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집시의 칼 저자(역자) : 시드니셀던(정영선) 출 판 사 : 영림카디널 출판 년도 : 1998년 초 록 : 비 오는 밤, 런던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연세살인극 제1부 1 창녀 사라 9월 26일 9:30 p.m. 차링크로스 짙은 안개가 밤을 재촉하고 있었다. 빅벤이 자정을 알린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안개는 템즈 강에서 계속해서 기다란 띠를 이루며 꾸역꾸역 트라팔가 광장 쪽으로 밀려들고 있었 다. 희끄무레한 안개로 뒤덮여 있는 넬슨 기념비가 마치 수의를 뒤집어쓰고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시체처럼 보인다. 사라는 아까부터 차링크로스 역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어두운 보도 위를 걸어가고 있는 그 걸음걸이에서 뚜렷한 목적이 없이 배회하는 자의 심정이 엿보인다. 그녀의 걸음은 어딘지 부자연스러웠다. 그녀의 등뒤에서는 차링크로스 역의 둥근 시계가 안개에 가려진채 어슴푸레한 불빛을 발 하고 있었다. 트라팔가 광장은 인적이 끊긴 지 오래였다. 그녀는 마침내 희미한 불빛이 비치 는 가로등에 등을 기대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모조가죽 핸드백을 열고 담배를 꺼내 입 에 물었다. 라이터 불빛에 잠깐 비친 그녀의 얼굴은 그다지 젊지 않았다. 마흔 살 정도 되었을까? 감 정 없는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불룩한 젖가슴에 몸에 찰싹 달라붙는 검은색 가죽 스커 트를 입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보기에도 거리의 여자다웠다. 요즘 매춘부들은 다들 고급 패션모델처럼 차리고 다닌다. 대부분 아직 20대인 사라의 동 료들은 절대 그런 모습으로 거리에 나서지 않는다. 고급스런 옷을 입고 나른한 걸음으로 거 리를 거닐면서 살며시 미소를 던질 뿐, 절대로 손님에게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그 옆을 스 치며, 자극적인 향수 냄새를 풍길 뿐이다. 그것만으로 남자가 자기를 따라올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있고, 그렇게 접근해 온 남자의 팔짱을 가볍게 끼고 사라지면 그뿐이다. 그러나 사라는 그렇지 않다. 마치 자신의 직업이 매춘부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다고나 할까. 담배를 피우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추파를 던지는 것이, 마치 먹이를 찾아 헤매는 굶주린 짐승 같다. 나이가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걸까? 나날이 그녀가 이 사냥터에서 전리품을 가져갈 확률은 희박해지고, 손님들은 그녀의 얼굴 을 확인하곤 이내 얼굴을 찡그리며 돌아선다. 어디 그뿐인가.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욕설을 던지고 가버리는 녀석들도 있으니. 이래저래 사라는 마음이 편치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마약중독자인 그녀는, 단 하루도 마약 주사를 맞지 않고는 견뎌낼 수가 없다. 먹 고 살기 위해 육체를 움직이려면, 마약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저녁부터 거리를 거닐어야 하는데, 재수없는 날은 50파운드짜리 숏타임 상대 하나도 건질 수가 없다. 물론, 특별히 운수가 좋은 날이라면 200파운드짜리 올나잇 손님이 걸려들기도 하지만 말이다. "공짜는 없어. 돈을 가져와! 무엇들 해서든." 사라의 악랄한 기둥서방, 듀크는 며칠째 그녀에게 약을 주지 않고 있다. 약만 있다면... 사 라의 입술은 약 기운이 떨어지면서 파리하게 변해갔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음주와 마약... 그 날도 사라는 싸구려 셋방에서 정오가 지나서야 눈을 뜬 뒤, 감자칩 한 봉지와 진한 커피 한 잔으로 허기를 때운 다음, 브래지어를 걸치고, 스웨터와 검은 가죽 스커트를 입고, 가죽 부 츠를 신고서, 얼굴엔 분을 바르고, 입술엔 빨간 루즈를 칠하고 거리에 나선 것이다. 그녀는 가로등에 기대어, 또 한 대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둠이 내린 런던 시내에는 오 렌지빛 가로등만이 졸음기 어린 눈처럼 아른아른 불을 밝히고 있었다. 사라는 이 골목이 좋 았다. 이 거리는 20여 년 전, 그녀가 첫 손님을 낚은 자리이기도 했다. 그때 얼마를 받았더 라? 사라는 안개와 스모그와 니코틴이 범벅이 된 런던 공기를 들이마시며 잠깐 생각했다. '이 거리에 선 지도 벌써 20년째야.'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고, 자꾸만 기침이 났다. 이대로 자신의 어둑한 아파트로 돌아가 뜨 거운 오트밀이라도 한 접시 먹고 푹 잠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아침에 주인 여자가 와서 방세를 독촉했을 때, 짜증 섞인 눈길을 던지던 듀크의 무자비한 얼굴이 떠올랐다. 머뭇거리는 그녀의 얼굴에 듀크는 낡아서 반들반 들해진 가죽 스커트를 집어던지며 닦달했었다. "어서 나가서 당장 돈을 벌어와!" 얼굴이 험악해진 그는 우악스럽게 그녀의 따귀를 한 대 올려붙이더니, 거칠게 코르셋을 채웠다. 그녀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고통을 호소했지만 듀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 렇게 해서 그녀는 이제는 너무 오래 입어서 반들반들 닳아버린, 그리고 나이에 턱없이 어울 리지도 않는 가죽 미니스커트를 입고 이 가로등 아래로 내몰린 것이다. 그녀가 한 개비의 담배를 다 피워갈 무렵, 그녀 앞으로 두 명의 사내들이 지나갔다. 그녀 는 억지로 웃음띤 얼굴로 윙크를 하며 휴혹했다. "누굴 찾는 거예요?" "여자 궁둥이를 찾고 있지." 두 놈팽이 중에 코가 움푹 가라앉은 자가 대꾸했다. 그 자의 팔짱을 끼며, 사라가 말했다. "두 블록 지나면 내 방이 있어요. 우리 연애 한번 신나게 해볼래요?" "얼만데?" "솟타임엔 50파운드면 돼요. 같이 가요. 내가 근사하게 해드릴게." "어라! 이거 완전히 할망구잖아?" 코가 찌부러진 자가 가까이 얼굴을 들여다보고 내뱉었다. "저리 꺼져! 너하고 하느니, 내 손가락 신세를 지는 게 낫갰다!" 사나이는 재수없다는 듯 그녀의 팔을 뿌리치고, 성큼성큼 가버렸다. '멍청한 자식들!' 그녀는 다시 가로등에 기대서서 담배를 하나 빼물었다. 그리고 건너편 모퉁이에서 나오는 남자들을 지켜보면서, 그 속에 누군가 고객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혹이라도 늙은 창녀에게 모성을 느끼는 녀석이 걸려들어 화대라도 듬뿍 받을 수 있었으면... 오, 하느님, 제발 그런 놈팽이 한 놈만 보내주옵소서! 이때, 그녀의 앞으로 자동차 한 대가 달려와 섰다. 그녀는 다시 교태 섞인 미소를 지으며 일부러 차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운전자의 눈앞에 풍만한 가슴을 흔들어대면서 그녀가 말했다. "놀다 가실래요? 입으로 해달라면, 해드릴 수도 있다구요." 그러나 운전자는 이내 차창을 올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녀는 몸을 비틀거리며 재빨리 차에서 물러섰다. 그리고 매정하게 지나쳐가는 차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 뒤로도, 몇 명의 남자들과 몇 대의 자동차들이 그런 식으로 지나갔다. 그녀는 서서히 피로를 느꼈다. 작은 부츠 안에서 발이 퉁퉁 부어올라 이제는 똑바로 서 있기조차 힘이 들었다. 마약을 하면서부터 곧잘 발이 부어올랐다. 더구나, 그녀가 신고 있는 가죽 부츠는 발에 너무 작았다. 그녀는 자신의 치수보다 작은 옷, 작은 부츠 속에서 가쁜 숨 을 몰아쉬며 다시 가로등에 몸을 의지해 보았지만,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부츠를 벗어버리기로 했다. 그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까지 오는군. 오, 제기랄!" 그녀는 욕설을 뱉으며, 벗어든 부츠 한 짝을 들어 비를 가렸다. 비를 그대로 맞고 있으면 감기에 걸려 며칠간 끙끙 앓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듀크, 그 개자식한테 맞아죽든 말든 아파트로 돌아갈까? 이때,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이 다가와 그녀의 옆에 멈취섰다. 아주 근사한 시보 레 승용차였다. 사라는 부츠 한 짝을 머리에 든 채,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그 멋진 시보레를 바라보았다. 그때, 시보레의 유리창이 소리 없이 열리며,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이 나왔다. 그 손이 안으로 타라는 시늉을 했다. 운전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사라는 눈을 빛내며. 서둘러 부츠를 발에 끼고 나서 재빨리 일어섰다. 어느새, 가죽 장갑을 낀 손이 사라지고, 차창도 다시 닫힌 뒤였지만, 사라는 용기를 냈다. 이게 웬 횡재지? 이 자를 놓쳐선 안돼!... 그녀는 서둘러 쩔뚝거리는 걸음으로 차도에 내려 가 시보레의 문을 열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녀를 태운 시보레의 문이 닫혔다. 이윽고, 차는 런던 거리를 유령처럼 감도는 짙은 안개를 헤치며 소리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9월 27일 5:20 a.m. 맨체스터 뒷골목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는 언제나 어둠의 그늘이 있다. 쓰레기가 뒹굴고 신문지 쪼가리가 바람에 날리고, 취객이 토해낸 오물이 길바닥 군데군데 널려 있는 뒷골목 풍경... 비가 내린 뒤면, 큰 거리는 깨끗해지지만 이런 뒷골목은 더욱 지저분해진다. 여기저기 움 푹 패인 흙탕길에는 더러운 빗물이 고여 있고, 주위엔 담뱃갑이나 빈 병, 콘돔 등이 흠뻑 젖 은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런던 경시청 강력계의 로버트 우 형사는 중절모를 깊이 눌러쓰고 양복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채, 이 더러운 골목길의 담장 밑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시체는 쇠사슬로 목이 졸린 상태였고, 알몸이었다. 흐트러진 금발, 허리깨와 넓적다리 사이의 탄력 있는 살집,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하얀 가슴. 이마에서 흘러내린 끈적끈적한 핏물 이 이 더러운 거리를 온통 붉은 얼룩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시체는 철거명령이 내린 낡은 골목길에서 발견되었다. 재개발 구역인 이 길의 모든 건물 입구는 판자를 대고 못질을 해 놓았다. 골목의 악취에 피비린내까지 섞여 더욱 역겨운 냄새 가 진동하는 가운데, 파리떼가 들끓었다. 길 입구에 순찰차가 경광등을 번쩍이며 서 있었다. 순경들은 지겨운 표정으로 구경꾼들을 쫓아내고 있었다. 감식계의 사진사는 여러 각도에서 시체를 향해 셔터를 눌러댔다. 플래시가 계속 터지고 있었다. 그때, 동료 형사인 캐빈이 무언가를 가지고 다가왔다. "이것 보게." "뭔가?" "콘돔이야. 다섯 개들이 상자가 무려 다섯 통." 우 형사는 캐빈의 넓적한 손바닥에 있는 물건을 흘끗 보았다. 캐빈이 물었다. "핸드백에서 나온 거야. 무슨 생각이 들지?" "글세..." "콘돔을 팔러 다니는 여잘까?" "농담 말게. 차림새로 봐서, 피살자는 이 근방 유곽에 있는 창녀가 틀림없어." "창녀라고?" "그래. 잘 보라고. 자네가 아는 여잘지도 몰라." 캐빈이 듬직한 몸을 구부리고 가까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뱉었다. "아니, 난 모르겠어." "잘 봐. 언젠가 네가 올라탔던 애 아냐?" 캐빈이 대번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 우 형사는 슬쩍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자 캐빈도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로버트 우 형사는 미색 버버리 코트에 녹색 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있었는데, 그는 보통 체격에 말씨가 부드러운 중국계 사나이였다. 약간 흐트러진 머리칼에 중절모를 눌러쓴 외양 이나, 살짝 눈꼬리가 치켜올라간 눈매도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 어느 모로 보나 형사라기 보다는 고등학교 국어 선생 타입의 인물이었다. 그에 비해, 존 캐빈은 핀란드 계통이었는데, 바이킹의 후예답게 붉은 머리에 상당한 거구 였다. 오렌지색 양복을 입고 있는 근육질의 체격이 조금은 우둔해 보였는데, 가슴과 팔뚝은 우람하고 단단해서 무엇이든 한방에 때려눕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 이제 끝났으면, 싣고 가지." 그때, 시체를 살피던 검시관이 다가왔다. "역시 교살입니까?" 우 형사가 물었다. "그래, 보다시피, 쇠사슬로 목을 졸랐어. 둔기로 머리를 친 다음, 무방비 상태일 때 말이 야." "사망한 지 얼마나 됐을까요?" "세 시간, 아니면 네 시간 정도?" "뭔가 색다른 게 있습니까?" "자네 카드놀이 좋아하나?" "더러 즐기는 편이죠. 왜요?" "입에서 이런 게 나왔더군." 검시관이 증거물을 담는 봉투를 들어보였다. 투명한 사각 봉투였다. 그 안에는 그림이 그 려진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이게 어디서 나왔다구요?" 캐빈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입에서." "왜 그게 입에서 나왔죠?" "알 게 뭐야." "배고파서 먹은 건 아니겠죠?" "흐응... 소스라도 있다면 쳐 먹을까, 그냥은 안 먹지." "그럼, 범인 짓이란 말입니까?" "그렇겠지." 우 형사는 그 카드를 자세히 살폈다. 뒷면은 보통의 카드와 별반 다를 바 없었으나, 앞면 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커다란 염소뿔을 단 악마가 쇠사슬로 목이 묶인 전라의 여인 위에 앉아 있는 기분 나쁜 그림이었다. 아래쪽엔 'THE DEVIL'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씌 어 있었다. '악마'라는 뜻이었다. "자, 행운의 부적. 주머니에 잘 간직해 두면 쓸모가 있을 거야." 우 형사는 카드가 담긴 증거물 봉투를 받아들었다. 잠시 후, 구급차에서 내린 병원 직원들이 시체를 움직이자, 파리떼가 부웅거리며 날아다니 기 시작했다. 그중, 한 마리가 우 형사의 얼굴로 날아왔다. 그는 얼른 손을 내젓어 파리를 쫓았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시체에 앉았던 파리가 얼굴에 닿다니! 기분이 영 꺼림칙했다. 형사 생활 7년째지만, 아직도 죽음과 직면하는 일에는 익숙해지질 않았다. 물론, 이런 시 체를 대할 때 받는 격렬한 쇼크는 약간 둔감해졌겠지만, 죽음 자체에 대해서만큼은 조금도 무디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에게는 한때 활기차게 먹어대고,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힘차게 걸어가던 인간이 이처럼 한 순간에 피투성이의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다는 것이 무슨 농담 처럼 여겨졌다. 6:40 a.m. 사라의 아파트 우 형사와 캐빈이 악취로 가득 찬 사라의 싸구려 아파트를 찾아낸 것은 시체가 발견되고 부터 한 시간쯤 지난 뒤였다. 듀크라는 이름의 사나이가 피살된 사라의 기둥서방이라는 사 실을 알아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맨체스터 빈민가에 사는 주민의 5할 이 사라를 등쳐먹고 사는 이 놈팽이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냄새 한번 지독하군." "똥물에 위스키 섞은 냄새야." 캐빈은 코를 감싸쥐고, 앞장서서 썩은 악취가 풍기는 낡아빠진 아파트 계단을 올라갔다. 냄새는 지독했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라 아파트는 깊은 정적에 싸여 있었다. 그들은 어두컴 컴한 복도를 지났다. "여기지?" "맞아." "자식, 아직 자고 있나 보군." 문짝 안에서 드르렁거리며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캐빈은 주먹으로 문짝을 두드렸다. 쾅 쾅거리는 소리에 코고는 소리가 뚝 그쳤다. 이어 신경질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야?" "듀크 씨 댁인가요?" 슬리퍼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덜컥 문이 열렸다. "어느 놈이 곤한 잠을 깨운 거야?" 듀크는 50대 초반에 체구가 땅딸막한 사내였다. 입술이 두텁고, 한쪽 눈은 찌부러져 있었 다. 빨간색 삼각 팬티 한 장만을 걸친 알몸이었는데, 눈을 흡뜨고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러나 문 앞에 버티고 있는 캐빈의 거구를 보고는 금방 기가 죽었다. 그가 주먹을 풀면서 불룩 튀어나온 아랫배를 긁적였다. "무슨 일이오?" "경찰이다. 수사에 협조 바란다." 우 형사는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방 안의 광경을 엿보았다. 침대 위에 단발 머리의 어린 창녀가 시트로 알몸을 가리고 바라보고 있었다. 바닥엔 싸구려 위스키병이 굴러다니고, 벗어 던진 속옷 따위가 널브러져 있었다. "경찰이 꼭두새벽부터 무슨 볼일이오?" 듀크가 역겨운 위스키 냄새를 풍기며 물었다. 캐빈이 굵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사라 벨을 알지?" "사라, 누구?" "사라 벨 말야. 이봐, 듀크, 왜 딴전 피우나? 다 알고 왔으니 잡아 뗄 생각은 말라고!" 캐빈은 현장에서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꺼내 듀크의 코 끝에 바짝 들이댔다. 듀크는 사 진을 낚아채더니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사진을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늙은 창녀 사라가 은빛 쇠사슬을 목에 감은 채, 공포에 질린 푸른 눈을 부릅뜨고 혀를 낼름 빼문 모습으로 찍혀 있었다. 듀크는 잠자코 캐빈과 우 형사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손에 쥔 사진에 시선을 박으며 중얼거렸다. "죽었소?" "보시다시피." 순간, 듀크는 태연하려고 애썼지만, 내심 움찔했다. 젊어서 한때, 사라는 이 생활이 진저리 난다며 짐을 싸들고 몰래 내빼곤 했다. 그때마다 듀크는 끈질기게 쫓아가서 그녀를 다시 잡 아들였으며, 그런 다음엔 으레 심한 주먹찜질로 보답했다. 그러나 이제 사라는 잡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다시는 잡을 수 없는 먼 곳으로 도망친 것이다. 사진 속의 사라는 그걸 알 고 있다. 그래서 자기를 잡아보라고 놀리는 듯, 혀를 빼물고, 약을 올리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알고 싶은 게 뭐요?" "알고 싶은 게 많아." "난 바쁜 사람이야!" 듀크는 사진을 손끝으로 튕겼다. 허공으로 날아오른 사진을 우 형사가 잽싸게 잡아챘다. "좀 들어가도 될까?" "그건 좀 곤란한데?" "어째서 곤란하지?" "수색영장도 없잖아?"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워!" 캐빈이 안으로 들어서려 하자, 듀크가 냉큼 문을 잡아당겼다. 캐빈이 막 닫히려는 문짝을 꽉 움켜쥔 뒤, 어깨를 밀어넣었다. 동시에 한 손으로 듀크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대가리 박살나고 싶어? 딱 5초야. 5초 동안 재빨리 옷을 입어. 안 그러면, 팬티 차림으로 끌고 갈 테니까!" 캐빈이 으르렁거렸다. 그는 듀크의 엉덩이를 힘차게 걷어차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린 창녀가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며 시트로 몸을 감싸고 복도로 뛰어나갔다. 그러나 집 안으로 들어가 서랍이며 침대 시트 밑을 샅샅이 뒤졌지만, 기대했던 증거물 대 신 찾아낸 것은, 마약주사용 주사기와 포르노 사진첩 같은 잡동사니뿐이었다. 8:15 a.m. 경시청 형사계 "설마, 나를 살인사건에 옭아넣을 생각은 아니겠지? 선량한 시민을 잡아다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경찰들 수작이라면 신물날 정도로 알고 있다고." 기둥서방 듀크는 짐짓 의젓한 태도로 의자에 기대앉아 중얼거렸다. 캐빈이 솥뚜껑 같은 손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면서, 코끝이 닿을 만큼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이봐. 듀크, 시간 낭비하지 말자구. 마음만 먹으면 자네 같은 개새끼 하나쯤 얼마든지 엮 어넣을 수가 있으니까. 잔머리 굴리지 말고 우리 일에 협조해. 우린 사라를 죽인 놈이 누군 지 알고 싶은 거라고, 알지? 만일 협조하지 않으면, 네 놈이라도 잡아넣고 말겠어!" 이렇게 말하고, 그는 듀크의 목을 놓아주었다. 그때, 우 형사가 커피를 양손에 한 잔씩 들고 들어왔다. 그는 한 잔을 캐빈의 앞에 놓고, 책상 옆에 비스듬히 기대선 채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내 커피는 왜 없어?"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듀크가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로 물었다. "나도 커피를 마시고 싶다구." 그는 책상 위에 놓은 커피잔으로 손을 뻗치려 했다. 캐빈이 뺏기지 않으려고 냉큼 잔을 움켜쥐자, 듀크가 손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인심 한번 더럽군" 그는 빈정거리는 눈빛으로 우 형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도 한 잔 뽑아다주면 안 돼?" "망할 자식, 여기가 무슨 커피숍인 줄 아는 모양인데?" 커피를 맛있게 홀짝거리며 캐빈이 말했다. "나도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싶다구. 어려운 부탁도 아닌데, 그걸 못 들어줘? 자존심이 상 해서 그러나? 나도 커피가 마시고 싶으니 한 잔 가져다달라는데, 뭐가 잘못됐단 거야?" "닥쳐! 한 번만 더 커피 어쩌구 지껄여대면, 네 놈을 사라를 죽인 범인으로 구속할 거야. 그러니, 아예 커피 얘긴 꺼내지 마." 우 형사가 대답했고, 이어, 캐빈이 말을 받았다. "저 친구 얘기 농담으로 들으면 큰코다쳐. 어때? 내가 마시던 거라도 줄까?" "쳇! 더러운 형사 입이 닿았던 구정물을 누가 마셔?" "너 같은 쓰레기한텐 이 구정물도 아까워. 알아?" "구정물이나 마시면서 쓰레기하고 얘기하는 네 신세는 어떻고?" "자자, 농담은 그만하자고, 듀크. 우리 일에 협조하고 집에 돌아가서 너도 따뜻한 커피를 마시는 게 좋잖아? 네 녀석 디룩디룩 살찐 게 다 누구 덕분이지? 그건 사라의 등골을 파먹 어서 그런 거야. 네 놈은 그 여자가 벌어들인 돈으로 빈둥거리며 잘 지냈으니, 이제 그 여잘 위해 우리 일에 협조해야 도리잖아?" "터무니없는 오해 말라고" "터무니없는 오해라니?" "사라가 돈을 벌어다줬다는 건, 오해야. 오히려 내 돈으로 그년을 먹여 살렸다는 사실을 당신네들은 알 수가 없겠지. 사라는 한물간 창녀라 손님이 안 붙었어. 내가 아니었으면, 그 년은 벌써 오래 전에 굶어 죽었을 걸. 밥을 먹고, 방값을 치른 것도 다 내 덕분이었고 말야. 그년은 한푼도 내놓지 않을 때가 더 많았어. 게다가 그나마 몇 푼 번 것도 모조리 마약을 사는 데다 써버린 걸 알기나 해? 그러니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사라를 뜯어먹고 살아온 것처럼 이러쿵저러쿵 인신모독하는 말 따윈 집어치라구!" "나도 너 같은 신사를 모독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러니 솔직히 대답해 봐. 듀크, 어젯 밤 넌 어디 있었지?" "어젯밤 몇 시?" "9시에서 11시 사이에." "집에 있었어. 아까 와봤잖아" "혼자 있었나?" "아니." "그럼, 누구하고?" "파멜라." "파멜라가 누구야?" "아까 봤던 그 애." "그 단발 머리 어린애?" "헤, 지금 내 알리바이를 캐고 있군? 그래 봤자지. 난 사라를 죽이지 않았으니까!" "네가 안 죽였다고?" "맹세코!" "그걸 누가 알지?" "파멜라가 안다니까. 그 애하고 밤새도록 재미보며 놀았다고." "우리한테 그 말을 믿으라는 말인가?" "믿거나 말거나!" "둘이서 미리 짜고서 입을 맞출 수도 있잖나?" "내가 아니라는데, 왜 이러는 거야, 염병할!" "좋아. 사라를 마지막 본 게 언제지?" "어젯밤에 나갈 때 본 게 마지막이었어." "밤 몇 시쯤에 아파트를 나갔는데?" "7시쯤에." "원한을 살 만한 손님은 없었나?" "왜 없었겠어?" "있었다고?" "창녀 생활을 몰라서 묻는 건가? 열 명의 손님을 받으면 적어도 다섯 놈하고는 싸우게 마 련인 걸." "뭣 땜에 싸우지?" "그야 여러 가지 이유에서지."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해 봐." 캐빈이 묻자, 듀키가 대답했다. "화대를 깎으려는 놈도 있고, 콘돔을 안 쓰겠다는 놈도 있지. 또 뒤로 하고 싶다는 놈도 있고, 자기 물건을 빨아달라고 하는 놈도 있으니까. 창녀를 찾는 놈들은 하나같이 모두 얼빠 진 개자식들이라고. 수백, 수천 가지 이유로 싸울 수 있거든. 창녀짓이 어디 쉬운 줄 아나? 이건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고 팔고 하는 것하고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몸만 파는 걸로 다 되는 게 아니야. 피 튀기는 전투라고나 할까." 캐빈이 말했다. "그게 사라를 죽일 만한 동기가 될까? 그런 이유를 묻는 게 아냐. 이봐, 듀크. 자네, 누가 그녀를 죽였는지 짐작이 전혀 안 가나?" "글세..." "잘 좀 생각해 봐" 듀크는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 생각에 집히는 녀석이 딱 하나 있기는 하지." 그가 입을 열었다. "그게 누군데?" 캐빈이 호기심을 가지고 바짝 당겨 앉았다. 듀크는 손가락을 세우더니 캐빈을 가리켰다. "당신이 그 앨 죽인 게 아닌가?" "내가? 내가 그랬다고?" "그래. 아무래도 당신이 수상하거든." 듀크가 능글맞게 대답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우 형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캐빈의 주먹이 듀크의 턱을 후려친 것은 그때였다. "망할 자식! 사라를 죽인 건 바로 네 놈이지?" 그가 불그레해진 얼굴로 으르릉거렸다. 9:30 a.m. 경시청 형사계 "그러니까, 그 뚜쟁이 녀석에겐 별다른 혐의점이 없단 말이로군?" 린치 경감은 파이프에 담뱃가루를 재어넣었다. 경감의 손가락은 길고 가늘었다. 엄지손가 락으로 담배를 꾹꾹 눌러담고 나서, 그는 불을 붙이더니 연기를 내뿜으며 얼굴을 들었다. "범행에 사용한 쇠사슬에서 지문은 안 나왔나?" "아니오." "그 자식 집 안에서도 장갑은 발견되지 않았고?" "그렇습니다." 우 형사가 대꾸했다. 린치 경감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카드를 집어들었다. 그것은 시체의 입에서 발견된 기분 나쁜 그림 카드였다. 그는 주위에 흩어져 있던 담뱃가루를 카드로 쓸어모아, 재떨이에 대고 톡톡 털었다. 그리고 입을 열였다. "그런데 이건 또 뭐지?" "타로(Tarrot) 카드라고 합니다." "타로 카드?" "예. 집시들이 점을 칠 때 사용하는 카드죠." "집시들이 점을 칠 때 사용하는 카드라고?" "그렇습니다." 린치 경감의 손에서 카드를 빼내며 우 형사가 말했다. "다윗의 별을 달고 있는 악마예요." 커다란 염소뿔을 단 흉칙스런 악마 그림. 쇠사슬을 목에 감은 전라의 여인 위에 앉아 있 는 악마의 상체는 벌거벗은 사람의 모습이었고, 등에는 박쥐의 날개를 달고, 하체와 두 다리 는 털이 부숭부숭한 독수리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마에 다윗의 별이 그려져 있었 던 것이다. "그런데 그 여자 입에서 왜 그게 나왔을까?" "누가 알겠습니까, 그걸?" 캐빈이 우 형사의 손에서 카드를 집어들며 말했다. "기분 나쁜 카드 아닙니까? 꿈에 나올까 무섭네요." 린치 경감은 파이프 연기를 내뿜었다. 그리고 회전의자를 빙그르르 돌리며 물었다. "그 여자가 직접 카드를 삼킨 건 아니겠지?" "물론이죠." "그 여자는 평소에 카드를 입에 물고 다녔을까?" "아닐 겁니다. 경감님 같으면 그런 창녀와 노시겠습니까? 게다가 입에 카드를 물고 다니 면서 호객행위를 하는 창녀가 있다는 얘긴 들어보지 못했거든요." 로버트에게 윙크를 던지며, 캐빈이 제법 재치 있게 응답했다. 그런 캐빈을 흘끗 노려보고 나서 경감은 카드를 뺏아들었다. "그럼, 죽은 뒤에 누군가가 넣었다고 봐야겠군." "그렇다고 봐야겠죠." "그럼, 그 여자 입에 카드를 쑤셔넣은 놈이 있다는 얘기겠지?" "맞습니다." "내 생각엔 그놈이 그 여잘 죽인 거 같아. 그 여자 입에 카드를 쑤셔넣은 바로 그놈 말야. 그놈을 잡아오라고." 카드를 내려놓으며 린치 경감이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게 바로 자네들 일이야. 그 여자 입에 카드를 쑤셔넣은 놈을 당 장 잡아오란 말이야." "어디 가서 그놈을 당장 잡아오란 말입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무튼, 그놈을 잡아오라고. 그래서 왜 카드를 입에 넣었는지 물 어보라고. 왜 맛도 없는 카드를 입에 처넣었는지 물어보란 말이야." 린치 경감이 말했다. 형사들 중에는 그를 '대머리 영감'이라고 부르는 자들도 있었는데, 아무튼, 그는 자신의 대 머리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시민의 안녕을 위해 골머리를 썩이느라 머리가 빠졌고, 그 래서 대머리가 됐으니 자랑스럽다는 것이다. 그는 경찰이야말로 법과 질서의 심벌이며, 도시 를 야수의 무리에게서 지키는 정의의 사자들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자신이야말로 정의 를 수호하는 경찰이라는 직업에 대단한 만족감을 가지고 있었다. 2 앵커우먼 모니카 9월 27일 6:00 p.m. 하이드 파크 런던에서 햇빛을 만나는 날은 흔치 않다. 그런데 그날은 오전 중에 퍼붓던 비가 그친 뒤, 스모그가 말끔히 걷힌 하늘이 화창하게 개었다. 날씨는 더없이 맑았고, 태양이 푸른 하늘 저 편을 환히 비추는 가운데, 런던 시내는 활기가 넘쳤다. 그리고 오후가 되면서 시민들은 가족 과 함께 분홍빛 노을이 곱게 물들어 있는 하이드 파크로 몰려들었다. 하이드 파크는 중세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소유의 장원이었는데, 헨리 8세가 왕실수렵장 으로 사용한 이후, 17세기부터 일반에 공개되었다. 부지 면적만 140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이 넓은 공원은, 특히 런던 시민들에게 휴식을 주는 쉼터로 사랑받고 있었다. 수전 홍은 마블 아치 앞에서 택시를 내렸다. 고색창연한 건물이 즐비한 거리를 지녁의 러 시아워로 접어들면서 약간 혼잡해졌다. 그녀는 길을 건너 하이드 파크로 들어섰다. 공원은 꽤 넓고, 잔디도 잘 손질되어 있었다. 산책하기에 좋은 거리였다. 하이드 파크에서도 유명한 곳은 마블 아치 남쪽에 위치한 스피 커스 코너이다. 누구나 제한 없이 자유로운 주제로 연설을 할 수 있는 이곳은 일요일이면 인산인해를 이루는데, 그날도 늦은 시간이었지만, 몇몇 사람들이 열변을 토해내고 있었다. 수전은 시계를 보았다. 예정보다 30분 정도 일찍 도착한 셈이었다. 그녀는 적갈색 보도를 따라 너도밤나무가 즐비하게 쭉 뻗어 있는 산책로로 접어들었다. 머리를 오렌지색이나 짙은 주황색으로 물들인 펑그족들이 오가는 모습이 이채로왔다. 록 그룹 '엘 도라도EL DORADO'의 공연을 보러 온 것이 틀림없었다. 한 시간 후면, 하이드 파크의 야외음악당에서 '엘 도라도'의 라이브 콘서트가 열릴 것이었 다. 수전은 단발 머리를 한 귀여운 얼굴의 동양 미인으로, 체구는 자그마했다. 그녀도 역시, '엘 도라도'의 라이브 공연을 보기 위해 일부러 하이드 파크를 찾아온 것이었다. 록 그룹 '엘 도라도'는 30대 초반의 4인조 밴드였는데, 2년 전 첫 번째 앨범 <메시아!>로 데뷔한 이래 브리티시 메탈밴드의 선두주자로 부상했다. 그 후, 두 번째 앨범 <데킬라!>가 연속 빅 히트를 기록하며 앨범 발매 직후부터 지금까지, 빌보드 차트 상위 랭크에서 상당히 오랜 기간 머무르고 있었다. 그들의 사운드는 그때까지 들어보지 못한 현대적인 감각에, 신 선함과 독특함이 결합되어, 가히 충격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어느 평론가는 이들의 음악 이야말로 '가장 비이성적이고,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진보적'이라고 찬탄했다. 특히, 리드 기 타와 보컬을 맏은 그룹의 리더, 크리스 올랜도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엘 도라도'의 라이브 공연이 열리는 야외음악당은 공연 한 시간 전인데도 인파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BBC와 M-TV의 카메라맨과 스탭진들이 공연장 여기저기를 미친 듯이 뛰어다 니고 있었고, 공연장 안은 열광적인 팬들로 흥분의 도가니였다. 그런가 하면, 만일의 사고에 대비해 공연장 곳곳에는 경찰이 배치되어 있었다. 수전은 사람들을 헤치고, 되도록 무대에서 가까운 자리로 나아갔다. 초저녁부터 물려들어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10대들, 그들이 내뿜는 젊음의 열기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것만 같 아, 그녀는 덩달아 흥분의 감정을 가눌 수가 없었다. 30분 후, 야외음악당은 발디딜 틈도 없이 꽉 들어찼다. 공연 시각이 가까워오면서부터는 모두들 술렁거리며 환호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곧이어, 공연장 불이 꺼졌고, 무대 위에는 오렌지색 하이라이트가 빙빙 돌았다. 현란한 오렌지색 조명을 받으며, 금발을 늘어뜨린 엘 도라도 멤버들이 무대 위로 올라왔 다. 그 순간, 관중들의 함성이 터졌다. 무대 위의 불이 꺼지고, 조명이 켜지면서 첫 곡의 리 프가 시작됐다. 그 순간, 모든 관중들이 환성을 질렀다. 곧이어 쿵쿵, 심장 박동처럼 커다랗 고 힘찬 드럼 소리가 무대를 울리기 시작하고, 일렉트릭 기타의 음향이 지잉지잉, 어슴푸레 한 초저녁의 어둠을 뚫고 퍼졌다. 동시에 공연장을 꽉 메운 팬들의 광란에 가까운 함성이 터져나왔다. "엘 도라도! 엘 도라도!" "와! 크리스 올랜도!" 터질 듯한 심장 박동 소리의 드럼 연주가 오프닝을 장식하면서, 곧장 크리스 올랜도의 기 타 독주가 이어졌다. 그는 양쪽 무릎을 꿇은 채, 속주 기타의 엑스터시 속으로 빨려들어갔 다. 그리고 마침내, 리더 크리스 올랜도의 노래가 시작됐다. 그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절규하 는 듯한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무법자 나는 무법자로 태어났네 나는 길 위를 질주하지 한 손에 성경을 들고, 한 손엔 총을 든 채로 아무도 내가 누군지 몰라 여자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네 나를 이해하지 않네 길 위의 인생은 이런거야 누가 무법자의 인생을 알기나 해 나는 밤새 달린다네 내 인생은 위험에 처해 있고 나는 모든 영혼과 심장을 훔친다네 사람들은 나를 아벨이라고 부르지 사람들은 나를 카인이라고 부르지 사람들은 나를 샘의 자식이라고 부르지 그러나 결코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한다네 인생은 아무것도 잃을 게 없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지 나는 무법자 나는 무법자라네 광란하는 10대 팬들. 지잉지잉, 울리는 일렉트릭 기타, 머리를 박박 밀어버린 근육질 드러 머의 신기에 가까운 난타, 머리 위로 치켜든 손목들이 물결처럼 출렁이는 가운데, 교성에 가 까운 흐느낌이 들리고, 더러는 실성한 것처럼 비명을 지르던 끝에 기절해 버리는 여자애들 도 보인다. 기절해 쓰러진 소녀를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들어올려, 뒤로 뒤로 전달하는 모습 은 차라리 광란에 빠진 사교집단의 종교의식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이 거대한 인간 파도는 그대로 환호성과 박수 갈채와 헤드 뱅잉과 구호 소리의 소용돌이에 뒤섞이며, 절정 의 순간을 향해 치달았다. 7:30 p.m. BBC 뉴스 룸 "이젠 빅벤도 늙었어. 디지털로 바꿔야 한다구." 저녁 뉴스 준비를 하느라 부산스러운 BBC 뉴스 룸에서 프로듀서 레인 번즈는 붉은 연필 로 기사를 체크하며 투덜거렸다. 그것은 영국 각지에 나가 있는 수백 명의 기자들, 그리고 세계 각지의 특파원들이 송고해 온 수백 가지의 기사들이었다. 그는 그중에서, 그날 방송할 뉴스 아이템을 골라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옆에서 아이템 작성을 돕고 있는 조 수를 향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옐친은 아직 살아 있나?" "사흘째 두문불출이랍니다." "오늘 증권 시세 변동폭은?" "하향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답니다." "아랍 산유국 회의 결과는 나왔나?" "아직요. 조너선 의원이 강경발언을 했다는군요. 대통령 출마 선언 이후, 최초의 발언입니 다." "빅벤 수리 건은 뉴스 중에라도 연락을 줘. 그리고 이건 또 뭐야?" "뭐 말입니까? 아, 르윈스키 시가 말이군요. 요즘 클린턴 스캔들로 르윈스키 시가가 잘 팔 린다는 소식 아닙니까?" "빼버려. 이런 게 무슨 뉴스 가치가 있다고... 그래. 됐어, 오늘은 이 정도로 하자고." 그는 클립 보드를 챙겨들고 일어섰다. 카메라맨과 음향기사, 조명기사, AD들이 조정실에 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조정실 내부의 자기 자리로 가서 앉으면서, 전화통 앞에 앉아 통 화 중인 모니카를 흘끗 노려보았다. 저녁 뉴스의 메인 앵커인 모니카 비숍은 그에게서 등을 돌린 자세로 앉아 달콤한 음성으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그래서 좀 여유가 생겼어요... 네, 좋아요... 그럼 오늘 밤, 거기서 만나요... 허니, 사랑해 요." 수화기를 놓고 돌아서는 모니카의 시선이 레인과 마주쳤다. 그녀는 그의 눈길을 무시하고 뉴스 룸 안으로 들어갔다. 레인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요즘 모니카의 얼굴이 봄을 만난 꽃송이처럼 활짝 피어올라 있었다. 그것이 레인의 심사를 뒤틀리게 했다. 더구나 그는 방금 그녀가 통화한 녀석이 누군 지도 잘 알고 있다. 에쿠우스 컴퓨터 사장인 에드워드 던컨의 샌님 같은 얼굴이 뇌리를 스 쳐갔다. '기생 오라비 같은 자식!'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모니터에 비친 모니카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그녀의 짙 은 화장이 마음에 걸렸다. 뉴스 룸과 연결된 마이크 스위치를 누르고 그가 말했다. "모니카, 화장이 너무 튀는 것 아닌가?" "내 화장이 뭐가 어때서요?" "가부키 배우 같잖아. 가면을 쓴 것 같다고. 눈 화장이 너무 짙어. 여긴 방송국이지 연극 무대가 아니라고." "공연한 시비 걸지 말아요. 평소에 했던 대로예요. 다른 날 보다 더 진하지 않은데, 도대 체 왜 그러죠?" 이어폰을 통해 모니카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화살처럼 날아왔다. 베테랑 앵커답게 발음 하 나하나가 정확하게 울려나오는 것도 신경에 거슬렸다. 그는 공연히 부아가 치밀어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화장이 짙어서 짙다고 말했을 뿐인데, 무슨 뚱딴지 소리야?" "당신 일이나 잘 하라구요!" "뭐가 어째?" 그때, 누군가 등뒤에서 레인의 어깨를 툭 쳤다. 제임스 국장이었다. 뚱뚱한 체구에 시가를 입에 물고 있는 그가 연기를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 "이봐, 레인, 자네 이혼한 전처에게 너무 신경 쓰는 거 아냐?" "연출자가 뉴스 진행자한테 화장이 짙단 말도 못합니까?" "제발, 신경 끄라구. 모니카는 예전의 자네 마누라가 아니지 않나? 이혼한 마누라는 이웃 집 고양이 같은 거야. 목에 방울을 달았든 리본을 맸든, 그건 자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구. 무슨 말인지 알겠나?" "누가 뭐랍니까? 내 말은 화장이 좀..." "화장이 뭐가 어때서? 어쨌거나 모니카는 제일 잘 나가는 앵커야. 사적인 감정은 배제하 게. 시청자들은 뉴스를 보는 거라고. 아무도 모니카 얼굴이 가부키 배우 같다고 생각하진 않 아.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알겠습니다." 레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제임스 국장은 시가 연기를 그의 얼굴 위로 날리고, 커피잔에 재 를 툭툭 떨었다. 그가 가버린 후, 레인은 기침을 쿨럭이며 '망할 자식'하고 욕설을 중얼거렸 다. 그리고 그는 날씨 담당인 조너선을 불렀다. 조너선이 달려와 원고를 내밀었다. 레인은 그 원고를 보다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이건 또 뭐야? 오늘 밤, 비가 온다고?" "방금 기상청에서 보내온 팩스예요." "어떻게 된 거야?" "그린란드 쪽에서 거대한 저기압대가 몰려오고 있다는데요? 집중 호우가 내릴 거라는군 요." 레인은 왠지 이 소식이 반가웠다. 흘끗 보니, BBC 건물 유리창으로 별들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린란드에서부터 먼 거리를 이동해 온 두툼한 먹구름이 밝은 별 빛을 일시에 삼켜버린 것이다. 그는 얼른 마이크에 대고 모니카에게 비꼬는 투로 말했다. "템즈 강변에서 새벽 커피라도 즐길 계획이었나 본데, 안 됐군. 오늘 밤에 비가 온다는구 만." 그러자 원고를 읽고 있던 모니카가 냉큼 고개를 들고, 외부와 연결된 마이크 버튼을 누르 더니, 날카롭게 되받았다. "새벽 커피를 즐길 계획이란 것 맞았어요. 하지만, 템즈 강변이 아니고 사보이 호텔이에 요. 비가 올 거라는데 강가는 너무 춥지 않겠어요?" 모니카 비숍의 차가운 답변에 레인의 눈썹이 꿈틀했다. "방송 시간입니다." 조수가 말했다. "알았어. 준비해." 레인이 지시했다. "10초 전" 조수가 카운트 다운을 시작했다. 잠시 후, 9시를 알리는 빅벤의 시보 소리가 들렸다. 이어, 저녁 뉴스의 시그널 음악이 흐 르면서, 모니터에는 모니카의 귀족적인 얼굴이 잡혔다. 조명 불빛을 받아 더욱 환하게 빛나 는 허니 블론드 머리결을 배경삼아 모니카가 침착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BBC 저녁 뉴스의 모니카 비숍입니다." 그녀의 음성은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방금 레인을 대했던 독살맞은 표정이나 음성은 눈을 씻고 찾아볼려야 찾아볼 수가 없었 다. 레인에게는 그것이 더욱 밉살맞게 여겨졌다. 그는 모니터를 무섭게 노려보며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망할 계집, 어디 두고 보자!' 10:40 p.m. 하이드 파크 무서운 비였다. 삽시간에 몰려든 검은 구름은 번개와 천둥을 토해내며, 런던 시내를 강타했다. 빅벤을 수 리하던 기술자들도 일손을 접고, 시계탑에서 내려가버렸다. 바늘 하나만을 단 채, 어색하게 멈춰선 빅벤 위로 연거푸 날카로운 번개가 내리쳤다. 이 비는 엘 도라도의 라이브 콘서트가 열리는 하이드 파크의 야외음악당 위에도 어김없이 쏟아졌다. 갑자기, 거친 폭우가 쏟아져 내린 것은 공연의 막바지 무렵이었다. 라이브 공연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부랴부랴 우산을 펼쳐드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한껏 열광에 들떠 있던 판이라, 오히려 이 갑작스런 폭우를 반기는 기현 상이 벌어졌다. 10대들은 일제히 웃통을 벗어던지며, 광란에 가까운 환호를 보냈다. 무대에 서는 폭우에도 불구하고, 엘 도라도의 마지막 레퍼토리인 '한밤의 UFO'가 연주되고 있었다. 그들은 지구에 와 있다네 아주 오래 전부터 여기 와 있었지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바로 그들 빛나는 녹색 피부에 수정 같은 눈동자 나의 고향은 플리아데스 성단 거기엔 나의 친부모와 가족들이 살고 있지 나는 매일 밤 그들에게 기도하지 하늘에서 내려온 수천 명의 외계인 아기들 그들은 전 세계에 퍼져서 살고 있네 나는 그들 중 한 명이라네 수전 홍은 크리스 올랜도의 열창을 뒤로 하고, 콘서트장을 빠져 나왔다. 갑자기 내린 비로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녀는 하이드 파크를 벗어나 웰링턴 박물관 앞을 지났다. 인터콘티넨탈 호텔 앞에서 택시를 잡으려고 하는데, 막 코너를 돌아선 푸른색 시보레가 그녀를 5미터쯤 지나친 곳에서 멈춰서는 것이 보였다. 시보레는 다시 후진해 오더니, 붉은 브레이크 등을 밝히며 바로 그녀의 옆에서 멈춰섰다. 수전은 시보레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우산을 펼쳐쓰고, 그녀 를 향해 다가왔다. 더블 브레스트의 회색 정장에 짙은 눈썹을 한 지적인 분위기의 중년 남 성이었다. 그가 비에 흠뻑 젖어 있는 수전의 머리 위로 우산을 받쳐주며 물었다. "어디까지 가시는지,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뇨. 고맙지만, 사양하겠어요." 수전은 일부러 그의 우산에서 벗어나 몇 걸음 비켜서며, 냉정하게 말했다. 비 오는 밤에 낯선 여자에게 접근해서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면, 그 의중은 뻔한 것이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다시 그녀 가까이 다가왔다. 수전은 이 낯선 남자가 추근거리는 것이 조마조마해지며, 은근히 겁도 났다. 그 남자가 말했다.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아가씨는 수전 홍이시죠?" 낯선 남자의 입에서 자기 이름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수전은 적잖이 놀랐다. "댁은 누구시죠?" "BBC에서 여러 번 얼굴을 마주쳤던 적이 있었을 텐데, 그래도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그제서야 수전의 눈에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BBC 방송국의 엘리베이터에서 여러 차례 그를 본 적이 있었다. "레인 번즈라고 합니다. 뉴스팀 프로듀서지요." "아, 당신이 바로 그 레인 번즈인가요?" "제 이름을 아시는군요." "그럼요. BBC에서 당신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럼, 저를 믿을 수 있겠군요. 어디까지 가시죠?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저는 그리니치로 가요. 방향이 다르지 않은가요?" "상관없습니다. 어서 타시죠." 그제서야 수전은 사양하지 않고, 그를 따라 시보레에 탔다. 레인 번즈의 푸른색 시보레는 빗줄기를 헤치며 빠르게 그린 파크를 지나, 그레이트 조지 스트리트로 들어섰다. 수전이 입을 열었다. "신기하네요." "뭐가 말입니까?" "난, 당신 얼굴을 알고 있었고, 또 이름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서로 다른 사람인 줄로 만 생각했거든요. 방금 다른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됐어요." "게다가, 차까지 얻어타게 됐다는 거죠?" "그래요. 그런데 저를 어떻게 아시죠?" "우리 뉴스팀에서 당신은 유명인사입니다. 검은 머리의 동양인 미녀 작가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죠. 하지만, 그래서 당신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구요. 지난 4월에 방영됐던 다큐멘 터리, 당신이 쓴 다큐멘터리 프로를 아주 감명깊게 보았습니다. 거... 제목이 뭐더라?" "<티벳 불교를 찾아서>?" "아, 맞아요. 달라이 라마가 등장하는 프로였죠?" "그 프로를 보셨군요." "그럼요. 최근에 방영된 BBC 다큐멘터리 중에 최고였어요." "과찬의 말씀이군요." "아닙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예요." 수전 홍은 웃으며 레인 번즈를 바라보았다. 옆에서 본 레인 번즈는 이목구비가 단정한 미 남자였다. 그러나 움푹 들어간 두 눈이 왠지 불안하게 번득거리는 것만 같았다. 설마 나를 납치하려는 건 아닐까? 순간, 그녀는 겁이 났다.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무언가 강한 감정 이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딜 갔다 오시는 거죠?" 그녀의 시선을 의식한 듯, 레인 번즈가 곁눈질을 하며 물었다. "네?" "이 늦은 시간에 하이드 파크에서 뭘 했는지 궁금해서요." "아, 엘 도라도의 콘서트를 보고 오던 길이예요." "엘 도라도?" "네, 엘 도라도를 아세요?" "물론이죠. 크리스 올랜도라는 미친 놈이 이끄는 밴드죠. 나는 그 망할 놈의 메탈 음악이 끔찍하게 싫어요." 그 말에, 수전은 쿡쿡 웃음을 참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나이든 사람들이 시끄러운 하드 록 음악을 싫어하는 것은 공통적인 것만 같았다. 서방에서 외교관 생활을 오래 해온 그녀의 부친 역시도 하드 록 밴드라면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셨다. 그러고 보니, 레인 번즈는 나이가 부친과 거의 비슷한 연배이거나, 두서너 살 아래인 것으로 보였다. "수전, 당신은 신의 존재를 인정합니까?" 시보레가 국회의사당을 지나 린치민스터 브리지를 건널 때 즈음, 레인 번즈가 뚱딴지 같 은 질문을 던졌다. "신 말인가요?" "그래요. 당신은 신을 소재로 무엇을 써보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지 궁금하군요." "글쎄요?" "그리스 신화를 읽었겠죠?" "네. 읽었어요." "그중에서도 특히 내가 좋아하는 건 아프로디테와 아레스의 이야기지." 에일레스라면 전쟁의 신이었다. 레인 번즈가 말했다. "아프로디테는 추악한 얼굴의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와 결혼하지 않았소? 그리곤 전 쟁의 신, 아레스랑 놀아났단 말이오. 이걸 안 헤파이스토스가 보이지 않는 그물을 장치했지. 그리고 연놈이 일을 벌일 때 그물을 잡아당겨 꽁꽁 묶어 만천하에 공개를 했다... 이런 이야 기 말이오." 순간, 수전 홍은 몇 개월 전, 주간 신문의 가십난에 실린 앵커 모니카와 프로듀서 레인 번 즈의 파경 기사가 떠올랐다. 모니카의 문란한 생활 때문에, 한때 소문난 잉꼬 부부였던 그들 의 결혼이 마침내 파경을 맞이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레인 번즈를 다시 보니 그의 두 눈은 바람을 맞은 숯덩이처럼 빨갛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무래도 레 인 번즈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몹시도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수전은 또다시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내 생각엔 말이오." 레인 번즈가 말했다. "그리스 신들이란 작자들, 인간하고 별반 다를 것이 없어요. 탐욕스럽고, 우둔하고... 당신 생각은 어떻소?" "아, 네... 그래요. 맞아요. 저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어느 쪽이지?" "네?" "당신 집 방향 말이오. 이제 여기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 거요?" "왼쪽,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 주세요." 수전은 자신도 모르게 음성이 떨려나왔다. 시보레는 빗물을 튀기며, 인적이 드문 거리를 질주해 갔다. 어두운 하늘에서는 날카로운 번갯불이 번쩍이며, 둔탁한 천둥 소리가 들려왔 다. 수전은 불안했다. 대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와이퍼가 미친 듯이 빗물을 걷어내 고 있었지만, 들이붓는 듯한 폭우로 도무지 방향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11:10 p.m. 템즈 강변도로 "이런, 우라질!" 몇 번이고 이그니션(ignition) 스위치를 돌려보았지만, 엔진은 가르릉거리는 소리만 울릴 뿐, 다시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모니카 비숍은 맥이 탁 풀리면서 짜증스런 기분이 들었다. 정기 점검을 제대로 안 받은 탓이다. 지금으로선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글러브 박스를 열고 소형 책자 한 권을 꺼냈다. 실내등을 켜고 거기 적힌 애프터 서비스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그런데 설상가상이랄까. 휴대전화기의 켜짐(ON) 버튼을 누르 고 통화를 하려는 순간, 삐익삐익 소리가 났다. 배터리가 떨어졌던 것이다. 그녀는 휴대전화기를 놓고 차창 밖을 보았다. 어두운 하늘에서는 억세게 빗줄기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밤 11시가 지난 시각이었다. 아무래도 약속 시간까지 사보이 호텔에 도착하 기엔 무리인 듯싶었다. 한동안 고민하던 모니카는 비상등 버튼을 누른 다음, 우산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빗줄기는 거칠게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져내렸다. 바닥에서 튀긴 빗방 울이 종아리에 와닿는 감촉이 차가웠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질주해 가는 차량들을 향해 손 을 흔들었다. 몇 대의 차량이 그대로 지나쳐갔다. 비상 라이트를 점멸시켜 놓고 도움을 청하는 것을 보 고도 무심히 사라져버리는 그들의 행태가 야속했다. 몇 걸음 더 차도 쪽으로 나가 손을 흔 들어보았다. 그래도 차량들은 무서운 속도로 빗물을 뿌리며, 그녀의 옆을 그저 스쳐갈 뿐이 었다. '매정한 사람들 같으니!' 그녀는 비에 흠뻑 젖어든 투피스 정장을 한숨쉬며 바라보았다. 에드워드 던컨이 런던의 고급 의상실 '아덴'으로 데리고 가서 생일 선물로 사준 옷이었다. 모니카는 차가 고장난 것 보다도,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보다도, 스코틀랜드산 고급 모직으로 재단된 이 정 장이 비에 젖어 엉망이 되는 것이 더 화가 나고 안타까웠다. 그곳은 템즈 강을 끼고 도는 도로였다. 차량의 통행이 그다지 많지 않은 곳이이서 한적했 다. 게다가, 캄캄한 강물로부터 꾸역꾸역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괴기스럽게 도로로 넘어오고 있었다. 모니카는 조금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날씨마저 차가워져 으스스한 한기가 느껴졌 다. 그 후로도 몇 대의 차량이 나타났지만, 그녀의 도움 요청을 무시한 채 그대로 지나쳐가 버렸다. 모니카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도대체 얼마 동안이나 이러고 있어야 할까? 마치 이 드넓은 세상에 혼자 버려진 것처럼 외롭고, 쓸쓸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나는 차량의 숫자도 점점 줄어드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다시 또 저편 어둠 속에서 나타나는 차량의 전조등 불빛을 응시했다. 