록 사랑을 나누었다. 코트 바스크에서 자동차로 달려 해발 3,500피트의 베른 산악지방을 여행했다. 그곳엔 산봉우리 위로 날아다니는 비행 관광 코스가 있어 몽블랑 산과 마테오른 의 빼어난 경관을 한눈에 즐길 수 있었다. 눈이 하얗게 쌓인 아찔한 산언덕에서 스키를 타고, 개가 끄는 썰매를 타고, 퐁뒤 파티에서 춤도 추었다. 토비의 인생에 이렇게 행복했던 때가 없었다. 비로소 자신의 인생을 완성시켜 줄 배우자를 만났기에 이제 더 이상 외롭지도 않았다. 토비는 영원히 신혼여행을 즐기고 싶었지만 질은 집에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 었다. 이젠 별천지들도, 즐거운 여행친구들도 다 시들했다. 그녀는 마치 금의환 향을 꿈꾸는 새 여왕처럼 할리우드로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토비 템플 부인에겐 풀어야 할 원한이 있었다. @ff 제 3부 파멸의 악취 파멸은 냄새를, 독기처럼 엉겨 붙는 지독한 악취를 풍긴다. 그리하여 개들이 사람에게서 공포의 냄새를 맡아내듯, 사람들은 냄새로 누가 파멸할지를 간파해 내는 것이다. 특히 할리우드는 더 그렇다. 연예계 사람들은 모두들 - 본인보다도 먼저 - 클리프톤 로렌스의 몰락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서 파멸의 악취가 물씬물씬 풍겼으므로. 클리프톤은 토비와 질이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이 다 되도록 그들에 게서 전화 한 통 받지 못했다. 비싼 결혼 선물을 사서 보내고 전화 메시지를 세 차례나 남겼건만 무심한 토비는 감감 무소식이였다. 이건 틀림없이 질의 계략일 터였다. 그녀가 중간에서 농간을 부려 토비의 마음을 돌려놓은 것이 분명했다. 클리프톤은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그와 토비는 그누구도 중간에 끼어들 수 없을 만큼 막역한 사이였으니까. 클리프톤은 토비가 스튜디오에 가고 없는 날을 골라 일찌감치 차를 몰고 템플 저택으로 향했다. 그의 차가 드라이브웨이로 접어드는 걸 본 질이 몸소 달려나 와 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클리프톤은 그녀의 미모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예상 외로 질은 아주 살갑게 굴었다. 정원에 마주않아 커피를 마시면서 그녀는 즐거웠던 신혼여행 얘기를 들려주었다. "클리프, 몇 번이나 전화를 하셨는데 토비가 연락을 못 드렸죠? 미안해요. 요 즘 우리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요." 질이 몹시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그 순간 클리프톤은은 자기가 그녀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질은 적이 아니었다. "질, 우리 둘이 새로운 마음으로 친구가 되었으면 해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마워요, 클리프. 저도 그러고 싶어요." 클리프톤은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가슴이 후련해졌다. "질과 토비를 위해 디너 파티를 열고 싶어. '비스트로' 연회실을 예약해 놓 지. 토요일 밤에 . 친한 친구들을 백 명쯤 불러서 정식으로 격식을 갖추어 하는 거야. 어때요?" "근사해요. 토비도 기뻐할 거예요." 질은 파티 날 오후까지 기다렸다가 클리프톤에게 전화를 걸었다. "클리프, 정말 미안해요. 아무래도 오늘 밤 파티에 못 가겠어요. 좀 피곤해서 요. 토비가 집에서 쉬라고 막무가내로 우기지 뭐예요." 클리프톤은 애써 섭섭한 마음을 숨기고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거 정말 안됐군, 질. 이해해요. 토비는 올 수 있겠지, 음?" 질이 한숨을 토해내는 소리가 전화선을 통해 들려왔다. "토비는 못 갈 것 같아요. 그이는 나 없이는 아무데도 가려 들지 않거든요. 아무튼 즐거운 파티 되세요." 그리곤 전화가 끊겼다. 이제 파티를 취소하기엔 너무 늦었다. 무려 3천 달러를 들여 떠들썩하게 준비 한 파티인데 이제 와서 주인공이 빠지겠다니! 그러나 이 일로 클리프톤이 입은 타격은 비단 3천 달러의 금전적 손실에 그치지 않았다. 파티에 초대된 할리우드 의 알짜배기들이 토비와 클리프톤의 심상치 않은 관계를 눈치채게 된 것이다. 클리프톤은 태연 자약하게 행동하려고 진땀을 빼며, 토비가 몸이 안 좋아서 못 왔다고 궁색한 변명을 지어냈다. 그러나 그건 일생일대의 실수가 되고 말았다. 이튿날 오후 '해럴드 이그재미너'지를 펼쳐 보니 간밤에 토비 템플 부부가 다저 스 스타디움에서 야구 경기를 관람하고 있는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클리프톤 로렌스는 목숨을 걸고 토비에게 매달려야 했다. 토비가 떠나면 영락 없이 실업자 신세가 되고 말 테니까. 토비 말고는 달리 고객이 없으니 큰 대행 사에 동업자로 들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나이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질과 화해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는 질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리고 갈 테니 얘기 좀 하자고 했다. "그러세요. 그러잖아도 어젯밤에 토비랑 요즘 통 클리프한테서 소식이 없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럼 15분 내로 가지." 클리프톤은 전화를 끊고 찬장으로 가서 독한 스카치 한잔을 따라 마셨다. 요 즘 들어 낮술을 하는 날이 너무 많아졌다. 근무중에 술을 마시는 건 나쁜 습관 인데. 근무? 무슨 근무? 여기저기서 출연 요청은 쇄도하는데 도대체 토비와 얼 굴을 마주할 기회가 없으니 아예 손놓고 앉아 있는 꼴이었다. 예전의 클리프톤 과 토비는 서로 감출 것이 없는 사이였다. 클리프톤은 새삼 토비와 함께했던 옛 시절의 추억에 젖었다. 그 즐겁던 여행들과 파티들, 웃음들, 여자들. 둘은 마치 쌍둥이 같았었다. 토비는 그를 필요로 했고 그에게 의지했었다. 그런데 이젠... 클리프톤은 스카치 한잔을 더 따르며 아직 손이 심하게 떨리지 않는 걸 다행스 럽게 생각했다. 클리프톤이 템플 저택에 도착했을 때 질은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 다. 클리프톤이 다가오는 걸 보고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나는 세일즈맨이다. 저 여자에게 나를 파는 거다." 클리프톤은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클리프. 앉으세요." "고마워요, 질." 클리프톤은 커다란 연철 테이블에 질과 마주앉아 그녀를 찬찬히 살폈다. 흰 여름 드레스와 선명한 대비를 이룬 검은 머리와 알맞게 그을린 황금빛 피부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질은 전보다 훨씬 젊고 순결해 보였다. 그녀가 따스하고 상 냥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물었다. "클리프, 아침 식사 좀 하시겠어요?" "고맙지만 난 벌써 먹었어요." "토비는 집에 없어요." "알아요. 질과 둘이서만 얘기하고 싶었지." "제가 어떻게 하면 되죠?" "내 사과를 받아 줘요." 평생 누구에게도 애걸해 본 적이 없는 클리프톤이 지금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질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내가... 내가 실수를 한 것 같아. 미안해요. 토비는 오랫동안 내 고객이자 친구였지. 그래서 토비를 보호하고 싶었어요. 이해할 수 있겠어요?" 질은 그윽한 갈색 눈동자를 클리프톤의 얼굴에 박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클리프." 클리프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토비가 얘기했는지 모르겠는데, 사실 토비를 키운 건 나지. 첫눈에 토비가 대스타감이란 걸 알았거든." 거기까지 말하고 질의 반응을 살피니 그녀는 열심히 듣고 있었다. "질, 그때 난 중요한 고객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오로지 토비에게 만 정성을 쏟기 위해 그들을 모두 포기했지." "토비가 클리프 은혜를 많이 입었다고 얘기하더군요." "정말?" 클리프톤은 반색을 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혐오스러웠다. 질이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샘 골드윈을 팔아서 전화를 건 얘기, 당신이 그날 밤 극장에 나타났던 얘기 를 다 하더군요. 클리프 당신은 참 좋은 분이세요." 클리프톤은 상체를 앞으로 내밀고 열심히 애원했다. "난 토비와의 관계가 잘못되는 걸 원치 않아요, 질. 그러니 내 편이 되어 줘 요. 전에 우리 둘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은 다 잊어 줘요. 내가 지나쳤던 거 사 과하겠어요. 그땐 그게 토비를 보호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잘못된 생각이 었어. 질은 토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야." "저도 그걸 원해요. 간절하게." "토비가 날 버리면, 나... 난 끝장이야. 단순히 일뿐만 아니라 내 인생 전체를 말하는 거예요. 토비는 나한테 아들과도 같은 존재지. 나를 그 를 사랑해요." 클리프톤은 애걸하는 자신을 경멸하면서도 계속해서 애걸하고 있었다. "질, 제발, 제발 부탁해..."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질은 그윽한 갈색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더니 한 손을 내밀었다. "나는 원한을 품는 성격이 아니에요. 내일 저녁 식사에 초대해도 되겠어요?" 클리프톤은 한숨을 푹 내쉬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시야가 뽀얗게 흐려졌다. "절대 이 은혜를 잊지 않겠어. 영원히." 이튿날 아침 클리프톤의 사무실에 등기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는데, 그 내용 인즉 토비 템플과의 계약 관계가 종료되었다는 것이었다. 복수의 여신 질 캐슬 템플은 할리우드에서 시네마스코프 이래 최고의 히트를 치고 있었다. 벌거숭이 임금님의 옷을 칭찬하는 아첨꾼, 위선자들의 도시 할리우드에서 그녀 는 저승사자의 낫처럼 무시무시한 혀를 마구 휘둘러댔다. 이 도시엔 아첨이 버 릇이 되다시피한 사람들만 우글거리고 살았으나 질 캐슬 템플만은 겁도 없이 자 기 생각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그녀는 자기에게 미친 듯 빠져든 토비의 막강한 힘을 몽둥이 삼아 밉살스런 스튜디오 간부들을 공격했다. 일찍이 그런 일은 겪 어 보지도 못한 그들은 질을 몹시도 두려워했다. 물론 토비의 눈 밖에 나고 싶 지 않아서였다. 토비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돈이 많이 벌리는 스타였기에 모두들 그를 원했다. 토비는 인기 최정상에 올라 있었다. 그의 텔레비전 쇼는 매주 닐슨 시청률 순 위 1위를 차지했고, 영화들은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였으며, 라스 베이거스에 서도 토비가 무대에 서기만 하면 그 호텔 카지노는 평소보다 두 배의 이익을 남 겼다. 바야흐로 토비는 연예계에서 가장 값진 보석이 되었다. 텔레비전, 영화, 광고, 레코드 업계할 것 없이 모두들 그를 이용해 돈을 벌어먹지 못해 안달이었 다. 할리우드의 거물급 인사들도 토비의 비위를 맞추려고 별별 아양을 다 떨었다. 약삭바른 그들은 질을 기쁘게 하는 일이 곧 토비를 기쁘게 하는 일임을 즉시 알 아챘다. 이제 토비의 모든 스케줄을 손수 관리하게 된 질은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기회를 주었다. 토비의 주위에 철옹벽을 둘러쌓고는 부유하고 유명 하고 권력 있는 사람들만 안으로 들였다. 질은 토비라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의 파수꾼이었다. 텍사스 오데사 출신의 보잘것없는 폴란드 계집애가 주지사, 대 사, 세계적인 예술가, 미국 대통령의 친구가 되었다. 이 도시는 그녀에게 몹쓸 짓을 저질렀다. 그러나 다시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으리라. 토비 템플이 그녀 의 손아귀에 있는 한은. 이제 정말로 곤란해진 사람들은 질의 미움을 산 이들이었다. 잠자리에서 뜨거운 사랑이 끝나면 그녀는 노곤해서 기분좋게 뻗어 있는 토비 의 옆구리로 파고들며 애교를 떨었다. "달링, 내가 그 얘기 했는지 모르겠네요. 옛날에 대리인을 찾아다니던 때 얘 긴데, 한번은 어떤 여자 대리인을 찾아갔었어요. 그 여자 이름이 뭐였더라? 아, 맞아, 로즈 더닝. 그녀가 마침 좋은 배역이 있으니 자기 침대에 앉아서 대본을 읽어 보라고 하더군요." 토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지?" 질은 미소를 머금으며 설명했다. "그때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천치였어요. 대본을 읽고 있는데 그 여자 가 내 허벅지를 만지는 거예요."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깔깔 웃었다. "얼마나 정신없이 도망쳐 나왔는지, 평생 그렇게 빨리 달려보긴 처음이었다니 까요." 그리고 열흘 뒤, 로즈 더닝은 영원히 대리인 면허를 박탈당했다. 그 다음 주말, 토비와 질은 팜 스프링즈의 집에 있었다. 두터운 터키 타올을 깔고 파티오 '스테인식 주택의 안뜰'의 마시지 테이블에 누워 있는 토비를 질이 천천히 마사지해 주고 있는 참이었다. 토비는 따갑게 눈을 찌르는 직사광선을 막기 위해 눈에 면 헝겊을 대고 있었다. 질은 부드러운 크림색 로션으로 토비의 발을 마사지해 들어갔다. "당신 덕분에 클리프의 정체를 알게 됐어. 그는 내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이었 어. 요즘 시내를 떠돌면서 동업자 자리를 구하는데 아무도 받아 주지 않는다더 군. 나 없인 목구멍에 풀칠도 못할 위인이지." 질은 잠시 손길을 멈추고 말했다. "클리프가 참 안됐어요." "여보, 당신의 문제가 바로 그거야. 당신은 늘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생각하거 든. 당신도 좀 매정해지는 법을 배워야 해." 질은 웃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난 그게 잘 안 돼요. 타고 나길 그렇게 타고났나 봐요." 그리곤 관능적인 손길을 사뿐사뿐 토비의 허벅지 쪽으로 놀려 갔다. 토비의 남성이 불끈 곤두섰다. "오, 이런." 토비가 신음소리를 냈다. 질의 손길이 허벅지에서 사타구니께로 다가가자 남근은 바윗돌처럼 단단해졌 다. 질은 미끌거리는 양손을 토비의 가랑이 사이로 집어넣었다. 거대한 남근이 더욱 부풀었다. "빨리, 베이비. 빨리 내 위로 올라타." 그들은 토비가 질에게 선물한 대형 모터보트 '질 호'에 타고 있었다. 내일은 토비의 텔레비전 쇼 녹화가 있는 날이었다. "평생 이렇게 즐거운 휴가는 처음이야. 일하러 돌아가기도 싫은걸." "당신 쇼는 정말 훌륭해요. 예전에 당신 쇼에 출연했을 때, 정말 재미났어요. 모두들 참 친절했죠." 그리곤 잠시 뒤에 살짝 덧붙였다. "거의 모두." "그게 무슨 소리지? 당신에게 친절하지 않았던 사람이 누구였지?" 토비의 음성이 사뭇 날카로웠다. "아니에요, 달링. 제가 괜한 말을 했나 봐요." 그러나 토비의 끝끝내 고집을 부려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냈고 이튿날로 배역 감독 에디 베리건은 해고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몇 개월 동안, 질은 자신에게 수모를 주었던 배역 감독들을 하나씩 하 나씩 제거해 나갔다. 그녀를 성의 노리개로 취급했던 사내들 모두가 대가를 톡 톡히 치렀다. 질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생각했다. 이건 마치 여왕벌의 짝짓기 의식 같군. 쾌락을 즐기고 처참하게 죽어가는 것. 이제 그녀의 독기 어린 화살은 샘 윈터즈를 향했다. 나한테 재능이 없다고 말 했겠다! 그러나 토비 앞에서 그를 비방하는 말은 결코 입에 담지 않았다. 오히 려 칭찬하고 추켜세웠다. 단, 다른 스튜디오 사장들을 조금 더 칭찬했다. 다른 스튜디오들이 토비에게 약간 더 유리하고, 다른 스튜디오 감독들이 더 토비의 재능을 잘 이해하고... 그러다 마지못해 털어놓는다는 듯 샘 윈터즈는 아무래도 토비의 재능을 별로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고 토를 달았다. 오래지 않아 토비도 질과 똑같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클리프톤 로렌스가 없고 보니 이제 토비가 믿 고 의지할 사람은 질뿐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팬 - 퍼시픽을 떠나 다른 스튜 디오에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을 무렵, 토비는 그게 순전히 자기 생각임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러나 질은 샘 윈터즈가 진실을 알도록 조처 했다. 그녀의 보복임을. 토비의 주변 인물들 중에는 질을 일시적인 침입자요, 스쳐 지나가는 환상쯤으 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질이 결코 오래가 지 못할 거라는 생각하고 애써 경멸을 감추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건 실수였다. 그들은 한 사람씩 차례로 제거되어 갔다. 지른 토비의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던 사람들이나 그녀 에게 불리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토비의 고문 변호사도, 홍보 회사도, 개인 고용인들도 모두 갈려 나갔다. '맥' 들도 해고되고 하인들도 모두 쫓겨났다. 대신 그녀가 손수 사람들을 고용했고 이제 그녀는 명실상부한 템플 저택의 안주인이 되었다. 템플 저택의 파티는 장안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다. 배우, 유명인사, 정치가, 기업가 할 것 없이 중요한 인물들은 다 거기 모이니까. 파티가 열릴 때맏 기자 들이 진을 쳤기에 일단 그 자리에 나타나면 매스컴을 타는 행운을 기대할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템플 저택의 파티 손님들은 흥겨운 파티를 즐기면서 매스컴을 통해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는 일거양득을 누렸다. 템플 부부는 매일 밤 주인 자격으로, 혹은 손님 자격으로 파티에 참석했다. 그들에겐 파티 초대장이 쇄도했다. 연극 첫 공연 기념 파티, 자선 디너 파티, 정치 행사, 레스토랑이나 호텔 개업 파티. 토비는 집에서 아내와 단둘이 지내는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했으나 질은 요란 한 파티를 좋아했다. 어떤 날은 하룻밤에 서너 군데씩 파티장을 돌기도 했다. 그야말로 강행군이었다. "세상에, 당신은 호텔 홍보부장이 적성에 맞겠어." 토비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다 당신을 위한 거예요, 달링." 질이 대꾸했다. 토비는 MGM에서 새로 제작하는 영화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러던 어 느 날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보니 파티복이 준비되어 있었다. "오늘도 나가는 건 아니겠지, 베이비? 일년 내내 단 하루도 집에서 편히 쉬지 못했단 말야!" "오늘은 데이비스 부부의 결혼 기념일이에요. 우리가 가지 않으면 무척 실망 할 거예요." 토비는 침대게 털썩 주저앉으며 웅얼거렸다. "뜨거운 물에 목욕이나 하고 조용히 쉬고 싶었는데. 당신과 단둘이서만." 그러나 토비는 파티에 갔다. 어디 그뿐인가, 늘 재치가 번득이고 사람들의 관 심을 한 몸에 받아야 하는 그였기에, 파티 손님들이 웃음과 박수를 보내며 토비 템플은 정말이지 웃음의 천재라고 혀를 내두를 때까지 사람들 앞에서 익살을 떨 었다. 그날 밤 토비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몸은 물에 젖 은 솜뭉치처럼 무거운데 정신은 또렷해서 아까 사람들이 보내던 웃음과 경탄이 자꾸만 생각났다. 그는 정말이지 행복한 사내였다. 모두가 질 덕분이었다. 어머니께서 살아 계셨다면 며느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을까. 3월이 되자 칸느 영화제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질이 초대장을 내밀자 토비는 고개를 저었다. "안돼. 거기 가느니 차라리 욕실에나 처박혀 지내겠어. 여보, 난 피곤해. 매 일 엉덩이가 닳도록 일하고 있다구." 그러나 토비의 홍보 담당 제리 거트맨이 질에게 들려준 말로는, 만일 토비가 그 자리에 참석하면 그의 영화가 최우수 영화상을 수상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었다. 그러나 초대를 섣불리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요즘 들어 토비는 늘상 피곤하고 잠도 안 온다고 투덜거렸다. 