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셀던의 에덴으로 돌아오다 3권 지은이: 마이클로렌스 번역: 한명준 출판사: 꿈이 있는 집 1. 밝혀진 비밀 그 끔찍한 일들은 과거로 돌리기엔 너무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나며 스테파니를 압박해 왔다. 삶을 두 번 사는 셈인 그녀로서는 지나간 악몽 등을 쉬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죽음 직전 구사 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스테파니는 뼈를 깎는 고통 끝에 현재의 완벽한 미녀로 다시 탄생할 수 있었고, 지금은 명실공히 호주 최대의 재벌기업인 하퍼사의 여 회장으로 있다. 그녀와 재혼한 댄은 의학박사이며 현재의 그녀로 성형시켜준 은 인이기도 했다. 댄의 뛰어난 의술과 정성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스테파니는 존재 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것이 인연이 되어 두 사람은 사랑을 키워가며 재혼했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흠잡을 데 없이 완전한 것이었다. 아직 에덴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 외에는 모두 만족스러웠다. 이들 부부에게는 전남편의 자식인 장남 데 니스와 따라 사라가 있다. 곱상해서 남자답지 않지만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 려는 데니스, 그리고 사라는 어머니의 성격을 닮아 인정 많고 아름다운 처녀였 다. 이들 네 식구가 하퍼가를 이루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 가정은 지극히 평온해 보였지만, 이면에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비밀이 있었다. 흔히 재벌들 가 족 간에 있는 암투는 보이지 안았지만 잠재된 요소에는 그럴 가능성이 다분했 다. 다만 아직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뿐이다. 스테파니는 취미 겸 운동 으로 저택의 드넓은 정원에 마련된 수영장에서 자주 수영을 즐기곤 했다. 이때 만큼은 세상사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탄력있는 그녀의 몸매는 인 어를 연상시킬 정도로 눈부셨다.. 한동안 수영을 즐기던 스테파니가 풀 밖으로 나왔을 때 댄은 신문을 읽는 중이었다. 싱싱한 몸매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아 랑곳없이 댄의 등 뒤로 다가간 스테파니는 그의 어깨 위로 상체를 굽혔다. “불 만이라도 있어요?”“응.”댄은 가볍게 대답했다. “뭔데요?”“봐, 내가 보는 신문에 물이 떨어지고 있어.”그가 들고 있는 신문에는 벌써 여기저기 물방울이 떨어져 얼룩이 졌다. “그 정도도 이해못해요?” 댄은 할 수 없다는 듯이 못다 본 신문을 접었다. “물론 이해하지.”“그런데요?”“7년 동안이나 우린 같이 살아왔어. 자, 이리와 봐” 댄은 그녀를 앞쪽으로 오도록 한 다음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그럴 때의 스테파니는 그 어느 때보다도 즐겁고 안락해졌다. “이건 약 을 처방하기 전에 하는 수법인가요?” 댄은 그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는 그보다 다른 이야기를 스테파니에게 하려던 참이었다. “사실 나에게 약간의 비밀이 있긴 해. 당신 역시 그런 것 같고.”“그래요?”“ 당신 요즘 너무 조용해. 에덴을 떠난 게 후회돼?”“고향이니까 ……아무리 그 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요…….”스테파니는 말끝을 흐리며 잠깐 회상에 잠겼다. 잠재된 과거의 일 중에 의혹이 짙게 깔린 광경을 떠올렸다. 두 남자가 커다란 해머로 벽을 허물고 있었다. 둔중한 쇳덩이는 벽을 무자비하게 강타했고 그럴 때마다 충격을 받은 벽에 처참한 구멍이 뚫리며 무너져 내리는 것이었다. 마치 현재의 모든 것들을 산산조각으로 부수는 듯한 그 광경은 매번 스테파니를 전율 시켰다. 하퍼사의 초고층 빌딩은 사내 한복판에 있었다. 하퍼가가 이루어 높은 역사만큼이나 견고해 보였다. 회사에서의 스테파니는 언제나 활력이 넘쳤다. “ 좋아요. 준비되는 대로 주식동향 보고서를 보여줘요.”“알겠습니다.”간부 한 사람과 헤어진 그녀는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마침 회장실에서는 총지배인 빌 리가 전화를 받고 있었다. 그는 그룹경영을 거의 도맡아하다시피 했으며, 스테파 니에게는 가장 절실한 가족이며 아버지 같은 사람이다. 창업멤버의 대표격인 그 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업가였다. 이미 머리에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은 나이 임에도 전생애를 하퍼사와 스테파니에게 바쳐오고 있었다. 빌리는 스테파니에게 수인사를 보내며 수화기를 통해 지시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누군지, 왜 그 러는지 알아내도록 하게.”그가 전화를 끊었을 때 스테파니가 먼저 물었다. “누 군가 우리와 게임을 하고 싶은가 보죠?”오늘 스테파니가 사옥에 나온 것은 빌 리의 요청 때문이었다. 빌 리가 굳이 그녀를 호출했다면 심상치 않은 문제가 있 다는 뜻이다. “도대체 실마리가 있어야지.”“누군가 입찰가를 노리는게 분명해 요.”“그럴 수 있지.”“그런 문제 때문에 일부러 나를 부를 필요까지 있을까 요?”“그 문제 때문이 아니오.”“그렇다면 무슨…….”“사라와 데니스도 불렀 소.”“네에?”스테파니는 데니스와 사라까지 불렀다는 빌리의 대답에 놀라며 다음 말을 기다리며 바라보았다. “모두 있어야 하기 때문이오.”빌리의 말은 스 테파니를 더욱 의아하게 만들었다. 웬만한 사내 문제 같으면 이렇게까지 할 빌 리가 아니었다. 스테파니는 그가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 다.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 하는 모습을 그에게서 분명히 발견한 것이 다. “무슨 일이에요, 빌리?” 스테파니는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다. 언제 나 그렇듯이 빌리는 이야기를 돌리지 않고 직선적으로 털어놓았다. “질리 스튜 어트에 관한 일이오.”“질리?”“그렇소.”심각한 빌리에 비해 스테파니는 오히 려 안심한 듯했다. “그런 나도 알고 있어요. 오늘 출감했다더군요. 하지만 난 전혀 관심없어요.”“정말 그렇소?”“그래요.”하지만 진실을 아니었다. 태연한 척할 뿐이다. 평생 잊지 못할 인물이 질리 스튜어트였다. 그녀는 스테파니의 친 구였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존재였다. 스테파니의 첫사랑이며 전남편인 그렉 은 원래 평판이 매우 나쁜 사내였다. 스테파니가 그렉과 사랑에 빠졌을 때 주위 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위해 반대하고 나섰었다. 성격이 저돌적이기도 한 스 테파니는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렉과의 결혼을 강행했고 결국 비참한 결 과를 초래했다. 하퍼그룹의 상속녀에게 보장된 재산은 천문학적인 숫자에 해당 했다. 애초부터 스테파니의 사랑과 미모보다는 재산에 욕심을 가진 그렉이 그 속셈을 드러내기까지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렉은 먼저 스테파니 의 친구이며 뛰어난 미모와 차가운 성격을 소유한 질리 스튜어트를 끌어들인 다 음 본격적인 음모를 꾸몄다. 질리와 함께 스테파니를 살해한 다음 그녀까지 죽 인 후 재산을 혼자 독차지 하려는 것이 그렉의 계획이었다. 그렉의 무서운 음모 는 질리 스튜어트의 도움으로 빈틈없이 진행되었고 스테파니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덫에 멋지게 걸려들었다. 결행날이 다가왔을 때 그렉과 질리는 벌써 그들 만의 축배를 들었다. “내일이면 끝나요, 모든 게. 당신과 난 이제 하퍼그룹의 재산으로 평생 즐기며 살게 됐어요.”질리는 어쩔 줄 줄 몰라하며 행복에 도취 되었다. 꿈에도 생각해 볼 수 없었던 일이 현실로 다가오자 형언할 수 없는 기 쁨에 사로잡혔다. 온 세상을 품에 안은 기분이었다. 신도 같은 심정이죠, 그렉? ”“하지만 조심해야 돼, 끝까지. 스테파니는 쉽게 볼 여자가 아냐.”무엇 때문 인지 그렉은 항상 질리 앞에서 무거운 표정을 벗어던지지 못했다. “걱정없어요. 남은 건 세계에서 최고로 멋지게 살 준비나 하는 거예요.” 그날 밤 질리는 타 고난 미모와 굴곡있는 육체를 이용해서 그렉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아끼지 않았 다. 운명의 날 스테파니는 그들의 제의에 따라 뱃놀이를 가게 되었다. 자신이 악 어가 우글대는 호수에 던져질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남편 그렉과 질 리 가 조소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스테파니는 계획대로 호수에 던져졌고 살인귀인 악어가 떼지어 달려들어 그녀의 육신을 물어뜯었다. 구사일생으로 구조된 그녀 는 살점이 흉하게 떨어져 속뼈까지 드러나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때 치료차 알 게 된 사람이 지금의 남편 댄이었다. 하루 아침에 세상을 달리 생각하게 된 스 테파니는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길고도 고통스러운 전신성형수술을 견뎌내었고 그 결과 더욱 빼어난 몸매와 얼굴을 갖게 되었다. ‘타라 웰스’라는 가명으로 시드니에 돌아온 스테파니는 복수의 첫단계로 그렉을 유혹하는데 성공했다. 그 렉이 질리와 공모한 데 비해 스테파니는 더욱 치밀하게 계획을 진행시켰다. 그 런 점에서 질리는 스테파니의 재능을 따를 수 없었다. 스테파니는 장차 하퍼그 룹을 경영할 인재답게 침착하면서도 필요에 따라서는 과감한 면을 갖춘 여자였 다, 모든 작전과 계획이 완벽해졌을 때 스테파니는 ‘타라 웰스’라는 가명을 벗어던지며 본래의 모습으로 그렉과 질리 앞에 홀연히 나타나서 그들을 경악시 켰다. 모든 꿈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순간, 패배감과 죄의식으로 절망한 질리 는 그렉을 권으로 사살했다. 그 후 살인죄로 체포되어 7년 동안 어둡고 참담한 감옥생활을 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끼리의 한 판 싸움으로 복수가 끝난 스테파 니는 더 이상 그 문제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다. 질리가 감옥에 가 있는 7년 동 안 수없이 지난 날의 악몽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더 이상의 복수에는 의미를 두 지 않으면서 살아왔다. 질리의 문제에 대해 빌리가 심각하게 생각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완전히 획득했다고 생각한 세상을 순식간에 빼앗긴 질리로 서는 그것이 순전히 스테파니 때문이라고 여길 것이며 동시에 그녀의 성격으로 보건데, 7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며 복수의 칼을 갈았을 것이 뻔했던 것 이다. 빌리로서는 그러한 질리를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큰 고민거리였다. 이미 빌 리가 알고 있는 사실, 스테파니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사실이, 그러나 오래 전부 터 그녀를 짓눌러오던 불길한 예감이 현실적으로 일어나려 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하퍼가문에 일대 파란을 일으킬 수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하퍼가문의 일 거수일투족은 곧 사회적인 관심거리가 되었다. 호주 제일의 재벌그룹인데다 7년 전의 살인 소동이 아직 세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지지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빌리 는 스테파니에게 보여주려는 듯이 텔레비전을 틀었다. 마친 뉴스가 보도되고 있 었다. “……질리 스튜어트 양의 출감과 함께 드라마틱했던 하퍼재단이 다시 화 제에 오르고 있습니다. 당시 그녀는 연인관계에 있던 그렉의 과실치사와 그 부 인인 하퍼 양의 살인미수건으로 유죄선고를 받은 바 있습니다. 뉴스와 함께 화 면에는 교도소에서 막 출감하는 질리 스튜어트의 모습이 나타났다. “상류사회 에서 흔히 발생되는 치정사건 같지만 재판이 몇 주 동안 지속된 점으로 미루어 미진한 부분도 상당히 있었던 것 같습니다. 7년 전 그 사건은 연일 세상을 떠들 썩하게 했었다. “……살인미수사건의 시점은 하퍼 양의 신혼여행이 막 끝난 다 음이었으며, 흉기가 3미터도 넘는 악어라는 점에서 모두는 경악을 했었습니다… ….” 질리는 그렉을 쏜 것 외에 스테파니를 악어에게 던진 혐의도 받았었다. “ 지금부터 방금 출감하는 질리 스튜어트 양과의 인터뷰를 보내드리겠습니다……. ” 빌 리가 텔레비젼의 스위치를 껐을 때 데니스와 사라가 들어왔다. 무엇 때문 인지 데니스는 매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내가 왜 여기까지 끌려 왔는지 말해 줄 사람 없어?”“진정해.”데니스를 진정시키는 사라의 태도는 동 생이라기 보다 누나처럼 의젓해 보였다. “이번엔 또 뭐가 잘못됐다는 거야?” 실내의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산만했다. 스테파니는 그녀대로 질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빌리는 거의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이윽고 댄을 포함한 하퍼 가문의 전가족이 모였다. 스테파니가 곤혹스러워 하는 것은 질리의 출감 때문에 전가족이 모여야 되는 의문 때문이다. 항상 철저한 빌리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더욱 궁금하고 불안했다. 잠시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빌리는 무엇인가 기다리며 문 쪽을 계속 확인했다. 그만이 알고 있었지만 질리가 감옥에서 곧장 그곳으로 오고 있는 중이었다. 잠시 더 지속된 침묵은 하퍼가문의 평온을 소리 없이 위협하는 징조같았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질리가 안내를 받으며 들어오는 순간 그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그녀의 모습은 전과 다음없었다. 수감 당시의 비참했던 모습을 7년이 지나는 동안 서서히 회복되어 지금은 완전히 냉정을 되 찾고 있었다. 질리는 얼굴 가득 일렁이는 조소를 감추지 않으며 하퍼가문의 가 족들을 훑어보았다. 하퍼가문의 누구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스테파니는 애써 무관심을 가장했고 테니스는 노골적인 적의를 보였다. 댄은 담담하게 바라 보는 반면 사라는 그녀의 표정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질리는 차가운 시선으 로 스테파니를 잠깐 응시했다. 그 입가에 조용한 잔인함이 스쳤다. 스테파니는 갑자기 가장 어렵고 난해한 문제와 만난 수험생 같은 모습이었다. 일가를 천천 히 둘러보던 질리의 시선이 한 곳에서 정지했다. 자신에게 가장 노골적인 적의 를 나타내고 있는 데니스였다. 그리고 그녀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잘 있었 니, 데니스?” 그 목소리는 어머니의 다정한 친구로서의 음성이었다. 데니스의 적의에 대한 질리의 도전적인 마음이 한껏 모양을 부려본 것이다. 데니스는 어 이없어 하며 빈정거렸다. “내 맘 같아선 당장 쫓아내고 싶지만 내 집이 아니니 그럴 수 없고…….” 데니스는 아예 혀를 찼다. 실제로 그는 당장 달려들어 질리 를 문밖으로 집어던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에게 있어 질리는 악마였다.아버지 라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렉과 공모해서 어머니를 죽이려 했던 살인자이며 요 부라는 생각을 한 번도 지워본 적이 없었다. 댄을 포함한 스테파니 그리고 빌리 등은 마치 연극의 다음 장면을 기다리는 관객 같았다. 그때 가장 막내인 사라가 재빨리 움직였다. 그녀는 마치 무거운 침묵을 깨는 게 자기의 임무라는 듯이 질 리에게 다가갔다. “돌아와서 기뻐요.” 질리는 사라와 가볍게 포옹했다. 형식적 인 장면이었다. 사라 역시 겉으로는 반갑게 행동했지만 어색한 나머지 재빨리 포옹을 풀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두번째로 입을 연 사람은 댄이었다. 비록 하퍼가문의 상속자를 아내로 두고 있지만 그의 인생목표는 의술과 스테파니에 대한 사랑이 전부였다. “안녕, 질리.”마치 한껏 당겨진 고무줄이 금방 끊어질 듯이 긴장된 분위기를 누그려뜨리고자 한 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질리의 반응 은 바뀌지 않았다. “댄.”그리고 스테파니와만 말했을 뿐 재빨리 빌리를 돌아보 며 거의 짜증스럽게 물었다. “내가 왜 여기에 와야 하는지 설명해 줘요.” 그때 까지 나름대로의 속 깊은 고뇌를 감추지 못하던 빌리가 미리 준비한 가방을 테 이블 앞에 끌어당기며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질리, 당신을 여기로 데려온 것 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오. 이 일은 정식으로 처리해야 되오. 자, 우선 모 두 앉읍시다.”그의 정중한 말투에 스테파니는 문득 이상한 예감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어릴 때부터 늘 곁에서 보아 왔고 지금은 자신보다 오히려 더 잘 알 수 있는 빌리였다. 그의 태도는 전에 없이 스테파니를 불안하게 했다. 그는 자신의 성격처럼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내놓었다. “스테파니의 아버님이 돌아가셨 을 때 유언장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재산이 자동적으로 스테파니에게 상속되었 습니다. 그런데 에덴을 수리하던 중 벽 속에서 상자가 하나 발견되었는데…….” 이때 스테파니의 뇌리에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광경이 있었다. 에덴의 벽을 때리 는 쇠망치, 허물어지는 벽, 움직이는 일꾼들의 억센 팔 그리고 벽 속에서 갑작스 레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던 커다란 상자……. “그 상자 속에 유언장과 진술서 가 들어있었소.”순간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질리만이 모든 것에 조소를 보내는 표정이었다. 그녀 역시 빌리를 통해 곧 밝혀질 엄청난 비밀을 예측하지 못했다. “지금부터 내가 여러분에게 유언장의 내용을 읽어 드리겠소.”그는 그가 밝혀 야 할 내용의 심각성 때문인지 잔기침을 하며 특히 스테파니와 질리를 예의 주 시했다. 이윽고 그가 밝힌 유언장의 내용은 과연 듣는 사람들을 경악시킬 만한 것이었다. ‘나 맥스웰 하퍼는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이 유언장을 작성한다. 모 든 재산을 내 딸 스테파니에게 상속한다…….’거기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 다. 문제는 그 내용 다음에 붙어 있는 단서였다, ‘다만 스테파니는 동생인 질리 를 부양해야 한다.’스테파니와 질리는 동시에 놀랐다. 댄을 비롯한 데니스와 사 라도 예외일 수 없었다. 더 듣거나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질리가 스테파니 의 동생이라는 것이다. 모두가 놀란 가운데 빌리는 이야기를 마무리 했다. “미 안하오, 질리. 맥스웰 하퍼 시는 당신 어머니와 연인 사이였고 당신의 아버지였 소.” 스테파니가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질 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스테파니와 내가 자매라는 건가요?”“그렇소.” 질리는 허탈 해진 듯이 소리없이 웃었다. 스테파니는 아직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그저 질 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꿈에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과 공모하여 자신 을 죽이고 하퍼그룹을 탈취하려던 질리가 자신의 동생이라는 사실 앞에서 자신 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도든 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완벽한 성격의 빌리가 발표한 이상 의심한 여지도 없었다. 그는 무엇 때문에 자칫 평지 풍파를 일으킬 수 있는 사실을 이제 와서 발표한 것일까, 그 역시 질리를 미워 했으며 오직 스테파니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는데. 질리와 그녀가 자매라는 사 실이 밝혀지면 어떤 의미에서든 스테파니 쪽이 불리했다. 모든 걸 불사하고 감 추어도 무방할 비밀을 공개한 것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었다. 한 가지는 거 짓이나 위증 따위를 가장 싫어하는 빌리의 성격 탓이다. 또 하나는 스테파니를 향한 질리의 예상되는 복수심을 염려하여 내린 배려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빌 리의 유언장 공개가 몰고온 파문은 지대했다. 댄을 비롯해서 아직 질리를 증오 하고 있는 데니스가 특히 그랬다. 살인자이며 요부인 그녀가 자신의 이모라는 사실을 어떤 경우에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역시 스테파니였다. 질리에 비해 모진 성격이 아닌 그녀였다. 사업적인 수완이나 인력관리 등에서 보이는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인정적인 면에서는 질리가‘악’ 이라면 그녀는 전적으로‘선’이었다. 그 동안의 모든 상황에도 스테파니는 질 리가 동생이라는 사실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퍼가문의 가족임이 밝혀진 질리는 스테파니의 집에 있게 되었다. 그 첫날, 스테파니는 벌서 질리를 동생으 로 받아들이려 했다. 태연한 척해도 생각할 게 많을 수밖에 없는 질리는 테라스 에 나와 어두운 밤하늘을 보며 서 있었다. 얼마 후 그녀가 차가운 밤공기에 추 울 거라고 염려한 스테파니가 두툼한 스웨터를 들고 나와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질리, 우리 얘기 좀 하자.”“할 얘기 없어.”그녀의 반응은 스테파니 의 예측보다 훨씬 냉랭했다. “그래, 솔직히 나도 믿어지지 않아. 하지만 슬기로 운 해결방법은 반드시 있을 거야.”“자매가 됐다고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면 오 산이야.”질리는 계속 차갑게 말했다. 감옥에 있던 7년 동안 한시도 스테파니에 대한 복수심을 잊어 보지 않았던 그녀였다. “달라져야 해.”“차라리 몰랐었으 면 좋겠어.”“진심은 아니겠지?”스테파니는 벌써 토라진 동생을 달래려는 언 니 같은 말투였다. “왜 미리 알려주지 않았지?”“자존심이 강한 분이니까 인 정하기 힘드셨을 거야.”“함께 자라며 친구가 되는 것을 보면서도 한 마디 안 해주다니…….”말끝을 흐리는 질리에게 스테파니는 애써서 부드럽게 말했다. “ 이제 생각하니 별로 놀라운 일도 아냐, 그렇지?”“그 사람이 널 죽이려 했을 때도 난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어. 친언니라는 걸 알았어도 그랬을까?”“질리, 그 동안 널 용서하려고 무던히 노력했어. 하지만 이렇게 되고보니 가능할 것 같 아.”“난 네가 결혼한 순간부터 널 증오해 왔어. 그 남자를 원해서 만이 아니고 네가 모든 걸 다시 차지했기 때문이야.”“이젠 그런 것들을 다시 바꿀 수 있어. ”“너무 늦었어.”“제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과거를 보상할 기회가 왔지 않니.”스테파니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질리는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격 의 차이와 더불어 그 동안의 원한이 그만큼 깊었던 탓이다. “무엇을 위한 기 회? 자선? 끝까지 희롱이나 당하는 게 내 운명인데?”질리는 갑자기 과격해지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여태 너의 권력과 부를 부러워했는데……그게 모두 내것 도 됐다니…….”그녀는 끝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내어 울었다. 2. 연극자살 댄은 방금 침실의 질리를 만나고 나왔다. 그래도 가족 중에선 그가 가장 무난한 입장이었다. “질리, 자도록 해요. 알겠지만 우리들 중에 누구도 당신을 해칠 생 각은 없어요.”그녀의 마음을 편히 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댄이었다. 하지 만 이미 가족들 사이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데니스와 사라였다. 질리의 충격적인 등장과 함께 그들은 당장 집을 나가려는 것이었다. 댄이 거실로 나왔을 때 사라 는 이미 전화로 항공편을 예약하고 있었다. “사라, 떠나려는 거 아니겠지?”“ 떠나겠어요.”“있어 주면 좋겠어. 엄마는 네 도움이 필요해.”“당신이 있잖아 요.”“진지하게 얘기하는 거야.”“저도 그래요.”“그런데?”“이 암투장의 희 생자가 되고픈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그걸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 어.”댄은 사라의 계부였다. 하지만 성격이 원만한 편인 사라는 친아버지처럼 생 각했다. 무엇보다 무난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시도는 해보고 싶어요. 하지 만 이 집의 가족상황을 보세요. 더러운 과거를 가진 할아버지, 당신을 만나기 전 에 완전히 무기력했던 엄마, 게다가 지금은 질리 스튜어트까지……당신은 도망 치고 싶지 않으세요?”사라는 돌아서서 걸어갔다. 댄은 앉은 채 사라를 바라보 며 간곡히 말했다. “그래,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네 엄마를 사랑해. 너도 그 렇고 제발, 사라. 며칠만이라도 여기에 있어 주렴. 데니스는 별로 도움이 안 돼. ”그말에 사라는 곁에 있는 의자에 앉으면 댄을 빤히 마주보았다. “좋아요. 하 지만 데니스를 미워하지 마세요.”오빠인 데니스와 댄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다 는 사실은 사라도 알고 있었다. “내가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잖아. 데니스 도 그걸 알았으면 좋겠어.”“알 거예요. 다만 당신을 못된 계주로 만드는 게 재 미있는 거죠.”“알 거예요. 다만 당신을 못된 계부로 만드는 게 재미있는 거죠. ”사라의 솔직한 말에 댄은 가볍게 웃었다. “엄마는 어디 있지?”“밖에요. 지 금 양심을 훈련시키는 중이지요.”댄이 테라스로 나갔을 때 스테파니는 데니스 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얘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하면 좋겠니?”“쫓아버려요, 엄마.”데니스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강 하게 주장했다.“하지만 어디로 가든지 우린 가족이란다. 그걸 무시하면 안돼.” “그 여자는 믿을 수 없어요. 걱정 마세요. 누구든 엄마를 다치게 하도록 내버려 두진 않을 테니까요.” 데니스는 댄이 다가오자, 즉시 그 자리를 떠났다. 댄과 함께 있기를 싫어하는 분명한 태도였다. 댄은 상관하지 않았다. 사라의 충고가 머리를 스친 것이다. “질리는 어때요?”스테파니가 먼저 물었다. “괜찮을 거 요. 그보다 당신이 걱정인데 어때요?”“혼란스러워요.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요. 나는 앞으로 그녀를 책임져야 해요.”“과거를 얘기하는 거라면…….”스테 파니가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모두 다예요. 미리 알았으면 모든 게 달 랐을 거예요.”댄은 그녀의 말에 조용히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을 사랑 하면서도 경우에 따라 사업과 가족을 우선하는 그녀였다. 그럴 때 댄은 자신의 존재를 되돌아보곤 했다. 그는 언제나 그녀의 사업과 가족에게 뒤로 밀리는 고 독감을 조용히 삭혀야 했다. 데니스의 말대로 질리는 믿을 수 없는 여자였다. 함 께 지낸 첫날 밤. 그녀는 한밤중 잠옷차림으로 침실을 나섰다. 도둑처럼 스테파 니와 댄이 잠든 침실로 숨어들었다. 침대에 나란히 잠든 두 사람을 내려다 보는 질리의 뜩였다. 스테파니의 진심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어붙은 마음을 전혀 녹을 기미 가 안 보였다. 여전히, 전보다 더 스테파니를 자신의 파괴자로 보는 눈빛이었다. 그녀 때문에 희생당한 자신의 모든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적의를 여실히 드러냈다. 잠시 두 사람을 노려보던 질리는 이윽고 모두 잠든 아래층의 거실로 내려갔다. 그렉을 알기 전 질리는 한 남자와 결혼한 몸이었다. 변호사로 일하는 필립 스튜어트였다. 바쁜 생활과 바보스러울 정도로 온순한 필립은 냉정한 그녀 에게 보기좋게 배신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밤중의 텅빈 거실에서 수화기를 들고 있는 질리의 모습은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필립은 집에 없었다. 자동응답 전화기가 집을 지킬 뿐이었다. “저 질리예요. 지금 스테파니의 집에 있어요. 달 갑지는 않겠죠…….”그때 데니스가 뒤에 나타났지만 질리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전 지금 몹시 외롭고 친구가 필요해요…….”질리는 갑자기 뒤에서 손 뼉을 치며 다가오는 데니스 때문에 전화를 계속할 수 없었다. “연기가 훌륭하 군요.”“연기가 아냐.”질리는 전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전화하기에 묘한 시간이군요. 사적인 전화인가 보죠?”데니스는 몹시 빈정거리며 소파에 가서 앉 았다. 그를 바라보는 질리의 눈빛이 뜨거웠지만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벌써 부터 날 그렇게 감시하자니 힘들겠군.”“천만에, 잠도 안오고 해서 술이나 마실 까 하고 나왔을 뿐인데 운이 없군요.”“넌 왜 그렇게 버릇이 없지?”데니스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당신이 어떤 여잔지 아니까.”이 순간 질리가무슨 새생각 을 하는지 데니스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몸이 거의 드러난 잠옷차림의 그녀 는 창가에서 갑자기 데니스를 향해 돌아섰다. “정말 날 알아 ? 감옥생활 7년 에 나도 많이 변했지. 어떻게 생각해?” 질리는 이제 노골적으로 데니스를 유 혹하기 시작했다. 한 번의 손놀림으로 그녀의 상반신은 어깨걸이뿐인 잠옷으로 가슴이 거의 전부 드러났다. 아직 탄력이 넘치는 가슴이었다. 훤히 비쳐보이는 잠옷 속은 거의 알몸이었다. “관심없어요” 데니스는 차갑게 대꾸했다. 질리는 이미 어떤 결심을 굳힌 듯 데니스에게로 접근했다. “7년 동안이나 나 같은 여 자가 남자없이 지내다 보면 긴장이 어떤 건지 알게 되지. 아마 너도 알 거야. 성 숙한 남자니까. 어떡해야 날 믿을 수 있지 ? ”데니스는 계속 다가오며 몸을 노 출시키려는 그녀에게 성큼 다가섰다. 비로소 그는 질 리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아차렸다. “나가 줬으면 좋겠어. 그것도 내일 당장. 돈도 주고 호텔도 잡아 주 지.” 질리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몸을 밀어붙였다. 그것은 굉장한 유혹이었다. 하지만 데니스의 적개심은 증오에 가까운 것이어서 그녀의 관능적인 육체와 그 유혹에 오히려 맹렬한 거부반응을 나타냈다. “더러운 년 ! ”그가 소리쳤을 때 갑자기 거실 안에 불이 켜졌다. “무슨 일이야, 데니스? ”놀라며 물은 것은 침 실에서 방금 나온 댄이었다. 그는 모든 일을 벌써 알아차렸다. 거의 알몸인 질리 의 모습이 그걸 뒷받침해 주었다. “말해도 믿지 않으실 걸요” 데니스는 퉁명 스럽게 내뱉은 다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럴 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할 수 있는 여자는 흔하지 않았다. 질리는 그 흔하지 안은 여자에 속했다. “괜찮아요, 댄. 다치게 하지 않았어요. 날더러 호텔을 잡아 주겠다더군요. 갈 거 면 벌써 갔을 텐데요.” 질리는 태연했다. 그보다 욕정에 굶주린 듯이 이번에는 댄을 향해 하소연 했다. “댄 평생 지금처럼 외로움을 느끼긴 처음이에요. 나 자 신도 도저히 억제할 수 없어요.” 댄은 침착성을 잃지 않았다. 질리의 유혹에 걸 려들 그는 처음부터 아니었다. “그만 가서 자는 게 좋겠소. 얘기는 내일 합시 다.”“필립한테 전화하려고 내려왔어요. 내가 미쳤지, 누구보다 날 싫어할 텐데 …….”그럴 때의 질리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가련한 여자로 보였다. 보는 사람 으로 하여금 동정심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댄은 서둘러 그녀를 침 실로 데려갔다. “이제 나한테 남은 건 뭐죠, 댄? 과거도 미래도……당신만이 이 해해 주는군요.”그녀는 거의 울먹였다. 조금 전 데니스를 유혹했던 질리가 아닌 가련한 운명을 원망하는 억울한 여자로 변해 있었다. 모든 점에서 질리를 보는 시각은 데니스가 가장 정확했다. 그를 제외한 가족들 누구도 상상하지 못 하는 가운데 질리는 또 다른 일을 꾸미고 있었다. 주위가 조용한 호숫가에 나온 그녀 는 알약이 가득찬 약병을 들고 묘한 미소를 떠올렸다. 잠깐 주위를 살핀 다음 안심한 듯이 병 속의 알약을 거의 모두 물에 쏟아버리고 몇 알만 남긴 채 집으 로 가져왔다. 그녀의 수상쩍은 행동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때 스테파니는 정원에 있었다. 그럴 때 질리는 침실에서 또 다른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몇 알 의 약을 입에 털어넣은 다음 컵의 물로 그것을 삼켰다. 침대시트를 그럴 듯하게 정리한 다음 빈 약병을 옆에 놓았다. 다시 생각을 바꾼 그녀는 쓰러뜨렸다. 그년 의 얼굴에는 내내 그녀만의 냉소적인 미소가 드러워져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 났을 때 그녀는 사실적으로 보이도록 최대한 배려한 뒤 드러누웠다. “불쌍한 질리…….”혼잣말로 중얼거린 질리는 소리없이 웃었다. 그것으로 만반의 준비가 됐다는 확신의 웃음이었다. 누구든 맨 처음 그녀의 잠든 모습을 발견하면 기절 초풍한 게 분명했다. 그때 정원의 데니스는 이미 질리의 음모를 알고 있는 듯이 스테파니에게 강력히 주장했다. “제 말대로 당장 내쫓으세요.”“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란다.”함께 있던 댄이 끼어들었다. “지금 질리는 정신적으로 극한 상황에 도달해 있어.”데니스는 심한 불만을 나타냈다. “장님이 됐어요? 그녀는 질리 스튜어트예요. 지금 우리와 게임을 하고 있단 말예요.”“무엇을 얻으려고? ”“그녀는 우리 가족을 미워해요.”“아냐, 그렇지 않을 거야.”스테파니 역시 확신할 수는 없었다. 데니스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힘들어도 받아들이고 싶었다. 질리는 한 가족이며 원하 면 함께 살 권리가 있으며, 가족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 권리를 인정할 수밖 에 없었다. 잠시 후 데니스가 염려하던 사건이 발생하였다. 안에서 달려나온 사 라에 의해 질리가 약을 먹었다고 알려졌을 때 스테파니는 거의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댄과 스테파니가 달려갔을 때 데니스는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 순간 데니스는 그 사태가 사실이기를 바라는 심정이었다. 또 무슨 흉계겠지 싶어지만 극단적인 결과 쪽에 희망을 걸고 싶은 그였다. 하지만 그의 희망은 빗 나갔다. 고의적으로 꾸민 연극에서 질리가 죽을 리 없었다. 데니스의 주장처럼 질리는 그들 가족을 상대로 게임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소동으로 특히 스 테파니에게 줄 충격의 정도를 즐기는 것이었다. 스테파니가 들어갔을 때 질리는 평소와 조금도 변함없는 건강한 모습이었다. 몇 알 정도의 수면제 덕분에 오히 려 피로가 풀린 모습이었다. “왜 그런 짓을 했지?”스테파니는 허탈해진 마음 으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왜, 나를 벌주고 죄의식을 느끼게 하려고?”“그럴 수도 있지.”지나칠 정도로 태연한 그녀의 대답에 스테파니는 가볍게 떨면서 중 얼거렸다. “데니스가 옳았군. 넌 우리 가족을 증오하고 있어.”“내 자신에 대 한 증오보다는 덜 해.”“그런 말은 안 믿어. 좋아, 한 가지만 물어 보자. 내가 되고 싶니?” 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스테파니는 갑자기 미궁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질리에 대한 이해심과 증오심이 동시에 고개를 쳐들었다. 그것을 접어두 기 위해서는 그에 버금가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그때 질리가 갑자기 말했다. “ 나도 싫지만, 나는 나냐. 이번 같은 바보짓은 다시 안 해.”스테파니는 겨우 자 신을 안정시키며 자조하듯 말했다. “너의 그런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 겠다. 솔직히 널 미위한 적도 있었지.”“미움이란 정원과 같은 거지. 가꿔야 크 는 거야.”질리의 말에 스테파니는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원하는 게 뭐지, 대체?”“데니스가 옳을지도 몰라. 특급호텔 방열쇠와 한 보따리의 돈…… 난, 떠나야 하는 건지도 모르지.”질리의 그같은 말들은 스테파니를 더 이상 참 을 수 없게 만들었다. “네가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어!”질리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를 화나게 만든 것에 만족한 듯이 느긋한 미소를 떠올렸다. “안락함을 원 해. 시간도 원하고……네게 했던 짓 때문에 7년이나 감옥에서 보냈어. 그걸로 충 분하지 않다고 생각해?”질리는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어른 같은 표정으로 스 테파니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길과 마주쳤을 때 스테파니는 가슴이 섬뜩함을 느꼈다. 이 무렵 지릴 때문에 골치아픈 스테파니에게 사업상 순탄치 않은 일들 이 생겼다. 호주 제일의 하퍼사가 누군가에 의해 손해를 보기 직전에 도달했다. 하퍼사를 노리고 계획적인 공략을 감행하는 상태의 정체는 아직 불확실했다. 증 권가 등 경제구조를 이미 훤히 섭렵한 그는 영국인이며 야망 있는 무법자 제이 크 샌더스라는 정보만을 입수했을 뿐이다. 노련한 빌리는 이미 위협을 느꼈지만 스테파니는 실감나지 못했다. 적어도 하퍼그룹은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확신할 뿐이었다. 그보다 앞서 하퍼사의 총지배인 비리는 새로운 여비서를 채용했다. 금 발의 미인인 캐시 존스로 그녀는 컴퓨터를 다루는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으며 기 업 분석을 전공한 엘리트였다. 제이크 샌더스라는 의문의 존재에 의해 어느 날 갑자기 하퍼사가 자금 압박을 받기 시작했고 중요한 업무처리는 캐시 존스가 담 당했다. 그녀의 역할을 그룹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을 만큼 중요했다. 한편 질리 에 대한 빌리의 견해는 데니스와 비슷했다. 질리가 동생인 이상 회사를 나누어 줄 수도 있다는 스테파니 의견을 그는 신랄하게 비난했다. “말도 안 돼! 내가 최초로 가르쳐 준 게 뭐지? ‘주식은 곧 힘이다, 가능한한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라는 거였어. 엄밀히 말해서 질리한테는 아무것도 줄 의무가 없어.”빌리 는 유언장을 공개한 걸 비로소 뉘우쳤다. 회사운영의 어려움과 함께 질리 문제 까지 스테파니를 어지럽혔다. 질리는 실제로 떠날 마음이 없었다. 그런 여자가 애당초 아니었다. 자신은 엄연한 하퍼가문이었다. 스테파니와 그녀의 가족을 위 해 떠나 주기엔 너무 억울했고, 오히려 그녀의 모든 영광을 벌써부터 탐냈다. 자 살연극 이후 스테파니는 질리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질리에게 누구도 접근하 지 않았다. 그녀에게 그나마 유일하게 호의를 베푸는 이는 사라였다. 질 리가 돌 아왔을 떼 유일하게 포옹한 것도 사라였다. 사라는 진심 반 동정심 반의 행동이 었다고 털어 놓았지만 질 리가 접근할 수 있는 상대는 사라뿐이었다. 사라는 그 녀를 위해 쇼핑에 동행해 주었다. 하퍼그룹 산하의 의류센터였다. 그곳의 경영은 스테파니의 친구인 조안나가 담당하고 있었다. 조안나를 질리를 특별히 미워했 다. 질리가 사라의 호의로 의상을 구입하려 할 때 면전에서 판매를 거절할 정도 였다. 질리는 결국 의류센터에서 ㅉ겨나는 모욕을 당하며 다시 한 번 마음 속으 로 독기를 품었다. 제이크 센더스의 계획적인 공략 때문에 자금 압박이 가중되 어 우울했던 데니스는 뜻밖에 의류센터에서 만난 질리에게 다시 떠나줄 것을 종 용했지만 그녀는 들지 않았다. “네 엄마가 떠나가면 빈손으로라도 떠나겠지만, 네 말을 소용없어!”질리는 그렇게 쏘아붙이고 의류센터를 나가버린 것이다. 스 테파니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질리는 천성을 최대한 이용할 속셈임이 분명했다. 이미 스테파니는 질 리가 동생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붙들린 상황이었 다. 댄은 최근에도 정기적으로 스테파니를 검진해 주었다. 가끔씩 병원의 진찰실 을 이들의 사랑을 나누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스테파니는 자신의 현재 모습이 댄의 훌륭한 작품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댄은 수술하기 전의 처참 했던 그녀의 모습마저도 아름더웠다고 고백할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 요즈음 댄이 부쩍 그녀를 걱정하는 것을 질리 때문이다. 그녀로 인해 스테파니가 받고 있는 고통을 곁에서 지켜보기가 안스러웠던 것이다. 한편 데니스는 앞장서서 회 사일에 노심초사였다. 하퍼가의 장남이며 장차 상속자인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가끔씩 경영자인 어머니와 방법의 차이를 보였지만 열성적이었다. 다만 그의 결정이라면 아직 분별력이 부족했고 특히 여자문제에 주의할 점이 많다는 것이다. 밀어붙이는 추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만 그 자체가 충분한 근거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데에 문제가 있어 스테파니의 비위를 건드리기도 했다. 최근에 들어온 빌리의 여비서 캐시를 처음 보았을 때에도 데 니스는 침착하지 못했다. “제이크 샌더스의 사생활에 대한 오점 같은 걸 찾았 소?”“없어요, 하퍼 씨.”캐시는 유난히 자신있게 대답하며 안경 너머로 데니스 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약간 모자란 듯하면서도 상대를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있었다. 팔을 벌리면 당장 안겨들 듯한 느낌이 드는 여자였다. “안됐군, 늦더라 도 좋으니 새로운 정보가 있으면 알려 줘요.”“그러죠.”데니스는 캐시가 신문 에서 오려낸 제이크의 사진을 들여다 본 후 넌즈시 말했다. “오늘 저녁 어때 요?”캐시는 너무 빠르지 않느냐는 듯이 안경을 고쳐 쓰며 그를 유심히 바라보 았다. “죄송합니다, 하서 시. 선약이 있습니다.” “취소할 수 없소?”“제가 왜 그래야 하죠?”데니스는 선뜻 대답할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일개 신입사원에게 장남이 멋지게 한 방 먹은 셈이다. 하지만 데니스 역시 빌리처럼 캐시의 정체를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선약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그 약속상대가 다름 아닌 제이크 샌더스라는 것이다. 즉 캐시는 제이크와 사랑에 빠진 나머지 하퍼 사에 산업스파이로 깊숙이 잠입한 상태였다. 그날 밤 캐시는 호텔에서 제이크에 게 또 다른 정보를 제공했다. “신문에서 당신의 사진까지 오려내 가지고 뒤를 캐는 중이에요.”제이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잘 나온 사지이면 좋겠군.”자 신만만 하다는 뜻이다. 캐시까지 하퍼사의 핵심부서에 투입시킨 제이크는 머지 않아 하퍼사가 수중에 들어올 것을 확신하는 게 분명했다. “진지하게 들어요. 만일 그들이 내 정체를 알라내면 어떡할까?”“최악이겠지.”아뇨. 최악은 내가 당신과 사랑에 빠진 거예요.”제이크는 그 말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호주 제일의 대기업을 수중에 넣으려는 그의 계획에 사랑에 빠진 캐시 는 자칫 소모품이 될 수 있었다. 비정한 승부세계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살 인보다 더욱 잔인한 일에 대해서도 그들은 외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개는 이용가치가 없어진 후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당하는 최후가 캐시 같은 존재였다. 이 무렵 에덴은 수리가 완전히 끝났고 질리가 그곳에 정착하며 나날 을 즐기는 중이었다. 그리고 스테파니가 중대한 결정을 내린 것도 이 즈음이었 다. 데니스가 빌리와 그의 사무실에서 제이크에 대해 얘기하고 있을때였다. “뭔 가 그에 대해 잡은 모양이야.”“잘됐군요, 빌리.”그때 스테파니가 어느 때보다 무거운 표정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빌리에게 건네주며 침 착하게 말했다. “빌리, 이 수표 결재해서 에덴으로 보내 줘요.”“이게 뭐요?” 빌리는 수표를 받아들며 무척 당황했다. “질리의 정착금예요.”“오백만 달러! ……”빌리에 이어 데니스도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엄마!”스테파니는 침착성 을 잃지 않았다. “말하지 마라, 데니스. 난 이미 결정했다.”그 문제에 대해서는 빌리도 적극적인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나섰다. “지금 제이크를 상대하기도 벅 찬데 이 돈을 불가능해!”“방법이 있겠죠. 그렇게 해 주세요, 빌리.”말을 끝낸 스테파니는 즉시 돌아서서 나가버렸다. 데니스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빌리에 게 다그쳤다. “설마 그렇게 하려는 건 아니죠?”빌리의 대답은 데니스에게 더 욱 절망적인 것이었다. 이 회사는 엄마가 소유하고 있어,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유언장을 읽는 게 아닌데! 어떡하든 그녀를 쫓아내야만 돼요!”데니스는 거 의 볼멘 목소리를 남기고 밖으로 나가며 재빨리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때의 그는 질리는 쫓아내겠다는 생각 외에 어떤 것도 안중에 없었다. 할 수 있는 모 든 방법을 동원할 작정이었다. 그때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그는 주저함 없 이 질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에덴으로 가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회장의 비서인 힐러리에게 당부했다. “타라에 가신 엄마한테 전화해서 한 시간 안에 에덴으로 만나자고 해 줘요.”타라는 하퍼그룹에서 운영하는 의류센터였다. 경영 담당인 조안나는 스테파니와 친한 사이이며 누구보다 하퍼사에 열성을 기울였 다. 데니스가 에덴의 질리에게 곧 가겠다고 전화했으며, 또한 스테파니를 에덴으 로 부른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물불 가리지 않고 질리를 쫓아내려는 데니스만 이 그 계획에 대해 알고 있었다. 3. 시작된 게임 데니스가 에덴에 도착했을 때 질리는 수영 후 신문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이미 시드니에서 발행되는 각종 신문에서는 제이크와 하퍼사와의 관계를 대서특필 하 고 있었다. “좋아, 이번 음모는 뭐지?”질리는 다가오는 데니스를 향해 넌즈시 물었다. 방금 풀에서 나온 그녀의 육체는 탄력이 더욱 넘치고 싱싱한 매력을 발 산하고 있었다. “지난번 이후 생각을 많이 해 봤는데요…….”데니스는 믿어지 지 않을 정도로 고분고분 했다. “힘들었겠군.”질리는 데니스의 태도를 무척 호 기심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당신을 오해했던 것 같아요, 많은 것을요. ”“그렇다면 더 이상은 실수하지 마.”의자에서 일어나 질 리가 돌아서려 할 때 데니스가 팔을 잡았다. 질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서 술이나 한 잔 하지 그래. 난 올라가서 샤워하고 올 테니까 진정되면 이 대화를 계속하자고. ”데니스는 저택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곁을 재빨리 따랐다. “내가 믿어 줬으면 좋겠다고 했죠? 믿음은 상호적인 거라고 말예요.”다음 순간 데니스는 막 거실 에 들어서는 질리의 어깨를 움켜잡으며 곧장 끌어당겼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질리는 조소하는 빛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정말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군. 지 난번 내가 널 유혹했다고 생각했지?”“!……”“네가 얼마나 마음이 깊은지 떠 보려는 것 뿐이었어.”그녀는 비참하게 일그러진 데니스를 뒤로 한 채 계단을 올라가며 덧붙였다. “사랑할 사람이 필요하면 남자를 고를 거야, 어린애 말고. ”힘없이 밖으로 나오던 데니스는 깜짝 놀랐다. 막 도착한 차에서 스테파니가 내리는 것을 발견한 그는 되돌아 이층으로 뛰어올라갔다. “데니스!”스테파니가 불렀을 때 데니스는 이미 샤워 중인 질리에게 접근해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하 지만 그 정도로 당황할 질리가 아니었다. “불장난하면 위험해. 감옥에서는 자기 방어부터 배우니까.” 그녀는 태연하게 몸의 구석구석까지 물줄기를 샤워해 나 갔다. “알 것 같아요. 엄마가 이런 우릴 보면 어떻게 반응하실지도 알고요.”“ 네 용돈을 깎을 테지.”“그럴 수도 있죠. 당신을 쫓아낸 다음에, 엄마는 지금 계단을 올라오는 중인 걸요. 당신을 이제 죽은 거나 다름없어요.”데니스는 그녀 의 얼굴에 손가락을 대며 총쏘는 시늉을 했다. 그때 계단쯤에서 데니스를 부르 는 스테파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질리는 데니스의 예측과 달리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자살연극에 이어 이미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을 그녀를 과소 평가한 탓이다. “들키면 너도 잃는 게 많을 텐데, 데니스?”아직 작전 실패를 깨닫지 못한 데니스는 겁없이 털어놓았다. “나야 빠져나갈 구멍이 있죠. 내가 도박에서 많은 돈을 잃은 걸 안다면 몰라도.”“저런 데니스! 하퍼가의 수억 재 산을 주무를 사람에게 그건 굉장한 결점이 될 텐데?”순간 데니스는 뒷머리를 한 차례 강타당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그 증거로 스테파니가 목욕실의 문을 열 었을 때 발견한 것을 질리의 모습뿐이었다. 데니스는 재빨리 문 뒤로 숨는 것으 로 질리의 승리를 확인시켜 주었다. “미안해, 질리.”“일찍 왔네.”질리는 만족 한 표정이었다. “데니스 못 봤어?”“아니, 난 여기에 있었는 걸. 집에 왔나?” 스테파니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을 질리와 함께 목욕실에 있는 데니스를 발견했다면 기절했을 것이다. “그애 차가밖에 있더군. 기분은 어때?”“좋아졌어. 고마워.”질리는 어느 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데니스와의 한 판 승부에서 멋지게 승리한 그녀의 기분을 스테파니는 전혀 알지 못했다. “얘기할 게 있으니까 준비되면 내려 올래?”알았어.”이 순간의 두 여 자는 다정한 자매였다. 불편한 관계가 전혀 없는 친자매의 모습이었다. 얼마 후 질리가 내려왔을 때는 빌리도 스테파니와 함께 있었다. 질리는 본능적으로 상황 을 직시하려고 노력하며 그들과 만났다. “질리, 이걸 받아. 세상 입방아는 신경 쓸 거 없어.”빌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스테파니는 5백만 달러의 거금을 수표로 건네주었다. “너무 후하군.“질리는 의외라는 듯한 반응을 나타냈다. “적당한 가격이야.”그때 데니스가 나타났다. 그는 어색한 행동을 감추려고 노력하며 천 천히 걸어왔다. “무슨 일 있었니?”“제이크 샌더스에 대한 정보가 있는 줄 알 았는데 허탕쳤어요.”그때 질리가 끼어들었다. “확실한 도박은 없어. 그렇지?” 데니스는 다시 한 방 얻어 맞은 셈이지만 다른 사람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윽고 스테파니의 요청에 의해 비리가 미리 준비한 서류를 꺼내놓았다. “아버 님의 유언에 따른 스테파니의 안배요. 오백만 달러를 받고 이 서류에 서명해요. 그냥 형식적인 거요. 질리.”빌리의 설명에 질리는 안색이 차갑게 변했다. “더 주장할 수 없다는 서류겠지. 그건 날 믿지 못한다는 증거야. 최소한 데니스는 솔 직했는데. 그게 뭐죠. 빌리?”“평범한 절차요. 돈이 지불되면 당연히 서명 절차 가 있어야 되지 않겠소. 우리 하퍼사는…….”질리는 그의 다음 이야기를 가로막 았다. “난 골칫거리가 아니고 스테파니의 친동생이에요.”“맞아요. 서류에 서 명하는 건 그만 둬요, 빌리.”빌리는 난색을 표명했다. 만일 질 리가 5백만 달러 를 끝까지 받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미 낭패감에 사로잡힌 데니스는 이때 한 마디도 끼어들지 못했다. “상관없어. 난 이런 분위 기에선 수표를 안 받겠어.”질리는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과장되게 나타내며 스 테파니의 거듭되는 요청을 거절했다. 하지만 스테파니가 거의 애원하다시피 권 유하자 못 이기는 듯이 수표를 받아 넣음으로써 스테파니를 안심시켰다. “나 좀 봐.”질리의 요청에 따라 스테파니는 그녀와 함께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밖으로 나왔다. “스테파니.”그녀가 갑자기 진지하게 불렀을 때 스테파니는 오 히려 당황했다. “괜찮아?”“난 네 돈은 싫어.”“?……”“믿음과 사랑을 위해 자매가 되고 싶을 뿐이야. 이 맘 알겠어?”순간 스테파니는 감격했다. “오, 질 리!”그녀는 두 팔로 질리의 어깨를 안으며 얼굴을 묻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감 동했다. 비로소 질리의 진심을 알았다고 확신하자 가슴을 뭉클했다. 하지만 그녀 는 포옹한 질리의 얼굴에 나타난 이면의 표정을 읽어내지는 못했다. 그 증거는 곧 나타났다. 스테파니에게 자매이고 싶다며 울먹였던 질리는 그 순간이 아직 스테파니의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제이크 샌더스를 방문했다. 과거에는 그 렉이 그녀를 유혹했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제이크를 유혹했다. 자신이 스테파니 의 친동생임을 밝힌 다음 하퍼사를 빼앗기 위한 도움을 그에게 요청했다. “스 테파니의 소유는 사실상 내 것이기 때문이에요. 나 혼자 빼앗기는 역부족이기에 도움을 청하는 거예요.”제이크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나타난 것은 당연한 일 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음모에 나선 질리조차도 제이크에 대해 전혀 몰랐다. 질 리와 공모를 합의한 제이크는 이튿날 아무도 모르게 공동묘지를 찾아갔다. 그는 한 무덤 앞에서 조용하나 음산한 독백을 했다. “스테파니와 결혼하려면 그 동 생과의 문제를 깨끗이 했어야지. 그녀들이 자매라는 걸 몰랐지? 하지만 걱정할 거 없어. 둘 다 모였으니 한꺼번에 잡을 수 있어. 아주 재미있을 텐데 형이 못 봐서 유감이군.”여기에 중대한 비밀이 있었다. 질 리가 죽은 스테파니의 남편 그렉은 제이크의 형이었다. 그가 감쪽같이 신분을 감추고 경제계에 뛰어들어 하 퍼사를 공격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형의 복수를 위해 치밀하게 짠 계획 으로 만반의 준비를 한 제이크는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다. 거기에 그렉을 죽인 장본인인 질리는 그녀 스스로 포위망에 걸려든 셈이었다. 그는 속도를 가속시켜 스테파니에게 접근했다. 스테파니가 자주 가는 승마장에서 직접 모습을 나타내 도전장을 제시했다. 스테파니는 제이크의 그런 모습에서 아무런 적대감도 느끼 지 못했다. 예의바르고 포부가 원대한 청년 정도로 받아들였다. 정식시합은 아니 지만 제이크가 뒤로부터 추격해 왔을 때에도 그녀는 훌륭한 솜씨로 따돌리며 오 히려 경계심을 늦추었다. 스테파니는 제이크로 인한 사업상의 위험보다 질리 문 제에 더욱 집착했다. 자매이고 싶어 수표를 거절한 질리의 배려에 마음이 아팠 다. 조건없이 돈을 건네주지 못했던 자신의 실수를 몹시 자책했다. “이봐요, 스 테파니, 그 비정하던 사업가 기질은 대체 어디 간 거요?”댄이 나약한 그녀의 모습에 일침을 가했지만 결과를 마찬가지였다. 그와 같은 성격 역시 하퍼가문의 완고한 기질 탓이었다. 그녀는 질리에 대해 가장 적대적인 데니스를 설득시키기 로 했다. “너와 질리에 대해 할 얘기가 있다. 너도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겠 지만 여긴 내 집이다. 전쟁터로 만들 수는 없어.”“누군가 그녀로부터 엄마를 보호해야만 돼요.”“내 몸 정도는 스스로 돌볼 수 있어.”그녀는 질리의 교묘한 거짓다짐을 신임했다. 이미 제이크와 결탁하여 또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렇겠죠, 그녀만 빼고요.”“끔찍한 상처를 입 은 질리를 더 이상 상처입힐 순 없어.”“맞아요. 그걸 알고 엄마를 이용하는 거 예요.”공교롭게도 이층에서 내려오던 질리가 모자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그 렇다면 데니스, 오백만 달러나 되는 엄청난 돈을 왜 안받겠니?”“누가 알겠어 요. 확실한 건 좋은 뜻이 아니라는 점예요.”듣고 있던 질 리가 기척과 함께 내 려오며 끼어들었다. “미안해. 엿들으려던 게 아니었어.”그녀를 응시하는 데니 스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괜찮아요. 그런 일에는 익숙할 테니까.”가시돋힌 그의 말을 스테파니가 꾸짖었다. “제발, 데니스. 미안해, 질리.”스테파니는 질 리에게 사과까지 했다. 그때 질리의 입에서 놀랄만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모 두 내 탓이야. 그래, 내가 침입자야. 난 여기에 어울리지 않아.”거의 동시에 극 단적으로 다른 반응이 스테파니 모자로부터 나타났다. “그렇지 않아, 질리.”“ 들어 봐요, 모처럼 올바른 소릴 하는데.”지리는 데니스를 꾸짖는 스테파니에게 더할 수 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봐, 난 문제만 일으키잖아.”“시간이 해결할 데니 기다리면 돼.”스테파니는 거의 매달리다시피 말했지만 질리는 결정적이 말을 더 미루지 않았다. “난 떠날 작정이여.“’안 돼. 어디로 간다는 거야.“스 테파니는 실제로 크게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나도 몰라. 언젠가 다시 친해질 수 있으면 좋겠어. 하지만 지금은 서로 떨어져 있는게 좋겠어.”“당장 가려고? ”스테파니는 거의 겁에 질렸다. 5백만 달러의 기금을 거절하고 빈손으로 떠나 겠다는 동생에 대한 양심이 가책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기뻐하는 아들 데니 스를 향해 진심으로 화를 내기까지 했다. 에덴을 나선 질리는 곧장 제이크를 찾 아갔다. 아마 중이던 여자를 내보내고 그녀가 직접 제이크의 몸을 안마하며 중 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핵심적인 정보는 하퍼사를 공략하기 위해 우선 약점이 있는 데니스부터 손보라는 것이었다. 데니스가 도박으로 빚진 전력을 공략하면 꼼짝 못할 정도로 타격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쫓고 쫓기며 물고 물릴 하퍼사와의 싸움에 임하는 두 공모자의 의도는 사실상 이때부터 그 이질성을 내 포하기 시작했다. 처음 승마장에서 스테파니는 만난 제이크의 느낌이다. 제이크 의 속셈을 들여다 보지 못한 질리는 당당하게 주장했다. “언니는 내가 말을 테 니 당신을 회사 걱정이나 하세요.”제이크는 그녀의 노골적인 유혹도 거절했다. 그리고 다음 날 질리 문제 때문에 아직 고민하는 스테파니를 대담하게 방문했 다. 그것은 질 리가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스테파니는 빌리의 적극 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이크를 만났다. 사업가적인 기질에서 그녀와 제이크 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스테파니는 기다리는 제이크를 당당하게 만났다. “제이크 씨, 용건이 뭐죠?”제이크는 예의를 갖추었다. “승 마를 어디서 배우셨는지 궁금해서요.”“그거라면 저 혼자 익혔어요.”“정말 잘 하시던데…….”“네, 알아요. 잘 하는 건 승마뿐이 아니죠.”“시간이 말해 주겠 지만 한 가지 제안이 있어서 왔습니다.”그들은 서로 권유도 없이 둘 다 지리에 앉았다. 먼저 회장자리에 앉은 것은 스테파니였다. “당신 회사의 주식을 약간 사들였죠.”“몇백만 정도더군요. 그걸 이제 나한테 터무니없는 값에 파실 작정 인가?”“천만에, 적당한 값이죠.”“그러세요?”“주당 4달러면 어떨까요?”“ 날강도군요!”스테파니는 거침없이 말했다. 제이크는 이때 이미 자매지만 질리와 스테파니의 전혀 다른 점을 확실하게 느꼈다. “당신한테는 별 거 아닐 텐데… ….”“당신은 한 재산 챙기고 말이죠?”“그보다 내가 가진 주식을 통합하면 당신한테는 골칫덩어리가 될 텐데요?”지금보다 더욱 절박한 상황에도 쉽게 허 물어질 스테파니가 아니었다. “안 그럴 걸요. 이 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이런 문 제에는 이력이 붙었어요.”제이크는 처음부터 협상의 타결을 기대하지 않은 탐 색전이었지만 생각보다 뛰어난 스테파니의 판단력과 대담성, 그리고 그녀가 뿜 어내는 자신감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끌려드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내가 아 직 사회적인 지위는 없지만 자주 만나게 될 겁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선 아니겠죠. 사회적인 지위는 상관없는 일이고 당신 자신뿐이에요. 안녕 히 가세요.”“다시 만날 때까지…….”제이크는 여운을 남긴 채 가벼운 목례를 보냈다. 그는 자신의 핵심참모인 변호사 안톤에게 스테파니가 인상적인 여자라 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복수심이 변한 건 아니겠지?”안톤은 대뜸 우려를 표 명했다. “천만에.”“준비는?”“솔직히 질리 스튜어트가 제 발로 나타날 때까 지는 방법을 몰랐어.”“질리라면 자네 형 문제에 대한 책임자 아닌가?”“맞아. 두고 봐, 쓸모없어지면 끝장낼 테니까.”그 말의 뜻은 잔인하면서 간단한 것이었 다. 비정한 세계에서 이용가치가 상실되면 처참하게 제거되는 게 정석이었다. 질 리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질리는 계획을 차질없이 진행시켰다. 에덴 을 나온 그녀는 제이크의 유혹에 빠지며 배신했던 전남편 필립 스튜어트를 찾아 갔다. 나이가 훨씬 연상인데도 어리석을 정도로 성격이 어진 필립은 아직 젊고 매력 넘치는 질리의 수단에 금방 백기를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동정하며 마음 아파했다. 필립과의 재회를 쉽게 성공시킨 그녀는 다음 단계로 필립을 이 용하기 시작했다. 함께 수감되어 있던 올리브라는 여죄수가 앞으로의 복수극에 꼭 필요했다. 변호사인 필립을 이용해 올리브를 석방시킬 작정이었다. “방법을 찾아냅시다. 내가 아직은 변호사니까.”필립으로부터 긍정적인 답을 얻어낸 질리 는 교도소로 올리브를 면회갔다. 올리브는 질리에 비해 천성적으로 야비하고 폭 력계에서 뼈를 굳힌 여자였다. 질리는 앞으로의 복수를 위해 테러범처럼 활동해 줄 인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적격이었다. “지내기는 어때, 올리 브?”그녀는 샴페인은 한 병 준비했다. “어떨 거라고 생각해?”“좋은 일이 생 길지도 몰라. 집 행유예는 어떻게 됐어? 널 도울 수 있을 것 같은…….”“날 내보내 줄 수 있다 는 거야?”“해 낼께. 하지만 반대급부도 알고 있겠지?”올리브는 질리의 말뜻 을 금방 알아차렸다. “항상 얘기했던 스테파니 하퍼에 대한 거라면 잊을 리 없 지.”“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나가 보니 우리가 자매라는 거야.”“하, 일이 재 미있게 돌아가는데.”질리의 본심을 올리브 앞에서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래도 내 마음의 동요는 없어. 오히려 더욱 증오하게 됐어.”“나한테 맡겨 둬.”“아 직은 아냐. 그녀가 가진 전부를 빼앗은 후에 천천히 고통받으며 죽게 만들 거야. ”그녀의 눈빛에 싸늘한 독기가 담겼다. 그것이 본심이었다. 에덴에서 스테파니 와 그녀의 가족에게 보인 태도는 그럴 듯한 연극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은 자부 하지만 스테파니에 비해 매우 단순한 그녀는 한 가지만을 생각했다. 스테파니의 모든 것을 빼앗은 다음 7년 동안 겪은 이상의 고통을 안겨 줄 작정이었다. 하 퍼사를 수중에 넣고 애원하는 스테파니를 마음껏 비웃어 주는 자신의 모습을 보 지 않으면 눈감고 죽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편 제이크는 질리라는 절대적인 제보자 덕분에 하퍼사 공략에 박차를 가했다, 스테파니를 만난 후 그는 갑자기 조급해졌다. 그에게는 훌륭한 정보원인 캐시 존스가 있었다. 캐시는 하퍼사의 총 지배인인 빌리에게 신임까지 얻었다. 제이크의 주식거래요구에 대해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실상 상층부는 고민에 휩싸였다. 그럴 때에 스테파니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샌더스를 막을 방법이 있기는 해요. 과감한 방법이죠.”“들어봅시다. ”빌리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주식교환이죠.”그때 캐시가 서류를 들고 들어왔 다. 빌리의 신임은 그녀의 회장실 출입을 제한하지 않았다. 하퍼사 수뇌부의 비 밀이 제이크에게 새어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때에도 스테파니는 캐시 의 존재를 무시한 채 긴밀하고 중요한 전화를 걸었다. “헨리 경, 저 스테파니 하퍼예요. 좋아요. 잘 지내셨어요?”상대방의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지만 스테파 니의 대화를 빠짐없이 캐시의 귀에 들어갔다. “다음 주에 점심 같이 하실 수 있나 해서요, 조언이 필요해요. 제이크 센더스가 우리 주식을 가지고 장난치려 해요. 그래서 주식교환이 승인됐는지 알고 싶어요.”그녀는 엿듣는 캐시는 안중 에 없이 계속했다. “주식소유주의 이 자리면……그에게 정하도록 하죠. 만일 거 절하면 하퍼주식의 거래를 중지시킬 수 있으니까요. 네, 그럼 다음주에 뵙겠어 요.”전화를 끊은 그녀는 계속 훔쳐듣는 캐시의 곁에서 상대방이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을 거의 털어놓고 있었다. “빌리, 우선 매스컴이 센더스의 부정한 거래 를 암시하는 보도를 하는 게 좋겠어요.”“그 일인 데니스가 적임자지.”그것으 로 하퍼사의 새로운 전략은 제이크 편에 완전히 노출된 셈이다. 스테파니는 즉 시 데니스를 찾았지만 그는 친구인 안젤로가 운동하는 권투장에 있었다. 안젤로 와 데니스는 절친한 사이였다. 재벌그룹의 상속자인 데니스는 사업 외에 스포츠 분야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 오직 회사일에만 몰두하는 스테파니를 못마땅 하게 만들 수 있는 문제였다. 그 외에 도박에도 손을 대 상당액을 잃었다는 것 을 질리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 문제가 제이크에게 상당히 유리하게 작용하 리라는 것은 상식에 속했다. 더구나 제이크는 이미 질리까지 수중에 넣은 데다 결정적으로 캐시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와 같은 조건들은 불원간에 벌어질 스테 파니 하퍼와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하기에 충분했다. 제벌그룹의 입장에서 우위 를 빼앗긴다는 것은 곧 처절한 패배를 의미했다. 그가 평소 안젤로와 친한 사이 임을 알고 있는 스테파니는 사안의 절박감 때문에 권투도장으로 찾아갔다. 제이 크로 인한 회사의 위험을 알리고 하퍼가문의 일원이 될 것인가의 결정을 촉구했 다.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불만 때문에 안젤로의 매니저를 자청 하고 나섰던 데니스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는 회사로 돌아갈 경우에 도 매니저는 단념하지 않을 결심이었는데, 현재의 매니저인 토니는 그 대가로 2 만5천 달러를 요청했다. 4. 미녀정보원 바다에 떠있는 요트 위에는 수영복 차림의 제이크와 캐시가 행복한 모습으로 승 선하고 있었다. 캐시가 최근의중대한 정보를 제이크에게 제공한 것은 순서에 의 한 일이나 다름없었다. 제이크는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머금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스테파니 하퍼는 생각보다 영리하군.”“주식교환 시에는 당신의 의 사를 밝혀야 하고 거부할 경우 당신의 하퍼주식은 거래중지가 된다는 거죠.”“ 본격적으로 시작되는군.”제이크는 시선을 먼 바다 돌리며 잠시 시각한 표정을 지었다. 예상보다 훨씬 강적을 만났다는 생각을 떼어버릴 수 없었다. “난 하퍼 를 인수한다는 게 당신답지 않다고 생각했어요.”캐시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야망이긴 해도 불가능한 일은 아냐. 누구한테나 취 약점을 있기 마련이니까.”“자신있어요?”“솔직히 말하지. 내 정보원은 너 하 나뿐이 아냐. 제일 좋아하기는 해도 말야.”그는 질리에 대해 이야기하려다 그만 두었다. “뭘 원해요?”“데니스 하퍼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 취미나 결정 등, 날 위해 알라 봐 주겠어?”데니스에 대한 정보는 질 리가 제공한 것이었다. “ 잠자리라도 같이 할까요?”생각하기에 따라 신중한 문제였다. 하지만 제이크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좋을대로.”하지만 제이크는 곧이어 진지한 표정이 되었 다. 그럴 때 무엇이 필요한가를 몸에 익힌 그였다. 그것은 바로 캐시 같은 여자 를 설득시키는 지름길이었다. “스테파니의 이번 움직임이 나의 화려한 경력에 종지부를 찍을수도 있어. 네 도움이 필요해.”이미 사랑에 빠진 캐시가 감동한 것은 당연했다. “엉뚱한 사람…….”그녀는 깊은 감동으로 사랑하는 그를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며 그의 억센 팔에 안겼다. 뜨겁고 격렬한 키스가 끝났을 때 에도 그녀는 다정한 누나처럼 제이크의 입술을 손으로 닦아주는 친절을 잊지 않 았다. 제이크에게 정보를 제공한 질리는 음모를 지연시키지 않았다. 하퍼가문 중 에 가장 손쉬운 접근 대상인 사라를 밖을 불러냈고 사라는 기꺼이 응했다. 공교 롭게도 그들이 만난 장소는 안젤로의 아버지가 경영하는 식당이었다. 질리는 하 퍼가족과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장소를 택했다. 아버지의 식당에 서 열심히 일하는 안젤로는 친절하게 이들을 대해 주었다. 그는 데니스와 가장 친한 사이였지만 사라와 만나는 질리에 대해 아직 아무런 편견 도 갖지 않았 다. “안젤로의 아버지가 이 집 주인인데 우린 친구예요.”사라는 상냥하게 소개 하며 미소를 지었다. 하퍼가문에서 유일하게 질리를 적대시 하지 않는 그녀였다. “만나 줘서 고마워. 나 때문에 집에서 곤란해지지 않으면 좋겠는데.”그녀의 염 려에 대해 사라는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내 친구는 내가 선택해요.”“그래, 하지만 결국은 스테파니가 원하는대로 하게 되잖아. 나랑 만나는 걸 금지시킨다 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겠지.”질리만의 모습인 애절한 표정이 사라의 가녀린 마음을 움직였다. “아뇨, 질리.”사라는 손을 내밀어 질리의 손을 따뜻하게 쥐 었다. 순간 질리의 시선에 스쳐가는 무엇을 사라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스테 파니가 노골적으로 밀어붙이는 대담성을 가진데 비해 질리는 항상 감추어진 비 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질리는 사라와 마음으로 통하려는 듯이 말을 꺼냈지 만 중도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다. 데니스가 놀라며 다가왔기 때문이다. “뜻밖이 군요,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데니스는 대뜸 불쾌한 기분을 노골적으로 드러냈 다. “널 보게 되새 반갑군, 데니스.”이들의 관계는 에덴 이층의 목욕실 사건 이후 각자의 상황에 빠졌다. 질 리가 자신있어 하는 만큼 데니스는 패배의 분노 를 느꼈다. 그리고 스테파니가 예측 못하듯이 데니스도 자신에 대한 정보가 제 이크에게 새어나간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사라에게 뭘 하고 있는 거지?” 그 대답은 사라가 했다. “데니스, 싫으면 가된 되잖아?”남매의 성격차이는 현 격했다. 비록 나약해 보이면서도 자신의 소신과 주장을 굽히지 않는 사라였고 데니스 역시자신의 주장이 사라를 위한 것이라고 확신하는 데에 충돌의 원인이 있었다. “왜 그래, 살. 네게 독물을 먹일 수도 있어. 모르겠어? 자기편으로 이용 하려 드는 거야.”사라는 질리를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냥 돌아가 줘, 데니스.”질리가 오히려 사라를 위로했다. “괜찮아, 사라. 내 말 맞지? 난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야.”“오, 질리 스튜어트. 언제부터 이리 온순해지셨을까요?” 데니스는 끝까지 빈정댔다. 질리는 앉았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음에 다 시 만날까? 난 팰리 세이즈 호텔에 묵고 있어.”사라가 뭐라기도 전에 데니스가 다시 조롱하듯 대꾸했다. “당신이 갈 만한 장소가 아닌 것 같은데요. 당신 같은 여자를 킹스크로스나 소호 같은 데가 어울리지 않아요?”질리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아 보였다. 표정이 변한 것은 사라였다. 그녀가 보기에 데니스는 너무 지나쳤다, 한쪽이 나쁘다고 해서 그 상대가 더욱 거칠게 행동하는 걸 묵과할 수 만은 없기 때문이다. “오, 데니스.”질리의 목소리가 갑자기 더욱 부드러워졌다. “난 이런 일은 좀처럼 안 하는데. 넌 예외가 되겠구나.”그말이 끝나는 것과 거 이 동시에 질리의 손이 데니스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전혀 무방비 상태였던 데니스는 전신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질리는 그런 다음 돌아서서 유유히 걸어나 갔다. “오빠가 자초한 거라구.”사라가 통쾌한 듯이 웃으며 뺨을 어루만지며 질 리를 노려보는 데니스에게 말했다. 사라 역시 질리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온 가족이 미워하는 그녀에 대해 일말의 동정심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녀 자신도 질리를 위험한 여자라고 생각하지만 가족 모두가 그녀를 몰아세우는 일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 문제는 저녁식사 때에 다시 거론되었다. 댄과 스테파니, 데니스, 사라 등 가족이 함께 한 자리에서 사라가 먼저 꺼낸 것이다. “그 일이 가십란 기자의 귀에 안 들어갔으면 좋겠다.”하퍼 사의 체면을 걱정하는 스테파니의 말이었다. “그게 걱정이에요? 사라가 질리와 어울리는 게 더 큰 걱정이라구요.”“어울린다구? 세상에, 오빠!”사라는 즉시 반발했다. 그들은 같은 생각을 가졌지만 표현하는 방법이 각각 달랐다. “질리는 어떻게 지내던?”역시 그녀에게 가장 관심이 많은 것을 스테파니였다. 그녀가 이미 제이크와 공모하고 더구나 감옥에 있는 올리브까지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스테파니였다. “얘기도 하기 전에 오빠가 왔어요. 팰리 세이즈 호텔에 있다고 했어요, 엄마.”순간 스테파니의 표정이 변했다. “확실하니?”그 녀는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예감을 느낀 듯했다. “그렇게 말했어요.”그때 스테 파니의 기분을 알아차린 댄이 끼어들었다. “신경쓰지 마, 스테파니. 우연의 일 치겠지.”그래도 스테파니는 석연치 않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질리가 그 호텔 에 묵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확실히 불길한 소식이었다. “무슨 얘기예요? ”사라가 궁금해 하며 물었을 때야 비로소 스테파니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다른 얘기를 하는 게 좋겠다.”이번에는 사라도 몹시 언짢은 표정이 되었다. 어린애가 아닌 그녀는 스테파니의 표정 뒤에 감추어진 무엇을 직감적으로 깨달 았다. “엄마, 질 리가 출감한 뒤부터 우리 집이 이상하게 변했어요.”맞아!”데 니스가 재빨리 동의했다. 질리가 팰리 세이즈 호텔에 묵고 있다는 불길한 소식 을 스테파니는 쉽게 지워버릴 수 없었다. 바로 제이크가 그 호텔에 묵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테파니는 가볍게 드러내지 않았다. 일단 접어둔 채 그 동안 줄 기차게 지원해 왔던 사라의 피아노연주 문제를 꺼냈다. 그녀는 사라가 연주회를 포기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그 동안 사라는 전혀 내키지 않았지만 어머니 때문에 피아노를 연주했고 더 견딜 수 없어서 단념했다. 그 문제에 대해 모녀는 테라스로 나와 진지하게 토론했다. “엄마를 위해서가 아니었음 벌써 피아노를 집어치웠을 거예요.”스테파니는 하나뿐인 딸의 장래 문제에 소홀할 수가 없었 다. “그럼 뭘 할 거니?”“타라의상실에서 일하고 싶어요.”“패션에 대해 알고 있니?”“엄마가 그걸 시작했을 때에 비해 많아요.”“모델이 되고 싶은 거니? ”“아뇨. 저도 한계를 알아요. 엄마를 닮지 않았거든요.”“얘야, 넌 감사해야 된단다. 네가 보는 엄마는 댄의 솜씨야.”“아이러니 해요.”“뭐가?”“질 리가 아니었다면……질리, 언제나 질리한테로 얘기가 돌아가는군요.”“네가 옳아. 질 리가 아니었다면 난 지금 어땠을지 몰라.”그 말은 질리의 악행 덕분에 자신이 오늘의 모습으로 바뀔 수 있었다는 고백 아닌 고백이었고 사라도 그것을 알아차 렸다. 모녀는 마주보며 웃었다. “엄마, 의상실에서 일해도 돼요?”스테파니는 계속 웃었다. “돼요?”그녀가 재차 물었을 때 스테파니는 새삼스럽다는 듯이 되물었다. “안 될 게 뭐 있니?”그 말과 함께 모녀는 다정하게 포옹했다. 사라 가 그 동안 고심했던 문제가 의외로 쉽게 해결된 것이다. 한편 댄과 데니스는 거실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서 말려야 되는 건 아닐까요?”데니스는 테라스에 있는 모녀를 가리켰다. 그의 생각에 피아노를 그만두겠다는 사라를 스 테파니가 요인할 것 같지 않았다. “아직 사우는 것 같지 않다. 그보다 데니스, 우리들 사이의 문제가 뭐기에 항상 껄끄럽지?”데니스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 었다. “아들과 계부 사이는 원래 그런 거 아니던가요?”“안 그러면 좋겠다. 잘 지낼 방법이 있을 텐데…….”그때 데니스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부 탁이 하나 있는데요. 2만5천 달려 빌려 주세요.”댄은 의외의 제안에 잠시 어리 둥절 했다. “2만5천 달러, 그런 식으로? 진지하게 얘기하는 거냐?”“돈에 관해 서 그래요. 줄 거라고 기대도 않지만.”“줄 수도 있지.”“좋은 투자가 될 거예 요. 빨라야 하지만.”그는 댄의 잔에 술을 따랐다. “엄마한테 말해 봤니?”“아 뇨.”“좋아. 하지만 정식으로 하고 싶다. 보증이나 지불조건 등.”데니스의 표정 이 굳어졌다. “그러시면서 왜 우리가 안 맞는지 모르시겠다구요?”“정당한 조 건이다.”댄은 침착하게 말했다. “남남끼리는 그렇겠죠. 질리 스튜어트나 그녀 를 위해 돈을 아끼시죠, 진짜 가족이니까.”그는 쏘아붙이듯이 말하며 자리를 박 차고 일어섰다. 현저한 견해차이였다. 모처럼 댄과 거리를 좁힐 수 있을지도 모 른다던 데니스의 기대는 실망으로 끝났다. 하지만 댄이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싫어해서는 아니었다. 모든 걸 확실하게 하려는 댄에 비해 데니스는 그를 계부 이상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따. 대재벌의 상속자가 2만5천 달러 때문에 비참해 졌다는 얄팍한 생각이 데니스를 화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방법이 옹졸했지만 그 는 돈이 꼭 필요했다. 안젤로의 매니저가 되기로 약속한 그는 어떡하든 그 돈을 마련해야만 했다. 스테파니와 기분좋게 합의한 사라와 달리 데니스는 장남이면 서도 곤경에 빠졌다. 사라가 의상실 타라에서 조안나와 사이좋게 이야기하고 있 을 때 데니스는 절박한 형편 때문에 전혀 다른 장소에 있었다. 그는 전직원이 퇴근할 때를 기다려 늦은 시간 하퍼사의 건물로 조용히 들어섰다. 하지만 늦은 시간에도 아직 일하는 사람이 있었다. 빌리의 여비서 캐시였다. 그녀는 누가 보 아도 열성적이지만, 사실상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시간을 이용해 정보를 빼내 던 중이었다. “뭐 해?”불쑥 나타난 데니스가 물었을 때 캐시는 본능적으로 몸 을 움츠렸다. “아, 아니예요…….”“미안해. 놀래 줄 생각은 없었어.”캐시는 재빨리 태연을 가장했다. “괜찮아요. 아직까지 일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거 든요.”“내일 저녁 시간 있어요?”데니스는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미안해 요, 하퍼 씨.”“데니스요.”그러면서 데니스는 키시에게로 바싹 다가섰다. 캐시 는 다시 놀라며 그의 팔에서 벗어나 재빨리 핸드백을 챙겨들었다. “안 돼요, 데 니스. 그럼 안녕.”데니스는 그녀를 엘리베이터까지 친절하게 전송했다. 그녀가 완전히 나가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한 가지 모험을 시도하려는 것 이다. 캐시가 나간 다음 좀더 기다린 그는 전직원의 서류가 보관된 사무실로 잠 입했다. 늦은 시간이지만 그가 사무실에 있다는 것을 의심할 사람은 한 명도 없 었다. 데니스는 서류함에서 꺼낸 명부 중에 타라의상실의 조안나를 택해 그녀의 사인은 의조했다. 2만5천 달러를 편법으로 조달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말썽이 생 기기 전에 메꾸어 둘 작정이었다. 데니스에게는 또 불쾌한 문제가 발생했다. 조 안나의 사인을 위조한 그는 여전히 제이크의 문제에 매달렸다. 그는 힘들게 제 이크의 과거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서 스테파니에게 전했다. “샌더스의 과거에 대한 이 자료는 신빙성이 있는 거니?”언제나 신중한 스테파니였다. “내가 약 간 손을 봤지만 거짓말은 아녜요.”“물론 부정적 인상을 심는 것이 우리의 의 도이기는 하나 각색을 지나치게 하면 안 돼. 우린 누굴 중상모략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다.”“왜 안 돼요? 우린 우리 것을 지킬 의무가 있다구요.” “그래, 하지만 정당히 못한 수법을 쓰면 결국은 똑같이 당하게 돼.”모자의 대 화는 어느 틈에 빗나가기 시작했다. “엄마는 약점 잡힐 일이 없잖아요. 떳떳하 신 줄 알았는데요.”“내가 아니고 네가 걱정이다.”“내가요?”데니스는 문득 자신의 행동을 떠올리며 다그치듯 물었다. “댄한테 들었나요?”“2만5천 달러 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데니스는 순간적으로 댄에 대한 배신감을 느꼈다. 남자끼리 나눈 이야기로 생각했던 탓이다. 그는 감정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애 썼다. “엄마한테 얘기해 봐야 소용없겠죠. 하지만 투자가치가 충분한 건데?”얘 기해 보렴.”“안 돼요.”데니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알고 있는 어머니는 권 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분이었다. “또 도박에서 진 빚은 아니겠지?”데니스 는 기가 막혔다. “소문 들으셨군요?”아니, 하지만 나도 바보는 아냐. 넌 내 아 들이고 난 널 사랑한다. 너의 나태함을 용서만 해 줄 수 없기 때문에 무시했을 뿐이다.”데니스의 귀에는 그녀의 ‘사랑’을 내세운 설득처럼 가증스럽게 들리 는 것은 없었다. 적어도 어머니는 아들을 사랑하는 게 아니고 무조건 미워한다 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는 몹시 불쾌해진 마음으로 투덜거렸다. “질리한테는 5 백만도 순순히 내놓으시더니 내겐 2만5천도 아깝군요!……”스테파니 역시 끓어 오르려는 분노를 재빨리 억제해야만 했다. “질리의 돈은 명분이 확실하기 때문 이야.”‘명분’이라는 말이 데니스의 비위를 극도로 자극했다. 자기가 낳은 아 들과 질리를 그런 식으로 비교하는 게 견딜수 없었다. “그래요? 난 또 양심에 찔려 그런 줄 알았죠.”데니스는 스테파니의 표정이 험악해지려는 것을 무시했 다. 그녀는 폭발하려는 감정을 힘들게 억제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만 싸우자, 데니스. 이러다 정말 험한 소리 나오겠다.”이번에도 데니스는 뒤로 물러나지 않 았다. 이 순간의 감정대로 라면 의절도 불사하고 싶었다. “그러기엔 너무 늦었 을 텐데요. 날 불신하시는 게 확실하니까.”“데니스!”스테파니의 언성이 날카 롭게 변했다. “나보고 어떡하라는 거예요? 돈을 얻으려면 살인미수를 저지르거 나 남편을 쏴야겠군요?”“데니스!”스테파니가 거의 절망적으로 소리쳤을 때 문이 열리며 빌 리가 들어왔다. 그녀가 데니스의 뺨을 후려치기 직전이었다. “ 실례하오. 스테파니. 톰이 와 있는데 보고 싶다고 했죠?”데니스는 어금니를 물 었다. 이미 어머니와의 관계는 끝난 듯한 기분이었다. “네, 물론이에요.”데니스 는 금방 표정이 바뀌는 스테파니를 노려보았다. 톰은 데니스도 알고 있었다. 같 이 자란 친구지만 성격이 맞지 않았다. 그리고 톰은 재벌의 아들이 회사일이나 돌볼 때에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미국의 하버드대학에서 유학했다. 스테파니가 금방 표정을 바꾸며 톰을 만나려는 태도가 데니스의 마음에 들 리 없었다. 장소 와 분위기가 달랐을 경우 그와 톰의 재회는 훨씬 기분좋은 일일 수도 있었겠지 만 이미 그럴 여지는 흔적없이 사라졌다. 데니스는 톰을 공연히 미워하게 된 것 이다. “톰 멕매스터는 방금 미국에서 돌아왔단다.”스테파니는 방금 전의 언쟁 을 잊은 듯이 데니스에게 설명하며 들어오는 톰을 반갑게 맞았다. “톰, 잘 돌아 왔다.”“감사합니다, 회장님.”톰은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스테파니라고 불러 요.”톰은 총지배인 빌리와 그의 아내인 리나의 양자였다. “안녕하세요, 리나.” 데니스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 말뿐, 침묵하며 우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반갑게 말을 걸어오는 톰에게 빈정대듯 건성으로 대해 주었다. 톰보다 그 에 대한 스테파니의 반색하는 태도에 비위가 거슬렸다. 하버드를 우수한 성적으 로 졸업한 톰은 월 스트리트에 이미 직장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스테파니는 다 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보다 내게 생각이 있는데, 함께 일하면 어떨까요? ”그녀의 제안에 톰은 깜짝 놀랐다. “진심이세요?”아버진 그런 말씀이 없으셨 는데…….”톰은 옆에 서있는 빌리를 쳐다보았다. 뒤쪽에 있던 데니스는 그 광경 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똑같이 젊고 의욕적이며 회사를 누구보다 아끼는 아들을 무시하고 톰에게 의지하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진심이에요. 톰.”“실은 저도 하퍼사에서 일하고 싶었습니다.”“됐어요. 당장 계약서를 작 성하도록 하죠.”톰의 입사는 즉석에서 결정되었다. 더구나 스테파니는 톰에게 회사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털어놓았다. 톰의 입사에 대해 모두가 기뻐했다. 늙은 나이에 하나뿐인 양자를 다시 미국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던 리나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기뻤다. 빌리도 다를 바 없었다. 데니스만이 그 문제에 대해 깊은 감정 의 골을 늦추지 않았다. 그는 질리와 함께 본격적인 작전을 전개했다. 그들의 첫 째 목표는 데니스였다. 회사와 스테파니에게 불만이 쌓인 데니스에게 접근하기 란 쉬운 일이었다. 이미 충분한 계획이 세워졌다. 행운의 여신이 그들에게 미소 를 보내는 듯했다. 스테파니에 대한 불만으로 터질 것은 데니스의 화약고의 도 화선 같은 존재였다.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허울좋은 재벌의 상속자로 살고 있는가에 강한 회의를 느꼈다. 5. 교활한 알리바이 데니스는 극단적인 모함의 함정에 빠졌다. 질리로부터 연락받는 그는 홧김에 선 뜻 안젤로의 식당으로 갔다. 그는 질 리가 제이크와 공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 혀 알 수 없었다. 어머니에 대한 화풀이로 질리를 만날 뿐이다. “안녕, 데니스. ”질리는 전에 없이 요란한 모습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왜 날 보자고 했죠?” 질리는 요염한 자태로 데니스의 맞은 편에 앉았다. 우유빛에 가까운 새하얀 피 부와 선이 또렷한 이목구비, 특히 두 눈과 입술은 그 자체만으로 남자들을 사로 잡을 만했다. “데니스, 그렇게 나를 미워할 필요는 없잖아?”“없다구요?““사 과하고 싶어, 전에 때린 거 말야. 그리고 다른 것들도……네 도박에 대해서는 입 도 열지 않았어.”질리는 데니스의 호감을 얻으려는 눈치가 분명해 보였다. “다 른 사람이 했겠죠. 다음 샤워 때를 기억해 두죠.”데니스는 다시 수세를 지키지 못했다. 그가 공격한 내용은 겨우 샤워뿐이다. 그런 점에서는 질 리가 스테파니 를 따를 수 없듯이 데니스는 질리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만 싸우자, 제발. 이건 시간낭비야.”“나도 마찬가지예요.”뜻밖에도 질리는 용건이 끝났다는 듯 한 태도였다. “어쨌든 내가 노력했다는 것만 기억해 주면 좋겠다.”“호기심에 서 묻는데요. 지난번 내가 강경했다면 어땠을까요?”질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니스의 질문은 그녀에게 아무런 자극도 주지 못했다. 노련한 질리에게 데니스 의 태도는 풋나기 같은 짓일 뿐이었다. “넌 아직 몰라.”질리는 그 말을 남긴 채 요염한 미소를 흘리며 돌아서서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데니스는 그녀의 속 셈은 물론 자신이 이미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아직 몰랐다. 스스로 질리에게 또 패했다는 생각에 은근히 부아가 끓어오르던 그는 때마침 다정하게 웃으며 옆 에 와서 앉는 여자를 거부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질리에 비해 새파랗게 젊은 아가씨였다. 진한 화장에도 불구하고 어린 티가 물씬 풍겼으며 첫눈에 호 기심이 끌릴 만했다. 