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으로 돌아오다 2권 지은이: 시드니셀던 출판사: 꿈이 있는 집 제1부 애증의 세월 마틴 그레함과 세리 모건의 결혼식은 그렇게 전격적으로 결정되었다. 모든 일이 세리의 계획대로 진행되어 이번에도 그녀는 하객도 없이 단 둘이서 결혼식을 올 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이키만은 참석시켜야 했다. 안나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존재이지만 마틴의 아들인 마이키만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세리는 그 점에 대해서 도 이미 준비해 둔 것이 있었다. 세리의 갑작스러운 무리한 요구에 대해서도 마틴은 세리를 믿으면서 그녀의 의사에 따라 일을 진행시킬 뿐이었다. 그들의 결혼식은 아직까지 마이키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마틴은 세리가 시키는 대로 신 혼여행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세리는 신혼여행지를 선택하는 것 조차도 특별했다. 그녀는 호텔이 아닌 곳으로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장소이기를 원했다. 그녀는 사람들 의 이목이 집중되지 않는 장소로 가고 싶어한 것이다. 마틴은 그런 요구에 대해 의심은 커녕 오히려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외딴 장소에서 둘만이 호젓하고 행복한 순간을 가지려 한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마틴은 아침부터 수소문을 해서 알아낸 외딴 지역에 있는 오두막에 대한 정보를 세리에게 설명해 주었다. "길을 따라 오다 보면 이런 오두막이 보일거요. 조르만 페리에서 2마일 정도 떨어진 곳이 요." "천국 같은 곳이겠네요?" 세리는 몹시 만족해 하며 연신 미소를 지었다. "내 생각은 그 곳이 신혼여행 장소로 적합한 것 같은데?" "좋아요 내가 원하는 곳인 것 같네요. 역시 당신은 내 마음을 항상 읽고 이해해 주시는 분 이에요, 마틴." 그녀가 감격해 하고 있을 때 마이키가 들어왔다. "마이키." 마틴은 어리둥절해 하는 아들에게 그 소식을 알려주었다. "놀랄 만한 일이 생겼단다." "네?" "우리 오늘 결혼하기로 했단다." 마이키는 잘못 알아들은 게 아닌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어떤 사람도 그런 뜻밖의 소 식을 듣게 되면 똑같은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오늘요?" "그래, 오늘." 세리의 두 눈에서 재빨리 번개처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리고 짐짓 마이키의 입장을 이해해 주려는 듯이 말했다. "괜찮아, 마이키." "네?" "약속은 중요한 거야. 그러니까 취소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우린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릴 거니까." 세리는 가급적 마이키를 떼어놓고 싶었지만 마틴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 연한 일이었다. "그 약속은 당연히 취소해야지, 안 그러냐? 마이키,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니?" "그럼 안나 이모는 요? 이모도 알고 계시나요?" "알려도 될지 모르겠구나." 마틴은 그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마이키라면 또 모르지만 그녀는 이 같은 결혼식을 반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리는 마틴의 망설임도 아랑곳없이 아주 당연하듯 나섰다. "당연히 안나도 참석해야죠. 당장 전화해 보겠어요." 그녀는 전화기로 다가가 안나의 집에 태연히 전화를 걸었다. 자신에 의해 살해 당한 안나 가 전화를 받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태연하게 전화를 걸고 있는 것이다. 세리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죽음의 곁에만 있어도 사람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자신이 죽여놓고서도 그렇게 태연할 수 있다는 것은 세리가 어떤 여자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정말 오늘 결혼식을 올리실 거예요, 아빠?" 나이는 어리지만 아직 믿어지지 않는 표정을 한 마이키에게 마틴은 자랑하듯 설명했다. "조르단 페리의 목사님께 주례를 부탁드렸더니 오늘 오후에 주례를 서주시기로 약속하셨단 다." 마이키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어른들이 결정한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자신의 위치가 위축된 것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안나 이모 에 이어 자신도 세리의 등장과 함께 아버지와 자신사이에 거리감이 생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 게 느껴지고 있었다. 더구나 마이키는 자신에게 시시각각 닥치고 있는 운명에 대해서는 아직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몇 차례 반복해서 안나의 집에 전화를 걸던 세리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기며 말햄ㅆ다. "전화를 안 받아요. 나중에 다시 해야겠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안나는 참석해야 되는데..."" 그녀의 언행과 태도에서 의심할 만한 구석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런 그녀를 누군가가 나타 나서 그녀의 정체라도 폭로한다 해도 마틴에게 큰 위치로 자리잡은 그녀를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이키, 지금은 우리 모두 같이 가지만 식이 끝나면 넌 이모와 같이 먼저 돌아와야 한ㄷ," 세리의 얼굴에 더 할 수 없는 기쁜 표정이 나타났다. 그것은 세리가 바라던 바였다. 그런데 그 말을 마틴이 먼저 한 것이다. 그렇게 마틴은 세리 가 방해꾼을 없애기 위한 계획을 실천하기 전에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다. "알겠어요, 아빠." "공항버스가 올 시간이야. 세리, 내가 먼저 가서 수속을 밟아야 겠소." "그러세요." 이 그때까지 세리는 어떤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마이키가 다른 방으로 들어간 마틴을 향해 급히 따라가려고할 때 비로소 세리는 번 뜩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마이키가 어쩐지 세리 자신이 없는 속에서 마틴에게 은밀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왜 그러니, 마이키?" 세리가 마이키를 불러 재빨리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아녜요. 아빠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세리는 조바심이 나며 더욱더 의심의 눈을 번뜩이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결혼을 앞두고 들 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신경이 온통 곤두서 있었다. 범행시간이 차츰 가까이 다가온 살인범의 심리 그것이었다. "뭐냐, 마이키." 마이키가 마틴이 있는 방으로 따라 들어가자 세리는 재빨리 문 뒤에 몸을 숨기고 두 사람 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뭐지?" "어젯밤 안나 이모가 오셨었어요." 세리의 두 눈이 번쩍 빛나기 시작했다. "술을 드신 것 같았어요." "확실하니?" 순진한 마이키는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확히 짚히는 데가 없었다. "안나 이모의 행동이 좀 이상했어요. 그리고 이상한 얘기도 많이 했어요." "어떤 얘기지?" "아줌마에 대해서요. 아빠께 꼭 말씀드리라고 했어요."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세리의 마음에는 독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마이키가 안나를 만났다는 사실 한가지만으로도 세리는 그 다음 일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틴은 자신의 운명을 어쩔 수 없었는지 마이키의 얘기를 듣기도 전에 잘라서 말했 다. "너한테 말해 둘 일이 있다. 이모는 세리를 질투하고 있어.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니 가슴이 아프다." "무슨 말을 했는지 듣고 싶지 않으세요?" 마이키는 약간 혼동에 빠졌다. 그가 만났던 안나의 태도에서는 세리를 질투하기 때문이라 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진지한 구석이 있었다. "뭐라고 했는데?" 밖에서 엿듣고 있던 세리가 재빨리 들어오며 마이키의 그다음 이야기를 가로막았다. 마틴과의 결혼식, 즉 여섯 번째의 살인에 대한 어떤 방해도 용서치 않겠다고 생각한 세리 였다. 마이키가 안나에게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자신에게는 치명적인 소식일 것 이라는 생각에 세리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마틴?" 그녀는 어느 때보다 다정하게 마틴을 불렀다. 그녀가 부르자 마틴은 마이키에게서 돌아섰 다. "미안해." "결혼식엔 어떤 옷을 입을 거죠?" 필요에 따라 그때 그때 임기웅변식으로 생각해 내는 세리는 다른 사람들은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양복하고 타이를 매야지." 당연한 일을 가지고 세리는 마이키와 마틴이 더 이상 이야기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었다. "회색 양복을 입어 줄래요? 당신에게는 그 옷이 제일 잘 어울려요. 네가 입을 옷도 준비해 야 되겠다, 마이키. 아주 멋진 것으로 말이야." "그럼 난 먼저 떠나겠다, 마이키." 아직 할 말을 못다한 마이키는 몹시 당황하는 빛이었다. "빠진 것 없이 다 챙겼어요?" "당신만 있으면 빠진 건 없는 거야. 조심해서 오도록 해요." "아빠, 제 말을 좀...." 왠지 모르지만 마이키는 안나의 말을 마틴에게 꼭 전해야된다고 생각했다. 안나의 말 가운 데 세리에 대한 부분들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틴은 마이키의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중에 얘기하자, 마이키." 세리는 돌아서서 나가는 마틴의 뒤를 ㅉ아가서 키스를 했다. 마이키는 당황하고 있었다. 이 상하게 그 이야기를 꼭 아빠에게 해야 된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던 것이다. "마이키, 세리를 잘 보살피도록 해라. 지금 잃고 싶지 않아, 알겠지?" 마틴은 당황해 하는 마이키에게 그말을 남기고 떠나버리고 말았다. 남겨진 마이키는 불안 해졌지만 세리가 곁에 있었기 때문에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세리는 위기 일발의 순간에서 무사히 벗어났다는 안도감에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하지 만 그녀는 이미 무서운 결심을 하고 있었다. 마틴과의 결혼에 방해가 되는 안나를 이미 살해 한 만큼 또 다른 살인도 기꺼이 할 수 있는 그녀였다. 방해가 되는 그 어떤 사람도 살려둘 수 없다고 독기를 품었다. 안나는 세리에게 죽기 전에 한가지 방법을 취해 두었다. 텔레비젼 방송국의 전화번호를 적었던 그녀는 마틴의 집에서 돌아온 후 방송국에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방송국의 직원은 그 제보를 다시 F B I요원에게 알려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건 수사가 벽에 부딪쳐 초조해 하던 그들에게 반가운 정보가 들어온 것이 다. "방송국의 제시카에요." "무슨 일이죠?" "제인 미첼에 대해서 였어요. 그녀는 어떤 남자의 집 주소와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줬어요. 미첼이 그 남자와 살고 있다더군요." "그래요?" "네." "무슨 증거라도 가지고 있던가요?" "결혼 반지 다섯개를 가지고 있다고 했어요." 안나의 신고로 세리 모건, 즉 제인 미첼의 현주소가 F B I요원에게 알려졌다. 그들은 제보가 아직 정확하다고 믿을 수는 없지만 그것을 간과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F B I가 안나의 제보를 믿고 그 즉시 마틴의 집을 급습한다면 세리를 체포할 수 있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더 이상 살인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같은 시간, 세리는 이미 어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느닷없이 마이키에게 가다가 놀 자고 제의했다. 결혼식을 오후에 있는 만큼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바람이나 쐬자는 것이 었다. 순진한 마이키에게 그녀는 곧 새엄마였다. 이모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지만 거절할 수는 없었다. 사실이 확인되지도 않은 이상 몇 시간 후에는 새엄마가 될 세리의 말에 따를 수 밖 에 없었다. 그녀는 능숙한 솜씨로 샌드위치를 만들어갔다. 밖에 나가서 먹을 샌드위치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마이키, 짐은 다 챙겼니?" 대답이 없자 이상히 여기며 마이키의 방으로 간 세리는 그 찾았지만 보이지가 않았다. 방 에 어질러져 있던 벗어놓은 옷을 무심코 정리해 주려고 집어들다가 그 때 무엇인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이상하게 생가하며 바지주머니를 뒤지던 그녀는 놀랐다. 안나가 마이키에게 주었던 반지함 이었기 때문이다. 순간 세리의 표정은 일그러지며 두 눈에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모르는 척하며 마이키의 방에서 나왔다. 그때 마이키는 안나에게 전화를 거 는 중이었다. 왠지 그는 안나가 꼭 결혼식에 참석해야 될 것만 같았다. "마이키, 서둘러 떠나지 않으면 시간이 없어." 세리는 아무일도 없었던 듯이 그를 재촉했다. "알았어요. 이모한테 전화 한 번만 더해 보구요." 욕조 안에서 죽어 있는 안나가 전화를 받을 리가 만무했다. "결혼식은 사진으로 보여주고 케이크도 좀 가져오지 뭐. 결혼 기념 케이크를 멋지게 준비 했잖니. 아빠를 기다리시게 해서는 안되지, 안 그래?" "알았어요." 시간만 있었다면 마이키는 안나의 집으로 직접 가서 확인을 하고 싶었다. 세리는 앞으로 있게 될 일을 짐작이라도 한 듯이 마이키를 차에 태우고 서둘러 집을 떠났 다. 아닌게 아니라 그리고 몇 분후 두 명의 F B I요원이 마틴의 집에 도착했다. 불과 몇 분 차이로 세리는 F B I요원을 피해 무사히 빠져나간 것이다. 이제부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결혼식은 이곳에서 상당히 떨어진 먼 교회에서 있을 테고, 신혼여행지 역시 잘 알려지지 않은 오두막이었으니 경찰이나 기타 수사요원이 그 속을 발견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 다. 세리에게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간단히 결혼식만 올리면 된다. 그리고 곧 장 신혼여행지인 오두막으로 갈테고 그 곳에서 모든 일은 끝나게 된다. 그후 지난번처럼 감 쪽 같이 자취를 감추면 되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데?" F B I 두 요원은 집이 굳게 잠겨 있는 것을 보았다. "어찌된 일이지?" "글쎄, 한발 늦었나?' "그나저나 배도 고픈데 어디 가서 뭘 좀 먹고 보자, 어때?" "그러지." 그들은 아직 정확한 증거를 포착하지 못한 상태였다. 방송국으로 들어온 신고에 대한 신빙 성은 항상 미지수이다. 장난 전화도 수없이 걸려올 뿐아니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걸려오는 전화도 더 많았기 때문이다. 두 명이 요원들이 막 마틴의 집을 떠나려고 할 때였다. 전부터 안나와 친하게 지냈던 그녀 의 친구가 뒤쪽에서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누구를 찾아오셨어요.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요원들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그녀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다가갔다. "그레함 씨를 아십니까?" "누구신데요?" 두 사람은 자신들의 신분을 밝힌 다음 다시 물었다. "저 집 사람들에 관해 방금 우리한테 얘기하셨죠?" "네. 오늘 아침 열 시쯤 그레함 씨는 공항 버스를 타고 갔어요." 두 요원은 서로 마주보았다. 세리의 완벽한 작전 때문에 바로 이웃집에 살고 있는 그녀조 차 그들의 결혼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아뇨." "그레함 씨가 누구와 함께 사는지 아십니까?" "아들 마이키와 그리고 얼마 전에 약혼한 약혼녀와 살아요." 약혼녀라는 말에 두 요원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약혼녀라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죠?" "갈색 머리에 상당한 미인이예요, 착하게 생겼구요. 그녀와 마이키도 조금 전에 집에서 나 갔어요." 요원들이 알고 있는 제인 미첼의 얼굴은 팔로 가린 사진을 통해서였다. 그것만으로는 판단 하기가 불가능했다. "그 여자에 대해서 더해 주실 말씀을 없나요?" "그건 저보다 안나하고 얘기하는 편이 나으실 거예요." "안나가 누구죠?" 마틴과 마이키도 잊고 있는 안나에 대해 친구가 말했다. "마틴 그레함 씨의 처제죠. 부인이 죽은 후부터 집안 일을 혼자 맡아서 해 왔어요. 안나는 왠지 세리를 싫어했어요." 그 말은 요원들에게 한 가지 가능성을 가지도록 해 주었다. "전화를 건 장본인일지도 모르겠군." 안나에 대해서는 그녀의 친구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중이었다. "오늘 아침부터 계속 전화를 했는데 안 받아요. 그런데 무엇때문에 그러시죠?" "물어볼 일이 있어서요.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더란 말이죠?" "오늘 아침부터 내내요." "어디 멀리 간건 아닐까요?" "그럴 리 없어요. 어딜 갈 예정이었다면 저한테 미리 알려줬을 거예요." "그렇다면? ...." 두 명의 F B I 요원은 다시 마주 바라보며 심상치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유능한 수 사관들이며 경험도 풍부했으므로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만일 방송국에 전화한 여자가 바로 마틴의 처제인 안나라면 이미 또 다른 사건이 발생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들의 뇌리를 스쳤다. 비로소 어젯밤 세리에게 피살당한 채 욕조에 버 려진 안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수사 요원의 관심이 안나에게 쏠리고 있을 때 세리는 마이키와 함께 외딴 곳의 조용한 호 숫가에 있었다. "어릴 때 우리 아빠가 날 데리고 소풍을 나오곤 했었지. 이건 내가 정성껏 만든 거야. 네가 이걸 좋아한다고 들었어. 먹어봐." 그녀는 자신이 집에서 만든 샌드위치를 마이키에게 주었다. 그러한 그녀의 표정과 행동은 평소와 다른 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배가 고프던 참이예요.. 조르단 페리는 여기서는 멀지 않아요. 빨리 먹고 떠나야겠어요. 눈이 올 것 같아요." 마이키는 그녀가 주는 샌드위치를 받아서 맛있게 먹었다. "세리 아줌마는 아줌마 아버지가 낚시를 가르쳐 주셨다면서요?" "그래." "아직 살아계세요?" 돌연 세리의 얼굴에 증오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투까지 갑자기 변했다. "죽었을 거야." 어린 마이키는 그녀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세리는 아버지 를 몹시 증오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면 그녀가 마틴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꼭 닮았다고 말했 던 것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아줌마는 아줌마의 아버지를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요." 흥분한 세리는 거침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어릴 때 엄마와 날 버리고 떠나버렸지, 나쁜 놈! 엄마는 그게 모두 내탓이라는 거야. 상상이 가니? 얘가 뭘 안다고 뒤집어 씌워!"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으며 얘기를 듣고 있던 마이키는 돌연 아픈 표정을 지으며 심한 기침 과 함께 구토 증세가 나타났다. "왜 그러니?" 세리는 몹시 걱정되는 듯이 물었다. "속이 안 좋아요." 마이키는 점점 더 심하게 구토를 했다. 금방 먹은 것을 모조리 토할 것만 같았다. "이건 내가 직접 만든 건데 왜 그런지 모르겠구나." "속이 뒤집어지는 것만 같아요." 마이키는 쩔쩔매기 시작했다. "뭘 좀 마셔야 되겠어요." "너무 급하게 먹어서 그런가. 조금 참고 있으면 나을 거야."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거나 걱정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마이키는 마실 것을 찾아 길가에 세워놓은 자동차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몸의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땅바닥에 쓰러져 뒹굴 것처 럼 보였다. 태연히 앉아 마이키를 보고 있던 세리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나타났다. 간신히 자동차까지 뛰어간 마이키는 트렁크를 열었다. 눈앞의 사물이 흐릿해지며 몸은 천 근도 더 되는 것처럼 무겁고 속이 뒤집혔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세리가 샌드위치에 섞어서 먹인 독극물이 이미 온몸에 퍼진 것이다. 음료수를 꺼내기 위해 트렁크를 열던 마이키는 뜻밖에도 앨범을 하나 발견했다. 다섯 명의 남자들 사진이 들어있는 앨범이었다. 모두 결혼식날 찍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세리가 신혼 여행에서 신랑의 사진을 즉석 카메라로 찍어 두었던 것들이었다. 마이키는 몽롱해진 의식 속에서도 안나 이모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깨닫고 크게 후회했지 만 더 이상 생각할 기력도 없이 그대로 땅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2 타라는 조안나와 함께 테니스 시합장에 있었다. 조안나도 테니스를 좋아하긴 했지만, 이 날 은 타라의 요청 때문에 함께 나온 것이다. 완전히 궁지에 몰린 그렉 마스던은 아직 남아 있는 자신의 인기를 발판으로 다시 명성을 얻어보려고 재기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코트에서 상대편 선수와 겨루며 땀을 흘리는 그렉의 모습을 바라보는 타라의 심정은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착잡했다. 대다수의 시드니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렉에 대해서는 조안나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렉은 젊었을 때는 꽤 날리는 선수였었지. 그런데 요즘엔 역시 옛날만 같지 않아." 타라는 조안나의 말이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렉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그녀는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결혼식을 끝내고 아직 에덴으로 떠나기 전, 그렉과 질리의 테니스 시합 장면이었다. 시합을 끝내고 나오던 두 사람의 표정에서 그렉과 질리의 불륜의 관계를 짐작했어야 했다. 그러나 타라, 즉 스테파니는 세월이 흐른 지금에서야 비로소 그들의 속셈을 깨닫게 된 것이다. "만일 노력만 좀더 했더라면 완전히 재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긴 내가 상관할 바 아니 지." 조안나는 그렉에게 관심이 많은 듯했다. 실제로 그녀뿐 아니라 수많은 여성 팬들이 그렉을 좋아했다. 시합을 하고 있는 그렉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갖가지 상념에 사로잡힌 타라에게 조안 나는 계속 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스테파니 하퍼의 재산을 노리고 그녀와 결혼했다는 기사를 당신도 읽은 적이 있을 거야." 그 일은 호주 사람들 전체가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 말에 타라는 또다시 지난 일이 뇌리 를 스쳤다. 무서운 그 광경은 그 동안 수없이 떠오르곤 했었다. 여자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자 악어가 무서운 입을 벌리고 덤벼들었고 보트에 타고 있는 그렉은 즐기며 지켜볼 뿐이고 질리도 그의 곁에서 어쩔줄 몰라하는 그 순간이 떠오르는 것이 다. 그당시의 그렉과 지금 테니스 시합을 하면서 땀을 흘리고 있는 모습도 조금도 다르지 않았 다. 타라는 제외한 모든 관람객들은 그렉이 멋진 옛 실력을 보일 때마다 탄성을 올겼다. 스포 츠 선수들에 대한 일방적인 열광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관중들은 아직 그렉의 환상에 빠져 있는 것 같아." 잠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조안나가 문득 타라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타라 역시 그렉에 대한 환상에 빠져 그의 모습에서 눈을 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타라와 그렉 의 관계를 모르는 그녀는 타라의 모습에서 그런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타라도 그렉을 보려고 여기에 온 거 아녜요?" 질문을 받은 타라는 당황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런 것 같은데?" "난 그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걸요. 그냥 시합을 보려고 왔을 뿐이에요." "물론 그렇겠죠." 경기 도중 그렉이 땀을 닦으면서 고개를 들었을 때 마치 약속이라도 되어 있는 것처럼 그 렉은 타라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고 그들의 시선은 마주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앞쪽에 앉 아있는 타라의 모습은 관중 속에서 단연 눈에 띄었다. 그녀는 다른 어떤 여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신비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극단적인 경우에도 여자에게는 변함 없는 바람둥이 그렉이었다. 그런 식으로 관람석 의 아름다운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수없이 반복된 일이었다. 그가 미소를 보내오자 타라는가슴이 미어져 왔다. 그 미소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그 동안 의 처절한 악몽에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이미 굳게 각오한 만큼 침착성을 잃지 않고 타라는 더욱 다정하게 그를 향해 미소를 보내주었다. 타라의 그렉에 대한 접근이 본격화된 것이다. 조안나는 타라도 다른 여자들처럼 그렉의 미소 작전에 넘어 갔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경기 후에 그를 만날 기회가 있는데 같이 갈래요?" "글쎄요...." 타라는 망설이는 척했지만 이미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경기는 그렉의 승리로 끝났다. 재기전이 성공한 것이다. 그는 재기전의 성공을 위한 축하파 티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조안나가 타라에게 그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파티를 얘기한 것이다. 파티장엔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그렉은 극성 팬들에게 에워싸여 사인을 하기에 바빴 다. "이걸 마시라고 준 거야?" 조안나가 주위의 시선을 끌려는 듯이 언성을 높이자 그 소리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사인 중이던 그렉에게 분명히 들렸고 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경기 때의 옷차림 그대로 나타났군. 잘 들어요, 타라. 그렉은 신선한 얼굴만 보면 그냥 있 지를 못해요." 조안나는 곁눈질로 그렉의 일거일동을 살폈으나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타라는 짐작하지 못했다. 그녀도 보이지 않게 그렉에게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특히 남들이 보기에도 그럴 듯한 여자에게 말이에요. 지금도 그러느라 바쁜 것 같군...." 조안나는 타라를 발견한 그렉의 표정이 이미 변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 쪽을 보는데.... 벌이 꿀통을 발견했다는 표정인 걸?" 그런 점에서는 조안나도 짓궂은 면이 있었다. 그녀는 타라에게 잘 해보라는 듯이 그 말을 남기고는 혼자 가버렸다. 뒤에 남겨진 타라는 구태여 도망치지 않았다. 이미 각오했듯이 그렉을 만날 작정이었다. 만 감이 교차되어 가슴이 몹시 뛰었지만 보이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그동안 수없이 겪어온 죽 음과 무서운 공포심으로 심장이 강해진 것도 사실이다. 그렉은 사인을 하다말고 타라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조안나의 말대로 벌 이 꿀통을 발견한 듯한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그 소리를 비로소 알아들은 듯이 천천히 돌아다보는 타라의 모습에 그렉을 넋을 빼앗긴 듯 했다. 타라는 그녀만의 신비한 아름다움과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난 그렉 마스던입니다." 다시 미소짓는 타라의 가슴 속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울렁거리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가. 바로 자신을 죽이려던 남편이 아니던가? "당신이 지금 내 앞에 있다는게 믿어지지 않는군요." 진실이라고는 전혀없는 오직 틀에 박힌 듯한 바람둥이의 감언이설이었다. 적어도 타라의 궁체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들리고 있었다. 대체로 바람둥이들은 한 번 목표를 정하면 맹수가 먹이를 발견한 것처럼 저돌적으로 돌진 한다. 그렉도 예외일 수는 없다. 타라의 매력에 넋이 나간 그는 지체하지 않고 적극성을 보이 기 시작했다. 이튿날 조안나의 사무실로 나간 타라에게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저 왔어요." 사무실에 들어서던 타라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다발이 가득한 것에 약간 놀랐다. "예쁜데요.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이 많은 꽃들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누기 이 렇게 많은 꽃을 보냈죠, 조안나?" "나에게 온 것이 아니어요, 모두 당신께 온 거예요. 누가 보냈는지 알아맞춰 봐요." "누군지 알겠군요." 타라는 그렉이 보냈으리라는 것을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어젯밤 그렉과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요?" "무슨 일이라뇨? 그렉이 내 차 있는 데까지 바래다 준 것뿐인데. 그리곤 바로 헤어졌어요." "차라니?" "내 차요. 어제 샀거든요. 덮개가 달린 독일 제품이에요. 아주 세련된 모델이에요." "정말이에요?' "그래요." "굉장한데요!" 조안나도 놀랐다. 일류 모델의 자리를 확보한 타라의 생활이 최고급 외제 승용차를 굴릴만 큼 향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는 사진사인 제이슨이 모델들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모델들이 옷을 벗으 려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런 분야에서는 옷을 벗는 것을 문제로 생각해서는 안돼.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 말 한마디에 모두 옷을 벗게 되어 있어. 자, 봐. 여러분, 옷을 좀 벗어주세요." 하지만 모델들은 서로 눈치를 살필 뿐 좀처럼 옷을 벗으려 들지 않았다. 제이슨은 화가 머 리 끝까지 치밀었지만 여자들에게 함부로 욕지거리를 퍼부을 수도 없었다. 조안나에게는 지난 밤에 있었던 패션쇼 때문에 아침부터 정신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조안나, 또 전화예요." "또야? 나한테 직접 연결시키지 말고 메모를 남기라고 했잖아." 그녀는 귀찮다는 듯이 대답하고는 타라에게 설명했다. "어젯밤 쇼의 반응이 굉장해요. 시내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 왔을 정도니 까요." "굉장하군요, 조안나. 축하해요." 두 여자가 있는 곳으로 들어오던 제이슨은 많은 꽃들을 보자 무척 당황했다. "이런, 난 꽃 알레르기야. 빨리 밖으로 내가야 해요, 조안나."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 "안녕하세요, 제이슨?" "안녕하세요." 제이슨은 타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당신이 테니스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면 라켓을 선물했을 거예요. 모델들이 도대체 옷을 벗으려 들지 않으니 어쩌죠, 조안나?" "좀 구슬러야지." "물론 그랬죠." "저이는 일에 미친 것 같아." 조안나는 제이슨에 대해 넌지시 타라에게 불평했다. 하지만 타라의 의견은 그렇지 않았다. "잘못된 게 아니잖아요?" 조안나는 그날 밤에 열릴 2차 패션쇼에 출품한 의상들을 먼저 타라에게 선보였다. "정말 아름다워요, 조안나. 반응이 좋을 거예요." "그래야겠지요. 그런데 타라, 그렉 마스던을 어떻게 생각하죠?" 조안나는 그 일에 매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점에서는 타라가 독신으로 지내는 게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기도 했다. "무슨 말씀이에요?" 타라는 뜻밖이라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를 좋아하는지 궁금해서 그러는 거예요. 남자들과 즐기면서 사는 것도 그리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같이 일해 오는 동안 줄곧 느낀 건데..... 남자 친구가 없죠?" "그럴 시간이 없어요. 모델 생활이 어떤지 잘 아시잖아요." "요즘 어떤지 알아요? 삼류 모델들조차 이 남자 저 남자로 갈아치우곤 한다구요. 그런데 하물며 톱 모델인 당신이 그런 고리타분한 생각을 가지고 재미없이 산다니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어요." 타라는 조용히 웃을 뿐이다.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을 아무도 없었다. 조안나가 비록 일류 모델로 만들어 주긴 했 지만 그녀에게도 자신을 밝힐 수 없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그 어느 누구에 게도 말할 수 없었다. 이제 막 그렉과의 접촉이 이루어졌다. 앞으로 타라에게는 할 일이 굉장히 많았다. 가장 핵심 인물인 그렉을 만나면서 그것은 시 작되었다. 그를 만난 것만으로도 타라는 굉장한 충격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렉은 이미 타라에게 적극적인 공세를 펴고 있었다. 언젠가 그녀가 미친 듯이 사랑했고, 그 사랑의 보답을 죽음으로 갚으려던 바로 그 장본인 이 그렉이었다. 그가 다시 타라로 변신한 스테파니에게 정신없이 빠져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날 집에 돌아온 타라를 한 가지 중요한 결심을 했다. 조안나 사무실에 있는 리사한테서 전화가 걸려왔을 때 타라는 막 그 생각을 하던 중이었 다. "타라 씨예요?" "리사, 웬일이에요?" "스케줄이 별경됐다는 것을 알려드리려구요." "뭔데요?" "6시 약속이 5시로 옮겨졌구요....." "장소는?" "같아요." "잘 알았어요. 잠깐만요, 리사. 그 쇼에 한 사람 더 초대해도 상관없겠죠?" "누군데요?" "그럴 사람이 있어요." "좋아요." 타라는 자신이 출연하는 패션쇼에 그렉을 특별히 초대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녀도 그렉 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톱 모델인 타라 웰즈의 인기는 굉장했다. 따라서 그녀가 출연하는 패션쇼는 각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며 대성황을 이루었다. 특별히 초대된 그렉 마스던은 한껏 멋을 내고 객석에 않아 있었다. 다른 모델들의 섹시한 모습도 굉장했지만 그렉의 관심은 온통 타락에게 집중되었다. 그렉은 타라가 등장할 때마다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곤 했다. 이미 마음 속으로 계획을 꾸며놓은 타라는 그와의 시선이 자주 마주치도록 행동했다. 그렉이 보기에도 그녀가 이미 자 신에게 빠지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쇼는 대성황을 이룬 성공리에 막을 내렸다. 쇼가 끝난 후 진행된 축하파티에서 드디어 타 라는 그렉과 춤을 추게 되었다. 언제였던가 싶다. 그날도 타라의 전신인 스테파니는 많은 사람들이 축하해주는 가운데 그렉과 춤을 추었었 다. 그 때는 말할 수 없이 행복했었고 이 세상의 모든 행복을 혼자서 독차지한 듯한 만족감 에 빠졌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가슴 속의 갈등은 오히려 타라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었다. 그녀는 그렉과 함께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그렉은 무척 만족해 하며 타 고난 기질을 충분히 발휘했다. 모델계에 혜성처럼 등장해서 일약 톱 모델의 위치를 굳힌 타라 웰즈는 그렉에게 새롭고 신 비스러울 만큼의 탐나는 여자일 뿐이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네?" "혹시 남편이나 남자 친구 있습니까?" 그렉으로서는 매우 당연한 일상적인 질문이었다. 상대의 정신적인 면보다는 그녀를 여자로 그리고 쾌락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그렉의 속셈이 벌써 드러나고 있었다. 그의 질문에 대해 타라는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 있었죠. 내가 정말 사랑했던 사람이었어요. 어렸을 때 꿈꾸던 동화속의 왕자님같 은 사람이었어요." 타라가 언젠가 스테파니로 살던 그때, 질리에게 했던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타라는 정색하며 묻는 그렉의 눈빛을 똑바로 응시하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꿈이 악몽으로 바뀌고 말았어요. 내가 꿈에서 깨어난 거죠. 자, 이제 당신도 얘기해 보세 요."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그렇게 간단히 끝내며 그렉의 이야기를 요구했다. 그가 무슨 생각 을 가지고 있는지 특히 스테파니에 대해 어떤 생각인지는 더욱 궁금했던 것이다. "무슨 특별한 일은 없었죠. 한 가지 분명한 것을 지금 당신에게 유혹받고 있다는 사실이죠. 타라, 우리 친구가 될 수 없을까요?" 그렉을 역시 그답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친구요?" 그렉의 바람둥이 기질을 알고 있지만 타라는 약간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동안 의 모진 삶에서 그녀는 어느 일류 배우 못지 않은 능수능란한 연기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친구건 애인이건, 뭐라고 이름을 붙이든 상관없습니다." 그곳에서 타라는 보고 싶은 사람 가운데 한 명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렉 아니오?" 그는 질리의 남편인 필립이었다. 모두에게 사람 좋기로 소문이 나 있었고 그의 성격 덕분 에 질리를 바람둥이로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었다. 타라의 입장에서는 질리와는 또 다른 의 미에서 필립을 보고 싶어했다. 필립을 보는 순간 타라는 자신도 모르게 아는 척 할 뻔했지만 타고난 배우의 재능으로 그 녀는 표정을 재빨리 고쳤다. 필립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 때 문득 타라는 그렉이 필립을 어떻게 대하는지 궁금해졌다. "필립 씨, 여긴 웬일이십니까? 요즘 어떻게 지내시죠?" 그들은 오랜만에 만난 듯 보였고 필립은 그렉과 질리의 관계를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럭 저럭 지내고 있소." "이리 앉으시죠." 그렉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예의까지 모이며 자리를 권했다. 필립을 보면서 타라는 그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또한 그것이 질리와 그렉의 관계 때문일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난 곧 갈 거요. 혹시 당신이 아닌가 싶어서 와봤소." 타라는 필립이 무슨 생각으로 확인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렉의 여자 관계나 그렉이 여자 와 함께 있는 모습은 필립에게 관심거리인 듯했다. 비로소 타라는 그가 질리와 그렉의 관계 를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소개하죠. 이쪽은 타라 웰즈, 그리고 여기는 필립 스튜어트 씨입니다. 내 처의 오랜 친 구죠." 그렉의 입에서 최초로 스테파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도요." 타라는 새로운 감회에 적으며 필립과 악수를 나누었다. 타라는 착한 필립까지 속이는 것이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질리는 요즘 어떻게 지내죠?" 타라는 태연한 척하면서 필립에게 질리의 근황을 묻는 그렉의 모습을 훔쳐 보았다. 그가 질리와 집에서 만난다는 사실을, 그것도 자신이 직접 목격했는 데도 그는 뻔뻔스럽게도 질리 의 소식을 그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지난 번 봤을 때까지는 좋아보였소. 요즘은...." 필립은 씁쓸한 듯이 말했다. "안됐군요." 순간 타라는 필립과 질리가 이미 헤어졌는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마음 한구석이 아파 옴을 느꼈다. 필립은 무척 불편한 듯 그 자리에 오래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맛있게들 들어요. 난 이만 가봐야겠소. 만나서 반가웠어요, 타라 씨." "저도요." 타라는 다시 마음이 아팠다. 필립과의 사이에 그런 말밖에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자신이 스 테파니 였다면,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스테파니였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타라와 필립은 똑같은 피해자였다. "스튜어트 씨는 내 아내의 가까운 친구 남편입니다." 그렉의 입에서 두 번째로 스테파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양심의 가책이라고는 전 혀 느끼지 않는지 자연스럽게 아내를 들먹이고 있었다. 타라는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 다. 이미 밝혀진 것이나 다름없는 문제이긴 하지만 스테파니에 대한 그렉의 진심을 확인하고 싶었었다. 사랑했던 사람의 배신을 바로 눈앞에서 확인하고 싶어진 것이다. "그렉 씨, 부인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그렉은 잠깐 망설이는 듯하면서 입을 열었다. "좋은 여자였습니다." 타라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걱정이 많은 여자였죠." 그렉은 스테파니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스테파니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지만...." 결국 그렉의 진심이 그 다음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자는 아니였죠. 뭐랄까, 미운 오리새끼라고나 할까요?" 타라는 가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어떤 소리를 들었다. 그는 스테파니를 미운 오리새끼라 고 표현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스테파니는 철저하게 속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렉은 다시 스테파니를 타라와 비교하며 말했다. "그 여자에 비해 타라 당신이야말로 내가 언제까지나 같이 있고 싶은 백조입니다." 그렉은 타라에게 완전히 빠져서 그렇게 스테파니를 깎아내리고 있는 것이다. 타락 바로 스 테파니 그녀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타라는 그의 본 모습을 몰 랐던 자신에게 말할 수 없는 비애와 분노를 느꼈다. 그런 남자를 동화 속의 왕자님으로 알고 사랑했던 자신이 죽이고 싶도록 밉기도 했다. 속 았다기 보다는 철저한 배신이 였으며 그 결과 끝끝내 스테파니는 그렉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뼈를 깎고 살을 저미는 고통을 수없이 경험하지 않았으면 그렉의 그와 같은 이야기를 가만 이 듣고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 우리 두 사람의 미래를 위해 건배." 그렉을 술잔을 들었다. "건배." 타라도 거기에 응하며 술잔을 가볍게 부딪친 타라는 술잔을 입술로 가져가 음미하는 그렉 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는 자신이 섭렵한 모든 여자가 그랬듯이 타라 역시 걸려 들었다고 자부하는 것 같았다. 타라가 가슴 속에 사무친 목적 달성이 멀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3 트렁크에서 사진들을 발견했지만 마이키는 그대로 쓰러져 길 위에서 언덕 아래로 한두 바 퀴 구르다가 멈추었다. 독이 완전히 몸 전체로 퍼진 것이다. 세리가 얼굴에 가득히 잔잔한 미소를 여전히 띄고 스러진 마이키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이젠 죽어가는 사람의 처참 한 모습을 즐기는 데에 완전히 익숙해졌을 뿐 아니라 승리감까지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사진이 잘 나왔지?" 그녀는 평상시에 이야기 하는 것처럼 말을 했다. "나도 좋아했어. 모두 좋은 남자들이지." 마이키는 정신을 차려서 살인마로부터 조금이라도 멀리 도망치려 했지만 점점 더 고통은 더해오고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긴장을 풀면 편하게 죽을 수 있어. 넌 좋 은 애였는데...." 마이키는 쓰러진 채 한가닥 남은 목숨과의 처절한 투쟁을 시작하였다. 세리 는 다시 마이키에게 다가가면서 마치 안타깝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널 사랑해 주는 아빠가 있어서 넌 얼마나 행복하니? 넌 너를 사랑해 주는 아빠를 계속 기억할 수 있을 거야." 그녀 는 괴로워 하며 죽어가는 마이키의 이마에 키스까지 해주었다. "이게 내가 너에게 주는 마 지막 선물이야, 마이키. 완벽한 추억이지." 그녀는 숨이 끊어지려는 마이키를 그 자리에 내 버려 두지도 않고 잔인하게 걷어차서 아래쪽으로 굴러 떨어지게 만들었다. 마이키는 이미 숨이 끊어진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편 두 명의 F.B.I요원들은 안나의 집을 수색하여 했 으나 문이 잠겨 있었기 때문에 집주인의 도움을 받느라 시간이 좀 지체되었다. 집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케케한 죽음의 냄새만이 풍기고 있었다. 집안 여기저기를 살피던 요원 가운데 한 사람이 반쯤 열려진 욕실 앞에 도착하자 비릿한 피냄새를 맡았다. 그와 동시에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재빨리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선 그는 깜짝놀라며 잔뜩 찡그렸다. "이런 세상에!" 욕탕 바닥에는 피가 홍건하게 고여 이미 굳어 있었고 물리 가득찬 욕조 안에 서 안나가 죽어있었다. 욕조 밖으로 늘어진 팔목은 동맥이 끊겨 있었다. 안나의 이마 한가 운데에는 흉기에 얻어맞은 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이건 뭐지?" 다른 요원은 세 리가 미리 작성해서 갖다 놓은 유서를 발견하고 달려온 것이다. 같은 시간, 외딴 호숫가에 죽은 듯이 엎어져 있던 마이키는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기적처럼 의식이 돌아왔다. 몸을 가 누지 못하면서도 일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마이키가 죽은 것으로 확신한 세리는 결혼식장인 교회로 가기 전에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가까스로 일어선 마 이키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비틀거리며 뛰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아 니에요, 엄마......" 세리는 평소의 버릇대로 혼자서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아빠는 나 때 문에 떠난 게 아니에요 남자이기 때문이에요 남자들은 모두 똑같거든요 사랑하게 만들고는 상처를 주지요 남자들은 다 그래요, 엄마. 그런데도 엄마는 나를 믿지 않았어요" 한맺힌 사 연이 있는 듯했다. 그것이 남자만을 선택해서 독살하는 직접적인 원인일 수도 있었다. "엄 마, 그 때는 내 잘못이 절대로 아니었어요 하지만 엄마, 지금은 안 그래요 달라요....." 그녀 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극도의 정서불안인 것이 확실했다. 이미 다섯 명의 남자를 죽 였고 또 방해자를 모두 없앴을 뿐아니라 조금전에는 16세된 소년을 죽인 그녀였다. 그러나 자신의 살인 행동에 대한 죄책감은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불행했던 자신 의 과거를 되새기며 눈물까지 흘리는 것이다. 진흙탕이 있는 숲지대를 겨우 빠져나온 마이 키는 마침 지나가는 트럭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도와주세요!" 트럭은 그를 발견하지 못했 는지 그냥 지나쳐버렸다. "제발...." 소용이 없었다. 트럭은 이미 그를 뒤로 하고 멀리 가버 렸다. 다행히 몸의 상태는 호전되었다. 하지만 걸어서는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었다.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받아야만 아버지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사 요원들도 몹시 긴장했다. 안나의 살인이 확인된 이상 그 제보가 사실이며 곧 벌어질 살인사건이 있음을 짐 작할 수 있었다. 관할 경찰서에서는 F.B.I요원들의 요구대로 다각적인 방법으로 수사에 박 차를 가했다. "그녀는 조르단 페리라는 곳에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틴그레함이라는 사람 은 모른답니다." 경찰의 담당자는 조사한 내용을 간략하게 알려주었다. "그곳 주변에는 작 은 마을들이 여럿 있습니다. 개발업자가 손을 대기 전까지 그곳은 대규모 낚시터였조" "자 동차로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4시간 반에서 5시간 정도 거립니다." "여자와 애는 차를 타 고 간 것이 분명해." "그리고 참, 죽은 여자 문제는 짐작하신 그대로 입니다. 동맥을 자르기 전에 이미 굉장한 흉기에 맞아서 죽었답니다." 안나의 사망 원인 규명되었다. 처음에는 자 살인 것처럼 보였지만 이마의 상처가 사인이었다. 수사요원은 연쇄 살인과 관련지어 추리가 가능했다. 즉, 안나간 방송국에 전화한 사실을 범인이 알았을 경우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죽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그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다시 살인 사건이 발생할 위험 지역까지는 자동차로 4시간 반에서 5시간이나 소요된다고 하지만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살인 을 막기 위해 한시라도 빨리 그곳까지 달려가야만 했다. "5시간 안네 범인이 또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몰라. 당장 경찰헬기를 동원하라고 해. 그곳 조르단 페리의 경찰에도 연락해서 사건 경위를 알려주고 그들은 마틴 그레함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알겠습니 다." 두 명의 수사요원이 급히 충돌할 때에 조르단 페리의 오무막에는 이미 살기가 감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안나는 물론 마이키에 대한 끔찍한 상황을 전혀 모르는 마틴은 신부가 되 어 웨딩 드레스는 아니지만 눈처럼 새하얀 드레스 차림의 세리 모건을 반갑게 맞아들이고 있 었다. 마틴의 눈에 비친 세리의 모습은 백의의 천사처럼 보였다. 그녀만큼 아름다운 여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그녀와 평생을 같이 할 수 있게 된 자신이야말로 행운아 라고 확신하였다. "세리!" 막 들어서는 그녀를 본 마틴은 그 아름다움에 놀라는 한편 한 가 지 의문점을 발견했다. "마이키는?" 그녀와 같이 오기로 했던 마이키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 다. "나쁨 소식이에요" 세리의 그럴 듯한 연기는 이미 준비되어 있던 것이었다. "당신이 떠 난 후 그 애의 여자 친구가 자전거를 타자고 했어요 그런데 그만 사고가 발생했어요" "사 고?" 마틴은 깜짝 놀랐다. "네." "마이키가 다쳤소?" "아뇨" "그럼?" "여자 친구가 자동차와 부딪쳐서 다리가 부러졌어요" "세상에!" 마틴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리의 거짓말은 완벽했다. 그녀는 앞으로 한두 시간만 무사히 넘기면 그만이었다. 모 든 일을 끝내고 다시 어디론가 종적을 감출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쯤 병원에 있어야 한다나 봐요 마이키가 그녀옆에 있고 싶어했어요" 세리는 일류작가의 구성만큼이나 완벽하고 그럴 듯하게 꾸며 놓았다. "우리의 결혼식을 연기하겠다니까 그러지 말아달라고 했어요 당 신에게는 연락도 안되고 해서 그냥 이렇게 온 거예요" 그들은 이제 곧 결혼식을 올릴 교회 앞에 다다랐다. 세리의 계획에 따라 그토록 멀리 떨어진 외딴 장소에서 결혼식을 올리려는 것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주례인 목사가 이들에게 다가왔다. "신부가 오셨나요" "네, 그렇 습니다. 세리, 마이키는 정말 괜찮소?" 전에 없이 마틴은 마이키를 걱정하였다. 세리를 사 랑하게 된 후 그는 거의 그녀에게만 열중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왠지 그가 더욱 걱정스 러워졌다. "그 앤 괜찮아요. 조금도 걱정하지 말아요? "그럼 갑시다." 그들이 결혼식을 올리 기 위해 교회로 들어가고 있을 때 마이키는 외딴 집을 발견하고 필사적으로 뛰어가서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집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잠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 마이키는 그 집 사람의 도움을 받아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었지만 그 집이 비어있어 실망했다. 그때 마이키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집 앞에 세워둔 자전거였 다. 자전거를 향해 달려갔다. 사이클 선수인 마이키에게 자전거는 굉장한 도움이 되는 것이 었다. 독물이 든 샌드위치를 먹고 사경을 헤맸던 그는 몸이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자전거 에 올라탔지만 그대로 넘어져 버렸다. 자전거 하나 마음대로 다룰 만한 기운이 없었지만 죽 을 힘을 다했다. 몇 차례 쓰러지고 넘어진 끝에 마이키는 간신히 자전거에 속도를 내며 달 릴 수가 있었다. 사이클 선수로서 체력단련을 했던 게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마이 키가 사력을 다해 자전거로 달리고 있을 때 마틴과 세리의 단촐한 결혼식은 이미 끝나가고 있었다. "반지를 주세요" 마틴은 준비한 두 개의 반지를 성경책 위에 놓았다. 세리가 간직 하고 있는 반지함에 여섯 번째로 들어갈 반지였다. "나를 따라 하세요. 이 반지로 결혼을 서 약합니다." "이 반지로 결혼을 서약합니다." "이 반지로 결혼을 서약...." 마틴과 세리는 상대 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며 결혼을 서약했다. "이제 두 분은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 다. 키스하세요" 결혼식은 간단하게 끝났다. 이미 안나와 마이키의 생명을 해쳤으면서도 세 리는 잠시후 있을 살인을 생각하며 자신의 계획이 차질 없음을 생각하며 미소짓고 있었다. 그들은 신혼여행 장소로 선택한 오두막에 도착하였다. 마틴은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에 대해 전혀 예측하지 못한채 촛불이 꺼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피워올리는 불꽃처럼 가슴 가득히 행복함에 젖어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세리에게 독살당한 다섯 명의 남자들은 세리를 위해 마지막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마틴 역시 오두막에서 생의 마지막 사진을 한 장을 찍었다. "이제야 진짜 그레함 부부가 되었군요" 그녀는 식탁 위에 샴페인과 케이크를 준비 해 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마틴처럼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꿈에도 예측하지 못햇다. "당신도 기념사진을 한 장 찍어야지, 안 그래?" "나중에요 지금은 샴페인과 케이크를 먹을 시 간이에요 난 전통을 신봉하거든요" 그녀는 마지막 단계로 계획을 완성할 시점이 된 것이다. 그녀는 샴페인이나 케이크에 무서운 독극물을 넣었을 것이다. "내가 지키고 싶어하는 신봉 도 있지." 마틴은 무엇엔가 좇기듯이 세리와의 키스를 원했다. 그가 만일 세리의 고집을 꺾 고 키스에 이어 사랑의 행동으로 이어지게 할 수만 있다면 세리의 계획은 실패로 끝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리는 말려들지 않았다. 전에 없이 마틴의 키스를 피하며 그럴 듯한 이유를 붙였다. "내가 긴장했나 봐요. 우선 축배부터 들기로 해요, 네?" "좋아." 드디어 마틴 은 세리의 술책에 완전히 말려들고 말았다. "나를 암흑에서 구해 준 여인을 위하여!" 