그래서 밤마다 수면제를 복용했고 아침이면 수면 부족으로 비틀거렸다. 질은 아침 식사 때마다 그에게 암페타민을 먹여 기운을 차리도록 했다. 이제 토비도 약기운에 의지해 사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미 초대를 받아들였어요. 그렇지만 취소하죠, 뭐. 상관없어요, 달링." "우리 팜 스프링즈에나 내려가서 한 달간 비누 'soap' 아래서 푹 쉽시다." 질이 빤히 쳐다보며 되물었다. "뭐라구요?" 토비의 몸이 흠칫 얼어붙었다. "비누 'soap'가 아니고 태양'sun'. 도대체 왜 비누라는 말이 튀어나왔는지 모 르겠군." 질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야, 당신이 코미디언이기 때문이죠. 아무튼 팜 스프링즈에 가는 것도 좋겠 어요. 당신과 단둘이만 있고 싶어요."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자꾸만 기운이 없어. 이제 늙나 봐." 토비는 그렇게 말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신은 절대 늙지 않아요. 나보다 더 오래 살걸요." 토비는 씨익 웃었다. "그래? 내 생각엔 우리 귀염둥이가 나보다 훨씬 오래 살 거 같은데." 그리곤 손으로 뒷통수를 쓸면서 말했다. "낮잠 좀 자야 되겠어. 솔직히 요샌 몸이 별로야. 오늘 밤은 파티 약속 없는 거지, 응?" "당신이 피곤하다면 뭐든 취소할 수 있어요. 오늘 저녁엔 하인들을 외출시키 고 제가 직접 요리할게요. 우리 둘만 단촐하게 저녁을 먹어요." "우와, 그거 근사한데." 토비는 밖으로 나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세상에 나같이 복많은 놈도 없을 거야." 그날 밤 그들은 다정하게 침대에 누워 있었다. 손수 마련한 저녁 식사가 끝나 자 질은 토비를 따끈한 물에 목욕시키고 마사지를 해주었다. 그녀의 손길이 닿 자 피로로 딱딱하게 굳은 몸이 스르르 풀렸다. "아, 정말 좋구나! 어떻게 여태까지 당신 없이 살아왔는지 몰라." "글쎄 말예요." 질은 남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토비, 칸느 영화제 얘기 좀 해줘요. 어때요? 난 한 번도 못 가봤거든요." "한마디로 난장판이지, 뭐.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영화 장사꾼들이 서로 거지 같은 영화를 팔려고 밀고 당기고 난리지. 세상에서 제일 판이 큰 신용 사기판이 야." "그럼 정말 신나겠군요." "그래? 글쎄, 신이 나긴 하지. 세계의 유명 배우들이 다 몰려오니까." 그리곤 아내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정말로 그 거지 같은 영화제에 가고 싶어?" 질은 재빨리 머리를 흔들었다. "아뇨. 그냥 팜 스프링즈에 가요." "이봐, 팜 스프링즈에는 내키면 언제라도 갈 수 있다구." "정말예요, 토비. 신경쓰지 마세요." 토비는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당신한테 왜 그렇게 죽고 못 사는지 알아? 다른 여자들 같았으면 칸느 에 데려가 달라고 지겹게 졸라댔을 거야. 당신은 속으론가고 싶어 죽겠으면서도 나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아니, 가기 싫다고. 팜 스프링즈에 가고 싶다고. 당신 벌써 못 간다고 칸느에 연락했어?" "아뇨, 아직. 하지만..." "그럼 그냥 놔둬. 인도로 가자구." 순간 토비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갔다. "내가 방금 인도라고 했지? 칸느 말인데..." 토비는 오를리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전보 한 통을 받았다. 양로원에 계신 부 친이 별세한 것이다. 이제 장례식에 가기엔 너무 늦었다. 토비는 그 양로원에 부모님 이름을 딴 별채를 짓도록 기부금을 보내기로 했다. 전세계가 칸느에 모여 있었다. 영화제의 막이 오른 칸느는 할리우드와 런던과 로마를 한데 합쳐 놓은 듯 현 란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가지각색의 외국어와 테크니컬러 '컬러 영화 제 작 방식의 일종으로, 같은 장면을 3원색용인 3개의 필름에 동시에 촬영한 것을 하나로 종합하는 것', 파나비전 '넓은 화면에 스테레오 음향효과를 내는 중형 70밀리 영사기'이 잔치 분위기를 한층 돋우었다. 영국, 프랑스, 일본, 헝가리, 폴란드 등 세계 각지에서 돈과 인기를 꿈꾸는 영화 제작자들이 필름통을 옆구리 에 끼고 프랑스 리비에라로 몰려들었다. 전문가, 아마추어, 베테랑, 신참자, 토 박이, 이방인 할 것 없이 모두들 상을 차지하려고 눈알이 시뻘갰다. 칸느 영화 제에서의 수상은 곧 흥행과 돈을 의미하므로. 칸느의 호텔들은 다 꽉꽉 들어찼고, 시내에서 숙소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티브, 볼류, 상트로페, 마토 등지의 근처 해안 도시로 흩어졌다. 그 소도시들 의 주민들은 세계적인 배우들이 길마다, 레스토랑마다, 술집마다 우글거리는 걸 보고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웬만한 호텔은 벌써 몇 달 전에 예약이 끝났으나 토비 템플은 별어려움 없이 '칼톤 호텔' 특실에 들 수 있었다. 토비와 질은 가는 곳마다 인기를 끌었다. 그 들 앞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고 그들의 행복한 얼굴이 세계 곳곳 에 보여졌다. 황금의 커플! 할리우드의 황제와 여왕! 기자들이 질에게 벌떼같이 몰려들어 프랑스 포도주 맛이 어떠냐로 시작해서 아프리카 정치에 관한 의견까 지 별벌 걸 다 물어댔다.텍사스 오데사 촌뜨기 조세핀 친스키에게는 평생 꿈도 꾸어 보지 못한 호사였다. 토비의 영화는 상을 받지 못했지만 영화제가 끝나기 이틀 전, 심사의원단은 연예계에 끼친 공로를 인정하여 토비 템플에게 특별상을 수상하겠다고 발표했 다. '칼톤 호텔' 대형 연회장은 정장 차림의 손님들로 가득했다. 질은 단상의 내 빈석에 토비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토비가 아무것도 먹질 않았다. "왜 그래요, 달링?" 토비는 머리채를 흔들며 대꾸했다. "오늘 햇빛을 너무 많이 쏘였나 봐. 속이 좀 메슥거려." "당신, 내일은 좀 쉬셔야겠어요." 내일도 오전에는 '파리 마치'지와 '런던 타임스', 점심때는 텔레비전 기자들 과 인터뷰 약속을 해놓았고, 저녁때는 칵테일 파티에 참석해야 했지만 아무래도 덜 중요한 스케줄은 취소해야 될 것 같았다. 디너 파티가 끝나갈 무렵 칸느 시장이 일어나서 토비를 소개했다. 만장하신 신사 숙녀 여러분, 세계에 즐거움과 행복을 전하는 훌륭한 일을 하고 계시는 분 을 소개합니다. 저는 우리들의 애정과 감사의 표시인 특별상의 수여자가 된 것 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시장은 금메달과 리본을 번쩍 들어 보이고는 토비를 향해 공손히 절을 했다. "무슈 톱비 템플!" 대형 연회장을 가득 메운 손님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우레와 같은 기립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토비는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일어나세요." 질이 옆에서 속삭였다. 토비는 창백한 얼굴로 더듬더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잠시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서 있다가 마이크를 향해 나아갔다. 반쯤 갔을까, 그는 의식을 잃고 바 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토비 템플은 프랑스 공군이 제공한 특별 수송 제트기편으로 파리로 날아가 " 아메리칸 병원"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프랑스 최고의 의료진들이 모여 치료를 하는 동안 질은 병원에서 제공한 특실에서 기다렸다. 그렇게 36시간을 그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세계 각지에서 쇄도하는 전화들도 받지 않았다. 질은 주위의 부산한 움직임에도 아랑곳없이 멍하니 벽만 쳐다보고 앉아 있었 다. 그녀의 마음은 오롯이 하나의 생각에 쏠려 있었다. "토비는 꼭 회복돼야 해." 토비는 그녀의 태양이었다. 그 태양이 지면 자연히 그림자도 사라지는 법, 그 런 일이 일어나게 할 수는 없었다. 새벽 5시경쯤 되었을까, 담당의사인 닥터 듀끌로가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특 실로 들어왔다. "템플 부인... 백방으로 노력은 했습니다만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남 편께서는 심각한 뇌일혈을 일으키셨습니다. 앞으로는 걷는 것도, 말을 하는 것 도 불가능할 겁니다." 당신을 위하여 이윽고 면회가 허락되자 토비가 누워 있는 중환자실로 들어선 질은 남편의 모 습을 보고 까무라칠 듯 놀랐다. 하룻밤 사이에 토비는 마치 생기가 다 빠져 나 간 사람처럼 형편없이 늙고 시들어 있었다. 전신 불수로 팔과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고, 그르릉거리는 짐승의 울부짖음만을 토해낼 뿐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6주가 지나서야 비로소 토비는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토비와 질 이 캘리포니아 공항에 도착하자, 기자단과 팬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토비 템플이 쓰러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에는 한바탕 충격의 회오리가 일었던 것이다. 토비와 질이 돌아온 뒤로 템플 저택에는 안부를 묻는 친구들의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텔레비전 기자들은 토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호시탐탐 집안으로 쳐들어올 기회를 노렸고 대통령과 상원의원들이 염려를 담은 서신을 보내왔다. 토비 템플을 사랑하는 팬들의 기도 어린 편지와 엽서들은 수천 통을 헤아렸다. 그러나 초대는 뚝 끊겼다. 전화를 걸어 질에게 따스한 위로으 말을 던지는 사 람도, 조용한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사람도, 드라이브나 영화구경을 하자고 권 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 할리우드 바닥에서 질을 염려하는 인간은 눈을 씻고 찾 아도 없었다. 곧 토비의 주치의 닥터 엘리 캐플란이 불려왔고, 그는 UCLA 메디컬 센터와 존 홉킨스 병원에서 미국 최고의 신경학자 둘을 초빙했다. 그러나 그들의 진단 결 과도 파리에서와 똑같았다. "반드시 명심해야 할 점은, 토비의 정신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는 사람들의 말을 다 듣고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나 말은 할 수 없습니다. 운동기능도 마비되었구요. 그래서 아무 반응도 보일 수 없는 겁니다." 닥터 캐플란이 질에게 설명했다. "그... 그럼 평생 저런 상태로 살아야 하나요?" 닥터 캐플란이 머뭇머뭇 대꾸했다. "물론 백 퍼센트 단정은 못 합니다만, 저희들 소견으론 신경조직이 워낙 심하 게 손상돼서 치료효과를 거두기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모르는 거죠." "그렇죠..." 그러나 질은 알고 있었다. 교대로 토비의 시중을 들 간호사 셋 말고도 매일 아침 물리치료사를 집으로 불렀다. 물리치료사는 토비를 안고 풀장으로 들어가 부드럽게 근육과 힘줄 이완 운동을 시켰다. 토비는 치료사가 이완 운동을 시키는 동안 따스한 물 속에서 미 약하게나마 발길질도 해보고 팔도 움직여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아무 차도가 없었다. 그렇게 4주가 흐르자 언어치료사가 초빙되었다. 그녀는 매일 오 후 한시간씩 토비에게 발성 연습과 말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렇게 2달이 지나도 별 차도가 없자 질은 닥터 캐플란을 불렀다. "어떻게든 토비를 도와야 해요. 저렇게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어요." 닥터는 도리 없다는 듯한 눈길로 말했다. "미안해요, 질. 벌써 오래전에 말해 줬어야 되는 건데..." 질은 닥터 캐플란이 나가고 나서도 한참이나 그대로 서재에 혼자 앉아 있었 다. 다시 끔찍한 두통이 시작되고 있었으나 지금은 자기 몸 생각을 할 때가 아 니었다. 그녀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토비는 베개를 등에 받치고 앉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질이 다가 가자 그의 짙푸른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동안 초롱초 롱한 눈동자가 줄곧 그녀에게 박혀 있었다. 그러다가 입술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토해냈다. 이내 그 파란 눈동자에 절망의 눈물이 맺혔 다. 질은 닥터 캐플란의 말을 생각했다. "반드시 명심해야 할 점은, 그의 정신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질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토비, 내 말을 들어줘요. 당신은 이제 일어날 수 있어요. 걷기도 하고, 말도 할 수 있을 거예요." 두 줄기 눈물이 토비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당신은 해낼 거예요. 나를 위해서요." 이튿날 아침, 질은 간호사들과 물리치료사, 언어치료사를 모두 해고했다. 그 소식을 들은 닥터 엘리 캐플란이 기겁을 해서 쫓아왔다. "물리치료사를 해고한 건 좋아요, 질... 하지만 간호사들까지! 토비는 스물네 시간 곁에서 보살펴 줄 사람이 필요..." "제가 토비 곁에 있겠어요." 닥터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게 어떤 일인지 몰라서 그래요.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도움이 필요하면 선생님을 부르죠." 그녀는 닥터를 돌려보냈다. 그렇게 시련은 시작되었다. 질은 의사들이 불가능이라고 선언한 일을 해낼 결심이었다. 우선 침대에서 토 비를 안아 내려 휠체어에 태웠다. 남편의 몸이 종잇장처럼 가벼워 가슴이 섬뜩 했다. 휠체어를 밀고 아래층으로 통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겨가 풀장으로 갔 다. 물리치료사가 시키던 운동을 그대로 따라 했지만 살살 그슬려 가며 부드럽 게 하던 물리치료사와는 달리 질은 엄격하고 무자비하게 나갔다. 토비가 이제 지쳐서 더이상 못 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면 질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안 끝났어요. 한 번만 더 해요. 나를 위해서요, 토비." 그렇게 억지로 한 번을 더 시켰다. 그러나 그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토비가 녹초가 되어 짐승의 흐느낌 을 토해낼 때까지 훈련은 계속되었다. 오후가 되면 발성 연습에 들어갔다. "오오오...오오오오오오." "아아아...아아아아..." "아니! 오오오오오오. 입술을 동그랗게 오무려요, 토비. 억지로라도 해봐요. 오오오오오." "아아아아아..."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당신은 말을 해야 해요! 자, 다시 오오오오오오오!" 토비는 고분고분 따라 했다. 저녁때면 음식을 먹이고 토비의 침대에 나란히 누워 그를 품에 안았다. 토비 의 무감각한 손을 들어 그녀의 유방과 사타구니를 쓰다 듬게 했다. "토비, 감촉을 느껴 봐요. 달링, 이게 다 당신 거예요. 당신 소유예요. 당신 을 원해요. 빨리 회복돼서 우리 다시 사랑을 나눠요. 토비, 당신과 섹스를 하고 싶어요." 질이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면 토비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빤히 쳐다보며 낑낑거리는 소리를 냈 다. "빨리요, 토비. 빨리." 질은 도무지 지칠 줄을 몰랐다. 옆에서 사람들이 얼쩡거리는 게싫어서 하인들 도 다 내보냈다. 그래서 요리도 손수 해야 했다. 그러나 한시도 토비 곁을 뜰 수가 없어서 시장에 직접 나가지 않고 요리 재료를 전화로 주문했다. 처음엔 안 부 전화 받는 것도 큰일이더니 이제 폭주하던 전화도 뚝 끊겼다. 토비 템플의 건강 상태를 부지런히 보도하던 매스컴도 이제 시들해졌다. 모두들 토비의 죽음 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시간 문제라고. 그러나 질은 토비를 죽게 할 수 없었다. 토비가 죽으면 자기도 따라 죽을 결 심이었다. 하루하루가 끝도 없이 되풀이되는 고된 일과의 연속이었다. 새벽여섯 시부터 시작되는 첫 일과는 토비를 씻기는 일이엇다. 토비는 전혀 대소변을 못 가렸다. 카테테르(체내에 삽입하여 액체를 빼내는 관)을 꽂고 기저귀를 찼지만, 밤 사이 몸에 오줌, 똥칠을 하기 일쑤였고 어떤 때는 잠옷까지 갈아입혀야 했다. 그래서 침실에 밴 악취는 참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질은 커다란 욕조에 따뜻한 물을 가 득 담아 스폰지나 부드러운 천으로 토비의 몸에 묻은 오줌이나 똥을 닦아냈다. 몸을 깨끗하게 씻고 나면 수건으로 말리고 파우더를 뿌려 주었다. 그리곤 면도 를 시키고 빗으로 머리를 곱게 빗겼다. "자 됐어요, 토비. 정말 예뻐요. 지금 이 모습을 당신의 팬들이 봐야 되는 건 데. 이제 곧 그들 앞에 설 수 있어요. 모두들 서로 당신을 보려고 아우성을 치 겠죠. 대통령도 올 거예요. 모든 사람들이 토비 템플을 보러 올 거라구요." 그리곤 토비의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수저로 떠먹일 수 있게끔 오트밀이나 크 림 수프, 스크램블드 에그 같은 음식을 주로 만들었다. 아기처럼 일일이 음식을 떠먹여 주며 당신은 곧 회복될 거라고 용기를 주었다. "당신은 토비 템플이에요. 모두들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이 돌아오길 바라요. 저 밖에서 팬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토비. 그들을 위해서라도 당신은 일 어서야 해요." 그렇게 길고 고된 하루가 시작되곤 하였다. 질은 토비의 마비된 몸을 휠체어에 태워 풀장으로 끌고 갔다. 운동이 끝나면 마사지를 해주고 곧바로 언어 치료에 들어갔다. 그러다보면 점심을 준비할 시간 이 되고 점심식사가 끝나면 오전의 훈련일정이 그대로 되풀이되었다. 훈련을 시 키면서도 줄곧 입을 쉬지 않았다. "당신은 멋진 코미디언이었어요. 모두들 당신을 사랑했죠. 지금 세상은 토비 템플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다 밤이 되면, 옛날 사진첩을 꺼내 함께 보았다. "여기 이건 여왕과 함께 찍은 사진이죠. 그날 밤 관객들이 얼마나 열렬한 성 원을 보냈는지 기억나요?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토비, 당신은 예전보다 더 큰 인기를 누릴 거예요. 그럼요." 밤이 깊어지면 토비의 잠자리를 봐주고 그 옆 간이침대에 천근만근 무거운 몸 뚱아리를 눕혔다. 이따금 한밤중에 고약한 똥냄새에 흠칫 잠이 깨기도 했다. 그 러면 무거운 몸을 일으켜 토비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몸을 씻겼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아침을 준비할 시간이 되었고 다시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또 하루, 또 하루. 끝도 없이 이어지는 낮과 밤의 행렬. 날이 갈수록 질은 토비를 맹렬하게 몰아쳤다. 이제 신경이 너덜너덜해지도록 닳고 닳아, 토비가 꾀를 부리면 사정없이 따귀를 갈겼다. "당신은 이겨내야 해. 다시 일어서야 해." 그녀의 음성은 맹수처럼 사나웠다. 스스로 자초한 고된 시련에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막상 잠자리에 누 우면 잠은 천리만리 달아났다. 마치 낡은 영화의 장면장면 같은 무수한 영상들 이 머릿속에서 춤을 추었다. 칸느 영화제에서 기자단에 둘러싸여 있는 그녀와 토비... 팜 스프링즈 별장을 친히 방문하여 그녀에게 아름답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던 대통령... 전야제에서 팬들에게 둘러싸인 그녀와 토비... 황금의 커플... 메달을 받으러 가다가 쓰러지는 토비... 쓰러지는 토비... 그러다가 자기도 모 르게 스르르 잠이 들곤 했다. 이따금 갑작스런 격렬한 두통에 소스라치게 잠이 깨는 적도 있었다. 그런 밤 에는 캄캄한 고독 속에 홀로 누워 두통과 싸우며 날이 밝기를 기다리곤 하였다. 이윽고 해가 떠오르면 다시 지친 몸을 이끌고 하루의 일과를 시작했다. 그렇게 또 지옥 같은 하루가 되풀이되었다. 마치 그들 부부는 이제 까마득히 잊혀진 무참한 학살극의 외로운 생존자들 같았다. 질캐슬 템플의 화려하던 인생 은 이 집안,이 사내로 오그라들었다. 그녀는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쉬지 않고 몸 을 놀렸다. 질은 토비를 무섭게 몰아쳤다. 