데니스는 현실로부터 도망칠 비상구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데니스는 장소를 옮겨 홀에서 정신없이 흔들어대는 무리 속에 섞였다. 원색적인 춤 동작이 어지럽게 난무하는 가운데 데니스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도록 술에 취했다. 게다가 주위의 현란한 분위기는 데니스의 이성을 잠재우 기에 충분했다. 그는 아가씨와 춤추며 되는대로 마구 지껄였다. “내가 누군지 알아?”“엔젤.”“천사? 정말 내가 누구지?”“계속 말해 놓구선. 세계 제일가 는 부호의 아들이라고.”“내가 그랬나?”“맞아요.”“내가 그랬어? 그렇다면 믿어 보기로 하지.”그러는 동안 데니스는 취기가 더욱 심해졌고 그와 함께 이 성을 잃어갔다. 거의 몸의 중심을 잃은 상태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흔 들어대는 모습이었다. 순간순간 홀 안의 풍경은 열기를 더해갔다. 남녀가 서로의 몸을 비벼대는 제스처는 물론 노골적인 행위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그때 사회자 의 안내방송이 홀 안에 퍼져나왔다. “……우리의 자랑인 부채춤입니다.”이어 한 무희가 무대가 아닌 홀에서 직접 나타났다. 무희는 하얀색의 사람 크기만한 깃털모양 부채로 앞 뒤 몸을 가렸고 가리워진 몸은 거의 알몸이었다. 연주되는 음악이 더욱 격렬해지는 가운데 아릿다운 무희의 선정적인 춤동작이 시작되었 다. 흰 색깔의 깃털부채와 무희의 피부는 현란한 조명과 함께 황홀한 분위기를 연출해서 데니스를 현혹시켰다. “난 내가 아니고 누구든 상관없이, 반은 벌거벗 은 영계로운! 영계와 삼페인이라, 좋지!”데니스는 갑자기 들고 있던 술잔을 단 숨에 비우며 춤추는 아가씨의 곁으로 접근했다. 인사불성일 정도로 취한 그는 무희의 주의를 맴돌며 자기도 격렬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홀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탄성을 올리며 무희와 데니스가 춤추는 주위에 빙 둘러섰다. 그리고 박 수로 흥을 돋구었다. 무희는 데니스를 거부하지 않고 보조를 맞추었다. 안젤로의 식당에서 질리는 만나고 이어 낯 모르는 무희와 어울리게 된 것이 모두 제이크 의 계획에 의한 것임을 알 리 없는 데니스는 술과 분위기에 도취되어 땀범벅이 된 옷을 벗기 시작했다. 둘러선 구경꾼들의 환호와 박수가 쏟아지는 가운데 그 는 더욱 몰입해 갔다. 대담한 몸동작과 함께 이번에는 바지까지 벗어던졌다. 팬 티차림으로 바닥에 뒹굴며 무희와 보조를 맞추는 데니스는 이미 하퍼가문의 장 남이 아니었다. 제이크의 계략에 말려들어 헤어나지 못하는 피에로였고 술취한 망나니일 뿐이었다. 그는 겨우 중심부만을 가린 무희의 마지막 하나까지 벗겨 그 알몸을 보고 싶다는 듯이 헐떡이며 따라다녔다. 구경꾼들은 더욱 신나하며 소리쳤다. 그때였다. 언제 나타났는지 구경꾼들 속에 끼어 있는 제이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유능한 사긴사를 대동하고 있었다. 구경꾼들 틈 에 섞여 함께 웃으며 동행한 사진사에게 그때 그때 셔터를 누르도록 지시했다. 하퍼그룹의 상속자인 데니스 하퍼의 가장 적나라한 치부를 필름에 담고 있었다. 그것은 스테파니에게 결정타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 사진들이 언론에 보도되면 그 순간부터 스테파니는 얼굴을 들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했다. 제이크는 질리의 결정적인 도움으로 그 멋진 작전에 성공한 것이다, 데니스는 골이 빠개지는 듯 한 통증과 함께 곤한 잠에서 깨어났다.. 거기가 어딘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 지 전혀 몰랐다. 어리둥절해져 잔뜩 찡그린 그의 시야에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은 제이크 샌더스였다. “잘 잤나, 데니스? 커피?”“아뇨…….”데니스는 아직 현 실을 깨닫지 못했다. 곁에서 친절하게, 자신이 데려다 재웠다고 말하는 상대가 제이크임을 알아차린 건 그 직후였다. “우린 어젯밤 만났지, 친해질 기회는 없 었지만.”“그 깃털부채…….”데니스는 악몽을 회상하듯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데니스, 함정에 빠진 것 같은데?”“난 악몽인 줄 알았는데…….”제이크의 간 단한 설명을 듣던 데니스는 비통하게 소리쳤다. “이런!”비로소 정신이 들기 시 작했다. “내가 보기엔 하퍼의 상속자가 그런 스탠들에 휘말리는 건 치명적일 것 같은데.”제이크는 친절하게 간밤의 사진들을 데니스에게 던져 주었다. 자신 이 사진사에게 샀다는 것이었다. 아직 핵심적인 내용을 모르는 데니스는 사진이 필름과 함께 있지 않다는 사실에 돌연 깜짝 놀랐다. “필름이 없는데요?”“그 건 내가 가졌지.”데니스는 전신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심을 나타내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좋아요. 조건이 뭐죠?”“잠깐, 데니스. 그런 게 아냐.”“그럼 요?”“자네가 신문에 흘린 나에 대한 정보보다 나쁘진 않을 거야.”“원하는 게 뭐예요?”“이해.”“?……”“언젠가 우리가 함께 일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문제를 알아차린 데니스는 점차 대담해졌다. 상대의 약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퍼에 침투할 생각은 아예 단념하시지.”데니스가 비로소 미소를 지을 때 노 크소리에 이어 안으로 들어온 이는 뜻밖에도 스테파니였다. 제이크는 모든 준비 를 완벽하게 했던 것이다. 침실의 데니스가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 그녀가 물었다. “내 아들은 어딨죠?”제이크는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과연 정보망이 놀랍군요. 침실에 있죠.”스테파니는 그를 무시하고 곧장 침실로 향했다. 그녀가 거칠게 문을 열였을 때 데니스는 너무 당황한 너머지 전혀 놀란 것 같지않아 보 였다. “엄마, 내가 여기서 뭘 하는지 궁금하시겠죠?”“샌더스 씨 말대로 내 정 보망은 정확하지. 사진이 있을 텐데?”스테파니가 전혀 당황하지 않는 데는 이 유가 있었다. 제이크 편에서 정보를 아직 흘리기 전에 미리 탐지한 그녀가 선제 공격을 가한 셈이었다. 데니스는 질리에게 계속 당했지만 이번에는 제이크가 스 테파니에게 한 방 먹은 셈이었다. 그녀는 사진은 물론 필름의 행방도 제이크에 게 물었다. “그건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죠.”스테파니는 계속 제이크를 감탄 시킬 정도로 과감하고 저돌적인 태도를 취했다. “왜요, 신문사에서 사자고 제의 하던가요?”“돈은 별로 관심없소.”“당신을 과소평가했어요. 작은 스캔들 때 문에 곤란한 건 아니겠죠? 아니면 하퍼사에 줄이 생겼다고 믿나요?”“가능성만 해도 매력이 있죠.”데니스가 옷을 챙겨입는 가운데 스테파니는 조금도 주저하 지 않고 제이크를 상대했다. “실망했어요.”“그럴까요?”“난 당신이 신선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업가인 줄 알았어요. 당신의 도전에 기대를 가졌죠. 그런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군요. 유치한 짓이에요. 난 사업적인 대결인 줄 알았는데 쥐 새끼 놀음이라니…….”제이크는 다시 연타석 홈런을 맞은 투수입장이 되고 말 았다. 스테파니는 계속 몰아붙였다. “난 당신 수준으로 내려가지 않겠어요.”이 번 게임은 그것으로 제이크가 완패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사실상 질리의 아이 디어였고 제이크는 재빨리 태도를 바꾸었다. “좋아요. 사업적 대결을 원한다면 합시다. 제가 좀 거칠다는 점은 염두에 두셔야 할 겁니다. 당신의 방법을 사용해 서 당신을 멋지게 굴복시킬 겁니다.”“그렇게 자신하지 말아요.”“천만에. 최 소한 당신이 비겼다고 인정할 때까진 단념하지 않을겁니다.”제이크는 패배한 자신을 만회할 결심을 하며 방에서 나가버렸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스테파니에 비해 한 수 아래라는 생각에 울화가 치밀었다. 목에 칼을 들이대도 눈 하나 깜 짝하지 않을 그녀의 대담성에 일순간 존경심과 분노가 동시에 치밀었다. 그가 거칠게 호텔의 자기 방으로 돌아왔을 때 질 리가 벌써부터 와서 서성이며 기다 렸다. “연락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몰라요. 어디 있었어요?”그녀의 짜증섞인 투정은 제이크를 더욱 불쾌하게 만들었다. “바빴소. 사진은 돌려주었고 필름은 없앴소.”“뭐라구요?”지리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계략으로 작전의 성공을 확 신했던 탓이다. “듣던대로 협상은 끝이오.”제이크의 그와 가은 태도에 겁먹을 질리도 아니지만 자신의 계획이 어긋난 데 대해 다소 블만을 드러냈다. “정신 나갔어요? 아니면 스테파니를 보더니 배짱이 사라졌나요?”“배짱은 있소. 하지 만 앞으로는 내 방식대로 하겠소.”그는 단호히 말했다. “난 복선을 까는 게 싫 어요.”“당신이 원하는 대로 될 거요.”“당신은요? 왜, 계획을 바꿨죠?”드디 어 제이크의 입에서 가장 거칠고 가장 솔직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그년한테 본때를 보여 주겠어. 회사뿐 아니고 그녀까지 내 껏으로 만들겠어!”그는 거칠게 내뱉은 다음 질리를 무시한 채 방에서 나가버렸다. 남겨진 질리는 한동안 정신 나간 듯이 멍하니 서서 문 쪽을 바라보았다. 질 리가 출감한 후부터 스테파니는 자주 악몽에 시달렸다. 물 속에 빠져 악어떼에서 물리고 찢기는 광경이었다. 곁 에 댄이 없으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제이크를 무시하고 혼자서라도 실 행하고 싶었다. 친자매로 용서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스테파니를 죽이고 싶었다. 그녀는 필립을 감언이설로 끌어들여 아직 수감 중인 올리브를 석방시키 는데 성공했다. 평생 동안 감옥에서 썩을 수도 있을 자신을 꺼내 준 데 대한 보 답으로 올리브는 어떤 행동도 기꺼이 해 줄 용의였고 또한 그녀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질리는 방금 석방된 올리브와 조용한 카페에서 은밀히 만났다. “꺼 내 줘서 고마워. 어떻게 했지?”“난 누워서 스테파니 생각만 했지.”두 여자는 마주보며 의미있는 미소를 교환했다. 그들은 감옥에 같이 있는 동안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올리브는 질 리가 석방된 후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 다. 질리는 수감생활 동안 한시도 스테파니에 대한 복수를 잊지 않았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에 앞서서 증오심에 사로잡혀 복수만을 꿈꾸었다. 올리브는 복수 의 방법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었다. 출감 후 질 리가 스테파니와 그녀의 가 족들에게 보인 태도는 처음부터 연극이었다. “이제 내가 어떡해야지?”올리브 가 묻자 질리는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마침 그녀들의 주위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안심한 질리는 핸드백 속에서 소형 권총을 꺼내 올리브에게 내밀었다. “언제?”올리브는 이미 권총을 깊숙이 집어넣었다. “가능한한 빨리.”“기꺼이 하지. 넌 정말 물건이다, 질리.”“아직은 아냐. 그렇게 되려는 참이지.”지금까 지 온갖 풍상을 겪으며 잡초처럼 살아온 올리브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권 총이 의미하는 내용에 대해서 오히려 일종의 쾌감을 느끼는 듯한 표정이었다. 올리브는 빠를수록 좋다는 질리의 부탁대로 움직였다. 질리는 그녀에게 스테파 니가 승마장에 자주 간다는 정보를 제공했고 그녀는 그곳을 범행장소로 대뜸 선 택했다. 드넓은 장소에 숨어들기 쉬웠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다음 날 스테파니 는 승마장에서 제이크를 다시 만났다. 스테파니는 잠복한 살인자를 전혀 예측하 지 못하며 제이크를 따돌리고 앞서서 말을 몰았다. 불행하게도 그녀는 전처럼 전속력으로 계속 달리지 않고 중간쯤에서 멈추었다. 계속 달렸을 경우 총탄을 그녀를 노릴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숲속에서 총구가 곧장 심장을 향했을 때 그 녀는 말을 쓰다듬어 주며 잠시 쉬고 있었다. 그녀와 총구와의 거리는 불과 5미 터도 되지 않았고 그녀의 뒤로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제이크가 뒤따라 달려오고 있었다. 올리브는 스테파니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지만 잔인한 성격과는 달리 사 격술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녀가 방아쇠를 당겼을 때 스테파니는 말 위에서 몸 을 숙여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고 있었다. 두 발의 총성은 조용하던 승마장 주위 를 뒤흔들었다. 곧이어 스테파니는 말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순간적으로 놀랐 던 제이크가 달려갔을 때 스테파니는 죽은 듯이 누운 채 꼼짝하지 않았다. 제이 크에 의해 스테파니는 재빨리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녀가 병원응급에 있을 때 올리브는 질리에게 권총을 되돌려 주었다. “이 게임에서 너의 배역은 없어. 또 보자.”이때의 두 음모자는 스테파니가 죽은 것으로 믿었다. 올리브는 그렇다치 고 질리는 가슴이 터질 듯했다. 스테파니만 없으면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 리라 믿는 것이다. 올리브의 사격솜씨는 형편 없었다. 두 발의 총탄은 사실 엉망 으로 빗나갔고 단지 스테파니를 몹시 놀라게 했으며 타박상을 약간 입혔다. 그 형편없는 살인미수사건을 계기로 댄도 제이크를 알게 되었다. 댄은 그가 스테파 니를 병원으로 옮겨준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표명했다. 의식이 회복된 스테 파니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제발 댄, 난 무서워요. 누군가 날 죽이려 했어요.” 댄 역시 이번만큼은 심상치 않게 생각했지만 겁에 질린 스테파니를 위해 태연하 게 위로했다. 스테파니 하퍼의 살인미수 사건은 즉시 화제에 올랐고 경찰은 수 사에 착수했다. 경찰은 7년 전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빨리 강력계 의 제닝 반장과 형사 한 명을 질리에게 파견했다. 가장 먼저 용의자로 지목된 것이 질리였다. 하지만 질리는 교활한 여자였다. 그녀는 사건이 있던 시간에 남 편과 아침을 먹었다는 위증으로 알리바이를 제시했다. 알리바이가 있는 이상 확 인할 때까지 경찰은 그녀를 입건하진 못했다. 그녀가 전남편 필립 스튜어트와 밤을 함께 보내고 아침식사를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7년 전 필 립을 배신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질리의 알리바이를 확인하기 위해 즉시 필립을 찾아갔다. 질 리가 그와 만나 입을 맞추기 전에 재빨리 확인해야 되는 것이다. 실제로 제닝 반장이 사무실로 찾아갔을 때 필립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질리의 재빠른 공작이 아니었다면 알리바이는 성립될 수 없었다. 제닝 반장이 한 발 늦은 것이다. 막 필립의 사무실에서 질문하기 직전 전화가 걸려왔다. 영문 을 모르는 필립은 나중에 받을 생각이었지만 제닝 반장이 받아도 좋다고 승낙하 는 눈짓을 보냈다. “저예요.”질리의 목소리에 필립은 크게 당황했지만 무엇인 가 눈치챘다. 변호사로서의 오랜 경력이 다급한 질리의 목소리로 인해 상황을 읽어낸 것이다. 그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질리 역시 능 숙했다. “벌써 경찰이 그곳에 도착했군요. 믿어 주세요. 젝가 한 짓이 아녜요. 저 혼자 자고 있었는데 알리바이가 없어서……당신과 함께 자고 아침을 먹었다 고 했어요……듣고 계세요.”그녀의 목소리는 애절하게 울먹이는 것이었다. “그 래요, 듣고 있소.”필립은 기다리는 제닝 반장과 형사를 여유있게 바라보았다. 수사관 경력이 풍부한 제닝 반장도 노련한 변호사에게는 당하지 못했다. “전 결백해요. 맹세할 수 있어요.”그럴 때 시간을 끌면 그만큼 불리하다는 것을 누 구보다 잘 알고 있는 필립이었다. “전화해 줘서 고맙소. 다시 연락하죠.”질리 는 완전하게 성공했다. 그녀와 함께 잤으며 스테파니 사건이 있었던 시간 두 사 람이 아침을 먹었다는 알리바이가 증명되었다. 질리의 혐의는 완전히 벗겨진 것 이다. 그녀의 사주를 받은 올리브가 죽은 것은 죄없는 말에 불과하고 스테파니 하퍼에 대한 끔찍한 사건과도 무관하게 되었다. 질리 역시 스테파니를 죽이지 못한 아쉬움보다 자신이 무시할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올리브가 있는 동안 에는 앞으로 더욱 좋은 기회가 분명히 올 것라는 생각과 함께 권총은 아무도 모 르게 절벽 위에서 바닷물 속으로 던져버렸다. 6. 냉혹한 현실 캐시와 제이크 사이에도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제이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위험으 무릅쓰고 정보원을 자처한 캐시였다. 시간이 경과되면서 캐시는 제이크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녀가 우너하는 사랑은 다정하게 대해 주고 만날 때마다 육체관계를 갖는 게 아니었다. 진실된 사랑을 원했다. 제 이크의 태도는 최근들어 확실히 처음 같지 않았다. 거기엔 원인이 있었다. 수테 파니 하퍼를 알게 된 것이 원인이다. 질리도 있었지만 큰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 미모나 육체적인 매력에서는 뛰어난 질리였다. 아직 미숙한 편인 캐시에 비해 질리는 침대의 시트를 흠뻑 적셔놓은 만큼 농염한 여자였다. 바람둥이 기질을 다분이 지니고 있는 제이크가 아직 질리의 무릎사이를 건드리지 않는 것은 사업 가적인 기질 탓이다. 한 마디로 위험한 여자임을 간파한 것이다. 질리에 비해 캐 시는 나이가 어린 만큼 청순한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미 여러 남자를 경험한 질리에 비해 캐시는 제이크 자신이 첫남자이며 한 명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테파니를 알게 된 후 캐시에 대한 그의 태도가 변한 것은 확실히 특별한 경우 였다. 사업가적인 기질은 물론 평범한 여자들이 따를 수 없는 완숙한 여자로서 의 매력까지 겸비한 스테파니에게 제이크는 속절없이 끌렸다. 자신도 모르는 사 이에 그녀를 향해 알 수 없는 호감을 가졌고 그것은 일종의 존경심과도 맥을 같 이했다. 스테파니에 비해 캐시는 어리고 나약했다. 제이크의 사랑을 의심하면서 도 면전에서 분명히 하지 못한 채 하퍼사의 이사회에서 중요 결정을 내리면 즉 시 알려 주겠다고 약속했다. 캐시가 돌아건 다음 제이크는 회심의미소를 지으며 질리에게 전화를 걸어서 대뜸 물었다. “질리, 불쌍한 언니께 무슨 짓을 한 거 요?”그는 누구보다 질리에게 혐의를 두고 있었다. 제이크는 에덴의 스테파니에 게 위로와 격려의 화환을 보냈다. 이미 완전히 회복된 스테파니는 문안차 찾아 온 타라의상실의 조안나에게 제이크의 베짱을 솔직히 칭찬했다. 댄은 병원에 있 었고 에덴에는 스테파니와 조안나 그리고 사라가 있었는데, 제이크의 화환에 이 어 뜻밖의 방문객이 찾아왔다. 사라가 열어 준 문으로 들어선 이는 요란하게 차 려입고 여배우처럼 화장한 질리였다. 그런 식의 교활함만은 어떤 여자도 질리를 따를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사라?”“안녕, 질리.”“질리 이모가 아니고?” 가증스럽도록 그럴 듯하게 묻는 그녀를 사라는 차갑게 바라보았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사라조차 질리를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증거는 없지만 그녀도 질리를 의심하며 경계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아녜요. 왜 오셨죠?”사라는 담담하게 물었다. 질리는 지대한 친밀감을 보이려고 노력하는 빛이 역력했다. 사라는 선뜻 그녀를 안으로 들여놓지 않았다. 그냥 돌려보내려는 듯했다. 그때 안에서 지켜보 던 스테파니가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아, 사라.“질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 웃으며 걸어들어왔다. 조안나는 노골적으로 질리를 경멸하며 화환을 들고 자 리를 피했다. 스테파니와 질리는 같은 핏줄이면서도 판이하게 달랐다. “경찰이 오더니 널 죽이려 했다고 사정없이 몰아세우지 뭐야, 글쎄.“사라는 예전의 데니 스와 똑같은 눈빛으로 질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스테파니 역시 어느 때보다 차가운 느낌으로 대꾸했다. 그녀 역시 끔찍한 사건의 첫 번째 용의자로 질리를 떠올린 게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들을 탓할 수도 없지.”의미있는 말에 이어 그녀는 질리의 정곡을 찔렀다. “그들이 널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 안 해?”질리는 충분히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강렬한 반감을 사라한테서 느낀 그녀는 마음을 야무지게 먹었다. “네가 꾸며낸 거 아냐?”질 리의 엉뚱한 역습에, 지켜보던 사라의 시선은 증오의 빛이 번쩍 스쳐갔다. 부엌 에 있던 조안나는 금방이라도 욕설을 뱉아낼 듯 했고 스테파니는 허탈한 표정으 로 되물었다. “기가 막히군, 하긴 사람은 종종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뒤집어 씌 우기도 하지.”스테파니의 조용하지만 송곳 같은 비난에 지리도 할 수 없이 말 꼬리를 돌렸다. 그녀가 못당해내는 제이크조차 섣불리 도전할 생각보다 신중해 지게 만든 스테파니를 그녀가 얕볼 순 없었다. “그래서 나에게 무슨 득이 있 어?”질리는 마치 ‘우린 친자매야’라고 강조하려는 듯이 조금도 감정을 노출 시키지 않았다. “앙갚음이겠지. 이미 옛날에 다 끝난 일인데……”이때 질리는 스테파니를 가장 정확히 설득시킬 방법이 과연 무엇인가를 알아냈다. 어릴 때부 터 함께 자라다시피해서 그녀의 사고의 깊이를 충분히 헤아리고 있는 질리였다. 질리는 무대 위의 연기자처럼 슬픈 표정을 지었다. “네가 옳아. 그래, 지금의 스테파니는 모든 여자들이 부러워할테니까.”하지만 스테파니는 사건 이전과 확 실히 달랐다. 슬픈 표정의 질리에게 오히려 단호한 반응을 나타냈다. “네가 행 복하라고 너한테 사과할 생각은 없어.”“!……”“네 인생의 좌절과 실패들을 위로나 하고 싶지도 않고, 모든 건 네게 달렸어.”이 순간 질리는 눈앞이 캄캄했 다. 스테파니의 마음이 확실히 변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질리는 절망한 나머지 그 상황을 교활하게 뒤집어서 표현했다. 갑자기 울먹이며 세상의 슬픔을 한 몸 에 지닌 듯이 애절해졌다. “스테파니, 난 이제 어떡하지?”스테파니는 침착하게 말했다. “간단해. 널 믿을 수 있게 만들어야지.”질리는 무릎이라고 끓을 듯이 눈물이 가득한 채 스테파니에게 다가갔다. “날 믿을 수 있어, 정말? 그렇게 나 쁜 일이 많이 겪었는데도?……”스테파니는 울면서 하소연하는 그녀의 어깨를 조용히 안아 주었다. 하지만 전과 같이 가슴으로 감동하는 기색은 전혀 아니었 다. 마음 속으로 교활한 미소를 짓고 있는 질리의 확신과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한편 질리에게서 성과를 얻어내지 못한 경찰은 수상대상을 다각도로 확대시켰 다. 심증에도 불구하고 알리바이가 증명되었기 때문에 더욱 단념할 수 없었다. 제닝 반장은 오랜 수사 경험에서 자신이 질리와 필립에게 속았다는 불쾌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면적으로 최근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지만 호주 제일의 그 를 하퍼의 여회장에 대한 살인미수사건을 대충 넘길 수도 없는 게 경찰의 입장 이다. 7년 전의 사건에 대해서도 의혹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현실이어서 상황은 더욱 절박하게 된 것이다. 광범위하게 수사대상을 물색하던 제닝 반장을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지체없이 스테파니의 하퍼그룹을 공략중인 제이크를 수 사대상에 지목시켰다. 그리고 신속하게 수사에 착수했다. 그가 형사 한 명을 대 동하고 느닷없이 제이크의 사무실에 들이 닥쳤을 때 제이크와 그의 법률상담 변 호사인 안톤은 크게 당황했다. 아직 법적인 하자는 없다고 자부했지만 달갑지 않았다. 특히 하퍼그룹 회장사건과 관련해서 경찰의 조사를 받는다는 것은 앞으 로의 목표에 막대한 지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닝 반장은 사전에 수색영 장까지 준비했다. 제이크는 불쾌하고 불편했다. 하퍼그룹과 싸우려는 입장에서 그와 같은 사건 때문에 조사받는다는 것이 결코 득이 될 게 없었다. 예고없이 들이닥친 제닝 반장이 먼저 찾아낸 것은 그 동안 제이크가 수집한 스테파니에 관한 사진들이었다. 혐의를 충분히 뒷받침할 수 있는 물증이었다. 하지만 더욱 불리한 것은 안톤이 간직했던 권총을 경찰이 발견한 사실이었다. 경찰이 스테파 니의 사진들과 권총을 압수한 데 대해 제이크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앞으로의 그의 계획에 적지 않은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 워졌다. 스테파니 앞에서 그럴 듯한 연기를 펼쳐 보였던 질리는 다시 필립을 만 났다. 30년에 걸친 사회생활을 통해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던 필립에게 위증이란 엄청난 것이었다. 누구보다도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과거의 처 절한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다시 질리의 미모와 연기 그리고 육체에 빠진 탓이다. 여자들에게 별 인기가 없는 타입이라는 것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질리처럼 뛰어난 미인이 손색없는 육체를 기꺼이 제공하며 다시 접근해 왔을 때 그는 이미 자제력을 상실했다. 30년에 걸친 인생의 진실성을 벗어던질 정도로 질리에게 깊숙이 빠져든 것이다. 한편 조안나의 사인을 위조한 데니스는 2만5천 달러의 현금을 만들어 안젤로의 매니저가 되긱로 테일러와 계약했다. 권투계의 이면을 잘 모르는 그는 자신만을 믿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다. 실상 공동 메 니저라지만 테일러는 그 바닥에서, 특히 질이 나쁜 부류들과 어울리며 잔뼈가 굵어온 터였다. 따라서 데니스 같은 초년생은 테일러로 볼 때 형편없는 풋나기 에 지나지 않았다. 캐시가 제이크에게 정보를 알려 주기로 약속한 하퍼사의 이 사회의는 차질없이 열렸다. 이날 회의의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빌리와 스테파니는 제이크의 공략에 대한 타격을 특히 우려하였다. 회의에는 데니스도 당연히 참석했다. 권투도장에 찾아와 양자택일을 요구한 스테파니에게 굴복했던 것이다. “우리가 안고 있는 현실을 매우 심각해요. 신속하게 처리하지 않을 경 우 다음 주쯤에는 제이크 샌더스가 여기 앉게 돼요.”스테파니의 말에 두 명의 이사가 차례로 발언했다. “20퍼센트가 되기 전에는 어림없는 일입니다.”“너무 과민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어떤 주주가 몇 푼 벌겠다고 그런 기회주의자에 게 주식을 팔겠어요?”그들은 모두 하퍼사의 열성적인 주주들이다. 하퍼가족들 은 한결같이 스테파니를 중심으로 단결되어 있었다. 빌 리가 진지하게 입을 열 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이었습니다만 추이가 심상치 않아요.”빌리에 이어 데 니스가 참견하고나섰다. “요즘 의리가 어디 있어요. 지금은 광고시대입니다. 우 리 주주들도 광고하고 캠페인을 전개하며 적극적으로 이끌고 나가야만 합니다. ”그때 캐시가 들어와 빌리에게 모종의 서류를 넘겨 주었다. 빌리는 그 서류를 다시 스테파니에게 넘겼다. 서류를 검토한 스테파니는 이사들을 천천히 둘러보 았다. 특히 최근에 입사해서 스테파니의 기대를 받고 있는 톰을 유심히 바라보 았다. “제이크 샌더스는 이미 18퍼센트를 확보하고 지급도 계속 사들이고 있어 요. 톰,. 당신 생각은 어때요?”순간 데니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연륜과 경륜이 쌓인 하퍼사의 충성스런 주주들을 제쳐놓고 새파란 풋나기의 의견을 정중하게 묻는 스테파니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 생각에는 돈이 바로 열쇠입니 다.”“계속해요.”“그가 우리의 주식을 사들이면 이쪽에서도 그의 주식을 매입 하는 겁니다. 미국에서는 ‘맨식 방어“라고 하죠. 공격은 최대의 방어이니까요. ”듣고 있던 데니스가 재빠른 반격을 가했다. “하버드에 33년이나 머물면서 겨 우 그걸 배워왔어?”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더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그때 스테파니가 재빨리 두 청년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다른 분들 생각은 모르겠지만 저는 톰의 말에 동감해요.”아사들은 일제히 상대방의 분위기를 살 핀 다음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맞습니다.”이사들의 동의를 덛은 스테파니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침묵을 지킨 것은 데니스뿐이었다. 그는 스테파니가 무엇 때문에 톰의 의견을 전적으로 지지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장차 상속자이며 누 구보다 회사를 위히는 장남을 무시하는 처사에 다시 분보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캐시의 회의내용은 염탐하기 위해 문은 약간 열어둔 채 문밖에서 엿듣고 있었다. 하퍼사 이사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이미 제이크에게 알려진 셈이다. 스 테파니는 이사들을 향해 ‘비밀사항입니다’라고 엄중히 경고했지만 이미 유출 된 것이다. 최근 일련의 상황은 스테파니를 더욱 회서일에 열중하게 만들었다. 댄은 저으리 당황했다. 남편의 존재가 사업에 떠밀리고 있다는 느낌을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 샌더스와의 대걀을 즐기ㅡ 것 같군.”댄은 방금 수영 을 끝내고 나온 스테파니에게 따뜻한 커피를 권하며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제가요?”“이젠 당신이 전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겠소”“그래서 싫으세요? ”“잘 모르겠소…….”그때 댄과 스테파니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 저건 뭐지?”댄은 정문으로 들어오는 대형 차량을 가리켰다. 그들이 다가가 확 인한 것은 한 필의 말을 싣고 있는 트럭이었다. “스테파니 하퍼 씹니까?”운전 사가 물었다. “그런데요?”“어린 말을 싣고 왔는데요. 제이크 샌더스 씨의 선 물입니다.”댄과 스테파니는 흑과 백의 반응을 보였다. “세상에 이럴 수가! 대 체 무슨 속셈이지?”댄의 반응과 달리 스테파니는 벌써 감동받은 듯이 말을 살 펴보고 있었다. “어떡할까요?”“도로 가져가시오! 그리고 샌더스에게 지옥에나 가라고 하시오!”댄이 어느 때보다 격분하며 낮게 소리쳤다. 하지만 스테파니의 생각은 달랐다. “아녜요. 받겠어요.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남편의 입장을 완 전히 무시당한 댄은 거칠게 돌아서서 걸어가버렸다. 그런데도 스테파니는 새로 운 말에 감동된 듯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어쩌면 제이크는 말을 보내면서 이 러한 갈등의 골을 예측했는지 모른다. 댄과 스테파니 사이에 그와 같은 갈등을 야기시키려는 전략일 가능성이 다분했다. 질리는 은밀한 장소에서 계속 제이크 의 공략을 제지시켰다고 생각한 하퍼사에서는 타라의상실을 통해 대대적인 패션 쇼를 준비하였다. 하퍼사가 건재함을 과시하려는 스테파니와 조안나의 뜻이 일 치된 행사였다. 그때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톰에 의해 조안나의 사인위조와 2만5천 달러가 비공식적으로 빠져나간 사실이 밝혀졌다. 그 문제에 대해 스테파 니는 대뜸 집히는 게 있었기 때문에 조안나와 톰에게 직접 처리하겠다며 더 이 상 문제를 확대시키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도 데니스는 안젤 로와 함께 경마도박에 열중했다. 그날도 데니스는 가진 것을 모두 잃었다. 그가 절망에 빠졌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제이크가 나타났다. 친절하게도 그는 돈을 빌려 주기까지 하며 자기의 말인 골든 카스켓에 걸도록 알려주었다.. 그의 말대 로 한 겨로가 데니스는 경마에서 돈을 따는 행운을 얻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제이크의 계획적인 접근에 다름 아니었다. 데니스가 경마장에서 기분좋게 돌아 오고 있을 때 에덴의 스테파니와 댄은 심각한 분위기였다. “못된 계부가 될 위 험을 무릅쓰고 말하겠는데, 데니스는 하퍼를 계승할 재목이 아닌 것 같소.”“… …”“듣고 있소?”“들었어요. 저도 어떡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해고라도 시 킬까요?”“나 같으면 그랬을 거요. 그냥 놔두는 게 그를 위하는 길은 아니지. 그도 이젠 어린애가 아니니까.”스테파니는 댄의 우울한 기분을 다른 문제와 결 부시켰다. “여보, 그 말 때문에 화나신 거라면 돌려보낼께요.”“그러기엔 이미 늦었지 않소?”스테파니는 비로소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왠지 모르지만 그 허세를 거부할 수 없었어요. 제가 너무 옹졸해질 것 같더군요.”하지만 그녀 의 솔직한 고백도 댄에게는 때늦은 것이었다. 경마장에서 돌아온 데니스가 그때 불쑥 나타났다. 그는 스테파니의 눈치를 살폈고 댄은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것 네 짓이지?”언제나 다름없이 스테파니는 대뜸 사인이 위조된 서류를 내 놓았다. 데니스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어떤 대답을 원하세요? 그래요, 제가 좀 빌려썼어요.”“빌렸다고?”스테파니의 얼굴에 분노의 표정이 나타났다. “그래요, 갚을 생각이었어요.”“이건 도둑질이야.”“좋은 대로 생각하세요. 난 돈이 필요했던 겁니다.”“왜, 무엇 때문에?”“그건 내 일이죠.”스테파니는 데 니스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네 위치를 남용할 때 그건 이미 내 일이기도 해! ”“우리 가족들의 회사가 아닌가요? 나도 그 일원 아닌가요?”데니스의 도전적 인 발언에 스테파니는 기가 막혔다. 그의 말대로 하퍼사는 가족들의 회사였다. 하지만 가족이라고 규칙을 무시하는 행동은 용서할 수 없었다. 스테파니는 기가 막힌 나머지 음성이 낮게 가라앉았다. “가족이라도 신용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 냐. 데니스. 넌 하퍼사는 고사하고 최소의 경영능력도 보인 적이 없어.”“유감 이군요.”““글세, 그렇겠지.”“내가 유감인 것 당신이 내 엄마라는 사실이에 요.”극단적인 표현 앞에 스테파니는 숨이 막혔다. 데니스는 급기야 두 사람의 모자관계를 들고 나섰다. 이해와 사랑으로 뭉쳐야 될 가정에서 더 이상의 불미 스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스테파니의 가슴을 메웠다. 데니스는 거 기서 그치지 않았다. “당신이 하퍼사의 회장이기만한 게 아니고 내 엄마라는 사실 말예요. 돈 여기 있어요!”그는 갑자기 안주머니에서 지폐뭉치를 꺼내 스테 파니를 향해 뿌렸다. 스테파니가 어떡할 겨를도 없이 지폐다발이 공중에서 흩어 지며 그녀를 향해 어지럽게 난무했다. 홱 돌아서서 나가는 데니스는 바라보는 스테파니의 눈동자에 수심이 가득찼다. 어머니로서보다 사업가러 가족을 대하는 스테파니의 태도는 때론 냉혹하게도 비춰졌다. 그것은 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였다. 때때로 그녀는 비정할 정도로 냉정했다. 하지만 자신의 내면은 그렇지도 못했다. 그녀는 두 아이의 어머니이며 댄의 아내라는 생각과 함께 그녀만의 고 독에 휩싸이기도 했다. 특히 데니스에 대해 어머니의 사랑으로 감싸주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던 것이다. 타라의상실에서 개최된 패션쇼는 데니스의 추태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관객석에는 불청객인 제이크 샌더스도 여자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그는 댄과 춤추는 스테파니에게 접근해 서 춤까지 추었다. 그보다 앞서 술에 만취된 데니스가 추태를 보였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며 상속자인 자신에겐 2만5천 달러도 아끼면서 그런 패션쇼에 큰돈 을 지출한다는 불만에 찬 반발이었다. 만취한 데니스는 만류하려는 톰에게 주먹 을 휘두르다 몸의 중심을 잃고 넘어지면서 집기를 부수는 폭행까지 연출했다. 그 자리엔 질리도 참석했고 수사가 미궁에 빠져 약오른 제닝 반장과 형사들도 패션쇼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타라의상 실에서 패션쇼가 진행되는 동안 다른 장소에서는 무서운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 다. 에덴이었다. 화사하게 웃으며 패션쇼에 참석한 질리에 의해 그 음모는 진행 되고 있었다. 승마장에서의 실패를 이은 또 하나의 시도였으며 그것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질리에게 대가를 받고 있는 올리브로서는 승마장에서의 실 패를 만회할 필요가 있었다. 동시에 질리의 적은 자신의 적이기도 했다. 스테파 니와 댄은 전혀 짐작하지 못하며 에덴으로 돌아와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7. 갈등의 소용돌이 “난 그냥 제이크 샌더스가 싫어.”댄은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냥 싫다 고요? 그가 춤을 잘 추기 때문인가요?”스테파니는 데니스에 대한 문제도 잊은 듯했다. 언제나 아침이면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아니. 당신하고만 추려하 니까.”“파티에서 가장 잘 생긴 남자들만 독점하는 기분은 그만이던데요!”그녀 는 지나가는 농담처럼 가볍게 받아넘겼다. “혹시 그가 정보를 캐기 위해 접근 했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소?”“역으로 생각할 수도 있죠. 정보를 얻을 수도 있 으니까.”“회사문제에 대한 정보?”“아뇨.”“제이크에 대해서?”“아뇨.”그 런 식의 아리송한 문답을 먼저 단념한 것은 댄이었다. 그는 스테파니가 제이크 와 춤추던 광경을 지워버리지 못했다. 어떤 각도에서도 두 남녀는 경영상의 적 수라고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번에는 스테파니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 다. “사실은 그보다 당신이 훨씬 잘 췄어요.”“정말?”“그가 또 추자는 걸 거 절했잖아요.”그녀는 아침 수영을 하기 위해 계단을 내려갔다. 중간쯤에서 그녀 는 아직 위에 잇는 댄을 돌아보았다. “당신이 질투하는 걸 보는 즐거움도 놓치 기 싫었어요.”“고맙군.”“제이크 샌더스는 사업경쟁자일 뿐이에요.”“그렇 소?”“그러니까 질투할 필요는 없어요.”스테파니는 뒤에 서있는 댄에서 가볍 게 키스한 다음 앞서서 내려갔다. “아침에 사무실에 갈 거요?”“점심때까지는 약속이 없어요.”그녀는 수영장을 향해 걸어갔다. “여보, 내 자동차 열쇠 못 봤 소?”“서랍을 찾아 보세요.”“거기도 없더군.”“목에 매달고 다녀야겠군요.” 댄이 다시 이층으로 올라갈 때 그녀는 수영장 앞에 선 채 가운을 천천히 벗었 다. 비키니 수영복 차림의 몸매는 데니스처럼 성장한 아들을 둔 어머니의 몸매 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군살 하나 없었다. 수영장의 물은 전과 다름없이 말고 평온했다. 마치 스테파니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이 순간에도 그녀는 지 난 밤에 있었던 엄청난 일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녀가 댄과 돌아오기 직전 올리브의 지휘로 세 명의 검은 그림자가 큼지막한 물체를 운반해서 수영장에 밀 어 넣었다는 사실은 스테파니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몸을 풀며 심호흡을 크게 한 다음 거침없이 물로 뛰어들었다. 인어처럼 유연하게 물 살을 가르며 반대쪽을 향해 헤엄쳐갔다. 그때였다. 수영장의 밑바닥에 죽은 듯이 웅크리고 있던 험상ㄱ고 시커먼 물체가 소리없이 움직였다. 몸의 길이가 사람보 다 훨씬 크고 울퉁불퉁 거칠게 생긴 그것은 다름아닌 악어였다. 올리브는 질리 의 부탁에 따라 그 악어를 멀리서 에덴의 수영장까지 운반해 온 것이다. 목적은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처음의 시도는 승마장에서였고 이번에는 에덴의 수영장 인 것이다. 스테파니가 수영을 즐긴다는 사실을 잘 아는 질리의 목적은 그녀를 그렇게 죽이려는 것이었다. 제이크로부터 확실한 인정을 못받고 있던 질리의 질 투심은 이렇게 잔인하게 드러났다. 스테파니는 계속 물살을 가르며 수영을 즐겼 다. 웅크린 거대한 악어의 각질에 둘러싸인 눈이 번쩍 떠진 후였다. 악어는 크기 가 한정된 수영장 안에서 그녀와 함께 있었다. 악어가 그녀를 해치우는 것은 시 간문제였다. 그녀가 수면에 떠올랐을 때 물 속에서 덥썩 다리를 물면 끝장이다. 그녀는 빠져나올 가망이 전혀 없었다. 악어가 웅크리고 막 도약하려 할 때 스테 파니는 잠수해서 물 속을 전진했다. 그리고 순간 바로 앞의 바닥에 있는 엄청난 크기의 괴물을 발견했다. 자신의 눈을 의심할 겨를도 없었다. 수영장에 악어가 있을 리 없다는 논리전개는 더더욱 불가능했다. 악어에 대한 그녀의 기억은 악 몽 바로 그것이었다. 미처 비명지를 틈도 없이맘껏 움직여주지 않는 팔다리를 어렵게 휘저어 물 위로 떠오른 그녀는 물가를 향해 정신없이 도망치며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공포로 인해 짐승에 가까운 울부짖음이었다. 악어는 그녀가 물가에 채 닿기도 전에 거의 그녀의 두 발을 향해 커다른 입을 쩍 벌렸다. 필사적으로 당도한 그녀가 허겁지겁 기어오른 것과 동시에 악어의 큰 입이 기세좋게 떠올랐 다. 이층에서 막 자동차 열쇠를 찾아 나오려던 댄은 스테파니의 처절한 비명소 리에 심장이 멎는 듯했다. 생각할 겨를없이 재빠르게 책상 서랍 속의 권총을 꺼 내든 댄은 정신없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가 뛰어갔을 때 스테파니는 물 속의 악어를 바라보며 두 손을 모은 채 정신병자처럼 떨고 있었다. 스테파니에게는 눈앞의 한 마리 악어가 과거의 수많은 악어떼로 보였다. 댄은 권총으로 악어를 난사한 다음 스테파니에게로 달려갔다. 댄이 집에 있지 않았다면 스테파니에게 어떠한 불행한 사고가 생격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악어는 물 속 에서만 살지 않는다. 뭍으로 충분히 기어오를 수 있다. 만일 그렇게 됐다면 제정 신이 아닌 스테파니는 물 밖에서 악어밥이 되고 말았을 게 분명했다. 댄의 응급 조치로 스테파니는 곤하게 잠들었다. 잠든 그녀의 혈압을 측정하는 댄을 지켜보 던 사라는 순간 집히는 바가 있어 분노가 치밀었다. “처음에는 말이더니 이번 엔 악어, 끔찍한 일이에요. 엄마 어때요?”“괜찮을 거야.”“경찰은 뭐래요?” “아직 단언하기는 일러. 최선을 다하겠지.”“엄만 마치 날 모르는 사람처럼 멍 하게 바라봤어요.”사라는 낮게 울먹였다. 잠들기 전의 스테파니는 딸조차 알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충격을 받아서 그래.”댄이 나간 후 침대곁에 앉은 사라 는 복받치는 울음을 간신히 참았다. 처음 승마장에서 발생한 사건과는 그 느낌 이 달랐다. 천성이 선량한 그녀지만 전신의 피가 역류하는 듯했다. 어머니를 죽 이려는 원흉을 쫓아가 이쪽에서 먼저 쏴죽이고 싶었다. 스테파니 하퍼에 대한 소식을 삽시간에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상황은 매우 나빴다. 엄청난 충격에서 헤 어나오지 못한 스테파니는 회장직을 수행할 수 없었다. 그여파로 캐시는 비로서 제이크의 진심을 깨닫고 비탄에 빠져들고 제닝 반장은 신속하게 질리를 방문했 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수사를 매듭지을 작정이었다. “협조하지 않으면 감 옥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소.”질리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변호사가 올 때까진 한 마디도 하지 않겠어요.”사건이 있던 전날 밤, 즉 에덴의 수영장에 악 어를 집어넣었을 시간의 알리바이가 입증되지 않았다. 필립과 함께 있었다고 진 술했지만 필립은 출장 중이었다. 그럴 때에 제이크가 다시 손을 뻗었다. 그 역시 질리의 혐의에 확신을 가졌으면서도 만일의 경우를 위해 그녀를 구할 필요가 있 었다. 수족과 같은 참모이며 변호사인 안톤을 보내 제닝 반장의 수사망으로부터 질리를 무사히 빼낸 것이다. 아직 질리는 정식으로 기소된 게 아니라는 변호사 의 주장에 제닝 반장은 속수무책이었다. 그것으로 질리는 혐의가 풀려 떳떳하게 거리를 활보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결백을 주장하며 나 다니게 되었다. 여러 날이 지났어도 스테파니는 평정을 되찾지 못했다. 그러한 와중이지만 시기적으로 하퍼사의 회장직을 계속 비워둘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제 이크는 계속 하퍼사를 조여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빌리를 비롯한 하퍼사의 중역 진은 물론 전직원은 침통한 분위기에 빠졌다. 그들은 한마음으로 스테파니를 지 지하며 옹립했었다. 단 한 사람 데니스만이 예외적인 존재였다. 그는 이번 사건 을 계기로 상속자인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그는 빌리한테 상의도 없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하퍼사의 상속자로서 새로운 변혁을 시도하실 계획 이십니까?”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변화는 불가피하겠죠.”“중역진도 개 편합니까?”데니스는 한쪽에서 걱정스레 지켜보는 빌리와 톰을 넌즈시 바라보았 다. “지금 시점에서 자세히 말씀들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급변하는 사업판도에 맞추기 위한 노력은 불가피하겠죠.”“그러면 신진세력을 많이 기용하실 계획입 니까?”데니스는 톰을 바라보았다. “이상적이겠죠.”“새대교체의 대상을 구체 적으로밝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데니스는 빌리의 표정에 여지없이 분노가 나 타난 것을 무시하듯 바라보며 대답했다. ’나이 많은 원로들이죠. 물론 빌리 씨 는 아니죠. 헌신적으로 일해온 분이니까요.”데니스는 마치 하퍼사를 계승한 듯 이 행동했다. 그 동안 보고 들었던 상식을 총동원해서 거드름까지 곁들이고 있 었다. 빌리의 분노가 폭발한 것은 인터뷰가 끝난 다음이었다. “다신 그런 짓 하 지 마라, 잘난 척 하는 애송아!”데니스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더욱 분노의 빌리는 걷잡을 수 없이 몰아붙였다. “넌 독수리 같은 놈이야. 엄마가 죽을 뻔했 는데 무슨 짓이야? 이때다 하고 좋아해? 내가 죽은 후에나 이 회사를 갖게 될 거다.”“톰에 대한 야심이 큰 건 알아요. 물론 이론적으로 똑똑하죠. 하지만 내 가 스테파니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래요.”데니스는 빌리의 꾸중을 그런 식으로 되받아 넘겼다. 마치 빌 리가 아들 톰에게 회사를 넘겨주려는 것처 럼 졸렬한 역습을 가했다. “내가 이 회사의 총지배인이다. 스테파니 이외의 누 구 말도 안들어. 너도 주식을 조금 가졌다고 이사회에 앉아 있지만 그게 고작이 라는 사실을 기억해 둬!”그를완전히 무시하며 돌아서 나가려던 데니스가 다시 돌아섰다. “빌, 안 들은 걸로 하는 게 최선일 것 같군요.”그가 거만하게 돌아 서서 걸어갈 때 빌리는 급히 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냈다. 요즘들어 건강이 좋지 않은 그는 데니스에 대한 분노 때문에 가슴이 죄어들었다. 스테파니의 상태는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잇달아 일어난 두 번의 사건으로 치명적인 충격을 받 은 그녀는 현실에 대한 판단력을 상실했다. 기회를 잡은 듯한 질리는 필립에게 4퍼센트나 되는 하퍼사의 주식이 있다는 것을 미끼로 제이크에게 접근했다. 제 이크가 내심 기뻐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데니스는 빌리의 엄격한 충고에도 불 구하고 계속 회장자리를 고수했다. 빌리나 톰은 그를 신임하지 않았지만 그렇다 고 강제로 돌아낼 수는 없었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데니스에게 업무전반을 세세 히 보고하지 않았다. “하퍼사와 관련된 문제라면 나한테 얘기하게.”톰은 재빨 리 변명했다. “그냥 어떠신가 궁금해서 왔어, 인사나 드리려고.”“뭐가 알아 내고 싶어?”그쯤되자 톰은 불필요한 오해는 받고 싶지 않았다. “몇 가지 정리 할 게 있기는 해.”“어머닌 주무시니까 내가 정리하지.”톰은 몹시 난처해졌다. “데니스, 급한 상황이야. 회사는 지금 무방비상태야. 회장님이 필요해.”그의 간 곡한 부탁도 데니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름대로 자신에 대한 비관이기도 했 다. “알았어. 가서 끌고 오시지. 얼마나 빨리 회사로 가야하지? 40분? 30분? 널 위해서라면 그럴 수 있지!”함께 있던 사라가 끼어들었지만 데니스는 막무가내 였다. 그가 톰에게 내릴 단안은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만들려는 것이었다. “어 머니가 스스로 일어날 동안 너의 그 탁월한 사업 지식과 나의 섭외 능력을 합쳐 서 더 나은 가능성을 찾는 거야. 알겠지?”톰은 찬성도 반대도 할 수 없는 난처 한 입장에 빠졌다. 데니스와 관련해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그가 매니저로 계약한 안젤로는 뜻밖에도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이번 시합에서 상태에게 져주라 는 압력을 받았다. 공동매니저인 테일러는 처음부터 안젤로를 속였다. 그 문제가 데니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지는 미지수이지만 유쾌한 일은 절대로 아니었다. 스테파니의 건강 상태에 대해 고심하던 댄은 정신과전문의 버네트 박사에게 도 움을 요청했다. 버네트 박사는 그녀도 익히 알고 있었다. 이미 한 번 치료를 받 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부인, 당신 같은 경우가 드문 건 아닙니다. 하지만 당 신이 협조해야 나도 도울 수 있습니다. 날 보세요. 부인…….”스테파니는 알아 듣지 못한 듯이 허공을 멍청하게 응시했다. “스테파니! 당신 얼굴은 잘못된 데 가 없어요. 흉터는 없어요. 자, 거울을 봐요.”“싫어요, 난 미워요.”그녀는 눈물 을 흘렸다. 현재가 아닌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나 그녀를 지배했다. 7년 전 악어 떼에서 물리고 찢겨졌던 그비참한 모습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그럼 처음으로 돌아가죠. 당신이 수영장의 물 속에 있을 때 무슨 일이 있었죠?” “ 난 물 속에 있었고 남편이 총으로 죽이려했어요.”버네트 박사는 한숨을 쉬었다. “남편이 총을 가진 건 사실이지만 그건 악어를 죽이기 위해서였어요.”버네트 박사는 댄을 쳐다보았다. “아녜요. 그냥 배 위에 서서 바라보기만 했어요.”의 아해 하는 버네트 박사에게 댄이 간단히 설명ㅎ ㅜ었다. “전남편 얘깁니다. 그 들은 보트에 타고 있으면서 스테파니를 악어떼에 물려 죽이려했었죠.”버네트 박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그건 오래 전 일이고 당신은 지금 시드니 에 있어요. 여긴 에덴이고…….”“질리도 거기 있었죠? 그래요, 거기 있었어요. 남편과 함께 웃고 있었단 말예요!”과거의 악몽에 사로잡힌 그녀를 버네트 박사 도 힘겨워했다. 스테파니는 공포에 새파랗게 질리며 몸을 떨었다. 이 순간에도 자신은 물 속에서 악어떼에게 물리고 보트 위에서 남편과 질 리가 웃으며 자신 을 지켜보는 환영에 시달렸다. 그녀가 입은 상처는 정신적인 것뿐, 악어의 이빨 은 그녀의 발끌도 건드리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는 동안 그녀는 정원을 산책하 기도 했다. 어느 날 그녀가 수영장 앞에 서잇는 것을 발견한 댄을 깜짝 놀랐다. “당신은 아직 누워있어야 해요.”그녀는 한숨을 길게 쉬며 수영장의 맑은 물을 내려다 보았다. 그때였다. 그녀는 수면에 갑자기 나타난 질리의 모습을 발견하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놀라면서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본 그녀는 실제로 질 리 가 서서 웃고 있는 모습에 댄의 품으로 쓰러지듯 안겼다. 댄은 서둘러 그녀를 침실에 데려다 눕혔고 이때는 사라도 질리를 거들떠 보지 않았다. 증오심에 가 득찬 시선으로 노려볼 뿐이다. “내가 스테파니에게 충격 일 줄 알았으면 오지 말 걸 그랬어요. 그냥 보려던 건데……내가 그런 게 아녜요.”질리는 슬픈 표정 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그녀와 관련된 사람은 빠짐없이 경찰의 심문을 받았소. ”“제이크 샌더스는 어때요? 스테파니의 기능상실로 가장 득을 보는 그가 가장 유력하지 않아요?”“가능하지만 죽이려고는 안 할 거요. 경찰이 알아서 처리할 거요.”댄 역시 전과 달리 그녀를 무뚝뚝하게 대했다. 거침없이 제이크에게 혐의 를 씌우려는 태도가 불쾌했던 것이다. “그가 나에게는 부드럽게 대하지 않더군 요. 그만 가겠어요. 스테파니에게 안부나 전해주세요. 질리는 사라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작별인사를 했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밖으로 채 사라지기도 전에 댄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저 여자를 믿으세요? 결백한 거 같 아요?”댄은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어.”“네?”“한 가지, 우리는 모르는 가 능성은 있는 것 같아.”댄은 질리에게 심중으로 혐의를 두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퍼가의 가족은 모두 같은 심정이다. 데니스만이 하퍼사의 후임회장이 되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는 벌써부터 노렸던 문제를 처리하기로 결심했다. 중요한 서류 를 가지고 의논하려고 들어온 톰에게 그는 준비했던 서류를 건네 주었다. “이 게 뭐지?”“퇴직명령서야.”침착한 톰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렇게는 안 될 텐데. 같이 일하기로 했잖아.”“일이 제대로 안 되고 있어. 그래서 내가 회사대표로서 자네의 퇴직을 요구하네.”자못 엄격한 데니스의 설명에 톰은 가 볍게 웃어넘겼다. “넌 어렸을 때도 숙제를 제대로 했던 것이 없었지, 기억나나? ”데니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잘 들어. 난 회장님과 개인적으로 계약했어. 회 사가 아니고 말야.”그는 퇴직명령서를 데니스에게 던져준 다음 문 쪽으로 걸어 가며 분명히 못을 박았다. “회장님 말씀이 아니면 난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 어.”데니스는 어금니를 물었다. 어쩌면 영문인지 회장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듯 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톰을 강제로 쫓아내 버리고 싶었다. 지금껏 그가 보고 느껴왔던 하퍼사의 회장자리는 결코 이런 게 아니었다. 빌리를 비롯한 전체 중 역은 물론 누구 하나 감히 회장에게 그런 식으로 반항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비로소 스테파니의 존재를 새롭게 깨달아야 했다. 그것이 또한 그를 참을 수 없 게 하였다. 톰 같은 신입사원 하나 임의대로 처리할 수 없다면 허수아비나 다름 없다는 비탄이 데니스를 더욱 빗나가게 만들었다. 8. 최초의 패배 하퍼사에 대한 소식은 연일 뉴스의 한 면을 장식했다. 언론기관에서 문의가 있 을 때마다 데니스는 자신이 직무대행임을 강조했다. 스테파니의 소식과 함께 하 퍼사와 제이크 샌더스와의 관계에 언론이 촉각을 곤두세웠다. 제이크와 관계가 아리송해진 상태에서 캐시는 데니스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제이크 때 문에 하퍼사의 일급비밀을 빼낸 데 대한 양심의 가책도 느꼈다. 하지만 아직 제 이크와 결별한 상태는 아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없나요?“캐시는 데니스의 곁으로 은근히 접근했다. “고맙지만, 할 수 있겠어. 일이 너무 많군.”“도움이 필요하면 불러 주세요.”전과 달리 데니스는 그녀를 사무적으로 대했다. 그때 회 장의 여비서인 힐러리가 방문객이 있음을 알렸다. “죄송합니다만 제이크 샌더 스 씨가 오셨는데요.”데니스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왜 왔대?”그때 제이크 가 벌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네를 보려고 왔지.”함께 있던 캐시가 재빨리 피하려 하자 데니스가 붙잡았다. “잠깐, 적도 일단은 만나볼 필요가 있는 법이 지.”그는 캐시에게 제이크를 정식으로 소개한 다음 나가도록 했다. 제이크나 캐 시는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인사를 나누었다. 캐시가 약간 당황하는 듯한 반면 제이크는 지극히 태연했다. 그녀가 나가자 제이크는 넌즈시 물었다. “사업 쪽인 가, 아니면 쾌락?“캐시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데니스는 그런 헛소리나 지껄이 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무슨 일로 오셨죠?”“지난번의 이사회 때에는 내 게도 몇 분쯤 시간을 줬어야지.”“터무니없는 소리!”데니스는 거세게 반발했 다. “일주일 후면 내가 하퍼사의 새로운 이사장이 될 텐데 피차 시간을 절약하 는 게 어때?”데니스는 대답 대산 인터폰을 거칠게 집어들었다. “경비원한테 당장 올라와 샌더스 씨를 끌고 나가라고 해!”제이크는 즉시 돌아서서 나가며 한 마디 던졌다. “언젠간 내가 이 일을 치하하게 될 거요.”데니스는 들을 척도 하지 않으며 등을 돌렸다. 그날 밤에는 안젤로와 에디 킹의 권투시합이 있었다. 그 전에 안젤로는 타일러와 그의 주먹패에 의해 심판 폭행을 당했다. 게임에 무 조건 져줘야 한다는 요구에 응하지 않은 데 대한 보복이었다. 타일러는 몸집이 단단한 두 사내를 데리고 식당에 나타나 아버지까지 위협하며 그 앞에서 안젤로 를 린치하고 돌아갔다. 그의 지시에 따르지 않을 경우 어떤 보복을 받게될 것인 가는 불을 보듯이 훤했다. 타일러와 그 일당은 살인이라도 서슴지 않을 뒷골목 갱조직의 일원이다. 데니스는 캐시를 데리고 시합장에 나갔다. 시합 전 안젤로는 전과 달리 침통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사라는 톰과 함께 안젤로네 식당 에서 텔레비전 중계를 보고 있었다. 톰과 사라가 가꺼워지는 것을 무척 꺼려하 는 빌리 내외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급속도로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빌 리 내외가 걱정하는 데는 매우 중요한 비밀이 있었다. 그것을 장차 두 사람은 물론 하퍼가 전체에 태풍을 몰고 올 문제였다. 안젤로의 어버지는 타일러 일당 한테 당한 경험 때문에 아들의 권투시합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톰과 사 라는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 들었다. “자, 미국에서 그 동안 뭘 했는지 털어 놔 요.”“일? 아니면 놀던 거?”“좋아요. 우선 밤 생활부터 얘기해 봐요. 뉴욕의 유명인사와 어울렸나요?”“글세……그래, 그랬지.”그들은 마주보며 웃었다. 여 자로 태어나 어머니 슬하에서 성숙하는 동안 사라는 처음으로 이성에 대한 호감 을 가졌다. 그녀는 사랑으로 진행되는 문턱을 막 넘어서고 있었다. 시합장의 광 경은 예측했던 대로 나타났다. 안젤로는 벌써 첫 번째 다운을 뺏겼고 다시 두 번째로 링바닥에 쓰러졌다. 한 라운드에서 세 번 다운되면 KO패가 된다. 안젤로 는 이를 악물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타일러 일당의 협박이 아니었으면 그 게임 의 양상은 완전히 달랐을 것이 분명했다. 시합을 지켜보던 데니스가 쉬는 시간 링으로 달려가 이유를 물었지만 안젤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에게 나 쁜 문제가 생길 것을 가장 겁내고 있었다. 다음 라운드에서도 안젤로는 또 다운 을 당했다. 이번에는 충격이 제법 컸기 때문에 거의 재기가 불가능했다. 링바닥 에 스러진 안젤로는 그만 단념할 작정이었다. 결과적으로 무릎을 끓어야 되는 시합에서 더 이상 당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흐릿한 시야로 관객석을 바 라보던 안젤로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출입구에서 걸어 들어오는 아버지를 발 견한 것이다. 웃으며 힘있게 다가오는 아버지를 발견한 안젤로는 갑자기 용기가 솟구쳤다. 결과는 타일러의 압력과는 무관하게 나타났다. 안젤로가 상대를 KO승 으로 제압했으며 상대는 즉시 병원으로 실려갔다. 병원으로 급송된 에디 킹이 응급실에 들어갈 때 사라와 톰은 유람선에 승선하여 급속도로 상대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을 확인했다. “돌아와서 좋아요, 톰.”“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그런 것은 사라 때문야,”“아닌 것은?”“더러운 싸움에 나까지 당하는 것 같 아서…….”그는 말끝을 흐렸다. “제이크 샌더스요?”“그도 있고 하퍼사 내에 도 있어.”“데니스요?”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는 재빨리 설명했다. “그가 좀 부족한 건 알아요. 하지만 엄마가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할 정도로 심각하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서 그럴 거예요.”톰은 잠깐 침묵하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 그런 문제까지 공개하고 싶지 않았지만 갑자기 사라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우리 아버지를 무안주거나 나를 내쫓는 것으로 어떻게 엄마를 돕는단 말이지? 나보고 회사를 나가라더군…….”사라는 깜짝 놀랐다. “정말이에요?” “물론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진 않을 작정이야.”사라는 상심에 가득찬 시선 으로 톰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데니스는 단숨에 정상 에 오르려하고 있어. 나도 야망은 있지만 순리에 따라야 돼. 데니스는 내가 보기 에도 아직 미숙해. 좀더 경험을 쌓아야 될 거야.”유람선이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 사라는 갑자기 초조해졌다. “너무 늦었어요. 조안나에게 데려다 줘요.”이성 교제가 전혀 없고 아직 밤 시간에 늦도록 외출한 경험이 없는 순진한 사라였다. 댄과 스테파니를 아끼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배려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증세 는 더욱 악화되었다. 침대에 누워 잠들었던 그녀는 연인 계속되는 악몽에 시달 렸다. 댄이 돌아온 것은 밤중이었다. 이날은 그에게도 고통스러운 하루였다. 안 젤로에게 맞아 쓰러진 에디 킹이 끝내 숨겼다. 댄이 수술하던 도중 심장이 멈추 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수술하던 환자가 죽었을 때 담당의사의 기분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에디 킹의 미망인에게 몸둘 바 몰라하던 안젤로의 모습을 연상하며 에덴에 도착했다. “스테파니?”그는 현 관에 들어서면서 큰 소리로 불렀다. 그녀가 잠들었다고 생각하며 이층으로 올라 갔다. 스테파니의 침실에 들어선 그는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그 의 예감은 적중했다. 그 방에 스테파니의 모습은 흔적도 없었다. 게다가 화장대 의 거울이 박살나 흩어져 있는 광경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되돌아 아래층 으로 뛰어 내려가던 그는 층계에서 가정부를 만났다. “스테파니 어디 갔는지 모르시오?”“침실에 안 계세요?”가정부가 되물었다.“없소.”“한 시간 전에도 계셨는데…….”댄은 정신없이 정원으로 달려나갔지만 수영장에도 스테파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원의 어디에도 마찬가지였다. 질리와 함께 침대에서 잠 들었던 필립이 갑자기 걸려온 전화로 사실을 알게 된 건 잠시 후였다. 댄은 웬 지 질리와 관련됐을지도 모른다는 육감에 급히 연락을 취한 것이다. “내가 도 와 줄 일이라도 있소?”“아뇨, 별로……소식을 들으면 알려 주세요. “즉시 연 락드리죠. 소식을 먼저 들으면 연락해 주세요.”“물론이죠.”아직 질리의 속셈 을 모르는 필립은 스테파니의 실종을 진심으로 걱정했다. 곧이어 그 소식을 들 은 질리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스테파니의 증세에 대해 소리없 이 쾌재를 부르던 그녀는 이날 밤에도 선량하고 성실한 필립을 타고난 육체로 완전히 사로 잡았다. 필립은 자신 같은 남자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젊 고 매력적인 그녀에게 푹 빠져 있었다. 이튿날 아침. 질리의 예측이 적중했다. 그녀가 갔을 때 스테파니는 타라의상실에 있었다. 과거로 돌아간 스테파니는 예 전 모델 때처럼 화장하고 패션쇼에서 하는 것처럼 실내를 천천히 걸어다니며 워 킹했다. 일류기업의 쟁쟁하던 여회장의 모습은 간 데 없었다. 악어떼로부터 구사 일생으로 살아난 후 댄의정성어린 도움으로 미모와 몸매를 되찾은 그녀는 타라 에 모델로 입사해서 톱 모델이 되었고 끝내 원래의 위치를 되찾았던 것이다. 타 라의상실에는 당시모델이었던 그녀의 사진이 과거를 증명하듯 고스란히 보관되 어 있었다.스테파니를 발견한 질리는 경계하며 그녀에게 접근했다. “스테파니?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패션쇼에서의 워킹에 몰두했다. “스테파니?”역시 대 답이 없자 질리는 방법을 바꾸었다. “타라?”“네.”스테파니는 공손하게 대답 했다. 하지만 질리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며 계속 접근했다. “내가 누군지 알 아요? 당신 친구예요. 도와주고 싶어요.”“도와준다고요?”“당신은 밤새 한잠 도 못 잤어요. 끔찍이 무서워서요, 맞죠?”질리 역시 옛날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재현했다. 그녀의 예측대로 스테파니는 완전히 타라로 되돌아가 있었다. “물이 기억나요…….”스테파니는 돌연 악어떼를 실제로 보는 듯이 겁에 질려 소리쳤 다. “물에 뭐가 있어!”질리는 재빨리 그녀를 부축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오래 전 자신이 했던 그대로였다. “침착하게 자리에 앉아요.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지 보고 싶지 않아요?”“아니야!”스테파니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름답 지 않다고?”“난 타라가 아냐”순간 질리는 흠칫 놀라며 이야기의 방향을 재빨 리 바꾸었다. “당신은 최고예요. 명성도 있고……겁낼 거 하나없어요.”그녀는 혼돈된 스테파니에게 거울을 보여 주었다. “싫어!”그녀는 홱 고개를 돌렸다. “타라?……”질 리가 더욱 부드럽게 그 이름을 불렀을 때 돌연 스테파니는 그 녀의 품에 안겨왔다. 어머니처럼 그녀를 안은 질리의 눈빛에선 기묘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정당한 경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먹에 숨진 에디 킹에 대한 죄의식에 사로잡힌 안젤로에게 이번에는 깡패들이 들이닥쳤다. 테일러와 그의 일당이었다. 때마침 데니스도 안젤로네 식당에 있었다. “다시는 내 명령에 거역하지 말라고 경고하러 왔지.”분노가 폭발한 안젤로의 주먹도 타일러의 권 총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안젤로는 아버지와 데니스가 지켜보는 앞에서 무 참하게 당해야 했다. 데니스는 비로소 내막을 알게 되었다. 정당한 경기가 아닌 뒷거래에 의해 벌어지는 독버섯 같은 속임수에 경악과 분노를 느꼈지만 얻어맞 는 안젤로를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데니스가 안젤로의 식당에서 비참한 입장에 처했을 때 에덴에서는 댄과 질 리가 잠든 스테파니를 조용히 지켜 보고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질리는 스테파니를 보호하며 에덴으로 데려왔다. “어떻죠?”질 리는 진찰을 끝내고 나오는 댄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앞으로 몇 시간은 푹 자겠지만 그 다음에는 전혀 모르겠소.”“좀 쉬지 그래요, 댄?”“!… …”“그렇게 자신을 혹사시키는 건 스테파니를 돕는 게 아녜요.”“난 괜찮소. ”“제가 곁에 있겠어요.”이번 일로 댄은 그녀를 의심했던 자신에게 갈등을 느 꼈다. “고맙소, 질리, 난 가까운 곳에 있겠소.”댄은 그녀에게 잠든 스테파니를 맡긴 채 침실을 나왔다. “불쌍한 타라!……”질리는 깊이 잠든 스테파니를 내려 다 보며 중얼거렸다. 아래층 거실에 앉아 졸고 있던 사라는 댄이 내려오는 소리 에 깨어났다. “거짓말은 필요없겠지. 상태는 별로 좋지 않아.”“회복될 수 있 을까요?”“그야 물론이지.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거야. 우리 모두가 네 엄마를 도와 줘야만 해.”사라는 의자에 일어나 댄에게 다가갔다. “그럼 댄은요? 누가 돌보죠?”“난 견딜 수 있어.”“부탁이에요. 어제 에디 킹의 문제도 있고 한데 좀 쉬세요, 네?”댄은 사라의 배려에 소파에 함께 앉았다. “알았어요. 의사 선 생님. 환자가 수술 도중 죽으면 마음이 아프고 책임도 느껴져. 또 그래야만 되는 일이고. 하지만 내가 누구보다 사랑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건 네 엄마야.”그는 사라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해 주었다. 스테파니를 에덴으로 데려가 간호까지 해 준 질리는 다시 제이크를 방문했다. 그녀는 제이크에게 정보를 제공했다. “대재 벌 하퍼 대표도 오래가지 않아요. 싸움은 끝났고 당신이 이겼어요.”제이크는 스 테파니가 누워있다는 정도밖에 알지 못했다. 자세한 상황은 철저히 비밀에 붙여 졌다. “질리, 새로운 정보가 있으면 매우 고맙겠소.”“얼마나 고맙죠?”“그건 후에 당신이 원하는 게 뭐냐에 달렸지.”“그래요? 오, 가엾은 스테파니…….” 질리는 갑자기 연극배우의 대사처럼 슬픈 목소리를 냈다. “불쌍하다는 건 적당 한 표현이 아닌 것 같군.”“오늘 아침에 보셨다면 같은 생각이었을 거예요.”그 자리에서 질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속셈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심각한 순간이 닥쳤다. 빌리도 더 이상 제이크를 이사회의에서 제외 시킬 수 없었다. 합당한 주식을 그가 가졌기 때문이다. 그는 빌리와 데니스를 비 롯한 전인원이 모인 가운데 거드름을 피우며 회의장에 나타났다. 이렇게들 나와 주셔서 고맙습니다.”빌 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왔으니 회의를 시작합시다. ”제이크가 아직 자리에 앉기도 전이었다. “아주 좋아요. 스테파니 하퍼는 늦나 보죠?”“회장님은 오늘 참석하시지 않습니다. 빌리는 제이크와 스테파니의 호 칭에 엄격한 격차를 두었다. “어디 아프신가요?”“아뇨. 아주 건강해요. 간단 히 끝낼 수 있는 회의에 참석할 필요를 느끼시지 않는답니다.”그 자리에서 빌 리의 발표에 대한 진위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자신과 데니스뿐이었다. “그럼 시작할까요?”“저쪽입니다.”빌리는 대뜸 회장자리에 앉으려는 제이크에게 이 사좌석의 빈의자를 가리켰다. “미안합니다. 내가 너무 서둔 것 같군요.”제이크 는 가벼운 실수처럼 넘기며 지목된 자리에 가서 앉았다. 빌리는 회의를 단도직 입적으로 시작했다. “모두 아시듯이 샌더스 씨의 이사임명을 투표에 붙이겠습 니다. 이미 충분한 논의가 계셨을 터이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그는 이어 제이 크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결과에 영향을 끼칠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그 자리에서 제이크를 동조할 사람은 자신뿐이다. “좋습 니다. 그럼 거수로 표결하겠습니다. 결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제이크의 이사임명 에 찬성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죄송하군요, 샌더스 씨.”보기좋게 당한 제 이크는 그래도 얼굴 하나 붉히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항상 이길 수 만은 없 을 테니까요. 내가 졌으니 여러분에게 한 가지 제안하겠습니다.”“뭐죠?”빌리 는 비롯한 전체가 일제히 그를 주시했다. “아시다시피 전 하퍼사의 이사가 되 기 위해 주식을 사 모았습니다. 이제 그 희망이 사라진 바람에 더 이상 연연하 고 싶지 않군요. 간단히 말하면, 그걸 사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팔겠습니다. 의외 로 쉽게 물러나겠다는 그의 발표에 데니스가 먼저 거부반응을 나타냈다. 전날 경마에서 돈을 잃었을 때 그가 빌려 준 돈으로 만회했던 일에도 불구하고 처음 부터 비위에 거슬렸던 탓이다. “흥미없어요.”“기다려, 데니스.”빌리는 데니스 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데니스도 물러서지 않았다. “살 필요는 없을 거예요. 속 셈은 알 수 없지만 이런 식으로 쉽게 포기하진 않으실 것 같군요, 샌더스 씨.” “좋아요. 직접 사지 않으시겠다면 주식시장에 내놓죠.” 그가 단념하며 일어나 려 하자 빌리가 재빨리 조건을 제시했다. “잠깐만요. 가격은 어떻게 생각하시 죠?”“주당 3백8십요.”데니스가 다시 끼어들었다. “속셈은 모르세요?”빌리는 데니스의 말을 무시했다. “그건 너무 비싸요. 3백2십이 좋겠군요.”다른 이사들 은 두 사람을 조용히 지켜 보았다. “저런, 그보다는 더 쓰셔야지. 3백7십이라도 거접니다.”빌리는 노련한 사람이었다. “3백6십, 그 이상은 우리도 거절합니다. 제이크는 잠깐 생각하는 듯했다. 그의 속셈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는 빌리와의 줄다리기에서 후퇴하려는 듯이 그 제안에 쾌히 응했다. “좋습니다.” 그는 빌리와 악수한 다음 여유우있게 회의실을 걸어나갔다. 제2부 1. 재기에 이은 위기 빌리와 리나 부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톰과 사라의 관계는 더욱 깊어갔다. 이들의 순수한 감정은 처음의 우정에서 어느덧 사랑으로 바뀌고 있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둘은 함께 어울렸고 급기야 톰은 그녀를 저녁식사에 집으로 초대했 다. “주식 때문에 모두들 걱정이신가 봐요.”사라는 빌리 내외의 전에 없이 침 울한 표정을 그렇게 해석했다. “더 나쁜 난관도 헤쳐온 나야. 이번에도 잘 될 거야.”빌리는 공연히 퉁명스럽게 말하며 물을 마셨다. “전 그저…….”사라는 무안당한 기분에서 톰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리나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맛 있어요, 리나 아줌마.”그녀는 부엌으로 가려는 리나를 따라가려 했다. 설거지를 도와 주고 싶었던 것이다.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리나도 전과 달리 도망치 듯 사라를 뿌리쳤다. 집안의 분위기가 확실히 이상했다. 스테파니의 딸인 사라를 누구보다 좋아해야 할 빌리 내외였기 때문이다. 톰은 몹시 불안했다. “도대체 왜들 그러세요?”그는 부엌의 리나에게 가서 다그치듯 속삭였다. 사라 역시 빌 리에게 이유를 물었다. “아저씨, 제가 뭘 잘못했나요?”“아냐, 물론 아니지, 실 례하고 싶지 않다만 급히 일이 좀 있어서…….”빌리는 아예 의도적으로 피하려 는 듯이 일었다. 평소 친아버지 이상으로 빌리는 믿었던 사라는 원망스러운 눈 빛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톰, 신경과민이다.”리나는 부엌에서 디저 트를 만들며 말꼬리를 돌렸다. “둘러대지 마세요. 사라가 말만 꺼내면 중지시키 셨잖아요.”“네 아버지와 나 지금 걱정이 많단다.”“얼마, 난 지금 남이 아니 고 사라를 말씀드리는 거예요.”“제발, 톰…….”무척 당황하는 리나의 반응이 톰을 더욱 궁금하게 만들었다. “무슨 일인지 얘기해 주셔야죠.”“넌 하퍼사의 직원이야. 사라와 만나는 게 웬지 마음에 걸린다. “회장님 딸이라서요? 이해할 수 없어요.”“우리 생각은 그렇다.”“나하고 상대가 안 된단 말씀이군요, 죄송 해요. 없었던 걸로 하죠.”톰은 묻기를 단념하고 부엌을 나왔다. 뭔가 석연치 않 았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는 차후에 알아보기로 하였다. 빌리와 리나는 사라와 톰의 문제에 대해 고민에 빠졌다. 그들만이 깊이 간직하고 있는 하퍼가문과의 내밀한 비밀이있기 때문이다. 스테파니의 악어사건에 대한 경찰의 수사는 답보 상태였다. 그들은 질리와 제이크를 수사대상으로 지목했지만 단서조차 잡지 못 했다. 에덴의 스테파니는 댄의 정성어린 노력에도 불구하고 차도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데니스에 대한 댄의 감정도 점차 악화되었다. “좀 어떠세요?”데니스가 불쑥 에덴에 나타나 물었을 때 그는 나무라듯 대꾸했다. “집에 들어오거나 전 화라도 했으면 알 수 있었을 텐데?”데니스는 그 동안 좀처럼 집에 들어오거나 전화도 하지않고 하퍼사의 회장 역할에만 여념이 없었다. “어떠시냐고 물었어 요.”데니스는 댄에게조차 회장처럼 행동하려 했다. “편히 주무시는 중이야.” “고마워요.”댄은 곧장 이층으로 향하는 데니스를 불러세웠다. “데니스, 나 같 으면 귀찮게 해드리지 않겠다.”“그런 게 아니고 그냥 내 눈으로 직접 보려고 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집에 들어오지 못한 이유가 있어요.”“?……”“빌 리가 회사를 말아먹으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어요. 엄마가 날 곁에 두고 싶어서 그 런 문제를 등한시 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잘못된 생각이죠.”댄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과연 스테파니의 아들인가 이때처럼 의심했던 적도 없었다. 그가 스테파니의 아들인가 그리고 빌리가 하퍼사를 말아먹으려 한다. 둘 가운데 택하라면 댄은 한 가지도 선택할 수 없었다. 회장직을 대행한다고 대내외에 선 포한 데니스는 원래 홍보담당이었다. 신뢰성 없는 그의 나태함에 하퍼사는 갑자 기 궁지에 몰렸다. 극비리에 붙였던 스테파니 소식이 ‘실종’으로 신문에 보도 되었다. 사실상 이익을 충분히 붙여서 하퍼사에 주식을 되팔어넘긴 제이크는 다 시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뉴스에 민감한 주식시장에서 하퍼사의 주식은 큰 폭 으로 하락하는 추세를 보였다. 제이크는 안톤을 통해 느긋한 마음으로 값이 더 욱 하락했을 때 20퍼센트를 확보하도록 당부했다. 지난번 단념했던 하퍼사의 이 사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정확한 정보는 입수하지 못했지만 스테파니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확신과 함께 재도전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주식값이 큰 폭으로 하락하면서 하퍼사의 빌리와 데니스 사이에도 갈등이 증폭되엇다. “무 슨 속셈인지 모르지만 하퍼사는 이제 끝났어요.”데니스는 그 원인을 노골적으 로 빌리에게 돌렸다. “그만해 두게, 데니스. 날 그렇게 떠볼 필요없어.”“떠봐 요?”“홍보에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나? 어머니 문제가 누설되지만 않았어도 이 지경은 안 됐어!”“변명하지 말아요. 왜 자신이 이미 한 물 갔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죠?”데니스가 홱 나가버린 직후 톰이 들어왔을 때 빌리는 치 미는 분노 때문에 부들부들 떨었다. “괜찮으세요?”빌리는 간신히 안정을 되찾 았다. “그래, 괜찮다. 웬일이냐?”“어젯밤 사라에 대해선데요…….”톰은 아버 지의 기분을 알아차리며 태도를 바꾸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군요. 그보다 아버 지, 데니스가 말썽이라면 무슨 수를 내야 되지 않겠어요?”“스테파니가 돌아올 때까지는 방법이 없지. 그녀가 돌아올 수만 있다면…….”빌리는 절망적으로 말 끝을 흐렸다. 누구보다 스테파니를 잘 아는 그였다. 언제까지 데니스를 옹호해 주겠느냐는 댄의 진심어린 충고에 대해 ‘그애가 내 아들일 때까지는요.’라고 대답했던 스테파니였던 것이다. 스테파니의 그 같은 성격을 충분히 알고 있지 않았다면 빌리는 총지배인 자격으로 데니스에게 어떤 방법을 강구했을 것이다. 스테파니의 상태는 어느 정도 호전되고 있었다. 정신과 전문의 버네트 박사와 댄의 정성이 가져온 결과였다. 그녀는 적어도 정상적인 대화를 가능하게 할 만 큼 과거의 악몽에서 벗어나 현실을 상당부분 되찾아냈다. “언제까지 이래야 되 죠?”스테파니의 물음에 버네트는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스스로 마음먹을 때 까지요.”“제가 일부러 이런다고 생각하세요?”“아뇨. 하지만 포기하는 쪽을 선택하신 겁니다. 하퍼사를 경영하면서 다른 사람의 판단에 그대로 따랐습니까? ”“그건 달라요.”그녀는 자신이 ‘타라’가 아닌 스테파니임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다르죠?”“내가 잘 아는 일들을 다루는 거니까요.”“언제나 말이죠? ”“너무 복잡할 경우에는 조언을 구하죠.”“혹시 그릇된 판단을 내린 일은 없 나요?”“실수는 누구나 하잖아요?”“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기도 합니까?”“그 렇지 않다면 경영자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거겠죠.”그쯤에서 버네트는 어느 정 도 자신을 가졌다. “그렇다면 말하죠.”스테파니는 의식이 분명한 시선으로 그 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수영장에서 악어를 발견했을 때 의식적이든 그렇지 안 든 현실로부터 도망치겠다고 결심한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도를 일시적인 것 에 그치지 않고 더 연장하기로 마음먹은 거죠.”“결국 제 잘못이군요?”댄은 한쪽에서 조용히 그들을 지켜보았다. “아뇨, 하지만 아직은 선택할 힘이있는 듯 합니다. 그 힘을 사용하느냐의 여부는 당신한테 달렸고요. ”“못해요.”댄이 다 가와 그녀에게 부드럽게 설명해 주었다. “박사님은 최면술을 얘기하는 거요.” “위험하지 않나요?”그녀는 겁먹은 시선으로 댄과 버네트를 바라보았다. “그 럴 수도 있겠지.”댄은 솔직히 대답해 주었다. 이윽고 스테파니는 표정을 바꾸었 다. “좋아요. 유일한 방법이라면 하겠어요.”그녀의 본래 성격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있습니까?”“예”“좋아요. 동생도 함께 있으면 좋겠군 요.”“질리요? 왜요? 그녀는 잇달아 물었다. “당신의 문제가 질리와 깊은 관련 이 있는 것 같아서입니다.”댄은 동감했다. 그 역시 스테파니의 증상이 질리와 관련되었다는 심증을 굳혔지만 그녀의 이번 태도 때문에 덮어두고 있었다. 댄과 질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스테파니에 대한 최면술이 시술되었다. 버네트는 현란 한 광채의 보석을 앉아있는 스테파니 눈앞에 대고 조금씩 움직였다. “마음을 비우세요. 당신의 몸이 자유스럽습니다.”“그래요, 계속하세요.”눈을 감은 그녀 의 얼굴에 형형색색의 보석광채가 천천히비치며 환상적인 움직임을 연출했다. “당신을 방해하는 요소는 하나도 없습니다.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자, 여기 질리가 있는데 얘기하고 싶은가요?”“아뇨. 가라고 해요. 혼자있고 싶어요.”스 테파니는 최면술에 서서히 깊게 빠져들었다. 그 말을 들은 질리가 대뜸 가겠다 고 했지만 댄이 진지하게 설득시켰다. 질리는 예상 외의 상황에 대해 호기심과 두려움이 반반인 채 숨을 죽였다. “스테파니, 질리를 미워하는 이유가 뭐죠?” 이때 스테파니는 최면상태에서 흉칙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미워하지 않아 요. 내 동이인 걸요.”그녀는 물리고 뜯겨 살점이 떨어젼 나간 자리에 선혈이 낭 자한 것과 삼킬 듯이 이빨을 드러낸 악어떼를 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당신을 죽이려했다고 생각하죠?”“아뇨, 안 그래요.”댄이 곁에서 급히 만류했지만 버 네트는 듣지 않으며 박차를 가했다. “솔직히 그녀를 싫어한다고 인정하시오.” “아뇨, 동생이에요.”스테파니는 이미 자신의 살점을 물어 뜯고 다시 덤벼드는 악어의 피묻은 입을 보았다. “당신은 미워하고 있어. 인정해! 미워한다고 인정 해!”순간 스테파니는 악어의 커다란 입에 손이 덥썩 물렸다. 지켜보는 질리도 겁에 질렸다. 갑자기 눈을 번쩍 뜬 스테파니가 질리에게 사납게 달려들며 부르 짖었다. “아뇨!”하지만 그녀는 질 리가 피할 사이도 없이 두 눈을 부릅뜬 채 무서운 힘으로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질리는 불의의 공격에 버둥거렸다. 금방이 라도 질식할 것 같았다. “스테파니! 깨어나시오!”최면술에서 깨어난 순간 스테 파니는 두 팔로 질리의 목을 끌어 안았다. 극과 극의 감정상태가 방금 전의 그 녀를 지배했다. 질리는 최면상태의 그녀에게 동생이기도 했고 악어보다 증오할 살인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스테파니를 침실로 데려가 안정시킨 다음 버네트는 심각하게 댄에게 말해 주었다. 원인은 악어가 아닌 다른 데, 즉 질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다. 버네트의 최면시술 이후 스테파니의 상태는 급속도로 좋아졌 다. 며칠 뒤 빌 리가 찾아왔을 때 그녀는 회사일을 걱정했다. 거의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는 증거였다. 제이크가 스테파니에 대한 정보를 얻는 길은 질리를 통 해서였다. 그녀는 에덴과 제이크 사이를 왕래했고 올리브와도 은밀하게 계속 접 촉했다. 스테파니가 하퍼사에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는 호의를 베풀었을 때에도 질리는 즉시 제이크에게 알렸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제이크의 진심을 저울질해 보았다. “하퍼사를 완전히 손에 넣으면 그땐 내가 필요없겠죠?”그녀는 부정하 는 제이크에게 웃으면서 경고했다. “난 속이는 남자를 죽이는 습관이 있답니다. ”“난 항상 위험 속에서 살지만 그런 식으로 죽고 싶은 생각은 없소.”질리가 제이크에게 제공한 정보는 정확한 것이었다. 스테파니는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 왔고 사건 전의 그녀가 되어 하퍼사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악어사건의 공포에서 벗어난 스테파니는 다시 수영을 시작했다. 그리고 댄에게는 그 동안의 간병에 감사해 했다. “그렇게 견디기 힘든 당신께 도움도 주지못했군요.”“당신은 그 럴 수 없었으니까.”“이제부터는 제가 할께요. 당신을 돕겠어요.”“내 마음을 알잖소. 우리만의 시간이 필요해.”“휴가요?”“물론, 당신과 나 모두에게 휴식 이 필요할 거요.”“여보, 지금은 안 돼요.”댄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졌다. “ 다른 때라면 저말 좋아했을 거예요. 하지만 회사를 이대로 내버려둘 수 없어요. 샌더스를 막아야 해요.”댄은 입을 다물었다. 견디기 어려웠던 그 동안의 일들이 뇌리를 스쳤다. 일단 정상으로 돌아온 스테파니의 모습이 그 전과 조금도 변하 지 않았다는 느낌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남편과 가족을 누구보다 사 랑하면서도 언제나 사업이 우선이었다. 그녀의 타고난 기질 탓인지 가족보다는 대외적인 활동에 더 비중을 두었다. 댄은 그럴 때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 와 함께 깊은 고독에 빠지곤 했었다. 만찬 겸 축하연이 벌어졌다. 스테파니의 완 쾌를 축하하기 위한 조촐하고 기쁜 만찬이었다. 스테파니와 댄을 비롯해서 빌리 와 리나 부부 그리고 질리, 특히 그녀의 전남편인 필립이 함께 참석했다. 모두 자리에 앉았을 때 빌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릴 때부터 보아왔지만 늘 탄 복하죠. 바로용기 때문입니다. 온갖 궂은 일들을 겪으면서도 그걸 일지 않았어 요. 건강을 회복해서 얼마나 반가운지 그리고 하퍼사가 회장님을 다시 모시게 돼서도 그렇고……그만 줄이겠소. 스테파니를 위해 건배!”일제히 건배를 들었 다. 모두 진심이었다. 질리만이 제이크와 내통했지만 그녀와 함께 중대한 발표를 준비한 필립은 누구못지 않게 진심으로 스테파니의 회복을 축하했다. “뭐라고 할 말이 없군요. 감사합니다. 스테파니 역시 그녀답지 않게 목이 메었다. 기쁨의 눈물이 소리없이 그녀의 눈가에 어리는 것을 비릴 내외는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전화가 걸려왔기 때문에 댄이 잠깐 자리를 비웠다. “바로 지금이에요.”질리의 속삭임에 필립은 알았다는 듯이 옷깃을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이 그 시간 같군요. 저희 두 사람도 발표할 게 있습니다. 방금 빌 리가 용기라고 하셨 는데, 저도 용기를 내서 결혼을 신청했죠.”“필립?”스테파니는 무슨 뜻이냔 듯 이 그를 바라보았다. 질리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기쁘게도 질 리가 제 청혼 에 응해 주었습니다.”일순간 좌중이 숨을 죽이는 듯했다. 그 자리에서 질리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석연치 않긴 해도 만족하며 좋아하는 사람은 필립 뿐이다. 하지만 이윽고 모두들 안도하는 듯이 기쁨을 나타냈다. “잘 됐어.”스 테파니가 먼저 질리에게 가서 포옹해 주었다. “고마워.”“축하해요, 필립, 정말 즐거운 일이에요?”그녀는 아직 마음을 나타내지 않는 빌리 내외를 바라보며 동 의를 구하듯이 물었다. “그렇군요.”리나에 이어 빌리도 비로소 필립에게 손을 내밀었다. “축하합니다.”“감사합니다. 두 분 모두.”이때 온갖 역정과 예견되 는 불안에도 불구하고 스테파니는 가슴이 뿌듯했다. 질리에게 새로운 전기가 올 것을 바라는 뜻에서였다. “언제 식 올릴 거야?”“날짜는 아직 미정이야.”댄에 게 걸려온 전화는 경찰로부터였다. 죽은 에디 킹 때문이다. 링에서 쓰러져 실려 온 그는 수술한 담당의사가 댄이다. 수술 중인 환자가 사망했을 경우 담당의사 는 일차적으로 책임을 져야 했다. 수사관 제닝 반장은 시체의 부검을 댄에게 미 리 통보한 것이다. 그녀는 스테파니의 중요한 비밀을 한 가지 알고 있었다. 제이 크는 통해 그녀와 그가 만날 약속이 되어 잇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날 데 니스가 참석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그는 스테파니의 회복이 오히려 못마땅했 다. 최근들어 제이크와의 관계가 멀어진 캐시에게 마음이 끌린 데니스는 울적한 마음을 그녀와 함께 보내면서 위로했다. 에덴에서 축배를 들 때 그는 캐시의 집 에 있었다. 모든 것을 잊고 그녀와 지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사건이 그의 계획을 망치고 캐시는 공포에 몰아넣었다. 