그는 샴 페인 잔을 기쁜 마음으로 입으로 가져갔지만 세리는 먹지 않고 들고 있으면서 감동을 억제할 수 없다는 듯 감탄사를 연발했다. "당신은 최고예요, 마틴, 내가 그동안 만나본 사람들 중 최고의 남자라는 걸 아셔야 해요" 세리는 마이키가 자전거를 타고 전속력으로 오두막으로 오 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살인자로서의 승리감에 이미 도취되고 있었다. "남은 평생 동안에도 계속 그렇게 생각해 주구료"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났지만 이들은 알아듣 지 못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다른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세리는 세리대로, 마틴은 마틴대로 도취되어 있었다. 마틴이 샴페인을 막 마시려는 순간 오두막의 문이 거칠 게 열리며 마이키가 뛰어들어 왔다. "아빠!" 마틴보다 기절할 듯이 놀란 것은 바로 세리였 다. 호숫가에서 죽어 있어야 할 마이키가 귀신처럼 나타난 것이다. "그 술 마시지 마세요!" 마틴은 어리둥절했다. "독약이 들어 있어요" 세리의 두 눈에서 살기가 뿜어나오는 듯했다. 마틴은 더욱 놀라게 만든 것을 마이키의 모습이었다. 온몸이 진흙투성이었다. 두 눈은 무섭 게 충혈되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사경을 헤맸던 그의 모습은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 했다. "우릴 죽이려고 해요" 세리는 살인마답게 태연했다. 갈 데까지 갔다고 생각하니 오히 려 초연해 진 것이다. "샴페인에는 이상없어요" 그녀는 자신의 샴페인 잔을 단숨에 비웠다. 정말 샴페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었다. 이제 변명도 통하지 않게 되고 말았다. 실제로 당한 마이키가 있었으며 마틴도 그의 처참한 모습 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는 애써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세리의 눈은 또 다른 무엇 인가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마침내 싱크대에 있는 날카로운 식칼을 발견하고 그곳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사고가 났다면서?" "사고라구요? 아녜요, 저 여잔 살인자예요 이모 가 말한 게 그거였어요 결혼식날 남편을 죽인다는.... 벌써 다섯 명이나 죽였대요!" 너무 엄청 난 이야기에 마틴은 다시 한 번 어리둥절해야 했다. 단번에 받아들이기에는 그 말은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거짓말이에요!" 세리는 날카롭게 소리치며 뒷걸음질 쳐서 싱크대로 향 했다. 그리고 식칼을 재빨리 움켜잡아 등 뒤로 감추며 기회를 노렸다. "세리, 대답해 봐. 그 럼 얘가 왜 여기에 왔는지. 병원 이야기는 뭐지?" 세리의 두 눈은 이미 살인자의 눈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마틴은 쓰러지려는 마이키를 부축하고는 한걸음.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는 이 순간까지도 세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할뿐아니라 믿기지가 않았다. "대답해 봐요, 세 리." 그녀는 무섭게 노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지?" 그거 한걸음 더 나 서려 했을 때 세리는 감추고 있던 식칼을 사납게 휘둘렀다. 그 바람에 마이키의 어깨가 그만 칼에 찔렸던 것이다. "거짓말이에요! 거짓말!" 그녀는 이성을 잃으며 발작하기 시작했다. 케 이크가 놓여 있는 식탁으로 다가가며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가까지 오지 말아요! 가까이 오 지 마! 날 건드리지 말란말이야!" "세리, 어서 그 칼을 내려놔요" 마틴은 끝까지 그녀를 설득 시키려 했다. 그는 세리가 살인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서, 세리.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다가오지 마!" 그녀는 계속 무섭게 식칼을 위협하며 악마처럼 부르짖었다. "칼을 내려놔요!" 마틴도 날카롭게 소리치며 성큼 한걸음 다가서려 했지만 식칼 때문에 가지 못하고 말았다. 이미 마이키를 찌른 그녀는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이윽고 세리는 미 처버린 악마처럼 행동했다. 식칼을 잡지 않은 손으로 케이크를 듬뿍 집어 입 안네 넣고 먹 기 시작했다. "미쳤어요" 마이키가 겁에 질린 채 세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칼에 찔린 곳에서는 계속 피가 나왔지만 지혈을 할 겨를조차 없었다. "세리, 무슨 짓이오? 대체 뭘 하 는 거야?" "독을 넣었을 거예요, 아빠, 독을 먹고 있는 거예요" 세리는 꾸역꾸역 케이크를 입 에 쳐놓고 먹었다. "세리" "다가오지 마!" "안 돼!" 마틴이 다급한 나머지 덤벼들어 붙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발작하듯 칼을 휘둘러댔다. "가까지 오지 마! 날 이대로 내버려 둬!" 자신의 목적이 완전히 실패한 것에 대한 세리의 비관이 그런 식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녀는 마지 막 길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었다. 마틴을 죽이지 못한 분풀이로 자신의 생명을 끊으려는 것 이었다. 그녀가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남자, 다섯명에 이어 안나와 마가 렛을 죽였지만 마이키를 죽이려다 실패하여 마틴까지 죽일 수 없게 되자 자신을 죽임으로써 벌을 가하려는 것이다. 케이크를 잔뜩 먹은 세리는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칼을 움켜 잡은 채 비틀거리며 오두막에서 걸어나갔다. 계단을 내려갈 때는 더욱 고통스러워 하며 괴 상한 신음소리를 냈다. 이이 다섯 명의 남자들이 그와 똑같은 고통을 받으며 죽어가는 광경 을 지켜보며 승리감에 미소를 지었던 그녀였다. 그러나 독극물이 몸에 퍼지는 말할 수 없는 고통에는 그녀도 어쩔 수가 없었다. 마틴은 마이키와 함께 약간 떨어져서 그녀의 뒤를 따랐 다. 그의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은 세리가 살인마여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세리가 고 통받으며 죽어가는 모습을 도저히 태연하게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비록 살인마라고 하더라도 그녀를 사랑했던 마음이 가슴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계단을 내려 가 몇 걸음 옮기던 세리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더 이상 몸의 균형을 유지할 수 없도 록 이미 몸 안에 독이 가득히 퍼져버린 것이다. 이미 칼도 떨어뜨린 상태였으므로 마틴은 아직 단념할 수 없다는 듯이 조심조심 접근했다. 그녀는 이미 숨이 끊어진 듯이 엎어진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왜,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마틴이 피끓는 절규로 말하자 별안간 세 리는 눈을 뜨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제일 사랑했어요" 하지만 그것은 악마의 목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전부 다 사랑했어요" 힘없이 그 말을 하고는 세리는 완전히 눈 을 감고 말았다. 삐뚤어진 복수심 때문에 살인마가 되어 여러 명의 생명을 앗아간 살인마의 최후 역시 처참했다. 마틴은 갑자기 속이 메스꺼우며 토할 것 같았다. 뒤에 있던 마이키는 어깨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부착하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마침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4 뜻밖의 사람이 스튜디오로 타라를 찾아왔다. 타라를 시드니에 진출하게 한 가장 중요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렉에 이어 질리가 불쑥 찾아온 것이다. 타라는 이날은 패션 쇼나 기타 지금까지 했던 장면과는 완전히 다른 요염하고 섹시한 장면이었다. 한 남자를 반 라의 상태로 유혹하는 광경을 연출하는 중이었다. 사진사 제이슨은 그 분야에서도 경험이 풍부했다. "피에 굶주린 흡혈귀 같은 포즈를 취해 봐요" 그는 계속해서 다른 모델들도 윽 박질렀다.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는 거야? 그러지 말고 집중해 봐." 그가 모델들을 대하는 태도는 개개인마다 완전히 달랐으며 가장 으뜸인 타라에게는 제이슨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 다. "잠깐 화장 좀 고쳐야겠어요" 그가 다른 모델들과는 계속 작업을 하고 있는 도중 방문 객이 찾아온 것이다. "아가씨, 무슨 일로 오셨죠?" "타라 웰즈 양을 뵙고 싶은데요?" 제이 슨은 안쪽에 있는 타라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타라, 여기 누가 당신을 찾아왔어요 너 무 시간 끌면 안돼요" 처음에 무심코 방문객을 맞던 타라는 깜짝놀랐다. 그런 곳에서 질리 를 만나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질리는 굉장한 의미가 있는 사람이었다. 놀 랐지만 타라는 그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애써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 "저를 찾아오셨다구 요?" 타라는 전혀 모르는 척하며 질리를 상대했다. "전 질리라고 해요. 잠깐 시간 좀 내 주 시겠어요?" 질리 역시 처음에는 그렉처럼 스테파니와 닮은 점이 있다고 느꼈지만 그녀가 훨 씬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따라서 타라에게 이미 질투심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혹시 기자세요?" 타라의 그와 같은 태도는 완벽했다. "전 그렉 마스던의 친구예요. 아주 가까운 친구죠" 질리는 타라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특히 강조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요?" "이틀 전 내 남편과 만났다고 하던데요?" "아, 맞아요 그렉이 레스토랑에서 소개시켜 주었 죠" 질리는 역시 화끈한 여자였다. 궁금한 것은 그 자리에서 해결하는 것이 그녀의 성격이 었다. "그렉과 밤새 같이 있었겠죠?" 타라는 크게 실망했다. 자신의 친구였던 그녀에게서 타락의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렉과의 빗나간 정욕 때문에 완전히 타락해 있었다. "뭐라구요?" 타라는 놀라며 되물었다. 어떤 경우에도 질리의 그 같이 저속한 태도는 비난받 아 마땅했다. 질투심으로 눈이 멀게 되었다고 그렇게 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난다는 거 알고 있어요" 질리는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에게서 예의라 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스테파니의 친구인 질리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장 초 라해져 질투심에 불타는 여자일 뿐이었다. 타라는 질리에 대해 다시 실망이 됐지만 침착성 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렉의 테니스 시합 때 우린 처음 봤어요 그 후 저녁 식사를 한 번 같이 했을 뿐이에요" "거짓말 하지 말아요" 그녀는 믿지 않았다. 자신이라면 그렇지 만은 않았을 것이라고는 그녀는 자신의 관점에서 모두를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그 런 모습에 타라는 더욱 실망을 했다. 그녀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 수 있었기 때문 이다. "이봐요" 한심하게 생각되자 타라는 자신도 모르게 평소와 다른 말투가 튀어나왔지 만 질리 정도의 말투는 아니었다. 다만 질리에게 좀더 못박아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나한테 할 이야기 더 있어요?" 그녀는 질리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계속 했다. "그렇다면 저쪽 코너에 바가 있는데 거기서 기다려요 두세컷 더 찍어야 될 것 같으니 까 잠시 후에 거기서 봐요" "좋아요" "곧 갈께요" 타라는 질리를 기다리게 한 다음 나머지 작업을 모두 끝냈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리고 질리에 대한 생각을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한 다음 그녀가 기다리는 곳으로 갔다. 예측대로 질리는 기다리며 이미 한두 잔 정도의 술을 혼자서 마시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에 가고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괜찮아요 뭘로 하겠어요" 질리는 타라의 예측 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타라는 이미 근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스테파니 시 절에도 사실상 질리는 그녀에게 항상 열등감을 느끼며 불만스러워 했다. "맥주가 좋겠어요" "여기 맥주 하나 하고 스카치 하나 더 주세요" 질리의 기호를 타라는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예측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적당히 술이 취하자 술에 대한 예찬론을 늘어 놓았다. "우울할 때는 술이 최고예요. 술을 마시면 외롭고 텅빈 것 같은 기분이 사려져요" "이해해요, 하지만 당신한테는 그렉이 있잖아요" 타라가 넌지시 그 말을 던졌을 때 질리는 약간 당황하는 듯했 다. "그렉이요?" 타라는 고개를 끄덕였고 질리는 술기운 탓인지 그 문제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렇다고 볼 수 있겠죠 그에겐 내가 필요해요 그이는 이술만큼이나 내 마음을 끌어요" 타라는 계속해서 자신이 알고 싶은 일들을 넌지시 꺼내놓았다. "지난 번 그렉이 그 의 아내에 대해서 애기해 주더군요 당신은 그의 아내와 가장 가까운 친구사이였다고 들었는 데...." "맞아요 어릴 때부터 단짝이었죠 집안끼리도 가까웠구요 부친끼리도 사업을 같이 했거 든요" 그런 부분을 모를 리 없는 타라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한한 공허함이 느껴졌다. 질리의 이야기대로 어릴 적의 단짝이 어쩌다가 이런 사이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 다. "그렉 부인의 죽음이 오히려 두 사람 사이를 가깝게 해 주었겠군요" "그런 사실이에요" 질리는 그 질문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웨이터가 주문한 술을 가져오자 질리는 기 다렸다는 듯이 술을 권했다. 그녀는 이미 술 기운이 어느 정도 돌고 있었다. "스테파니도 옛날에 맥주를 좋아했어요" "스테파니에 대해서 좀 얘기해 주시겠어요?" 질문을 던진 순간 타라는 약간 긴장되었다. 자신의 모습이 질리에게 어떻게 비쳤는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질 리의 입에서도 그렉과 똑같은 이야기가 나왔다. "그렉은 스테파니를 사랑한 적이 없었어요 그가 나한테 그렇게 말했어요 그 후 그와 나는 사랑에 빠졌죠 그래서 그런지 스테파니에 대 해선 미안한 생각이나 죄책감 같은 것은 들지 않아요 그렇고 그런 일이니까요 이 말이 무슨 뜻인지는 당신도 알 테죠?" 타라는 또다시 커다란 비애를 느꼈다. 결혼한 스테파니를 사랑 하지도 않는 그렉과의 불륜을 질리가 정당화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렉이 만일 스테파니를 사랑했다면 자신은 죄책감을 느꼈으리라는 것이었다. 타라는 질리도 나쁘 지만 보다 중요한 원인은 그렉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가슴 속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타라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스테파니는 어땠죠?" "네?" "그렉을 사랑했나요?" "그랬던 거 같아요" 이야기하는 가운데 많은 시간이 조용히 흘러갔다. 질리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라도 난 듯이 물었다. "지금 몇 시나 됐죠?" "일곱 시 십 분이요" 타라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질리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듯했다. "가 봐야겠어요 그렉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타라는 그렉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스테파니가 실종된 후 그는 질리와 계속 관계를 가져온 것이 분명했다. 필립과 질리의 관계도 전번 레스토랑에서 느낀대로 매우 악화되었다는 것이 또다시 확인된 셈이다. 질리는 남편을 배신한 채 아직도 그렉과의 사랑놀음에 빠져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그 렉은 타라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치고 있는 것이다. "차 가지고 왔나요?" "아뇨, 요즘은 주 로 택시를 이용하죠" "그렇다면 내가 집까지 바래다 드리죠" "정말요?" 질리는 반가운 표 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만큼 단순한 여자이기도 했다. "지금 곧장 가야 되는데 ..... 늦으면 그렉이 화낼 거예요" "좋아요, 가요" 질리와 함께 밖으로 나온 타라의 마음은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남편을 두고도 그렉과 같이 살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타라는 그녀의 남편인 필립을 진실된 남자로 보아 왔었다. 질리가 아닌 필립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마음씨 좋 은 그가 혹시 질리의 행동으로 입었을 상처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과거 스테파니에 대한 그렉의 진심을 이미 확인한 이상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자신의 재신을 탐 내고 결혼했다는 잡지나 신문들의 기사가 옳았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사랑에 빠져 앞 뒤를 분간하지 못했던 자신이 혐오스러우면서 그런 식으로 당한 것은 자신이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테니스 선수로 명성을 날리던 그렉에게 허영에 들뜬 다른 여자 들처럼 맹목적으로 반했다는 결과밖에 남지 않았다. 숱한 여성들이 열광하는 테니스 스타 그렉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착각에 빠져 그토록 행복해 했던 과거의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질리는 당연한 듯이 그렉의 집으로 향했다. 그 집은 그렉의 집이기 이전에 스테파니 하퍼의 집이었다. 지금은 그렉이 독차지해서 질리와 그리고 다른 여자들과 향락을 즐기는 유희의 장소로 변했지만 말이다. 이렇게 영욕이 깃든 집으로 그렉을 만나러 가는 질리를 데려다주 며 타라가 태연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타라는 자신의 어리석 음에 대한 자책감과 무서울 정도의 복수심으로 대단한 인내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타라는 어둠 속 문밖에서 그렉이 초조하게 담배를 피우는 광경을 볼 수 있 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질리가 늦는 것에 화를 내고 있음이 분명했다. 질리는 차에서 내리기 전에 머리를 매만지고 백밀러를 들여다보며 얼굴화장도 고쳤다. 마치 그렉에 게 밉게 보이면 끝장이라는 듯이 안절부절하면서 서둘렀다. 그 동안 함께 쾌락에 빠져서 지 내왔으면서도 항상 그렉의 눈밖에 나지 않을까 싶어 불안해 하는 모습이다. "조심하세요" "데려다 줘서 고마워요" "천만에" "우리언제 다시 만나요 전화해 주겠어요?" 질리는 그런 점에서는 전과 다름없이 붙임성이 있었다. 처음에는 타라와 그렉의 관계를 의심하고 질곡했 지만, 그게 아님이 밝혀지자 이내 친구처럼 사귀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낮 동안은 모르지만 아침이라면 통화할 수 있을 거예요" "잘 있어요" "잘 가요" 질리는 이제 아무런 의심없이 타 라를 대하고 있었다. 그만큼 단순한 여자였다. 나이도 많고 온순한 남편보다는 와일드한 그 렉에게 빠진 것도 단순한 성격과 빗나간 정욕 때문이었다.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을 추구하 는 질리였지만 지금은 그렉한 사람에게 깊숙이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타라는 질리가 그렉에게 걸어가는 모습을 잠깐 바라본 다음 자동차를 돌려 그곳을 떠났다. 이튿날 은 타라에게 중요한 촬영이 있었다. 제이슨이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분장사를 재촉하며 서 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짐작이 가능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해?" 분장사는 분장사대로 마음이 조급한 듯했다. "5분이면 돼요, 제이슨." 제이슨은 타라를 제외한 다른 모델들을 재 촉했다. "타라의 눈가에 피곤하면 생기는 기미를 보고 싶지 않다면 어서 나가서 기다려요" "아무튼 최대한 서둘러요" 분장사는 다시 타라의 메이크업을 시작하며 밖으로 나간 제이슨을 지칭하듯 타라에게 말했다. "이럴 때는 카메라가 망가져버리기라도 했으면 좋겠죠?" 타라 는 가볍게 웃었다. 그녀 역시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톱 모델은 그 명예만큼이나 모든 작업과정에서 힘들고 어려운 것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도 집 에 가지 못하고 일을 계속 해야 하다니...." 분장사는 불평 아닌 불평을 그렇게 늘어놓고 있었 다. "미안해요" "아직 5분이 안됐어요 이제 곧 끝나요" "제이슨도 피곤할 거예요" "그럴 테 죠" 타라는 바쁘게 생활하느라 전혀 뜻밖의 사람을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한동안 기억 저편으로 밀려 있던 고마운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분장실로 곧장 그녀를 찾 아들어온 사람은 바로 댄 마샬이었다. "타라?" 뒤에서 들려오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타라는 깜짝놀랐다. "오랫만이오" 그의 모습과 미소는 변함이 없었다. "댄!" 그녀는 낮게 소리쳤다. "당신이 여기 웬일이세요?" 그렇게 놀랍고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타운즈빌의 댄 마샬이 찾 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의 탁월한 의술과 정성이 아니었으면 오늘 의 타라 웰즈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댄 마샬은 세련되고 아름다운 타라의 여러 모습 에 새삼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에 대한 소식은 잡지 등을 통해 상세하게 알고 는 있었다. 엘리자베스를 통해 전에 타라가 그랬듯이 여러 잡지들을 구입해서 볼 수 있었다.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타라가 사들인 집과 독일제 자동차에 대해서도 댄은 놀라움을 나타냈 다. 불과 얼마전 흉칙하게 일그러진 모습으로 타운즈빌을 찾아왔던 타라 웰즈의 모습은 흔 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뿐아니라 그와 같은 타라의 멋진 변신은 그를 기쁨과 감탄을 동시에 느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조가비들을 많이 모았나 보군요" 타라는 그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각종 조개껍질이나 산호초 등을 수집했다. 바닷가의 추억은 그녀에게는 영원히 남 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어요" 타라는 댄에게 대접할 저녁식사를 손수 준비했다. 과거 타 운즈빌에 있을 때만 해도 그녀의 요리솜씨는 엉망이었다. 그전까지 직접 주방에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시드니로 다시 돌아온 후부터 그녀는 변화된 생활에 적응하 면서 음식도 직접 만들어 먹었다. 6개월 동안의 노력으로 요리도 어느 수준까지 이르게 되 어 지금은 웬만한 요리는 전문가 못지 않게 만들 줄 알게 되었다. "당신이 보고 싶었고, 타 라." 댄을 만난 이후 타라의 마음 속에는 동요가 일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나타내지 않 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으나 타운즈빌에서의 일들이 낱낱이 기억되기 때문에 무척 힘들었다. 그녀는 요리를 만들기 위해 이것 저것 재료를 준비했다. 하지만 마음의 동요 탓인지 병뚜껑 을 열 때에도 댄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애써 태연하려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그런 모습들을 보이고 만 것이다. "당신을 만나면 계란과 베이컨 요리를 먹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데요?" "그보다 의사치고 최신 유행잡지를 보는 사람은 나 뿐일 거요" "뭘 보시는데요?" 타 라는 계속 주방에서 요리를 준비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엔 보그지를 보고 있소" "당 신이 그 잡지를 보세요?" "그렇소" "상상이 안 가는데요?" 타라는 환하게 웃었다. 보그지는 젊은층이나 패션계에서 애독하는 잡지였다. 그 잡지는 이미 몇 차례 타라 웰즈를 표지모델 로 실었다. 그리고 매번 패션계, 특히 타라 웰즈에 대한 기사를 싣고 있는 것이다. "타라, 당신은 그렇게 명랑하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요" 댄이 처음으로 명랑하게 웃는 타라의 모 습을 본 것은 타운즈빌에서였다. 성형수술 결과가 완전히 성공으로 나타난 후였다. 그들은 모터보드트를 즐겼고 바다에 들어가 댄이 작살로 고기를 잡기도 했다. 싫어하던 생선을 타 라는 맛있게 먹으며 몹시 행복해 했었다. "제가 그랬잖아요, 잘 지낼 거라고" "난 사실 당 신의 건강을 걱정했었소, 타라. 하지만 이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소 매우 좋아 보이니까." "이제 제 걱정은 그만 하세요, 댄." "지금 행복해요?" 불쑥 묻는 댄의 질문에 타라는 잠깐 당 황했다. 단순한 이유외에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타운즈빌에서 작별할 때에 댄은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비춘 적이 있었다. 독신인 그가 타라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 같아요" 타라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행복하지도 불행 하지도 않은 것이 그녀의 생활이었다. 즉, 타라 웰즈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었지만 자신 의 전신임 앞으로 반드시 되찾아야 될 스테파니 하퍼로서는 결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소, 타라." 그가 무엇을 보고 그렇게 느끼는지 타라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재빨리 말해주었다. "아니에요, 댄. 전 지금 정말 행복한 걸요" 그녀의 부정에 댄은 가장 관심이 있던 문제를 넌지시 꺼냈다. "만나는 남자가 있소?" 댄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질문을 한 것이다. 톱 모델이며 신비한 아름다움을 지닌 타라 웰즈에게 사귀는 남자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댄이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이다. 타라가 시드니에서 댄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만약 그녀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행복을 빌어줄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으 므로 댄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기대를 가지고 그렇게 시드니로 찾아온 것이었다. "아무 도 없어요" 타라는 솔직하게 말했다. 댄은 믿어지지 않았지만 기뻤다. "당신이 떠난 후 당 신의 소식들을 들으면서 많이 생각해 봤소" 타라는 댄의 그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 다. 아니, 듣고 싶지 않다기 보다 들을 수 없었다. 현재의 그녀로서는 댄과 그런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앞으로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댄에게 비밀로 해야 하는 일들도 많았다. 따라서 심각한 이야기는 나누고 싶지 않았던 것이 다. "그런데 여기엔 어떻게 오신 거죠?" 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직 그걸 말씀해 주시기 않았잖아요?" 댄은 그녀의 의중을 이내 알아차린 듯했다. 같은 남자이면서도 그렉과 는 비교도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라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섣불리 댄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 수 없었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그와의 어떤 교류도 피하 고 싶었다. 5 댄은 타라가 느끼는 것 이상으로 타라를 생각하고 있었다. 타라가 돌아가는 카메라 앞에서 온갖 포즈를 취하며 생활하는 동안 댄은 타운즈빌에서도 줄곧 그녀를 그리워했었다. 환자를 돌보거나 수술할 때에도 느닷없이 타라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던 것이다. 어떤 댓가를 요구 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자신도 미처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타라가 그의 가슴 한 구석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통을 견디기 위해 이를 악물던 모습에서 기쁨으로 가득찬 미소 하나 하나까지 그의 뇌리에 예고도 없이 불쑥 떠오르곤 했었다. "학회에 참석 하기 위해 시드니에 왔소 그렇지만 난 당신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더욱 기뻤소 아무래도 당 신을 그런 식으로 내 마음에서 떠나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오" 타라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 졌다. 점잖은 댄이 어렵게 한 말이니 그냥 듣고 넘길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 이다. "우린 서로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타라는 침착해야 된다고 자 신을 독려했다. 어떠한 경우라도 그녀는 자신의 사랑이나 기타 사생활을 생각할 때가 아니 라고 다짐했다. 그녀도 그를 좋아하니 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싶지만, 그 이전에 해야만 하는 일이 더 많았다. 사랑 때문에 다시 인생을 실패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건 선생 님 혼자만의 생각이세요" 그녀는 애써 태연하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순간 댄의 표정이 핼 쓱해지며 실망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것도 잠시, 그는 재빨리 표정을 바꾸고 물었다. "화장 실은 어디요?" "침실 안 오른쪽이예요" 댄은 타라와 잠시 얼굴을 피하고 싶은 듯했다. 거 실을 지나 침실로 들어서던 댄은 문득 한 곳에 눈길을 주었다. 눈으로 댄을 뒤쫓던 타라는 순간 아차 싶었다. 침대 옆 스탠드 앞의 두 개의 사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라와 데니스의 사진이었다. 댄은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타라에게 그런 가족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도 남매로 보이는 아이들의 사진이었다. 거실에서 초조해 하 던 타라는 댄이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재빨리 뛰어들어가서 사라와 데니스의 사진을 서랍 속에 조용히 집어 넣었다. 허겁지겁 주방으로 나온 그녀는 오븐에 음식재료를 넣으면서 고 통스러움을 느꼈다. 은인인 댄에게까지 그런 사실을 숨겨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새삼 싫 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댄은 다시 어리둥절해졌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사진액자 두 개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타라가 자신에 게 어떤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녀를 믿었으며 믿고 싶었다. 설령 그녀에게 어떤 비밀이 있음을 안다고 해도 모두 이해하고 관대하게 받아들일 사람이었다. 댄은 잠깐 의아하게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침실에서 나왔다. 타라는 이미 식탁에 식 사를 차려놓고 그를 기다렸다. "냄새가 좋은데요?" "저 쪽에 않으세요" 댄은 타라에게 먼 저 의자를 권한 다음 식탁 맞은 편에 앉았다. "창 밖으로 보이는 경관이 매우 좋군요, 타 라." 그 역시 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야경이 마음에 들어했다. "네. 전 항상 시드니의 항구를 좋아했어요" "나도 그래요 그렇지만 오페라 하우스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소" 두 사람은 조금 전의 갈등은 덮어두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저녁식사를 즐겼다. 그런 점이 그렉 과 댄의 서로 다른 모습이었다. 댄은 접근하는 방법도 매우 신사적이었다. "여기서 머무시 는 동안 한 번 가보시는 것도 좋을 거예요 마침 괜찮은 작품들이 공연되고 있거든요" "당신 은 음악을 좋아하죠, 그렇죠?" 댄은 타운즈빌에서의 우아하고 지적이며 음악을 좋아하던 타 라를 기억했다. "네. 긴장을 푸는 데는 음악이 제일이거든요" 댄은 음식을 먹으면서 넌지시 한 마디 던졌다. "나와 오페라에 함께 가주겠소?" "물론이죠" 타라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 다. 그 정도는 못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댄은 자신의 은인일뿐더러 예의를 갖출 줄 아 는 신사였다. 그런 그와 함께 품위 있는 오페라를 감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그렉은 강요하는 느낌이 역력하지만 댄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받아들이기 전에는 신사로서의 예 의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 확실했다. "그럼 됐어요" 비로소 그는 만족한 표정을 보였다. "맛 있게 드세요, 댄." "지금 맛있는 먹고 있는 중이오 당신의 요리솜씨에 다시 한 번 놀라겠군 요, 타라." "그러세요?" 댄은 새삼스럽게 타라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얼마 만큼 변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쩌면 타운즈빌에서의 타라는 이미 완전히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식 사를 끝내고 두 사람은 옛친구처럼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음악을 감상했다. 타라는 두 눈을 감은 채 소파의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앉아 음악에만 열중했다. 그들은 거의 입을 열지 않았 다. 댄은 타라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이고 타라는 사실상 그에게서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오 지 않게 하기 위한 의도이기도 했다. 자신이 음악감상에 몰두하면 그는 말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댄의 마음은 타라와 달랐다. 아까 타라에게 말한 학회 때문만 아니라 타라를 만나려는 목적이 더 큰 이상 시드니에 온 목적은 달성해야 했다. 와서 놀랄 만큼 변한 그녀를 만났고 그녀에게 무슨 비밀이 있는 듯했지만 현재 사귀는 남자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니 그것만으로도 타라를 만난 성과가 크다고 자위할 수밖에 없었다. 그 녀가 남자를 사귀지 않는 데에는 그럴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 음이 놓였다. 이미 타라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녀를 포기하고 타운즈빌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타라가 혼자서 살고 있는 집에서 밤이 늦었는데도 모르는 척하고 머 물 수는 없었다. 댄은 그렉 같은 남자가 아니었다. 여자 혼자 지내는 집에서 밤 늦도록 있 는다는 것은 예의에 벗어난 일이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 숙소인 호텔로 돌아가려했다. "타 라." 얼마쯤 지나 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그만 가야겠어요" 그는 무언가 말하려는 타라를 조용히 가로막았다. "말하지 말아요 나 혼자서 갈 테니 듣던 음악을 계속 들어요" 타라는 레코드 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완전히 심취하고 있는 듯 보였다. "잘 자요" 댄이 일어서서 나가는 모습을 타라는 보지 않았다. 계속 두눈을 감고 있었다. 댄이 나가자 그녀 는 비로소 눈을 떴다. 좀처럼 음악이 다른 때처럼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녀는 이미 알 수 있었기 때문에 피한 것이다. 그가 더 이상 이야기 할 수 없 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녀 역시 댄을 은인으로 생각하고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렇지만 그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앞으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것이란 확신은 변함이 없었다. 댄이 다녀간 다음에도 타라의 일은 더욱 바쁘게 이어졌다. 그 동안 그렉은 몇 차례 연락을 해왔 지만 타라와 직접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러자 그렉은 몹시 조급해져서 안쓰러울 정도로 타 라를 찾아다녔다. 타라가 자신을 피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남자들은 대개 거 의 비슷해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여자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완전한 정복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렉 같은 그런 남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타라가 그 곳에서 그렉을 만난 것은 뜻밖이었다. 두 명의 남자모델과 더불어 야외촬영을 하고 있을 때 그렉이 차를 몰고 나타난 것이다. "들뜬 분위기를 연출하는 거예요. 세기의 은행털이가 이제 막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는 순간이죠 타라, 카메라에 잡히지 않으니까 앞으로 좀 나와 줘요" 그녀는 촬영하는 도중에도 그의 자동차를 알아보았다. 결혼기념으로 스테파니가 선물한 자동차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제이슨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 데 왜 그러는 거죠?" 타라는 촬영을 위한 술잔을 든 채 차에서 내려섰다. "잠깐만 다녀올 데 가 있어요, 제이슨 5분이면 돼요" 그녀는 제이슨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차를 세우고 기다리 는 그렉을 향해 다가갔다. "테니스를 친다는 그 녀석이군!" 제이슨은 몹시 불쾌해 하며 투덜 거렸다. 여자들의 경우라면 다르겠지만 같은 남자의 입장에서 그렉은 확실히 혐오스러운 바 람둥이였다. 진실성이라고는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는 겉치레만 요란한 사람이었다. "안녕, 그렉." 이미 목적이 있는 타라는 자못 애인이라고 되는 듯이 그를 다정하게 대했다. "몇 번 이나 전화를 했는데도 없더군요 어떻게 된 거죠?" "바빴어요" "당신을 찾으려고 시내를 온통 헤맸어요" 그렉은 언짢은 표정까지 지어보이고 있었다. 타라가 그에게 구속받을 하등의 이 유가 없는데도 그는 나무라듯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알아요 그동안 나도 눈코뜰 사이 없 이 바빴어요" 타라는 속에서 들끓는 증오심을 표면상으로는 자못 미안한 표정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그건 변명이 안 돼요" 그렉은 갈수록 점점 더했다. 상대가 이미 자신의 소유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바람둥이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렉, 지금 이런 얘기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제이슨과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뿐아니라 제이슨이 타라를 향 해 크게 소리쳐 재촉했다. "타라, 지체하면 자연조명을 이용할 수 없게 돼요!" 그렉은 제이 슨에 대해서까지 간섭을 했다. "누구요?" "친구예요" "얼마나 가까운 사이요?" 사람은 대개의 경우 자신의 수준에서 남을 평가하기 마련이다. 그렉은 특히 더했다. 여자와 남자는 친구가 될 수 없으므로 남들도 자신과 같이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제이슨을 노려 보는 그렉의 시선이 그것을 잘 입증해 주고 있었다. 이번에도 타라는 그렉의 수준을 어쩔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아주 그럴 듯한 미소와 변명으로 승화시켰다. "별로 가깝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에요 일 때문에 만나고 일하면서나 같이 있는 입장이죠" "어디 가서 커피라도 한 잔 하지 않겠소?" 그는 타라의 일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었다. "지금은 안 돼요" "어째서?" "그럴 시간이 없어요" 그렉은 제이슨을 다시 못마땅한 눈초리로 흘겨보고는 말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그럼 이번 주말 계획은?" '아직은요" "우리집에 와 서 나와 함께 보내는 게 어떻겠소?" "당신 부인 집에요?" 타라는 재빨리 물었다. 그러나 순 간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심결에 튀어나온 말이다. 그렉에게 부인의 집에서 살고 있 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다행히도 그녀를 단순히 여자로 보기에 급급한 그렉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소" 타라는 무엇으로 뒷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는 겨우 한두 번 만났을 뿐인 여자를 벌써 집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첫눈에 반해서 그러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렉처럼 타락하고 음탕한 사내한테서 그런 순수한 마 음에서라고 기대하거나 엿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녀는 갑자기 집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 절했고 그녀가 그렇게 했다고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좋아요" 그녀는 선뜻 승낙했다. 자연스럽게 그 집을 방문하면 기억을 회복한 후부터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사 라와 데니스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그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최선 이었다. 타라의 깊은 뜻을 알 리 없는 그렉의 얼굴에는 금방 만족한 미소가 가득 번졌다. "이거 정말 기쁜데?" 타라는 물끄러미 바라보다 재빨리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열 시까지 당 신을 데리러 가겠소" "알았어요" 그들이 이야기 하는 동안 제이슨은 장비를 가방에 챙겨넣고 이미 저만큼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온갖 생각들 때문에 잠시 잊고 있던 타라는 깜짝 놀랐다. "제이슨, 어딜 가는 거예요?" 타라는 급히 뛰어가면서 제이슨의 팔을 움켜잡았다. 제이슨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일을 하고 싶지 않다면 그에게나 돌아가요!" "그러지 말아 요, 제이슨." "농담하는 거 아녜요 이롭다 그가 더 주용하지 않아요?" "오, 제이슨, 아이처럼 왜 이러는 거예요, 네?" 타라는 애교스럽게 말하며 제이슨의 어깨에 매달렸다. 순식간에 마 음이 풀린 제이슨은 그녀의 허리를 한 쪽 팔로 껴안고 한 바퀴 빙돌렸다. 서로 믿는 만큼 그렇게 쉽게 마음이 풀어진 것이다. 그렉과의 끝없는 갈등을 가지고는 있지만 육체적인 욕 망의 노예가 되어 버린 질리는 드디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현재와 같은 이중생활이 싫어 졌고 그것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판단했다기 보다는 벼랑끝에서 생각 한 최선책이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남편인 필립을 놓칠 수도 없지만 그렉을 놓칠 수 더 더욱 없었다. 그녀를 다급하게 만든 것은 타라 웰즈 때문이기도 했다. 모델계의 혜성처럼 나타나 신비스러운 매력을 지닌 타라에게 그렉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작용한 것이 다. 갈림길의 그녀는 필립을 완전히 단념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날 아침 질리는 그 사실 을 말하기 위해 필립에게 중요한 일이 있다고 언질을 해 두었다. 그녀가 잠옷 바람으로 필 립이 있는 테라스로 나갔을 때 그는 조용히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커피 드릴까요?" "그 러지." 질리는 커피 주전자와 담배를 각각 양손에 들고 있었다. "특별히 할 말이 있다고?" "그래요" 질리는 필립의 곁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커피를 따라주었다. 요즘들어 그녀는 눈 에 띄게 불안해 하는 것이 보였고 날마다 술을 마신 덕분에 약간 초췌해지기도 했다. "요즘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아 우리가 이렇게 같이 모닝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 한다는 게 보통 일 은 아니지?" 필립의 표정은 언제나 여유로움이 있었다. 마치 달관한 사람 같았다. "무슨 심 각한 애기를 할 것 같군, 안 그래?" 필립은 침착하게 물으며 질리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질리는 담배연기를 깊숙이 들여마신 다음 천천히 내뿜었다. 이 순간에도 그녀는 그렉과 타 라에 대한 생각 뿐이었다. 이미 남편 필립은 안중에도 없었다. 타라와 그렉이 더 가깝게 되 기 전에 막아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혼하고 싶어요" 질리는 선언하듯 말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필립은 조금도 놀라워하지 않았다. 별로 마음의 표현을 하지 않는 사람이 긴 하지만 미리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듯이 태연했다. "좋아." 태연한 태도 뿐 아 니라 선뜻 승낙하는 까닭에 질리가 오히려 당황했다. "그건 그렇고 이 결정을 내리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렸군, 당신이 언제 나한테 그 말을 하려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질리는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필립이 그와 같은 반응을 보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대하지 않는단 말이죠?"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필립을 빤히 바라보았다. 필립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충격은 커녕 오히려 잘되었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반대하지 않아." "그래요?" "난 이제 모든 일에 지쳤소 그렉이 어떤 작자인지 당신이 깨닫게 되기를 기다렸는데 이젠 완전히 가망이 없어진 것 같소 그렇지 않아도 나 역시 이 문제에 대 해 당신에게 이야기 하려던 참이었지." 질리의 의아함은 어느새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필립 에게 그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럼 당신은...?" "뭐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 었다는 말인가요?" "나라고 눈도 귀도 없는 줄 아오?" "그런데 왜 그 동안 시치미를 떼고 있 었죠?" 질리는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기 보다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 필립을 원망하고 있었 다. 필립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지 않소 그래서 이번에도 당 신이 그렉에게 싫증을 느끼게 될 때까지 기다렸을 뿐이오" "당신은 매사에 다 그런 식이기 때문에 내가 더 싫은 거예요" "그랬었나?" "그럼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언제부터 그렉 과의 관계를 알고 있었어요?" 질리의 얼굴에는 뉘우친다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표정 따 위는 조금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반복하고 계속되 는 질리의 음탕한 짓에 완전히 지쳐 버린 그의 반응은 더욱 놀랄 만했다. "난 둘이 눈이 맞 은 날까지 정확히 집어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래요?" "스테파니와 그렉이 에덴으로 떠 나기 전 우리 모두 함께 테니스장에 갔던 날일 거요" 질리는 내심 깜짝놀랐다. 하지만 그녀 는 알면서도 모르는척하고 지내온 필립이 미웠다. 모든 잘못은 그에게 있는 것 같았다. "틀 렸어요" 그녀는 야멸차게 말했다. 자존심이 상한 그녀는 끝까지 지고 싶지 않아 엉뚱한 이 야기까지 지어냈다. "그보다 훨씬 전이었어요" 오히려 그녀는 더욱 약이 올랐다. 이번에도 필립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스테파니도 알고 있었고?" "물론 몰랐죠" "질리." 필립은 갑 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 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질리에게 한 가지 충고를 해 주었다. "에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무슨 말이죠?" "그렉은 어떤 짓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작자요" 그 말에는 필립도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충고가 아 닌 경고였다. 필립은 스테파니의 실종에 대해 그렉을 의심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질리도 그 것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란 암시였다. 하지만 질리는 그 경고를 즉석에서 무시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착각에 빠진 자신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당신이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어요 난 그렉과 결혼할 거예요" 필립은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오히 려 안쓰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타락을 불쌍히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스테파니 의 실종에 대해 그렉을 의심하는 사람은 필립 뿐만이 아니었다. 스테파니를 아끼고 그렉을 아는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퍼 그룹의 총지배인인 빌이 그렉 을 스테파니의 남편으로서 인정해 주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가 만일 그렉을 스테 파니의 진정한 남편으로 인정했다면 지금처럼 홀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테파니가 실종 된 다음에도 여전히 방탕한 생활을 하는 그렉을 그는 인간답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질리는 그런 그렉과의 결혼만이 자신이 살 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6 시드니에 머물고 있는 댄이 타라를 찾아왔다. 그녀는 기꺼이 그와 함께 외출을 했다. 이런 저런 얘기 중에 댄도 시드니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타라는 크게 놀랐다. 그가 시드니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런 줄은 정말 몰랐어요." "전 부터 말하려 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소" "괜찮아요, 댄.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그런데 우린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소. 나의 어린 시절과 함께 지금껏 잊지 못하고 있는 곳이요." "궁금해지는데요, 어떤 곳인지." "실망할 수도 있을 테니 너무 기대는 하지 말아요." "알겠어요." 댄과 함께 있으면 타라는 마음의 평안함을 느꼈다. 그가 현재의 타라 웰즈를 창조해 주었다는 사실은 절대 잊을 수가 없었다. 댄이 타라를 안 내한 곳은 한 술집이었다. 술을 마시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 곳은 손님들로 북적 거렸다. "여기가 그곳인가요?" "그렇소"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소리와 함께 얼큰한 술 냄새 와 담배연기가 실내에 가득했다. 활기찬 생명력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낮에는 열심히 일한 다음, 밤에는 한 잔 하면서 회포를 풀며 피로까지 씻어내어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그곳 에 있었다. "전에는 이 집이 이렇게 붐비지 않았는데?" "세월이 흘렀잖아요" 타라는 매우 오랜만에, 그보다 거의 망각되었던 사람들의 모습과 또한 그들의 냄새를 느낄 수 있는 고향 에 온 느낌이 들었다. "어렸을 때 난, 이 근처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소. 우리 아버지는 목 요일만 빼놓고 매일 이 집에 들렸지요."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 빈 테이블을 찾아 두리번거 릴 때 옆에서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오래 전부터 그 술집을 경영하고 있는 여주인 이었다. "당신의 얼굴이 기억나는군요. 한 이십 년은 더 된 것 같은데요?" "저도 기억납니 다." 댄 역시 그녀를 알 수 있었다. 이런 광경을 곁에서 지켜보던 타라는 갑자기 훈훈한 인 정을 느꼈다. 과거를 기억하고 추억 속의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일인가. 불쑥 사라와 데니스가 가슴 가득히 다가왔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타라는 이내 서글픈 생각 이 들었다. 하지만 재빨리 이러한 상념은 지워버리고 웃는 표정으로 바꾸었다. 마음씨가 넉 넉하게 생긴 여주인은 댄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 아버지가 우리집 단골이셨죠." "네/" "아버님 뿐만 아니라 당신도 의사처럼 보였어요. 그것도 아주 일류 의사로 말예요. 날마다 따라와서 우리집 고양이에게 붕대를 감았다 풀었다 하면서 놀던 모습이 선해요." 타 라는 고개를 돌려 댄을 바라보았다. "맞아요, 아주머니. 지금도 그렇답니다." "무슨 말이 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어머나, 그럼.....?" 여주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댄을 쳐다보았다. 댄은 마치 옛날의 순진한 소년 같은 미수를 여주인에게 보이고 있었다. "그럼 당신, 정말 의사가 됐단 말인가요?" "네." "세상에 이런 일이! 정말이지 놀랍군요. 축하해요, 이름이 뭐더라..... 댄! 댄이 맞죠?" "네, 아주머니, 댄 마샬입니다." "맞아요, 댄 마 샬. 당신이 그렇게 될 줄 알았어요. 어쩌면 정말 의사가 되셨을까." "아주머니, 소개하죠. 이 쪽은 타라 웰즈 양입니다." 그는 비로소 생각난 듯이 타라를 소개시켰다. "만나서 반가 워요, 타라." "저도요, 아주머니." "자, 어서 자리에 앉으셔야죠?" "네." 댄은 타라를 데리 고 한쪽의 빈 테이블로 갔다. 그들을 바라보던 여주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마 치 그 테이블을 댄을 위해 비워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타라는 댄의 직업이 천직이라는 것을 새삼 다시 느껴졌다. "여기 앉으실 줄 알았지. 자, 마셔요" "고맙습니다." 댄은 두 잔의 맥주를 가져다주는 여주인의 따뜻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자신도 잊고 있었던 어린 시 절의 모습을 그녀를 통해서 보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들은 가볍게 한두 잔 마신 다음 타라의 집으로 돌아왔다. 댄이 타라를 그 집에 데려간 까닭은 술을 마시기 위한 것만 이 목적이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그녀와 함께 추억의 장소로 가보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 모든 것을 같이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마음이 사랑이라고 성급하게 간주하고 싶지 는 않았지만 그것이 사랑이 바탕이 되어 나타난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나는 시드니에서 행복한 생활을 보냈고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곤 했지요. 