아내와 단둘이서 지옥에 갇힌 토비, 그는 아내 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했다. 지루하고 끔찍한 하루하루가 어느덧 몇 주, 몇 개월을 훌쩍 넘어섰다. 이제 토비는 질이 가까이만 와도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무자비한 훈련이 무섭고 고 통스러워서였다. 질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가혹해졌다. 토비가 고통을 참다 못 해 짐승처럼 절규할 때까지 그의 마비된 사지를 잔인하게 혹사시켰다. 남편이 제발 좀 그만하자고 눈물로 하소연을 하면 그녀는 도리질을 치며 말했다. "아직 안 돼요. 당신이 다시 인간이 될 때까지,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을 때 까지." 그러면서 그의 지친 몸을 주물러 주었다. 토비는 무력한 얘어른이며, 식물인 간이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질의 눈에 비친 그의 미래는 절 대 현재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었다. "당신은 걸을 수 있어요!" 질은 토비를 안아 일으켜 한발 한발 걸음마 연습을 시켰다. 그 허부적거리며 걷는 꼴은 영락없는 술주정뱅이에 탈구된 꼭두각시였다. 질의 두통이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환한 빛만 봐도, 시끄러운 소음만 들려와 도, 갑자기 움직이기만 해도 두통의 발작이 시작되었다. "진찰을 좀 받아 봐야겠어. 나중에, 토비가 회복되면 말야." 지금은 자신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오직 토비, 토비만이 문제였다. 질은 마치 무엇에 홀린 여자 같았다. 걸치는 옷마다 다 헐렁헐렁 했지만 자기 가 얼마나 야위었는지, 지금 자기 몰골이 어떠한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제 그녀의 얼굴은 형편없이 쪼그라들었고 눈도 퀭하니 들어갔다. 그토록 윤기 가 흐르던 아름다운 머리칼도 부석부석해지고 축축 늘어졌다. 그러나 본인은 그 런 사실을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어느 날 대문 아래 전보 한 장이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전화 좀해달라는 닥 터 캐플란의 전갈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지금까지 해온 훈련을 차질없 이 계속해야 하니까. 질은 하루하루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토비를 목욕시키고, 훈련시키고, 옷을 갈아입히고, 면도를 시키고, 음식을 먹였다. 그렇게 세월은 자꾸만 흘러갔다. 질은 보행기를 하나 마련해서 토비의 손가락을 거기 붙들어 매고 방안에서 걸 음마 연습을 시켰다. 앞으로, 뒤로, 옆으로... 그렇게 강행군을 계속하다가 선 채로 잠이 들기도 했다. 이젠 자기가 누구인지도,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도 의식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도 늦게까지 토비의 시중을 들다가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자기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던지고 비몽사몽간을 헤매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눈을 떠 보니 날이 환하게 밝아 있었다. 깜빡 잠이든 것이 정오가 지나도록 내처 자버린 것이다. 토비 목욕도 못 시키고, 먹이지도, 옷을 갈아입히지도 못했다. 지금쯤 하릴없이 침대에 누워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아마 몹시 겁을 먹 고 있을 거야. 질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피로가 뼛속 깊이 쌓이고 쌓여 녹초가 된 몸뚱어리가 마침내 주인에게 반항하기 시작한 것이 다. 질은 무력하게 침대에 누운 채 자기가 졌다는 것을, 그동안의 지옥 같은 나 날들이 결국 헛수고로 끝나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토비의 몸뚱어리처럼 그 녀의 몸뚱어리도 주인의 의지에 거역하고 있었다. 이제 토비에게 줄 힘이 모조 리 빠져 나갔다는 생각이 들자 질은 울고 싶었다. 다 끝난 것이다. 그때 문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토비가 부 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보행기를 잡고 혼자 문간에 서서 우는 소리를 내고 있었 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것 같았다. "지이이이...지이이이..." 아, "질"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질은 갑자기 설움이 복받쳐 목놓아 울었다. 자꾸만, 자꾸만.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그날부터 토비는 놀라운 속도로 회복되어 갔다. 이제 그도 자기가 다시 일어 설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질이 아무리 지독하게 몰아쳐도 절대 반 기를 드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그걸 좋아했다. 사랑하는 질을 위해서라도 빨리 일어서고 싶었으니까. 질은 그의 여신이 되었다. 예전에 가졌던 그녀에 대한 감 정이 사랑이었다면 이제 그는 그녀를 숭배하고 있었다. 질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이제까지 그녀가 처절한 싸움을 벌여 왔던 건 오로 지 자신을 위해서였고 토비는 단지 그 수단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 다. 마치 토비가 그녀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그들은 하나의 목적에 사로잡힌 명실상부한 일심동체였다. 그들은 함께 호된 시련을 겪었다. 질은 오롯이 자기 손에 맡겨진 남편의 생명을 구해냈다. 남편의 시든 정신과 육체에 자양분과 원 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는 사이 고결한 사랑이 싹튼 것이다. 질이 토비에게 속해 있듯, 토비도 그녀에게 속해 있었다. 질은 토비가 다시 예전의 몸무게를 유지하도록 식단을 바꿨다. 토비는 매일 따스한 햇살 아래서 긴 산책을 즐겼다. 처음엔 보행기에 의지하다가 다리에 힘 이 좀 붙자 지팡이로 바꿨다. 그러다 마침내 혼자 힘으로 걷게 된 날, 질과 토 비는 식탁에 촛불을 밝혀 놓고 둘만의 축하 파티를 열었다. 이제 토비가 사람들 앞에 설 때라는 판단이 서자 질은 우선 닥터 캐플란에게 전화를 걸었다. 간호사가 즉시 연결시켜 주었다. "질! 몹시 걱정했어요,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통 연락이 닿지 않으니. 전보까 지 보냈는데 소식이 없길래 토비를 데리고 어디로 떠난 줄 알았어요. 토비는... 저..." "직접 와서 보세요, 엘리." 닥터 캐플란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믿을 수가 없어요. 이건 이건 마치 기적 같아요." 그가 질에게 말했다. "기적이죠." 질은 그렇게 대꾸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스스로 기적을 만들어 내야 해. 왜냐하면 하느님은 늘 다른 일로 바 쁘시니까." "아직도 전화로 토비 소식을 물어 오는 사람이 많아요. 집으로는 연락이 안 되니까 나한테 전화를 하나 봅디다. 샘 윈터즈는 일주일에 한 번꼴로 전화를 하 고, 클리프톤 로렌스도 계속 연락을 하고 있어요." 질은 클리프톤 로렌스는 무시했다. 그러나 샘 윈터즈라! 좋아! 그녀는 토비 템플이 아직도 슈퍼스타이며 자기와 토비가 영원한 황금의 커플임을 세상에 알 릴 방도를 찾고 있었다. 이튿날로 샘 윈터즈에게 전화를 걸어 토비를 좀 보러 와줄 수 있겠냐고 청했 다. 전화를 끊고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샘이 집 앞에 도착했다. 그는 현관문 을 열어 주는 질의 모습을 보고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불과 몇 개월 전보다 십 년은 늙어 보였던 것이다. 그윽하고 생기있던 갈색 눈은 퀭하니 들어갔고, 얼굴 엔 굵은 주름살이 패여 있었다. 몸도 너무 야위어 꼭 해골 같았다. "샘, 와주셔서 고마워요. 토비가 몹시 기뻐할 거예요." 침대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의 몰골을 예상했던 샘은 토비의 모습을 보고 까무라칠 듯 몰랐다. 풀장 가장자리에 누워 있던 토비는 샘이 다가가자 좀 굼뜨 기는 하지만 똑바로 몸을 일으키더니 힘차게 손을 내밀었다. 알맞게 선탠을 한 모습이 쓰러지기 전보다도 건강해 보였다. 마치 신비의 묘술로 질의 건강과 활 력이 토비의 몸속으로 들어가고 토비를 시들게 했던 병약함이 질에게 전이된 것 같았다. "여어! 만나서 반가워요, 샘." 토비의 말투는 전보다 약간 느리고 정확해지긴 했지만 또렷하고 기운이 넘쳤 다. 소문으로 듣던 마비의 흔적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다. 저 소년 같은 얼굴 에 여전히 짙푸른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샘은 토비를 포옹하며 말 했다. "오, 하느님!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었다구요." 토비가 씨익 웃으며 재치 있게 대꾸했다. "둘만 있을 때는 나한테 그렇게 깎듯이 "하느님"이라는 존칭 쓸필요 없어요." 샘은 토비를 가까이서 살펴보며 경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믿을 수가 없어요. 세상에, 전보다 더 젊어 보이잖아! 할리우드 전체가 장례식 준비를 하고 있는 참인데." "내 시체를 묻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이거죠." 토비가 웃으며 말했다. "현대의 의술의 기적을..." "의사들이 한 일이 아니오." 토비는 노골적인 숭배의 눈길로 질을 바라보았다. "누가 이룬 기적인지 알고 싶소? 바로 질이요. 질이 맨손으로 이룬 기적이오.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혼자 힘으로 나를 일으켜 세웠다오." 샘은 어리둥절해서 질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런 헌신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여자로 안 봤는데, 내가 잘못 봤나 보군. "토비, 앞으로의 계획은? 당분간은 휴식을 더 취히고 싶..." "토비는 다시 일을 시작할 거예요. 그냥 허송 세월을 하기엔 너무 아까운 사 람이니까." 질이 톡 나서서 말했다. "빨리 일을 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려 죽겠소." 토비도 맞장구를 쳤다. "샘이 당신에게 마땅한 일거리를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부부는 기대에 찬 시선으로 샘을 쳐다보았다. 샘은 토비를 낙담 시키고 싶지 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짓 희망을 품게 할 수도 없었다. 어느 스튜디오건 미래 가 불확실한 스타는 쓰지 않는 법, 이제 토비 템플을 덥석 받아들일 스튜디오는 한 군데도 없다. "당장은 마땅한 게 없어요. 하지만 앞으로 기회를 마련해 보지." 샘이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토비를 쓰길 두려워하는군요, 그렇죠?" 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질이 따지고 들었다. "아아, 절대 그렇지 않아요." 그러나 토비의 질은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눈치챘다. 이제 할리우드에선 토비 템플을 다시 기용하는 모험을 감행할 자가 없는 것이 다. 토비와 질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젊은 코미디언의 연기를 지켜 보고 있었다. 토비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순 엉터리야. 염병할, 나도 다시 TV에 나가고 싶어. 아무래도 대리인을 구해 야 될 거 같아. 요즘 돌아가는 상황도 좀 알고 발이 넓은 사람으로 말야." "안 돼요! 괜히 쓸데없이 당신 시간이나 축내는 사람은 들일 수 없어요. 당신 은 일자리를 구걸하는 백수가 아니란 말예요. 당신은 토비 템플이에요. 사람들 이 당신을 찾아오도록 만들어야 해요." 토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베이비, 사람들은 우리 집 문을 두드리지 않아." "앞으론 그렇게 될 거예요. 사람들은 지금 당신이 어떤 상태인지 몰라요. 당 신은 예전보다 더 나아졌어요. 그걸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구요." "잡지 표지에 누드 모델로 나가야겠군." 질은 듣고 있지 않았다.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원맨 쇼를 하는 거예요." "엉?" "원맨 쇼요."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흥분을 더해 갔다. "당신을 '헌팅건 하트포드 극장' 무대에 세울 거예요. 그러면 할리우드 사람 들이 전부 몰려오겠죠. 그리곤 어떻게 될지 알아요? 모두들 우리 집 대문이 부 서져라 두드려댈 거예요!" 정말로 할리우드 사람들이 전부 몰려들었다. 프로듀서, 감독, 스타, 비평가 연예계에 관련된 사람들은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래서 바인 스트리트에 위치한 '헌팅건 하트포드 극장' 좌석표는 이미 오래 전에 매진되었고, 수백 명이 표를 구하지 못해 그냥 돌아가야 했다. 토비와 질이 기사 딸린 리무진을 타고 극장 앞에 도착하자 로비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우우 몰 려들었다. 토비 템플은 그들의 영웅이었다. 사람들은 사지에서 돌아온 그를 전 보다 더욱 열렬히 숭배하고 있었다. 극장 안을 꽉 메운 관객들은 위대한 인기 코미디언에 대한 예우로 찾아와 준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호기심 때문에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죽어가는 영웅, 꺼져 버린 스타에게 고별 인사를하러 온 것이었다. 이 쇼는 질이 단독으로 기획했다. 오핸론과 레인저를 찾아가. 아직 살아 있는 토비를 장사 지내려는 할리우드를 풍자하는 날카롭고 재기 번득이는 대본을 쓰 게 했다. 그리곤 아카데미상을 세 번씩이나 수상한 작곡가팀을 찾아갔다. 그들 은 누구에게도 노래 대본을 써 준적이 없었지만 질의 간곡한 부탁을 물리치지 못했다. "토비는 세상에서 선생님들만이 그를 일어서게 할 수 있다고 우기고..." 무대 감독 딕 랜드리도 영국에서 급히 귀국했다. 토비를 받쳐 줄 최고 정예팀을 끌어모드긴 했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주인 공이었다. 원맨 쇼이므로 토비 혼자 무대에 서서 모든걸 이끌어 가야 했다. 이윽고 운명의 시간이 닥쳐왔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서서히 막이 오르기 시작 했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앉아 마법의 힘이 나타나기를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 다. 토비 템플이 소년 같은 얼굴에 특유의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보무도 당당하 게 무대에 오르자 잠시 적요가 깔리는가 싶더니 이내 요란한 박수와 환호성이 터졌다.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 박수를 보냈고 그 우레 같은 박수 소리가 장장 5분 동안이나 극장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토비는 가만히 서서 아우성이 가라앉길 기다리고 있다가 이윽고 조용해지자 한마디 불쑥 내던졌다. "아, 이런 게 바로 환영이라는 거군요." 왁자한 웃음 소리. 그날 밤 토비는 가히 눈부셨다. 모놀로그'독백 형태의 코미디'도 하고, 노래 도 부르고,춤도 추고,날카로운 혀로 사람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마치 그는 무대 를 떠난 적이 없었던 듯했다. 관객들은 감격하고 또 감격했다. 이제 그는 단순 한 슈퍼스타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 즉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이튿날 '버라이어티'지에 실린 평을 보자. "토비 템블의 장례식에 보러 모여들었던 관객들은 목이 쉬도록 웃고 환호했 다. 그는 무대에서 찬란하게 타올랐다! 연예계 역사상 저 코미디의 노장이 부리 는 마술을 흉내낼 자는 없다. 어젯밤의 공연은 기립 박수의 연속이었고 극장 안 에 들어갈 수 있었던 행운의 관객들은 그 밤의 추억을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 며..." '할리우드 리포터' 지는 이렇게 썼다. "관객들은 어젯밤 위대한 스타의 컴백을 보러 갔지만 사실 토비 템플은 무대 를 떠난 적도 없는 듯했다." 다른 신문들도 모두 입을 모아 격찬을 했다. 그 뒤로 템플 저택의 전화통은 불이 났고 초대장과 출연 요청이 폭주했다. 사람들이 그의 집 대문을 극성스럽게 두드려대기 시작한 것이다. 토비는 시카고, 워싱턴, 뉴욕을 돌며 원맨 쇼를 했고 가는 곳마다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의 인기는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때를 같이하여 애틋한 향수병이 돌아, 예술 극장들마다 대학가마다 토비의 흘러간 영화들을 상영하는 게 유행이 되었다. 텔레비전 방송국들도 지지 않고 '토비 템플 주간'을 기획하 여 그가 출연했던 프로들을 재방송했다. 토비 템플 인형, 토비 템플 게임, 토비 템플 퍼즐, 토비 템플 유머집이 등장 했고, 커피, 담배, 치약까지 토비 템플을 팔아먹었다. 토비는 '유니버설'에서 찍고 있는 뮤지컬 영화에 특별 출연도 하고, 대형 버 라이어티 쇼에 초대 손님으로도 나갔다. 방송국마다 새로이 '토비 템플 쇼'를 신설하려고 아이디어를 짠다. 작가들을 확보한다 야단이었다. 태양은 다시 떠올랐고 그 눈부신 태양이 질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다시 파티가 시작되었다. 각국 대사들, 상원의원들, 기업가들 할 것 없이 모 두들 템플 부부를 초대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토비와 질은 국가 유력인사들에게 나 기회가 주어지는 백악관 디너 파티에 주인공으로 초빙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 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제 질도 토비 못지않는 갈채를 받게 되었다. 맨손으로 토비를 간호해서 다 시 일어서게 한 위대한 행위가 전세계인들의 영감을 자극했던 것이다. 그녀의 눈물 어린 간병기는 세기의 러브 스토리로 격찬되어 신문마다, 잡지마다 실겼 다. 그들 부부는 '타임'지 표지 인물이 되기도 했는데, 그 호에는 질의 위대한 이야기를 담은 특집 기사가 함께 실렸다. *** 토비는 거금 5백만 달러를 받고 9월부터 매주 한차례 선보이게 될 텔레비전 버라이어티 쇼 진행을 맡게 되었다. 이제 12주 후면 첫방송이 나갈 참이었다. "여보, 우리 그때까지 팜 스프링즈에 내려가서 푹 쉬도록 해요." 질이 말했다. 토비는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은둔 생활은 충분히 했다. 인생이 얼마나 짧은 건데." 그리곤 아내의 어깨를 껴안으며 덧붙였다. "베이비, 난 농담 말고는 내 감정 표현에 서툴러. 당신에 대한 내 감정을 어 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그냥 이렇게 말해두지. 당신을 만난 순간 부터 내 진정한 인생이 시작되었노라고." 토비는 아내에게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획 돌렸다. 토비의 원맨 쇼는 런던, 파리, - 그리고 파격적으로 - 모스크바 공연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가는 곳마다 그의 사인을 받으려고 수라장을 이루었고, 미국 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그는 숭배의 대상이었다. 바다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어느 화창한 날에, 그들은 '질호'를 타고 캐 털리너 섬으로 향하고 있었다. 선상에는 샘 윈터즈와 토비의 새 텔레비전 쇼에 수석 작가로 임명된 오핸론과 레인저를 포함, 여남은 명의 승객들이 타고 있었 다. 모두들 살롱에 모여 노름도 즐기고 재미있는 얘기들도 나누었다. 이야기에 빠져 있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본 질은 토비가 보이지 않자 갑판으로 찾아 나섰 다. 