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유혹 지은이 시드니 셀던 출판사 도서출판다리 위험의 시작 런던의 일기는 항상 짙은 안개가 하늘가 대지를 뒤덮고있으며 언제 그 안개 대신 비가 낼 릴지 알수 없었다. 그석은 영국 신사가 단장처럼 항상 우산을 소지하고 다니는 모습을 연상 해 보면 어렵지 안게 이해할 수 있다. 영국은 신사의 나라이지만 날씨만큼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외국인 여행자들이 자주 골탕을 먹는 것도 이러 이유에 서이다. 공연스레 잔뜩 멋을 부리며 모처럼의 외국 여행을 자랑하려다간 비 대문에 기분까 지 망치기 쉽다. 한마디로 런던방문 시에는 비를 대비해서 반듯이 우산을 준비할 필요가 있 다고 하겠다. 때마침 미국의 대그룹 가운데 단연 지명도가 높은 뿐아라 국외의 여러 나라 에 지점을 개설해 놓고 활발하게 운영을 하고 있는 메인 그룹의 총수인 리차드 메인의 런던 여행이 있었다. 리차드 매인의 이번 여행은 무척 중요한 회의 때문에 이루어진 것으로 사업 계획의 일부였다. 하지만 막상 런던에 도착했을 때 그와 함께 동행하는 메인 부인인 저스틴 은 벌써부터 기분이 들떠 있는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언제나 그녀를 이해하는 리차드는 사 업상의 여행이지만 이런 경우에도, 저스틴은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거나 감정을 쉽게 변하 시키진 않지만 지차드를 사랑할 때만을 언제나 달랐다. 때문에 메인 부부는 언제나 행복했 고 그런사실을 주위 사람들도 높이 평가해 주었다. 사업은 물론 가정은 생활 역시 만점인 부부였다. "여보, 비가 그친 것 같아요." "그렇군." 로스엔젤레스가 아닌 런던에서의 메인 부부 모습은 또 다른 조화된 분위기를 풍겼다. 그들 이 가는 길이 항상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따라서 런던 여행도 낙관하기 힘든 것이 사실 이다. 더구나 런던은 낯선 곳으로 그들을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극소수일 뿐이다. "저스틴." "네?" 리차드는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당신? 뭐 잘못됐나요?" "아니, 정반대야." "네에?" 저스틴은 수수께끼에 걸려든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 런던에 와서 보니까 기막히게 더욱 아름다운데!" "오!" 저스틴은 짧은 탄성과 함께 전혀 뜻밖의 질문을 던ㅈ다. "리차드, 혹시 런던으로 이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은 없나요?" "이사?" "네." "우리가?" "그럼 누구겠어요." "런던으로 말이지?" "그렇다니까요." 메인 부부의 평범한 대화는 언제나 그런 식이다.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했고 농담을 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 들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언제난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 나오는 애정이 있었다. "난 생각 없어." "왜요?" "털옷이 너무 가벼워서 싫거든." "그건 그렇네요. 정말." 리차드의 의견에 이번에는 저스틴이 즉석에서 동의했다. 메인 부부는 늘 이런 식이었다. 느 낌도 똑 같았을 뿐 아니라 부부만의 시간에서도 최고의 기쁨을 느끼는 것마저 서로 일치했 다. 그들만큼 어울리는 한 쌍은 드문 것이다. 항상 원기 왕성한 리차드와 매력 넘치는 저스 틴의 침실은 그래서 항상 기쁨으로 가득 찼다. 집을 설계할 때 방음 장치를 특별히 주문했 어야 될 정도로 저스틴은 충분한 만족을 얻었다. 절정에 도달하는 그녀의 모습이야말로 그 들 부부가 누리는 가장 극적인 광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떤 때는 너무 지독해서 처절하 게 보일 정도였다. 전신에 땀이 비오듯했고 그녀는 마치 셔츠를 흠씬 적셔 놓은 정열의 화 신과도 같았다. "음..." 리차드는 문득 속에 빠져 있는 듯했다. 그때 저스틴이 리차드의 생각 속으로 비집고 들어 왔다. "우리가 말이에요, 여보.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는다면 굉장히 멋지게 보일 텐데요, 안 그래 요?" "때아니 무슨 가죽옷?" "아니예요" "어째서?" "그 자리는 이미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임자가 있기 때문이죠. 설마 그걸 모르셨던 건 아 니겠죠?" "음, 그럴 수도 있겠군!" "네?" "저스튼 당시은 로스앤젤레스의 여왕이니 왕관을 두 개 씩 쓸 수야 없겠지." 저스튼은 실제로 대학 시절, 퀸에 뽑혀 왕관을 머리에 얹는 영예를 안았던 적이 있었다. "그래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왕관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여왕이죠." 비는 그쳤지만 거리에는 여기저기 물이 고여 있었고 대기는 눅눅했다 목적지까지는 먼 거 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걷기로 했다. 런던의 시가지를 걸어보는 것도 나름대로의 멋 진 추억거리로 남겨둘 수 있을 것이다. "여보, 걸음을 좀더 빨리 하지 안으면 약속 시간에 늦을 수도 있겠어." 비로소 저스틴은 이야기를 이번 여행의 목적인 사업 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안아요?" "뭐가?" "사업이야기를 카지노에서 한다는 거 말예요." 이번 여행은 확실히 특별한 데가 있었다. 런던까지 여행하는 것도 그렇고 특히 유명한 카 지노 클럽에서 회의를 한다는 것은 더 더욱 이상했다. 도박장 같은 장소에서는 지금껏 한 번도 사업에 관한 일 때문에 모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낮에 있었던 회의 사간에 패트릭을 만나지 못했어. 그 사람 시간만 있으면 언제나 컨 싱턴 클럽에서 지내니 큰일이야." 켄싱턴 크럽은 런던에서 카지노로 유명한 장소였으며 외국인들도 도박을 하기 위해서 여행 도주에도 반드시 찾곤 하는 장소였다. "아, 좋은 생각이 있어요." "당신한테?" "당신, 상담이 끝난 다음에 우리도 도박을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떻겠어요. 어차피 회의 장소 도 도박장이니까요." "당신한테서 그런 이야기가 나올 줄 짐작했지." 리차드의 저스틴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이 정도였다. 그녀의 표정이나 눈빛만보아도 벌써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어다. 저스틴은 리차드의 예견에 놀라하면서도 한편으로 기뻤다. 그럴 때 그녀가 웃는 모습은 어떤 여자의미소보다 리차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여러 가지의 독 특한 매력 중 저스틴의 미소는 빼놓을 수 없는 매력에 속했다. 켄싱턴 클럽은 이미 손님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대규모 유홍업소들이 흔히들 그렇지 만 이 클럽의 웨이트리스들은 뛰어난 미인들이었다. 영국의 팔등신 미인들은 모두 이 클럽 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정도였다. 유치하고 선정적인 노출을 하진 않았더 라도 그들은 매력 만점이었다. 짧은 스커트 그리고 그 아래로 죽 뻗은 두다리만으로도 충분 했다. 그들은 젖가슴을 정도 이사응로 노출시키지도 않았다. 웨이트리스들이 아예 젖꼭지를 드러내고 있는 광경은 싸구려 술집이 아니더라도 흔히 연상되는 장면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상이 아닌 사실이다. 아예 ㅇ몸을 알몸인 채 서비스하는 유홍업소가 버젓이 도시 한복판 에서 운영되고 있을 정도이니까. 리차드와 저스틴은 정확히 약속 시간을 지켰다. 그들이 클 럽 안으로 들어갔을 때 이 크럽의 총지배인이며 리차드와 친분이 두터운 조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조지는 미국에 간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저스틴과도 이미 알고 있는 사이였다. "리차드!" "조지!" 두사람은 반갑게 악수를 나누며 활짝 웃었다. "다시 만나서 바낙ㅂ습니다. 리차드." "반갑습니다." 조지는 이어서 저스틴에게 반가움을 표시했다. "저스틴." 조지는 눈부신 듯 그녀를 바라보며 탄사를 늘어놓았다. "영국이 해가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말도 당신 앞에서는 부끄럽습니다." "안녕하세요, 조지." "죽을 지경입니다." 조지는 계속해서 리차드와 저스틴에게 말했다. "지금 내 방에서 해스머그 씨가 기다리고 있어요. 중요한 일인 것 같더군요. 보통 때도 이맘 때면 수백 파운드를 잃기 마련이죠." 장소가 도박장이기 때문에 대화 중에는 거의 언제나 그런 이야기가 섞이기 마련이다. 이제 리차드가 사업상 해스버그 씨를 만나야 하기 때문에 리차드와 저스틴은 잠시 동안 떨어져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곳은 미국이 아닌 런던이며 특히 번잡스러운 카지노 크럽이다. 그곳 에 저스틴을 혼자 두어야 했다. 만일 저스틴이 혼자 남겨 질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도박장의 분위기는 원래 예상치 못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 다. 특히 저스틴같이 아름답고 매력 넘치는 여자는 나비 떼를 불러 모으기에 충분한 꽃이나 다름이 없었다. 벌떼조차 그 향기 넘치는 꽃 앞에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리차드는 계속 그녀와 함께 있으면서 그녀를 지켜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중요한 상담을 우 선 끝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조지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저스틴은 침착한 성격을 지 녔으며 어쩔 수 없이 연약한 여자라고는 하지만 그녀는 이성과 자성이 절묘하게 갖추어져 있어서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서툰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가셔야죠, 여보?" "그 도안 당신이 혼자 있는 게 마음에 걸리는군." "오래는 걸리지 않을 거야." "좋아요." "나중에 봐." 잠시 동안 헤어져 있어야 되는 아쉬움의 표현으로 리차드와 저스틴은 가볍게 포옹했다. 하 지만 이때는 리차드도 저스틴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문제가 닥쳐오리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성분이 좋지 않은 범죄자들은 때와 장소를 구별않고 사건을 저질 렀다. 또 이런 자들은 언제 어디에서는 존재하기 마련이며 호시탐탐 범죄의 기회만을 노린 다. 특히 카지노 클럽에서는 더욱 많으며 더구나 저스틴 같은 미인은 눈에 띄는 대상이 되 기 쉬었다. "조지, 저스틴 좀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리차드.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맙습니다." 리차드는 해스버그를 만나기 위해 총지배인의 사무실로 걸어갔다. 이때부터 저스틴은 낯선 공간에 리차드 없이 남겨지게 되었다. "옷을 받아 드릴까요. 저스틴?" "네. 고마워요." "어떻습니까, 저스틴?" "네?" "리차드를 기다리시는 동안 룰렛 게임 한 판 하시는 것 말입니다." 저스틴은 리차드에게 도박의 뜻을 비추였었지만 혼자서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 떤 것이든 그녀는 남편과 같이 있을 때나 함께 움직일 때에만 의욕을 느꼈던 것이다. "아니예요. 조지." "싫으십니까?" "싫다기 보다는... 그냥 구경이나 하겠어요." "그러실래요? 자, 가시죠." 조지는 저스틴을 카지노로 안내했다. 사라진 남작 클럽에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긴장된 표정으로 룰렛 게임을 하고 있었다. 게임 판에는 돈 을 걸고 참가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뒤에 서서 구경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게임을 진행시키고 있는 딜러는 금발 머리가 단정해 보인는 젊은 백인 청년이었다. 이런 장소에 와 볼 기회가 거의 없었던 저스틴은 새로운 기분을 느꼈다. "손님 여러분, 돈을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좋다고 생각되는 번호에 돈을 걸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특별해 보이 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도박판에서는 언제나 볼 수 있는 데스타브 남작이었다. 그가 작위를 어떻게 받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모두 그를 남작이라고 불렀다. 인상이 부드럽 거나 자상해 보이지 않는, 어떻게 보면 무서운 느낌을 주는 중년의 신사였다. "당신은 천재적인 도박사야. 다음 번에도 오는 거겠지." 남작은 옆에 앉은 사람에게 그럴듯하게 말했다. 마투로 보아 런던뿐만 아니라 세계의 도시 를 섭렵하며 도박을 벌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스틴은 조지와 함께 뒤쪽에 서서 조용히 구경했다. 주변에 여자들이 별로 없기도 했지만 저스틴의 모습은 역시 눈에 띄 었다. "이제 됐습니다. 더 걸지 말아 주십시오." 젊은 백인 딜러는 능숙한 솜씨로 룰렛 게임을 진행했다. 돈을 걸어 놓은 사람들이 긴장하 는 가운데 회전판이 돌아갔고 이윽고 당첨 숫자가 정해졌다. "흑색 17번입니다." 그때 저스틴은 남작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던 그녀 는 자신의 앞에 앉은 남작의 번호가 흑색 17번임을 알았다. 그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했다. "어머, 따셨군요." 놀라는 그녀 모습은 순진한 소녀와 같았다. "우연이지요." 방금 돈을 딴 남작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한마디로 잘라 말하며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 다. 다음 순간 그의 표정이 크게 변하는 것을 저스틴은 분명히 보았다. "아니, 우연이 안일지도 모르겠군요! 당신이 행운을 가져다 준 게 분명합니다." 남작은 앉았던 몸을 천천히 일으키더니 저스틴과 정면으로 마주 섰다. 그의 시선에는 놀라 움이 가득했으며 한시도 저스틴의 모습에서 시선을 옮기지 않고 뚫어질 듯이 바라보고만 있 었다. 그 표정은 기적의 순간을 본 사람과도 같았다. 아니면 굉장히 놀랍고 기뿐 일을 순식 간에 당한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단순한 경이로움이 아니라 매우 뜻깊은 무엇인가를 느낀 모습이었다. "아, 저는..." 남작의 긴장된 표정과 강열한 눈빛이 저스틴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금방 그가 팔을 ㅃ쳐 무 슨 일을 저지를 것같은 위기감조차 느껴졌다. 그녀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곁에서 지켜보던 조지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는 남작같은 도박군의 우혹으로부터 저스틴을 보호 할 책임이 있었다. "소개해 드릴까요?" "이쪽은 테스타브 남작, 그리고 메인 부인입ㄴ.ㅏ" 조지는 저스틴이 유부녀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가 저스틴을 소개했을 때였다.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도박꾼이 재빨리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는 저스틴을 이미 알고 있고 있는 듯 보 였드며 그늬 눈빛에는 심상치 않은 느낌이 담겨 있었다. 그너나 카우보이 보자를 쓰고 있는 이 의문의 남자는 어떤 수상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저스틴은 순식간에 남작꽈 그 남자, 즉 수상쩍한 두 남자 사이에 서게 되고 말았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아직은 알 수 없지민 저 스틴은 그들에게서 물안한 느낌을 받았다. 조지를 통해 소개된 저스틴도 스스로 자신을 소 개했다. "저스틴 메인이예요." 그러자 카우보이 모자를 쓴 남자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메인 부인."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는 남작이 자신을 소개한 저스틴의 손등에 답례로 정중하게 카스하는 광경을 재빨리 노려 보았다. 저스틴으 소개한 조지까지 자리를 저나려고 했다. "그럼 즐겁게 지내세요. 부인." "고마워요. 조지." 조지가 인사를 하고 물러가자 남작은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재발리 저스틴이 앉도록 권했 다. "자, 자리에 ㅇ으시죠." "아, 아니에요." "어서 앉으세요. 단순히 농담으로 부인께 자리를 권하는 것이 아닙니다." "괜찮아요. 전 여기서 그냥 구경만 하겠어요." 저스틴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녀늬 곁에는 처음 보는 낯선 남자들밖에 업고 그나마 믿을 수 있던 조지조차 가버렸다. 이럴 때에는 평소 침착했던 저스탄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녀에게 행운을 가져왔다고 말한면 자구 자리를 권하는 남작의 태도가 웬지 모르게 마음네 걸렸다. 그리고 그 강렬한 눈빛과 굳은 표정 등은 저스틴에겐 모두 이질적인 것들이었다. 남 작은 저스트니을 보는 순가 어떤 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남작의 계획은 다 른 어떤 사람도 눈치 챌수 없었다. 물론 저스틴은 더 더욱 알수 없었다. 지금 그녀의 입장은 어른들에 의해 강제로 위험한 장소에 끌려온 아니와 다름이 없어ㅆ. 그때 저ㅅ은 더욱 불안 하게 하는 광경이 벌어졌다. "남작." 마치 시비를 거느 사람처럼 말을 한 것은 카우보이 모자를 쓴 남자였다. "설마 혼자서만 차지하려는 것은 아닐 테지요?" 남작은 그의 말뜻을 얼른 알아차리지 못하고 대답했다. "그 점은 걱정할 게 없어요. 오늘 저녁에 딴 돈을 모두 입금시켜 놓겠소." "젠장, 돈 이야기가 아니요." "그럼?" "그 아름다운 여자 말이야." 갑자기 저속해진 그의 말에 저스틴은 감짝 놀랐다. 그남자가 그녀를 직업여성쯤으로 취급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 알았소." 납작은 서둘러 그 남자에게 저스틴을 소개했다. "소개해 드리겠소. 용서하시오. 이쪽은 저스틴 메인 부인, 그리고 닐 완슨 씨요." 저속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 앞에서 떠벌이던 남자는 닐 완슨이었다. 그가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저스틴은 전혀 알 길이 없었으나 좋지 않은 인상을 풍기는 사람 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부인." 닐 완슨은 짐짓 예의를 갖추려는 듯 보였다. "안녕하세요?" 항상 에의를 잃지 않는 저스틴은 자신의 불쾌해진 감정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더욱 명랑한 펴정을 지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손님 여러분." 젊은 딜러는 마치 남자과 닐 완슨이 저스틴에게 접근하도록 기다려 주어다는 듯이 얼마간 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게임을 진행시켰다.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돈을  ㄹ어 주시기 바랍니다." 디러의 말을 신호로 남작은 본격적인 접근을 시작했다. 그는 거의 강제로 앉혀진 저스틴의 등 뒤에 바짝 부어선 뒤 그럴듯하게 물었다. "몇 번에 거시겠습니까?" "남작님." 저스틴은 또다시 당황했다. "전 구경만 하게썽요." "어서요. 부인." 당장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더구나 그석은 여자로써 너무 경솔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더 더욱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남작은 저스틴을 처음 보는 순간 이미 그런 점들을 꿰ㄷ어 보앗을 것이다. 강요하면 거절하지 못하는 저스틴의 성 격까지도 간파했을 것이 분명했다. 저스틴의 감수성은 경우에 따라 아지곧 처녀 시절과 비 슷한 만감함을 보이기도 했다. 자신을 행은의 여신처럼 칭찬했던 남작의 말을 떠올린 것이 바로 그런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그것은 저스틴의 호기심이랄 수도 있었다. 왠 지 두렵고 기분이 나쁘면서도 한 구석에서는 호기심이 조금식 고개를 쳐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어서요. 부인. 이 기막힌 행운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딜러의 시선이 잠깐 남작의 표정에 머무는 듯하더니 이내 재발르게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누구나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하면 당황하게 될 것이다. 저스틴은 더 했다. 남작의 적극적인 권유는 강요나 다름없는 것이며 밈묘하게도 그의 태도는 그녀로 하여금 이미 호기심을 느기 게 하고 있었다. 위험한 장난인 줄 알면서도 한번 해 보고 싶은 아이같은 모험심이 일어나 고 있었던 것이다. "전 어떻게 하는지도 몰라요. 남작님, 정말이에ㅛ." 젊은 딜러의 시선은 다시 남작의 표정에서 이번에는 저스틴의 표정으로 재빨리 움직여ㅆ. 하지만 그의 시선은 의심하거나 다른 뜻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딜러는 흔히 고개들의 표정에서 그 기분을 살피는 버릇이 있었다. 게임을 진행시키는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작님, 기다리고 있습니다." 딜러가 재촉했다. 그런 분위기는 저스틴에게 정신적인 부담감을 다시 주어고 어떤 식으로 든 그의 부탁을 다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가지 그녀를 몰고 갔다.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고 해도 저스틴은 앞으로 전진할 수박에 없다. "그냥 생각나시는 번호 하나만 부르시면 됩니다." 저스틴은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게 되자 생각나는 번호 하나 정도라면 불러 줄 수도 있다고 생각되기 시작했다. "음..." 생각해 보던 저스틴은 어렵지 않게 숫자를 결정했다. "4번이요'" "좋습니다. 부인." 남작은 그녀를 행운의 여신으로 믿는 거이 분명했다. 그녀가 선택한 4번에 굉장한 액수의 칩을 선뜻 가져다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 광경을 보고 있던 닐 완슨이 노골적으로 빈정댔다. "남작, 요즘 석유가 많이 나오는 모양이군요." 자신이 선택한 번호에 남작이 상당히 많이 거는 것을 본 저스틴은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 했다. 그가 시켜서 어절 수 없이 했던 일이지만 만일 잃게 된다면 원망을 들을 거라고 생각 했다. 돈을 잃고 가만히 있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번호 가 당첨되기를 은근히 바라며 보고 있었다. "이제 됐습니다. 더 걸지 말아 주십시오." 놀랄 일이 벌어졌다. 저스틴 자신도 당첨될까하는 불안에서 벗어날 여유도 없이 놀라서, 믿 을 수 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놀랍게도 남작이 예감이 적중했던 것이다. 작은 돌은 이상하게도 저스틴이 선택한 4번에서 딱 멈추었다. "흑색 4번입니다." 딜러의 발표에 모두 탄성을 질렀다. 곁에서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던 사람들도 일제히 소리 치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예기치 못한 일이 저스틴을 더욱 당황하게 만들 었으며 마치 무엇에 홀린 기분처럼 걱정했던 일이 잘 풀렸는데도 기쁘지가 않았다. 저스틴 으로서는 어떤 식으로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착가이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생하게 된다. 저스틴은 자신에게 정말 행운이 따라주고 잇는지도 모른다는 어이없는 생각에 빠져들기 시 작했다.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휘험한 것인지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남작은 감동된 표정 을 감추지 못했고 카우보이 모자의 날 완슨은 더욱 뜻밖의 말을 꺼냈다. "어떻습니까, 부인." 저스티은 닐 완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부탁하고 싶군요." "네?" "우리 정유 회사의 석유 탐사 중역으로 와 주세요." "어머!" 경솔한 여잔 같으면 이번 제의를 선뜻 받아들이겠지만 저스틴은 아니다. 솔깃해진 것은 사 실이지만 이럴 대 어떻게 말해야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이건 우연히 들어맞았을 뿐이에요. 완슨 씨." 그때 룰렛 게임이 벌어지는 주위에는 어느새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지켜보고 있 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저스틴도 마음이 들뜰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 데 자신이 신통력이라도 발휘한 기분이었다.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부인. 그게 아닙니다. 당신이야 말로 행운을 몰고 와 준 여신입니 다." 남작은 경건한 목소리로 극찬한 다음 이번에는 저스틴의 손을 끌어다 여신께 예의를 드리 는 모습으로 손등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그렇지 않아요, 남작님." 저스틴은 자신의 당황하는 모습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그러나 저 깊 은 마음 한 구석에는 남작의 극찬에서 도망치고 싶기도 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4번을 정확히 맞춘 것을 자랑하고 싶기도 했다. 그대 사람들 뒤쪽으로 한 남자가 조용히 나타났다. 그 남 자는 모자를 쓴고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콧수염이 있는 모자 쓴 사내는 그들이 있는 곳 을 날카롭게 쳐다보며 한 걸음씩 다가왔다. 그가 살피는 것이 누구인진, 모르지마 눈빛으로 보아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저스틴은 알 수가 없을 분 아니라 그녀는 의문의 사내가 이들을 주의깊게 살핀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손님 여러분, 돈을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돈을 걸어주세요.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방금 저스틴의 손등에 엄숙한 모습으로 입을 맞춘 남작은 무심코 주위를 둘러 보다 말고 모자를 쓴 콧수엄의 남자를 발견하고는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 남자 역시 자신을 발 견한 남작과 시선이 마주쳤다. 딜러는 룰렛 게임을 진행시키는 데 신경을 쓰느라 주위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딜러 특유의 눈치로 남작과 의문의 모자 쓴 콧수염의 남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특별한 티를 내지 않 고 있을 분이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상황으로 모아 저스틴이 보이지 않는 어떤 음모에 걸 려든 것만은 확실했다. "한 번 더 하실까요?" 남작은 저스틴을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그가 지금까지 땄던 것과 가지고 있던 칩을 몽땅 모으고 있는 것을 본 그녀는 더욱 깜짝 놀랐다. "전부 다 말인가요?" 저스틴은 어느덧 남작의 제안에 무조건 따르지는 않았다. 그것은 어느 사이에 그녀도 자신 의 행운을 무언중에 믿고 있음을 느꼈기 대문인지도 몰랐다. 다만 남작의 엄청난 배짱에 마 음이 불안해질 뿐이었다. 남작은 약간은 초조한 빛이지만 아까보다는 더 확실하게 대답했다. "물론 전부 다요." "네에?" "그렇습니다. 3만 파운드를 한번에 걸겠습니다." 저스틴도 소심한 여자는 아니었다. 미국의 대기업인 메인 그룹 총수의 아내라서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 결정할 줄 아는 통이 큰 대담한 여자였다. 여성적이고 알뜰한 것과 이런 문 제는 서로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녀였다.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저스틴의 그런 걱정은 매우 상식적인 것이어서 남작은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렇 수도 있겠죠." "그런데 어떻게..." "부인게서는 아무것도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네?" "어떤 위험도 내가 책임질 뿐, 부인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입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남작의 말은 의심되는 부분이 전혀 없었고 사실이었다. 그가 원해서 저스틴은 남작이 시키 는 대로만 했을 뿐이었다. 일이 잘 안되다고 해도 책임은 남작한테 있다. 주위에는 그 일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증인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어떻습ㄴ, 부인? 행운을 한번 더 베풀어 주실길 바랍니다." 남작에 이어 딜러까지 저스틴을 재촉했다. "부인, 번호를 불러 주시죠, 그래야 시작합니다. 다른 분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딜러의 재촉은 저스틴이 마음을 생각하고 절리할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드디어 그녀 는 3만 파운드의 거금을 말 한마디에 결정하는 커다란 모함을 하게 된 것이다. 그녀로써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런 경우를 굼에도 생각한 적이 없어ㅆ. 룰렛 게임이나 구경하겠다고 생각했던 바로 전가지도 그랬다. 잠깐 생각을 해 본 저스틴은 떠오르는 번호를 조심스럽게 말했다. "15번에 걸겠어요." 그녀의 말은 적중률이 높은 예언으로 통했다. 남작은 2만 파운드를 ㅂ해서 주위의 모든 사 람가지 그 번호에 돈을 걸었다. 게임을 하는 당사자들은 물론 주위에서 구경하는 사람들까 지 일시에 숨으 죽이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됐습니다. 더 걸지 말아 주십시오." 딜러의 시작 선언과 함께 분위기는 더욱 긴장되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액수의 판돈이 과연 어느 번호에 떨어질 것이가. 이번에도 저스틴의 예언이 맞을 것인가에 모든 사람의 긴장된 마음이 한껏 고조되었다. 그때 뜻밖에도 "난 이만 가야겠습니다." 하고 남작이 말을 해ㅆ. 하지만 저스틴은 긴장된 마음에 이 말을 금방 알아듣지 못했다. "예? 가시겠다구요?" 그녀는 남작이 의문의 콧수염 남자외 시선이 마주친 다음 갑자기 마음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보다 남작과 그 남자와의 가 계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남작은 그 남자가 나타남으로 해서 그 장소에 더 머무를 수 없는 비밀이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남작은 구가 보아도 의심할 정도로 서두는 모습이었다. "만일 이번에도 따게 되면 내 칩을 보관해 주십시오." "하지만, 남작님. 그냥 가시면 어떻해요." 그러는 사이에 회전판은 판돈이 많이 걸린 게임의 당첨번호를 이미 결정해 놓았다. "흘색의 15번입니다." 순간 일제히 함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스틴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곁에 있는 남작에게 무엇인가 말하려다 중도에서 말 끝을 흐렸다. "남작님 아번에도 이겼어..." "남작님?" 저스틴은 급히 주위를 살폈지만 남작의 모습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아ㅆ.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저스틴에게 딜러가 말을 걸었다. "여기 있습니다. 부인, 모두 1백만 파운드입니다." 광장한 액수였다. 아니 그보다도 엄청난 돈이었다. 하지만 저스틴은 그 돈이 남작의 돈이기 때문에 더욱 당황해하며 계속 남작을 찾으려 했다. "남작님!"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남작이 대답할 리가 없었다. "실례합니다." 저스틴은 곁에서 구경하고 있는 여자에게 물었다. "저, 혹시 남작님이 어디로 가셨는지 아세요?" 여자는 빙글빙글 웃으며 엉뚱하게 대답했다. "남작이요?" "네" "여기서 그 행운의 사나이를 보지 못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됴?" "데스타브 남작님 말이에요." "글세, 그렇다니까요?" 저스틴은 더 물어도 원하는 대답이 나올 것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인?" 딜러가 그녀를 부르며 산더미처럼 쌓인 칩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 "부인의 칩입니다." "아녜요. 그건 테스타부 남작님의 칩이에요." "그렇다고 테이블 위에 그냥 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저스틴은 입장이 매우 난처해지고 말았다. 적은 액수라도 남의 것라면 마땅히 그 사람에게 되돌아가야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1백만 파운드나 되는, 엔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사람 의 돈이 자신에게 밑겨진 셈이어서 당황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때 옆에서 몽땅 돈을 잃은 닐 완슨이 넌지시 저스틴에게 말했다. "부인께서 사양하시면 그 칩을 제가 갖겠습니다." 그럴 수는 업었다. 그것은 남의 돈이었고 더구나 남작이 보관해 달라고 부탁까지했기 때문 에 더 더욱 중요했다. 그 돈은 무사히 주인에게 넘겨주어야 하는 책임이 저스틴에게 있는 것이다. 그녀는 넉살스러운 닐 완슨을 가볍게 노려보았다. "그 칩은 제 것이 아니에요, 아시겠지만." 그때 딜러가 최선의 방법을 그녀에게 제시했다. "부인, 이렇게 하시는 게 어떨지 모르겠군요." "네?" "전 여기서 일하고 있는 딜러입니다." "네." "제가 이 칩을 출납 창구에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네 고마워요." 달리 어떤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남의 돈을 저스틴이 가지고 있을 수는 더욱 없었다. 카지노의 작원인 딜러를 믿고 일임시켜 보관하느 것 외에는 더 뾰족한 다른 방법이 지금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문제에 대해 저스틴은 더욱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지 못 했다. 다만 카지노의 출납 창구에서 나중에 테스타브 남작의 찾아가도록 해주기만 하면 된 다고 행각했다. 그러나 단순하게 생각했던 일에 숨겨진 움모나 함정이 있는 줄 저스틴은 전 혀 알 수가 없었다. 저스틴은 이미 남작과 얽힌 음모에 발을 들여 놓았으며, 이것이 굉장히 위험한 문제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제아무리 부자인 남작이라 해도 1백만 파운드 의 거금을 쉽게 남에게 맡길 수 없으므로 모종의 음모가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저스틴은 카지노 클럽에 처음 와서 당황해 있는 그녀를 남작이 해운을 갖고 온다는 드으이 말로 어리 둥절하게 만드는 바람에 상황 판단력이 흐려지게 되었다. 평소 저스틴의 통찰력 같으면 충 분히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남작과 딜러 테스타브 남작이 별안간 사라진 것은 또 다른 문제들을 끌어들였다. 저스틴은 더 이상 복 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남작이 맡긴 돈 때문에 리차드까지 개입시켜야 했 다. 카지노의 총지배인인 조지도 남작의 실종에 대해 아는 부분이 전혀 없었다. 상담을 끝낸 리차드와 만났을 때 저스틴은 그동안 있었던 사실부터 알렸다. "뭐라구?" 리차드도 처음에는 믿기 어렵다는 듯 어리둥절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전혀 몰랐어요. 난 그냥 구경이나 하려는 생각이었는데..." "구경이 아니겠지." "네?" "당신 나에게 말했었잖아, 도박을 한 번 해보고 싶다고." "그거야 당신과 함께 하고 싶었던 거죠." "그나저나 그 남작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알았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데?" "구경이나 하려고 했는데 조지가 소개하는 바람에 알게 되었어요." "조지가 잘 아는 사람인가?" "그런 것 같았어요. 다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 카지노에 단골인 것도 같고요." "그럼 조지한테 가 봅시다." "그러는 것이 좋겠어요." 두 사람이 찾아갔을 때 조지는 자기 방에 있었다. "상담은 잘 끝났나요. 리차드?" "덕분에요.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네?" 조지는 적지 않게 놀라며 메인 부부를 바라보았다. "어떤 문제입니까?" 그는 자기가 책임지고 있는 곳에서 어떤 문제도 발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제가 말씀드리겠어요." "좋습니다, 저스틴." "아까 리차드가 상담하는 동안 나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혼자..." 저스틴은 그 일을 간략하고 명확히 설명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네. 어떡하면 좋겠어요?" "그거야 우선 남작을 찾는 게 중요하겠죠." "빨리 찾아서 돈을 돌려주면 좋겠어요." "남작이 보관을 부탁했단 말이죠?" "그랬어요." "보관해 주겠다고 하셨나요?" "그렇게 말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졌어요." "이상한 일이군요. 그런 많은 돈을 데스타브 남작이 단념했을 리가 없는데..." "혹시 무슨 사고라도 생긴 것이 아닐까요?" "글쎄요..." 데스타브 남작이 의문의 남자를 발견하면서 당황하는 모습을 저스틴이 발견했다면 문제는 아마 쉽게 추리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에 실마리가 잡히 지 않았다. 데스타브 남작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기 때문에 종적을 감춘 것이다.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남작을 찾아볼 테니까." 조지는 인터폰을 통해 카지노의 각 부서에 데스타브 남작의 행적을 찾았다. 그의 표정으로 보아 남작을 찾지 못했다는 것을 메인 부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데스타브 남작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군요. 카지노에서 떠난 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저스틴은 리차드의 표정을 재빨리 살폈다. 이제서야 그녀는 왠지 자신이 어떤 문제에 빠져 든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게 어떤 문제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복잡한 것임 에는 틀림이 없었다. 한편 조지의 입장에서는 그 돈을 저스틴에게 일단 맡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녀와 리차드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또한 능력 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조지, 우리는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습니다. 두 시간만 있으면 비행기가 떠나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리차드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 돈을 남작이 부인께 부탁한 만큼 우선 보관하시는 게 좋겠다는 겁니다." "제가요?" "네." "그렇지만 우린 두 시간후 여길 떠나는데 어떻하죠?"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종업원이 보통 크기인 여행용 가방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고마워요. 브릭스." 브릭스가 나간 다음 조지는 가방을 열었다. 그 속에는 달러가 지폐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조지?" "그 칩을 우선 달러로 바꾸도록 했습니다." "2백만 달러." 현금으로 2백만 달러가 가방 안에 들어 있었다. 돈의 단위보다 전체적인 분위기 때문에 리 차드와 저스틴은 세삼스럽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 주인이 없으면 돈을 경찰 당국에 맡기면 됩니다. 하지만 난 당신을 잘 알고 있 죠." "구태여 일을 어렵게 만들 필요가 없다는 뜻이죠. 그리고 잔액은 통상 크럽측이 갖는다는 것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조지의 말은 그 돈을 저스틴이 맡아달라는 뜻이다. 경찰에 맡길 경우 여러 종류의 절차를 밟아야 한고 따라서 거기 에 따르는 부담을 피하려는 것이다. 리차드는 조지의 설명에도 불 구하고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여보, 이 돈을 클럽에 맡겨놓고 가는 것이 아무래도 좋겠어. 뒤에 남작이 와서 찾아가면 아 무런 문제도 없을 테니까." "난 잘 모르겠어요." 저스틴의 입장에서는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었다. "남작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해요. 그 사람은 내게 돈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고요." 마음이 여린 그녀는 이미 데스타브 남작의 입장을 동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일 그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마땅히 돈을 자신이 보관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쉬운 부탁이 아니지." 리차드 역시 저스틴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ㄱ까지 반대할 사람은 아니다. 그녀가 원한 다면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생각이라고 하면 따르는 것이 그의 태도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 고 앞으로도 그러한 태도는 변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우리가 만일 그 돈을 보관하고 있다가 어떤 문제가 생길 경우에 보험도 적용되지 않습니 다." 조지가 말했다. 그쯤 되면 저스틴과 리차드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특히 저스틴은 이미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여보." 그녀는 리차드를 향해 부탁한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많은 현금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골란한 문제란 건 알아요. 그렇지만 그분은 나를 믿고 있었어요. 그러니 아무래도..." "우리가 보관하자는 말이군." "그래야 될 것 같아요." "할 수 없군." "고마워요. 여보." "고맙긴." 저스틴의 결정에 대해 조지도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고객의 많은 돈을 보관해야 하는 일 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해서 저스틴과 리차드는 아직 그들이 눈치채지 못한 문 제 속으로 더욱 깊숙이 빠져들고 말았다. 딜러는 무엇인가 매우 못마땅한 표정으로 테스타브 남작의 호텔 방에 들어섰다. 남작은 느긋하게 앉아 들어오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됐나?" "계획대로 됐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달러로 바꾼 돈을 그 여자가 보관하게 된거죠." "다행이군. 액수는 2백만 달러 맞지?" "네. 그런데..." 딜러는 불만을 털어놓을 때가 된 듯이 데스타브 남작을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왜?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 "솔직히 그렇습니다." "뭔지 말해 봐." 남작이라는 귀족의 작위에도 불구하고 데스타브의 외모나 눈초리에는 언제나 사나운 기운 이 감돌았다. 결코 선량한 느낌이나 귀족적인 분위기는 느낄 수가 없었다. "그 여자 말인데요." 딜러의 불마이 무엇인지 남작은 금방 집어냈다. "저스틴 메인 말인가?" "네." "그래서?" "그런 여자를 어떻게 믿을 수 있다는 겁니까? 남작은 대답 대신 더욱 느긋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전부터 친하게 알고 지냈던 사람도 아니잖습니까?" 딜러의 불만에 대해 남작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있었다. 마치 저스틴에 대해 머리 ㄱ에서 발 끝가지 알고 있다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 "경험이지. 무슨 뜻인지 알겠나?" "무슨 경험요?" "그 동안 겪어 본 경험 말야. 더구나 그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자네도 보았겠지만 클럽에 하그렌드 경감이 갑자기 나타났잖아." "그 사람이 왔었어요?" 딜러는 그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는 듯했다. "불쑥 나타나지 않았겠나. 그러니 나로서는 그럴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던 거야." "그 사람이 언제나 문제군요."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카지노에 불쑥 나타나 데스타브 남작과 시선이 마주쳤던 수염이 난 사내, 그는 다름 아니 하그렌드 경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는 다름 아닌 하그렌드 경감이 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는 런던 경시청 소속의 노련한 수사관이었던 것이다. 즉, 경감을 보 고 도망칠 만큼 남작은 어떤 범죄의 용의자로 경찰의 의심을 받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 가 용의자가 아니라면 돈을 땄다는 이유만으로 도망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다 룰 렛 게임의 딜러가 남작과 공모자라고 볼 때 사간의 전모는 더욱 확실해진다. 룰렛 게임에서 의 딜러는 자기가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조작을 할 수도 있었다. 결국 저스틴에게 행운이 따른 것이 아니라 딜러의 조작이었던 셈이 된다. 그 다음은 간단했다. 데스타브 남작과 딜러 의 조작에 의해 게임은 결정되고 그 희생자로 저스틴이 선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 면 무엇 때문에 저스틴을 끌어들여야 되었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네." 남작의 말에도 불구하고 딜러는 미심쩍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메인 부인은 그 돈을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갈 거야." "..." "그녀는 자기 돈이 아니니까 잃어 벌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겠지. 따라서 최선의 방법으로 그녀는 돈을 가지고 미국으로 가는 수밖에 없지." 딜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남작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만 있었다. "내가 그곳으로 갈 때까지 메인 부인은 그 돈을 안전하게 보관할 걸세. 그런데 무슨 걱정인 가?" "꼭 그렇게 될까요?" "난 확신하네." 남작의 표정에서는 의심하는 구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말처럼 경험이 풍부한 그 는 저스틴과 리차드를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자넨 아직 사람을 볼 줄 모르는군. 그녀는 내가 그곳에 가서 연락만 하면 기꺼이 돈을 돌 려주는 양심적인 사람이야." 딜러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남작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남작의 장담처럼 저스틴은 돈 을 잘 보관하고 있다가 원래의 임자에게 되돌려 줄만큼 분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돈 이 2백만 달러이든 아니든 액수와 상관없이 저스틴은 양심을 지킬 사람이다. 그러나 이렇게 경우에 따라서는 그녀와 같이 선량한 양심이 범죄에 이용당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는 것 이다. "마치 전부터 그 여자를 잘 알고 있는 것 같군요." 딜러는 여전히 저스틴을 의심하는 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그녀를 모르지. 전에는 만났던 적도 없으니까." "그런데요." "자넨 모르겠지만 난 그런 류의 여자를 상대해 본 경험이 풍부하다네. 그건 틀림없어." 딜러가 데스타브 남작에 대해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소문에 의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고 특히 남자그이 문란한 여성 편력에 대해 상당 부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도박판에서 군림하는 것처럼 여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대단히 좋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상대한 여 성들 가운데 그이 정체를 완전히 파악한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데스타브 남작은 베일에 싸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그렇지만..." 딜러는 끝가지 안심이 안된다느 표정이었다. "지금 생각하시는 것과 반대일 수도 있을 겁니다." "반대?" "그렇죠." "물론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아닐 거야." 데스타브 남작은 다른 사람에 비해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지고 있다. 그건 어떤 종류의 범 법자라도 반듯이 갖추어야 할 사항이다. 모든 종류의 범법자들은 전문가의 분석이 별도로 필요 없을 정도로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난 지능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데스타브 남작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상대를 한 번 보면 금방 알아차렸다. 즉, 자신이 이용해도 좋은 상대인가 판단하는 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계속 되는 딜러의 의심을 일축하며,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항공사 부탁합니다." 남작과 딜러의 관계는 현재로서는 그들이 저스틴에게 강제로 떠맡긴 2백만 달러를 노리는 함 패임을 짐작하는게 전부였다. 그들은 대체로 그렇듯이 겉으로는 함께 일하면서도 서로 다른 속셈을 가졌을 수도 잇다. 딜러도 역시 그런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배제시킬 수가 없었다. "우린 언제 떠납니까?" 딜러의 질문에 데스타브 남작은 빙그레 웃었다. 웃을 대에도 그이 모습은 험상궂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만큼 묘하게 일그러졌다. "우리가 떠나는 게 아니지." "네?" "나만 떠나는 거야." "그럴 수가..." 딜러의 얼굴이 실망과 분노의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번거롭게 자네까지 미국으로 날아갈 필요가..." 딜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날카롭게 따졌다.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모든 범죄자들이 그렇듯 서로가 상대방의 약점을 완벽하게 쥐고 있기 마련이다. 이들도 딜 러가 만약 입을 열면 데스타브 남작의 입장은 삽시간에 변할 테고, 마찬가지로 데스타브 남 작의 태도 여하에 따라 딜러의 입장이 궁지에 몰릴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작은 태연했다. "좋아" "네?" "그렇다면 자네가 미국으로 날아가게." "그 다음에는요?" "메인 부인에게 돈을 달라고 해야겠지. 번거롭게 두 사람이 같이 행동할 필요는 없을 테니 까. 그래, 자네가 그렇게 하겠나?" 딜러의 얼굴에 약간 당황하는 빛이 나타났다. 당연히 딜러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메인 부인은 그 돈을 남작 당신 것으로 알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거야." "네?" "자네는 나를 믿고 기다려야 해. 무슨 뜻인지 알겠지?" "그렇지만..." "공연한 소리 자꾸 지껄이지 말고, 애당초 약속한 그대로만 해. 오늘부터 일주일 후에 알카 불고에서 다시 만나는 거야." 데스타브 남작은 할 말이 끝났다는 듯이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항공사 좀 빨리 부탁해요." 그는 리차드와 저스틴을 다라 미국으로 날아갈 결심이다. 모두가 계획된 것이다. 딜러가 자 구만 의심스러워하는 것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중에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는 미지수 지만 현재로서는 모든 계획이 뜻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미 런 던 경시청의 하그렌드 경감이 개입된 사실에 대해서는 남작은 잠시 잊고 있었다. 뒤바뀐 거금 리차드와 저스틴은 문제의 돈이 든 가방을 들고 정확한 시간에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했 다. 국외 여행이나 출장이 흔하지 않았던 저스틴은 이번 여정이 굉장히 길었던 것으로 느껴 졌다. 벌써 아늑한 집과 좋은 사람, 시고니 그리고 사랑스러운 애견 프리웨이의 모습이 눈앞 에 선할 정도였다. 만일 그들이 테스타브 남작 역시 거의 같은 시간에 미국으로 날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해도 전혀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미국에 도착한 다음 문제 의 2백만 달러를 달라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돈의 내막을 전혀 모르는 메인 부부 는 처음부터 남작의 것이라고 믿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주인에게 돌아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대까지도 리차드는 그 문제를 전혀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런던의 안개와 작별하고 이제는 로스앤젤레스의 매연을 맡게 되는군." "상관없어요." 비행기가 창공을 나는 동안 그들은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상관없다니, 무슨 뜻이야?" 리차드는 지도에 그려진 그림처럼 멀리 내려다보이는 지상의 모습에 시선의 모습에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 집에 가잖아요?" "그렇지." "집에만 가면 돼요. 그 동안 집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요. 당신은 어땠어요?" "나도 물론 그렇지. 시고니도 보고 싶고." "그리고 프리웨이두요." "물론이지. 하지만 당신이 더한 것 같군." "정말이에요. 아마 한 달쯤 집을 떠나 있어야 된다면 난 견디지 못할지도 몰라요." "이럴 때는 꼭 소녀처럼 보이는군." "어머, 내가요?" "그럼 누구겠어" 두 사람은 마주보며 낮게 소리내어 웃었다. 