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벌거벗은 얼굴 지은이: 시드니 셀던 ----- 차 례 ----- ⊙ 작가와 작품에 대해서 제 1 장 제 2 장 제 3 장 제 4 장 제 5 장 제 6 장 제 7 장 제 8 장 제 9 장 제 10 장 제 11 장 제 12 장 제 13 장 제 14 장 제 15 장 제 16 장 제 17 장 제 18 장 제 19 장 제 20 장 제 21 장 제 22 장 제 23 장 ⊙ 작가와 작품에 대해서 。벌거벗은 얼굴。(The Naked Face, 1970)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시드니 셸던(Sidney Sheldon)의 처녀작이다. 이 작품은 발표되던 해에 뉴욕 타임스의 앨런 뷰빈이 그 해의 최고 처녀작으로 평가했고, 곧 이어서 1971년에 미국추리작가협회 신인상 후보로 올랐다. 물론 그 해의 신인상은 로렌스 샌더스(Lawrence Sanders)의 。도청。(The Anderson Tapes)으로 돌아갔지만, 。벌거벗은 얼굴。은 곧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시드니 셸던의 인기는 폭발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셸던은 계속해서 。깊은 밤 깊은 곳에。(The Other Side of Midnight), 。거울 속의 이방인。(A Stranger in the Mirror), 。화려한 혈통。(Bloodline), 。천사의 분노。(Rage of Angels), 。게임의 여왕。(Master of the Game) 등을 발표해서 계속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돈을 잘 버는 억만장자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지금은 이토록 화려한 작가가 된 셸던이 데뷔한 것은 실은 50세가 조금 지나서부터이다. 그전까지 그는 할리우드를 무대로 해서 시나리오를 썼었다. 그러나 그가 작가로서 지닌 재능은 훨씬 일찍부터 나타나, 24。25세 때 벌써 ‘독신자와 여학생’이라는 영화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아카데미상을 받았고, ‘애니여, 총을 잡아라’와 ‘부활절 퍼레이드’라는 뮤지컬 영화로 영화작가 길드상을 받은 바 있다. 그가 영화계에서 제작자, 연출가로 일하다 소설계로 방향을 전환한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아마도 영화의 사양화에 따른 불안감과, 영화로는 아무래도 제한받을 수밖에 없는 그의 상상력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다. 。벌거벗은 얼굴。은 할리우드에서 브라이언 포브스 감독이 로저 무어, 로드 스타이거, 엘리옷 굴드, 앤 아처 주연으로 영화로 만든 바 있다. 1990년 10월 옮긴이 씀 제 1 장 오전 10분 전 11시, 하늘은 난무하는 눈송이로 가득 차면서 이내 거리는 눈발에 휩싸였다. 부드러운 눈송이는 이미 얼어붙은 맨해튼의 시가지를 회색의 수렁으로 바꾸어 놓았고, 얼음장 같은 12월의 바람은 쇼핑객들을 따사로운 집이나 아파트로 몰아세웠다. 노란색 레인코트를 입은 키가 후리후리하고 마른 남자가 분주한 크리스마스의 군중 속에서 자기 자신의 리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잰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추위에서 벗어나려는 다른 통행인들과 같은 조급한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그는 얼굴을 쳐들고, 자기에게 부딪쳐 오는 통행인들은 안중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오랫동안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마침내 그것이 끝났다는 것을 메어리에게 알려주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과거는 묻혀지고 밝은 황금빛 미래가 있었다. 이 일을 알리면 얼마나 메어리의 얼굴이 환해질 것인가를 그는 머리에 그려 보았다. 59번가 모퉁이에 도달했을 때 교통신호가 갑자기 붉은색으로 변했기에 그는 걸음을 재촉하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멈추어섰다. 몇 피트 떨어진 곳에 큰 냄비가 걸려 있고 구세군의 산타클로스가 서 있었다.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운명의 신들에게 바칠 동전을 더듬어 찾았다. 그 순간 누군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갑작스럽고 예리한 타격이 그의 온몸을 흔들었다. 크리스마스 기분으로 들뜬 어떤 술이 거나한 친구가 나름대로 친근한 정을 나타내려는 짓거리일까 ? 그게 아니면 브루스 보이드일 것이다. 브루스는 자기의 뚝심을 의식하지 못하고 육체적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철부지 같은 습관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1년 이상이나 그를 만나지 못했다. 그는 자기를 호되게 친 사람을 뒤돌아보려고 했지만 뜻밖에도 무릎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먼 곳에서라도 바라보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몸이 슬로 모션으로 보도에 넘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등에 둔탁한 통증이 느껴지고 그것이 차츰 번져 갔다. 숨이 가빠졌다. 그는 수많은 구두가 마치 산짐승들처럼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의식했다. 볼은 얼어붙은 보도에 닿아 감각을 잃고 있었다. 그는 거기에 누워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입을 벌렸다. 그러자 미지근하고 붉은 것이 뿜어져 나오며 질척거리는 눈 속에 번져 갔다. 그는 그것이 보도를 가로질러 차도로 흘러내리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고통은 점점 심해졌다. 하지만 그는 크게 걱정이 되지 않았다. 갑자기 마음 부듯한 뉴스를 생각해 냈던 것이다. 그는 자유인인 것이다. 그는 눈부신 새하얀 하늘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눈발은 어느새 진눈개비로 변했지만, 그는 이미 그걸 느끼지 못했다. 제 2 장 캐롤 로버츠는 접수실의 문이 열리고 닫히며 남자들이 들어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얼굴을 들기도 전에 그들이 어떤 치들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찾아온 사람은 둘이었다. 한 사람은 40대 중반쯤 된, 키가 6피트 3인치(약 191··) 가량의 기골이 장대한, 인상이 좋지 않은 거한이었다. 커다란 머리와 움푹 패인 차갑고 푸른 눈, 거기에 매서운 입매를 지니고 있었다. 두 번째의 남자는 젊었다. 그 얼굴 생김은 윤곽이 뚜렷하고 섬세했다. 눈은 갈색으로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두 남자는 외모상 서로 판이했지만, 캐롤에게는 쌍둥이처럼 생각되었다. 경찰이다. 캐롤은 그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들이 책상으로 가까이 오는 것을 보며 그녀는 땀이 겨드랑이로부터 속옷을 적시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마음은 필사적으로 불길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영역을 넘나들었다. 치크에 관한 것일까 ? 하지만 치크는 이미 반 년 전에 손을 씻지 않았던가. 그날 밤 그는 아파트에서 그녀에게 구혼을 하며 폭력조직과는 손을 끊겠다고 약속했었다. 새미일까 ? 그녀는 미공군의 일원으로서 해외에 나가 있는 오빠를 잠시 머리에 떠올렸다. 하지만 그에게 무슨 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알리기 위해 이런 남자들이 몰려올 리가 없다. 틀림없이 그녀를 잡으러 온 것이리라. 캐롤은 핸드백 속에 마리화나를 갖고 있었다. 어떤 입이 가벼운 작자가 그걸 입 밖에 낸 것일까 ? 하지만 왜 두 사람씩이나 왔을까 ? 캐롤은 그들은 자기에게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을 거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녀는 더 이상 그들에게 쫓겨다니는 할렘의 어리석은 흑인 창녀가 아니다. 지금은 다르다. 국내의 유수한 정신분석 의사의 접수실을 맡고 있는 터이다. 하지만 두 남자가 가까이 옴에 따라 캐롤의 공포는 커지기만 했다. 그녀는 오랜 세월 숨어 살던 냄새나고 비좁은 아파트와, 백인 경관이 문을 발로 차고 들어와 아버지나 언니, 또는 사촌들을 연행하던 것을 기억에 떠올렸다. 하지만 마음속의 동요는 조금도 그녀의 얼굴에 나타나지 않았다. 두 형사는 깔끔한 베이지색 정장을 하고 있는, 황갈색의 피부를 가진 한창때의 흑인 아가씨를 눈여겨 보았다. 캐롤의 목소리는 냉정하고 무표정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 ” 그녀는 물었다. 그때 나이가 위인 앤드루 맥그리비 경사는 캐롤의 정장 겨드랑이 아래로 배어나오는 땀에 눈길이 갔다. 그는 이것이 장차 도움이 될 수도 있는 흥미 있는 사실이라는 생각을 자동적으로 기억 속에 남겨두었다. 접수실 아가씨가 몹시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맥그리비는 낡은 배지를 핀으로 꽂은 주름투성이의 모조 가죽 지갑을 꺼냈다. “19분서의 맥그리비 경사.” 그리고 동행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앤젤리 형사. 우리는 살인과에서 왔소.” 살인과 ? 캐롤의 팔의 근육이 자기도 모르게 꿈틀 움직였다. 치크 ! 치크가 누군가를 해친 모양이다. 그녀와의 약속을 깨고 다시 폭력조직에 가담한 모양이다. 강도짓을 하다가 누군가를 쏘았거나 · 10· 아니면, 그가 맞은 걸까 ? 죽었을까 ? 두 사람은 그것을 그녀에게 알려주려고 찾아온 걸까 ? 그녀는 땀이 배인 얼룩이 번지고 있음을 느꼈다. 캐롤은 갑자기 거기에 신경이 쏠렸다. 맥그리비는 캐롤의 얼굴을 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가 땀을 눈치채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나 맥그리비 같은 남자에게는 말이 필요없었다. 그들은 단번에 상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몇 백 년 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는 것이다. “주드 스티븐스 선생을 만나고 싶소.” 젊은 형사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겉모습처럼 부드럽고 공손했다. 캐롤은 그가 끈으로 동여맨 작은 포장물을 갖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형사의 말을 받아들이는 데는 잠시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면 치크의 일이 아닌가 보다. 새미의 일도 아닐 뿐더러 마리화나와도 관계가 없는 모양이다. “미안합니다만 · 10· ” 캐롤은 안도의 빛을 애써 감추면서 말했다. “스티븐스 선생님은 지금 진찰중이십니다.” “용건은 2。3분이면 끝나오.” 맥그리비가 말했다. “잠깐 선생에게 알아볼 일이 있소.”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사정이 여의찮다면 서까지 나오셔도 되고.” 그녀는 곤혹스러운 눈으로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 살인과의 형사들이 스티븐스 선생에게 도대체 뭘 알아보려는 것일까 ? 경찰이 어떻게 생각하든 선생은 결코 나쁜 짓을 저지를 분이 아니다. 캐롤은 선생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되었을까 ? 4년이 된다. 일의 시작은 야간법정에서였다…… 새벽 3시, 법정의 천장에 매달린 전등이 사람들을 음산하고 창백한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실내는 낡고 더러웠으며, 청소를 언제 했는지 모르게 오랜 세월에 걸쳐 누적된 곰팡내에 전 공포가 감돌고 있었다. 캐롤로서는 운수사납게 머피 판사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2주 전 그의 악에 끌려나가 보호관찰에 처해진 적이 있었다. 초범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처음으로 재수없게 걸려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이번에는 호된 벌을 받으리라고 각오를 했다. 그녀보다 악선 재판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판사 악에서 차분한 남자 하나가 수갑이 채워진 채 덜덜 떨고 있는 뚱뚱한 피고에 관해 뭐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차분한 남자는 변호사일 거라고 캐롤은 생각했다. 그에게는 그런 분위기가 느껴졌고, 그 태도에는 자신감이 있었다. 캐롤은 뚱뚱한 남자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변호사가 없었다. 사내들이 자리를 뜨자 캐롤의 이름이 불려졌다. 그녀는 떨지 않으려고 양쪽 무릎을 꼭 붙이고 일어섰다. 법정 관리가 그녀를 가볍게 좌석 쪽으로 밀었다. 서기가 기소장을 판사에게 건네주었다. 머피 판사는 캐롤을 보고 나서 자기 악에 놓인 기소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캐롤 로버츠. 도로상에서 호객행위, 부랑자, 마리화나 소지 및 공무원에 대한 저항이로군.” 마지막 죄목은 억지였다. 경관이 그녀를 윽박질렀기에 급소를 걷어찬 것뿐이다. 그녀도 미국 시민이다. “캐롤, 넌 2。3주 전에도 여기 온 적 있었지 ? ” 그녀는 일부러 겁먹은 소리를 냈다. “네, 재판장님.” “그리고 보호관찰을 받았고 ? ” “그렇습니다.” “몇 살이지 ? ” 예상을 벗어난 질문은 아니었다. “열여섯입니다. 오늘이 저의 열여섯 번째 생일입니다. 생일날 치고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격한 오열에 잠겨 몸을 떨었다. 가까운 테이블 옆에 키가 크고 온화한 인상의 남자가 서서, 서류를 모아 가죽으로 된 서류가방에 챙겨넣고 있었다. 그 남자는 울먹이는 캐롤에게 시선을 돌려 잠시 손을 멈추고 지켜보았다. 그러더니 그는 머피 판사에게로 갔다. 판사는 휴정을 선포하고 그 남자와 함께 대기실로 모습을 감추었다. 15분 뒤, 간수가 캐롤을 판사의 대기실로 데리고 갔다. 온화한 인상의 그 남자는 판사에게 무엇인가를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넌 재수가 좋은 아이로구나, 캐롤.” 머피 판사가 말했다. “너에게 또 한 번 기회를 준다. 법정은 너를 스티븐스 의사에게 위탁한다.” 그렇다면 이 키가 큰 남자는 변호사가 아니고 돌팔이 의사인 것이다. 하지만 캐롤로서는 그가 ‘살인마 잭’(19세기 말 런던을 떠들썩하게 했던 연쇄 매춘부 살해사건의 범인)이라도 상관없었다. 캐롤은 오늘이 그녀의 생일이라는 거짓말이 탄로나기 전에 이 재미없는 법정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의사는 그녀를 자기의 아파트까지 차에 태우고 가며 대답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를 얼마간 하고는 캐롤로 하여금 차분하게 생각할 여유를 주었다. 그는 이스트 강이 내려다보이는 71번가의 현대적인 아파트 악에 차를 세웠다. 아파트의 도어맨과 엘리베이터 보이가 의사에게 인사를 하는 정중한 태도로 보아, 그가 새벽 3시에 16세의 흑인 아가씨를 끌어들이는 것은 조금도 별난 일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었다. 캐롤은 이 의사의 아파트처럼 훌륭한 방을 본 적이 없었다. 거실은 희게 칠해져 있었고, 화사한 트위드천으로 씌워진 두 개의 낮은 소파가 있었다. 그 사이에는 유리를 깐 크고 네모난 커피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베네치아 풍의 문양이 든 큼직한 체스 판이 있었다. 벽에는 몇 점의 현대화가 장식되어 있고, 입구 쪽 방에는 유선 텔레비전이 로비 쪽을 비추고 있었다. 거실 한모퉁이에는 유리로 칸막이가 된 바(bar)가 있고, 선반에는 크리스탈 잔과 포도주병이 늘어서 있었다. 창밖을 넘겨다본 캐롤은 아래쪽으로 작은 배가 이스트 강을 달려내려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재판소에 가면 언제나 시장기를 느끼게 되지.” 주드가 말했다. “어디 생일상을 차려 볼까.” 그는 캐롤을 부엌으로 데리고 가서 솝씨있게 멕시코식의 오믈렛 감자 튀김, 토스트, 샐러드, 커피 등을 장만했다. “이것도 독신의 고마운 점이지. 언제든 마음만 내키면 요리를 만들 수 있거든.”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는 독신이고 이 집에는 여자가 없다. 혹시 그녀가 약게만 군다면 굉장한 행운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배불리 먹고 나자 의사는 캐롤을 손님용 침실로 데리고 갔다. 침실은 푸른색으로 꾸며져 있으며, 대형 더블 베드가 있고, 청색 격자무늬의 침대보가 씌워져 있었다. 그리고 적갈색의 스페인풍의 낮은 화장대도 있었다. “오늘밤은 여기에서 자도 좋아.” 그가 말했다. “잠옷을 찾아올께.” 캐롤은 고상하게 꾸며진 침실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이봐, 캐롤 ! 넌 굉장한 봉을 잡은 거란다 ! 저 남자는 어린 흑인 아가씨가 탐이 나는 거야. 넌 그 소망을 채워 주기만 하면 돼.’ 그녀는 옷을 벗고 30분이나 걸려 샤워를 했다. 윤기가 도는 육감적인 몸에 수건을 두르고 욕실을 나온 그녀는 호색가인 백인이 침대 위에 놓아 둔 잠옷을 보았다. 그녀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리고는 수건을 내던지며 거실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의사가 보이지 않았다. 캐롤은 서재로 통하는 문을 기웃거렸다. 그는 큰 책상 악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고풍스러운 스탠드가 있었다. 서재에는 바닥에서 천장까지 책이 꽉 들어차 있다. 캐롤은 그의 등뒤로 걸어가 그의 목덜미에 키스를 했다. “자, 시작해요.” 그녀는 속삭였다. “나 이제 참을 수가 없는걸요.” 그녀는 몸을 비벼댔다. “뭘 하는 거예요, 파파 ? 빨리 해주지 않으면 미치고 말아요.” 그는 사려깊은 눈으로 잠시 캐롤을 바라보았다. “말썽은 이제 충분할 텐데 ? ” 그는 조용히 말했다. “네가 흑인으로 태어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리화나를 피우는 16세 창녀가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는 거야.” 캐롤은 곤혹스러워져서 자기가 무슨 재미없는 말이라도 했던가 싶어 그를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는 자신을 흥분시키고 쾌락을 더하기 위해 그녀를 매질하는 것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아니면, 데이비드슨 목사(서머셋 몸의 소설 。비(雨)。의 주인공. 윤락된 여인을 구원하려다가 오히려 육욕에 빠진다) 식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검은 육체를 악에 두고 기도를 드리고 그녀로 하여금 회개를 하게 하고 나서 범하려는 것이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시도했다. 남자의 양다리 사이로 몸을 디밀며 그의 몸을 애무했다. “어서요.” 그는 조용히 캐롤을 밀어내어 팔걸이 의자에 앉게 했다. 그녀는 이토록 곤혹스러워 본 적이 없었다. 이 남자는 호모가 틀림없다. 요즘 사내들은 뭐가 뭔지 알 수 없거든. “뭘 원하시죠 ? 어떻게 하라고 말만 해요, 그대로 할 테니까.” “그럼, 이야기나 하지.” 그가 말했다. “이야기 · 10· 말로만 ? ” “그래.” 그들은 이야기했다. 그것도 날이 샐 때까지. 캐롤로서는 가장 기묘한 밤이었다. 스티븐스는 그녀를 탐색하고 시험해 보면서 차례로 화제를 바꾸었다. 그는 베트남이나 중동문제, 심지어는 대학가의 분쟁 등에 관해서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 캐롤이 그가 정말로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되면 스티브는 곧 화제를 바꾸었다. 그들은 캐롤이 지금껏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항이나, 그녀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일에 관해서도 이야기 했다. 그로부터 여러 달이 지나, 이따금 그녀는 잠이 오지 않을 때면 자기를 바꾸어놓은 말과 생각, 그리고 마법과도 같은 문구를 다시 생각해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것은 허사였다. 그녀는 마침내 마법과도 같은 말은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티븐스 의사가 한 것은 극히 단순한 것이었다. 그는 캐롤과 이야기했다.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지금까지 자기를 상대로 그렇게 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캐롤을 인간으로서, 대등한 사람으로서 대하고, 그녀의 의견이나 느낌을 존중했던 것이다. 그날 밤, 이야기 도중에 캐롤은 불현듯 자신의 알몸이 부끄러워져 침실로 들어가 그의 잠옷을 걸쳤다. 그가 뒤따라들어와 침대머리에 걸터앉아 두 사람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모택동과 훌라후프며 피임약 등이 화제에 올랐다. 결혼을 하지 않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가진 사생아에 관한 의견도 교환했다. 캐롤은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오랫동안 의식의 저 아래에서 잠자던 것도 털어놓았다. 그리고 마침내 잠에 골아떨어질 무렵에는 그녀는 스스로가 텅 비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수술을 받아 많은 독소를 배출한 그런 기분이었다. 이튿날 아침, 식사를 끝내고 그는 캐롤에게 100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저 거짓말을 했어요. 생일이 아니었어요, 어제가.” “알고 있어.” 그는 싱긋 웃었다. “하지만 판사에게는 비밀로 해두지.” 그는 표정을 고쳤다. “이 돈을 갖고 가도록 해. 아무도 너를 방해하지 않을 거다. 다시 경찰에 잡히는 일이 없는 한.” 그는 화제를 바꾸었다. “지금 접수실에 한 사람 필요한데, 너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캐롤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음 쓰실 거 없어요. 저는 속기도 타이프도 못 치는걸요.” “학교에 가면 할 수 있게 될 거다.” 캐롤은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설레는 마음으로 말했다. “그런 것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지만, 나쁠 것 같지는 않네요.”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아파트를 뛰어나와 자기 또래들이 진을 치고 있는 할렘의 피시맨스 드러그 스토어에 가서 모두에게 100달러짜리 지폐를 자랑하고 싶었다. 이것 한 장이면 1주일 동안 멋대로 놀 수가 있을 것이다. 그녀가 피시맨스 드러그 스토어에 들어갔을 때 가게는 어제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언제나처럼 불만에 찬 얼굴이 있었고, 언제나처럼 시건방진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캐롤의 영역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의사의 아파트를 떠올렸다. 그 차이는 단지 가구의 탓만은 아니었다. 그 아파트는 무척 청결했다. 그리고 조용했다. 다른 세계의 작은 섬 같았다. 그는 그런 세계로 들어가는 입장권을 주겠다고 한다. 무엇 하나 잃을 것은 없다. 장난삼아 해보아서 의사로 하여금 그의 생각이 엉뚱했다는 것을, 그녀는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면 되는 것이다. 캐롤 자신에게도 정말 뜻밖의 일이었으나 그녀는 야간학교에 들어갔다. 그녀는 가구가 딸린 셋방을 떠나기로 했다. 세면대는 얼룩으로 더럽고, 화장실은 고장나기 일쑤였고, 창의 녹색 블라인드는 부서졌고, 침대는 삐거덕 소리가 나는 싸구려였지만 그녀는 거기에서 꿈을 찾고, 연극에 빠져들었었다. 그녀는 파리나 런던이나 혹은 로마의 아름답고 부유한 상속인이고, 그녀의 육체를 애무하고 있는 사나이는 결혼해 주기를 갈망하는 돈많고 핸섬한 왕자였다. 하지만 오르가즘이 끝나면 사나이는 그녀에게 멀어져 가고 그녀의 꿈은 끝나는 것이다. 다음 사나이가 끌려 들어올 때까지는. 캐롤은 아무런 미련을 남기지 않고 방과 왕자들을 버리고는 부모의 집으로 돌아갔다. 스티븐스 의사는 그녀가 학교에 다니는 동안 수당을 주었다. 그녀는 우등으로 고등학교를 마쳤다. 졸업식에는 의사도 참석했다. 그의 잿빛 눈은 보람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가치가 있는 인간이었다. 캐롤은 낮에는 네딕 상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비서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그 과정을 수료한 이튿날부터 그녀는 스티븐스 의사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만을 위한 아파트도 빌릴 수 있게 되었다. 지난 4년간, 스티븐스 의사는 언제나 처음 만났던 밤과 마찬가지로 근엄하고 인자하게 캐롤을 대했다. 처음에는 스티븐스가 그녀의 과거와 오늘의 변모에 관해서 어떤 말을 할 거라고 마음을 도사리기도 했다. 하지만 마침내 캐롤 역시 스티븐스가 그녀를 언제나 현재의 그녀로서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그녀가 스스로에게 충실하도록 도와주었다. 캐롤에게 문제가 있을 때는 언제든 시간을 내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동안 그녀는 자기와 치크와의 관계를 그에게 털어놓고, 최근의 자신에 대해 치크에게 알리는 것이 어떤지를 상의하려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차마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캐롤은 스티븐스 의사가 자랑스러워할 그런 여자가 되고 싶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와 자는 일도, 그를 위하여 누구를 죽이는 일까지도 망설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살인과의 두 형사가 의사를 만나겠다는 것이다. 맥그리비가 짜증을 냈다. “어쩔 거요 ? ” “치료중에는 방해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캐롤이 말했다. 그러면서도 맥그리비의 눈에 떠오르는 기색을 살폈다. “여쭈어 보지요.” 그녀는 전화를 들어 인터폰의 부저를 눌렀다. 30초 동안의 침묵 끝에 스티븐스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지 ? ” “두 형사분이 선생님을 만나시겠답니다. 살인과에서 나오셨답니다.” 그녀는 의사의 목소리의 변화 · 10· 흥분이나 공포의 그림자 같은 것 · 10· 에 귀를 기울였다. 목소리는 변하지 않았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해요.” 그는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자랑스러운 마음이 가득 차 올랐다. 형사들은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 수는 있었어도, 그녀의 선생님으로 하여금 침착성을 잃게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캐롤은 얼굴을 번쩍 쳐들며 말했다. “들으신 바대로입니다.” “환자의 치료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립니까 ? ” 젊은 앤젤리 형사가 질문을 했다. 캐롤은 책상 위의 시계를 보았다. “약 25분 지나야 합니다. 오늘의 마지막 환자입니다.” 형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기다리지.” 맥그리비가 한숨을 섞어가며 말했다. 두 사람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맥그리비는 그녀를 훑어보며 말했다. “당신을 어디선가 본 것 같군.” 캐롤은 그런 수단에는 말려들지 않았다. 떠보는 수작이다. “다들 그렇게 말하데요.” 그녀는 잘라 말했다. “우리들은 모두가 비슷해 보인다고요.” 정확히 25분 뒤, 치료실에서 직접 복도로 통하는 곁문이 찰칵 소리를 냈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나 의사 방의 문이 열리며 주드 스티븐스가 걸어나왔다. 그는 맥그리비를 보자 눈을 깜빡거렸다. “전에 만난 적이 있는 것 같군요.” 의사가 말했다. 하지만 장소는 생각나지 않았다. 맥그리비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맥그리비 경사입니다.” 그리고 몸짓으로 동료를 가리켰다. “이 사람은 프랭크 앤젤리 형사.” 주드와 앤젤리는 악수를 나누었다. “들어오십시오.” 세 사람은 주드의 방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혔다. 캐롤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나이가 든 형사는 스티븐스에 대해서 적의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그 형사의 본바탕인지도 모른다. 캐롤이 확신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땀에 젖은 옷을 세탁소에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드의 진료실은 프랑스 시골 주택의 거실 같았다. 책상은 없었다. 그 대신 푹신한 안락의자와 묵직한 낡은 스탠드가 놓인 작은 탁자가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었다. 방 끝에는 복도로 나가는 문이 있었다. 바닥에는 정교한 무늬의 융단이 깔려 있고, 한쪽 구석에는 다마스크(綾織)천으로 감싼 소파가 있었다. 맥그리비는 벽에 졸업증서나 면허증이 걸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벌써 조사를 끝낸 뒤다. 만일 스티븐스 의사가 마음만 먹는다면 상장이나 증명서로 벽을 도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신과 의사의 치료실에 들어와 본 적은 처음입니다.” 앤젤리가 두드러진 감상을 나타내며 말했다. “내가 사는 방도 이렇게 아늑했으면 좋겠는데.” “환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지요.” 주드가 스스럼 없이 말했다. “그런데 나는 정신분석과 의사랍니다. 정신과가 아니고.” “죄송합니다.” 앤젤리가 말했다. “어떻게 다른지요 ? ” “한 시간에 50달러라네.” 맥그리비가 말했다. “내 짝은 아직 세상일에 어둡답니다.” 짝……그제야 생각이 났다. 4년 전 · 10· 아니 5년이 됐나 보다. 주류상회의 강도사건으로 맥그리비의 짝이 총에 맞아 죽고 맥그리비도 부상을 입은 사건이 있었다. 에이모스 지프렌이라는 조무래기 폭력단원이 범인으로 체포되었다. 지프렌의 변호사는 정신이상을 이유로 지프렌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리고 주드는 변호인측의 전문가로 출정해서 지프렌의 정신감정을 의뢰받았다. 그는 양심적인 전문가의 입장에서 피고가 돌이키기 어려운 정신분열증에 있음을 진단했다. 그리고 주드의 증언에 따라 지프렌은 사형을 면하고 정신병원으로 보내졌다. “이제야 생각이 납니다.” 주드가 말했다. “지프렌 사건이었군요. 당신은 세 발을 맞고서도 살아남았고, 당신의 짝은 죽은 일이 있었지요.” “나도 당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맥그리비가 말했다. “당신은 살인범을 살려 줬지요.” “그래서 용건은 ? ” “정보가 좀 필요합니다.” 맥그리비는 앤젤리에게 눈짓을 했다. 앤젤리는 들고 온 포장물을 만지작거렸다. “당신에게 보여 줄 게 있습니다.” 맥그리비가 조심스럽게 일부러 말을 돌렸다. 앤젤리가 꾸러미를 풀었다. 그리고 노란 방수 레인코트를 내밀었다. “이걸 본 적이 있습니까 ? ” “내 것 같군요.” 주드는 놀라서 말했다. “당신 겁니다. 안쪽에 당신의 이름도 있습니다.” “어디에서 갖고 왔나요 ? ” “어디라고 생각합니까 ? ” 두 형사는 더 이상 인사치레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주드는 흘끔 맥그리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길고 낮은 테이블 위의 파이프걸이에서 파이프 하나를 집어 담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를 말해 주시지요.” 그는 차분히 말했다. “이 레인코트 말입니다, 스티븐스 선생.” 맥그리비가 말했다. “만일 이것이 당신 거라면 어떻게 당신의 손에서 떨어져 나갔는가를 알고 싶은 겁니다.” “별로 이상할 건 없습니다. 오늘 아침 출근할 때 이슬비가 내렸지요. 평상시에 입던 레인코트를 세탁소에 보내서 이 노란 것을 입고 나왔습니다. 낚시 갈 때 가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환자가 빗발은 굵어졌는데 레인코트 없이 왔기에 빌려 준 것이지요.” 의사는 말을 끊었다가 갑자기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그분에게 혹시 무슨 일이라도 ? ” “그분이라니요 ? ” 맥그리비가 반문했다. “내 환자 · 10· 존 핸슨 말입니다.” “맞습니다.” 앤젤리가 점잖게 말했다.“바로 그 사람입니다. 핸슨 씨가 레인코트를 돌려 드리러 오지 못한 것은 죽었기 때문입니다.” 주드는 가벼운 충격을 몸속에서 느꼈다. “죽어요 ? ” “누군가가 등뒤에서 칼로 찔렀습니다.” 맥그리비가 말했다. 주드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맥그리비는 앤젤리의 손에 있는 레인코트를 받아들더니 등뒤를 뒤집어 크게 찢어진 자리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적갈색의 반점이 묻어 있었다. 주드는 토할 것 같았다. “누가 이런 짓을 ? ” “그걸 당신에게 물어보려고 온 겁니다.” 앤젤리가 말했다. “정신분석의사가 가장 잘 알 것 같아서.” 주드는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언제 살해되었나요 ? ” 맥그리비가 대꾸했다. “오늘 오전 11시. 렉싱턴 애버뉴에서 한 블록 가량 떨어진 곳입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그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겠지만, 모두가 크리스마스 준비로 바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기에 그는 출혈로 죽을 때까지 눈 속에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주드는 테이블의 모서리를 꽉 움켜쥐었다. 손가락의 관절이 하얗게 변했다. “핸슨이 오늘 아침 여기에 온 것은 몇 시쯤이었습니까 ? ” 앤젤리가 물었다. “10시입니다.” “치료시간은 얼마나 걸렸지요 ? ” “50분.” “끝나고 바로 돌아갔나요 ? ” “예. 다른 환자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핸슨은 접수실로 나갔나요 ? ” “아니, 환자는 접수실 쪽에서 들어와 저 문으로 나갑니다.” 