토비는 난간을 붙잡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질이 다가가서 물었다. "괜찮으세요?" "그냥 물을 바라보고 있는 거야." "아름답군요, 그렇죠?" "상어라면 그렇게 느끼겠지." 토비는 그렇게 대꾸하며 몸서리는 쳤다. "나는 물에 빠져 죽는 건 싫어. 그게 제일 무섭고 끔찍해." 질은 토비의 손을 꼭 쥐었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세요?" 토비가 돌아보며 말했다. "그냥, 죽고 싶지 않아서 그래. 난 저승이 두려워. 이승에서 난 위대한 인물 이지. 모두가 알아보는 토비템플. 하지만 저승에선 어떨까...?당신 내가 생각하 는 지옥이 어떤 건지 알아? 관객이 없는 곳." *** '프라이즈 클럽'에서 토비 템플을 주빈으로 모셔 놓고 로스트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토비와 질, 샘 윈터즈, 토비의 새 쇼를 제작하게 된 방송국 사장, 그리 고 인기 코미디언 여남은 명이 단상에 자리하고 있었다. 질이 사회자의 소개를 받고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하자 모두들 기립 박수를 보냈다. "저들은 나에게 환호하고 있어, 토비가 아니라 나에게!" 질은 벅찬 감격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사회자는 인기리에 방영중인 TV 심야 토크 쇼의 진행자였다. "오늘 이 자리에서 토비와 함께 하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왜냐면 오늘 밤 이 자리에서 그를 주빈으로 모실 수 없었다면 '포레스트 론'에서 행사를 열 어야 했을 테니까요." 일동 웃음. "거기 음식은 정말 지독해요. '포레스트 론'에서 식사해 보신 분 있으세요? 거긴 최후의 만찬에다 먹다 남은 음식을 그대로 낸다니까요." 다시 웃음. 그는 토비를 향해 말했다. "토비, 우리는 정말로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정말 진심이에요. 그런데 의학 계에서 사후에 뇌를 기증해 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다면서요? 하버드 의대에서 그 걸 실험관에 담아 보관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문제는 당신의 뇌가 들어갈 만큼 큰 시험관을 마련할 수 없다구요?" 이번엔 요란한 폭소. 그러나 막상 토비가 마이크 앞에 서자 다른 재치꾼들은 기가 팍죽어서 조용히 엎드려 있어야 했다. 파티가 끝나자 모두들 '프라이어즈 클럽' 최고의 로스트 파티였다고 입을 모 았다. 그날 밤 클리프톤 로렌스도 손님들 틈에 끼여 앉아 있었다. 그의 자리는 별 볼일 없는 손님들이 앉는 홀 맨 뒤쪽, 주방이 훤히 들여다보 이는 구석 테이블이었지만 그것도 담당자에게 옛 친분을 빌미로 강요하다시피 해서 얻은 것이었다. 토비 템플이 떠난 뒤로 클리프톤 로렌스에게는 실패자의 낙인이 찍혔다. 규모가 큰 대행사들과 동업을 하고 싶은 생각은 간절했지만, 데 리고 있는 고객이 없으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작은 대행사 들을 찾아다녔지만 그런 데서도 나이 먹은 경력자보다는 진취적인 젊은이를 선 호했다. 결국 가까스로 얻은 자리가 새로 생긴 작은 대행사의 사원 자리였다. 거기서 받는 주급은 잘 나가던 시절에 '로마노프즈'에서 하룻밤 저녁값으로 썼 던 액수보다도 적었다. 사무실에 첫 출근한 날의 기억은 평생 잊지 못하리라. 그 사무실은 3명의 진 취적인 젊은이들이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었는데 모두스물 후반에 자식도 없었 다. 고객들은 주로 록 스타들이었다. 그 젊은 주인들 중 둘은 턱수염을 길렀고, 셋 다 스포츠 셔츠에 청바지, 그리고 맨발에 테니스화를 신고 다녔다. 그 틈에 섞여 있자니 클리프톤은 천년쯤 묵은 곰팡내 진동하는 고물 같았다. 셋이 모이 면, 클리프톤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유행어를 지껄이며 킬킬거렸고 아예 클리프 톤을 '아빠'라고 불렀다. 정말이지 옛날에 누렸던 영화를 생각하노라면 울고 싶 은 심정이었다. 한때 그토록 스마트하고 활기 넘치던 대리인이 이젠 초라하고 상심한 실패자 로 전락해 버렸다. 토비 템플은 그의 인생의 전부였었다. 클리프톤은 거의 강박 관념에 사로잡히다시피 하여 그 시절의 얘기들을 하고 다녔다. 자나깨나 그 생 각뿐이었다. 그리고 질. 그는 이 모든 불행의 책임을 그녀에게 돌렸다. 토비도 어쩔 수 없었으리라. 저 여우 같은 계집년에게 홀딱 빠졌으니까. 질, 질 캐슬, 클리프톤은 그녀를 증오하고 또 증오했다. 그렇게 구석 테이블에 앉아서 사람들이 질 템플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는 광경 을 바라보고 있는데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내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토비는 정말 복 많은 놈이야. 나한테도 그런 복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저 여자 잠자리에서 끝내 주거든." "그래?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옆사람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푸시캣 극장'에서 저 여자가 나오는 포르노 영화를 봤다구. 염병할, 글쎄 저 여자 말야, 하도 화끈해서 아주 남자 간까지 빼먹을 기세더라니까." 클리프톤은 갑자기 목구멍이 바싹 말라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저... 정말 질 캐슬이 분명해요?" 예의 사내가 돌아보며 대꾸했다. "아, 그럼요. 확실하다구요. 이름은 가명으로 했더구만, 조세핀 뭐라던가? 이 상한 폴란드식 성이었는데." 그리곤 반색을 하며 외쳤다. "이봐요, 당신 클리프톤 로렌스 아닌가요?" *** 샌타 모니카 가에는 페어팩스 군과 라 시네가 군이 갈라지는 경계 지구가 있 다. 그 지역의 일부분은 로스앤젤레스 시에 둘러싸여 있지만 형식상으로는 군 관할이며 주변의 시 관할 지구들보다 규제가 느슨하다. 따라서 그 여섯 블록 정 도 규모의 좁은 지역에, 농도 짙은 포르노 영화만 상영하는 영화관이 넷, 칸막 이를 여러개 설치하여 손님들이 그 안에 혼자 들어가 서서 은밀하게 야한 영화 를 즐길 수 있게 해놓은 이름뿐인 서점이 여섯, 반나의 아가씨들이 별별 서비스 를 다 해주는 마사지숍이 여남은 개 들어서 있다. '푸시캣 극장'은 바로 그 한 복판에 자리를 잡고 있다. 어두컴컴한 영화관 안에는 스무 명 가량의 관객들이 있었는데 서로 손을 꼭 잡고 붙어 앉아 있는 여자 둘을 빼면 전부 남자들이었다. 클리프톤은 그들을 둘 러보며 왜 저들은 이런 한낮에 컴컴한 굴속 같은 극장에 앉아 영화 속에서 남들 이 정사를 즐기는 광경을 몇시간씩이나 보고 있을까 궁금했다. 이윽고 영화가 시작되자 클리프톤은 모든 잡념을 털어 버리고 스크린에 몰입 했다. 상체를 잔뜩 앞으로 내밀고 여배우들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영화의 줄 거리인 즉, 어느 젊은 대학 교수가 밤이면 여학생들을 자기 침실로 끌어들여 섹 스 강의를 하는 내용이었다. 여배우들은 하나같이 젊고 매력적이고, 또 놀랍도 록 연기력이 뛰어났다. 그들은 젊은 교수를 상대로 별별 기교들을 다 동원해서 섹스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질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제발 저기에 있어야 할텐데." 클리프톤은 무던히도 애가 달았다. 하기야 이것이 질에게 복수할 수 있는 유 일한 기회니까. 만일 정말로 질이 포르노를 찍었다면 주저없이 토비에게 보여줄 작정이었다. 토비는 마음의 상처를 입긴 하겠지만 결국 극복해 낼 것이다. 질만 파멸하는 거다. 토비는 자기 아내가 더러운 창녀하는 걸 알게 되면 당장에 내칠 것이다. 그러니 질은 반드시 이 영화에 나와야 한다. 아, 저기 저 총천연색 스크린 위에 그녀가 나타났다. 정말 많이도 변했군. 지 금의 모습보다 살집도 있고 좀 촌스럽기도 하지만, 그래. 질인 건 틀림없어. 클 리프톤은 캄캄한 어둠 속에 앉아 스크린을 노려보며 이제야 복수의 날이 왔다는 희열과 승리감에 가슴이 터질듯한 흥분을 맛보았다. 그는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나올 때까지 그대로 앉아서 기다렸다. 그래 저기 있다. 조세핀 친스키. 이름을 확인한 순간, 벌떡 일어나서 곧장 영사실로 들어 갔다. 비좁은 영사실 안에서는 와이셔츠 바람의 영사 기사가 경마 예상표를 훑 어보고 있었다. 클리프톤이 들어가자 사내는 흘낏 쳐다보며 말했다. "여긴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 "저 영화 복사 필름을 사고 싶소."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비매품이요." 그리곤 다시 경마 예상표에 시선을 떨구었다. "한 부만 복사해 주면 백 달러 주겠소. 절대 비밀로 하겠소." 사내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그럼, 이백 달러." 영사 기사는 보고 있던 경마 예상표를 한 페이지 넘겼다. "그럼, 삼백." 그제서야 사내는 고개를 들고 클리프톤을 쳐다보았다. "현금?" "현금." 이튿날 오전 10시경, 클리프톤은 문제의 필름통을 옆구리에 끼고 템플 저택에 도착했다. "이건 필름이 아니야. 다이나마이트라구. 질 캐슬을 지옥에 보낼 수 있을 만 큼 위력이 센 다이나마이트." 그는 달콤한 상상에 젖었다. 처음 보는 영국인 집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 "템플 씨께 클리프톤 로렌스가 왔다고 전하게." "죄송하지만 주인님은 지금 안 계십니다." "그럼 기다리지." 클리프톤이 단호하게 내뱉었다. "기다려도 소용없어요. 주인님과 사모님은 아침에 유럽으로 떠나 셨습니다." 출구 없는 지옥 유럽에서도 역시 성공의 연속이었다. 토비가 런던(팔라듐)에서 첫 공연을 하던 날 밤 (옥스퍼드 광장)은 먼 발치에 서나마 토비와 질을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대혼란을 이루었고, (아르길 스트 리트) 근방에는 런던 경찰이 비상선을 쳤다. 그러나 열광한 관중이 경찰 저지선 을 뚫고 들어오면 즉각 지원 병력이 파견되어 왔다. 정각 8시가 되어 왕실 가문 의 사람들이 도착하자 이윽고 쇼가 시작되었다. 토비는 상상을 초월하는 멋진 무대를 만들어 나갔다. 특유의 순진무구한 얼굴 로 영국 정부와 영국인들의 인습에 젖은 점잔 빼는 태도를 맹렬히 공격했다. 어 찌하여 오늘날의 영국이 우간다보다 못한 약국이 되었는지, 왜 이 모양 이 꼴로 폭삭 주저앉았는지 자기는 안다고 익살을 떨었다. 영국인들은 그게 순전히 농담 이라는 걸 알았기에 배를 잡고 웃어댔다. 사실 토비의 날카로운 풍자는 웃음 그 자체를 위한 것이었고 진의는 추호도 없었다. 그는 영국인들을 좋아했다. 그들이 그를 좋아하듯이. 파리 시민들의 환영은 훨씬 요란스러웠다. 대통령 관저에 초빙도 되고 관용 리무진 편으로 시내 관광을 하기도 했다. 날이면 날마다 그들에 관한 뉴스가 신 문 1면을 장식했으며, 그들이 공연장에 나타났을 때는 열광한 군중을 통제하기 위해 추가 병력까지 배치되었다. 공연이 끝나자 경찰 에스코트를 받으며 대기중 인 리무진을 향해 가고 있는데 갑자기 수백 명의 인파가 구호를 외치며 경찰 저 지선을 뚫고 들어왔다. "토비, 토비... 우리의 소망 토비!" 거센 파도를 이룬 군중의 물결이 손에 손에 사인을 받을 펜과 종이를 들고 밀 려왔다. 위대한 토비 템플과 그의 여왕 질을 직접 만져보고 싶은 손길들이 우르 르 앞으로 쏠렸다. 이윽고 경찰 저지선이 무너지자 열성 팬들이 달려들어 무지 막지하게 토비의 옷을 찢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져가 평생 기념품으로 간직하려 는 것이었다. 이제 토비와 질은 압사 직전이었으나 질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저 광란의 무리는 지금 내게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야. 나는 그럴 만한 일을 했으니까. 저들에게 토비를 돌려주었으니까.) 마지막 공연지는 모스크바. 6월의 모스크바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힌다. 기품 있는 흰 베 레즈까(자작나무)와 노란 꽃봉오리를 터뜨린 리빠(보리수)가 줄지어 선 한길마다 모스크바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따스한 햇살을 즐기며 한가로이 걷고 있다. 바야 흐로 관광철인 것이다. 이곳 러시아에서는 공식 방문단이 아닌 일반 여행자들은 모두 정부직속 기관인 관광청의 통제 하에 교통편과 숙소, 가이드 딸린 관광여 행을 해야 한다. 그러나 토비와 질은 (셰레메티에보 국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고급 리무진 편으로 메트로폴 호텔에 들었다. 메트로폴 호텔은 소련 위성국의 VIP들이 묵는 곳이다. 방안에 들어서니 러시아의 명물인 보드카와 검정 캐비어 가 준비되어 있었다. 소련 고급 당간부 유리 로마노비치 장군이 환영 인사를 하러 호텔로 찾아 왔 다. "이곳 러시아에선 미국 영화를 잘 상영하지 않습니다만, 귀하의 영화는 이미 여러 차례 상영된 바 있습니다. 우리 러시아인들은 천재성은 모든 걸 초월한다 고 믿고 있지요." 토비는 (볼쇼이 극장)에서 3차례 공연을 갖기로 되어 있었다. 그 첫 공연에서 는 질도 토비와 함께 기립 박수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관 계로 판토마임 연기가 대부분이었는데 관객들은 박수와 웃음을 아끼지 않았다. 토비가 엉터리 러시아말로 익살스럽게 씨부려대자 거대한 극장 안이 웃음과 박 수 소리로 찌렁찌렁 울렸고 그 광경은 사랑의 축도를 연사케 했다. 그 뒤 이틀 동안 토비와 질은 로마노비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관광을 즐겼 다. 고리끼 공원에 가서 거대한 관람차도 타보고,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성 바질 대성당도 둘러보았다. 모스크바 국립 서커스단 공연도 보고 (아락비)의 연회에 참석하여 여덟 종류의 캐비어 중 가장 희귀하다는 황금색 곤이 캐비어, 글자 그 대로 해석하면 (조금 먹다)라는 뜻인 자꾸스까(전체 요리), 입에서 살살 녹는 파 시떼뜨(고기 파이)를 맛보았다. 디저트로는 요블로츠냐(살구 소스를 끼얹은 사과 살로트 패스트리)를 먹었는데 그 맛이 기가 막혔다. 관광 이틀째 되는 날에는 (푸쉬킨 예술 박물관)과 레닌의 능, 모스크바가 자랑 하는 어린이 용품 상점(뎃스끼 미르`어린이 세계`)를 구경했다. 그들은 대부분의 러시아인들도 잘 알지 못하는 장소들로 안내되었다. 그라놉 스코 거리엔 기사 딸린 고급 자가용들이 부지기수였고, (특별 통행소)라는 문패 가 붙은 소박한 문을 밀고 들어가니 전세계에서 수입한 고급 식품들이 즐비한 상점이 나왔다. 이곳이 바로 (나찰스트보`러시아 엘리트 계급`)가 쇼핑을 즐기는 장소였다. 또 어느 호화판 다차(별장)에 초대되기도 했는데 그곳에는 영화 관람실이 설 치되어 있어 특권층이 외국 영화들을 관람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것은 인민 국가의 색다르고도 흥미진진한 면모였다. 토비의 마지막 공연이 열리는 날 오후, 템플 부부는 쇼핑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토비가 피곤한 기색으로 말했다. "여보 혼자 가면 안 되겠어? 잠깐 눈 좀 붙였으면 해서." 질은 남편을 찬찬히 살피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그럼.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나가서 모스크바를 통째로 사들이라구." 질은 잠시 망설였다. 토비의 안색이 창백해 보였던 것이다. 이번 해외 공연이 끝나면 새 텔레비젼 쇼가 시작될 때까지 푹 좀 쉬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요. 그럼 쉬세요" 막 로비를 걸어 나가려는데 낯익은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조세핀" 질은 돌아보기도 전에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 뜻하지 않은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데이빗 캐년이 활짝 웃으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이렇게 만나다니 정말 반갑군." 질은 그만 심장이 멎어 버릴 것 같았다. (내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이 남자 하나 뿐이지.) "잠시 뭐라도 마시면서 얘기 좀 할 수 있겠어?" 데이빗이 물었다. "그러죠" 호텔 안에 있는 커다란 바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으나 다행히 한가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구석 자리가 하나 있었다. "모스크바엔 무슨 일로 왔죠?" 질이 물었다. "정부 요청으로 온 거요. 석유 거래에 관한 협상을 하려고." 따분한 얼굴을 한 웨이터가 와서 주문을 받아 갔다. "시시는 잘 지내요?" 데이빗은 잠시 빤히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혼한 지 몇 년 됐어." 그리곤 교묘하게 화재를 바꾸었다. "조세핀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웬만큼 알고 있지. 사실 난 어릴 적부터 토비 템플의 팬이었거든." 토비가 꽤나 늙은 듯한 뉘앙스를 ㅍ기는 말이었다. "그가 다시 회복돼서 기뻐. 처음에 그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조세 핀 걱정을 많이 했었지." 데이빗의 눈동자에는 오래 전에 보았던 갈망이 깃들어 있었다. "할리우드 공연과 런던 공연 모두 훌륭하더군." "그 공연들을 봤어요?" 질이 깜짝 놀라 물었다. "음." 그리고 재빨리 덧붙였다. "마침 사업상 볼일이 있어서." "왜 무대 뒤로 찾아오지 않았죠?" 데이빗은 주저 하다가 대꾸했다. "조세핀한테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아서. 조세핀이 날 반가워할지 자신도 없었 고." 주문한 음료가 땅딸막하고 육중한 잔에 담겨 도착했다. "조세핀과 토비를 위해" 건배를 하는 데이빗의 목소리엔 왠지 모를 슬픔과 갈망이 담겨 있었다. "여기 오면 늘 메트로폴에 묵나요?" 질이 물었다. "아니, 사실 여기 방을 잡느라고 무척 애를..." 그제서야 질의 영리한 질문에 걸려든 걸 깨닫고는 멋적게 웃으며 솔직하게 털 어놓았다. "조세핀이 여기 묵을 거라는 걸 알았지. 원래는 닷새 전에 모스크바를 떠날 예 정이었는데 계속 남아서 기다린 거야. 혹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할까 해서." "왜죠, 데이빗?" 데이빗은 한참이나 뜸을 들인 뒤에야 대답했다. "이젠 너무 늦어 버린 일이지만, 그래도 진실을 말해 주고 싶었어. 왜냐면 조 세핀에겐 진실을 알 권리가 있으니까." 그는 시시와 속아서 결혼한 이야기, 그녀의 자살 소동, 호숫가에서 만나기로 했던 날 밤에 일어난 사건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런 고백을 하는 데이빗의 음 성이 너무도 절절해서 질은 자꾸만 마음이 흔들렸다. "늘 조세핀을 사랑했어." 질은 따스한 포도주의 취기 같은 행복감에 젖어 조용히 앉아 있었다. 마치 간 절히 바라던 사랑의 꿈이 이제야 이루어진 듯했다. 지금 데이빗의 입에서 나온 고백은 그녀가 소망하고 갈구하던 모든 것이었다. 질은 마주앉은 사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자신의 몸을 애무하던 그의 단단한 손길과 뜨겁게 타오르던 육체를 떠올렸다. 그러자 가슴에 격렬한 소용돌이가 일었다. 하지만 토비가 있 다. 토비는 나의 일부이다. 그렇지만 데이빗... 그때 누가 뒤에서 은근한 목소리로 불렀다. "템플 부인!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모릅니다." 로마노비치 장군이었다. 질은 얼른 데이빗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에 전화하세요." 그날 밤 마지막으로 (볼쇼이 극장) 무대에 오른 토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 은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관객들은 꽃다발을 던지고, 환호를 지르고, 발을 구르 며 좀처럼 공연장을 떠나려 들지 않았다. 무릇 성공의 클라이맥스를 이룬 무대 였다. 공연이 끝나고 성대한 파티가 열리게 되어 있었으나 토비는 몸이 지칠 대 로 지쳐 있었다. "난 녹초가 됐어. 질, 당신 혼자 파티에 가도록 해. 난 호텔에 가서 눈 좀 붙여 야겠으니까." 질은 홀로 파티장에 나갔으나 매순간 데이빗이 옆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 다. 그녀는 파티 주최 측과 담소도 나누고 춤도 추면서 러시아인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아까 데이빗과 만났던 일이 한 순간도 머리에서 떠나질 않고 있었다. "조세핀, 난 결혼을 잘못했어. 시시와 난 이혼했어. 늘 조세핀을 사랑해 왔어." 새벽 두 시경에야 파티가 끝나 정중한 에스코트를 받으며 호텔방까지 모셔졌 다. 안으로 들어가니 토비가 방 한가운데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연락을 취하려고 안간힘을 썼는지 전화기를 향해 오른손을 뻗 고 있었다. 토비 템플은 엠블런스를 타고 급히 스베르츠코프 3번지에 있는 디플로매틱 종 합병원으로 옮겨졌다. 