목소리가 언제나 명쾌한 저스틴은 다른 승객에 게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웃음소리를 내며 둘만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비 행 여행도 끝나고 드디어 집에 도착했을 때 저스틴의 모습은 정말 성숙한 소녀처럼 보였다. 마치 꿈에도 그리던 고향의 정든 집에 돌아온 모습이었다. "아, 즐거운 우리 집! 앞으로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잠만 자야지!" 언제나 그렇듯이 시고니가 여행에서 돌아온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시고니느 집에 서 일하는 사람이라기보다 한 식구나 다름이 없었다. 때에 따라선 주인 내외를 위해서는 자 신의 목숨도 받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메인 부부와 그들의 저택에 대해서 갖는 시고 니의 애정은 세상의 어떤 애정보다 깊고 소중한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메인 씨, 메인 부인." "잘 있었어요, 시고니?" "그럼요. 저야 집에서 편안하게 지냈죠. 두 분 다 몹시 피곤하시죠?"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시고니는 아직 정정했다. 무엇보다도 주인 내외를 예의는 타인의 추종을 불허했다. "우리 좀 피곤해요. 시고니." 저스틴이 재빨리 덧붙여 말했다. "지금 당장 침대에 들어가서 쉬고 싶을 만큼." "그렇게 하시죠. 그런데 가져오신 짐은 어떻게 할까요?" "참, 말해 둘 게 있어요." "네?" "거기에 있는 그 가방 속에 저스틴이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은 거금이 들어 있어요." "네?" 거금이라는 말에 시고니는 약간 의아해했다. "2백만 달러예요." "저런! 그럼 정말 큰돈이군요." "그래요." "그럼 어떻게 할까요?" "오늘밤에는 그냥 여기에 두고 내일 아침에 금고에 갖다놓도록 하세요." 시고니는 평소 궁금한 것을 그냥 넘길 수 없는 사람이므로 2백만 달러라는 엄청난 돈에 호 기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런 돈을 누가 보관해 달라고 부탁했는지보다는 문득 한번 보 고싶어졌다. "저어, 메인 씨!" "뭐죠, 시고니?" "그렇게 많은 액수의 돈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한번 구경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상대가 시고니라면 그 이상의 부탁도 들어 줄 수 있는 리차드가 그런 시고니의 부탁을 거 절할 리가 없었다. "시고니, 이건 선물이에요." 저스틴은 시고니에게 선물을 준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시고니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그녀는 값보다는 그가 좋아할 수 있는 실용적인 물건을 선물로 준비하였다. "고맙습니다. 메인 부인." 저스틴은 또 한 가지 마음의 선물을 준비했다. 비록 사람은 아니지만, 여행을 갔다 올 대는 언제나 이렇게 마음을 기울였다. "프리웨이, 이건 너에게 줄 선물이다." 곁에서 꼬리를 흔들던 프리웨이는 그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작게 몇 번을 짖었다. 프리 웨이 역시 시고니와 함께 메인 부부의 가족 가운데 하나였다. 리차드, 저스틴, 시고니, 프리 웨이, 네 명이 한 가족인 셈이다. "여보." 한족에 있던 리차드가 보채듯 저스틴을 불렀다. "네?" "우린 빨리 침실로 가서 자는 게 좋지 않을까?" "그래요" "그런데 어떤 것을 침실로 가져가야 하나?" "저 가방요." 저스틴은 시고니가 막 뚜껑을 열고 있는 돈 가방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그 돈 가방은 침실 에 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출입문은 물론 모든 창문까지 경보 장치가 완벽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천재지변이 없는 한 집안은 안전하다고 믿었지만 그래도 곁에 두어야 안심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문제가 발생하였다. 돈 가방을 열 고 들여다 본 시고니는 약간 황당해진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애매하게 말했다. "아니! 이건... 저한테 농담을 하신거군요." 리차드와 저스틴은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들이 발라볼 때 시고니는 더욱 어 이가 없다는 듯이 덧붙였다. "이 가방에 들어 있는 것은 장난감 돈인데요?" 이번에도 메인 부부는 시고니의 말과 당황해 하는 모습을 눈치채지 못하고 저스틴은 마치 농담하듯 말을 했다. "그럴지도 모르죠, 시고니." "네?" "그건 카지노에서 장난이나 하는 돈이니까요." "그게 아닙니다. 메인 부인." "네?" 저스틴은 그제서야 시고니의 당황한 표정을 보면서 두눈을 크게 떴다. "진짜 돈이 아니라구요." "네에?" 이번에는 리차드의 얼굴에 놀라움이 나타났다. 직감적으로 일이 심상치 않게 벌어지고 있 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호텔을 짖고도 남을 액수지만 가짜인 걸요."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시고니? 그럴 리가..." 시고니는 다가온 그녀에게 가방 안의 돈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걸 좀 보세요." "어머나!" 저스틴은 깜짝 놀라며 다급하게 남편을 불렀다. "리차드!" 시고니가 의아해 하는 리차드에게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말했다. "장난감 돈입니다. 메인 씨." "그럴 리가!" 리차드 역시 그 사실을 확인하고도 무척 놀랐다. 가방 속에 차곡차곡 들어 있는 것은 한 눈에 보아도 장난감 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런던에서 보았을 대는 분명히 진짜 지폐 였던 것이 감쪽같이 한 눈에 보아도 장난감 돈임을 알 수 있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그야말 로 귀신에 홀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시고니보다 저스틴과 리차드가 더 놀랍고 당황해 나 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였다. 돈이 들어 있는 가방을 런던에서 집으로 가져올 때가지 누구한테 보였거나 맡긴 적도 없었으니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조 심스럽게 다루었던 가방이 가짜 지폐가 든 가방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상식적인 판단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보다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도한 이 문제로 인해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지게 될지도 예측이 불가능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여보?" "글세..." 옆에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시고니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처음에는 이런 가짜 돈이 아니었다는 겁니까?" "그래요, 시고니." "그럼요." 리차드와 저스틴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그것 참 이상하군요. 어떻게 이런 일이..." 메인 부부는 한동안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한편 문제의 인물인 데스타브 남작도 같은 시간 미국에 있었다. 그는 메인 부부의 저택에 서 가장 가까운 호텔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아직 저스틴을 완전히 믿고 있는 듯보였는데 그러면서도 무엇인가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그는 가방 속에 들어 있던 돈이 장남감으로 변한 것도 모르고 있었고 다만 저스틴이 보관한 가방에 2백만 달러가 들어 있으 며, 런던에서 무사히 미국으로 가져올 수 있었던 사실에 흡족하게 생각하며 즐거워하고 있 었다. 많은 여자들이 도박장에 자주 나타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요즘에는 전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오직 돈뿐이었므로 여자에대한 관심은 뒷전으로 미뤄둔 지 오래였다. 그와 같은 사람에게 술과 도박, 여자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지만 이번 계획을 세우면서부터는 예외였다. 도박장 주위를 배회하는 여자들은 대부분 많은 남자 에게 추파를 던지면 멋진 남자와 한번 멋있게 즐기려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 돈을 탐내는 여자들이 아니었다. 돈은 남부럽지 않게 가지고 있는 부유한 여자들이다. 돈보다는 남자를 원했고, 더 늙기 전에 마음껏 즐기고 싶어하는 사람들 중에는 같은 연령층보다는 나 이 많은 사내와 즐기면서 여유로움을 좋아하는 20대의 새파랗게 젊은 아가씨들도 있었다. 그러나 데스타브 남작은 도박 전에는 절대로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도박꾼들 중에는 그와 정반대인 사내들도 있긴 하다. 도박을 시작하기 전에, 아니면 도박을 하는 도중, 다시 말해 끗발이 서지 않을 대에는 재빨리 장소를 옮겨 여자와 섹스를 즐긴 후 에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런던의 컨싱턴 클럽에서 데스타브 남작과 함께 룰렛 게임을 했던 닐 완슨의 경우는 앞에서의 예 중에서 후자에 속했다. 그는 도박 전 꼭 여성과 섹스를 해야 만 행운이 찾아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대마다 그가 섹스 파트너를 정하는 취향은 언제 나 독특했다. 이때는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미인이나 글래머의 아가씨는 절대로 선택하지 않 았다. 오히려 신분이 낮은 하녀나 거리에서 구걸하는 여자, 혹은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여인들을 상대하였다. 그런 여자들은 대개 굉장히 고분고분하게 시키는 대로 복종했고 몇 닢의 동전 때문에 그냥 몸을 제공할 뿐이라서 어떤 감정 표현이나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냥 시키는 대로하며 사내가 끝낼 때까지 기다려 준 다음 속옷을 챙겨 입는 것이다. 하지 만 그런 여자들 중에도 예외가 있어서 닐 완슨은 당황시켰던 적도 있었다. 다른 때처럼 대 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그는 어느 순간 깜짝 놀랐다. 뜻밖에도 그 여자는 무서울 정도로 반 응하며 파고 들어왔다. 이런 날은 닐 완슨은 마치 올가미에 걸려든 기분이었고 그날은 도박 판에 나가지 않았다. 도박을 섹스와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그는 이런 상대를 만난 날은 도박 판에서도 만만했던 상대에게 의외로 돈을 물려 크게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의 도와는 달리 마치 여자에게 휘말렸던 것처럼. 메인 부부의 저택에 전화가 걸려온 것은 정오가 거의 다 될 무렵이었다. 시고니는 벨소리 가 계속 울리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전화기를 들었다. 아직까지 자고 있는 메인 부부를 방해하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메인 씨 댁입니다." 상대방의 음성에는 전혀 예의다 들어 있지 않았다. "메인 부인 좀 부탁합니다." 시고니는 거기서 이미 불쾌한 느낌을 받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만, 지금은 바꿔 드리기가 곤란합니다." "집에 안 계신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그럼 메인 부인과 언제 통화할 수 있는 겁니까?" "메인 부부께서는 어젯밤 런던에서 늦게 도착하셨기 때문에 주무시는 중입니다." "아지도 말이오?" "그렇습니다." 저스틴이 아직 자고 있다는 시고니의 설명에 상대방은 더욱 불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어나시면 데스타브 남작이 로스앤제레스에 와서 전화했었다고 전해 주시오." 이제는 목소리가 아예 퉁명스럽기까지 했다. 시고니는 치미는 감정을 재빨리 억제시키려고 애썼다. 어떤 사람이든 상대방은 저스틴을 찾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화번호를 알려주시면 제가..." "그럴 필요 없소." "네?" "내가 다시 전화하겠소." 남작은 마치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명령하는 투로 계속말을 하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 전화할 테니까. 그때는 곡 통화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소." 남작은 시고니에게 달리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딱 끊어 버렸다. 시고 니는 어이없이 잠시 전화기를 든 채 서 있었다. 마음속에서는 계속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역시 참아야 된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젠 남작이라는 귀족도 존경할 만한 인물은 못 되는 것 같군!" 시고니는 그렇게 스스로의 감정을 위로했다. 한편, 같은 시간 호텔에 있던 데스타브 남작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에게는 한 시간이 급했다. 가급적이면 빨리 2백만 달러를 찾아서 다 른 데로 떠나야 된다. 한가하게 호텔에 머물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제 늦게 런던에서 돌 아왔기 때문에 정오가 되도록 자고 있으며 전화도 바꾸어 줄 수 없다는 말에 그렇지 않아도 사나운 그의 심기가 끓어올랐다. 남작은 심리적으로 쫓기는 이유는 하그렌드 경감 때문이었 다. 경감이 런던의 컨싱턴 클럽에 있었던 광경을 목격한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생 각이 남작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쥐도 새도 모르게 클럽을 빠져 나오면서 돈을 저스 틴에게 맡기게 되었고 지금은 신속하게 움직여 미국까지 도망쳐 왔지만 역시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하그렌드 경감과 남작은 이미 오래 전부터 쫓고 쫓기는 사이이다. 더 구나 지금까지 무사한 것은 경감에게 결정적인 증거를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감은 남 작을 체포하기 위한 증거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남작은 닥쳐온 고비를 매번 그만 의 탁월한 솜씨로 해결했다. 이렇게 자신은 한 시간이 초조한고 급한 상황인데 돈을 보관한 저스틴이 아직까지 편하게 자고 있다는 사실에 올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남작은 먹기 위해 주문했던 아이스크림도 먹지 못했고 그뿐이 아니라 피우고 있던 담배까지도 아이스크 림에 콱 처박아 버렸다. 앞에 어떤 물건이 있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 는 즉시 달려가 권총으로 협박해서라도 돈을 빼앗아 오고 싶었다. 남작은 필요하다면 저스 틴이나 그녀의 남편가지도 쏘아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2백만 달러의 거금도 중요했 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언제 나타나서 방해할지 모르는 하그렌드 경감이었다. 그가 만일 미 국까지 추적해 온다면 큰일이었다. 이번에 그에게 붙잡힐 경우 남은 평생을 감옥에 들어가 있게 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남작이 이번에 벌인 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단 번에 현금 보관자로 저스틴을 선택한 남작이 범죄적인 안목만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었다. 2백만 달러를 무사히 되돌려 받고 하그렌드의 수사망에서 벗어나도 남작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범죄 행각을 계속 확장시켜 나아갈 것이다. 남작은 런던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의 대도 시를 두루 돌아다니며 필요하다고 느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도박판에 끼어드는 사람 이었다. 걸려든 함정 문제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저스틴과 리차드가 알고 있는 현금이 가짜돈으로 바뀌었다는 사실 한 가지였다. 그 외에 얽혀진 어떤 사건도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굉장히 심각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이 자신과 연관되지 않았을 경우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다. 저스틴은 돈의 보관을 일방적으로 부탁 받았고 어쩔 수 없이 그 돈을 미국까지 가져오게 되었다. 그 돈이 중간에서 어떻게 바 뀌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으며 아울러 그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심각 한 범죄가 일어났다 해도 그것은 수사 당국의 일인 것이고 본인들이 떳떳한 이상 초조해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리차드와 저스틴은 정오가 지나도록 편히 잠을 잘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잠에서 깨어나 것은 오후 두 시가 지나서였다. 잠에서 막 깨어 났을 때 리차드가 엉뚱한 말을 꺼냈다. "여보, 당신 왜 그랬어?" "네?" 저스틴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리차드를 바라보았다. "밤새도록 뒤척였잖아." "제가요?" "그럼 누구 다른 사람이 내 곁에서 잤었나?"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지금?" 부부의 침실이 간밤에는 오랜만에 아주 조용했었다. 여행의 피로 때문에 리차드와 저스틴 은 가벼운 키스와 포옹만 하고 곧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물론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잠들기 전,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는 습관 때문인지 밤에는 누구랄 것도 없이 뒤척 이며 계속 상대의 몸으로 파고 들었고 무심결에 상대의 몸을 매만졌던 것이다. 이것에 대해 리차드와 저스틴은 똑같이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할는지 모르겠군요." "그래?" "난 잘 잤어요." "당신이..." "그럼요. 밤새도록 뒤척인 사람은 당신이라고요." "그걸 어떻게 알았지. 밤새도록 잘 잤다면서." "어머, 당신 그렇게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기예요?" 그쯤 되면 언제나 양보하는 쪽은 리차드였다. 사실 리차드는 저스틴과 다투거나 다른 뜻을 가져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설령 밤새도록 뒤척였다고 해도 그것이 부부를 다투 게 할 문제는 아니였다. 리차드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내가 어젯밤에 무슨 꿈을 꾸었는지 당신 알겠어?" "꿈?" 리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어요. 안 그래요?" "그건 그렇군. 어제 저녁에 런던에서 여우를 사냥하는 꿈을 꾸었어." "런던에서 여우 사냥을 해요?" "그렇다니까." "런던 시내에서 말예요?" "시내는 아니었어, 거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리차드는 그 꿈 이야기를 간략하게 들려주었고 저스틴은 여는 때와 마찬가지로 흥미 있게 듣고 있었다. 그곳은 드넓은 평원 같기도 했고 산 속의 공터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곳이었다. 잔디밭이 까마득히 펼쳐져 있고 저쪽에는 수목림이 보였다. 어떤 나무들이 그곳에 있는지는 거리가 너무 멀어 알 수가 없었다. 앞에선 사냥개 십여 마리 정도가 요란하게 짖어 대며 뛰 어 가고 있었고 그 뒤에 말을 타고 있는 다섯 명의 귀족이 사냥개의 뒤를 쫓아 달리고 있었 다. 그들 사이에는 리차드도 중간쯤에 끼어 있었다. 몰이꾼으로 동원된 하인들은 십여 명이 넘어 보였고 그들의 손엔 무엇인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숲에서 동물들을 쫓아낼 때에 상용 하는 것들이었다. 물이꾼들과 사냥개들이 동물을 평지로 몰아내며 귀족들은 총으로 쏘아서 잡았다. "오늘은 어떤 동물을 잡을 계획입니까?" 리차드는 바로 곁에 있는 귀족에게 물었다. "오늘은 여우를 잡을 것이오." "그런데 혹시..., 이 사냥이 허가된 것입니까?" 꿈에서도 리차드는 밀렵은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우리의 사유림이요." "그렇군요." 리차드는 안심하며 그 사냥에 참가했다. 앞쪽에서는 계속해서 개들이 짖어댔고 중간부터는 드디어 몰이꾼들이 동원되었다. 사냥이 계속되는 동안 리차드는 거의 다른 생각을 하지 않 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멋지게 한 마리 잡고 싶었다. 사격 실력을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윽고 수목림이 가까이 다가오자 리차드는 긴장하며 총을 힘주어 잡고 천천히 말을 몰았다. "그래서요?" 거기까지 말을 했을 대 저스틴이 끼어들었다. "여우를 잡았어요?" "더 들어 봐." 리차드는 그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수목림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몰이꾼들이 소리쳤 다. "여우다!" 그와 함께 사냥개들은 더욱 사납게 짖어대기 시작했고 귀족들도 모두 긴장했다. "넓은 곳으로 몰아라! 어서! 빨리 몰아!" 귀족의 명령에 몰이꾼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수목림 사이에서 뛰어나오는 여우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우는 한 마리뿐이었다. 다섯 자루의 엽총과 몰이꾼, 사냥 개 등에 비해 여우는 오직 혼자서 쫓기고 있는 셈이다. "저기 있다." 리차드의 곁을 달리던 귀족이 소리치며 말의 속도를 늦추더니 엽총을 들어 올렸다. 리차드 는 잠깐 망설였다. 그 여우는 그 귀족의 몫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리차드는 마음을 바꾸었다. 나머지 귀족들도 일제히 엽총을 들어 올렸기 때문에 리차드는 '그렇다면 나도 가 만히 있을 수 없지'하는 생각과 함께 총을 들어 올렸다. 여우는 몰이꾼과 사냥개에 쫓겨 사 냥꾼들이 있는 곳을 행해 도망쳐 오는 중이었다. 잔디밭이지만 길게 자란 풀들이 숲을 이루 고 잇기 때문에 몸집이 작은 여우는 교묘하게 피해 다녔다. 좀처럼 몸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아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다. "저기 있다." 한 귀족이 낮게 소리치며 방아쇠를 당겼다. 요란한 총성이 산야를 뒤흔들었지만 여우는 맞 지 않았다. 바로 그때 리차드의 시선이 번쩍 빚났다. 여우가 바로 그가 겨눈 총구 정면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서둘러 방아쇠부터 당기지 않았다. 우선 충분히 겨냥한 후에 숨 을 죽였다.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는 호흡을 멈추어야 되고 이어 처녀의 젖가슴을 만지는 것 처럼 아주 천천히 당겨야 하는 것이다. 이윽고 리차드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천천히 당길 때였다. 돌연 다른 쪽에서 먼저 탕 하는 요란한 총성이 올렸다. "어머, 그래서 어떻게 괬어요? 당신은 못 잡았겠군요?" 그때 시고니가 밖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리차드는 계속해서 그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저스 틴은 리차드가 잡지못한 것 같아서 더 이상 묻지도 않았다. 시고니는 메인 부부의 생활 습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와 푹 자고 난 리차드와 저스틴이 제일 먼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안녕들 하십니까. 오후까지 주무셨어요?" 그가 들어오자 리차드의 첫 마디는 역시 예상한 그대로 였다. "오전이든 오후든 상관없이 우선 커피부터 한 잔 마시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시고니" "예,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 커피!" 무엇보다도 저스틴이 반가운 탄성을 올렸다. 함께 살아가는 동안 부부는 서로 닮는다고 한 다. 아마 리차드와 저스틴의 경우가 그 대표적일 것이다. 시고니는 준비해 온 커피를 잔에 따르며 아침에 걸려왔던 전화의 내용을 전해 주었다. "메인 부인, 아침나절에 전화가 왔었습니다." "나한 테요?" "네." "누구라고 하던가요?" "데스타브 남작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던군요." "아아." 저스틴은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사람이 뭐라고 했지요?" "내일 아침에 다시 전화를 하겠답니다." 저스틴이 리차드 쪽을 바라볼 대 시고니가 덧붙였다.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면 이쪽에서 전화를 걸겠다고 했는제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중요한 일 같았는데." 시고니는 리차드에게 먼저 커피를 권했다. 데스타브 남작의 태도가 아직 불쾌하게 느껴지 는 그였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고마워요, 시고니." "천만해요." 시고니는 저스틴에게 커피를 주고는 조용히 물러갔다. 리차드는 시고니가 끓여 주는 커피 맛에 완전히 길들여져 있었다. 어디서는 그만큼 향기롭고 맛좋은 커피는 먹을 수 없다는 것 이 시고니의 커피에 대한 그의 예찬이었다. 시고니가 준비하는 모든 음식에는 무엇보다 끓 이고 준비하는 정성이 포함되어 있었다. 시고니가 나가자 저스틴은 새삼 심각한 표정이 되 었다. 데스타브 남작의 2백만 달러는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였다. 자세한 과정은 경찰의 목 이라고 하더라도 그녀가 직접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보, 이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죠?" "글세, 나도 지금 그 생각을 하녹 있는 주이었어." "우리하고는 사실상 상관없는 문제예요. 분명히 누군가 중간에서 바꿔치기 했을 거예요." "그렇겠지." "그게 누굴까요?" "적은 돈이 아닌 만큼 경찰에서 철저하게 조사하겠지." "런던경시청에서요?" "그럴 거야, 아마." 저스틴은 자신에게 부탁을 남기며 총총히 사라져버린 데스타브 남작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나 아직 그가 무엇대문에 그런 식으로 사라ㅈ는지 그 이유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의 돈이 장난감 돈으로 바뀐 사실을 알게 되면 그사람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요? 우리 는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걸까요?" "우리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안 그래?" "그렇긴 하지만... 돈 가방을 가지고 미국으로 온 건 우리 잖아요." "건드리지도 않았잖아." "물론이죠. 그렇지만..." "그러니까 우리는 모르는 일이지." "그렇지만 어떻게 알아볼 방법이 없을까요? 생각 좀 해보세요. 그 뒤어난 추리력으로." "추리력은 말한다면 당신이 좀 생각해 보세요." "그러지 말아요, 리차드. 당신이 좀 생각해 보세요." 저스틴은 진지한 표정으로 리차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차드 역시 말은 그렇게 하지만 곰 곰이 생각해 보는 중이었다. 표현은 않했지만 이번 일이 잘못되면 골치 아픈 문제로 비약될 수도 있다는 점을 그는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런던에 있는 조지한테 전화로 물어봐야겟어." "당신은 그 돈이 런던에서 바귄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당연하지." "그렇까요?... 하긴 비행기에 탑승한 다음에는 아무도 그 가방을 건드리지 않았어요." "그렇지. 켄싱턴 클럽을 떠난 다음부터는 우리가 계속 그 가방을 지켜봤으니까." 저스틴은 리차드의 의견에 동의하며 고개를 그덕였다. 문제의 가방은 런던에서 바뀐 게 분 명한 듯했다. 두사람이 켄싱턴 클럽을 떠날 때는 종업원이 가방을 들어다 주었다. 또한 클럽 안에서 잠시 가방이 있었던 동안에라도 누군가 노린다면 얼마든지 가방을 바꾸어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가방이 조지의 방에 도착한 후 한 시간 정도는 그렇만한 시간적 여유가 있 었다. "여보, 런던의 지역 번호가 어떻게 되지?" 그런 문제에서 리차드는 저스틴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런 사소한 것들 외에도 리차드가 해 야 되는 일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잠깐요... 그래요, 생각나요. 런던 지역번호는 0114421예요." "0114421... 틀림없어?" 그때 저스틴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여보, 당신 설마 조지를 의미하는 건 아니겠죠?"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면 조지가 제일 먼저 떠올려지는 인물이긴 했다. 그는 켄싱턴 크럽의 총지배인이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친구는 아닐 거야" "그렇겠죠." "돈을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지. 우습게 아는데 뭣하러 그런 짓을 하겠어, 안 그 래?" "당신 말에도 일리가 있군요. 당신이 그를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장담할 수 없는 문제다. 돈을 주용하게 생각치 않는다고 해도 2백만 달러 정도면 충분히 탐낼 수 있는 양이다. 시고니의 말대로 호텔을 짓고도 남을 만한 액수인 것이다. "어쨌든 그 사람이라면 무엇인가 알고 있을지도 몰라. 그래 줬으면 좋겠는데,,," 리차드는 번호를 다 돌린 다음 전화기를 귀에 대고 기다렸다. 벨이 울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안 받아요?" "안 받아." "그 사람이 자리를 비울 때도 있나요." "나도 같은 생각이야. 좀 지나서 다시 걸어 봐야겠어." "그나 저나 내일 다시 전화를 걸어오면 뭐라고 해야 하죠?" "어절 수 없지." "사실대로 말해요?" "그래야지. 따지고 보면 그 사람한테도 책임이 있어. 평소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막 무가내로 이렇게 큰돈을 맡기다니 말야." "날 믿어겟지요." "당신을 어디에서 봤다고?" "그거야 간단하죠." "뭐가?" "적어도 난, 저스틴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리차드 메인의 아내니까요. 안 그래요?" "그런데 여뵤, 생각해보면 의문점이 없는 것도 아냐, 마치 무슨 함정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함정요?" "그렇잖아." "어재서죠?" "난생 처음 보는 사람한테 돈을 맡기고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 아무래도 이상해. 뭔가 떳떳하지 못한 사람일수도 있어." "남작의 작위까지 받은 사람인데 설마 그럴까요." 리차드는 데스타브 남작의 의심하고 있는 듯했지만 저스틴은 그렇지 않았다. 바로 그것이 남작이 그녀를 선택한 이유일 수도 있었다. 그가 만일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실제로 저스틴은 함정에 걸려 있는 줄도 모르고 데스타브 남작을 믿고 있었다. 두 얼굴의 사내 또 다른 의무느이 사건이 발생한 것은 그날 오후였다. 시간이 갈수록 저스틴의 마음은 불 안했다. 리차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였지만 그녀는 돈을 건네 받은 당사자였기 때문에 리차드와는 또 달랐다. 중요한 것은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데스타브 남작이 사실을 이 해해준다면 아무런 문제없이 함께 노력해서 진짜 돈의 행방을 추적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남작이 오해를 할 경우에는 해결 방안이 없다는 것이다. 직관적인 판단이나 대내외적인 지 명도로 미루어 메인 그룹의 총수 부부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은 그 어느 누구도 의 심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데스타브 남작이 문제를 삼는다면 메인 그룹의 명예에까지 누를 끼칠 수도 있었다. 그들이 2백만 달러를 탐낼 사람들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데스타브 남 작이 이해하기만 바랄 뿐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저스틴과 리차드가 이미 함저에 걸려들었다는 사실을 가맣게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가짜 돈으로 바 뀐 가방을 그들이 가져온 것부터가 바로 함정의 시작이었다. 저스틴은 리차드와 함께 아무 도 모르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속도로 함정에 걸려들었으므로 그만큼 빠져나가기도 힘들 것 이다. 이날 오후 메인 부부는 시내의 야외 삭다에서 마주앉아 있었다. "여보, 어떻게 됐어요." 저스틴이 물었을 대 리차드의 표정이 별로 밝지 않아 그녀의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 다. "연락은 됐어." "그런데요?" "그 친구 지금 스코틀랜드에 가 있다고 하는군." "조지가요?" 리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제에 대해 저스틴과리차드는 곰곰이 생각해야 되는 부분 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업무에 바쁜 조지가 휴가철도 아닌 이대에 휴가를 떠난 것 은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였다. "낚시를 갔다는데." "낚시오?" 그것도 이상했다. 휴가를 이용한 낚시 여행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런 식으로 외딴 곳으로 가버린면 외부와의 연락을 피할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가 건네준 2백만 달러가 가 짜 돈으로 바뀌어 있었고 그와 때를 같이해서 조지는 낙시 여행을 떠났다. "그래서요?" 저스틴은 조지의낚시나 휴가 여행보다 문제의 가짜 돈에 관한 것이 더 궁금했다. "연어 네 마리를 잡고 독감에 걸렸다는군." "여보?" "응?" "지금 우리한테 궁금한 건 그게 아니잖아요. 그 돈에 대해서 그가 뭐래요?" "그도 돈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더군." "그래요?" "알아보겠다고 했어." 저스틴의 얼굴에는 실망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그녀와 리차드가 현재의 입장에서 유일하게 기대를 걸고 있었던 사람은 조지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모르고 있다면 문제는 원점으 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내일 오전이면 데스타브 남작이 어김없이 전화를 걸어올 것이다. 그 가 미국까지 온 것은 그 돈을 찾아가려는 데 목적을 둔 것이 분명하므로 그느 반드시 저화 를 할 것이다. "이젠 어떡하죠?" "조지가 알아보고 즉시 연락해 주기로 했어." 그때 저스틴에게 갑자기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시 한 번 천천히 생 각해 보았다. 가능성의 확률이 어느 정도인지는 그녀로서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문제였다. 전혀 가능성이 없을 수도 있고 반대로 뜻밖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입장에서는 전혀 미지수였다. "여보!" 저스틴은 그 이야기를 리차드에게 말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신 조지에 대해 잘 아시죠?" "갑자기 무슨..." "이건 그냥 가정한 것이니 언짢게 듣지 말아요. 혹시 그 사람도 관련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 어요." "조지?" "네." "그럴 리가 없어." 즉시 반대하던 리차드도 이내 고개를 갸웃하더니 저스틴의 말에 수긍하는 듯한 표정을 보 였다. 그느 항상 어떤 문제에서나 범인이 밝혀지지 않는 한 모든 사람을 배제시켜서는 안된 다고 생각해 왔다. "물론 아니다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 "알아요. 그 사람이 지접적으로 관련된 문제니까요." "좋아. 그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어. 여러 각도에서 검토해 보아야 될 문제 같으니까." 그때 저스틴의 시선이 갑자기 한 곳에서 멈추었다. 무심코 주변을 살펴보던 눈길에 놀라운 목표물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왜 그래?" 리차드도 저스틴의 모습에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저 남자!" 저스티은 그곳에 시선을 계속 두면서 낮게 속삭였다. "어떤 남자?" "그날 그 카지노에 나타났던 사람이에요." 그녀의 기억은 정확했다. 그날 그녀가 분명히 보았던 수염을 기른 사내가 약간 떨어진 곳 에서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다. 컨싱턴 클럽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 였다. 저스틴은 그가 바 로 런던경시청의 하그렌드 경감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데스타브 남작이 그 사 람 때문에 도망쳤다는 사실은 더욱 모르고 있었다. "마치 옛날에 모았던 영화에나 나오는 사람같이 보이는데." 그것이 하그렌드 경감에 대한 리차드의 첫인상이었다. 그는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에 구식 양복과 모자 등 전체적인 분위기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옛날 사람을 보는 듯한 인사을 주 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고 있는 중이에요. 여보 무슨 일일까요?" "글세..." 리차드 역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별로 경계하는 빛은 아니었다. 실제적인 면을 아직 알 순 없지만 하그렌드 경감의 모습에는 적개심이나 도전적인 느낌 같은 것들이 엿보이지 않았 기 때문이다. 하그렌드 경감이 만나려고 하는 사람은 메인 부부, 그 중에서도 저스틴 메인 임이 분명했다. 경감은 보여지는 모습과는 달리 정면으로 접근해 왔다. 용기가 있고 아무 두 려움이 없는 사람인 듯했다. "용서하십시오." 경감은 메인 부부의 테이블 곁으로 바싹 다가서며 저스틴을 향해 정중하게 말을 걸어왔다. 저스틴보다 리차드가 재빨리 경감의 태도를 살폈다. 이대 리차드는 상대방의 겉모습만으 로도 그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경감의 외모는 사실상 볼품이 없었던 것이다. "혹시 얼마 전 런던에 있는 켄싱턴 클럽 카지노에서 룰렛 게임을 하셨던 그 부인 아니십니 까?" 저스틴은 한 가지도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 네. 그랬어요. 그때는 운이 좋았었나 봐요. 그렇죠?" 리차드는 계속해서 하그렌드의 태도를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그 일을 운이었다고 생각하십니가, 부인." "글쎄요." "그 게임에서 다른 사람 대신 게임을 하셨던 부인 맞죠." 경감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수사관이라는 작업의식에서 다시 한번 확인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제가 게임을 직접한 건 아니에요. 물론 아시겠지만." 곁에서 지켜보던 리차드가 끼어들었다. "그 일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요. 미스터..." 경감은 상대방의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 "아, 하그렌드라고 합니다. 메인 씨 맞죠?" "네." 리차드는 그가 지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약간 의아한 생각을 가졌다. 하지 만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은 도처에 많이 있기 때문이었다. 경감 은 자신의 신분을 시원스럽게 밝혔다. "나이젤 하그렌드, 브레시티 아메리칸 무역회사의 사장으로 있습니다." 이때 리차드의 눈빛이 재빠르게 변하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감은 계속해 서 정중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습니다. 메인 씨.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누가 어디서 어떤 행운을 차지한다고 해도 저 하고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는 잠시 멈추고 두 사람의 표정을 살핀 뒤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렇지만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이라고 해도 호기심 정도는 있지 않겠습니까?" 이때 리차드는 이미 마음을 결정한 듯했다. 방금 전 하그렌드가 자신을 소개했을 때 그는 이미 하그렌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만으로도 상대방의 신분을 의심하 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리차드는 상대방이 런던 경시청에서 파견되었다고는 꿈에도 생각 하지 못하고 있었다. "웨이터, 여기 계산서 줘요." 그 말은 흥미 없으니 그만 돌아가겠다는 뜻이었다. 저스틴은 상대가 룰렛 게임을 들고 나 왔기 때문에 스스로 변명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이건 간에 확 실하게 해 두고 싶었던 부분이었다. "그 게임을 여러 사람이 보았어요. 본 사람들은 그 돈이 나의 돈이 아니라는 살실을 알 거 예요." "물론 그렇죠." 하그렌드 경감은 우선 저스틴의 말을 인정했다. 자신도 그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경 감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그 후의 진행된 과정이었다. "그때 별안간 남작이 사라진 거군요. 부인께서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은, 그렇지 않습니까?" 이때 리차드는 상당히 불쾌했다. 신분을 위장한 엉터리 같은 사람이 나타나 지난 일을 가 지고 은근히 캐묻는 것이 불쾌했던 것이다. 그럴 때 리차드는 참을성이 많지 않은 편에 속 했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 싶군요." "네." 경감도 이미 리차드가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의 표정에서 알아차렸다. "하그렌드 씨, 비록 호기심 때문이라고 하지만 모든 일에는 그 한계가 있습니다. 잘 아실 줄 알지만." "물론이죠. 그렇습니다."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궁지에 몰린 하그렌드 경감은 난처해졌다. 하지만 이 대로 돌아가 벌릴 수는 없었다. "한 가지만 더 부인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네?" 리차드는 불쾌하여 눈썹이 약간 치켜 올라가고 있었다. "대답할 필요를 느끼시지 않으시면 안하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저스틴은 경감의 모습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남작과 다시 만나서 돈을 돌려줄 약속을 하셨습니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리차드가 대신하였다. 상대방이 한 번만 더 귀찮게 질문을 하면 그 대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암시였다. "하그렌드 씨, 당신네 나라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소." "무슨 말씀이죠. 메인 씨?" "우리는 그런 문제에 철저하다는 걸 알아두시오." 남의 돈을 마부로 챙기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남작이 사라진 이상 그 돈의 임자는 저스틴 이 될 수도 있었다. 그녀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하그렌드. 경감의 질문을 그런 의도로 이해 한 리차드는 처음보다 훨씬 더 불쾌했다. "돈이 문제입니다. 돈 말입니다." 경감은 그럴듯하게 너스레를 계속 떨었다.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은 법이죠." 그때 경감의 주머니에 들어 있던 회중 시계에서 소리가 우렸다. "실례했습니다." 그는 얼른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값이 나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영국 신사들이 필수품처럼 지니고 다니는 회중 시계였다. "리틀 벨이라는 겁니다." 그는 갑자기 서둘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약 먹을 시간이 됐군요. 말라리아에 걸렸죠. 인도에 우연한 일로 갔다가 그만 걸렸지 뭡니까.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런 대로 매우 즐거웠습니다." 이때에도 저스틴은 예의를 갖추어 대답했다. "네. 만나ㅂ게 되어서 반가웠어요. 하그렌드 씨."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부인. 그리고 메인 씨." 하그렌드 경감은 인사를 마친 다음 총총히 사라졌다. 뒤어 남은 리차드와 저스틴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리차드는 아직 불쾌하다는 표정이고 저스틴은 어리둥절해 있는 것이 역 력했다. 저스틴은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기분이었다. 런던의 켄싱턴 클럽에서부터 시작 된 꿈이다. 2백만 달러, 데스타브 남작, 바뀐 가짜 돈, 하그레드 등등... 무엇이 어떻게 돌아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방금 사라지 하그렌드라는 사람도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데스타브 남작과 관계가 있는 사람일까? 아니면 조지나 기타 아직 나타나지 안은 인물이 보낸 사람으로 현재 상황을 살피기 위해 나타났던 것일까. 하그렌드라는 사람은 예 의는 바르지만 분명 무엇인가 감추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 하는 그의 행동에선 오히려 어색한 느낌이 더 들었다. 그의 목적은 룰렛 게임이나 돈을 우 연히 따는 것이 아니고 저스틴이 남작을 다시 만나서 그 돈을 돌려주기로 약속했는가를 알 아내는 것에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에게 이 문제가 중요한지, 그렇 다면 과연 그는 누구인지 하는 의문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2백만 달러의 현금 이 이미 가짜 돈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더욱 문제는 심각해졌다. 누구인지 몰라도 분명히 돈 을 바꿔 가로 챈 사람이 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저스틴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리차드에게 물었다. "모르겠어." "당신도 그래요?" "처음부터 당신이 시작한 일이니까. 안 그래?" "여보!" 저스틴은 볼멘 소리로 말을 했다. "처음에 그랬지만 나중에는 아니었잖아요." "뭐가?" "그 돈 가방을 나 혼자 가져 온 것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도 있어요." "그래?" "우리는 부부예요. 내 일이 당신 일이고, 당신 일이 내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닌가요?" "그야 물론이지." "그렇다면 여보, 남의 일처럼 이야기해도 되는 거예요?" "난 그런 적 없어." "정말요?" "그건 그렇고, 난 이미 한 가지 사실을 알아냈어." "네?" 저스틴의 두 눈에 커졌다. 우연히 빠진 문제 때문에 그녀는 확실히 고민에 쌓여 있었다. "조금 전에 왔던 하그렌드라는 사람 말야. 우리한테 거짓말을 했어." "정말이에요?" "그렇다니까." "그 사람이 우리한테 무슨 거짓말을 했는데요?" "그날 밤 컨싱턴 클럽에서 사업 이야기를 했다는 것 알고 있지?" "그럼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내가 브레시티 아메리칸 무역회사의 사장으로 앉게 되었는데 저 자가 나타나 자기가 사장이라고 우기는군." "정말이에요?" "내 말도 거짓말처럼 들려?" "그게 아니구요. 그렇다면... 그가 우릴 속인 것이 확실하군요." "맞았어."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이유가 있겠지. 그것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일이 점점 더 복잡해지네요. 어디서부터 매듭을 풀어야 좋을지 도대체 모르겠어요." "그건 그렇고 그만 일어날까?" "네." 야외 식당을 나오는 저스틴의 마음은 오히려 더 무거워졌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일이 점점 더 복잡해진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 런던에 갔던 일을 후회할 수 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가 이미 보이지 않은 올가미에 걸려들었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당연히 남편인 리차드도 관련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리차드와 저스틴, 둘을 노리는 음모가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저스틴은 자신의 신분을 속여가며 접근했던 하 그렌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는 두 얼굴을 가진 사내임이 분명했다. 브레시티 아 메리칸 무역회사의 사장을 사칭한 것부터 그렇다. 그럼 그는 누구이고 무슨 이유로 여기에 나타난 것일까. 심야의 침입자 사건은 점점 비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가운데 메인 부부의 입장은 시시각각 위험을 맞 이하고 있었다. 메인 부부가 야외식당을 출발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이었다. "여보." 저스틴은 조금 전에 만났던 의무의 남자인 하그렌드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하그렌드라는 사람말이예요, 아무래도이상하게 느껴져요." "음..." 리차드는 핸들을 잡은 채 정면을 응시하며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고 애썼다. "그 사람이 로스앤젤레스에 왜 왔을까요?"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을 테지."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군요. 리차드." "그럼 당신은?" "난 그가 미국에 왔다가 여기서 우연히 우리를 만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당신은 그의 어떤 점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지?" "글쎄요...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막연히 그런 느김이 들어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들은 각자 하그렌드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부가 똑같 이 하그렌드의 진짜 신분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의 신분을 알았더라면 사건은 보다 쉽게 풀릴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가 런던에서 파견된 경시청의 경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면 저스틴도 리차드도 그를 그런식으로 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그렌드가 메인 부부에게 자신의 신분을 위장할 수밖에 없는 데도 물론 이유가 있다. 겉보기에는 옛날 영화에나 출연 하면 어울릴 것 같은 그였지만 런던 경시청에서는 손꼽히는 수사관이다. 그는 나름대로 충 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저스틴과 리차드에게 접근했다. 경험을 통한 그이 판단 은 어떤 확증이 잡힐 때가지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 사람 무엇 때문에 신분을 속였을까요?" "내가 그 자리에 취임한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겠지." "만일 알았다면?" "물론 도 다른 직함을 생각해냈을 거야." 리차드는 자동차를 비교적 한가로운 도로이지만 일정하고 안전한 속도로 운행하고 있었다. 여기서 집으로 가는 길의 도로라면 리차드는 눈을 감고도 운전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하다. 그러나 항상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사는 이들 부부는 드라이브를 하는 사람들처럼 차 속에 서 이야기를 나누며 여유있게 운전을 했다. "내가 보기에 그 사람은 우연히 여기에 나타난 것 같지않아." "같은 생각이예요. 그 돈과 관련된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해요." "맞아." "그런데 어떻게, 왜?" "지금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이제와서 말해야 소용없지만 일이 아주 묘하게 꼬여 들었어." "당신이 상담할 때 같이 있을 걸 그랬어요, 다른 때처럼 그런 적도 많이 있었잖아요." "그래..." 말끝을 흐리며 무심코 백미러를 보던 리차드는 문득 뒤 따라오는 차 한 대를 발견했다. 그 는 의아해 하며 차의 백미러에서 룸미러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상황이 똑같다는 것을 쉽 게 판단할 수 있었다. 검정색의 자동차 한 대가 약간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우연이겠지하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나도 이상했다. 직감적으로 리차드는 상황이 심 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뒤쪽의 자동차는 분명히 그들을 미행하고 있었다. 비슷한 경험은 수 없이 가졌던 리차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두 사람은 미행당하고 있었다. "하그렌드 그 사람은 우연히 여기에 오지 않았어. 그리고 우리에겐 또 다른 문제가 있지." "뭔가요?" "아까부터 우리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자동차가 있는데, 그차도 우연히 우리를 따라오고 있 는 것이 아냐." "네에?" 저스틴은 깜짝 놀랐다. "우리를 미행하고 있어." "어쩌죠?" "침착해." "그렇지만 미행당한 다는 것은 기분 나쁜 일이잖아요." "그래도 할 수 없지, 그건 우리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어떡하죠?" 리차드는 다시 생각해 보았다. 어떤 자가 미행한다는 것은 저스틴의 말처럼 기분 나쁜 일 이다. 그러나 우선 기분보다 중요한 것은 저 자동차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이다. 방법 은 두 가지이다. 가장 무난한 방법은 따돌리는 것이고 아니면 교묘하게 붙잡아 정체를 밝혀 내는 것이다. 