이때, 빗줄기를 헤치며 자동차 한 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푸른색 시보레였다. 폭우 속에서 그녀의 음성이 들릴 리 없었지만, 모니카는 혼신의 힘을 다해 소리치며 마구 손을 흔들어댔다. "이봐요, 도와줘요, 도와주세요! 여기예요!" 또다시 그대로 지나쳐가는 것일까? 그게 아니었다. 마치 기적을 목격한 것만 같았다. 모니 카는 자신을 지나쳐간 시보레가 얼마쯤 떨어진 곳에서 붉은 브레이크 등을 밝히며 멈춰서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녀는 환히 웃으며, 시보레가 멈춰진 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녀가 조수석 문을 열고, 우산을 접으며 차에 올라타는 것이 빗줄기 너머로 보였다. 그리 고 나서 잠시 후, BBC의 앵커우먼 모니카 비숍을 태운 푸른색 시보레는 빗줄기를 헤치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3 스튜어디스 케이트 9월 28일, 4:10 p.m. 히드로 국제공항 스위스 취리히를 출발한 브리티시 에어라인 여객기가 히드로 공항 활주로를 미끄러져 들 어왔다. 탑승구를 통해 파일럿과 스튜어디스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나올 무렵, 케이트 해밀턴은 누구보다 서둘러서 탑승구를 빠져나왔다. 브리티시 에어라인 제복 차림의 그녀는 아담한 체 구에 발랄한 커트 머리를 한 금발의 아가씨였다. 그녀는 숄더 백을 한쪽 어깨에 메고, 갈색 승무원 가방을 카트에 올려놓고 밀고 나오면서, 그대로 세관과 이민국을 통과했다. 케이트는 카트를 끌고, 터미널로 나왔다. 그때, 이상한 기미가 느껴졌다. 흘끔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니, 누군가 자기를 쫓아오고 있었다. 세관에서 얼핏 얼굴이 마주쳤던 감색 양복의 남자였다. 케이트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비행을 끝내고 나면, 간혹 뒤쫓아와 말을 거는 남자들이 있다. 커피를 한 잔 하자거나, 언제 시간내어 만나자는 치들이다. 그런데 그는 그런 유의 남 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비쩍 마르고 키가 크고, 어딘지 007 영화에 등장하는 첩보원 같은 인 상을 풍겼다. 케이트는 얼른 에스컬레이터에 탔다. 얼마쯤 내려가다, 다시 또 돌아보니, 그 남자 역시 막 에스컬레이터에 타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카트를 끌고 걸었다. 그리고 얼마쯤 가다, 로비를 오가는 사람들에 가려진 틈을 타서 재빨리 공항 매점 뒤편의 기둥에 몸을 숨겼다. 감색 양복의 남자가 두리번거리며, 약간 허둥대는 걸음으로 지나쳐가는 것이 보였다. 케이트는 기둥 뒤에서 고개를 살짝 내밀고, 그 남자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후, 카트를 끌고 달음박질 치듯 아래층으로 내려가, 지하 주차장으로 나왔다. 그녀는 어두컴컴한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줄지어 늘어서 있는 차들을 지나쳐 자신의 빨간 색 도요타 승용차 앞에 이르러, 그녀는 가쁜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핸드백에서 자동차 열쇠 를 꺼내, 뒤트렁크를 열고 가방을 그 속에 넣었다. 바로 그때였다. "실례하겠습니다." 막 뒤트렁크 문을 닫으려는 순간, 등뒤에서 굵직한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그녀는 심장이 오싹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감색 정장의 남자였다. 그가 양복 안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 펼쳐보이 며 말했다. "마약단속반의 특별수사관 제임스 키딩입니다." 수첩엔 런던 경시청의 배지와 남자의 사진이 보였다. "무슨 일이죠?" 케이트가 물었다. "그 가방에 뭐가 들어 있는지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제 가방을요?" "그렇습니다." "왜죠?" "의례적인 검문입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그는 마치 위압하는 듯한 눈초리로 빤히 바라보았다. "보세요." 케이트는 어깨를 움칫했다. 그녀가 지퍼를 열어 보인 가방 속에는 여벌의 유니폼 한 벌, 속옷과 브래지어, 팬티스타 킹, 세면도구가 든 손가방, 그리고 승무원 교본과 갖가지 소지품이 들어 있었다. 마약단속반 의 수사관은 마치 더러운 물건이라도 집어드는 것처럼, 손가락 두 개를 사용해서 그것들을 차례차례 들춰가며 바닥을 확인했다. 케이트는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꼼짝않고 서서 그의 시 선이 두툼한 생리대 봉투에 머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에겐 그 시간이 미칠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이윽고, 단속반의 수사관이 물었다. "이건 뭡니까?" "보시다시피, 생리대예요." 화난 표정으로 노려보며 케이트가 응답했다. "생리대라고요?" "그래요."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생리대를 집어들었다. 아주 무례한 행동이었다. 양해를 구하는 말 한마디 없이, 그는 생리대 포장을 뜯어내기 시작했는데, 미처 뺏을 틈도 없었다. 그 안에서 는 흰 가루가 들어있는 투명한 봉지가 나왔다. "아가씨 생리대는 꽤 독특하군요?" 감색 양복이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다. "이름이 뭐죠?" "..." "이름 말이오. 아가씬 자기 이름도 몰라요?" "케이트 해밀턴이에요." "미스 해밀턴, 당신 가방에 왜 이런 게 들어 있는 겁니까?" "몰라요." "모른다고요?" "..." "아무튼, 좋아요, 미스 해밀턴. 당신을 마약소지죄로 체포하겠소." 수사관은 마약을 가방 속에 던져넣고 감색 양복 앞자락을 젖혔다. 허리춤에 달린 가죽 케 이스에서 수갑을 꺼내는 순간, 케이트는 자신도 모르게 카트를 집어들고 힘껏 휘둘렀다. 카 트의 쇠막대는 수사관의 옆얼굴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우웁!" 수사관은 신음 소리를 토하며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가 바닥에 무릎을 꿇는 순간, 그녀는 겁에 질려 카트를 멀리 집어던진 다음, 마치 미치 광이 같은 동작으로 뒤트렁크를 닫고, 차에 황급히 올라탔다. '아아, 미쳤어!' 그녀는 시동을 걸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차량을 후진시켜 주차구역을 빠져나온 뒤, 바닥에 쓰러진 채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수사관을 뒤로 하고, 급히 엑셀러레이터를 밟아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4:40 p.m. 첼시가가 케이트는 첼시가가를 지나다가 공중전화 부스를 발견하고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린 그녀 는 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로이 윌리엄스 씨 계신가요?" 전화를 받은 여자에게 케이트는 다급히 말했다. "누구시죠?" "케이트 해밀턴, 급한 일이에요." "잠깐 기다리세요." 수화기를 든 손에 땀이 배었다. 그녀는 속으로 외쳤다. '로이, 빨리 전화를 좀 받아줘. 나를 도와달란 말야!' "여보세요." "네." "로이 씨는 지금 자리에 안 계신데요." 좀 전에 전화를 받은 여자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어디 멀리 갔나요?" "그런 것 같진 않아요. 방금 전까지 계셨는데, 잠깐 자릴 비우신 모양입니다. 메모를 남기 시겠어요?" "아니, 그와 직접 얘기해야 해요. 중요한 일이거든요." "그럼 5분쯤 후에 다시 해보시죠." "알았어요. 케이트에게 전화 왔었다고 전해주시겠어요? 5분 있다 다시 하겠어요." 케이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제발, 로이...' 그녀는 속으로 외쳤다. 나는 지금 곤경에 처해 있어... 나를 구해줄 사람은 당신 한 사람뿐 이야. 제발, 어서 나를 구해줘... 그녀는 눈을 감고, 두 손을 꼭 감싸쥔 채 기도했다. 그때, 톡 톡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바싹 마른 노파 한 사람이 돋보기 안 경 너머로 그녀를 무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전화 부스는 기도하라고 거리에 세워놓은 게 아니에요." 노파의 따끔한 말이 들렸다. 케이트는 전화 부스에서 나왔다. 그리고 자신을 노려보는 노파를 지나쳐 차도에 세워놓은 도요타로 가서 운전석에 앉았다. 평소와 달리, 5분은 끔찍하도록 긴 시간이었다. 그 경찰관은 어떻게 됐을까? 혹시 죽지는 않았을까? 아니, 그 정도로 죽지는 않았을 거 야... 하지만, 그녀는 자꾸만 걱정이 됐다. 마약 소지 사실이 발각되었고, 거기다 경찰관을 때 리고 나서, 도주까지 했으니, 큰 죄를 짓고 만 것이다. 이 사실이 항공사에 알려지면, 직장을 잃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다. 동료들을 볼 면목도 없고, 창피스럽기 짝이 없다. 케이트는 후회가 됐다. 이게 다 로이 때문이야. 애초부터 그의 부탁을 들어줘서는 안 되는 건데. 사랑하는 사람이 간절히 꼬드기는 바람에 어리석은 짓을 했어... 이제 어쩌면 좋지? 사 건은 이제 그녀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까지 확대되고 만 것이다. 5분이 지난 뒤였는데도, 아까의 노파는 전화 부스를 차지한 채 나올 생각을 안 했다. 케이 트는 차에서 내려 다시 전화 부스 앞으로 걸어가 그녀가 어서 나오기만을 조바심내며 기다 렸다. 그런데도 노파는 수첩을 꺼내들고, 그녀가 와 있는 것은 아랑곳없이 자꾸만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댔다. 혹시나 케이트가 전화를 양보하라고 할까봐 아예 등을 돌린 채 두 손으로 수화기를 꽉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 얄미웠다. "오, 저런, 캐리... 몇 번이나 말했지만 파이에 양배추를 넣는건 나찌 공습보다 더 끔찍한 거야. 세상에..." 그 노파는 이런 너저분한 화제로 쉴새없이 떠들면서 10분 정도나 더 공중전화를 독점한 뒤에야 부스에서 나왔다. "또 기도할 작정이우?" "무슨 상관이에요!" 케이트는 냉큼 대꾸하고 당장 부스로 들어가 전화를 걸었다. "누구시죠?" 그녀는 반가움에 왈칵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로이였다. 그녀에겐 이 순간, 구세주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녀가 말했다. "오, 로이. 나예요." "케이트?" "그래요." "목소리가 왜 그렇지? 무슨 일 있어?" "들통났어요. 모두. 물건을 가지고 나오다 발각됐단 말이에요. 이제 어떡하면 좋죠? 그리 고 나, 경찰을 때렸어요. 그 사람 어떻게 됐는지 몰라요. 죽었는지도 모른다고요!" "케이트, 제발 침착해. 무슨 말이야? 어떻게 된 건지 차근차근 말해 보라구." "공항에서 나오다 마약단속반 경찰에게 검문을 당했단 말예요. 내가 그 사람을 때렸어요. 짐가방을 싣는 카트로요. 그래서 그 사람은 쓰러졌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수화기 저편에서 나직이 투덜대는 욕설이 들려왔다. "로이, 이제 어떡하면 좋아요? 도와줘요, 제발, 빨리요! 지금 당장 나와줄 수 있지요?" "거기 어디야?" "첼시가가예요. 하이드 파크 근처에서 공중전화를 거는 거라구요." 그녀는 거의 울먹이는 음성으로 응답했다. "지금 나올 거죠?" "나갈 수 없어." "뭐라고요?" "나갈 수 없다고! 바쁜 일이 있어." 케이트는 찬물을 확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사랑하는 연인의 부탁으로 몰래 마약을 들여오 다 발각된 상황이었다. 게다가 경찰을 다치게 하고 도망쳐 와서, 어떻게 해야 할지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바쁜 일이란 대체 뭐란 말인가? "내 말, 잘 들으라고." 로이의 단호한 음성이 들렸다. "지금은 도저히 나갈 수 없어. 이따 밤 9시에 피커딜리 서커스에 있는 에로스상 앞에서 만나. 알겠지?" 케이트는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동안 어디 가 있으란 말예요? 집엔 갈 수 없다고요. 내 정체를 알아버렸으니, 곧 경찰 이 찾아올 거예요!" "그건 알아서 하라고! 아무튼, 이따 봐." 로이가 냉정하게 응답하더니 덜컥, 전화가 끊겼다. 부스에서 힘없이 나오면서 케이트는 소리쳐 울고 싶고, 당장 차도에 뛰어들어 죽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동시에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로이,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지? 아아, 나쁜 자식...! '이제 어디로 가야 한담!' 첼시는 도요타의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며, 중얼거렸다. 마땅히 갈 만한 곳이 없었다. 집에는 이미 경찰이 와서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 작정 시내를 배회할 수도 없다. 브리티시 에어라인 여승무원 유니폼 차림으로 다니다가는 경찰의 눈에 띄기 십상이다. 어쩌면 이미 빨간색 도요타 차량 수배지령이 내렸는지도 모른 다. '대체 어디로 가야 한담?' 케이트는 난감한 심정으로 망설이다 자기도 모르게 라디오를 틀었다. 엘 도라도의 가 흘러나왔다. 이 세상 어디에도 도망칠 곳이 없다는 가사가 자신의 처지를 말하는 것 같아 참담한 심정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백미러를 보니, 순찰차 한 대가 접근해 오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순찰차는 바로 그녀의 옆에 와서 정지했다. 차 안에는 경찰관 두 명이 타고 있었다. 그녀 는 숨을 죽인 채 기다렸다. 차에서 내린 경찰관이 다가와 유리창을 똑똑 두드렸다. 케이트가 차창문을 내리자 경찰관이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브리티시 에어라인에 다니십니까?" "네." "이름은?" "케이트... 헤밀턴." "미스 헤밀턴. 차를 좀 빼주셔야겠습니다." "네?" "차를 빼달라고 했습니다. 여긴 주정차 금지구역이거든요." "어머, 미안해요. 몰랐어요!" "원칙대로라면 위반 딱지를 끊어야 하는데, 어여쁜 스튜어디스니까, 이번만은 특별히 봐드 리죠." "고마워요." "저는 브라이언이라고 합니다." 젊은 경찰관이 말했다. 그는 코가 삐쭉하고, 목이 길쭉해서 왠지 집오리를 연상시키는 외 모를 하고 있었다. 그때, 순찰차 운전석에 있던 경찰관도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까딱여 보였다. "저 친구는 조지라고 하는데, 애가 둘이나 딸린 기혼자죠. 그런데도 새로 아가씨를 사귀어 혼외정사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쪽은 쳐다볼 필요 없구요. 제 얼굴만 보세요." "아, 네에." "제가 베푼 친절에 감사한 생각이 드십니까?" "네. 물론, 고마워요." "혹시 커피를 사고 싶지는 않은가요? 물론, 언제든 나갈 용의가 있습니다. 이건 제 연락첩 니다. 저희 교통단속반엔 브라이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둘 있는데, 늙은 브라이언 말 고 젊은 브라이언을 찾아주십시오. 거리 순찰을 나가 자리를 비웠을 때는 메모를 남겨두시 면 됩니다." 젊은 경찰관은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케이트가 그것을 받아들자, 그는 가볍게 경 례를 하고 순찰차로 돌아갔다. 차가 출발하기 전, 브라이언은 한껏 상냥함이 담긴 미소를 그 녀에게 던졌다. 순찰차가 가버리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케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금 받아든 명 함을 구겨 바닥에 버렸다. '아무래도 이대로 다니는 것은 위험해.' 어딘가에 도요타를 주차해 두고, 백화점에서 옷을 사서 갈아입는 것이 안전할 것 같았다. 그녀가 막 차를 출발시켰을 때, 라디오에서는 음악이 끝나고, 뉴스 속보가 흘러나왔다. 이 틀 전에 실종된 BBC의 앵커 모니카 비숍의 승용차가 템즈 강변도로에서 발견됐다는 것이 었다. 4:35 p.m. 템즈 강변도로 캐빈과 우 형사를 태운 낡은 올즈모빌은 완만하게 굽어드는 템즈 강변도로를 시속 100킬 로의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런던 시가를 빠져나오면서부터, 주말을 즐기려는 차량 행렬이 꼬리를 물었는데, 울위치를 지나 이리스와의 분기점에 이르러서야 자동차의 물결은 다소 줄 어들었다. "모니카 비솝이 그렇게 유명한 여잔가?" "영국 여왕만큼이나 유명하지." "그런데 이상하군. 난, 그 여자 얼굴을 한번도 못 봤거든." 캐빈이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리면서 말했다. 옆자리에 있던 로버트 우 형사는 몸이 쏠리 는 바람에 급히 손잡이를 잡았다. 캐빈의 운전 솜씨는 거칠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모니카 비숍의 승용차가 발견된 현장을 향해 달리는 중이었다. "대체 어떻게 생겼어?" "누구?" "모니카 비숍." "아, 아주 멋진 여자지! 갸름한 달걀형 얼굴에 고양이처럼 커다란 호박빛 눈을 하고 있거 든. 머리는 물결치는 금발이야. 게다가 세련된 지성미가 풍기는 멋진 여자지." "나이는?" "글쎄? 마흔한두 살?" "여자가 마흔 살을 넘기고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게, 난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그건 기적 이라구. 우리 마누라를 보면 알지. 우리 마누란 이제 겨우 서른다섯이거든. 근데, 벌써 허리 둘레가 절구통처럼 굵어졌어. 볼때기엔 심술이 덕지덕지하고, 턱은 이중턱으로 변했지. 게다 가 잘 땐 이빨까지 갈아대니, 같이 사는 게 고역이야." "자네도 날씬한 편은 아이고, 게다가 엄청스럽게 코를 골아대니, 천생연분이지 뭘 그래?" 얼마쯤 달려가자, 갑자기 차량의 흐름이 느려지며 강변도로 한편에 경광등을 번쩍이며 서 있는 순찰 차량 서너 대가 보였다. 주변에선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 바로 저기로군!" "망할 자식들, 벌써 냄새를 맡고 몰려들었어!" 캐빈이 중얼거렸다. 순찰 차량 틈으로 신문사 차량 몇 대가 진을 치고 있었고, 그 틈새로 비상 점멸등을 깜빡거리고 서 있는 모니카 비숍의 은회색 BMW 승용차가 보였다. 캐빈은 맨 뒤편에 있는 순찰 차량 뒤에다 올즈모빌을 세웠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렸다. "저리들 비켜요, 비켜 서요!" 몰려든 신문기자들을 막으며, 경찰관이 고함을 질렀다. 카메라맨은 카메라를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고, 연거푸 셔터를 눌러댔고, 기자들은 경찰관 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모니카 비숍의 차가 확실합니까?" "처음 발견한 사람이 누굽니까?" 그 북새통 속에서도 감식계 형사들이 증거 채취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핸들에 서 지문을 채취하는 사람, 운전석과 뒷좌석을 향해 계속 플래시를 터뜨리는 사진 담당자, 차 체 옆에 쭈그리고 앉아 증거를 채취하는 형사 등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캐빈이 중얼거렸다. "모니카 비숍이 굉장한 여자라는 걸 이제야 알겠구만." 5:27 p.m. 올드본드 스트리트 케이트는 올드본드 스트리트를 건너 벌링턴 아케이드로 들어갔다. 그리고 주로 캐시미어 제품을 취급하는 70여 개의 점포들 중에서 숙녀복을 취급하는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걸었 다. 마침 진열장에 감색 파카가 눈에 띄었다. 케이트는 그 점포 안으로 들어갔다. 진열대엔 전 시된 제품과 비슷한 것들이 색상과 사이즈를 달리한 채 즐비하게 걸려 있었다. 그녀는 그중 어두운 적갈색 제품을 집어들었다. "정말 잘 어울려요." 케이트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고 있는데, 점원이 곁에 와서 말했다. "마음에 드세요?" "네. 이걸로 하겠어요." 살짝 몸을 돌리고, 어깨 너머로 다시 또 거울을 바라보며, 케이트가 말했다. 그 말에 점원 은 약간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단번에 그렇게 결정하시는 손님은 처음이예요. 다른 것도 한번 보시잖구요?" "아녜요. 이 옷이 마음에 들어요. 이걸로 주세요." 사실, 모양 때문에 옷을 고른 것이 아니니 당연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유니폼을 가릴 수 있다면, 디자인이나 색상은 아무래도 좋았다. 케이트는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 점원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조회를 하는 동안, 꼬리표를 떼어내고 파카의 단추를 채웠다. 파카엔 모자까지 달려 있어, 위급할 경우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사인해 주시겠습니까?" 케이트는 점원이 내민 청구서 용지에 능숙한 필치로 사인을 했다. "포장해 드릴까요, 아니면 그대로 입고 가시겠어요?" "그냥 입고 가겠어요." 케이트는 이렇게 대답하며 재빨리 모자를 둘러썼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게를 나섰다. "이제, 어디로 가지?" 벌링턴 아케이드를 걸으며 그녀는 이제 어디서 시간을 보낼 것인지 궁리해 보았다. 아무래도 로이와 만나기로 약속한 피커딜리 서커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그녀는 레전트 거리를 지나 소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레스터 광장에 이르자, 오데온과 워너, 두 개의 영화관이 보였다. 케이트는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다행이 극장 부근에 경찰관의 모습은 보이지 않 았다. 그 다음, 그녀의 눈길은 극장에 내걸린 간판에 머물렀다. 오데온에서는 피터 그리너웨 이 감독의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이 상영되고 있었고, 워너에서는 대니 보일 감독의 <트 레인스포팅>이 상영 중이었다. 케이트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본 다음, 워너의 매표구에서 표를 사서 안으로 들어갔다. 참으로 기묘한 것은, 옷을 살 때도 거울에 맵시를 비춰보았던 것처럼, 쫓기는 와중에도 좀더 취향에 맞는 영화를 선택했다는 점이었다. <트레인스포팅>은 런던 뒷골목, 하류층 젊은이들의 일탈된 일상을 집요하게 추적해 가는 냉소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영화였다. 물건을 털고, 골목길을 질주하는 이완 맥그리거의 모습 이 긴박감 있는 영상으로 전개됐다. 그러나 케이트는 자신의 현실이 영화보다도 더 절실했기 때문에 좀처럼 영화에 집중할 수 가 없었다. 그녀가 영화관에 들어온 것은 그곳이 다른 어떤 곳보다 안전할 것으로 생각됐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오로지 이 어두운 공간 안에서 안전하게 몇 시간을 보내다가 피커딜리 광장의 에로스상 앞에서 로이를 만날 일로 머리가 꽉 차 있었던 것이다. '로이, 나를 구해줘. 난, 당신이 시킨 대로 했을 뿐이야. 일이 이 지경으로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구!' 그녀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어지럽게 전개되는 스크린 속의 장면들을 건성으로 바라보면 서, 마음 속으로는 이렇듯 간절하게 기도했다. 8:30 p.m. 피커딜리 서커스 케이트가 극장에서 나온 것은 8시 반경이었다. 그 동안 그녀는 <트레인스포팅>을 연속해 서 2회나 본 셈이지만, 머릿속에 남아 있는 줄거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완 맥그리거가 거 리를 미친 듯이 질주하는 단속적인 몇 장면이 잔상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느새, 하늘은 완연한 어둠 속에 휩싸여 있었다. 거리엔 네온싸인이 화려하게 번쩍이고, 불을 밝힌 차량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케이트는 길을 건넜다. 피커딜리 서커스는 도로의 교차점을 이루는 작은 광장이었다. 에로스상 주위에는 낮이나 밤이나 산책나온 젊은이들과 여행객들로 붐빈다. 케이트는 캐시미어 파카의 모자를 눌러쓰 고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러면서 조급한 마음으로 자꾸만 손목시계 를 보았다. 8시 50분이었다. '10분만 더 기다리면 돼!' 그녀는 10분을 더 기다렸다. 그러나 10분이 지난 뒤에도 로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케이트 는 머리를 숙인 채 에로스상 주위를 몇 바퀴째 돌면서, 혹시나 이미 와 있는데도 못 본 것 은 아닐까 싶어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간이 10시를 지나면서부터는 차츰 무거운 절망감이 엄습해왔다. 케이트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장구름이 무서운 속도로 물려오고 있었다. 이미 멀 리서 아스라하게 천둥 소리도 들려왔다. 소나기가 오려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어둑해진 하 늘에서 후드득 세찬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광장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 서둘러 비를 피해 주변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케이트는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빗 줄기는 갑자기 거세어지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주위는 온통 물보라의 세계로 변했다. '아, 추워. 로이 제발 빨리 좀 와줘!' 케이트는 우산도 없이 비를 흠뻑 맞으며 오돌오돌 떨었다. 낮에 산 캐시미어 파카는 내리 는 빗물로 흠뻑 젖어, 마치 묵직한 자루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만 같았다. 광장엔 비를 피할 만한 차폐물이 전혀 없었다. 비를 피하려면, 길 건너까지 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녀는 로이 와 어긋날까봐 잠시도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로이, 뭐하고 있는 거야? 빨리 와달란 말야!' 어느새, 케이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4 죽음의 타로 카드 9월 29일, 6:35 p.m. 타워 브리지 런던 탑은 런던시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 1078년, 노르만의 정복왕 윌리엄이 궁전으로 건 립한 이래, 수많은 정치범이 유폐되고, 처형이 거행된 비극의 무대이기도 했는데, 이제는 유 명한 관광명소가 되었다. 지금도 이중의 벽으로 둘러싸인 이 성 안에는 단두대 자리가 보존 되어 있다. 템즈 강 위로 아침 해가 떠오르며,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런던탑의 회백색 성벽이 핑크 빛으로 물들었다. 간밤에 내린 비로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고, 런던 시내는 여명을 받으며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템즈 강을 가로지르는 타워 브리지 아래에 경광등을 번쩍이며 순찰 차량 몇 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중엔 캐빈의 낡은 올즈모빌도 보였다. 그곳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타워 브리 지의 전망대로 올라가는 런던 탑 쪽의 입구 부근이었다. "얼핏 보니, 돼지가 죽어 있는 것 같았어요. 아직 날이 채 밝기 전이어서 희끄무레한 물체 가 눈에 잘 띄었거든요. 그래서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내려와 봤더니. 글쎄..." 사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런던 탑의 수위였다. 그는 튜더 왕조풍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 날이 밝으면 유니온 잭을 게양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날도 국기를 게양하고 성루를 지나다가 타워 브리지 아래 강기슭에 누워 있는 여인의 시체를 발견했던 것이다. 우 형사는 그의 진술을 한귀로 흘려 들으며, 엎드린 자세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금발 여인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모자가 달린 적갈색 캐시미어 파카를 입고 있었다. 나이는 스물한 살? 아니면 스물둘? 아무튼, 아름다운 여자였다. 이런 식으로 죽기에는 아까울 만큼 젋고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얼굴이 지금은 고통의 충 격으로 일그러져 있다. 잔뜩 부릅뜬 눈, 충혈된 눈알, 크게 벌어진 입, 그리고 창백하게 변해 버린 피부, 곧게 뻗은 두 다리는 어긋나 있고, 벗겨진 구두 한 짝은 저만큼에서 뒹굴고 있었 다. 바닥엔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흥건했다. "마치 첩보 영화의 스틸 사진 같군." 캐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투덜거렸다. 강에서는 비릿한 물비린내가 풍겨왔다. "저 위에서 곧장 떨어진 거겠지?" 캐빈은 높다란 타워 브리지를 올려다보았다. 현장 상황으로 보아, 여자는 탑 위에서 떨어져 내린 것이 틀림없었다. 아마, 즉사였을 것 이다. "자살일까?" "글쎄?" "로버트. 이 여자는 직업이 스튜어디스인가 봐." "그걸, 어떻게 알지?" 캐빈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캐시미어 파카를 들췄다. 그 속으로 브리티시 에어라인의 여 승무원 유니폼이 보였다. 좀더 가까이 얼굴을 살피던 캐빈이 갑자기 큰 소리를 질렀다. "맙소사! 입 안에 뭔가 들어 있어!" "입 안에 뭐가 들어 있다구?" "그래, 뭘 물고 있다니까!" 여자의 입술을 손끝으로 벌리고 무언가를 끄집어내던 캐빈의 입에서 지독한 욕설이 튀어 나왔다. "이런 우라질! 지난번과 똑같아!" "뭐가 똑같다는 거야?" "입 안에 망할 놈의 카드를 물고 있다니까!" 캐빈이 입 속에서 꺼낸 것은 카드였다. 그는 카드를 손끝으로 쥐고 얼굴이 붉어져서 일어 섰다. 타로 카드였다. 지난번 창녀 살해사건 때와 똑같았다. 우 형사는 그것을 받아보았다. 끈적끈적한 침이 묻어 있어 기분이 섬뜩했다. 거기엔 아주 묘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높다란 탑에 번개가 내려치는 그림이었는데, 탑의 한쪽이 화염과 연기에 휩싸여 무너지기 시작하는 가운데, 너풀거리는 옷을 입은 여자가 거꾸로 떨어져 내리는 그림이었다. 아래쪽엔 'THE TOWER'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탑'이라는 뜻이었다. "이 여잔 투신자살한 게 아니야!" 캐빈이 말했다. "창녀를 살해한 녀석의 범행이 틀림없구만. 이봐, 로버트 지난번 카드 그림 기억하지?" "염소뿔이 난 악마, 그리고 쇠사슬에 목이 졸린 벌거벗은 여자였지?" "그리고 이번엔 탑에서 떨어진 여자라?" "그림대로 살해한 거로군." "맞아, 이거 점점 재미있어지는데?" 캐빈은 몹시 흥분한 얼굴로 힐끔 사체를 내려다보았다. 10:00 a.m. 경시청 수사계 "타로 카드는 집시족들에겐 아주 신비한 의미를 담고 있는 일종의 성서와도 같은 것이죠. 주로, 앞날의 일을 점쳐주는 화투패로 이용되죠." 우 형사는 린치 경감의 책상 위에 56매의 카드를 세 줄로 늘어놓았다. 히브리의 상징에 바탕을 둔 '생명의 나무'로 알려진 패턴이었다. 그는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 골똘히 귀를 기울이는 린치 경감에게 설명했다. "초자연적인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이 카드 전체가 인류와 우주, 신의 본성을 포괄하는 철학 체계를 나타낸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카드를 떼어놓고 명상하면, 우주의 신비를 직관적으로 꿰뚫어 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를테면, 카드가 아무렇게나 떨어지는 게 아니 라,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떨어진다고 생각하니까요." 우 형사의 설명은 계속됐다. "1889년, 제라드 앙카세는 타로 카드에 대한 연구 끝에 그 기원이 인도로부터 유럽으로 흘러들어온 집시족에 있다고 발표했죠. 한편, 유명한 타로 카드 연구자인 앙투안 쿠르드 게 블린은 1781년 이집트 인물이 모든 지식을 압축해서 그림들로 형상화시킨 것이라고 주장했 고요." 타로 카드의 연원에 대해서 분명히 확인된 내용은 아직 없다. 다만, 14매씩 4조인 56장의 카드는 왕과 여왕, 그리고 악한이나 기타 중세 사회의 유물들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지팡이는 농부를, 컵은 성직자를, 칼은 귀족을, 동전은 상인을 상징한다. 프랑스 궁정의 조신들은 이 카드의 상징적 그림들이 예언적인 점술 기능을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는데, 즉 지팡이는 소식을, 컵은 행복을, 칼은 죽음을, 동전은 돈을 예고한다는 것이다. "타로 카드의 신비한 기능이 드러난 사건은 1601년 3월에 유럽에서 발생했습니다. 에섹스 백작의 시종인 앙리 쿠페가 반역죄로 교수형을 당했는데, 그의 운명이 타로의 세 카드패로 이미 예언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던 것이죠. 그 소문의 내용은 교수대, 재판관, 교도관의 세 카드패였습니다. 경감님도 한번 운수를 점쳐보시겠습니까?" 우 형사가 묻자, 린치 경감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난 사양하겠네." "왜요? 앞날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내 앞날은 내가 잘 알아. 둘 중의 하나겠지." 린치 경감이 말했다. "첫째는, 살인범을 잡아 청장님에게 표창을 받는 거야. 둘째는, 정년을 못 채우고 목이 잘 려 쫓겨나는 거고. 내가 쫓겨날 땐, 자네들도 무사하지 못할 걸? 캐빈과 자네를 함께 데리고 나갈 테니까." "완전히 물귀신 작전이군요." "그러니까, 범인을 잡으라고." 그때, 캐빈이 신문 한 부를 들고 들어왔다. "보십시오. 온통 이번 사건으로 떠들썩합니다." 그는 가지런히 놓인 카드 위에 신문을 펼쳐놓았다. 방금 찍어낸 것이어서 잉크 냄새가 물 씬 풍겨왔다. 캐빈이 페이지를 넘기는 데 따라, 온통 '타로 카드 연쇄살인사건'에 관한 기사 가 대문짝만하게 게재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사흘 전에 실종된 모니카 비숍마저 타로 카드 살인마에게 희생됐을 거라는 추측성 기사도 눈에 띄었다. '모니카 비숍은 어디에 있는가?' '자살인가? 아니면 실종인가?' 라는 제목이 박혀 있었다. "이 여잔 대체 어디에 가 있는 걸까?" 캐빈이 신문에 눈을 박고 중얼거렸다. 모니카 비숍이 실종된 것은 9월 27일 밤 10시 반경이었다. 방송을 끝낸 뒤, 새로 사귄 연 인인 에드워드 던컨을 만나러 사보이 호텔로 향하던 중, 홀연히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고 말 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17시간이 지난 다음날 오후 4시경, 그녀의 BMW 승용차가 비상등을 점멸시킨 상태로 템즈 강변도로에서 발견됐지만, 모니카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때부터, 각 신문사는 이 여류 명사의 행방불명을 대서특필했고, 방송사들도 가세하여 매 시간마다 주요 뉴스로 보도했다. 경찰은 그녀가 얼굴이 널리 알려진 유명 앵커라는 점에서 금품을 노린 계획적인 납치사건으로 추정했지만, 실종 사흘째가 지나도록 납치범의 협박 따 위는 아무것도 접수된 것이 없었다. "비숍은 현직 뉴스 프로듀서인 레인 번즈와 이혼하고, 컴퓨터 회사 사장인 에드워드 던컨 과 재혼할 예정이었답니다." 캐빈이 신문기사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었다. "그녀는 두 번 결혼에 실패했군요. 그리고 세 번째 남성과 연애 중이었지만, 사소한 다툼 이 잦았답니다. 평소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해 불면증에 시달렸으며, 식사도 불규칙적이어 서, 위장질환 치료를 받아왔다고 하고..." 신문기사는 '모니카 비숍의 알려지지 않은 사생활'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는데, 각 언론 매체들은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 덕분에 그녀의 뉴스 를 시청하던 국민들은 그녀의 사생활이 외면적으로 보이는 것만큼, 화려하고 선망할만한 생 활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이번엔 레인 번즈의 인터뷰 기사를 읽어나갔다. "레인 번즈가 이렇게 말했어요. 아내는 우리 모두를 골탕먹이려고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게 틀림없다. 나는 거기가 어딘지도 알고 있지만, 그녀 스스로 나타날 때까지는 밝힐 수가 없 다... 이런 내용인데요? 이 여자에 대해, 아직 이렇다 할 제보가 없습니까?" 신문을 접으며, 캐빈이 물었다. 린치 경감은 파이프 재를 털어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수천 건의 제보전화가 답지하고 있어서, 경시청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야. 하지만, 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은 거의 없는 형편이라구." 린치 경감은 고개를 갸웃이 하고는 손에 쥔 파이프로 자신의 대머리를 가볍게 톡톡 건드 렸다. "승용차가 발견된 지역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수색을 펼쳤지만, 아무것도 발견된 게 없어. 심지어는 전문 다이버까지 동원해서 템즈 강물 속까지 뒤져보았지만, 마찬가지야. 수사에 도 움이 될 만한 단서는 아무것도 찾아낸 것이 없고." "그렇다면, 모니카 역시 같은 범인에게 피살됐을 가능성이 커지는군요." "그렇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전화벨이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린치 경감은 파이프를 옮겨쥐고 나서, 오른손을 뻗어 수화기를 들었다. "뭐라구? 그게 정말인가? 도버? 어디라고? 화이트 클립? 음... 알았네. 즉시 형사들을 그쪽 으로 보내겠네." 린치 경감은 전화를 끊은 뒤에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방금 불을 끈 파이 프에 다시 불을 붙이고 나서 연기를 깊숙이 한 모금 들이킨 후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드디어 모니카 비숍이 있는 곳을 알아냈다는군." "예? 거기가 어딥니까?" "화이트 클립." 12:00 p.m. 화이트 클립 화이트 클립은 도버 해협에 있는 절벽지대였다. 고생대부터 바다조개의 껍데기 파편과 미 세한 해양 동물의 잔해에 함유된 탄산칼슘이 쌓이고 쌓여서 이루어진, 거대하고 견고한 화 석의 퇴적물 덩어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 석회암의 일종인 두꺼운 백악층으로 변모해 버린 것이다. 캐빈과 우 형사를 태운 올즈모빌은 캔터베리를 지나고부터 시작되는 노스타운스의 구릉지 대를 지났다. 페리 선착장을 지나 얼마쯤 더 가자, 거기서부터 구릉지대는 남쪽으로 뻗어나 가다가, 돌연 벼랑이 되어 바닷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동쪽 절벽 바로 위로는 도버 성의 성루가 보였다. 돌로 쌓아 만든 벽에 둘러싸인 고색창 연한 성채였다. 코발트빛 바다를 배경으로 서있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이곳은 옛날에 프랑스 군의 침공에 대비해 쌓은 영국의 전략적 요충지대였는데, 지금은 아름다운 풍광으로 여행객 이 몰려드는 관광지로 변했다. 올즈모빌은 수목이 울창한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길은 좁고, 경사진 흙길이었다. 얼마쯤 가다 널찍한 숲속 공터에 이르러 멈춰섰을 때, 이미 그곳에는 순찰차와 감식계 차량이 도착 해 있었다. 캐빈과 우 형사는 차에서 내려 300미터 가량 숲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윽고, 아래쪽이 푸른 바다와 그대로 맞닿아 있는 절벽지대에, 경찰관들과 감식계에서 나온 수사관 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제기랄, 저것 좀 보라구! 맙소사, 저게 무슨 꼴이람!" 캐빈이 이빨 사이로 휘파람을 불었다. 거대한 자작나무에 모니카 비숍의 시체가 로프에 묶인 채 거꾸로 걸려 있었던 것이다. 등 뒤로 두 손이 묶이고, 왼쪽 다리를 구부린 기묘한 모습이었다. 오른쪽 발목에 로프가 묶인 채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는 것이 마치 마네킹처럼 보였다. 치마가 아래 로 흘러내려와 하반신과 팬티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기분이 더럽군!" "나도 그래. 그 녀석 짓이 틀림없어." 캐빈과 우 형사는 이렇게 투덜대며 시체가 매달려 있는 나무 밑까지 접근해 갔다. 허공에 떠 있는 시체의 머리는 땅바닥에서 거의 1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기다란 금발 은 거의 땅바닥까지 닿아 있었는데, 목덜미엔 예리한 칼로 베인 자상이 나 있었고, 거기서 흘러내린 핏물이 삭아버린 낙엽과 흙 위에 검붉은 색깔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예감은 그대로 적중했다. "또 카드를 물고 있어!" 시체를 살피던 캐빈이 고개를 흔들며,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모니카 비숍은 눈을 뜨고 있었는데, 고양이를 닮은 호박빛 눈동자가 마치 그들을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경동맥은 예리한 칼로 베어져 있어 끔찍했다. 거기서 흘러내린 핏물이 얼굴 전체와 기다랗게 늘어뜨려진 금발을 온통 붉은 빛깔로 물들이고 있었 다. 마치 붉은색의 투명한 셀로판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몰골이었다. "궁금하군. 이번에는 또 어떤 그림이 나올지." 캐빈이 모니카 비숍의 입술을 살짝 들춰보았다. 약간 벌어진 위아래 이빨은 혀로 꽉 막혀 있어 확인이 힘들었다. 캐빈이 양손으로 그녀의 턱을 쥐고 힘주어 벌리려고 했지만, 여의치 가 않았다. 범행이 자행된 지, 적어도 하루 이상 지난 듯싶었다. 이미 하악골 근육이 경직되 어 버린 것이다. 캐빈이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이빨 사이에 넣고, 약간 힘을 주자 입이 벌 어졌다. 캐빈은 볼펜을 끼워 입안에서 카드를 꺼냈다. "보라구. 이번에도 놈은 그림대로 여자를 살해했어!" 타로 카드엔 T자형의 나무에 사람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원색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두 손을 등뒤로 묶인 채, 왼쪽 다리를 구부리고, 오른쪽 발목에 밧줄이 걸려 있는 모습이 모니 카의 모습과 똑같았다. 머리 주위엔 황금빛의 아우라(AURA)가 둘러져 있었는데, 아래쪽엔 'THE HANGED MAN'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거꾸로 매달린 사람'이란 뜻이었다. "완전히 미친 놈 짓이군!" 우 형사는 보이지 않는 망령이라도 본 것처럼, 등줄기에 전율을 느꼈다.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무서운 어떤 것과 맞부딪친 듯한 기분이었다. "시체를 발견한 지 얼마나 됐소?" 캐빈이 현장을 지키고 있던 경찰관에게 물었다. "두 시간쯤 됐습니다." "제일 처음 발견한 사람이 누구지?" "관광온 일본인 부부입니다." 경찰관이 캐빈의 등 뒤편을 손짓해 보였다. 신혼부부로 보이는 20대 후반의 일본인 커플 이 보였다. 그들은 몹시 당혹해 하며 불독처럼 생긴 늙은 경찰관에게 발견 당신의 정황을 설명하고 있는 중이었다. 낯선 일본어가 귓전에 들려왔다. "아라, 혼또이 무사시이데스. 가노조와 다레데스까?" "나제까라 손나 온나가..." 불독처럼 생긴 경찰관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우 형사를 보고 도움을 청했다. "이 사람들 영어를 모른답니다. 뭐라고 몇 마디 하긴 하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요." "자네 일본어 아는가?" 캐빈이 물었다. "아니 몰라." 우 형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 일본어라면 단 한마디도 아는 말이 없었던 것이다. "아나따다찌와 겐사쯔데스까?" 그때, 일본인 남자가 반색을 하며 물었다. 대화가 안 통해 곤혹스러워 하던 중에 우 형사 를 보고 일본인으로 착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우 형사 역시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저어 보이자, 실망스런 표정이 역력했다. "정확한 건 부검해 봐야 알겠지만, 사망 시간이 언제쯤인 것 같은가?" 다시 캐빈이 물었다. "부검해도 확실한 사망시간은 몰라. 언제나 한두 시간 차이가 있는 법이니까." "그야 어차피 부검을 할 테고, 부검하면 알게 되겠지." 우 형사는 캐빈의 말을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났다. 자신에 대해, 혹은 이 여자를 이 지경으로 만든 범인에 대해, 아니, 어쩌면 이 세상 모두 에 대해 화가 났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디 그뿐인가. 이 아름다운 육신에 메스를 가해 내장 을 끄집어내고, 부분부분 토막내어 온갖 실험기구에 집어넣고, 거기에 이런저런 화학약품을 섞어 여러 가지 단서를 찾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정확한 사인을 밝히고, 그것을 단서로 범인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과정이기는 하다. 그래도, 그는 왠지 그 모든 과정이, 마치 멀쩡한 한 여인을 쓸모없는 무기 질 덩어리로 바꾸어놓은 살인범의 소행 못지않게 비정하고 잔인한 행위인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벌써 세 번째 살인이로군." 다시 캐빈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아무래도 여기서 끝날 것 같지가 않구만. 으음, 타로 카드가 모두 몇 장이라고 했 지?" "56장." 우 형사가 캐빈의 말에 대답했다. "그럼, 이번으로 세 장째고, 앞으로 53장이 남은 셈이군. 로버트, 이 미치광이 녀석은 56명 의 여자를 이런 식으로 차례차례 죽일 작정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캐빈이 물었지만, 우 형사는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아무튼, 나는 이런 종류의 사건이 싫어. 아주 더러운 기분이 들거든." 캐빈이 말했다. "이건 미치광이의 짓이 틀림없다고! 병적으로 일그러진 정신의 소유자라고나 할까? 무서 운 도착 증세의 표본으로 삼아야 할 만큼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악마의 소행이니까 말야." 캐빈이 투덜거렸다. 로버트는 음울해지는 기분을 떨쳐버리고 싶었다. 그가 캐빈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캐빈." "왜 그래?" "왜 범인은 여자만을 노리지? 왜 남자는 노리지 않을까? 어째서 힘없는 여자만 노리고, 자네 같은 형사는 노리지 않는 걸까?" "그야, 어떤 놈이건 내 입에 카드를 쑤셔넣으려는 놈이 있다면, 가만 있지 않을테니까. 그 런 놈은 이 주먹 한 방으로 두개골을 으스러뜨려놓을 테야!" 캐빈이 해머처럼 묵중한 주먹을 흔들어대는 모습을 보자, 로버트는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제2부 5 두 사람의 용의자 용의자1 : 에드워드 던컨 에쿠우스 컴퓨터의 사장인 에드워드 던컨은 6피트가 넘는 훨친한 키에 더블 브레스트의 미색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까만 머리카락과 의지형의 각진 얼굴 윤곽, 새파란 눈동자에 는 예리한 지성의 빛이 반짝였다. 우 형사가 들어갔을 때, 에드워드 던컨은 으리으리한 집무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잉글랜드 은행과 증권거래소가 내려다보였다. "모니카 사건 때문에 찾아온 거겠죠?" "그렇습니다. 바쁘신데,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드워드 던컨은 그를 흘긋 본 다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잠자코 우 형사에게 자리를 권하고,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마치 사냥꾼처럼 감정과 행동을 제어하면서 조용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상당히 자제력이 강한 사나이라는 인상이 들었다. 우 형사는 단도직입 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모니카 비숍과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였습니까?" "닷새 전에 만났더랬소." "어디서죠?" "당신이 앉아 있는 바로 그 자리." "그게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인가요?" "그렇소. 그리고 사흘 전, 실종되던 당일, 사보이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녀는 나타 나지 않았지." "몇 시에 만나기로 했습니까?" "자정경. 뉴스를 마치고 뒷정리를 하고 나면 그때쯤이나 되어야 올 수 있으니까." "그런데 오지 않았단 말이군요?" "그렇소." "그래서 연락을 해봤나요?" "물론이오. 그녀의 휴대전화로 여러 차례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결되지가 않았어요. 사흘 동안, 아마 수십 번은 해봤을 겁니다." "모니카가 실종되던 날의 일정을 상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날은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온 왕세자를 접대하느라 무척 피곤했소. 그래서 일단 눈을 좀 붙일 생각에 먼저 잠자리에 들었소. 모니카에게는 이미 방 번호도 알려주었고, 늦어지더 라도 프런트에 말해 두면 방에 들어올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녀는 오지 않았단 말이군요?" "그렇소." "그녀가 살해됐다는 소식은 언제 알게 됐죠?" "오늘 오후에 신문 보도를 보고 알았어요." "상심이 컸겠군요." "별수없잖소? 모두 신의 뜻이겠지." 그의 태도는 의외로 냉담했다. 자신도 이런 냉담함이 마음에 걸렸던지, 던컨은 한마디 덧 붙였다. "부디, 그녀를 그 지경으로 만든 범인을 꼭 좀 잡아주시오." "물론입니다, 던컨씨.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 저희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실을 알고 계신 건 없습니까?" "어떤 사실 말이오?" "이를테면, 그녀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다던가..." "당신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내 입으로 밝혀야 하겠소?" "무슨 말씀이시죠, 던컨 씨?" "이 세상에서 모니카를 미워하는 사람은 딱 한 사람밖에 없어요." "누군데요?" "그녀의... 전 남편." "레인 번즈 말인가요?" "그렇소." "당신은 그가 모니카를 살해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 혼자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닐 텐데?"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한단 말인가요?" "물론, 그가 범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오. 그건 당신들이 밝혀 낼 문제겠지. 아무튼, 내 말은, 그에겐 모니카를 해칠 만한 충분한 동기가 있다는 거요. 당신은 누굴 죽이고 싶도 록 증오해 본 적 없었소?" "죽이고 싶도록 증오하는 것과 실제로 죽이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던컨 씨." "그 자는 능히 그럴 만한 위인이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 자는 미치광이오. 아시겠소?" 천천히 담배를 비벼끄며, 던컨이 말했다. "그날도 그 자식한테서 전화가 왔었거든." "언제 말입니까?" "모니카와 만나기로 한 바로 그 시각 말이오." "번즈에게서 전화가 왔었다는 건가요?" "그래요." "뭐라고 하던가요?" 에드워드 던컨은 소리내어 웃었다. "던컨 씨. 어떤 전화였죠?" 던컨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입을 열었다. "고약한 말을 하더군. '늙은 아레스 같으니, 네 놈을 죽여버리겠다!' 그러더군." "늙은 아레스라고요?" "그렇소. 늙은 아레스라고 했소." "늙은 아레스라는 게 무슨 뜻인가요?" "나도 모르오. 그건 번즈에게 물어보면 알겠지." 던컨이 말했다. 용의자2 : 레인 번즈 "늙은 아레스는 전쟁의 신이오."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레인 번즈는 긴 다리를 바꾸어 꼬았다. "아레스는 아프로디테를 꼬드겨서 바람을 피우게 했지. 그 친구에게 그것만큼 적당한 이 름이 있겠소? 아무튼, 던컨이란 놈이 우리 사이에 끼여들기 전까지, 모니카와 난 정말 행복 했으니까." "그래서 모니카 비숍을 증오했겠군요?" "물론이오. 그런 짓을 했으니 예뻐할 수가 있겠소?" "어느 정도나 증오했습니까?" "죽이고 싶을 정도로." "죽이고 싶을 정도로요?" 캐빈의 눈이 레인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레인은 빙글 웃었다. "나를 의심하는 거요?" "의례적으로 묻는 겁니다." "의례적으로 묻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제발, 그런 눈으로 보진 마시오. 난 안 죽였으니까. 생각해 보면 모르오? 만일, 내가 누굴 죽이기로 작정했다면, 그건 모니카가 아니라, 에드워 드 던컨이란 놈이겠지." "모니카가 실종된 시간, 당신은 어디에 있었죠?" "런던 시내를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지. 