사냥개처럼 냄새맡은 테일러가 일당 두 명을 데리고 침입해 온 것이었다. 그들은 총으로 데니스를 위협했고 무자비 하게 기물을 파괴하며 협박했다. 안젤로가 에디 킹을 링바닥에 눕힌 보복이며 그를 다시 노리개로 끌어들이기 위한 수법이다. “그놈이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다음엔 이 아가씨의 목을 분지르겠다.”일당 중의 거구가 커다란 정수용 우리병 의 목을 잔인하게 잘라버리는 시범을 보였다. 물이 사병으로 꽐꽐 쏟아졌다. 완 전히 공포에 떠는 캐시는 새파랗게 질린 채 경찰의 도움을 청하자고 했지만 데 니스가 거절했다. “하퍼사의 인식이 나빠져.”“날 죽인다고 했는데도?”“내가 약속할께. 당신을 무사히 지키겠다고. 됐지?”데니스 역시 불안했지만 하퍼사가 뒤에 있다는 후광 때문에 그렇게 장담할 수 있었다. 같은 날 밤 댄은 스테파니 를 하퍼빌딩까지 차에 태워다 주었다. 그녀의 부탁에 의해서였다. “여기서 기다 릴까?”“시간이 얼마나 걸릴 지 모르겠어요. 차 보내라고 전화할께요.”그녀에 게서는 어떤 이상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인데 내일 아침에 처리하 면 안 돼?”“할 일이 산적해 있어서 밀린 일들을 빨리 처리해야 돼요.”“그래 서 이렇게 늦은 밤인데도 일을 하겠다고?”“그래요…….”그녀는 잠깐 빌딩을 올려다 보더니 다시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요, 여보. 나중에 봐요.”스테파니는 댄에게 키스한 다음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댄은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다 시 허전한 생각에 빠졌다. 빌리는 ‘용기’라고 격찬했지만 댄에게는 꼭 그런 것만일 수 없었다. 그때 이번에는 또 다른 생각이 댄의 발길을 붙들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혹시 그녀가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하는 염 려이다. 이미 두 차례 더할 수 없는 위기에서 겨우 희생한 그녀였다.. ‘그럴 리 없겠지.’싫으면서도 댄은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스테파니에게 아무런 위험도 없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스테파니가 제이크와 단둘이 만난다는 사실을 꿈 에도 몰랐다. 냉정한 의미에서 스테파니는 댄을 속였다. 혹시 생길지 모를 오해 를 사전에 방지하려는 그녀의 깊은 ㄸ이라고 해도 댄은 분명히 속고 있었다. 더 구나 낮도 아닌 시간,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제이크와 단둘이 만나기로 약속 된 상태였다. 댄은 이제 곧 닥칠 사태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다만 스테파니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그녀의 뒤를 미행하듯 따랐다. 2. 배신아닌 배신 댄이 뒤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스테파니가 텅빈 빌딩 안의 회장실 에 들어섰을 때 제이크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 마음이 변하신 줄 알았습니다. 그는 스테파니의 의자에 점잖게 앉아 있었다. “아, 마음이 변하신 줄 알았습니 다.”그는 스테파니의 의자에 점잖게 앉아 있었다. “형식적인 인사는 생략하고 용건부터 처리하죠.”그녀는 가능한 최대한의 사무적인 입장을 취했다. 제이크와 는 구면이다. 그에게 승마장에서 신세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업상의 경쟁자로 만난다는 사실만을 강조했다. “왜 그렇게 서두르죠?”그는 매우 느긋 했다. “오고 싶지 않았어요. 남편에게 거짓말하는 것도 싫고요.”“굉장히 신경 질적이시군요.”“회사일이 걱정돼서 나왔을 뿐이에요. 뒷거래를 해서라도 회사 를 구할 수 있다면 하죠. 하지만 경고하는데, 여기서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 우 끝까지 싸우겠어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도 댄에게 거짓말을 하 면서까지 제이크와 만나려는 의도가 집약되어 있었다. “그렇게까지는 안 될 거 요.”“가격을 제시하세요. 완전히 손뗀다는 조건으로.”그때 댄은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불안과 초조가 뒤섞인 마음이었다. “그 렇게 흥분하시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우선 내 의자에서 당장 일어나는 것부터 시작하시죠.” “아!……”제이크는 재빨리 일어섰다. 그 는 두 번씩이나 허락없이 회장자리에 앉은 것이다. 한편 아래층의 댄은 생각을 바꾸려했다. 스테파니가 원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먼저 돌아간 줄 알았 던 그가 불쑥 나타났을 때 그녀가 어떤 반응을 나타낼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죠. 지금 우린 각각 다른 생각을 가진 것 같소. 난 하퍼사 를 원했었죠. 하지만 지금은 손뗄 생각이요. 당신이 쉬는 동안 나는 가능한 최대 한의 주식을 모두 사들였소.”“그래도 이사직을 갖기엔 부족했죠. 더구나 이번 엔 그만큼 가지고 있지도 않고요.”“겨우 몇 주 차이였지요. 내가 이 자리에 앉 는 건 시간문제요. 그리고 당신은 내 밑에서 일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해야 되 겠지.”“그렇게 자신이 있다면 왜…….”스테파니가 궁지에 몰린 것은 사실이 다. 제이크의 말대로 될 수 있었다. 그녀가 용기를 낸 건 그런 위기 때문이다, 더구나 남편을 속이면서까지 제이크를 만난 데에는 비장한 각오가 전제되어 있 었다. 승마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 제이크의 눈빛을 그녀는 잊지 않았다. 사업상 의 경쟁자보다 정복하고 싶은 여자로 보는 느낌 강했었다. 스테파니의 비장한 협상조건이 그 느낌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때 일층의 로비를 서성대며 고심하던 댄이 다시 마음을 바꿔 엘리베이터로 걸어왔다. “그런데 왜 만나느냔 말이죠? ”그녀는 가깝게 다가오는 제이크를 경계하면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있을 이사회에서 좋지 않은 일이 생겨도 우정을 지키려고… ….”엘리베이터가 댄을 태운 채 순식간에 상승함과 동시에 두 사람 사이에 돌 발적인 상황이 전개되었다. 제이크가 예고없이 키스해왔을 때 스테파니는 거절 하지 않았다. 이미 각오한 일일뿐더러 제이크의 저돌적인 선제공격에 방어할 기 회조차 잡지 못한 탓이다. 댄은 아니지만 상대는 뜨거운 정열을 가지고 접근했 고 스테파니는 본능이 강한 여자였다. 그들의 키스는 형식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무너지려는 자신을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버텼다. ‘안 돼, 이건 작전일 뿐이야……넘어가면 난 파멸이야. 정신차려, 스테파니! 냉정해져야만 해! 그래, 맞았어. 난 하퍼사를 살려내야 되는 경영자이며 댄의 아내야. 남편이 있 어…….’순식간에 격렬한 갈등이 스테파니의 머리를 조여왔다. 하지만 제이크는 더욱 집요하게 그녀에게 달라붙어왔다. 바로 그때. 갈등과 함께 포옹한 채 몸의 위치를 바꾸며 문 쪽을 바라보던 스테파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막 그곳에 도 착한 댄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그녀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찼던 댄은 심장박 동이 순간적으로 멎는 듯했다. 홱 돌아서서 뛰어가는 그는 전신의 피가 한꺼번 에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믿을 수 없는 충격과 함께 스테파니가 달려나갔을 때 댄은 이미 문이 닫히는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곧장 내려가지 시작했다. 현기증이 일어났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할 수 없었다. 침착하고 용기있는 성격은 더 이상 그녀와 상관없는 듯했다. 창가로 뛰어가 차를 타고 떠나버리는 댄을 내려 다 보는 그녀는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확실한 것은 댄이 제이크와 키스하는 광 경을 보았다는 것뿐 무엇을 잘못했는지 머리 속은 온통 윙윙거리며 아득하기만 했다. 그녀가 힘없이 돌아왔을 때 제이크는 두 잔의 샴페인을 따랐다. “중역실 에서의 삼각관계라……하퍼와 샌더스의 병합, 과연 가능할까?”그는 샴페인 잔 을 여유있게 스테파니에게 건네주었다. 술잔을 받아든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제이크의 안면에 확 끼얹었다. “이런 낭비가!”얼굴에 술벼락을 맞은 제이크는 여전히 이죽거렸다. 그 시간 스테파니와 제이크의 모습을 목격한 댄은 이성을 잃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전속력으로 차를 몰았다. 차선을 무시하면서 거칠게 몰아대던 그는 대형사고의 고비를 몇 차례 넘기면서 무작정 가속 페달을 밟고 있었다. 스테파니는 어떻게 하퍼빌딩을 나와 에덴에 도착했는지 모른다. 그저 댄 만을 생각했다. 거실로 뛰어 든 그녀는 눈으로 댄을 찾았다. “시키실 일 있으세 요?”가정부는 그녀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이 들어오셨어요?”“아뇨”“ 전화는 있었나요?”“아뇨…….”가정부는 공연히 불안해졌다. “시키실 일이라 도 있으시면…….”“됐어요. 주무세요.”스테파니는 급히 이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가정부의 말대로 댄은 돌아와 있지 않았다. 이튿날 이른 시간에 사라는 댄의 연락을 받고 서둘러 나갔다. 그녀가 약속된 장소에 도착했을 때 댄은 모래 사장에 앉아 손가락으로 무엇인가 그리고 있었다. “일찍 불러내서 미안해.”“ 몇 해만에 해뜨는 걸 보는군요. 무슨 일이세요?”“아냐, 그냥 보고 싶어서.”하 퍼가문에서 댄이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는 스테파니와 사라뿐이다. 사라는 댄이 모래바닥에 그려놓은 둥근 모양을 내려다 보며 물었다. “뭐예요?”“그냥. 지도 라고나 할까…….”“어디요?”“섬.”“엄마와 만나신 섬요?”댄은 고개를 끄덕 였다. “그래서 엄마를 재기하도록 도와 주셨죠. 그리고 중요한 건 사랑에 빠지 신 거였죠.”댄은 먼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런 것 같아. 그녀한테도 뭔가 있 었어. 섬에도 사랑에 빠질 무엇이 있지. 사라, 아무래도 네 엄마를 놓칠 것 같아 …….”댄이 먼저 일어나 물가를 걷기 시작했고 사라가 따랐다. 그녀는 아직 어 리지만 최근 톰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생각도 그만큼 성숙되었다. 댄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음은 스테파니의 혈통 이었다. 댄은 이야기를 돌려 에디 킹의 장례식에 가야된다고 말했다. “꼭 가셔 야 해요?”그의 상심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사라의 침착성은 스테파니의 딸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에디 킹의 장례식에는 댄과 사라, 데니스와 캐시 그리 고 안젤로가 침통한 얼굴로 참석했다. 댄은 에디 킹을 살려내지 못한 것에 의사 로서의 가책을 느꼈다. 그는 사라에게 당분간 스테파니를 만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 문제에 대해 사라는 놀랍도록 침착한 반응을 보였다. 한편 에디 킹을 죽게 했다는 죄의식과 함께 테일러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찬 안젤로는 신부에 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의 고민을 알게 된 신부는 성직자지만 불의는 용언하지 않도록 조언했다. 그결과 안젤로는 자기 때문에 고통받는 데니스와 캐시에게 테 일러와 맞설 것을 선언했다. 에디 킹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댄의 소식이 두절되 었을 때 스테파니는 점차 인내심을 잃어갔다. 댄에게 솔직히 털어놓고 자신의 경솔했음을 사과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상대의 마음도 헤아릴 줄 알기 때문 에 더욱 초조하게 댄의 소식이 기다려졌다. 하지만 위기에 몰린 회사경영에 게 을리 하지 않았다. “댄의 소식이면 회의 중이든 어떤 상황이든 즉시 알려 줘요. ”그녀는 여비서 힐러리에게 당부한 다음 회의실로 들어갔다. 이번만큼은 회의 중에라도 달려갈 작정이었다. 댄과의 사이에 오해의 골이 깊어지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이날 회의에는 빌리와 톰, 데니스 등 핵심 멤버만 참석했다. 데니스와 톰의 사이는 전과 다름없이 삐걱거렸다. “네 어머님께서 조언자로 참 석해 달라고 하셨어, 데니스.”“샌더스도 너한테 오라고 할지 의문이군. 회사가 그이 손에 들어간다면 전적으로 조언 덕분이니까.”데니스는 가시돋힌 말을 서 슴히 않았다. 모두 자리에 앉았을 때 스테파니는 전과 다름없는 침착한 태도를 보였다. 끔찍한 고난을 겪은 흔적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동안 직접 얼굴을 대한 적이 없는 데니스는 가볍게 한 마디 던졌다. “돌아오셔서 반갑군요.”스테 파니는 대꾸하지 않았다. 자신이 공석 중일 때 그가 했던 일들에 대해 어떤 질 책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바로 시작하죠. 샌더스 문제는 시각을 다투는 사안이니까.”이대도 데니스가 먼저 의견을 제시했다. “우리가 굳게 뭉치기만 하면 하 등의 위협이 못 될 거예요.”“뭉칠 수 있다면 말이지.”톰이었다. 그는 데니스가 자신을 내쫓으려 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스 테파니의 불행을 이용해 하퍼사를 마음대로 움켜쥐려는 데니스의 행동에 대해 긍정적이기 보다는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어떻게 됐죠, 톰?”스테파니는 데니스가 아닌 톰에게 질문했다. “주식시장에서 우리 주식으 로 한 재산 모으는 중입니다.”다시 데니스가 끼어들었다. “거의가 우리 돈이 지. 나쁜 소식 말고는 없나?”그는 자신이 상속자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과시 했다.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어.”“그래서 네 아이디어 때문에 현금잔고가 바 닥났단 말야.”“그럼 네 생각은 뭐지? 빨리 가서 팔지 말라고 애원이라도 할 까?”스테파니는 데니스와 톰의 언쟁에 침묵했다. 그들의 언쟁을 말리고 나선 것은 빌리였다. “우리끼리 다투면 샌더스만 좋아할 뿐이야. 모두가 냉정히 생각 해 볼 필요가 있어.”“옳아요.”스테파니는 빌의 의견에 동조하며 자신의 견해 를 밝혔다. “난 톰의 전략에 긍정적이에요. 아직 끝난 게 아닌 만큼 힘을 합하 면 승산이 있어요.”스테파니의 발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자리의 누구도 그녀의 경영자질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하퍼사에서 사활을 다투는 전략에 몰두할 때 제이크 샌더스는 전혀 다른 시간을 보냈다. 20 퍼센트이 주식화보와 함께 하퍼사의 이사직이 거의 확실해진 가운데 질리와 단 둘이 있는 중이었다. 그는 질리와 함께 막 호텔에 도착했다. 질리는 필립과의 결 혼식에서 입을 웨딩드레스를 가지고 제이크 앞에서 그걸 입기 위해 거침없이 옷 을 벗어던졌다. “질리, 정말 역겹군!”그는 옷을 몽땅 벗어던질 질리의 몸을 바 라보며 농담처럼 한 마디 던졌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제 웨딩드레 스 보고 싶지 않아요?”“필립이 보기라도 한다면…….”“보게 되겠죠. 하지만 당신한테 먼저 보여주고 싶었어요.”필립과 결혼을 앞둔 질리의 고백이었다. 그 녀가 무엇 때문에 결혼하려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어리석을 정 도로 순진한 필립이 보는 것은 그녀의 표면뿐이다. 그럴 듯한 감언이설과 미모 그리고 넘겨다 볼 수도 없다고 믿은 그녀의 훌륭한 육체였다. 돈은 있어도 사창 가의 젊은 창녀조차 찾지 못하는 그에게 아직 젊고 매력적인 질리의 육체는 환 상적이었다. 질리는 웨딩드레스로 성장한 다음 제이크에게 다가섰다. “난 당신 들 두 사람의 결혼선물을 준비하려고 고생하는 중이오.”“필립은 까다로우니 제쳐놓고 제 선물만 주세요, 아셨죠?”그녀는 의미있는 눈빛으로 제이크의 품에 안겼다. 전략상 질 리가 필요한 제이크는 가장 적절하게 그녀를 다루었다. 그녀 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물을 원하는지 알 수 있소.”그는 두 팔로 질리를 포옹하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필립한테는 비밀이에요, 아셨죠? 그의 기대를 망칠 순 없잖아요?”“그럴 테지.”질리는 일 종의 도박을 즐겼다. 늦었지만 재혼에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는 필립이다. 그에 게 이번이 재혼은 인생 최대의 기쁨이며 만족이었다. 하지만 도박을 즐기려는 질리의 뜻은 전혀 다른 데 있었다. 그녀는 제이크와 먼저 즐긴 다음 자신이 전 부라고 생각할 필립을 조롱하고 싶었다. 그녀는 제이크를 위해 최대한의 서비스 를 제공했다. 그녀가 제이크와 육체관계를 가진 다음 돌아갔을 때 필립은 그녀 를 위한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 스테파니가 힘들어 하리라는 필립의 우려를 무시하고 질리는 결혼식을 에덴에서 하기로 결정했다. “그날은 우리에게 새로 운 인생이 시작되는 날이오.”“저한테도 얼마나 중요한 일이지 알아 주셨으면 좋겠어요.”그녀의 몸 구석구석에는 아직 제이크의 숨결이 남아 있었다. “당신 이 행복하면 그만이요, 질리.”필립은 특별히 준비한 선물을 그녀에게 주었다. 필립은 하퍼사의 주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걸 질리에게 선물한 것이다. “당신 이 스테파니에게 동정받기 싫어 한다는 걸 알고 있소.”그는 질리와 제이크 그 리고 스테파니의 보이지 않는 관계를 짐작하지 못하고 질리의 궁핍한 생활을 진 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제이크는 하퍼사의 주식을 끌어모으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스테파니를 파산시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제이크를 도울 수 있는 질리를 짐작조차 못했다. 즉 필립은 하퍼사의 주식을 질리에게 건네줌으로써 장차 감당 할 수 없는 큰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하퍼사의 중역회의는 거듭되었고 매번 회 의 때마다 스테파니는 힐러리에게 댄의 소식은 회의와 관계없이 알려 주도록 특 별히 당부했다. 이날 회의도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문제는 샌더스가 더 이상의 주식을 사들일 수 있느냐지요.”스테파니의 우려에 빌리가 자신있는 반응을 나 타냈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더 이상은 사들이지 못해요.”데니스도 한 마디 했다. “그렇게 되면 샌더스는 하퍼사를 차지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금압박을 받습니다. 결국 사들인 주식을 덤핑으로 처분할 수밖에 없죠.”“하지만 샌더스 는 희박한 가능성만 있어도 물러날 사람이 아냐.”데니스는 자신의 의견이 다시 무시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때 회의실밖에 댄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박사 님.”힐러리는 무척 반겼다. 그녀 역시 하퍼사의 가족으로 스테파니를 누구못지 않게 걱정했다. “스테파니는?””지금 회의중이신데 소식있으면 즉시 알려달라 고 하셨어요.”“고맙소, 힐러리.”회의실의 데니스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스테 파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걸 알고 계세요.”“어떤 인간인가는 알아.”“그래요?”데니스가 거의 빈정거릴 때 힐러리가 들어와 스 테파니에게 댄의 소식을 전했다. 스테파니는 회의진행을 빌리에게 부탁하고 즉 시 회의실을 나섰다. 댄은 회장실에 혼자 있으면서 사진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와 스테파니 그리고 데니스와 사라, 네 명의 행복한 모습이었다. 스테파니는 가슴 속의 동요를 간신히 억제하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섰을 때 댄은 사무적인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반갑게 포옹할 기분이 아니었으며 스테파니 역시 같은 기 분이었다. “샌더스가 사무실에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네.”“그럼 왜 일 하러 온다고 했었소?”“일하려 왔어요.”댄의 표정이 달라졌다. 모든 사실 앞에 서는 자신을 정당화시키려는 그녀가 불쾌했다. 스테파니는 또한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원래의 의도를 밝혔다. “일을 더 망치지 맙시다.”“여보, 사 실을 말하는 거예요. 샌더스는 내가 불렀어요. 하퍼사를 포기할 뜻이 전혀 없다 는 사실을 확실해 해두려고요.”그게 스테파니의 진실이지만 댄에게는 설득력이 없었다. “그럼 왜 말하지 않았소?”“그건 당신을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기 때문이에요.”“그럼 당신은,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지?”두 사람의 뜻이 지금처럼 상방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전 지금 그와 치열하게 싸우는 중이에 요.”“내겐 그렇게 안 보이던데?”댄은 옹졸하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하지 만 회사문제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눈앞의 그녀 모습을 제이크와 텅빈 사무실에 서 키스하던 모습을 연상시킬 뿐이었다. “잘못 보신 거예요.”“내가?”“그는 당신에게 보이려고 고의적으로그랬어요. 모르시겠어요, 그가 우릴 가지고 노는 걸?”그녀가 제이크의 얼굴에 술을 끼얹는 광경을 댄을 보지 못했다. “당신들 둘이 그런 게 아니고?”힐러리가 들어왔다. “회장님께 전환데요……”“지금 바빠요, 힐러리.”“샌더스 씬데 어떡할까요?”시묘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서로 사랑하고 행복했던 두 사람 사이를 갑자기 냉각시킨 장본인은 제이크였다. 그 문제로 다투고 있을 때 그는 때맞춰 전화를 걸어왔다. 댄이 주목하는 가운데 스 테파니는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렇게 둘러대고 전화를 연결시키 지 말아요.”“알겠습니다.”댄은 갑자기 허탈해졌다. 어떤 경우에도 단둘이 있 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 사이가 끝나게 될지도 모를 긴박한 순간 에도 계속 업무를 보아야 하는 스테파니의 모습은 댄과 상관없는 여자같았다. “그렇군. 당신은 항상 바쁘고 난 방해가 되는군.”스테파니는 일어서서 나가려 는 댄에게 매달리듯이 말했다. “댄, 제발요. 우린 얘기를 해야만 돼요.”댄의 얼 굴이 차갑게 변했다. “얘기로 해결될 일은 하나도 없어. 빨리 제이크한테 전화 걸지 그래, 사업상의 일인데?”댄의 말은 빈정거림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심각 함을 띠었다. 그의 진심이다. “당신이 날 믿지 않으실 거라고 그가 말하더군요. ”그녀는 좌절감에 낮게 중얼거렸다. “그 말이 맞아.”댄은 더 이상 지체할 필 요없다는 듯이 나가버렸다. 스테파니는 그를 붙잡지 못했다. 소용없다고 생각했 기 때문이다. 그녀다운 결정이다. 댄이 그녀의 회사경영을 싫어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개인적인 생활도 병행해줄 것을 원했다. 하지만 지금껏 그녀 는 개인적인 생활보다 회사일에 중점적으로 매달려왔던 게 사실이다. 타고난 기 질 탓이기도 했다. 경영자적인 기질을 타고난 그녀는 업무에 열중한 남편이 아 내를 등한시하듯 댄을 대한 것이 사실이다. 댄은 이해하려고 수없이 노력했지만 번번이 좌절감을 맛보았다. 특히 이번 제이크와의 관계는 지금껏 누적되어왔던 모든 좌절감에 배신감까지 안겨 주는 계기가 되었다. 3. 불확실한 전만 이 무렵 캐시는 제이크와 멀어지고 데니스와 가깝게 지냈다. 악당인 테일러는 데니스와 가까운 캐시를 계속 협박했다. 톰과 사라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균열 이 생겼다. 그들은 전처럼 자주 만나지 않았다. 댄과 스테파니의 불편함 정도의 수위는 아니었지만 사라 편에서 톰을 피하였다. 댄은 다시 에덴으로 돌아왔지만 이전 같지 않았다. 본질적인 문제는 마음 한 켠에 묻어둔 채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며 지냈다. 스테파니는 회사문제와 댄과의 갈등으로 꽤 지쳐있었지만 에덴 에서의 질리의 결혼식을 기꺼이 허락해 주었다. 필립이 사랑의 선물로 질리에게 준 그 주식이 제이크에게 넘어갈 경우 제이크는 기대하던 주식 20퍼센트가 확보 되어 이사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된다. 지릴로서는 충분히 이 모든 일을 실행할 수 있었으며 이미 모종의 약속이 되어 있었다, 댄에게 한 가지 다행스러운 소식 은 에디 킹의 사망에 대한 혐의가 완전히 풀린 일이다. 제닝 반장에 따르면 에 디 킹의 사인은 심한 마약중독증세 때문임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여보, 안심이 에요.”“그래. 당신이 나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렇겠지.” 스테파니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댄의 이야기에 뼈가 들어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몹시 서글프게 만들었다. 한편 안젤로는 타일러의 온갖 협박에도 불국하 고 권투를 그만두었다. 타일러 일당은 다시폭력을 휘두르려했지만 이번에는 지 난번처럼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데니스는 권총을 준비하고 안젤로는 권투로 단 련된 주먹을 사용해 보기좋게 그들을 쫓아보냈다. 그런 가운데 톰과의 사이에 벽이 생긴 사라는 데니스의 친구인 안젤로와 가까이 지냈다. 데니스는 타일러가 노리는 캐시를 안전한 장소로 피신시켰다. “더 무서운 일이 생기기 전에 경찰 에 알려요.”“다 괜찮을 거야. 경찰을 불러들이면 어렵다는 거 알잖아.”데니스 자신도 불안했지만 자신의 일로 하퍼사와 스테파니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 았다. 하지만 한 차례의 반격으로 그의 생각처럼 쉽게 물러날 타일러는 결코 아 니었다. 질리와 필립의 결혼식은 에덴에서 조촐하게 진행되었다.. “이렇게 행복 한 너를 보기는 처음인 것 같아.”스테파니는 화사한 웨딩드레스 차림의 질리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고마워, 네가 아니었다면 오늘 같은 날은 없었을 거 야. 필립도 나한테 과분할 정도로 잘 해 주고.”진정으로 그녀는 행복하다는 표 정을 짓고 있었다. “질리, 정말 이 결혼을 확신해?”“그럼. 왜 네 생각엔……. ”“아니. 나도 좋다는 건 알아. 다만 결혼이란 매우 중요한…….”질리가 재빨 리 그녀의 다음 말을 가로막았다. “걱정 마, 스테파니. 모든 게 만족할 만해. 남 편은 과거의 이혼에도 불구하고 날 사랑하며 잘 돌봐 줘. 우린 행복할 거야. 너 희 부부처럼 완벽한 한 쌍으로 잘 살 거야.”질리의 말처럼 행복하고 완벽한 한 쌍이 이미 아니다. 질리와 필립의 결혼식에는 가까운 친지들만 참석했지만 더없 는 축복 속에 진행되었다. “잠깐 실례할께요.”질리는 그럴 듯하게 양해를 구한 다음 식장을 빠져나갔다. 호수로 이어진 에덴의 선착장으로 달려간 그녀는 남편 보다 더욱 뜨겁게 한 남자에게 안겼다. 바로 제이크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신부에게 키스해 주지 않겠어요?”제이크는 가볍게 키스한 다음 용건부터 꺼 냈다. “주식은 구했소?”질리는 거침없이 웨딩드레스 자락을 올리고 속옷을 드 러냈다. 그리고 그 속에 은밀히 감추었던 서류봉투를 꺼내 제이크에게 건네주었 다. “정말 꺼림칙해요. 스테파니가 알면 안 돼요.”“모르게 하지, 최소한 당분 간만이라도.”“그런 다음에는?”“그땐 내가 하퍼사를 경영할 텐데 무슨 걱정 이겠소.”“우리 둘이 말이죠.”“마찬가지 아닐까? 아무래도 진짜 결혼한 신부 같지 않은데?”그녀는 입가에 기묘한 미소를 흘렸다. “빌린 거니까 일이 끝나 면 돌려 줘요.”“이자까지 합쳐서 돌려 주지. 들키기 전에 돌아가는 게 좋겠소. ”식장으로 다시 돌아온 질리는 하퍼사와 스테파니를 결정적으로 위험에 빠뜨려 놓고도 태연했다. 그저 행복에 가득찬 신부의 모습으로 꾸미고 있었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캐시와 함께 참석한 데니스에겐 위험이 닥쳤다. 그가 식장에 머 무르는 동안 한 그림자가 밖에 세워둔 그의 자동차를 몰래 조작한 것이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데니스는 캐시와 함께 파티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자동차로 에덴을 떠났다. 그는 운전하는 캐시를 계속 키스로 괴롭혔다. “그만해요, 데니 스 계속 키스로 괴롭혔다. “그만해요, 데니스. 운전하잖아요!”캐시는 어쩔 줄 몰라했다. 하지만 정작 위험한 상황에 빠진 것은 내리막길에서 였다. 갑자기 브 레이크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브레이크가!”그녀는 겁에 질린 채 부르짖었 다. 정신없이 브레이크를 밟아댔지만 조작된 브레이크가 들을 리 만무였다. “핸 드 브레이크를 써!”데니스가 소리친 것은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기 직전이었다. 그녀의 적시 실행으로 그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그 순간에도 그들은 그것을 단 순한 사고로 여겼다. 그러나 머지 않아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계획된 사고였음 을 알았을 때 비로서 경찰에 신고했다. “타일러의 짓입니다. 처음엔 내 아파트 에 침입해서 기물을 온통 부수며 협조하지 않으면 날 해치겠다고 협박했단 말입 니다.”그는 캐시는 끌어들이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왜 지금까지 숨기셨나요? ”제닝 반장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데니스를 바라보았다. “지금 하퍼사는 경 영권 다툼에 휘말려 있죠. 우리의 평판이 나빠지면 당연히 상대편에 득이 되니 까요.”그는 타일러를 정식으로 고발해도 구속 5분 후에 풀려날 거라는 제닝 반 장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경찰조차 어떡하지 못하는 악당에게 이미 붙들린 자 신이 원망스러운 뿐이었다. 댄은 모종의 결단을 내렸다. 스테파니와 자신의 문제 를 더 이상 수수방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타파티가 끝나고 축하객들이 모두 돌아갔을 때 스테파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침실로 오실 거죠?”“아니, 조금 피곤해.”“언제까지 그러실 거예요? 저에게 뭘 원하세요?”그녀는 더 이 상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회사를 구하려는 노력만큼 우리의 결혼을 지 킬 의지가 있는지 모르겠소.”“있어요.”그녀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나하고 떠납시다.”“곧 그럴께요. 약속해요. 설마 당장 회사를 버려두고 떠나자 는 건 아닐 테죠?”“망할 놈의 회사!”댄은 그답지 않게 버럭 화를 냈다. “난 당신을 원해.”“전 당신 거예요.”“이사회 회장이 아닐 때만 그렇지.”두 사람 의 갈등이 극도로 팽배해져갔다. “전 이사회 회장이에요.”“샌더스에게 다른 속셈이 있었는지도 모르겠군.”그가 갑자기 말했다. “그는 그랬는지 몰라도 전 아녜요.”“증명해 봐.”“?……”“나한테 내일 10시에 출발하는 비행기표 두 장이 있어. 같이 떠났으면 좋겠소.”흑백논리처럼 단호한 댄의 요구에 스테파니 도 거침없이 대답했다. “갈 수 없어요.”그녀에게는 댄 못지 않게 회사도 증오 했다.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었다. 댄은 침통하게 일어섰다. “동행하지 않겠다 면 결정된 걸로 알겠소. 어떤 경우이든 난 떠나겠소.”그는 스테파니를 지나쳐 밖으로 나가버렸다. 스테파니는 한동안 굳어버린 듯이 꼼짝하지 않았다. 가슴 속 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초조와 실망이 뒤엉키며 출렁거렸다. 타일러는 끝내 안젤 로를 가만두지 않았다. 안젤로는 불쑥 들이닥친 두 악당에 의해 납치당했다. 그 리고 얼마 후 데니스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안젤로야, 문제가 생겼어.”다급한 그의 목소리에 데니스는 갑자기 긴장되었다. “수산시장 근처의 5번 창고야……. ”그러던 그의목소리에 데니스는 갑자기 다급하게 소리쳤다. “오지 마, 데니스! ”그와 함께 전화가 끊기기 직전 커다란 비명소리가 들렸다. 데니스는 그에게 어떤 위험한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함께 있던 캐시의 만류 를 뿌리치고 나섰다. “그는 내 친구야. 가봐야 해.”“경찰을 불러요. 여기로 전 화한 걸 보면 이미 장소는 노출되었어요. 나만 혼자 두고 가지 말아요.”“시간 없어. 문단속 잘하고 내가 올 때까지 열어 주지 마.”데니스는 당부한 다음 친구 와의 우정을 위해 어떤 위험도 불사하며 달려갔다. 그때 안젤로는 거구의 두 사 내에게 무참하게 린치당했다. 입술이 터지고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로 엉겨 있었 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속수무책이었다. “됐어, 그만 해. 기분이 어떤가?”안젤 로는 핏발이 선 눈으로 타일러를 쏘아보았다. “열을 좀 식혀야 할 테니 얼음창 고에 쳐넣어.”그의 명령대로 안젤로는 금방이라도 몸이 얼어붙을 듯한 얼음창 고에 감금되었다. 한편 캐시는 데니스가 나간 즉시 그곳을 나와 제이크에게로 향했다. 어리석을 정도로 순진하고 겁많은 그녀였다. 대담한 구석은 눈 씻고 찾 아도 보이지 않는 그녀는 눈앞의 두려움에 질려 데니스도 잊은 듯이 제이크에게 찾아간 것이다. 데니스가 수산시장 근처의 5번 창고에 도착했을 때 타일러는 약 간 놀란 듯했다. “의리 한 번 끝내 주는군.”“난 사업하는 사람이야. 이러지 말고 협상하는 게 어때?”“그것도 좋겠지.”하지만 타일러는 순순히 협상할 상 대가 아니었다. 그가 눈짓하자 부하들은 무차별 폭행을 시작했다. 하퍼사의 상속 자이지만 신체적으로 나약한 데니스는 상태의 무자비한 주먹에 이미 보기좋게 나가떨어졌다. 몇 차례 정신없이 얻어맞은 그는 안젤로가 있는 얼음창고에 함께 갇혔다. 상황은 시시각각 변했다. 이튿날 아침, 댄은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지난 밤 내내 댄의 문제로 고민한 스테파니는 당분간만이라도 댄을 위해 떠날 결심을 굳혔다. 하퍼사가 소중한 만큼 댄과의 사랑도 소중했던 것이다. 한편 타일러는 잔인한 기질을 더욱 드러냈다. “넌 아마추어야, 하퍼. 엄마돈으로 거들먹거리는 어린애지. 진짜 사업이 뭔지도 몰라. 안다면 여길 오지 않았을 테니까.”전신이 얼어붙은 듯이 입조차 놀릴 수 없는 데니스와 안젤로는 극한 상황에 빠졌다. 그 들의 얼굴에 흥건했던 핏자국은 검붉게 얼어붙었다. “날 속이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겠다.”그는 두 명의 부하에게 데니스와 안젤로를 죽이도록 명령한 다음 돌아서서 창고를 걸어나갔다. 그 순간 끈질기게 테일러의 뒤를 추적하던 제닝 반장의 출현으로 그들은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테일러의 죄목은 에디 킹에 대한 과실치사협의였다. 기물파괴나 협악범 정도로는 테일러를 감옥으로 보낼 수 없 다고 판단한 제닝 반장은 에디 킹의 죽음에 수사의 초점을 맞췄던 것이다. 한 편, 댄과 함께 떠나기로 결심한 스테파니는 초조하게 데니스를 찾았다. 그가 비 록 부족했지만 아들이기 때문에 특별히 당부할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운명은 그녀를 그냥 두지 않았다. 그녀는 집사인 로버트에게 챙긴 가방을 운반하도록 부탁한 다음 찾아온 톰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회장님.”“어서와 요, 톰.“아버님이 전화받으실 때 함께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시죠?”그는 스테 파니가 빌리에게 전화로 부탁한 문제 때문에 찾아왔다. “잠시 떠나요.”“오늘 요?”톰은 깜짝 놀랐다.“그래요. 그러나 걱정 말아요. 회사를 포기하는 게 아니 니까. 여기 앞으로 필요한 지시사항을 적어 두었으니까 착오없도록 해요.”스테 파니는 급히 작성한 메모를 건네주었다. “상황이 어찌될지 모르겠습니다. 소식 에 의하면 샌더스가 필요한 주식을 확보했다고 합니다.”“허풍일 거예요.”그녀 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질리가 제이크에게 필립의 주식을 넘겨 준 사실을 알 리가 없는 그녀였다. “그렇지 않으면 어떡하죠?”“이미 결정했어요, 톰.” “알겠습니다. 즐거운 여행이 되시기 바랍니다.”톰은 불안했지만 겉으로 내색하 지는 않았다. 하퍼사의 악화된 경영난에 대해 누구보다 걱정하는 그였다. 댄에 대한 그녀의 감정을 이해하고 싶었지만, 그보다 그녀가 없는 하퍼사의 운명이 더욱 걱정이었다. 한편 캐시는 제 발로 제이크에게 걸려든 셈이었다. 그녀는 제 이크가 관계를 요구했을 때 간곡히 거절했다. “안 돼요, 제발…….”“좋아. 그 럼 내가 뭘 원하는지 말해야겠군. 주식을 좀 샀는데, 그걸 나에게 넘긴 사람의 이름을 비밀로 하고 싶어.”캐시는 금방 알아들었다. 컴퓨터 조작으로 필립의 이 름을 은닉 시켜달라는 것이었다. “싫어요 안 하겠어요.”데니스를 좋아하게 된 그녀로서는 당연한 대답이였다. “하게 될 걸?”캐시는 갑자기 울고 싶었다. 끝 까지 제이크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제이크가 모든 사실 을 폭로할 경우 자신의 입장은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럴 즈음 스 테파니는 심경이 변화를 가져왔다. 매사에 신중한 톰의 보고 때문이다. 제이크 샌더스가 이사자리에 앉을 수 있는 주식을 확보했다면 회피할 수 없는 문제였 다. 댄에게 양해를 구하고 하퍼사가 제이크의 수중에 넘어갈지도 모를 위기에 대처할 결심이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빌리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했다. 하퍼가 족의 일원인 필립의 주식이 제이크에게 넘어 갈 가능성은 감히 예측조차 못한 일이었다. 공항에 먼저 도착한 댄은 다시 깊은 근심에 잠겼다. 출발시각인 10시 가 입박해도 스테파니의 모습이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짐작할 수 있었 다. 확인하지 않아도 그녀가 마음을 바꾼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두리 번거리고 있었다. 그때 대합실의 스피커에서 댄에게 전화가 왔음을 방송했다. 댄 은 재빨리 다가갔다. “전화가 왔다고요?”“그렇습니다. 댄 마샬 박사님이죠?” “그렇소.”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하지만 순간 마음을 바꾸었다. 10시가 임박했 는데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전화가 왔다면 짐작할 만했다. 그는 말없이 수화기 를 내려놓았다. 하퍼빌딩에서 초조하게 통화를 기다리던 스테파니는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을 정도였다.“힐러리, 전화가 끊겼어. 무슨 일이지?”“공항에서 끊겼 어요. 다시 걸어볼께요.”“아냐, 그만 둬.”그녀도 이미 알아차렸다. 한 번 전화 를 받지 않은 댄이 다시 발을 리 없었다. 스테파니 역시 이미 그의 마음을 알아 차리며 침울해졌다. 빌리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제이크 샌더스가 긴급 이사회를 요청한 것은 댄이 아직 공항에서 고민할 때였다. 필요한 주식을 확보한 제이크 는 지체없이 이사회의를 요청했고 하퍼사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끝내 스테파니 가 와 주지 않을 경우 그녀와의 관계는 되돌릴 수 없는 과거가 될 것이며 절단 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마음이 한없이 괴로운 댄이었다. 자신이 필요할 때마다 스테파니는 회사일로 달려갔고 같은 상황은 앞으로도 계속 재현될 게 분명했다. 그걸 생각하면 괴롭더라도 이번 기회에 그녀를 단념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테파 니의 상황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긴급 이사회를 요청한 제 이크는 안톤과 함께 하퍼빌딩의 회장실로 당당하게 들어섰다. “이사회 소집을 원하셨죠? 여긴 이사실이 아녜요.”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그러지 말아요. 장 미를 가져왔소. 내가 가진 하퍼사의 주식퍼센트와 같은 스물 한 송이요.”그는 붉은 장미다발을 내밀었지만 스테파니는 받지 않았다. “그렇다면 열아홉 송이 가 맞죠”스테파니는 제이크의 주식 확보를 아직 모르고 있었다. “미안하군요. 2퍼센트를 분명히 더 확보했소. 이걸 확인해 보시오.”그는 증명서를 건네 다음 안톤과 함께 이사실로 향했다. 여비서 힐러리는 자신의 일보다 더욱 초조해 하 며 계속 공항에 전화를 걸어 드디어 연결시켰다. 그때 댄은 탑승하기 위해 개찰 구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비행기표를 들여다 보던 공항직원은 마침 방송 중인 댄 마샬 박사의 이름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선생님 전화 아니에요?”“아니오. ”댄은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저으며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스테파니와의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같은 시간 하퍼사의 긴급 이사회의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에게 불리해지고 있었다. 제이크의 증명서를 확인한 결과 틀림없었다. 계속 확인 중이지만 회생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이상하게 주식을 제이크에게 넘긴 사람이 밝혀져 있지 않은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캐시의 컴퓨터 조작 때문이다. 데니스는 테일러의 부하에게 얻어맞아 시퍼렇게 멍든 얼굴로 이사회에 나타나서 는 실수로 문에 부딪혔다고 변명했다. 어쩔 수 없이 제이크 샌더스의 요청에 따 라 이사회를 속개할 때 스테파니는 창 밖으로의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방금 공항 의 활주로에서 이륙하는 여객기가 보였다. 그 비행기에 댄이 타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안다. 제이크가 아니었으면 그녀도 동행했을 것이다. 그렇게 댄을 떠나 보낸 그녀는 가슴 속의 커다란 무엇이 빠져나가는 허전함과 비참함을 느꼈다. 스테파니 못지 않게 필립도 항상 일에 쫓겼다. 신혼여행 마지막 날에도 그는 급 한 일 때문에 출장을 떠나야했다. “미안하오.”“이번만 봐드릴께요.”“정말 괜찮겠소? 취소할 수도…….”“아녜요. 그러실 필요없어요.”질리는 서둘러 그 렇게 말했다. 그녀는 사실상 제이크의 연락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필립과 신혼여 행을 보내면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제이크와 연락했다. 첫날부터 필립이 어딘가 급한 용무로 떠나주기를 은근히 기다렸던 것이다. 몹시 미안해 하는 필립이 호 텔을 벗어나기도 전에 질리는 실내 수영장으로 달려갔고, 미리 연락받은 제이크 가 풀에서 대개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애인이나 남편이 아니면서도 그 이 상 밀접한 관계였다. “내 주식은 잘 써먹었나요?”“오늘부터 난 하퍼사의 이 사요.”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축하해요. 곧 차기 회장이 되겠죠?”“시간문제 지, 애석하게도.”“뭐가 애석해요.”“이제야 스테파니 다루는 법을 알았거든. 나에게는 다방면으로 이상적인 파트너요.”“쫓겨난 다음엔 아닐 걸요?”질리는 제이크가 회장자리에 앉고 스테파니를 해고시키는 것을 기정사실로 알았다. 하 지만 제이크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사무실에 미인을 하나쯤 두는 것도 괜 찮겠지.”“내가 있잖아요?”“당신은 이사회를 지겨워할 거야. 그렇다고 당신과 스테파니 둘다 거느린다는 건 좀 과욕일 테고.”“스테파니를 쫓아버려요.”“두 고 봐야지.”질리는 그의 다음 말을 자신의 입술로 막으며 목을 끌어안았다. 그 녀의 육체는 필립에게도 그리고 제이크에게도 그 순간만이 최상인 것처럼 보였 다. 대상이 바뀐 것과 상관없이 철저하게 상대를 위해 타오르는 것이었다. 4. 위험한 재회 제이크를 하퍼사의 이사로 앉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질리는 자못 신혼 의 행복에 젖은 듯이 만족한 모습으로 에덴에 나타났다. “좋아 보이는구나.”댄 에 대한 생각으로 연신 스테파니는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우린 정말 행복했어. 너도 댄과 다시 신혼여행을 떠나는 게 어때?”“댄은 떠났어.”“왜, 어디로?”질리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섬에. 모든 것으로부터 떠났어. 날더러 함께 자라고 했지.”“그런데 왜 안 갔어?”“지금 상황에선 몸을 뺄 수가 없어. ”그 원인은 사실상 질리에게 있었다. 질리는 제이크에게 이사자리를 내준 스테 파니의 기분이 은근히 궁금해서 방문한 참이다. 그녀는 속마음을 전혀 내색하지 않고 자신이 알고자 하는 바를 간교한 요설로 이끌어 내는데는 남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불가항력이었던 거야. 아니면 방치해 두었던 거야?”“그게 댄 이 떠나며 생각한 거야. 나와 샌더스를 애인관계라고…….”질리의 눈빛이 순간 번쩍였다. “그렇다면 더욱 동행했어야지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라도.”“이미 엎 질러진 물이야. 같이 갔던 안 갔던.”스테파니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질리 앞 에서 진심으로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돼. 전화로라도 설명하면 되잖 아.”“안 받아.”“내가 걸어 볼까?”“아니.”“혹시 다른 이유가 있는 거 아 냐?”질리는 제이크의 말을 떠올렸다. ‘이제야 스테파니 다루는 법을 알았다면 그리고 미인 한 명쯤을 사무실에 두겠다’던 것을. 스테파니는 질리를 빤히 바 라보았지만 이내 시선을 떨구었다. 그리고 항변하듯 말했다. “샌더스와 무슨 관 계가 잇느냐고? 물론 아냐. 말도 안 돼! 최소한 난 그렇지 않아.”“샌더스는?” “그런 내가 알 바 아냐.”스테파니는 생각만 해도 불쾌했다. 순간적인 그와의 키스가 불러온 과정에 대해 문득문득 비위가 상했다. 자신의 입술을 벗겨버리고 도 싶었다. 그와 접촉했던 순간의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스테파니를 진퇴양난에 빠뜨린 제이크는 문득 캐시의 방문을 받았다. “공식방문이 아녜요. ”데니스를 사랑하게된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하퍼사의 주식을 당신이 어 디서 구했는지 아직 의심하고 있어요.”“알려 줘서 고맙군.”“오해 마세요. 내 가 발각되면 당신도 마찬가지예요.”“컴퓨터 경로를 검색하려면 몇 주는 소요 될 테고 그때쯤이면 상관없어.”그는 자신만만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랑에 빠져 그에게 아낌없이 주었던 생각을 하자 캐시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 배반자가 동생이라는 걸 회장님께 알려주고 싶어요.”“설마…….”“그럴까요? ”“며칠 후에는 내가 회장이 될 거야.”“상관없어요.”의외로 담담한 그녀의 반응에 제이크는 내심 놀랐다. “우린 친구 이상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었던 가?”“우리가 끝난 걸 한 순간도 후회해 보지 않았어요.”어처구니없어진 제이 크는 짐짓 안타깝다는 듯이 그녀의 가장 약한 부분을 넌즈시 건드렸다. “솔직 히 그 동안 네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망할 자식!”제이크는 능글맞게 웃 었다. 그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제스처였다. 설혹 캐시가 뺨을 갈겼어도 그는 하퍼사를 거머쥐기 위해 빙글빙글 웃었을 것이다. “데니스에게 우리의 과거를 어떻게 설명할 셈이지? 질리의 주식보다 그걸 먼저 설명해야 될 텐데?……”캐 시의 얼굴이 가벼운 경련을 일으켰다. 다음 날 제이크는 사라가 일하는 타라의 상실까지 하퍼사의 이사자격으로 나타났다. 그는 스테파니에게 나머지 2퍼센트 의 주식을 어디서 구했는지 저녁식사에 응하면 밝히겠다며 유혹의 미끼를 던졌 다. 스테파니의 마음의 동요를 느꼈다. 2퍼센트의 주식의 출처에 대해 의심가는 데가 분명히 있었다. 그게 사실로 판명되며 대책을 강구할 수도 있었다. 질리를 심중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만나시려는 건 아니죠?”사라는 크게 걱정했다. “나도 모르겠다.”이 무렵 빌리 내외와 캐시는 거의 비슷한 문제 때문에 고민 하고 있었다. 톰과 사라가 사귀는 문제에 대해 빌리 내외는 안절부절 못했다. 모 든 비밀을 스테파니에게 밝혀야 했지만 적당한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들이 더 이상 깊숙한 관계에 빠지기 전에 알려야만 했다. 톰과 사라는 태어날 때부터 서 로 사랑할 수 없는 관계였다. 캐시는 용기를 내어 데니스에게 과거를 밝히려 했 지만 번번이 기회를 잡지 못했다. 무엇보다 데니스 편에서 전혀 그녀를 의심하 지 않았다. 그리고 이야기를 꺼내려 할 때마다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톰과 사라 가 아니면 안젤로 등이 불쑥 나타나 기회를 놓쳐버리곤 했다. 스테파니의 생각 은 점차 방향이 바뀌어갔다. 하퍼사와 댄의 사이에서 한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 던 것이다. 마지막까지 막아보려던 제이크가 결국 이사자리를 확보한 데 대한 일종의 패배감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잠시 머리를 식히고 그 동안의 긴장으로 잃 어버린 사랑도 되찾고 싶었다. 사라를 통해 제이크가 스테파니를 저녁식사에 초 대했다는 사실을 들은 데니스는 즉시 에덴으로 달려왔다. “그것 때문에 왔어요. ”“너도 그럴 거니? 샌더스 얘기라면 듣고 싶지 않다.”“아네요. 엄마는 그 정 돈 분별력이 있는 분인 걸요.”스테파니는 이 순간처럼 데니스가 믿음직스러웠 던 적도 없었다. “그는 위험한 존재예요. 제가 손을 쓰고 싶어요.”“치사한 방 법은 싫다. 우린 한 번도 그러지 않았어.”“알겠어요. 단지 조사만 하게 해 주 세요. 그에게도 약점은 분명히 있을 테니까요.”“전에도 해 봤지만 별 소득이 없었어.”“그때는 열심히 하지 않았어요.”그러던 데니스는 문득 스테파니에게 다가서며 한쪽 손을 자고 다른 팔을 그녀의 허리에 둘렸다. “너 지금 뭘 한?” “춤 배운 걸 가르쳐드리겠어요.”“그렇다면 기꺼이 응하지.”스테파니는 천진 한 소녀처럼 기뻐하며 신고있던 구두를 벗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스테파니 하퍼 여사님.”뜻밖이었다. 기대도 희망도 갖지 못했었다. 굉장히 오랫만에 행복 한 순간에 뛰어든 스테파니는 데니스의 솜씨를 칭찬했다. “교습이 효과가 있었 구나. 정말 잘 추는데!……”그때 데니스가 넌즈시 물었다. “댄만큼요?”“오, 데니스……”대의 이야기에 스테파니는 갑자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이 순간 만 큼은 다른 어떤 문제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함에서의 슬픈 마음을 느꼈다. 아들 은 어머니의 마음을 누구보다 빨리 읽어냈다. “무슨 일이에요. 뭔가 잘못되어 가는 것 같은데?”“넌 댄을 싫어하니까 듣고 싶지 않을 거야.”“내 감정이 어 떻든 두 분이 사랑하시는건 알아요. 그리고 결혼을 지키는 방법은 하나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그것은 설득이 아니다. 스테파니 편에서 간곡히 원하던 문제 였다. 결혼을 지키는 방법, 즉 사랑을 되찾는 방법이 하나뿐이라는 아들의 말은 그녀를 크게 감동시켰다. “그래, 날 공항까지 데려다 주겠니?”“그럼요.”데니 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선뜻 대답했다. 이 순간처럼 어머니와 아들이 한마음이 됐던 적도 없었다. 어머니의 사랑을 되찾아 주고 싶은 아들의 마음과 그걸 가슴 깊이 느끼는 어머니였다. 하지만 이미 닥치고 있는 하퍼사의 위험은 훨씬 심각 했다. “내가 하지.”예고도 없이 불쑥 들어온 질리가 데니스를 대신하겠다고 자 칭했다. 스테파니를 공항까지 테워다 주는 동안 질리는 놀라운 사실을 들었다. 제이크와 스테파니가 2퍼센트의 주식 출처 문제로 저녁약속이 되어 있었다는 사 실이었다. 제이크가 만일 진실을 털어놓았다면 하는 생각에 질리는 현기증이 핑 돌 정도였다. 그녀는 약속을 못 지키게 된 스테파니 대신 제이크를 방문했고, 제 이크 저녁준비르 막 끝내고 스테파니를 기다리던 참이었다. “스테파니를 왜 초 대했죠?”“말 않던가?”“비행기 시간이 촉박해서 그럴 겨를이 없었죠.”“그 렇다면 비밀로 하겠어. 기왕 저녁이 준비됐으니 지금부터 당신이나 유혹할까?” 질리는 제이크의 표정을 낱낱이 읽었다. 결과적으로 다행이지만 그야말로 시한 폭탄 같은 존재임을 새삼 가슴에 새겼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떤 짓도 서 슴지 않을 질리지만 제이크 역시 그에 못지 않은 존재로 느껴졌다. 빌리 내외가 크게 고심하는 중에도 톰과 사라는 다시 만나기 시작했고 오히려 더욱 가까운 사이로 발전했다. 공원에서 그들은 어린시절을 떠올렸고 다시 서로의 사랑을 확 인하며 키스로 간절한 마음을 대신했다. 질리는 제이크가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 에 더욱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에게 눈돌릴 겨를조차 허용하면 안 된다는 생 각에 어느때보다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애썼다. “이해할 수 없게도 모 두들 언니가 좋대요.”그녀는 재빨리 제이크의 반응을 살폈다. “남자에겐 분명 히 보이지.”“그게 뭔지 말해 줘요.”“개성적이고 매력있고……지적이고 도전 적이지.”“그녀가요?”질리는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질투심으로 스테파니의 개인적인 비밀을 서슴없이 털어놓았다. “난 그녀와 함께 자랐지만 언제나 수동 적이었어요. 18세 때에 이미 임신도 했고요, 모르셨어요?”“몰랐어.”제이크는 별로 놀라거나 실망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질리는 더욱 약이 올랐다. “애가 태 어나자마자 아빠가 유럽으로 보냈어요. 몇 달 후에는 나도 유럽으로 보내졌죠, 위로해 주라고.”“위로?……”“애가 죽었거든요.”“정말이오?”“못 믿겠죠? ”그 정도면 스테파니에 대한 제이크의 호감이 훨씬 줄었으리라고 믿었다. 제이 크 정도면 18세에 이미 사내와 관계해서 아이까지 낳은 여자를 좋아할 리 없다 고 생각했다. “그년가 18세에 뭘 했건 무슨 상관이오. 날 혼란시킬 생각은 안하 는 게 좋아.”“제가요?”질리는 크게 실망했지만 여전히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 았다. “그녀는 정말 안 오는 거요?”“분명해요. 그리고 당신도 조심하세요. 제 이크.”“당신도, 질리.”“그녀한테 주식을 준게 나라는걸 밝히려 했죠?”“스 테파니가 그랬소?”“그럼 아니란 말예요?”이들은 웃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서로를 예민하게 경계했고 한치도 허점을 보이지 않으려고 거의 필사적이었다. “그건 불러내려는 미끼에 불과했소, 당신이 위험한 여자라는 걸 알려주려던 게 아니고.”“그걸 내가 믿겠어요?”제이크의 표정이 먼저 굳어졌다. “선택하라는 게 아니오. 다신 날 협박하지 마. 딱 질색이니까!”그의 경고에 대해 기가 꺾일 질리는 애당초 아니다. “내가 이미 경고한 걸 잊으면 곤란해요.”제이크는 금방 알아들었지만 역시 태연했다. 배신하는 사람은 쏴죽이는 습관을 가졌다던 질리 다. “그렉 마스던을 쏠 때보다 더한 건가?”그렉은 질리가 살해한 스테파니의 전남편이다. “당신 이제 보니 스테파니한테 반했군요?”“하퍼사의 경영권을 수중에 넣기까지는 아니오.”“지금이 그 기회예요. 그녀가 소중한 결혼을 지키 기 위해 떠나고 없거든요.”그녀의 이야기는 어쩔수 없이 원점으로 돌아왔다. 나 름대로 제이크가 하퍼사를 빼앗도록 하려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아 는데, 문제는 그녀를 섬에 얼마나 더 붙들어 놓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야.”최종 적인 결과와 관계없이 눈앞의 목표가 같은 이들은 분명한 견해차이에도 불구하 고 결국 의견의 일치를 보였다. “그 정도는 내가 처리할 수 있어요.”질리는 계 속 비밀리에 접촉하고 있는 올리브의 싸늘한 모습을 떠올렸다. “그렇겠지, 질 리.”제이크는 그녀와 올리브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듯이 빈정거렸다. 그게 사실 이라면 감방동기 여가 하나 믿고 함부로 설쳐대는 질리의 모습은 가소로운 꼴이 었다. 제이크는 스테파니에게 일어났던 두 차례의 사건이 질리짓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스테파니는 빌리와 톰에게도 알리지 않고 섬으로 떠났다. 하만 그들 역 시 회사의 위기상황을 감안해도 스테파니의 결혼을 지키려는 마음에 동정심과 함께 격려를 보냈다. 톰은 제이크를 이사로 임명시킨 2퍼센트의 주식에 대해 어 느 정도 윤곽을 잡았다. 그가 그 문제를 들추었을 때 캐시는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다. 처음부터 각오했지만 톰이 철저한 성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 식등록 건에 대해 얘기할 시간 좀 주겠소?”“잘못된 거라도 있나요?”제이크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면 벌써 새파랗게 질렸을 그녀였다. 이사가 된 제이크의 존 재는 그녀에게 다소나마 위안을 주었다. “지난 달 체계에서 누락된 부분이 있 어요.”“그게 언제죠?”“이틀 전.”“그럴 줄 알았어요, 컴퓨터가 다운 됐었거 든요.”“그럼 기초자료에서 뽑아야죠. 필요하면 수동작업으로라도.”컴퓨터에 대해서는 톰도 캐시만큼 익숙했다. “여러 날 걸릴 거예요.”“며칠 밤을 새워도 괜찮아요. 그 주식의 출처를 알아내야만 해요.”“제가 맡죠.”“무리한 부탁이 아닐까요?”“아뇨. 작동고장이니까 제가 하고 싶어요.”어떤 일이 있어도 그 작 업을 톰에게 남길 수 없었다. 비밀이 즉시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료를 급 히 내려보내라고 하겠소. 하나뿐인 자료니까 분실되지 않도록 하시오.”“조심하 겠어요.”2퍼센트의 주식 출처를 밝힐 수 있는 기밀서류가 그 조작자인 캐시에 게 넘어감으로써 하퍼사는 마지막 희생 기회를 놓치고 만 셈이었다. 한편 질리 와 야합한 제이크는 스테파니가 없는 동안에 목적을 달성할 결심이었다. 그는 24시간 내에 임시총회의 개최를 정식으로 요구했다. 그 요구에 대해 빌리는 절 망적이었다. 스테파니가 돌아오지 않으면 제이크에게 경영권이 넘어갈 것이 분 명했기 때문이다. 제이크는 나름대로 거의 확신했다. 카리스마적인 스테파니인 만큼 그녀가 참석하면 경영권에의 도전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녀가 현장에 없 을 경우 이사들은 위기에 처한 회사를 등지고 여행 떠난 그녈 옹호하지 않으리 라는 확신이었다. 질리에 대해서도 정리할 때가 임박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걱정 하는 안톤에게 분명히 선언했다. “이제 곧 질리와의 볼 일은 다 끝났네. 더 이 사 소용없게 되지.”“뒤를 조심하게.”안톤의 충고는 경고나 같은 것이다. 질리 는 악에 받치면 뒤에서 방아쇠를 충분히 당길 수 있는 여자라는 뜻이다. 스테파 니와 헤어져 혼자 섬에 도착한 이후 댄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졌다. 원주민 의 민속공연도 흥겹지 않았고 싱그러운 바다내음도 코 끝에 느낄 수 없었다. 주 위의 온갖 사물들이 어느 것 하나 그의 울적한 마음을 위로해 주지 못했다. 더 구나 그 섬은 그에게 가장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 준 곳이기도 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스테파니를 만나 사랑하게 됐었다. 섬과 함께 그녀를 인생의 최 고로 간직했던 추억이 생생한 곳인 만큼 댄의 현재 외로움은 견디기 어려운 것 이었다. 하퍼사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유야 어쨌든 스테파니와의 사이를 떼어놓은 직접적 원인이었다. 데니스와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는 사 실은 하등의 원인이나 문제가 되지 못했다. 텅빈 바닷가에 혼자 앉은 댄은 먼 수평선도 더 이상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낭만보다는 고독의 쓰라림만이 느껴진 탓이다. 그는 시선을 떨군 채 그림자처럼 앉아 있다가 무심코 천천히 고개를 들 었다. 그때였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다. 그다지 멀지 않은 물가 모래사장 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디에도 사람은 있을 수 있었다. 여자도 마찬가지였 다. 바닷가에 수영복을 걸친 젊은 여자가 있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모습이다. 그런데도 댄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댄을 향해 곧장 걸어오 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끌어당기듯 상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 의 거리가 좁혀졌다. 그리고 드디어 서로가 상대를, 특히 댄이 상대를 알아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앉았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말없이 다가서 며 서로를 힘껏 끌어안았다. 댄은 상대를 안아 번쩍 들고 몇 바퀴나 감격해서 돌고 또 돌았다. 숨막힐 듯 감격에 겨운 뜨거운 입맞춤으로 재회의 기쁨을 끝낸 댄과 스테파니는 아직 그 감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서로의 눈을 더듬었다. “ 마음을 바꿔서 기쁘오.”그는 감격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요. 하지만 당신 과 회사 둘 중 택일한 건 아녜요.”“그때는 그러기를 원했지만 지금은 상관없 소. 사랑하오.”“저도 사랑해요.”그들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궁금한 게 있 는데?”“뭐든지요.”“샌더스가 매력적이었소?”스테파니는 댄이 마음 소의 앙 금을 털어버리려는 것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건 맞아요. 하지만 그런 타입은 오래 전에 포기했어요.”솔직한 대답이었다. 그녀는 제이크에게 끌리는 점이 있 었다. 댄은 만나기 전에 사랑했던 사람과 이미지가 매우 닮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제이크는 죽은 그렉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렉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여보, 당신 혹시 제가 그와 잠자리라도 했을 거라고 의심하는건 아니죠?”“글쎄…….”“절 못 믿으세요?”“믿지. 하지만 당신이 내게 말해준 그렉이라는 사람과 샌더스는 어쩐지 비슷한 느낌이오.”댄 역시 그 렉의 이미지를 제이크로부터 느꼈기 때문에 스테파니를 쉽게 의심하게 되었었 다. “당신은 그렉과 결혼했고 그를 사랑했었을 게 아니겠소?”“그런 다시는 저지르지 않을 실수였어요.”그녀는 단호히 말했다. 처음부터 재산을 노리고 접 근한 그렉과 사랑에 빠졌던 과거는 분명히 그녀에게는 되새기고 싶지 않은 악몽 이었다. “당신을 잃는 건 견딜 수 없는 일이오.”그때 스테파니에게 전갈이 왔 다. 빌리로부터 급한 전화가 왔다는 것이다. 댄은 순간적으로 그녀의 표정을 살 폈다. 그러한 댄의 마음을 헤아린 듯 스테파니는 대뜸 거절했다. “전화가 또 오 면 연락이 안 된다고 하세요.”그녀와 댄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유쾌하게 웃어 젖혔다. 시드니의 하퍼사가 어떤 곤경에 빠졌는지 상상 못하는 천진한 웃음이었 다. 댄과의 사랑을 지키고 싶은 그녀지만 시드니에서 진행 중인 일을 알게 되었 다면 그렇게 웃지 못했을 것이며 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5. 최악의 상황 늦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엄마가 오셔야 되는데…….”데니스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오빠, 이번만은 엄마와 댄을 그냥 놔두면 안 돼?”사라는 하퍼사의 위 기를 아직 모르고 있었다.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하퍼사의 운명이 걸려 있 어…….”“그렇게 심각해?”“샌더스가 긴급 이사회를 오청했어. 속셈을 모르겠 니?”“그런 오빠와 톰이 막을 수 없는 거야?”사라는 당연하지 않는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톰은 오히려 나보다도 샌더스를 상대할 능력이 부족해.”사라의 얼굴에 노골적인 불만이 나타났다. “왜 항상 톰을 깎아내려? 그가 위협이 돼? ”“나는 하버드에서 공부하지 않았고 증권가에도 없었으니까.”데니스의 말투 에서 열등의식이 배어나왔다. 데니스는 톰이 신임을 얻고 있는 원인을 그러한 경력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빠는 데니스 하퍼야. 오빠 외에 누가 상속자가 되겠어.”“샌더스가 마음대로 하게 되면 상속자도 필요없게 되 겠지.”비로소 사라도 회사의 위기를 깨달았다. “그렇게 되면 안 돼. 제발, 오 빠. 오빠와 톰이 서로 친해졌으면 좋겠어.”“그렇겠지, 넌 그놈을 좋아하니까.” “그를 사랑해. 데니스는 사라를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진심이냐고 묻는 듯했 다. 사라의 조용한 눈빛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비록 톰이 싫더라도 여동생이 그를 사랑한다면 그로서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가 댄을 싫어하지만 스테파니와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인정해 주는 것과 같은 경우를 데니스는 이미 머리 속에 그렸다. 질리는 스테파니에 대해 위협을 느꼈다. 제이크의 태도에서 번번이 그럴 가능성을 본 그녀는 다시은밀한 계획을 진행시켰다. 하퍼사가 제이크의 수중에 들어갈 경우 쉽게 물러날 그녀가 아니다. 필립은 여전히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 었다. 질리의 속셈을 알리 없는 그는 이틀 동안의 출장에 대해 무척 미안해 했 다. 그가 자리를 비우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질리의 속마음을 꿈에도 모른 채. 필립이 출장차 막 집을 나서기 무섭게 올리브가 나타났다. 질리로부터 연락을 받은 그녀는 벌써부터 뒷문으로 잠입해서 필립이 나가기를 기다렸었다. “도움 이 필요해.”“어떤……?”“조사할 일이 있어. 스테퍼니는 결혼하기 전에 아이 를 낳았지.”“그런 얘긴 없었잖아.”올리브에게선 항상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 다. 생긴 모습부터가 범죄형인 그녀의 작고 째진 두 눈은 독수리의 발톱을 연상 시켰다. “그건 비밀이었거든. 댄이나 다른 가족이 혹시 알지 몰라.”“그 아이 를 찾으라는 거야?”“아니, 그 아인 죽었어. 필요한 건 그런 일이 있었다는 증 거야.”“왜?”“이젠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를 깨버릴 때가 됐어.”질리는 모든 면에서 철저하게 스테파니를 파멸시킬 작정이었다. 하퍼사뿐 아니라 그녀의 인 격적인 부분까지 철저히 파괴시키려는 것이다. “그거라면 어렵지 않지.”감옥에 서 꺼내준 데 대한 보답과 함께 뭔가 일을 꾸미지 않으면 안달이 나는 올리브였 다. 또한 올리브는 세상에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자신했다. “확실치 않은데, 임신했을 때 아버지가 화내셨었지. 가명을 썼을 테지만 출생지와 생년월 일을 내가 알아.”“좋아.”올리브야말로 질리에게는 완벽한 해결사였다. 매번 지나치게 문제를 확대시켰지만 질리에겐 그것이 득이 되었다. 어떤 경우에도 직 접 손쓰지 않았기 때문에 안심이었고, 문제가 클수록 파문도 커지는 법이다. 질 리의 음모와 함께 하퍼사의 위기도 속속 임박했다. 모처럼 댄과의 사랑을 확인 한 스테파니는 시드니를 거의 잊고 있었다. “정말 시드니에 전화 안 해도 괜찮 겠소. 애들 일인지도 모르는데?”“아뇨. 그보다 우리 둘만 있는 게 좋아요.”그 녀는 더 이상 하퍼사의 여회장이고 싶지 않은 듯했다. 중년여성이며 정열적인 그녀는 모처럼 되찾은 사랑의 향연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하퍼사와 더불어 정 신적이며 육체적인 사랑도 그만큼 인생의 중요한 몫임이 분명했다. 하퍼사에 제이크의 압력과 질리의 음모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스테파니의 그같은 사랑에의 몰입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제이크는 이미 하퍼사의 경영권을 넘겨받은 듯이 행동했다. 최근들어 제이크를 멀리하고 데니스와 가까워진 캐시는 양심의 가책 을 느꼈다. 그녀는 하퍼빌딩에서 데니스와 단둘이 만났을 때 마음을 결정했다. “톰이 문제의 주식 출처를 알아내라고 해서…….”“톰의 명령따윈 받을 필요 없어.”데니스는 하퍼사를 그토록 걱정하면서도 톰에 대한 질시를 앞세웠다. “ 그게 문제가 아녜요.”“그럼 뭐가 문제지?”“내가 알아내려는 것은 문제의 주 식이 위장된…….”결정적인 순간에서 캐시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렇지 않았 으면 최종 2퍼센트의 주식은 질 리가 제공한 것임이 밝혀지고 하퍼사는 위기에 서 극적으로 탈출할 수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미리 짐작하고 막으려는 듯이 제 이크가 예고도 없이 그 장소에 불쑥 나타났다. “미안하군. 아무나 출입하지 않 게 하려면 문을 닫아야지.”영문을 모르는 데니스는 캐시를 밖으로 내보냈다. 톰 에 대한 경쟁심 때문에 하퍼사를 구할 수 있는 것는 가장 귀중한 정보를 놓쳤다 는 사실을 그는 꿈에도 몰랐다. “회의는 내일이라는 걸 모르셨나요?”“어머니 도 그걸 아시면 좋겠군.”“오실 거예요.”“자신있나? 열대지방의 통신사정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잘 알 텐데?”사실상 스테파니에게 연락조차 못한 상황에서 데니스는 안간힘을 다해 태연을 가장했다. “필요하다면 비행기를 띄워서라도 모셔와야죠.”“그건 너무 낭비야. 이사회에서 그런 낭비를 좋아할까? 특히 그녀 가 돌아오지 않겠다고라도 한다면?”데니스는 느낌으로 자신이 제이크에게 한 수 뒤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제이크의 확신에 가득찬 태도에 비해 그는 아직 모 든 준비가 불투명한 상태였다. “무슨 일인지 아시면 틀림없이 오실 거예요.”“ 자넬 위해서라도 그랬으면 좋겠군. 경영권이 나에게 넘어오면 자네 자리도 위태 롭지 않겠어?”데니스는 빙글 웃고 돌아서서 나가는 제이크의 뒷모습을 노려보 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당장 달려가 한 방 먹여 주고 싶은 충동은 물론 전신의 피가 역류하는 것을 느꼈지만 무엇 하나 할 수 없었다. 또한 스테파니에게 끝내 연락이 안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더욱 그를 초조하게 했다. 발리와 리나 내외 의 말 못할 고민에도 불구하고 톰과 사라는 다시 깊은 사랑에 빠졌다. 그들이 걱정하는 부분만 아니면 그들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아름답고 상냥한 사 라와 장래가 촉망되는 톰의 결함은 누가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그들은 스테파니 가 여행을 떠나고 있는 에덴에서 그들만의 시간을 즐겼다. “그 애들이 오늘 에 덴에서 저녁을 같이 먹는대요.”리나는 어쩔 줄 몰라 불안에 가득찼다. “하느 님, 제발 그애들이…….”빌리는 다음 말을 잊지 못했다. 그의 절망적인 표정으 로 미루어 톰과 사라는 결합에는 근본적으로 숨겨진 문제가 있음이 분명했다. 젊은 그들이 저녁을 함께 먹으면 거기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에덴 은 비어있었고 둘 다 근본적인 문제를 모르기 때문이다. “에덴에 전화해 봐야 겠소, 혹시 모르니까.”그는 서둘러 에덴의 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사라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행복에 빠진 톰은 이미 짐작이나 한 듯 전화를 받지 않아서 빌리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와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톰과 사라는 에덴에서 밤을 함께 보냈다. 이튿날 아침 톰은 에덴의 수영장에 있었고 사라와는 이미 완전한 하나가 되어 있었다. 사라는 기 꺼이 순결을 주었고 톰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청년이 되어 숭고하게 받아들였 다. 즐거운 아침을 맞이한 사라는 말투부터 바뀌었다. “이사회에 가셔야 되지 않아요?”그녀는 자신이 톰이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더할 수 없는 행복을 느 꼈다. “난 선거권도 없고 컴퓨터 결과가 없는 한 불필요한 존재야. 그 보다 여 기가 정말 좋아.”그때 집사인 로버트가 전갈을 가져왔다. “맥매스터 부인이 전 화로 톰을 찾으셔서 찾아보겠다고 했어요.”빌리의 아내이며 톰의 어머니인 그 녀는 지난 밤 거의 한 잠도 이루지 못하며 노심초사였다. “어머니와 통화하고 싶어요?”사라는 따스한 눈빛으로 톰을 응시했다. “나중에 하지.”그의 말에 사 라는 로버트에게 넌즈시 당부했다. “찾아보았지만 없다고하세요.”“알겠습니 다, 아가씨.”로버트는 두 젊은이의 스릴있는 사랑게임에 동참한 듯한 기분으로 웃으며 돌아갔다. 한편 섬의 스테파니에게 위기가 알려진 것은 이튿날 아침, 그 것도 위험이 고조에 달했을 때였다. 댄과 함께 있던 그녀는 섬을 향해 급하게 돌진해오는 보트를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당신만 행복하시면 다 시는 하퍼사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어요.”그녀는 분명히 말했다. “그렇게까지 할 건 없고 우리가 함께 있는 시간만 많으면 좋겠소.”스테파니의 지나친 확신 은 떨쳐지지 않는 불안감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그랬다. 그녀는 시드니의 하퍼사 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배에서 내 리는 사람을 보며 다시 말했다. “아무리 급한 연락이라도 받지 않겠어요.”그것 역시 회사일에 마음이 이끌리는 데 대한 강한 부정이었다. “받아보구료, 애들인 지도 모르는데.”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외딴 섬에까지 와있는 스테파니에게 연락 이 온 것으로 미루어 시급한 일임이 분명했다. 보트에서 내린 사람에게서 스테 파니는 급히 수화기를 건네받았다. 그들이 투숙한 호텔에서는 전화선을 가까운 섬까지 연결하여 긴급사태에 응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샌더스가 긴급 이 사회의를 요청했어요. 자신있나 봐요.”데니스의 보고에 스테파니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그가 회장직을 노려? 그거 확실한 거니?”“엄마가 투표하지 않으 면 그가 앉게 돼요.”스테파니는 더욱 다급해졌다. “언제 회의 시작이지?”“20 분 후요.”“좋아, 전화를 회의실 내 자리에 놓거라, 여기에서 유선으로 참석할 테니까.”“그럴께요. 빌리도 하고 싶은 얘기가 있대요.”“그래, 바꿔라.”곁에 서 듣고 있는 댄도 같이 초조해졌다. 전과 달리 스테파니를 이해한 탓이다. 하지 만 그들이 예측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전화가 갑자기 뚝 끊어졌다. “여보 세요! 데니스?……”이미 불통이 되고 말았다. 질리의 지시에 따라 그곳까지 따 라온 올리브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전화선을 단칼에 끊어버린 것이다. 당황한 스테파니와 댄은 까닭을 추적할 겨를도 없이 해변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다른 전화는 보트로 30분 거리에 있었다. “해낼 수 없을지도 몰라요.”그녀는 정신없 이 뛰면서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노력을 해 봐야지.”상황파악을 한 댄도 스테 파니를 위해 적극적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이미 예고된 불행은 그들을 향해 입 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전화선을 끊어 사실상 스테파니의 참석을 좌절시킨 올 리브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질리의 복수심과 올리브 자신의 천성적인 잔 인함이 가세한 결과, 올리브는 스테파니와 댄을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의 늪 속에 밀어넣을 준비를 완벽하게 끝내놓고 있었다. 전화가 있는 섬을 향해 보트는 전 속력으로 달렸다. 긴장된 채 앞만을 응시하며 보트에 타있는 스테파니와 댄은 출발 때부터 그들이 탄 배에서 가솔린이 펑펑 새어나오고 있음을 볼 수 없었다. 한편 섬과 갑작스런 연락두절에도 빌리와 데니스는 끝까지 버텨볼 요량으로 회 의실의 회장자리에 특별히 전화기를 설치하였다. “어떤 경우에도 이 전화는 사 용치 말게, 스테파니가 전화로 회의에 참석해야 되니까.”“연락이오면 말이죠? ”데니스는 이미 불안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엄마라면 능히 해낼 거야. 그때까 지 버텨야만 해.”회의실 문이 열리며 연락받은 이사들이 속속 들어섰다. 빌리는 그들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도날드 경, 급히 드린 연락인데 이렇게 와 주 셔서 감사합니다. 빌리는 이사들 중에 가장 나이 많은 도날드를 내심 의지하고 싶었다. 제이크는 어느 때보다 의젓하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스테파니 하퍼께 서도 오시는 거죠?”빌리는 속에서 울컥 치솟는 적개심을 재빨리 억제했다. “ 전화로 참석하신 답니다. 회사규정상 보장된 항목입니다.”“그런 수고를 하시다 니, 회의주재자가 필요한대요.”제이크는 일말의 불안을 느끼는 듯 빈정거렸다. 빌리의 말대로 라면 작전은 실패할 것이 분명했다. “설마 당신이 회의를 주재 할 생각은 아니겠죠?” 제이크는 어쩔 수 없이 불안해 하는 데니스를 여유있게 바라보았다. “그럴 생각은 없네.“스테파니와 댄이 유출되는 기름으로 인한 폭 발 직전의 보트에서 전화만을 신경 쓸 때 끝내 회의는 속개되었다. 제이크의 추 천과 빌리의 동의로 도날드가 회의의 회장직을 대행했다. ’회의를 시작하죠. 샌 더스 씨. 임시회의를 소집한 이유를 설명해 주시겠소?”“현재의 회장인 스테파 니 하퍼의 불신임을 논의하고 싶습니다.”“그 안건이 통과되면 새회장을 뽑아 야 되는 것도 알고 있소?”데니스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물론 알겠죠?”그는 빌리 쪽을 바라보았다. 그와 빌리는 스테파니의 전화를 기다리며 최대한의 지연 작전을 써야만 했다. 총지배인의 자격으로 가능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상 대는 교활하고도 치밀한 제이크 샌더스였다. “이사 여러분, 진행하기 전에 스테 파니를 대신해 말씀 드릴까 합니다…….”제이크의 입가에 여유있는 미소가 돌 았다. “저는 스테파니의 아버님이신 맥스 하퍼 씨가 회장님으로 계실 때 이 회 사에 들어왔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있었지만, 이 회사는 스테파니가 없으면…….”제이크가 빌리의 지연작전에 제동을 걸고 나섰을 때 에도 스테파니와 댄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보트 위에 있었다. 이미 시간 경과로 스테파니는 거의 절망에 빠져 있었지만 그보다 더욱 심각한 사태가 코 앞에 닥 친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 같으니 그만 투표를 시작할 까요?”제이크 역시 당당한 이사였기 때문에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도날드 는 빌리와 데니스 쪽을 바라보았지만 그들도 속수무책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스테파니 하퍼 현회장의 불신임안 투표에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찬성하시는 분 은 손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당연히 제이크가 먼저 손을 쳐들면서 맞은편에 앉은 다른 이사에게 시선을 보냈다. 이사들은 당황하며 비릴와 데니스를 바라보 았다. 분위기로 보아 제이크는 이미 자기 편을 확보해 놓은 듯했다. 제이크에 이 어 한 사람 또한 빌리와 데니스의 사야에서 벗어나있던 다른 이사가 손을 들어 세 사람의 찬성표가 나왔다. “이번에는 반대하는 분 거수하시기 바랍니다.”빌 리와 데니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쳐들었다. 그리고 임시대행한 도날드가 합 세했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하는 진영의 패배였다. “3대2로 내가 이긴 것이 아 닌가요? 동점일 경우에만 중역의 표가 가산되죠?”그가 말하는 ‘중역’은 데니 스를 지칭했다. 그는 상속자이지만 이사직을 갖지 못했다. “어머니가 반대표를 던질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제이크는 노골적인 비웃음을 나타냈다. “추측은 안 되죠. 연락이 없으니 그녀는 기권입니다. 회사의 규정을 다시 확인하세요. 빌 리와 도날드는 할 말을 잃었다. 특히 빌리는 평생 몸담고 열심히 일해온 하퍼사 가 제이크에게 넘어간 절망감에 정신이 아찔했다. 바로 그때 스테파니와 댄은 결정적인 사태에 직면했다. “보트에서 뛰어내려! 빨리!”뒤늦게 기름 유출을 발 견한 댄이 처절하게 부르짖자 스테파니는 반사적으로 물로 뛰어들었고, 동시에 그들이 타고 있던 보트는 요란한 폭음을 내며 폭발하고 말았다. 스테파니와 댄 의 모습은 치솟는 화염이 집어 삼키고 있었다. 시드니의 하퍼빌딩에서는 새로운 회장이 탄생했다. 빌리와 데니스의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제이크의 승리로 끝났 다. 제이크 샌더스의 기회포착이 적중했고 불행하게도 그가 회장자리에 앉는 것 과 동시에 스테파니는 댄과 함께 망망대해에서 치솟는 불길 속으로 모습을 감추 고 말았다. 하퍼사의 신임회장이 된 제이크가 들이닥쳤을 때 질리는 깜짝 놀랐 다. “필립이 돌아올 시간이에요.”제이크는 어느 때보다 차갑게 그녀를 대했다. “오래 걸리지 않아.”“웬일이세요?”“잘 아실 텐데, 스테파니 일을?”“이번 엔 또 뭔데요?”“죽었을지도 몰라.”“무슨 소리예요?”질리는 눈이 휘둥그래 졌다. “사고가 있었어, 아주 적절한 보트폭발사고지. 그 일이 만일 너와 관계된 거라면 목을 비틀어버리겠어!”제이크는 단순히 위협만 하는 게 아니었다. 질리 는 그가 그러고도 남을 상대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당신을 만난 외에 난 집에 만 있었는데 무슨 소리예요. 왜 스테파니를 없애려 했겠어요? 네 계획도 그런 게 아녜요. 회장이 되더니 돌변한 거 아녜요? 이번만큼은 그녀도 진심이었다. 올 리브에게 스테파니를 죽여달라고 부탁한 적은 없었다. 그때 필립이 출장에서 돌 아왔다. “샌더스 씨?……”필립은 크게 놀라며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가려던 참입니다, 스튜어트 씨.”제이크는 홱 나가버렸고 질리의 교활한 연극이 시작되 었다. “어휴, 저 지겨운 남자!”“저 사람 여긴 웬일이요?”질리는 필립의 눈 치가 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느끼면서 모르는 척했다. 여느 때 출장에서 돌아오 던 모습이 결코 아니었다. “스테파니와 댄이 실종을 알려 주려고 왔어요.”필립 이 노골적으로 불쾌해 했다. “그 사건은 내가 당신한테 알려주려 했는데 연락 이 안 되더군. 두 대체 그 동안 어디 있었소?” 하지만 그 정도 가지고 눈썹 하 나 깜빡할 질리가 아니었다.줎“필립, 또 시작이군요?”“어젯밤 계속 전화해도 없던데, 어디 갔었소?”질리는 다시 그녀 특유의 역습을 감행했다. “절 의심하 는 거예요”언제나 그렇듯이 필립은 그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아니, 그저… ….”“당신은 질투심이 강한 남편이군요. 불쌍한 스테파니…….”질리는 낮게 중얼거리며 필립의 품에 안겼고 필립은 벌써 그녀의 입술에 넋을 빼앗겼다. 6. 절망적인 사랑 섬 주변 해안 일대에 대대적인 수색작전이 펼쳐졌다. 데니스와 사라가 거처를 섬으로 옮겼고 해안경비대 요원과 행동을 같이 했다. 특히 데니스는 직접 수색 작전에 가담해서 그 일대의 해안을 철저하게 찾아보았지만 아직 이렇다할 흔적 조차 찾아내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결과가 그뿐입니다.”해양경찰대의 장교는 공연히 송구스러운 표정이었다. “뭔가 어떤 표시같은 거라도 있겠지요. ”사라의 초조한 말에 장교는 그 일대가 자세히 표시된 지도를 짚어가며 설명했 다. “이 일대와 큰 섬 사이를 반복 조사했습니다,”데니스도 절망적으로 말했 다. “없어. 파견 조각 하나 없어. 내일은 어떻게 할 거죠?”“동이 트자마자 시 작할 겁니다.”“비행기가 더 필요해요.”“저희가 소유한 비행기는 총동원했습 니다.”데니스는 장교의 답변에 불만을 나타냈다. “인원도 기구도 더 증대해요. 시간이나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사라가 잔뜩 불만을 털어놓는 데니스에게 눈 치를 주었다. “오빠, 최선을 다하고 계시잖아.”사라와 데니스는 똑같은 심정이 었다. 데니스는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냈고 사라는 그녀답게 속으로 불안을 삭히 며 참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스테파니와 댄의 실종은 점점 더 묘연해졌다. 연일 수색작적이 계속됐지만 증거품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이번 사건을 통해 그들 남매는 스테파니에 대한 사랑을 재확인하였다. “진정해. 그런다고 좋을 거 없 어.”숙소에 돌아왔을 때 사라는 연거푸 들이키는 데니스의 술잔을 빼앗았다. “ 왜 엄마를 이곳에 오시도록 했는지 모르겠어.”데니스는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그건 엄마의 결정이었잖아.”“우리 모두 댄에게 가라고 부추겼는데…….”“ 전부 그랬지. 행복해지시길 원했으니까.”“못 찾으면 어떡하지?”사라는 데니스 의 눈에 나타난 절망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퍼사가 제이크에게 넘어갈 때에도 그만큼은 절망적이지 않았던 그였다. 한편 시드니의 제이크도 가만히 있 지 않았다. “구조반에 연락해서 온갖 수단을 동원해 꼭 찾으라고 하시오. 그리 고 힐러리, 국무총리와 연결해 줘요. 압력을 넣도록 해야겠소.”호주 제일의 그 룹인 하퍼의 신임회장이 된 제이크는 못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이상 할 정도로 스테파니의 실종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질리와 달리 그녀를 기필코 찾아내겠다는 듯이 동분서주하였다. 빌리와 리나의 크나큰 걱정에도 불구하고 사라와 톰의 관계는 더욱 깊어갔다. 데니스와 함께 섬에 가 있는 사라는 톰이 더욱 그리웠다. 어려울 때에 더욱 절실한 게 사랑하는 톰의 위로와 격려였다. 톰 은 수시로 섬에 장거리 전화를 해 사라를 위로했다. 떨어져 있는 동안 그들은 같이 있을 때보다 더욱 상대를 필요로 했다. 한편 제이크의 참모이며 수석공신 인 안톤은 중요한 업무도 망각한 듯이 스테파니의 소식에 열중하는 제이크의 모 습에 적지 않은 우려를 표했다. “스테파니 걱정을 그렇게 하다니 자네답지 않 아, 제이크.”“형이 그녀에게 빠졌던 이유를 이해할 것 같아?”“내가?”제이크 는 문득 소리내어 웃었다. “내가 그런 실수를 한 적 있던가?”안톤은 그래도 믿을 수 없었다. “지금까진 없었지, 하지만 선택해야만 될 일은 안 생겼으면 좋 겠네.”“그녀와 형에게 했던 약속 사이에서 말이지?”“그래.”“그럴지도 모르 지…….”제이크와의 대화는 안톤을 더욱 걱정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제이크가 사랑에 빠진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더구나 상대는 바로 스테파니였다. 자칫 지금까지의 온갖 노력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하퍼사의 경영 문제와 스테파니의 실종 등 굵직한 문제와 더불어 또 한 가지의 당연한 고민이 빌리 내외를 괴롭혔다. 스테파니에게 먼저 알려 그녀 스스로 처리하도록 하려던 빌리의 생각이 그녀의 실종으로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도저히 안 되겠소. 당 장 말해야지.”“좀 보류하면 어떨까요? 불쌍한 사라가 어떻게 될까……!”리나 의 마음은 한없이 아팠다. 어머니를 잃은 사라에게 실연의 아픔까지 더해줄 것 이기 때문이었다. “이건 스테파니의 생사와는 관계없는 문제요.”“왜 이 지경 이 될 때까지 내버려뒀는지…….”“그나저나 그게 사실이요?”“그래요.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어요?”리나가 안타깝게 말할 때 톰이 거실에 들어왔다. ”안 녕히 주무셨어요? 누가 사랑한다고요?”빌리는 어느 때보다 엄숙한 표정으로 톰 에게 다가가 대뜸 물었다. “너 사라와 함께 잤냐?”톰은 아직 영문을 몰랐다. “잘 아시잖아요. 그리고 비밀로 할 생각도 없어요.”“우리가 참견할 일이 아니 라고 하겠지만, 너희들 둘이…….”빌리가 엄격하게 다그쳤다. “같이 잤느냔 말 이다!”톰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지금 보고 있는 상태는 그 동안 생각 해왔던 아버지의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아들의 연애에 지나친 참견이나 하는 고집스러운 노인이었다. 아들이 하퍼사의 회장 딸과 사귀는 일에 겁내는 졸장부 처럼 보였다. “죄송해요. 대답할 필요성을 못느껴요.”그는 불쾌한 모습을 감추 지 않았다. “톰, 엄마가 내가 묻고 있지 않니.”톰은 더욱 불쾌해졌다. “대답했 잖아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구요.”“좋다. 앞으로 사라 하퍼와 만나는 걸 금 지하겠다.”빌리의 엄중한 명령에 대해 톰은 노골적으로 반발했다. “우리 사이 를 막으실 수 없습니다. 계속 만나겠어요.”톰은 돌아서서 나가버렸다. 뒤에 남 은 빌리는 갑자기 절망의 늪에 빠져든 사람처럼 리나를 바라보았다. 리나는 완 전히 겁에 질린 표정인 채 눈물이 글썽거렸다. 톰과 사라가 사실상 남매라는 사 실을 이해시키지 못한 자신을 통탄하는 빌리의 모습은 슬프고 처절한 것이었다. 데니스는 연일 구조대와 행동을 같이 했다. 