두 가지 방법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 뒷차는 점점 속도를 내며 거리를 좁혀 왔다. 운전석에 앉은 상대를 식별하기에는 약간 거리가 멀었 다. 어떻게 처리할까 생각하던 리차드는 행동을 정하고 갑자기 차의 속도를 올렸다. "꽉 잡아." 리차드는 저스틴을 향해 소리쳤다. 뒤따르던 자동차도지지 않으려고 속도를 높이며 추적해 왔다. 이때부터 리차드는 점점 치열한 추적전을 벌였다 미행자의 솜씨도 만만치 않았다. 가 끔씩 왕래하던 다른 자동차들은 때아닌 추적전에 놀라 혼비백산하여 위험을 피했다. 액션영 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리차드는 중앙선을 넘어 앞서서 달리는 차를 계속 추월했다. 뒤에서 따라오는 차 역시 만만치 않게 따라붙으며 필사적으로 쫓고 쫓았다. 자동 차는 한쪽으로 언덕이 있는 위험한 길을 통과하기도 했으며 그럴 때마다 쫓아오는 자동차는 리차드의 차를 맹렬히 몰아 붙였지만 리차드 역시 만만치 않았다. 추적전이 계속되는 동안 리차드와 저스틴은 뒤쫓아 오는 자동차를 누가 몰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저스틴이 상대방을 알아보고 놀라 소리친 것은 추적전이 한참 동안이나 계속된 다음이었다. "어머!" 그녀는 놀라며 소리쳤다. "왜 그래?" "그 사람이예요!" '누구?" "그때 보았던 그 사람이요." 크게 놀란 저스티은 두서없이 상대방을 설명하였다. "무슨 소리야?" 리차드는 운전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며 몰았다. "있잖아요, 런던에서..." 리차드가 다그치듯 물었다. "역시 켄싱턴의 카지노에서 본 사람이야?" "맞아요." 그녀의 대답과 함께 리차드는 어떻게 하든 추적자를 따돌려야 된다고 결심했다. 심상치 않 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2백만 달러 때문에 그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수 없는 상황 이었다. 저스틴은 그녀대로 더욱 불안에 사로잡혔다. 다만 리차드가 아직 여유를 잃지 안고 있는 모습에서 힘을 얻고 있을 뿐이었다. "저 사람 혹시 하그렌드나 남작의 부하가 아닐까요?" "아니면 독자적으로 나섰다고 해도 상관없지!" 리차드는 조금도 겁에 질리지 않았다. 그 정도는 충분히 따돌릴 수 있다고 자신하는 모습 은 불안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저스틴에게 굉징한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도로의 폭이 좁아진 데다가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자칫하면 길가의 시설물과 충돌하기 쉬 운 지역에서 리차드는 굉장한 위기를 만났다 가속이 붙은 상태여서 블레이크를 밟을 수도 없는데, 저 앞쪽에 거대한 트럭이 나타나 길을 가로지르려 했다. 저스틴은 자신도 모르게 비 명소리를 냈고 리차드 역시 마지막 각오를 하였다. 그 순간이었다. 트럭의 앞부분이 막 도로 의 진입하는 것과 때를 맞추어 리차드의 자동차는 극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쫓아 오던 자동차는 급 브레이크를 밟은 후 정지해서 트럭이 통과할 동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저스틴이 놀라서 소리치게 한 미행자의 이름은 닐 완슨이었다. 카지노에서 카우보이 모자를 썼던 것처럼 지금도 검정 모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저스틴은 쉽게 그를 알아 볼았던 것이 다. "겨우 따돌렸군!" "당신 정말 굉장해요, 여보!" 저스틴은 탄복하며 리차드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일단 위기에서 벗어나면 그녀 역시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그건 그렇고, 분명히 카지노에서 보았던 사람이야?" "틀림없어요. 바로 내 곁에 있었는 걸요. 그리고 참, 또 있어요." "뭐가?" "나중에 남작이 따 놓은 칩을 놓고 어쩔 줄 몰라 망설이고 있을 대 그러면 자기가 가져가겠 다고 했어요. 어쩐지 좋은 사람 같지는 않아 보였어요." "당연하지." "네?" "좋은 사람이라면 런던에서 미국까지 그 돈을 찾아서 달려오는 짓은 안할 테니까." "맞아요. 그럼 벌써 두 명의 적이 생겼군요." "데스타브 남작은?" "그는 돈 임자잖아요." "내가 보기에는 그도 좋은 사람 같이 느껴지지 않는군, 당신은 어떨지 모르지만." "무슨 뜻이예요, 당신?" "내 생각에 그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을 것 같아." "데스타브 남작요?" "맞아." "그나저나..." 저스틴은 문득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여행을 하면 언제나 좋은 친구를 만난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죠?" 리차드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은 리차드가 런던으로 떠나기 전 저스틴에게 했던 말이자.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이 얼마나 무색한지 설명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어느덧 낮동안의 일기가 변한 것은 초저녁이 지나면서 부터였다. 느닷없이 먹구름이 밤하 늘을 뒤덮고 비를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점차 굵어지더니 이번에는 천둥번개까지 거세 게 내리쳤다. 날씨의 갑작스런 변화를 예상하지 못했다. 초저녁까지만 해도 하늘에는 별이 총총히 빛났으므로 기상대의 예보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그 비를 예측하지 못했다. "날씨가 이상해요." "비가 오려나 봅니다." 저스틴과 시고니가 초저녁에 주고 받았던 말이다. 리차드도 시고니와 같은 의견을 가졌었 다. "아무래도 한밤중에 굉장히 퍼부울 모양이군." 저스틴의 아이 같은 말에 리차드와 시고니는 대답 대신 조용히 웃을 뿐이다. 집안에서는 걱정할 일이 하나도 없었다. 허리케인이 들이닥친다고 해도 적어도 몇 시간 정도는 버틸 만 큼 견고한 건물이다. 해일이 아니고서는 순식간에 집어삼킬 수 있을 만한 집이 아니었다. 그 렇지만 저스틴은 웬지 마음이 불안했다. "당신 왜 그래, 겁나?" 리차드는 저스틴을 조용히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왜요?" "겁에 질린 표정 같아 보이는군, 정말이야!" "날씨 탓일 거예요." "당신은 만년 소녀야. 그만 올라가서 잡시다." "그래요 아무래도 그러는 게 좋겠어요." 그럴 때 저스틴에게 가장 필요한 안식처가 있다면 바로 둘만의 장소인 침실일 것이다. 리 차드와 함께 있을 때 저스틴은 가장 아늑하고 행복한 기분에 잠겼다. 그때 시고니가 거피를 준비해 가지고 거실로 들어왔다. "커피 드세요." "고마워요, 시고니." 메인 부부는 동시에 합창하듯 시고니에게 말했다. "천만예요." "피곤할 텐데 그만 가서 자도록 해요, 시고니." "그러세요." 시고니는 나이 탓인지 밤잠이 별로 없었다. 메인 부부가 잘 대에도 그는 가끔 밤중에 일어 나 정원이나 집주위를 둘러보곤 했다. 경보 장치는 완벽했지만 그것만을 믿고 안심하는 성 격은 아니었다. "그럼, 편안히 주무세요. 메인 씨. 메인 부인." 시고니는 밤인사를 하고 별채에 있는 자기 방으로 갔다. 리차드와 저스틴은 이층에 있는 침실로 올라갔다. 그 때가 밤 열 시가 조금 안될 무렵이었다. 낮에 있었던 두 가지 심상치 않은 일 때문에 시고니를 포함한 세 사람은 거실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르 나누었다. "이젠 어떻게 될까요?" 저스틴은 침실에 들어건 다음에도 그 이야기를 꺼냈다. "저슨틴, 여긴 침실이야. 여기서까지 그런 이야기를 해야겠어?" "걱정돼서 그래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아까도 말했지만 하그렌드와 그 사람 말이예요. 이제 생각이 났어요. 그 사람 이름은 닐 완 슨이었어요." "닐 완슨?" "혹시 들어본 이름 인가요?" "글세... 지금으로서는 기억이 나질 않는군." "그 사람 클럽에서 볼 때도 좀 이상했어요. 남작하고는 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 같았어요." "이번 문제에 서로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건 그렇고 그만 침실로 들어갑시다." 메인 부부의 애정이 두텁다는 것은 자타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때로는 리차드가, 어떤 때 에는 저스틴이 상대를 재촉했다. 리차드도 그럴 때에는 소년처럼 보채었다. 그는 빨리 침대 에 들어가 사랑을 나누고 싶어했다. 저스틴은 다른 때와 달리 오늘은 생각이 계속 다른 곳 을 향해 달렸다. 하그렌드와 닐 완슨, 데스타브 남작 등의 모습이 차례로 떠올랐고 잠깐씩 룰렛 게임의 젊은 딜러와 조지의 모습도 겹쳐 떠올랐다. "당신 정말 안 잘 거야?" 리차드가 보채고 저스틴이 생각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지나갔고 깜깜한 유리창 밖에는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가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시간 아래층 거실에선 작 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침실에서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어둠을 뚫고 두 명의 시 커먼 그림자가 잠입한 것이다. 각자 복면을 하고 마치 자기 집이라도 되듯 익숙하게 거실에 들어와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2층 침실에서는 리차드의 성화에 못이긴 저 스틴이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침대에서 기다리는 리차드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다가 가자 리차드는 기다렸다는 듯이 두 팔을 당겨 그녀를 가슴에 꼭 껴안아 주었다. 리차드는 그녀를 껴안자마자 두 손을 등에서부터 아래로 쓸어내렸다. 저스틴이 미처 준비할 틈도 주 지 않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두 손으로 탄력 있는 그녀의 둔부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럴 때 저스틴은 어떤 식으로도 시간을 끌거나 저항하지 못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저스틴 역시 두 손을 이용해서 망설임도 없이 리차드를 쓰다듬는 것이었다. 그런 날은 어느 때 보 다 두 사람의 결합이 빨리 이루어졌다. 같은 시간 아래층 거실에 침입한 두 명의 복면 고한 은 무엇인가 열심히 찾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저스틴이 사랑하는 남편을 완전히 정복하고 동시에 그녀와 그가 환희의 절정에 도달한 순간 리차드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잠깐!" 그는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속삭였다. "왜요?" 지금 막 절정을 향해 가던 저스틴은 어이없다는 듯이 리차드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가 들렸어." "어디서요?" "거실 쪽인 것 같애." "설마..." "정말이야. 무슨 소리가 들렸어." 그때 아래층에서 들리는 소리를 저스틴도 들을 수 있었다. 그와 함께 리차드와 저스틴은 달아올랐던 몸이 굳어지며 갑자기 어떤 긴장 상태로 빠져들었다. "누가 들어왔나 봐!" 리차드는 빠르게 몸을 일으키며 가운과 속옷을 입었고 저스틴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 웠다. 자신도 분명히 알아들은 소리에 저스틴은 벌써 긴장이 되고 겁에 질린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내려가 봐야겠어." "괜찮겠어요?"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그렇지만..." 리차드는 터스틴을 자기 뒤에 따라오게 하고 자신은 앞에 서서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갔다. 계단 위쪽의 난간에서 침입한 괴한을 확인한 그들은 더욱 긴장을 했다. 거실에서는 두 명의 괴한이 어둠 속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럴 때 리차드는 겁내지 않고 대처했다. 그 는 우선 벽에 붙은 스위치를 눌러 거실의 불을 켰다. 갑자기 거실이 밝아지자 두 명의 괴한 은 기겁을 하며 놀라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야행성 동물처럼 어둠 속에서 능숙하게 움직이다 가 갑자기 주위가 대낮처럼 밝아지자 뜻밖의 일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둘 다 복면을 하고 있었지만 한 사람은 날렵해 보이는 젊은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몸집이 뚱뚱한 사람이었 다. 리차드는 침착하게 움직였다. 당황하거나 도망을 치면 침입자들을 기민하게 움직이며 위 협을 줄 것이다. 리차드는 그렇게 방관 내지 동조해 주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들의 침입 목적을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위험이 따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와 같은 위 험에는 이미 익숙해 있었다. 리차드와 저스틴은 지금까지 메인 그룹을 경영해 오면서 수없 이 많은 위험을 겪어 왔다. 그래서 지금은 웬만한 위험쯤은 서슴지 않고 맞설 용기를 가지 고 있었다. 그는 우선 저스틴의 안전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면서 저스 틴에게 침착하게 말을 하였다. "여보. 당신은 침실에 가서 경찰에 신고하도록 해요." "네?" "어서!" "그럼 당신은..." "난 상관없어." "나도 당신 옆에서 싸워야 하지 않겠어요?" 저스틴은 사실사 위급한 상황에선 나약한 여자일 뿐이지만 마음은 반대였다. 남편을 돕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 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상대는 두 명이다. 저스틴은 상황이 다급해 지자 최소한 어느 한 사람이라도 정신을 흐트려 놓아야 리차드가 나머지 사람과 싸우기 때 문에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리차드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빨리 경 찰에 신고한다면 경찰이 곧 달려 올 것이다. 그 동안만 시간을 끌면 되는 것이다.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두 명의 침입자로 하여금 얕보게 만들면 안되다는 생 각을 가지고 의연한 태도로 견제하고 있었다. 저스틴 역시 남편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냥 그 자리에 겁에 질려 서 있을 수 만은 없었다. 그래서 경찰에 전화를 걸기 위해 재빨리 침실로 되돌아갔고 리차드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리무중 두 명의 침입자와 리차드와의 대치는 긴장 속에서 숨막히는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 때 불리한 것은 리차드 쪽이었다. 옳지 못한 행동을 발각당한 침입자들은 어떤 위험도 가리 지 않고 덤빌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아니, 그보다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그들은 살인도 서슴지 않고 저지를 것이다. 평소 운동으로 단련된 리차드라도 안심할 순 없었다. 불의의 습 격은 언제나 치명적인 결과로 남기 마련이었다. 이윽고 아래층까지 내려온 리차드는 두 명 의 상대로 격투를 벌여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침입자 들이 리차드를 발견했지만 그를 해치려는 마음을 같고 있지 않다는 것을 리차드가 분명히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리차드의 입장은 그들과 같을 수는 없었다. 그곳은 그의 집이며 두 복면 괴한은 침입자였기 때문이다. 분명히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에 리차드의 집 에 침입했을 것이며 그 목적을 밝혀내기 위해, 최소한 신고 받은 경찰이 들이닥칠 때까지 리차드는 버텨야만 했다. 수없이 불리한 입장에서 싸워 본 경험이 있는 리차드는 두 명 중 에서 허점을 드러내는 것이 누구인지 날카롭게 살폈다. 어떤 경우라도 누구나 허점을 있기 마련이었다. 리차드는 몸이 날렵하고 강인하게 느껴지는 젊은 쪽을 먼저 공격하는 것이 유 리할 것 같았다. 몸집이 둔해 보이는 괴한에게 선제 공격을 가할 경우 예측할 수 없는 또 다른 공격이 뒤에서 덮쳐 올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다음 순간 리차드는 둘 가운데에서 강해 보이는 복면한 사람을 향해 몸을 날리며 필사의 일격을 가했다. 제아무리 강한 상대도 일단 한 대를 맞자 쥐로 나가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뒤에서 또 다른 복면한 자가 리차드를 향해 공격해 왔지만 리차드는 가볍게 몸을 틀어 옆으로 비키며 공격을 피했다. 이때부터 두 복면과 리차드와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리차드는 상대의 강한 주먹을 맞고 바닥에 쓰 러졌지만 재빨리 일어나 정산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그 순간 또 다른 주먹이 이미 그의 코 앞에 도달해 있었다. 경찰에 두 복면 강도를 신고한 저스틴이 리차드에게 돌아 왔을 때에 리차드는 어쩔 수없이 열세에 몰려 있는 상황이었다. 저스틴도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당장 달려 내려가 리차드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마음과 다리 발걸음이 좀처럼 계단에서 떨어져주 지 않았다. 그녀가 겨우 계단을 밟으며 거의 내려오는 순간 갑작스런 사건이 발생하였다. 리 차드가 수세에 몰리다 극적으로 상대를 깔고 앉아 주먹을 쳐드는 순간 별안간 싸우는 세 사 람 사이에서 총성이 울렸다. "리차드." 저스틴이 부르짖으며 리차드를 보았을 대 그는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두 명의 괴한은 서둘러 문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리차드는 쓰러진 채 여전히 움직이질 않고 있었다. "아아!" 저스틴은 외마디 비명 소리를 내면서 서 있던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듯 허물어지고 있었 다. 리차드를 쓰러뜨리고 뛰쳐나간 두 명의 괴한은 이미 세 워 놓았던 자동차에 올라타자마 자 시동을 걸고는 급히 차를 출발시켜 정원을 지나 정문을 지나 정문 밖에서 급회전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막 차를 회전시켜 전진하려는 순간 두 대의 경찰 순찰차가 두 명의 괴한이 탄 차의 앞 뒤를 가로막으며 달려왔다. 자연히 괴한이 타고 있던 차는 앞 뒤로 포위되어 꼼 짝도 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좋아. 꼼짝 마라!" 순찰차에서 내린 경찰관은 곧장 권총을 겨누며 크게 소리쳤다. "차에서 내려! 손, 머리에 얹고!" 두명의 괴한은 꼼짝없이 현장에서 경찰에 체포당했다. "수고하십니다. 여러분." 두명의 복면 주에서 한 명이 여유 있게 차문을 열고 앞으로 나섰다. 두 명의 괴한 중에 몸 집이 큰 그는 얼굴에 쓰고 있던 복면을 서슴없이 벗었다. 정체가 드러난 괴한은 다름아니 하그렌드였다. 출동한 경찰들이 그의 신분을 알 리가 없었다. 또 한 명의 복면을 쓴 강도 역 시 정체를 드러냈다.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현직 영국 경찰인 하그렌드 경감과 한밤에복면 을 하고 메인 부부의 집에 침입한 또 다른 괴한은 뜻밖에도 컨싱턴 클럽 카지노의 젊은 딜 러였다. 전에는 분명 데스타브 남작과 같은 패거리였는데 이번에는 남작을 추적하는 하그렌 드 경감과 한 패가 되어 복면 강도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 기 어려운 일이었다. 한밤중 쏟아지는 비와 천둥 번개 속에서도 때 아닌 총소리를 알아들은 시고니는 즉시 달 려왔다. 그는 자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총소리를 듣곤 소스라치게 놀라 별채에서 뛰어왔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지금껏 메인 부부의 집에서 한밤중에 총성이 올렸던 적은 한 번도 없었 기 때문에 그는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고니는 달려가 쓰러져 있는 리차드를 부축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괴변입니까! 메인 씨, 괜찮으세요?" "난 괜찮아요." 리차드는 다행히 심각한 상처를 입진 않았다. 조금 전에 발사된 총은 공포탄인 듯했다. 복 면의 괴한들, 즉 하그렌드 경감과 딜러는 리차드를 해치고 싶은 생각이 애당초없었던 것이 다. 리차드가 느꼇던 이해 못 할 분위기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이 노린 것은 문제 의 돈 가방이었다.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경보기를 끊었습니다." 그대 리차드는 계단 밑에 쓰러져 있는 저스틴을 발견했다. 자신의 아픔도 잊은 채 달려가 서는 저스틴을 흔들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저스틴!" 애견 프리웨이도 놀란 듯이 곁으로 달려왔다. 다행히 저스틴에겐 상처가 없었다. 저스틴은 순간적으로 기절해서 혼절 상태였던 것이다. 그제서야 부시시 깨어난 저스틴은 별안간 들린 총소리와 동시에 움직이지 않은 채 쓰러져 있는 리차드를 보고 그가 죽은 줄 알았던 것이 다. "저스틴, 내가 부축해 주지! 이층으로 갑시다." "아..., 아니에요." 순간적이지만 의식불명 상태에서 회복된 그녀는 세삼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신 괜찮아요?" "그런 것 같아." 이들을 지켜보는 시고니는 당황하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이들 부부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 는 것을 그는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메인 부인, 좀 어떠세요?" "괜찮아요, 시고니." "걱정했어요." "고마워요." 리차드는 깨어나긴 했짐난 저스틴의 상태를 아직 안심할 수는 없었다. "여보, 아무래도 침실로 가서 쉬는 게 좋겠어, 당신은 충격이 컷을 거야." "아니예요, 리차드." "정말 괜찮겠어?" "아직은 이층으로 올라가고 싶지 않아요." 의식이 회복되고 리차드가 무사한 것을 알았으니 시고니까지 함께 있을 수 있는 이곳이 좋 았다. 그녀는 혼나자 떨어져 있기 보다 사람들과 같이 있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 그리고 왜 일어났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좋아, 저스틴. 그럼 우선 거실로 갑시다." "그게 좋겠어요." 리차드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부축해서 거실의 소파에 데려다 앉힌 후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서야 겨우 저스틴에게 그녀가 쓰러진 이유를 묻기 시작했다. "당신 어떻게 된 거야?" "총소리를 듣는 순간 계단에서 미끄러졌어요. 난 당신한테 큰일이 생긴 줄 알고..." "아스피린을 가져오겠습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시고니는 자신이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정신적으로 충격 받은 저스틴에겐 약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죠?" "나도 모르겠어." "그 사람들 누구에요?" "복면을 했으니 알 수 없지." 아스피린을 가져오겠다던 시고니는 아직 그곳에 서 있었다. 그 역시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짐작도 안 되세요?' "복면을 해서 제대로 볼 수가 있어야지. 그들이 가방을 들고 갔어." "그 가방을?" 리차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스틴도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들이 누군지 알 수는 없었지만 가방 속에 가짜 돈이 들어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게 분명했 다. 진짜 돈이 들어 있는 줄 알고 훔쳐 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시고니는 아직도 아스 피린을 가지러 가지 않고 있었다. "여보, 혹시 하그렌드나 닐 완슨이 아닐까요?" "모르겠어.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해." "네?" "우리 집 내부를 샅샅이 알고 갔으니 아마 도 올 거야." 리차드와 저스틴의 대화는 시고니를 계속 붙들어 두고 있었다. 범인들이 또 오리라는 리차 드의 장담에 그는 이미 대책을 생각해야만 했다. 그런 때에 느닷없이 전화 벨이 울렸다. 함 께 있던 세 사람은 일제히 마주보았다. 이윽고 리차드가 전화기를 들었다. 급한 문제가 아니 면 그 시간에 전화를 걸오올 사람은 어무도 없었다. "누구십니까.?" 세 사람은 사건이 터지기 전에 저스틴이 경찰에 신고했었다는 사실을 잠깐 잊고 있었다. "경찰입니다. 메인 시." "아!" 리차드는 비로소 그 일을 기억해 내었다. "방금 댁에서 도망치려는 괴한 둘을 체포했습니다." "아, 그래요?" "지금 댁으로 데리고 들어가도 되겠습니다. 메인 씨?" 순찰차의 경찰관은 본부의 있는 교환을 통해 전화를 걸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이죠. 지금 들어오세요. 고맙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 리차드는 아직도 그들 곁에 서 있는 시고니를 발견했다. 그는 아직도 아스 피린을 가지러 가지 않고 있었다. "시고니, 아스피린은 어떻게 된 겁니까?" 시고니는 오늘 저녁에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느라 잊어버린 채 있다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지금 갑니다, 메인 씨." 그는 급히 뛰어가서 아스피린과 물이 담긴 컵을 들고 저스틴에게로 돌아왔다. "여기 있어요, 메인 부인. 그런데 누구였습니까?" "네?" "방금 전화한 사람말이예요." 시고니는 메인 부부의 집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대해 산 치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생 각했다. 이때에도 그는 자신이 필요하다면 어떤 위험이 뒤따른다 해도 기꺼이 나서야 한다 고 생각하고 있었다. "경찰이예요." "아아." 시고니의 얼굴에 금방 안도의 표정이 나타났다. 경찰이라면 안심해도 좋다는 생각이 든 것 이다. "방금 우리 집에서 도망친 두명의 범인들을 체포했다고 하는군요." "잘 됐군요, 메인 시 어떤 자들인지 한번 봐야겠어요." 그 마음은 메인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리차드도 저스틴도 그들이 대체 누군지 빨리 보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들이 메인 저택에 침입한 목적에 대해서도 당장 알고 싶었다. 얼마 자나지 않아 현관에서 벨소리가 들렸다. 저스틴과 시고니는 약간 긴장된 표정을 지 었다. "문을 열어 줘요, 시고니." "경찰입니까?" "그럴 거예요." "메인 씨를 공격했던 그 나쁜 자들도 함께 입니까?" 그 사실만으로도 시고니는 얼굴 가득히 분노의 표정을 나타냈다. 그로서는 리차드와 저스 틴을 다치게 한 범인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 우리 집 담을 넘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테니까 그 자들이 틀림없을 거예 요." "알겠습니다, 메인 씨." 시고니는 화가 난 듯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의 행동으로 보아 범인들을 가 만히 놔둘 것 같지 않았다. 문이 열리자 두명의 경찰관이 두 명의 사내를 인도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메인 씨." "천만예요, 수고가 많습니다." 이때 리차드는 물론 저스틴과 시고니도 경찰관과 함께 들어온 두 사내를 소는 듯이 쳐다보 았다. 한 명은 젊은 청년이고 다른 한 사람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나이가 좀더 들어 보이느 사내였다. "이 자들이 자동차를 타고 도망치려는 것을 저희가 직전에 체포했습니다." 경찰관은 그들이 가지고 도망치던 가방을 들어 보이며 계속 얘기했다. "이 가방도 있었는데 메인 씨 가방이 맞습니까?" 그때 두 명의 범인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약간 옆으로 비껴 돌아서 있었다. 그래서 얼굴을 쉽게 알아 보기는 어려웠다. "네, 그래요. 고맙습니다." 그때 한 경찰관이 뚱뚱한 사람과 젊은 사람의 얼굴을 메인 부부가 볼 수 있도록 돌려세우 며 물었다. "이들이 누군지 혹시 아시겠습니까, 메인 씨?" 두 사람의 얼굴을 보았을 때 가장 놀란 것은 저스틴이었다. 그녀는 두 사람은 모두 기억하 고 있었기 때문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리차드는 두 명의 범인 가운데 한 명에 대해 선 전혀 알지 못했다. 리차드는 먼저 몸집이 뚱뚱하고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내를 가리켰다. 그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를 야외 식당에서 보았고 거짓말까지 했었으 므로 분명히 기억할 수 있었다. "저 사람은 하그렌드..." 그는 함께 있으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저스틴을 향해 넌지시 물어 보았다. "저 사람 혹시 아는 사람이요, 당신?" 그에게 지적받은 젊은 청년은 몹시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룰렛 게임 대에 테이블에서 딜러를 보던 사람이에요." 그녀의 말에 리차드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저 삶이 딜러였단 말이오?" "틀림없어요." "도박을 하시려고 런던에서 꽤 멀리까지 오셨군!" 리차드의 이런 빈정거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남의 집에 복면을 하고 침입했 다가 붙잡혔는데도 두 사람은 조금도 위축되어 있지 않았다. 사람들의 날카로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떳떳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한 태도들이었다. 범인들의 모습에 서는 경찰에 의해 체포당한 초조함이나 낭패감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때 하 그렌드가 거침없이 앞으로 나섰다. "여러분, 이 문제에 대해 내가 설명해 드리도록 하죠."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오른손을 웃옷의 안주머니에 넣으려 했다. "아, 중지!" 그의 곁에 있던 경찰관이 재빨리 총을 겨누며 체포당한 범인이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알 려주려 하였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어. 만일 변호사를 선임 할 수 없을 때 당신은 국선 변호사 를 통해서 자신의..." 듣고 있던 하그렌드가 재빨리 중지시켰다. 실은 그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이것 봐요. 그럴 거 없어요, 경관." 하지만 두 명의 경찰관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은 하그렌드의 당당한 태도 에 얼굴 가득히 의아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와 같은 피의자의 권리를 알려 줄 필요는 없소." 모두의 얼굴에 더욱 의아한 표정이 나타났다. 하그렌드는 여유 있게 다시 말을 계속했다. "난 지금 무기를 꺼내려는 것이 아니오. 내가 가진 증명서를 꺼내려 할 뿐이요. 당신네 미국 경찰들은 이것을 신분증이라고 하죠." 여유만만한 하그렌드의 태도에 모두는 다시 한 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그런 당당한 태도는 방금 체포당한 어떤 범인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윽고 하그렌드는 자신의 증명서를 꺼내 펼쳐 보이며 말을 계속했다. "처음 만났을 때 제가 큰 실례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그는 리차드와 저스틴을 향해 가벼운 목례를 해 보였다. 저스틴과 리차드는 다시 한 번 크 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거기서 제시한 것은 확실한 증명서였다. "제 신분을 소개해 드리겠소." 딜러를 제외한 두 명의 경찰관과 모두는 일제히 그에게 이목을 집중했다. "내 이름은 나이젤 하그렌드이며, 런던 경시청에서 근무하고 있는 수사과 경감입니다." 그에게 이목을 집중했던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영국의 경찰이 가지고 다니는 증면서에 해 해서라면 리차드와 저스틴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경찰이었다니 놀랄 수밖에 없지 않으 가! 애써 이해한다 하더라도 함께 복면을 하고 가방을 훔쳐서 달아나려했던 카지노의 딜러 와는 도 어떤 관계에 있는지 그것도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데스타브 남작에 대한 수 수께끼가 아직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일단 하그렌드에 대한 의혹은 풀렸다. 닐 완슨의 정체 가 아직 묘현한 상황에서 다시 젊은 딜러가 등장해 문제가 한층 심각해지기 시작했지만, 그 에 대한 의혹도 금방 풀리게 되었다. 경감은 계속해서 함께 붙잡힌 딜러를 소개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나와 함께 일하고 있는 로만 경사입니다." 저스틴이 특히 놀란 상황에서 딜러는, 아니 로만 경사는 자신의 증명서르 꺼내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깜짝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수사관들이 어느 나라나 관계없이 수사를 위해 필요하다면 신분을 위장하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필이면 그가 저 스틴이 잠깐 머문 도박장에서 딜러로 활동을 했으며 왜 이 미국까지 건너와 가방을 훔치려 했느냐는 것이다. 리차드와 시고니 역시 굉장히 놀랐다.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도저 히 상상하지 못했었다. 마치 무엇에 홀린 기분이었다. 2백만 달러의 현금이 감쪽같이 장난감 지폐로 둔갑했고 런던경시청의 경찰관 신분증 정도는 전문가들이라면 쉽게 위조할 수도 있 는 것이었다. 실제로 경찰관을 사칭한 범인들이 도처에서 떳떳하게 범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즐비하며, 그보다 몇 배 더 정교하고 중요한 서류도 위조되어 범죄로 이용되는 것이 현실이 다. 그러나 문제는 분위기였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하그렌드가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이 들 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저지른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저스틴은 런던의 컨싱 턴 카지노 클럽에서의 일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데스타브 남작의 실종 을 이해하게 되었다. 하그렌드 경감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는 성급히 도망친 것이다. 또한 하 그렌드의 신분이 밝혀짐에 따라 데스타브 남작이 어떤 인물인지는 확실히 밝혀진 셈이다. 거금을 두고 도망칠 저ㅇ라면 그는 아마 중대한 죄를 짓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궁금증이 완전히 해결되 것은 아니엇다. 필사적으로 메인 부부의 자동차를 추격했던 닐 완슨은 도대 체 누구인지 그느 어떤 사람이며 무엇 때문에 그들 부부를 쫓아 왔던 것일까. 그도 역시 런 던경시청의 수사관일 수도 있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딜러, 즉 로만 경사에 대한 의문점이 었다. 분명히 하그렌드 경감의 조수라고 신분을 밝히긴 했지만 그에 대한 메인 부부의 의문 이 확실히 풀린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사건은 점점 오리무중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조수의 정체 두 복면 괴한의 침입에 대한 의문은 그것으로 풀렸다. 하그렌드와 로만을 체포했던 경찰 들은 돌아가고 메인 부부의 집에 침입한 두 명이 그 동안의 경위를 설명하기 이ㅜ해 남았 다. 저스틴보다 리차드가 웬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그것은 영국 경찰과 마국 경찰의 차이점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경찰의 인기 가 놓은 나라가 영국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시고니는 한 차례 소동을 겪은 사 람들을 위새 커피를 끓여 가지고 들어왔다. 이젠 그도 안심했기 때문에 표정이 한결 밝아 있었다. "감사합니다.' 하그렌드 경감은 시고니에게 점ㅈ게 사례를 표시했다. "고마워요, 시고니." 그때 경감이 이색적인 제의를 함으로서 리차드와 저스틴의눈길으 끌었다. 시민들에게 항상 친절을 베푸는 것이 몸에 밴 경감이 커피를 직접 타 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제가 타 드릴까요, 부인?" 저스틴은 약간 당황해 하긴 했지만 이내 승낙했다. "네." 리차드는 아직도 조금 전의 일들이 잊혀지질 않았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벌어지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한다 하더라도 무엇보다 처음분터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 지게 되었는지 그 상황이 궁금했다. "경감님." 리차드는 티스푼을 잡고 있는 하그렌드 경감에게 말을 걸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군요." "그러실 겁니다. 메인 씨." "경감남게서 우리한테 설명을 해주셔야 하겠습니다." 하그렌드 경감의 표정은 그런 질문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천역덕스러웠다. 오랜 동안의 수사관 경력에서 얻어진 경험 같았다. "그런 질문을 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말씀드리기 전에 우선, 잠시나마 저희 때문에 불 쾌했던 점을 메인 부인께서 요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굉장히 여유가 있었다. 저스틴의 커피 잔을 한 손에 잡고 다른 손에는 티스푼을 잡은 채 그녀의 식서을 물었다. "부인, ㅍ과 설탕을 커피에 타십니까?" "네. 몇 스푼이죠?" "한 스푼씩이요." 경감은 커피 잔에 설탕과 프림을 각각 한 스푼식 타면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특히 부인께선 정신적인 충격이 크셨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렇지 않으셨습니까?" "네.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래요." 마치 상대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앞질러서 말하는 경감에게 저스틴은 할 말을 잃었다. 경감의 조수로 소개된 로만 경사는 함께 있으면서도 아직 한마디의 하지 않았다. 상 급자가 이야기를 채 끝내기도 전에 앞에 나설 수도 없었을 테지만, 그보다는 일부러 치묵을 지키는 모습이 완연했다. "경감님, 어서 말씀해 주시죠. 우리 부부는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이 계속 발생하고 있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특히 내 아내는 매우 난처한 입장에 빠져 있습니다. 혹시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군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메인 씨?" 하그레ㄴ는 무슨 일인지 전혀 알 수 없다는 듯이 의아한 표정으로 리차드를 바라보았다. 리차드 역시 의구심을 품은 채 마주 응시했다. 이윽고 리차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경감님께서는 이 돈 가방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물론 알고 있지요." "모두 다 말입니까?" "네?" "간다히 말습드려서 이 가방은 우리가 런덩에서 가져왔던 그 가방이 아닙니다." "네에?" 이때는 경감과 경사가 동시에 놀라는 표정이었다. "아직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하긴 그렇기 때문에 이 가방을 내 집에서 가져가려 하신 것이 겠지요." "메인 씨,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모르시겠습니다.?" 경감은 계속 이야기를 하면서도 저스틴에게 커피르 건네주는 여유를 보였다. "그러니까..." 리차드는 재빨리 그 부분에서 생각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가 보기에 경감과 경사는 돈 가방이 뒤바뀐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보다 경감님, 이야기의 순서를 바꾸는 게 좋겠군요." "네?" 경감은 의아한 표정으로 비로소 저스틴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 한마디로 하지 않았 다. 하지만 런던에서부터 이번 문제에 말려든 것은 바로 저스틴이었다. 물론 경감도 그 사실 을 알고 있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듀독 저스틴의 행운의 여신이 되었고 우연하게 도 그녀가 부르는 번호는 모두가 당첨이 되었으며, 그때 경감이 나타나자 데스타브 남작은 감쪽같이 종적을 감추지 않았던가. 남작은 경감이 나타난 것과 관련해서 어떤 음모를 감추 기 위해 도망친 것이 확실해 보였다. 룰렛 게임은 같이 했으며 미국가지 저스틴을 쫓아와 미행을 하다 실패한 닐 완슨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분명한 것은 그가 리차드와 저스틴의 집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알기 위새 자동차로 축적해 했을 가능 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뒤얽신 이번 사건의 핵심적인 열쇠는 도대체 누가 지ㅜ고 있는 것일까? 그것을 아는 것만이 이 혼란스러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정확히 가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윽고 하그렌드 경감은 자신과 로만 경사가 왜 마국까지 왔으며 또 메인 부부의 집에 잠입한 이유 등을 간략하게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영국에서 데스타브 남작을 만나지 못하셨죠?" "네." 저스틴은 대답했고 리차드는 가볍게 고개르 끄덕였다. "그렇다면 남작 역시 당신들에게 아직 연락이 없었습니까?" "런던에서요?" 리차드는 재빨리 그녀의 눈길을 주시했다. 저스틴은 금방 리차드의 눈길을 이해했다. 즉 데 스타브 남작이 로스앤젤레스까지 와서 전화한 사실을 아직 밝히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 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부인." 저스틴은 리차드의 암시대로 그 이상 말하지 않아다. "결국 그런 문제 때문에 내가 먼저 이 사건에 뛰어든 겁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리차드는 하그렌드 경감과 로만 경사르 번갈아 바라보며 질문했다. "물론이죠. 아실 지 모르겠지만 수사상 일선에서 뛰다보면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만날 때 가 있기 마련이죠." "네에" "짐작은 갑니다." 저스틴과 리차드가 차례로 긍정하자 경감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결론을 내렸다. "내가 먼저 뛰어든 것은 파문을 일으켜 놓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결론에 대해서 저스틴과 리차드의 반응은 각각 달랐다. "그렇다 하더라도 묘하다느 생각이 드는군요. 경감님." "무슨 뜻이죠. 메인 씨?" 하그렌드 경감은 갑자기 표정이 굳혔다. 하그렌드 경감은 다시 리차드의 커피 잔에 커피르 부으면서 말을 계속했다. "당신들은 남작이 그 돈을 가져갔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동안 남작을 으심했던 것이 아닌 가요?" "네?" 경감의 뜻하지 않은 말에 리차드와 저스틴은 놀라며 무엇인가 들킨 것을 감추려는 것처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경감이 거기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는 깜짝 올랄 수밖 에 없었다. 뒤바뀐 돈 가바엥 대해 저스틴이 말하려는 것은 리차드가 멈추게 한 이유가 바 로 거기에 있었다. 그들은 데스타브 남작을 의심하고 있었다. 넌지시 돈을 맡겨놓고 그들모 르게 돈을 배돌린 다음 다시 돈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도박자에서 종적 을 감춘 사람이라면 여러 가지 의문스러운 점으 ㄹ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남작이 나쁜 마음을 먹거나 원래 나쁜 사람일 수도 있었다. 경감이 자신들의 생각을 이미 거기까지 추리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메인 부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경감은 노련한 수사 관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그쯤 되면 메인 부부는 돈 가방에 대해 더 이상 숨길 필 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경감님." "말씀하시죠. 메인 씨. 아,... 그런데 설탕과 프림은 타서 드십니까?" 여유 있게 리차드의 커피 기호를 묻는 경감의 태도에 리차드는 저스틴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슥한 후 대답했다. "네. 두 스푼씩 탑니다." "알겠습니다." 경감은 커피에 설탕과 프림을 차례로 넣으면서 천천히 저었다. "그 돈 가방에 대해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스틴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사실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가방 안에 들어 있는 돈이..." 경감은 갑자기 리차드의 말을 중단시켰다. "그건 문제가 아닙니다. 메인 씨." "네에?" "그 문제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리차드는 옛날 영화에 나오는 배우같은 하그렌드 경감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기업 경 영이나 기타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라면 그도 나름대로 충분한 경함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 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경찰의 수사에 대해서도 그 동안 경험했던 것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문제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스워 보이는 런던 경시청의 하그렌드 경감은 확실 히 다른 점이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상당히 앞서서 파악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리차드는 그 시점에서 대화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 데스타브 남작이란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미리 알았으면 좋을 뻔했군요." 그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로만 경사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 사람 일종의 세탁업을 하고 있죠." "세탁업?" 저스틴의 재빠른 질문에 경사는 확실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부인." 저스틴은 리차드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처음에는 의아해 했지만 즉시 알겠다는 표정을 지 었다. 이윽고 하그렌드 경감은 데스타브 남작의 실체에 대해 그 동안 알고 있는 사실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경사의 말이 맞습니다. 그는 더러운 돈을 만지죠." 리차드와 저스틴은 다시 한번 마주 보았다. "그는 수백만 달러의 돈을 해외로 밀 반출하는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그랬군요. 남작이라는 귀족이 왜 그래야만 하는지, 올바른 사람이라면..." "물론 올바른 사람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죠." "그렇다면 남작이라는 작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저스틴은 경감의 대답을 기다리며 카지노에서 보았던 데스타브 남작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고 있었지만 어딘가 섬칫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그 작위는 지금으로서는 문제가 아니죠." "네?" "다시 말해서 그는 국가에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때 저스틴이 갑자기 다른 의문점을 제시했다. "그렇다면요, 경사님." 그녀는 로만 경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질문했다. "그때 딜러였던 것은 어떻게 된 건가요?" "저 말씀이십니까. 부인?" 로만 경사는 이미 그 질문을 예상했었다. "네." "그 문제는 경감님이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저야 경감님이 명령에 따랐을 뿐이죠." "그렇습니다. 우선 두 분께 그 일부터 말씀드려야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데스타브 남 작 때문에 무척 고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확실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하그렌드 경감은 그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런던 경시청에서는 소위 돈세탁으로 막대한 달러를 국외로 유출시키는 혐의로 데스타브 남작은 벌써부터 주목해왔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그 범인이 데스타브 남작이라는 점에는 의심할 바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정확한 증거였다. 그런데 그것을 잡을 수가 없었 던 것이다. 증거도 없이 용이자를 체포할 수는 없었으며 남작처럼 돈과 관련된 범죄는 일반 적인 범법과 달리 애매한 점이 많았다. 자칫 국가의 경제에 커다란 손실을 가져올 수도 있 을 뿐만 아니라 다루기도 까다로웠다. 경시청의 고위 당국자 회의에서는 그 문제가 벌써부 터 중요한 안건으로 다루어져 오고 있었다. 런던 경시청에서 수십 년 동안 민완 수사관으로 일해서 그 실력을 인정받은 나이젤 하그렌드 경감에게 수사 책임자의 임무를 맡긴 것은 얼 마 전 최고급 간부회의 때의 일이다. 이미 이 사건으로 여러 명의 수사 책임자가 교체디ㅗ 었고 동원된 수사관 연 인원만 해도 상당수에 달했다. 급기야 낭젤 하그렌드 경감이 수사 책임자로 결정된 것이다. 경시청의 담당 국장은 결정된 직후 하그렌드를 집무실로 불렀다. "부르셧습니까. 국장님?" 언제나 옛날식 양복 차림에다 덥수룩한 수여, 좀 모자라는 듯한 하그렌드의 인상은 외모와 상관없이 미국 영화의 콜롬보 반장을 연상케 했다. 언젠나 허름한 바바리 코트의 콜롬보에 비해 옛날 식이지만 양복 차림인 것이 다르다면 다른 차이점이다. "자네한테 새로운 임무가 떨어졌네, 하그렌드." "그렇습니까?" 하그렌드는 어떤 일에도 크게 놀라는 성격이 아니었다. 노려한 수사관의 입장에서 새로운 임무가 부여됐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당신도 알고 있겠지, 데스타브 남작에 대해서?" "네?" 하그렌드는 알아들었으면서도 다시 물었다. 그는 가끔 어떤 사실을 재확인하기 위해 습관 적으로 되묻곤 했다. "그자가 귀족 신분을 앞세워 벌써부터 벌이고 있는 행동은 이미 국가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 고 있네, 자네도 알겠지만." "돈 세탁 말씀이군요? 우리 경시청에서 그 사건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어쨋든 좋아." 원래 국장은 농담이나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목석이라 통할 만큼 항상 사 무적이고 철저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가 내가 무엇 때문에 자네를 보자고 했는지도 알겠군. 그러가?" "아닙니다." "아니라고?" "국장님께서 말씀해 주셔야죠." 국장은 다시 한 번 하그렌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윽고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하그렌드 경감." "내, 국장님." "자네는 이 시간부터 데스타브 남작을 미행한다." "미행입니까?" 하그렌드는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질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아직 그에 대한 정확한 증거를 잡지 못했으니까 체포할 수는 없어, 알겠지?" "네. 제가 미행해서 증거르 ㄹ확보하던가 현장을 덮쳐야 되겠군요." "맞았네. 그런 다음 체포하면 끝나는 거야. 참고로 말해 두겠는데, 그자는 주로 유명한 클럽 의 카지노에 나타나서 도박을 즐기는 편이지." "시내에 잇는 켄싱턴 클럽 같은 곳이어야 하겠군요?" "그곳에도 가끔 나타난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네." "알겠습니다. 국장님." "한 가지 더 있네." "네?" "그는 필요하면 외국을 원정을 가기도 하네." "굉장하군요." "한 번에 수백만 달러씩 움켜쥐기도 한다더군." "그걸 모두 국외로 빼돌린다면 혹시 스위스 은행을 통해서가 아닐까요." "그런 사실들을 알아내는 게 자네가 할 일이야. 하그렌드 경감." "알겠습니다." "잘해 보게." "네, 그럼 가보겠습니다." 국장실을 나온 하그렌드는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가슴에 새겼다. 데스타브 남 작에 대해선 이미 들은 바가 있었다. 여러 곳의 도박장에서는 그를 귀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함불 대하질 못했고 남작은 그석을 미끼로 어렵지 않게 범행을 저지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 하그렌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치밀하고 지능적인 젊은 수사관 을 조수로 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혼자만으로는 도저히 수사레 진척을 기대하기 어 렵다고 판단한 그가 선택한 사람은 젊은 경사인 로만이었다. 고만에 대해서 하 실하게 알 고 있는 정보는 없었지만 그런 대로 쓸만하다는 평판이 나있었다. 하그렌드 국장실을 나온 즉시 로만 경사를 불렀다. 이런 문제는 신속해게 퍼리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경감에게 서 이야기를 들은 로만은 갑자기 흥미가 당기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가 미행해야 되는 사람은 눈굽니까?" "데스타브 남작이야." "그래요?" 그 순간 로만의 시선에 무엇인가 재빨리 스치는 것이 있엇지만 하그렌드는 전혀 알아차리 지 못했다. "국장께서 나를 특벼ㄹ 선택한 만큼 우리는 성과를 올려야 해. 알겠나?" "당연히 그래야죠, 경감님." "좋아." "엔제부터 시작합니까?" "오늘 당장." "좋습니다." "자네 자신 있지?" "명령만 내려 주시면 어김없이 처리하겠습니다." "됐어." 하그렌드 경감과 로만 경사는 그렇게 해서 함께 일하게 된 것이다. 제3의 사나이 "그후 나는 조수인 로만 경사를 데스타브 남작 측으로 아무도 모르게 접근시켰죠." 하그렌드의 설명에는 전혀 하자가 없었다. 리차드와 저스틴은 하그렌드의 치밀한 계획에 은근히 감탄해 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만 경사 역시 수긍이라도 하듯 가벼운 미소 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이윽고 하그렌드는 그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내 조수가 남작과 친구가 되는 데 성공하기를 바랐습니다." 