공공연히 밀회를 즐기는 연놈을 증오하면서." "빅토리아 스트리트를 달린 건 아닌가요?" "천만에. 사실은 나도 그쪽을 달려볼까 했지. 속도 내기엔 안성맞춤이니까. 그런데 어울리 지 않게 선행을 베푸느라 그리니치 쪽으로 달렸소." "그리니치?" "그래요. 하이드 파크 도로를 달리고 있다가, 비를 맞고 걸어가는 동양인 아가씨를 만났 지. 딱하더군. 그리니치에 산다고 하길래, 태워다주었소.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으로 비 내리는 시가지를 목숨 걸고 달리는 것보다야, 가련한 미인을 안전하게 귀가시켜 주는 것 이 더 보람찬 일이라고 생각되었으니까." "번즈 씨, 방금 한 말이 사실입니까?" "확인해 보면 될 것 아니오?" "물론입니다. 확인해 봐야겠죠. 어쨌든, 그 동양 여성이 누구였습니까?" "수전 홍. 여성 작가요." "연락처를 아십니까?" "아, 난 모르지. 하지만, 방송국에 알아보면 알 수 있을 거요. 그 여잔 가끔 우리 방송국 다큐멘터리 일을 했으니까. 그런 것까지 내가 알아봐줘야 하나?" "뭐, 그런 수고까지야... 우리가 직접 알아보도록 하죠." "그럼, 이제 됐소?" "일단은 됐습니다." 캐빈 형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인이 기다렸다는 듯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방을 나서기 전에 캐빈이 돌아보며 덧붙였다. "하지만, 곧 다시 찾아올 일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네 손목에 수갑을 채우러 말이군?" "글쎄올시다?"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요." 이렇게 내뱉으며 레인은 문을 소리나게 닫았다. 캐빈은 레인 번즈를 만나고 나오는 길에 BBC방송국에 전화를 걸었다. 신분을 밝히고, 여 러 절차를 거쳐서야 가까스로 수전 홍의 전화번호를 알아낼 수 있었는데, 그녀의 전화번호 를 몇 번이나 눌렀지만, 신호가 여러 번 울릴 때까지도 전화기 저편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6 인터뷰 그 시각, 수전 홍은 록 밴드 '엘 도라도'의 리더 크리스 올랜도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이번 인터뷰는 <타임>지에 실릴 예정이었는데, 크리스 올랜도가 인터뷰를 끔찍하게 혐오했 던 이유로 여러 번의 접촉 끝에 가까스로 얻어낸 기회였다. "크리스, 90년대 헤비메탈의 경향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어요." "헤비메탈은 죽었어요. 포이즌, 워런트, 스키드로 같은 그룹들을 보면 주체성이 결여되어 버렸단 걸 알 수 있지요. 그 대안이 바로 얼터너티브가 아닐까요? 내가 스릴을 느끼고 있는 부분도 음악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다시 희망을 주는 겁니다." 크리스 올랜도는 낡고 헐렁한 스웨터에 구멍난 청바지를 입었고, 발은 맨발이었다. 푸른 색조의 벽지를 바른 넓은 방 안에는 수십 송이의 흰색 백합꽃이 꽂혀 있었고, 탁자 위에는 엘 도라도의 전설을 형상화한 남아메리카 부족의 금속 공예품이 보였다. 황금으로 치장한 왕과 세 명의 노 젓는 노예를 태운 배 모양의 조각품이었다. 벽에도 잉카의 태양신을 형상 화한 태양가면, 현란한 색조로 마야의 신들을 그린 커다란 가죽 태피스트리 따위가 걸려 있 었고, 검은 물소의 박제품도 보였다. 수전 홍은 질문을 계속했다. "'엘 도라도'는 16세기에 아메리카 대륙에 존재했던 전설 속의 이상향입니다. 특별히 그룹 명을 이것으로 선택한 이유가 있는지 알고 싶군요?" "에르난 코르테스를 알죠?"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에스파냐의 정복자죠." "그래요. 16세기 에스파냐인들은 전설의 나라를 상상했죠. 순금으로 포장된 길에, 벽도 황 금으로 되어 있고, 사람들 또한 온몸에 금가루를 바르고 있다는 이방의 도시를 동경했어요. 그래서 에르난 코르테스가 이끄는 에스파냐 군대는 부에 대한 욕망과 종교적 열정을 안고 위험한 여행을 떠났고, 마침내, 피비린내를 뿌리며 아즈텍 제국을 정복했던 겁니다." "당신에게 에르난 코르테스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요?" "난, 스스로를 에르난 코르테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이상향을 찾아 모험을 하고, 그곳을 정복하려는 열정을 갖고 있죠." "그게 당신이 음악을 하는 이윤가요?" "그래요." "그럼, 당신이 정복할 대상은 무엇이죠?" "자본주의 세상. 안락한 타성에 젖어 있는 자본주의, 그리고 단꿈에 빠져 있는 중산층의 허위의식 같은 것, 그게 바로 내가 정복하려는 대상이죠." 크리스 올랜도는 섬세한 손가락으로 자신의 긴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그의 어두운 얼굴에 조금은 냉소적인 미소가 스쳤다. 수전이 물었다. "<무법자>는 엘 도라도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곡인데, 어떤 동기로 이 곡을 만들었나 요?" "내가 살아오면서 세상에 대해 느낀 소외감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곡이에요. 나는 항상 누 구하고도 말을 안 하고 혼자서 지냈어요. 늘 혼자였죠. 그게 좋았어요." "당신의 성장 배경을 알고 싶은데..." "웨일스 지방에 있는 카디프에서 65년에 태어났어요. 거기서 자라고 학교를 다녔죠. 평범 하고 단란한 가정이었죠. 아버지는 양복 재단사였고 어머니는 수를 잘 놓으셨죠. 난 두 분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고... 불행히도 두 분 다 일찍 돌아가셔서 대고모 할머니 댁에서 자 랐어요. 좋은 분들이셨어요." 크리스의 눈에 처음으로 따뜻한 미소가 돌았다. "처음 음악을 접한 계기에 대해 말해 주세요." "대고모 할머니는 나를 케임브리지에 진학시키고 싶어했지만 난 공부가 영 적성에 맞질 않았어요. 친구들이랑 어설픈 밴드를 뚝딱뚝딱 만들어 가지고, 펍(pub)에서 노래를 하다가 어스카인이라는 음악 프로듀서의 눈에 띈 거죠. 전형적인 스타 이야기죠, 뭐. 운이 좋았어 요." "96년, 첫 유럽 투어 때의 일을 말해 주시죠." "그땐 완전히 지쳤어요. 너무나 정신 없이 바빴지요. 그래서 술과 약물에 손을 댔고... 아 무튼, 7주 동안 죽는 줄 알았어요. 좁은 볼보 밴에 모든 장비와 함께 열 명이 타고 다녀야 했으니까요." "왜 약물에 손을 댔죠?" "내가 보기엔 정신과 신체는 밀접한 상관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식사를 조절하거나, 운 동, 금연, 금주, 휴식으로 신체를 정상적으로 유지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들에 의존할 수 없는 상황이 있어요. 그때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 반 년 정도 헤로인을 했던 거죠. 하지만, 이젠 완전히 끊었어요." "당신은 언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망할 놈의 언론 따위엔 관심도 없어요. 노 코멘트! 말하고 싶지 않군요." "공연이 끝나고 기타를 때려부수는 행위엔 어떤 의미가 있죠?" "우린 많은 감정을 갖고 무대에 섭니다. 공연이 끝나면 그런 감정들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듯한 기분이 들지요. 그래서 그냥 내려올 수 없는 거예요. 장비를 때려부수는 행위가 긴장을 해소시키는 한 방법이 되죠. 관객들도 그래야 더 흥분하잖아요?" "마지막으로, 성공이라는 문제에 대한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어요. 당신은 분명 성공한 아 티스트인데, 당신에게 성공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한참, 침묵을 지키고 나서, 크리스 올랜도가 입을 열었다. "세속적인 성공은 오히려 음악에 해만 됩니다. 예전이 그리운 건 그 때문이죠. 아무도 알 아주지 않던 무명시절 말예요. 싸구려 바에서 20명 정도만 앞에 두고 연주했던 때가 진짜였 어요. 좀더 말해도 괜찮겠어요?" "말하세요." "난, 요즘은 전혀 흥분을 못 느껴요. 우리가 연주를 끝내고, 객석의 불이 꺼지고, 관객들의 열광적인 환호성이 들려도 아무런 감동이 없는 거예요. 무대에서 내려올 때, 나는 내가 관객 들을 속이고 돈을 뜯어낸 것만 같아, 아주 처참한 심정이 되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수전이 입을 열었다. "크리스, 당신에게 부탁이 있어요. 개인적인 부탁일 수도 있겠는데... 난, 얼마 전부터 당신 평전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허락하실 건가요?" 크리스 올랜도는 얼굴을 들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웃었다. "당신이 내 평전을 쓰고 싶다고요?" 수전이 끄덕이자, 그는 피식 웃으며 응답했다. "물론, 당신은 내 평전을 쓸 수 있겠지만, 나의 진면목, 본래 면모는 도저히 알 수 없을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무슨 뜻이죠?" "얘기해 줄 수 없어요. 아무에게도 얘기해 줄 수 없는 비밀이 나한테는 있다는 말이지요." 크리스는 이렇게 말하더니,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수전 양이십니까?" 크리스 올랜도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홈즈구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막 돌아왔을 때, 문 앞 에 낯선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붉은 머리에 체격이 우람한 노르만 계통의 남자였다. "네? 누구시죠?" 그녀가 맑고 새까만 눈동자로 올려다보았다. "런던 경시청의 캐빈 형사입니다." 그는 신분증을 꺼내 펼쳐보았다. "무슨 일이시죠?"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잠깐이면 됩니다." "그래요? 그럼, 안으로 잠깐 들어오시죠." 그녀가 가방에서 꺼낸 열쇠로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캐빈은 안으로 들어섰다. 밝은 연두 색깔의 방 안에는 독신여성의 거처답게 아기자기한 가구며, 장식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모슬린천의 커튼이 드리운 창가엔 밝은 햇살이 비쳐들 고, 한없이 줄기를 뻗어가는 러브체인 화분이 책이 가득한 책장 위를 지나 컴퓨터가 놓인 책상 위에까지 닿아 있었다. 아주 깔끔하게 정리된 실내였다. "차 드시겠어요?" "주시면, 고맙지요." "홍차 어때요?" "좋습니다." 확실히, 동양 여성은 예절이 바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을 접대할 줄 아는 것이다. 탐 문 수사를 다니면서 무수히 문전박대를 당해온 캐빈으로서는 그녀의 이런 상냥한 태도가 마 음에 들었다. 그는 거실에 있는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왠지 마음이 부드럽게 녹아드는 기분 이었다. "설탕을 타시나요?" "탈 때도 있고, 안 탈 때도 있습니다." "지금은요?" "타도 좋고, 안 타도 좋습니다." 수전이 홍차가 담긴 찻잔을 테이블에 놓으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가 찻잔을 들고 막 마시려는데, 그녀가 말했다. "차가 우러날 때까지 조금 기다리세요." "아, 그럴까요?" 그는 찻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나요?" "혹시 레인 번즈라는 사람을 아시나요?" 캐빈이 물었다. "레인 번즈?" "예. BBC프로듀서 레인 번즈 말입니다." "아, 알아요." "최근에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네. 그저께 밤에요. 그런데 무슨 일이죠?" "레인 번즈와는 무슨 일로 만나셨습니까?" "우연히 만났어요. 크리스 올랜도의 라이브 공연을 보러 갔다 오는 길에 그 사람을 만났 어요. 비가 몹시 퍼부어대고 있었는데, 집에까지 태워다주겠다고 해서, 그의 차를 얻어타고 왔더랬죠." "크리스 누구라고요?" "크리스 올랜도요." "연극배운가요?" "아뇨. 록 가수예요." "아하!" "아시죠?" "아니, 모릅니다." "그래요? 아무튼, 저는 크리스 올랜도 팬이에요. 그래서 공연을 보러 갔었죠. 아! 이제 차 가 우러났네요. 따뜻할 때 드세요." "감사합니다." 캐빈이 두툼한 손가락으로 티백을 건지고 나서, 차를 한 모금 마시는 것을 기다렸다가, 수 전이 물었다. "그런데 왜 그런 것을 물으시죠?" "모니카 비숍 피살사건 때문입니다. 뉴스 들으셨나요?" "들었어요. 참 안 됐어요. 굉장히 지성적인 여자였는데..." "레인 번즈는 그 여자 전 남편입니다." "네. 최근에 이혼한 걸로 알아요." "저는 레인 번즈의 알리바이를 조사하는 겁니다. 모니카가 실종됐던 시간에 그는 당신을 집까지 바래다주었다고 진술했거든요. 그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기 위해 당신을 찾아온 겁니다." "모니카가 실종된 게 언제였죠?" "27일 밤 11시에서 자정 무렵까지죠." "그럼, 사실이에요. 그 시간에 저는 하이드 파크에서 우연히 그분을 만나서 차를 얻어타고 집에까지 왔거든요." "레인 번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생각하다뇨? 친절한 사람이에요. 낯선 사람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 정도니까요." "하지만, 아내에겐 그리 친절하지 못했던 것 같더군요." "모니카 비숍 쪽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던데..." "레인 번즈에게 동정적이군요." "아는 대로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녀의 증언에 의하면 레인 번즈의 알리바이는 확실한 것 같았다. 더 이상 물어볼 것이 없었다. 캐빈은 남아 있는 차를 마저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친절히 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차가 맛있군요." 이렇게 말하고 캐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7 바람둥이 로이 "레인 번즈에겐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더군요. 모니카가 실종된 시간에 그는 수전이란 동 양 여자를 집까지 태워다준 것이 확실해요. 하지만, 그의 혐의가 벗겨진 것은 아닙니다. 그 게 모니카를 살해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캐빈의 설명을 들으며, 린치 경감은 파이프에 담뱃가루를 재어넣었다. 그는 불을 붙이더 니, 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들었다. "어째서 범인은 여자만 노리는 거지?" "여자에게 애증을 느끼기 때문이겠죠." 우 형사가 응답했다. "왜 여자에게 애증을 느끼는데?" "왜라뇨? 남자라면 누구나 그렇지 않습니까? 남자들은 누구나 여자에게 애증을 느끼죠." "하긴 그래. 나도 마누라를 사랑하면서, 때때로 미울 때가 있거든. 하지만, 그렇다고 마누 라 입에 카드를 쑤셔넣었던 적은 없는데." "여자만 골라 살해하는 놈들은 대개 성도착자입니다." 다시 우 형사가 말했다. "간혹, 여성의 성기를 막대기나 칼로 쑤시는 놈들도 있지 않습니까? 놈들은 칼이나 막대 기를 자신의 성기로 여기는 것이죠." "이번 범인도 그런 놈일까?" "그럴 겁니다." "하지만, 우리 손님은 여자 생식기엔 관심이 없잖은가? 입에다 집시 카드를 쑤셔 박는 데 만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결국, 같은 것 아닐까요?" "같은 거라고?" "예. 여자의 입은 생식기나 마찬가지니까요." "여자 입이 생식기와 마찬가지라고 누가 그래?" 관심 있게 듣고 있던 캐빈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나섰다. "프로이드가 그랬어." 우 형사가 대답했다. "프로이드가 누군데?"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야." "그거 미친 놈 아냐? 어떻게 여자 입이 거기랑 같다는 거지?" "그야 난들 알 수 없지. 오랫동안 연구하면 그런 결론에 도달하는가 보지." "그 자식 어딨어?" "누구?" "그 정신분석학자 말야." "몰라." "왜 몰라?" "죽었어." "죽었다고?" "그래. 죽었어." "캐빈, 왜 정신분석학자를 찾는 건가?" 린치 경감이 물었다. "왜 찾느내고요? 그야, 이상한 말을 지껄여대니까 그렇죠. 그 녀석이 여자 입이 성기나 마 찬가지라는 말을 했다지 않습니까." "그런 말을 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꺼야." "그 이유가 뭔데요?" "자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겠지." "제 머리가 어때서요?" "자네 머리가 어떻다는 게 아니야. 아무튼, 자네가 찾아야 할 건 정신분석학자가 아니라, 범인이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나?" 린치 경감이 말했다. 그의 책상 위에 사체에서 끄집어낸 세 장의 타로 카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는 파이 프 담배 연기를 뿜으며, 그중 한 장을 집어들었다. 교수목에 거꾸로 매달린 사람이 그려진 카드였다. 모니카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자식은 이 카드를 자기의 성기로 생각하고 여자의 입에 쑤셔 넣은 것이란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잖습니까." "그 자식이 카드를 자기 성기로 생각한단 말입니까? 어째서 그렇지요?" 그때, 또 캐빈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끼여들었다. "캐빈, 그걸 내가 어떻게 아나?" 린치 경감이 대꾸했다. "세상엔 별의별 해괴한 짓을 하는 놈들이 다 있다구. 내가 수사했던 살인범 중에는 시체 를 잘라서 인삼과 옥파를 넣고 요리해 먹은 놈도 있었어. 또, 어린 소녀를 유괴해서, 한쪽 젖을 베어내 설탕을 쳐서 먹은 놈도 있고 말야. 그런 놈들이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내 머리 로는 도저히 알 수 없지. 그 자식들 미친 생각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어?"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린치 경감이 수화기를 들었다. 그는 한동안 통화를 하더니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보자가 찾아왔다는군. 두 번째 피살자인 케이트 해밀턴의 동료라는데, 뭔가 말할 게 있 어서 찾아온 모양이야. 지금 건물 입구에 와 있다는구만." 린치 경감은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케이트는 착하고 명랑한 아이였어요. 저하고는 단짝 친구여서, 우린 입사 때부터 항시 어 울려 다녔죠." 제니 브라우닝은 키가 상당히 큰 아가씨였는데, 갈색 머리에 브리티시 에어라인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난번, 취리히 비행에선 온종일 우울한 모습을 보였지요. 전, 그 애가 그러는 까 닭을 눈치챘어요. 케이트는 로이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가 무리한 부탁을 자꾸 해대서 그걸 고민하고 있었던 거예요." "로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브리티시 에어라인의 부조종사예요." "그럼, 같은 항공사에 근무하겠군요?" "그래요. 저는 왜 케이트가 로이 같은 바람둥이한테 빠졌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요." "로이가 바람둥인가요?" "그럼요. 아주 소문난 바람둥이죠. 그 자식은 케이트를 꼬여내어 결혼하자고 했던가 봐요. 케이트는 순진하게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그 자식이 하란 대로 따랐고요. 아시죠? 그 애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예. 압니다. 마약을 밀반입하다 검문에 걸렸더군요." "그건 바로 로이가 시킨 짓이에요." "증거가 있습니까?" "증거는 없지만, 틀림없어요. 오, 바보 같은 케이트... 그 악당한테 이용당하고, 비참한 꼴 을 당하다니!" 제니 브라우닝은 고개를 떨구면서 훌쩍훌쩍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도 로이에 대한 비 난은 그치지를 않았다. "게다가, 로이는 이멜다란 년하고 놀아나는 관계였는데, 케이트는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구 요!"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찍어내며, 제니가 말했다. "이멜다는 또 누굽니까?" "이멜다 베이시 말인가요? 최근에 우리 항공사에 들어온 신출내기인데, 아버지가 엄청난 부자래요. 로이는 그년한테 접근해서 금세 휘어잡았죠. 아마, 로이로선 놓치기 아까운 상대 였을 거예요. 항공사 직원들이라면 누구나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바보같이 케이트만 눈치 채지 못했죠.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모른척 내색하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구요. 그만큼 케이트는 진심으로 로이를 사랑했거든요." "로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매력적인가요?" "로이가 매력적이냐구요? 네, 그래요, 그가 미남인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지독한 가난뱅 이죠. 왜 그런 사람 있잖아요? <적과 흑>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말예요. 이름이 뭐더 라? 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 혹시 그 소설 읽으셨어요?" "저는 읽지 못했습니다. 바빠서 말이죠. 하지만, 이 친구는 읽었을 겁니다. 이봐, 로버트! 그게 누구지? 그 <적과 백>에 나오는 주인공 말야." 캐빈이 돌아보며 우 형사에게 물었다. "<적과 흑>이겠지." "제기랄, 적과 백이건 적과 청이건 빨주노초파남보건 그게 뭐 중요해?" "쥘리앙 소렐." "맞아요! 쥘리앙 소렐. 그 사람이에요." 제니 브라우닝이 말했다. 캐빈이 다시 제니에게로 머리를 돌리며 물었다. "그게 누군데요?" "<적과 흑>의 주인공 말이에요. 가난하지만, 재능과 야심이 있는 젊은이죠. 로이는 람스 게이트에 있는 부모와 동생들에게 매달 생활비를 보내서 부양해야 할 만큼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어요. 자기 학비도 가정교사를 해서 벌었다고 하더군요. 내 생각엔 케이트를 죽인 건, 바로 로이가 한 짓이 틀림없는 것 같아요." "어째서 그렇게 짐작하시죠?" "왜냐구요? 그건, 쥘리앙 소렐이 마틸다와 결혼할 작정으로 레날부인을 살해한 것과 같은 이치죠. 소설 말고, 그런 영화도 있었잖아요?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젊 은이의 양지>라는 영화 말예요. 그 영화를 보면,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결혼하려고 임신한 애인을 보트에서 빠뜨려 죽이잖아요. 로이가 케이트를 살해한 동기 역시 그것과 같은 거예요. 그는 이멜다와 결혼할 욕심으로 방해가 되는 케이트를 제거한 거라구 요. 아직도 무슨 뜻인지 모르시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로이 헵번의 주소를 아십니까?" "알아요. 하지만, 지금 그의 집을 찾아가도 없을 거예요. 그 놈은 지금 다른 데 있을 테니 까요." "다른 데라뇨?' "이멜다한테 가 있을 거예요." "이멜다의 집은 어딘데요?" "빅토리아 강변에 있어요. 그 집을 알아요. 알려드릴까요?" "그러면 고맙겠습니다만." "약도를 그려드리죠. 볼펜 좀 주시겠어요? 메모지도요." 제니 브라우닝은 캐빈이 건네주는 메모지와 볼펜을 잡더니, 이멜다의 집 위치를 상세하게 그려나갔다. 현재, 로이가 머물고 있다는 이멜다 베이시의 거처는 웨스트민스터 다리에서 블랙프라이 어스 다리까지 이어지는 빅토리아 강변의 한 아파트였다. 제니 브라우닝을 보내고 나서, 두 사람은 곧장 로이 헵번을 찾아 나섰다. 캐빈과 우 형사는 이멜다의 아파트로 들어섰다.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서 내려 복도를 지났다. 차링 크로스 잔교와 템즈 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주 전망이 훌륭한 곳이었다. 이멜다의 집은 511호였다. 초인종을 누르고 얼마 안 되어, 다갈색 머리의 여인이 문을 열 었다. 풍만한 가슴을 아슬아슬하게 가린 네글리제 위에 핑크색 가운을 걸치고 있었는데, 머 리가 부스스한 것이 금방 침대에서 일어난 기색이었다. 얼굴을 찌푸리며, 그녀가 물었다. "무슨 일이죠?" "이멜다 베이시 양인가요?" "그런데요?" "로이 헵번 씨 계신가요?" "어디서 오셨나요?" "런던 경시청의 존 캐빈 형삽니다. 이 친구는 로버트 우 형사고. 로이 햅번 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로이를 왜 여기서 찾는 거죠?" 그녀가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새뜬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없습니까?" "여긴 없어요." 때마침, 욕실 안에서 우렁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멜다, 누가 왔지?" 그리고 이내 목소리의 주인이 삐죽이 얼굴을 내밀었다. 스페인 혈통일까? 영국인 같지 않 게 가무잡잡한 피부에 검은 눈동자가 이국적인 미남이었다. 보디빌딩으로 몸을 단련시켰는 지 여자들을 뇌쇄시킬 만큼 근육질의 체격이었는데, 시꺼먼 털로 뒤덮인 알몸에 오렌지색 트렁크형 팬티를 입고 있었다. 그는 면도 중이었던 듯, 턱 주위엔 하얀 면도 크림이 뒤덮여 있었고, 손잡이가 달린 기다란 면도칼을 손에 쥐고 있었다. "누군데 그래?" "경찰이래." 이멜다가 불쾌한 음성으로 뇌까리면서 다정스레 로이의 품에 몸을 안겼다. 캐빈은 금세 이맛살을 찌푸렸다. 목불인견의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우 형사가 물었다. "로이 헵번 씨? 신문을 보셔서 아시겠죠?" "뭘 말이오?" "케이트 해밀턴 양이 피살된 사실을 모르십니까?" "케이트가 피살됐다고요?" "모르십니까?" "금시초문이오." "뉴스에도 나왔는데?" "아아, 보다시피 우린 이제 막 일어났소. 어젯밤, 캔싱턴 헤르메스에서 밤새도록 노느라고 말이오." 캐빈과 우 형사는 어이가 없었다. 오후 5시가 가까워오는 시간까지 늘어지게 잠을 자고도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안 보이는 것이 더더욱 그랬다. 로이가 말했다. "그런데 케이트가 피살당했다는 게 무슨 소리요? 언제 그랬죠?" "9월 28일 새벽에." "누가 그런 짓을 했는데요?" "그걸 몰라서 범인을 잡으려는 겁니다. 이 사진을 좀 봐주시겠습니까?" 로버트는 로이의 코 앞에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타워 브리지에서 추락해 죽은 케이트 해밀턴의 시신이 찍힌 사진이었다. 순간, 로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멜다의 표정도 흐려졌 지만 크게 동요하는 빛은 띠지 않았다. "떨어져 죽었소?"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럼, 자살 아닙니까?" "자살이 아닌 것 같아서요." "누가 떨어뜨려 죽였단 말입니까?" "그걸 알기 위해서 찾아온 겁니다." "로이, 이 사람들은 지금 당신을 의심하고 있다구요." 이멜다가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몹시 신경질적인 여자였 다. "나를 의심한다고? 내가 케이트를 떨어뜨려 죽였다는 겁니까?" 로이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당신 짓이라는 말은 안 했소. 참고인 진술을 들으려는 거니까, 협조해 주십시오." "만약 싫다면요?" 이멜다가 날카로운 음성으로 되받았다. 우 형사가 대꾸했다. "미스 베이시. 협조해 주지 않으면 앞으로 더 자주 폐를 끼치게 될 텐데, 그래도 괜찮겠습 니까?" "아아, 이멜다가 지금 피곤해서 그래요. 신경이 날카롭습니다. 잠을 설쳤거든요. 질문에 답 할테니, 뭐든지 물어보세요. 이멜다, 잠깐 두 분을 안으로 모셔도 될까?" "여기서 얘기해요." 이멜다가 내뱉었다. 생긴 것은 예쁘장한데, 몹시 불쾌한 여인이었다. 로이의 유유자적한 표정도 역겨웠지만, 이 여자의 경망스런 태도에 비하면 그것은 그런대로 참을 만했다. "로이 씨, 당신 케이트의 애인이었지?" "누가 그래요?" "아닙니까?" "글쎄, 생각하기 나름이죠. 몇 번 동침한 사이를 애인이라고 부른다면, 분명 애인이었소. 이멜다, 케이트하고 몇 번 잤다고 내가 말했지?" 이멜다는 표독스럽게 로이를 노려보았다. "케이트의 도요타 승용차 뒤트렁크에서 헤로인이 발견됐는데, 그녀가 헤로인를 몰래 반입 한 건 당신이 시킨 일이 아닌가요?" 면도 크림을 손으로 휙 닦아내며 로이가 벌컥 화를 냈다. "무슨 터무니없는 소립니까! 누가 그런 얘길 했소? 내가 케이트한테 헤로인을 숨겨오라고 시켰다니! 대체 누가 그 따위 터무니없는 말을 했냐구요!" "사실이 아니란 말인가요?" "아니고 말고. 말 안 해도 누가 그런 얘길 지껄였는지 안다구요. 제니 브라우닝이 그런 얘 길 했을 테지. 개 같은 년! 그년이 시시콜콜 다 떠벌렸을 게 틀림없어. 이보시오, 형사님들, 난 전혀 그런 사실이 없어요. 그건, 제니가 날 시기해서 꾸며낸 거짓말이오, 아시겠소?" "왜 제니가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요?" 캐빈의 질문에, 그는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숨김없이 말하리다! 소문을 들으셨겠지만, 난 소문난 바람둥이라오. 브리티시 에어라인에 근무하는 스튜어디스들을 내가 죄다 건드린 것도 사실이오. 물론, 그중엔 케이트가 있고, 제 니 브라우닝도 있어요." 순간, 이멜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로이! 당신, 제니하고 잤단 얘긴 안 했잖아요!" "그랬나? 내가 그 얘길 안 했던가? 아무튼, 제니도 내가 두서너번 데리고 놀았던 건 사실 이야. 하지만, 그 애를 사랑해서 그런 건 아니라고." "더러운 바람둥이 자식!" 이멜다가 로이의 따귀를 후려쳤다. 그녀가 머리끝까지 화를 내면서 안으로 사라지고 난 후, 로이가 투덜거렸다. "당신들 때문에 난 저 여자한테 들들 볶이게 됐어요." 우 형사가 질문을 계속했다. "9월 28일 밤 10시부터 자정 무렵까지, 당신은 어디서 뭘하고 있었지요?" "케이트가 죽은 그날 말인가요?" 로이가 벌겋게 손자국이 난 뺨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그날은 이멜다의 생일이었어요. 이멜다와 같이 교외로 나가 식사를 하고 밤늦게야 돌아 왔죠." "식당에서?" "그래요. 식당에서." "그 식당이 어디지?" "켄싱턴에 있는 헤르메스." "켄싱턴에 있는 헤르메스?" "그래요. '앤디'라는 웨이터가 서빙을 맡았어요. 우릴 기억할 거요. 이멜다의 생일을 축하 하려고 특별히 청해서 악단이 세레나데까지 연주했으니까." "아직 안 끝났어요?" 다시 이멜다가 나타났다. "우린 아침도 못 먹었어요. 빨리 끝내줄 수 없어요?" 이멜다가 속눈썹을 곧추세우며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캐빈은 이 여자의 뻔뻔스런 낯짝을 한 대 후려갈기고 싶음 마음을 꾹 내리눌렀다. 로이가 말했다. "헤르메스로 가서 확인해 보세요. 앤디에게 물어보면 알 겁니다. 이제 됐습니까?" "예. 됐습니다." "그만 가주세요!" 이멜다가 캐빈을 떠밀면서 재빨리 문을 닫았고, 두 사람의 코 앞에서 쾅, 소리를 내며 문 이 닫혔다. 아파트를 나서며 캐빈이 웅얼거렸다. "망할 연놈들! 정말 밥맛 없는 치들이야. 저런 것들하고 같은 하늘 아래서 숨쉬고 산다는 게 부끄럽다구." 그들은 길목에 주차해 둔 올즈모빌에 올라탔다. 그리고 로이와 이멜다의 알리바이를 확인 하기 위해 헤르메스라는 식당으로 향했다. 8 집시퀸스 '헤르메스'는 켄싱턴에 있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는데, 흰색 2층 벽체 에 붉은 기와를 얹은 남프랑스풍의 아름다운 건물 앞은 고운 잔디로 단장된 널따란 정원이 었다. 정원엔 네 그루의 야자수가 서 있었다. 캐빈과 우 형사가 들어섰을 때, 잔디 위에서 거닐던 공작 두 마리가 우아한 자태로 다가와 그들을 멀뚱히 올려다보았다. "저리 꺼져, 이 녀석들아!" 캐빈이 공작에게 주먹질을 했다. 공작이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며 부리나케 도망치는 모습 이 우스꽝스러웠다. 로버트는 캐빈이 이멜다에게 당한 분풀이를 엉뚱한 데 해대는 것처럼 여겨져 웃음이 나왔다. 때마침, 저녁 시간이어서 식당 안은 손님들로 가득했다. 세련된 유니폼을 입은 종업원들이 분주히 오가는 모습도 보였다. 두 사람이 들어갔을 때, 지배인으로 보이는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가 공손한 태도로 다가왔다. "예약하셨습니까?" 캐빈이 대답 대신 신분증을 꺼내보이며 물었다. "앤디라는 웨이터가 누굽니까?" "아, 앤디요?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지배인이 두리번거리더니, 빨간 조끼 차림에 나비 넥타이를 매고, 분주히 서빙을 하고 있 던 젊은이를 불렀다. 그가 다가왔다. 짧은 금발에 키가 후리후리한 20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캐빈이 물었다. "로이 헵번이 여기 멤버쉽 회원인가?" "그렇습니다만." "최근에 온 게 언제였나?" "이틀 전에 오셨더랬습니다." "혼자 왔나? 아니면, 누구와 같이 왔나?" "여자 분과 함께 오셨죠." "어떤 여잔가?" "이멜다 베이시 양이었습니다." 앤디는 별로 망설이거나 생각하는 기색도 없이 응답했다. 너무도 즉각적인 대꾸여서 우 형사는 도리어 의심이 들었다. 혹시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로이가 미리 전화를 걸어 입을 맞춘 것이나 아닐까? "자네 말야, 어떻게 동행한 여자 이름까지 일일이 기억하지?" "제가 로이 씨 담당이거든요." "자네 담당 손님은 데이트 상대 여성 이름까지 기억해 두나?" "그럼요.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지만, 로이 씨는 수시로 데이트 상대가 바뀌는 편 입니다. 이틀 전에 함께 온 이멜다란 여자분은 자그마하고 섹시한 분이셨죠. 두 분은 9시경 에 도착해서 풀코스 정식요리를 주문하셨고, 제가 직접 테이블 서빙을 맡았거든요." "두 사람은 몇 시까지 있었나?" "풀코스 식사만 어림잡아 두 시간 걸리는데, 식사 후엔 저쪽에 딸린 플로어로 자리를 옮 기셨습니다. 매주 금요일 자정부터 새벽 2시까지 저희 식당에서는 스페셜 무대가 열리거든 요. 두 분은 그날 공연이 끝날 때까지 계시다 떠나셨습니다." "그럼 새벽 2시까지 여기 있었단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떠나실 땐, 보관함에서 여자 분 코트를 가져다드리고 제가 배 웅했죠." 그때였다. 홀 한쪽 편에서 요란한 박수가 들려왔다. 그리고 중세풍의 집시 복장을 한 4인조 악단이 무대에 등장해 손님을 향해 인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앞엔 치렁치렁한 치마에 검은 머리의 여인이 환상적인 스포트라이트를 온몸으로 받으며 서있었다. 실내의 조명은 약간 어둡게 바뀌었다. 빠르게 튕겨대는 플라멩코 기타 연주를 들으며 로버트가 물었다. "저 사람들, 집시인가?" "그렇습니다. '집시퀸스'라는 그룹입니다." "이 식당 전속인가?" "계약직인데, 이달 말까지 공연하기로 했죠. 상당히 솜씨가 뛰어나서 손님들에게 인기가 굉장합니다." 플라멩코 기타 연주의 뒤를 이어, 만돌린과 캐스터네츠의 엇박자가 뒤따랐다. 정열과 기교 가 넘치는 음악이었다. 플로어의 아름다운 집시 여인이 화려한 카덴차풍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두 팔을 들어올리고 약간 흐느적거리는 듯한 매우 고혹적인 몸놀림이 었다. 기타 연주자는 길게 울려퍼지는 메아리 같은 창법으로 노래를 불러댔다. 까미난또 뽈라 깔레, 까미난또 뽈라 깔레... 라라라라라! 랄라라 리루랄라, 리룰룰루 라리 라니라! 니나! 니나...! 경쾌하고 빠른 곡조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음울함이 배어 있는 노래였다. 마치 텅 빈 허 공에서 소용돌이치는 바람 같달까. 신기에 가까운 기타 연주와 함께 듣는 이의 가슴 속을 뒤흔드는 노래였다. "저 사람들은 언제부터 여기서 일했지?" "보름 정도 됐습니다." "그 전에는?" "그 전엔 남프랑스에서 활동했다고 하더군요." 웨이터 앤디는 계속되는 질문에 약간 귀찮아하는 기색을 보였다. 로버트는 다시 악단 쪽 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시야의 집시 의상을 입은 늙은 노파 한 사람이 테이블 사이를 지 나는 모습이 보였다. 집시 노파는 손님의 테이블에 앉더니 소매 속에서 카드 한 벌을 꺼냈 다. 그리고 손님과 뭐라고 대화를 나누며, 손에 들고 있는 카드를 한 장씩 테이블 위에 놓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다시 우 형사가 물었다. "저 노파는 누구지?" "아, 카르멜라 할머니 말이군요? 집시 카드 점을 쳐주는 겁니다." "집시 카드 점을 쳐준다고? 타로 카드 점 말인가?" "맞아요. 타로 카드. 귀부인들이 아주 좋아한답니다." 우 형사와 캐빈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두 사람 모두 마음속으로 똑같은 느낌이 스 쳐갔던 것이다. 세 건의 연쇄살인사건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지만, 왠지 이상한 직감 같은 것이 작용했던 것이다. "저 노파를 좀 불러주겠나?" "왜요? 형사님들도 운세를 보시려고요?" "아무튼, 잠깐 와보라고 해." 앤디가 그쪽 테이블로 가서 집시 노파에게 말을 전했다. 그러자 노파가 얘기를 중단하고 고개를 돌려 우 형사와 캐빈이 있는 쪽을 흘끗 쳐다보더니, 앤디에게 뭐라고 말했다. 잠시 후, 앤디가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되돌아와서 우 형사에게 말했다. "지금은 안 오겠답니다." "뭐? 안 오겠다고?" "예, 형사님은 곧 다시 올 거랍니다. 어여쁜 아가씨를 동반하고 오시면, 그때 점을 봐드리 겠다고 하는군요." "무슨 소리야?" "글쎄요? 카르멜라 할머니에게 들은 대로 저는 전하는 것뿐입니다." 앤디가 말했다. 우 형사는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점을 봐주기 싫어 핑계를 대는가 보군." 캐빈이 로버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그만 가자구. 예쁜 아가씨를 데리고 오게. 그럼, 점을 봐준다니까." 우 형사는 별수없이 캐빈을 따라 현관을 나섰다. "내 생각엔 역시 번즈란 녀석이 의심스러워." 캐빈이 담뱃갑을 꺼내 담배를 입에 물며 중얼거렸다. 아무튼, 로이 헵번의 알리바이는 확 인된 셈이었다. 용의선상에서, 로이 헵번과 에드워드 던컨이 떨어져 나감으로써, 결과적으로 레인 번즈에 대한 혐의가 그만큼 짙어진 셈이었다. 최초의 사건이 발생한 지 열흘이 지난, 10월 9일까지도, 이 사건은 거의 진척되지 못했다 는 말이 옳을 것이다. 그 사이, 피살당한 세 구의 시체는 부검을 마쳤고, 주변 인물에 대한 조사도 어느 정도 진행됐지만, 이렇다 할 단서조차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의미한 시간 이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피살된 세 명의 여성은 외면적으로는 한 가지 점에서 분명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세 사람 모두 금발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제외하고는 이 세 사람을 연관지을 만한 어 떤 유사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첫 번째 피살자인 사라 벨은 거리에서 남성들을 유혹해, 그날그날 먹고 사는 매춘부였다. 두 번째 피살자인 케이트 헤밀턴은 브리티시 에어라인의 젊은 스튜어디스였고, 세 번째 피 살자인 모니카 비숍은 국영방송국의 여성 앵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직업만큼이나 천차만 별인 세계에서 살아왔고, 따라서 이들이 생애의 어느 지점에서 서로 알았거나, 마주쳤을 가 능성은 없었던 것으로 쉽사리 추측해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이들을 묶고 있는 공통점은, 금발 여인이라는 외모상의 단순한 특징과, 비 오는 날 자정을 전후한 시각에 어딘가로 끌려가 살해당한 뒤 카드를 입에 문 채 피살체로 발견되 었다는 매우 추상적인 한 가닥의 끈이 있을 뿐이었다. 서로 관련이 없는 세명의 피살자가 발생한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는 것은 마치 각기 다른 세 편의 영화를 관람하고, 거기서 하나의 공통된 주제를 찾아내려는 시도만큼이나 곤란하고 힘겹기까지 한 일이었다. 도대체 '타로 카드 살인범'은 누구일까? 어째서 여인을 죽인 뒤에 입 속에 타로 카드를 집어넣는 것일까? 이 해괴하고 엽기적인 행위에는 어떤 동기가 숨어 있을까? 도무지 실마리를 찾을 수 없는 난해한 퍼즐과도 같았다. 이렇게 수사가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신문들은 앞을 다퉈가며 경찰의 무능을 매섭게 질타하는 사설을 게재하고 있었다. 경찰은 도대체 뭘하고 있는 건가? 벌써 한 주 사이에 세 명의 선량한 여인이 피살당했다. 그것도 아주 잔혹하고 끔찍한 방법으로, 그런대도 경찰은 아직 이렇다 할 단서조차 못 잡고 있다. 도대체 런던 시내를 공포에 떨게 하는 이 악랄한 '타로 카드 연쇄살인범'을 왜 못 잡 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해 볼 수 있다. 예전에 비해, 전체적으로 경찰의 사 명감이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 경찰은 타성에 젖은 무사안일주의에 젖어 시민의 혈세 로 마련된 봉급을 축내고 있지나 않은지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안 이한 사고와 고답적인 수사방법의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루가 다 르게 발달하는 범죄수법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모두는 경찰의 본분인 시 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도외시하는 결과로 귀착되고 말 것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타로 카드 살인범'은 다음 희생자를 노리며 런던 시내를 버젓이 활보하고 있을 것 이다. 마치 경찰의 무능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경찰의 각성을 촉구하는 뜻에서 몇 자기 고언을 제시하는 바이다. 첫째... "망할 놈의 신문 같으니!" 캐빈은 비에 젖은 신문지 같은 맛을 내는 구내식당 토스트를 억지로 뱃속에 쑤셔넣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읽고 있던 석간신문을 집어던졌다. 그 신문은, 묵묵하게 앉아 빵에 꼼꼼히 버터를 바르고 있던 로버트의 버터 접시에 떨어졌다. 로버트는 잠자코 접시에 떨어진 신문을 집어서 옆으로 치웠다. 캐빈이 그처럼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전날 오후, 린치 경감에게 불려가 호된 질 책을 들었던 것이다. "기한은 앞으로 열흘이야. 그 안에 해결하지 못한다면 자네들 둘다 좌천시켜 버리겠어. 버 밍엄이든 어디든, 벽촌으로 쫓아버릴 거란 말일세. 하늘에 두고 맹세하지. 내 직권을 다 동 원해서라도 반드시 그렇게 하고 말겠어. 자, 어쩔 텐가? 범인을 잡아서 멋지게 승진하고, 스 코틀랜드 야드의 영웅이 될 텐가, 아니면 무능한 경찰로 낙인 찍혀 시골 촌구석에서 좀도둑 이나 잡으며 세월을 보낼 텐가?" 린치 경감 또한 자신이 청장에게 당한 질책을 이런 식으로 부하들에게 퍼부었던 것이다. 로버트는 버터 바른 빵을 한입 베어물며, 창 밖으로 무심한 눈길을 던졌다. 이제, 유럽에 는 서서히 겨울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구내식당 창 밖으로 출근하는 형사들의 모습이 보였 다. 모두들 두터운 버버리 코트에 고개를 푹 묻은 채, 종종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 한결 을씨년스러운 정취를 자극했다. "또 호출이군!" 그때, 캐빈이 허리춤에 달고 있는 무선호출기 액정판을 들여다보며, 투덜거렸다. "로버트, 경감이 부르는데, 가보자구." 캐빈이 짜증난다는 듯 에스프레소를 한입에 털어넣고 일어섰다. 로버트도 정성껏 버터를 발라 이제 겨우 한입 베어문 빵을 그대로 접시에 놓아둔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9 사보이호텔 704호 "당신 정말 나를 출세시켜 줄 수 있어요?" "왜 내 말을 못 믿는 거야? 내가 누군 줄 몰라?" "알아요. 하지만, 그저 재미만 보고 입 싹 닦을까봐 걱정돼서 하는 말이에요." "그런 걱정 집어치우고, 어서 옷이나 벗어." "알았어요." 메리 스미스는 들고 있던 핸드백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을 등뒤로 돌려, 입고 있던 원피 스의 후크를 열었다. 그녀의 주황색 원피스는 몸에 찰싹 달라붙는 것이었다. 그녀는 마치 뱀 이 허물을 벗는 것처럼 이리저리 엉덩이를 뒤틀어 가까스로 원피스를 벗었다. "보지 마세요. 부끄러워요." 메리가 브래지어를 벗으며 말했다. 그녀의 젖가슴은 아주 크고 풍만했다. 레인 번즈는 술 병을 쥔 채, 탐욕스런 눈길로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보지 마세요. 부끄러워요.' 라고? 이 계집은 남자 앞에서 옷을 벗을 때마다 '보지 마세요. 부끄러워요.'라는 말을 했을 게 틀림없어!... 그는 웃으며 생각했다. 사실상 메리는 브래지어를 훌렁 벗어던지면서도 조금 도 부끄러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레인 번즈는 방금 술을 상당히 마신 상태로 그녀와 함께 이곳 사보이 호텔 704호실로 들 어왔다. 메리 역시 취한 상태였다. 그녀는 26세로, BBC 방송국의 풋내기 아나운서였다. 모 니카 비숍이 피살된 후, 비어 있는 저녁 뉴스 앵커 자리를 노리는 수많은 암괭이들 중의 하 나였다. 모니카의 자리는 당분간 남자 앵커가 대신하고 있었지만, 임시적인 것이었다. 따라 서 방송국 내의 여자 아나운서들의 경쟁은 피를 튀길 만큼 자못 치열했다. 메리가 담배를 꺼내물며 물었다. "위에선 무슨 얘기들을 해요? 누가 모니카 뒤를 이을 건지, 아직 결정되지 않았나요?" "아직 결정 못했어." "물망에 오른 건, 누구누구죠?" "조너선, 레베카, 아일린, 그리고 당신이야." "당신 생각은 어때요? 그 애들보다 내가 낫지 않아요?" "내 생각도 그래." "국장한테 나를 추천해 주실거죠?" "물론이지." 레인 번즈는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차근차근 그녀의 몸매를 뜯어보았다. 머리 위에 걸린 전등 불빛이 그녀의 농익은 육체를 더욱 빛내주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얇은 흰 색 팬티 이외에는 아무것도 몸에 걸치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사타구니 사이의 손바닥만한 부위를 가릴 뿐인 아주 조그맣고 앙중맞은 헝겊조각이었다. 겉보기보다도 훨씬 풍만한 몸매 였다. 이거야말로 진짜 성숙한 여자의 육체로군. 남자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완전히 성숙한 육체야... 그는 기대감 때문에 후끈 몸이 달아올랐다. 벌써부터 아랫도리가 충일해지는 감각 을 느꼈다. 저 몸뚱이 속으로 진입해 들어간다는 생각만으로도 금방 아찔한 황홀감이 엄습 했던 것이다. 그런 감정을 한층 자극하듯, 메리가 살랑살랑 엉덩이를 흔들며 자신의 몸매를 한껏 과시 했다. "내 몸매 괜찮지요?" "음, 멋지군." "그런 말 많이 들었어요." 역시 부끄럽다는 말은 빈말이었다. 그녀는 부끄러움 따위는 조금도 느끼지 않는 눈치였다. 팬티를 벗는 것도 능숙해서, 마치 물 흐르듯 우아한 동작으로 얇은 팬티를 벗어던졌다. 그러 더니 담뱃불을 붙여 입에 물고. 그녀는 침대로 걸어가 훌렁 몸을 눕혔다. 침대 역시 늘상 이 런 일엔 익숙하다는 듯 출렁이면서 그녀의 몸을 가볍게 받아 안았다. "구경만 할 셈이에요?" 메리가 한 손에 담배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까만 음모로 뒤덮인 부위를 문지르며 유 혹해 왔다. 레인 번즈는 술병을 내려놓고, 성급히 허리띠를 풀었다. 지퍼를 내린 다음, 바지를 훌렁 벗어던졌다. 그리고 푹신푹신한 침대에 놓여 있는 탐스러운 먹이를 향해 몸을 던졌다. "당신, 정말 나 출세시켜 줄 거지요?" "그런다고 했잖아." "정말이죠? 욕심만 채우고 입 싹 닦을 생각은 아니지요?" "왜 이래? 속고만 살았나?" 레인 번즈는 메리의 손에서 담배를 뺏아 재떨이에 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풍만한 몸뚱이 를 끌어안으며 침대 위로 나뒹굴었다. 그는 메리의 젖가슴을 한참 동안 빨고 더듬다, 이번엔 허리를 잡아서 돌려세웠다. 그리고 자신의 페니스에 침을 듬뿍 바른 다른, 그녀의 엉덩이에 두 손을 대고 항문을 힘껏 벌렸다. 페니스를 집어넣자, 그녀는 소스라칠 듯 놀라며 몸을 뿌리쳤다. 번즈는 그녀의 허리를 꽉 잡 아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왜 이래요? 당신, 잘못 넣었다구요! 거기가 아니예요." "제대로 넣은 거야!" "당신, 이제 보니 변태군요! 아파요, 아파 죽겠단 말예요!" "잠자코 있지 못하겠어?" 번즈는 에널 섹스를 시작했다. 메리는 처음엔 약간 저항하는 듯 했으나, 이내 태도를 바꾸 어 그의 요구에 따랐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그 정도 수모쯤은 충분히 감수하겠다는 의 지의 표시였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녁 뉴스의 앵커 자리를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 이라도 하겠다는 것이 그녀의 각오였다. 결정권을 가진 자들을 차례로 만나서 육체를 미끼 로 설득할 작정이었다. 레인 번즈는 바로 그 첫 번째 상대였다. 10분 후, 레인 번즈는 숨을 깊게 몰아쉬며, 메리의 몸에서 떨어졌다. 그는 침대에 엎드린 채 숨을 헐떡이고 있는 메리를 두고 손가방을 집어들고, 욕실로 들어 갔다. 그리고 욕실에서 거울 앞에 섰다. 술과 격렬한 섹스로 인해 벌겋게 상기된 얼굴이 비 쳤다. '재미난 게임은 이제부터야!' 레인 번즈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들고 있던 손가방을 열고, 그 안에 든 물건들을 세면대 위에 쏟아냈다. 예리한 칼과 두꺼운 면 테이프, 흰 가루가 든 조그만 비닐봉지, 그리고 타로 카드 한 벌이 나왔다. 그것 을 집어드는 그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그는 우선 비닐봉지를 열었다. 그 안에 든 흰 가루를 손바닥에 쏟아 그것을 콧구멍에 대 고 깊이 들이켰다. 그는 같은 식으로 몇 번이나 마약을 흡입했다. 이제 손바닥엔 약간의 가 루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레인 번즈는 손바닥에 묻은 가루룰 털어버리고 나서, 칼과 테이프를 든 채로 욕실에서 나 왔다. 여전히 메리는 침대에 엎드린 채, 가쁜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 그가 나오 는 기척을 듣고 생긋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이내 그녀의 눈동자가 커진 것은 물론 이다. 그녀는 번즈가 손에 번쩍이는 칼을 쥐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소리쳤다. "그 칼 뭐예요? 왜 칼을 가지고 그래요!" "시끄러워! 얌전히 굴어!" 번즈는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그리고 메리를 침대에 거칠게 밀어뜨린 뒤, 몸뚱이를 깔아 뭉개며, 그 위에 올라탔다. "무슨 짓이죠! 당신, 나를 죽일 작정이에요?" 그녀는 시끄럽게 비명을 질러댔다. 그는 그녀를 계속 때렸고, 그녀 역시 격렬히 몸부림치 며 계속 비명을 질러댔다. "조용히 하라구! 그렇지 않으면, 더 지독한 맛을 보게 될 테니까!" "뭐든지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죽이지만 말아줘요!" 번즈는 그녀의 두 손을 뒤로 돌려 손목에 접착 테이프를 붙였다. 그리고 입도 접착 테이 프로 봉했다. 그 다음 도망치지 못하도록 발목까지 몇 겹이나 테이프를 돌려감았다. 이제 그녀는 끈에 묶인 돼지처럼 꼼짝못한 채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번즈의 다음 행동 을 지켜보는 눈빛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번즈는 술병을 집어들고, 다시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런 다음, 남은 술을 메리의 머리 위에 쫙 쏟아버리고, 욕실로 들어가 다시 헤로인 가루를 꺼내 콧구멍에 대고 깊이 들이마셨다. 그는 점점 더 스릴을 느꼈다. 다시 가방을 열고, 그 속에 들어 있는 타로 카드 한 벌을 끄집어냈다. 그는 카드들을 재빨리 펼쳐보며 마음에 드 는 것 한 장을 골라냈다. '커다란 낫을 든 해골'이 그려진 카드였다. 그 카드가 마음에 들었 다. '그래. 이걸 저년 입 속에 처넣어야지!' 그는 해골이 그려진 카드를 쥐고, 비척비척 욕실에서 나왔다. 그의 손에 타로 카드가 쥐어져 있는 것을 본 메리의 얼굴엔 한층 더 격심한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번즈는 메리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고개를 꺾은 뒤, 나이프를 왼손으로 옮겨들고 오른손에 쥔 칼을 그녀의 목에 들이댔다. "입 벌려!" 입에 붙인 테이프를 확 잡아떼며 번즈가 명령했다. "뭐라구요?" "입을 벌리라고 했어!" "당신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이제 보니, 모니카를 죽인 범인은... 바, 바로 당신 이었군요!"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 내가 모니카를 죽였어!" 레인 번즈가 음산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당신 나를 죽일 작정인가요? 그 카드를 내 입에 넣을 작정인가요?" 그녀가 거칠게, 미친 듯이 항의했다. "그냥 재미만 보는 걸로 알았다구요! 이런 이상한 짓을 할 줄은 몰랐단 말예요!" "이게 재미있는 거라구!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렇지 않으면 네년을 발기발기 찢어발겨 버릴 테니까!" "제발, 살려줘요!" "입닥치지 못하겠어!" "부탁이에요. 나더러 어떡하라는 거예요? 나를 돌려보내 달란 말예요!" 그녀는 흐느낌으로 목이 꽉꽉 막히면서 숨가쁘게 애원했다. 공포에 질려 훌쩍거리며 우는 모습이 번즈에겐 꼴사나워 보였다. "더러운 암괭이 같으니! 저항에 봤자 소용없어. 넌, 내 먹이라구! 어서 입 벌려! 이걸 입에 물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란 말야!" 그는 메리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카드를 쑤셔넣으려고 했다. 순간, 그녀의 이빨이 그의 손가락을 힘껏 깨물었다. 번즈는 비명을 지르며 얼른 손을 빼냈 다. "이런 우라질 년이!" 손가락에서 피가 흘렀다. 번즈는 손가락을 움켜쥔 채, 아픔을 참느라 이를 악물었다. 깨물 린 손가락이 쿡쿡 쑤셔댔다. 손가락에는 이빨 자국이 선명했다. 