한 시간이 그에게는 하루보다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그에겐 하퍼사도 안중에 없었다. 어머니를 찾고 싶을 뿐, 다른 어떤 조건도 필요없이 다만 사랑하는 어머니가 어딘가에 살아 있어 주기를 간곡 히 기원했다. 보트의 폭발과 함께 의식을 잃은 스테파니는 파도에 밀려 멀리 떨 어진 해안으로 떠내려갔다. 그리고 모래사장에 의식불명인 채 쓰러져 있었다. 대 대적인 수색작업에도 불구하고 이곳만은 비켜간 것이다. 구조대는 원주민들로 구성되었고 데니스도 이에 합류하였었다. 수색헬기는 스테파니가 쓰러져 있는 지점을 교묘하게 비켜서 지나쳤고 경비행기도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데니스 와 함께 스테파니가 쓰러져 있는 지점 가까이 접근했던 장교가 문득 발길을 돌 렸다. “왜 그러는 거요?”“다시 한 번 되돌아 보려는 겁니다.”“다른 섬들도 모두 조사합시다.”“그럴 만한 인력이 없어요.”“다시 한 번 조사해 볼 필요가 있을 갑니다.”“죄송합니다.”그때 데니스는 갑자기 무엇인가 느껴졌다. 이 날 은 무언가 꼭 발견할 것 같은 예감이었다. “가능성이 없는 뜻입니까?”장교는 고개를 저었다. “계속 찾아봅시다.”그때였다. 데니스는 무엇에 끌린 듯이 시선 을 앞쪽으로 가져갔다. 그 동안 이 지점에는 한 번도 와보지 않았었다. 정면으로 약 5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문뜩 한 물체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데니스는 숨 을 죽였다.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파도에 휩쓸려 올라온 것은 분명한 나무토막 이었다. 그리고 그위로 새하얀 손이 얹혀져 있었다. 다음 순간 데니스는 그곳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그의 발견을 정확했다. 나무토막 뒤쪽의 모래밭에 스 테파니가 즉은 듯이 누워있었다. “여기예요! 빨리!”“엄마!”스테파니는 가까 운 병원으로 급히 옮겨갔다. 다행히 치명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탈수증과 정신 적 충격이 심하지만 곧 괜찮아질 겁니다.”의사의 검진에 사라는 안심하면서도 불안한 듯했다. “확실한가요, 사고가 있었다는데?”“전부 확인했어요. 아주 운 이 좋았습니다.”“감사합니다.”데니스와 사라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기 쁜 눈빛으로 마주보았다. “댄도 그 근처에 있을 데니까 찾으러 가겠어.”어머니 의 안전을 확인한 데니스는 다시 댄을 걱정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새롭게 깨달은 데니스는 댄의 존재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엄마가 깨어 나시면 댄에 대해 뭐라고 말씀드리지?”“모르겠어.”이들은 스테파니가 의식을 되찾은 후 댄에 실종된 사실을 알면 다시 절망에 빠질 일이 두려웠다. 스테파니 가 댄을 찾아오지 않았으면 애당초 이번의 사고도 없었을 게 분명했다. 보트사 고 역시 질리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의도는 스테파니를 죽이려는 게 아니었다. 단지 스테파니를 섬에 더 붙들어 두고자 한 것이 올리브의 잔인성 으로 인해 일을 확대시킨 결과를 낳았다. 스테파니의 구조 소식은 제이크에게도 전해졌다. 그는 평정을 되찾았고 질리 역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제이크의 의심 과 달리 질리는 스테파니를 그렇게 쉽게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완벽한 이 미지를 산산조각으로 부순 다음 철저한 패배자로 만든 후 그 위에 자신의 존재 를 드러내는 게 그녀의 목적이다. 하지만 제이크의 마음은 질리보다 스테파니에 게로 기울고 있었다. 질 리가 찾아갔을 때 제이크는 전화로 막 소식을 전해들었 다. “스테파니는 괜찮다는군, 댄 마샬 박사는 아직 못 찾았고.”“좋으시겠군요. 슬픈 미망인이라……축배라도 들키까요?”제이크는 그녀의 조롱섞인 말을 가볍 게 받아넘겼다. “축하할 만한 일은 아니오.”“그럴까요? 언니가 충견인 댄을 떼어버리고 오는데 말예요? 환영파티라도 준비하셔야겠어요.”“그럼 당신은? 발 등을 찍을 작정이오?”“왜요? 이젠 우리가 하퍼사도 빼앗았고……무기력해 진 스테파니와의 싸움은 우리의 승리로 끝날 텐데요.”질리의 ‘우리’라는 표 현에 제이크는 조소를 보냈다. “우리? 이 동맹관계가 오래갈 걸로 믿으면 오산 이오, 질리.”“사랑싸움이라도 하자는 건가요?”자신이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할 때 질리의 두뇌회전은 비상했다. “그보다 당신이 의도하는 일에 난 더 이상 관 련되기 싫소.”질리는 제이크에 대해 잠시도 경계심을 품어보지 않았다. 칼날위 를 걷는 기분으로 항상 제이크와 겨루었던 것이다, “간단히 두 가지가 필요해 요. 한 가지는 타라의상실을 주세요.”“또 한 가지는?”“타라를 줄 건가요?” 그녀는 일목요연하게 짚고 넘어가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런 말은 한 적 없 는데.”“타라는 스테파니의 자랑이고 기쁨이며 행운이었어요, 처음 그녀의 복수 의 원동력이 됐던 곳이죠. 그걸 내가 갖겠어요.”“생각해 보겠소.”“두번째는 당신이에요. 그것도 지금 당장.”질리의 작전은 언제나 공식처럼 행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육체는 완전한 도구였다. “당신이 원한다면야…….”제이크 역 시 가중된 스트레스를 풀고 싶던 참이었다. 열 번이 아니고 계속 반복된다 해도 그것 때문에 약점잡힐 그는 처음부터 아니다. 그녀 쪽에서 스스로 유혹하는 것 을 거절할 그가 아니다. 질리는 자신의 육체를 최고의 무기로 생각하지만 제이 크의 생각은 달랐다.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그녀의 육체를 욕정의 배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극도의 쾌감을 느끼는 듯이 몸부림치는 질리의 농염 한 육체는 그에게 최고의 섹스 파트너에 불과했다. 스테파니는 의사의 검진대로 쉽게 의식을 되찾았다. 데니스가 들어갔을 때 곁에 있던 사라가 조용히 말해 주 었다. “기운이 없으셔. 조금 전 댄 얘길 했어.”그대 스테파니가 다시 힘없이 눈을 떴다. “데니스, 보트 폭발이 있었어. 댄은 어때? 말해다오.”데니스와 사라 는 어쩔 줄 몰라하며 마주보았다. 하지만 소녀처럼 간곡한 스테파니의 시선에 데니스가 어쩔 수 없이 사실을 밝혔다. “아직 못찾았어요.”사라도 끼어들었다,. “계속 찾고 있는 중이에요, 엄마.”“엄마가 발견된 그 주변을 다시 수색하고 있어요.”“찾아야 해. 꼭 찾아야만 해…….”스테파니는 애절할 정도로 간곡히 말했다.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데니스는 그 길로 해안경비대 의 구조본부로 달려갔지만 아직 어떤 소식도 접할 수 없었다. 구조반에서는 거 의 포기한 상태였고 이에 데니스는 화를 냈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그렇게 행복했는데……다시 사랑에 빠진 기분이었어. 내가 왜 그 전화를 하려고 했는지 ……!”스테파니는 댄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회상했다. “자책하지 마세요, 엄마. ”톰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사라는 어머니의 사랑을 어느 때보다 깊게 이해했 다. “그럼 누굴 탓하겠니. 샌더스? 아냐 하퍼사는 그럴 가치조차 없어.”사라는 그녀가 하퍼사를 그렇게 평가절하하는 말을 지금껏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사고 전까지 사라와 주위 사람들은 하퍼사와 스테파니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 었다. 한편 하퍼사의 경영진에선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빌리는 여전 히 총지배인 자리에 있었지만 마음은 제이크에게 전혀 주지 않았다. 톰과 캐시 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데니스만이 스테파니 실종사건으로 회사를 떠나 있었다. 회사 문제와 함께 톰과 사라의 제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빌리는 매 시간 긴장 속에서 지냈다. “말씀 드렸잖아요. 사라 얘기는 하지않겠어요.”톰은 시간이 갈수록 강한 반발심 드러냈다. “그래, 그만두는게 좋아. 스테파니와 얘 기하면 너희들 사이는 금방 끝날 테니까.”“자신하지 마세요.”사라와의 관계가 왜 문제되는지 알지 못하는 톰은 아버지의 일관된 고집에 환멸을 느꼈다. 그때 캐시가 들어왔다. “뭘 좀 찾았소?”톰이 묻자 캐시는 그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샌더스 씨는 컴퓨터를 잘 다루시더군요.”“그럴 듯한 말이군.” 빌리는 심상치 않은 시선으로 캐시를 노려보았다. “원천지를 추적할 수 없다는 뜻인가요?”“네.”질 리가 제이크에게 건네준 필립의 주식에 대한 문제였다. “ 그럼 샌더스는 영원히 감사하겠군.”빌리의 그런 말투에 톰이 이의를 제기했다. “아버진 캐시가 고의적으로 샌더스를 감싼다는 거예요?”“다르게는 설명할 수 없어.”“확실한 증거도 없이 증상은 말아 주세요.”톰이 비록 하버드 출신의 석 학이지만 빌리의 노련함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 동안 꾸준히 지켜본 결과 캐시 와 제이크가 무관한 사이가 아니라는 추측에 확신이 들었다. 이론과 원칙만을 내세우는 약관의 톰과 달리 그는 심증을 굳혔다. “당신은 당장 해고요, 존스 양. 증거만 잡혔으면 경찰에 연락해올 것이오.”“맙소사, 아버지…….”캐시 역 시 만만치 않았다. 그녀의 뒤에는 데니스보다 신임회장인 제이크가 버티고 있는 것이다. “공정성이라는 걸 모르세요? 적어도 샌더스 씨에게 물어는 봐야죠.”“ 뭐 하러, 놈은 사기꾼인데.”“그렇다면 내가 하죠.”그녀는 보라는 듯이 즉시 제이크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금 해고당했어요, 어떡하겠어요?”“숨 좀 돌리 고 얘기하지 그래.”제이크는 캐시가 기대하는 반응을 전혀 나타내지 않았다. “ 앉아서 구경만 할 건가요?”“빌 리가 총지배인이야. 인사문제는 그의 담당이지. ”제이크의 차가운 반응에 캐시는 당황했다. “그 2퍼센트를 추적하지 못한다고 경찰을 부른다던데요?”도전적인 캐시의 말에도 제이크는 태연했다. 그 정도의 협박에 백기 들 그가 아니었다. “방금 말한대로 그건 내 소관이 아니오.”제이 크는 정색을 하며 캐시 뒤에 나타난 톰과 빌리는 바라보았다. “이런 나쁜 놈!” 캐시는 등 뒤에 빌리와 톰이 와 있는 것을 알지 못하며 제이크에게 덤벼들었지 만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는 격이었다. “더 이상 할 말은?”“일 자릴 돌려 줘 요.”“말했잖소. 빌리가 인사담당이라고. 내가 원해도 그의 영역을 침범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안녕히 가시오.”제이크는 캐시를 미련없이 회사에서 해고시켰다. 하지만 그 광경은 빌리와 톰이 지켜보았으며 톰도 그들 관계에 의혹을 품었다. 누가 보아도 제이크와 캐시 사이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그 실수가 지시에 의한 건가요?”“왜 그런 생각을 하지?”제이크의 되묻 는 버릇은 질리와 거의 흡사했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 빠져도 태연에는 능수 능란했다. “묻고 있지 않소!”톰은 당당하게 다그쳤다. 묻지 않아도 현실파악이 됐지만 울분을 참고 삭히기엔 그는 너무 젊었다. “내가 원하는 게 있다 해서 사람을 실수하게 만들진 않네. 자신의 운을 과신하고 있군.”곁에서 둘의 혈전을 지켜보던 빌리는 톰이 한 수 뒤지고 있음을 알았다. “톰, 그만 나가자.”톰은 듣지 않았다. 빌 리가 캐시를 해고시킬 때도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제이크의 비 리를 좌시하고 싶지 않았다. “아뇨. 직접 답을 듣고 싶어요..”그는 제이크를 노 려보았다. 하지만 제이크는 이미 하퍼사의 경영권을 장악한 사람이다. 톰이 쉽게 볼 인물은 아닌 것이다. “가 봐. 이번 자네 상사는 옹호해 줄 딸이 없다는 사실 을 기억하라고, 알겠나?”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 톰의 주먹이 정확하게 그의 턱에 꽂혔다. 도리없이 정면으로 얻어맞은 제이크는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 “진 정해, 톰!”빌 리가 급히 만류했다. 불시에 일격을 받은 제이크가 의외로 여유있 게 몸을 일으켰다. “좋아, 좋다고. 난 항상 받은 만큼 되돌려 주는 성격이지.” 제이크의 강력한 주먹이 톰의 복부에 꽂혔고 톰은 허리가 깊숙이 꺾였다. “그 만들 해!”빌리는 간신히 그들을 떼어놓았다. “책임질 수 없는 일은 아예 시작 하지 마!”샌더스의 경고에 톰도 지지 않았다. “걱정 마, 책임질 테니!”“두고 보지.”빌리는 반강제로 톰을 데리고 제이크의 사무실을 나왔다. 제이크는 모든 문제가 빌리 때문에 발생한 것임을 안다. 그러나아직 빌리를 어떻게 조처할 단 계가 아니기 때문에 어금니를 깨물며 톰에게 얻어맞은 턱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스테파니는 몸이 회복되었지만 아직 섬에 남아 있었다. 데니스와 사라도 함께였 다. 스테파니는 댄의 소식을 알기 전에는 섬을 한발자국도 떠날 수 없다고 했다. “이건 돈 문제가 아니고요, 엄마. 그들도 하는 일이 너무 많아요.”“결국 희망 이 없다는 얘기구나.”스테파니니는 다시 절망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생 각은 하기 싫지만…….”사라는 말끝을 흐리며 데니스를 바라보았다. “수색 범 위를 좁혔으니까 아직 희망은 있어요.”“알겠다.”“엄마, 큰 위안은 못되지만 우리가 있잖아요.”“그래, 얘들아.”스테파니는 데니스와 사라를 각각 양쪽 팔 로 껴안았다. 가족의 소중함이 그토록 절실했던 적도 없었다. 자신을 찾기 위해 남매가 보여준 노력 그리고 댄을 찾고자 노력하는 그들이 믿음직스러웠다.“그 만들 나가 보렴.”“그럴께요, 엄마.”그 방을 나왔을 때 데니스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언젠가 직시해야 될 문제야.”그는 댄에 대한 희망을 거의 포기한 상 태였다. “알아. 그래도 마지막 며칠은 행복하게 지내셨으니까.”“이젠 뭘 하 지?”“집에 가자고 재촉도 못하겠어.”“샌더스가 하퍼사를 운영하는 마당에 돌아가고 싶은 낙도 없으시겠지.”“오빠, 아직은 만회할 수 있는 여력이 남아 있는 거 아냐?”“엄마만 포기하지 않으시면 가능한 일이지.”“엄마가 뭔가 신 경쓰실 일을 만들어 드리는 게 좋겠어.”사라는 스테파니가 한시라도 빨리 댄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돕고 싶었다. 그때 뜻밖의 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 생각에 몰두하며 막 침실에 들어서던 사라는 깜짝 놀랐다. “톰! ”톰이었다. “보고 싶었어.”그들을 뜨겁게 포옹하며 상대의 입술을 찾았다. 누 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가 원했다. 이순간의 그들은 못견디게 서로를 사랑하 는 연인이었다. 빌리 내외가 크게 우려하는 일이 다시 진행되기 시작했다. 둘이 똑같이 스테파니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알 리 없었다. 그 들이 서로 남매임을 모르는 이상 그들만을 탓할 수도 없었다. 다만 그렇지 않아 도 쑥밭이 되다시피한 하퍼가문에 또다시 불미스런 관계가 급속히 영글어 가고 있었다. 7. 기쁨과 절망의 쌍곡선 제이크의 배신으로 해고당한 캐시는 갑자기 억센 여자로 변신했다. 데니스가 섬에 가고 없었지만 그가 있어도 별수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비장한 결심으로 타 라의상실로 질리를 찾아갔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질리로서는 캐 시의 입장에 하 등의 동정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당신을 감사 줬잖아요.” 그건 필립의 주식에 관한 문제였다. 하지만 질리 역시 제이크와 같은 냉담한 반 응을 보였다. “넌 제이크를 위해 그랬을 뿐이지 나완 상관없어, 그에게 얘기해. ”“벌서 했어요.”“그럼 하퍼사의 회장도 못하는 일을 내가 어떻게 해?”“당 신은 언니를 배반하고 2퍼센트의 주식을 제이크에게 넘겨주었잖아요.”“사업 얘긴 정말 지겹군. 그리고 난 바빠.”질리는 노골적으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 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제이크와 침대에서 뒹구는 캐시의 모습을 연상했던 것이 다. 질리를 찾아올 때부터 독하게 마음먹은 캐시는 순순히 물러날 기색이 아니 었다. “누가 회사를 팔아넘겼는지 스테파니가 알게 된다면 지루해 하지 않을 텐데요?” “하지만 지금은 없잖아.”“빌리 멕매스터 씨는 있죠.”그쯤 되자 질 리도 할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너에 대한 감정이 안 좋은 그가 네 말 을 믿을까?”“증거가 있어요.” 순간 질리의 시선이 잠깐 흔들렸다. “그럼 왜 그때 제시하지 않았지? 제이크와의 거래가 끝난 모양이지.” “당신 남편에게도 제이크에게 팔았다고 얘기ㅎ겠군요.” 캐시의 날카로운 질문에 질리는 내심 놀 랐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냐.” “상관하겠다면요?” 질 리가 계속 어린 것에게 끌려다니 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제이크가 그랫듯이 이럴 때에 필요한 건 한 수 높은 역습이었다. 매번 제이크에게 당한 것처럼. “내가 너라면 더 이상 협박같은 건 안 하겠어. 데니스가 너와 제이크와의 관계를 알게 된다면 어떨까? 다음엔 누 굴 협박하고 싶으면 그런 자신의 약점부터 챙기라고. 그리고 난 쉽게 겁먹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기억해 둬.”“쉬게 빠져나가지 못할 걸.” 캐시가 먼저 일 어났다. 이번은 판정패라고 느꼈지만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결심이었다. 그녀 가 밖으로 막 나갈 무렵 가까운 곳에서 계속 지켜보던 올리브가 불쑥 나타났다. 그녀는 질리의 도움으로 멋진 슬랙스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이다. “내가 손 좀 볼까?” 항상 극단적인 일을 저질러 해결하려는 올리브는 질리에게도 위험한 존재였다. “별로 신경 쓸 애가 아냐, 나중에 써먹을 수도 있고, 게다가 넌 지금 지나치게 하고 있어.” 질리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나타냈다. “그거, 그래……난 그녀가 전화하려 가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어.”“올리브, 넌 정말 정도를 모르는 구나.”“스테파니에 대해선 네 정보 그대로야. 18세 때 앨 낳았더군.”질리는 새로운 화제에 올리브에 대한 불만이 약간 누그러진 둣했다. “그녀의 부친말야. 네 아빠지만, 아주 철저하게 은폐했던군.”“늘상 그랬어. 하지만 이젠 별로 중 요한 정보도 아냐.”“그래?”“그 아들이 아직 살아있다면?”올리브는 그 방면 으로 거의 완벽했다. 한 가지를 시키면 거기에 따르는 부수적인 일까지 거뜬히 해냈다. 스테파니가 18세 때 낳은 아이와 그에 관련된 증빙서류까지 이미 확보 해 가지고 왔던 것이다. 한편 톰과 사라는 빌리 내외의 근심을 부추기기라도 하 려는 듯이 섬에서 계속 밤을 함께 보냈다. 둘이 함께 있는 장면을 데니스도 보 게 되었다. 데니스는 톰을 무척 싫어했지만 사라가 사랑하기 때문에 이해해 주 었다. 이번 스테파니의 사고로 가족간의 사랑이 무엇인가 절실하다는 사실을 경험한 그였다. 질리는 올리브 덕분에 또 한 번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질 리의 요구에 대해 제이크의 의지는 분명했다. 총지배인인 빌리가 승낙해야 타 라의상실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빌리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그의 약점을 확 보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제이크처럼 노력없이 얻으려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수법이다. 올리브 덕분에 빌리의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된 질리는 시간을 지체하 지 않았다. “당신은 도와 타라의 경영권을 넘겨줄 것으로 안다면 오산이오.” 빌리는 강경했다. “난 스테파니의 동생이며 친구이기도 해요. 자기 편을 하나 라도 늘려야 되지 않겠어요.”“자기 편? 당신이? 필요없소.” 빌리는 더욱 차갑 게 말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질리의 표정에 기묘한 미소가 섞여 나타났다. “난 도와주리라 생각했는데. 샌더스는 지금 타라를 없앨 생각인데 스테파니가 좋아할까요?”“아무리 샌더스라도 그렇게는 하지 못할 거요.”“모든 걸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남자예요.”빌리의 얼굴에 수긍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샌더 스 제이크에 관한한 질리의 의견에 그도 공감하고 있었다. “당신이 어떻게 돕 겠다는 거요, 패션을 전혀 모르면서? 타라를 구하는 길은 장사가 잘 되게 하는 길뿐이오.”“배울께요.”질리는 자신을 철저하게 위장하며 간곡하게 말했다. “ 최소한 내가 타라의 중요성은 알잖아요.” 갑자기 간곡해진 그녀의 표정에 빌리 는 다시 역겨움을 느꼈다. “의리가 깊은 척하지만 난 오랫동안 당신이 어떤 여 잔지 겪어왔소.”“그건 그래요. 하지만 당신께 의리를 저버린 적은 없잖아요.” “정말이오?”질리는 자신이 기선을 잡을 시기가 지금이라고 판단하며 넌즈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샌더스가 뭘 좀 묻더군요.”“뭐에 대해서요?”“글쎄 요…….” 그녀는 말끝을 슬쩍 흐리면서 빌리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뭐냐고 물 었소.”“톰에 대해서요.”“내 아들에 대해 왜 당신에게 묻지?”빌리는 확실히 질리의 작전에 말려들고 있었다. “진실이 의심스러운가 보죠.”“질리, 장난은 그만 하시지.”“시치미 떼실 필요없어요. 애가 태어났을 때 난 스위스에 같이 있었어요.” “그래서?” 지“애는 죽은 게 아네요. 우리 들 다 아는 일 아녜요? ” 빌리는 자신이 가장 아름답게 보일 때라는 듯이 애교있는 미소를 만면에 머 금었다. “새인생을 시작할 기회예요. 전 그 동안 인생을 허비만 했어요. 타라 는 저에게 튼큰 의미가 될 거예요. 좋은 결과 있을 걸로 믿겠어요.” 질리는 옹 건 끝났다는 듯이 의미있는 말을 남기고 빌리의 사무실을 여유있게 나갔다. 빌 리는 다급한 마음으로 인터폰을 눌렀다. “힐러리, 톰을 즉시 찾아내게 연락하도 록 해요.” 하지만 톰은 어디에도없었따. 톰은 섬에서 사라와 함께 있었다. 스 테파니는 데니스와 사라의 간곡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댄을 단념하지 못했다. “ 엄마, 이젠 현실을 인정하셔야만 해요.”“넌 모른다, 데니스! 알 수 없지.. 견딜 수 없구나, 데니스…….”데니스는 댄을 향한 스테파니의 집요한 사랑에 짜증스 러울 정도의 감동을 받았다. 스테파니가 돌아오기 전에 타라의상실을 차지하려 는 질리는 제이크와 빌리에게 말한 정도로 충분하다는 듯 타라의 주인처럼 행세 했다. 타라의상실에 나타난 그녀는 종업원을 직접 지휘하며 실내를 세롭게 단 장했다. 그곳에는 스테파니의 대형 사진이 정면 벽에 걸려 있었다. 지난 날 스 테파니가 모델로 활약했던 당시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그건 좀 눈에 안 띄는 곳에 놓도록 해요.” 그 사진을 치워버리도록 지시할 때 제이크가 불쑥 나타났 다. “그대로 놔 둬. 질리, 당신이 여기서 이럴 권한이 있소?“’경영권 주는 걸 생각해 본다고 했잖아요?” 그녀는 새초롭하게 대꾸했다. “아직 생각 중인데 별로 마음에 안드는군.”“별문제 없을 거예요. 빌리도 날 밀어 준댔으니까요. 그리고 스테파니는 앞으로 몇 해 동안을 일할 수 없을 테구요. 미망인 옷이나 당신이 팔려는 게 아니라…….” 순간 제이크의 손에 번쩍 올라가며 질리의 뺨 을 후려쳤다. 얼떨결에 종업원 앞에서 뺨을 맞은 그녀는 당황할 틈도 없이 다 시 때리려는 제이크의 손을 막으며 두 눈에서 독기를 뿜어냈다. “아니. 조금 더 혼자있고 싶구나.”“알겠어요.” 사라가 돌아간 다음 스테파니는 혼자 바닷가로 나가 모래사장을 걸었다. 시원한 해풍과 함께 그토록 다정스럽게 코 끝에 와 닿던 바다 내음도 이젠 그녀와 별개였다. 바다 속에 잠겨있을 댄을 위해 따온 몇 송이 꽃을 띄우는 그녀의 마음은 착찹했다. 대이 없는 시드니에 가면 무슨 소여이랴 싶었다. 에덴의 그 행복도 파도처럼 부서져 내렸다. 허탈감이 걷잡을 수 없이 몰려왔따. 차라리 물로 뛰어들고 싶었다. 제 세상 어딘가에 댄이 먼저 가 있다면 기꺼이 뒤따르고 싶었다. 최근 며칠 사랑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은 그녀의 마음은 온통 댄에게만 쏠렸다. 댄과의 시작과 끝이 이루어진 섬을 이번 에 떠나면 다시는 올 것같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스테파니는 계속 같은 방향 으로 흐르듯 걸어갔다. 그렇게 한참을 걸으며 상념에 잠긴 그녀는 문득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누군가 힘들게 기어간 흔적이엇다. 어쩌면 댄일지도 모 른다고 생각한 그녀는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바닷가에서 숲쪽으로 이어진 자 국을 따라갔다. 그녀의 가슴은 사정없이 뛰었다. 걸음도 빨라졌다. 댄이 살이 있다면……. 그때였따. 흔적의 실체를 발견한 그녀는 정신없이 달려가며 소리쳤 다. “오, 제발.” 그녀는 기적과 같은 현실 앞에서 죽은 듯 쓰러져 있는 댄의 가슴에 엎드렸다. “댄! 댄- !” 댄은 온몸이 멍들고 상처투성이인 채 조용히 누어있었다. “하느님, 가사합니다.!”기적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댄의 심장은 미미하게나마 아직 분명히 뛰고 있었다.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그녀는 순식간에 행복을 되찾았다. 집으로 옮겨진 댄은 그 녀처럼 목숨을 다투는 중태는 아니었다. 생각보다 의식도 빨리 회보했다. 그가 깨어났을 때 스테파니는 그의 곁에 있었다. “주무세요, 여보”“그래…….” 창백한 모습에 상처투성이였지만 다시 살아났고 더구나 곁에 스테파니가 있다는 사실이 실제보다 강한 생명력을 주었다. “의사의 지시예요. 당신이 완쾌될 때 까지 곁에서 한 발도 움직이지 ㅇ겠어요.” 댄은 희미하게 지난 일을 기억했다. “회사는 어떻게 됐소, 전화하려던 게 기억나는데…….”“사움은 끝나고 샌더스 가 경영권을 차지했어요.”“안됐소. 미안하오.”“아녜요. 당신을 돌볼 시간이 더 생겨서 기뻐요. 이제 더 주무세요.”“사고 전엔 그렇게 행복했는데…….”“ 우린 계속 행복할 거예요, 여보, 푹 주무세요.” 스테파니는 누워있는 댄의 가슴 에 조용히 얼굴을 묻었다. 그의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는 것만으로 그녀는 행 복했다. 섬에서 댄까지 구출되고 그들이 시드니로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캐시는 다시 제이크를 찾아갔다. “내 명예를 회복시키고 복직시켜 주세요.” 스테파니의 귀환은 그녀에게도 자극이 되었다. “너무 늦었어, 빌리가 새로운 사 람을 고용했을 테니까.”“당신이 회장이잖아요. 데니스가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미안해. 남자친구 문제는 혼자서 해결해.” “당신과 질리 사이를 비밀로 해 줬는데두요?”“지금 협박하는 거야?”날카로운 제이크의 질문에도 캐시는 겁먹 지 않았다. “필요하다면요.”“이건 어때, 타라에 일 할 자리가 있는데?”제이 크는 작전상 일 보 후퇴하려는 눈치였다. “흥미없어요.”“누구나 탐내는 자리 야.” 뜻밖에도 질 리가 그때 들이닥쳤다. “누가 오는지 보세요.” 그녀의 뒤를 따라 데니스가 사무실에 들어섰다. “데니스, 마샬 박사님은 어떠신가?”“집에 서 치료받고 계세요.”“스테파니에게 전화해야겠군.”“놔두세요, 때가 되면 어 머니 스스로 오실 테니까.” 데니스는 재빨리 자리를 피하려는 캐시를 붙들었다. “잘 있었어?” 캐시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부서 이동에 대해 논의중이 었지.. 타라를 캐시한테 맡길까 하고…….” 캐시가 재빨리 동의했다. “그래서 하겠다고 대답했어요.”“잘 됐군.” 그 문제라면 데니스도 싫어할 리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한 건 그 직후였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뵙지요.” 미이 송 곳처럼 곤두선 질리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타라의상실을 캐시에게 맡기도 록 놔둘 리 없었다. 그녀는 데니스의앞을 가로막으며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 세상 좋군요. 상사와 특별한 관계를 맺으니 좋긴 좋군요.” ”질리! 제이크가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이미 때늦은 후엿따. ”데니스는 모르는 것 같은데, 캐시는 하퍼사의 현재 회장님과 오래 전부터 침대를 같이 쓰는 사이였어.” 제이크는 고개를 숙였고 데니스는 우뚝 멈춰섰다. “사실이야?”그럴 때의 임기응변을 생 각해 내기엔 캐시는 아직 순진하고 부족했다. “네, 하지만………” 데니스는 홱 돌아서서 거칠게 걸어갔다. 캐시는 울음을 터뜰릴 듯이 뒤따라가며 애원했다. “데니스, 기다려요.”“필요없어!”“질리가 과장한 거예요. 오래 전부터 고백하 려 했어요. 당신이나 회사에 해끼치려던 게 아네요. 제이크를 아시잖아요…….” 데니스는 이미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당신도 알지.”“그렇지만… ….” 엘리베이터 문은 닫히고 데니스는 가버렸다. 절망과 비탄에 빠진 캐시는 넋을 잃고 멍하니 서서 어떤 곳에도 시선을 두지 못했다. 에덴으로 스테파니를 제일 먼저 방문한 이는 빌리였다. 스테파니는 캐시 때문에 고민에 빠져 낮부터 술을 마시는 데니스를 달래고 있었다. “빌리!” 그들은 흡사 아버지와 딸처럼 감격스럽게 껴안았다. “얼마나 걱정했는지!……댄은 좀 어떻소?”“괜찮을 거예 요.”“급히 상의할 얘기가 있고. 아주 다급한 문제요.” 그의 마음을 알리 없는 스테파니는 고개를 적었다. “더 이상은 아녜요. 저는 지금 가족이 가장 중요해 요. 사업 얘기라면 샌더스에게 하세요, 제발…….”“사업이 아니고 그보다 훨신 중요한 얘기요.” 그대 공교롭게도 톰과 사라가 무척 행복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버지!” 빌리는 대뜸 꾸짖었다. “연락하려고 애썼는데 대체 어느 구석에 쳐 박혀 있었냐?” 스테파니는 빌리를 이상히 여기며 바라보았다. 지금껏 그렇게 초조해 하고 화를 내는 그를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정원에 있었어요. 우리 약혼했어요.“톰의 발표에 스테파니가 먼저기쁨을 나타냈다. “정말 기쁜 일이구나.” 빌리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는 가운데 데니스도 그들을 축하했다. “축하한다.”“고맙네.”톰과 데니스가 악수를 교환활 때 빌리가 불현 듯 소리 쳤다. “안 돼! 그걸 순 없어…….” 그는 채 말을 끝내지 못하며 바닥에 쓰러졌 다. “빌리!” 스테파니가 먼저 달려가 그의 머리를 부축했다. 그의 안면에 심 한 경련이 일어났고 손은 자신의 가슴을 잔뜩 움켜쥐고 있었다. 그는 스테파니 를 겨우 쳐다보며 더듬거렸다. “스테파니……톰, 토옴은 당신의 아들이오……. ” 이어 그는 의식을 잃었다. 스테파니는 순간 강한 충격을 받았지만 침착하게 빌리를 병원에 옮기도록 조치했다. 8. 사랑해선 안될 사랑 충격적인 사실을 현실로 먼저 받아들인 것은 사라였다. “이미 일어난 사실을 바꿀 수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사라에겐 그 순간 선착장의 정경도 전에 없이 스산하고 적막했다. “사라, 모르고 깊은 관계까지 맺었지만 후회하진 않아.”“하지만 부당한 일이에요.” 톰이 갑자기 흥분하며 울분을 토해냈다. “ 그때는 그렇지 않았어. 부당한 건 우리가 지금까지 사실을 모르고 자라온 일이 야. 당신을 사랑해, 사라. 이 사실만은 그들의 진실도 바꾸지 못해.” “제발, 톰…….”“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 봐.”사라는 약혼의 증표인 반지를 손가 락에서 뺐다. “이젠 끝났어요. 그래야 해요. 싫어도 할 수 없어요.” 톰은 그 반지를 받아 물에다 멀리 던져버렸다. 의식이 회복된 빌리는 통해 스테파니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들을 잃고 싶지 않아 그 동안 비밀로 해왔던 불임 의 노부부에 대해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다. 걱정되는 것은 사라와 톰의 충격이 었다. 사라는 몹시 괴로워하며 비관했다. 댄과 스테파니의 위로도 소용없었다. 세상이 무엇보다도 가족이 소중하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 스테파니 역시 마음의 상처가 컸다. 그들이 친남매인 줄 몰랐던 것은 전적으로 어른들의 책임일 수밖 에 없다. 한편 제이크를 불쑥 찾아간 질리는 뜻빡의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새로 채용한 여비서와 업무 중에 추태에 가까운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여비서는 젊 고 미인인데다 대담한 자세였고 침대에 들기 전의전히를 즐기는 듯했다. 늘신한 다리는 스스럼없이 허벅지까지 드러나 있었고 풍만한 젖가슴을 제이크의 몸에 밀착시킨 채였다. “방해가 됐나요?” 여비서는 못마땅한 시선으로 질리를 응시 하며 밖으로 나갔다. “지금쯤은 고용인의 질을 높였을 줄 알았는데 여전하군요. ” 제이크는 조금도 어색해하거나 쓱스러워하지 않았다. “난 바쁘니까 용건만 얘기해요.”“스테파니 걱정 때문에요? 톰이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더군요.” “흥미롭긴 해도 이 세상의 끝은 아니지.” 제이크는 분명히 스테파니에 관한 약점을 덮어두고 싶어했고 질리는 그것이 몹시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으 로 스테파니는 파멸이 시작됐어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그렇게 상상 력이 없어요? 매스컴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떠들어댈 덴데!” “난 그런 치사한 방법을 쓰지 않아도 원하는 걸 가질 수 있소.” “그렇다면 상상력이 부족한 것 도 아니군요.” “신문은 안 돼, 알았소.” 제이크는 못박득이 선언했다. 아니 경 고에 가까운 것이었다. 질리의 눈꼬리가 순간적으로 옆으로 찢겨지며 이내 요염 한 표정으로다시 돌아왔다. “좋아요. 주식증명서를 주세요.” 제이크는 웃었다. 질리의 요구는 아무런 효과도발휘할 수 없었다. “이제 이것의 소임은 끝났소.” 증명서를 받아들는 질리는 다시 약이 올랐다. 급한 용무가 끝나고 나면 느긋해 지는 사람의 심리를 왜 몰랐던가 싶었다. “시소한 부탁이 또 있어요. 캐시를 타 라에소 내보세요.” 제이크는 이미 그녀의 속셈을 읽은 것처럼 받아넘겼다. “성 급히 굴지 마. 적당한 시기가 되면 처리할 테니까.”“시간을 너무 끌진 마세요. ” 질리는 그 이상 어떤 방법도 사용할 수 없었다. 질리 대신 타라의상실을 차 지한 캐시는 열심히 일했다. 컴퓨터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만큼 경영에도 금방 익숙해졌다. 원단값을 밀고 당길 정도가 되었다. “사라 못 봤소?” 데니스가 들 어오며 남보다 더 차갑게 물었다. “오늘은 안 나왔어요.”“언제부터 여기서 일 하오?”“이번 주부터 시작했어요.” 캐시는 여전히 데니스를 사랑했으며 그와 그의 가족에게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능력에 의한 인사이동이라고는 못하 실 테지.” “그러지 말아요!” 그녀는 간곡하게 말했다. “제이크 샌더스에게 제공한 서비스의 대가인가?”“아녜요, 테니스. 정말 그런 게 아니고…….” 데 니스는 역겨움을 노골적으로 나타내며 돌아서서 나가버렸다. 뒤어 남겨진 캐시 는 눈물이 글썽해졌다. 제이크에게 배신당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 꼈었다. 그녀가 데니스를 사랑하게 된 것은 제이크의 경우와 달리 가장 순수한 감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스테파니와 데니스를 배신한 꼴이 된 자 신이 저주스러웠다. 데니스가 나가버린 다음 허전하게 서있던 캐시는 핸드백 속 에서 무엇인가 꺼냈다. ‘필립 스튜어트’라는 수취인의 이름이 적힌 편지였다. 데니스와 스테파니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질리으 주 식건을 먼저 필립에게 은밀히 밝히려는 것이었다. 약삭빠르고 교활한 질리도 거 기까지는 예측하지 못했다. 스테파니와 댄이 있는 에덴에 화사한 옷차림으로 나 타난 질리는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스테파니가 회사는 잃었어도 당신은 잃지 않았군요.” 댄은 전처럼 친절하게 그녀를 대하지 않았다. 스테파니도 많이 변했 다. 그들은 그 동안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질리와 무관하지 않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게 위안이 됐으면 좋겠소. 우린 회사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데 서로 합의했소.”“하지만 샌더스가 회사를 집어삼킨 일은 불쾌해요.” 스테파니의 시 선이 차갑게 질리를 응시했다. “아직 싸움이 끝난 건 아냐.” “그렇소?” 댄이 뜻밖이라는 듯이 물엇따. “아녜요.” 스테파니는 듣지 않아도 질리와 제이크와 의 관계를 읽일 수 있었다. 그녀가 에덴에 온 것도 자신의 정황을 알아보기 위 한 것으로 여기고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자 했다. “댄, 오늘은 그만 피곤하게 해 드리고 다음에 올께요.” 스테파니는 질리를 배웅하는 형식으로 따라나섰지만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댄이 없는 장소에서 떠볼 문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 질리, 샌더스와는 얼마나 아는 사이지?” 질리는 뜻밖의 질문에 잠깐 당황했지 만 내색하지 않는 것엔 익숙했다. “안면이 있을 정도지.”“네기 혹시 그를 도 와준게 아닌가 해서…….” 스테파니는 재빨리 질리이 표정을 살폈지만 그녀는 태연했다. “내가 왜 그런 짓을?”“날 아직 증오하니까.”“어떻게 그런 말을… ….”“네가 출감한 후부터 사고가 끊이진 않아. 네가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은 하기 싫지만 확인해야겠어.” 질리는 당연하다는 듯한 반응을 나타냈다. “네가 모든 걸 망쳐놓고 탓할 사람을 찾는구나. 희생양은 다른데서 찾아 보시지!” 그 녀는 파르르 화를 내며 걸어갔다. “기다려! 날봐.” 스테파니도 이번만큼은 전 처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위압적으로 질리를 뚫어직 응시했다. “네가 샌다스가 경영권을 쥘수 있도록 돠오준 거야?”“아니.” 질리는 자못 억울하다 는 듯이 목매인 소리르 냈다. 그리고는 엉뚱한 데로 화살을 돌렸다. “데니스의 여자친구인 캐시가 의심스럽긴 해.” 질리는 그럴 듯하게 말하며 준비한 서류까 지 꺼냈다. “오늘 아침 주식중계인에게서 문의가 왔는데, 주식거래 사류에 따르 면 내 주식이 샌더스에게 넘어갔다지 뭐겠어.” 스테파니의 반응은 질리의 기대 를 다시 벗어났다. “네가 팔아넘긴 게 아니고?”“절대로, 캐시가 내가 그런 것 처럼 조작했을 뿐이야.” 질리는 가능한 최대로 캐시를 끌어들임으로써 빠져나 가려고 했다. “그녀가 왜 그런 짓을?”“넌 정말 순진해. 누구나 믿으니, 나만 빼놓고. 그녀가 샌더스의 하수인일 수도 있잖아?” 스테파니는 여전히 의심을 풀지 않았따. 그녀가 그럴수록 질리는 초조해졌다. “의심스럽다면 왜 내게 말해 주지 않았지?”“증거도 없고 회사일도 관심도 없는 것 같아서.” 질리는 댄에 대한 스테파니의 사랑까지 물고 늘어졌다. “그럴 줄 알았지.” 스테파니의 그 말이 마음에 걸린 질리는 서두러 다른얘기를 꺼냈다. “네가 걱정거리가 많아 보였어. 톰 문제라던가…….”“알아?”스테파니가 재빨리 물었다. 질리는 내심 회심의미소를 지었다. “소문을 들었어. 하지만 계속 궁금했어. 애기가 죽은 후 몇 달 안 지나서 빌 리가 입양했다는 게 아무래도 수상했어.” 그녀는 올리브에 게서 알아낸 정보를 적절하게 이용해서 자신의 열세를 극적으로만회했다. “왜 그런 얘길 안 했지?”“너도 아는 줄 알았지.” 스테파니는 속으로 질리를 새롭 게 생각했다. 그 동안의 사고와 하퍼사의 문제에 질리가 깊숙이 개입됐다는 확 신과 앞으로 신중하지 않으면 어떤 짓으로 당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톰의 등장에 대해 데니스는 사라의 고통을 이해하면서도 불만이었다. 그로서는 상속 자가 한 명 늘었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한편 질리와 필립 사이도 삐걱거리기 시 작했다. 필립이 홍콩으로 출장간 동안 질리는 한 번도 집에 붙어있지 않았다. 온 갖 음모를 꾸미며 나돌다 보니 열두 번이나 걸려온 필립의 전화를 한 번도 받지 못했다. 집에 돌아온 그의 추궁에 질리는 전과 다름없이 역습을 가했다. “제발 어린애 같은 투정은 그만두세요!” 그녀는 오히려 화를내며 횡하니 나가버렸다. 필립은 전처럼 그녀에게 금방 사과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사람 좋기로 소문난 그도 더 이상 질리의 방종을 묵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캐시로부터 심상치 않은 우편물까지 받았다. 그는 질리가 나가버리자 즉시 캐시에게 전화로 만날 약속을 정했다. 그럴 즈음 톰과 데니스는 사라에 대한 문제로 에덴의 수영장에서 격투 까지 벌였다. 극도의 상황으로 치달은 톰은 전같지 않았다. 그는 모든 사실 앞에 도 사라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 없었다. 댄의 점진적인 회복으로 여유가 생긴 스테파니는 하퍼빌딩에 모습을 나타냈다. “스테파니!”제이크는 예고없던 그녀 의 방문에 저으기 놀랐다. “편안해 뵈는군요, 샌더스 씨.”“그건 이사회의 결 정이었소.”제이크와 함께 있던 안톤은 그가 스테파니를 진심으로 반기는 모습 에 불안감을 느꼈다. “그렇다더군요. 하지만 주식인수의 부당성이 밝혀지면 어 떨까요?” 그녀는 얼굴에 어무런 표정도 나타내지 않았다. “실례입니다만 그건 중대한 비난입니다.” 안톤의 말에 스테파니는 일면 숙으하는 여유를 보였다. “ 알고 있어요.”“캐시의 실수가 밝혀졌기 때문에 전근시켰소.” 질리의 말과 일 치하고 있었다. “내가 물러날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에요.”“스테파니, 그 러지 말고 같이 손잡아 이 회스를 태평양 제일의 기업으로 키웁시다.”“그래 요?”“당신을 해치지 않고 함께 일하고 싶소.” 그건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었 다. 그것이 스테파니를 더욱 분노케 만들었다. “지옥에나 가시지.” 제이크와 안톤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협조를 거부하면 하퍼사에서 완전히 손을 떼 도록 만들겠소.”“해보세요.”“안녕히 계세요.” 스테파니는 조금도 초조해 하 지 않으며 밖으로 나갔다. 뒤에 남은 제이크는 안톤의 경고에 놀라운 답변을 했 다. “네 형 그렉은 멍청이었어. 이제야 그걸 깨달았어.” 제이크는 닫혀진 문을 꿈꾸듯 응시했다. 안톤은 그 눈길이 무엇을 뜻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스테 파니가 나왔을 때 힐러리는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도 그만둘까 봐요.”“아니, 그러지 말아요. 아직 끝난 게 아녜요. 그보다 페르시아 의 아말 왕께 전화해 주겠어요?”“그러죠.”“이사실에서 기다릴께요.”회장직 과 관계없이 이사직엔 아직 적을 두고 있는 그녀였다. 페르시아의 아말 왕은 스 테파니와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페르시아에서 시드니 까지 금방이라도 날아올 수 있는 지지자이기도 했다. 한편 톰은 병상의 빌리로 부터 하퍼사의주주 투표권을 위임받았다. 빌리는 사직했지만 이사직은 아직 그 대로였다. 그는 사라의 결별선언과 관계없이 그녀를 계속, 전보다 더욱 사랑했 다. 뜻밖에도 톰이 자신의 아들임이 밝혀진 스테파니의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것 이었다. 겉으료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 마음은 번민으로 들끓었다. 그녀는 톰과의 대화를 시도해 봤지만 실패였다. “제겐 이미 엄마가 계세요.”“알아. 리나에 대한 감정을 바꾸라는게 아냐.”“그럴 수도 없죠.” 스테파니와 톰의 사이는 어 느 틈에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다. 질리는 계속 에덴을 맴돌았다. 스페타니가 어 떤 모습으로 파괴되는지 지켜보려는 듯이 온갖 구실로 주위를 배회했다. “수영 이 즐거웠소?” 방금 수영장에서 돌아온 질리에게 댄이 물었다. 질리는 고의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수영복 그대로 댄 앞에 섰다, “이제. 악어는 없더군요.”순 간 댄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이 집에서 그런 말은 금기라는 걸 모르시오? ”“미안해요. 눈치가 없었군요.”가즈스럽게도 질리는 에덴 수영장의‘악어’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들추어냈다. “경찰이 아직 범인을 못 잡다니…….” 댄은 마음 속으로, ‘범인이 눈앞에 있었는데…….’하는 의미로 낮게 중얼거렸지만 질리는 너무도 평온해 보이는 그의 모습 때문에 거기까진 짐작하지 못했다. “ 왜 늘 나만 못살게 굴어요. 스테파니도 날 의심하고요.”“당신이 그랬소?” 댄 이 불쑥 묻자 질리는 일순간 숨을 멈추더니 이윽고 되물었따. “진심으로 묻는 건가요?”“대답에 따라서는 그렇소?”“정말 믿을 수 없어요. 내가 뭘 어떻게 했다는 거죠?”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시선으로 댄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범 인이라고는 안 했소. 그냥 물어본 것뿐이지. 죽음에 직면하니까 상황이 명확하게 보이더군.” 그 말은 질리에게 더욱 자극을 주었다. 마치‘네가 한 걸 알고 있 으니 솔직히 자백해’라는 것처럼 그녀의 귀에 들렸다. “믿을 수 없어…….” 댄의 잔잔한 추궁은 계속되었다. “바로 그게 문제요. 아무도 당신 짓이라고 믿 으려하지 않았으니까. 스테파니는 그 가능성조차 인정하지 않으려 했소.” 자신 의 입장에 궁지에 몰렸음을 느꼈는지 질리는 다은 문제를 걸고 나왔다. “내 진 실성 문제라면 그녀는요? 아이에 대해 알았어요?” 그녀의 반격에 댄은 무관심 으로 맞쳤다. “그건 별개의 문제요.”“게다가 그 아이의 아빠가 누군지는 더욱 모르죠?” 댄의 마음 말이 두려운지 그녀는 그 말만 남기고 그곳을 떠났다. 홀 로 남은 댄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졌다. 지금에 와서는 그를 비롯한 모든 사람의 질리의 소행을 충분히 알아차렸다. 다만 정확한 증거를 잡지 못했다. 직접 범행 을 저지른 게 그녀가 아닌 올리브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 하나로 질리는 자신의 범행을 교묘하게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스테파니는 타라의상실에 들어서 고 있었다. “캐시를 만나려고 왔다.”“지금 없는데요.” 사라는 스테파니의 표 정을 조심시레 살폈다. 캐시는 필립을 만나기 위해 외출하고 없었다. “넌 어떠 냐, 얘야.”“그냥 사는 거죠. 성공적이진 못해요.” 때마침 톰이 들어오다가 스 테파니를 보며 주춤했다. 그는 노골적으로 사라에게 말했다. “이렇게 계속 피하 면서 살 수는 없어.” 스테파니는 재빨리 돌아섰다. “난 간다.”“아뇨. 가지 마 세요.” 사라가 급히 그녀를 붙들었다. “그럼요. 우리 인생을 어떻게 망치셨는 지 보셔야죠.”“제발, 톰…….” 스테파니는 침착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려했다. “톰이 화내는 건 당연하지만 사라를 봐서라도 들어다오. 섬에서 있었던 일은 잘못된 거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끝난 건 아니다.”“틀린 말은 물론 아니죠.” 톰은 경멸하는 눈빛을 스테파니에게 보냈다. “너희들은 남매야. 사실을 직시해 야지.” 톰은 더욱 흥분했다. “지금껏 믿고 살아오던 걸 갑자기 바꾸란 뜻인가 요? 모든 게 거짓이라면 이번 일은 왜 믿어야 하죠?”“사실이니까!” 그때 곁 에서 안타깝게 스테파니를 바라보던 사라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사실이니까!” “원한다면 출생기록을 확인할 수도 있겠지.”“확인해 봤지만 내가 태어난 걸 증명할 생모는 증명되지 않았어요.”“나외 얘기할 마음이 생기면 언제든 찾아 와라.” 스테파니는 돌아서며 사라와 톰이 이야기 할 시간을 주려했다. “차에서 기다리마.”“같이 가요, 엄마. 안녕, 톰.” 사라의 태도는 분명했따. 톰은 도망치 듯 스테파니와 함게 나가버리는 사라의 뒷모습을 원망에 가득찬 눈으로 바라보 았다. “너 괜찮니?” 타라의상실을 나왔을 때 스테파니가 먼저 물었다. “엄마 는요? 톰이 저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나 같아도 그랬을 거야.”“전 아니에 요, 엄마를 사랑하니까.”“고맙다, 얘야.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르겠구나.”“ 그런데……사실이 아니었음 좋겠어요. 톰을 사랑하니까. 잊어야 하겠지만 시간이 걸릴 거예요.¨…그래, 안다. 정말 미안하구나.” 스테파니는 가엾은 딸의 어깨를 당겨 가슴에 안아주었다. 톰과달리 자기의 사랑보다 어머니를 선뜻 택한 딸의 마음에 가슴이 시리도록 아팠다. “엄마, 톰의 ㅇ아버지는 특별한 분이였나요?” “그렇단다.” 이때 스테파니는 어떤 사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엇다. 톰이 아들이 라고 밝혀졌을 때 이미 그 사람의 생각에 사로잡힌 그녀였다. “아들 톰처럼요? ”“그래, 아들처럼.” 스테파니는 사라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가‘특별한’ 이라고 말한 것은 그만큼 톰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역시‘특별한’톰 의 아버지를 사랑했지 때문에. 문제는 톰이었다. 그의 불신은 수그러들 것 같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페르샤의 아말 왕을 기다리는 스테파니의 마음은 무척 착잡했다. 제3부 1. 죽음과 패배 캐시로부터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 필립은 충격으로 사색이 되었다. “아니, 이건…….”“유감이에요.” 질 리가 결혼선물로 벋은 주식을 제이크에게 넘겼 고, 제이크는 이와 같은 결정적 도움으로 하퍼사를 차지할 수 있게 됐음이 밝혀 졌다. 필립은 여전히 하퍼사가 스테파니의 경영권으로 환원되어어야 한다고 믿 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필립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가 수습할 수있도록 힘외 된 것은 배신한 질리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다. 그는 질 리가 나가고 없는 집에 서 혼자 술잔을 기울였다. “혼자 드시는 거예요?” 외출에서 돌아온 질리는 활 짝 웃었따. “익숙한 일이지.”“제가 있으니까 대작해 드릴께요.”“어디 갔었 는지 물어도 소용없겠지?”“의심하지 말아요. 여기 있으니까. 아직 절 사랑하시 죠?” 필립은 심한 갈등 속에서 해어나지 못했다. “당신을 사랑하오. 하지만 당 신이란 사람을 모르겠소”“물론 절 아시잖아요?”바로스럽도록 온순한 필립도 치미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다. “더 이상 날 가지고 놀지 말고 사실을 얘기 해!”질리는 속으로 뜨끔했지만 짐짓 서글픈 표정이 되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은 절 믿지 않으시는군요.”“그건 이제 안 통해, 거짓말하고 있나는 걸 알 고 있소.”질리는 다시 태도를 바꾸며 토라지는 시늉을 했다. “그렇게 못믿겠다 면 뭣 땜에 결혼했어요!”질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캐시에게서 넘겨받은 서 류를 꺼냈다. “이것에 대해 해명할 수 있겠소?” 질리는 내심 놀랐지먼 기다렸 다는 듯이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응수했다. “벌써 스테파니에게 말했어요?” 필립은 입가에 어느 때보다 진한 조소가 묻어 있었다. “그랬겠지. 하지만 난 거 짓이 아닌 사실을 원해.”“지옥에나 가요!” 질리는 파르르 화를 내며 거칠게 나가버렸다. 필립은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그보다 어리석게도 악마 같은 여자에 게 두 번씩이나 속아 스테파니까지 곤경에 빠뜨린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제이크 는 불쑥 회사를 방문한 페르시아의아말 왕이 석유게약을 채결하겠다는 통고에 당황하고 있었다, 페르시아의 석유는 하퍼사의 경영에 절대적이었다, 펴법으로 하퍼사를 차지한 제이크로서는 중요한 고비였다. 스테파니로부터 긴급연락을 받 은 아말 왕은 이미 그녀를 돕기로 작정한 것이다. 재이크는 그 분야엔 전혀 문 외한이었다. 그는 질리에게 도움을 청했다. 마침 궁지에 몰렸던 질리는 돌파구를 발견한 듯이 찰싹 달라붙었다. “내가 얼마나 알아내야 하는 거죠?”“당신을 가르칠 필요는 없겠지.”“하지만 실습이 필요해요.”“그거라면야…….” 그들 은 이미 뜨거운 키스부터 시작했다. 질리는 저신의 온몸을 제이크에게 던졌다. 필립에 비해 제이크의 테크닉은 바람둥이답게 굉장했다. 어떤 여자든 그에게 안 기멸 치열한 싸움처럼 거칠게 다루어졌다. 지금껏 방편으로 사용했던 육체임에 도 질리는 그에게서 깜짝깜짝 놀랄 정도의 쾌감을 느끼며 자시도 모르게 몸부림 쳤다. 그때마다 그녀는 황홀경에 빠지며 침대시트를 흠뻑 적시는 것이다. 도중에 제이크가 느긋한 표정으로 훑어본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는 마치 여체를 조종 하듯, 달아오른 질리의 전신을 경련하도록 만들며 속도를 늦추거나 혹은 가속시 켰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안타깝게 달라붙으며 거의 울부짖었다. 제이크에 의해 드디어 절정에 오른 그녀가 무섭게 떨며 이윽고 털썩 내려않을 때에도 제이크는 그녀를 비웃는 듯이 느긋했다. 에덴으로 돌아온 스테파니는 지금까지 기다리던 무척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아말!”“스테파니.”그들은 오래된 친구 이상으 로 반갑게 포옹했다. 페르시아에서는 절대권자이지만 스테파니에게는 가장 다정 하고 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믿을 수 없군.”“난 지금 하퍼사의 회장도 아 니고 무엇 하나 할 수 없어요.”“그래서 날 불렀군.”“어자피 다음 달에는 계 약갱신 때문에 오셔야 되잖아요.”“당신과 함께라면 1년도 있을 수 있소. 샌더스란 남자를 이길수 있게 도와달라는 거겠지요?”“회사에 피해없이 회장직을 되찾을 방법이 필요해요.”“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한다는 걸 알 잖소.”“알아요.” 대도 아말의 방문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스테파니와 아말의 사이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친숙한 걸 알지만 그는 스테파니를 믿고 또 사랑했 다. 스테파니가 다시 하퍼사에 연연하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그녀를 위해 이번 에는 불평하지 않았다. 스테파니는 처음부터 짐작했던 일들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 오히려 담담할 수 있었다. “질리의 짓이 사실이라면 난 정말 멍청이군요.” “아니오 누굴 믿는 게 멍청한 일은 아니지.”“게속 자문해 봤어요. 질리의 짓 이 사실이라면 다시 감옥에 보내야 하는데 그럴 수 있을까 하고요.”“그녀가 자초한 일인데?”“그걸 모르겠어요?”“어떤 생각이오?”이번에는 댄이 스테파 니보다 더욱 적극적이었다. 사랑하는 스테파니가 다시 어떤 위험에 빠질지도 모 르기 때문이다. “모든 걸 무시하고 그녀가 뒤에서 암습하게 방치할 작정이오? ”“조심하겠어요. 질리는 내 인생을 결정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거예요.”“이미 결정했잖소, 우리 둘만 있으면 다른 문제는 상관않기로!”“죄송해요. 내가 잘못 생각했어요. 회사를 잊고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럴 수 없어요. 다시는 회사 와 당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은 않게 해 줘요. 제발…….”“선택이 아니고 균형을 유지하라는 거요.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함이 있다는 데 합 의한 줄 알았소.” 그녀를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댄은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못 했다. “결과와 관계없이 끝까지 해보겠어요.”“좋소, 기다리지. 당신을 사랑하 니까.”“고마워요, 여보.” 댄은 문득 톰의 아버지에 대해 애기했다. 질리의 충 동질 때문이다. “알고 싶으시면 말씀드릴께요.”“아니오. 오래 전 일인데, 뭐. ” 댄은 스스로 포기해했다. 과거사로 스테파니와의 사이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 지 않았다. 그는 현재와 미래의 스테파니를 사랑할 뿐 과거는 문제삼고 싶지 않 았다. 한편 톰의 등장으로 데니스는 고민에 빠졌다. 26년 전에 잃었던 아들을 다 시찾아내서 자신이 상속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캐시에 대한 배 신감 등이 그를 못견디게 만들었다. 그는 안젤로의 식당에서 술을 퍼마셨고 다 시 거리로 나섰다. 곧 소집될 이사회를 앞두고 데니스의 그와 같은 탈선은 스테 파니에게 분명한 적신호였다. 그의 불만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했다. 스테파니 는 자신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는 이사회를 앞두고 하퍼사로 제이크를 방문했 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제 사무실, 아니 우리 사무실로 들어오시죠.” 제이크는 매우 공손하게 스테파니를 안내했다. “할 말이 뭐죠?”“당신부터 하 세요.” 제이크는 기다렸다는 듯이 의견을 제시했다. “회장직을 당신과 겸임하 면 어떨까 합니다만?” 그가 진심이 아니라면 페르시아와의 석유재계약 때문에 아말 왕과 친한 스테파니를 이용하려는 게 분명했다. “가치있는 일이라면요.” 그녀는 냉랭하게 대답했다. “자존심으로 일을 망치진 말아요. 하퍼사를 원하지 않소?”“한 가지 확실한 건 믿을 수 없는 사람과는 일할 수 없다는 거죠.” 제 이크의 표정이 점차로 굳어졌다. “전부가 아니면 싫다는 거군요.”“그래요.” 비겁하게 경영권을 빼앗는 제이크와 합의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회장직에 있 으면서 위협받을 때보다 지금은 오히려 더 초연했다. “그렇다면 좋소. 이번 이 사회에서 당신을 제명할 수밖에.”“자신있나 보군요.”“해볼 만은 하죠.”“내 가 뭘 하려는지 알려드리는 게 좋겠군요. 당신이 질리의 주식을 갖게 된 동기를 조사하겠어요. 그럼 당신의 회장직도 위험해지겠죠.” 그녀는 드러나게 당황하는 제이크를 반갑게 쏘아본 다음 두말없이 돌아서서 나왔다. 다급해진 제이크는 즉 시 인터폰을 사용했다, “안톤, 도움이 필요하네!” 필립의 주식이 질리에 의해 편법으로 인수된 사실이 밝혀지면 그의 하퍼사 회장직 박탈은 시간 문제였다. 제이크의 측근인 안톤과 질리를 제외한 모든 멤버들이 여전히 스테파니를 지지 하고 있었다. 스테파니와하퍼사에게 시한폭탄 같은 존재인 데니스는 또다시 질 리의 계획에 걸려들었다. 자신의 입장이 계속 불리해진 그녀는 데니스의 불만을 가차없이 이용했다. “데니스, 죽은 줄 알았는데 정신이 돌아왔군.”“내가 왜 여기있죠?”간밤 엉망으로 치한 데니스는 어딘 줄도 모르고 질리의 침대에서 벌 거벗은 채 곯아떨어졌었다. “걱정 마, 너무 취해서 일을 저지를 상태는 아니었 으니까.”“필립 얘길 하는 거예요?” 데니스는 간밤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 했다. 취중에 질 리가 유혹했다면 이모와 조카의 불륜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필 요에 따라 질리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출장 중이야. 나하고 침 대도 같이 사용하지 않고.”“필립을 탓할 사람도 없지.”“심술떨지 마, 데니스. 너도 꽤나 저극적이덴데, 뭘.” 순간 데니스는 울컥 비위가 상했다. 제아무리 질리의 육체가 뇌쇄적이어도 이미 그녀를 알고 있는데 어떡할 리 없었다. 그리 고 혹시 취중에 하는 생각에 더욱 울화통이 터졌다. “터무니없는 소리! 내 옷이 나 줘요.”질리는 한쪽에 멋대로 벗어던지 그의 옷을 얼굴을 향해 힘껏 던졌다. “오, 질리! 지옥에나 떨어져라!”“왜, 너의 새 형이 네 자리를 넘볼까봐 겁나? 오늘 이사회도 있지?”“빌어먹을!” 데니스는 정말로 화가 치밀었다. 그게 또한 이날 있을 이사회에서의 중요한 결정에 결정적인 방해요인이 될 수도 있었다. “안됐다, 데니스. 스테파니가 네게 사실을 밝히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엄만 몰랐어요.” 데니스는서둘러 옷을 입었다. “그렇게 말했어?”“그래요, 왜요?” 데니스는 다시 질리의꼬임에 말려들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녀는 짐짓 말꼬 리를 흐려서 데니스가 더욱 궁금하게 만들었다. “뭐죠? 말해요.”“아무것도 아 니라니까…….” 데니스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며 그녀의 팔을 움켜잡아 일으켰 다. 질리는 비로소 어쩔 수 없다는 듯했고 작전도 성공했다. “그만해. 좋아. 사 실을 말해 주지. 그 일은 엄마도 알고 나도 알고 있었어.” 데니스는 분함을 참 지 못하여 부들부들 떨었다. “안 믿어요. 알았다면 사라가 그렇게 되도록 놔두 지 않았아요!”“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엄마가 그런 일이 생길 줄 알았겠니?” “그래도 안 믿어요.”“그러눈 편이 낫겠지.”데니스는 힘없이 질리의 집을 걸 어나왔다. 그의 뒷모습을 질리의 교활한 미소가 뒤따르고 있었다. 데니스의 믿음 은 질리의 교활함에 무너지고 있었다. 자신의 비행이 스테파니에게 발각된 상태 에서 질리는 비옇하게도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꼬리와 뭄통을 붙잡힌 뱀이 혀 를 날름날름 거리듯 질리의 잔인함은 지칠 줄을 몰랐다. 스테파니에게는 최악이 될 수도 있는 순간이 왔다. 제이크는 만일을 대비해서 스테파니의 측근을 제외 한 다른 이사들의 위임장을 손에 넣었다. 자동적으로 모두 그의 편이 되는 것이 다. 그토록 중요한 이사회에 데니스는 가장 늦게 참석했다. 질리의 말을 떨쳐버 리지 못하고 있었다. “톰의 결정과 데니스의 참석여부에 따라 당신이 질 수도 있소.” 톰과 데니스가 찬성하면 스테파니는 다시 하퍼사의 회장이 될 수 있지 만 둘 중 한 명만 반대해도 그녀의 희망은 순식간에 수포로 돌아간다. 관건은 그들에게 있었다. “아버님은 저를 믿는다고 하셨어요.”톰이었다. 그는 스테파 니에게 호의적인 눈길을 보냈다. “투표하기전까지 내 제안은 휴효합니다. 만일 진다면 주식에 대한 조사권도 박탈되죠.” 그때 데니스가 들어와서 회의에 참석 하자 스테파니는 비로소 안심했고 제이크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이제 개회하 겠습니다.”“이번 안건은 스테파니 하퍼의 제명에 관한 것입니다.”숨막히는 순 간이었다. 톰과 데니스의 가부에 따라 스테파니 하퍼의운명이 결정될 위기였다. “찬성하시는 분?”초조한 제이크의 물음에 톰의 태도에 불안했었다. “데니스? ” 그러나 데니스는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스테파니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고 심 장이 멎는 듯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찍힘 그 이상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들 이 어머니를 절망의 벼랑으로 떠밀어버렸다. “왜지?” 스테파니가 겨우 입을 열었을 때 데니스는 넉살좋게 대답했다. “저녀석 때문이에요.” 그는 톰을 가리 켰다. 제이크는 만면에 가득찬 웃음을 비치고 다시 업숙한 표정이 되었다. “이 젠 더 이상 얘기할 필요도 없을 것 같군요.……” 믿었던 아들의 졸장부 같은 태도 때문에 재기의 기회를 놓쳐버린 스테파니는 조용히 회의실을 걸어나갔다. 데니스는 비로소 아차 싶었지만 소용없었다. 회의 직후 제이크와 질리는 축배를 들었다. 때마침 집에 돌아왔던 필립은 결정적인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질리는 필립을 무시하고 제이크를 집으로 불러들였던 것이다. “그 사고가 없었다면 당 신은 회장이 되지 못했을 거예요. 알죠?”“그랬겠지.” 그들은 문이 열리는 것 조차 알지 못하고 멋대로 떠들었다. “날 과소평가하지 말아요, 당신에게도 똑같 은 사고가 발생할 수 있으니까.”“굉장하게 들리는군. 내가 필립보다 잠자리가 나은가?”“누구도 필립보다 나아요.” 엿듣고 있던 필립은 남자로서 자신의 인 격이 내동댕이쳐짐을 뼈저리게 맛보았다. 문 뒤에 몸을 숨겼던 그는 두 사람이 한 차례의 격렬한 정사를 치르고 잠든 틈을 이용해서 자신의 결심을 실행했다. 소형녹음기에 유언을 녹음시켰다. “질 리가 나를 망쳤소. 하지만 스테파니, 당 신을 구할 수 있다면 헛된 일은 아닐 것이요. 지릴가 우리 모두를 속였소. 절대 질리나 샌더스를 믿지 마시오. 자신을 방어할 방법을 찾으시오. 나도 믿고 싶지 않지만 믿으시오. 질리에게 진실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며 내가 결혼선물 로 준 주식을 샌더스에게…….” 녹음을 끝낸 필립은 데이프를 꺼내 봉투에 넣 고 봉했다. 그는 미리 연락한 배달원이 왔을 때 그것을 에덴의 스테파니에게 전 해 주도록 부탁한 다음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유일한 희망은 자신의 최후진 술이 스테파니에게 도움이 되는 것뿐이었다. 같은 시간 패배자로 하퍼빌딩을 나 온 스테파니는 곧장 아말 왕을 찾아갔다. “사업에 관심이 없어질 정도로 상심 했다던데 무슨 일이오?”“당신이 알 일이 아니에요.”“우린 여러 해를 두고 알던 사인데 무슨 비밀이 필요하오?” 아말 왕은 진지한 표정으로 스테파니의 대답을 기다렸다. “물론 아실 권리가 있죠.”“관리?”“당신이 처음 호주에 왔 을 때 제가 열여덟 살이었죠.”“그걸 어떻게 잊겠소.”“그때 아일 낳았었는데 죽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빌리가 입양해서 키우셨다는 거예요.”“톰?…….” 아마르이 두 눈이 커다랗게 빛났다. “네 톰이 제 아들이에요. 당신의 아들이기 도 하고요.” 아말은 잠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26년 전의 그 일을 한시 도 잊어본 적이 없었던 그였다. 그때의 사랑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줄곤 스테파 니의 가장 훌륭한 지지가자 되어 주었다. 톰이 자기와 스테파니 사이에서 태어 난 아들이라는 사실에 아말이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편 유언이 담긴 필립 의 테이프가 에덴에 도착한 것은 한 시간 후였다. 물건의 중요성을 모르는 하녀 는 그것을 받아 다른 우편물ㄱ ㅏ께 복도의 전화기 옆에 그냥 두었다. 하녀의 하소한 실수는 결국 스테파니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하였다. 소포가 전달될 무렵 필립은 생의 종말을 맞고 있었다. 자동차의 배기가스에 호스를 연 결해서 차 안으로 새어나오도록 한 다음 창문을 밀폐했다. 그리고 편안히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변호사로 일하며 일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필립의 최후였 다. 사랑한 여자에게 기만당하고 급기야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참한 최후를 맞 이하고잇었다. 질리가 차고 안의 차 속에서 질식한 필립을 발견한 것은 그가 사 망한 후였다. 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미 싸늘한 시체였다. 겉으로 그녀는 남 편을 잃은 미망인의 슬픔과 비탄에 젖은 모습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론 신경을 곤 두세우고 있었다. 필립의 유품 중에서 한 장의 쪽지를 발견했는데 확인 결과 필 립이 죽기 전에 에덴의 스테파니에게 소포를 보낸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더욱 다급해진 질리의 거짓된 슬픔과 비탄을 결정에 달했다. 필립의 소포가 스테파니에게 전달될 경우 자신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감을 아는 질 리는 거의 필사적이었다. 다급해진 질리는 부랴부랴‘안정’을 핑계로 에덴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필립이 보낸 우편물이 개봉되지 않은 채 놓여져 있 는 것을 보고서야 안도의 숨을 도렸다. 이젠 아무도 모르게 그것을 손에 넣으면 되는 것이다. 모색 끝에 질리는 실행에 옮겼다. 위로하는 댄과 스테파니 앞에서 슬픔에 울부짖는 척하며 컵을 깨어 손에 피를 흘렸다. 당연히 스테파니와 댄이 구급약을 챙기는 틈을 타서 우편물을 수중에 넣은 질리는 비로소 안심하며 회심 의 미소를 날렸다. 그녀는 서둘러 에덴을 나섰다. 차 속에서 그녀는 카세트 테입 에서 흘려나오는 필립의 유언을 낱낱이 들을 수 있었다. 약을 응징해야 마당한 심판의 여신으 여전히 스테파니에게 등으 돌리고 있었다. 필립은 이미 죽었고 그의 유언도 소임을 다하지 못한 채 결국 질리의 손아귀로 돌아옴으로써 필립의 죽음마저 헛되게 되었다. 어머니를 지지하지 않은 데니스는 한 가지 고민을 더 안게 되었다. “나를 위해 그런 건 아니겠지만 아무튼 고맙네.” 제이크는 그에 게 술을 권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젠 내가 물러날 차례겠죠.”“아니지. 네 엄마도 쫓아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네.” 제이크는 데니스에게 하퍼사 에 머물 것을 요구했지만 그는 회의적이었다. 언뜻 빌 리가 사직한 총지배인 자 리를 들먹였지만 내키지 않았다. 스테파니를 내쫓은 데 한 몫 한 셈이지만 제이 크를 증오하기는 전과 다름없었다. 한편 안톤은 제이크가 스테파니를 단념하지 않자 재차 우려를 표명했다. “현실을 적시하게. 스테파니는 가질 수 없어. 그럴 필요도 없고.”“내가 반했다고? 만일 그렇다면 난 계속 노력할 거야.”제이크는 한 번도 스테파니를 단념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따. 다만 질리에 대해서는 안톤에 게 분명한 뜻을 밝혔다. “그녀는 독사야. 독사란 잡고 있을 때가 안전하지 놔 주거나 놓치면 오히려 내가 죽게 돼.” 그런 면에서 제이크는 질리를 정확히 보 고 있었다. 2. 소중한 사람들 대은 필립의 자살에 의혹을 품기 시작했다. “방금 필립의 주치의와 얘기를 나누었소. 아주 건강했다더군. 사업도 성공적이었고 재정압박이 다소 있기 했지 만 충분히 융자받을 수 있었는데 전혀 노력한 흔적이 없다더군.”“자살할 동기 가 없다는 거군요.”“필립 인생의 변수는 한 가지뿐이야. 질리지.” 댄은 거의 확신했다. “좋아요. 성실치 못했다 치죠. 그렇다고 자살까지?…….”“사랑의 정 도로 미룬다면 그럴 수도 있지. 당신도 알잖아. 그녀를 의심하지 않소.” 스테파 니는 갑자기 혼란에 빠졌다. “아들은 내게 반대표를 던지고 다른 아들은 알려 고도 하지 않고……딸은 내가 자기를 망쳤다고 하고 당신조차 미온적이예요. 여 보, 난 가족이 필요해요. 뭉쳐야 해요. 질리도 포함해서요. ”필립의 자살과 데니 스의 배신은 스테파니를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질리의 연극에 감족같이 속은 그녀는 질리를 가족에 포함시켜 단결을 촉구하고 있었다. “회사를 잃었기 때문에 가족이 필요한 거군.”“말도 안 돼요.”“하지만 회사를 잃었는데 질 리 가 한 몫 했다면 어쩔 셈이오?” 스테파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와 데니스가 다시 부딪친 것은 에덴에서 있었던 필립의 장례식 때였다. 처음부터 계속 술만 마셔대는 데니스에게 스테파니가 다가갔다. “너무 마시는 거 아니냐?”“위스 키를 너무 많이 축낸다는 건가요?”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웠던 탓일까. 그는 지 나치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얘기 좀 하자.” 데니스는 더욱 빈정거렸 다. “왜요, 형을 갖게 된 로맨스를 얘기하실 건가요? 하퍼사의 새로운 상속자 라, 너무 늦은 거 아녜요?” 스테파니의 두 눈에 서글픔이 배였다. “톰에 대해 선 전혀 몰랐다. 고의적으로 속인 게 아냐.”“그게 다예요?”“그래. 그게 사실 이야.”“지금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엄말 믿을 수 없어요.”그녀는 최대 한 자제하려고 애썼다. “데니스, 이사회에서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한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난 우리 가족의 단결을 원해.”“가족 전부 말이죠?” 스테파니 는 감정을 식히기 위해 데니스의 곁을 무시하듯이 벗어나 안젤로에게로 갔다. 그는 사라와 함께 있었다. 뜻밖에도 제이크가 장례식에 나타나 질리에게 조의를 표했다. “회사를 대표해서 깊은 조의를 표합니다. 스튜어트 부인.”“고마워요. ” 질리는 그럴 듯하게 응답한 다음 재빨리 다른 곳으로 갔다. 그와 함께 있으 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혹은 어떤 의심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자격지심 때 문이었다. 제이크가 가까이 왔을 때 댄은 냉담한 반응을 나타냈다. “필립을 아 는 줄 몰랐소.” 그 말은 질리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몇 번 만났었죠.” “난 반갑다고 할 수 없지만 질리는 고맙게 생각할 거요.”“마샬 박사님, 하퍼 사를 사적인 감정으로 보지 마십시오.”그의 점잖은 태도에 댄은 오히려 경멸을 느꼈다. “오해하시는군요. 수단은 긍정하지 않지만 하퍼사가 넘어간 건 솔직히 기쁘오. 개인적으로 당신께 유감이 있을 뿐이오.”“그렇다면 마주치지 않는 게 좋겠군요.”그들은 점잖은 대화 속에 날카로운 비수를 숨긴 채 역시 점잖게 헤 어졌다. 질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간 제이크는 역시 날카로운 말을 뱉었다.“오스 카상 감이로군, 스튜어트 부인.”“여긴 웬일이에요?”질리는 주위를 재빨리 경 계했다. 마침 아무도 없었다. “스테파니가 이대로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서 탐색 하러 왔지.”질리는 그에게 아파트에서 만나자며 빨리 돌아가도록 촉구했다. 다 된 밥에 재뿌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데니스에 대해 분노와 서글 픔이 엇갈린 스테파니가 밖으로 나왔을 뿐 마침 아말이 있었다. “나쁜 시간을 골랐나 보오.”“아니에요. ㅊ;ㄴ구가 필요하던 참이에요.”“그럼 오길 잘 했군. 당신이 하퍼사에서 제명당했다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잇었소?”아말의 진심을 스테파니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질리같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그녀 역시 아말을 통해 하루 아침에 하퍼사를 되찾을 수도 있었다. 아말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충분히 있었다. 스테파니가 원하기만 하면 기꺼이 지원할 것이다. “데니스가 내게 반대표를 던ㅈ어요.”“아들이 엄마를 배신해?”아말은 믿을 수 없다는 투였다. 문화권이 다른 그들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보 같은 충동이죠. 톰 때문에 화가 났던 거예요.”“그건 이유가 못되오. 아들은 엄 마를 위해 싸우는 거요. 그런데 톰은 이땠소?”“나를 밀어 줬어요. 그리고 톰에 겐 아직 당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어요.” 아말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톰에게 당신이 친아버지라는 걸 알리길 원하세요?” 아말은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답게 신중했다. “생각할 시간을 가집시다. 톰과 나에게 최선의 길을 모색해 보겠소. ” 그때 공교롭게도 톰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톰을 발견한 아말이 순간적으로 당황하자 스테파니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톰, 여긴 아말 왕이셔. 전화, 여기는 톰 맥매스터예요.” 아말은 이미 차분해져 점잖게 악 수를 청했다. “반갑소. 내가 하는 사업이 하퍼사와 연관이 있다오.”“영광입니 다, 전하.”톰과 아말을 잠깐 시선이 맞부딪쳤다. 이미 그가 아들임을 알고 있는 아말과 전혀 사실을 모르는 톰이지만 그들은 첫눈에 호감을 느끼는 듯했다. 스 테파니가 안으로 들어왔을 때 지리와 제이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한 사람은 슬프게 사로잡힌 미망인으로 다른 한 사람은 의례적인 방문객으로 왔 다 돌아갔다. 그리고는 질리의 아파트에서 다시 만났다. “필립의 테입은 어떡했 소?”“그가 가지고 갔죠.” 그녀는 장례식 당시 관 속의 필립시체를 싸늘하게 쳐다보며 문제의 카세트 테이프를 고인의 수의 섶에 끼워 넣었다. 공개되기를 바랬던 고인의 뜻과는 달리 마지막 희망까지 절망으로 묻히게 될 운명으로 만들 었던 것이다. “잘 했군. 이젠 서로 원하는 걸 가졌으니…….”“모든 게 끝나면 요.”“스테파니에게 뭘 원하지. 피? 말해 봐.”“방심은 시기사조예요. 개인재산 이 많기 때문에 반격이 가능해요.”“그녀의 오른팔인 빌리는 병상에 있고 아들 도 등을 돌렸지. 온 가족이 모두 제각기……폭풍이 부는 언덕의 파티같지 않나 요?”“하지만 그녀가 복수하려고덤비면 불가능이 없어요.”“누구나 마찬가지 아닐까?”“게다가 그녀의 강력한 지지자 아말도 있어요. 오늘 정원에서 만나는 걸 봤어요.”“나도 알아.”“지금은 그를 유혹할 수도 없어요. 필립이 죽으니 그런 손해도 보는군요.” 제이크의 눈가에 조소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생전 에도 속이더니 관이 묻히자마자 딴 생각이로군.”“고약한 사람!” 결코 가치없 느 짓을 하지 않는 제이크가 문득 질리에게 다가들며 손을 뻗었다. “미망인은 이래야 돼. 전통적인 검정색 의상……장례식으로 몸이 경직됐군!”“풀어 주세 요.” 질리는 소복을 거추장스러운 듯이 벗어 던졌다. 순식간에 거리낌없이 알몸 으로 변한 그녀는 제이크에게 다가갔다. 방금 남편의 장례식에서 돌아온 미망인 은 사내의 손을 잡아 자신의 다리 사이로 깊숙이 안내했다. 그리고 더욱 적극적 으로 하반신을 그 무릎에 걸치며 최대한 다리를 벌리며 신음소리를 냈다. 어느 때보다 적극적인 제이크의 공격에 유례없이 몇 차례나 혼절했던 질리는 아침 늦 게 잠에서 깨어났다. 여자로 태어나 성숙한 이래 이성과의 쾌감을 최초로 맛본 듯이 심신이 뿌듯해서 침대를 내려오던 질리는 예기치 않게 놀라고 말았다. “ ……질 리가 날 사랑한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소. 결혼도 날 이용하려는 거짓이 었소. 그 동안 계속 샌더스와 관계를 맺었다오……”처음엔 자신의 귀를 의심했 지만 그건 분명한 필립의 육성이었다. “당신 눈에서 안개를 걷어내면 사실이 명확히 보일 것이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질리는 주위를 살폈 다. 시선이 문쪽에 닿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넋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부 르짖었다. 침실 입구 쪽에서 손에 카세트 테이프를 들고 서있는 이는 아직 앳된 처녀였다. 죽은 필립의 조카딸인 제시카였던 것이다. “유령을 본 것 같은 얼굴 이군요?” 질리는 재빨리 제정신을 수습하려고 필사적이었다. “그건 어디서 났 어?”“필립삼촌이 작별선물로 준 거죠.”질리는 땅을 치고 싶었다. 시체와 함께 사라진 줄 알았던 테이프가 제시카의 손에 들어 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 었다. “얼마는 원해?”질리는 벌써 본색을 드러냈다. 이미 씻어버릴 수 없는 인 연에 대해 제시카는 질리를 증오하고 있었다. “원본이 아직 스테파니에게 넘어 가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랬다면 매수하려들지 않을 테니까. 평생 속아서 살아온 삼촌이지만 마지막엔 저한테 보험을 들었죠.” 질리는 자신을 잊은 채 죽은 필 립에게 이를 갈았다. 그는 죽기전에 테이프를 복사해서 제시카에게도 보냈던 것 이다. “얼마야? 수표를 써 줄께.”“여기 있을끼 해요. 슬퍼하는 조카와 애도하 는 미망인. 장례식은 어땠어요. 눈물도 많이 흘렸겠죠?”“원하는 걸 말해!”질 리는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전부 다요. 난 삼촌을 사랑했죠. 당신이 한 짓을 알아요.”“네가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별짓을 다했었지.”“솔직할 수 없어 요? 당신 같은 창녀는 또 없을 걸? 오늘은 누구랑 놀아났죠, 장의산가요?”“나 가!” 질리는 참을 수 없어 하며 발악하듯 소리쳤지먼 제시카는 더욱 여유를 보 였다. “스테파니한테요? 날 거두는 게 신상에 좋을 걸요? 옛정을 생각해서도 말이죠. 옛날 일이 아직 생생해요…….” 제시카는 목에서부터 몸 전체에 입은 흉칙한 화상자국을 보여 주었다. “이런데 어떻게 잊겠어요?” 아름답고 매력적 인 얼굴과 달리 그녀의 목부분부터 있는 밀가루 반죽을 더덕더덕 붙인 듯한 흉 터가 질리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녀는 적어도 당분간 제시카를 내쫓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한편 스테파니는 고민 끝에 톰을 아말에게 정식으로 소개시키 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아말이 기다리는 곳으로 톰을 테워다 준 다음 자리를 비 켜주었다. 사라는 캐시와 함께 타라의상실에서 괴로움을 달래며 조용히 일했다. 데니스가 타라에 왔을 때 사라는 없었다. 그리고 공교롭게 질 리가 제시카를 데 리고 나타났다. “데니스, 하퍼사에서 제이크의 구두를 닦고 있어야 되는 거 아 냐?”데니스가 그녀를 무섭게 노려볼 때 제식카가 그를 알아보며 반갑게 뛰어갔 다. “안녕, 데니스!”“제시카! 정말 많이 컸구나.”데니스 역시 금방 알아보았 다. 어릴 때 그들은 거의 함께 자랐다. “삼촌일은 안 됐어.”“장례식에 맞춰 돌아올 수가 없었어요.”“얼마나 있을 거야?”“잘 모르겠어요. 질리가 같이 있 자고 해서. ” 제시카는 슬쩍 질리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안내해 주지.”“좋아요.”질리는 제시카를 데려가며 데니스의 귀에 들릴 정도로 크게 말했다. “저놈은 믿지 마라, 엄마한테 물어보면 알 거야.”“다른 데 가서 발톱을 세우시지, 자기 무덤을 파지 말고.”데니스의 중오에 가득찬 말에 질리는 오히려 활짝 웃었다. 그녀는 캐시에게 명령했다. “스튜어트 양에게 옷을 보여 줘요. 수선은 즉시 하고 용수했다. 사라가 돌아왔을 때 제시카는 호화로운 의상 을 선택했다. ’목선을 대담하게 파 놓은 드레스가 어울릴 텐데.”“난 구식인가 봐.”사라도 제시카의 화상으로 입은 흉터를 알지 못했다. “넌 어릴 때부터 목 선이 높은 옷만 입었지. 돌아와서 기뻐, 제시카. 우리가 더욱 친해졌음 좋겠다.” 아직 사실을 적시하지 않고 사랑을 고집하는 톰 때문에 제시카 같은 친구가 절 실히 필요한 사라였다. “나도 아주 친해지고 싶어, 질리가 뭐랄지 모르지만. 내 게 참 잘해 줘.”제시카의 말뜻을 사라는 저혀 짐작하지 못했다. 사라가 온실 속 에서 자란 반면 제시카는 많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온 터였다. 제시카가 다가가 기 전에 캐시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마주하고 있었다. “필립의 장례식에 안 왔더군, 캐시?”“잘 모르는데요, 뭐.”“펜팔이라도하는 줄 알았지. 서류 정리하 다 발견했어.”질리는 캐시가 필립에게 보냈던 메모를 보여주며 빈정거렸다. “ 자살하게 만든 기분이 어때?”“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잘 아실 텐데 누구 한데?”“망할 계집애!”질리가 대뜸 캐시의 뺨을 때리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더 욱 세차게 질리의 뺨을 때렸다. 그 광경을 지켜본 제시카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당신이 졌어요, 질리.”질리의 두 눈에서 형형한 독기가 뿜어나왔다. 제시카 앞에서 세우려던 체면이 오히려 구겨진 것이다. 아말을 아버지로서 만난 톰은 마음이 한결 안정된 듯했다. 그는 그 즉시 스테파니를 찾아와 그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사과했다. “지난 행동을 사과드리겠어요. 이젠 원망하지 않겠어요.”“ 그분은 갓 태어난 널 꼭 한 번 안아 봤을 뿐이지. 넌 노인처럼 주름살 투성이였 고 푸른 눈에…….”톰이 갑자기 소리쳤다. “내 눈은 밤색이에요!” 스테파니는 그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말을 만난 직후 스테파니의 말이 다시 톰에게 어떤 확신을 안겨 주었다. 아말과 스테파니의 아들은 푸른눈이며 아울러 저신은 친아들의 아니라는 확신이었다. 그는 사라를 즉시 찾아가 그 사실을 밝혔다. “ 난 네 오빠가 아냐! 난 알 수 있어. 증거를 찾겠어. 유일한 기회야.” 톰은 증거 추적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맹세했다. 확증은 없지만 심증을 확고하게 굳 힌 그는 사라를 다시 되찾을 작정이었다. 데니스는 자신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제이크의 요청으로 하퍼빌딩에 출두한 스테파니가 대기실에서 외롭게 기다리는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 “혼자 알아서 하라시지 이렇게 기다리시다니!”“그럼 집에 앉아 손톱이나 물어뜯이란 말이냐?”데니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회사고 아들이고 다 잃은 마당에 또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날 잃은 건 아네요.”“ 다행이구나.”“다투고 싶지 않아요. 엄마시댄 가고 이젠 내 차례예요.” 스테파 니의 시선에 다시 분노와 서글픔이 나타났다. “다행이구나. 승자가 되어야 해, 반드시. 넌 할아버지를 꼭 닮았어.” 그때 아직 회장의 비서로 남아있는 힐러리 가 다가왔다. “샌더스 씨가 들어오시라는데요……정말 죄송합니다.”“괜찮아 요. 데니스, 오늘을 가족끼리 저녁을 먹자, 오겠니?” 데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테파니가 들어갔을 때 제이크는 여전히 정중하고 친절하게 대했다. 재차 하퍼 사를 공동 경영할 것을 진지하게 제안했지만 스테파니의 반응은 냉담했다. “여 전히 자신만만 하군요. 자신에게 솔직해 보시오.”“당신을 전부 조사했지만 쫓 아낼 방법은 없더군요. 하지만 개인적인 건 맘대로 안 될 거예요. 왜 내가 필요 한 거죠?”“안톤은 내가 당신께 푹 빠졌다고 하더군요.”“그래요?”“유전인 가 보지만, 내 형도 여자한테 빠졌는데 끝이 안 좋았죠.” 스테파니는 그 말의 뜻을 알지 못했다. “정말 유전인가 보군요.”“다시 거절한다면 미친 짓이오. 정말 관대한 겁니다.”“거절해서 당신의 승리에 오점이 생긴다면 정말 기분좋 을 거예요.” 제이크는 웃지 않았다. 점차로 표정이 돌처럼 굳어졌다. 사실상 그 는 하퍼사의 새 경영자로서 최선의 조건을 제시했다. “지금 나가면 그게 하퍼 사와 마지막이 될 겁니다.”“그래요?” 스테파니는 그의 엄중한 경고를 무시한 채 여유있게 제이크의 사무실을 걸어나갔다. 뒤에 남은 제이크는 주먹을 불끈쥐 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하지만 스테파니의 강경한 의지에 어쩔 숭 벗이 끌리 는 자신을 다시 확인하며 괴로웠다. 그 역시 질리와마찬가지로 스테파니가 순순 히 단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어떤 싸움으로 그녀에게 다시 충 격을 주기보다 합의점을 도출해내고 싶었다. 아말에게 부탁하면 쉽게 하퍼사를 되찾을 수 있지만 스테파니는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하퍼빌딩을 나 온 그녀는 병원에 누워있는 빌리를 찾아갔다. 빌리는 그녀에게 있어 아버지처럼 의지하고 싶은 존재였다. “내가 가장 필요한 시기에 이렇게 쓸모없이 누워있어 서 미안하오.”“회사일에 신경쓰지 마세요, 몸에 나빠요. 우린 이제 한물 갔나 봐요.” 한평생 하퍼사에 몸담아온 빌리로서는 단념하기가 쉽지 않았다. “똑바 로 봐야할 사실이 있지. 질 리가 샌더스를 도왔단 말이오.”“때가 오면 질리 문 제도 생각해 보죠. 지금은 가족이 뭉쳐야 해요. 톰은요?”“기다려 봅시다. 정말 회사를 포기할 작정인가?” 빌리의 노안에 실망과초조의 빛이 역력했다. “선택 의 여지가 없는 걸요. 제가 진 거예요.” 그토록 절망에 바지고 기운없는 스테파 니를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빌리는 제이크, 특히 질리에 대해 들끓는 분노를 느 꼈다. “다시 되찾은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좀 황당하고 돈이 많이 들지만, 그 리고 다시 진다면 모든 것을 완전히 잃게 되겠지만……,”“그 내용은 제가 들 어야 하나요?” 빌리는 그런 사태에 대비해서 열심히 메모한 계획서를 스테파니 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직접 구상한 기획인데 결정은 당신에게 달렸소. 스테파 니.”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메모를 대충 훑어보던 스테파니는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톰은 자신의 눈이 푸르지 않고 밤색이라는 사실에 집착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푸른눈으로 변하기도 한다는 사라의 설득을 그는 도저히 받 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 사라의 마음은 톰과의 갈등으로부터 도망이라도 하듯 안젤로와 가까워졌다. 무엇인가 생각을 바꿀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고 어 릴 때부터 친구로 자라온 안젤로가 편안하게 느껴졌다. 스테파니를 끌어들이는 데 실패한 제이크에게 에상됐던 난제가 닥쳐왔다. 하퍼사 경영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아말 왕과의 재계약 건이다. 상대가 일국의 왕인데도 제이크 편 은 속수무책이었다. 안톤도 어쩌지 못했다. 질리를 통해 미인계를 쓰려던 계획도 실패했다. 아말을 일반적인 남자로 과소평가한 것이다. 아말과 단독으로 대좌한 제이크의 최선책은 지난 해와 똑같은 조건의 재계약 제의였다. 계약신청서를 검 토한 아말은 엄숙하게 답변했다. “유감이지만 샌더스 씨, 조건이 적합하지 않군 요.”“작년과 똑같은 조건입니다.”“그렇지만 작년과 지금은 상황이 많이 변했 소.” 제이크는 상대의 말뜻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스테파니 하퍼와 거래하는 게 아니란 말씀이군요.”“그녀는 나의 친구요. 차이없게 대한다면 친구로서의 아무런 의미도 없겠죠.” 제이크는 크게 실망했다. “잘 있으시오, 샌더스 씨.” “연락드리겠습니다.”“그러길 바라오.”그를 정중하게 배웅한 제이크는 즉시 질리에게 전화로 도움을 청했다. “질리, 중동친구가 까다롭게 굴고 있어. 좀 고 분고분하게 만들 방법이 없을까?” 그는 여전히 아말 왕을 과소평가하고 있었 다. 적어도 스테파니와 관련된 일이라면 막대한 손해도 망설이지 않을 그였다. 스테파니에게 털끌만큼이라도 불리한 일이라면 천하의 역색을 총동원해도 말려 들지 않을 그를 질리 정도로 매수하여 드는 어리석음을 범하려 하고 있었다. 3. 하퍼가문의 도전 모처럼 에덴에 하퍼가문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데니스가 좀 늦었지만 그는 스테파니를 위해 꽃을 가져왔다. “자, 모두 모였으니 미래를 위해 어떻게 되든지 건배!” 