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으로 돌아오다-1 꿈이 있는 집 출판 시드니 셀던 지음 이정화 편역 주요 등장 인물 스테파니 하퍼(타라 웰즈) 호주 제일의 대 그룹인 하퍼 그룹의 상속녀. 탁월한 두뇌에 인정도 많지만 그룹의 경영에만 전념한다. 결혼해서 남매를 두고 남편과 사별, 오랜만에 사랑을 깨닫고 재혼하지만 그 길은 처절한 운명으로 이어진다. 그렉 마스던 스테파니 하퍼의 재혼 남편. 한때 명성을 떨친 테니스 선수였지만 슬럼프에 빠져 재벌의 상속녀인 스테파니와 결혼하지만 스테파니의 친구인 질리 스튜어트와 애정행각을 벌이며 스테파니의 재산을 노리고 살해하려 한다. 질리 스튜어트 스테파니의 가장 친한 친구로 바람기가 대단한 여자. 이미 결혼한 남편으로 두고 스테파니의 남편인 그렉과 눈이 맞아 불륜에 빠져 친구를 배신하지만.......... 댄 마샬 유명한 성형외과 전문의이며 스테파니 하퍼를 완전히 다름 여자로 변신시켜 톱 모델을 만들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조안나 랜들 유명한 모델 에이전트이며 스테파니 하퍼를 톱 모델로 만든다. 케이티 에덴에서 평생을 보낸 노파, 스테파니 하퍼를 누구보다 아끼고 친어머니 이상으로 사랑한다. 크리스 에덴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자란 흑인 하인이며, 케이티처럼 스테파니 하퍼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긴다. 빌 하퍼 그룹의 총 지배인이며 스테파니를 딸보다 더 아끼며 그녀의 죽음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다. 제 1부 행복의 단절 1 거울처럼 맑은 물이 잔잔하게 일렁이는 호수를 앞에 두고 자리를 잡은 에덴은 저택이라고 말하기보다는 하퍼 가문의 왕국이었다. 그곳은 가문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곳으로 언제부터 그곳이 에덴으로 불렸는지 후손들로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그곳은 에덴이라는 이름과 같이 자신들의 행복한 보금자리로만 인식되어질 뿐이었다. 마치 성서에 등장하는 에덴동산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그곳은 꿈과 희망과 안락이 넘치는 집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에덴의 유일한 상속녀인 스테파니 하퍼가 그녀의 아버지인 에덴의 군주를 영원의 세계로 떠나보낸 것은 17년 전, 그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스물 세 살로 세상의 일들에 대해선 전혀 눈을 뜨지 못한 순진한 아가씨였을 시절이었다. 스테파니 하퍼의 아버지는 에덴에서는 왕이나 다름없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왕이나 다름없던 아버지의 임종 앞에서 스테파니는 하염없이 울었다. 평소 절대적인 권위와 아버지의 다정함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아버지 모습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한계였음을 스테파니는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넓은 저택과 많은 방들도 그 순간만큼은 모두 침묵의 무거움에 짓눌려 있었다. 저택 안을 기어다니던 아주 작은 벌레조차도 주인을 잃은 슬픔에 빠진 듯 사방은 조용하기만 했다. 다만 돌아가신 아버지의 주검 곁에 엎드려 흐느껴 우는 스물 세 살의 스테파니의 슬픔은 소리 없이 살아서 조용히 저택 안을 물결칠 뿐이었다. 그 소리는 인간과 인간의 영원한 작별에 대한 의미이기도 한 듯 끝이 없었다. 스테파니는 그날의 슬픔과 외로움 그리고 말할 수 없는 두려움에 몸과 마음을 떨었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있어선 유일한 존재로 아직도 그 품안에서 보호해 줄 수 있는 아늑하고 절대적인 보금자리였다. 스테파니는 자신이 짊어져야 할 운명에 대한 한마디의 유언도 없이 돌아가신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이후 하퍼 가문의 막대한 유산이 그녀에게 상속되었지만 그것으로 행복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삶의 본질을 돈과 재물에서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스테파니에게는 시작부터 문제들이 발생했다.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가슴에 안겨줄 큰 불행들일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때, 이후에 자신에게 불어닥칠 모진 풍파를 일견하기만 했다면 스테파니는 기꺼이 아버지를 따라 죽음의 세계로 함께 따라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장례식 이후 스테파니는 몰려드는 슬픔을 걷잡을 수 없었다. 자신의 사랑하는 말을 타고 숲을 헤치고 평야를 끊임없이 달리기도 했지만 외로움과 두려움은 가셔지지 않았다. 에덴의 충실한 하인들도 근심에 잠긴 채 그녀를 걱정할 뿐이었다. 특히 에덴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늙은 케이티 아주머니와 어린 아기 때부터 에덴에서 태어나 자라고 늙어 온 흑인인 충실한 하인 크리스의 걱정은 남달랐다. 하인들은 혼자서 말을 달리며 슬픔을 감추는 스테파니를 지켜보며 한숨이 나왔다. 스테파니의 슬픔은 에덴에 속한 모든 이들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후 얼마 안되어 외로움을 느끼던 스테파니는 곧 결혼을 했다. 하지만 그 결혼은 그녀를 행복한 삶으로 만들어 주지 못했다. 딸 사라와 아들 데니스가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 일도 스테파니에게 행복을 주지는 못할 뿐 아니라 일생을 통해 씻어버릴 수 없는 오점만 남게 할뿐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사별한 지 정확히 17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지표를 시작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혼과 더불어 새로운 사람과의 재혼이었다. 새롭게 출발하려는 이 순간이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점이 느껴졌으나 당사자인 스테파니 하퍼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꺼림칙해 하는 것은 재혼할 상대인 그렉에 대한 평판 때문이었다. 그는 건실한 면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전형적인 바람둥이로 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그가 스테파니의 재산 때문에 정략적으로 결혼하려 한다는 소문이 조심스럽게 나돌기조차 했다. 언뜻 보기에도 매력이 넘치는 그가 연상의 여자를 더구나 이미 두 아이의 어머니이기까지 한 스테파니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의혹이 이미 세간에선 나돌았던 것이다. 하퍼 가문의 명성만큼 스테파니의 재혼에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매스컴은 물론 각계각층의 저명한 인사들이 대거 이들의 결혼식에 참석하였다. 그들의 또 다른 관심은 하퍼 가문에서 경영하는 대 그룹의 총수 자리에 관한 내용이었다. 사실상의 총수가 스테파니인 만큼 가난뱅이 그렉이 결혼 후 과연 그 자리를 넘겨받아 총경영권을 쥐느냐 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여자이기는 하지만 스테파니는 아버지와도 같은 총지배인 빌과 그 외의 여러 핵심간부들의 보좌로 인해 그룹의 운영은 탄탄하게 꾸려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스테파니는 두 번이나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셈이었다. 처음 결혼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모두의 축하를 받아 축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치러진 결혼이 비극으로 끝났을 때,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랐다. 그리고 다시 기다렸다는 듯이 연하의 무일푼의 바람둥이와 재혼을 하게 되자 모든 사람들은 의외의 빠른 진행과정에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성대한 결혼식 준비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속속들이 결혼식장 안으로 모여들었다.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친 채 스테파니는 결혼식을 진행시키기 위해서 신랑인 그렉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각 매체에서 나온 기자들도 대재벌인 스테파니 하퍼와 그렉의 결혼을 남보다 먼저 그리고 특종으로 다루기 위해 정원에 모인 채 그렉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객들이 타고 온 자동차가 마치 전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주차장에 가득히 주차해 있었고 여지없이 오늘의 결혼에 대한 관심들은 여기 저기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저기 온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소리치자 일제히 그쪽을 바라보았고 기자들은 뒤질세라 뛰어갔다. 그렉은 결혼선물로 스테파니에게서 받은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결혼식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 두 아이까지 있는 연상의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 자신의 희생이라고 하듯 그는 얼굴 가득히 애매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가 타고 있는 승용차는 금방 기자들에 의해 에워싸여 플래시가 연거푸 터지고 여러 개의 녹음기가 그렉에게 집중되었다. "그렉 씨, 세계 제일의 부유한 여자와 결혼하는 소감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기자의 질문에 그렉은 만족한 미소로 대답했다. "그야 물론 좋죠." 단조로운 대답이었다. 적어도 그에게선 멋진 신사의 품위나 느낌 같은 것이 풍기지 않았다. 또 다른 기자의 질문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결혼생활의 성공여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자신 있습니다." 그는 그제서야 자신 있다는 표정을 억지로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기자들의 질문공세를 은근히 걱정하는 눈치였다. 이번과 같은 결혼이 기자들에게 있어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스테파니가 세계 제일의 부유한 여자로 알려져 있는 반면 상대는 전혀 그렇지 못한 처지였으므로 이번 결혼에서 드러나지 않은 내막을 찾아내려고 기자들은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차가 멋지군요." "고맙습니다." "이 차는 결혼 선물로 받으신 건가요 그렉 씨?" "예." 그렉은 약간 어색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여자에게 자동차를 선물 받았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는지 그렉의 표정은 밝아 보이지 않았다. 기자들은 계속 끈질기게 파고들었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당신이 스테파니의 돈을 보고 결혼한다고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그렉 씨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요." 그는 거기서 잠깐 망설였다. 안면에 불쾌한 표정이 스치는 것을 기자들은 놓치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그렉이 스테파니를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렉이 만일 진실된 남자라면 무엇보다 먼저 사람들의 그와 같은 의혹을 불식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는 전혀 그런 빛이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그렉은 항변이라도 하려는 듯이 약간 불쾌하게 대답했다. "그런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어대건 그건 그들의 자유죠." "무슨 뜻이죠?" "우린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번 결혼이 사랑하기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물론이죠." 그렉에게는 되도록 빨리 그곳에서 벗어나려는 빛이 역력했다. 그렉이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키는 이유는 분명했다. 스테파니가 경제계에서 돈독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면 그는 테니스 선수로 유명했다. 그가 각종 대회에서 상금을 휩쓸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만 스테파니의 재산에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특히 낭비벽이 심하고 여성 편력도 심하기로 유명한 그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사치와 허영에 들떠 있는 여자 팬들은 그를 테니스계의 영웅으로 생각하고 흠모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일부 스포츠 담당 기자들 사이에서는 그렉의 심한 낭비벽으로 미루어 볼 때 머지않아 돈 많은 여자와 결혼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돌기까지 했었다. 결국 그는 기자들의 뜻을 따르기라도 한 듯이 세계 제일의 갑부인 스테파니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그렉이 아무리 도망치려해도 기자들은 쉽게 물러나지 않을 기세였다. "당신의 테니스계의 스타입니다. 그렉씨." "고맙습니다." "설마 이번의 결혼을 계기로 테니스계를 떠나시는 것은 아니겠죠?" "천만 에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는 펄쩍 뛰었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좋습니다만, 아시다시피 모두들 저를 기다리고 있으니 간단히 질문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스테파니 양과 결혼하는 당신을 사람들은 지독히도 운이 좋은 사내라고들 말하는데요." "그래요?"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시죠?" 그렉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설마 신문에서 떠들고 있는 일들을 모두 사실이라고 믿는 것은 아니실 테죠?" 이내 다른 기자가 파고들었다. "그렉 씨, 이번이 초혼이시죠?" "물론입니다." "스테파니 씨는 재혼에다 슬하에 남매가 있는데요?" "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질문이 점점 노골적으로 곤란한 사항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자 그렉은 이내 당황했다. 그가 만일 스테파니와의 결혼에 대해 완벽한 확신이나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면 기자들의 짓궂은 질문에 당당하게 맞서야 할 것이다. "솔직히 여기서 너무 시간을 지체한 것 같군요. 다음에 봅시다." 기자들도 더 이상 그를 붙잡지 못했다. 그가 대답하지 않은 나머지 질문들은 각자의 예상에 맡겨진 셈이다. "결혼생활이 행복하기를 빕니다." 그들은 그렇게 그렉의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그게 진심이든 아니든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그렉은 잠시후 스테파니 하퍼와 결혼 할 것이다. 그리고 세계 제일의 부유한 여자의 남편으로 당당히 자리를 잡을 것이다. 테니스계의 바람둥이 스타 그렉과 경제계의 일인자로 평가받는 하퍼 그룹의 총수가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함께 부부가 되려고 하고 있었다. 스테파니 하퍼는 대외적인 명성과는 달리 매우 온순한 여자였다. 순진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어느 모로 보나 그녀는 하퍼그룹의 총수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이층에서 결혼식을 기다리는 동안 질리와 함께 있었다. 질리는 스테파니의 친구지만 성격부터가 그녀와는 완전히 달랐다. 얌전하고 여성의 전형적인 품성을 갖춘 스테파니에 비해 질리는 매우 개방적이고 탐욕적이었다. 어릴 때부터 두 여자는 함께 성장했지만 성격 차이 때문에 자주 의견충돌이 빚어지기는 하지만 친구로서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다. 질리가 스테파니의 운명 속에 존재하게 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장차 다가올 스테파니의 운명은 질리와의 만남이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질리는 오래 전에 현재의 남편 필립과 결혼했다. 필립은 아내인 질리에 비해 보수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우유부단할 정도로 나약한 남편이었다. 그들의 관계를 단적으로 증명하듯이 그들 사이에는 아직 아이가 없었다. "질리." 스테파니는 아침 내내 기분이 들떠 있었다. 지금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순진한 처녀처럼 보이는 그녀는 그렉과의 재혼을 무척 행복하고 만족해했다. 한 번 결혼 생활에 대한 희망이 산산이 부서진 경험이 있는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실패했던 과거까지 되찾고 싶었다. 그래서 내린 그녀의 판단은 그렉이라면 전 남편에게서 받지 못했던 사랑마저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너 생각나지?" "뭘?" 스테파니는 서둘러 준비하기 시작했다. 성대한 결혼식인 것은 사실이지만 재혼인 점을 고려해서 식순은 간단히 끝낼 계획이며 의상도 검소하게 차려입기로 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말이야. 백마를 타고 찾아온 멋진 기사와 결혼하는 것을 꿈꾸곤 했었지. 아직 기억나지?" "응, 기억해." "그 꿈이 드디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어." 질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질투심이 강한 그녀는 자신이 필립과 결혼할 때 지금의 스테파니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스테파니가 에덴의 소유주라면 질리는 단지 그곳의 이방인일 뿐이었다. 질리가 에덴을 부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는 일이다. 자신이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질리야, 난 어떻게 하든 그의 마음을 차지하고 싶어.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무엇인가를 이렇게 간절히 원해 보기는 처음이야." 그것은 스테파니의 진심이었다. 질리가 어떻게 듣건 간에 그건 상관없었다. 자신이 질리를 신뢰하는 만큼 그녀도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빌어 주리라고 믿고 있었다. "스테파니, 너 오늘은 정말 아름답게 보여." 그녀는 옷을 입는 것을 거들어 주던 질리의 칭찬에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정말 그래?" "그럼, 정말이지." 스테파니는 감격해서 질리를 껴안았다. 이 순간만큼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온통 자신과 그렉의 결혼을 축하하고 격려해 보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와의 결혼에 이미 무서운 음모가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은 도저히 예상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건 그렇고, 스테파니." "응?" "오늘 오후만 해도 신부의 얼굴은 이렇게 세 번씩이나 보는 데 신랑될 사람은 코끝도 보이지 않고 있어. 도대체 그는 지금 어디 있는 거지?" "이제 곧 오겠지." "그래?" "아마 너도 그를 보면 마음에 들어할 거야." "기대되는데?" "틀림없어." "그러다 공연히 내가 좋아지면 어쩌지?" "그런 뜻이 아냐, 질리. 너도 알지 않니, 그렇지?" "알고 있어. 그러니 조금도 걱정할 거 없어." 질리는 소리내어 웃었다. 웃는 모습도 스테파니와는 전혀 달랐다. 어딘가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는 요염한 기운이 배어있는 것만 같았다. 스테파니가 위에 입을 의상을 거르는 동안 질리는 베란다로 나가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모여든 하객들은 여기 저기에 무리 지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렉이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광경을 조용히 내려다 보며 기름칠을 해서 매끈하게 빗어 넘긴 머리스타일이 평소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이도 많고 대머리인 남편 필립에게서는 남성미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렉이 빛나는 보석이라고 한다면 필립은 퇴색된 유리알처럼 생각되며 비교되었다. 문득 질리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자신도 스테파니와 다를 바 없는 미모와 재능을 지닌 채 이 세상에 태어났고 그것을 스테파니에 비해 부족하지 않다고 자부해온 그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테파니는 보석을 하지만 자신은 유리알밖에 소유할 수 없었다. 내가 스테파니였다면 하는 생각과 함께 곧장 그렉을 직시했다. 필립과는 비교도 안되는 멋진 근육질의 사내였다 .그녀는 스테파니와 필립 그리고 자신과 그렉을 연결 지어 상상하면서 에덴을 차지할 수도 있고 그렉과 같이 멋진 테니스선수를 남편으로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정원에 모여든 수많은 축하객들이 스테파니가 아닌 자신을 향해 축하를 보내는 광경을 머릿속에 연상해 보면서 그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갑작스러운 상상의 나래는 순간적으로 현실을 망각하기 시작해서 자신이 스테파니로 바뀌어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 "질리?" 갑자기 스테파니가 부르는 소리에 잠깐 동안의 상상은 그녀가 몸담고 있는 현실 때문에 부서지고 말았다. "이 옷 어때?" 스테파니는 검정색의 실크 블라우스를 들고 있었다. 잠깐 당황했던 질리는 재빨리 표정을 고쳤다. 조금 전의 일은 상상일 뿐이었다. 질투심이 들기는 했지만 스테파니를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질리 역시 스테파니의 재혼을 하퍼 가문의 경사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과 비교할 때 은근히 질투심이 생기기는 하지만 더 이상은 아무런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2 "그 옷 멋진데?" "정말이야?" "검정색이 잘 어울릴 것 같아." "그럼 됐어." "이 옷을 입을 생각이야?" 질리는 스테파니가 몸에 대고 한 바퀴 돌며 보여주는 검정색 실크블라우스를 만지면서 질감을 느끼듯 말했다. "이런 옷을 내가 입을 수 있다니 믿어지지 않아." "어째서?" "처음이거든." 스테파니는 재혼과 함께 확실히 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검정색이라고는 하지만 굉장히 야한 블라우스였다. 지금까지 그녀는 그런 의상을 좋아하지 않았다. 언제나 점잖고 검소한 옷만을 즐겨 입었다. 그녀는 존경받는 하퍼 가문의 상속자답게 행동해 왔다. 충분히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사치스럽지가 않았다. 따라서 그룹의 간부들은 물론 전체임원이 그녀를 믿고 따랐다. 그룹의 총수로서 손색이 없었다. 질리는 베란다의 난간을 통해 다시 정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이에 드디어 그가 도착했나 봐." 그녀는 새삼 그의 도착을 알리며 정원에 서있는 그렉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서 이내 그렉을 발견한 스테파니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래, 그이야." "첫눈에 알겠어." "그렇지?" "응." "어때?" "나야 뭐........" 질리는 말끝을 흐리면서 계속 그렉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때마침 고개를 돌리던 그렉의 시선이 이층 베란다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질리의 시선과 마주쳤다. 두 사람의 눈빛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그들은 이상한 충격 같은 것을 느꼈다. 무엇인가 굉장히 특별하고 새로운 느낌이었다. 또한 그와 같은 느낌은 계속 안으로 안으로만 잦아드는 것이었다. 쉽게 잊혀지지 않을 새롭고 충동적인 느낌을 질리와 그렉은 동시에 느낀 것이다. 하퍼그룹의 총 지배인인 빌은 몇 가지 준비 때문에 약간 늦게 하퍼 가에 도착했다. 스테파니가 결혼식에 필요한 몇 가지 서류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빌은 하퍼그룹의 창립멤버였다. 스테파니의 아버지와 함께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퍼그룹에서 중요한 업무를 맡아보았으며 스테파니가 그룹을 맡은 후 빌이 없었다면 단 하루도 운영하기 어려울 만큼 그녀가 의지하는 인물이었다. "자넨 어떤가?" 빌은 들어서며 정중하게 맞이해 주는 집사에게 악수를 청했다. "정신없이 바쁘지?" "시키신 대로 모든 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고맙군, 언제나 자네만 믿고 있지." 이층에서 스테파니가 계단을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웨딩드레스는 입지 않기로 했다. 질리와 함께 내려오는 스테파니를 발견한 빌은 반갑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스테파니, 정말 아름답군요." "고마워요, 빌." 스테파니는 그룹 총지배인 이상의 존재인 빌의 축하가 어느 누구의 말보다 기뻤다. 한마디로 아버지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빌도 역시 그녀를 가족처럼 사랑하며 그룹도 성실하게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빌은 질리에게도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질리, 잘 왔어요." "안녕하세요, 빌." 질리는 스테파니처럼 빌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스테파니가 빌과 합작해서 하퍼그룹을 운영하는 것이 왠지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래, 갔던 여행은 어땠나요?" "좋았어요, 덕분이에요." 조금전 이층의 베란다에서 그렉과의 첫 대면 충격이 남아있는 듯 그녀는 아직까지도 흥분이 되어 있었다. "빌, 제가 부탁드린 서류는 다 준비해 오셨겠지요?" "그게 그런데........" 빌은 말을 하다 말고 망설이고 있었다. "왜요, 빌?" 성품이 온순하고 인정이 많기는 하지만 업무적인 문제에서만큼은 거의 완벽한 스테파니였다. "가지고 오긴 했는데, 위원회에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눈치더군요." 스테파니의 제안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빌은 물론 운영을 담당하는 경영위원회에선 그녀의 제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렉에 대한 것이었다. 빌을 포함한 위원들은 스테파니가 그렉을 회사의 중역에 기용하려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만일 스테파니가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오지만 않았다면 재혼 자체도 반대했을 것이 분명했다. 테니스 선수라는 명예에 파묻혀 사치와 호강을 일삼던 남자를 스테파니의 남편으로 맞이하는 데에 대한 불만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스테파니는 한 번 세운 계획에 대해서는 어떤 경우가 있어도 결코 물러나는 법이 없었다. 물론 충실하게 계획을 준비하고 완벽하게 모든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성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개인적인 문제에서도 사업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렉과의 결혼 문제도 그와 같은 스테파니의 과감한 성격에서 진행시켰다. "그건 이미 예상했던 일이 아니에요, 빌?" "......." "안 그래요?" 빌은 끝내 마음이 개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자신과 위원들과의 의견 때문에 스테파니의 의견을 번복할 수는 없었다. "그렇군요, 스테파니. 원하기만 한다면 남은 계열회사 자금의 절반을 독자적으로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잘 되었어요." "그리고......." "네?" "이제 앞으로는 내가 별 도움이 안되겠군요." "무슨! 빌. 그러지 마세요." 빌의 말에 스테파니는 갑작스럽게 당황해 했다. "당신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제가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잖아요. 제발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빌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마치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기 자신의 의견을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그것은 빌뿐만 아니라 경영에 참여하는 모든 위원의 의견이기도 했다. "제 생각을 이야기해도 될까요?" "뭐든 지요, 빌. 오늘따라 왜 이러시는지 알 수가 없네요." "좋아요. 아무래도 그렉에게 회사를 맡기시기보다는 필요할 때 돈을 조금씩 주는 것이 더 좋을 방법일 것 같은데요." 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질리는 모든 것이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스테파니가 그룹의 계열회사 몇 개를 그렉에게 맡기려고 하자 빌과 위원들이 반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스테파니의 남편이기는 하지만 회사를 경영하기에 그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 어떤 면에서도 그렉은 사업가 타입이 아닐뿐더러 그럴만한 자질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하지만 스테파니는 그렉이 사업에 참여하는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들어보세요, 빌." "?......" "옛날과 똑같은 실수를 다시는 저지르고 싶지 않아요." 듣고 있던 빌의 표정도 어느 틈에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스테파니의 불행했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남편이 경제적으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네에." "그렇지 않으면 또 내가 남편에게 용돈을 준다느니 어떻다느니 하는 구설수가 따를 테니까요." 빌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스테파니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려 짐작할 수 있었다. 재벌의 총수인 그녀의 재혼은 세상의 관심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남편에게 용돈을 주니 마니 하는 얘기로 이미 그녀는 상처를 있는 대로 받은 입장이었다. 하지만 빌의 입장에서는 그렉 같은 사람에게 회사를 맡기는 일은 끝내 불안하기만 했다. "좋습니다." 그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스테파니의 의견에 동의하며 말을 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부군께선 우리 회사의 사람입니다. 당신이 행복하다면 저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스테파니." "고마워요, 빌." 스테파니는 비로소 환하게 웃었지만 빌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행복한 결혼생활이 되기를 빌겠습니다." "고마워요, 진정으로." 그들은 가볍게 포옹하며 격려와 감사의 키스를 나누었다. 질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 스테파니의 재혼에 대해 호기심이 점점 더 생겨나기 시작했다. 첫 남편 때에는 그렇지 않던 그녀가 이번에는 그렉에게 회사를 맡기려 했다. 과감한 결단이 아닐 수가 없었다. 자신의 인생과 삶의 가치가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처음 결혼에 실패한 스테파니는 재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냥 아들 데니스와 딸 사라에 만족해하면서 그룹의 경영에만 열중할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결혼은 불행이며 악몽으로 기억될 뿐이었다. 같은 길을 걸어 또 다시 불행에 빠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렉과의 재혼을 결심하기까지에는 한 여인으로서의 외로움이 크게 작용한 셈이었다. 세상에 부러울 것 하나 없을 것 같은 가정이었지만 여자의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체험하지 못하고 불행한 나날들로 결혼생활은 점철되었고 급기야 결혼은 파경에 도달하고 말았다. 한 겨울의 땅처럼 굳게 얼어붙었던 그녀의 마음이 다시 녹아 내리기 시작한 만큼 또 다시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어느 정도의 희생이 뒤따른다고 해도 정당한 부부관계를 정립시키겠다는 것이 그녀의 결심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테파니는 그렉을 사랑했다. 그도 자신처럼 사랑하고 있어 그의 진정한 사랑을 얻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런 그를 아내에게 의지해서 사는 남편으로 만들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스테파니의 재혼식은 간단하게 치렀다. 잔잔한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빌이 아버지 대신 스테파니를 그렉에게 인도했고 사제의 간략한 축도로 식을 끝냈다. 꽃다발을 들고 빌과 함께 그렉에게 걸어가는 스테파니를 그렉에게 인도했고 사제의 간략한 축도로 식을 끝냈다. 꽃다발을 들고 빌과 함께 그렉에게 걸어가는 스테파니의 모습은 행복에 가득찬 신부의 모습이었다. 새롭게 세상에 태어난 듯 그녀는 그렉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확신하는 빛이 역력해 보였다.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과 하느님 앞에서 그렉과 스테파니가 부부로 맺어지게 되었음을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며,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늘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그날의 행사는 그렇게 간략하게 끝나 버렸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스테파니와 테니스 스타 그렉이 집중된 세상의 이목 가운데 부부로 맺어진 것이다. 지금의 스테파니의 행복감만큼 축하파티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결혼식 축하파티보다 성대하게 벌어졌다. 정원과 집안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풍성하게 장만된 음식을 먹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웃고 떠들며 즐겼다. 스테파니는 축하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렉과 춤을 추었다. 그에게 가볍게 안겨 스텝을 밟는 스테파니의 가슴은 행복으로 가득 채워졌다. 한 여자의 자리를 찾는다는 것이 그런 것인 줄은 미처 몰랐다.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게 느껴졌으며 어릴 때부터 소녀들이 기다리던 백마 탄 기사가 바로 그렉이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그와 맞잡고 음악에 맞추어 춤추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자신은 새롭게 태어났다고 확신했다. 그 동안 자신의 삶과 행복을 향한 문은 오랫동안 굳게 닫고 있어 몸도 마음과 마찬가지로 그룹의 경영과 가족들 그리고 주변의 경제동향에 국한되어 있었다. 덕분에 하퍼그룹의 경영과 매출 신장은 아버지 때보다 오히려 견실해졌으며 경영주로서의 스테파니의 탁월한 재능에 모두가 감탄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재혼 때문에 빌과 위원회에 약간의 이견과 반발을 사게 된 것이다. 그렇게 생활하던 중년의 여인의 사랑은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적극적이고 진지한 것이었다. 질리는 파티가 진행되는 동안 필립과 함께 집안에 머물러 있었다. 필립은 매사에 소극적인 편이라 그렇다 하지만 그렇지 않던 질리도 왠지 스테파니가 그렉과 함께 있는 것을 보며 축하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춤이 끝나고 박수소리가 가벼이 들릴 때 그녀는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녀는 스테파니가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마음에 변화가 찾아든 것만은 확실했다. "데니스야." 필립은 음식을 집어먹고 있는 스테파니의 아들에게 말을 걸었다. "새아빠가 맘에 드니?" 데니스는 나이답지 않게 의젓한 소년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걸요, 뭐." "그래." "겨우 두 번 정도 만났을 뿐이에요." 데니스와 달리 그의 누나인 사라는 계속 시무룩해 보였다. 가장 예민한 사춘기에 접어든 사라 에게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예사롭게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스테파니의 결혼에 대해 사라는 왠지 불안함이 느껴졌다. 질리가 끼어들었다. "있지, 데니스. 네 새아빠에 대해 잘 모르기는 다름 사람들도 마찬가지일거야." "아줌마도 그래요?" "그럼." "모두 같군요." "참 너희들 학교에서 빠져나올 때 무슨 문제 같은 거 없었니?" 입을 다물고 있던 사라가 갑자기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문제가 될 일이 뭐 있겠어요, 질리 아줌마. 엄마는 그 동안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결혼식에 꼭 참석해 달라고 그러셨는걸요." 사라는 약간 심술이 나 있는 것이 분명했다. 스테파니는 그런 부분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렉이 그녀에게 남편이기는 하지만 데니스와 사라에게는 전혀 새로운 아버지였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아버지와 아이들과의 관계도 중요했다. 데니스는 나이와는 달리 이해심이 있는 편이었지만 사라는 감정이 예민한 소녀였다. "누나가 심술을 부리는데, 신경 쓰지 마세요." 데니스의 어른 같은 말에 필립은 탄복한 듯 말했다. "저런, 네가 너희 할아버지께서 했음직한 말을 하고 있구나." 필립마저 자신을 나무라는 듯 느껴지자 사라는 밖으로 휙 나가버렸다. "잠깐만요. 누나, 어디가?" 데니스는 서둘러 사라가 뛰어간 곳으로 달려갔다. "쯧쯧.......불쌍한 것들......." 필립은 혀를 끌끌찼다. 데니스와 사라는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의 사랑도 받지 못했다. 결혼의 파경과 함께 스테파니는 가족의 문제를 굉장히 등한시했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듯이 그룹의 경영에만 모든 정성을 쏟았다. 하지만 데니스와 사라는 경제적인 풍요로움만 가지고 절대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들에겐 정작 갖고 싶은 부모의 사랑이 결핍된 탓이기도 했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데니스의 대견스러운 모습이었다. 그에게서는 그늘이 엿보이지 않았으며 항상 표정이 밝아 보였다.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사라와는 대조적이었다. 동생이 누나를 부모님 대신 항상 보살피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할 것 없이 데니스는 늘 사라의 곁에 있었다. 어머니를 향한 사랑은 사라에겐 따뜻한 봄날의 햇살과 같이 간절하게 지속되길 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라에게는 그것을 받거나 주고싶을 때에도 어머니가 곁에 있어주지 않았다. 특히 이번의 재혼은 사라에게 마음 갚은 곳으로부터의 새로운 서운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제 그렉은 정식으로 스테파니의 남편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가 사람들에게 받는 예우는 스테파니에 미치지 못했다. 우선 빌의 태도부터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정원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렉이 이층에서 바깥계단으로 내려오는 빌에게 겸손하게 먼저 말을 걸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빌의 한쪽 손에는 반쯤 채워진 술잔이 들려 있었다. "요즘 어떠세요?" 그렉이 다가갔을 때 빌은 마치 아이를 대하듯 해서 그것은 마치 자신이 보좌하고 있는 스테파니의 남편을 대하는 태도라고 생각할 수 없는 미묘함이 서려 있었다. "잘 지내고 있네."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마치 무슨 나쁜 일이 있어야 당연하다는 얘기 같군, 다행이라니." 빌이 이상하게 받아들인 말 한마디에 그렉은 잠깐 당황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건 그렇고, 스테파니한테 들었네." "네?" "우린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떠날 줄 알았는데......에덴으로 간다지?"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스테파니의 신혼여행은 최소한 유럽일주 정도는 될 것이라고 세간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외국도 아닌 국내, 그것도 고향집인 에덴을 택하다니! 스테파니 그녀에게 에덴은 어떤 장소보다 귀중한 곳이었다. 그녀의 일생을 통해 가장 가고 싶은 곳으로 에덴에서 태어나고 자란 추억뿐 아니라 그녀만이 느낄 수 있는 하퍼 가의 전통과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곳이기도 했다. 따라서 스테파니가 그곳을 신혼여행지로 선택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신혼여행지를 그곳으로 정한 것은 그렉이었다. 그가 스테파니를 사랑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그곳을 신혼여행지로 정한 그렉의 세심한 배려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것이 나이 어린 남편의 세심한 배려와 사랑을 느꼈기 때문이다. 에덴을 그렉이 스테파니의 환심과 애정을 키우기 위해 이용한 것은 무엇보다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3 평소 관찰력이 뛰어나다고 자부해 왔던 빌도 전혀 아무런 짐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장 에덴에 가게 될 것 같지는 않군요." "그렇다면 떠나기 전에 회사에 한 번 찾아올 순 있겠군." 스테파니가 요구했던 그룹의 경영에 관한 사항을 미리 그렉에게 설명해 주려는 것이었다.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빌로서는 스테파니의 남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였다. "그러시다면 월요일에 한 번 찾아가죠." 그렉은 가볍게 대답했다. 스테파니를 통해 앞으로 자신의 위치가 어떻게 될 것인지 미리 들었다면 그렇게 간단하게 넘길 문제는 아니었다. 사업가가 된다는 것이 그에게 생각처럼 가벼운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월요일 오전 열한 시 반이 어떻겠나? 그 후에 점심을 같이 하기로 하지." "그러죠." "됐군." "그럼 월요일 다시 만나 자세한 말씀을 나누기로 하죠." 그는 빌에게 손을 내밀었다. 빌은 잠깐 그의 손을 잡고는 이내 돌아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렉은 무척 어색해진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빌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그의 입가엔 빌의 냉랭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엷은 미소가 나타났다. 그 미소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그렉 마스던뿐이었다. 질리는 이층의 베란다 난간에 비스듬히 기댄 채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날 그녀가 보인 태도는 확실히 전과는 다른 것이었다. 가장 많이 떠들고 가장 요란하게 파티장을 누비며 주인처럼 행세를 하고 다녀야 할 그녀였음에도 오늘은 사뭇 조용하고 차분했으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성을 사수하기 위한 병사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태도였다. 그녀는 베란다에서 그렉의 움직임을 조용히 주시하고 있었다. 마치 먹이를 쫓는 사나운 들짐승 같이 지켜보던 그녀의 시선은 그가 빌과 이야기하는 광경도 빼놓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보다 앞서 스테파니와 빌이 그렉에 관해 나누던 이야기도 이미 모두 알고 있었으니 그들 둘의 만남이 예사롭게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스테파니 왕국에서 작은 왕국을 떼어 그렉에게 넘겨준다면 대체 어느 회사를 떼어줄 것인가, 하퍼 그룹의 계열회사들은 모두 그 규모가 굉장했다. 멋쟁이 테니스 스타가 회사의 경영자로 변신한 그렉의 모습에 질리는 굉장한 호기심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질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렉이야말로 평소 질리가 가장 흠모해 오던 남성이라는 사실이다. 정원에 있던 그렉은 조금 전부터 베란다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질리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때때로 그녀를 살피기도 하는 그렉의 눈빛은 계속 심상치가 않았다. 어떤 기회를 노리기라도 하듯 그는 천천히 질리를 향한 관심의 폭을 좁혀가기 시작했다. 빌과 헤어진 그렉은 술잔을 들고 이층으로 통하는 바깥계단으로 걸어가서는 계단 밑에서 우연인 듯 고개를 쳐들었다. 예외 없이 질리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나 그녀 역시 계속해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말은 필요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눈빛만으로도 드러내어 말을 하는 것보다 충분한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다. 그렉의 시선은 파고 들어가려는 것과 같이 다분히 공격적이었다. 반면에 질리의 시선 역시 도전적이었고 요염함까지 풍겼다. 이 순간 그렉에게는 빌과 약속한 월요일의 회사방문이나 스테파니와의 결혼은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으며 그들은 고의적이기라도 하듯이 어떤 결정적인 계기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눈빛으로 서로를 익히려는 것처럼 보였다. 질리의 전과 다른 태도에 가장 먼저 의아심을 나타낸 것은 남편 필립이었다. "당신 오늘은 이상하군." "왜요?" "너무 조용한 것 같아서.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사람이 너무 북적거려요." 질리는 몹시 지치고 피곤한 듯 의자에 기대앉았다. 확실히 그녀는 지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지쳐 보이는 것은 사람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객이 수백 명이라 해도 그녀에게 보이는 것은 오직 그렉 한 사람 뿐이었다. "정말 굉장한 파티야." 아내 질리의 생각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필립은 이의 없이 질리의 말에 동의했다. "그럼, 스테파니가 얼마나 기다리던 파티인데." 중년이 되도록 자신의 인생을 잊고 살아온 스테파니가 재혼에 거는 기대는 동정할 만큼이나 대단한 것이었다. 비록 검소한 결혼 절차를 거치기는 했지만 파티만큼은 가장 성대하게 열고 싶은 것이 스테파니의 마음이었다. 준비하는 음식의 종류까지도 일일이 스테파니의 손길이 닿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우리도 함께 사진을 찍으러 갈까?" 질리는 필립의 제안에 난색을 표했다. 갑작스럽게 모든 의욕을 상실한 사람 같았다. "여보." "왜?" "미안하지만 전 지금 무척 피곤해요." 평소 질리의 말이라면 이견 없이 늘 동의해오던 필립이었다. 그런 면이 오히려 질리에겐 권태로움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그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답게 거부할 줄도 알고 때로는 완강하게 부정할 줄 아는 면을 질리는 원했다. 그녀는 용광로의 불길처럼 타오를 줄 아는 남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 필립은 이미 나이가 들어 있었다. "당신이 피곤하다니 할 수 없군. 조금 더 있다가 떠나도록 합시다." "그러는 게 좋겠어요." 지금은 스테파니가 주최한 파티가 성대하게 열리는 중이었다. 질리는 성대하게 열리고 있는 파티를 참석하지 않고 그냥 지금이라도 당장 떠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건 그렇고." 그녀의 마음을 알 리 없는 필립이 입을 열었다. "스테파니의 남편 말이야." "네?" "새신랑이 어떤 사람처럼 보여. 당신은?" "글쎄요.......저런 남자 하고라면 아마 안심하고 살 순 없을 것 같은데요." "그래?" 필립은 소리내어 웃었다. 그도 질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스테파니가 그렉 같은 바람둥이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가 무척 궁금했다. 그렉에 비해 스테파니는 지금까지의 모든 면으로 비추어 보았을 때 지나치게 보수적이었기 때문이다. 파티장을 돌아다니며 하객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스테파니는 한가지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그녀는 깜짝 놀라서 다가갔다. "아니, 데니스!" 그녀는 너무나도 놀라 데니스가 들고 있는 술잔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다시 그의 눈빛을 성난 듯, 다그치듯 들여다보았다. "누가 너한테 샴페인을 주었니?" 스테파니의 태도와는 달리 데니스의 태도는 오히려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학교 선생님이 너의 모습을 본다면 뭐라고 하시겠니?" 아무리 샴페인이긴 하지만 데니스는 아직 그걸 마시기엔 너무 어린 소년이었다. "놀라시진 않을 걸요." 데니스는 태연하게 말했다. "뭐라고?" "이런 걸 마시지 않는 애들은 아마 한 명도 없을 테니까요." "맙소사!......" 스테파니는 크게 당황하고 놀랐다. 데니스의 말은 그녀에게 놀라울 만큼 충격적이었다. 어린 아들의 입에서 그런 말이 그토록 자연스럽게 나올 수는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그녀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그 동안 생각해 오고 살아왔던 것과는 너무나도 상반되는 이야기였다. 그 동안 자신의 인생조차 망각하며 살아온 그녀가 뒤늦게 자신의 인생을 찾기 위해 눈길을 돌렸을 때 비로소 주변의 사물들이 눈에 뜨이기 시작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따지고 보면 데니스와 사라는 어머니에게 다가와 축하의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그들 남매에게 그렉은 아무런 의미도 아닌 듯 했다. 어머니가 사랑하기만 한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데니스와 사라는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처럼 행동했다. 비로소 그것을 눈치챈 스테파니의 놀라움은 예전의 무관심과 비례해서 대단한 것이었다. 스테파니가 잠깐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질리가 다가왔다. 그녀는 스테파니에게 작별을 하기 위해 다가온 것이다. "스테파니, 여기서 뭘하고 있니?" 스테파니는 재빨리 표정을 고치며 미소를 지었다. "파티는 잘 되어 가는 것 같아?" "응, 만족해." "그런데 데니스가 왜 저러지?" 질리는 걸어가는 데니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스테파니와 데니스의 대화를 심상치 않다고 느낀 질리가 물었다. "글쎄 데니스가 평소와는 달리 엉뚱한 짓을 하기에........" "무슨 일인데?" "자기 새아빠랑 이야기라도 하지 않고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있지 뭐겠니?" "어머, 데니스가?" "그래." "네가 이해해야지, 스테파니." "그걸 어떻게 이해하니, 어린 녀석이 엄마에게서 멀어지려하는데." "오늘은 좋은 날이잖아." "그리고 애들이 너무해. 데니스는 물론 사라도." 스테파니는 자신도 모르게 우울해지는 것을 느끼며 질리에게 의지하려 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니?" "한마디도 축하한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어. 쟤들이 정말 엄마에게 그래도 되는 거라고 생각하니?" 그녀는 파티장 한구석에서 잡담을 나누는 데니스와 사라를 원망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당연하지." "당연해?" "생각해 봐. 저 애들은 아직 새아빠에게 익숙하지 못해. 그건 네 책임도 있어. 데니스랑 사라가 새아빠와 겨우 두 번 정도 만났을 뿐이니 당연하지." "그건 그렇지만......." 스테파니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떤 경우라도 자신은 두 남매의 친어머니이다. 따라서 어머니가 맞아들이는 남편은 그들에게는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별도로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이 아이들이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애들에게도 시간이 필요할 거야.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 "그런 생각은 아직 하지 못했어. 그 애들이 벌써 그렇게 컸나?" "어린애들이 아냐. 설마 네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뭐가?" "새아빠와 익숙해질 시간도 주지 않고서 아이들이 축하해 주지 않는다고 서운하다고 말하는 것 말이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만은 아니야." "아니라구?" "난 진심이야 정말 심각하다구." 마침 그렉이 다가왔기 때문에 스테파니는 재빨리 표정을 바꾸고는 얼굴 가득히 그를 반기는 미소를 나타냈다. 그녀에게 그렉은 사랑하는 남편이었고 사랑 받고 싶은 유일한 남자였다. "당신 여기에 있었소?" 그렉과 함께 필립도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스테파니는 자신의 기분이 얼마나 좋은가를 그렉에게 확인시켜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렉." 그녀는 우선 필립을 소개했다. "당신 필립을 공식적으로 소개받으신 적이 없었죠?" "처음 뵙겠습니다." 그렉이 먼저 손을 내밀자 필립은 반갑게 악수를 나누며 진심으로 축하하는 말을 건넸다.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필립 씨." 그리고 이어 그렉과 질리는 스테파니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소개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는 내 친구 질리에요, 그렉." 스테파니는 다정하게 질리의 손을 잡으며 덧붙였다. "아이들 다음으로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사람들이랍니다. 서로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렉이 먼저 질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대며 두 눈은 그녀의 시선을 쫓아 응시했다.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한편 스테파니는 조금 전에 자신을 괴롭혔던 일들은 금방 잊어버린 듯 그녀의 말대로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필립과 질리를 새남편에게 소개시킨 것만으로도 한없이 기뻤다. 다시 그들과 그렉의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그녀는 무엇인가 하고 싶었다. 그들 모두가 한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그들 역시 한 식구처럼 지낼 수 있게 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우정과 사랑의 징표를 남기고 싶어했다. 그녀는 그렉과 질리의 사질을 찍어 기념해 두는 것이 가장 낫겠다 싶었다. "저쪽으로 가서 질리와 같이 서요, 그렉. 둘의 사진을 찍어줄께요." 그녀는 거의 강제로 질리와 그렉을 나란히 세웠다. 서먹해하던 두 사람은 금방 다정한 연인처럼 바싹 다가섰다. 스테파니는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자, 내앞에서 포즈를 잡아봐요. 어서요." 그렉은 자연스럽게 질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고 두 사람의 뺨은 거의 닿을 듯 그들은 서로를 끌어당겼다. "좋아요." 스테파니가 비디오 카메라를 들이댈 때 그렉은 조심스럽게 재빨리 질리에게 속삭였다. "질리, 당신 매우 아름답군요." 그들을 지켜보는 필립도 전혀 의심하지 못할 정도였다. 스테파니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친구와 새남편이 다정하게 포즈를 잡은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든 눈치였다. "좀더 붙어 서요. 좋아요. 근사한 사진이 나올 거예요, 분명해요." 그녀는 감탄 어린 목소리로 질리와 그렉에게 더욱 다정하게 서 있을 것을 요구했다. 스테파니의 요구에 따라 자연스럽게 다정한 연인처럼 어깨에 손을 얹은 그들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얼굴 가득히 드러냈다. 스테파니에 의해 질리와 그렉은 금세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었다. 스테파니가 여자로서의 매력을 갖추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 동안의 인생역정이 그녀를 더욱 그렇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결혼의 파란과 그룹운영이 그녀에게 있어선 인생의 전부였다. 따라서 그렉에게조차도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을 두었다. 그렉은 질리에게 공개적으로 접근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질리, 테니스는 잘 치십니까?" 그는 테니스 선수답게 테니스 얘기로 그녀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렉은 스테파니가 그 분야에선 거의 문외한이라는 사실을 몇 번의 시합을 통해 알고 있었고 스테파니 자신도 그 점은 인정하는 바였다. "잘 치지는 못해요." "좋아하나요?" "그럼요. 운동은 모두 좋아해요, 그러나 모두 아마추어 수준이지만." "잘 됐군요." "네?" "한 번 같이 치도록 하죠. 어떠세요?" "글쎄요........" 질리는 짐짓 스테파니의 표정을 살폈다. 질리는 스테파니가 스포츠에 실력도 없고 취미도 없다는 점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과장되게 말한 것은 사실이다. 묘하게도 필립 역시 운동에는 전혀 취미가 없었다. 테니스를 친다면 그렉과 질리가 어울릴 수밖엔 없었다. 그렉은 바로 그 점을 노렸고 질리 역시 충분히 그렉의 의도를 눈치챌 수 있었다. 질리도 그렉과 단둘이 어울릴 수 있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렉, 당신이 원한다면 질리와 테니스를 하세요." "그래도 되겠어, 스테파니?" 질리가 재빨리 되물었다. "알잖아, 질리." "넌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 "그래." 스테파니는 질리의 물음에 아무런 부담감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사랑하는 그가 원하는 것들을 모두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 싶었다. 이튿날 그들은 테니스 코트에서 다시 만났다. 스테파니와 필립은 관람객이 되어 객석에 앉아 있었고 그렉과 질리만이 코트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믿을 수 없을 만큼 상대와 어울리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필립." 객석에 앉아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스테파니가 입을 열었다. "이해할 수 없어요." "뭐가 말이죠?" "그렉과는 마치 한 10년동안 같이 산 기분이 들어요. 그럴 수도 있을까요?" 그녀는 어제 겨우 결혼식을 가진 그렉이 조금도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결혼식을 올리기 전, 그들은 육체관계를 갖지 않았다. 육체적으로 그들은 아직 남남이었다. 그렉 편에서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의 요구가 있었다 하더라도 스테파니 쪽에서 응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이후 여러 해 동안 스테파니는 젊음을 애써 다른 곳에 쏟아 넣었다. 남자나 사랑에 관해서 라면 그녀의 몸과 마음은 굳게 닫혀있었고 애써 거부해 왔기 때문에 스테파니가 새로운 남편을 맞아들이는 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셈이었다. 모든 면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며 외형적인 명성이나 지위와는 달리 그녀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욕구는 당당한 그녀의 요구였다. 그녀가 그렉에게서 느끼는 감정은 바로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조금도 후회하거니 실망하지 않는 그녀의 자발적인 의사 결정이었다. 마치 업무를 수행하고 과감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그녀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것처럼 자신의 결혼 역시 일을 처리하는 그녀의 과감성이 다분히 발현된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자신의 욕망을 위한 결단이었다는 것만이 굳이 다르다면 다른 면이었다. 