댄 같은 개구쟁이 는 아 마 없을 거라고......" 과거에 대한 회상이라기 보다 타라를 향한 고백이었다. 그 이야기는 타라에게 친근감이 생기게 되어 그녀 역시 자신도 모르게 댄에게 마음이 끌려가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 행복한 어린 시절이었소." 타라의 표정은 확실히 변화되어 있었다. 그것은 댄의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 당신을 알았어야 했어 요....." 그녀의 솔직한 말은 댄으로 하여금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 타라에게 사랑을 고백하 려면 지금이 바로 적절한 때라고 생각되었지만 대뜸 털어놓고 고백할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그렉 같은 사람에게서는 너무나도 쉬운 일이겠지만 댄이 사랑을 고백하기는 어떤 위험한 수 술보다 어렵게 느껴졌다. 집에 도착하자 타라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어두운 베란다로 걸어 나가 멀리 보이는 항구를 응시했다. 심리학자는 아니지만 타라의 행동에서 어떤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것을 댄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가 처음 병원에 왔 을 때부터 댄은 이미 그녀가 사연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고 점차 그녀와 대화하는 동안 더 욱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시드니 경찰서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타라 웰즈에 대한 조사를 부탁해 놓은 상태였다. 또한 그는 타라가 이미 자신의 과거를 어느 정도 살려 냈고 그것으로 완전히 기억을 상실했을 때와는 다른 고통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분명히 있었 기 때문이다. 멀리 어둠 속에서 불리 켜진 배가 한 척 보였다. 타라는 그곳을 조용히 바라 보며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타라" 댄은 뒤로 다가가며 침착하게 그녀를 불렀지만 그 의 가슴은 몹시 뛰고 있었다. "혼자서 그렇게 고민하지 말고 나한테 얘기해 봐요" "그럴 수 없어요, 댄." 타라의 목소리는 저 깊은 곳으로부터 가늘게 떨려나오고 있었다. 댄은 그녀의 뒤로 좀더 가깝게 다가섰다. 그녀의 머리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갔다. 향긋한 냄새와 함께 말할 수 없는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그는 그대로 두 눈을 감았다. 이 여자야말로 그가 그 동안 독신으로 살아오며 기다린 반려자라는 확신이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타라 역시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마음 속의 깊은 고통과 함께 따뜻한 연민의 정을 느끼며 조용히 눈을 감 고 있었다. 댄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고 가볍게 키스를 했을 때에도 그녀는 거부하지 않 았다. 그녀 역시 댄을 사랑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평소보다 따스한 숨결이 그녀의 마음을 나타내는 듯하자 댄의 마음은 그녀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녀는 댄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끌려들었다. 마주보면서 그가 옷을 천천히 벗기기 시작했 을 때 그녀는 잠깐 고개를 뒤로 젖히며 그녀의 어깨를 드러냈다. "내가 원하는 당신은 사회 적으로 성공하고 유명해진 모델이 아니었소....." 그는 진심을 말하며 타라의 옷을 거의 모두 벗겨내렸다. 타라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가슴이 심하게 뛰고 알 수 없는 설레임이 그녀를 또 다른 세계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따뜻하고 지혜로운 여성으로 당신을 원했던 것이오" 타라의 숨소리가 조금씩 불규칙해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던 극한상황에서 소생한 그녀가 다시 한남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음악을 좋아하고 아기와 동물을 사랑하는 여자라면 나는 만족하오" 댄 은 계속 속삭이면서 이번에는 자신의 웃옷을 벗었다. 그는 처음으로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평생 이렇게 여자에게 강렬한 욕망을 느낀 적은 없었다. 타라가 처음이었다. 그녀를 소유하고 싶었고 그녀를 사랑하고 싶었으며 그녀와 항상 함께 지내고 싶었다. 지금 까지 독신으로 지내온 것은 그녀를 만나기 위한 숙명적인 기다림이었다고 확신했다. 타라 역시 댄이 믿음이 가는 사람이었다. 그렉 같은 속물과는 비교도 안되는 사람이었으며 그녀 가 항상 바라던 그런 사람이었다.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살고 싶었다. 그의 손길이 몸에 스칠 때마다 오랫동안 잠들었던 본능이 조금씩 조심스럽게 깨어남을 그녀는 느꼈다. 그러나 그동안 살아오면서 여성으로서 행복을 느꼇던 적이 과연 있었던가,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는 누구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자신의 과거 괴로움들이 떠올랐다. 결혼식날 같이 춤을 추던 남자, 질리와 테니스를 치고 나서 질리에게 뜨겁게 키스했던 남자 그리고 악어게게 던져넣어 죽이려 했던 남자의 모습이 재빨리 타라의 뇌리를 스쳐갔다. 안 돼, 난 이럴 수 없어. 나에게는 꼭 해야될 일이 있어, 꼭! 그 일을 끝내 지 않고서는..... 타라는 갑자기 댄의 손을 밀쳤다. "댄, 그만해요" "무슨 말이오?" "미안해 요" 댄은 타라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한 채 그녀가 자신이 싫이 때문에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 에 머쓱해졌다. "내가 싫소, 타라" "아녜요, 댄" 이미 타라의 머리 속은 어지럽게 뒤섞이고 있었다. 댄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다. "앞으로 우린 다시 만나지 않는 게 좋겠어요" "당신을 이해할 것 같소. 그러니 날 믿어요" "아녜요, 댄.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믿어요" "그런데?" "제가 믿을 수 없는 것은 제 자신이에요" 타라는 재빨리 옷을 고쳐입고 댄에게서 떨어졌다. "타라....." 그의 목소리는 간곡했다. 어떠한 문제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용 서하세요" 끝내 타라는 댄의 곁을 떠나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타라!" 베란다에 홀로 남겨 진 댄은 땅 밑으로 정신없이 꺼져들어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방금 전까지의 여명이 종말로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 순간 모든 게 끝나고 자신은 황량한 벌판에 버려 진 한 마리의 숫사슴처럼 외로웠다. 문득 밤바람이 선뜻 벗은 몸에 와서 닿았다. 타라와 함 께 뜨겁게 달아오르려던 살갗이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녀를 껴안아야 했던 두 팔에는 공허함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밤공기는 혼자서 마시기에는 아무래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아주 나약한 존재로 이 순간 변해 있는 것이다. 타라의 마음에는 적지 않은 동요가 찾 아왔다. 그녀는 댄을 싫어하지 않았다. 이 세상의 어떤 남자보다 좋아하고 존경했다. 환자 로서 은혜를 입었다는 것 때문은 아니다. 그의 모든 면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그의 정겹고 따뜻한 인간미에 포근한 정을 느꼈다. 그런 그가 사랑을 고백한 것이다. 그리 고 그가 자신의 육체를 향해 접근한 것이다. 그녀 자신도 그를 원했던 만큼 그를 받아들이 려 했지만 아직은 무리인 것같았다. 그가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있을 수 없 는 일이다. 어떠한 경우라 해도 타라는 댄에게 상처를 줄 수 없었다. '감히'라는 말이 그럴 때에 꼭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누구인가. 오늘의 타라 웰즈가 존재할 수 있도록 심 혈을 기울여 준 사람일 뿐아니라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생각해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적인 원한 때문에 그이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해 소중한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 것이다. 이러한 상념은 작업에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끼 쳤다. 전에는 어떤 어려운 장면도 열심히 그리고 거뜬하게 해치우며 필사적일 정도로 타라 는 카메라 앞에서 열성을 보였다. 제이슨이 감탄하고 조안나가 놀라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 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두꺼운 털외투를 입고 함박눈이 내리는 가운데 포즈를 잡아야 하는 촬영이었다. 내리는 눈을 즐기며 빙글빙글 도는 간단한 포즈였다. 제이슨은 특별히 여러 대 의 카메라를 공중과 지상에 설치했다. 함박눈을 대신할 소품도 완벽하게 준비했다. 남은 일 은 타라가 멋진 포즈를 취하는 것 뿐이었다. 처음에는 작업이 그런대로 무사히 진행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가면서 타라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여 상황은 금방 바뀌고 말았다. 지난밤의 일들이 문득 떠오르는 순간부터 평소 타라의 열성적인 태도도 함께 흔들렸다. 내 리는 눈을 맞으며 빙글빙글 연거푸 도는 포즈를 취하다가 갑자기 몸의 중심이 흔들리면서 바 닥에 쓰러질 뻔했던 것이다. "왜 그래요, 타라?" 공중에 설치된 카메라 뒤에서 제이슨이 놀 라며 물었다. "모르겠어요" "무슨 소리죠? 그렇게 돌면 안 돼요. 자, 그려지 말고 정신 차려서 다시 한 번 해봐요" 그러나 이번에도 제대로 되지가 않았다. "잘 못하겠어요" 그녀는 솔직 하게 고백했다. 그러나 평소에는 좀처럼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던 제이슨이 성난 얼굴을 나 타냈다. "고개를 조금만 쳐들고 돌아봐요, 타라" 타라는 시키는대로 했다. "조만 더요" 뜻 대로 되지 않았다. 열심히 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더 나빠질 뿐이었다. 타라 자신도 어떻 게 할 수 없었다. "당신, 오늘은 왜 그러는지 모르겠군요!" 제이슨도 결국 노골적으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원래 다혈질적인 성향이었지만 타라 앞에서는 아직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 인적이 없었다. 지난번 그렉을 만났을 때 한 번 화를 냈던 것이 전부였다. 제이슨은 타라가 당혹스러워할 만큼 화를 냈다. "내가 할 일이 없어서 여기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요?" 타라 는 감히 그를 어떻게 달랠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한 번 화를 내기 시작한 제이슨은 걷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악화되었다. "다 집어치워!" 바닥으로 뛰어내린 제이슨은 다른 카메라맨들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지금껏 제이슨이 그렇게 화내는 것을 본 적이 한 번도 없 었기 때문에 그들은 한 마디도 못하고 어리둥절하고 당황해 할 뿐이다. "난 프로고 이건 내 직업이란 말이요. 아미추어한테 낭비할 시간이 없어. 모두 집에 가! 끝났어! 집에 가날 말 이야!" 스튜디오 안은 금방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고 말았다. 제이슨이 그럴 줄은 아무도 예 측하지 못했다. 그는 극단적인 말까지 하면서 타라를 아미추어로 몰아붙인 것이다. 시드니 전체가 알고 있는 톱 모델이 타라 웰즈였다. 잡지마다 앞다투어 그녀의 사진과 기사를 실었 고 그녀에 대한 새로운 소식이 판매부수를 좌우할 정도로 최고의 인가를 누리고 있었다. 물 론 제이슨 자신의 경력에 비하면 그렇게 불 수 있지만 최근에는 타라를 그렇게 취급하는 사 름은 한 명도 없었다. 다른 카메라맨들도 모두 무겁게 입을 다물었다. 제이슨이 너무도 화 가 나 있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난감해진 표정이었다. 조안나 랜들의 에이젠트에서 제이슨 의 위치는 확고했다. 그가 만일 손을 갑자기 뗀다는 타격이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그가 화가 나서 휙 돌아서서는 문을 꽝 닫으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타라는 문 쪽을 바라보 며 초조한 빛을 감치지 못했다. 명성과 명예를 얻은 후 최초로 시련에 부딛힌 것이다. 짓눌 리는 듯한 침묵이 잠깐 계속되었지만 그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이슨이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타라는 재빨리 그의 표정을 살폈지만 평소 농담을 자주 하던 모 습은 아직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입을 열 때까지 사람들은 긴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주말에는 푹 쉬고 화요일 아침 일찍 이곳으로 나오는 거 잊지 말아요" 비로소 모든 사람들 의 얼굴에서 긴장된 표정은 풀리기 시작했다. 제이슨은 덧붙여서 그들을 더욱 안심하게 해 주었다. "여러분, 모두 사랑해요" 잔뜩 굳어 있던 타라의 얼굴에도 비로소 미소가 나타났 다.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따라 굳어 있던 얼굴을 펴고 미소로 바꾸었다. 아직 웃지 않던 제이슨도 여러 사람들의 미소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싱긋 웃으며 윙크를 보낸 후 다시 밖으로 나가버렸다. 7 심리적인 갈등은 타라를 몹시 피곤하게 만들었다. 댄에 이어 제이슨과도 순간적이긴 해도 갈등을 겪었던 것이다. 그녀가 아직 깊은 잠에서 빠져 있는 이른 아침에 느닷없이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모델 일을 하면서부터 전하에 민감해진 타라는 재빨리 팔을 뻗어 수화기 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뜻밖에도 질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을 깨워서 미 안해요, 타라" 생각도 못했던 일에 타라는 몹시 의아해 했다. "무슨 일이에요. 질리?" "당 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무슨 일이죠?" "부탁해요, 제발." 보이지는 않지만 질 리가 절박 한 입장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죠?" "경찰서요" "뭐라구 요?" 타라는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녀가 경찰서에 있으면서 도움을 청해온 것이다. "미안 해요, 탈.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어서 전화했어요." 타라는 생각해 볼 여유가 없다는 것 을 알아차리고는 말했다. "알았어요." "와 주는 거죠?" "앞으로 삼십 분 안에 그리로 갈께 요." "정말 고마워요, 타라. 잊지 않겠어요." 질리는 감격해 하며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았 다. 옷을 갈아 입는 동안 생각해 보니 어렵지 않게 상상이 되었다. 평소 술을 많이 마신다 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라가 그녀를 도와주려고 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 다. 질리는 그렉과 함께 타라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의 장본인이었다.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질리의 신상에 어떤 변수가 발생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선 구해 준 다음 가깝게 접근하려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역시 짐작대로 술 때문에 질리는 경찰서에 연행되어 있었다. 타라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질 리가 스스로 털어놓았던 때에도 타라는 대충 들어 넘겼다. "그런 상황에서 마땅히 전화로 도움을 청할 친구가 떠오르지 않았어요. 예전에는 친구가 많았던 것 같은데....." 질리는 말 끝을 흐리며 새삼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 이야기를 들으며 타라는 다시 옛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의 다정했던 질리와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왜 그렉에게 전화하지 않았어요?" "그건 안 돼요" 질리는 펄쩍뛰며 강력하게 부인했다. "왜요?" 타라는 어이가 없어 물었다. 질리와 그렉 사이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거든요" 타라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왠지 동정 심이 들어 다시 한 번 질리를 바라보고 싶었지만 재빨리 그만두었다. "그는 화가 나면 난폭 해져요. 걷잡을 수 없을 만큼요" 타라는 그 말에서 그렉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한 것이다. 마음에 드는 여자 앞에서는 가장 상냥하고 다정한 남자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의 속물근성은 감출 수 없는 게 분명했다. 그도 처음에는 질리에게 그런 식으로 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이와의 사이가 요즘 들어 삭막해지는 것 같아요" 타라의 정체를 모르는 질리는 오늘 일 이 고맙게만 생각되었다. 그래서 자신과 그렉만의 비밀까지도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그이 와 잠자리를 같이 한 지가 벌써 일 주일이나 지났어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타 라는 그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렉의 마음은 질리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바람둥이의 성격상 한 여자를 오래 사귀지 않을 뿐아니라 질리가 아닌 다른 여자인 자신에게 열중하기 시작했으니 짐작은 가능했다. 질리는 뜻밖의 사실도 타라에 게 털어놓았다. "스테파니가 죽은 다음부터 내가 지금까지 그를 먹여살려 왔어요. 전기세든 뭐든 다 내가 해결했어요" 타라는 무척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렉의 뻔뻔스러움에 질려버릴 정도였다. 그는 자신이 죽인 여자의 집에서 살면서 그 여자가 결혼기념으로 선물 한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도 부족해서 간통상대인 질리에게 경제적인 원조를 받으며 살아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여자를 두고도 한껏 멋을 부리고 돌아다니면서도 또 다른 여자를 유혹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그러니까 시드니에 온 다음부터 타라는 그렉과 질리의 사이를 확인했었다. 하지만 질리가 말한 그 정도의 안간 이하일 줄은 생각하 지 못했다.타라는 하루라도 빨리 모든 계획을 끝내고 싶어졌다. 질리는 그에게 화가 났지만 불안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지금에 와서 날 이렇게 대하다니...." 타라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맞장구 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뿐만아니라 하고 싶지 도 않았다. 질리는 문득 이상한 말을 꺼냈다. "그렉에 대해 이야기하라면 나도 할 말은 많 아요. 나는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타라는 그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곧 알 것 같았다. 그녀는 그렉의 범죄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증인이었다. 그가 스테파니 하퍼를 악어 밥으로 던져버릴 때 그 광경을 현장에서 목격한 유일한 목격자였던 것이다. 그 렉이 아직 모든 사람들의 의심을 받으면서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질 리가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이었다. 교활한 그렉은 질리에게 약점이 잡혀 있으면서도 오히려 감언이설로 그녀 를 유혹하고는 항상 굶주려 허덕이는 그녀의 욕정을 채워주며 대신 입을 다물고 있도록 만들 고 있었던 것이다. 질리를 통해 그렉의 또 다른면을 알게 된 타라는 더욱 그를 증오하게 되 었다. 드디어 그녀는 그녀의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그렉의 차를 타고 그 집으로 향했 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발코니가 있고 이쪽 건너에는 아름다운 정원과 한눈으로 시드니 의 전경을 볼 수 있는 집이었다. 타라가 기억을 되찾은 후부터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던 가 슴 속의 그 집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진입로부터 주변의 모든 사물에 대한 향수가 알알이 되살아났지만 애써 외면했다. 그렉은 정문밖에서 잠시 차를 정치하고는 리모콘으로 철문을 열었다. 자동차가 정문을 지나 정원으로 들어설 때 타라에게 가슴 속 깊은 곳에서는 고동소리가 울렸다. "여기야." 현관 옆에 차를 세운 그렉은 말투까지 바꾸어 말했다. 그렇 게 저급한 바람둥이의 기질이 드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타라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마음에 드는데요?" "스테파니의 취향에 맞추어서 지어진 집이지." "그래요?" "그녀의 단 순한 성격이 그대로 나타나 있어.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실내장식은 엉망이거든." 그렉은 스테파니를 깎아내리며 자신을 올려세우려는 듯했다. 스테파니 앞에서 스테파니를 깎아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라도 안다면 그도 무척 당황할 것이다. "참, 미리 말하려 했는데 잊고 있었군. 오늘 이 집에서 스테파니의 애들을 만나게 될 거야." "그래요?" 타라 는 깜짝 놀라는 척했다. 막연히 기대를 하긴 했지만 못하더라도 그 집을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었다. "주말을 여기서 보내기 위해 왔나 봐. 그 애들에 대해 심각하게는 생각하 지 말았으면 해." 타라의 가슴은 사라와 데니스를, 목숨보다 소중한 그 아이들을 만날 수 있 다는 기쁨으로 가득찼다. 데니스는 학교에서, 사라는 피아노 연주 발표회에서 먼 발치로 보 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내가 얼마나 가정적인 남자인지는 오늘 보면 알게 될 거야." 타라 는 아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렉의 그럴 듯한 말을 분명히 듣고는 있었지만 그보다 이 이들에 대한 생각이 더 컸다. 그리고 그 얘들과 만날 때 혹시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가 벌써 부터 걱정이 되었다. "타라." 그렉은 운전석에 앉아서 조수석에 앉은 타라의 뺨을 손 끝으 로 어루 만졌다. "스테파니가 죽은 후 여기로 데리고 온 여자는 당신이 처음이야." 마치 그 뜻을 알 아달라는 듯 말하고 차에서 내려 자못 예의 바르게 타라가 내릴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차가 들어오는 것을 본 집사 메이티가 다가왔다. "짐을 부탁해요, 메이티." "알겠습니다." 메이티를 보는 순간 타라는 또 다시 가슴이 세차게 뛰었지만 재빨리 진정시켰다. 어릴 적부 터 정들었던 사람이었다. 하퍼가에서 늙고, 하퍼가를 위해 자신의 온갖 정성을 바치고 있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타라는 감회에 젖으며 바라보았지만 그는 타라에게 관심이 없는 듯 잠 깐 바라보았을 뿐이다. "자, 마음에 들어?" 무심코 윗쪽을 쳐다보던 그렉은 한심하다는 듯 이 덧붙였다. "저런, 누군가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군." 타라도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자동차가 도착할 때부터 이층에서 내려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물어볼 것도 없이 사 라였다. 사라는 불만이 가득차서 증오심에 가까운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참, 메이티. 타라 웰즈 양이에요." 그렉은 집사에게 타라를 소개시켜 주었다. "잘 오셨습니 다, 웰즈 양." "만나서 반갑습니다." 집사는 그렉의 많은 여자들 중의 한 명이라는 생각에 건성으로 인사하고는 짐을 들고 앞장서 갔다. 그러나 그때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일이 발생 했다. 개가 느닷없이 꼬리를 치며 타라에게 달려든 것이다. 하펴 집안에서 예전부터 기르고 있던 몸집이 커다랗고 영리한 개로 낯선 사람에게는 무척 사나웠다. 처음 보이는 손님인 타 라를 그 개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며 반겼다. 타라는 순간 당황했지만 재빨리 개를 쓰다 듬어 주었다. "정말 잘 생긴 개로구나." 확실히 개는 영리한 동물이었다. 변신한 그녀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지만 개는 이미 알아보고 반겼던 것이다. "개가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 서 다행이군." 그렉은 잠깐 의아해 했지만 이내 그렇게 넘기고 말았다. "동물들이 나를 따 르는 편이죠." "안으로 들어가지." "그래요." 옛주인을 만난 개는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계 속 따라왔다. 개가 만일 말을 할 수 있었다면 타라는 더 이상 자신의 정체를 감출 수 없었 을 것이다. "나가 있어!" 개는 그렉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타라의 뒤를 따라왔다. "나갓!" 그렉은 화까지 냈다. 타라는 개 때문에 난처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 기 때문에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개는 그렉에게 쫓겨난 다음에도 문 밖에서 계속 끙 끙거리며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그렉과 타라가 겨우 개를 떨쳐버리고 집 안에 들어섰을 때 집사 메이티는 짐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이 때 타라도 간과해 버린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스테파니의 집과 거기에 딸린 모든 것을, 특히 개에 대해서 집사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개가 타라를 대뜸 반기는 광경을 보고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처음보는 방문객을 향해 그렇게 반길 개가 아닐뿐 아니라 그도 타라를 처음에 보았을 때 스 테파니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느껴졌다. 그러나 다시 보았을 때는 달랐다. 그러나 확실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스테파니를 만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급기야는 개까지 반기니 집 사는 더더욱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급히 태연한 척했다. 스테파니가 아직 죽지 않았 다고 믿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인 집사는 그녀가 만일 스테파니라면, 또 그렇게 나타났다 면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쪽으로 와, 방을 보여주지." 그렉은 타라 를 이층으로 안내하며 집주인임을 한껏 강조했다. "요리사에게 곧 짐심식사 준비를 하도록 이르지." 그러나 질리를 통해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는 타라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 은 그런 게 하나도 문제되지 않았다. 비록 일 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수십 년 보다 더 긴 세월이 자난 것처럼 느껴졌다. 꿈에도 그리던 정든 집에 들어선 그녀로서는 다른 아무런 생 각도 가슴에 넣을 겨를이 없었다. 그 집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가슴은 터질 듯 이 벅찼다. 살아서 다시 이 집에 오게 되다니. 타라는 벅찬 감동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 이었다. 흉칙한 몰골이 되어 산을 떠날 때 타운즈빌에서 타라의 완전한 변신과 함께 떠나 시드니로 돌아온 일들이 모두 새삼스럽기만 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집에 손님으로 있어야 된다는 생각에 처벌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전망이 좋지?" 그렉은 자신의 집인양 자알하 고 싶어 이곳 저곳을 보여주었다. "그래요, 굉장히 멋있군요." 그녀는 바깥경치를 내다보며 재빨리돌았다. 그 순간의 표정을 그렉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행동이었다. "타라?" 그녀는 표정을 고치며 돌아보았다. "저쪽이 내방인데, 필요한 모든 것을 그 방에 준비되어 있어." 그는 타라의 방문을 위해 철저히 준비를 해 두었다. 경제력이 전혀 없는 그가 또 질리를 이 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했다. "당신이 와줘서 정말 기뻐." "나도, 그래요." 그렉은 잠 시 타라를 그곳에서 기다리게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 타라는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이 집과 이 느낌이 그리고 참 밖의 풍경, 벽돌과 기둥까지 모두 자신의 몸처럼 느껴졌다. 타라가 아닌 스테파니가 되고 싶었다. 스테파니가 되어 그렉은 경찰에 넘기고 사 라와 데니스, 그들과 정겨운 하퍼가의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다른 아무것도 바라 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살고만 싶은 것이다. 문득 밖에서 누군가 노크를 하자 타라는 재빨 리 표정을 바꾸었다. 조심스럽게 웃으며 들어선 것은 데니스였다. "안녕하세요?" "안녕? 네가 바로 데니스구나, 그렇지?" 데니스, 그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토록 보고 싶어 밤 잠을 설치게 하던 사랑하는 아들 데니스가 지금 함께 있는 것이다. "난 아줌마가 누군지 알 아요." "그래?" "아줌마 모델 타라 웰즈죠?" "맞아." 데니스는 매우 귀엽고 붙임성이 있 었다. 어느 누가 보아도 영리하고 사랑스러운, 껴안아 주고 싶은 소년이었다. "우리 누나는 잡지에 실린 아줌마 사진을 모으고 있었다." "누나가 정말?" "누난 아줌마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대요. 요즘도 사진을 모으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어때요, 아줌마. 집구경 하시겠어 요?" 구김살 없는 데니스의 모습에 타라는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 애가 그렇게 자라 준 것 은 타라에게 너무나 가슴벅찬 일이었다. "집구경?" "네." "좋지. 그런데 내가 함부로 기웃 거리고 다녀도 괜찮을지 모르겠구나." "난 괜찮아요. 그런데 누나는 다를 거예요. 좀 싫어 할지도 모르고요." "누나는 그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지?" 타라는 자동차에서 내렸 을 때 이층에서 내려다 보는 사라의 눈빛을 분명히 보았다. 그 눈에서 증오를 느낄 수 있었 던 것이다. "맞아요." 이 때에도 사라는 몸을 숨긴 채 데니스와 타라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 었다. 하지만 증오의 눈빛은 아니라 일종의 놀라움과 함께 경계심 같은 것이 소녀의 두 눈 에 담겨져 있었다. "사라 누나는 단순한 성격이예요.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경계하는 편이죠. 그리고 고집도 아주 센편인 걸요." 타라는 데니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라에 대 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데니스는 명랑한 성격이어서 마음이 흐뭇했지만 사라는 그 렇지 않은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렉은 자신이 가정적인 남자임을 자랑했다. 그게 사 실이라면 사라도 데니스처럼 구김살이 없어야 했다. 사라가 그러는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는 느낌이 들자 그녀는 마음이 무거웠다. "데니스, 혹시 너희 아빠에 대해 얘기해 줄 수 있 겠니?" 타라는 그 아이가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데니스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자세히는 몰라요." "그래?" "탐구과학자였는데 탐사 도중 자동차 사고를 당했 다고 들었어요." 데니스는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간단하게 대답했다. 타라 역시 더 이상 묻 지 않았다. 데니스가 알고 있는 그밖의 다른 상황을 생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데니스와 어떤 방 앞에 섰을 때였다. 그 방을 이미 알고 있는 타라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엄마의 방인가 보구나?" "네, 어떻게 아셨어요?" 타라는 무의식 중에 튀어나온 말 때문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자신이 스테파니였을 때 지냈던 방인 것이다. 그 방에는 스테파니의 숨결이 아직 남아 있을 것이다. "네가 그 방을 바라보는 눈빛을 보고 알았지." 그려면서 타라는 방문을 열려 했다. "그 방에는 들어가지 않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아줌 마." "왜지?" "사라 누나가 안에 있거든요." "지금 말이니?" "누나는 여기만 오면 그 방에 틀어박혀서 나올 생각도 하지 않아요." "저런!" "배가 고플 때만 나온다니까요. 그 대신 제 방을 보실래요?" "그래도 되겠니?" 벌써부터 원하고 있던 것이었다. 스테파니의 방에 들어 가 보고 싶은 것처럼 데니스의 방도 보고 싶었다. 그 아이가 어릴 때부터 지내온 방이다. 데니스의 모든 게 그 안에 있을 것이었으며 그것이 보고 싶었다. 데니스를 가슴에 당장 안 아주지도 못해 안타까운 마음에서 그 방이라도 보고 싶은 것이다. "아줌마만 특별히 보여드 리는 거예요." "그래?" "우리 집에 어떤 손님이 와도 제 방은 절대로 보여주지 않아요." "어째서?" "방이 엉망이거든요." "영광이구나, 데니스 얼마나 엉망이길래?" "보시면 알아 요." "궁굼하구나, 몹시." "제가 안내할께요." 그 집의 구조는 다른 저택에 비해 특별한 데 가 있었다. 그렉이 말했듯이 스테파니의 기호에 맞추어 설계된 집이어서 한 건물 안에 방들 이 있으면서도 줄입구는 밖으로 다시 나와야 했다. 데니스이 방으로 가기 위해서 집 밖의 계단을 내려가 앞으로 모퉁이를 돌았다. 계단을 내려가는 타라의 뇌리에 다시 괴로운 광경 이 떠올랐다. 그곳에는 나무들이 많이 있는 정원이 이었으며 언제였던가 싶을 정도로 까마 득한 옛일처럼 느껴지는 결혼식 출하 파티가 성대하게 열렸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그 날의 주인공인 스테파니 하퍼와 그렉 마스던이 화려한 몸동작으 로 춤을 추었다. 그 자리의 누구 하나 오늘을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다만 너나할 것 없이 그렉의 진심을 몰라 걱정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스테파니와 한 것은 그녀 의 막대한 재산 때문일 것이라는 억측들이 나돌았지만 스태파니의 결심은 확고부동했다. 그 러나 결과적으로 그렉과 스테파니의 결혼생활은 시작되기도 전인 신혼여행에서 끝나고 말았 던 것이다. 그 문제와 관련해서도 그렉을 의심하는 소문이 꾸준히 나돌며 오늘에 이른 것이 다. 데니스의 방으로 가기 위해 밖으로 나오자 타라의 뇌리에 많은 생각들이 스친 것은 그 런 의미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그 집에서는 어느 것 하나 타라와 관계없는 게 없었던 것이 다. 8 "세상에!" 데니스의 방에 들어서는 순간 타라는 소리를 질렀다. "이걸 모두 네가 조립한 거 니, 데니스?" 방 안은 온통 각종 모형들로 어지러울 정도였으나 방이 엉망이라던 데니스이 말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타라에게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또래 소년 들이 가질 만한 각종 모형들이 정교하게 조립되어 그 나름대로 정리가 되어 있었다. "예." 데니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제 보니 너 굉장한 솜씨를 가졌구나?" "그렇 재도 않아요." "어째서?" "통 안에 들어 있는 것을 꺼내 간단히 조립하기만 하면 되는걸요, 뭐." 데니스는 공중에 떠 있듯이 자리잡고 있는 최신형 전투기의 모형으로 다가가며 자랑하 듯 말했다. "그렇지만 이건 정말 만들기 힘들었어요." "놀랍구나, 정말." 타라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데니스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더욱 그랬다.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구김살 하나 없이 자란 아들이어서인지 더욱 가슴 저리게 기뻣다. 그리고 엄마라고 밝힐 수 없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가슴이 더욱 아파왔다. "전요, 학교룰 졸업한 후에 비행기로 조종 사가 되려고 해요." "파일럿 말이니?" "네." "위험하지 않겠니?" 타라는 걱정부터 앞섰다. 아들을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이었다. 데니스는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타라를 대했다. 미친 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친근하게. 소년과 여인은 자연스럽게 소파에 나란히 않 아 이야기를 계속했다. "문제 없어요, 아줌마." "그래?" "해 낼 자신이 있어요." 대견스러 운 데니스의 모습에 타라는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평소 스테파니가 잘 하던 말을 했다. "넌 아직 어리니까 천천히 생각해도 늦지는 않을 거야. 시간을 두고 생각 해 보자꾸나." 데니스는 깜짝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줌마." "응?" "그 건 우리 엄마가 자주 하시던 말씀인데....." 타라는 아차 싶었다. 순간적으로 그녀는 엄마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만 옛날에 자주해 주던 말을 해 버린 것이다. 다행히 어린 데 니스는 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깊이 파고 들지 않았다. "하지만요, 아줌마. 난 다른 일에는 단 일 초도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 그는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음을 금방 느낄 수 있는 사 진 액자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 분이 우리 엄마세요." 타라는 다시 한 번 가슴이 뭉클했 다. 사진을 데니스가 수중하게 간직할 줄은 몰랐다. 잊을 수 없는 모습이라기 보다 가슴 속 으로 파고드는 모습으로 사진 속으로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현재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얼 굴이었다. 자신이 언제 그런 모습이 있었나 싶은 생각조차 들었다. 하지만 데니스와 사라는 사진 속의 여인을 엄마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데니스, 너 아직도 엄마가 보고 싶니?" 데니스는 갑자기 그녀에게 등을 보이며 창가로 걸어가시며 천천히 이야기를 했다. "전 엄마 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 "사람들은 엄마가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다고 하지만요, 전 언젠가는 엄마가 이 방으로 늠름하게 걸어서 들어오실 거라고 믿어요....." 타라 는 가슴이 미어졌다. 그리고 데니스의 다음 이야기는 그녀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소년답 지 않게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는 몇몇 사람들을 놀라게 해 주실려고 그러실 거예요." 몇몇 사람들을 놀래줄 것이라고 했다. 몇몇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우선 데니스 자신과 사라 및 가족들을 뜻하는 말일 수 있고 다음으로는 그렉과 질리 그들일 것이다. 또한 그것은 스테파니의 복수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했다. 어린 데니스가 그 렇게까지 생각할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에 듣고 있는 타라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아이가 엄마는 절대로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점이다. 데니스와 타라가 그 방을 나와 다시 정원을 통해 안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도 사라는 처음에 있던 그 자리에서 계속 지켜 보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음의 동요가 일고 있는 듯 보였다. 타라는 점심식사를 위해 그렉과 데니스와 함께 한가족 처럼 식탁 앞에 마주않았다. 옛날 자신이 살던 집에 들어온 이후 어느 것 한 가지도 예사롭 게 넘겨지지가 않았다. 그렉은 그렇다 치고 데니스와 함께 식사를 한 것이 언제였던가 싶었 다. 데니스는 집사가 접시에 담아 주는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넌 그것 좋아하는가 보구 나?" 타라의 말에 그렉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래요, 데니스는 그걸 좋아하지. 그건 그 렇고....." 그는 타라가 보는 앞에서 으시대고 싶은 모양이었다. 자신이야말로 그 집의 당당 한 주인이라는 점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 점심식사 후 뭘 할까?" 그는 가장 가 정적인 남자로 보이기를 원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당신이 원하는 걸로 하기로 하지, 타 라." "어떤 일이 가능한지 그것부터 알아야죠." "어떤 일이 가능한지 그것부터 알아야죠." 타라는 음식을 먹고 있는 데니스에게 눈길을 거의 떼지 못하고 있었다. 특별히 이상할 정도 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렉은 조금도 의심을 품지는 않았다. "수영도 할 수 있고 요트를 타거 나 테니스 그리고 낚시 등 뭐든지 할 수 있지." 데니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낚시는 싫어 요." 그렉이 뭐하고 말하기 전에 타라가 얼른 말했다. "데니스, 넌 낚시를 좋아하지 않나보 구나?" "난 뭐든 살아 있는 걸 죽이는 일에는 반대예요." 타라에게는 어린 데니스의 그 말 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잘 들어라, 데니스." 그렉은 가장 점잖고 자상한 아버지처럼 말 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다른 동물을 죽여야 하는 거야. 그게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 알겠니, 데니스?" 그렉의 이야기 역시 타라에게는 예사롭게 들리지 않고 가슴에 와서 닿았다. "뭘 죽여요 상관없다는 말 같군요" 그렉은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할 리 없었다. 다만 다시 설명을 데니스에게 해 줄 뿐이었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야." 타라는 입을 다물고 데니스의 표정을 살폈다. 데니스는 비록 어떤 내색도 하지 않고 있었지 만 그렉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짐짓 자상한 양부인 척 하고 있는 그렉이 그동안 어떻게 했을 지 대충 짐작은 되었다. "태초이래로 우리 인간은 그렇게 살아왔다. 그 런데 그걸 지금에 와서 갑자기 바꾼단 말이냐?" 데니스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타라의 표 정만 살피고 있었다. 어쩌면 조금 전 타라의 말을 공감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누군가가 죽이려 했지만 죽지 않고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데니스, 지금 네가 먹고 있는 게 뭐라고 생각하니?" 데니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이다. "넌 그게 살아 있다고 생각하냐?" 지켜보고 있던 집사의 얼굴에 긴장된 표정이 나타났다. 그는 그렉 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화가 나면 걷잡을 수 없게 난폭해진다는 것을. 집사는 손 님 앞에서 그렉에게 정면으로 자신의 뜻을 밝힌 데니스가 몹시 걱정되는 듯했다. 그의 얼굴 에는 긴장되고 걱정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잠깐 흥분한 듯했던 그렉도 지금만은 스스로 자 제하며 기분을 전환시켰다. "자, 자. 우리 이러지 말고 좀 재미있는 얘기를 하는 게 좋겠다." 비로소 집사의 얼굴에 안심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그는 오늘은 타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그렉은 데니스를 그대로 놔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데니스의 성 격에 타라는 또다시 감탄을 했다. 그녀는 아직 철부지라고 생각했었지만 오늘은 어린아이답 지 않는 용기가 있어 보였다. 정이 있을 리 없는 의붓아버지의 위협적인 태도에 조금도 겁 먹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를 바꾸는 용기까지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 라를 제일 먼저 발견한 그는 방금까지의 긴장됐던 분위기를 일소시켰다. "드디어 누나가 나 타난 걸 보니 몹시 배가 고픈가 본데요." 그는 특별히 타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라는 무 표정하게 걸어와 식탁 앞에 않았다. "안녕." 타라가 먼저 말을 걸었지만 사라는 대답이 없 었다. 불만으로 가득찬 표정만 지을 뿐이다. 그렉은 그럴 때 아버지로서의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보여주려는 듯이 점잖게 입을 열었다. "사라, 이 분은 타라 웰즈 씨란다." 그러나 사라의 얼굴은 오히려 반항적으로 변했다. "유명한 모델이지. 너도 텔레비젼 광고에서 봤을 거다, 그렇지?" 이에 대한 사라의 반응은 타라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저 여자가 누군 지는 나도 알고 있어요. 그리고 나와 내 동생은 쉬려고 오랜만에 여기에 왔어요." 일순간 그렉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이내 사라졌다. "메이티, 사라에게 점심을 가져다 줘요." "알겠 습니다." 집사가 접시에 음식을 담아 주자 사라는 다정한 미소를 보였다. 그렉에게 대하던 태도와는 전혀 다를 표정이었다. 그들 사이는 매우 정다워보였다. 그것은 사라가 그렉을 어 느 정도 싫어하는지를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조용히 지켜보던 타라는 넌지시 사라에게 말을 건넸다. "사라, 넌 참 예쁘구나." 그녀의 말에도 사라는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다. "난 예쁘 지 않아요." 그 다음 이야기가 타라에게 더욱 충격적이었다. "우리 엄마를 닮았다는 거 다 알고 있어요." 그렉의 표정이 결국 일그러지고 말았다. 사라가 그렇게 반항적이 된 이유를 알게 해 주는 광경이었다. "타라 씨가 손님으로 와 있는데 엄마 얘기를 꺼내다니!" 그이 언 성이 약간 높아졌지만 사라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태도에 그렉은 더욱 화를 냈다. "그런 버릇없는 행동을 하려면 여기서 당장 나가." 분위기가 갑자기 긴장되었다. 타라도 물 론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사라는 조금도 겁먹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대들었다. "내 게 명령하지 말아요! 그리고 여긴 당신 집도 아녜요!" 사라는 날카롭게 소리치며 벌떡 일어나 서 홱 나가버렸다. 그러자 그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달려가 사라를 어찌 할 것만 같 았다. 타라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몹시 긴장되고 불안해서 가슴을 졸였으나 어쩔 수가 없었 다. 그녀는 무엇보다 그렉의 옹졸한 태도에 크게 실망했다. 사라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았다. 어른에게 대들었다는 것 이전에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 그렉이었다. 바로 그 때 데니스의 재치가 다시 한 번 나타났다. 그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큰 소리로 지껄여댔다. "누나는 겉으로만 저럴 뿐이에요. 매일 밤 잠자기 전에 우는 걸요. 내가 분명 히 들었어요." 타라의 가슴이 다시 뭉클해졌다. 데니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지만 듣고 있는 타라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 그리고 울컥치미는 분노와 슬픔을 안간힘을 쓰 며 참았다. 달려나가 사라를 껴안고 엄마라는 것을 밝히고 싶었다. 더 이상 그렉 같은 인간 에게 설움을 받지 않도록 자신이 보호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며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녀는 너무 쉽게 흥분하고 불같이 화 를 내는 모습에서 그렉의 이면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었다. "보트나 타러 가지." 깊은 생각 에 빠져있던 타라는 그렉의 말을 미처 알아듣지 못했다. "뭐라구요?" "보트나 타러 가자 구." 그렉의 태도에서 교양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속물적인 근성이 여지없이 드 러날 뿐이었다. 그는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타라를 속일 수는 없었다. 그의 속셈을 모 를 리 없는 타라는 나름대로의 방법을 이미 생각해 내고 있었다. "데니스, 너도 우리와 같이 보트 타러 가겠니?" "물론이죠." 데니스는 타라의 마음을 이해라도 한 듯이 선뜻 대답했다. 그는 이미 타라에게 마음이 끌린 게 분명했다. 확실히 알 수 없는 무엇이 그의 마음을 타라 에게로 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렉의 얼굴에 불만이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난 우리 두 사람 만이 가는 줄 알았는데?" 그는 조급해져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타라와 단 둘만의 기회를 가지려 했던 것이다. 그의 그와 같은 속셈을 알고 있는 타라가 기회를 줄 수는 없었다. "난 당신을 가정적인 사람으로 보았는데요?" 그 말에 그렉도 아무런 이의를 달지 못했다. 그것 은 그가 자랑삼아 했던 말이었기 때문에 철면피 같은 욕망을 가졌다고 해도 그 말을 스스로 부정할 수는 없었다. 데니스가 같이 있었기 때문에 타라는 안심할 수 있었다. 그렉과 단둘 이라면 호수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고양이 앞에 신선한 생선을 내놓는 격이 될 것이 뻔 했기 때문이다. 그렉은 이미 노골적으로 타라의 육체를 노리고 있었다. 사라가 그 후 식사 도 하지 않은 채 나가버린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당장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타라 가 나설 입장이 아니었으므로 때가 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데니스 등 세 사람이 타고 있는 커다란 보트도 스테파니의 소유였다. 하퍼가에서 그렉의 소유는 아직 한 가지도 없었다. 그렉은 명목 뿐인 스테파니의 남편일 뿐 실제의 권리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렉이 보트의 뒷편에서 배를 운전할 때 데니스는 뜻밖의 질문을 타라에게 던졌다. "타라 아줌마." "응?" "왜 그렉 같은 사람을 좋아하시는 거죠?" 같이 있을 때는 내색하지 않던 데니스의 솔직한 마음이 그렇게 드러나고 있었다. 타라는 애써서 태연한 모습을 보이며 말 했다. "난 여러 사람을 다 좋아한단다. 특히 데니스 널 좋아해." 그들의 모습은 모처럼 함 께 하는 모자간의 정다운 한때처럼 보였다. 물론 실제로 그렇기도 하지만 그럴 수 없이 다 정해 보였던 것이다. 데니스도 그렇지만 타라는 특히 애틋한 만큼 정겨운 모습을 하고 있었 다. 타라로서는 그렉보다 데니스와 함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덕분에 그렉에게도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잠시 선실에 내려간 타라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갑판 위로 올라왔을 때 데니스가 그렉 대신 보트를 운전하고 있었다. "나를 기다렸나요?" 타라 의 모습에는 아무런 의심도 품을 수 없었다. 있는 그대로 보여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렉은 그녀의 놀라운 연기에 감쪽같이 속아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렉이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데니스에게 말을 걸었다. "데니스, 너 수영할 줄 아니?" "물론이죠." "잘 됐다." "좋아, 그 럼 내가 먼저 간다?" 타라는 멋진 포즈로 물에 뛰어들었다. 데니스가 뒤따라 물로 뛰어들 었다. 그들을 보며 그렉이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맨마지막으로 뛰어들었다. 타운즈빌 에 있을 동안 회복을 위한 운동의 한 방편으로 수영을 한 것이 지금은 선수 못지 않게 수영 을 잘 하게 되었다. 데니스의 수영실력도 결코 만만하지 않아 그는 앞서서 물살을 가르는 타라의 뒤를 바싹 뒤ㅉ았다. 데니스는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엄마 없이도 휼륭하 게 자라준 것이 대견했다. 타라는 그런 데니스가 무조건 고맙고 또한 기뻣다. "데니스야, 너 수영 참 잘하는구나." "보통이죠, 뭐." "우리 시합 한 번 해 볼까?" "좋아요, 타라 아줌 마." 두 사람은 한 차례 수영실력을 겨루었다. 데니스는 여전히 만만치 않게 보였다. 타라 는 전력으로 질주하지 않고 데니스와의 간격을 유지하여 주었다. 이윽고 한 차례 물살을 가 른 다음에 뒤떨어져 주고는 먼저 말을 했다. "너 정말 수영실력이 보통이 아니구나, 데니스 아줌마는 오늘 컨디션이 별로 안 좋은데." 이 때 데니스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는 그 동안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 아줌마를 기억해요." "그래?" "언젠가 제가 학교 운동장에서 애들하고 공놀이를 하고 있을 때 정문 밖에서 지켜보고 계셨죠?" "그 게 언젠데?" 태연하게 되물었지만 타라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데니스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아이는 일부러 그렉이 없는 자리에서 말하는 신중한 행동에 또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쎄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아요." "다른 사람이겠지. 난 네 학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걸." 타라는 아들까지 속여야만 하는 자 신의 신세가 처량할 뿐아니라 무엇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모든 일은 머지않아 밝혀지면 그런 다음 아들에게 털어놓기로 했다. 그리고 원한다면 자신의 모든 것 을 바쳐서 보상해 줄 것이다. "이 봐!" 갑자기 보트 가까이에서 맴돌던 그렉이 타라를 불렀다. 타라는 데니스에게 슬 쩍 윙크한 다음 그렉에게로 헤엄쳐 갔다. 이번에도 그녀는 그렉에게 여유를 주 지 않고 먼저 보트 위로 올라가려 했다. 그러자 그렉은 그럴 수 없다는 듯이 재빨리 뒤로 다가왔다. 바람둥이인 그에게 물 속이야말로 더할나위 없는 멋진 장소였다. 둘 다 옷차림이 간편했고 겉옷을 벗어야 하는 부담감이 없고 원하면 간단하게 접촉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렉, 이러지 말아요." 타라는 부드럽게 그 의 손길을 막았다. "왜 그래?" "데니스가 있잖아요." "저 녀석이 우리한테 신 경이나 쓸 것 같아?" 그렉은 타라도 자신과 똑같은 인간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데니스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데니스가 아녜요." "그럼?" "내가 신경쓰여요." 이번에도 그렉은 타라에게 완전히 당하고 말았다. 처음에 는 가정적이라는 점을 내세워 데니스를 데리고 오더니 이번에는 다시 그런 식으 로 접근을 차단시킨 것이다. 타라는 그렉으로부터 시시각각 다가오는 위기를 현명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데니스가 키를 잡고 있는 동안 그들은 갑판 위에 한가롭게 누워 일광욕을 즐겼다. 그럴 때에도 그렉의 눈빛은 무엇인가를 집요 하게 요구하는 듯했다. 그럴수록 타라는 그때 그때 그럴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 모면하였다. "타라, 당신이 보기에 애들이 어떤 것 같아?" "글쎄요....." 