그 사이, 테이프를 찢어낸 메리는 두 손이 자유롭게 되자, 재빨리 발목에 붙인 테이프도 뜯어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번즈가 달려드는 순간, 그녀는 히스테릭한 분노의 괴성을 내지르며 번즈에게 달려들어 손톱 으로 그의 얼굴을 할퀴었다. "아이쿠!" 번즈가 얼굴을 감싸쥐고 바닥에 나뒹구는 사이, 메리는 침대에서 발딱 일어나 문을 향해 달려갔다. 그녀는 문을 쿵쿵 두드리며 필사적으로 손잡이를 돌리려고 했다. 번즈가 일어섰 다. 단숨에 달려가서 머리채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을 때, 문이 왈칵 열리면서 메리는 밖으로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사람 살려! 누구 없어요, 사람 살려요!" 메리는 알몸으로 복도를 달려가며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댔다. 번즈 역시 미친 듯 이 그녀를 잡으려고 쫓아갔다. 메리는 마구 비명을 질러댔고, 번즈는 페니스를 덜렁덜렁거리 며 악착같이 쫓아갔다. 그는 마약에 취해, 자신이 아랫도리를 입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까맣 게 잊은 채였다. "이 망할 계집!" 마침내, 그는 계단참에서 메리를 잡았다. 그는 세차게 머리칼을 낚아채어 잡아당겼다. 메 리가 기우뚱 바닥으로 고꾸라지며 단말마의 비명을 질러댔다. "아악, 사람 살려!" 약 기운에 취해 번즈는 차츰 현실과 공상을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녀의 입에 타로 카드를 쑤셔넣고 싶었다. 그래서 강제로 손가락으로 입을 벌리고, 카드를 입속에 쑤셔넣었다. 그녀는 더욱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고, 온몸을 비틀어대 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마침, 그때 룸서비스를 하려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호텔 종업원이 이 장면을 목격했다. 그는 처음엔 단순한 남녀의 승강이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남자가 자꾸만 여 자의 입 속에 무언가를 쑤셔넣으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것은 타로 카드엿 다. 그도 신문을 보아 연쇄살인사건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순간, 놀란 호텔 종업원은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다 홱 몸을 돌린 다음, 재빨리 빈 객실로 들어가 호텔 내의 구내 전화를 집어들었다. 캐빈과 우 형사가 도착했을 때, 호텔 이미지 보호를 위해 비밀리에 신고를 한 탓인지 호 텔은 예상외로 조용했다. 지배인이 재빨리 뛰어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두 사람은 지배인에게 서 상황 설명을 들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분명히 여자 입에 타로 카드를 집어놓는 걸 목격했단 말이죠?" "그렇습니다. 제가 본 게 아니라, 우리 종업원이 똑똑히 목격했다고 합니다." 지배인은 열심히 사정을 설명했다. 그들은 7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린 후, 복도를 지나 곧 704호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 방입니다." 지배인이 문을 여는 순간, 여자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아니, 저 자가 누구지? 레인 번즈 아냐?" 막, 방으로 들어서던 캐빈이 셔츠 한 장만을 걸친 채, 아랫도리를 그대로 내놓고 의자에 묶여 있는 번즈를 보고 소리쳤다. 그는 미치광이처럼 머리를 산발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혀 져 등뒤로 손이 묶인 채 끊임없이 욕설을 퍼부어대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제 정신이 아니었 다. 곁에서는 두 명의 경찰관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 여자가 피해자입니까?" "그렇습니다. 등을 칼로 찔려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메리는 알몸으로 침대에 엎드린 자세였는데, 호텔 의사의 응급치료를 받으며, 끊임없이 이 상한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주변엔 남녀의 속옷과 옷가지가 널려 있고, 여기저기 핏방울 이 떨어져 있는 가운데, 범행에 사용된 칼과 뜯어낸 테이프와 타로 카드와 술병이 뒹굴고 있었다. 우 형사의 시선은 침대에 누워 있는 메리의 알몸에 머물렀다. "부상이 심합니까?" 그가 의사에게 물었다. "등을 칼로 찔렸는데, 그다지 심한 상태는 아닙니다." 의사가 대답했다. 메리가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금발은 마구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말이 아니었다. "당신, 형사님인가요?" 그녀가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저 자식은 살인마예요. 나를 죽이려고 했다고요!" "저 자가 당신에게 어떤 짓을 했는데요?" "칼을 들이대고, 협박했어요. 내 입을 강제로 벌리게 하더니, 저 미친 놈이 카드를, 끔찍한 그림이 그려진 카드를 내 입 속에 쑤셔넣으려고 했단 말예요! 저놈은 자기가 연쇄살인범이 라고 그랬어요. 모니카를 죽인 것도 자기 짓이라고 그랬다구요!" "모니카 비숍을 살해한 게 자기라고 했단 말입니까?" "틀림없어요.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니까요!" 그때, 레인 번즈가 짐승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모니카! 모니카!" 그는 완전히 제 정신이 아니었다. 캐빈이 번즈에게 물었다. "이봐, 번즈, 내가 누군 줄 아나?" 번즈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누구지?" "런던 경시청 캐빈 형사야. 지난번에 봤잖아? 생각 안 나?" "내가 너 같은 개자식을 알 게 뭐야?" "그래? 아무튼, 난 당신을 다시 보게 될 줄 알았지. 그런데 이렇게 빨리 보게 될 줄은 몰 랐어. 게다가 아랫도리도 입지 않은 꼴로 대면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번즈의 아랫도리로 향하던 캐빈의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입에서는 짧고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새어나왔다. "히야, 자네 물건 끝내주게 크구만!" BBC 프로듀서 레인 번즈! 방송인 메리 스미스 살인미수 혐의로 수감! 경찰, '타로 카드 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BBC 프로듀서 레인 번즈 체포! 모니카 비숍의 전 남편 레인 번즈, 살인미수 혐의로 체포! 다음날, 조간신문은 온통 레인 번즈의 살인미수 사건에 대한 기사로 채워졌다. <더 타임 즈>가 이 사건을 제일 먼저 보도했고, 오후부터는 TV도 정규방송을 중단하며 이 사건을 보도했다. 체포 당시, 레인 번즈는 마약에 취한 상태였는데, 일단 경찰병원으로 옮겨져 엄중한 감호 를 받았다. 처음 몇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의 머리를 벽에 마구 부딪치며 광란적인 자해 소동 을 벌였으나, 나중엔 기진맥진해져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심문은 다음날 오후 2시경, 경찰병원 감호실에서 행해졌다. 번즈는 어느 정도 원기를 회복한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의식은 혼탁한 상태였다. 그는 의 자에 앉아 불빛이 너무 강하기라도 한 듯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정식 조서를 꾸미는 자리 여서, 그 자리엔 노트북 컴퓨터를 사용하는 경찰관이 동석했다. 질문은 주로 캐빈이 했고, 우 형사는 옆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번즈 씨, 당신 어제 메리 스미스에게 한 짓이 생각납니까?" 캐빈의 첫 질문에 번즈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도로 미루어 그가 자신의 행위를 알고 있다는 인상이 들었다.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말해 보지 그래요?" 번즈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자신의 혐의점을 완강히 부인하기 시작했다. "메리에게 그렇게 한 건 순전히 마약 때문이었소. 그녀를 정말로 죽일 작정으로 그런 건 아니란 말이오." "정말로 죽일 작정이 아니었다구? 그럼, 당신이 가지고 있던 칼은 뭐요? 또 그녀를 결박 할 때 사용한 테이프는 뭐지?" 캐빈이 날카롭게 물었다. 번즈는 자꾸만 얼굴을 씰룩거렸다. 메리가 할퀸 얼굴의 상처가 쑤셔서인 듯했는데, 한참을 그러고 나서야,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건, 흥분을 느끼기 위해 준비한 소도구에 불과해요. 난, 좀더 강렬한 자극을 원했을 뿐 이오. 여자를 묶어서 꼼짝 못하게 해놓고 즐기려 했던 것뿐이란 말이오." "당신은 여자를 묶어놓고 칼로 등을 찔러야 흥분하나? 그래야 발기가 된단 말인가?" "내 말을 믿지 않는군!" "이봐, 번즈. 거짓말은 하지 말라고. 이미, 당신은 현행범으로 체포된 몸이야. 우린 그 동 안 당신이 저지른 일을 낱낱이 알고 있다고." "내가 저지른 일이라니?" "당신, 사라 벨을 알지?" "사라 벨? 아니, 몰라." "케이트 해밀턴은?" "나는 모르는 여자요!" "그럼, 모니카 비숍은?" "..." "설마 모니카 비숍도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 "대답해 보지 그래?" "나를 놀릴 셈이군!" "모니카 비숍을 안다는 뜻인가?" "물론이지. 이혼했지만, 이름까지 잊은 건 아니니까. 어떻게 모니카를 잊어? 나하고는 5년 동안 살을 맞대고 살아온 여잔데!" "모니카 비숍을 안다고? 그럼, 마찬가지로 사라 벨도 알고, 케이트 해밀턴도 알 텐데?" "그 여자들은 모른다고! 모른다는데, 왜 그러는 거야!" 드디어, 레인 번즈가 벌컥 화를 냈다. "이봐, 시침 떼는 건 그만 둬. 이 여자들은 모두 당신이 살해한 여자들이라고. 이름은 모 를 수도 있겠지만, 얼굴까지 모른다고는 하지 못할걸?" 캐빈은 사라 벨과 케이트 해밀턴, 그리고 모니카 비숍의 사진을 그가 잘 볼 수 있도록 펼 쳐놓았다. "이 여자들은 모두 당신이 죽인 여자들이라고! 그중엔 당신의 전부인도 포함되어 있고 말 이야. 똑바로 보라고! 기억을 되살리면, 전부 생각날 거야." 번즈는 두 손바닥을 펼치더니 얼굴을 묻었다.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당신들, 나를 연쇄살인범으로 옭아넣을 작정이로군. 난, 아니야. 내가 죽인 게 아니라구!" "그럼, 메리 스미스의 입 속에 타로 카드를 쑤셔넣은 이유가 뭔지 말해 주겠어?" 캐빈의 냉혹한 질문에 번즈는 순간, 말을 잊었다. "역시 대답을 못하는군. 하긴 어떤 식으로도 변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할 말이 없겠지. 그 럼, 다음 질문을 하지. 마약에 손을 댄 건 언제부터였나?" "모니카와 헤어진 직후부터." "그게 언젠데?" "반 년쯤 됐소." "그 전엔 하지 않았단 말인가?" "하지 않았소. 마약을 하게 된 건, 그녀와 이혼하고 나서, 계속 얼굴을 마주치는 게 괴로 웠기 때문이었어. 게다가, 모니카에겐 끊임없이 스캔들이 따라다녔고, 그때마다 난 질투를 견딜 수가 없었지. 그래서 손을 댄 거요." "메리 스미스는 어떻게 알게 됐어?" "같은 방송국에 근무하는 여자요." "처음 만난 게 언젠데?" "한두 달 되었을까? 그녀는 출세를 위해 몸부림치는 여자요. 모니카의 뒤를 이어 저녁 뉴 스 앵커가 되려고 바짝 몸이 달아 있었지. 결정은 윗사람들이 하지만, 내 의견도 참작되니 까, 나한테 접근했던 것이고, 몸을 주겠다고 접근해 오는 걸 마다할 이윤 없잖소? 그래서 만 났고, 간간이 즐겼소. 그게 전부요." "당신은 같은 방송국에 근무하는 여자는 누구나 침대로 데려갈 수 있나?" "아무렴, 당신 같은 경찰보다야 수월하지 않겠소?" 캐빈의 심문에 지지 않고, 레인 번즈 역시 빈정거렸다. "이봐, 번즈. 우리가 그 말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일 것 같나? 당신은 평소에 알콜중독자였 어. 게다가, 아내였던 모니카에게 증오감을 품고 있었지. 그래서 당신은 술에 만취한 상태에 서 아내에게 품은 증오심 때문에 사라 벨이란 창녀를 죽이게 된 거야. 한번 맛을 들인 뒤엔 또, 케이트 해밀턴을 죽였고 말야. 그러다 끝내는 진짜 목표인 모니카까지도 없애고 말았지. 그런데 이젠 여자를 죽이는 일이 아주 습관이 되어버렸단 말이야. 그래서 살인 충동을 가누 지 못해 메리 스미스까지 죽이려 했던 거야. 그렇지 않나?" 캐빈은 평소 용의자에게 하는 습관대로, 번즈에게도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번즈가 그의 얼굴에 퉤, 침을 뱉었다. "이런 개자식이!" 캐빈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버트가 재빨리 그를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 쇠 뭉치 같은 주먹으로 번즈의 얼굴을 사정없이 두들겨 팼을 터였다. 그는 분노를 참느라 씨근 덕거리며 당장 때려죽일 것처럼 번즈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 굴의 침을 닦으면서 치미는 분노를 억제했다. "이봐, 번즈, 난, 처음부터 네 놈 짓인 줄 알았어. 잡아떼도 소용 없다구. 내 손으로 반드 시 네 놈을 전기의자에 앉히고 말 테니까!" 캐빈이 얼굴을 씻기 위해 밖으로 나가고 난 후, 이번에는 로버트가 캐빈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담배를 꺼내 번즈에게 권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다른 질문은 접어두고, 한 가지만 묻겠소. 어째서 메리의 입에 타로 카드를 넣으려고 했 던 거죠?" "그 자를 흉내내고 싶어서." "그 자라면, 타로 카드 살인범을 말하는 겁니까?" "그렇소." "왜 그 자를 흉내내고 싶었던 겁니까?" 번즈는 다시 또 입을 다물었다. 방 안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에야, 번즈는 입을 열었다. "나는 모니카를 죽이고 싶었소. 그런데 누군가 다른 놈이 내 대신, 내가 하고 싶은 짓을 해버렸지. 나는 그 자의 기분이 어떨까 궁금했소. 그래서 그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고, 물론, 이런 생각이 옳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자꾸만 그 흉내를 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휘몰려 들어갔던 것이오. 왜냐하면, 모니카가 참혹한 모습으로 피살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그리움과 가련함에 눈물을 흘렸더랬소만, 차츰차츰, 내가 그녀를 똑같은 방법으로 죽이는 장 면을 자꾸만 상상하게 됐던 거요. 나는 그런 유혹과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욕망을 억제하기 가 어려웠소. 그래서 결국 모니카의 역을 연기할 대상을 궁리했는데, 마침 거기에 안성마춤 인 상대가 떠올랐소. 그녀가 바로 메리요. 나는 술을 엄청나게 마시고, 그 여자를 불러냈던 거라오!" "단순히 흉내를 내볼 작정이었다는 겁니까?" "그렇소. 정말 죽일 생각은 없었소!" 레인 번즈의 눈에 눈물이 고이며,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맹세코 말하지만, 정말 죽일 생각은 없었소! 게다가 타로 카드 살인범의 소행은 절대 내 짓이 아니란 말이오!" 번즈는 말을 마친 후,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긴장으로 굳어진 그의 뺨이 씰룩씰룩 경련 하고 있었다. 화이트 채플은 러시아에서 쫓겨온 유태인들이 많이 살던 런던 동부의 빈민가였다. 1888년, 런던 탑에서 가까운 이 지역에서는 8월 31일부터 11월 8일까지, 70일에 걸쳐 다섯 명의 여 자가 참혹한 방식으로 살해된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최초의 희생자는 메리 앤 니콜스라는 매춘부였다. 그녀는 8월 31일 금요일 오후 2시가 조금 넘어서 한 손님을 유인했는데, 박스라는 거리에 왔을 때 범인은 그녀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이어 칼을 목에 대고 목젖을 찌른 다음, 그 녀가 땅에 쓰러지자 힘껏 목을 잘랐다. 그리고 배 부위를 몇 군데나 일직선으로 깊이 내리 긋고 나서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두 번째 살인은 일주일 후인 9월 6일, 새벽 2시에 발생했다. 희생자는 애니 채프먼이라는 47세의 매춘부였다. 그녀는 방세를 치를 돈이 없어, 싸구려 여관에서 쫓겨나 손님을 유인하려고 헤매던 중에 27번가의 뒤뜰에서 범인을 만났다. 그곳은 첫 번째 살인이 자행된 장소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장소였다. 범인은 그녀의 머리 부분을 완전히 잘라내고, 목뼈까지 자르다가 목이 거의 떨어지게 되 었을 때, 마음이 바뀌었는지 손수건으로 목뼈를 묶어 붙여놓았다. 그리고 시체에서 빼낸 두 개의 구리반지를 동전 몇 개와 함께 그녀의 발 밑에 가지런히 놓아둔 채 사라졌다. 범행이 자행될 때, 이웃집 남자가 변소에 가려고 뒤뜰로 나왔다가 여자의 '제발, 제발...'하 는 소리와 다투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살인은 9월 30일, 하룻밤 새에 일어난 일이었다. 세 번째 희생자는 '키 다리 리즈'라고 알려진 매춘부로, 버너가 40번지 뒷골목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목에서는 아직도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네 번째 희생자인 케이트의 시체는 그 지점에서 걸어서 몇 분 안에 갈 수 있는 마이터 광장에서 발견되었고, 가장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케이스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1월 9일, 다시 또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25세의 매리 켈리는 검은 머리가 치렁치렁하고 약간 뚱뚱해 보이는 건강한 젊은 여자로, 이전의 피해자들에 비해 훨씬 예뻤다. 그녀는 비좁은 자기 방에서 팔다리가 절단된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핏물은 벽에까지 튀어 있었다. 범인은 당시 임신 중이었던 매리 켈리를 인간 이라고는 하기 어려운 꼴로 만들어놓았을 뿐 아니라, 배를 가르고 태아의 코와 귀까지 베어 냈다. 신출귀몰하는 이 정체불명의 잔혹한 살인마에게 이후 '잭 더 리퍼 JACK THE RIPPER (찢어죽이는 잭:역주)'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형사들은 첫 범행 후부터 계속 그를 추적했으나 결정적인 성과를 올리지 못했고, 칼잡이 잭은 단서를 거의 남기지 않은 채, 화이트 채플의 들끓는 사람 물결 속으로 종적을 감추곤 했던 것이다. 범인은 과연 누구인가? 어떻게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그처럼 짧은 시간에 그토록 참혹한 범행을 저지를 수가 있을까? 수백 명의 전문가들이 여러 가지로 추리를 해보았으나 아무도 수수께끼를 풀어내지 못했 다.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은 오직 잭 더 리퍼, 자신뿐이었다. 그러나 살인마 잭이 누구 였건 그의 무시무시한 비밀은 영원히 어둠 속에 파묻혀 버렸고, 그의 잔인한 범죄는 범행 후, 1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로버트 우 형사는 경시청 문서보관실에서 당시 런던 경시청 범죄 수사부장을 지낸 멜빌 맥내프턴의 수사기록을 네 시간에 걸쳐 꼼꼼히 살폈다. 캐빈은 레인 번즈를 범인으로 확신하고 그를 검찰에 송치시키기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 었지만, 로버트 우 형사는 캐빈의 움직임과는 별도로 자신의 추리를 전개해 왔다. 그가 특별히 '잭 더 리퍼' 사건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이번 사건과의 우연한 공통점 때문 이었다. 왠지 그는 이번 '타로 카드 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하면서 전설적인 살인마인 '잭 더 리퍼'를 연상하곤 했다. 이 두 가지 연쇄살인사건은 공교롭게도 런던 탑을 중심으로 발생했 다는 지역적인 일치점, 그리고 꼭 111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에 발생했다는 숫자적 마술성 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쩌면 피상적인 선입견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연쇄살인범은 '잭 더 리퍼' 말고도, 어느 시대, 그리고 세계 어디에나 존재했던 까닭이다. 아무튼, 우 형사는 이런 자료를 토대로, 역대 살인마들의 유사점 내지는 공통점을 세세히 메모해 나갔다. 어쩌면 그것이 '타로 카드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데 뜻하지 않은 단서를 제 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영국엔 잭 더 리퍼 말고도 고든 커밍즈라는 희대의 살인마가 있었고, 프랑스엔 조세프 바 셀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고히라 요시오와 오쿠보 기요시 사건이 있었고, 1964년에서 1967년 까지 3년 동안, 20명의 여인을 해치운 폴란드의 '빨간 거미' 루치안 스타니아크도 이 계보에 서 빼놓을 수 없다. 범죄학자들이 추출해 낸 이들 살인마의 공통점은 아래와 같은 것이었다. 첫째, 대개의 연쇄 살인범은 건장한 체격의 스포츠맨 타입으로, 평소에는 주위 사람들에게 호감을 살 만큼 친절하고 온순한 성격이다가 어느 순간, 놀라우리만큼 포악한 인물로 돌변 한다. 둘째, 위험할 정도로 성욕이 강한 자들이다. 셋째, 대개 여자로부터 실연당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그 옛 애인을 무섭도록 증오하는데, 묘하게도 피살자들의 옛 애인과 비슷한 외모를 지닌 경우가 많다. 넷째, 사고로 머리에 상처를 입은 적이 있을 수 있다. 다섯째, 범행 전에 최소 몇 주일부터 길게는 몇 년간 끊임없이 범행을 마음 속으로 상상 하는 버릇이 있다. 이들은 마치 발정난 개가 닭을 물어 죽이듯이, 충동적인 살인과 강간을 반복한다. 여섯째, 혼자 사는 독신 남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 형사는 이런 인물을 머리에 그리며 수첩에 적힌 '타로 카드 살인마'의 범행일지를 살펴 보았다. 첫 번째 사건 사라 벨 - 38세. 직업 : 매춘부. 9월 26일 새벽 2시경, 맨체스터 뒷골목에서 1미터 길이의 쇠사슬에 목이 졸린 시체로 발견됨. 영양상태가 열악한 마약중독자. 옷가지나 그 밖의 유류 품은 발견되지 않음. '염소뿔을 단 악마'가 그려진 타로 카드가 입에서 나왔음. 용의자로 동 거남인 듀크 카릴(50세)를 취조했으나 혐의점 없음. 수사 중. 두 번째 사건 케이트 해밀턴 - 23세. 직업 : 브리티시 에어라인의 스튜어디스. 9월 29일 새벽 3시경, 런 던 탑 방향의 타워 브리지 노상에서 추락사한 시체로 발견. 항공사 유니폼에 적갈색 캐시미 어 파카를 걸친 차림. '탑에서 추락하는 여자' 그림이 그려진 타로 카드가 입에서 나옴. 28일 오후 4시경. 히드로 공항에서 마약단속반 수사관 제임스 키딩에게 불심검문 당하던 중, 키딩 을 때리고 도주. 같은 날 5시경, 하이드 파크 근방에서 순찰 19호차 브라이언 순경에게 목격 됨. 29일 정오경 몽캄 호텔 뒤편 골목길에서 그녀의 빨간색 도요타 승용차 발견. 차 트렁크 엔 1킬로그램 가량의 헤로인이 실려 있었음. 수사 중. 세 번째 사건 모니카 비숍 - 40세. 직업 : BBC방송국 앵커. 9월 27일 밤 10시 반경. 방송국을 나간 후 실종됨. 28일 오후 4시경. 템즈 강변도로에서 그녀의 BMW 승용차 발견. 실종 이틀 후인 29 일 정오경. 화이트 클립 숲속에서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사체로 발견됨. 살해 시각은 대략 사체발견 시점으로부터 24시간 전후로 추정됨. 예리한 흉기로 경동맥이 잘린 상태였고, '교 수목에 거꾸로 매달린 사람'이 그려진 타로 카드가 입에서 나왔음. 용의자로 전 남편 레인 번즈와 현재 애인인 에드워드 던컨이 떠오름. 수사 중. 로버트 우 형사가 맥내프턴의 자료를 사서에게 반납하고, 문서보관실을 나온 것은 오후 6 시경이었다. 사무실은 스코틀랜드 야드 건물 3층에 있었는데, 사무실로 향하면서 그의 뇌리 속엔 한 가지 의문점이 맴돌았다. '잭 더 리퍼'가 날뛰던 당시는 빅토리아 시대였다. 런던의 이스트엔드는 영국의 얼굴에 돋 아난 곪은 상처와도 같아서, 거리엔 악취가 풍기고, 겹겹이 누추한 집들이 붐비고 있었고, 밤이 되면 골목길, 공터, 모퉁이들은 창문 밖으로 비치는 촛불이 미치지 못해 깜깜한 동굴이 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오막살이 집 안에서는 북적거리는 식구들이 조금이라도 장소를 더 차지하려고 아 우성이었으며, 집 밖에서는 남자, 여자, 어린애 할 것 없이 거리에서 비참한 밥벌이에 혈안 이 되어 있었기에, 범죄가 횡행하던 시대였던 것이다. 남자들은 하루의 노동으로 벌어들인 품삯으로 진 한 병을 사가지고, 곤드레가 되어 만사 를 잊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고, 여자들은 매춘 이외에는 달리 살아갈 길이 없었던 시대... 그리고 바로 이러한 가난과 비참의 도가니 속으로 살인마 잭이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같은 밤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다르지 않은가?' 거리엔 가로등 불빛이 대낮처럼 밝혀져 있다. 번화한 도심엔 낮과 밤의 구분 없이 밤늦도 록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그런데 무수한 불빛과 눈들이 지켜보는 이 도시의 한가운데서 끔 찍한 살인사건이, 그것도 연쇄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로버트로서는 도무지 납득되지 가 않았던 것이다. '범인은 대관절 어떤 놈일까?' 로버트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며 생각했다. '세 번의 살인을 저질렀다면, 아마도 놈은 지금 네 번째 범행을 구상하고 있을 게 틀림없 어.' 로버트가 들어섰을 때, 사무실에서는 레인 번즈를 '타로 카드 살인범'이라고 확신하는 캐 빈이 열심히 조서를 작성하느라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로버트는 왠지 그 가 지금 헛수고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안쓰럽기까지 했다. 적어도, 레인 번즈가 '타로 카드 살인범'은 아닐 거라는 나름대로의 직감이 그에겐 있었던 것이다. "이봐, 캐빈, 번즈가 태워다줬다는 그 여자 이름이 뭐지?" 옆자리에 앉으며 로버트가 묻자, 캐빈이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힐끔 쳐다보았다. "수전 홍 말인가? 그 여잔 왜?" "번즈에 대해 물어볼 게 있어서." "뭘 물어보려고?" "그날, 번즈의 행동에 대해서 말야." "자네, 헛수고하는군. 그럴 필요가 있을까? 번즈는 이미 현행범으로 잡힌 놈이야. 그 자식 이 타로 카드 살인범이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구." "자기가 한 짓이 아니라잖아." "그 말을 믿나? 대체 어떤 놈이 자기 입으로 자백하겠어? 순진하기는." 캐빈은 의자를 돌려, 책상 위에 놓아둔 담뱃갑을 집어들었다. 그가 담배 한 개비를 뽑아 입에 무는 것을 보고, 로버트는 주머니에서 꺼낸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었다. "캐빈, 자네는 번즈가 범인이라고 확신하는 태도군." "물론이지." 캐빈이 연기를 뱉으며 대꾸했다. "난 그놈이 범인이라는 걸 장담할 수 있다고! 하늘에 두고 맹세하라면 하겠어. 그럼, 로버 트, 자넨 번즈 녀석이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어. 왠지..." "미쳤군! 그럼 그 자식이 왜 메리의 입에 타로 카드를 쑤셔넣으려고 했는지 설명해 줄 수 있겠나?" "흉내내 본 것뿐이라고 하잖아?" "흉내냈다고?" 캐빈이 재떨이에 담뱃재를 툭툭 털며 낄낄거렸다. "이제 보니, 자네 아주 순진하군. 아무튼, 그 여잘 만나도 별다른 건 없을거야." "그래도 난 한번 만나보겠네." "마음대로 하라고. 이젠 범인도 잡혔으니, 자네가 한가한 시간을 어떻게 쓰건, 그거야 자 네 자유니까." 캐빈은 담배를 이빨 사이에 꽉 깨문 채, 다시 의자를 돌리더니 모니터를 쳐다보며 부지런 히 자판을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10 사랑의 시작 로버트는 차에서 내려 수전의 집 앞으로 갔다. 현관문은 윗부분이 동그랗게 생긴 녹색 나 무문이었고, 그 위에 노란색 초인종이 달려 있었다. 입구 주위의 화단에는 탐스런 빨간 장미 송이가 활짝 만개해 있었다. 초인종에 뾰족이 나온 빨간 꼭지를 누르자, 마치 요술상자의 뚜 껑이 열리는 것처럼 문이 열리며, 귀엽고 깜찍한 동양 여자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가지 런한 단발에 피부가 깨끗하고 눈이 해맑았다. 우 형사는 마치 도자기로 만든 중국의 소녀 인형을 보는 것만 같았다. "수전 홍 양이시죠?" "누구시죠?" "런던 경시청의 로버트 우 형사입니다." "혹시 중국 사람?" "그래요." "어머, 반가워요. 그런데 지난번에 오셨던 분이 아니네요?" "캐빈 형사 말씀이시군요. 캐빈은 저의 파트너입니다." "들어오세요. 다시 오실 줄 알았어요. 하지만, 런던 경시청에 중국계 형사님이 계신 줄은 몰랐는 걸요?" 우 형사는 거실로 들어가 수전이 권하는 대로 소파에 앉았다. 눈에 친숙한 중국의 전통 수묵화 몇 점이 걸려 있는 정갈한 실내였다. 창가에 놓인 두 개의 러브 체인이 아주 길게 자라 벽을 타고 지나가 책상에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작업 중인 듯, 책상엔 노트북 컴퓨터가 전원이 켜진 채로 놓여 있었고, 방의 한 편엔 오디오 세트가 보였는데, 그녀처럼 자그마한 미니 컴포넌트였다. 이퀄라이저가 그녀의 눈빛처럼 반짝반짝 흔들리면서, 스피커에서는 음악 이 흘러나왔다. "간식을 하려던 참이었는데, 같이 드시겠어요?" 마침, 오후 4시의 티타임이었다. 수전은 박하향이 감도는 따끈한 차와 함께 집에서 구운 아몬드 쿠키를 내왔다. "고맙습니다." 우 형사는 접시에서 아몬드 쿠키 하나를 집어들었다. 방금 구운 것이어서 따뜻한 온기가 손 끝에 느껴졌다. 바삭바삭하게 씹히는 맛이 고소했다. "운 좋게도 미인과 티타임을 가지게 되었군요." 로버트가 부드럽게 말머리를 꺼냈다. "하지만, 제 작업엔 좀 방해가 되겠는데요?" "미안합니다." "저도 미안해요." "뭐가 미안하다는 말씀인가요?" "별로 도움될 만한 사실을 알고 있는게 없거든요. 지난번에 형사님이 오셨을 때와 똑같은 대답을 드릴 수밖에 없어요. 정말 그날, 레인 번즈 씨의 시보레를 우연히 탔고, 그분이 저를 집에까지 태워다주셨다는 것 말곤..." 수전이 수줍게 웃었다.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로버트는 자신이 중국계라는 사실을 느낄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다. 또한, 그 자신 사고방식 자체가 전형적인 유럽인의 것이었으며, 따라서 수전이 아직까지 지니고 있는 중국적인 분위기가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물론, 그전에도 그가 중국 여인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방학이 되면 그의 사촌누이들이 영 국으로 찾아오곤 했다. 그러나 그녀들은 동양 여인 특유의 조용하고 수줍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간혹 로버트의 집을 찾아오는 그의 친구들은 그녀들의 그런 조용한 태도를 신비스 럽게 여기곤 했지만, 로버트는 어딘가 답답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같은 중 국 여인이면서도 수전은 달랐다. 상대방이 약간 놀랄 정도로 솔직하고, 대담하면서도, 경박 하지 않은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로버트가 물었다. "수전 양, 레인 번즈의 뉴스는 들으셨죠?" "네. 들었어요." "그래서 찾아뵌 겁니다. 혹시 그의 차를 타고 집에 온 그날, 그가 이상한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나요?" "아뇨. 저한테는 무척 친절했어요. 물론, 어딘가 좀 불안정한 기미는 느꼈지만, 그것은 저 에 대한 감정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거든요. 그때, 그는 모니카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진정으로 모니카를 사랑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더랬죠."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죠?" "모르겠지만, 그런 직감이 들었어요. 전, 그가 타로 카드 연쇄 살인범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물론, 조금 불안정한 사람이긴 했지만, 살인을 저지를 만큼 나쁜 사람 같진 않았거 든요." "그래요?" "네." "그 후로는요? 그 후에 다시 번즈 씨를 만난 적은 없었나요?" "없어요." "통화한 적도요?" "네. 통화한 적도 없었어요." 이것으로 우 형사는 수전에게서 듣고 싶었던 증언의 대부분을 들은 셈이었다. 그것은 어 느 정도 그가 이미 예상했던 것과도 일치했다. 만일, 레인 번즈가 '타로 카드 연쇄살인범'이 라면, 수전을 고분고분 보내주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성을 범죄 의 제물로 삼는 미치광이 살인범이 검은 머리의 동양계 여성이라고 해서 특별히 예외로 삼 을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잠시 대화가 중단된 사이, 오디오에서 흐르는 음악이 귀에 들어왔다. 또 한 개의 아몬드 쿠키를 집어들며, 로버트가 말했다. "귀에 익은 곡이군요." "엘 도라도의 곡인데, 아세요?" 수전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방긋이 웃어보였다. "곡조가 귀에 익어요. 라디오에서 자주 나오는 음악이라, 몇 번 들었거든요. 음, 엘 도라도 의 음악이었군요. 엘 도라도의 노래를 좋아하세요?" "네. 특히 크리스 올랜도를 좋아해요.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여러 가지 감정이 느껴져 요." "이 곡 제목이 뭐죠?" "웨일스의 집시." "웨일스의 집시?" "네. 이런 가사예요. '히이드가 덮인 웨일스의 목장, 눈부신 금발의 소녀는 만돌린 반주에 맞추어 춤을 춘다. 웨일스의 집시... 사랑하는 그녀를 떠나야 하는 웨일스의 집시..." 수전은 나지막이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 약간 콧소리가 섞인 허밍의 후렴 부분이 듣기 좋 았다. 우 형사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귓전에선 노래가, 입 안에선 달콤쌉싸름한 박하향이 감돌았다. 수전이 말했다. "이 곡은 올랜도의 곡 중에선 드물게 발라드풍으로 만들어진 노래예요. 묘한 향수를 자극 하죠." <웨일스의 집시>가 끝나고, 그 다음에 이어진 곡은 엘 도라도의 데뷔곡인 <무법자>였다. 앞의 곡과는 다르게 강한 비트의 시끄러운 반주 속에 크리스 올랜도의 허스키하면서도 애절 한 음성이 절규처럼 울려퍼졌다. '나는 무법자. 나는 무법자로 태어났네. 나는 길 위를 질주하지. 한 손에 성경을 들고, 한 손엔 총을 든 채로 아무도 내가 누군지 몰라...' 로버트는 아몬드 쿠키를 하나 더 집어 입 안에 넣었다. 찻잔에 남은 한 모금의 박하차를 마저 마시고 나자, 이젠 달리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용무가 끝난 것이다. 그러나 왠 지 그는 일어서고 싶지가 않았다. 이대로 그녀와 함께 차를 마시면서 음악에 빠져드는 시간 이 좋아서일까? "실례지만, 작가라고 들었는데, 무슨 글을 쓰시죠?" "이것저것 써요. 방송 원고도 쓰고 잡지에 기사도 기고하기도 하고요." "소설이나 시도 쓰시나요?" "아뇨. 제가 좋아하는 건 픽션보다 논픽션 쪽이에요. 주로 다큐멘터리 대본을 쓰죠. 간혹, 유명한 인물의 평전을 쓰기도 하고요." "책으로 출판된 것도 있습니까?" "아직요. 하지만, 지금 준비하고 있는 건 있어요." "어떤 책인데요?" "크리스 올랜도의 평전을 쓰려고 해요." "엘 도라도의 크리스 올랜도 말입니까?" "네." "아, 그렇군요." 그는 더 묻고 싶었느나,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크리스 올랜도에 대해서라면 전혀 아는 것 이 없었던 것이다. 어느새, 아몬드 쿠키는 남아 있지 않았다. 찻잔도 비어 있었다. 마치 그것 들이 어서 일어나라고 무언의 재촉을 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그녀의 작 업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깐 서먹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조용히 일어섰다.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수전도 따라 일어섰다.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로버트는 명함을 내밀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저한테 연락하세요." "무슨 일이라뇨?" "이를테면, 도둑이 들었다거나, 주차위반을 했다거나... 뭐, 그런 일 말예요. 그럼, 제가 원 만히 해결해 드릴 것을 약속드리죠." "런던 경시청에 친구가 있다니 든든하네요." 수전은 로버트의 명함을 받아들고, 생긋 볼우물을 지으며 미소지었다. "안녕히 계세요." "안녕히 가세요." 로버트는 수전의 집을 나왔지만, 왠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수전은 문을 열고 선 채 배웅해 주고 있었다. 그때, 탐스럽게 핀 장미꽃송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 꽃은 직접 심으신 건가요?" "네. 아름답죠?" "무척 아름답군요." 로버트는 꽃송이에 코를 갖다대어 보았다. 강렬한 향기가 후각을 자극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등뒤에 서 있는 수전의 귀여운 얼굴을 떠올렸다. 순간, 믹서기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놀란 로버트는 소스라치듯 재빨리 뒤로 물 러섰다. 입술이 따끔했다. 로버트는 깜짝 놀라 입술에 손을 갖다대자, 무언가 스르르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커다란 벌이었다. 벌 한 마리가 땅바닥에서 비실거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 다. "어머, 벌에 쏘였어요!" "제가 벌에 쏘였습니까?" "그래요. 보세요, 벌써 입술이 부어오르고 있잖아요." 로버트는 자기의 입술이 평소보다 훨씬 커진 것을 알아챘다. 그와 함께 바늘로 찌르는 듯 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손으로 입술 부위를 감싸쥐며 얼굴을 찌푸렸다. "잠깐만요." 수전은 냉큼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잠시 후, 그녀가 탈지면과 성처를 소독하는 약병을 들 고 나올 때까지 로버트는 멍청히 서 있었다. 윗입술은 엄청난 크기로 부풀어올라 평소보다 거의 두 배는 커져 있었다. 그녀와 마주선 로버트는 부어오른 입술을 한 손으로 가리고 미 소를 지었다. 수전 역시 웃음을 참느라 애쓰는 모습이었다. "제 얼굴이 우습게 변했나요?" "조금요. 하지만, 신경쓰지 마세요. 그래도 미남인 걸요. 잠깐 앉으세요." 로버트는 현관 앞 계단에 걸터앉았다. 수전이 약병을 열고, 탈지면에 소독액을 묻혀 그의 입술에 발라주었다. "중국에선 벌에 쏘이면 된장을 바르곤 하죠. 어릴 때, 여러 번, 벌에 쏘인 적이 있거든요. 그럴 때면, 어머니가 된장을 발라주곤 하셨어요." 로버트가 말했다. 입술이 부어 약간 발음이 불분명했다. 수전은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수전이 약간 얼굴을 붉히며 살며시 시선을 피했고, 로버트 역시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였 다. "약간 따끔하죠? 곧 괜찮아질 거예요." "고맙습니다." "뭘요? 오히려 제가 사과를 드려야 하는데... 저희 집 벌이 쏜거잖아요?" 로버트가 계단에 떨어져 있는 벌을 집어들었다. 손가락으로 건드렸지만, 벌은 이미 움직임 을 멈춘 상태였다. 로버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가만히 벌을 들여다보면서 용기를 내 어 물었다. "혹시, 오늘 저녁에 특별한 약속 없으세요?" "저요?" "네." "저한테 묻는 건가요?" "그래요." 수전은 그의 손바닥에서 벌을 집어들더니, 그것을 잠깐 살펴보고는 장미꽃 화판 사이에 가만히 올려놓았다. 그녀가 말했다. "특별한 약속은 없어요." "그럼, 제게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켄싱턴에 제가 잘 아 는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집시악단의 생음악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아주 멋진 곳이죠." 11 타로 카드 점 "정말 멋진 곳이에요!" 수전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로버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비록 입술이 퉁퉁 부풀어 있었지만, 그는 진심으로 수전을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싶 었다. 그들은 이제 막 헤르메스에서 농어 요리를 맛있게 먹은 후, 화이트 와인을 마시며 주 변 경치에 젖어들 참이었다. 창 밖으로는 야자수가 서 있는 넓은 정원이 보였고, 휘황한 정원등 아래 우아한 공작 두 마리가 거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원에서 곧 쇼가 시작되는데, 자리를 마련해 드릴까요?" 그때, 그들을 서빙해 준 앤디가 다가와서 물었다. 헤르메스는 회원제로 운영되는 레스토랑 이라서 일반 손님은 받지 않았지만, 로버트는 새로 만난 아리따운 여인을 위해 거의 우격다 짐을 써서 가까스로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어떤 쇼지?" 로버트가 물었다. "지난번에 보셨던 집시퀸스의 공연입니다." 로버트가 의향을 묻는 눈빛으로 수전을 보았다. 수전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빛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앤디가 두 사람을 정원으로 안내해 주었다. 정원 한편에 서 있 는 아름드리 너도밤나무 아래에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고, 그 주위엔 하얀 식탁보를 씌운 수 십 개의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었다. 식당에서 나온 손님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메워가는 중 이었다. 로버트와 수전은 무대에서 가까운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앤디가 식탁 위에 놓인 은촛대에 불을 밝혀주었다. "술을 한 잔 하시겠습니까?" 앤디의 주문에 로버트가 수전을 보며 물었다. "어떤 걸로 주문하겠소?" "전, 엔젤스 키스로 주세요." "앤디, 숙녀 분껜 엔젤스 키스를, 그리고 난 위스키 언더락으로 한 잔 주게." 앤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무대 위로 '집시퀸스'의 멤버들이 등장했다. 화려한 술이 달 린 집시풍의 복장을 하고 각자 손에는 만돌린과 탬버린, 기타, 그리고 캐스터네츠 등을 하나 씩 들고 있었다. 그리고 네 명의 남성 멤버에 들러싸인 채, 아름다운 집시 무희가 화사한 웃 음을 던지며 나타나 객석을 향해 인사를 했다. 그녀는 칠흙처럼 검은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 뜨리고, 꽃술과 프릴이 달린 치마를 입고 있었다. "정말 아름답죠? 저 집시 여인." 수전은 감탄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이 더 아름답소." 로버트가 응답하며, 때마침 술을 가져온 앤디에게 물었다. "앤디, 그렇게 생각지 않나?"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앤디가 수전에겐 엔젤스 키스를, 로버트에겐 위스키 언더락을 놓으며 대꾸했다. 수전이 물 었다. "저 집시 여인의 이름이 뭐죠?" "에스메랄다." "에스메랄다?" "네. 에스메랄다입니다." 앤디가 대답했다. 이때, 무대에서는 기타를 든 맴버가 마이크에 다가서서 인사를 했다. 의외로 그는 약간 어 색한 영어를 구사했다. "함께 자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는 집시퀸스라는 악단입니다. 저는 이 악단의 리더 이자 싱어인 스테파노입니다. 집시퀸스와 함께하는 오늘 밤이 여러분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 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로 연주할 곡은 '모래의 춤'입니다." 그의 어눌한 영어 발음에 수전은 웃음이 나왔다. "저 사람, 영어가 서툴러요." "웨일스 지방 사투리라 그렇습죠. '집시퀸스'는 웨일스 지방에서 왔거든요." 앤디가 참견했다. "웨일스에서 온 집시라고요? 어머, 엘 도라도의 노래 제목하고 똑같네요. 엘 도라도의 노 래 중에 '웨일스의 집시'라는 노래가 있거든요." 곧, 정열적인 탬버린 소리와 만돌린 소리가 밤의 공기를 가르고 날아왔다. 집시 음악 특유 의 빠르고, 정열적인 박자와 리듬이었다. 그 음악을 배경으로 스테파노가 노래를 불렀다. 모래의 춤을 보았나? 천 년을 기다린 애절한 몸짓을... 모래의 세레나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천 년을 삭인 애타는 그리움을... 짧게 끊어지는 가사에 힘이 넘쳤고, 스테파노의 목소리에는 집시 특유의 다듬어지지 않은 야성과 원시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마치, 천 년의 침묵과 인내 속에 응결된 야성의 절규 같 다고나 할까. 반주와 노래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름다운 몸매의 집시 무희 에스메랄다가 춤을 추기 시작 했다. 그녀는 정열적인 박자에 맞춰 열정적인 몸놀림으로 춤을 추면서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고혹적인 미소를 던지며 테이블 사이를 능숙하게 지나갔다. 그녀의 기다란 머리결이 허공에 너풀거리고, 프릴 치마가 부채살처럼 화사하게 펼쳐졌다 오므라들기를 반복했다. "집시는 원래 인도에서 왔다고 해요. 그래서인지 피부 빛깔이 가무잡잡하고, 기질도 유럽 사람들하곤 많이 다르지 않아요?" 수전이 엔젤스 키스를 홀짝거리며 말했다. 중세 인도에서부터 기나긴 유랑의 세월을 보내며, 한군데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집시에 게서는 어딘가 슬프고도 신비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중에서도 집시 여인에게서는 특히 아름답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풍겼다. "저들은 어째서 한군데 정착하지 못할까요?" "글쎄, 무슨 천형 같은 것 아닐까요?" 로버트의 질문에 수전이 대답했다. "인간에겐 누구나 그런 방랑의 기질이 있는데, 집시들에겐 특히 그런 충동이 강한가 보죠. 아무튼, 저들에게선 이상한 향수와 신비감 같은 게 느껴져요." 그때였다. "집시에겐 또 하나 신비한 것이 있다오." 등뒤에서 묘하게 허스키한 음성이 들려왔다. 수전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았다. 몹시 늙고, 허리가 굽은 자그마한 몸집의 늙은 집시 노파가 서 있었다. 잔주름이 많은 얼굴에 움 푹 볼이 들어가고 눈빛만이 반짝거렸다. 로버트는 그 노파를 본 적이 있었다. 지난번 캐빈과 함께 왔을 때 보았던 바로 그 집시 노파였다. "잠깐 실례해도 되겠소?" "예. 앉으세요." 노파는 자리에 앉더니 큰 소리로 앤디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앤디, 나한테도 술 한 잔 주겠나? 안주는 필요없고, 독한 데킬라로 한 잔 가져다주게. 계 산은 이 신사 분께서 하실 거야." "어떻게 할까요? 가져올까요?" 앤디가 웃으며 로버트에게 물었다. "내가 계산할 테니, 가져와요." "알겠습니다." 앤디가 가고 나서, 집시 여인은 소매 속에서 타로 카드 한 벌을 꺼냈다. 그녀가 로버트를 보며 물었다. "당신 이름은?" "로버트 우입니다." "저번에 왔을 때, 나를 청하지 않았던가?" "예? 아, 그랬더랬죠. 맞아요. 그랬어요!" 로버트는 문득 생각이 났다. 손님들 테이블에서 카드 점을 봐주는 노파를 불러달라고 앤 디에게 청했을 때였다. 노파에게 말을 전하고 돌아온 앤디는 '며칠 후, 어여쁜 숙녀와 다시 올 것'이란 말을 그녀가 하더라고 했다. 로버트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녀의 예언대로 자신이 수전과 함께 이곳에 오게 된 사실이 너무나 신기했다. "약속대로 점을 쳐주지. 우선 숙녀 분 운세를 먼저 봐드릴까?" 집시 노파는 앤디가 가져온 데킬라를 단숨에 비우고 나서, 타로 카드를 가지런히 추린 뒤 수전을 쳐다보았다. "이름을 말해 봐, 아가씬 이름이 뭐지?" "수전 홍이에요." "좋아, 수전. 이 카드패를 잘 섞어서 일곱 장씩 떼어보라구." 수전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로버트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도 타로 카 드에 관해서라면 약간의 상식이 있었다. 타로 카드는 각 장마다 모두 다르고, 그 하나하나가 일정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것의 배열 순서와 선택에 따라 점패의 의미와 해석은 완전히 달라진다. 집시 노파가 수전에게 시킨 방법은 '생명의 나무'라고 일컬어지는 전형적인 배열 방식이었다. 이윽고, 모두 일곱 장씩 열한 개의 파트가 만들어지고, 나머지 한 장이 떨어졌다. 집시 여 인은 제일 처음의 카드 한 묶음을 집어들고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아가씨, 당신은 이제 막 사랑에 빠져 들었군? 안 그래?" 수전의 얼굴이 금세 새빨간 사과처럼 물들었다. 그녀는 흘긋, 로버트를 바라보고 이내 고 개를 떨구었다. 로버트는 순간, 자신을 향한 그녀의 눈빛이나 고개를 떨구는 그녀의 순진한 행동이 너무 따뜻해서 가슴이 뭉클했다. 노파의 음성이 계속됐다. "이 사랑은 아주 고귀하고 신비한 섭리의 작용으로 성취된 거야. 아가씬, 오래도록 이 행 복한 사랑을 지속할 수 있겠군. 그래 맞아. 당신은 행복이 보장된 인생을 살 거라구. 아주 드문 사람들 중의 하나야. 죽는 그날까지, 행복할 게 틀림없어." 수전은 고개를 떨군 채,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끄덕였다. '맞아, 난 이제 막 사랑에 빠져든 것 같아." 그녀는 생각했다. 사실, 수전은 유학생활 내내 외로웠다. 또 동양인에 대한 배타적인 분위 기를 견뎌야 했던 힘든 기억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이국 생활에 쉽게 적응하 고, 나름대로 원하던 것도 성취한 셈이었다. 그리고 오늘 밤엔 그녀가 평소 이상적으로 그리 던 멋진 남자와 저녁식사까지 즐기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가씨에겐 한 가지 넘어야 할 고비가 기다리고 있구만." 노파가 다음 차례의 카드 무더기를 집어 살핀 뒤에 조용한 음성으로 되뇌었다. "네?" 수전이 냉큼 고개를 들고, 놀란 눈으로 보았다. "아가씨, 곧 당신에겐 위험이 닥칠 거라구." "위험이오?" "그래,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이 곧 닥칠 거야. 자칫하면,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르는 아주 위급한 재앙이 덮칠 거라구." 수전과 로버트는 동시에 얼굴을 마주보았다. "하지만, 안심해도 좋아." 다시 노파의 음성이 들렸다. "왜냐하면, 든든한 기사님이 당신을 위험에서 구해줄 테니까. 그래서, 결국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당신들은 마침내 행복한 나날을 맞이할 테니, 절대 믿음을 잃지 말라구. 당신들에 겐 어떤 고난이나 재앙도 극복할 수 있는 좋은 운이 작용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아암." 이번에 노파는 로버트를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은 이름이 뭐지?" "제 이름은 로버트 우입니다." "좋아. 로버트, 자네도 이 카드패를 잘 섞어서 일곱 장씩 떼어보라구. 아까, 수전이 했던 방식대로 말이야." 로버트 역시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일곱 장씩 열한 개의 파트를 떼어내고, 나머지 한 장이 남았다. 집시 여인은 제일 처음의 카드 한 묶음을 집어들고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로버트, 당신은 쌍둥이로 이 세상에 태어났구만?" 로버트는 충격을 받았다. "그렇지 않은가?" "아니, 맞습니다!" "당신보다 5분 먼저 태어난 형은 나흘만에 죽었지?" 로버트는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 노파의 말은 사실이었다. 방금 밝힌 대로, 그는 쌍둥 이로 태어났는데 5분 먼저 태어난 형은 나흘만에 죽었다는 말을 부모에게서 들었던 것이다. "정말 놀랍군요!" "로버트, 당신은 어렸을 때, 그 형을 생각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지? 만일 쌍둥이 형이 죽 지 않았다면, 그와 함께 어떤 식으로 놀았을까? 어떤 얘기를 나누었을까? 그런 것들을 생각 하면서 말이야. 언제나 마음 속에 죽은 형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 차 있었을 걸세. 그렇지 않 나?" "그렇습니다. 사춘기 때까지 죽은 형을 상상하며 시간을 보낸 적이 많았더랬죠." 집시 여인은 두 번째 묶음의 카드를 집어들었다. "그래서 이제 형을 만나게 됐군 그래." "형을 만나다니요?" "당신의 쌍둥이 형이 지금 여기에 와 있다는 뜻이야." "예? 그게 무슨 말이죠? 형이 이 자리에 와 있다니요?" 로버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주위엔 그들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로버트는 다시 노 파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 말입니까? 어디 와 있다는 거죠?" "바로 눈 앞에 와 있다고!" 다시 집시 노파가 말했다. 로버트는 앞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앞에는 귀엽게 생긴 수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엔젤 스 키스를 한 모금씩 홀짝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형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아직도 모르시겠어?" "뭘 말입니까?" "바로 당신 앞에 있는 여자." "예엣?!" 