난생 처음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여자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을 정도였다. 이제 겨우 만난 그렉이 마치 10년 동안 같이 살아 온 느낌이 드는 것도 그런 연유였던 것이다. "살다보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더군요." "당신도 그래요?" "잠깐, 메리 포인트인 것 같은데요?" 필립은 두 사람의 게임이 끝나 가는 것을 보았다. 행복해하며 그렉과의 시합에 열중해 있는 질리의 모습이 그에게는 예사롭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필립은 결혼초기를 제외시키면 질리가 그렇게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소녀처럼 즐거워했고 사랑에 빠진 여자처럼 계속 소리내어 웃었다. 가벼이 넘기려 해도 왠지 신경이 쓰였다. 상대가 다름 아닌 스테파니의 남편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필립의 의심을 풀기에는 부족한 듯 보였다. 질리가 지적했듯이 그렉 같은 남자와 사는 여자는 마음을 놓을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 일면에는 이해가 되었다. 스테파니의 배려와는 달리 질리는 그렉 때문에 행복해 보이는 것이 분명했다. 필립이 미심쩍어 할만큼 질리의 기분은 보기 드물게 최고조에 달해 있음이 보였다. 테니스 시합은 막 끝났다. 질리와 그렉은 시합을 마치자마자 이내 그들이 앉아있는 벤치로 갔지만 공교롭게도 스테파니와 필립이 앉아 있는 관람석에선 벤치를 향해 걸어오는 그들의 모습이 구조물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4 그렉이 질리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끌어당기자 그녀만의 짙은 체취가 땀에 섞여 풍겨왔다. 매우 독특한 느낌의 체취였다. 그것은 그렉의 마음을 끄는 매력적인 체취이기도 했다. "질리, 당신은 테니스를 정말 잘 치던데요?" 질리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당신과 테니스를 치게 되다니 영광이에요."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크게 웃다가 그렉은 자석에 끌린 듯 질리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질리가 미리 예측할 겨를도 없이 갑작스럽게 입술을 덮친 것이다. 으레적이고 가벼운 호감의 키스가 아니라 뜨겁게 요구하는 정열적인 키스였다. 그는 몹시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입술을 세차게 빨아 질리는 전신이 빨려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지만 얼른 그 늪에서 빠져나왔다. 스테파니와 필립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그렉보다 그녀가 더욱 빨리 냉정함을 되찾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렉의 짧고도 깊은 키스는 그가 최초로 나타낸 질리에 대한 과감한 몸짓이었다. 그가 질리에게 진정 원하는 것은 키스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게 하는 순간이었다. 질리는 그렉에게서 빠져나와 걸음을 옮겼다. "질리. 당신은 나에게서 테니스 레슨을 받아야 될 것 같군요." "좋죠." "그래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레슨비가 상당히 비싸겠죠?" 그렉의 미소는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질리 역시 매우 행복해 하는 모습이었다. "난 레슨비가 비싼만큼 훌륭한 코치에요." "정말 그럴까요?" "받아보면 아마 충분히 알 겁니다." "기대되는데요." 두 사람은 또 다시 서로를 마주한 채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들은 스테파니와 필립이 앉아 있는 관람석을 향해 함께 걸어갔다. "여보, 잘 쉬었소?" 그렉이 스테파니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우리 편이 졌어. 과연 그렉의 실력은 대단해." 스테파니도 필립도 전혀 그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있다면 조금 행복해 하는 질리의 모습이 필립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 뿐이었다. 질리는 여전히 행복한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시합에 관해 떠들고 있었다. 자칫 이번 결혼식의 주인공이 그녀가 아닌가 싶을 정도의 분위기였다. 그렉은 질리에게 테니스 레슨 제안을 했다. 테니스 레슨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형식적 명목으로 그녀와 함께 있을 시간을 마련하기 위한 술수에 불과했다. 그것도 가능하다면 단 둘만의 은밀한 시간을 공식적으로 얻으려는 방편이었다. 그는 질리에게 테니스를 가르쳐 주겠다는 제안에 반대나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는 계산을 이미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특히 질리를 아끼는 스테파니라면 오히려 환영할 것이라는 스테파니의 태도를 추측할 수 있었다. 연습하는 시간을 적절하게 이용하기만 한다면 그렉은 마음속에 가득 채워진 질리에 대한 욕망을 어렵지 않게 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테니스를 끝낸 후 그렉은 거의 노골적으로 질리의 곁을 맴돌았다. 스테파니의 시각에선 충분히 의심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아끼는 친구와 남편이 오래된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만 있다면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스테파니 그녀로서는 필립이 있는 질리를 그런 식으로 상상할 수 없었다. 스테파니의 사고방식으로는 특히 친구의 남편에게 엉뚱한 생각을 품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좀처럼 남을 의심하지 않는 그녀의 성격이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기회를 가로막았던 것이다. "스테파니." 질리가 문득 스테파니를 쳐다보며 말을 했다. "에덴에 가서 얼마나 있을 거지?" "확실치는 않지만 한 달 정도 생각하고 있어." 그렉은 계속 질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는 스테파니는 물론 질리의 남편인 필립이 함께 있는 것조차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우리 두 사람만 오붓하게 머물 거야." "그 넓은 집에서?" "물론 케이티 아주머니가 집안 일을 보살펴 주시겠지만 말야." 그녀는 그렉을 쳐다보며 미소를 보냈다. 그도 마주 웃어 주었다. 하지만 그의 웃음이 스테파니의것은 아니었다. 오로지 질리만이 자신을 향해 끈적하게 달라붙는 그렉의 미소를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렉, 당신 아마 에덴에 가보면 놀라게 될 거에요." 질리는 그렉에게 시선을 던지며 마주 웃었다. 오히려 스테파니는 그와 같은 두 사람의 태도를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그렉." "뭐요?" "내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에덴을 마음에 들어했으면 좋겠어요." 그렉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질리에게만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에덴에서는 언제나 마음 편하게 쉴 수 있거든요." 하지만 그렉의 반응은 전혀 의외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에덴에서 그녀와의 단란한 여행의 계획이 자리잡을 마음이 없는 듯 전혀 엉뚱한 말이 그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여보, 나한테 좋은 생각이 하나 있는데." "뭔데요?" "질리와 필립을 에덴으로 초대하는 게 어떻겠소?" "네?" 스테파니는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의아한 듯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아끼는 사람이지만 신혼여행에 함께 데려간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만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가 한 달 동안 머문다면 마지막 한두 주 동안만이라도 말이오. 당신 생각은 어떻소?" 그렉의 제안에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의아한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제일 먼저 반응을 나타낸 것은 질리였다. 그녀는 약간 놀란 듯했지만 이내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그렉의 제안을 찬성했다. "그때 필립은 이곳에 있기 힘들 거에요. 뉴욕으로 돌아가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그녀는 그렉의 제안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던 것처럼 의심스러울 만큼 태연하게 행동했다. 두 사람 사이에 이미 계획된 일이기라도 한 듯 그렉과 질리는 서로의 마음을 맞추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앞으로의 행복한 삶에 대한 스테파니의 염원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그 시작은 신혼여행부터 비껴 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렉과 단둘만의 아늑한 신혼여행을 계획했고 기대에 가득차 있었다. 하지만 그렉의 그럴 듯한 구실을 붙여 엉뚱한 사람을 끌어들이려 했다. 스테파니가 원하는 것이 무언인지 알지 않으려는 듯 그녀를 무시하며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질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렉은 질리에게 방문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질리, 당신 혼자라도 오는 것이 어떨까요?" 그가 에덴으로 초대하고 싶은 사람은 필립 내외가 아니라 질리였다.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필립이 뉴욕에 가고 없는 기회를 이용하며 그는 성급하게 질리에게 방문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질리는 상황을 무마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기쁘면서도 내색하지 않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성의는 감사하지만......이건 당신들만의 신혼여행이잖아요." 스테파니의 탁월한 하퍼그룹 경영 실력도 사랑에 눈먼 여자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눈치챌 만한 이성이 사랑이라는 굴레에 싸여 전혀 맥을 추지 못하는 것을 감지할 수가 없었다. 그렉의 제안과 질리의 반응은 스테파니로서는 털끝만큼도 의심이 가지 않아 그녀의 생각을 가로막은 셈이었다. 그렉의 속셈이 완전히 드러난 셈이었는데도 아무도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스테파니조차 그렉의 마음으로 조금도 엿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보." 그렉은 교활할 정도로 다정하게 스테파니를 불렀다. 스테파니의 마음을 자기에게 끌어들임으로서 더욱 그녀를 자신의 포로로 만들려는 것이 분명했다. "우리 모두가 같이 간다면 더욱 더 좋은 여행이 될 것 같은데 당신은 어떻소?" 그리고는 느닷없이 스테파니의 손등에 다정한 입맞춤을 했다. 그야말로 스테파니의 판단력을 흐트러뜨리려는 제스쳐가 아닐 수 없었다. 모처럼 다시 찾은 자신만의 인생과 여자로서의 행복을 찾기 위한 애절한 기다림은 또 다시 그녀를 여리게 만들었고 그렉의 속뜻을 전혀 눈치챌 수가 없었던 그녀는 그를 좋아했고 사랑하는 마음뿐이었다. 그의 사랑을 얻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기꺼이 할 수 있다는 절박함이 그녀의 온몸에 배어 있었다. 설령 에덴으로 가는 신혼여행에 더욱 많은 사람을 데려가거나 질리 내외와 침실을 함께 쓰자고 하더라도 반대하지 않을 정도였다. "좋아요." 스테파니의 입에서 떨어지는 단 한마디의 말에 그렉의 표정은 금새 환하게 밝아졌다. 질리 역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만족해하면서 가슴 벅찬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질리?" 질리는 난처한 표정을 나타내면서 그렉과 스테파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우리가 에덴에 함께 갔던 적이 벌써 언제지?" "굉장히 오래 됐지." "그래, 맞아. 그때는 정말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되는데." 그들은 함께 서로의 과거를 되살려 보기 시작했다. 두 여자는 함께 이웃하고 성장해 온 유년기와 청년기 시절로 그때는 거의 매일을 함께 하다시피 했다. 가문의 차이나 생활 수준에는 큰 차이가 있었지만 그것만큼 두 여자는 더욱 서로에게 깊이 빠져 있었다. 그래서 에덴에서의 생활은 그들의 인생 중에서 가장 즐거운 나날이었다. 스테파니가 더이상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필립이 넌지시 질리에게 말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게 하구려." 그가 그들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쉽게 질리를 에덴에 보내는 판단은 내리지 않았어야 했다. "그래, 질리. 같이 가자." 질리는 재빨리 그렉의 눈빛을 살폈다. 그의 눈빛 속에는 당신도 원하지 않느냐는 눈짓이 담겨 있었다. "글쎄......스테파니의 신혼여행인데 어떻게 내가......" 질리는 몹시 난처한 표정이었지만 스테파니는 오히려 조급한 듯 그렉의 얼굴빛을 살폈다. "한 번 생각해 볼게." 질리는 스테파니를 몸달게 하려는지 여유를 갖자고 하였다. 어쩌면 그렉의 마음을 더욱 초조하게 하려고 자신의 마음을 숨기려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어떤 면 때문에 그렉의 마음이 그토록 강하게 끌리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가 질리에게 그토록 강렬하게 끌리는 것은 어쩌면 쾌락적인 욕망을 추구하려는 그의 욕망이 그를 그렇게 그녀에게 집착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질리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애당초 필립 식의 애정처럼 오래되고 지속적인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도 자극적이고 욕망에 가득찬 여자였다. 그녀의 상대로 필립은 언제나 맞지 않았다. 그렉이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사랑을 스테파니에게서 얻고 있다면 질리는 필립에게서였다. 그렉이 육체적으로 스테파니보다는 바로 질리에게 끌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처음 하퍼가의 대저택에서 눈이 마주친 순간에도 그렉과 질리는 동시에 서로에게 끌리는 육체적 감정을 느꼈다. 같은 종류의 욕망을 가슴에 품은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전율과도 같은 느낌이 바로 그들 사이에 찾아온 것이다. 그렉은 스테파니에겐 신사적이었고 늘 널은 이해심과 아량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모든 점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감싸주는 듯했다. 에덴에 도착한 다음, 그는 스테파니의 육체를 요구하지 않았다. 오랜 기간 동안 굳게 닫혀 있었던 육체의 문을 함부로 열지 않겠다는 배려인지도 몰랐다. 스테파니 스스로가 오랫동안 닫고 있었던 육체의 문을 열고 싶어할 때까지 그렉은 참고 기다리는 굉장한 인내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스스로 열어 주기 전에 강제로 파괴하고 들어가는 옹졸함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이....... 그와 같은 그렉의 사려 깊은 이해심에 스테파니는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그녀는 그 문제를 처음부터 각오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렉은 정식으로 결혼한 남편이었으므로 아내가 남편의 육체적인 요구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고통스럽다거나 견딜 수 없다고 하더라도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스테파니는 아직 중년의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비록 잊고 살아왔다고는 하지만 느끼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언제라도 자신 속에 내재 있는 육체적인 쾌감을 다시 되살릴 수는 있었다 조심스럽고 불안하기만 할 뿐 잠재의식 속에는 그 느낌이 아직도 여전히 살아남아 있었다. 에덴에 도착한 이후 스테파니는 더욱 초조해졌다. 하루가 지나고 밤이 되자 더욱 그랬다. 건강한 그렉에게서는 남자의 체취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주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포옹과 키스 정도는 있었지만 그것은 매번 그렉은 그 이상을 요구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이상한 느낌이 들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는 동안 스테파니는 언제 그렉이 육체관계를 요구할지 몰라 늘 초조해 하거나 불안을 느끼면서 그와 동시에 조심스러운 기대감마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끝내 자신을 기다려 주는 그렉의 배려에 무한한 고마움이 생기면서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 감동과 어우러지면서 그녀는 가슴이 뭉클해질 만큼 행복을 느꼈다. 세상에 그렉 같은 남자는 없을 것 같았다. 단지 육체관계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수없이 많은 고마움과 감동을 느끼기에 그녀로서는 충분했다. 자신의 이런 느낌으로 인해 크게 감동을 받은 스테파니는 그것 이외의 다른 문제에 대해선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렉이 질리를 에덴으로 부른 이유에 대해서는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만 했다. 필립과 함께 오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들 사이에 어떤 암약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마음과 마음의 교류에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육체의 교류를 위해서라면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해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렉과 질리가 서로 상대방에 대한 육체적 욕구를 느끼고 있었다면 그들 사이에 이미 어떤 약속이 이루어져 있을 것이 뻔한 일이었다. 에덴은 하퍼가문의 넋이 숨쉬고 있는 근원이나 마찬가지였으며 한 가문의 살아 있는 역사와도 같은 곳이었다. 스테파니의 어린 시절의 추억과 애증이 함께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려니와 옛날에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사치와 번영을 누리던 에덴이었지만 지금은 단지 네 명의 가족만이 남아 있는 텅빈 고성과도 같은 곳으로 변했을 뿐이었다. 그나마 스테파니 부부가 와서 늘어난 식구들이었다. 평소에는 집안살림을 도맡아 하며 에덴을 지켜 주는 케이티 아주머니와 그곳에서 자라 흑인이긴 하지만 한 식구나 다름이 없는 크리스 두 사람뿐이었다. 하퍼가문에서 잔뼈가 굵었고 주인을 위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충직한 하인이 바로 크리스였다. 케이티는 늙을 때까지 독신으로 지내 온 탓인지 자주 술을 마시는 버릇이 있었다. 성격이 남자처럼 거친 것도 따지고 보면 독신으로 살면서 거친 세상과 대면해 온 것이 원인일 수도 있었다. 에덴에 대해서 그녀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없을 정도로 스테파니의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 있는 에덴의 증인인 셈이었다. 크리스와 함께 그들은 에덴에서 가장 필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여보." 화사한 아침 스테파니는 한 가지 자신의 생각을 꺼냈다. 한적하고 외딴 곳에 있는 남편이 무료해 할 것 같다는 배려해서였다. "오늘은 사냥이나 나가 보는 게 어떻겠어요?" "사냥?" 그렉은 뜻밖이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근처에 있는 산에 가면 사냥할 만한 짐승들이 많이 있어요." "글쎄......" 그렉은 별로 마음이 내켜 하지 않는 반응이었다. "왜요, 싫으세요?" "싫다기보다 사냥은 해본 적이 없어서 그렇소. 당신도 알다시피 난 테니스 선수가 아니오." "그걸 내가 잊었군요. 하지만 한 번 정도는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특별히 하는 일이 없으니 무료하긴 해." 그렉은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듯 말문을 열려 했지만 이내 그만두는 눈치였다. "케이티와 같이 가면 재미있을 거예요." "그 아줌마가 사냥에 간단 말이오?" "겉보기와는 달라요. 총도 잘 쏘지요." "사냥을 할 줄 안다고?" "남자들이 못 따라갈 정도죠." "믿어지지 않는군." "사냥개도 있어요. 어때요, 여보. 날씨도 좋은데 한 번 나가 보지 않겠어요?" 생각에 잠겨 있던 그렉은 썩 내켜 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스테파니가 원한다면 응하겠다는 반응이었다. "어디 가 봅시다." "잘 생각하셨어요." 스테파니는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그가 자신의 제안에 응해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만족해했다 .그렉이 별로 탐탁해 하지는 않았지만 한 번 해보면 금방 기분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립던 에덴에서 남편과 함께 그것도 친어머니나 다름없는 케이티와 함께 사냥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뜨기까지 하는 그녀였다. 다시 옛날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스테파니는 그런 식으로라도 그렉과 자신이 좀더 가까워질 수 있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사랑을 얻으려는 애틋한 바람과 함께 그녀 스스로도 더욱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럼 가시는 거죠?" "그렇소." "당장 준비하겠어요. 당신도 준비하세요." "뭘 준비하지?"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으세요. 참, 벌레에 물리지 않아야 해요, 아셨죠?" "총은?" "내게 맡겨요. 케이티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요." "그렇군." 그렉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기분이 좋아진 스테파니에게는 전혀 그의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렉의 어떤 모습도 그녀에게는 나빠 보이지 않을 만큼 그녀는 흠뻑 그렉에게 빠져 있었다. 5 에덴의 전경은 주위의 배경과 함께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정원에는 풀장이 있고 그 앞에는 선착장이 있는 드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는 낭만이 듬뿍 깃들어 있는 곳이 바로 에덴이었다. 단지 몇 명뿐인 가족에게는 하나의 성곽과도 같은 대저택은 마치 왕궁이나 다름없었다. 스칼렛의 타라와는 다른 모양새이긴 하지만 스테파니에게는 스칼렛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그리운 곳이 바로 에덴이었다. 케이티는 사냥을 좋아했다. 스테파니의 얘기를 들은 그녀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총과 탄약부터 챙겼다. 스테파니가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었지만 케이티는 여러 마리의 산짐승들을 자신의 손으로 잡았다고 늘 입버릇처럼 얘기해 왔었다. 작게는 산토끼를 비롯해서 여우와 멧돼지까지 잡았다는 것이 늘 그녀의 자랑이었다. 에덴의 교통 수단은 신통치 않았다. 도시로 가기 위해서는 비행기를 이용할 간이 비행장이 있었지만 근처로 사냥을 가기 위해선 낡은 지프 한 대가 전부였다. 그렉이 운전을 맡았고 스테파니는 조수석에 앉았다. 장총을 비껴든 채 사냥개와 뒷좌석에 앉아 있는 케이티의 모습은 늠름한 사냥꾼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사냥개는 네 명의 가족 외에 유일한 식구나 다름없었다 그렉은 그곳에선 테니스 코트에서와는 달리 몹시 서툴러 보였다. 말끔하게 포장된 도시의 차도도 아니고 울퉁불퉁한 산길이어서 인지 계속 덜컹대는 것이 불만인 듯 보였다. "당신 기분 어때요?" 스테파니가 차의 요동에 몸을 내맡긴 채 그에게 물었을 때 그렉은 지나가는 말처럼 대답했다. "그저 그래." "이제 금방 달라질 거에요." "그래야겠지." "당신도 총은 쏠 수 있죠?" "그래." 그렉의 말투는 그의 기분을 반영하듯 어느 틈엔가 퉁명스럽게 변해 있었다. 사냥에 대한 불만 탓인지 전처럼 점잖고 품위 있으며 다정한 말은 언제인지 그의 입에서 사라져 버렸다 뒷자리에 앉아 있는 케이티는 그렉의 그런 모습에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네에게 스테파니는 유일한 여주인이었으며 어릴 때부터 자신의 손으로 직접 키워 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므로 그녀에게 있어선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다. 왠지 무례하고 불량해 보이는 그렉이 세상에 하나뿐인 스테파니의 남편이 된 것이 몹시 불만스러웠다. 스테파니의 전 남편에 대해서도 케이트는 스테파니보다 오히려 더욱 더 잘 기억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파경에 이르고 말았지만 그는 그렉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그렉은 그녀에게도 불량하고 전형적인 바람둥이로 보였던 것이다. 그녀는 스테파니를 사랑했으며 또 존경하였다. 여자의 몸으로 하퍼그룹을 경영하는 그녀의 당당한 모습에 케이티는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자신이 만일 어떤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면 스테파니와 그렉의 결혼을 전적으로 강력하게 반대하였을 것이다. 배운 것이 없고 제대로 교양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평생을 하퍼가문에서 일하면서 늙어 온 케이티였지만 사람의 도리나 경우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경험이 풍부한 그녀였다. 하퍼가문의 훌륭한 전통이 어느틈엔가 그녀의 몸에 완전히 배고 말았다는 것이 더 정확한지도 몰랐다. 단지 이미 그렉이 스테파니의 남편이 되었기 때문에 스테파니를 생각해서 대우해 줄뿐이었다. 스테파니는 미처 느끼진 못했지만 케이티는 사냥길에서 그렉의 또다른 면을 발견하고 말았다. 울퉁불퉁하고 험한 벌판길을 달리던 도중에 자동차가 고장을 일으켰을 때였다. 그렇지 않아도 불만스럽던 그렉이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그 말에 놀란 것은 스테파니가 아니라 케이티였다. 하퍼가문에서 그런 식으로 품위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케이티로서는 스테파니가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뿐이었다. 그렉은 계속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이 차에 문제가 생겼어." "카브레타에 먼지가 끼었기 때문에 그럴 거야." "고칠 수 있을까요?" "우선 살펴봐야지." 그렉은 운전석에서 내린 다음 차의 앞쪽으로 걸어갔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케이티의 생각은 그렉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자동차에 대해서만큼은 그녀가 그렉보다 많이 알고 있었다. 자동차뿐만 아니라 에덴의 모든 것들, 심지어 마구간의 말에 대해서까지 하퍼가문에서 그녀만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카브레타가 고장난 것이 아닌데......" "뭐라고요?" 스테파니가 얼른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이건 분명 베이퍼록 때문일 거예요." "네?" 자신처럼 하퍼가의 에덴에서 늘고 낡은 지프에 관한 것이라면 케이티는 훤히 알고 있었다. 비록 정비에 대해서는 모르는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어디가 고장이 났는지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고 그 정도의 간단한 수리는 거뜬히 할 수 있는 케이티였다. 그리고 크리스만 곁에 있었다면 그 역시 케이티와 똑같은 진단을 내렸을 것이다. "카브레타가 아니고 베이퍼록 때문이라고요." "그게 뭔데요?" 말에 관해서라면 훤하게 알고 있는 스테파니지만 자동차에는 완전히 문외한이었다. 그녀만큼 말을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자신이 아끼는 애마에 대해서라면 그 발소리조차 알아들을 정도였다. 그녀가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스포츠는 승마였고 그 실력은 수준급에 속했다. 수영도 약간은 하지만 테니스만큼은 거의 해본 적이 없었다. "베이퍼록이요?" "그래요." "그게 뭔데요?" "카브레타가 문제를 일으켰어." 지프의 앞뚜껑을 열고 들여다보던 그렉이 큰 소리로 소리쳤다. 여전히 불만에 가득찬 목소리였다. 도시에서의 생활에 젖어 있던 그로서는 당연히 느끼는 불만이었다. "아니라니까요." 케이티는 큰 소리로 말했다. "베이퍼록 때문인데요, 자꾸 엉뚱한 곳에 손을 대고 있군요." 투박한 그녀의 말에 그렉은 어이없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럴 때 스테파니가 재빨리 나서서 케이티를 변명해 주었다. "케이티는 있죠, 여보. 엔진에 대해서는 전문가 에요." 케이티는 답답하다는 듯이 총을 내려놓은 채 차에게 내렸다. 용감하고 충직한 사냥개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얌전히 웅크린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렉이 보기에는 일개 가정부이며 이미 다 늙어빠진 케이티의 그런 행동은 만용으로만 생각되었다. "잠깐만 비켜 주겠어요?" 필립과 질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케이티 역시 그렉에게 주인으로서의 정중한 예우를 거의 갖추지 않았다. "그래요, 한 번 해보시죠." 그렉은 약간 뒤로 물러나며 빈정거렸다. 케이티는 김이 피어오르는 엔진 내부를 잠깐 살핀 다음 자신의 주장을 다시 확인했다. "봐요, 내 말이 맞잖아요." "그래요?" 스테파니도 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다가갔다. "엔진이 너무 뜨거워졌어요. 식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그렉은 아직 케이티의 설명을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빨리 정비소에 연락을 하는 게 어떨까요?" 케이티도 만만치 않았다. 그렉에 관해 이미 자신만의 평가를 내린 상태이므로 더 이상 존경이나 예우를 해 줄 필요가 없는 듯 보였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그렇기 하시던가."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뒷자리로 걸어가 총을 집어들었다. "케이티 아주머니가 정말 자동차에 대해 알고서 저러는 건가?" 그럴 때 스테파니는 어찌해야 좋을 지를 몰랐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둘 다 소중한 사람이었고 케이티에 관한 것이라면 그렉보다도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요, 여보." "믿을 수 없군, 저런 여자가......"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여보." 그녀는 그렉의 팔을 잡고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케이티의 말은 틀리는 법이 없어요, 여보." "그래?" "그럼요." "그렇겠지. 그렇고 말고." 그렉은 끝내 케이티의 말을 믿으려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케이티는 부엌에서 음식이나 만드는 여자, 그것도 다 늙은 노파에 불과할 뿐이었다. 케이티가 그렇듯 그 역시 그녀를 탐탁하게 여기는 눈치가 아니었다. "엔진이 식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해요." "할 수 없지." "봐요, 여긴 어때요?" 스테파니는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진 평야를 가리켰다. "여기서 사냥을 하자고?" "그럼요." "뭐가 있겠어?" "두고 봐요. 케이티가 어떻게 하는 지 보면 알 거예요." 케이티는 총을 들고 사냥개와 함께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도시에서 온 고집쟁이에게 멋진 본때를 보여 줄 작정이었다. 그곳에서 사냥할 만한 짐승은 얼마든지 있었다. 평야의 풀숲을 달리는 야생 동물은 그 근처 어디에나 있었던 것이다. 도시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에덴에서 느끼는 불편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간단한 교통 수단도 없을 뿐더러 편리한 문화생활에 비교될 바도 못되지만 대개는 오히려 도시보다 정겨운 면에 마음이 끌리기 마련으로 틀에 박힌 도시에 비해 자연 그대로의 멋과 운치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잊지 않고 찾는 곳이 바로 에덴이었다. 그렉은 좀처럼 에덴에 정을 붙이지 못하는 듯했다. 스테파니와 그는 아직 각각의 침대를 사용하고 있었다. 결혼한 몸이긴 하지만 마음 뿐, 몸은 아직 하나가 되지 않은 그들이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초조하고 불안했던 스테파니의 마음은 오히려 천천히 안정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오래된 부부처럼 자연스럽게 밤이 되면 각자의 침대로 향했다. 그녀는 그렉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그렉도 자신처럼 분명히 어떤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여보, 지루하지 않으세요?" 스테파니가 걱정이 되어 물었을 때 그렉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당신이 있는데, 뭘." "정말요?" 스테파니의 마음은 그 말에 다시 한 번 감동을 받았다. 그도 드디어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곧 질리도 올 텐데, 안 그래?" "그래요. 질리가 오면 당신도 덜 무료할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렉은 마치 무엇인가 캐내려는 사람처럼 재빨리 물었다. 하지만 스테파니는 그렉의 재빠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질리라면 테니스도 잘 치니까 당신과 어울릴 수 있을 거예요." "그건 그렇지." "네?" "아니, 아무것도......." "그래요, 여보. 질리는 아주 명랑하고 좋은 친구 에요. 나와는 성격이 다르기는 하지만 저에겐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거든요." "질리가 당신 같지 않고 명랑한 것은 사실이야." "그렇죠?" 스테파니는 자신의 마음처럼 그렉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좀더 빨리 오라고 할 걸 그랬나 봐요." 순간 그렉의 눈빛에 재빨리 스쳐 지나가는 것을 그녀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분명히 스테파니보다 더 질리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또한 그가 질리를 기다리는 것은 스테파니와는 분명히 다른 이유에서였다. 이미 보는 순간부터 육체적인 쾌락에 휘말려 든 두 사람이었다. 그렉은 에덴에 도착한 다음 자신의 계획을 훨씬 앞당기기로 결심했다. 케이티와 함께 갔었던 사냥에서 계속 시큰둥해 있던 그렉이 새삼 사냥 이야기를 꺼낸 것은 매우 이채롭고 의아한 일이었다. "당신은 사랑을 싫어하잖아요?" "다 그렇지는 않아." "그래요?" 스테파니는 신기한 이야기라도 들은 듯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떤 사냥을 좋아하시는데요?" "악어." "네에?" 스테파니는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당신이 악어사냥을 좋아하신다구요?"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아뇨." "전에도 가끔 가곤 했지. 산에서 작은 짐승이나 잡는 것보단 스릴이 있어서 좋아." "그렇겠군요." 악어라면 평소에 별로 생각해 보지도 않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동물인가는 구태여 생각해 볼 필요조차 없었다. 그리고 악어를 사냥한다는 말도 별로 들어보지 못한 것 같았다. 밀렵꾼들에 의해 잡힌 악어의 가죽이 여자용 핸드백이나 악세사리가 되어 시장에 팔린다는 정도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 혹시 악어 사냥을 하려는 건 아니겠죠." 그녀의 질문에 그렉은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사실상 그는 에덴에서 가까운 곳에 악어 떼가 서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조사했던 것이다. "당신 생각은 어때?" "무서울 거 같아요." "그런 걱정은 안해도 돼. 준비만 완벽하게 갖추면 되니까. 당신 혹시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여기서 가까운 곳에 가면 악어가 서식하는 장소가 있어." "어머, 그래요?" 깜짝 놀라던 스테파니도 이윽고 떠오르는 것이 있다는 듯 이내 수긍해 보였다. "맞아요. 옛날에 아버지한테 들은 기억이 있는 것 같아요." "이렇게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잖아, 안 그래?" "그래요. 당신이 악어 사냥에 취미가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당신이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사냥을 가도록 해요." "못할 것 같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스테파니는 재빨리 표정을 고쳤다. 그녀는 그렉의 마음을 거슬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더구나 그의 마음의 문이 열리면서 자신에게 사랑이 쏟아지려는 때였으므로 두말 할 것도 없이 그의 뜻에 따르고 싶었던 것이다. "당신이 악어 사냥을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세요. 그대신 난 좀 떨어진 곳에 있어도 되겠죠?" "물론. 같이 가는 사냥꾼들도 여자는 접근하지 못하게 할 테니까." "사냥꾼이 또 있어요?" 그녀는 케이티와 함께 갔던 사냥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당신이 말했듯이 악어 사냥에는 매우 큰 위험이 따르게 돼. 그래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반드시 있어야 사냥할 수가 있지." "네에." "그들은 전문가야. 그 동안 수백 마리도 더 잡았을 테니까." "과연 전문가로군요." 스테파니는 썩 마음이 내키진 않았지만 그렉을 따라 악어 사냥에 동행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언제 떠나죠?" "며칠은 있어야 돼. 준비할 기간도 필요하고 또 전문가들이 시간이 나야 하니까." "질리가 온 다음이면 좋겠어요." 질리?" "네." "그렇군. 당신이 혼자 있는 것보다는 그녀와 같이 있는 것이 더 낫겠지?" "물론이죠." "그 생각을 못했군. 좋아. 그럼 질리가 여기에 온 다음으로 날짜를 잡도록 하지." "고마워요, 여보." 스테파니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그렉의 넓은 이해심에 새삼 감동을 느꼈다. 그렇지만 그곳에는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기에는 부족했다. 스테파니가 그렉에게 푹 빠져 있기 때문이다. 질리가 에덴에 도착한 다음으로 악어 사냥 계획을 잡은 스테파니의 마음은 순수한 것 바로 그 자체였다. 사냥꾼들 틈에 혼자 섞여 가는 것보다 질리와 함께 있으면 분명히 더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스테파니의 그런 생각과 그렉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다. 스테파니의 입장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질리가 그의 곁에 있게 된다는 것에만 마음이 끌린 그렉은 분명히 벌써부터 질리와 가까이 있게 될 기회를 만들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그는 질리를 보자마자 어느 때보다 강렬한 욕구가 느껴졌으며 그것은 질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렉에게 필립에게서는 느끼지 못했던 육체의 뜨거운 욕망을 느꼈다. 평소 그녀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그리고 그 동안 조용히 잠자고 있던 본능의 욕구가 갑자기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조용하고 은밀했던 그 동안의 것과는 엄격하게 다른 굉장하고 강렬한 것은 원했던 것이다. 필립과 결혼하기 전에 그녀는 수많은 남자와 관계를 가졌다. 굉장히 어린 나이에 이성을 경험한 이후 그녀는 때 이른 쾌락에 빠지고 만 것이다. 리차드의 아내인 에이미는 몸집이 비대한 편이었다. 아직 젊은 나이였고 얼글도 잘 생긴 여자였지만 한 가지 문제는 비만이었다. 더구나 리차드는 결혼하기 전부터 뚱뚱한 여자를 세상에서 가장 싫어했다. 결혼 초기에는 에이미도 날씬했지만 아이를 낳고부터는 갑자기 살이 찌기 시작했다. 에이미에 비해 리차드는 근육질에 체격이 단단하고 얼굴도 잘 생긴 미남이었다. 그들은 부부싸움이 잦았고 특히 잠자리에 들 때에는 거의 예외없이 냉전상태에 돌입하곤 했다. 에이미는 자신처럼 비만인 여자에게 어울리는 성행위의 체위까지 동원하곤 했지만 공교롭게도 효력은 거의 없었다. 그들과 멀지 않은 이웃에 살고 있던 질리는 가끔 그들을 만나곤 했는데 리차드가 질리에게 눈독을 들이게 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원인은 질리가 노골적으로 그를 유혹한 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무더운 여름날 질리는 심하게 속살을 노출시킨 모습으로 리차드의 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균형이 잘 잡힌 뛰어난 그녀의 육체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으며 남자들에게는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날 공교롭게도 리차드는 에이미와 크게 싸움을 했고 그 바람에 에이미는 집을 나가고 없었다. 혼자 술잔을 기울이던 리차드는 지나가는 질리를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질리!" 리차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큰소리로 지나가는 그녀를 불렀다. 질리는 걸음을 멈추며 리차드를 바라보았다. 위험할 만큼 드러난 두 다리의 탄력이 리차드의 눈에 번쩍 뜨였다. 이미 술기운이 체내에 퍼진 리차드는 제 정신이 아니었으며 충분히 질리의 육체에 도취되어 있었다. "이리 와 봐." "왜요?" 질리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리차드가 있는 문 앞으로 다가갔다. 리차드는 이미 그때 감당하기 어려운 질리의 체취가 느껴졌다. 그때 질리는 리차드의 드러난 가슴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며 건강하고 남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가슴에 끌렸다. 이미 경험이 풍부했던 그녀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남자에 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부인은 어디에 갔나요?" "없어." 그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더니 다시 술잔을 들이켰다. 컵에 반쯤이나 담긴 술을 단숨에 들이킨 그에게선 이미 술냄새가 확 풍겼다. "아무도 없다고요?" 질리는 확인이라도 하는 듯이 집안을 둘러보았으나 에이미는 아이까지 데리고 나갔기 때문에 집안은 텅비어 있었다. "언제 오는데요?" "안 올 거야?" "왜요?" 질리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대뜸 리차드의 곁으로 자리를 잡으며 엉뚱하게도 질문을 꺼냈다. "왜 혼자서 술을 마시는 거예요?" 리차드는 그녀가 쉽게 자신에게 다가오자 갑작스럽긴 하지만 싫지 않은 욕망을 느꼈다. 평소 가끔씩 질리를 볼 때마다 그는 은근히 군침을 삼키고 있었기 때문에 에이미와의 사이에 불화가 생긴 지금은 질리에게 더욱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질리는 몇 살이지?" "스물 하나예요."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이미 마신 술기운과 질리에게 풍기는 체취와 노출된 몸이 리차드의 욕망을 단순간에 일깨우고 말았다. 질리가 그런 식의 유혹적인 자태로 서슴없이 접근하자 리차드는 예전에 느꼈던 생각과는 달리 쉽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에이미는 어때요?" "뭐가?" "좀 뚱뚱하죠?" "그래." "궁금한 게 있어요. 남자들은 그렇게 뚱뚱한 여자와 어떤 방법으로 관계를 갖죠?" "전엔 그렇게 뚱뚱하지 않았어." "그래요?" "난 질리 같은 여자가 좋아." "왜죠?" "날씬하니까." "그거야 당연하죠, 안 그래요?" 질리는 그의 앞에서 교태에 가까운 미소를 지어 보이자 리차드는 느닷없이 질리를 와락 끌어당겼다. "이리 와." 질리는 피할 겨를도 없이 그의 무릎에 엉덩이를 얹은 자세가 되었고 그는 그녀의 가슴에 손을 갖다 대였다. 질리는 질겁을 하며 움찔거렸지만 도망칠 뜻은 없는 듯 보였다. "누가 오면 어떡해요?" "그녀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아무도 오지 않아." "에이미가 오면?" "오지 않아." 그러자 질리는 리차드보다 오히려 더욱더 적극적인 태도로 자신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나하고 하고 싶어요?" "그걸 말이라고 해?" 리차드는 더욱 과감한 행동을 나타내며 거칠게 질리의 스커트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 순간 그녀는 소리쳐 말했다. "이러지 말아요. 잠깐 기다려요." "왜?" "침실로 가야죠." "뭐라고?" "거기서 에이미와 할 때처럼 해요." 기대하지 않던 질리의 태도에 리차드는 놀라 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격동을 느꼈다. 그는 질리의 날씬한 몸을 사정없이 두 팔로 안고 침실로 달려갔다. 그곳에서도 질리는 또 다른 과감함을 보이기 시작했다. "먼저 옷부터 벗어야죠." "뭐라고?" "어서요.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몽땅 벗어요, 알았죠?" "그럼 너도 벗어!" 리차드는 성난 사자처럼 몹시 으르렁거렸다. "당신이 먼저예요." "알았어!" 리차드는 마치 옷에 불이라도 붙은 듯 자신이 걸친 옷들을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질리는 탐나는 물건처럼 그의 벗은 몸을 살폈다. 그런 다음에 그로 하여금 침대에 눕도록 했다. 격렬해진 분위기는 리차드로 하여금 충동적인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지만 질리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대로 받아 줄뿐이었고 리차드는 마치 싱싱한 생고기를 만난 맹수처럼 계속 으르렁거리며 질리에게 달려들었다. 그녀가 기꺼이 응해 오자 리차드는 자신의 이성을 되살릴 시간도 없이 질리가 전해 오는 격정과 욕망에 자신을 내맡기기 시작했다. 6 에덴의 불이 꺼졌다. 전기 시설이 고장이 났기 때문이다. 더구나 에덴을 공급하는 전기를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케이티는 오후에 마신 술 때문인지 완전히 취한 상태였으므로 침대에서 내려올 수가 없었다. 크리스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는 전기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그의 임무는 주로 바깥일을 맡아 했기 때문에 내부의 살림은 전적으로 케이티의 몫인 셈이었다. 스테파니는 물론 그렉 역시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남자인 그렉이 전기 정도는 두팔 걷어붙이고 나설 수도 있으련만 전혀 그는 그렇지가 못했다. 자동차의 엔진이 고장난 것에 대해서도 케이티보다 알지 못하는 그는 겨우 운전만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는 테니스가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었으며 여자에 대한 바람기와 야심적인 성격만이 그라는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전부였다. 그에게는 스테파니도 아직 짐작하지 못하는 야심이 있었다. 아이가 둘이나 되는 것을 알면서, 세상의 눈총을 받아 가면서까지 스테파니와 결혼을 결심하게 된 동기도 따지고 보면 그와 같은 야심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야심을 눈치채거나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케이티를 잘 알고 있는 스테파니는 억지로 그녀를 깨우지 않았다. 전기가 고장이 나서 불이 들어오지는 않지만 랜턴이 있고 촛불도 있었으므로 케이티를 깨우지 않고도 불편 한대로 하룻밤 정도는 보조 조명으로 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깥일은 크리스가 돌보고 있지만 집안 일은 케이티 몫이므로 대충 스테파니가 둘러보기로 했다. 대충 방들을 돌아 본 그녀가 그렉의 침실로 들어갔을 때 그는 옷을 벗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안됐지만 오늘밤에는 랜턴을 켤 수밖에 없군요." "할 수 없지." 그렉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거나 일어나 앉으려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전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에덴에선 케이티 아주머니뿐이에요. 그런데 지금 그 아주머니의 형편이 말이 아니거든요." 그 문제에 대해서라면 그렉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케이티는 늙은 데다 술까지 퍼마시는 쓸모 없는 노파에 불과했다. "만일 케이티가 술을 마시는 것만큼이나 집안의 여러 가지 시설에 신경을 썼다면 이런 일은 아마 없었을 거야." "예?" "우리가 지금처럼 이렇게 어둠 속에 갇혀 있을 필요는 없을 테지." "촛불은 켰잖아요." "전기만은 못 해." 스테파니의 생각에는 오히려 운치가 있어 보였다. 오랜만에 촛불 아래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밤을 보낸다는 생각에 약간 기분이 들뜨기까지 했다. 하지만 단순하고 도시형인 그렉으로서는 촛불이 매우 못마땅한 듯이 보였다. "할 수 없잖아요, 여보." "할 수 없지, 케이티 때문이니까.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는지 모르겠어." 스테파니는 그렉과 케이티의 중간 입장이 되어야만 했다. 어느 편을 일방적으로 들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이었다. 또한 그렉의 편을 들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이었다. 또한 그렉의 편을 들어 케이티를 나쁘다고 할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케이티 아주머니는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지 않아요." "믿어지지 않아." "정말이에요." "케이티가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고?" "그래요." "당신한테는 그렇게 보이는 게 당연하겠지." 스테파니는 재빨리 케이티 문제 때문에 그렉과 다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렉의 기분도 상하게 하지 않고 케이티도 욕되게 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오늘은 그렇지만요, 여보. 평소에는 그렇게 많이 마시는 편은 아니에요. 내일이면 나이가 70인데 어떻게 많이 마실 수 있겠어요, 안 그래요?" 그렉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그는 전혀 다른 일에 몰두해 있는 중이었다. "여보, 나가서 좀 둘러보는 것이 좋겠어요. 당신 괜찮죠?" 그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막 문을 열고 나가려는 스테파니를 넌지시 불렀다. "여보." "네?" "당신 이쪽으로 와 줄 수 있겠어?" "네에?" 스테파니는 주춤거리는 걸음을 멈추며 놀란 표정으로 그렉을 바라보았다. 에덴에 온 후로 그렇게 자신을 부른 적이 없는 그렉이었으므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렉의 두 눈엔 전과는 다른 색다른 무엇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와 닿았다. "어서." 그의 재촉에 스테파니는 조심스럽게 그렉이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왔다. 그렉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스테파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스테파니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마치 그렉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분과 같이 온몸을 스치는 전율이 바로 이 순간에도 자신을 내리치는 것만 같았다. 스테파니의 손끝이 가볍게 떨리면서 그렉이 앉아 있는 침대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렉의 눈빛은 확실히 보통 때하고는 달라 보였다. "여보." 스테파니는 그렉의 조용한 목소리에 자신의 숨소리를 죽이며 앉아 있었다. "아직도 그렇게 걱정하고 있어?" "......."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걱정 안해요." 입으로는 그렇게 말을 하기는 했지만 마음과 몸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렉의 손이 어깨에 닿았을 때 그녀는 소스라치듯 목을 움츠렸다. 그렉은 그녀가 걸치고 있던 슬립 가운을 등뒤로 흘러내리도록 벗겼다. 이내 어깨가 드러나고 슈미트에 연결된 어깨 걸이가 보였다. 그렉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것마저 어깨에서 재빨리 벗겨 내렸다. 상체가 완전히 드러나면서 스테파니는 가슴이 더욱 세차게 고동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미 수차례 각오하기는 했지만 냉정을 차리기에는 긴장감이 앞섰다. 몇 년 전인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도 없었다. 전 남편 이후 그녀의 육체는 아직 한 번도 문을 연적이 없는 처녀지와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한 여자로서의 본능이 그 동안의 긴 잠에서 비로소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그 동안 묵묵하게 기다려 주는 듯했던 그렉의 본능도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진 듯했다. 그는 바로 이날 밤 스테파니의 육체를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려 하고 있었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고 했잖아, 기억하지?" 그녀는 재빨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가슴의 설렘과 긴장 때문에 입술이 열리지가 않았던 것이다. 무엇부터 먼저 생각해야 좋을지 전혀 그녀의 머릿속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렉은 이미 그녀의 결혼한 남편이었다. 그가 요구하기 이전에 스테파니 편에서 먼저 요구할 수도 있었지만 전혀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먼저 요구해 올 것에 대비한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이 먼저 앞서는 것이었다. 한 때는 거침없이 열리면서 남편을 받아들였던 그녀의 육체가 이제는 파들 거리면서 떨고 있었다. "당신은 항상 걱정을 너무 많이 하는 게 탈이야." "걱정 같은 건 안해요......." 그녀는 간신히 한 마디를 입밖으로 던졌을 뿐이다. 하지만 그렉이 그녀를 눕히고 몸 위로 올라왔을 때 그녀는 순간적으로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자신이 남자의 몸을 알고나 있었는지 육체관계의 경험을 가지기는 했었는지 까마득한 기억 속에 어렴풋하게 느껴지며 전 남편의 얼굴과 아이들의 얼굴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사라는 긴장된 듯한 표정으로, 데니스는 계속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뜻밖에도 빌과 질리의 모습도 그녀의 시야에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질리는 매우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스테파니를 응시했다. 아직 벗은 가슴을 누르는 그렉의 감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오려는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는 가슴의 격정이 한 차례 그녀 가슴을 휩쓸며 지나갔다. 그러한 격정은 다시 스테파니를 울고 싶도록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렉은 그녀를 위해 부드러운 애무를 해주는 배려가 전혀 없었다. 언뜻 보기에 그는 스테파니와 함께 있으면서도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을 연상하는 듯했다. 하지만 스테파니는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순간 그렉이 자신에게 굉장히 가깝게 다가왔다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사랑해요." 그 말뿐이었다. 더 이상 할 말이 그녀에겐 없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렉에게 몸을 맡겨야 하며 남편이기 때문에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밀어내고 그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스테파니였다. 그가 계속해서 더욱 가깝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아득하게 잊고 살아왔던 느낌이면서 감각이었다. 그가 그녀의 주위를 배회하는 동안, 그녀의 육체는 아주 조심스럽게 깨어나고 있었다. 그녀의 육체는 중년여인이라기 보단 순결한 미개척지나 다름이 없었다. 제왕절개 수술을 통해 사라와 데니스를 낳았다고는 하지만 오래 전에 남성을 알았고 이미 거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지금은 육체적인 사랑에서 벗어난 채 살아온 그 동안의 생활에서 과감하게 벗어날 할 때였다. 그렉은 남편으로, 아니 남자로 생각하고 그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결혼한 남편과 아내 사이에 가장 현실적이고 절실하게 필요한 두 육체의 결합을 일구어 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렉은 여전히 스테파니의 몸 위에서 느리게 어느땐 빠르게 하얀 살갗을 애무할 때마다 스테파니의 몸은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둘 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는 순간 그렉의 애무에 익숙해진 듯 스테파니의 몸이 흐느적거리기 시작했고 양 무릎 사이로 그렉의 커다란 몸이 천천히 부딪쳐 왔다. 그리고 다시 짧은 시간이 지났을 때는 좀더 분명한 현상이 일기 시작했다. 스테파니는 자신의 육체에 고마움을 느꼈다. 가슴이 조이는 불안과 긴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육체는 성의 유희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사랑의 속삭임도 더 이상의 부드러운 그렉의 손놀림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의 육체는 몸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렉의 몸이 그녀의 몸 안에서 춤을 출 때마다 스테파니는 육체는 따라 춤추기 시작하였고 움직일 때마다 짧게 터져나오는 신음 소리만 어둠을 타고 흘러 나갔다. 스테파니는 그날 밤 이후 더욱 그렉을 향한 사랑에 빠져들었다. 새롭게 탄생한 여자로서의 육체가 그렉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가득히 가슴에 끌어안았다. 비로소 완전한 여자로 다시 태어난 느낌이었다. 결혼의 의미를 미처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지난날의 일이 마치 꿈을 꾸듯 다가왔다. 그녀는 질리가 도착하기로 약속된 날만을 조급하게 기다렸다. 그녀에게 자신의 기쁨을 나누고 싶은 욕구가 차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누구에겐가 털어놓지 않고서는 가슴이 터질 듯한 그날 밤의 일들을 질리에게 고백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렉과 질리의 관계를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는 전혀 다르지만 그렉 역시 질리의 도착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스테파니가 그 이유를 미리 알고 있었다면 17년전 아버지를 따라 죽지 못한 자신을 후회했을 것이다. 회사를 맡기지 말고 필요에 따라 그렉에게 돈을 주자던 빌의 제안을 그녀는 거부했으며 위원들의 불평도 감수하면서까지 그렉의 존재를 하퍼그룹에 인식시키려고 노력해 온 그녀였다. 하퍼그룹에서 스테파니를 싫어하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한결같이 그녀를 좋아했고 존경하기까지 했다. 그녀가 파경을 맞이했을 때는 모두가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의 일처럼 가슴아파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전혀 다른 분위기가 결혼식 내내 계속되었다. 마치 그녀의 운명을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가 깊은 우려와 관심을 나타내기에 바빴다. 스테파니의 행복을 기원하는 그들에게 그렉은 적임자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그와 같은 우려가 현실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필립과 동행하지 않은 채 질리 혼자 에덴으로 초대되었을 때 부터였다. 그렉의 비위를 맞추려던 스테파니 자신도 무관하지만은 않았다. 스테파니는 그렉과 질리 사이에서 타오르기 시작하는 불꽃에 기름을 퍼붓는 커다란 실수를 범하고 만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는 바로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질리가 도착하기로 약속된 날 그렉은 아침부터 질리 이야기를 꺼내는 등 약간 들뜬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드디어 질리가 오기로 약속된 날이군." "그래요, 여보." "당신이 덜 심심할 거야." "당신 역시 그렇고요." "무슨 소리지?" 