그렉은 아이들에 대해 물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 타라는 생각했다. 처음으로 스테 파니를 사랑한 적도 없는 그가 하물며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이를 좋 아할 리가 있겠는가? 그가 사라에게 그렇게 포악하게 대하는 것을 본 것만으로 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한 일이었다. "변덕스러운 애들이지." 그가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날 타라가 만나본 두 이이는 절대로 그렇 지 않았다. 그녀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렉은 자못 걱정해 주는 듯이 말했다. "얘들 때문에 혹시 당신이 불편하지는 않은지 모르겠군. 그렇다면 말하도록 해." "돌려 보내시려구요?" "그럴 수도 있지." "난 조금도 불편하다고 느끼지 않아요." "그렇다면 다행이구." 그렉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데니스와 사라를 강제로라도 돌려보내 버릴 게 분명했다. 타라는 그렇게 하도록 놔둘 수는 없었 다. "불편하기는커녕 데니스를 만나서 굉장히 기뻐요." "당신은 애들을 좋아하 는군." "그럼요. 아이들을 싫어하는 사람을 아마 없을 거예요. 당신도 그랬잖 아요, 가정적인 남자라고?" 그렉은 당장 뭐라고 입을 열지 못하며 씁쓸한 표정 이 되었다. 문득 타라는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9 우연히 타라는 데니스와 사라가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엿듣게 되었다. 그들 은 타라가 엿듣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정원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 었다. 그렉한테는 잔뜩 적대감만을 보였던 사라였지만 데니스에게는 그렇지 않 았다. 같은 핏줄이며 다정한 누나의 모습 그 자체였다. "누나, 사실은 타라 아 줌마를 좋아하는 거지?", "뭐라고?", "그냥 싫은 척하고 있는 거지, 그렇지?", "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니?", 되물으면서도 사라는 조금도 화를 내거나 짜 증을 부리지 않았다. 데니스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그들이 그렉을 어떻게 생 각하는지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누나, 아줌마가 그렉과 친하다고 해서 똑같은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잖아?", 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데니스 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어." "뭐가?" "타라 아줌마 말이 야, 누굴 많이 닮은 것 같지 않아?" 듣고 있던 타라는 약간 긴장이 되었지만 사 라의 반응에 다시 안심을 했다. "아니" 이어서 사라는 놀랄 만한 이야기를 거침 없이 꺼냈다. "그 여자도 다른 여자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어. 틀림없이 그렉 과 자는 데만 관심이 있을 거야" 그렉이 평소 그 아이들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데니스의 생각은 사라와 달랐다. "그렇지 않을 거야" "어째서?" "누나가 항상 남자 생각만 하고 있기 때문일 거야" "그게 무슨 말이 야?" 사라는 사춘기 소녀답게 얼굴을 붉혔다. 타라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 왔다. 이 아이들이 언제 이렇게 성장했나 싶어 대견스럽기만 했다. "아무튼 그 여자가 우리 집에 와서 설치고 다닐 권리는 없어. 그렉이 미워 죽겠어." "나도 마찬가지야, 누가. 하지만 아줌마는 달라." "아냐," "어째서?" "그 여자도 미워." "그건 그렉 때문이잖아." "마찬가지지." 타라는 사라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렉이 밉기 때문일 것이다. 식사 도중 엄마 이야기를 했다고 벌컥 화를 내며 당장 나가라고 소리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 순간 타라는 그렉의 또 다른 내면을 확실하게 발결할 수 있었다. 그녀는 곰곰이 생 각해 보았다. 목표대로 옛날 자기가 살던 집에 다시 돌아왔을 때 데니스는 별 문제가 없다고 확신했지만 사라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나타날 것을 발견했다. 자신은 그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만 했다. 현재 사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다정하게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양 부모가 모두 없는 상태에서 사랑에 굶주려 있는 것이다. 당장 누군가 사랑하는 마음으 로 따뜻하게 감싸주어야 할 때라고 타라는 생각했다. 그녀는 오후에 그렉이 없 는 틈을 타서 사라와 대화를 나누기로 결심했다. 데니스의 말대로 사라는 엄마 의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늘 낮에는 더구나 그렉 때문에 점심도 먹지 못했다. 타라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을 때 사라는 방에서 엎드려 공부를 하 고 있던 중이었다. 주위에는 책들을 널어 놓고 오디오 기기의 볼륨을 높여놓고 있었다. 사라는 엄마를 닮아 음악을 좋아했다. 타라가 들어가자 얼른 리모콘으 로 음악을 껐다. 그러나 별다른 거부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 방이 바로 타라 가 되찾고 싶어했던 스테파니 하퍼의 방이었다. 하지만 그런 느낌 이전에 그녀 는 사라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고 그 일이 더욱 중요했다. "음악을 끄지 않 아도 되는데 그랬구나, 사라. 그건 내가 좋아하는 곡이거든." 나라가 방에 들어 선 후 처음으로 경계하는 눈빛으로 빤히 바라보았다. 너는 내 딸이야, 하고 말 하지 못하는 타라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착잡했다. 어느 때까지는 서로 마음 이 통하는 아줌마로 있어야 하는 것이다. "네가 잘 있나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아까 배타러 갈 때 넌 왜 오지 않았니?" 그말에 사라는 갑자기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우리 엄마의 배에요. 아무도 만지거나 탈 수 없다고 변호사가 말했어요" 실종된 스테파니 하퍼의 모든 재산이 아직 그렉과 상관없다는 뜻이었 다. 하퍼그룹의 핵심인물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스테파니의 사망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건 오해하지 마." "오해라구요?" "너희 새아빠가 나를 기쁘게 해 주 려고 그런 거 뿐이란다." "그 사람은 당신과 자고 싶어서 당신을 우리 엄마 집에 끌어들였을 거예요, 맞죠?" 순간 타라는 자신도 모르게 성난 표정이 되었다. 교 양있는 여성으로서의 모욕감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딸의 불건전한 생각에 분 노를 느낀 것이다. "사라, 그런 말이 어디 있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꾸짖었 다. 사라는 이번에도 그렉에게 그랬던 것처럼 따지고 들었다. "왜요, 그 남자는 당신의 애인이 아니던가요?" "그렉은 내 애인이 아냐!" 다시 날카롭게 말한 타라 는 그러나 이내 서글퍼졌다. 그 아이를 탓한 자신이 미웠다. 어떻게 자신이 그 아이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그 아이가 나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사랑은 애당초 시작된 적도 없었으며 엄마도 없이 외롭게 살고 있는 아이들이다. 의붓아버지라는 사람 역 시 사랑을 베풀어 줄 리 없는 사람이었다. 타라는 사라에 대한 뜨거운 정이 갑 작스럽게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창가로 걸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창문에 기대고 서 있는 사라에게 다가가서 한 쪽 어깨에 손을 얹었다. "미안하다, 얘 야." 그녀는 진심으로 사과하며 사라를 돌려세워놓고 그 눈을 깊숙이 들여다 보 았다. 그녀의 따사로운 시선을 받자 사라의 눈에 나타나 있던 경게심과 증오의 빛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 말을 잘 들어, 알았지?" 사라는 조용히 그 녀의 시선을 응시하며 진위를 가늠하고 있었다. "그렉은 내 애인이 아니야, 그 리고 너희 어머니의 허락이 없는 한, 이 집에서 네가 말한 그런 나쁜 일은 일어 나지 않을거야, 내가 너한테 약속하마." 눈물을 삼키며 말하는 타라의 진심은 어 린 사라의 마음에도 그 뜻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다. 사라의 마음은 이미 풀 어지고 있었으며 더 이상 타라를 경계하거나 미워하는 빛이 보이지 않았다. "어 떻게 아줌마 같은 사람이 그렉을 좋아할 수 있어요?" 사라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보다 사라, 난 네 친구가 되고 싶어. 데니스도 그렇고 그렉 보다도 말이야." 사라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마음이 완전히 바뀌었다. 어쩔 수 없는 혈육으로서의 따뜻한 정을 그렇게 느끼게[ 된 것이다. 어느덧 사라는 소 녀다운 동경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아줌마 정말 예뻐요. 나도 그렇게 예뻤 으면......" 타라는 사라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앉았다. 의자 위에서가 아니라 선 자리에서 그대로 바닥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댔다. 그와 같은 격식을 갖추지 않 은 그녀의 태도는 사라에게 더욱 친밀감을 주었다. 그녀는 친구처럼 사라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줌마가 네 나이였을 적에는 어땠는지 아니?" "어땠는 데요?" 사라의 두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겁이 많고 통통한 데다 치아교정 틀까지 끼고 있었지. 외모에 정말로 자신이 없었단다." 조금도 거짓이 섞이지 않은 그녀의 말에 사라는 점점 더 호감을 갖기 시작했다. "누군가 나를 진정으 로 사랑해 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단다. 그래서 난 일부러 외모 같 은 것에는 관심도 없는 척했지. 그런 두려움과 보호막을 벗어나는 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단다." 그보다 더 진실이 담긴 설득은 없을 것이다. 사라의 마음은 다정하고 아름다운 아줌마를 향해 완전히 열리고 있었다. "하지 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뭐가?" "자신이 아름답다는 것을 아줌마도 아시잖아 요." "그건 한 순간일 거야. 그렇게 생각해." "우리 엄마도 그랬어요. 엄만 자 신이 예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돈 보고 자신을 좋아할 뿐이라고 생각했어 요." 타라는 또다시 가슴이 아렸다. 그게 바로 예전의 자신이었다. 사라가 엄마 의 마음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애가 거기까지 파억하고 있을 줄 은 몰랐다. 그냥 철없는 아이로만 생각했던 지난날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녀는 이 아리르 위해 해줄 수 있는 가장 진실되고 가장 사랑이 담긴 이야기를 생각해 냈다. "하지만 얘야, 네가 정말 운이 좋다면 너의 그 아름다운 마음을 알아 주는 사람을 분명히 만날 수 있게 될거야." "그럴까요?" "그래, 그러니 우 리는 남의 마음을 저버리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만 된단다." 그녀의 설 득은 사라의 가슴에 그대로 와 닿았다. 엄마가 없어진 후 누구도 그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얼굴이 못생겼다고 해서 마음까지 못생긴 건 아니란다." 그녀는 사라의 기다랗게 자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사라는 그녀 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다정함을 느끼고 있 었다. "이 머리를 뒤로 넘기면 훨씬 달라 보일 것 같은데?" 사라는 그녀가 자신 의 머리를 만져주기를 바랬다. 지금까지 누구도 그렇게 해준 적이 없었다. 결 혼이 확정된 후부터 그렉에게 빠져버린 엄마도 그런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 이다. 그렉을 더욱 미워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렉은 결혼으로 엄마의 마음을 빼앗아간 것도 부족해서 끝내 엄마를 영원히 잃어버리게 만들었다고 사 라는 생각했다. "왜 예쁜 얼굴을 머리칼로 숨기고 있니?" 그녀는 사라의 머리를 뒤로 넘겨주었다. "사라." "네?" "앞으로 우리, 다정한 친구가 될 수 있겠지?" 사라가 잠깐 망설였지만 타라는 조급해 하지 않았다. 이미 사라의 마음이 변하 고 있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글쎄요....." 사라가 그렇게 대답했을 때에도 그녀는 동요하지 않았다. 쑥스러워서 그럴 뿐, 자신과 사라는 이미 친구가 되어 서로 마음이 통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이미 데니스하고는 완전히 친한 사 이가 되어 있었다. 그 아이는 무엇보다 붙임성이 있고 남자다운 면이 보여서 믿음직스러웠다. 천성적으로 작은 일에 흥분할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따라서 데니스와 함께 있으면 타라는 어느 때보다도 마음이 편안했다. 데니스는 타라 에게 가능한 모든 친절을 베풀고 싶어했다. "아줌마." "왜 그러니?" "보여드릴 게 있어요. 좋아하실지 모르지만." "궁금해지는데?" "정말요?" "그럼. 데니스 가 보여주는 거라면 뭐든지 빨리 보고 싶어. 내가 거짓말 하지 않는다는 거 너 도 알지?" "물론이죠. 이쪽으로 오세요. 제가 안내할께요." 데니스는 타라를 자기의 방으로 안내한 다음 환등기를 설치했다. 바깥은 이미 어두워졌기 때문 에 커튼 따위로 빛을 차단시킬 필요는 없었다. 그가 보여주고 싶어한 것은 옛 날에 찍은 슬라이드 필름이었다. 첫 장면이 스크린에 비치는 순간 타라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우리 엄마가 젊었을 때 할아버지와 찍은 거예요." 스테파니 하 퍼의 젊은시절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따라 죽고 싶어했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먼저 타라에게서 스테파니를 발견하고 안타깝게 반겼던 개도 그들과 함께였다. 젊은 시절의 하퍼 씨는 매우 건장했다. 하퍼그룹은 그의 강인한 의지가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 스테파니를 한 팔에 거뜬히 안고 비행기 앞 에 서 있는 하퍼씨의 모습도 보였다. "어때요. 우리 엄마?" "좋은 분 같구나." 스테파니가 아닌 타라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가슴은 엉망진창으로 찢 겨지고 있었지만 아픔을 나타낼 수 없었다. 데니스는 타라가 원하지 않는 광경 도 보여주었다. 그것은 스테파니가 결혼식 날 찍은 것이었다. 결혼식을 올리고 있는 스테파니 하퍼와 그렉 마스던이 보였다. 질리에게 힐끔 힐끔 눈을 돌리는 그렉의 모습도 화면에 나타났다. 바로 그 때 별안간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덕분에 타라는 점점 심해지는 고통 속에서 겨우 헤어나올 수가 있었다. "여기 주인 어디 있어?" 함부로 소리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데니스와 타라 는 금방 알아차렸지만 서로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사의 당황해 하는 목 소리 너머로 계속 거칠게 떠들고 있는 것은 질리였다. 그녀는 술에 몹시 취해 있었다. 데니스가 먼저 타라를 쳐다보고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 갔다. 질리는 몹시 취해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만나는 군요" 타라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아줌마인 줄 알았어요." 데니스도 한 마디 던졌다. 그럴 때의 데니스는 이미 소년이 아니었다. 질리가 무엇인가 말을 하 려고 할 때쯤 다른 방에 있던 그렉이 다급하게 걸어나왔다. 그렉은 짐짓 반가 운 척 질리를 맞았다. 그렉의 그런 모습만으로는 그의 마음을 짐작하기 어려웠 다. "질리, 당신이군요. 웬일이죠?" 그는 몹시 서두르고 있었다. 질리에게 말 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었다. "질리, 이쪽은 타라 웰즈에요. 그리고 타라, 질리 스튜어트씨로 우리 집안과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이지요." 성급하게 양쪽을 소개하는 그렉의 태도에 타라는 시치미를 뗄 수밖에 없었다. "만나서 반 가워요." 질리는 대답도 하지 않고 불만과 질투심으로 가득찬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그러자 그렉은 더욱 서둘러 말했다. "잠간만 실례하겠어요. 질리와 중 요한 사업 이야기가 있어서요. 질리, 이쪽으로" 그렉은 재빨리 질리를 데리고 그가 있던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데니스가 다시 어른스럽게 한 마디 했다. "질리 아줌만 술을 많이 마시죠." 타라는 모르는 척하고 데니스를 데리고 이층 으로 올라갔다. 데니스의 어깨에 팔을 두른 그녀는 더할 수 없이 다정한 어머 니의 모습, 그것이었다. 그들이 막 이층으로 올라갔을 때 쯤이었다. 질리를 데 리고 방으로 간 그렉은 방문을 닫으며 질리를 방 안쪽으로 난폭하게 밀쳤다. 그 바람에 질리는 하마터면 방 구석에 쳐박힐 뻔 했지만 겨우 몸을 지탱했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는거야!" 질리도 맞받아 소리쳤다. "내가 여기서 뭘 하냐 구?" "그래!" "그럼 저 여자는 여기서 뭘 하는거지? 질리는 들끓는 자존심으 로 거의 이성을 잃고 있었다. "취했군." "그래, 나 취했다!" "뭐야?" "당신은 저년과 놀아나느라 바쁘실 테지!" 질리는 그렉과 결혼하려고 남편인 필립한테 이혼을 요구해서 사실상 합의를 본 상태였다. 이후 그렉이 보이는 행동이 변했 으니 질리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었다. "경고하겠어." "나도 당신에게 경고하겠 어!" 질리가 전에 없이 강경하게 나오자 그렉은 태도를 바꾸었다. "이봐, 질리! 난 저여자와 단지 몇 번 만났을 뿐야. 그게 전부야, 알겠어?" 당장 주먹질이라 도 할 듯이 소리치던 그렉이 스스로를 억제 하였다. 역시 그는 질리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질리의 말 한 마디로 당장 쇠고랑을 찰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봐, 질리. 진정하고 내 말부터 들어봐," 그렉은 질리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다정한 척 대했다. "내가 일 때문에 몇 명의 여자들을 만난다는 것은 당신도 알고 있잖아?" 질리는 이미 다소곳해져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있지, 질리. 당신이 그런 식으로 나오면 오히려 나를 멀리 쫓아 버리게 될 거야, 설마 그걸 모르지는 않겠지?" "그것 뿐인가요?" 질리는 이미 조금 전까지의 모습이 아니었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여자의 전형적인 모습일 뿐이었다. "그렇다니까." "몇 번 만났을 뿐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단 말이죠?" "생각해 봐. 내가 스테파니의 애들이 있는 집에서 저 여자와 일을 저지를 것 같 아?"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이 한 가지는 잊지 말아야 될 거여." "뭔데 요?" 질리는 이미 그렉에게 완전히 설득 당하고 말았다. "당신은 아직 남편과 이혼을 하지 않았어." 그는 질리가 이혼하는 것을 동의하였던 것이다. 질리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사실 그 일에 대해 말할 게 있어서 왔어요." "뭐라 구?" "우선 있죠, 웃어 봐요." 그렉은 어리둥절 했다. "남편이 이혼에 합의했 어요." 순간 그렉의 얼굴에 절망적인 표정이 나타났지만 질리는 발견하지 못했 다. "이제 우린 정식으로 부부가 될 수 있어요, 그렉." "그게 정말이야?" "그 렇다니까요. 이런 일에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 그 렉은 더욱 참담해졌다. 애초 스테파니가 있을 때부터 지금가지 그는 질리를 사 랑한 적이 없었다. 단지 육체적인 쾌락때문에 그녀를 유혹해서 끌어들였던 것 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녀와 관계를 지속하는 이유는 한 가지 뿐이다. 그녀 의 입을 봉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때문에 이제껏 질리에게 서 둘지 말고 천천히 해도 늦지 않는다고 구슬려 두었는데 그녀가 필립과 이혼 합 의를 하고 나타나자 그렉은 다시 당황하고 말았다. 필립과 이혼한 다음 그녀 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는 불을 본 듯이 훤했다. 그렉의 진심과는 전혀 다르게 일이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거절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목적을 달성하고 먼 곳으로 도망치기 전에 질리가 입을 열면 모든게 수포로 돌아가 버릴 것이다. 고 민에 빠진 그렉은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얘기하지." 우선 질리를 진정시켜 놓고 방을 나온 그는 이층에서 데니스와 내려오는 타라를 발견 하고 크게 당황했다. 그녀는 올 때 가져온 가방을 들고 내려오는 중이었다. "지금 뭘 하는 거요?"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 어요?" 타라는 조용히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어." 타라는 이미 마음을 결정 했으므로 그렉이 어떻게 해도 그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내가 여기에 있 는다고 해도 뭐 좋은 일은 없을 것 같군요." 그 말에 그렉도 어떻게 만류할 수 가 없었다. 사실상 그도 심경이 복잡해졌으므로 그냥 타라를 보내는 것이 좋겠 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결혼을 요구하기 위해 온 것이므로 그런 일을 타라에게 절대로 알려서는 안된다는 계산도 있었다. "그럼 내가 태워다 주지." 그것도 타라는 이미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렉의 됨됨이를 잘 알고 있는 그녀 는 집에 대려다 준다는 구실로 차에 태운 다음 그가 어떤 짓을 할지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럴 필요 없어요." "뭐라구?" "데니스가 택시를 불렀어요." "네가 그랬니?" 그렉의 두 눈빛이 금방 사나워지며 데니스를 노려 보았다. "내가 부탁했어요." 타라의 말에 그렉도 데니스를 어떻게 하지 못했다. 그렉은 재빨리 화제를 바꾸며 자신의 입장을 변명했다. "질리는 내 아내하고 가 장 가까운 사이였었지." "이해해요." 타라는 그와 더 이상 질리에 대한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말하기 전부터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으므로 끓어오르 는 증오심을 안감힘을 쓰며 간신히 참아낼 뿐이다. "짐은 내가 들어주지." "잘 있어라, 데니스. 사라에게 아줌마 갔다고 전해 주렴." 타라는 데니스의 뺨에 아 쉬움이 가득 담긴 작별의 키스를 했다. 데니스는 순순히 그녀의 키스를 받아들 였다. 그런 광경도 그렉에게 놀랄 만한 것이었지만 그는 질리의 일을 생각하느 라 미처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질리의 문제 뿐 아니라 그로 인해 혹시 타라 와 모처럼 이루어지려던 관계가 끝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 때문에 전전긍긍 할 뿐이었다. 10. 그렉은 밖에서 택시의 경적소리가 들리자 화자 치밀었다. 하지만 타라의 앞 이기 때문에 억지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타라가 기다리고 있던 택시의 뒷좌석 에 올라탔을 때 그렉은 더욱 안타깝고 초조해졌다. 그녀ㅡ 그렇게 돌려보내면 그동안의 노력이 무너지고 말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몸 과 마음이 완전히 자신의 소유가 되어 있어야 계산이 맞는 것이다. 그런데 느 닷없이 나타난 질리가 모든 일을 망쳐 버린 것이다. 그는 차 안에 앉아 있는 타라의 손을 잡으며 다정스럽게 말했다. "정말 데려다 주지 않아도 되겠어, 당 신?" 타라는 대답없이 그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잘 알면서 무슨 어린아 이 같은 투정이냐는 듯한 눈빛이었으므로 그녀 역시 단둘 만의 은밀한 시간을 원한다고 생각한 그렉은 굉장히 타라가 친밀하면서도 금방 쓰러져버릴 듯이 허 탈해졌다. "가요, 아저씨." 그렉은 마지못해 물러서며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역시 어떡해 볼 재주는 없었다. 타라를 태운 택시는 이미 저만큼 가고 있었다. 그녀가 탄 택시가 미처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그렉은 성난 걸음으로 질리가 기다리는 방으로 갔다. 그가 들어갔을 때 질리는 다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간 그렉은 대뜸 질리의 뺨을 후려갈겼다. "무슨 일이예요?" 느닷없 이 얻어맞은 질리는 아픔을 느끼기보다는 어리둥절한 것 같았다. "다시는 이곳 에 나타나지 마!" 그는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분풀이를 질리에게 하고 있었 다. "그리고 술에 취한 상태로는 더더욱 안돼. 알겠어? 알겠느냐고!" 그는 맹 수처럼 으르렁거렸다. 그쯤 되지 질리도 약이 오를대로 올랐다. 더구나 그녀는 거의 만취된 상태였다. "더 때려봐!" 그렉은 어금니를 악물면서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왜 못 때려, 이 자식아!" 그녀의 감정은 갈 데까지 간 게 분명했 다. 그런 상황에서는 그렉도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죽여버리지 않는 한 언제 일을 당할지 예측하기 어렵기 대문이다. 이 때 그렉이 할 수 있는 방뻐은 한 가지 뿐이었다. 성큼 그녀에게도 다가선 그렉은 나폭하게 그녀의 옷을 찢었 다. 순식간에 슈미즈 바람이 된 질리는 멍하게 서있었다. 그렉은 그 앞에 무릎 을 굽힌 자세로 앉았다. 그가 똑바로 노려보는 같은 높이에는 얇은 슈미즈를 통해 훤히 비치는 비너스의 언덕이 있었다. 그렉은 질리의 그곳이 원수이리라 도 한 듯이 잠시 무섭게 노려보았다. 한편 질리는 이미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 했다. 그들의 쾌락게임에서 그 방법은 단골메뉴나 다름없었다. 그렉은 특히 그 방법을 즐겨 사용해서 질리를 쾌락의 도가니로 몰아넣곤 했다. 그가 얼굴을 그 녀의 살에 파묻고 입술과 혀로 애무할 때 질리는 최고도의 만족을 느끼곤 했다. 그녀는 특히 작은 돌기의 애무에 민감해 순식간에 오르가즘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렉은 어느 때보다 거칠게 질리를 다루기 시작했다. 벌떡 몸을 일으켜 질리를 우악스럽게 끌어당겼다. 그의 거친 공세에 질리는 모든 감정이 눈이 녹듯이 풀 리는 것을 느끼며 쾌락에 말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이 숨가쁜 육체의 향연을 벌 이고 있을 때 타라는 또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그녀가 그렉, 아니 스테파니의 집에 가 있는 동안 벌써 여러 시간째 그녀의 집 앞에서 서성거리며 그녀를 기다 리는 사람이 있었다. 이윽고 택시가 집 앞에서 멈추었을 때 반갑게 다가와 문 을 열어 준 사람은 댄 마샬이었다. 그는 타라에게 할 말이 있어 오랫동안 그곳 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안녕, 타라." 뜻밖의 상황에 타라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리둥절해 했다. "댄, 어떻게 여기 계세요?" "마음을 바꿨죠." "오래 기다리셨어요?" "하루 종일요." 타라는 더욱 놀랐다. 거짓말도 과장도 하지 않을 댄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그녀가 데니스와 사라를 만나고 있는 동안 댄은 그곳에서 내내 타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당신을 만났으니 됐어요, 당신이 늦도록 오지 않기에 어딘가 멀리 주말 여행이라도 떠난 줄 알았죠." " 좀 들어가시겠어요?" "아뇨. 잠깐....." 댄은 앞서서 들어가려고 하는 타라를 불러세웠다. 비로소 타라는 댄이 뭔가 용건이 있어 왔다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네?" 타라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댄의 눈빛이 여느때 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 아니오라고 대답만 하면 되 는 간단한 질문을 하려고 기다렸소." "그게 무슨.....?" "나와 결혼해 주겠소?" 난데없는 질문이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빨리 단도직입적으로 질문 을 받게 될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청혼에 응하고 싶다고 해 도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뼈를 깎는 고통과 함께 세운 목표가 이제 막 궤도 에 접어들려는 차였다. "그럴 수 없어요." 괴로워 하는 그녀의 표정에도 불구 하고 댄은 실망하는 빛을 감추지 못했다. "왜 안된다는 거요?" "묻지 말아 주 세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타라. 당신과 결혼하고 싶소 그냥 이대로는 물러설 수 없어요." 댄은 비굴해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진지하게 말했다. 지금 까지 생활하면서 그렇게 애절하게 한 여자를 느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당신 과 저는 서로를 이해해 왔다고 생각했는데요?" 타라의 머릿속은 어느 때보다 혼란되어 있었다. "당신은 한 번도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지 않소? 당 신에게 뭔지 모르지만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몹시 걱정이 됩니다." 댄은 그녀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자 본인이 말 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객관적인 면에서 추리해 보면 무엇인 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교통사고라고 거짓말을 하며 속인 것부터 곰 곰이 생각해 본결과 심상치 않은 은원관계가 있다는 짐작을 하기에 이르렀다. 원래의 모습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이유도 그렇게 되면 설명이 가능한 이야기였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타라의 주변에서 진행 되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그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타라를 위해 그녀와 결혼해서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기꺼이 그녀의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타라는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까지 부인하지는 않았다. "당신과는 관계없는 일 이예요, 댄. 정말이에요." "그건 그럴 것이오." "당신은 저에 대한 기본적인 것도 모르고 계세요." "들어봐요, 타라. 난 단지 나에게 남은 인생을 당신과 함 께 하고 싶다는 것 뿐이오. 혹시 나 말고 또 다른 사람이 있는건 아니오?" "어 떤 면에서는요." 댄의 두 눈에 놀라움과 함께 실망의 빛이 교차되었다. 댄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놀라움과 실망을 떨쳐버리려는 듯이 재빨리 말했다. "그건 정확한 대답이 될 수 없어요, 타라." "하지만 더 이상은 이야기해 드릴 수 없어 요, 댄. 이게 제가 말해드릴 수 있는 전부예요." 타라는 댄의 두눈을 똑바로 응 시하지 못했다. "당신 혹시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소?" 그렉을 두고 하는 말에 타라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 가장 가슴 아픈 상처가 그것 이었다. "댄, 제발요." "......." "저를 이대로 내버려두고 돌아가 주세요. 그리 고 더 이상 저에 대해 관심을 갖지 말아주세요." 타라는 그에게서 얼른 도망치 고 싶은 심정 뿐이었다. 그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가 없었다. 내심 증오의 불길을 피워올리면서도 태연히 대할 수 있는 그렉과는 경욱 완전히 달랐 다. 댄 역시 가슴의 고통을 느끼며 소리없이 신음했다. 그러나 그는 타라를 괴 롭히고 싶은 생각은 ㅊ도 없었다. 그녀가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면 잠시도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가급적이면 신속하게 일을 매듭짓기는 것이 좋 다고 생각했다. "좋아요, 타라." "네?" "당신이 내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나 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렇게 하겠소." 타라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기 는 듯이 아팠다. 하지만 시간을 끌수록 아픔은 더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과 함 께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순간 댄의 두 눈에 비친 촉촉한 안개를 타라는 평생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거짓 말."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면서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댄이 아니고 서는 불가능할 일이었다. "행운을 빌어요, 타라." 한 마디를 남긴 댄은 조용히 돌아서서 걸었다. 그가 어둠속으로 모습을 완전히 감추었을 때 타라는 숨이 막 혀오는 것을 느꼈다. "오, 댄!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녀는 오열하기 시작했 다. 그녀는 댄을 사랑하고 있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댄을 사랑한 것은 이미 타운즈빌에 머물 때부터였다. 댄 같은 사람과 일생동안 진심으로 사 랑하며 살면서 거기서 행복을 찾고 싶었다. 참된 행복이 어떤 것인지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가르쳐주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것은 댄 에게서는 느낄 수 있어 타라는 가슴이 설레이기도 했었다. 시드니로 돌아와서 꼭 해야할 일만 없었다면 타라는 타운즈빌에 머물었을 게 분명했다. 댄과 결혼 하고 그동안 짓밟힌 인생과 빼앗긴 행복을 되찾으면서 남은 생애를 보람있게 보 내고 싶었던 것이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이 따로 있었 던 것이다. 댄의 괴로운 마음을 헤아리기 이전에 그녀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괴롭고 양심의 가책까지 느꼈다. 댄의 가슴에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이 자신을 더욱 괴롭혔다. 저녁식사도 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느닷없이 중요한 문제를 꺼낸 댄이 어떤 면에서는 원망스럽기도 했다. 좀더 기다려 주지 못하고 너무 성급하게 나선 그가 야속하기도 했다. 어금니를 악물었다. 산 속의 캠프에서 그리고 타운즈빌에서 수술받을 때와 같은 마음의 고통이 다시 한 번 다가왔다. 하지만 그 때도 그랬듯이 타라는 이번에도 그것을 극복해야만 했다. 계획을 앞 당기는 것이 댄의 고통을 최대한 단축시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목적했던 일들을 그만큼 빨리 끝내야만 댄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용서를 구할 수가 있 는 것이다. 신중한 생각과 함께 한동안 결심을 다진 타라는 이윽고 그렉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시간 그렉 역시 깊은 상념에 사로잡힌 채 소파에 드러누워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렉은 금방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질리 에 관한 문제 그리고 운좋게 타라를 집까지 불러들였으면서 고스란히 돌려보냈 다는 생각에 울컥울컥 화가 치밀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격인 질리가 생각 하면 할수록 죽이고 싶었다. 스테파니처럼 죽여버리고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드는 것이었다. 그녀의 입을 영원히 봉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뿐이었다. 질리 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만에 하나 실패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전화벨이 계속해서 울렸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질리의 전화일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치지 않고 울리는 벨소리에 그는 하는 수 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왜 이렇게 늦게 받아요?" 그의 예측과는 달리 타라였다. "당신을 생각하느라고." 그렉 같은 사람은 그런 말을 마치 진심인 것처럼 할 수 있었다. "듣기에 나쁘진 않군 요." "오늘 있었던 일은 정식으로 사과하지." "괜찮아요." 이미 중대한 결심을 굳힌 타라는 한껏 부드럽고 다정하게 하면서 그렉이 긴장을 풀도록 했다. "날 믿는 거지, 타라?" 그렉은 자신이 쳐놓은 덫에 스스로 걸려들고 있었다. 그는 타라가 던지는 미끼에 굉장한 식욕을 느끼는 고기나 다름없었다. "사람들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곳으로 당신과 단 둘이 떠나고 싶어요." 그렉의 눈이 번쩍 뜨였 다. "생각해 봤는데, 에덴으로 가는 게 어떨지 모르겠어요." "에덴?" 이번에는 그렉이 자신도 모르게 놀라고 말았다. "당신이 전에 얘기 했었잖아요. 둘이서 만 지내기에는 거기만큼 좋은 장소가 없다고." 그렉의 얼굴 표정을 타라는 짐작 할 수 있었다. 에덴과 그렉사이에 얽힌 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거긴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 곳이요." 그렉의 그와 같은 반응도 타라는 이 미 예측하고 있었다. "당신이 에덴과 관련된 슬픈 추억을 가지고 있다는 건 나 도 알아요." "맞아. 그러지 말고 산으로 가는 게 어떨까?" 그가 넌지시 장소 를 바꾸어 보려고 시도했지만, 타라는 이에 대한 대비책도 미리 세워놓고 그렉 에게 미끼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산은 안 돼요." "어째서?" "사람들이 보게 될테니까 그렇죠." 타라는 그렉이 말할 여유를 주지 않고 재빨리 덧붙였다. "난 있죠, 그렉. 당신과 단둘이 있고 싶을 뿐이에요, 에덴에서. 다른 뜻은 아무 것도 없어요." 타라의 마지막 미끼를 그렉은 덥썩 물고 말았다. 그렉으로서는 충분히 구미가 당기는 미끼였던 것이다. 그때 그렉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도 타 라는 짐작할 수 있었다. "정말 그러고 싶어?" "그럼요." 그렉은 타라의 계략 에 완전히 말려들고 말았다. 언젠가는 타라가 그의 무서운 계략에 말려들었었 지만, 지금은 반대의 입장이 되어 있는 것이다. "좋아, 타라. 당신이 원한다면 뭐든지 다 하겠어." "고마워요." "지금 뭘 하고 있어?" 그렉의 응큼한 속셈이 다시 슬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고양이 하고 그냥 침대에 누워 있어요." "그리 로 지금 갈까?" "이 밤중에 말예요?" "5분후면 당신과 나란히 침대에 누울 수 있어." "물론 그렇겠죠." "무슨 뜻이야?" "당신은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올 수 있겠죠. 하지만 그렉, 에덴은 어떡하겠어요?" "알았어." "됐죠?" "내일 아침 에 전화하지." "그러세요. 잘 자요." "당신도." 타라는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 었다. 첫 작전은 성공한 셈이다. 그렉도 어쩔 수 없이 끌려들고 말았다는 생각 에 잠시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눈빛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에덴 과 그렉, 그렉과 스테파니 그리고 질리 등등....... 타라의 두눈에 그 어느때보다 매서운 기운이 나타나며 정면을 똑바로 노려보는 두 눈에서 증오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같은 시간 그렉은 벌써 타라의 모든 것을 차지한 듯 느긋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날이 밝으면 에덴으로 떠나게 될 것이다. 그렉은 하루도 그냥 허 비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에덴, 그곳은 스테파니 하퍼의 애증이 점철된 곳 이다. 에덴 자체에는 증오심을 가질 이유가 없지만 그곳과 관계되어 떠오르는 인간들 때문이다. 그래도 그곳에는 어머니나 다름없는 케이티가 있고 크리스도 있다. 스테파티가 아닌 타라의 입장에서 그들을 만난다는 게, 에덴으로 다시 간 다는 것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마음이 아팠지만 극복해야만 할 난관이었다. 넘어야만 하는 언덕이며 험준한 산형인 것이다. 에덴에 가게 된다는 생각은 타 라의 밤잠을 설치게 했다. 그녀는 온밤을 거의 하얗게 밝히고 아침을 맞았다. 드디어 에덴으로 가기로 한 날이다. 그곳에서 모든 계획을 마무리 짓고 더 이 상 타라가 아닌 스테파니 하퍼로 돌아갈 것이다. 피곤도 느껴지지 않았다. 새 로운 각오로 다시 한 번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예측대로 그렉은 아침 일찍 전 화를 걸어왔다. 망설일 이유가 없는 타라는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다. 시드니에 는 개인적인 수송을 위한 경비행기 회사가 여럿 있었다. 비행장으로 떠나기 전 타라는 새삼스럽게 집안을 둘러보았다. 목적을 달성하고 무사히 스테파니 하퍼 로 돌아간다면 그 집에서는 더이상 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렉이 살고 있는 옛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싫었다. 그집은 데니스와 사라가 살도록 두고 에덴에 머물며 살고 싶었다. 아니, 아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앞으로는 어떤 일이 생 겨도 사랑하는 두 아이와 떨어져서는 지낼 수 없었다. 그 아이들이 성인 될 때 까지 따뜻하게 보살피며 그동안 주지 못했던 사랑을 곱절로 갚아주고 싶었다. 타라는 짐을 간단하게 꾸몄다. 사실상 아무 것도 가져가고 싶지 않았다. 에덴 은 그녀의 고향이며 그녀의 옛집이므로 그곳에 케이티와 크리스가 여전히 있는 것처럼 그녀의 모든 것들이 그대로 있을 것이다. 따라서 평소와 같이 그냥 가 고 싶었다. 그렉은 어느 때보다 만족한 미소를 보이며 비행기에 짐을 실었다. "잠깐만요, 그렉." "뭐지?" "전화좀 해야겠어요." "어디로?" "조안나한테요. 깜빡 잊고 온게 있어요." "빨리 다녀와." 모든 것이 타라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그렉은 전혀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전화로 불러낸 사람은 조안나가 아니었다. 감쪽같이 그렉을 속이고 실은 질리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질리는 아직 침대에 들어 있는게 분명했다. "여보세요?" 잠에서 덜 깬 목소리 가 대답했다. "나예요, 질리." "타라?" 그녀는 깜짝놀랐다. "말해 둘 게 있어 서 전화했어요." "무슨....." 질리는 벌써 긴장되는 듯 했다. 그렉의 집에서 만 난후 질리는 타라를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지금 나 에덴으로 떠나요." "뭐 라고 했어요, 지금?" 질리는 얼떨떨한 듯했다. "그렉과 함께 에덴으로 떠나는 길이에요." 타라는 간단하게 말했다. "에덴?" "그래요." "지금 거기가 어디 죠?" "비행장이에요 몇 분 후 곧장 에덴으로 날아갈 거예요" "그게 정말이에 요?" 질리는 정신이 확 들고 기절할 듯이 놀라는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당신 이 궁금해 할 것 같아서 알려 주는 거예요." "어떻게 된 거야?" "뭐가요?"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잖아!" 질리는 이미 질투심에 불타서 히스테 릭하게 소리쳤다. 타라는 입가에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더욱 그럴 듯하게 말했 다. "미안해요, 안녕." "여보세요! 여보....." 타라는 얼굴에 가득 웃음을 지으며 수화기를 찰칵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보지 않아도 질리가 어떡하고 있을지 뻔 했다. 그녀에게 가장 충격적인 소식일 것이다. 질리는 이미 두 눈이 뒤집힐 만 큼이나 화가 치밀었다. 그렇지 않아도 타라 때문에 전즌긍긍 하고 있었느네, 하 물며 그렉과 타라가 호젓하게 에덴으로 여행을 간다고 했다. 여행의 목적이 무 엇인지 질리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그렉과 타라의 사이가 이미 그 정도라는 사실에 질리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걱정했던 일이 벌어지고 만것 이다. 11. 감작스럽게 상황히 급박해졌다. 타라가 그렉과 함께 에덴으로 향하는 경비행 기에 탑승하고 있을 때 뜻밖에도 댄이 조안나 랜들의 의상일로 급히 찾아왔다. 그는 긴장된 표정이었고 평소의 그답지 않게 초조해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 요?" 그는 접수창구에 앉아 있는 아가씨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 때문에 오셨나요?" "조안나 랜들 씨를 만나고 싶은데요?" "약속이 되었나요?" "아닙니다.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매우 급한 일이라서요." "지금 당장은 곤란 한데요." 한쪽에 있던 여자가 다가왔다. 그녀는 조안나의 밑에서 보조로 일하 는 리사였다. "무슨 일이세요?" 일류 모델 못지 않게 아름다운 리사는 댄에게 호감을 가진듯 했다. "나는 댄 마샬이라고 하는데 타라 씨의 친구입니다." "그 러세요?" "급한 일 때문에 뵙고 싶다고 조안나 랜들 쌔에게 전해 주시겠습니 까?" 이 무렵 조안나는 응접실에서 업무 관계로 손님을 만나는 중이었다. "이런 획기적인 방법입니다." A회사에서 파견된 판촉사원이 열성적으로 조안나를 설 득시키는 중이었다. "그렇게 획기적인 방법이라면 왜 이제까지 알려주지 않았 죠?" 조안나는 그 남자의 말에 의구심을 가진 듯했다. 의상실과 더불어 모델 에이전시를 오랫동안 운영해 온 노련한 여자였다. "스크립터에 없었기 때문입니 다." "하지만 우린 모델을 써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그때 리사가 조용히 들어와서 조안나에게 다가와 댄의 방문을 알렸다. "원장님, 댄 마샬이라는 분이 만나고 싶다는데 어떡하시겠어요?" "지금 중요한 일로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얘기할 시간이 없어요, 리사." 조안나는 한마디 내뱉은 후 다시 사무적으로 되 돌아갔다. "그래, 좋아요. 찍어요. 그리고 스크립터는 누가 쓴 거죠?" "접니 다." "그럴 줄 알았어요." 남자의 대답에 조안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장님, 댄 마샬 시는 타라 씨의 친구라고 하는데요?" "마샬이 누구길래 타라 의 이름을 팔아먹는 거지?" 조안나는 타라가 유명해진 다음부터 그녀의 이름을 팔며 접근해 오는 사람들은 여러 명 상대했기 때문에 그런 사람중의 한 명이라 고 생각했다. "제가 댄 마샬입니다." 어느 틈에 들어와서 직접 자신을 소개하 는 댄에게 리사는 언짢은 듯이 한마디 했다. "원장님은 지금 바쁘시니까 밖에서 기다리시라고 했잖아요." 댄은 리사의 말을 무시하고 조안나에게 재빨리 말했 다. "타라 씨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도와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실례인 줄 알면서 찾아왔습니다." "난 지금 시간이 없어요." 조 안나는 댄 쪽을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무시하며 말했다. 실내의 분위기는 몹 시 어수선 해졌다. 한쪽에서는 제이슨이 서커스단의 삐에로로 분장한 채 롤러 스케리트를 타고 미끄러지면서 큰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천 달러, 이천 달러, 축하합니다. 당신은 지금 이 슈튜디오가 생긴이래 가장 비싼 사진을 제작하는 데에 한 몫을 하고 있어요." 조안나 역시 계속해서 판촉사원과 상담했기 때문에 있었으며 댄은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당신네 사장이 이걸 보고 어떻 게 나올지 궁금하군요." 댄은 이렇게 무한정 그녀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한 시가 급했다. 그는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되었다. 조안내 랜들은 물론 시드니 전체에게 충격을 던질 만한 것이었다. "며칠 전 타라 씨의 신원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었습니다." 기다리다 못한 댄이 그냥 얘기를 꺼내자 조안나는 비로소 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타라의 이름이나 팔아 먹고 다닐 사람 같지는 않다라는 예감이 들었다. "성함이 어떻게 된다고 하셨 죠?" "댄 마샬입니다. 말씀드렸죠. 타라 씨에 대한 신원조사를 의뢰했다고?" "그런데요?" 조안나는 아직 댄의 말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 결과를 통고받고 곧장 이곳으로 비행기를 타고 급히 왔습니다." "무엇때문이죠?" "타 라 씨의 신변이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조안나는 아직 곁에 있는 리사에게 부탁 했다. "리사, 샌디에게 전화 좀 해봐요. 미안해요, 마샬 씨. 타라하고는 어떻게 아는 사이죠?" "일 년전 우연히 알게 됐죠. 조용히 얘기하고 싶은데요?" 조안 나는 세상 경험이 풍부한 여자였다. 댄이 막된 사기꾼이 아님을 알게 되자 그 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더구나 타라에 대한 일이라면 무시할 수 없다고 생 각하게 되었다. "전화 연결되었는데요, 원장님?" 리사의 말에 조안나는 대뜸 언성을 높였다. " 내 사무실에서 받을 테니 안으로 돌려." 그렇게 해서 댄은 겨우 조안나와 단둘이 있게 되었다. 하지만 성격이 괄괄한 조안나는 우선 댄의 무례할 정도로 급한 접근에 대해 따끔한 한마디를 던졌다. "이것 봐요.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알겠죠?" "너무 급한 일이기 때문에 잠시도 지체 할 수 없었습니다." 조안나의 표정을 밖에서 살피던 리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제이슨을 부를까요?" "됐어요, 리사." "샌디의 전 화는요?" "내가 다시 연락한다고 해요. 그리고 제이슨에게는 준비해 놓고 기다 리라고 해요." 산더미처럼 쌓인 업무를 대충 처리한 조안나는 비로소 댄에게 관 심을 가졌다. "미안해요, 오늘 아침에는 유난히 정신이 없군요. 앉으시죠" "바 쁘신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너무 급한 일이라서....." 댄은 자리에 앉아 느긋하 게 이야기할 겨를이 없었다. 타라의 일로 그는 한 시가 조급할 뿐이다. "제가 알기로는 타라는 당신을 신뢰한다고 합니다만...." "나라고 특별할 게 있겠어요. 다 똑같지." "그렇군요. 타라가 혹시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나요?" "그건 왜죠?" 어떤 경우라도 타라의 입장을 보호해 주려는 조안나였다. 댄이 비록 점잖고 교양있는 사람으로 보이지만 아무래도 초면인 것이다. "전 타라 씨 를 사랑합니다. 그녀를 내 아내로 맞아들이고 싶습니다." "그래서요?" 조안나 는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타라에 대한 사랑 얘기를 위해서 온 것 만은 아니리라 는 생각이 들었다. "소문에 의하면 타라가 다른 남자와 만난다고 하더군요. 혹 시 그게 누군지 아십니까?" 댄의 어뚱한 질문에 조안나는 조금은 실망하는 눈 치였다. "그게 나한테 급히 하겠다는 얘기입니까?" "그렉 마스던이겠죠?" 댄 의 그같은 질문은 너무 성급한 것이었다. 자칫 타라가 그렉 마스던과 정말 사 귀는지 알고 싶어서 찾아온 것이구나라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댄 은 그 때문에 얘기를 그렇게 꺼낸 이유는 아니었다. "이것 보세요, 신사 양반. 당신은 나쁜 사람같지는 않지만 그 일 때문이라면 이 자리에서 나가세요. 그럴 리도 없겠지만 둘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아요." "만일 내가 당신에게 타라 웰즈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도 그렇습니까?" 조안나는 아직도 댄의 깊은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타라가 가명을 쓰고 있다 는 말이군요. 하지만 모델들에게는 흔히 있는......" 댄은 결레를 무릎쓰고 그녀 의 말을 가로 막았다.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타라 웰즈가 도대체 누구란 말이죠, 그녀가?" 댄은 잠깐 긴장된 표정이더니 이내 침착하게 말했다. "스테파니 하퍼입니다." 순간 조안나의 표정은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조안 나는 기절할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어 도깨비에게라도 흘린 듯했다. 타라가 스테파티 하퍼라니..... 스테파니 하퍼라면 그녀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또 좋아했던 사람이다. 댄이 갑자기 나타나서 사실이라고 믿기 어려운 이야기 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댄은 얼어 붙은 듯이 굳어있는 조안나에게 간단명료하게 이제까지의 일들을 설명해 주었 다. "그녀가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실 겁니다. 중상이었지만 다행히 목숨은 잃지 않았죠. 죽지 않고 기적처럼 살아난 겁니다." 댄의 설명에 조안나 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그녀는 사고로 중상을 입은 후 타운즈빌에 있는 한 정형외과 전문의에게 6개월 동안 치료와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성형 수술로 완전히 다른 여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시드니에 돌아온 다음 그녀 의 타라 웰즈라는 현재의 이름으로 이 계통에서 활동하고 있는 겁니다." 너무나 쇼킹하고 놀라운 이야기에 조안나는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지금가지 살아오면서 그런 터무니없는 말은 처음이에요."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시드니 경찰에 있는 내친구의 도움으로 스테파니 하퍼임이 밝혀진겁니다." 조안나는 그게 사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스테파 니 하퍼가 살아있다면 현재 마흔 살이나 됐을 텐데. 타라는..... 그녀는 말끝을 잇지 못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건 맞습니다." "이봐요. 난 그렇 게 한가한 사람이 아녜요. 아시겠어요, 마살 씨?" 댄은 그제서야 자신의 신분 을 밝혔다. "죄송합니다. 닥터 마샬입니다. 정형외과 전문의죠." "네?" "바로 타라의 수술을 집도한 사람입니다." 조안나는 너무나 갑작스런 사실에 입을 다 물 수 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표정이 굳어졌다. 댄의 말을 부정할 어떤 다른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 상황에서 다만 심한 충격으로 몸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환자의 신변에 관한 비밀을 남에게 털어놓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환자에 대 한 사랑에 빠지기도 처음이구요. 그녀는 지금 매우 위험한 상황에 빠져 있습니 다. 조안나, 이젠 그녀가 어떤 남자와 만나는지 알려주실 수 있겠죠?" 조안나 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가슴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렉 마스던예요." 타라가, 그보다 스테파니가 위험에 빠졌다면 조안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모델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타라 웰즈가 죽은 줄만 알았던 스테파니 하퍼였다는 사실은 지금 이 순간에는 그렇게 시급한 문제가 아니었다. "고맙습니다." 급히 밖으로 나가려던 댄은 문앞에서 잠깐 돌아섰다. "조안나, 이 사실은 아직 아무 에게도 말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조안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직 제 정 신이 아니었다. 그런 일이 과연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믿어야 된다고 생각하면 서도 아직 믿어지지 않았다. 스테파니의 변신보다 그녀의 기구한 운명이 조안 나의 망므을 몹시 뒤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었다. 그녀가 그렉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던 것이 이런 일이었을까? 자신의 신 분이 밝혀졌다는 사실을 모른 타라는 그렉과 에덴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 앉아 멀리 창 밖을 바라보았다. "저기 보이는 곳이 우리 사랑의 보금자리 에덴이야." 멀리 에덴의 아름다운 전경이 창 밖으로 펼쳐졌다. 그렉의 설명이 없더라도 그 곳은 꿈에도 그립던 곳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게 펼쳐진 들판이 황량한 사막이라면 에덴은 천국과 같은 오아시스였다. 