저스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카지노에서 남작이 돈을 딸 수 있도록 도와준 겁니다." "그럼 그 게임은 딜러인 당신이, 아니 로만 경사가 조작한 것이였군요?" "로만 아서입니다. 부인." 로만은 자신의 정확한 이름을 저스틴에게 알려주었다. "네 아서." "그렇습니다. 제가 남작이 돈을 따도록 해주었습니다." 저스틴은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게 되어 시원해 하면서도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데 스타브 백작이 그녀를 행운의 여신이라며 감탄해 했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으며 번호를 정하면 그 번호에 어김없이 당첨금이 붙던 상황은 그녀로서는 느낄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이 었다. 자신을 행운의 여신이라고 칭송하는 사람 앞에서 화낼 여자는 이 세상에 한 명도 없 을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던 셈이다. "어쩐지 운이 좋다고 생각했지요. 안 그래요 여보." 저스틴은 어색해진 자신의 입장을 위로 받고 싶다는 듯이 라차드를 바라보았다. 리차드 역 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다면 말씀입니다, 경감님." 리차드는 조금 전부터 또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뭐죠, 메인 씨?" "조지도 이번 일에 관련되어 있습니까?" "컨싱턴 클럽의 조지 베네딕 말인가요, 메인 씨?" "네." "그도 물론 협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당신네 경찰에 말인가요?" "물론이죠." 리차드는 비로소 안심이 되는 표정을 지었다. 조지와 그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 였다. 하지만 이번의 예기치 못했던 사건 때문에 은근히 조지를 의심한 것은 사실이었다. 파 운드를 달러로 환전해 준 사람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그는 클럽의 총지배인이다. 따라서 원한다면 그 안에서 어떤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직책이기도 했다. 다행히 그가 남작이 아닌 경찰에 협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리차드는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2백만 달러를 준 다음 그가 어떻게 하는가를 보려고 했던 겁니다." 로만 경사의 표정은 하그렌드 경감과 비교가 되었다. 다른 생각이 의중에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미묘한 움직임을 아무도 눈치채진 못했다. "그랬는데 그 돈을 제가 가지고 왔군요?" 저스틴은 그 동안의 궁금증이 상당히 풀린 표정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경감은 계속해서 저스틴이 남작의 계획에 걸려들게 된 배경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 남작은 선량한 외국인을 이용한 겁니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그 방면에서는 남작이 전 문가이니까요. 부인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었다 해도 그자한테는 당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고마워요." 자신만이 바보처럼 당했다고 생각했던 저스틴은 경감의 위로하는 듯한 부연 설명에 한결 위안을 받았다. 그리고 사실 그럴 수박에 없었다. 경감의 설명으로 사건은 어느 정도 밝혀지 고 있었다. 다만 로만 경사 한 사람만이 그들 중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 였다. 철저하게 위장하기 위해 로만이 데스타브 남작과 한 팀으로 행동할 수는 있다. 그러나 2백만 달러에 대한 배분 다툼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데스타브 남작은 로만 에게 앞으로 정확히 일주일 후, 알카불고에서 만나 그의 몫을 배분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이 런 사실까지는 하그렌드 경감도 여러 가지의 정황으로 볼 때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한동안의 이야기가 오고간 다음 리차드는 같은 내용의 논의는 더 이상 아무런 진전도 가져 오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좌중을 천천히 둘러본 다음 저스틴 쪽을 바라보며 차 분하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일이 어떻게 진행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다행입니다." 리차드는 하그렌드의 말을 무시하기라도 하듯이 저스틴에게 직접 물었다. "여보, 그렇지 않소?" "이해할 수 있겠어요." 저스틴 역시 리차드의 진의를 이미 알아차렸다 그녀 생각으로 리차드는 아마 또 다른 생각 에 빠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마땅히 의견을 동의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리차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말했다. "한 가지만 빼놓고 말이요, 여보. 안 그래?" "맞아요." 메인 부부의 이야기에 두 사람은 잠깐 어리둥절해졌다. "경감님, 한가지 궁금한 일이 있어요." "어떤 문제입니까. 부인?" "돈이요." "네?" "그 돈은 어떻게 된 건지 말씀해 주세요." "그 돈?" "무슨..." "모르고 계셨어요?" "돈이라면..." 경감은 얼른 대답하지 못한 채 곁에 있는 경사를 바라보았다. 경사도 역시 마주 바라볼 뿐 이었다. 리차드와 저스틴은 그들이 보여주는 태도의 변화를 잠시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유 심히 살폈다. 저스틴과 리차드는 가방 속에 들어 있다 바뀐 2백만 달러의 행방을 이야기하 는 중이었다. 이번 사건에는 또 한 사람의 의문의 사나이가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아직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왜 메인 부부가 타고 있는 자동차를 필사 적으로 추적해야 했는지, 그가 무엇 대문에 그런 짓을 저질러야 했는지에 대해서 아무도 몰 랐다. 카우보이 모자의 닐 완슨, 그만이 알 수 있는 문제였다. 그가 런던에서 로스앤젤레스 까지 쫓아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가 단독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그 렇지 않으면 또 다른 패거리가 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데스타브 남작과 내통하고 있는지 에 대해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다만 하그렌드, 로만, 메인 부부도 모르는 의문의 인물 로 나타난 셈이었다. 그가 미국으로 건너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현재로선 저스틴과 리차드 뿐이었다. 메인 부부와 하그렌드, 로만이 이야기하고 있는 바로 그 시간에 닐 완슨은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한적한 도로에 세워진 자동차 안에 혼자 있었다. 그는 자동차안에서 전화를 통해 누군가와 통화하는 중이었다. 그가 단독으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이 분 명해졌다. "그렇지 않아, 제이 제이." 그는 통화하는 상대방을 제이 제이라고 불렀다. "그럼 어떻게 된 거야?"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엿들을 사람도 엿보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닐 완슨은 마음 놓 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제수가 없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됐다니까!" 닐 완슨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화가 치미는 모습이었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상황이고 보면 상대방의 추궁에 화가 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 도대체 뭘 알나냈다는 거야, 거기서?" "내가 알아낸 건 자동차 번호뿐이야. 그리고 이름은 메인이구. 그것뿐이야." "그걸 가지고 뭘 어떻게 알아낼 수 있다는 거지? 경찰에 의뢰해서 차번호를 추적이라도 할 셈이야?" "말도 않되는 소리 그만해!" 닐 완슨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도 할 만큼은 했어." "뭘?" "자동차 등록소에 가서 알아본 거야, 경찰이 아니구." "그랬더니?" "등록이 안되어 있었어." "뭐야?" 리차드는 그 동안 갖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겪어 왔다. 수없이 많은 경쟁 상대자들, 돈을 노 리는 악당들 등등. 그 종류도 무척이나 다양했다. 그의 집에 설치된 경보 장치가 최첨단 시 설로 갖추어진 이유만 봐도 그의 집이 얼마나 공격의 대상이 되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 었다. 창문 하나라도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그의 집은 단단한 벼랑위의 요새와도 같았다. 자동차 역시 닐 완슨이 알아본 것과 같다. 그의 차는 등록 사업소에 특별히 부탁해서 기록 장에는 올리지 않고 있었다. 자동차 번호를 추적한 자들에 의해 여러 번 위험한 고비를 겪 었기 때문에 비슷한 사건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매우 특별한 조치를 강구했던 것이다. 그 렇게 철저히게 조치한 이후 자동차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경우는 없었고 번호를 가지고서도 리차드에 대해 어떤 사실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이봐, 닐." 제이 제이로 불리는 상대는 몹시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닐 완슨을 불렀다. "왜 그래." "자네도 메인 그룹을 알고 있잖아?" "물론 들었지. 미국에서는 손꼽히는 그룹이라고." "말도 안돼." "뭐가?" "그렇게 유멍한 사람을 로스앤젤레스에서 전혀 소재 파악이 안된다는 말이야?" "내가 바보라고 생각해? 나도 다 알아봤다구." "뭘 알아봤다는 거야?" "회사에 연락해 봤지. 메인 그룹에 말이야." "그랬더니?" "주소도 안 가르쳐 줘." "뭐야" 당연했다. 메인 그룹에서는 외부 전화에 대한 경계망을 완벽하게 구축해 놓고 있었다. 외부 로부터 메인 그룹의 총수인 리차드 메인을 찾는 전화가 오면 가장 신속하게 조회를 한다. 상대를 알게 되면 단 몇 초안에 이미 상대방의 모든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필요한 경우 경찰의 컴퓨터 기록과도 연결이 가능할 정도였지만, 그보다 대개는 자체에서 보관 중인 자 료만으로도 처리가 가능했다. 닐 완슨이 실패했던 것과 같이 리차드의 인적 사항은 일체 공 개될 수가 없었다. 그 적용 대상자는 리차드 메인과 저스틴 메인이 우선이었고 그 다음으로 는 그룹의 핵심 간부에게까지 이어졌다. 아무런 결과도 얻어내지 못한 닐 완슨은 제이 제이 에게 마자막 카드를 내놓았다. "이봐, 제이 제이." "뭐야?" "자네 벌써 잊었어?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 "무슨..." 닐 완슨의 말투를 통해 상대는 어떤 심상치 않은 기미를 알아차리며 말끝을 흐렸다. "자네 그 동안 나한테 신세를 많이 졌어, 안 그래?" "그거야, 내가..." "잔말 말고 당장 알아 봐." "알았네." "시간 없어!" "지금 당장이야, 어렵지." "그럼?" "앞으로 두 시간의 여유를 주면 어떻게 해 볼께." "알았어. 실수하면 안돼!" "그래." "좋아, 그대 다시 전화할 테니 명심해!" 닐 완슨은 계속 상대를 거칠게 굴었다. 그에게는 이번 문제가 굉장히 심각한 것임을 느낄 수 있었으며, 그는 리차드보다 저스틴을 더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리차드 보다 저스틴을 놀린다는 것을 확실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하그렌드 경감과 로만 경사가 메인 부부의 집을 방문하였다. 전날밤 그 들의 이야기했던 사건 전모는 사건을 정리하련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2백만 달러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에는 아직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다. "여보, 어쨌든 이젠 이 문제에서 손을 떼도록 합시다." 간밤 잠자리에 들기 전 리차드는 그렇게 말했다. "나도 그렇게 하고싶어요, 여보. 그렇지만..." 저스틴은 마음을 온전히 결정짓지 못한 태도였다. "그렇지만?" "간단히 말해서 결과를 보고 싶어요." "어째서?" "내가 처음부터 관련된 문제였으니까요." "그 남작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했잖아. 당신이 처음은 아니라는 것을 모르겠어?" "다른 문제는 상관없어요. 이번만큼은 내가..." "알았어." 리차드는 체념하듯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와 같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양보하는 사람은 언제나 리차드였다. "당신 역시 못 말리겠군." "내가 누군데 그러세요?" "누구냐고?" "네." "누구긴 누구?" "리차드 메인의 부인이에요. 모두 당신을 닮아서 그런거러고요." 리차드는 어이없이 하면서도 더 이상 이의를 제시하진 않았다. 이튿날 아치부터 방문객을 맞은 리차드는 탐탁하진 않았지만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어서 오세요, 두 분." "안녕하십니까, 메인 부인, 그리고 메인 씨." "좀 앉으시죠." "고맙습니다." 모두 자리에 앉은 후 하그렌드 경감이 먼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시작했다. "두 분께 죄송스럽습니다 어제 여러 가지 문제를 말씀들렸습니다만, 오늘 이렇게 도다시 방 문한 것은 어려운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로만 경사는 경감의 옆자리에 조용히 앉아 쳐자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저스틴은 하그렌드 의 표정에서 시서을 떼지 않았고 그가 과연 어떤 이야기를 꺼낼지가 궁금했다. "메인 부인." 경감은 곧장 저스틴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 영국 정부는 데스타브 남작을 체포하고 돈을 회수할 수 있도록 부인이 도와주시면 대 단히 고밥게 생각할것입니다." "어떻게 하라는 거죠?' "데스타브 남작은 돈을 받기 위해 연락해 올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메인 부인께서..." 곁에 있던 리차드가 재빨리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만 두세요." 어젯밤 저스틴이 요구할 때는 일단 체념했던 그도 이번에는 태도를 바꾸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저스틴이 직접 뛰어들어 데스타브 남작을 체포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경감의 요구는 리차드가 생각했던 범위 이상의 심각한 문제였다. 필요할 경우 법정에서 증인이 되어 줄 수는 있다. 그 정도의 부탁이라면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범인을 체포하는 과정에 참ㅂ여하는 경우라면 어던 위험이 다를지 예측할 수가 없 었다. 범인의 체포 과정에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리차드는 제스틴을 그런 위험에 빠드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하그렌드 경감은 리차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빨리 변호를 시작했다. "진정하세요, 메인 씨. 우선 제 얘기부터 들어보신 다음에 말씀하셔됴 늦지 않습니다." 저스틴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리차드는 전혀 수긍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그는 경 감의 다음 말이 어떤 것인지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권투 지망생을 극구 반대하는 부모에게 선수를 스카웃하려는 코치는 말한다. 권추는 때리고 맞는 것만이 아니다. 하지만 권투를 잘 하기 위해서는 때리는 일 이외에도 맞는 일도 필요히다. 리차드가 생각하기에 하그렌드가 저스틴을 이용하기 위해 지금 하는 모든 말은 권투 지망생을 끌어들이려는 것과 같은 이치 였다. 그는 경감으 ㄹ향해 노골적으로 털어놓았다. "더 들어볼 필요는 없어요." "네?" "무슨 얘긴쟤 굳이 듣지 않아도 알겠습니다." 그의 말에 하그렌드는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문슨 말씁이십니까, 메인 씨. 내가 부인께 드리려는 부탁에 대해서 말입니까?" "물론이죠." "네?" "적어도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저스틴이 그 사람을 만나야만 한다는 거시 아닙니 까?" 리차드의 예측은 정확했고 그것은 상식적인 문제였다. 하지만 저스틴이 데스타브 남작을 다시 만나지 않고는 그를 체포할 방법이 없다. 다른 경우라면 용인해 줄 수도 있지만 그 일 만큼은 리차드로서는 반대하고 싶었다. "역시 정확히 보셨구요, 메인 씨 놀랍습니다." 경감은 그렇게 말한 다음 표정을 바꾸며 정색했다. 표정을 진지하게 바꾼 후 메인 부부를 바라보며 그는 간곡하게 말했다. "메인 시가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아실 줄 믿습니다만, 남작을 체포할 수 있는 유일한 방 법은 그것뿐입니다. 그래서 싫어 하실 줄 알면서도 염치를 불구하고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 입니다." "그렇습니다. 메인 씨, 메인 부인. 부탁을 들어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로만 경사도 경감이 이어 간곡하게 부탁했다. 리차드와 저스틴이 잠깐 침묵을 지키며 마주 보는 사이에 하그렌드가 다시 정중하게 말했다. "메인 씨, 분명하게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뭘 말입니까?" "부인의 신변에 대해서는 우리 영국 경찰의 명예를 걸고 안전하게 책임질 수 있다고 약속드 립니다." "경감님." 리차드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협조해 드리기 싫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시다면..." "만일, 생각해 봅시다. 저스틴과 남작이 다시 만나게 되는 경우에 대해서 말입니다." "네 메인 씨." "그렇다면 당연히 일은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벌어지지 않겠습니까?" "네?" 저스틴은 조용히 앉아 들으면서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있었다.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리차드는 그녀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남작은 아마도 저스틴이 돈을 가지고 나올 줄 알고 있을 겁니다." "네에." 경감의 얼굴에 갑자기 난처해 하는 빛이 나타났다. 리차드는 자신의 생각을 이어서 정리했 다. "따라서 저스틴은 돈을 가지고 가야만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돈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남작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 점이 리차드가 저스틴을 걱정해서 협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였다. 그것은 정확한 분석이다. 데스타브 남작이 가방 속의 돈이 바뀐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것은 상식에 속 하는 문제였다. 돈을 갖지 않고서 남작을 만날 수는 없다. 경감이 아니라 경시청의 청장이 부탁해 온다고 해도 리차드의 생각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위험이 따르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을 수 있었다. 남작은 돈의 보관을 부탁 했고 그 부탁을 받은 사람은 저스틴이다. 그녀가 돈을 갖고 있지 않다면 결국 오해가 생겨 어떤 일이 발생될지 예측할 수 없다. 돈 문제에 대해선 경감도 난처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 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무슨 뜻이죠?" "메인 씨가 부인의 안전을 걱정하시는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 경찰도 우리의 명예를 걸고 신변을 책임지겠다는 것 아닙니까. 이 점을 양지하시고 심사숙고해 주 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리차드의 강경한 태도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건 이해합나다." "그렇다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천만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네?" "문제는 가방 속에서 바뀐 가짜 돈입니다. 그 돈이 없다면 저스틴은 절대로 남작을 만날 수 없습니다." 리차드의 계속되는 강경한 반대에 하그렌드 경감은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업무상 필요에 의해 떠났던 리차드의 런던 여행은 결국 이렇게 쉽게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를 발생 시켰다. 행운의 여신이라는 듣기만 해도 굉장했던 저스틴에 한 잠깐 동안이 찬사가 빚어낸 결과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아직 이들은 저스틴을 다라 런던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카우보이 모자를 쓴 닐 완슨의 신분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제이 제이 라는 미지의 인물에게 저스틴에 관한 신분을 알아보도록 압력을 넣을 정도로 무엇인가 목적이 있 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는 무엇 때문에 저스틴의 행방에 대해 그토록 궁금해하는 것일까! 합의된 작전 그것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였다. 경시청 수사괴의 경감 선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수사상 필요한 전폭적인 지원을 한다고 하지만 2백만달러라는 큰 돈을 지원해야 하는 경제 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별도의 건의와 승낙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그렌드 경감이 난처한 빛 을 감추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그런 연유에서였다. 결과적으로 저스틴이 런던의 컨싱턴 클 럽 총지배인 조지에게 받아온 2백만 달러는 종족을 감추고 말았다. 어떤 과정을 거쳐 누구 의 손으로 들어갔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연적으로 소멸되는 물체가 아 닌 이상 호텔을 짓고도 남을 액수의 지폐는 누군가의수중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 고서는 달리 어떤한 추측도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 리차드로서는 저스틴을 보낼 수가 없 었다. 데스타브 남작과 만나는 일만 아니라면 부담없이 하그렌드의 수사에 협조해 줄 수도 있다. 정의를 위한 일일 경우에는 언제라도 기꺼이 나서는 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와 서 돌이켜보면 런던에 갔을 당시 저스틴이 룰렛 게임에 관여했다는 사실부터 탐탁치 않았 다. 행운의 여신이니 뭐니 하며 도박꾼에게 칭송을 들었다는 사실이 리차드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저스틴의 마음이 상할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ㅂ루만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원래부터 그는 도박과 거리가 멀었다. 아니 그보다 도박을 싫어 했다. 하그렌드 경감이 나름대로 리차드의 제안을 몹시 꺼려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 다. 당시 영국의 경시청에서는 이미 데스타브 남작에게 미기를 던지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왔다. 그 돈의 행방도 묘연한 현재로서는 다시 자금을 투입할 수는 없는 실정이다. "메인 씨, 다시 한 번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부인께서 그자를 한 번 만나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요?" "솔직히 말씀드리죠. 현재 우리는 데스타브 남작의 소재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 일 그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만 있다면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는 자못 난처하고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런던경시청을 대표해서 특별히 파견된 만큼 현 재의 입장에서는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경감님의 계획은 어떤 것입니까?' "네. 메인 씨. 제 생각은..." 하그렌드는 자시의 계획을 간략하게 설명했다.데스타브 남작의 행동은 신출귀몰했다. 런던 의 켄싱턴 클럽에서 하그렌드가 그를 놓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현자에서 체포할 목 적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계속 미행을 했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 현장에서 하 렌드는 남 작을 순간 감쪽 같이 놓쳐 버렸고 다만 그가 갔을 것으로 추측되는 로스앤젤레스로 급히 달 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 와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데스타브 남작은 종적도 없 이 사라졌다. 조수인 로만과 혈안이 되어 수색을 해보았지만 남작의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복면강도로 위장해서 메인 부부의 집에 침입할 정도로 다급했 다. 따라서 그드르이 한밤중 강도행각은 그가 고백한대로 강도로 위장을 해서라도 뛰어들어 사건을 흐트러뜨리면 어던 단서가 잡힐 수도 있다는 막4연한 추리에서 벌인 해프닝이다. 그 결과 메인 부부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협조를 부탁하게 되었지마, 이번에는 리차드의 이견으로 앞이 막히게 되었다. 경감의 계속되는 난하  속에서 돌파구를 찾는 가장 좋은 방 법은 저스틴이었다. 그는 분명히 돈을 찾기 위해 저스틴에게 연락할 것이다. 반드시 연락을 취해 올 남작은 저스틴이 만나주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하그렌드의 수사 각본이었다. 남작 은 분명히 무방비 상태일 것이다. 따라서 그 기외를 이용해서 덮치면 남작을 무난히 체포하 고 영국 정부는 돈을 회수하게 된다는 것이 그것의 내용이었다. 그의 생각도 틀린 것은 아 니었다. 다만 사건 해결에 조급한 나머지 리차드 만큼이나 저스틴의안전을 염두해 두지 않 은 것이 문제였다. 리차드도 정의를 위해서 돕고는 싶지만 그보다 저스틴의 안전이 더 중요 한 문제였다. 하그렌드의 설명을 듣고 난 다음에도 리차드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경감님, 그것은 당신네 영국 경찰의 문제입니다." "이해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이것은 이해를 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시죠?" "솔직히 당신과 영국 경찰은 남작을 체포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야 물론이죠?" "바고 그겁니다." "네?" "당신네 영국 경찰은 남작을 체포하고 돈을 회수하면 그만이겠지만 난 그렇지 않아요." 이 때 입을 다물고 있던 로만이 리차드에게 물었다. "메인 씨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시죠."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겐 남작의 체포보다 저스틴의 안전이 더욱 주용합니다. 이해하시겠죠?" "물론 이해합니다, 메인 씨." 하그렌드는 어떻게 해서든지 리차드를 설득시키기 위해 온갖 지혜를 동원하려는 모습이 역 력했다. "그래서 애당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부인의 신변을 책임지고 보호하겠다고 말입니다." "그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리차드의 개속된는 주장에 하그렌드는 약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노련한 수사관 인 그는 재빨리 존전과 같은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물리한 부탁인 줄은 잘 알고 있습니다. 메인 씨, 메인부인께도요. 그렇지만 남작 같은 자가 계속 나쁜 짓을 저지르고 다니도록 놔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 점에서는 동의합니다." "그러시다면..." 그때까지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저스틴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녀는 리차드와 하그렌 드 양측이 원만하게 합의하기를 원했다. 리차드의 의견과 하그렌드의 의도를 충분히 들은 만큼 저스틴으로서는 나름대로 어떤 절충안을 내놓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우선 하그렌드에게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경감님?" "네, 메인 부인." "말씀하신 그대로라면, 남작을 제가 만나기만 하면 현장에서 체포할 수 있다고 하셨죠?"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뭐가 걱정인지 이해할 수 없어요?" "네?" "남편은 나의 안전을 위해 잃어버린 2백만 달러를 진짜돈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 어요." "하지만 그게 좀..." "이해할 수 없군요. 현자에서 남작을 체포하기 위한 2백만 달러도 영국경찰은 지원해 줄 수 없나요? 설마 그런건 아니겠죠?" "그럴 리 있겠습니까. 부인께선 좀 지나친 말씀을 하시는군요." 옆에서 듣고 있던 로만이 끼어들며 말했다. "부인이 옳습니다." "뭐라고?" 하그렌드는 다그치듯 로만을 곧장 바라보았지만 로만은 의외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부인의 말씀처럼 돈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인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요. 우 리 경찰에서 그 정도라면 충분히 준비해 줄 수 있지 않습니까." 로만이 갑자기 저스틴의의견에 적극 동조하고 나섰다. 그가 이런 태도를 보인 이유를 하그 렌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만두게, 로만, 우리는 이미 백만 파운드를 잃어버렸지 않은가." 돈 문제에 대해서 하그렌드는 계속 비관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하지만 로만의 태도는 전혀 하그렌드와는 다른 입장을 보였다. "그 돈은 남작이 국외로 빼돌렸습니다." "그러니까 문제지." 리차드와 저스틴은 그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경감님, 제 의견을 말씀들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게, 로만." "우리 경찰에서는 이미 잃어버린 돈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남작으 ㄹ체포해야 됩니다." "당연한 일이지. 그것을 말이라고 하는 건가?" "바로 그겁니다." "뭐라고?" "네, 경감님. 정붕에서는 그 돈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다시 백만 파운드를 지우너해 줄 겁니 다." 로만은 계속해서 타당성 있는 결정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그것은 리차드의 뜻과도 부합되 는 내용이었다. "메인 씨도 계속 그렇게 말슴하지 않으셨습니까. 즉 메인 부인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가 장 좋은 방법은 그 돈을 우리가 준비하는 겁니다." 듣고 있던 리차드와 저스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만의 논리는 빈틈없이 완벽한 것이었다. 경찰 측과 저스틴 측이 동시에 공감할 수 있는 공정한 내용으로 모두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조건이라고 한다면 리차드도 반대할 의사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실은 그도 데스타브 같은 인물이 빨리 체포되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다만 저스틴의안전이 더중요했을 뿐이다. 드디어 하그렌드 경감이 결정을 내렸다. "좋습니다, 메인 씨. 메인 부인. 로만의 의견을 듣고 보니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으로 판단됩니다." 리차드와 저스틴은 더 이상 이의를 갖지 않고 있었다. "그럼 두 분께 묻겠습니다." "좋아요." "그러세요." 리차드와 저스틴이 함께 대답했다.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메인 부인?" "그런 사람은 반듯이 체포해서 또 다시 이런 짓을 못하게 해야죠." "그럼 남작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만나기로 약속해 주십시오." "그러겠어요." "감사합니다, 부인.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그렌드는 비로소 얼굴 가득히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직 아니었다. "전화 왔습니다. 메인 부인." 거실에 있던 시고니가 아직 침실에 있는 저스틴에게 큰소리로 알려주었다. 런던에 다녀온 후 저스틴과 리차드는 이전보다 늦게 일어나는 습관이 생겼다. 사실상 전화가 일찍 걸려 오 긴 했지만 그 이전에 비해 메인 부부는 확실히 늦잠을 자는 경우가 많았다. 느닷없이 끼여 들게 된 데스타브 남작 사건이 바로 그 원인이었다. 어느 때의 다른 사건들보다 그 문제는 저스틴에게 심리적인 부담을 안겨주고 있었다. "여보세요." 저스틴은 침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아직도 가운 차림이었다. 사실 런던에 다녀온 후 처음으로 지난밤 그녀는 리차드와 함께 황홀한 잠자리를 같이했던 것이다. 덕분에 리차드는 아직까지 자고 있었다. "메인 부인이시오?" 상대방의 목소리에서 저스틴은 금방 그가 누구라는 걸 알아 차렸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그 녀의 목소리 때문에 부시시 깨어나는 리차드에게 가벼운 눈짓을 보냈을 뿐이다. "그런데 누구시죠?" "아, 데스타브 남작이오." 켄싱턴 클럽에서와는 다르게 남작의 목소리는 매우 딱딱했다. "어머, 남작님이시군요?" 그녀가 짐짓 다정하게 말을 걸자 비로소 남작이 말투도 바뀌었다. "그렇습니다. 부인." 남작은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저스틴의 반응에 굉장히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셨습니까? 어제도 전화를 했는데 주무신다고 하더군요." "들었어요. 죄송합니다." "천만에요, 부인. 그건 그렇고 난 지금 로스앤젤레스에 와 있습니다." "그러세요?" 이때는 리차드도 이미 침대에 일어나 앉아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을 기다리던 참이었어요. 런던에서 맡기신 돈을 돌려 드려야 하니까요." "대단히 감사합니다. 역시 제가 부인을 제대로 봤군요.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어떻게 감사 표시를 해야 할 지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제가 그쪽으로 방문해도 되겠습니까?" "방문하신다구요?" 저스틴은 옆에 앉아 있는 리차드가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소리내어 반복해 물었다. 리차 드는 놀라면서 안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아니요." "네?" "마침 오전에 시내에 나갈 일이 있어요. 어디에 계신지 말씀해 주신다면 제가 그 곳으로 가 겠어요." "아, 그것도 좋겠군요. 그럼 다시 한 번 신세를 져야 하겠습니다."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좋아요, 남작님." 어렵지 않게 남작이 있는 호텔을 알아낸 저스틴은 시간 약속을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여보." 리차드가 갑자기 저스틴을 불렀다. "경감한테 그 호텔을 알려주고 우린 빠지는 게 어때?" "안돼요, 여보." "그럴 수도 있잖아, 남작을 체포만 하면 되는 거니까." "농담하시는 거예요?" "할 수 없군." "약속은 지켜야죠, 아무리 영국 경찰이지만. 그리고 또 있어요. 그것은 당신이 더 잘 아실 텐데요?" "그래?" "물적 증거요. 남작이 우리가 가지고 간 돈을 받는 현장에서 체포해야 되잖아요, 안 그래 요." "과연 그렇군. 당신 이제 웬만한 사건 정도는 수사관만큼이나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군!" "이러지 말아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아직 가운만 걸친 리차드와 저스틴은 어느덧 서로를 뜨겁게 껴안고 있었다. 시고니가 언제 커피를 가지고 들어올 지 모르는 시간에도 메인 부부는 가끔 씩 스릴을 느끼며 재빠르고 결력하게 아침의 정사를 즐기곤 했다. 그것은 번갯불이 지나가 는 것과 비슷했다. 그 짧은 순간에 그토록 커다란 기쁨을 맛볼 수 있는 부부는 아마 그들밖 에 없을 것이다. 리차드가 좀더 깊숙이 공격해 들어오는 순간 저스틴은 벌써 전신을 뚫고 달리는 희열과 함께 소리 죽여 신음하며 몸부림을 쳤다. 한발의 총성 리차드가 저스틴과 동행한 것은 실과 바늘이 함께 움직이는 원리와 같이 당연한 일이었 다. 특히 이번 같이 저스틴의 신변 문제가 걸려 있는 경우라면 리차드는 그룹의 업무가 아 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저스틴을 최우선으로 선택했다. 그녀가 존재할 때에 비로소 자신도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데스타브 남작이 투숙하고 있는 장소 는 로스앤젤레스에서도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작은 호텔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그런 한적한 장소를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저스틴에게서 2백만 달러를 넘겨받으면 그 는 즉시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이번에는 런던이 아닌 미국 라스베가스의 카지노에 갈 것이 다. 그리고 거기서도 한몫 잡기 위해 또 다른 음모를 꾸밀 것이다. 그가 영국에서 불법적으 로 빼돌린 돈과 그 밖의 다른 돈들의 행방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극 히 개인적이며 그리고 빗나간 욕망으르 채우기 위해 한적한 소도시 내지는 작은 섬을 몽땅 사들여서 요새화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그만큼 베일에 쌓인 인물이었다. 호텔 앞, 차에서 내린 리차드와 저스틴은 자신들이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저 스틴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마음 한 구석에서는 데스타브에게 미안한 감도 없진 않았 다. 그가 비록 체포되어야 마땅한 인물이긴 하지만 자신이 미끼를 물고 그를 찾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저스틴은 안 될 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하그렌드 경감에게 미리 한 가지 부탁을 해 보았다. "경감님, 우리가 남작을 만난 후에 그를 체포해 주세요." "네?" 하그렌드는 그 말을 미처 알아듣지 못했다. "다시 말씀드릴까요?" "네." "우리가 남작을 만나서 돈을 건네주고 나온 다음에 그를 체포해 주셨으면 하는 거예요." "그건 안됩니다." "어째서죠?" "설명 드리죠." 경감의 설명에는 충분한 일리가 있었다. 남작에게 돈을 건네준 저스틴이 현장에 없으면 체 포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이 경감의 설명이었다. 그것은 그 돈이 어떤 돈인지 법적으로 증명 할 수가 없기 때문이며 자신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돈이라고 우긴다면 할 수 없기 때문이 다. 자연히 저스틴이 문제의 돈을 넘겨준 현장에서만 비로소 남작을 체포할 증거가 생긴다 는 것이다. 경감의 그 말에 대하서는 리차드도 동의했다. 저스틴은 그런 이유로 마음 한구석 에는 미안함을 지닌 채 계획대로 하그렌드가 머물고 있는 호텔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메인 부부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평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금씩 운동을 하는 것이 메인 부부의 습관이었다. "몇 호실이라고 했지?' "313호실이요." "혼자 있을까?" "그럴 거예요. 아니, 그럴지도 모르죠." "무슨 소리야?" "떳떳한지 못한 돈을 받는 데 옆에 사람이 있기를 원하겠어요?' "그것도 그렇군." 이윽고 313호실 앞에 도착한 그들은 잠시 멈추어 호흡을 안정시킨 후에야 문을 두드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남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요?" "저스틴 메인이예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안에서 부지런히 다가오는 발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렸다. "아, 메인 부인." "안녕하세요."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데스타브 남작은 너무나도 친절했다. 그는 묵묵히 저스틴과 함께 들어서는 리차드를 향해 서도 예의를 갖췄다. "메인 씨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반갑습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악수했다. 남작은 힘껏 손을 잡고 흔들 생각이었지만 리차드 쪽에서 가 볍게 건드리는 것처럼 잡았다. 문제의 돈 가방은 리차드가 들고 있었다. 그는 가급적이면 일 을 빨리 끝낼 생각이었다. 그런 곳에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끈다는 것이 그로서는 견딜 수가 없을 만큼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가방만 건네주고 그 후에 하그렌드 경감이 들이닥쳐 남작을 체포하면 상황은 모두 끝나게 된다. "이 가방 당신 것이죠?" 리차드는 더 묻지 않고 가방을 남작에게 건네주었다. 남작은 초조해 하면서도 회색이 만연 한 가운데 거의 낚아채듯 가방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는 가방을 건네 받자 곧 탁자 위에 올려놓고 뚜껑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현금으로 2백만 달러가 들어 있었다. 남작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남은 문제는 그 가방을 가지 고 호텔에서 유유히 사라지는 것뿐이었다. 그는 문에서 돌아선 채 저스틴에게 나름대로 사 의를 표시하고 싶어했다. "메인 부인, 약소하지만 저의 호의를 받아..." 이때 남작은 저스틴에게 사례할 목적으로 지폐 뭉치 가운데 한 움큼을 집고 있었다. 그러나 남작의 호의가 채 저스틴에게 전해지기도 전에 하그렌드 경감이 로만 경사를 대동하고 색실 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돈을 집던 남작은 느닷없이 등쪽에서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그가 놀 라서 미처 돌아보기도 전에 방에 함께 있던 리차드의 목소리가 아니, 전혀 다른 남자의 굵 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시오, 찰스." 그 목소리와 그 말투, 남작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를 찰스라고 부르는 사람은 오직 한 사 람 뿐이다. 그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그를 데스타브 남작이라 불렀다. 자신의 뒤 에 누가 나타났는지 알게 된 남작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어떤 생각을 떠 올릴 겨룰도 없었다. 지금은 저스틴을 원망할 수도 없고 자신을 탓할수도 없었다. 데스타브 남작의 성격 가운데 칭찬할 만한 것이 있다면 누구보다도 체념이 빠르다는 것이다. 재역전 의 기회를 노리는 일에 가히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망설 이지 않고 체념하는 것도 가히 천부적이다.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어서 오십시오. 경감님." 그렇게 말하는 남작의 태도나 표정은 리차드와 저스틴을 충분히 놀라게 만들만큼 차분했 다. 하그렌드 경감 역시 회심의 미소를 얼굴 가득히 짓고 있었다. 이때 남작은 경감과 나란 히 서 있는 로만을 날카롭게 노려보더니 이내 원래의 표정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남작은 바 라보는 로만 역시 무표정했다. 전날 런던에서 그들은 일주일 후 알카불고에서 만나 서로의 몫을 나누기로 분명히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그 로만이 바로 하그렌드 경감과 나란히 나타 나 그날의 공범을 체포하려는 것이다. 리차드와 저스틴은 한쪽으로 물러서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때에도 저스틴 은 그녀만의 가책을 느꼈다. 그녀가 남작을 배신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 사람은 마땅히 준엄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다만 하필이면 그녀가 그런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 저스틴 으로 하여금 순수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하그렌드는 여유 만만했다. 곁에 로 만까지 함께 잇는 상황에서 데스타브 남작은 드디어 독 안에 든 쥐와 마찬가지였다. "내 예상이 꼭 들어맞았군. 돈 냄새가 나는 곳에 찰스 당신이 나타날 줄 알았지." 데스타브 남작의 얼굴에는 체념의 빛이 역력했다. 올 때까지 왔다고 생각한 것일까? 특히 리차드와 저스틴이 목격자라는 사실이 그를 완전하게 묶어 놓는 셈이 되고 말았다. 데스타 브 남작은 그 앞에서 어떤 비굴한 짓을 하더라도 소용없음을 인식하는 듯했다. "솔직하게 얘기해 봅시다, 경감." "좋소."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소?" 남작은 경감에 이어 로만과 메인 부부를 차례로 바라보며 약간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여유 있는 표정을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거야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오, 남작." 경감은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함께 있는 로만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어떤가, 로만 경사. 남작과는 서로 아는 사이겠지?' 순간 남작의 눈빛에 번뜩이는 날카로운 것이 스쳤다. "로만이군." 그는 침통한 투로 짧게 그 이름을 불렀다. 이 순간까지도 그는 로만의 신분을 모르고 있음 이 분명했다. 확실할 수 없지만 표정과 분위기로 보아 남작은 로만이 경찰이라는 사실을 모 르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리차드와 저스틴이 조용히 지켜보는 가운데 하그렌드 경감은 남작에게 로만을 정식으로 소개하며 그를 다시 놀라게 했다. "이 사람은 런던경시청에 소속을 두고 있는 수사과경사 아서 로만이요. 데스타브 남작. 이제 알겠소?" "그렇군." "이 세상에 완전 범좌란 있을 수 없소." 남작은 로만을 향해 어떤 비난이나 추궁도 하지 않았다. 완전히 궁지에 몰린 자신의 입장 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자칫 어설픈 감정 표현으로 인해 오히려 더욱 비굴해질 수는 없는 일이다. 비록 범죄 사실이 현장에서 발각되어 체포되기 직전의 상황으로까지 몰리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신분과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는 오히려 로만을 향해 부드럽게 빈정거렸다. "축하하네, 로만. 내가 자넬 아직 모르고 있었다니 내 스스로 무덤을 판 셈이군." 그는 웃지도, 그렇다고 화를 내지도 않았으며 로만에게 한마디 더 던졌다. "이제 보니 돈의 유혹도 거절할 줄 아는 애국 청년이었군. 몰라 봐서 미안하네." 리차드와 저스틴은 일이 빨리 끝나 주기를 바랐다. 그들은 사실상 할 일을 끝낸 셈이다. 그 대로 호텔 밖으로 나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다만 사건의 결말을 지켜보고 싶을 뿐이었 다. 이윽고 하그렌드 경감이 로만 경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로만, 지금 즉시 로스앤젤레스 경찰에 연락해 주게." "알겠습니다. 경감님." "이 지역의 경찰과 사소한 마찰도 일으킬 필요는 없겠지. 돈 가방을 챙긴 후에 어서 전화로 연락하게." "네." 전화기는 남작이 올려놓은 돈 가방 바로 그 곁에 놓여 있었다. 로만이 그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며 리차드와 저스틴은 상황이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로만은 로스앤젤레스 경 찰에 연락하기 위해 가방과 전화기가 있는 탁자로 갔다. 그는 우선 돈 가방의 뚜껑을 닫은 다음 이어서 전화기를 들었다. 바고 그때 로만의 행동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그 안에 한 사 람도 없었다. 리차드와 저스틴은 물론 하그렌드 경감조차 남작에게 시선을 준 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로만은 왼쪽 허리춤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 그의 바로 곁에는 가방 속을 확 인하다 잡힌 데스타브 남작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로만은 양복저고리 자 락을 활짝 열어 젖혔고 권총은 바로 남작의 코앞에 있었다. 남작은 믿었던 로만의 배신을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체념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런 그의 머리 속에 갑자기 어떤 생각이 번뜩였다. 로만은 양복 자락을 다시 한번 ㅈ혔고 남작은 로만의 허리에서 그를 향해 고개를 삐쭉이 내민 권총을 볼 수 있었다. 로만의 동작에서 남작이 행동을 옮기기까지의 사 이에는 채 몇 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남작이 번개 같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일순간 상 황은 뒤바뀌고 말았다. "꼼짝 마!" 남작은 손에는 이미 로만의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번개 같이 로만의 허리춤에서 총을 뽑 아 모두를 겨눈 것이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 앞에서 경감은 비롯한 모두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남작은 움켜잡은 총구에 힘을 주며 명령을 내렸다. "로만, 수화기를 내려두고 뒤로 물러서라!" 로만은 꼼짝없이 뒤로 물러섰다. 돈 가방이 있는 곳에서 한 발짝 씩 물러선 셈이다. 남작은 그럴 경우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경감, 총을 꺼내 놓으시오!" 총구 앞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속수무책이었다. 자칫 서툰 동작 때문에 하나뿐인 생명을 날려 버리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바닥에 던져!" 경감은 꺼낸든 권총을 바닥에 떨어드렸다. 그는 순간적으로 탄식했다. 자신이 10년만 젊었 어도 하는 생각으로 괴로워했기 때문이다. 이런 위기에 몸을 날렵하게 굴리며 바닥에 엎드 려 상대에게 선제 공격을 할 수만 있다면 하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자. 이쪽으로!" 남작은 총구로 지시했다. "모두 저쪽으로 비켜서시오!" 경감과 경사, 리차드와 저스틴은 그의 총구가 지시하는 대로 벽쪽으로 물러섰다. 남작은 총 을 쥐지 않은 손으로 돈 가방을 들었다. "메인 부인?" 그는 저스틴을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도저히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 앞에서 저스틴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리차드를 바라보았다. 리차드 역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이들 중에 어느 누구도 상황이 이렇게 돌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쪽으로 오시오, 부인." 거절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어설프게 멈칫거리다가는 거친 행동이나 폭언을 뒤집어 쓸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저스틴은 체념한 표정으로 남작에게 다가갔다. "우선 용서를 구해야겠소이다. 메인 부인." 남작은 사뭇 예의를 갖추며 양해부터 구했다. "부인, 나를 한 번 더 도와주셔야 되겠습니다." 남작은 저스틴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들이댔다. 그 광경을 보고 리차드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내부에서는 분노의 용암이 들끓고 있었다. 이와 비슷한 위기를 여러 차례 겪긴 했었지 만 매번 극적으로 위기를 벗어나곤 했었다. 하지만 현재 그는 두 명의 수사관과 함께 있으 면서도 남작의 총구 앞에서는 꼼짝못하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리 비켜!" 경감과 리차드가 움직이려 하자 남작은 갑자기 거칠게 소리쳤다. 그 자신도 위기감을 느끼 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도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며 상대들에게 위협을 주고 있지만 내심 불 안과 초조로 긴장하고 있었다. "순순히 길을 비켜주지 않으면 여자가 죽는다." 리차드는 멈추었다. 그의 입자에서는 저스틴이 무사할 수 있다면 남작이 돈을 가지고 도망 쳐도 상관없었다. 저스틴이 안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얼마든지 남작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남작은 문 쪽을 향해 가면서 사납게 소리쳤다. "이리 와! 빨리! 돌아 서!" 그는 리차드에게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당신 부인을 해치진 않겠어. 그냥 방패로 삼을 뿐이지. 걸어! 어서 걸어!" 