그렉은 혹시 자신의 감추어 둔 음모가 드러나지는 않았는가를 염려하면서 보이지 않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같이 테니스도 칠 수 있을 테니까요." "이번 기회에 당신도 함께 배우는 게 어떻겠어?" "테니스요? 하지만 난 제대로 해내지 못할 거예요." "하긴 당신에게는 운동복보다는 우아한 의상이 더 잘 어울릴 테니까." 그렉은 더 이상 그녀에게 권하지 않았다. 그의 속셈이 우아한 의상이 운동복 보다 어울린다는 그럴 듯한 말속에 감쪽같이 숨겨진 것을 그녀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럴지도 모르죠." "질리의 남편은 어때?" "필립 말인 가요?" "응." "매우 좋은 사람이죠. 그 만큼 아내를 사랑하는 남자도 세상에는 많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럼 그녀는 무척 행복하겠군."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질리에게 필립은 허울뿐인 남편임을 충분히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테파니의 결혼식 날 하퍼가에서 처음 눈빛이 마주쳤을 때 그렉과 질리 사이에는 서로 통하는 것이 있었다. 그 이후 두 사람 사이에서는 보이지 않는 교류가 계속된 셈이고 이미 그들은 서로를 몹시 그리워하는 사이가 되고만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사물에 대한 특히 사랑하는 상대방에게 눈이 멀게 된다고 하는 말은 스테파니를 두고 하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렉을 향한 사랑 때문에 가슴앓이를 할 정도였는데 그와 함께 밤을 지샌 다음부터는 그 감정이 더욱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그렉에 대한 정확한 판단력이 생길 리는 없었다. 그가 무엇을 원하고 있으며 무엇을 생각하는지, 질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갑작스런 악어 사냥에는 과연 어떤 음모가 들어 있는 것인지 객관적인 생각에 빠져 있을 겨를이 없었다. 질리가 도착하기로 되어 있는 날 아침부터 공연히 그렉은 들떠 보였다. 그렉은 아내의 친구가 오기로 되어 있는 아침부터 아내에게 좋은 일이라도 생긴 듯 부산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스테파니의 생각으로는 그것은 자신에 대한 배려였으므로 그녀를 그렉에게 더욱 깊이 빠져들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스테파니는 크리스와 함께 마구간에서 말을 돌보고 있었고 같은 시간, 그렉은 거실을 서성이며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계속해서 창문을 통해 활주로를 내려다보곤 했다. 그의 모습으로 보아 질리를 무척 기다리는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는데 곁에서 그를 지켜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눈치챌 사람은 전혀 없었다. 따라서 그렉은 자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채 초조하게 안을 서성거렸다. 질리가 약속대로 무사히 에덴에 도착해야만이 그 불안이 불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렉에 비해 스테파니는 담담한 마음이었다. 질리가 기다려지는 것이 사실이기는 했지만 그렉처럼 초조하고 불안해하지는 않았다. 크리스와 함께 말을 돌보던 그녀는 이윽고 먼 하늘에서 날아오는 비행체를 발견했다. 그녀보다 앞서 집안에서 질리의 도착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렉의 표정은 금새 환하게 밝아졌다. 그곳에 다른 비행기가 들어올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잠시 후에는 다가오는 경비행기가 하퍼그룹의 전용기임을 금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렉도 창가로 달려가더니 날아오는 비행기를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마음은 당장이라도 활주로까지 달려가 그곳에서 질리를 맞이하고 싶었다. 사랑에 눈먼 스테파니만 혼자 있다면 또 모를 일이었지만 다른 두 사람이 더 머물러 있었으므로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케이티는 허술하고 형편없는 노파같이 보이기는 했지만 사냥터에서 보여준 그녀의 행동으로 전혀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더욱 행동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렉은 비행기가 활주로에 안착하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가 스테파니가 먼저 질리를 맞이한 다음에야 나설 작정이었다. 그룹의 전용기를 조종하는 조종사는 과연 스테파니와 총지배인인 빌의 뜻에 따라 선택된 일류급 조종사였다. 비행기는 능숙한 조종 솜씨로 무사히 활주로에 진입했다. "질리가 오나 보다!" 스테파니는 마구간을 나와 활주로로 향했다. 마치 벙어리처럼 항상 입을 다물고 있는 하인 크리스는 활주로로 뛰어가는 스테파니의 모습을 걱정이 되는 듯 바라보았다. 그는 스테파니를 누구보다 좋아하고 존경했다. 하지만 그렉에 대해서만큼은 전혀 그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불안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것은 그렉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도 왠지 불길하고 불안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또한 크리스는 질리가 에덴에 오는 것조차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공연히 불안만 더해질 뿐이었다. 그는 옛날부터 질리에 대해선 달갑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한 마디로 스테파니에 비해 질리는 형편없는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런 여자가 두 사람의 신혼 여행지인 여기까지 쫓아온다는 점이 크리스로 하여금 왠지 모를 불안감을 더욱 가증시켰다. 비행기는 무사히 안착했고 이윽고 질리의 모습이 나타났다. "데려다 줘서 고마워요." 질리는 조종사에게 가볍게 인사한 후에 트랩을 내려왔다. "어서와, 질리?" 미리 기다리고 있던 스테파니는 기뻐서 두 팔을 벌리며 그녀를 맞이했다. "안녕, 스테파니." 두 여자는 그렇게 아주 반갑게 서로를 껴안으며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비로소 집안에 있던 그렉이 성급한 걸음으로 거의 뛰다시피 나오는 것이 멀리서도 어렴풋하게 보였다. 정원수에 물을 주던 케이티는 물끄러미 그 광경을 바라보았고 마구간에 있던 크리스도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초조해 했다. 그들이 보기에 그렉의 행동이 마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애인이라도 맞으러 가는 것 같은 모습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스테파니의 친구가 왔는데 그렉이 그렇게 기뻐할 이유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상대가 형편없는 여자로 생각했던 질리로 그것도 혼자였다. 그녀가 필립과 동행이기라도 했더라면 크리스도 케이티도 그렇게까지 불안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와줘서 고마워, 질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될 거야." "안녕, 크리스." 질리가 경쾌한 목소리로 크리스에게 말을 건넸다. 두 여자는 현관을 향해 걸어가다가 조급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그렉을 만났다. "여행은 편안했니?" "지루해서 죽는 줄 알았어." 질리는 어느 때부터 활기차고 아름답게 보였다. 야생화와도 같은 야성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잘 왔어요, 질리." 그렉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그렉." 두 사람은 잠깐 서로의 손을 잡았을 뿐 의심받을 만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친구의 남편에게 그리고 아내의 친구에게 할 수 있는 의례적인 인사만 건네는 모습이었다. "에덴에 잘 왔어요." 세사람은 질리를 가운데 두고 그렉과 스테파니가 각각 양옆에 서서 나란히 걸었다. 그러나 그렉은 질리의 어깨에 팔을 얹은 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다가온 크리스가 질리의 가방을 양쪽 손에 들고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뒤를 따랐다. 온통 새까만 크리스의 얼굴에서 표정을 읽어낸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스테파니에게 닥칠 어떤 운명이라도 이미 감지하고 있는 것처럼 내내 그의 표정은 불안하기만 했다. 7 양쪽 손에 무겁게 가방을 들고 그들의 뒤를 따르는 크리스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불안했다. 비록 하인의 신분이기는 하지만 그의 몸속에서는 인디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가 느끼는 감정이나 선입관, 예측은 무척 민감했다. 그가 하퍼가문과 스테파니 하퍼를 존경하며 평생을 따르는 것도 그의 내부에서 흐르는 탁월한 선입견이 그렇게 하도록 그를 유도한 것이 크게 작용한 탓이다. 따라서 크리스가 그렉과 질리를 향해 갖는 선입견은 놀랄 만큼 예민하고 섬세한 직감이 작용하는 것이었다. 스테파니는 하퍼그룹을 어떻게 이끌어 왔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현실에 무척 둔감했다. 그것은 사랑에 빠지는 여자에게는 더욱 심해지는 것처럼 그 점이 지금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스테파니의 큰 단점이 되고 말았다. 그쪽으로는 그렉이 교활하다 할 정도로 의도적이었다. 질리도 그렉에 못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진실된 모습은 크리스만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 그들이 몰고 올 위험을 충분히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인 그렉의 사랑을 얻었다고 확신하는 스테파니의 모습은 마치 어린애가 아닌가 싶을 만큼이나 천진난만했다. 한 번이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그렉과 질리의 미묘한 관계를 그녀는 바보처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참, 질리." 스테파니는 여전히 자신의 마음만을 믿고 있었으므로 마치 친언니가 동생을 걱정해주는 듯한 태도였다. "점심은 먹지 않았겠지?" 이때의 그녀 모습은 하퍼그룹의 총수로서가 아니라 다정하고 상냥한 여자일 뿐이었다. 그 여자가 남편과 부정한 관계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는 친절하게도 그녀의 안부와 건강을 걱정하는 사랑에 흠뻑 빠져버린 여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케이티도 네가 온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어." "어머, 정말이야?" 질리는 호들갑스럽게 물으면서 조금 과장되는 몸짓을 보이기까지 했다. 그때 그녀의 몸이 스테파니의 반대편에 서 있는 그렉의 몸에 부딪쳤다. 그녀는 고의적이라는 느낌이 들만큼 과장되게 몸을 흔들며 놀라는 모습을 나타냈다. "그렇다니까." 스테파니는 기분이 좋은 듯 유쾌하게 말했다. "케이티를 본 게 벌써 언제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스테파니." "오래됐지." "그 아줌마, 지금은 어떻게 지내니?" "여전하셔." "그럴 줄 알았어."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질리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정원수에 물을 뿌리는 케이티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그녀는 말일 뿐 생각은 전혀 다른 곳에 머물러 있음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너를 위해 특별히 점심을 준비했어." "점심을?" "그래." "누가?" 엉뚱한 그녀의 질문에 스테파니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누구긴, 케이티지." 질리는 비로소 자신이 에덴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케이티 아줌마도 내가 오는 걸 알아?" 스테파니는 다시 어이없다는 듯이 가볍게 웃었다. "질리, 너 오늘은 좀 이상하구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니?"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그렉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치 질리가 혹시 실언이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경계심에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그런 게 아냐, 스테파니. 있잖아, 오랜만에 에덴에 오니까 내정신이 아닌 것 같아." "내가 보기에도 그렇구나. 하긴 얼마만에 오는거니." "그래." "정말이지 다시 우리가 옛날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야." "실은 나도 그래." 곁에서 두 여자의 대화를 듣는 그렉의 입가엔 조용한 미소가 떠올랐다. "공항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긴 했어." "그래?" "하지만 말도 마, 엉망이었으니까." "저런, 그렇게 나빴니?" "그렇다니까." 뒤따르는 크리스는 마치 화약을 지고 불길에 뛰어드는 기분을 느꼈다. 질리와 스테파니의 대화와 은근히 기뻐하는 그렉의 모습에 그는 화약고 같은 위험이 자꾸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케이티 역시 질리의 방문을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같은 여자이긴 하지만 그런 바람둥이는 그녀에게 있어 반갑지 않은 방문자였다. 그녀가 점심식사를 마련한 것은 전적으로 스테파니의 체면 때문이었다. 스테파니를 위해서는 어떤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 케이티였기 때문이다. 스테파니는 뒤에서 듣고 있던 크리스가 더욱 놀랄 만한 말을 꺼내놓았다. "질리, 우리가 내일 어디로 가기로 했는지 아니?" "글쎄?......." "악어사냥을 떠날 예정이란다." "뭐?" 질리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스테파니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보다 더욱 놀란 것은 뒤에서 묵묵히 그들을 따라오던 크리스였다. 무엇 때문인지 정확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절망감이 느껴졌다. 우선 악어사냥이라는 자체부터가 스테파니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 크리스의 생각이었다.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스테파니가 직접 사냥에 나서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어떤 불길한 예감이 스치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악어사냥을 간단 말이지?" "그래." "넌 그런 사냥은 별로 좋아하지 않잖아?" 그렉의 눈길이 재빨리 질리에게로 쏠렸다. "그건 사실이야." "근데?" "이 이가 생각해 낸 거야." 스테파니는 다시 행복한 듯 그렉을 가리켰다. 그렉은 질리를 쳐다보던 눈길을 재빨리 거두어들이며 그녀에게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단 크리스에게는 그런 그들의 모습들이 낱낱이 눈에 보였다. "우선 안에 들어가서 차라도 한 잔 마시는 게 어때? 피곤할 텐데." "그러는 게 좋겠어." 그럴 때 그렉은 붙어 서다시피한 질리의 허리를 넌지시 팔로 휘감아 껴안았다. 질리는 그러는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아니 그보다 더 오히려 몸을 그렉에게 바싹 붙이려는 의도가 역력해 보였다. 허리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면서 힘껏 그녀를 자신에게 끌어당기기조차 하는 것이었다. 스테파니 그녀가 그렉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떤 여자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그에게 육체를 허락한 다음부터 스테파니는 더욱 그에게 빠져들었다. 오랫동안 갇혀있던 육체의 문을 열어 준 그렉에게 은인 같은 고마움조차 느끼는 그녀였다. 당당하게 대그룹을 경영하는 여장부이긴 하지만 그녀 역시 어절 수 없는 여자임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심정을 질리에게 솔직하게 고백했다. "있지, 질리. 무엇 때문에 그렉 같은 남자가 나 같은 여자와 결혼할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 때가 있어."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들어봐. 그런데 그 의문이 이제서야 풀리는 거 같아." "그래?" 질리는 의심이 드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자신의 표정을 고쳤다. "그이가 옆에 있으니까 사는 게 정말 재미있는 것 같아." "그게 정말이야?" 질리는 놀랐다는 듯이 그리고 믿어지지 않는 다는 듯이 물었다. 거기에는 전혀 다른 그녀만의 감정, 즉 질투가 섞여 있었다. "그럼, 정말이구말구." "굉장하네." "그래, 정말 굉장해. 이건 새로운 발견이야." "그 정도야?" "질리, 있지? 난 그이를 너무너무 사랑하고 있어. 나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여자야." 그렉은 확실히 스테파니의 눈을 가려 전혀 앞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한 번이라도 다시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기라도 했다면 금방 알 수 있을 터인데도 그녀에게는 그럴 많나 시간적,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만큼 그렉은 스테파니를 자신의 포로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스테파니는 미친 듯이 그렉에게 열중 해 있었다. 에덴으로 찾아 온 질리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지, 그녀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렉의 마음은 어떤 것인지, 전혀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듯했다. 그들이 이미 어떤 암약을 했다 하더라도 상관이 없어 보였다. "하긴......악어사냥을 즐기는 남자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 말에는 약간의 불만스러움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렉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는데 그가 설령 더 끔찍한 취미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미 스테파니의 감각이나 마음은 그것을 올바로 느끼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사랑에 빠진 한 여인의 절규 같은 염원이 스테파니의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난 악어 같은 짐승을 죽이는 일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래. 그런데 어떻게 마음이 변할 수 있었던 거지?" "나도 모르겠어. 아마 그이를 사랑하기 때문이겠지." "아주 푹 빠졌구나?" "그래, 맞아. 너도 알겠지만, 사랑에 빠진 여자는 남자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법이거든." 스테파니는 그렉에 대한 자신의 사랑에 그 만큼이나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확신 이상이기도 했는데 마치 자신에게 닥쳐 올 운명적인 순간을 앞당기기라도 하려는 듯 그렉에게 몰두해 있었다. 그녀는 질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머지 않아 일어난 비극적인 운명에 대해선 마치 악마의 장난이기라도 한 것처럼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질리가 도착한 후부터 그렉의 기분은 무척 좋아 보였다. 두 여자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있을 때 그들에게 다가온 그렉의 손에는 캔맥주가 들려 있었다. 이미 하나를 마시고 두 개째였다. "두 사람이 앉아서 얘기하는 모습이 무척 잘 어울리는데?" "그럼요, 여보. 나하고 질리는 친한 친구 사이인데요. 그렇지, 질리?" "그래." 질리는 매력적으로 웃으며 살짝 그렉을 쳐다보았다. "에덴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질리." "무슨 말씀이세요, 그렉. 에덴에 대해서는 내가 당신보다 더 잘 알고 있어요." "참, 그렇군요!" 세 사람은 함께 웃었다. 특히 그렉과 질리는 잠시도 시선을 떼지 않으며 서로의 눈을 마주쳤다. 그렉은 두 여자가 앉아있는 소파에서 질리 쪽의 팔걸이에 걸터앉으며 몸을 굽혔다. 그런 자세에서 질리의 어깨 위로 몸을 굽히면서 손을 뻗어 스테파니의 머리칼을 만져주었다. 스테파니는 그의 동작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머리칼을 만져주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 외의 다른 일에는 아무런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렉과 질리는 그렇게 스테파니의 신경을 흐려놓으면서 그들만의 엉뚱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상체를 굽힌 것 같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완전히 고의적인 외설적인 행동이었는데 더구나 질리 쪽에서는 모르는 척 하면서도 받아주는 것이 더욱 상황을 공교롭게 몰고 갈 뿐이었다. 그렉의 하반신이 질리의 어깨에 얹혀 있었다. 그곳이 질리의 어깨에 닿는 순간 그녀는 깜짝 놀라는 듯했지만 그것도 역시 순간뿐이었다. 그녀는 스테파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전보다 과장된 몸짓으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어깨를 으쓱하기도 했고 공연히 우습다는 듯 상체를 심하게 흔들기도 했다. 스테파니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그렉의 성기가 그런 상태에서 발기되기 시작했다. 그렉은 헐렁한 실내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스테파니는 거의 눈치를 챌 수가 없었다. "스테파니?"' "응?" "말들은 어때?" 질리는 창문을 통해 정원의 한쪽을 차지하는 마구간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크리스가 있었다. "여전해. 크리스가 돌보고 있으니까." "저말들 중에 네가 타는 말은 어떤 거지?" "저쪽 저기......." 스테파니는 말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손으로 그곳을 가리켰다. 그러는 사이에 질리는 머리를 만지는 척하면서 머리 쪽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재빨리, 그리고 최대한 노력하면서 그렉의 발기된 성기에 손을 가져갔다. 다급하고 초조한 상황은 그렉을 더욱 급작스럽게 흥분시켰다. 스테파니가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질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앉아있었다. 그렉과 질리는 이미 쾌락의 합의점을 찾아내고 있었다. 더 이상 그들에게는 약속의 말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악어사냥을 가기로 되어있는 전날은 스테파니에게 영원히 기억될만한 날이었다. 질리가 에덴에 도착한 것이 사건의 시작이었으며 사랑에 빠진 스테파니는 내일 있을 악어사냥의 불안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편안하고 아늑한 잠자리에 빠져들었다. 희미한 달빛이 구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밤의 대지를 조용하게 밝히는 밤이었다. 고즈넉한 밤풍경은 매우 수상쩍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듯 조용하기만 했다. 하지만 공기는 긴장된 듯 음울하고 차가운 전율이 흐르는 듯 조용하게 떨리고 있었다. 충직한 하인 크리스는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질리의 등장에 따른 의혹과 이튿날 있을 악어사냥에 대한 불길한 예감 때문에 그는 두 눈을 계속 뜬 채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그는 에덴의 전경을 천천히 살펴보면서 이제 곧 그 안에서 벌어질 심상치 않은 일에 대해 직감하고 있었다. 전에 없이 크리스는 긴장된 마음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크리스의 불안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희미한 달빛만으로도 충분히 앞을 볼 수 있을 정도였는데 먼저 모습을 나타낸 것은 질리였다. 그녀는 도둑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여가며 거실을 지나 밖으로 천천히 나왔다. 술에 취해서 곯아떨어지지 않은 밤이면 작은 소리에도 깨어나는 케이티였으므로 그녀를 걱정하는 눈치였다. 밖으로 나온 질리는 마구간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에는 말이 쉬는 곳 이외에도 건초뭉치를 쌓아두는 창고가 붙어 있었다. 질리는 그곳에 서서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리며 달빛을 쳐다보면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 한숨의 의미는 그녀만이 알고 있는 것으로 확실한 것은 그녀가 매우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도둑처럼 방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듯 했지만 크리스가 말 우리에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피부색이 검은 크리스의 모습은 어둠과 혼합되자 전혀 사람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녀를 발견한 크리스는 다음에 벌어질 일에 대해 이미 짐작을 하면서 불안에 떨고 있었다. 크리스의 예측은 불과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적중하고 말았다. 다시 희미한 가운데 그림자가 나타났다. 크리스는 그림자가 누군지 그 이전부터 짐작할 수 있었고 그의 짐작은 거의 정확한 것이었다. 그림자의 주인공은 그렉이었다. 그는 잠깐 서서 질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윽고 조용히 다가갔다. 그러자 질리의 호들갑스러운 놀라움이 한차례 있었지만 이미 알고 있는 듯 했으며 그렉은 뒤로부터 살짝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렉!" 그녀는 조급하게 돌아섰고 그 앞에는 그렉의 가슴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이미 그들은 남이 아니었다. 친구의 남편도 아니었고 아내의 친구도 아니었다. 다만 욕정에 굶주린 남녀가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잠을 이룰 수가 없지 뭐겠어요." "나도 그래." "어머, 당신도?" "당신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려서 말이지......." 그들은 성급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오, 그렉!" 질리는 이미 그렉의 바지를 내리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두 손으로는 어쩔 줄 모르며 이미 발기된 그렉의 성기에 성급하게 손을 대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 파묻힌 크리스가 낱낱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크리스의 표정은 어둠 속에서 전혀 아무런 변화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무한한 분노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렉보다 더욱 미운 것은 질리였다. 스테파니가 질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토록 아껴주는 스테파니를 이렇게 질리는 철저하게 배신하고 있었다. 그 시간은 별로 길지 않았다. 그렉은 그녀를 번쩍 들어안더니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질리는 그렉에 의해 건초묶음 위에 두 다리를 늘어뜨린 채 걸터앉게 되었다. "이번엔 내차례야." 그렉이 얼굴을 움직일 때마다 질리는 천천히 전기에 감전이라도 되는 듯 전신을 무섭게 요동쳤다. 그리고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렉은 서서히 몸을 앞으로 내밀기 시작했고 질리는 어쩔 줄 몰라하며 그의 어깨를 두 팔로 감았다. 창고 안은 두 사람의 뜨거운 입김으로 가득 찼다. 밖에서 지켜보던 크리스는 질리가 격정을 이기지 못한 채 건초묶음 위로 쓰러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미 벗겨진 그녀의 상체로 유방이 드러났다. 두 육체는 자연스럽게 결합되었고 그렉은 질리를 더욱 짜릿한 무아경으로 몰아갈 수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호흡은 거친 폭풍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제 2부 처절한 운명 8 스테파니를 향해 소리 없이 다가오는 운명의 순간은 그 속도를 조금도 늦춤이 없이 물밀 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그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었고 피할 수는 더욱 없었다. 왜냐하면 그렉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도 컸으므로 그녀가 그렉을 조금만 덜 사랑했다면 비극적인 운명을 비껴 갈 수도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미 질리와의 불륜으로 그녀를 배신한 그렉이었다. 결과적으로 스테파니는 그토록 사랑하는 그렉과 사라와 데니스 다음으로 가장 소중한 친구 질리에게도 배신당한 셈이다. 애석하게도 불륜을 저지른 당사자 외에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크리스뿐이었다. 하지만 크리스는 너무나 엄청난 충격 때문에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그 일을 가슴에만 담아 두고 있었다. 그 사실을 만일 알게 된다면 스테파니가 어떻게 나올지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차라리 입을 다문 채 가슴속에 묻어 두기로 결심했다. 그 길이 스테파니를 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가 만일 그렉과 질리의 불륜을 스테파니에게 알리기라도 했다면, 그래서 그녀가 그렉의 배신을 알게라도 되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스테파니의 마음이 그렉을 경계하거나 최소한 약간이라도 멀어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애석하게도 크리스는 그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예정대로 이튿날 스테파니와 질리 그리고 그렉은 몇 명의 전문가라는 사람들과 악어 사냥을 떠났다. 악어가 서식하는 호수에서 먼 곳에 텐트를 쳤기 때문에 별다른 위험은 없어 보였다. 두 여자는 야간을 이용해서 악어 사냥이 벌어지는 현장에는 함께 끼여들지 않았다. "왜 밤에 사냥을 하죠?" 스테파니가 물었을 때 그렉은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원래가 그래. 낮에는 잡기가 힘들거든. 그리고 큰놈은 밤이라야 잡을 수 있어." "그렇군요. 당신, 몸조심해야 돼요, 여보." "걱정할 거 없어. 성공하면 내일 낮에는 굉장한 악어들을 구경하게 될 거야." 스테파니는 두려움 때문에 얼굴을 찡그렸다. 악어의 모습은 상상하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질리는?" 그가 물었을 때 스테파니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텐트 안에 있어요. 그 애는 나보다 더 무서운가 봐요." "당신도 무섭소?" "당연하죠, 여보." "하긴 나도 무섭기는 해. 놈은 원체 포악하고 사납거든." "그럼 가지 마세요." "안되지, 이미 전문가들까지 다 왔는데." "조심하세요." 스테파니는 그렉의 마음에 이미 자리잡은 어떤 무서운 음모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방법은 아직 결정하지 못했지만 목적은 이미 분명하게 설정되어 있는 셈이었다. 그가 스테파니와 결혼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받는 의혹을 감수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가 스테파니의 재산을 노린다고 공공연하게 떠들어댔고 매스컴까지 동조해서 그를 몰아세웠던 것이다. 악어 사냥은 그 포악성 때문에 특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그 분야에서 평생을 살아 온 전문가들조차 잠시도 경계심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잠깐의 실수로 최소한 몸의 일부분이라도 물어뜯긴다면 바로 잘려 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필요한 장비는 랜턴이었다. 어둠 속에서 벌어지는 사냥이므로 불은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었고 다음에 필요한 것은 악어의 등에 꽂아야 되는 밧줄에 달려 있는 날카로운 창과 여간해서는 끊어지지 않을 밧줄이 필요했다. 밧줄은 최대한 가늘고 강한 것이라야 했다. 악어의 가장 무서운 입을 묶어야 되기 때문에 굵으면 사용하기가 힘들었다. 악어에 대한 추적은 물과 땅에서 동시에 시작된다. 땅에 올라와 자는 순간 놈을 발견하며 놈이 아직 완전히 사나워지기 전에 처치해야만 하는 것이다. 드디어 뭍에서 자고 있는 한 마리를 발견했다. 랜턴의 불빛에 깨어난 악어는 본능적으로 물을 향해 빠르게 옮겨가기 시작했다. "저기 간다." 사냥꾼이 먼저 발견했다. 스테파니에게는 큰소리를 쳤지만 사실상 그렉은 사냥꾼은 아니었다. 곁에서 함께 거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전문가들은 과연 전문가답게 침착하게 움직였다. "저쪽이야." "조용히 해." 만일 악어에게 섣불리 접근하면 놈이 언제 급선회해서 무섭게 달려들지 모를 일이었다. 악어는 예측대로 이윽고 물 속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악어를 사냥하기에 편리한 점은 놈이 항상 물위에 떠 있다는 것이다. 놈은 물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지 않았다. 가끔씩은 바닥에 죽은 듯이 붙어서 꼼짝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물위로 등과 머리통을 내놓고 있을 때가 많았다. 사냥꾼 일행은 보트에 올라탄 채 막 물에 들어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 악어의 뒤를 바싹 뒤따랐다. "던져." 제일 고참인 사냥꾼이 창을 들고 있는 동료에게 말했다. 그의 동료는 창던지는 솜씨가 대단했다. 만일 그가 실수라도 한다면 일행은 또 다른 악어를 쫓아 늪을 헤매야만 할 것이다. 그렉은 그들의 곁에서 사냥보다는 생각에 곰곰이 빠져 있었다. "잠깐, 명중이다." 사냥꾼이 던진 창은 정확하게 악어의 등에 꽂혔다. 가죽이 단단하기 때문에 웬만한 창이나 칼을 가지고는 놈을 찌를 수는 없었다. 창이 몸에 박힌 악어는 순간적으로 힘을 잃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놈을 뱃전까지 끌어내야만 된다. 놈이 요동을 치기 시작하면 잡는 일은 굉장히 어려워지게 된다. 창과 연결된 끈을 당겨 놈을 무사히 뱃전까지 끌어당겼다. 과정은 그 다음이 가장 중요했다. 이번에 선택된 것은 사람의 몸집만큼이나 크고 굉장한 놈이었다. 수면으로 약간 올려지면서 쩍 벌려진 놈의 아가리는 공포 바로 그것이었다. 크기로 보아 덥석 물리면 단번에 꿀꺽 삼켜 버릴 듯 했다. 뱃전에서 질긴 끈으로 올가미를 만들어 이미 대기하고 있던 사냥꾼 한 명이 민첩하게 그것을 놈의 아가리 위쪽에 걸었다. 그들은 과연 전문가였다. 그렉은 뒤에 앉아 있으면서 잔심부름 정도나 거들뿐이었다. 아래위로 벌어진 아가리 위로 다시 또 한 겹의 올가미가 걸렸다. "단단히 잡아!" 두 겹의 올가미가 걸리자 놈은 한 번 거칠게 요동을 쳤다. 한 번의 요동으로도 그것은 굉장한 힘이었다. 으르렁거리는 호랑이도 물 속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했을 것이며 근처의 물이 소용돌이치면서 뱃전이 요동을 쳤다. 한두 차례 요동을 치면서 파문을 일으키던 놈도 단단한 끈에 의해 묶이자 수면으로 약간 상체가 들려졌다. 그러자 또 다른 올가미가 아가리에 걸렸다. 이번에 걸린 올가미는 결정적으로 놈의 포획을 위한 것이었다. "끌어올려!" 여럿이 힘을 합쳐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저리 비켜!" 곁에서 걸리적거리는 그렉에게 한 사냥꾼이 소리쳤다. 그가 비록 하퍼그룹의 총수와 결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사냥꾼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사실 그들에게 변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뱃전으로 끌어올려진 놈의 크기는 정말 굉장했다. 물에 있는 것을 보았을 때와 비교해 보면 훨씬 크고 무게 또한 엄청난 것이었다. 상황이 급변했는데도 아무도 사실을 눈치채지는 못했다. 악어 사냥에 다녀온 그렉만이 알고 있었는데 곁에서 악어가 포획되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그는 한 가지 무서운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애당초 그가 스테파니와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던 동기와 연결되는 잔혹한 것이었다. "사냥은 어땠어요?" 스테파니가 물었을 때 그렉은 자랑하듯 말했다. "한마디로 굉장했어." "그래요?" "스릴 만점이야. 내일 보면 알겠지만 커다란 악어가 잡혀 올라오는 것을 보니 정말 굉장하더군." "당신도 같이 잡았나요?" "당연하지. 그런데 질리는?" 그렉은 항상 질리의 존재에 대해 먼저 물었다. "피곤하다고 했으니까 아마 잠들었을 거예요." "질리는 잠을 많이 자는 편이군." "지금이 몇 시인데요, 그럼. 당신도 어서 자도록 해요." 그들이 악어 사냥에서 돌아온 것은 새벽녘이었다. "그러는 게 좋겠군. 그런데 참, 여보." 그렉은 갑자기 생각난 듯 스테파니를 불러 세웠다. "당신 사진 찍는 것 좋아하지 않아?" "사진이라고요?"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하는 거 말이야." "그건 내 취미예요. 그런데 왜요?" "악어 사냥을 하면서 문득 생각이 나더군." "네?" "악어가 굉장히 많았어. 놈들이 물살을 가르거나 죽은 듯이 가만히 떠 있는 광경은 정말 실감이 날 정도로 굉장하더군. 거기다 호수 주변의 경치는 그야말로 장관이었어." 스테파니는 그렉의 말뜻을 아직 충분히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또한 그렉의 말은 사실이기도 했다. 다만 그런 생각을 갖게 된 동기가 의심스러울 뿐이었다.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죠?" "내 말은......." 그렉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계속 이어나갔다. "당신이 굉장히 좋아할 것 같은 경치였어. 사실 그런 경치를 쉽게 접할 수는 없지. 그래서 말인데, 질리와 셋이서 내일 그곳에 가서 사진이나 찍는 것이 어떨까 싶어." "악어들을 찍는다구요?" "악어뿐이 아니지. 주변의 경관에 당신은 금방 반하고 말 거야." "그렇게 멋져요?" "난 솔직히 그 방면에 취미가 없어서 그런데, 당신의 예술적인 감각이라면 금방 감탄할 것 같은데?" 그렉은 스테파니에게 예술적인 감각까지 운운하며 부추기기 시작했다.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스테파니는 잠깐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과거 에덴에 살면서도 그곳에 가 보지는 못했다. 위험하기 때문에 출입을 철저하게 금지시킨 탓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다 큰 어른일 뿐만 아니라 이미 그것은 십수년이 지난 옛날의 얘기였다. 세월이 흐른 지금에는 오히려 스테파니가 아이들을 염려해야 할 정도로 시간이 흘러 있었다. "그렇게 경치가 좋아요?" 그렉은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가 재빨리 표정을 바꾸었다. 그는 스테파니가 거절하지나 않을까를 심각하게 우려하는 기색이었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예?" "악어가 비록 사납다고는 하지만 배를 타면 안전할 거야. 놈은 뱃전으로 기어오르지는 못하니까." "그렇겠군요." "어때, 가보지 않겠어?" "글쎄......." "이번에 돌아가면 다시 이곳에 오기도 쉽지 않을 거야. 그리고 계절상 지금이 가장 경치가 좋을 때라고 하더군. 전문가들은 이곳을 자기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훤히 알고 있거든." "악어 사냥을 자주 오는가 보죠?" "당연하지. 그들에게 그것은 생계나 다름없으니까. 어때, 여보. 망설이지 말고 그 경치를 카메라에 담아 두도록 합시다. 그러면 우리의 신혼여행의 좋은 추억을 기록에 남기는 셈이 되지 않겠소?" 그렉은 끈질길 정도로 스테파니를 설득하려 들었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으며 그렉의 마지막 말에는 강한 설득력까지 내포되어 있었다. 신혼여행을 기념하기 위한 추억의 기록이라는 그럴 듯한 말에 스테파니는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면 그의 말에도 일리는 있는 것 같았다. 신혼여행의 추억을 남기고 싶다는 남편의 마음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점점 움직여졌다. "뭘 그렇게 망설이지?" "그런 게 아니고......." "설마 신혼여행의 추억을 남기고 싶지 않은 건 아닐 테지?" "그럴 리가, 여보." 스테파니가 성급하게 말했다. 조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다만 악어라는 무서운 짐승 때문에 아직 마음을 결정짓지 못할 뿐이었다. "나도 우리 신혼여행의 추억을 남기고 싶어요. 이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거든요.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그럼 됐어. 결정한 거야. 질리한테는 당신이 말해. 아마 거절하지는 않을 테니까." "질리를 그렇게 잘 아세요?" "내가?" 스테파니의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그렉은 무척 당황하는 듯한 눈치였는데 이내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녀의 성격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 아니겠어." 이미 질리와의 밀회를 즐기기 시작한 그였다. 거기에는 단순한 육체의 욕망만이 있을 뿐이었지만 유혹의 눈빛만으로도 질리는 금방 그에게 끌려들었고 이미 빠질 수 없는 육체관계에 끌려 들어갔다. "그럼, 내일 봅시다." "주무세요." 모든 일들은 마치 그녀의 운명을 알기라도 하듯 재촉하는 것과 같았다. 오후의 따스한 햇살이 조금은 덥게 느껴졌다. 스테파니는 사냥꾼들이 간밤에 잡은 악어를 구경하면서 새삼 겁이 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몸집이 커다란 악어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저 악어의 입을 보세요." 사냥꾼은 앉아 있는 스테파니에게 설명을 해 보였다. "저걸 보면 우리가 간밤 저놈들과 얼마나 사투를 벌였는지 아마 짐작이 가실 겁니다." 사냥꾼들도 스테파니에게는 함부로 대할 수가 없는 눈치였다. 그녀의 남편이 된 그렉에게는 전날 함부로 대하던 그들도 스테파니에게는 존경심으로 보여주었다. "정말 굉장히 크군요." "저게 크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렇게 몸집이 커다란 악어는 본 적이 없어요." "아직 모르시는군요." "네?" 사냥꾼은 어림도 없다는 듯이 말해 주었다. "그건 아마 인디고 블루색의 악어를 보지 못하셨기 때문일 겁니다." "그것도 악어 인가요?" "굉장한 놈입니다. 놈은 벌써 70년을 살아온 데다 자그마치 길이는 20피트나 된답니다." "벌써 몇 년째 그놈을 잡으려고 벼르고 있는데 매번 허탕만 치고 결국은 놈을 놓치고 말거든요." "영화에 나오는 얘기군요." "그렇다고 할 수도 있죠. 아무튼 그 녀석은 벌써 사람을 네 명이나 해치웠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 소름이 끼치는데요."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조심만 하면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테니까요." 사냥꾼은 스테파니를 이내 안심시켜 주었다. 그도 그렉을 통해 충분히 들어서 알고 있는 바였다. 스테파니가 그렉과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호수로 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여보." 그렉이 그녀에게 가깝게 다가왔다. "준비는 다 됐소?" "네." "그럼 내가 먼저 가 있어야겠군." "여보게." 사냥꾼이 그렉을 불러 세웠다. "공연히 보트에서 발을 헛디딜지도 모르니까 조심하게. 물론 떨어지면 금방 악어들이 덤벼들 거야." "걱정 마세요." "여보, 이제 악어는 그만 잡기로 해요." "알았어." 해는 서쪽으로 훨씬 기울어지고 있었다. 스테파니는 비디오 카메라를 준비한 다음 보트를 타기로 되어 있는 곳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까지는 맑은 물을 바라보며 즐거운 생각에만 잠겨 있던 그녀였지만 사냥꾼들이 잡아 놓은 악어를 보자 마음이 변했다. 갑자기 호수의 물이 무서워지면서 당장이라도 악어가 불쑥 튀어나와 거대한 입을 벌리고 달려들 것만 같았다. 그녀가 물을 바라보며 스스로 겁에 질려 있을 때 그렉은 마침 크리스와 의견 대립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가시는 건 위험합니다." 크리스는 스테파니의 안전을 걱정했기 때문에 무례함을 무릅쓰고 말리려 들었다. 질리와 가졌던 밀회를 목격한 다음부터는 더욱 그랬다. 그에게는 그렉이 스테파니를 데리고 호수로 나간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불길하게 느껴졌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거긴 위험해요." "시끄러워!" "그렇지만......." 그렉의 서슬 퍼런 태도에 크리스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물을 바라보며 잠깐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스테파니는 뒤에서 느닷없이 어깨에 손을 얹는 그렉 때문에 기절할 듯이 놀랐다. "여보, 놀랐어요." "미안해." 그렉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상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었던가 싶을 만큼 스테파니에게 잘 대해 주었다. "호수의 황혼이 아마 근사할 거야." "그럴 것 같아요." 스테파니는 가까스로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런데 질리는 어디에 있지?" "그렉은 여전히 질리의 행방부터 물었다. 스테파니는 그런 그렉의 태도에 별다른 의심을 갖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렉은 신혼여행의 추억을 남기고 싶어할 정도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렉은 질리를 찾기 위해 자리에서 잠시 일어났다. 그리고 질리가 머물러 있는 텐트로 부지런히 걸어가는 그렉을 한 사냥꾼이 불러 세웠다. "여보게, 그렉." "뭐죠?" "얼마 안 있으면 어두워 질 거야." "그래서요?" "자네들끼리 호수에 나간다는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군. 우리가 함께 동행이라도 해줘야 할 것 같네." "천만 에요. 걱정해 주시는 건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정말 괜찮겠나?" "숙녀들에게 황혼을 가까이 에서 보여 주려는 것뿐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조심하면서 잠시만 둘러보고 올 겁니다." 사냥꾼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눈치였다. 그 호수의 위험에 대해서는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아차 하는 순간 악어 떼의 습격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두워지기 전에는 꼭 돌아와야 하네, 알았지?" "그러죠.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면 공포를 쏴서 알리겠어요." "그럼 우리가 금방 달려가지."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았네." 사냥꾼의 말을 귓전으로 듣고 넘긴 그렉은 질리가 있는 텐트 속으로 들어갔다. 스테파니의 말대로 질리는 이미 그곳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그렉은 주위의 동정을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질리에게 접근해 갔다. "질리." 그는 낮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질리의 몸에 손을 가져가자 눈을 번쩍 뜬 질리는 소리를 지르려다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놀랬잖아요." "어서 일어나. 해 지는 광경을 보러 가기로 했잖아." "그 손이나 치워요. 그럼 스테파니는?" "기다리고 있어." 이윽고 그들은 태연하게 텐트 밖으로 걸어나왔다.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할 거 없어. 만일을 위해 총을 준비해 놓았으니까." "왠지 겁이 나는데요." "날 믿으라고, 알았지?" 모든 준비가 끝나자 그렉과 스테파니 그리고 질리는 보트에 올라탔다. 스테파니는 밀려드는 공포심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그렉이 함께 있었고 또 그에게는 악어를 죽일 만한 화력의 총이 있었다. 설령 악어가 덤벼든다고 해도 사랑하는 그렉이 총을 쏴서 처치해 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착각인가를 스테파니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녀는 운명의 기로에 서 있었던 것이다. 9 스테파니의 운명적인 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을 때 도시에서 약간 떨어진 외진 성당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다. 우선 하객이 한 사람도 없이 신랑 신부와 주례 그리고 피아노 반주자와 기록원이 전부였다. 그것은 이상한 예감을 갖도록 했다. 신랑과 신부의 나이로 보아 그들이 불장난 때문에 도망쳐 나온 것은 아닌 듯 보였다. 남녀가 그런 식으로 단촐하게 결혼식을 올리는 광경이 왠지 석연치가 않았다. 하지만 신랑 신부 장본인은 무척 행복한 모습이었다. 누가 보더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해 보이는 결혼식이었다. 그런대로 어딘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풍기는 것은 어딘가 이들의 결혼식에 남들과는 다른 일들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듯 했다. 식은 성당의 관습에 따라 경건하게 진행되었다. "......성스러운 결혼식을 경건하게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주례를 맡은 신부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성당 안에 메아리쳤다. 그 앞에 서 있는 신랑과 신부는 둘 다 중년으로 보이는 남녀였다. "신랑 워니 브랜드리, 당신은 신부 제인 미첼을 아내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평생을 같이 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워니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만큼 그는 제인을 사랑하는 마음에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제인 미첼, 당신은 워니 브랜드리를 남편으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신부 제인은 잠깐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다소곳이 대답했다. "맹세합니다." 그녀가 잠깐 망설인 것은 가슴벅찬 감격 때문인 듯했다. 순서에 따라 성서 위에 반지가 놓여졌다. "이 반지로 결혼을 서약합니다." 다음에는 제인이 워니에게 반지를 끼워 주며 주례 앞에서 엄숙하게 결혼을 서약했다. 그것으로 워니 브랜드리와 제인 미첼의 결혼식은 간단하게 끝났다. 사업에 성공한 중년의 워니 브랜드리는 제인 미첼에게 완전히 빠져 있었다. 그 이유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녀를 우연히 알게 된 후부터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마치 마력이 아니라면 최면술에라도 걸려든 것만 같았다. 제인 그녀야말로 워니가 평생 동안 찾고 있던 바로 그 여성이었다. 마치 그녀를 만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생긴 모습이나 말투, 행동하는 모습 그리고 조용히 침묵할 때조차 제인의 모습은 워니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워니가 그녀의 제안대로 순식간에, 더불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단둘이 결혼식을 올린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성공한 사업가인 워니에게는 당연히 친지는 친구, 이웃이 굉장히 많았다. 그들은 그 지역의 유지나 저명인사, 정치인, 예술인 등이 대거 포함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서 전격적으로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신혼여행도 특별했다. 외국 여행도 충분히 가능한 경제력이 있었는데도 제인의 의견에 따라 시내의 특급 호텔로 정하고 말았다. 형식이나 외형보다는 실제가 중요하다는 제인의 의견에 워니의 마음이 설득 당한 탓이다. 다만 자동차만큼은 최고급의 리무진을 이용했다. 결혼 예복 차림으로 호텔 앞에서 차를 내린 두 사람의 모습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자세히 보면 제인은 뛰어난 미인에 속하지는 못했다. 신부 화장과 무엇보다 행복에 젖은 표정, 미소가 그녀를 한결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들뿐이었다. 호텔의 예약된 특실이 있는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렸을 때 워니는 제인을 번쩍 들어안고 방을 향해 걸어갔다. 짐을 가지고 뒤따르는 안내자가 방해될 리는 없었다. 오히려 중년의 신혼부부가 그토록 행복해 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은 듯 했다. "여깁니다." 워니는 그가 열어 주는 방문 안으로 제인을 여전히 안은 채 들어섰다. 사랑하는 그녀와 함께라면 하루 온종일 안고 다녀도 힘들 것 같지가 않았다. 워니도 제인 못지 않게 진심으로 행복해 하는 모습이었다. "자, 이제 문턱도 넘었으니 우린 진짜 결혼을 한 거야." "워니, 너무 행복해요." 제인은 행복에 도취된 듯 방안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머지 않아 그곳에서 벌어지게 될 무서운 일에 대해선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내 말이 맞았죠, 워니?" 워니는 얼굴에 가득한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멋지지 않아요?" 그녀는 달려가듯 워니에게 다가가 그의 가슴에 안겼다. 그 어떤 사연이 감추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행복에 젖은 여인의 모습은 아름답기가 끝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행복해 하는 제인을 의심할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단둘이서만 결혼식을 올리는 거 말예요. 오늘 당신의 모습은 너무나 멋졌어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보다 당신이 너무 아름다웠소, 제인." 그는 제인의 허리를 가볍게 껴안으며 감격해 하고 있었다. 안내자가 곁에 있기는 했지만 두 사람의 행복한 순간에는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이젠 됐어요." "뭐가?" "모든 게 다요. 모든 게 잘 됐어요." "그렇게 생각하오?" "그럼요. 그럼요, 워니. 정말 그래요. 당신만 저를 이렇게 생각해 주신다면 다 된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더 이상 뭐가 필요하겠어요." 제인은 계속해서 자신의 감격을 드러내며 흥분에 들떠 있었다. "내가 그 동안 꿈꾸어 왔던 바로 그런 결혼식이었어요. 모두 완벽하고 훌륭했어요." "완벽했고 말고." 워니는 한 점의 의혹도 없이 재빨리 그녀의 말에 동감했다. 오히려 그가 하고 싶어했던 말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여자의 일생을 통해서 결혼식은 굉장한 의미를 갖게 된다. 한 번 실패한 결혼 때문에 오랫동안 마음과 육체의 문을 닫고 사업에만 열중했던 스테파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록 결혼식은 재혼이기 때문에 간단히 끝냈지만 그 결혼식이 그녀의 인생관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여자의 몸으로 세상에 태어나 최초로 사랑을 깨닫게 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든 것이 스테파니의 경우였다. 제인의 경우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결혼식을 올리자고 제의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워니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처음부터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녀를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제인의 얼굴에 슬픈 표정이 나타났다. "왜 그러오?" 워니는 놀라며 숙인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쳐들었다. "울고 있잖소." 그녀는 몹시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선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워니는 가슴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내가 뭘 잘못했소?" "아니에요, 여보." "그렇다면 왜?......." 그녀한테는 그럴 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다만 워니는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워니의 어떤 운명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제인의 다음 이야기가 나왔을 때 워니는 내려앉았던 가슴을 이내 진정할 수가 있었다. "아버지가 생각나요." 행복한 결혼식날 갑자기 슬픈 표정을 짓고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 했던 그녀의 입에서는 의외로 매우 나약한 말이 나왔다. 그와 같은 제인의 슬픔을 확인한 워니는 오히려 그녀를 더욱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끌어 올랐다. 앞으로 평생 동안 그녀만을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한다고 맹세했던 것이다. 제인은 이윽고 다시 전처럼 행복한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당신은, 워니. 우리 아버지를 너무나도 닮았어요." "내가?" "강인함과 그 미소.......너무나 똑같아요." "그래서 갑자기 아버지가 생각난 거군요." "네. 지금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요." "아버님에 대한 얘기는 하도 많이 들어서 내가 여러 번 만나 뵌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구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해 남다른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토록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는 이유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워니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녀만이 알고 있는 비밀로 느껴질 뿐이었다. 워니는 다시 한 번 그녀에게 감동을 하면서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남편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죽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사랑스러운 여인이 한없이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그는 다시 한 번 그녀와의 결혼에 행복감을 느꼈다. 그들은 잠깐 같은 방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가 그가 큰기침을 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이방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더 필요하신 것은 없습니까?" 잠깐 놀란 두 사람은 이내 어색하게 웃으면서 이마를 마주했다. 약간은 쑥스러웠던 것이다. "필요한 건 없소. 수고했소." 워니는 재빨리 그에게 팁을 준 다음 밖으로 내보냈다. 그가 막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을 때 제인이 느닷없이 사진을 찍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것은 즉시 사진이 현상되어 나오는 즉석카메라였다. "뭘 하는 거요?" 제인은 이미 사진기에서 사진을 뽑아 내고 있었다. "당신은 사진에 찍히는 것을 싫어하지 않소?" 그것은 사실이었다. 제인은 이상하리 만치 사진에 찍히는 것을 싫어했다. 덕분에 워니는 그녀와 함께 한 번도 기념사진을 찍지 못하고 말았다. 사진이란 언제까지라도 남아 있기 마련이므로 그것을 싫어한다면 자신의 모습이 남겨지는 것을 꺼려한다는 뜻이 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제인은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남겨지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결혼식도 마찬가지로 단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결혼식을 올리기를 원했다. 제인은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굉장히 꺼려하는 듯했다. 자신의 모습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였지만 워니는 그 문제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듣고 넘겼다.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면 모든 일이 긍정적으로 느껴진다는 말이 있듯이 워니에게는 제인의 그런 점까지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방금 뽑은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당신의 그 아름다움을 담을 수 있는 카메라는 아마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오." 