근처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유 일한 낙원으로 에덴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그 시간에 댄 마샬은 날므대로 그렉과 타라의 행방을 찾기 위하여 나름대로 동분서주하면 분주히 움직이고 있 었다. 에덴의 케이티는 그렉에게 미리 연락을 받아서 그들의 도착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곳으로의 연락 방법은 무전만이 유일한 연락수단이었다. 따라서 지 구에서 멀리 떨어진 별세계나 다름없었다. 케이티는 아직도 역시 그렉을 좋아 하지 않았다. 또한 점점 더 적대감만 쌓여가고 있었다. 스테파니를 친딸보다 더욱 사랑하던 그녀를 그렇게 잃게 된 것이 다 그렉의 책임이라는 생각에 더욱 그랬다. 그가 타라라는 여자와 같이 에덴에 온다는 사실에 대해 케이티는 잔뜩 불만을 품었다. 그러나 그가 법적으로 아직 스테파니의 남편이기 때문에 주인 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다. 에덴의 또다른 식구인 크리스도 케이티와 마찬가지 로 그를 싫어했다. 그는 그렉이 스테파니를 데리고 호숫가로 나갈 때부터 심상 치 않은 예감이 있어 위험하다고 반대했지만 그렉의 호된 질책에 물러서야 했던 것이 아직 가슴에 남아 있었다. 그 뒤 에덴의 가족으로 합류한 샘만이 자세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제 에덴을 지키는 식구가 세사람으로 불어난 것이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던 케이티는 비행기의 착륙소리를 듣고는 심상치 않은 표 정이 되었다. 스테파니의 모습이 눈앞에 선한데 그렉이 다른 여자와 에덴을 방 문한다니 그녀는 심한 불쾌감이 생겨났다. 비행기의 착륙과 함께 크리스가 가 서 가방을 받아들었다. 그는 묵묵히 가방을 들고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비행 기에서 내리는 타라의 모습을 보는 순간 크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지를 뻔 했다. 스테파니로 잘못 보았기 때문이다. 스테파니를 평소 아끼고 좋아했던 사람들은 타라를 처음 보는 순간 모두 그런 착각에 빠졌었다. 비록 스테파니가 타라의 얼굴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이미지만은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케이 티도 현관에서 그렉과 타라를 맞았다. 그녀 역시 잠시나마 놀라지 않을 수 없 었다. 다시 한번 타라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렉의 눈치를 살폈다. 스테파니를 만났다는 착각에 사로잡힌 것이었다. 하지만 다시금 바라본 그녀의 얼굴은 다 른 여자여서 또 한번 놀랐다. "오랫만이군요, 케이티." 그렉은 자못 예의바르게 인사를 했다. "오랫만이네요." 케이티는 내뱉듯 퉁명스럽게 대했다. 원래의 성 격이 그렇기 때문에 그렉은 탓하지 않았다. "요즘은 어떠세요? 이 쪽은 타라 웰즈 양이에요." "안녕하세요?" 타라는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그녀 역시 순 간적으로 가슴속 가득 밀려드는 지난날의 추억때문에 긴장되는 것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스테파니와 케이티의 관계는 어머니와 딸 관계 이상으로 정이 두터웠으니 더욱 그랬다. "안녕하시오." 그 목소리와 그 눈빛, 표정 등 타 라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려고 필사적이어야 했다. 이렇게 복받히는 감정을 억제하고 태연하게 웃어 보이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방으로 안내해 드리리다." 케이티가 앞장서자 뒤에서 가방을 들고 따라오던 크리스는 거리르 두고 타라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역시 케이티와 같이 마음 한 구석에 밀 려드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윗층은 그때 이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다오." 타라는 에덴에 들어선 순간부터 마음 속의 혼란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무단히 노력했다. 타라는 자신도 모르게 지난 날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는 마음이 무척 아프셨겠어요. 할머니 하고는 굉장히 친한 사이라고 들었는데요." "스테파니는 내딸이나 다름없었지." 타라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맞아요, 케이 티 그래요 나도 당신이 어머니보다 더 그리웠어요. 보고 싶었어요. 우린 이렇 게 만났는데 아는 척도 할 수 없군요...." "여기가 아가씨가 머물 방이오." 케이 티는 아랫층의 한 방을 치워놓고 있었다. "케이티, 스테파니가 쓰던 방을 부탁 했잖아요?" 그렉이 타라를 스테파니의 방에 머물게 하려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그는 타라를 질리처럼 생각하지 않고 나름대로 전혀 다른 차원 으로 생각하려는 것이었다. "이 방이 전망이 더 좋을 것 같아서 그랬어요." 케 이티가 스테파니의 방을 아끼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 누구한테도 급 ㅏ을 사용하게 할 수는 없었다. 어느날 갑자기 에덴으로 무사히 스테파니가 돌 아올 것이니 그녀를 위해 항상 그곳을 비워두었던 것이다. 그녀는 할 수 없다 는 듯이 두 사람을 스테파니가 전에 사용했던 방으로 안내했다. "이 방은 언제 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가 돼 있지..." 스테파니의 방은 케이티가 하루도 빼 놓지 않고 정성껏 닦아 깨끗이 정리하였다. 그 방을 보는 순간 타라는 질식할 듯이 숨이 막혀왔다. "삼십 분이면 점심이 준비될 거예요." 케이티는 그 말을 하고 나갔다. 그녀는 나름대로 타라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캐이티가 저러는 거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그녀가 스테파니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 저 여자는 나를 좋아한 적이 없지. 스테파니가 죽은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말의 끝부분에서 타라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렉은 스페타 니가 죽었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그 죽음이 자기 탓이라고 케이티가 생각한다 는 말을 너무 쉽게 하고 있었다. 그렉의 그런 점들이 타라로 하여금 다시 한번 깊은 상념에 빠지게 하였다. "알겠어요." 타라는 그와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싶 지 않았다. 어서 빨리 그렉을 다른 방으로 보내고 자신만이 방에 있고 싶었다. "당신이 이곳에 와주어 정말 기쁘게 생각해." "짐을 정리해야 될 테니 잠시만 나가줘요." 그렉은 자연스럽게 타라의 입술을 요구했다. 타라 역시 거절할 구 실이 없어 받아들여야 했다. 적어도 어느 순간까지는 그를 좋아하는 척을 해야 했다. 두 사람이 입술이 막 ㄷ으려 할 때였다. 마치 그렇게 방관할 수만은 없 다는 듯이 크리스가 가방을 들고 복도에 들어서며 헛기침을 했다. 가장 중요한 순간 나타나 두 사람의 키스를 방해한 것이다. 그렉의 얼굴에 잠깐 차가운 표 정이 스치며 할 수 없다는 듯이 타라에게서 물러났다. 그리고 걸어가면 크리스 를 쳐다보며 그에게 싸늘한 미소를 보냈다. 크리스 역시 맞대놓고 그렉을 바라 보았지만 타라 앞에 왔을 때는 공손한 모습을 보였다. "안녕." 타라 역시 상냥 하게 그를 대해 주었다. "안녕하세요." "침대 위에 그냥 놓아요." 크리스는 그 녀의 가방을 침대에 올려놓고 돌아서서 나왔다. "고마워요." "천만에요." 크리 스는 간단히 대답한 다음 조용히 걸어나갔다. 드디어 그 방에 혼자있게 된 타 라는 서둘러 문을 닫고는 등을 문에 기댄 채 잠깐 눈을 감았다. 그녀가 이 순 간에 느낀 감회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것이었다. 바로 그 방이다. 자신이 사용하던 방은 옛모습 그대로 있었다. 방안의 가구나 그 배치 그리고 모든게 옛날 그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케이티의 정성이 새삼스럽게 고맙게 느껴지며 가슴이 뭉클했다. 저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솟구치고 있었다.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몇 가지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자기만의 추억에 잠겼다. 이곳 특히 이방은 시간이 정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드디어 에덴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이 단순한 감동을 뛰어넘어 끝없이 달음질 쳤다. 바깥 풍경이 보고 싶어졌 다. 지나간 그 때처럼 베란다에 나가 하늘을 바라보고 싶었다. 산속의 캠프에 서 보았던 태양 그리고 타운즈빌에서 보았던 태양과 에덴에서 보는 태양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베란다로 나온 그녀는 우선 눈부신 태양을 쳐다보면서도 그녀 는 문득 자신이 에덴에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집의 정면으로 나있는 베란다는 건물의 끝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그곳의 천장을 받치고 있는 돌기둥 조차 정답게 느껴졌다. 그것들을 손으로 쓰다듬어 보면서 가슴 속에 간직한 뜨 거운 옛정을 느꼈다. 가슴 속 밀려오는 옛정에 젖어 있던 타라는 무심코 한 곳 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며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 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스가 한쪽에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 었던 것이다. 그는 타라의 정체를 눈치챘는지 그녀를 그렇게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럴 수가 없었다. 또한 그런 일이 있어서도 안된다. 마지막 순 간까지 그녀는 계속 타라 웰즈여야만 했다. 타라는 재빨리 표정을 바꾸며 자신 의 방으로 들어갔다. 크리스는 타라에게 이상한 느낌이 있어 그녀를 지켜보다 가 에덴에 대해 남다른 정을 느끼고 있는 타라의 모습을 보며 확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12 케이티는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이었다. 몇 년전 스테파니와 그렉이 에덴으로 신혼여행 왔을 때보다 요즘은 더 많은 양을 마셨다. 부엌 찬장에는 항상 술병 이 있었다. 점심식사 후 설거지를 할 때에도 케이티는 찬장에서 술병을 꺼내 몇 모금 들이켰다. 그녀도 타라를 처음 본 순간부터 더욱 의혹이 시간이 갈수 록 더욱 깊어만 갔다. 그러한 의혹 때문에 케이티는 술을 마시지 않고는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술을 몇 모금 마시고 있던 중 인기척 소리에 그녀는 재빨리 술병을 찬장에 넣고 문을 닫고 돌아섰다. 타라가 커피잔과 주전자를 쟁반에 얹 어가지고 들어왔던 것이다. "내가 치우려 했는데, 그냥 거기 놔 두세요." 타라 는 케이티와 단둘이 있으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 했다. "점심 잘 먹었어요." 케이티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렉이 부엌으 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여기 있었군, 타라." 그의 한마디에는 한 시도 타라와 떨어질 수 없다는 뜻의 사랑이 담겨 있었다. "말타러 가지 않겠소?" 에덴에는 여러 필의 말이 있었다. 그렉이 승마에 어느정도 자신을 가진듯 보였다. "스테 파니 아가씨는 말을 굉장히 잘 탔죠. 하기야 어렸을 때 이미 말을 타고 달렸으 니까요. 킹은 스테파니 아가씨의 말이에요. 아가씨 외에는 아무도 그 말을 탈 수 없어요." 그녀 외에 그 말을 그렇게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케이티." 그렉은 만족한 듯이 말했다. "그래야죠." "타라, 밖에 나가 있겠소." 그렉이 먼저 나가자 방안에는 둘만이 남게 되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케이티는 무엇인가 말하려는 눈치였지만 이내 단 념했다. "나중에 뵙겠어요." 타라는 케이티에게 인사를 하고 나와서 승마할 준 비를 했다. 밖에서 그렉도 승마하기 위해서 서두르고 있었다. "샘." "왜 그러 시죠?" "나와 웰즈양을 위해 말을 준비해 놓도록 해." "알겠습니다." 부엌에 있던 케이티는 갑자기 온몸이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타라에 대한 의혹과 함께 그녀가 말을 탄다는 게 공연히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그녀는 승마복으로 갈 아입고 마굿간으로 걸어가는 타라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샘은 두 필의 말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당신이 탈 말이오. 샘이 도와줄 거 요." 그렉은 타라의 승마실력을 완전히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이 말 이름이 뭐죠?" "팬입니다." 이미 조사해 두었던 것처럼 그녀는 팬에 대해 뜻밖의 말을 꺼냈다. "하퍼 양의 계열회사 중에 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회사가 있는 것 같던데요?" 그렉은 짐짓 놀랐다. 타라가 그런 사실까지 안다는 것은 뜻밖이었 기 때문이다. "당신은 신문의 경제란을 자세히 읽는 것 같군." "가끔요." "샘, 뭐하는 거야?" 그러나 그렉은 또 그녀에게 놀라고 말았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타라는 샘의 도움을 받으며 말에 올라타야 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그렉은 놀라움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를 의혹의 눈으로 쳐다보는 두 사람은 그렉보다 더 놀라고 말았다. 크리스와 부엌에서 내다보던 케이티의 두 눈에는 무엇인가가 확인되었 다는 눈빛으로 빛났다. 그녀는 마치 방금전까지도 그말과 같이 있었던 듯이 익 숙하게 올라타는 것 뿐만 아니라 능숙하게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단지 모는 것이 아니고 달리는 것이었다. 프로가 아니고는 해낼 수 없을 만큼 경쾌하게 말을 몰았다. 또한 주위의 지형에도 익숙하지 않고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달릴 수 없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케이티는 기절할 듯이 놀라며 부엌에서 바깥으로 나왔다. "이런 세상에!" 이미 저 멀리 달리고 있는 타라의 모습을 지 켜보던 케이티는 돌기둥을 부여잡으며 쓰러지듯이 가라앉았다. 그것은 충격이 상이었다. 에덴의 말을 그렇게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이세상에 오직 하나 스테파니 뿐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알 리 없는 그렉은 서둘러 타라의 뒤 를 따랐다. 케이티는 기둥 옆에 거의 주저앉은 채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보고 있던 그녀는 타라 웰즈가 아닌 스테파니 하퍼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케이티는 그렉이 스테파니를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살인범 그렉이 스 테파니를 데리고 다시 에덴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스테파니가 아니고 타 라 웰즈로 변해서 말이다. 그렉은 타라의 정체를 모르는데 확실했다. 그러면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니 눈앞에 캄캄해졌다. 스테파니가 무서운 음모를 꾸만 것만큼 확실했다. 그렉은 타라의 승마실력을 따르지 못했다. 평소의 그도 승마실력만은 누구보다 자부했지만 타라를 타르지는 못했다. 타라는 한참을 달 린 후 연못가게 있는 고목앞에서 세웠다. 그곳 역시 옛날에 그녀가 자주 찾곤 했던 낯익은 장소였다. 오랫만에 정든 말을 타고 한참을 달린 타라는 기분이 어느때보다 상쾌해졌다. "정말 재미있는데요?" "말 타는 솜씨가 대단하군." "그래요?" "놀랬어. 언제부터 말타는 걸 배웠지?" "오래 됐어요." "말을 다루 는 솜씨도 보통이 아냐." 타라는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게 자신에게 이 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요, 그렉. 당신 여자를 유혹하는 방법 한가 지만 얘기해 보세요." "음! 상대편의 눈을 가마니 들여다 보는 거지." 그렉은 자못 여자 사냥에 자신이 있는 양 눈에 힘을 주었다. "내가 보기에는 인상을 쓰 는게 더욱 매력적이던데요?" "난 인상 같은 거 쓰지 않아." 그렉은 정색을 했 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항상 점잖고 교양있는 표정만을 짓는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렇지 않아요." "내가?" "인상을 써요." "이렇게 말이야?" 그제서야 그렉은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평소에 사라에게 화냈던 모습이나 질리 에게 하던 모습의 근처에도 미치지 않는 것이었다. "비슷해요." 그렉은 새삼 그녀의 아름다움에 도취된 듯 신비스러운 모습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기 시작했 다.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늘 신선한 모습을 보이지?" 상대가 비록 그렉라고 해도 듣기에 기분나쁜 말을 아니었다. "당신에게서는 볼 때마다 새로운 모습이 느껴져." "그래요?" "웃는 못브이 정말 보기좋아. 농담이 아냐." 그렉의 표정 이 갑자기 심각하게 굳어졌다. 항상 손에 잡힐 듯하지만 막상 잡으려 하면 잡 힐듯 말듯 미끄러져 빠져나가곤 하는 타라에 대해 그는 더이상 참을 수 없는 듯 했다. "나하고 게임을 하려드는 여자는 나를 정말 화나게 해. 내가 싫다는 데 도 왜 기어이 에덴으로 오자고 했어?" 그렉은 타라를 화가 나게 만드는 여자라 고 표현하더니 처음에는 조용히 가벼운 키스를 하려는 듯하더니 다음 순간 그녀 의 허리를 으스러지도록 껴안았다. 그가 사랑하는 남자였으면 타라는 행복감에 젖어 즐거웠을 테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그렉은 타라가 진정 사랑하는 남 자가 아니었다. 타라는 고통스러워하며 몸을 뒤틀었다. "아파요! 이거 놔요." 그렉은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는 듯 확고해 보였고 타라는 그럴 수 없다고 이 를 악물었다. "당신은 원하는 데도 가질 수 없다는 게 날 미치게 만들어." 이 러한 순간을 벗언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 무엇이라는 것을 타라는 알고 있었다.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거 알리라 믿어요." "그런데?" 타라의 계획대로 그 말 의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그렉이 그녀의 허리에서 손을 풀었다. "하지만 당신 이 내몸에 손을 댈 때마다 난 당신의 아내 생각이 나는 걸요." 그녀는 만일을 대비하듯 말에 올라타며 계속 말했다. "그녀에 대한 생각을 내 마음 속에서 지 울 수 없어요." 그렉의 안면 가득히 잔인한 미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는 타라에게 지울 수 없는 또 하나의 충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그게 정말 야?" "그래요." "그렇다면 내가 모두 말하지." "뭘요?" "그 여자에 대해서." "스테파니 말예요." 그렉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그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내 가 스테파니와 결혼한 것은 전적으로 돈 때문이었어."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다시 한 번 놀랐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렉에게 직접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한 이야기는 타라의 마음을 잔인하게 도려내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난 한번도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었소. 그 당신 나는 부상을 당해 슬럼프에 빠 져 있는 데다가 매켄로 같은 강적을 만났지. 그래서 테니스에 대한 애정도 사 그라들 때였고...." 타라는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 부서지면서 내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그것이야말로 그렉의 가장 솔직한 고백이라는 사실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타라의 환심을 사기 위해 스테파니에 대해 가장 나쁜 말을 거침없이 하는 것이다. '아! 이 남자는 나를 두 번씩이나 죽이고 있 어.' "그럴즈음 스테파니 하퍼가 내 앞에 나타났지. 그런데 내가 그녀를 왜 놓 치겠어, 안 그래?" 타라는 북받치는 울분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필사적으로 억 제해야만 했다. 분노로 몸의 중심이 흔들리며 말등에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지금 당장 그렉을 말발굽으로 짓밟아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참고 념겨야 한다. 그렉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계속해서 말을 했다. 그는 드디어 가장 치욕적인 말까지 거침없이 꺼내놓았다. "그녀는 나이도 많은 데다 뚱뚱하고 더구나 섹스하고는 거리가 멀었어." 타라는 하마터면 찢어질 듯이 고 함을 지를 뻔했다. 갑자기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날 밤 에덴에서 타라 아 니 스테파니는 오랫동안 잊고 지내왔던 남성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오랫동 안 굳게 닫고 있던 육체의 문을 사랑하는 남성을 위해 열었다. 그녀가 육체의 문을 열고 그렉의 남성을 받아들이기까지 가졌던 온갖 상념과 갈등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렉은 그때 분명히 밀어를 속삭이며 행복해 했다. 마지막 절정에 도달해 정액을 그녀의 몸속에 분출시킬 때는 그녀가 최고라며 섹 스에 만족해 했다. 그런데 나이가 많고 뚱뚱해서 재미도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 말은 스테파니를 악어밥으로 만든 행위보다 더욱 잔인한 것들이었다. 마음 을 죽이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렉과의 황홀했던 그날 밤 이후 그녀는 완전한 사랑을 얻었다고 확신했었다. 그래서 모든 게 행복하게만 느껴졌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가식과 위선이라니 혐오와 증오심이 한꺼번에 몰아치고 있는 타라 의 귀에 그렉의 그럴 듯한 유혹의 말이 다시 한마디 떨어졌다. "당신과 스테파 니는 서로 극과 극이야." 참담해진 타라는 그곳에 잠시도 더 머무르고 싶지 않 았다.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올 때처럼 타라가 앞서서 갔고 그렉은 약간 뒤 로 처졌다. 그때 그렉은 부지런히 그녀의 옆으로 다가오며 자못 심각하고 진지 하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타라, 당신을 사랑해." 그 말소리는 악마의 저 주처럼 타라의 가슴속 깊이 파고 들었다. "가자!" 타라는 대답 대신 고삐를 당 기며 쏜살깥이 달리기 시작했다. 에덴의 케이티는 아직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 다. 그녀가 무엇때문에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점이 케이티를 초조하 게 만들었다. 케이티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할 지를 생각하다가 그녀가 그렉에 게 복수하기 위한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처음 생 각과는 다르게 스테파니가 완전히 기억을 생실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 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후자대로라면 그냥 모 르는 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나서서 그녀의 기억력을 회복시켜 주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으로 혼자 안절부절하며 술을 마시던 케이티에 게 묘안이 떠올랐다. 케이티는 술잔을 손에 든 채 몰래 스테파니의 방으로 들 어갔다. 잘 정돈되어 있는 타라의 소지품을 살펴보았다. 먼저 보고 놀란것은 타라가 벗어놓은 흰색 블라우스였다. 타라는 그 방에서 옛날 스테파니가 즐겨 입었던 옷을 꺼내 놓았던 것이다. 더욱 믿음이 가면서 옷장을 열어 보았다. 그 곳에는 타라가 가져온 손가방이 있었고 그 옆에는 상자가 있었다. 그런 상자속 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귀중품 등을 넣어 두기 마련이 다. 마침 그게 잠겨있지 않기 때문에 쉽게 열 수 있었다. 상자 안을 살피던 케 이티는 또 다시 놀랄 만한 물건을 발견했다. 똑같은 크기의 액자에 들어있는 데니스와 사라의 사진이었다. "오, 세상에....." 이제 상황은 더욱 확실해졌다. 타라는 분명히 스테파니였다. 기억을 완전히 상실한 것도 아닌 것이다. 데니스 와 사라의 사진을 그렇게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증명된 것이다. 케이티는 자신이 마시던 술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는 사실조차 아득하게 망 각한 채 두 아이의 사진을 떨리는 손으로 들고 확인을 거듭했다. 그때 갑자기 밖에서 말들의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당황ㅎ며 서둘러 모든 것을 전처럼 정리 하고는 그방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막 몸을 피했을 때 타라와 그렉이 복도에 들어섰다. 이때 타라는 이미 마음의 안정을 다시 찾은 듯해 보였다. "오늘 오 후 시간을 즐겁게 보내게 해줘서 고마와요." 그들은 정답게 상대의 허리를 한쪽 팔로 껴안고 있었다. "타라, 당신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유일한 여자야, 내 가 어떤 사람인지 좀 알아줬으면 고맙겠어." 타라의 두 눈에 재빨리 스치는 게 있었지만 그녀가 고개를 숙였기 때문에 그렉은 눈치채지 못했다. "당신을 놓치 고 싶은 않아, 타라. 진심이야." "아직도 희망은 있을 거예요." "당연히 그래 야지." "당신을 존경해요, 그렉. 하지만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줬으면 고맙 겠어요." 타라의 말은 어떤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피워올리는 촛불과 같았다. 모든 것을 각오한 그녀는 그렉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경계심을 갖거나 의심 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결정적인 시간까지는 그렉이 그녀를 타라 웰즈 로 믿고 있다가 당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렉은 이번에도 자연스러운 동작으 로 타라에게 입술을 가져갔다. 그에게 완벽한 타라로 보이려는 그녀는 그의 키 스에는 응해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렉은 예상치 못했던 방해를 받아야 했 다. 갑자기 한쪽에서 케이티의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더 필요한 거 없어요?" 돌연 그렉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듯 했다. 둘만의 오붓한 분위기를 즐 기려던 그렉의 계획이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그렉은 타라 앞이기 때문에 드러 내놓고 케이티에게 화를 내지는 못했다. 첫날에는 크리스 때문에, 이번에는 케 이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을 방해 받았다. 케이티는 그들이 키스하지 못하도 록 고의적으로 방해하고 나선 것이다. 타라가 바로 스테파니라고 확신한 이상 그렉이 그녀에게 감히 그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막고 싶었던 것이다. "됐어요, 케이티. 수고했어요." 케이티는 물러갔고 그렉은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훌륭한 식사였어요. 고마워요." 타라는 케이티의 뒤에다 대고 다정하게 말했 다. 그녀는 케이티가 자신을 의혹에 찬 눈초리로 응시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녀가 이미 데니스와 사라의 사진으로 확인했을 줄은 모르고 있었다. 또한 그 녀가 팬을 능숙하게 다루는 솜씨와 달리는 광경에 기절할 듯이 놀라며 의혹을 가졌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옛날의 습관이 그대로 튀어나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실은 팬도 옛날의 주인을 금방 알 아보았다는 점이었다. "케이티는 스테파니를 생각하며 음식을 만들었어." "그 걸 어떻게 알죠, 말하지도 않았을 텐데?" "모든 음식이 다 스테파니가 좋아하는 것 뿐이었어." "정말인가요?" 타라는 짐짓 놀라는 듯했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케이티가 식단에 올린 요리들은 모두 스테파니의 기호에 맞춘 것이었다. 그것 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 가지 그렉이 어떤 의심을 갖게 되지 않을까 걱정될 뿐인 것이다. 그렉은 케이티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고 집이 굉장히 센 여자이지." 타라는 겉으로는 짐짓 태연한 척 했지만 속으로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그런 식으로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싶었다. "스테파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든다니까." "여기에 와서 보니까 케이티 혼자 서 이 큰집 살림을 꾸려 나가는 것 같던데 혹시 다른 사람은 없나요?" 타라는 에덴에 또 누가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케이티는 이집을 관리하기엔 너무 늙었어." "무슨 말이에요?" "아무래도 그만 고향으로 내려보내는 게 좋겠어." 타라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떨렸다. 어 떤 일이 있어도 케이티를 에덴에서 나가도록 할 수는 없었다. 에덴은 그녀의 고향이고 또 안식처였다. 그녀는 하퍼가문의 한 식구였다. 죽음을 얼마 남기지 않은 지금, 그녀가 인생의 종말을 맞이해야 될 곳은 에덴이어야 한다. 모든 계 획이 성공해야 하는 이유가 한가지 더 생긴것이다. 케이티에게 생애의 마지막 기쁨을 빼앗을 자격은 아무에게도 없었다. "그건 너무 심한 거 같아요, 그렉." "뭐가?" "사십년 동안이나 이곳을 관리하며 살아왔다고 하던데, 맞죠?" "그럴 거야." "그렇다면 여기가 고향이지 또 어디로 갈 수 있겠어요, 안그래요?" 문 득 그렉의 마음에 다른 생각이 끼어든 듯 말했다. "타라, 밖에 나가서 산책이라 도 좀 할까?" 타라는 한시바삐 이런 자리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것을 피부로 느 꼈다. 야심한 시간이나 아무도 없는 장소는 가급적이면 피하려 했다. 그녀는 그렉에게 조그마한 헛점도 보이지 않기 위하여 가장 그럴 듯한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오랫만에 승마를 즐겼더니 오늘은 좀 피곤해요." "그래?" "일찍 잠 자리에 들고 싶어요. 괜찮겠죠?" "그러는 게 좋겠군." 그렉도 더이상 그녀를 강요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타라의 늪에 빠져있기에......?" "고마워요." "당 신의 하해와 같은 이해심에." "고맙긴. 잘 자요." "당신도" 그들은 가벼운 입 맞춤만으로 아쉬움과 위기의 순간을 념겼다. 타라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다시 한번 케이티를 생각했다. 그녀의 눈치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케이티가 자 신의 방에 들어왔던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의 조바심은 극에 달했다. 케이티가 만일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 지 알수 없는 일이었다. 자칫하면 모든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비록 그녀가 안다고 해도 방해하려는 의도는 물론 털끝 만큼도 없을 테지만 노인이기 때문에 성급한 나머지 실수를 할 수도 있었다. 그녀의 계획에는 어떤 조그마한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다. 아 주 작은 실수로도 모든 일을 망칠 가능성이 있었다. 타라는 우선 케이티의 의 중을 떠보기로 했다. 그녀는 주위를 살핀 다음 그렉이 방으로 들어간 것을 확 인하고는 재빨리 케이티의 방으로 갔다. 그녀가 갔을 때 케이티는 앉아서 옛추 억이 담긴 사진을 보는 중이었다. "들어와요, 옛날에 찍은 사진들을 보며 추억 에 참겨있는 중이라요." 타라의 눈에 낯익은 장면들이 펼쳐졌다. 그것은 케이 티의 방으로 예전에는 자주 들어와서 놀던 곳이다. 오래 들어와 보지는 않았다 고 해도 그곳에서 어머니와의 숨결을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은 그렇게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제가 말을 타는 동안 제 방에 들 어 왔다 가셨죠?" "아뇨." 케이티는 크게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타라는 케 이티를 다그치려는 뜻은 전혀 없었다. 그저 그녀의 마음을 알고 싶을 뿐이다. "제 방에 술잔이 놓여 있던데요?" 결정적인 증거에 케이티는 그만 변명 할 말 조차 잊고 말았다. "아, 맞아요." 그녀는 재빨리 돌려댔다. "침대를 치우려고 들어갔어요. 재 정신 좀봐, 내가 거짓말장이가 아니라고 생각해 줬으면 해요." 타라의 두 눈에 케이티에 대한 애정이 뜨겁게 담겨져 있었다. 그녀는 당장 케 이티의 따뜻한 품에 차라리 안기고 싶었다. 그녀를 거짓말장이로 생각하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옛날부터 그 손에서 자란 그녀가 말이다. 다만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에 가슴이 메어질 뿐이었다. "그렇지 않아요, 케이티. 제가 왜 그러겠어요." 케이티는 비로소 안심하며 들고 있던 사진을 가리켰다. "이건 모두 옛날사진이에요." "그럼 됐어요. 저녁 정말 잘 맛있게 잘 먹었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타라는 재빨리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더이상 케이티의 눈을 마주볼 수 없었다. 그녀에게 너무 죄를 짓는 것 같았다. "아가 시또요......" 방문을 나서는 타라의 뒤에 대고 낮고 애틋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방을 나온 타라는 다시 주위를 경계하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타라의 가슴 은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다. 케이티의 눈빛이 앞에 어른거리며 그대로 남아있 었다. 그녀는 이미 어떤 사실을 알아챈 게 아닌게 싶었다. 베란다로 나온 그녀 는 안절부절하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아직 은 안심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실수가 생기면 이번에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 으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베란다를 서성이던 타라의 눈길이 문 득 한 곳에 멈추어졌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불빛이 보였다. 크리스였다. 그 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똑바로 타라를 응시한 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타 라도 크리스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입장 때문에 그냥 그렇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는 하인이기 때문에 먼저 타라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하지만 타라는 '크리스'하고 먼저 정답게 불러 '내가 스테파니 하퍼야' 하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현실이 그렇지가 못해 가슴이 아팠다. 13 타라는 어떤 문제가 발생될 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녀 스스로 그렉에게 정면 도전한다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하고는 측 면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일으켜 그 결과를 맺으려 하는 것이다. 오랫만에 팬을 타고 그립던 산들을 돌아다녀본 그녀는 밤에도 거의 잠을 이루 지 못했다. ㅎ산시바삐 모든 일을 끝내고 완전한 스테파니로서 에덴에 머무르고 싶었다. 케이티와 트리스는 물론 그녀를 생각해주는 하퍼그룹의 사람들, 특히 데니스 와 사라의 모습이 잠시도 눈에서 떠나지 않았다. 가슴 속에서도 그들이 숨쉬며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른 아침 타라는 아무도 모르게 방을 나섰다. 그 시간쯤이면 케이티나 크리스도 아직 잠자리에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시간 이었으므로 그렉을 말할 것도 없었다. 타라는 바로 그런 시간을 이용해서 꼭 하 고 싶은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미 승마복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마굿간으로 향했다. 도둑처럼 그녀가 찾아 간 곳에는 그녀의 애마인 킹이 있었다. 케이트의 말처런 주인이 아니면 감히 건 드릴 수도 없는 말이었다. 애견이 그렇듯이 킹도 주인을 금방 알아보았다. 사람들은 그녀의 바뀐 모습때 문에 탈 웰즈로 속고 있지만 짐승들은 달랐다. 아직도 옛주인에 대한 느낌과 애 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잘 있었니, 킹?" 킹은 반기는 듯 코를 흥흥대다. 여태까지 자신을 잊지않고 반겨주는 킹이 타 라는 눈물이 날만큼 반갑고도 고마웠다. 그러나 킹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옛정을 되새기는 자신을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 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우리 귀여운 녀석.... 내가 그동안 얼마나 널 보고 싶어 했는지 너도 알지? 내 오랜 친구야.... 네가 아직 이렇게 건강하다니 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 그 때였다. 킹과의 옛정에 사무쳐서 쓰다듬어며 얼굴을 비비고 하는 타라를 갑자기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에피?"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녀를 타라도 아니고 스테파니도 아닌, 에피라고 부를 사람을 에덴에 꼭 한 명 뿐이었다. "아가씨 여기 계시죠?" 마굿간으로 성급하게 들어오는 사람은 역시 케이티였다. 에덴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에피라는 애칭으로 부를수 있는 사람이었다. 타라는 기절을 할 만큼이나 놀랐다. 그런 일이 발생할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 한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정체가 탄로난 셈이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생각했 다. 어떤 일이 었어도 아직은 자신이 스테파니임을 밝혀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잘 잤어요, 케이티?" 타라는 이미 태연한 표정으로 케이티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 아침 일찍 말을 타고 달리는 걸 좋아해요. 킹이 매우 좋은 말이라기에 어 떤 녀식인지 한 번 보고 싶었어요." 케이티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에덴에서 쭉 젊은 시절을 보낸 그녀를 제 아무리 타라라고 해도 속여넘길 수는 절대로 없는 일이었다. 킹은 소문 듣고 함부로 타는 말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므로 타라는 스스로 자 시자신이 바로 수테파니임을 인정해 버리고 말았고 이미 케이티는 확신을 가지 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거짓말은 더이상 소용이 없었다. "아가씨, 내 눈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타라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난감했다. 케이티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 다. "난 아가씨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아가씨가 이렇게 돌아오실 수 있도록 매일 밤 기도했어요. 내가 아가씨의 독특한 분위기를 모를 거라고 생 각해요?" 케이티의 그 말에는 원망도 담겨 있었다. 타라가 계속 자신을 감추려 하기 때 문이었다. 케이티의 입장에서는 타라가 적어도 자신에게만은 사실을 털어 놓고 무엇이든 협조를 부탁했으면 했다. 그런데 자신에게까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속이려 한는 타라가 원망스러 웠던 것이다. 케이티는 몹시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그렉처럼 자기의 뱃 속이나 채울 줄 아는 작자는 속여넘길 수 있을지 몰라 요." "....." "그렇지만 난 안 돼요. 아가씨도 아시잖아요." 타라는 다시 한 번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게 마지막 고비라고 생각했 다. 그 고비를 무사히 넘기지 못하면 앞으로의 계획도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하 며 자신을 독려했다. 자신이 살아서 돌아와 주기를 매일 밤 기도한 케이티의 정성을 모를리 없다. 눈물이 쏟아질 젓만 같았다. 정든 노인의 품에 안겨 실컷 울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참아야 한다. 더욱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 "뭔가 오해를 하고 있군요." "오해?" 케이티의 두 눈에 분노 같은게 슬픔과 섞여서 나타났다. 그녀는 끝까지 자신 을 속이려는 타라의 태도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꼈다. "오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가씨 쪽이에요. 절 믿지 못하시니 말이에요. 아가씨 가 완전히 다른 외모를 하고 다니시는 건 이해가 가요. 하지만 그렇게 감쪽같이 신분을 속이는 것을 이해 할 수 없군요." 케이티는 그 시점에서 더 이상 타라가 숨기지 않고 털어놓아 주기를 간곡히 원했다. 그녀에게 필요한 도움이 된다면 늙은 목숨이나마 기꺼이 바치고 싶었다. 케이티의 두 눈에서 반짝이는 이슬이 보였다. 더는 슬픔을 참슬 수 없는 듯했 다. 이번에도 타라는 과거에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더이상 ㅂ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처럼 생각하며 보고 싶던 케이티의 눈물을 보고도 냉담할 수 있을 만한 강심장을 지ㄴ 못한 타라였다. 그렇지만 아직은 참아야 했다. 견뎌내야만 했다.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제 이름은 타라 웰즈예요." "좋아요, 좋아." 드디어 케이티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게 술 기운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타라 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슬퍼서 진정으로 나오는 울음이었 다. "그렇게 부르는 데는 달리 이유가 있겠죠 아지만 잘 들어요. 난 언제나 아가씨 편이에요!"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돌아섰다. 어디가서 엉엉 아이처럼 울고 싶 었기 때문이다. 울면서 뛰어가듯이 나가는 케이티의 뒷모습에 그만 울컥 치미는 슬픔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려고 타라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마음이 그렇게 아플 수가 없었다. 갈기갈기 찢긴다해도 그 정도로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자신이 울었으면서 지금에 와서 늙은 케이티까지 울려야 하는 자신의 운명에 타라는 자신의 목표에 회의가 생겼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 라와 데니스 그리고 케이티를 아무리 잠시 동안이라 하더라도 뒤로 밀쳐둔 채 자신이 증오심으로 복수를 자져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죄송해요, 케이티. 하지만 아지은 어쩔수 없어요. 제발, 제발 좀 이해해 주세 요. 내가 왜 케이티를 울리고 싶겠어요? 꼭 그럴 만한 일이 있답니다. 조금만 있 으면 케이티도 아실 거예요. 우선은 야속하시겠지만 조금만, 조금만 더 참아 주 세요. 이제 곧 에덴에서 무서운 일이 벌어질 거예요. 그런 다음에는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예요.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꼭 그렇게 만들고 말겠어요....' 타라는 킹을 타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었다. 케이 티와 더불어 에덴에서 옛주인을 가장 그러워하는 크리스였다. 그는 밖에서 케이티가 돌아가기를 기다린 다음 마구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옛날 스테파니가 킹을 탈 때에 사용하던 것들이었다. 케이티에 대한 상념에 깊숙이 빠져있던 타라는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크리스 가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타라 역시, 무슨 말을 해야할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크리스가 준비해 온 킹의 채찍을 조용히 내밀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표 정이었지만 타라는 그렇게 해석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자신이 곧 스테파니이긴 하지만, 자신이 직접 인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 했다. 그녀는 말없이 크리스가 내미는 채찍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다정한 미소로 답 해 주었다. 크리스 역시 마주 보며 미소를 지어 답례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두 사람이 옛날로 되돌아갔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얼마 만인지 기억해 낼 수도 없었다. 킹을 타고 산야를 달렸던 기억은 아스라 했다. 세상에 태어나 킹만큼 정이 가고 아끼고 싶었던 말은 없었다. 팬 등 다른 말들도 귀여워했지만 킹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각별했다. 킹도 비록 말은 못하는 짐승이지만 옛주인을 등에 태워서 기분이 무척 좋은 듯했다. 자신을 쓰다듬어 주는 주인의 손길을 그동안 얼마나 그러워했는지 모르 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렇게 킹을 몰고 나온 타라는 우선 에덴의 주위를 폭넓게 한 바퀴 돌았더ㅏ. 그러는 사이에 햇살이 퍼지고 아침이 왔다. 에덴의 사라들 가운데 크리스만이 그녀가 나온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렉은 평소 늦잠을 자므로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설령 그가 일찍 일어난 다고 해도 타라는 킹과 되도록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었다. 그녀는 옛주인을 태 우고 옛날처럼 달리고 싶어하는 킹을 달래며 속도를 내지 않았다. 달리는 것보 다 그렇게 킹을 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낄수가 있었 다. 그러는 사이에 에덴에는 드디어 사건이 발생하고 있었다. 눈부신 아침햇살 사이로 비행기가 한 대 나타났다. 이를 발견한 타라의 가슴 은 몹시 뛰었다. 어떤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에덴으로 오는지 이미 짐작할 수 있었다. "천천히, 킹. 그래, 그래야지." 그녀는 킹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커다란 나무 뒤에서 기다렸다. 그곳에서 는 비행기가 착륙할 지점이 빤히 바라보였다. 상황은 타라의 예측대로 정확히 전개되고 있었다. 비행기의 소음을 들은 그렉 이 달려나와 활주로로 뛰어가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타라는 킹의 등위에 앉아 유심히 지켜보았다.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하고 거기서 가방을 들로 내리는 사람이 보였다. 자세히 조비 않아도 질리라는 것을 금방 알수 있었다. 타라가 시드니를 떠나기 직전 비 행장에서 전화로 알려준 결과였다. 곧이어 그렉과 질리 사이에 심한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렉은 질리를 마고 거 칠게 대하고 있었다. 그녀의 가방을 들어주기는 커년 뭐라고 고함을 지르며 밀 치기도 하는 등 계속 사납게 굴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타라의 입가에 조용한 미소가 나타났다. 질리가 에덴으로 그렉을 쫓아온 부분까지는 타라의 계획은 일단 성공한 셈이 다. 그녀는 그렉과 질리를 함께 에덴에 불러 놓고 모든 일을 마무리 지을 작정 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말소리는 타라에게까지 들리지는 않았다. 그렉이 질리를 질질 끌다시피하며 활주로 쪽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보였다. 당장 돌려보내려 하는 듯했다. 하지만 비행기는 이미 출발해 버린 다음이었다. 더욱 화가 치민 그렉은 질리에게 더욱 난폭하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가 냅다 밀치는 바람에 질리가 땅바닥에 곤두박질 칠 뻔하는 광경이 타라의 시야에 들어왔다. 올게 온 것이었다. 거기까지 지켜보던 타라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 자리에 남겨두고 킹의 고삐 를 돌렸다. 그렉과 질리의 다툼은 금방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느쪽도 먼저 양보하지 않을게 분명했으니깐. 이제 타라가 나름대로 세워놓은 계획을 한 가지씩 한 가지씩 실천에 옮길 차 례였다. 그녀는 두 사람이 심하게 다투고 있는 광경을 다시 한 번 쳐다본 다음, 그들 에게 좀더 시간을 주기로 마음먹으며 말머리를 다른 곳으로 향했다. 질리를 되돌려 보낼 수 없게 된 그렉을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그녀를 질질 끌다시피하며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온 그렉은 자기의 방문을 열고 질리를 확 밀쳐넣었다. 그의 두 눈은 적의로 이글거리고 표정은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래도 질리는 조금도 겁을 내지 않았다. 나름대로 그렉의 결정적인 약점을 그녀가 알 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어찌 하지 못하리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다. 방에 들어온 다음에는 질리가 먼저 그렉을 다그쳤다. "그년 어디 있어?" "뭐야!" "그년이 여기에 없다는 말은 하지 마, 그년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왔으니 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순간까지도 그렉은 타라와 함께 에덴에 온 사실을 숨기려는 게 분명했다. 그럴수록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질리는 질투심과 분노가 더욱 들끓어올랐다. "이런, 거짓말쟁이!" 질리가 그를 때리려고 손을 쳐들었지만 맞고 있을 그렉이 아니었다. 그렉은 질리의 팔을 잡아 벽쪽으로 다시 밀쳐버렸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그 사실부터 그렉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질리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조 차 일체 비밀리에 붙이고 시드니를 떠났는데 말이다. 타라가 질리한테 알렸으리 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건 알 필요없어, 이 자식아!" 그녀는 마구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타라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타라가 에덴가지 온 것을 전적으로 그렉이 유혹했기 때무ㅜ이라는 생각 에서 였다. "조용히 못하겠어?" 그렉은 에덴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될까봐 걱정을 하고 있었다. 타라를 데리고 와서 한껏 위신을 차리려던 참에 질리의 등자으로 모든 일을 그러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과 질리와으ㅢ 관계가 스테파니와의 신혼여행 때 이 미 발각되어 버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사람들한테 네놈이 어떤 자식이라는 걸 말해 줘야겠어. 그러고 타라 이년을 먼저 만나야겠어." "그녀는 여기 없어." 그렉을 딱 잘라 말했다. 질리는 다시 술병을 찾아 컵에 가득 부어 입으로 가 져갔다. 에덴에 오면서도 이미 그녀는 흠뻑 마신게 분명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 녀와 같은 입장이라면 술을 마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말 그렇게 마셔대는 데는 이제 지쳤어. 끔찍하단 말이야!" 그 말에는 질리도 잠깐 움찔했다. 사실상 술을 마시고 화풀이를 하면서도 그 녀는 그렉으ㅢ 어떤 결단을 두려워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 이다. 질리는 침착해지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빛이 역력했다. 흔히 질투심에 사로잡 힌 여자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경우가 종종있다. "그년을 사라하고 있겠지?" 그렇게 물었지만 그녀는 그렉의 대답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그렉은 질 리가 은근히 기대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래" 짧막한 그렉의 대답에 질리는 순간적으로 놀랐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 었다. 이번에도 그렉은 타라라는 톱 모델과 불장난을 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ㄱ없는 그렉의 욕정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렉은 계속해서 더욱 가혹한 말을 거침없이 했다. "그러니까, 내일 아침에 떠나도록 해." 질리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다시는 내 앞에 다타나지 마." 질리의 표정은 다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졀교를 선언한 것이다. "난 이제 당신이 어디에 있던 상관없어. 알고 싶지도 않아. 무슨 뜻인지 알겠 어?' "그년을 당장 여기서 쫓아내." 질리는 지지 않고 그렇게 역공을 감행했다. "그러고 싶지 않다면?" 그렉은 의뢰로 침착해진 표정이었다. 마치 더 이상 화낼가치도 없다는 듯했다. 그쯤 되면 질리도 별 수 없었다. 가지고 있는 마지막 카드를 제시할 수 밖에 없 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항상 그렉에게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좋아, 말 다했어?" "그래." "그렇다면 나도 할 말이 있지. 경찰에 가서 모든 것을 말해 버리겠어." 질리는 그렉의 반응을 날카롭게 살피며 계속했다. "당신은 자기 아내의 가장 친한 친구와 놀아나기 위해 아내를 죽여버렸지. 그 사실을 당신의 여성 팬들이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의외로 그렉은 참을성이 많은 듯했다. 그는 이번에도 화를 내거나 하지 않고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도 공범자야." 그러자 질리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별 거리낄 것이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내가 공범자라고 쳐. 그래도 소용없어." "무슨 말이야?" "필립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어쩌지?" 그 말에는 그렉의 표정이 금방 반응이 나타났다.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또 있다면 그것은 확실히 심각한 문제였다. "그리고 필립은 아직도 날 사랑하고 있어, 가련하게도 그이가 당신을 별로 좋 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을 테지?" 그렉의 두 눈이 험악하게 변하고 있었다. 질리는 계속해서 그렉의 의표를 찔 렀다. "나 혼자서만 그런 사실을 아고 있다면 당신은 아마 날 죽이려 하겠지, 입을 봉하려고." 거기까지 말한 질리는 갑자기 한 판 승부내기에서 승리를 거둔 것처럼 그렉에 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그러나 그렉이 확 밀치는 바람에 또 그녀 는 하마터면 바닥에 그대로 곤두박질 칠 뻔했다. 이 무렵 에덴에서는 또다시 어마어마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 까지 타라의 계획에 들어있는 일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우연히 복도를 지나가던 케이티가 그들의 말을 듣고 깜짝놀라 방문에 더욱 귀 를 바싹 갖다대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알리 없는 질리는 밖에까지 들리도록 마 구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자 , 그렉. 