한밤중임에도 모스크바 최고의 뇌 전문가 세이 불려왔다. 모두들 질을 안쓰러워했다. 병원 원장이 친히 그녀를 빈 사무실로 모시고 가서 기다리고 있도록 배려했다. "이건 미치 영화 재상영 같아. 이 모든 게 전에 일어났던 일이야." 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치 꿈속을 헤매이듯 정신이 몽롱하기만 했다. 몇 시간쯤 흘렀을까,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땅딸막한 소련인 사내가 어기적어 기적 걸어 들어왔다. 몸에 잘 맞지도 않는 옷차림이 꼭 가난한 연관공 같았다. "저는 닥터 두로프입니다. 부인 남편 담당의사지요." "상태가 어떻죠?" "우선 좀 앉으시죠, 탬플 부인." 질은 그때까지 자기가 계속 서 있었던 것도 모르고 있었다. "빨리 말해 주세요!" "남편의 병명은 의학 용어로 말하자면 뇌정맥 혈전입니다." "얼마나 심각하죠?" "가장 위험한 경우입니다. 아직 깨어난다는 보장은 못합니다만, 만약 깨어나더 라도 전신 불수에 실어증까지 겹칠 겁니다. 정신은 말짱하지만 몸이 완전히 마 비되는 경우죠." 질은 모스크바를 떠나기 전에 데이빗의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군. 내가 곁에 있어 줄게. 언제라도 내가 필 요하면 꼭 연락해. 즉시 달려갈 테니까." 그것은 다시금 악몽에 시달리게 된 질에게 한 줄기 환한 햇살이었다. 귀국행은 마치 저승길 같았다. 비행기 안에까지 설치된 병상, 공항에서 집으로 달리는 엠블런스, 그리고 다시 병실이 된 침실. 더구나 이번에는 전혀 희망이 없었다. 면회가 허락되어 토비의 얼굴을 처음 본 순간부터 질은 그걸 알았다. 토비는 심장도 뛰고 다른 중요한 기관들도 제대 로 기능하는 엄연히 살아 있는 생명체였지만 인간으로선 너무도 불완전했다. 그 는 숨쉬고 심장이 뛰는 시체요, 산소 흡입용 천막 속에 누워 있는 사자였다. 온 몸에 마치 안테나처럼 꽂힌 튜브와 주삿바늘들이 그의 육신이 생존하는 데 필요 한 원기를 공급하고 있었다. 입이 벌려진 채 끔찍하게 뒤틀린 얼굴은 마치 악마 의 웃는 얼굴 같았고 입술이 말려 올라가 잇몸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소련 의 사도 전혀 희망이 없다고 말했었다. 그게 벌써 몇 주 전이었고 이제 그들은 다시 벨 에어 저택에 올라와 있었다. 질은 도착하는 즉시 닥터 캐플란을 불렀고 그가 전문가들을 부르고 그 전문가들 이 또 전문가들을 불러 몇 차례나 진단을 했지만 한결같이 신경 중추가 심각한 손상 혹은 파괴 상태라서, 전처럼 기적적으로 치유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결 과를 알려왔다. 다시 간호사들과 물리치료사를 두어 토비를 돌보게 했지만 거건 부질없는 짓 이었다. 토비의 몰골은 흉측하기 짝이 없었다. 피부는 누렇게 변했고, 머리칼도 한뭉치 씩 빠져 나가 군데군데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마비된 사지도 오그라들어 버 렸고 얼굴에 늘 기괴한 웃음이 감돌았다. 마치 시체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눈은 살아 있었다. 아니, 그냥 살아 있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초롱초 롱한지...! 그의 두 눈은 무용지물의 껍데기 속에 갇힌 영혼의 몸부림과 절망을 내보이며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질이 그 방에 들어갈 때마다 토비의 탐욕 스런 눈길이 그녀를 따라다녔다. 그 미친 듯 애원하는 눈길! 도대체 무얼 애원하 는 거지? 다시 걷게 해 달라고? 다시 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다시 인간이 되 게 해 달라고? 질은 조용히 그를 내려다보며 혼자 생각했다. "나의 일부가 저기 누워 있는 거야. 육신의 감옥에 갇힌 채 고통받으면서." 그들 부부는 하나로 묶인 몸이었다. 토비를 구할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자신 을 구할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젠 방법이 없었다. 전혀. 전화벨이 끝도 없이 울렸다. 전에도 그랬듯이 모두가 토비의 병환을 걱정하는 안부 전화들이었다. 그러나 그 의미 없는 무수한 전화들 속에 특별한 전화가 있었다. 데이빗 캐년 의 전화였다. "조세핀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 기다리고 있 을게." 질은 어느새 데이빗의 준수하고 건강미 넘치는 모습과 옆방에 누워 있는 괴물 형상의 사내를 비교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데이빗, 정말 고마워요, 도와줄 건 없어요. 지금 당장은요." "여기 휴스턴에 뛰어난 의사들이 많은데, 그중엔 세계 최고의 실력자들도 몇 명 있어, 그들을 보내줄까?" 질은 목이 메어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아, 데이빗에게 나를 이곳에서 좀 빼 내 달라고 애결하고 싶다! 그러나 그럴 순 없는 일, 나는 토비에게 묶여 있어. 평생 그를 떠나지 못해. 그가 살아 있는 한은. 닥터 캐플란이 토비를 진찰하는 동안 질은 서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닥터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어색하게 쾌활한 목소리를 가장해서 말했다. "질,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요." "나쁜 소식을 먼저 말해 주세요." "토비의 신경 조직은 손상 정도가 워낙 심각해서 회복이 불가능해요. 이번에 의심의 여지가 없소. 이제 다시는 걷지도, 말을 하지도 못해요." 질은 한참이나 닥터를 응시하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좋은 소식은 뭐죠?" 그제서야 닥터 캐플린은 미소를 머금었다. "토비의 심장이 놀라울 정도로 강해요. 잘만 돌봐주면 앞으로 20년을 더 살 수 있어요." 질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20년이라니! 게다가 그게 좋은 소식이라고?) 위층에 맥없이 누워 있는 끔찍한 괴물을 떠맡은 질은 출구 없는 지옥에 갇힌 신세나 한가지였다. 이혼은 불가능하다. 그건 모두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남편의 목숨을 구한 공으로 영웅이 되었으니까. 만일 지금 그녀가 남편을 버린다면 모두들 배 신감에 치를 떨 것이다. 데이빗 캐년조차도 그러니 토비가 살아 있는 한 이 지 옥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이제 데이빗은 매일같이 전화를 걸어와 그녀의 놀라운 희생정신과 성실성을 칭찬했고, 둘 사이의 사모의 마음은 점점 깊어져 갔다. 둘은 무언의 언약을 나누었다. (토비가 세상을 떠나면...) 악몽 간호사 셋이 교대로 토비의 병상을 지키고 있었다. 모두들 팔팔하고 유능하고 기계적인 여자들이었다. 질은 토비 탬플 곁에 가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기에 그들의 존재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기괴한 미소가 감도는 토비의 얼굴만 봐도 소름이 오싹 끼쳐서, 자꾸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그의 방을 멀리했다. 경 련성 마비 상태에 갇혀 무력하게 누워 있다가도 질이 방안에만 들어서면 그 짙 푸른 눈동자에 활기가 넘쳤다. 질은 그의 무언의 호소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나를 죽게 내버려두지마. 도와줘. 도와줘!) 질은 남편의 망가진 육신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리곤 했다. (당신을 도울 수가 없어요. 당신도 그런 꼴로 계속 살고 싶지 않겠죠, 차라리 죽고 싶겠죠.) 그 생각이 질의 마음속에서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었다. 요즘은 신문마다 불치병에 걸려 고생하는 남편을 아내가 고통에서 해방시켜 준 얘기들로 가득했고, 거기다 의사들까지 한몫 거들어 가망없는 환자들의 생명 을 억지로 연장시키지 않는다는 얘기를 털어놓고 있었다. 그걸 의학 용어로 (안 락사)라 불렀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자비로운 살인. 그러나 살인은 살인인 법, 비록 살아 있는건 집요하게 그녀를 따라다니는 끔찍한 두 눈뿐이었지만 토비는 아직 엄연히 생명을 지닌 인간이었다. 질은 그 몇 주 동안 두문불출 집 안에서만 박혀 있었고 그것도 대부분 자기 침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다시 두통이 시작되었고 마음의 위안거리는 전혀 없었 다. 신문, 잡지들은 다투어 전신 불수의 슈퍼스타와 이미 한차례 남편을 소생시켰 던 그의 헌신적인 아내에 대한 휴먼 스토리를 냈다. 그리고 간행물들마다 과연 이번에도 질이 기적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인지 점치고 있었다. 그러나 질 자신 은 이제 더 이상 기적이 없으리란 걸 알았다. 토비는 결코 일어서지 못할 것이 다. 닥터 캐플란은 20년이라고 말했었다. 데이빗이 저만치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 는데 말이다. 어떻게 해서든 이 감옥에서 탈출할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그 일은 어느 음울한 일요일에 시작되었다. 아침부터 내린 비가 종일 지붕과 창문을 때렸고, 질은 정말이지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는 혼자 침실에 앉아 책을 읽으며 저 사악한 빗소리를 마음속에서 몰아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마침 야간 근무를 맡은 간호사 잉그릿드 존슨이 들어왔다. 그녀는 빳빳하기 이를 데 없는 전형적인 북구인이었다. "위층 버너가 고장입니다. 그래서 부엌에 가서 템플 씨의 저녁 식사를 준비해 야겠으니 몇 분만 좀 템플 씨 곁에 있어 주시겠습니까?" 질은 간호사의 목소리에서 못마땅해 하는 기색을 읽었다. 아마도 병상에 누운 남편을 멀리하는 아내가 이상하게 여겨졌으리라. "그러죠" 질은 읽던 책을 닫고 토비의 침실로 향했다. 문간에 들어서기도 전에 병마의 악취가 코를 찔렀다. 너무도 익숙하고 진저리나는 냄새였다. 순간, 그녀의 존재 를 이루고 있는 미세한 조각 가닥가닥이 토비를 구하기 위해 고군 분투했던 저 길고 끔찍한 몇 개월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커다란 베게에 고개를 의지하고 있던 토비는 질이 들어서는 걸 보자 눈에 불 을 켜고 미친 듯 무언의 메시지를 보냈다. "도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왜 그렇게 나를 멀리했지? 당신이 필요해. 도와 줘!" 마치 그의 눈이 목소리를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질은 흉측하게 뒤틀린 몸뚱 어리와 일그러진 미소가 감도는 데드 마스크를 내려다 보며 구역질을 느꼈다. "당신은 일어나지 못해요, 지옥에나 가벼려요! 당신은 죽어야 해요! 당신이 죽 었으면 좋겠어!" 순간, 토비의 눈빛이 돌변했다. 눈동자에 경악의 표정이 스치는가 싶더니 이내 독기 어린 증오와 적의가 나타났다. 그 표정이 너무도 노골적이어서 질은 자기 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른 건지 깨달았 다. 아무 의식 없이 속생각을 그냥 밖으로 내놓았던 것이다. 그녀는 황급히 돌아서서 도망쳐 나왔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비가 그쳤다. 지하실에 처박아 두었던 토비의 휠체어가 요즘 다시 사용되고 있었는데, 낮 근무를 맡은 간호사 프랜시스 고든이 일광욕 을 시키려고 토비를 휠체어에 태워 정원으로 데리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질 은 휠체어 굴러가는 소리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멀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살그머니 문을 열고 나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막 서재 앞을 지나는데 전화벨 이 울렸다. 데이빗이 워싱턴에서 건 전화였다. "오늘은 좀 어때?" 데이빗의 목소리가 이토록 반가웠던 적은 없었다. "괜찮아요, 데이빗." "조세핀, 당신이 내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두요. 당신을 너무나도 사랑해요. 당신을 원해요. 당신 품에 안기고 싶어요. 오, 데이빗..." 그러다 이상한 직감에 고개를 돌려 보니 토비가 휠체어를 탄 채 복도 한가운 데에 앉아 있었다. 간호사가 잠시 볼일을 보러 간 모양이었다. 그의 짙푸른 눈동 자가 증오와 적개심으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질은 몽둥이로 한대 얻어맞 은 듯 비틀거렸다. 토비의 눈이 소리치고 있었다. "널 죽여 버리겠어!" 질은 공포에 사로잡혀 수화기를 떨어뜨렸다. 그녀는 토비의 증오가 무슨 난폭자나 악마처럼 꽁무니에 따라붙는 걸 느끼며 허둥지둥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종일 음식도 거부한 채 방안에만 틀 어박혀 있었다. 의자에 멍하니 앉아서는 아까의 장면을 곱씹어 생각했다. 토비가 알아챘어. 다 알아챘어. 이젠 다신 그의 얼굴을 대할 수가 없어. 이윽고 밤이 찾아왔다. 아직 유월 중순이었지만 밤이 되어도 날씨가 후덥지근 했다. 질은 하다못해 미풍이라도 들어오도록 창문을 활짝활짝 열어젖혔다. 토비의 방에서는 갤러어 간호사가 근무를 서고 있었다. 그너는 발꿈치를 세우 고 서서 환자의 동정을 살폈다. 환자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좀더 잘 보살필 수 있을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불을 잘 여며 주며 쾌활하게 말했다. "자, 이제 편히 주무셔야죠. 이따가 다시 와서 봐드리게요." 아무 반응이 없었다. 토비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어쩌면 아예 그의 마음을 모르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갤러어 간호사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환자에게 시선 을 던지고는 곁방으로 텔레비젼을 보러 갔다. 그녀는 특히 토크 쇼를 좋아했다.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토크 쇼에 나와 스스럼없이 사생활을 얘기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마치 이웃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텔레비전 소리가 환자의 수 면을 방해하지 않도록 볼륨을 한껏 낮췄다. 그러나 아무리 텔레비전 소리가 커 도 토비 템플은 듣지 못할 터였다. 다른 생각에 골몰해 있었으므로. 저택은 벨 에어 숲의 정적에 싸인 채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다. 이따금 저 아 래 선셋 가에서 자동차 경적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갤러어 간호사는 심야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텔레비전에서 토비 템플의 옛 영화들을 보여주었으 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주인공을 바로 곁에 두고 그의 영화를 감상하는 기분 이 아주 색다를 테니까. 새벽 4시경, 갤러어 간호사는 공포 영화를 보면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토비의 침실은 깊은 정적에 싸여 있었다. 다시 질의 침실, 침대 옆에 놓인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고요한 정적을 깨고 있었다. 질은 알몸으로 베개를 껴안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몸뚱어리가 흰 시트 위에 검은 윤곽을 그려 놓고 있었고 멀리서 거리의 소음이 희미하게 들 렸왔다. 질은 잠결에 몸을 뒤척이며 몸서리를 쳤다. 데이빗과 알래스카로 신혼여행을 간 꿈을 꾸고 있었다. 그들은 얼어붙은 광야에 서 있었는데 돌연 눈보라가 불어 닥쳤다. 찬바람이 사정없이 얼굴을 갈기는 바람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데 이빗 쪽을 돌아보니 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질은 홀로 꽁꽁 얼어붙 는 북극의 추위 속에 서서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서 숨을 쉬려고 헐떡거리고 있 었다. 누군가 목이 졸려 캑캑거리는 소리에 그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급박하게 와서 씨근덕거리는 소리, 임종 직전처럼 목청이 가르랑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 니, 그 소리는 바로 자기 목구멍에서 나고 있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얼음 같은 냉기가 마치 음란한 모포처럼 그녀의 알몸을 감싸고는 유방을 더듬으며 무 덤 냄새처럼 고약한 입김을 풍기는 차가운 입술로 키스를 해왔다. 질은 거칠게 뛰는 심장을 안고 숨을 쉬려고 몸부림을 쳤다. 폐가 냉기로 바싹 오그라든 것 같았다. 어떻게든 일어나 앉으려고 했지만 보이지 않는 무게가 그녀를 사정없이 찍어 누르고 있었다. 이건 분명 꿈일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목구멍에서 나는 씨근덕거리는 소리가 생시처럼 똑똑하게 들려왔다. 그건, 그건 토비가 틀림없었 다. 갑작스런 공포에 힘을 얻은 그녀는 필사의 집념으로 침대 발치로 기어갔다. 이윽고 바닥을 딛고 내려서서 문을 향해 내닫는데 냉기가 끈질기게 뒷꼭지를 물 고 늘어졌다. 문 손잡이에 손이 닫자 힘껏 비틀어 열었다. 그리곤 헉헉거리며 복 도로 달려나갔다. 그제서야 오그라든 허파에 산소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복도는 따스하고 고요했다. 질은 거기 휘청거리고 서서 정신없이 이빨을 맞부 딪치며 떨고 있었다. 그러다 돌아서서 방안을 쳐다보니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 화롭게 보였다. 그러니까 악몽을 꾼 것이었다. 질은 잠시 주저하다가 느릿느릿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방안은 따뜻했다. "두려워할 거 없어. 그럼, 토비는 나를 해치지 못해" 곁방에서 잠이 깬 갤러어 간호사는 환자의 상태를 점검하다 갔다. 토비 템플은 아까 잠들 때와 똑같은 자세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천장을 향한 그의 시선이 갤러어 간호사는 보지 못하는 어떤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뒤로는 마치 불길한 운명의 징조나 앞으로 닥칠 무서운 사건의 선견처럼 그 악몽이 규칙적으로 되풀이되었다. 그리하여 질의 가슴속에 서서히 공포가 쌓 여 갔다. 집 안에 들어서기만 하며 토비의 존재를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간호 사가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오면 휠체어의 삐걱거리는 고음이 신경을 자극했다. (어떻게든 이 공포에서 벗어나야 해.) 그녀는 토비의 방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무 소용이 없었 다. 그는 도처에서 그녀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두통도 끊이지 않고 찾아와 무자비하고 규칙적인 울림을 반복하고 있었 다. 질은 단 한시간, 아니 1분, 1초만이라도 그 고통에서 헤어나고 싶었다. 어쨌 든 잠은 자야 하니까. 생각다 못해 토비의 방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부엌 골방 으로 들어갔다. 하녀의 처소였던 그 방은 조용하고 따뜻했다. 질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잠이 들었다. 그러나 방안을 가득 매운 악취 나는 냉기에 오싹하는 전율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 무시무시한 냉기다 달려들어 그녀를 매장시켜려 하고 있었다. 질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도망쳤다. 낮 동안도 끔찍했으나 밤은 더 지독했다. 공포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침대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잠을 쫓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잠이 들면 또 토비가 찾아올 것이므로. 그러나 녹초가 된 몸이 허물어지면서 스르르 잠이 든다. 잠이 들면 영락없이 냉기에 ㅉ겨 후다닥 깬다. 잠이 깨서도 냉기가 스멀스멀 기어들고 요기가 마치 끔찍한 저주처럼 온몸을 휘감아 오는 걸 느끼며 와들와들 떨어야 한다. 그러다 참다못해 미친 듯이 밖으로 도망친다. 