그는 저스틴을 강제로 몰다시피 해서 문 쪽으로 가도록 재촉했다. "메인 부인은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 사람이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부인은 무사히 돌려 보낸다." 데스타브 남작은 지금도 저스틴을 행운의 여신으로 믿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자, 어서! 어서 걸어! 가!" 남작은 저스틴을 인질로 삼아 호텔 방을 나섰다. 누구 하나 손을 쓰지 못한 채 남작의 명 령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저스틴이 피투성이가 되어 끝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대로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저스틴은 무사할 수 있다. 단 이것 은 남작이 돈을 가지고 무사히 탈출한다는 전제조건에서만 허용되는 문제였다. 남작이 문 밖으로 막 나갔을 때의 일이다.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자 로만이 재빨리 움직였다. 그는 허리 에 차고 있던 권총 외에 비상용 무기로 또 다른 초소형 권총을 양말 속에 넣고 다녔다. 남 작이 문밖으로 나가서 방안의 상황을 보지 못하는 사이 로만은 권총을 거내서는 망설이지 않고 문밖을 나서며 소리쳤다. "남작!" 일제히 놀랐다. 남작 역시 소리가 난 방향을 재빨리 바라보며 들고 있는 권총을 곧장 겨누 었지만 로만이 한 발 빨랐다. 남작이 미처 손 쓸 사이도 없이 요란한 총성이 복도를 울렸다. 로만의 총구에서 발사된 총알은 남작을 향해 날아갔다. 남작은 심장을 움켜쥐고는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비틀거리더니 이내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전개된 상황 속에 서 남작은 어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저스틴은 남편에게 달려가서 그의 품에 안기는 것조차 잊은 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리차드 역시 쓰러진 남작을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경감이 먼저 움직였다. 쓰러진 남작의 목 부분에 손등을 대어 본 후 그는 무 겁게 선언했다. "죽었어요." 로만 경사의 사격 솜씨는 정확했다. 단발에 남작의 심장을 명중시켜 그를 절명시킨 것이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한 채 서 있기만 했다. 로만 경사만이 당황하며 겁에 질린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완벽했다. 여인을 인질로 삼아 거액의 국고금을 가로채어 도망치려는 범인을 정확하게 맞춰서 사살하고는 극적으로 인질을 구출해 냈다. 이 이상 임무를 완벽하 게 처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어느 누구도 로만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아 니 물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모범적인 수사관으로 표창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남 작이 비록 저스틴의 안전을 약속했어도 확실하게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목적 을 달성한 다음 남작이 저스틴을 물론 리차드와 경감, 경사까지 처치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증거를 없애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안전을 더 연장시키기 위해 충분히 피를 뿌릴 수 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작이 완전히 숨졌다. 저스틴은 무사했고 영국 정부로 환속해야 된는 거액의 돈도 무사히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이보다 좋은 결과는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남작은 사살한 것은 수사관의 업무상 필요한 조치였다. 로만은 아직 얼떨떨 한 표정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일어날 사건을 미리 예견할 수 있는 사람은 더구나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불쾌한 방문객 한 가지 문제만이 아직 미해결인 채로 남아 있었다. 저스틴이 런던에서 가져왔던 2백만 달러의 행방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돈을 되돌려 받고 데스타브 남작을 체포하기 위해 영국 정부가 두 번째에 출연한 돈은 결국 되돌려 받게 됐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데스타브 남작이 죽었기 때문에 애당초 그가 도박장에서 땄던 2백만 달러의 향방은 찾을 길이 막혔다. 그 돈 의 행방을 알고 있을 남작이 이미 죽었다. 그리고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마련이다. 로만이 꼭 남작을 죽여야만 했던가에 대해서 의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약 그가 유능한 수 사관이었다면 남작을 죽이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범인을 사살하는 것은 최악의 경우 에 한에서 마지막에 사용해야 할 극단적인 방법이다. 로만이 극단적이 방법을 사용해야 할 만큼 그 상황이 최악의 경우였는가에 대해선 의무의 소지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로만의 사 격 솜씨라면 남작의 심장을 피해서 총격을 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만은 단발에 현장에서 남작을 즉사시켰다.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 때문에 노련한 하그렌드 경감조차도 아 직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로만의 신속한 대처와 처리에 만족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리차드는 역시 저스틴의 신변 안전에만 신경을 쓰느라 전후 사정을 유추 해 볼 여유가 없었다. 리차드와 저스틴은 하그렌드가 본국에 돌아가 보고하기 위해 작성하 는 서류 작업을 도와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저스틴의 증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리차드 역 시 증인이 되어 주었다.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일선 수사관이 범인을 사살할 경우 자칫 심 각한 문제로 비약될 수도 있었다. 사태가 원만히 해결되기 위해선 저스틴과 리차드의 증언 이 꼭 필요했다. 결과적으로는 로만이 취한 행동을 옹호해 주는 셈이 되고 말았다. 경찰이 작성하는 조서 및 진술 내용들에는 수사관 만큼이나 경험이 풍부한 리차드가 크게 도와줄 수 있었다. 그들은 하그렌드와 로만이 묵던 호텔로 함께 돌아왔다. "고맙소, 경사." 리차드는 비로소 저스틴을 무사히 구해준 데 대한 감사의 마음을 로만 경사에게 전했다. "천만해요, 메인 씨." "이 정도면 천천히 런던에 돌아가서 다시 조서르 ㄹ작성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 다." 경감이 로만 대신 대답했다. "네, 메인 씨. 메인 부인. 너무 오랜 시간을 붙들어 두게 되서 정말 죄송합니다." 저스틴 역시 자신을 무사히 구출해 준 로만에 대해 급히 감사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경사님. 수고가 많으셨어요. 다시 한 번 저를 남작으로부터 구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부인." 저스틴은 문득 런던의 카지노에서 딜러였던 그의 모습과 지금의 로만을 비교해 보았다. 그 때는 어딘가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의심스러운 청년이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유능한 수사관이라는 생각과 함께 몹시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젊은이다운 기백과 기지가 넘치는 그 모습 속엔 경찰만의 든든함이 배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을 떠나기 전에 저스틴은 하그렌드 경감에게 넌지시 물어 보았다. "경감님?" "네 부인." "런던에서 바뀐 그 돈은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건가요?" "그것이 딜레마입니다." "네?" "지금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공연한 질문을 한 것 같은데요." 리차드와 로만은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과는 달리 하그렌드 경감 은 농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문제이겠지요." "네?" "국가의 재정은 어느 나라나 똑같은 놀리 속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인." "네에." "그 돈을 영원히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만큼의 세금을 더 걷어들여야 하는 것이 그 논리죠." 저스틴은 하그렌드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결국은 여왕만 괴로운 일이겠죠." 그 말을 들은 리차드의 입가에 미소가 나타났다. 애당초 리차드는 하그렌드를 다른 사람과 는 좀 다르게 보았을 때부터 그를 옛날 영화에 나오는 배우 같다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면 에서 구식 냄새가 났었고 그런 사람이 런던의 경시청에도 핵심적인 수사관으로 재직한다는 사실이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믿어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이미지의 하그렌드와 그의 조수인 젊고 날카롭게 생긴 로만이 멋진 대조를 보이는 한쌍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오 히려 호텔에서 일행이 위기에 몰렸을 때 로만이 보여주었던 미첩한 동작은 그야말로 현직 수사관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춘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윽고 하그렌드는 대화를 마무 리짓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로만과 나는 호텔에서의 계산이 끝나는 대로 즉시 런던행 비행기를 타겠습니다." 리차드 역시 저스틴과 그 동안의 미묘했던 문제로부터 원래의 지신들만의 세계로 빨리 돌 아가고 싶어했다. "경감님." "말씀하시죠, 메인 씨." "우리가 더 필요한 일이 없겠습니까?" 그는 곁에 함께 앉아 있는 저스틴의 팔을 잡았다. "아, 아닙니다. 오히려 대단히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더 이상 우리는 필요가 없겠군요."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메인 씨 당치도 않아요. 런던에 돌아간 다음에도 우린 두 분을 기억할 겁니다." "그럼 이제 그만 돌아가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럼..." 리차드와 저스틴이 막 돌아서려 할 때 하그렌드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이곳에 있는 동안 무례했던 것을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헤어지기 전에 정식으로 사과 드립니다." "천만에요, 경감님." 로만도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한마디 끼어들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도 남작을 해칠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걱정할 거 없어요, 경사." "네?" "그것은 전적으로 근무 중에 발생한 문제 아니겠소." "그렇습니다." "우리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요, 경사님." 저스틴도 한마디 거들자 로만은 몹시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두분께서는 굉장히 너구러우시군요." "나중에 필요하다면 증언해 줄 수도 있어요, 경가." "다음 번에 런던에 오실 기회가 있으시면 꼭 경시청에 들러 주십시오. 기쁘게 맞아들이겠습 니다." "그 동안 수고 많았소 경사.' "경감님도요." "안녕히 가십시오, 메인 씨 메인 부인." 리차드와 저스틴은 가벼운 마음으로 경감과 경사가 묶고 있던 뉴 파더 호텔을 떠났다. 호 텔을 나선 메인 부부는 세워 둔 자동차에 올라탔다. 그들은 사건이 완전히 종결됐다고 생각 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여보." 자동차가 거의 집 가까이에 도착했을 때 저스틴이 불쑥 입을 열었다. "당신 어떻게 생각하세요?" "갑자기 뭘 말이요?" 리차드는 정면을 응시하며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그 돈말이에요." "돈?" "우리가 런던에서 조지한테 받았던 돈이요." "2백만 달러?" "맞아요." "그 돈이 왜?"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저스틴, 이제 그만해 두는 게 좋지 않을까? 어차피 경감이 영국으로 돌아가서 해결할 텐데 말야." "그래도 궁금해요." "당신은 정말 못 말리겠군." "그럴 수밖에 없죠. 우리가 조지한테 받았고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돈인데 궁금해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닐까요?" "그만 잊읍시다." "알겠어요." 저슨틴은 그런 점에서 매우 집요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리차드가 잘 알고 있었다. 저스틴은 어떤 문제에 말려들었을 때나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도 그 문제에 대 한 미련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편이였다. 덕분에 미궁에 빠질 뻔했던 사건이 새롭게 수사에 착수되어 뜻밖의 개가를 올렸던 경우도 여러 번 있기도 했다. 저스틴은 그들의 집이 시야에 들어오자 다시 한 번 그 이야기를 꺼냈다. "생각해 봤는데요, 여보." 리차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돈은 영국을 떠나기 전에 사라졌을 것 같아요." 리차드는 언제나처럼 대화의 상대역이 되어 주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곰곰히 행각해 봤는데요. 아무래도 미국까지는 돈이 들어오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글세." "제 생각으로는 런던에서 바뀐 것이 분명해요." "카지노에서?' "아뇨." "그럼?" "우리가 비행기를 탔던 히드로 공항 화물 구역이 가능성이 많아요." "으음." 저스틴의 말에 리차드는 자신도 모르게 동의했다. 그 역시 거금이 바람같이 사라진 문제에 대해 곰곰이 행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켄싱턴 클럽의 총지배인인 조지에게 돈 가방을 건네 받은 다음부터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할 때가지의 상황을 샅샅이 떠올려보았다. 가방이 바뀔 만한 기회는 어디에도 없었다. 미국에 도착한 다음부터는 직접 가방을 차에 싣고 집까지 싣 고 집까지 달렸다. 귀신이라 하더라도 달리는 차에서 가방을 바꿔치기 할 수는 없는 일이었 다. 저스틴의 말을 듣는 순간 리차드의 머리를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왜 그 문제를 지 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문제의 돈 가방이 타인에게 노출될 수 있는 기회는 그때뿐 이었다. 공항의 화물 구역이라면 필요에 따라서 얼마든지 가방을 바꿔치기 할 수 있었을 것 이다. 리차드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자동차는 벌써 집가까이에 도착하고 있었다. "당신 생각이 맞을 것 같군." "그렇죠?" "그곳이 아니고서는 가방에 손을 댈 수 없었을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거죠?" "어떻게 하긴, 하그렌드 경감도 바보는 아닐 테니까?"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차에서 내려 시고니가 기다리고 있을 현관을 향했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벨을 눌렀을 때 시고니가 문을 열어주었다. 2백만 달러의 돈이 런던의 히드로 공항 화물 구역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며 로비로 들어서던 리차드와 저스틴은 깜짝 놀랐다. 예기치 못했던 관경이 그들을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실의 안쪽에서 불쑥 나타난 것은 시 고니가 아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있는 닐 완슨이었다. 전에 자도차로 맹렬히 추격해 왔던 그가 이젠 집에서 메인 부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저스틴은 소스라 치게 놀랐고 리차드는 몸이 굳어지고 있었다. 닐 완슨은 손에 권총을 들고 유유하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망칠 생각은 말아요. 당신은 해운을 안겨주는 여신이니까." 닐 완슨은 저스틴을 향해 총구를 곧장 겨누었다. 뜻밖의 상황 앞에서 저스틴과 리차드는 그 자리에서 몸이 얼어ㅂ는 것을 느꼈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은 안쪽에서 시고니가 천천히 나타난 것이다. 그는 전혀 겁에 질린 표정이 아니었다. "이제 오셨어요? 닐 완슨 씨는 이미 두 분 다 알고 계시죠?" "시고니!" 리차드가 재빨리 소리쳤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시고니?" 저스틴은 닐 완슨의 총구와 시고니를 번갈아 가며 뚫어지게 바라보았지만 도저히 그 상황 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닐 완슨이 총을 겨누고 있는데 시고니의 얼굴에서는 전혀 겁에 질 린 표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시고니, 말 좀 해봐요!" 리차드는 전과 다르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안에는 사실을 빨리 해명하라는 리차 드의 강한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네. 메인 씨." 그 때 닐 완슨이 시고니의 말을 가로막았다. "오해 마십시오, 메인 씨 댁의 부인께서는 행운의 여신이십니다." 그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리차드와 저스틴은 재빨리 마주보았다. "부인께서 도박장에서 돈을 따시는 것을 보았다는구요." 시고니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리차드와 저스틴은 아직도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 하고 있었다. 그들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닐 완슨의 목소리가 갑자기 부드럽게 바뀌었 다. "그렇습니다. 부인." "네?' "그때부터 부인을 찾기 위해 런던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습니다." 비로소 리차드와 저스틴은 상황을 짐작했다. 닐 완슨이 누구도 해칠 뜻이 없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러자 리차드는 점점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이것 봐요, 당신이 누구든 상관없소, 그러나 그 총을 계속 겨누고 있을 장정이요." "이것 말입니까?' 닐 완슨은 비로소 깨달은 것처럼 들고 있던 총을 들여다 보더니 너무나도 어이없는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건 라이터일 뿐입니다. 선물로 받은 거죠, 어때요 너무 귀엽지 않습니까?" 닐 완슨은 그 권총을 당겨 물고 서 있던 시가에 불을 붙였다. 리차드는 더욱 불쾌해졌다. 이 위험이 사라졌다고 판단되자마자 느끼는 안도감보다는 어처구니없는 닐 완슨의 해프닝에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저스틴도 마찬가지였다. 저스틴도 마찬가지였다. 좀처럼 남에게 화를 내거나 남을 불쾌하게 만드는 일을 훤하지 않는 그녀도 이번 일에는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하루에도 두 번씩이나 권총으로 위협 당한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고문과도 같았기 때문이 다. 데스타브 남작의 위협은 로만이 해결했다. 그러나 또 다시 이런 일이 집에서, 그것도 그 일이 끝나지 미처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일어난다는 것은 관장한 정신적인 충격을 주었다. "대체 용건이 뭐요?" 닐 완슨은 라이터 권총을 아래로 내리며 이번에는 저스틴을 향해 간청하기 시작했다. "부인." 저스틴은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시고니 역시 그녀의 기분을 알아차리고 불안해 하는 모습이었다. "이번에 나는 라스베가스에 있는 라운드 로빈 호텔로 갈것입니다." 저스틴은 차가운 시선으로 닐 완슨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곳을 저하고 함께 가주셨으면 좋겠는데요?" "그만하시오!" 리차드의 날까로운 목소리에 놀란 것은 닐 완슨보다는 시고니였다. 지금까지 집에서 리차 드가 이렇게 큰 소리를 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닐 완슨은 비굴할 정도로 단념하 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끌어 나갔다. "메인 씨, 다른 뜻으로 드리는 말씀은 절대로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믿어 주세요, 그럼요, 믿어 주셔야죠." 리차드의 얼굴에 차가운 당혹스러움과 경멸이 점점 피어나고 있었다. "메인 씨께서도 함께 가주신다면 더욱 영광이겠습니다. 사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룰 렛 게임에서 번호만 결정해 주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지켜보는 세 사람의 얼굴에 똑같이 조소의 빛이 나타났다. 리차드는 화를 낼 가치조차 없 다고 판단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동업을 하자 이것이죠. 50대 50, 어떻습니까?" 듣다 못한 저스틴이 철부지 아이를 부르듯이 닐 완슨을 불렀다. "닐 완슨씨." "네, 부인." "내가 행운의 여신이라면 무엇 때문에 당신과 동업을 해야 하는 건가요?" "휴우!" 닐 완슨은 한숨까지 내쉬어 가며 말을 덧붙였다. "그런 말씀을 하실 줄 알고 있었습죠. 그렇죠, 부인. 그러나 저를 믿어 주시고..." 문 쪽에서 리차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완슨 씨." "네?" 그가 돌아보았을 때 리차드는 이미 현관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잘 가시오." 리차드의 엄한 표정에 닐 완슨은 비실대듯 문을 향해 걸어 나가며 볼멘 소리를 냈다. "이거, 이러는 것 아닙니다. 이렇게 확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크게 힘이 들거나 돈이 드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단지 번호만 불러 주시면 거액의 금액이 한꺼번에 수중에 들어 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는 데요, 지금 아주 후회할 일을 하고 계신 겁니다." "내가 할 소리요." 닐 완슨은 이미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고 계속해서 몸을 비틀거렸다. 그는 쫓겨 나가고 있 었다. 어차피 스스로 자초한 문제였으므로 그렇게 밀려 나가는 것이 당연했다. 밖으로 나가 던 그가 갑자기 등을 돌렸다. "시고니." 그는 시고니에게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다음 주에 네바다로 오시겠어요?" "사정이 허락되면요." 시고니의 대답에 메인 부부는 다시 한 번 어리둥절해졌다. 이 순간 그들은 마치 광대들의 연극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리차드와 저스틴은 이때처럼 시고니에 대해 의아해 하거나 거리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또 다른 비밀 "네바다?" 리차드는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느냐는 표정으로 시고니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닐 완 슨 때문에 리차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고니가 그와 어떻게 알고 지 내는 사이인지 그것이 궁금했다. 시고니가 닐 완슨을 잘 알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하필이 면 왜 그런 자와 알고 지내는 것인지 리차드로서는 그것이 불만이었다. 시고니에게 평소 각 양각색의 친구들이 많다는 사실은 리차드와 저스틴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친국 가 운데는 여자도 여러 명이나 있었다. 언제 그런 여자들과 사귈 기회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시고니의 개인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상관하지 않으며 지내왔었다. 그러나 닐 완슨과 시고니가 주고받은 말투로 보아 보통 사이의 친구가 아님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궁금했다. 어떤 인연으로 시고니가 닐 완슨 같은 건달을 알게 되었는지 리차드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리차드의 솔직한 기분은 볼쾌할 뿐이었다. 지금껏 함께 한 식구 나 다름없이 살아오는 동안 이번처럼 시고니에게 실망했던 일은 없었다. "네바다..." 시고니는 어떤 뚜렷한 답변을 하지 못했다. 리차드는 알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차마바다." 그는 계속 이해하지 못할 말을 다시 지껄이더니 이윽고 표정을 바꾸어 원래의 그로 되돌아 왔다. "염려 마세요, 메인 씨. 메인 부인.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용히 지켜보던 저스틴이 궁금함을 나타냈다. "시고니, 저런 사람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요?" "별 것 아닙니다." "친구예요?" "아뇨, 메인 부인. 친구라니 말도 안됩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 집에 들어와 있었죠?" "그건, 그러니까..." 시고니는 계속 시원스럽게 털어놓지 못했다. "말해 봐요, 시고니. 일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된 건지." 리차드도 전에 없이 시고니를 은근히 추궁하고 있었다. 대인 관계에서는 때에 따라 불쾌한 여운을 남기는 경우가 가금씩 있기 마련이다. 닐 완슨과 같은 경우가 바로 그 것이었다. 그 런 건달 같은 사내가 시고니의 허락을 박고 집에 들어와 앉아 있었다는 사실이 몹시 불쾌할 뿐이었다. "나중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메인 씨, 그렇게 해도 괜찮겠지요?" 리차드는 저스틴을 바라보았다. 물론 안될 리는 없었다. 시고니의 부탁이라면 어느 것 한 가지 거절하고 싶지 않은 것이 메인 부부의 진심이었다. 그 동안 함께 살아오면서 시고니가 메인 부부를 위해 기울인 노력은 어떤 것으로도 보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극했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는 말 못할 까닭이 있을 것이다. "웃기는 사람이에요, 시고니. 그렇지 않아요?" 저스틴이 갑자기 그렇게 화제를 바꾼 의도를 리차드는 재빨리 알아차렸다. 그녀는 하찮은 문제를 가지고 시고니를 너무 몰아세우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맞아. 우스운 사람이야." 리차드도 저시틴의 말에 동의하며 짐지 싱겁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시고니는 그들의 마 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데스타브 남작이 로만에 의해 사살되어 한 가지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 그런데 다시 웃지 못할 해프닝과 함께 미행하며 따라오던 위험의 추적자가 바 로 눈앞에서 조용히 걸어나감으로서 두 번째 문제도 역시 우연찮게 해결되었다. 그러나 2백 만 달러의 행방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채 미완의 문제로 남아 있다. 런던의 히드로 공항 화물구역에서 누군가에 의해 장난감 지폐로 바뀐 채 감쪽같이 증발된 돈 가방만이 모든 사 람들의 의문 속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점점 미궁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시고니와 닐 완슨의 미심쩍은 관계 때문에 잠시 썰렁해던 분위기가 가라앉은 즈음 탁자 위에 있는 전 화 벨이 갑자기 요란스럽게 울렸다. "내가 받겠어요, 시고니." 마침 리차드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여보세요?" 전화를 걸어온 것은 로스앤젤레스 경찰국 수사과였다. "영긴 경찰국 수사과입니다. 메인 씨 되시죠? 혹시 그 곳에 런던 경시청의 하그렌드 경감 계십니까?" "아니오, 안 계시는데요." "그럼 혹시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지금쯤 영국으로 떠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 안 떠나셨습니다." "그렇다면 호텔로 연락해 보시면 될 텐데..." "연결이 잘 안되는군요." "그래요?" "다시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십시오." 시고니는 밖으로 나갔고 저스틴은 곁에서 통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시고니와 닐 완 슨과의 문제는 이미 잊어버린 모습이었다. 시고니에 대한 애정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리차드보다 오히려 그녀였다. "어디서 왔어요?" "전화?" "경찰 아니에요?' "맞았어, 그런데..." 리차드는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어떤 뜻밖의 생각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왜 그러세요?" "잠깐, 생각나는 게 있어." "네?" "잠깐 기다려, 먼저 경찰에 전화로 알아봐야겠어." 리차드는 저스틴이 채 묻기도 전에 이미 경찰국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저스틴은 언제나 럼 조용히 입을 다물고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기다렸다. 당장은 궁금하긴 했어도 곧 리차드 가 자세한 설명을 해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경찰국입니다.." "수사과 부탁합니다." "어떤 분을 찾으시죠?" 경찰국의 교환 아가씨는 매우 상냥하고 낭랑한 목소리를 가진 여자였다. 리차드는 평소 알 고 지내던 수사과의 레이첼 반장을 생각해냈다. "레이첼 반장 부탁합니다." "기다려 주세요." 기다리는 사이에 리차드는 그의 생각을 저스틴에게 재빨리 전해주었다. "방금 생각났는데, 매우 중요한 문제인 것 같아." "뭔데요?" 그 때마침 레이첼 반장이 전화를 받았기 때문에 리차드는 저스틴에게 손짓을 보냈다. "여보세요." "레이첼 반장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리치드 메인입니다." "아, 메인 씨. 안녕하십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지난번 자택에 괴한이 침입했다고 신고가 들 어왔을 때 혹시 미흡한 점은 없었는지 모르겠군요." 반장은 하그렌드와 로만이 복면하고 들어왔던 일을 말하고 있었다. "천만에요, 반장님이 즉시 출동해 주셔서 무사히 해결했어요. 그건 그렇고,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요." "뭡니까?" "이번에 런던 경시청의 하그렌드 경감과 로만 경사가 로스앤젤레스에 와서 해결한 문제 말 입니다." "어떤 문제인지 혹시 제가 알아도 되겠습니까, 반장님?" "그거야 어렵지 않죠. 메인 씨에게 말씀드리지 못할 사건은 없습니다. 극비 사항만 제외한다 면." "고맙습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리차드의 호기심이 비로소 크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신의 추측과 레이첼 반장의 말이 맞 아떨어질 경우 문제는 굉장히 심각해지게 된다. 반장은 조서를 살필 필요도 없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당한 데스타브 남작의 시체는 부검할 필요가 없더군요." "그럴 거예요." "메인 씨와 부인께서도 그 현장에 계셨죠?" "그래요."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사실이 발견됐습니다." "그게 뭐죠?" "기록에 보면 죽은 남작이 권총으로 부인을 인질로 잡고 다른 사람들을 위협해서 런던 경시 청의 로만 경사가 그를 사살했댜죠?" "그렇습니다. 덕분에 우리 부부도 무사했죠. 그런데 반장님, 이상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시 죽은 남작이 가지고 있던 총 말입니다." "그 총이 어쨌다는 거죠?" "그 총에는 실탄이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뭐라고요?" 리차드는 깜짝 놀랐다. 곁에서 지켭던 저스틴까지 리차드의 비명소리에 놀라 눈을 크게 떴 다. "아니 그럼 빈총이었단 말입니까?" "아뇨. 그렇지는 않고 공포탄이 장전되어 있었습니다." "음!..." 리차드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추측이 옳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로만 경사의 태도에서 의문을 갖고 있었다. 당시 그가 전화를 걸기 위해 남작의 곁으로 다가갔을 때, 그 의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지나치게 남작에게 노출시켰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비로소 사격 솜씨 좋은 로만이 무엇 때문에 남작을 단발에 적명시켰을 하는 의 심이 들기 시작했다. 유눙한 수사관일수록 범인을 사살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문제였다. 여죄를 추궁하게 위해서라도 반듯이 생포하는 것이 경찰관의 의무이다. 급소가 아 닌 부위를 저격해도 충분히 남작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반장님, 그렇다면 남작은 그 총으로 아무도 죽일 수 없었겠군요?" "그렇습니다." "이상하군요." "그 문제 때문에 하그렌드 경감과 로만 경사를 찾는 중입니다." "고마워요, 반장님. 잘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전화를 내려놓고 있는 리차드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여보, 뭐가 잘못됐군요?' 곁에서 궁금증을 참고 있던 저스틴이 재빨리 물었다. "뭔가 있어." "네?" "아무래도 이상해." "궁금해요, 여보.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들어봐. 남작이 당신과 우리를 권총으로 위협했었지?" "네. 무서웠었요, 그때는 정말." "그보다 중요한 게 있어. 그가 사용한 권총은 하그렌드의 조수인 로만이 차고 있던 것이었 어." "맞아요." 저스틴도 당시 상황을 다시 보는 것처럼 눈앞에 떠올렸다. 남작이 그토록 민첩한 동작으로 로만의 권총을 뺏을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거기에 문제가 있어." "네?" "방금 반장이 얘기했는데, 그 총에는 실탄이 아니고 공포탄이 장전되어 있었다는 거야." "공포탄?" "발사해도 총알은 나가지 않는 것이지." "어머나!" 저스틴 역시 깜짝 놀랐다. 실제로 무기를 사용해 본 경험이 그녀에겐 없다. 아마 총을 쥐 어준다 해도 그녀는 목표물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지도 못할 것이다. 하물며 사람이 목표물 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다시 상식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리차드와함께 살면서 온갖 사건들과 맞닥뜨리는 가운데 그 정도의 상식은 이미 터득하고 이는 그녀였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한 후에 다시 리차드에게 물었다. "이해할 수 없군요." "나도 같은 생각이야." "남작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요?' 저스틴은 리차드와 또 다른 각도에서 그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어떻게 보면 리차드보다 한 단계 앞선 추리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다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리차드에게 설명했다. "남작은 무엇 때문에 공포탄이 장전되 총으로 위협하며 도망치려는 생각을 했을까요?" 그것이라면 리차드도 이미 생각해 본 후였다. 남작은 아마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 이다. "남작도 몰랐겠지." "네?" "그건 남작의 권총이 아니었으니까, 안 그래?" "그래요! 그런데 로만은 왜 권총에 공포탄을?" 리차드는 자신의 생각을 저스틴에게 얘기했다. "남작이 로만의 권총을 뺏은 것은 그가 동작이 빠르기 때문만은 아니었어" "그럼요?" "고의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애." "어째서요?" "그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로만이 경감의 명령에 따라 로스앤젤레스 경찰에 신 고하기 위해 탁자로 다가갈 때부터 말이야." 리차드는 자신이 생각했던 문제점과 나름대로 유추한 전후 사정을 명료하게 저스틴에게 들 려주었다. 듣고 있던 저스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비로소 이해가 간다는 표 정을 지어 보였다. 듣고 난 저스틴의 얼굴에 커다란 놀라움이 나타났다. "그러니까 여보, 로만이 남작에게 권총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군요?' "바로 그거야." "세상에! 그런 줄도 모르고 우린 로만이..." "그런데 여보, 로만은 왜 자기 권총에 공포탄을 장전해서 남작에게 주었을까요?" "좋은 질문이야." "네?" 로만의 계획에 대해 대체적인 윤곽은 잡았지만 구체적인 상황을 저스틴은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로만의 애당초 목적은 남작을 살해하는 데에 있었다. 문제의 핵심은 거액의 돈이었 을 것이다. 따라서 로만은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하그렌드 경감과 함께 행동하면 서도 그는 자기 계획을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것이다. 수사관의 봉급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을 거금에 눈이 어두워진 그는 평소 그가 지닌 지식과 상식을 총동원해서 계획을 세웠다. 전체 적인 상황으로 봤을 때 남작을 체포한는 것은 모두의 목적이었다. 저스틴의 협력으로 남작 은 체포죈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정도는 로만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하자만 남작이 체포되고 그가 가졌던 2백만 달러가 경감의 손에 넘겨진다면 모든 계획은 수표로 돌아간다 는 것 또한 로만은 예측해야만 했다. 로만은 비장한 각오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남들이 보기 에 그가 남작에게 순간적인 방심으로 권총을 빼앗긴 것처럼 보이지만 민첩한 솜씨로 남작을 제거한후 돈을 되찾게 된다는 것은 그이 계획된 시나리오였다. 그리고 그의 계획이 성공하 기 위해서는 또 다른 안전 조치가 필요했다. 그것은 만에 하나 남작이 로만 자신보다 먼저 권총을 쏘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자신이 넘겨준 자신의 총에 살해될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로만은 공포탄을 결정적인 도구로 사용하게 되었다. 남작이 먼저 총을 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실탄이 없다. 따라서 목격자들이 볼 때는 남작과 자신이 한발 앞서 방아쇠를 당긴다. 따라서 로만은 남작의 총탄에 맞지 않고 결국 남작만이 로만의 총탄에 맞는 결과가 나오게 된는 것이다. 로만은 그 다음의 계획 역시 완벽하게 세워 놓고 행동했기 때문에 로만의 각본에 따르면 남작은 반드시 죽어야했다. 저스틴은 리차드의 이야 기를 조심스럽게 듣고 있었다. "맞았어요... 그 돈에 손댈 수 있는 사람은 로만밖에 없어요." 공항까지 가기도 전에 카지노에 있던 로만이 먼저 손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은 충분한 근거 가 있는 얘기였다. 리차드는 계속해서 자신의 생각을 저스틴에게 말했다. "우리가 클럽에서 나오기 전에 돈을 바꿔치기 할 수도 있었을 거야." "맞아요. 우리가 왜 글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어요." "당연하지, 로만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으니까." "이제 어떻게하죠?" "영국으로 떠나기 전에 그를 잡아야지." "경찰에 맡기는 게 어때요?" "그럴 시간이 없어." "왜요?" "경찰에 설명하는 동안 그는 도망갈 테니까.' "위험하지 않겠어요?" "우선 전화해서 그들이 떠나는 것을 지연시켜야겠어." 리차드는 즉시 전화를 걸었다. "로스앤젤레스 시내에 있는 뉴 파더 호텔이 몇 번인지 가르쳐 주세요." 그는 전화기를 막고 저스틴에게 재빨리 속삭였다. "방아쇠를 한 번만 당기면 또 2백만 달러가 굴러들어올테니까, 공포탄도 그자의 계략이야." 그때 교환수가 뉴 파더 호텔의 전화번호를 알려왔다. "네, 네...고맙습니다." 모든 사실은 분명해졌다. 로만은 이미 런던에서 2백만 달러를 바꿔치기 했으며 그돈을 아 무도 모르게 감쪽같이 자신의 것으로 가져갔다. 그것도 부족해서 이번에는 남작을 죽이고 다시 2백만 달러를 더 가져갈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리차드는 뉴 파더 호텔의 전화번호를 돌리면서도 저스틴에게 재빨리 사건 전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래서 로만은 자기 총에 공포탄을 미리 장전한 거야." "결국 그가 남작을 살해했군요. 업무상 필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발사한 것이 아니구요." "맞았어." "끔찍해요." "그것뿐이 아냐, 로만은 우리까지 죽이려고 했었어." 그 말에 저스틴은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만약 그때 조금이라도 잘못했으면 로만의 초 에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임무를 핑계삼아 방해되는 사람들을 모두 죽여서라도 돈을 갈취하려 했던 로만의 정체는 비로소 완전히 들러나고 말았다. 막대한 달 러를 불법으로 유출시켜 망상적인 욕망을 채우려다 죽은 남작과 비교했을 때 로만 역시 그 와 다를 바 없는 파렴치한이었다. 뉴 파더 호텔과는 쉽게 전화가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호텔입니다." "죄송하지만 로만 씨의 방을 연결해 주세겠습니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저스틴은 전화하는 리차드의 곁에 바싹 붙어 있었다. 어느 때보다 초조하고 긴장된 모습이 었다. 이윽고 로만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서 들려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로만 씨." 리차드는 사건의 전모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어느 때보다도 밝은 목소 리로 말했다. "누구시죠?" 그러나 로만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긴장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 리차드 메인입니다." "아, 네. 그러시군요! 그런데 어떤 일로..." "다른 게 아니라 두 분이 혹시 떠나셨나 해서요." "네?" "너무 서운하게 헤어진 것 같더구요. 그래서 다음 기회에 런던에서 만날 약속이라도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연락을 드린 겁니다." 지켜보던 저스틴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게 신경을 쓰실 것까가지야... 하여튼 고맙습니다, 메인 씨." "혹시 하그렌드 경감님도 같이 계십니까?" "아, 네?... 미안합니다, 메인 씨." 로만은 확실히 당황해 하고 있었다. 따라서 리차드의 의혹은 더욱 깊어졌다. "하그렌드 경감님은 공항으로 먼저 떠나셨습니다." "그래요?" "네.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뇨, 아닙니다." 리차드는 몹시 당황하고 있는 로만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냥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요..." "다음에 기회가 있겠죠." "물론이죠. 그런데 혹시 무슨 비행기를 타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지금 제가 공항으로 나가면 만날 수 있을 것도 같은데요." "글쎄요..." 로만은 더욱 당황하면서도 감추려는 노력이 역력했다. "그건 글ㅆ요... 미리 여쭙지 않아서 모르겠는데요." 그가 당황해하느 것은 당연했다. 하그렌드 경감은 바로 그이 옆에 있었다. 두 손과 발이 묶 이고 입이 테이프로 봉해진 채 침대에 꼼짝 할 수 없도록 앉혀져 있기 때문에 전화기를 향 해 소리지르지 못할 뿐이었다. "메인 씨." "네." "혹시 제가 경감님께 전해드릴 말이라도 있을까요? 만약 있다면 제가 런던에 가서 전해드리 죠." 리차드는 신경을 온통 상대방에게 집중시키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전화기를 통해 이상 한 소리가 들렸왔다. 짧은 멜로디인데 보통 들을 수 있는 연주와는 전혀 다른 음색이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리차드는 재빨리 사태를 눈치챘다. 로만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그 소리는 리틀 벨이었던 것이다. 리차드는 야외 식당에서 들었던 그 음색을 기억해냈다. 경감 을 묶어놓고 떠날 준비를 끝낸 로만은 리차드가 눈치챈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는 것이 분 명하므로 리차드는 빨리 전화를 끊어야 된다고 판단했다. "아니, 좋아요.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닙니다. 그냥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뵐 수 있을까 물어 본 것 뿐이니가요. 일부러 전해 주 것까지는 없습니다, 로만 씨. 고맙습니다." "그럼 이것으로 됐습니까?" "네. 그럼..." 짐잣 여유 있게 전화를 끊은 후 리차드는 갑자기 서두르기 시작했다. 사태가 어떤 방향으 로 전개되고 있는 지를 이미 간파했기 때문이다. 한시가 급했다. 이미 경감을 죽였을 수도 있고 필요한 경우라면 리차드와 저서틴도 죽일 수 있을 로만이었다. "여오, 빨리 갑시다!" "네?" "가면서 얘기하지. 좌우간 어서 갑시다." "그 호텔로 말인가요?" 리차드는 이미 양복 윗도리를 입으면서 저스틴을 재촉하며 문 쪽으로 급히 걸어가고 있었 다. 저스틴도 이미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면서 그의 뒤를 빠르게 따랐다. 경찰의 지원을 부탁할 겨를이 없었다. 빨리 가지 않으면 또 다른 사람의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 다. 위험한 질주 리차드는 어느 때보다도 전속력으로 차를 몰았다. "어떻게 된 거에요?" 궁금한 저스틴은 대강은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어른을 보채는 아이처럼 리차드를 재촉하며 물었다. "로만이 거짓말을 하고 있어. 경감이 먼저 공항으로 떠났다는군." "그럼 떠나지 않았나요?" "그 방에 같이 있어." "그것을 어떻게 알았죠? 같이 있으면서 없다고 했다면 무슨 조치를 취했을 것 같은데요." "리틀 벨, 기억해?" "리들 벨." "우리가 야외삭당에서 경감을 처음 만났을 때..." "아아, 생각나요!" "전화 도중에 그 소리가 들렸어. 말은 못하게 했다고 해도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거 지." "그렇군요." 저스틴도 비로소 상황을 알아차렸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역시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로만이라면 목적달성을 위해 어떤 짓도 불사할 것이다. "빨리 가요! 참, 그런데 도착한 다음에는 어떻게 할 작정이에요?" "우선 가봐야지." "경찰에 연락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요?" "그럴 시간이 없어. 경감의 목숨이 위태로울 테니까." 로만이 모든 사건의 범인임이 밝혀진 이상 모든 상황을 리차드는 어렵지 않게 추리해 낼 수가 있었다. 공범자가 있다고 해도 대개는 서로가 불신하기 마련이고 끝내는 서로간의 사 움으로 반드시 어느 한쪽이 당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로만은 누군가와 함께 범행을 저지르 지 않은 이상 역시 거금을 혼자서 독차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와 같이 있는 하그렌드 경 감은 직속상관이며 결코 돈에 현혹될 사람이 아니다. 그럼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는 결론은 한가지뿐이다. 돈에 눈이 뒤집혀 남작을 살해한 로만이 하그렌드 경감을 그냥 둘 리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아마 경감까지 살해할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런 후에 로만은 런던이 아닌 제3국 어딘가로 도망쳐 은둔할 것이다. 사건이 전개되기 전 리차드의 이와 같은 추리는 언 제나 한 점의 착오도 없이 정확했다. 정확한 추리와 상황 판단력은 사건을 신속하고 착오없 이 처리하기 위한 리차드의 사전 준비 작업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로만은 이미 하그렌드 경감을 벗어날 완전한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수중에 막대한 현금이 있는 한 그를 막을 문제는 하나도 없었다. 부패한 음식에 파리가 꼬여 드는 것과 같이 돈만 두득이 주면 사람 의 목숨을 파리만도 못하게 생각하는 살인 청부업자가 있는 세상이다. 전 미국에도 독버섯 처럼 서식하는 살인자들의 숫자는 어떤 기록에도 나타나 있지 않지만 아마도 그 수를 헤아 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숫자가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도 로만은 알고 있을 것이다. 로만의 탈출을 도와 줄 수 있는 것은 그가 품에 지니고 있는 돈과 비례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마지막 각오까지 끝낸 로만에게 하그렌드 경감은 거추장스러운 짐짝과 다를 바가 없었다. 로만은 검은 장갑을 천천히 끼었다. 침대에 앉혀진 상태로 전신이 묶이고 입에 테이 프까지 붙여진 하그렌드 경감이 살아있다는 증거는 눈을 뜨고 있다는 것과 얕고 빠르게 가 슴이 움직인다는 것이 전부였다. 경감은 두 눈으로 낱낱이 보고 귀로는 들을 수도 있지만 어떻게 해 볼 도리 없이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었다. 하그렌드 경감은 리차드보다 한발 앞서 로만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것이 그를 죽이기로 결심한 로만은 더욱 부추긴 셈이 되 고 말았지만. 로만은 경감이 그 사실을 런던 경시청에 은밀히 보고했다는 것도 아주 우연하 게 알아낼 수 있었다. 이미 각오한 일이지만, 만일 런던을 돌아간다해도 로만은 즉시 체포될 것이다. 그는 묶여 있는 상태에서도 두 눈을 치켜 뜨고 있는 하그렌드를 향해 조소가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어요, 경감님?" 입이 틀어 막힌 경감은 대답도, 그렇다고 손이나 발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왜요, 당신의 천재성이 마지막에 뒤집힌 건가요?" 하그렌드 경감은 막힌 입으로 무엇이라고 웅얼거렸다. 몸을 뒤틀어 보기도 했지만 꼼짝할 수가 없었다. 수사관 경력을 통해 로만은 하그렌드 경감을 완벽하게 결박할 수가 있었다. 이 순간 하그렌드 경감은 메인 부부를 생각하고 있었다. 묘한 일이었다.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그들뿐이라는 믿음과 함께 그들이 아닌 다른 사람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와주지 않으면 로만에게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묘한 위기감과 긴박감조차 느껴졌다. 조금 전 걸려왔던 전화가 리차드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부 터 경감은 떨림조차 느끼지 못했다. 때마침 리틀 벨이 소리를 내주었기 때문에 메인 씨가 그 소리를 들었다면 틀림없이 그를 살리기 위해 달려올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로만은 마지 막 순간을 앞두고 있는 직속상관에게 자못 동정하는 투로 말을 걸었다. "정말 안됐군요, 경감님." 간발의 차이로 죽을 수도 있고 살아날 수도 있는 운명 앞에서 경감은 전신에 식은땀이 흐 르는 것을 느꼈다. "경감님, 모를 척할 일이지 무엇하러 그런 일을 보고했죠? 모른 척했으면 나도 생각을 달리 할 수도 있었을지 모르는데..." 경감의 두 눈에 절망과 분노의 빛이 뒤섞여 번뜩였다. 수족이 자유롭다면 로만이 비록 자 신보다 젊다고는 해도 죽는 일이 있어도 싸우고 싶었다. 싸우다가 죽는다면 이보다는 덜 억 울할 것 같았다. 양손에 검은 장갑을 낀 로만은 전화기를 들었다. 그는 경감을 결박한 후 곧 장 프론트에 헬기를 부탁해 놓았다. 자동차를 이용함으로 해서 일어날 수 있는 위험을 피하 기 위한 방범이었다. 돈이 있으므로 제트기라도 부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돈만 가지고 있다 면 뭐든 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그였다. "여보세요, 프론트죠?" "그렇습니다.." "717호 로만입니다. 헬기는 어떻게 됐소?" 그를 쳐다보는 경감의 눈에 절망의 빛이 조금씩 짙어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로만 씨. 곧 헬기가 도착할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호텔의 프론트에서는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언제나 고객의 원할 경우 호텔측은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특히 자금을 많이 갖은 손님일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이봐요, 난 지금 즉시 공항으로 나가야 된단 말이오!" "다시 연락해 드리겠습니다." "알겠소." 로만은 헬기를 부탁할 대 행선지는 공항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또 다른 계획도 가지고 있었 다. 로스앤젤레스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는 것이 안전한가, 안전하지 않은가에 대해 사실상 로만은 정확한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그렌드 경감을 잡아놓고 있기 때문에 일단 자신의 신변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 다. 런던경시청에 자신의 행적이 모두 보고 되어 있으므로 경시청 사람들은 런던에서 경감 이 자신을 체포해서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 문명하다. 따라서 형사들을 로스앤젤레 스까지 파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항에서 여객기를 이용하는 데 는 아무런 위험 도 없다. 로만은 로스앤젤레스 경찰국이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도 확신했다. 