로버트와 수전은 동시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동시에 집 시 노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집시 노파가 세 번째 묶음을 살피더니, 다시 입을 떼었다. "로버트, 당신은 영혼의 존재를 믿나?" "영혼의 존재요? 아, 예... 확신하는 건 아니지만, 영혼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듭니다." "맞아. 인간은 죽으면 새로운 육체를 받아서 다시 태어나는 거라고. 그렇게 우리 영혼은 끊임없이 이 세상에 다녀가지." 노파의 허스키한 음성이 음산하게 들렸다. "수전은 전생에 바로 당신의 쌍둥이 형이었어. 하지만, 당신들은 형제의 인연이 아니었기 에, 일찌감치 세상을 떠났던 거야. 당신들은 그래서 첫눈에 상대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연모의 감정으로 발전했지. 앞으로 당신과 수전은 결혼하게 될거야. 부부의 연으로 이생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거라고." 로버트는 당황해서 수전을 바라보았다. 수전 역시 얼굴이 새빨개져서 시선을 어디다 두어 야 할지 어쩔 줄 몰라했다. 그녀는 어색한 기분을 떨치려는 듯 술잔을 들고, 시선을 내리깐 채, 자꾸만 술만 홀짝거리고 있었다. "수전, 신경쓰지 마세요. 그냥 재미로 보는 것일 뿐이니까요." 로버트는 살며시 그녀의 귀에다 속삭였다. "저도 알아요." 수전이 기어드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로버트는 그러면서도 과히 언짢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의 쌍둥이 형이었다는 말 을 액면 그대로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이 여인에게 훨씬 친근한 감정이 느껴졌던 것 이다. 사실이 아니면 어떤가? 아무튼, 첫 대면 때부터 수전에게 묘한 친밀감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었다. "제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로버트가 화제를 돌렸다. 사실은 곤란한 입장을 모면할 작정으로 던진 질문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뭐가 궁금하지?" "저는 런던 경시청의 형사입니다. 우린 연쇄살인범으로 어떤 사람을 체포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엔 묘하게도 타로 카드가 연관되어 있 어요. 그 사람이 범인인지 아닌지 알고 싶은데, 그게 가능할까요?" 집시 여인은 다섯 번째 카드 더미를 집어들었다. "그 사람은 눈썹이 짙고 곱슬머리에 매부리코로군." 레인 번즈의 인상착의를 떠올려보고 나서, 로버트는 놀라운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눈섭이 짙어요. 그리고 곱슬머리에 약간 매부리코예요." "잘못 짚었어." "잘못 짚었다구요?" "그래, 그 사람은 범인이 아니야." "예? 범인이 아니라구요?" "곧, 그 사람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질 테니 두고 보라고!" 노파가 장담하듯 되뇌었다. "어떻게 밝혀진단 말인가요?" 로버트가 물었다. 그러자 집시 여인은 열한 무더기로 떨어지고 남아 있는 마지막 한 장의 카드를 뒤집어 보 았다. 천사가 나팔을 불고 있는 그림의 카드였다. 'JUDGEMENT'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심판'이라는 뜻이었다. 노파가 말했다. "곧 새로운 살인사건이 발생할 거라고." "다시 또 살인이 발생한다구요? 언제죠? 언제 말입니까?" "오늘 밤." "예? 오늘 밤이라고요?" "그래. 바로 오늘 밤, 한 여자가 죽게 될 거야.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여자로군. 그 여자 가 끔찍한 모습으로 살해될 거라구. 그 여자의 이름 첫 글자는 C로 시작하지." "범인이 누구죠?" "범인을 알면, 내가 형사를 하지, 왜 이러고 있겠는가? 나도 몰라. 어쨌든, 떄가 되면 알게 될 거야. 그 전까지는 그가 누구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노파는 이렇게 대꾸하며 카드를 섞더니,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대에서는 여전히 '집시퀸스'가 정열적인 집시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고, 에스메랄다의 화려한 춤이 한밤의 정 취를 한껏 부추기고 있었다. 12 네 번째 희생자 로버트가 수전과 첫 데이트를 즐기던 바로 그 시각, 인터콘티넬탈 호텔 904호실의 정적을 깨뜨린 것은 가을밤의 귀뚜라미 소리 같은 휴대전화의 벨 소리였다. 풍만한 나신의 금발 여인이 신음 소리를 내며 옆에서 잠들어 있는 사나이의 어깨 너머로 손을 뻗었다. 그녀는 여전히 잠결인 듯 눈을 감은 채 손을 더듬더듬 머리맡의 전화기를 찾 아내서 그것을 귀로 가져갔다. 그러자 어느 틈에 깨어난 사나이가 그녀에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거칠게 전화기를 빼앗았다. "내 전화라구! 내 전화는 절대 받지 말라고 했잖아!" 사나이는 화난 음성으로 나무랐다. "어머, 몰랐어요! 제 전화인 줄 알았거든요." 금발 여인은 그제서야 잠이 달아난 얼굴로 변명했다. 그리고 그녀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욕실 쪽으로 사라졌다. 사나이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다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러나 그 뒤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수화기를 든 채, 듣고만 있었는데, 그의 미간 사이에는 신경질적인 주름이 깊게 패이고, 눈썹은 신경질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통화는 길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조용히 휴대전화의 덮개를 닫았다. 그리고 어두운 표정으로 욕실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욕실에서는 샤워 물 소리가 들렸다. 사나이는 침대에서 내려와 천천히 옷을 입기 시작했다. 속옷을 입고, 셔츠를 입고, 바지를 입고, 구두까지 신은 뒤, 그는 손목에 시계를 감고 나서 넥타이를 집어들고, 거울 앞으로 갔 다.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매고 있는데, 욕실에서 흰색 로브를 걸친 금발 여인이 나타났다. 그 녀는 타올로 머리의 물기를 닦아내며 그의 등뒤로 다가왔다. 30대 초반의 지성적인 타입의 여성이었다. "헨리, 무슨 전화였어요?" "내 전화에 대해 알고 싶나?" 그의 음성은 얼굴 표정만큼이나 냉담했다. "그런 게 아니라, 혹시 부인에게서 온 건가 해서..." "그랬다면, 오히려 다행이었을 거야." 그는 넥타이 매듭을 바짝 조이고 나서,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말했다. "거기 앉아봐, 첼시." 첼시는 젖은 타올을 한 손에 쥔 채, 화장대 의자에 가만히 앉더니 헨리를 올려다보았다. 헨리가 그녀의 어깨에 두 손을 얹으며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첼시, 아직도 그 사건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데, 사실인가?" "그 문제 때문인가요?" "그래, 그것 때문이야!" 돌연, 헨리 에딩턴의 어조엔 노기가 서렸고, 순간, 첼시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헨리가 말했 다. "그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내가 분명히 말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알아요. 하지만..." "뒤를 캐서 도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지? 당신, 보수당의 파멸을 원하나? 그래봐야, 당신에 게도 이로울 게 없다고 내가 누누이 말했는데도, 아직 모르겠나? 대답해 보라구!" "그건, 내 일이에요. 비리가 포착된 이상, 모른 척 할 수가 없다구요!" "좋아, 그럼 묻겠어. 내가 그 일에 연루되어 있다고 해도, 당신은 당신 고집대로 할 작정 인가? 어때? 대답해 보지 그래?" "..." 첼시는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외면했다. "왜 대답을 못 해? 역시 그렇군. 나 따윈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이로군. 알았 어, 무슨 뜻인지.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 당신 입장을 배려할 필요는 없게 됐군!" 그는 화난 모습으로 웃옷을 집어들었다. "헨리, 사랑해요!" 첼시가 의자에서 일어나 그의 팔을 잡으려 했으나, 그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뒤 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객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힌 뒤, 첼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 었다. 앞으로 힘껏 모아쥔 손이 떨리고, 눈가엔 조금씩 눈물이 고여들었다. 거리로 나왔지만, 첼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평소대로라면 브라우닝 가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가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다음날을 위해 준비를 해야 할 터였지만, 왠지 그날은 집으로 가고 싶지가 않았다. "나도 더 이상 당신 입장을 배려해 줄 필요는 없게 됐군!" 호텔을 나서며 헨리가 던진 이 한 마디가 첼시의 귀에 울렸다. 무슨 뜻일까? 설마 자신과 당을 보호하기 위해서 나를 파멸시키겠다는 뜻은 아닐까? 헨리가 정말 나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빵빵!' 곁에서 자동차가 큰 소리로 경적을 울렸다. 첼시는 깜짝 놀랐다. 신호가 바뀐 것도 모르고 길을 건너다니! 그녀는 미안하다는 뜻으로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서둘러 남은 횡단보도를 지나 건너편 보도로 올라섰다. 거기서 얼마쯤 가자, '브리가든'이라는 네온 불빛이 보였다. 첼시는 불빛이 켜진 바의 입구 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오셨군요." 바텐더, 윌슨이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권했다. 그곳은 그녀가 머리를 식힐 겸 이따 금 들르는 단골 술집이었다. 실내엔 바이올린의 나른하고도 감미로운 선율이 울려퍼지고 있 었다. 그녀는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윌슨이 그녀 앞에 분홍빛의 칵테일 한 잔을 내놓았 다. "이건 뭐죠?" "제가 만든 칵테일입니다. 미스 브라이튼의 취향에 맞을 것 같아서요." "그래요? 고맙군요." "그런데 아직 적당한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고민하던 중입니다. 미스 브라이튼이 이름 을 지어주시겠습니까? 멋지고 색다른 느낌을 주는 이름이면 좋겠는데..." 첼시는 웃으며 한 모금을 마셨다. 빛깔과는 달리 깊고 짙은 맛이 났다. 강하게 쏘는 듯한 뒷맛이 혀 끝에 오래 감돌았다. 그녀는 다시 한 모금을 마셔보았다. 바텐더가 기대 어린 눈 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첼시는 방긋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바텐더의 얼굴에 즐거운 미소가 번졌다. "미스 브라이튼, 이름을 정해주셔야죠." "제가요?" "그럼요." 첼시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귀에 기교적인 바이올린 선율이 들려왔다. "윌슨." "예, 미스 브라이튼." "이 곡, 곡명이 뭔지 알아봐주실래요?" "잠깐만요." 윌슨이 턴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가서, 레코드판의 재킷을 보고는 돌아와서 말했다. "크라이슬러의 '집시의 여인'이군요." "그걸 이 칵테일 이름으로 하면 어떻겠어요?" "집시의 여인?" "그래요." 윌슨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탁 쳤다. "히야, 역시 미스 브라이튼에게 묻길 잘했군요!" "마음에 드나요?" "마음에 들다마다요!" 윌슨은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멋지군요, 집시의 여인... 고마워요. 미스 브라이튼. 이름을 지어주셨으니 다음에 연인과 함께 오시면, 그땐 이 칵테일을 무료로 서비스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지금 시음하시는 것도 거저 드리는 겁니다만." "고마워요." 윌슨은 피스타치오 한 접시를 놓고는 다른 자리로 갔다. 첼시는 피스타치오 껍질을 벗겼 다. 그리고 톡 쏘는 자극적인 맛이 나는 칵테일, 방금 자신이 이름을 지은 '집시의 여인'을 마시며 생각에 잠겨들었다. 첼시가 헨리 에딩턴을 만난 건 킹스필드 고교 시절이었다. 그는 당시 초선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후, 모교인 킹스필드 고교를 방문한 것이었는데, 학 생대표었던 첼시에게 그와 인터뷰를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것이 그들의 첫 만남이었다. 당시, 첼시의 가정 형편은 어려웠다. 트럭 운전수인 부친이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 불수 가 되고나서부터 식품 공장에 나가는 어머니의 수입으로 근근이 생활하던 때였다. 인터뷰 당일도 입고 나갈 옷이 없어, 결국 어머니가 젊을 때 입었던, 20년 동안 햇빛 한번 보지 못한 채 옷장 속에 처박혀 있던 곰팡내 나는 구식 원피스를 입고 나갔다. 그때, 헨리의 회색눈이 첼시를 보자 일순 가볍게 웃음기를 담았다. 그는 정답게 웃으며, 첼시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건 진심이오만, 정말 멋지군. 브라이튼 양." 그는 뛰어난 재능과 출세의 열망을 가진, 이 작은 여학생을 한눈에 알아보았던 것이다. 더 욱이 그녀가 가난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몹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나, 첼시 앞으로 편지가 한 통 우송되었다. 편지엔 "우연히 당신의 재 능을 눈여겨보게 되었소. 그 재능을 소중히 여겨 매달 당신이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돈을 다달이 보낼 테니, 부디 열심히 노력해서 당신이 꿈꾸는 인물이 되기를 바라겠소."라는 짤막 한 메모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첼시의 계좌엔 익명의 한 인물로부터 매달 꼬박꼬 박 넉넉한 돈이 입금되었다. 그 덕분에 그녀는 더 이상 생활비를 벌기 위해 온종일 가스 스 테이션에서 휘발유 냄새를 맡지 않아도 좋았고, 햄버거 스탠드에서 다진 소고기 냄새에 시 달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익명의 인물은 3년 후, 첼시가 옥스퍼드 법대에 입학했을 때, 커다란 꽃다발을 보내왔 을 뿐, 여전히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이 얼굴도 모르는 '키다리 아저씨'를 그리는 한편, 늘 마음 속 깊이 감사함을 느끼며 열심히 공부했다. 4년 후, 첼시가 법관 임용고시에 패스하던 날, 그녀에게 다시 꽃다발과 작은 봉투 하나가 배달되었는데, 그 봉투 속엔 간단한 주소가 적힌 메모지와 열쇠 하나가 들어 있었다. 첼시는 그 주소로 이사했다. 그곳은 작은 아파트였다. 그리고 거기서 그녀는 처음으로 자 신을 후원해 준 은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키가 훤칠하게 큰 40대 초반의 신사였다. 바로 7년 전, 킹스필드 고교에서 인터뷰를 했던 그 남자, 현재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상원의원 으로 변신해 있는 그는 헨리 에딩턴이었다. 그녀는 헨리가 마련해 준 아파트에서 본격적인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때때로 헨리가 그 녀를 찾아와, 함께 밤을 보내고 돌아가곤 했다. 그는 보수당 당수인 힐튼경의 외동딸 로자와 결혼한 기혼자였지만, 첼시에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 생활이 10년 가까이 지속되어 왔던 것이다. 그 사이, 첼시는 유능한 여검사로 여러 가지 굵직굵직한 사건을 통해 나름대로의 입지를 굳혀왔다. 그리고 그즈음, 그녀는 보수당 상원의원들이 연루된 뇌물수수 사건의 단서를 포착해, 수사 해 오던 중이었다. 사건의 내용은 보수당이 차기 총선자금을 마련할 의도로 북해에서 유전 을 개발 중인 다국적 기업으로부터 막대한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것으로, 만일 총선을 앞 둔 시기에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면, 차기 정권의 향배는 불보듯 뻔했다. 더욱이 그 배후엔 보수당의 유력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그녀의 오랜 후원자이고, 은인이며, 동시에 연인이기도 한 헨리 에딩턴이 개입되어 있는 것 또한 확실했다. 은혜를 배신으로 되갚음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대로 묵과해 버려야 할 사안인가? 아니 면, 사회정의를 위해 이 검은 흑막을 파헤쳐야 할 것인가? 그즈음, 첼시는 이런 문제 때문에 고심하고 있었다. '그래, 그의 날개를 꺾어버리자.' '집시의 여인'이 담긴 칵테일 잔을 천천히 흔드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절 반쯤 남아 있는 술을 단숨에 들이키며 생각했다. '그래, 그가 날아오르려는 하늘을 없애버리는 거야. 그가 딛고 있는 대지를 불살라버리란 말이야!' 이렇게 결심하자, 보수당의 침몰과 헨리의 몰락이 눈앞에 그려졌다. 사랑하는 사람의 장래 를 무너뜨린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역시 사회정의였다. 그녀는 그런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법학을 공부했던 것이다. 첼시는 담배를 꺼내물었다. 그리고 윌슨에게 '집시의 여인'을 한 잔 더 주문한 뒤, 라이터 를 켜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미스 브라이튼, 너무 과음하시는 것 아닌지요?" "괜찮아요. 윌슨, 걱정 말고 한 잔 더 따르라고요. '집시의 여인'으로 가득히 한 잔 더 따 라주세요." 첼시는 이렇게 말하며, 담배 연기를 허공에 내뱉었다. 그날, 첼시가 자정이 넘어 브리가든을 나섰을 때, 이미 거리는 정적에 잠겨 있었고, 거친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검은색 클라우드 하비의 코트 깃을 세웠다. 네 잔이나 마 신 독한 칵테일의 취기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리고 비릿한 비 냄새가 견딜 수 없는 슬픔 처럼 축축하게 후각을 자극해 왔다. 그녀는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피커딜리 광장을 건넜다. 그런 그녀의 곁으로 전조등 불빛을 밝힌 푸른색 시보레 한 대가 다가왔다. 그것이 살아 있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튿날, 첼시 브라이튼은 솔즈베리에서 16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피살체로 발견되었다. 정확한 위치는 거석문화 유적지로 유명한 스톤 헨지로, 그녀는 엄청난 크기의 돌기둥이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중앙 부위, 길쭉한 장방형의 바위 위에 잠든 듯이 눕혀져 있었다. 캐빈과 우 형사가 현장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 무렵이었다. 두 사람은 이번에도 역시 피살자의 입에서 한 장의 타로 카드를 찾아냈다. 그 카드엔 제사를 집전 중인 마법사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THE MAGICIAN'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는데, 여검사 첼시 브라이튼은 '타로 카드 연쇄살인사건'의 네 번째 희생자 였던 것이다. 제3부 13 집시의칼 그는 히이드가 덮인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축축하게 비에 젖은 히이드가 너무 미끄러워 그는 몇 번이나 곤두박질 칠 뻔했다. 멀리서 양들의 방울 소리가 아스라하게 들려왔다. 심장 이 터질 듯 아파왔다. 그러나 등뒤에서 들려오는 추적자의 거친 호흡과 발소리 때문에 그는 질주를 멈출 수가 없었다. 이번에 잡히면 끝장이야!... 이렇게 생각하며 그는 온 힘을 다해 달려갔다. 그러나 점점 가 슴은 압박되어 오고, 점차 의식이 희미해진다. 양들의 방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진다. 얼굴에, 머리에, 가슴에 부드러운 보슬비가 흘러내렸다. 목 위로는 섬뜩한 감촉이 느껴진다. 그리고 찰그랑 찰그랑, 맑고 차갑게 울리는 금속성 소리... 크리스 올랜도는 가슴이 터질 듯한 압박감을 느끼며 번쩍 눈을 떴다. 순간, 정체불명의 괴 한이 그의 가슴을 타고 앉아, 억센 두 손으로 그의 목을 꽉 조르고 있었다. 어두워서 얼굴은 알아볼 수 없지만, 무척 건장하고 다부진 남자임에 틀림없다. 상대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그 의 목을 조여대고 있었다. '차라랑, 차라랑...' 이상한 금속성 소리가 울린다. 어디서 들었을까. 방금 꿈속에서 들었던 방울 소리였다. 억 센 손이 목을 조이고, 그가 거칠게 저항하는 데 따라, 방울 소리는 점점 더 숨가쁘게 울려댔 다. '차라랑, 차라랑...!' 크리스는 차츰 저항할 힘을 잃어갔다. 그때, 시퍼런 빛이 어둠을 가르는 것이 보였다. 정 체불명의 괴한이 시퍼런 단도를 빼어들었던 것이다.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어떻게든 소리를 질러 이 위기를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불러야 한다. 옆방에 자고 있는 앤 드루가 생각났다. 하지만, 그는 지난밤 파티에서 완전히 지쳐 곯아떨어졌을 텐데, 그를 어떻 게 깨운다지? 문득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조각품에 생각이 미쳤다. 얼마 전 구입한 카미유 클로델의 작품, 저것을 깨뜨려 소리를 낸다면! 단도가 빛살을 뿜으며 내리찍히는 순간, 크리스는 재빨리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단도는 베개에 그대로 꽂혔다. 하얀 새털이 풀풀 날아올랐다. 두 번째 칼날이 다시 어둠을 가르더 니, 칼끝은 그의 배를 푸욱 쑤시고 들어왔다. 그는 예리한 통증을 느꼈다. 그 틈에 크리스는 팔을 휘둘러 마침내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인 조각품을 밀어 떨어뜨렸다. '꽈당!... 쨍그랑!' 조각품이 큰 소리를 내며 사이드 테이블 옆에 있던 전신거울에 부딪혔고, 거울이 깨지며 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괴한이 당황하는 빛을 보였다. 그 틈에 크리스 는 힘껏 그를 밀치고, 몸을 일으켰다. 창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차가운 냉기가 들이쳤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괴한은 바람처럼 달려, 창문을 뛰어넘어 사라져 버렸다. "크리스, 무슨 일이야?" 크리스 올랜도의 매니저인 앤드루가 잠옷 차림으로 벌컥, 방문을 열어젖히고 뛰어들었다. 곧, 환한 불빛이 어두운 방 안을 밝혔다. 방 안은 난장판이었다. 산산히 깨져나가 바닥에 흩 어져 있는 거울 조각이 빛을 발했고, 바닥에 단검에 찔린 크리스가 배를 움켜쥔 채, 쓰러져 있었다. "이봐, 정신 차리라고!" 앤드루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크리스를 일으켜 안았다. 크리스는 연신 고통스런 신음 소 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의 아랫배엔 기이한 모양의 단도가 꽂혀 있었다. 앤드루는 손잡이 를 쥐고, 단도를 뽑아냈다. 순간, 핏물이 분출했다. 핏물은 순식간에 앤드루의 손과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마룻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앤드루는 손바닥으로 크리스의 얼굴을 뒤덮은 핏물을 닦아냈다. 그때, 날카롭게 깨져나간 거울 조각 틈으로 무언가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수십 장의 타로 카드였다. "도대체 알다가도 모를 일이로군." 린치 경감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파이프에 잎담배를 꾹꾹 눌러 담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앞에는 정교한 장식의 단검 한 자루와 타로 카드 십여 장이 놓여 있었다. 제각기 다양한 그 림들이 그려져 있는 집시의 카드였다. "이 칼 말이야. 아무래도 예사로운 칼이 아니잖나?" 린치 경감은 파이프 담배연기를 뿜으며 단도를 살펴보았다. 아름다운 칼이었다. 손잡이엔 가죽이 덧대어져 있었는데, 길이 들어 반질반질했다. 칼날은 반달 모양으로 둥글게 굽어 있었고, 칼날엔 말라붙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그리고 손잡이 가 죽에는 인두로 지진 듯, 영문자 R이 새겨져 있었다. "사장에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지? 안 그래?" "그렇습니다. 수제품이 틀림없습니다. 손잡이에 가죽을 덧대고 직접 날을 벼렸군요." "손잡이에 새겨진 이 R자는 범인의 이니셜일까?"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요." 로버트가 말했다. 크리스 올랜도를 습격했던 범인이 남긴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단검이나 카드 어느 쪽에서도 범인의 지문은 검출되지 않았다. 아마도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장갑을 낀 상태 에서 범행을 저질렀을 것이다. 아니면, 크리스 올랜도의 매니저인 앤드루의 지문에 지워져버 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방에 떨어져 있던 이 타로 카드 말이야." 린치 경감이 타로 카드 한 장을 집어들었다. "칼도 그렇고, 이 카드도 크리스 올랜도를 노린 범인이 떨어뜨렸을 텐데, 그렇다면, 놈은 크리스 올랜도를 살해하고 카드를 입 속에 쑤셔놓으려고 했던 거라고 봐야겠지." 린치 경감이 대머리를 갸우뜽거렸다. "그런데 아무래도 납득할 수가 없다구. 지금까지 발생한 네 건의 피살자들은 모두 여자였 거든. 그것도 금발의 여성들이었다고. 그런데 이번엔 엉뚱하게 남자를 노렸잖아? 그것도 유 명한 로커를 말이야." 사실이었다. 이전까지 차례로 피살된 네 명의 희생자는 금발의 여성들이었다. 여전히 동기 는 불분명하지만, 어떤 맥락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그 한 가지 공통점조차 도 무위로 돌아가버린 셈이었다. "로버트, 자네 지난번에 했던 말 기억하지? 범인은 여성의 입을 성기로 생각한다고 했잖 나? 그래서 카드를 입 속에 쑤셔넣는다고 그랬지?" "그랬죠." "그러면 이상하지 않은가? 범인은 어째서 크리스 올랜도를 노렸을까? 남성의 입에 카드를 쑤셔넣는 것은 앞서의 얘기와 다르지 않은가?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라고. 남성의 입까지도 여자의 성기로 생각할까? 그건 아닐 테고... 도무지 알 수가 없구만." 린치 경감이 중얼거리며 카드를 테이블에 집어던졌다. "이 칼 혹시, 집시들이 쓰는 칼이 아닐까요?" 그때, 캐빈이 단검을 집어들며 말했다. "집시들이 쓰는 칼이라고?" "그렇습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지?" "타로 카드와 연관지어 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카드가 집시들의 거라면, 칼도 그럴 거라는..." "그럴 듯한 생각이군."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제 생각엔 이번 연쇄살인범이 어쩌면 집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캐빈이 단검으로 손바닥을 탁탁, 치며 말했다. 경감은 저으기 놀란 눈빛으로 캐빈을 보았다. 그는 평소에 캐빈의 머리를 그다지 신뢰하 지 않는 편이었다. 캐빈이 약간 우둔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런 캐빈의 머 리에서 그럴 듯한 추리가 튀어나왔다는 사실은 뜻밖이었다. "듣고 보니, 그럴 듯하군. 범인이 집시라... 그래서, 집시 카드를 피살자의 입 속에 쑤셔넣 는 거라... 우린 어째서 그런 생각을 못했지? 캐빈, 대단하군! 자네 머리로 그런 생각을 했다 는 게 믿기지가 않아!" 린치 경감이 흥분해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캐빈의 어깨를 치며 격려했다. "경감님이 저를 우둔한 놈으로 치부해 온 건 잘 압니다. 하지만, 저도 가끔은 괜찮은 생각 을 할 때가 있다구요." 캐빈이 붉은 얼굴을 빛내며 으쓱거렸다. "그리고 어디로 가면 집시 놈들을 만날 수 있는지도 알고 있죠." 린치 경감과 우 형사가 바라보았다. 캐빈이 말했다. "헤르메스라는 레스토랑이 있는데, 거기엔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르는 집시 패거리들이 손 님들 앞에서 공연을 하고 있거든요." "헤르메스에 집시들이 있다고?" "그렇습니다. 한두 놈도 아니고 떼로 몰려 있죠. 여자도 있고, 노파도 있습니다. 남자놈들 이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하면, 계집년은 춤을 추고, 할망구는 타로 카드로 점을 쳐준답니 다. 악단 이름이 뭐더라? 이봐, 로버트, 그놈들 이름이 뭐였지?" "집시 퀸스야. 하지만, 캐빈! 그 사람들은 이번 사건하고 아무런 관련도 없잖아."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 그건 아무도 모른다고. 어쩌면 그 악단 패거리 중에 우리가 찾는 살인범이 있을지도 모르고 말야." 캐빈이 우겨댔다. 린치 경감이 모처럼 그런 캐빈을 두둔하며 나섰다. "로버트, 내 생각도 그래. 이번엔 캐빈이 아이디어를 냈잖아? 그러니, 캐빈의 의견은 충분 히 존중해 줄 가치가 있다고. 범행 현장에서 집시 카드가 발견됐다면, 범인이 집시일 가능성 이 있는 거고. 따라서 집시들 뒤를 캐어보는 것도 헛수고는 아니잖나?" "딴은 그렇군요." 로버트 역시 수긍했다. "그럼 나가보라고. 수사는 난롯가에 둘러앉아 옛날 얘기나 하는 것처럼 이러쿵저러쿵 해 서는 해결되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겠나? 자, 어서 당장 나가라고! 크리스 올랜도를 찾아가 봐. 그래서 원한을 가진 녀석이 있는지 물어보란 말야. 그리고 헤메슨지 뭔지 하는 식당에도 가서 그 집시 패거리 역시 조사해 보라고!" 린치 경감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천천히 연기를 토해 내며 두 사람의 동태를 흘끔거렸다. 캐빈과 밖으로 나오며, 로버트가 말했다. "캐빈, 정말 이번 추리는 그럴 듯해. 아주 감탄했다고. 이제부터는 자네를 다시 봐야겠는 데?" "그거 기분 나쁘게 들리는군." "칭찬해 주는데, 어째서 기분이 나쁘단 거지?" "자네 평소에 나를 어떻게 봤길래,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고? 응? 도대체 나를 어떻게 봤 길래 그러는 거지?" 캐빈은 목에 힘을 주며 이렇게 큰소리쳤다. 크리스 올랜도는 런던대학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정복 경찰관의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있는 병실 주변 복도는 열광적인 10대 팬들이 밀어 닥쳐 어수선했다. 캐빈과 우 형사가 들어갔을 때, 병실 안 역시 듬직한 체구의 사설 경호원이 지키고 있었 고, 침대 주위엔 팬들이 보내온 꽃다발이 가득했다. 크리스는 아랫배에 붕대를 감은 채, 침대에 기대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다행히 칼 날이 내장을 비껴가서 부상이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당분간 노래를 할 수는 없겠지 만, 그 밖에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올랜도 씨, 저는 런던 경시청의 로버트 형사고, 이 친구는 캐빈이라고 합니다." 로버트가 신분증을 보이며 자신과 캐빈을 소개했다. 올랜도가 웃으며, 담배를 쥔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과 침대맡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경호 원을 번갈아 가리키며 대꾸했다. "로버트 씨, 저는 엘 도라도의 올랜도고, 이 친구는 제 보디가드인 데이빗이라고 합니다." 가까이서 보니, 얼굴 선이 섬세한 미남자였다. 더구나, 남자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 큼 긴 속눈썹과 결이 가느다란 금발 탓인지 약간 몽환적인 분위기마저 느껴졌다. "올랜도 씨, 상처는 좀 어떻습니까?" "아, 의사는 스무 바늘을 꿰맸는데, 솜씨가 아주 좋아요. 엄마가 바느질 품을 팔아 학비를 댔나 봅니다. 나무랄 데 없는 솜씨지요. 보시겠어요?" 크리스는 웃으며 장난스럽게 환자복 상의 자락을 들추었다. 왼쪽 배 부위에 길쭉한 봉합 자국이 나 있었다. 그는 자기 배꼽에 담뱃재를 털고, 웃어보였다. 그리고 환자복 자락을 내 렸다. 창가에 놓인 포터블 전축에서는 경쾌한 탱고 음악이 흐르고 있었는데, 록 가수의 병실에 서 탱고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조금 재미있어 로버트가 물었다. "탱고를 좋아하시나 보군요." 그가 말했다. "무엇이든 상관없소. 내 노래만 아니라면 어떤 것이든 좋소.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틀어놓죠. 혹시 탱고를 좋아하오?" "글세, 그다지 좋아한다고는 할 수 없는데요?" "저 탱고 음악 제목은 '포르주나 카베자'예요." "그렇습니까?" "탱고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쿵후는 어때요?" 크리스의 입술이 비껴 올라갔다. 왠지 조롱하는 투였다. 로버트가 응답했다. "쿵후는 할 줄 모릅니다. 저는 영국에서 태어났고, 영국에서 자랐죠." "하긴 나도 영국인이지만 폴로 경기를 해 본 적은 없으니까, 피장파장이군." 크리스가 장난스럽게 쿡쿡 웃었다. "이봐요, 올랜도 씨, 우린 농담이나 하자고 여기에 온 게 아니란 말이오!" 그때, 캐빈이 으르렁거렸다. 그는 그때까지 묵묵히 듣고 있다 마침내, 화를 참지 못해 한 마디 했던 것이다. "그럼, 당신들은 뭣 땜에 온 거죠?" 캐빈이 즉각 응대했다. "당신을 습격한 범인 땜에 온 거요. 범인이 누군지 알기 위해 온거란 말이오!" "혹시, 뭔가 집히는 게 없습니까?" 캐빈을 저지하며 로버트가 물었다. "이를테면, 누구에게 원한을 산 일이라든가, 그렇지 않으면 최근에 협박 전화를 받은 일은 없었나요?" "나를 미워하는 놈들은 많아요. 원한을 살 일이야 많지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올랜도 씨." "아아... 얼마 전 인터뷰에서 메탈은 죽었다고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자기는 스키드로를 끔 찍이 사랑하는 메탈 매니아라면서, 우리 공연장에 시한폭탄을 설치하겠다는 전화가 걸려왔 었죠. 그런 전화는 수시로 걸려와요. 어떤 녀석은 나 때문에 여자친구가 자기를 버렸다면서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기도 하죠. 물론, 우리 멤버 사이에도 늘 암투가 있어서, 서로 죽이고 싶은 격렬한 감정까지 느끼는 적도 한두 번이 아니거든. 그뿐만이 아닙니다. 여기 서 있는 이 친구, 데이빗 말이오. 이 녀석도 나를 굉장히 미워하는 치들 중의 하나거든." 그는 자신의 침대 곁에 서 있는 사설 경호원을 턱으로 가리켰다. 경호원이 기가 막힌 듯 항변했다. "아니, 크리스 씨. 내가 언제 당신을 미워했단 말입니까?" "누구나 나를 미워하는데, 자네라고 예외일 수는 없잖은가, 안 그래?" 크리스 올랜도가 이렇게 대꾸하며 웃어댔다. 그리고 그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껐다. 캐빈 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로버트가 물었다. "당신 방에 타로 카드가 여러 장 떨어져 있었어요. 그건 당신 카드였나요?" "아니, 난 카드놀이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데?" "당신 카드가 아니었단 말이죠?" "난, 카드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 왜 그런 걸 묻죠?" "혹시, 타로 카드 살인범 얘길 못 들어보셨습니까?" "아, 그거야 신문에서 읽었죠. 그럼, 나를 습격한 놈이 바로 그 자였단 말이오?" "그 자의 짓이라고 단정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그런게 발견됐으니, 우리로서 는 두 사건을 연관지어 생각해 보는 겁니다. 혹시, 당신을 습격한 괴한이 카드를 입에 강제 로 물리려는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나요?" "아니, 그는 내 목을 조이기만 했어요. 단도로 나를 찔러 죽이려고 했지. 오, 맞아. 그렇군. 이제 생각났어! 그 녀석이 나와 육박전을 벌일 때, 방울 소리가 났어!" "방울 소리라구요?" "그렇소. 찰그랑 찰그랑, 금속끼리 맞부딪치는 방울 소리를 들었어요." "당신의 목을 조일 때 말입니까?" "그래요. 내 목을 조일 때." "옷에 방울이 달려 있었던 겁니까?" "그건 알 수 없소. 옷에서 들린 건지, 아니면 다른 어디에서 들린 건지... 아무튼, 방울 소 리를 들었어요." "잘못 들은 건 아니겠죠?" "틀림없이 들었소. 분명히 방울 소리를 들었단 말이오." 크리스 올랜도는 차츰 질문이 성가신 듯 귀찮아하는 기색을 보였다. "크리스 씨, 고향이 어딥니까?" "내 고향은 웨일스의 카디프요." "카디프라면 저도 한 번 가본 적이 있죠. 로마 시대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럼 '웨일스의 집시'라는 노래도 고향을 추억하기 위한 것인가 보군요?" "당신이 내 노래를 알다니 놀랍군. 아, 그건 그냥 사랑 노래요. 일종의 세레나데 같은 거 랄까? 아무튼, 분위기를 집시풍으로 바꿔서 좀 강렬하게 불러본 것뿐이오." "집시라고요?" "그래요, 집시... 내 고향 웨일스는 척박하고 외로운 땅이오. 어릴 적, 나는 종종 집시를 보 았더랬어요. 그때의 감정을 바탕으로 만든 노래가 바로 '웨일스의 집시'요. 그들은 왠지 슬퍼 보여요. 그래서 척박한 땅을 떠도는 집시들의 삶에서 받은 영감을 곡으로 옮긴 것이 바로 '웨일스의 집시'였단 말이오." 크리스는 부쩍 피곤한 듯한 기색을 보였다. "괜찮다면, 좀 누워서 쉬고 싶군요." 로버트와 캐빈은 서로 눈짓을 하고 일어났다. "올랜도 씨, 그럼 쾌유를 빌겠습니다." 로버트가 말했지만, 크리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시트를 고쳐 덮더니, 눈을 감으며 몸을 돌려누웠다. 14 만월제의 밤 캐빈과 우 형사가 헤르메스에 도착했을 때, 서편 하늘에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캐빈은 이 번에도 반갑게 다가오는 공작을 향해 욕설을 뱉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잠시 후, 앤디가 나타 났는데, 그는 안면이 익은 두 사람을 친근한 태도로 맞이했다. "수전 양이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지금 어디 있지?" "방갈로 쪽으로 가보세요. 오늘 밤엔 만월제 축제가 열리는데, 준비가 한창이거든요." "앤디, 만월제가 뭔데?" "아, 집시들의 축젭니다. 훤히 떠오른 달빛 아래서 모닥불을 피우고, 한바탕 노래와 춤을 즐기는 거죠. 두 분, 오늘 밤, 좋은 구경을 하게 되셨어요." "그런가? 아무튼, 고맙군, 앤디." 두 사람은 본관 건물과 얼마쯤 떨어져 있는 숲 속의 방갈로 쪽,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캐 빈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수전이라면 혹시 자네가 요즘 사귄다는 그 여자인가?" "맞아." "그런데 그 여자가 왜 여기 와 있지?" "수전은 요즘 헤르메스에 출근하고 있거든." "웨이트리스로 직업을 바꾼 건가?" "며칠 전, 그녀와 여기서 식사를 했는데, 그때, 집시퀸스의 공연을 보았거든. 수전은 그 공 연을 보고 집시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은 생각이 떠올랐대. 그래서 요즘 매일 같이 여기 나와 인터뷰도 하고, 자료도 정리하는 모양이더라고." "크리스 올랜도란 친구 평전을 쓴다고 하지 않았나?" "음, 두 가지 작업을 병행할 모양이야." "자그마한 여자가 욕심도 많군! 오, 신이여, 맹렬 여성을 축복하소서." 캐빈이 웅얼거렸다. 그것은 영국 국가의 제목인 '신이여, 여왕을 축복하소서'를 비꼬는 말 이었다. "자네, 내가 수전과 교제하는 게 못마땅한가?" "조금 그렇지." "어째서?" "난 호모거든. 사실은, 자네한테 반했다구. 그래서 기회를 봐서 자네한테 프로포즈를 할 생각이었는데, 뜻밖에 경쟁자가 나타났잖아." "자네가 호모라구?" "그래, 난 호모야." 캐빈이 킥킥거리고 웃었다. 로버트는 그의 묵중한 배에 한 방을 먹였고, 캐빈은 '어이쿠!' 신음 소리를 내더니 계속해서 히히덕거렸다. 방갈로가 있는 뒤뜰 정원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거기에 집시퀸스의 멤버들이 활활 타 오르는 모닥불을 에워싸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한쪽에 타로 카드 점을 치는 노파 카르 멜라와 집시 무희 에스메랄다가 있었는데, 그 틈에 수전의 아담한 모습도 보였다. 그녀는 카 르멜라 노파의 곁에 바짝 붙어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노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 이었다. "어머, 웬일이세요?" 수전이 로버트와 캐빈을 보고 손을 까딱였다. "좋은 구경거리가 있다기에 와봤지요." 로버트가 대답했다. 집시퀸스의 멤버들은 카르멜라 할머니의 얘기에 온통 정신을 팔고 있었다. 노파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와하고 웃기도 했다. 그날이 집시들에게 특별한 의 미가 있는 날이라는 것은, 주위에 마련된 여러 가지 준비물을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정원 공 터엔 장작더미가 가득히 마련되어 있고, 바비큐를 할 수 있는 야외 그릴이며 냄비들, 그리고 불을 붙이기 위한 기름통 따위가 있었다. 그때, '집시퀸스'의 리더인 스테파노가 숲 저편에서 나타났다. 그는 집시들이 입는 흰색 프 릴 셔츠에 붉은색 볼레로 조끼, 그리고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는 다른 단원 한 사람과 함께 무언가 희멀건 물체를 양쪽에서 들고 나타났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것은 털을 벗겨낸 커다란 통돼지였다. "엄청나게 크죠?" 수전이 로버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걸 통째로 구울 건가 보죠?" "네. 축제용 굴라시를 만들 거래요." "오늘이 집시들에겐 특별한 날인가 보죠?" "네. 만월제 날이에요." 캐빈의 질문에 수전이 응답했다. "남프랑스의 집시들은 보름달이 뜨면 축제를 벌인데요.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통돼지 바비큐를 구우면서, 노래와 춤을 즐기는 거죠." "만월제라면 달이 떠야 할 텐데. 영국에서도 가능할지 모르겠군요." 캐빈이 심통스런 말투로 중얼거렸다. "달이 뜨고 있잖아요. 저기 보세요." 수전이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 위로 둥근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마치 핏물에 담근 은쟁반을 꺼내 든 것처럼 불그레한 빛깔로 물들어 있는 보름달이었다. "런던 날씨는 믿을 수가 없어요." 캐빈이 여전히 볼멘소리를 지껄여댔다. "금방 맑았다가도 갑자기 비가 쏟아져 내리는 게 런던 날씨라구요. 수전 양은 오랫동안 런던에서 살았으면서도 그걸 모르십니까?" "일기예보엔 비가 안 올 거라고 하던 걸요?" "맙소사, 이렇게 순진하시기는! 런던에서 도무지 신뢰할 수 없는게 딱 두 가지 있죠. 하나 는 정치인들이 내거는 선거공약이고, 또 하나는 바로 일기예보라구요." 모닥불 곁에 웅크리고 앉아, 투덜거리는 캐빈의 음성이 마치 커다란 곰이 신음하는 소리 처럼 들렸다. "캐빈 형사님은 왜 그렇게 불만이 많으세요?" 캐빈의 퉁명스런 태도에 수전은 조금 기분이 상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듯 로버트가 재치있게 끼어들어 수전의 귀에 속삭였다. "저 친구, 오늘 윗분한테 호된 꾸지람을 들었어요. 그래서 기분이 엉망이라 그런 거니 이 해하세요." 그때, 어디선가 찰그랑찰그랑 울리는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로버트와 캐빈은 순간적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 소리는 통돼지를 기다란 쇠막대기로 꿰어 바비큐 그릴에 얹고 있는 스테파노에게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스테파노가 움직일 때마 다 맑고 차가운 방울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의 조끼에 달린 작은 금속 방울과 장신구들이 부딪치며 내는 소리였다. "이런, 이게 뉘신가?" 카르멜라 노파의 허스키한 음성이 들렸다. 한참 얘기에 열중하던 그녀가 뒤늦게 로버트와 캐빈을 발견했던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런던 경시청의 형사님들이 웬일이슈?" "미안합니다. 불청객이 나타나서." "불청객이라니? 우리 만월제 축제엔 누구나 다 환영이라오. 그러니 그런 소리 말아요!" 카르멜라 노파는 주름진 얼굴에 가득 웃음을 담고, 로버트와 캐빈의 손을 차례로 잡았다. 진정으로 환영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수전이 친근한 미소를 던지며 노파에게 말했다. "카르멜라 할머니, 오늘 굴라시는 맛있겠죠?" "암, 그렇고 말고. 오늘 돼지는 아주 희고 통통한 게, 저기 떠 있는 보름달처럼 우리 마음 을 풍족하게 해주는군 그래." 그때, 캐빈이 로버트 옆에 다가앉으며 나지막이 귓속말을 했다. "로버트, 저 녀석들 좀 보라구. 허리춤에 모두 단검을 한 자루씩 차고 있잖아?" 로버트가 보니, 과연 캐빈의 말처럼 집시퀸스의 멤버들은 허리춤에 단검 한 자루씩을 차 고 있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그 단검들이 크리스 올랜도의 습격 현장에서 발견된 단검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저 녀석이 수상해." 캐빈이 로버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다시 귓속말을 속삭였다. 그의 시선은 스테파노를 향하고 있었다. 스테파노는 모닥불에서 조금 떨어진 바위 위에 걸터앉아 고개를 숙인 채, 무 릎에 얹은 기타의 줄을 고르고 있는 중이었다. "잘 보라구! 저 녀석만 단검이 없어. 다른 놈들은 모두 단검을 가지고 있는데, 저 녀석 혼 자만 없다구!" 만월제 축제가 시작된 것은 본격적인 어둠이 내린 후였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중천에 떠오르고, 숲속에서는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는 가운데, 정열 적인 플라멩코 기타 소리가 울려퍼졌다. 커다란 통돼지 바비큐가 지글지글 기름을 흘리며 구워지는 가운데, 모두들 모닥불 주위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있었다. 스테파노는 왁자지껄한 그 무리에 끼어 완전히 몰입된 상태에서 플라멩코 기타를 치고 있 었다. 주변의 소란스러움은 아예 잊은 듯한 모습이었다. 모두들 저마다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고, 떠들며 웃어대느라 그의 기타 연주를 듣고 있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캐빈은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스테파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그리고 또 스테파노를 주시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에스메랄다가 연주에 몰입되어 있는 스테파노에게 간단없이 뜨거운 눈길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스테파노의 사촌 여동생이래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수전이 로버트에게 속삭였다. "그래서인지 아주 다정해 보이는군요." "다정하기만 한 게 아니에요. 저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라구요." "옛? 사촌 사이라면서 연인이란 말입니까?" "그렇대요." "암, 그렇고 말고! 집시들에겐 그런 관습이 보편적이거든. 사촌끼리 결혼하는 게 다반사라 구!" 이때, 카르멜라 노파가 수전과 로버트의 사이에 끼여들었다. 그녀는 손가락마다 알록달록 한 반지를 낀 손에 커다란 은제 술잔을 들고 있었다. 몹시 기분 좋은 상태에서 술을 꽤 마 셨는지 어지간히 취해 있었다. "스테파노는 좋은 애라오. 하지만, 저 애에게는 나도 모르는 슬픔과 분노가 있다오. 저 애 는 열여섯 살 때, 갑자기 니스로 나를 찾아왔지. 지금부터 10년 전이야. 브뤼셀에서부터 걷 거나 히치하이크를 해서 왔다고 했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 '람스게이트에서 배를 탔는 데, 다시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다' 그 애가 영국에 대해 말한 건 그게 전부였어. 영국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거든. 잘 들어보라구! 저 애의 기타 소리를 들 어보면 알 수 있어. 가슴에서 타오르는 무서운 감정의 소용돌이를 말이야." 노파는 이렇게 말하며, 손에 든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잠시 후, 건너편에서 요란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로버트와 수전이 놀라서 일어나보니, 방갈로 앞에 집시들이 둘러 서 있는 가운데 캐빈과 스테파노가 한 덩어리로 뒤엉켜 바닥을 뒹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비명은 에스메랄다가 지르는 소리였다. "더러운 집시 새끼, 죽여버린다!" 캐빈이 스테파노의 가슴 위에 올라타고, 얼굴을 사정없이 난타했다. 주먹이 한 번씩 스테 파노의 얼굴을 내려칠 때마다 에스메랄다의 비명이 높아졌다. 다행스러운 것은 집시 남자들 이 스테파노와 합세해 캐빈을 두들겨 패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주변에 둥그렇게 둘 러서서 열심히 동료를 응원하며 목청껏 소리만 질러대고 있을 뿐이었다. "이봐, 캐빈, 무슨 짓이야. 당장 그만둬!" 로버트가 달려들었지만, 캐빈의 힘을 감당해 낼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 틈을 타서 스테 파노가 허리를 비틀어 캐빈을 떨쳐내고, 재빨리 일어서면서 동시에 이마로 캐빈의 얼굴을 들이받았다. "아이쿠, 망할 놈이!" 캐빈이 얼굴을 감싸쥐고, 뒹굴었다. 스테파노가 다시 달려들려는 것을 로버트가 붙잡았다. 그러자 스테파노는 한 마리 맹수처럼 방향을 돌려, 로버트에게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동시 에 한 덩어리가 되어 모닥불 쪽으로 뒹굴었다. "스테파노!" 주먹이 막 로버트의 얼굴을 후려치려는 순간, 카르멜라 노파의 음성이 허공을 쩌렁쩌렁 울렸다. 무엇으로도 억제할 수 없을 것 같던 스테파노의 싸움질이 멈춘 것은 그때였다. 그는 갑자 기 얼어붙은 듯 휘두르던 주먹을 멈추었고, 그 틈을 타서 로버트는 그를 밀치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로버트에게 수전이 달려와 옷을 털어주었다. 에스메랄다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스테파노를 부둥켜안고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러자 스테파노는 벌떡 일어나 숲속으로 달려갔고, 에스메랄다가 그를 뒤따라 달려갔다. 로버트는 나무에 기대앉아 씩씩거리고 있는 캐빈에게 다가갔다. "뭣 땜에 그 야단이 난 거야?" "카르멜라 할망구한테 단도를 내보이며 이 물건을 본 적이 있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할망 구가 당장 '왜 스테파노의 단도를 당신이 갖고 있느냐?'고 되묻더군. 그건 스테파노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거라는 거야. 손잡이에 있는 R자는 스테파노의 아버지 이니셜이래. 라파엘로 라고. 그러더니, 할망구가 큰 소리로 스테파노를 불렀어. 난, 그 녀석이 어떤 얼굴을 할지 궁 금했지. 곧 그 녀석이 오자, 할망구가 '네 단도를 왜 이 양반이 가지고 있냐?'고 묻더군. 그 랬더니, 녀석이 느닷없이 내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잖아!" 캐빈이 입가의 핏물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투덜거렸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라구. 단도는 스테파노 녀석의 것임에 틀림없어. 따라서, 크리스 올랜 도를 습격한 놈이 바로 그 녀석이란 얘기지." 나중에 확인해 본 것이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다. 집시들은 누구나 단검을 한 자루씩 소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손잡이엔 각기 자신의 이니셜이 있었다. 이를테면, 호세의 것은 H, 나 자리노의 것은 N, 심지어 에스메랄다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의 이니셜은 E였다. "이제 그 녀석을 체포하는 일만 남았다구. 어쩌면, 놈은 크리스를 습격한 범인일 뿐만 아 니라, '타로 카드 연쇄살인범'일 가능성도 크다구." 어느새 왔는지 캐빈의 말을 엿들은 수전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스테파노가 타로 카드 연쇄살인범이라구요?" 로버트는 즉각 그 말을 부정했다. "아냐, 그건 캐빈이 괜히 해본 소리야." "그럼, 크리스를 습격한 범인이란 말은요? 로버트, 정말 스테파노가 크리스 올랜도를 습격 한 범인이라고 믿고 있나요?" "그건 캐빈의 말이 맞아.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의 짓이라고 봐야겠지." 수전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테파노가 어째서 크리스를 죽이려 했을까요? 