그는 제인이 말할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그는 지나치게 성급한 나머지 침착성을 잃어버릴 정도였다. "나중에 주려고 했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듯 제인의 마력이 그를 완전히 사로잡은 듯했다. 그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꺼낸 것은 바로 준비했던 값비싼 목걸이었다. 사실상 그 선물은 분위기를 멋지게 장식하기 위해 제인과 신방을 치른 다음에야 그 자리에서 목에 걸어 줄 계획이었다. 약혼 때에도 제인은 그와의 동침을 완강히 거부했다.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이 제인의 뜻이었는데 비록 마음은 조급하기는 했지만 그러는 것이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라 믿었다. 오히려 그녀의 말대로 좀더 참고 인내하는 가운데 그녀에 대한 사랑을 차곡차곡 쌓아 온 그였다. 약혼식까지 올린 여자가 그 남자와의 동침을 완강히 거부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다. 스테파니의 경우는 특별한 것이어서 결혼한 다음에도 며칠 동안은 그렉에게 육체의 문을 열어 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녀는 서로 사랑을 느꼈을 때에는 자연스럽게 육체적인 결합을 갖게 된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각자의 사랑은 더욱 깊고 넓게 느껴지면서 결국 결혼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제인은 확실히 다른 데가 있는 여자였다. 제인은 놀라 하면서 진심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선물을 받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못한 눈치였다. 경제력이 풍부한 워니는 사랑하는 그녀에게 값이 굉장히 많이 나가는 목걸이를 선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인은 그것보다 선물을 받았다는 자체가 말할 수 없이 기쁜 모양이었다. 그 선물이야말로 워니에게 받는 마지막 선물이라도 되는 듯 제인은 어쩔 줄 모르게 기뻐하는 것이다. 스테파니가 자신의 운명을 미처 깨닫거나 예감하지 못하며 그렉의 일거일동에 기뻐하고 사랑을 확인하는 것과 같은 의미일 수도 있었다. "걸어 주세요." 제인은 워니의 앞에서 뒤로 돌아섰다. 워니는 그녀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이건 너무......." 제인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달리 보면 무엇인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모습이기도 했다. "완벽하단 말이지?" 워니는 넌지시 물으며 그녀의 눈빛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알아보기 어려운 갖가지의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눈빛만으로는 전혀 판단할 수 없었다. "너무 아름다워요." "당신이 기뻐하니 나 역시 만족하오." 워니는 제인의 눈빛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해 내야 했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연막이 그의 시야를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어떤 점도 그는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저도 준비한 선물이 있어요." "당신도?" "그럼요. 당신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예요, 워니." "궁금해지는데?" "만족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런 걱정은 하지 말아요. 당신이 설령 독약을 나한테 선물한다고 해도 기꺼이 받을 거요." "무슨 말씀을!" 제인은 잠깐 화를 내는 듯 했다. "내 표현이 지나쳤소? 그렇다면 취소하지. 하여튼 그 정도라는 것만 알아요." "알겠어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인은 돌아서서 침대에 있는 가방을 향해 걸어갔다. 여기서 워니와 제인이 선물을 주는 시점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워니는 나중에 주려 했던 선물을 급한 김에 서둘러서 주었다. 하지만 제인은 그렇지 않았다. 될 수 있으면 빨리 준비한 선물을 줄 계획이었다. 워니가 남편으로서의 당연한 처사로 육체를 요구하기 전에 그녀는 준비한 선물을 주려고 생각한 것이다. 제인이 가방에서 꺼낸 선물은 크지 않은 상자였다. 아름다운 모양의 리본이 장식되어 있는 진한 갈색의 단단해 보이는 상자였다. 상자를 건네 받은 워니는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지만 막상 그녀에게 선물을 받게 되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기대감에 번쩍이는 눈빛으로 상자를 열더니 다시 한 번 놀랐다. "이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브랜디가 아니오." "그래요, 워니." "놀랍군!" "약혼 때에 몽땅 마셔 버린 브랜디 대신이에요." "이런 걸 요즘은 구하기가 힘들 텐데." "어떻게 구했소?" "지난주 포도주 경매가 있었는데 일부러 가서 구했어요." "그럼 축배를 들도록 합시다." "좋아요." 워니는 서둘러 가서 두 개의 유리잔에 브랜디를 각각 따랐다. 제인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가장 심각한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곧 들이닥칠 사태를 그녀는 의심하지 않았다.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는 것 역시 그만큼 자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워니가 가장 행복해 하는 순간을 그녀는 기다렸다. 기다렸다기 보다 노렸다. 그런 다음 기쁨의 정상에 도달하면 그 순간 그녀의 계획이 실현되는 것이다. "자, 건배!" 유리잔이 쨍그랑 투명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무엇 때문인지 제인은 입을 열지 않았다. 조용히 입다문 채 마치 신기한 광경이라도 되는 듯이 워니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워니가 만일 한 번만 다시 그녀의 행동을 이상히 여겼다면 분명히 어떤 것을 알아차렸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니의 분별력은 이미 완전히 상실된 상태였다. 눈앞에 사랑하는 여인이 있고, 그녀하고는 드디어 완벽한 결혼을 했으며, 신혼여행에서 드디어 건배를 들게 되었다는 생각만이 그의 가슴에 들어차 있었다. "듭시다." 워니는 기다리지 않고 먼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잠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이 한 모금 마셔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러는 동안 제인은 계속 지켜볼 뿐이었다. 그녀는 마시지 않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당연히 무엇인가 한 마디 기쁨을 표현하며 마셨어야 할 브랜디를 들고 있을 뿐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무엇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굉장히 심각한 문제인 것만은 사실이다. 제인의 얼굴에 나타난 미묘한 표정과 눈빛이 그런 의미를 강하게 풍겼다. 다시 보면 제인은 이제 곧 비명에 죽어 가게 될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더구나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경과된 시간은 불과 몇 초뿐이다. 그토록 짧은 시간에 워니는 자신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 순간이 닥쳤다. 겨우 한 모금의 브랜디를 목구멍으로 넘긴 워니의 표정이 돌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됐어......" 그는 심하게 더듬거렸다. 안면 근육이 일그러졌고 목부분에서도 심한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제인은 그가 브랜디를 마시기 전과 똑같은 표정으로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마치 음미하는 것 같았다. 상황은 이미 분명해졌다. 워니는 매우 강력한 독극물 성분을 마신 것이다. 당연히 효과도 신속하게 나타났다. 서 있던 그의 몸뚱이가 이미 뒤로 밀리더니 탁자 위에 내던져지듯 쓰러졌다. 제인의 표정에는 털끝만큼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매우 익숙해 있는 듯이 찬찬히 지켜볼 뿐 놀라지도 않았다. "이......이게 뭐지?" 비로소 제인은 매우 차분하고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고 체념하면 훨씬 편해질 거예요." 무서운 말이었다. 죽음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더구나 마치 워니를 여전히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죽어 달라는 듯이 속삭이듯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소리야?" 간신히 몸을 일으키려던 워니는 이번에는 바닥에 풀썩 엎어지고 말았다. 그의 몸 안에는 이미 독극물 성분이 골고루 퍼져 나간 것이다. "나, 날......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그는 바닥에 엎어진 채 얼굴조차 들지 못했다. 손끝조차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랑해요, 워니." 그녀는 마치 귀신같았다. 비명에 죽어 가는 사람 앞에서 그렇게 태연할 수 있다면 인간이 아닌 귀신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신이 상상도 못할 만큼이나 사랑해요." 그녀는 아주 침착하고 다정하게 말했다. 어디 한 점 양심상의 거짓도 없어 보였다. "이제 알겠어요? 당신을 너무너무 사랑해요. 그래서 이럴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필사적인 워니도 이제는 사태를 완전히 파악했다. 그는 경찰에 신고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교환을 부르려면 전화가 필요했다. 팔을 간신히 뻗어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온몸이 떨리고 손끝에서 기운이 완전히 빠져나갔다. 입으로 말도 할 수 없었다. 경찰에 신고조차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것은 제인의 태도로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브랜디에 강력한 독극물을 넣어 워니에게 먹였다. 워니가 그 브랜디를 마신 후 죽어 가면서 경찰에 신고하는데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신고하면 경찰이 출동할 것이다. 그러나 워니는 이미 죽은목숨이기 때문에 신고하지 못한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확신처럼 워니는 입안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서로를 사랑할 때 끝내고 싶었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전화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수화기에서 교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짓말이나 상처를 주기 전에......모든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될 때......." 워니는 그녀의 말이 계속되는 가운데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아직 말을 계속했다. 죽음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해할 수 있죠? 그렇지 않아요, 워니?" 죽은 워니가 대답할 리 없었다. "마음 편하게 저 세상으로 가도록 해요." 한 남자의 처참히 죽은 시체 옆에서 그토록 태연자약할 수 있는 여자는 제인 미첼 뿐일 것이다. "교환?" 그녀는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네, 무슨 일이시죠?" "전화를 연결하지 마세요, 이 방에는." "알겠습니다." "오늘 결혼식을 올렸거든요. 방해받고 싶지 않아요." "이해합니다." "오늘만은 완벽해야 해요." "즐거운 시간을 빕니다." 제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오히려 안정되고 침착하게 흘러나왔다. 수화기를 제자리에 올려놓은 그녀는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워니의 시체에서 결혼 반지를 태연히 빼냈다. 시체에서 반지를 빼낸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입술에 갖다 댔다. 그 반지가 시체에서 빼낸 것이라도 상관없는 듯했다. 오히려 애착심이 더욱 느껴지는 듯이 입술에 대고 가볍게 키스까지 한 것이다. 그러면서 눈가에 잔잔한 미소를 나타냈다. 그런 모습으로 보아 그런 일을 처음 겪는 게 아님을 분명히 짐작할 수 있었다. 10 워니 브랜드리가 그랬듯이 스테파니에게의 운명의 순간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그렉에 의해 치밀히 세워진 계획은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그렉은 자신의 계획을 지리에게조차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비록 그렉과의 쾌락에 빠지기는 했지만 마음이 약한 여자이며 또 스테파니와의 오랜 우정이 그것을 막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불길한 예감과 함께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사람은 바로 하인 크리스였다. 그렉의 무서운 협박 때문에 자신의 심정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그였다. 죽음이 두렵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스테파니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던질 수 있는 그였는데 그것은 아마 어릴 때부터 주인에게 복종하도록 길들여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 사람이 타고 갈 보트를 늪에서 밀고 물로 나가는 크리스의 마음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다. 당장 스테파니에게 가지 말라고 소리를 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옆에는 늘 그렉이 함께 있었으므로 비록 증오에 가까운 미움을 느꼈지만 그는 스테파니의 공식적인 남편이었다. 늪에 빠지면서까지 물로 보트를 밀어낸 다음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사라지는 보트를 지켜보았다. 스테파니와 질리는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렉이 보트를 이끌고 있었다. 문득 무섭고 불길한 예감이 크리스의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보트는 스테파니를 태운 채 황혼으로 붉게 물든 석양의 수면 위로 상당히 멀어져 가고 있었다. 보트가 물에서 옮겨지는 동안 스테파니는 안정을 되찾았다. 황혼을 듬뿍 받은 호수는 무서운 악어가 득실거린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매우 아름답게 보였다. 주변의 경관도 스테파니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너무도 아름다웠다. 사진 촬영을 좋아하는 스테파니는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감지하지 못할 만큼 경관에 빠져 있었다. 뒤에서 노를 젓고 있는 그렉의 표정은 그녀를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내내 굳어 있었는데 가끔 질리를 향해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곤 했지만 그녀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도 그렉의 엄청난 음모를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멋진 광경이야!" 스테파니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비디오 카메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런 것에는 별로 취미가 없는 지리는 건성으로 스테파니의 말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저기 새들 좀 봐. 이런 곳에서 언제까지나 머물고 싶어." 날아가는 새들조차 스테파니의 마음을 끌 정도였다. 새롭게 사랑을 얻은 만큼 모든 복잡한 도시의 일들을 훌훌 벗어 던지고 자연과 함께 그곳에 파묻혀 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길 좀 봐!" 갑자기 한 곳의 수면을 가리켰다. 언제 나타났는지 거대한 악어 한 마리가 보트가 진행하는 방향을 따라 약간의 거리를 둔 채로 헤엄치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스테파니는 그 악어를 보는 순간 이미 그 악어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굉장한데? 저런, 맙소사. 사냥꾼한테 들었던 바로 인디고 블루 악어가 아냐? 듣던 대로 과연 크구나!" 그 악어는 굉장히 거대해서 보기만 해도 공포에 사로잡힐 정도였다. 질리는 그 쪽을 제대로 바라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거대한 인디고 블루 악어는 마치 이제 곧 벌어질 사태를 짐작하기라도 하듯이 계속해서 그들을 따라왔다. 악어에게 정신이 팔린 스테파니는 그녀의 뒤쪽에 앉아 있는 그렉이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어떤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자신의 운명이 이미 닥쳤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스테파니는 거대한 인디고 블루를 필름에 담아 두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악어 사냥의 전문가조차 함부로 다루지 못한다는 인디고 블루를 필름에 담아 두면 무섭긴 하지만 좋은 추억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녀는 보트 안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눈으로는 계속 비디오 카메라를 들여다보며 좀더 자세히 악어를 찍기 위해 물위로 몸을 구부렸다. 설마 그것이 그렉이 기다리던 기회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그곳에서 물로 떨어진다면 인디고 블루가 단 몇 초안에 그녀에게 덤벼들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돌연 그렉은 들고 있던 노를 내려놓고선 조용히 움직였다. 보트가 흔들려 스테파니가 쓰러지지 않도록 하려는 듯 조심조심 그녀의 뒤로 접근해 갔다. 하지만 곁에 앉아 있는 질리조차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스테파니도 마찬가지였다. 등뒤에서 그렉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기는 했지만 별다른 의심 없이 악어를 촬영하는 데만 열중했다. 왠지 그렉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은 스테파니가 마침 카메라에서 눈을 뗄 때였다. 그 순간 그렉이 몸을 약간 움직였다. 아니, 움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고의적으로 스테파니의 몸을 밀쳤다. 작은 보트 안이다 보니 결과는 뻔한 일이었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스테파니는 비명 소리와 함께 물로 떨어지고 말았다. 질리도 기절할 듯이 놀라며 비명 소리를 냈다. 물에 빠진 스테파니는 처절한 비명 소리를 내며 질리와 그렉에게 구조를 요청했다. "도와 줘요!" 하지만 그렉은 응답하지 않았다. "여보!" 이미 스테파니가 타고 있던 보트를 뒤따르던 인디고 블루가 이네 덤벼들었다. "그렉! 여보." 하지만 스테파니는 악어를 당할 수가 없었다. 기적의 힘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의 몸뚱이가 거대한 인디고 블루에 의해 물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을 그렉은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 순간까지도 그렉의 살인마적인 속셈을 전혀 깨닫지 못한 질리는 스테파니에게 던져 주려는 노조차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이 때의 질리는 너무 무서웠기 때문에 그렉의 살의를 아직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렉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점점 번져 가기 시작했다. 그는 스테파니가 악어에 의해 완전히 죽을 때를 기다리는 듯했다. 거대한 악어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스테파니의 모습은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한 차례 몸뚱이가 물위로 솟아오르기는 했지만 다시 끌려 내려졌다. 물아래서의 소동이 벌어진 후, 이번에는 그녀의 두 발이 보이는 것이었다. 이미 수면 위로는 붉은 피가 파문을 그리듯 둥그렇게 번지기 시작했다. 스테파니는 더 이상의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그 일이 비록 순식간에 벌어지기는 했지만 긴긴 밤 동안 계속 된 악몽보다 더욱 처절한 것이었다. 드디어 스테파니의 얼굴이 악어에 의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수면에 떠오르더니 이내 악어에 의해 다시 물밑으로 끌어내려지는 것이 보였다. 호수 위로 퍼지는 비명 소리는 질리의 것이기만 할 뿐 그렉은 그 동안 한참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스테파니의 얼굴이 악어에 의해 찢기고 상처 입은 것을 확인한 다음 비로소 천천히 총을 들어올렸다. 스테파니에게 노를 내려 주지 못하게 방해한 그렉이 악어를 쏘아 죽이기만을 질리는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렉은 시간을 끌면서 방아쇠를 쉽게 당기지 않았다. 스테파니가 완전히 악어에게 물려서 죽기를 기다린다는 것이 확인되는 끔찍한 순간, 악어에게 총을 겨누고 있던 그렉은 다시 총구의 방향을 바꾸어 악어가 아닌 허공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는 동안 질리는 말할 수 없는 공포와 함께 미친 듯이 울부짖고 있었다. 하지만 그렉은 어느 때보다 침착하고 잔인하게 스테파니의 처참한 운명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스테파니는 평범한 여자가 아니었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하퍼그룹을 운영하는 총수였다. 그녀의 비극이 세상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분명히 커다란 파문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그렉의 잔인한 살의에 의해 스테파니는 악어에 의해 끌려 들어가 물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가 쏜 공포탄을 신호로 사냥꾼들이 달려오기는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렉은 그 시간까지도 이미 그의 계획에 포함시켜 고의적으로 시간을 지연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가의 캠프로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스테파니에 대한 평판은 악어 사냥꾼들 사이에서도 매우 좋았다. 처음부터 그렉의 계획을 우려하고 있던 사냥꾼들은 스테파니가 호수에 빠졌다는 말에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꼈다. 그들은 그렉에게 분노를 느끼며 스테파니를 구해야 된다는 생각에 가득 차 있었다. "이 바보 같은 자식아!" 그렉이 스테파니의 남편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그들 역시 그렉을 아직 스테파니처럼 존경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처음부터 가지 말라고 했잖아!" 사냥꾼들은 장비를 챙겼다. 그 광경을 본 그렉은 끝까지 살인자의 근성을 숨기지 못했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지연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지금 당신들이 찾아 나서겠다는 말인 가요?" "구해야 하지 않소!" "어떻게 말이죠? 어떻게 구한단 말입니까?" 사냥꾼들도 기가 막혔다. 스테파니가 빠졌다는 물 속에는 살인적인 악어가 득실거렸다. 스테파니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항력일 터였다. 그러나 사냥꾼과 그렉의 태도는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애당초 가지 못하도록 말렸어야 되는 건데......." "그건 분명히 사고였다고 거듭 말하잖아요!" 그렉은 몹시 억울하다는 듯 항변을 늘어놓았다. "그때 아내는 좋아서 소리를 지르며 비디오 촬영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그만 발을 헛딛은 거라고요." 하지만 사냥꾼들은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평소 그들이 알고 있던 스테파니는 그렇게 경망스러운 여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위험천만한 보트 위에서 소리를 지르며 좋아하다 발을 헛딛을 만큼 사적인 감정에 빠지는 여자가 아니었다. "이런 사고가 발생하리라고 낸들 어떻게 알았겠어요." 하지만 사냥꾼들은 여전히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질리에 대한 육체적인 욕망 그리고 정식으로 결혼한 이상 하퍼그룹의 최고 경영자로 명실공히 자리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한 잔인한 살인극이 벌어진 것이다. 처음 그렉은 사냥꾼이 현장에 나가려고 하는 것을 은근히 저지시켰다. 그러나 갑자기 그가 태도를 바꾸었다. 사냥꾼이 일단을 기다리기로 결심한 것을 알아차린 탓이다. "지금 내 관심은 당장 아내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자, 이젠 어떡하시겠어요?" 그는 마치 스테파니가 사고를 당한 것이 사냥꾼의 책임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를 다그쳤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그 시간엔 누구도 나서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무선 연락을 취해 놓고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기다려야 된단 말예요?" "할 수 없지." "그 안에 내 아내가 어떻게 될지 누가 알아요?" 사냥꾼이 두 눈을 치켜 떴다. 바로 스테파니가 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도 구해 내지 못한 그를 탓하는 뜻이 두 눈에 담겨 있었다. 그를 마주 노려보던 사냥꾼은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싸울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 듯 했는데 그렉이 비록 젊기는 하지만 사냥꾼도 만만치만은 않았다. "여봐요." 그가 체념한 듯 돌아서서 걸어가자 그렉이 급히 그를 불렀다. "뭐야?" "내 아내가 살아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 것 같죠?" 순간 사냥꾼의 얼굴에 분명한 조소와 증오의 표정이 스쳤다. "자네가 진정으로 아내를 사랑한다면 그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을 것 같군." 그는 침통하게 말한 다음 돌아서서 걸어가 버렸다. 뒤에 남은 그렉은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은 채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자신의 속셈을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렉은 스테파니가 살아 있을 확률에 무척 신경을 곤두세웠다. 캠프의 모닥불은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활활 타올랐다. 질리가 모닥불 앞에 앉아 슬픈 눈물을 계속 흘리며 앉아 있었으며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지켜보는 크리스는 질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비통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질리가 느끼는 슬픔과는 전혀 성질이 다른 것이었다. 그는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며 질리가 에덴에 도착할 때부터, 아니 그보다 신혼여행으로 에덴에 도착한 그렉을 처음 보는 순간 왠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때는 자신도 그 이유를 잘 알 수 없었지만 그렉을 처음 보는 순간 가슴을 스치는 서늘한 기운이 쉽게 그렉에게 가까이 갈 수 없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크리스가 그렉을 증오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계기가 있다면 질리가 에덴에 도착한 날 밤 그렉이 그녀와 불륜의 관계를 갖는 현장을 직접 목격한 탓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질리를 미워하거나 의심하지는 않았다. 진심으로 스테파니의 사고를 슬퍼하면서 울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감정에는 어떤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할 수 없음을 충분히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스테파니를 배신했다고는 하지만 지금처럼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측은하고 안쓰러운 감정이 생겼던 것이다. 울고 있는 질리에게 그렉이 다가가자 크리스의 두 눈에선 분노의 광기가 번뜩였다. 그렉은 질리의 곁에서 자세를 낮추더니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울고 있는 질리의 이마에 아주 다정하게 키스해 주었지만 질리는 여전히 슬픔을 가누지 못하며 연신 눈물을 훔치며 흐느끼고 있었다. 질리는 분명한 목격자였다. 총구를 허공에 겨누던 일,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물위로 손을 내미는 스테파니에게 매정하게도 구원의 손길을 뿌리치던 모습들을 분명하게 두 눈으로 확인한 것이 바로 그녀가 아니었던가? 한 때 육체의 쾌락을 위해 그렉을 유혹하기도 한 그녀였지만 그가 그녀의 곁에 다가오자 그녀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일은 사고였어, 질리. 분명히 그렇지?" 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슬픔 때문만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교활한 그렉의 말에 오한을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소리쳐 거절하지 못하는 것은 그녀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한 가닥 남은 사악함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직 그렉을 완전히 단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렉은 그녀의 대답을 유도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둠 속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크리스를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렉은 가능하면 암시를 통해 그녀에게만은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질리의 어깨에 팔을 얹거나 그녀의 손을 건드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질리는 흐느끼면서도 그렉의 뜻을 충분히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렉의 행동들은 설득과 함께 협박이 담긴 애매한 것이었다. 그 일이 사고였음을 시인하지 않으면 영원히 입을 봉할 수도 있다는 협박이기도 했다. 그렉은 필요하다면 어떤 방법이든 쓸 수 있는 매우 위협적인 존재임이 오후의 사건을 통해 질리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자신도 스테파니처럼 될 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윽고 질리는 그렉의 조작된 의견에 동의하듯 조용히,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사고였어요." 그렉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얼굴 가득 퍼졌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느긋한 표정이었는데 유일한 목격자인 질리가 사고였음을 인정한 이상 어떤 변명이나 증인도 필요 없이 자신은 완전범죄를 저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설령 법정까지 비화된다 하더라도 사고를 증명할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때 그렉이 보인 행동을 지켜보던 크리스는 더욱 참기 어려운 분노를 느꼈다. 그렉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다정하고 사랑스럽게 질리를 다루었다. 가장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고서는 그렇게 행동할 수는 없었다. 울고 있는 그녀의 등이나 어깨에 다정한 키스를 해주며 토닥거리는 그렉이었다. 질리는 아직 울음을 그치진 않았지만 그렉의 살인극에 동참한 셈이고 보면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이걸 마시면 좀 나아질 거요." 그는 주머니에서 휴대용 술병을 꺼내더니 그녀에게 권했다. 잠깐 그것을 들여다보던 질리는 이윽고 받더니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그것으로 슬픔이 진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질리는 그렉이 다정하게 어깨를 감쌀 때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가슴에 안겼다. 처음부터 그 광경을 지켜보는 크리스의 두 눈에 나타난 분노는 말할 수 없는 배신감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질리와 그렉이 담합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그렉의 협박과는 전혀 상관없이 질리도 역시 살인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울러 스테파니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스테파니의 처절한 비명을 묵묵히 집어삼켰던 날이 소리 없이 지나가고 이윽고 날이 밝았다. 캠프에서는 스테파니에 대한 수색 작전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희망이 거의 없는 듯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전혀 밝은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같은 시간, 그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늪지대에도 아침은 찾아왔다. 한 여자의 비극은 대자연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은 듯 햇살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삭막하게만 보이는 늪지대의 창공을 낮게 날아다니는 철새 떼가 스산한 느낌을 줄뿐만 아니라 죽어 있는 수목들이 도처에 쓰러져 있으면서 늪을 구성하는 진흙탕까지 을씨년스러움을 더하고 있었다. 다른 때와는 달리 공중을 나는 새들은 늪지대에서 얼마 높지 않게 날아다녔다.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늪지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새들은 그 새로운 물체가 먹이인가를 확인하는 듯 낮추었다가 높이 나는 비행을 주기적으로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새들이 떼지어 낮게 날고 있는 그 바로 밑에는 과연 심상치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처음 그들의 눈에 뜨인 것은 사람의 팔이었다. 진흙과 피가 범벅이 되어 있었고 전신이 만신창이가 된 그것은 진흙탕에 엎어진 채 전혀 미동도 하고 있지 않았다. 얼굴도 처참하게 찢겨져 상처가 깊었고 한쪽 눈은 완전히 찢겨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것은 바로 스테파니 하퍼였다. 그녀는 죽은 듯 했다. 그녀에게 만일 희미한 심장 박동이라도 느껴진다면 그것은 기적적으로 인디고 블루 악어가 그녀에게 선심을 베풀었다고 밖엔 달리 생각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 그녀가 물에 빠진 지점에서 굉장히 멀리 떨어진 그곳은 진흙이 갯벌을 이루고 있는 곳이었는데 바로 그 위에 몸을 길게 누운 채 얹혀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곳도 언제 악어가 나타날지 모르는 위험이 늘 도사리는 곳이었다. 때마침 그곳에서 약간 떨어진 물위에 한 노인이 보트를 타고 나타났다. 마치 스테파니의 운명을 예감하기라도 하듯 그는 쓰러져 있는 그녀에게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흙탕물을 튀기며 두꺼운 등가죽을 드러낸 커다란 악어가 조용히 움직임을 시작하고 있었다. 두 가지 운명의 갈림길이 동시에 그녀에게 밀어닥친 것이다. 밤새 시장기를 느낀 악어는 그의 훌륭한 아침 식사 거리를 찾아 서서히 먹이 사냥을 시작하려 했던 것이다. 악어는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느릿하게 이동하는 중이었다. 한편 막 보트를 돌려 되돌아가려던 도인이 갑자기 동작을 멈추더니 조용하게 그리고 무엇인가에 집중하면서 한 곳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늪지대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듯, 거리가 약간 떨어져 있었는데도 진흙에 쓰러져 있는 물체가 사람이라는 것을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노인은 스테파니를 향해 조심스럽게 움직임을 시작한 악어도 동시에 발견하고는 서둘기 시작했다. 악어가 발견하기 전에 쓰러진 사람을 먼저 구해야 하는 것이 우선 이라고 생각했다. 늪지대에 능숙한 그는 이미 보트에서 내려 스테파니에게 다가갔다.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악어가 발견하기 전에 스테파니를 배로 옮기기 위해 있는 힘껏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들쳐업을 수도 없을 만큼 축 늘어진 그녀는 끌리다시피 하면서 배 위로 옮겨졌다. 의식은 전혀 없어 보였다. 지금은 노인에 의해 악어밥이 되는 것을 겨우 면하기는 했지만 살아날 수 있다는 가망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그녀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다만 스테파니가 그렇게 그렉에게 당하지 않았다는 것만이 확실할 뿐이었다. 11 워니 브랜드리의 시체는 금방 발견될 수 있었다. 물론 그를 독살한 제인 미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제인이 호텔을 살인 현장으로 선택한 것은 충분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범행 후 사람들 틈에 섞여 쉽게 도주할 수도 있을 뿐더러 도주할 곳도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만약 외진 곳이었다면 도주의 위험은 충분히 감안해야 할만큼 그녀에겐 위험이 매우 많았다. 경찰에 의해 워니의 시체는 옮겨졌고 이번의 살인 사건 수사를 위해 특별히 F.B.I에서 두 명의 수사 요원이 파견되기도 했다. 그것은 이례적인 일이기도 했다. 연방수사국에서 두 명의 수사 요원을 파견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을 것이다. 우선 경찰 검시관의 중간 보고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관할 경찰서의 수사 반장과 감식 반원 그리고 F.B.I 요원 두 명이 배석했다. "사망의 원인은 청산가리에 의한 독살입니다." 실해 요인은 밝혀졌다. "어떤 방법을 사용했죠?" 한 수사 요원이 물었다. "이런 경우 대부분 범인은 음식이나 음료를 사용합니다." "그밖에 다른 것은 없나요?" "그건 자세한 것은 부검이 있은 다음에라야 알 수 있습니다." 제인은 브랜디에 명독물질인 청산가리를 교묘하게 섞어 워니에게 먹였다. 결혼식을 올린 직후여서 새신부는 남편에게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범행 현장에는 지문이 전혀 없었습니다. 깨끗이 지워졌더군요." 검식반원에 이어 수사 반장이 의문을 나타냈다. "이번 사건이 이곳 관할구역에서 발생한 겁니다. 그런데 왜 F.B.I에서 관심을 갖는지 전혀 알 수 없군요." "부합되는 점이 많이 드러났기 때문이죠." F.B.I요원이 대답했다. "무슨 뜻이죠?" "예를 들면 죽은 남자는 부자이기 때문에 미모의 미망인이 생겨났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 말에 동료 수사 요원이 한마디 덧붙였다. "다시 말하면 자취를 감춘 미망인을 말하는 거죠." F.B.I에서는 이미 이번 사건에 대해 어느 정도 꼬리를 잡고 있는 듯했다. 즉 이번에만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 그것이었는데 수사 반장은 즉시 알아차렸다. "연쇄 살인이라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아직 확실한 단서나 증거를 잡은 것은 아니지만." "연쇄적인 살인이란 그 범인들이 남자들의 영역이 아니었습니까?" "지금은 그렇지도 않아요." F.B.I에서는 워니의 살해 사건을 연쇄 살인으로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죽은 남자가 모두 부자라는 점, 워니 브랜드리도 중년이고 성공한 사업가라는 점에 의혹이 갔다. 미망인이 감쪽 같이 자취를 감추고 보니 범인이 희생자의 아내일 수도 있다는 점이 수사에 일말의 의혹을 느끼게 했다. 실제로 제인 미첼은 남편을 독살한 현장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또 다른 단서는 없습니까?" 수사 반장의 질문에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지난 10년동안 다섯 차례의 살인 사건이 있었죠. 그런데 아직 범인의 윤곽조차 잡아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범인은 매번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같은 범인의 소행으로 본단 말입니까?" "지금으로서는 그렇습니다. 카멜레온과 같아요. 범인은 살해된 남자가 평소에 원하던 모습으로서 충분히 변신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범인이 여자, 그것도 몇 시간 전에 결혼식을 올린 신부라는 사실에는 관할 경찰의 수사 반장도 전적으로 동의한 바였다. 희생된 워니와 함께 투숙한 제인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살인을 저지른 후에는 아무도 모르게 사라집니다." "우리가 아직 파악하지 못한 문제가 있는데......." "어떤 것이죠?" "범인이 살해한 대상을 어떻게 선택하느냐 하는 거지요." "그렇군요." 지난 10년 동안 다섯 차례의 동일 수법에 의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면 한 차례의 살인을 준비하는 기간은 2년이나 걸린 셈이다. 그 기간 동안 범인은 충분한 사전 준비를 끝마쳤을 것이고 그것은 F.B.I의 추리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제인 미첼이 워니 브랜드리를 사귄지 2년만에 그는 독살을 당하고 말았다. F.B.I가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범인, 즉 제인이 어떤 방법으로 살해할 대상을 결정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F.B.I의 의문을 비웃기라도 하듯 제인 미첼은 전혀 다른 곳에서 조용히 그녀의 다음 대상을 고르고 있었다. 완전하게 모습을 바꾼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머리 모양과 색깔 그리고 가능한 모든 것을 완전히 바꾸고 이름도 세리 모건이라고 바꾸었다. 그리고 다음 대상을 찾는 중이었다. 그녀는 길가 가판대에서 잡지를 집어들었다. 그 잡지에는 특별히 한 남자의 기사를 크게 다루고 있었다. 표지에도 큼직하게 사진이 실려 있었고 그의 직업이나 그의 성공 세계까지도 자세하게 실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세리 모건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끈 것은 그 남자가 현재 독신이라는 사실이었다. 전처와 사별한 후에 외아들과 함께 단란하게 사는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이 그를 다루는 기사의 전부였다. 그의 이름은 마틴 그레함이었고 시내의 중심가에서 가장 규모가 큰 대형 서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잡지에는 마틴 그레함의 개인적인 사생활까지 소개하고 있었는데 사별한 부인과의 사랑 그리고 성격, 또한 그가 좋아하는 여성 등등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었다. 따라서 그 기사를 두 번만 주의 깊게 읽으면 마틴 그레함에 대해서 마치 오랫동안 사귄 사이처럼 자세하고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워니 브랜드리 사건과 관련해서 F.B.I까지 동원된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세리 모건은 유유히 시내 한복판을 활보했다. 누가 보아도 그녀는 제인 미첼이 아니었다. 마치 경찰과 F.B.I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다음 대상을 마틴 그레함으로 결정한 그녀는 전과 다름없이 조용히 그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그녀의 작전은 지금까지 실수한 적이 없을 만큼 이번 계획도 그녀의 의도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가 경영하는 서점에 요리책을 주문하는 등 거래를 시작해 놓은 다음 기회를 엿보았다. 마틴 그레함은 주로 서점에 머물러 책을 정리하는 등 성공한 사업가답지 않게 건실한 생활을 해 오고 있었다. 사별한 후에도 여러 차례의 구혼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모두가 그의 취향에 맞지 않아 거의 단념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는 살림을 도맡아 해 주는 사람과 함께 외아들을 가족으로 두고 단란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한 여자가 그에게로 접근해 왔다. 한 눈에 그가 좋아하는 타입으로 비친 그녀는 바로 세리 모건이었다. 카운터 곁에서 책을 정리하던 마틴은 카운터에서 아가씨와 이야기를 하고 있던 세리를 발견하는 순간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왠지 낯이 익은 여자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서두를 건 없어요." 세리는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내며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사이에 마침 그녀를 바라보던 마틴과 눈이 마주쳤다. 마틴은 그녀가 고객이었기 때문에 우선 친절하게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어떤 책을 찾아 드릴까요?" "아녜요. 주문한 책이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에요." 세리는 이미 그에 대해 충분한 조사를 마친 후였으므로 준비한 대로 행동을 했다. "전에도 오셨던 것 같은데요." "그래요? 혹시 이 서점 직원이신가요?"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시치미를 떼며 오히려 그에게 반문하는 여유를 보였다. "이곳을 운영하고 있죠. 저는 마틴 그레함입니다." 마틴은 서둘러 자신을 소개했다. 세리는 의외라는 듯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시선을 놓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직은 그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무관심한 척하면서도 마틴의 관심을 끌려는 계획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이 서점에 있는 책들을 전부 아시겠군요?" "제가 모르는 책이 아마 없다고 해도 좋을 겁니다. 필요하신 것이 무엇인지 어서 말씀해 보시죠." "새로 출판된 책인데요, 제목은 잘 기억되진 않지만 불란서의 시골 음식에 관한 요리책인데요." 세리는 이미 그녀의 계획에 따라 찾아야 할 책의 제목까지도 세워 놓고 있었다. 이미 그 책의 제목을 알아 놓고 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책의 제목이 '시골구석의 한 자리' 아닙니까?" 마틴은 금방 그녀가 찾던 책을 찾아냈다. "맞아요. 정말 놀랍군요." 그녀는 감탄한 듯이 마틴을 바라보았고 그는 쉽게 호감이 가는 여성의 매력적인 미소를 눈이 부신 듯 바라보았다. "놀라실 건 없습니다. 신간인 데다 요즘 아주 잘 나가고 있는 책이니까요. 지금은 품절 됐지만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주문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카운터의 메리가 세리에게 몇 권의 책인가를 가져다주었다. "19세기 러시아에 대한 책은 이게 전부예요." "고마워요, 메리." 그녀는 무척 상냥했다. 마틴은 그녀의 모습에서 확실히 예전에 만났던 사람과는 다른 느낌을 그녀에게서 받았다. "책을 많이 읽으시는군요." "자료를 조사하는 중이에요. 전 연애 소설 작가거든요." "그러세요?" "왕자와 농촌 아가씨의 사랑 이야기를 쓸 계획이죠." "굉장한 농촌 아가씨겠군요." "굉장한 왕자이기도 하구요. 요리책은 구해 주실 건가요?" "어떤 일이 있어도 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확실하시네요, 마틴 씨." "책을 어디로 보내드리면 될까요?" "메리가 알고 있어요. 도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세리는 사무적이면서도 상냥한 미소를 남긴 채 돌아섰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이미 마틴의 가슴에 새로운 자리를 만들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거기다 평소 마틴이 독신임을 동정하던 카운터의 메리가 넌지시 한 마디 던졌다. "세리 모건, 한 번 사귀어 보시지 그래요?" 그 말은 마틴에게 뜻밖에도 세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가 세리에게서 받은 첫인상은 확실히 특별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독신으로 생활하면서 어떤 여자에게서도 느끼지 못한 독특한 느낌이었다. 스테파니가 그렉을 만났을 때 받았던 느낌과 비슷한 것이었다. 세리의 주도면밀한 작전은 금방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나타냈다. 그 다음날 세리가 집에서 막 커피를 마시려 할 때 마틴이 찾아왔다. 불과 하루 만이었다. 마틴은 그녀가 주문한 책을 출판사까지 찾아가서 구한 다음에 직접 세리의 집으로 찾아온 것이다. "마틴 씨." 짐작으로 하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빠른 그의 방문에 세리는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죄송합니다. 연락처에는 전화번호는 없고 주소만 있더군요. 믿으실 지 모르겠지만 이 근처에 마침 볼일이 있었죠,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가지고 온 겁니다." 그의 어색해 하는 표정에 세리는 그가 느끼지 못하는 미소를 나타냈다. "구하셨군요." "급히 필요하신 것 같아서 구해 왔습니다." 세리는 이미 그 다음에 그가 가져야 할 단계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마틴은 집에 들어오도록 하지 않고 넌지시 되돌려 보낸 다음에 마틴의 마음을 더욱 조급해지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좀 들어오셨으면 좋겠지만 마침 오븐이 고장났으니 어떡하죠?" 예절을 지킬 줄 아는 마틴은 금방 세리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손님을 집안으로 맞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시다면 서점에서 또다시 뵐 수 있겠죠?" "물론이에요." 그때 마틴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븐이 고장났다고 하시니 말입니다만, 다른 약속이 없으시다면 밖에 나가서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요." 그럴 때 어떻게 행동해야 된다는 것쯤은 이미 세리의 머릿속에 세워져 있었다. "거기가 어딘지 말씀해 주시기만 하면 나중에 찾아가도록 하죠.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신다면요." "괜찮고 말고요. 여덟 시에 브라서리가 어떻겠습니까?" "좋아요." "됐군요.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그녀에게 식사를 약속 받은 마틴은 기분이 좋은 듯 만면에 함박 웃음을 띄운 채 돌아갔다. 그를 돌려보낸 다음 세리는 매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 일은 워니 브랜드리의 경우보다 쉽게 풀릴 듯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신중해야 한다는 그녀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한편 마틴은 세리가 던진 올가미에 이미 걸려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최면술에라도 걸린 듯 이미 그는 그녀에게 푹 빠지기 시작했다. 그날 세리는 마틴이 가장 좋아할 만한 차림으로 약속 시간에 약간 늦게 브라서리 식당으로 나갔다. 마틴은 약속 시간 보다 약간 이른 시간에 나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마치 난생 처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청년처럼 들뜬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늦어서 죄송해요. 뭘 입을지 몰라서요." 마틴은 그녀의 모습에 잠깐 넋을 잃은 듯 바라보기만 했다. "뭐가 잘못됐나요?" 세리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모르겠다는 것처럼 물었다. "아닙니다. 너무 아름다워서요." "고마워요. 그리고 여긴 너무 멋진 곳이군요." "포도주를 마시겠소?" "좋아요" 마틴은 그녀와 자신의 잔에 각각의 포도주를 따랐다. "오늘 당신이 썼을 만한 책을 찾아보았습니다." "아마 세리 모건이라는 작가는 없었을 거예요." "그렇더군요." 세리는 전혀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놀랄 만큼이나 태연하게 순간적인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연애 소설을 쓴다는 것은 마틴에게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술수이었으므로 당연했다. "전 가명을 사용해요. 언젠가는 진짜 제 이름으로 작품을 쓰는 것이 제 소원이에요. 그때 연애 소설이나 썼다는 이력을 달고 싶지는 않거든요." 마틴은 완전히 그녀에게 넋을 잃은 채 빠져 들어갔다. "당신의 작품은 짐작으로 알아내야 하겠군요?" "쓸데없는 그런 일은 무엇 때문에 하시는 거죠?" "난 책을 많이 읽어요. 직업병이라고 할 수도 있죠. 아들 때문에 시간을 많이 뺏기거든요." "아들이 있으세요?" 이미 알고 있는 일이면서도 세리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네, 있습니다." "좋으시겠어요." "그래요." "몇 살이죠?" "마이키는 올해 열 여섯 살이죠. 좋은 애예요. 그런데 혹시 아이가 있으십니까?" 세리는 미리 준비해 놓은 듯 남자의 마음이 가장 이끌리는 대답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아이를 낳아 본 적이 없는 그녀는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가장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는 없어요." "그럼 결혼은......." "결혼까지 갈 뻔했던 일이 한두 번은 있었죠. 하지만 결혼은 아직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매우 그럴듯한 말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아직 짝을 만나지 못한 거겠죠." 씁쓸해 하는 그녀의 표정에 마틴은 따뜻하고 묘한 동정심을 느꼈다. 그는 세리가 아직 미혼이라는 말에 충격 아닌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녀가 아직 미혼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탓이다. 그가 뭐라고 하기 존에 다시 신세를 한탄했다. "이상해요.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생활이었는데......."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틴은 왠지 당황스러운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세리가 만일 자신처럼 아이도 있는 미망인이기라도 했다면 그런 식으로 당황해 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한 그는 여자와의 데이트에 확실히 서툴러 보였다. 식사가 끝났을 때 순진한 마틴은 자신의 입장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이런 모습을 보여서 죄송합니다." "네?" "데이트를 해본 지가 워낙 오래 됐거든요." "그렇다면 저로서는 영광이네요." "다시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세리는 갑자기 종이를 꺼내더니 그 위에 무엇인가를 적었다. 그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것을 마틴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뭐죠?" "제 전화번호예요." "감사합니다." 그녀의 전화번호를 넘겨받은 마틴은 무척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미 마틴의 가슴에 널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스스로 고백 한대로 굉장히 오랜만의 데이트였으므로 자신이 선택한 여자를 향한 애착심은 상승하는 비행기처럼 갑자기 강렬하게 그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세리의 표정은 돌연 변했다. 마틴에게 보였던 상냥하고 다정한 표정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사납고 표독스러운 여자가 서 있을 뿐이다. 안면의 근육은 심하게 일그러졌고 두 눈에선 번뜩이면서 소름 끼치는 광채가 있었다. "바보 같은 것! 그렇게 서두르면 어떡해! 눈치챘을 거야." 그녀는 거울 앞에서 자신을 노려보며 사납게 소리쳤다. 자신에 대한 힐책이었는데 마틴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준 것이 돌아오는 길에 너무 빠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지른 일이었지만 돌아서자 후회가 되었던 것이다. 세리 모건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 때문이었다. 상냥하고 지적인 여성의 모습 이면에 존재하는 포악성이 바로 그것이었다. 워니 브랜드리를 독살한 후에 그가 처절하게 죽어 가는 모습을 차분하게 앉아 지켜보는 잔인성을 가지고 있는 그녀였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숨겨진 이중성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특별히 조심해, 알았지?"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에게 음난할 정도로 사납게 다짐했다. 하지만 불이 당겨진 마틴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그녀에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거절과 응답을 반복해 가면서 은근히 그에게 끌려드는 것 같은 반응을 보였고 바로 그것이 마틴의 마음으로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세리는 마틴의 초대에 기꺼이 응했다. 마틴은 그녀를 초대한 후에 처제와 아들 마이키에게 소개시키기로 했다. 그리고 특별하게 세리가 만든 요리를 그의 가족들과 함께 먹기로 했다. 그쯤 되자 세리의 무서운 계획은 절반 정도는 성공한 셈이었다. 두 사람은 다정한 연인이나 부부처럼 나란히 슈퍼마켓에서 필요한 물건을 하고 있었다. "재미있을 거예요. 전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손님을 집에 초대했던 기억이 언제인지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혹시 아드님이 좋아하는 요리를 아세요?" "마이키는 걱정하지 말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요." 마틴은 평소와는 달리 음식을 만들 재료들을 듬뿍듬뿍 후하게 사들였다. "상당히 많은 양이군요. 몇 사람 분을 만들어야 되나요?" "당신과 나 그리고 마이키와 그 아이의 여자 친구 네 명이 먹을 양이면 충분합니다." "여자 친구가 있나요?" "그렇소." "귀엽기도 해라." "그리고 또 한 사람 죽은 아내의 동생이 있소. 우리와 함께 살고 있죠." "네?" 세리는 깜짝 놀랐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등장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처제는 살림과 아이 엄마 역할을 동시에 해주고 있죠." 세리는 마음속에 느껴지는 불안을 일체 나타내지 않았다. "그런 분이 있었다니 다행이에요." "그래요." "그럼 모두 다섯 명이군요. 문제없어요. 참, 후식으로 먹을 체리도 필요하네요." "그래요." 잠시 체리를 사기 위해 그를 떠난 세리는 뜻밖의 광경을 발견하고는 무척 당황해 하는 것이었다. 한 여자가 아주 어린아이를 호되게 야단치는 중이었는데 아이는 겁에 질려 울지도 못하고 있었고 아이의 엄마는 아이에게 손찌검까지 하려 했던 것이다. 세리는 재빨리 달려들어 아이 엄마의 손목을 사납게 낚아챘다. "어린애한테 무슨 짓이에요!" 그녀의 표정은 마녀처럼 사납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이 엄마는 넋을 잃은 듯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뿐이었다. "다시 한 번 애를 때리려 했다간 나한테 끔찍하게 당할 줄 알아!" 소름끼치는 협박과 무서운 경고였다. 세리의 내부에 잠재하고 있던 포악한 성격이 순간적인 장면에서 자제력을 상실한 듯 드러난 것이다. "무슨 일이오?" 마틴이 다가왔다. 그 순간 세리는 다시 예전처럼 표정을 바꾸었다. 다시 전처럼 상냥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 전체를 덮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녜요." 그녀는 몸을 일으키더니 아이 엄마에게도 미소를 던졌다. "나중에 봐요." 마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손짓까지 한 그녀였다. 아이의 엄마는 황당한 듯 여전히 멍하니 사라지는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12 스테파니가 노인에 의해서 극적으로 구출된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어디서 무엇 때문에 이런 곳까지 왔는지 전혀 알 길 없는 노인은 그곳에서 멀지 않은 산 속에 캠프를 차려 놓고 은둔자처럼 지내고 있었다. 