주드는 복도로 통하는 문을 가리켰다. “다른 환자와 얼굴을 맞댈 필요가 없으니까요.” 맥그리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핸슨은 여기에서 나간 지 불과 몇 분 내에 살해되었군. 치료를 받으러 온 이유는 ? ” 주드는 주저했다. “유감스럽게도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분명히 누군가에게 살해되었습니다. 당신은 범인을 찾는 데 협조를 해주셔야 합니다.” 주드의 파이프의 불은 꺼져 있었다. 그는 천천히 불을 다시 붙였다. “언제부터 치료를 받았나요 ? ” 이번에는 앤젤리가 물었다. 형사들의 팀워크였다. “3년 전부터입니다.” 주드가 대답했다. “그는 어떤 문제를 갖고 있었나요 ? ” 주드는 대답을 망설였다. 그는 그날 아침의 존 핸슨의 모습을 떠올렸다. 핸슨은 싱글벙글 새로운 자유를 즐기려는 의욕에 차 있었다. “동성애였습니다.” “또 골치 아픈 사건이 되겠는걸.” 맥그리비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동성애였으나 · 10· ” 주드가 말했다. “핸슨은 치유를 했습니다. 나는 오늘 오전 더 이상은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었지요. 그는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아내와 두 아이가 있습니다.” “호모에게 가족이 ? ” 맥그리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흔히 있는 일입니다.” “호모의 상대가 그와 헤어지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군. 그래서 싸움이 붙었다. 상대는 눈이 뒤집혀서 그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건가 ? ” “그럴 수도 있겠지요.” 주드는 생각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아요.” “왜죠, 스티븐스 선생 ? ” 앤젤리가 물었다. “핸슨은 1년 이상이나 호모와 접촉이 없었습니다. 나는 강도의 소행이 아닌가생각합니다. 핸슨이라면 그런 일에 저항을 할 사람입니다.” “용감한데다 아내를 거느린 호모로군.” 맥그리비는 무겁게 말했다. 시가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하지만 강도 애기에는 한 가지 결점이 있습니다. 핸슨의 지갑은 그대로였거든요. 지갑에는 100달러 이상이 들어 있었는데.” 그는 주드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앤젤리가 말했다. “미치광이를 찾는 일이라면 훨씬 편할 텐데.”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요.” 주드는 반박했다. 그는 창가로 걸어갔다. “저 아래 군중을 보십시오. 20명 중 한 명은 정신병원에 들어가 있던가, 과거에 들어갔던가, 아니면 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만일 미치광이라면……” “미치광이는 반드시 겉으로 보아 판별이 간다고는 할 수 없지요.” 주드가 설명했다. “명백한 정신이상의 증거가 있는데도 진단되지 않는 것이 적어도 열 건은 되니까요.” 맥그리비는 특별한 흥미를 드러내며 주드를 지켜보고 있었다. “당신은 인간성을 잘 아십니다그려.” “인간성이라는 건 없습니다.” 주드는 말했다. “동물성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요. 토끼와 호랑이의 중간치를 상정해 보십시오. 아니면, 다람쥐와 코끼리의 평균을.” “정신분석의로 개업한 지 얼마나 됩니까 ? ” 맥그리비가 물었다. “12년입니다. 왜죠 ? ” 맥그리비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은 미남입니다. 적잖은 환자가 당신을 따랐을 것 같은데.” 주드의 눈이 차가워졌다. “무슨 말인지 ? ” “선생, 아실 만할 텐데 ? 우리는 서로간에 세상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호모가 여기를 찾아와 미남인데다가 젊은 의사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맥그리비는 자신에 찬 말투가 되었다. “3년간 치료를 받으러 드나드는 사이에 핸슨이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욕망을 느끼지 않았을 거라고 단언할 수가 있습니까 ? ” 주드는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당신이 말하는 세상을 아는 사람이 보는 견해입니까 ? ” 맥그리비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럴 가능성이 있음직하다는 이야기요. 다른 가능성도 말씀드리지. 당신은 핸슨에게 더 이상 오지 말라고 했소. 핸슨은 그것이 불만이었을지도 모르죠. 3년 동안에 그는 당신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생겼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당신들은 다퉜습니다.” 주드의 얼굴은 노기로 붉어졌다. 앤젤리가 긴장을 허물었다. “누군가 그를 증오하는 사람은 없었습니까 ? 아니면, 그가 미워한 사람이라든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야기하지요. 존 핸슨에 관해서는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증오심을 품고 있지 않았으며, 누구에게서도 미움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까 ? 당신은 아마도 훌륭한 의사겠군요.” 맥그리비가 말했다. “그의 파일을 얻어갈 수 있겠습니까 ? ” “그럴 수는 없습니다.” “법정의 명령서를 얻어올 수도 있는데 ? ” “그러시지요. 기록에는 도움이 될 만한 아무것도 쓰여 있지가 않아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넘겨준다고 해서 난처할 것도 없을 텐데요 ? ” 앤젤리가 말했다. “핸슨의 아내나 아이들이 곤란합니다. 당신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핸슨을 죽인 것은 그와는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맥그리비가 날카롭게 말했다. 앤젤리는 다시 레인코트를 꾸리고 끈으로 묶었다. “이건 좀더 조사해 보고 돌려 드리겠습니다.” “필요없습니다.” 주드가 말했다. 맥그리비는 복도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는 복도로 나왔다. 앤젤리는 주드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맥그리비의 뒤를 쫓았다. 주드는 못박힌 듯이 서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파도가 쳤다. 그때 캐롤이 들어왔다. “왜 그러시죠 ? ” 그녀는 안스러운 듯 물었다. “존 핸슨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다는군.” “살해되다니 ! ” “칼에 찔렸다는 거야.” 주드가 말했다. “어머나 ! 아니, 어째서요 ? ” “경찰도 아직 몰라.” “세상에 ! ” 그녀는 주드의 눈에서 고통을 보았다. “선생님, 뭐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 ” “뒷일을 부탁해. 나는 핸슨 부인을 만나러 가겠어. 내 입으로 부인에게 알려야겠어.” “걱정마세요. 여기 일은 제가 마무리할께요.” “고마워.” 주드는 나갔다. 30분 뒤, 캐롤이 기록을 챙기고 자기 책상에 자물쇠를 잠그려 했을 때 복도 쪽의 문이 열렸다. 이미 6시가 지나 빌딩 속은 조용했다. 캐롤이 얼굴을 들자 남자는 웃으며 다가왔다. 제 3 장 메어리 핸슨은 인형과도 같은 여자였다. 작은 몸집에 아름답고 우아했다. 부드러운 인상에 남부 출신 특유의 애처로워 보이는 모습을 지녔지만, 그 내면은 화강암처럼 단단했다. 주드는 존 핸슨의 치료가 시작되고 나서 1주일 뒤에 그녀를 만났었다. 치료를 받는 데 대해 그녀는 막무가내로 반대했기에 핸슨은 의사에게 아내를 한번 만나봐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남편께서 정신분석을 받는 데 대해서 왜 그렇게 반대를 하시는 겁니까 ? ” “친구들에게 미친 사람과 결혼했다는 손가락질을 받고 싶지가 않습니다.” 메리는 주드에게 오히려 부탁을 했다. “남편에게 이혼을 하라고 말해 주세요. 일단 헤어지면 그 사람이 뭘 하든 상관없습니다.” 주드는 이 시기에 이혼을 하면 존을 완전히 못쓰게 만들 것이라고 타일렀다. “못쓰게 되고 말고 할 것도 없어.” 그녀는 언성을 높였다.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면 결혼 같은 거 하지 않았을 텐데. 그 사람은 여자라고요.” “모든 남성이 여성적인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드는 말했다. “모든 여성에게 남성적인 요소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남편되시는 분의 경우는 극복해야 할 어려운 심리적인 문제가 두드러지다는 것뿐입니다. 남편께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부인. 도와드리는 것이 그분이나 아이들에 대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만.” 주드는 세 시간 이상이나 설득을 했다. 그제서야 부인도 간신히 이혼을 보류했다. 그 뒤 메어리는 남편의 자기와의 싸움에 흥미를 갖고 거기에 참여하게 되었다. 주드는 부부를 동시에 환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방침이었으나, 메어리의 부탁으로 그녀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은 효과가 있었다. 메어리가 그녀 자신을 이해하고 아내로서의 결점을 깨닫게 됨에 따라 존은 급격하게 좋아졌다. 하지만 지금 주드는 그녀의 남편이 의미없이 살해된 것을 전하러 온 것이다. 메어리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지금 들은 말을 믿지 못하고 무슨 지나친 농담으로 받아들이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마침내 진실을 알아차리자, “남편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군요 ! ” 하고 외쳤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 ” 그녀는 복받쳐 오르는 비탄으로 해서 마치 짐승처럼 자신의 옷을 찢기 시작했다. 여섯 살 된 쌍둥이가 들어왔다. 그 순간부터 소란은 더 커졌다. 주드는 간신히 아이들을 이웃집에 데려가 맡겼다. 그리고 핸슨 부인에게 진정제를 먹이고는 가까운 곳의 주치의에게 연락을 취했다. 자기가 할 일이 완전히 마무리된 것을 확인하고서 그는 그곳을 떠났다. 주드는 자동차에 올라타서 깊은 생각에 잠겨 정처 없이 차를 달렸다. 핸슨이 어려운 싸움에 견뎌 마침내 승리한 순간에……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죽음이었다. 그를 죽인 것은 정말로 동성연애자였을까 ? 핸슨의 변심을 원망하는 과거의 애인이었을까 ? 그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기는 했지만, 주드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맥그리비 경사의 말로는 핸슨은 그의 진료소에서 약 1블록 떨어진 곳에서 살해되었다고 했다. 만일 범인이 증오에 사로잡힌 동성연애자였다면 한적한 곳에서 핸슨을 만나 죽이기 전에 설득을 하고 마음을 돌리려 하소연했을 것이다. 거리 한복판에서 핸슨의 등 뒤에서 칼로 찌르고 달아나지는 않을 것이다. 주드는 거리 모퉁이의 전화 박스를 발견했을 때, 갑자기 피터 해들리 의사 내외와 저녁식사 약속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 냈다. 그들은 가장 친한 사이였지만, 지금 주드는 아무와도 만나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전화 박스로 들어가 해들리의 번호를 돌렸다. 노라 부인이 전화에 나왔다. “늦으시는군요. 지금 어디 계시죠 ? ” “부인, 오늘은 용서해 주셔야겠습니다.” “안돼요.” 노라가 난처한 듯 말했다. “멋진 금발 아가씨가 당신을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는걸요.” “다음으로 해요. 아무래도 마음이 내키지를 않아서 그럽니다. 대신 사과 드려 주십시오.” “의사란 왜들 그럴까 ! ” 노라의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기다려 주세요. 남편을 바꿔 드릴 테니.” 피터가 전화를 바꿨다. “무슨 일인가, 주드 ? ” 주드는 망설였다. “바쁜 일이 있었다네. 내일 이야기하세.” “멋진 스칸디나비아산 요리를 그냥 지나칠 셈인가 ? 미인이라고.” “만나게 되겠지.” 주드는 약속을 했다. 소곤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노라가 다시 나왔다. “아가씨는 크리스마스 만찬에도 오기로 했어요, 주드. 그때는 오시겠지요 ? ” 그는 잠시 생각했다. “거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오늘 저녁은 정말 미안합니다.” 주드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노라로 하여금 중매를 그만두게 할 좋은 방법은 없을지 궁리해 보았다. 주드는 대학 졸업반일 때 결혼을 했었다. 엘리자베스는 사회학을 전공하는 푸근한 느낌의 머리가 좋고 구김살없는 아가씨였다. 젊은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사랑했고, 오래지 않아 태어날 아이들을 위해 세상을 개조할 여러 가지 굉장한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결혼하고 첫해 크리스마스를 악두고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몸속의 아이는 자동차와 정면충돌사고로 죽었던 것이다. 주드는 절망을 딛고 일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미국에서도 손꼽이는 정신분석 전문가로서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지금도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사람들 틈에 낄 수가 없었다. 그 자신도 이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도저히 크리스마스를 엘리자베스나 아이와 연관짓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주드는 전화 박스의 문을 밀어 열었다. 그러자 박스 밖에 여인이 서서 전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젊고 아름다웠다. 몸에 딱 들어맞는 스웨터에 미니 스커트를 입고 화사한 레인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주드는 박스를 나오며, “미안합니다.” 하고 사과를 했다. 그녀는 따사로운 미소를 보냈다. “괜찮습니다.” 그 얼굴에는 무언가를 기대하는 기색이 있었다. 주드는 그 표정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그가 무의식중에 지니고 있는 장벽을 돌파하고 싶어하는 고독한 마음이다. 여자를 끄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주드가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잠재의식 깊은 곳에 숨어 있었다. 그는 스스로의 매력을 분석해 본 적은 없었다. 환자에게 사모를 받는다는 것은 유리하기보다는 결함이었다. 그것은 그의 입장을 몹시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다. 주드는 상냥하게 목례를 하고 여인 곁을 스치고 나왔다. 차를 타고 달려갈 때까지 그는 여자가 빗속에 서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스트 강 드라이브로 진입해서 메리트 파크웨이로 향했다. 한 시간 뒤에는 코네티컷 턴파이크를 달리고 있었다. 뉴욕의 눈은 더럽혀지고 질퍽했지만, 눈보라가 코네티컷의 풍경을 커리어 앤드 아이브스(미국의 석판인쇄회사)의 그림엽서처럼 아름답게 바꾸어놓고 있었다. 주드는 굉장한 겨울 경치에 둘러싸인 채, 그의 차 밑으로 빨려들어가는 리본 모양의 도로에 될 수 있는 한 주의를 집중하려고 애썼다. 존 핸슨에 대한 일이 머리에 떠오르면 곧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돌리곤 했다. 그는 어두운 코네티컷의 시골길을 계속 달리다가 몇 시간 뒤 피로를 느끼자 차를 돌려 집으로 향했다. 늘 미소를 머금고 그에게 인사를 하는 불그레한 얼굴의 도어맨인 마이크는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지 표정이 없었다. 집안에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나 보다고 주드는 상상을 했다. 언제나처럼 주드는 마이크의 10대가 된 아들과 결혼한 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오늘밤은 그럴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는 마이크에게 차를 차고에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알겠습니다, 스티븐스 선생님.” 마이크는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그만두는 눈치였다. 주드는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관리인인 벤 케이츠가 로비를 걸어왔다. 그는 주드를 보자 신경질적으로 손을 흔들고는 급히 자기 방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오늘밤은 모두가 왜 저럴까 ? 아니면 내 지레짐작일까 ? 주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보이인 에디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스티븐스 선생님.” “아, 에디.” 에디는 침을 삼키고 멋적은 듯 시선을 돌렸다. “왜 그러지 ? ” 주드가 물었다. 에디는 머리를 흔들었으나 시선은 돌린 채였다. 어라, 이 녀석도 내 환자가 될 참인가 ? 주드는 그런 생각을 했다. 빌딩 전체가 갑자기 그런 사람들로 변한 것 같았다. 에디가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어주자 주드는 밖으로 나가 자기 방 쪽으로 걸어갔다. 엘리베이터가 닫히는 소리가 나지 않기에 돌아다보니 에디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주드가 뭐라고 말을 하려 하자 에디는 황급히 엘리베이터의 문을 닫았다. 주드는 자기 방으로 가서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아파트의 전등은 켜져 있었다. 맥그리비 경사가 거실에서 옷장의 서랍을 막 열고 있는 참이었다. 앤젤리는 침실에서 나오다가 그를 바라보았다. 주드는 화가 치밀었다. “내 아파트에서 뭘 하고 있는 거요 ? ”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스티븐스 선생.” 맥그리비가 말했다. 주드는 성큼성큼 걸어가 탁 서랍을 닫았다. 맥그리비는 하마터면 손가락을 끼일 뻔했다. “어떻게 들어왔소 ? ” “우리는 수색영장을 갖고 있습니다.” 앤젤리가 말했다. 주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수색영장 ? 내 아파트의 ? ” “잠깐 들어볼 말이 있소.” 맥그리비가 말했다. “대답하는 것은 변호사와 상의한 뒤라도 됩니다.” 앤젤리가 말했다. “당신이 말한 것은 모두 선생에게 불리한 증거로써 제시될 수도 있다는 것을 양해바랍니다.” “변호사를 부르시겠습니까 ? ” 맥그리비가 물었다. “변호사는 필요없습니다. 악서도 말한 것처럼 나는 오늘 아침 존 핸슨에게 레인코트를 빌려주었는데, 당신들이 오후에 그걸 갖고 올 때까지 본 적이 없어요. 내가 그를 죽일 틈이 어디에 있단 말이오. 하루 종일 환자를 봤는데. 로버츠 양에게 물어보면 알 거요.” 맥그리비와 앤젤리는 말없는 눈짓을 교환했다. “오늘 오후, 진료소를 나와 어디에 갔습니까 ? ” 앤젤리가 물었다. “핸슨 부인을 만나러 갔었지요.” “그건 알고 있소.” 맥그리비가 말했다. “그 다음은 ? ” 주드는 약간 당황했다. “드라이브.” “어디를 ? ” “코네티컷에 갔었습니다.” “차를 세우고 식사를 한 곳은 ? ” 맥그리비가 물었다. “식사는 안했소. 시장하지도 않았고.” “그럼, 선생을 본 사람은 없겠군.” 주드는 잠시 생각했다. “아마 그럴 거요.” “기름을 넣기 위해 차를 세운 곳은 없습니까 ? ” 앤젤리가 물었다. “아니,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오늘밤 어디를 갔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지요 ? 핸슨은 아침에 살해되었는데.” “다시 진료소에 갔었나요 ? 저녁에 일단 퇴근했다가 ? ” 맥그리비는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아니, 왜 그러지요 ? ” “침입한 자가 있어요.” “뭐라고 ? 누가 ? ” “아직 알 수 없소.” 맥그리비가 말했다. “함께 가봅시다. 어떤 것이 없어졌는지 살펴봐 주시오.” “좋아요.” 주드가 대답했다. “그걸 경찰에 알린 사람은 ? ” “경비원이오.” 앤젤리가 말했다. “진료소에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까 ? 현금이라든가, 마약이나 그런 거 ? ” “돈은 약간 있지만 마약은 없습니다. 훔칠 만한 것은 별로 없을 텐데 헛일을 했을 겁니다.” “하여간 가봅시다.” 맥그리비가 악장섰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에디는 주드에게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주드는 눈짓으로 알았다는 신호를 보냈다. 설마 경찰이 그가 자기의 진료소에 도둑질하러 들어갔다고 의심하는 것은 아닐 거라고 주드는 생각했다. 맥그리비는 죽은 동료 때문에 꼬투리만 있으면 주드를 옭아넣을 생각인 모양이다. 하지만 5년이나 지난 일이다. 그 동안에도 계속 맥그리비는 주드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를 생각하며 그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일까 ? 진료소가 있는 건물에 도착하자 주드는 출입자 명단에 서명을 했다. 경비원인 비젤로는 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것도 단지 생각 탓일까 ? 세 사람은 엘리베이터로 15층까지 올라가 복도를 따라 주드의 진료실 쪽으로 걸어갔다. 정복을 입은 경관이 문 악에 서 있었다. 경관은 맥그리비에게 목례를 하고 한켠으로 비켜섰다. 주드는 열쇠를 꺼내려 했다. “문은 열려 있습니다.” 앤젤리가 말하며 문을 밀어 열었다. 주드가 악장서 일행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접수실은 엉망이었다. 서랍은 모두 책상에서 빠져나와 있고, 종이조각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주드는 멍해지고 말았다. 직접 폭행이라도 당한 듯한 충격을 느꼈다. “침입자가 무엇을 찾으려 한 것 같습니까 ? ” 맥그리비가 물었다. “알 수 없소.” 주드가 말했다. 그는 안쪽 방문 악으로 가서 손잡이를 잡았다. 맥그리비가 바짝 뒤를 따라 들어갔다. 진료실에는 두 개의 작은 테이블이 뒤집혀 있고, 부서진 스탠드가 나뒨굴었고, 피가 융단에 배어 있었다. 방 구석 쪽에는 기묘한 모양으로 캐롤 로버츠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그녀는 알몸이었다. 양손은 피아노선으로 뒤로 묶이고 얼굴과 가슴, 그리고 허벅지에 산(酸)이 부려져 있었다. 오른손의 손가락도 몇 개인가 부러져 있었다. 얼굴은 구타를 당한 듯 부풀어오르고, 뭉쳐진 손수건이 입에 물려 있었다. 두 형사는 시체를 지켜보는 주드의 기색을 살폈다. “얼굴이 창백합니다.” 앤젤리가 말했다. “앉으십시오.” 주드는 고개를 흔들고 몇 번인가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노여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누가 · 10· 누가 이런 끔찍한 짓을 ? ” “그걸 당신에게 듣고 싶은 겁니다, 스티븐스 선생.” 맥그리비가 말했다. 주드는 고개를 들어 맥그리비를 바라보았다. “캐롤에게 이런 짓을 할 자가 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소. 그녀는 한 번도 누구에게 상처입힌 일이 없어요.” “이제 슬슬 진짜 이야기를 해주시지 그래.” 맥그리비가 말했다. “핸슨에게 원한을 품은 자는 없었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그의 등을 찔렀다. 캐롤에게 위해를 가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몸에 산을 부리고 그녀를 개잡듯 했다.” 그의 목소리가 신랄해졌다. “그런데 당신은 아직도 그들을 해칠 만한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당신은 뭡니까 · 10· 벙어리에 귀머거리에 장님입니까 ? 캐롤은 당신에게 4년간 고용돼 있었습니다. 당신은 정신분석 전문가입니다. 캐롤의 사생활은 몰랐고, 신경도 쓴 적이 없다는 겁니까 ? ” “물론 신경은 썼지요.” 주드는 긴장을 하며 말했다. “캐롤은 남자친구와 결혼할 생각이었습니다……” “치크 말이군. 그는 이미 만나보았지.” “그로서는 이런 짓을 할 수 없습니다. 진지한 청년인데다가 캐롤을 끔찍이 사랑했으니까.” “당신이 캐롤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언제입니까 ? ” 앤젤리가 물었다. “아까 말한 것처럼 핸슨 부인을 만나기 위해 여기를 나갔습니다. 나는 캐롤에게 뒷일을 부탁했어요.” 갑자기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는 침을 삼키고 심호흡을 했다. “오늘 또 환자를 볼 예정이 있었나요 ? ” “아니.” “범인은 미치광이라고 생각합니까 ? ” “미치광이겠지요. 하지만 · 10· 미치광이라도 무슨 동기는 있어야 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맥그리비가 말했다. 주드는 캐롤의 시체 쪽으로 다시 시선을 보냈다. 그것은 가지고 놀 만큼 논 다음 버린 부서진 봉제인형과 같은 가련한 모습이었다. “언제까지 저대로 방치할 셈이오 ? ” 주드는 격한 말투로 물었다. “이제 실어갈 겁니다.” 앤젤리가 말했다. “검시도, 살인과의 조사도 끝났으니까.” 주드는 맥그리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캐롤을 저렇게 내버려둔 것은 나 때문이오 ? ” “그야……” 맥그리비가 말했다. “다시 한 번 묻는데, 이 방에는누군가가 · 10· ”그는캐롤을몸짓으로가리켰다.“저런 짓을 하면서까지도 손에 넣고 싶어하는 것이 있습니까 ? ” “없습니다.” “환자의 기록은 어떻습니까 ? ” 주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닐 겁니다.” “당신은 협조적이 아니군.” “나 역시 이런 짓을 한 놈을 찾아주기를 바랍니다. 내 기록 속에 그럴 만한 것이 있다면 이야기하고말고요. 나는 환자들을 잘 알고 있지만, 캐롤을 죽일 만한 사람은 없어요. 범인은 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범인이 당신의 기록을 노리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 ” “기록은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맥그리비는 흥미롭다는 듯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걸 알지요 ? 살펴보지도 않고.” 주드는 안쪽 벽 악으로 갔다. 그리고 두 형사가 보는 악에서 그가 판자의 아랫부분을 누르자 벽의 일부가 열리며 선반이 보였다. 선반에는 테이프가 가득했다. “환자와의 대화는 모두 녹음해서 여기에 보관합니다.” “범인은 테이프가 있는 장소를 알아내기 위해서 캐롤을 고문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까 ? ” “이 테이프에는 남에게 가치가 있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포함되어 있지 않아요. 그녀를 죽인 것은 다른 동기에서입니다.” 주드는 다시 한 번 캐롤의 처참한 시체를 보았다. 그리고 복받치는 분노를 삭이기 어려운 듯 언성을 높였다. “이런 짓을 한 놈은 찾아내야 합니다 ! ” “찾아내고말고.” 맥그리비는 그렇게 맞장구를 치며 주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빌딩 악, 바람이 드세고 인기척이 없는 거리에서 맥그리비는 앤젤리에게 차로 주드를 바래다 주라고 일렀다. “나는 아직 볼일이 있네.” 맥그리비는 그렇게 말하고 주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수고하셨소, 선생.” 주드는 우람한 뒷모습이 보도 저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갑시다.” 앤젤리가 재촉했다. “얼어죽겠는걸.” 주드는 악좌석 앤젤리 옆에 앉았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캐롤의 가족에게 알려야 합니다.” 주드가 말했다. “벌써 해두었습니다.” 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신도 캐롤의 가족을 만나야 하겠지만 이제 급할 건 없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주드는 맥그리비 경사가 이런 한밤중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생각했다. 그의 마음속을 꿰뚫어보듯 앤젤리가 말했다. “맥그리비는 훌륭한 경관입니다. 그는 동료를 죽인 지프렌은 사형에 처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프렌은 정신에 이상이 있었소.” 앤젤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선생의 말을 믿습니다.” 하지만 맥그리비는 믿지 않는다고 주드는 생각했다. 그는 캐롤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녀의 쾌활한 성격이며, 애정과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긍지를 차례로 되새겨보았다. 앤젤리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어느덧 그의 아파트가 눈악에 있었다. 5분 뒤, 주드는 자기 방에 있었다.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브랜디를 따라 서재로 갔다. 캐롤이 아름다운 나신으로 걸어들어와 부드럽고 따사로운 육체를 비벼대 오던 그날 밤이 생각났다. 그가 냉정하고 타이르듯 하는 태도를 취한 것은 그것이 그녀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캐롤은 그가 그녀를 품어버리고 싶은 유혹을 억제하는 데 얼마나 큰 의지의 힘이 필요했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아니, 알고 있었을까 ? 그는 잔 속의 브랜디를 입안에 털어넣었다. 이 도시의 시체안치소는 새벽 3시의 다른 도시의 시체안치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단 한 가지 다른 점은 누군가가 문에 겨우살이 나무의 둥근 다발을 걸어둔 점이다. 성탄절 기분에 들뜬 어느 직원의 짓이 아니면, 누군가의 장난일 거라고 맥그리비는 생각했다. 그는 복도에서 검시해부가 끝나는 것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검시관이 손짓을 하기에 그는 기분 나쁠 정도로 새하얀 검시실로 들어갔다. 검시관은 수돗물에 손을 씻고 있었다. 몸집이 왜소한 새와 같은 인상을 주는 남자인데, 목소리가 유난히 카랑카랑한데다가 동작이 좀스러울 정도로 신경질적이었다. 그는 맥그리비의 질문에 단편적이고도 빠른 말투로 답변을 하고는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다. 맥그리비는 잠시 거기에 멈추어 서서 지금 들은 검시결과를 머릿속에 정리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택시를 잡기 위해 얼어붙은 거리로 나갔다. 택시는 눈에 뛰지 않았다. 택시 운전사들도 휴가로 버뮤다에라도 간 모양이다. 언제까지 서 있다가는 몸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그는 지나가는 순찰차를 보자 신호를 해서 세우고는 운전석의 풋내기 경관에게 증명서를 보이고 19분서로 가자고 했다. 그것은 규칙위반이었다. 하지만 그걸 지킬 판국이 아니었다. 아마도 밤샘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맥그리비가 분서로 돌아오자 앤젤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캐롤 로버츠 검시가 끝났네.” 맥그리비가 말했다. “그래서요 ? ” “임신을 했던걸.” 앤젤리는 놀라 맥그리비를 바라보았다. “임신 3개월이야. 지우기에는 조금 늦었지만 남의 눈에 띌 정도는 아니지.” “그게 그녀의 피살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 ” “좋은 질문이군.” 맥그리비가 말했다. “만일 캐롤의 남자친구가 그녀를 임신시키고 결혼하게 되었다고 하면 별로 큰일이 아니지. 두 사람은 서둘러 결혼하고 몇 달 뒤에는 아기가 태어날 테니까. 흔한 일이잖아. 또한, 남자가 여자를 임신시켜 놓고도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대단한 일도 아니야. 미혼모가 되는 건데, 그것도 흔해빠진 일이지.” “치크에게 물어보았더니, 결혼할 생각이라고 하던데요.” “알고 있어.” 맥그리비가 대꾸했다. “그래서 어디를 출발점으로 하느냐를 생각해 봐야 하거든. 나는 흑인 아가씨의 임신이 출발점이라고 생각해. 그녀가 아이의 아버지에게로 가서 임신한 사실을 이야기하자 아가씨를 죽일 마음을 먹었다면 ? ” “그는 분명 미치광이예요.” “아니면 무척 교활한 자겠지. 나는 교활하다고 생각해. 이렇게 생각해 보자고. 캐롤은 아이 아버지에게로 가서 바람직하지 않은 뉴스를 전하고 유산은 싫다, 꼭 아이를 낳겠다고 말했다고 치세. 그녀는 임신을 무기로 남자에게 결혼을 강요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하지만 남자에게는 결혼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면 어찌될까 ? 그는 아내가 있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백인인지도 모르고. 아니, 이름난 의사라고 가정해도 좋아. 만일 여자와의 관계가 알려진다면 그건 파멸을 의미하는 거지. 흑인 접수담당 직원을 임신시켜, 별수없이 결혼한 정신분석의에게 진료를 받으러 올 환자가 있을 성싶은가 ? ” “스티븐스는 의사입니다.” 앤젤리가 듣다 못해 말했다. “아무에게도 의심받지 않고 살해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텐데요.” “그럴지도 모르지.” 맥그리비는 말했다. “그렇지 않을는지도 모르고. 만일 조금이라도 사인(死因)이 의심스럽다는 판단이 나오면 그에게 혐의가 걸리고, 그걸 속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걸. 그가 독극물을 사들였다면 어딘가에 그 기록이 남지. 로프나 칼을 사면 거기에서도 단서가 생길 수가 있고. 하지만 이 그럴듯한 수법을 보게나. 미친 놈이 아무 이유도 없이 쳐들어와 접수 직원을 죽인다 ? 충격을 받은 고용주는 경찰을 보고 범인을 잡아달라고 핏대를 올리고 말이야.” “좀 억지가 심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네. 그의 환자 존 핸슨을 생각해 보세. 이것도 누군지는 모르지만 미치광이의 이유 없는 살인이야. 그런데 말일세, 앤젤리, 나는 우연을 믿지 않아. 더더구나 우연이 하루에 두 번이나 일어난다면 이거야 말이 되겠는가. 그래서 존 핸슨의 죽음과 캐롤 로버츠의 죽음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 보았네. 