새벽 3시였다. 의작에 앉아 책을 읽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던 질은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이윽고 눈을 뜨는데 방안이 칠흑같이 캄캄했다. 순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느낌에 가슴이 철렁했다. 이내 그게 무슨 일인지 생각났다. (분명 불을 켜놓고 잤는데...) 질은 두 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달래며 스스로 타일렀다. (무서워 할 거 없어. 갤러어 간호사가 들어왔다가 내가 잠이 든 걸 보고 불을 끈 게 분명하니까.) 그때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복도 저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삐걱... 삐걱... 삐걱... 토비의 휠체어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질은 머리 끝이 곤두 서는 느낌이었다. (나뭇가지가 지붕이나 처마에 부딪치는 소리일 거야.)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려 보았지만 그건 자신이 생각해도 억지였다. 삐걱... 삐 걱... 그 장송곡 같은 기분 나쁜 소리는 너무나도 귀에 익숙한 토비의 휠체어 소 리였다. (토비일 리가 없어. 그는 꼼짝못하고 누워 있으니까. 내가 미쳐가고 있는 거 야.) 그러나 그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윽고 방문 앞에 이르자 소리가 뚝 끊겼다. 죽음과도 같은 정적, 갑자기 쨍그랑 하는 소리가 그 정적을 깼다. 질은 밤새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다. 너무 무서워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아침이 되어 문을 열고 나가 보니 복도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꽃병이 산산조 각 나 있었다. 질은 닥터 캐플란에게 물었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이론을 믿으세요?" 닥터는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떻게 말예요?" "그러니까... 토비가 침대에서 일어나고 싶은 바람이 아주아주 간절하다면, 그 렇다면 그게 가능할까요?" "아무 도움도 받지 않고 말이오? 현재 상태에서요?" 닥터는 사뭇 회의적인 표정이었다. "지금 토비는 전혀 몸을 움직일 수 없어요. 전혀" 질은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계속 물고 늘어졌다. "만약에... 만약에 정말로 일어나야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면 -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닥터 캐플란은 고개를 저었다. "정신이 육체에 명령을 내리는 건 분명하지만 운동 자극이 차단되면, 즉 그 명 령을 실행할 근육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럼, 인간의 정신력으로 물체를 움직일 수 있다는 건 믿으세요?" "염력 말이오? 현재 다양한 실험들이 행해지고 있긴 하지만, 글쎄 나로선 아직 확실한 만한 증거를 보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내 방 앞에 꽃병이 깨져 있었어.) 질은 닥터에게 꽃병 얘기와 악몽 속의 냉기, 토비의 휠체어 소리에 관해털어 놓고 싶었지만 공연히 실성했다는 소리만 들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정말 내가 미쳐 버린 걸까?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걸까?) 닥터 캐플란이 나가자 질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뺨은 푹 꺼졌고 조막만해진 파리한 얼굴에 눈만 화등잔만했다. (계속 이렇게 살다간 토비보다 내가 먼저 죽겠어.) 그녀는 축 늘어진 부스스한 머리칼과 갈라진 손톱을 보았다. (데이빗에게 이런 몰골을 보일 순 없어. 이제부턴 자신을 가꿔야해. 당장 시작 하는 거야. 일주일에 한 번씩 미장원에 가고, 하루 세끼 꼬박꼬박 찾아 먹고, 여 덟 시간씩 충분히 자야 해.) 이튿날 아침 질은 당장 미용실로 달려갔다. 워낙 기진맥진한 상태라 헤어 드 라이어의 따스한 훈기에 앉은 채로 깜빡 잠이 들었고 다시 악몽을 꾸었다. 꿈속 에서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그런데 토비의 휠체어 소리가 들려왔다. 삐걱... 삐걱... 삐걱... 그가 천천히 휠체어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기괴한 웃음을 흘리며 다가왔다. 뼈만 앙상한 손이 그녀의 목에 닿았다. 질은 미친 듯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나 미용실을 쑥밭으로 만들어 놓고 머리를 산발한 채로 거기 서 도망쳐 나왔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는 집을 나서기가 두려워졌다. 그러나 집 안에 있기도 두려웠다. 질의 머리에 심상치 않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제 두통만이 문제가 아 니라 건망증까지 겹쳤다. 아래층 부엌에 내려갔다가 자기가 거기 왜 갔는지 잊 고 망연히 서 있기가 일쑤였다. 게다가 과거와 현재가 뒤죽박죽 뒤엉키는 증세 도 일어났다. 한번은 고든 간호사가 무슨 말을 하러 왔는데 집안에 웬 간호사 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이내 기억을 해내기도 했다. 감독이 세트에서 질을 기다 리고 있었다. 그녀는 대사를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상태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선생님." 어떻게든 감독을 붙잡고 그 신을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의견을 나누어야 한 다. 고든 간호사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템플 부인! 템플 부인! 괜찮으세요?" 그제서야 질은 현재의 온전한 기억을 되찾으며 자신에게 무서운 일이 일어나 고 있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자신 이 정말 미쳐 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토비가 몸을 움직여 그녀를 살해 하려고 하는지 실상을 밝혀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선 토비를 직접 보아야겠기에 억지로 긴 복도를 따라 토비의 침실 로 걸어갔다. 문밖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마음을 다잡고 방문을 열었다. 토비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마침 간호사가 스폰지로 몸을 닦아주는 참이었다. 간호사는 문 소리에 고개를 들더니 질이 들어오는 걸 보고 반색을 했다. "어머나, 템플 부인이 오셨네요. 지금 우리는 개운하게 목욕을 하고 있어요, 그 렇죠?" 질은 침대에 누운 형상을 바라보았다. 형편없이 오그라든 사지는 온통 뒤틀리고 쭈글쭈글한 몸통에 힘없이 붙어 있 었고, 사타구니에 이제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남근이 마치 흉물스런 뱀모양 축 늘어져 있는 게 보였다. 얼굴에 황달기는 가셨지만 입이 헤벌어진 백치 같은 미 소는 그대로였다. 그의 몸뚱어리는 죽었으되 두 눈만은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그 영악한 푸른 눈이 이리저리 쏘아보고, 탐색하고, 재보고, 계획하고, 증오하고 있었다. 은밀한 계획과 무시무시한 결의로 가득 찬 저 눈. 질은 그 눈을 통해 토 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의사도 그의 정신은 말짱하다고 말했었지.) 토비의 마음은 맹렬하게 타오르며 질을 파멸시킬 방법을 모색하고 있으리라. 질이 그의 죽음을 바라는 것 이상으로 토비도 질의 죽음을 원하고 있으니까. 질은 증오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토비의 눈을 내려다보며 그의 소리없는 외침 을 들었다. (너를 죽이고 말겠어.) 그의 두 눈이 내뿜는 증오가 어찌나 맹렬한지 마치 몽둥이로 사정없이 두들겨 맞는 것처럼 정신이 아찔했다. 질은 그 눈을 들여다보며 깨어진 꽃병을 떠올렸고, 끔찍한 악몽들이 결코 환 상이 아니었음을 확신했다. 분명 토비가 어떤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이제 그녀는 토비에게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지옥의 끝 닥터 캐플란은 토비의 진료를 마치고 질을 만나러 갔다. "풀장 물리치료는 이만 중지하는 게 좋겠어요. 시간 낭비니까. 토비의 근육 조 직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희망했는데 검사 결과 전혀 차도가 없는 걸로 밝 혀졌어요. 내가 치료사한테 직접 얘기하지요." "안 돼요!" 그것은 날카로운 울부짖음이었다. 닥터 캐플란은 깜짝 놀라서 쳐다보았다. "질, 지난번 당신이 이루어 낸 기적은 나도 잘 알아요. 그렇지만 이번엔 전혀 희망이 없어요. 난..." "포기할 수 없어요. 아직은 안 돼요," 질의 음성엔 절망이 짙게 베어 있었다. 닥터 캐플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게 정 그렇게 절실하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요 절실해요." 그 순간 질에게 물리치료를 계속하는 건 절대 절명의 일이었다. 그것만이 자 신의 목숨을 구하는 길이니까. 이제 질은 자기가 할 일을 알고 있었다. 이튿날은 금요일이었다. 데이빗이 전화를 걸어와 마드리드로 출장을 떠난다는 소식을 전했다. "주말에 아마 연락 못 하게 될 거야." "당신이 보고 싶을 거에요. 아주아주." "나도 그래. 그런데 어디 아픈가? 목소리가 이상해. 너무 지쳐서 그런 거야?" 질은 끔찍한 두통에 자꾸만 잠기는 눈을 뜨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이 제 음식을 먹은 기억도, 수면을 취한 기억도 까마득하기만 했다. 기력이 쇠해서 서 있기도 힘겨웠지만 억지로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괜찮아요, 데이빗." "사랑해, 조세핀 몸조심해." "그럴께요, 데이빗. 사랑해요. 부디 그걸 기억해 줘요."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말예요.) 질은 물리치료사의 차가 드라이브웨이로 접어드는 소리를 듣고 쏜살같이 아래 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두통은 아우성을 치고 다리는 후들후들 떨려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으나 젖 먹던 힘까지 모아 물리치료사가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먼 저 현관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템플 부인." 인사말을 던지고 안으로 들어서려는 물리치료사를 질이 얼른 막아섰다. 그가 깜짝 놀라서 쳐다보았다. "닥터 캐플린이 물리치료를 중지하라고 했어요." 물리치료사는 단박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진작 연락을 해줬어야지 이렇게 헛걸음을 하게 하다니. 다른 때 같았으면 무슨 이런 경우가 있냐고 싫은 소리를 했겠지만 템플 부인이 워낙 훌륭한 숙녀이고 또 거푸 불행을 당한 것이 안쓰럽 기도 해서 그냥 웃는 얼굴로 말했다. "뭐, 괜찮습니다, 템플 부인. 이해합니다." 물리치료사는 차를 타고 돌아가 버렸다. 질은 자동차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이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중간쯤 올라갔을까,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 잠시 난간에 매달려 서 있었다. 이제 와서 중지할 순 없다. 중지한다는 건 곧 죽는 거니까. 질은 토비의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갤러어 간호사가 안락의자에 앉아 뜨개질 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문간에 우두커니 선 질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아! 부인께서 찾아오셨군요. 템플 씨, 좋으시죠?" 침대를 향해 하는 말이었다. "템플 씨가 기뻐하시리란 걸 저도 알지요. 그렇지 않아요, 템플씨?" 토비는 베게에 의지해 일어나 앉은 자세로 질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기 시 작했다. (널 죽여 버리겠어.) 질은 그 눈길을 외면하고 갤러어 간호사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남편 곁에 있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던 것 같아서요." "아, 예. 저도 사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부인께서도 몸이 편 찮으시니까 뭐..." "이제 많이 나아졌어요. 저이와 둘이만 있고 싶어요." 갤러어 간호사는 주섬주섬 뜨개질거리를 챙겨 들고 일어났다. "물론 그러시겠죠. 템플 씨도 아주 좋아하실 거예요." 그리곤 침상의 일그러진 형상에게 눈길을 주며 다짐을 했다. "그렇죠, 템플 씨?" 그리곤 다시 질을 향해 말했다. "저는 그럼 부엌에 가서 차나 한잔 만들어 마셔야겠네요." "아뇨, 앞으로 30분 뒤면 근무 교대니까 지금 퇴근해도 돼요. 고든 간호사가 도착할 때까지 내가 여기 있을께요. 걱정 말아요. 내가 있으니까." 질은 짧은 미소로 간호사를 안심시켰다. "그러잖아도 쇼핑을 좀 할까 했었는데..." "좋아요. 그렇게 하세요." 질은 현관문 닫히는 소리, 곧이어 갤러어 간호사의 차가 드라이브웨이를 달려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이윽고 차소리가 여름의 정적 속으로 잦아들자 그제서야 토비를 향해 돌아섰다. 토비의 독기 어린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똑바로 날아와 꽂혔다. 질은 억지로 그에게 다가가 이불을 젖히고 폐물이 되어 버린 빳빳한 몸뚱어리와 맥없이 축 늘어진 무용지물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방구석에 휠체어가 놓여 있었다. 질은 토비를 태우려고 휠체어를 침대 곁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그를 향해 팔을 뻗다가 흠짓 멈췄다. 남편의 몸을 만지기 위 해선 초인적인 의지력이 필요했다. 백치같은 미소를 머금은 입과 독기를 뿜어내 는 시퍼런 두 눈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질은 용기를 내어 토비의 몸을 안아 들 었다. 토비의 몸이 종잇장처럼 가벼웠음에도 그녀는 워낙 기력이 쇠해 쩔쩔매야 했다. 그의 몸에 손이 닿는 순간, 예의 그 냉기가 온몸을 에워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두통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격렬해지며 눈앞에 선명한 동그라미 들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그것들이 현란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지럼증에 못 이겨 기절해 넘어지려는 순간, 그녀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추스렸다. 지금 여기 서 쓰러지면 안 돼. 그러면 죽는 거야. 그녀는 기를 쓰고 토비의 축 늘어진 몸을 휠체어에 태웠다. 그리곤 손목시계를 보니 이제 20분밖에 시간이 없었다. 부리나케 자기 방으로 달려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토비의 방으로 오는 데 5분이 소요되었다. 질은 휠체어의 브레이크를 벗기고 복도로 밀고 나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 리베이터에 타서는 토비의 눈을 보지 않으려고 일부러 휠체어 뒤에 섰지만 그의 독기 어린 시선을 그대로 느낄 수가 있었다. 밀폐된 엘리베이터 안에 예의 그 악취 나는 축축한 냉기가 서서히 차오르는가 싶더니 그녀를 에워싸고 고문하기 시작했다. 질은 숨이 막혀 연신 캑캑거렸다. 그러다 무릎에 힘이 풀리면선 털석 주저앉아 숨을 쉬려고 헐떡거렸다. 최후의 순간까지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몸부 림을 치다가 막 졸도해 넘어지려는 찰라,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질은 따스한 햇살 속으로 나와 땅바닥에 대자로 누워서는 신선한 공기를 허파 깊숙이 빨아들 이며 서서히 원기를 되찾았다. 좀 견딜 만해지자 엘리베이터 안을 들여다보니 토비가 휠체어에 앉아 쳐다보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질은 얼른 일어나 휠체어를 밖으로 밀었다. 그리고 풀장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하 고 상쾌한 날씨였고, 풀장의 맑고 푸른 수면 위로 햇살이 눈부시게 부서져 내리 고 있었다. 질은 풀의 가장 깊은 쪽으로 휠체어를 밀고 가서 일단 브레이크를 걸고는 휠 체어 앞쪽으로 갔다. 토비의 당황한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질은 안전띠를 힘 껏 잡아당겨 단단히 고정시켰다. 갑자기 힘을 쓰는 바람에 다시 어지럼증이 일 며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한 토비의 눈이 미쳐 날뛰기 시 작했다. 질은 그 자리에 서서 토비의 눈동자에 거칠고 광포한 공포가 어리는 것 을 지켜 보았다. 그녀는 휠체어의 브레이크를 벗기고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쥐고는 물을 향해 밀기 시작했다. 토비가 비명을 내지르려고 마비된 입술을 처절하게 움직였다. 비 록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그 모습이 너무도 기괴해서 소름이 오싹 끼쳤다. 질은 더 이상 그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을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녀는 수면 가까이까지 휠체어를 밀고 갔다. 그런데 거기서 그만 시멘트 턱에 걸려 바퀴가 구르질 않았다. 더 힘껏 밀어 보았지만 그래도 꿈쩍하지 않았다. 마치 토비가 필사의 의지력으로 휠체어가 움 직이지 못하도록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휠체어에서 빠져 나오려고 마비된 몸뚱어리로 발버둥 치는게 역력히 보였다. 이내 그가 안전띠를 풀고 일 어나 저 뼈만 앙상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조를 것만 같았다. 질의 귀에 그의 절 규가 똑똑히 들렸다. (난 죽고 싶지 않아... 난 죽고 싶지 않아...) 그게 환청인지 아니면 실제 그의 목구멍에서 나오는 외침인지 구분도 안 될 지경이었으나 미칠 듯한 공포에 불끈 힘이 솟아 휠체어 뒷판을 냅다 떠밀었다. 그러자 휠체어가 앞으로 휙 기울더니 영겁처럼 느껴지는 긴 시간 동안 그 상태 로 정지되어 있다가 첨벙 소리를 내며 물 속으로 떨어졌다. 그리곤 한참이나 물 위에 떠 있다가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작은 소용돌이가 휠체어의 방향을 돌려놓아 질은 토비의 부릅뜬 눈이 물에 잠기기 직전까지 그녀를 죽일 듯 노려 모는 광경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질은 따스한 오후의 햇살 아래서 와들와들 떨며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 다. 그렇게 서서 정신과 육체의 원기를 조금씩 되찾아갔다. 이윽고 몸을 움직일 기운이 생기자 수영복을 물에 적시기 위해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경찰에 전화를 걸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검시 심리 토비 템플의 죽음은 다시 한 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토비와 질 템플은 대중의 영웅이었으니까. 매스컴마다 그들에 관한 뉴스와 사진이 실렸다. 템플 부 부의 위대한 러브 스토리가 거듭거듭 칭송되었고 그 비극적인 결말에 모두들 통 절함을 금치 못했다. 국가 원수, 주부, 정치가, 재벌, 비서 할 것 없이 너도 나도 조문 편지와 전보를 보내왔고 토비의 죽음을 자기 일인양 애통해 했다. 웃음이 라는 재능을 아낌없이 팬들과 나눈 그였기에 모두들 그의 존재에 감사하고 있었 던 것이다. 방송마다 토비에 대한 칭송으로 가득했고 앞다투어 그에 대한 특집 방송을 만들어 내보냈다. 토비 템플 같은 위대한 코미디언은 다시 나오기 힘들 것이다. 