스테파니가 실종된 캠프에서는 대대적인 수색 작전이 벌어졌다. 호수와 공중에서도 동시에 수색하곤 했지만 그녀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만일 노인에게 구출되지 못했다면 아마 스테파니는 악어의 밥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진실한 사랑을 얻었다고 확신하고 행복에 가득차 있던 스테파니 하퍼는 결국 그 사랑의 배신으로 비극적인 운명을 맞고 말았다. 그 노인은 그녀의 의식으로 회복시키고 상처를 치료하는 일에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현대 의학이 미치지 못함과 비례해서 신비한 약초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노인은 대항이 그런 약초들에 대해서 훤히 알고 있는 덕분에 불가능할 것 같던 스테파니를 결국 소생시켰다. 피투성이가 된 몸과 돌아오지 못한 의식을 되찾기 위해 노인은 정성껏 치료했다. 노인은 스테파니를 눕힌 다음 약초를 이용해 상처의 독이 몸에 퍼지지 않도록 응급 처치를 했고 그러는 사이 시간이 이미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시간을 지체할 경우 스테파니의 소생이 그만큼 어려워지기 때문에 그의 손놀림은 어느때 보다도 분주했다. 온종일 상처를 닦아 내고 약초를 찧어 상처에 바른 다음 치료를 거의 마칠 대는 이미 별이 떠 있는 밤이었다. 노인은 호롱불 밑에서 마지막 치료를 위해 몰두해 있었다. 몸과 얼굴의 찢어진 상처를 꿰매서 봉합시키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는데도 다행이 노인은 능수 능란하게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스테파니였지만, 상처에 마취도 없이 바늘이 꿰이자 고통을 참지 못하며 신음 소리를 냈다. 목소리 역시 마치 짐승이 울부짖는 것처럼 들렸다. 그녀는 바늘이 피부에 깊숙이 들어갈 때마다 으르렁거리며 팔을 뻗어 노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조금만 참아요."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부지런히 상처를 꿰맸다. 스테파니의 오른쪽 눈은 상처로 인해 찌그러진 채 거의 감겨진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왼쪽 얼굴도 역시 깊숙하게 찢어진 흉한 상처가 생기고 말았다. 입술은 일그러졌고 턱의 모양도 온전치 않았다. 그녀의 얼굴이 악어에 물린 것은 그렉과 질리가 보트에서 악어와 싸우고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을 때였다. 그들은 스테파니의 얼굴에서 시뻘건 피가 튀기며 뿜어 나오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노인은 마지막으로 스테파니의 찢어진 얼굴 부위에 바늘을 갖다 댔다. "이제 다 됐어요." 바늘이 들어갈 때마다 처절하게 그르렁거리는 스테파니의 괴성과 모습은 이미 사람의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노인은 그녀에게 다정한 목소리를 들려주며 아픔을 덜어 주기 위해 노력했다. 얼굴 부위까지 완전히 봉합한 노인은 비로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성껏 치료를 마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스테파니가 완전히 회복될 수 있다는 보장은 아직 할 수가 없었다. 상처에 침입된 세균이나 독성분 때문에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할 수 있는 만큼 정성을 기울인 노인도 마지막 결과는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노인은 거의 뜬눈으로 스테파니의 곁에서 날을 밝혔다. 그는 스테파니가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그런 무서운 일을 당했는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사경을 헤매는 한 연약한 생명을 정성을 다해 구하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스테파니를 잃고 하퍼그룹 전체가 발칵 뒤집힌 것도 노인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기도 했다. 다행이 스테파니의 생명은 그렉의 잔인한 야심에 의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운명과 생면부지 노인의 지극한 정성이 어우러져 그녀는 결국 다시 소생한 것이다. 다음날 아침, 스테파니는 완전히 의식을 되찾았다. 아직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의식은 뚜렷하게 되돌아왔고 결국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충격 때문인지 과거를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결국 그녀는 상처난 육체와 함께 정신마저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노인은 계속해서 그녀의 치료에 정성을 쏟았다. 산에 들어가 위험을 무릅쓰고 약초를 구해 오기도 했으며 더러는 근처에 살고 있는 원주민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곳은 현대문명과 동떨어진 원주민 부족들이 대자연과 맞물려 살고 있는 곳이기도 했는데 노인이 신비한 약초로 스테파니를 치료한 것도 그곳 원주민들의 도움이 크게 작용한 셈이었다. 산 속에 은거하는 동안 노인은 원주민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온 것이 결국 효력이었던 것이다. "이런 곳을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노인은 새로운 약을 준비한 다음 스테파니에게로 다가갔다. "이건 야생화와 진흙을 이겨서 만든 약입니다. 원주민들 사이에선 널리 알려져 있는 처방법이지요. 이곳 사람들은 이 약을 기적의 약이라고 부릅니다." 노인은 우선 스테파니의 얼굴에 나 있는 상처 부위에 정성껏 약을 발라 주었다. 약이 상처에 닿는 순간 스테파니는 굉장한 고통을 느꼈다. 아직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대문에 짐승처럼 끙끙대면서 몸을 심하게 뒤틀었다. "고통이 몹시 심하리라는 것은 알아요." 노인의 다정한 말 한마디는 스테파니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그녀가 느끼는 노인에 대한 감정은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실하고 절박한 것이었다. 운명의 순간 그녀는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는 고귀한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상처에 약을 골고루 바른 다음 노인은 다시 끓인 죽을 그녀의 입에 떠 넣어 주었다. "이건 특별히 내가 만든 죽이요. 고통을 없애 주죠. 그렇다고 마취제는 아니라오. 약초로 만든 것이니 만큼 충분히 효과가 있을 거예요." 스테파니는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었다. 한쪽 눈은 거의 감기듯 눈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닫혀 있었고 보기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거기다 얼굴의 깊은 상처 때문에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곧 나아질 테니." 노인은 이제 확신을 갖기 시작한 듯 했는데 기적의 약은 충분히 효험을 보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직은 스테파니의 운명이 끝날 때가 아니라는 확신이 그에게 있었으므로 치료와 그녀의 상태 변화에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몸과 마음이 동시에 갈기갈기 찢긴 스테파니 하퍼의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룹의 총수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을 뿐만 아니라 지성과 교양을 갖춘 스테파니 하퍼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흉측하고 혐오스러운 한 여자가 거기에 있을 뿐이었다. 악어에게 물리고 찢긴 사나운 몰골에서는 도저히 예전의 스테파니 모습을 찾기가 불가능했다. 남편에 의해 악어에게 던져졌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서 아직 자신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채 다만 전신에 파고드는 고통 때문에 몸부림치는 한 가련한 여자가 그렇게 깊은 산속 캠프에 누워 있는 것이다. 노인의 기대는 결코 어긋난 것이 아니었다. 스테파니의 상처는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몰골은 사나웠지만 며칠 뒤에는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좋아졌다. 스스로 일어나 앉기도 하고 누울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가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노인은 재빨리 소형 거울을 감추었다. 스테파니가 자신의 흉한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던 것이다. 산 속에서 혼자 생활하던 노인은 예상치 못했던 사람이 같이 머물고 있다는 사실에 따뜻한 인정을 베풀었고 그 동안 쌓여 있던 외로움이 가셔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어디에서 왔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다만 빨리 완쾌될 수 있기만을 빌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지내는 동안 그녀를 위해 정성껏 치료해 주고 상처를 보살피면서 스테파니에게서 어떤 품위 같은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은 알려 하진 않았다. 하루하루 차도를 보이던 스테파니는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되자 몸과 마음이 완쾌되면서 자신의 존재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기억 속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떤 이유로 상처를 입었으며 왜 이 깊은 산 속까지 오게 되었는지 전혀 기억할 수가 없었다. 문득 자신의 모습이 궁금해지기는 했지만 전혀 볼 수가 없었다. 거울을 찾으려 했지만 아무데도 없었다. 한편으론 자신의 모습을 보기가 두렵기도 했다. 그녀의 기억상실은 오히려 신이 내린 축복일 수도 있었다. 그녀가 만일 과거를 모두 기억하고 있다면 그녀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오히려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스테파니는 깨닫게 되었다. 노인이 밖에 나가고 없을 때 스테파니는 더위에 지쳐서 물을 찾았다. 그 동안 노인이 손과 발을 간단히 씻어 주기는 했지만 얼굴은 상처 때문에 한 번도 물을 대본 적이 없었다. 꿰맨 상처가 거의 회복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얼굴을 씻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캠프 주위를 걸어다니는 일은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스테파니는 노인이 세수할 때 사용하는 작은 그릇을 들고 물을 받아 놓은 커다란 통으로 걸어갔다. 심하게 다쳤던 왼쪽 팔은 아직 완전하진 못하지만 사용할 수는 있었다. 웬만한 통의 세 배쯤 되는 물통에는 맑은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무심코 물을 퍼 올리려던 그녀는 갑자기 그 상태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은 완전히 체념하고 있던 그녀였다. 물을 퍼 올리기 위해 몸을 숙이는 순간 그녀는 수면에 자신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소스라칠 듯 놀란 그녀의 눈에는 사람이 아닌 괴물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도 결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괴물이 그녀의 등뒤로 다가와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의 과거는 기억 속에서 지워지고 없지만 가끔씩 기억을 비집고 튀어나오는 것들은 바로 상처를 치료받을 때 느꼈던 엄청난 고통이었다. 물에 비친 모습이 바로 자신의 것임을 깨달은 스테파니는 가슴이 갈갈이 찢기는 고통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모습을 가졌었는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충격은 스스로 감당하기가 어려울 만큼 큰 것이었다. 때마침 캠프로 돌아오던 노인이 그 광경을 발견하고는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몹시 당황스러웠으며 어떤 말로도 그녀를 위로해 줄 순 없을 것 같았다. 상처를 치료해 준 것만으로도 그녀를 도와주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에 새겨진 상처까지도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스테파니는 계속해서 그 자리에 선 채 처절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노인은 그녀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녀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몸을 피했다. 기억을 상실하기는 했지만 현재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자신의 괴롭고 고통스러운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생명을 구해 준 사람이기는 하지만 노인에게도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그녀가 보지 못하도록 재빨리 장소를 옮긴 노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스테파니가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 것처럼 노인 역시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스테파니의 건강이 거의 완벽할 정도로 회복되어 활동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이제 그녀에게 필요한 일은 계속해서 산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녀가 죽은 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야만 했다. 자신을 비관하도록 놔두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미 흉측한 자신의 몰골을 발견한 이상 그녀의 정신적인 고통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질 것이 분명하므로 빨리 현실 세계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 고통과 비관에서 구해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노인은 스테파니가 지성과 교양을 갖춘 여자라는 것을 충분히 알아차렸다. 그녀의 일거일동을 통해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를 되돌려 보내도 무모한 짓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마음을 결정한 노인은 스테파니를 돌려보내기 위해 우선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노인은 보트를 저어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원주민 마을로 갔다. 원주민들도 생활하는 방법은 현대인과 똑같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모두 가지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진 호수는 어디를 가나 늪지대가 있었다. 그가 찾아간 곳은 외딴 집이었다. 염소와 닭이 있었고 우리 안에는 조랑말도 보였다. 잠시 주변의 동정을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노인은 재빨리 행동을 시작했다. 그가 취한 행동은 먼저 빨래줄에 널려 있는 여자옷 가운데 스테파니가 입을 만한 것을 고르는 일이었다. 다음에는 벽에 걸린 모자를 떼었는데 스테파니의 흉한 얼굴을 가리기 위해선 모자가 반드시 필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침 여자용 구두가 보였으므로 옷과 모자, 구두까지 집어들고 서둘러 그가 세워 둔 보트로 뛰어갔다. 노인이 캠프로 돌아왔을 때 스테파니는 조용히 앉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이 걱정하던 문제는 없는 듯 했다. 그녀가 아직도 고통에 빠져 있지는 않을까 하고 크게 염려했지만 그것은 역시 기우에 불과했다. 그녀는 경솔할 정도로 생각이 얕은 사람도 아니었으며 충분히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있는 여자였다. "몸은 좀 어때요?" 스테파니는 가벼운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는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없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말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편히 지내도록 해요." "계속 누워만 있었는걸요." 비로소 그녀는 짧지만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말투나 억양으로 보아 정상적인 목소리에서 굉장히 많이 벗어나 있었다. 마치 짐승과 사람의 음성이 혼합된 것 같은 목소리였는데 마치 공포 영화에 등장하는 마녀의 목소리 같았다. "내가 옷을 가지고 왔으니 입도록 해요." 스테파니는 자신이 걸치고 있는 옷을 내려다보았다. 노인이 입던 옷이라 말이 아니었다. 몸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척 낡아 있었다. 노인은 자신이 생각하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어떨지 모르겠군요." "네?" "지금 원주민들을 만나고 오는 길이에요. 그런데 그들은 당신이 여기를 떠나 주기를 원하는 눈치 에요." 노인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원주민들은 스테파니가 있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그녀가 떠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다만 스테파니를 빨리 그녀가 살던 곳으로 보내기 위해선 그 방법이 가장 좋다고 그는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스테파니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건강이 회복된 이상 계속해서 노인의 신세를 진다는 것이 미안한 일이었다. 과거는 모두 잊었지만 어디론가로 떠나야 하는 그녀였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기억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가슴속에 남아 있기도 했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졌다. "여기서 떠나면 곧장 사람들에게 알려요." 스테파니의 흉한 얼굴에 참담한 표정이 나타났다.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연락해서 당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될 테니까요." 기억을 할 수는 없지만 그녀에게도 연락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녀가 죽은 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야 된다는 것에는 동감하고 있었다. "여기를 떠난다는 것이 두려워요." "충분히 이해해요. 그렇지만 당신은 떠나야만 해요. 여긴 당신이 살 곳이 못되니까요." "그렇지만......과거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걸요......." 그녀는 힘없이 말끝을 흐렸다. 현재로서는 황량한 벌판에 혼자 버려진 것만 같았다. "내 이름이 뭐였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 걸요. 다만 한 가지......." 스테파니는 조금이라도 더 기억해 내려는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드문드문 생각이 나는 것들을 말했다. "생각이 나는 것은 제가 아주 옛날에 결혼식을 올렸을지도 모른다는 것뿐이에요." "기억나는 게 있다면 더 잘 생각해 봐요. 천천히 생각하면 혹시 더 생각이 날 수도 있을 거예요." "글쎄요......." "그렇지만 아무래도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하는 게 좋겠어요." 노인은 천천히 스테파니의 곁으로 다가가서 그녀의 옆에 앉았다. 스테파니에게 그는 아버지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노인은 마치 딸을 대하는 것처럼 스테파니의 손을 잡고는 자신의 손으로 다정하게 토닥거렸다. 그의 마음엔 스테파니에 대한 애절한 동정심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스테파니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지금은 오래된 일이긴 하지만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추억이 있었다. "이건 오래 전 얘긴데........" 스테파니는 노인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내와 사별한 다음 우연한 기회에 한 소녀를 알게 됐어요. 맨다이저 출신의 깜찍하고 귀여운 아가씨였는데......난 그만 그 소녀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죠."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스테파니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편해졌다. 노인의 진실은 어떤 약보다도 그녀의 마음에 치료가 되고 있었다. 그녀는 감동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이름은 타라였어요." 이후 스테파니 하퍼가 한동안 타라 웰즈로 불리게 된 동기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타라의 어머니는 평생 동안 꼭 한편의 영화를 보았다고 해요. 그게 어떤 영화인지 알아요?" "글쎄요." "그 유명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였지요. 그래서 딸의 이름도 영화의 배경이 되고 있는 타라로 이름을 지어 준거라고 했어요." 노인의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가슴 아픈 진실에 스테파니는 감동을 받았다. 노인은 스테파니가 질문하기 전에 스스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난 그녀를 좋아했어요. 그런데......어찌된 셈인지 그녀는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남자와 결혼하고 말았죠. 지금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스테파니의 마음에 노인에 대한 동정심이 일어났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쓸쓸함의 정체가 무엇 때문인지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가지 묻겠는데......" 그는 스테파니의 표정을 살핀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만일 당신이 괜찮다고 하면 당분간만이라도 당신을 타라라고 불러 주고 싶군요."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스테파니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 순 없지만 '타라'라는 이름이 마음에 꼭 들었다. "됐어요. 한 번 불러 볼까요?" 스테파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라!" 그녀는 대답 대신 노인의 어깨에 다정하게 얼굴을 기댔다. 그녀가 마음을 드러내는 표현 중에 한가지였다. 노인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아버지와 딸이 느끼는 둘만의 공감대가 이 순간 노인과 스테파니의 마음에는 간절하고도 잔잔히 흘러 넘치고 있었다. 스테파니의 마음속에는 고요한 파문이 일어났다. 내가 만일 제대로 살 수 있게 된다면 이 분의 은혜를 꼭 갚을 테야...... 13 한동안 정적만 감돌던 마틴의 집에는 새로운 여자가 등장했다. 세리 모건의 출현은 이웃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할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은 여자 관계라고는 전혀 없으면서 사업에만 열중해 있었던 마틴의 모습을 이웃들도 충분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리에 관한 일은 처제인 안나도 이미 들어서 잘 알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그들이 만난 적은 없었다. 마틴과 세리보다 약간 늦게 집에 도착한 안나는 비로소 집으로 들어가는 그들을 마침 같이 온 친구에 의해 그들의 모습이 확인되었다. "너희 형부와 같이 온 여자는 누구니?" 친구의 물음에 안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여자 일거야." 그러나 안나는 새로운 느낌을 받는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세리의 등장은 하나의 새로운 사실이며 형부에게 갑자기 여자가 생겼다는 사실이 굉장히 생소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미인인데?......." 안나는 집이 있는 쪽을 계속해서 바라볼 뿐이었다. "아주 미인이야, 안나." "나중에 봐." 안나는 간단히 인사를 한 다음 부지런히 집을 향해 걸어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동안 혼자가 된 형부와 함께 살면서 아직까지 이렇게 낯선 기분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나이가 많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도 그녀는 독신이었다. 하지만 형부를 남자로 생각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언니를 대신해서 형부와 마이키를 보살피며 살아왔는데 느닷없는 여자의 출현은 안나에게 왠지 모를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때로는 형부와 좀더 가깝게 지내고 싶기도 했었지만 그것뿐이었으며 이성으로는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자신의 여자로서의 본능에도 불구하고 애써서 마음을 가라앉히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여자가 나타났을 때 그녀는 갑작스럽게도 감정의 혼란을 느꼈다. 자신이 그 동안 형부를 남자로 생각해 오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안나가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을 때 마틴에 집에 들어선 세리는 과장된 몸짓과 목소리로 감탄을 하기 시작했다. "집아 아니라 마치 최고급 호텔 같은데요." "내가 직접 설계한 집이오. 마음에 드오?" 그녀는 벽난로 위에 있는 사진첩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아름다운 여자의 환한 미소가 바로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내 아내요." "미인이군요. 특히 미소가 아름답네요." 그렇게 말하는 세리는 어쩐지 진심의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틴은 이미 그녀에게 빠져들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전혀 그녀의 그런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설령 세리가 죽은 아내를 질투한다고 해도 세리를 나쁘게 생각하진 않을 그였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마틴의 처제인 안나가 들어왔다. "도와 드리려고 왔어요. 세리 씨죠?" "안나로군요." 세리는 쇼핑한 커다란 봉투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악수를 나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의 두 여자는 각각의 상대에 대해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뭐가 빠졌소?" "네. 체리를 잊었어요." "그럼 내가 가서 가져오겠소." "미안해요. 후식으로는 체리가 적격이거든요." "금방 다녀오겠소." 그때 안나가 넌지시 끼여들었다. "다녀오세요. 그래야 형부의 험담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거 걱정되는데?" 세리는 가벼운 미소를 마틴에게 던지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안나 역시 부엌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싱크대를 살피더니 이렇게 말했다. "마이키가 설거지를 해 놓기로 했는데 왜 안했지?" "어차피 다시 치워야 할텐데 접시 몇 개 더 있다고 힘들 건 없겠죠?" 세리의 그 말은 매우 너그럽고 부드럽게 들렸다. 안나는 계속해서 그녀의 동정을 살폈다. "팔찌가 예쁘네요." 안나는 세리가 하고 있는 팔찌를 보며 칭찬해 주었다. "그래요?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좋아하는 거예요." "형부가 그러는데 러시아 연애 소설을 쓰신다구요?" 세리는 가만히 웃어 보이기만 할 뿐 대답하지는 않았다. 선뜻 대답하기에는 어떤 가책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전 안나 카레리나를 좋아해요." "저도 그녀의 작품을 좋아해요." 무심코 던진 세리의 말에 안나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다시 보였다.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로맨스 작품을 쓴다는 세리가 안나 카레리나를 소련의 유명 작가쯤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 다른 의문을 갖진 않았다. 처음 방문하는 것이니 만큼 당황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마이키 엄마와 당신 중에 누가 동생이죠?" "제가 동생이에요." "마틴은 언니를 무척 사랑했나 봐요, 그렇죠?" 그녀의 질문에 안나는 아무런 의심 없이 대답했다. "모두 그를 사랑했죠. 형부는 훨씬 더했구요. 언니가 죽었을 때 형부는 완전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죠." 학교에서 사이클 선수를 하고 있는 마이키가 부엌으로 들어오면서 쓰고 있던 헬멧을 벗었다. "이모, 아빠가 밖으로 나가시던데 어디에 가시는 거죠?" 세리의 눈빛은 태연한 척하면서도 재빨리 마이키에게 쏠렸다. "손님께 인사부터 해야지, 마이키." "죄송해요. 전 마이키예요." "난 세리야."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 그것으로 이들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악연은 시작된 셈이다. "사이클을 좋아하니?" "어떻게 아세요?" "글쎄?" "누가 가르쳐 줬어요?" 마이키는 세리가 자신에 관한 것까지 이미 사전에 파악해 놓은 사실을 짐작하지 못했다. 그녀는 마틴 그레함에 대한 사전 조사를 충분히 마친 다음 자신을 가지고 그에게 접근했으며 충분히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마이키, 설거지는 왜 해 놓지 않은 거지?" "시간이 없었어요." "가서 옷 갈아입고 샤워해라. 더러워진 옷은 세탁기에 집어넣고." 한쪽에서 식료품을 정리하는 세리의 눈빛이 수시로 안나와 마이키의 동정을 살폈다. 어머니 대신 오랫동안 같이 살면서 보살폈기 때문인지 안나는 꼭 어머니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벌써부터 그녀가 안나에게 질투심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순 없지만 세리는 마틴과 관련된 모든 것을 상세히 알고 싶은 것만은 분명했다. 사랑을 느낀 남자에 관한 모든 것을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세리의 때때로 날카롭게 번뜩이는 눈빛이 수상쩍게 보였다. "알았어요." 마이키 역시 어머니를 대하듯 말하면서 부엌을 나갔다. 안나는 측은한 듯 욕실로 가는 마이키를 바라보며 낮게 속삭였다. "저 애도 많이 힘들어하죠. 걱정이에요." 세리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가져간 꽃을 화병에 꽂았다. 그녀는 식료품과 함께 한 다발의 튜울립을 사 왔던 것이다. 워니 브랜드리를 호텔방에서 독살하고 세리 모건으로 변장한 제인 미첼은 마틴 그레함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었다. 다섯 차례에 걸친 연쇄 살인을 수사 중인 F.B.I 요원들은 수사를 계속해 나갔다. 그들은 워니 브랜드리가 죽기 전 제인 미첼과 사귀던 시절 당시 그녀를 아는 사람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지역에서 제인 미첼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아내는 일에 성공한 것이다. 따라서 새롭게 세리 모건으로 변장해서 마틴 그레함에게 접근하고 있는 세리 모건에게는 굉장히 불리한 일이었다. "한 마디로 굉장한 여자였죠." F.B.I 요원들이 만난 그 사람은 그녀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굉장한 여자라면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이죠?" "모두들 워니한테 뭐라고 했는지 압니까? 그런 여자를 얻었다고 억세게 운이 좋다고 했었죠. 이건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당신이 그녀를 만났을 때 처음 만난 인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제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글쎄요......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데가 있었어요." "다시 말하면?" "확실히 알 순 없지만 섬뜩한 느낌이 드는 여자였어요." "섬뜩하다고요?" 두 명의 수사관은 서로의 시선을 마주쳤다. "그 여자가 제인 미첼 맞습니까?" "그럼요." "계속하시죠." "그녀는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싶어했어요." "그래서요?" "남들에게 칭찬을 듣기 위해서라면 그야말로 거의 필사적이었으니까요. 어딜 가든지 그곳의 분위기를 한 눈에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서 행동하는 겁니다." "확실히 특별한 여자군요." "그럼요. 참, 그녀의 사진이 한 장 있어요." "그게 정말입니까?" 두 요원의 표정은 눈에 띄게 변했다. 지금까지 수사상 필요했지만 그녀의 얼굴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사진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진척인 셈이었다. "별로 잘 나오지는 않았어요." 그는 자신의 사물이 들어 있는 사물함에 가더니 사진 한 장을 꺼내 이내 돌아왔다. 사진은 분명한 세리 모건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사진에 찍히지 않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팔로 급히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분명하게 나온 사진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진을 보고도 쉽게 그녀가 제인 미첼임을 알 수 있을 정도의 사진이었다. 그것 역시 경우에 따라선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정체를 위장하고 있는 단서 가운데 한가지가 결국은 이렇게 밖으로 드러나고 만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사진에 찍히는 것을 무척 싫어했어요." 그 설명 역시 요원들의 구미를 당길 만큼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세리 모건은 실제로 사진에 찍히기를 죽기만큼이나 싫어했다. "혹시 그녀를 알아볼 수 있는 특징 같은 것을 알고 계십니까?" "특징이라고요?" "얼굴이나 몸에 특별하게 남들과 구분할 수 있는 특징 같은 것을 알고 계십니까?" "글쎄요......아, 생각이 나는군요." "네?" "긁힌 상처를 본 기억이 납니다." "긁힌 상처라고요?" "네. 팔에 가늘게 긁힌 자국이 있었어요. 여기와 여기에 말이죠." 그는 자신의 팔을 들어 보이며 아래와 위를 가리켰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생긴 상처인지는 잘 모르겠군요." "여러 가지로 고맙습니다." 그에게서 얻어낼 수 있었던 정보는 사진과 함께 제인의 성격이나 습관 등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은 세리 모건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별히 파견된 요원들의 수사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세리 모건은 마틴 그레함의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그 자리에는 그녀와 마틴, 안나와 마이키 그리고 마이키의 여자 친구까지 합석했는데 세리는 모두를 사로잡을 만큼 특별한 요리를 만들었다. "이런 식사는 처음으로 먹어 보는 거예요." "분명히 평소에 먹을 수 있는 그런 건 아냐." 마이키도 여자 친구의 말이 끝나자 자신의 느낌을 말했다. 그들이 먹은 저녁 식사는 확실히 특별한 것이었다. 세리는 그들이 놀라고 감탄할 만한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그 동안 열심히 요리책을 살펴보며 충분히 실습까지 마친 후였다. 한편 안나는 모두의 즐거운 기분과는 달리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줄곧 앉아 있었다. 지금껏 마틴과 마이키의 식사는 그녀의 담당이었다. 겨우 이제 한 번 뿐인 세리의 솜씨에 그들이 놀라고 감탄하는 광경이 그녀의 눈에 별로 유쾌할 리는 없었다. 이제 겨우 처음 방문했을 뿐인 세리가 금방이라도 그 집의 안주인이라도 된 듯한 것이 비위에 거슬렸던 것이다.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무엇보다 만족해하는 것은 마틴이었다. 그녀를 좀더 일찍 집에 데려오지 못한 것을 은근히 후회할 정도였다. "정말 포도주 한 잔 들지 않을 건가요?" 세리의 권유에 안나는 난처한 표정을 나타냈다. "됐어요." "한 잔만 해요. 버리면 너무 아깝잖아요." 두 여자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틴과 마이키는 유심히 그들의 관계를 지켜볼 뿐이었다. "싫다니까요. 고마워요." 세리는 할 수 없다는 듯 더 이상 그녀에게 권하지 않았다. 안나가 무엇 때문에 술을 강력하게 거부하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혹시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지기까지 했다. 안나에게는 술을 마실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마틴과 마이키는 그 이유를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세리는 알지 못했다. 마틴의 처제에 대해서까지 그녀의 연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다. 세리는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그녀는 샴페인을 안나는 생수를 마셨다. 식사 후 세리가 부엌에 있는 동안 마틴은 마이키와 안나가 있는 자리에서 세리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마이키의 여자 친구에겐 세리와 함께 설거지를 도와주도록 했다. "마이키, 네가 보기에는 세리 아줌마가 어떻지?" 마이키는 세리에 관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으므로 그냥 집에 초대된 손님으로만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첫인상은 일단 좋은 편이었다. 세리는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끌어들일 수 있는가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여자였으므로 호감을 하는 일에는 언제나 실수하는 일이 없었다. "좋아요." 간단한 마이키의 대답에 안나도 조용히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 때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세리는 준비한 후식을 가지고 부엌에서 나왔다. 후식 말고도 그녀는 가족의 대화를 엿듣고 싶어하는 것이 분명했다. "후식을 먹을 배는 어디에 있나요?" "과연 놀랍소!" 세리는 후식을 만드는 일에도 독특함을 보였다. 그녀를 제외한 그곳에 있는 어느 누구도 먹어 본 적이 없는 독특한 후식을 만들었던 것이다. "놀라지 마, 마이키. 이건 바로 체리 쥬빌리라는 거야." 마이키의 여자 친구는 놀라는 표정과 함께 소리쳤다. "멋진데요?" 마이키도 기분이 좋아진 듯 즐거운 표정이었다. "조금만 들어 봐요, 안니. 알코올은 날아가서 전혀 없어요." 이번에 안나는 거절하지 않고 접시에 후식을 받았다. "맛있겠는데?" 세리는 마치 주부이기라도 한 것처럼 다정하고 상냥하게 골고루 자신이 만든 후식을 나누어주었다. 다른 사람보다도 안나는 그런 세리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겨우 한 번 찾아왔을 뿐인데도 마틴과 마이키 그리고 집안의 분위기를 완전히 장악한 듯한 그녀의 모습에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저녁 식사 후에 마틴은 당연하다는 듯 세리를 그녀의 집까지 차로 태워다 주었다. 집에 초대한 후에 식사까지 함께 한 그들이지만 아직까지 손도 잡아 본 적이 없는 그들이었다. 마틴 역시 서둘지 않았다. 그보다 조심스러움을 느낄 뿐이었는데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감정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상태였으므로 경이롭게 세리를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잘 있어요." 마틴은 문 앞에서 조용히 돌아서며 작별 인사를 했다. 하지만 세리는 그의 생각과는 달랐다. 가능하다면 시간을 단축시키고 싶었다. 그녀는 매우 자연스럽게 마틴에게 키스를 요구했다. 마틴은 무척 어색해 하면서 가벼운 키스만으로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잠깐 들어오시겠어요?" "글쎄......." 마틴은 갑자기 난처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혹시라도 세리에게 실수라도 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그의 가슴을 조이게 했다. 이미 치밀한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세리의 무서운 속셈을 그가 짐작할 수 없는 이유에서였다. 14 스테파니를 돌려보내는 노인의 마음에는 오직 진실만이 있을 뿐이다. 그녀가 귀찮거나 미워서 돌려보내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전적으로 그녀를 위한 배려에서 하는 행동이었다. 만일 그녀가 계속해서 캠프에 머문다면 더 이상의 발전이나 희망을 기대하기란 어려워지게 된다. 아무리 신비한 명약을 쓴다 해도 더 이상 스테파니를 향상시킬 방법은 없었다. 몰골이 흉하게 변하기는 했지만 스테파니가 아직 중년의 젊은 여자라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따라서 그녀의 남아 있는 더 많은 인생을 비참하게 파묻어 두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희망적인 가능성을 부여해 주고 싶었다. 스테파니를 그녀가 살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려는 마음 역시 어디든 도시로 나가 좋은 기회를 만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었던 것이다. 더구나 노인은 스테파니를 떠나 보내는 마음이 꼭 사랑하는 딸을 객지로 떠나 보내는 마음과 같았다. 자식의 장래를 위해 마음고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장래를 생각하는 부모의 안타까운 마음과도 같은 심정이었다. 스테파니 역시 마음을 굳게 먹으며 캠프를 떠나게 되었다. 그녀는 노인이 훔쳐 온 옷과 구두, 특히 모자를 쓴 채 노인이 태워다 주는 보트 편으로 캠프를 떠났다. 그곳을 떠나는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착잡하기만 했다. 노인은 그녀를 도시로 향하는 길목이 있는 곳까지 실어다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스테파니의 마음은 설레고 있었다. 그리고 노인과 헤어져야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뭍으로 스테파니를 데려다 준 노인은 전과 다름없이 조용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타라." "네?" "이걸 받아요." "그게......." "이별 선물이요." 그가 꺼낸 것은 크기가 작고 네모난 보석함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굉장히 귀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내게는 이제 소용이 없어진 물건이오." 노인이 스테파니에게 주려는 물건은 생각보다 굉장히 값어치가 나가는 귀중품이었다. "아마 당신이 새롭게 생활을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요." 스테파니의 신분이 하퍼그룹의 총수라는 사실은 노인은 물론 그녀 자신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는 그 선물이 스테파니에게 커다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색깔이 근사하죠?" 노인은 손으로 네모나고 납작한 물건을 닦으며 이렇게 말했다. 과연 영롱한 광채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밤에 보면 번쩍거리면서 빛을 내지요. 이걸 보석상에 가져가면 아마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을 거요." 스테파니는 벌써부터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목숨을 살려주고 값비싼 선물까지 주면서 맨몸으로 떠나는 자신을 도와주려는 노인의 마음이 가슴이 사무칠 만큼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녀가 보기에도 노인의 선물은 굉장한 값이 나가는 귀한 것이었다. "공연히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안되니까 조심해요." 눈물을 억제하기에는 그의 세세한 배려와 고마움은 너무 크고 깊었다. 스테파니는 비로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벅차 올랐고 사랑하는 아버지와 영원히 헤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슬픔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자, 그럼......." 노인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 "난 이제 가 봐야겠군요. 그리고 한 가지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 줘요. 내 말 알았죠?" 그것은 상관없었다. 그가 누구이고 무슨 연유로 깊은 산 속에 들어와 살고 있는지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다만 그는 스테파니의 은인이며 구원자였다. "그 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어떻게 말씀드려야 좋을지......." "됐어요, 타라. 그럼 잘 가요." "안녕히......." 스테파니는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재빨리 돌아섰다. 노인도 그녀를 더 이상 바라보지 못하고 돌아서더니 천천히 보트로 걸어갔다. 스테파니는 그가 보트를 저어 사라지는 모습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지만 이내 입술을 깨물며 돌아섰다. 이윽고 큰길에 올라선 스테파니는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기로 했다. 방향 감각도 전혀 없었고 어느 쪽으로 가야 될지도 알 수 없었다. 닥치는 대로 우선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노인이 준 보석을 보석상에 가져가면 우선 그녀가 움직일 수 있는 돈이 생긴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또다시 노인에게 깊은 감사를 느끼며 자동차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돈만 있으면 어디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점을 그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마침 대형 콘테이너를 실은 트럭이 그녀가 있는 곳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이 때 스테파니는 자신의 현재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안면의 한 쪽은 완전히 일그러져 있고 눈은 거의 감겨 있었으며 입술까지 균형을 잃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트럭은 그녀의 앞을 그냥 지나쳐 갔다. 그녀는 실망하며 한숨을 쉬었다. 워낙 한적한 길이기 때문에 언제 다시 다른 자동차가 올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를 지나쳐 간 대형 트럭이 그녀가 서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 멈추었다. 스테파니는 급히 그곳으로 달려갔다. 트럭 운전사는 다행히도 마음이 좋은 사람이었다. 스테파니의 이상한 용모에는 무관심한 척하며 묵묵히 그녀를 태워 준 것이다. 트럭의 조수석에 앉아 있는 동안 스테파니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얼굴 모습은 물론 목소리도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장소를 떠나는 기분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착잡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한동안 묵묵히 차를 몰던 운전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젊은 아가씨가 이런 외딴 곳까지 웬일이죠?" 스테파니는 쉽게 그리고 빠르게 대답할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혹시 차가 고장 났나요?" 그렇게 묻던 운전사는 스테파니의 초라한 옷차림을 보더니 다시 질문을 바꾸었다. "여기에 아는 사람이 살고 있나요?" "그래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운전사가 계속 질문을 던지거나 의심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과거를 완전히 상실하기는 했지만 현재 상태까지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아는 사람이 달란드에 살아요?" "네." 스테파니는 달란드가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자신이 타고 있는 트럭이 달란드라는 곳을 경유하거나 아니면 그곳까지 가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달란드이든 어디든 간에 도시로 나간 다음에야 다음 일을 생각해 볼 결심이었다. 그녀를 태워 준 트럭은 한동안 웅장한 소리를 내며 산길을 일정한 속도로 운행하고 있었다. 주변은 온통 깊은 산중이었고 밀림지대만이 보일 뿐이었다. 트럭은 산길이 지나 계곡물이 흐르는 개울을 횡단하기도 했다.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던 스테파니에게 돌연한 사태가 발생했다. 트럭이 개울물을 건널 때 바퀴에서 튄 물이 운전석의 앞 유리창을 덮치는 순간 느닷없는 악몽이 눈앞에 떠오른 것이다. 물이 요동을 치는 가운데 그 속에 한 여자가 빠져 허우적거리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악어의 습격을 받고 있었다. 처절한 악어와의 싸움은 이미 그 결과가 확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여자의 얼굴에는 피가 튀었고 물위에는 붉은 피가 번져 갔다. 가까운 곳에는 보트가 떠 있었고 그곳에는 사람이 타고 있었다. 한 남자와 한 여자였는데 여자는 겁에 질려 울고 있었지만 남자는 악어에게 당하는 여자를 잔인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짧은 순간이기는 하지만 시야에 나타난 그 광경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한 것이었다. 그리고 너무 선명했다. 차창으로 튀는 물방울과 함께 꿈도 아닌 현실을 통해 드러나는 처참한 광경에 스테파니는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이 누구인지 전혀 기억할 수가 없었다. 물에 빠져 악어에게 당하는 것은 스테파니 자신이었지만 보트에 타고 있던 여자와 남자에 관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 "왜 그래요?" 악몽 때문인지 몹시 놀라고 겁에 질린 그녀의 모습을 운전사가 알아본 듯 했다. "아녜요." "놀란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아요. 그냥 좀 무서운 생각이 들었어요." "이 차가 커서 그래요?" "그런가 봐요." "걱정할 거 없어요. 자동차란 덩치가 크면 클수록 그만큼 안정하다는 것만 알아둬요." "알겠어요." 스테파니가 입을 다물자 운전사도 더 이상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달란드에 왔을 때에야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가 달란드에요." "네. 고마워요." "잘 가요." 스테파니는 난생 처음으로 달란드에 내렸다. 그곳이 어디에 위치하는 지도 알지 못했지만 마치 세상에 첫발을 내딛듯이 그 곳에서 생활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부터 시작한 다음에 앞으로 해야 될 일을 생각해야 될 것만 같았다. 달란드는 도시라고는 볼 수 없는 곳이었다. 작은 마을쯤으로 보였는데 다행스럽게 그곳에는 보석상이 있었다. 만약 보석상이 없었다면 스테파니는 그곳에서 한 발도 움직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다시 자동차를 얻어 타야 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바로 그곳에서 다음 계획을 세워야만 하는 일이었다. 보석상에 노인의 선물을 팔아 돈을 만들지 않고서는 아무런 계획도 세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보석상 주인은 약간 놀라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재빨리 친절한 표정으로 바꾸었다. "이걸 좀 봐 주세요." "파시려구요?" "네." "어디 볼까요?" 노인의 선물을 받아 든 보석상 주인은 대뜸 보석의 값어치를 알아보았다. "이건 굉장히 좋은 물건이군요." "선물 받은 거예요." 스테파니는 새삼 노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의 덕분에 그녀는 두 번이나 살아난 셈이기 때문이다. "이걸 파시겠단 말이죠?" "네." "그럼 잠깐만 기다리시죠. 물건이 좋은 것일수록 정확한 감정이 필요하니까요." "그러죠." 보석상 주인이 물건을 감정하는 동안 스테파니는 한 쪽에 서서 조용히 감정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 때 다시 얼마 전에 생각났던 악몽의 순간이 되살아났다. 여자가 물에 빠져 악어에게 물리면서 처절하게 울부짖던 광경이었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악어에게 물리고 찢겨서 지금과 같이 흉한 몰골이 되었음을 그녀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와 같은 자신의 최근 일들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 스테파니는 갑자기 마음의 동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한 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가 없을 정도로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면서 눈앞에서 형언할 수 없는 혼란이 급작스럽게 일어나고 있었다. 순간 그녀는 자신이 그곳에 무엇 때문에 왔는지조차 망각한 채 도망치듯 밖으로 달려나가려 했다. "이봐요, 아가씨!" 보석상 주인이 급히 그녀를 부르며 달려왔다. "돈을 가져가야죠. 삼천 달러는 되겠어요." 다행이 그 보석상 주인은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돈을 가지고 달려나온 그는 스테파니가 쓰러질 듯이 비틀거리는 것을 겨우 부축해 주었다. "이봐요, 아가씨. 괜찮아요?" 비로소 스테파니는 다시 제정신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안돼, 이래서는 안돼. 정신차려야 해.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만 해......." 거의 필사적으로 정신을 가다듬은 스테파니는 보석상 주인이 손에 쥐여 주는 삼천 달러의 돈을 받았다. 하퍼그룹에 비하면 형편없는 액수였지만 현재의 스테파니의 형편에서 보면 그 돈은 충분히 그녀에게 힘이 될 수 있었다. 스테파니는 과거가 아닌 현재의 상황을 인식하며 자신의 모습을 서서히 되찾아 가기 시작했다. 수중에 가진 돈을 토대로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점검했다. 과거를 잊었다고는 하지만 그녀의 내부에 잠재하고 있는 치밀한 계획력과 추진력 지적인 상황판단 능력까지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생각하고 연구할 수 있는 능력은 아직까지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얼굴을 원래의 상태로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현재의 흉측한 얼굴 모습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는 그녀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망가진 얼굴은 수술로 고쳐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서 가장 탁월한 전문의를 찾을 필요가 있었다. 비교적 값이 저렴한 모텔이 일단 자리를 정한 스테파니는 그 분야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여러 가지 방향으로 노력했다. 신문이나 잡지 등 제일 먼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통해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다행히도 어렵지 않게 정보를 얻을 수가 있었다. 의약 계통의 잡지에 그런 내용의 기사가 실렸기 때문이다. 타운즈빌에는 댄 마샬이라는 유명한 정형외과 전문의가 있는데 그는 주로 상태가 심한 환자들을 치료한다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운명적인 일이었다. 신에게 버림받은 것 같으면서도 전혀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 스테파니를 버렸던 운명은 다시 그녀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댄 마샬이라는 정형외과 전문의를 발견한 것은 운명적인 또 하나의 만남이었다. 자신의 흐트러진 마음을 수습한 스테파니는 침착하게 움직였다. 우선 타운즈빌까지 갈 수 있는 교통 편을 알아본 다음 그곳으로의 여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배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는 섬이었다. 둥글고 넓은 모자로 얼굴을 가리기는 했지만 얼굴의 흉한 모습을 감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곳에는 스테파니처럼 얼굴이 흉하게 변한 그녀 외의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특별히 취급될 이유는 없었다. 시간을 헛되이 낭비할 수 없는 스테파니는 이튿날 선착장으로 나갔다. 우선 타운즈빌에 가서 정형외과 전문의 댄 마샬의 정확한 검진을 받아야만 했다. 승선권 매표구에서 그녀는 가급적 태연하려고 노력하면서 판매원에게 티켓을 부탁했다. "타운즈빌까지 가는 표 주세요." 티켓 판매원은 그녀의 이상한 목소리에 관심을 나타냈다. 그리고 모자 밑으로 드러난 그녀의 얼굴에도 다시 한 번 시선을 주었다. "왕복표를 드릴까요?" 스테파니는 재빨리 타운즈빌에 갔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되돌아오는 것은 물리칠 수 없는 절망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뇨. 편도로 주세요." 그녀가 돈을 꺼내자 판매원은 다시 한 번 의아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거액의 현금이 그녀에게서 나오자 깜짝 놀랐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그녀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다만 유일하게 노인이 지어 준 이름이 있을 뿐이었다. "타라 웰즈예요." 이때부터 스테파니는 타라 웰즈로 불리게 되었다. 스테파니는 타라 웰즈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떠나기에 앞서 타라는 댄 마샬의 병원에 미리 전화로 예약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배가 섬을 향해 항해하는 동안 타라는 가급적이면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예기치 못한 사건이 터져나올 것만 같아 너무나도 불안했다. 어쩌면 그녀가 앞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람도 없는 바다 위를 스테파니를 태운 배는 순항 끝에 무사히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배가 도착하자 그녀를 안내할 여자가 미리 나와 맞아 주었다. 몸집이 커다란 여인은 따가운 햇빛을 피하기 위해 파라솔까지 받쳐들고 배에서 내리는 타라를 환영했다. "마샬 병원에 잘 왔어요." 첫눈에 수다스럽긴 해도 마음좋은 여인임을 충분히 느끼게 했다. 타라는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막상 그곳에 도착하니 다시 머리가 복잡해졌다. "오늘 날씨가 정말 좋죠?" 타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엘리자베스라고 해요. 다들 리치라고 부르긴 하지만요." 엘리자베스는 수다스럽게 자신을 소개한 다음에 비로소 타라에게 물었다. "전화로 예약하신 타라 씨 맞죠?" "네." "짐이 이것 뿐인 가요? 이리 줘요." 엘리자베스는 뱃사공이 건네주는 타라의 가방을 받아 들면서 다시 한 번 수다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내가 항상 주장하는 것은 말이죠, 즉 여행은 가볍게예요. 그 말이 딱 들어맞는 것 같군요." 그녀는 타라의 손을 잡아 그녀가 배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햇빛이 따가우니까 빨리 안으로 들어가요." 자외선을 차단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섬은 햇빛이 말할 수 없이 뜨거웠다. "잘 가요, 아저씨. 가는 길에 낚시라도 즐기시구려." 엘리자베스는 뱃사공을 향해 수다스럽게 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부지런히 건물을 향해 걸으면서도 입을 다물지 않았다. "마샬 씨는 이곳 외과의사이고 나는 이곳에 임원 중의 한 사람입니다. 약간의 감투를 쓰고 있기도 하죠. 그건 그렇고, 우리 병원은 어떻게 알고 찾아오신 건가요?" "잡지에 실린 기사를 읽었어요. 정형수술을 전문으로 한다고 들었는데......." "물론이죠. 마샬 선생님은 그 분야에선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의사 에요." 