그러자 갑자기 우연의 일치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 캐롤이 그의 진료실로 들어가 그의 아이를 가졌다는 나쁜 뉴스를 전했다고 하세. 끝내는 말다툼이 일어나고 여자는 남자를 협박하려고 하네. 결혼을 강요하든가, 돈을 요구하든가 · 10· 아무래도 좋아. 옆방에 들어온 핸슨이 그 이야기를 들은 거지. 스티븐스는 환자를 맞이할 때까지는 그가 이야기를 엿들었다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핸슨이 폭로하겠다는 협박을 했다면 ? 아니면, 그의 동성연애의 상대가 되라고 강요했을지도 모르지.” “생각이 지나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해. 핸슨이 돌아가자 의사는 몰래 뒤를 밟아 영원히 입을 막아 버린 거지. 그리고 돌아와 캐롤을 처치해버리고. 그는 미치광이 짓으로 돌리고 핸슨 부인을 찾아가 위로를 하고는 코네티컷으로 드라이브를 하지. 이걸로 문제는 해결이 되었어. 스티븐스는 시치미를 떼고, 경찰은 구름잡듯 미친놈 수색에 동분서주, 정신을 못 차린다 이거야.” “납득이 안 갑니다.” 앤젤리가 말했다. “당신이 구성하는 살인사건에는 한 조각의 구체적인 증거도 없습니다.” “자네가 말하는 ‘구체적’이란 건 무얼 말하지 ? 두 사람의 시체가 있지 않은가. 하나는 스티븐스에게 고용된 여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의 환자로 진료소를 나와 한 블록 지나서 칼을 맞았네. 동성애 때문에 치료를 받으러 오는 남자라네. 내가 테이프를 들어보자니까 거절을 하더군. 왜 ? 스티븐스가 노출시키기를 꺼리는 것은 누구지 ? 나는 누군가가 침입한 것은 진료소 안에 무엇인가 목적하는 물건이 있었던 것이 아니겠느냐고 물었네. 그렇다면 우리는 캐롤이 침입자와 맞부딪치게 되고, 침입자는 목적하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내기 위해 캐롤을 다그쳤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울 수도 있었지. 하지만 어떤가 ? 그런 중요한 물건은 없다. 테이프는 타인에게는 한푼어치의 가치도 없다. 마약도 돈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미치광이를 찾아야 할 판인데, 이게 말이 되나 ? 주드 스티븐스 말고는 다른 혐의자가 없어.” “그를 해치울 생각이군요.” 앤젤리가 조용히 말했다. 맥그리비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그가 범인이기 때문이야.” “그를 체포할 겁니까 ? ” “얼마 동안은 스티븐스를 그냥 놔둘 거야.” 맥그리비가 말했다. “그러면서 모든 비밀을 털어놓게 하는 거야. 한번 눈독을 들이면 절대 놓치지 않아.” 맥그리비는 뒤로 돌아 밖으로 나갔다. 앤젤리는 맥그리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맥그리비는 스티븐스 의사를 잡아들이려 할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앤젤리는 아침이 되면 버텔리 서장에게 알려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제 4 장 조간신문들은 일제히 캐롤 로버츠 참살사건을 대문짝만한 표제로 보도했다. 주드는 전화교환 서비스를 통해서 환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그날의 예약을 취소하게 할까 생각을 해보았다. 한숨도 자지 못해서 눈꺼풀이 무겁고 뭔가 들어간 것처럼 눈이 까실까실했다. 그러나 환자들의 리스트를 살펴보니 그 중의 두 사람은 예약을 취소하면 절망적이 되고, 세 사람은 쇼크를 받을 것 같았다. 나머지 환자에게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는 평상시대로 치료를 계속하는 것이 환자를 위해서도 좋고, 사건을 잊을 수 있어 스스로에게도 이로울 것으로 판단을 내렸다. 주드는 일찌감치 진료소에 도착했는데도 복도에는 이미 신문기자나 텔레비전 방송기구와 카메라맨 등으로 법석을 이루고 있었다. 기자들이 진료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인터뷰 역시 완강히 거부함으로써 그는 가까스로 혼자가 되었다. 그는 안쪽의 문을 공포심에 가득 차서 살며시 열었다. 하지만 피에 젖은 융단은 제거되고 다른 가구도 원래의 자리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만 달라진 것이라고는 미소를 머금은 캐롤이 더 이상 생기있게 걸어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주드는 접수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첫번째 환자가 온 것이다. 해리슨 버크는 잘생긴 얼굴에 은발인 좋은 체격의 소유자로 대기업의 경영자다운 풍모를 지닌 국제철강주식회사의 부사장이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주드는 그의외모가 버크를 경영자로 만들었는지, 아니면 경영자의 이미지가 버크라는 틀을 만들었는지 궁금했었다. 주드는 언젠가는 표면적인 가치에 관한 책을 써보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의사의 환자에 대한 태도, 변호사의 법정에서의 화려함, 여배우의 얼굴과 스타일 · 10· 이런 것들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화폐와 같은 것이다. 표면적인 이미지이지 진정한 가치는 아니다. 버크를 소파에 눕게 하고, 주드는 그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버크는 2개월 전 피터 해들리 의사의 소개로 찾아온 환자다. 주드는 10분 만에 해리슨 버크가 살인을 범하기 쉬운 편집광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신문은 지난 밤 이 진료소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으로 떠들썩한데도 버크는 거기에 대해 일언반구도 말이 없었다. 그것은 그의 심리상태의 특징이었다. 속속들이 자기 자신 속에 침잠해 있는 것이다. “일전에는 믿어주지 않았지만 · 10· ” 버크가 말했다. “오늘은 놈들이 나를 노리고 있는 증거를 갖고 왔소.” “해리슨 씨, 거기에 관해서는 우리가 마음을 넓게 갖기로 결정을 본 일이 아닙니까 ? ” 주드는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어제 우리의 생각은 일치를 보았었습니다. 상상이라는 것은 · 10· ” “상상이 아니야.” 버크가 외쳤다. 그는 일어나 앉으며 주먹을 쥐었다. “놈들은 나를 죽이려 해 ! ” “자, 누워서 마음을 편안히 가지십시오.” 주드가 달랬다. 버크가 벌떡 일어섰다. “그런 것밖에 할말이 없소 ? 당신은 내 증거라는 것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아 ! ” 그의 눈빛이 험해졌다. “당신도 그들과 한패거리인지도 모르지.” “그럴 리가 없다는 건 당신도 알 텐데. 나는 당신편입니다. 당신을 도우려는 겁니다.” 주드는 실망의 아픔을 느꼈다. 지금까지 쌓아올린 치료의 효과가 한꺼번에 무너져내린 기분이었다. 지금 그의 악에 있는 환자는 두 달 전 처음으로 진료실에 들어오던 겁에 질린 편집병 환자의 상태와 다를 바가 없었다. 버크는 국제철강회사의 사환으로부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른 사람이다. 25년 동안 그의 훌륭한 용모와 성실한 성격은 그로 하여금 회사의 최고에 가까운 지위까지 올라가게 했다. 서열상으로도 장차 사장의 위치에 앉을 사람이다. 그런데 4년 전, 아내와 세 아이가 사우댐프턴의 여름 별장에서 화재로 죽음을 당했다. 그때 버크는 애인과 함께 바하마 섬에 가 있었다. 이 비극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큰 충격을 그에게 주었다. 경건한 카톨릭 신자로 자란 그는 죄악감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버크는 우울해지고 친구를 피하게 되었다. 그는 집안에 틀어박혀 불에 타죽을 때의 아내와 아이들의 고통을 머리에 떠올리며, 그 시각에 애인과 함께 침대에 있었던 자신을 저주했다.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거듭되는 영화의 장면과도 같았다. 그는 가족의 죽음이 자기 탓이라고 스스로를 책망했다. 자기가 거기에 함께 있었다면 처자가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번민이 강박관념을 형성해 갔다. 나는 사람도 아니다. 스스로는 물론 하나님도 그걸 알고 있다. 남들도 알게 될 것이 틀림없다. 자기가 자신을 증오하는 것처럼 남도 나를 미워할 것이다. 사람들은 자못 동정어린 얼굴로 따뜻하게 대해 주는 척하지만, 실은 그가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려 덫에 몰아넣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걸려들 자기는 아니라고 다짐한다. 버크는 중역식당에 가는 것을 그만두고 자기 방에서 혼자 점심을 먹게 되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사람 만나기를 꺼려 했다. 2년 전 새로운 사장이 필요해졌을 때, 회사는 해리슨 버크를 젖혀두고 외부인사를 영입했다. 그리고 1년 뒤, 부사장이라는 직책이 신설되고 다른 남자가 버크의 상석을 차지했다. 이제야 그는 자기에 대한 음모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모든 필요한 증거를 쥐었다. 그는 주위 사람들을 은밀히 감시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밤에는 중역들의 사무실에 비밀 녹음기를 장치했다. 그것이 6개월 전에 발각되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파면을 면한 것은 오랜 근무기간과 그의 지위 덕분이었다. 사장은 버크를 돕고 정신적 압력을 덜어주기 위하여 차츰 그의 책임을 가볍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역효과를 내서, 버크는 더욱더 그들이 자기를 박해하는 것으로 믿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가 비상한 것을 그들이 겁먹고 있다 · 10· 만일 내가 사장이 되면 놈들은 바보니까 모두 해고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과오는 늘어만 갔다. 그것을 주의받으면 부르르 떨며 자기의 실수가 아니라고 우겨댔다. 누군가가 그의 보고서에 손을 대서 숫자나 통계를 고쳐 자기를 모함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는 자기를 노리는 것이 회사 사람들만이 아니라는 착각에 빠졌다. 밖에는 스파이가 있다. 그들은 쉴새없이 자기를 미행한다. 그의 전화를 도청하며 그의 우편물을 검열한다. 버크는 음식에 독이 들어갈 것이 걱정이 되어 먹는 걸 겁냈다. 체중이 눈에 뛰게 줄었다. 걱정이 된 사장은 피터 해들리 의사에게 예약을 하고 반강제적으로 진찰을 받게 했다. 30분 가량 버크를 진찰한 해들리는 주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드의 예약 리스트는 꽉 차 있었으나, 피터가 긴급을 요하는 환자라고 해서 주드는 할 수 없이 버크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지금 해리슨 버크는 다마스크천으로 감싼 소파에 천장을 보고 누워, 양손을 겨드랑이에 꽉 대고 주먹을 쥐고 있다. “증거라는 걸 이야기해 보십시오.” “놈들은 어젯밤 우리 집에 침입했소. 나를 죽이러 온 거지. 하지만 내가 더 영리했소. 서재에서 잠을 자고, 문마다 특별한 자물쇠를 달아 놈들은 결국 나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던 거지.” “도둑의 침입을 경찰에 알렸습니까 ? ” 주드가 물었다. “천만에 ! 경찰도 한 패인걸. 나를 쏘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단 말이오. 하지만 사람들이 있는 데에서는 그럴 수가 없지. 그래서 나는 사람들 틈에 있으려고 하는 거요.” “잘 알겠습니다.” 주드가 말했다. “내 정보를 어찌할 셈이오 ? ” 버크가 진지하게 물었다. “나는 당신이 말하는 것은 빠짐없이 주의깊게 듣습니다.” 주드가 말했다. 그리고 몸짓으로 테이프 레코더를 가리켰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은 모두 이 테이프에 녹음이 되지요. 따라서 만일 그들이 정말로 당신을 해치게 되면 음모의 기록이 테이프에 남게 됩니다.” 버크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기야 그렇군 ! 그거 좋아 ! 테이프라면 놈들도 별수없겠는걸.” “다시 누우시지요.” 주드가 재촉했다. 버크가 고개를 끄덕이고 소파에 몸을 눕히고는 눈을 감았다. “피곤하군. 나는 여러 달 자지 못했소. 잠이 오지 않아요. 여러 사람이 노리고 있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건지 당신은 모를 거요.” ‘모를 것도 없지.’ 하고 주드는 맥그리비에 대해서 일을 생각했다. “집안일 하는 사람이 누군가가 숨어들어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나요 ? ” 주드가 물어보았다. “말해 주지 않았던가 ? ” 버크가 말했다. “2주일 전에 내쫓았소.” 주드는 최근의 해리슨 버크와의 면담을 서둘러 머리에 떠올렸다. 불과 3일 전에 버크는 그날 고용인과 충돌했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렇다면 그의 시간에 대한 관념은 엉망인 것이 된다.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주드는 대스럽지 않다는 듯 흘려 버렸다. “내쫓은 것이 정말 2주 전인가요 ? ” “나에게는 착오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버크는 세찬 어조로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큰 회사의 부사장이 된 줄 아시오 ? 남다른 머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건 알아두시는 게 좋겠어.” “왜 고용인을 그만두게 했지요 ? ” “나를 독살하려 했거든.” “어떤 방법으로 ? ” “햄버거에 비소를 넣었지.” “한입이라도 먹어 보았나요 ? ” “천만에.” 버크가 거칠게 대꾸했다. “어떻게 독이 든 걸 아셨지요 ? ” “냄새로 안다고.” “그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 ” 버크의 얼굴에 자못 만족스럽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말은 무슨. 두들겨 패서 녹초를 만들어 버렸지.” 좌절감이 주드를 휩쌌다. 그는 시간만 끌면 해리슨 버크를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없어지고 있었다. 정신분석에는 늘 자유연상이라는 탈출구를 마련해 줌으로써, 마음을 가리고 있는 엷은 막을 파열시키고, 밤의 겁먹은 야수처럼 마음속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원시적 격정이나 감정을 풀어 밖으로 내보내 준다. 그래서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것은 치료의 첫걸음이다. 버크의 경우는 그것이 순조로웠다. 그는 마음속에 묻어두고 있는 모든 잠재적 적의를 하나하나 밖으로 내몰았다. 면담이 거듭될수록 버크는 치료의 효과를 보였으며, 음모 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과로와 신경과민으로 정신적으로 지쳐 있다는 주드의 의견에 동의했다. 주드는 보다 깊은 분석에 들어가 문제의 부리에 공격을 가할 단계에까지 버크를 유도해 온 것으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버크는 교활하게도 그 동안 주드를 기만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드를 시험하고, 고분고분하면서도 덫을 놓아, 그가 적과 한편이 아닌가를 탐색했던 것이다. 해리슨 버크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걸어다니는 시한폭탄이었다. 이 사실을 통보해 줄 친척도 없었다.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증상의 심각성을 말해 줄 것인가 ? 만일 그렇게 한다면 버크의 미래는 그 자리에서 파멸될 것이다. 그는 정신병원에 수용당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버크가 살인도 서슴지 않는 극도의 편집광이라는 진단은 과연 정확한 것일까 ? 주드는 전화를 걸기 전에 다른 의사의 진단을 받아보게 하고 싶었지만, 버크는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혼자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버크 씨, 한 가지만 약속해 주지 않겠습니까 ? ” “어떤 약속이오 ? ” 버크는 경계의 눈으로 물었다. “그들이 당신을 함정에 몰아넣으려 한다면, 당신이 난폭한 짓을 저질러 주기를 바랄 겁니다. 그래야만 당신을 체포할 수 있으니까요……하지만 당신은 현명하기 때문에 그런 실수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도전을 받아도 폭력을 쓰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주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도 당신을 어쩌지를 못하지요.” 버크의 눈이 번쩍거렸다. “하기야 그렇군. 그런 계획이었군 ! 하지만 우리는 머리가 좋으니까 그런 수단에는 걸려들지 않는다, 맞소 ? ” 주드는 접수실의 방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다음 환자가 온 것이다. 주드는 조용히 녹음기를 껐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해둡시다.” “빠짐없이 녹음이 된 거지요 ? ” 버크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모두 녹음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당신을 해치지는 못할 겁니다.” 주드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오늘은 회사에 돌아가시지 말고 집에 가서 쉬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만.” “안됩니다.” 버크가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절망적이었다. “만일 내가 사무실에 없다면 그들은 사무실의 내 명찰을 떼내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내걸 거요.” 그는 주드에게로 한 발 가까이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조심하시오. 만일 당신이 진정 내 편이라면 당신도 그들이 노릴 겁니다.” 버크는 복도로 통하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문을 조금 열어 그 틈으로 밖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나서야 몸을 옆으로 해서 문틈으로 빠져 나갔다. 버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에 대해 취해야 할 조치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만일 버크가 6개월 전에 왔었다면……그때 갑자기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해리슨 버크는 이미 살인을 저지른 것은 아닐까 ? 혹시 존 핸슨이나 캐롤 로버츠의 죽음에 그가 관계된 것은 아닐까 ? 버크도 핸슨도 주드의 환자이다. 두 사람이 만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버크의 예약이 핸슨 바로 다음이었던 것이 지난 2。3개월 내에 몇 번 있었다. 버크는 여러 번 시간에 늦었으니까 그들이 복도에서 만났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렇게 몇 번인가 만나는 동안에 버크는 핸슨이 그를 미행하고 있으며, 공격을 할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사로잡히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한편, 캐롤은 치료를 받으러 올 때마다 만났다. 그의 빗나간 마음은 그녀로부터 어떤 협박을 받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서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살해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 버크는 도대체 언제부터 그런 망상에 빠지게 된 것일까 ? 그의 아내와 세 아이가 화재로 인해 죽었다고 했다. 과연 실화(失。)였을까 ? 그것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 주드는 접수실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들어오십시오.” 앤 블레이크가 조용히 일어나 따뜻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며 가까이 왔다. 주드는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처럼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내 엘리자베스를 잃고 난 뒤로 여자에 대해 깊은 감정적 반응을 느낀 적이 별로 없었다. 엘리자베스와 앤은 전혀 닮은 데가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금발에 몸집이 작은 편이며 푸른 눈을 갖고 있었다. 앤 블레이크의 머리는 검고, 보기 드문 자수정 빛깔의 눈은 길고도 검은 눈썹 아래 그늘져 보였다. 키는 컸고 몸매는 아름다웠다. 그녀의 싱싱한 지성과 고전적이고도 귀족적인 아름다움은 접근하기 어려운 느낌을 풍겼지만, 그녀의 눈에 있는 따사로움이 그것을 극복해 주었다.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우며 약간 허스키에 가까운 면이 있었다. 나이는 20대 중반이었다. 그녀는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주드가 지금까지 만난 여자 중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러나 주드를 사로잡은 것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초월한 그 무엇이었다. 그녀는 그를 끌어들이는, 만지면 손에 잡힐 듯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먼 옛날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말로는 설명이 어려운 반응이었다. 이미 여러 해 전에 메말라 버린 것으로 생각했던 감정이 갑자기 새 순처럼 솟아나오는 격렬함에 주드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앤은 3주 전 아무런 예약 없이 주드의 진료실에 나타났었다. 캐롤은 그의 예정이 꽉 차서 아마도 새로운 환자를 볼 틈이 없을 거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앤은 조용히 기다려 보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대기실에서 두 시간이나 기다렸다. 미안스럽게 생각한 캐롤은 할 수 없이 짬을 보아 앤을 주드에게로 안내했다. 주드는 처음 얼마 동안은 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분간을 못할 정도로 강력한 정서적 반응을 느꼈다. 그는 단지 자기의 입으로 앉으라는 말을 했고, 그녀가 자기의 이름을 앤 블레이크라고 소개한 것만을 기억하고 있다. 앤은 가정주부였다. 주드는 그녀에게 문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앤은 망설인 끝에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조차도 확실치 않았다. 잘 아는 의사가 말하기를, 주드가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정신분석 의사 중 한 사람이라는 말을 했기에 찾아왔다는 것인데, 그 소개한 의사가 누구냐는 질문에는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전화번호부에서 자기의 이름을 안 것이 틀림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예약이 다 차서 도저히 새로운 환자를 받아들이기가 어렵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다른 5。6명의 정신분석 전문들을 추천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앤은 굳이 그에게 치료를 받겠다고 차분한 말투로 고집을 부렸다. 결국 주드는 승낙을 했다. 그녀는 외견상 다소의 스트레스가 엿보이는 것 외에는 조금도 정상을 벗어난 구석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앤의 문제는 비교적 단순한 것이며, 쉽게 해결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그래서 다른 의사의 소개 없이는 환자를 받지 않는다는 스스로의 규칙을 어기고 앤을 치료하기 위해 점심시간을 줄이기로 했다. 앤은 지난 3주간 매주 2회 내왕했지만, 주드가 그녀에 관해 알아낸 것이라고는 처음 만났을 때와 별로 다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자기자신의 변화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았다. 그는 사랑을 하게 된 것이다 · 10· 엘리자베스를 사랑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첫번째 면답이 있었을 때, 주드는 앤에게 남편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답변을 바라고 있는 자신을 미워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말했었다. “사랑해요. 남편은 친절하고 무척 강해요.” “남편에게는 당신 아버지의 이미지가 있습니까 ? ” 주드가 물었다. 앤은그희귀한자수정빛의눈으로그를바라보았다.“아뇨, 저는 아버지의 이미지를 추구하지 않아요. 어릴 때 가정환경은 행복했지요.” “출생지는 ? ” “비어예요. 보스턴 근방의 작은 도시지요.” “부모님은 아직 살아 계십니까 ? ” “아버지가 생존해 계십니다. 어머니는 제가 12살 때 뇌일혈로 돌아가셨고요.” “부모님 사이는 원만하셨나요 ? ” “네, 서로 아끼셨지요.” ‘그건 당신을 보면 알 수 있지.’ 주드는 즐거운 기분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늘 성격이 일그러지고 비정상이며, 파탄에 직면한 사람만을 대해야 하는 주드에게는 앤은 4월의 훈풍처럼 싱그러웠다. “형제분은 ? ” “없어요. 전 외동딸이에요. 버릇이 없지요.” 그녀는 생긋 웃었다. 그것은 교활하거나 꾸밈이 없고, 개방적인 친근감을 주는 미소였다. 앤은 국무부의 관리였던 아버지와 해외에서 생활했던 일, 아버지가 재혼해서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것, UN에서 통역으로 일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프랑스어 외 이탈리아어 및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했다. 남편을 만난 것은 휴가로 바하마 제도에 갔을 때였다. 앤은 처음에는 그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지만, 그는 집요하고 설득력 있는 구혼자였다. 서로를 안 지 2개월 만에 결혼했다. 그것이 6개월 전이다. 그들은 뉴저지에 있는 저택에 산다고 했다. 여섯 번에 걸친 면담에서 주드가 그녀에 관해서 알아낸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는 지금까지도 앤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단서를 잡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데 감정적 장애를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주드는 처음 면담 때 한 질문의 일부를 생각에 떠올렸다. “당신의 문제는 남편과 관계가 있습니까 ? ” 응답없음. “당신과 남편은 원만합니까, 육체적으로 ? ” “네.” 쑥스러운 표정. “남편이 다른 여성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 ” “아뇨.” 재미있다는 말투. “당신은 다른 남자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습니까 ? ” “천만에요.” 화가 난 얼굴. 주드는 장벽을 깰 최상의 접근방법을 생각해 내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산탄총의 원리를 응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명중할 때까지 모든 문제를 건드려 보는 것이다. “금전문제로 싸움을 했나요 ? ” “아뇨. 남편은 돈을 아끼지 않아요.” “시부모에게 문제가 있나요 ? ” “남편에게는 직계 가족이 없어요. 그리고 제 아버지는 캘리포니아에 그냥 사시고요.” “당신이나 남편께서 마약을 쓴 적이 있습니까 ? ” “없어요.” “남편에게 동성애 혐의가 있나요 ? ” 픽 웃는다. “없어요.” 그는 추궁의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당신은 동성과 성적 관계를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 ” “아뇨.” 별소리를 다 듣겠다는 얼굴. 주드는 알코올 중독, 불감증, 임신에 대한 두려움 · 10·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입에 담았다. 그때마다 앤은 깊이 생각하고 총명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주드가 답변을 다그치면 그때마다 그녀는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여유를 주셔야지요. 저는 저의 방식대로 하겠어요.” 다른 환자였다면 그는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실은 그녀를 계속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주드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게 했다. 앤은 아버지와 함께 10여 개국을 여행했고,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녀는 머리 회전이 빨라 재치있는 유머도 발휘했다. 주드는 그녀가 자기와 같은 책, 같은 음악, 같은 극작가를 좋아하는 것도 알았다. 앤은 상냥하고 애교스러웠으나, 주드는 그녀가 자기를 의사 이외의 존재로 생각하는 조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아이러니컬한 일이었다. 주드는 무의식 속에서 그 동안 앤과 같은 여성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런 여성이 눈악에 나타났는데도 그의 임무는 그녀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남편에게로 돌려 보내야 하는 것이다. 앤이 방안에 들어오는 것을 보며 주드는 소파 곁에 서서 그녀가 편안히 몸을 눕히기를 기다렸다. “오늘은 달라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가능한 일이라면 도움이 될까 해서 찾아왔어요.” 주드는 잠시 멍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 이틀 동안 극도로 긴장을 해서 그런지 그녀의 생각지 못한 동정은 그로 하여금 가슴 뭉클한 것을 느끼게 했다. 앤의 얼굴을 바라다보며 그는 자기가 경험한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그를 휩쓴 악몽과, 맥그리비와, 그 작자의 터무니없는 의심에 관해 그녀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는 환자인 것이다. 아니, 더욱 난처하게도 그는 앤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손을 대서는 안되는 남의 아내인 것이다. 앤은 선 채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주드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그냥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저는 캐롤을 정말 좋아했어요.” 앤이 말했다. “왜 살해되었을까요 ? ” “알 수가 없습니다.” “누가 그랬는지 경찰은 모르고 있나요 ? ” ‘경찰이라고 ! ’ 주드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가 알면 깜짝 놀랄 것이 뻔하다.’ 앤은 이상하다는 듯이 그를 보았다. “경찰은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주드가 말했다. “충격이 크셨겠어요.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오늘은 나오시지 않을 거라고 생각을 했지요.” “쉴 생각이었습니다.” 주드가 말했다. “하지만 · 10· 나왔습니다. 어쨌거나 만나고 싶었으니까요. 자, 당신의 이야기를 합시다.” 앤은 망설였다. “이젠 더 말씀드릴 것이 없어요.” 주드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하나님, 그녀가 더 이상 오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저, 다음주에 남편과 함께 유럽에 가요.” “그거 좋은 일이군요.” 그는 간신히 말했다. “공연히 시간만 빼앗은 것 같네요. 용서하세요.” “용서라니요.” 주드는 말했다. 그는 자기의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음을 알았다. 앤은 그를 버리려 하고 있다. 물론 그녀는 모르겠지만, 그는 유아적 심리상태에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그렇게 진단했지만, 그의 마음은 그녀를 영원히 잃는다는 고통 때문에 무너질 듯했다. 앤은 핸드백을 열어 돈을 꺼냈다. 다른 환자들은 나중에 수표를 끊어 보내왔지만 그녀만은 매번 현금으로 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주드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당신은 오늘 친구로서 왔습니다. 나는 · 10· 거기에 감사할 뿐입니다.” 주드는 다른 환자에게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말을 했다. “한 번만 더 와주었으면 합니다만.” 그녀는 가만히 주드를 올려다보았다. “왜죠 ? ” ‘이렇게 당신과 헤어지는 것이 싫어서 그렇소.’ 그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당신과 같은 여성은 다시 만날 수 없기 때문이오. 만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요.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오’ · 10· 그는 마침내 소리를 내어 말했다. “뭐라고 할까요 · 10· 끝맺음을 했으면 합니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어, 당신이 정말 문제를 극복했는지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말하자면 졸업식 같은 거군요.”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요. 오시겠습니까 ? ”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 10· 물론 찾아뵙지요.” 