로스앤젤레스 경 찰당국은 죽은 남작이 쥐고 있던 총에 공포탄이 장전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의혹을 느끼긴 했지만 아작 직접적인 조사를 벌이고 있지는 않았다. 리차드가 직접 뛰어든 이유도 바로 여 기에 있었다. 로만은 로스앤젤레스 공항이 아직까지는 안전할지 몰라도 만약을 대비해서 도 다른 차선책도 마련해 놓았다. 헬기에 일단 탑승하기는 하지만 상황판단에 따라 필요하면 다른 공항으로 날아갈 작정이었다. 미국에는 사설 비행장이 여러 곳에 있다. 그 가운데서 한 곳을 찾아 소형 비행기를 저네 낸다면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원하는 어떤 지역으로도 도망갈 수 있으며 수중에 두둑한 돈까지 있다고 생각하자 로만은 거리낄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꼈다. 그는 이제 드디어 경감과 작별할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먼저 경감을 처리한 후에 헬기가 도착하는 대로 옥상에서 헬기를 타고 탈출하면 모든 문제가 완 만하게 끝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얼굴에 잔인한 미소를 띄우며 커다랗게 뜬 경감의 두 눈을 내려다보았다. "이봐요, 나이젤." 로만은 이제 경감에 대한 예의를 잊어버린 듯 말했다. "그 동안 줄곧 당신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소. 그게 뭔지 짐작하겠소?" 묶여 있는 경감이 몸을 뒤틀리듯 움직였다. "당신같이 건방지기 짝이 없는 돼지 밑에서 조수 노릇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당신은 아마 모를 거요, 경감." 경감의 입 속에서 헛소리 비슷한 웅얼거리는 소리가 잠깐 들렸지만 이내 뚝 그쳤다. "이젠 모든 것이 다 끝났소. 경감." 이번에도 경감의 두 눈에서 불이 뿜어 나올 것 같은 열기가 돌았다. 로만이 최후의 발악을 하는 짐승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 동안 엄격하게 지켜왔던 경감과 조수의 입장을 뒤바꾸어 보려고 하는 로만의 태도가 경감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간은 어김 없이 초조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초조의 한계를 뛰어넘은 긴박함이었다. 한 사람의 생명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었다. 교활하고 잔인한 범죄자에 의해 생사 여부가 달린 매우 긴 박한 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경감의 예측처럼 리차드는 그때 저스틴을 태우고 교통 법규도 무시한 채 뉴 파더 호텔을 향해 질주하는 중이었다. "한 가지 당신을 칭찬하고 싶은 것이 있네, 경감. 그래, 나를 남작의 동업자로 투입시킨 것 말야. 아주 완벽한 작전이었지. 그렇게 부하의 신분을 파악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자네 책 임이야, 경감." 그가 지껄이고 있는 조소와 경멸을 묶인 채 듣고 있는 경감은 분통을 충분히 터뜨리고도 남을 만했다. "덕분에 난 그 돈을 클럽에서 바꿔치기하고 증거가 될 수 있는 남작은 아예 죽여서 없애 버 렸지." 모든 사건과 범행 일체가 로만의 입을 통해 밝혀지고 있었다. 경감은 지금이라도 리차드가 빨리 와주기를 난생 처음 하느님께 간절히 빌었다. 반평생 동안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한 번도 기도를 드리지 않은 그였다. 로만은 이제 자신의 모험담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시끄 럽고 유난스럽게 털어놓고 있었다. "난 이번에 또 다시 2백만 달러를 손에 거머쥐었네, 경감. 이제 남은 일은..." 로만은 거기서 잠깐 말을 멈추며 창문 밖의 동정을 살폈다. 저스틴이 남작을 만나도록 경감이 부탁했을 때 리차드는 전적으로 반대했었다. 그건 돈 때문이었다. 영국 경찰이 신변을 보장해준다 해도 일단 돈을 가지고 나가지 않으면 위험하 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경감은 영국 정부가 이미 막대한 돈을 이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출원해 왔기에 돈 문제에 과해서는 난색한 표명했다. 그때 돈이 꼴 필요하다고 동조한 것은 로만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로만의 음모는 그때부터 이미 세워진 셈이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알겠나, 경감? 하니 하그렌드?" 경감은 발목이 묶인 두 발을 비틀었다. 그러나 발뒤꿈치로 겨우 한 번 굴렀을 뿐이다. "그건 바로 당신을 영원히 잠재우는 일이지. 그것으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끝나게 된다네. 가엾은 경감." 같은 시간 리차드는 계속 교통법규를 무시하면서 비교적 한가한 외곽 도로를 골라 전속력 으로 달렸다. 그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폭주였다. "여보." 무심코 백미러를 쳐다보던 저스틴이 다급하게 불렀다. "왜." "저기 경찰이 있어요." "그래?" "갈림길 입구에요." "할 수 없지!" 리차드는 차의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달렸다. 결과는 불보듯 뻔했다. 심상치 않게 지 켜보고 있던 모터사이클의 순찰 경관은 서둘러 쫓아오기 시작했다. "우릴 쫓아와요." "나도 알아. 젠장." 좀처럼 비속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리차드도 욕이 튀어나왔다. 교통경찰이 과속 차량 을 단속하는 임무는 당연한 일이지만 현실적인 김박감이 그로 하여금 평소와는 달리 침착하 지 못한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다. 모터사이클은 사이렌을 울리며 맹렬히 추격해 왔다. 리차 드는 뉴 파더 호텔까지 남은 거리를 추정해 보았다. 아무래도 그냥 무시하고 계속 갈 수는 없다는 판단이 들었으므로 우선 차를 길가에 세웠다. 급히 추적해 온 경찰은 경계하며 서둘 지 않고 리차드가 탄 차로 접근해 왔다. 일 초가 급한 리차드로서는 경찰관이 임무의 절차 를 밟을 때가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집사람이 만삭입니다." "그래요?" 경찰관이 반사적으로 저스틴의 배를 살폈다. "언제 아이가 나올지 모릅니다. 굉장히 급해요." 저스틴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제했다. 난데없는 임신이라니! 더구나 분만 운운하며 자신을 만산의 임산부 취급을 하는 데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은 아직 젊은 청년이었다. 그는 저스틴을 한번 쳐다본 다음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임신한 여자치고는 너무 날씬한데요?" "평소 체중이 조금밖에 나가지 않았거든요." "그래요, 그래도 안되겠습니다. 저를 따라 오시죠." 경찰관은 자기의 오토바이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한시가 급한 리차드는 힘껏 액셀레이 터를 밟았다. 동시에 자동차는 요란한 굉음을 터뜨리며 쏜살 같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정지!" 경찰관이 소리쳤을 대는 이미 리차드의 자동차는 백여 미터도 더 나간 상태였다. "제기랄!" 경찰관은 투덜거리며 정신없이 뒤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다시 경찰 오토바이와 리차드가 탄 자동차와의 거리가 점차 좁혀지는 가운데 치열한 경주가 시작되었다. 리차드는 나름대로 계산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의 속도와 간격이라면 다시 붙잡히지 않고도 뉴 파더 호 텔에 도착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잠시 후 리차드는 도로에서 급히 돌아 호텔의 입구로 진 입했다. 그때 거의 다 따라온 경찰 오토바이도 호텔 입구로 진입했다. 리차드와 저스틴이 호 텔에서 서둘러 내리는 것을 보며 이상하게 생각한 경찰관이 소리쳤다. "이봐요! 이것 봐요." 둘은 이미 현관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거긴 산부인과가 아니고 호텔이에요. 호텔!" 리차드는 급히 뛰어가면서도 뒤를 돌아다보며 소리치는 여유를 보였다. "우리 집사람은 언제나 호텔에서 분만해요!" 어리둥절해 하며 서 있던 경찰관이 다시 바라보았을 때 리차드와 저스틴은 이미 호텔 안으 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경찰관은 잠깐 헛것을 쫓은 것이 아닌가 하는 표정을 지은 채 계 속해서 멍하니 서 있었다. 극히 짧은 순간 때문에 경감의 목숨이 좌우되는 상황에서 격식을 차릴 겨를이 없었다. 그는 사람들을 마구 밀치며 뛰어가고 있었다. 행복한 시간 시시각각 상황은 숨막히게 전개되고 있었다. 리차드가 호텔의 로비에 들어섰을 때 그 건 물 옥상에서는 이미 헬레콥터의 프로펠러 소리가 주변의 소음을 제압하고 있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로만은 프론트의 연락을 받고 있었고 같은 시각 리차드와 저스틴은 엘리베이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5층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중이었다. "계단으로 올라갈까?" "그래도 엘리베이터가 빨라요." "왜 빨리 내려오지 않지?" 리차드는 유난히 시간이 길다고 느끼며 초조해 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로만이 전화기를 들었다. "로만 씨, 방금 헬기가 도착했습니다." "좋아요. 곧 올라가겠소." "짐을 들어다 드릴까요?" "아니, 괜찮소." 듣고 있던 경감의 얼굴에 절망적인 표정이 나타났다. 끝났다는 생각과 함께 자신의 인생역 정이 머리 속에 스쳐지나 갔다. 로만은 권총 속에 실탄을 확인한 다음 침대에 앉아 있는 하 그렌드 경감의 곁으로 다가섰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겠소. 경감? 그 도안 나를 위해 수고가 많았소. 덕분에 이제 부자가 됐으니 죽을 때까지 고맙게 생각하겠소." 삶과 죽음의 어긋난 대립이었다. 로만과 하그렌드는 서로 다른 갈림길에 서서 서로를 대하 고 있었다. 죽음은 하그렌드의 몫이고 삶과 풍요 로만에게 부여된 최고의 선택인 셈이다. "잘 가시오, 나이젤 하그...렌드..." 로만은 서서히 권총을 들어 경감의 관자놀이를 겨냥했다. 이젠 총구를 정확히 조준할 필요 없이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된다. 한 바르이 무쇠덩어리가 경감의 머리를 관통하려는 순 간이었다. 이 순간 일 초는 평소에 느꼈던 것의 수백 아니 수만배나 되는 것 같았다. 로만의 손가락이 권총의 방아쇠를 천천히 당기기 시작할 때였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출입문이 열 리며 두 사람이 쏟아지듯 들어 안으로 들어왔다. 리차드와 저스틴이었다. 난데없는 방해꾼에 로만은 놀라 당황했다. 리차드는 로만이 정신을 차릴 겨를을 주지 않고 힘껏 몸을 날려 덮 쳤다. 로만은 그에게 떠밀려 바닥에 쓰러졌고 리차드는 로만을 부둥켜안고 나뒹굴며 격투를 벌렸다. 두 사람의 치고 박는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저스틴은 결박당한 하그렌드 경감을 서 둘러 풀어 주었다. 그 사이에 리차드는 그를 벗어나 도망치는 로만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갔 다. 그는 리차드보다 젊고 힘도 강했으며 경찰학교 출신답게 무술도 수준급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경찰이 아니라 단지 쫓기는 범법자일 뿐이므로 몸에 익힌 무술로 리차드를 때 려눕힐 여유가 없었다. 옥상에서 헬기가 이미 대기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타고 도망치는 것 만이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에 리차드를 뒤로하고 도망치는 치에 급급했다. 리차드 역시 필사적이었다. 어떤 위험이 닥친다 해도 로만의 탈주는 반드시 막아야만 했다. 옥사에서는 헬기가 이륙 준비를 한 채 대기중이었다. 필사적으로 옥상으로 도망친 로만은 거세게 헬기 안으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이륙시켜!" 조종사는 손님을 기다리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어리둥절하였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 황이기도 했지만 또 뒤이어 쫓아오는 리차드의 모습을 보고는 더욱 어쩔 줄 몰라했다. "뭘 해!" "저기 또 한 사람이..." "당장 이륙시켜!" 리차드는 헬기를 향해 달려가며 소리쳤다. "정지! 조종사, 이륙시키면 안돼요!" 조종사는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는 더욱 어찌할 바를 몰랐다. 뒤쫓아 달려온 리차드를 본 로만은 눈이 뒤집혔다. 그에게 붙잡히면 끝장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조종석을 맡길 수가 없었다. 그는 어리둥절해 있는 조종사를 별 안가 헬기 밖으로 밀어버렸다. 무방비상태였던 조종사는 아래로 떨어졌다. 로만은 경찰학교 에서 익힌 조종술로 헬기를 이륙시켰다. 이때 뒤따라온 리차드는 점프해서 헬길 기체에 겨 우 매달렸고 두 팔의 힘으로 공중에서 지탱하며 헬기로 올라가려하고 있었다 조종하던 로만 은 조종간을 잠시라도 놓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기어오르는 리차드 역시 그대로 방치할 수 는 더 더욱 없는 입장이었다. 겨우겨우 발길질을 시도하긴 했지만 리차드는 가볍게 받아넘 길 뿐이었다. 그때 저스틴과 하그렌드 경감이 옥상으로 뒤이어 뛰어올라왔다. 그들은 공중에 있는 헬기에 매달려 필사적으로 기어오르려는 리차드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 다. 저스틴은 어쩔 줄 몰라하며 곁에 있는 경감의 팔을 붙잡았다. 숨막히는 순간의 연속이었 다. 리차드가 만약 헬기에서 떨어진다면! 저스틴은 숨도 쉴 수가 없었으며 몸은 사시나무 떨리듯 했다. 다만 리차드가 무사하기만을 무아지경 상태에서 혼신의 정성으로 빌 뿐이었다. 리차드는 드디어 헬기의 조종실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상황은 훨씬 안전해졌다. 적어도 손을 놓쳐 떨어질 염려가 없어진 것이다. 로만은 계속 조종대를 잡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리차드의 일격에 왼쪽 뺨을 얻어맞았다. 리차드는 우선 조종실에 있는 돈 가방을 집어 밖으 로 내던졌다. "내 돈!" 로만은 리차드에게 얻어맞은 와중에서도 소리쳤다. "그건 가짜야!" 리차드가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가방이 뒤바뀐 것 은 로만이 하그렌드 경감을 결박하기 전, 그가 로만의 행동을 런던 경시청에 보고한 직후에 취해진 조치였다. 리차드는 싸우는 도중에 로만이 도망칠 때 들고 있던 가방이 바뀌어 있는 것을 알았다. 로만과 격투하는 사이 리차드는 경감의 신호를 통해 재빨리 상황을 알아차렸 다. 가방 속의 돈이 가짜라는 말에 로만은 조종간을 놓고 리차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제 는 헬기가 추락하는 것은 상관할 때가 아니었다. 리차드를 죽이고 싶을 뿐이었다. 그는 이성 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고 리차드는 오히려 침착성을 되찾아 냉정하게 로만을 상대했다. 오 른쪽 팔꿈치를 이용해 명치끝을 힘껏 가격해올 때 로만은 기절했다. 자가용 헬길 몰고 다닌 경험이 있기 때문에 조종을 할 수 있는 리차드는 조종석으로 얼른 자리를 이동한 후에 헬기 의 기체를 바로 잡으면서 천천히 능숙하게 착륙을 시도했다. 옥상에서 쳐다보고 있던 저스 틴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됐어요 경감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며 박수를 쳤다. "그렇군요, 부인!" 하그렌드 역시 감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윽고 헬기가 리차드에 의해 옥상에 무사히 착륙하자 저스티은 소녀처럼 뛰어갔다. 방금 의식이 회복된 조종사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상 태여서 헬기와 저스틴, 하그렌드 경감을 번갈아 쳐다보며 정신을 차리는 중이었다. "여보!" "다 끝났어!" 저스틴은 빨리 남편에게 안기고 싶었다. 그러나 리차드는 기절한 로만을 조종실에서 끌어 내는 중이었다. "경찰에 연락했소?" "경감님이 하셨어요." 곁으로 다가온 하그렌드 경감은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로만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고 저스틴이 리차드에게 말할 기회를 주기 위해 가볍게 미소 지으며 입을 다물고 있는 배려를 보였다. "로만은 이제 곧장 감옥으로 가야겠군요, 그렇죠?" "운 좋게 손에 넣은 2백만 달러는 한 푼도 써 보지 못하고 말이지?" "그래요." 비로소 저스틴은 리차드의 가슴에 힘껏 안겼다. 그녀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남편과의 재 회를 맛보는 것처럼 깊은 기쁨을 느꼈다. "정말 감사합니다. 메인 씨." "별 말씀을." "이렇게 구해 주시지 않았으며 지금쯤 하늘나라에 가 있었을 겁니다." 그들은 한꺼번에 소리내어 웃었다. 메인 부부의 애정은 리차드가 경영하고 있는 메인 그룹의 모범적인 성장과 경영 실적만큼 이나 유명했다. 세계의 여러 나라에 지사를 두고 있는 메인 그룹의 경영 실적은 가히 세계 적이었다. 결코 경쟁기업을 부당한 방법으로 침해하지 않았으며 도산된 기업을 인수할 때에 도 가장 합법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된다는 것이 총수인 리차드의 경영철학이었다. 런던 경 시청의 하그렌드 경감과 로만 경사에 얽힌 사건이 완전하게 해결된 것도 리차드의 정의감과 용기가 무엇보다도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공중에 떠있는 헬기 안에서의 격투까지 불사하면서 사건을 해결했던 것이다. 그날 밤은 메인 부부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이들 은 그들만의 매우 특별한 게임을 즐겼다. 그들은 특별히 기쁜 일이 있을 때에도 게임을 즐 기곤 했다. 그날도 여지없이 그들은 로만 문제를 해결한 후의 가벼워진 마음으로 게임을 즐 기는 중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체스게임 같지만 자세히 보면 말판이 다른 체스와 전 혀 다른 것임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있잖아요." 저스틴은 게임 도중 갑자기 말을 꺼냈다. "방금 생각이 났어요." "무슨 생각이지?" "만일 로만이 진짜 돈이 들어 있는 가방을 탈취해 가지고 무사히 헬기를 탔다면 어떻게 됐 을까요?" "글쎄, 어떻게 됐을까?" 이들은 이미 긴 시간 동안을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조건은 돈 내기였다. 누구든 패하면 용서없이 돈을 내야한는 내기였다. "아마 그 돈 가방이 떨어졌으면 로스앤젤레스에 돈으로 만들어진 비가 뿌려졌을 거예요." "그거 재미있는 말이군, 돈 비라." "그럼, 그렇지 않겠어요, 2백만 달러나 되는데." "글쎄?" 리차드는 저스틴의 질문에 대답하면서도 말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상황은 저스틴보다 그가 유리하도록 진행되는 중이었다. "당신도 로만처럼 운이 다 된 모양이지. 보라고, 이걸 어디에 놓지?" "저런!" 저스틴은 비로소 자신이 불리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긴 메인 플라자 호텔이야. 여기에 오면 5천 달러를 내야 돼, 큰일났군." 이들이 사용하는 말판에는 리차드가 말한 것처럼 각종업소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호텔에도 등급이 있는 것처럼 어떤 패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내기 금액에 차등이 생기는 것이었다. "5천 달러씩이나?" "물론이지." "음... 난 지금 7백 50달러뿐인데 어쪄죠?" "그렇다면?" 저스틴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그녀의 뇌리를 스쳐가는 옛일로 잠깐 미소를 띄우 면서 말을 이었다. "그 대신 다른 것으로 대신하면 안될까요?" 그녀의 생각이 기발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 았기 때문이다. 필경은 돈이나 물건이 아닌 색다른 제안을 할 것이다. "대신할 만한 것이 있었나?" "물론 있지요." "궁금한데?' 그녀의 마음을 알기 위해 리차드는 빤히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비 슷한 예가 언젠가 있었던 것을 리차드도 기억해 내었다. 결혼하고 여러 해가 지났지만 이들 은 아직 연애하는 기분으로 살아가도 있었다. 그런 느낌은 철저하게 저스틴이 고수해 온 편 이었다. 가끔 리차드는 그녀의 벗은 몸을 밝은 곳에서 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녀는 곡 필 요할 때 외에는 절대로 벗은 맨살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런데 메인 부부는 언젠가 게임을 하면서 질 때마다 옷가지를 한 가지씩 벗는 게임을 했었다. 그때 리차드는 마치 결혼하기 전처럼 기대에 가득 찼다. "당신 정말이지?' "좋아요." "당신이 질 때마다 옷을 하나씩 벗는 거지? 나중에 다른 말을 하면 갑별로 갚아야 해, 알겠 지?" 그렇게 시작한 게임에서 저스틴은 계속 패했다. 고의적으로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이 안일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에 없는 패배를 거듭했었다. "자, 어서!" 한 번 패할 때마다 리차드는 더욱 들뜬 표정으로 재촉했다. 한 번 약속한 이상 저스틴은 약속들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년의 용기는 조심성과 별개의 거신 것만 같았다. "알겠어요." 저스틴도 어쩔 수 없이 한가지를 벗으면서 약간 약이 올랐다. 이런 식으로 게임을 계속 진 행되었고 도 저스틴 쪽에서 계속해서 졌다. 규칙은 지키라고 만들어진 것이다. "계속할 거야?' "그럼요." 저스틴은 태연하려고 애쓰면서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이었으며 가리거나 피하지도 않았 다. 결국 이 게임은 저스틴이 리차드에게 알몸을 공개 한 채 끝나게 되었다. 로만에 대한 사건의 완전한 해결이 가져다준 만족감과 여유로움에서 저스틴은 색다른 조 건을 제시하려는 것 같았다. 그때를 잠깐 회상해 보던 리차드는 일단 저스틴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안 돼. 5천 달러 내." "정말 그래야만 되겠어요." "물론이지." "할 수 없군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저스틴은 언제 준비했는지 소파 뒤쪽에 있던 가방을 꺼냈다. "자, 어때요?" 그녀가 뚜껑을 열자 가방 속에는 장난감 지폐가 가득들어 있었다. 지난번 런던에서 가져온 그 가방이었다. 복면으로 변장한 하그렌드 경감과 지금은 교활한 범법자로 체포당한 로만이 훔쳐내려다 실패한 바로 그 가방이었다. "안돼!" "그건 위반이야." "위반이라고요?' "위반이지, 그럼." "지금껏 내 돈을 모조리 따 놓고 그래도 부족해요?' "당신 화났어?" "몰라요." "난 정상적인 게임으로 이겼을 뿐이야." "알았어요.' 저스틴의 기분은 어느 틈에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두 눈에는 벌서 따뜻한 미소가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리차드는 저스틴에게 낮게 속사였다. "우리 그만할까?" "그게 좋겠어요." 그들의 가운데에 쪼그리고 앉아서 둘을 지켜보던 프리웨이가 작은 소리로 짖으며 나갔고 이때부터 그들은 둘 만의 행복을 시간을 이어갔다. 변신한 친구 "메인 씨" 오전에 시내에 나갔다. 돌아온 시고니가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시고니?" 그와 생활해 오는 동안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리차드는 이미 시고니에게 어떤 문제가 발 생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얘기해 봐요." "그런데 그게 좀..." 시고니가 이렇게 망설이며 이야기를 꺼냈던 적은 별로 없었다. 그들은 단순한 주인과 하인 의 관계가 아니라 한 가족이나 다름이 없었다. 사실상 시고니가 리차드에게 못할 말이란 없 었다. "얘기해 봐요, 시고니. 내가 도울 일이라도 있나요?" "그보다 조언이 필요합니다." "그래요?" "네." 시고니는 다시 한 번 망설인 끝에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제 친구 가운데 존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리차드는 시고니의 기분을 파악했기에 더욱 신중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 친구는 돈이 좀 많죠." "네..." "원래는 빈민가에서 태어났지만 크게 성공한 사람입니다. 저보다는 좀 젊습니다만. 그 동안 무엇을 해서 그렇게 많은 재산을 모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업을 하나요?" "네 여러 가지 사업에 손을 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네." "그런데 이번에 그 친구가 로스앤젤레스로 다시 돌아왔어요." "돌아와요?" 리차드는 아직 시고니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짐작을 못하고 있었다. 다만 시고니에게 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는 정도만을 파악할 뿐이었다. "네. 돌아왔어요. 그런데 이 친구가 좀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있더군요. 그래서 메인 씨와 상의를 하려는 겁니다. 전 원래 말재주가 없어서...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 겠군요." 그때 저스틴이 욕실에서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나왔다. 그녀는 가끔씩 오후에 샤워하는 습관이 있었다. 외출하지 않고 집에 있을 때, 그녀는 자주 샤원를 하곤 했다. 로만에게 재판 을 걸쳐 실형이 선고된 후 오랜만에 메인 부부는 느긋한 시간을 함께 집에서 보내고 있었 다. 그 동안 런던 경시청의 하그렌드 경감으로부터 몇 차례 전화가 왔었다. 금연간 미국에 올 것 같으며 그때 꼭 로스앤젤레스에 들르겠다는 것이었다. "무슨 얘기예요. 여보?" 시원하게 샤워를 끝낸 저스틴은 상쾌한 표정으로 리차드와 시고니를 바라보았지만, 시고니 의 표정에서 문득 심각함을 느꼈기 때문에 그녀도 정색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지금 시고니하고 그의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야. 시고니, 어서 얘기해 봐요." "네, 메인 씨. 메인 부인께서 들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저스틴은 더욱 의아하게 생각하며 리차드의 옆으로 자리를 고쳐 앉았다. "존, 그 친구는 동부구역의 빈민가 출신입니다. 그렇다고 빈민굴에서 태어났거나 자란 건 아 닙니다. 그래도 학교는 제대로 다닐 수 있는 집안이었죠." 리차드는 들으면서도 나름대로 시고니의 이야기를 정리하려 애썼다. 시고니는 마치 한 편 의 소설을 시작하려는 것처럼 서두를 꺼내고 있엇다. 분위기로 보아 재촉하거나 앞서서 물 어볼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제가 친구와 사귀게 된 것은 벌써 오래 전 일이죠. 그것도 아주 이상한 인연으로 말입니다. 지금은 그 친구와 제 입장이 하늘과 땅의 차이를 보이지만 당시만 해도 그렇지는 않았습니 다." 리차드는 특별한 계획이 없는 만큼 이날만큼은 시고니를 위해 할애해야 되겠다고 생각했 다. 시고니는 존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로스앤젤레스의 거주지역 중에는 특수한 구역이 있었다. 미국에선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구역이 있는가 하면 뉴욕 등과 같은 대도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매우 지저분한 빈민굴이 도심의 변두리에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자기 잡을 가지고 있다 해도 하류층에 속해 있으며 주변에는 부랑아들이 들끓었다. 부랑아의 무리에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아이에서 노인 까지 연령층은 다양했으며 남녀의 구별도 없었다. 대낮에도 길가에 누워 잠든 사람들이 있 었고 여기 저기서 왕래하는 행인들에게 손을 벌린 아이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어 울려 싸움질을 하거나 도둑질을 하는 그곳은 미국이 아닌 완전한 이색지대처럼 보였다. 20 년 동안, 어디에 가서 어떤 사업을 했는지 도무지 통 소식을 전하지 않던 존이 그 지역으로 돌아온 것은 나름대로 굉장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그가 시고니를 찾은 것 역시 의외의 일로, 뭔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지기 전의 전초전처럼 느껴졌다. 시고니 도 전혀 존이 어디에 살고 있으며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 그를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 인 호텔 커피숍으로 나갔다. "안녕하신가, 존. 오랜만일세." 시고니는 전처럼 그를 대하면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잘 있었소, 시고니?" 존의 태도는 이미 그 전의 그가 아님을 느끼게 했다. "나야 뭐 항상 그렇지." 시고니는 존의 모습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볼수록 존에게서는 돈 냄새가 물씬 풍겼다. 재벌의 총수이기도 하듯, 느껴지는 분위기가 사뭇 예전과는 달랐다. 재벌이라며 메인 그룹의 총수인 리차드 메인을 손꼽을 수 있지만, 그 에게 는 전혀 대 그룹의 총수라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다. 평범한 사업가 정도로만 보일 뿐이었다. 다름 사람이 메인 그룹을 최고 경영자 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그를 만나게 된다면 분명히 평범한 신사 정도로만 알아볼 것이다. 저스틴 메인도 마찬가지였다. 별도로 사교계에 출입하지 않았으며 항상 난편을 가진 아내로 서 현숙하고 검소하게 생활해 왔다. 번쩍거리는 장신구를 달고 다니지도 않았고 최고급의 미용실에서 비싼 서비스를 받지도 않았다. 메인 그룹이 기타 재벌 그룹에 비해 계속 향상되 면서 견실하게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는 밑거름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존에게선 전 혀 그런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돈 냄새만 풍길 뿐이었다. 말투와 태 도, 몸짓 등이 너무나도 어색했으며 그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시고니는 의아하며 이어서 조금씩 실망하기 시작했다. 친구하고의 의리라면 자신의 목숨도 마다 않는 것이 시고니의 성격이긴 했지만 몇 년만에 만난 존의 모습은 충분히 그를 실망시킬 만큼 변해 있었다. "존, 이제 보니 신수가 아주 훤해졌는데 좋은 사업이라도 하는 모양이군?" 시고니는 자신도 모르게 말투가 어색해졌다. 백만장자 앞이라 하더라도 의기소침해지거나 주눅들지 않는 성격임에도 이상하게 존은 어색할 상대로만 느껴졌다. "당신은 지금 뭘 하고 있소?" "나야 뭐 메인 씨 댁에서..." 시고니는 재빨리 거기서 말을 바꾸었다. "그렇지, 원래 가진 게 없는 사람이니까. 큰 변동이야 없지 않은가." 존이 등뒤로 서류 가방을 옆에 낀 두 명의 신사가 다가왔다. 언뜻 보기에도 법조계에서 일 하는 사람임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강한 인상을 풍겼다. 그 중의 한 명이 공손하게 존에 게 말을 걸었다. "회장님, 준비됐습니다." 시고니는 깜짝 놀랐다. 서류 가방을 가진 신사는 존에게 회장님이라는 존칭을 깍듯이 사용 했기 때문이다. 회장님이라니, 놀라움은 시고니가 근래에 가졌던 어떤 사건보다도 컸다. "수고했고, 닉 그리고 와그너 당신도?" "예, 회장님, 저도 분부하신 대로 처리해 놓았습니다." "고맙소, 와그너." 시고니는 갑자기 앉아 있는 자리가 불편해졌다. 오지 말아야 될 자리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참, 시고니. 이쪽은 내 고문 변호사들이오. 닉과 와그너. 그리고 이쪽은 오래 전 내가..." 존의 소개에 시고니는 더욱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고문 변호사를 두 명씩 두고 있는 존을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몰랐다. 리차드에게도 고문 변호사들은 있다. 그것을 특별히 이상하 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존의 출신이 빈민가였기 때문에 더 더욱 놀라는 것 이다. 전체적으로 시고니는 존이 이미 옛날에 알고 지내던 그 친구가 아님을 확실하게 깨닫 게 된 셈이다. "시고니 내가 당신을 보자고 한 것은 오랜만에 보고 싶기도 하고 또 도움을 받고 싶어서였 소." "내 도움이야 뭐..." "앞으로 차차 이야기하겠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이 지역에서 계속 살아온 당신의 도움이 필 요하오." 시고니는 가만히 앉아 존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날 위해 시간 좀 더 내줄 수 있겠지?" "오래 걸리지만 않는다면야..." 시고니는 말할 때마다 말끝을 흐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떤 경우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던 그의 모습이다. "잠깐이면 되오." 존은 차분히 강압적이었다. 자신이 결정하기만 하면 끝난다는 식이었다. 별도로 상대의 의 견을 참고할 의사가 전혀 없어 보였다. "닉, 가서 차를 대기시키시오." "네. 회장님." "그리고 와그너, 시고니를 차까지 안내하시오." "알겠습니다. 회장님." 존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명의 변호사가 공손히 곁에 서 있는 모습 속에서 시고니 는 문득 변호사라는 직업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하찮은 직업에 불과했던 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시죠." 시고니는 와그너 변호사의 일방적인 안내를 받으며 호텔을 나섰다. 호텔 밖에서는 그 어느 누가 타더러도 안전할 것 같은 리무진이 운전사와 함께 대기중이었다. 어쩔 수 없이 시고니 는 다시 리차드 메인을 생각했다. 존의 재정적이며 사회적인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 직 미지수다. 그러나 시고니가 생각하기에 리차드 메인의 맞수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장 담할 수는 없지만 메인 그룹에 대한 사회적인 지명도와 성공을 시고니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껏 메인 부부의 집에서 함께 살면서 리차드가 리무진을 타는 것을 본 적이 없 었다. 언제나 그는 자신의 몸처럼 아끼는 소형 자동차만을 애용했다. 시고니가 아는 한 그 차가 고장만 나지 않는다면 리차드의 손에서 벗어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일행을 태운 2대 의 리무진은 시가지를 약 10분 동안 지나 어느 빌딩 앞에 도착했다. 이때도 존이 차에서 내 리자마자 사람들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두 명의 변호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몇 명의 건장 한 청년들이 경호원처럼 존을 호위하는 가운데 일행은 빌딩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존을 선두로 그의 좌우와 뒤를 따라 걸으며 엘리베이터를 향했고 일행 뒤를 시고니도 변호사와 나란히 걸어갔다. 청년들 중에서 몹시 불량해 보이는 몸집이 큰 사람도 있었고 날렵하고 눈빛이 매우 날카로워 보이는 사람도 보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존을 에워싸며 마치 보스를 둘러싼 경호원처럼 걸었다. 그것은 마치 어떤 영화의 한 장면을 영상하게 할 정도로 절도 있었고 엄격했다. 시고니는 빌딩 안으로 들어설 때 빌딩이 몇 층이었는지 미처 보지 못했다. 초고속의 엘리베이터가 멎었을 때에야 비로소 35층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다시 한번 놀랐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40층에 달하는 그 빌딩의 주인은 존이었다. 일행이 들어간 곳은 드넓은 사무실로 안에는 회의실로 꾸며진 곳이었다. 동시에 수십 명도 넘게 앉을 수 있는 자리와 긴 테이블, 정면에 서리된 상황판 등등. 시설도 최첨단으로 갖추진 곳이었다. 시고니 는 시간이 지나자 눈으로 보이는 것 외에 더 굉장한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존이 회장석에 자리를 잡고 앉자 뒤쪽에 청년들이 섰으며 두 명의 변호사 가 존의 앞, 양쪽 자리에 앉았다. 시고니는 특별히 존의 옆에 자리잡고 앉아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닉, 이제 시작할까?' "알겠습니다." 닉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상황판으로 보이는 공간이 커튼에 가려 져 있었다. 닉이 커튼을 천천히 열어 그 안의 내용을 보이기 시작하자 시고니는 깜짝 놀랐 다. 존을 만나면서부터 계속해서 놀랄 일을 겪어 왔지만 이 광경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실제 와 똑같은 조형물의 모형이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그곳이 어느 지역 인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로스앤젤레스 외곡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빈민구역이 놀라울 만큼 정교하게 구체적을 만들어져 있었다. 허물어져 가는 건물들, 판잣집들, 공동수도, 심지 어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거리들까지 똑같이 표현되어 있었다. "어떻소, 시고니. 이곳이 어디인지 알겠소?" 존이 물었을 때 시고니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동안 넋을 잃은 사람처럼 시고니는 모형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돈은 시고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시고니, 내가 당신을 제일 먼저 찾은 이유가 이것 때문이오." 시고니는 두 눈을 크게 떴다. "회장님." 변호사 와그너가 입을 열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건 잘못 판단하신 겁니다." "어째서 말이오?" "투자할 가치가 전혀 없습니다." 와그너는 단호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시고니는 이방인처럼 조용히 앉아 들으면서 나름대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건 당신이 틀렸소, 와그너." "네?" "난 이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오." "알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나에게 평생의 숙원을 갖게 해준 곳이오. 그리고 아직 모르는 것 같은데, 투자할 가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오." "그렇지만 회장님, 이 지역의 절반은 이미 히든 벨이 차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가장 큰 문제요." "네?" "문제는 한 사람이 전체 지역을 한꺼번에 개발해야만이 투자할 가치가 생기는 것이오." "하지만 히든 벨을 만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나도 알고 있소." 시고니도 히든이라는 사람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히든 벨 클라크 회장으로 알려진 그 는 굉장한 주식과 함께 호화판 술집, 도박장들을 가진 재벌로 소문이 나 있는 사람이었다. 리차드 메인 같은 건실한 기업가가 이니라 돈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그런 사 람이었다. 그가 초기에 돈벌이를 위해 여자 장사를 했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사 실이었다. 그는 주로 최고급 콜걸을 밑천으로 삼았고 또 그 분야에 남달리 재능이 있어서 직업적인 창녀보다는 값비싼 여자들을 상당히 거느리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유부녀를 비 롯해서 대학생, 직장인 등 각양각색의 향락에 굶주린 고급여성들을 거물급한테 안겨주고 두 둑한 대가를 받아 챙김으로서 짧은 시간에 큰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계속된 사업 확장 과 투자로 오늘날 존이 노리는 지역의 절반을 소유하게 된 히든은 최근 들어서는 과거를 완 전히 청산한 채 새로운 사업가로 변신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히든이 어떤 사람인가는 이미 파악해 놓았소. 그리고 그를 꺾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여 일단 우리는 나름대로 계획을 차질 없이 추진시켜야 하오." "전 아직 이해가 안됩니다." "그래?"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그곳에 투자할 액수로는 더욱 좋은 조건에서 수익성 또한 보장되는 사업을 얼마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네 하필..." 와그너는 끝까지 존의 의견을 반대하고 있었다. "회장님께서도 아시겠지만 그 지역은 빈민굴입니다. 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역적으로 관광단지를 조성할 수도 없는 곳입니다." "천만에." "네?" "뭘 모르고 있군, 와그너. 그곳이야말로 개발만 하면 최고의 투자 가치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오." "그렇지만 회장님,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을..." "잠깐." 존은 와그너의 다음 이야기를 가차 없이 중단시켰다. "닉." "네. 회장님." "보여 주시오." "알겠습니다." 그때까지 시고니는 한마디로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앉아 있었다. 물론 존이 묻거나 말을 시 키지도 않았다. 마치 참관인 자격을 특별히 초대된 사람 같이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닉은 천천히 움직였다. 먼저 빈민구역의 모형도 위쪽에 있는 장치를 점검한 다음 존을 바라 보며 지시를 기다렸다. 존이 손가락을 퉁겼다. 그것을 신호로 닉은 장치를 작동시켰고 그와 동시에 위에서부터 육중해 보이는 물체가 천천히 내려왔다. 그 시간은 1분도 채 걸리지 않 았다. 거기에 나타난 모형을 보고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계속 반대하던 와그너 조차 놀랄 수밖에 없었다. 존의 계획에 의해 제작된 신도시의 모형이었다. 빈민구역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초 호화판 지역이 들어서 있었다. 최신형으로 건축된 고층빌딩과 상가, 아파트, 위락시 설 등 미국의 어느 대도시에서도 불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신도시가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어떻소, 와그너?" "굉장합니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이 정도면 내가 왜 그렇게 강력하게 추진하려 하는 이해하겠소?" "이제야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히든은 어떡합니까?" "그 문제가 관건인데, 한 가지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오." "어떤 방법인지 저희가 알면 안되겠습니까?" "좀 기다려요, 머지 않아서 알게 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됐소, 여러분. 난 옛 친구와 할 얘기가 있소." 존의 한마디에 모두들 그 즉시 자리를 떠났다. 단둘이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소, 시고니?" "당신, 정말 대단하군요. 저 지역을 모형처럼 개발하겠다는 것이오?" "물론 그렇소." 시고니는 존의 말투로 인해 상했던 기분이 바뀌었다. 그는 굉장히 돈이 많은 부자이고 한 구역을 몽땅 개발할 계획까지 진행시키고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시고니." 이윽고 존이 정색하며 말을 시작했다. "당신은 계속 이 지역에서 살아왔으니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오." "내게 무슨 도움을 청하는지 모르겠군요. 난 아무런 능력도 갖고 있지 않아요." "그게 아니오." "네?" "이런 일에는 새로운 지역을 개발할 때마다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과의 사이에서 발 생되는 문제가 있소. 더구나 내가 개발하려는 곳은 빈민가이기 때문에 더욱 어려움이 따르 게 될 것이오. 알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고집이 셀 뿐더러 바라는 것도 턱없이 많거든." 시고니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존을 바라볼 뿐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주민들이 응해주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뜻이오." "땅을 내놓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바로 그거요. 물론 그들을 몰아낼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오." "방법이요?" "물론." "강제로 말입니까?" "그런 방법밖에 없다면 어쩔 수 없지 않겠소. 하지만 난 순리적으로 처리하고 싶은 사람이 오." 시고니는 존의 말하는 뜻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마음과 마음 리차드와 저스틴은 시고니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다. 그들이 보기에 시고니는 그 문제 때문에 몹시 착잡한 모습이었다. 그가 무엇 때문에 착잡해 하는가에 대해서 메인 부부는 이 미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시고니." 리차드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단신이 걱정하는 것은 존이 주민들을 강제로 몰아낼 경우를 생각하는 거죠?" "맞습니다, 메인 씨. 그들은 불쌍한 사람들이거든요. 만일 거기서 강제로 내쫓기게 된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일방적인 행동을 하겠어요? 적절한 보상이 선행될 테죠. 안 그래요?" "그것이 영 개운하지가 않아요." "무슨 뜻인가요, 시고니?" 저스틴이 궁금해 하면서 한마디 물었다. "이런 말씀을 들여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메인 씨나 부인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니까 솔직하 게 말씀드리겠어요." 리차드와 저스틴은 동시에 시고니를 쳐다보았다. "원래 있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의 형편을 모르는 것 아닙니까? 죄송합니다. 메인 씨." "아녜요, 시고니." "우리한테까지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리차드에 이어 저스틴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위로를 했다. 시고니가 그런 식으로 말 했다고 해서 메인 부부는 조금도 언짢게 생각하지 않았다. "계속해 봐요, 시고니. 전부터 그 사람하고 친했었나요?" "친했다기보다는 그냥 좀 알고 지낸 사이였죠." "같은 고장 출신 정도였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큰 뜻을 품고 돌아온 셈인데, 오자마자 시고니를 찾았다면 뭔가를 시고니에게 기대하고 있 는 것이 분명해요." "그래요, 여보." 저스틴이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제 생각에는 시고니에게 주민들을 몰아내는 악역을 시키려는 것 같아요." "그런 것 같습니다." 시고니도 저스틴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것이 바로 시고니를 착잡하게 만드는 이유였던 것 이다. "전 그런 일은 못합니다. 충분한 보상이 먼저 이루어진다면 또 모르겠지만요." "시고니, 그건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군요." "그가 만일 충분한 보상을 계획하고 있다면 시고니에게 도움을 청하진 않았을 거예요." "맞습니다. 메인 씨.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 사람을 직접 만나보니 좋은 뜻을 가진 사 람 같지는 않았어요." "그래요?" "변호사 두 명이 비서처럼 따라다니고 보디가드가 여러 명씩이나 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도 좋은 방법으로 사업을 하려는 사람은 아닌 것이 분명해요." 시고니의 생각은 간단했다. 떳떳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리차드처럼 경호원 같은 것은 필 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시고니의 결론이었다. 그가 리차드를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거 기에 있었다. 존처럼 돈을 가졌다고 거드름을 피우지도 않는다. 변호사는 사업상 필요에 의 해 사무실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이지 비서처럼 대동하고 다니지도 않았다. 사업을 위한 경 쟁에는 늘 정당했고 가지지 못한 사람을 멸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실업자를 구제하기 위 해 출혈을 감수하면 도산한 기업을 인수해서 활성화시키는 경우가 있을 정도였다. "그가 정식으로 부탁했나요?" 리차드 역시 시고니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직은 아닙니다. 또 다른 문제가 해결되어야 개발에 착수할 수 있을 테니까요." "또 다른 문제?" 저스틴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지만 가끔씩 그렇게 한마디씩 묻기도 했다. "좀 복잡해요. 그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존, 그 사람이 모두 인수해야 되는데 그게..." 시고니는 존과 히든 벨 클라크와의 관계를 간단히 설명했다. "히든 벨 클라크?" 리차드가 재빨리 물었다. "네." "그래요, 시고니. 나도 그 사람을 알고 있어요." "알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그 사람 초창기에는 좋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제대로 사업을 경영하는 사람이오 자 신의 그런 과거 때문인지 좋은 일도 많이 하는 모양이더군요." "'좋은 일이요?" "몰라도 되는 그런 일이 있어요." 리차드는 그 이야기를 시고니와 저스틴 앞에서 꺼내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들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히든 벨 클라크는 최근 과거를 뉘우치려는 뜻에서 직업훈련학교를 설립했다. 주로 창녀나 불우한 여성들을 수용한 다음 적성에 맞는 직업훈련을 무료로 시키는 곳이었 다. 히든 벨 클라크가 아직 독신으로 살아가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으며 리차드는 그 문제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었다. "맞아요. 히든이 빈민구역과 관련이 있다고 들었어요." "바로 그겁니다, 메인 씨." "네?" "존은 히든 씨가 소유하고 있는 몫까지 전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까지?" "그 몫까지 합쳐서 자기가 전체를 소유해야 개발할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문제라면 심각하게 발전될 수도 있겠군요." 리차드는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오늘날의 메인 그룹이 있기까지 그가 겪어온 과정과 경 험은 어느 경영자 못지 않게 넓고 깊다. 시고니가 설명하는 이런 경쟁 과정도 여러 번 지켜 보아온 터였다. 정당한 경쟁에서는 문제가 생기지 않지만, 그것과는 정반대일 경우 반드시 문제가 발생한다. 심지어 피까지 보는 분쟁이 발생하는 광경도 직접 목격한 경험도 있었다. "그런데 메인 씨." 시고니는 문득 생각이 떠오른 것처럼 입을 열었다. "오늘은 매우 조용하군요." "뭐가 조용하다는 거지요?" "전화 한 통 걸려오지 않으니 말입니다." "미리 특별한 문제가 아니면 연락하지 말라고 부탁해 놓았어요." "그러셨군요." 그때 시고니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전화 벨이 울렸다. "저런! 제가 받죠." 시고니가 혀를 차며 전화기로 가는 모습에 리차드와 저스티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여보세요, 네? 메인 씨 댁입니다. 네?" 리차드와 저스틴은 곧장 시고니를 바라보았다. "지금 계십니다만, 누구시라구요? 나이젤 하그렌드 경감님이요... 아, 네. 그러시군요." 리차드와 저스틴이 재빨리 마주보았다. "경감?" 리차드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은 채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런던으로 돌아간 다 음 몇 번 전화가 왔지만 최근에는 뜸했던 하그렌드 경감의 전화였다. "전화 받으세요, 메인 씨." "고마워요, 시고니." 리차드는 시고니로부터 전화기를 넘겨 받았다. 시고니도 저스틴도 궁금한 표정으로 리차드 를 바라보았다. "오랫만이군요, 경감님." "안녕하세요, 메인 씨." "런던에는 지금도 비가 내리고 있습니까?' "런던요?" "네." "여긴 런던이 아니에요." "네?' "미국입니다. 방금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도착해서 곧장 전화를 드리는 겁니다." "그래요?" 리차드는 놀라더니 재빨리 전화기를 막고 저스틴에게 경감의 소식을 알려 주었다. "하그렌드 경감이 이곳에 왔다는데." "어머, 그래요?" 저스틴도 놀랐다. 하그렌드 경감이 로스앤젤레스에 와서는 곧바로 메인 부부에게 전화를 한 것은 확실히 심상치 않은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예고처럼 보였다. 나이젤 하그렌드 경감의 미국행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무슨 일로 로스앤젤레스까지 오셨습니까?" "아무래도 전 로스앤젤레스하고 인연이 있나 봅니다." "그래요?' "여기는 공항이라 긴 얘기는 만나서 하도록 하죠. 제가 댁으로 찾아가도 괜찮겠습니까?" "우리집으로 오신다구요?" 리차드가 설명하지 않아도 저스틴은 그가 집으로 직접오겠다는 말을 했다는 것을 짐작했 다. 시고니 역시 커피나 저녁식사를 손님 몫까지 준비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저는 연락이 안되는 줄 알았습니다." "왜요?" "회사에서 아주 까다롭게 묻더군요. 어디에 계시느냐고 물었더니 신분을 확인한 다음에야 겨우 계신 곳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보안장치가 철저한 데 놀랐습니다." "미안하게 됐군요. 불필요한 전화들이 많이 걸려와서요." "이해합니다." "그건 그렇고, 지금 곧장 오시겠습니까?" "지장만 없으시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부탁드릴 일도 있고 해서요." "좋아요. 기다리죠." "곧 가겠습니다. 거기가 어딘지는 제가 잘 아니까요." 리차드는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지금 오신 답니까?" 시고니가 묻자 저스틴 역시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시고니." "뭘 좀 준비해야겠어요, 공항에서 여기까지 금방이니까요." "도착한 다음에 준비해도 늦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이상한 예감이 드는군." "뭐가요?" "부탁할 일이 있다던데 일상적인 문제 같지가 않아." "혹시 또 무슨 사건 때문에 온 것이 아닐까요?" "글쎄..." "그 사람 매우 바쁜 형사군요, 런던에서 여기까지 출장을 또 오다니." "형사가 아니고 경감이죠. 런던경시청에서는 베테랑으로 손꼽힌다고 들었어요." "네에." 시고니는 그 문제를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그에게는 형사나 경감이나 똑같이 생각되었다. 