그러니 우리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게 어떨까?" 케이티의 놀라움은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것이었다. 질리와 그렉이 공모해서 스테파니를 죽이려 한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그런데 죽지 않고 살아난 스테파니는 타라가 되어 자신을 죽이려 했던 그렉과 다시 에덴에 나타난 것이다. 그녀의 계획이 어떤 것이든 간에 케이티는 그 사실 자체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기서 당장 떠나야 할 사람은 내가 아냐. 타라 그년이 당장 떠나야만 해." 그렉은 깊은 상념에 사로잡힌 듯했다. "자 이제 어떻게 하시겠어?" "......." "당신이 그년에게 말할 테야?" 아니면 내가 말할까?" 그 말을 듣고 있던 케이티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급히 손으로 입 을 가로막았다. 맑은 하늘의 날벼락 같았다. 질리와 그렉이.... 눈앞이 캄캄해지고 가슴은 온통 들끓었다. 질리는 이미 앞으로 그들이 해야 될 모든 일을 계획해 놓았다. "우리의 결혼식은 교회에서는 무리일 테고 결혼등록소에 가서 그냥 등록이나 하는 게 가장 적당할 것 같은데, 어때?" 그렉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질리는 승리감에 도취된 듯 했다. 그녀는 그렉 이 이번에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구를 들어주지 않 으면 당장 쇠고랑을 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그와 같은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결혼이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을 그녀는 간과하고 있었다. 그녀는 결혼하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육체로 만족을 얻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필립과의 결혼생 활을 만족못한 것이 전적으로 그런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렉과는 서로에게 육체적인 향락을 만족하다면 그것으로 원만한 결혼생활이 유 지될 것으로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렉의 입에서 케이티를 더욱 기절하게 만들만한 이야기가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내가 재혼을 하게되면 스테파니의 재산을 상속받는 데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돼. 그러니까 결혼은 할 수 없어." 그레근 뒤로 돌아가 벽에 걸려있던 엽총을 꺼내가지고 왔다. 질리는 돌아서 있었기 때문에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렉이 실탄을 장전하는 과정에서 낸 소리를 듣고 비로소 알아차리게 되었다. 14 그렉은 결혼을 할 수 없다는 이유를 잘라 말했다. 질리도 그의 고충을 이해한 듯 가만이 있었다. 사랑이든 쾌락이든간에 그것을 즐기며 살려면 경제적인면도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렉이 끝까지 배신만 하지 않으면 스테파니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까 지 받게 된다면 그것보다 바람직한 일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알고 싶어할 것 같아 말해주는 거야." 질리는 입을 다물었다. 엽총을 꺼낸 그렉이 자신을 위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그렉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 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렉이 무엇 때문에 엽총을 꺼냈는지 질리로서는 알 수도 물어볼 수도 없었 다. 사실 그녀는 그렉의 표정과 총구를 보는 순간 심장이 얼어붙은 듯했었다. 그 러나 지금은 약간 안심이 되었다. 한편 밖에서 문틈에 귀를 갖다대고 엿듣고 있던 케이티는 너무나 놀라운 사실 에 충격을 바도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허겁지검 피해 케이티는 재빨리 다른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들어선 케이티는 그 방에 설치되어 있는 무전기를 보는 순간 경찰에 연락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이티는 무전을 칠 줄 알았다. 에덴과 시드니 사이의 유일한 연락 수단은 그 것분이었다. 무선의 주파수를 맞춘 그녀는 성급한 마음에 두서없이 말을 하고 있었다. "여기는 에덴인데 빨리 좀 와 주시겠어요?" 케이티가 허겁지검 피할 때 인기척을 느끼고 수상쩍게 여긴 그렉이 그녀를 뒤 쫓아 방 안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방문을 열고 그렉이 막 들어섰을 때 무전기에서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덴, 무슨 일입니까?" 그렉이 총을 들고 나타나자 케이티는 새파랗게 겁에 질려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타라는 어디 있소. 여긴 당신 방이 아니잖아?" 그렉은 케이티를 무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아침 일찍 생각할 일이 있다면서 나갔어요." 잔뜩 겁에 질러 손바닥에서 식을 땀이 배어나왔지만 케이티는 사실대로 말해 주지 않았다. 타라가 킹을 타고 나갔다는 사실을 알려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생각한 탓이다. 무전기에서는 계속 케이티를 찾고 있었다. "말씀하세요, 에덴. 무슨 일 때문에 호출하셨조?" 그러자 그렉의 눈빛이 무전기를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말했다. "나가서 샘과 크리스에게 준비시키도록 해." 그는 사납게 명령했다. 케이티는 도망치듯 그 방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그렉이 사냥을 나가려한다고 믿었다. 그녀가 나간 다음 잠시 무전기를 노려보던 그렉은 총으 내려놓고 그 앞에 앉 았다. 잠깐 생각한 다음 그는 무전기의 뚜껑을 얼었다. 케이티가 무슨 연락을 하 려했는지는 모르지만 수상쩍었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는 당분간 외부와의 연 락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하고는 무전기 속에서 부품 하나를 잡아뗐다. 그러자 계속 들려오던 상대방의 목소리가 뚝 그쳤다. 케이티의 표정으로 보아 조그만 문제만 경겨도 금방 결찰에 연락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비로소 안심을 한 그는 다시 총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샘과 크리스가 지프에 낮아 기다리고 있었다. 케이티는 그가 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버 렸다. "샘, 타라 아가씨 봤나?" "못 봤는데요." 사실상 그렉을 타라를 걱정하고 있었다. 야생동물들이 우글거리는 산 속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케이티는 이러한 일들을 정반대로 해석했다. 엿들은 내용으로 보아 그렉과 질 리가 도모해서 타라를 해치려 한다고 생각 한것이다. 그대로 앉아서 그녀를 또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다. 어떤 위험이 따라도 구해 야 된다고 생각한 그녀는 부지런히 말을 끌어내어 안장을 얹었다. 샘과 크리스 가 그렉과 함께 갔기 때문에 에덴에는 그녀 뿐이었다. 비록 나이가 많이 들긴 했지만 아직 말 을 탈 수는 있었다. 그렉은 자동차를 타고 떠났지만 에덴 일대를 훤히 알고 있는 그녀는 지름길로 가면 타라를 먼저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자신할 수 있는 것을 옛날 스테파니가 즐겨찾던 곳 들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타라가 킹을 타고 분명히 그런 곳들을 돌아보고 있으리라 고 생각했다. 그 나이치고 케이티는 말을 능숙하게 몰았다. 타라가 갈 만한 곳까지 달려간 그녀는 말을 세우고 큰 소리로 불렀다. "에피! 에피!" 대답이 케이티는 점점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렉이 먼저 타라를 찾아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함든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찾아다녔다. 하지만 타라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에피!" 입안의 침이 바삭 말랐다. 마음이 점점 더 조급해져서 서두르며 눈에 불을 켜 고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 시간에 타라는 명마인 킹을 타고 숲 속을 기분좋게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킹도 오랜만이어서 기분이 좋은지 씩씩하게 달렸다. 어릴 때부터 킹과 함께 그 지역에 익숙한 탓에 마치 묘기를 부요주려는 것처럼 달리 는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렉이 나가자 질리는 그의 방에서 술을 또 마시기 시작했다. 눈가에는 멍이 들어 있엇고 입술도 터진 모습이다. 그렉에게 그렇게 폭행을 당한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렉은 화만나면 거칠어져서 질리조차 그런 그에게 겁을 먹고 있었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술을 마시면서 질리는 속에서 타라에 대한 질투심과 분 노가 부글부글 끓었다. 당장 타라를 찾아내어 요절을 내고 싶었다.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는 마당 에 불쑥 나타나 그렉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녀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같은 여 자의 입장에서 보기에도 타라는 신비한 매력이 느껴지기는 했다. 복도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질리는 직감적으로 타라라는 것을 알아차렸 다. 타락 승마를 끝내고 돌아온 것이다. 질리는 손에 술잔을 든채 일어나 복도로 나가서 타라임을 확인하자 질리는 새파랗게 타라를 잠시 노려보다가 질리는 자 신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나쁜 년!" 타라는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욱 침착했다. 그런 일은 이미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잘 지냈어요, 질리?" 경찰서에서 데리고 나온 후 첫번째 만남이었다. 에덴으로 떠나기 전에 전화연 락을 한 것이 그 이후에 둘 사이에 가졌던 관계의 전부였다. 한 가지, 타라는 질리를 완벽하게 알고 있지만 질리에 대하 몰랐으니 오히려 차분한 타라의 반응에 질리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여기에 올 줄 어떻게 알고 있었지?' 질투심으로 눈이 뒤집힌 그녀는 제대로 생각도 하지 못했다. 공항에서 일부러 전화로 알려준 타라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당연히 알 수 있죠." "친구처럼 다가오더니 내 등 뒤에서 내가 사랑하는 그이하고 놀아나? 그래도 되는 거야?" "그렉을 어디 있어요?" 전과 다름없이 예의바르게 상대해 주는 타라의 태오에 질리는 더욱 화가 치밀 었다. 마치 혼자서 공연히 벽에다 얘기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네 년을 찾고 있는 중일 태지. 총을 들고 나갔는데 무엇인가 쏘려는 것 같더 군." 질리는 너지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런 말에 동요될 타라가 아니었다. 적어도 그렉이 질리보다는 자신에게 열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차 한 마실 생각인데 같이 드시겠어요?" 타라는 앞장서서 주방으로 걸어갔다. 차와 상관없이 질리는 그녀의 뒤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내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디로 가는 거야? 타라, 도망 치지마!" 타라의 입가에 조용한 미소가 나타났다. 질리는 허겁지겁 그녀의 뒤를 따르며 발악하듯이 타라를 다그쳤다. "말해 봐, 타라." "멀요?' "여기에 온다는 얘길 왜 나한테 해 준 거지? 왜! 왜냐구?" 타라는 침착한 시선으로 질리를 잠깐 바라본 다음 커피를 준비하며 차갑게 말 문을 열었다. "사실을 알려주는 편이 당신에게 좋을 것 같아서요." "뭐라구?" "그렉이 당신에게 사실대로 말해 줄 리는 없을 테니까." "서로 언제부터 만나기 시작했지?" "좀 됐어요." "흥, 그래? 결국 게임을 벌이신 게로군, 그렇지?" "그래요" 타라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쯤 되자 질리도 기가 막혔지만 화만 내고 있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타라의 마음이 이미 그렉에게 완전히 쏠려 있는 게 분 명해 졌다. 그렉 역시 타라를 사아하고 있다는 뜻을 분며ㅇ 했었다. "내가 도대체 네년한테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때 타라의 두 눈에 순간적으로 스쳐가는게 잇었다. 그녀는 질리로 하여금 불길 같은 질투심과 분노를 느끼게 만들려는 것이 타라 의 계획이었다.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타라는 유리했다. "네 눈 앞에서 네년이 썩 꺼져줬으면 좋겠어." "그런 일이 생기면 그렉이 굉장히 서운해 할 텐데?" 그 순간 질리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술잔의 술을 타 라의 얼굴에 확 끼얹어버리고는 성난 여우처럼 부엌에서 나가버리자 타라는 숨 을 깊숙이 들이마시며 두눈을 감았다. 머리가 술에 젖었지만 그것은 문제도 아 니었다.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그보다 몇십 배 아니 몇백 배로 반드시 갚아줄 결심을 새삼 다짐했다. 그녀는 이미 모든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그 기회만을 기다리는 중이다. 킹을 타고 달리면서 그녀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 결과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물론 서둘러도 안되겠지만 어서 모든 일을 끝내고 제자리를 찾고 싶었다. 그녀는 무서운 각오를 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 차례 자신의 육체를 희생하기로 결심하기까지는 용 기가 필요했다. 다른 방법으로도 복수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가장 간단히 방법은 경찰에 알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끝내고 싶 지 않았다. 그동안 당한 고통과 슬픔을 되새겨보면 그렉과 질리의 뼈를 갈아서 마셔도 시원해질 것 같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그렉이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갚아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를 악어떼에게 던져주고 어떻게 당하는지, 어떻게 물리고 찢기는지 지켜보 보고 싶기까지 한것이다. 경찰에 알려 그냥 쇠고랑만을 차도록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악어에게 물어뜯기면서 처절하게 울부짖는 광경을 두 눈 을 똑바로 뜨고 지켜보고 싶었다. 붉은 피가 얼굴에서 튀고 악어에게 이끌려 물 속으로 잠겨들었다가 다시 나와야만 했다. 그래와 비로소 그도 자신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 다. 그리고 다시 치료받을 때의 고통도 맛보헤 해주고 싶었다. 의사도 망설이며 두렵게 생각하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맛보도록 하고 싶었다. 현실은 타라를 그런 식으로 갚게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럴수 없다고 한다면, 그 게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정신적 고통을 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 다. 타라가 계획한 방법은 바로 그렉과 질리에게 육체가 아닌 정신적인 고통을 주 어 피가 말라가는 순간들을 맛보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경찰 에 넘길 계획인 것이다. 호주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하퍼그룹의 경영을 여러 해 동 안 해왔던 그녀였다. 그런 점에서는 바람이나 피울 줄 아는 질리 그리고 한때 제법 날리던 테니스 선수로서 여성 팬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착각에 빠진 그렉이 감히 따를 수 없었 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계획을 아무도 모르게 그녀 혼자서 치밀하게 진행시 키는 것이다. 누구에게 그녀의 그런 계획을 들어내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사랑하는 자실들에게조차 신분을 속였다. 그토록 다 정했던 조안나와 필립 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에덴에 있는 어머니 같은 케이티에게도 끝내 밝히지 않았다. 케이티는 크리스와 함께 이미 알아차리고 확인하려 했지만 타라는 끝내 시인 하지 않았다. 케이티의 노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서까지 참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을 고문보다 견디기 어려웠었다. 타라는 계획을 그렇게 피눈물을 감추며 진행시킬수록 그렉과 질리에 대한 한 이 더 맺혀갔다. 그녀만큼 한이 맺힌 사라도 그리 흔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타라가 스테파니라는 것을 아는 케이티는 옛날에 모시던 아가씨를 걱정해서 자신의 나이도 아랑곳 하지 않고 타라를 찾아 나섰다가 결국 허탕만 치고 돌아 왔다. 찾아 헤매다 그냥 발길을 돌려야 했던 심정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타라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보호해 달라고 내내 마음으로 기도를 올릴 수 밖에 없었다. 초조하게 되돌아온 케이티는 마굿간 안에 있는 킹을 보는 순간 그만 전신에 긴장이 풀리며 맥이 빠져버렸다. 킹이 무사히 돌아왔다면 타라도 무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리한 킹에 관해서는 타라 못지 않게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돌아올 때쯤 타라는 방에서 목욕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날 저녁 그녀가 목욕을 준비하는 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단순히 목 욕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남은 생애 동안 다시는 없어야 될 마지막 순간을 장식하기 위한 중요한 시간이었다. 케이티가 킹의 무사함을 기뻐하고 있을 때 그녀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가득 채우고 예전에 스케파니가 사용하던 향료를 풀었다. 그 향료는 케이티의 정성에 의해 마치 스테파니를 기다리는 것처럼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당시의 반쯤 남겨진 상태 그대로였다. 욕조에 적당량을 부은 후 뚜껑을 닫기 전에 코에 대고 냄새를 다시 한 번 음 미하니 오히려 옛날에는 맡지 못했던 미세한 향기까지 맡을 수 있었다. 꿈결처 럼 느껴졌다. 거울 앞으로 다가가서 거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보았다. 그녀 자신 이 보기에도 그것은 스테파니 하퍼의 모습은 아니였다. 느껴지는 아미지는 비슷 하다고 해도 생김새는 전혀 달랐다. 외모에 그토록 자신이 없었던 스테파니가 아닌 타라 웰즈의 모습이 눈에 보일 분이다. 타라가 보기에도 굉장히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눈길을 때지 못했다. 킹을 보고 우선 마음이 놓인 케이티는 안심하며 곧장 그녀의 방으로 갔다. "에피!" 문을 두드렸지만 대답이 없었다. "에피 아가씨, 안에 있어요?" 역시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잠시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곧 문 밑을 내러다 보 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불빛이 거기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안에서 언뜻 물소리도 들렸다. 나이 때문에 제대로 알아 듣지 못하는 부분도 있지만 경험에 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타라는 안에 있으며 목욕 중이라는 것을 확신한 케이티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아무리 그렉이라고 해도 에덴에서는 어떤 짓을 할 수 없으리라는 게 케이티의 확신이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잠시 만감이 엇가렸던 타라는 이윽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을 따뜻하고 향기로운 물이 담긴 욕조에 집어넣 었다. 에덴에서의 그 욕조 속의 그 물에 대한 느낌을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 모든 것들이 타라를 어느 틈에 스케파니 하퍼로 되돌려 놓고 있었다. 이 때 어두운 밤하늘에 느닷없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타라의 비장한 결심을 알아차린 것처럼 갑자기 섬광이 새파랗게 번쩍이더니 이윽고 지상의 모 든 생물을 짓눌러버리기라도 할 듯한 천둥이 작렬해지기 시작했다. 바람도 세차 게 불기도 했다. 그렉 일행이 지프를 타고 돌아온 것이 그 때였다. 지프에서 내린 그렉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방에 불을 켠 그가 제인 먼저 발견한 것은 술에 잔뜩 취해 잠에 곯아 떨어진 질리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큼 깊은 잠에 뻐져 있었다. 15 천둥과 번개가 쉴 사이없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소파에서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질리를 잠시 내려다 보던 그렉을 곧장 돌아서 서 방을 나왔다. 그의 관심은 온통 타라에게 집중되고 있을 뿐이었다. 복도로 나온 그의 눈에 곧장 타라의 방문이 보였다. 그 안에는 타라 혼자 있 을 것이다. 질리가 불쑥 에덴에 나타났기 때문에 그렉의 마음도 갑자기 조급해 졌다. 질리가 무슨 일을 저지르기 전에 타라를 완전히 정복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타라에게 받은 느낌으로 미루어 한 차례의 관계를 갖는다면 그 남자에게서 평생 도망치지 못하리라고 그렉은 확신할 수 있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타라를 정복할 절호의 찬스였다. 그렉은 굳은 결심을 한 채 타라의 방으로 다가갔다. 문을 두드릴 것인가 그냥 밀고 들어갈 것인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렉을 조용히 방문 앞에서 물러났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옆에서 잠에 떨어진 질리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한 채 그는 옷을 벗고 곧장 욕 탕으로 들어갔다. 시원한 물줄기를 맞으며 샤워를 하기 시작 했다. 같은 시간 타라도 욕조 속에 몸을 담근 채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렉은 전에 없이 오랫동안 샤워를 계속했다. 타라가 욕조에서 나왔을 시간에 도 그는 아직 욕조에 들어있었다. 목욕을 끝낸 타라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 다. 그녀는 이미 마음 속에 비장한 각오를 끝냈다. 남은 문제는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정신적인것 뿐이다. 천둥과 번개는 에덴 전체를 명암의 극단으로 몰아놓고 있었다. 타라의 일생일 대의 중요한 결심에 놀란 듯 조바심을 느끼는 것처럼 쉴새없이 몰아치고 있었 다. 욕조안의 시원한 물줄기를 즐기는 그렉 역시 무엇인가 중요한 결심을 하고 있 었다. 오늘만은 그냥 넘기지 않을 각오였다. 가능하면 순리적으로 그렇지 못할 경우 물리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한이 있어도 기필코 타라를 자기 것으로 만들 작정이었다. 이 모든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어느때보다 긴 시간 동안 샤워를 계속하며 결 심을 다지고 있었다. 타라에 대한 그렉의 욕망은 단순히 육체적인 것만이 아닌 또 다른 것이 있었 다. 이미 퇴색된 자신의 테니스 선수로서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방법일 수도 있다. 타라는 아직 시드니 최고모델의 위치를 확고하게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스테파니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면 호주 제일의 부자가 될 것이다. 거기다 톱 모델과 같이 지낼 수 아ㅣ다면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셈이니 말이 다. 문제는 질리였지만 그녀에 대한 문제는 별로 문제될 게 없었다. 어떤 의미로 보아도 질리는 단순한 여자였기 때문이다. 육체에 관한 비장한 각오를 마친 것은 타라도 다를 바 없었다. 그녀가 마지막 으로 다시 한 번 결심을 다질 때 쯤에는 그렉도 샤워를 끝내고 욕탕을 나왔다. 타라는 알몸에 슈미즈만을 걸쳤다. 그리고 방안을 천천히 둘러본 다음 베란다 로 나왔다. 모든 각오는 이미 끝난 상태였다. 그녀가 베란다로 나왔을 때에는 천 둥과 번개가 다욱 심하게 작렬했다. 그녀는 잠시 서서 어두운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때 돌연 폭풍우 같이 세찬 바람이 불어닥쳤다. 슈미즈차림인 그녀는 육체의 윤곽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날 밤만은 자신의 육체를 체념한 그녀였다. 앞으로 있을 일을 위해서 그리 고 모든 일을 위한 희생을 각오했다. 자신의 육체를 한 차례 희생시킴으로써 목 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타라의 목표는 그렉이었다. 한편 그렉 역시 샤워를 완전히 끝낸 다음 타올 한 장으로 몸을 감고 벽난로 앞에 서있었다. 그대로 타라의 방으로 찾아 갈 결심이었다. 이 밤이 타라를 정복하기 위한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타라가 이미 자신의 육체를 한 번 체념하기로 결심한 처절한 각오를 전혀 모르고 있었으므로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타라는 일체의 다른 생각들을 머리 속에서 몰아냈다. 꼭 한가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녀는 자신의 결심을 다시 한 번 굳힌 다음 그렉의 방을 향해 다가갔다. 에덴의 건물 구조는 집 안쪽의 복도처럼 베란다가 쭉 이어져 방마다 연결되어 있었다. 벽난로 앞에 서 있다가 막 타라의 방으로 찾아가려던 그렉의 눈은 무심코 보 다가 창 밖에 서 있는 타라에게 멈추었다. 뜻밖의 기적과도 같은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신의 가호가 어느 틈에 여기까지 미쳤나 싶었다. 그렉은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타라 역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잠시 물끄러미 쳐다본 다음 조용히 그의 방 으로 들어왔다. 슈미즈 차림인 것을로 미루어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렉 은 그녀가 자신의 육체를 갈망하여 찾아온 것으로만 받아들였다. 그것은 사실로 나타났다. 말 한마디 없이 방으로 들어온 타라는 그렉의 정면에 마주 섰다. 두 사람을 서로를 쳐다보며 서 있었다. 만족해 하는 그렉과는 달리 타라의 표 정은 몹시 긴장된 듯 굳어 있었다. 그녀 스스로 이렇게 찾아오리라고는 전혀 예 상하지 못했던 그렉은 기분이 좋아져서 믿기지 않았다. 타라가 그렉의 눈빛을 그대로 응시하면서 스스로 슈미즈의 어깨걸이를 하나씩 벗어내리기 시작했다. 슈미즈가 타라의 몸을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이윽고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그를 몹시 원하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동안 수없이 갈망했던 타라의 알몸이 그의 앞에 있었다. 여체로서의 윤곽 이나 볼륨은 문제가 아니다. 타라의 전체가 거기에 있었다. 그렉은 자신의 몸에 감고 있던 타올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의 알몸이 그 안에서 타라의 알몸을 맞아주었다. 모든 각오를 끝낸 타라는 능동적으로 움직였다. 그렉의 요구에 스스로 응하면 서 황홀경에 점차로 빠져드는 모습을 보였다. 케이티와 크리스의 숙소는 별채에 있었다. 따라서 안체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 도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거기다 천둥과 번개가 심했기 때문에 웬만한 소리라도 별채에 있는 케이티에게 까지 들릴리 없었다. 다만 한 사람 질리만이 그 곳에서 자고 있었다. 타라는 그문제를 이미 감안하 고 있었다. 소리가 들릴 경우 질리는 술에 취해 잔다고 해도 시간이 지니면 깰 수 있을 것이다. 그렉은 이것 저것 생각할 겨를없이 성급하게 굴었다. 언제 타라의 마음이 변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타라는 조금도 거부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의 요구에 순순히 응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렉의 몸 이 여기저기에 부딪힐 때마다 느끼는 혐오스러움을 필사적으로 극복하고 있었 다. 그 뿐이 아니다. 그에 대한 당연한 반응을 나타내는 것도 그녀는 잊지 않았다. 짐짓 뜨거운 신 음소리를 연발하며 두 팔로 그렉의 목을 끌어안았다. 죽음의 문턱을 넘는 경험 을 한 그녀도 그보다 더한 고통은 없을 것 같았다. 그녀도 여자로서의 행복을 느끼고 싶기도 했다. 첫번째 결혼에서 두 아이를 낳았지만 육체적인 환희에는 거의 도달하지 못했다. 남편과 아내로서의 의무감 같은 성관계를 가졌을 뿐 이었다. 그녀는 성장하고 성숙하는 동안 스스로 아름 답지 않은 외모 때문에 고민에 빠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남자들이 뚱뚱한 여자 를 싫어하는 이유를 당시만 해도 미처 몰랐다. 사랑이 전부라고 믿었을 뿐이다. 육체의 접촉에 있어서 그런 식으로 미세한 부분이 적용될 줄은 몰랐었다. 남편인 그렉과 같이 있을 때 스테파니가 그토록 행복해 했던 이유도 역시 서 로 사랑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난생 처음으로 여자로서의 행복이 무 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도달하지 못했던 정점에 도달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정신적인 사랑 과 함께 육체적인 기쁨도 누려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오늘의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육체는 정신과 별개의 것일 수도 있으며 실제로 그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 특히 여성의 경우, 그런 상황을 종종 체험하기 마련이었다.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신체의 구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거부해 보지만 여성의 방어행동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 다. 그러나 이 밤을 지새는 타라에게는 전혀 의미가 달랐다. 의도적이었다. 자신의 감각과 감정을 극단적으로 거부하며 다만 행위만을 받 아들이고 있었다. 그렉의 남성이 어느 순간 몸 속 깊숙이 들어왔을 때 그녀느 격렬한 반응을 나타내 보였다. 그의 행위가 계속됨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반응 도 나타냈다. 뜨겁게 신음하며 점차 높은 소리를 냈다. 두 팔로 그렉에게 매달리며 헐떡였 다. 순간순간 그렉의 몸이 자신의 몸 속 깊은 곳에서 움직일 때마다 타라는 거 의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제하며 과장된 표현을 서슴지 않는 독기를 보였다. 앞으로 다가올 세월이 없었다면 또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면 타라는 죽는 한이 있어도 그렉하고는 육체관계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다고 해도 단연 거부했을 것이다. 그러한 치욕이야말로 죽음보다 더 견딜수 없는 것이었다. 증오스럽고 저주하 고 싶은 그렉에게 몸을 허락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렉에게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자신의 계획과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악어에게 물려서 죽는 게 낫 다는 생각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렉 하고의 육체관게에 열중하면서도 타라는 계획의 다른한 부분을 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계획은 예측대로 적중했다. 방에서 잠들어 있던 질리는 이날따라 기절한 것처럼 곯아떨어진 것이 아니었 다. 이 무렵 그녀는 심상치 않은 소리에 잠이 깨고 말았다. 귀를 기울이자 금방 무엇을 뜻하는 소리인지 알 수 있었다. 동시에 그녀의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질리는 허겁지검 숨을 헐떡이며 그렉의 침실을 보기 위해 베란다로 나왔다. 그 소리는 그렉의 침실에서 나는 소리였다. 질리는 마침내 모든 광경을 목격하 고 말았다. 타라의 계획중 일부분이었다. 그 광경은 질리의 가슴에 불을 지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렉과 타라가 침대에 알몸으로 서로 엉켜 있었다. 그렉은 반듯하게 누워있고 그 위에 타라가 걸터 앉은, 흔히 연상되는 관계를 갖는 중이었다. 타라는 그렉의 몸 위에서 상하로 움직이며 신음소리를 연발했다. 계획대로 질리가 엿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타라는 더욱 잔인해졌다. 질 리의 눈앞에서 또 다른 행동을 과감하게 연출했다. 재빨리 자세를 바꾸며 이번 에는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그렉은 가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배후로 돌아갔다. 그는 질리가 엿보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두 눈에 질투와 증오의 불길이 튀었다. 공교롭게도 그렉의 광장해진 남성이 타라의 배후에서 그 몸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광경을 똑똑히 목격하고 만 것 이다. 질리는 더 이상 그 광경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미친 사람 처럼 자기가 자고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술을 퍼마셨다. 정신이 몽롱해질 때까지 마셔댔 다. 걱정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자고 있던 방 안쪽 침실 에서 말이다. 질리의 마음은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 찼다. 당장 달려가 타 라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타라의 계획 한 가지는 멋지게 적중한 것이다. 16 에덴에서 타라의 계획이 그렇게 진행되고 있는 동안 시드니에서도 또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타라 웰즈가 스테파니 하퍼라는 사실을 확인한 댄 마샬은 그녀의 행방을 찾아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렉도 찾아야 했다. 그가 바로 에덴에서 스테파니 하퍼를 악어밥으로 던진 범인이라는 사실도 이미 확인된 것이다. 그런 그들이 동시에 시드니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상황의 발생 을 예고하는 것이었으므로 더욱 급해져다. 댄은 여전히 타라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가 두 아이를 두고 있는 엄마이며 스태퍼나 하퍼라고 해도 변함이 없었다. 그의 사랑은 그녀가 과거의 어떤 사람이었던가에 따라 변할 것이 아니었다. 타라의 행방을 찾아내고 그녀의 안전을 확인하기 전에는 타운즈빌로 돌아가지 않을 결심이었다. 타라의 신변을 고려해서 조안나 랜들에게도 비밀로 해 줄것을 부탁해 두었던 것이다. 스테파니 하퍼의 집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다만 남들의 이목을 피해 은밀하게 방문하는 어려움이 있을 뿐이었다. 그 집은 호주 제일의 그룹 총수의 저택답게 웅장했다. 정문에 도착한 댄이 벨을 눌렀지만 응답이 없었다. 반복해서 여러번 눌러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귀를 기울이자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기는 했다. 이대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타라는 반드시 찾아내야만 했다. 그는 할 수 없이 정문을 타고 도둑처럼 넘어갔다. 도둑은 물론 외부인의 접근을 한 치도 용납하지 않던 사나운 개가 댄의 접근 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개는 짖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댄이 안으로 들어가자 오 히려 꼬리를 흔다는 것이었다. 미침 정원의 풀장에서 수영하고 있던 데니스가 댄을 먼저 발견했다. 그는 물 에서 나오며 개가 반갑게 꼬리치며 맞아주는 낯선 사람을 의심쩍은 눈으로 바라 보았다. "누구세요?" 댄은 부드럽게 미소를 보이며 데니스에게 다가갔다. "여기는 개인 소유지인데요?" 댄은 첫눈에 데니스가 매우 영리한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알고 있어요." "어떻게 오셨죠?" "벨을 여러 번 눌렀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기에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부득 이 담을 넘고 말았단다." "무슨 일이신데요?" 데니스 역시 뜻밖의 방문객을 유심히 살폈지만 별로 의심하는 빛은 보아지 않 았다. 조안나 랜들이 그랬던 것처럼 댄에 대한 첫인상은 데니스에게도 호감을 주고 있었다. 짐 승인 개조차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나 댄 마샬이라는 사람이야." "그런데요?": "그렉 마스던을 찾는 중이지." 데니스의 얼굴에 약간 실망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지금 여기 안 계신데요. 친구되시나 보죠?" 댄 같은 사람이 그렉을 찾자 데니스는 실망한 눈빛으로 빤히 쳐다보았다. 어 찌된 영문인지 댄을 처음 보는 순간 데니스는 친근함을 느꼈던 것이다. "친구는 아니다." "그런데요?" "난 타라 웰즈의 친구란다." 순간 데니스의 얼굴에 놀라는 표정이 나타났다. 타라에 대한 이미지는 아직도 데니스의 기억에 생생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마스던 씨는 그녀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아서 그래." 데니스는 댄에게 조금도 적대감이나 경계심을 나타내지 않는 개를 다시 돌아 보았다. "우리 개가 이상해요." "뭐가 말이지?" "이름이 카이다인데요, 얼마나 사납다구요. 그런데 왜 아저씨를 보고 짖지 않 는지 모르겠어요." "글쎄, 내가 보기에도 사나운 것 같구나. 하지만 아무에게나 사납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 "우리집 식구 외에는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다라는 이름의 커다란 개는 댄이 쓰다듬어 주자 꼬리 를 흔들어 보였다. 데니스는 카이다의 태도에서 우선 댄을 안심한 만한 방문객 이라고 생각했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개가 매우 영리하구나. 내가 해치지 않을 친구라는 것을 알아본 것 같아." 데니스는 집으로 댄을 안내했다. "타라 아줌마하고는 언제부터 알고 지냈어요?" "일 년이 좀 지났다." "어디서 처음 만나셨어요?" 데니스는 타라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타라에게서 느꼈던 감정 탓이었다. 예사로운게 아니었던 것이다. "타운즈빌에 있는 한 병원에서 만났어." "병원요?" "응" 데니스는 관찰력이 예민했다. "아저씨 혹시 의사 선생님이세요?" "그렇단다." 댄의 대답은 데니스의 신뢰를 한층 높였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그에게 호 감이 갔다. 전부터 알고 지냈던 어른처럼 느껴졌다. 그렉을 대할 때하고는 비교 도 안 될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들이 현관 앞에 이르렀을 때 사라가 이층 계단 위에 서 있었다. 스테파니가 그렉과 결혼하던 날 그렉과 질리의 시선이 마주쳤던 곳이기도 했다. 데니스는 어른스럽게 사라를 댄에게 소개했다. "우리 누나 사라예요." 사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처음 만나는 상대에게 경계심부터 가졌다. "누나, 이분은 마샬 선생님이셔. 타라 아줌마 친구시래." 그 말에 사라는 비로소 안심을 할 수 있었다. 타라에 대해서는 사라도 이미 마음에 새겨두고 있었다. 데니스처럼 그녀가 남같지 않게 느껴졌다. 자신에게 그 토록 정답게 대해 준 사람은 엄마를 제외하고 타라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추워 죽겠어요. 빨리 안으로 들어가요." "그러자꾸나." 댄 역시 데니스에게 알 수 없는 정을 느꼈다. 우선 영리한 소년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스테파니의 아들이라는 점이 무엇보다 애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 아이들에게 타라의, 스테파니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얼굴을 대하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가족 같은 느낌마 저 들었다. 사라 역시 댄의 모습에 전혀 적대감이 없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데니스는 한쪽 벽에 걸린 커다란 초상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엄마 초상화예요." 초상화를 바라보는 댄은 감회가 깊었다. 타라 웰즈, 아니 스테파니 하퍼의 원 래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병원에서 수술 하기 전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도 록 사진을 그녀에게 요구했던 기억이 새로웠다. "우아해 보이시는 구나." "그렇게 생각하세요?" 데니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댄을 바라보았다. 엄마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직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엄마가 미인이라거나 혹은 그와 비슷한 표현이라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곁에서 듣고 있던 사라에게는 특히 더했다. 민감한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자신의 외모에 대해 늘 비관하고 있었다. 엄마를 닮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엄마가 못생겼기 대문에 남자들이 돈만 보고 엄 마에게 접근한다는 말까지 타라에게 했었다. 타라에 이어 두 번째로 사라는 엄마의 외모에 대한 칭찬을 듣는 셈이다. 타라 는 사라의 말을 듣고 사라가 충분히 위로받을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해 주었 다. 그런 부분들이 사라에게서 항상 존재하는 열등의식을 잠시나마 잊도록 해주 었다. 당시의 타라를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라에게 댄 역시 호감을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너희 새아빠는 지금 어디 계시지?" 스테파니의 신분이 확인된 다음 댄은 그녀의 신상문제를 대충 알아보았다. 시 드니에서 스테파니 하퍼의 소식을 알기란 매우 쉬운 일이었다. 거의 모든 시드 니 사람들이 스테파니 하퍼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댄은 그녀가 그렉 마스던과 재혼을 한 것과 그 후 실종된 사실을 어렵 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지금 에덴이라는 시골의 별장에 갔어요." "에덴?" "네." "그게 어디지?" 댄은 에덴에 대한 것을 아직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데니스는 에덴의 전경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커다랗게 담고 있는 액자를 가리 켰다. "저게 에덴이에요." 댄은 스테파니 하퍼의 가문을 새삼스럽게 상기시키며 바라보았다. 개인의 별 장이라기 보다는 어느 군주의 성같은 규모였다. 에덴의 견경을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데니스가 설명을 해 주었다. "타라 아줌마는 우리 집에 오기 전에 한 번 본일이 있어요." "그래?" "학교에서 친구들과 시합을 하다가 공이 정문쪽으로 굴러갔을 때 거기에 서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이상해요." "뭐가 말이지." "우리 집에 왔을 때 물었더니 아줌마는 그런 적이 없다고 했어요. 잘못 본 걸 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 "아녜요. 분명히 그 아줌마였어요.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글쎄..." 댄은 쉽게 말을 해줄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만나지 얼마되지 않지만 데 니스가 영리한 소년이라는 것을 금방 알수 있었고 그 기억 또한 정확하다고 생 각했다. 타라에게 어떤 사정이 있으리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 아들 앞에 나설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으리란 것을 댄은 생각하였다. "그리고 또 있어요." "..." "타라 아줌마요, 아무래도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하루종일 같이 있으면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어요." "이상한 느낌을?" "네." "어떤 느낌이지?" "우리 엄마 같다는 느낌이 자꾸만 들어요." 함께 있는 사라 역시 데니스의 말에 동의하는 듯했다. 댄은 데니스의 말에서 이미 어떤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 뭔가 문제가 있어서 타라 아줌마도 에덴으로 간 것이 아닌가요?" 데니스의 질문에 댄은 약간 당황하였다. 굉장한 관찰력이었다. 데니스는 벌써 댄과 같은 의혹을 갖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줌마를 아신 지 일년이 좀 지났다고 하셨죠?" "그래." "엄마가 사고를 당한 때가 그 쯤일 거예요. 이해할 수가 없지만 분명히 뭔가가 느껴져요." 데니스의 얼굴에 고통스러워 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어린 소년의 그런 표정을 보는 댄의 마음도 아팠다. 그 아이와 같이 있는 사라의 눈빛에 나타난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역력히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슴이 뭉클하기만 하였다. 두 아이는 타라 웰즈에게 엄마를 느낀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인륜은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타라가 비록 모습을 바꾸고 나타났지만 아이 들은 이미 느낀 것이다. 역시 피는 속일 수 없는 것인가 보다. 타라 역시 그 아 이들 이상으로 마음 아파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댄은 망설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그 아이들에게 말해 주어야 할지 어떨지 갈피를 잡 기 어려웠다. 그런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쉽게 말을 할 수도 없는 내용이었다. 타라가 지금까지 자신을 숨기고 있다면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 므로 자신이 먼저 아이들에게 말해주어도 되는 것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하 지만 그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타라의 신분이 밝혀진 셈이라 본다면 머지않 아 시드니에 그 소식이 알려질 것이다. 엄마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아이들에게 한시라도 빨리 위로해 주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것으로 어떤 문제가 발생 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책임지겠다고 생각을 굳히는 데까지 댄은 심한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그는 결국 아이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기로 결심을 하였다. 스테파니와는 별도로 데니스와 사라에게도 이미 애틋한 정이 느껴졌다. "데니스." "네?" 댄이 무엇인가 중요한 말을 할 것같은 분위기여서 사라와 데니스는 다음 이야 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너의 느낌이 맞는 것 같구나." "그렇다면..." 데니스는 말을 얼른 잇지 못했다. 어린 가슴에 굉장한 파문이 일어난 듯 보였 다. "타라 아줌마가 우리 엄마예요?" 거기서 댄은 다시 한 번 신중히 생각한 다음 대답해 주었다. "그렇단다, 얘들아." 순간 데니스는 얼어붙은 듯이 굳어버렸다. 오히려 사라가 먼저 두 손으로 얼 굴을 가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 댄은 재빨리 사라의 어깨를 안아주자 데니스도 그의 팔에 안겼다. 댄은 울고 있는 사라의 등을 토닥거려 주면서 또한 데니스의 등을 쓸어 주었다. "괜찮아. 너희 엄만 무사히 살아계서. 자, 내 말을 잘 들어. 이런 때일수록 침 착해야지. 안그러니? 자, 울음을 거쳐. 지금은 울고 있을 때가 아니란다." 댄의 따뜻한 위로에도 불구하고 사라는 쉽게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엄마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사라는 슬픔에 빠져 일 년이 넘게 살아 왔다. 데니스가 있고 집사인 메이티가 있었지만 엄마는 아니었다. 거기에다 그렉은 오히려 마음을 언제나 상하게 만들었다. 사라에게 엄마가 없다는 것은 앞으로 살아갈 희망도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엄마가 살아 있다고 했다. 이미 한 번 만났던 타라가 엄마라고 했다. 기적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잘못된 듯했다. 그녀가 왔을 때 좀더 다정히 못한 것이 가슴에 맺혔다. "그만들 진정해라, 지금은 그러고 있을 때가 아냐." "뭘 어떻게 해야 하죠?" "저도요." 사라도 무슨 일이건 하겠다고 선뜻 나섰다. 엄마를 위하고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어떤 고통도 감수하고 싶어진 것이다. "에덴에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이 뭐지?" "거긴 전화도 안돼요. 아주 외딴 곳이죠." "그럼 비행기로는 갈 수 있겠지?" "네, 그것 뿐이예요, 에덴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서둘러야겠구나." "우리도 같이 가요." "네, 저도요. 제발.... 제발요..." 사라는 다시 울음을 터트리며 간곡하게 매달렸다. 댄은 어쩔 수 없다고 느꼈 다. 그 아이들은 스테파니의 분신이기도 하였다. 댄 자신도 스테파니의 신변이 걱정되는데 그 아이들은 오죽할 것인가 싶었다. 댄 자신 보다 스테파니를 걱정하고 무사하기를 비는 마음이 더욱 간절할게 분 명했다. 그는 이번에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자. 우리 함께 에덴으로 떠나자." "고마워요, 정말..." 사라는 가슴이 벅차 또 다시 울음을 터뜨렸지만 데니스는 남자답게 몸을 털고 일어섰다. 엄마를 위해 어떤 일이라도 기꺼이 하겠다는 용기가 넘쳐 보였다. 댄은 대견스러운 데니스와 애틋한 사라를 다시 한 번 다정하게 안아 준 다음 에덴으로 떠날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럴 즈음 에덴의 타라는 아침 일찍부터 부산하게 움직였다. 간밤의 일은 그것으로 이미 끝내 망각의 심연 속으로 던져버렸다. 앞으로가 가장 중요했다. 그녀는 케이티와 크리스에게 은밀하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케 이티는 물론 크리스도 오히려 기븜을 감추지 못했다. "걱정하기 마세요, 아가씨. 이런 때를 기다렸어요." 케이티는 어쩔줄 몰라하며 기뻐했다. 인생의 황혼기에 깊숙이 접어든 그녀는 타라가 무엇을 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렉에 대한 복수 때문이었다. 그 일 은 사실상 케이티가 하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다. 크리스에게는 또 다른 부탁을 했다. "크리스, 부탁이 있어요." "뭐든지 말씀하세요." 피부의 색깔 때문에 희비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던 크리스의 얼굴에도 기쁜 표 정이 역력했다. 지금껏 숨을 죽이고 살았다면 이제야말로 숨을 쉴 수 있다고 생 각하는 듯했다. "킹을 맡아줘요." "네?"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아무도 킹을 보지 못하도록 숨겨줘요. 할 수 있겠죠?" "그럼요. 조금도 염려하지 마세요." "고마워요, 크리스." "천만에요." 그도 이미 타라가 스테파니임을 알고 있었다. 아가시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 도 바칠 수 있는 각오가 이미 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 한가지의 준비는 그것으로 완전하게 끝났다. 그런 다음 타라는 또 다음 단계의 준비를 서둘렀다. 그 단계에서 그녀는 케이 티에게 굉장히 죄송스러움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자신의 육체까지 한 차례 더럽히면서까지 계획을 실행하고있으므로 나중에 모든 일이 끝나면 케 이티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작정이었다. 스테파니를 확인한 케이티와 크리스는 순식간에 모든 준비를 해치웠다. 그날 아침 그들은 비로소 살아 있다는 생동감을 느꼈다. 그들이 아침 일찍부터 밖에 나간 사이 타라는 우선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녀 는 찬장에 들엉있는 케이티의 술병을 꺼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약물을 술병 에 넣었다. 하지만 그 약은 결코 케이티를 해치려는 게 아니었다. 그런 일은 상상할 수 도 없었다. 다만 필요한 시간 만큼 케이티가 움직일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해서였 다. 그리고 그것은 케이티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문제가 발생할 경우 케이티는 위험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상황이 끝날 때까지 케이티를 격리시키려는게 타라의 계획이었다. 두 번째로 타라는 부엌에 있는 모든 술병을 모았다. 하나도 남김없이 모아 쟁 반에 얹어서 들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깊숙이 감추었다. 에덴의 어디에도 마실 만한 술이 남아있지 않도록 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한편 그렉은 느긋하게 늦잠을 잤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에덴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잠결에 곁에 있던 타라가 없어진 것을 알고 눈을 떴다.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에덴이 다른 곳처럼 느껴졌다. 타라 웰즈를 드디어 정복했다는 성취감이 짜릿 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세계 최고봉을 정복한 것 만큼이나 뿌듯하고 흐뭇한 승 리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에게 안겼던 간밤의 타라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더구나 앞으로 몰아닥칠 일들을 상상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는 타라 웰즈를 정복했으니 그녀의 명예를 차지할 수 있고 이제 하퍼그룹만 차지하면 끝난다고 생각했다. 케이티는 어느 날보다 씩씩해 보였다. 드디어 아가씨를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땔나무를 장만하기 위해 톱질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크리스 가 우려를 표시했다. "그냥 놔둬요, 케이티. 내가 할께요" 나무에 올라가 가지를 자르고 있던 크리스가 내려다 보며 걱정을 했다. "내가 할 수 있어" 케이티는 씩 씩하게 말하며 계속 톱질을 했다. "무리하면 심장에 나빠요" 에덴에서 같이 생활 하면서 유일하게 케이티를 걱정하는 크리스였다. 두사람 모두 같은 처지였다. 케 이티도 성격이 퉁명스럽긴해도 항상 걱정하며 보살펴주었다. 크리스는 어렸을 적부터 에덴에서 그녀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말도 안되는 소리 말아라, 할 일이 태산 같은데" "무엇 때문에 할머니가 그러시는지 알고 있어요" "뭐라구?" "다 안다구요" "네가 알기 뭘 알아?" "왜 마음이 편하지 않으신지 알고 있다구 요" 크리스는 연민의 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케이티를 내려다 보았다. "쓸데 없 는 말 그만하고 어서 일이나 해!" 케이티는 여전히 퉁명스럽게 말하며 계속 톱 질을 했다. 그녀는 아가씨의 계획이 성공하게 되기만을 빌고 있었다. 그게 어떤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꼭 필요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스테파니 아가씨 가 다시 에덴을 되찾게 되어 예전처럼 받들며 죽을 때까지 같이 살고 싶은게 그 녀의 마지막 염원이었다. 