그녀는 일어섰다. “선생님에게는 더 다녀야 하겠지만……하지만 당신이 뛰어난 의사 선생님이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언젠가 상태가 악화되면 다시 또 올 거예요.” 앤은 손을 내밀었고 그는 그 손을 쥐었다. 그녀는 그 따뜻한 손에 힘을 주었다. 주드는 다시금 두 사람 사이를 끌어 잡아당기는 강력한 힘을 느꼈다. 동시에 그녀가 아무런 감정도 표시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금요일에 오겠습니다.” 앤이 말했다. “예, 금요일입니다.” 주드는 그녀가 복도로 통하는 문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 의자에 깊이 몸을 파묻었다. 그는 그때만큼 완벽한 고독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는 없다. 사건에 대한 해답이 필요했다. 만일 맥그리비에게 범인을 찾아낼 생각이 없다면, 맥그리비가 그를 파멸시키기 전에 스스로 범인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맥그리비는 내심 주드를 이 두 개의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으나 주드는 그 반증을 내세울 수가 없었다. 그는 언제 연행될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체포된다면 의사로서의 생활은 엉망이 될 것이다. 그가 사랑하게 된 여인은 유부녀로서 이제 한 번밖에 만날 수 없다. 그는 좀더 밝은 것을 생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무엇 하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제 5 장 그날의 나머지는 마치 물 밑에 가라앉은 것처럼 지나갔다. 환자 중 몇몇은 캐롤에 대해 입에 올렸으나, 증상이 심한 환자는 자기의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꽉 차 있었다. 주드는 주의를 집중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곧 다른 방향으로 미끄러지며 사건에 대한 해답을 골똘히 탐색하고 있었다. 환자로부터 미처 알아듣지 못한 이야기는 나중에 테이프를 틀어 다시 검토해 보면 된다. 오후 7시, 마지막 환자를 내보내고 나서 그는 방 한구석에 있는, 술을 넣어둔 캐비닛으로 가서 독한 위스키를 마셨다. 그것이 빈 속에 올라왔다. 그는 새삼스럽게 아침은 물론 점심식사도 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식사에 대한 생각만 해도 밥맛이 가시는 느낌이었다. 그는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두 살인사건에 관해 파고들었다. 환자들의 기록에는 살인의 원인이 되는 것은 전혀 없었다. 협박을 음모한 자가 기록을 훔치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협박자는 남의 약점이나 파고드는 비겁한 성격의 인간이다. 캐롤에게 들켜 살해했다면 황급히 일격에 해치웠을 것이다. 그녀를 고문하듯 온갖 잔혹한 행위를 즐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달리 설명을 구할 수밖에 없다. 주드는 오랫동안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다시 한 번 이틀 동안의 일을 천천히 훑어나갔다. 그러나 마침내는 한숨을 몰아쉬고 머리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계에 눈이 가자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싶어 스스로 놀랐다. 그가 진료소를 나왔을 때는 이미 9시가 지나 있었다. 로비를 지나 거리로 나오니 얼음장 같은 찬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은 허공에서 춤을 추고, 모든 것이 부옇게 보였다. 거리는 아직 마르지 않은 캔버스에 그린 유화처럼 보이고, 고층 빌딩이나 거리의 건물은 그것을 그린 물감이 회백색으로 녹아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렉싱턴 애버뉴 길 건너쪽 쇼윈도에 큼직한 희고 붉은 간판이 불빛을 발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쇼핑은 나머지 6일뿐 ! ’ 크리스마스라……주드는 머릿속에서 크리스마스를 밀어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 악에서 어떤 보행자가 아내가 아니면 애인에게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 외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눈에 뛰지 않았다. 주드는 지금쯤 앤은 무얼 하고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남편과 그가 회사에서 지낸 하루에 관해서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남편과 더불어 이미 잠자리에 들어……‘그만 ! ’ 주드는 스스로에게 호통을 쳤다. 눈발이 날리는 도로에는 자동차도 드물었다. 그래서 주드는 횡단보도에 다다르기 전에 차도를 가로질러 자기의 차를 놓아둔 차고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거리의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등뒤에서 소리가 들려오기에 그는 뒤돌아보았다. 크고 검은 리무진이 불도 켜지 않은 채 눈 속에서 타이어를 공회전시키면서 그에게로 달려들고 있었다. 거리는 10피트(약 3·)도 안되었다. ‘음주운전 ? ’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주드는 급히 몸을 날려 안전한 보도 쪽으로 달렸다. 하지만 자동차 역시 그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차는 스피드를 올렸다. 주드가 자기를 죽이려는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주드가 마지막으로 의식한 것은 단단한 어떤 것이 가슴에 부딪치고 우레와도 같은 요란한 소리를 낸 것이었다. 어두운 거리가 갑자기 불꽃놀이 때처럼 환해지면서 그 중의 하나가 머릿속에서 작렬하는 기분이었다. 그 섬광 속에서 주드는 갑자기 모든 답을 알아냈다. 왜 존 핸슨과 캐롤 로버츠가 살해되었는지를 알았다. 그는 속이 시원해졌다. 맥그리비에게 이야기를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빛이 사라지자 다음은 축축한 암흑의 침묵이 지배할 뿐이었다. 겉에서 보면 19분서는 비바람에 시달린 4층짜리 학교처럼 보였다. 갈색의 벽돌 건물로 추녀 밑은 여러 대에 걸친 비둘기똥으로 하얗게 덧게비가 쳐 있었다. 19분서는 59번가에서 86번가까지, 5번 애버뉴에서 이스트 강에 이르는 맨해튼 구역을 관할구역으로 하고 있었다. 뺑소니 사고를 신고하는 전화는 밤 10시 조금 지나 병원에서 경찰의 교환으로 걸려오고, 곧 수사부로 연결되었다. 19분서로서는 바쁜 밤이었다. 악천후를 틈탄 강간이나 강탈사건이 급증하고 있었다. 행인이 뜸한 거리는 황량할 정도여서 약탈자들은 그들 영역 내로 잘못 발을 들여놓은 재수없는 사람들을 덮쳤다. 대부분의 형사들은 출동중이어서 수사부에는 프랭크 앤젤리 형사와 방화 용의자를 취조중인 부장형사가 있을 뿐이었다. 전화가 울렸을 때, 수화기를 들은 것은 앤젤리였다. 상대방은 시립병원의 뺑소니 사고 환자 담당의 간호사였다. 환자는 맥그리비 경사를 시급히 만나고 싶다고 했으나, 맥그리비는 문서기록보관소에 가고 없었다. 앤젤리는 환자의 이름을 물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확인하고는 자기가 곧 가겠다고 말했다. 그가 막 수화기를 놓았을 때에 맥그리비가 들어왔다. 앤젤리는 전화에 관해 이야기했다. “얼른 병원으로 가보시지요.” 앤젤리가 말했다. “서두를 것 없네. 우선 사고가 있었던 관할서의 서장에게 전화를 걸어 봐야지.” 앤젤리는 다이얼을 돌리는 맥그리비를 지켜보았다. 그는 버텔리 서장이 자기와 있었던 이야기를 맥그리비에게 했는지 궁금했다. 앤젤리는 간단히 요점만을 서장에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맥그리비 경사님은 훌륭한 경찰입니다.” 앤젤리가 말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5년 전에 있었던 사건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버텔리 서장은 차가운 눈으로 그를 치켜보았다. “자네는 그가 스티븐스 의사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우려 한다고 생각하나 ? ” “경사님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서장님에게 실정을 있는 대로 알려드리는 것뿐입니다.” “알았네. 참작하지.” 그걸로 이야기는 끝났다. 맥그리비의 전화는 3분 걸렸다. 그 동안 맥그리비는 투덜대기도 하고 메모지에 뭘 적기도 했다. 앤젤리는 조급한 듯 근처를 서성거렸다. 10분 뒤, 두 형사는 순찰차로 병원으로 달렸다. 주드의 병실은 6층이었는데,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찌르는 길고도 휑한 복도 끝에 자리잡고 있었다. 전화를 걸었던 간호사가 그들을 주드의 방으로 안내했다. “상태가 어떻소 ? ” 맥그리비가 간호사에게 물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담당의사가 설명해 줄 겁니다.” 그녀는 짧게 말을 끊었지만, 입이 간지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에요. 뇌진탕을 일으키고 갈비뼈와 왼팔에 부상을 입긴 했지만……” “그런데도 의식이 있다는 건가 ? ” 맥그리비가 다그쳤다. “예, 자꾸만 뛰쳐나가려고 해서 침대에 붙잡아두기가 고역이랍니다.” 그녀는 맥그리비에게로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그리고 한시바삐 형사님을 만나야 한다고 떼를 쓰는 거예요.” 그들은 병실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6개의 병상이 있었는데 모두 자리가 차 있었다. 간호사는 커튼으로 칸을 막은 안쪽의 침대를 가리켰다. 맥그리비와 앤젤리는 침대로 다가가 커튼 곁에 섰다. 주드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이마에는 큼직한 반창고가 붙어 있었으며, 왼팔은 붕대로 어깨에 매달려 있었다. 맥그리비가 말을 건넸다. “사고를 당했다고요 ? ” “사고가 아닙니다.” 주드가 강하게 부정했다. “나를 죽이려 했어요.” 그의 목소리는 가냘펐으나 단호했다. “누가 말입니까 ? ” 앤젤리가 물었다. “몰라요. 하지만 모두가 맞아떨어집니다.” 그는 맥그리비 쪽을 바라보았다. “범인이 노린 것은 핸슨이나 캐롤이 아닙니다. 나라고요.” 맥그리비는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 ” “핸슨이 살해된 것은 내 노란 레인코트를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범인은 내가 그 레인코트를 입고 빌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을 겁니다. 그래서 핸슨이 그것을 입고 진료소에서 나오자 나로 착각을 한 겁니다.” “그건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앤젤리가 말했다. “그럴까 ? ” 맥그리비는 주드에게 얼굴을 돌렸다. “그렇다면 범인은 엉뚱한 사람 죽인 것을 알고 당신의 진료소로 쳐들어갔다가 뜻밖에 흑인 아가씨만 있어서 화가 치밀어 때려 죽였다는 이야기가 되는군.” “나를 죽이러 왔다가 캐롤과 얼굴을 맞닥뜨리자 그녀를 살해한 겁니다.” 주드가 말했다. 맥그리비는 외투 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냈다. “조금 전에 사고발생 장소의 관할 경찰서 서장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 10· ” “사고가 아니라니까.” “경찰 보고에 의하면 당신은 교통규칙을 무시했더군.” 주드는 어안이벙벙해서 맥그리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교통규칙 ? ” 그는 같은 말을 되뇌었다. “횡단보도가 아닌 곳을 가로질렀습니다.” “자동차의 왕래가 없었기에 · 10· ” “자동차는 있었습니다.” 맥그리비가 정정했다. “당신이 보지 못했을 뿐이지. 눈이 왔고 시계(視界)가 흐렸소. 당신이 갑자기 차도로 내려오자 운전사는 브레이크를 걸었지만 미끄러지며 선생을 친 겁니다. 그리고는 겁이 나서 도망쳤다 이겁니다.” “그건 사실과 달라요. 헤드라이트도 켜지 않았어요.” “그것이 그 사람이 핸슨과 캐롤 로버츠를 죽인 증거가 됩니까 ? ” “나를 치여 죽이려 했어요.” 주드가 같은 말을 했다. 맥그리비가 고개를 흔들었다. “효과가 없습니다.” “무슨 효과 ? ” “당신을 못 본 체하고, 나는 있지도 않은 가공의 범인을 쫓아다니라는 겁니까 ? ”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사나워졌다. “캐롤의 임신은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 ” 주드는 눈을 감고 베개에 머리를 떨구었다. 캐롤이 그에게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이 그 일이었었나 ? 그는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지금 맥그리비는 나를……그는 눈을 떴다. “아니, 모르는 일이오.” 그는 맥이 빠졌다. 주드는 머리가 지끈지끈 쑤시기 시작했다. 다시 두통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침을 삼키며 치밀어오르는 구역질을 참았다. 그는 벨을 눌러 간호사를 부르고 싶었으나, 맥그리비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나는 시청을 비롯해서 여러 군데에서 기록을 조사했소.” 맥그리비가 말했다. “당신의 귀여운 접수 직원은 당신에게로 오기 전에 매춘부였다는 것을 아니라고는 못할 겁니다.” 주드의 머리는 빠개질 것 같았다. “알고 있었소, 스티븐스 선생 ?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은 알고 있었지. 4년 전 호객행위 현장에서 체포된 그 아가씨를 야간법정에서 빼낸 것은 당신이었으니까. 이름난 의사가 일류 진료소의 접수 직원으로 매춘부를 고용한다는 건 좀 이례적인 일이 아닐까요 ? ” “처음부터 매춘부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소. 나는 16살의 한 소녀가 재생의 길을 걷도록 도와주려고 했을 뿐이오.” “겸사겸사 흑인 아가씨도 즐길 겸.” “야비한 소리 집어쳐 ! ” 맥그리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야간법정에서 캐롤을 끌어내 어디로 데리고 갔소 ? ” “내 아파트.” “캐롤은 거기에서 잤나요 ? ” “맞소.” 맥그리비는 의미있는 웃음을 지었다. “대단한 일이군 ! 야간법정에서 미인인 젊은 매춘부에게 흥미가 끌려 아파트로 데리고 가서 재워 준다. 뭣 때문에 ? · 10· 체스 상대로 말입니까 ? 만일 정말로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틀림없는 동성연애자일 거요. 그 상대가 누굴까 ? 존 핸슨이었겠지. 반면에 당신이 그날 밤 캐롤과 함께 잤다면 관계는 그녀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보아 무방하겠지. 그런데도 시치미를 딱 떼고, 뺑소니 운전사가 살인범이라고 나를 따돌릴 참이오 ? ” 맥그리비는 휙 몸을 돌리더니 노기로 얼굴이 벌개져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주드의 두통은 극에 달했다. 앤젤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괜찮겠습니까 ? ” “나를 도와주시오.” 주드가 말했다. “누군가가 나를 해치려 합니다.” 그 소리는 스스로의 귀에 슬픈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당신을 살해할 만한 동기를 갖고 있는 자가 누굽니까 ? ” “몰라요.” “적이 있나요 ? ” “아니.” “누구의 아내나 걸프렌드와 잔 적이 있습니까 ? ” 주드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당신의 가족에게 재산이 · 10· 당신이 죽기를 바라는 친척이 있나요 ? ” “전혀.” 앤젤리가 한숨을 쉬었다. “그럼, 아무도 당신을 죽일 동기를 갖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군요. 당신의 환자는 어떻습니까 ? 환자의 리스트를 넘겨 주시면 좋겠습니다만. 조사를 해보게 말입니다.” “그건 안됩니다.” “이름만이라도 좋습니다.” “유감입니다만 · 10· ” 말을 하기에도 힘이 들었다. “나는 치과의사나 이비인후과 의사가 아닙니다. 이해가 안 가십니까 ? 내 환자에게는 각기 문제가 있는 겁니다. 거의가 정신적인 문제지요. 당신들이 그들을 심문한다면 쇼크를 받을 뿐만 아니라 나에 대한 신뢰감은 무너지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그들을 더 이상 치료할 수가 없어요. 그들의 명단을 밝힐 수는 없습니다.” 그는 피로에 지쳐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앤젤리는 묵묵히 주드를 내려다보다가 잠시 뒤 물었다. “사람들이 작당을 해서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을 뭐라고 하지요 ? ” “편집광이라고 하지요.” 주드는 앤젤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은 설마 나를……” “내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앤젤리가 말했다. “내가 지금 그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당신이 주장하는 말을 해댄다고 가정해서, 당신이 내 의사라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 ” 주드는 도려내는 듯한 아픔에 눈을 감았다. 앤젤리의 말이 계속되었다. “이만 실례해야겠습니다. 맥그리비가 기다릴 테니까.” 주드가 눈을 떴다. “잠깐……기회를 준다면 내 이야기가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볼 수가 있어요.” “어떻게 ? ” “나를 노리고 있는 자는 다시 한 번 시도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누군가가 나와 함께 있어 주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이번에 그 자가 일을 저지르려 할 때 체포할 수가 있을 게 아닙니까 ? ” 앤젤리는 주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스티븐스 씨, 만일 정말로 누가 당신을해치려고 한다면 세계의 모든 경찰을 집결시켜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겠지요. 이곳에서 어려우면 다른 장소에서 합니다. 당신이 왕이든 대통령이든 보통 시민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목숨이란 가는 실오라기 같은 겁니다. 순간적인 충격에 뚝 끊어지고 말지요.” “아무것도 · 10· 경찰은 내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는 겁니까 ? ” “충고라면 할 수 있지요. 아파트의 문에 새로운 자물쇠를 설치하고, 창문은 단단히 닫아두십시오. 낯선 사람은 안에 들여놓아서는 안됩니다. 당신이 부탁한 물품이 아니면 배달부도 접근시켜서는 안되지요.” 주드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말랐다. “아파트에는 도어맨과 엘리베이터 보이가 있지요 ? ” 앤젤리가 말을 이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요 ? ” “도어맨은 10년 전부터 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엘리베이터 보이도 8년은 됐지요. 둘 모두 믿을 만합니다.” 앤젤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다행이군요. 두 사람에게 주변을 잘 살펴달라고 하십시오. 그들이 경계를 잘 해준다면 당신의 아파트로 침입해 들어가는 건 힘듭니다. 진료소는 어떤가요 ? 새로운 접수 직원을 고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 주드는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캐롤의 의자에 앉아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밑도끝도없는 노여움이 끓어올라왔다.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남자를 앉힐 수도 있는 일이지요.” “생각해 보겠습니다.” 앤젤리는 나가려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망설이듯 말했다.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뭔데요 ? ” 주드는 자기의 목소리가 지푸라기에라도 매달리듯 하는 허약함에 스스로 환멸을 느꼈다. “맥그리비의 짝을 쏘아 죽였다는 그 사람……” “지프렌 말입니까 ? ” “그 사람은 정말 정신이상이었나요 ? ” “물론이지요. 정신이상의 범죄인을 수용하는 매트원 주립병원에 수용되었습니다.” “수용되고 나서 당신을 원망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 사람에 관해서 조사를 해보겠습니다. 탈주를 했는지, 아니면 석방이 됐는지. 내일 오전중에 나에게 전화를 걸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주드는 정말 고마웠다. “직무상의 일일 뿐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 사건에 관계한 것이 사실이라면 맥그리비를 도와 당신을 체포할 수밖에 없겠지요.” 앤젤리는 걸음을 옮기다 말고 말을 이었다. “맥그리비에게는 내가 지프렌을 조사한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그러지요.” 두 사람은 미소를 나누었다. 앤젤리는 떠났다. 주드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날 아침의 상황이 암울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더욱 암울했다. 그 어떤 것이 아니었다면 주드는 이미 체포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어떤 것이란 맥그리비의 성격이었다. 맥그리비는 끈질기게 복수를 꾀하고, 그것을 절대 확실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증거를 갖추려 하는 것이다. 그 뺑소니가 단순한 사고일 수 있을까 ? 길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리무진은 잘못 미끄러져 실수로 그를 칠 수도 있다. 하지만 왜 헤드라이트를 끄고 달려왔을까 ? 그리고 그 차는 어디에 있다가 갑자기 나타났을까 ? 그는 암살자의 짓이라는 확신을 굳혔다 · 10· 암살자는 다시 시도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잠에 떨어졌다. 이튿날 아침 일찍, 피터와 노라 부부가 병원으로 주드를 문병왔다. 아침 뉴스에서 사건을 안 것이다. 피터는 주드와 같은 나이로, 주드보다는 체구가 작고 깡마른 사람이다. 피터와 주드는 같은 네브래스카 주 출신인데다가 함께 의과대학을 졸업한 절친한 친구였다. 한편, 그의 아내 노라는 영국인이었다. 금발의 오동통한 몸매, 5피트 3인치(약 160··)의 키로는 지나치게 크고 부드러운 가슴을 갖고 있었다. 쾌활하고 붙임성이 있어서, 누구라도 그녀와 5분 동안만 이야기를 나누면 오랜 친구처럼 느끼게 된다. “지독하군.” 피터는 주드의 상태를 눈여겨 보며 말했다. “환자 다루듯 하지 말게나, 의사 선생.” 주드는 두통이 거의 사라지고, 몸의 통증도 밤새에 많이 가신 것 같았다. 노라는 카네이션 꽃다발을 주드에게 안겨주었다. “꽃 갖고 왔어요.” 그녀는 허리를 굽혀 그의 볼에 키스를 했다. “어떻게 된 일인가 ? ” 피터가 물었다. 주드는 약간 망설였다. “뺑소니 사고라네.” “언짢은 일은 꼬리를 무는 법이지. 캐롤에 관한 건 신문에서 읽었네.” “무서운 일이에요.” 노라가 말했다. “난 캐롤이 좋았는데.” 주드는 목이 메는 것을 느꼈다. “나도 그랬답니다.” “범인은 잡힐 것 같던가 ? ” 피터가 물었다. “경찰이 수사중이니까.” “조간신문에서 맥그리비 경사가 말하기를 곧 체포할 단계에 와 있다고 했더군. 자네는 짚이는 데가 없나 ? ” “조금은.” 주드는 건성으로 말했다. “맥그리비가 정보를 알려주거든.” “이런 경우가 돼서야 경찰이 고맙다는 걸 알게 되거든요.” 노라가 말했다. “해리스 선생이 자네의 X레이 사진을 보여주더군. 타박상은 있지만, 뇌진탕은 별것이 아니더군. 2。3일이면 나갈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주드는 그렇게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그들은 캐롤 로버츠에 대한 애기를 의식적으로 피하면서 30분 가량 이야기를 나누었다. 피터와 노라는 존 핸슨이 주드의 환자였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맥그리비는 그 사실을 신문에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해들리 내외가 돌아가려 했을 때, 주드는 피터에게만 할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다. 노라가 병실 밖으로 나가자 주드는 피터에게 해리슨 버크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미안한걸.” 피터가 말했다. “버크를 자네에게 보냈을 때 나도 증상이 심각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네. 하지만 자네가 치료를 맡으면 늦지는 않을 줄 알았지. 사실이 그렇다면 정신병원에 보낼 수밖에. 언제 보낼 참인가 ? ” “내가 퇴원하면 곧.” 주드는 그렇게 말했으나 그건 진심이 아니었다. 그로서는 아직 해리슨 버크를 다른 곳으로 보낼 생각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버크가 두 살인사건을 저질렀는가의 여부를 밝혀야 했던 것이다. “뭐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거든 전화 주게나.” 그렇게 말하고 피터는 물러갔다. 주드는 모로 누운 채 다음 행동에 관해서 생각을 했다. 그를 살해할 이렇다 할 동기를 가진 자가 없는 한, 두 번의 살인을 저지른 범인은 정신적 균형을 잃은 자, 또는 그에 대해서 제멋대로 원한을 품은 자라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에 부합되는 것이 해리슨 버크와 맥그리비의 동료를 살해한 에이모스 지프렌 두 사람이다. 만일 버크에게 해리슨이 살해되던 날 아침의 알리바이가 없다면 앤젤리 형사에게 그 점을 귀뜀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일 버크에게 알리바이가 성립된다면 지프렌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면 된다. 주드를 감싸고 있던 우울한 기분이 한결 가시는 것 같았다. 그는 그제야 뭔가 잡힐 것 같았다. 그리고 갑자기 병원에서 뛰쳐나가고 싶어졌다. 주드는 벨을 누르고 간호사를 불러, 속히 해리스 선생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1분 뒤 세이머 해리스가 병실로 왔다. 그는 밝은 청색 눈을 가진, 몸집이 작은 남자로 곱슬거리는 검은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주드가 그를 안 지는 오래 되며, 또한 존경하는 의사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허, 잠자는 미녀가 잠을 깼구먼. 고생이 많은걸.” 주드는 그 말에는 신물이 났다. “기분은 좋은 편이라네.” 그는 거짓말을 했다. “퇴원을 해야겠는데……” “언제 ? ” “지금 곧.” 해리스 의사는 나무라는 눈으로 주드를 바라보았다. “입원한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 2。3일 푹 쉬게나. 애교 만점의 간호사를 두서너 명 붙여주지.” “고맙네, 세이머. 하지만 정말로 퇴원을 해야 할 일이 있어.” 해리스 의사는 한숨을 쉬었다. “할 수 없지. 자네도 의사니까. 나라면 그런 상태로는 쏘다니지 않을 텐데.” 그는 진지한 눈으로 주드를 바라보았다. “뭐, 내가 도움이 될 일은 없겠나 ? ” 주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간호사에게 자네 옷을 갖고 오라고 하겠네.” 30분 뒤, 접수대의 여자가 그를 위해 택시를 불러주었다. 주드는 10시 15분에 진료소에 도착했다. 제 6 장 첫번째 환자 테리 워시번이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테리는 20년 전에 할리우드에서 이름을 날린 스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스타로서 누리던 자리는 하룻저녁에 무너져 내려, 그녀는 오레곤 주의 목재업자와 결혼해서 은막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 뒤로도 테리는 대여섯 번이나 결혼을 했었는데, 지금은 새 남편인 수입업자와 뉴욕에서 살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못마땅한 얼굴로 복도를 걸어오는 주드를 지켜보고 있었다. “도대체……” 그녀는 입을 열었지만 말끝을 흐렸다.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반복했던 비난의 말이 그의 얼굴을 보자 꼬리를 감추고 만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 ” 그녀가 물었다. “마치 트럭에 부딪친 모습이네요.” “하찮은 사고였습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그는 열쇠를 돌려 문을 열고는 접수실로 안내했다. 주인이 없는 캐롤의 책상과 의자가 그의 눈악에 있었다. “캐롤에 관한 건 신문에서 읽었어요.” 테리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흥분이 되어 있었다. “섹스 살인이었나요 ? ” “아닙니다.” 주드는 간단히 대꾸했다. 그는 진료실의 문을 열면서 말했다. “10분 정도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진료실로 들어가서 탁상 달력을 보면서 그날의 예약을 취소하기 위해 환자들의 전화번호를 돌리기 시작했다. 주드는 움직일 때마다 가슴과 팔에 통증을 느꼈다. 다시 머리가 아파 왔다. 그는 서랍에서 진통제를 꺼내어 물과 함께 삼켰다. 그리고 나서야 대기실로 통하는 문을 열고 테리를 들어오게 했다. 그는 모든 번거로움을 마음속에서 털어버리고 50분 동안을 테리의 문제에만 집중하려고 애썼다. 그녀는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스커트 자락을 살짝 무릎 위로 올리고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20년 전 눈이 부실 정도의 미인이었던 테리 워시번은 아직도 그 흔적을 지니고있었다. 그녀는 주드가 만난 여성 중에 가장 크고, 가장 부드러우며, 가장 맑은 눈을 갖고 있었다. 관능적인 입언저리에는 몇 가닥의 주름이 있었지만 매혹적인 느낌은 그대로였으며, 꽉 몸에 달라붙는 푸치 무늬의 드레스 아래의 가슴은 풍만하고 단단해 보였다. 주드는 실리콘 주사로 부풀린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녀가 그런 말을 하기 전까지는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하여간 그녀의 몸매는 아름답고 그 각선미는 보통이 아니었다. 주드에게 여성환자는 치료기간 중 때때로 그를 사모하고 있는 눈치를 보일 때가 많았다. 환자와 의사라는 관계에서, 환자 · 보호자 · 연인으로의 자연적인 감정의 변화과정이다. 하지만 테리의 경우는 달랐다. 그녀는 처음 그의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주드와 관계를 가지려 했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그를 유혹하려 했는데, 그녀는 그런 수법에 능란했다. 마침내 주드는 그녀에게 경고를 했다. 삼가지 않으면 다른 의사에게 보내겠다고 말이다. 그 이후, 그녀는 얼마간 삼가는 듯했다. 하지만 세심하게 그를 관찰하며 그의 아킬레스건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눈치였다. 테리를 소개한 것은 저명한 영국의 내과의사였는데, 그것은 그녀가 앙티브(모나코에 가까운 지중해 연안의 소도시)에서 국제적인 스캔들을 일으킨 뒤의 일이었다. 프랑스의 어느 가십 기자는, 테리가 약혼중인 그리스 굴지의 해운업자와 요트로 주말여행을 했었는데, 배의 주인인 해운업자가 사업상의 일로 하룻동안 로마를 다녀오는 사이에 그의 형제 셋과 침대를 같이 했다고 써댔다. 이 가십은 곧 취소가 되고, 그 기자는 쥐도새도 모르게 해고되었다. 하지만 테리는 첫번 면담에서 그 소문은 사실이었다고 자랑을 했다. “어쩔 수가 없다니까요.” 그녀는 말했다. “난 늘 섹스가 필요한걸요. 나에겐 늘 채워지질 않아요.” 그녀는 양손으로 허리를 만지작거리며 스커트를 치켜올리고는 주드를 훔쳐보았다. “내 말 아시겠어요 ? ” 그녀가 물었다. 그 첫번 면담 이래 주드는 차츰 테리에 관한 신상명세를 보다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그녀는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탄광촌에서 태어났다. “우리 아버지는 골이 빈 폴란드인이었지요. 즐거움이라곤 토요일마다 위스키와 맥주를 섞어 마시고는 엄마를 두들겨패는 일이었어요.” 그 무렵 13살의 테리는 여자의 육체와 천사의 얼굴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광부와 숲속으로 가면 50센트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일을 눈치챈 아버지는 어느 날 그들의 통나무집으로 달려들어와 폴란드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욕지거리를 하며테리의 어머니를 쫓아냈다. 그는 문에 자물쇠를 채우고는 허리띠를 풀어 테리를 매질했다. 그리고는 딸을 범했다. 주드는 침상에 누워 그때의 이야기를 떠벌이는 테리를 지켜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것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본 마지막이었어요.” “가출을 했군요.” 테리는 놀라며 상반신을 그에게로 돌렸다. “뭐라고요 ? ” “아버지에게 당한 것이 · 10· ” “서러워서 집을 나왔다는 건가요 ? ” 테리는 픽 웃었다. “나는 그거라면 아무와라도 좋아요. 엄마가 나를 쫓아낸 거예요.” 주드는 테이프 레코더의 스위치를 넣었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요 ? ” 그가 물었다. “섹스요. 당신이 왜 그렇게 목석인지 정신분석을 해보면 어떨까 몰라.” 주드는 그 말을 무시했다. “어째서 캐롤의 죽음이 성적폭행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요 ? ” “나는 무슨 일에도 섹스를 악세워 생각해요.” 그녀는 몸을 꼬았다. 스커트가 한결 위로 올라갔다. “스커트를 내리십시오, 테리.” 그녀는 시침을 떼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 10· 토요일 밤, 멋진 생일 파티가 있었어요, 선생님.” “그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그녀는 주저주저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여느 때와는 달리 근심 어린 무엇이 깃들어 있었다. “나를 싫어하면 안돼요.” “악서도 말했지만 나의 시인은 필요없습니다. 오로지 하나 필요한 것은 당신 자신의 시인입니다. 옳다거나 틀렸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게임을 하기 위해 우리 자신이 만든 규칙에 지나지 않습니다. 