엘리자베스의 말만으로도 안심할 수 없던 그녀가 댄 마샬이라는 정형외과 전문의에게 마음이 끌린 것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는 미묘한 일이었다. 왠지 그 의사에게 마음속에서 의지가 되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곧장 타라를 건물 안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여기가 머무실 곳이에요." 타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생각 외로 많은 환자들이 보였다. 댄 마샬의 실력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깔끔하죠?" "그렇군요." 엘리자베스는 타라에게 벌써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타라 씨. 다들 편하게 대해 줄 거예요." 타라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려고 했지만 안면의 근육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다행이 엘리자베스는 몸집만큼이나 마음도 넉넉해서 끝까지 타라에게 친절을 베풀어주었다. 엘리자베스가 방에서 나가자 타라는 병원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떤 환자들인지 일일이 알 수는 없었지만 남녀노소 구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더러는 휠체어에 앉아 있기도 했고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제 3부 타라 웰즈 15 마틴은 약간 망설였다. "차나 한잔하고 가세요." 세리의 목소리는 매우 간곡해 보였다. 그녀를 이미 사랑하기 시작한 마틴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좋소." 세리는 무척 좋아하며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도 되겠어요?" "그래요." 그녀의 예의바른 행동에 마틴은 마음이 흐뭇했다. 그녀가 슈퍼마켓에서 아이를 때리던 엄마에게 하던 모습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완전한 야누스의 두 얼굴이었다. "저쪽에 술이 있으니까 마음대로 따라 마시세요." 세리는 술병이 여러 개 놓여 있는 곳을 가리킨 다음 이층으로 올라갔다. 마틴은 우선 코트를 벗은 다음 자신이 좋아하는 술을 골라 잔에 따랐다. 그에게 세리의 집은 신비롭게 보였다. 사랑을 처음 느낀 남자가 상대방 여자의 집에 처음으로 갔을 때 느끼게 되는 신비감 같은 그런 것일 것이다. 문득 타자기가 눈에 들어왔다. 언뜻 보아도 세리가 작품을 쓰던 중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이 세리가 일부러 꾸며 놓은 일임을 마틴으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세리는 이날 마틴을 집에 불러들이기 전에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가 잠깐 원고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세리가 뒤에서부터 다가왔다. "대충 줄거리만 잡은 거예요. 보시면 안되는데......." 마틴은 소리내어 웃었다. 세리의 그와 같은 연극에 속지 않을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만큼 그녀는 완벽하게 움직였다. "그게 아니오.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다고 하기에 난 생각하기를......." 그는 갑자기 말끝을 흐리며 민망스러워 하는 표정을 지었다. "뭔데요?" "난 그게 그러니까........난 아무래도 질이 떨어지는 영화를 많이 본 것 같소." 그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통속 애정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을 떠올렸었는데 편한 옷이란 여자가 알몸을 거의 드러낸 채 남자의 눈을 자극하는 그런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실망하셨나요?" 세리는 단정한 옷을 입고 있었다. "전혀 그렇지 않소." "고마워요." 세리는 표정을 서서히 변화시키면서 눈을 빛냈다. 그녀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마틴도 충분히 알아차렸다. 그도 어느 틈에 세리와 같은 것을 원하는 지도 몰랐다. 점잖게 돌아가려 했지만 막상 안에 들어와 단둘만이 있게 되지 본능적인 욕구가 발동했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가볍게 입술과 입술을 접촉시켰다. 하지만 그 후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뜨겁고 강렬하게 발전되었다. 사실상 세리의 계획적인 키스였는데 마틴은 전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잠깐 후에 그녀의 계획적인 의도가 드러났을 때조차 마틴은 그것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뜨거운 키스와 함께 세리의 옷이 자연스럽게 벗겨지면서 어깨가 드러났고 마틴의 본능은 그 다음의 것을 원하기 시작했다. 세리는 짐짓 소스라치게 놀라는 행동을 보였다. "안돼요! 그만해요!" 마틴의 입장은 순식간에 난처해지고 말았다. 마치 그녀의 옷을 벗기고 겁탈이라도 하기 위해 덤빈 입장에 빠지게 되자 그는 당황해 하며 중얼거렸다. "당신이 원하는 줄 알았는데......." 계획적이고 교활하게 마틴을 난처한 입장에 빠뜨린 세리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마틴의 입장에서 보면 더욱 그녀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는 계획적인 의도였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예요. 정말 미안해요." 세리는 얼굴 가득히 슬픈 표정까지 지어 보이며 마틴을 또다시 당황시켰다. "세리, 괜찮소?"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내가 당신에게 실수를 했소?" 세리는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대답들을 적재적소에서 꺼내 놓았다. "잠깐 겁이 났었어요. 진행이 너무 빠른 것 같아서.......제가 아마 이성을 잃었나 봐요, 죄송해요." 그와 같은 세리의 모습은 마틴에게는 한차의 오차도 없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우린 아직 준비가 덜된 것 같소! 그럼 이만 가보겠소." 바로 거기에서부터 세리의 다음 작전은 시작되었다. 마틴으로 하여금 그의 생각과 주관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만들면서 정신없이 자신에게 빠져들게 만드는 작전이었다. "안돼요. 제발 있어 줘요." 그녀는 다급하게 품을 파고들며 애원했다. "절 안아 주세요, 마틴." 마틴은 그 상황에서 그녀를 뿌리칠 수 없다는 것을 세리는 이미 계획에 넣어 두었다. 모든 것이 그녀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렇고 지난 여러 번의 계획에서도 세리의 계획은 한 번의 실수도 범하지 않았다. 마틴은 이미 그녀의 계획에 깊숙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다시 뜨겁고 정렬적인 키스와 함께 마틴은 황홀한 느낌에 도취되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여자와의 육체적인 접촉은 이미 잊기라도 한 것처럼 긴 세월 동안을 살아온 그였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세리의 공세는 그를 쉽게 함락시켰다. 자제력을 상실할 정도였다. 방금 전에는 안된다며 거절했던 세리가 이번에는 능동적인 자세로 전환한 것이다. "당신이 날 어떻게 만든 거죠?" "저도 같은 질문을 하려고 했어요." 그녀는 촛불을 켜 놓고 분위기를 돋구었다. 그리고 함께 술을 마시며 흥분을 고조시킨 다음 서서히 마지막 단계로 몰고 갔다. "다시는 이런 기분 느끼지 못할까 봐 두려웠소." 그는 아이처럼 기뻐하며 솔직한 고백을 늘어놓았다. 세리가 기다리는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다시는 그가 자신에게서 도망을 치거나 빠져나가지 못하게 올가미를 씌우는 것이 세리의 목적이었다. "우리 가요. 이층이 침실이에요." "진심이오?" "그럼요." 마틴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 집에 돌아가야 된다는 생각과 아들 마이키, 처제 안나는 지금 그의 안중에 없었다. 눈앞에는 세리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녀가 여자라는 것과 강렬하게 그녀의 육체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녀는 마틴을 이층의 침실로 이끌었다. 황홀함에 도취된 한 남자에게 육체의 향연을 미끼로 그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물고기가 가장 좋아하는 미끼를 던져 덥석 삼키도록 유도했다. 바람둥이가 아닌 바에 마틴은 모든 여체의 신비에 동일한 감동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서툴지만 고의적인 세리의 육체에 그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채 빠져들고 말았다. 세리에 대한 안나의 견해는 조금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 사랑에 깊숙이 빠진 마틴과는 달리 그녀는 현실을 냉정하고 침착하게 볼 수 있었다. 왠지 불안했다. 형부를 이성으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걱정이 앞섰다. 그녀를 불안하게 하는 의문이 자꾸만 일어났다. 세리의 태도나 몸가짐은 안나가 보기엔 왠지 의심스럽게 느껴졌다. 안나는 자신의 그런 기분을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왠지 난 믿음이 가질 않아." "누가?" "세리, 이유는 묻지 말아 줘." "그래?" "그냥 느낌이니까." "어떤 느낌인데?" "그 여자, 겉으로 보는 것과는 분명히 다를 거야." 안나의 친구는 뜻밖에도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누구나 언젠가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되는 거야. 너도 알잖아, 안나." "그런 얘기가 아냐." "그럼?" "글을 쓰는 작가라고 하면서도 안나 카레리나가 책의 제목이라는 것도 모르지 뭐야. 내 생각에 그녀는 작가가 아냐. 그러니 이상하잖아, 왜 거짓말을 했지?" 그녀의 의심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세리의 일거일동은 자연스럽지 않고 마치 연극배우 같았다. "연애 소설을 쓴다잖아. 순수문학이 아니라." "그래도 이해할 수 없어. 그 정도도 모르는데 어떻게 글을 쓸 수 있지?" 친구는 이번에도 안나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어쩌면 안나가 질투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 여자가 한 남자와 오래도록 같이 살다 보면 생길 수 있는 자연스런 감정일 수도 있었다. 때때로 그가 이성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건 그렇고, 어젯밤 형부는 집에 안 돌아왔니?" "내가 어리석은 걸까?" 안나는 스스로의 갈등에 빠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금까지 마틴은 언니의 남편이고 함께 한집에서 살고 있는 가족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여자를 사귀어서 집까지 데려오자 안나는 알 수 없는 마음의 동요를 느꼈다. "네가 어리석은 게 아닐까? 안나, 넌 현실적이지 못했어." "내가?" "마틴은 어른이야. 친구쯤은 스스로 선택할 수가 있다고. 거기에 네가 끼여들 자격은 없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오해는 하지 마" "알아."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는 형부일 뿐이야, 안 그래?" "그건 나도 알아. 그렇기 때문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거야. 형부가 혹시 라도 불행해지면 안되잖아?" "지나친 기우야." 친구를 만나고 집에 돌아온 안나는 잠시 동안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틴이 간밤에 돌아오지 않은 이유는 두 번 다시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세리와 함께 있었을 것이다. 결국 마틴은 그 여자에게로 가 버린 것이다. 새삼스럽게 자신의 입장과 위치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함께 살면서 깊은 정이 들었고 사랑이라는 표현이 맞지는 않지만 무척 가깝고 다정하게 지낸 것만은 사실이었다. 혹시 그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얼른 고개를 저었다. 마틴이 세리를 사랑한다면 행복을 빌어 주어야 된다고 마음을 결정하기까지에는 갈등이 심했다. 하지만 결국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마틴을 세리에게 보내기 전에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고 싶었다. 마틴 역시 기꺼이 응해 줄 것으로 믿었다. 마음을 결정한 그녀는 슈퍼마켓에 가서 마틴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재료를 사들였다. 지금까지의 마음을 담아 요리를 만들고 파티를 가질 작정이었다. 요리할 재료를 구입한 다음에 안나는 서점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때 세리가 바로 서점에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안녕, 메리. 나 안나야." 메리와 안나는 오래된 친구처럼 다정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형부는?" "지금밖에 나갔는데 금방 돌아오실거야." 때마침 카운터와 가까운 곳에 있던 세리의 눈빛이 강한 의혹의 빛이 나타났다. 안나에게서 걸려 온 것을 이미 알아차리고는 경계심을 가졌다. "메모해 놓을까? 그래, 알았어." 갑자기 세리의 눈빛이 무섭게 빛났다. 섬뜩할 정도였다. "저녁 여덟 시, 핑계는 안 통함.......꼭 전해 줄게. 안녕." 세리는 재빨리 표정을 바꾸더니 카운터로 접근했다. 그녀는 안나가 마틴을 유혹하려 든다고 생각하면서 질투의 칼날은 곤두세웠다. 메리는 메모한 종이를 마틴이 잘 볼 수 있도록 메모판에 붙여 놓았다. "작품은 잘 돼 가나요?" 메리가 먼저 세리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이미 마틴과 가까운 사이로 발전한 세리에게 각별한 친절을 베풀어주었다. 진실로 마틴이 세리와 행복해지기를 원했다. "아직은 자료를 조사하고 있는 중이에요." "어서 읽어보고 싶어요. 물론 해피엔딩이겠죠?" "연애 소설이란 대개 해피엔딩으로 끝나잖아요?" 세리는 마틴의 곁에 어떤 여자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참, 마틴의 사무실에 스카프를 놓고 왔는데 좀 찾아 주지 않을래요?" "물론이죠." 메리가 기꺼이 승낙하고 잠깐 카운터를 비운 사이 세리는 재빨리 메모를 떼어 낸 다음 잔인하게 구겨서 휴지통에 집어넣었다. 그녀의 그 같은 행동은 독살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세리 모건은 혼자 있을 땐 정서가 몹시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혼자서 울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다. 그녀는 안나가 마틴에게 접근하기 위해 유혹하려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마치 사랑하는 마틴을 안나에게 빼앗긴 듯해서 눈물까지 뜨겁게 흘렸다. 그토록 심한 정서 불안 속에는 사람을 독살시키면서 지켜볼 수 있는 잔인함까지 곁들여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 마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을 때 세리는 또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메리가 그러는데 당신이 서점에 들렸다더군." "보고 싶었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일류 배우도 흉내낼 수 없을 만큼이나 풍부한 감정이 배어 있었다. 마틴처럼 순진한 남자의 가슴을 금방 뒤흔들어 놓는 그런 것이었다. "당신과 저녁 식사를 같이 하고 싶은데 퇴근하면서 바로 와 주실 수 있겠죠?" "먼저 집에 들러서 마이키도 만나고 옷을 갈아입어야 하오." "여기 오셔서 샤워하고 마이키한테 전화하면 되잖아요. 시간이 늦었는데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인걸요." 세리가 던진 미끼는 마틴이라는 물고기를 단번에 낚아채고도 남을 만큼 유혹적이었다. "당신에게 넘어가지 않을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겠군." "절대로 없죠." "좋아." 같은 시간, 안나는 집에서 정성껏 파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정성 들여 아름답게 가꾸었고 샴페인도 준비했다. 가장 아껴 두었던 드레스까지 꺼내 입은 후엔 식탁 위에 촛불도 켜 놓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준비를 마련하면서 마틴이 오기를 기다렸다. 항상 청바지에 헐렁한 웃옷을 입기만 하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몰라볼 만큼 아름답고 우아하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메리가 메모한 종이를 세리가 없앤 사실을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과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세리가 온갖 교활한 방법을 동원해 가면서 마틴을 불러들인 사실조차 더욱 알지 못했다. 마틴은 평소 단골로 다니던 식당으로 세리를 데리고 갔다. 그는 그곳에서 발생하게 될 무서운 음모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식당에 들어서면서부터 세리의 잔인한 근성이 발동할 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마틴, 이럴 수가! 뜻밖이에요." 깜짝 놀랄 만큼 반색을 하며 마틴을 맞아들인 것은 마가렛이다. 그녀는 식당의 지배인이었으며 평소 단골로 다니는 마틴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갈색 머리의 마가렛은 세리에 비해 뛰어난 미모와 매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놀라는 세리를 무시하듯 마틴에게 가벼운 키스까지 건넸다. "예약 명단에 당신의 이름이 없어서 몰랐어요." 세리의 눈빛은 이미 심상치 않은 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마틴은 마가렛의 태도가 약간 마음에 걸리기도 했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는 오해의 소지를 없애려는 듯 서둘러 두 여자에게 서로를 인사시켰다. "여기는 세리, 그리고 이쪽은 마가렛이오." "안녕하세요?" 마가렛이 친절하게 미소를 보냈지만 세리는 차가운 눈빛만 보낼 뿐이었다. 그녀의 마음엔 이미 마가렛에 대한 질투심이 타오르고 있었으며 그녀가 자신보다 미인일 뿐만 아니라 마틴에게 적극적인 키스와 호감을 보내는 일에 은근히 미워지기까지 한 것이다. "이게 도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마틴. 5개월? 아니면 6개월 됐나요?" "그 동안 좀 바빴소" 마가렛의 태도가 좀 지나친 면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세리의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질투의 무서운 불길은 그 이상이었다. "아주 좋아 보이는데요?" "당신도 그렇군, 마가렛." "마틴, 가서 앉죠." 세리의 말에 마가렛은 재빨리 두 사람을 테이블로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그들을 테이블로 안내한 마가렛은 자상하게도 여러 가지 친절을 베풀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마틴. 나중에 또 올게요." 시시각각 세리의 가슴은 질투심에 불타며 독이 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마가렛과 마틴이 매우 깊은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을 무시하며 교태까지 부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가렛은 노골적으로 마틴을 매우 좋아한다는 말까지 해 놓았던 것이다. "미인인데요, 마틴. 깊이 사귄 여잔 가요?" 세리는 태연한 척 하지만 마틴에게 가시돋힌 질문을 퍼부었다. "몇 번 만난 일이 있을 뿐이야. 심각한 사이는 아니었어." "설명할 필요 없어요. 다 지난 일이니까." 입으로는 그렇게 말을 하지만 세리의 마음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당신, 시장하오?" "죽을 지경이에요." "여긴 해산물이 유명하지. 무엇보다 재료가 싱싱하거든." "전 낚시를 좋아해요. 어릴 때 아빠에게 배웠죠. 혹시 투어 낚시 해보셨어요?" 마틴에 대해 미리 조사를 할 때 그가 이미 투어 낚시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조사했으며 아주 적절한 기회를 이용해서 그의 호감과 관심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 낚시요." "그래요? 몰랐어요." 세리는 자못 놀랐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유명한 낚시터가 있는데 한 번 같이 가도록 합시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마가렛이 다시 그들이 있는 곳으로 온 것은 두 사람의 식사가 막 끝났을 때였다. 그녀는 여전히 마틴에게 정이 듬뿍 담긴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즐거우셨어요?" "너무 맛있었어요. 자주 와야 되겠네요." 이때 세리가 보여주는 태도만큼 겉과 속이 완벽하게 다른 것은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좋죠. 참, 술 한 잔 하실래요? 제가 서비스해 드리겠어요. 옛정을 위해서예요." 마가렛은 세리의 잔에 여종업원이 가져온 술을 부었다. 그 순간 세리는 지나가는 여종업원의 다리를 살짝 걸었고 순식간에 난장판이 벌어지고 말았다. 여종업원이 넘어지는 바람에 마가렛은 따르던 술을 여지없이 세리의 옷에 부어 옷을 적시고 말았다. "어머, 죄송합니다." 마가렛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사과했다. 세리가 발을 걸어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내가 알아서 할게." 마가렛은 거의 새파랗게 질려 있는 어린 여종업원을 우선 돌려보냈다. "이런 실례가, 어떡하죠?" "물로 좀 닦고 오겠어요." 세리는 불쾌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마틴은 약간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리의 내부에서 치솟는 표독스러운 질투심 그리고 잔인한 내면을 그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수할 때도 있지." "안되겠어요. 가서 어떤지 보고 올께요." 마가렛은 서둘러 그녀가 있는 화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갔을 때 화장실에 있던 세리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 험상궂게 일그러진 표정의 세리는 손수건으로 미친 듯이 옷을 문지르고 있었다. 마치 정신이 나간 듯한 그녀의 행동에 마가렛은 순간 당혹스러워 했다. "그러다 옷이 상하겠어요." 마가렛은 그녀가 몹시 기분이 상해 있다고 생각했다. "세탁소에 보내고 청구서는 저한테 주세요." 마가렛의 말에 세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더욱 사납고 거칠게 옷을 문질러 대며 숨까지 헐떡거리는 것이었다. "술 얼룩에는 더운물이 최고 에요." 그녀가 막 손수건을 잡으려 할 때였다. "그만해!" 느닷없이 소리친 세리는 그녀의 손목을 우악스럽게 움켜잡더니 비틀 듯 그녀의 손을 쳐들었다. 마가렛은 느닷없는 그녀의 공격적인 태도에 어이가 없었는데 세리의 두 눈에선 살기마저 뿜어 나오고 있었다. "경고하겠어. 앞으로 마틴에게 접근하지 마!" 마가렛은 말도 하지 못한 채 험상궂게 일그러진 세리의 표정에 넋을 잃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에 나타난 것은 살기와 질투가 섞인 묘한 것이었으며 그것을 쳐다보는 마가렛은 섬뜩한 공포감을 느꼈다. 16 정형외과 전문의인 댄 마샬과 스테파니 즉 타라 웰즈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댄은 우선 타라의 상처를 세밀하게 관찰했다. 오른쪽 눈은 완전히 감겨 있었고 왼쪽 뺨의 상처는 매우 깊었으며 그리고 험상궂었다. 그 외에도 악어에게 공격당한 흔적은 그녀의 몸 여러 곳에 치명적인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면밀하게 상처를 살핀 댄은 크게 놀랐다. 그런 상처는 쉽게 치유되거나 고칠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의 입장으로 진단한 결과였다. 그의 생각으로도 단순한 사고는 아니었다. 상태를 면밀하게 살펴본 다음 댄은 동정심을 느끼면서 입을 열었다. "무슨 사고를 당했기에 이렇게 심한 상처가 생겼죠?" 타라는 그 질문에 쉽게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 자신도 자신의 상처가 생긴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이건 개인적인 질문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의사로서 좀 알아야 되겠어요." 타라는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차량 충돌 사고였어요." "그게 언제였죠?" "한 6주정도 됐어요." 댄은 그 말에 크게 놀랐다. "6주밖에 되지 않았다고요?" 타라의 심한 상처와 그 치유 정도로 미루어 상처가 생긴 시기가 상당히 오래 전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가 알고 지내는 어떤 분이 약초와 진흙을 사용한 민간 처방을 해 주셨어요." 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밀림 지대에서 원주민들 사이에 기적의 약이 통용된다는 소문은 그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타라의 상태는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다. "우리도 그와 비슷한 약을 치료에 사용하긴 해요." 댄은 타라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 소파로 안내해 주었다. "턱뼈가 심하게 부러지긴 했지만 어떻게 해볼 수는 있을 것 같군요. 치료해 주신 분이 의학적인 상식을 토대로 치료를 해주었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그 질문에 타라가 대답할 수 있는 대답은 오직 한 가지 뿐이었다. "아무튼 그 분은 제 생명의 은인이세요." 댄은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웰즈양." 댄은 진지한 표정을 보이며 신중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긴 하지만 당신의 상처는 아직도 매우 심각한 상태입니다." 한쪽뿐인 타라의 눈에 초조한 빛이 나타났다.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해도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여러 차례 거듭돼야 할 것 같아요. 정형수술과 함께 성형수술도 겸해야 하니까요. 더구나 그 수술에 따르는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댄은 조심스럽게 타라의 반응을 살폈다. 웬만한 환자라면 댄의 말에 공포에 사로잡힐 테지만 타라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조금도 겁을 내거나 위축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통이라면 조금도 두렵지 않아요." 댄은 그녀의 말을 듣고서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그녀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을까, 어쩌다가 그런 비참한 일을 당했을까 하는 의문들이 잇달아 댄의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비록 흉측하게 변한 얼굴이기는 하지만 평소 그녀가 어떤 여자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만한 태도였다. 굉장히 탁월한 여자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각오하고 있다는 얘기군요, 그렇죠?" "네." 댄은 잠깐의 여유를 두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밀 검사를 실시한 다음에라야 수술에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검사하는 데만도 상당한 기간이 걸리게 됩니다." "그건 괜찮아요." 타라의 굳은 결심을 확인한 댄은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대수술과 거기에 따르는 고통에 환자가 겁을 낸다면 손을 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타라의 상태를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모험을 걸고 도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좋아요, 웰즈양. 그럼 혹시 사고 전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라도 있으면 보여 주겠어요?" "죄송합니다. 사진은 한 장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 타라는 갑자기 댄을 향해 간곡하게 애원하듯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마샬 선생님, 저는 흉터를 단순히 지워 버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어요. 전 새로운 얼굴을 갖고 싶어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잊어버린 과거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그 처지까지 된 것은 단순한 사고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에 의해 고의적으로 생긴 상처라는 것만이 그녀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전부였다. 가해자가 있다면 가해자를 찾아내고 복수하기 위한 방법이 필요했다. 기억을 상실하기 이전의 그녀가 아닌 전혀 다른 여자로 세상에 태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제가 이 병원을 나갈 때에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있었으면 해요." 그녀의 마음을 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간절한 절규에 이해와 동정심이 느껴졌다. 그녀가 가진 과거와는 상관없이 그녀가 원하는 대로 전혀 다른 여자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좋아요. 해봅시다." "고맙습니다, 마샬 선생님." "천만 에요. 난 정형외과 의사요.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내가 해야 될 일 아닙니까? 웰즈양?" 타라는 눈물을 흘렸다. 댄에 대해 자신도 알 수 없는 신뢰감이 쌓이는 것이었다. 수술하기로 결정을 내린 타라는 당분간 타운즈빌에 정착하게 되었다. 수술에 대한 댄의 설명을 그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제 아무리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따른다고 해도 극복할 자신이 있었다. 노인에게 치료받는 동안 그녀는 이미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을 겪지 않았던가!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그보다 더한 고통이라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처럼 처참한 몰골이 된 이유를 천천히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악몽처럼 떠올랐던 광경들이 다시 떠오르는 것이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려 달라고 부르짖는 여자, 그 여자에게 덤벼드는 거대한 악어, 보트 위에서 울던 여자와 즐기듯 물에 빠진 여자를 내려다보던 남자의 모습 등이 예사롭지 않게 생각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결혼을 했던 것 같은 희미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씩 기억 속에 장면들이 서로 연결되기 시작하면서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악어에게 물리던 여자가 자신일 것이란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그녀는 좀더 확실하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아직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악어에게 던져졌다는 것을 생각에 이르자 그와 관련된 몇 가지 추측이 이제는 확신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섬을 둘러싸고 있는 푸른 바닷물이 잔잔한 해풍에 휩쓸리면서 모래알들을 씻어 내고 있었다. 타라는 조용한 바닷가를 거닐며 깊고 심각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하려 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바로 결혼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가장 믿었던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 타라는 또 한차례의 괴로움을 느꼈다.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서까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기억력을 살려내려는 그녀의 노력은 매우 집요한 것이었고 따라서 조금씩 단편적인 일들이 언뜻 머리를 스치면서 조금씩 모양을 갖추어 가기 시작했다. 바닷가를 거닐며 다시 생각에 잠긴 타라의 모습은 한없이 외롭고 가련한 그 자체였다. 그녀는 기필코 과거의 모습을 되찾은 후에 만일 가해자가 있다면 복수를 할 결심이었다. 복수를 하기 위해선 그 전의 모습이 아닌 전혀 다른 여자로 세상에 나가야만 되었다. 한편 댄은 독신으로 지내며 의료 활동에만 전념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활동적이며 건강한 삶을 사는 모범적인 남자이기도 했다. 타라가 바닷가를 거닐고 있을 때 아침 일찍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돌아왔다. 건강미가 넘치는 그의 모습을 타라는 마치 먼 나라의 풍경을 보듯 바라보았다. "이봐요." 가까이 다가온 댄은 타라를 향해 밧줄을 던졌다. "밧줄을 거기 있는 통나무에 좀 걸어 주겠소?" 타라는 밧줄을 집어 통나무에 걸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타라에겐 아무런 흥미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녀의 생각은 온통 자신의 문제에만 집중되고 있었다. "잠깐만요." 잡은 고기를 들고 뭍으로 나온 댄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리와 봐요." 댄은 그녀를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이것 좀 봐요. 굉장하죠?" 그는 잡아온 고기를 꺼내보였다. 굉장히 큰 고기로 살아서 펄떡이고 있었다. 하지만 펄떡이는 고기를 본 순간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자신에게 덤벼들어 덥석 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생선 요리 먹어요?" "아뇨." 그녀는 재빨리 대답했다. "아마 건강을 위해 드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녀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 날씨가 참 좋죠?" "그렇군요." 타라는 자신의 목소리를 하루라도 빨리 되찾고 싶었으며 얼굴은 다른 여자로 변하더라도 목소리만은 원래의 그녀의 것으로 회복하고 싶었다. 목소리는 정상이 아니었지만 언어 구사 능력은 완벽해졌다. "여기는 자연경관이 나무랄 데 없이 좋죠. 병을 치료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입니다." 그 점이라면 타라도 충분히 공감하고 있는 바였다. "최근에는 관광객들 때문에 좀 북적거리긴 해도 여전히 자연경관은 매우 좋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디서 태어났나요?" "시골에서요......." 그 정도의 임기응변이라면 충분히 구사할 수 있을 만큼 그녀는 자신의 처지에 관해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시골에서 태어났다니 부럽군요. 가족들은 뭘하죠?" 댄의 질문은 점점 자연스럽게 그녀의 사생활로까지 옮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질문에도 타라는 망설이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저에게 가족은 없어요." 댄은 문득 고개를 들어 그녀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그녀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녀가 밝힐 수 없는 그녀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과 함께 동정심이 느껴졌다. "이런 말을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타라는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나요?" 타라는 재빨리 자신의 생각을 바꾸었다. 어차피 댄의 노력 여하에 따라 자신의 처지가 달라질 수 있으므로 그와 함께 지내야 하는 시간이 길어진다면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샬 선생님." 댄도 그녀의 표정을 통해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리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은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비밀로 해 주신다고 알고 있는데......." "그래요." 댄은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안심하고 얘기해요, 타라. 그리고 또 당신에게 약속하죠." "네?" "앞으로 더 이상 당신에 대해서 유도 질문을 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그 동안 댄은 타라에 관해 알기 위해 여러 가지 유도 질문을 던진 것이 사실이다. 그 정도는 타라도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녀는 댄의 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한 가지 더 있어요." "네?" "나를 마샬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네?" "그냥 댄이라고 불러요." 타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자, 그럼 같이 좀 걸을까요?" "네." 댄은 어느 때보다도 다정하게 타라와 상대를 해주었다. 의사라기 보다는 정다운 이웃처럼 느껴지는 그의 태도에 타라는 큰 용기를 얻었다. 그녀를 버렸던 운명은 이젠 다시 그녀를 위해 길을 열어 주는 것이 분명했다. 댄이 밀림에서 그녀를 도와 준 노인처럼 그녀의 처지를 진심으로 안쓰러워 하는 모습이 그랬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그녀가 원하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정형외과를 전공한 그는 탁월한 능력으로 많은 환자들을 치유시켜 주었고 그로 인해 그에 관한 명성은 널리 알려졌다. 그것은 그의 투철한 사명 의식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타라 웰즈를 만난 순간 나름대로 사명 의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17 무서운 일이었다. 그것은 그렉이 스테파니를 늪지대로 데려간 것만큼이나 계획적인 일이기도 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사람을 독살하고도 양심의 가책은커녕 성취감을 느끼며 만족해하는 세리였다.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마가렛이 훨씬 뛰어나다는 것은 그녀도 첫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세리에 비해 그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상냥하며 매력적인 여자였는데 그런 여자가 마틴을 좋아하니 세리는 참을 수 없는 살인자의 본능을 느꼈다.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한 채 다만 오랜만에 접촉한 여자에게 빠진 마틴은 흐뭇했다. 그는 식당의 화장실에서 세리가 변신했던 모습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F.B.I에서 이미 파악한 것처럼 완전히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는 그녀를 제대로 알아차리기에 마틴의 관찰력은 완전히 마비되어 있었다. 오히려 그녀에게 가슴 벅찬 고마움까지 느끼며 그는 저녁 시간을 끝냈다. "집까지 데려다 주겠소." "아뇨, 괜찮아요." 전 같으면 그녀가 먼저 집까지 데려가 달라거나 아니면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했어야만 했는데도 그녀는 즉석에서 거절했다. "내일 서점으로 전화할게요." 별다른 의심 없이 마틴은 그녀의 말이라면 무조건이다 싶을 만큼 복종했다. "그래요." "안녕." 마틴은 그래도 아쉬운 듯한 표정을 남기며 돌아갔다. 그가 떠나고 잠시 후에 세리의 표정은 완전히 변하면서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표정은 마가렛이 화장실에서 보았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곧장 집으로 돌아온 마틴은 마이키와 안나가 자는 것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용하게 움직였다. 식탁에 아직 촛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나치려다가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샴페인 병이 있고 요리 접시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하지만 세리와 이미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들어온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촛불을 껐다. 다음날 아침 마이키나 안나에게 물어 볼 생각이었다. 한편 마가렛은 밤이 늦어서야 식당의 문을 닫았다. 지배인이기 때문에 아침에 열고 문을 닫는 일은 그녀의 책임이었다. 그녀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여종업원은 세리에게 발이 걸려 넘어졌던 바로 그 아가씨였다. 그녀는 모든 잘못이 자신에게 있다며 아직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까는 죄송했어요." "괜찮아. 운이 좋지 않았던 거지." 마가렛은 그녀의 모습같이 곱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세리 같은 야누스적인 면이 없는 그대로였다. "문을 모두 잠그실 때까지 같이 있어 드릴게요." 바로 그때였다. 마가렛과 종업원은 앞 길가에 차가 한 대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차의 운전석에서 조용하고 음침하게 앉아 있는 것은 바로 세리 모건이었다. 그녀가 어떤 이유로 다시 돌아와 바로 그곳에 차를 대고 있는가는 그녀의 본모습을 아는 사람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마가렛은 그 사실을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미 화장실에서 세리가 보였던 두 얼굴도 이미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럴 거 없어. 내일 또 나올거지?" "그럼요. 돈을 벌려면 나와야죠. 안녕히가세요." 문을 모두 잠근 마가렛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세리가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는 꿈에도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리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녀에게는 불행이 찾아왔고 그녀의 불행과는 관계없이 다시 밝은 아침이 찾아왔다. 간밤에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을 전혀 알 리 없는 마틴은 오직 하나만을 기억하고는 제일 먼저 그 일을 마이키에게 꺼냈다. "마이키, 어젯밤 파티라도 있었던 거냐?" 하지만 마이키는 전에 없는 불만으로 가득찬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모가 아빠를 위해 온종일 정성 들여 요리를 만들었어요." 마틴은 곧 무슨 뜻인지 짐작했다. 하지만 안나의 마음까지는 읽어 낼 수는 없었다. "난 전혀 몰랐다." "이젠 미리 약속이라도 해야만 되나요?" 뜻하지 않은 마이키의 항변이 마틴은 잠깐 당황했다. "세리 때문이냐?" "그 아줌마 때문이 아녜요." "그럼?" "우리 때문이에요. 아빠는 이제 집에도 잘 들어오시지 않잖아요." 평소라면 그토록 심하게 드러내는 마이키의 불만에 충격을 받을 마틴이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이미 마이키나 안나보다 오히려 세리에게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양자를 택일하라고 한다면 세리를 택할지도 모를 그였다. "난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마이키." 마이키의 눈빛에는 묘한 실망의 빛이 나타났지만 마틴은 전처럼 자상하게 하나뿐인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아버지가 이미 아니었다. 세리의 미끼는 마약이나 최면술 같은 효력을 나타냈던 것이다. "그녀와 결혼할 생각이다." 그는 마치 세리에게 정신적인 조종을 당하는 사람이기라도 한 것처럼 스스럼없이 말했다. "우린 새롭게 가정을 꾸밀 수 있을 거야. 마이키, 그렇게 되면 좋지 않겠니?" "좋겠죠." 마이키는 아버지의 생각에 반대하려 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원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찬성하고 싶었다. 하지만 예고도 없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변한 아버지를 이해하기가 어려웠으며 세리 때문에 아버지의 마음이 변한 것도 마이키로서는 충분히 알아차렸다. 간밤에 정성을 들여 치장을 했던 안나가 아니라 평소의 청바지 차림의 안나가 들어왔다. "안나." 마틴은 재빨리 안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젯밤엔 정말 미안했어. 솔직히 난 전혀 몰랐었거든." 그 문제라면 마틴과 안나는 세리가 메모를 없앤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안나는 마틴이 어쩔 수 없이 꾸며대는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즐거운 시간을 갖고 싶었어요. 함께 모인지도 오래 됐잖아요?" "안나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 마틴은 솔직한 기분이었다. 그가 안나가 남긴 메모를 보았다면 세리의 제안이 있었더라도 안나의 초대에 기꺼이 응했을 것이다. 마틴은 마이키에게 말한 것과 똑같은 자신의 심정을 안나에게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리에 대해 분명하게 해 두고 싶어." 그 말이 안나에게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질 리는 없었다. "그 얘긴 하고 싶지 않아요. 형부가 그 여자와 무슨 관계이던 상관하고 싶지 않아요." 의외로 강경한 안나의 태도에 마틴은 저으기 당황했다. 하지만 세리에 대한 그의 마음은 이미 최면술에 걸려든 것처럼 확고했다. 세리의 감쪽같은 행동과 그녀에 대한 F.B.I의 수사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 여자 말이야. 아주 어릴 때 학대를 받았던 것 같아." "지금 필요한 것은 심리 분석이 아니라 물적 증거야." "살인범에 대해 좀더 알아보고 싶어서 그래." "그렇다면 그 여자에 대해 뭘 알고 있지?" "예민한 성격이긴 하지만 모두들 그 여자를 좋아했어. 왜냐면 피해자들이 항상 그리던 그런 여자로 변신했으니까." "그래서 뭘 알 수 있다는 거지?" "대충 이런 여자야." 두 명의 수사 요원은 자신이 파악한 범인에 대해 분석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학대를 당하고 매를 맞고 강간까지도 당했을거라고 생각해. 아빠는 엄마를 버렸을 테고 이후 엄마는 아마 창녀가 되었을 거야." 그의 분석은 세리의 실제와 거의 접근하고 있었다. "엄마도 어릴 때부터 학대를 받았겠지. 그건 유전되기도 하는 거니까." "어릴 때 당한 일을 성인이 된 다음에야 복수한다는 거야?" "바로 그거야." "그것 때문에 다섯 명이나 되는 남자를 죽였군. 맙소사!" 그 수사 요원은 혀를 내둘렀다. 수사 요원 생활을 적지 않게 해 온 그들로서는 이번 사건의 장기적인 지속력과 범인의 놀라운 변신 능력, 완전범죄에 가까운 치밀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같은 시간에 마틴은 세리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점점 깊숙이 그녀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그는 세리가 마가렛을 어떻게 했는지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다. 세리는 다음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마틴을 찾아 서점에 모습을 나타냈다. 마침 마틴은 외출 중이었으나 메리의 말대로 그는 곧 돌아왔다. "어디 갔었어요?" "그건 비밀이야." 세리는 남달리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틴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돌아왔는지 충분히 알아차렸다. "난 비밀은 싫어요. 그 주머니에 뭐가 들었어요?" 그녀의 질문에 순진한 마틴은 금방 손을 들었다. 그는 마치 수줍어하는 소년처럼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여기에서는 안되고 저쪽으로 갑시다." 그는 세리를 데리고 한쪽으로 간 다음 주머니에 들어 있던 작은 선물 상자를 꺼냈다. "이 상자에 내 미래와 함께 행복이 담겨 있어." 그가 건네준 상자 속에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들어 있었다. "저한테 주시는 건가요?" "당신 때문에 내가 다시 희망을 찾게 됐소. 사업 말고 다른 인생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 그것은 바로 사랑이야." 마틴은 스테파니가 그렉에게 빠졌던 것과 똑같은 절차를 밟고 있었다. 그녀 역시 그렉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으나 그렉의 음모에 완전히 말려들었다. 그는 내친 김에 세리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세리, 나와 결혼해 주겠소?" "네, 하겠어요." 거절을 하거나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그것은 바로 세리가 계획한 대로 진행되는 단계였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리 없는 마틴은 감격한 나머지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세리에게 키스를 했다. "최고의 약혼 파티를 열어 주겠소." 세리는 황홀한 듯 그에게 달려들더니 키스를 한 다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사랑해요, 마틴." 카운터의 메리는 넌지시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마틴의 독신생활을 딱하게 여기던 그녀는 세리와의 결합에 축하를 보내고 싶었다. 안나의 전화가 걸려 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안녕, 안나야." "안나." "마틴과 통화하고 싶은데." 안나는 아침에 있었던 일들을 후회하고 있었다. 자신이 지나쳤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과해야 할 일이 있어." "조금 기다려야 될 것 같은데.......지금 바쁘셔. 방금 세리에게 청혼을 하셨어. 잘 됐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안나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단지 질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세리에게 본능적으로 의혹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 나에게 전화해 달라고 전해 주겠어?" "좋아, 안녕." 전화를 끊은 안나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틴이 행복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세리에게는 강한 의구심이 느껴졌다. 일이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윤곽을 잡을 순 없었지만 몹시 불안할 뿐이었다. 18 수술에 따르는 어려움과 고통을 감수하기로 댄과 약속한 타라는 몹시 불안했다. 고통과 아픔이 이유는 아니었다. 불확실한 결과가 그녀를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성공할 수만 있다면 설령 죽음에 가까운 고통이라 하더라도 이를 악물고 견뎌 낼 수 있을 것 같지만 불안한 마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마샬 병원에는 여러 종류의 수많은 환자들이 있었다. 모두 정형외과의 치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팔과 다리는 물론 온몸에 이상이 있는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다. 아직 나이가 어린 벤은 한쪽 팔이 완전히 절단된 소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쪽 팔만으로도 멋지게 수영을 할 줄 알았다. 그가 열심히 물살을 가르며 헤엄을 칠 때 엘리자베스는 그를 따라 풀 위에서 손뼉을 쳐가면서 격려해 주었다. "벤, 잘 한다. 잘 해. 아주 굉장하구나." 벤은 거뜬하게 풀장을 왕복했다. 비록 한쪽 팔이 잘리기는 했지만 굳은 의지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타라에게 증명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벤을 열심히 격려하던 엘리자베스는 마침 다가오는 타라를 향해 매우 반가운 미소를 보내 주었다. "타라." 그녀는 준비해 두었던 몇 개의 꾸러미를 들고서 타라에게 걸어갔다. "당신이 부탁한 잡지들이에요. 오늘 아침에 도착했어요. 자, 여기 있어요." 이제는 거의 완벽하다고 할 정도로 기억을 되찾은 타라였다. 그녀는 자신의 사고와 관련된 기사가 실린 잡지를 엘리자베스에게 부탁했었다. 그곳은 섬이었기 때문에 육지를 왕래하는 선박편에 부탁해서 특별히 구한 책들이었다. "저런, 타라." "왜요?" 타라는 놀라는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쳐다보았다. "볼 때마다 더 마르는 거 같군요." 그 때 마침 댄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댄은 인사를 마친 후 타라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의사라기 보다 풋풋한 이웃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타라, 기분이 좀 어때요?" "네. 괜찮아요." "잘 있었니, 벤?" 그는 풀장에 들어가 있는 벤에게도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늘은 풀장을 세 번이나 왕복했는 걸요." "그러니? 아주 잘 했다." 댄의 칭찬에 벤은 다시 물 속으로 뛰어들어 한쪽 팔만으로도 기운차게 물살을 헤치기 시작했다. "저 에도 당신처럼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타라. 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 중이었는데 차에 불이 났어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죽었죠. 그들 중에는 그 애 아버지도 끼어 있었죠." 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무심코 댄을 내려다보던 타라는 몹시 겁에 질려 하며 몸을 떨었다. 그녀는 방금 물 속에 떠 있는 거대한 악어를 보았다. 그것은 인디고 블루 악어였다. 자신을 향해 덤벼들던 바로 그 악어였다. 이제 타라는 자신의 상처가 악어에 의해 생겼다는 사실까지 완벽하게 기억해 내고 있었다. "타라, 왜 그래요? 무슨 일이 있어요?" 타라는 재빨리 변명을 했다. "저 물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뛰는 것 같아서요. 전 물이 무섭거든요." "그렇지만 수영이 회복기에 있는 환자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알아야 해요." 댄은 부드럽게 말을 하며 그녀도 하루 빨리 수영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특히 댄이 타라에 대한 정성은 굉장한 것이었다. 타라의 증세를 면밀히 조사하고 성형 전과 후의 상태를 세밀하게 분석하는 그의 태도는 지지하고 몰두해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사고 전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으로의 변신이었다. 굉장히 어렵고 끈질긴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는 수술이라는 점은 의사인 그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타라의 두상을 찍은 X-레이 사진들을 살펴보며 여자의 얼굴을 그림으로 그리는 연구를 밤늦게까지 계속하였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얼굴을 창조하려는 준비 단계였다. 자신의 뜻에 따라 새롭게 아름다운 여성을 탄생시키려는 댄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기억을 되찾기 시작한 타라의 고통은 점차 커지고 있었다. 엘리자베스에게 부탁했던 잡지는 오래 전의 것으로 하퍼그룹에 관한 기사가 사진과 함께 커다랗게 실려 있었다. 기사는 스테파니 하퍼와 그렉 마스던의 결혼식 장면이 실려 있었고 타라는 자신도 모르게 그 사진을 손으로 더듬어 나갔다. 잡지에는 스테파니 부부의 신혼여행까지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 스테파니는 결혼식 파티에서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그렉과 춤을 추던 광경까지 뚜렷하게 시야에 되살아났다. 순간 그녀는 너무나 선명하게 떠오른 기억에 큰 충격을 받은 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본능적으로 자신의 손가락에 아직도 끼어 있는 반지를 뽑았다. 그것은 그렉에게서 받은 결혼 반지였다. 과거가 되살아난 타라는 수술에 거는 희망이 더욱 간절해졌다. 수술실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되었다. 댄의 곁에 둘러 선 채 그를 보조하는 의사와 간호사들 그리고 수많은 수술 기구들이 한층 긴장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댄은 우선 완전히 감겨 버린 그녀의 왼쪽 눈부터 시작했다. 그 시간은 굉장히 길었다. 다음으로 그가 손을 댄 곳은 타라의 얼굴에 깊숙하고 흉하게 새겨진 흉터였다. 수술은 장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긴 시간 동안 내내 댄은 긴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손놀림 하나 하나에도 정신이 집중되었다. 자신의 노력과 실력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의 타라를 세상에 탄생시켜야 하는 부담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노력은 긴 수술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엘리자베스는 타라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그녀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전신 마사지를 해주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었다. "결혼이 실패한 후 살길이 정말 막막했어요. 그러다가 마샬 선생님의 도움으로 이곳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거죠." 타라는 엎드린 채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선생님 같은 분은 정말 복 받으실 거예요. 선생님께 왜 결혼은 하지 않느냐고 몇 번이나 물어 본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뭐라고 하시는지 알아요?" "글쎄요......." "호감이 가는 여자는 그 동안 몇 명이나 있었지만 결혼할 만큼 끌리는 여자는 여태껏 만나 보지 못했다고 하시더군요." 하지만 타라에게 그 말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순간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아프지 않나요?" 엘리자베스는 타라가 굉장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심하게 다친 부위를 마사지 할 때에도 그녀는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던 것이다. "네. 괜찮아요." "당신은 참을성이 정말 굉장하군요, 타라." 타라로서는 그 정도의 육체적인 고통을 아픔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지금까지 겪어 왔고 또 앞으로 수많은 고난의 세월들을 부딪쳐야 하기 때문이다. 타라의 수술은 한 번으로 끝날 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일차적인 정형수술에 이어 고통이 따르는 성형수술까지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의사인 댄의 입장에서도 쉽게 손을 댈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만일 타라가 중도에서 도망을 치거나 단념할 경우 시작하지 않는 편이 훨씬 현명한 일이기도 했다. 댄은 수술하기 전 타라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다짐을 받아 두었다. 바다가 펼쳐져 있는 언덕 위에 혼자 안장 있는 타라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댄이 조용하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바람을 쐬는 중이군요?" "네." "이곳엔 나도 가끔 오는데.......여긴 정말 외부 세계와는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죠?" 타라는 아무런 대답 없이 먼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댄은 누구보다도 그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타라." 댄은 조용히 앉아 있는 타라에게 어느 때보다 심각하고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 수술이 시작돼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다짐을 하고 싶은데, 일단 시작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잘 알고 있어요." 타라의 대답은 오히려 담담했다. 마음을 비운 듯 그녀는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보통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지력으로는 감히 따를 수 없는 초인적인 의지가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그런 후 시작한 댄의 일차적인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불안하기는 그 역시 타라 못지 않았으며 실패할 경우의 부담까지 느껴지자 그도 매우 불안했었다. 