해가 이미 상당히 올라왔을 때 그렉은 침대에서 내려 왔다. 아직 에덴에서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짐작하지 못한 채 담배를 피워물었 다. 침대 옆 바닥에는 간밤의 흰색 타올이 아직 그대로 있었다. 그것을 집어서 들여다보던 그렉은 이내 한쪽으로 던져버렸다. 바로 그것이었다. 그렉의 속셈이 다시 드러나고 있었다. 타라 웰즈를 드디어 정복했다는 승리감이 별로 오래가지 않았던 것이다. 천성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이후의 청사진을 그리 기에 여념이 없었다. 타라 웰즈의 인기와 명예를 이용해서 자신의 인기를 회복 시킨다 그러면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고 많은 여성 팬을 갖게 될 것이다. 즉, 벌써 또 다른 많은 여자와 바람 피울 생각부터 하는 것이다, 결코 한 여자로 만 족하지 못하는 그였다. 타라 웰즈는 말하자면 상징적인 여자로 곁에 두고 더 많 은 여자와 즐기고 싶었다. 그는 간밤의 타라와의 정사에서도 별로 만족하지 못 한 듯했다. 그에게 여체에 대한 만족은 애당초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질리에 이 어 타라 그리고 다음에는 또 어떤 여자일 것인가가 지대한 관심사였다. 자신의 현위치는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가운데 여색을 향한 몽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다. 그는 에덴에 온 후 어느 때보다 느긋하고 기분좋은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며 밖으로 나왔다. 햇살이 유난히 눈부시게 빛났다. 햇살조차 자신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듯했다. 저쪽에서 나무를 자르는 케이티의 모습이 보였다, 케이티는 그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더욱 열심히 톱질을 했다. "잘 잤어요, 케이티" 그렉 은 전에 없이 친절한 목소리로 인가를 건넸다. "날씨 참 좋죠?" 케이티는 대답하 지 않았다. 오히려 별꼴 다 보겠다는 듯이 곁눈질을 했을 뿐이다. "타라는 어디 있죠? 케이티가 기다리던 질문을 해왔다. 그녀는 아가씨의 부탁대로 이미 대답 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나갔어요" "나가요, 어디로?" 그렉은 여전히 짐작도 못 하고 있었다. "말을 타러 갔죠" "뭐요?" "아침을 느즈막히 먹고 악마바위 쪽으로 말을 타고 갔어요" 그렉이 깜짝 놀라자 케이티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아가씨가 당신을 깨우지 말라고 하더군요." "무슨 말을 타고 갔소?" "킹이요" "뭐라구!" 그 렉은 순식간에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떻게 악마바위를 알게 됐 지?" "내가 말해주었지요" 모든 것이 타라의 계획이라는 것을 그가 알리 없는 그렉은 벌컥 화를 냈다.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다니!" 케이티는 대답하지 않았 다. 크리스는 그에게 맡겨진 역할이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나무에서 내려왔다. 이 미 준비해 두었지만 만일을 위해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세시간씩이나 걸리는 데를 혼자 가게 하다니, 그러다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을 텐데" 그가 펄쩍 뛰자 케이티의 입가에 그렉을 비웃는 미소가 나타났다. '네까짓게 뭘 알아, 너는 길을 잃어도 우리 아가씨는 잃지 않아....' "만일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당신이 책 임져요! 제기랄!" 그는 피우던 담배를 땅바닥에 내동댕이 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타라를 찾으러 나가려는 것이다. 바로 타라의 계획 가운데 중요한 한 부분이었 다. 타라는 일정시간 동안 그렉이 에덴에 있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케이티는 톱을 내던지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침 설거지도 아직 하지 않았다. 전에 없었 던 일이다. 40년동안 에덴의 살림을 도맡아 해오는 동안 그런 적이 한 번도 없 었다. 스테파니의 사고가 알려졌을 때에는 아예 자리에 누워 그럴 겨를도 없었 었다.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초조 하고 조급했다. 두렵기도 했다. 그녀가 보기에 그렉은 악당이며 살인자였다. 그 런 악당을 아가씨 혼자서 당해낼 수 있을지 그게 걱정이 되었고 두려웠다. 당장 나서서 도와주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섣불리 나서서 끼어들었다가 오히려 아가씨의 입장을 불리하게 만들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스테파니가 모든 점 에서 침작하고 신중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퍼그룹을 경영하는 그녀에 대해 항상 감탄해 왔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왠지 두렵기만 했다. 상대가 이미 스 테파니를 한 번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그렉이었다. 그녀가 어떤 기적을 만나 다 시 에덴으로 돌아오게 되었는지는 아직 잘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하지 않 았다. 현재 살아 있다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지금 그렉에게 대가를 치루레 하려 는 중이라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어떤 형태와 어떤 방법이 되든 스테파니는 반드시 승리해야만 된다. 그녀의 승리를 위해 필요하다면 기꺼이 늙은 목숨을 던질 수 있었다. 몹시 착잡해진 케이티는 찬장에 있는 술병을 꺼냈다. 그 술에 무슨 약물이 섞여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케이티가 부엌에서 약 을 탄 술을 한 모금씩 마시고 있을 때 그렉은 이미 승마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케이티의 몸 속에는 술에 섞인 약 기운이 점차 퍼져가기 시작할 때쯤 그렉은 자신이 타던 말에 올라탔다. 그는 마굿간 안에 있는 크리스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 보더니 욕설을 퍼부었다. "이 바보같은 검둥이 자식아!"그 말을 들은 크리스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다른 욕은 참을 수 있어도 검둥이란 말은 참을 수 없었다. 스테파니도 케이티도 하퍼가의 누구도 그를 그렇게는 부르지 않았다. 하물며 상대가 그렉인만큼 크리스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튕겨져 나왔다. "킹은 아무나 탈 수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 거야?" 크리스는 분노와 적개심으 로 얼굴이 돌처럼 굳어 있었다. 그렉은 그를 향해 거칠게 다가가며 다시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채찍을 쳐들어 크리스를 힘껏 후려치려 했다. 하지 만 그렇게 쉽게 뜻대로 할 수는 없었다. 채찍을 들고 있는 손목을 크리스가 움 켜 잡았다. 힘이 어찌나 센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힘도 힘이지만 크리스의 증오심 때문에 그렉의 손목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무섭게 노려보았지만 도저 히 당해낼 수 없었다. 만일 그런 광경을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그는 얼굴을 들 고 다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크리스가 손목을 놓아주자 비로소 움직일 수 있었다. 가뜩이나 타라 때문에 케이티에게 화가 치밀어 있던 그렉은 속이 부글 부글 끓었다. 그가 막 에덴에서 나가려 할 때 갑자기 질 리가 나타나서 앞을 가 로 막았다. "할 말이 있어요" 마음이 마음이 아닌 그렉은 대뜸 사납게 질리를 노 려 보았다. 그런 모든 일들이 따라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렉은 물론 질리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어젯밤에 둘이 같이 있는 걸 봤어요" 그 녀는 취해 있지 않았다. "지금 당장 경찰에 가겠어, 이제 주저할 필요가 없어졌 어. 당신이 고통받는 것을 보고 싶을 뿐이야" 그렉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의 마음에는 타라에 대한 생각과 케이티, 크리스에 대한 증오심만이 있을 뿐이 었다. 질리는 안중에도 없었다. 다만 귀찮은 존재일 뿐인 것이다. "할 말 없어 요?" 질리의 눈에는 질투와 증오심이 불타고 있었지만 그렉의 현 심정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비켜!" 그렉은 사납게 쏘아 붙이고 질리를 향해 곧장 말을 몰았 다. 상황이 순식간에 바뀌고 말았다. 새파랗게 질린 질리는 뒤로 도망치기에 여 념이 없었다. 그렉은 그녀를 말발굽으로 깔아뭉갤 기세였다. 그 말에 짓밟히면 질리의 생명은 무참히 찢겨질 것이다. 죽음의 공포가 질리를 미친 여자처럼 보 이게 했다, 그렉은 말에 속도를 점점 더 높여 도망치는 질리를 쫓았다. 그녀는 간격이 점점 좁아지자 결국 짓밟힐 수밖에 없을 것 같아 더욱 서둘고 있었다. 상황이 그쯤되자 질리는 죽음의 공포에 완전히 사로잡히고 말았다. 다른 어떤 생각도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말발굽을 피하는 것만이 급했다. 그렉의 눈빛에는 분명히 그녀를 죽이려 하는 살기가 번뜩이고 있음을 질리 스스로 그것을 깨달았 다. 그렉이 그녀를 죽일 이유는 충분했다. 그녀를 그냥두면 경찰서에 가서 사실 대로 말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렉도 끝장나기 때문에 그도 일이 그렇게 되게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스테파니를 악어밥으로 던지는 광경을 목격했 던 질리는 그렉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마음만 있다면 자기를 죽이려고 덤빌 것 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 는 질리는 필사적으로 도망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삶에 대한 애착심은 그런 사 오항에서 강해지기 마련인 것이다, 그녀가 건물 앞의 테라스로 도망쳤지만 그렉 은 단념하지 않았다. 테라스에까지 말을 탄채 질리를 쫓아 올라가며 사납게 육 박해 왔다. 질리의 눈이 뒤집혀 졌다. 어딘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울타리에 열려 있는 작은 문을 향해 다시 뛰었다. 가장 현명하게 도망칠 방법을 생각할 틈도 없었다. 우선 발이 움직일 수 있는데까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갈 데까지 가고 그 다음 일은 그 때에 가서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생명의 위협에 휩싸인 질리는 건물의 어딘가에서 타라와 크리스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 랐다. 그녀는 구경꾼이 지켜보는 가운데 맹수에게 쫓기는 가엾은 토끼 한 마리 나 다름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질리는 완전히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뛰던 발끝이 어딘가에 걸려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계속 추격해 오던 그렉이 10미터도 안되는 거리를 두고 우뚝서서 사납게 노려 보고 있었다. 질리는 더 이 상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가 다시 말을 몰고 달려오면 밟혀 죽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완전한 절망이었다. 얼굴은 이미 핏기가 사라졌고 두 눈의 초점 도 흐려졌다. 그렉의 처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가라!" 그렉이 말에 채찍을 가하는 순간 질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나님을 부를 겨를도 없었다. 불과 몇 초도 남지 않은 생명의 불꽃이 꺼지기 직전이었다.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리 며 가깝게 다가왔다. 다음 순간 발굽이 넘어진 질리에게 떨어지는 듯 돌진을 하 였다. 질리는 심장이 멎어버리는 듯 숨을 딱 멈추고 죽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렉은 그녀를 뛰어넘어 평원을 향해 말을 달리고 있었다. 질 리가 아직도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을 마굿간에서는 타라와 크리스 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크리스가 숨겨 놓은 킹과 함께 그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렉이 들이닥치거나 발각될 경우 그녀는 킹을 타고 있어야 했던 것이 다. 그들은 그렉의 모습이 멀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안심했다. "고마워, 크리스" "천만에요" "이제 짐들을 제자리에 갖다 놓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크리스는 감 추고 있던 물건들을 가지고 마굿간을 나갔다. 타라는 또 다음 계획을 위해 다른 곳으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갔다. 이제까지는 완벽한 성공을 거둔 셈이 되었다. 그렉은 악마바위로 달려갈 것이 분명했다. 그가 말했듯이 그곳까지는 세 시간을 달려가야 했다. 그곳에서 사람을 찾다가 다시 돌아오려면 온 종일이 걸릴 것이 다. 이제 두 명의 복수대상 가운데 질리 한 명만이 남게 되었다. 모든 일은 타라 가 계획한 그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질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는 생각과 함 께 어느 때보다 절박하게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한편 케이티는 타라의 계획에 따라 부엌에서 아직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타라는 그녀가 밖에서 벌어지는 일 을 보지 못하도록 했다. 일이 해결될 동안 케이티는 전혀 모르게 하고 싶은 것 이다. 한 잔씩 계속 마시던 케이티는 점차 정신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독성분 은 아니지만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약물이 포함된 술을 여러 잔이나 마신 덕 분이었다. "내가 왜 이러지?" 이상하게 생각하며 의자에서 일어나려던 케이티는 갑자기 의식이 몽롱해지며 식탁에 쓰러졌다. 순간적으로 전신에 기운이 하나도 없고 땅이 꺼지는 것만 같았다. 그와 같은 사실을 미리 알고 있는 타라는 다음 대책을 세우는 데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크리스" 그녀는 항상 마굿간에 있다 시피 하는 크리스를 불렀다. "네?" "케이티는 지금 어디 있죠?" "아마 부엌에 계 실 겁니다." "좀 가 보겠어요?" "그러지요" 크리스는 아무런 이유도 달지 않았 다. 타라의 부탁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들어 주고 싶었다. 부엌으로 케이티를 찾 으로 갔던 크리스가 곧장 달려나왔다. "할머니가 이상해요" "왜요?" "식탁에 쓰 러져 있어요" "저런!" 타라는 아주 놀라는 척하며 급히 말했다. "빨리 방으로 모 셔가야겠어요" "알겠습니다" 크리스는 즉시 달려가 술에 곯아 떨어진 듯한 케이 티를 안고 그녀의 방으로 데려다 침대에 뉘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크리스 괜찮 을 거예요." 그녀는 우선 크리스를 안심시킨 다음 케이티를 돌보기 전에 다시 중 요한 일을 그에게 부탁했다. "크리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말씀하세요" "샘 과 함께 차를 가지고 경찰서로 가요, 가서 짐에게 이 쪽지를 전해요.. 꼭 짐한테 전해야만 돼요." "알겠습니다." 크리스 역시 케이티처럼 대단한 흥미와 더불어 기쁨을 느꼈다. 하인이긴 하지만 알 만한 것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는 맨처음 그렉이 스테파니를 데리고 호수로 나가던 광경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스테파니 가 실종되었을 때 모닥불 옆에서 그렉이 질리를 설득하던 광경도 기억을 하고 있었다. 그때 그렉은 신혼여행 도중에 아내를 잃은 남편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마치 다정한 애인처럼 질리를 껴안아 주며 온갖 다정한 행동을 모두 했었던 것이다. 그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스테파니는 죽지 않았다고 믿어왔었다. 아니 그녀는 그렇게 죽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렉이 타라를 데리고 왔을 때 에도 크리스는 깜짝놀랐다. 타라의 모습에서 스테파니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변해서 나타난 스테파니가 경찰에 가라는 말에 무엇보다 신뢰감을 받았다. 드디 어 그렉과 질리가 붙잡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무한한 즐거움에 휩싸였다. 스테파 니와 관련된 일이라면 불길 속에라도 뛰어들고 싶은 게 크리스의 심정이었다. 타라가 그에게 샘과 함께 가라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케이티는 자신이 술에 넣은 약으로 인해 이미 에덴에 없는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크리스가 샘과 함께 경찰서로 가면 에덴에는 질리와 그녀 자신만이 남게된다. 그게 바로 타라가 원 하던 바였다. 타라가 케이티를 돌보고 있을 때 질리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채 정신없이 짐을 챙겼다. 에덴에 이대로 머물다가는 그렉에 의해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돌아오기 전에 이곳을 떠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했다. 그렉의 성격으로 보아 돌아오면 자신부터 죽일 것은 분명했다. 비록 그렉의 약 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뻔한 일이다. 목숨은 하나 뿐이며, 하나 뿐인 목숨을 잃게 되면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다. 에덴에서 도망쳐 경찰서를 찾는 것도 중요 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은 살아야 했다. 짐을 챙기는 손이 떨리고 심장이 두근두근 심하게 요동쳤다. 가방을 대충 챙긴 그녀는 곧장 밖으로 나와 차고로 달려 갔다. 에덴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지프가 한 대 있다는 것을 질리는 알고 있었다. 우선 당장 내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죽음이 코 앞에 닥쳐있는 현재 가 문제였다. 그 지프를 몰고 가장 빠른 시간애에 에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야 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세상에!" 차고에 도착한 질리는 땅이 꺼 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텅빈 차고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이곳에 있던 지프는 경찰서로 가는 크리스가 몰고 가버렸다. 하늘이 무너지듯 눈앞이 캄캄했다. 주위를 살펴 보았지만 농사일에 사용하는 트랙터만이 있을 뿐 이었다. 그것을 타고 도망간다면 얼마 가지도 못하고 그렉에게 붙잡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말을 타고 갈 수도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질리는 말을 탈줄 몰랐 다. 배울 기회는 여러번 있었지만 그녀는 말타는 것을 싫어했다. 자동차를 타고 스피드를 즐기는 일이 그녀에게는 더욱 더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입 안의 침이 바싹 마르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언제 그렉이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정말 그에게 죽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생명을 보존해야 한 다는 생각 뿐이었다. 이렇게 생명에 애착심을 갖기는 처음이었다. "케이티!" 그녀 는 미친 듯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발악적으로 케이티를 찾기 시작했다. "케이 티!" 대답이 있을 리 없다. 무언의 대답만이 메아리를 칠 뿐이었다. 그 부분까지 이미 계산에 넣은 타라에 의해 질리는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것이다. 이제 질리 에게 도움을 줄 사람은 에덴에는 단 한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미친 듯이 허겁지 겁 에덴의 넓은 마당을 휩쓸고 다니던 질리는 다시 케이티의 방으로 내달았다. 방안에서 케이티를 보살피고 있던 타라는 갑작스러운 노크소리에 소스라치게 놀 랐다. 질 리가 이렇게까지 나오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타라였다. 질 리 가 케이티의 방으로 들어오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미친 듯 이 달려들어 싸움이라도 벌어지게 되면 이제까지의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될 판 국이었다. 질리는 계속해서 마치 두들겨 부수기라도 할 듯 문을 두드려댔다. "케 이티!" 타라는 재빨리 문 뒤로 가서 몸을 숨겼다. 문을 잠그긴 했어도 안전할 수 만은 없었다. 제정신이 아닌 질리에 의해 문이 부서질 정도였다. 다행스럽게도 질리는 한두번 소리치며 문을 두드린 다음 그대로 물러갔다. 케이티는 완전히 혼수상태에 빠진 게 아니었다. 단지 기운없이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뿐이었다. 타 라는 그 다음 단계의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숨을 죽이고 밖의 동정을 살 폈다. 질리의 발소리가 멀어지기를 기다려 잠긴 방문을 열었다. "이리 들어온." 문 밖에서 쪼그리고 있던 개가 기다렸다는 듯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영리한 에 덴의 개도 이미 옛주인을 알아보고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대기 중이었다. "착 하지, 응? 네가 내 대신 케이티를 잘 보살펴 줘, 알았지?" 개는 침대로 올라가 케이티의 곁에 않아 길다란 혀로 그녀의 두 뺨을 핥아 주었다. 케이티는 손끝하 나 움직일 기력이 없었지만 개를 알아 보았다. "너로구나, 귀여운 것... " 케이티 는 일정한 시간만 경과하면 예전처럼 건강하게 회복될 것이다. 타라는 케이티의 모습에 안심하며 재빨리 다음 단계의 계획을 위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질리는 자신에 엄습해오는 죽음의 공포로 인하여 새파랗게 질린 채 에덴의 구 석 구석을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구원의 손길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죽음의 공 포에 떨고 있는 그녀는 타라가 이층의 한 창문을 통해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 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들 어디 있는 거야?" 에덴 전체가 텅비어 있다는 적막감에 그녀는 몸서리치도록 무서웠다. 본채고 별채고 모든 것이 유령 의 집처럼 텅비어 있었다. "케이티!" 고함을 질러보았지만 메아리만이 허공을 맴 돌 뿐이었다. "케이티!" 목이 터져라하고 다시 사방에 대고 불렀지만 역시 마찬 가지였다. 타라의 완벽한 계획에 의해 그녀는 점차 질려가고 있었다. 가는 데만 도 세 시간이나 걸릴 악마바위로 타라를 찾으러간 그렉이 이곳으로 되돌아오려 면 늦은 밤이나 되어야 가능했다. 그동안 타라는 질리에 대한 복수를 철저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언뜻 질리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에덴에 무전장치 가 되어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에덴에 대해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 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전기는 이미 그렉에 의해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뜻밖 에도 그렉이 타라를 도와준 셈이 되었다. 무전기조차 망가져 있음을 확인한 질 리는 미칠 것 같았다. 더 이상 어떤 방법도 찾을 수 없다는 절망감으로 그녀는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렉이 돌아 오기만을 기다려 그의 손에 꼼짝없이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 음으로 질 리가 생각해 낸 것은 술이다. 술의 힘을 빌리면 무시무시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 녀는 술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술이 있을리 없었다. 이미 타라가 모두 숨겨 버린뒤였다. 타라의 계획은 너무나 완벽했다. 찬장에도 어디에도 술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정신나간 사람처럼 부엌의 모든 기물들 속을 찾았지만 헛수 고였다. 케이티도 없고 무전기도 망가진 채였다. 모든 것을 잊기 위하여 술을 찾 았지만 그것마저 없었다. 이제 질리는 정말 정신이 돌아버리기 직전의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점점 무서워졌으며 화가 치밀었다.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짓을 했 을까 싶어 그가 누구던 당장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렉의 짓일까 생각해 보았지 만 그의 짓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무엇 때문에 자신을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는지 알 길이 없었다.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포도주를 찾았다. 설마 웅장한 저택의 어딘가에 포도주라도 있겠지 싶어 사방을 찾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자포자기에 빠진 질리는 몸 속 깊이 파고 드는 절망감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 시간에 모든 상황을 훤히 파악한 타라는 넓 은 저택 안의 또 다른 방에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 복수의 시간이 왔다고 판단 했다. 자신이 만들어낸 모든 계획들은 완전하게 성공한 셈이다. 그녀는 은밀하게 장치된 옥내의 유선방송 마이크를 꺼냈다. 만감이 교차되는 가운데 마이크를 들 고 침대에 걸터 앉았다. 폐쇄회로의 카메라가 설치되지 않은 게 유감이었다. 질 리가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지 훤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술조차 찾아내지 못하 고 절망에 빠졌던 질리는 문득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안녕, 질리" 질리는 자신 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며 한기를 느꼈다. "고통을 잊 기 위해 술이라도 마시고 싶겠지만 너에게 줄 술은 없어"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기계장치를 통해서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어딘가 허공에 서 들려오는 악마의 저주같았다. "내가 누군지는 알겠지? 질리? 그래, 너도 알고 있을거야" 질리는 새파랗게 질려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어디에도 사람의 그림자 는 없었다. 더구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스테파니임을 알게되자 더욱더 새파랗 게 질렸다. "우린 어렸을 때부터 다정한 친구였어.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지?" 질리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확실한 스테파니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일년전에 이미 죽지 않았던가. 그녀가 느닷없이 에덴에 나타났다면 그것 은 유령일 수밖에 없다.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잘 알 거야, 질리. 우린 자매 보다도 더 친했었지." 마이크에 대고 말하는 타라 또한 옛생각을 다시 떠올 리며 슬픈 듯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넌 내 인생의 일부였어. 질리, 난 너를 굳게 믿었어. 누구보다 널 믿었어. 그런데 네가....질리 네가 나한테 그런 짓을...." 질리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분명한 스테파니 의 목소리였다. 가장 믿었던 친구의 배신을 증오하는 목소리였다. 어디서 들려오 는지 알 수 없지만 스테파니가 질리를 향해 다그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 란... 그만..." 질리는 겁에 질려 어쩔 줄 모르며 기어드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발 그만 둬..." 스테파니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었다. 새삼스 럽게 그 때의 일들이 떠올랐다. 악어에게 물리며 살려달라고 처절하게 울부짖던 스테파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난 네 마음을 알아. 질리, 네가 고통스러워 하는 걸 알고 있어. 넌 결국 그렉의 사랑을 완전하게 얻지도 못했어. 질투심과 분노에 하루하루를 보내며 고통받고 있겠지?" "그만, 그만!" 질리는 고함칠 기력조차 없 었다. 금방 쓰러질 듯이 비틀거리며 고통스럽게 중얼거렸다. 이미 그녀에게는 변 명할 어떤 구실도 있지 않았다. 스테파니의 말 그대로였다. 그렉의 완전한 사랑 을 얻지도 못했으며 질투와 분노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결국은 그렉으로부터의 죽음에 대한 공포심에 휘말려 떨고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들려 오는 스테파니의 목소리에도 울음이 섞여 있었다. "대답해 봐, 질리. 그렉이 그런 고통과 괴로움을 감당해도 좋을만큼 가치있는 인간이었니?" "그만!" 질리는 허공 을 향해 절규했다. "그런 무서운 죄까지 저지를 만큼 가치있는 일이었어?" 계속 되는 스테파니의 목소리도 서서히 바뀌었다. 슬픔에서 원망과 증오심에 가득찬 것으로 변했다. "너희 두사람 모두 나를 배신했어. 처음에는 그렉이 그리고 나중 에는 질리 네가, 알겠니? 그래, 질리, 너도 잘 알고 있을 거야. 너도 일말의 양심 이 있을테니까 그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을 거야" 견디다 못한 질리는 그 방에 서 뛰쳐나갔다. 그녀가 달려간 곳은 본채의 넓다란 거실이었다. 그곳에는 에덴을 세운 하퍼씨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질리와 친자매처럼 친하게 지냈던 시절의 스테파니 초상화도 있었다. 질리는 스테파니의 초상화 앞으로 다가갔다. 옥내의 방송시설은 그곳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질리, 지금의 네 심정이 어떤지 알만해. 충분히 알 수 있어. 하지만 그건 네가 선택한 거야. 네가 한낱 육체적인 욕정 때문에 날 배신하지 않았다면 애당초 이런 일은 생기지도 않았을 거야. 그 건 너도 알고 있는 사실이야." 처음에는 겁에 질렸다. 그리고 나중에는 양심의 가책과 함께 북받치는 슬픔으로 모든 사실을 허공에 대고 고백하는 질리의 모습 은 처참한 것이었다. "그건 모두 그렉의 생각이었어. 정말이야. 스테파니. 날 믿 어줘. 경찰에 가서도 거짓 진술을 하도록 그가 내게 강요했단 말이야...." 그녀는 스테파니의 초상화 앞에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결코 스테파니를 원망하지 않았 다. 그렉과의 육체적 쾌락 때문에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그동안 스테파니 의 실종으로 인하여 잔뜩 겁에 질린채 밤잠을 설친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 것을 잊기 위해 술을 마셨고, 그렉과의 육체적인 쾌락에 더욱 몰두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양심의 밑바닥까지 썩은 질리는 아니었다. 스테파니의 원망 에 가득찬 목소리만으로도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게 그 증거였다. 스테파니가 모습을 나타낸 것도 아닌데 그토록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난 그런일이 일어나 기를 바라지 않았어. 날 믿어줘. 지금 생각해도 너무 끔찍해. 무서워, 정말 무서 워 죽겠어." 질리는 허물어지듯 소파에 주저앉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더 이상 스테파니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들은 것만으로도 질리 는 무너져 갔다. "부탁이야. 스테파니 날 좀 도와줘, 난 지금 어떻게 해야할지 모 르겠어. 스테파니....제발...." 질리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과 두려움에 떨었다. 그 렉에 대한 죽음의 공포에 이어 이번에는 스테파니에 의해 양심의 가책으로 갈기 갈기 찢어져 처절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일들은 타라의 계획에 의해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자신을 배반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렉과 그리고 그에게 달라붇어 친구를 배신한 질리 두 사람을 가장 처절한 방법으로 복수하려는 그녀의 독기 품은 계획이 한 가지씩 완성되고 있는 것이다. 케이티에 의해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그렉은 악마바위를 향해 정신없이 말을 달렸다. 그가 타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타라 대문에 질리를 버리려 한다는 사실이다. 어디까지가 진 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렉은 에덴까지 쫓아온 질리를 미워하고 있는 것이 확 실했다. "타라!" 악마바위에 도착한 그렉은 사방에 대고 목청껏 불렀다. "타라!" 대답이 없었다. "타-라" 더욱 큰소리로 불러 보았지만 주인없는 메아리만이 대 답할 뿐이었다. 그는 질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질투심은 타라를 그냥 내버려둘 수 없을 만큼 폭발해 있었다. 혹시 어떤 속임수를 사용해서 타라를 시 드니로 돌려보냈을 수도 있었다. 타라라는 여인이 질리에 비해 생각이 깊은 여 자였지만 알수 없는 일이었다,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충분히 가능했다. 더구나 질리가 그러고도 남을 여자라고 느껴졌다. 그렉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갑자기 조급해졌다. 해는 이미 서쪽 하늘 저편에 걸려 있었다. 대낮과는 달리 황혼은 금 방 지기 마련이다. 머지않아 황혼이 지면 곧이어 어둠은 쉽게 찾아올 것이다. 다 시 에덴까지 돌아가기 위해서는 세 시간이나 필요했다. 제아무리 빨리 달린다고 해도 밤이되기 전에는 도착이 불가능 했다. 그렉은 다시 한 번 악마바위 주위를 살펴본 다음 이윽고 전속력을 내며 에덴으로 말을 몰았다. 만일 질리가 타라에 게 조그마한 위해라도 가햇다면 정말로 죽여버릴 작정이었다. 그밖의 일은 안중 에도 없었다. 자신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이미 스테파니를 죽인 그였다. 그에게 질리를 죽이는 일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스테파니를 향한 양심의 가책과 지 신의 처지 그리고 그렉에게 느끼는 죽음의 공포 등 마음을 가눌 길이 없던 질리 는 거의 탈진상태에 빠져 있었다. 타라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켜보며 또 다른 저주의 계획을 준비하고 있을 때 질리는 거의 탈진 상태로 소파에 쪼그리고 앉 은채 잠이 들었다. 그리고 몇시간 동안 죽은 듯이 잠에 취해서 스테파니의 악령 에 시달렸다. 질리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주위는 온통 어둠에 물들어 있었고 무덤 속 같은 적막만이 맴돌고 있었다. 그녀는 말발굽소리를 듣 고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렉이 돌아온 것이다. 그가 돌아왔을 때 거대한 저택 인 에덴은 어둠의 적막 속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어둠이 무서워 촛불을 켜 놓고 겁에 질린 질리가 웅크린 채 몸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에덴 전체가 어둠 에 휩싸인 이유에 대해 아직 질리나 그렉은 생각하지 못했다. 케이티는 아직도 그녀의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에피..." 기어드는 목소리로 스테파니의 애칭을 부르며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에피...아가씨...." 40년 동안 에덴에 살아온 그 녀만이 취할 수 있는 주인에 대한 복종심이었다, 주인에 대한 진정한 복종심이 무의식 중에도 배어나오고 있었다. 질리는 복도에서 들려오는 무거운 발소리에 몸을 움추렸다. 하지만 처음과는 느낌이 달랐다. 스테파니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 은 까닭이다. 스테파니의 유령이 찾아왔다면 그렉은 더욱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스테파니는 둘을 똑같은 배신자라고 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스테파니를 죽 인 것은 그렉이었다. 질리 자신은 곁에 있었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 다. 그 사건 이후에도 질리는 그렉에게 계속 협박당하며 지내온 것이다. 그런 점 에서 질리는 오히려 스테파니의 유령이 나타나기를 은근히 기다렸다. 스테파니 는 원래 정이 유난히 약했기 때문에 옛친구를 다시 생각할 수도 있다는 희망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이제 에덴에서 도망칠 어떤 방법도 없지만 스테파 니 유령등장 소식을 들으면 그렉도 마음이 변하리라 믿었다. 그렉은 질리를 잡 아먹을듯한 표정으로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섰다. 돌처럼 굳어 있는 그의 표 정에서 어떤 이성이나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타라는 어디 있어?" 그는 질 리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다그쳤다. "타라가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물어잖아?" 질리는 스테파니의 유령 이야기를 꺼내려 했지만 그렉이 성난 목소리로 다시 다 그치는 바람에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대답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 지?" 그가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질리가 만일 스테파니에 대해 얘기했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그렉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타라가 알게 된다 면 그녀는 에덴에 계속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기필코 시드니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렉은 다시 한 번 다그쳤다. 질리가 정말 타라에게 스테파니의 일을 얘기했다면 죽여버릴 결심을 하고 있었다. "빨리 말해! 그녀한테 무슨 말을 했지?" "아무 말도..." "솔직히 말해!" 그렉의 갑작스러운 고함소리에 질리는 넋 이 빠져 할 말을 잊고 있었다. 질리가 어느 정도 침착할 수 있었던 것은 스테파니의 유령에 관한 소식때문 이었다. 그 말에는 그렉도 어쩔 수 없이 겁을 먹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난 타라를 보지 못했어요." "뭐야?" "정말이에요. 왜 내 말을 믿지 않는 거죠?"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그냥 두지 않겠어. 자, 어서 말해. 그녀한테 스테파니 얘 기를 했지?" 그렉의 입에서 먼저 스테파니의 이름이 나오자 질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맞아요, 그렉" "역시 그렇군, 그래서 그녀가 시드니로 돌아간 거 지?" "돌아가요, 누가요?" "닥쳐!" "내말 들어 봐요, 그렉. 스테파니가 나타났어 요." 그렉은 그 말에 어처구니없이 하는 표정을 지었을 뿐 놀라거나 하지도 않았 다. "정말이에요. 그렉. 그애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어요. 틀림없이 유령이 나타 난 거예요." 그렉은 여전히 질리의 말을 믿지 않았다. 생각할 가치조차 없는 헛 소리로 취급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령 이야기 따윈 18세기에나 나오는 것 이니. "또 취했군!" 그녀를 술주정뱅이로만 취급했다. 질리는 그 말에 정색을 했 다. "내가 지금 취했다구요" "그래." "천만에. 날 보면 취하지 않았다는 걸 알잖 아요. 당신? 지금 내가 취한 것 같아 보이나요?" "타라는 어디 있어?" 그렉은 질 리의 말을 무시하며 다시 사납게 다그쳤다. 질리는 결국 스테파니의 유령문제에 대해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내 말을 믿지 않는데, 난 아무것도 신경쓰 고 싶지 않아요." 그 말에는 분명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스테파니의 유령이 나 타나면 한 번 당해 보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그렉은 지금 질리의 경고 따위를 다시 한 번 되새길 만큼 여유가 없었다. 또한 질리의 어처구니없는 말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의심했다. "분명히 말해두지. 멀리 떠난다면 너를 죽이지는 않겠어. 알겠지?" 질리는 다시금 안절부절하며 불안에 빠져 들었다. 이럴 때 스 테파니의 유령이 나타나서 그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면... "그렉, 제 발요" 질리는 할 수 없이 다시 애원하듯 말했다. "정말 스테파니의 육성을 들었 단 말예요. 이건 절대로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구요. 왜 믿지 않는 거죠?" 그렉 은 계속되는 질리의 이야기에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어떤 이야기를 누구한테 말 할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좋아, 대답해 봐." "뭘요?" "당신이 에덴에 온 걸 누가 알고 있지?" "비행기 조종사요" "그리고 또 없어?" 질리는 다시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렉의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조종사 외 에 당신이 여기에 왔다는 사실을 누가 알고 있지?" "없어요." "거짓말 마!" "여 기에 오기 전 시드니에서 누구한테 에덴에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 "아무한 테도요" "솔직히 말해!" "정말이예요!" 질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그렉이 그렇게 의심스럽게 묻는 이유는 한 가지 뿐이었다. 이럴 경우 그녀는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그녀가 에덴에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렉의 의도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 사실만을 강조했다. 따라서 그렉은 그녀를 감쪽같 이 없앨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미 수차에 걸쳐 그렉은 질리를 없애려 했다. 타라 웰즈를 만난 이후 그렉의 살인충동은 더더욱 반복되었다. 질리가 살아있는 한 언젠가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항상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었다. 질리처럼 질투심이 강한 여자일 경우 더욱 곤경에 빠질 위험성이 높았다. 그렉의 성격상 그녀 하나만으로 결코 만족하지 못할 바에야 질리는 암적인 존재였다. 질투심 강한 질리가 스테파니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 는 것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언제 꺼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순간의 연속이었다. 사건은 이미 경찰에 거짓으로 진술했지만 아무 때나 번복시킬 수 있었다. 낮에 도 경찰에 가겠다는 그녀를 말발굽으로 깔아뭉개려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있었기 때문에 겁만 잔뜩 주고 끝냈을 뿐이었다. 아직 타라의 행방조차 묘연한데 스테파니의 유령이니 어쩌니 떠벌이며 헛소리를 하는 질리를 이번에는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렉의 두 눈은 이미 살기가 번뜩이기 시작했다. 에덴은 이미 암흑에 싸여 있었고 그 인적없은 고도에는 그 렉과 질리 뿐이었다. 질리 하나쯤 없애는 일은 식은 죽 먹기 보다 쉬운 일이었 다. "정말 이곳에 온 사실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단 말이지?" "정말이에요. 그런데 왜..." "그리고 타라도 못 봤고?" "그래요" 질리는 갑자기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렉이 어떤 행동을 할 것이라는 예측 때문이다. "왜 그래요, 그렉? 날 어떻게 하려고..." "간단해." 그렉이 한 발 앞으로 내딛으며 성큼 다가섰다. "안 돼!" 질리는 갑자기 소리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그렉은 네가 뛰어 봐야 내 손안에 있다는 듯이 여유를 보였다. 다급해진 질리는 재빨리 도망치려 했다. "도와줘요!" 그러나 애절한 구원의 음성은 멀리 흩어질 뿐이었다. 누구하나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질리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섰고 그렉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그녀는 분명히 보았다. 그가 어떤 짓을 하려는지 의 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녀가 다시 도망치려고 몸을 움직이기 직전이었다. 소리도 없이 한쪽에서 등불이 나타났다. 순간 두 사람의 움직임이 정지되며 불빛을 향 해 눈을 움직였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둠 속에서 등불을 들고 서있는 무엇인가는 지옥에서 온 유령이었다. 불빛에 비친 그 모습이야 말로 유령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질리도 그렉도 그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질리는 멋모르고 구세주라도 나타난 양 그쪽을 향해 도움을 요청했다. "도와줘요! 저 사람이 날 죽이려 해요!" 외마디 소리를 질러댄 질리는 그제서야 불빛 뒤의 상대를 볼 수 있었다. 등불을 들고 있던 여자는 조용히 안으로 걸어 왔다. 그 분위기는 너무 신비하고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렉과 질리가 겁에 질려 말문이 막혀 있을 때 상대편에서 먼저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았을텐 데, 질리?" 그 모습은 타라도 스테파니의 모습도 아니었다. 화장끼라고는 전혀 없는 얼굴에 금발이었다. "너희 두 사람은 그 일을 완전범죄라고 생각했을 테지. 그런데 나는 그 늪에서 죽지 않았어." 그렉은 순간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스테파니 한 사람 뿐이었다. 하지만 앞 에 서 있는 여자가 스테파니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늪에서 거의 반 쯤 죽은 상태로 어느 고마운 분에 의해 목숨을 건지게 됐어. 아주 보기에도 끔 찍하게 흉칙한 몰골로 말이야.... 하지만 난 죽지 않고 살아있었어. 중요한 사실 은 바로 그거야" 질리는 이미 상대를 목소리를 통해 스테파니임을 확인했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상대가 스테파니라고는 아직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렉 역시 반신반의하는 빛이 역력해 보였다. 그는 부군가 두 사람을 골탕먹이기 위해 연 극을 꾸민 것으로 생각하고 싶은 듯했다. 그런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었다. 어떻게 당시의 상황을 알게 된 사람이 연극을 꾸며 그런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었다. 스테파니 그녀는 자신의 악 몽과 같았던 지난 일을 생생하게 떠올리며 두사람을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상처가 아물 때까지 그 분이 나를 치료해 줬지.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신비의 약 초로 만든 기적의 약이 나를 살려낸 거야." 그런 말들은 그렉과 질리에게는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떤 고마운 분이니 신비의 약초로 만든 원주민들의 기적 의 약이니 등 모두 생소한 말들 뿐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아직 등불을 들고 나 타난 스테파니의 모습에 대해 실감하지 못할뿐더러 믿으려 들지 않았다. 현실적 으로 이러한 상황은 발생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 분은 죽을 뻔한 나를 살려 줬을 뿐이 아니라 내가 그곳을 떠날 때 평생동안 모은 재산까지 줬지. 너희 같 은 살인자와 그와 같이 고마운 분이 세상에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 지지 않아." 스테파니의 음성은 점차로 격렬해지고 있었다. 그런 그렇게 간단히 회살할 수 잇는 것이 아니었다. 평생을 주고 되씹어도 다는 할 수 없을 만한 것 이었다. 신비와 절망감에 묻혀버린 한 시간은 한 달 보다 길었다, 뼈를 깎아내는 듯한 고통 그리고 절망감 등 세상의 어떤 극한 상황과도 비교되지 않았다. 상처 가 회복된 다음에는 육체의 고통보다 더욱 심한 정신적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수면 위에 비친 자신의 추악한 몰골을 발견했던 그 때는 차라리 죽을 생각까지 했었다. 그러나 가슴 한 구석에서 생겨나는 어떤 것이 그녀로 하여금 삶에 애착 심을 갖도록 만들었는지 지금와서 생각하면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돈 을 가지고 병원을 찾아가게 됐지. 멀리 떨어진 외딴 섬에 있는 병원이었지,. 그 병원에서 난 하늘의 도움으로 굉장히 유명한 정형외과 의사를 만나게 됐어. 그 리고 병원에 6개월 동안 입원했지...." 스테파니는 타운즈빌에 대해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정신적인 갈등과 고통, 수술에서 비롯된 찍어내는 듯한 통증 그리 고 수술 결과를 기다리며 초조해 했던 일 등이 아직 그녀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 아 있었다. 앞으로 죽는 날까지도 스테파니는 그 일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렉 과 질리는 넋이 빠져 한마디도 말하지 못했다. 그들은 아직 실감하지 못하고 있 는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스테파니는 이미 죽은지 일년도 넘었다. 당시 그 늪 속의 악어한테서 살아났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 앞에 서 있는 여자는 스테파니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타라의 모 습도 아니었다. "그 병원에서 퇴원할 때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지. 의사에게 부탁해서 내 얼굴을 바꾸어 달라고 했었으니까... 그 기간 동안 내가 얼마나 그 일에 대한 생각들로 복수의 칼날을 갈았는지 알기나 해?" 비로소 그 렉과 질리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지금 한 말에는 그럴 듯한 부분이 있었다. 그들이 보고 있는 여자는 스테파니가 아니라는 의문이 풀린 것이다. 정형외과에 서 얼굴의 모양을 바꾸는 일은 이상할 게 없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 모 습이 스테파니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의혹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된 것이다. 그 동안 두 사람을 생각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는 스테파니의 말에 그렉보다 질 리가 먼저 등골이 오싹해졌다. 실감은 나지 않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그 말 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한다면, 하는 생각과 함께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흘러내렸 다. 과거의 악몽에 대한 추억과 함께 스테파니는 스스로 격정에 사로잡히기 시 작했다. "때로는 증오와 배신감 때문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어. 그냥 경찰에 가 서 내가 누구이며 어떻게 사고를 당했는지 털어 놓아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었 지. 하지만 그것 만으로는 가슴에 맺힌 한이 풀릴 것 같지 않았어, 그보다는 당 신들 두 사람을 완전히 파멸시키고 싶었어." 그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못하며 넋 이 나가 있던 그렉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런 엉뚱한 말을 지껄이고 있는 당 신은 누구지?" "지금까지 듣고도 아직 나를 모르겠단 말이지?" "정체를 밝혀!" 질리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지만 그렉은 그렇지 않았다. 질리는 이미 스테파니의 존재를 믿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그렉보다 스테파니에 대한 느낌이 마음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아무리 그럴 듯하게 꾸며대도 모두 거짓말이야.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순간 스테파니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 졌다. 간단히 말하고 있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가 또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동안 받았던 고통은 상상할 수도 없 는 것이었다. "왜, 무엇 때문에 나를 파멸시키려 했던거지?" 그 질문은 그렉과 질리에게 한 것이었다.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그렉 이 잠깐 여유를 두고 다시 강력히 부정했을 뿐이다.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파멸시키지?" "여전히 믿으려 들지 않는군, 그렉 마스던."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 그렉은 갑자기 스테파니를 무섭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 소 리에 질리가 놀랐을뿐 스테파니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그렉의 말을 무시하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했던 두 사람이 말이야..." 그녀는 울먹이는 듯했지만 그것은 슬프기 때문이 아니다. 분노와 증오심 때문이었다. 지나친 분노와 슬픔은 그녀에게 눈물조차 마 르게 했다. 스테파니는 그쯤해서 이야기를 마무리짓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그 이 상 무슨 말을 한다해도 그렉은 받아들이거나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자, 이제 이 일의 가장 큰 아이러니를 아셔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내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말이야." 그 말과 함께 스테파니는 쓰고 있던 금발 의 가발을 벗어던졌다. 그 속에는 원래의 스테파니 머리카락이 있었다, 그녀는 보라는 듯이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적어도 이런 기회를 나에게 준 것에 대해 서는 감사해야 되겠군" 비로소 그렉과 질리는 놀라며 더듬거렸다. "타라...." "타...라...." 타라의 모습이 완연했다. 처음에는 스테파니로 보이도록 가발 등을 사용했으나 그 가발이 벗겨지자 타라의 모습이 되돌아온 것이다. 스테파니의 얼 굴을 되찾고 싶어도 그 일은 불가능했다. 성형수술은 완전히 스테파니를 타라로 변시시켜 놓았으므로 앞으로 그 얼굴은 영원히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댄 마샬 은 특별히 영구적인 성형수술을 시술했던 것이다. 처음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 리고 어둠 속에서 조용히 나타났을 때 질리는 틀림없는 스테파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모습이 타라가 분명해지자 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경찰이 곧 올 거야, 이미 사람이 갔으니까." 스테파니는 그것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끝 났다고 생각했다. 그 만큼 충격을 주었으면 나머진느 경찰에서 법에 따라 처리 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엇다. 철창에 갇혀 지은 죄를 뉘우치게 되기를 기다리려 는 게 그녀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결정이 얼마나 위험스럽고 어리석 을 짓이 었는지 스테파니는 예측하지 못했다. 