어차피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녀야 되는 사람이라면 다를 것이 뭐가 있겠냐 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건 그렇고, 시고니. 아까 그 얘기 아직 안 끝났죠?" "존 얘기요?" "그래요. 그러니까, 아직 정식으로 부탁을 받은 건 아니군요?" "네." 화제는 하그렌드에서 다시 존에게로 돌아갔다. 시고니의 표정은 화제가 돌아가자마자 곧 바뀌었다. 그만큼 부담스러운 문제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부탁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요?" 리차드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시고니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뭐죠?" "왜 히든이라는 사람 있지 않습니까?" 리차드는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존은 그 사람에게도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좋지 않은 일을 꾸민 후에 계획을 진행시키려 하는 게 분명합니다." "히든 정도면 만만한 상대가 아닌데 그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존도 대단해요. 40층짜리 빌딩이 그의 소유인데다 그 시설도 굉장하더군요." 저스틴은 하그렌드 경감이 또 무슨 사건 때문에 미국에 왔을까를 생각하느라 시고니의 이 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뉴 파더 호텔에서 침대에 앉혀진 채 묶여 있던 모습은 아직도 저스틴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메인 씨,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글쎄요... 갑작스러운 일이라 어떻게 얘기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우리 변호사를 통해 넌지 시 알아볼까요?" "아닙니다. 메인 씨.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단지 메인 씨의 의견을 들었을면 해서 요." 시고니는 공연한 문제로 리차드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변호사까지 동원 시키는 문제는 더 더욱 원하지 않았다. 다만 리차드에게서 개인적인 조언을 듣고 싶었던 것 이다. 리차드 역시 난처했다. 현재와 같은 상태에서 시고니에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좀처럼 자신의 내면적인 문제를 꺼내놓지 않는 성격을 가진 시고니였기 때 문에 더욱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과묵한 성격에다가 성실한 성격 때문인지 시고니는 불필 요한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메인 그룹이 있고 메인이 있기까지의 시고니는 건축물의 초석 과 같은 존재였다. "시고니, 내 생각에는 조금 더 시간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어때요?" "알겠습니다.." "언제 그 사람하고 만날 약속이 되어 있나요?" "연락하겠다고 했습니다." "알았어요. 나도 그 문제에 대해 좀더 생각해 보겠어요." "고맙습니다. 메인 씨." 로스앤젤레스 공항에서 메인의 집까지는 비교적 한적한 도로이기 때문에 차로 곧장 달리면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하그렌드 경감은 필경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려올 것이다. 시고니가 말한 존에 관한 문제를 생각하던 리차드는 무심코 시계를 보다가 생각난 듯이 말 했다. "하그렌드 경감이 도착할 시간이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집 앞에서는 자동차가 들어와 멎는 소리가 들렸다. 빗나간 야망 존은 야망으로 가득찬 사람이었다. 현재의 그는 자신을 능가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자 부하고 있지만 다만 아직 어려 연륜이 부족하기 때문에 표면상 겸손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 력할 뿐이었다. 그는 히든 벨 클라크에 대해 면밀하게 조사를 했다. 히든의 재정적인 능력은 이미 세상에 알려져 있으므로 특별히 알아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재무 구조가 견고한 만큼 자본의 대결로는 그에게 뒤진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현재 히든의 대외적인 평판 도 상당히 좋아 정상적인 대결이나 경쟁만 가지고서는 그를 꺾기 어렵다는 것이 조사된 결 과였다. 따라서 편법을 쓸 수밖에 없다. 존은 수단가 범법을 가리지 않고 히든을 꺾을 결심 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옛고향을 위해 발전시킨다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개인적인 욕 심을 채우려는 야의 탈을 쓴 특대와도 같았다. 존은 히든의 사생활 및 성격상의 약점을 주 안점을 두고 조사시켰다. 히든이 어떤 경우에 가장 쉽게 마음이 움직이게 되는가를 철저하 게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존이 현재의 위치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상대의 자존심을 자극시켜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비열한 비법이 가장 큰 요인이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존은 그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변호사인 닉의 지휘 아래 여러 명을 동원시켜 히든의 자존심과 거기에서 비롯될 수 있는 약점을 낱낱 이 조사하도록 시켰다. 힌든이 거대한 건축물이라고 한다면 그 기초가 되는 초석을 제거해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비열한 작적이었던 것이다. 히든에게 매우 불행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떳떳하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을 반성하며 가능한 최선의 노력을 하려 는 그에게 보이지 않는 막강한 상대가 나타난 셈이다. 히든의 자존심은 누구보다도 강했다. 아직 그런 일은 없었지만, 누군가 자존심을 건드리고 자극하면 어떤 생각을 갖게 될지 스스 로도 예측하지 못했다. "회장님." "말해 보시오." "아무래도 쉬울 것 같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각오한 사실 아니오. 조사한 결과는?" "그보다 다른 문제부터 말씀드리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다른 문제?" 닉은 모형을 집어가면서 설명했다. "이 지역에선 현재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여러 명을 만나서 직접 물어 보았 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뭐라고 하던가?" "한마디로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어차피 가난하게 태어난 운명이니까 단지 호강하려고 태어 난 집을 버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히든이 땅주인인데 그가 자기들한테 잘 해주고 있다는 겁니다." "히든의 인기가 그렇게 대단할 줄은 몰랐군." "저도 놀랐습니다. 히든은 굶주리는 거지들에게 선교단을 통해 먹을 것을 나누어 주기도 한 답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우리도 할 수 있으니까." "그게 아니죠." 닉은 평소 솔직한 그의 성격처럼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말이며 꼭 덧붙여 했다. "회장님이 지금 시작하시면 이미 늦었습니다." "어째서 그렇소?" "히든이 이미 기반을 굳혔기 때문에 지금 다른 곳에 급식소를 마련하더라도, 주민들은 히든 쪽으로 갈 것이 확실합니다." "배불리 먹여 주는 데도?" "이렇게 생각하시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식당에 음식이 맛은 좋지만 집에서 먹는 음식만은 못한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그 정도로 히든의 인기가 좋단 말이오?" "죄송합니다." 존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히든에 비해 아직 젊은 그였다. 그런 그가 어떻게 현재의 위 치에 설 수 있었는가에 대해 의혹을 갖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결국 히든과의 싸움이군."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만 그와 겨루면 패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선 그는 주민들의 지 지를 전폭적으로 받고 있으니까요." "그 문제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가 없소. 그건 그렇고 내가 지시한 사항은 어떻게 됐소?" "다 조사했습니다." "결과는?" "히든에게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공할 가능성에 대 하서는 그 누구고 예측할 수 없습니다." "무슨 소리지?" 우수한 성적으로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규정된 코스를 밟아 변호사가 된 닉이지만 경제적인 문제 앞에서는 존의 개인비서나 다름없었다. 존은 사람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닉 과 와그너가 별도로 개업해서 얻을 수 있는 수익 이상을 보장해 주고 있었다. 따라서 사건 이 이어야만 하고 의뢰인이 일정하지 않은 개업 변호사보다 훨씬 안정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회장님?" 닉은 조사해서 기록한 서류를 이미 존에게 건네 준 상태였다. "내가 우선 이 서류를 검토한 후에 결정하겠소." "알겠습니다." "그리고 주민들의 동향에 대한 얘긴데, 별도로 나한테 생각이 있소." "어떤 겁니까?" "당신도 지난번에 봤을 거고, 내가 데려온 사람을."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시고니." "아, 네. 생각이 납니다." "겉보기에는 그래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거요. 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설득력을 갖춘 사람이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지금은 리차드 메인의 집에서 일하고 있소." 존은 이미 시고니에 대해서도 철저한 조사로 준비를 해 놓고 있었다. "리차드 메인이라면 저 메인 그룹의 총수 말씀입니까?" 경제계에서 리차드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맞소. 거기서 보수를 얼마나 받는지 모르지만 내가 적당히 대우해 주면 금방 협조하겠지." 존은 시고니를 자기 식으로 판단했다. 항상 그는 매사를 돈으로 계산하고 그 돈을 벌기 위 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존이 닉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리차드와 저 스틴은 런던에서 미국에 도착한 하그렌드 경감과 만나고 있었다. 지난번 복면침입 때에는 경감이 메인 부부에게 커피를 서비스했지만 이번에는 시고니의 차례였다. 메인 부부를 찾아 온 손님에게는 항상 정성을 다하는 것이 시고니의 생활 철학이었다. "그 사람이 결국 그런 짓을 범했군요." 리차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처음부터 매우 불안한 사람 같아 보였어요. 런던에서 여기까지 나를 따라 올 때 알아봤어 야 하는건데. 정말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에요." "그렇습니다, 메인 부인. 돈에 눈이 어두워지면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죠." 예상했던 일이라기 보다는 어이없는 일이었다. 라스베가스의 라운드 로빈 호텔에서 저스틴 의 행운을 이용해서 도박을 하겠다던 닐 완슨이 그 사이에 사건을 저질렀던 것이다. 런던 경시청에서는 지난번 로만 사건을 해결한 하그렌드 경감에게 역시 이번 사건을 맡겼다. 로 만 사건도 사실상 리차드의 도움으로 해결한 경감은 이번 사건의 무대가 로스앤젤레스라는 점에서 더욱 리차드가 생각났던 것이다. 지역적인 문제 이외에도 리차드가 이 방면에선 탁 월한 능력이 있음을 경감은 누구보다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경감님, 닐 완슨이 미국으로 도망친 게 확실합니까?"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이미 확인했죠. 다른 곳도 아닌 로스앤젤레스행 비행기를 탔더군요." "그 사람 라스베가스에서는 얼마나 있었죠?" "런던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두달 정도 있다가 런던으로 돌아 왔다고 하는군요." "런던에서도 계속 도박을 했나요?" "그렇다면 그곳 총지배인인 조지도 그를 알겠군요?" "그렇겠죠." "확실하지는 않다는 겁니까?" "켄싱턴 클럽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메인 씨, 아시고 계 시겠지만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을 조사하는 것도 벅찬 일이라서." "이해합니다, 경감님." "그런데요, 경감님." 곁에서 듣고 있던 저스틴이 갑자기 생각난 듯이 경감에게 물었다. "네, 부인." "닐, 그 사람 혹시 이곳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왜 그런 생각을 하시죠?" "아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리로 왔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많은 곳 중에서 이곳을 선 택했다면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걸 알아낼 방법이 없군요." 그때 저스틴의 머리 속에 반짝하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참, 그가 우리집에 왔던 적이 있어요. 그렇죠, 여보?' "그렇습니까?" "경감은 뜻밖이라는 듯이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리차드는 별다른 뜻 없이 대답했다. "그때 집에 오기는 했었지만 우리가 내보냈지, 쓸데없는 헛소리를 하기에..." "어떻게 된 일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경감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자 눈이 빛났다. 그로서는 미국에서 그의 행적을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쾌거를 올린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제가 말씀드리겠어요. 닐 완슨은 우리가 없을 때 이미 집안에 들어와 있었어요. 라이터 권 총을 가지고." "권총을 가지고 있었단 말입니까?" 경감은 무척 놀라면서 물었고 그에 대해 리차드가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진짜 총이 아니고 라이터였죠." "네에. 그런데 메인 씨, 그것이 언제인가요?" "그날이죠. 로만이 도망치려다 잡힌 날." "'좀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어렵지 않아요. 여보, 당신이 얘기해 드리지." 리차드의 말에 저스틴은 망설일 것 없이 말을 꺼냈다. "그날 뉴 파더 호텔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어요." 저스틴은 그날의 일을 간단 명료하게 경감에게 설명해 주었다. 듣는 동안 하그렌드 경감은 두 세 번 고개를 끄덕이며 나름대로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잠깐." 저스틴의 이야기가 막 끝났을 때 리차드가 갑자기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그때 시고니가 집에 있었지, 닐 완슨과 함께." "맞아요. 그랬군요." 저스틴도 동의했다. "시고니가 그와 함께 있었다는 겁니까?" "그랬어요. 시고니를 불러서 물어 보는 게 좋겠군요?" 리차드는 주방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시고니를 불렀다. "시고니, 잠깐만 와 보세요." 주방에 있던 시고니는 앞치마를 두른 채 거실로 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메인 씨?' "한가지 당신께 물어 볼일이 있어요." 경감은 메인 부부보다 훨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닐 완슨을 알고 있죠?" "누구요?" 시고니는 처음에는 리차드가 누구를 말하는지 얼른 알아차리지 못했다. "닐 완슨요, 언젠가 우리 집에 당신과 같이 있었던." "아아. 그 사람이요?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켜보던 경감이 조급한 표정으로 끼여들었다. "그자를 잘 압니까?" 시고니는 경감 족으로 시선을 옮기다가 리차드와 저스틴을 차례로 쳐다보며 표정을 살핀 다음 마치 지나가는 말투로 대답했다. "잘 알지는 못해요." 그렇게 묻던 리차드는 혹시 시고니의 마음이 상할 것을 염려하여 재빨리 덧붙였다.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녜요, 시고니. 실은 경감님이 그 사람 때문에 여기에 오셨거 든요." "무슨 잘못된 일이 있나요?" "닐 완슨이 런던에서 사건을 저지르고 이곳으로 도망쳤어요." 경감의 말에 시고니는 크게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래요, 시고니. 그래서 당신이 혹시 잘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묻는 거예요." 시고니는 비로소 상황을 이해하는 듯했다. "그랬었군요. 그렇다면 말씀드리죠, 메인 씨. 전 원래 그 사람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제 친구가 전화로 소개해서 알게 됐죠." "그래서 집에 들어오게 했나요?" "죄송합니다, 메인 씨." "아니, 사과를 듣자는 것이 아녜요. 친구가 소개했다고 했잖아요. 그 친구라는 사람은 시고 니가 잘 아는 사람이겠군요?" "그럼요." 잠깐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경감은 경감대로, 리차드와 저스틴은 그들 나름대로 거의 똑같 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닐 완슨의 친구를 시고니가 알고 있다는 그의 말에 관한 것이었다. 한번의 기적 하그렌드 경감은 뜻밖의 쾌거를 올린 셈이었다. 닐 완슨이 로스앤젤레스에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가 있다는 사실, 런던에 있는 동안에는 그 친구와의 교분은 끓지 않고 지 냈다는 사실만으로도 흡족해 했다. 그와 같은 사실이 밝혀지게 된 것도 시고니 덕분이었다. 경감은 집에서 묵으라는 리차드의 권유를 끝까지 거절하며 호텔로 갔다. "전번에 좋지 안은 일도 있고 해서 뉴 파더 호텔로 가겠습니다. 저번에 갔던 굿이라 프론트 에서 기억하고 있을 테니 잘해 주겠죠." "정 그러시다면 할 수 없군요. 대신 아침식사는 집에 와서 하시기를 바랍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여러 가지로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자동차로 호텔까지 모셔다 드리고 싶지만 차를 가져오셨으니 그것도 안되겠네 요." 경감이 떠난 다음 리차드와 시고니, 저스틴은 거실에 마주앉았다. 리차드는 아까부터 생각 해 왔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시고니, 아까는 경감 때문에 가만히 있었어요." "알고 있었습니다, 메인 씨." "역시 그랬군요." 메인 부부와 시고니는 늘 그런 식이었다 눈빛만 보아도 상대의 마음을 알 수가 있었던 것 이다. "그럼 묻지 않아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군요?' "물론입니다, 메인 씨." "좋아요." 그때 저스틴이 시고니의 입장을 옹호해 주었다. "난처한 문제라면 얘기하지 않아도 좋아요, 시고니. 그렇죠, 여보?" "음..." 그렇지만 리차드는 듣고 싶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시고니가 그런 눈치를 모를 리 없었다. 그 자신도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었다. "사실 닐 완슨이라는 사람은 모릅니다 그런데 그날 친구한테서 갑자기 전화가 왔어요." "가끔씩 연락을 했던 친구인가요?" "전에는 빈번했었는데 한동안 뜸했죠. 사실 그 친구는 제가 여기서 살고 있는 걸 모르고 있 어요." 저스틴이 물었다. "내가 밖에 나가 있을 때 우리가 잘 가는 단골 술집으로 연락을 했었죠." "사람은 시고니가 우리와 함께 사는 것을 몰랐단 말이군요?" "대개는 알고 있지만 그 친구한테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 봅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말입니다." 리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활하다 보면 고의적이 아니면서도 그런 경우가 가끔씩 생기 는 것이다. "시고니의 친구는 어떤 사람인가요?" 저스틴이 물었을 때 시고니가 잠깐 망설이자 시고니를 항상 생각해주는 눈치 빠른 저스틴 이 재빨리 말을 했다. "난처하거나 곤란하면 대답하지 말아요, 시고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그렇지만." 리차드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계속이었다. "시고니, 당신도 이미 짐작했을 거예요. 나이젤 경감은 그 문제 대문에 런던에서 여기까지 왔어요.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시고니, 이해하죠?' "물론입니다, 메인 씨. 사실 난 감추고 싶은 일도, 숨길 것도 없는 걸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지금 상황에서는 아마 닐 완슨의 행방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할 거 예요. 마침 시고니가 그의 친구를 알고 있다는 의외의 성과가 나올지도 몰라요." "그랬으면 좋겠군요. 그런데 메인 씨, 우선 전화부터 한 통화하고 얘기하면 어떻겠습니까?" "상관없어요, 시고니." 리차드는 말하면서 저스틴 쪽을 잠깐 바라보았다. 메인 부부는 전화기로 다가서는 시고니 의 모습을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시고니는 이미 외우고 있는 번호를 침착하게 돌리더니 이 윽고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시고니는 의례적인 몇 마디를 건넨 다음 마치 안불 전화를 거는 것처럼 말했다. "제이 제이, 지금 있죠?" 리차드나 저스틴에게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시고니는 분명히 저스틴의 행방을 알려주겠다 고 닐 완슨과 약속한 제이 제이를 찾고 있었다. 그 제이 제이가 시고니의 친구라는 것은 놀 라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시고니가 평소에 잘 알지도 못하는 닐 완슨을 집에 들어오도록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지금 없다고요?' 리차드와 저스틴은 계속 묵묵히 지켜보았다. "네, 그래요?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겠네요? 네, 네에...알겠습니다. 아닙니다. 다음에 다시 연 락하죠." 시고니는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그래요, 시고니?" 저스틴이 먼저 물어다. "이상하군요." "뭐가요?" 리차드 역시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웬만해서는 집을 비우지 않는 친구이데 없다는군요." "제이 제이가요?" "네, 메인 씨. 나간 지 몇 칠이 지났답니다. 그것도 언제 돌아온다는 말도 없이 나가서요. 그 럴 리가 없는데 이해가 안 가는군요." 시고니의 말에 리차드는 자신도 모르게 저스틴을 바라보았고 그녀 역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리차드를 마주 바라보았다. 이윽고 리차드가 시고니에게 말했다. "시고니, 전화부터 건 후에 모든 사실에 대해 말하겠다고 했죠?" "네." "좋아요." "실은 제이 제이, 그 친구가 갑자기 전화로 간곡히 부탁하는 바람에 닐 완슨을 집에 들어오 도록 했었습니다. 메인 부인을 꼭 만나야 되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난 그 친구를 믿었죠 사실상 제 친구 가운데 나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알아요, 시고니. 그 문제는 이미 지난 일이에요. 지금 중요한 것은 제이 제이를 통해 닐 완 슨의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닐 완슨은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서 로스앤 젤레스행 비행기에 탑승했어요." "로스앤젤레스요?' "네." "그렇다면 분명히 제이 제이를 찾아 왔을 겁니다. 메인 씨. 그가 언제 떠났죠?" "닐 완슨은 말하는 건가요?' "네." "3일 전에 떠났다는군요." "맞아요!" 시고니가 갑자기 소리치는 바람에 저스틴은 놀랐다. '맞아요?' "네, 메인 씨 제이 제이도 사흘 전에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분명히 관련이 있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이것은 예기치 못했던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닐 완슨이 런던을 떠난 날과 제이 제이가 집에서 나간 날짜가 같다는 것은 두 사람이 연관이 있다는 것을 듯했다. 시고니가 제이 제이에 대해 특별한 마음을 갖고 신경 쓰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다른 친 구와 달리 그는 신체 장애자였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남성으로서는 가장 심각 한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 한동안은 시고니도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사람과 똑같았고 성격도 좋은 편으로 그런 문제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또 다른 친구의 소개로 그를 알게 된 이후 시고니는 매년 여름휴가를 그와 같이 보냈으며 그후에도 함께 단골 술집에서 만나 술을 마시며 이런 저런 인생 얘기를 하면서 둘 사이의 우정을 쌓아왔다. 그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작년 여름휴가 때의 일이다. 다른 때처럼 시고니는 그를 비롯한 친구들과 어울려 카드놀이를 했고 술도 마셨다. 술을 마 실 때의 일이었다. 그날 따라 시고니는 다른 때보다 많이 마셨다. 좀처럼 그런 일이 없었음 에도 불구하고 그날은 상당히 취해 있었다. 전에 없이 시고니에게 친구들이 여자와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멋대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이봐, 시고니. 자네 도대체 여자가 어떤 건지 알기는 하는 거야?" 한 친구가 느닷없이 시고니에게 불을 당겼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여자를 모르다니?" "안 그런가?" "물론 아니지." "늙어 가는 나이에다 그렇게 혼자 사는데 무얼 어떻게 알겠나, 안 그래? 어떤가, 시고니. 집 에 젊고 섹시한 여자가 같이 살던데 마음이 끌리지는 않는가?" "누구?" 평소 같으면 벌써 화를 냈을 시고니도 취한 상태였기 때문에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직접은 못 봤지만 사진에서 여러 번 봤어, 그 여자. 그런 여자가 끝내 주지, 알기나 해?" 시고니는 그 친구가 저스틴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여자를 한 번 안아보면 죽여주지. 그 입술 봤지? 그런 입술이 최고야. 내가 보건대 그 여자는 꽉꽉 물고 빨아들이고 정신없을 거야. 이건 정말이라고." 그 친구는 시고니보다 훨씬 더 취해 있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술 취한 남자들의 빼놓을 수 없는 이야깃거리였다. 평소 수준 높고 교양 있는 사람들도 가끔씩 취하면 별 수 없었다. "예끼, 이 사람!" 시고니는 짐짓 그러면서도 정말로 화를 내지는 않았다. 술에 취해서 그러려니 하며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시고니의 장점일 것이다. 금실 좋은 메인 부부를 보면서 독신으로 계속 지낼 수 있었던 것도 그 스스로가 억제할 수 있는 인내력을 쌓아왔기 때문이므로 덕분에 다 른 친구들처럼 주책없이 구는 법이 없었다. 문득 시고니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두 가 멋대로 지껄여 대고 있을 때 계속 침울한 모습으로 침묵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제이 제이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봐, 제이 제이. 자넨 그런 이야기에 흥미가 없는 모양이군. 정말 그런가?" 시고니의 물음에 그는 가볍게 웃기만 했다. 시고니는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래, 자네? 혹시 언짢은 일이라도 있나?" "'아니." "그런데?" "없어, 아무것도." 그때 저희들끼리 떠들어대던 친구 중 한 명이 불쑥 기어들었다. "이봐, 시고니. 그 친구한테 쓸데없는 소릴랑은 아예 말게나." "쓸데없는 소리?" 아직 아무런 내용도 모르는 시고니로서는 더욱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제이 제이, 이 친구 말야. 시고니, 자네 아직 모르는 모양인데..." "그만해!" 제이 제이가 낮게 소리쳤지만 잔뜩 취한 친구에게 그 소리는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저 친구 젊었을 때 물을 너무 뽑아서 지금은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다네." "그만해!" 제이 제이의 두 번째 경고도 무시당했다. "지금은 꽃 같은 아가씨가 옆에서 무슨 짓을 해도 반응이 없다니..."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탁'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방금까지만 해도 지껄여 대던 친구 의 얼굴이 테이블에 처박혀 있었다. 제이 제이가 술병으로 정수리를 내려찍은 것이다. 순식 간에 테이블은 피바다가 됐다. 맞은 친구는 머리에서 피를 쏟으며 기절했고 잠깐 사이에 흥 겹던 분위기가 깨졌다. 기절한 친구는 병원으로 실려 갔지만 제이 제이는 계속 술을 병 채 로 들이켰고 시고니는 마신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그 문제로 인해서 시고니는 제이 제 이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젊었을 시절에는 정상적인 생기 발랄한 청 년이었지만 그의 문란한 애정 행각과 지나치게 방종한 생활이 발기 불능의 성불구자로 만든 것이다. 제이 제이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치료를 시도해 보았지만 계속 실패했다. 의과적 인 방법은 물론 물리적인 방법도 동원했지만 한 번 잠잠해진 제이 제이의 남성은 끝내 방응 을 나타내지 않았다. 시고니는 조롱하는 친구를 술병으로 내리친 제이 제이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게 되었고 시고니는 그 친구를 각별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시고니는 그때 닐 완슨을 집에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로 인해 절망에 빠진 제이 제이는 한동안 거리를 방황했다. 잔뜩 취한 상태에서 벌거벗고 뛰어다니는가 하면 아무 집이고 거 침없이 뛰어 들어가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지금처럼 안정을 되찾기까지에는 3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리고 지금은 체념한 상태에서 조용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 다. 그가 닐 완슨을 알게 된고 그의 신세를 지게 된 것도 이 문제 때문이었다. 닐 완슨은 영 국에서 일류의 섹스 걸을 미국까지 데려와 주었으며 제이 제이를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때 기적처럼 제이 제이는 딱 한 번의 반응을 나타냈었다. 그 때문에 제 이 제이는 닐 완슨에게 진 신세를 잊지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짓과 위선 하그렌드 경감은 로스앤젤레스 경찰국과 공조 수사를 벌이면서도 메인 부부의 집이 마치 수사본부인 것처럼 자주 드나들었다. 경찰국보다는 리차드의 도움이 더욱 켰기 때문이다. 리 차드에게 도움을 받을 경우에는 경찰국처럼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지도 않아 신속 정확하다 는 것이 그가 리차드의 집을 이용하는 이유였다. 지금은 완전히 변해 버린 존에 대해 시고 닌가 리차드에게 의논하려 했던 것도 이 문제 때문에 뒤로 밀려났다. 존과 히든의 문제는 리차드가 깊숙이 개입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닐 완슨의 사건만큼은 적극적이 었다. 닐 완슨이 저지른 죄질에 대해서 리차드는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그가 돈 때문에 저 지른 범죄는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도박장 주변에는 언제나 돈과 여자, 향락이 있기 마련이 다. 불로소득으로 큰돈을 딴 사람은 당연한 것처럼 거의 대부분 향락에 그것을 탕진했다. 그 런 눈먼돈을 행해 여자들도 암내를 풍기며 모여드는 것을 어쩌면 당연한 일일 지도 몰랐다. 닐 완슨의 경우도 특별히 예외일 수는 없었다. 데스타브가 죽은 후 도박판에서 판돈을 끌어 들인 닐 완슨은 쓰고 있는 검정색 카우보이 모자를 번쩍거리며 돌아다녔다. 주위에는 당연 히 아리따운 여자들이 모여들었고 그 가운데서 닐 완슨이 선택한 여자는 가장 아름답고 매 력적인 니아였다. 소녀 같이 싱싱한 아주 젊은 여자를 선택한 그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며 향락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도박판에 끼어들지 않을 때에는 항상 그녀를 곁에 두었다. 전에는 도박을 위해 여자와의 관계까지 신중을 기했던 그가 돈이 들어오고 예 쁜 여자가 생기자 습관도 바뀌었던 것이다. 한때 저스틴을 행운의 여신으로 믿었던 일 완슨 은 이번에는 이 젊은 여자를 행운의 여신으로 확신하였다. 그래서 그는 게임을 할 때마다 항상 젊고 싱싱한 그녀를 그의 뒤에 붙어 있게 했고 그럴수록 돈을 쉽게 땄다. 그러나 도박 판의 행운이 결코 지속적일 수는 없었다. 향락에 무친 생활을 6개월쯤 보냈을 때의 일이었 다. 도박의 생리가 그렇듯이 한 번 잃기 시작하면 그 내리막길은 급경사를 이루게 된다. 한 번 잃으면 두 번째 게임에서 만회하려 하고 그런 과정이 몇 번 반복된 다음에는 헤어나지 못하고 게임의 수렁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닐 완슨의 젊은 애인이 그에게 붙어 있던 이유 도 돈 때문이었다. 그에게 돈이 떨어지자 자연히 그녀는 멀어졌고 끝내 막바지까지 몰린 닐 완슨은 무서운 계획을 세우기까지 이르렀다. 평소 닐 완슨에게 끈질기게 그의 여자를 요구 하던 친구가 있었다. "어차피 평생 데리고 살 여자도 아니잖아, 안 그래? 닥 한 번만 빌려주게, 두둑이 낼 테니." 닐 완슨의 여자 니아는 그런 사내들이 한 번 보면 금방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 정도로 매력 이 넘쳤다. 궁지에 몰린 닐 완슨이 그 친구를 생각해 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생각에 다음번 판돈만 이으며 꼭 딸 자신이 있었고 그 돈을 꼭 마련해야 했던 것이다. "얼마 낼 텐가?" "정말이야?" 그 친구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다그쳤다. "장난이 아냐. 하지만 두둑하지 않으면 어림없지." "얼마면 되겠나?" "사실 다른 여자 열 명을 상대해도 그녀와 한번 지내는 것만 못할 거야." "그 정도야?" "말은 필요 없어. 어떡할 텐가?" "그런데... 그녀가 정말 응해 줄까?" "값만 흥정하고 그건 내게 맡겨. 자, 어서 말해 봐." 젊은 여자를 놓고 벌이는 흥정이 결코 일상적일 수는 없었다. 비인간적이고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문제이긴 하지만 그들은 여자를 사이에 두고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자네가 말해 봐." 그 문제라면 닐 완슨은 이미 생각해 둔 상태였다. "10만 파운드." 친구는 깜짝 놀랐다. "농담하지 말게. 여자 한 번 껴안는 데 10만이라니 말도 안돼!" "싫으면 그만 둬." 닐 완슨은 딱 잘랐다. 그는 상대가 그 정도는 낼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박에 서 딴 돈이 두둑한 이때 그 정도는 충분히 낼 수 있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닐 완슨의 거절은 친구의 마음을 갑자기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도 사실 그 정도의 여자를 얻기 위해서는 10만 파운드 정도는 투자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참이었다. "좋아." "좋아?" 힘든 입씨름을 걸쳐 닐 완슨은 자신의 여자를 친구에게 10만 파운드를 받고 넘겼다. 빌려 준다기보다 사실상 떼어 넘긴 셈이다. 그에게는 다음 도박에서 돈을 따서 모든 문제를 쉽게 풀 수 있는 확신이 있었다. 심각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변호사나 다른 사람들을 모두 물리치고 단 둘이 만난 존 과 히든은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장소를 선택했다. 존의 건물도 히든의 건물도 아닌 개발 대상 지역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건물의 옥상에서 둘은 만났다. "히든 회장님." 단둘이 있을 때에는 존도 어쩔 수 없어 보였다. 히든은 자신과 비교해 보면 대 선배였고 실질적으로 재무구조도 훨씬 단단한 것은 사실이었다. "당신은 이 지역에 대해 잘 모르실 겁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오?" "난 여기서 태어나 자랐죠. 여기서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내 고향과도 같습니다."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오?" "아시겠지만 난 옛날의 가난했던 존이 아닙니다." "알고 있소." 히든은 그곳이 고향이라는 구실로 어느 날 갑자기 뛰어들어 전지역의 소유권을 노리는 존 을 사실상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곳에 뿌리를 박은 것은 그 자신이 먼저였기 때문 이다. "이곳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 어떤 시대입니까? 마땅히 이 젠 개발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문제라면 나도 해결할 수 있소. 불쑥 나타난 당신이 걱정하지 않아도 말이오." "물론 그건 압니다. 충분히 그러실 수 있으시겠죠. 하지만 이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먼 저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는 것도 아실 겁니다." "조건이라고 했소?" "그렇습니다." "무슨 조건을 말하는 것이오?" 존은 말할 때마다 손으로 자신이 고향이라고 지칭한 도시의 빈민 지역을 가리켰다. 마치 그 지역에 대한 향수심에 젖은 모습을 보이려는 듯해 히든으로서는 건방지게 느껴질 따름이 었다. "현재 히든 회장님이 지역의 절반 정도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가 차지할 수 있는 것은 그 나머지뿐이죠." "당신이 차지한다고 했소?" "현재 추진 중인데 조만간 그렇게 될 겁니다." 히든의 얼굴에 놀라는 빛이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정보를 통해 파악하고 있는 중이긴 했 지만 존의 태도가 우서 건방졌고 무엇보다 히든은 그의 지나치게 큰 야심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자신이 대단하군요. 존, 일이 그렇게 당신의 뜻대로 된다고 확신하시오?"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이오?" "방금 그 말씀을 드리려던 참입니다. 아시겠지만 이 지역이 양분된 상태에서는 개발을 불가 능합니다." "누군가 독점해야 된다는 뜻이오?" "그렇습니다." "이유는?" "전지역을 동시에 개발하지 않으면 개발하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투자 가치도 물론 상실하 게 됩니다." "투자 가치?" "물론이죠. 막대한 자금이 투자될 예정인데 그 가치를 계산하지 않을 수는 없겠죠." "간단히 말합시다." "네." "당신 말은 우리 둘 가운데 누군가 단독으로 저 지경의 소유권을 가져야 된다는 것 아니 오?" "그렇습니다. 히든 회장님은 역시 안목이 깊으시군요." 히든의 얼굴에 갑자기 단호한 표정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히든의 갑자스런 변화에 존도 잠 깐 어리둥절해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특별히 그를 만난 것은 그의 체면을 지켜주기 위해서 라기보다 묘수를 찾아내려는 속셈에서 였다. 꼭 할 수만 있다면 목적을 위해 물리적인 방법 으로도 히든을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히든은 과거와 관계없이 현재는 정통성을 가진 재벌 이지만 존은 정통성이나 정의보다는 야망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존은 어떤 물리적인 힘이 라도 동원시켜 목적을 달성할 것이고 그럴 만한 능력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얘기는 끝났소, 존." "네?" 존은 잠깐 어리둥절했다. "어차피 이 지역에선 내가 뿌리를 내리고 있소. 당신이 꼭 미개발 지역에서 투자 가하다 찾 고자 한다면 다른 곳에도 얼마든지 적당한 장소가 있을 것이오." "그건 안됩니다." 존도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이곳을 정한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충분한 이유?"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신은 어릴 때부터 고생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살았더군요." "내 신상에 대한 조사까지 했단 말이오?" 히든의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다른 뜻은 절대로 없습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미리 파악해 두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조사를 시켰을 뿐이며 그 사실은 극비에 붙여졌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당시의 신상에 대해 조사해도 할 말이 없을거요?" "그거야..." "대답해 보시오, 존." "그래도 특별히 얻을 것은 없으실 겁니다. 아시다시피 전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고생하며 살아온 사람인데 히든 회장님처럼 화려한 경력이 있을 쑨 없죠." "화려한 경력?" 히든은 더욱 불쾌해졌다. 자신의 고거에 대한 조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은 조금도 주저 하지 않고 계속해서 덧붙여 말했다. "과연 굉장하시더군요. 손을 안 댄 사업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다양할게..." "닥치시오!" 히든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존을 노려보았다. 존은 확실히 그를 모욕하고 있 었다. 필요하다면 과거의 치부를 공개해서 망신을 줄 수도 잇다는 배짱이 존의 얼굴에 나타 나 있었다. "언잖으시다면 사과하겠습니다." 존은 히든이 더 이상화를 낼 수 없도록 금방 태도를 공손하게 바꾸는 교활함을 보였다. "하지만 저에게도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히든은 아직 기분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난 당신이 전혀 모르는 것을 얼고 있습니다. 당신은 고생이 무엇인지 모를뿐더러 가난 자 체도 아마 모르실 것입니다. 헐벗고 굶주리는 고통에 대해서 아십니까?" 갑자기 진지해진 조의 질문에 히든은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존의 그 말이 사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히든은 가난에 대해 전혀 몰랐다. 존은 계속해서 히 든의 취약함 부분을 건드렸다. "난 그걸 알죠. 어릴 때부터 충분히 경험했고 그로 인해 지금처럼 뼈가 굵어졌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일이 지금 하는 이야기와 무슨 상관이오?" "상관이 있죠. 절대적으로." 히든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적어도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그들을 위해 개발할 사람이라면 그 사람들에 대 해 알고 있어야 된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그들을 위한 개발이기 때문이죠." 존의 설명은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두 가지 게임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시고니?" 저스틴은 그 문제에 대한 굉장한 관심을 나타냈고 리차드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서 듣 고 있었다. "어이없는 일입니다. 아이들 장난 같은 일이죠." "내기를 걸었나요?" 리차드가 묻자 시고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히든 회장이 하루만 여유를 갖자고 했답니다." "존은 뭐라고 말을 했나요?" "그 사람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좋지 않은 일을 벌이 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것이지요." "나도 같은 생각이에요, 시고니. 어쨌든 굉장한 도박이 되겠군요, 내기가 설립된다면." "그렇습니다, 메인 씨.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런 게 어디 어린애 장난하듯 할 수 있는 일 입니까?" 시고니 역시 매우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여보, 그 사람들 정말 그런 내기를 걸까요?" 저스틴은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고 그녀는 다시 시고니를 행해 확인하듯이 물었다. "히든 회장이 빈민가에서 한 달 동안 버텨야 된단 말인가요?" "그럼요." "평생 동안 고생을 모르고 살던 사람이 돈 한 푼 없이 버틸 수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존이 노리는 점입니다, 메인 부인. 히든이 어리석게 말려든 셈이죠." 그러나 저스틴과 시고니의 의견에 비해 리차드는 다른 견해를 나타냈다 히든을 잘 알고 있 는 그로서는 그 게임이 히든에게 불리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지만은 않을 거야. 히든, 그 사람 대단하거든." "대단하단요?" "한번 결심하면 좀처럼 바꾸지 않는 성격이야. 글쎄,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 아직 알 수는 없 지만 설령 내기가 성립된다고 해도 존이 쉽게 이길 수는 없을 것이 분명해." "내 생각에는 존이 내기에서 이겨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메인 씨." "그래야겠죠." 이들이 말한 것처럼 존은 히든에게 한 가지 기발한 내기를 제의했다. 개발예정지 전체에는 현재 거지들이 우글거렸다. 골목마다 그들이 있었고 다리 밑은 그들의 가장 아늑한 보금자 리였다. 집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비록 그들이 거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근근히 연명해 가 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만 동냥그릇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지 않을 뿐이었다. 존의 자극적인 제안은 히든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렸다. 평생 동안 고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 온 사 람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수 없다는 것이 존의 강력한 주장 이다 결국 고생을 경험한 자신이 적임자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한 명분을 찾으려는 존의 속 임수였다. "지금까지는 내가 고생을 모르고 살아왔지만 나도 자신이 있소." 히든은 이렇게 강력히 항변했으며 이것은 내기의 기폭제로 작용하기도 했다. "당신도 할 수 있다는 뜻인가요, 히든 회장님?" "물론!" "저기서 그들가 어울려 살아갈 수 있단 말이죠?" "그렇소.!" "좋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제안을 하죠." 히든의 수중에 돈도 한 푼 없이, 신용카드도, 누구의 원조도 없이 부랑아들과 어울려 30일 동안 버틴다는 것이 존이 제안한 희한한 내기의 전부였다. 시고니의 말처럼 어린아이들 장 난 같기도 했다. 만일 성공하면 존은 기꺼이 다른 지역으로 철수해야 했고 실패하게 되면 히든이 다른 지역으로 철수해야 되는 것이다. 완전한 자존심의 대결이었다. 리차드가 생각하 고 잇는 것처럼 히든은 자존심이 대단하기로 주위에 소문난 사람이었다. "존은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요, 여보?" 저스틴은 히든보다 존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컸다. "자신이 이길 것이라고 믿겠지, 그러나 항상 변수는 있기 마련이니까. 난 히든을 믿어."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요?" 시고니는 리차드와 견해를 달리했다. "어째서죠, 시고니?" "그 사람은 결국 극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히든을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한 번 결심하면 낙타를 바늘구멍에 넣기 위해 평생이라도 바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요." "아무리 그렇지만 그곳은 빈민굴입니다. 굶주리고 헐벗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게다가 거지들 이 우글거립니다. 도둑이 판을 치고 싸움질이 끊일 날이 없죠. 사방에서 악취가 품어 나와서 코를 막게 만듭니다. 향수 대신 썩은 오물 냄새를 맡아야 하는 곳입니다. 스테이크 대신 쓰 레기통 속에서 찬밥을 얻어먹어야 하는 그런 곳에서는 정말 상상도 못할 삶이 기다리고 있 죠." "글쎄요..." 리차드는 시고니의 설명과 지신이 알고 있는 히든 벨 클라크를 조용히 비교해 보았다. 시 고니의 판단이 들어맞을 수도 있다. 히든은 평생 고생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말 그대로 가난이나 빈곤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다. 하루나 이틀 정도라면 또 모르겠지만 기간 은 무려 30일이라고 했다. 그 기간이 히든에겐 30년보다 견디기 힘든 고통의 연속일 것은 분명했다. 갑자기 전화 벨이 울렸다. 존과 히든의 어이없는 내기에 대해 생각 중이던 세 사 람은 동시에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내가 받죠, 메인 씨." 언제 나처럼 시고니가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네. 경감님이시군요." 리차드와 저스틴이 재빨리 마주 바라보았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바꿔 드리죠." 시고니는 리차드에게 전화기를 건냈다. "경감님?" "안녕하세요, 메인 씨." "사건은 잘 되어 갑니까?' "그 문제 때문에 전화를 드리는 겁니다." "말씀해 보세요." 하그렌드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있었다. "메인 씨, 지금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무슨 일입니까?" "그건 지금 말씀드리기가 곤란하군요.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그래요?" 리차드는 시계를 보았다. "부탁합니다." "오래 걸리겠습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좋아요." 리차드는 하그렌드가 있는 장소를 알아 놓은 다음 전화를 끓었다. "무슨 일이에요?" "경감인데, 급히 좀 보자고 하는군." "왜요?" "모르겠어. 급한 것 같은데 가봐야 할 것 같아. 당신도 같이 가겠소?" "물론 가고 싶어요."언제나 리차드의 곁에 있고 싶어하는 저스틴이다. 이번이라고 예외일 수 는 없었다. "다녀오세요, 메인 씨. 메인 부인." "예, 시고니." 시고니는 급히 밖으로 나가는 메인 부부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존을 생각했다. 모든 점에 서 존보다 훨씬 앞서 있으면서도 평범해 보이는 리차드에게 새삼 존경스러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닐 완슨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런 사태가 발생할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10만 파운드를 받고 니아를 넘긴 것으로 끝날 줄 알았고 그녀를 넘겨받은 친구 역 시 도박판에서 사귄 친구일 뿐, 오래 전부터 사귀어 온 사이는 아니었다. 니아를 그 친구에 게 넘기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닐 완슨의 이야기를 들은 니아가 크게 하를 내었던 것이다. "니아,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뭔 데요?"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부터 닐 완슨에게 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니아가 시큰둥해져서 대답했다. "어떻게 얘기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오해하지 말고 들어줘. 이간 다 니아와 나를 위해서 야." "얘기나 해요." "니아, 니아는 그 동안 남자를 많이 사귀었겠지?" "그래서요?" "내 말은 이번에는 우리를 위해서 한 번만 눈 감아 달라는 거야." "뭘 눈 감아요?" "다음 판에는 내가 꼭 딸 자신이 있는데 판돈이 없어. 그래서 말인데... 니아가 한 번만 눈 감아 주면 10만 파운드가 굴러 들어와." "글쎄 뭘 눈감아 달라는 건지, 말이나 해 봐요." "이만큼 말했으며 알 텐데?" "모르겠어요." 니아는 알면서도 설마하는 생각에 모르는 척했다. 터놓고 얘기할 수도 없는 입장인 닐 완 슨은 망설인 끝에 결국 솔직하게 털어놓고 말았다. "니아를 굉장히 원하는 친구가 있어. 니아가 그를 한 번만 만나 주기만 한다면 10만을 내 놓겠다는 거야." 니아는 갑자기 입을 다물며 닐 완슨을 서글픈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호를 낼 줄 알았던 닐 완슨은 오히려 어리둥절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 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니아는 놀랍도록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날더러 다른 남자에게 돈을 위해 아니 당신을 위해 몸을 팔라는 거예요?" "그렇다기 보다는... 그렇게까지 말하니 할 말이 없군." "바꾸어 말하면 지금 날더러 다른 사내와 한 번 하룻밤을 지내라는 거죠? 그리고 그 대가로 10만 파운드를 받아 다음 도박의 밑천을 삼겠다는 건가요?" 닐 완슨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어떤 말이 떨어질지 예측할 수 없어 불안했 다. 그러나 잠시 후 니아는 승낙하면서 뜻밖의 조건을 제시했다. "좋아요." "좋아?" 닐 완슨은 뛸 듯이 기뻐했다. "대신 두 가지 조간이 있어요." "뭐든지 말해 봐." 니아는 확실히 특별한 여자였다. 그녀는 닐 완슨이 상상하지 못했던 두 가지 조건을 제시 했다. "첫째, 그 남자가 누구든 허튼 짓은 안돼요." "뭐라구?" "애무나 키스도 허락하지 않겠어요. 곧바로 간단히 끝내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하여튼 좋아. 