그런데 타라에 관한 댄의 관심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녀의 신상 문제였는데 비록 말하진 않았지만 그녀에게 매우 특별한 사건이 있을 것이라고 그는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지 몹시 궁금했던 것이다. 그는 시드니의 경찰서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드니 경찰서입니다." 경찰서의 교환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존슨 경사 좀 부탁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고맙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댄은 타라의 X-레이 사진들을 살펴보았다. 그녀에 대한 일들이 마치 댄의 생활에서 전부인 것처럼 보였다. "예, 존슨입니다." 존슨 경사의 독특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 왔다. "여보게, 날세. 그 동안 어떻게 지냈나?" "댄?" "그래. 한 가지 물어 볼 게 있는데, 어떤 사람의 신원 파악을 부탁하면 도와줄 수 있겠나?" "자네 친구?" "아니, 내 환자 가운데 한 사람인데 일시적인 기억상실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어." 댄은 타라가 기억을 되찾은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타라는 자신만의 비밀 속에서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워 두고 있었던 것이다. "알았네." 존슨 경사는 댄의 부탁을 아무 스스럼없이 들어주었다. 일단 수술이 끝난 타라의 얼굴은 눈과 코, 입을 제외하고는 온통 붕대로 칭칭 감겨져 있었다. 댄의 그녀의 병실로 찾아갔을 때 그녀는 낮게 소리내며 울고 있었다. 환자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헤아리는 댄은 정성껏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괜찮아요, 타라." 그녀는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이제 곧 괜찮아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견딜 수 없이 슬프고 두려워진 타라는 허공을 향해 손을 내저으며 무엇인가를 잡으려 했다. 어떤 것이라도 붙잡고 매달리지 않는다면 절망과 공포의 나락으로 추락할 것만 같았다. 댄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을 다정하게 잡아 주었다. "그래요, 타라. 안심해요. 겁내지 말아요. 이제 좋은 결과가 곧 나타날 테니까." 그의 진심이 담긴 위로에 타라는 천천히 울음을 그쳤다. 이 순간 댄은 타라에게 있어선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의 재가 이처럼 크게 느껴지리라고는 타라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마샬 병원에는 수시로 환자들이 드나들었다. 새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퇴원하는 사람도 있었고 대개는 완치되어 행복한 모습으로 섬을 떠나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였다. 입원을 해서 치료를 받는 동안 환자들은 마치 서로를 한 가족처럼 지냈다. 한쪽 팔을 잃고도 정상인 못지 않게 수영 실력을 발휘했던 벤과 타라도 어느덧 서로에게 정이 들어 있었다. 같은 처지라는 공감대와 함께 생활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충분히 주고받았다. 타라는 자신의 처지와도 같은 어린 벤에게 아픈 동정심을 느꼈다. "타라, 작별 인사를 하려고 왔어요." 많은 환자들이 각자의 테이블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타라는 머리를 붕대와 석고로 고정한 채 식탁에 안장 천천히 아침을 먹고 있었다. "아니, 언제 떠나요?" "잠시 후에요." "그래요?" "작별 키스를 하고 싶지만 어디에 해야 할 지 모르겠군요." 한쪽 팔을 잃고 목발까지 짚기는 했지만 명랑한 벤의 모습은 타라로 하여금 가벼운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아무튼 잘 지내요, 타라." "행운을 빌어요, 벤." "고마워요. 당신에게도 행운이 있기를 빌어요." 떠나는 벤을 보며 타라는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마샬 병원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잊지 않겠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한 가족처럼 서로를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 가족에게 배신을 당해 죽음보다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겪어 온 타라의 운명에서 그들이야말로 진짜 가족처럼 생각되었다. 두 번째 수술에서는 특별히 다른 전문의 몇 명을 초빙했다. 타라에 대한 그의 배려가 엿보이는 부분이었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댄은 물론 다른 의사들의 표정 역시 어느 때보다도 긴장되었다. 모두 신중하게 움직였고 특히 타라의 얼굴에 칼을 대는 그 순간은 숨막히도록 긴장되었다. 수술이 끝났을 때 댄은 거의 탈진 상태에 빠져 있었다. 손을 씻고 얼굴에 물을 적시기는 했지만 아직 긴장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다. 가장 어려운 고비를 넘기긴 했지만 결과를 아직 속단할 순 없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백 퍼센트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다음 수술이 또 남아 있었다. 타라가 새롭게 태어나기 전까지는 어려운 일들이 겹겹으로 쌓여 있는 셈이었다. 아직 수술에 따르는 부작용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댄은 수시로 타라의 상태를 살피며 한 치의 오차도 발생하지 않기를 간곡히 바랐다. "지금까지의 경과는 아주 좋아요, 타라." 그는 타라의 붕대를 보살피면서 그녀에게 수술 경과를 전해 주었다. "통증이 심하죠?" "견딜만 해요." 댄은 그녀의 인내심에 무척 놀라며 경외심까지 느꼈다. 인체의 모든 부위가 그렇겠지만 얼굴은 특히 민감한 부분이어서 고통 또한 다른 부위에 비해 더욱 심했다. 그럼에도 타라는 잘 견뎌 내었다. 붕대를 풀기로 되어 있는 전날 밤 댄은 타라와 함께 바닷가를 걸었다. 수술을 시작하기 전보다 오히려 더 긴장되었다. 그리고 타라에게 다시 한 번 굳게 다짐을 받아 둘 필요를 느꼈다. 고통을 감수한 이차 수술의 결과가 바로 내일 나오기 때문이다. "타라, 내일은 붕대를 풀 예정이에요. 마음의 준비를 해 두는 게 좋을 거예요." 타라는 조용히 듣는 듯했지만 사실 가슴속에는 점점 긴장이 고동치고 있었다. "붕대를 풀고 처음 거울 앞에 섰을 때 당신은 당신의 변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자신의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죠." 댄의 그런 말들은 타라의 귓속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들려 왔다. 이날 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도 그 소리는 그녀의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날이 밝기도 전에 선잠을 깬 그녀는 밖으로 나왔다. 하늘과 바다를 보았고 바람소리도 들었다. 그렇지만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초조하기만 했다.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 두렵기도 했다. 그녀는 댄이 기구를 준비해 왔을 때에도 베란다를 계속 서성거렸다. 초조와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잠은 잘 잤소?" "별로요."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잠을 설친 것은 나도 당신과 같았어요. 자,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안으로 들어갑시다." 두 사람에게 똑같이 숨막히는 순간이 다가왔다. 타라는 물론 댄도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타라에 대한 특별한 애착심과 수술 결과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지금껏 어떤 수술에서도 이렇게 초조하고 긴장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댄은 우선 타라를 의자에 앉혔다. 그녀의 심장 박동은 마치 댄에게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오늘은 붕대를 풀고 실밥은 나중에 뽑을 거에요." "네에." 그녀는 겨우 들릴 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준비됐어요?" 그러나 타라는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한 번 끄덕였을 뿐이었다. "좋아요. 시작합시다." 댄은 그녀가 숨을 힘차게 들이마시는 것을 보았다. 그 역시 초조하고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붕대와 깁스를 동시에 떼어 내자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 일을 해내는 짧은 시간이 두 사람에게는 무척 길게 느껴졌다. "이제 됐어요." 타라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붕대와 석고가 두 쪽으로 갈라져 떼어졌지만 타라는 감은 눈을 뜨지 못했다. "자, 봐요." 거울을 받는 타라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쉽게 손을 내밀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얼굴을 거울 속에 비춰 보았다. "어서 봐요, 타라." 그녀는 겨우 떨리는 손으로 거울을 들었다. 그리고 간신히 얼굴이 보이도록 고쳐 잡았다. 다음 순간 타라의 표정은 정지된 듯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눈이었고 뺨의 흉터도 자국만 남아 있을 뿐 깨끗했다. 깊숙이 패여서 흉측했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고 비록 흉터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턱뼈가 바로 잡힌 까닭에 턱의 모양도 반듯했고 정상적이었다. 전체적으로 타라의 얼굴은 완전히 정상적으로 회복되고 있었다. 댄도 평소의 그답지 않게 흥분했지만 침착하려고 애쓰면서 입을 열었다. "사고가 있기 전의 당신 모습을 알지는 못하지만.......어때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시선이 박혀 있는 타라의 두 눈엔 굵은 이슬방울이 맺혔다. 그녀는 시선을 댄에게 돌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타라는 와락 댄의 품에 안겼다. 그 이상의 어떤 감정 표현이 있을 수 없을 만큼 댄과 타라는 마주 포옹하며 벅찬 감동에 거의 주체하지 못했다. 19 마틴이 마음을 결정한 이상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서둘러 세리와의 약혼식을 준비했다. 자신이 이미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그는 마치 모든 행운을 독차지한 사나이처럼 행복감에 빠져 있었다. 약혼 기념 파티에 그는 모든 것을 동원했다. 충분한 자금을 풀었고 평소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을 광범위하게 초대했다. 평생 기억이 남을 만한 파티를 세리를 위해 벌일 계획이었다. 이날 아침부터 마틴의 집은 요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요리사가 파티에 대해 상의하려고 온댔어요. 집에 들어오실래요, 아니면 내가 알아서 할까요?" 안나 역시 별다른 이의를 갖진 않았다. 마틴이 행복하다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싶었다. 약혼 파티 때문에 경황이 없던 마틴은 우연히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안나의 전화를 받으며 무심코 신문을 뒤적이던 마틴은 깜짝 놀랐다. "이런, 세상에!" 신문에는 커다란 사진과 함께 마가렛의 피살 소식이 실려 있었다. 모든 살인이 그렇듯 마가렛 역시 처참하게 살해되었다는 기사였다. 마틴은 평소라면 그녀에게 달려갔을 테지만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 여자의 죽음보다는 자신의 행복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마가렛의 죽음은 뒷전이었다. 마가렛을 살해한 세리 모건과의 약혼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사랑에 눈이 먼 그는 세리가 마가렛을 죽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더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천사 같은 마음을 가졌으며 영원히 사랑하고 싶은 세리뿐이었다. 약혼 파티는 예상대로 성대하게 벌어졌다. 이 날의 주인공인 마틴의 모든 친지들이 그 곳에 모였고 음식과 약혼식장을 장식하기 위한 필요한 자금에 마틴은 아끼지 않았다. 마치 그의 인생이 그것으로 마감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는 먼저 파티장에 도착해서 세리를 기다렸다. 세리 모건은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고 우아한 화장과 옷차림으로 파티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세리, 여기예요." 누구보다도 먼저 반갑게 그녀를 불렀다. "금방 갈게요." 세리는 그녀를 축하해 주는 몇몇 사람에게 천사 같은 미소를 보내며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 자리에는 안나도 참석해 있었다. 그녀는 마틴의 행복을 축하해 주기 위해 정성을 들여 모습을 가꾸었고 의상도 갖추어 입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한 가지 일은 잊지 않고 있었다. 드디어 마틴이 세리를 그의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 소개할 차례였다. "세리, 내 친구를 소개하겠소. 조지, 여긴 내 약혼녀인 세리일세." "안녕하세요?" 세리는 우아하게 보이는 몸짓으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상대는 그녀의 손등에 정중한 예의를 보였다. "마틴은 보석과 여자에 대한 안목이 보통이 아니죠. 수준급입니다." "고맙습니다. 친절한 말씀이세요." "세리, 조지는 나하고 둘도 없는 낚시 친구라오. 조지, 세리가 낚시를 좋아한다고 하지 뭔가. 그래서 내일 이스트 강에 나가 낚시를 하기로 했네." 그대 한 여자가 조지에게 다가오더니 춤을 청했다. 이미 파티장에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누구 나하고 춤출 사람 없어요? 어때요, 조지?" "신청이 들어왔군. 실례." 그는 여자와 함께 홀의 중앙으로 나갔고 세리는 가장 행복해 보이는 미소 속에서도 경계하는 눈빛을 잃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보지 않을까하는 불안에 자신을 웅크린 채 주변을 살피기에 바빴던 것이다. "저 사람 의사라고 했어요?" "그는 소아과 의사야. 아주 좋은 친구지. 방금 춤을 신청한 여자가 그를 좋아해." 세리가 팔소매를 약간 걷어올릴 때였다. "이건 무슨 상처지?" 마틴은 그녀의 팔에 있는 긁힌 상처를 발견했다. 세리는 몹시 당황했다. 하지만 그 정도 때문에 정체를 드러낼 만큼 순진한 여자는 애당초 아니었다. "이웃집 고양이가 할퀸 거예요. 잘 해 주려고 했는데 할퀴더군요." 그녀의 말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지에게 좀 봐 달라고 하는 게 좋겠군." 세리는 홀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녀는 마틴이 마음에 들어할 일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손님들 틈에서 혼자 어색하게 서 있는 마이키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마이키가 따분해 보이네요. 잠깐 실례하겠어요." 마틴은 깜짝 놀라는 듯 했지만 오히려 흐뭇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들에게까지 친엄마처럼 신경을 써 주는 그녀가 고맙기까지 했다. "마이키, 나와 춤추지 않겠니?" 마이키는 어색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음악은 내 취향에 맞지 않는 걸요." "믿을 수 없는데? 자, 한 번 춰 보자고." 마이키는 그녀에게 끌려 어쩔 수 없이 어색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세리의 솜씨는 과연 대단한 것이어서 금방 마이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마틴이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안나는 한쪽에서 메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음료수가 좀 독한 것 같아." "그래? 난 모르겠는데......." "지난번 저녁 약속이 엉망이 됐다고 하던데?" 메리가 먼저 그날 저녁의 일을 꺼냈다. "미안해, 안나. 하지만 난 정말 메모를 남겼어." 안나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으려는 듯했다. 실수로 깜빡 잊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메모지에 발이라도 달려서 걸어갔나 보구나." "믿지 못하겠다면 세리에게 물어 봐." "누구?" "세리가 옆에 있었으니까." "정말이야?" 순간적으로 안나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었지만 세리가 메모를 없앴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잠깐 실례, 안나." 그녀가 가 버리자 안나는 마이키와 춤을 추고 있는 세리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세리는 마이키를 그럴듯하게 설득하는 중이었다. "내가 새엄마가 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마이키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난 네 엄마의 자리를 뺏으려는 게 아냐. 난 네 아빠를 사랑해, 너도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은데." "새엄마라고 하지 말고 친구처럼 지내면 어때요?" 세리는 이미 마이키까지 자신에게 끌리도록 만들어 놓았다. 마틴은 흐뭇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혼자서 술을 마시는 안나의 모습을 보았는데도 그는 거의 무감각했다. 전 같으면 안나의 파트너가 되어 줄 사람은 당연히 마틴이었지만 그는 혼자 외롭게 마시는 안나를 내버려둔 채 세리에게 걸음을 옮겼다. "마이키, 잠깐 실례할까?" 마이키는 어른들 몰래 장난치다 들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좋아요." 그가 물러가자 마틴과 세리는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좋은 아이예요." "나도 알아." 안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술잔을 계속 입으로 가져갔다. 가끔씩 자신의 생활이 비관스러워질 때 마시는 버릇이 생긴 탓이었다. 세리가 저녁 식사 때 권한 샴페인을 끝까지 거절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한 번 술을 입에 대면 많이 마시는 것이 그녀의 습관이었다. "세리, 당신 어떻소?" "네?" "즐겁소?" "그럼요." "나 역시 지금까지 가졌던 파티 중에서 최고인 것 같소." 세리의 두뇌는 수시로 경계심을 일으켰다. 그리고 어떤 태도와 말이 마틴의 마음을 꼭 사로잡을 것인가를 집요하게 생각해 내고 있었다. "당신과 함께라면, 마틴. 뭐든지 상관없이 즐거워요." 그녀의 말은 다시 마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세리, 우리 집으로 들어와 함께 살면 어떻겠소?" 세리의 눈빛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미묘하게 반응했다. 그녀의 목표가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간 셈이었다. 안나가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마틴의 마음을 사로잡을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저도 그러고 싶어요." "그런데?" "하지만 안나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요......." "이건 언젠가는 결정해야만 되는 일이오." "그렇긴 해도......." 세리는 마틴의 보다 확고한 대답을 유도하고 있었다. 그 대답을 듣기 위해 고의적으로 시간을 끌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목적을 달성하기도 전에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는데 갑자기 주방 쪽에서 안나의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여러분, 조용히 해 주세요." 파티장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안나가 촛불까지 켠 케이크를 두손에 받쳐든 채 나타났다. 그것은 파티의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는 순서가 아니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안나는 이미 술에 취해 있었다. "제가 한 마디 하겠어요." 그녀의 말에 마틴은 그의 곁에 서 있는 세리에게 넌지시 물었다. "저건 뭐지?" 세리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그녀도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우리를 위한 케이크에요." "그래?" 마틴은 역시 뜻밖이라는 듯 안나를 바라보았다. 안나는 케이크를 들고 계속 홀의 중앙을 향해 걸어오면서 큰 소리로 소리쳤다. "여러분, 오늘은 우리 모두가 세리를 만나는 날이기 때문이죠. 바로 이 케이크를 구운 장본인이에요. 세리는 요리를 매우 잘 하죠. 사실은 못하는 게 없지만요." 그녀의 말에 사람들은 각기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하지만 안나가 과장된 몸짓과 행동을 보이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녀는 이미 술에 잔뜩 취해 있었고 행동마저 과장되어 있었다. 세리를 추켜세우는 것이 진심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사진사는 당연하게 세리와 마틴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댔다. "자, 웃어요." 셔터가 터지는 순간 세리는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사진 찍기를 싫어하는 그녀는 순간적인 본능으로 재빨리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하지만 셔터가 눌러지는 순간은 그녀의 손놀림보다 더 빨랐다. F.B.I요원들이 확보한 것과 똑같은 상태의 사진이 되었다. "우리 모두 박수로서 세리를 환영합시다." 안나는 두 손에는 케이크를 든 채로 사람들을 향해 호의와 애정을 권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는 어느 누구에게도 의심을 받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고 여유가 있는 행동이었다. 20 타라의 증세는 이미 충분히 완쾌되었고 남은 것은 성형수술의 결과뿐이었다. 또 한 번의 수술만을 남겨 놓고 있기는 하지만 이미 자신감에 가득차 있는 그녀였다. 그녀는 댄의 권유에 따라 수영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물이 무서워 근처에도 갈 수 없는 타라였지만 이를 악물고 두려움을 극복해 낼 수 있었다. 어떤 어려움이 따른다 하더라도 해내야 하는 것이 그녀의 상황이었고 극복해야 할 문제였다. 단호한 결심 때문인지 그녀는 금방 물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더 이상 물과 악어를 연관시키지도 않게 되어 이제 그곳은 악어가 가득한 늪이 아니라 맑고 투명한 물이 가득한 풀장일 뿐이었다. "잘 하고 있어요, 타라." 엘리자베스는 벤에게 했던 것처럼 풀의 가장자리를 떠나지 않고 타라의 속도에 맞춰 따라가며 그녀를 격려해 주었다. 그날 밤 타라는 사진들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엘리자베스에게 부탁을 해서 다른 사진들이 실린 잡지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곳에는 그녀와 그렉의 결혼 사진 이외에도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그리운 얼굴들이 있었다. 딸 사라와 아들 데니스의 독사진이 각각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커다란 사진이었다. 사랑하는 딸과 아들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타라는 이 순간만큼은 예전의 스테파니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떤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는 계속해서 타라 웰즈로 남아 있을 작정이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쓰라리고 아린 고통이 퍼져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젠 이미 정상적인 모습에 거의 가까웠다. 하지만 문득문득 그녀의 머릿속에는 노인의 캠프에서 받았던 충격이 되살아났다. 물통에 엎드려 물을 퍼내기 위해 고개를 숙였을 때 보았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한쪽 눈은 거의 감길 만큼 주저앉았고 일그러진 뺨과 입술 그리고 턱으로 인해 괴물처럼 흉측스럽던 모습이 떠오르다 곧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어졌다. 그것은 단지 악몽처럼 먼 기억 속에서 아물거렸으나 거울에 비친 지금의 모습과는 전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수영 연습과 함께 타라는 회복을 위한 프로그램에 따라 열심히 자신의 몸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몹시 위축되어 있던 체력을 단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였다. 수영 외에 맨손체조와 에어로빅도 했는데 체력뿐만 아니라 몸매를 가꿀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분명하게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 두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자신 있는 분야를 선택해서 그 동안 짓밟혔던 자신의 위치를 되찾고 생명만큼이나 소중한 가족들과 하퍼그룹의 식구들을 만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결심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타라는 침실에 앉아 자신이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일들을 준비해 나가기 시작했다. 일단 그녀는 녹음기를 준비한 다음 자신의 목소리와 언어를 적절하게 구사하는 능력을 훈련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녹음하고 청취를 해 나갔다. "패션 컨설런트이자 패션 에이전시의 대표를 맡고 있는 조안나 랜들은 말했다. '액세서리를 적당히 잘 이용하면 패션에 다양한 변화를 줄 수 있어요.' 라고........." 그녀는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 재생시킨 후에 자세히 검토해 보았다. 짐승처럼 그르렁거리던 목소리는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전에 스테파니라는 여자로서 살았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목소리의 탄생이었고 마치 새로운 세계의 창조와도 같은 목소리가 그녀에게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턱뼈의 이상으로 거의 완전히 망가졌던 음성은 댄의 수술로 거의 완벽하게 변화할 수 있었다. 타라에게 남은 과정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성형수술 후 실밥을 뽑는 것이 마지막 과정이었다. 그 과정도 역시 댄과 타라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실밥을 한 올씩 뽑아감에 따라 본래의 타라보다 오히려 고운 얼굴을 가진 타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실밥을 모두 뽑자 타라는 거울을 보지 않아도 충분히 수술 결과를 알 수 있었다. 손끝으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어 보던 그녀는 감격해 해며 재빨리 댄에게 말했다. "달라진 걸 손으로도 느낄 수 있겠어요." 그녀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드디어 완전한 정상인으로 되돌아왔다. 그렉의 살인 음모 때문에 희생되기 전보다 더욱 아름다운 모습의 한 여성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그것은 댄에게도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좋은 일을 만난 사람처럼 들떠 있었다. 그것은 의사로서의 보람 그 이상이었는데 타라에 대한 댄의 느낌은 처음부터 매우 색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호수에서 나란히 모터보트를 탔다. 완전히 새롭게 소생한 타라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모습으로 보트 위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스쿠버 다이빙을 하며 함께 물 속 깊이 들어가 고기를 잡거나 아름다운 바닷속을 살피며 그들만의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완전히 건강을 되찾은 그녀는 아름다운 용모 또한 되찾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는 댄이 작살로 잡은 물고기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무서운 환상이 사라진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6개월 동안 타라가 겪어야 했던 온갖 고통과 고뇌는 그것으로 충분히 보상되었다. 이름을 타라 웰즈로 고쳤을 뿐 그녀는 완벽한 스테파니 하퍼로 되돌아온 것이다. 해변으로 나오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다정한 연인처럼 보였다. "오늘 저녁 식사를 같이 할까요?" "좋아요." 반대할 리가 없는 타라였다. 노인은 생명의 은인이라면 댄은 두 번째 은인이었다. 생명 못지 않게 귀중한 인간적인 삶을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숲에 앉아 댄이 잡은 물고기를 불에 구웠다. 처음에 그녀가 생선을 먹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물이 무섭고 특히 악어에 대한 공포가 끊임없이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여왕도 부럽지 않은 저녁 식사가 되겠어요." "댄에게 요리를 배워야 할 것 같아요." "요리를 배우고 싶으면 언제든지 전화해요." 타라의 얼굴에 갑자기 허전한 표정이 나타났다. 회복이 된 이상 댄 마샬의 병원에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난 당신이 준비해 주는 계란과 베이컨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싶군요." 그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한 타라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것은 그녀도 원하는 것이긴 하지만 마음뿐이었다. 댄 역시 더 이상의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는 타라를 위한 선물을 준비했다. "이건 작별 선물이에요." 그는 그녀와 헤어질 때를 대비하기라도 한 듯이 선물을 건네주었다. 이별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덜고 싶었던 것이다. 타라는 선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지 않았고 댄 역시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내용물이 아니라 선물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오래도록 간직하겠어요." 타라가 댄에게 할 수 있는 보답은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한 마디에 자신의 마음을 모두 담았다. 댄은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기 위해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당신은 정말 아름답소." 타라 역시 그의 마음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당신의 실력이 좋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시는군요." "당신을 6개월 동안이나 보면서 지내 왔어요. 하지만 처음 만난 것처럼 당신에게서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게 기피하는 거죠?" 그 부분은 타라의 가장 민감하고 아픈 것이었다. "댄, 그만해요." "알았어요." 그 역시 타라의 아픈 곳을 건드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알고 싶은 것이 있었다. "여길 떠나면 시드니로 돌아가게 되겠죠?" "네." "그 곳에 가면 어떤 일을 할 작정입니까?" "글쎄요......." "가족이 없다면서 생활을 어떻게 해결할 거죠?" 단순한 호기심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었다. 타라가 필요하다면, 그녀가 요구하기만 한다면 기꺼이 도와주고 싶은 것이 댄이었다. 조건이나 전제로 제시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 순수한 마음에서 도와주고 싶을 뿐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떠나면 그리워질 거예요. 나에게 당신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는 당신도 알고 있을 거요." 타라는 그의 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댄, 부탁이에요." "무슨 말이죠?" "저 혼자서 꼭 처리해야만 될 일이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요. 댄, 우리 이런 얘긴 그만해요." "알았소." "고기가 타기 전에 어서 먹어요." 그녀가 먼저 다 구워진 생선의 한 조각을 떼어 입에 넣었다. 신간은 멈추지도 그렇다고 되돌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앞으로의 전진만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타라 웰즈가 타운즈빌을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6개월 동안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그녀는 처음 그곳을 찾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떠나게 되었다. 자신이 스테파니 하퍼가 아닌 타라 웰즈로 살아야 한다면 타운즈빌을 떠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고 앞으로 꼭 해야 될 운명적인 일들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처음 그녀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여행은 간단하게'라고 했었지만 이제는 '이별은 간단하게'라는 말로 자신의 슬픔을 대신하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다. 모두와 작별 인사를 한 다음,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타라를 육지로 데려갈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떠날 준비가 다됐는데요." 뱃사공의 말이 두 사람의 이별을 재촉했다. "떠나는 게 두렵소?" "조금요."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전화해요." "꼭 그러겠어요." 그들은 이별의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가벼운 키스로 이별의 아쉬움을 대신했다. 그들의 키스를 빨리 끝내기라도 하려는 듯 배의 엔진 소리가 커다랗게 들려 왔다. "잘 지내요, 타라." "당신도요........" 타라는 채 말끝을 맺지 못하고 기다리는 배로 뛰어갔다. 배 위에 서게 되자 그녀는 비로소 슬픔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댄 역시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치미는 격정의 소용돌이를 느끼기 시작했다. "잘 가요, 타라........그리고 꼭 행복을 되찾도록 해요........" 댄은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안녕히, 댄.......언제까지나 당신을 잊지 않겠어요. 그리고 가슴속에 간직해 두겠다고 약속할게요........" 타라 역시 애절한 작별의 인사를 남겼다. 그리고 그녀를 태운 배는 조용히 물결을 헤치며 육지를 향해 나갔다. 시드니의 중심가에 자리를 자고 있는 하퍼 빌딩에는 스테파니가 사라진 이후에도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경영을 총책임지고 있는 빌은 그 동안 한 번도 스테파니 하퍼를 잊은 적이 없었다. 따라서 그렉 마스던에 대한 빌의 생각은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호시탐탐 그룹이 자기의 손아귀에 들어오기를 노리면서 여전히 방탕한 생활에 빠져 있는 그렉은 어느 누구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 특히 빌은 스테파니가 실종되었는데도 아직 변함없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스테파니는 그렇게 쉽게 사라질 여자가 아니었다. 만약 악어에게 당했다면 시체의 잔해라도 마땅히 발견되어야 하는 데도 호수에서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므로 그녀를 꼭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바꿔 본 적은 없었다. 빌은 증거를 포착하지 못했을 뿐 스테파니의 실종에 대해 무시하지 못할 만큼 그렉을 의심했다. 그는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중이었다. 다시 인터폰이 울렸다. "예." 빌은 이미 긴 시간 동안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태연하게 대답했다. "마스던 씨가 벌써 30분이나 기다리고 있는데요?" "알았어요. 들여보내도 좋아요." 30분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던 그렉은 약이 오를 대로 올라 있었다. 적어도 스테파니의 남편으로서 대우를 받아야 하는데 지금 그가 받고 있는 대우는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스테파니를 악어밥으로 처넣던 바로 그 순간에 보여주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빌은 의자에 앉은 채 그렉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웬일인가, 무슨 할 얘기라도 있나?" 하퍼그룹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말하는 빌의 태도에 그렉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내내 당신을 만나려 했어요." "해마다 이맘 때가 연중 가장 바쁘네. 그 자리에 앉게나." "그 사건이 있은 지 벌써 8개월이나 됐습니다. 스테파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군요." 빌의 두 눈에 노여움이 스쳤다. 그는 그렉의 속셈을 이미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스테파니는 하퍼그룹 내에서 한 번도 잊혀진 적이 없네." "물론 저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사반 세 팀이 그녀의 시체 확인에 나섰는데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니 믿어지지 않는군요. 더구나 조사팀 가운데 두팀은 하퍼그룹 내에서 파견했다죠?" 스테파니의 시체가 발견되어야 비로소 안심할 수가 있으므로 사실상 내색을 못하지만 그렉도 초조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동원했네." "전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가?" 빌의 두 눈에 다시 분노가 스쳤다. "금, 은, 보석은 그렇게도 잘 찾아다니면서 시체 하난 찾아내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 엄청난 인원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렉은 자못 분개한 듯 그를 다그쳤다. 빌 역시 더 이상은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위선자 같으니!" "뭐라고요?" "당신이 스테파니의 시체를 찾는데 그렇게 관심을 갖는 이유가 단 한 가지뿐이라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는 모양이군." 그렉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지기 시작했지만 빌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의 유산 때문이 아닌가?" 그러나 그렉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 딸이나 다름없이 아꼈던 스테파니야. 내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장례식이나 제대로 차려 주는 일일세. 하지만 나는 그녀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는 걸 오히려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네." 그렉은 미처 해야 할 말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앞으로 1년 동안은 더 기다리는 게 좋겠지. 그런 후에야 호주에서 제일 많은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미리 일러 둘 것이 하나 있네." 빌은 이어서 그렉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다. "스테파니와 자네가 결혼하기 전에 내가 그녀를 설득해서 유서의 내용을 바꾸기로 했네." 그렉의 표정은 놀라움과 분노로 뒤범벅이 되었다. 하지만 물러날 수박에 없는 상황 때문에 감히 덤벼들지 못할 뿐이었다. "스테파니가 만일 자네보다 앞서서 이 세상을 뜨고 자네가 재혼을 하게 될 경우 모든 유산상속은 무효로 돌아가게 되네. 그러니 그 동안 직장이나 알아보는 게 좋을 거야. 생활 전선에서 뛰게 되면 그 백수건달 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 않나?" 듣고 있던 그렉의 얼굴빛은 창백해졌다. 빌은 절대로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퍼그룹뿐만 아니라 시드니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바였다. 스테파니가 결혼하기 전에 이미 빌이 취한 조치는 그렉의 모든 야욕을 단숨에 짓밟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는 사납게 일어나 돌아서더니 총지배인실인 빌의 방을 나가 버렸다. 그는 여전히 스테파니에게서 선물로 받은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낭비와 여색을 탐닉하며 다녔다. 때를 같이 해서 타라는 시드니에 모습을 나타냈다. 다른 여자로 변신한 그녀는 쉽게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었다. 수수한 옷차림에 간단한 여행 가방을 들고 있는 그녀는 영락없는 시골 여성이 도시에 진출한 바로 그 모습이었다. 그녀는 우선 머물 곳을 찾기 위해 광고를 살폈다. 당장은 값이 싸고 허름한 잠자리를 구하기로 했다. 광고를 보고 허름한 호텔을 찾아간 타라는 약간은 실망을 했다. 호텔이라고는 하지만 1층에는 싸구려 술집이 있었고 그곳에는 사람들이 모여 시끄럽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비록 내키는 곳은 아니었지만 타라는 그대로 돌아설 입장이 못되었다. 우선 방값이 쌌기 때문에 일단은 그곳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녀는 유리창으로 다가가 가볍게 창을 두드렸다. 안에서 손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호텔 주인 샌디가 그녀에게 출입문 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무슨 일이죠?" "주인 되세요?" "맞아요." "제가 주간지에 실린 광고를 보고 전화한 사람이에요." "좋아요. 보증금 백 달러에 한 달 월세는 선불입니다." 그의 말에 타라는 저으기 당황해 했다. "광고에는 보증에 관한 얘기는 없던데요?" "낸들 이러고 싶겠어요?" "네?" "손님을 믿고 싶지만 매 번 당하기만 하니까요." 타라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제가 가진 전 재산이 4백 달러뿐이에요. 식사는 해야 하고 그 밖에도 더러 쓸 일이 있는데요.......아무래도 안되겠군요. 미안해요. 공연히 시간만 허비하게 해서." 돌아서서 나가려는 그녀를 샌디가 급히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보증금은 없던 걸로 합시다." 타라는 표정을 고치며 되돌아섰다. "그럼 선불을 두 주일 치만 먼저 내면 어떻겠어요?" 샌디는 이미 타라를 믿고 있는 듯했다. 그녀에게선 비양심적이거나 사람을 속이려는 뜻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럽시다. 왠지 모르지만 아가씨에게는 믿음이 가는군요. 그래요, 2주치만 선불로 해도 좋아요." "고마워요. 그럼 방을 볼 수 있을까요?" "좋아요. 어서 들어와요." 샌디는 타라를 데리고 이층의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이래뵈도 상당히 유서가 깊은 술집이죠. 언제 옮겨오실 겁니까?" "지금이라도 당장 들어가죠." "그렇게 하세요, 난 아무래도 괜찮으니까." "이 호텔은 얼마나 오래됐지요?" "지내보면 알겠지만 생각보다는 편안한 곳이랍니다." 이층 방에 들어선 타라는 우선 전망이 좋아서 마음에 들었다. "전망이 좋으니 이 방에 묵도록 하겠어요." 이층의 다른 방들은 모두 비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요. 그런데 당신 이름은 어떻게 되죠?" "타라 웰즈예요." 그 소리를 들은 샌디는 생각난 것이라도 있는 듯 가볍게 웃었다. "왜 그러세요?" "그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무대잖아요?" 타라는 그 말에 지난 기억 속에 살아 있는 노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사귀었다는 젊은 아가씨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난 샌디라고 해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라도 얘기해요." "고마워요, 샌디." "천만에요." 타라는 샌디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8개월만에 그녀는 다시 시드니로 돌아왔다. 악몽과 같은 8개월이 지나면서 기뻤던 날이라고는 타운즈빌에서 수술 결과가 나왔을 때, 바로 그 동안뿐이었다. 드디어 시드니로 돌아온 것이다. 21 모두에게 박수로 세리를 환영 하자며 앞으로 나서던 안나는 그만 그 자리에서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세리는 급히 그녀에게 달려와 엎어진 케이크를 주워담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안나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녀는 몹시 취해 있었다. "누구 살찌고 싶은 분 없어요?" 하지만 세리는 농담까지 해 보이는 여유를 보였다. "미안해요, 아줌마." 마이키는 안나를 부축하며 세리에게 사과를 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덕분에 성대하던 약혼 파티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이튿날 술이 깬 안나는 제일 먼저 마틴에게 사과를 했다. "어젯밤엔 정신이 없었어요. 하지만 고의는 아니었어요. 믿어 주세요." "안나, 우리 모두 적응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마틴은 그 길로 세리와 낚시를 하러 갔다. 세리는 마틴에게 낚시를 잘 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마틴은 그녀가 전에 한 번도 낚시를 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에 이런 낚시는 처음 해보는 것 같은데?" 두 사람은 물 속으로 들어가 낚시를 던지는 중이었다. "옛날만큼은 되지 않네요. 리듬을 탈수가 없어요." "손목에 힘을 주고 팔을 구부리면 안 돼." "미끼가 없어진 것 같아요." 그녀의 바늘에 미끼를 달아 주던 마틴은 그녀가 반지를 끼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반지는 어디에 있지?" "잃어버릴까 봐 집에 두고 왔어요. 돌아가면 다시 낄 거예요." 세리의 말은 그럴 듯 했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 음모가 있다는 사실을 마틴은 전혀 눈치를 챌 수 없었다. 세리는 눈의 가시처럼 생각하는 안나를 없애기 위해 그녀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음모를 꾸며 놓고 있었다. "당신은 우리 아빠를 너무 많이 닮았어요." 그녀는 바늘에 미끼를 묶어 주는 마틴의 모습을 쳐다보며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표정을 말했다. "자, 다시 한 번 해봐." "고마워요." 운 좋게 세리는 큼직한 고기를 한 마리 낚을 수가 있었다. "당신이 잡았어." "굉장히 크네요." 그들이 낚시를 끝내고 돌아왔을 때 세리는 자신의 음모를 실행에 옮길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샤워부터 하구려." "당신이 먼저 하세요. 셔츠가 좀 찢어진 것 같은데 바늘하고 실을 찾을 수가 없네요." 하지만 바로 거기에 세리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마틴은 전혀 눈치챌 수가 없었다. 세리는 고의적으로 자신의 셔츠를 찢기까지 했던 것이다. "안나가 바느질통을 갖고 있을 거야. 잠깐만 기다려요. 내가 가서 가져올 테니까." "오, 나의 왕자님!" "그걸 평생 잊지 말아 줘." 바늘과 실을 가지러 가려는 마틴에게 세리는 느닷없는 키스 공세를 퍼부었다. 그리고 그가 돌아서자 입가에 의미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내용을 알 리 없는 마틴은 뜻밖에도 안나의 바느질통에서 세리의 반지를 발견하고는 크게 놀랐다. 그녀의 반지가 안나에게 있다는 것 자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어머! 내 반지군요." 세리는 깜짝 놀라며 마틴에게서 반지를 건네 받았다. "안나의 바느질 그릇에 있었어. 어떻게 된 거지?" 세리가 노리던 기회가 드디어 찾아오고 말았다. 그녀는 아주 그럴듯하게 마틴의 마음을 유도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반지가 없었어요. 난 절대로 빼놓지 않았는데.......온 집안을 뒤졌는데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반지 때문에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몰라요." 그녀는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잊어버린 게 아니잖소." 마틴은 이미 어떤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는데 세리의 목적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반지를 안나의 바느질통에 넣은 것도 다름 아닌 세리 자신이었던 것이다. 때마침 안나가 그들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벌써 돌아왔군요. 낚시는 어땠어요?" 심상치 낳은 분위기에 의아해 하는 안나를 마틴은 조용히 데리고 나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세리의 입가엔 다시 만족해하는 미소가 나타났다. 안나는 마틴의 이야기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했지만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반지가 왜 거기에 들어가 있었는지 난 정말 몰라요." "안나가 혹시 세리가 뽑아 놓은 반지를 보고 없어질까봐 바구니에 집어넣었던 것 아냐? 내가 안나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는 바로 그거야." 하지만 안나는 세리가 그렇게 반지를 허술하게 다룰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잃어버렸단 말인 가요?" "그랬다더군." 그렇지 않아도 세리의 등장으로 인해 생활의 변화가 심해 편안하지만은 않았던 안나는 금방 기분이 상했다. 마틴까지 자신을 의심하려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배신감을 느꼈다. "이건 반지 얘기가 아니죠?" 그녀는 마틴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세웠다. "집에 식구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모두가 편하기 위해선 내가 나가 사는 것이 좋겠군요." "그러지 마, 아나. 안나는 우리 가족이야." 마틴의 위로 아닌 위로는 안나를 더욱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가족인 것에는 변함이 없어요. 단지 사는 방법에 변화가 생기는 거죠. 그게 좋겠죠?" 그때 세리는 밖에서 교활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낱낱이 엿듣고 있었다. 상황은 그녀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마틴은 안나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결정된 거예요." 아무런 말도 없이 마틴이 밖으로 나가 버리자 기회를 엿보고 있던 세리가 진지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집을 옮기기로 했다면서요. 이렇게 돼서 정말 유감이에요." 안나는 그녀를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당신이 떠나면 허전할 거예요." "당신이 더 잘할 수 있겠죠." "당신이 힘들어 보였어요. 그럴 뜻은 없었는데........" 세리만큼 감쪽같이 자신의 기분을 감출 수 있는 여자는 흔하지 않았다. "내가 있는 것이 당신에게 힘든 줄은 알아요. 마틴에 대한 당신의 감정도 그렇고........그래도 자주 찾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때 안나는 세리에게 꼭 전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말만은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잘 모르고 있지만 난 잘 알아요. 이제 당신이 원하던 대로됐군요. 명심하세요. 내가 당신의 모든 행동을 지켜볼 테니까." "........" 세리는 끝까지 자신의 속셈을 감춘 채 아무렇지 않은 듯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이긴 자의 아량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안나는 자신의 다음 거처를 정한 뒤에 짐을 챙겼다. 나중에야 그런 사실을 알게 된 마이키는 몹시 서운해했지만 어른들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이게 마지막이다." 안나는 나직하게 말하며 마지막 짐을 상자 속에 집어넣었다. "안나, 가는 데가 어디야? 그곳도 이곳처럼 좋은 곳일까?" "난 괜찮아, 마이키." "안나가 나가는 건 싫어. 보고 싶을 거야." 어릴 때부터 이모를 엄마처럼 의지하면서 살아온 그였으므로 그에게는 안나가 엄마나 다름없었다. "네 엄마가 이런 너를 보셨다면 얼마나 든든해했을까? 내가 아주 멀리 가는 것도 아니니까 앞으로 자주 만날 수 있을 거야." 아직 안나는 자신에게 닥칠 또다른 운명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가 조카와 자주 만나고 싶어하는 마음도 머지 않아 소용이 없어지고 말 것이다. "이게 다예요?" "그래, 차에 가져다 실어라. 금방 나갈게. 그리고 나머지 짐은 내가 가져갈게." 안나는 마이키를 내보낸 다음 미리 준비해 두었던 편지를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떠나면서 마틴에게 남기고 싶은 마지막 당부가 적힌 편지였다. 그 편지를 침대에 조용히 올려놓고 그녀는 다시 한 번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 방에서 얼마 동안 지내 왔는지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누구 없어요?" 방안의 동태를 살펴보기 위해 그렇게 불러 보는 세리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나타났다. 드디어 안나를 쫓아냈다는 생각과 함께 갑자기 춤이라도 추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침대 위에 놓여 있는 편지를 발견하자 금방 표정이 사납게 변하더니 재빨리 편지를 집어 펼쳐 보았다. 형부와 마이키에게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이것이 모두에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이젠 제가 방해되는 일은 없겠지요. 모두 사랑해요. 안나 그때 문 밖에서 마틴의 목소리가 들리자 세리는 안나의 편지를 재빨리 감추었다. "여기서 뭘하고 있소?" "안나가 생각이 나서 들어왔어요. 그녀가 없으니 텅 빈 것만 같아요." 마틴은 세리가 무척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여자라고 생각했다. 세리야말로 그가 보아 온 여자 중에서 가장 인정이 많고 다정한 여자였다. 이후 세리는 마틴과 마이키에게서는 새엄마의 관계를 그럴듯하게 유지하며 생활을 해 나갔다. 그녀는 마이키에게도 관심을 기울이며 일일이 보살펴 주기도 했다. 오히려 변한 것은 마틴이었다. 세리에게 완전히 빠진 그는 마이키에게조차 점점 소홀해지기까지 했다. 전처럼 다정하고 아들만을 사랑해 주었던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이미 아니었다. 소리 없이 그는 변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이클 선수인 마이키는 머지 않아 벌어지는 경주 때문에 열심히 연습을 하는 중이었는데 마틴은 전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만 실례해도 되겠죠?" "잠깐, 어딜 가는 거냐?" 마틴은 아침을 대충 먹고 급히 나가려는 마이키를 불러 세웠다. "학교 가기 전에 몇 킬로미터만 달려 보려고요." "수학 숙제는 잘 하고 있겠지?" "세리 아줌마가 도와줘서 잘 하고 있어요." 그때 세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을 찾아갔었는데 그 정도만 유지하면 낙제는 면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봤죠, 아빠? 저도 경주에 나가려면 낙제는 면해야 된다구요." "경주라니?" 모처럼 아들에게 관심을 나타내려 했던 마틴은 오히려 자신의 무관심이 드러나는 결과만을 발생시키고 말았다. "23킬로미터 경주요." 그 말에 나타난 마틴의 반응은 매우 완고한 것이었다. "난 뒤를 밀어 줄 수가 없다. 가게를 확장할 생각이니까." 마이키의 얼굴에 금방 불만스러운 표정이 나타났다. "아빠, 내가 지난번에 우승한 건 알고 계세요? 관심도 없으신 것 아닌 가요?" 마이키의 대드는 듯한 태도에 마틴 역시 화를 냈다. "마이키, 넌 도대체........" 그 때 세리가 재빨리 중간에 끼여들며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그런 면에서는 나무랄 데 없는 여자였지만 그런 모든 일들이 무서운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한 계략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떻게든 해 보마. 아빠도 시합엔 가 보실 거야, 그렇죠?" "그러지." 세리의 강요나 다름없는 태도에 마틴은 어정쩡하게 수긍을 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난 분명히 갈 거야, 마이키. 네가 우승하는 걸 어떻게 보지 않을 수 있겠니." "고마워요, 아줌마. 그럼 다녀올게요." "그래, 다녀오렴." 마이키는 세리 덕분에 한결 풀어진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세리는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 마틴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의 위치를 굳혀 가고 있었다. 마이키의 시합날이 다가왔을 때 또 하나의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마이키의 시합날 마틴은 빠지고 세리만이 마이키와 그의 여자 친구를 데리고 시합에 참석하기 위해 차를 몰고 달리고 있었다. 세리는 친절하게도 그들을 차에 태워 시합이 벌어지는 곳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다. 마이키가 막 자전거를 차의 뒤에 매달고 있을 때 집을 나선 세리는 색깔이 짙은 위장용 안경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 정도라면 웬만해서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떨려?" "아니, 오늘 컨디션은 최고야." 마이키는 여자 친구에게 자신 있게 대답했다. 이윽고 두 사람을 차에 태운 세리는 시합이 벌어지는 장소를 향해 출발했다. 같은 시간, 안나는 보금자리로 꾸민 아파트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혼자 머물게 되면서부터 자주 술을 마시는 버릇에 빠진 그녀는 지금도 술을 탄 주스를 혼자서 마시고 있었다. "오늘의 주제는 피로 물든 결혼식입니다. 남자를 유혹한 후에 결혼을 한 여자가 바로 결혼식 날 그 남자를 살해하는 살인 사건입니다." 무심코 화면을 바라보던 안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치 짝짓기를 한 후 수컷을 죽여 버리는 사마귀와 같죠. 청산가리에 의해 독살된 워니 브랜드리의 시신은 바로 결혼 첫날을 보내야 하는 호텔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놀라운 뉴스에 안나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F.B.I요원 존슨 씨에 따르면 신부였던 제인 미첼은 이외에도 네 건의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워니 브랜드리 살인 현장에 있던 존슨 씨를 만나 보겠습니다." 계속해서 이번에는 F.B.I요원과 인터뷰하는 광경이 화면을 통해 비춰지기 시작했다. "제인 미첼이라는 여자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 여자는 돈과 권력을 따라 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여자입니다. 대상을 정한 뒤에 점점 그에게 접근한 후에 살해하기 때문에 아주 무서운 여자라고 할 수 있죠." 이어서 화면을 지켜보던 안나에게 가장 충격적인 장면이 화면을 통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가 범인의 사진을 입수하긴 했지만 잘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런 여자를 보거나 알고 계신 분들은 속히 전화를 주십시오. 여러분의 제보가 살인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안나는 그 사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볼 수가 있었다. 틀림없는 세리였다. 눈을 가리기는 했지만 코와 입부분은 똑똑히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에!" 기절할 듯이 놀란 안나는 급히 전화번호를 메모했다. 