그년느 그렉의 검은 마음을 모르 고 있엇다. 경찰이 곧 달려올 것을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은 제시간에 와 주지 ㅇ았다. 그렉과 같은 살인자가 상대일 경우 더욱 그렇다. 질리의 경우엔느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스테파니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숨도 제대호 쉬지 못하고 잇었지만 그렉은 그렇지 않았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건 무슨 짓이 건 할 수 있었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테파니와 질리 뿐만 아니라 에덴 까지도 말살시킬 수 있었다. 지신을 위한 일이라면 세상의 무서운 짓도 서슴지 않을 인물이 그렉이었다. 그는 아직 스테판니를 믿지 않는 듯했지만 실상은 속 으로 겁을 먹고 있엇다. 스테파니의 설명ㅇ르 의심할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죽지 않고 살아소 오늘날 타라 월즈가 돠어 다시 나타난 것에 의심할 여지가 없 었다. 에덴 전체는 스테판니에 의해 아직 정전으로 무덤 속처럼 어둠에 싸여 있 다. 조그만 촛불과 스테파니가 들고 있던 등불이 겨우 세 사람만의 공간을 밝히 고 있ㅇ르 뿐이었다. 자신의 정첼르 밝히고 사후 계획까지 ㅂ힌 그테파니는 밖 에서 경찰차의 사이렌소리만이 들리길르 기다렸다. 경찰 앞에서는 제아무리 그 렉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밖에서는 아직 아무런 소리도 들 리지 않고 있었다. 크리스가 실수할 리가 없었다. 그는 분명히 경찰서의 짐에게 스테파니의 쪽지를 전하고 이미 에덴으로 돌아와 있었다. 심상치 않은 사건이 발생할 것을 예측한 크리스는 정원의한 언덕 위에 모닥불ㅇ르 패울놓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때 근느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의식을 진행하고 있 었다. 얼굴과 몸에 온통 흰색과 붉ㅇ느 색으로 칠한 다음 모닥불 앞에서 괴상한 춤을 추었다. 스테파니에게 무사안일ㅇ르 기원하는 부족들의 의식이었다. 근느 어둠 속에서도 유일하게 불빛이 새어나오는 한 방에서 잠시도 눈길ㅇ르 떼지 않 았다. 그 안에 잇는 세 사람의 모습도 보고 있었다. 선천적으로 그는 특히 어둠 을 뚫고 사물을 볼수 있는 능력이 뛰어났다. 스테파니가 등불을 들고 그 방에 들어갈 때부터 한 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스테파닐르 돕기 위해 달려갈 준빌르 갖추고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대기 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느 순간 그렉이 반응을 보일 것은 뻔한 일이었다. 가만히 서서 경찰이 달려와 쇠고랑ㅇ르 채울 때까지 기다릴 그렉은 애당초 아니었다. 그렉ㅇ느 곧장 스테파니에게 덮칠 기세로 달려들었다. 슨식간에 벌어진 사태에 깜짝 놀란 스테파닌ㄴ 뒤로 몸을 피했고 그와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등불이 바 닥에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석유가 바닥에 쏟아지며 카페트 로 불길이 옮겨붙었다. 스테파니로선느 상상도 못했던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경찰을 아직 소식도 없었고 그렉은 다시 사납게 그녀를 향해 덤벼들었다. 밖에 서 지켜보고 있던 크리스가 깜짝놀라며 잽싸게 어덴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스테파니가 위험에 빠진 것ㅇ르 직감한 그는 한 걸음에 그 방까지 달려왔다. 때 마침 그렉은 스테파닐르 두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어떤 정신적인 능력에도 불 구하고 스테파니는 연약한 여자의 몸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악에 받친 그렉 에게 그녀는 형편없이 미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질리는 손끝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 불안에 떨고 있었으며 스테파니는 고통스러운 비명소리를 냈다. 이 상 태가 계속되면 그렉은 그녀의 목을 졸라 그 자리에서 살해할 것이 분명했다. 이 때 질리는 밀려드는 심적 갈등으로 인하여 몸을 떨어야마나했다. 이미 그렉에게 도 배신을 당한 상태였다. 근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질리를 죽이려 했음이 분명 했다. 스테파니가 나타나주지 않았으면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스 테파니가 비록 북수의 일념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렉과는 틀릴 것이다. 그년느 두 사람을 경찰에 넘겨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질리는 스테파니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질 리가 스테파니를 위해 어떤 행동ㅇ 르 하려고 할 때 느닷없이 밖에서 들이닥친 크리스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아무런 대비책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크리스는 그렉의 몸을 뒤쪽에서 부둥켜 안은 채 스테파니로부터 떼어놓으며 그를 뒤쪽의 바닥으로 던졌다. 그가 나가떨어진 곳 은 공교롭게도 불이 붙은 카페트 위였다. 처잘한 비명소리가 그레ㅣ에게서 터 져나왔다. 입고 있던 옷에 불이 붙은 것이다. 근느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허둥댔 지만 근느 살인자답게 강인한 심장ㅇ르 가진 사내임은 확실했다. 등에서 불길이 활활 타올랐지만 좌절하지 않고 불이 붙지 않은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위험 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그는 크리스 그리고 스테파니와 질 리가 초조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그렉ㅇ느 필사적으로 바닥에 뒹굴며 불을 끄 는데 성공했다. 그가 위기에서 벗어난 이상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옷에 불을 끈 그는 벌떡 일어서며 매수처럼 으르릉 거렸다. 카페트에 붙은 불은 그 사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창가로 옮겨가기 시적했다. 당황한 스테 파니는 커튼자락을 휘둘러서 불을 끄려고 했다. 하퍼 가문의 상징인 에덴을 음 흉한 살인자로 지금 이시간 할 수 있는 방법은 너무 미약한 것 뿐이었다. 그녀 가 불을 끄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에도 그렉과 크리스는 격렬한 싸움을 벌 이고 있었다. 힘에는 어느 누구보다 자신이 있는 크리스였다. 아침에 그가 손목 을 움켜잡았을 때 그렉은 꼼짝도 하지 못했었다. 크리스는 지금껏 한 번도 남 과 싸워본 적이 없었다. 싸움은 힘만 가지고 승리할 수 없는 법이다. 우리 안에 서만 살던 짐승ㅇ느 야생의 짐승을 당할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그렉은 테니스 선수 출신으로 특히 테니스로 단련된 그의 팔 힘은 어떤 누구도 얕잡아 볼 수 없게 굉장했다. 크리스가 점차 궁지에 몰린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조 금 전부터는 질리도 합세해서 불을 끄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원수도 배신자도 이 순간에는 중요하지 않았다. 에덴을 불길에서 구하지 못하면 그 안에 있는 사람들도 위험했다. 만일 그 불길이 아니었으면 크리스에게 결정적인 위험은 닥 치지 않았을 것이다. 눈이 뒤집히도록 포악해진 그레은 굉장한 힘을 발위했고 크리스는 계속해서 궁지에 몰렸다. 더구나 그 방에는 벽의 장식장 속에 엽총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렉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미친 사람은 힘이 더욱 강해지 기 마련이고 살인자인 그렉은 놀랄 만큼 침착했다. 한 치의 실수도 그는 용납하 지 않았다. 크리스를 떠밀면서 엽총이 보관되어 있는 장식장까지 간 그렉은 아 무거나 손에 잡히는대로 집어들고 장식장의 유리문을 박살냈다. 그런 다음 크리 스가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그 안에있던 엽총을 재빨리 꺼내들었다. 스테파니 와 질리는 불을 끄기에 여념이 없었다. 별안간 한 발의 종성이 사방을 진동시켰 을 때 스테파니와 질리는 기절할 듯이 놀랐다. 상황은 금방 명확해졌다. 살인자 그렉은 스테파니를 해치지 못하도록 하려는 크리스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것이 다. 크리스의 비명소리에 스테파니는 어쩔 줄 몰랐지만 달려가서 돌봐줄 수도 없었다. 그렉ㅇ느 총을 가지고 있었으며 크리스의 다음 목표는 그녀일 것이 분 명했다. 크리스는 구석의 벽에 기댄 채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며서서해 무너 져내리고 있었다. 이윽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스테파니를 향해 어서 도망치라 는 눈짓을 보냈다. 그렉이 크리스로부터 천천히 돌아서며 스테파니를 향했다. 그 의 두 눈은 살인자의 광기로 번뜩이며 입가에는 잔인한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 다. 그는 스테파니를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그곳에 머무는다는 것은 그렉이 죽 여 줄 때를 고스란히 기다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낮추며 가구를 은폐물로 삼아 그 방에서 빠져나갔다. 에덴의 건물 구조에 대해 그녀는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ㅇ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렉이 제아무리 민첩하다고 해도 당장 스테파니를 붙잡지는 못했다. 스테파니는 이미 사라졌고 그렉은 엽총 을 움켜잡은 채 눈빛을 번뜩이며 추격하기 시작했다. 이미 질리의 존재는 그레 에게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스테파니를 찾는 일이 급선부였다. 스테파니가 살아 있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계획이 완전히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뿐이 아 니었다. 이미 신고를 받은 경찰이 언제 들이닥칠지 알 수 없었다. 현재의 급박한 상황하에서는 그는 즉시 에덴에서 도망쳐야했다. 경찰이 들이닥치기 전에 어딘 가 먼 곳으로 종적ㅇ르 감추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의 내부에서는 살인자의 잔 인성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이대로는 도망칠 수 없었다. 스테파니를 죽인 다 음 도망칠 작정이다. 가능하다면 질리도 함께 죽이고 싶었다. 사견의 진상ㅇ르 알고 있는 두 사람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경우 증언 할 사람이 없어지게 되 어 완전범죄로 완전히 미궁에 빠질 것이다. 따라서 그 사견을 영원한 미해결로 남게 될 수도있는 것이다. 질리는 소방수의 역할이 자신의 본분인 양 불끄는 일에만 매달렸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도망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스테파니를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뿐이라 고 결심이라도 한 듯했다. 한편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리라고는 꿈에도 색각지 못했던 케이티는 긴 잠에서 깨어나 침대르 내려왔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정신이 말짱해졌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그녀는 침대를 내러와 곧장 밖 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어ㅉ된 일인지 방문이 밖에서 잠겨있었다. "세상에 이 런 일이!..., " 자신이 방에 갇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에덴에서 그녀를 방에 감금시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짚히는 사람은 그렉 뿐이었다. 그가 아니 고서는 누구도 그런 짓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스테파니가 만일에 대비해서 밖으로 나오지 못아게 했다는 사실은 짐작조차 못했다. 크리스가 이미 그렉의 총에 맞았으며, 스테파니 역시 그렉의 총에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는 사실도 알 리 없었다. 더욱 에덴에 불이 났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스테파니는 경찰 이 연락받는 즉시 출동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질리와 그렉을 잔뜩 겁먹 게 하려는 게 그녀의 첫 번째 목적이었다. 다움에는 그들에게 충격과 함께 정신 적인 복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찰에 넘기는 것이었다. 그녀의 계획은 모두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렉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리라고는 도저히 예상치 못한일이었다. 에덴이 워 낙 넓고 광활하여 자신을 숨기는 일은 쉬운 일이었지만 그렉의 무서운 총구가 노리는 한 결코 안전지대만은 아니었다. 20 스테파니늬 모습은 어둠의 장막에 휩싸인 에덴에서 감쪽 같이 사라져 찾을 수 없엇다. 주변이 온통 칠흑같은 어둠으로 더욱 찾아내기 힘들었다. 손전등을 들고 잇었지만 그 불빛으로 볼 수 있는 시야의 폭은 한정된 것일 뿐이었다. 앞으로 나갈 만한 길을 밝힐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렉이 스테파니를 쫓아나간 다음에도 질리의 불끄는 작업은 필사적이었다. 덕분에 불길은 잡을 수 있었지만 그동안 ㅁ았던 연기 때문에 그만 질식해서 바닥에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그렉은 이 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전장에서 적군을 사살하기 위해 수색하고 있는 군인처럼 눈이 뒤집혀 사방으로 스테파니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스테파니의 모습은 그의 시야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고 흔적조차 없었다. 아래층을 오른느 그의 발길은 조 금도 거침이 없었다. 그에게는 총이 있었고 스테파니에게는 아무런 무기도 없었 다. 그것뿐이 아니다. 스테파니는 이미 완전히 겁에 질려서 전의를 상실하고 있 었다. 스테파니가 사고를 당한 이후 에덴의 이층은 사용하지 않았다. 모든 가구 와 집기들은 흰천으로 씌워놓았고 마치 텅빈 유령의 집처럼 보였다. 왠지모르게 기분이 섬ㅉ했지만 스테파니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곳 저 곳을 손전등으로 비치며 뒤져 보았지만 이층에서도 스테파니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다. 에덴은 너무나 광활했다. 어느 한곳에 쥐죽은 듯 숨어 있으면 찾아낼 방 법이 없었다. 그런데다 스테파니는 에덴을 손바닥 들여자 보듯 훤히 알고있어 그녀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장소가 에덴에는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었다. 그렉은 체념하듯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아래층의 현관문 앞에서 그는 근처에 스테 파니가 있는 것같았다. 두 눈에 불을 켜고 둘러보았다. 하지만 주위가 너무 어둡 고 손전등 만으로는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실제로 그때 스테파니는 그 근 처에 있었다. 청소도구를 보관한느 창고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렉은 그 런 곳에 창고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스테파니는 문틈으로 엿보다가 그렉이 나간 다음 창고에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그곳도 계속해서 안전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어딘가 좀더 안전한 장소를 찾아내야 했다. 그녀는 뒤쪽의 별채를 생 각해냈다. 그렉은 별채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잘 모르고 있을 것이다. 웅장한 성곽처럼 자리잡은 에덴은 드넓은 정원을 두 팔로안은 듯이 본채와 별채가 나란 히 지어져 있었다. 스테파니의 끝없는 숨바꼭질에 그렉은 더욱 약이 올랐다. 이 제 그에게는 스테파니를 찾는 일만이 전분였다. 그녀를 찾아 죽여버리고 에덴을 떠나겠다고 다시 한 번 결심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는 그녀를 찾을 수없다는 것 을 알고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 결과 한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현재와 같 이 어두운 상황에서는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서 빨리 불을 밝혀 야만 하는 것이다. 우선 불부테 밝힌다음에 스테파니를 찾아나서야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스테파니가 어둠을 이용해 별채로 급이 달릴 때 그렉은 차고로 향했 다. 그곳에 지프가 있었지만 지프보다 트랙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 지 프보다 트랙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순간적으로 그는 굉장해 무서운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트랙터로 에덴의 건물 한 귀퉁이를 미어버리는 것이었다. 그즘 되면 스테파니도 가만히 숨어 있지만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트랙터에 시 동을 걸자 즉시 요란한 소리를 내며엔진이 가동되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꺼버 렸다. 그러나 그때 더욱 좋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기 땜문이다. 그는 회심의 미소 를 지으며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이때 스테파니는 바교적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숨은 채 그렉의 행동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렉이 발전실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야챈 순간 크게 당황하고 놀랐다. 그가 그곳까지 알고 있을 줄 은 몰랐다. 전혀 계획에 없던 상상못했던 일이었다. 그래서 그냥 정전만을 시켰 을 뿐이었다. 에덴에는 비상시에 대비한 자가발전시설이 되어 있었다. 이미 빗나 가기 시작한 그녀의 계획은 더욱 위험한 상황으로 치닫기 시적했다. 완전히 눈 이 뒤집힌 그렉에게 들키면 끝장이다. 그는 무자비하게 그녀의 심장을 챵해 총 구를 겨눌 것이다.더구나 그엽총에는 산탄이 아닌 무쇠탄환이 들어 있었다. 들새 나 잡으려면 산탄이 필요하지만 산짐승은 그렇지 않았다. 무쇠탄이라야 잡을 수 있었다. 사람도 한 발이면 끝장이다. 그리스가 이미 그 총에 맞은 것을 스테 파니는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한편 시드니에 있는 스테파닝 집에서는 그 밤이 빨리 지나가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댄을 비롯해서 데니스와 사라가 가슴을 조이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그만들 들어가서 자도록 하렴, 날 이 밝아야 떠날 수있다니까." 댄은 어느틈에 두 아리에게 가장 소중란 어른이 되 어 있었다. 사라도 데니스도 그를 종아했다. 그가 엄마의 친구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기도 했지만 그런 사람 정도면 엄마의 친구가 되어도 좋을 사람이라는 생각 이었으므로 믿음이 갔다. "잠이 오질 않아요, 아저씨." "저도요." 데니스와 사라 는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너희들 심정은 애해한다. 하지만 잠을 자두지 않으면 내일 피곤할 텐데 괜찮겠니?" "상관없어요" 데니스에 이어 사란느 댄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을 꺼냈다. "그동안 엄마 생각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새 운적이 하루 이틀이 아녜요" "그랬겠지." "엄마의 사고 소식ㅇ ㄹ들었을 때는 며 칠 동안 꼬박 새웠어요." 곁에 있던 데니스가 겨들었다. "정말이어요 그때 누난 먹지도 않고 잠도 안잤어요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는 걸요." "그 마음이 노죽했 겠니. 충분히 애해할 수있다." 댄 역시 그들 남매가 남처럼 생각되지 않았다. 왠 지 모르게 아주 가깝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어린 남매가 엄마 때문에 겪었을 고 퉁을 생각하며 마음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요, 아저씨." 데니스는 갑자 기 생가난 석이 있는 듯 했다. "뭐지?" "엄마가 무엇 때문에 그렉 같은 사람을 사귀는 걸까요. 에데까지 같이 가구요" "글세..." 그부분에 대해서는 댄도 자신의 추측을 말해줄 수없었다. 근느 이미 어떤 직감을 가지고 불안에 떨고 있었다. 타라가 타운즈빌에서 수술받기 전과 전혀 다른 얼굴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던 말이 생생했다. 그리고 그 일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분명한 피해자였다. 피해 자가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가해자 측에서 정체를 숨기기 위해 모습을 바꾸고 싶어하는게 정상이었다. 그는 스테파니가 그렉에게 접근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도그들이 에덴으로 갓다는 것을 그의 짐작을 더 욱 확인시켜 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렉이 처음부터 맘에 들지 않았어요." "저도 그랬어요 아주 나쁜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에덴의 케이티 할머니는 엄마를 죽인게 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케이티 할머니?" "그 할머닌 에덴에서 40년도 더 살았대요무뚝뚝하긴 해도 좋은 할머니세요." "가정부시니?" "네." 데니스와 사라는 에덴에 대해 알고 있는 일들은 모두 댄에게 들려 주었다. 댄은 그 이야 기들을 들으며 새삼스럽게 스테파니가 걱정되었다. 그는 점점 스테파니가 복수 하기 위해 그렉을 에덴으로 데려간 것이 확실시 되는 것 같았다. 어떤 경우에도 복수에는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더구나 스테파니의 상대는 남자였으므로 충 분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렉이 일 년 전에도 그녀는 죽이려 했으니 더 그녀의 목숨은 위험할 수 있는 것이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서 진행 되고 있었다. 스테파니는 그렉이 단지 테니스 선수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착각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가 비상용 발전기를 능숙하게 가동시 키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단전으로 어 둠 속에 휩싸였던 에덴이 밝아오면 스테파니는 그만큼 숨을 장소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발전기를 가동시킨 그렉은 에덴의 모든 전등과 조명을 어떻게 밝히는지 도 알고 있었다. 불과 몇 분만에 에덴의 전기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정원 과 풀장의 수중전등까지 켜지자 한동안 암흑 속에 묻혀있던 에덴 전체가 대낮처 럼 밝아졌다. 그만큼 스테파니의 위험성은 높아졌다. 이미 독이 오를대로 오른 그렉은 에덴을 밝힌 다음 총을 가지고 다시 스테파니를 찾기 시적했다. 스테파 니는 자리를 옮기기가 매우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한곳에만 머무를 수도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말들을 날뛰게 하고 그 뒤에 숨어서 장소를 옮기는 게 고작이었다. 또 다른 더 좋은 방법은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스테파니!" 드디 어 그렉이 정원의 현관 앞으로 나서며 고함을 질렀다. 스테파니는 슴을 죽였다. 그녀는 그가 사방에 총구를 겨누며 언제라도 방아쇠를 당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에게 발각되면 즉시 사살당할 것이다. 그렉은 에덴의 어 느 지점에서나 자신의 모습이 보일 수 있는 장소에 자리를 잡았다. 그동안 스테 파니는 몇 차례 숨는 장소를 옮겼지만 더 이상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어서 나 오지 못해, 이 나쁜 년아!" 그는 모든 것을 스테파니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마 티 스테파니 때문에 모든 일이 일어났고 그녀가 자신을 해채려들기 때문에 정당 방위를 위해 용감하게 나섰다는 식이었다. 그는 스테파니를 욕하면서 저주까지 했다. 그것은 살인자이며 악마인 그렉 자신의 야욕을 달성하지 못하게 만든 탓 이었다. 그렉에 의하면 이미 스테파니는 죽였는데 무엇 때문에 살아서 돌아왔느 냐, 너는 다시 죽고 내가 재산을 물려받아야 된 다라는 논리였다. 그는 계속해서 사방을 향해 맹수처럼 부르짖었다. "널 죽여버릴 거야! 왜 숨어있는 거지? 넌 지 금 나를 굉정해 화나게 만들고 있어!" 건물에서 벗어난 스테파니는 정원의 나무 뒤에 몸을 숨긴채 그렉의 저주섞인 음성을 듣고 잇었다. 하지만 그곳도 언제 발 각당할지 알 수 없었다. 별안간 총성이 울리며 심야의 에덴을 뒤흔들었다. 총소 리에 스테파니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렉이 갑자기 우리 안에 갇혀 버린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는 다시 건물 안으로 향하더니 계단을 올라가 이층으로갔다. 이등 창가에 우뚝 서 다음 정원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그리고 이 번에는 실제로 정원의 구석구석을 향해 마구잡이 식으로 총을 난사하는 것이었 다. 일종의 위협사격이었다. 그 효과는 굉장한 것이어서 스테파니는 완전히 죽음 의 공모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일이 이렇게 진행도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다. 자신의 계획대로 복수극이 무사히 성공할 줄 알았다. 하진만 이미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어 위험에 빠진 것은 그렉이 아니었다. 경찰이 한시바삐 와 주지 않는다면 그렉에게 죽임을 당하게될 것은 스테파니 자신이었다. 미친 듯이 사방 에 대고 총을 난사하던 그렉은 다시 큰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소 리가 스테파니에게는 악마의 웃음으로 다가왔다. 그의 음흉맞고 잔인한 웃음소 리는 에덴을 완전한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는 과기 때문에 제정신 을 잃은 게 분명했다. 불을 끄다가 연기에 질식해 의식을 잃은 질리는 치명적인 것이 아니기에 점차 의식을 되찾았다. 의식을 되찾은 질 리가 먼저 말견한 것은 크리스였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은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죽은 듯이 조용히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광경을 목격한 질리는 자신도 모르게 몸서 리를 쳤다. 크리스가 그렉과 싸우던 광경이 되살아난 것이다. 그렉이 크리스에게 총을 쏘던 광경도 떠오랐다. 그리고 그때의 그렉의 소름끼치는 눈초리도 생생하 게 떠오르자 다시 한 번 몸서리를 쳤다. 문득 스테파니가 궁금해졌다. 그동안 무 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흑시 그렉이 이미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에 갑자기 마음이 아파왔다. 돌이켜보니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일 년 전 그가 스테파니를 죽였을 때 떠났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마 땅히 그를 경찰에 고발하고 친구를 위해 그와는 더 이상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렉은 또 다시 스ㅌ니의 상처난 가슴에 못질을 하기 시작 했다. 이미 체념했고 미친 개한테 물린 것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렉 의 그와 같은 언동은 아픔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렉의 잔인성과 교활함은 끝끝 내 스테파니에게 독소로 작용하여 가슴에 맺히고 있었다. "잘 들어, 스테파니. 난 타라리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어. 처음부터 믿음이 가지 않았어." 그말들은 스 테파니의 귀에 똑똑히 들렷다. 그토록 타라에게 열성적이었던 그렉이었다. 그게 또 모두 거짓이었다고 했다. 필요하다면 아무 때 어디서나 자신의 모습은 바꿀 수 있는 카멜레온 같은 남자였다. 의식을 되찾은 질 리가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그 방을 나오고 있을 때쯤 그렉은 더욱 교활하게 스테파니를 비난했다. "우리가 어떻게 사랑을 나누었는지 기억할 테지? 그래, 넌 아직 기억하고 있을 거야. 그게 어떤 느낌이었는지 말야." 그렉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 스테파니의 가 슴 속으로 파고들어 날카로운 송곳 끝처럼 아프게 찌르고 있었다. 여자인 그녀 가 그런 일들ㅇ르 잊을 리 없었다. 그렉은 스테파니와의 부부관계에 대해 타라 에게 분명히 고백했었다. 스테파니느 나이도 많고 몸도 뚱뚱해서 재미가 없었다 고 했었다. 그말의 의미 때문에 그때 그녀는 말할 수 없는 비탄에 빠졌었다. 여 자에게 정신적인 사랑이 중요한 것처럼 육체도 그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그 재미의 개념은 여자에게 결정적인 것일 수 도 있었다. 그 어느 것보다 치욕적인 말들로 스테파니는 갈기갈기 찢기는 정신 적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었다. 그런데 그렉은 지금도 계속해서 그녀의 아픈 부 분을 난타하기 시작했다. "그 때의 일이 모두 기억날테지? 그래, 기억날 거야, 잊 을리 없지, 나보다 네가 더 정확히 기억하고 있을거야. 너하고 관계를 하느니 살 찐 암퇘지가 더 나을 거야" 그 마지막 말에 스테파니는 혀를 깨물고 싶었다. 그 가 총을 겨누고 있다고 해도 당장 달려나가 물어뜯고 싶기까지 했다. 그렉은 그 렉대로 약이 올라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떠들어 대며 약을 올려도 스테파니는 모습을 나타낼 기미조차 보이지 않자 심장이 터져벌릴 것 같았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언제 불쑥 경찰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 서 멈출 수는 없다. 경찰이 오기 전에 스테파니를 쏴 죽이고 에덴에서 도망쳐야 만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디에가 있어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스테파니의 영혼까지 갈기갈기 찢은 다음 떠나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리나와 봐!" 때로는 이지적으로 그리고 또한 발악적으로 고함을 쳐댔다. 그러다가 빈정 거리기도 했고 다시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스테파니, 내가 무서워서 도망치는 거냐? 그는 주변의 모든 곳을 향해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스테파니 넌 절대로 내게서 도망치지 못해! 넌 반드시 내 손에 죽어 줘야만 해, 그런 형편없는 육체 를 가지고 살면 뭘해, 안 그래?" 분위기는 다시 그렉의 미친 듯한 고함소리로 인 하여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끝내 스테파니의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갑자기 그렉에게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 다.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스테파니는 그의 행동에 의아해 했다. 그렉이 마굿간 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테파니는 그가 말을 타고 도망칠 것이라 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예상은 무섭게 적중했다. 그렉은 그녀가 가장 소중히 아끼는 킹을 끌고 나왔다. 그가 어떤 짓을 저지를 것인지 알고는 숨이 막혔다, 그렉은 스테파니가 더 이상 숨어 있을 수 없는 가장 교활한 방법 을 생각해 낸 것이다. 그는 킹의 고삐를 잡고 풀장이 있는 사방에서 가장 잘 보 이는 지점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잘 들어, 스테파니! 당장 내 앞으로 나오지 않으면 킹을 여기서 쏴 죽이겠어! 내 말 들려! 다섯까지 세겠다. 그 안에 나오지 않으면 킹은 끝장이다." 그 일은 스테파니에게 최악의 위기였다. 킹은 그녀의 목 숨만큼이나 소중한 애마였다. 킹이 죽는다면 자신도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떤 위험이 닥친다고 해도 킹은 죽이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하나, 둘, 셋, 네엣.... 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스테파니는 그렉의 음모에 무릎을 끓고 말았다. "안돼!" 그녀는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그렉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럴 줄 알았지" 그렉의 입가에 만족스럽고 잔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리 가까이 와!" 스테파니는 그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킹을 살리기 위해서는 불가피 한 일이었다, "킹을 놔 줘요!" "이리 가까이 오기나 해" 그렉이 버럭 소리를 질 렀을 때였다. 돌연 킹이 세차게 소리를 지르며 뛰어 올랐다. 고삐를 쥐고 있던 그렉은 킹의 굉장한 힘을 감당할 수 없었다.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킹의 앞발에 채여 저만큼 바닥에 나가 떨어지고 말은 것이다. 영리한 킹은 자신에게 위험이 닥친 것을 알아차린 게 분명했다. 킹은 그렉을 쓰러뜨린 다음 곧장 자신의 집인 마굿간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스테파니는 얼 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가 있는 장소는 풀장과 가까운 곳이었고 그렉은 거기서 좀더 떨어진 곳에 쓰러졌지만 부상은 당하지 않은 듯했다. 잠시 후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그렉은 겁에 질린 채 굳어 있느 스테파니를 무섭게 노려 보았다. 이때의 스테파니는 전혀 무방비 상태였다. 거기다 그렉은 방금 전 킹에게 공격을 당했기 때문에 극도로 잔인하고 포악스러워졌다. 그가 어떤 가혹 한 행동을 해온다고 해도 이 순간의 스테파니는 속수무책이었다.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는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이 때 뜻밖의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렉은 떨어뜨린 총을 다시 집어들지 않았다. 구태여 총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고 느꼈거나, 아니면 또 다른 악랄하고 교활한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 분명했다. 일순간 그렉은 스테파니를 향해 질풍처 럼 덤벼왔다. 그가 달려드는 기세로 인해서 스테파니는 그와 함께 풀장속으로 곧장 쳐박히고 말았다. 순식간에 당한 스테파니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며 그에게 서 도망치려 했다. 스테파니도 수영에는 누구에게도 지지않을 만큼의 실력이라 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이미 광기에 가득찬 그렉은 무서운 힘을 발휘했다. 어느 틈엔가 뒤쫓아 와서는 그녀를 물 속으로 쑤셔 넣었다. 스테파니 는 다시 도망치려 했지만 이번에는 발목이 붙잡혔다. 그렉의 억센 손에 의해 다 시 물 속으로 곤두박질친 것이다. 그렉은 그녀를 물 속에 쳐넣어 물귀신을 만들 작정이었다. 그것은 일년전의 악몽과 너무 흡사했다. 그 때는 악어에게 당했고 지금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에게 당하기 직전이다. 스테파니는 필사적이었지만 그렉의 억센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제발 이러지 말아요! 제발..." 잠깐 물 위에 떠오르면서 애원했지만 그렉은 더욱 잔인하게 그녀를 물 속으로 짓눌렀다. "도와 줘요!" 도움을 청했지만 달려와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크리스는 그렉의 총에 맞았고 케이티는 스테파니에 의해 방에 갇혀 있었다. 스테파니는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게 된 셈이다. "그렉!" 스테파니는 완전히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서 부르짖었다. 멋지게 복수를 하려던 그녀의 계획은 극단적인 위험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그렉은 그녀를 두 번째 죽이기 직전이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그 녀는 이제 곧 그렉에 의해 두 번 죽게 되는 것이다. 질 리가 스테파니의 고함소 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또 하나의 기적을 예고하는 신의 가호일지도 모를 일 이었다. 그녀는 급히 풀장을 향해 뛰어갔다. 거기서 스테파니가 그렉에게 당하는 광경을 보며 크게 놀랐다. 순간적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스테파니를 도와줘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스 테파니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질리는 두 번씩이나 스테파니의 죽음의 순간 을 목격하게 된셈이다. 첫 번째는 악어에게 그리고 이번에는 그렉에게 죽기 직 전이었다. 질리는 스테파니가 필사적으로 물가를 향해 도망치는 것을 보았다. 하 지만 다시 그렉에게 붙잡혔다. 그렉은 그녀를 물 속에 깊숙이 쳐박으며 악마처 럼 웃었다. 죽음 힘을 다해 잠깐 물 위로 치솟으면 이내 쳐박혔다. 그렉은 여기 에 만족하지 않고 스테파니를 물 위로 끌어올려 두 손으로 목을 조르기 시작했 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는 질리의 마음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긴장되었 다. 스테파니가 그렉에게 죽임을 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살기 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안절부절하며 떨리는 가 슴으로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질리의 마음이 갑자기 변한 것은 그 잠깐 뒤다. 그것은 그렉이 저지른 죄의 인과응보였다. 그렉은 확실히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 었다. 그는 단순히 스테파니를 죽이려는 것만이 아니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 는 일들이 그 상황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죽음의 문턱으로 들어서며 몸이 늘어지기 시작한 스테파니의 얼굴을 두 손으로 쳐들더니 별안간 입술을 빨 아댔다. 불빛이 밝았기 때문에 질리는 그의 미세한 행동까지도 볼 수 있었다. "더러운 놈!" 옆에서 지켜만 보던 질리의 입에서 낮은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녀 는 바로 앞에 떨어져 있는 총을 발견했다. 그렉이 스테파니의 목을 심하게 조르 려할 때 돌연 한 발의 총성이 에덴의 밤공기를 무자비하게 흔들어 놓았다. 그와 동시에 그렉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소리가 터져나오며 물 속으로 떨어져서 가라 앉았다. 총을 들고 있는 질리를 스테파니가 발견한 것은 잠깐 뒤의 일이었다. 그 녀가 그렉을 쏘았던 것이다. 스테파니의 바로 앞 물에 시뻘건 피가 번져올라왔 다. 스테파니의 놀라움이 극도에 달한 순간 돌연 바로 앞에서 물기둥 같은 게 치솟아올랐다. 그렉은 죽지 않고 왼쪽 어깨에 선혈이 낭자한 채 오른쪽 손으로 움켜잡고 고통스러워 하며 떠오를 것이다. 그는 아직 총을 들고 있는 질리를 악 어보다 더욱 섬뜩한 눈빛으로 노려 보았다. 질리는 총을 든 채 겁에 질린 표정 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약사빠른 그렉은 그녀를 알고 있었다. 스테파니에게 다 시 어떤 짓을 하거나 질리를 공격하면 그녀는 분명히 두 번째 방아쇠를 당길 것 이다. 그는 결국 질리에 의해 심한 총상을 입고 더 이상 어떡할 수 없는 자포자 기의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질리의 총구로 인하여 스테파니를 죽이지 못했다는 사실이 자신을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만큼 포기도 빨랐다. 그는 악어 보다 무섭게 질리와 스테파니를 노려본 다음 천천히 움직였다. 선혈이 풀장의 물을 붉게 물들인 것으로 보아 총상은 심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렉은 연신 신 음소리를 내면서 풀장에서 밖으로 나왔다. 그가 무슨 행동을 하려는지 그들은 알 수 없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도망치듯 걸어가는 모습에서 조금 전의 당당함 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를 동정하며 도와줄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그 는 비틀거리면서 한 곳을 향해 계속 걸어갔다.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은 격납고가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스테파니는 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아직 기진맥진한 상태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까운 곳에 서 있는 질리 를 쳐다보았다. 질리는 아직 총을 든 채로 멍한 상태가 되어 스테파니를 내려다 보았다. 그렉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지만 더 이상의 위험은 없다고 판단한 듯했 다. 격납고까지 걸어간 그렉은 한쪽 팔만으로 커다란 철문을 힘겹게 밀어제쳤다. 심한 총상으로 혼미상태에 빠진 그였지만 그는 또하나의 음모을 꾸미고 있었다. 그가 두 번째의 격납고 문을 젖먹던 힘을 다해 밀고 있을 때 스테파니는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질리에게로 다가가 그녀가 들고 있던 총을 건네받았 다.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은 다음 그녀의 양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그러나 질리 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무표정할 뿐이었다.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은 스테 파니 역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무거운 정막만이 두 사람을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반감이 교차된다는 것은 그런 경우를 두고 생겨난 말 같았다. 스테파 니는 그녀대로 그리고 질리 역시 할말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동안의 모든 일 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다만 결론적으로 이번에는 질리가 스테파 니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그녀로 인하여 그렉을 결정적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그 결과로 그렉은 격납고에서 비행기에 올라타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스테파니와 질리는 마주 보면서 천천히 주저앉았다. 스테파니 는 질리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건에 대해 감사해야 할 지 미워해야 할지 스테파니는 판단이 서지 않는 듯했다. 형언할 수 없는 침묵 속에 시간은 조금씩 소리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스테파니는 이 순간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렉의 흉악한 손아귀에서 무사히 벗어난 것만을 생각하 고 있었다. 그 외의 어떤 생각도 없었다. 케이티와 크리스에 대한 생각조차 없었 다. 그렉이 심한 출혈로 인하여 점차 몽롱해지는 의식 속에서 비행기의 조종석 으로 기어 올라가는 것도 스테파니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무사히 시드니로 돌아간다면 또 어떤 흉계를 꾸미고 나타날 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비행 기로 에덴을 떠나려는 것은 단순히 도망치기 위한 것만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그가 살아있는 한 스테파니와 질리는 화약고에 있는 것처럼 늘 불안속에서 살아 갈 것이다. 격납고에서 비행기의 엔진이 작동되는 소리가 들렸을 때 스테파니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 비행기는 에덴의 상징이기도 했다. 에덴을 세운 하퍼 씨의 것이었다. 특별한 일 외에는 누구도 그 비행기에 손을 대지 못했다. 그렉은 그 비행기를 몰고 에덴에서 도망치려는 것이었다. 비로소 스테파니는 갑자기 정 신이 번쩍 들었다. 그 비행기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렉에게 줄 수 없었다. 자신 을 죽이고 에덴을 파괴하려 했으며 하퍼그룹까지 탈취하려 들었던 그렉에게 도 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스테파니가 격납고 쪽으로 향했을 때 비행기는 이미 활주로로 굴러가고 있었다. "안돼! 그럴 수는 없어!" 스테파니는 다급하게 중얼거리며 뛰어갔다. 비행기가 진행하는 방향으로 달렸다. 그 앞을 가로막으며 두 팡를 저었다. 그와 같은 스테파니의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렉이 그녀의 말을 들을 이유는 만고에 없었다. 오히려 위험이 있을 뿐 이다. 그렉은 마지막으로 스테파니를 비행기의 바퀴로 짓이기고 가버릴 수도 있 었기 때문이다. "안돼!" 그녀는 커다랗게 부르짓었다. "그렉!" 엔진소리 때문에 그녀의 외침은 사방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녀는 단념하지 않았다. 활주로를 점 점 빠른 속도로 굴러가는 비행기를 계속 따라가며 부르짖었다. "그렉! 안돼!" 무 모한 일이었다. 그렉은 심한 출혈 때문에 몹시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조종간을 놓지 않았다. 에덴을 빠져나가야 된다는 놀라운 집념으로 드디어 비행기를 활주 로에서 무사히 이륙시켰다. 스테파니는 절망에 휩싸인채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 았다. 그 비행기는 아버지의 가장 소중한 유물이었다. 그 비행기를 몰고 다니며 하퍼그룹을 탄생시켰다. 가장 소중한 가보를 그렉 같은 살인자에게 탈취당한 것 이다. 한편 그렉의 조종 실력은 아마추어급을 뛰어넘었다. 비행기 조종에는 자신 이 있었다. 그가 에덴을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방법으로 비행기를 선택한 것만 으로도 알 수 있었다. 에덴에는 지프도 있었지만 쓰지도 않던 비행기를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경우는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는 질리에 의해 심 한 총상을 입고 응급처치도 봇한 상태였다. 선혈이 조종실 바닥을 붉게 물들였 다. 비록 테니스로 단련된 건장한 몸을 가졌다 해도 심한 출혈을 오래도록 감당 할 수는 없었다. 의식이 몽롱해지면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조종석의 계기판들이 어지럽게 돌아가기 시작했고 곧이어 아예 보이지 않았다. 시시각각 상태가 심각 해지면서 드디어 조종간에 쓰러지고 말았다. 활주로를 떠난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며 망연자실해 하던 스테파니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비탄에 빠진 채 숨을 헐떡였다. 바로 그 직후였다, 돌연 공중에서 요란한 폭음이 울리며 섬광 이 번쩍였다. 불길이 치솟고 두 번째의 폭발음과 함께 검은 연기와 불길이 커다 랗게 피어오르는게 분명히 보였다. "그렉!" 그녀는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그것은 그렉을 생각해서가 아닌 원한에 가득한 외침이었다. 끝내는 에덴의 상징이며 아 버지의 가장 소중한 유물까지 말살시킨 그렉에 대한 저주의 외침이었다. 그렉이 그 비행기와 함께 공중에서 산화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비명소리조차 한 번 내지 못하며 순식간에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폭음에 기 절해 있던 크리스가 눈을 번쩍 뜬 것도 기적적인 일이었다. 지옥같은 에덴의 하 룻밤에서 처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은 그렉 한 명뿐이었다. 에덴에 새로운 아침 이 밝았다. 악몽에서 완전히 깨어난 스테파니는 이미 타라 웰즈라는 그동안의 가명을 영원히 벗어던지고 원래의 스테파니 하퍼로 돌아와 왔다. 아침 일찍 경 찰서의 짐이 부하들을 데리고 달려왔다. 그들은 우선 총상을 입은 크리스를 응 급처치한 다음 들것에 태워 구급차로 향했다. "잠깐 기다려요." 스테파니는 들 것을 들고 있는 경찰관에게 부탁한 다음 누워있는 크리스에게 다가갔다. 크리스 는 조용히 누워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옛주인을 다시 찾은 기쁨 때문인지 그는 전혀 고통스러워 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고마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옛주 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과감히 던진 크리스였다. 어떤 물질적인 보상 으로도 그 마음에 보답할 수는 없었다. 스테파니의 다정한 손길이 크리스의 머 리카락을 만져 주었다. 그녀는 다시 허리를 굽혀 크리스의 이마에 감사 키스를 해 주었다. 크리스는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옛주인의 다정한 모습을 지켜 보았 다. 옛주인의 진심을 마음 속 깊이 새겨 두려는 것이었다. "됐어요" 크리스는 구 급차로 옮겨졌다. 다행히 그렉처럼 심각한 상태는 아니어서 분명히 머지않아 왼 쾌되어 다시금 에덴으로 돌아올 것이다. 경찰서의 짐이 질리를 데리고 집안에서 나왔다. 숄을 걸치고 있는 질리의 모습은 몹시 창백했다.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며 스테파니의 눈빛을 살폈다. 스테파니도 그녀에게 할 말이 없었다. 두 여 자는 잠깐 시선을 마주했을 뿐 그 동안의 일들로 그들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 다. 어느 편에서도 뭐라고 먼저 말을 꺼낼 수 없는 분위기였다. 비록 복수의 대 상이었지만 결정적인 순간 질리는 스테파니를 구해 주었다. 그 문제는 스테파니 가 차후 법정에서 질리를 위해 증언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렉과 함께 그동안 스테파니를 배신한 부분은 심판을 면할 수 없었다. 자신이 낳은 아이들 외에 가 장 소중한 존재라고 믿었던 질리 스튜어트였다. 두 여자는 결국 그와 같은 상황 에서 에덴에서 서로 헤어져야만 했다. 이윽고 질리는 경찰관에 의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스테파니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경찰서의 짐형사는 아직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동안에 있었던 일 들의 결과가 그런 것일 줄은 예측하지 못했다. 스테파니의 실종에 대해 강한 의혹을 품었지만 타라 웰즈에 대해서는 전혀 예측도 추리도 하지 못한 게 사실이었던 것이다, "전 아직도 믿을 수 없습 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니!" 스테파니 역시 침묵으로 답할 뿐이었다. "보내 주신 메모를 읽고도 한동안 믿어지지 않더군요. 빨리 오지 못해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은행카드와 필적을 대조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기 때문이죠." 짐은 스테파니가 크리스를 통해 보낸 쪽지의 필적과 전에 그녀가 은행에 남긴 필적을 대조하는작업을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것이다. "와줘서 고마와요." "이렇게 에덴으 로 다시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그럼..." 짐이 경찰차로 향했을 때 케이티가 다가 왔다. 그녀는 아가씨를 그렇게 다시 찾은 이상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 했다. "아가씨?" "케이티..." 케이티는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소녀처럼 기쁨을 감 추지 못하며 스테파니에게 몸을 기댔다. 스테파니 역시 하마터면 영원히 만나지 못할 뻔했던 친어머니를 만난 것보다 마음이 더욱 기쁘고 편해지는 것을 느꼈 다. 스테파니는 자신의 모습에서 타라웰즈의 이미지를 완전히 씻어내려고 노력했 다, 그녀는 더 이상의 타라 웰즈가 아니었다. 모델작업에 매력은 느꼈지만 그보 다 더욱 중요한 일이 있었다. 첫 번째는 그동안 절망 속에서 살아왔을 때 두 아 이들, 즉 데니스와 사라에게 엄마의 사랑을 안겨 주어야 했다. 다음에는 그동안 모든 책임을 지고 고생한 빌에게서 하퍼그룹의 경영을 넘겨받는 것이었다. 하퍼 그룹의 어누 누구도 그녀의 복귀를 반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댄 마 샬이 있었다. 자신의 계획 때문에 거짓으로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 다음 밤새도록 혼자서 울었던 그녀였다. 무전기는 다시 수선이 되었고 시드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댄이 두 아리를 데리고 곧 에덴에 도착한다는 연락이 비행기로부 터 타전되어 왔다. 스테파니의 기쁨을 무엇이라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가족의 소중함과 함께 자유의 무한함을 동시에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멀리 창공에서 비 행기 소리가 들렸을 때 스테파니 하퍼는 이미 그들을 맞을 준비를 끝낸 상태였 다. 그녀의 가슴은 몹시 뛰기 시작했다. 40년 동안 살아오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동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 저리고 아프게 느껴지고 있었다. 비행기가 착 륙하자 잠시 후 두 아이의 모습을 발견했다. 사라와 데니스가 창문을 통해 내다 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아이들은 죽음에서 엄마를 다시 건졌고 엄마는 품에 안지 못할 뻔한 아이들을 다시 찾은 것이다. 이 순간 만큼 은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었다. 비행기의 문이 열리고 앞다투어 내려서는 두 아 이가 보일 뿐이다 큰소리로 웃으며 달려오는 꿈에도 못잊었던 두 아이만이 시야 를 가득 채웠다. "엄마!" 두 아리를 향해 스테파니 하퍼도 마주 달려갔다. 그들은 북받히는 슬픔과 즐거움으로 부둥켜 안았다. "사라! 데니스 얘들아..." 너무나 커 다란 감동과 감격에는 눈물이 나지 않기 마련이다. 미친듯한 웃음만 터져나올 뿐이었다. 엄마도 아이들도 울지 않았다. 드넓은 활주로에 마냥 기쁨으로 넘치는 웃음소리가 가득할 뿐 또 다른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대로 언제까지 부 둥켜 안고 있고 싶었다. 모성애라는 것이 이렇게 클줄이야 예전에는 미처 몰랐 다. 아이들의 느낌이, 냄새가 그리고 모든 것들이 바로 행복의 지렛대라는 것을 스테파니는 새롭게 깨달았다. 자신이 그동안 그 아이들의 엄마였던가 싶었다. 믿 어지지 않았다. 그런 날이 와 주리라는 기대를 잊어버린게 언제인가 싶을 뿐이 었다. 비행기에서 또 다른 사람이 옆으로 다가왔다. "엄마, 누군가 맞춰 보세요." 데니스는 어른스럽게 비행기 쪽을 가리켰다. "아는 분이죠?" 사라도 한마디했다. 항상 우울하고 공연히 남을 경계하던 모습은 사라에게서 찾을 수가 없었다. "댄!...." 스테파니는 감동과 서러움에 목이 메인 채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 의 목소리는 마냥 들떠 있었다. "그럼 얘들아, 알고말고! 너무너무 잘 아는 분이 란다." 그녀는 댄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댄 역시 그녀를 향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서 가서 마중해야죠, 엄마." "어서요" 데니스와 사라가 엄마 를 떠밀다시피 재촉했다. 남매는 그동안 댄과 굉장히 친해 있었다. 그가 마음에 들었고 의지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엄마를 되찾게 해 준 댄에게 평생동안 은혜 를 갚고 싶었다. 스테파니와 댄이 만나 손을 잡았을 때 남매는 활짝 웃었다, 그 들이 껴안았을 때에는 남매도 더욱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어떠니? 데니스?" 사 라가 먼저 물었다. "뭐가?" "저기...." 사라는 눈짓으로 키스하는 스테파니와 댄을 가리켰다. "좋아" "너도 그렇지?" "그래. 너무 보기 좋은 걸!" 데니스와 사라는 뜨거운 키스를 나누는 엄마와 엄마의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진심으로 축하를 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