검시 심리는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 그랜드 애버뉴에 위치한 형사 법원의 작 은 법정에서 열렸다. 심리를 주재하는 검사관과 6명의 검시 배심원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법정 안은 심리를 구경 온 사람들로 대만원을 이루었고 질이 당도하자 기자 들, 사진사들, 팬들이 벌떼같이 몰려들었다. 심플한 검정 모직 투피스 차림의 질 템플은 화장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도 그 어느 때보다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토비가 죽고 나서 며칠 사이 그녀는 가히 기적적으로 옛 아름다움을 되찾아 갔 다. 실로 몇 개월만에 악몽에 시달리지 않고 편안히 잘 수 있었다. 갑자기 식욕 이 돌아 걸신들린 사람처럼 먹어댔고 두통도 씻은 듯 사라졌다. 그녀의 생명력 을 소진시키던 악마가 마침내 꼬리를 감춘 것이다. 질은 데이빗과 매일 통화를 했다. 그가 법정에 오겠다고 했을 때 질은 아직은 멀찌감치 있어 달라고 애원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지겹도록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 데이빗은 (평생 동안)이라고 말했었다. 모두 6명의 증인이 법정에 출두했다. 갤러어 간호사, 고든 간호사, 존슨 간호 사가 환자의 하루 일과와 당시의 건강 상태에 대해 증언했다. 그중에서 갤러어 간호사의 심문 장면을 보도록 하자. "사건 당일 오전, 증인은 몇 시에 근무를 교대하게 되어 있었나요?" 검사관이 물었다. "10시오" "그럼 증인이 퇴근한 시간은?" 갤러어 간호사는 잠시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9시 반입니다." "평소에도 늘 그렇게 근무 교대자가 도착하기 전에 환자 곁을 떠났나요?" "아닙니다. 그날 처음 그랬어요." "왜 그날 규정보다 일찍 퇴근을 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템플 부인이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남편과 둘이만 있고 싶다구요." "고맙습니다. 이상입니다." 갤러어 간호사는 증언대를 내려오며 생각했다. (당연히 토비 템플의 죽음은 사고야. 질 템플 같은 훌륭한 여성을 이런 자리에 세우는 것 자체가 몹쓸 일이지.) 갤러어는 질을 바라보며 예리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죄책감을 느꼈다. 볼일이 있어 템플 부인의 방에 들어갔다가 그녀가 의자에 앉은 채 잠들어 있는 걸 보았 던 밤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때 갤러어는 부인이 잠을 깨지 않도록 불을 끄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그런데 캄캄한 복도를 더듬더듬 걷다가 그만 꽃병을 쳐서 깨뜨렸던 것이다. 이튿날 즉시 부인에게 사실대로 얘기하고 용서를 구할 생각이었으나 꽃병이 워낙 값져 보였고 또 부인도 별말이 없어 그냥 함구 하고 있었다. 이제 물리치료사가 증언대에 섰다. "보통 매일 템플 씨에게 물리치료를 실시했나요?" "예, 그렇습니다." "물리치료 장소가 풀장이었습니까?" "예. 풀장 물을 백도까지 데워서..." "사건 당일에도 템플 씨에게 물리치료를 했나요?" "아닙니다."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녀가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방금 (그녀)라고 하신 건 템플 부인을 자칭하는 건가요?" "맞습니다." "부인이 그 이유를 말하던가요?" "닥터 캐플란이 물리치료를 중단하라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템플 씨를 보지도 않고 그냥 떠났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닥터 캐플란이 증언대에 섰다. "사고가 난 뒤 템플 부인이 박사님께 전화를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고인의 상태를 검진했습니까?" "예. 경찰이 시체를 물 속에서 건져냈더군요. 시체는 휠체어에 안전띠로 묶여 져 있었습니다. 경찰의와 제가 익사체를 검진하고 소생이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내렸습니다. 양쪽 폐에 물이 차 있었고 바이탈 사인(맥박, 호흡, 체온, 혈압 등) 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뒤에 어떻게 했지요?" "템플 부인을 돌봤습니다. 부인은 극심한 히스테리 상태여서 무척 걱정이 됐지 요." "닥터 캐플란, 물리치료를 중단하는 문제에 대해 템플 부인과 사전에 의논한 적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부인에게 그건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말했지요." "그랬더니 템플 부인은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닥터 캐플란은 질 템플에게 시선을 보내며 대답했다. "매우 의외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부인은 치료를 계속해야 한다고 우겼습니 다." 그는 잠시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진실을 말할 것을 서약한 몸이고 또 배심원 여러분들도 진실을 듣고 싶 어할 것이므로 이 얘기를 해야만 될 것 같습니다." 일순 장내엔 숨막히는 정적이 감돌았고 질은 닥터 캐플란을 뚫어지게 쳐다보 았다. 닥터 캐플란이 배심원 석을 향해 말했다. "이 얘기를 꼭 기록에 남기고 싶습니다. 템플 부인은 제가 평생토록 만난 여성 들 중에 가장 훌륭하고 용감한 분입니다." 그러자 법정 안의 시선이 모두 질에게 쏠렸다. "그녀의 남편이 맨 처음 쓰러졌을 때 우리들은 모두 전혀 회복될 가망이 없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템플 부인은 맨손으로 남편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입 니다. 그건 제가 아는 한 어떤 의사도 이루어 낼 수 없는 기적이었습니다. 남편 에 대한 그녀의 희생과 헌신은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닥터는 질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녀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감격입니다." 그 말이 끝나기게 무섭게 우레와 같은 박수가 법정 안을 뒤흔들었다. "이상입니다. 닥터 캐플란. 다음으로 템플 부인을 증언대로 모시겠습니다." 질이 일어나서 느릿느릿 증언대로 걸어가 선서를 하는 모습을 모두들 정숙하 게 지켜 보고 있었다. "템플 부인, 이 모든 절차가 부인께는 고통스런 일이란 걸 잘 압니다. 되도록 신속하게 심리를 끝내도록 힘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질은 조그만 소리로 대답했다. "닥터 캐플란이 물리치료를 중지하자고 제안했을 때 왜 부인께선 치료를 계속 하겠다고 고집하셨지요?" 질은 검사관을 빤히 쳐다보았고 검사관은 그녀의 눈빛에서 까닭모를 고통을 보았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었어요. 토비는 삶을 사랑했고, 전 남편에게 다시 삶 을 돌려주고 싶었어요. 전..." 그녀는 자꾸만 목소리가 잦아들어 어렵사리 말을 이어갔다. "전 남편을 도와야만 했어요." "사건 당일, 물리치료사가 왔는데 그냥 돌려보내셨지요?" "예" "하지만 아까는 물리치료를 중단할 의사가 없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물리치료사를 왜 돌려보냈는지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건 아주 간단해요. 오직 우리의 사랑만이 토비를 회복시킬 힘을 지녔다고 믿었던 거죠.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으니까..." 질은 도저히 말을 이을 수가 없어 거기서 끊었다가 겉으로 다 드러날 정도로 안간힘을 다해 마음을 다잡아먹고 쉰 목소리로 계속했다. "남편에게 제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는지, 얼마나 그를 살리고 싶어하는지 보여 주고 싶었어요." 법정 안의 모든 이들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고 질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 마디를 열심히 듣고 있었다. "사건 당일 오전에 일어났던 일을 그대로 얘기해 주시겠습니까?" 질이 다시 기력을 모아 입을 열 때까지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토비의 방으로 갔어요. 남편은 저를 보자 몹시 기뻐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제부터 제가 직접 풀장으로 데려가 운동을 시켜 주겠노라고 말했죠. 다시 일 어서게 해주겠다고요. 토비와 함께 물 속에 들어가려고 수영복으로 갈아입었어 요. 그런데 토비를 침대에서 안아 들어 휠체어에 태우려는데 가... 갑자기 현기증 이 일었어요. 그때 그만뒀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거기서 중지할 수가 없었어 요. 설사 그게 토비에게 도움이 못 된다고 하더라도요. 토비를 휠체어에 태워 풀 장으로 내려오면서 줄곧 그에게 용기를 주었죠. 풀장 가장자리까지 그렇게 갔는 데..." 거기서 다시 얘기가 끊겼고 법정 안은 무덤 속처럼 고요했다. 간간이 들리는 소리라곤 기자들이 수첩에 미친 듯이 휘갈겨 쓰는 펜소리뿐이었다. "휠체어 안전띠를 풀려고 몸을 구부리는데 다시 현기증이 오면서 기절할 것만 같았어요. 그 그러다 실수로 브레이크를 벗겼나 봐요. 휠체어가 물 쪽으로 굴러 가기 시작했어요. 달려가서 잡으려고 했지만 어느새 물 쪽으로 굴러가기 시작했 어요. 달려가서 잡으려고 했지만 어느새 물 속으로 떨어져 버렸어요. 토비를 태 운 채로." 다시 그녀의 목이 감겼다. "얼른 물로 뛰어들어 토비를 건지려고 했지만 안전띠가 너무 단단하게 매여져 서 그만... 그래서 휠체어를 통째로 끌어내려고 했는데 너무 무거웠어요. 너무... 너무... 무거웠어요." 그녀는 깊은 고뇌를 숨기려고 눈을 내리감았다. 그리곤 속삭이듯 말했다. "토비를 구한다는 게 그만, 그를 죽이고 말았어요." 검시 배심원들이 판결을 내리는 데는 겨우 3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토비 템플 사고사.) 클리프톤 로렌스는 법정 뒷자리에 앉아 판결 내용을 듣고 있었다. 그는 질이 토비를 살해했다는 걸 확신했다. 그러나 그걸 증명할 길이 없었다. 저 교활한 계 집이 감쪽같이 일을 해지운 것이다. 그렇게 심리는 끝났다. 장례식 장례식장은 초만원이었다. 팔월의 어느 햇살 눈부신 오전 - 공교롭게도 그날 은 토비 템플의 새 텔레비전 쇼가 시작되기로 예정되었던 날이었다 - (포레스트 론)에서 장례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파도가 넘실거리듯 울렁울렁 기복을 이룬 드넓은 잔디밭에 수천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 작별을 고하러 온 광경을 롱 숏으로 찍으면서 이따금 무덤가에 도열한 스타, 제작자, 감 독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비추었다. 미 합중국 대통령도 친히 조문 사절을 보냈으며 주지사들, 스튜디오 사장단, 대기업 대표들, 토비가 살아 생전에 소속 되었던 SAG(영화 배우 조합), AFTRA(미국 텔레비전, 라디오 예술가 재단), ASCAP(미국 작곡가, 작가, 출판업자 모임) 같은 단체들의 대표들이 모여 있었 다. VFW(해외 전쟁 참전 용사 모임)의 베벌리 힐즈 지부장은 군복 차림으로 참 석했다. 그리고 지방 경찰과 소방서에서 파견한 분견대도 도착해 있었다. 거기엔 소위 (시시한 사람들)도 모여 서 있었다. 토비 템플과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영화 촬영장의 무대 담당들, 소품 담당들, 엑스트라들, 스턴트맨들, 의상 담 당들, 전기 담당들, 조감독들... 모두들 저 위대한 미국인에게 경의를 표하러 찾 아온 이들이었다. 오핸론과 레인저도 그들 틈에 끼여 서서, 맨 처음 (20세기 폭 스) 건물에 든 그들의 사무실을 찾아왔던 때의 말라깽이 청년 토비를 추억하고 있었다. (두 분이 나를 위해 대본을 써줄 거라고 알고 왔습니다... 저 손 동작 좀 봐, 꼭 톱질을 하는 것 같군. 저 친구한텐 나무꾼 대본이 딱 좋겠어... 너무 밀어붙이 는 경향이 있어... 세상에, 뭐 저따위 대본이 다 있어, 그래?... 코믹은 웃음의 문 을 여는 사람이고 코미디언은 문을 우습게 여는 사람이지.) 토비 템플은 열심히 배우고 익혀 정상에 우뚝 섰다. (그는 아픈 가시였지. 그러나 바로 우리들의 가시였어.) 레인저는 속으로 생각했다. 클리프톤 로렌스도 와 있었다. 이발도 산뜻하게 하고 제법 단정한 옷차림으로 나타났건만, 눈빛에 영 자신이 없었다. 그는 토비가 사주한 거짓 전화를 생각했 다. (샘 골드윈이 신인 코미디언의 공연을 꼭 봐 달라고 했다고... 그리고 토비의 공연... 이 친구야, 꼭 캐비어 한 단지를 다 먹어 봐야 그 맛을 아는가?... 토비, 자넬 내 고객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네... 맥주 파들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 으면 샴페인 파는 누워서 떡 먹기지... 나는 자넬 연예계 최고의 스타로 만들 수 있어... 그리고 스튜디오마다, 방송국마다, 나이트클럽마다 코비 템플을 원했지... 선생님은 고객들이 너무 많아서 이따금은 나한테 충분히 신경을 못 쓰시는 거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이건 무슨 그룹 섹스 같다구요. 한 사람이 욕구를 만족시 키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잔뜩 발기한 채 기다리고 있어야 되는... 클리프, 상의 할 일이 있어요... 어떤 여자가 있는데...) 클리프톤 로렌스는 추억거리가 너무나 많았다. 클리프톤 옆에는 앨리스 태너가 서 있었다. 그녀는 토비가 첫 오디션을 받으러 왔던 날을 회상하고 있었다. (스타들도 모두 한때 그저 재능있는 젊은이일 뿐이었어요... 어젯밤에 프로들의 공연을 보고 나니까, 글쎄요 도저히 자신이 안 생겨요... 그리곤 그와 사랑에 빠 졌지. 오, 토비, 당신을 너무너무 사랑해요, 앨리스...) 그리고 그는 떠났지만, 앨리스는 잠시나마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걸 행운으로 여겼다. 앨 카루소도 조의를 표하러 와 있었다. 이제 백발이 성성한 꼬부랑 노인이 된 그의 산타클로스 같은 갈색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토비가 밀리한테 얼마나 훌륭한 남편이었는지 회상하며 감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샘 윈터즈도 있었다. 그는 토비가 수백만의 관객들에게 준 웃음을 회고하며 그런 걸 생각하면 그가 몇몇 사람들에게 고약하게 군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때 누가 옆구리를 쿡쿡 찔러서 돌아보니 열여덟쯤 되어 보이는 흑발의 예쁜 아가씨가 웃고 있었다. "윈터즈 씨, 저를 모르실 거예요. 윌리엄 포브즈 감독님이 만드는 새 영화의 주연 여배우감을 찾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전 오하이오 출신이고..." 데이빗 캐년도 와 있었다. 질은 오지 말라고 했지만 그녀 곁에 있고 싶어서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려 이렇게 온 것이다. 질도 이제 별로 문제될 게 없다는 생각에 굳이 만류하지는 않았다. 모든 연기가 끝났으니까. 연극은 막이 내렸고 그녀가 맡은 역도 끝났다. 기진맥진한 질은 그게 너무나 기뻤다. 이제 막 끝난 지옥불의 시련 속에서 가슴에 사무쳤던 단단한 원한의 응 어리도 녹아 없어지고, 평생의 무수한 상처와 실망, 증오들도 모두 불태워진 듯 했다. 질 캐슬은 무서운 화염에 휩싸여 죽어갔고 그 잿더미 속에서 조세핀 친스 키가 환생했다. 다시금 마음의 평화를 되찾은 그녀는 소녀 시절 이후 잊고 지냈 던 타인에 대한 사랑과 만족감으로 가슴이 벅차 올랐다. 평생 이토록 행복했던 기억은 없었고 이 행복을 세상 사람들고 공유하고 싶었다. 장례식이 끝나자 질은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대기중인 리무진으로 갔다. 거 기 데이빗이 연모의 눈빛을 반짝이며 서 있었다. 질은 그에게 미소를 보냈다. 둘 은 손을 맞잡고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마침 지나가던 사진기자 하나가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질과 데이빗은 대중들의 눈을 의식해 5개월쯤 더 기다렸다가 결혼식을 올리기 로 했다. 그동안 데이빗은 많은 시간을 해외에서 보냈지만 전화 통화만큼은 매 일 했다. 토비의 장례식이 끝나고 4개월쯤 지난 어느 날 데이빗이 전화로 말했 다. "방금 묘안이 떠올랐다. 이제 더 이상 기다리지 말자. 다음주에 회의차 유럽에 갈 일이 있거든. 우리 함께 브르따뉴 호를 타고 프랑스로 가는 거야. 배 안에서 선장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면 돼. 파리에서 신혼을 즐기며 어디든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어. 내 생각 어때?" "오, 좋아요, 데이빗. 좋아요!" 그녀는 마지막으로 집 안을 찬찬히 둘러보며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회상 했다. 첫 디너 파티와 그 뒤를 이은 멋진 파티들, 토비의 투병 생활, 그리고... 추 억이 너무나 많았다. 그녀는 이곳을 떠나게 되어 기뻤다. 특별한 이방인 데이빗의 전용 제트기편으로 뉴욕으로 날아가니 공항에 리무진이 대기하고 있 다가 그녀를 파크 에버뉴에 있는 (리젠시 호텔)로 모셨다. 호텔에 도착하자 지배 인이 친히 호화로운 펜트하우스 객실로 안내했다. "템플 부인, 부인을 편안히 모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캐년 씨께서 각 별히 잘 보살펴 드리라고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채 10분도 안 되어 데이빗이 텍사스에서 전화를 걸어 왔다. "편안해?" "좀 복잡한데요. 데이빗, 침실이 다섯 개나 돼요. 저것들을 다 어떻게 쓰죠?" 질이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거기 있다면 직접 보여줄텐데." "맨날 약속, 약속, 약속만 하구, 도대체 우리 언제나 만나는 거예요?" 질이 앙탈을 부렸다. "내일 정오에 브르따뉴가 출항할 거야. 여기서 남은 일을 좀 보고 배 안에서 만나지. 신혼부부를 위한 선실로 예약해 놨어. 행복해, 달링?" "평생 이렇게 행복했던 적은 없었어요. 진심이었다. 그동안 겪은 고뇌와 아픔이 보람이 있었던지 이제 그녀는 눈부신 인생을 맞게 되었다. 지난 시절의 고통스런 추억은 어렴풋한 꿈처럼 아스라이 멀어져 갔다. "내일 아침에 당신을 태울 차가 그리로 갈 거야. 승선권은 기사가 갖고 있으니 까 신경쓰지 말고." "준비하고 있을게요." 내일. 그 소문의 발단은 토비의 장례식장에서 질과 데이빗 캐년이 밀회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던 기자가 어느 신문사에 그 사진을 판 것이었을 수도, 질이 묵었 던 뉴욕 리젠시 호텔 종업원이나 브르따뉴 호 승무원이 무심코 지껄인 한마디였 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발달이냐 어찌됐든 질 템플 같은 유명인의 결혼 계획이 끝까지 비밀에 붙여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결혼에 대한 특종을 다룬 행 운의 신문사는 (어소시에이티드 프레스 불러틴)이었다. 그 뒤, 미국과 유럽 전역 의 신문들이 그 기사를 1면에 실었다. 그러니 (할리우드 리포터)지와 (데일리 버라이어티)지가 그 요란한 뉴스를 놓 쳤을 리 만무하다. 정각 10시에 리무진이 도착하자 호텔 문지기와 벨보이들에 차에 질의 짐들을 실었다. 미침 오전 시간이라 도로가 한산해서 90번 부두까지 가는 데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고참 항해사가 트랩에서 질을 기다리고 있었다. "템플 부인, 이렇게 부인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았 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오르시지요." 그는 질을 (프럼나드 갑판)으로 안내해 테라스까지 딸린 널찍하고 우아한 선 실로 모셨다. 방안에는 싱싱한 꽃들이 가득했다. "저희 선장님께서 대신 인사를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이따 저녁 식사 때 뵙 겠답니다. 결혼식의 주례를 서게 되어 무척 기쁘다고 하셨습니다." "고마워요. 그런데 캐년 씨는 도착하셨나요?" "방금 전화 연락을 받았는데 지금 공항에서 이리로 오고 계시는 중이랍니다. 짐은 이미 도착했습니다.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고맙지만 필요한 건 없어요" 진심이었다. 이제 그녀에겐 부족함이 없으니까.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니까. 