규칙이 없이는 게임이 되지가 않으니까요.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 10· 규칙이란 인위적인 것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유쾌한 파티였어요. 우리 집 양반이 6중주단을 고용했었지요.” 그는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몸을 비틀어 주드를 바라보았다. “정말 나를 경멸하기 없기예요 ? ” “나는 당신을 도와드리는 입장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남부끄러운 일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런 행위를 계속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녀는 주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소파에 반듯이 누웠다. “선생님께 이야기 안했나 ? 남편 해리는 불능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들은 적 있습니다.” 그녀는 가끔 그런 말을 했었다. “결혼 이래 만족해 본 적이 없어요. 남편은 늘 뭐라 뭐라 구실을 만들거든요……그래서……” 그녀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그래서……토요일 밤, 나는 해리가 보는 악에서 밴드의 남자들과 뒨굴었지요.”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주드는 테리에게 휴지를 몇 장 건네주고는 지켜보았다. 지금까지 테리 워시번에게 부당한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자는 없었다. 처음으로 할리우드에 나온 테리는 드라이브 인 식당의 웨이트리스 일자리를 얻었고, 보수의 거의 전부를 털어 3류급 연극 코치에게 다녔다. 1주일도 되기 전에 코치는 그녀를 집으로 끌어들여 식모 부리듯 하고는 해준 것이라는 침실에서의 코치가 고작이었다. 몇 주가 지나자 그에게 연극 일을 알선해 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안 그녀는 코치의 집을 나와 비벌리 힐스의 어느 호텔 드러그 스토어의 경리가 되었다. 어느 영화사의 촬영부장이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잊고 있던 아내에게 줄 선물을 사러 들렀다. 테리를 뜯어본 그는 그녀에게 명함을 주고 나중에 전화를 걸라고 했다. 테리는 일주일 뒤에 스크린 테스트에 합격했다. 그녀는 영리하지도 못하고 훈련을 받지도 못했지만, 두 가지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굉장한 미모와 스타일, 그리고 기가 막히게 카메라를 잘 받아 촬영부장은 그녀를 고용하기로 한 것이다. 테리 워시번은 그 해에 10편의 영화에 단역으로 나갔다. 그녀에게로 팬레터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차츰 배역도 급수가 올라갔다. 1년이 지났을 때 그녀의 은인이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테리는 회사에서 자기를 내쫓을지 모른다고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새로운 부장은 그녀를 불러 그녀를 위한 큼직한 기획이 있음을 알렸다. 그녀는 새로운 계약서에 서명했고, 보수가 올라가 거울이 달린 침실이 있는 넓은 아파트에 살 수 있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관객들이 일부러 테리 워시번의 신작을 보기 위해 영화관을 메울 정도로 인기가 올라가자, 그녀는 어느덧 A급 주연 여배우로 발돋움했다. 그 화려했던 한때는 이미 먼 옛날의 이야기이다. 소파에 누워 울음을 삼키고 있는 눈악의 그녀를 보고 주드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물을 마시겠습니까 ? ” 그가 물었다. “아뇨.” 그녀는 말했다. “괜찮아요.” 그리고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코를 풀었다. “용서하세요. 나 정말 바보죠 ? ”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주드는 조용히 의자에 앉은 채 그녀가 마음을 가라앉히기를 기다렸다. “나는 어째서 해리 같은 남자와 결혼했을까요 ? ” “그건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라고 생각합니까 ? ” “내가 어떻게 알아요 ! ” 테리가 외쳤다. “당신은 의사가 아닌가요 ? 그런 남자인 줄 알고도 내가 결혼한 걸로 생각하시나요 ? ” “글쎄요.” 그녀는 놀란 얼굴로 주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생각하는군요.” 그녀는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개새끼 ! 내가 정말 좋아서 악단놈과 놀아났다고 생각하는 거야 ? ” “아닙니까 ? ” 테리는 벌컥 화를 내며 꽃병을 집어 주드에게로 내던졌다. 꽃병은 테이블에 맞아 산산조각이 났다. “이젠 알 만해요 ? ” “모르겠군요. 그 꽃병은 200달러 준 겁니다. 청구서에 합산을 하겠습니다.” 테리는 맥이 풀린 눈으로 주드를 바라보았다. “내가 정말 그런 짓 하기를 좋아하는 걸까요 ? ”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스스로 대답을 해보십시오.” 그녀의 목소리는 더욱 작아졌다. “무슨 병이 틀림없어요.” 그녀는 말했다. “그래요. 병이라고요. 나를 도와줘요, 주드. 도와달라고요 ! ” 주드는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내가 당신을 도와주는 일에 협력해 주셔야 합니다.” 테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돌아가거든 당신이 어떻게 느끼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짓을 하고 있는 동안이 아니라 하기 전에 말입니다. 그것을 알면 당신 자신을 잘 알게 될 겁니다.” 테리는 잠시 동안 그를 그윽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이부드러워졌다.그녀는손수건으로다시코를풀었다.“선생님은 멋진 분이세요.” 그녀는 핸드백과 장갑을 챙겼다. “그럼 내주에 또 와야죠 ? ” “예, 내주에 오십시오.” 주드는 복도로 통하는 문을 열었고 그녀는 나갔다. 그는 테리의 문제에 관한 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했다. 사랑이란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낌없이 주어지는 것이라는 걸 배울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어지게 되기까지는 사랑이란 속속들이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때가 올 때까지 테리는 그녀가 갖고 있는 유일한 화폐 · 10· 육체로써 사랑을 사려고 할 것이다. 주드는 테리가 빠져 있는 고뇌와 끝간데를 알 수 없는 절망적인 자기 증오를 짐작하고는 그녀에게 동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도와주는 유일한 길은 그녀에 대하여 사사로운 감정에 흐르지 않는 냉정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주드는 환자들이 그가 거만을 떨며 올림포스 산의 꼭대기에 앉아 지혜를 내려주는 것처럼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외견상의 태도도 치료의 중요한 일부인 것이다. 실제로는 그는 환자들의 문제를 깊이 마음속에 아로새기고 있는 것이다. 환자들이 알 턱은 없지만, 주드는 가끔 무서운 악마들이 환자의 감정과 성곽을 두드려 부수려 하는 악몽을 꾸었다. 주드는 정신과 의사로 개업한 뒤에, 정신분석 전문의가 되기 위해 필요한 2년간의 분석실습기간을 보냈는데, 최초의 6개월 동안은 심한 두통에 시달렸었다. 감정유입에 의해 환자의 증상이 그에게 고스란히 옮겨 오기 때문이었다. 감정적인 영향을 조절할 수 있을 때까지는 거의 1년이 걸렸다. 테리 워쉬번의 테이프를 치우자 주드의 머리는 곧 자기자신의 문제로 채워졌다. 그는 전화기 쪽으로 가서 19분서의 번호를 물었다. 다이얼을 돌리자 분서의 교환은 요청하는 대로 수사부에 연결해 주었다. 맥그리비의 깊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맥그리비 경사입니다.” “앤젤리 형사를 부탁합니다.” “기다리십시오.” 주드는 맥그리비가 수화기를 놓는 소리를 들었다. 곧 앤젤리가 전화를 바꾸었다. “앤젤리 형사입니다.” “주드 스티븐스입니다. 알아보셨나요 ? ” 한 순간 망설이는 듯한 기미가 엿보였다. “조사해 보았습니다.” 앤젤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예, 아니오로만 대답해 주시면 됩니다.” 주드의 가슴이 설。다. 그는 과감하게 다음 질문을 했다. “지프렌은 병원에 있던가요 ? ” 앤젤리가 대답을 하기까지의 시간이 무한정 길게 느껴졌다. “있더군요.” 실망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아, 그렇군요.” “안됐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주드는 조용히 수화기를 놓았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해리슨 버크뿐이다. 해리슨 버크는 모든 사람이 자기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 믿고 있는 구제불능의 편집광이다. 과연 버크는 ‘적’에게 선수를 친 것일까 ? 존 핸슨은 월요일 오전 10시 50분에 주드의 진료소를 나가 몇 분 뒤에 살해되었다. 그때 해리슨 버크가 주드의 진료소에 있었는지 아닌지를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버크의 회사 전화번호를 돌렸다. “국제철강회사입니다.” 자동응답기와도 같은 냉랭한 목소리였다. “해리슨 버크 씨를 부탁합니다.” “해리슨 버크 씨라고 하셨지요 ? ……알겠습니다……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주드는 버크의 비서가 전화를 받아주기를 빌었다. 만일 비서가 자리를 떠서 버크가 직접 받는다면…… ? 여자의 목소리가 말했다. “버크 씨 방입니다.” “주드 스티븐스 의사입니다. 좀 알아볼 일이 있어서.” “네, 스티븐스 선생님.” 그녀의 목소리는 안도와 걱정이 뒤섞인 그런 것이 되었다. 주드가 버크의 정신분석 담당의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주드가 도와주리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 혹시 버크는 비서도 못살게 구는 것은 아닐까 ? “버크 씨의 청구서 말입니다만……” “청구서 ? ” 그녀는 실망을 말소리에서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주드는 그대로 말을 계속했다. “접수실 직원이 자리를 비우게 되어 장부를 정리하는 중에 있습니다만, 접수 장부의 버크 씨 난에 지난 월요일 9시 30분 예약으로 기입이 되어 있더군요. 버크 씨 달력의 월요일 아침 부분을 살펴봐 주시겠습니까 ? ” “기다리세요.” 비서의 목소리에는 불만의 빛이 역력했다. 주드는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윗사람은 정상이 아닌데 의사라는 자는 금전에 관한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2。3분 뒤에 목소리가 말했다. “그곳 접수 장부의 잘못이라고 생각됩니다, 스티븐스 선생님.” 그녀는 차가운 소리로 말했다. “버크 씨는 월요일 아침에는 진료소에 갈 예정이 없었습니다.” “확실합니까 ? ” 주드는 물고 늘어졌다. “접수 장부에는 그렇게 기입이 돼 있는데 · 10· 9시 30분으로 · 10· ” “장부에 어떻게 적혀 있던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녀는 주드의 태도에 화를 내고 있었다. “버크 씨는 월요일 오전 내내 중역회의에 참석하셨습니다. 회의는 8시에 시작했지요.” “도중에 한 시간 가량 빠져나올 수도……” “그렇지가 않아요. 버크 씨는 그날 한 번도 외출한 적이 없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제 비난이 섞여 있었다. ‘버크 씨는 병을 앓고 있단 말예요. 그걸 고쳐 줄 생각은 하지도 않고.’ “전화를 연결해 드릴까요 ? ”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주드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는 그녀를 안심시키고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보태고 싶었지만 할말이 없었다. 그는 전화를 끊었다. 그랬구나. 그는 3진을 먹은 것이다. 그를 죽이려 한 자가 지프렌도, 해리슨 버크도 아니라면 · 10· 달리 동기를 가질 만한 사람이 없다. 주드는 출발점으로 되돌아갔다. 어떤 사람이 · 10· 또는 일단의 사람들이 그의 접수 직원과 환자 중 한 사람을 죽였다. 뺑소니는 계획적이었는지 모르지만, 우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는 계획적인 것으로 생각이 되었었다. 어쨌거나 돌이켜보면 주드는 며칠 동안의 일로 흥분돼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대단히 감정적인 상태 속에서 그가 단순한 사고를 흉악한 음모로 지레짐작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는 그를 죽일 어떤 동기를 갖고 있는 자는 전혀 없는 것이다. 환자와의 관계는 극히 원만하며, 친구들과의 사이도 틀어진 적은 없다. 그가 기억하는 한 누구를 다친 적도 없다. 전화벨이 울렸다. 저음의 다소 허스키한 목소리여서 그것이 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쁘세요 ? ” “아니, 별로.” 그녀의 목소리는 걱정스러운 빛을 띠고 있었다. “신문에서 다치셨다는 기사를 읽었어요. 좀더 빨리 전화를 했어야했는데, 어디로 연락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고 해서 · 10· ” 주드는 일부러 경쾌하게 말했다. “대수롭지 않습니다. 교통규칙을 어긴 벌이지요.” “신문에는 뺑소니라고 나와 있던데요.” “그렇습니다.” “도망친 사람은 아시나요 ? ” “아뇨. 아마 술취한 사람이었겠지요.” ‘검은 리무진에 라이트도 끄고 있었답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 ” 이질문에주드는뒤통수를얻어맞은기분이되었다.“그게 무슨 뜻이지요 ? ” “잘은 모르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자신이 없었다. “그냥 · 10· 캐롤 일도 있고 해서. 그런데 이번에는 · 10· ” 그렇다면 그녀도 그런 의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미치광이가 득실거리는 것 같아요.” “경찰이 잡겠지요.” “선생님에게는 위험이 없나요 ? ” 그는 마음이 푸근해짐을 느꼈다. “물론 없지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그것을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호의에 찬 전화를 환자의 위로 이상의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앤은 대상이 누구든 불행을 겪은 사람에게는 전화를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타입인 것이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금요일에는 오실 수 있는 거죠 ? ” 그가 물었다. “네.” 그녀의 목소리에 미묘한 여운이 섞였다.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닐까 ? “약속한 겁니다.” 그는 다급하게 다짐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물론 이성간의 약속일 수는 없다. 진료를 위한 약속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안녕히 계세요, 스티븐스 선생님.” “안녕히, 블레이크 부인. 전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전화를 끊고 나서 한동안 앤에 관해서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은 자기가 얼마나 행운의 사나이인가를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과연 앤의 남편은 어떤 사람일까 ? 그녀가 남편에 관해 이야기한 단편적인 사항들에서 주드는 매력이 넘치고 사려깊은 남성의 이미지를 상상하고 있었다. 스포츠맨에다가 밝고 뛰어난 사업가이며, 예술을 위해 돈을 기부하고 있다. 주드가 친구로 삼고 싶은 그런 타입의 인물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 10· 만일 사정이 지금과 달랐다면 말이다. 앤이 갖고 있는 문제란 도대체 무엇일까 ?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꺼려야 할 문제 · 10· 아니, 정신분석 의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문제가 무엇일까 ? 앤과 같은 성격의 여자에게 있어서는 결혼 전 또는 결혼 뒤의 연애가 아마도 큰 죄악감으로서 마음을 압박할 것이다. 그는 경솔하게 바람을 피우는 앤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앤은 금요일에야 주드에게 털어놓을지 모른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만나기로 한 금요일에는. 오후의 시간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주드는 예약을 취소할 수 없었던 몇 명의 환자를 만났다. 마지막 환자가 돌아가자, 그는 해리슨 버크의 면담 테이프를 틀고 이따금 메모를 하면서 들었다. 그것이 끝나자 그는 테이프 레코더의 스위치를 껐다. 할 수 없는 일이다. 내일 아침, 버크의 상태를 회사의 사장에게 통고해야겠다고 주드는 생각했다. 창밖으로 시선을 보내자, 그는 이미 해가 진 것을 보고 놀랐다. 벌써 8시에 가까웠다. 제정신으로 돌아간 그는 피로를 느꼈다. 늑골 언저리가 묵직하고 가슴이 뻐근하게 아팠다. 그는 아파트로 돌아가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드는 테이프를 모두 챙기고 버크의 테이프만은 옆 테이블 서랍에 넣고 잠갔다. 재판소가 임명한 정신과 의사에게 넘겨주기 위해서다. 그가 오버를 걸치고 막 방에서 나가려 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되돌아와 수화기를 들었다. “스티븐스입니다.” 상대는 말이 없었다.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여보세요 ? ” 역시 응답이 없었다. 주드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잠시 서 있었다. 번호를 잘못 돌린 것이 아닐까 · 10· 그렇게도 생각해 보았다. 진료소의 전기 스위치를 끄고, 문을 잠근 다음 그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른 방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은 벌써 퇴근을 한 모양이다. 밤에 일하는 청소부가 오기에는 아직 시간이 이르고, 빌딩 안에는 야간 경비원인 비젤로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주드는 엘리베이터에 다가가서 단추를 눌렀다. 엘리베이터의 표시판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다시 한 번 단추를 눌렀다. 변화가 없었다. 그때 복도의 전깃불이 일제히 나갔다. 제 7 장 주드는 엘리베이터 악에 서 있었다. 암흑의 파도가 그를 둘러쌌다. 심장의 박동이 느려지다가는 빨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본능적인 공포감에 휩싸인 그는 주머니를 뒤져 성냥을 찾았다. 그리고 성냥갑을 진료소에 놔두고 나온 것을 깨달았다. 아래층에는 전기가 들어와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조심스럽게 그는 계단으로 통하는 문 쪽으로 이동했다. 그는 문을 밀어 열었다. 계단은 캄캄했다. 그는 난간을 잡고 암흑의 밑바닥을 향해 내려갔다. 저 아래쪽에서 손전등의 불빛이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계단을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주드는 마음이 놓였다. 경비원인 비젤로일 것이다. “비젤로 ! ” 그는 외쳤다. “비젤로 ! 나 스티븐스라고 ! ” 그의 고함은 돌벽에 퉁겨져 계단 아래위로 울려퍼졌다. 손전등을 가진 사람은 아무런 대꾸 없이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누구야 ? ” 주드가 물었다. 거기에 대답한 것은 울림으로 돌아오는 그의 목소리뿐이었다. 주드는 갑자기 상대가 누구라는 것을 알았다. 암살자다. 암살자는 적어도 두 사람이 틀림없었다. 한 사람이 지하실의 전원을 끊고, 또 한 사람은 그가 도망가지 못하게 계단을 봉쇄한 것이다. 손전등 빛은 2층에서 3층에 이르자 신속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드는 공포로 인해 식은땀이 흘렀다. 심장은 터질 듯 두근거렸으며, 발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주드는 곧 원래의 층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계단의 문을 연 채로 귀를 기울였다. 캄캄한 복도에 누가 숨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계단을 달려 올라오는 발소리가 한결 크게 들렸다. 주드는 입안이 타는 것을 느끼며 칠흑의 복도로 나아갔다. 엘리베이터 있는 곳까지 와서 그는 각 방의 문의 수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그의 방까지 도달했을 때, 계단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열쇠가 그의 떨리는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정신없이 바닥을 더듬어 열쇠를 찾아서는 접수실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이중으로 자물쇠를 채웠다. 이제 특별한 열쇠가 없이는 아무도 열지를 못한다. 밖에서 복도를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주드는 안쪽의 방으로 들어가 조명 스위치를 눌렀으나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빌딩 전체의 전기가 나간 것이다. 그는 접수실로 통하는 문에 자물쇠를 채우고 더듬더듬 전화기의 다이얼을 돌렸다. 벨소리가 길게 세 번 울리고 교환이 나왔다. 바깥 세계와의 유일한 연결로였다. 주드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교환 ! 급한 일이오. 나는 주드 스티븐스 의사. 19분서의 프랭크 앤젤리 형사를 부탁합니다. 급해요.” “알겠습니다. 당신의 번호는 ? ” 주드는 번호를 말했다.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누군가가 안쪽 방의 복도로 통하는 문을 달가닥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문의 바깥쪽으로는 손잡이가 없으므로 그리로 침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환, 빨리 ! ” “조금만 기다리세요.” 냉정한, 그리고 느릿한 목소리가 말했다. 마침내 다시 전화벨이 울리고 경찰의 교환이 나왔다. “19분서입니다.” 주드의 마음은 설。다. “앤젤리 형사를 ! ” 그는 외쳤다. “급한 일이오 ! ” “앤젤리 형사 ? · 10· 잠시 기다리십시오.” 바깥 복도에서는 계속 인기척이 났다. 주드는 낮은 말소리도 들었다. 다른 암살자와 합류한 것이다. 뭘 하려는 것일까 ? 귀에 익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앤젤리 형사는 지금 없습니다. 나는 동료인 맥그리비 경사입니다만. 여보세요 · 10· ” “주드 스티븐스입니다. 지금 진료실에 있습니다. 전기가 전부 나갔고, 누군가가 침입해서 나를 죽이려고 합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봐요, 선생.” 맥그리비가 말했다. “그러지 마시고 이리로 와서 이야기를……” “갈 수가 없어요 ! ” 주드가 거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가가 나를 죽이려 한다니까.” 상대방이 침묵했다. 맥그리비는 그를 믿지 못하고, 도와주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접수실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들은 접수실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 특별한 열쇠 없이는 문을 열 수가 없을 텐데 ? 하지만 주드는 그들이 진료실 문 쪽으로 가까이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맥그리비의 소리가 전화기를 흘러나왔으나 주드는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그는 수화기를 놓았다. 맥그리비가 달려온다고 해봤자 속수무책일 것이다. ‘목숨이란 가는 실오라기 같은 것입니다. 순간적인 충격에 뚝 끊어지고 말지요.’ 그를 감쌌던 공포가 격한 노여움으로 변했다. 그로서는 핸슨이나 캐롤처럼 무참히 살해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끝까지 싸워야 한다. 그는 어둠속에서 무기가 될 만한 것을 더듬어 찾았다. 재떨이……종이 자르는 칼……소용없었다. 암살자들은 권총을 갖고 있을 것이다. 마치 카프카의 악몽 같았다. 그는 까닭도 모른 채 얼굴을 알 수 없는 집행인의 처형을 받으려 하고 있다. 그들이 더욱 가까이 진료실의 문에 다가서는 기색이 엿보였다. 그는 자기의 목숨이 이제 1。2분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이상할 정도로 냉정하게, 마치 환자라도 대하듯 그는 최후에 다다른 스스로의 심리를 관찰했다. 앤이 머리에 떠오르고, 뼈아플 정도의 상실감이 마음을 채웠다. 그는 환자들에 대한 것, 그들이 얼마나 자기를 필요로 하고 있는가를, 그리고 해리슨 버크를 생각했다. 버크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켜야 한다는 말을 그의 사장에게 통고해 주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그 테이프를 꺼내 놓아야 했는데……그의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 싸울 무기가 있다 ! 주드는 문의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으나 견고한 것은 아니었다. 금방 부서질 것이다. 주드는 버크의 테이프를 넣어둔 책상 쪽으로 더듬어 갔다. 문에 압력이 가해져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자물쇠가 덜커덩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어째서 부숴버리지를 않을까 ? 그는 의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 거기에 대한 응답은 상당히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걸 생각해 볼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떨리는 손가락 끝으로 그는 테이프가 들어 있는 서랍의 자물쇠를 열었다. 그리고 서둘러 상자에서 테이프를 꺼내어 테이프 레코더에 걸었다. 막연한 희망이었으나 그것이 유일한 기회였다. 주드는 정신을 집중해서 버크와 했었던 정확한 대화를 생각해 내려고 했다. 문에 걸리는 압력이 드세졌다. 그는 급히 기도라도 드리듯 입속에서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정전인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어 소리를 내어 말했다. “곧 불이 들어올 겁니다, 해리슨 씨. 그대로 누워 계십시오.” 문에서 나는 소리가 갑자기 끊겼다. 주드는 테이프 레코더에 테이프를 완전히 장치했다. 그리고 ‘ON’의 단추를 눌렀다. 테이프는 돌아가지 않았다. 빌딩 전체의 전기가 나갔으니 당연한 일이다. 다시금 자물쇠를 건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절망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예, 그렇게 누워 계십시오.”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마음을 편안히 가지시고.” 그는 테이블 위를 더듬어 성냥을 찾아 불을 켰다. 불꽃을 레코더에 가까이 대보니 ‘축전지’라는 글씨가 인쇄된 스위치가 보였다. 그는 그 스위치를 젖히고 다시 ‘ON’을 눌렀다. 그 순간 찰칵 소리가 나고 문의 자물쇠가 열렸다. 그의 마지막 방위선이 돌파된 것이다 ! 그때 버크의 목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그런 말밖에 할말이 없소 ? 당신은 내 증거라는 것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아. 당신도 그들과 한패거리인지도 모르지.” 주드는 벌떡 일어나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심장은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건 당신도 알 텐데.” 테이프 속의 주드의 목소리가 말했다. “나는 당신편입니다. 당신을 도우려는 것입니다……증거라는 걸 이야기해 보십시오.” “놈들은 어젯밤 우리 집에 침입했소.” 버크의 목소리가 말했다. “나를 죽이러 온 거지. 하지만 내가 더 영리했소. 서재에서 잠을 자고, 문마다 특별한 자물쇠를 달아 놈들은 결국 나에게 접근을 할 수가 없었던 거지.” 접수실에서 나는 소리가 멎었다. 다시금 주드의 목소리가 말했다. “도둑의 침입을 경찰에 알렸습니까 ? ” “천만에 ! 경찰도 한패인걸. 나를 쏘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단 말이오. 하지만 사람이 있는 데에서는 그럴 수가 없지. 그래서 나는 사람들 틈에 있으려고 하는 거요.” “잘 알겠습니다.” “내 정보를 어찌할 셈이오 ? ” “나는 당신이 말하는 것은 빠짐없이 주의깊게 듣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은 모두 · 10· ” 그 순간 주드의 머릿속에 경보가 울렸다. 다음 말은 ‘이 테이프에’였다. 주드는 황급히 스위치를 껐다. “내 마음속에 담아두지요.” 주드가 소리내어 말했다. “한 가지 가장 좋은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거기에서 입을 다물었다. 다시 테이프를 틀 수는 없었다.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주드의 유일한 희망은 접수실에 있는 괴한들이 환자가 있다고 믿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믿는다고 해도 과연 단념할까 ? “이러한 예는 · 10· ” 주드는 다소 목소리를 높였다. “생각보다 많습니다, 해리슨 씨.” 그리고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왜 전기가 빨리 들어오지 않을까 ?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당신의 운전사도 무슨 일인가 해서 찾아 올라올 것 같군요.” 주드는 말을 끊고 귀를 기울였다. 문 저쪽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을 상의하고 있을까 ? 갑자기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리더니 가까워 왔다. 속삭이는 소리가 멎었다. 주드는 접수실의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였으나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아직 거기에 있는 것일까 ? 사이렌 소리는 한결 커졌다. 그리고 빌딩 악에서 멎었다. 동시에 전기가 들어왔다. 제 8 장 “마시지 않겠습니까 ? ” 맥그리비는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젓고는 찬찬히 주드를 관찰했다. 주드는 두 번째 스카치를 따랐다. 맥그리비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주드의 손은 그때까지도 떨리고 있었다. 위스키의 술기운이 돌면서 그는 차츰 안정을 되찾아갔다. 맥그리비는 전기가 들어온 지 2분 만에 진료실에 도착했었다. 함께 온 육중한 몸매의 부장형사는 의자에 앉아 수첩에 속기로 메모를 했다. 맥그리비가 말했다. “아까 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들려주시오, 스티븐스 선생.” 주드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되도록 차분한 목소리를 내어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진료소를 닫고 엘리베이터로 갔습니다. 그러자 복도의 전기가 한꺼번에 꺼졌지요. 나는 아래층에는 전기가 켜져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주드는 되살아나는 공포심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가 손전등을 들고 계단을 올라왔습니다. 내가 말을 걸었지요. 나는 경비원인 비젤로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누구였을까요 ? ” “아까도 말한 것처럼, 알 수가 없습니다. 상대방은 대꾸도 하지 않았으니까.” “어째서 그들이 당신을 죽이러 왔다고 생각 하셨습니까 ? ” 노기에 찬 말이 그의 입술 사이로 퉁겨져 나오려 했으나 그는 이를 악물었다. 맥그리비로 하여금 자기를 믿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들이 내 방까지 쫓아왔다니까요.” “두 사람이 당신을 죽이려 했다고 생각합니까 ? ” “적어도 두 사람입니다.” 주드는 말했다. “나는 그들이 소곤거리는 말소리도 들었습니다.” “당신은 접수실에 들어와서 복도로 통하는 바깥문을 걸어 잠갔다고 했습니다. 맞죠 ? ” “맞습니다.” “그리고 안쪽 진찰실로 들어와 접수실로 통하는 문에 자물쇠를 채웠다 ? ” “그래요.” 맥그리비는 접수실과 진찰실 사이의 문에 가까이 갔다. “그들은 이 문을 부수려고 했나요 ? ” “아뇨.” 주드가 대답했다. 그는 그때 그들이 그러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었던 일을 머리에 떠올렸다. “알겠습니다.” 맥그리비가 말했다. “접수실에서 복도로 통하는 문에 자물쇠를 채웠을 경우, 밖에서 문을 열려면 특별한 열쇠가 필요하겠지요 ? ” 주드는 망설였다. 그는 맥그리비가 그로 하여금 무슨 말을 하게 하려는지 짐작이 갔다. “맞습니다.” “그 열쇠를 갖고 있는 것은 누굽니까 ? ” 주드는 얼굴이 발개지는 것을 느꼈다. “캐롤과 납니다.” 맥그리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청소부는 어떻습니까 ? 그들은 어떻게 이 방에 들어오지요 ? ” “특별히 시간을 맞추어 놓고 있었습니다. 캐롤이 일주일에 세 번 일찍 출근해서 청소부를 안에 들어오게 합니다. 그리고 청소는 첫번째 환자가 오기 전에 끝납니다.” “그거 불편하군요. 왜 다른 사무실을 청소할 때 함께 하지 못하게 합니까 ? ” “이 방에 있는 기록이 개인적인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다소 불편은 했지만 아무도 없을 때 남을 들여놓는 것이 싫었습니다.” 