댄을 비롯해 모두 건배했다. “미래는 우리에게 달린 것 같군요. ” 데니스의 말에 사라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데니스의 배신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오빠나 그렇지. 엄마, 왜 모이게 하셨어요?”“지난 몇 달 동안 너희 들이 너무 고생한 것 같아서.”“여보, 그럴 필요없소. 우린 다 이해하오.”“그 래요?”데니스가 다시 빈정대자 사라가 면박했다. “화해를 위한 저녁이야!”데 니스는 거기서 그만두지 않았다. “그래서? 하퍼사의 전통처럼 모두 제각기 흩 어져 엉망인데요?” 그는 톰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스테파니를 배신하고서도 아 직 상속권에 연연하는 듯했다. “데니스,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말라구요? 저는 이런 혼란이 우리 집 전통인 줄 알았는데요.” 스테파니는 시선을 떨구고 사라가 대들 듯이 따졌다. “또 싸우자는 거야?” 사라가 걱정하는 눈빛이 되자 스테파니는 오히려 그녀를 진정시켰다. “아니다, 얘야. 그게 내가 사과하려는 이유다. 너희들은 너무 힘들게 만든 것 같다.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거다.”“우리가 그러길 원한다고 생각하세요. 엄마?” 사라는 안타까운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댄도 그녀를 거들었다. “여보, 우리 모두는 당신을 사랑하오.” “그런 맞아요. 하지만 현재의 위기는 엄마가 자초하신 거예요.” 데니스는 끝까 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서사라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오빠, 그만하 지 않으면 음식접시를 얼굴에 던질 테야!” 그때 스테파니가 갑자기 낮게 소리 쳤다. “그리, 질리야!” 그녀는 비로소 질 리가 악순환의 진범임을 알아차린 듯 했다. 그때 질리는 안젤로의 식당에서 아말 왕과 만나고 있었다. 제이크의 요청 도 있었지만 그녀 자신 중동인, 특히 한 나라의 왕을 유혹하는데 특별한 호기심 을 가졌다. 아말은 자연스럽게 질리를 대했다. “저녁을 이런 데서 먹다닌 특이 하군요.호주는 모든 게 자연스럽군요. 게다가 이태리 음식도 좋죠.” 안젤로의 아버지도 알고 있는 그는 안젤로에게 안부를 전했다. 그는 스테파니와 가장 가 까운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항상 수행원이 따라다녀요?” 질리는 아말 의 경호원들이 거슬린다는 듯이 넌즈시 물었다. “항상은 아니오, 스튜어트 부 인. 그보다 언니를 어떻게 도와주면 좋겠소?” 질리는 상대의 마음을 전혀 헤아 리지 못했다. 언니가 지금은 저를 보지 않으려 해요.”“그랬소?”“네.”“싸웠 소?”“내가 배반했다고 생각해요.”“배반했소?”“언제나 그렇게 직선적이세 요?”“그러려고 하오.”“난 배신하지 않았어요. 언니를 좀 설득시켜 주세요.” 가장 순진하고가장 아름답게 보이려고 거의 안달하는 질리를 아말은 알 수 없는 눈길로 응시했다. “우선 회사를 되찾아야 되니까 싸우도록 설득해야 하오.”“ 어떻게요?” 그녀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일렁였다. “그건 모르겠지만 그래야 된 다는 것은 아오. 지금 포기하면 스테파니는 죽은 거나 다름없지.”“언니를 잘 아시는군요. 언니가 왜 당신을 비밀에 부쳤는지 이상하네요.” 질리는 넌즈시 미 끼를 던졌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당신을 보호하려고 그랬는지도 모르지. ”“유감이군요. 사랑하셨어요?” 아말은 가볍게 웃어 넘기고 곧장 캐어 물었다. “항상 그렇게 직선적이오?”“사과하죠. 남자들은 언니를 자세히 알지도못하면 서 사랑에 빠지더군요…….”질리는 상대의 눈치를 재빨리 살폈지만 결과는 마 찬가지였다. “나는 그녀를 아주 잘 아오.”“얼마나 잘 아시느냐고 물으면 무례 하겠죠?”“대답을 해 준다면 난 신사가아니겠죠?” 그의 여우잇는 되물음에 할 말을 잃었다. 어떤 점에서도 스테파니를 우선하는 그에게 질 리가 비집고 들어 설 틈이 없었다. 세상의 모든 남자를 끌어들일 수 있다고 확신해왔던 그녀는 뜻 밖의 강한 벽을 느껴야 했다. 에덴의 분위기는 식사 후 조금씩 바뀌었다. 한동안 주의를 잊은 듯이 깊은 생각에 잠겼던 스테파니가 불쑥 입을 열었다. “여보, 고 백할 게 있어요.” 사라가 듣지도 않고 반대하고 나섰다. “엄마, 또요? 이젠 싫 어요.”“그게 아니다. 빌 리가 회사를 위해 싸우자는 거야.”“어떻게 말이오? ”“군대라도 보내나요?” 댄과 데니스가 거의 동시에 묻자 스테파니는 이내 체 념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상관없어요. 난 안 할 거니까. 다시 한 번 해볼까 도 생각했지만…….”“왜 마음을 바꿨소?”그 원인에 대해 댄이 가장 깊은 관 심을 표명했다. 처음에는 회사에만 매달리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사랑 때문에 회사를 빼앗기고 ㅇ머한 고비까지 넘겼다. 그리고 시드니에 돌아온 후 그녀가 어떻게 당하고 참패했는지 지켜본 그는 사랑하는 만 큼 그녀의 입장을 충분히 동정했다. “여기 앉아서 우리 가족들을 지켜보는 게 낫겠어요. 사우려면 가진 것 모두를 걸어야 하는 데 안 하겠어요.” 안도하는 댄 과는 달리 데니스의 반응은 완곡했따. “저는 유감이라고 생각해요.”“계획이 뭔지도 모르면서?” 사라였다. “상관없어. 뭐든 상관없어 엄마를 돕겠어요.” 데니스는 히차게 장담했다. “그렇게 장담하지 말아라. 아무튼 고맙다. 모두 고 마워. 빌어먹을 하퍼사!……” 그녀의 돌발적인 태도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 좀 처럼, 아니 지금껏 한 번도 그렇게 과격한 발언을 안 했던 그녀였다. 이때 덴을 비롯한 가족 모두는 그녀의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열정을 분명히 읽을 수 있 었다. 아말을 유혹하는데 실패한 질리는 심기가 뒤틀렸다. 오기가 나서 집에 돌 아온 그녀는 때마침 제시카가 눈에 보이지 않자 퍼뜩 묘안이 떠올랐다. 이때다 싶어진 그녀는 도둑고양이처럼 제시카의 침실로 숨어들었다. 평소 제시카가 눈 치채지 못하도록 그녀의 물건들을 보아 두었던 질리는 대뜸 그녀의지갑을 찾아 냈다. 제시카가 가장 소중히 간직한다고 생각되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교활한 질 리도떼로는 제시카의 꾀를 앞지르지 못했다. 그녀가 열심히 지갑을 뒤지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제시카의목소리가 비꼬는 듯이 들려왔다. “찾으셔도 소용없어요. ” 질리는 뒷목을 움쳐잡힌 듯이 흠칫 놀랐다. “하나 더 녹음해서 안전한 장소 에 뒀거든요.” 질리는 맥이 탁 풀렸다. “왜 돈이나 받고 가지 않지?”“그렇게 쉽게 나를 떼어버리진 못해요. 지금도 가끔 통증이 온다고요.” 제시카의 목소리 는 야멸차게 변했다. “그건 내탓이 아냐.”“날 돌보기로 되어 있었는데 당신은 다른 일로 바빴죠.”“난로에서 불꽃이 튕긴 거지 내 잘못이 아냐” 순간 제시 카의 두 눈이 날카롭게 질리를 쏘아보았다. “내 방에 연기가 가득차 아무것도 안 보일 때 비명을 질렸죠. 질리 숙모가 날 구해 줄 거라고 믿었죠. 다치진 않을 거라고. 당신은 뒷방에 있었어요. 그때!” 제시카는 교활한 질리조차 어쩌지 못 하게 몰아세웠다. “좋았나요? 남자하고의그 짓이 그렇게 즐거웠나요? 여덟 살 된 어린애가 불길 속에 있는 것조차 버려둘 정도로 쾌감을 느꼈나요?” 질리는 기가 꺾였다. 제시카의 말대로였다. 여덟 살 난 아이가 뒷방에서 불길에 휩싸여 비명을 지를 때 그녀는 남편도 아닌 다른 사내와 한창 오르가슴에 도달해서 헐 떡였던 것이다. “그럴 줄은 몰랐어. 그리고 넌 너무 과민해. 그래도 넌 여전히 예뻐.” 질리가 할 수 있는 변명을 그게 고작이었다. “난 신체의 열등감으로 남 자친구글 사귈 수가 없었어요. 내 몸을 보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용기거 없어 서요. 당신은 내게 갚을게 많아요.” 제시카의 잔잔하면서도 면도날같이 날카로 운 원망에는 함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와 비슷하게 톰도 지금껏 믿고 살았던 아 버지 빌리를 원망했다. “내 아버지가 아녜요. 그건 확실히 안다구요! 죄송해요. 전 사실을 알아야만 해요. 일이 어떻게 시끄러워지든 상관없이…….” 병실의 침 대에 누운 빌리는 난감해진 표정으로 나가는 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퍼가 문은 여기저기서 말썽이 잇달았다. 엄밀히 말하면 하퍼사를 집어삼킨 제이크보 다 근본적인 원인은 질리에게 있었다. 그 동안의 온갖 사건과 문제들은 그녀가 출감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톰을 자기의 아들로 믿게 된 아말 왕은 아들을 위 해 무엇이든 해줄 마음이었다. 그것이 곧 스테파니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샌더스와의 계약은 어떻게 됐어요?”“제자리를 맴돌게 조처해 놨지.”“제자 기를 맴돌게 조처해 놨지.”“왜요?결국은 사인하게 될 텐데요. 양쪽 다 이익되 는 계약이에요.”스테파니의 말에 아말은 기다렸다는 듯이 응답했다. “그건 사 실이지. 당신에게 시간을 좀 벌어 준다고나 할까…….”“왜요?” 아말은 미리 준비한 것을 그녀에게 제시했다. “백지수표요. 얼마가 지출되도 좋으니 하퍼사 를 구하시요.”“몇백만일 거예요.”“선물로 받기 싫다면 빌려 주는 조건으로 하지.”“받을 수 없어요. 그 정도는 아시잖아요.” 스페타니와 질리의 본질적인 차이점이 여기에 있었다. 지릴라면 아말이 제안하기 전에 그의 수중에서 돈을 긁어내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을 테지만 스테파니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 면 내가 하퍼사를 사서 당신에게 넘기겠소.” 스테파니는 다시 없을 절호의 찬 스를 끝내 거부했다. ’아말, 말도 안 돼요.“’난 할 거요. 당신도 알 테고……. ”“그러시면 안 돼요.” 아말은 실망과 함께 또 다른 감동으로 눈빛이 젖어들 었다. 스테파니의 굳은 의지에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그럼 싸우시오.” 그는 강력하게 궈했다. “하퍼사는 당신 인생의 절반이오. 싸워서 다시 차지하시오. 불가능하다는 말은 마시오. 빌리와 얘기했는데 가능한 계획이요.”“샌더스의 안 색이 변하는 꼴을 정말 보고 싶어요. 하지만 안 돼요. 가족과 약속했어요. 회사 는 상관안키로.” 아말은 집요하게 권유했다. 하퍼사가 없는 스테파니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산송장과 같아지오. 가족이 원하던가?”“댄 은 더 행복할 거예요.”“얼마나 오래? 그는 포기하지 않은 여자를 사랑한 거요. 집에서 뜨개질이나 하는 당신 모습을 상상이나 해봤소. 당신은 재기해야만 돼.” “위험부담이 너무 커요.”스테파니는 끈질긴 설득에 약간 고개를 숙였다. “인 생이란 게 뭐요? 안 하겠다면 내가 하퍼사를 매입해서 주겠소.” 아말의 능력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러면 정말 거북할 거예요.”“그러면 싸우시오!”스 테파니는 더욱 난처한 입장을 표명했지만 그럴수록 아말은 더욱 강력하게 부추 겼다. 아말의 충고는 스테파니를 다시 깨어나게 만들었다. 다시금 그녀의 의지를 불타게 만들었다. 더 이상 망설이며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녀는 당 장 밀어붙이기로 결심했다. 뜨개질이나 하는 여자보다는 포기하지 않는 여자를 사랑할 거라는 댄에 대한 해석이 스테파니에게 큰 힘이 되었다. 자신의마음을 굳힌 스테파니는 은밀하게 몇 가지 필요한 조치를 취한 다음 불숙 제이크 샌더 스를 방문했다. “계속 놀라게 하는군요!”그녀가 회장실에 들어 섰을 때 제이크 는 마침 옷을 갈아입던 중이었다. “옷을 벗던 중인가요. 아니면 입던 중인가요? ”“그런 당신이 왜 불쑥 왔는가에 달렸죠.” 혹시나 하고 묻는 제이크에게 그 녀는 쐬기를 박았다. “법 규정상 시간 내에 통보토록 명시되어 있어서 직접 알 리려고 왔어요. 하퍼사를 다시 사서 개인회사로 만들겠어요. “뭐라고요?” 제이 크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상대가 다름아닌 스테파니였기 때문이다. “그러 려면 51퍼센트의 주식을 가져야 할 텐데요?”“알아요.”“돈이 얼마나 드는지 알고 있소? 성공한다 해도 마찬가지요. 지금 그렇게 많은 돈이 있을 리 없소.” “만들기 위해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할 거예요.”“지면 몽땅 잃게 되는데?…… ”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스테파니를 똑바로 응시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여자는 스테파니뿐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면서였다. “이번에야말로 필사적인 싸움이 되겠죠, 한 사람에게는…….”되돌아 나가던 그 녀는 때마침 들어오던 질리와 마주쳤지만 차갑게 외면해 버렸다. “드디어 스테 파니 하퍼를 잡았군요!”거의 옷을 벗으 ㄴ제이크의 옷매무새에 질리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그녀는 스테파니와 제이크가 육체관계를 가졌다고 생각한 게 분명 했다. 에덴의 수영장에 하퍼가문의 네 식구가 모였다. 스테파니가 수영을 끝내고 나왔을 때 댄은 신문을 펼쳐들고 있었다. “이래서 가족이 뭉치길 원했군. 개인 이 아니고 사업적으로 우리가 필요했던 거야.” 그는 신문을 가리켰다. 이미 스 테파니의 도전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제이크를 내쫓고 회사를 되찾으려 면 51퍼센트의 주식이 필요해요.” 데니스는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그래, 데 니스.”“큰 돈이에요.”“그래, 부동산으로.”“빈털터리가 될 수도 있어요.” 스테파니는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데니스와 사라에게 말했다. “둘 다 잘 들어 라. 이 집까지 포함해서 모든 부동산을 저당잡혔다. 계획대로 안 될 경우에 대비 해서 너희들의 주식은 사겠다. 그래야 최악의 경우에도 상속분은 무사하게 되니 까.” 아말의 백지수표를 마다하고 자구책을 택한 것은 역시 스테파니 다운 결 정이었다. “우린 가족이잔항요. 같이 노력하는 거예요.” 사라는 전에 없이 강 경한 태로를 보였다. “아니다. 이건 내 싸움이고 내가 결정한 일이다.”“그래 도 제 주식은 그냥 드리겠어요.”“이기려는 싸움이지만 너까지 희생시킬 순 없 다.”“제 주식은 엄마 거니까 더 말씀하지 마세요.” 댄이 묵묵히 지켜보는 가 운데 데니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엔 감정적인 처리였다고 비난 하셨으니 이번엔 안 그럴께요.”“좋다.”“패하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죠?” 스테파니는 댄을 포함한 모두를 천천히 둘러 보았다. “제이크가 회사를 독차지 하게 되고 우린 직장을 구해야 되겠지.”“그런 위험부담을 감수해요? 이럴 때 제가 빠질 수 없죠. 제 주식도 전부 드릴께요. 그를 쫓아내야만 해요. 치사한 수 법으로 나올거예요.”“그럴 테지.”“행운을 빌어드릴께요.”“고맙다, 너희 둘 다.”댄은 묵묵히 남매와 어머니의 굳은 결속을 지켜보았다. 이번에는 그도 스테 파니를 비난할 수 없었다. 가족의 동참에 힘을 얻은 스테파니는 병상의 빌리를 찾아갔다. “많이 회복되었지만 아직 무리하시면 안 돼요.”“난 괜찬아. 문제는 51퍼센트의 주식이야.”“사업얘긴 안 하기로 하셨잖아요?”“약 먹는 생각만 하지 않으려면 뭔가 다른 일을 생각해야지. 가져라.” 그는 미리 준비해 놓았던 주식서류를 스테파니에게 넘겨주었다. “이러시면 안 돼요, 빌리.”“난 하퍼가 족이 아니란 말인가? 이 지경이 된 것은 내 실수 탓이니 만회할 기회를 주게.” 빌리도 스테파니도 진심이었다. “사라와 데니스도 참여했어요. 우린 이길 거예 요.”“이제야 스테파니 하퍼답구료.” 병약하고 늙은 빌리의 얼굴에 오랜만에 화색이 돌았다. 희망은 확실히 모든 인간에게 활력속로 작용했다. 때마침 질리가 화사한 얼굴로 병실에 나타났다. “사업구상에 방해를 한 건가요?”“사실은 그 렇소.”빌리는 그녀를 노골적으로 불쾌하게 대했다. “죄송해요. 어떠신가 해서 왔어요.”“다른 걱정 때문에 왔겠지, 질리.” 빌리의 병문안까지 챙길 질리는 애당초 아니다. 빌리는 노련한 완목으로 그녀가 제이크의 지시로 염탐하려고 왔 음을 직감했다. 게다가 모든 사태의 원흉인 그녀를 대하기가 역겨웠다. “항상 나의 아픈 곳을 찌를길 좋아하셨죠.” 질리는 염탐의 목적을 생각할 겨를도 없 이 쫓기듯이 병실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너무 심하셨서요. 의심이 간다해도. ” 스테파니는 쫓기다시피 나가버린 질리를 동정하듯 말했다. “어떤 때는 예리 한데 또 어떤 때는 바보같군, 스테파니.”“타고난 성격인 걸 어떻게 바꾸겠어 요.”“어쨋든 내가 퇴원하기 전에 회장자리를 되찾게.”“약속하죠.” 그들은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스테파니의 추진력은 하퍼사 경영 당시로되돌아갔다. 아 울러 하퍼사의 경영권 싸움이 불붙자 매스컴이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며 전격적 으로 스테파니와 제이크의 대담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세인들의 관심은 하퍼그 룹의 경영권 다툼에 집중되었다. 그런데 텔레비전 방영에 앞섯 보고싶소. 싸울 필요가 없어요. 둘이 함께 경영하면 되니까. 분장실에서의 대화였다. ”처음엔 회사를 강탈해 가더니 이번엔 침대로 유혹하시는군요.〔”난 좀더 형식이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죠. 나와 결혼해 주시오.” 제이크는 진지했지만 그것은 그를 내리막길을 걷게 하는 결정적인 실수로 작용한다. 이윽고 두 사람은 사회자를 가운데 두고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내 계산에 따르면 현 재 시중에 51퍼센트의 주식이 없습니다. 하퍼 씨도 알다시피 51퍼센트가 안 되 면 경영권은 불가능합니다.” 제이크는 카레라를 의식한 듯이 한 것 점잔을 뺐 다. “계산은 나중에 하죠. 하퍼 씨. 주주들이 샌더스 씨에게 등을 돌리고 당신 을 지지할 거라는 근거는 뭐죠?”“센더스 씨가 패배할 거라는 뜻인가요?” 스 테파니는 확신에 가득찬 모습이었다. “글세요. 그럴 수도 있겠죠.”“주주들께 서 샌더스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실 수 있겠죠. 더욱 중요한 것은 하퍼사가 앞 으로 1,2년 후‘개업해적’이라는 평판의 샌더스 손에소 어떻게 벗아나느냐는 것입니다. 그녀의 산랄한 비판에 제이크의 낯빛이 붉어졌다. ‘물론 나의 경영 방법이 종래의 것보다 부족하다는 것은…….” 스페타니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 다. “아직도 중동이 거물급 거래처와의 석유재계약 건으로 애를 먹고 있습니 까?” 사회자와 함께 모든 시청자들이, 특히 데니스와 사라 등은 화면에서 눈을 떼짐 ㅗ했다. “아뇨, 개인적인 발언은 피하겠소.” 순간 스테파니의 입가에 엷 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분장실에서 결혼신청은 개인적인 게 아닌가요? ” 사회자는 깜짝 놀랐다. 시청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사실입니까, 샌더스 씨?”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고 생각한 제이크는 안간힘을 써 태연을 가장하며 그럴 듯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만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소.” 스테파니는 때가 됐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대답해 드리죠, 샌더스 씨.” 그녀는 사회자나 제이크가 미처 판단할 겨를도 없이 탁자 위의 물컵을 들어 제 이크의 머리 위에 쏟어부었다. 사회자는 더욱 놀라며 방송을 재빨리 중지시켰다. 시청자들의 관심이 집중됐던 하퍼사의 경영권 경쟁에 대한 대담은 그렇게 해서 중도에서 무산되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제이크는 큰 망신만 당한 셈이다. 만일 결혼신청과 관련된 스테파니의 행동이 아니었으면 단연 그녀가 불리했다. 빼앗 긴 하퍼사를 찾으려는 최후의 발버둥 정도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다. 제이크의 결혼 신청은 결과적으로 스테파니에겐 전화위복의 기회를 준 셈이다. 텔레비전 을 지켜보던 사라와 데니스는 쾌재를 불렀다. “오래 전에 저러셨어야 하는데!” 데니스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다른 주주들도 우리처럼 생각해야 되는데…….” “그럴 거야. 가서 일해야겠어.” 데니스는 기운이 용솟음쳤다. 한편 그 직후 사 라는 제시카의 비밀을 알고 깜짝 놀랐다. 지금껏 제시카가 화상을 입었다는 사 실을 저혀 모르고 있었다. 4. 불길한 승리 빌리의 병실에서 사실상 쫓겨난 질리는 뒤틀리는 울화를 겨우 진정시며 돌아 왔다. 요즘 그녀에겐 신나는 일이라곤 없었다. 제이크에게 안겨 그의 능숙한 기 교에 헐떡이고 몸부림치는 일도 여러 날재 없었다. 스테파니의 심상치 않은 도 전을 받은 제이크가 상심했기 때문이다. 간신히 마음을 안정시킨 지릴가 들었을 때 제시카 역시 침울한 표정이었다. 얼굴에는 자신있었지만 화상 때문에 그 나 이 또래의 쾌활성을 잃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그녀였다. “기분이 안 좋 아 뵈는구나.”“다른 사람의 기분도 신경쓸 줄 알다니 놀랍군요.”모처럼 가라 앉힌 질리의 기분을 제시카가 쑤셔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가 당하고만 있을 리 만무했다. “넌 아직 사내경험이 없는 거야?”“당신은 경험없을 때가 없엇 나요?”“네 문제가 육체적이기 보다는 정신적인데 있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어? ”“애도하는 미망인께서 자상한 숙모로 변하신 거예요?”질리는 화내지 않았 다. “흉터 때문에 소극적이 된 건 이해해. 하지만 네 나이에 경험할 수 있는 이 성교제를 억제하는 건 몸에 해로와.”제시카는 질리의 안하무인격인 직설적 성 격에 어이가 없었다. “남자와 관계하고 싶을 땐 해야해. 너 아직 자위행위도 해 보지 않았다면 가르쳐 줄까? 직접하는 것만은 못할지 모르지만 여러 번 반복할 있어서 좋고 쾌감도 그런대로 만족할 만…….” 제시카는 더 듣고 있을 수 없었 다. “그래서 당신은 그렇게도 건강한 동물이군요?”“넌 정말 관심이 없구나? 충동도 못느끼니?”질리의 그 말을 제시카에게 욕설보다 더욱 가혹한 것이었다. 여덟살 때 이미 그녀는 모든 것을 목격했다. 필립이 아닌 다른 사내와 발정한 동물처럼 뒤엉켜 헐떡이는 질리를. “당신이 그런 짓을 하는 장면을 보는 게 고 무적은 아녔죠.”비로소 질리의 표정이 사납고 표독스러워지며 살쾡이처럼 제시 카를 노려보았다. “잘 들어, 너무 까불지 마!”제시카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날 겁주는 건 아니겠죠, 질리?”“필립의 테입이 언제까지 널 보호해 주리라 고 생각해?”“그래서요! 악어밥으로 호수에 던질 건가요?” 질리는 등골이 오 싹했다. “그래야 한다면 기꺼이, 또다시 날 위험한다면 그땐 흉터 정도로 끝나 지 않아!” 그녀의 살벌한 협박에도 제시카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뚫어질 듯 이 마주 노려보았다.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그녀의 가슴 속에는 질리에 대한 증 오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톰의 짜증스럽도록 집요한 사랑은 사라를 몹시 피곤하 게 만들었다. 그녀는 할 수 없이 톰의 출생 당시의 가정부가 캐티라는 노파임을 실토했고 톰은 그 즉시 찾아나설 결심이었다. 톰의 그와 같은 무모함은 사라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하여 언제나 편안하게 느껴지는 안젤로에게 기울어지게 만 들었다. 스테파니의 작전은 호조를 보였다. 삽시간에 34퍼센트의 주식을 확보하 였으며 캐시까지 자신의 컴퓨터 재능을 제공하겠다며 합류했다. 아말과의 재계 약 난항과 스테파니 진영의 도전에 짐짓 당황한 쪽은 제이크였다. 텔레비전 인 터뷰에서 하릴없이 망신만 당한 그는 남모를 고민에 빠졌다. 질리도 그에게 그 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사라에 대한 톰의 사랑이 무모한 것이라고 한다면 댄 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스테파니가 다시 힘찬 약동을 재개한 문제에 대해 누구 보다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스테파니를 사랑하기 때문인 것은 사실이지만 결 과적으로 그녀를 구속하는 꼴이었다. 스테파니가 댄의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 그 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나타냈다. “TV에서 당신이 했던 얘긴 들었소. 못본 게 유감이던군.”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좀더 다정해질 수는 없나요. 어느 쪽 이든 곧 끝날 텐데?”“우리의 결혼도 수렁에 빠지게 되겠지.”“절대로 그렇지 않아요.”“당신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 봐. 회사는 상관않고 가족이 우선이라는 당신의 말을 믿었었어!”댄은 철모르는 아이처럼 신경질적이었다. “ 알아요. 생각을 바꾼 거예요. 내 자신을 깨닫게 됐어요. 싸워보지도 않는다면 자 신과 주위 사람까지 증오하게 돼요.”“스테파니 하퍼의 마음을 그렇게 잘 아는 자가 누구지? 누가 그렇게 당신을 속속들이 알아서 그런 인생처방을 한 거냐고! ”스테파니의 두 눈에 실망의 빛이 스쳤다.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누구의 충언이길래 남편의 감정보다 우선하는 거지?” 스테파니를 독점하고픈 질투심에 휩싸인 댄은 눈을 번뜩이며 다그쳤다. “그런 게 아녜요.”“대체 누구요?”스테 파니는 대답을 선뜻 할 수 없었따. 댄이 과거라며 이해해 주는 줄 알았는데 오 히려 들추어 다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새삼스러운 그의 태도에 스테파니는 반감 마저 느꼈다. “아말이에요.”그녀는 솔직히 대답했다. “아말……”댄의 표정이 그답지 않게 질투심으로 가득찼다. “점심이나 같이 할까 하고 들렀어요.”“미 안하오. 선약이 있소.” 대답은 스테파니가 짐작한 대로였다. 이긋나고 있는 댄 의 모습은 추하게 보일 정도였다. 마치 스테파니의파멸을 기다린 듯한 저향에 스테파니는 아연했다. 그녀가 제이크에게 하퍼사를 빼앗긴 것은 질리의음모 이 전에 댄에게도 다소 그 원인이었다. 그가 어린아이처럼 토라져서 섬으로 가버리 지 않았어도 결과는 지금과분명 다를 수 있었다. 댄은 실제로 질리와 식사 약속 이 있었다. 다만 스테파니가 자신을 속이고 제이크를 만난 데 ㅂ대한 보복처럼 스테파니에게 비밀로 하고 약속장소에 나갔다. 질리의 속셈은 필립의 자살에 대 한 이혹을 벗으려는 의도였다. 댄이 필립의 주치의를 만나 캐어물었다는 소식에 불안한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했다. 생전의 필립에게 자살할 동기가 분명히 있었다는 그녀의 주장을 댄을 묵살했다. “그러니까 필립의 자살은 내 잘못이라는 거군요?” 그럴 즈음 스테파니와 아말 이 식당에 들어섰고 댄은 재빨리 그곳을 피했다. WLOFFL는 호기라고 생각하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오래있을 수 없어요. 가서 싸워서 하니까요.”“그렇겠 죠. 내가 도울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잊지 않아요.” 그때 질 리가 교활 하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안녕. 스테파니. 아말, 두 분의 그림이 열여덟 살 때 가졌던 의문을 떠오르게 하는군요.” 질리는 거침없이 비아냥거렸다. 여전히 그 녀를 이해하려는 스테파니도 소리없이 놀랐다. “그땐 참 좋은 시절이었소.” 아 말은 스테파니의 표정을 살피며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질리는 다시 스테파니를 향해 에덴의 사탄 같은 혀를 다시 날름거렸다. “그때 매일 밤 비밀리에 스테파 니와 나갔었죠. 난 상대가 당신이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아말은 이미 질리의 속셈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오래 전 일이야.”스테파니는 여전히 질리를 이해 하려고 했다. “그래.그런데 있지, 두 분이 애인 관계였다는 미친 생각이 들더군. ” 이번에는 지리의 눈빛이 재빠르게 두 사람의 표정을 핥았다. “멋진 생각이 지만,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았소.” 질리는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떠올리고는 돌 아섰다. “유감이야. 점심 잘 드세요. 아랍 왕이 거짓말을 하다니…….” 그녀는 두 사람의 귀에 들리도록 고의적으로 빈정거린 다음 우아한 숙녀처럼 걸어나가 고 있었다. 질리는 부지런히 쏘다녔다. 식당을 떠난 그녀는 곧장 하퍼빌딩으로 제이크를 찾아갔다. “정말 그녀를 사랑하는 거지?”“그 사실이 견디기 힘든 거죠?”“그녀가 거절한 게 내 탓은 아녜요.”그녀는 ㅈ이크의 비위를 여지없이 건드렸다. “당장 나가, 질리!” 제이크가 화를 냈지만 그녀는 생글생글 웃었다. 악마의 성품만 없다면 굉장히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가 질리였다. “아랍친구 가 당신보다 먼저 스테파니와 함께 잔 게 견딜 수 없겠죠?”그녀는 제이크가 충 격받을 만한 사실을 거침없이 늘어놓았다. “아말은 말 사육에만 관심있는 게 아녜요. 그가 톰의 친아버지예요. 스테파니는 어리고 못생겼었지만 뜨거운 피를 가졌었죠. 주주들이 그 사실을 추잡하다고 보지 않을까요?”“당신은 뭐든 추하 게 만드는 소질이 있으니까.”“하퍼사를 지키고 싶은 건가요, 아니면 그 반대인 가요.”“쩌하는 법이 없군.”그는 차갑게 반응했다. 안톤이 질리는 잡고 있을 때만 안전한‘독사’라고 밝힌 바처럼. “난 원하는 게 있으면 틀림없이 차지하 죠.”“나도 그렇지만 시궁창에 빠지는 건 싫어해.”“당신 정말 스테파니를 사 랑하고 있군요?” 제이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죠? 전남편 그렉은 보통도 못 된다고 평하던데?” 질리는 그렉이 제이크의 형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듯이 함부 로 지껄였따. 제이크는 그 말에 오히려 비웃었다. “그가 멍청했나 보지, 당신 같은 여자를 끌어들였으니.”“그래요. 당신과 비슷하게 쾌락은 상상력이라고 했 죠.”“당신 같은 여자를 필립이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군.”“스테파니가 그 소리를 들으면 기절하겠군요.”그녀는 대담하게 웃었다.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낸 그녀로서는 제이크가 새삼스레 속옷을 벗긴다고 해서 놀라거나 동망칠리 없었다. 나체족의 처녀가 남자에게 치부를 보인다고 부끄러워 할 리 없는 것이 나 다름없었다. 때마침 안톤이 급히 들어왔다. “급한 일이네.”“스튜어트 부인 은 막 가려던 참이네.”어쩔 수 없이 밀려나게 된 질리는 약이 올랐다. “안톤이 란 이름의 푸들을 키웠었는데 정말 충성스럽더군요.”그녀가 흘려놓고 나간 조 롱을 안톤은 얼른 알아차리지 못했다. 제이크가 적당히 얼버무렸다. “못된 입에 서 나올 게 못된 농담밖에 더 있겠나?”안톤은 데니스가 사립탐정을 고용해서 제이크의 뒷조사를 의뢰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적당한 조치를 취해 놓았다는 것 이었다. 스테파니는 데니스와 함께 틈틈이 주식시장에 들러 동향을 살폈다. 상당 히 희망적이었다. 그녀가 정신없이 뛰고 있을 때 그녀와 아말의 관계를 의심하 기 시작한 댄은 빌리를 방문해서 넌즈시 떠 보았다. “스테파니에게 직접 물어 보구료.”댄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실망했다. 그럴 때에 질 리가 불쑥 병원으로 댄을 찾아왔다. 그럴 듯하게 댄과 스테파니의 결혼생황을 추켜세운 후 엉뚱한 얘기를 꼬집어냈다. “아말이 톰의 아버지란 사실을 아세요?”최근들어 댄도 그 럴지도 모른다고 짐작하고 있었지만 질리로부터 사실을 전해들었을 때는 막연히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강한 질투심이 솟구쳤다. 스테파니에겐 과거의 일은 모두 잊자고 했지만 나약한 인간인 탓인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댄은 낮빛이 변하면 소 허탈감이 몰려왔다. 사실의 진위를 판단할 능력조차 상실하고 일순간 체면없 이 분개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날 밤 댄은 그 문제를 정식으로 들추었다. 질 리가 노린 대로 걸려든 것이었다. “그 동안 우리 집에도 오고 당신은 중동으로 출장가고…….”“댄!”스테파니는 간곡하게 말했다. 댄은 멈추지 않았다. “집에 와선 나와 악수하고 친구라고 부르고……그가 날 얼마나 비웃었을지 알 만하지. ”“그렇지 않아요. 아말은 친구일 뿐이에요.”“그것뿐이 아니지. 톰의 아버지 이기도 하잖아!”댄은 버럭 소리질렀다. 스테파니는 깜짝 놀랐지만 올 것이 왔다 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열여덟 살 때 일이에요. 알고 싶으냐고 물었었잖아요? ”“중요한 거냐고 물었더니 아니랬어. 거짓말을 한 거야!”스테파니는 댄에 대 해 이 수간처럼 실망한 적이 없었따. 그녀는 분명히 듣고 싶으냐고 물었고 댄은 지난 일이라며 대답을 원하지 않았었다. 사업에 매달린 스테파니에 대한 불만이 까닭없이 댄을 추하게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질리의 충동질에 거의 이성을 잃 고 있었다. 그가 스테파니를 얼마만큼 사랑하든 지금의 그는 올졸한 사내에 불 과했다. “그렇지 않아요, 여보.”“계속 날 갖고 놀려는 거야?”“어떻게 그런 말을…….” 스테파니는 목이 메어오는 것을 느꼈다. “당신네 하퍼사람들은 특 이한 취향을 즐기시는군!”그는 벌떡 일어나 침실에서 나가버렸다. 뒤에 남은 스 테파니는 눈앞이 캄캄했다. 댄과의 결혼이 정말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녀 의 생각은 극단적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이 순간 댄의 모습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전혀 아니다. 헌신적으로 그녀의 전신을 성형수술해준 의사도, 감사하며 사랑하게된 훌륭한 남편도 아닌 의처증에 사로잡힌 졸장부로밖에 보이지 않았 다. 한편 졸지에 사랑을 포기해야만 될 상황의 톰은 사라의 극구 반대에도 불구 하고 18년 전의 가정부, 캐티 노파를 수소문 끝에 찾아갔다. 하지만 이미 늙고 중풍까지 걸린 캐티 노파는 톰이 기대했던 답을 주지 못했다. 노파는 무엇에 두 려움을 느끼는지 횡설수설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았을 뿐이다. 제시카의 흉터 를 보게된 사라는 깊은 동정심을 가졌다. 스테파니의 과거에 대해 알고 있는 그 녀느 제시카 또한 씻을 수 없는 아픔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제시카의 의견 을 타진한 다음 댄에게 특별히 부탁했다. 댄과 스테파니의 갈 등을 사라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댄은 수술에 앞서 제시카와 상담했다. 제시카는 왠지 성형수술에 겁을 먹고 있었다. 댄은 제시카에게 두 가지 심리를 발견했다. 하나는 병원과 수 술을 칼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질리에 대한 복수심을 강화하기 위해 흉터를 치료하지 않고 자학한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 문제에 관한한 질 리가 원인제공자라는 사실을 그는 아직 몰랐다. 스테파니와 제이크의 치열한 경 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스테파니의 과감한 전법으로 제이크의 주식을 최고가격 에 사갰다고 제안했고 제이크는 결혼조건을 다시 내세웠다. 제이크는 다시 아말 이 톰의 아버지라는 점을 무기로 내세웠지만 스테파니는 물러나지 않았다. 제이 크의 뒷조사를 의뢰한 데니스는 완전히 실패했다. 그가 조용한 사립탐정은 안톤 에 의해 다시 매수되었고 그 역할은 질 리가 수행했다. 속살이 훤히 들여다 보 이는 하늘하늘한 옷차림의 유혹적인 접근에 사립탐정은 쉽게 무릎을 끓었다. 질 리는 눈이 휘둥그래진 사내에게 알몸을 거의 드러내 보이면서 정신을 빼앗은 후 육체가 아닌 지폐다발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사립탐정이 저신의 드러난 젖가슴 을 보며 군침을 삼키는 모습에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더불어 스테파니가 또다 시 당하게 됐다는 사실에 질리는 벅찬 흥분과 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사태의 추 이는 그녀의 생각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행운의 여신은 갑자기 스테파니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크게 당황한 질리는 즉시 또 다른 음모에 착수했다. 제이크가 패배할 경우를 대비한 계획이었다. 어느 쪽이든 이기는 편에 일단 빌붙어야 직 성이 풀렸다. 제이크보다 그녀는 더욱 기회주의였다.결국 해결사인 올리브를 몰 래 불러들여 제이크의 미행을 지시했고 그가 공동묘지에 가끔 은밀하게 간다는 정보를 사립탐정에게서 알아냈다. 데니스의 요청으로 알아낸 정보를 사립탐정은 그녀의 허벅지 깊숙한 곳을 들여다본 대가로 기꺼이 제공해 주었었다. “그 묘 지에 뭔가 있을 테니까 제이크를 미행해. ”올리브는 그 한 마디에 자동인형처럼 복종했다. 질리는 제이크 샌더스가 자신이 죽인 그렉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스테파니와 제이크의 치열한 공망전을 텔레비전 뉴스를통해 일 일이 분석되어 공개됐다. “스테파니 하퍼가 회사 탈환을 위해 필사적으로 질주 중입니다. 전레에 없는 주식경쟁에서 스테파니는 고용인들에게 직접 주식을 팔 아달라고 호소라고 있으며, 다수의 호응과 지지를 얻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추 세로 나간다면 스테파니 하퍼의 승리는 낙관적으로 보인다는 평들입니다…….” 제이크는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그리고안톤에게 자신의 패배를 솔직힌 인정했다. “이젠 결정적인 것 같아. 그녀가 이겼어.”안톤은 대뜸 이의를 제기했다. “자 네답지 않아. 다른 방법이 또 있어.”“그건 불법이라고 했잖아. 결국엔 소용없 게 될 텐데, 뭘.” 안톤의 적극성과 질리의 충돌질에도 불구하고 제이크는 비열 한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같은 제이크의 태도는 스테파니에게 특별한 감정 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제이크의 진영과는 반대로 에덴은 축제 분 위기였다. 스테파니와 댄 그리고 데니스, 사라, 캐시 등 그 동안 수고한 핵심멤 버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댄뿐이었다. “최종결과 가 나오고 있어요.” 캐시가 컴퓨터 앞에 앉아 소식을 전달했다. “드디어 해냈 어요! 51,…2퍼센트나 ehodt!”모두들 희색이 만면했다. “제이크는 땅을 치게 생 겼군.” 데니스에 이어 사라도감격한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정말 잘 해내셨어 요, 엄마!”스테파니는 오히려 허탈해진 표정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못해내실 줄 알았어요.” 비로소 스테파니가 입을 열었다. “미리 얘기해 주지 않아 고맙 구나. 그랬으면 난 포기했을 거야.”“아닐 걸요?” 그때 불청객 질 리가 들어오 며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해낼 줄 알았어. 축하해.” 그 자리의 누구도 질리 쪽을 바라보지 않는 가운데 댄만이 관심을 나타냈다. “댄 엄마가 이겼어요.” 사라의 기쁨에 댄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일어서며 찬물을 끼얹었다. “항상 그렇 잖아. 난 그만 나가 봐야겠소.” 스테파니는 가슴 한 구석이 텅비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걸어가는 댄의 뒷모습을 보라보았다. 그의 뒷모습에서 돌연 설명할 길 없는 불길한 에감이 스쳤지만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말은 누구보다 그녀의 승리를 기뻐해 주었다. 스테파니의 승리로 석유 재계약만 끝내면 페르시아로 귀 국해야 함을 무척 안타깝게 여겼다. 그들 두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일치했다. 아 말은 그녀에 대한 사랑을 가솜 속에 묻어둔 채 댄의 이해를 기대했다. 댄이 그 들의 과거를 알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그는 스테파니를 더욱 걱정했다. “도 움이나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날 기억해 줘요, 행복하길 비오. 상황이 달랐으면 좋겠지만……당신을 사랑하오.”아말의 진실이 가슴에 와서 닿는 만큼 아픔도 따랐지만 그녀에겐 그녀의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퍼사를 되찾았고 더구나 그녀에겐 댄이 있었다. 그것으로 하퍼사에 관한 승부는 완전히 끝난 듯했다. 적 어도 스테파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제이크 역시 그리 쉽게 물러날 사람 은 아니었다. 5. 침실의 파멸 그 일은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자신의 패배가 확실해지기 저에 이미 제이크는 그 일을 준비했다. 스테파니가 그의 제의를 모두 거절했을 때 최악의 사태에 대 비한 제이크의 잔인한 편법이었다. 또 한 가지, 제이크의 그 비책에는 질리도 철 저하게 외면당했다. 어차피 그녀는 제이크에게 있어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불 길한 예감을 말끔히 씻은 스테파니는ㅍ당당하게 하퍼빌딩으로 들어갔다. 그곳이 아득한 낭떠러지 위의 벼랑 끝이라는 사실을 예측하지 못한 채. 여비서 힐러리 는 눈물까지 글썽해서 그녀를 반겼다. “이제 의자를 돌려 주시죠.”회장실에 들 어선 스테파니는 승리자의 아량을 보이며 요구했다. 제이크는 순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이상할 정도로 담담했다. “물론 이 의자는 당신 거요. 내가 사랑한다는 말은 믿지 않고, 그것조차 게략이라고 생각했죠?”“믿었 어요.”그녀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난 같은 질문을 세 번씩 반복하는 성미가 아니죠.”“미안해요. 내 대답은 달라지지 안아요. 안녕히 가세요. 제이크.” 이 순간까지도 스테파니는 무엇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다. 자 연스럽게 악수를 청하는 그녀에게 제이크가 건네주는 서류를 가볍게 받았다. “ 타라는 당신 명의로 해놓았소.”“원래 내 것인데요?”다음 순간 제이크는 당연 한 듯이 침착하게 놀라운 이야기를 꺼냈다. “그 의자도 하퍼사도 이젠 끝장이 오. 한 시간 전에 하퍼사는 샌더스 기금으로 무상상환되었소.” 스테파니는 정신 이 아찔했다. “그럴 수는 없어요!”“벌써 그렇게 됐소.”“법정에서 끝까지 싸 우겠어요.”“결국엔 당신이 승리하겠지. 하지만 법정투쟁은 앞으로 몇 년 걸릴 테고 채무자들은 그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오.”“이런 나쁜 놈!” 스테파 니는 증오에 가득찬 주먹으로 제이크의 안면을 힘껏 갈려준 다음 밖으로 나갔 다. 로비에는 이미 인부들이 하퍼사와 관련된 간판 등의 철거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스테파니는 어수선한 작업을 보며 더욱 처절한 패배를 가슴에안았다. 법 정투쟁으로 제이크의 비열한 편법을 응징할 수 있지만 그때까지 견디낼 능력이 전혀 없었다. 에덴까지 빼앗길 위기에 빠지고 만 것이다. 가족 중에 데니스가 가 장 분개하며 에덴만이라도 고수할 것을 강조했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스테파니 의 성공을 보고 떠나려던 아말 왕이 다시 그녀를 찾아와 위로해 주었다. “스테 파니, 어디로 갈 거요?” 스테파니와 아말은 선착장에 있었다. “우선 호텔로 가 야겠죠. 모르겠어요. 너무 무기력해요. 이런 일이 벌어질 때 어떡해야 하는지… ….” 스테파니는 비탄에 빠진 시선을 힘없이 멀리 보냈다. “절망을 느끼면 날 기억해요.”“충분히 도와주셨어요.”“우리 사이에는 많은 것들이 있다오.” 스 테파니는 누구보다 그의 진심을 안다. 그의 간절한 사랑을 드러내지 않고 댄과 의 행복을 빌어 주는 진심에 가슴저리는 고마움을 느꼈다. “알아요. 위험할 정 도죠. 특히 댄과 저는 지금 약해져 있어요. 이럴 때 당신께 의지하면 댄이 절대 로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아말 역시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떤 권유도 하지 않았다. 댄의 이해심이 조금만 더 넓을 경우 아말의 도움으로 스테파니는 쉽게 만회할 수 있지만 댄은 그걸 원하지 않았다. 사라는 복잡한 집안일에 톰과의 갈등까지 겹쳐 깊은 고민에 빠지고 댄은 오히려 환영했 다. 다만 데니스만이 에덴이라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호주 제일의 재벌그 룹이던 스테파니 하퍼가문도 제이크에 의해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데니스는 자신의 출생을 확인하기 위해 떠나려는 톰을 찾아갔다. “네 도움이 필요해.” 톰은 댄과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스테파니가문의 몰락위기도 아 랑곳없이 그들은 사랑에 빠져 주위를 돌보지 않았다. “미안해. 서둘러야 해.” “나도 그래, 돈이 필요해. 그것도 아주 많이. 엄마를 위해서 에덴을 사려고 해, 우리 엄마 말야.” 데니스는 처음으로 톰과 자신이 형제임을 인정했다. “우리가 아니고너의 엄마야.”“뭐?”데니스는 눈을 부릅떴다. “옛날 에덴에 가서 캐티 할머니를 만났어. 약간의단서를 얻었는데 지금 확인하려고 가는 중이야.” 데니 스의 귀에는 그런 말이 들리지 않았다. “경매는 금방 열려. 샌더스가 에덴을 사 겠다는 거야. 우린 그 동안 서로 잘 지내진 못했지만 그것만은 같이 막아야 하 지 않겠어?”“데니스, 우리 힘으로는 어림없어. 수백만 달러는 호가할 거야.” “그날은 10퍼센트만 있으면 돼.”“나머지도 90일 후에는 지불해야 할 텐데?” “도와주지 않겠어?” 문제의 심각성이 그만큼 절박한 탓도 2만5천 달러 내놓을 께.”“더 없어?”“총 재산이야.”“언제 돌아올 거야? 멀면 비행기를 타고가지 그래?”“일주일에 두 번밖에 안 뜨는데 이번 금요일이야. 기다릴 수 없어.”“ 그럼 내 차를 가져가.”“뭐?” 톰은 깜짝 놀랐다. “진심이야. 내 포르쉐가 훨 씬 빠를 테니 가져가.”“정말 진심이야?”“자, 열쇠. 행운을 빈다.”“사라에게 내 사랑을 전해 줘. 잘 하면 네 매제가 될 거야.”“좋아, 좋아.” 2만5천 달러를 지원받은 데니스는 아끼던 포르쉐까지 톰에게 선뜻 빌려 주었다. 톰의차에 비해 성능이 월등했기 때문에 예상보다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이다. 법률은 냉 혹했다. 스테파니 가족은 거처를 호텔로 옮겨야 했다. 데니스는 한창 이삿짐을 옮기는 댄에게 다가가 도움을 청했다. “이 짐이 엄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아시잖아요?”“난 정말 이 가문의 자만심에 구역질이 나! 돈밖에 모르지. 그래 서 좋았던 일이 뭐가 있어?”그러는 과정에서 댄과 스테파니가 함께 찍은 사진 이 들어있는 액자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댄은 스테파니에 대한 불만과아말에 대한 질투심으로 평소의 침착성을 잃고 하퍼가문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였다. 스테파니는 제이크를 통해 비로소 모든 사고에 질 리가 개입되었음 을 확인했다. 이에 아랑곳없이 질리는 타라의상실에 나타나 스테파니에게 협조 한 캐시에게 해고명령을 내렸다. “난 안 나가요.”“뭐?”“날 여기서 내보낼수 있는 사람은 스테파니뿐이에요. 모르겠어요?” 질리는 하퍼사와 관계없이 타라 는 제이크에 의해 스테파니의 명의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따. 그때 질리는 또 하나의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올리브의 활동에 의해 제이크가 자신이 죽인 그렉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제 어떡할 거야?” 올리브는 무엇이든 말만 하라는 식이었따. 표적이 제이크라해도 기꺼이 살해할 수 있는 그녀였다. “좋아. 그렇다면 나도 생각이 있어.”“뭔데?”“공격이 최 대의 방어야.” 질리는 두 눈에서 광기에 가꺼운 빛을 뿜어내며 이를 악물었따, 그녀는 지체하지 않고 제이크를 찾아갔다. 그 사실에 대해서는 접어둔 채 그녀 는 제이크에게 캐시를 공식적으로 해고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안 돼. 일을 잘 하니 그대로 둘 거야. 다른 일은?”제이크는 그녀가 그렉과 자신과의 관계를 알 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좋아요. 내가 이사회에 들어가면 내쫓아 버리 죠.”“그건 계라능 겨우 사놓고 양계장을 꿈꾸는 격이군.”“당신이 빠른 시일 내에 날 이사회에 참석시키는 거예요.”“농담 그만하고 가보시지.” 이미 서로 의 치부를 드러내놓고 있으면서도 특히 질리는 제이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 고 있었다. 우습게 보지 말아요. 계획대로 될 테니까.〔”어째서?”“당신에게 해준 대가죠. 거절하면 경찰이올 거예요. 스테파니에 관한 미해결 살인사건 때문 에.” 제이크는 노골적으로 조소했다. “당신이 저지른 일인데 왜 날 끌어들이 지?”“경찰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죠. 당신이 그렉의 동생이라는 사실이요. 그만하면 동기는 충분하죠? 게다가 내게 다시 그런 고의적인 사고가 발생한다면 어떨까요?” 제이크의 양미간이 좁혀지며 금방이라도 떼릴 듯이 그녀를 노려보 았다. 그러나 그는 목을 한껏 세우고 쳐다보는 질리의 도도한 태도에서 상황이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예석한 마음으로 에덴을 떠나는 스테파니 가족이 그 동안 집에서 일한 사람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눌 때 였따. 뜻밖에도 질 리가 어느 때보다 요란한게 치장하고 사진기자들을 모고 나 타났다. “조간신문에 내 사긴을 싣겠다기에 여길 배경으로 찍자고 했어.” 질리 는 유치한 원색의 화려한 옷차림으로 안껏 멋을 부리며 수영장으로 걸어갔다. “한본 볼까?” 스테파니가 중엉거리며 지리르이 뒤를 재빨리 따르자 데니스가 이미 짐작하기라도 한 듯 사라에게 속삭였다. “난 엄마에게 걸겠어.”“사진을 찍겠대?” 다가간 스테파니가 묻자 질리는 거만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수영장 가에서 포즈를 취했따. 카메라맨들이 일제히 모였다. “그럼 이런 걸 찍으라고하 지”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스테파니는 느닷없이 질리를 물 속으로 떠밀었 다. 허우적거리는 질리를 향해 카메라의 셔터들이 일제히 뻔쩍거렸다. 데니스와 사라는 소리내여 웃었고 이튿날 조간신문에는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질리의 사진이 톱기사로 실렸다. 스테파니의 질리에 대한 감정이 표면적으로 타나난 해 프닝이었다. 한편 캐티 노파가 말한 수녀원을 찾아간 톰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짐작대로 그는 스테파니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한 가지 사실에 만족한 톰은 자신의 친아버지가 누군지 밝혀낼 생각도 잊고 즉시 시드니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그 수녀원은 톰이 어릴 때 맡겨졌던 곳으로 수녀원장은 톰의 생 부도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수녀원장과 남매간이었다. 톰이 돌아간 다음 그의 생부와 수녀원장이 마주앉았다. “그애는 지금 호주 제일의 부호인 스테파니 하퍼의 아들인 줄 알고 있더구나.”“좋아요, 누님. 때가 올 때까지 내 가 그애의 아버지란 걸 절대 비밀로 해 주세요.”“알았다. 수녀원에서의 은밀한 대화를 톰이 알 턱이 없었따. 새로운 희망에 가슴벅찬 톰이 시드니로 돌아오고 있을 때 아말은 여전히 스테파니 곁을 떠나지 않고 스테파니를 돕겠다고 제의했 다. 그런 아말의 태도에 댄은 처음부터 거부반응을 나타냈다. “내가 도와 줄 테 니 내일 입찰하시오. 그가 얼마를 부르던 더 높게 부르시오. 샌더스가 당신들에 게서 에덴을 뺏도록 내버려둘 순 없소.”“결코 갚지 못할 거요. 이자도 감당못 할 테고.”“빌려 주겠다는 아니오.“자선을 베푸시는 건가요?”“친구를 돕는 건 자서닝 아니죠. 그리고 당신은 이상이고 호주에 있는 내 가족이나 다름없어 요. 아말의 말에 댄의 얼굴 근육이 못마땅하게 일그러졌다. ’결국 우린 당신의 집에서 살게 되겠군요.“ 댄의 빈정거림에도 아말은 진지했다. “아뇨. 에데은 스페타니와 당신 명의로 하겠소.” 댄은 끝까지 거절하며 먼저 자리를 떠나버렸 다. “내가 바보였군. 그도 자존심이 있을 텐데 내가 그렇게 말하다나……가서 설득해 보겠소.” 스테파니는 댄을 뒤따르려는 아말을 얼른 가로막았다. “그는 우리 사이를 알기 때문에 저러는 거예요.”“그건 오래 전 일이잖소. 우리 둘 다 자긍심과 자제력이 있는 사람들 아니오?”“하지만 댄이 당신이 사준 집에서는 결코 편하지 않을 거예요.”“그런 그의 감정이 당신에게 조그만 선물도 못하게 하는군.”“댄이 없으면 집이 텅빌 거예요. 그가 어린애 같다고 생각하시죠? 그 보다 더 심각해요. 톰이 당신 아들이라는 걸 알아요.”“알겠소.”아말은 깊은 수심에 싸이며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에덴의 경매는 세인들의 관심 속에 다음 날 이루어졌다. 데니스와 사라 그리고 톰과 캐시 등에 이어 댄도 5만 달러를 내 놓겠다고 하여 데니스를 감격시켰다. 그 정도면 충분히 입찰경매에 나설 수 있 겠따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때였다. 에덴에 모인 많은 사람들 중에 유독 눈에 띄 는 남자가 있었다. 청바지에 카우보이 차림인 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사내는 주위를 세밀하게 관찰하며 드러나지 않게 경매상황을 주시했다. 이윽 고 경매가 시작되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의 경매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다음 말을 잇기도 전에 경매를 이끄는 팀의 한 남자가 사회자에게 다 가가 귓속말을 했다. “여러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순간 하퍼가에 가벼운 슬렁임이 있었다. “에덴의 정액을 상회하는 금액에 개인협상으로 팔렸습니다. 죄송하지만 오늘의 경매는 취소됐습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새어나왔다. 특히 하퍼가족들은 찬물을 끼얹은 듯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질리가 에덴의 현관문에서 열쇠를 흔들며 요염하게 웃고 있었다. “저 여우 같은 게!” 데니스는 이를 갈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사라를 비롯한 캐시 등은 반 넋이 나 간 얼굴들이었다. 같은 시각 톰은 고속도로의 공중전화에서 계속 전화했지만 사 라와 통화하지 못했다. 아무런 얘기를 듣지 못한 사라는 에덴을 질리에게 빼앗 긴 절망감과 그 외의 모든 현실로부터 도망치려는 듯이 안젤로와 가까워졌다. 경매가 있던 그날 사라는 조용한 바닷가에서 안젤로와 사랑의 행위를 갖기에 이 르렀다. 달리 마음을 의지할 테 없는 그녀는 톰만은 못해도 순진하고 성실하며 자신을 진실되게 사랑하는 안젤로에게 모든 것을 바쳤다. 톰이 사라와 남매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달하기 전에 이루어진 불행한 일이다. 스테파니와 댄의 사이 가 급격히 악화될 계기가 발생했다. 아말은 페르시아로 떠나기 전에 급격히 악 화될 계기가 발생했따. 아말은 페르시아로 떠나기 전에 스테파니에게 마음의 선 물을 했다.‘타라의 명예’라고 이름 붙여진 훌륭한 한 필의 말이었다. 댄과의 문제가 해결되면 아무 때라도 스테파니를 왕비로 맞아들이고 싶은 아말의 마음 은 무척 착잡했다. 스테파니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댄을 결코 단념할 수 없었따. 그들은 안타까운 마음을 억제하며 작별의 키스를 나우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스테파니를 찾아오던 댄에게 목격당하고 말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댄!”그 녀가 절망적으로 외쳤지만 댄을 그들을 본 즉시 가버렸다. 불행은 혼자서 오지 않는다는 경구처럼 그날밤 다시 두 가지의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따. 하나는 데니스가 홧김에 에덴을 방화하려고 기름을 거실에 뿌리다가 때마침 질리와 함 께 있던 올리브의 공격을 받고 비참하게 붙잡힌 일이었다. 질리는 경찰에 넘기 라는 올리브를 무시하고 스테파니를 불렀다. 달려간 스테파니는 그 광경에 아연 실색했다. 그녀는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일단 질리에게 감사했다. “제 정신이 아냐. 경찰을 부르지 않아 고마워, 질리.”데니스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가 에덴을 나와 차에 오르는 광경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다름아닌 예의 카 우보이 차림의 남자였다. “오늘 밤 여기 내 집에서 얘길 나누고 싶었는데……. ”스테파니의 체취가 담긴 에덴을 벌써 자기 집으로 강조하는 질리의 태도가 스 테파니의 심경을건드렸다. “네가 날 망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고 있어.”“ 그걸 정확히 얘기해 주고 싶던 참이었어. 그건 7년 동안 게획한 일이었으니까. 질리는 비로소 자신의 검은 속을 드러내 보이지 시작했다. ’감옥에서 게획했단 말이야?”“그것 때문애 난 미치지 않았어. 증오심이란 창의력을 키워 주지.”“ 우리가 자매라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엔?”“더욱 증오했지. 모든 게 내것이 될 수도 잇는 거였잖아?”“네가 날 해치고 널 해쳤으니 그냥 끝내면 됐을 거 아 냐?”“난 실수했어. 그렉 마스턴에게 흘렸었으니까. 하지만 네게 해를 끼치진 않았어.”“아냐. 그가 날 해칠 때 넌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그저 보고만 있었 어.”“그를 사랑했으니까. 그런데 네가 끼어들었어. 정말 위험한 줄다리기였지. 하지만 두번째로 널 죽이려 했을 때는 내가 그를 쫘 죽였어. 네 목숨을 그렇게 구한 대가로 난 7년 동안 감옥에서 썩었단 말이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스테 파니도 인정했다. 하지만 그건 도움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전에 이미 그녀 는 한 번 죽은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널 구하려고 애썼어. 변호사 비용도 내가 다 지불했구.”“하지만 날 위해 증언해 주진 않았어. 너무 바빴을 테니까 …….”그녀의 빈정거림에 스테파니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증언할 수 없었어, 너무나 널 미워했으니까.”“봐, 내가 네게 한 짓이 네가 한 짓보다 잔인한 건 아냐.”“나 때문에 네가 그렇게 됐다면 미안해.”질리의 입가에 가늘고 긴 미소 가 나타났다. “넌 모든 걸 잃었어. 가진 게 없다구.”“내 결혼은 남았어. 그걸 로 충분해.”“그것도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어. 그렇지?”“깨지지 않았어. 앞으 로도 안 깨질 가야.”스테파니는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럴까?……”질리는 스테파니가 사라지자마자 차를 몰았다. 심복인 올리브가 제공한 정보는 스테파니를 파멸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녀가 안젤로의 식 당에 도착했을 때 대은 술에 만취헤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한쪽 구 석에서 그 정보를 제공한 얼리브가 음산한 미소를 띠며 지켜보는 가운데 질리는 요염하게 댄에게 접근했다. “다 필요없어.”“어디 가서 커피라도마셔요, 네?” “스테파니는 날 못볼 거야. 왜냐하면, 내가 그녀를 안 볼 거니까.”“좋아요.” “당신이 참견할 일이 아냐.”“좋아요. 호텔방을 잡으면 되잖아요. 정신차려요. ”몸을 제대로 가누지못하는 그를 질 리가 부축했을 때 안젤로가 걱정스럽게 다 가왔다. “차를 부를까요?”“괜찮아, 안젤로. 댄의 차로 가겠어. 부인이 찾아오 면 내가 데려갔다고 말해 줘.”“그러죠.”질리는 정신없이 취한 댄을 차에 싣고 에덴으로 돌아왔다. 이제 에덴은 스테파니의 집이 아니다. “왔어요.”대은 비틀 거리며 질리를 의지하여 겨우 움직였다. “미안하오. 미안…….”“침대로 가서 주무세요.”“여기서?”“어서요.”“여기 어디서?”댄은 취한 중에도 자신이 어 디에 있는지 알게 되자 무척 난처한 표정을 지었따. “제가 눕혀드릴께요.”질리 는 비틀거리는 댄을 강제로 침실로 데려가 침대에 눕혔다. 잠깐 제정신이 돌아 왔지만 댄은 전신에 퍼진 술기운으로 침대에 눕자마자 이내 잠들고 말았다. “ 당신을 이용하진 않아요.”달콤한 말과 달리 음흉하게 소리내어 웃으며 그녀는 댄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안젤로에게서 댄의 얘기를 전해들은 스테 파니는 에덴을 향해 차를 달렸다. 그녀는 음흉한 낚시꾼의 미끼에 덥썩 물린 꼴 이었다. 에덴에 도착한 스테파니는 걷잡을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곧장 질리의 침실로 뛰어올라갔다. 침실문을 반즘 열려있었다. 노크할 겨를이 없었다. 손잡이를 잡는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문을 열머 한 걸음 침실 안 으로 내딛었을 때였다. “여긴 뭣하러 왔어?” 스테파니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 다. 알몸의 질리가 풍만한 젖가슴을 잠든 댄의 맨가슴에 얹은 채 모로 누워 있 었다. “덴은 나를 필요로 해. 나가!”질리는 보라는 듯이 이불자락을 들추었다. 그녀의 하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암감색의 무성한 숲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스테파니는 미친 듯이 돌아서서 뛰쳐나갔다. 밖으로 뛰어나온 스테파니는 세워 둔 차에 정신없이 올라탔다. 설움에 복바쳐 소리내여 울며 차의 시동을 건 그녀 는 무작정 달렸다. 그때 근처에서 감시하듯 지켜보던 카우보이 사내가 심상치 않은 상황에 그녀의 뒤를 따랐다. 정신없이 차를 몰아댄 스테파니는 잠시 후 바 닷가에 도착했다. 그녀는 이제 울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 차분한 모습이었다. 카 우보이 사내가 멀리서 지켜보는 줄도 모르며 그녀는 곧장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물가에 이르렀다. 먼 수평선을 바라보던 그녀는 차분하게 몸에 걸쳤던 겉옷을 하나하나 벗어 떨어뜨린 후 구두까지 벗었다. 그 시간은 불과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한 번도 뒤돌아 보지 않고 물 속을 향해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사내가 놀라서 소리치며 달려갔다. “스테파니! 스테파니! ” 무심한 파도소리는 남자의 고함소리르 통째로 집어 삼켰다. 허겁지겁 겉옷을 벗어던진 사내가 물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 스테파니의 모급은 굼실대는 파도 속 으로 실려가며 자취를 감추었다. 6. 밝혀진 의혹 댄이 호텔로 돌아온 것ㅇ 아침 여덟시경이었다. 지난 밤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여전히 스테파니에 대한 앙금을 지울 수가 없었다. 데니스가 찾아 와 스테파니의 행방을 물었지만 댄은 시큰둥하게 흘려 버렸다. 사라 역시 스테 파니의 실종을 모른 채 안젤로와 함께 있었다. 그들은 두 번째로 육체관계를 가 졌다. “후회 안 해?”사라는 조용히 웃었다. “아니, 책임감을 느기거나 할 필 욘 없어.”“난 느끼는데?”그들이 뜨겁게 키스할 때 톰은 시드니를 향해 숨가 쁘게 포스쉐를 몰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이 그리 순탄치 못했다. 계속되는 무 리한 운행 탓에 고장난 포르쉐를 정비소에 맡기고 렌트카로 운행하는 바람에 시 간은 계속 지체됐다. 이성을 되찾은 대은 비로소 불안을 느꼈다. 지금껏 출장 외 에는 단 하루도 외박한 적이 없는 스테파니였다. 댄은 간밤의 일도 확인할 겸 에덴으로 질리를 찾아갔다. 질리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스테파니를 골탕 먹인 일에 만족할 뿐이었다. 댄이 간밤의 실수를 확인할 때쯤 문득 경찰에서 경 찰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경찰은 질 리가 아닌 댄을 찾았고 그는 별다른 생각없 이 수화기를 들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소스라치며 소리쳤다. “세상에…… 스테파니!¨댄은 수화기를 집어던지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삽시간에 댄을 비롯해 서 데니스와 사라가 소란스러운 해변에 모였다. 공중에서는 헬기가 수면에서는 경비정이 요란한 소음을 내며 수색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제 하퍼 부인의 옷과 구두 맞습니까?”담당경찰의 질문에 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눈에 봐도 엄마의 것이 분명했다. “할 수 있는 일이 더 있습니까?”데니스의 초조한 질문 에 경찰은 난처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경찰 잠수부들이 조사하고 있습니다 만 기대는 안 합니다.”한편 소식을 전해들은 질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모든 눈총과 혐의가 자신에게 집중될 것이 뻔했다. 스테파니의 생사보다 자신이 감당 할 타인의 비난이 문제였다. 그녀는 곁에서 부추기는 올리브를 이제 떼어놓으리 겨 두둑한 봉투를 건네주었지만 올리브는 순순히 믈러날 기색이 아니다. 그녀 역시 질리의 승리를 분배받을 속셈임이 분명했다. 최초로 질리에게 혐의를 가지 고 나타난 사람은 제시카였따. “스테파니의 자살은 슷로 한 거지 내가 한 게 아냐!”질 리가 날카롭게 소리쳤지만 제시카는 가소롭다는 반으응로 응수했다. “당신 자신은 그렇게 믿을지 모르지만 전 안 그래요. 왜 이래요, 질리. 당신이 바라던 거잖아요.”“그래?”“당신이 진짜 슬퍼한다고 믿은 사라은 하나도 없 어요.”“두고 보지.”질리는 올리브의 모습을 떠올랐다. 그것은 연약한 제시카 에게 무시무시한 일일 수 있었따. 스테파니의 자살서식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각 매스컴의 기자들은 에덴으로 몰려와 질리와의 인터뷰를 요청하며 웅성거렸 다. 질리는 그 상황에서도 자신이 어떤 태도를 보여야 되는지 알고 있었다. 검정 색 드레스에 검은 안경을 끼고 기자들 앞에 나타난 그녀는 언니의 자살 때문에 슬픔과 비탄에 잠긴 동생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연출했다. 하지만 그녀를 알고 있는 기자들의 비수 같은 질문이 쏟아졌다. “스테파니 하퍼가 자살한 겁니까? ”“끔찍한 질문이군요.”“당신은 여러 가지 사건과 관련이 있는데요, 그렉 마 스턴이나 남편 필립 스튜어트의 죽음 그리고 스테파니의 실종 등…….”“질문 의 의도가 뭐죠?”그녀는 억울하다는 듯이 거의 울상을 지었따. “최근 에덴을 사셨죠. 출감한 지 얼마되지 않은 입장인데 굉장하군요.”누구도 그녀가 자기 돈 으로 에덴을 샀다고는 믿지 않았다. 불법적이었기 때문에 스테파니를 죽도록 유 도했다는 혐의가 타당성을 인정받고 있는 상황이다. “에덴은 스테파니에게 주 려고 샀어요. 남에게 넘기기 싫었죠.”“하지만 스테파니는 호텔로 옮기지 않았 습니까?”“언젠가는 여기서 함께 살려고 생각했어요.”그녀의 대답은 숱한 의 문에 대한 설득력이 없엇따. 한쪽에서 제이크가 날카롭게 주시하는 가운데 계속 임기웅변을 그럭 듯하게 늘어놓던 질리는 끝내 벽에 부딪혔다. 그럴 때 지리가 전유물처럼 써먹는 방법이 있었다. “스테파니가 주었을 가능성은 생각하고 싶 지도 않아요…….”그녀는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울먹이며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질문과 추궁으로부터 벗어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뛰어 들어온 그녀가 컵에 가 득찬 술을 들이킬 때 밖에서 계속 지켜보던 제이크가 바싹 다가왔다. “자축하 는 중이오?”그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가왔다. 눈빛은 먹이를 노리는 맹수 같 았다. “아니에요.”자기가 벌인 일은 간접일 뿐 직접적이지 않다는 점에 깊숙이 숨어버리려는 그녀를 제이크는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왜 아니지? 어떻게 한 건지 말해, 질리.”“스테파니가 죽었다면 당신도 반은 책임이 있어요.”“나 는 최소한 그녀에게 선택한 기회를 줬었지.”“몸과 마음을 바치라구요? 그러니 죽는 걸 선택했겠지.”“당신이 죽였지?”제이크는 갑자기 비위에 짓눌린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뇨.”“뭔가 있었어. 정말로 절망적이지 않는 한 자살할 리 없어.”“틀렸어요. 당신이 생각한 만큼 강한 여자가 아녜요. 스테파니는.”“ 아니, 강해.”그는 단호히 말했다. 그는 지금껏 스테파니만큼 의지가 강한 여자 를 보지 못했다. “영리하지도 않고요. 내가 댄을 침실로 끌어드였다고 생각했 죠.”무심코 내뱉은 그녀의 말에 제이크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그는 이미 모든 걸 간파했다. “그거로군. 네가 일을 꾸몄어. 네가 그렇게 몰고 간 거야!”그와 동시에 제이크는 달려들어 질리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계속해! 끝내버리라 구!”질리는 목이 졸려 핏기가 가시면서도 발악했다. 제이크는 손에 더욱 힘을 가했고 질리의 얼굴은 새파할게 질리며 꺾이기 시작했다. “끝내버……!”질 리 가 캑캑거리면서 계속 대들자 제이크가 갑자기 손을 놓았다. “그럴 만한 가지 도없어.”그는 병자처럼 중얼거렸다. “그만큼 대를 아시는 양반이군.”질리는 목을 어루만지며 여전히 빈정거렸다. 그때 뜻밖에도 소리없이 나타난 올리브가 제이크에게 총을 겨누었다. “당신은 누구요?”“신경 쓸 거 없어. 다시 질리에 게 손대면 당신은 죽어!”“나가요, 제이크.”의외로 질리는 올리브의 등장을 탐 탁해 하지 않았따. 제이크는 새로운 사실에 강한 의혹을 느끼며 에덴을 떠났다. “내가 말썽없이 처리할 테니 샌더스한테 겁먹을 필요없어.”질리는 그보다 올 리브의 존재를 제이크에게 들킨 채 마음에 걸렸다. 올리브의 정체가 노출될 경 우 그 동안의 여러 사건에 대한 혐의에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스테 파니의 실종은 하퍼가문을 뒤흔들어 놓았다. 댄과 데니스 사이에 다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고 사라는 어머니의 실종을 사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스테 파니의 실종이 댄에게서 비롯되었음을 그 자신은 알지 못했다. 오히려 스테파니 에 대한 불만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던 데니스는 처음부터 의 심했던 질리를 불쑥 찾아갔다. 마침 질리는 침실에서 옷을 갈아입기 위해 거의 알몸의 상태였다. 데니스는 상관하지 않았다. “옷 갈아 입을 때까지 밖에 나가 서 기다려.”“그러죠.”하지만 그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어젯밤 여기로 나 를 데리러 오셨을 땐 침울해 보이긴 했지만 아무 말씀 안 하셨어요.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았으며 해요.”“상관있어?”“엄마가 왜 바다로 들어가셨는지 알게 된다면요.”“설마 날 탓하는 건 아니지?”“그럼 누굴 탓하죠?”“미안해, 데니 스. 난 정말 옷을 갈아입어야 해.”질리는 분명히 고의적이었다. 상체를 겨우 가 렸던 브래지어를 벗으며 데니스를 향해 돌아섰다. 데니스는 그녀의 유혹적인 젖 가슴에서 시선을 돌렸다. 천부적인 혜택인지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질리의 유방 과 유두는 거의 처녀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왜 이래요, 질리. 정숙한 척은 안 해도 되잖아요.”“너의 그런 행동이 네 엄마에게 어떻게 비쳤을지 알겠구나.” 그녀는 팬티까지 벗었따. 완전한 알몸이었다. 그리고 가장 은밀한 부분을 적나라 하게 조금씩 보이도록 움직이며 옷을 갈아입었다. 겨우 손바닥만 천을 다리에 꿰는 과정에서 그녀는 슬쩍 자신의 숲에 손바닥을 대기도 했다.데니스를 혼란시 키려는 듯이 스르르 눈을 감으며 숲의 한 부분 적은 돌기에 손가락을 세우기도 했지만 데니스는 외면했다. 끝내 반응이 없자 그녀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네가 방화범이라는 걸 아시고 얼마나 충격이 크셨겠니.”“내 탓이라구요? 천 만에. 당신이 이 집을 훔친 걸 아시기 때문에 이해하셨다고!”그녀는 드레스의 등 지펴를 올려 주도록 돌아섰지만 동시에 데니스도 돌아섰다. “당신 입에 지 퍼가 있다면 올려드리지!”아무것도얻어내지 못한 채 침통하게 계단을 내려오던 데니스는 제시카와 마주쳤다. “안녕, 제시카. 질리 이모와 잠깐 얘기했어.”“다 들었어요.”“이 집안 사람들은 열쇠구멍으로 엿듣는 취미가 있나?”데니스의 불쾌한 질문에 제시카는 언성을 낮추었다. “제 경우는 악어가 아니라 자기방어 뿐이에요.”“너도 질리를 믿지 않는군?”“독거미 같은 여자죠.”“골탕먹일 클 럽이나 만들까?”데니스도 언성을 낮추었다. “그러면 내가 창립멤버가 되죠.” 그들은 마주 보면서 의미있는 미소를 교환했다. 그때 질리는 나름대로 계획을 점검했다. 자신이 더 의심받기 전에 사실을 밝혀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취했던 댄 을 빌미로 어떤 수단을 강구만 하면 자신은 벗어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질리는 지체없이 댄을 찾아갔다. 몇 가지 얘기 끝에 그녀는 넌즈시 본론을 꺼냈다. “데 니스는 내가 스테파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비난하는 거예요.”“그럴 만도 하지.”“그의 기분은 이해해요. 하지만 당신과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데니스에 게 말하지 않았어요.“술에 취해 그녀의 침대에서 잤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무시 할 수 없는 약점으로 잡힌 것이다. “거짓말은 할 필요없소.”아직 그 일이 스테 파니 때문에 있었다고 댄은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어요.”“문제?”“제 가 일어나기도 전에 가버리셔서 말씀 못드렸는데, 에덴에 그때 스테파니가 왔었 어요.”“에덴에?……”댄의표정이 순식간에 변했고 질리는 보이지 않는 미소를 흘렸다. “당신이 제 침대에 누워있는 걸 그냥 뛰어나갔어요. 말 할틈도 없었는 데 어떤 상상을 했는지 뻔하죠.”질리는 스테파니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 로 댄에게 씌우려 했다. 댄은 그대로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당신 말은… ….”그는 말끝은 더듬거렸다. “오해할 소지가 많은 광경이었죠. 자기 인생에 중요한 두 사람이 같지 잔다고 말이에요.”댄은 입도 열지 못했다. 둔기로 뒤통 수를 얻어맞은 듯 혼란스러웠다. 스테파니의 실종에 대한 의문이 한꺼번에 풀렸 다. 그 자신 스테파니가 아말과 키스하는 모습에 그 지경으로 취했었다. 하물며 질리와 나란히 침대에 누워있는 댄의 모습을 목격한 스테파니의 충격은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 즉시 호텔로 돌아온 댄은 절망적인 비탄에 빠졌다. 안젤로와 바닷가에서 헤어져 호텔로 돌아온 사라는 깜짝 놀랐다. “괜찬으세요, 댄?”“내 잘못이었어, 사라! 변명할 말이 없어.스테파니는 나 때문에 죽었어. 내가 죽인 거 야!”쥐어짜는 듯한 댄의 절규에 사라는 어리둥절했다. 그녀는 감히 무슨 이유냐 고 묻지도 못한 채 미리 겁에 질렸다. 모든 일을 교묘하게 만든 질리는 다시 제 이크를 찾아갔다. 그녀는 안톤이 이미 올리브의 신상파악까지 했다는 사실에 놀 랐지만 거기서 물너나지 않았다. 제이크는 질 리가 수감 중 심한 알콜중독 상태 였다는 약점까지 알아냈지만 아직 밝히지 않았다. 질리는 그가 에덴에서 자신의 목을 조른 것을 문제시하며 경찰을 들먹였다. 그녀의 말에 안톤이 경찰에 고발 할 경우 유일한 증인인 올리브가 전과자이기 때문에 증언에 설득력이 없다고 하 자 다소 실망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단념할 질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법정판 경보다 사회적 물의가 더 무섭다는 것도 알죠? 하퍼사의 회장이 여자를 폭행했 다면 어떻게 될까요?”제이크는 결국 그녀의 요구조건을 들어 주었다. 그날부터 질리 스튜어트는 하퍼사의당당한 이사로, 그것도 회장의 옆방인 총지배인실을 당분간 가용하게 되었다. 안톤이 질리의 행동에 우려의 뜻을 비치자 제이크는 자신의 뜻을 밝혔다. “그녀의 뒤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결정하기 전까지는 내 옆방에 두고 감시하겠네.”질리와 제이크의 도박이 새롭게 시작된 듯했다. 에 덴으로 돌아온 질리는 제시카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현재로서는 제시카가 가 지고 있는 테이프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자기시능 지난 죄상 뿐 아니라 앞으 로의 계획에도 분명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흉터수술에 기대를 거 는 제시카에게 비꼬듯 말했다. “지금 댄은 수술할 형편이 못 돼.”“왜요?”“ 너무 자포자기해서 사회적 명성도 아랑곳하지 않을 거야.”그녀는 자신이 꾸며 낸 가공할 범죄에 대해 만족하고 있었다. “강하신 분이 그렇게 포기하실 리 없 어요. 필립 삼촌의 테입을 댄에게 주면 처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죠.“테이프는 제시카의 유일한 무기였다.”“너무 늦었어. 스테파니는 이제 없어. 그러니 테입 을 내놔.”“그래도 경찰은 흥미를 가질 걸요?”질리는 어쩔 수 없이 물러섰다. 하지만 그 직후 제시카의 질리에 대한 승리는 영원히 끝나고 말았다. 질 리가 나가자마자 올리브가 제시카에게 무섭게 접근했다. “왜 그러세요?”제시카에게 무석게 접근했다. “왜 그러세요?”제시카는 올리브의 살기어린 눈빛에 겁이 덜 컥났다. “불길 속에 갇혔을 때는 아주 어렸었다지?”“어떻게 아세요?”제시카 는 더 이상 뒤로 물러나지 못하며 올리부에게 붙잡혔다. “질 리가 얘기하더군. ”올리브는 갑자기 라이타 불을 켜서 제시카의 얼굴에 들어댔다. “날 내버려둬 요.”제시카는 새파랗게 질리며 애원했다. “이 스카프……그래, 예쁘지만 순식 간에 타버리지. 옷이 타면 끔찍하게 될 거야.”그녀는 오들오들 떨고 있는 제시 카의 옷자락에 금방이라도 불을 당길 듯이 위협했다. “또 그런 사고를 당하고 싶지 않겠지? 이젠 목뿐이 아니고 배꼽까지 흉터가 번지고 그곳의 털도 태워 줄 까?”이미 사색이 된 제시카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런 꼴을 당하고 싶지 않으 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얼마 후 질 리가 돌아왔을 때 올리브는 그녀에게 문 제의테이프를 내놓았다. “제시카가 평화협정을 하자더군. 복사테입까지야.”“ 다른 게 또 있는지 어떻게 알아?”질리는 뜻밖의 수확에 내심 크게 만족했지만 내식은 하지 않았다. “겁을 먹엇으니까. 내게 당하긴 싫겠지.”“터 좋은 방법 은 아마 없었을 걸.”“난 내가 아지 ㄱ너에게 필요하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을 뿐이야.”“넌 에덴에는 있을 수 없어. 벌써 정체가 드러났어. 그리고 젊은 사람 으로 집사 한 명을 구해줄=도록 부탁해 놨어.”“눈요기라도 하려고?”질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조차 느끼기 않았기 때문이다. 이즈음 올리브에 대 한 질리의 태도가 변하고 있었다. 중요할 때마다 이용하면서도 항상 귀찮은 존 재로여겼다. 수감 당시 죽이 맞던 옛친구는 이미 아니었다. 어느 정도 성공을 거 둔 질리에게 올리브는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질리가 자신의 성공 에 만족하고 있을 때 자책에 빠진 댄은 확실한 정보를 얻기 위해 하퍼빌딩으로 제이크를 방문했다. “이제 스테파니가 없어졌으니 좋겠구료.”“나에게 덮어 씌 우려 하지 마시오. 그런 개인적인 일이니까요.”의례적인 인사말도 없이 그들은 설전부터 시작했다. “가업인 회사를 잃었는데 어찌 개인적인 일리겠소.”“당신 과 질리의 관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댄은 그의 말을 금방 알아들었다. “그래요. 스테파니가 본 것은 아무것도 아닌데 오해한 거요.”“질 리가 약간의 장난을 친 것 밖에는요.”“뭐요?”댄은 다급하게 물었다. “그런 기회를 그냥 지나칠 여자가 아니죠. 분명히 오해하도록 만들었을 겁니다.”“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이오?”“왜 이러십니까, 박사님. 쇼크가 커서 지능도 잃으셨소? 내게서 이런 말을 듣는 건 언짢으시겠지만 당신의 기분은 충분히 이해해요. 종류는 달 라도 둘 다 그녀를 사랑했고 지금은 잃어버렸죠.”모든 의혹이 한꺼번에 풀렸다. 만취한 자신을 데려다 침대에 눕히고 스테파니가 오도록 한 다음 그럴 듯한 장 면을 고의적으로 보여 주었을 것이 분명했다. “망할 질리!”댄의 두 눈은 노여 움으로 이글거렸다. “반드시 대가를 받을 겁니다!”제이크의 말을 들으며 나가 던 댄은 데니스와 마주쳤다.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댄은 어느 때보다 격 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제야 모든 걸 알았어. 스테파니는 질리 때문에 죽었 어.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건 에덴에 달려가 질리를 쏴 죽이는 거야!”의외로 데 니스가 차분하게 말했따. “진정하세요. 그녀를 처리할 방법은 많아요. 엄마도 당신이 살인하는 걸 원치 않으실 거예요.”“그래, 네가 옳아. 그렇지…….”댄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질리의 응분의 대가를 받게 될 거예요.” 그 전에 제이크도 질리에 대해 똑같은 말으 했었다. 이제 질리의 주변엔 그녀를 증오하는 이들로 가득했다. 그녀 편은 한 명도 없었다. 지금껏 하수인 노릇을 해 온 올리브도 만일 질리가 떼어놓으려 한다면 어떤 보복을 할지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시카를 포함해서 캐시까지 모두 그녀의 비참한 말로를 기다렸다. 7. 두 번째 소동과 불신 하퍼가문의 비탄처럼 스테파니는 자살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를 뒤따라 소 리치며 띄어든 카우보이 사내와 함께 의식을 잃고 해변으로 떠밀려 왔다. 그녀 가 먼저 깨어나고 잠시 후 남자도 의식을 되찾았다. 그들이 의식을 되찾았을 때 는 거의 벌거벗은 채였다. 마주 본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담 배는 없겠죠?”“남자가 조용히 물었다.”“다른 옷에 뒀나 봐요.”“어떻게 된 거요?”“난 도움이 필요없었는데, 수영도 못하면서 날 구하겠디고 뛰어 들어 요?”“알 수가 없어서 그랬는데 날 구해 줘서 고맙소.”스테파니를 구하겠다고 물에 뛰어든 사내를 오히려 그녀가 구조하려다 기진맥진하는 바람에 물살에 떠 밀리며 의식을 잃었었다. “자살하려던 게 아니었소?”“모두 잊고 싶은 생각은 있었지만 난 자살형은 아녜요. 그랬다면 오히려 쉬웠을 테죠.”우연이란 스테파 니의 경우처럼 예상 밖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자살할 뜻이 없었음에도 그 남자의 개입으로 지금처럼 상황이 바뀐 것이다. “왜요, 문제가 있어요?”“돌아 가긴 틀렸으니 육지로 가요. 우릴 모두 찾을 거에요.”“우리가 아니고 당신을 찾겠죠.”“어쨌든 가요.”스테파니가 앞장서 두 사람은 육지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이 어딘지 전혀 알 수 없었따. 시간도 알 수 없어고 주위는 무인도처럼 조 용했다. “수영도 못하면서 어떻게 날 구하려 했죠?”“그보다 한 몫 잡을 수 있을 줄 알았죠.”남자의 솔직한 대답에 스테파니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스테 파니를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를 전혀 몰랐다. “좀 늦으셨군요. 난 다 잃었으 니 당신이 더 값나갈 거예요.”“그렇게 나빠요?”“돈뿐만이 아니라 모두 잃었 어요, 모두.”“어쩌다 그리됐소?”“내가 실수했죠, 그것도 여러분…….”스테파 니는 그 문제를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닐 텐데…….”“왜 날 조사했죠?”그때 숲길의 서 갈래 길이 나타났다. 남자는 그녀에게 도움을 청한다기 보다 의견을 물었다. “어느 쪽으로 갈까요?”약간 앞서서 걷던 스테파니는 주변을 살핀 다음 방향을 결정했다. “ 이쪽으로 가면 어쨌든 큰 도로가 나타날 거예요.”그녀는 때마침 드높이 나르는 여객기를 보며 방향을 정확히 잡았다고 생각했다. “돌아서서 뭘 할 생각이죠? ”“글쎄요…….”“해변에 당신의 차도 있고 옷이 있으니 모두들 죽었다고 생 각할거요.”“그렇겠죠.”그때 사내가 넘어지면서 발을 움켜 쥐었다. 그는 보기 보다 마음이 약한 남자같았다. 바바닥이 약간 찔려 피가 조금 난 정도인데 마치 다리라도 질린 듯이 비명을 질러댔다. 스테파니는 그나마 빌려 입었던 그의 남 방을 찢어 상처를 칭칭 매어 주었다. “붕대를 감지 않으면 영영 여길 빠져나가 지 못할지도 몰라요.”“죽은 체 할 수도 있죠.”“뭐라고요?”“전에도 한 번 그랬잖소.”뜻이 담긴 말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고 스 테파니도 묻지 않았다.‘죽은 채’했다는 것은 스테파니가 어떤 사내한테 육체 를 정복당했던 옛날과 관련된 말이었더. 게속 걸어도 숲이 이어질 뿐 인적이라 곤 느낄 수 없었다. 걷는 일은 스테파니보다 그가 더욱 힘들어 했다. 그는 꼭 가 고 싶은 생각이 없는 듯해 보였다. “계속 여기 있을 거예요?”그녀는 땅바닥에 주저앉는 사내에게 물었다. “붕대를 갈아야겠소.”“나도 더 이상 품위를 잃을 수는 없어요.”그의 상처를 지혈하기 위해 찢긴 남방으로 인해 이미 스테파니의 옷매무새는 배꼽이 드러나 있었다. “멋있는데요?”“당신은 더해요.”그녀는 팬 티뿐인 사내를 웃으며 바라보았다. “난 평생에 한 번 올까말까한 기회를 집에 가려고 놓치진 않아요.”“무슨 생각인지 모르지만 난 그럴 순 없어요. 난 가족 이 있고…….”“전에도 타라 웰스란 이름으로 해보지 않았소. 이해할 거요.”스 테파니는 그런 문제에 골몰할 생각이 없었다. 그냥 있는대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아시니까 묻죠. 어떻게 질리와 샌더스에게서 다시 뺏을 수 있죠?”“아직은 모르지만 날 믿어요. 방법이 있을 거요. 날 믿어요.”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한편 시드니에서는 뜻밖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질리에 대한 증오심에 가득 차 있던 댄은 빌리의 부인인 리나의 침통한 방문을 받았다. 그녀는 거의 울먹였 다. “왜 그래요?”“톰이요. 톰이 타고 있던 차가 전복됐대요. 시드니로 급히 데려왔어요.”“얼마나 나쁜 거죠?”“급히 수술해야 된대요, 댄. 당신이 해 주 시겠어요?”“!……”“톰을 맏아 주시겠지요?”모든 일로부터 떠나고 싶던 댄 이었다.톰은 기쁜 소식을 한시 바삐 사라에게 알려 사랑을 되찾기 위해 무리한 운전 중 전복사로를 일으켜 의식불명상태였다. “댄, 제발…….”함께 있던 사라 도 간곡히 부탁했다. 평생 남을 해치기는커녕 괴롭게조차 해보지 않은 마음씨 착한 리나는 눈물이 글썽해졌다. 댄은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네, 그럼요. 제 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하죠, 리나.”리나는 대답만으로도 톰을 살랴낸 듯이 댄을 껴안았다. 스테파니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만 했다. 그 ㄷ일은 그때가 서 생각해도 늦지 않다. 우연히 동행하게 된 남자에 대해서도 이름조차 묻지 않 았다. “난 여기서 밤을 새우긴 싫어요.“그녀는 서쪽으로 깊숙이 기울어진 태양 을 쳐다보았다. ’돌아가기로 결심한 거요?“’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책임질 수 있는 선택이죠.“’그 책임질 수 잇는 선택이 결국 어떻게 됐소?”“속옷만 입 은 남자와 황야를 헤매고 있죠.”“더 나쁠 수도 있죠.어쨋든 돌아가기로 결심했 다니 집으로 갑시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아스팔트가 깔린 차도를 발견했 다. “길이에요!” 약간 떨어진 곳에는 공중전화까지 있었다. 스테파니는 더 이 상 방황할 필요가 없었다. 수중에 동전 한 닢 없었지만 수신자 부담으로 세계의 어디라도 연락할 수 있었다. 달려간 스테파니는 공중전화의버튼을 눌렀다. 그녀 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통화는 즉시 연결되었다. “여보세요?”댄의 목소리였 다. 순간 울컥 치미는 게 있었다. 울음부터 터져나오려 했지만 다음 순간 느닷없 이 떠오르는 광경이 있었다. “여보세요?”두번째 들리는 댄의 목소리를 멀리하 며 그녀는 수화기를 제자리에 걸었다. 그녀는 축 늘어진 채 사내가 기다리는 곳 으로 되돌아왔다. 사내는 이미 알아차렸다. “다시 싸우기로 결심했소?”“생각 해 보겠어요.”그들은 다시 인적없는 길을 택해 숲속을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걷다간 평생 여길 빠져나가지 못할 텐데…….”스테파니도 동감이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 숲속을 방황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사내가 뜻밖의 물건 을 발견한 것은 바다와 그다지 멀지 않은 숲에서였다. 조금 전 그곳에 도착한 젊은 남녀가 자동차에 옷을 벗어 놓고 바다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카우보이 사내는 재빨리 여자의 옷을 스테파니에게 건네주었다. “난 못해요.”“왜요, 사 이즈가 안 맞아요? 색깔이 싫어요?”“남의 옷을 훔치다니 안 돼요.”“저들은 나체주의자이기 때문에 옷이 필요없어요.” 실제로 그들 남녀는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해변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흉해요.”“완벽한 한 쌍이요.” 그는 먼저 젊은 남자의옷을 입었다. 스테파니는 끝까지 반대했지만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사내가 젊은 남녀의 자동차를 훔쳐 타고 달리는 데 공범 이 되었다. 에덴에는 젊고 건강한 청년이 집사로 들어왔다. 올리브는 여전히 질 리의 주변을 맴돌았고 테이프를 빼앗긴 제시카는 그래도 머물겠다고 간곡히 부 탁했다. “갈 곳 없는 조카를 거두는 것도 보기 좋겠지. 좋아, 하지만 조금이라 도 눈에 거슬리면 그걸로 끝장이야.” 제시카는 무엇 때문인지 에덴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날 아침 질리는 에덴의 여주인답게 우아한 몸짓으로 집사가 준 비한 아침식사를 테라스의 테이블에서 먹을 참이었다. 테이블에는 향기좋은 요 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한껏 멋을 부리며 의자에 앉은 질리는 질리는 요리가 담 긴 크고 둥글게 위로 솟은 은빛 뚜껑을 열었다. 순간 그녀는 혼비백산 하며비명 을 내질렀다. 알팍하게 평평한 용기 안에는 굵은 뱀이 또아리를 튼 채 가득 담 겨 연신 혀를 날름했다. 젊은 집사가 달려왔지만 뱀에게 손도 대지 못했다. 제시 카가 놀라서 달려왔다. “네 짓이지?”“난 아무 짓도 안 했어요.”“거짓말 마! 넌 시골서 자랐기 때문에 뱀에 대해 잘 알잖아!”