똑똑 노크소리가 나더니 급사가 꽃다발을 들고 들어왔다. 함께 온 카드를 보 니 미합중국 대통령이 보낸 것이었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옛 기억들. 질은 억 지로 그 기억들을 몰아내며 짐을 풀기 시작했다. 사내는 주갑판 난간에 붙어 서서 배에 오르는 선객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 고 있었다. 모두들 휴가를 즐기러 떠나는 사람들이거나 해외에 거주하는 친지들 을 만나러 가는 이들이라 한껏 들뜬 표정들이었다. 몇몇이 사내를 향해 미소를 보냈지만 사내는 알은채도 하지 않았다. 그저 트랩만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출항 20분 전인 오전11시 40분, 기사가 모든 (실버 섀도우)가 90번 부두를 미 끄러지듯 달려와 멈춰 섰다. 그 차에서 데이빗 캐년이 부리나케 뛰어내리더니 손목시계를 보며 기사에게 말했다. "시간에 딱 맞게 떨어졌군, 오토." "감사합니다, 사장님. 두 분 행복한 신혼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고맙네" 데이빗 캐년은 서둘러 트랩으로 걸어가 승선권을 제시했다. 아까 질을 선실까 지 안내했던 그 고참 항해사가 다시 달려왔다. "템플 부인께서 선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맙소" 데이빗은 신혼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질의 모습이 눈에 선하여 가슴이 두근거 렸다. 그가 막 걸음을 옮기려는데 누가 뒤에서 불렀다. "캐년 씨..." 데이빗은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돌아섰다. 아까부터 난간에 기대어 줄곧 승객들의 얼굴을 살피고 있던 그 사내였다. 생면 부지의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자 데이빗은 잔뜩 긴장했다. 안면도 없는데 반갑게 접근하는 걸 평생 부 유하게만 살아온 데이빗은 육감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내가 손을 내밀자 데이빗은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아 흔들었다. "우리가 서로 구면이던가요?" 데이빗이 물었다. "나는 질의 오랜 친구지요." 그러자 데이빗은 비로소 경계심을 풀었다. "로렌스라고 합니다. 클리프톤 로렌스" "처음 뵙겠습니다. 로렌스 씨." 데이빗은 빨리 사내에게서 놓여 나고 싶어 안달이 났다. "질의 부탁으로 이렇게 마중을 나온 겁니다. 선생께 깜짝 놀랄 선물을 하나 준 비했지요." "무슨 선물이지요?" "이쪽으로 오시죠. 직접 보여드릴 테니까." 데이빗은 잠시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런데, 오래 걸립니까?" 작달막한 클리프톤 로렌스는 데이빗을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C갑판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승객들이 우글거리는 인파 속을 헤치고 지나갔다. 복도를 따라 걸어가다 보니 거대한 이중문이 나타났다. 클리프 톤이 문을 열고 데이빗을 안으로 안내했다. 그들이 들어간 곳은 텅 빈 극장이었 다. 데이빗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서요?" "여기서요." 클리프톤이 미소를 흘리며 대꾸했다. 그는 돌아서서 영사실에 있는 영사 기사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사 기사는 보통 탐욕스런 자가 아니어서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 이백 달러나 주어야 했다. "발각되면 나는 그냥 모가지라구요." 기사는 그렇게 불퉁거리며 액수를 올렸었다. "아무도 모를 걸세. 그냥 장난 좀 치는 것일 뿐이니까. 자네가 할 일은 아주 간단해. 내가 친구를 데리고 들어오면 일단 극장 문을 잠그고 영화를 틀면 되는 거야. 10분이면 다 끝나." 그때 클리프톤이 했던 약속이었다. 그리하여 영사 기사는 협조를 약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데이빗이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영환가요?" "캐년 씨, 일단 앉으시죠." 데이빗은 통로 바로 옆 좌석에 앉아 긴 다리를 쭉 폈다. 클리프톤은 그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 데이빗의 얼굴에 시선을 박았다. 극장 안에 불이 꺼지고 대형 스크린에 선명한 이미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쇠망치로 태양신경총(인체의 위 뒤쪽에 있는 가장 큰 교감신경총) 을 강타당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데이빗은 스크린 위에서 펼쳐지는 음란한 장면 장면에 눈을 박고 있으면서도 머리로는 시각이 받아들인 이미지를 거부하고 있 었다. 일찍이 그가 사랑했던 풋풋한 모습의 질이 알몸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영상이 워낙 선명해서 그녀의 나체가 너무도 뚜렸이 보였다. 놀라움에 말을 잊 은채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사내 하나가 질 위에 걸터 앉더니 남근을 그 녀의 입 속으로 집어 넣었다. 그러자 질이 육감적인 입놀림으로 그걸 빨기 시작 했다. 여자 하나가 더 나타나더니 질의 가랑이를 벌리고 혀를 그 안으로 집어 넣었다. 데이빗은 금방이라도 실성할 것만 같았다. 한 순간 저 모든 장면들이 필 름을 이어 붙인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간절한 희망을 품어 봤지만, 카메라에 잡 힌 질의 동작동작이 그 희망을 여지없이 깨버렸다. 이윽고 멕시코 인 사내가 나 타나 질 위에 올라타자 데이빗의 시야에 몽롱한 붉은 장막이 드리워졌다. 그는 다시 15살 소년이 되어 있었다. 베스 누나의 침대에 멕시코 인 정원사가 알몸으 로 누워 있었고 누나가 그 위에 타고 앉아 황홀한 속삭임을 토해내고 있었다. "오, 오, 주안! 사랑해요. 계속해 줘요. 멈추지 말아요." 데이빗은 경악에 찬 표정으로 문간에 서서 사랑하는 누나를 쳐다보았다. 그러 다 돌연 격렬하고 맹목적인 분노에 눈이 뒤집혀 책상 위에 있던 쇠 레터 오프너 를 움겨쥐고 침대로 달려가 누나를 휙 밀쳐내고 정원사의 가슴을 거푸 내리찔렀 다. 순식간에 방안이 피바다가 되었고 누가의 절규가 메아리쳤다. "오, 하느님! 안 돼! 그만둬, 데이빗! 그를 사랑해. 우린 결혼할거라구! 어머니가 뛰쳐 들어오더니 데이빗을 피신시켰다.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그때 어머니는 캐년 가문과 절친한 지방검사를 전화로 불렀다고 한다. 그들은 서재에 서 긴긴 얘기를 나누었고 마침내 멕시코인의 시체는 감옥으로 옮겨졌다. 이튿날 아침, 그가 감옥 안에서 자살했다는 발표가 났다. 그 3주 뒤, 베스는 실성해서 수용소로 갔다. 그 끔찍했던 과거가 걷잡을 수 없이 되살아나자 데이빗은 죄책감을 견디지 못 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그는 맞은편에 앉은 밉살스런 사내의 멱살을 잡아 일 으켜 주먹으로 사정없이 얼굴을 갈겼다. 입으로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절규를 토해내며 베스 누나를 위해, 질을 위해, 치욕스런 자신을 위해 사내를 무자비하 게 공격했다. 클리프톤 로렌스는 자신을 방어하려고 발버둥질 쳤지만 상대의 광 포한 주먹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코를 오지게 얻어맞아 코뼈가 부러졌고 입 을 직통으로 맞아 핏줄기가 강을 이루었다. 그는 하릴없이 서서 다음 주먹이 날 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먹세례가 뚝 그쳤다. 이제 영화관에는 그의 으르렁거리는 고통에 찬 숨 소리와 스크린이 토해내는 음란한 소음들밖에 들리지 않았다. 클리프톤은 손수건을 꺼내 쏟아지는 피를 멈추게 하려고 애썼다. 이윽고 정신 이 좀 들자 코와 입을 손수건으로 가리고 비틀비틀 극장을 나와 질의 선실로 향 했다. 막 식당 앞을 지나는데 미침 주방으로 통하는 자동문이 열려 그 안으로 들어갔다. 바빠서 정신이 없는 요리사들과 급사들, 웨이터들 몰래 얼음 만드는 기계로 가서 얼음을 한 웅큼 떠서는 손수건에 싸서 코와 입에 대고 눌렀다. 그 리곤 다시 나가려는데 맨 꼭대기에 솜사탕으로 신랑 신부의 모습을 만들어놓은 대형 웨딩 케이크가 눈에 들어왔다. 클리프톤은 신부의 머리를 주먹으로 쾅 내 리쳤다. 그리곤 질을 찾아 나섰다. 배가 물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질은 5만 5천 톤급 여객선이 미끄러지듯 부두 를 빠져 나가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데이빗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 는 거지?) 여장을 다 풀어갈 무렵, 밖에서 누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질은 부리나케 문 쪽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데이빗!" 문을 열고 나가며 두 팔을 힘차게 앞으로 내밀었다. 뜻밖에도 클리프톤 로렌스가 온통 찌그러지고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우뚝 서 있었다. 질은 내밀었던 팔을 거두며 그를 쏘아보았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죠? 그리고...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한거죠?" "질, 그냥 인사나 하러 들렀지." 질은 도무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데이빗에 대한 소식도 전할 겸." 질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데이빗요?" 클리프톤은 잠자코 선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이상한 태도에 질은 신경이 바싹 곤두섰다. "데이빗은 어디 있죠?" 클리프톤은 그녀를 향해 돌아서며 입을 열었다. "지나간 시절의 영화들이 어땠는지 기억나? 늘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이 함께 나왔더랬지. 결국엔 악한 자들이 죄값을 톡톡히 치르는 권선징악적인 내용 이었고 말야. 질, 난 그런 영화들을 보면서 자랐어. 인생도 그와 똑같이 선한 자 들이 결국에 승리하고 만다는 믿음을 갖고 자랐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이따금 인생에서도 옛 영화들처럼 결국 선한 자가 승리한다는 건 참으로 기 쁜 일이지." 클리프톤은 거기서 잠시 얘기를 끊고 온통 찢어지고 부어 오르고 피투성이가 된 입술에 미소를 머금었다. "데이빗은 떠났어. 영원히." 질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때 갑자기 배가 정지하는 게 느껴졌다. 클리프톤은 뚜벅뚜벅 베란다로 걸어 나가더니 배 옆구리를 내려다보았다. "이리 오지" 질은 머뭇거리다가 베란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름 모를 공포가 서서히 몸으로 차 오르고 있었다. 난간 너머로 내려다보니 저 아래에서 데이빗이 예인 선을 타고 브르따뉴 호를 떠나는 게 보였다. 그녀는 난간을 움켜잡고 외쳤다. "왜? 무슨 일이지?" 클리프톤 로렌스가 대꾸했다. "그 영화를 보여줬지." 질은 그게 무슨 소린지 단박 알아내고 신음을 내질렀다. "오! 하느님. 안 돼! 제발, 안 돼! 당신이 날 죽였어!" "그럼 이제 피차 공평하게 됐군." "나가! 여기서 나가란 말야!" 질은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달려들어 길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빰을 사정없이 할퀴었다. 그 바람에 클리프톤의 얼굴에 길쭉길쭉한 생채기가 생겼다. 클리프톤 은 그녀의 뺨을 호되게 갈겼다. 질은 풀썩 주저앉으며 고뇌에 찬 얼굴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클리프톤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영원히 기억 하고 싶은 그녀의 모습이었다. "안녕, 조세핀 친스키" 클리프톤은 얼굴 하반부를 손수건으로 가리고 갑판으로 올라갔다. 갑판 위를 느릿느릿 걸으며 승객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눈에 확 띄는 신선한 얼굴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 어디서 재주꾼과 맞닥뜨리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는 이제야 비로소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누가 알아? 제2의 토비 템플을 발굴해 내는 행운이 따를지도. 클리프톤이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끌로드 데사르가 질의 선실문을 노크했다. 아무 대답이 없었지만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는 잠시 기다렸다가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템플 부인, 저는 수석항해사 끌로드 데사르입니다. 혹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 을까 해서 왔습니다." 아무 대답도 없었다. 데사르의 머릿속에서 경보 장치가 급박하게 울려대기 시 작했다. 이 배 안에서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났고 그 일은 분명 템플 부인과 관 계가 있다. 불길하고 끔찍한 생각들이 앞다투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부인이 살해당했거나 납치된 거야. 그는 문고리를 잡고 돌려 보았다. 잠겨 있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천천히 문을 열었다. 질 템플은 선실 저 끝에 서서 현창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데사르는 그녀의 냉랭하고 꼿꼿한 뒷모습에 그만 입이 얼어붙 고 말았다. 이대로 조용히 물러갈 것인지 아니면 좀더 기다려 볼 것인지 갈피를 못 잡고 우물쭈물 어색하게 서 있는데 돌연 상처 입은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처 절하고 날카로운 비명이 선실을 채웠다. 부인의 형언할 길 없는 고뇌 앞에서 형 편없이 무력해진 데사르는 조용히 문을 닫고 물러나왔다. 그는 잠시 문 밖에 서서 선실 안의 무언의 절규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깊 이 상심한 채 주갑판에 위치한 극장으로 향했다. 그날 저녁 식사 때 선장 테이블의 자리 두 개가 비어 있었다. 선장은 한참 식 사를 하다가 두 테이블 건너에서 2급 승객들을 접대하고 있는 데사르를 불렀다. 데사르는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허둥지둥 선장 테이블로 달려갔다. "아, 데사르" 선장은 상냥한 목소리로 그렇게 부르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힐난조로 말했다. "도대체 템플 부인과 캐년 씨는 어떻게 된 거야?" 데사르는 테이블의 손님들을 한번 둘러보고는 은밀하게 속삭였다. "선장님도 아시다시피, 캐년 씨는 앰브로즈 등대선에서 예인선을 타고 떠났습 니다. 그리고 템플 부인은 선실에 계십니다." 선장은 부아가 나서 혼자 궁시렁거렸다. "빌어먹을! 결혼식 준비를 다 해놨는데" 그는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깐깐한 사내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선장님" 데시르는 어깨를 으쓱 올리며 천장을 향해 눈알을 굴렸다. "미국놈들은 그저 하나같이..." 질은 어둠이 깔린 선실 안에서 무릎을 모아 껴안고 의자 위에 웅크리고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지금 그녀가 느끼는 슬픔은 데이빗 캐년 때문도, 토비 템플 때 문도, 심지어는 자신 때문도 아니었다. 조세핀 친스키라는 이름의 어린 소녀 때 문이었다. 질은 그 어린 소녀를 위해 많은 것을 해주고 싶어했었지만, 결국 조세 핀 친스키를 위해 꾸었던 멋지고 신기한 꿈들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질은 형언할 수 없는 패배감에 온몸이 마비된 채 초점 없는 시선을 그저 허공 에 박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세상을 다 가졌었는데, 원하던 모든 것 을 가졌었는데... 이제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 그녀는 서서히 두통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벌써 아까부터 시작된 두통이었건만, 오장을 찢는 듯한 고뇌에 휩싸여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다가 이제야 감각을 되찾고 있는 것이다. 머리에 동여맨 띠가 점점 조여드는 것 같은 두통, 질은 뱃속의 태아처럼 무릎을 한껏 가슴에 붙이고 모든 것을 잊으려 했다. 너무너무 피곤했다. 피곤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영원히 이 자세로 굳어 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면 잠시라도 고통이 멎 을지도 모른다. 질은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로 걸어가 맥없이 누워서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악취를 풍기는 냉기가 다가와 그녀를 둘러싸고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 녀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예." 질은 속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무엇에 홀린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선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머릿속 에서 들리는 유혹의 목소리에 따라가는 것이었다. 질이 선실 밖으로 나왔을 때는 새벽 2시경이어서 갑판에 나와 있는 사람이 아 무도 없었다. 그녀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배가 수면을 가르고 지나가면서 잔잔한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두통이 얼마나 기승을 부 려대는지 바이스로 머리통을 죄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걱정 말라고, 다 잘될 거라고 달래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봐.) 목소리가 말했다. 질은 바다 위에 무언가 떠돌고 있는 걸 보았다. 얼굴이었다. 토비의 얼굴, 토 비의 얼굴이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풍덩 뛰어들고 싶은 짙푸른 눈이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얼음 같은 미풍이 살며시 그녀의 등을 떠밀어 난간에 바싹 붙게 했다. "토비, 그럴 수 밖에 없었어요. 당신도 알죠, 그렇죠?" 질은 물 속의 얼굴에 대고 속삭였다. 물 속의 얼굴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까딱까딱 고개짓을 했다. 이리 오라는 것 이었다. 바람이 점점 차가워져 질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겁내지 마... 물 속은 깊고 따스해... 당신은 나와 함께 여기 있을 거야... 영원 히. 이리 와, 질.) 목소리가 자끄만 유혹했다. 질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러나 토비의 웃음 짓는 얼굴은 배의 움직임 에 맞추어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오그라든 사지가 물 속에서 어른거리는 게 보 였다. "나한테 오라구"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제발 좀 그냥 내버려둬 달라고 애원하려고 몸을 난간 너머로 내미는데 때마침 차가운 바람이 등뒤에서 쒸잉 불어와 그녀의 몸이 부드러운 벨벳 같은 밤공기 속으로 휙 솟구쳤다가 허공에서 필루엣(발레에서 발끝으로 도는 동작)을 했다. 토비의 얼굴이 마중이라도 하는 듯 가까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그의 마비된 두 팔이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가 되었다. 영원히. 이제 그곳엔 부드러운 밤바람과 무한의 바다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하늘엔 별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은 별들이 총총히 박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