맥그리비는 부장형사가 속기를 모두 하고 있는지를 넘겨다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주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가 접수실에 들어왔을 때 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부순 것이 아니라 · 10· 열려 있었다 이 말입니다.” 주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맥그리비가 말을 계속했다. “저 문의 열쇠를 갖고 있는 것은 당신과 캐롤뿐이라고 하셨겠다. 캐롤의 열쇠는 우리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달리 열쇠를 갖고 있는 사람은 ? ” “아무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들이 들어왔다고 생각합니까 ? ” 주드는 별안간 생각이 떠올랐다. “캐롤을 죽인 뒤 그녀의 열쇠를 복사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건 가능하겠군요.” 맥그리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차가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만일 복사를 했다면 열쇠에 파라핀이 남게 됩니다. 감식반에 조사를 의뢰해 봅시다.” 주드는 그러라고 했다. 그는 승리를 쟁취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만족감은 오래 가지를 않았다. “당신 생각엔 · 10· ” 맥그리비가 이어서 말했다. “두 남자가 · 10· 지금 현재로는 여자는 개입되지 않았다고 가정하고 · 10· 두 남자가 진료소에 침입해서 당신을 살해할 목적으로 열쇠를 복사했다 · 10· 이런 결론이군요 ? ” “그럴 겁니다.” 주드가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진료실의 문에도 자물쇠를 채웠다고 했습니다. 사실입니까 ? ” “사실입니다.” 맥그리비의 목소리가 기분이 언짢을 정도로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우리가 왔을 때 자물쇠는 채워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열쇠를 갖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문이 열렸는데 왜 당신을 죽이지 않았을까요 ? ” “아까 말한 것처럼 테이프 소리를 듣고 · 10· ” “흉악한 두 남자가 용의주도하게 전기를 끊고 당신을 여기에 몰아넣은 다음, 방안으로 들어와서도 당신의 머리칼 하나 다치지 않고 사라졌다 ? ” 그의 목소리에는 경멸이 내포되어 있었다. 주드는 발끈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 ” “알기 쉽게 이야기합시다. 아무도 여기에는 오지 않았고, 아무도 당신을 죽이려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내 말을 믿어달라고는 하지 않겠소.” 주드는 못마땅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하지만 전기는 어찌된 일이지요 ? 경비원 비젤로는 ? ” “그는 로비에 있습니다.” 주드는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도 죽었나요 ? ” “우리를 맞아들일 때까지 살아 있었어요. 전원에 고장이 생겨 비젤로는 그걸 고치러 지하실에 갔었고,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막 수리를 끝내고 나오는 중이었지요.” 주드는 멍하니 맥그리비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 ”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떤 심산인지 모르지만 · 10· ” 맥그리비가 말했다. “악으로는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그는 문 쪽으로 나갔다. “또 한 가지 부탁은, 내게는 전화도 걸지 마시라는 거요 · 10· 일이 있으면 내가 걸겠소.” 부장형사도 철썩 수첩을 닫고는 맥그리비의 뒤를 따라 나섰다. 위스키의 효과가 말끔히 가셨다. 술기운은 사라지고 그는 의기소침해졌다. 다음에는 어떤 수단을 취해야 할지 막막했다. 주드는 힌트도 주어지지 않은 퍼즐 속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그는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지른 소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그의 늑대는 잔인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이며, 맥그리비가 나타날 때마다 자취를 감추는 것처럼 보였다. 유령이냐, 아니면……또 하나의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인정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하지만 주드는 그것을 피해서는 안된다. 그는 자신이 편집광이라는 가능성에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린 마음은 현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망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경우가 있다. 주드는 과로가 겹쳐졌다고 생각했다. 몇 년 동안 휴가도 가보지를 못했다. 거기에 핸슨과 캐롤의 참사가 계기가 되어 그의 마음은 감정의 울타리를넘어, 그 때문에 만사가 비정상적으로 확대해석 쪽으로 줄달음을 쳤다고도 생각되었다. 편집광의 세계에서는 일상적으로 별다른 일이 아닌데도 아주 끔찍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그 예로 자동차 사고를 들어보자. 만일 계획적으로 주드를 살해할 생각이었다면 운전자는 차에서 내려 그의 숨통을 끊어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오늘밤에 온 두 남자는 어떤가 ? 주드는 그들이 권총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본 것도 아니다. 자기를 죽이러 왔다는 것이 편집광적인 추측은 아닐까 ? 두 남자를 좀도둑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그들은 안쪽 방에서 사람 소리가 나기에 달아난 것이다. 만일 암살자였다면 잠겨 있는 문을 박차고 들어와 그를 해쳤을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하면 그는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인가 ? 다시 경찰에 호소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은 뻔했다. 주드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어떤 아이디어가 머리에 떠올랐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생각해 낸 것이긴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럴듯하게 여겨졌다. 그는 전화번호부를 집어들고 직업별 번호란을 살폈다. 제 9 장 이튿날 오후 4시, 주드는 진료소를 나와 자동차로 로워 웨스트 사이드로 향했다. 도착한 곳에는 낡고 황량한 갈색 아파트가 있었다. 그 초라한 건물 악에 차를 멈추었을 때 그는 의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혹시 주소를 잘못 알았나 ? 하지만 그때 아파트 1층 유리창문에 붙은 글씨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노만 Z 무디 사립탐정 완벽한 조사 보증 주드는 차에서 내렸다. 바람이 강한 추운 날씨인데, 밤 늦게 눈이 내릴 거라는 일기예보가 나와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보도를 가로질러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섰다. 음식 냄새와 변소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그는 ‘노만 Z 무디 · 1호’ 라고 쓰여 있는 단추를 눌렀다. 순간 벨이 울렸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 1호실을 찾았다. 문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노만 Z 무디 사립탐정 벨을 누르고 들어오십시오 주드는 벨을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디는 사치스러운 것에 돈을 낭비하는 사람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사무실은 마치 좀도둑이 장식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넝마며 잡동사니가 방안 모든 공간을 메꾸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찢어진 일본 병풍도 세워져 있었다. 그 곁에는 동인도에서 건너온 램프, 램프 악에는 흠집투성이의 덴마크제 책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신문과 잡지가 사방에 수북히 쌓여 있었다. 안쪽으로 통하는 문이 홱 열리고 노만 Z 무디가 나타났다. 키 5피트 5인치(약 165··) 가량, 몸무게는 300파운드(약 136··)는 족히 나갈 것 같았다. 그는 옆으로 몸을 추스리며 걷는데, 주드는 막연히 부처님을 연상했다. 둥글고 태평한 얼굴에, 크고 악의가 없는 푸른 눈을 갖고 있었다. 계란 모양의 머리는 완벽한 대머리인데, 나이는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스티븐스 선생이십니까 ? ” 무디가 인사를 했다. “그렇습니다.” 주드가 말을 받았다. “자, 앉으시지요.” 부처님은 남부 사투리를 썼다. 주드는 주변을 둘러보며 의자를 찾았다. 그는 스프링이 퉁겨져 나올 것 같은 닳아빠진 팔걸이의자 위에 놓인 산더미 같은 보디 빌딩이나 누드 잡지를 치우고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무디는뚱뚱한몸을특대형의자에깊숙이파묻었다.“그런데 무슨 일로 ? ” 주드는 자기의 실수를 깨달았다. 전화에서 그는 일부러 무디에게 자기의 이름은 물론 성까지 말했었다. 그것은 요 며칠 동안 뉴욕의 모든 신문 제1면에 오르내린 성명이었다. 그런데 주드는 뉴욕에서 그에 관한 일을 전혀 모르고 있는 단 한 사람의 사립탐정을 고른 것이다. 하지만 주드는 지금 꽁무니를 뺄 구실을 찾고 있었다. “어느 분의 소개를 받으셨나요 ? ” 무디가 물었다. 주드는 혹시 그가 화를 내지 않을까 망설였다. “직업별 전화번호부에서 알았냈습니다만.” 무디가 웃었다. “직업별 전화번호부가 없다면 나는 굶어죽을 판이랍니다. 옥수수 위스키 이래의 대발명이지요.” 그는 거침없이 웃어댔다. 주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정말 바보천치를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실례했습니다, 무디 씨.” 그는 말했다. “좀더 생각해 본 다음에 상의를 드릴까 합니다……”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무디가 말했다. “하지만 예약하신 요금은 내셔야지요.” “물론입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지폐를 몇 장 꺼내들었다. “얼마면 되겠습니까 ? ” “50달러.” “50달러 · 10· ” 주드는 화를 식이며 돈을 세어서 무디에게 내밀었다. 무디는 꼼꼼하게 돈을 헤아렸다. “이거 감사합니다.” 무디가 말했다. 주드는 머저리 취급을 받은 기분으로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선생……” 주드가 뒤돌아보았다. 무디는 조끼 주머니에 돈을 쑤셔넣으면서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어쨌거나 50달러 빼앗겼으니 · 10· ”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앉아서 문제의 이야기라도 해보시지 그래요. 내가 늘 하는 말입니다만, 털어놓으면 얼마간은 마음이 편해집니다.” 비꼬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바보스러운 뚱뚱보의 말을 듣자니 주드는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주드의 생활은 남이 털어놓는 문제를 듣는 것이 전부였는데, 입장이 반대가 된 것이다. 그는 무디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손해날 건 없겠지.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어떤 도움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을 테니까. 그는 천천히 아까의 의자로 돌아가서 걸터앉았다. “선생은 온 세계의 걱정거리를 혼자 떠맡고 있는 표정이십니다그려. 내가 늘 하는 말입니다만, 백지장도 둘이 들면 한결 가벼워지지요.” 주드는 무디의 이런 격언 인용을 어디까지 참아 넘길 수 있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무디는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왜 여길 찾아오시게 되었나요 ? 여자, 아니면 돈입니까 ? 내가 늘 하는 말입니다만, 여자와 돈을 빼버리면 세계의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이 나죠.” 무디는 그를 지켜보면서 말문을 열기를 기다렸다. “누가……누군가가 나를 죽이려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파란 눈이 깜빡였다. “생각이 든다 ? ” 주드는 무디의 혼잣말 같은 질문을 무시했다. “그런 일을 전문적으로 알아봐 줄 사람을 아십니까 ? ” “알고말고요.” 무디가 말했다. “노만 Z 무디. 미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겁니다.” 주드는 맥이 풀려 한숨을 쉬었다. “나에게 이야기해 보십시오.” 무디가 말했다. “그리고 둘이서 분석해 봅시다.” 주드는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마치 자기가 늘 하던 말을 그대로 흉내내는 것 같았다. ‘편안히 누워서 무엇이든 마음에 떠오르는 말을 이야기해 보십시오.’ 그래, 해드리지. 그는 며칠 동안에 일어났던 일을 될 수 있는 한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어느덧 그는 무디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자기 자신에게 이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을 설명하고 있는 착각에 빠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정신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사지 않도록 조심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무디는 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단한 문제 같군요. 누군가가 선생을 죽이려 하든가, 아니면 선생이 정신분열성 편집광증에 사로잡혀 있든가 둘중의 하나라, 이 말씀인데.” 주드는 놀라 얼굴을 들었다. 노만 Z 무디는 그의 마음속을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무디가 말을 이었다. “형사 둘이 사건을 담당하고 있다고 하셨죠 ? 이름을 알고 있습니까 ? ” 주드는 망설였다. 그는 이 사람이 너무 깊이 개입해 들어오는 것이 꺼림칙했다. 그리고 그만 이곳을 떠나고 싶어졌다. “프랭크 앤젤리.” 그는 다시 또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맥그리비 경사입니다.” 무디의 표정에 작은 변화가 스쳤다. “상대는 어떤 이유에서 당신을 살해하려 하지요 ? ” “짐작도 할 수 없습니다. 나로서는 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글쎄올시다. 누구에게나 다소간의 적은 있게 마련입니다만.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적절한 적이란 인생에 있어 소금과도 같은 것이지요.” 주드는 얼굴을 찡그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부인은 ? ” “없습니다.” “동성애를 하시나 ? ” 주드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런 건 이미 신물이 나도록 경찰에 말했소. 그걸 또 · 10· ” “알겠습니다. 하나 경찰과는 달리 선생은 나에게 돈을 지불했습니다.” 무디는 조금도 흐트러지는 데가 없이 조목조목 물어 나갔다. “누구에게서 돈을 빌린 적 있습니까 ? ” “빚이라고는 월말에 계산하는 푼돈뿐입니다.” “선생의 환자는 어떻습니까 ? ” “어떻다니요, 뭐가 ? ” “내가 늘 하는 말입니다만, 조개껍질을 주우려면 바닷가로 가야 합니다. 환자 중에는 미치광이도 더러는 있을 텐데요 ? ” “그렇지는 않아요 ! ” 주드는 매섭게 말했다. “문제를 지닌 사람들일 뿐입니다.”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마음의 문제이지요. 환자 중에 선생을 증오하는 자는 없습니까 ? 그건 진정으로 미워할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선생에게 공식적인 불만 같은 것을 품고 있는 자가 없느냔 말입니다.” “가끔 있을 수 있지요. 하지만 환자의 대부분은 1년, 또는 그 이상 나에게 와서 치료를 받습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인간으로서의 그들을 알 수 있습니다.” “환자가 선생에게 화를 내는 적은 없나요 ? ” “가끔 있지요. 그러나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화를 내는 환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알아내야 하는 것은 최소한 두 명을 살해하고 여러 번에 걸쳐 나를 죽이려 했던 편집광입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만일 그러한 환자가 있는데도 그것을 짐작하지 못했다면 지금 당신 악에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가장 무능한 정신분석 의사라고 할 수 있지요.” 주드는 눈을 치켜뜨고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무디를 바라보았다. “내가 늘 하는 말입니다만, 중요한 것은 우선 순서가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무디가 유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될 일은 정말로 누군가가 선생의 목숨을 노리고 있느냐, 아니면 선생의 머리가 어떻게 되었느냐입니다. 아닙니까, 선생 ? ” 그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그것이 그의 말이 조금도 악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어떤 방법으로 ? ” 주드가 물었다. “간단하지요.” 무디가 말했다. “선생의 문제는 타석에 서서 커브를 치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볼을 던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우선 우리는 게임이 진행중인지 아닌지를 조사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선수가 누군지를 알아보는 겁니다. 차를 갖고 오셨지요 ? ” “예.” 주드는 어느새 이곳을 빠져나와 다른 사립탐정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잊고 있었다. 지금 그는 무디의 태평하고 소탈한 얼굴과, 그가 수시로 남발하는 격언 뒤에 가려진 차분하고도 지적인 능력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선생은 신경이 지칠 대로 지쳐 있습니다.” 무디가 말했다. “얼마 동안 휴가를 갖도록 하십시오.” “언제부터 말입니까 ? ” “내일 아침부터입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주드가 반대했다. “환자들과의 예약이 · 10· ” 무디는 말을 가로막았다. “취소하십시오.” “도대체 왜 · 10· ” “나에게 맡기십시오.” 무디는 말했다. “여기를 나가거든 곧장 여행안내소로 가십시오. 그리고는 예약을 하는 겁니다.” · 10· 그는 잠시 생각했다 · 10· “그로싱어스로. 캐츠킬 산중을 꽤나 드라이브하게 될 겁니다. 선생, 아파트에는 차고가 있습니까 ? ” “있습니다.” “그럼, 차 점검을 철저히 해달라고 하십시오. 도중에서 고장이 나면 곤란하니까.” “내주에 가면 안되겠습니까 ? 아무리 생각해도 내일 예정이 · 10· ” “예약이 끝나면 진료소로 돌아가 환자에게 전부 전화를 거는 겁니다. 급한 일로 일주일 가량 진료소를 비운다고.” “그건 안됩니다. 그래 가지고는 · 10· ” “앤젤리에게도 전화를 걸어 두십시오.” 무디가 말했다. “선생이 없는 동안에 경찰이 찾을지도 모르니까요.” “왜 나는 이런 일을 해야 합니까 ? ” “선생의 50달러를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내친 김에 일러두겠습니다만, 그 밖에 의뢰예약금으로써 200달러 주셔야 되겠고, 하루의 경비는 50달러씩 청구하게 되겠습니다.” 무디는 뚱뚱한 몸을 크게 추스르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내일 일찍 출발하도록 하십시오.” 그는 강조했다. “해지기 전에 도착해야 하니까요. 아침 7시에 출발할 수 있겠습니까 ? ” “가……가능할 겁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뭐가 있을까요 ? ” “일만 잘되면 득점 카드를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5분 뒤, 주드는 생각에 잠긴 채 차에 올라탔다. 그는 무디에게 그렇게 갑자기 환자들을 내팽개치고 떠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떠나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는 사립탐정 폴스타프(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 。윈저의 즐거운 아내들。에 등장하는 활달하고 기지에 찬 뚱뚱보 기사)의 손에 목숨을 맡겨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차를 출발시키며 새삼스럽게 무디의 창에 쓰여진 글귀를 보았다. ‘완벽한 조사 보증’ ‘정말로 그래 줘야 할 텐데’ 주드는 가슴이 답답했다. 여행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주드는 매디슨 애버뉴의 여행대리점에 들렀다. 대리점에서는 그를 위하여 그로싱어스에 방을 예약해 주고, 도로 지도와 캐츠킬 산에 관한천연색 컬러 팸플릿을 여러 종류 주었다. 다음에 그는 전화 서비스에 부탁해서 환자의 예약을 전부 취소해 주도록 부탁했다. 그리고 19분서로 전화를 걸어 앤젤리 형사를 바꿔달라고 했다. “앤젤리는 몸이 불편해서 집에 있습니다.” 무표정한 목소리가 말했다. “그의 집 전화번호가 필요합니까 ? ” “부탁합니다.” 잠시 뒤, 주드는 앤젤리와 통화를 했다. 목소리로 미루어보아 앤젤리는 지독한 독감에 걸려 있는 모양이었다. “며칠 동안 도시를 벗어나기로 했습니다.” 주드가 말했다. “내일 아침에 떠납니다. 당신에게 알려두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되어서.” 앤젤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군요. 행선지는 어딥니까 ? ” “내 차로 그로싱어스로 가서 묵을 생각입니다.” “알겠습니다. 푹 쉬십시오. 맥그리비에게는 내가 말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앤젤리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어젯밤 진료소에서 있었던 소동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 “맥그리비의 입장에서 그의 견해를 들었을 테지요.” 주드가 말했다. “선생을 죽이려 한 자들을 보셨나요 ? ” 그렇다면 앤젤리는 얼마쯤은 그를 믿고 있는 것이다. “아뇨.” “우리의 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겁니까 ? 피부색이라든가, 나이, 또는 키 같은 거 ? ” “유감스럽게도 어두워서.” 주드가 대답했다. 앤젤리는 코를 훌쩍거렸다. “그렇습니까 ? 나도 조사해 보겠습니다. 돌아오시면 좋은 뉴스를 전해 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몸조심하십시오, 선생.” “그러지요.” 주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답했다. 다음에 주드는 해리슨 버크의 회사로 전화를 걸어 버크의 상태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그를 병원에 입원시키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주드는 또 피터에게 전화를 걸어 일주일 동안 여행을 한다는 말을 전하고, 버크에 대해 필요한 수속을 밟아달라고 부탁했다. 피터는 그러기로 했다. 준비는 끝났다. 주드의 마음을 가장 심란하게 한 것은 금요일에 앤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다시는 만나기 어려울 테지. 아파트를 향해 차를 달리면서 주드는 노만 Z 무디에 관해서 생각했다. 무디가 무엇을 노리는지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주드가 여행을 떠나는 것을 환자 모두에게 알림으로써 무디는 환자 중에 살인자가 있는지 · 10· 만일 정말로 살인자가 있다면 · 10· 를 규명하기 위해 주드를 미끼로 덫을 놓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무디는 행선지를 전화 서비스와 아파트의 도어맨에게 알려두라고 그에게 지시했었다. 주드가 어디에 가 있는지를 누구에게나 알리려는 것이다. 주드가 아파트 악에 차를 세우자 마이크가 나와서 그를 맞이했다. “마이크, 나는 내일 아침 여행을 떠나네.” 주드가 말했다. “차고 사람에게 내 차를 잘 점검하고 기름 탱크를 가득 채워 달라고 일러주겠나 ? ” “알겠습니다, 스티븐스 선생님. 차는 몇 시에 쓰시게 됩니까 ? ” “7시에 떠날 생각이야.” 주드는 아파트로 들어가면서 마이크가 등뒤를 지켜보는 시선을 느꼈다. 주드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모든 문에 자물쇠를 채우고 창문도 점검했다. 아무데도 허술한 곳은 없었다. 그는 코데인을 두 알 먹고, 알몸이 되어 욕조에 물을 채우고는 쑤시는 몸을 푹 담갔다. 그러자 등과 목부분에서 긴장이 풀려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몸을 물에 담근 채 생각했다. 무디는 왜 차가 도중에 고장을 일으키면 곤란하다고 했을까 ? 캐츠킬 산중의 후미진 도로에서 습격을 받을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리라. 만일 주드가 습격을 받으면 무디는 어떻게 할 생각일까 ? 무디는 그의 계획 · 10· 계획이 있다면 · 10· 을 주드에게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주드는 자기가 덫에 뛰어들고 있다는 확신을 굳혔다. 무디는 주드의 적을 끌어내기 위해 덫을 놓는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몇 번이나 생각해 보아도 같은 답이 나왔다 · 10· 덫은 오히려 주드를 그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놓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왜 ? 그가 살해된다면 무디에게 무슨 이익이 있단 말인가 ? ‘쓸데없는 생각 ! ’ 주드는 생각을 고쳐 먹었다. ‘맨해튼의 직업별 전화번호부에서 무작위로 골라낸 사람이 나를 죽이려 한다고 생각하다니 ! 그야말로 편집광적이지 않은가 ! ’ 그는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수면제가 듣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힘겹게 욕조에서 나와 수건으로 멍든 몸을 조심스럽게 닦고는 파자마를 입었다. 그리고 침대에 들어가 자명종 시계를 6시에 맞춰 놓았다. 캐츠킬이라 · 10·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는 피로에 지쳐 깊은 잠에 빠졌다. 아침 6시에 자명종이 울리자 주드는 곧 눈을 떴다. 마치 전혀 시간의 흐름이 없었던 것처럼 맨 먼저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나는 일련의 우연의 일치를 믿지 않으며, 환자중의 누가 대량학살자라는 것도 믿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편집광이든가 편집광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라는 것이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조속히 다른 정신분석의의 진료를 받아보는 일이었다. 그는 라비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볼 생각을 했다. 그것은 주드가 의사로서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만일 그가 편집광적인 증세를 나타낸다면 입원조치가 취해질 것이다. 혹시 무디는 주드를 정신병자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 그래서 휴가를 가라고 권한 것은 아닐까 ? 누군가가 주드의 목숨을 노려서가 아니라 정신병의 증후를 엿보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 아마도 가장 현명한 길은 무디의 충고에 따라 며칠 동안 캐츠킬 산에 가는 일일 것이다. 혼자가 되어 모든 압박에서 벗어난다면 그는 스스로를 평가하고, 언제부터 그의 정신에 이상이 생겼는지, 언제부터 현실과의 접촉을 잃기 시작했는지를 냉정히 판단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혼자서 지낸 뒤 돌아와 라비 박사에게로 가서 그의 치료를 받아보리라고 주드는 마음먹었다. 그것은 고뇌에 가득 찬 결단이었지만, 일단 그렇게 마음을 굳히니 한결 머리가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5일간에 필요한 옷가지를 챙긴 가방을 들고 엘리베이터 악에 섰다. 에디는 아직 출근을 하지 않아서 엘리베이터는 셀프서비스였다. 주드는 지하의 차고까지 타고 내려갔다. 그는 차고 담당 윌트가 없나 둘러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차고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주드는 한구석, 콘크리트 벽가에서 자기의 차를 찾아냈다. 그는 차에 가까이 가서 뒷자리에 가방을 넣고 악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그가 시동 키를 꺼내려고 했을 때, 갑자기 한 사나이가 그의 곁에 나타났다. 순간 주드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시간을 잘 지키셨군.” 그건 무디였다. “전송을 나와 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소.” 주드가 말했다. 무디는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동그란 얼굴 구석구석으로 웃음이 번졌다. “할 일도 없고 잠을 설쳤기에.” 무디의 자상한 마음씨가 불현듯 고맙게 생각되었다. 그는 주드가 정신이상이라는 사실을 건드리지 않고, 한적한 곳으로 가서 휴양을 취하라고 권유한 것뿐이다. 주드로서는 만사가 정상인 것처럼 외견상 꾸미기만 하면 되었다. “당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산에 들어가서 야구의 득점 카드가 찾아질는지 시험해 보렵니다.” “아니, 그런 일로 어디에 갈 필요는 없습니다.” 무디가 말했다. “그 일은 이제 끝났습니다.” 주드는 어안이벙벙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무슨 뜻입니까 ? ” “간단합니다. 내가 늘 하는 말입니다만, 무엇의 밑바닥을 알려면 우선 파봐야 하지요.” “무디 씨……” 무디는 차창가로 몸을 기댔다. “당신 문제에 내가 왜 흥미를 갖게 된 줄 압니까 ? 5분마다 누가 당신을 해치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것처럼’이 나의 흥미를 끈 것입니다. 하여간 당신에게 정신상의 이상이 있는지, 아니면 정말로 누군가가 당신을 잠재우려고 하는지 규명하기 전에는 손을 쓸 수가 없었지요.” 주드는 무디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캐츠킬에……” “캐츠킬 같은 산속에 갈 필요는 없어요.” 그는 차문을 열었다. “내리십시오.” 영문을 모른 채 주드가 차에서 내렸다. “이해하시겠습니까 ? 그건 단순한 광고였습니다.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상어를 잡으려면 우선 물속에 피를 부려야 하지요.” 주드는 그의 얼굴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신은 도저히 캐츠킬에는 도착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무디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는 자동차 악쪽으로 걸어가 보닛을 열었다. 주드도 그의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배전기의 헤드에 세 토막의 다이너마이트가 테이프로 묶여 있었다. 두 가닥의 가는 줄이 점화장치로 연결되어 있었다. “폭발장치입니다.” 무디가 말했다. 주드는 곤혹스러운 얼굴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당신이 어떻게……” 무디는 빙그레 웃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잠이 없는 편이지요. 한밤중에 여기에 왔습니다. 나는 경비원에게 돈을 주어 놀러 가게 하고 이 부근에 몸을 숨겼지요. 경비원에게 나중에 20달러 더 줘야 합니다.” 그는 덧붙여 말했다. “당신이 인색한 사람으로 평가받아서는 안되니까.” 주드는 이 뚱뚱한 사나이가 갑자기 좋아졌다. “장치를 하는 놈을 보았습니까 ? ” “아니, 내가 오기 전에 이미 장치를 해뒀습디다. 조금 전에 더 이상은 아무도 올 것 같지 않기에 조사를 해봤지요.” 그는 늘어진 줄을 가리켰다. “당신의 친구는 정말 영리합니다. 당신이 무심코 보닛을 열고 줄을 스치면 다이너마이트는 폭발하고, 시동 키를 돌리기만 해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이 차고의 절반이 날아갈 정도로 강력한 거지요.” 주드는 갑자기 구토증을 느꼈다. 무디는 안됐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기운을 내요.” 그는 말했다. “수확이 컸습니다. 우선 당신이 미치광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두 번째는……”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누군가가 끝까지 당신을 죽이려고 안달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제 10 장 두사람은 주드의 아파트 거실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디의 뚱뚱한 몸집이 소파에서 비어져 나왔다. 무디는 이미 퓨즈를 벗긴 폭탄을 조심스럽게 자기 차 트렁크에 옮긴 뒤였다. “폭탄을 그대로 두고 경찰로 하여금 조사를 하게 할 생각이 아닌가요 ? ” 주드가 물어보았다. “내가 늘 하는 말입니다만, 이 세상에서 가장 처치곤란한 일은 정보가 지나치게 많다는 겁니다.” “하지만 폭탄을 맥그리비 경사에게 보이면 내 말이 정말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가 있었을 텐데.” “그럴까요 ? ” 주드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맥그리비로서는 주드가 스스로 다이너마이트를 장치할 수도 있다고 볼 것이다. 