그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요?" "알 수 없지." "그럼, 크리스도 스테파노를 알고 있을까요?" "그는 우리가 찾아갔던 날, 범인의 정체를 모른다고 했거든. 만일, 스테파노의 짓인 줄 알 고도 그런 말을 했다면 거짓말을 한 거겠지." "두 사람 관계가 궁금해요. 대체 어떤 관계인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수전은 비로소 캐빈에게 관심을 보였다. "많이 다치지 않았어요?" "견딜 만합니다. 하지만, 놈은 힘이 대단하더군요. 가라데 유단자인 내가 당해내기 힘들 만큼 무서운 놈이에요!" 캐빈이 부어오른 얼굴을 문지르며 말했다. "로버트, 언제 갈 거예요? 캐빈도 상처를 치료해야잖아요?" "난, 가지 않겠어. 여기서 기다리다, 스테파노 놈이 나타나면 체포해야지." 그가 대꾸했다. 에스메랄다가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녀는 풀죽은 모습으로 사람들 사이에 끼여들 었다.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어느새, 집시들은 방금 전의 소동은 아랑곳하지 않고, 술울 마시거나 시끄럽게 얘기를 지껄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일어나 허 리춤의 단검을 꺼냈다. 그리고 이제 막 먹음직스럽게 익은 통돼지 바비큐를 자르기 시작했 다. 그때, 누군가가 만돌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통째로 돌아가며 구워지는 바비큐 냄새가 풍겨왔다. 카르멜라가 옥수수로 빚은 술을 모두에게 돌렸다. 이때, 북을 치는 소년 호세가 커다란 단지에 술을 담아 들어왔다. 구운 바비큐 고기도 먹 기 좋게 썰어왔다. "고마워, 호세." 로버트와 수전도 커다란 잔에 하나 가득 옥수수 술을 받았다. 나머지 집시들이 손뼉을 치 며, 박자를 맞추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집시 남자가 탬버린을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 다. 히이드가 덮인 들판, 성처럼 서 있는 그대. 낡은 성의 망루처럼 언제나 먼 곳을 보는 그대, 나는 성을 둘러싼 해자처럼 언제나 그대 곁을 맴돈다네. 폭풍이 오리라, 그대 먼 눈을 때리며... 폭풍이 오리라, 내 가슴에 눈물을 채우며... 아름다운 세레나데였다. 누군가에게 저토록 애절하게 갈증을 느껴본 적이 있을까? 수전이 살며시 로버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아마도 한두잔째 마신 독한 옥수수 술 의 취기가 오른 모양이었다. 그녀의 귀여운 얼굴에 발그스름한 홍조가 떠오른 모습이 보기 에 아름다웠다. 로버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아직 소년 티가 채 가지시 않은 젊은 집시, 호세가 작은 북으로 장단을 맞췄다. 북소리에 따라 만돌린 소리도 격정적으로 한 옥타브 올라가고, 노래의 곡조도 격렬해져 갔다. 누군가 장작을 집어넣었고, 장작을 삼킨 불길은 더 세게 타올랐다. 그리고 짙은 불그림자가 사람들 의 얼굴에 어른거렸다. 로버트는 술잔을 기울이며 주위의 집시들을 살펴보았다. 다들 비슷비슷한 단도를 허리에 차거나, 주머니에 꽂고 있었다. 그들은 즉석에서 그 단도를 뽑아 송아지 고기를 썰기도 하 고, 나뭇가지로 무엇인가 조각하기도 했다. 오랜 세월 노숙을 해온 그들에게 있어, 저런 단 도는 생필품일 것이다. 곡은 어느새 바뀌어, 세레나데가 흐르고 있었다. 이번엔 호세가 노래를 이어갔다. 어머니, 나를 보세요. 창 밖을 보지 마세요. 나만을 보세요. 나는 어머니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나를 버려두고 어디로 가시려고 하나요? 나는 어머니와 함께 있고 싶어요. 그런데 어머니는 자꾸만 저 먼 지평선 너머로 가시는 거죠? 나를 혼자 버려두고 말이에요. 어머니의 시선이 향하는 저 지평선 너머엔 무엇이 있나요? 어머니, 창 밖을 보지 마세요. 제발 나를 보세요. 나만을 보세요. 저 지평선 너머엔 아무것도 없어요. 구슬픈 멜로디였다. 어느새, 보름달은 자작나무 위의 하늘 꼭대기에 걸려 있었다. 비현실적으로 보일 만큼 아 름다운 정경이었다. "카르멜라 할머니, 스테파노가 보이지 않아요." 에스메랄다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카르멜라를 보았다. "스테파노는 어디로 간 걸까요?" 스테파노는 아까 사라진 이후,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카르멜라가 다정하게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에스메랄다를 위로해 주었다. "걱정 마라. 스테파노는 어디 가지 않는다. 언제든 네 곁으로 돌아올 거야." 그러나 그날 자정이 다 되어 수전과 로버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까지도 스테파노는 돌아오지 않았다. 캐빈은 수전과 로버트가 떠난 후에도 스테파노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15 어둠 속의 실루엣 며칠째, 찌뿌드하게 흐린 하늘이 계속됐다. 수전은 자정이 넘어서까지 노트북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지만, 머릿속은 하얗기만 했다. 크리스 올랜도 평전은 구성이 모두 잡혀 있었다. 그런데, 왠지 두서너 페이지에서 생각이 막힌 채 진행이 저조한 상태였다. 그녀는 베이컨과 크루아상으로 대강 요기를 했을 뿐, 저녁도 거른 채로 커피만 연거푸 다섯 잔째를 마시고 있었다. '역시 글을 쓴다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야.' 그녀는 마침내 책상 앞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여섯 잔째의 커피를 타서 소파에 앉았다. 스테파노가 행방불명된 지 보름이 넘어가고 있었다. 만월제의 밤에 캐빈과 싸움을 벌이고 사라진 후, 다시는 헤르메스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집시퀸스'는 공연을 중단한 상태였다. 리더인 스테파노 없이는 공연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타로 카드 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단원들은 너나없이 모두 경찰 의 취조를 받아야 했다. 물론, 모두 무혐의로 밝혀졌지만, 이 때문에 헤르메스 측으로부터 일방적인 계약파기까지 당하며 팀의 분위기는 매우 뒤숭숭했다. 자연스럽게, 종적을 감추고 있는 스테파노에 대한 혐의는 한층 더 짙어져 갔다. 게다가, 그는 크리스 올랜도를 습격한 유력한 용의자로 경시청의 추적을 당하고 있는 터였다. 그래서 요즘 집시퀸스의 멤버들은 깊은 수심에 싸여 있었다. 헤르메스에서는 그들이 숙소로 쓰고 있던 방갈로를 비우라는 독촉을 해댔다. 하지만, 그들 에겐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갈 곳이 있다 해도, 스테파노만 남겨두고 훌쩍 떠나버릴 수도 없었다. 임시로 다른 곳에 일자리를 구하려 해도, 스테파노가 없는 상태에서는 제대로 연주 를 해낼 수도 없는 처지였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서, 수전은 BBC 측에 자신이 기획한 프로그램인 <집시>를 포기한다 는 의사를 전달했다. <집시>는 다큐멘터리로서는 매력적인 아이템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취재가 불가능한 데다가, 당장 다음 개편에 맞춘 특집방송으로 내보낼 계획이었기 때문에 시일이 매우 촉박했던 것이다. 이렇게 한 가지 일거리가 줄었으니, 이젠 크리스 올랜도의 평전에만 전념하면 되는데, 도 무지 몰입이 안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보름 전에 발생했던 크리스 올랜도 피습사건이 무 척 예민한 부분으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평전이 출판된다면, 독자들이 가장 흥미를 느낄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 될 것이다. 그들은 크리스 올랜도가 어떻게 살해될 위기를 넘겼는지 알고 싶어할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크리스 올랜도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말아 줄 것을 요청해 왔다. 그것은 단지 정신이상자나 극성팬의 소행일 뿐이니, 무시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런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평전 출간 문제는 허락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그러나 수전과 출간을 계약한 출판사 측에서는 크리스 올랜도 피습사건을 꼭 다루지 않으 며 안 된다고 그녀를 압박해 왔다. 적어도 이것은 몇만 부의 판매를 좌우할 만큼 흥미로운 이슈이기에, 어찌보면 출판사 입장에서는 당연한 요구였다. 아무튼, 이 틈바구니 사이에 낀 수전은 골치가 아팠다. 어떻게든 절충점을 찾아야 했는데,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아아, 글을 쓴다는 건 골치아픈 일이야. 나는 왜 하고많은 직업을 두고,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어.' 수전은 남은 커피를 홀짝 마시고 나서, 투덜대며 일어섰다. 빈 커피잔을 싱크대의 개수통에 넣고, 그녀는 창가로 다가갔다. 온종일 컴퓨터 화면에서 깜빡거리는 커서만을 지켜보아서인지 눈앞이 침침했다. 그녀는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 다. 어두운 하늘에서는 요란스럽게 비가 퍼부어대고 있었다. '이런, 또 비가 오잖아?' 차가운 빗방울이 들이치자, 그녀는 얼른 창문을 닫았다. '정말 런던은 비가 많은 곳이야!' 다시 소파에 돌아와 팔짱을 끼고 앉으며, 그녀는 문득 홍콩을 떠올렸다. 그녀가 태어난 아름다운 항구 도시 홍콩도 런던처럼 습기가 많고 비 오는 날이 많은 편이 다. 하지만, 홍콩인들은 영국 사람들처럼 음울하지 않고, 생기발랄하면서도, 시끄럽다. 사실, 수전은 외교관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서방 국가를 돌아다니며 살아온 터 여서, 동양의 문화나 관습에 대해서 그리 많이 아는 편은 못 되었다. 그래도 아주 어릴 적에 뛰놀던 홍콩의 골목길은 언제나 자신의 고향인 것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일찍 상처를 하고, 혼자 살다가 공직에서 물러난 후, 재혼을 했고 얼마 전 홍콩 으로 돌아갔다. 그때, 수전은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고, 혼자 영국에 남겠다고 했다. 오랫동안 떠나 살아 온 낯선 고향보다, 차라리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익숙해진 서양식 생활이 더 편 해서였을까? 아니, 그건 정당한 이유가 못 된다. 왜냐하면, 비록 지금은 중국 영토로 환원됐다고는 해도, 1세기에 걸친 통치의 흔적으로 홍 콩엔 영국의 문화와 관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게다가 건물이나 지역 명칭도 영국식을 따 르는 곳이 대부분이니 생활하는 데 낯설거나 특별한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가 혼자 남은 진짜 이유는 새어머니와 이복동생들과 어울려 사는 데 익숙치 못해서였을 것이 다. 하지만, 요즘 들어 가끔씩 아버지가 계신 홍콩이 그리웠다. 특히 오늘처럼 습기가 차고 음 울한 하늘만 올려다보이는 날씨에는 더욱 그랬다. '홍콩으로 가버릴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홍콩으로 떠날 수 있다. 내일 당장이라도 홍콩행 비행기를 타고 빅토리아 항구가 보이는 퀸즈로드의 아버지 집으로 가면 된다. 그러면 아버지는 무척 반갑 게 맞이해 줄 것이다. 새어머니와 이복동생들과 함께 사는 것이 싫다면 따로 아파트를 얻어 혼자 살 수도 있다. '그런데 왜 망설이고 있을까?' 허공을 멍한 눈길로 바라보자, 문득 로버트의 미소띤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의 마음을 사 로잡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어느새, 로버트가 자신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알아 챈 순간, 수전은 놀라움과 함께 흐뭇한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그때, 창 밖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옆집 노부부가 키우는 독일산 도베르만이다. 거 칠고 사납기는 하지만, 영리한 녀석이다. 낯선 사람과 동네 주민을 구별할 줄 알 만큼 영리 하다. 그런 녀석이 저렇게 짖어댄다면 분명히 지금 이 근처에는 낯선 사람이 와 있다는 뜻 이다. 혹시, 그 사람이 로버트라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로버트가 왔는지도 몰라!' 수전은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달려갔다. 커튼을 조금 들추고, 틈새로 정원 쪽을 내 다보았다. 정원엔 오렌지빛 등이 하나 밝혀져 있었는데, 어디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바보 녀석, 도둑 고양이를 보고 짖었나 봐.' 수전은 실망하며 커튼을 내렸다. 그리고 막 돌아서려는 순간, 커튼 위로 시꺼먼 그림자 하 나가 빠르게 휘익, 지나쳐가는 것을 보았다. 수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숨겼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밖은 조용하다. 개 짖는 소리도 그쳤다. 추적거리며 내리는 빗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올 뿐이다. 잘못 본 걸까? 아무래도 이상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귀를 기울였지만, 발소리는 물론, 조그만 인기척조차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잘못 본 거야. 피곤해서 헛것을 봤나 봐.' 수전은 안심하며 휴우,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생각하며 벽에서 몸을 떼는 순간, 다시 또 커튼 위에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목격했다. 분명히 사람의 그림자였다. 누군가 그녀의 2 층 창문 베란다 앞에 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로버트는 아니야. 그가 2층 베란다를 통해 들어올 리가 없잖아? 그럼, 도대체 누구지? 아 아, 도대체 누구람!' 수전은 공포에 사로잡힌 채, 벽면을 따라 조금씩 이동해 갔다. 그녀는 벽에 걸어둔 장식용 중국제 검을 집어들었다. 아버지가 아끼던 소장품이었는데, 홍콩으로 가기 전 수전에게 선물 로 주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칼집에서 날이 시퍼런 장검을 조심스럽게 빼어냈다. 장검을 두 손으로 움켜쥐자, 대담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담대함에 용기를 얻은 그녀는 조 심조심 옆걸음질을 치며 방의 맞은편 끝으로 걸어가, 이윽고 벽면의 스위치 옆까지 도달했 다. 그녀는 한 손을 뻗어 스위치를 내렸다. 순간, 방 안의 불이 꺼지면서 어두워졌다. 동시에 창가엔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되어보이는 시꺼멓고 커다란 그림자가 확, 떠올랐다. 그 그림자는 방에 불이 꺼지는 것에 놀란 것처럼, 휘익 옆으로 사라졌는데, 마치 시꺼먼 바 람이 지나쳐간 것처럼 재빠르고 민첩한 동작이었다. '들어오려면 어디 한번 들어와 보라구! 이걸로 당장 후려칠 테니!' 수전은 장검을 두 손으로 꽉 움쳐쥔 채, 두근거리는 심정을 억제하며 똑바로 창문을 주시 했다. '아니, 들어오지 않는 게 피차 좋을 걸!' 그녀는 그렇게 꼼짝도 않고 서서 기다렸다. 그러나 커튼엔 정원의 보안등 불빛만이 어른 거릴 뿐이었다. 장검은 상당히 길고, 또 무거웠다. 두 손으로 들고 있는 것이 차츰 버거워졌 다. 이마에선 식은 땀이 흐르고, 두 손에도 진땀이 배었다. 마침내, 장검을 든 그녀의 두 손 이 아래로 조금씩 처지더니, 칼끝은 바닥에 닿게 되었다. 그녀는 혀를 빼물고 헉헉거리며 생 각했다. '괴한은 가버린 걸까?' 가버린 것 같다. 아니, 아직도 창밖에 그대로 숨어 있을지 몰라... 몹시 궁금했지만, 창문을 열고 밖을 확인해 볼 엄두는 차마나지 않았다. 그녀는 바닥에 처져 내려온 장검을 여전히 두 손으로 쥔 채, 엉거주춤 서서 꼼짝도 않고 기다렸다. "수전! 수전! 나예요!" 30분 후, 누군가 수전의 현관문을 마구 두드렸다. 로버트였다. 그는 여러 번 초인종 벨을 눌렀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다. 그래서 현관문을 마구 주먹으로 두드린 것이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아무런 대답이 없는 것이 이상했다. 도움을 청하는 수전의 전화를 받자마자 최대한 신속하게 달려왔는데, 그새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로버트의 머릿속엔 온 갖 걱정이 오갔다. 그의 몸은 빗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수전, 안에 없어요? 나, 로버트란 말이오!" 그는 다시 또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그때, 안에서 수전의 음성이 들렸다. "누구죠?" "오, 수전. 나요, 로버트!" "로버트라구요?" "그렇소. 어서 문을 열어요!" 문이 살짝 열리더니, 수전이 냉큼 얼굴을 내밀었다. 로버트임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커다 란 눈에 생기가 돌았다. "오, 로버트! 왜 이제야 왔어요?" "전화 받고, 즉시 달려온 거요." "얼마나 기다렸다구요!" 와락 로버트의 목에 매달리며,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수전! 대체 무슨 일이오? 자자, 이젠 괜찮아요! 겁내지 말아요!" 로버트는 수전을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로버트, 너무 무서웠어요!" "놈이 여기까지 들어왔었소?" "아뇨. 들어오진 않았지만, 너무 무서웠어요!" 그는 겁에 질린 수전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 별다른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기다란 장검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자신을 보호하느라 지니 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작고 연약한 그녀가 저렇듯 무거운 장검을 들고 떨었을 것을 생각하니 가련하면서도, 한편으론 대견했다. "당신이 저 칼을 빼들고 있었군요?" "맞아요. 괴한이 들어오면 맞설 작정으로요." "잘했소. 수전. 아주 훌륭해요!" "제가 잘 했나요?" "그럼 그럼, 아주 잘 했어요. 잘 했고말고!" 그 말에 수전이 울음을 터뜨렸다. 로버트가 곁에 있다는 안도감에 한꺼번에 공포와 긴장 이 풀리고, 울음이 터져나왔던 것이다. "자자, 울지 말아요!" 그는 그녀를 달래서 소파에 앉히고는, 창가로 가서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베란다 에 놓인 화분 하나가 쓰러진 외엔 별다른 흔적이 없었다. 비가 퍼부어대는 정원에도 역시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창문을 닫고 커튼을 가린 뒤, 소파로 돌아왔다. 그 리고 몸을 움추리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수전의 곁에 앉았다.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쥐 며 그가 물었다. "어떤 자인지 괴한의 얼굴을 보았나요?" "아뇨. 얼굴은 못 봤어요. 커튼 너머에서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을 뿐이예요." "커튼을 젖히고 내다보지 않았단 말이죠?" "어떻게 내다봐요? 당신 같으면 내다볼 수 있었겠어요? 물론, 당신이라면 내다볼 수 있었 겠죠.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어요. 너무 겁이 나서 그럴 수 없었다고요!" "알아요, 알아요. 그럴 수 없었다는 걸, 충분히 이해해요." "로버트, 혹시 타로 카드 살인범이 아닐까요? 타로 카드 살인범은 꼭 비 오는 날 밤에 범 행을 한다잖아요? 그 자가 나를 죽이려고 왔던 건 아닐까요?" "그건 모르겠소. 하지만, 아닐 거요. 타로 카드 살인마는 금발의 여자만 노리거든." 이렇게 수전을 안심시키면서도 로버트는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진짜 타로 카드 살인 범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단순한 좀도둑이었는지도 모르고. "로버트, 당신 권총 가지고 있어요?" 수전이 그의 허리춤을 더듬으며 물었다. "지금은... 어, 없어요." 그녀의 손길에 간지러움을 느끼며 로버트가 대답했다. "어째서 경찰이 권총도 없어요? 경찰이면서 어째서 권총을 안 가지고 다니는 거죠? 범인 을 맞닥뜨린다든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권총이 있어야 하잖아요?" "미국 경찰은 늘 권총을 가지고 다니지만, 우린 달라요. 영국 경찰은 원칙적으로 개인 무 기를 휴대하고 다니지 않게끔 되어 있어요. 그래서 경시청 보관함에 두고 다니죠. 그런데 왜 그런 걸 묻죠?" "로버트, 아무래도 나 권총 한 자루 사야 할 것 같아요." 수전이 말했다. "저기 저 칼 있죠. 저 칼은 너무 무거워요. 그래서 오래 들고 서 있기가 아주 힘들었다구 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커다란 중국제 장검을 가리키며 그녀가 말했다. "수전, 잠깐 기다려요." "어딜 가려고요?" "밖에 잠깐 나갔다 오겠소. 혹시 무슨 흔적을 남겼나 보고 오려는 거요." "무서워요.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되나요? 흔적은 내일 찾아보면 되잖아요?" "빗물에 씻겨나갈 수도 있으니까... 걱정 말고 있어요. 문을 꼭 잠그고 있으면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금방 돌아오겠소." "금방 오는 거죠? 정말, 금방 와야 돼요!" "알았어요." 로버트는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는 수전을 남겨둔 채, 현관 밖으로 나왔다. 로버트는 비를 맞으며, 수전의 정원 뒤쪽으로 갔다. 당장 눈에 띄는 물체가 있었다. 자작나무 고목과 잔디 위에 시꺼먼 덩어리가 누워 있었던 것이다. 가까이 가서 보니 커다란 도베르만이었다. 개는 죽어 있었다. 목덜미를 예리한 칼로 잘린 것이 확인됐다. 상처에서 흐른 핏물이 쏟아져 내린 빗물에 섞여 피웅덩이를 이루고 있 었다. '이게 뭘까?' 로버트는 혀를 빼물고 있는 개의 입 속에 무언가 허연 것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 두워서 잘 보이지가 않았다. 그는 그것을 개의 이빨 틈새에서 꺼냈다. 수은등 불빛에 비춰보니, 흰색 천조각이었다. 핏물이 불그스레 배어 있는 것이, 모양으로 보아 셔츠의 소매쯤으로 보였다. 특이한 소매였다. 주름이 잡힌 프릴 장식이 된 소매였던 것 이다. '집시...?' 로버트의 뇌리를 당장 스친 것은 헤르메스에서 보았던 '집시퀸스' 멤버들이 입고 있던 셔 츠였다. 그들의 셔츠 소매 조각이 틀림없었다. "집시들이 입는 셔츠의 소매 같아요." "당신 생각도 그렇소?" "틀림없어요. 그럼 아까 그 괴한은 스테파노일까요?" "아직 단정할 순 없어요." "스테파노는 왜 나를 죽이려 했을까요?" "이 소매가 스테파노 것인지, 아니면 다른 누구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잖소?" "그렇긴 하지만..." 수전은 두려운 눈길로 로버트가 주워온 증거물을 다시 한번 보았다. 정말 수수께끼 같은 일이었다. 로버트는 정말 뭐가 뭔지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키는 기분 이 들었다. 사실, 그 역시도 마음 속으로는 스테파노를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어째서 스테파노는 수전의 집 안에 침입하려고 했던 걸까? 크리스 올랜도를 습격했던 동 기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가 다시 수전을 노린 이유는 정말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 이었다. "그가 다시 나타날까요?" "글쎄, 알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일단 조사하는 게 좋겠어요." "로버트, 그가 나를 노리는 이유가 뭘까요?" 수전이 물었다. "나도 모르겠소." 로버트가 대답했다. "그 녀석이 수전의 집에 침입하려고 했다면, 거기엔 무언가 이유가 있었을 거야. 크리스 올랜도를 습격한 것도 마찬가질 테고. 수전은 올랜도의 평전을 집필하고 있다는데, 거기에 무슨 단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캐빈의 말에 로버트는 고개를 저었다. "평전이 이 사건과 관계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관련이 없다면, 어째서 수전을 노린 거지?" 로버트는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아무튼, 아직 그 괴한이 스테파노였다는 게 확인된 건 아니니까, 뭐라고 단정할 수 없다 구." "그야, 이 천조각에서 혈액을 뽑아 유전자 감식을 해보면 알겠지. 그래서 만약 스테파노의 소매가 맞다면, 이건 그 자가 타로 카드 살인범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물이 될 거구." 캐빈의 말에 로버트는 깜짝 놀랐다. "자네 말은, 수전이 타로 카드 살인사건의 다섯 번째 희생자가 될뻔했다는 말인가?" "그렇잖고? 저번에도 말했지만, 난 스테파노 그놈을 연쇄살인범으로 확신하고 있다고. 물 론, 자넨 내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았지만 말이야." 캐빈이 의기양양하게 지껄여댔다. "하지만, 놈을 찾을 수가 없어. 지난번, 만월제 밤에 사라진 후로는 종적이 묘연하단 말이 지." 캐빈은 스테파노에 대해 굉장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다. 타로 카드 연쇄살인범이 집시일 것이라고 단정했던 자신의 추리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만월제 밤에 주먹다 짐을 벌인 적대감에 더하여, 중요한 증거물이었던 단검을 잃어버린 일로 경감에게 호된 꾸 지람을 들은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스테파노 자식, 내 손으로 잡고 말거야! 그 자식 몽타주를 더 뿌려야겠어. 그리고 헤르메 스에 가서 에스메랄다와 다른 집시들에 대한 감시도 게을리하지 말아야지!" 캐빈은 의기양양하게 말하며 방을 나섰다. "수전! 수전!..." 이튿날 오후 3시경, 누군가 큰 소리로 부르며, 수전의 집 문을 두드렸다. 수전이 나가보니, 이웃집의 퇴직 교사 노인이었다. 그는 검은 양복 정장 차림으로 가슴에는 흰 장미꽃을 꽂고 있었다. 쭈글쭈글 주름이 가득한 얼굴은 무척이나 화가 나 있었다. "아, 로베르만 씨. 무슨 일이죠?" "무슨 일이냐고? 정말 무슨 일로 왔는지 몰라서 묻는 거요?" "아, 네... 그 일 때문이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뭐라고 사과드려야 할지. 물론, 퓨리 때문 이시겠죠? 정말 안됐어요. 멋진 개였는데... 로베르만 씨가 느끼실 상실감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하죠? 퓨리와 같은 종의 개를 선물하면, 조금 마음의 위안이 되실 지 모르겠네요. 만일 원치 않으시면, 적정한 선에서 보상을 해드릴 각오는 돼 있습니다. 물 론, 그걸로 위안이 되시진 않겠지만... 아무튼, 용서하세요. 저 때문에 퓨리가 죽은 책임을 통 감하고 있었요." 로베르만 씨는 안절부절 못하는 수전의 말이 끝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다 퉁명 스럽게 반문했다. "정말 안 갈거요?" "네? 어딜요? 어딜 말씀이죠, 로베르만 씨?" "지금 퓨리를 묻으러 가는 길이오. 그런데 당신이 모른 척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면, 그건 도리가 아니잖소?" "아, 그 문제 때문이군요. 물론, 가야죠. 잠깐 기다리시겠어요? 곧 준비하고 나오겠습니 다." 수전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서 옷장 문을 열었다. 어떤 옷을 입고 가야 할까? 문득, 로베 르만 씨가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는 것이 생각났다. 그녀는 자신도 검은 색깔의 원피스를 꺼내 서둘러 몸에 걸쳤다. 그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로베르만 씨를 따라 집 앞으로 나왔다. "어머, 영구차를 부르셨군요!" 로베르만 씨 댁 앞에는 검은색 영구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길쭉한 링컨 콘티넨탈이었다. 수전은 기껏 개 한 마리가 죽은 걸 가지고 영구차까지 부른다는 게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말을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때, 로베르만 씨 댁에서 두 남자가 관을 들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 뒤에는 허리가 구 부정한 로베르만 부인이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다른 손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으며, 뒤따 라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수전을 노려보았다. "로베르만 부인, 정말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퓨리가 그런 꼴을 당해서..." 밉살스럽다는 듯 노려보며 로베르만 부인이 투덜댔다. "그러게 뒤창문을 없애라고 몇 번이나 충고했잖소?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창문이 많아서 좋을 건 없다고 했지?" "네, 그랬었죠." "아무튼, 우리 퓨리는 당신 땜에 죽은 거예요. 알고 있죠?" "네. 알고 있습니다." "당신을 대신해서 우리 퓨리가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으면 됐어요. 당신을 원망 할 생각은 없어요. 아무튼, 퓨리를 묻으러 가기나 합시다. 당신 차로 따라오겠소, 아니면 우 리 차로 갈 거요?" "제 차를 타고 따라가죠." "그럴 필요 없이, 우리 차에 함께 타고 갑시다. 가면서, 여러 가지 할 얘기두 있구." "네. 뭐, 그러죠." 수전은 로베르만 부부의 폰티악 뒷자리에 올라탔다. 잠시 후, 로베르만 부부의 폰티악은 도베르만의 관을 싣고, 앞장서 가는 영구차를 따라 홈 즈구의 주택가를 빠져나갔다. 16 잠복 주변이 쥐죽은 듯 조용했다. 캐빈은 시계를 보았다. 새벽 2시였다. 캄캄한 밤하늘엔 피묻 은 반월도를 닮은 불그스름한 초생달이 덩그러니 걸려 있어 한결 스산한 기분이 느껴졌다. 캐빈은 자작나무 숲에 몸을 숨긴 채 집시들이 묵고 있는 방갈로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벌써 보름째 이곳에서 잠복 근무를 해왔는데, 오늘도 자정에 도착했으니 꼬박 두 시간이 지 난 셈이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건만, 아무튼, 캐빈은 만월제 날 자신과 한바탕 주 먹다짐을 벌이고 사라진 후, 종적이 묘연한 스테파노가 나타나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언젠가는 나타날 게 틀림없어. 이 개자식, 나타나기만 해봐라!' 캐빈은 스테파노를 타로 카드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크리스 올랜도를 습 격한 것 역시 스테파노라고 그는 확신했다. 현장에서 발견된 집시 단검은 움직일 수 없는 확실한 증거였다. 그는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도 꾹 참아야만 했다. 혹시 스테파노란 놈이 담배 불빛을 보고 달아나버리면, 그간의 고생이 헛수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흡연 욕구를 억제하고, 졸 음도 쫓을 겸 그는 쉴새없이 껌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더러운 집시 녀석들!' 그는 이제 이곳에 잠복헤 있는 것이 지겨웠다. 두툼한 양털 파카를 입고, 따뜻한 캐시미어 내의도 껴입었지만, 새벽이 되면 견딜 수 없을 만큼 한기가 느껴졌다. 게다가, 비라도 오는 날에는 준비해 온 방수포를 뒤집어써도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도 캐빈은 이런 모든 고역을 보상받을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 믿었 다. 타로 카드 살인마를 잡으면, 거기엔 상응하는 보상이 따를 것이니까 말이다! 때로는 낮에도 집시들의 방갈로에 가보는 일이 있었는데, 그럴 때면, 그들은 애써 시선을 외면하고 피하거나, 방갈로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작은 북을 치는 호세라는 젊은 집시 놈은 노골적으로 그를 모욕하기까지 했다. '스테파노 형은 여자를 죽이지 않아!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다음 만월제 날엔 통돼지 대신 당신의 뚱뚱한 몸뚱이를 쇠꼬챙이에 끼워서 바비큐를 만들 테니, 두고 보라고!" 누구라도 그랬겠지만, 그런 말을 듣고 나면, 기분이 몹시 더러웠다. 그 따위 애송이 녀석 의 협박을 무시해 버리리라 맘 먹었지만, 그 후로도 왠지 그 말이 자꾸만 떠오르곤 했다. 아주 묘한 기분이었다. 정말로 자신이 홀라당 벗겨진 몸으로 쇠꼬챙이에 꿰어져 모닥불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만 같달까. 혓바닥부터 항문까지 쇠꼬챙이가 그대로 뱃속을 관 통한 것처럼 뜨끔하고, 거북했다. 더러운 집시 녀석들이라면 실제로 자기 몸을 그런 식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건방진 꼬마 녀석! 그런 말을 함부로 지껄이다니. 나중에 따끔한 맛을 보여주고 말겠어!" 캐빈은 껌을 우물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언짢은 것은 카르멜라 노파의 우묵한 눈과 에스메랄다의 아름다운 눈 을 마주치는 일이었다. 스테파노는 카르멜라 노파에겐 손자가 되고, 에스메랄다와는 부부나 다름없는 연인 관계 이다. 스테파노가 살인사건 용의자로 쫓기고, 공연 계약이 파기되어 오갈 데 없는 곤경에 처해 있는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카르멜라 노파는 평화로운 얼굴을 한 채, 방갈로 바깥에 있는 낡 은 벤치에 앉아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가끔 캐빈과 눈이 마주치면 온화한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가끔은 밤중에 에스메랄다가 커다란 바구니에 빵과 스튜를 담아서 가져오기도 했다. 카르 멜라 노파가 시킨 일일 것이다. 손자를 잡으려고 잠복해 있는 형사에게 이처럼 따뜻한 배려 를 아끼지 않는 노파도 알 수 없었지만, 직접 빵 바구니를 가져다 주는 에스메랄다의 태도 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에스메랄다는 캐빈이 잠복해 있는 장소에서 얼마쯤 떨어진 곳에 도착해서. 가만히 바구니 를 내려놓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방갈로 쪽으로 돌아가곤 했다. 처음엔 마치 개한테 먹이를 주고 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며칠 동안은 아예 빵 바구니 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그들의 고마운 심정이 가슴에 와닿고, 하도 배가 고프 기도 해서 빵을 집어 먹었고, 그때부터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날도 에스메랄다는 새벽 1시경에 바구니를 가져다놓고 가버렸다. 캐빈은 슬그머니 일어나 빵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왔다. '스테파노. 어서 나타나라! 어서 모습을 드러내란 말이야!' 그는 보온병 뚜껑을 돌려 따뜻한 커피를 따르고, 빵을 씹으며 중얼거렸다. 커피는 마누라 가 담아준 것이었다. 그녀는 매일 밤 집을 나갔다가 새벽녘에 소금에 절인 양배추처럼 축 처진 모습으로 나타나는 남편이 도무지 못마땅해서 쉴새없이 투덜거리면서도 커피를 끓여 넣어주었다. 아마, 그 커피엔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침이 거의 반 가량은 섞여 있을 것이 다. "로버트 자식은 지금 수전의 집에 가 있을 거야." 따뜻한 커피를 조심스럽게 삼키면서 캐빈은 생각했다. 로버트는 그날도 수전의 집으로 퇴 근했다. 수전을 만나고부터 로버트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모습을 캐빈은 흥미롭게 지켜보았 다. 언제나 타인의 모범이 될 만한 행동만을 하던 그가 수전과 연애에 빠지고부터는 업무에 소홀한 면을 보였다. 일과 중엔 온종일 애인 생각으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고, 일과가 끝나는 즉시 곧장 애인의 집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그 자식, 지금쯤 재미보고 있을 게 틀림없어!' 캐빈은 어느새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며, 알몸의 수전과 로버트가 서로 부둥켜안고, 침대에 서 뒹굴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마치 에로틱한 영화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그는 여러 가 지 세세한 공상을 하며 슬며시 혼자 웃음을 지었다. 달밤에 숲에 혼자 앉아 있자니, 별별 잡념이 다 떠올랐던 것이다. 그 시각, 로버트가 수전의 집에 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집 안이 아니라, 집 밖이었다. 그리고 실상 추운 새벽 한기에 몸을 떨고 있기는 캐 빈의 처지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이를테면, 캐빈의 상상처럼 따뜻한 방 안에서 알몸으로 수전을 부둥켜 안고, 침대 위를 구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 역시 정원의 사철나무 울 타리 뒤에 몸을 숨기고, 추위에 몸을 떨며, 그녀의 창문을 멀찌감치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 다. 그는 울타리 뒤의 커다란 단풍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무성하던 나뭇잎이 모두 떨어져 내려, 방석을 깔고 앉은 것처럼 푹신했다. 거기서 로버트는 몇 시간째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단풍나무 고목 그늘에 몸을 숨긴 채 숨을 죽이고, 이제나저제나 괴한이 나타날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인적이 없는 정원을 빈틈없이 경계하고 있었다. 자꾸만 졸음이 밀려왔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유혹이 강했지만, 불빛 때문에 마음이 걸렸다. 그래서 졸음을 쫓을 작정으로 미리 준비 해 간 박하사탕을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리며 눈을 부릅뜨고 있었던 것이다. 하기는 어떤 점에서 캐빈의 공상이 옳을 수도 있었다. 로버트 역시 몇 시간째 한 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기다리는 처지이다보니, 머리 속엔 온갖 공상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달콤한 공상은 바로 캐빈의 머리에 떠오른 바로 그 장면이었다. 로버트는 마음 속으로 수전의 옷을 차례차례 벗겨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아담한 알몸을 가볍게 안아들고 침대에 걸어가, 그녀를 살그머니 내려 놓는 장면을 상상한다. 그리고 자신도 하나씩 옷을 벗는다. 겉옷을 벗고, 셔츠를 벗고, 바지를 벗고, 팬티까지 벗 어던진다. 수전의 알몸은 부드럽고 따뜻하다. 푹신한 침대 위에 올라가 그녀의 몸을 부둥켜안고, 키 스를 한다. 처음엔 이마에, 그 다음엔 입술에, 그리고 목덜미와 젖가슴에 차례로 키스를 해 나간다. '수전, 사랑해!' 로버트는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달콤한 상상인가! 그는 새벽 한기에 부르르 몸을 떨면서 또다시 상상의 날개를 펼쳐나갔다. 수전의 젖가슴은 아담하다. 손바닥을 오므리면 그대로 덮일 정도로 자그맣다. 하지만, 로 버트는 차라리 작은 편이 좋다. 서양 여자들처럼 터무니없이 큰 젖가슴은 별로다. 그는 그녀 의 작고 탄력 있는 젖가슴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그리고 자그맣고 분홍빛을 띤 유두에 살 그머니 입술을 대보고, 이어 혀끝으로 건드리듯 조금씩 조금씩 핥으며 맛을 본다. '오...!' 로버트는 눈을 감았다. 수전의 유두에서는 짙은 박하 냄새가 풍긴다. 로버트는 눈을 감은 채, 짙은 박하 냄새가 풍기는 박하사탕을 입안으로 굴리며 나지막한 신음 소리를 뱉었다. 수전은 브래지어 속으로 손을 넣어 손톱으로 유두를 긁적거렸다. 아까부터 이상하게 젖꼭 지가 간질거렸다.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바람에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들이 뒤엉키며, 더 이 상 작업을 진전시킬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흥분이 될까?' 그녀는 세이브 키를 눌러, 작성 중이던 문서를 저장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젖꼭지가 간 지럽고 온몸이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이상했다. 몸살 기운이 있는 걸까? 그녀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거울 앞에 서서 겉에 입은 스웨터를 들어올리고, 브래지어를 내린 다음, 젖꼭지 부근을 살펴보았다. '괜찮은데... 왜 이러지?' 그녀는 다시 브래지어를 올리고, 스웨터를 내린 다음, 고개를 갸웃거리며 창문가로 걸어갔 다. 그리고 커튼을 살짝 들추고, 밖을 내다보면서 생각했다. '로버트는 아직도 저기에 있을까?' 나뭇잎이 떨어져 헐벗은 단풍나무 고목이 세찬 바람에 가지를 흔들고 있을 뿐, 어디에서 도 로버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기는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나무 그늘 뒤에 숨어 있을 것이니 말이다. '가련한 사람. 쌀쌀한 날씨에 밖에서 떨고 있으니 얼마나 힘들까? 잠깐 들어와서 따뜻한 차라도 한 잔 하라고 말해도 듣지 않으니 답답해!' 로버트가 자기 집을 지키고 있는 것을 알아챈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이웃집 퓨리의 장례 식을 치르고 돌아온 날 밤, 로베르만 노인이 누군가 당신의 집 정원에 숨어 있으니 조심하 라는 전화를 걸어주었다. 그래서 다음날 자정경에, 창문을 내다보니 로버트가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는 곧장 나무 뒤의 그늘 속으로 몸을 감춘 뒤, 한 시간이 지나도록 모습을 드러내 지 않았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예요?" 수전이 겉옷을 걸쳐 입고, 정원에 나가 그늘에 대고 소리쳤다. 그러자 로버트가 약간 머쓱 한 표정을 지으며 어둠 속에서 걸어나왔다. "로버트, 왜 안으로 안 들어오고 여기 있지요?" "수전, 어서 들어가요. 난 여기서 당신을 지키고 있는 겁니다." "나를 지킨다고요?" "그래요. 당신을 노린 자가 또 나타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거죠." 수전은 그 말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밤새 추운 바깥에서 떨고 있 는 그의 마음이 너무나 고마웠던 것이다. "당신, 언제부터 그랬어요?" "일주일 전부터... 날씨가 차요. 자, 어서 들어가요. 내 걱정은 말고." "그래도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당신이 여기서 떨고 있는 걸 알면서, 저 혼자 따뜻한 방 안에 있으란 말인가요?" "당신 마음 알아요. 하지만, 수전, 이건 내 일이에요. 난 당신을 노리는 범인을 잡으려는 거예요. 그리고 또, 이런 일을 나는 좋아해요. 그래서 형사가 된 거구요." 로버트가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불안해 했다. 혹시 그새 범인이 나타나 자신이 그녀와 얘기하는 모습을 볼까봐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수전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여기서 밤새 이러고 있으면, 도대체 잠은 언제 자죠?" "새벽에 날이 밝으면 돌아가서 그때 자요." "출근해야 하니까, 몇 시간 못 잘 거 아녜요?" "네 시간은 잘 수 있어요. 그 정도면 거뜬해요. 자, 내 걱정 말고 어서 들어가요. 그게 수 전이 나를 도와주는 겁니다." 로버트는 떠밀다시피 그녀를 다그쳤다. 아무튼, 그 바람에 수전은 별수없이 집으로 들어오고 말았지만,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사랑하는 연인이 밖에서 떨고 있는데, 침대에 누운들 편히 잠이 올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그가 춥지 않도록 두툼한 담요를 가져다주고 맛있는 빵과 함께 뜨거운 커피를 보온병에 담아 갖다주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작가라는 직업이 제일 힘들고 고달프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니었다. 작가인 자기보다 더 힘들고, 고달픈 것은 바로 로버트의 직업이었다. '형사란 직업은 할 짓이 못 돼. 만일 로버트와 결혼하게 되면, 당장 직업을 바꾸라고 해야 지!' 수전은 이렇게 생각하며 커튼을 내리고, 다시 책상으로 돌아왔다. 로버트가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가 바깥에서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무척 마음이 든든한 것만은 사실 이었다. 그녀는 다시 노트북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자판에 손가락을 대고,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 앞에 쓴 문장들을 주욱 흝어보았다. 크리스 올랜도는 캔싱턴의 작은 비틀즈였다. 일요일 아침만 되면 어린 크리스는 미키마우스 복장을 하고 작은 북을 메 고서 이웃집을 돌았다. 그리고 비틀즈의 <헤이, 주드>를 부르면, 어른들은 쿠키나 캔디, 혹은 호두 같은 것을 주머니에 넣어주며 칭찬하곤 했다. 간혹 그가 오지 않는 일요일 아침이면, 마을 사람들은 그의 부모를 찾아 가 '우리의 어린 존 레논은 어디 아픈가요?' 하고 물었다. 만약에 그가 정말 아프다고 하면, 이웃들은 마당에서 갓 꺾은 어린 장미 나 초콜릿을 바구니에 가득 담아 들고 그를 방문했다. '우리는 그의 팬이었답니다.' 지금도 그의 고향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회상한다... 여기까지 쓴 것을 읽어보고, 그녀는 빙긋 웃었다. 옆에 놓인 자료들 중에는 바로 이 시절의 모습을 찍은 사진도 있다. 양복 재단사였던 아 버지가 손수 만들어주었다는 미키마우스 복장을 입고 작은 북을 둘러멘 채 개구쟁이처럼 천 진스럽게 웃고 있는 어린 크리스 올랜도의 사진이다. 가운데 앞니 두 개가 빠져 있어, 더욱 귀여웠다. '이렇게 천진난만했던 아이였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크리스 올랜도가 가사를 짓고 작곡까지 한 '엘 도라도'의 레퍼토리들은 대부분이 반항과 저항의식, 그리고 삶의 부조리와 마약에 대한 탐닉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처럼, 세상에 대한 반항의식이 싹트게 된 동기는 바로 그를 끔찍하게 사랑했던 아버지 의 죽음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크리스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완전히 성격이 변해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그는 한 번도 밝힌 적이 없었다. 확실히 그의 성격엔 괴팍한 면이 있었다. 얼마 전에 당했던 피습사건을 평전에서 다루지 않아야 한 다는 조건도 마침내 그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그의 고집이 출판사의 요청을 꺾어버린 것이 다. 그리고 궁금한 점이 또 한 가지 있다. 크리스 올랜도와 스테파노와의 관계였다. 만일 캐빈의 말대로 크리스를 습격한 범인이 스 테파노라면, 그 동기는 무엇일까? 그리고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 생각할수록, 수전의 궁금증은 더해만 갔다. 아무튼, 크리스는 예상보다 회복이 빠른 편이었다. 이제 거동에도 전혀 불편이 없었다. 그 가 부상을 당해서 수전에게 좋은 일은, 그 덕분에 평전 집필에 많은 시간을 내주었다는 사 실일 것이다. 보름 동안, 수전은 거의 이틀 걸러 한 번씩 크리스를 만나, 그가 생각하고 있 는 인생과 음악에 대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오후에도 그와의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그래. 내일은 부친의 죽음에 관해서 입을 열게 해야지. 그리고 기회를 봐서 그가 스테파 노를 알고 있는지도 알아내야지.' 수전은 이렇게 생각하며, 다시 작업을 이어나갔다. 17 꼬마비틀즈 이튿날 오후 5시, 수전은 캔싱턴에 있는 크리스 올랜도의 거처로 찾아갔다. 원래, 그의 집 은 첼시가에 있는 상류층의 고급 아파트에 있었는데, 극성 팬들을 피해 매니저인 앤드루의 집에 임시로 머물고 있는 중이었다. 그날, 수전이 찾아갔을 때, 크리스는 캔디가 든 유리 항아리를 옆에 놓고, 바닥에 배를 깔 고 엎드린 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스케치북엔 그가 크레파스로 그린 멋진 사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는 장난치다 들킨 꼬마처럼 수줍게 웃어보였다. "캔디 드시겠어요?" "고마워요." "자, 오늘은 또 어떤 걸 물을 작정인가요?" 크리스는 바닥에 비스듬히 누운 채, 한쪽 팔로 팔베개를 하고 수전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수전은 그가 집어준 캔디 껍질을 벗겨 입안에 넣고, 가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그녀는 그것을 크리스에게 주었다. 미키마우스 복장을 하고 북을 치고 있는 금발 소년의 사진이었 다. "귀엽지 않아요?" "네, 귀여워요." "그런데 이 꼬마가 누구죠?" "누구냐고 묻는 사람이에요." "이 꼬마가 저라구요?" "그래요. 여섯 살 먹은 크리스 올랜도죠." "이 꼬마가 저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데요?" 크리스는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을 재밌다는 듯 들여다보며 농담을 했다. 수전은 서서히 그의 부친의 죽음에 대해 질문을 하기 위해 한 걸음씩 그의 내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크리스, 이렇게 예쁜 미키마우스 옷은 어디서 난 건가요?" "아버지가 만들어준 거예요." 사진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그가 대답했다. "보통 이런 옷은 어머니가 만들어주는데?" "나는 좀 특별한 케이스예요. 아버지가 솜씨 좋은 재단사였거든요. 그래서 짬을 내서 만들 어주신 거예요."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우리 아버지 말인가요?" 그는 팔베개를 하며 벌렁 드러누웠다. "음...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을 사랑하고, 또 꽃을 사랑하고, 뭉게구름이 번지는 여름 하 늘을 아주 사랑했던 분이셨죠. 참 좋은 분이셨어요." "어머니는요?" "미인이었죠. 학교 자모회 때 엄마가 오면 으쓱했던 기억이 나요. 아주 예뻤거든요. 요리 솜씨도 좋았죠. 또 수를 잘 놓았어요. 제 손수건, 쿠션, 침대보, 커튼, 어머니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죠. 덕분에 어린 시절, 제 패션은 정말 이상했다구요. 다른 아이들처럼 기성 복을 사 입히지 않고, 아버지가 손수 만드신 옷에 어머니가 직접 수를 놓은 옷이니까 아이 들이 무척 놀랐어요." 그가 팔베개를 하고 누운 자세로 한쪽 다리를 건들거리며 대답했다. 지금 물어볼까? 수전은 잠깐 머뭇거렸다. 그래, 물어보자. 어차피 물어볼 건데, 뭘... 그녀 는 아주 조심스럽게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질문을 꺼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생존해 계신가요?" "아니, 아버님은 돌아가시고, 어머님은,... 모르겠어요." "무슨 뜻인가요?" "무슨 뜻이라뇨? 말 그대로예요." 크리스의 얼굴이 갑자기 흐려졌다. 내키지 않은 질문에 마지못해 대답하는 기색이 역력했 다. 틈을 주지 않고, 수전이 내처 물었다. "아버지는 당신이 몇 살 때 돌아가셨어요?" "여덟 살 때." "어떻게 돌아가셨죠?" 크리스는 팔베개를 한 자세 그대로 눈을 감더니,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까딱거리던 다 리의 움직임도 멈추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 위로 흡사 먹구름이 덮인 듯했다. 그의 침묵은 길었고, 또 무거웠다. 수전은 왠지 긴장이 되어 캔디통에서 캔디 하나를 집어들었다. 마침내, 그가 눈을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자살하셨어요." "왜 자살하셨죠?" "나도 몰라요. 왜 자살했는지는." 캔디를 다시 내려놓으며 수전이 물었다. "저, 이런 질문해서 죄송한데... 어떤 방식으로 자살하셨어요?" "손목의 동맥을 끊었어요. 새벽에 소변이 마려워 잠이 깨서 방을 나왔어요. 어둠 속에 무 언가 시꺼먼 물체가 보였어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불을 켰죠. 아버지는 식탁에 엎드린 자세 였는데, 주위에 핏물이 흥건했어요." "어머, 세상에!" "그 일 있고, 얼마 후에 어머니는 집을 나가셨어요. 그리고 그 후로는 소식이 끊겼지요.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나는 졸지에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가 돼서, 카디프에 살고 계신 할머니 댁으로 보내졌죠. 그리고 거기서 자랐어요." 수전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할머니는 어떤 분이셨죠?" "무척 따뜻한 분이셨어요. 할아버진 해군 소령이었는데, 일찍 돌아가셨죠. 할머닌 할아버 지가 돌아가신 후, 줄곧 혼자 살고 계셨는데, 생활은 비교적 풍족한 편이셨죠. 