질리의 말대로 제시카는 뱀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늘 아침엔 방에서 나오지도 않았어요. 조용히 지내랬잖 아요. 이제 생각나요. 당신은 뱀을 싫어하죠. 그때 농장에서…….”“닥쳐! 어서 뱀이나 치워버려!”“알겠어요.”제시카는 놀란 만큼 능숙하게 커다란 뱀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넌즈시 중얼거리며 밖으로 향했다. “누가 했는지 다음엔 더 잘 했으면 좋겠네.”그대 불쑥 나타난 올리브가 제시카의 팔을 움켜잡았다. “네 짓이라면 후회하게 될 걸?”지켜보던 질리가 한 마디 던졌다. “그럴 배짱 도 없는 년이야.”“제이크 짓일까?”“글세……그답지 않아. 어쨌든 경찰이 수 사를 시작하면 누군지 땀 꽤나 흘리겠지!”질리는 즉시 경찰에 신고했지만 오히 려 의혹만 남겼다. 집 안의 어디에도 뱀은 없었고 제닝 반장은 처음부터 그녀를 믿지 않았다. “에덴에 파충류가 몰려오고 있군. 수영장의 악어, 그리고 뱀, 차음 엔 스테파니더니 이번엔 당신, 집안의 전통인가?”“누군가 날 죽이려고 했어요. 어떤 조치를 취하실지 알고 싶어요.”“귀부인 행세는 그만 하시지. 감옥에 있을 땐 엉망이었다면서?”담당형사에 이어 제닝 반장은 더욱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 다. “뱀은 분명히 없소. 왜 그랬을까. 죄의식 때문에? 난 아직 당신 언니에게 관심이 있소. 수사가 종결되지 않았으니까. 나 같으면 저 전과자를 당장 내보내 겠소. 의심이 짙어지니까.”결과적으로 올리브까지 경찰에 완전히 노출된 꼴이었 다. 하지만 질리는 올리브가 어느 때보다 필요해졌따. 에덴의 뱀소동은 데니스와 사라를 즐겁게 했다. “우린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 대신 해 주는군.”데니스는 제시카에게 함게 살자고 제안했지만 그녀는 선뜻 응하지 않았다. 한편 댄의 딥 도로 수술받은 톰의 경과는 좋지 않았다. 뇌의 손상이 컸기 때문이다. 톰의 중상 은 사라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안젤로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지만 가슴 속에서 는 톰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데니스를 통해 사라와 톰의 관계를 자세히 알게 된 안젤로 역시 고민에 빠졌다. 톰은 병상에서 사경을 메매며 헛소리를 해댔지 만 아무도 듣지 못했다. “사라, 모두 틀렸어! 사실을 알았어. 버나데트 수녀님을 통해. 사실은…….”톰은 다시 의식을 잃었고 그나마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시드니의 하퍼가문이 그렇게 어수선할 때 스테파니는 그 남자와 훔친 자동차를 타고 힘들이지 않게 오래 전 머물던 장소를 찾아갔다. “데이브 웰스라는 노인 이 누구요?”남자는 강을 따라 보트를 타고 오는 노인을 가리키며 물었다. “옛 날 악어가 습격했을 때 구해주고 간호해 준 분이에요. 그때 내가 기억상실증에 걸렸기 때문에‘타라’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죠. 그리고 보석을 많이 주셔서 복 스를 가능하게 해 주셨고 그 이름을 따서 난‘타라 웰스’가 됐던 거예요.”스 테파니는 지난간 악몽을 가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게 누구람!”보트에서 내 린 노인은 어쩔 줄 몰라하며 스테파니를 반겼다, 누가 보아도 감격적인 해후였 다. “네 남편 솜씨가 매우 훌륭하군!”노인은 댄의 성형수술을 격찬했다. “그 런데 남편은 어딨어?”“나중에 말씀드릴께요.”“그럼 저건 누구야?”노인은 사내를 의심스러운 누빛으로 바라보았다. 비록 많이 늙었지만 정글을 누비며 혼 자서살아가는 노인답게 강인함이 엿보였다. “제 친구예요.”“네가 그렇게 말한 다면 그런 거지.”노인은 두 사람을 보트에 태우고 왔던 길을 되돌아 완전한 자 기의 거처로 데리고 갔다. 스테파니의 정글생활이 다시 기약없이 시작되었다. 뱀 소동으로 오히려 손해만 보게 된 질리는 다시 모략을 준비하여 제이크를 찾아갔 다. 제이크와 함께 있던 안톤을 밖으로 내보낸 질리는 놀라운 요구를 했다. “총 지배인 자리를 나에게 주셨으면 좋겠어요.”제이크는 어이가 없었다. “이사회에 들어오더니 머리가 이상해졌군. 조심하는게 좋아.”“조심해야 될 사람은 당신이 죠.” 그녀는 준비한 서류를 내놓았다. 뜻밖에도 올리부가 조작한 거짓 진술서였 다. 제이크가 올리브를 고용해서 스테파니 하퍼를 해치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결 과적으로 이번에도 제이크가 한 수 빼앗겼다. 뒤에 가서 진실이 밝혀진다고해도 당장이 문제였다. 전과자를 끌어들여 그런 흉계를 꾸몄다는 거짓사실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총지배인에 이사직, 다음은 뭘까?”“ 적응이 빠르시군요.”“오늘 저녁이나 같이 할까?”질리는 날카롭게 제이크의 표저을 살피며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올리브를 떠올리며 안심했다. “좋아요. 당신을 믿는 건 아니지만 응하겠어요.”“현명하군.”총지배인 자리를 사실상 거 머쥔 질리는 서류가 작성되기도 전에 회장의 여비서인 힐러리를 해고시켰다. 축 하해 주지 않는다는 구실이었다. 그 도안 스테파니만을 생각하는 힐러리가 눈의 가시였고 앞으로를 위해 그 편을 제거시킨 것이다. 뿐만 아니라 데니스에게도 터무니없는 일을 시켰다. “그 일을 다 하려면 밤을 세워도 모자랄 텐데요?”“ 그런 줄 알고 있어. 하지만 오늘 오후 다섯시까지 상황보고서를 만들어 놔.”데 니스는 대답할 말을 잃었다. 안톤 역시 제이크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질리의 약점은 그렉을 잃느니 차라리 죽여버릴 정도로 사랑한거네.”“그래서?”안톤은 얼른 알라듣지 못했다. “형을 사랑했다면 나도 사랑하겠지. 난 그렇게 만들 수 있어.”“대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앉아서 구경이나 하게, 안톤.”제이 크는 깊은 눈빛으로 창 밖 먼 하늘을 내다보았다. 그의 속셈은 안톤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제이크는 그날 저녁식사를 빌미로 질리의 마음을 사로잡을 작정이었 다. 사방에 적을 두고 있는 질리였따. 적들과 싸워 이기기 위해 정당성도 없는 자기권리를 지키려는 약점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스테파니는 시드니에서 자신 의 장례식이 준비되고 있을 때 데이브의 거처에서 지내고 있었다. “어떻게 생 각하세요? 제가 바보였나요?”그녀는 모든 사실을 데이브에게 털어 놓았다. “ 너에겐 가족이 필요하지. 넌 적을 존중할 줄 알지만 네가 마실 맥주에 독약을 탄 게 핏줄이라는 사실에 견딘수 없었던 거야.”“전 끝까지 그녀를 돌봐 줄 생 각이었어요.”그때 사내가 다가왔다. 그는 비로소 데이브에게 자신의 이름이‘존 노’임을 밝혔다. 데이브는 존노에게 불피울 나무를 가져오도록 내보낸 다음 스 테파니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저 친구도 너를 신경써 줘야 한다고 말하더군. 하지만 지난번과는 달라. 타라, 넌 모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어.”“제가요? ”“난 확신해.”그 문제에 존노도 스테파니에게 강력하게 얘기한 것이다. “길 게 생각해요. 바보같이 전화나 전보 같은 걸 보낼 생각 말고요. 당신이 죽었다고 모두들 믿게 되었을 때 그때 한 방 먹이는 거요. 그리고 당신은 혼자가 아닐 테 고…….”“날 내버려 둬요. 지난번 여길 떠날 때 난 위험하고 조심스러웠는데 지금도 그래요.”그녀는 그 옛날의 악몽이 떠올랐다. 가족과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것에 생각이 미치자 몸서리쳤다. 제이크 보다도 자매임을 항상 내세우면서 이면에서는 모든 음모를 꾸민 지릴가 더욱 증오스러웠다. 그녀를 끝까지 가족으로 생각하고 싶었던 자신도 마찬가지 였다. 그리고 아버지나 다름없는 데이브, 지신과의 과거가 심상치 않은 존노 등 의 강경한 재기권고도 압력처럼 부담을 주었다. 시드니에서는 스테파니의 장례 식을 준비하는 한편으로 사라와 안젤로의 사이가 더욱 미묘해져갔다. 톰과의 관 계를 낱낱이 알고도 이해하며 사랑을 머추지 않는 안젤로에 대해 사라는 점점 더 마음이 끌렸다. 사랑하지만 남매인 톰은 여전히 의식불명 상태였다. 제이크는 안톤에게 장담했듯이 질리의 마음을 점점 사로잡았다. 겉과 속을 구별하기 어려 운 지릴였지만 확실히 제이크의 작전에 말려들고 있었다. 낮 동안 비위를 맞춰 가며 질리의 마음을 움직인 제이크는 에덴까지 함께 가서 분위기를 연장시켰다. “요즘의 에덴은 썰렁하군.”그는 올리브가 지켜보던 가운데 자못 그럴 듯하게 늘어놓았다. “고용인을 뒀어요.”질리는 올리브를 그런 식으로 간접적으로 소개 시켰다. 제이크는 아직 올리브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당신의 사랑을 믿지는 않아도 밤을 같이 지낼 순 있죠. 엣정을 생각해서라도…….”질리는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그의가슴에 파고 들었다. 때때로 그녀의 육체적인 본능은 성격의 양 면성과 관계없이 진실로 타오르기도 했다. 지금이 그랬다. 제이크는 그녀를 뜨겁 게 안아주며 연인들만이 간으한 키스로 그녀를 사로잡았다. 여자에 익숙한 그는 질리의 육체가 어떤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는지 분명히 느꼈다. 몇 마디의 근사 한 이야기와 뜨거운 키스에 그녀의 육체는 본능적으로반응하며 깊은 곳으로부터 서서히 문을 열고 사내를 받아들이기 위해 젖어들었다. 하지만 조금 더 기다렸 다. 그녀의입에서 벌써 낮은 신음소리가 새오나올 때 제이크는 갑자기 키스를 중단했따. 그녀가 완전히 빠져 있을 때 갑자기 중단해 버린 것이다. “난 갈 거 요.”“뭐라고요?”그가 입술을 떼자 질리는 달라붙으며 기겁했다. “난 이걸로 만족할 수 없소. 내 사랑을 믿지 못한다면 그렇게 살아야 하겠지. 어정쩡한 건 싫소. 잘 자요.”제이크는 몸달아 하는 그녀를 남겨둔 채 재빨리 사라져갔다. 질 리는 방금 자신의 육체 속에 들어와있던 남성이 갑자기 빠져나간 듯이 허탈한 허무감에 빠졌다. “알려주지 그랬어. 바이올린이라도 켜 줬을 텐데.”올리브가 곁에서 빈정대자 질리는 앙칼지게 소리쳤다. “닥쳐, 올리브!”하지만 질리의 그 런 태도에 겁먹을 올리브가 아니다. “고용인? 내 위치가 고작 그거로군.”“넌 내가 있으라고 해서 있다는 걸 알아야 해.”“내가 진술서에 서명했기 때문에 넌 제이크를 이겼어.”“그런 공치사는 내일 해, 난 피곤하니까.”“오늘 널 보 니 그놈한테 완전히 녹았더군.”“일부러 그런 거야.…….”질리는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이윽고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난 피곤해. 여기서 나가라고!”올리브 는 할 수 없다는 듯이 그 방을 나갔지만 불만에 찬 눈빛이었다. 이층 침실에서 내려간 그녀가 혼자 술을 마시며 제시카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따. 올리브를 내보내고 막 침대에 들려던 질리는 별안간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침대의 시트 를 들추고 막 들어가려는데 굵고 커다란 뱀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 은 사고 투성이야. 딴 데 가서 살도록 해, 제시카.”올리브는 웬지 그렇게 말하 며 이층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새파랗게 질려 어쩔 줄 모르는 질리에게 먼저 달 려간 것은 제시카였다. “무슨 일이에요?”“배, 배, 뱀이야! 침대에 있어! 어서 잡아!”그녀는 처절할 정도로 더듬거리며 부르짖었다. 제시카는 서슴지 않고 족 히 사람 크기 만한 뱀을 두 손으로 잡았다. “올리브, 경찰을 불러!”올리브가 급히 아래층에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이건 독이 없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애완용으로 키우기도 하죠.”“죽여버려!”“내가 처리할 테니 나가서 문을 닫아 요.”질리는 뱀과 제시카를 침실에 남겨둔 채 밖으로 도망쳤고 신고받은 제닝 반장이 형사를 대동하고 달려왔다. “또다시 허깨비 놀음이 아니면 좋겠소, 스튜 어트 부인.”“누군가 날 죽이려 해요. 언니를 죽이려던 사람일 거예요.”“어디 봅시다.”질리는 그들을 데리고 이층으로 올라가서 조심스럽게 침실문을 열었다. “죄송해요. 찾을 수가 없군요.”제시카의 태연한 말에 질리는 두 눈이 확 뒤집 어졌다. “뭐라는 거야? 뱀을 어쨌어?”“뱀은 없었어요.”“손에 들고 있었잖 아!”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증인이 없었다. 유일한 증인인 제시카가 시치미를 뗐고 거기다 제닝 반장은 처음부터 질리를 불신했다. 결국 뱀은 애당 초 없었고 질리의 거짓으로 결말지어졌다. “또다시 뱀이 보이면 정신과 의사를 부르시오. 스튜어트 부인.”질리는 그야말로 복장이 터지고 환장할 지경이었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사회적인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기 전에 제시카의 태도에 울화가 치밀었따. 그녀는 올리브가 묵묵히 지켜보는 가운 데 그 즉시 쫓겨났다. 쫓겨난 제시카가 갈 곳은 댄 등이 묵고 있는 호텔뿐이다. 8. 증폭된 의혹 스테파니의 자예식은 댄을 비롯한 모두가 애도하는 가ㅇ 조촐하게 치루어졌 다. 질리도 검은 정장을 하고 참석했다. “사람들이 너무 조금 왔네요. 스테파니 의 인기가 떨어졌나 보군요?”그녀를 잘 알고 있는 댄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제해야만 했다. “가까운 가족과 친구만을 불렀는데 당신은 어느 쪽도 아닌 것같군.” 피는 비난보다 진하죠. 제시카를 거두셨더군요. 조심하세요.〔”실례하 겠소.”댄이 다른 곳으로 가버리자 데니스가 곱지 않게 다가왔다. “베짱도 좋으 시군.”댄과 마찬가지로 데니스도 울컥 치미는 분노를 간신히 억제했다. “이 옷 어때, 데니스? 필립의 장례식 후 세탁해 뒀었어. 선견지명이 있었던가 봐.”“당 신을 노리는 사람이 성공하면 또 입을 기회가 있겠군.”“누구 짓인지 둘 다 알 잖아?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 즐기라고.”질리는 장례식장을 휘젓다시피했다. 이 번에는 빌리와 리나에게 접근했다. 그리고는 독설을 태연히 늘어놓았다. “처음 엔 엄마더니 이번엔 톰이군요. 불행의 연속이라더니…… 혹시 당신 자리에 앉아 서 기분 나브세요?”“그런 직책에는 재능과 경험이 필요한데 당신에겐 둘 다 없지. 업게에서는 당신의 총지배인 임명이 벌써 웃음거리가 되고 있더군.”질리 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사방에 자기의 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그녀는 삶에 대한 의욕이 불끈 솟구치는 것이다. 빌리의 조롱에 몹시 기 분이 나빠진 질 리가 하퍼빌딩으로 갔을 때 제이크는 또 다른 선물을 준비해 놓 고 있었다. “새로 임명된 총지배인에게 주는 꽃다발이오.”“치우세요, 그럴 기 분 아니니까.”“꽃을 싫어한다면 이건 어떨까?”그는 서류봉투를 질리에게 주 었따. “뭐예요?”“타라의 등기서류지. 당신이 늘 갖고 싶어하지 않았소. 사랑 의 선물이오. 아무 조건도 없으니 생각해 봐요.”질리의 얼굴이 금방 흡족한 표 정이 되었다. 캐시에게 넘겼던 타라의상실을 법적으로 완벽하게 차지할 수있게 된 것이다. 제이크의 행동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는 안톤에게 제이크는 폭탄 같 은 선언을 했다. “그년하고 결혼할 거야!”타라를 넘겨받은 질리는 지체없이 타 라의상실로 갔다. 마침 캐시와 사라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 지금부터 내가 여기의 주인이야. 제이크가 선물로 줬어.”캐시와 사라는 서로 멍하니 바라 보았다. 누구도 질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실례하겠어요.”캐시가 재빨리 돌아 섰다. “어디 가는 거야?”“사표 쓰러요. 해고시키는 기쁨을 당신에게 주진 않 겠어요.”이번에는 사라가 가지고 있던 타라의 열쇠를 질리에게 건제주었다. 질 리는 받지 않으려 했다. “넌 있어 줘, 사라. 감옥에서 나왔을 때 날 반긴 건 너 뿐이었어.”“이젠 됐어요. 여기서 엄마의 수고가 물거품이 되는 걸 보느니……. ”“아냐. 난 아무것도 안 바꿔. 타라는 승리자야. 그 정도는아니까 있어 줘.”질 리는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사라를 붙잡았다. “싫어요. 하지만 타라를 제대로 운영하고 싶으면 캐시를 붙들어요.”결국 캐시와 사라는 타라에 남게 되었다. 하 지만 질 리가 마음을 완전히 바꾼 것은 아니다. 그녀는 제시카에 대한 복수를 위해 쉬지않고 방법을 강구했다. 캐시가 데니스를 좋아하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서 복수할 작정이었다. 그녀가 노리는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제시카가 새로 맞춘 의상을 찾기 위해 타라에 왔을 때 데니스도 동행했다. 그들은 별다른 감정없이 서로 다정하게 대했지만 질리의 그럴 듯한 꼬임으로 캐시의 눈에는 그 렇게 보이지 않았다. “제시카를 봐, 캐시. 여자들 중에는 남자에게 교태가 많은 여자가 있지. 캐시도 그런 편이지만 제시카를 따를 수는 없어”“관심없어요, 지 리.”그렇게 말하면서도 데니스를 사랑하고 있는 캐시의 마음은 벌써 흔들리고 있었따. “여기 오자마자 데니스에게 눈독을 들였어. 하퍼가의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는 거야. 하지만 실제로는 데니스를 경멸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해.”그녀의 독설은 멈추지 않았다. “저걸 좀 봐. 교활하게 데니스를 조정하고 있어. 물론 같이 자지 못하지, 목의 흉터를 보일 수 없을 테니까. 아무리 좋아해도 그런 흉 터를 감수할 남자는 없을 거야. 옷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제시카에게 데니스 가 대신 지불해 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캐시는 이 순간 거의 이성을 잃었다. 제 시카가 진한 노랑색으로 보였다. 새로 맞춘 의상을 입고 한창 기뻐하는 제시카 에게 다가간 캐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여기 실밥이 풀렸네…….”말과 동시 에 캐시는 제시카의 드레스 목부분을 확 열어제쳤다. 순간 그녀 목의 흉터가 모 두에게 흉하게 드러났고 그녀는 미친 듯이 소리치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런 못된 것!” 사라도 깜짝 놀라는 사이 데니스가 뒤따라 나갔지만 제시카는 이미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 “제시카! 괜찮아!”원래 마음이 모질지 못한 캐시는 곧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쳤다. “그러면 안 되는 건데…….”“물론 잘못했지. 하 지만 넌 데니스를 좋아하잖아? 그를 원하지?”질리는 사악한 뱀의 혀를 계속 놀 려댔다. “이젠 날 미워할 거예요.”“데니스 같은 남자는 조종하기에 달렸어.” “당신 같아지고 싶지 않아요.”“착하게만 굴면 제시카 같은 애 때문에 손해만 보게 돼 있어. 나한테 조금만 배우면 승자가 될 수 있어. 생각해 봐. 네가 강해 지면 우리 우정의 시발점이 될 수 있어.”제시카를 뒤따르던 데니스는 곧장 호 텔로 돌아가 댄에게 그 사실을 털어 놓았다. “내 잘못도 커요. 그 흉터를 보고 놀라는게 아닌데…….”“이해할 수 없어. 제시카가 싫어하는데 캐시가 왜 그랬 을까?”“저지른 사람은 캐시지만 분명히 질리가 뒤에서 충동질했을 거예요.” 그때 사라가 호텔에 돌아왔다. “댄…….”그녀는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 다. “왜 그래. 사라? 무슨 일이지?”“말씀하신 대로 의사에게 갔었어요. 소화 불량인 줄 알았더니…….”“그런데?”“제 임신했어요…….”“뭐?”댄과 데니 스가 동시에 소리쳤다. “톰의 애예요. 이제 전 어떡하면 좋아요?”그녀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고 댄과 데니스는 커다란 충격에 한동안 할 말을 잊었다. 스테파 니에 이어 또 하나의 암울한 문제가 하퍼가문에 생긴 것이다. 무인도에서 지내 는 스테파니는 예전의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물에 두 발을 담그고 앉아 팔을 걷어부친 채 빨래하고 있는 모습은 보기에도 비참했다. 호주 제일의 그룹을 경 영하던 그녀의 명예와 영광은 시체없는 장례식을 치룸으로 땅 속에 묻혀버린 듯 소박한 생활을 했다. 물가로 다가간 데이브는 준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 다. 때마침 가까운 숲에서 총성이 들려와서 그녀는 허리를 폈다.“무슨 소리죠? ”“네 친구지. 아침거리를 잡아오라고 보냈어.”“총으로요? 그래도 될까요?” “애생동물이 그를 가지고 놀겠지. 피해는 없을 테고.”“없겠지, 스스로에게 밖 에는”그때 데이브는 스테파니가 빨고 있던 옷을 보며 깜짝 놀랐다. “그건 내 옷이잖아.”“그래요. 빨아야겠던대요.”“내 빨래는 내가 해. ㅎ아상 하던 일이 니까. 빨래할 사람이 필요해도 너에게 시키진 않아.”“나도 밥값은 하고 싶다구 요.”“좋아. 그럼 나와 함께 시내로 가서 생필룸을 사도록 하지.”데이브는 계 속 피하려는 그녀를 바깥 세상으로 끌어낼 작정이었다. “아뇨, 싫어요.”“왜 지?”“그냥 싫어요.”“뭐가 무서워서 그래?”“전부 다요. 죽은 체하는 게 재 미있어졌어요.”“넌 할 말이 많아. 오늘은 시내에 안 나가도 되지만 언젠간 나 가서 모든 걸 정리해야 될 거야.”“날 내쫓는 거예요?”“그럴 수밖에 없다면. ”스테파니는 데이브 노인의 말에 문득 긴장했다. 겉으로는 그렇게 말하지만 시 드니의 모든 것을 한시도잊은 적이 없었다. 가족과 친지 그리고 하퍼사와 제이 크, 특히 질리에 대한 그녀의 증오심을 시간이 갈수록 응어리가 더욱 커졌다. 데 이브와 시내에 갔을 때 스테파니는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브 가 신선한 음식을 가져올 거예요. 훈제연어나 캐비아를 놓치지 말라구요. 존노는 몹시 불만스서워 보였다. ”여기가 싫으세요?”“지옥보다는 훨씬 났겠지. 우린 해야될 일이 있잖소.”“죽은 척하는 데 동의한 건 시간을 벌기 위해서예요. 하 지만 당신은 그 터무니없는 계획에 동의한 건 아녜요.”존노는 끈질기게 스테파 니의 재기를 권하면서 나름대로의 계획까지 짜놓고 있었다. “터무니없다니, 그 보다 더 완벽한 계획은 있을 수 없을 거요.”“그건 주위 사람들을 아프게만 만 들거예요.”“그렇다고 남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지 않소.”“당신이 여기에 있어야만 할 이유는 없어요.”“그렇다면 가겠소. 당신이 결심하면 돌아 오겠지만, 지금은 시드니에 가봐야 하오.”“양복을 맞출 건가요, 아니면 주식 때문에?”“아뇨. 당신이 모르는 아들이 하나 있소.”스테파니는 이해할 수 없다 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말 하지 않았잖아요?”“미리 얘기했어야 되는데 충격이 너무 심한 것 같아서…….”“당신의 아들이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죠?”존노는 잠깐 침묵하며 시선을 돌렸다. 스테파니는 촉각을 세웠다. 심상치 않은 예감이 그녀를 휘감았다. “톰 맥매스터는 당신 아들이 아니오.”그녀는 차 마 묻지 못했다. “내 아들이오.”놀림당하는 듯한 충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테파니는 멍청해졌다. 고민하던 사라의 모습과 반향적이던 톰 그리고 빌리와 리나의 모습 등 어수선하게 뇌리를 스쳤다. 이윽고 그녀는 중병을 앓고난 사람 처럼 기력없이 존노를 바라보았다. “톰이 아니라면 어딘가에 내 아들이 살고 있겠군요…….”“그것도 밝혀내고 싶소?”“언제든 해야겠죠.”“한 번에 한 가 지씩만 합시다.”“사라에게는 더없이 좋은 소식이 되겠군요.”“톰이 벌써 말했 을 거요. 그가 알고 있으니까.”“그래야겠죠, 물론.”이들은 톰의 사고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시드니로 몰래 가서 확인해 봅시다.”“그보다 내 아들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아뇨. 하지만 원한다면 찾아 줄 수 있소.”그때 스테파니에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톰이 내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빨리 아말에게 알 려야겠어요.”“당신의 아라비아 왕은 당신이 살아있는 것조차 모르잖소.”“가 만히 있을 수 없어요. 아말, 톰, 사라, 데니스…정말 못할짓이에요.” 그녀는 처 음으로 다시 돌아갈 뜻을 비쳤다. “성급하게 결정하지 말아요. 우선 알아볼 테 니 그 다음 결정해요.”“한 가지만요, 이런 일에 당신은 어떤 이익이 있죠?”“ 글쎄…….”존노는 갑자기 뒤숭숭해진 듯이 중얼거렸다. “당신은 돈도 없대고 침대로 데려갈 가능성도 없고……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소. 그러니 나랑 시드니 로 가는게 어떻소?”“아직은 아녜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존노는 스 테파니의 표정에서 분명한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녀에겐 언제나 강한 의지 가 내재되어 있었으나 이때만큼 강렬한 빛을 발한 적도 드물 것이다. 하지만 그 녀가 사망한 것으로 인정된 시드니에서는 제이크와 질리의 심상치 않은 관계가 전과 다름없이 계속 유지됐다. 제시카는 드디어 댄에게 성형수술을 ㅂ게 되었는 데 수술 전 마취과정에서 뜻밖의 헛소리를 했다. “댄, 댄, 당신을 원해요!”평소 제시카의 가슴 속에 숨어있던 잠재의식이 분명했다. 아직 어리지만 성숙한 그녀 는 댄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테파니가 그랬듯이 이번에는 제시카가 자신 을 흉터를 성형해 주는 댄에게 사랑을 느꼈다. 제이크는 지릴에게서 우선 올리 브를 떼어놓을 작정이었다. 질리를 에덴으로 데려가 한껏 몸달게 만든 다음 차 갑게 돌아서곤 했다. “올리브 때문에 거시겠다는 거예요?”질리는 안타깝게 그 의 가슴에 매달렸다. “그렇소. 난 정말 그녀에게 등도 보이고 싶지 않소. 그녀 가 주의를 서성거릴 때 내가 어떻게 바지를 벗을 수 있겠소?”질리는 풀이 죽었 다. “쫓아내기가 쉽지 않아요.”“당신 하기에 달렸지, 내일 봅시다.”“당신을 붙잡을 방법이 전혀 없는 건가요?”이날 만큼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붙잡고 싶은 질리였다. 요즘들어 한동안 그녀는 혼자서 지냈다. 그녀의 본능은 제이크의 남성을 애타게 갈망했다. “잘 자요, 질리.”끝내 제이크가 가버리자 애먼 올리 브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올리브, 당신 우리 주위를 어슬렁대지 마!”올리브는 그녀대로 질리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샌더스에게 완전히 빠졌더군.”“그래 서 열쇠구멍으로 엿들었어?”“넌 보호가 필요해, 특히 샌더스에 대해서는.”“ 너의 진술서에는 샌더스가 시켜서 사고를 조작했다고 ㅆ어. 그거면 너와 샌더스 로부터의 보호막은 충분해.”“무슨 뜻이야?”“살인은 시도했댔잖아. 그걸 기억 하라고. 난 이제 네가 필요없고 넌 진술서가 경찰에 넘어가면 안 돼.”“날 다시 감옥으로 보낼 생각이군. 그렇다면 너도 함께 가야해.”“그래?”이해관계로 만 난 두 여자는 더 이상 서로가 필요없는 존재가 되자 날카로운 대립을 보였다. “이젠 너의 더러운 수법도 끝난 줄 알았는데? 너한테 있으라고 하자 그때부터 뱀이 나오다니 이상하잖아?”“날 의심하는 거야?”“네 짓인 걸 알아. 조심하 라구.”그녀의 경고에 대해 올리브의 가느다란 실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그녀가 어떡하든 쉽게 물러날 올리브는 아니었다. 게다가 어떤 끔찍한 보복울 행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악행에 관한한 두 여자는 바늘과 실이었다. 사라는 조용히 누 워있는 병실의 톰 곁에 않아있었다. “당신이 빨리 나았으면 좋겠어요, 톰. 어떡 하면 좋아요.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는데…….”그때 안젤로가 찾아왔다. “안젤 로, 여긴 웬일이여?”“해답을 찾고 있어.”그 역시 고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 하고 있었다. “너도 그래? 다음엔 인생의 의미를 찾겠구나.”“너랑 결혼하고 싶어. 승낙할 때까지 계속 청혼하겠어.”“그럴 수 없어.”사라는 고개를 저었다. “왜? 널 사랑해, 사라.”“미래가 없어.”“왜 없어, 톰 때문에?”“맞았어. 그 리고 그의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야.”안젤로는 병실을 나가는 사라의 뒤를 재빨 리 따랐다. 그는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미래까지 보장할 수 없지만 현재는 사 라에 대한 사랑으로 출렁였다. “가족 외에는 아무도 내 아이가 아닌 줄 모를 거야. 조산했다고 말하면 돼.”“냉정하게 생각해 봤어? 정말 자신있어?”“널 사랑해. 같이 있고 싶어, 언제나. 네가 평생 후회할 일을 하는 걸 묵인할 수 없 어.”사라는 태아를 유산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네 친자식이 아닌데도?” “내 자식이 될 거야.”안젤로는 단호히 말했다. “난 아직 톰을 사랑하는데?… …”“승낙만 해.”“안젤로, 너한텐 정말 부당한 일이야.”“난 내가 우너하는 모든 걸 얻는 거야. 제발 결혼해 줘, 사라!”그 문제에 대해 사라도 끊임없이 고 민했다. 절망에 빠진 그녀에게 그런 점에서 안젤로는 유일한 구원의 손길이었다. 톰은 오빠일 수밖에 없었고 안젤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나약 해질대로 나약해진 사라는 더 이상 그의 애틋한 청혼을 거절할 수 없었다. 모든 사실들로부터 도망쳐 안젤로의 뒤에 숨고 싶어졌따. 안젤로라면 어느 정도 보호 받을 수 있고 그러다 보면 현재보다는 훨씬 나아질 수 있다는 생각에 희망을 걸 었다. 마침내 결혼을 받아들였을 때 안젤로는 세상을 모두 얻은 듯이 껑충껑충 뛰어오르며 고함쳤다. 제시카에게도 기쁨이 찾아왔다. 댄은 절말에 빠져있던 또 한 여자를 구해 준 셈이다. 제시카는 간호원을 통해 듣게 된 마취상태 때의 일 을 댄에게 사과했지만 그녀의 가슴 속에는 댄에 대한 애절한 사랑이 이미 떼어 낼 수 없을 만큼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의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병원에 찾아온 질리는 그녀에게 다시 에덴으로 와 줄 것을 부탁했지만 제시카는 거절했다. “ 외로운가요? 그런 거예요? 그렇다면 불쌍도 하셔라…….”질리에게 제시카는 확 실히 멋대로 다룰 수 없는 상대였다. 그녀로 인해 어릴 때 입은 상처 때문에 성 숙한 처녀가 되어서도 그때의 앙금을 씻어버리지 못하는 제시카였다. 한편 스테 파니의 죽음에 대해 제이크는 의문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는 데니스에게 분명 히 말했다. “스테파니는 자살이나 하기엔 너무 강한 여자야. 보통 사람이라면 가능해도 그녀는 아니지.”“요점이 뭐죠?”데니스는 제이크의 속셈을 꿰뚫어 보려는 듯이 노려보았다. “죽지 않았을지도 몰라. 연막인 거지. 계획의 일부분 으로 흥미로운 생각 아닌가?”“저도 자살은 납득이 안 가지만 죽은 척한다고는 믿지 않아요.”“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어.”“습관적인일 수는 없지만 희망사항 이기는 합니다.”“가능하지.”“하지만 틀렸어요. 고의적이든 아니든 엄마는 물 에 빠져 돌아가신 거라구요.”“그럴까?”제이크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데니스 역시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점에서든 자살한 정도로 의지가 약한 어머니는 아니였다. 제이크의 느닷없는 의문은 데니스에게 새로운 활력소 를 제공해 주었다. 혼자서만 가지고있던 가능성을 더욱 확대시켜 생각하게 되었 고 그는 지체없이 모종의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에 이르었다. 데니스는 캐시를 다시 끌어들였다. 그녀가 전날 제시카에게 했던 짓을 이해해 주었따. 더 큰 계획 에 캐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디 둘이 뭉치면 뭔가 할 수 있을 거야.”그들 은 사실상 제이크에게 똑같이 억압받는 입장이었다. “무슨 뜻이에요?”“확실 하진 않지만 당신의 컴퓨터 실력이면 뭐든 할 수 있어.”“그것 대문에 나에게 잘 해주는 건 아니겠죠?”기뻐하던 캐시의 시선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물 론 아니지. 오늘 밤 저녁이라도 같이 할까? 사업 얘긴 안 하기로 약속하지.”“ 좋아요.”캐시는 비로소 데니스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햇다. 캐시와 헤어져 복도를 걷던 데니스는 뜻밖에 사라를 만났다. “사라, 적 의 심장부에서 뭘 하는 거야?”사라는 얼른 데니스를 조용한 곳으로 이끌엇다. “왜 그런 짓을 했지? 부인할 생각은 마. 라디오에서 떠들어 대는 걸 들었어.” “미안, 사라. 얘기할까 했지만 거절할 게 뻔해서야.”“우리가 조용히 결혼하려 는 건 알잖아. 엄마도 안 계신데 광고해서 얻을 게 뭐 있어?”데니스는 계획상 쉬쉬하며 추진하는 사라와 안젤로의 결혼을 매스컴이 떠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엄마 때문에 그랬어”“뭐?”사라는 데니스의 계획을 눈치채지 못했다. “댄, 너 모두가 엄마를 포기했어. 제이크만 빼고 말야.”“엄마는 돌아가셨어.”“시 신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확신해. 어딘가 살아계신다면 어떡하겠니?”“ 엄마가 왜 그런 짓을?”“몰라. 이유가 있겠지. 나올 계획도 없이 바다로 걸 어들어가셨다고는 믿을 수 없어.”“그건 나도 마찬가지로 생각해. 하지만 왜 우리에게도 말하지 않으시는 거지?”데니스는 자신의 생각을 비로소 털어 놓앗따. “외동딸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으시면 오실 것 같아서야. 알아?”“정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사라 역시 어머니의 죽음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절망한 그녀였다. “가능성은 희박해, 만일 살아계시다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실거야. 우리만이라도 그렇게 생각해야지.”“틀릴 경우를 생각해서 너무 기대하지 마.” 사라는 데니스를 위로하면서도 데니스와 같은 기대를 갖기 시작했다. 질리는 항상 어디서나 예고없이 불쑥 나타나곤 했다. 데니스와 헤어져 나오던 사라는 그녀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방금 라디오에서 소식 들었어. 축하해, 사라.”그녀느 전과 다름없이 대하고 있었지만 스테파니의 죽음이 그녀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실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철면피 같은 질리는 가장 친절하고 다정한 이모처럼 굴었다. 그녀는 사라와 안젤로의 결혼장소로 에덴을 제공하겠다고까지 했다.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널 돕게 해 줘, 사라. 난 항상 널 좋아했어.”“댄과 상의해서 연락하죠.”그녀와 헤어져 엘리베어터로 향하는 사라의 가슴 속에서 분노와 증오의 불길이 타올랐다. 그럼에도 드러내놓고 응징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제4부 1. 빙산의 일각 데니스의 계획은 적중했다.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 시내에 다녀온 데이브에 의해서였다. 그대 존노는 스테파니에게 메모를 남긴 채 잠시 섬을 떠나고 없었 다. 데이브가 없는 동안 스테파니는 그가 하던 돌깨는 일을 했다. 그 지역 일대 에는‘오팔’이라고 불리는 보석이 많이 있었다. 오팔은 단백석으로, 결정이 아 닌 덩어리 또는 종모양으로 산출되는 함수 규산의 교상질 광물을 말한다. “잘 하는군.”돌아온 데이브가 스테파니의 솜시를 칭찬했다. “노력하는 거예요.”“ 금방 날 따라잡겠어.”“능숙한 오팔 광부가 될 수 있겠어요?”“그럴 수는 있 겠지만 그래선 안 돼.”“왜요?”“넌 그보다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니 까.”언제나 그렇듯이 데이브의 이야기는 항상 원점으로 돌아갔다. “하느님한테 라도 물어보셨어요?”“누군가 너를 다시 현실로 돌아가게 만들어야만 해.”“ 여긴 현실이 아닌가요, 뭐. 당신은 정말 좋은 분이시지만 어떤때는 정말 마음이 아파요.” 주글골이 깊은 데이브의 얼굴에 수심이 어렸다. 스테파니를 볼때마다 그녀의 처지를 생각하며 그렇게 수심에 싸이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만의 십자 가는 있는 법이지.”“내가 왜 돌아가야 되는지 얘기해 주세요. 그리운 것도 없 는데요.”“너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그렇지만 나를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없어요.”그녀는 댄과 질리의 침실 광경을 다시 연상하며 말했다. “그렇겠지. 하지만 사라의 결혼식 때는 네가 필요할 게야.”“네에?”그녀는 깜 작 놀랐다. “라디오에서 끝부분만 들었어. 넌 죽은 걸로 알려져 있는데도 여전 히 뉴스거리더군.”스테파니는 마음의 격동을 간신히 억제하며 조용히 말했다. “톰은 우물쭈물 하는 사람이 아니니 잘 한 거예요.”그녀는 사라의 결혼상대를 당연히 톰으로 알고 있었다. 전 같으면 펄쩍 뛸 듯이 놀랐겠지만, 톰이 존노의 아들임을 알게된 지금은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톰이 누구의 아들이건 서 로 사랑했고 톰 정도의 능력있는 청년이면 만족했다. 오팔광산에서 오두막까지 는 보트를 타고 가야했다. 데이브는 스테파니를 보트에 태우고 가면서 다시 말 했다. “쉽지 않지?”“…….”“모두 잊고 접어둘 수 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어느 순간이 되면 모든 것이 떠올라 머리가 혼란스럽겠지.”“전부 아시는군요. ”그녀는 데이브의 말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네 생각을 알기 위해서는 독심술 도 필요없어.” 그때였다. 보트를 운전하던 데이브는 느닷없이 전방에 나타난 물 체를 급히 피하려다 순식간에 전복되었다. 급기야 두 사람은 물속에 빠지고 데 이브는 다리에 심한 상처까지 입었다. 스테파니는 수영에는 자신있었기 때문에 데이브를 이끌고 무사히 건너편 물으로 기어오를 수 있었다. “착하군. 이젠 괜 찮아.” 강한 의지력에도 데이브는 이미 너무 늙어 있었다. “어디 한번 볼까요? 세상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쇠붙이에 찍혔는지 쩍 갈라진 상처가 나 있었다. “심한가?”“꽤 깊어요, 출혈도 심하고.” 그녀는 자신의 옷을 찢어 허벅지 상 처에 단단히 묶어 출혈부터 막았다. “오두막이 어딨죠. 의사에게 무전 연락해야 겠는데?”데이브는 난색을 표명했다. “배를 타고 가야하는데…….” “어떻게 요?”“저기 있잖아.” 데이브는 물 건너편에 처박혀 잇는 보트를 가리켰다. 다 행히 보트는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저기까지 헤엄쳐 건녀야 해. 육로를돌아 서 오두마까지 갈 수는 없을 게야.” 스테파니는 난감해ㅈ다. 그녀의 앞에는 악 어가 득실거리는 호수가 가로막고 있었다. 헤엄쳐 건너기 위해서는 몇 마리의 악어와 싸워야 될지 알 수 없었다. 더구나 악어라면 이성으로 제어키 힘든 공포 를 느꼈다. 데이브는 그녀의 표정을 흘깃 살핀 다음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좋 아, 내가 가지. 악어도 이 늙은이를 잡아먹진 않을 게야.” 그는 실제로 물에 들 어가려 했다. 순간 스테파니가 분연히 일어섰다. “아녜요. 당신은 안 돼요. 제가 가겠어요.”“좋아. 조심해라. 너라면 할 수 있어.”“붕대나 꼭 매고 계세요.” 그녀는 얼음장처럼 굳어진 표정인 채 물에 들어섰다. 수영으로는 그 정도 거리 를 몇 번이라도 왕복할 수 있었다. 문제는 언제 어디서 공격해올지 모르는 악어 의커다란 입이었다. 더구나 데이브는 총도 갖고 있지 않았다. 무사히 데이브를 오두막에 데려갈 때까지 스테파니는 초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자신을 진정시킬 겨를도 없이 데이브의 상처부터 치로했다. 구급약으로 소독한 다음 피부점막이 손상되기 전 에 실로 정성껏 꿰맸다. 마취도 하지 않은 맨살을 꿰매다보니 데이브는 혼절을 여러 차례 거듭했다. “좋아요. 금방 끝낼께요.”“이런 일을 너한테 시킬 순 없 어, 타라.”“원래 바느질을 여자가 하는 거예요.”“이제 두 바늘만 더 꿰매면 돼.” 외과의사는 커녕 수련의도 아닌 그녀는 용기와 신념만으로 불가능한 일을 하는 중이었다. “좋아요, 단 데 보고 계세요.”“왜?”“그냥 날 보지 마세요.” 스테파니는 상처를 다 꿰맨 다음 상처에 다시 술을 부었다. 데이브는 고통을 참 기 위해 농담을 기껄였다. “아깝군, 그건 진짜 술인데.”“존노가 술값이나 내 갰어요. 어디? 이 정도면 의사가 올 때까지 괜찮을 거예요.”“의사는 필요없겠 군. 의사가 할 일을 다 해버렸으니.”“다른 사람 의견도듣고 싶어요. 이젠 수저 도 저을 수 없을 정도로 진한 커리를 타올께요.” 그때 데이브가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 “타라.”“네?”“알아 둬야할 게 있어. 사실 이 강에는 악어가 원 래부터 없어!”“이런 엉터리!……”스테파니는 기가 막혔다. “그래도 들어갔잖 아.”“그건…….”데이브는 스테파니의 다음 말을 가로 막았다. “그래야 했기 때문이지. 바로 그거야. 그런 식이라면 넌 못 할 일이 없어, 알겠니?” 데이브는 이번 사고로 스테파니의 강한 의지력을 다시 확인했다. 그 의지력을 재기의 용 기에 접목시키는 일만 남아 있는 것이다. 이튿날 아침. 연락받고 찾아온 의사는 스테파니의 응급처치에 감탄했다. “이상 일 쉬신 다음 통원치료를 하면 되겠습 니다.”“아니, 지금 당장 입원시켜 주게.” 의사는 깜짝 놀랐다. “병원이라면 죽기보다 싫어하시더니 달라지셨군요?”“믿을 수 없단 말이오?”“더구나 간호 해 줄 아름다운 여인까지 있지 않습니까?” 스테파니를 두고 하는 말이엇따. “ 내가 여기에 없으면 그녀는 여기 있을 구실이 없어지오.”데이브는 이번 기회에 스테파니를 무인도에서 내보낼 작정이었다. 그냥 두면 좀처럼 시드니로 돌아갈 것 같지않았다. 그렇게 되면 그녀가 마땅히 해야될 일을 계속 피할 것이 분명하 기 때문이다. 제시카의 수술경과는 댄도 만족할 정도였다. 그녀는 이제 하퍼의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사라와 안젤로의 결혼식 준비가 한창 진행 중일 때 모두 를 의아하게 만들 일이 있었다. 결혼장소를 에덴으로 해 주겠다던 질리는 사라 의 확답을 듣기도 전에 결정해버렸다. 청첩장을 받아든 사람들은 모두 깜작 놀 랐다. “에덴에서 결혼식을 하겠다고?” 댄도 탐탁치 않아 했다. 에덴은 이제 하 퍼가문에게 더 이상의 낙원이 아닌 악마의 근거지와 다를 바 없었다. “질리가 권하기에……내가 좋아할 거라고 지레 짐작했군요.”“지금 전화해서 취소시켜 야겠어.”“잠깐만요.”“설마 받아들이려는 건 아니겠지?”데니스도 강한 의문 을 나타냈다. 하지만 사라는 자신의 진심을 조용히 설명했다. “엄마도 원하실 거예요. 나도 늘 에덴에서 꼭 결혼하고 싶었고…….”“네가 그러고 싶다면……. ”댄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또 어떤 속셈이 숨겨졌는지 알 수 없지만 질리의 게획은 일단 성공했다. 에덴에서는 질리와 올리브의 반목 이 첨예하게 날이 선 가운데 다시 제이크의 폭탄 같은 선언이 있었다. “와서 같이 샴페인이나 들어요.” 질리는 여러 가지로 울적하여 술을 마시던 참이었다. “우리 둘 중 하나는 나가야 되지 않을까?” 제이크는 곁에서 경계의 눈초리를 번뜩이는 올리브를 겨냥해 말했다. “여기서 시작해서 끝내도 상관없어요. 고마 워, 올리브. 필요하면 부를게.” 질리는 어느 때보다 부드럽게 올리브를 내보냈 다. “아직 있는 거야?”제이크는 나간 올리브를 다시 떠올렸다. “그만 좀 해요 ” “오늘 어침 이게 배달됐더군.”그는 청첩장을 내보엿따. “여기서 결혼식을 하게 하다니 우아하시군. 속셈이 뭐지?”“그런 건 없어요. 난 사라를 좋아해요. 가족인 걸요. 피는 물보다 진하잖아요.”“당신도 약해지고 있군. 누구나 결국에 는 그런 법이지. 제안이 하나 있는데……지금의 달콤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거야. ”“흥미롭게 들리는데요?”질리는 조롱당하기 싫다는 듯이 샴페인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지리는 마시던 샴페인이 목에 걸린 듯 갑자기 기침을 해댔다. “미안 해,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질리는 어리둥절해졌따. “농담을 하려 면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려야죠. 농담이었죠?”질리는 빌붙듯이 제이크를 바라보 았다. 제이크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아니. ”“장난이 너무 심하군요.” 시드니의 질리 스튜어트도 이때만큼은 수줍고 겁 에 질린 소녀같은 표정이엇다. 제이크는 기다렸다는 듯이 강하게 밀어붙였다. “ 장난이 아냐, 질리. 나하고 결혼해 줘.”순간 질리는 딱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 했다. 두 눈은 황홀한 꿈에 잠긴 듯이 몽롱해졌다. 교활하고 잔인할 정도로 냉혹 한 그녀도 사랑에 굴복당하고 있었다. 스테파니는 무인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병원까지 나오게 한 데이브의 목적은 휠체어나 밀어주는 간병인을 원했 던 건 아니었다. “데이브, 지금 돌아간다는 게 정말 어려워요.” 그녀가 넌즈시 데이브의 심중을 간파했음을 표명했따. “넌 견딜 수 있어. 제일 먼저 뭘 할지도 결정했어?”“아뇨. 아직 존노의 게획에 확신이 없어요.”톰의 친아버지인 존노 는 계획을 세워 먼저 시드니에 가 있었다. “이게 필요할 거야. 싫다고 하지 마, 네가 번 거니까.”그가 내준 작은 주머니에는 상당량의 오팔이 들어었었다. “이 러시면 안 돼요. 두 번씩이나 은혜를 입을 수는…….”“말도 안 돼.” 스테파니 는 더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럼 빌린 거예요, 네?”“ 좋아, 빌려주는 걸로 하지. 그리고 이것도.” 그는 또 다른 허름한 종이를 건네 주었다. “이게 뭐예요?”“필요하면 담보로 사용해. 신이 창조한 최악의 50만 에이커 땅문서야.” 그 땅문서는 데이브가 평생 동안 개간하고 지켜온 것이었다. 오팔과 함께 그의 한 평생이 고스란히 간직된 것이었다. “안 돼요, 데이브.”“ 어서 가져가, 도움이 될 테니까. 우물쭈물 하지 말고.” 스테파니는 가슴 속에서 작고 깊은 파문을 느꼈다. 순순한 정을 그만큼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 에 흔하지 않았다. 데이브의 마음은 티글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가증 인간적인 것이어서 숭고하기조차 했다. “데이브, 신세를 너무 많이 졌어요. 날 등지에서 내쫓으려고 일부러 병원에 입원하신 거죠?”“이제야 머리가 회전하기 시작하는 군. 그래야지. 어서 가, 타라.”“지금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요.” “타라 웰스가 부활하기는 시효가 너무 늦었어.” 스테파니는 울꺽 치미는 벅찬 감동을 감추기 위해 급히 데이브의 곁을 떠났다. 하지만 데이브의 노안은 그녀 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며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덧 스테파니는 그 의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데이브의 그와 같은 권고로 마음 을 다진 스테파니는 우선 시드니로 몰래 숨어들었다. 이미 상황을 파악한 존노 와 만나기 위해서였따. “아직 확신은 없지만 와야만 할 것 같았어요.” 존노는 그녀가 시드니에 나타났다는 사살만으로도 희망적인 결과를 점쳤다. “당신이 있든 없든…….”“톰은 만나 봤어요?”“아뇨. 아기고 있는 중이오.”“회피한 다는 게 맞겠죠.”“정확히 말하면 질리를 쫓아다니다보니 시간이 없었소.” 질 리의 말이 나오자 스테파니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내 다정한 동생은 어때 요, 댄은 있던가요?”“같이 있는 걸 보기는 했는데, 샌더스와 더 많이 있더군 요.”“질리답게 둘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모양이군요.” 그녀는 비웃었다. 그리 고 거기서 용기를 얻은 듯했다. “좋아요, 해 보겠어요. 제대로 될지 확신할 순 없지만요.”“잘 될 거요, 여기 이 사람도 보통은 넘으니까.”“그래서 걱정이에 요.”“결과가 어떻든 재미는 있겠죠.”“그보다 결과와 관계없이 분명한 건 누 군가 다치게 되는 일이죠.” 그녀의 말에는 이미 강한 투지가 깃들고 있었다. 질 리에 대한 증오심 탓임이 분명했다. “당신은 변한 게 없군요. 마음이 그렇게 여 러서 일이 이 지경이 된 겁니다.”“언제 톰에게 얘기할 거예요?”“지금 얘기 하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요. 더구나 지금쯤 톰과 사라는 결혼 때문에 정 신없을 테고…….”“만나기가 무서운 거죠?”“매일 아빠가 되는 건 아니니까. ”“매일 딸이 결혼하는 것도 아니죠. 저도 그애들 결혼식에 가고 싶어요.”“말 도 안 돼요.” 그는 펄쩍 뛰었다. 바로 그때 그는 무엇엔가 놀라면서 동시에 스 테파니의 어깨를 와락 껴안으며 키스를 퍼부었다. 얼떨결에 그와 키스한 스테파 는 어리둥절했다. “대체 뭘 하는 거예요?”“들키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 소. 질리와 샌더스가 방금 저차를 타고 지나갔소.” 그는 사라져 가는 자동차를 가리켰다.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군요. 결혼식에 가고 싶어요.”“너무 위험해 요.” 존노는 그녀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았다. 그녀의 결정을 번복시 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어떤 방법으로 그녀가 사라의 결혼식에 가도록 도와주느냐가 중요했다. 스테파니의 정체가 노출되면 그의 계 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상황의 변화에 따라 엄청난 파문을 몰고 올 수도 있는 스테파니의 결심과 함께 사라와 안젤로의 결혼식날이 왔다. 이날 사 라는 병원의 톰을 먼저 찾아갔다. 비록 톰이 자신들의 친아들이 아니었지만 빌 리와 리나는 병실을 떠나지 않았다. 죽을 대까지 그들은 톰을 아들로 여길 것이 다. 사라는 의식불명인 톰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 방법밖에 없어요, 톰. 상황이 달랐더라면…….”빌 리가 그녀의어깨를 만져주며 위로했다. “톰이 제일 먼저 너의 행복을 빌었을 거야.” 그 장소에 있는 누구도 톰이 스테파니의 아들이 아 니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러고 싶지 않았어요.”“알아. 행운을 빈다. 리 나와 난 결혼식엔 못갈 것 같구나. 그 동안의 일들을 생각하면.”“물론이에요. 이해해요, 아저씨.”사라는 다시 톰을 바라본 다음 돌아섰다. 잠시 후면 그녀는 안제로의 아내가 되는 것이다. 결혼식장은 에덴이었다. 현재 에덴의 주인인 질리 와 제이크는 매우 당정한 모습으로 나란히 있었다. “다음 결혼식은 우리가 될 거요.”“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뭘 입을까요. 검은 상복?” 질리의 꼬집는 듯 한 말을 제이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랑하오.” 제이크의 다정스런 태도는 전혀 의심할 수 없었다. 결혼식이 시작될 무렵, 톰의 병실에서 예기치 못했던 일 이 발생했다. 그 동안 한 번도 깨어나지 않았던 톰이 사라의 결혼식을 알아차리 기라도 한 듯이 돌연 의식을 회복햇다. “아버지!”“톰! 하느님, 감사합니다. 네 가 깨어났구나!”빌리는 어쩔 줄 몰라하며 누워있는 톰을 껴안았다. “사라 여기 있어요?” 톰은 허둥대며 병실을 둘러보았다. “아니.” 빌리의표정이 굳어졌다. 톰이 얼마나 사라를 사랑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나야 해요. wddy한 일 이에요. 수녀와 얘기했는데 우린 남매가 아녔어요. 사라한테 말해야 돼요. 제발 절 데려다 주세요.”톰은 울음을 터뜨릴 듯했다. 이때는 빌리도 무엇인가 장난이 아님을 직감했다. 함부로 지껄일 톰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버나데트 수녀에 대해서는 빌리도 알고 있었다. 그는 급히 전화기로 달려갔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또 다른 시간은 사라와 안젤로의 결혼식을 계속 현실화시켜갔다. 전화를 끝내고 달려온 빌리는 굉장히 흥분된 모습이었다. “사 실이구나,톰! 하지만 사라는 오늘 안젤로와 결혼식을…….” 빌리는 그 다음 말 을 잇지 못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 때까지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었따. “결혼식을 중지시켜 주세요.”“가보마.” 그는 서둘러 외 투를 걸치며 병실을 빠져나갔다. 가능하면 결혼식을 중지시키고 싶었다. 사라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는 톰이며 완벽한 커플은 그들 두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안젤로를 나쁘게는 결코 보지 않았다. 다만 사라는 톰과 결혼해야 모두 행복하 게 된다고 믿기 때문에 결혼식을 중지시키려는 것이다. 2. 태풍의 눈 “지금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사랑이 하느님 앞에 맺어지는 것을 축복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빌 리가 자동차로 도착했을 때 결혼신을 이미 시작되었다. 같은 시 간 에덴의 선착장에는 소형 보트가 조용히 와서 닿았다. 거기서 내린 이는 존노 와 망토를 걸친 노파였다. 노파로 변장하고 있는 그녀는 다름아닌 스테파니였다. 그녀는 자신이 에덴에 다시 왔다는 감회를 가슴으로 느낄 겨를도 없었다. “항 상 그에 결혼식 때 이 반지를 주겠다고 했었어요.”“그걸 어떻게 전해주겠소? 일을 전부망칠 셈이요?” 존노는 아직도 불안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멋했다. “ 믿으세요. 내 딸과 당신 아들, 우리 관계가 어떤 건지 아세요.”“내가 생각했던 관계는 아니지. 조심하세요, 할머니.” 변장한 스테파니는 주위에 눈도 돌리지 않으며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신랑과 신부가 결혼서약을 하는 중이었다. “나 사라 하퍼는 안젤로 당신을 남편으로 삼아 기쁠 때나 슬플 대나, 겅강하거나 아 플 때나 평생 같이 살 것을 맹세합니다.” 스테파니는 식장 문 밖에서 잠시 망 설엿따. 불쑥 들어갔다가 어떤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서를 하였 으므로 하느님의 축복과 가호가 함께 하실 겁니다. 그때 빌 리가 들이닥쳤다. 허 둥지둥 식장으로 들어가던 그는 문옆에 서잇는 스테파니와 하마터면 부딪칠 뻔 했다. “실례합니다.” 그는 스테파니에게 양해를 구하며 급히 삭장 안으로 들어 서다 말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하느님이 정하신 일을 인간이 풀지는 못합 니다. 신부에게 키스하시오. 안젤로.” 빌리가 들어섰을 때 이미 혼인서약이 끝 났다. 그는 허물어질 듯한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돌아서서 식장을 빠져나갔다. 스테파니 역시 비로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며 소리없이 외쳤다. “안젤로잖아! ”사라의 남편이 톰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랐던 그녀는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지금에 와서 사라의 신랑이 누구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결혼하는 사라가 증오했 다. 그리고 반지를 전해주고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는 일이 무엇보다 증오했다. 처음엔 자신있엇지만 막상 닥치고보니 난감했다. 사라에게 반지를 전해 줄 묘안 이 떠오르지 않았. 질리와 제이크가 함께 있었고 데니스와 캐시, 제시카 등이 모 여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을 소리쳐 부르며 달려가고 싶은 충동은 무 엇에도 견줄 수 없었다. 딸의 결혼을 축하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해야 되는 고충 역시 가슴저리는 것이었다. 캐시와 데니스가 베란다 쪽으로 나갈 때 질리에게 걸어가는 사라의 모습이 보였다. 저애가 정말 내 딸이던가 싶게 청초하고 아름 다운 모습에 스테파니는 잠깐 넋을 잃었다. 사라에게 주고 싶은 반지를 꼭 쥐고 잇는 스테파니는 점차 초조해졌다. 그때 댄이 하객들의 맨 앞에서 나섰다. “신 사숙녀 여러분, 음식이 맛있어 보이니 듭시다!”댄의 목소리를 들은 스테파니는 갑자기 도망치고 싶어졌다. 자신의 감정에 빠져있다간 자칫 실수를 할 수도 있 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는 생각을 바꾸었다. 뒷일은 운명에 맡기기로 하고 복 도의 한 꽃병 속에 반지를 넣은 다음 급히 식장을 빠져나갔다. “가요, 난 배고 파요.”“나도 아사 직전이야.”아침부터 들뜬 기분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 던 사라와 안젤로는 아이들처럼 속삭인 다음 주방을 향해 뛰어갔다. 서두른 나 머지 사라의 웨딩드레스 자락이 감기며 복도의꽃병 하나를 떨어뜨렸다. 꽃병이 깨지는 소리에 놀라 허리를 굽혔던 사라는 파편 조각 사이에서 놀라운 물건을 발견했다. “뭐지?”안젤로가 다가왔을 때 사라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반지 예요. 엄마 반진데?……”한눈에 누구의 반지인지 알 수 있었다. 분명히 스테파 니의 반지엿다. “어떻게 여기에 들어있지?”의문과 동시에 섬광처럼 스치는 생 각이 있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요, 알았죠?”사라는 반신반의했다. 전부 터 그곳에 반지가 들어있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스테파니는 반지를 늘 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엄마가 오셨나?’하는 느낌이 사실처럼 다가왔다. 그렇다해도 어쨌뜬 비밀에 붙이는 편이 좋겠다는 결 론을 내렸다. 무사히 선착장으로 빠져나온 스테파니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 었다. “톰이 아니에요.”“뭐라고요?”조노도 깜짝 놀랐다. “톰과 결혼하는게 아니라고요.”존노는 누구에게 발각되기 전에 보트부터 출발시켰다. 그들은 언젠 가 질 리가 제이크에게 필립의 주식증서를 넘겨 줄 때처럼 소식없이 왔다가 재 빨리 사라져갔다. 한편 병원으로 돌아온 빌리의 이야기에 톰은 절망에 빠졌다. “그 결혼을 무효화시키거나 할 수는 없나요?”“글쎄다……!”“내가 오빠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혼했을 리 없어. 미 안하다, 톰.”톰도 더 이상 어쩌지 못했다. 진정 사라를 사랑했지만 그는 지성인 이었다. 이미 끝난 결혼식이기에 안타까움은 자신의 고뇌로 남길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의 모든 일을 장담할 수 없었지만 현재로서는 단념해야만 되었다. 그는의 식이 되돌아온 것을 소리없이 원망했다. 에덴에 다녀온 스테파니는 아직 확신은 없었지만 현저하게 변해 있었다. 그래도 단념할 수 없다는 생각과 함께 내부에 서 고개 숙이고 있던 의지가 기지개를 켰다. 그녀의 곁에는 사돈이 될 뻔했던 존노가 항상 같이 있었다. 존노와 함께 페르시아로 날아갔다. 아말은 그녀를 위 해 전용기를 바그다드까지 보내주었다. 페르시아에 도착한 스테파니는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아말과 함께 특히 공주인 타리사가 그녀를 환영했다. 타리사 는 문화의 풍습이 전혀 다른데도 이질감보다는 자유스러운 스테파니를 동경하였 다. 아말은 그녀와의 상봉을 당연한 귀결처럼 생각했다. 거구나 시드니에서는 이 미 그녀의 장례식까지 치루어진 상태이다. 시드니의 스테파니 하퍼가 페르시아 에 함께 있다는 사실이 그를 전에 없이 만족시켰다. 아말은 나라를 다스리는 군 주였다. 자유분방한 민주주의 국가와 달리 왕정국가에서 아말의 존재는 절대적 인 것이다. 스테파니가 원한다면 그 나라에서 불가능이란 없엇다. 하퍼사를 통째 로 매입해서 주겠다던 아말의 제외는 절대로 허튼소리도 과장도 아니었다. 그는 충분히 그럴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승마를 즐긴 스테파니는 새로운 활력으로 넘쳐 있었다. “봤소? 당신은 여기가어울려. 다시 생기가 돌지 않소.” “공식적으로는 아니죠.”“그러니까 더욱 나와 함께 여기 잇어야 하오.”“아 말, 또 그러시는군요.” 스테파니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 니까 열아홉 살 때부터로군.” 스테파니는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그렇게 간단 한 문제가 아녜요.”“인생은 단순한 거라오. 사람들이 그걸 복잡하게 만들 뿐이 지, ‘아끼는 사람은 헤어진다.’라고 당신이 말했던가? 스테파니, 난 당신을 행 복하게 해줄 수 있소.”“이젠 진정한 행복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겠어요.” 아말 은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답게 스테파니의 마음을 헤아렸다. “한 번은 있었 지. 당신과 내가 같이 있던 때…….” 아말은 현재를 과거로 돌리고 싶어했지만 스테파니는 그렇지 않았다. 어리다고밖에 볼 수 없었던 그 시절의 소중한 추억 과 현재의 인생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때와는 모든 게 달라졌죠.”“공식적으 로는 스테파니가 없을지 몰라도 내가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는 여인은 지금 내 곁에 있소.”“저도 당신과 함께 있는 게 좋아요.”“댄이 그렇게 중요하오?”충 분히 그럴 수 있고 그 사실을 확신하면서도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에 고통을 주 는 일을 가장 두렵게 생각하는 아말이었다. “전 너무 자주 도망쳤어요.”“그들 은 나름대로의 삶을 영위하겠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말에는 비록 자유국가와 석유 문제로 왕래가 잦지만 군주로서 벗어날 수 없는 제약과 절제가 비탄처럼 잠겨있었다. 스테파니는 그를 더 이상 그런 비탄에 머물도록 하고 싶 지 않았다. “대항해서 싸우라고 격려해 준 건 당신이에요. 기억나세요?”“그건 나에게 당신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모를 때였소.”“이건 제가 해야될 일이에요. 이해해 주세요, 제발.” 아말은 그녀가 상대한 어떤 사람보다도 이해심이 넓은 남자였다. “이해하오. 우린 같은 종류의 인간이지. 나같아도 싸울 거요.”“우리 의 우정은 영월할 거예요.”“난 영원히 그 이상을 원할 거요, 스테파니.” 두사 람의 언약은 어떤 것보다 중요했다. 약간 다르지만 댄과 스테파니가 했던 약속 보다 중요했다. 현실적으로 댄과의 사랑 때문에 지금처럼 되었지만 그녀의 가슴에서 아말은 영원히 사라질 수 없는 존재였다. 두 사람이 왕궁으로 돌아왔을 때 타리사 공주는 직접 차를 끓이는 성의를 보였 다. 그 나라의 풍습으로는 금기사항이었다. “물어볼 필요도 없이 승마가 즐거우 셨죠?”“정말 좋았어요.”“두 분 다 생기가 넘쳐서 인생을 즐기시는 분들 같 아요.” 사실 아말은 여전히 마흔의 왕자였다. 다만 어버지인 왕이 늙어 더 이상 나라를 다스릴 수 없어 아말이 전면에 나서 실질적으로 왕권을 행사했다. “내 동생은 당신이 가족으로 있게 되길 바라는 거라오.” 그 말에 타라사가 급히 변 명을 늘어놓았다. “아말, 우리 둘 다 당황하잖아오.” 그녀의 말은 아말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아말과 함께 타리사도스테파니가 같은 왕궁으로 가족으로 지내기를 원했던 것이다. “타리사, 시녀를 시키지 않고서?” 그녀는 공주가 직 접 쟁반을 들고 다니는 것을 지적했다. “왜요, 스테파니가 할 때는 가만히 잇으 시면서?”“그건 달라. 그녀의 관습은 우리하고다르니까.”“그 편이 나은 것 같 아요. 스테파니, 당신이 온 후로 저는 훨씬 편해졌어요.” 스테파니는 새삼 관습 이 다른 국가와의 웃지 못할 차이를 절감했다. “제가 관습을 어기고 있나요?” “그래요. 감사한 일이죠.”“그럼 우리 나라에 한 번 오세요, 타라사.”“갈 수 있으면요. 하지만 오빠가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이때 스테파니는 또 다 른 계획을 머리 속에 그렸다. 그녀는 아말과 함께 타리사도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들은 자신이 따를 수 없는 순수함과 고귀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아말, 당 신의 축복과 함께 싸우러 나갈 거예요.”“그래요, 스테파니. 당신 혼자서 가는 건 아니오.”타리사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나는요? 이번 모험에 날 끼워주지 않겠어요?”“우리가 상대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 싶지는 않구나.” 이번만 큼은 타리사도 종전처럼 쉽게 단념하지 않았다. 그 나라의 관습으로는 생각할 수도 없는 도전이었따. “스테파니에게는 괜찬고요?” 아말의 얼굴에 곤혹스러 운 표정이 나타났다. “스테파니는 세상 사람이지, 너는 내 동생이고, 널 보호하 는 게 나의 임무다.” 타리사는 금방 수그러졌다. “감사하지 않는 게 아니고 조 금 부러워서요.” 스테파니는 남매의 우애에 크게 감동했다. “당신은 사랑하는 동생이 있으니 행복하시군요, 아말. 모두 다 그런 게 아니니까요.” 그녀는 자신 의 유일한 동생인 질리의 갖자기 모습들을 떠올렸다. 한편 시드니의 하퍼사에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회장여비서였던 힐러리를 질리가 해고시킨 후 새로 채용 된 여비서는 첫 출근한 그날 이미 제이크와 침대에 들었다. 질리와의 결혼을 앞 둔 제이크는 또 새로운 여자를 하루만에 정복했다. 의외로 여비서는 능숙했다. 상대가 회장이라는 점도 한몫했겠지만 남자를 그만큼 다루는 여자도 드물었따. 그런 점에서 질리를 능가했다. 제이크가 옷을 벗기기 시작했을 때 벌써 남성의 조루증처럼 한 차례 절정에 도달했다. 그가 한 차례 끝낼 동안 세 차례나 절정 에 도달했을 정도였다. 질리의 경우 제이크의 등을 끌어안고 손톱을 세웠지만 새로 온 여비서는 전혀 달랐다. 스스로 억제하지 못해 전신을 무섭게 경련했고 마지막 순간에는 일체의 동작을 뚝 그쳤다. 몇 초 동안 죽은 듯이 정지해 있다 가 다시 큰 진폭으로 전신을 경련하는 것이다. 공교로운 것은 그들의 격렬한 게 임이 끝난 직후 질리가 예고없이 찾아온 점이었다. “내버려 둬요, 가버리게.” 여비서는 아직 조금 전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거의 신경질직이엇다. “ 중요한 일인지도 몰라.” 제이크는 여비서의 투정에 따를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침실을 나와 현관문을 여는 순간에는 그도 적지 않게 놀랐다. “혼자서 잠이 안 와요……방해가 됐나요?”질리는 도둑고양이처럼 주위를 재빨리 살폈다. “샤워 를 하려던 참이었지.”제이크는 어수선한 옷차림을 재빨리 얼버무렸다. “혼자서 요? 그런 낭비가 있나.”“이젠 혼자 저녁을 먹지 않아도 되겠군. 솔직히 얘기하 면 굉장히 배가 고팠던 참이지.”“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뜻인가요?”방금 여비 서에거 정력을 탕진한 제이크를 알 리 없는 질리는 의미있는 눈짓을 보냈다. “ 그런 거지. 우선 마실 것 좀 만들어. 옷을 갈아입고 나올께.”“도와드릴께요.” 질리는 제이크가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제이크는 다시 한 번 속이 뜨끔했다. “옷 입히는 건 당신 특기가 아니잖아.”그는 그럴 듯하게 말하 며 침실로 들어갔다. 약삭빠른 고양이는 밤눈이 어둡다고 했다. 질리는 침실에 여비서가 잇는 줄은 상상도 못하고 거실에서 음악을 틀었다. 분위기를 한껏 돋 구고 싶은 그녀였다. 침실의 제이크는 아직 알몸인 여비서 앞에 손에 잡히는대 로 지폐를 놓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우리가 나간 다음 택시를 불러, 침대도 정 리해 주겠지?”그는 말하면서 허겁지겁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아직 자신이 적 신 시트 위에 앉아있던 여비서는 강한 패배감을 느꼈지만 어떻게도 할 수 없었 다. 상대는 회장이고 방문객은 총지배인인 질리임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이크는 서둘러 질리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들이 안젤로의 식당에 도착했 을 때 제이크가 물었다. “좋은 식당도 많은데 하필 이 집이지?”“안젤로도 이 젠 우리 가족이니까 매상 좀 올려 줘야죠.”이때 그 식당의 한쪽에서는 존노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족들에겐 당신의 인기가 별로 좋지 않을 텐데. 어 쨌든 당신은 묘한 여자야.”“그런데 왜 결혼하고 싶어하죠?”“에덴에서 살고 싶어서.”질리는 제이크의 자연스러운 화제전환에 끌러들었다. “그래서 스테파 니에게 끌렸었나요. 에덴에서 살려고?”“옛날 일이야.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런 일이 정말 있었는지 의심스러워.”“그렇게도 뜨겁게 달아있었는데?”“나도 같 은 생각이었어.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 스테파니는 내가 원하는 모든 걸 가졌었 어. 관능적이고 부자엿지. 그렇다고 결혼하고 싶은 상대는 아니었어.”고무줄처 럼 늘이고 혹은 줄이는 제이크의 화술에 약삭빠른 질리도 꼼짝없이 넘어갔다. “감쪽같이 속았었어요.”“나도 속았는 걸. 내가 정말 스테파니와 결혼한 생각 이었다면 누구도 막지 못했을 거야.”“맞아요,그랬을 거예요. 우린 진짜 어울리 는 파트너예요. 맞죠?”“우린 같은 종류의 인간이니까. 우린 서로에게 속해 있 어. 축배할까?”지리는 어느 때보다 흡족해진 마음으로 잔을 들었다. 그녀는 제 이크의 입가에 나타난 미소를 그녀 편할대로 해석했다. 페르시아 왕궁에 머물고 있는 스테파니는 아말보다 더 적극적인 협조자를 확보했다. 자신의 재기에 단연 활력소가 되엇다. 타리사였다. 스테파니와 타리사는 앞으로의 위험한 계획에 합 의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들은 아말은 펄쩍 뛰었다. “정말 터무니없는 생각이 오!”“그렇지만 성공할 거예요.”타리사였다. “안돼!”그는 스테파니나 타리사 앞에서 그렇게 화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스테파니도 진지하 게 거들었다. “훌륭한 계획이에요, 아말.”“당신과 내 동생이 꾸민 거니까 그 렇겠지. 많은 여자들처럼 당신이 남자들보다 똑똑하다고 믿겠지.”“사실이에요, 오빠. 이점도 굉장히 많아요.”“그래, 스테파니도 같은 생각이오?”“타리사가 옳아요. 그 계획대로 하면 성공률이 두 배나 돼요.”“스테파니, 위험 부담을 생 각해 보시오.”“그런 일로 주저하신 적이 있으셨던가요?”“당신과 내 동생 때 문에 하는 말이오. 둘 다 내 책임이란 말이오. 그리고 내 동생은 이번 일과 전혀 관계없소.”아말의 반대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조금 황당하시겠지만 생각해 보면 좋은 계획이라는 걸 아시게 될 거예요.”두 여자 모두 아말에겐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글쎄……가능성은 있소?¨…타리사는 최소한도만 참여시킬 것 을 약속하겠어요.¨…오빠, 허락해 주세요. 부탁해요.”아말은 반대해도 소요없다 는 것을 깨달았다. “거절할 방법이 없군. 좋소. 여행사에 알아봐서 내일 떠납시 다. 괜찮겠소. 스테파니?”“고마워요.”“당신들 둘 다 굉장한 여인들이오. 놀랐 소.”그의 승낙을 얻어낸 타리사는 스테파니에게 낮게 속삭였다. “당신이 이겼 어요, 스테파니.”“아직은 아니지만 그렇게 될 거예요.”그들은 손을 굳게 잡았 다. 증오했던 질 리가 자매라는 사실에 모든 악감정을 잊고 친해보려고 노력했 지만 끝내 배신당한 그녀에게 타리사는 자매 이상으로 가깝게 느껴졌다. 친구로 서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의논하고 의지하고 싶은 상대였다. 시드니에서 계획에 착수한 데니스는 타라에서 일하는 캐시를 하퍼사에 잠입시켜 컴퓨터를 조작할 작정이었다. “저도 제이크와 질 리가 망하는 걸 보고 싶어요. 하지만 위험해요. 금방 회사의회계사가 의심하게 될 테고…….”“적당한 돈만 모이면 소송을 걸 겠어. 회사를 불법으로 뺏은 거니까 반드시 되찾겠어. 시작하려면 돈이 필요해. 좀 도와줘. 캐시.”캐시는 데니스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때를 같이 해서 페르시아의 아말은 하퍼사에 정식으로 자신의 방문을 통고했다. 안톤은 그 사실을 에덴의 제이크에게 전화로 급히 알렸다. “중요한 일이 아니면 방해하지 말라달라고 했지 않나!”제이크는 질리 앞에서 짐짓 안톤을 야단쳤다. “아말 왕 자로부터 내일 오겠다는 연락이 왔네.”“사업차 방문하는 거겠지.”제이크는 담 담하게 받아들였지만 내심 긴장했다. “다른 이유라면 스테파니 하퍼밖에 없겠 지.”“최고의 고객을 잃으면 안 되니까 융숭하게 대접해야겠지.”“연락하는 태 도가 지나치게 정중하던데?”제이크는 안톤의 말뜻을 금방 알아차렸다. “예감 이 안 좋단 말이야?”“이젠 스테파니 하퍼도 없는데 왜 우리와 거래하려는지 몰라.”“뭔가 특혜를 줘야겠지, 제기랄!”제이크는 갑자기 신경질적인 말투로 내뱉었다. 아말과 스테파니의 관계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이엇다. 아말의 공식적 인 방문에는 굉장한 비밀이 담겨있었다. 스테파니와 타리사의 과감한 계획에 아 말이 전적으로 동의했다. 능력잇는 세 사람의 합작은 장차 제이크와 질리 그리 고 하퍼사에 예측할 수 없는 태풍의 눈으로 작용할 것이다. 3. 변장한 스테파니 새로 입사한 여비서는 그토록 농염함에도 사회적으로는 애송이였다. 이튿날 출근한 제이크를 본 그녀는 대뜸 반갑게 말을 걸었다. “어젯밤엔 잘 들어갔어 요?”“그래.”제이크는 위험있게 말해다. “제이크, 전 말이죠…….”“회사에서 는 샌더스 씨라고 불러야지.”여비서는 무척 당황했다. “어젯밤 함께 보냈는데 …….”그녀는 간밤 제이크와 침대에서 지낸 일을 상기시켰다. 하지만 그러한 태 도는 제이크가 어떤 남잔지 모르는 소치였다. 그는 차갑게 대꾸해 여비서를 꼼 짝 못하게 만들었다. “전화 받으라고 당신한테 월급 주는 거야. 일이나 착실히 하지 그래?”여비서는 멍청해진 채 찬바람을 일으키며 사무실로 들어가는 제이 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육체관계까지 가진 상대가 그렇게 냉혹하게 나올 줄 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제이크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아말의 공식적인 방문을 앞두고 그에겐 이렇다할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테파니가 사임할 때 그녀를 따른 여러 사람이 함께 회사를 그만두었다. 아말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스테파니와 가까운 사람이 필요했다. 제이크나 안톤으로서는 불가능했 다. 아말은 전적으로 스테파니 옹호자이기 때문이다. 질 리가 차지하고 있는 총 지배인 자리의 전임자인 빌리 맥매스터가 있으면 가능하지만 그도 없었다. “그 는 날 증오하네, 안톤. 유감이야. 유능한데. 자네 말이 옳아. 그가 꼭 필요해. 하 지만 어떻게?”“아들일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모양이더군.”안촌은 그 문 제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 듯했다. “무슨 뜻인가?”“지금의 상황을 알 아보는게 좋은 것 같네.”한편 성공적으로 수술이 끝난 제시카는 댄에게 적극적 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수술 전 마취상태에서 지껄인 것은 단순한 헛소리가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 속에는 댄에 대한 사랑이 벌써부터 자리잡고 있었다. 담 당의사와 환자의 관계로 그리고 친지 중에도 제법 가까운 사이인 댄과 제시카는 함께 있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왜 항상 저랑 스 테파니를 비교하죠. 우린 다른데?”대은 제시카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의아해 졌다. “그녀같이 되고 싶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사회적으로 성공했고 아름 다운 걸 얘기했던 거예요. 전 제 자신이에요. 당신도 그래요, 댄. 당신은 누구의 그림자가 아녜요.”“제시카, 난…….”제시카는 그의 다음 말을대담하게 가로막 앗다. “댄, 저도 제 마음을 할 수 없어요. 아직 괴루우신 건 알지만 행복을 포 기하는 건 견딜 수 없어요.” 댄은 비로소 제시카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현실적 으로 그녀는 딸이나 다름없이 어렸다. 비록 성인일지라도댄에 비하면 어린애였 다. 순수한 마음과 순결을 고스란히 간직한 그녀가 마음에 사랑을 품었다면 함 부로 물리칠 수도 없었다. 상처받기 쉬운 여린 가슴을 가진 처녀로부터 사랑을 고백받았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문제였다. 댄은 제시카의 마음을 분명히 들여다 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지금은 적당한 때와 장소가 아닌 것 같소.”그는 당장 이라도가슴에 안겨올 듯한 제시카를 부드럽게 거절했다. 그는 승마자의 말을 관 리하는 사람에게 특별히 부탁했다. 바로 샌더스 제이크가 스테파니에게 선물했 었던 명마‘타라의 명예’를 되돌려 주라는 것이었다. 한편 필요에 따라 어디든 신출귀몰하는 질리는 병원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번쩍이는 금속성 옷감으로 단장한 채 톰이 입원 중인 병원에 나타났다. 주위의 신선을 한 몸에 받으며 도 도하게 들아왔지만 직계가족만 면회할 수 있다는 규칙 때문에 빌리에 의해 병실 출입을 거절다했다. 또 다른 사람이 병원의 접수구에 나타난 건 그때였다. “실 례합니다. 방금 병실로 들어간 분이 빌리 맥매스터 씨입니까?”그는 다름아닌 존노였다. 사라가 톰이 아닌 안젤로와 결혼한 사실에 에상외로 초조해진 그는 병원까지 찾아들었다. “내.”“부인이 아프신가요?”“아들이에요.”“뭐라고 요?”존노는 깜짝 놀랐다. 톰이 아프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며 단순한 문제가 아 니다. 톰은 그의 친아들이기 때문이다. “교통사고였어요. 아주 심한 상태였죠.” “회복됐나요?”“네. 하지만 아직 허약한 상태예요.”“가서 보는게 좋겠군요. 몇 호실이죠?”“죄송합니다. 직계가족만 면회할 수 있어요.”“그렇군요.”그는 씁쓸했다. 그가 바로 아버지이면서도 지금은 전혀 내색할수 없다. 누구보다 먼저 톰을 만나야 할 사람이지만 현재의 그는 톰과 아무 상관없는 제삼자였다. 그가 복도에서 곰곰이 궁리하고 있을 때 병실 안의 톰과 빌리는 새로운 애정을 다졌 다. 빌리의 고충을 톰이 이해했고 톰은 사라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 부던히 애썼다. “그 결혼을 막을 수 있었다면 뭐든 했을 거다.”“사라는 굉장히 아름다운 신부였을 거예요. 사라에게 잘 해 주겠죠?”“안젤로는 좋은 젊은이다. 그녀를 무척 사랑하지. 필요한 거 있냐?”“아뇨, 아무것도…….”“넌 좀 자야겠다.”빌리는 쓰라린 고통을 삭히고 있는 톰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 “죄송해요.”“미안하다. 처음부터 우리의 잘못이 크구나. 잘 알아 보았어야 하 는 건데.”“괜찮아요, 아버지. 다 끝난 일인 걸요.”“내일 보자.”빌리가 나가 자 톰은 품안에 간직해 두었던 사라의 사진을 꺼냈다.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고 소중히 간직했던 것이다. 망연히 사긴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병실문이 조 심스럽게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새 타올을 가져왔습니다. 병원의 보조원 으로 변장한 존노였다. 아들의 상태를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벌써 왔다 갔는데요?”톰은 담담하게 상대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귀빈이라 하루에 두 번 타올을 주나 보죠.”존노는 드러나지 않게 톰의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 어쩌다 이렇게 됐소?”그가 자기의 친아버지라는 사실을 알리 없는 톰이지만 웬 지 친근감을 느꼈다. “차가 뒤집혔어요. 그 뒤로는 기억이 없어요.”“살았으니 다행이오.”“네.”존노는 톰이 들고 있는 사진을 슬쩍 들여다 보았다. ”여자친 구요?”“아뇨. 그냥 알던 사람이에요.”사진을 집어놓는 톰의 그늘진 표종에 존 노는 가슴이 아팠다. 비로소 톰이 사라와 결혼하지 못한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여기엔 예쁜 여자들이 많던데 몸이 나으면 눈에 들어올 거요. 톰은 그 말에 담긴 존노의 깊고 애절한 마음을 몰랐다. “아뇨. 잠 좀 자야겠어요.”“경마 어 떻소, 내기할 생각없소? 5등 안에 들어올 말이 있는데.”“싫어요.”존노는 조용 히 드러눕는 톰을 잠깐 내료다 본 다음 돌아섰다. 병실은 나오는 그의 마음은 안도의 한숨으 쉴 수 있었다. 마음은 아프겠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수사히 살아 난 게 위안이 되었다. 신혼여행 중인 사라와 안젤로는 부러울 게 없어 보였따. 사라는 회복된 톰이 가슴 속의 고통을 어떻게 감수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 다. 비록 그녀의 가슴 속 깊이 톰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현실에 순종하고 있었다. 설령 톰이 회복되었다 하더라도 안젤로를 선택했을 것이다. “넌 내가 영원히 잃어버린 줄 알았던 행복을 줬어.”그녀는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키 스로 표현했다. “약혼반지를 안 사길 잘 했지. 그 반지 옆에서는 유리알로 보일 거야.” 안젤로는 사라가 끼고 있는 스테파니의 반지를 감동적으로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또 시작하지 마. 돈이 중요한 게 아냐. 그보다 엄만 내가 결혼하 면 이 반지를 주겠다고 하셨는데 약속을 지키셨어.”“너나 또 시작하지 마.”“ 아냐. 너무 우연의 일치잖아. 얼마나 아끼시던 반지인데 꽃병에 떨어뜨리고 잊으 실 리 없어.”“그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모르겠어…….”그년,ㄴ 갑자기 수평선으로 시선을 돌리며 심각한 표정이 되엇따. “오빠의 말대로 아직 살아 계신다면……처음엔 정말 그러신 거라면 용서못할 것 같았는데 지금은 돌아오시 기만 해도 바랄 게 없어.”“엄마가 보고 싶은 건 이해해.하지만 지금은 내가 있 잖아.”그들은 모래사장을 나란히 걸으며 한 쌍의 행복한 신혼부부가 되엇따. 사 라는 모든 일들을 잊고 싶어 안젤로를 더욱 뜨겁게 껴안고 그의 키스를 적극적 으로 받아들였다. “사라, 걱정거린 그거뿐야? 결혼은 후회 안 해?”“물론 아 냐.”“정말 널 사랑해, 사라.”“나도 알아. 조금만 시간을 줘.” 사라는 진심으 로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 안젤로에게; 가고 싶었다. 거기서 정착하여 안젤로와 행복한 삶은 영위하고 싶었다. 아말의 공식적인 방문을 앞둔 하퍼사의 제이크와 안톤은 다급한 나머지 빌리를 급히 찾아갔다. “요즘 회사형편이 좋지 않죠? 지 리를 임명했을 때 이미 예측하고 있었소,”빌리는 주저없이 말했다. “당신보고 그만두라고한 적은 없습니다.”“하퍼사를 뺏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 었지. 그런데, 스테파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남기를 원하겠소.”“지금 샌더스 씨는 경영자문이라는 후한 제안을 하시는 겁니다. 안톤은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건강상 무리하시면 안 될 테니 원하는 시간만 일해도 돼요.”안톤에 이어 제이크도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건강상태는 상관없소만, 당신이 있는 하 퍼사에서는 일하지 않을거요.” 제이크와 안톤은 다시 최근 어려워진 빌리의 경 제사정을 들추었다.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이미 뒷조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 “스테파니에 대한 당신의 충성은 익히 압니다. 그녀는 상사라기 보다는 딸에 가까웠죠. 그렇게 헌실적일 수가 없었소,”“잘 아시는군.”“하지만 지금 이 회 사엔 당신과 스테파니에게 충성스러운 사람도 많은데 그들이 실업자로 나앉는 건 어떨까요?” 제이크는 빌리의 약한 부분을 건드렸고 그것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좀 늦지 않소?”“아주 늦은 걸까요? ”이쯤 되자 거절만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샌더스 제이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질리에게 모종의 부탁을 했다. 그는 함께 목욕하던 중에 질리에게 약 혼반지를 선물하며 한껏 기분을 돋군 다음 본론을 꺼냈다. “닌 지금 궁지에 몰 려있다오. 빌리 맥매스터 때문에…….”“무슨 뜻이에요?”호가의 다이아몬드 반 지를 선물받은 질리는 한껏 기분이 좋었다. “아말이 왔을 때 빌 리가 없다면 상당한 손해를 보게 될 거야.”“그는 할 거예요. 회사에 충성스러우니까.”“하 퍼사에 대한 충성이지, 난 아냐.”“당장 직장을 가져야만 될 걸요.”그녀 역시 빌리의 어려운 형편을 알고 있었다. “다른 데서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면?” “나도 좋은 조건을 제시하고 있는 중인 걸요.” 그녀의 암시에 제이크는 만족 한 미소를 띠었다. 이어 그들은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서 남자와 여자가 되었고 서서히 한 몸이 되엇다. 제이크는 여자를 함몸시키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줄기차 게 퍼붓는 물을 전신에 받아내며 서로의 살이 섞이기 시작하자 질리는 전혀 새 로운 분위기를 경험하며 상반신을 서서히 젖혔다. 견디기 어려운 신음소리가 새 어나왔다. 한편 데니스는 나름대로의 계획을 은미하게 추진시켰다. 그가 설득시 킨 캐시를 데리고 하퍼빌딩에 잠입했을 때 빌리는 댄을 찾아가 제이크이 제안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직원에 대한 책임감을 들먹이면서 정곡을 찌르기 않겠소. 사업이 제대로 안 풀리는 모양이야. 그러면 하퍼사의 고객들만 골탕먹 지.”자신의 형편보다 하퍼사에 대한 애정이 더 강해 보였다. “단단히 넘어겼군 요.”“그럼요. 겪어봐서 알죠.”“나에겐 다른 이유도 있네.”“뭐죠?”“샌더스 는 회사를 불법으로 갈취했네. 증거수집이 끝나면……데니스와 사라가 법정투쟁 으로 되찾을 수 있지.”“둘 다 그럴 돈이 없어요.”“지금은 없지만 시간이 지 나면 증거만으로 충분할 수 있네.”빌리는 제이크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앞서 이 미 그 문제를 생각해 놓고 있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그 굴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나쁠 건 없겠군요.”“내 양심에 위안도 되고.”“회사로 들아가셔 도 스테파니는 이해할 겁니다.”빌 리가 돌아갔을 때 댄과 함께 있던 제시카가 불만을 늘어놓았다. “왜 당신을 끌어들이지 않고는 해결을 못하는 거죠? 당신 은요. 당신 생각은 누가 해주죠?”그 말에는 댄에 대한 사랑이 가득차 있었다. “한순간에 반평생을 정리하긴 어려워. 시간이 걸리지.”“당신을 원하는 사람은 외면하면 더욱 오래 걸리게 돼요. 빌리에게 스테파니는 이해할 거라고 하셨죠? 그럼 덩신에겐요?”“글세……그냥 오래 된 의무감이라고나 할까.”“당신을 사 랑해요.”제시카의 직접적인 고백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동안 항상 곁에 있으 면서 느낌과 행동으로만 절실한 사랑을 호소했었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드리 고 싶어요.”제시카의 보기 들물게 대담해졌다. 댄이 아직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에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키스 세례를 퍼부어 왔다. 하지만 댄을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재빠릴 몸을 일으켰다. “미안해, 제시카. 아직은 너무 이른 것 같아.” 제시카는 몹시 허탈해진 채 성급히 들어가버리는 댄의 뒷모습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댄은 스테파니를 아직 단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실종 그리고 그 녀의 죽음에 대해 심한 자책을 느꼈다. 질리의 잔꾀에 빠져 스테파니를 죽음으 로 치닫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생가했다. 그는 어린 제시카가 함께 거처하는 것 도 부담스러웠다. 딸 같은 나이의 그녀가 사랑을 고백해 오는 것은 더욱 그를 난간하게 했다. 반면 그의 의사에 무관하게 제시카의 사랑은 더욱 깊어갔다, 아 말 일행은 약속한 시각에 정확히 시드니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그들의 도착을 기다린 이는 존노였다. 그는 경호원들의 엄중한 호위 속에 비행기에 내리는 아 말과 두명의 여자를 맞았다. “이쪽은 내 동생 타리사 그리고 이쪽은 여행친구 요.”“그런데 스테파니는 어디 있습니까?”존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금 돌아오는 건 위험할 것 같아서 궁에 있기로 했소.”“좋겠군요.”그가 실망할 때 타리사와 함께 있던 여자가 재빨리 다가오며 속삿였따. “선물을 돌려드리겠어 요.”그녀가 품에서 꺼내주는 작은 술병을 보던 존노는 낮게 소리쳤다. “스테파 니!”스테파니는 퍼르시아 여인처럼 공주인 타리사와 똑같은 차드르로 휘감아 변장하고 아랍인처럼 행세했다. 아말은 숙소를 예기치 못한 장소로 선택했다. “ 좋은 곳이군요. 내가 돈을 안 내니 다행입니다.”존노는 아말 일행이 여장을 풀 때 호화로운 호텔 내부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제이크와 같으 호텔에 있는 게 어떨지 모르겠어요.”“층 전체를 빌렸소. 엘리베이터와 문 입구에 경호원도 배 치했으니 외부인의 출입은 없을 거요. 그러니 제이크가 당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 리 없지.”스테파니는 비로소 눈만 내놓고 얼굴을 가렸던 검은 망사를 풀었 다. “훨씬 좋군요. 이제야 당신인 줄 알아보겠소.”존노는 스테파니의 모습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다. “당신이 알아보지 못했으니 다른 사람들도 그랬으면 좋겠어요.”“잘 될 거요.”“타리사가 매처럼 날 호보해줄 거예요. 실수하지 않 도록요.”“그럼 나도 보따리를 싸야겠군.”그러자 한쪽에 있던 아말이 얼른 물 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소?”“아, 내 갈 길을 간다구요.”아말은 정색을 했다. “있으시오, 존노. 당신도 할 일이 있소. 어건 원래 당신이 계획한 일이잖소.”“ 스테파니가 공주로 변장할 계획은 없었죠. 그녀가 어떻게 왕자님을 끌어들였죠? ”존노의 계획은 아말의 간접적인 지원하에 스테파니와 자신만이 행동에 나선다 는 것이었다. “나도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그녀의 결심은 확고했소.”“무슨 말씀이신지 압니다.”존노는 타리사에게 넌즈시 말을 걸었다. “당신이 정말 왕 자님의 동생입니까?”“네.”그녀는 풍습대로 얼굴을 남자에게; 보이지 않으며 대답했다. “나도 꽤 기발한 구석이 있는 놈이지만 이건 뜻밖이오. 이건 굉장한 속심수요.”스테파니가 끼어들었다. “훨씬 유리할 거에요.”“실제로 행동은 안 할 줄 알았는데.”“말도 안 돼요. 제이크와 질 리가 어떻게 되는가를 똑똑히 보 겠어요.”스테파니의 확고한 결의가 힘있는 말투에서도 드러났다. “스테파니, 곧 그들을 만날 시간이오.”스테파니는 타리사의 도움으로 다시 차드르를 걸쳤 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던 존노가 나직이 말했다. “스테파니도 약간은 긴장되는 모양입니다.”