나마지 조건은 뭐지?" "이건 단신과의 약속이에요. 10만을 걸고 도박을 해서 돈을 따게 되면 원래 걸었던 10만을 제외한 나머지 돈은 몽땅 나한테 넘겨요." "뭐라고?" 닐 완슨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설명은 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도박에서 돈을 따 게 될 경우 몇 십만 아니 몇 백만 이나 되는 파운들 긁어 올 수도 있다. 그녀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데는 닐 완슨으로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니아가 제안한 두 가지 조건은 모두 이색적이고 엄청난 것이었으며 둘 다 지켜지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키스도 애무도 안되 고 도박에서 딴 돈 중 밑천만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니아에게 뺏기다시피 주는 것은 그야말 로 상식적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조건들이었다. 그러나 당장 급한 닐 완슨은 우선 니아의 조건을 순순히 승낙했다. 그러나 바고 그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될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친구는 니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바로 직전에 10만 파운드를 주기로 약속했다. 사건이 발 생한 곳은 니아와 닐 완슨의 친구가 만나기로 정한 장소에서 였다. 마치 10만 파운드가 저 절로 들어오는 것 같았고 그것으로 다음 번 도박에서 한 몫 잡을 자신이 있는 닐 완슨은 공 연히 기분이 좋았다. 그는 아직까지는 이루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들떠서 많은 사람 들에게 값비싼 술을 한잔씩 돌리고 있었다. 바고 그 카지노 클럽의 이층 방에선 니아와 닐 완슨의 친구가 만나기로 되어 있고 그 후에는 10만 파운드가 저절로 닐 완슨의 손으로 들어 온다고 생각하니 닐 완슨은 저절로 흥이 났던 것이다. 약속 시간은 저녁 8시였고 도박은 오 후 9시에 시작한다. 니아의 조건에 따라 일은 몇 분이면 끝날 테고 그런 다음에 한 전 더하 면 게임을 즐길 수가 있다. 닐 완슨은 멋진 계획이라고 확신했다. 모든 일은 순조롭게 계획 대로 진행되어 7시 30분쯤 친구는 약속장소에 나타났다. 그보다 약간 앞서 니아는 이미 약 속된 방에 들어가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닐, 왔나?" "이층에서 기다리고 있어." "잘 됐군." "돈은?" "걱정 말게, 여기 이렇게 있으니까." 친구는 직접 돈을 닐 완슨에게 보여 주었다. "이봐, 닐. 우선 그 여자 얼굴이나 한 번 보세." "뭐라고?" "시작하기 전에 얼굴 정도는 볼 수 있겠지?" "그거야 어렵지 않지." "올라가 보세. 내가 안내할 테니." "좋아." 닐 완슨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눈앞에서 10만 파운드가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엔제 돈을 보았었나 할 정도로 닐 완슨은 마음이 급했다. 그 10만 파운드가 도박판에서 몇 십, 몇 백만 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도박꾼의 고질적인 희망이 닐 완슨으로 하여금 잔뜩 부풀게 만들었 다. 친구는 마치 고의적이기라도 하듯 조용히 노크한 다음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냥 내려갈까 했던 닐 완슨은 그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친구가 나오면 우선 돈부터 받고 다시 들여보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는 친구의 돈만을 생각했다. 니아가 비록 이런 생활을 하는 여자라고는 하지만 그녀의 자존심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다만 닐 완슨 은 돈이 필요했고 그것을 갖기 위해서 그녀를 이용하려는 것뿐이었다. 이런 일에 어떤 양심 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무엇 때문에 순순히 응했을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지 않고 있었다. 니아도 이런 환경에서 생활하는 여자이긴 하지만 그녀는 이 제의에 실망과 분 노를 느꼈다. 니아의 이런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닐 완슨은 복도를 서성거리며 앞으로 펼 처질 즐거운 나날을 생각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앞으로 발생할 뜻밖의 사건을 예상하지 못한 채. 니아의 얼굴이나 보고 나오겠다고 약속한 친구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 갔을 때 니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지?" 낮게 중얼거리는 사내의 귀에 물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던 그의 두 눈은 커졌다. 문이 바쯤 열린 욕실에서 니아는 샤워를 하는 중이었다. 약속된 시간까지 아무도 오 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니아는 그렇게 알몸을 드러내고 방심한 채 샤워를 하고 있었다. 사내는 입을 벌린 채 넋을 잃은 사람처럼 니아의 알몸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닐 완슨은 복도에서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별다른 뜻은 없었다. 친구가 나오면 10만 파운 드가 손에 들어온다는 생각뿐이었다. 바로 그때 별안간 안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예기치 못한 사건 "자네 나 한테 신세진 일을 아직까지 잊진 않았겠지?" 닐 완슨의 말투는 마치 협박 조였으며 제이 제이를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거야... 그건 그렇고, 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야? 자네가 이곳으로 도망쳤다고 런던 경시청 이 거기서 구경만 하고 있을 것 같은가?" "그건 지금 생각할 문제가 아냐, 알겠어?" "그럼." "자네가 나를 경찰에 고발하지만 않으면 돼." "내가 왜 그런 짓을 할거라고 생각해?" "어쨌던 분명히 얘기해 두겠는데 만일 내가 여기에 있다는 소문을 내면 죽여버리겠어." 닐 완슨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사람을 죽였다 고의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 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먼저 친구를 니아가 있는 방으로 들여보내고 밖에서 기다 리던 닐 완슨은 난데없는 비명소리에 놀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전까지 닐 완슨은 그 친구가 그와 같은 습관을 가졌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가 뛰어들어갔을 때 친구는 샤워 중이던 알몸의 니아를 거실 바닥에 쓰러뜨린 다음 강제로 두 손을 묶는 중 이었다. 그 상황으로 보아 니아를 결박한 다음 강간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닐 완슨이 사납게 소리쳤지만 친구는 그 소리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잠깐만 나가 있으라고." "뭐야?" "이걸 보고 애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나, 안 그래?" 그는 닐 완슨이 들어갔는데도 뚫어지게 노려보는 니아의 엉덩이를 슬슬 어루만지고 있었 다. 아직 물기도 채 마르지 않은 니아의 몸에는 아무것도 걸쳐진 것이 없었고 사내의 억센 힘에 의해 바닥에 엎드린 자세에서 두 손은 등뒤로 묶이고 있었다. "약속이 틀리잖아!" "무슨 약속, 어차피 한 번의 기회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해도 이건 안돼. 당장 그녀를 놔 줘!" "그거야 안될 말씀이지. 닐, 안 그런가?" 그의 친구는 이미 니아의 두 손을 벗어 놓은 브래지어로 완전히 묶어 놓은 상태였다. "나가고 싶지 않으면 거기서 구경이나 하게. 보는 것도 괜찮겠지." 그는 니아의 두 손을 묶은 다음 몸을 한 바퀴 돌려 벗겨진 니아의 몸을 천장을 향해 반듯 하게 뉘였다. 처음에는 닐 완슨이 구해 줄 것으로 생각했던 니아는 다시 발버둥치며 소리치 기 시작했다. "안돼! 이러지 마!" 그녀는 발길질을 시도했지만 두 손이 등뒤로 묶여 있기 때문에 역부족이었다. 사내는 여유 있게 웃으며 니아의 발목을 붙잡았다. 사내의 억센 힘에 니아는 속수무책이었다. "얌전하게 있으라고. 난 닐한테 이미 약속을 받아 놓았어. 알고 있을 텐데, 안 그래?" 사내는 니아의 발목을 양쪽으로 크게 벌림 다음 가운데로 파고 들어갔다. 그때였다. 갑자기 사내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닐 완슨이 쳐다보았을 때 그의 친구는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만 지고 있었다. 그녀가 발로 힘껏 걷어찼던 것이다. "이것이!" 사내도 잔뜩 화가 났다. "가만히 있지 못하겠어?" 니아가 다시 걷어차려 할 때 사내는 먼저 주먹을 휘두르며 무자비하게 니아를 내려쳤다. 그녀의 입에서는 쥐어짜는 것 같은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화가 오른 사내는 어느 틈엔가 무서운 폭력배로 변해 고통스로워 꿈틀거리는 니아를 계속 사정없 이 주먹으로 내려쳤다. 그런 상황에서도 니아는 계속 저항했고 저항하는 그녀의 발길질에 사내의 눈은 확 뒤집혀진 것처럼 보였다. "이년이!" 욕설과 함께 벌떡 일어난 사내는 마치 성난 호랑이처럼 미친 듯이 니아에게 달려들었다 "그만, 그만 뒤!" 보다 못한 닐 완슨은 냅다 소리치며 친구를 니아에게서 떼어놓으려 했지만 이미 그는 이성 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막무가내였다. "저리 비켜!" 그는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며 닐 완슨을 냅다 밀쳤다. 닐 완슨은 뒤로 비틀거리며 밀려나면 서 발에 걸리는 무언가에 의해 뒤로 벌렁 나가떨어졌다. 그사이 실내는 친구의 가죽벨트까 지 마구 휘드르는 병적인 행동으로 삽시간에 처절한 비명과 함께 살벌한 분위기로 변했다. 뒤로 넘어졌던 닐 완슨이 겨우 일어났을 때는 니아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였고 그 광경은 닐 완슨으로 하여금 제 정신이 아니도록 만들었다. "그만두지 못해! 이러다 사람 죽이겠어!" "저리 비켜! 흥분한 사내는 오히려 닐 완슨에게도 덤벼들려는 자세를 취했다. 순간 닐 완슨은 반사적으 로 위험을 느꼈고 그때 그의 손에 움켜잡은 것은 탁자 위에 있던 금속제로 만들어진 재떨이 였다. 하지만 이것 저것을 생각할 겨룰이 없었다. 순간 닐 완슨이 움켜잡은 금속제 재떨이는 사내의 얼굴을 향해 힘껏 날아갔다. 탁, 하는 둔탁한 소리와 거의 동시에 어이쿠, 하는 묵직 한 비명소리가 닐 완슨의 귀에 들렸다. 순간적으로 흥분했던 상태에서 자신을 방어했던 닐 완슨은 소리나는 쪽을 재빨리 쳐다보았다.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이 친구는 니 아의 곁에 허물어진 벽돌담처럼 쭈그리고 있었고 온몸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니아는 헝클어진 자세로 누운 채 움직이지 않았다. 더구나 주위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니아?" 대답이 없다. "이봐!" 그의 친구도 대답이 없었다. 니아에게로 가려던 닐 완슨은 먼저 친구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확 잡아챘다. "대체 무슨 짓을..." 그는 말을 뚝 그쳤다. 어깨를 당겼을 때 친구는 썩은 나무토막처럼 나뒹굴었던 것이다. "이러지 마!" 닐 완슨은 갑자기 더욱 화가 나서 소리쳤다. 그때 니아는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고개를 들 었다. 그녀가 쓰러진 사내의 얼굴을 발견했을 때 니아는 기절할 듯이 놀라 부르짖었다. 그 바람에 더욱 놀라 친구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닐 완슨은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그의 친구 는 이미 두 눈이 허옇게 뒤집혀진 채 죽어 있었던 것이다. 니아가 미친 여자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친구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닐 완슨은 정신없이 소리쳤다. "조용, 조용히 해!" 니아는 막무가내로 계속 부르짖었다. 그대로 계속 소리를 치면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다. 닐 완슨은 이렇게 생각이 되자 본능적으로 니아에게 달려들면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미 제정신이 아닌 니아는 닐 완슨의 손가락을 깨물었고 닐 완슨은 비명 소리와 힘께 니아의 몸 을 힘껏 밀었다. 니아의 몸뚱이는 맥없이 침대 쪽으로 밀려갔다. 그로부터 얼마 후 다른 사 람이 그 방에 들어갔을 때 니아는 침대 다리에 기댄 채 기절해 있었고 사내의 시체는 바닥 에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이봐, 닐" 제이 제이는 표정이 심각하게 고치며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 자네는 고의적으로 사람을 해친 게 아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사람이 죽었단 말이야." "고의적으로 그런 건 아니잖아." "마찬가지야. 내가 재떨이로 그를 때려 죽였다고." "우선 변호사를 만나보는 게 어떻겠나?" "안돼." "어째서?" "경찰이 먼저 살인죄로 날 체포할 테니까." "자넨 정당방위였어, 닐. 그가 먼저 가죽벨트로 공격하려 했잖아. 그리고 그는 그때 이미 여 자한테 폭력을 휘둘렀고. 자넨 오히려 옳은 일을 한 거야. 그래도 모르겠나?" "아내. 안 그래. 경찰은 애가 그를 죽였다는 사실만을 강조할 것이 분명해. 그건 또 사실이 고..." 닐 완슨은 비참하게 중얼거리며 주먹으로 벽을 쳤다. 자신이 니아까지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현장에서 도망친 다음 곧장 외곡지대에 있는 모텔에서 며칠 동안 숨어 있으면 서 앞으로의 행동을 모색한 후 로스앤젤레스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경시청이 수 사에 착수한 후였다. 병원에 실려간 니아는 그날로 퇴원했다. 사건 수사를 맡은 경시청에서 닐 완슨을 체포하려는 것을 결정적으로 니아의 증언 때문이었다. 그녀는 닐 완슨이 친구를 무론 자신도 죽이려 했다고 오해했기 때문이었다. 제이 제이는 딱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이봐, 닐.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서 지낼 수 있을 것 같은가?" "나도 몰라. 하여튼 난 이대로 붙잡힐 수는 없어. 밑천을 만들어 한몫 잡아 보석금이라도 마 련하기 전에 안돼." "그건 틀린 생각이야." "그럼 날더러 어떡하라는 거야? 그래, 이제 알았다. 날 숨겨주는 게 싫단 말이지?" "이러지 말게, 닐.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다만 자네가 직접 자수하기를 원할 뿐이 야." 그때 닐 완슨의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제이 제이, 한 가지 날 위해 해줘야 될 일이 있어." "뭔데?" "만일 런던의 경시청에서 수사를 시작했다면... 그래, 어쩌면 여기까지 다라 왔을지도 몰라. 그러니 그걸 알아봐야겠어." '어떻게?" "자네 메인 씨 집에서 일하는 친구 알지?" "시고니?" "맞아. 그한테 연락해 봐." "그거야 어렵지 않겠지만, 시고니가 알겠어?" "짚이는 게 있어서 그래." 닐 완슨은 지난번 로만 사건 때 하그렌드 경감이 라차드의 집에 갔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 었다. "지금 말인가?" "그래, 지금." "그건 어렵지 않아." "나하고 같이 있는 것을 눈치채게 하면 절대로 안돼, 알았지?" "걱정말게." 제이 제이는 교환을 통해 평소 기억하고 있던 리차드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때마침 혼자 있던 시고니가 전화를 받았다. "잘 있었나, 시고니?" "누구신가요?" 시고니는 금방 상대를 알아차리고는 놀랐다. "제이 제이 아닌가!" "어떻게 된 거야?" 시고니는 제이 제이가 집에서 나간 지 며칠 도안 연락도 없이 지냈다는 사실을 생각해냈 다. "어떻게 되다니 무슨 소리야?" "지금 어디 있어?" "시내에 있어." "아직도 집에 들어가지 않은 거야?" "일이 좀 있어서." "무슨 일인지 말해 줄 수 없겠나?" "그보다 시고니, 자네 혹시 내 친구 닐 완슨을 기억하고 있나?" "닐 완슨?" 시고니는 바싹 긴장하면 재빨리 덧붙였다. "물론 기억하지.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 때문에 전화를 했더니 며칠째 집을 나가 소식이 없 다더군. 몹시 걱정했네. 자네 괜찮은가?" 제이 제이는 시고니의 이야기 속에서 무엇이든 알아내려 했다. 그는 곁에서 긴장된 표정으 로 지켜보는 닐 완슨을 힐끗 바라본 다음 모르는 척하며 입을 열었다. "닐 완슨 때문이라니, 그 친구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겼다는 말인가?" 시고니는 제이 제이가 닐 완슨과 함께 있을 거라곤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의심 이 가긴 했지만 직접 통화를 하는 동안 오히려 그를 의심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제이 제 이는 자신에 대한 비관 때문에 떠돌아다니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메인 씨 집에 손님이 왔었지. 런던에서 말야." "런던에서?" 그 말에 닐 완슨은 크게 긴장했다. "자넨 모를 거야. 지난 번에도 왔었던 경시청의 하그렌드 경감이야." "그가 왜 왔지?" "닐 완슨을 찾고 있었어." "그래? 아니, 그 친구가 뭘 잘못했기에?" "그건 나도 모르겠어. 좋은 일은 아닌 게 확실하지만 어떤 일로 이곳에 왔는지 그건 잘 모 르겠네." "런던경시청의 하그렌드 경감이 왔단 말이지?" 제이 제이는 곁에 있는 닐 완슨이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또박또박 반복해서 묻고 있었다. 전화 통화를 통해 사실을 알아차린 닐 완슨은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어쩔 줄 몰 라했다. 하그렌드 경감이 로스앤젤레스에 왔다면 그 목적은 이미 밝혀진 셈이나 다름이 없 었다. 그에게는 로스앤젤레스도 더 이상 안정한 지역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궁지에 몰린 쥐 이 시간 하그렌드는 닐 완슨과는 상관없이 전혀 다른 장소에서 메인 부부를 기다리고 있 었다. 시내의 변두리에 속한 고속도로 입구에 위치한 주유소 옆 작은 모텔에 로비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리차드는 그와 주변을 한 차례 살펴보았다. "그나저나 죄송해서 어쩌죠?" 하그렌드는 굉장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시오?" "정보가 잘못된 것을 모르고 연락을 드렸어요." "그래요?" "이 모텔에 닐 완슨이 투숙하고 있다는 정보였습니다. 아시다시피 난 미국인도 아니고 경찰 보다는 메인 씨의 도움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런 정보는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다음에 설명을 드리겠지만 나름대로 신경을 좀 썼죠." "닐 완슨이 이 모텔에서 묵었다는 정보는 정확합니까?" "그건 사실이었습니다. 하룻밤 묵고 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어요." "뭐죠?" "그자는 혼자가 아니었답니다. 이름은 알 수 없지만 미국인이 동행했다고 하는군요." "미국인요?" "네." 곁에서 듣고 있던 저스틴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여보 혹시 시고니의 친구라는 그 사람이 아닐까요?" "시고니의 친구?" 하그렌드는 갑자기 긴장된 표정을 나타냈다. "있잖아요, 전에 시고니가 말했던 그 친구요." "아아, 그렇군." 리차드도 그 생각을 해냈다. "이름이 뭐랬더라... 제이.... 그래, 제이 제이였어. 하지만 닐 완슨과 함께 다니는 미국인이 제이 제이라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지?" "그냥 떠올랐던 생각을 말해 본 것뿐이에요." 언제나 생각나는 대로 생각을 표현하는 저스틴은 이번에도 스스로 말꼬리를 접으려 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두 분." 하그렌드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생각납니다. 시고니가 그날 전화했다던 친구라는 사람 말입니다. 닐 완슨이 히드로 공항을 떠났던 그날, 그 사람도 집을 나갔다고 하지 않았었습니까?" "그렇군요." "맞았어요!" 리차드와 저스틴은 거의 동시에 맞장구쳤다. 하그렌드가 말을 꺼내기 전가지 그 사실에 대 해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제이 제이의 부탁으로 시고니가 닐 완슨을 집에 들여 보냈다 는 사실을 메인 부부는 다시 생각해 냈다. 닐 완슨을 위해 그런 도움을 줄 수 잇는 친구라 면 현재도 친구를 위해 도움을 줄 확률은 그만큼 높다고 할 수 있었다. "여보." 저스틴이 다시 말을 꺼냈다. "이렇게 있지만 말고 같이 우리 시고니에게 가보는 게 어때요?" "지금?" "그럼요." "아니, 우선 전화부터 하는 게 좋겠어." "그게 좋겠군요, 메인 씨." 리차드는 즉시 전화가 있는 곳으로 가서 시고니가 기다리고 있는 집에 전화를 걸었다. 시 고니가 전화를 받았다. "메인 씨 댁입니다." "나 에요, 시고니." "메인 씨,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기신 겁니까?" 저스틴과 하그렌드는 똑같이 리차드를 주시했다. 리차드가 어떤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아 들을 수는 없지만 표정만큼은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좀 물어 볼 것이 있어요." "말씀하세요." "시고니의 친구 중에 제이 제이라는 사람이 있죠?" "제이 제이요?" "홰 지난번 하그렌드 경감이 왔을 때 전화했던 사람 말입니다." "네 압니다." "글 사람 지금 어디에 있는지 혹시 알고 있어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참, 조금 전에 제이 제이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었습니다." "그래요?" 리차드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저스틴과 하그렌드는 긴장된 모습으로 지켜보았다. "네, 메인 씨." "그게 언제였죠?" "아마 10분이 좀 지났을 겁니다. 그런데 왜 그러시죠?" "지금은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공중전화니까. 제이 제이가 어디에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나요?" "아뇨. 그런 말은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디에 있냐고 물었더니 그냥 시내라고 하던군 요." "시내?" "네. 그 친구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메인 씨." "무슨 뜻이죠?" "그것 역시 지금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아무튼 자신을 비관하고 있을 겁니다." "무슨 이유죠?" "그 이유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마 그 이유 때문에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그렇게 돌 아다니는 것이 분명합니다." "좋아요, 나중에 듣기로 하죠." "집에 들어오시면 말씀드리죠." "그럼 나중에 집에서 봐요." "네, 메인 씨." 리차드는 전화를 끊고 저스틴과 하그렌드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나 뭔가 꼭 중요한 것을 빼먹은 것 같은 기분이 리차드의 머리에 머물고 있었다. "시고니가 뭐라고 하던가요, 여보" 하그렌드보다 저스틴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가만!" 리차드는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저스틴과 하그렌드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유심히 리차 드를 바라보았다. "잠깐만요, 경감님. 다시 전화해 봐야겠어요." "네?" 그때 리차드는 이미 전화기를 향해 급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저스 틴도 하그렌드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리차드는 시고니와 통화할 때에 잠깐 잊고 있었던 일을 생각해 냈다. 제이 제이가 10분 전에 전화했었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시고니." 다이얼을 돌린 리차드는 시고니가 수화기를 들자마자 본론부터 이야기를 했다. "메인 씨 인가요?" "그래요, 나예요." "그런데..." 시고니는 의아해 하며 말끝을 흐렸다. 좀처럼 그런 조급함을 보이지 않는 리차드 였다. "제이 제이 말이에요, 시고니." "네, 메인 씨." "전화할 때 혹시 이상한 느낌을 받지는 않았나요?" "네?" 시고니는 리차드의 말을 재빨리 이해하지 못했다. "시고니 혹시 누구와 함께 있는 것 같지는 않았던가요?" "글쎄요, 약간 이상한 것 같기는 했습니다만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이상했죠?" "그전 같지 않고 마음이 조급한 것처럼 들렸어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요, 시고니. 그가 전화를 할 때 곁에서 어떤 소리라도 들리지 않던가 요?" "글쎄요..." 시고니는 재빨리 제이 제이가 전화한 당시를 생각해 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리차드가 그런 식으로 말할 때에는 무엇인가 굉장히 중요한 일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되었다 따라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시고니는 금방 깨달았다. "무슨 소리가 들리진 않았던 것 같은데요. 메인 씨." "그런데?" "글쎄요, 정확히 뭐라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평소 때와는 좀 달랐어요, 네 맞습니다. 그건 꼭 곁에서 누군가 감시하고 잇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분명하죠?"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런데, 메인 씨. 무슨 일입니까?" "간단히 말하죠." "알겠습니다." "지금 우린 닐 완슨이 하룻밤 묵고 간 모텔에 있어요." "모텔요?" "그런데 그것보다는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네?" "닐 완슨이 어떤 미국인과 함께 머물렀다는 거예요." "미국인요?" "그래요." "혹시 그가 제이 제이 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꼭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겠죠." 시고니와 전화를 하는 도안에도 리차드는 이번 사건을 해결할 결정적인 단서를 궁리하는데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어떤 보이지 않는 확신 같은 것이 그를 계속 몰아 대는 것만 같 았다 제이 제이가 닐 완슨과 함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확신 속에 사로잡은 것이 다. "시고니, 부탁이 있어요." "말씀하세요, 메인 씨." "지금 교환에 연락해서 제이 제이가 어디에서 전화를 했는지 좀 알아 달라고 부탁해요. 그 러면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지금 빨리요." 전화를 끝낸 리차드는 저스틴과 하그렌드가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오는 동안 침착성을 되찾 았다. 그의 마음은 굉장히 조금해 있었다. 일종의 육감 같은 것으로 하여금 어떤 확신을 갖 게 만든 것이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제이 제이는 닐 완슨과 함께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제이 제이는 아마 동정을 살피기 위해 시고니에게 전화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전화예요?" 저스틴은 아직 리차드의 생각을 알아차리지 못하고있었다. 함께 있던 하그렌드도 마찬가지 였다. 그가 비록 런던 경시청의 베테랑급 수사관이라고는 하지만 시고니와 리차드의 통화내 용을 일지 못한 상태에서 사건 전반에 대해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시고니한테 뭘 좀 부탁했어. 그리고 경감님, 어쩌면 닐 완슨의 소재가 곧 밝혀질 것 같습니 다." 리차드는 저스틴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경감을 바라보며 의외의 성과를 알렸다. "그래요?" 하그렌드 경감은 깜짝 놀랐다. 닐 완슨의 행적을 찾은 후에 체포할 수 있게 됐다고 믿으며 리차드에게 협조까지 요청했지만 의외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해 실망에 빠져 있던 중이었 다. 실추된 체면을 살리는 것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기다리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을 것같다는 리차드의 말은 경감으로 하여금 더욱 놀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장담은 아직 할 수 없어요." "확률은 얼마나 됩니까?" "글쎄요..." 하그렌드의 얼굴에는 초조와 긴장된 표정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었다. 런던 경시청에서는 내로라하던 자신이 전문 수사관도 아닌 리차드의 판단에 의존한다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 이기도 했지만 현재로서는 자존심을 따지기 이전에 닐 완슨을 체포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 한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체면이나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였다. 닐 완슨은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그렌드 그자가 로스앤젤레스에 왔단 말이지?" 그는 다시 확인하듯 제이 제이를 쏘아보면서 물었다. "그렇다는군." "그리고 또, 또 뭐가 있지?" "뭐가 있냐고?" "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냐고." "아니." "너 혹시 나와 같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만든 건 아니겠지?" "아니야, 절대로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어. 바로 옆에서 너도 들었잖아." 이미 제이 제이도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닐 완슨과 동행하며 그를 숨 겨 주기는 했지만, 사실 그는 닐 완슨을 설득해서 자수시키고 싶었다. 그것이 친구를 위해서 도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닐 완슨은 끝내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조 급한 나머지 또 무슨 짓을 저지를 지 알 수 없는 위험만 높아질 뿐이었다. 시시각각 닐 완 슨의 초조와 불안은 더해 가고 있었다. 조그마한 쥐도 궁지에 물리면 고양이를 덤비는 것처 럼 닐 완슨의 모습이 바로 그렇게 보였다. 하그렌드 경감이 로스앤젤레스에 왔다는 사실을 듣는 순간부터 그의 눈빛은 벌써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제이 제이, 아무래도 안되겠어. 장소를 이동해야 할 것 같아." "어디로?" "멕시코로 빠지면 어떨까?" "국경을 넘자는 말이야?" "거기에만 가면 안전할 수 있을 거야. 안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닐, 생각해 봐 우리가 멕시코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 것 같나?" "왜 못 간다고 생각하지?" "런던에서 경감이 왔다고 하는데 그래도 모르겠나? 이미 수사망을 전국에 걸쳐 펼쳐 놓았 을 거야?" "자수하는 길이 최선의 방법이야. 달리 무슨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안 그래?" "닥쳐!" 닐 완슨은 갑자기 소리치며 날카롭게 제이 제이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흥분하지 말고 내 말을 들어봐. 닐." 제이 제이는 침착한 표정으로 설득을 시도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자넨 고의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야. 그건 실수였고 정당방위로 인정될 수도 있어. 죽은 그 친구가 니아를 학대했으니 말이야. 그리고 자네까지 공격하려고 덤비지 않았는가.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자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거야. 그러니 제발 진 정하고 내 말대로 해보란 말야. 닐." "안돼! 난 그럴 수 없어. 경감은 날 미워해. 보기만 하면 당장 감옥에 처 넣을 거야."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넌 몰라서 그래 아무튼 죽어도 자수는 못 해. 그보다 제이 제이, 우리가 멕시코로 넘어 갈 수 있는 길을 빨리 알아 봐." "또 그 소리야?" "이번 한 번만 부탁해. 다시는 부탁하지 않을게." 닐 완슨은 몹시 불안정한 상태에서 빌 듯이 간곡하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는 순간 다 시 사납게 날뛸 지 알수 없을 정도로 그의 마음은 불안정 했다. 그와 같은 모습은 그가 뻔 뻔한 살인자는 되지 못한다는 의미로 사람이라면 그렇게까지 불안해하지는 않는다. 살인자 들은 자신의 행위를 측면에서 항상 자위하며 타당성을 준비하기 마련이니까. 사건 후 곧장 도망친 닐 완슨은 니아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현재 니아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그후 또 다른 남자를 사귀어 지금은 유럽으로 향락 여행중이라는 사실은 닐 완슨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봐, 닐 자네 자꾸 멕시코로 가겠다고 하는데 가진 돈이라도 있나?" "돈?" "나도 돈은 없어. 이미 다 써버렸다고." "나도 없어." "그러면서 어떻게 멕시코로 가겠다는 거야?" "아무튼 가야 해. 여가 있다간 잡혀." "불가능해." "돈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돈이라도 넉넉해야지. 그러면서 뭘 어찌겠다는 거야. 안 그래?" 닐과 말하는 동안에도 제이 제이는 이미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판단과 함께 기회를 노려 경찰에 소재지를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닐 완슨이 눈 치챌 경우 어떤 위험이 따를지 예측할 수없다. 그를 죽이려고 덤빌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현 재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두면 닐 완슨은 초조한 나머지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그는 몹시 불안해했다. 제이 제 이는 닐 완슨은 위해서라도 그 방법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닐 완슨이 체포된 다고 하더라도 공정한 재판은 받으면 금방 풀려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봐, 닐. 자네 배고프지 않아?" "아니?" "난 배가 고파서 못 견디겠어." 이들은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런던에서 도망칠 때의 닐 완슨은 거의 빈털터리였 다. 제이 제이 역시 갑자기 집에서 나왔기 때문에 수중에 있던 돈도 이미 다 써버린 상태였 다. "우선 뭘 좀 먹어야 살지. 식당에서 사 먹을 처지도 못되고... 햄버거라도 사와야겠어." 그 말에 닐 완슨의 눈빛은 금방 사납게 변했다. "밖에 나가면 안돼!" "무슨 소리야?" "나 혼자 방에 있는 건 싫어." "그럼 같이 가지." 제이 제이는 닐 완슨을 피해 밖으로 나간 후에 경찰에 신고할 작정이었다. "난 자네 친구야. 그래서 이렇게 함께 있는 것 아닌가, 맞지?" "그래서?" "금방 나갔다. 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안된다니까!" "그럼 같이 나가자니까. 여기서 누가 자넬 알아보겠나, 자넨 미국인도 아닌데 미국인도 아닌 데 말야?" "하그렌드가 왔잖아." 하그렌드의 이름을 떠올리면서 닐 완슨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그는 제이 제이를 잡아먹 을 듯이 무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왜 그래?" 제이 제이는 겁을 먹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닐 완슨의 두 눈에 난데없이 살기가 번 득이고 있었다. "이것 봐, 닐. 정신 차려." 닐 완슨은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더욱 사납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제이 제이를 놀 려볼 뿐이었다. "리차드 메인 씨 계십니까?" 프런트 데스크에 앉아 있던 모텔의 지배인이 큰소리로 리차드를 찾았다. "여기 있소." 리차드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프런트로 다가갔다. 그는 시고니의 연락을 기다리던 주이 었다. 하그렌드와 저스틴의 긴장된 시선이 리차드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여보세요." "접니다 메인 씨." 생각대로 시고니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시고니, 어떻게 됐어요?" "방금 알아냈습니다." "잘 됐군요, 시고니. 그가 지금 어디에 있답니까?" "시내에서 약간 털어진 모텔에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확실한 위치를 아는 건 아니지만 전화로 확인한 겁니다." "모텔?" ""네. 제이 제이가 그곳에서 전화를 걸오온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분명히 확인된 거죠?' "물론이죠." "혹시 전화해 보지 않았어요. 아직 그가 있는지?" "그건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눈치챌 지 몰라서 그냥 물어 보기만 했을 뿐인 걸요." "알았어요." 시고니는 항상 신중한 사람이었다. 만일 제이 제이가 닐 완슨과 함께 있다면 조심할 필요 가 있다고 생각했다. 섣불리 전화를 했다가 역효과를 가져올 가능성도 있었다. "시고니, 한 번만 더 수고해 줘요." "말씀만 하세요, 메인 씨.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선 그 모텔에 전화를 해요." "네." "그리고 친구라고 하면서 제이 제이를 찾아요. 거기서 전화가 걸려 왔었으니 괜찮을 거예 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런 다음 제가 다시 연락을 드리죠." "부탁해요, 시고니." "알겠습니다." 리차드가 자리로 되돌아가는 동안 시고니는 잠깐 망설였다. 리차드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 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제이 제이가 닐 완슨과 같이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시고니는 리차드만큼이나 높은 비중을 두고 있었다. 시고니가 생각하기에 그들은 쉽게 이동할 것 같 지가 않았다. 하지만 장담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위험 때문에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반면 에 언제 어떻게 행동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시고니가 전화기를 들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모텔에 투숙 중인 닐 완슨은 또 다른 범죄를 벌이려 하고 있었다. 평소의 그가 아니 라고 생각될 만큼 변해 버린 그는 제이 제이를 인질로 잡고 강도 짓을 벌리려 했다. 닐 완 슨이 설마 이렇게까지 변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제이 제이의 두 손은 뒤로 묶 은 후 닐 완슨은 술병을 깨서 그 깨진 술병의 날카로운 부분을 제이 제이의 목 근처에 대고 프런트 데스크로 다가가면서 사납게 소리쳤다. "얌전히 굴어! 허튼짓 않으면 이 사람을 죽인다.!" 모텔의 로비는 순식간에 공포의 분위기로 변했다. "닐, 자네 미쳤나?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닥쳐! 어서 가~!" 닐 완슨은 제이 제이를 몰고 계속 지배인 앞으로 다가갔다. 날카로운 유리 끝이 닿기만 해 도 제이 제이의 목에선 금방 피가 콸콸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 서랍 열어!" 지배인은 어쩔 줄 몰라하며 시키는 댈 계산대의 서랍을 열었다. 바로 그때 닐 완슨의 시야 에는 돈과 함께 서랍속에 들어 있던 권총이 눈에 들어왔다. "그게 이리네!" "네,네!" 지배인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권총을 닐 완슨에게 넘겨주었다. "이거 설마 장난감은 아니겠지?" 닐 완슨이 권총을 잡고 겨누자 지배인의 얼국은 새파랗게 질렸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 권총에는 탄환이 장전되어 있습니다." "그래?" 닐 완슨의 입가에 만족한 미소가 나타났다. "그럼 이제 이런 건 필요 없게 됐군." 그는 들고 있던 깨진 병을 집어던지고 다시 권총으로 모두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그때 전 화 벨이 울렸다. 지배인은 전화기도 들지 못한 채 겁에 질려 닐 완슨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 다. "이러지 말게, 닐.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이러면 죄만 더 무거워질 뿐이야." "나도 이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았어. 널 해치고 싶지 않을니까 잠자코 있어." 전화 벨은 계속해서 울렸고 지배인은 더욱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해 했다. "전화를 받으라고 해, 어떤 전화인지 알 수 없으니까." 제이 제이의 말에 닐 완슨은 비로소 승낙했다. "그 전화 받아. 대신 허튼 수작하면 쏴버리겠어." 지배인 비로소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전화를 걸온 것은 다름 아닌 시고니였다. "거기 모텔이죠?" "그렇습니다만..." 시고니는 상대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떨리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전화기를 통해 서 그의 공포와 겁에 질린 표정이 적나라하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시고니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여유를 보였다. "아, 그곳에 제 친구가 묵고 있을 겁니다. 조금 전 그곳에서 나한테 전화가 왔었는데. 제이 제이라고..." "네? 누구요?" "제이 제이요. 지금 방에 있을 겁니다." "제이 제이요?" 지배인이 되묻는 순간 닐 완슨이 사납게 소리쳤다. "전화 끊어!" 그와 거의 동시에 제이 제이가 소리쳤다. "안돼!" 지배인은 전화기를 든 채 어쩔 줄 몰라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한편 시고니는 전화기를 통 해 모텔에서 나는 공포와 비명의 소리들을 이미 들을 수가 있었다. 그와 동시에 모든 상황 이 파악됐다. 세부적으로 자세히 들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충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는 것만은 직감한 것이다. 시고니는 재빨리 전화를 끊고 리차드에게 연락했다. "그게 정말이에요?" 리차드는 깜짝 놀랐다. "그렇습니다. 메인 씨. 빨리 경감님과 함께 가보셔야 되겠습니다." "알았어요, 시고니." 자리로 돌아온 리차드는 초조한 빛으로 서둘렀다. "경감님, 빨리 갑시다. 그리고 당신도." "어딜 가는 겁니까. 메인 씨?"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가면서 얘기하죠." 세 사람은 리차드를 선두로 급히 모텔을 나섰다. 저스틴도 그렇지만 이미 사태는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하그렌드 경감은 긴장하며 허리에 차고 있는 권총을 의식했다. 리차드는 전 속력으로 차를 몰았다. 로만의 경우와는 달리 경찰의 오토바이나 순찰차가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때문에 계속해서 전속력으로 달릴 수가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메인 씨?" 미국에 온 다음부터 계속 궁지에 몰려 있는 것 같던 하그렌드 경감은 난처한 표정을 감추 지 못했다. "지금 닐 완슨이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려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네에?" 저스틴도 깜짝 놀랐다. 이번 사건에는 하그렌드 경감이 항상 곁에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지켜보는 입장을 보여 온 그녀였다. "방금 시고니가 알려왔어요. 그 모텔에서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죠?"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모텔의 지배인이 협박당하고 있는 게 확실하답니다. 분명히 닐 완슨 일 거예요. 보다 결정적인 것은 제이 제이의 목소리도 들렸다는군요." "큰일이군요!" 저스틴은 말하진 안했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다. 리차드와 결혼한 이 후 온갖 사건을 그와 함께 겪어온 그녀였다. 수사과이나 사립탐정을 능가할 정도로 저스틴 은 사건해결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나직 많이 남았습니까?" 하그렌드 경감은 계속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곧 도착할 겁니다."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군요. 메인 씨. 지난번에 이어 또 한 번의 신세를 지고 말았으니..." "그런 말씀 마세요, 경감님. 우리 부부는 원래 이런 일들 좋아한답니다. 안 그래, 여보?" "맞아요. 경감님." 저스틴의 맞장구에 하그렌드는 더욱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거의 다 왔어요. 저 앞에 보이는 곳입니다." 이미 주변의 지리를 잘 알고 있던 리차드는 곧장 문제의 그 모텔을 향해 차를 달렸다. "잠깐만요, 메인 씨." 차가 모텔 앞에 거의 도착했을 때 경감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네?' "조용히 진입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리차드는 엔지의 소음을 줄이며 디시 물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그 사이에 자동차는 벌써 소리를 죽인 채 주차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리 차드는 정문으로 뛰어들 작정이었다. 무기를 소지하지는 않았지만 결코 배우나 측면으로 현 장을 급습하지 않는 것이 범죄를 해결해 왔던 리차드의 습관이었다. "메인 씨는요?" "정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좋습니다. 내가 먼저 내린 다음 3분 동안의 여유를 두고 들어가게요." "네?"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겁니다." "그러죠." 하그렌드 경감은 뚱뚱한 몸집에 비해 비교적 재빠르게 움직였다. 먼저 차에서 내린 그는 정문을 피해 자세를 낮추며 건물 모퉁이로 이동했다. "당신은 어떻게 할 거예요?" 저스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은 차에서 잠깐 기다려, 나주에 들어오는 것이 훨씬 안전하니." "같이 가겠어요." "위험할 텐데?"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할 수 없군. 좋아. 같이 들어가자고."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나란히 정문을 행해 걸었다. 저스틴은 리차드의 팔을 곡 붙잡은 채 리차드와 함께 투숙하기 위해 찾아온 손님처럼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로비 안의 풍경 은 리차드의 예상 그대로였다. 막 카운터의 금고를 들어 있는 돈 뭉치를 움켜쥐고 밖으로 뒤쳐 나가려던 닐 완슨과 딱 마주친 것이다. "꼼짝 마!" 닐 완슨이 겨눈 총구 앞에서 메인 부부는 우뚝 설 수밖에 없었다. "이제 보니 메인 시로군! 안녕하시오, 행운의 여신?" 뒤쪽에선 재이 제이 간곡하게 빌고 있었다. "닐, 제발 그러지 마. 대체 어쩔려고 그런 짓을 계속 저지르고 있나? 자네 그러다가 붙잡히 면 정말 감옥에서 평생 있게 돼. 제발..." "입 다물어, 제이 제이! 또 그러면 정말 쏴버리겠어!" 리차드와 저슨틴은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전에 그들이 집에서 만났던 닐 완슨의 모습은 전혀 없었다. 그는 완전히 미친 듯한 광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자. 순순히 길을 비켜 주실까? 이 몸은 갈 길이 급해." 닐 완슨은 총구를 움직여 메인 부부가 비켜서도록 명령했다. 닐 완슨은 덮치려던 메인 부 부도 닐 완슨을 밖으로 내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리차드는 권총의 방아쇠에 걸린 닐 완슨 의 손가락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잘 있었나, 닐 완슨. 그 총 내려놓고 두 손을 들게." 뜻밖에 뒤쪽에서 하그렌드 경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닐 완슨은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바고 그 순간 리차드는 몸을 던져 닐 완슨을 덮쳤다. 리차드는 닐 완슨이 방아 쇠를 당기는 것과 거의 동시에 그를 덮쳤고 발사된 총알은 천장에 매달려 있는 샹들리에를 박살내고 말았다. 무한한 가능성 시고니의 발길이 분주하게 주방과 거실로 움직였다. 메인 부부와 하그렌드 경감은 모든 긴장에서 벗아나 가벼운 칵테일을 즐기는 중이었다. 하그렌드 경감은 닐 완슨을 먼저 런던 으로 압송시킨 다음 인사차 메인 부부를 방문하는 길이다. "뭐라고 감사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메인 씨. 메인 부인." "천만에 말씀입니다, 경감님. 마지막에 경감님이 아니었으면 우린 꼼짝도 못하고 그를 놓아 주어야 했을 겁니다." "맞아요,, 여보 그때는 정말 겁이 나던데요." 저스틴의 말에 세 사람은 소리내어 웃었다. 그때 시고니가 주방에서 거실로 나왔다. "더 필요한 것은 없으십니까?" "됐어요. 시고니." 리차드는 닐 완슨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문제를 생각해 냈다. "참 시고니, 당신도 이리 와서 좀 앉아요, 궁금한 게 있으니까?" 시고니는 리차드의 말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 역시 친구인 제이 제이가 관련된 이번 사건에 전적으로 몰두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게임 어떻게 됐어요?" "네?" "지난번에 얘기했던 존과 히든의 내기 말예요." "아아, 그거요." 시고니는 비로소 리차드의 말을 이해했다. 저스틴 역시 깊은 관심을 나타내듯 표정을 상기 시켰다. 오직 하그렌드만이 알아듣지 못한 채 사람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내기가 성립됐나요?" "네. 그렇다고 합니다." "흥미가 끌리는데요?" "정말 그런 내기를 한다는 거예요. 시고니." "그렇습니다, 메인 부인. 아주 재미있게 됐어요. 하지만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죠. 언제 나 그렇지만 좋은 사람은 이기고 나쁜 사람은 패하게 될 겁니다." "그렇겠죠." 가만히 듣고 있던 하그렌드가 넌지시 끼어들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군요. 누가 누구하고 무슨 내기를 했다는 겁니까?" 리차드는 저스틴을 바라본 후 다시 시고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일은 아주 드문 경우이긴 합니다. 만, 특정지역의 개발사업을 둘러싸고 두 재벌이 내 기를 했다는군요. 아이들처럼." "그런 내기도 있나요?" "그러니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경감님." 저스틴의 말에 경감은 더욱 어리둥절해 했고 사람들은 가볍게 소리내어 웃었다. 이윽고 하 그렌드 경감이 정색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튼 메인 씨, 그리고 메인 부인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벌써 두 번씩 신세를 졌으니 정년까지 계속 신세를 져야 할 지도 모르겠군요." 그 말에 저스틴이 얘기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경감님. 그건 아주 당연한 일이에요. 더 큰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그를 체포해서 다행인 걸요. 그 사람은 원래는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닐 완슨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도박이 문제요. 일하지 않고 얻는 불로소득만을 노리는 그런 자들은 사회에서 모조리 쓸어 버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영국과 미국은 물론 전세계 대도시의 카지노부터 영업을 못 하게 해야겠네요." 리차드의 말에 모두들 소리내어 한 차례 웃었다. 하그렌드 경감은 그날 오후에 출발하는 비행기편으로 런던으로 돌아갔다. "다시는 이런 문제로 만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냥 친구로 지내면서 다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또 연락해도 되겠죠, 메인 씨?" "물론입니다, 경감님." 시고니도 하그렌드 경감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메인 부부의 침실에는 다시 평소와 같은 밝은 분위기가 찾아왔다. 사랑을 나누기에 시간 은 너무 짧았고 세월도 또한 너무나 빠르게 흐른다고 항상 아쉬워 해 온 그들이었다. 항상 외적인 이유 때문에 방해받기 일쑤였고 사건에 휘말리다보면 둘만의 행복한 순간을 빼앗기 는 일은 다반사였다. "여보." 방금 샤워를 끝내고 나온 저스틴이 싱그러운 비누냄새를 풍기며 리차드에게 다가왔다. "어때요, 당신?" "오늘은 상당히 기분이 좋은데!" "사랑하기에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좋은 날?" 리차드는 저스틴의 말뜻을 알아차렸으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리차드는 비스듬히 누 운 채 침대 곁에 앉아 있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엷은 실크 가운 사이로 저스틴의 속살이 훤 히 들여다보였다. 단 둘이 있을 때 저스틴은 노골적이고 공격적이 되었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을 만큼 적극적이었다. 저스틴은 상상할 수 없는 쾌락과 환희의 세계로 함께 들어가고 싶 어했다. 리차드는 그녀의 살갗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사랑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목격했다. 몸 전체의 감각이 예민하게 충만해지는 것을 느끼는 가운데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리 차드의 옆에 저스틴은 가볍게 누웠다. 리차드는 저스틴이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답다고 느껴 지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