그러면서도 주드는 사립탐정이 증거를 경찰에게 넘겨 주려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디라는 사람의 대부분은 멍청한 시골뜨기와도 같은 겉모양 아래가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무디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주드는 기쁨에 가득찼다. 그의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은 아니었고, 또한 이 세상이 갑자기 우연의 일치투성이로 변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역시 암살자가 서성거리고 있었던 일이 확실해졌다. 환상이 아니라 현실의 암살자가. 그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를 목표로 선정했다. 우리의 자아라는 것은 얼마나 쉽게 무너져 내릴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하고 주드는 생각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스스로를 편집광이라고 믿으려 했었는데. 그는 무디에게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은혜를 입은 것이다. “……당신은 의사고 · 10· ” 무디는 말을 이었다. “나는 단순한 탐정입니다.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꿀이 탐나면 벌집을 찾아야 하지요.” 주드는 무디의 헛소리 같은 이야기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찾는 사나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내 의견을 듣고 싶다는 거군요.” “맞습니다.” 무디가 웃었다. “상대는 미치광이 우리에서 탈주한 · 10· ” ‘정신병원 말이군.’ 주드는 반사적으로 생각했다. “살인광이거나, 아니면 보다 복잡한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 ” “복잡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주드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 ” “첫째로 지난번 밤에 두 사나이가 내 진료소에 침입했습니다. 미치광이가 한 사람이라면 이해가 갑니다만, 두 미치광이가 협력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지요.” 무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리고 ? ” “두 번째로 정상을 벗어난 마음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 쉽지만, 거기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존 핸슨이나 캐롤 로버츠가 살해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 한 나 자신이 세 번째, 그리고 마지막 희생자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어째서 당신이 마지막 희생자라고 생각하십니까 ? ” 무디는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것은 · 10· ” 주드가 대답했다. “리스트에 오른 또 사람이 있다면 처음에 나를 살해하는 데 실패했을 때 그들은 그를 해치웠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없애는 데만 열중하고 있습니다.” 무디는 대견하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은 천부적인 탐정의 소질도 갖고 있습니다그려.” 주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해가 안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예를 들어 ? ” “우선 그 동기입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 10· ” “그건 뒤로 돌립시다. 그 밖에는 ? ” “만일 끝까지 나를 죽일 생각이라면 나를 차로 치었을 때 다시 차를 되돌려서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나는 의식을 잃고 있었으니까요.” “아, 거기에서 벤슨 씨가 등장하게 됩니다.” 주드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벤슨 씨는 당신이 당한 사고의 목격자입니다.” 무디가 설명했다. “당신이 내 사무실에서 돌아간 뒤, 나는 경찰보고서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알아내어 그를 만나러 갔었습니다. 택시 요금이 3달러 50센트입니다. 아시겠습니까 ? ” 주드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벤슨 씨는 · 10· 직업은 모피상입니다. 멋진 물건이 많습디다. 만일 당신이 애인에게라도 사주시겠다면 내가 대폭 할인해 드리도록 주선하지요. 어쨌거나 사고가 있었던 화요일 밤 그는 동생의 아내가 일하고 있는 사무실 빌딩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는 성경을 파는 그의 동생이 감기에 걸렸기에, 동생의 아내인 그녀에게 약을 전해 주려고 갔었던 거지요.” 주드는 답답한 마음을 억눌렀다. 만일 노만 Z 무디가 권리장전의 전문을 암송했다고 해도 그는 그것을 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벤슨 씨가 약을 전하고 빌딩에서 막 나오는 참인데, 리무진이 당신에게로 달려드는 것을 목격하게 된 겁니다. 물론 그는 그때 당신이 누군지 알 턱이 없었지요.” 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옆으로 움직였는데, 그가 보기에는 미끄러지는 듯했답니다. 당신이 차에 치이는 것을 보자 그는 당신을 돕기 위해 달려 나갔습니다. 그때 리무진은 다시 한 번 당신을 치기 위해 되돌아오다가 벤슨 씨를 보고는 그대로 달아났다고 하더군요.” 주드는 꿀꺽 침을 삼켰다. “그렇다면 벤슨 씨가 없었다면……” “그야 · 10· ” 무디가 점잔을 빼고 말했다. “나와 당신은 만나지도 못했겠지요. 그들은 소일거리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내 진료소를 습격한 것 말입니다, 그들은 왜 문을 부수지 않았을까요 ? ” 무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게 아직도 의문입니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당신은 물론 다른 사람이 있다면 그도 함께 죽이고 아무에게도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달아날 수가 있었는데. 하지만 그들은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고 착각하고 물러갔다 · 10· 이걸 알 수가 없습니다.” 그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만일에……” 그가 말했다. “만일에 뭡니까 ? ” 무디의 얼굴에 무엇인가를 생각해 냈다는 표정이 스쳤다. “혹시……” 그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뭔데요 ? ” “좀더 뒤로 미룹시다. 어떤 일이 생각났습니다만, 그 동기를 밝혀내기 전에는 무의미한 이야기입니다.” 주드는 별수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를 죽여야 직성이 풀릴 사람을 아무래도 생각해 낼 수가 없어요.” 무디는 생각 끝에 물었다. “잠깐, 당신과 환자인 핸슨과 캐롤 로버츠 사이의 비밀은 없었습니까 ? 당신들 세 사람만이 아는 비밀.” 주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갖고 있는 비밀이란 환자에 관한 의사로서의 비밀뿐입니다. 또한, 그들의 진료기록에는 살인의 원인이 될 만한 것은 무엇 하나 포함되어 있지 않아요. 내 환자 중에 첩보부원이라든가 외국의 스파이, 또는 탈옥수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 · 10· 주부라든가, 지적 직업인이라든가, 은행원 등으로서 스스로는 처리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뿐입니다.” 무디는 솔직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환자 중에 살인광이 없는 것은 확실합니까 ? ” 주드는 자신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어제였다면 확신을 갖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실은 나 자신이 편집광이고, 당신은 내 증상에 적당히 장단만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했었으니까요.” 무디가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건 나도 생각했었습니다.” 그는 말했다. “당신에게서 예약전화를 받은 뒤, 당신에 관해서 좀 뒷조사를 해봤지요. 친분이 있는 의사 몇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는데, 당신은 상당한 명성이 있더군요.” 그렇다면 말끝마다 깍듯이 ‘스티븐슨 씨’라고 하는 것도 그냥 시골티를 내느라고 그러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 경찰에 가서 · 10· ” 주드가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이야기하면 최소한 범인수사를 시작하게 만들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 ” 무디는 약간 놀란 얼굴을 했다. “그렇게 생각합니까 ? 우리는 뭐 대수로운 걸 파악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무디가 말했다. “우리는 크게 악으로 전진한 것이 사실입니다. 범위가 상당히 좁아졌으니까요.” 하지만 주드의 목소리에는 낙담의 빛이 엿보였다. “그렇군요. 상대는 미국 동부의 누군가라는 것은 알았으니까.” 무디는 잠시 천장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머리를 흔들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가족입니다.” “가족 ? ” “선생 · 10· 당신이 환자들에 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건 틀림없을 겁니다. 그들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한다면 나도 그렇게 믿겠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벌집이고, 당신은 꿀의 보관자이니까.” 그는 소파에서 몸을 악으로 끌어내다시피 하고 말했다. “그런데 알고 싶은 것은, 환자를 받아들일 때 환자의 가족을 만나지는 않습니까 ? ” “아니, 때로는 정신분석을 받고 있는 것을 가족이 모르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디는 만족한 듯, 이번에는 상체를 소파의 등받이에 기댔다. “그렇겠지요.” 주드는 그를 넘겨다보았다. “환자의 가족이 나를 죽이려한다는 말인가요 ? ” “그럴지도 모르지요.” “가족에게도 환자나 마찬가지로 동기가 없습니다. 아니, 환자보다도 그 동기는 더욱 희박합니다.” 무디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선생, 부탁 좀 합시다. 최근 4。5주 내에 치료를 담당한 환자의 리스트가 필요합니다. 안되겠습니까 ? ” 주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곤란합니다.” 그는 간신히 말했다. “의사와 환자 사이의 비밀이기 때문인가요 ? 하지만 조금은 융통성 있게 생각할 일이 아닐까요 ? 당신의 목숨이 위험한 일이니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은 환자의 가족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니까요. 만일 환자의 가족 중에 정신이상자가 있다면 치료중에 알게 됩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감스럽습니다만, 무디 씨, 나로서는 환자를 지켜야 합니다.” “당신의 기록에는 중요한 사실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하셨지요 ? ”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기록의 일부가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3번 애버뉴의 게이 바에서 수병들을 물색하는 존 핸슨. 악단의 멤버와 놀아나는 테리 워시번. 고등학교 재학생으로서 매춘부 노릇을 하는 열네살의 이블린 워셰이크……“미안합니다만 · 10· ” 그는 같은 말을 했다. “기록은 보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무디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됐습니다. 대신 내가 할 일의 한 부분을 당신이 해주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 ” “지난 한 달 동안 치료한 환자 모두의 녹음 테이프를 꺼내어 하나씩 주의해서 들어보십시오. 단, 이번 경우에는 의사로서가 아니라 · 10· 탐정의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구석이 없나 살펴 듣는 겁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요. 늘 하는 일이니까.” “부탁합니다. 그리고 신변을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이 사건을 해결하기 전에 당신이 당하면 곤란하니까.” 그는 오버를 집어들고는 몸을 비틀며 그것을 입었다. 뚱뚱한 편치고는 몸놀림이 유연하다고 생각되었다. “이 사건에서 가장 기묘한 것이 뭔지 압니까 ? ” 무디는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듯이 물었다. “뭔데요 ? ” “당신은 상대가 두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당신을 살해하려 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지만, 어째서 두 사람일까요 ? ” “모르겠습니다.” 무디는 생각을 굴리면서 잠시 주드를 바라보았다. “틀림없습니다 ! ” 그가 말했다. “뭐가 말입니까 ? ” “이것은 영감일지 모릅니다만, 내 생각이 틀림없다면 당신을 죽이려 하는 사람들은 둘 이상입니다.” 주드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를 노리는 하나의 집단이 있다는 겁니까 ? 그럴 리가 ! ” 무디의얼굴에차츰흥분의빛이진해지기시작했다.“선생, 이 게임의 주도자가 누군지 알 것 같습니다.” 주드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빛이 감돌았다. “왜 그렇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누군지는 알 것 같습니다.” “누군데요 ? ” 무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걸 이야기했다가는 당신은 나를 미친놈 취급할 겁니다. 내가 늘 하는 말입니다만, 발사하기 전에 총알이 채워져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나에게 당분간 사격연습을 하게 내버려 두십시오. 틀림없다는 걸 알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게 정말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드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무디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렇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이 자신의 목숨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면 · 10· 내가 틀리기를 바라야 할 겁니다.” 그런 말을 남기고 그는 밖으로 나갔다. 주드는 진료소까지 택시로 갔다. 금요일 오후였다. 크리스마스까지 쇼핑할 기간은 불과 사흘만을 남기고 있어, 거리는 허드슨 강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견디기 위해 두둑히 입은 쇼핑객으로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상가의 쇼윈도는 밝고 화려하게 장식한 크리스마스 트리나 그리스도 탄생 인형 등으로 행인의 눈길을 끌었다. 땅 위에 평화 · 10· 크리스마스. 엘리자베스와 태어나지도 못한 그들의 아기. 언제고 · 10· 그가 살아남는다면 · 10· 그는 자기의 평화로운 삶을 재건하고, 죽음의 과거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킬 날도 있을지 모른다. 앤과 함께라면 아마도……거기에서 그는 자신을 강하게 제지했다. 사랑하는 남편과 외국여행을 떠나려는 유부녀를 공상 속에 끌어들여 무슨 소용이 있는가 ? 택시가 빌딩 악에 멎고, 주드는 차에서 내려 주위를 불안스러운 눈으로 살펴보았다. 하지만 뭐를 어떻게 조심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살인을 위한 흉기가 어떤 것인지, 누가 그것을 들이댈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진료소에 다다르자 그는 접수실에 자물쇠를 채우고 테이프를 숨겨 놓은 판자 쪽으로 가서 그걸 열었다. 테이프는 각 환자의 이름 아래 날짜순으로 정리가 되어 있었다. 그는 가장 최근의 것을 골라 테이프 레코더 곁으로 갖고 갔다. 그날의 예약은 전부 취소했기에 환자나 환자의 가족을 말려들게 할지도 모르는 단서를 찾는 데 정신을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주드는 무디의 추리가 지나친 생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에게 감탄을 하게 된 터라 무시할 수도 없었다. 첫번째 테이프를 틀면서 그는 지난번에 테이프 레코더를 사용했었던 상황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게 불과 그제 밤의 일이었던가 ? 악몽치고는 너무나 생생했다. 누군가가 여기 캐롤이 참살당한 이 방에서 그를 죽이려 했었던 것이다. 주드는 갑자기 그가 한 주일의 반나절만 무료로 봉사하고 있는 병원의 환자들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아마도 살인자들이 그 병원이 아니라, 이 진료소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그는 캐비닛에 ‘병원’이라고 써놓은 곳으로 가서 테이프를 살펴보고는 그 중에서 여섯 개를 골라냈다. 그는 첫번째 것을 레코더에 걸었다. 로즈 그레이엄. “……그냥 욱했던 거예요. 낸시는 걸핏하면 울어요. 낸시는 울보지요. 제가 낸시를 때린 것도 그애를 위해서였습니다.” “낸시가 왜 그렇게 우는지 알려고는 하지 않았습니까 ? ” 주드의 목소리가 물었다. “그건 응석받이로 자랐기 때문이에요. 낸시의 아버지는 그애를 애지중지했었지만, 우리 모녀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낸시는 언제까지나 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할 줄 알았지만 버리고 도망칠 정도니까, 해리가 정말로 사랑을 했는지도 알 수가 없지요.” “당신은 해리와 결혼을 하지 않았던가요 ? ” “글쎄요……내연의 처라고 할까요. 정식으로 결혼을 할 생각이었습니다만.” “함께 산 기간은 ? ” “4년이었습니다.” “당신이 낸시의 팔을 부러뜨린 것은 해리가 달아난 지 얼마나 지나서입니까 ? ” “일주일이나 지나서였을까요. 팔을 정말로 부러뜨릴 생각은 아니었어요. 도저히 울음을 그치지 않기에 커튼의 레일을 집어 두드려 팼던 거예요.” “해리가 당신보다는 오히려 낸시를 더 사랑했다고 생각합니까 ? ” “아뇨. 해리는 저라면 사족을 못 썼습니다.” “그러면서 왜 당신을 버렸지요 ? ” “그건 사내니까 그렇죠. 사내라는 것이 어떤 건지 아시잖아요. 짐승이라고요 ! 당신들 모두 ! 사내들이란 모두 돼지처럼 도륙을 당해 마땅하다고요 ! ” 그녀는 흐느껴 운다. 주드는 레코더의 스위치를 끄고 로즈 그레이엄에 관해 생각했다. 그녀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주위의 사람들을 증오해서, 두 번이나 6살 난 딸아이를 죽도록 매질했다. 하지만 그녀의 착란은 그를 노리는 살인자의 패턴과는 일치하지 않았다. 주드는 다음 테이프를 레코더에 걸었다. 알렉산더 팰런. “팰런 씨, 경찰은 당신이 칼을 들고 챔피언 씨를 덥쳤다고 합니다만 ? ”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누가 당신에게 챔피언 씨를 죽이라고 하던가요 ? ” “그분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란 ? ” “하나님이십니다.” “왜 하나님이 그를 죽이라고 하던가요 ? ” “챔피언은 나쁜 놈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배우지요. 나는 무대에서 그를 보았습니다. 그는 여자에게 키스를 했습니다. 여배우에게. 사람들이 보는 악에서 그는 키스를 하고 그리고는……(침묵)” “그래서 ? ” “그녀에게 손을 댔습니다 · 10· 젖가슴에.” “그래서 화가 났습니까 ? ” “물론입니다. 무척 화가 났습니다. 그는 그녀를 범한 것입니다. 극장을 나올 때, 나는 소돔과 고모라에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벌을 받아 마땅한 놈입니다.” “그래서 그를 죽이려는 결심을 했군요 ? ” “내 결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결정입니다. 나는 그분의 명령을 실행에 옮긴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자주 당신에게 말을 걸어 옵니까 ? ” “그분의 뜻이 있을 때뿐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그분의 도구로서 선택하셨습니다. 나는 순결하기 때문이지요. 무엇이 나를 순결하게 하는지 아십니까 ? 세상에서 인간을 가장 깨끗이 정화시키는 것이 무언지 아십니까 ? 사악한 사람을 죽여 없애는 일입니다.” 알렉산더 팰런, 35세, 빵집 시간제 고용인. 그는 6개월간 정신병원에 수용된 뒤 퇴원했다. 하나님은 그에게 동성연애자인 핸슨이나, 원래 매춘부였던 캐롤과, 그들의 옹호자인 주드를 죽이라고 명령한 것일까 ? 주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팰런의 사고 과정은 짧고 고통에 가득 찬 발작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거기에 비해서 그를 노리는 살인계획은 극히 정밀하게 조직된 것이었다. 그는 병원 쪽 환자의 테이프를 몇 개 더 들어봤지만 찾고 있는 패턴에 합치하는 것은 없었다. 병원 쪽 환자 중에는 없는 것이다. 그는 진료소 쪽 환자의 테이프를 살펴보았다. 한 이름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스키트 깁슨. 그는 그 테이프를 틀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 내가 선생을 위하여 준비한 이 쾌청한 날씨가 어떻습니까 ? ”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 모양입니다.” “이 이상 기분이 좋았다가는 정신병원행이지요. 어제 저녁의 내 쇼 보셨나요 ? ” “아니, 유감스럽게도 못 봤습니다.” “히트를 쳤지요. 잭 굴드(미국의 저널리스트)는 ‘세계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코미디언’이라고 평을 했어요. 잭 굴드 정도의 천재가 그렇게 평한다면 나 역시 반대할 필요야 있겠소 ? 관객의 박수갈채를 들려주고 싶군요. 엄청난 아우성이었지. 왜 그런지 아시오 ? ” “관객이 ‘박수’라는 카드라도 본 게 아닙니까 ? ” “제법입니다, 선생님. 나는 그런 유머 감각이 있는 정신분석 의사를 좋아하거든. 그전의 의사에게는 질려 버렸지. 턱수염이 요란해서 그것도 늘 신경에 걸렸고.” “턱수염이 왜 ? ” “여의사였으니까.” 웃음 소리. “재미있지요, 선생 ? 그런데 실은 내가 기분이 삼삼한 까닭 하나는 100만 달러 · 10· 1달러짜리 지폐로 100만 장이오 · 10· 를 비아프라의 아이들에게 기부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랍니다.” “큰일을 하셨습니다.” “그야……그래서 세계의 모든 신문 제1면에 나왔지요.” “그렇게 중요한 일입니까 ? ” “그렇게 중요하다니 ? 그렇게 큰 돈을 기부하기로 약속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 줄 아시나 ? 내 선전 같지만, 나는 그만한 기부를 약속할 수 있었던 것이 기쁘기 짝이 없다 이겁니다.” “약속이라는 말만 자꾸 하시는데, 정말 낼 생각입니까 ? ” “약속과 내는 것과는 뭐가 다르지 ? 100만 달러를 약속한다 · 10· 몇 천 달러를 낸다 · 10· 그래도 감지덕지……참, 오늘이 내 결혼기념일이라는 말 했던가요 ? ” “아니,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굉장한 15년이었지. 당신은 샐리를 만나보지 못했지만, 지상에서 가장 멋진 여자랍니다. 나는 분명히 복된 결혼을 했소. 처가집 떨거지란 골치 아픈 존재로 알려져 있지만, 난 그렇지가 않아요. 샐리에게는 형제가 둘인데, 벤과 찰리가 그치들이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벤은 내 텔레비전 쇼의 주 대본가이고, 찰리는 내 프로듀서. 둘 다 천재지요. 프로는 벌써 7년이나 계속되고 있는데, 닐센(텔레비전 등의 시청률 조사기관)의 베스트 10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거든. 그런 처가 집과 인연이 닿은 게 정말 다행이 아니고 뭡니까. 대개의 여편네라는 것은 남편을 차지하고 나면 뚱뚱하게 살이 찌고 칠칠맞게 굴게 마련이지. 하지만 샐리는 결혼 당시보다도 더 늘씬하답니다. 대단한 여자지……담배 없소 ? ” “여기 있습니다. 담배를 끊은 줄 알았는데.” “나는 원래의 의지력이 있는지를 알고 싶었던 거요. 그래서 담배를 끊어 봤었죠. 지금 입에 대는 건 그냥 피우고 싶어서……어제 네트워크와 새로운 계약을 맺었소. 내 생각대로 조건을 관철시켰답니다. 시간이 다 됐나 ? ” “아직 남았습니다. 기분이 들뜹니까 ? ”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와 있는지도 모를 만큼 컨디션이 좋아요.” “이젠 문제가 없겠군요 ? ” “내게 ? 세상은 내 마음대로라고. 나는 다이아몬드 짐 브래디(미국의 부호이며 자선가)라고요. 이것도 당신 덕택일걸. 정말 신세 많이 졌소이다. 당신은 명의사요. 당신처럼 돈을 벌 수 있다면 나도 의사 간판을 내걸어 볼까 ? ……그래서 생각이 났는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어떤 남자가 정신분석의를 찾아갔는데, 우울한 얼굴로 소파에 누운 채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더라는 겁니다. 한 시간 지나 의사가 말했지. ‘50달러 청구합니다.’라고 말이오. 그런 식으로 2년 동안이나 그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답니다. ‘선생님 · 10·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습니다만.’ 의사왈, ‘무슨 ? ’ · 10· 그러자 남자는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동업할 생각 없습니까 ? ’ 라고 말입니다.” 웃음 소리. “아스피린 같은 것 없소 ? ” “있습니다. 또 골치가 아파 옵니까 ? ” “대수롭지는 않소……고마워요. 이젠 괜찮겠지.” “두통의 원인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 ” “연예계에서는 극히 흔한 증상이지요……내일 오후에 대본 읽기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불안해지는 겁니까 ? ” “내가 ? 바보 같은 소리 ! 나는 불안을 느끼고 말고도 없지. 대본의 내용이 시시하더라도 내가 표정을 고쳐 관객에게 윙크만 해도 모두가 신이 나거든. 아무리 보잘것없는 쇼에서라도 이 리틀 스키트가 등장하면 순식간에 장미꽃 향기가 흐른단 말씀이야.” “매주 두통이 심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 ” “내가 어떻게 알아요. 당신은 의사가 아니오 ? 당신이 말해 줘야지. 나는 한 시간이나 당신과 얼굴을 맞대고 얼간이 같은 질문을 받기 위해 돈을 내는 게 아니오. 당신과 같이 하찮은 두통도 못 고치는 돌팔이가 개업을 해서 남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드는 행위는 용서할 수 없어. 어디서 의사 면허를 땄지 ? 수의과대학인가 ? 당신에게는 우리 집 고양이 새끼도 맡길 수가 없어. 당신은 가짜 의사야. 여기에 온 건 샐리가 귀찮을 정도로 꽁무니를 떼다밀어서 그랬어. 바가지 긁는 것이 지겨워서 말이야. 내 지옥의 정의를 알고 계시나 ? 추하고 말라 비틀어진데다가 바가지를 긁어대는 여편네와 15년 동안이나 사는 것이 바로 지옥이라고. 봉으로 잡을 만한 녀석을 가르쳐 드릴까 ? 샐리의 멍청이 오빠라는 녀석들 · 10· 벤과 찰리를 꼬셔보라고. 내 각본을 쓴다는 벤은 동서도 구분 못하지. 찰리는 그 이하고. 두 녀석 모두 죽어 없어져야 하는 인생인데. 녀석들은 나를 파멸시킬 틈만 엿보고 있지. 내가 당신에게 호의라도 지니고 있는 줄 아시나 ? 제기랄 ! 거기에 점잔을 빼고 앉아 모두를 내려다보며 깔보지 말라고. 그래, 당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거겠지. 그게 왜 그런지 아시나 ? 당신은 현실 속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아무것도 모르지. 하루종일 버티고 앉아 환자의 돈을 말아먹는 것밖에 아는 게 없으니까. 네놈의 얼굴에 우는 상을 짓게 해주지. 미국의사협회에 네놈을 일러바칠 테다……” 울부짖는 소리. “그런 대본 같은 건 읽고 싶지도 않아요.” 침묵. “기분 언짢아 하지 마시오, 선생. 그럼, 내주에 또 오리다.” 주드는 테이프 레코더를 껐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코미디언 스키트 깁슨은 10년 전에 병원에 수용되어야 했다. 그의 도락이라고는 금발의 쇼걸들을 후려패거나 술집에서 싸움을 거는 일이다. 스키트는 몸집이 작기는 하지만, 옛날에 프로복서 생활을 해서 주먹을 쓸 줄 안다. 그가 잘하는 짓 중 하나는 게이들이 모이는 바에 가서 동성연애자를 화장실로 유인해 한 주먹으로 졸도시키는 일이다. 스키트는 경찰에 여러 차례 체포되었지만, 사건은 크게 확대되지는 않았었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희극배우였던 것이다. 스키트의 편집광 증세는 정말 살인을 저지를 정도로 심했고, 또한 노여움의 발작이 일어나면 사람을 죽일 만큼의 힘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처럼 용의주도한 음모를 실행에 옮길 만큼 냉혈적인 타입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거기에 해결의 열쇠가 있다고 주드는 느꼈다. 그를 죽이려 하는 자는 격정에 휩쓸려 일을 저지르는 타입이 아닌 것이다. 조직적이고도 얼음처럼 차가운 자이다. 미치광이인 것이다. 결코 날뛰지 않는 미치광이인 것이다. 제 11 장 전화가 울렸다. 상대방은 전화 서비스였다. 앤 블레이크 이외에는 모든 환자들에게 연락이 되었다는 통지였다. 주드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수화기를 놓았다. 그렇다면 앤은 오늘 찾아올 것이다.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부푸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의사인 그에게서 오라는 말을 듣고 들를 뿐이라는 사실을 주드로서는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의자에 걸터앉아 앤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는 과연 얼마만큼 그녀에 관해서 알고 있는 것일까 ? 주드는 테이프 레코더에 앤의 테이프를 걸었다. 그녀가 처음 찾아왔을 때의 테이프였다. “자세를 편히 하십시오, 블레이크 부인.” “네, 감사합니다.” “마음을 편안히 가지셨나요 ? ” “네.” “양손을 꽉 쥐고 계신데요.” “조금 긴장이 되었나 보네요.” “무슨 일로 ? ” 긴 침묵. “가정생활에 관해 이야기해 보십시오. 결혼한 지 6개월이 되는군요.” “예.” “이야기해 보십시오.” “남편은 훌륭한 분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집에 살고 있죠.” “어떤 집입니까 ? ” “프랑스의 시골풍이 깃든 가옥입니다……아주 아름다워요. 집안에는 이리저리 구부러진 차도가 나 있습니다. 집 주위에는 꽁지가 빠진 우스꽝스러운 청동 수탉이 서 있습니다. 옛날에 누가 장난삼아 엽총으로 쐈다나 봐요. 토지는 5에이커쯤인데 대부분이 숲으로 싸여 있답니다. 저는 자주 숲속을 산책하죠. 마치 시골에 사는 느낌이에요.” “시골을 좋아하십니까 ? ” “네, 무척.” “남편께서는 ? ” “좋아한다고 생각해요.” “5에이커나 되는 넓은 땅을 사들일 사람은 별로 없겠는데요. 시골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남편은 저를 사랑합니다. 저 때문에 샀을 걸로 생각해요. 남편은 아주 통이 크거든요.” “남편 이야기를 들려 주십시오.” 침묵. “잘생기셨나요 ? ” “앤터니는 미남입니다.” 주드는 까닭을 알 수 없는, 의사로서는 용서받을 수 없는 질투를 느꼈다. “두 분은 육체적으로 원만합니까 ? ” 그것은 마치 혀로 아픈 이를 더듬듯 하는 질문이었다. “네.” 그는 침대에 있는 그녀를 상상할 수 있었다. 매혹적이고, 부드러우며, 몸과 마음을 함께 바치는 여자. 제기랄 ! 그따위 이야기를 시켜서 뭣하나 싶었다. “아기를 원하십니까 ? ” “네.” “남편께서도 ? ” “네. 물론이지요.” 긴 침묵. 그리고 희미하게 테이프 돌아가는 소리뿐. 그리고 나서…… “블레이크 부인, 부인은 중대한 문제로 해서 찾아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남편과 관계되는 일입니까 ? ” 침묵. “그럼, 그렇다고 생각하기로 하겠습니다. 아까 이야기로는 두 분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충실하며, 두 분 모두 아기를 갖기를 희망하며, 아름다운 집에서 가정을 꾸미고 있습니다. 남편께서는 사업에 성공적이며, 미남인데다가 부인의 소망이라면 뭐든지 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결혼한 지 불과 6개월밖에 되지가 않습니다. 마치 낡은 농담에서처럼, ‘선생님, 나도 고민이 있나요 ? ’ 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이지요.” 다시금 테이프가 돌아가는 소리만 들릴 뿐 대화가 끊겼다. 잠시 뒤 그녀의 말소리가 들렸다. “저 · 10· 저로서는 이야기를 못하겠어요. 모르는 분이니까 상의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주드는 그때 그녀가 소파 위에서 몸의 방향을 바꾸고, 그 큰 수수께끼와도 같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모습을 생생하게 눈악에 떠올렸다 · 10· “오히려 더 힘드네요.” · 10· 앤은 그녀로 하여금 침묵을 지키게 하는 장벽을 뛰어넘기라도 하려는 듯 잰 입놀림으로 말했다 · 10· “저는 어떤 소문을 듣게 되었는데 · 10· 곧장 제 멋대로 결론을 내리고 만 것 같아요.” “남편의 사생활에 관한 것이었나요 ? 여자 말입니다.” “아닙니다.” “일 관계 ? ” “네 · 10· ” “남편이 어떤 일로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나요 ? 