아무튼, 적적 한 노년을 보내던 때였으니, 저를 아주 귀여워해 주셨죠. 하지만, 제가 고등학교 졸업반일 때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저는 마음 맞는 친구들과 같이 바에서 연주를 하다, '어스카인'이라는 음악 프로듀서를 만났고, 그래서 록 가수가 된 거예요." "학교 다닐 때, 당신은 인기가 대단했겠는데요? 미남인데다가, 노래도 잘 했으니." "천만에요!" 크리스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두 발을 모은 자세로 앉아 머리를 흔들어대며 이렇게 말했 다. "아주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어요. 학교 생활은 저한테는 아주 악몽과도 같아요. 지긋지긋 한 수학이며, 넌덜머리 나는 선생들 때문에 학교 가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죠. 그래도 난 책 은 제법 많이 읽었어요." "주로 어떤 책을 읽었나요?" "플레이보이나 허슬러, 팬트하우스 같은 도색잡지죠." "친구들은 많았나요?" "많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서너 놈하고는 친했어요. 대개, 저하고 비슷한 말썽꾸러기들이 었지만. 그 녀석들과 처음 밴드를 조직했는데, 아주 열심이었어요. 왜냐하면, 도무지 흥미를 느낄만한 일이 그 밖에는 달리 없었으니까 말이에요. 대개는 신통찮은 노래를 흉내내는 정 도였는데, 열심히 하다 보니 차츰차츰 실력들이 향상되어 나갔죠." "그들 중에 당신처럼 아티스트가 된 사람도 있었나요?" "아니, 없어요. 그 녀석들은 지금 카디프에서 세탁소를 하거나 농사를 짓고 있죠. 트럭 운 전을 하는 녀석도 있고요. 만나본 지는 오래됐지만, 그래도 제법 괜찮은 녀석들이에요." "첫사랑 얘기를 좀 해보죠? 처음 사귄 여자친구 얘기를 좀 해주시겠어요?" 크리스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대답을 하는 대신 잠자코 일어나 방의 구석 에 세워둔 어쿠스틱 기타를 집어왔다. 그는 기타를 안고, 주저앉아 조용히 노래를 시작했다. 솜털보다 가볍고 밀랍보다 부드러운 너. 별빛처럼 영롱하게 빛나던 너의 영혼. 내 손에서 만들어지던 아름다운 너의 몸짓. 내 마음은 성벽을 타고 오르는 넝쿨처럼 한없이 네 몸을 타고 뻗어나간다. 내 가슴에 둥지를 튼 작은 티티새. 그대, 나의 작은 여인이여... 부드럽고 감미로운 멜로디였다. 수전은 마음 한구석에 따뜻한 불빛 하나가 조용히 켜지는 느낌을 받았다. 크리스는 아름다운 영혼을 노래하는 음유시인처럼 보였다. 노래가 끝났을 때, 수전은 가볍게 박수를 쳤다. "정말 아름다운 노래군요. 첫사랑 애인을 위해 만든 노랜가요?" 기타를 내려놓으며, 크리스가 대답했다. "맞아요. 그녀를 위해 만든 노래죠." "그녀의 이름이 뭔가요?" "제스퍼." "그녀가 지금 어디 살고 있는지 아세요?" "제스퍼는 죽었어요.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어요. 겨우 열네 살의 나이였는데, 강간당한 후 에 끔찍한 모습으로 살해당했죠." "오, 크리스... 자꾸 가슴 아픈 질문만 해서 미안해요." 수전은 크리스 올랜도의 내면에 깃든 비애를 엿본 것만 같았다. 성공한 록 아티스트의 화 려함 뒤에 가려진 한 인간으로서의 아픈 상처였다. "수전, 오늘은 이쯤 하는게 어떨까요?" 그가 약간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수전도 끄덕였다. 그녀가 카세트 리코더와 메모를 챙기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크리 스가 물었다. "앤드루가 당신에게 극성이죠?" "네. 빨리 끝내라고 성화더군요." "아, 앤드루 자식 때문에 귀찮아서 못 살겠어요. 제가 부상당한 뒤로 빌보드 차트에서 우 리 노래 순위가 자꾸 내리막길을 타고, 신진 그룹에게 밀려난다 어쩐다 하면서 귀가 따갑게 떠들어대거든요. 원래 대중들은 뭐든지 금방 잊어버리는데, 그 자식은 어리석게도 그걸 모르 는가 봐요." "그래도 한두 달 공백기가 있다고 해서, 당신과 엘도라도를 잊지는 않을 거예요. 게다가, 당신 평전까지 출간되고 나면, 엘 도라도와 크리스 올랜도의 팬들은 더 많아질 게 틀림없으 니까요." "당신이 어떻게 써줄지 궁금한데, 출간 전에 보여줄 거지요?" "안심이 안 되나요?" "약간 불안한 게 사실이에요. 우리 책이 나가면 사람들이 어떻에 생각할까 조금 걱정이 돼서 말예요." "다시 한번 수정 작업을 거칠 거예요. 당신이 못마땅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 면, 마음에 들 때까지 몇 번이고 고칠 테니 걱정 마세요." "고마워요." "그런데 크리스, 저... 한 가지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뭐죠?" "지난번, 당신을 습격한 사건 말예요." "그 얘긴 언급 않기로 약속했을 텐데, 잊었나요?" "알아요. 당신이 이 질문을 싫어한다는 건... 하지만, 꼭 알고 싶어서 묻는 거예요." "무엇을 알고 싶은 건데요?" "혹시, 스테파노라는 집시를 알고 있나요?" "스테파노? 그가 누군데요?" "스테파노 모르세요? 헤르메스라는 식당에서 공연하는 '집시퀸스'의 멤버인데, 경찰은 그 가 당신을 습격한 범인이라고 믿고 있어요." "그 얘긴 누구한테 들었죠?" "우 형사라고 하는..." "오, 런던 경시청에 있는 그 중국계 친구!" "맞아요." "그와는 어떤 관계죠?" "네?" "서로 사랑하는 사인가요?" "아직 그렇게 말할 단계는 아니에요. 단지, 음..., 뭐랄까... 단지, 그가 저한테 잘해 주어서 호감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수전은 이렇게 머뭇머뭇 말하며 얼굴을 붉혔다. 크리스가 말했다. "수전, 당신은 멋진 여자예요. 당신이 그 친구와 그런 사이라니 갑자기 질투가 나는군요." 크리스는 환히 미소짓는 수전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그리고 진지한 눈빛으로 입 을 열었다. "요즘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더니 답답했어요. 그래서, 머리도 식힐 겸 드라이브를 하고 싶었는데, 언제 나랑 드라이브하지 않을래요? 혹시 람스게이트 항구에 가보셨어요?" "아뇨, 못 가봤어요." "아름다운 곳이죠. 난 람스게이트를 좋아해요. 눈앞에 도버 해협이 그대로 펼쳐지거든요. 바다를 건너 벨기에로 가는 커다란 배가 있어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의 그 배를 기다리죠. 어떤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오기도 하고..." "자전거를요?" "네, 대개는 여행하는 학생들이죠. 자전거를 타고 람스게이트까지 가서 배를 타죠. 물론, 자전거도 함께 싣고요. 그리고 배가 그날밤에 벨기에 브뤼셀 항구에 닿으면, 다시 자전거를 타고 유럽 대륙을 여기저기 달리는 겁니다. 진짜 여행은 이렇게 하는 거예요. 안 그래요?" 수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가 말을 이었다. "언젠가 한번은 텔레비젼 출연을 펑크내고, 혼자 그리로 달아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인 상이 너무 좋았어요. 영국치고는 좀 색다른 곳이거든요. 특히, 내가 좋아하는 곳은 '어부들의 교회'라는 곳이죠." "어부들의 교회?" "네, 그 동네에 들어서면,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 같아요. 중세풍의 마을인데, 골목을 지나 다보면 400년쯤 시간을 거슬러올라온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죠. 그런 동네에 아주 낡은 교 회가 있는 거예요. 좁고 기다란 창문이 달린 중세풍의 교횐데, 세월에 바랜 낡은 회색 담, 낡은 출입문, 그리고 금방이라도 스러질 듯한 회색 지붕이 보이죠. 그 지붕 위에 갈매기떼가 날아다니기도 하고, 가만히 앉아 햇볕을 쬐기도 하죠. 이미 폐쇄된 지 오랜데, 담벼락엔 '어 부들의 교회'라고 쓰여 있거든요." "멋지군요." 수전은 출어를 앞두고 어부들과 그의 가족들이 그 교회에 모여 기도하는 장면을 마음 속 으로 상상해 보았다. 거친 북해에서 파도와 싸우는 어부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진지한 기도였을 것이다. "한번 가보고 싶네요." 수전이 말했다. 교회를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이렇게 방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보 다, 크리스 올랜도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어서였다. "그런데 당일치기 여행인가요?" "네. 아침에 떠나면, 저녁 땐 돌아올 수 있으니까요." "좋아요." "허락하는 겁니까?" "그래요. 언제 갈까요?" "내일 어때요? 모레부터는 도무지 시간을 낼 수 없거든요. 내일 특별한 스케줄은 없겠죠? 있어도, 저를 위해 그 스케줄은 취소하세요." "알겠어요. 당신 같은 유명인사와 멋진 드라이브를 할 수 있다니, 영광인데요." "저 역시, 영광입니다. 당신이 점점 좋아지는 걸요. 아무래도 수전 양에게 반한 것 같아 요." "물론, 농담이시겠지만, 기분은 좋군요. 당신, 그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여자를 유혹했죠? 그 말을 듣고 황홀했던 여자가 한두 명이 아니었을 거예요. 그렇죠?" 가볍게 받아넘기며, 수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테파노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끝내 들을 수 없었지만, 그런대로 만족스런 인터뷰였다. 크리스 역시 웃음을 터뜨리며, 따라 일어섰다. 18 협박 편지 "이 소포는 언제 도착했습니까?" "두 시간 전에 속달로 도착했어." "무슨 의미로 보낸 걸까요?" "무슨 의미겠어? 우리를 조롱하는 거겠지. 정말 대담한 녀석이야!" 그의 앞에는 커다란 케이크 박스 크기의 종이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수취인은 런던 경 시청 수사과장이었다. 그 안에서 나온 옷가지와 여성용 소지품이 즐비하게 책상 위에 늘어 놓여 있었다. 검은색의 짧은 가죽 스커트와 흰색 스웨터, 모조 가죽 핸드백, 브래지어와 코 르셋, 팬티, 가죽 부츠 등이었다. 이것들 위엔 말라붙은 핏자국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첫 번째 피살자인 사라 벨이 입고 있던 옷이 틀림없군요." 내용물을 차례차례 살피던 우 형사가 말했다. 창녀 사라는 발견 당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그녀를 죽이고 나서 범인 은 옷을 모두 벗겨가지고 갔던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것을 보관해 오다, 오늘에야 이렇게 소포로 보낸 것이다. "그뿐이 아냐. 여기 케이트 해밀턴의 여승무원 신분증하고 모니카 비숍의 BBC방송국 출 입증이 같이 들어 있잖나?" 린치 경감은 두 장의 신분증을 꺼내놓았다. 각기 케이트와 모니카의 증명사진이 붙여진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걸 좀 보라고!" 린치 경감이 다시 내민 것은 A4 사이즈의 보통 종이였다. 잉크젯 프린터로 출력되어 있 었는데, 내용은 단 두 줄뿐이었다. 내일 밤 8시, 다섯 번째 여자가 살해된다. 그녀가 마지막 희생자가 될 것이다. - 스테파노. M. 우 형사는 심각한 얼굴로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날짜와 시각만 적혀 있다. 장소가 어딘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정말 스테파노의 짓일까요?" "거기에 그렇게 써 있잖나?" "자기 범행이란 걸 스스로 알린단 말입니까?" "그러길래 대담한 놈이라는 거지. 우리에게 도전하는 거라고! 망할 자식!" 린치 경감은 뻑뻑 파이프를 빨아대다가, 다 타버린 재를 재떨이에 털었다. 그리고 새로 담 은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고개를 들었다. "다섯 번째 살인에서 범행을 끝낸다는 건 무슨 뜻일까? 어째서 네 번째에서 멈추지 않고, 다섯 번째 범행을 저지르겠다고 경고하는 거지? 또, 어째서 여섯 번째 범행은 안 저지르겠 다는 거냐고?" 경감의 질문에 우 형사가 응답했다. "놈은 카피 캣이 아닐까요?" "카피 캣이라고? 누구의 카피 캣?" "잭 더 리퍼 말입니다." 카피 캣(Copy Cat)이란, 유명한 연쇄살인범을 흉내내는 모방범죄를 이르는 전문 용어다. "어째서 잭 더 리퍼의 카피 캣이라고 생각하나?" "몇 가지 유사점이 있거든요." "어떤 유사점인가?" "우선, 런던을 중심으로 범행이 저질러졌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게다가, 두 사건 사이엔 111년이라는 시차가 있습니다. 기묘한 숫자죠. 두 사건 모두 기괴하고, 엽기적이라는 것도 공통점으로 꼽을 수 있겠죠. 더구나 '잭 더 리퍼'도 다섯 건의 살인을 저지른 뒤, 종적을 감 췄습니다. 그 후엔 다시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죠." "그래서 자네 의견은 타로 카드 살인마가 '잭 더 리퍼'의 카피 캣이라는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그걸 알았다고 해서, 수사에 도움이 되는 건 없잖나?" 파이프 연기를 뱉으며, 린치 경감이 웅얼거렸다. "수사에 도움이 되는 건 없지요." "문제는 이 스테파노라는 놈을 잡는 거야. 그 동안 수배령을 내렸는데도, 이놈은 종적이 묘연해. 도대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다고!" 다시 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때, 창 밖에서 마치 탱크가 굴러가는 듯한 소리가 울려 왔다. 이미 어둠이 깔린 지 오래였다. 런던 시내에 짙은 어둠이 내리면서, 북해에서 몰려온 차가운 비구름이 도시를 뒤덮었다. 태풍이 상륙한 것이다. 벽시계의 시침은 8시를 향해 움직 이고 있었다. "또 한바탕 퍼부어댈 모양이군." 경감이 중얼거렸다. 그때, 책상 위의 전화기가 벨을 울렸다. "뭐라고, 그게 정말인가?" 수화기를 들고 통화를 하던 린치 경감의 눈이 커졌다. 통화를 끝내고 나서, 수화기를 소리나게 내려놓으며 그가 말했다. "방금, 상황실로 시민의 제보 전화가 걸려왔다는군. 샤프츠베리 극장에서 집시 녀석을 발 견했다는 거야. 어서, 자네도 현장에 출동하라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캐빈은 어딨죠?" "그 녀석이 어딨는지 내가 알 게 뭐야?" "아마, 헤르메스에 갔을 겁니다. 가면서 제가 연락하죠." 우 형사가 이렇게 말하고, 막 린치 경감의 사무실을 나오려는데, 경감이 그를 불러세웠다. 그는 자신의 책상 서랍을 열더니 거기서 38구경의 레밍턴 권총을 꺼냈다. "이걸 가지고 가게. 절대로 놈을 놓쳐선 안 돼!" 우 형사는 권총을 집어들고, 인사도 없이 문을 나섰다. 19 태풍의 밤 어두운 하늘에 기다랗고 날카롭게 빗금을 그으며 번개가 번쩍였다. 천둥 소리가 기분 나 쁜 둔탁한 울림으로 울려퍼졌다. 북해에서 날아온 시꺼먼 흑룡의 무시무시한 포효다. 하늘에 선 금방이라도 요란스런 빗줄기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정말 스테파노가 범인일까? 그 자가 다섯 번째 살인을 예고하는 소포를 보냈단 말인가!' 로버트는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차를 달렸다. 벌써 어둠이 깔린 거리는 태풍의 전조로 어 수선한 기미가 느껴졌다. 거리엔 귀가를 서두르는 행인들의 분주한 모습이 보이고, 차량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넘쳐나고 있었다. 로버트는 그 차량들 틈을 마치 곡예하듯 헤집고, 추월해 나갔다. 그의 승용차 위에서는 붉 은 경광등이 번쩍이면서, 요란한 경적음을 삐뽀삐뽀... 울려댔다. '아무래도, 오늘은 수전의 집에 못 가겠는 걸!' 그는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려 급하게 U턴을 하며 생각했다. 그 동안 거의 20일 가까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밤마다 그녀의 집 근처에서 잠복해 왔는 데, 오늘은 아무래도 그녀를 지켜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샤프츠베리 거리 주변을 통제하고 검문에 임하다 보면, 그럴 틈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로버트는 수전의 얼굴을 떠 올리며 미안한 기분이 스쳤다. 오늘처럼 우중충한 날씨에 만일 그가 오지 않은 것을 안다면, 그녀가 더욱 불안해 할 것 같았다. '참, 캐빈에게 연락부터 해야지!' 그는 퍼뜩 캐빈 생각이 나서, 차량에 장착된 무전기의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전파를 잡느라 지직거리는 잡음이 들리더니, 캐빈의 차량과 연결이 되었다. 태풍의 기미를 알아챈 새들이 파다닥 날개짓을 하며 부산스럽게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렸 다. 멀리서 마치 거목이 쓰러지는 듯한 천둥 소리도 들렸다. 캐빈은 근처 식당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다시 헤르메스로 돌아와서 주차장에 차를 대다가 로버트의 연락을 받았다. "캐빈, 거기 어디야? 헤르메스?" "당연하지. 대단한 비가 퍼부을 모양이야. 자넨 지금 어디지?" "샤프츠베리 거리로 달려가는 차 안이야. 급한 일이 발생했어. 아직 린치 경감한테서 연락 못 받았나?" "못 받았는데? 무슨 일이지?" "범인이 협박 편지를 보냈어. 다섯 번째 여자를 죽이겠다는 살인 예고인데, 소포 안에 피 살당한 여자들의 소지품도 함께 넣어 보내 왔더라구!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기로 하고,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어. 방금 샤프츠베리 극장에서 집시 남자를 목격했다는 시민의 제보 가 있었거든. 그래서 거기로 달려가는 중이라고! 자네도 당장 이리로 와주겠나?" "그 제보가 사실인 게 확실해? 허위 제보일 수도 있잖아?" "그거야 난들 알 수 없지. 왜 그래? 안 오겠다는 거야?" "오늘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해서 그래. 스테파노란 놈이 꼭 헤르메스에 나타날 것 같거든! 아무래도 난, 여기 남아서 이쪽을 지키는 게 낫겠어!" "자네 마음대로 하라구. 하지만, 나중에 린치 경감한테 당하는 건 책임질 수 없다고!" "아, 알았어... 지금 그리로 가지! 제길, 그 영감쟁이 얼굴 생각하니까 괜히 겁나는군! 알았 어, 가겠다고!" 캐빈은 교신을 끝내고 나서, 다시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차를 후진시키기 위해 몸을 돌리 는 순간, 승용차 뒤창문으로 무언가 불길이 번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집시들의 방갈로가 있는 쪽에서 불길이 솟구치고 있었다. "저런, 맙소사!" 캐빈은 당장 시동을 끄고, 차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방갈로가 있는 숲을 향해 전력을 다해서 뛰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맙소사! 먹을 만한 게 아무것도 없잖아!' 수전은 냉장고 문을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먹다 남은 야채 몇 가지와 오래된 소고기 한 토막이 있을 뿐이었다. 귀가하는 길에 식료 품을 사가지고 온다는 것을 깜빡 잊은 것이다. 어떡할까? 지금이라도 나가서 사가지고 올 까? 슈퍼마켓까지는 차를 타고 5분 정도 가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막 쓰다가 잠깐 중 단한 작업이 걱정됐다. 식료품을 사가지고 오자면, 아무래도 20분 정도 걸릴 것이다. 그 사 이에 머리에 떠오른 좋은 생각들이 모두 달아나버릴까봐 염려됐던 것이다. "별 수 없지. 이걸로라도 오늘 저녁은 대충 때우고 말지, 뭐." 그녀는 결국 남은 재료를 가지고, 스튜를 만들기로 했다. 당근과 버섯, 그리고 양파 등의 야채 토막을 꺼내들고, 그녀는 싱크대로 갔다. 그리고 냄비를 꺼냈다. 야채를 물에 헹구어 도마에 올려놓고, 잘게 썰었다. 그녀는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방금 토막낸 야채를 살짝 볶았다. 그렇게 볶은 야채를 냄비에 넣고, 육수를 부은 뒤, 가스불에 끓이기 시작했다. 이때, 라디오에서 일기예보가 들려왔다. "기상청에서는 오늘 밤, 런던을 비롯한 영국 해안지방에 집중호우를 예보하고 있습니다. 이 집중호우는 북해에서 발생한 태풍의 영향입니다. 항해하는 선박은 안전한 항구에 정박해 주기 바라며, 시민들은 가능한 한 외출을 삼가시고..." 수전은 스튜를 젓던 손을 문득 멈췄다. '태풍이 몰려온다고? 오늘 밤 또 비가 내린단 말야?' 수전은 더럭 걱정이 되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창 밖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로버트 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런데 비까지 온다니,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20일 가까이 지켰어도 아무 일 없었잖아. 괴한은 다시 오지 않을 거야. 로버트에게 도 이제 보초 서는 일은 그만 두라고 해야지!'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수전은 가스불을 줄이고 소파 쪽으로 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수전, 나요." "오, 로버트! 방금 당신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웬일이죠?" "오늘 당신한테 갈 수 없을 것 같아서, 미리 전화하는 거요." "왜요? 무슨 일이 있나요?" "그럴 일이 있어서... 아무튼, 미안해요." "아니에요. 그러지 않아도 이젠 밤에 보초 서는 일은 그만두라고 말할 참이었어요." "지금 차에서 전화하는 거라 오래 할 수가 없어요. 내가 다시 전화할게요." "알았어요. 로버트." 수전은 수화기를 놓았다. '아무튼, 다행이야.' 그녀는 미소지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못 온다고 하니, 갑자기 두려운 기분이 스친 것도 사실이었다. 그 동안 그가 밖에서 지켜준다는 사실이 얼마나 마음 든든했는지 모 른다. 그런데 하필 오늘같이 비 오는 날 혼자 밤을 보내야 한다니... 어느새, 날씨는 험악하게 변해 있었고, 바람이 웅웅거리면서 창문을 흔드는 소리가 몹시 음산하게 들려왔다. 불길은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캄캄한 밤인데도 주위가 환할 만큼 불빛이 밝았다. 집시의 방갈로는 어느새 한 덩어리의 커다란 화염으로 변해 탁탁,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캐빈이 도착했을 때, 방갈로를 뛰쳐나온 집시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카르멜 라를 부축하고 있는 에스메랄다의 모습도 보였다. 카르멜라는 에스메랄다의 손을 뿌리치고 자꾸 불길 속으로 돌아가려고 했고, 에스메랄다는 미친 듯이 매달린 채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빌어먹을!" 캐빈은 매캐한 석유 냄새와 짚이 타들어가는 냄새로 숨쉬기도 힘들었다. 그 와중에, 집시 들은 양동이에 물을 퍼담아 와서 불길을 잡느라고 아우성이었다. 이미 두 채의 방갈로를 태운 불길은 이제 자작나무 숲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그대로 놔 두면, 조금 떨어져 있는 레스토랑 헤르메스는 물론이고, 주변이 온통 화재에 휩싸이게 될 위 기일발의 상황이었다. 캐빈은 우선 에스메랄다를 도와, 미친 듯 불에 휩싸인 방갈로 쪽으로 들어가려는 카르멜 라 노파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노파는 연방 자기 소지품이 타고 있다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정신이 없는 노파였다. 목숨이 위태로운 판에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가 소지품을 챙 겨오겠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었다. 그는 넋나간 얼굴로 몸부림치는 카르멜라를 들쳐업고, 에스메랄다를 이끌고 달렸다. 집시 들이 그의 뒤를 따라 달렸다. 그들의 뒤에서 불탄 방갈로가 쓰러졌다. 그때, 누군가의 비명 이 들렸다. 호세였다. 불길이 붙은 방갈로의 기둥이 넘어지면서, 그를 덮친 것이다. 호세는 기둥 밑에 깔려 단말마의 비명을 질러댔다. 캐빈은 카르멜라를 내려놓고, 노파가 어깨에 걸치고 있던 널따란 망토를 잡아챘다. 그리고 그걸 움켜쥔 채 방갈로로 달려가 불붙은 기둥에 마구 휘둘러대어 어느 정도 불길을 끈 다 음, 가까스로 호세를 끄집어냈다. 그런 그를 다른 집시들이 도왔다. "이 멍청한 놈아, 나를 바비큐로 만들겠다더니, 네 놈이 그 꼴이 될 뻔했잖아!" 그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호세의 등과 어깨는 벌겋게 화상 자국이 나 있었다. 바삭바삭 타버린 옷자락에서 모락모 락 연기가 피어오르며, 살이 타는 역겨운 냄새가 풍겼다. "아악!" 고통을 못 이긴 호세는 짐승 같은 비명을 지르며, 동료들의 손을 마구 깨물었다. 캐빈의 주먹이 그의 얼굴을 후려쳤고, 호세는 단 한방에 기절하여 의식을 잃었다. 한 방의 주먹이 임시 마취 효과를 나타낸 것이었다. "어서 이 녀석을 내 등에 업히라고!" 캐빈이 소리쳤다. 집시들이 호세를 부축해 캐빈의 넓적한 등에 얹어주었다. 캐빈은 그를 들쳐업고, 부랴부랴 차를 세워둔 주차장 쪽으로 있는 힘껏 내달렸다. 그때, 굵직한 빗방울이 후드득 얼굴에 떨어졌다. 그러더니 곧이어 엄청난 소낙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퍼부어댈 모양이었다. 캐빈은 달리면서 태풍이 고마웠다. 불길이 더 이상 번지지 않고 빗물에 사그라들 것이기 때문이다. 주차장에 도착한 그는 호세를 뒷좌석에 태우고, 자동차에 올라탔다. 뒤따라 온 체구가 작 은 집시가 날렵한 동작으로 조수석에 뛰어 들었다. 캐빈은 전속력으로 차를 후진시킨 뒤, 급히 핸들을 틀어 방향을 바꾸었다. 그때, 환한 헤 으라이트 불빛 속으로 무언가 뛰어드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무언가 부딪치는 충격이 차체에 느껴졌다.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늦었다. 그는 별수없이 그대로 앞으로 전진하며 힐끔 백미러를 살폈 다. 방금 차가 지나온 아스팔트 바닥에 공작 한 마리가 죽어 있는 것이 보였다. '맙소사, 기어이 죽였구만!' 엑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캐빈은 가슴이 뜨끔했다. 그는 옆자리의 집시를 쳐다보았다. "방금, 뭐지?" "공작이 차에 치었어요!" "못 본 걸로 해주게. 내가 차로 공작을 치었다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줘!" 캐빈이 말했다. 빗줄기가 거칠게 창문을 때려댔다. 수전은 빗소리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노트북 컴퓨터를 그대로 켜둔 채 책상 앞에 서 일어섰다. 지붕과 벽,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또 비가 내리네!' 수전은 요즘처럼 빗소리에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빗소리를 상쇄할 작정으로 라디오의 음악 볼륨을 높였다. 그때, 무언가 타는 냄새 가 났다. '이런, 맙소사! 내 정신 좀 봐!' 그녀는 화들짝 놀라 가스 레인지 앞으로 달려갔다. 스튜 냄비를 올려놓은 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냄비 뚜껑을 열자, 매캐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미, 스튜는 새카맣게 졸아붙어 있었다. 매캐한 탄내에 콧속이 다 시큰거렸다. 멍청하게 스튜를 올려놓고, 잊고 있었어... 수 전은 연기를 빼내려고 재빨리 창문을 연 다음, 냄비 위에 수돗물을 틀었다. 슈퍼마켓까지 가 기가 귀찮아 야채 토막을 끓여 요기나 하려 했는데, 이제 그마저도 틀린 것이었다. 꼼짝없이 저녁을 굶거나, 이제라도 슈퍼마켓에 다녀와야 한다. '어떡하지?' 그녀는 비가 퍼부어대는 창 밖을 내다보며 망설였다. 귀찮더라도 다녀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혼자 사는 것도 서러운데, 굶으면서 잠을 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시간은 어느새 11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슈퍼마 켓은 문을 닫고 만다. 그녀는 옷장에서 레인코트를 꺼내 입고, 지갑을 챙겼다. 그리고 우산을 찾아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로버트는 벌써 두 시간째나 샤프츠베리 극장을 감시하고 있었다. 비 내리는 거리 주변엔 경시청에서 출동한 사복 형사들이 좌악 깔려 차량과 행인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는 중이었 다. 이미 극장 주변의 골목길 요소요소에도 물샐틈없는 경계망이 펼쳐지고 있었다. 샤프츠베리 극장에서는 현재, 뮤지컬 <헤어>가 공연 중이었다. 무려 2000회나 공연한 유 명한 롱런 뮤지컬이었는데, 등장하는 모든 남녀 배우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 으로 공연한다고 해서 화제가 된 작품이었다. '스테파노 녀석은 지금 저 극장 안에서 뮤지컬을 보고 있을까?' 뭔가 좀 이상했다. 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쫓기는 놈이 알몸 남녀 배우들이 떼거리로 나와 와르르 이쪽 무대에서 저쪽 무대로 몰려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는 장면을 구경하고 있 다는 것이 말이다. 아무튼, 극장 내부엔 이미 십여 명의 형사들이 잠입해 있는 상태였지만, 공연 중이어서 멋 대로 수색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공연이 끝나 불이 켜지고, 관객들이 몰려나올 때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혹시 허위 제보는 아닐까?' 자꾸만 그런 의구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런 한편, 로버트는 자꾸만 수전이 걱정됐다. 그녀에게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 음만 뚜뚜거릴 뿐, 받지를 않았다. 그는 다시 휴대전화로 수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역시 그녀는 받지 않았다. '캐빈 녀석은 뭘 하기에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거야!' 이번엔 캐빈이 안 오는 것이 짜증나서, 그의 번호를 눌러보았다. 그러자, 캐빈의 심통스런 음성이 휴대전화 구멍에서 튀어나왔다. "로버트?" "그래. 도대체 어딨는 거야? 뭘 하고 있느라고 아직도 안 오고 있느냐고!" "아, 나 지금 병원에서 막 출발하는 참이야. 헤르메스에 있는 집시들의 방갈로에 화재가 났거든." "집시 방갈로에 화재가 났다고? 어째서?" "아직 확실친 않은데, 어떤 녀석이 방화를 한 모양이야. 휘발유 냄새가 지독했으니까!" "그래서 자네가 다친 건가?" "아니, 내가 다친 게 아니고, 호세라고 알지? 왜 그 조그맣고 성깔 사나운 꼬마 집시 녀석 말이야. 그 녀석이 진화 작업을 하다 불기둥에 깔려서 이제 막 병원에 데려다준 길이라고. 그런데 그쪽 상황은 어때? 아직 그 집시 녀석을 발견하지 못했나?" "아직... 하지만, 곧 공연이 끝나면 관객들이 몰려 나올 거야. 놈이 그 틈에 숨어 있을 거 라 생각하고, 모두들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중이라고!" "그놈은 내 손으로 잡을 거야. 지금 네가 있는 곳으로 달려갈 테니, 기다려!" "알았어. 그놈이 나타나도 네가 올 때까진 안 잡고 기다릴 테니, 빨리 오라고!" 로버트는 전화를 끊었다. 시간을 보니 11시 40분이었다. 그때, 막 극장 건물 정면으로 형사들이 부리나케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공연이 마침내 끝난 모양이었다. 유리문을 통해 로비로 관객들이 밀려나오는 것이 보였다. 로버트는 당장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극장 앞으로 달려갔다. 효율적인 검문을 위해, 극장 문은 한쪽만 개방하기로 극장 측에 협조를 얻어둔 터였다. 그 문으로 혐의가 없는, 즉 외모가 완전히 영국인과 일치하는 관객들만이 일렬로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극장 밖에도 정복 경찰관 일개 중대가 양편에 길게 늘어서 장벽을 이루고 있 었다. 극장에서 거리로 나오는 관객의 행렬이 마치 구멍에서 빠져나오는 기다란 뱀처럼 보 였다. 수전은 식료품 봉투를 들고, 현관으로 들어와 문부터 단단히 잠갔다. 레인코트를 벗어 입 구 옷걸이에 걸고, 그녀는 주방 쪽으로 갔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열고, 방금 사온 것들을 봉투에서 꺼내 하나하나 집어넣었다. 우유와 냉동 피자, 롤빵과 사과 쥬스, 포장 스테이크, 그리고 계란 등이었다. 마지막으로 봉투에서 바나나를 꺼내 막 냉장고에 넣으려는데, 갑자기 불이 꺼지며 집 안 전체가 어두워졌다. '어머, 어쩌지? 정전인가 봐!' 그러나 그녀는 정전이 아닌 것을 곧 알아챘다. 문을 열어둔 냉장고 불이 그대로 켜져 있 었던 것이다. 창 밖을 보니, 정원의 등불도 그대로 켜진 채였다. '그런데 어째서 불이 나갔지?' 순간, 수전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창문이 열려 있고, 열린 창문새로 들이친 비바람에 커튼 이 펄럭였다. 스튜를 태우고나서 연기를 빼기 위해 창문을 열어놓은 채 그대로 나갔던 것이 다. 수전은 바나나를 손에 든 채, 주변의 어둠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조금씩, 조금씩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이 창문 아래쪽 바닥에 멈추었다. 거기에는 축축한 발자국이 몇 개인가 찍혀 있는 것이, 밖에서 비쳐든 불빛 속에 희미하게 보였다. 그녀가 나갔다 온 사이 누군가 집 안으로 침입한 것이 틀림없었다. 수전은 바나나를 떨어뜨렸다. 그녀는 천천히 냉장고 반대편에 벽감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벽에 이르 러 시선은 여전히 주위의 어둠을 향한 채, 한 손을 뻗어 벽에 걸린 장검을 꺼내들었다. 그녀는 재빨리 칼집을 벗겨냈다. 밖에서 비쳐든 불빛에 치켜든 칼날이 번쩍였다. '또 왔어. 아아, 어쩌면 좋아!' 그녀는 칼을 들고 후들후들 떨며 생각했다. 쉴새없이 살폈지만, 침입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관절 어디 숨어 있는 걸까?' 이때,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방금 전까지 서 있던 냉장고 부근이었다. 갑자 기, 냉장고 문이 스르르 닫혔다. 그나마 주변을 밝히던 불빛도 삼켜지면서, 순간 수전은 머 리카락이 쭈뼛 섰다. 검은 실루엣이 그녀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샤프츠베리 극장 앞에는 정복 경찰 병력과 사복 형사들만이 우글거릴 뿐, 이제 민간인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수백 명의 관람객들을 일일이 확인하고 내보냈지만, 그중에 집시로 의심되는 인물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극장에 들어가 배우들과 스탭들은 물론, 객석의 의자 밑바닥과 화장실 내부까지 일일이 확인해 보았지만, 집시를 닮은 쥐새끼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도 미심쩍어 머리칼이 새까만 동양인 몇 사람을 끝까지 붙들고 신원을 확인했 지만, 사건과 관련 있는 사람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허위 신고임이 확인된 셈이었다. 수백 명의 인원이 세 시간째 긴장감 속에 헛고생만 했을 뿐, 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잔뜩 기대를 걸고 출동했던 형사들은 허탈감과 분노에 너나없이 허위 신고한 놈에게 욕설을 퍼부어대면서,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캐빈과 우형사는 극장 베란다 밑에서 나란히 비를 피하고 있었다. 큰 기대를 갖고 몸소 현장에 달려온 린치 경감이 방금 화를 내고 돌아가는 것을 배웅하고 나서, 허탈한 심정을 달래며 담배를 피우는 중이었다. 꽁초를 구둣발로 밟아 끄며, 캐빈이 로버트에게 물었다. "자, 이제 우리도 돌아가자구. 밤새 여기 이러고 서 있을 순 없잖나?" "그래, 밤새 이러고 있을 순 없지." "난, 헤르메스에 잠깐 들렀다가 집으로 갈 작정이야. 자넨 어쩔텐가?" "글쎄? 수전 집에 들렀다, 나도 집으로 가야지." "그럼, 오늘은 여기서 찢어지자구!" 캐빈은 이렇게 말하고 양복 깃을 세우더니 비가 퍼부어대는 거리를 달음박질 쳐, 자기의 승용차를 세워둔 곳으로 가버렸다. 우 형사는 문득 수전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휴대전화를 꺼내 그녀의 번호를 눌러댔다. 벨 소리가 십여 차례나 울렸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직도 안 받는군. 도대체 왜 전화를 받지 않지?' 로버트는 계속 울리는 벨 소리에 차츰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20 한밤의 침입자 창문 밖으로 번개가 내리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태풍이 몰고 오는 큰 비였다. 수전은 페치카 옆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두 손으로 중국검을 높이 치켜든 채, 침입자의 희미한 실루엣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소리를 질러, 이웃 로베르만 부부에게 도 움을 청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이처럼 엄청난 기세로 쏟아져 내리는 폭우 소리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릴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 노부부는 귀마저 어둡지 않은가! '이럴 때, 로버트가 와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보 같은 사람이야. 도움이 필요 없는 날엔 매일처럼 와서 밤새 벌벌 떨면서 지켜주더니,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땐, 나타나지 않잖아!' 수전은 눈물이 날 것 같은 두려움 속에서도 이처럼 자신을 공포에 떨게 하는 상대의 정체 가 궁금했다. '누굴까? 나한테 도대체 무슨 원한이 있는 거람? 도대체 누구야?' 그녀는 누구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 말은 목구멍 안에서 맴돌 뿐, 입 밖으로 새어나오지는 않았다. 너무나 겁에 질려 혓바닥이 꽁꽁 얼어붙고 만 것 같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시퍼런 번갯불이 번쩍였다. 마치 창문 밖에서 조명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말이다. 그 순간, 시퍼런 불빛이 방 안을 순식간에 밝히면서, 침입자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수전은 심장이 목구멍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놀랐다. 그때, 귓청을 때리는 듯한 천둥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려퍼졌다. 그는 스테파노였다. 너무 순식간에 스쳐간 영상이어서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상대는 스 테파노가 틀림없었다. 머리를 길게 풀어 헤치고,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마치 물에서 빠져나온 귀신의 행색이랄까. 무시무시한 공포를 느끼게 하는 몰골이었다. "스테파노... 당신 스테파노죠? 다 알아요. 당신이 누군지 안다고요! 나한테 왜 이러는 거 예요?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구요!" 수전은 용기를 내어 이렇게 소리쳤다. 그러나 스테파노는 대꾸가 없었다. 그는 다시 또 한 걸음씩 그녀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가까이 오면, 이 칼로, 당신을 가만 두지 않을 거라구요!" 그녀는 중국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칼끝이 자꾸만 흔들렸다. 온몸이 후들후 들 떨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자꾸만 옆걸음질 쳤다. 그래도 여전히 스테파노는 그녀를 향해 조심스럽게 접근해 왔다. 이윽고, 그가 두어 걸음 앞까지 다가섰을 때, 수전은 두 눈을 꽉 감고 중국검을 힘껏 휘둘렀다. 칼날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묵직한 중국검의 무게에 못 이겨 수전의 몸이 한 바퀴 핑그 르르 회전했다. 스테파노는 재빨리 몸을 피했고, 와장창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오디오 가 박살이 난 것이다. '오, 맙소사! 내가 아끼는 오디오가 박살이 났어!' 수전은 비틀비틀 몸의 중심을 가누면서도 오디오 걱정을 했다. 이때, 방 안에 밝은 불빛이 확 비쳐들었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었다. 누가 온 모양이었다. '로버트야. 이제야 로버트가 나타났어!' 불빛을 보자, 수전은 힘이 솟았다. 그때, 다시 또 스테파노가 덮치는 기미가 느껴졌다. 스 테파노가 그녀를 잡아채기 위해 그림자처럼 다가와 날쌔게 덮쳐왔다. 수전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내려뜨리고 있던 칼을 있는 힘을 다해 아래에서 위로 휘둘렀다. "으윽!" 칼날이 다리를 스친 모양이었다. 갑자기, 스테파노가 고통스런 신음 소리를 토하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때마침, 번개가 번쩍였다. 다리를 베인 스테파노가 피를 흘리며 버둥거리고 있 는 것이 보였다. 수전은 칼을 집어던지고, 재빨리 현관 쪽으로 내달렸다. 그녀는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로버트! 로버트!" 그녀를 로버트를 부르며,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향해 정신 없이 달려갔다. 마침, 차에서 한 남자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그대로 돌진해 그의 품에 안겼다. "수전, 이게 무슨 꼴이오?" 뜻밖에도 그는 로버트가 아니라, 크리스였다. "오, 크리스!" "왜 그래요? 수전,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당신이... 어쩐 일이죠?" "당신이 걱정돼서 왔어요.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안에 누가 있는 겁니까?" "스테파노예요. 그가 나를 헤치려고 했어요!" "스테파노? 지금 스테파노가 안에 있단 말이지?" "그래요. 방금 그에게서 도망쳐 나오는 길이에요!" 크리스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려 수전의 집 창문을 보았다. 그 순간, 헤드라이트의 밝 은 불빛이 비추는 창가에 스테파노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음산한 눈길로 그들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자식이 스테파노로군. 수전, 잠깐 여기서 기다려요!" 크리스는 그녀를 떼어놓고, 당장 집 안으로 들어가 보려고 했다. 그의 소매를 잽싸게 수전 이 잡아끌었다. "안 돼요. 들어가지 말아요. 그는 칼을 가지고 있어요. 위험하다구요. 어서 여기서 도망쳐 요. 어서요!" "알았소. 저 녀석은 경찰에 신고하기로 하고, 그럼, 일단 여기서 벗어납시다."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한 듯, 크리스는 수전을 차에 태웠다. 그리고 그 자신도 운전석에 올 라탔다. 여전히 스테파노는 들이치는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꼼짝도 않고 창가에 선 채 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크리스는 차를 후진시킨 뒤, 거리로 빠져나왔고, 이내 푸른색 승용차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도로를 빠른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막 수전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로버트는 전면에서 푸른색 승용차 한 대가 급히 주택가 를 빠져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누굴까? 저렇게 급히 차를 달리는 게?" 로버트는 이런 생각을 하며 도로에 차를 주차시켰다. 차에서 내리며 얼핏 보니 수전의 집 뒤창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왠지 불안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래서 얼른 차 문을 닫고, 비를 맞으며 수전의 현관문 앞으로 뛰어갔다. "수전! 수전! 문 좀 열어줘요!" 그는 문을 두드리며 외쳐댔다. 몇 번을 두드려도 아무 응답이 없어 손잡이를 돌리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문도 잠그지 않았잖아?' 또 한번 이상한 생각이 스쳤다. 로버트가 수전의 거실로 들어가 전등 스위치를 올렸을 때, 그의 눈앞에 놀라운 장면이 펼 쳐졌다. 수전이 아끼는 오디오가 박살 나 있었고, 바닥엔 커다란 중국검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 다. 한바탕 격투를 벌인 흔적인 듯, 칼날과 융단 위에 붉은 핏방울이 흥건히 배어 있었다. 그 핏방울은 점점이 기다란 선을 이루면서, 활짝 열린 창문 앞에 흥건히 떨어져 있었고, 거기서 다시 또 꼬리를 끄는 것처럼 이어져 주방 뒤편으로 사라졌다. 로버트는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겨누면서 핏방울 의 흔적을 따라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주방 쪽으로 가보았다. 그러자, 냉장고 뒤편에 누군가의 발이 삐죽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로버트는 몇 걸음 더 가서 멈춰섰다. 거기에 다리에 부상을 입은 스테파노가 피를 흘리며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로버트는 철커덕, 권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그리고 침착하게 그를 향해 외쳤다. "스테파노, 두 손을 머리로 올려라!" 힘겹게 고개를 치켜드는 스테파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 고통이 어린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지면서 그가 말했다. "그 권총을 치우시지." "쓸데없는 소리. 어서 손을 머리로 올리래두!" "마음대로 하라구. 난, 손을 올릴 수 없어. 보다시피, 손을 떼면 핏물이 쏟아져 나와 그럴 수가 없단 말야." 로버트는 머뭇거렸다. 그는 스테파노에겐 전혀 대적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아차렸다. 게다가, 그의 부상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고, 무기도 소지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 다. 그런 사실들이 확인되자, 로버트는 무엇보다 수전의 안위가 걱정됐다. 그는 재빨리 집 안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혹시나 싶어 옷장 문까지 열어보았지만, 그녀 의 모습은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시 스테파노에게로 돌아와 로버트가 물었다. "수전은 어디 있지?" "그 권총부터 치우시지. 난 달아날 생각이 없으니까. 달아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잖아. 보다시피!" "아무튼,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수전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어!" "수전은 그놈이 데려갔어." "그놈이라니?" "당신이 찾는 녀석이 누구지? 비 오는 날만 되면 여자를 죽이는 미친 녀석 말이야!" "타로 카드 살인마?" "그래. 바로, 그 녀석이 데려갔다고." "그 녀석이 대체 누군데? 어서 말해 봐. 대관절 네가 말하는 그 녀석이 누구냐고?" "크리스 올랜도." 스테파노가 쿡쿡 웃으며 대답했다. "크리스 올랜도? 이 자식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 따위 수작을 내가 믿을 줄 알 아?" 로버트는 벌컥 화를 냈다. 그러나 스테파노는 태연히 웃으며 응대했다. "내 말을 믿지 않는군. 지금 그녀가 위험해. 나를 붙잡고 이러고 있는 동안, 그녀가 어떤 끔찍한 일을 당할지 모른다고. 그러니까, 어서 그녀를 찾아보는 게 좋을 거야!" 스테파노가 느물느물 웃으며 말했다.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한 태도였다. 로버트는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믿지 말아야 할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21 도피 "크리스, 어떻게 된 거예요? 당신과의 약속은 내일이었던 걸로 아는데, 어떻게 저한테 오 게 된 거죠?" "이런 날씨에 혼자 있는 당신이 걱정돼서 전화했어요. 그런데 불통이더군.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지난번처럼 괴한이 침입했나 해서 말이오. 그런데 내 예감 그대로였 군요." 수전의 질문에 크리스가 대답했다. 그들이 탄 자동차는 그리니치 주택가를 벗어나 런던 강변도로를 달리는 중이었다. "아무튼, 천만다행이오. 내가 마침 맞게 나타나서..." 아직도 공포의 후유증에서 깨어나지 못해 간간이 떨고 있는 수전을 크리스가 위로했다. "정말 고마워요.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어요." "우 형사는 어딨는 거요? 그 사람이 당신을 지켜준다고 하지 않았소?" "오늘 급한 일이 있었나 봐요. 어젯밤까지 꼬박 20일 동안 내내 밖에서 저를 지켜주었는 데." "정작 위험이 닥칠 때, 그가 없었던 거로군." "세상 일이란 게 다 그런 식이잖아요. 필요 없을 땐 있다가도, 필요해지면 없는 것처럼..." 객관적으로 따지면, 로버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수전은 마음 한편으 로 야속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문득 스테파노가 자신과 크리스를 노리는 이유가 궁금했 다. "스테파노가 우리 두 사람을 노리는 이유가 뭘까요?" "그 녀석이 나를 노리는 이유는 뻔해요." "그 이유가 뭔데요?" "내가 유명인이니까 그런 거겠지. 유명인사만 골라 범행을 하는 미치광이들 있잖소? 하지 만, 수전을 노리는 이유는 정말 나도 이해가 안 가는군." 승용차는 그리니치를 완전히 벗어나 울위치 지역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여전히 하늘엔 검 은 구름이 밀려가고, 거센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험악한 날씨였다. 차창 밖으로는 미친 듯 이 비바람이 불었다. 어찌나 세게 부는지 바람의 형체가 가닥가닥 다 보일 것만 같았다. 템 즈 강은 소용돌이치는 태풍에 짓눌려 둔중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람스게이트로 갑시다. 어차피 가기로 약속했던 거니, 몇 시간 출발을 앞당긴 셈치지요." "람스게이트까지... 이렇게 날씨가 험한데!" "차로 두 시간쯤이면 도착할 수 있어요. 당신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람스게이 트엔 내 개인 소유의 작은 성이 한 채 있지요." "어머, 크리스, 당신에게 성이 있다고요?" "그래요. 600년 된 고성이죠. 고든 성이라고. 내가 그 성의 임자라는 건 아무도 몰라요. 얼 마전에 수리를 마쳐서 근사하게 변했죠. 수전 양이 그 성의 첫 방문객이 될 겁니다." "당신에게 그런 멋진 면이 있다는 건 몰랐는데요?" "어릴 때부터 나는 그런 꿈을 꾸었더랬어요. 커서 돈을 많이 벌면, 오래된 성을 한 채 사 들여서, 거기서 왕처럼 지내고 싶다고 말이오." 수전은 아름다운 고성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될 것을 상상하며 잠깐 행복한 기분에 잠겼 다. 그러다 이내 걱정이 됐다. 외간 남자와 낯선 성에서 함께 지내는 것은 너무 경솔한 짓이 아닐까? 상대가 로버트라면 별 문제 없겠지만, 크리스는 자신이 집필 중인 평전의 당사자가 아닌가? 만일 이 사실을 나중에 로버트가 알게 되면, 언짢아 하지는 않을까? 물론, 크리스는 신사라서 별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왠지 망설여지며 이런저런 근심이 뇌리를 스쳐갔다. '아냐. 오늘은 좀 특별한 경우잖아.' 그렇다. 오늘은 좀 예외일 수 있다.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 도피하는 것이니 말이다. 게 다가, 크리스는 위기에서 나를 구해주었으니, 로버트도 이해할 것이다. 로버트는 그렇게 속 좁은 남자는 아니지 않은가? 만일, 그가 이 문제로 화를 낸다면, 나는 로버트를 잘못 본 것 이고, 그와의 결혼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테니. 어떤 점에서는 이번 여행이 로버트의 진면 목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이다. 그런데 로버트는 대체 어디 있는 걸까? 그러다 수전은 문득, 크리스가 스테파노를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 다. "크리스, 당신 아직도 이 일을 신고하지 않았잖아요?" "아하, 깜짝 잊었군. 그 휴대전화 좀 주겠소?" 수전은 글러브 박스 위에 얹어둔 크리스의 휴대전화를 집어 그에게 건넸다. 크리스는 한 손으로 핸들을 쥐고, 다른 손으로 휴대전화의 번호를 눌렀다. 그가 말했다. "여보세요. 경시청이죠? 아, 저는 크리스 올랜도라고 합니다. 지금 홈즈구 학생거리에 있 는 수전 홍의 집으로 당장 출동해 주셔야겠소... 거기에 타로 카드 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쫓기는 스테파노가 나타났소. 그 자는 부상을 당해 멀리 도망가진 못했을 테니 지체 없이 가주시오. 그리고 이 사실을 로버트 우 형사에게 전해줘요. 또, 그에게 수전 양은 크리스 올 랜도가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으니 안심하라고 전해주시오." 크리스는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다른 번호를 누르다가, 휴대전화의 덮개를 닫으며 투덜거 렸다. "이런 제기랄! 배터리가 다 됐군. 앤드루한테 급히 알릴 일이 있는데 어쩌지?" "저도 로버트한테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데." "한 시간만 참읍시다. 성에 도착하면 전화가 있으니까." "어째서 크리스 올랜도가 타로 카드 살인마라는 거지? 어떤 근거로 그가 범인이라는 건 지, 말을 해봐. 그래야 내가 네 말을 믿든지 말든지 할 것 아냐." 로버트가 우격다짐을 하듯 묻자, 스테파노는 묘하게 눈꼬리를 치켜뜨며 응답했다. "당신 이제 보니 멍청하군. 