범인이 세리라는 것을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동시에 마틴을 위해 범인을 잡아야 한다고 결심했다. 증거가 필요한 안나는 서둘러 집을 나왔다. 그리고 차를 몰아 마틴의 집을 향해 달려갔다. 22 시드니로 돌아와 싸구려 호텔에 자리를 잡은 타라는 무엇보다도 우선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 자신의 입지를 먼저 이룩한 다음에야 하퍼그룹에 접근할 작정이었다. 그녀의 새로운 인생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진 셈이다. 만에 하나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면 신중할 필요가 있겠지만 그 점이라면 타라는 자신이 있었다. 이미 그녀는 스테파니 하퍼가 지니고 있는 모든 재능과 능력을 회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타라는 자신의 식구처럼 다정하게 지낼 수 있는 대상을 발견했다.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가 그곳에서 검정색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한 것이 그것이었다. 고양이는 몹시 굶주린 듯했고 마치 그곳에서 타라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너 배가 고픈가 보구나. 뭘 좀 줄까?" 그녀가 안아 들었을 때 고양이는 포근하게 기대 왔다. 현재로서는 넓은 세상에 혼자 남겨진 그녀에게 고양이는 더없이 정다운 존재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먹을 것을 줄게." 타라는 고양이에게 맥시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맥시라는 이름이 마음에 드니?" 그녀는 자신이 먹으려고 준비한 음식을 맥시에게 나누어 먹였다. "우리 귀염둥이 맥시는 참을성도 많네? 자, 여기 있다." 맥시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타라는 한결 의지가 되는 것을 느꼈다. 비록 동물이긴 하지만 그녀에겐 유일한 친구가 생긴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타라는 전화기를 찾아 다이얼을 돌렸다. 그때 그렉은 당구를 치는 중이었다. 그는 자신이 스테파니의 남편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끊임없는 낭비와 여러 여자와의 애정 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여보세요?" 8개월만에 들어보는 그렉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타라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여보세요?" 다시 수화기를 통해 목소리가 들렸다. 타라의 가슴속에선 무서울 만큼이나 소용돌이가 있었는데 결국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야 말았다. 곧 울음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타라, 한 잔 할래요?" 손님과 술을 마시던 샌디가 그녀에게 술을 권했지만 돌아볼 수조차 없었다. 서둘러 이층으로 올라가는 그녀의 전신은 와들와들 떨리기조차 했다. 한편 그렉은 전보다 더욱 난잡한 생활 속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는데 그의 곁에는 늘 여자들이 있었다. 그에게 제재를 가하거나 그의 생활을 가로막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마냥 방종한 생활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렉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을 때 마침 의자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검은 실루엣의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드레스 안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당구대 위로 한쪽 다리를 올리고 걸터앉을 때 스스럼없이 여자의 깊은 곳이 드러났다. 그렉은 천천히 여자의 무릎 사이로 들어서며 지퍼를 내렸다. 이윽고 그렉의 몸이 그녀에게 다가들면서 여자의 허리를 안았을 때 그 여자는 상체를 젖히면서 한 차례 신음 소리를 냈다. 드러난 젖가슴에 그렉이 얼굴을 가져가자 여자는 두 번째 신음 소리를 냈다. 그리고 계속해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그렉은 에덴에서 질리와 나누었던 정사처럼 여자를 앉힌 채 절정을 향해 몰아가고 있었다. 8개월만에 그렉의 목소리를 들은 타라는 조용히 눈물을 삼켰다. 그녀가 스테파니로 나서지 않는 이유는 이미 앞으로 해야 할 계획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보다도 가혹한 고통에서 살아난 그녀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있었다. 수중에 있는 돈을 털어 간단한 카메라를 한 대 구입한 타라는 곧 사랑하는 아들 데니스가 다니는 학교를 찾아갔다. 그녀가 마침 그곳에 도착했을 때 데니스는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다. 마음은 소리쳐 부르며 달려가 껴안고 싶었지만 데니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타라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 보이는 아이가 바로 자신의 아들이라는 생각에 타라는 새삼 어떤 일이 있어도 저 아이를 다시 되찾고 데니스의 엄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데니스가 밝은 표정으로 뛰노는 광경에 무엇보다도 마음이 놓였다. 공을 몰며 뛰어가던 데니스가 친구에게 발이 걸려 넘어지는 순간, 타라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벌떡 일어난 데니스는 친구를 향해 덤벼들 기세였다. "데니스, 네가 참아." 친구들이 그를 말리며 매달렸기 때문에 다행히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다. 공이 정문 쪽으로 굴러 왔을 때 공을 줍기 위해 데니스가 뛰어왔다. 타라는 그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보기 위해 아들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무심코 공을 집어 돌아가려던 데니스가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본다고 느낀 것이 분명했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하지만 데니스는 전혀 엄마를 알아보지 못했다. 길고 견디기 어렵던 8개월만의 상봉이었는데도 그는 타라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이내 돌아서 뛰어갔다. 데니스는 좀 더 몸집이 커졌고 어른스러워 보였다. '데니스야, 내가 네 엄마야' 라고 말하지 못하는 타라의 마음은 예리한 면도날로 횡경막을 긋는 것보다 더욱 쓰라리고 가슴이 아팠다. 그곳을 떠난 타라는 이윽고 자신이 살던 집으로 접근했다. 바다가 있는 선착장 쪽에서 몰래 접근했을 때 마침 그렉은 그곳에 있었다. 풀에서 수영을 한 후라 물기를 머금은 그는 위로 올라와 벤치에 가볍게 앉았다. 숨어서 그 모습을 엿보는 타라의 마음은 데니스를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떨림이 느껴졌다. 문득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한 대의 차가 와서 멈추더니 운전석의 여자가 리모콘을 이용해 문을 여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바로 질리였다. 전과 조금도 변함이 없는 질리가 그렉은 찾아온 이유는 단 한가지일 것이다. 8개월 전에는 그렉을 향한 사랑에 완전히 빠져 있던 그녀였다. 지금에 와서 혼자 있는 그렉의 집으로 그녀가 찾아온 것은 정년 의례적인 방문은 아닐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타라는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을 확인하고 만 것이다. 더 이상 그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서둘러 호텔로 돌아온 타라는 곧 공중전화로 걸어갔다. 질리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녀가 호텔로 오는 동안 그렉과 질리는 이미 뜨거운 시간 속에 빠져 있는 중이었다. 한 차례의 격렬한 애무에 두 사람은 모두 달아올랐다. "여보, 받지 말아요." 벨이 울렸을 때 질리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하지만 전화벨은 끊어짐이 없이 계속해서 울렸다. 그렉은 질리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그는 질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다. 울리는 전화벨에는 상관없이 질리를 눕힌 다음 그 위로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이불을 덮어쓰며 질리의 하반신께로 온몸을 숙였다. 드러난 질리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지더니 재빨리 신음 소리를 터뜨렸다. 이불을 뒤집어 쓴 그렉이 조금씩 움직이자 질리는 마치 앓는 소리를 냈다. 머리를 침대 아래로 늘어뜨린 질리의 모습은 마치 섹스의 화신처럼 보였다. 이윽고 그녀는 깊숙하게 두 다리 사이에 그렉의 얼굴을 조이면서 미친 듯이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그렉은 그녀의 여성에 달라붙어 게걸스럽게 작은 돌기를 빨아내는 것이었다. 타라는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공연히 정에 이끌리다 보면 오히려 시간 속에 모든 것을 망각된 채 잊혀질 것은 뻔한 일이었다. 사랑하는 아들 데니스도 보았고 그렉과 질리도 보았다. 그 외에도 딸 사라와 빌 등 가슴에 사무친 사람은 너무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결심이었다. 그녀는 계획한 대로 자신의 모습을 완벽하게 가꾸었다. 노인에게 받은 돈을 알뜰하게 절약한 이유도 바로 그곳에 있었다. 바로 일류 모델이 그녀의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상과 함께 메이컵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결코 평범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단번에 눈에 띄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댄 마샬 덕분에 신비스러울 만큼이나 아름다운 미모를 부여받은 그녀에게 모델이라는 직업은 천부적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그녀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먼저 의상실에 들른 그녀는 미용실로 향했다. 마음에 든다고 판단한 그녀는 드디어 첫발을 내딛었다. 그녀가 찾아간 곳은 시드니에서도 알려진 유명한 의상실이었는데 사실 전부터 그녀는 그 의상실을 경영하는 모델 에이전트의 조안나 랜들을 잘 알고 있었다. 스테파니와 그녀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덕분에 타라는 조안나의 취향과 관심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타라는 조안나의 시선을 끌기 위해 자신을 충분히 가꾸었다. 그녀가 마침 그곳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모델 에이전트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렸지만 불쑥 나타난 타라는 관심을 끌기에 충분할 만큼 뛰어난 미모와 특이한 의상을 차려 입고 있었다. "조안나 랜들 씨를 만나고 싶어서 왔는데요." "지금 바쁘신데요." 아가씨는 타라의 모습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려고도 하지 않았다. 모델이 되기 위해 조안나를 찾아오는 여자가 하루에도 수십 명이나 있는 탓이었다. 그러나 들어오는 타라에게 시선이 끌린 다른 여자가 금방 호기심을 나타냈다. "당신이라면 조안나 랜들 씨께서 만나려고 할 것 같군요." "고마워요." 타라는 안쪽을 향해 들어가면서 조안나의 방문을 두드렸다. 조안나는 문을 열어 놓은 채 창가를 향해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지금은 바빠요." 그녀 역시 방문객에 관해 전혀 무관심했다. 타라가 만일 스테파니 모습을 한 채로 찾아왔다면 조안나는 달려나와 그녀를 껴안았을 것이다. 그녀 역시 스테파니의 실종에 가슴아파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다시 문을 두드리자 조안나는 무심코 돌아서서 방문객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는 숨을 죽였다. 옛날 그대로인 조안나는 충격을 받은 듯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모델 에이전트인 조안나에게 새로운 타입의 여자는 금방 그녀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하지만 타라는 그 이상이었다. 놀라는 조안나의 표정이 금방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6개월 안에 책표지에 모델로 설 수 있는 에이전트를 찾고 있는 중이에요." 타라는 활짝 웃었다. 조안나에게 그 미소는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그녀는 타라의 모습과 이미지에 단번에 끌려들고 만 것이다. "어서와요." "고마워요." "이름은?" "타라 웰즈예요." "멋진 이름이군요." 이때부터 타라는 가족과 자신의 처지는 모두 잊어버리고 톱 모델이 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조안나는 그녀에게 사진 전문가인 제이슨을 특별히 붙여 주었다. 특별한 미모와 이미지 덕분에 모델로서의 포즈나 기타 필요한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훈련했다. 제이슨 역시 그 분야에서 인정받는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카메라를 통해 훈련받고 배출된 모델 역시 시드니에서는 수십 명이나 되었다. 제이슨 역시 조안나처럼 타라에게 특별한 의욕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대로가 나간다면 타라가 6개월 안에 표지의 모델이 되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모델 수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장 힘든 것은 사진을 찍는 훈련이었다. 사진을 찍는 일에는 위험이 따르기도 할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전 지금 너무 피곤해요." 타라가 무척 힘들어하는 와중에서도 제이슨은 맹훈련을 반복했고 계속 새로운 배경과 포즈를 창출해 내기를 바라며 결코 그녀를 풀어 주지 않았다. 시가지의 모든 장소가 배경이 되었는데 지하철의 계단이 그랬고 빌딩의 옥상 역시 무대가 되었다. 또한 각처에 흩어져 있는 모든 장소에서 제이슨은 타라를 필름에 담았다.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어요. 12시전까지 모든 것을 끝내야 일에 차질이 생기지 않아요." "당신은 정말 말릴 수 없는 사람이군요, 제이슨." 함께 일하면서 가까운 사이가 된 타라는 그에게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첫 번째 목표인 모델이 될 때까지 그녀는 가족과 하퍼그룹에 대해 일체 생각하지 않을 결심이었다. "그래요. 그러니 다시 시작합시다. 천천히......." 제이슨은 또다시 여유를 두지 않고 타라에게 각종 포즈를 주문했다. 타운즈빌에서 체력 단련을 위해 노력한 덕분에 그녀는 고단하고 피곤한 육체적 고통도 견딜 수 있게 된 것이다. "제이슨, 오늘은 정말 춥고 피곤해요. 지금 당장 집에 가고 싶어요." "진정해요. 여기는 정말 사진을 찍기에 적합한 장소예요. 자, 눈을 감아요." 제이슨의 훈련은 그야말로 스파르타식이었다. "긴장을 풀고,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고 상상해 봐요." 하지만 타라는 적응할 수가 없었다. 잠깐 사랑했던 사람이 지금 그녀에게는 증오와 저주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피가 끓어오르는 표정을 지어 보도록 해 봐요. 자, 웃어요. 좋아요. 그런데 지금 그 표정은 뭐죠?"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에 타라는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달아오른 표정 인가요, 아니면 놀란 표정 인가요?" "미안해요. 너무 야단치지 말아요, 제이슨." 타라는 자신도 모르게 나타난 표정에 미안한 생각마저 들었다. 하퍼그룹 안에선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전적으로 그렉의 탓이었다. 자신의 스테파니의 남편이라는 명목으로 그는 사치와 낭비로 생활을 일삼은 탓이다. 총지배인인 빌은 그에게 규정된 이상의 돈은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이미 유서 내용까지 바꾼 빌에게 그렉은 그렇지 않아도 증오심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자신이 탕진한 자금으로 인해 압박이 가증되자 그렉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호주에서 제일 가는 하퍼그룹에서 자신은 스테파니의 엄연한 남편이었다. 그 정도의 돈은 당연히 그룹에서 조달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그래, 나에게 이럴 수 있어요?" 그렉은 궁지에 몰린 쥐처럼 으르릉거렸고 빌은 차분하게 그를 바라보기만 할뿐이었다. "당신이 나한테 이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빌은 그렉이 요구한 청구서를 즉석에서 거절했고 그렉의 신용은 이제 땅에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스테파니가 당신한테 분명히 지시를 내렸잖소. 그리고 난 아직 법적으로 엄연히 그녀의 남편이란 말이오." "이건 지난 주 중역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결정된 사실이지. 그러니 법적으로는 아무 하자가 없네. 만약 자네가 변호사를 들이댄다고 해도 난 말리지 않겠네." 빌의 설명에 그렉은 두 눈을 부릅떴다. 지금까지는 감히 빌에게 대들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궁지에 몰렸기 때문에 앞뒤가 제대로 보일 리가 없었다. "중역회의를 열면서 왜 매번 나한테는 연락해 주지 않는 거죠?" "자넨 지난 일 년 동안 한 번도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어. 아무튼 만장일치로 결정된 일이니까, 설령 자네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걸세." 여유 만만한 빌의 말에 그렉은 몸이 달았다. "빌어먹을!" 그렉은 다시 사나운 기세로 빌을 향해 따지면서 덤비기 시작했다. "그럼 그 많은 경비를 나보고 어떻게 감당하라는 거야!" 빌의 두 눈에는 어처구니없어 하는 분노의 빛이 나타났다. 그는 그렉의 방랑한 사생활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자네에 대한 공식적인 지출은 계속 있을 걸세. 하지만 개인적인 소비에 대해서는 한 푼도 책임질 수 없네. 결국 자네가 감당할 수밖에 없지.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그 집에서 당분간은 살 수 있도록 해주겠네." 가능하다면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당장이라도 내쫓을 수 있다는 노골적인 암시에 그렉은 고양이한테 덤비는 쥐처럼 으르렁거릴 뿐이었다. "당신은 내가 스테파니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지? 이 능구렁이 같은 놈!" 급기야 그의 입에서 욕설까지 튀어나왔다. 하지만 빌은 전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는데 빌이 보기에 그렉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쓰레기 같은 인간일 뿐이었다. "이젠 얘긴 다 끝난 것 같군." "지옥에나 가 버려!" 그는 사납게 소리치며 빌의 사무실에서 나가 버렸다. 그렉이 나가자 빌은 조금도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깊은 눈빛으로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그의 생각 속에는 스테파니 하퍼로 가득 찼다. 지난 일 년동안 한 번도 그녀에 대한 생각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녀의 실종과 관련해서 빌은 여전히 그렉을 의심하고 있었으며 스테파니를 데리고 악어가 들끓는 호수로 나간 것부터가 의심의 시작이었다. 그 때에 질리도 함께 호수로 나간 것이 의심을 더하게 만들었다. 그렉과 질리의 관계가 이미 공공연하게 알려진 후였으므로 의심은 더 커졌다.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빌은 스테파니 하퍼에 대한 믿음과 생존에 대한 가능성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만일 이미 시드니에서 타라로 변신한 스테파니가 모델 수업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상황은 급변했을 것이다. 23 안나의 마음은 극도로 불안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확신에 차 있었는데 세리 모건이 결혼식날 남편을 살해하는 잔인한 살인범이 제인 미첼이라고 확신했다. 살인범이 여섯 번째 대상으로 마틴을 선택한 것이다. 마틴은 이미 세리의 교활한 수단에 속아 제정신을 잃은 만큼 빠져 있었다.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안타깝게도 마틴의 마음이 세리에게 완전히 빠진 탓에 섣불리 입을 열 수조차 없었다. 그는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 분명할 것이다. 방법은 단 한 가지 정확한 증거가 필요했다. 움직일 수 없는 증거물을 확보하면 마틴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경찰에 알려 세리를 체포하는 방법이 있을 뿐이었다. 마음이 조급해진 안나는 급히 달려간 것이다. 시간을 확인한 그녀는 서둘렀다. 세리가 마이키의 사이클 경주에 가고 없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세리의 소지품 가운데 증거물이 분명히 있을 것 같은 기대 때문에 가슴이 몹시 뛰기까지 했다. 하지만 만일 세리에게 발각이 된다면 어떤 짓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을 다섯 명이나 죽인 그녀는 어떤 짓이라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해치울 것이다. 예측한 대로 마틴의 집은 텅비어 있었으며 문은 잠겨 있었다. 그 집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안나는 현관문을 통하지 않고도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주방으로 통하는 창문을 열었다. 그 문은 거의 잠그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나는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주방을 통해 잠입한 안나는 곧장 이층으로 올라갔다. 몇 군데를 살피기는 했지만 필요로 하는 물건은 이층에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세리의 침실에 들어간 안나는 우선 옷장 문을 열었다. 세리가 처음 집에 들어올 때부터 보아 둔 것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유난히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 같던 가방이었다. 가방 속에서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앨범이었다. 펼쳐 본 순간 안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곳에는 결혼식장에서 찍은 것이 분명한 여러 개의 사진들이 들어 있었으며 그것은 한결같이 남자들만 찍힌 것이었다. 다시 가방을 뒤지던 그녀는 길고 납작한 함을 발견했다. 가방에서 조용히 그것을 꺼내 열어 본 순간 안나는 더욱 놀라고 말았다. 결혼 반지 다섯 개가 그곳에 나란히 꽂혀 있었는데 아직 빈자리가 많은 것으로 보아 더 많은 남자들을 살해한 목적인 것이 분명한 것 같았다. 저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한편 안나에게는 시시각각 위험이 닥치고 있었는데 마이키와 그의 여자 친구를 경기장에 데리고 간 세리는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며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을 느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집에 되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불길한 예감은 계속해서 그녀에게 스며들었다. "마이키." "네?" "나는 잠깐 집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왜요?" "가져올 것이 있어. 금방 다녀올게, 먼저 들어가." "그럴 게요." 그녀는 자동차를 몰고 집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안나는 그녀가 돌아오리라는 사실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리가 마틴의 집으로 향하고 거의 도착할 때는 안나가 문제의 반지들을 발견한 시간이었다. 집이 가까워짐에 따라 세리의 마음은 왠지 더욱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예측과 불안이 적중된 것은 그녀가 막 집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녀가 집 앞에 정차해 있는 안나의 자동차를 발견했다. 안나의 자동차를 발견한 세리의 가슴에선 벌써 그녀의 잔인성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털끝만큼이라도 불리한 문제가 발생한다면 세리는 예외 없이 끝없는 잔인한 근성을 되살릴 것이 뻔한 일이다. 세리는 심각한 표정으로 밖에서 집안의 동정을 살폈다. 하지만 안나는 그녀가 집에 도착한 것을 꿈에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차에서 내리는 세리가 차 문을 닫는 소리를 안나는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문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안나는 겁이 덜컥 났다. 서둘러 가방을 집어넣은 다음 반지 상자를 가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때는 이미 세리가 열쇠로 현관문을 여는 모습이 유리창을 통해 보이고 있었다. 안나는 재빨리 거실의 모퉁이에 몸을 숨겼다. 세리에게 들키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그녀는 숨조차 내쉴 수가 없었다. 안으로 들어 선 세리는 어떤 낌새를 눈치채고는 거실을 향해 몇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만 더 다가온다면 안나는 발각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숨막히는 긴장감이 짧은 순간이지만 계속되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세리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이내 돌아섰다. 여전히 집안의 분위기는 정적과 긴장이 감돌았으며 세리는 천천히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기 시작했다. 잠깐 머뭇거리던 안나는 재빨리 처음에 들어왔던 주방의 창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창문을 다시 닫았다. 하지만 안전하다고 말하기에 아직은 성급했다. 이층에 올라간 세리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집안 어딘가에 안나가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의 차가 공연히 집 앞에 정차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밖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심하기는 했지만 안나가 주방의 창문을 닫는 소리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창문에서 커튼을 걷는 동시에 세리는 도망치는 안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안나는 자신이 발각 당한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한 채 이층을 경계하면서 낮은 자세로 뛰어가고 있었다. 안나가 도망치듯 집에서 빠져나가는 모습을 발견한 세리는 두 눈에서 독기가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자신의 소지품이 들어 있는 가방을 꺼냈다. 옷이나 기타의 물건을 안나가 노렸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가방을 연 흔적은 분명했다. 그리고 급하기 다시 닫았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서둘러 지퍼를 연 그녀가 손을 집어넣은 순간 세리의 표정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있어야 할 반지함이 감쪽같이 없어진 것이다. "안돼! 안돼!" 세리는 갑자기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화장대의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향해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 바보 같은 계집애!" 두 눈에선 증오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네가 다 망쳤어! 도대체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잖아! 네가 증오스러워!"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물건을 들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향해 후려갈겼다. 거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한 번 증오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면 감당하지 못하는 그녀였다. 한편 다섯 개의 죽음의 반지를 가지고 돌아간 안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당장은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초조와 불안에 휩싸여 있던 안나는 한 가지 방법을 선택했다. 마틴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어떤 경우라도 그는 세리를 믿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안나에게 오해를 가질 수도 있었다. 그녀가 세리를 모함한다고 생각할 가능성도 많았다. 일단 그녀는 마이키를 선택했다. 마이키의 말이라면 마틴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을 정한 안나는 마이키를 만나야 된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모르게 마이키에게만 그 사실을 알리고 그를 통해 마틴에게 세리가 가지고 있는 비밀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안나는 세리가 없는 동안 마이키를 만날 수가 있었다. "안나 이모!" 느닷없이 찾아 온 안나를 본 마이키는 대뜸 반가움과 동시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짐작했다. "아빠 계시니?" "아니." "안 계셔?" "응, 이모. 그런데 이모, 괜찮아?" 허둥대면서 겁에 질려 있는 안나의 모습에 마이키는 몹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안나 얼굴이 이상해. 무슨 일이 있어?" "그래, 아주 중요한 일이야." "중요한 일이라는 무슨 일인데?" "바로 그 여자가 문제야." "그 여자?" 자신의 목숨이 걸려 있는 문제인 만큼 잔뜩 겁에 질려 있었고 조급한 나머지 안나는 두서없이 설명을 해대고 있었다. "결혼식날 남편을 살해하는 그 살인 사건에 대해서 너도 알고 있지?" "하지만 그 여자의 신분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면서?" "그래, 하지만 난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어. 이상하긴 해도 말이야."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마이키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갑작스럽고 놀라운 일일 뿐더러 안나의 태도가 마치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안나 이모, 술이라도 마신 것 아냐?" 마이키는 그녀의 태도가 술버릇 때문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약혼 파티 때에도 술에 취해 크게 망신당한 것을 보았고 집안에 술을 마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탓도 있었다. "안 마셨어!" 안나는 화를 냈다. "냄새가 나는데?"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냐. 내 인생은 산산조각이 나고 있지만 그게 문제는 아냐. 문제는 바로 그 여자란 말이야." 그녀는 가지고 간 반지함을 꺼내더니 그것을 열어 보았다. "내 말이 사실이라니까. 자, 이걸 봐. 결혼 반지 다섯 개야. 문제는 바로 그 여자야." "이건 세리 아줌마 보석함인데." 마이키도 그 반지함을 알아보았다. "그것뿐이 아니야. 팔찌도 봤다구!" "무슨 팔찌?" "그녀가 자주 끼고 다니던 그 팔지 말야." 안나는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던 팔찌를 말하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는 그녀의 팔에는 팔찌가 끼어 있었는데 지금도 자주 세리가 끼고 다니는 그 팔찌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경황없이 떠들어대는 안나의 설명은 마이키에게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이모, 말이 앞뒤가 맞지 않잖아." 안나는 초조하고 조급했다. 세리가 돌아오기 전에 떠나야만 했다. 그녀에게 발각을 당하면 마이키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이키, 아빠에게 꼭 말씀드려. 그리고 이 반지도 꼭 아빠한테 보여 드려야 한다." 그녀는 반지함을 건네주며 마이키의 손을 꼭 잡았다. 그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왜 직접 말씀드리지 않아?" "날 믿지 않을 테니까" "설마........" "정말이야, 마이키. 너만 믿는다. 아빠를 위험에서 구해 내야만 해. 내 말 알았지? 부탁이야, 제발......." 그녀는 간곡하게 부탁을 남기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아직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리가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안나는 그녀의 표적에서 피할 수가 없을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안나는 경찰에 전화를 걸어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예상대로 경찰에서는 그녀의 정보를 가볍게 넘겼는데 이때에도 그녀는 너무 당황한 탓에 말을 두서없이 늘어놓았던 것이다. 평소처럼 잠이 와 주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일이 벌어질 것인지 불안하고 초조하기만 했다. 그리고 두려웠다. 다만 안나는 세리가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마이키가 마틴에게 반지를 건네주면서 자세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기만을 기다렸다. 잠자리를 뒤치락거리던 안나가 겨우 잠이 들기 시작한 것은 자정이 지날 때쯤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심상치 않은 소리에 놀란 안나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이상한 생각이 든 안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침대 머리맡의 스탠드를 켰다. 시계는 밤 12시 1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시간에 그녀를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몹시 겁이 났다. 가운을 여미며 침실을 나온 안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거실을 향했다. 우선 캄캄한 거실에 불을 켰다. 밝아지자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밝아진 거실 안을 조심스럽게 살폈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겨우 마음을 놓은 그녀가 막 주방 쪽을 살피려 할 때였다. 갑자기 불이 꺼지더니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세리의 목소리였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음산하면서도 소름이 끼치는 듯한 목소리였다. "안나, 반지는 어디에 있지?" 가죽 점퍼에 가죽 바지를 입고 어둠 속에 서 있는 그녀의 두 눈에선 살기가 느껴졌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그리고 다가오지 마!" 안나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무시할 수 없는 공포가 느껴졌다. 몸이 떨리면서 세리에게 대항할 능력은 안나에게 하나도 없었다. "네가 집에서 도망치는 것을 봤어. 반지를 가져간 걸 모를 줄 알아?" 세리는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미 그녀의 말투로 보아 평소의 세리가 아닌 것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아냐!" 안나는 필사적으로 소리를 쳤다. 돌아서서 도망칠 힘도 없었으며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주변에선 온통 살기와 광기로 가득 채워진 것 같아 오직 자신에게만 의지할 수 있을 뿐 그녀를 도와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 두고 보면 알겠지." 순간, 세리의 두 눈에서 무서운 독기가 뿜어 나왔다. 그녀는 한쪽 손을 뒤로 돌리고 있었는데 감추어진 손에는 쇠장도리가 쥐어져 있었다. "몰라! 난 정말 몰라." "거짓말하지마!" 세리가 날카롭게 고함을 치는가 싶을 순간이었다. 성큼 다가선 그녀는 뒤로 감추었던 손을 느닷없이 앞으로 휙 휘두르는 순간 안나의 입에선 처절한 비명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고는 침묵이 이어졌다.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나는 정통으로 이마를 쇠망치로 맞아 즉사하고 말았다. 쓰러진 안나를 쳐다보는 세리의 표정은 오히려 편안하고 느긋한 것이었다. 이미 다섯 명의 남자를 독살한 살인마답게 만족한 표정에는 미소까지 떠올랐는데 죽은 시체를 끌고선 욕탕으로 들어갔다. 욕조 안에 시체를 밀어 놓은 후에 앉아서 죽은 것처럼 꾸며 놓은 것이 분명했다. 두 팔을 욕조 밖으로 늘어뜨리게 하고는 한쪽 손목의 동맥을 면도칼로 베었다. 동맥을 끊어 자살한 것으로 위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안나가 작성한 듯한 유서까지 준비한 세리는 시체의 곁에 그것을 놓아두었다. "이제야 분명해 졌어." 그녀는 만족한 듯 시체의 곁에서 중얼거렸다. "나와 마틴 그리고 마이키.......완벽한 가족이야. 완벽한 행복........그런데 네가 감히 훼방을 놓겠다구? 난 용서할 수가 없었어." 세리는 마치 살아 있는 사람에게 하듯이 시체를 곁에 두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같은 인간이면서 그녀에게 타인의 목숨은 파리만도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것만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 안 그래?" 머리와 손목에서 낭자하게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안나가 응답을 할 리는 없었다. 다만 세리 혼자서 자신의 만족스러운 마음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결혼식을 망칠 순 없었어. 내 마음을 이해하겠지, 안나? 내가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너는 이해할 거야. 그렇지?" 세리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일을 완벽하게 끝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성취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녀는 방금 전에 안나를 죽인 망치를 들고 욕실을 나갔다. 그녀가 돌아섰을 때 죽은 안나의 손에 쥐어 준 면도날이 바닥에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세리의 완전한 살인극은 그것으로 간단히 끝나고 말았다. 그녀는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마틴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안나를 살해한 세리에게는 또 다른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안나까지 죽인 상태에서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모든 일정을 앞당길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에 마틴을 끌어들일 자신도 있었다. "세리, 어딜 갔었소?" 먼저 침대에 들어 있던 마틴이 들어오는 세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에게 세리는 유일한 행복이었고 삶의 보람이었다. 어느덧 그녀가 없는 삶과 세상은 마틴에게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암흑과 절망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져올 것이 있어서 잠깐 집에 다녀왔어요." 불과 몇 분전까지만 해도 한 생명을 처참하게 살해한 세리의 모습은 태연하기만 했다. 조금도 당황해 하거나 불안해하는 것이 없었다.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세리 모건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두 시간 전에 내가 전화했는데 당신, 받지 않던데?" "드라이브를 좀 했어요. 그런데 마틴. 곰곰이 생각한 일이 있어요." "그게 뭐지?" "우리 기다리지 말고 내일 당장이라도 결혼식을 올리도록 하는 게 어때요?" "느닷없는 그녀의 말에 마틴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내일?" "그래요." "그렇게 빨리는 곤란한데........"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세리는 안나의 시체가 발견되기 전에 재빨리 결혼식을 올리고 싶었다. 문제가 발생되기 전에 여섯 번째의 살인을 실행에 옮기기로 이미 마음을 굳힌 세리였다. 하지만 마틴에게 세리의 그와 같은 살인 계획은 먼 나라의 이야기로만 생각되었다. "성대한 결혼식 같은 것을 바라지는 않아요." 그때 세리가 꼭 필요할 때면 반드시 써먹던 자못 그럴 듯 하게 상대방을 끌어들이는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우리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되는 게 아닌 가요?' 그럴 듯한 말이었다. 두 사람 당사자가 서로 사랑한다면 아무 것도 필요한 것이 없을 것이다. 성대한 결혼식이 장래의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 말속에 진심이 어느 정도 들어 있느냐가 문제였다. 세리는 이미 똑같은 말을 다섯 명이나 되는 사랑에 빠진 남자들에게 사용했었다. 남자들은 그녀의 마술에라도 걸린 듯 매번 그 말에 자신의 존재도 잊은 듯 말려들었다. "마틴, 준비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계획 없이 갑작스럽게 하는 게 어때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거예요." "갑작스럽게?" 그 말은 마틴에게 너무도 엉뚱하고 충격적으로 들렸다. 늙지는 않았지만 그 동안의 삶에 의하면 노인이나 다름없이 살아 온 그였다. 그가 세리에게 빠진 이유도 바로 그런 연유에서였다. 살인마인 세리에게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빠지고 말았다. "낭만적이지 않아요?" "그건 정신나간 짓이야." 마틴은 전혀 세리의 말에 동조할 뜻이 없었다. 결혼식은 그런 것이 아니었으며 낭만을 찾기에 그는 이미 나이가 들었다. 그리고 최대한 화려하고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싶었다. 그로서는 세리가 급하게 서두르는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세리는 마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알아요. 그래도 하고 싶은 걸 어떡해요." 그녀가 원한다는 말에 마틴의 마음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당신이 그렇게 꼭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야겠지." "어머, 정말이지요?" 그녀는 반색을 했다. 이미 그가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내일 합시다." "오, 마틴! 정말 고마워요. 당신은 역시 멋진 분이에요." 그녀는 마틴에게 달려들더니 키스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24 타라의 모델계 진출은 놀라운 것이었다. 조안나는 물론 사진사인 제이슨도 감탄을 금하지 못할 정도로 천부적인 재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과거 스테파니가 눈여겨보았고 생각해 왔던 것들을 실제로 하나하나 행동에 옮겼다. 그녀의 눈부신 성장과는 반대로 그렉과 질리의 관계는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나친 낭비벽과 여색에 탐닉한 나머지 재정적으로 궁지에 몰린 그렉은 전처럼 질리와 상대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빌과 마지막으로 담판을 벌이기는 했지만 결국은 멋지게 패하고 만 셈이다. 현재 그가 살고 있는 스테파니의 집에서 좀더 머물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될 판국이었던 것이다. 법적으로 스테파니의 남편이기는 하지만 이미 허울뿐이었고 실제적인 권한은 아무것도 없었다. 총지배인 빌은 물론 중역회의에서조차 그렉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고립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이였다면 문제가 발생되지 않았을 것이지만 사랑과는 무관하게 쾌락의 상대로 만난 그렉과 질리에게는 육체적인 욕구가 전부인 그들이었다. 경제적으로 결정적인 궁지에 몰린 그렉은 어느 날 갑자기 질리에게 냉정한 모습을 보였다. 질리 또한 그런 그렉의 변화에 히스테릭한 반응을 나타냈다. 불륜의 관계에서 흔히 보이는 과정이 그들에게도 나타난 것이다. "더 이상 이런 식으로 당신과 만날 수는 없어요." 질리는 병적으로 안타깝게 몸부림치며 소리쳤다. 요즘 들어 질리는 술을 마시는 시간이 길어졌다. "당신 취했어." 그렉은 전과는 달리 질리의 취한 모습이 추하게 보였다. 그렉은 매달리는 질리는 냉정하게 밀어젖히며 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래, 나 취했어. 그리고 난 창녀가 아니야. 내 말 알아듣겠어?" 그렉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벗어 놓았던 양복저고리를 집어들었다. "그렉, 어디 가는 거야?" 잔뜩 취한 질리의 태도는 갈 때까지 간 모습이었다. 그녀는 최근 들어 그렉의 태도가 확실히 변했으며 그 이유가 다른 여자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가려는 거야." 그렉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리 돌아오지 못해!" 그녀는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순간적으로 질리는 그렉의 자존심 같은 것은 전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더욱 불쾌해진 그렉은 그렇지 않아도 모든 일들이 불만과 증오심으로 더욱 가득 찼다. 질리는 요즘 들어 확실하게 히스테릭해져 있었다. 하고 싶은 말들을 지껄여 놓고도 막상 그렉이 나가 버리려 하자 이번에는 초조해졌다. 아주 가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렉 없이 필립만으로는 살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녀가 그렉에게 길들여진 육체적인 쾌락은 마치 마약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를 놓치고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알았어요, 그렉." 그녀는 나가려는 그렉을 향해 서둘러 달려가면서 안타깝게 매달려 애원하기 시작했다. "뭐든 원하는 건 다 가져가요. 제발 오늘밤엔 나와 함께 있어 줘요, 그렉. 내가 바보였어요." 그렉은 질리에게서 등을 돌린 채 그녀를 바라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늘 밤, 나와 함께 있어 주는 거죠, 그렇죠?" 눈물이 그녀의 뺨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가슴이 조일 만큼 두려워졌다. 울며 매달리는 질리의 모습에 그렉은 더욱더 화가 치밀었다. 사실상 벌써부터 질리를 떼어버리고 싶었지만 질리의 비위를 건드릴 수가 없었다. 그녀야말로 그에게는 피할 수 없는 살아 있는 증인이었다. 그녀의 한 마디면 그렉은 스테파니 하퍼의 살인범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가 질리를 쾌락의 늪 속에 깊숙이 빠뜨려 놓은 것도 바로 증거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없애기 위한 계략이었다. 타라로 변신한 스테파니가 시드니에 돌아온 지 6개월이 지났다. 그 동안 그녀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고 있었는데 이제 정식 패션모델로 진출하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아마 시드니 패션계에선 타라 웰즈라는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한 마디로 혜성처럼 패션계에 등장한 여왕인 셈이었다. 잡지들이 다투어 타라 웰즈를 표지 모델로 하겠다고 아우성이었으며 그 일은 조안나 랜들이 경영하는 모델 에이전트의 경사이기도 했다. 수많은 모델들을 시드니의 패션계에 진출시킨 조안나도 의외로 빨리 나타난 효과에 의아해 할 정도였다. "패션모델로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을 축하해요, 타라." 조안나는 타라의 진출에 우선 간단하게 축배를 들기까지 했다. 타라의 성공은 이미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신 흥분하고 있어요, 조안나." 사진사인 제이슨도 사실 약간 흥분해 있었다. 타라처럼 순식간에 부와 명성을 한꺼번에 손아귀에 넣은 경우는 난생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어디에서 온 누구이며 어떤 사연이 있는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현재의 타라 웰즈를 보며 감탄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도시의 상공에 나타난 UFO처럼 그녀는 순식간에 모델계를 휘어잡은 여왕으로 군림하고 만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린 타라가 이렇게까지 눈부신 발전을 가져오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어요." "이번에는 조안나 랜들을 위하여!" 이미 몇 잔의 샴페인을 마셔 댄 제이슨이 다시 잔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러자 조안나가 잔을 높이 들었다. "이번에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우린 정말 잘 해냈어요." 건배가 거듭되면서 제이슨의 술기운도 조금씩 높아지는 듯했다. "이번에는 나를 위해서 한 잔!" 그는 자축이라도 하려는 듯 잔을 단숨에 들이키며 참석자들을 한바탕 웃게 만들었다. 타라 역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많은 꿈 같은 일들에 타라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자, 두 분을 위하여!" 타라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으므로 잔을 높이 들어올렸다. "고마워요, 타라." "저도 마찬가지에요." 조안나와 제이슨은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 "6개월이라........그거 나쁘진 않군." 조안나는 처음 타라와 만났던 일을 회상이라도 하려는 듯 새삼스럽게 기쁜 표정을 나타냈다. "겨우 나쁘지 않다는 말이 전부에요?" 제이슨이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자 조안나는 재빨리 정색을 하더니 자신의 표현을 수정해서 말을 했다. "그래, 제이슨. 알았어요. 대단한 성과에요." 타라 외에 다른 모델들도 함께 축하와 자축을 겸해 두었다. 하지만 어떤 모델들도 타라의 눈부신 발전을 뒤따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시기하지 않고 진심으로 타라를 축하해 주고 있었다. 모델들이 새로운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를 나가자 조안나와 제이슨에게 타라는 감사하는 마음을 전했다. "두 분과 함께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어요." "타라." 조안나는 정색을 하며 순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6개월 전 당신이 우리 사무실을 처음 방문했던 때의 기억이 나는군요. 당신에게서 신비스러운 매력이 느껴졌어요. 아무튼 뭔가 당신은 아주 다르다고 느꼈지요." 조안나는 스테파니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리고 그녀는 스테파니를 특별히 좋아했다. 그런 그녀가 지금은 타라 웰즈로 변신한 스테파니와 다시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스핑크스 알죠?" 제이슨이 문득 이상한 이야기를 꺼냈다. "당신은 스핑크스와 너무도 많이 닮았어요, 타라." "내가요?" "지성이 가미된 성숙함이 신비한 매력을 자아낸다는 점에서 말이죠." "타라,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요?" "방송사와의 계약서에 쓰인 당신의 글을 읽었는데, 정말 대단했어요." 타라는 환하게 웃었다. "나도 갖고 있지 못한 센스를 가지고 있던데, 어디서 그런 걸 터득했는지 정말 놀랐어요." "타고났다고 해야 할까요?" 그것은 사실상 조안나와 관련된 것이었는데 타라는 타운즈빌에서 이미 조안나의 인간적인 면이 아니라 사업적인 면에 대해 충분한 조사를 한 후였고 처음부터 패션모델계의 여왕 격인 에이전트를 목표로 부단하게 노력해 왔던 것이다. "텔레비전으로 진출하게 되더라도 무대에 다시 서고 싶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그러면 즉시 자리를 마련해 줄 테니까." 그때 연거푸 마셔 댄 제이슨은 이미 충분하게 취해 있었다. 실수로 잔을 떨어뜨린 그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조안나와 타라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 "미안해요." 타라는 재미있다는 듯 활짝 웃었다. "이삼 년 동안 아니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과 함께 일을 같이 할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어." "그야 당신이 날 좋아하기 때문이죠, 귀엽기도 하구요." 타라는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말도 안되는 소리 말아요, 제이슨. 진지하게 받아들인 내가 잘못이지." 제이슨은 매우 취해 있었기 때문에 조안나의 잔까지 가져가서 마시려고 했다. "내 잔을 건드리지 말아요. 아무래도 내가 들고 가는 게 낫겠군." "그래요." 조안나는 타라에게 윙크를 한 다음 밖으로 나갔다. 타라와 남게 된 제이슨은 기분이 몹시 좋은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평소에는 허술해 보이면서 자신이 맡은 사진 찍는 작업에선 한 치의 실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모델인 타라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를 몰아세웠으며 결국은 제이슨의 그와 같은 독려가 타라에게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타라는 제이슨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꼈다. 그 역시 다른 몇몇 사람들과 함께 오늘의 타라를 있게 해 준 은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제이슨은 계속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스튜디오 안을 걸어다니거나 공연히 카메라를 만지기도 했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타라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편하면서도 약간의 피로감이 느껴질 뿐이었다. 스튜디오 안을 돌아다니던 제이슨이 문득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타라." 그녀는 조용히 그를 쳐다보았다. "난 내 자신만큼이나 당신이란 사람을 잘 파악하고 있어요. 당신을 좋아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부드러운 조명 아래에서는 스물 한 살의 앳된 모습으로 강렬한 조명 아래에서는 서른 다섯 아니 서른 아홉까지로도 볼 수 있는........" 제이슨은 과연 전문가다웠다. 때에 따라 타라처럼 모습과 이미지를 완벽하게 변화시킬 줄 아는 모델은 아마 보기 힘들 것이었다. 자신의 인생에 관련된 만큼 피나는 노력이 뒷받침을 해준 것도 사실이지만 그곳에는 천부적인 재능까지 곁들여져 오늘이 만들어진 것이다. "당신은 정말 신비스러운 매력을 지니고 있어요, 타라. 당신한테서는 스핑크스처럼 불가사의한 매력이 느껴져요. 몇천 년 동안 신비스러운 비밀을 지켜 온 스핑크스 말이에요." 그는 스튜디오에 소품으로 준비 된 오토바이 위에 납작 엎드렸다. 스피드 경주에 출전한 선수처럼 장난스러운 그가 일단 카메라를 잡으면 금방 그 일에 열중하는 사진사로 변신하는 모습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당신은 정말 사랑스러운 사람이에요, 제이슨." 칭찬만으로는 부족한 듯 제이슨은 타라에게 말했다. "그게 나의 비밀 아니겠어요? 이렇게 하면 어때요?" "뭐가요?" "우리 두 사람의 비밀을 위하여 내 오토바이에 타지 않을래요?" 타라는 가볍게 웃었다. "집에 가야겠어요." 제이슨은 오토바이에서 몸을 일으키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오토바이 위에서 경주하는 자세로 돌아갔다. 타라는 곧 집으로 돌아왔다. 모델로 자리를 잡은 뒤로 그녀의 생활은 훨씬 편해졌는데 그녀는 시드니의 중심을 가로지른 호수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경관 좋은 방에서 넉넉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막 집에 들어섰을 때 그녀를 가장 반겨 주는 것은 바로 고양이 맥시였다. 그리고 유일하게 그녀의 가족이기도 했다. "아이구, 우리 맥시. 잘 지냈니?" 타라는 고양이를 반갑게 안으며 거실로 들어섰다. "오늘은 정말 힘든 하루였단다. 이곳 저곳을 바쁘게 돌아다녔거든." 이번에 새로 이사온 집은 특별히 타라의 마음에 든 곳이었다. "새 집이 마음에 드니?" 고양이는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야옹하는 소리를 냈다. 타라에게 있어서 유일한 가족은 고양이였으며 그녀의 대화 상대 역시 고양이였다. 그녀는 늘 고양이와 대화를 나누며 자문자답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건 아주 비싼 집이란다. 난 무엇보다 창 밖의 풍경이 마음에 들어. 아무래도 너한테 여자 친구를 하나 구해 줘야 되겠구나. 하지만 네가 떠나고 나면 난 외로워질 것 같애." 이 날은 전신이 납처럼 나른하고 무거웠다. 오늘이 있기까지 지난 6개월 동안 그녀는 한 번도 편하게 쉬어 본 적이 없었으며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맥시야 정말 피곤하구나." 그녀는 우선 색깔이 있는 콘택트렌즈를 떼어 냈다. 렌즈의 색깔은 그녀를 완벽하게 타인으로 변신시키고 아름다움을 북돋우는 효과가 있었다. 댄 마샬에 의해 창조된 그녀의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은 확실히 뛰어났다. 아직 하퍼그룹에 접근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모든 정보는 입수해 놓은 후였다. 그녀의 침실에는 데니스와 사라의 사진이 값비싼 액자에 끼워져 있었으며 아무리 피곤하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아들과 딸의 사진만큼은 반드시 들여다보는 습관이 있었다. 언제 보아도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모습에 타라는 피곤함도 잊고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유람선으로 보이는 배가 어둠 속에서 창문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외롭게 앉아 생각에 잠기는 날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것은 결혼식날 질리와 함께 다정한 포즈를 취하는 그렉의 모습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일이지만 그녀의 기억 속에서 그것은 사라질 수 없는 아픈 기억이었다. 창가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타라는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끝마쳐 놓았으며 이제 남은 일은 이제부터 그것을 시작하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자신의 기반을 잡아 놓은 타라는 그렉에게 접근하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타라는 스포츠에 관한 잡지를 펼쳐 보았다. 테니스 선수인 그렉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는데 기사와 함께 라켓을 휘두르는 멋진 포즈의 사진도 함께 들어 있었다. 잠시 그 사진을 들여다보던 타라는 가위를 꺼내 그 페이지를 오려 냈다. 드디어 그렉에게 접근하기로 마음을 결정한 것이다. 때마침 타라에겐 좋은 기회가 와 주었다. 스테파니 하퍼와 결혼한 후 자만심에 빠져 사치와 낭비를 일삼던 그렉은 하퍼그룹으로부터 전혀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하자 궁지에 빠지고 말았다. 현실적인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게 된 그렉은 궁여지책으로 다시 라켓을 잡았다. 예전의 인기를 다시 부활시켜 보려는 의도였다. 한 때는 이름을 날리던 그였지만 여자의 돈을 그리고 스테파니 하퍼와 결혼했다는 세인들의 소문에 따라 결국은 인기도 급추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인기가 테니스계에서 아직은 살아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타라 웰즈는 드디어 그렉 마스던의 재기를 노리기 위해 마련한 시합장에 나가기로 결심을 했다. 그렉은 여전히 바람둥이로서의 습성을 버리지 못했을 것은 뻔한 일이었으므로 타라의 모습을 본다면 금방이라도 그녀에게 덤벼들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타라가 노리는 일이었다. 그에게 접근하기로 결심한 만큼 그녀는 적극적으로 그렉에게 접근할 작정이었다. 과거에는 어처구니없는 사랑에 빠지기는 했지만 지금은 사랑에 빠질 만큼 예전의 스테파니가 아니었다. 가장 냉정하고 계획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렉에게 미끼를 던져 그를 유혹해야만 했다. 에덴으로 돌아오다 2권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