“제이크와 질리를 만나는 일이잖소. 이번이 큰 관문이 되겠죠.”“내가 콤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말했나요?”“들었소, 내 아들이라 해 서 든든했는데 좀 실망했소.”“아직 그녀를 사랑하시죠?”“당신의 감정도 내 게는 보입니다.”“솔직히 난 한 몫 잡기 위해 뛰어들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문 제가 있어요. 톰은 지금 병원에 있고 사라가 아직 진실을 모른다는 걸 알면 그 들을 만나러 갈 거고, 그러면 끝장나죠.”“그럼 당분간은 비밀로 하는 게 좋겠 군요.”아말과 존노는 그 사실을 당분간 비밀에 붙이기로 합의했다. 톰이 존노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경우 모든 계획은 삽시간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 다. 스테파니에게는 가장 긴장된 순간이 다가왔다. 타리사 공주로 변장한 그녀는 아말과 함께 경호원들의 삼엄안 경호를 받으며 약속장소로 나갔다. 상대 편은 제이크와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질리 그리고 비릴엿다. 스테파니는 그들에게로 가기 전에 아말에게 조용히 물었다. “빌 리가 왜 저들과 함께 있죠?”“모르겠 소. 그는 타리사를 아니까 조심해야겠소.”이윽고 그들은 대면했고 아말이 그의 일행을 소개시켰다. “내 동생 타리사 공주를 소개하겠소.”“영광입니다.”제이 크는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반갑군요, 빌리. 건강이 좋아 보입니다.”빌리와 아말은 구면이었다. “잘 지내고 잇습니다. 공주님,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스 테파니는 타리사의 도움으로 완벽하게 변장했고 그들의 풍습도 충분히 익혔다. “복직하셨나 보군요, 빌리, 아니면 새로운 회사에 들어갔다고 해야 될지 모르겠 군요.”“빌리는 우리의 최고 자문위원입니다.”아말이 먼저 인사했을 때 질리는 한껏 예의를 갖추어 응답했다. “공식적인 입장으로 나왔어요. 제가 총지배인직 을 맡고 있죠.”그 말에 가장 놀란 것은 변장 속의 스테파니였다. “사실은 당신 회사에 부탁할 일이 있어서 왔소.”아말의 말에 제이크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사무실로 가셔서 정식으로 의논할까요?”“복잡한 게 아니오. 동생도 여길 더 좋아할 것 같고. 실은 북쪽 부근에 있는 땅을 사고 싶소. 정치적인 이유가 있어 선데, 당신 회사에서 내 대신 그걸 사주었으면 하오. 커미션은 충분히 내겠소.” 상대의 제의가 의외인데 대해 제이크는 일단 안심을 하는 눈치다. 아말이 페르 시아에서 가지는 권한만은 못해도 시드니에서 제이크 역시 그 정도는 쉬운 일임 이 분명했다. “저희들이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죠. 빌리?”“문제없을 것 같 습니다. 계획이 있으십니까?”그 질문에 대해 아말을 충분히 대비해 놓고 있었 다. “여기는 가축의 나라이니 땅이 쓸모없을지 모르겠소. 누가 알겠소, 동생이 외국인과 결혼하게 될지. 그러면 매우 좋은 지참금이 될 거요.”그 말에 의심을 품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그는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였다. 그때 질 리가 변장한 스테파니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나라를 처움 방문하셨나요?”“ 네.”그녀는 끓어오르는 증오심을 삭히며 다소곳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 말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타리사는 오래 전부터 호주에 와보고 싶어했소. 그래 서 가능하면 다양한 호주의문화를 접하도록 하고 싶소.”제이크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우리도 돕고 싶군요. 사업 때문에 바쁘실 테니 여기 있는 질리양이 공주님을 모실 수 있을 겁니다.”“물론이에요.”제이크와 질리의 말에 스테파니 는 등골이 오싹했다. “폐가 되지 않겠소?”“질리는 솔직하죠. 우린 결혼할 사 이니까 가장 솔직하죠.”스테파니는 또 다시 놀랐다. 그들이 결혼하리라고는 상 상도 못했던 것이다. 4. 타리사와 변장여인 타리사 입장에서도 변장한 스테파니가 에덴으로 숙소를 옮기는 일은 매우 위 험한 도박이라 생각했다. 철저한 보안조치가 선행될지라도 상대는 질리와 제이 크였다. 특히 스테파니는 질리는 더욱 경계해야될 입장이었다. 그녀가 에덴으로 들어가기에 앞서서 질리와 올리브 사이에 심한 충돌이 있었다. “공주가 온다니 까 넌 짐싸서 나가는 게 좋겠어”“난 아무 데도 안 가.”올리브는 단호했다. “ 어차피 결혼하면 제이크가 널 내쫓을 거야. 돈 문제라면 달라는 만큼 줄 테니 걱정하지 마.”올리브의 두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도으로 매수할 생각이라면 오산이야. 넌 날 내쫓지 못해. 내가 너무 많이 아니까.”“협갑하지 마. 네가 서 명한 진술서가 있어. 당장 나가!”“그래?”다음 순간 올리부는 재빨리 질리의 한쪽 손목을 움켜잡고 동시에 뒤로 비틀어 꺾었다. “감옥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알아? 내가 어떡했지?”팔이 뒤로 꺾인 질리는 고통스로운 비명소리를 내질렀 다. 때마침 밖에서 들어오던 제이크가 놀라며 달려들어 올리브를 소파로 밀어던 졌다. “당장 나가버려! 다시는 돌아오지 마. 쓸데없는 짓을 하면 쥐도새도 모르 게 죽여버릴 테다.” 올리브는 제이크에게 쫓겨 에덴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리고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의 시작이었다. 오리브가 그리 쉽게 쫓겨나갈 위인이 아닌 까닭이다. 호텔로 돌아온 스테파니는 아말과 존노에게 이해할 수 없는 상 황에 대한 심정을 토로했다. “샌더스와 질리가 약혼을 했다니 믿을 수 없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댄의 경우도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어요. 댄은 질리를 절대 믿지 않았어요. 알아 보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어요.” 존노는 벌써 그녀가 무 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잠깐, 일을 벌여놓고 그런 식으로 망칠 작정이오? ”“알아야만 해요, 존노.”“그럼 나도 같이 가겠소.”“아뇨. 난 내 방법대로 하겠어요.”그녀는 존노의 충고를 물리치며 급히 나가버렸다. 존노와 아말은 우 려의 빛을 감추지 못햇따. 그녀는 화약을 지고 불길에 뛰어드는 격이다. 정체가 탄로나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은 명약 관화했다. 하지만 한 번 결심하 면 누구도 그녀를 막지 못했다. 호텔을 떠나 택시를 타고 떠났던 스테파니는 뜻 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댄과 제시카의 관계였다. 댄이 제시카를 사랑하고 그 들은 이미 보통 사이가 아님을 목격한 스테파니의 충격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 다. 호텔로 돌아온 그녀는 비탄의 눈물을 흘렸다. “스테파니, 잘못 봤겠지.”아 말조차 그 일을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아말, 전 댄이 사랑할 때의 눈빛을 알고 있어요.”스테파니는 다시 걱정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 사이 에데에서 는 올리브에 의해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다. 쫓겨났던 그녀는 무엇인가가 담긴 큼직한 자루를 들고 도둑처럼 숨어들었다.. “난 가서 샤워나 하겠어. 같이 할 까?”“다음에요.”올리브의 계획은 처음부터 빗나갔다. 그녀가 노리는 것은 질 리였는데 먼저 샤워를 하려는 이는 제이크였다. 그리고 그 순간은 예정보다 너 무 빨리 닥쳤다. 무심코 욕실문을 열던 제이크는 막 자루에서 뱀을 풀어놓은 울 리브를 발견했다. 올리브가 아무리 날렵해도 상대는 남자였다. 그녀는 순식간에 제이크에게 붙잡혓다. “전부 당신 짓이군!”“놔 줘요.”올리브는 그녀답지 않 게 새파랗게 질렸다. “넌 뱀을 좋아하잖아. 이번엔 네가 당해 봐야지.”제이크 는 그녀를 안에 둔 채 밖에서 문을 잠그고는 소리내어 웃었다. “안 돼요, 제이 크! 나가게 해 줘요. 빨리!”안에서 뱀을 피하느라 유리문에 매달려 애원하는 올 리브를 제이크는 무시햇따. “질리, 올라와 봐! 뭐가 기어나왔는지 보라구!”“제 이크, 독사예요! 난 즉어요!”제이크는 믿지 않았다. 올리브는 더욱 절발하게 부 르짖었다. 지금까지 에덴에 출현한 뱀은 독사가 아니었지만 올리브가 준비한 뱀 은 실제로 물리면 순식간에 숨을 끊어놓는 독사였따. 질 리가 이층으로 올라오 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뭐예요?”“지금 저 안에서 올리브가 인생 최대의 경험을 하는 중이야. 친구인 뱀하고.”“그럴 줄 알았어요.”질리는 대수롭지 않 게 여기며 욕실문으로 다가가 두드리며 야유햇다. “재미있어, 올리브! 그 공포 가 어떤 건지 이제야 알았을 테지? 거기서 나오고 싶으면 다시는 에덴에 오지 않겠다고 맹세해. 결정해, 거기 있던가 영원히 떠나던가.”제이크도 거들었지만 올리브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기절했나 봐요.”“아냐. 뱀이 기절했다면 몰 라도.”순간 질리는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다. “뭔가 잘못됐어요. 빨리 문 열 어요.”“속이려는 걸 거야.”“문 열어요!”제이크 역시 의아해하며 문을 여는 순간 그들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세상에! 뱀에 물려서 죽었어요~!”올리브는 욕실의 코너에 이미 시퍼렇게 독이 퍼진 채 죽어 잇었다. 부릅뜬 두 눈은 죽기 직전의 공포 분위기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제이크는 호아급히 문을 닫으 며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속이려는 줄 알았어, 지난번처럼 독이 없는 뱀인 줄 알았는데…….”질리는 새파랗게 질려서 어쩔 줄 몰라했다. “우리 때문이에 요. 살인을 했다구요.”“사고였어.”“아뇨. 믿지 않을 거예요. 우릴 잡아 갈 거 야!”“아무도 감옥엔 안 가.”“어떡하죠?”“몰라, 발리 뭔가 생각해 내지 않 으면 안 돼. 우선 저 뱀부터 처리해야 돼.”제이크도 이때처럼 당황하고 겁에 질 린 적이 없었다. 우선 저 뱀부터 처리해야 돼.”제이크도 이때처럼 당황하고 겁 에 질린 적이 없었다. 경찰이 질리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 문이다. “나한테 총이 있어요.”“가져와.”“누가 총소릴 듣고 경찰에 신고하 면요?”“그런 걱정은 나중에 해도 돼.”이윽고 그들은 제이크가 총을 들고 앞 장선 채 욕실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았다. “도대체 어디 갔지?”“시체 밑 에 있나 봐요.”뱀의 모습은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올리브의 시체 속으로 들어갔다고 볼 수도 없었다. 겁에 질려 욕실 아능ㄹ 뒤지던 제이크와 질 리가 한순간 동시에 소리쳤다. 천장에 배달린 뱀이 갑자기 축 늘어져 내려온 것 이다. 다행히 뱀은 한 발의 총단으로 처치했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가 남 아 있었다. 올리브의 시체를 감쪽같이 처리하는 문제였다. 질리는 완전히 겁에 질렸지만 선택의여지가 없었다. 제이크의 제안에 따라야만 했다. 그들은 밤이 되 기를 기다려 시체를 천으로 둘둘 쌌다. 접사로 채용된 사내는 특별휴가를 주어 내보냈다. 시체가 무겁다기보다 갑작스럽게 닥친 사건에 짓눌린 그들은 무척 긴 장했다. 특히 질리는 시종 몸을 떨었다. “이건 정말 싫어.”그녀는 천으로 둘둘 말아 놓은 시체의 발 쪽을 들었고 제이크는 머리 쪽을 들었다. “내가 더 무거 운 쪽을 들고 있어.”그러는 사이 실수로 떨어뜨린 시체는 나무토막처럼 계단을 굴러 거실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 바람에 눈을 부릅뜬 시체의 얼굴이 드러나 서 질리를 더욱 공포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정말 못견디겠어요.”“좋아, 경 찰을 불러, 자수해 봐. 정신차리지 않으면 결과는 마찬가지니까. 자, 서둘러!”질 리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 같은 모습이었다. 7년 동안 감옥에서 지낸 그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 그런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힘들게 올리브의 시체를 밖에 세워둔 차의 트렁크에 옮겨 실었다. 시간은 늦은 밤이다. 질리와 제 이크에게는 또 다른 불운이 기다리고 잇었다. 그 시간에도 타라의상실에서는 캐 시가 아직 일하고 있었다. 데니스의 간곡한 부탁과 함께 그에 대한 사랑은 단념 할 수 없었던 그녀는 밤마다 하퍼빌딩에 숨어들어 컴퓨터로 계획한 조작을 진행 하는 중이었다. 공교롭게도 제이크와 질리가 시체를 싣고 간 곳은 타라사 앞의 선탁장이엇다. 시체ㄹ 보트에 싣고 먼 바다에 내다버릴 계획이었다. 혼자 남아서 막 일을 끝내고 데니스가 기다리는 하퍼빌딩으로 가려던 캐시는 문득 밖에서 자 동차가 멈추는 소리를 들었다. 웬지 의아스럽게 생각한 그녀는 블라인드 사이로 어두운 바깥을 살폈다.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질리와 제이크가 차의 트렁크에서 무엇인가를 힘들게 꺼내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처음 자신의 눈을 의심했지만 곧 그것이 무엇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캐 시는 등골이 오싹했지만 서둘러 다음 행동을 취했다. 최근들어 사진찍는 기술이 크게 향상된 그녀는 카메라의 망원렌즈를 이용해 셔터를 눌러댔다. ㄷ 사람의 거동은 일일이 캐시의 카메라에 담겼다. 심상치 않은 물체를 보트에 옮겨 싣고 떠날 때까지의 장면들이 고스란히 담긴 필름이 그녀의 손에 쥐어진 것이더다. 캐시는 그 즉시 하퍼빌딩에 가서 데니스를 만났다. “서둘러야 해, 45분 후면 방 범점검이야.”“데니스, 이러지 않아도 돈을 구할 방법이 있어요.”캐시는 자신 이 목격한 장면에 대한 확신이 섰다. “그게 어떤 방법이지?”“하지만 재판에 그 돈을 써버리고 싶진 않아요. 우릴 위해서 써요. 어디로 가서 새 생활을 시작 해요.”그 말이 데니스에게 실감있게 들릴 리 없었다. “그 비밀이 뭔데?”“아 직은 말할 수 없어요.”“고맙군.”“나랑 떠난다고 약속하면 말해 줄께요.”“ 제이크와 질리에 대한 복수는?”“돈이 그들에게서 나오게 돼요.”“이 회사도 되찾아야 해.”사랑에 빠진 캐시는 다시 어처구니없는 도박을 시작햇다. “우리 와 회사 중에 뭐가 더욱 중요하죠?”데니스는 그녀의 돌연한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캐시는 자신의 위험한 도박에 지나친 기대를 가졌다. “웬지 이용당하는 느낌이 드네요. 당신도 제이크보다 나을 게 없어요. 아니라면 당신의 마음을 증 명해 봐요.”“!……”“아니라면 제이크를 잊고 나와 떠나요. 어디로 갈까요, 유 럽? 미국?”“지금 그만들 수 없다는 걸 알잖아. 자, 그들의 약점이 뭐지?”“당 신에겐 말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지금 하던 일도 더 이상 돕지 않겠어요. 제가 당신을 도운 건 당신이…….”그녀는 완전히 절망에 빠졌다. 자신의 도박에 현실 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그녀의 사랑은 거의 맹목적일 수밖에 없었 다. 그들은 복도를 걸어나왔다. “난 언제나 저지르는 실수를 또 반복했어요. 언 제나 남자에게 이용만 당하죠.”“지금 단념할 수는 없어.”캐시보다는 복수심이 더욱 강한 데니스의 생각이 그녀의 사랑하는 마음과 맞물렸다. “당신을 도와야 할 이유를 하나라도 말해 봐요.”“마음대로 생각해. 당신이 하는 걸 봤기 때문 에 나도 컴퓨터를 조작할 수 있어.“’데니스, 돌킬 거예요.“캐시의 나약한 마 음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데니스의 솜시라면 컴퓨터 조작이 금방 탄로날 게 뻔 했기 땜누이다. “그만두고 싶으면 좋아, 내 걱정은 내가 하지.”캐시는 결과적 으로 데니스의 마음을 더욱 멀리 떼어놓고 말았다. 혼자 집에 돌아와 암실에서 필름을 현상하는 캐시의 모습은 매우 쓸쓸해 보였다. 그걸 이용하면 제이크와 질리에게서 큰돈을 뜯어낼 수 있다는 확신에도 불구하고 데니스와 다시 멀어졌 다는 실망이 그녀를 소리없이 절망의 늪으로 밀어넣었다. 그들의 행위가 캐시에 게 노풀된 줄 모르는 질리는 제이크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솔직히 당 신을 의심했어요. 하지만 오늘로 모든 게 변했어요.”“좋아. 약혼을 후회해?” “왜요? 믿지 못해서 죄송해요. 그렉 이후로 난……누구도 믿을수가 없었어요. 당신도 그렉처럼 배반할 거라고 생각했죠. 이제야 비로소 제가 틀린 걸 알았어 요. 7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조금 이상해졌었나 봐요. “그녀는 진심어린 눈빛 으로 제이크를 응시하며 나직이 말했다. “모두 증오했는데 당신이 날 변하게 만들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이때만큼은 그녀에게도 사심이 없어 보였다. 그들 은 빠른 시일내에 결혼하기로 합의했다. 올리브 때문에 악몽에 사로잡히는 침실 은 이튿날 오기로 약속된 타리사 공주에게 주기로 했다. “공주와 함께 있으면 서 내가 부탁한 걸 잊지 마.” 제이크는 그 문제까지 이미 생각해 놓고 있었다. “만약 공주가 왜 그 땅을 사려는지 전혀 모르면 어떡하죠?”“두고 봐야지. 아 말이 북쪽에 있는 그 땅을 사려는 이면에는 반드시 속셈이 있을 거야.”스테파 니의 작전의 핵심은 그것이었고 제이크는 그 문제에 의심이 가긴 했지만 전혀 윤곽을 잡지 못했다. “정말 목장을 할 계획일 수도 있잖아요.”“아냐. 가격이 매우 미싸던데 굳이 그 땅을 사려하는 게 이상해.”“그는 엄청난 부잔테요?” “아냐. 분명히 뭔가 있어. 당신만 믿을 테니 꼭 알아봐.”“힘껏 해볼께요.”질 리는 제이크 앞에서 다소곳한 여인으로 바뀐 듯했다. 스테파니는 타리사 공주로 변장해 경호원으로 위장한 존노와 함께 에덴으로 향했다. “세상에……!”“마음 이 뱐했소?”에덴이 저만치 보였을 때 스테파니가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 “저 집으로 다시 들어가다니……저기서 질리를 만나다니…….”공주로 변장했지만 그녀가 에덴으로 들어가는 문제에 대해 아말 등은 신중하게 논의했었다. “원하 면 대나무 숲을 만들어 아무도 못보게 할 수 있소.”“이미 늦었어요. 결심도 했 고.”그녀는 다시 한 번 각오를 굳게 다졌다. 전쟁터의 포화 속으로 뛰어드는 병 사와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질리는 몸단장을 새롭게 하고 정원까 지 나와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었다. “안녕하세요, 공주님. 에덴에 잘 오셨습니 다. 공주님 집처럼 편리 지내셨으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스테파니보다 존노 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스테파니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었다. “타리사 공주 님은 당신의 환대에 무척 고마워 하십니다.” “당신은 공주님의 경호원인 존 라이언 씨겠군요. “통역도 하죠.”질리는 스테파니와 존노에 완전히 속아넘어갔 다. “공주님도 영어를 하시겠죠?”“주저않고 부탁하죠, 이제 안으로 들어가실 까요?”그녀는 스테파니의 손목이라도 잡아주려는 듯이 움직였고 스테파니는 흠 칫 놀랐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존노는 벌써 그 이유를 알아차리고 정색했 다. “공주님 나라에서는 외부인과의 접촉이 금기사항이죠.”“몰랐어요.”자신 도 모르게 흠칫 놀랐던 스테파니의 동작은 존노의 재치에 의해 오히려 좋은 결 과로 나타났다. “이제부터는 허락을 받아야겠군요.”“그래도 직접적인 접촉은 안 하는 게 좋은 겁니다. ’명심하겠어요.“두 사람은 안내하는 질리가 이층으로 올라가기 직전 내려오던 제이크와 마주쳤다. 천으로 가려진 스테파니의 입가에 증오의 경련이 스치고 지나갔다. “안녕하십니까, 공주님.”제이크는 정중히 예 의를 갖췄다. “제 약혼자는 어제 만나셨죠?”“제가 뭐 도울 일 있으면 서슴지 마시고 말씀해 주십시오.”제이크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여 보이는 공주의 눈빛 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것도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앞으로 거처할 방에 들어간 존노는 질 리가 보는 앞에서 방의 구석구석을 조사했따. 벽 에 걸린 액자 뒤까지도 빼놓지 않고 샅샅이 점검하는 척했다. “이상하게 받아 들이지 마십시오. 통상적인 안전점검이니까.”이윽고 질리가 나갔을 때 존노는 문부터 잠갔다. 그는 스테파니의 낮은 한숨소리를 들었다. “한순간 제이크가 날 알아보는 줄 알았어요.”“당신은 매우 잘 하고 있소. 자기 집에서 손님행세를 하려니까 좀 어색하죠?”“그보다 제이크를 과소평가하면 안 돼요. 날카로운 자 니까.”“그렇게는 안 뵈던데.”“우린 그를 혼란시켜야 해요. 타리사 공주가 조 금이라도 유혹하면 감쪽같이 속을 거예요.”그녀의 당돌한 계획에 존노는 깜짝 놀랐다. “그러단 당장 탄로날 거요.”“잘 할 수 있을 거예요.”“구경하면서 진땀빼란 말이오?”“스릴있잖아요.”“질리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오?”“설마 내가 질투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질 리가 속끓이는 걸 보고싶긴 하지만 그 건 아니예요.”“우리가 여기 온 목적을 잊지 말아요. 일이 잘 되는 즉시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요.”그때 아래층 거실에서는 제이크와 질 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침대 밑에 암살범이라도 있는 것처럼 굴지 뭐겠어요.”“경호가 임무 니까.”“그녀한테 반했어요?”“그보다 베일 속에 뭔가가 있는 것 같아. 정말 이상하지만 한순간에 나는…….”제이크가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뭐예요?”” 처음 만났을 때는 느끼지 못했었는데 여기 에덴에서 공주를 보니까…….”그는 또다시 말끝을 흐렸다. “뭐가 다르다는 거예요?”질리는 상대가 젊고 아름다운 이국여자이기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모르겠지만 그 눈빛이 마음에 걸려.”“ 조심해요, 공주도 그럴지 모르니. 누가 알겠어요. 공주가 정말 무섭게 밝히는 여 잔지. 제이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거실을 나갔다. 이때의 질리는 단순한 경계심 뿐 제이크가 생각하는지 전혀 몰랐다. 빌리는 다시 하퍼사에서 일했다. 오랜 경 험에서 얻어진 것일까. 그는 컴퓨터에 문제가 생겼음을 쉽게 알아냈다. “데니 스, 난 이유가 있어서 다시 하퍼사에 들어왔네.”“그게 뭐죠?”“여긴 그런 말 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아냐.”그때 여비서가 전산 부서에서 가져온 파일을 빌리 에게 전해 주자 데니스는 당황했다. “그건 왜 찾으셨죠?”“현재의 급격한 이 윤하락의이유를 찾아내라더군.”데니스는 긴장했다. “뭘 좀 찾았나요?”“아직 없지만 차분히 검토하면 알아낼 수 있겠지.” 데니스는 더욱 긴장했따. 그의 계 획에 있어 빌리는 크게 염두에 두지 못햇따. 노련한 빌리라면 컴퓨터에 이상이 생겼음을 쉽게 발견할 것이 분명했다. 한편 제이크의 엄명을 받은 질리는 항상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눈치채지 못하게 관찰의 눈과 귀를 곤두세웠다. 그녀는 우선 타리사 공주를 타라의상실로 안내햇다. 통역이자 경호원인 존노도 함께였 다. “여기가 타라예요. 우리 나라 최고의 패션 숍이죠.”타리사로 변장한 스테 파니의 가슴은 견디기 힘들게 마구 뛰었다. “이런 곳을 세우시다니 정말 재능 이 뛰어나셨나 보군요.”존노의 능청에 질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석하게도 제겐 그런 천사를 들을 자격이 없어요. 이건 타라웰스라는 모델이 세웠죠.”스테 파니는 애써 자신의 커다란 사진을 외면했다. “눈이 아름답군요.”존노의 능청 은 계속되었다. “언니가 보고 싶으시겠군요.”불쑥 튀어나온 그녀의 말에 질리 보다 존노가 더 놀랐다. “공주님이 어떻게 타라가 제 언니라는 걸 아시죠?”스 테파니는 다시 재빨리 말했다. “우리 궁의 모든 사람이 스테파니를 알지요.”“ 공주님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영어를 잘 하시는군요.”그때 캐시가 들어 오자 존노는 이때다 싶어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이분은 누구죠. 모델인가 요?”“아뇨, 비서예요. 캐시, 공주님을 모시고 옷 고르시는 걸 도아드려요.”스 테파니는 깜짝 놀랐다. “안 돼요. 그럴 수는 없어요.”“아말 전하께서 우리 나 라를 배우라고 하셨잖아요?”이번에도 조노가 스테파니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랬죠. 하지만 관습이 중요해요, 특히 의상에 관해서는 말이죠.”“알겠어요. ”그때 질 리가 소스라치게 놀랄 일이 생겼다. 새로운 디자인이라고 캐시가 건 네준 팜플렛에는 전날 캐시가 찍은 사진들이 있었다. 올리브의 시체를 운반하던 광경이었다. 그녀는 양해를 구하는 것조차 잊고 캐시를 문 저쪽으로 데리고 갔 다. 누가 보아도 두 여자는 심하게 다투는 모습이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 어나는지 알고 싶어요.”스테파니가 깊은 관심을 표명할 때 질리와 캐시는 칼날 처럼 날카로운 분위기였다. 망원렌즈는 어쩌다 드러난 올리브의 얼굴까지 잡아 놓았다. “이 여자는 당신 친구가 맞죠? 왜 그랬어요? 제이크와 당신의 계획에 방해가 됐나요?”“가불지 마, 너도 같은 꼴이 될 수 있어.”질리는 항상 써먹는 수법대로 협박부터 했다. “지금 큰소리칠 입장이 아닐 텐데요. 또한 사람의 측 근이 실종된다면 어떨까요?”“좋아, 네 뜻을 알겠어.”질리도 더 이상 강하게 나가지 않았다. “좋아요. 내가 원하는 걸 말하죠.”질리는 끓어오르는 분노 때 문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타라에 타리사 공주가 왔을 때 노려 그것을 제시한 캐 시가 죽이고 싶도록 증오스러웠지만 어떻게도 할 수 없었다. 꼼짝할 수 없는 증 거가 눈앞에 있었다. 5. 위기(1) 몇 시간 동안 외출하겠다며 에덴을 떠나는 질리를 확인하고 돌아온 스테파니 는 스카치를 마셨다. 베일도 쓰지 않은 채였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야 되는 거 아니오?”“잠시는 괜찮을 거예요.”그녀는 꿈에도 잊지 못했던 에덴을 여기저 기 들러보았다. “약간 울적해 뵈는데 댄 때문이오?”“여기서 한동안은 정말 행복했어요.”“질리가 나타나기 전엔?”그녀는 몹시 착잡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전부 그녀 때문일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렇게 빨리 다른 사람을 찾을 줄은 몰랐어요. 그것도 딸 나이밖에 안 되는 젊은 여자를…….”“공정히 생각해요. 세인에게 당신은 죽은 사람이오.”“글쎄요……안 그랬어도 똑같았을 거예요. 내 가 모든 걸 잃지 않았으면 내게서 떠났을 거예요.”“당신은 어떻소? 사랑하기 때문에 상심한 거요, 아니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거요?”“어쨌든 계획에는 차질없을 테니 걱정 마세요.”“타라에서 올 때 질 리가 초조해 하는 걸로 봐서 캐시가 그녀의 약점을 찾아낸 것 같소.”“잘 한 거예요.”그때 질리는 더할 수 없이 긴장된 모습으로 하퍼빌딩에 나타났다, 그녀는 여비서의 저지를 무시하며 회장실로 향했다. 안에서는 제이크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말과 빌 리가 지도를 펴놓고 검토하는 중이었다. “제가 그 땅의 조사를 끝낼 때까지 기다리시죠.”빌 리는 항상 그렇게 신중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소.”그때 질 리가 몹시 긴장 된 표정으로 들이닥쳤다. “실례합니다. 잠잔 할 말이 있는데요.”“지금은 안 돼, 질리. 중대한 회의 중이요.““기다릴 수 없는 일이에요.”그녀는 더 말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숙녀를 기다리게 하면 안 되죠.”아말의 말에 제이크는 할 수 없이 양해를 구하고 질리를 따라나갔다. 그가 나가자 빌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불쑥 땅의 매입에 반대했다. 아말이 그 권고를 받아들일 리 없었따. 원래 신중한 빌리는 전적으로 아말을 위해 그 땅에 대한 정보까지 제시하여 아말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때 밖으로 나온 제이크는 질리로부터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교활한 게 타라의 경영권 반을 내놓으래요.”“적당하군, 입만 다 물어 준다면야. 달라는 대로 줘야 해. 분명히 여러 군데 수를 써놨을 거야.”제 이크는 상상 외로 캐시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아직 육체적으로 캐 시에게 영향력을 가졌다고 확신하는 게 분명했다. 회장실의 빌리는 아말에게 진 심으로 만류했다. “실수하시는 겁니다. 더구나 터무니없는 값인데…….”“값은 얼마든지 낼 용의가 있소.”“왜죠? 또 다른 가지가 있다면 몰라도……혹시 값 나가는 자원이라도 묻혔습니까?”“빌리, 당신께 충분히 설명하지 못할 이유가 있소.”아말은 비로소 바깥을 경계하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에는 모 든 걸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상화이 변했소.”“샌더스 밑에서 일한다 고 스테파니를 잊은 건 아닙니다. 그리고 그녀의 친구에게도 전고 다름없이 충 실할 겁니다.”“당신을 나쁘게 생각하는 건 아니오. 하지만 이번 일은 정말 신 중히 처리해야 되오.”아말의 그런 설명으로 의혹이 풀릴 빌리는 아니엇다. “이 번 게약은 매우 수상합니다. 샌더스도 그렇게 느끼죠. 그를 믿으면 안 되지만 당 신도 실수하실까봐 걱정됩니다. ’정말 오랜 친구에게까지이러는 게 괴롭소.“빌 리는 비로서 아말에게 어떤 피지 못할 고충이 있다고 생가가했다.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스테파니와 관련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4시 타라 의 명예가 있는 승마장으로 오시오. 그러면 모두 설명하겠소.”아말은 계속 문 쪽을 경계하며 말했다. “그렇지만…….”“그때 봅시다. 이건 절대로 비밀이오. ”아말은 거듭 비밀임을 강조했다. 그때 제이크가 들오자 아말은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말썽생기는 건 싫으니 모든 절차를 서두러 끝내 주시오.”“말썽은 없을 겁니다. 이미 준비가 끝났는 걸요.”제이크의 말에 아말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빌리도거기에 동조했다. 그들은 그들대로 치밀하게 계획하고 있다고 믿 었지만 제이크의 예리한 눈은 벌써 그들을 의혹의 눈길로 보고 있었다. 물론 그 러한 의혹은 공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엿따.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사라와 안젤 로는 새 집을 구할 동안 댄과 함께 지내기로 했다. 사라는 톰의 의식이 돌아왔 다는 대느이 설명에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그녀는 댄에게 특별히 부탁 해서 병원의 톰을 찾아갔다. 그때의 톰은 전날의 그가 아니었다. 아직은 그녀에 대한 사랑을 다 정리하지 못했지만 체념하고 그녀의행복을 빌어주려고 노력했 다. “내가 의식이 없을 때 날 간호해 줬다고 박사님이 그러셨어.”“그댄 가망 이 없다고 하셨어요.”“아직은 수명이 남았나 보지.”톰은 웃어 보이기 위해 필 사적이었다. “그래야죠.”사라 역시 웃고 있었지만 가슴 속으로는 울고 있었다. “의식을 회복한 날이 네 결혼식이더군.”“실은 안젤로와 사귀고있었어요. ’설 명할 필요없어. 행복해?”사랑을 위해 길 떠났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톰 그 리고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그의 아이까지 가지고 있는 사라의 슬픈 만남이었 다. “잘 될 거예요, 좋은 사람이니까. 그렇게 멀리까지 가지 않았으면 끔찍한 사고도 당하지 않았을 텐데.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해죠?”톰은 다시 웃었다. 쓸 쓸하게 보이는 그 미소 속에는 부르짖는 절규가 감추어져 있었다. “네 말이 맞 았어.”“나 때문에 이런 일을 겪어서 정말 미안해요.”“나도 하지만 이제 난 오빠로 굳어진 셈이군.”톰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행동하기보 다 억제하기가 그토록 힘들 줄은 몰랐다. 참는다는 것은 온갖 지성과 이성을 훤 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같은 시간 제이크는 타라로 캐시를 방문했다. 나름대로 어떤 자신을 가ㅈ던 그는 캐시의 태도에서 그가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느꼈다. “늦으셨군요, 이보단 빨리 오실 줄 알았는데?”“당신을 겁주려는 게 아냐. 우 리 이성적으로 얘기해 보자구.”제이크는 과거에 함께 침대에서 뒹굴던 때를 연 상시키려고 애썼지만 캐시의 반응은 확고했다. 어떤 접근도 허용하지 않았다. “ 난 아직 늦지 않았어. 새롭게 시작할 수도…….”캐시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 천하에 몹슬 사람 같으니! 내 생명이 걸렸다고 해도 당신을 싫어요.”“거절이 군.”제이크의 기대는 여지없이 허물어졌다. “고맙게도 느껴요. 많은 걸 배웠으 니까.원하는 걸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우는 법과 방해되는 거 있으면 가차없이 밟고 지나가는 생존법을.”그리고 타라의 소유권 50퍼센트를 넘겨주지 않으면 당장 경찰서에 가졌다는 캐시의 조건에 제이크는 무거운 발걸 음으로 타라를 나섰다. 톰에게 사라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소식을 전해주려던 빌리는 좀처럼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톰의 반응 때문이다, 모처럼 힘들게 안정 을 되찾은 그의 마음을 다시 흔들어 놓을 수는 없었다. “아말과 약속이 있어서 오래 있을 순 없다. 그런데 이상해…….”“왜요?”“아니다. 사업문제로 널 걱 정시킬 생각은 없다. 넌 안정이 꼭 필요해.”“샌더스와는 어떠세요?”“약간 불 편한 건 사실이지만 난 아직 고개만 쳐들면 스테파니가 걸어올 것 같구나.”“ 돌아가셨다는 게 진실로 믿어지지 않으시죠?”“그녀가 그리워…….”비로소 빌 리는 마음 속에 있던 말을 넌즈시 비쳤다. “톰, 사라와 안젤로가 돌아온 걸 아 니?”“네. 벌써 만나 봤어요.”뜻밖의 대답에 빌리는 적지 않게 놀랐다. “뭐라 고 했지?”“허탕치고 돌아왔다고 했어요.”빌리는 가슴이 뭉클했따. “그러니까 아직 널 오빠로 생각하겠구나…….”“안젤로와 행복하다면 구태여 파문을 일으 킬 이유가 어딨겠어요.”그것으로 빌리의 근심은 완전히 ㅆ겼으나 톰의 넓은 아 랑에 콧날이 시큰햇다. “네가 자랑스럽구나!……”“아버님이 제 친아버지라면 좋겠어요. 더 좋은 아버진 안 계실거예요.”부자관계가 아니면서도 톰과 빌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되어 함께 웃으며 힘차게 손을 맞잡았다. 남자와 남자의 결속 같은 것이었다. 한편 캐시에게 냉정하게 거절당한 제이크는 침통한 기분으로 돌 아왔다. “캐시는 더 이상 당신을 원하지 않는군요.”문제해결을 위해서는 제이 크가 다시 캐시와 육체관계를 가져도 마다 않을 지릴였다. “고집불통 같은 계 집애! 원하는 대로 해 줘야 되겠어.”“타라는 내 것이에요.”“뭐가 더 중요해. 타라와당신 생명이야?”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면 사진과 필름을 확실 히 받아두도록 해요.”해달라는 대로만 하면 말썽은 없을 거야”“못 믿어요.” “지금 그것도 문제지만 더욱 중요한 일이 잇어.”“잠시만 있어 줘요.”질리는 갑자기 실눈을 뜨며 제이크의 가슴을 더듬어 만졌다.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했다. 정신적인 긴장이나 불만 등을 잊기 위한 분위기 전환을 요구했다. 어 떤 때의 그녀는 그럴 때에 느닷없이 흥분되기도 했다. 생리때에 도둑질을 하듯 그럴 때 전에 없이 몸이 달아오르며 열정적으로 제이크에게 달라 붙었던 것이 다. “지금은 안 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빌리가 작성한 땅에 대한 보고서를 검토해야겠어..”질리는 아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공주는 어디 잇어?”“ 그 끔찍히 귀하신 분께서는 스테파니의 말을 보러 갔어요.”“말을?”제이크는 날카롭게 물었다. “그렇다니까요.”제이크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뭘 좀 알아내라고 했잖아. 따라갔어야지.”“안 그런 줄 알아요? 친애하는 공주님은 노 골적으로 닐 멀리하더라고요.”제이크의눈빛이 다시 한 번 빛났다. “내 느낌으 론 공주에게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 아직 그게 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공주는 아주 풋내기 같던데 혹시 남성적인 매력에 약하지 않을까요?”“글세 …….”그 말은 필요하다면 약혼자인 제이크를 기꺼이 공주의 침실에 보내겠다 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공주에 대해 강한 의혹을 품은 제이크는 승마장을 향 해 갔다. 그때 승마장에서는 제이크에게 들키면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토록 위태로운 상황이 시작되고 있을 때에 사라는 댄과 조용히 이야기 하고 있었다. “제가 온 후 톰은 어땠어요?”“아주 조용하던군.”“제가 애기에 대해 말하지 않을 권리가 있을까요?”“난 의사로서 그에게 충격을 주게 하고 싶지 않아.”“양심에 조금 위안이 되는군요.”“사실 나도 조금 양심에 걸리는 일이 있어.”사라는 그 문제를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오빠가 이 집에서 나간 이유 에 대한 건가요?”“그래. 제시카에 대한 거야.”댄은 솔직히 시인했다. “제시 카가 당신한테 반해서 충격을 받았데요?”“알고 있었나?”“물론이죠. 불쌍한 제시카. 부드럽게 거절하셨나요?”댄의 얼굴에 몹시 곤혹스러운 표정이 나타났 다. “사실은 그렇질 안아, 사라. 데니스는 제시카와 나 때문에 떠난거야.”그는 솔직히 고백했다. 그는 스테파니의 남편이었다. 스테파니는 데니스의 어머니엿 다. 그런 댄이 딸 같은 제시카와 사랑에 빠지자 집을 나가버린 것이다. “나도 고민했지, 제시카는 나이도 어리고……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사랑하게 됐 어.”사라 역시 실망의 빛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제시카가 엄마를 잊게 하려 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겠군요.”“아직 스테파니를 사랑해.앞으로도 그럭 거고. 하지만 우리의 결혼생활은 특히 나중엔 굉장히 나빴어.”“알아요. 회사가 문제 였죠.”“어떻게 보면 난 너무 외로웠어, 스테파니가 죽기 전에도. 제시카는 모 든 걸 주려고 해. 사랑과 젊음……그녀 자신까지도 그걸 놓치고 싶지 않아.¨사 라는 모든 문제에 대해 정면으로 부딪히기 보다는 이해하고 돌아가는 성격이었 다. “당신도 인간이에요.”“난 평생 스테파니에 대해 슬퍼할 거야.”그때 제시 카가 화려한 옷차림으로 외출에서 돌아왔따. 그녀는 연예계로 진출하기 위해 노 력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댄과 사라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사라에게 우리 얘길 했어요?”그녀는 당돌하게 사라는 향해 말했다. “데니스를 보지 않아도 우리가 반갑진 않겠지. 넌 어때?”“좀 시기적으로 이르다는 생각뿐이야.”“너 도 댄이 슬픔 속에서 지내기를 원하겠지.”제시카에게 그런 당돌함이 있었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사라는 조용히 입을 다물엇다. 마치 누눈가에게 빼앗겼던 사 랑을 되찾은 듯한 언동이었다. “사라는 우릴 반대하는 게 아녀. 이해하고 있오. ”사라는 댄이 더 이상 어머니의 남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두 분 다 행복해 지길 빌어요.”그녀는 댄의 얼굴을 외면하고 싶었다. 장레식을 치른 지 얼마 되 지 않아 벌서 딸 같은 여자와 사랑에 빠진 그를 이햐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을 듯했다. 그보다 앞서서 빌리는‘타라의 명예’가 있는 승마장에 도착했다. 주차 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존노가 그를 맞이했다. “맥매스터 씨입니까?”“그렇소. ”“아말 왕자님은 못오신답니다. 죄송하다고 전해달라시더군요.”“만사를 젖혀 놓고 달려온 거요. 자세히 설명해 주겠다고 하셨는데…….”빌리는 크게 실망하 며 카우보이 처럼의 존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를 따라오시면 궁금한 걸 아시게 될 겁니다.”빌리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존노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마굿 간 앞에서는 타리사 공주가‘타라의 명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잇었다. “정말 훌륭하구나! 네가 정말 보고 싶었단다.”그대 존노와 빌리가 다가왔다. “공주님, 맥매스터 씨가 설명을 요구하시는데요?”빌리는 아직 사실을 모르며 예의를 갖 추었다. “무례를 범하려는 게 아닙니다. 왕자님과 약속이 있는데 당신이라도 설 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주는 잠깐 입을 열지 못했다. 감정이 격해졌기 때문이다. 빌리는 그녀에게 아버지나 다름없이 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이윽고 그 녀는 얼굴의 베일을 재빨리 벗었따. “빌리, 뭐라 할 말이 없어요…….”“스테 파니!”그들은 다음 말을 잊지 못하고 뜨겁게 포옹했다. 죽었다가 환생한 딸을 만난 아버지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그때였다. 막 도착한 제이크가 자동차에 서 내렸다. 그는 무엇인가 확증을 찾아내려했다. 그리고 이미 어떤 확신에 근접 하고 있었다, 타리사 공주가 스테파니의 말을 보러갔다는 사실에서 벌써 그의 예감은 적중하고 있었다.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갑군요.”그들은 아직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적어도 나에게는…….”경영으로 늙은 빌리도 채 말끝을 잇지 못 했다. “죄송해요. 모두들 속이고 죽은 것으로 위장해 슬프게 만들었죠. 하지만 질리와 제이크를 따돌릴 유일한 방법이었어요.”“하퍼사를 되찾기 위한 일이라 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어.”살아돌아온 그녀와 만난 것만으로도 빌리는 기뻤다. 그 동안 슬퍼했던 시간들조차 기쁨으로 바뀌었다. 스테파니와 그녀의 하퍼사를 위해서는 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 그였다. 너무 반갑고 기쁜 나머지 그들은 느닷 없이 들이닥친 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다. 서둘러 뒤따라온 제이크에게 상봉장면 이 들켜버린 것이다. “스테파니!”그녀를 확인한 제이크는 거의 부르짖으며 달 려왔다. 스테파니는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급격한 사태에 빌 리가 나서 보려했지만 불가능했다. “샌더스! 그녀가 아니오!”그가 앞을 막았지만 제 이크는 확 밀치며 스테파니의 뒤를 따라 숨가쁘게 뛰었다. 그대 숲에서 느닷없 이 튀어나와 제이크를 덮친 것은 존노엿다. 제이크는 그 바람에 순간적으로 의 식을 잃었다. 존노는 스테파니를 서둘러 차에 태운 다음 승마장을 빠른 속도로 벗어나 계속 달렸다. 좀처럼 당황하지 않는 스테파니도 완전히 겁에 질렸다. “ 날 알아봤는데 도망치면 무슨 소용이에요? 이제 끝장났어요.”“여기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가능성을 있소.”존노의 생각을 스테파니는 짐작할 수 없었다. 한편 승마장에서는 빌 리가 쓰러진 제이크를 일으켜 주엇다. “따라가지 마시오. 안 그러면 왕자와는 끝이오.”“스테파니였소.”“타리사 공주였소. 당신이 그녀의 맨얼굴을 봤기 때문에 당황해서 도망친 것이오.”“그래요, 당신은요?”“난 중 동에 가서 일한 적이 있소. 타리사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소.”“스테파니가 분명해요!”그는 빌리는 뿌리치며 자동차로 달려가 앞서간 스테파니의 자동차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뒤에 남겨진 빌리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스테파니의 정체가 탄로나면 하퍼사는 그 순간이 종말일 것이 분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테파 니의 차를 발견한 제이크는 맹렬히 추격했다. “떼어버릴 수 없어요?”“그래도 에덴까지는 갈 수있소.”“에덴?”스테파니는 절망적으로 놀랐다. “존노, 그가 알았으니 이젠 끝났어요.”“그래도 마직막까지 노력은 해 봐야죠.”그에게 어떤 복안이 있는 게 분명했지만 스테파니는 절망에 빠졌다. 빌리에게 얼굴만 보이고 다시 베일로 가리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였다. 같은 시간, 에덴에서 일광욕 중이 던 질리는 느닷없이 들이닥친 아말에게 약간 당황했다. 그녀는 거의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 “안녕하시오, 스튜어트 부인.”“어머! 기대하지 못했던 영광이군 요. 죄송해요, 몸에 기름을 발라서.”“신경쓰지 마시오. 예고없이 불쑥 찾아와서 미안하오. 동생을 좀 만나야겠소.”아말은 어떤 문제에 대해 내심 초조해 하고 있었다. “승마장에서 안 돌아오셨는데요.”“그런가요?……”그의 눈에 더욱 불 안한 기운이 스쳤지만 질리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제이크도 갔어요. 지금쯤 공 주님을 구경시켜 드릴 거예요.”아말은 질리에게 놀라는 표정을 보이지 않기 위 해 경호원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소.”영문을 모르 는 질리는 아말의 속셈을 떠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잠깐 옷 좀 갈아입 고 오겠어요. 왜 목장주가 되시려는지 얘기해 보도록 하죠.”아말은 에덴의 정문 쪽을 날카롭게 살폈다. 스테파니와 빌리가 만나는 승마장에 제이크가 갔다면 문 제는 심각했다. 한편 제이크에게 추적당하던 존노는 신호등 앞에서 차를 세웠다. “뭘 해요?”“교통규칙은 지켜야죠, 빨간 불인데.”“자금은 준법정신이나 논할 때나 아니예요!”그녀는 발을 동동 굴렀다. “이래야 더 스릴이 있죠.”존노의 예측은 적중했다. 차가 서자 뒤따르던 제이크가 차를 세우고 뛰어내렸다. 한 순 간도 소중하다는 듯이 스테파니의 차를 향해 달려왔고 이윽고 가까이 접근했다. “스테파니!”그는 차창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바로 그때 신호등이 바뀌는 바람 에 스테파니가 탄 차가 출발하자 제이크는 차에서 미끄러졌다. 자연히 추격의 시간이 늦어지게 되었다. 쫓고 ㅉ기는 추격전이 전개되는 가운데 에덴의 질리는 아말의 마음을 열심히 저울질했다. 6. 위기(2) “이 땅에 대해 어떻게 아셨죠?”“에이전트가 있소.”“그런 투자를 하기에는 외진 곳이 아닐까요?”아말은 그볍게 웃었다.“난 유목민의 후손이기 때문에 외 진 곳을 좋아하오.”“그 에이전트가 누구죠?”아말은 처음부터 그녀의 속셈을 알고 있었다. “당신도 알겠지만 사업상의 비밀은 묻는게 아니오.”“네, 그렇죠. ”그대 자동차가 급하게 도착하며 존노와 스테파니가 뛰다시피 에덴으로 들어왔 다. “모두 잘 됐소?”아말은 존노를 붙잡을 듯이 물었다. “공주님은 방으로 가 시고 싶어 합니다.” 그대 필사적으로 추적한 제이크가 급브레이크를 밝고 뛰어 내렸다. “뭐가 잘못됐어요?”질리는 영문으로 모르고 공주에게 물었다. “ 아뇨. 난 쉬고 싶어요.”존노와 스테파니가 이층으로 올라갈 때 제이크가 달려오 며 큰소리로 외쳤다. “질리, 그녀를 잡아! 스테파니야!”존노와 스테파니는 더욱 서둘렀고 사태를 짐작한 아말이 재빨리 나섰다. “이게 무슨 짓이오?”“스테파 니!”계속 부르며 뒤따르던 제이크는 경호원들에 의해 제지당했다. “제이크, 세 상에 맙소사…….”질리는 제이크가 미친 게 아닌가 생각했다. “저 여자는 스테 파니 하퍼요. 내가 얼굴을 봤어.”질리가 놀라기 전에 아말은 불같이 언성을 높 였다. “뭐요, 우리 가족을 모욕하다니! 요즘의 사업방법은 이렇소?”이미 확증 을 가지고 있는 제이크는 조금도 위축당하지 않았다. 이제 그는 아말도 두렵지 않았다. “5초 후면 당신께 대답할 수 있소. 가서 얼굴을 봅시다.”그가 다시 움 직였을 때 경호원들이 재빨리 권총을 겨누었다. “공주를 방으로 데리고 가서 보호하라!”제이크는 위엄을 나타내는 아말에게 여전히 빈정거렸따. “얼마든지 점잔을 빼보시지요. 아말, 난 스테파니가 저 위에 있는 걸 아는데 언제까지 속일 작정이시오?”아말 다음으로 당황한 것을 질리였다. “아말 제이크가 큰 실례를 범하는데 해결방법은 하나밖에 없죠.”그녀도 어느덧 의심하기 시작한 듯했다. 타리사 공주를 처음 보았을 때의 모습을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아말은 신중한 남자였다. “내버려 두라고요? 말도 안 돼. 어떤 남자도 내 동생의 얼굴을 볼 수 없소.”질리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이죠. 하지만 전 같은 여자예요.”아말은 다시 위기에 빠졌다. 그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질리는 막을 구 실이 없었다. 신의 가호를 빌 수밖에 없었다. 질리가 올라갔을 때 존노가 다시 앞을 막아섰다. “허락할 수 없습니다.”“아말 전하께서 동의하셨어요.”이번에 는 존노도 그녀를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어쨌든 경호원들 뿐이다. 그는 매우 당혹스런 표정으로 방문을 열어 주었다. 문이 열렸을 때 그 정면에 공주가 앉아 있었다. 질리는 순간적으로 야릇한 감정을 느꼈다.‘제이크의 말이 사실이 라면’하는 야심 만만한 기대 가슴속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공주님, 제이크의 행동을 사과드립니다. 가서 아니라고 말할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그렇게 하시죠.”공주의 대답에 질리는 눈빛을 더욱 빛냈다. 끝가지 거절하면 제이크의 말대로 공주는 가짜임이 분명할 것이다. 그녀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었다. “얼굴도 안 보고 내려갈 수는 없어요. 제이크는 예리하죠.” 공주의 눈빛이 재빨리 스치는 게 있었지만 공주가 엄숙하게 신효하자 존노는 즉 시 벽을 향해 돌아섰다. 그 직후엿다. 얼굴의 베일을 천천히 벗은 공주를 본 질 리는 새파랗게 지렸다. “공주님, 죄송합니다, 제이크도 사과드리고 싶을 겁니다. 공주님과 왕자님께서 그의 사과를 받아들여 주시길 바랍니다.”“그럴지 의심스 럽군요. 이제 그만 내려가 보시지요.”그녀는 분명히 타리사 공주였다. 질 리가 새파랗게 질려 아래층으로 내려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래층에서는 제이크가 여전히 아말을 몰아세우는 중이었다. “이젠 그 당당함을 거두시죠. 당신 정도의 사람이라면 이런 사기극은 재고 했어야죠.”이때 내려오던 질 리가 계단에서 날 카롭게 소리쳤다. “닥쳐요, 제이크! 아말 전하, 제이크는 스테파니의 자살에 충 격이 컸습니다, 우리 모두 같았었죠. 부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제이크는 갑자기 멍청해ㅈ다. “대체 무슨 소리야?……”“이층에 계신 분은 타리사 공주 님이었어요. 얼굴을 봤다구요. 스테파니가 아녜요! 그러니 제발 입 좀 다물고 있 어요.”그녀의 뒤에 서있던 존노가 재빨리 아말에게 안심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질리, 난 미치지 않았어. 스테파니를 봤어. 여기까지 따라오는 동안 한시도 눈 을 떼지 않았단 말야. 분명히 스테파니는 이 집에 있을 거야. 저 사람이 눈짓하 는 걸 봤어.”그는 존노를 가리켰다. 방금 그다 아말에게 신호하는 제스처를 알 아차린 것이다. 하지만 질리가 믿을 리 없고 때맞춰 아말이 노여움을 터뜨렸다. “지금 당신네 나라에 있지만 더 이상 내 동생을 모욕하면 당신머리가 온전치 못할 거요.”그는 계속해서 존노에게 지시햇다. “공주를 데려오시오. 지금 즉시 여기서 떠나겠소.”“아말…….”질리는 어쩔 줄 몰라했다. “당신 회사와의 거 래는 끝이오, 샌더스. 동생의 명예를 회복할 방법을 별도로 찾겠소. 당신 하나 망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이때 이층에서는 스테파니와타리사가 긴장에 서 벗어난 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빠가 질리와 풀장에 있을 때 몰래 숨어들어 왔죠. 혹시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 노심초사 했어요. 정말 흥미진진했어 요.”타리사는 난생 처음의 경험에 들떠 있었다. “당신이 살려줬어요.”그때 존 노가 별로 밝지 않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질리는 넘어갔는데 왕자님이 불같이 화가 나셨어요.”그 말에 스테파니와 타리사는 금방 수심에 싸였다. “그걸 염려 했는데…….”“당신은 끌어들이지 않기로 약속하고 왔는데 어쩌죠?”“결정은 내가 했어요. 오빠는 늘 내 명예를 걱정하죠. 하지만 친구를 돕는 것도 명예로운 일이에요.”“당신은 빨리 여기서 빠져나가요. 스테파니. 제이크는 믿지 않소.” 그곳은 이층이다. 아래층처럼 통로가 많을 수 없었다. 스테파니가 제이크에게 들 키지 않으려면 계단을 통해서 나갈순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원래 에덴의 주인 이었다. “그는 에덴을 나만큼 몰라요.”“부두에서 만납시다.”존노는 서둘러 짐을 챙긴 다음 경호원들에게 맡기고 공주와 함께 방에서 나왔다. 스테파니는 이미 그 방에서 사라졌다, “아말 전하, 제발 재고해 주세요.”질리는 애원하며 아말을 이해시키려고 거의 안달이었다. “공주를 차로 모셔라.”“저는 잘못한 게 없잖아요.”“에덴은 당신 집이오.”“아무리 그래도…….”“당신에게 개인 감정은 없소. 하지만 당신네 회사와 계속 거래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소.”아말은 차갑게 말꼬리를 던진 다음 에덴을 나가버렸다. 그때까지 도깨비에 홀린 듯이 서있던 제이크는 재빨리 이층으로 올라가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와 같은 제 이크의 행동은 지리를 극도로 흥분시켰다. “잘도 하시는군요, 제이크. 오늘은 정말 끝내 주고 있어요.”그녀는 발톱을 도사린 암코양이 같은 모습이었다. “스 테파니가 여기 있었어. 머리를 쓰라구, 이건 음모야.”질리는 차라리 허탈해ㅈ따.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을 나무라진 않겠어요. 하지만 당신의 바보 같은 행동으 로 단 몇 시간만에 우리의 가장 큰 고객을 잃었단 말예요!”제이크는 비로소 분 노가 치밀었다. 자신의 의식이 분명한데 상대의 속임수에 넘어간 질리의 투정에 견딜 수 없어졌다. “내 말 들어 봐.”그는 질리의 팔을 우악스럽게 움겨잡으며 계속했다. “스테파니는 분명히 여기 있었어.”“아파요!”그녀는 거칠게 뿌리치 며 비웃듯이 따졌다. “공주가 비슷은 하더군요. 잘못 본게 아닌지 어떻게 장담 해요?”“확실해.”“그래요? 보고 싶었던 사람은 본게 아니고? 내 말이 맞죠? ”그녀는 폭발 직전이었다. “다른 방도 모조리 뒤지겠어.”“그녀가 살아있기를 원하는 거죠? 아직 그녀를 사랑하죠? 이제까진 모두 거짓말이었군. 그래요, 우린 끝났어요. 당장 나가버려!”그녀는 참을 수 없는 배신감과 그에 대한 분노로 두 눈에서 새파란 독기르 뿜어냈다. 빌리는 스테파니에게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 다. 하지만 그녀의 생존확인만으로 모든 걸 알아차렷다. 데니스와 사라도 스테파 니의 생존에 대한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원인은 사라가 끼고 있는 반지였다. 데 니스는 반지가 발견된 경위를 듣고 대뜸 알아차렸다. “사라, 모르겠어? 엄마가 샐종된 날 그걸 끼고 계셨어. 누가 거기다 뒀겠니?”“그럴 줄 알았어. 그래, 암 마는 살아계셔!”남매는 새로운 희망을 조심스레 가슴에 안았다. “엄마의 죽음 이 확실해야 제이크를 공격하기 쉽지.”“하지만 우리한테까지 그러셔야 했을 까?”그런 면에서는 사라가 아직 생각이 부족했다.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그 렇게 슬퍼하지 않았을 테니 제이크가 속아넘어 갈 리 없어. 나였어도 그랬을 거 야. 나도 제이크와 질리를 한 방 먹일 준비를 하는 중이야.”데니스는 새로운 희 망에 가슴을 쭉 폈다. 스테파니만 무사하다면 제이크와 질리를 거뜬히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쳤다. 꼼짝없이 당한 제이크는 전에 없이 어금니를 물었 다. 그 사실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하퍼사 전체와 자신의 생명을 거는 한 이 있어도 기필코 밝혀낼 결심이었다. 그는 여비서에게 강력하게 지시했다. “아 말에 대한 자세한 서류를 찾아와. 가족관계까지. 빌리의 서류를 찾아서 아말과 중동에서 일한 적이 있는지도. 만일 그랬다면 아말 가족과의 우대관게에 대해서 도 상세히 찾아봐.”처음 멋모르고 그와 관계를 가ㅈ던 여비서는 냉혹한 세상을 뼈저리게 경험하였다. 어처구니 없게도 상사와의 은밀한 관계는 근무에 전혀 도 움도 특혜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한편. 호텔로 돌아온 아말은 실제로 불 같이 화를 냈다. 일국의 군주로서 이날 그가 겪어야했던 사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당신ㄷㄹ 말을 듣는 게 아니었소.”“스테파니는 친 구예요. 그런데 어떡해요?”아말은 타리사가 변명하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넌 조용히 해. 내 동생이 도둑처럼 몰래 남의 집에를…….”“아말, 할 말이 없어요. 이런 일이 생겨 정말 유감이에요.”“타리사는 관여시키지 않기로 약속 했잖소.”곁에 있던 존노가 끼어들었다. “그럼 어떡합니까. 제이크는 따라오고, 그때 번뜩…….”“당신 머리에서 나온 생각인 줄 벌서 알았소.”아말은 존노에 게도 불만을 나타냈다. “좋아요. 내 잘못이오. 하지만 발각되진 않았잖소? 원한 다면 사과하죠. 모두에게 사과합니다. 자, 이제 그만합시다.”스테파니의 설득과 존노의 사과에도 아말의 분노는 쉬 풀리지 않았다. “우리 나라에서는 당신 같 은 사람의 손목을 잘라버리오.”곁에서 불안해하던 타리사가 다시 조심스럽게 기어들었다. “스테파니와 존노는 오빠가 그렇게 화내실 줄 몰랐어요.”그녀의 두둔은 오히려 아말의 분노를 돋구었따. “넌 알았지! 네 방으로 가라.”스테파 니는 대꾸도 못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타리사의 뒷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흥 분했다. “꼭 그렇게 애처럼 다뤄야 해요?”“우리 나라에서 여자는 복종해야만 하오. ”“그렇다면 난 그런 곳에선 절대로 행복할 수 없어요.”“우리의 문화를 이해해 줬으면 좋겠소.”스테파니의 저항에 아말은 약간 누그러졌고 때마침 그 의 연락을 받은 빌리가호텔로 들어섰다. “빌리, 기다리고 있었소.”“왕자님, 스 테파니와 얘기하고 싶습니다.”스테파니는 아말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빌리와 다른 방으로 갔다. 목숨보다 중요한 여동생의 명에에 대해 진노했던 아말은 역 시 스테파니를 여전히 사랑했다. 옆방에서 스테파니와 대면하게 된 빌리는 한숨 부터 내ㅂ았다. “제이크가 당신을 못쫓게 하려니까 분명해지는 게 있더군. 당신 을 확실히 알았으니 모든 게 끝났다고 말야.”“내가 아니라고 설득할 수 없어 요?”“가능만 하다면.”“하셔야 해요. 그게 안 되면 정말 끝장이에요.”“그보 다 먼저 설명해 줘야 되는 거 아냐? 혹시 북쪽 땅과 관계 있나?”스테파니는 자 신들의 계획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 땅을 왜 사려는지 궁금하게 만든 다음 타 리사로 변장한 스테파니가 교묘히 거기서 기름이 나온다고 누설하면, 그 땅이 금방 수억 달러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제이크와 질리는 당연히 즉시 매입할 것이고 매각한 그 돈으로 다시 하퍼사를 사들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한테는 그게 안 통하지.”“무슨 소리예요?”“난 의심스러워서 그 땅 을 조사해봤어. 보고서가 제이크의 책상에 있어서 제이크가 그걸 읽으면 끝장이 지.”“벌써 읽었어요?”스테파니는 모든 계획이 빌리의 철저한 업무태도에 의 해 물거품이 되지 않기를 간곡히 바랐지만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묻제의 땅이 전혀 쓸모없다고 밝혀지만 그 순간이 계획의 종말인 것이다. “글세, 당신 을 따라다니느라 아직 못 읽었을지도…….”“그럼 오늘 밤 그걸 꼭 찾아오세요. 아시죠?”“알아.”빌리 역시 암담해졌다. 자신이 스테파니의계획을 무산시키는 장본인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그 순간 빌리의 목숨도 끝장날 수밖에 없었다. 제이크는 단념하지 않았다. 하지만 실리적인 안톤은 심각 하게 충고했다. 우선 아말과 질리에게 사과하라는 것이었다. 제이크 역시 그의 말에 일단은 수긍했지만 나름대로 뒷조사를 시켰다. 빌리와 아말 가족의 관계 등에 대해서 조사한 여비서의 보고는 제이크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맥매스 터 씨는 종동에서 근무하신 적이 있으며 궁성에도 아말 아버지의 친구 자격으로 초대된 적이 있어요.”여비서는 증빙서류까지 준비했다. “그럼 아말의 가족관계 는?”“아말은 남자형제들과 타라사라는 이름의 여동생이 하나 있어요.”그것으 로 빌리나아말의 이야기는 모두 사실로 증명된 셈이다. 제이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또 다른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한편 스테파니의 부탁을 받은 빌리 는 밤인데도 불구하고 곧장 하퍼사로 달려갔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제이크가 아 직 퇴근하지 않고 있었다. “여기 있을 줄 알았소.”“급한 일이라도 있나요?” 제이크는 여비서를 먼저 퇴근시켰다. “방금 당신이 했던 말들을 확인해 봤죠.” 빌리는 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내가 왜 그런 일을 거짓으로 말하겠소.”“당 신은 스테파니 일이라면 무슨 짓이든 하니까요.”빌리는 이때다 싶었다. “스테 파니는 죽었소. 이제 내 일은 회사일 뿐이오. 중요한 고객이 당신의 터무니없는 망상 때문에 떨어져 나가는 것을 묵과 할 수 없소.”그는 자신이 제출한 서류가 제이크의 책상 위에서 개봉되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것을 확이했다. “내 개인 자료에 대한 조사가 끝났으면 돌려주시오.”그는양해를 구하며 재빨리 책사 위 의 서류들을 들고 문을 향했다. 그때 제이크가 갑자기 불러서 빌리를 섬칫하게 만들었다. “그 북쪽 땅에 대한 보고서는 어떻게 됐소, 약속한 날짜가 지났는데? ”“알고 있소. 아침에 독촉하겠소.”재빨리 제이크의 사무실을 빠져나온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마터면 스테파니의 계획을 무산시킬 만한 보고서는 이 제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다. 이튿날 제이크는 안톤의 충고대로 질리에게 사과하기 위해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 “이 말을 사랑의 정표로 당신에게 주 겠소.”그것은 전날 스테파니에게 선물했던 말이다. 그는 선물공세에 약한 질리 를 그렇게 다시 끌어들었다. 승마장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상히 생각했던 질리는 확실히 마음이 플기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그곳에 와있던 댄과 제시카를 발견 한 질리는 비뚤어진 마음으로 가득찼다. 댄은 아말이 스테파니에게 선물한 말‘ 타라의 명예’를 훈련시킬 작정이었다. “사이가 좋아 뵈는군요. 이제 스테파니 는 잊었나 보죠?”“당신과는 얘기하고 싶지 않소.”댄은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나타내며 돌아섰다. 제시카 역시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질리, 당신도 언 젠가 당할 날이 있어요. 꼭 지켜볼 거예요.”“네 장래는 어떻고? 댄은 흉터있는 여자를 좋아하니까.”제시카는 찬바람이 일도록 홱 돌아서서 댄과 가버렸고 질 리는 소리내어 웃었다. 제이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봐요, 제이크. 댄과 제시카가 스테파니가 죽은 걸 증명해요. 살아 있다면 저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 았을 거예요.”“반박의 여지가 없소.”제이크는 솔직히 시인하는 듯했다. “당 신의 선물이 마음에 들어요. 이걸‘복수’라고 이름 지어야 겠어요.“’어릴 때 취미가 혹시 잠자리날개 꺾기 아니오?“’나비였어요.“그것으로 제이크는 질리 의 마음을 돌려놓는데 성공했다. 한편 아말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다. 그는 타리사를 즉시 본국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난 돌아가기 싫어요.”“벌 주려는 게 아니고 네 명예를 지켜주려고 하는 거다. 넌 공주야. 센더스가 공주를 조사하 도록 뇌둘 수 없다.”“제이크는 설득됐을지도 몰라요.”질리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스테파니의 말이었다. “스테파니 당신에 대한 약속을 지키겠소. 원한다 면 샌더스에게 가서 계속 거래하겠다고 말하지.”“아뇨. 날 위해 그런 수모까지 감수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래요, 제이크가 이겼는지도 몰라요…….”스테파니의 그와 같은 좌절은 현실과 달랐다. 그녀의 말대로 제이크는 질리에 의해 완전히 설득당했다. 질리는 아말이 북쪽 땅을 왜 사려는지에 관심이 집중했다. 그리고 제이크에게는 아말에게 사과할 것을 거듭 강요했다. 또한 스테파니의 계획을 성 공시키려는 빌리의 지능적인 방법에 제이크를 동시에 압박했다. “아말을 설득 하지 못하면 어마어마한 손실이 생길 것이오.”“과장이 심하시군.”“세 가지 이유가 있소.”“그게 뭐죠?”“하나는 아말과 관련된 몇백이나 되는 거래처요. 둘째는 아말이 다른 고객들도 주선해 줬으니 그가 떠나면 다른 고객들도 등을 돌릴 거라는 점이오. 또 세 번재는…….”“됐어요, 됐어. 나도 알아요.”“세번 재는 국제사회에서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이오. 이 문제가 알려지면 당신 의 신뢰도가 땅에 떨어질게 분명하오.”“당신이 알아서 하시오.”그렇게 업무를 넘겨받은 빌 리가 내심 만족하며 나갔을 때 연락 받은 안톤이 들어왔다. “빌리 를 미행해. 스테파니를 위해 일하니까 그녀한데로 갈 거야.”안톤은 안면을 잔득 찡그렸다. “내 말은 통 안 듣는군. 사업이 엉망진창인데 아직 죽은 여가나 쫓아 다니고 있다니!”“스테파니는 안 죽었어. 완전히 증명될 때까지는 회사도 위험 해. 자 어서 나가서 시키는 대로 하게.”제이크의 그와 같은 집념에는 안톤도 혀 를 내둘렀다. 제이크의 판단은 정확했지만 모든 정황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판단을 혓된 망상으로 일축하게 만들었다. 한편 캐시를 통해 데니스의 근황을 알게 된 사라는 깜짝 놀랐다. “제이크와 질리를 골탕먹이려고 해서 도아주기로 했었어.”“어떻게?”“컴퓨터를 조작해서 금괴를 빼돌려 암시장에 판다는 거야. ”“돌았어. 왜 그런 일을 도왔어?”행동적이고 과격한 데니스에 비해 사라는 이성적이었다. “이유는 분명하잖아. 데니스지. 갑자기 나한테 다정하게 대해주 니까 앞 뒤 생각없이 그렇게 한 거지.”“말려야만 해.”“난 손떼겠다는데도 혼 자서 하겠다는 거야. 그는 컴퓨터에 그리 능숙하지 못하니까 조만간 잡힐 거야. ”사라는 크게 걱정했다. 캐시의 말대로 데니스는 겁업싱 회사의 금괴를 빼내 암시장에 내다 팔았다. 소송할 자금을 마련하려는 상당히 위험한 모험이었다. 캐 시의 우려처럼 그느 머지 않아 꼬리를 잡히게 된다. 7. 하퍼가의 세 여인 톰은 자신의 문제에 대해 쓰라린 결단을 내렸다. 자신이 어떤 위험에 빠졌는 지 아직 모르는 데니스가 찾았을 때 그 결심을 밝혔다. “혼자서 걷는 걸 보니 기쁘군.”“나도 기뻐. 의사들이 유능해서 그래. 난 여기에 있지 않을 거야.”“ 그래?”“미국으로 떠나.”“언제?”“내일. 그리고데니스, 사라에게는 비밀로 해줘, 작별하려 올지도 모르니까. 그건 견딜 수없을 것 같아.”“그럼, 그럼……. ”데니스는 톰의 마음을 짐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서 임신했다던데 행운 을 빈다고 전해 주게.”“네가 떠나는 걸 빌리는 어떻게 생각하시지?”“이해하 셔.”“제이크한테 가시다니 놀라워,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어. 경영자문?…… ”데니스는 노골적인 불만을 나타냈다. 그는 스테파니가 돌아온 걸 아직 모르고 있었다. 같은 시간 에덴에서는 질 리가 존노와 만나고 잇었다. “왕자님께서 어 제의 일을 오해로 받아들이셨으면 좋겠어요.”두 사람의 대화에는 각각의 숨겨 진 타산이 맞물려 있었다. “글세요……명에에 관한한 완고한 분이시죠.¨…그런 데 당신은 여기 웬일로 오셨어요?”첫번째 작전에 실패한 스테파니 일행은 두 번째 작전에 돌입하엿다. “어제 일로 책임추궁을 당했죠. 내 책임이란 겁니다. ”“그게 나와 무슨?”“값만 적당하다면 새로운 주인을 모셔볼까 하고요, 특히 매력적인 여인은.”그럴 듯한 존노의 말에 질리는 쉽게 넘어갔다. “왕자님이 언 짢게 생각하시지 않을까요?”“난 빈손으로 오지 않았죠. 그가 갖고 싶어 하는 땅에 대해 궁금하지 않나요?”“가서 술이나 한 잔 가져오지 그래요?”그녀는 안달이라도 난 듯이 하퍼사로 제이크를 찾아갔다. “난 오늘 회사를 위해 큰 일 을 했다구요.”“궁금한데?”“아말이 왜 그 땅을 사려는지 알았어요. 기름이에 요. 우리가 선수를 쳐야해요.”“그 정보는 누가 줬지?”제이크는 질리처럼 놀라 지 않았다. “존노요. 공주의 보디가드 있잖아요.”“질리, 웃기지 마.”하지만 질리의 생각은 이미 굳어져 있었다. “당신의 어리석은 행동이 이걸로 만회됐어 요. 그는 공주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고 쫓겨났데요.”“함정이야. 그걸 줄 알았지. 어린애라도 알 수 있어. 그 땅은 잊어버려.”“함정이라뇨? 누구의 함 정? 이름을 대 봐요. 스테파니일까요?”질리는 제이크의 판단을 받아들이지 않 았다. 조노의 세 치 혀 끝에 넘어가 버린 것이다. 스테파니 측에서는 더욱 치밀 하게 계획을 진행시켰다. 그녀는 빌리가 가져온 보고서 대신 가짜를 준비했다. 그 땅에 기름이 무진장 매장되어 있다는 내용의 거짓보고서였다. 그리고 그보고 서는 제이크보다 앞서서 질리의 손에 넘어갔다. 스테파니 측으로 보면 금상첨화 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럴 즈음 사라의 주변에서 예상밖의 문제가 발생했다. 데니 스의 행동을 충고하던 그녀는 안젤로를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엇따. 톰의 부탁을 잊은 데니스가 안젤로에게 톰의 당부를 무시하고 털어놓았던 것이다. “ 톰이 내일 미국으로 떠난대, 난 네가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깜작 놀란 사라는 즉시 댄에게 달려가 의논했다. “난 그러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해, 사라.”댄은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끝까지 숨기기를 충고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그의 아이에요. 알 권리가 있어요.”톰조차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가슴아픈 결단을 내린 마당에 사라는 자청해서 폭풍우를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안다고 뭐가 달라지지? 널 잃고 거의 폐인이 됐있어. 아이일을 알면 어떻게 될까?”“ 그는 평생 거짓말만 듣고 살아왔어요. 저는 그럴 수 없어요.”“톰을 위해 그러 는 거냐, 아니면 짐을 덜고 싶은 거냐? 그런 말을 하면 결코 안 되는데도 고집 을 피우겠다면 네 뜻대로 하렴.”사라의 진실은 문제의 중요성으로 비추어 시한 폭탄 같은 것이었다. 작게는 톰과 그녀 그리고 안젤로에 관한 문제지만 크게는 하퍼가문을 뒤흔들어 놓을 수도 있었다. 스테파니의 계획은 차질없이 진행되었 따. 질리는 존노에게 정보의 대가로 일시적인 쾌락까지 허락했다. 나중에 한 몫 준다는 조건과 함께 침대로 글어들인 것이다. 문제는 사라였다. 질리가 북쪽의 땅을 사들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동안 사라는 이미 결정했다. 질리는 그 땅을 사들이기 이해 제이크에게 상의도 없이 소유한 모든 것을 저당잡혔다. 에 덴을 포함해서 타라까지 저당잡혀 우선권을 확보했다. 사라 역시 진실을 밝히기 로 마음을 결정했다. “안제로, 난 공항에 가요. 톰은 사실을 알아여 해요.”“대 체 뭘 어쩌려는 거야?”안젤로는 크게 화를 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겠 어요.”“톰에게는 무슨 짓이고? 내가 그렇게 무신경한 줄 알아? 5년이나 10년 후를 보자고. 그대 자기 자식이라고 우기면 어떡하지?”“미안해요.”사라는 끝 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내 말도 안 듣더군.”댄 역시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그녀도 하퍼가의 여자답군요. 좋은 걸 가지면 참지 못하고 망가뜨려야 직성이 풀리죠.”그녀가 공항으로 가고 있을 때 제이크는 질리를 통해 기절할 만한 사 실을 비로소 알았다. “난 모든 걸 저당잡혔어요. 그걸로 그 땅의 우선권을 샀 죠. 불쌍한 아말 왕자…….”“이런 바보 같은!”제이크는 넋바진 사람처럼 잠시 멍해졌다. 하지만 질리는 자신이 덥썩 물고 있는 미끼의정체를 전혀 깨닫지 못 했다. “당신도 안 됐어요. 조만간 나는 호주 제일의 부호가 될 거예요. 그리고 당신이 죽은 여자에 빠져있을 동안 이 회사를 뺏겠어요!”“어떻게 해야 정신차 리겠소?”“크게 한 몫 잡으려면 정신을 안 차릴 수 없죠.”“사기야. 내가 안속 으니까 당신을 붙잡은 거라구.”“믿지 않아요. 이미 늦었다구요.”제이크의 낯 빛이 변했다. “설마 서명한 건 아니겠지?”“스물네 시간 안에 해요. 날 막진 못해요.”“질리, 이건 고전적인 수법이야. 모르겠어? 스테파니를 망치고…….” “스테파니는 죽었어요.”질리는 역시 하퍼가의 여인이었다. “그래서 똑같은 방 법으로 당신을 파멸시키려는 거란 말이요.”“이 보고서에는 그 땅에 기름이 가 득 묻혔어요. 당신은 스테파니가 살아 있다고 우기지만 증거 있어요?”스테파니 에 대한 확신이 현재로서는 제이크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 “당신은 파산하게 될 거여. 그래도 난 보서시켜 주지 않겠소.”“내 생각은 않고 자기 말을 증명할 생각뿐이군요.”“이 일이 끝나면 당신은 출감 후나 똑같은 처지가 될 거요.”질 리는 제이크의 어떤 충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난 무지무지한 부자가 될 거예요. 부자든 가난하든 당신은 나와 함게예요. 결혼반지도 없고 교회에 서 지도 않았지만 육체는 나누었어요. 그것으로 우린 묶여있어요. 그러니 샴페인이 나 주문하시고 축하할 준비나 하시라고요.”제이크는 속수무책이었다. 잘못되고 있음을 확신햇지만 무엇으로도 질리를 만류시킬 수 없었다. 오직 한 가지만 생 각하는 사라는 하퍼사를 뒤집어 놓고 스테파니까지 궁지에 몰아넣기로 작정한 듯이 곧장 공향으로 달려갔다. 마침 빌리와 작별을 나누던 톰은 그녀를 보자 얼 굴을 찡그렸다. “이 말은 꼭 해야겠어요. 아기 아버지는 당신이에요. 애는 몰라 야 하지만 당신은 알아야 해요. 미안해요. 우리 둘을 위해서…….”지켜보던 빌 리가 깜짝 놀라 재촉했지만 톰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사라, 내 말을 들어. ”“변하는 건 없어요. 내가 네 오빠가 아니란 증거가 가졌어. 난 스테파니의 아 들이 아냐!”이번에는 사라가 놀랐다. “그럴 리 없어요.”“내가 회복됐을 때 넌 결혼했어. 난 네가 행복하길 바라고 얘기하지 않았어. 아이에 대해 알았더라 면…….”“아뇨. 난 믿지 않아요.”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울기 시작했다. “못믿겠다면 아버님게 여쭤 봐.” 곁에 있던 빌리는 침통한표정으로 시인했고 사라는 더욱 슬픔에 빠졌다. “아녜요!” 갑자기 소리지르며 달려가던 사라는 앞 에 있던 커다란 물체에 부딪혀 쓰러지며 배를 움켜쥐었다. “구급차를 불러요!” 톰은 정신없이 소리치며 쓰러진 사라를 부축했다. 자신의 한 마디로 모든 평화 를 깨뜨린 사라는 병원으로 실려가면서도 가만히 있지 않앗다. “톰, 가지 마세 요. 우리의 아기를 잃고 싶지 않아요.”사라의 어리석도록 진실한 마음은 궁지에 몰린 제이크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아말과 스테파니에 대한 뒷조사는 진 척이 없었다. 경호원들의 눈을 피해 그곳에 잠입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럴 때에 사라의 소식이 제이크의 귀에 들어갔다. 스테파니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그는 금방 묘안을 떠올렸다. 그것은 사라의 병세를 언론에 확대시켜 스테 파니가 병원으로 달려가도록 하려는 작전이었다. “스테파니는 오래 숨어있지 못해. 에미는 자식이 몹시 아프면 날아오는 법이지.” 제이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의 계획은 스테파니의 계획처럼 신속한 효과를 나타냈다. 신문에서 사 라의 과장된 기사를 읽은 아말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스테파니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군.”“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갑니다.”존노는 대뜸 우려를 나타냈 다. “그건 그녀가 결정할 문제지……!” 그때 스테파니가 공주와 웃으면서 들어 왔다. “무슨 일이 있어요?”침통한 두 사람의 표정에서 의아해진 스테파니는 아말이 건네준 신문을 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세상에……가 봐야 해요! ”제이크의 계략이 적중했다. 그녀 역시 하퍼가의 세 여인 중 하나엿다. “스테 파니!”타리사 역시 사태를 짐작하고 극구만류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댄과 안젤로의 진지한 충고를 무시하고 공항으로 달려간 사라 그리고 제이크의 확실 한 충고를 무시한 질리 등 세 여인은 운명에 이끌려 이성을 ㅇ고 있었다. “난 가야해요.”그녀는 아말과 존노도 모르게 빠져나갈 결심이엇따. “함정이면 어쪄 죠?”타리사는 스테파니에게 친구 이상이었다. “걸리게 되겠죠. 하지만 사라가 어떤지 봐야만 해요.”타리사는 황급히 나가는 그녀를 원망에 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타리사 역시 아말과 존노처럼 그게 알 수 없는 함정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는 것이다. 기사문제에 대해서는 병원의 사라와 데니스도 의아해 했다. “왜 내가 위독하다고 신문에 났지?”데니스는 대뜸 말했다. “맞춰 봐, 제이크야. 엄마를 끌어내려는 속셈이지. 그렇게 될 거야.”그 역시 스테파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막을 수 없을까?”“어떻게? 어디 계신지도 모르고 나가서 경고할 순 없잖니. 경고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벌써부터 병원을 감시할 테니 내가 보면 동시에 그들도 엄말 볼 거여.”“엄마가 오지 않으시면 좋겠는 데…….”사라는 모든 게 자기 탓임을 깨닫지 못한 채 스테파니에 대한 불안과 초조에 휩싸였다. 제이크는 사라가 입원한 병원 주변에 여러 대의 차량을 동원 해서 물샐틈없이 감시하게 만들었다. 그의 추측대로 스테파니가 병원 안에 나타 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을 때였다. “저 여자야. 즉시 안톤에게 연락해서 독수 리가 착륙했다고 전해.”제이크가 드디어 발견하고 입가에 만족한 미소를 지을 때 아말은 허위보도임을 알았다. “빌리가 전화했는데 사라는 위독하지 않다더 군.”“그럴 줄 알았죠. 함정이에요.”“스테파니는 어디 있지, 안심시켜야 되는 데?”그들은 스테파니가 없어진 사실에 다시 한 번 경악했다. “이런 바보 같은 여자!”허털감에 빠져 투덜대던 존노가 다급하게 말했다. “제이크가 잡기 전에 그녀를 말려야 돼요!”“우리가 뭘 할 수 있겠소?”“몰라요.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죠.”그런 면에서 존노는 탁월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승마장에사의 위기 를 모면한 것도 그의 예지였다. 그가 호텔을 급히 빠져나갈때였다. 스테파니는 자신이 제이크에게 발견된 사실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사라의 병실에 들어섰다. “나다, 얘야.”“엄마!”막 눈을 뜨던 사라는 기쁨으로 어쩔 줄 몰라하며 스테 파니의 품에 안겼다. “어떤 거니, 응? 알 방법이 있어야지.”“의사가 괜찮댔어 요. 어빠는 엄마가 살아계신 걸 알았어요.”그때 데니스가 막 들어와서 어머니와 해후했다. “부활하시는데 3일보다 오래 거리셨군요.”그렇게 해서 남매와 어머 니의 재회가 이루어졌다. 코 앞에 닥친 위험에도 불구하고 스테파니는 순간적인 기쁨에 만족했다. “데니스, 너희들과 연락하지 않은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 른단다. 너희들은 너무 사랑하니까.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었단다……!”“또 이러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용서해 다오, 얘야. 너희들이 알았다니 다행이구 나.”“정말 보고 싶었어요.”사라는 데니스와 함께 다시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신문엔 위독하다고 났더데?”“제이크의 미끼였어요. 그것을 엄마가 덥썩 물 으신 거죠.”확신에 찬 제이크는 질리를 강제로 병원까지 데려왔다. “10분 전에 들어갔어. 모든 축구를 봉쇄했으니 아직 여기 있어.”“항상 그거죠! 이젠 충분 해요!”질리는 홱 돌아서서 걸어나갔다.“이봐, 어디 가는 거여?”“보면 믿겠 지?”그는 강제로 질리의 팔을 낚아채며 움켜잡았다. “놔 줘요. 아프단 말이에 요!”“닥쳐!”이번에야말로 사실을 증명하려는 양 제이크는 강압적으로 그녀를 끌고 병원 복도를 걸었다. 그때 병실에서는 사라가 톰과 안젤로의 문제에 대해 서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고 있었다. “바보 같은 일은 안젤로도 어떤 면 으로는 사랑한다는 거예요.”“차선책은 항상 후회하기 마련이란다. 그때 문이 열리며 의사로 변장한 존노가 급히 들어섰다.”“제이크와 질 리가 이리로 오는 중이오. 이제 어떻게 여길 빠져나갈 수 있지?”그는 거의 낯빛이 창백할 정도로 긴장되어 있었다. “괜찮아요. 내가 이럴 줄 알고 준비해 뒀어요.”데니스는 재 빨리 움직였다. 아옹다옹하던 제이크와 질리는 그들 곁을 스쳐가는 이동침대를 무심코 지나쳤다. 마스크에 모자, 가운을 걸친 의사가 시트로 온몸을 덮고 발만 내놓은 환자를 옮기는 중이었다. 제이크는 의기양양하게 앞장서서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병실로 들어갔다. “늦으셨군요, 제이크.”데니스가 태연하게 그 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디 있지?”“여기요. 약을 먹었으니 시끄럽게 하지 마세요.”침대에누운 것을 사라였다. 제이크는 당황하며 병실 안을 뒤지기 시작 했다. 침대 밑이며 화장실 등을 정신병자처럼 온통 들쑤시고 돌아다녔다. “뭘 찾아요?”“스테파니!”“무슨 소리죠?”질리의 표정이 싹 달라졌다. “이게 무 슨 바보짓이에요!”“닥쳐!”제이크는 날카롭게 소리치며 여전히 병실을 뒤졌다. “무슨 일이에요, 질리?”사라가 어리둥절해서 묻자 제이크가 다그쳤다. “사라, 사실대로 말해. 엄마가 오셨었지?”“엄마는 돌아가셨는데…….”“거짓말 마, 너희들 둘 다…….”“그만해요, 당신이나! 사라는 지금 아파요!”질리는 홱 나가 버리는 제이크를 무시하고 사라에게 사과하듯 부드럽게 당부했다. “미안해, 사 라. 어서 낫도록 해.”“제이크는 병원에 가야겠군요.”“제이크는 병원에 가야 겠군요.“질 리가 꽁지를 사린 강아지처럼 나가버린 후 사라는 큰 소리로 승리 를 축하했다. 존노의 신속함과 데니스의 사전 준비가 제이크를 멋지게 한 방 먹 였다. 뒤늦게야 제이크는 성급히 그들을 지나쳐 가던 침대차를 기억해 냈다. 하 지만 질리는 그이 통탄을 신경질적으로 무시할 뿐이었다. “마스크를 쓴 의사가 아말의 보디가드야, 존노라는 사람! 그렇게 우리의 코 앞에서 빠져나간 거야.” “정말 못말리겠군요. 당신 지금 얼마나 심리적인 압박을 받고 있는지나 아세 요?”제이크는 들끓는 분노를 느꼈지만 어떻게 해 볼 묘안이 없었다. 아슬아슬 하게 성공한 한 판 승리에도 불구하고 사라는 이내 고민에 빠졌다. 병실에 찾아 온 안젤로와 벌써 의견충돌이 일어났다. 상황이 변했다는 그녀의 말에 안젤로는 대뜸 화를 냈따. “날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최소한 조금은.”“그래.”“하지만 그를더 사랑한다는 거야? 난 널 보낼 수 없어!”그때 공교롭게도 미국행을 포기 한 톰이 병실로 들어섰다. 안젤로와 톰은 사라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격결하게 다투었다. 주먹다짐 직전 톰이 먼저 단념하고 나갈 때 안젤로가 소리쳤다. “다 신 여기오지 마?”톰도지지 않았다. “나한테 그렇게 말할수 있는 건 사라뿐이 야.”사라는 자초한 문제 때문에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하퍼가의 여인 답게 고집을 꺾지 않은 결과가 그것이었다. 데니스는 한 판 승리를 기뻐할 겨를 도 없이 복수심에서 벌여놓은 금괴누출이 발각되 덜미가 잡혔다. 빌리의 세심한 우려와 충고가 있었지만 데니스 자신도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빼돌린 금괴가 증거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데니스는 벼랑 위에 서잇는 기분으로 캐시에게 달 려갔지만 그녀 역시 절망적인 반응이었다. “내가 도와도 소용없어요. 그들이 의 심하지 않을 때나 통용돼요.”“몇 시간 안 남았아.”그 문제에 대해 제이크는 빌리에게 조사하도록 시키지 않았다. 안톤에게 직접 지시했다는 사실을 빌리에 게서 전해들은 데니스는 숨이 턱에 찼다. “방법은 하나뿐이에요. 증거가 없으면 당신을 체포할 수 없으니까 당장 금을 없애요.”“헐값에도 팔기 어려워. 그리고 지금까지의 수고도 물거품이…….”“정신차려요, 데니스. 지금 상황이 급박해요. 바다에 쳐넣은 한이 있어도 금을 당장 없애요!”캐시의 다급하고 진실된 충고에 데니스는 더욱 초조해졌다. 복수만을 생각하고 앞 뒤 생각없이 행동한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더구나 안톤은 이미 확실한 증거를 잡고 그 사실을 제이크에게 알렸다. 제이크는 그 소식에 대해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보낸다고 확신했다. 이 번에야말로 스테파니를 끌어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런 물제들과 함께 하퍼가 에 또 한 차례의 심상치 않은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다. 스테파니였따. 그녀는 하퍼가의 여인임을 다시 증명하려는 듯이 댄과 제시카의 관계를 확인하겠다고 말했다. “미친 짓이오. 그건 오히려 당신을 괴롭힐 뿐이오.“아말은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그와 제시카를 내 눈으로 봐야만 해요.“’당신이 죽은 줄 아는데… ….”“난 알아야겠아요. 다시 산 사람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아말은 혀를 찼다. 그 역시 스테파니를 막지는 못했다. “이것은 틀린 일이오, 스테파니.”“ 제발요, 아말…….”타리사로 분장한 스테파니는 댄에게 가는 도중 벌써 제이크 의 지시에 따르는 미행자와 만났다. “제이크의 사람이 우릴 미행하고 있소.”스 테파니는 고집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배반감과 질투에 사 로잡혀 애초의 계획을 망각한 채 행동하고 있었다. 8. 한판 승부 아말은 긴장한 가운데 타리사로 변장한 스테파니를 데리고 댄과 제시카를 방 문했다. “동생 타리사 공주를 소개하겠소.”“공주님, 여긴 제시카 스튜어트입 니다.”스테파니의 베일 속 얼굴은 아무도 볼 수 없었다. “당신도 하퍼가의 친 구인가요?”그녀는 음성도 변행시켰다. 그리고가급적이면 댄과는 시선을 마주치 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 이상이. 우린 가능하면 결혼할 생각입니다.”“아, 축 하하오. 댄은 운이 좋군요.”아말은 곁의 스테파니에게 강조하듯 큰 소리로 말했 다. “감사합니다, 왕자님.”“난 언제나 당신의 우정을 중요하게 생각했죠.”’ 이제 과거는 흘려보냅시다.“’그렇게 간단한 일인지 의심스럽구료.“아말의 그 말도 스테파니를 의식한 것이었다. 하지만 스테파니는 조용히 듣고만 있지 않았 다. “부인의 일에 깊은 조의를 표합니다. 적당치 않은 것 같지만…….”그녀는 제시카의 표정을 재빨리 살폈다. “아직은 스테파니 생각을 많이 합니다.”“당 신이 있어서 다행이었군요.”스테파니의 말에 아말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우리 하고는 관습이 틀리단다, 타리사. 우리 나라는 추모기간이 길지요.”“저도 빠르 다고는 생각합니다만, 그렇다고 사과할 생각은 없습니다.”“저도 빠르다고는 생 각합니다만, 그렇다고 사과할 생각은 없습니다.”“오빠가 덩신의 결혼생활이 행 복하지 않았다고 하셨어요.”그녀의 뼈잇는 말에 아말은 놀라며 급히 사과했다. “동생을 용서해 주시오. 항상 저렇게 직선적입니다.”그는 댄과 제시카의 표정 이 변하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직선적인 게 좋죠. 더 기단린다해도 달라진 건 없어요. 스테파니를 대신할 수도, 그럴 생각도 없어요. 그녀는 일이 우선이었죠. 댄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지만 전 달라요.”제시카의 당돌한 말에 스테파니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며 댄에게 재빨리 물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댄?”그녀가 자제력을 잃은 태도에 누구보다 아말이 크게 당황하였다.“타라사! 백배사죄하오. 넌 그런 질문할 권리가 없어!”아말은 타리사를 꾸짖는 한편 댄에 게 머리숙여 사과했다. “아뇨. 제시카가 약간 심하게 말했지만 그녀가 옳아요. 사람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해도 할 수 없는 일이죠.”스테파니는 그들의 관계를 확인하며 자신의 가슴 속에 찬바람이 이는 것을 느꼈다. 댄은 이미 제시카에게 로 마음을 빼앗긴 듯했다. 호텔로 돌아온 스테파니는 침통한 기분을 벗어던지지 못했다. “당신은 스테파니 하퍼요, 당신은 튕겨나오는 여자란 말이오.”아말에 곁에서 존노를 거들었다. “이번만은 나도 존노와 동감이오. 당신은 이번 일도 극복할 힘이 있소. 그리고 원한다면 댄을 되찾을 수도 있을 것이오. 원한다면 말 이오. 그게 중요하지 않소?”“아닐지도 몰라요. 가게 놔 두는 게 둘을 위해 나 을지도 몰라요.”스테파니는 자신의 갈등과 소리없이 싸웠다. “가지려는 것은 힘이지만 가게 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지. 이제 거의 다 끝났소. 내일 아침이면 질리가 계약서에 서명할 테고 당신은 제이크와 싸울 돈이 생기지. 질리와 제이 크가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되는 날이 벌써 기다려지는군.”하지만 아말의 그런 기대는 발설한 직후부터 벗나갔다. 밖에서 급히 들어온 존노가 그 소식을 두 사 람에게 알렸다. “제이크 샌더스가 아래층에 와서 스테파니를 찾는 답니다.”