상황을 보고도 모르겠나? 당신이 사랑하는 수전은 지금 크리 스라는 놈이 데리고 갔다고. 비가 이렇게 퍼붓는 날씨에 그가 왜 당신 애인을 데리고 갔겠 나? 그래도 모르겠어?" "그야, 네 놈이 침입했으니,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킨 거겠지?" 이렇게 입으로 대꾸하면서, 로버트는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재빨리 상황을 되 짚어 보았다. 만일 이런 일이 벌어져 크리스가 수전을 데리고 나갔다면, 그는 응당 가까운 곳에서 경찰에 신고부터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쯤엔 이곳에 경찰이 도착해 있어야 마 땅하다. 그런데 30분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없다. 그것은 그가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말 이 아닌가. 크리스 올랜도는 어째서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은 걸까? 이처럼 험악한 날씨에 도대체 수전을 데리고 어디로 간 것일까? "오늘, 우리 사무실에 타로 카드로 희생된 여자들의 소지품이 담긴 소포가 배달돼 왔어. 스테파노, 그건 네가 보낸 게 아닌가?" "내가 소포를 보냈다고?" "그래. 그 안에 있던 메모지에 네 놈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다음날, 다시 여자 하나를 살해하겠다고 했어. 그러니까, 바로 오늘이 되겠군. 그걸 네가 보낸 게 아니란 말인가?" "미련한 양반 같으니. 연쇄살인 용의자로 쫓기는 내가 우체국에 들어가 소포를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해?" "다른 사람을 시킬 수도 있지. 에스메랄다를 시킨 걸 수도 있잖아." "에스메랄다는 캐빈이란 우둔한 놈이 온종일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내 대신 소포를 보낸 다는 거지?" "아무튼, 다섯 번째 살인을 예고하는 협박 편지엔 네 놈 서명이 적혀 있었단 말야." "이봐, 그깟 서명을 믿는단 말야? 서명은 아무나 할 수 있어. 당신이 내 이름을 적어서 보 낼 수도 있고, 내가 당신 이름을 써서 보낼 수도 있는 거라고. 편지에 당신 이름이 적혀 있 으면 연쇄살인범은 당신이란 말인가?" 로버트는 스테파노의 논리에 대항할 말이 없었다. 이제, 그의 마음 속에서 점점 스테파노에 대한 의심이 사라지며, 반대로 혐의는 크리스 올 랜도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가 데리고 간 수전에 대한 걱정이 눈덩이처럼 부 풀어오르기 시작했다. "크리스가 수전을 데리고 어디로 갔을까?" 로버트가 묻자, 스테파노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도 모르지. 분명한 건, 그 녀석이 예고한 다섯 번째 희생자가 바로 당신이 사랑 하는 여자라는 사실이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로버트의 눈앞을 가리고 있는 장막이 확, 벗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동 시에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수전, 그리고 이제까지 그가 목격했던 네 명의 여자들처럼, 참 혹한 모습으로 살해된 그녀의 피살체가 차례차례 뚜렷한 영상으로 그의 망막을 스쳐갔다. 로버트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신음 소리를 토해냈다. '이렇게 무력할 수가!' 사랑하는 애인이 바로 자기가 쫓던 연쇄살인범에게 납치되어 간 상황인데도 도무지 그녀 를 구해낼 방법을 모르고, 속수무책으로 있자니, 가슴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대관절, 지금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수전, 바로 저기 보이는 저 성입니다." 수전은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어둠 속이라 분명한 윤곽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리 크지 않 은 고성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옆으로는 황량한 초지가 펼쳐져 있었다. 거센 빗줄기 속에서 도 성채는 견고한 위엄을 잃지 않고,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 이제 다 왔으니 차에서 내립시다." 수전은 크리스를 따라 승용차에서 내렸다. 바다가 가까워서일까? 바람이 더욱 거세진 느 낌이다. 빗줄기는 조금 누그러들었지만, 공기 속에는 진한 소금 냄새가 났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요." "그럴 겁니다. 하지만, 날이 밝으면 아주 멋진 자태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자, 어서 들어갑 시다. 너무 춥군요." 크리스가 준비해 온 손전등을 켰다. 성 주위는 깜깜했다. 수전은 크리스를 따라 조그만 손 전등 불빛에 의지해, 성으로 이어지는 돌층계를 올라갔다. 성문 앞에 이르러, 크리스는 열쇠를 꺼냈다. 이내 묵직한 나무로 된 성문이 둔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크리스가 앞서 들어가서 스위치를 올리는 소리가 찰칵, 하고 들렸다. 순간, 환한 불빛이 성의 내부를 감쌌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천정에 매달려 화려한 빛살을 뿜고 있었다. 수전은 마치 꿈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동화의 궁전에 자신이 이제 막 발을 들 여놓은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오, 크리스... 너무나 아름다워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군요." 벽과 계단이 온통 값비싼 원목으로 치장되어 있었는데, 정성껏 기름걸레로 닦은 것처럼 불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대리석 바닥 역시도 불빛을 반사시키며 반질반질 빛을 냈다. 수전은 그 얼음장처럼 매끄러운 대리석을 지나 나무 계단을 올라갔다. 사방 벽 위에 걸려 있는 중세풍의 장식물들이 웬만한 돈으로는 구입할 수 없는 값진 것들이어서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모든 게 정말 당신 것이란 말예요?" "못 믿으시겠어요?" "네, 너무 엄청나서..." "돈을 버는 족족 이 성을 꾸미는 데 모두 투자했죠." 수전은 크리스의 안내를 받으며 2층으로 올라와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된 복도를 지났 다. 중세 기사의 철갑옷이 서 있는 문 앞에서 크리스가 방문을 열었다. "오늘 밤, 당신이 묵을 방은 여기요. 이 성에서는 제일 전망도 좋고 편안한 곳이랍니다." 방 안에는 그대로 귀족의 내실이 재현되어 있었다. 투박하면서도 고상한 멋이 감도는 덧 문, 그리고 유리문 밖에는 중세풍의 석조 발코니가 보였다. 크리스는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나서, 그녀를 발코니로 부르더니, 이렇게 설명했 다. "전망이 꽤 좋은 곳입니다. 여기에서는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죠. 또 침대에 누워서도 하늘의 별자리를 올려다볼 수 있거든요." 태풍이 몰아치는 날씨라서, 창 밖으로는 바다도 하늘도 보이지 않고 오직 시커먼 어둠뿐 이었다. "참, 이것 좀 보시겠어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수틀입니다." 크리스가 가리킨 것은 튼튼해 보이는 수틀이었다. 그 수틀에는 천연실로 씨실과 날실이 교차된 색바랜 천이 팽팽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천 위에는 사자가 포효하는 그림이 절반쯤 만들어져 있었는데, 수실의 붉은 색깔이 변색된 걸로 보아 꽤 오래 전에 누군가가 수를 놓 다 중단한 것 같았다. "이런 걸 다 어디서 구하셨어요?" "그 수틀은 진짜 중세 때 거예요. 우리 외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이거든요. 이를테 면, 가보인 셈이죠. 그 천은 제가 아주 어릴 때 어머니가 갖고 계시던 천인데, 아름답지 않 아요?" "그럼, 이 수는 어머니가 놓으신 건가요?" "솜씨가 좋으셨죠. 그 수를 완성하진 못했지만... 가끔 어머니가 생각날 때면, 여기 와서 이 수틀을 보면서 위로를 받곤 하지요." "어린애 같은 면이 있군요." 수전은 수틀을 어루만지며 미소지었다. 그러면서 천에 반쯤 수놓인 사자문양을 보며, 크리 스의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마음 속으로 상상해 보았다. 그 사이, 크리스는 한쪽의 중세식 벽장문을 열었는데, 거기에는 최신식 오디오가 숨어 있 었다. 그가 스위치를 누르자 챔벌로 소리와 류트 소리가 흘러나왔다. 고색창연한 실내에 챔 벌로와 류트의 연주까지 울리자 수전은 정말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로 들어온 것만 같았다. 수전은 매혹된 듯이, 귀를 기울였다. 모든 것을 파괴할 듯, 절규하는 음성으로 노래하는 록 가수의 내면에 이렇게 고풍스런 취 향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터라, 수전은 더욱 더 크리스 올랜도라는 인물이 신비스럽게 여겨졌다. "이 성을 평전에 써도 좋겠지요? 당신의 색다른 면을 알 수 있는 훌륭한 소재가 될 거예 요." "아니, 그건 절대 안 됩니다." 크리스가 정색을 했다. "어째서죠?" "무엇보다, 극성스런 팬들이 몰려드는 게 싫어요. 게다가, 그 개떼 같은 기자들까지 몰려 와 사진을 찍으면서 난리를 칠 테니까요. 수전, 부탁이니 이 성 얘기는 쓰지 말아줘요. 이 성은 나 혼자만의 안식처로 간직하고 싶으니... 아, 목이 마른데, 뭐라도 한 잔 마십시다. 아 이리시 커피 어때요?" "네, 좋아요." 크리스는 오디오 옆에 붙어 있는 문을 열었다. 거기엔 각종 양주와 음료수가 들어 있는 홈바가 설치되어 있었다. 커피를 준비하는 크리스의 뒷모습을 보며, 수전은 그의 이중적인 면모를 보았다. 록 음악 의 히어로라는 대외적인 모습 속에 숨어 있는 그의 중세 취향, 그리고 반대로 중세풍으로 꾸며진 실내 곳곳에 숨어 있는 오디오와 홈바 같은 현대적 장치들... 이 순간, 수전은 자신의 행방을 몰라 안타까워하는 로버트의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하드 록의 영웅 크리스 올랜도의 고성 분위기에 흠뻑 도취되어 있었다. 22 어부들의 교회 로버트의 시선이 무심코 수전의 노트북 컴퓨터에 멎은 것은 아마도 하늘이 도와서였을 것 이다. 아니면, 오로지 그녀의 안위를 걱정하는 그의 지극한 마음이 보답을 받은 것인지도 모 른다. 그의 손끝이 가볍게 자판을 스쳤을 때,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절약 모드로 들어가서 까 맣게 꺼져 있던 화면이 밝아졌다. 화면엔 수전이 작성하다 중단한 문서의 내용들이 가득히 보였는데, 그 문장들을 한 줄씩 읽어내려가던 로버트의 시선은 중간쯤의 줄 위에서 멈춰졌다. 크리스 올랜도는 도버 해협에 위치한 람스게이트 항구를 매우 사랑한다. 그는 언젠가 텔레비젼 출연을 펑크내고 달아난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어부들의 교회'라는 멋진 장소를 발견했다고 고백했다. 어부들의 교회.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중세풍의 마을 골목을 지나 다 보면 400년쯤 시간을 거스러올라온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드는... 그 런 동네에 아주 낡은 교회가 있다. 좁고 기다란 창문이 달린 중세풍의 교 회... 세월에 바랜 낡은 회색 담, 낡은 출입문, 그리고 금방이라도 스러져 버릴 것 같은 회색 지붕, 그 지붕 위에 갈매기떼가 날아다니기도 하고, 가만히 앉아 햇볕을 쬐기도 하는... 그런 교회를 상상해 보라. 지금은 폐쇄됐지만, 과거에는 출어를 앞둔 어부들과 그의 가족들이 옹기 종기 모여 앉아 기도하던 곳... 그들의 기도는 거친 북해에서 파도와 싸 우는 어부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진지한 기도였을 것이다. "한번 가보고 싶군요." 내가 말하자, 크리스가 웃었다. 그러더니 내일 당장 가보자고, 그가 말했다. 나는 그와 함께 '어부들의 교회'에 가보기로 약속했다. 문장은 거기서 중단되어 있었다. '어부들의 교회? 람스게이트에 있는 어부들의 교회... 나는 그와 함께 '어부들의 교회'에 가 보기로 약속했다?' 로버트는 한참 동안 그 문장을 되뇌어보았다. 문서 작성 날짜를 보니, 그날 수전이 쓰다 중단한 것이 틀림없었다. 혹시, 그녀는 크리스를 따라 '어부들의 교회'로 간 것은 아닐까?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거실을 서성거리다가, 스테파노에게로 다가섰다. 스테파노는 셔츠 를 찢어, 그것을 상처에 붕대처럼 동여매어 지혈을 하고 있었다. 로버트가 물었다. "스테파노, 자네 혹시 어부들의 교회라고 들어봤나?" "어부들의 교회라고? 아니 못 들었어. 그게 어딨는 건데?" "람스게이트에." "람스게이트?" "그래. 람스게이트에 있는 오래된 교회라는군. 방금 수전이 쓴 글을 보고 알았어. 크리스 올랜도는 람스게이트를 좋아하는데, 거기에 그녀와 내일 가보기로 약속했다는 거야. 지금은 폐쇄됐지만, 옛날에 어부들이 예배를 드리던 곳인가 봐." 스테파노는 무언가 집히는 것이 있는지 손가락을 튀겼다. 그리고 로버트를 올려다보며 자 신만만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알겠어! 크리스 녀석이 수전을 납치해 간 곳이 어딘지 이제 알았단 말야!" "그래? 정말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았단 말인가?" "짐작할 수 있지. 자네, 수전이 간 곳을 몰라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하더니, 굉 장한 사실을 알아냈군 그래!" "그게 어디야? 어부들의 교회라는 덴가?" "아니." "아니라고?" "그래, 거기가 아닐 거야. 비비람이 몰아치는 한밤중에 폐쇄된 교회에 갈 리가 없지! 크리 스가 갈 만한 곳을 내가 알아. 고든 성! 람스게이트에 낡은 성이 있지. 그 자식은 수전을 납 치해 간 것이 틀림없어!" "확실한가?" "확실하고 말고. 크리스 녀석은 바로 고든 성에서 첫 번째 살인을 저질렀거든. 열일곱 살 때였지. 거기서 그 녀석은 내가 사랑하던 여자를 죽였어. 놈은 첫 번째 살인을 저지른 장소 에서 다시 또 수전을 죽이고 싶은 거야!" "위치를 알려주게. 지금 당장 달려가봐야겠어! 한시도 지체할 수 없어!" "설명해 줘도 한밤중에 혼자 그곳을 찾아가긴 힘들 걸. 내가 안내해 주겠네. 나하고 함께 가지." "자네, 그 몸으로?" "이제 괜찮아. 피도 흘릴 만큼 흘렸고... 크리스 올랜도 녀석은 내 손으로 죽여야 할 원수 야. 놈을 죽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으니, 이제 놈을 잡는 일에라도 협조를 해야지! 자, 어서 나를 부축해 주게!" 스테파노가 부상을 입은 몸을 일으켰다. 로버트는 그를 부축해 주었다. 두 사람이 수전의 집을 막 나섰을 때, 경광등을 번쩍이며 경찰 차량들이 연이어 도착했다. 그중, 한 차량에서 캐빈이 뛰어내렸다. 10분 전, 로버트의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나타난 것 이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두 사람 앞으로 달려왔다. "스테파노, 망할 자식... 기어이 잡혔구나!" 그는 로버트에게 의지해 있는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어, 당장 그의 다른 팔을 낚아챘다. 그 리고 허리춤에서 수갑을 꺼내, 막 채우려 했다. 캐빈의 손목을 잡으며 로버트가 말했다. "이봐, 캐빈. 스테파노가 범인이 아니야." "뭐가 어째? 스테파노가 범인이 아니라고?" "그래, 스테파노는 범인이 아니니, 어서 그 수갑 치워!" "무슨 소리야? 이 자식이 범인이 아니라니? 자네, 지금 나를 놀리는 거야?" 손을 뿌리치고, 다시 수갑을 채우려 드는 캐빈의 손을 다시 로버트가 움켜쥐었다. "바보 같은 짓 좀 그만두라구! 동료의 말을 못 믿는다는 거야? 내가 말하면, 그런 줄 알아 야지." "믿을 수 없어. 이 자식은 범인이 틀림없다니까!" "자네, 지난번엔 레인 번즈가 범인이 틀림없다고 우겼잖나? 그 사실, 아직 기억하지? 스테 파노는 범인이 아니라고. 우린 지금 진짜 범인을 잡으러 가는 거야!" "진짜 범인? 그놈이 누군데?" "크리스 올랜도, 그 녀석이 범인이라고!" "자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릴 하는 거야? 단단히 미쳤구만! 이 집시 놈이 범인이라고, 샤 프츠베리 앞에서 죽치고 같이 기다린 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캐빈이 벌컥 성을 내자, 로버트 역시 맞받아쳤다. "지금 자네하고 노닥거릴 시간이 없어. 정, 못 믿겠다면 우릴 따라오면 되잖아. 녀석은 지 금 수전을 살해하려고 납치해 갔단 말이야." "무슨 소린지 도통 모르겠군. 수전을 크리스가 납치해 갔다니?" "알건 모르건, 잔소리 말고 따라오기나 해. 몇 번이나 말했지만, 시간이 없다구. 가면서 설 명해 줄 테니, 잠자코 따라오란 말이야. 자네, 그냥 보고만 서 있을 건가? 그쪽에서 스테파 노 좀 부축해 주지 않겠어?" 캐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어쨌든, 스테파노의 다른 쪽 팔을 부축하며 두 사람을 뒤따 라왔다. 그들은 주위에 둘러선 경찰관들을 헤치고, 차량에 올라탔다. 스테파노를 뒷좌석에 태우고, 그 옆에 캐빈이 앉았다. 로버트는 운전석에 오르기 전에, 둘러서 있는 경찰들을 향해 소리쳤 다. "타로 카드 살인마를 잡으러 출동하는 겁니다. 모두 내 차 뒤를 일렬로 따라오시오!" 그의 지시에 따라, 경찰관들이 우르르 차량에 분승했다. 그리고 로버트의 선도 차량을 뒤 따라 십여 대의 경찰 차량이 경광등을 번쩍이면서 꼬리를 물고 홈즈구를 빠져나갔다. 23 추적 그 무렵, 수전은 고든 성의 화려한 침실에서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방 안의 불은 모두 꺼지고, 침대 위의 간접 조명만이 출입문 쪽을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 후, 낭하를 울리는 발소리가 문 앞까지 다가오더니, 커다란 방문이 스르르 열렸다. 크리스 올랜도였다. 그가 스위치를 올리자 방 안이 환해졌다. 그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완전한 알몸이었다. 기다란 금빛 장발을 늘어뜨리고 서 있는 외 모가 마치 수행하는 고행자 같은 모습이었는데, 그는 천천히 마루를 밟으며 수전의 침대 쪽 으로 다가왔다. '세상 모르고 자고 있군.' 크리스는 화려한 침대 위에서 깊이 잠들어 있는 수전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이리시 커피에 탄 수면제가 힘을 발휘한 모양이었다. 옷도 벗지 않은 채, 그대로 침대 속에 파묻혀 곯아떨어져 있는 이 작은 동양 여인은 마치 덤불 속에 파묻혀 있는 작고 귀여운 한 마리의 참새처럼 보였다. 크리스는 희미한 미소를 띈 채, 그녀를 침대에서 들어올렸다. 약간 몸을 뒤척이며 잠꼬대 같은 신음 소리를 냈을 뿐, 그녀는 잠든 그대로였다. 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 방을 나갔 다. 크리스는 방을 나온 후, 복도를 지나 계단을 천천히 한 걸음씩 내려갔다. 마침내, 중앙 홀 을 지나자, 거기에 눈에 잘 띄지 않는 조그만 문이 있었다. 그는 양손으로 수전을 가볍게 안 아올려 왼쪽 어깨 위에 짊어졌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다시 또 계단이 나타났다. 지하로 통 하는 계단이었다. 그는 전등불을 켜고 나서 수전을 무슨 짐꾸러미처럼 어깨에 둘러맨 채 천 천히 침침한 불빛을 밟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엔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또 다른 통로가 있었다. 얼마나 오래 됐는지 검푸른 이끼가 묻어 얼룩덜룩했고, 음습하면서도 서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크리스는 그 통로를 통과해, 나 무로 된 문짝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은 이제까지와는 완연히 다른 분위기의 장소였다. 매우 스산했다. 성이 세워진 이후부 터 무수한 사람들이 이곳에 갇히고, 고문 받고, 죽어간 지하 감옥 겸 처형 장소였던 것이다. 역시 오래된 화강암이 사방 벽면을 두르고 있었다. 맞은편 벽 위엔 사람을 묶을 수 있는 쇠사슬이 달려 있고, 중세풍의 여러 가지 고문 기구들도 보였다. 크리스는 수전을 어깨에서 내려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옷을 하나씩 벗겨내 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었을 때, 그는 그녀의 몸뚱이를 벽에 늘어뜨려져 있는 쇠사슬에 묶었다. 양쪽 팔과 발목에 족쇄를 채우자, 수전의 알몸은 마치 도 살장에 매달려 있는 짐승처럼 보였다. 이미 그 장소에는 최근에 누군가를 처형했던 듯한 흔적이 널려 있었다. 바닥엔 말라붙은 핏자국이 보였다. 크리스 올랜도는 나무 형틀 위에 놓아 두었던 타로 카드 한 벌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 는 한 장씩 그것들을 살피면서, 때때로 수전의 벌거벗은 알몸을 쳐다보았다. 마치 어떤 방을 장식하는데, 어떤 무늬의 벽지가 가장 어울릴까 고심하는 그런 표정이었 다. 람스게이트를 향해 달리는 차 안에서 집시의 방갈로에 불이 났다는 캐빈의 말을 듣는 순 간, 스테파노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가 잔뜩 쉰 음성으로 캐빈에게 물었다. "그래서 모두 어떻게 됐지? 에스메랄다와 카르멜라 할머니는 무사한가?" "카르멜라 노파와 에스메랄다는 무사해." "그래? 다른 사람들은?" "호세가 다쳤어. 불을 끄다가 기둥에 깔려 화상을 입었는데,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야." "어느 정도나 다쳤는데?" "심한 화상을 입었어. 특히 양팔과 어깨... 다시는 북을 칠 수 없을 거야." 스테파노가 무거운 신음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캐빈이 말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해. 어떤 녀석이 고의적으로 방갈로에 불을 지른 흔적이 있거든. 현 장에 휘발유 냄새가 지독했다구! 어떤 놈이 그런 무모한 짓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 야." 그러자 스테파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게 누구 짓인지 알아!" 그의 두 눈은 증오의 불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누구? 불지른 놈이 누군지 자네가 안다고?" "그래, 내가 알고 있어. 누구 짓인지!" "그게 누군데?" "크리스 올랜도, 그 녀석이 불을 지른 거야." "또, 크리스 올랜도라구? 어째서 그 녀석 짓이란 거지?" "우리 식구들을 죽이려고 한 거야!" "어째서, 그놈이 그런 짓을 한 건데?" "내가 그 자식을 죽이려고 하니까, 거기에 대한 복수지." 스테파노가 웅얼거렸다. 엄청나게 쏟아져 내린 비로 도로가 침수되어, 차량 진행은 자꾸만 더뎌졌다. 승용차의 움직임이 마치 물살을 헤치고 달리는 모터보트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로 버트는 점점 더 초조한 기분이 들어 속도를 높였지만,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로버트는 입술이 바짝바짝 탈 만큼 긴장이 됐다. 평소에는 냉철한 편이지만, 지금은 도무 지 침착할 수가 없었다. 수전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벌써 그 잔혹한 살인마의 손에 희생된 것은 아닐까? 로버트는 자꾸만 마음을 파고드는 끔찍한 장면에 마음이 괴로웠 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의 두 눈은 불안감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도로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 곳에서 그가 물었 다. "스테파노, 이제 여기서 어느 쪽으로 가야 되지?" "곧장 가. 그대로 큰 길을 따라서." 이렇게 대꾸하는 순간, 무언가 머리에 떠오른 것처럼 캐빈이 스테파노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제 알겠어. 그렇다면, 지난번에 크리스를 습격한 건 네 짓이 분명하군. 그런데 너는 어 째서 그 자식을 죽이려고 한 거지?" "그 이유는 아까 로버트에게 말했어. 너한테 다시 말하고 싶지 않아. 알고 싶으면 나중에 로버트한테 물어보라고." 스테파노가 웅얼거리며, 캐빈이 물고 있는 담배를 뺏아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로버트가 말했다. "캐빈, 그건 내가 나중에 얘기해 주기로 하지. 아무튼, 모든 게 크리스 놈의 짓이야. 이제 내막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정리가 된다고. 녀석은 얼마 전부터 수전을 다섯 번째 희생자로 점찍은 것이 분명해. 그런 결심이 서자, 경시청으로 살인을 예고하는 협박 소포를 보냈지. 그런 다음, 스테파노가 샤프츠베리 극장에 나타났다고 허위 신고를 하고 나서 방갈로에 불 을 지르고, 곧장 수전을 납치하러 달려간 거야. 수전을 납치하기 위해 나를 먼저 멋지게 따 돌린 거라고!" "거참, 교활한 녀석이로군!" 캐빈이 웅얼거렸다. 로버트가 다시 스테파노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직도 의문이 있어. 스테파노, 어째서 너는 수전의 집에 침입한 거지?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말이야." "내가 그녀를 찾아간 건, 그녀에게 위험을 알려주기 위해서였어. 살인사건이 이어질 때 크 리스의 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 물론, 확신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야. 아무튼, 수 전에게 그의 정체를 알려주고 싶었어. 왜냐하면, 그 녀석을 가까이 하면 언젠가는 희생될 위 험이 커지니까." "하지만, 자네는 그런 사실을 수전에게 밝히지 않았잖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고. 우리에 게 말했다면, 미리 대비를 했을 텐데, 그러지 않았잖나?" "당신들은 나를 범인으로 의심하고 있었잖아? 그 상황에서 내가 크리스가 범인이라고 말 하면 믿어줄까? 수전에게도 그 말을 해주려 했지만, 도무지 말할 틈을 주었어야 말이지. 별 수없이, 나는 그 녀석이 본색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고. 다 왔어! 바로 저 성이야. 저 앞에 보이는 성이 고든 성이라고!" 스테파노가 외쳤다. 어둠에 싸인 언덕 위에 오래된 성채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그 성은 장엄하면서도 어딘지 기괴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24 위기의 순간 수전은 잠결에 몸을 뒤척이려 했지만, 누군가 손목을 꽉 붙잡고 있는 듯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게 생각하며 눈을 뜨는 순간, 크리스의 웃는 얼굴이 희미하게 어른거렸다. "이제야 깨어났군!" "크리스, 여기가 어디죠?" "여긴 내 성이야. 아직 정신이 덜 들었나 보군, 나하고 함께 성에 온 사실이 기억나지 않 나 보지?" "아, 그랬었죠. 그런데 여긴 너무 춥군요!" 그녀는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웠다.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며 가까스로 고개를 치켜드는 순 간, 썰렁한 감방 같은 곳이 시야에 들어왔다. 처음에 그녀는 자기 눈에 비친 장면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자신이 알몸으로 쇠사슬에 묶여 있는 것을 알아채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크리스를 보니, 그 역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무슨 일이 벌 어진 것인지 한동안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 그녀는 무언가 호된 둔기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이내 공포 심이 엄습해 왔다. "크리스, 도대체 무슨 짓이에요?" "당신을 사랑해. 레베카!" 크리스가 차갑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난, 레베카가 아니에요. 난, 수전 홍이라구요. 제발 여기서 내보내줘요!: "레베카, 무슨 섭섭한 소릴 하는 거야? 그런다고 내가 속을 줄 알아? 당신, 언제나 그런 식으로 나를 속였었지?" 그는 이상한 소리를 했다. 수전은 사태를 파악했지만, 이미 때가 너무 늦었다. 그녀는 덫에 걸린 쥐처럼 갇혀버리고 만 것이다. 이제 잠시 후면, 그의 손에 잔혹하게 살해당할 것이다. 어느새, 날카로운 칼날이 목덜미에 와 닿았다. 수전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공포에 질려 칼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오, 로버트 어디 있는 거야? 난, 이제 곧 죽을 거라고!' 눈에서는 왈칵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시각, 로버트 일행은 성문 앞에서 조바심을 태우고 있었다. 성문은 묵직했고, 굳게 닫 혀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성 안으로 들어가는 다른 통로를 찾아보았지만, 성채는 견고한 화강석으로 높다랗게 쌓여 있어 도무지 진입이 불가능했다. "방법이 없어. 이거 야단났군. 어떻게 하지?" 캐빈이 안타까운 듯 중얼거렸다. 역시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로버트가 갑자기 계단을 뛰 어내려갔다. 잠시 후, 캐빈은 로버트가 차에 올라타는 것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대체 저 녀석이 어디로 가려는 걸까? 이 급한 와중에 성벽을 기어오를 수 있는 로프라도 구하러 가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로버트가 방금 올라탄 차의 헤드라이트가 켜졌다. 이어, 차는 곧장 성문을 향해 돌진해 왔다. 마치 오토바이 레이서의 묘기를 보는 것 같았다. 승용차는 전속력으로 성문 앞의 계단 위 를 덜컹거리며 올라오기 시작했고, 금방이라도 캐빈을 덮칠 것처럼 불빛이 닥쳐왔다. "아이쿠, 저런 미친 녀석!" 캐빈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재빨리 옆으로 비켜섰다. 스테파노 역시 절룩거리며 도망쳤 다. 순간, 승용차는 계단 위를 튕겨오르더니, 점프를 하는 것처럼 공중으로 튀어올라 성문에 그대로 부딪쳤다. 콰당탕-! 엄청난 기세로 돌진해 온 승용차가 성문을 때리면서, 천둥같은 소리가 울렸다. "맙소사! 저 자식이 죽을려고 환장했군!" 캐빈이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급히 달려가 보니, 승용차는 성문을 뚫고 그대로 안쪽까지 들어가 뒤집혀 있었다. 후드는 완전히 우그러들고, 모든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그 틈에서 덜컥 문짝이 떨어져 내리며, 로버트가 인상 쓴 얼굴로 비척비척 기어나왔다. 밖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경찰관들이 놀라서 우르르 성 안으로 뛰어들었다. "로버트, 자네 괜찮나?" "아, 나는 괜찮다고. 어서 수전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기나 해, 어서!" 크리스는 무언가 쾅, 하는 소리를 듣고 멈칫했다. 견고한 성채의 지하에까지 들린 정도라 면 굉장히 큰 소리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소리를 무시했다. 엄청나게 커다란 천둥 소리 일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다시 또 수전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자, 이제 너를 내 방식대로 사랑하겠어! 당신에게 줄 선물이 있는데, 이걸 입에 물어보라 고!" 크리스는 그녀의 머리칼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입 안에 타로 카드를 살그머니 밀어넣었 다. "레베카, 난 너를 사랑해. 그리고 죽이고 싶도록 증오해. 넌, 나를 버리고, 스테파노 놈과 사랑했잖아? 나를 속이고 말이야!" "난 스테파노를 사랑한 적이 없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로버트라구요. 크리스, 당신 사람을 잘못 보았어요. 난, 레베카가 아니라니까요!" "또 나를 속이려 드는군. 하지만, 이제 두 번 다시 속지 않아. 난 너를 찾아내려고 온 세 상을 뒤졌어. 그래서 가까스로 너를 찾아낸 거라구." 그의 음성은 몸서리쳐질 정도로 음산했다. 지하의 돌감방을 밝히고 있는 것은 희미한 두 자루의 촛불뿐이었다. 그 불빛이 일렁거리는 데 따라 크리스의 길쭉한 그림자가 벽면에서 유령처럼 어른거렸다. 캐빈은 닥치는 대로 이방 저방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지만, 성 내부는 너무 넓어 어디 가 어딘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을 뛰어다녔지만, 수전과 크리스의 모습은 어디 에도 보이지 않았다. 로버트 역시 온몸의 통증을 견디며, 사방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마찬가 지였다. "아무 데도 없어.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구!" 캐빈이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순간, 로버트의 뇌리엔 오래된 성엔 으레 비밀 장소가 있 을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때,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스테파노가 다가왔다. "스테파노, 자네 이 성에 대해 잘 알잖아? 어디 비밀 장소가 없었나?" "맞아. 이제 생각났어. 지하에 감방이 있었어!" "그래, 어디로 들어가지?" "나를 따라오게!" 로버트와 캐빈은 절룩거리는 스테파노를 뒤따랐다. 중세풍 기사 갑옷과 투구들이 줄줄이 늘어선 중앙 홀의 뒤를 지나자, 자그만 목조문이 빼 꼼이 열려 있었다. 스테파노가 말했다. "바로 이 문으로 들어가면, 지하 감방이 나올 거야." 스테파노가 말했다. 로버트가 권총을 꺼내들고 앞장서 들어갔고, 캐빈이 뒤따랐다. 칼끝을 그녀의 목덜미에 힘주어 갖다댔을 때, 수전은 질끈 두 눈을 감았다. 크리스는 멈칫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막 칼을 그으려는 순간,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누가 안으로 들어온 걸까?' 바로 그때, 지하 감방의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리면서 로버트와 캐빈이 뛰어들어왔다. 로 버트의 손에는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잠시 후엔 다리를 절룩거리며 스테파노도 들어섰다. "크리스 올랜도! 칼을 버려라!" 로버트의 음성이었다. 수전은 귀에 익은 반가운 음성에 반짝 눈을 떴다. 크리스의 칼날이 목젖을 누르고 있어,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늦지 않게 나타나 준 로버트에게 사랑한 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칼날에 당장 목젖이 잘리기 전에, 꼭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 "망할 자식!" 크리스가 눈빛을 번뜩이며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로버트의 총구에서 불꽃이 뿜어졌다. 총탄은 크리스의 이마 한가운데를 정확히 꿰뚫고 지나 벽면에서 튕겨졌다. 크리스는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떨어뜨리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고, 그대로 움직임을 멈춘 채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수전, 당신 괜찮소?" 로버트가 수전에게 다가가,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괜찮아요. 근데, 로버트, 당신 내 알몸을 봐버렸어요. 그렇죠?" "나만 본 게 아니라, 캐빈도 봤어." "창피해요. 당신 몸으로 내 몸을 가려줘요. 그리고 모두들 나가 있으라고 말해 줘요, 어서 요." 로버트가 그녀의 몸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돌려 뒤돌아 보았다. 캐빈과 스테파노가 난처 한 듯 서 있다가 눈빛이 마주치자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로버트는 수전의 팔과 다리에서 족쇄를 풀어주었다. 그녀는 로버트에게도 돌아서 있으라고 말한 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자신의 옷가지를 주워들었다. 잠시 후, 옷을 다 입은 그녀는 로버트의 몸을 힘 껏 끌어안았다. "로버트, 사랑해요!" "나도 당신을 사랑해. 당신이 죽었다고만 생각했어." "나도 죽는 줄로만 알았어요!" "아무튼, 살아 있다니, 꿈만 같아!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기도는 나중에 하고, 어서 여기서 빠져나가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수전은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로버트는 그런 그녀를 안아들고, 다 급히 지하 감방을 빠져나왔다. 25 수전에게 장미를 수전이 런던 시립병원 입원실에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전신이 바스라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런데 그 통증 때문에 흐릿하던 정신이 다시 돌아오는 듯했다. 그제서야 자기를 걱 정스레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로버트였다. 수전은 입가에 다정한 미소를 담고 서 있는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로버트가 등뒤에 감추고 있던 붉은 장미 꽃다발을 그녀의 눈앞에 내밀었다. "어머, 고마워요." "수전, 당신에게 고백할 말이 있어." "뭔지 말 안 해도 알아요." "뭔데?" "장미 꽃다발을 건네며, 남자가 할 말이 있다고 한다면, 뻔한 거예요. 당신, 저한테 청혼하 려는 거죠?" "맞았어. 받아주겠어?" "로버트, 당신은 제 생명의 은인이에요. 대개 영화를 보면, 여자들은 늘 자기 생명을 구해 준 은인하고 결혼하는 걸로 결말이 나 있다구요." "허락하는 건가?" "물론이죠!" 그녀는 눈을 감더니, 살그머니 얼굴을 들어보였다. 로버트는 허리를 숙여 그녀의 도톰한 입술에 얼굴을 가져갔고, 수전의 두 팔이 자연스럽게 그의 목덜미에 감겨왔다. "히야, 이거 눈 뜨고 못 봐주겠군!" 등뒤에서 캐빈의 장난기 어린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노트도 없이 병실문을 열고 들어왔 다. 수전과 로버트가 깜짝 놀라서 몸을 떼며 바라보니, 멋진 중절모자로 대머리를 가린 린치 경감과 스테파노, 그리고 화려한 투피스 차림의 에스메랄다가 제각기 꽃다발을 들고 서 있 었다. "너무 에너지를 한꺼번에 소모하는 건 안 좋아요. 수전이 하루 빨리 완쾌되려면, 우 형사 가 좀 자제를 하셔야죠." 에스메랄다가 고혹적인 미소를 띠며 던진 말에, 병실에 모여든 일동이 와르르 웃음을 터 뜨렸다. 그들의 행복한 웃음 너머로 창 밖에서는 탐스러운 눈송이가 휘날리고 있었다. 어느 덧, 겨울이 성큼 다가온 것이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로버트와 수전은 모든 사람들의 축복 속에 리전트 팰리스 호텔의 웨 딩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로버트는 수전과의 약속대로 결혼하기 1개월 전, 런던 경시청을 사직하고, 옥스퍼드 대학 에 편입해 형사소송법을 공부하는 학생 신분으로 돌아와 있었는데, 그래도 결혼식 날, 식장 로비는 경시청의 형사들과 경찰관들로 북적거렸다. 스테파노와 에스메랄다, 그리고 집시퀸스의 멤버들은 두 사람의 결혼식이 끝나고 곧장 남 프랑스로 돌아갔는데, RCA레코드에서 파격적인 조건으로 첫 음반을 제작하기로 했다는 반 가운 편지를 보내왔다. 연쇄살인사건이 해결되고 크리스 올랜도의 범행이 밝혀진 뒤 한 동안 런던 시민들 사이에 서는 이 끔찍한 악몽이 커다란 화젯거리였지만, 새해가 시작되면서부터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까맣게 잊혀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크리스 올랜도의 흔적은 그가 남긴 앨범이나 비디오 테이프에서 보고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에필로그 수전이 쓴 크리스 올랜도 이야기 크리스 올랜도는 웨일스의 카디프 태생으로, 재단사였던 아버지가 고향에 가게를 열면서 그곳에서 자라났다. 아버지 잭 올랜도는 카디프에서 알아주는 일류 재단사였고, 어느 모로나 성실한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외아들 크리스를 끔찍이 사랑해 그에게 직접 옷을 만들어주 기도 하고, 미키마우스 복장을 지어 입히기도 하는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어머니 산드라 올랜도는 금발에 푸른 눈이 아름다운 화사한 여인이었는데, 수를 잘 놓았 고, 요리 솜씨 역시 뛰어난 여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아들 크리스는 어려서부터 사랑스러운 외모에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 지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재롱을 잘 부려 동네 사람들에게 큰 귀여움을 받았다. 일요일이 면, 그는 아버지가 만들어 입힌 미키마우스 복장을 하고 작은 북을 치면서 집집마다 돌아다 니며 비틀즈의 노래를 불렀는데, 그럴 때면, 사람들은 아주 즐거워하면서 그에게 캔디나 호 두를 선물로 주었다. 어쩌다 그가 노래를 거르는 일요일이면, 이웃들은 올랜도 부부에게 "우리들의 작은 존 레 논은 어떻게 되었나요? 무슨 일이 있나요?" 하고 묻곤 했다. 이런 배경으로 본다면, 크리스는 누구보다 행복한 유년기를 보낸 소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행복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크리스가 여덟 살이 되던 해부터 이 화목했던 집안에 서서히 어두운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의 외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린 크리스는 늘 외출이 잦고, 밤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돌아오는 어머니를 기다리며 아 버지와 함께 통조림으로 저녁을 때우는 나날이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어머니를 미행해 보기로 했다. 어머니의 자동차 트렁크 속에 숨어, 어머니를 미행했던 크리스에게 그날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날이었다. 그는 엄청난 장면 을 목격했고, 이후 말없는 소년으로 돌변했다. 그날, 어머니가 들어간 곳은 삼촌의 집이었고, 크리스는 나무 위로 올라가 어머니와 삼촌의 정사 장면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 일피일 미루고 있던 어느 날 저녁, 아버지는 심심풀이로 타로 카드 점을 치고 계셨고, 어머 니는 오랜만에 외출을 하지 않고, 수틀에 앉아 수를 놓고 있었다. 어린 크리스는 저녁을 먹고 곧 잠이 들었는데, 무서운 악몽에 시달리다 이상한 느낌에 눈 을 떠 거실로 나와 보니, 사랑하는 아버지는 식탁 위에 피를 토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고, 어 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식탁 위엔 방금 전까지 아버지가 떼어놓은 타로 카드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모든 것이 밝혀진 것은 다음날이었다. 아버지를 죽인 것은 어머니였고, 어머니는 살인 직 후, 삼촌과 함께 어딘가로 달아나고 만 것이다. 아버지를 묻고 나서, 크리스는 가장 가까운 친척인 람스게이트에 살고 있는 제인 할머니 댁으로 가게 됐다. 제인 할머니는 부유한 연금생활자로 크리스를 무척 사랑해 주었는데, 그 집에는 스테파노 라는 이름의 동갑내기 집시 소년과 레베카라는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 스테파노는 전에 제인 할머니 집에서 일하던 집시 출신 가정부 칼멘 라 로자의 아들이었 는데, 칼멘이 죽은 후 의지할 곳 없는 그를 제인 할머니가 보살펴주고 있는 것이었고, 레베 카 역시 비슷한 처지였다. 세 아이는 곧 친구가 되었고, 그들은 고든 성에서 함께 놀면서 자랐다. 세 아이는 모두 고 아였다. 이 상처는 이들의 연대감을 강화시켜 주는 한편, 그들 세 사람을 세상으로부터 격리 시키는 역할도 했다. 크리스와 스테파노는 어여쁜 레베카를 위해서 기꺼이 기사가 되었고, 그들은 고든 성에 숨어들어 거기에 기거하던 쥐떼를 몰아내고, 도둑고양이들과 싸운 끝에 나선형 계단을 통해 들어가는 가장 높은 방을 레베카에게 바치고 '레베카의 방'이라고 불렀다. 스테파노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 인종적인 편견을 견딜 수가 없었고, 곧 영국을 떠나 프랑스에 있는 할머니에게 갈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스 역시 학교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했는데, 암암리에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이 고, 시동생과 달아났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던 데다가, 폐쇄적인 성격으로 인해 학교에서는 언제나 따돌림을 당했다. 동급생들은 파티에 같이 가기 싫은 파트너를 뽑는 투표에서 그를 1위로 꼽았고, 최악의 동창생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단 한 가지, 그의 학창시절을 환히 밝혀준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음악교사인 해미온을 만난 일이다. 그녀는 기악 교습시간에 크리스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 그에게 음악을 해볼 것 을 권유했다. 그 후, 크리스는 수업 시간을 빼먹으며, 람스게이트 항구에 있는 선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렇게 모은 돈으로 어쿠스틱 기타를 산 다음, 언제나 헛간에 들어앉아 작곡과 연습 에만 몰두했다. 이즈음, 그는 사랑에 빠져 있었는데, 상대는 레베카였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스테파노에게는 슬픈 일이었다. 레베카와 크리스가 고성에서 만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스 테파노의 외로움과 질투는 더해갔다. 어느 날, 스테파노는 크리스를 고성으로 불러낸 뒤, 오랜 세월 그만이 알고 있던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것은 레베카 자신도 모르는 출생의 비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녀가 바로 크리스의 삼촌인 라이오닐의 딸이라는 것이었다. 라이오닐 삼촌. 그는 바로 크리스의 어머니를 유혹해 아버지를 죽게 하고, 함께 달아난 남자가 아닌가. 크리스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이 소녀가 그 남자의 딸이라니... 그날 이후, 크리스는 다시 어머니와 아버지에 얽힌 악몽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우울 증 증세까지 보이며 레베카를 피했고, 람스게이트 항구를 떠돌다가 거친 뱃사람들과 어울렸 다. 그는 이후 어떤 여자에게서도 연정을 느끼지 못했고, 동성애에 빠졌으며, 마침내 마약까 지 손을 댔다. 언제나 그의 가슴에는 어머니에 대한 증오가 들끓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아직 어머니를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있다는 진실이 역겨웠다. 더욱이 레베카의 푸른 눈과 금발을 볼 때마 다, 그녀가 어머니를 닮았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그래서 그는 어느 비 오는 날 밤에, 레베카를 고성으로 불러냈다. 한동안 자기를 피하는 크리스의 태도 때문에 상심하고 있던 레베카는 기꺼이 고성 안에 있는 '레베카의 방'에 나타 났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실종됐던 레베카는 고성의 작은 방에서 목이 졸려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범인은 잡지 못한 상태에서 치러진 레베카의 장례식은 쓸쓸했고, 그 자리엔 평 소에 그녀를 사랑했던 제인 할머니와 크리스, 그리고 스테파노와 몇 명의 친척들만이 조용 히 자리를 지켰을 뿐이었다. 그러나 장례식 날, 크리스는 스테파노의 시선이 줄곧 자기에게 머무는 것을 느낄 수 있었 다. 그리고 자신이 레베카를 죽였다는 사실을 스테파노가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실상, 스테파노는 바로 그 날, 레베카가 상기된 얼굴로 집을 나간 후, 마음을 잡지 못한 채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가, 비까지 내리는 날씨에 그녀가 좀처럼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되 어 고성으로 가보았던 것이었다. 나선형 계단으로 다가갔을 때, 그는 이상한 신음 소리를 들었고, 조심스럽게 지하 감방에 내려가 안을 엿본 순간, 꿈틀거리는 레베카를 타고 앉아, 목을 조르고 있는 크리스를 목격했 다. 그러나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스테파노는 그 순간 레베카를 구할 생각도 못하고, 그대 로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채, 살인 장면을 지켜보았고, 잠시 후 크리스가 성을 빠져나가는 것 을 보았다. 아무튼, 레베카의 장례식이 끝난 후 스테파노는 영국을 떠났다. 남프랑스의 니스에 사는 외할머니 카르멜라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이미 차가운 결심이 서 있었다. 언젠가 크리스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말겠다는 결의! 그래서 스테파노는 그가 절대로 경찰에 잡히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거기에는 레베카 가 살해당할 당시, 살인 혐의가 자신에게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레베카를 구 하지 못했던 자신의 비겁함에 대한 뼈저린 자책감이 있었다. 그리고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남프랑스, 니스에서 '집시퀸스'라는 악단을 만들어 공연을 하던 스테파노는 어느 날, 크리 스가 로커로 데뷔했고, 그가 이끄는 그룹 '엘 도라도'가 인기상승 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악단을 이끌고 런던으로 들어왔고, 그의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 그것은 크리스 올랜 도를 자기 손으로 죽이는 것이었다. 그 첫 번째 시도는 그해 10월 초순, 영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크리스 올랜도 살해미수사건 이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올랜도는 이미 살인 행각을 시작한 상태였다. 그는 런던을 공포의 도가 니로 몰아넣었던 타로 카드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으로서, 부친이 어머니에게 살해되었던 당 시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비 오는 날 밤마다 금발의 여성들을 차례차례 살해하는 끔찍한 범죄 행각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크리스올랜도는 아버지를 살해한 어머니에 대한 증오로 평생을 저주와 미움 속에서 보냈 고, 부박한 대중적 인기 속에서 언제나 불안에 떨었으며, 진실한 사랑과 관심에 굶주린 채 외롭게 지내는 날이 많았다. 결국, 이러한 환경이 그를 미친 살인범의 광기 속으로 끝없이 몰아갔던 것이다. 어쨌거나, 이제 크리스 올랜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 그의 영혼은 람 스게이트 해변의 고성을 거닐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우리 시대를 다녀간 쓸쓸하고 가 련한 영혼이다. 하지만, 그가 저지른 끔찍한 행위 탓에, 아무도 감히 그를 용서해 달라고, 그 의 평안을 기도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또한 안타깝다. 그렇다. 크리스 올랜도는 우리 마음을 어루만지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불세출의 아티스트 였고, 동시에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을 자행한 희대의 살인마이기도 했다. 이 두 가지 모순된 얼굴을 가진 그의 가련한 영혼 앞에서 도대체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이 모든 이야기를 상세하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집시 스테파노 무어의 충실한 증언 덕분이었다. 그는 이번 사건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그는 살해미수범으로 쫓기는 몸이 되었 고, 그의 사랑하는 동료 호세는 팔을 잃었다. 하지만, 어느 날 밤, 나를 찾아온 스테파노는 오히려 평화로워 보였다. 이미 그는 레베카 를 죽인 크리스 올랜도를 용서하고 있는 듯했고, 어쩌면 그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처럼도 느 껴졌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날 밤, 그가 내게 해준 증언은 크리스 올랜도의 평전을 쓰는 데 있어, 더없이 소 중한 자료가 되었다. 스테파노는 밤새워 긴 증언을 해 주고, 미처 날이 밝기도 전에 다시 길 을 떠났다. 이제 두 번 다시 그를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의 정직한 눈빛과 정열적인 플라멩코 기타 소리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어디에 있건, 나는 그가 참으로 집시답게 살아가기를 빌고 싶을 뿐이다. 수전 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