아 직 상황을 정확히 모르는 아말은 경호원을 시켜 쫓아버리려 했지만 존노는 그게 아니었다. “신중히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데니스와 함께 있습니다.”“데니스! ”스테파니는 가장 먼전 놀라며 존노와 아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존노를 어깨 를 으쓱해 보인 다음 복도로 나가 제이크를 상대했다. “스테파니에게 우리가 여기 있다고 전하시오.”“미쳤군요, 스테파닌 죽었소.”“내 말이 그 말이죠.” 데니스였다. “왜 이래, 데니스. 넌 내 편이어야지. 공금횡령은 중죄야. 최소한 몇 년은 감옥에서 씩어야겠지.”데니스는 금괴를 만지던 현장에서 제이크에게 잡혔다. 제이크는 그를 경찰에 넘기는 대신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이다, “살아계신데도 엄마를 팔아넘기느니 감옥에 가겠다고 했어요.”“끝까지 버티 겠다? 좋아, 스테파니에게 전해 주시오. 오늘 밤 타라에서 만나자고. 오지 않으 면 데니스를 경찰에 넘기겠소.”첫번은 실패했지만 데니스를 잡고 있는 한 스테 파니를 끌어낸거나 다름없다고 제이크는 확신했다. 그들은 돌려보낸 존노는 즉 시 스테파니에게 전말을 알렸다. “오늘 밤 타라로 오랍니다.”그도 기운이 빠져 있었다. “그럼 그래야겠군요.”스테파니의 말에 아말이 펄쩍 뛰었다. “그럴 순 없어. 지금까지의 수고가 물거품이 돼.”“데니스를 감옥에 가게 할 순 없어요. ”“데니스는 차라리 감옥세 가겠답니다. 포기하지 않을 작정이죠.”존노의 설명 도 스테파니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안 그래도 될지 몰라요. 아직 이길 방 법이 있어요.”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확신에 가까운 표정을 보면서 다소는 안심하고 있었다. 모두들 그녀를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날 밤 타라에서는 캐시가 준비한‘동과 서의 만남’이라는 패 션쇼가 질리의 심상치 않은 계획과 함께 성대하게 열렸다. 그녀는 제시카와 댄 에게 자신의 어떤 승리를 장담했다. 하지만 그 직후 존노를 만나는 순간 자신의 승리에 곧장 따라붙는 참혹한 패배에 대해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존노는 질리 를 데리고 조용한 장소로 옮겼다. “계약이 깨지다니 무슨 소리예요?”그게 존 노의 미끼였다. “아말이 알아냈어요. 값을 올려서 선수를 치려해요.”질리는 이 미 그가 던진 미끼를 주저없이 또다시 물었다. “내게 우선권이 있잖아요?”“ 그게 소용없게 됐소. 여기 도슨 씨가 소유주 대행이십니다.”존노는 이미 도슨이 란 사람까지 동원시켰다. “우선권은 어떻게 됐죠?”“오늘 자정이면 유효기간 이 끝납니다. 자정에서 1분만 지나면 아말이 높은 값을 부를 겁니다.”질리는 비 로서 약간의 의문을 품었지만 존노의 완벽한 준비 앞에서는 드러내지 못했다. “당신이 다행이시라면 왜 내게 아릴죠, 더 받을 수 있는데?”“당신께 알리는 게 더 이익이기 때문이죠.”존노가 그럴 듯하게 거들었다. “내가 매수했어요. 자, 어서 계약서를 내 놔요.”“모르겠어요, 너무 갑자기라…….”“그럼 놓치는 거죠.”그때였다. 아말이 성난 표정으로 이들 앞에 불쑥 나타났다. “존노, 자넨 왜 여기 있나? 자넨 또 웬일인가, 도슨?”“너무 늦었어요.”존노의 말에 다급해 진 질리는 앞 뒤 가리지 않고 계약서에 서명했다. “당신이 증인이에요. 도슨. 죄송해요. 아말. 그 땅과 기름은 이제 모두 제것이 됐어요.”아말은 존노에게 화 를 냈다. “이 배신자!”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질리에게 아주 그럴 듯한 비난 을 퍼부었다. “당신은 교활하군요, 스튜어트 부인.”질리는 한껏 우쭐해졌다. “ 화내지 마세요. 당신은 그게 아니라도 부자잖아요. 당신에겐 사소한 일이지만 내 게는……난 이제 호주 제일의 부자예요. 스테파니가 전에 그랬던 것처럼요.”이 때 그녀가 존노 등의 마음을 털끝만큼이라도 엿볼 수 있었다면 심장마비를 일으 켰을 게 분명했다. 그녀는 스테파니의 작전에 완벽하게 말려들고 말았다. 톰과 사라 사이에 갈등이 더욱 깊어졌다. 마음을 돌린 톰이지만 사라는 그렇지 않았 다. “어떻든 누군가 다치게 돼요. 당신 때문에 안젤로를 떠날 순 없어요.”“사 랑해, 사라. 네가 이러는 걸 보니 내가 가는 게 낫겠어.”톰은 가슴 속에 일던 희망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아프게 느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에게서 떠나 야 되는 심정은 그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한편 타라에서는 패션쇼와 더불어 제이크와 스테파니 그리고 질리, 이 세 사람의 중대한 결판이 임박했다. 작전에 완전히 성공한 스테파니는 그녀대로, 아말은 타리사와 함께 제이크를 만났다. “ 와 줘서 기쁘군요. 얼굴을 가릴 필요가 있소, 스테파니?”그는 에덴의 이층에서 타리사의 실물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진짜를 스테파니로 착각했다. “경고하겠 소, 제이크.”아말의 엄중한 경고에 제이크는 고분고분했다. 스테파니를 찾았다 는 만족감 때문이다. “소란은 피우지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아말. 재회를 기 뻐할 뿐이죠.”“데니스를 놓아 주겠다고 약속해 주겠소?”“금을 되찾았으니 데니스는 필요없어요. 약속하죠. 내가 치사한 수법을 쓰기는 해도 약속은 반드시 지킵니다.”그때 질 리가 날아갈 듯이 기쁜 표정으로 다가왔다. “아말, 타리사.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해요.”“질리, 아말과 공주께서 놀래줄 일이 ㄹ있다시 는군.”그는 아직 타리사를 스테파니로 착각하고 있었다. “저도 잇어요, 아말이 벌써 말했나요? 땅을 샀어요. 10분 전에 서명 했죠.”“이런 바보!”제이크는 얼 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걱정 말아요. 당신도 끼워줄 테니. 오후에 회사돈 2 천을 썼어요.”“당신이…….”그가 갑자기 질리에게 덤벼드는 것을 존노가 재빨 리 붙잡앗다. 아말이 비로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때가 되엇다고 생각하며 전 지하게 입을 열였다. “제이크의 우려 그대로요. 그 땅은 쓸모없는 거라오.”질 리가 믿을 리 없었다. “당신답지 않군요, 아말.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실 줄 알 았는데…….”“질리, 스테파니는 살아 있소. 방금 당신이 모든 걸 잃었소. 제이 크의 2천만 달러까지 포함해서.”“거짓말이에요!”질리는 맹수처럼 부르짖었다. “공주가 진짜인 줄 알아? 내가 뭐라고 했어?”제이크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아 말이 쐐기를 박았다. “이번엔 당신이 틀렸소, 제이크. 여기는 진자 공주 타리사 요.”제이크는 감히 아말의 말을 무시하진 못했다. “그럼 스테파니는…….”그 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타리사를 바라보았다. 그때 무대에 한 모델이 우아한 몸 직으로 나타났다. 자연스럽게 모자를 벗엇을 때 모든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스 테파니였다. “안 돼!”봇물이 터지듯 부르짓는 질리의 처절한 절규가 타라를 뒤 흔들었다. 패션쇼를 취재하기 위해 와있던 기자들이 스테파니에게 몰려들었다. 그들은 한 눈에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질리 스튜어트는 이번 일과 어떤 상관 이죠?”기자의 질문에 스테파니는 환하게 웃었다. “이번 일은 그녀가 계획했죠. 감사하고 싶어요. 그리고 샌더스씨도 내가 돌아오도록 힘써 주셨죠.”그 장소에 서 놀란 사람 중에는 댄과 제시카도 있었다. 그들은 그곳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스테파니가 재빨리 쫓아갔다. “댄, 기다려요!”“살아온 걸 환영하오.”댄은 담 담한 표정이었다. “섦여할께요.”“전에도 들은 얘기요. 흥미없소.”“이럴 수밖 에 없었어요.”댄은 먼저 나가겠다는 제시카를 붙들었다. “같이 갑시다. 잘 가 시오, 스테파니.”스테파니는 그를 그렇게 보낼 수 없었다. 지금껏 한 번도 잊어 본적이 없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래요.”“이해?”그녀의 슬픈 목소리에 댄이 갑자기 돌아섰다. “물론 이해하지, 날 믿지 않는 걸. 골란에 처했을 때 아말에 게 간 것도 이해해. 너무 이해하지. 난 한 번도 하퍼왕조의 일원인 적이 없었지. 그냥 집안에 의사가 한 명 필요했을 뿐일 테니까!”“처음부터 계획했던 게 아 니에요.”“그렇겠지. 복수하는 게 가족보다 중요했겠지.”“그런데 사라를 보러 갔겠어요?”“위험을 즐기니까. 이번 계획의 일부였을 거야. 재미를 더하려고, 그렇지? 거기다 우릴 방문해서……그보다는 교양이 있는 줄 알았는데…….”댄 은 스테파니의 어떤 이야기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곁에 있던 제시카가 댄을 강 제로 데리고 나갈 때 스테파니 역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혼하는데 7년 을 기다릴 필요는 없어요. 방해되고 싶지 않으니까.”“왜 그렇겠소, 충실한 아 말이 손을 벌리고 기다리는데?”그들은 가버렸다.. 뒤에 남은 스테파니는 이날의 멋진 승리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보다 슬프고 외로움에 싸였다,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 이번에는 정말 바다 속으로 영원히 들어가버리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온 제시카는 댄의 태도에 큰 충격을 받았다. “화가 난 듯이 말하고 있지만 진투가 나는 거예요. 스테파니를 되찾고 싶은 거죠? 인정하세요.”“무슨 소릴?”“솔직 히 대답해 주세요.”“왜 이래, 제시카! 당신에 대한 내 감정을 알잖소.”제시카 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을 풀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그걸 알아야겠어요. 지금 당장! 원하신다면 5분안에 짐을 쌀 수 있어요.”댄은 순식간에 두 여자를 모두 놓칠 위기에 빠졌다. “이해해 주오, 제시카. 스테파니를 다시 보니까……. ”“아직 사랑한다는 걸 아셨군요.”“사랑이 아니고정말 화가 났소. 그녀뿐 아 니라 사라와 데니스까지……무슨 사람들이 그럴까. 죽음을 가장해 가까운 사람 들이 고통받는 걸 구경만 하고 있다니.”“그렇게 화가 나신 건 아직 그녀를 생 각한다는 증거예요.”게속되는 제시카의 공격에 댄도 견딜 수 없었다. “연극학 교에서 그렇게 배웠나?”“그녀와 이혼하는 게 싫으시죠?”그녀는 울음이 터질 듯했다. “그렇소. 하지만 당신을 잃기는 더욱 싫어!”그가 와락 껴안았을 때 제 시카는 억제했던 눈물을 조용히 쏟아냈다. 한편 질리는 타라에서 곧장 에덴으로 옮겨져 의사의 진찰을 받았만 특별한 이상은 없엇따. 충격을 받았을 뿐이라는 진단이었다. “정말 죽었는 줄 알았어요. 또다시 보게 되다니.”질리의 태도에 제이크는 어이가 없었다. “멀쩡하게 살아있었지. 전보다 오히려 더 좋아졌더군. ”“아직 다 끝난 건 아녜요.”“근본적으로 회사돈을 쓴 문제부터 생각해 보지. ”“같이 해결해 보죠.”“서명한 건 당신이여, 당신이 스테파니에게 갖다바쳤 어. 멋지게 해치운 거지. 처음부터 당신은 그녀의 상대가 못 된다는 걸 알 았어야지.”그는 꽃병에 꽃혀있는 꽃을 한 송이 따서 질리에게 던지며 횡하니 나가버렸다. 뒤에 남은 질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스테파니가 죽었다고 했을 때 슬퍼했다니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어. 당장 죽어버렸으면…….”“혈압 을 생각해.”질리는 제이크를 에덴에 머물도록 강요했다. 이날과 같은 기분일 때 그녀는 육체적인 욕망이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 몹시 화나거나 슬플 때 그녀는 평소보다 몇 배나 격렬한 오르가슴에 도달하는 습성이 있었다. 제이크는 그녀의 의도에 응해 주지 않았다.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어요.”“안 좋은 일이군, 얼 굴에 미소가 나타난 걸 보니.”“아직 중요한 크다가 있죠. 데니스예요. 그녀에 게 데니스가 감옥에 가는 것과 회사 중에 선택하라면…….”“스테파니와 약속 했어.”질리의 얼굴에서 미소가 갑자기 사라졌다. “언제부터 그렇게 약속을 잘 지켰나요?”“그녀도 약속을 지켰지. 당신 욕심이 지나쳤어.”“당신에게 필요하 다면 데니스를 집어 넣엇을 거예요.”“틀렸어. 잊어버려. 정말 혈압에 나쁠 테 니까.”“스테파니를 유혹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군요.”“어서 자고 내일 만 나.”질리는 나가려는 제이크를 다시 불러놓고 뜻ㅂ의 사실을 밝혔다.“내가 당 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죠?”그녀는 옷장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왔다. “나 와 결혼할 거죠? 확실히 해 두고 싶어요.”“미쳤군.”그는 거침없이 말했다. “ 그럴까요?”질리는 봉투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게 뭐지?”“사진요. 키 시가 찍은 당신과 나죠. 죽은 올리브의 사진도 되죠.”제이크는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없앴다고 했잖아?……”“내가 사진을 얼마나 좋아흐는 지 아시죠. 당신이 올리브를 고용해서 스테파니를 죽이려했다는 진술서도 고스 란히 있어요.”“당신도 함께 찍힌 사진이야.”“내가 감옥에 가면 당신도 가요. 우린 같은 운명이에요. 그러니 스테파니 하퍼는 잊는 게 좋겠지요.”제이크는 어 떤 최악의 경우에도 질리와 같은 신세가 되고 싶지 않았다. “몇 번이나 얘기해 야 하오, 스테파니는 과거라고.”“더 이상 당신을 믿지 못하겠어요.”“오늘 그 녀가 보여준 건 회사만이 전부라는 뜻이었지. 남편도 자식도 아닌 하퍼사가 그 녀의 전부요. 난 둘째는 못참는다는 걸 알지 알소?”“사실인 게 좋을 걸요. 아 니면 경찰의 사이렌 소리를 금방이라도 듣게 될 테니까…….”이때만은 제이크 도 별도리가 없었다. 그는 질리의 특별한 욕정을 우선 채워줄 수밖에 없다고 판 단하고는 에덴에서 떠나려던 생각을 바꾸었다. 제이큰 하퍼사를 둘러보기 위해 일차 방문한 스테파니에게 강한 호감을 보였지만 스테파니는 냉정했다. 전과를 확연히 달라진 스테파니의 모습에 제이크는 더욱 끌렸다. 간신히 제이크를 붙들 고 있는 질리는 시간이 조금씩 지나자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인지 스테파니를 만나기 위해 에덴을 나설 때 스테파니는 호텔에서 존 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스테파니는 그 동안의 수고에 감사하는 뜻으로 상당액의 돈봉투를 건네주었지만 그는 거절했다. 계속 유대관계를 갖고 싶다는 것이엇다. “참, 톰과는 어떻게 됐어요?”“아직 지켜 보는 중이오.”“밝히지 않았어요?”“친아버지가 떠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실망할 거요.”“그래요, 존노. 당신은 똑똑하고 꽤 쓸 만한 건달이에요.”그때 아말이 들어오며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스테파니, 질리가 와서 당신을 만나겠다는군.”“가서 목이나 매달라고 해요.”대뜸 그러는 존노와는 달리 스테파니는 만날 뜻을 비쳤다. “아 뇨, 만나겠어요.”“그러는 게 현명할까? 당신을 계속 해치려 들 텐데?”아말도 깊은 우려를 표했다. “난 피하고 싶지 않아요.”“좋소. 하지만 존노가 함께 있 어야 하오.”“아뇨. 지금부터는 내가 모든 걸 주도하겠어요.”그녀의 단호한 의 지에 존노도 할 수 없이 거실로 나가 질리를 만났다. “하퍼 씨가 곧 나오실 겁 니다.”존노를 발견한 질리의 두 눈에 신경질적인 분노가 나타났다. “친절하시 군요. 날 옭아놓고 얼마나 받았죠?”“내가 해야했던 일에 비하면 약소하게 받 았죠.”그대 스테파니가 나타났다. “앉아, 질리”순간 질리는 듣고 있던 핸드백 을 그녀에게 힘껏 집어던지며 화가 나서 빈정거렸다. “댄과 애들도 무척 놀라 더군. 넌 네가 전능한 줄 알아. 항상 최고가 아니면 못 참지!”“우린 자매니까 공통점이 있겠지.”“그 땅이 쓸모없나는 걸 처음부터 알았지!”“네 욕심이 지 나쳤기 때문에 자초한 일이야.”“아직 끝나지 않았어. 제이크와 내가 이대로 물 러날 줄 알아? 어림없지. 내가 누군지 알 텐데?”“문제는 네가 날 모른다는 거 야, 예전에도 그랬지만.”평생을 두고 치열하게 싸운 이들 승자와 패자가 만난 광경은 싸움의 결과처럼 판이하게 달랐다. “맥스 하퍼의 못생긴 딸이었지. 남자 들이 침대로자가는 이유가 돈 때문이라는 걸 모르는 멍청한 여잔데 어쩌다 똑똑 해졌지. 댄과 결혼하고부터는 오리새끼가 백조로 변했지.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 지 않았어. 플라스틱 성형에다 비싼 옷으로 휘감아도 본색을 숨길수 없는 거야. ”질리는 안간힘을 썼다. “다 했어?”“아니. 난 네가 나에게 준 고통과 치욕을 전부 되돌려 줄 거야. 네가 파멸될 때까지 단념하지 않아. 내 일생을 전부 바쳐 서 널 망쳐놓고 말겠어. 널 증오해, 들었어?”질리는 차가운 스테파니의 반응에 자신의 손톱을 물어뜯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넌 날 망치려고 거의 발버둥쳤 다. 그 중에도 가장 나빴던 건 필립을 자살하게 만든 거야. 그것만으로도 널 절 대로 용서할 수 없어.”“증거를 대!”질리는 발악했다. “그런 건 필요없어. 네 가 더 잘 알 테니까 너도 겪어야겠지. 나이가 들수록 넌 더 많은 죄의식을 벗어 버리지 못해.”질리는 거의 이성을 잃었다. “지옥에나 가!”미친 듯이 달려들며 주먹을 휘둘러대는 질리의 팔을 스테파니가 재빨리 낚아챘다. “더 이상 너한테 아버지의 유언을 지킬 게 없어, 할 만큼 했으니까! 가서 제이크한테 말해. 피비 린내 나는 싸움이 사작됐다고!”그와 동시에 스테파니의 손바닥이 질리의 뺨을 한 차례 후려쳤다. “이젠 나가!”뺨을 얻어맞은 질리는 히스테리 발작처럼 커다 랗게 웃으며 호텔을 나가버렸다. 그와 같은 광경을 뒤에서 지며보던 아말과 존 노는 싱긋이 웃고 있었다. “스테파니가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왔소.”아말의 흐 뭇한 말에 존노는 갑자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제5부 1. 영원한 마음의 위안자 안톤의 충고에 앞서 제이크 스스로 질리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잘 안 될 걸?”“기다리게, 안톤. 여자 경험은 내가 더 많아. 질리는 내가 처리하지.”그는 에덴 앞에 세워둔 차에서 안톤을 기다리게 한 다음 혼자 앞으로 들어갔다. 그때 질리는 초조한 빛으로 혼자 서성대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음악을 틀어 놓고 있 었지만 듣는 것 같지는 않았다. “파티하는 중이오, 질리?”“제이크, 정말 반가 워요!”그녀는 소녀처럼 깡총 뛰어가 제이크에게 안겼다. “왜 떠날 때 깨워주지 않았어요?”제이크는 그녀를 차갑게 밀쳐냈다. “지금 하러 왔잖소.”질리의 표 정이 확 달라졌다. “지금 장난할 기분이 아녜요, 제이크.”“간단하지. 감옥이냐 결혼이냐에서 감옥을 택했소.”그는 새파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빈정거렷따. “또다시 감옥에 가고 싶지않은 얼굴이군, 그렇지? 경찰이 사진을 보면 당신도 함게 잡아갈 테니까.”질리는 제이크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냈다. “그년한테 갈 거죠?”“이렇게 말하지. 난 감옥은 싫어, 당신과의 결혼이 그거니까. 안녕, 난 가겠어.”질리는 차갑게 돌아서는 제이크에게 달려들며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 안 돼, 못가, 제이크! 가게 놔두지 않겠어!”그는 또다시 질리의 팔을 붙들어 사 납게 밀쳐냈다. “안녕이라고 말했어.”순간 질리는 악에 받쳤다. 그녀는 어느 틈에 준비했던 권총을 꺼내 제이크를 겨냥하며 표범처럼 으르렁거렷따. “죽여 버리겠어! 내가 갖지 못하면 그년도 못가져!”“감옥에 가게될 텐데?”“상관없 어.”“좋아. 흥분했군. 말로 하지, 총은 치우고.”그가 천천히 다가서며 총을 뺏 으려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질리의 두 눈에 살기가 어려 있었다. 안톤을 데리고 들어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쏴버리겠어, 당신 형에게 했던 것처럼!”제이크 는 등에 식은땀이 배어나는 것을 느꼈다. “말로 하자니까…….”“다가오지 마! ”“좋아. 총부터 내려놔, 알았지?”이때는 지리보다 제이크가 필사적이었다. 혹 여 실수로라도 한발의 총탄이면 자신을 세상을 하직해야 한다. 생명을 걸어놓은 도박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제이크는 어느덧 무섭게 긴장했다. 필사적으로 기호를 노리던 그는 다음 순간 질리의 팔을 날쌔게 붙잡아 위로 꺾었다. 순간 총은 여 지없이 발사되며 총알은 천장에 가서 박혔다. 제이크는 다시 그녀를 소파에 쓰 러뜨리며 총을 뺏는데 성공했다. “죽여버리겠어! 스테파니도 죽일 거야!”그녀 는 총을 빼앗아 나가는 제이크에게 다시 울부짖었다. “떠나지 말아요! 제발, 제 이크!”그때 안톤이 밖에서 뛰어들어왔다. 총소리에 놀란 것이다. “무슨 일이 야?”“스튜어트 부인과 작별하는 중이었지.”“제이크, 사랑해요.”제이크는 그 녀의 애원을 무시하고 안톤과 밖으로 나왔다. “어떡할 거야?”스테파니를 주저 하지 않고 쏴죽일 거야. 제이크는 자신보다 스테파니를 걱정하고 있었다. “없애 버려.”짐작은 했지만 느닷없는 제이크의 결정에 안톤은 저으기 놀라며 빤해 바 라보았다. “방법은 상관없어. 오늘 안으로 실행해.”그들이 차로 에덴을 떠날 때 질리는 병원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의사선생님께 에덴으로 전화 좀 해달라고 전해 줘요. 몹시 아파요…….”그녀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 전혀 예측하 지 못했다. 제이크와의 충돌과 정신적인 절망 그리고 충격 때문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에겐 놀라운 사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의 상황은 시시각각 변했 다. 안젤로는 사라를 위해 권투를 다시 시작하려 했고 제시카는 스테파니에게 댄의 마음을 자유롭게 풀어주도록 간곡히 부탁했다. 질리는 의사의 진단결과를 기다리며 과거 제이크가 스테피니에게 선물했다가 다시 그녀에게 준‘복수’라 는 말을 멜보론 컵 경마에 출전시킬 준비를 했다. 스테파니 역시 아말에게 선물 받은‘타라의 명예’로 그 대회에 출전할 계획이어서 남다른 자매의 극적인 대 결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스테파니에게 간곡히 부탁해서 댄과 승마장에서 만나 도록 주선한 제시카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어땠어요?”댄이 돌아왔을 때 제시 카는 대뜸 물었다. 댄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타라의 명예”좋더군. 스테파니가 거기 왔더군.”“그래요?”제시카는 드러나지 않게 조바심을 쳤다. “처음 만났을 때 같더군. 몹시 겁에 질려 있었지만 강한 용기와 정직성이 있었 지. 오늘도 그걸 봤어.”“다시 합치기로 하셨군요.”제시카는 가슴 속에서 무너 져내리는 무엇을 느꼈다.“아니”“하지만…….”“직선적으로 말하던군.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었지. 자존심이 상해서……안 되는 이유를 그녀가 먼저 말했어 ”“그래서 다시 노력해 보자고 하셨어요?”“아니, 그럴 기회도 없었어.”“그 렇게 하고 싶으세요?”“처음엔 잘 몰랐지만……그녀가 옳다는 걸 알았어. 우린 극과 극이야. 필요할 때는 가능했지만 풍부한 것은 아니지.”제시카는 댄의 말뜻 에 더욱 어리둥절했다. “이젠 어떡하실 거예요?”“가게 하는 거지.”“네?”“ 그래도 친구로사 남기로 했어.”제시카는 비로소 얼굴 가득히 기쁨의 미소가 떠 올랐다. “기뻐요.”“나도 그래, 당신과 함께 행복할 기회를 얻었으니까.”“확 신하세요?”“지금처럼 확신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그들은 더 기다리지 않 고 서로를 뜨겁게 껴안았다. 제시카는 어느 때보다 포근하고 행복한 가슴으로 그에게 안기며 정성스러운 입맞춤으로 마음을 전달했다. 스테파니는 댄과 헤어 진 후 승마장에 남아 소리없이 울었다. 댄을 완전히 잊기 위한 아픔의 눈물이었 다. 그때 아말이 조용히 다가왔다. “누구나 올 때가 있는 거라오.”“댄과 얘기 했어요…….”“끝냈소?아니면?……”“제 생각이었는데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 겠어요.”“인간의 약점과 불가능이라는 것 때문이지.”“내가 옳았다는 것은 알 지만 갑자기 외로워졌어요.”아말은 스테파니에게 영원한 마음의 위안자였다. “ 다시 청혼해 볼까? 당신은 물론 거절할 테고 난 조금 울겠지. 그리고 지금 당신 에게 필요한 건 남자가 아니고 또 다른 도전이지.”“아말, 당신은 항상 적당한 말을 찾아내시는군요.”비로소 그녀의 얼굴에서 슬픈 표정이 걷혀갔다. “내 동 생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요.”“부탁 하나 들어 주시겠어요?”“말해 보시 오.”“타리사에게 조금만 자유를 주세요. 자기의 인생을 즐기도록 해주세요.” 그 부분에서는 단연 완고한 아말도 전과 같지 않았다. “노력해 보리다. 당신과 같이 지냈으니 그애도 에전 같진 않겠지. 이젠 돌아가겠소. 항상 당신 편이라는 걸 기억해 주시오.”“기억하겠어요. 당신은 언제나 절 편안하게 해 주시는 분이 에요.”“친찬인지 아닌지 모르겠군. 한 가지 할 말이 있소. 우리 사이의아이 말 이오.”“톰의 반응을 보았기 때문에 어떨지 모르겠어요.”“알겠소. 우리의 아 들을 찾는 것도 좋겠는데…….”갑자기 쓸쓸해져 보이는 아말의 모습에 스테파 니는 가슴이 아팠다. “조금 더 생각해 보겠어요.”“당신이 결정한 일이지만 내 게도 연락해 주시오.”“물론이죠, 아말. 당신이 그리울 거예요.”“나 역시.”그 들은 마음과가슴의 눈으로 잠시 마주보았다. 그 순간의 그들 만큼 상대를 진심 으로 이해하는 관계는 드물 것이다. 제이크의 지시에 따라 안톤이 움직이러 할 즈음 아말과 타리사는 떠날 준비를 했다. “이렇게 빨리 가야 해요?”타리사는 아쉬운 빛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이다. 집에 가소 싶지 않니?”“물론 가고 싶 어요.”타리사는 스테파니를 서운한 듯 바라보았다. “유감이구나. 돌아가기 전 에 여행이나 할까 했는데.”“그거면 더욱 좋지요.”타리사의 표정이 갑자기 밝 아졌다. 그때 스테파니가 새로운 제안을 했다. “타라의 명예가 출전하는 걸 볼 수 있게 계획을 세우세요.”“당연하요.”아말은 기꺼이 응했다. 타리사도 기뻐 하며 또 다른 제안을 내놓았다. “정말 멋있어요. 그런데 여행을 하려면 존노처 럼 지리에 밝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아요? 안내도 하면서 보디가드를 겸한다면 정말 좋은 거예요.”그것을 타리사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시녀가 아니고더 구나 존노 같은 남자를 여행에 동행시킨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스테파니의 간곡한 부탁도 있고 해서 아말은 선뜻 들어 주었다. “당신에게 신 세가 많았소, 존노. 우리와 함께 가겠소?”“저야 좋지요.”차마 엄두도 못냈을 타리사 공주의 제안은 상상 외로 쉽게 풀렸다. 궁중의 법도에 어긋나는 일을 아 말이 승낙한 것이다. 한편 질리는 자신의 위기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수영장 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저승사자와 같은 안톤이 찾아왔다. 그 는 누어있는 질리를 놔둔 채 에덴의 주방에 들어가 컵에 쥬스를 따랐다. 그리고 두 개 중 하나에는 준비한 가루약을 넣어 골고루저었다. 그가 쟁반에 두 잔의 쥬스를 받쳐들고 나타났을 때에도 질리는 아무것도 짐작하지 못했다. “한 잔 하기에는 너무 졸리신가요?”언제 왔어요?”“방금 전에요, 자고 있기에 시원한 쥬스를 만들어왔죠.”“이상하구요. 당신과 내가 잡담을 하다니…….”“제이크 가 사무실에 있을 때 할 말이 있어서요.”“왜요?”“많은 기복이 있었지만 솔 직히 스테파니보다는 당신과가깝죠. 아직 늦지 않았아요. 아시겠지만 난 매우 유 능하죠.”안톤을 잘 알고 있는 질리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그가 준 쥬스를 조금 씩 마셨다. “난 오늘 회사에서 고역을 치뤘어요.”“그랬군요.”“스테파니 하 퍼를 막을 방법을 알아냈어요. 그 땅의 계약건에 대해서도 방법이 있고요.”“안 톤, 우린 공통된 관심사를 가졌군요.”그녀가 다시 쥬스를 한 모금 마실 때 에덴 의 거실에 있는 전화벨이 울렸다. “잠깐요.”그녀는 갑자기 현기증 같은 것을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톤 때문에 한껏 기분이 좋아졌다. “질리 스튜어트입니다. 네, 바꿔 주세요. 감사합니다. 박시님. 정말 감 사합니다!”그녀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즉시 제이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예요, 질리 의사가방금 전화했어요. 놀라운 뉴스가 있어요. 전 임신했어요. 우리 가 아기를 갖게 됐다구요.”숨가쁘게 털어놓는 그녀의 이야기에 제이크는 시큰 둥했다. “질리, 처음엔 고혈압이라더니 이젠 임신이라니, 장난 그만해.”“사실 이에요. 검사결과 확실하데요. 정말 기뻐요. 아이를 원하셨죠?”제이크는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럼 사실이군, 그래?”“네. 물론이에요. 집으 로 오세요. 축하하게요.”제이크는 다급해졌다. “질리, 안톤 거기 잇어?”“네. ”“잘 들어. 사무실로 즉시 와, 얘기 할 게 있어!”하지만 질리는 현기증을 좀 더 강하게 느꼈다. “지금 이 건강상태로요? 안 돼요, 제이크. 당신이 오세요. 안 톤과 난 벌써 축하하는 중인 걸요. 그런데 너무 센 것 같아요…….”그녀느 말끝 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제이크는 새파랗게 질리며 소리쳤다. “질리, 전화 끊지 마!”질리는 알아듣지 못한 듯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수영장에 있는 정우너으로 다시 나갔다. 제이크가 다급하게 전화했지만 이미 그녀는 받을 수 없었다. 안톤 을 에덴에 보내 질리를 끝장내도록 지시했던 제이크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질리 의 임신이 확샐히진 이상 그녀를 죽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 그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그가 정신없이 에덴으로 향할 때 안톤은 그늣하게 이미 몸의 중심이 흐트러진 질리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약간…….”그러면서 다시 쥬스를 무 의식적으로 들이킨 질리는 더 견디지 못하고 앉은 자세에서 잔디 위로 미끄러져 쓰러지고 말았다. 안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번쩍 들어 수영장을 항해 걸 어갔다. “뭘 하는 거예요?”질리는 혼미한 상태에서 간신히 눈을 떴다. 약효는 이미 그녀의 전신에 퍼져나갔다. “제이크가 옛날에 했어야 하는 일을 하는 거 요.”비로소 질리도 낌새를 알아차렸다. “음료수……내게 독을 먹였군요.”하지만 그녀는 이미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독은 아니오. 강한 수면제니까 오래도록 잘 거요. 걱정 말아요.”안톤 은 웃으면서 질리를 물 속에 던졌다. “사고처럼 보일 테니 걱정 말아요. 제이크 는 무사할 거요.”물 속에 던져진 질리는 허우적거리며 간신히 고개를 내밀었다. “애에 대해……아는데…….”“왜 이래요, 이보다 잘 할 수 있잖소.”“살려줘 요.”그녀는 더욱 허우적거렸다.“협상합시다. 사진과 진술서는 어디 있소?”“ 안 돼. 줄 수 없어!”급박한 위기에서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안톤의 응답은 간단하고 잔인했다. 그는 간신히 떠오른 질리의 얼굴을 물 속으로 쳐넣었다. 그 리고 잠시 후에 들어올렸다. “그걸 주지 않으면 빠뜨리기 싫어도 어쩔 수 없군 요.”“제이크를 떼어놓으려는 거죠?”“정확히 그렇소. 마지막 기회요. 사긴은? ”그녀가 얼른 대답하지 않자 다시 물고문이 계속되었다. 약기운이 퍼진데다 안 톤에게 머리채가 움켜잡힌 질리는 숨이 턱에 닳아 헐떡였다. “마지막 기회요.” 대답이 없자 그녀는 다시 물 속에 쳐박혔다. “자, 그게 어디 있지?”이미 죽음 의 세계를 본 듯이 공포에 질린 그녀는 헐떡이며 간신히 중얼거렸다. “침실… …뮤직박스에…….”“아주 좋아요. 진술서는?”“같이 있어요.”“착하구요.”“ 사, 살려줘요.”하지만 이미 각본은 짜여져 있었다. 필요한 정보를 캐낸 다음 자 살이나 사고사로 위장한다는 것이었다. 최근 그녀의 정황으로 보아 충분히 가능 성이 있는 각본이엇다. “안녕히 가세요, 스튜어트 부인.”안톤은 그녀를 물 속 으로 깊숙히 밀어넣었다. 지칠대로 지친 그녀는 시체처럼 엎어진 채 떠올랐다. 그대로 두면 머지 않아 질식할 것이다. ㄱ,토록 숱한 사건을 음모하고 사회를 떠 들썩하게 만들었던 질리 스튜어트의 최후가 그렇게 비참하게 끝나고 있었다. 누 구도 그녀를 구하거나 발견할 수 없고 안톤만이 완전범죄였다. 문제의 사진과 진술서를 찾아서 여유있게 걸어나오던 안톤은 깜짝 놀랐다. 물 속에 들어가 질 리를 안고 나온 제이크가 정신없이 인공호흡을 시키고 있었다. “도대체 뭐하는 거야. 정신나갔어? 거의 다 됐는데.”안톤은 믿을 수 없어 하며 제이크를 노려보 았다. “내 아이를 가졌어.”“거짓말이야. 자넬 잡으려는 수법이야.”“아닌 것 같아.”“그게 무슨상관이야?”“나에겐 문제가 돼.”“대단하군. 그럼 경찰을 부를 테고 뒤집어쓰겠꾼.”안톤의 표정이 즉각 일그러졌다. “그건 내가 처리하 지. 해결한 후 사무실에서 만나세.”“그녀가 경찰에 신고하는 것만 막게나.”“ 그러지.”그렇게 해서 질리의 목숨은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질리의 임신은 그 자 신의 목숨도 구하고 우선은 제이크도 붙잡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제이크의 진심 을 질리와 그녀가 낳을 아이가 아니었다. 그가 아직도 원하는 것은 스테파니였 다. 안톤에 대한 문제는 제이크의 방법대로 질리를 설득했다. 하지만 안톤은 더 이상 하퍼사에서 일할 수 없었다. 질리에게 무슨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안톤, 지금껏 사운하게 대우한 것도 아니니 불만없겠지. 월급은 계속 받을 수 있네. 물론 가명으로.”“회사가 있을 때 얘기지. 내 장래를 맡길 곳이 아닌 것 같네. 잘있게.”그 동안 제이크의 오른팔이었던 안톤은 스테파니에게 빠져있는 제이크의 곁을 떠났다. 그는 결국 제이크가 스테파니에게 패할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질리와 그녀의 아이 그리고 스테파니 중 제일 먼저 스테파니를 선택한 제이크는 호텔로 불쑥 그녀를 찾아갔다. 그는 룸 서비스를 적당히 내보낸 다음 당돌하게 스테파니 혼자 있는 호텔방에 들어섰다. “커피를 두 사람 몫 시키진 않았는대요?”스테파니는 전혀 당황하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커피 마시려고온 게 아니오.”“드릴 게 없는대요?”“이거면 잠자리가 조금 편안해질 거요.”그 는 가져간 서류봉투를 스테파니에게 건네주었다. “데니스에 대한 증거의 전부 인가요?”“컴퓨터 기록은 지워버렸소. 이젠 깨끗하오. 난 약속하면 지키는 사림 이죠.”“고마워요.”“질리가 임신한 걸 아시오.?”“세상에……누구 앤지는 안 대요?”대뜸 나온 질문에 제이크는 표정이 굳어졌다. “나요 결혼하지 않으면 유산시키겠다는 거요. 난 아들을 원하오.”제이크의 이야기에 스테파니는 제이크 의 생각과 관계없이 자신의 느낌을 털어놓았다. “제이크 샌더스도 결국 인간이 군요, 아니면 이기심인가요?”“그것보단 진심이오.”“결혼식은 언제죠?”그때 제이크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침통하게 말했다. “당신에게 달렸소.”스테파 니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들러리를 서라구요? 고맙군요.”“무슨 뜻인 지 알잖소.”스테파니는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이크의 말뜻을 그제야 알 아차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으며 계속 냉소적으로 대햇다. “ 미안해요. 날 놓쳤군요.”“내가?”계속해서 그ㅡ 사력을 다해 자신의 뜻을 피력 했다. “마지막 기회요. 스테파니. 당신만 얻을 수 있다면 질리와는 당장 끝내겠 소.애를 어떡하든 상관없소. 당신이 낳아주면 되니까. 우리 둘의 아이를 생각해 봐요.”스테파니는 속으로 올컥치미는 역겨움을 간신히 참았다. “샌더스 가문 요?”“그게 어떻다는 거요?”“당신은 제이크예요. 고맙지만 답은 같아요. 난 하퍼사가 좋아요.”제이크가 느닷없이 스테파니를 당켜 키스했지만 그녀는 목석 처럼 내버려 두었다. 그의 발작적인 수법에 증오심까지 일어났다. 자신을 질리쯤 으로 생각하는 그를 아예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고 판단했다. “커피가 식어요.” “커피?”키스까지 헛되이 끝나자 제이크는 커피잔을 집어던졌다. 모든 게 끝났 다는 좌절감이 그의이성을 마비시켰다. 그는 눈을 부릅뜨며 맹수처럼 으르렁거 렸다. “정말 그렇다면 나와 정면으로 싸워야할 거요!”그럴수록 스테파니는 오 히려 여유를 보였다. “당신에겐 승산이 없다는 걸 알 텐데요?”“내가 가질 수 없다면 완전한 빈털터리로 만들어버리겠소!”지금껏 그럴 듯하게 위장되었던 제 이크의 본성이 극한상황 앞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당신은 순진한 척도 잘 하 던군. 연습 많이 했겠어.”그이 치사한 공격에 스테파니는 비웃었다. “어서 질 리한테나 가보시는 게 어때요?”“질 리가 맞았어. 겉만 화려할 뿐 속을 목석 같아!”거의 발작적인 그의 야유에 스테파니는 어쩔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마 음이 목석 같다는 발언은 확실히 충격적이었다. 정말 그렇지 않을까 싶어지기까 지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제이크는 그녀의 도전적인 성격에 불을 당긴 셈이 되었다. 2. 극단과 여유 “어젯밤 어디있었죠?”그 상황에서 간밤 제이크가 에덴에 와 주지 않은데 대 해 질리는 몹시 화가 나있었다. “진전해, 질리. 의사가 진정하랬잖아. 어서 앉 아. 물이나 커피 뭐마실 거 줄까?”스테파니에게 최종적인 의사를 확인한 제이 크였다. “결혼할 의사가 없는 거죠?”“왜 이래, 지금가지 잘 지냇는데. 그렇지 않아도 의논하려고 에덴으로 가려던 참이야.”“그래요?”비로소 그녀는 의자에 앉으며 불안한 표정을 거두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당신도 없고, 안톤 때문 에 아직 겁나요.”제이크는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말했다. “그건 걱정 마, 내가 모두 처리했으니까. 그건 그렇고, 다음 주 정도면 어떨까?”“다 음 주요!” 그녀는 아느 틈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음식이랑 초청장이랑 웨 딩드레스는 어떡하구요? 난 결혼식을 성대하게 치루고 싶어요, 제이크.”“아니, 성대하게는 안 돼!”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좋아요, 당신이 원한다면.스테 파니도 오면 좋겠어요, 얼굴 좀 보게.”“스테파니는 이제 우리와 상관없어. 알 아들어?”“우리의 애는 아들일 거예요. 난 알 수 있어요.”“그러는 게 좋겠지. ”“맞아요. 이 엄마의 직감을 믿으라구요.”질리는 제이크의 속마음을 모르는 채 만족했따. 제이크와 결혼하게 된 마당에 거칠 게 없었다. 의기양양해진 그녀 는 하퍼사를 떠나 곧장 타라로 갔다. 마침 그곳에 있던 데니스가 그녀를 맞았다. “결혼식 전야젠가요?”“그럴 수도 있지.”“결혼식을 셋이서 한다죠? 꾀가 좋 군요. 대 이을 아들을 원한다지만 회사가 없으면 소용엾죠.”데니스의 말에는 매 번 뾰족한 가시가 돋혀서 질리를 극도로 흥분시켰다. “경찰서엔 점심 전에 갈 까, 후에 갈까?”“미안해요. 버스는 이미 따났죠. 몰랐어요? 제이크가 엄마가 제조건없이 증거물을 건네줬는데. 친한 친구 사이의 우정으로. 물론 드었겠죠?” 질리는 비위가 뒤틀리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아 마 엄마에게 다시 한 번 시도해 봤을 거예요. 그런데 거절당했으니 결혼식을 올 리나 보죠?”그 정도면 질리도 견디기 어려워졌다. “제이크가 곧 올 텐데 가보 는 게 좋을 걸?”“위로의 말을 전해 주세요. 그가 그 선에서 주저앉을 줄은 몰 랐어요. 아마 엄마의 친척만이라도 되고 싶었는지 모르죠.”질리는 데니스의 웃 는 얼굴을 외면했다. 증거물을 스테파니에게 넘긴 제이크를 혼쭐내고 싶었지만 결혼을 깨뜨릴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날 질리는 제이크에게 기어코 분풀이를 했다. “그놈을 그렇게 놔 주다뇨!”“데니스는 괜찮아. 어떤 때는 꾀를 부리기도 하지만.”“그 증거만 가지고도 스테파니를 이길 수 있었는 데.”“그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어.”말이 나올 때마다 스테파니를 노골적으로 옹호하는 제이크의 태도에 질리는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그걸 이용해 다시 한 번 스테파니에게 접근을 시도한 거겠죠.”“또 오해하는군.”“바보취급 말아 요. 우린 아직 결혼한 게 아녜요.”“무슨 소리야?”“스테파니 일을 깨끗이 정 리하지 않은 한 애는 없을 줄 아세요!”그녀는 앙칼지게 소리치며 핸드백을 휘 둘러 제이크를 때렸다. 한편 제이크와의 싸움에서 기선을 제압한 스테파니는 존 노와 함께 퀸 스탠드로 갔다. 버나데트 수녀를 만나 아들을 찾기 위해서였다. 지 난번 톰이 그곳 수녀원에 갔었고 수녀는 존노의 친누나였다. “스테파니 하퍼 부인이에요.”존노는 그녀를 정식으로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조노를 통해 좋 은 얘기 많이 들었어요.”“어서 오세요. 사무실로 들어가죠.”그때. 수녀원 정원 숲에서 누군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버나테트 수녀와도 이미 알고 있 는 듯이 스테파니가 모르게 눈짓을 교환했따. 손가락에 검정색 알이 박힌 반지 가 특이해 보이는 사내였따. “왜 왔는지 궁금하죠, 누나?”의례적인 말 뒤에 존 노가 넌즈시 물었다. “톰 때문이 아니란 건 안다. 네가 생부라는 건 밝혔는지 모르지만.”“아직 결정하지 않았어요.”“제가 제 아들을 찾으려고 존노에게 여 기까지 오지고 부탁했어요. 단지 그 애가 살고 있는지만 알고 싶을 뿐이에요.” 스테파니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다. 톰이 아닌 친아들이 분명히 어딘가 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아들 이야말로 말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그 정도는 알 수 있죠?”“글세……입양됐다는 걸 모르고 행복하게 산다면 그 렇겠지.¨…방해할 뜻은 조금도 없어요. 혹시 친엄마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면 제 가무척 사랑하며 보고 싶어한다고 전하고 싶어요.”“좋아요. 하지만 찾으려면 올래 걸려요.”“좋아요. 하지만 찾으려면 오래 걸려요.”존노가 기어들었다. “ 좀 서둘러 주실 순 있죠?”버나데트 수녀는 지난번 톰에게 했던 것처럼 이튿날 다시 방문해 줄 것을 부탁했다.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었지만 스테파니는 짐작 하지 못했다. 그때 질리는 엉뚱한 발상을 준비해서 제이크에게 털어놓았다. “스 테파니가 회사에 돌아오는 건 시간문제예요. 우린 쫓겨나게 되겠지만 난 가난은 죽기보다 싫어요.”“그녀가 되찾기 전에 회사를 무일푼으로 만들겠어.”“그래 도 우리가 가난해지는 건 마찬가지지만……안 그럴 수도 있죠.¨…정말 스릴이 느껴지는군.”“그러지 말아요. 제이크. 회사돈을 몽땅 빼돌려 스위스은행에 넣 고 떠나는 거예요.”제이크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농담이겠 지.”“아뇨. 스테파니에게 빚더미만 남겨 주고 떠나는 거죠.”“공금횡령이 언 제부터 범죄가 아니었지?”“체포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나라는 많아요.”질리 의 그런 비열함이 끝내 제이크를 완전하게 붙들지 못하는 요인이었다. “진담은 아니겠지?”“아뇨. 나 혼자만을 위해 이러는 게 아녜요. 애기는요? 이름이나 겨 우 물려줄 게 아니고 재산도 두둑히 물려줘야죠. 다른 방법으로는 한 푼도 어려 워요.”비양심적인 부자와 고결한 가난뱅이 중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는 그녀의 극단적인 질문에 제이크는 또 다른 위험을 느꼈다. 질리는 분명히 전자를 택할 수 있는 여자였다. 그리고 제이크는 그럴 수 없는 점이 소소한 차이였다. 수녀원 근처에서 밤을 같이 보내게 된 스테파니의 마음에 중요한 변화가 찾아왔다. “ 난 곧 내 길을 갈 거요.”존노의 말에 스테파니는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서두 르지 마세요. 뭘 원하는지 물어 봐도 되겠죠. 원한다고 모두 갖는 건 아니겠지 만?”“어차피 당신은 안 될 테니 가능한 걸 원해야 되겠군…….”“그래서 날 더 이상 유혹하지 않는 건가요? 존노, 조금만 더 내곁에 있어 주세요.”“그러다 영원히 안떠어지면?”“한 번 해보겠어요.”그것으로 스테파니의 마음은 확실해 졌다. 그녀는 사업의 승산에도 불구하고 고독한 여인이었다. 누군가의 손길이 필 요했다. 사업과 무관한 인간적인 손길이. 그 동안의 경험으로 그녀는 존노의 인 간성을 충분히 파악했다. 쓸모있고 똑똑한, 비록 건달이긴 하지만 성실한 점도 상당히 갖고 있다. 댄에 비유할 수 없었지만 그처럼 금방 딸 같은 여자를 사랑 하지는 않을 사람이라고 여겨졌다. 그날 스테파니는 존노와 침대를 사용했다. 제 이크는 에덴에서 질리의 시중까지 들었다. 주방에서 직접 샌드위치를 만들어온 그에게 질리는 침대에 앉은 채 물었다. “아직 리오에 가는 게 꺼림칙해요?”“ 썩 내키진 않아.”“더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요?”“그래. 우리의 말이 맬보론 대회에서 이길 수도 있잔소, 그 말이 일등하고 우리가많은 돈을 걸면 한 몫 잡 는 거지.”“우리의 장래를 한 필의 말에다 걸고 싶진 않아요.”“잘 생각해 봐. 우린 평생 동안 객지에서 살아야 돼.”“안 그래요.”“어떻게?”“남편과 자식, 거기다 두둑한 통장이 있죠. 한 주일 남았으니까 빨리 수속을 밟아요. 그래서 결 혼 즉시 떠나버려요.”제이크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 방을 갔다. 어떤 경우에 도 질리의 의견에 동조할 수 없었다. 자존심도 허락치 않았지만 질리를 끝까지 신뢰하지 않았으며, 안락만을 위해 그런 사기꾼이 되고싶은 마음도 추호도 없었 다. 한편 스테파니는 아들의 소식을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버나데트 수녀에 의 하면 그 자료만 분실됐다는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날밤 그 서류는 도 난당했다. 제이크를 떠난 안톤에 의해서였다. 그는 그 서류를 예의 반지 낀 사내 에게 높은 대가를 받고 넘겨주었다. “스테파니의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서류가 전부 여기 있소.”“잘 했소.”“난 일거리를 찾던 중이고 또 스테파니도 별로 좋아하지 않소.”“다시 연락하겠소.”뛰어난 실력으로 능력을 발휘했던 안톤은 다시 전과 같은 비난 받을 일에 손을 댔다. 제이크에게서 보고 배운 바를 써먹 는 것이 분명했다. 스테파니가 안톤 덕분에 허탕치고 시드니로 돌아올 때 질리 는 하퍼사의 제이크 사무실을 휘저었다. 여러 개의 두둑한 쇼핑백을 안고 들어 오는 그녀의 모습에 제이크는 눈쌀을 짜푸렸다. “리오에 가면 사람들을 놀래 주고 싶어요.”“아직 간다곤 말하지않았소.”“갈 거예요.”“망항 스테파니 하 퍼 같으니.”뜻밖의 말에 질리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당신 입에서 그런 소 리가 나오니 좋네요.. 참, 내 결혼선물도 샀어요.”“아직 부족해?”“스위스은행 계좌번호를 알았으면 해요.”“좋은 결혼은 서로 믿어야 가능해.”“다시 바람둥 이 기질이 튀어나올지도 모르니까요.”“그러도록 내버려 둘 것 같아?”“결혼 날짜를 신고했나요?”“모두 처리했소.”“좋아요. 이것들 좀 집에 가져가세요. 더 살 물건이 있거든요.”그녀는 끝이 없었다. 제이크가 그녀를 견딜 수 잇는 것 은 스테파니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다. 반드시 자기의 것이어야 하는 귀중한 물 건을 차지하지 못한 일종의 패배감이 그를 증오심에 불타도록 만들었다. 그 증 오심은 끝내 질리와의 결혼식을 강행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아무도 모르게 단 둘이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제이크는 결혼선물로 스위스은행의 계좌번호를 질리에게 주었다. 질리는 앞서가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한 듯이 태어날 아들의 이름까지 스위스 식으로‘길로메’라고 지었다. 하지만 제이크의 속마음은 아직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떠날 준비에 혈안이 된 질리와는 달리 제이크는 서두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시드니로 돌아온 스테파니는 더 이상 심리적인 부담없이 댄과의 관계를 청산했다. 댄 역시 제시카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담 당자가 그러는데 이혼수속은 쉽다는군요.”“그럼 됐군.”“댄, 우리 행복했던 7 년을 잊지 않기로 해요.”“잘못된 원인이 뭘까…….”“생각하지 말기로 해요. ”그녀는 핸드백에서 무엇인가 꺼내 댄에게 내밀었다. “당신 돈은 싫소.”“이 건 당신 거예요. 빚을 갚는 거죠. 회사 문제로 그 동안 많이 쓰셨어요.”“그것 도 지난 7년의 한 부분으로 잊읍시다.”“섬에다 병원을 세우려면 필요하실 거 예요.”“제시카와 정말 새롭게 시작하려면 지금 이대로가 좋소.”“이런 문제로 다툴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그들은 이제 잔잔한 마음 속의 갈등만이 남아 있 었다. “당신 마음을 이해해. 그리고 고맙소. 하지만 당신만 독립을 원하는 것은 아님을 알아 줬으면 좋겠소.”“언제라도 도움이 필요하시면 친구로서 말씀해 주시는 거죠?”“물론이오.”댄과 헤어져 돌아오는 스테파니는 차라리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녀에 대한 잔잔한 갈 등을 혼자서 조용히 식히고 있던 댄은 전에 없이 기쁜 표정으로 외출에서 돌아온 제시카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왜 그렇 게 기분이 좋지?”“전 스타가 될지도 몰라요.”제시카는 열에 들뜬 소녀처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대사는 네 줄뿐이고 차만 따르는 역할이라더니?”“그 렇지만도 않아요. 극작가가 오셨는대요. 제가 너무 잘한다고 다음 작품에 오디션 을 주선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어요.”댄은 제시카의 그런 모습에서 최초로 생소 함을 느꼈다. 중년에 접어든 자신과 소녀 가은 제시카의 발랄한 욕망에서 비롯 된 것이었다. “하룻밤에 스타가 되갰군.”댄은 거의 빈정거렷지만 들뜬 제시카 는 눈치채지 못했다. “오디션에 합격하는 게 관문이에요. 저 같은 새로운 얼굴 을 찾던 중이래요.”“좋은 소식이군.”“내일 오디션이 있는데 만일 되면 곧 시 작해요.”“그럼 당분간은 시드니에 잇어야 될 것 같군.”“괜찮겠죠?”“!…… ”“병원일을 마무리 하려면 몇 달 정도 걸리지 않겠어요?”댄은 대답하지 않았 다. 제시카와 만나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 후에 순간처럼 그녀가 스테파니와 흡 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톰과의 사랑 때문에 고민에 빠졌던 사라는 안젤로가 다시 권투를 시작했다는 또 다른 소식에 깜짝 놀랐다. 그것도 시합으로 돈을 벌 어 사라를 위하겠다는 이유였다. 안젤로에게 권투를 중지ㅅ고 톰에 대한 애정을 이해시키기위해 체육관에 갔던 그녀는 때마침 찾아온 톰으로 인해 오히려 불행 한 일을 만든 결과가 되고 말았다. “안젤로, 얘기 좀 하자.”“톰, 내가 할께요. ”그러는 두 사람은 본 안젤로는 눈에서 불꽃이 튕겼다.“무슨 짓들이야?”“이 젠 끝났어. 미안해, 우린 잘 안 돼…….”“저놈이 그랬어?”“그럴 필요도 없었 따. 다만 널 상처입히긴 싫었어.”결혼의 종말을 분명히 밝힌 사라의 말에 안젤 로는 전신의 피가 역류하기 시작했다. “네놈 짓이지? 계속 주의를 맴돌며 우리 를 갈라 놨어.”“이건 사라의 결정이야.”이미 사라를 놓칠 수 없다고 작정한 톰도 만만칭 ㅏ았다. 안젤로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렇겠지!”그 말과함게 샌드백을 치던 주먹이 톰의 복부를 번개같이 파고 들었다. 톰은 변명할 여지도 없이 격심한 고통으로 배를 움켜쥐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안 돼, 안젤로!”사 라가 달려들며 쓰러진 톰을 감쌌다. 안젤로는 다시 주먹을 들었다가 스스로 체 념했다. 결국 그는 사라에게 이용만 당하는 꼴이었다. 그녀가 비록 안젤로를 좋 아했다해도 그건 만족스런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사라를 사랑 한 안젤로에 비하면 사라는 기회주의자였다. 모든 것을 잊고 미국으로 떠나려는 톰에게 평지풍파를 일으킨 사라의 태도가 그것을 증명했다. 그가 톰을 더 때리 지 않은 이유는 그나마 이성 때문이었다. 사라 때문이 아니라 들끓는 분노에 휩 싸인 중에도 과거가 떠올랐다. 애디 킹이다. 그를 자신의 주먹으로 죽였다는 순 간적인 자책 때문에 그는 톰에 대한 울분의 주먹을 억제할 수 있었다. 스테파니 와 존노의 관계도 무리없이 정리되었다. 남은 것은 질리와 제이크였다. 스테파니 는 떠나는 존노에게 마음의 선물을 했다. “내 차도 있는데…….”“내가 샀어 요.”스테파니는 그를 위해 장거리 여행에 가장 편리한 자동차를 구입했다. “차 라리 날 사는 게 싸게 먹히지 않겠소?”“차보다 귀한 걸 얻었어요.”“너무 좋 은 차라서 받을 수 없소.”“존노!……”존노는 그녀의 진심을 알아차리자 거절 할 수 없게 되엇다. “그럼 빌리기로 하지.”“오일 바꿀 땐 다시 오겠어요?”존 노는 고개를 끄덕었다. 백 마디의 말보다 신중한 대답이었다. 스테파니는 스스로 를 억제하기 위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럼……또 봐요.”“그럽시다.”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어깨를 감싸안고 가벼운 키스를 교환했다. 그 키 스는 스테파니가댄과도 나누지 못했던 것이었다. 논노는 차에 탄 다음 주머니에 서 동전을 꺼내 스테파니에게 던져 주었다. “어려운 결정을 할 때 써 봐요.”스 테파니는 떠나는 존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 꼼짝않고 지켜보았다. 가벼 운 미소와 함께 걸음을 옮기는 스테파니의 모습은 지금가지의 그 어느 때보다 경쾌해 보였다. 마음의 짐을 모두 벗어 놓은 여자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남은 것은 승리뿐이지만. 그 역시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질리와 제이크의 관계는 여전히 삐걱거렸다. 승마장에서‘복수’를 돌보고 있는 제이크를 찾아온 질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집에서 짐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어찌된 거죠?”“내 말 에 대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중이요.”“당신은 지금 신혼이에요. 상관없는 말 에 신경쓰지 말고 정신차려요.”그녀는 제이크가 보는 앞에서 차의 트렁크를열 었다. “당신이 어떤 얘길 할지 충분히 짐작해요!”“그만! 이제 그만 좀 사들여 요.”그때 제이크는 놀라운 것을 목격했다. 질 리가 가져온 가방에 상당액수의 지폐가 들어있었다. “용돈이에요.”“대체 어디서 난 돈이지?”놀라는 그에게 질리는 동화의 나라 주인공처럼 자랑스럽게 말했다. “사무실에 들렀더니 당신 은 없고 해서 봉급을 슬쩍 했죠. 이건 쓰고 남은 돈이에요. 내일 아침까지 없어 진 줄도 모를 거예요.”제이크는 눈앞이 캄캄했다. 회사에 들러 전체사원의 봉급 까지 빼내온 질리에 대해 할 말을 잊었다. “돌았군. 단단히 돌았어!”“그러니 까 어서 말에게 인사고 짐이나 사요. 비행기를 타야잖아요?”제이크는 입을 다 물었다. 갈 데까지 와있는 지릴에게 어떤 말도 소용없을 게 뻔했다. 이미 그녀의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은 패망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새삼스럽게 질리 와 스테파니를 비교했다. 뱃속에 아이가 있는 것처럼 합쳐도 질리는 스테파니를 따를 수 없다고 절감했다. 하지만 스테파니에게는 어떤 가능성도 기대하지 못했 다. 완전히 끝났다. 그는 스테파니가 어떤 전격적인 제안을 준비하고 있는지 상 상하지 못했다. 얼마 전까지의 스테파니가 아니었던 것이다. 3. 패배의 하향선 상황은 급변했다. 어쩔 수 없이 떠날 준비로 짐을 싸서 아래층으로 내려오던 제이크는 뜻밖에도 소파에 앉아 있는 스테파니를 발견했다. “신혼이 무척 재미 있으신가 보군요.”“아내가 평생 신혼으로 지내자던데, 측하할 생각은 아닐 테 데?”제이크는 자신의 눈을 아직 믿지못하는 듯했다. “제안이 있어서 왔어요.” “미안하오. 남 유부남이오.”스테파니는 진지했다. “사업얘기예요.”그대 막 이 층에서 내려오려던 질 리가 깜짝 놀라며 그들 들의 얘기를 엿들었다. “지겨운 법정 싸움보다 시간을 절약하고 싶지 않나요?”“어떻게 말이오?”제이크는 그 녀의 본심을 짐작하지 못했다. 스테파니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당신의 말인 복 수도 대회에 나간다죠?”“그럴 계획이었소.”스테파니도 그들의 해외도피에 대 해서는 전혀 몰랐다. “타라의 명예도 출발할 거예요. 승자가 모두 갖는 게 어때 요?”제이크는 차라리 웃었다.“그게 스테파니의 최신판 농담이오?”그럴수록 스테파니는 더욱 진지한 표정이었다. “복수가 이기면 회사를 당신이 갖고 난 깨끗이 물러나죠. 대신 타라의 명예가 승리하면 당신과 질리는 조용히 물러나는 조건, 어때요?”“진담이오?”질 리가 긴장한 채 계단에 서서 내려다 보는 가운 데 제이크는 아직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두 말 할 필요없어요.”제이크는 고 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오. 당신은 원래 도박사가 아녔소.”“사람이란 변해 요.”“당신은 예외요.”“놀랐겠군요. 인생이란 모든 걸 간단히 끝내면 후회도 적게 되죠. 어때요, 하겠어요?”제이크는 신중하게, 그것도 재빨리 두뇌를 회전 시켰다. 모두 엿들은 질리는 계단에서 어쩔 줄 몰라했다. 이윽고 제이크가 스테 파니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을 때였다. “제이크, 안 돼요!”질리가 날카롭게 소 리쳤지만 제이크는 이미 마음을 결정했다. “합시다!”그는 스테파니와 협상자 로서 악수를 나누었다. “안돼요!”질리가 다시 부르짖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 가 어떡해 볼 겨를도 없이 스테파니와 제이크는 일생일대의 도박에 합의했다. 공금을 몽땅 횡령해서 외국으로 도망치는 게 최선책인 질리와 승산있는 싸움에 도 불구하고 과감한 승부를 거는 스테파니의 성격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 었다. 그와 때를 같이해서 주변에서 시끄러운 문제가 소리없이 발생했다. 수녀원 에서 빼돌린 자료를 입수한 반지 낀 사내였다. 이날 밤 그는 스테파니의 침실까 지 숨어들었다. 그녀가 깊은 잠에 빠졌을 때였다. 소리없이 숨어든 그림자는 자 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무겁게 내려다 보더니 이윽고 침대머리맡에 있는 사진첩 으로 다가갔다. 가족사진 액자였다. 그것을 들여다 보던 그는 갑자기 사진의 댄 과 스테파니의 얼굴을 검정색으로 짓뭉개듯 칠했다. 그것뿐이 아니다. 검정색으 로 얼굴을 뭉갠 다음 사진의 목부분을 찢어 얼굴을 뜯어낸 다음 그것을 자고 있 는 스테파니 옆에 던져놓고 나가버렸다. 이튿날 제이크는 아침부터 승마장에 나 가 말을 연습시키는데 열중했다. 하지만 질리는 여전히 불만으로 가득찼다. “필 요없으니까 스테파니와의 약속을 취소해요.”“그럴 수 없어.”“그러고 싶지 않 은 거겠죠?”“완벽한 내기야, 질리. 타라의 명예와 복수가 승부하는 거라구. 우 리가 승리하면 하퍼사는 영원히 우리 것이 돼, 모르겠어?”“지면요? 그런 내기 를 받아들이다니 바보예요. 속임수라는 걸 왜 모르죠?〔”이제 그만 좀 해.”더 늦기 전에 돈을 가지고 여길 떠나요, 네?”제이크의 마음은 확고했다. “그래서, 리오에서 범죄자처럼 살 생각은 추호도 없어.”“전엔 안 그랬잖아요.”“그땐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 스테파니가 기회를 줬어.”“봉급 줄 돈을 아직 가지고 있어요. 모두 갖고 당장 떠나요, 제이크. 제발요, 네?”“아 냐. 누가 알기 전에 빨리 제자리에 갖다 놔, 알겠어?”질리 역시 그의 말을 듣기 에는 이미 늦었다. 제이크가 다시 스테파니에게 끌려든다면 혼자서라도 도망칠 수 있는 여자였다. 한편 아침 잠에서 깨어난 스테파니는 침대에 떨어져 있는 찢 어지고 뭉개진 사진을 보는 순간 가슴이 섬칫했다. 누군가 자기에게 원한을 품 고 있음을 직감했다. 질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약간의 위로는 되었지만 수법 이 그녀같지 않아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도려진 사진을 데니스에게 보여주었다. “오늘 아침 이걸 발견했다. 설마 네 장난은 아 니겠지?”“왜 그런 짓을 하겠어요.?”“그럼 누구지?”“호텔 프론트에 알아 보죠.”일생일대의 경마를 앞둔 그녀에게 그것을 확실히 불길한 징조였다. 제이 크가 끝내 말을 듣지 않게 되자 질리의 비뚤어진 사고방식이 다시 본색을 드러 내기 시작했다. “말을 못달리게 해야 돼요. 다쳐서라도요.”“그럼 모든 걸 잃 게 돼.”“뭐라고요?”“대회에 나가지 않으면 기권승으로 상대가 이겨.”그녀의 눈빛이 빛났다. “양쪽 다 마찬가지겠죠?”“타라의 명예에 그런 문제가 생기면 우리가 기권승을 거두지.”제이크는 당연한 문제를 생각없이 말해 주었다. “맞 아, 그거예요.”“안 돼, 질리.”제이크는 이미 그녀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난 약속하면 꼭 지켜.”“특히 스테파니에게는.”“이번 내기의 매력은 단번에 스테 파니를 이길 수 있다는 거야.”“당신의 자존심을 정말 잘 건드려 놨군요.”“맞 아, 정곡을 찔렀어.”“나한테 맡겨요, 꼭 이길 테니까.”“뭐라고?”제이크는 다 시 깜짝 놀라며 그녀를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정석보다는 비열한 승리에 정 신의 말초신경이 짜릿짜릿 쾌감을 느끼는 그녀였다. 스테파니에게 일어났던 심 상치 않은 경고가 데니스에게도 날라왔다. 데니스는 이번의 경마를 승리로 확신 했다. 그 동안 관계가 순탄하지 않았던 캐시를 이번 기회에 완전히 자기 사람으 로 만들고 싶었다. 하퍼가는‘타라의 명예’에 충분히 걸었지만 자신과 캐시의 몫을 확보하고 싶었다. 그의 결혼요구에 감동한 캐시는 즉석에서 상당액을 내놓 기로 결정하고 뜨겁게 포옹할 때 그런 문제가 발생했다. 스테파니의 침실에 숨 어들었던 수상쩍은 사내는 다시 데니스와 사라의 사진을 똑같이 목부분에서 잔 인하게 찢어 그 장소에 던져놓았다. 그걸 받아듣 데니스 역시 불길한 예감을 떨 칠 수가 없었다. 질리는 역시 그녀다왔다. 제이크가 없는 틈을 이용해서 모든 현 금을 가방에 챙겼다. 그때 제이크는 다른 방에서 이번 경마에 관한 내용의 중요 한 전화를 하는 중이었다. 돈을 가방에 챙긴 질리는 도둑처럼 에덴을 빠져나갔 다. 이미 비행기표도 예매한 그녀였다. 치사한 방법으로 경마에서 스테파니를 해 칠울까 생각했지만 그녀에게 계속 열중하는 제이크가 싫어진 탓이다. 에덴을 빠 져나온 질리는 곧장 공항으로 달렸다. 그 지경까지도 제이크는 전혀 논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공항대합실에 도착한 그녀에게 또 다른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질리 샌더스 부인, 데스크에 전화가 와있습니다.”뜻밖의 안내방송에 질리는 깜짝 놀랐다. 분명히 제이크라고 생각한 그녀는 수화기에 대고 대뜸 쏘아붙었다. “필요없어요, 제이크. 너무 늦었어요.”하지만 상대는 제이크가 아니었다. “제 이크가 아니오. 당신을 말리고 싶어서 전화했소.”“누구세요?”질리는 깜짝 놀 랐다. “리오로 가지 마시오. 승리할 가능성이 충분하오.”“무슨 뜻이지요?”그 녀는 어리둥절했다. “우린 서로 필요하게 될 거요. 대회가 끝나고 연락하죠. 잘 들어요. 스테파니가 승리하도록 절대로 놔두지 않겠소!”상대의 단호한 의지에 지릴는 갑자기 마음이 변했다. 그보다 앞서서 에덴의 제이크는 아무것도 모르고 질리의 방으로 들어섰다. “당신은 어린애 같아. 안 된다면 토라져버리니…….” 그는 침실의 불부터 켰다. “우린 이길 거야. 이봐, 자는 척 그만해.”그는 질 리 가 침대에 잇는 것으로 알았다. 하지만 베개를 넣어 불룩하게 꾸민 시트를 들추 는 순간 얼굴빛이 변했다. 더 둘러볼 필요도 없이 그는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갔 다. 질리가 혼자 떠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방법은 공항으로 달려가 그녀 를 붙잡는 일뿐이다. 그때 또 다른 일이 제이크를 놀라게 만들었다. “어디 가세 요?”현관문을 여는 순간 질리가 가방을 들고 거기에 있었다. 제이크는 긴장이 갑자기 풀렸다. “갔는 줄 알았소.”“다음으로 연기했어요. 사실은 떠나려고 나 갔지만 끝까지 보고 싶어서 돌아왔어요.”그는 질리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갔 으면 쫓아가서 죽였을 거야. 거기서 경찰은 못찾아도 난 당신을 찾아 낼 수 있 지. 다시 한 번 그러면 찾아내서 아들만 낳게 한 다음 죽여버리겠어.”“그렇게 아들이 걱정이면 물려 줄 것도 생각해요.”“물려 줘야지. 난 운이 좋아.”“운 이란 창조해야 오는 법이에요. 어쨌든 스테파니가 이기도록 놔두진 않겠어요.” “경기는 공정해야 돼.”“사랑해줘요, 지금…….”그녀는 갑자기 제이크의 품으 로 파고들었다, 정신적인 긴장과 스테파니에 대한 증오가 다시 그녀의 관능을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요즘들어 그녀는 어 느 때보다 자주 그걸 느꼈다. 그리고 최고의 절정에 도달하며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바람둥이인 제이크조차 놀랄 정 도였다. 이튿날 스테파니가 예고도 없이 하퍼사를 방문했을 때 제이크와 질리는 막 키스하려던 참이었다. “총 지뱅인 자리가 네 능력에 맞았나 보지?”“난 다 재다능해, 언니는 그렇지 못하지만.”마음 속으로어떤 비책을 준비해 놓고 있는 질리는 자신만만했다.“제이크, 우리 내기의 서면계약서예요, 난 서명했어요.”스 테파니는 계약서를 제이크에게 건네주었다. “신사협정을 불신하시는군.”“물론 이죠, 신사와 거래할 때만 믿어요. 질리, 네가 증인을 서주겠지?”제이크는 자신 이 먼저 서명한 다음 펜을 질리에게 넘겼다. 질리는 마지못해 서명했다. “이젠 됐군요. 이 사무실을 다시 꾸며야겠어. 경기 후에 손봐야지.”스테파니는 사무실 을 둘러본 다음 여유있게 걸어나갔다. “경기가 끝나면 넌 무일푼이 될 거야.” 질리의 저주에 대해 웃음으로 응수했다. 제이크도 웃었다. 그러자 약오른 질리는 곁에 있던 책을 집어 제이크에게 내던졌다. ‘타라의 명예’와‘복수’의 경기 는 그렇게 해서 이루어졌다. 스테파니의 재기와 제이크의 몰락이 거기에 달렸다, 또한 정반대로 결론지어 질 수도 있었다. 스테파니는 데니스와 함께 승마장에 있었다. 그녀는‘타라의 명예’가 승리할 것을 확신했따. 아말이 굉장히 좋은 말 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 승마장에서는 예기치 못했던 사태가 발행했 다. ‘엄마, 그 사진 또 나왔어요?’‘아니, 잊었는데 왜 묻지?’그들은 마굿간 앞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저도 받았어요. 더구나 몇 주 전부터 미행당하는 느 낌이 들어요.”그때였다. 얼굴을 거의 가린 여자가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그들의 앞을 지나쳐 뒤쪼그로 걸어갔다. 마주치는 순간 데니스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데니스, 질 리가 말로 변장했나 보다.스테파니도 이상했던지 한 마디 농을 던 졌다. 순간 데니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질리!”그는 낫게 부르짓으며 의문 의 여자를 따라 후다닥 뛰어갔다. 그의 육감은 적중했다. 그가‘타라의 명예’가 있는 마굿간에 들이닥쳤을 때 그 사실이 판명되었다.‘이건 하나도 안아파. 금방 끝날 거야.’지릴엿다. 말의다리에 막 주사바늘을 찌르려 했다. ‘거기서 꼼짝말 아!”약물을 주사하려던 질리는 질겁하며 달려드는 데니스를 밀쳤다. 엉겁결에 얻어맞은 데니스가 바닥에 쓰러지가 질리는 정신없이 뛰쳐나갔다. “저 여자를 잡아!”데니스가 마굿간을 뛰어나와 소리쳤을 때 질리는 이미 저만치 뛰어가고 있었다. 정신없이 도망치던 그녀는 변장했던 것도 모두 벗어던졌다. “거기 서! ”도망치던 질리는 마친 조련사가 끌고 오던 말을 빼앗아 타고 삽시간에 사라졌 다. “지릴는 포기하는 법이 없군!”데니스와 함께 서있던 스테파니는 깊이 탄식 했다. 하마터면‘타라의 명예’는 질리 때문에 폐마가 될 뻔했던 것이다. 그 소 식은 금방 제이크의 귀에 들어갔다. 스테파니가 경찰에 연락했고 그 ㅈ 에덴에 수사관이 들이닥쳤다. “연기는 집어치워, 질리!”’늦잠을 잤나 봐요.”화가 나 있는 제이크는 그녀의능청에 더욱 기가 막혔다. “밖에 경찰이 와있어.”질리는 여전히 시치미를 뗐다. “왜 왔대요?”“몰라서 물어?”“그들에게 뭐라고 했어 요?”그쯤 되자 지릴도겁에 질린 듯했다. “당신은 집을 가간 적이 없다고 했지 만, 대체 무슨 짓을 했어?”항상 겪으면서도 제이크는 무섭게 화를 냈다. “우릴 구하고 싶었어요. 망할 놈의 데니스?”오히려 데니스를 증오하는 질리의 태도에 제이크는 극도로 흥분해소 소리쳤다. “당장 목을 부러뜨릴 수도 있어!”“당신 협박은 신물나요.”“다시 그런 짓 하면 꼼짝 못하게 가둬버리겠어.”“난 당신 이 그렇게 강할 때가 좋더라…….”“그래? 난 내 아이가 감옥에서 태어나는 걸 원치 않아.”그는 갑자기 질리의 목을 힘껏 조였다가 결국엔 풀어주었다. 아이가 아니었으면 그녀는 벌써 안톤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질리는 그래도 중단하지 않았다. 그녀를 알고 있는 스테파니는 말을 다른 장소로 옮겼다. 멜보론으로 보 내 아무도 모르게 숨겨놓기로 했다. 그녀의 예측대로 질리는‘타라의 명예’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따. 이번의 게획은 전처럼 말에 주사나 놓는 정도가 아니 다. 죽여버릴 작정이었다. 그 계획에 질리는 상당액의 돈을 아낌없이 투자했다. 스테파니의 치밀한 계획을 알 길 없는 질리는 다시 캐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캐 시가 다시 데니스와 가까워지고 결혼까지 약속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캐시는 처음 질리의 유혹을 완강히 거절했다. “그 말이 어디 있는지 나도 몰라요. 설혹 알아도 가르쳐 줄 수 없죠.”그 정도로 물러날 질 리가 아니다. 그녀는 거금을 제시하는 한편 캐시의 약점을 적나라하게 찔렀다. 처음 캐시는 그녀가 내미는 거금의 증서를 찢어버렸따. “싫어요, 질리. 난 데니스를 사랑해요.”“바보같이 굴지 마. 사랑은 돈이 없어도 가능하겠어? 알지, 데니스는 온실 속의 화초야. 돈 만 떨어지면 사랑도 지속되지 못해.”그 부분에서는 캐시도 질리의 말에 공감했 다. 돈이 없는 생활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그녀는 이미‘타라의 명예’ 에 가진 돈을 모두 걸려는 참이었다. “내가 손을 쓰면‘타라의 명예’는 경기 에 나오지도 못해. 당연히 우리가 이기는 거지.”캐시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질리를 위할 생각은 꿈에도 없지만 데니스와 행복하게 살기 위해 돈이 팰요했다. 이미 에덴까지 스테파니에게 뺏긴 질리가 눈이 ㄷ집혀 있 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성격이 단순한 캐시는 돈만을 생각했다. 캐시는 이제 하퍼가의 식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한때 스테파니를 돕기도 했던 그녀였 다. 스테파니는 데니스가 그녀와 결혼하는데 이의가 없었다. “질리는 무서운 여 자예요.”캐시는 스테파니에게서 정보를 얻어내려고 했다. “말이 어디 있는지 모르면 잔꾀를 부릴 수 없지.”“멜보론에 있죠?”“아니, 다른 곳으로 옮겼어. 약간 거짓말을 했지.”스테파니는 캐시를 데니스의 여자로만 생각했다.“말은 확 실히 안전한가요?”질리의유혹에 빠진 캐시는 데니스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데 니스는 그녀를 사랑했다. 가족의 단합이 어느 때보다 필요할 때여서 캐시를 동 지와도 같다고 믿었다. 그는 캐시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만 비밀을 그녀에게 누 설했다. “지금 혹시베리 마굿간에 잇있을 거야. 공항에서 직접 그리로 옮겨지 지. 우린 지금 말과 작별하러 가는데 같이 가겠어?”“아뇨. 전 멜보론에 가기 전에 할 일이 있어요.”“불안해하지 마, 캐시.”그는 불안해하는 캐시를 오히려 위로했다. 그 정보가 곧장 질리에게 전해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 어리석게도 캐 시는 데니스와의 행복을 질리에게 맡겼다. 스테파니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도 불 구하고 단순하게 데니스와의 행복만을 원했다. 그녀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또한 캐시는 스테파니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를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4. 최후의 심판 질리는 스테파니보다 확실히 한 수 뒤졌다. ‘타라의명예’는 멜보론 공항에 서 곧장 혹시베리 마굿간으로 수송되지 않았다. 한가한 국도를 점령하고 여러 명의청부업자를 비싼 값에 고용한 질리의 작전은 완벽한 듯했다. 길가에‘공사 중’이라는 팻말을 놓고 대기하던 저격수들이 무차별 난사한 트럭에는 말이 실 려있지 않았다. 작전이 성공한 것으로 확신한 질리는 제이크의 사무실에서 성급 한 축배까지 들었다. “건배해요.”“뭘 위해?”“우승이죠. 내가 보증해요.”“ 그렇게 확신하는 걸 볼 때마다 걱정부터 앞서는군.”제이크는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들이 키스할 때 스테파니가 불쑥 들이닥쳤다. “난 회의할 때마다 여길 오는군.”“뭘 원해?”질리는 잔뜩 약오른 표정으로 스테파니를 노려보았다. 스테파니는 아무것도 내색하지 않았다. “회사 비행기로 내일 모두 함께 갔으면 어떨까 해서.”제이크가 즉시 찬성했다. 그때 스테파니는 미리 준비한 다른 모습을 연출했다. “실은 친구 몇 명 초대했어요, 제이크. 모두 내일의 결과를 기대하는 사람들이죠.”그와 함께 아말과 타리사가 사무실로 들이섰다. “믿기지 않는군!”제이크는 가벼운 신음소리를 냈다. “샌 더스 씨, 축하할 일이 있다고 해서 왔소.”타리사도 한 마디 던졌다. “전 타리 사 공주지 스테파니가 아녜요.”“그런 것 같군요.”제이크는 지난 일을 조소하 는 타리사의 비유에 속이 뒤틀렸다. “스테파니는 이제 얼굴을 감추지 않아도되 오. 내 여동생은 이제 풀려났소.”“내일‘복수’가 이기면 모두에게 가리개가 필요할지도 모르죠.“아말은 질리의 증오섞인 말을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그가 우승하면 그럴 거요.”제이크가 웬지 모르게 불안해 하고 있을 때였따. 이번에는 댄과 제시카 그리고 데니스가 예고도 없이 사무실에 나타났다. 아직 승리를 확 신하는 질리는 눈꼬리를 치켰다. “갈수록 재미있어지네. 또 놀랄 일이 있어, 스 테파니? 혹시 남편이나 애인이라두?”“질리, 우린 친구로 가끔 만나기로 했다 오.”댄은 부드럽게 말했고 제시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데니스가 기다렸다 는 듯이 질리에게 곧장 설명했다. “그랫는지 안 그랬는지 모르지만, 당신이 이 번 테러사건에 관련됐는지 아닌지에 따라 다르겠죠. 빈 마굿간도 그렇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질리!”제임크는 낯빛이 창백해지며 날카롭 게 소리쳤다. 스테파니 측들은 그 이유를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제이크만이 질 리가 저지른 일을 모르고 있었다. 단순한 테러 정도로 생각하는게 분명했다. 제 이크의 분노와 스테파니 진영의 조소에도 불구하고 질리는 아직 가능성을 믿었 다. ‘타라의 명예’는 최소한 부상을 입었을 것이며, 그 이유는 익명의 동조자 를 은영 중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그녀의 확신을 완전히 벗어나고 말았다. 이튿날 수많은 관중들과 함께 스테파니 진영 그리고 제이크 진영이 손 에 땀을 쥔 가운데 진행된 경기는 스테파니의 승리로 끝났다. ‘타라의 명예’ 가 우승을‘복수’는 준우승도 차지하지 못했다. 질리는 있는 대로 독이 올랐다. 모든 게 끝났다는 절망과 함께 당장 스테파니를 쏴 죽이고싶어졌다. 하퍼사에도 불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제이크는 오히려 태연했다. 스테파니를 축하하는 듯 이 보였다. “입 닥쳐요, 제이크! 안 그러면 가만 안 두겠어요!”경마장에서 돌아 올 때 차 안에서 휘파람을 불었던 것이다. “겁나는데?”“당신 같은 멍청이한 테야 말로 통하지 않겠죠.”질리는 바짝 독이 올랐다. “계산된 모험이었소. 이 제부터 우리의비상금으로 살아야겠군.”“우리가 아니고 내 비상금이에요.”“잘 알아 둬. 우리를 묶는 건 아이뿐이야. 태어난 다음에는…….”제이크는 다음 말 까지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의 결심은 확고한 무엇이 있는 게 분명했다. 아이 때문에 질리의 온갖 극에 다다른 모부림에도 불구하고 함께 있는 것이다. 에덴 도 빼앗긴 질리는 테렐비전에서‘타라의 명예’의우승을 축하하는 화면에 눈이 뒤집혔다. 당연히 축하받는 사람은 스테파니였다. “나쁜 넌!”질리는 곁에 있던 재떨이를 화면을 향해 힘껏 집어던졌다. 재떨이는 화면에 스테파니를 정확하게 맞혔고, 그 순간 요란한 폭발음이 내며 TV 가 타버렸다. 이제 스테파니에 대한 그녀의 증오는 극에 다다르고 있었다. 에덴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되돌아온 원래 의 주인 스테파니의 승리를 축하하는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지난 날의 하퍼가 족이 빠짐없이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제시카가 연극에 몰두한 나머지 완전히 그쪽으로 기우었다. 댄은 스테파니에 이어 다시 고독해졌다. “난 내일 아침 비 행기로 떠나겠소.”“작별하러 가진 않겠어요. 당신이 그리울 거예요.”스테파니 는 댄의 고독을 분명히 느낄수 있었다. “나도 그렇소. 에덴도 그리울 테고. 여 기서 우린 행복했었지…….”“당신과 지세카는 더울 행복할 수 있을 거예요. 그 녀가 섬에 가기 싫다면 어떡하시겠어?”“혼자서 행복해지는 법을 배워야지. 당 신께 배운 거요.”그들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파티에는 사라도 참석하지 않았 다. 안젤로와 톰의 중간에서 그녀는 아직 방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데니스도 캐 시 때문에 안젤로의 식당에 있었다. “돈을 다 잃엇어요.”“농담하지 마.”“복 수에다 걸었어요.”“농담 말라니까!”언성까지 높였던 데니스는 사실이 확인되 자 허탈해ㅈ다. “그 말이 이길 줄 알았어요.”“질리한테 당했군, 그렇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캐시는 데니스의시선을 피했다. “날 봐. 날 보라구!” 데니스는 끓어오르는 부노에 어쩔 줄 몰랐다. 그리고 이내 다시 허탈해졌다. “ 당신만은 믿었는데…….”“믿어도 돼요.”“질 리가 다른 제안을 할 때까진 그 랬겠지!”그는 식탁을 발길로 걷어찼다. “우릴 위해서 그랬어요. 당신을 사랑해 요.”그녀의 진심은 이미 데니스와 상관없어진 듯했다. 그는 식탁 위의 물건을 집어 바닥에 내던졌다. 캐시도 흥분하기 시작했다. “당신네 하퍼는 그런 일에 강하죠. 웃기는 건 당신네는 항상 잘되지만 하퍼가 아닌 나 같은 사람은 그런 모험을 못해요. 그래요, 내 최대의 실수는 당신을 다시 받아들인 거였어요!”데 니스는 더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때 질리는 또다시 마지막 음모를 실천에 옮기려 했다. “옷 입어요, 에덴에 가게.”제이크는 어이없다는 듯이 그 녀를 바라보았다. “끝까지 반항해 보려고?”“아뇨. 스테파니를 축하해 줘야죠. ”“어떻게? 계란에 폭탄이라도 설치하나?”“알고 싶으면 따라와요.”“흥미롭 군. 당신이 또 스테파니한테 당하는 걸 볼 테니까.”그때 질리는 서랍에서 권총 을 꺼내 핸드백에 넣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번엔 당하지 않아…….”그들이 호텔을 나설 때 에덴에서는 한 가지 감격적인 일일 있었다. 제시카와 댄이다. 급 히 에덴에 도착한 제시카는 스테파니의 충고에서 새로운 것은 느꼈다. 평소 그 녀처럼 사업 때문에 사랑을 잃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녀는 급히 집으로 달려갔 다. 그때 댄은 이튿날 떠날 비행기 좌석을 예약하는 중이었다. “여보세요. 난 마샬 박사인데 비행기표를 한 장 예약하려는데…….”그때 뛰어들어온 제시카가 수화기를 뺏앗았다. “예약은 두 장으로 해 주세요.”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제게서 도망치시려고요?”“메모는 남겼여. 난 작별 에 약하기 때문에…….”그는 아직 제시카의진심을 알지 못했다. “저도 가겠어 요.”“연극은?”“포기했어요. 전 당신과 있고 싶어요.”댄은 가벼운 흥분으로 심장이 드높게 뛰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면 안 돼. 난 스테파니에게 배웠어.” “선택은 싫지만 둘 다 가질 수 없잖아요?”“그건 우리가 하기 나름이지.”“ 노력해 볼 수도 있조.”그들이 오랜 갈등 끝에 완전한 사항을 되찾고 있을 때 질리와 제이크가 에덴에 도착했다. “불청객이 오셨군.”먼저 발견한 아말이 살 며시 알려주었다. 스테파니는 승자답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당신들을 초대한 기억은 없는대요?”“정식으로 축하 하려고왔소.”질리도 거들었다. “언니의 성 공을 말이야.”하지만 스테파니는 그녀를 더 이상 믿지 않았다. “이번엔 또 무 슨 계획이지?”제이크와 질리를 발견한 빌리도 다가오며 대뜸 말했다. “이 사 람들이 여긴 웬일이지?”스테파니가 그러는데 편히 지내는 당신을 끌어내 이용 했다더군요.”질리의 비뚤어진 모함에 제이크가 재빨리 제동을 걸었다. “질리! ”스테파니가 끼어들었다. “둘 다 그만해요.””스테파니, 저들 둘을 내쫓지 않 는다면 당신은 바보요.”빌리의 말에 스테파니도 동의했다. “그런 기쁨을 주고 싶진 않아요.”그때 질 리가 갑자기 복통을 호소했기 때문에 제이크는 급한대로 이층에 데려가도록 양해를 구했다. 그것마저 거절할 스테파니는 아니었다. 그녀 는 질리가 임신 중임을 알고 있었다. 그때 캐시 때문에 고민하던 데니스는 차에 오르다 뒤에서 급슬한 괴한에게 얻어맞고 기절했다. “데니스, 네가 엄마한테 얼 마나 중요한지 봐야겠어.”기절한 데니스를 끌고 가며 중얼거리는 괴한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괴한은 줄곧 하퍼가 사람들의 주위를 맴돌던 사람이다. 사진을 찢 거나 검은 칠을 해대던 장본인이었다. 스테파니는 이층으로 올라가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는 질리의 마법에라도 걸린 듯이 제이크와 질리의 뒤를 따라 이층으 로 올라갔다. “당신은 오지 않아도 되는데…….”제이크였다. “아녜요. 내가 물 을 갖다 줄께요.”바로 그때, 누워 아픈 척하던 질 리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 다. “그럴 필요 없어!”더욱 놀란 것은 제이크였다. 어리둥절한 스테파니에게 질 리가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질리! 내려 놔!”제이크는 놀라 고함쳤다. “방 아쇠만 당기면 넌 승자가 아냐!”질리의 두 ㄴ은 이미 살기로 번뜩였다. “정말 미쳤구나.”“제이크, 당신이 증인이에요. 언니가 총을 들고 싸우다가사고로 오 발된 거예요.”“엉뚱한 짓 말고 어서 총을 내놔.”질리는 다가서려는 제이크에 게조차 무섭게 경고했다. “꼼짝 말고요. 왜 그가 언니를 망치려했는지 알아?” 그녀는 제이크의 만류를 무시하며 계속했다. “죽기 전에 사실을 알아 둬. 제이 크는 그렉의 동생이야. 그래서 복수가 시작된 거지.”새로운 사실에 스테파니는 악몽을 꾸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렉을 쏜 건 너야.”“그리고 7년 동안 감옥에 서 널 쏘는 건데 잘못했다고 후회했지. 이제 그 기회가 왔어!〔스테파니는 비로 소 새파랗게 질렸다. 질리는 분명히 살의를 품었으며 방아쇠를 당길 것도 확실 했다. 그녀는 서서히 총구를 스테파니의 심장에 겨누며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 다. 그 시간은 몇 초도 필요치 않았다. 제이크 역시 사태를 알아차렸다. ”안 돼! 그는 갖바기 소리치며 질리를 덥쳤다. 그 순간 방아쇠가 당겨졌다. 총단은 달려 들던 제이크의 복부를 완전히 관통했고 피가 튕겼다. 스테파니는 제정신이 아니 었다. 튕겨나는 핏줄기를 맞으며 질리에게 달려들어 총부터 뺏을 다음 숨을 헐 떡이는 제이크를 부축했다. 그녀의 드레스는 제이크의 피로 온통 물들었다. 제이 크는 임 사경에 들어선 듯 마지막 발작처럼 꿈틀거렸다. 질 리가 다시 스테파니 에게 덤벼들었지만 총을 뺏지는 못했따. 제이크의 피투성이 시체가 계단에서 굴 러떨어지며 파티장의 사람들을 경악시킨 게 그 직후였다. 총소리에 놀라 당황하 던 모두는 저마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때 드레스가 피투성이인 스테 파니의 넋빠진 모습이 층계 위에 나타나서 모두를 다시 경악시켰다. 정신병자처 럼 계단을 내려와 멍청히 바라보는 그녀는 오른손에 권총을 쥐고 있으면서 그것 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질 리가 층계 위에 나타난 것을 바로 그때였다. ” 스테파니가 죽였어요! 내 눈으로 봤어요! 냉혈동물 같으니! 누구도 그녀를 의심 하지 않았다. 정황은 분명했다. 제이크가 시체로 굴어떠어졌다. 온통 피투성이인 스테파니가 총을 들고 있다. 더구나 그 모습은 자신이 저지른 살인에 대해 넋이 빠지 모습 그 자체였다. 아말과 타리사, 빌리 내외 그리고 모인 모든 사람들이 스테파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방금 전의 대승리를 거둔 그녀가 끝내 피 비린내나는 복수를 참지 못했다는 생각이 그들을 침통하게 만들었다. 스테파니 도 한 마디도 없었다. 의식을 되찾은 데니스는 어리둥절했다. 전혀 모르는 장소 였다. 소이 묶인 채였다. 주위의 벽에는 여러 가지 사진들이 어지럽게 붙어있었 다. 더구나 그는 길었던 머리가 보기 사납게 깎여 나간 모습이었다. 카메라를 들 고 잇는 청년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손가락에 검정색 알이 박힌 반지를 끼고 있 었다.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어떻게 된 거요?”데니스는 상대를 유심히 보았 지만 전혀 안면이 없었다.“이젠 나도 모르겠소.”“힌트라도 줘 봐요.”데니스 는 상대에게서 더 이상의 적대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널 엄마한테 백만 불에 팔아넘길 작정이었지.”“뭐라고?”“하지만 다 틀렸어.”“무슨 소리야?”“네 엄마는 지금 제이크 샌더스 살해한 혐의로 가소됐어.”“말도 안 돼!”“무슨 소 리야?”“네 엄마가 그러지 않았어. 질리가 그랬어, 그것도 사고로.”“이제 보 니 네가 사진을 보냈군. 넌 도대체 누구야?”상대는 모든 걸 체념한 듯이 스스 로 털어놓았다. “이름은 크리스야. 그래도 모르겠지만 네 형이야, 데니스. 엄마 가 18살 때 버린…….”데니스는 금방 알아차렸다. “엄만 버리지 않았어. 그러 니까 아말 왕자의 아들이군. 그렇다면 백만 달러는 문제도 아냐.”“널 죽이지 않으면 그렇다는 거야?”스테파니야 아말 사이에서 태어난 크리스는 데니스의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근데 내 머린 왜 이렇게?”“오래 생각해서 그런 거야.”크리스는 데니스의 묶인 손을 풀어 주었다. 톰과 달리 그들은 분명한 형 제였다. 한편 누명을 쓰고 기소된 스테파니는 사실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유 일한 목격자 질리에 의해 누명을 썼기 때문이다. 질리는 승리감에 도취된 듯이 감옥까지 찾아왔다. “아무도 만나기 싫댔잔아요!”스테파니는 간수에게 몹시 화 를 냈다. “그럼 재판정에서 보시지, 내가 도움은 못되겠지만.”질리는 확신했다. 법정에 나서도 증인은 그녀뿐이다. 스테파니는 유죄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 런 일을 당할 이유가 없어. 저 여잘 당장 내보세요!”“회색 감옥이 별로 어울리 지 않는군. 나도 전에 싫어했었지.”“넌 오래가지 못해!”그때 스테파니의 경고 가 사실로 입증되었다. 질리는 승리감에 빠져 일 분 후도 예측하지 못했다. 데니 스와 크리스 그리고 제닝 반장이 느닷없이 들이닥친 것이다.“안녕, 엄마.”스테 파니는 가족을 보자 금방 울음이 터질 듯했다. 그녀는 힘껏 데니스를 포옹한 다 음 필사적으로 안정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네 머리가 그런데……”모든 문 제가 해결된 데니스는 여유를 보였다. 어리둥절한 것은 지켜보는 질리였다. “알 라요, 엄마. 다신 그 이발소에 가지 않겠어요.”데니스는 이어서 지릴가 놀랄 만 한 사실을 공개했다. “약간은 충격이시겠지만요, 이쪽은 엄마의 아들 크리스예 요.”“뭐라고!”질 리가 스테파니보다 더 놀랐다. 데니스의 계속된 얘기는 질리 를 거의 실성한 여자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크리스는 질 리가 제이크를 쏠 때 발코니에 있었대요. 그걸 사진까지 찍었다지 뭐겠어요.”“말도 안 돼!”질리는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닝 반장이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 다. “이미 증언도 했소. 같이 가실까. 샌더스 부인?”부드러운 말투와 달리 제 닝 반장은 우악스럽게 질리의 팔을 움켜잡고 밖으로 끌어냈다. “아냐! 내게 이 럴 순 없어! 넌 정말 운이 좋구나, 나쁜 넌!”질리는 덫에 걸린 살쾡이처럼 부르 짖었다. 하지만 그렉에 이어 그이 동생인 제이크가지 살해한 그녀의 미래는 이 미 확정되었다. “우린 할 얘기가 많겠구나…….”스테파니는 크리스의 손을 잡 았다. 그리고 천천히 끌어당겨 뜨겁게 가슴에 안았다. 자매의 운명이 이제 상반 된 길을 걷게 되엇따. 지릴는 다시 감옥세 수감되고 스테파니는 무혐의로 석방 되었다. 데니스와 크리스를 데리고 감옥에서 나온 스테파니는 에덴으로 돌아왔 을 때 곧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댄이 기다려요. 아직 안 떠났죠.”그녀가 묻기 전에 데니스는 그녀가 궁금하게 여길 일들을 상세히 설명했다. “아말과 타리사는 호텔에 있고요. 크리스에 대해 전화로 제가 우선 알렸어요. 괜찮죠?” “그럼.”스테파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보고 싶대요.”“아말이?”“네. ”“나도 그렇단다.”“이젠 뭘 하시겠어요?”크리스는 아직 한 마디도 하지 않 았다, 그는 모든 게 생소하게 느껼질 수밖에 없었다. “얘들아, 지금은 너희 둘 과 그냥 같이 있고 싶구나. 중대한 결정은 기다리라고 해. 난 갑자기 자유의 참 뜻을 깨닫게 됐어. 그래, 다신 이 자유를 빼앗기지 않겠어.”그들은 선착장에 있 었다. 스테파니는 두 아들을 각각 양쪽 팔로 안은 채 먼 수평선으로 시선을 던 졌다. ‘중대한 결정’은 기다리라고 했다. 댄과 완전히 헤어진 그녀에게 남은 사람은 아말뿐이다. 또 있다면 존노였지만 아직 그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 지 않았다. 하퍼사가 페르시아 왕궁과 맺어지면 세계 굴지의 히사가 될 것은 당 여한 일이다. 다시는 제이크 같은 도전자가 얼씬거릴 엄두도 못낼 만큼 막강하 게 될 것이다. 사라와 안젤로 그리고 톰의 문제는 아직 미궁에 빠진 상태였다. 좀처럼 결말짓기 어려운 문제였다. 원인제공은 사라였지만 그걸 탓할 수도 없었 다. 그보다는 오히려 무척 가엾게 느껴졌다. 먼 수평선에 던져진 스테파니의 시 선에는 그 동안의 온갖 인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지나갔다. 그리고 인간의 참 된 행복과 진실한 사랑, 자유에 대해 그녀는 심각하게 생각했다. 자신이 그 동 안 해놓은 일들과 그 과정에 대해 무엇을 확신할 수 있을지 자문해 보았다. 대 답은 찾아낼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만이 분명했다. 인간은 인간일 수밖에 없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새삼 두 아들의 소중함을 가슴으 로 느끼며 힘주어 그들을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