거래에서 상대를 속였다든지.” “비슷한 내용입니다.” 주드는 간신히 자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남편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다는 이야기로군요. 남편이 지금껏 부인이 몰랐던 일면을 드러냈다 ? ” “구 · 10· 구체적으로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곳에 온 것만 갖고도 남편을 배반한 느낌이 들어요. 오늘은 더 이상 묻지 마세요, 스티븐스 선생님.” 그날의 면담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주드는 테이프 레코더의 스위치를 껐다. 앤의 남편은 잔재주를 부렸던 것 같다. 탈세를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누군가를 파산으로 몰고 갔는지도 모른다. 앤은 물론 놀랐을 것이다. 그는 감수성이 예민한 여자다. 그래서 남편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간 모양이다. 주드는 앤의 남편을 가능한 용의자로 생각해 보았다. 그는 건설업자이다. 주드는 그를 만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사업상의 문제를 안고 있는지는 몰라도, 상상할 수 있는 한 그것이 존 핸슨이나 캐롤 로버츠, 나아가 자신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앤 자신은 어떤가 ? 그녀는 정신병자일까 ? 살인광일까 ? 주드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그녀를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애썼다. 주드는 그녀의 입을 통해서 들은 것 이외에는 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그녀의 가정이라든가 남편에 관한 것은 모두가 거짓말이며, 그냥 만들어낸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이 그녀에게 어떤 이익이 된단 말인가 ? 만일 그것이 살인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어떤 동기가 있어야 한다. 그녀의 모습과 목소리에 대한 기억이 그의 마음 가득히 퍼지면서 그는 앤이 그런 끔찍한 일과 관계가 있을 턱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자기의 목숨을 걸어도 좋다고 단정하고는 스스로의 결단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테리 워시번의 테이프를 가지러 갔다. 어딘가 그냥 넘어간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테리는 특별히 원해서 최근에 예약 외의 특별면담을 받고 있었다. 테리는 아직 그에게 말하지 않은 새로운 고민을 갖고 있는 것일까 ? 그녀는 늘 섹스에 사로잡혀 있어, 그녀의 현재의 회복과정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 10· 그녀가 갑자기, 더구나 시급한 특별면담을 요구하게 된 것은 무슨 이유일까 ? 주드는 그녀의 테이프 중 하나를 레코더에 걸었다. “당신의 결혼에 관해서 이야기합시다, 테리 양. 결혼은 다섯 번 하셨군요 ? ” “여섯 번이에요. 하지만 큰 차이는 없네요.” “당신은 남편들에 대해서 충실했나요 ? ” 웃음. “알고 계시면서. 나를 만족시켜 줄 남자는 온 세계에 하나도 없어요. 육체적인 문제라고요.” “‘육체적인 문제’란 ? ” “내 몸뚱이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이야기예요. 나에게는 뜨거운 틈새가 있는데, 거기를 내내 막고 있어야 해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합니까 ? ” “틈새를 막는다는 것 ? ” “당신이 육체적으로 다른 여자와 다르다는 것 말입니다.” “물론이죠. 촬영소의 의사가 그런 말을 했어요. 선천적으로 어떻고 저떻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정말 못봐줄 인간이었지.” “나는 당신의 모든 검사 결과를 살펴보았습니다. 당신의 신체는 생리학적으로 모든 점에서 정상입니다.” “검사 결과 같은 건 믿을 게 못돼요. 선생님이 직접 겪어보시지요.” “당신은 사랑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 ” “선생님을 사랑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죠.” 침묵.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어쩔 수가 없어요. 내 몸뚱이는 그렇게 돼먹은걸요. 나는 지금도 굶주리고 있어요.” “그럴 겁니다. 하지만 굶주리고 있는 것은 당신의 육체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요. 내 마음과 섞어볼래요 ? ” “아니.” “어떻게 하고 싶죠 ? ” “당신을 도와주고 싶습니다.” “이리 와서 내 곁에 앉아 보세요.” “오늘은 이만합시다.” 주드는 스위치를 껐다. 그는 테리가 대스타로서의 생활을 이야기하고, 그가 왜 할리우드를 떠났느냐고 물었을 때의 대화를 머리에 떠올렸다. “어느 지랄 같은 파티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작자의 뺨을 후려갈겼지요.” 그녀는 말했었다. “그런데 그게 사장이었지 뭐예요. 그는 나를 할리우드에서 내쫓았어요.” 주드는 그때 그녀의 가정환경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그 이상은 물어보지 않았고, 그 뒤에도 거기에 대해서는 화제를 삼지 않았었다. 이제야 그는 작은 의혹을 품었다. 거기에 대해서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봐야 했었다. 주드는 루이스 리키 박사(미국의 고고학자)나 마거릿 미드(미국의 인류학자)가 파타고니아 지방의 주민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 같은 의미에서만 할리우드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매혹적인 스타였던 테리 워시번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까 ? 다행히 노라 해들리는 대단한 영화 팬이었다. 주드는 그들의 집에 영화잡지가 수북히 쌓여 있는 것을 보고 피터를 놀린 적도 있었다. 노라는 어느 땐가 영화계 이야기를 하느라 그를 상대로 밤을 새울 뻔한 일도 있었다. 주드는 전화기 쪽으로 가서 다이얼을 돌렸다. “여보세요.” 그가 말했다. “어머나, 주드 ! ” 그녀의 목소리는 따사롭고 친근했다. “만찬에 오실 수 있는 날짜를 알려주시려고 전화한 거죠 ? ” “가까운 시일 내에 그러겠습니다.” “그러세요.” 그녀가 말했다. “저는 잉그리드와 약속을 했어요. 잉그리드는 미인이라는 말 했죠 ? ” 주드는 미인이라는 말을 믿었다. 하지만 같은 미인이라도 앤과는 다르리라고 생각했다. “당신이 또 바람을 맞히면 스웨덴과 전쟁이 일어날지 몰라요.” “이번에는 걱정 없습니다.” “사고에 관한 것은 정리가 됐나요 ? ” “예.” “재난도 그런 재난이 어디 있어요 ? ” 노라의 목소리에 망설이는 느낌이 섞였다. “주드……크리스마스날 말이에요. 피터와 나는 당신이 와줄 걸로 생각해요. 꼭요.” 그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매년 이런 말을 반복했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인 피터와 노라는 언제나 크리스마스를 혼자 지내는 주드를 안쓰럽게 생각했다. 주드는 알지도 못하는 남들 속에 섞여, 아무런 연고도 없는 군중 속에 스스로를 매몰시키고는 지쳐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때까지 걸어다니는 것이 습관이었다. 마치 죽은 자를 위해 으스스한 미사를 올리고, 해묵은 의식 속에서 비탄에 젖어, 스스로의 심신에 상처입히고 학대하는 듯했다. ‘너는 마치 스스로를 비극의 주인공인 양 자처하고 있다.’ 그는 혼잣말을 했다. “주드……” 그는 헛기침을 했다. “성의는 고맙습니다만.” 그는 노라가 얼마나 간절히 그러기를 바라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그녀는 실망의 빛을 목소리에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알겠어요. 피터에게 그렇게 전하지요.” “미안합니다.” 갑자기 그는 왜 전화를 걸었는지 생각해 냈다. “노라 · 10· 10· 테리 워시번을 알고 계십니까 ? ” “어머, 그 테리 워시번 ? 여배우 말이죠 ? 왜 물으지요 ? ” “오늘 아침 · 10· 매디슨 애버뉴에서 그녀를 봤거든요.” “진짜요 ? 정말 ? ” 노라는 어린아이처럼 진지해졌다. “그래, 어떻던가요 ? 늙었던가요 ? 아직 젊어요 ? 뚱뚱해지진 않고 ? 말랐던가요 ? ” “멀쩡하던데요. 굉장한 스타였었나요 ? ” “굉장한 스타라고요 ? 테리 워시번은 최대의 스타였다고요 · 10· 모든 점에서. 이해가 안 가시겠지만.” “그런 여배우가 왜 할리우드를 떠났나요 ? ” “떠났다기보다는 쫓겨난 거죠.” 그렇다면 테리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주드는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의사 선생님이란 세상 돌아가는 건 통 모르시나 봐. 테리 워시번은 할리우드가 문을 연 이후 최악의 스캔들과 관련이 됐었어요.” “그래요 ? ” 주드가 물었다. “무슨 일이었는데요 ? ” “보이 프렌드를 죽였거든요.” 제 12 장 또눈이 내리고 있었다. 15층 아래의 거리로부터 왕래하는 차소리가 차가운 바람에 춤추는 눈송이를 날리며 들려왔다. 그는 길 건너 맞은편 빌딩의 불이 켜진 사무실 창에, 흘러내리는 물기에 젖어 부옇게 흐려진 여비서 아가씨의 얼굴을 보았다. “노라 · 10· 그게 확실합니까 ? ” “할리우드에 관한 일이라면 저는 걸어다니는 사전이라고요. 그때 테리는 콘티넨탈 영화의 촬영소장과 함께 살았는데, 또 한편으로는 어느 조감독과 관계를 갖고 있었지요. 그녀는 어느 날 밤 그 조감독의 배신을 알고 그를 찔러 죽였어요. 소장은 여러 방면의 사람들에게 돈을 써서 단순한 사고로 얼버무렸답니다. 그때의 조건은 그녀가 할리우드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테리는 영원히 영화와 손을 끊게 된 거예요.” 주드는 아연해진 얼굴로 수화기를 바라보았다. “주드, 듣고 계세요 ? ” “예, 듣고 있습니다.” “좀 이상하네요.” “그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습니까 ? ” “듣다뇨 ? 신문이나 영화잡지에는 모두 나온 이야기인데.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인걸요.” 하지만 그는 예외였다. “고마워요, 노라.” 그는 말했다. “피터에게 안부 전해 주십시오.”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테리 워시번은 살인경력이 있으면서도 그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살인경력의 소지자라면…… 생각에 잠기면서 그는 메모지에 적었다. ‘테리 워시번.’ 전화가 울렸다. 주드가 수화기를 들었다. “스티븐스입니다……” “별일이 없나 해서요.” 앤젤리 형사였다. 아직 감기 기운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였다. 주드는 감격스러웠다. 그래도 그를 편들어 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뭐 달라진 것은 없나요 ? ” 주드는 잠시 망설였다. 마침내 폭탄에 대해서 가만히 있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굳혔다. “또 한 번 당할 뻔했습니다.” 주드는 앤젤리에게 무디에 대한것과자동차에장치된폭탄에관해서이야기했다.“이제는 맥그리비도 믿어 줄까요 ? ” “폭탄은 어떻게 했습니까 ? ” 앤젤리의 목소리는 흥분하고 있었다. 주드는 당황했다. “처치했지요.” “어떻게 했다고요 ? ” 앤젤리는 납득이 안 간다는 투로 물었다. “누가 손을 댔습니까 ? ” “무디입니다. 그는 경찰에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필요가 없다 ! 그자는 경찰이 뭣 때문에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 그것을 보기만 해도 폭탄을 장치한 자를 알 수도 있었을 텐데. 경찰에는 MO의 기록이 있어요.” “MO ? ” “수법(Modus Operandi)을 말합니다. 인간에게는 각기 나름대로의 습관적인 방식이 있지요. 처음에 어느 방법을 써먹으면 그 뒤에도 거의 같은 방법으로 반복하게 됩니다. 당신은 잘 모르는 일이겠습니다만.” “알 것 같습니다.” 주드는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무디도 그런 것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맥그리비에게 폭탄을 보여 주기 싫은 이유라도 있었단 말인가 ? “스티븐스 씨 · 10· 어떻게 해서 무디에게 의뢰를 하게 되었나요 ? ” “직업별 전화번호부에서 그의 이름을 골라냈습니다.” 그 말을 하고 있는 자신이 바보스럽게 생각되었다. 앤젤리가 꿀꺽 침을 삼키는 기색이 전해 왔다. “그러면 그에 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겠군요 ? ” “전혀. 하지만 지금은 그를 믿고 있습니다.” “이 판국에서는 아무도 믿어서는 안됩니다.” 앤젤리가 잘라 말했다. “하지만 무디가 사건과 어떤 관계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요. 전화번호부에서 마구잡이로 골라낸 이름이니까.” “어떻게 골라냈던 대수가 아닙니다. 웬지 석연치 못한 데가 있어요. 무디는 당신을 노리는 자를 잡기 위해 덫을 놓는다고 했다지만, 미끼를 채갈 때까지 덫을 조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범인은 빠져나갈 수가 있었지요. 그리고 나서 차의 폭탄을 당신에게 보여 주었지만, 그건 무디 스스로가 장치한 건지 누가 압니까 ? 그래야 당신의 신뢰를 얻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주드는 말끝을 흐렸다. “무디는 선의로 시작했는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당신을 덫에 몰아넣으려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어요. 우리가 진상을 캐볼 때까지 경솔히 처신하지 마십시오.” 무디가 그를 배반한다 ? 그건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한때는 무디가 자기를 놈들이 기다리는 사지로 몰아넣으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었던 일을 머리에 떠올렸다. “나는 어떻게 하면 되나요 ? ” 주드가 물었다. “어딘가로 떠나볼 생각은 없습니까 ? 정말로 여행을 떠나는 겁니다.” “환자를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선생 · 10· ” “더구나 · 10· ” 주드는 덧붙여 말했다. “그걸로는 해결이 되지도 않습니다. 나는 어떤 자에게서 도망을 쳐야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또 같은 일이 되풀이될 테니까.”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딴은 맞는 말씀입니다.” 앤젤리가 내쉬는 한숨 소리가 감기 끝이라 쌕쌕거렸다. 상당히 심했던 모양이다. “무디에게서 언제 연락이 오게 됩니까 ? ” “알 수 없어요. 그는 이 사건의 배후에 있는 자가 누군지 짐작이 가는 모양입니다만.” “그 배후에 있는 자가 무디에게 당신보다도 더 많은 돈을 지불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해보시지 않았습니까 ? ” 앤젤리의 목소리는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 “그가 만나야겠다고 전화를 걸어 오거든 나에게도 알려주십시오. 나는 한 이틀 동안은 더 집에서 쉬게 될 겁니다. 하여간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서 그를 만나서는 안됩니다.” “혹시 지나친 생각을 하는 건 아닙니까 ? ” 주드는 반발했다. “무디가 내 차에서 폭탄을 제거했다고 해서 · 10· ” “그것만이 아닙니다.” 앤젤리가 말했다. “내 육감으로는 당신은 잘못된 사람을 선정했습니다.” “하여간 그에게서 전화가 있으면 연락드리지요.” 주드는 약속했다. 그는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며 수화기를 놓았다. 과연 앤젤리의 의심은 도를 지나친 것일까 ? 무디가 그의 믿음을 사기 위해 폭탄을 조작했는지도 알 수 없다. 일단 신용만 얻어두면 다음은 누워서 떡먹기다. 주드에게 전화를 걸어 증거를 보여 주겠다는 구실로 한적한 곳으로 불러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주드는 몸서리쳤다. 그는 무디의 인격을 그 정도로 잘못 판단했단 말인가 ? 처음 무디를 만났을 때의 그의 인상을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무디는 무능하고 머리 회전이 느린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머리가 보기와는 달리 명석하고 예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걸로 무디를 철두철미 믿어도 된다는 조건은 될 수 없다. 하지만……그때 접수실 문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앤이다 ! ’ 그는 곧 테이프를 치우고 복도에 난 문 쪽으로 가서 그것을 열었다. 복도에는 앤이 서 있었다. 그녀는 깔끔한 감색 양장을 하고, 한결 얼굴의 윤곽이 돋보이는 작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앤은 그때까지도 멍하니 생각에 잠겨 눈악의 주드를 얼핏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면서 홀린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어느 구석에서든 흠을 잡아내어 그녀는 자기에게는 맞지 않는다, 오래지 않아 자기에게 딱 들어맞는 여인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마음을 먹게 할 이유를 찾았다. 그렇다 ! 여우와 신 포도. 정신분석의 시조는 프로이트가 아니라 이솝이다. “안녕하십니까 ? ” 그가 말했다. 그녀는 눈을 치켜뜨며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곧 미소를 띠었다. “안녕하셨어요 ? ” “들어오십시오, 블레이크 부인.” 그녀는 주드의 곁을 지나 진료실로 들어갔다. 그녀의 탄력있는 몸이 스쳤다. 그녀는 뒤돌아 그 자수정과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뺑소니 운전사는 잡혔나요 ? ” 그녀의 표정은 안쓰러워 보였다. 마음속으로부터 걱정을 해주는 것이다. 그는 다시금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좋게 평가하더라도 그것은 그녀로부터 값싼 동정이나 이끌어내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혹은, 자칫 잘못했다가는 미지의 위험 속에 그녀마저 끌어넣을지도 모른다. “아직은요.” 앤은 그의 얼굴을 그냥 지켜보고 있었다. “안색이 피로해 보이네요. 일하시기에는 아직 이른 게 아닐까요 ? ” 그는 동정에 저항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녀의 동정에는 매달리고 싶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예약은 모두 취소했습니다. 당신에게는 전화 서비스에서 연락이 안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녀의 얼굴에 불안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기 때문에 주드가 쉴 수 없게 된 것이 미안한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저……그냥 돌아갈까요……” “아니, 상관없습니다.” 그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연락이 닿지 않아 오히려 잘되었습니다.” 그가 그녀를 만나는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래, 상태는 어떻습니까 ? ” 그녀는 우물쭈물 무슨 이야기인가를 하려다가 도중에서 생각을 바꾸었다. “좀 혼란스러운 것 같아요.” 그녀는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섬세하고, 오래도록 잊고 있던 마음에 와 닿는 어떤 것이 있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금세라도 생각이 날 것 같으면서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서 따사로운 것이, 강한 육체적인 갈망 같은 것이 발산되고 있음을 느꼈다 · 10· 그러자 갑자기 생각이 났다. 그는 자기 자신의 감정을 그녀에게 귀납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동안이었지만, 정신과 1년생처럼 어리석은 일을 생각한 것이다. “유럽으로 언제 떠납니까 ? ” 그가 물었다. “크리스마스날 아침에요.” “부인과 남편 둘이서만 ? ” 그는 스스로가 진부한 내용만 입에 담는 바보처럼 느껴졌다. 쉬는 날의 바비트(싱클레어 루이스의 소설의 주인공. 장사와 부자가 되는 것밖에는 흥미를 갖고 있지 않다) 같은 식이다. “행선지는 ? ” “스톡홀름 · 파리 · 런던 · 로마 등지예요.” 내가 유럽을 두루 안내해서 다니고 싶은걸 · 10· 주드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는 로마의 아메리칸 병원에서 1년간 인턴생활을 한 적 있었다. 티볼리의 옛 유적 가까이에 시벨이라는 오래 되고 좋은 레스토랑이 있다. 그것은 언덕 위 낡은 이교도의 신전 곁에 있는데, 양지 쪽에 앉으면 수백 마리의 산비둘기가 절벽 위로 하늘이 까맣게 될 정도로 난무하는 광경을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앤은 남편과 로마에 가는 것이다. “두 번째 밀월여행이지요.” 그녀는 말했다. 그 말소리는 웬지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하기에 따른 사소한 것이다. 아마도 오랜 세월 훈련을 쌓지 못한 귀로는 판별하기 어려운 정도의 것이리라. 주드는 주의깊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표면상 그녀는 평온하고 정상으로 보였지만, 그는 그 깊은 곳에 놓인 긴장을 감지할 수 있었다. 만일 이것이 사랑하는 남편과 유럽으로 두 번째 밀월여행을 떠나는 젊은 여자의 그림이라면, 그 그림에는 어딘가 잘못된 구석이 있었다. 그는 갑자기 그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앤에게는 마음의 설레임이 없는 것이다. 있다고 해도 그보다 심각한 감정에 덮여 있다. 그건 슬픔인가, 아니면 후회인가 ? 주드는 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얼마 동안……여행기간은 얼마나 됩니까 ? ” 다시 바비트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의 입가에 보일락말락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그의 마음의 움직임을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글쎄요 · 10· ” 그녀가 대꾸했다. “앤터니의 계획이 정해지지를 않아서요.” “그렇습니까.” 그는 비참한 기분으로 시선을 융단 위로 떨구었다. 이제 이런 짓은 끝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대로라면 앤은 그를 정말 바보스러운 남자로 생각하고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녀를 속히 돌려보내야 한다. “블레이크 부인……” 그는 말문을 열었다. “네 ? ” 그는될수있는대로심각성을떨구어내려고애썼다.“오늘 오시라고 한 것은 실은 구실이었습니다. 오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나는 그냥 · 10· 작별을 고하고 싶었던 겁니다.” 이상하게도 긴장이 그녀로부터 사라져 가는 것처럼 보였다. “알고 있어요.” 그녀는 차분히 말했다. “저도 작별을 하러 왔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직 신경이 쓰이는 구석이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드……”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시선을 마주 대했다. 그는 그녀의 눈속에서 아마도 자기의 눈속에도 있을 것 같은 것을 보았다. 그것은 거의 물리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강한 감정의 반영이었다. 그는 그녀에게로 빨려들어가려 하다가 걸음을 멈췄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위험에 그녀를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평상시의 침착을 되찾고 있었다. “로마에 가시거든 연락 주십시오.” 그녀는 그윽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디 몸조심하셔야 합니다, 주드.” 그는 다시 쑥스러운 말이 나올까 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걸어나갔다. 전화벨이 세 번 울리고서야 주드는 그걸 알았다. 수화기를 들었다. “선생이오 ? ” 상대는 무디였다. 그의 목소리는 흥분 때문에 수화기가 깨질 정도로 꽝꽝 울렸다. “혼자십니까 ? ” “예.” 무디의 흥분에는 주드가 알 수 없는 묘한 것이 있었다. 조심성인가 ? 공포인가 ? “선생 · 10· 내가 사건의 배후에 있는 자가 누군지 알 것 같다는 말을 한 걸 기억하고 계십니까 ? ” “예……” “짐작한 대로였습니다.” 주드는 냉기가 몸속을 달려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누가 핸슨과 캐롤을 죽였는지 알았다는 이야기입니까 ? ” “알았습니다. 누군지, 그리고 그 이유도. 다음은 당신입니다, 선생.” “범인은 · 10· ? ” “전화로는 말할 수 없어요.” 무디가 말했다. “어디서 만나 이야기합시다. 혼자서 와주십시오.” 주드는 손에 들고 있는 수화기를 내려다보았다. ‘혼자서 와주십시오 ! ’ “듣고 있는 겁니까 ? ” 무디의 목소리가 물었다. “예.” 주드는 엉겁결에 말했다. 앤젤리가 뭐라고 했더라 ?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혼자서 무디를 만나서는 안됩니다’ · 10· “이리 와 주시지 않겠습니까 ? ” 그는 시간을 벌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나는 미행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아요. 간신히 떼어놓기는 했지만. 지금 파이브 스타 정육 출하회사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 중이오. 장소는 10번 애버뉴 서쪽 23번가 선창에 가까운 곳입니다.” 주드는 무디가 또 덫을 놓으려고 한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무디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앤젤리 형사와 함께 가겠습니다.” 무디의 목소리가 세차게 반대했다. “누굴 데리고 와서는 곤란해요. 당신 혼자 와야 합니다.” 역시 그런 거다. 주드는 전화선 저쪽의 뚱뚱하고 체구가 단단한 부처님의 얼굴을 머리에 떠올랐다. 그 호인처럼 생긴 사나이가 하루 50달러의 경비를 청구하면서 그를 사지에 몰아넣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주드는 감정을 억제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물었다. “사건의 배후인물을 알아낸 것이 확실합니까 ? ” “절대로 틀림없습니다, 선생. 돈 빈톤이라는 말 들어본 적 있습니까 ? ” 그렇게 묻고 무디는 전화를 끊었다. 주드는 그의 몸속을 휘몰아치는 폭풍우와도 같은 감정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그는 앤젤리의 집 전화번호를 찾아내어 다이얼을 돌렸다. 벨이 다섯 번 울렸다. 주드는 갑자기 앤젤리가 집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쌓였다. 과감히 혼자 무디에게로 가본다 ? 그때 앤젤리의, 감기로 코가 맹맹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주드 스티븐스입니다. 방금 무디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앤젤리의 목소리가 흥분을 보였다. “무디는 뭐라고 하던가요 ? ” 주드는 냉혹하게 자신을 살해할 계획을 진행하고 있는 뚱뚱한 그 사나이에 대한 신의와, 그리고 호의를 완전히 저버릴 수가 없어 잠시 망설였다. “파이브 스타 정육 출하회사로 나와 달라고 합니다. 장소는 10번 애버뉴에 가까운 23번가입니다. 나보고 혼자 오랍니다.” 앤젤리는 쓴웃음을 짓는 모양이었다. “그럴 테지요. 진료소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서는 안됩니다. 내가 맥그리비에게 전화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둘이서 선생을 모시러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주드가 말했다. 그는 천천히 수화기를 놓았다. 노만 Z 무디. 전화번호부에서 골라낸 낙천적인 부처님 인상의 사나이. 주드는 갑자기 밑도끝도없는 비애 같은 것을 느꼈다. 그는 어느덧 무디를 좋아하고 있었다. 신뢰가 싹텄던 것이다. 그 무디가 자기를 죽이려 기다리고 있다니. 제 13 장 20분 뒤, 주드는 앤젤리와 맥그리비 경사를 맞이해 들이기 위해 진료소 문의 자물쇠를 풀었다. 앤젤리의 눈은 붉게 충혈되고 목소리는 갈려 있었다. 주드는 그를 병상에서 끌어낸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맥그리비의 인사에는 그냥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맥그리비 경사에게 노만 무디의 전화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앤젤리가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가봅시다.” 맥그리비는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5분 뒤, 그들은 표식이 없는 경찰차로 웨스트 사이드를 달리고 있었다. 앤젤리가 운전을 했다. 눈발은 멎고, 간신히 얼굴을 내밀었던 늦은 오후의 태양은 맨해튼의 하늘을 낮게 뒤덮기 시작한 무거운 비구름으로 가려졌다. 먼 곳에서 우렛소리가 들리자 가로세로로 칼날과도 같은 번개가 달렸다. 굵은 빗방울이 방풍 유리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차가 달려감에 따라 고층 빌딩은 한기를 막기 위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는 것과도 같은 변두리의 초라한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 자동차는 모퉁이를 돌아 23번가로 꺾어들어가더니 서쪽의 허드슨 강으로 향했다. 그리고 고철 야적장, 수리공장, 지저분한 술집 등을 지나 차고, 화물운송회사 등이 모여 있는 블록을 지나갔다. 10번가에 가까워 오자 맥그리비는 앤젤리에게 차를 세우라고 했다. “여기에서 내리세.” 맥그리비는 차에서 내리며 주드를 돌아보았다. “무디는 누군가와 함께 있겠다고 했소 ? ” “아뇨.” 맥그리비는 오버 단추를 풀고, 권총을 허리의 케이스에서 빼내어 오버 주머니에 넣었다. 앤젤리도 그렇게 했다. “우리들 뒤를 따라오도록 하시오.” 맥그리비가 주드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세 남자는 옆으로 후려때리는 빗발에 고개를 움츠리고 걷기 시작했다. 블록을 반쯤 걸어간 곳에 황폐한 건물이 서 있고, 출입구 위에 색바랜 간판이 걸려 있었다. 파이브 스타 정육 출하회사 자동차도 트럭도 인기척도 없었다. 두 형사는 출입구 쪽으로 걸어가 좌우로 위치를 잡았다. 맥그리비가 출입문을 살폈다. 자물쇠는 잠겨져 있지 않았다. 그는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초인종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빗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쉬는 날 같습니다.” 앤젤리가 말했다. “그런 것 같군.” 맥그리비가 말했다. “크리스마스 전의 금요일이라 · 10· 대개는 회사마다 오후부터는 휴가로 들어가지.” “화물이 드나드는 통용문이 있을 겁니다.” 주드는 물구덩이를 피하면서 그림자처럼 건물 끝 쪽으로 움직여 가는 두 형사의 뒤를 쫓았다. 마침내 통용문을 발견했다. 문 안을 살펴보니 화물적하장 곁에 빈 트럭이 여러 대 보였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적하장 쪽으로 다가갔다. “자.” 맥그리비가 주드에게 말했다. “불러보시지요.” 주드는 망설였다. 무디를 배신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큰소리로 외쳤다. “무디 ! ” 거기에 응답한 것은 비를 피해 숨어들어온 도둑고양이의 놀란 으르릉 소리였다. “무디 씨 ! ” 창고 안의 출하품을 이동시켜 트럭에 옮겨 싣기 위해 만들어진 판 위에 큼직한판자문이 있었다. 그 판에는 계단이 없었다. 맥그리비의 거한이라고 할 만한 체구가 보기보다 가볍게 판 위로 날아올랐다. 뒤이어 앤젤리가, 그리고 주드가 뒤따랐다. 앤젤리가 나무문에 가까이 가서 잡아당겼다. 자물쇠는 채워져 있지 않았다. 큼직한 문은 비위에 거슬린다는 듯이 큰소리를 내고 열렸다. 고양이가 비를 피하는 것도 잊고 기대에 찬 울음소리로 거기에 응했다. 창고 안은 캄캄했다. “플래시를 갖고 왔나 ? ” 맥그리비가 앤젤리에게 물었다. “아뇨.” “별수없군.” 조심스럽게 그들은 어둠 속을 악으로 나아갔다. 주드는 다시 한 번 불렀다. “무디 씨, 주드 스티븐스입니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마룻바닥이 삐거덕거릴 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맥그리비는 주머니를 뒤져 납작한 종이성냥을 꺼냈다. 그는 한 개비를 그어 쳐들었다. 약하고 흔들거리는 불꽃이 공허하고 큰 동굴과도 같은 공간을 노랗게 비춰 드러냈다. 곧 성냥이 타버렸다. “전기 스위치를 찾아봐.” 맥그리비가 말했다. “지금 그게 마지막 한 개비였어.” 주드는 앤젤리가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는 소리를 들었다. 주드는 계속 악으로 나아갔다. 그는 두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 “무디 ! ” 그가 외쳤다. 창고 한 구석에서 앤젤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스위치가 있습니다.” 찰칵 소리가 났다. 하지만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마스터 스위치를 내렸군.” 맥그리비가 말했다. 주드는 벽과 맞부딪쳤다. 몸을 지탱하기 위해 뻗은 손이 문의 손잡이에 닿았다. 그는 빗장을 빼고 잡아당겼다. 육중한 문이 스르르 열리며 차가운 공기가 흘러나왔다. “문을 찾아냈소 ! ” 그가 소리질렀다. 문지방을 넘어 그는 조심조심 악으로 전진했다. 등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심장이 요란스럽게 고동쳤다. 아까의 방보다도 더 어두웠다. 마치 칠흑의 나락에라도 떨어진 느낌이었다. “무디 ! 무디 ! ” 깊고도 무거운 침묵. 무디는 어디에라도 있어야 했다. 만일 그가 없다면 맥그리비가 또 어떤 생각을 하게 될는지 뻔한 노릇이다. 주드는 또 한 번 늑대가 나타났다고 허풍을 떤 소년꼴이 될 것이다. 다시 한 걸음 악으로 나간 주드는 갑자기 차디찬 고깃덩이가 얼굴에 철썩 와닿는 감촉을 느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퉁기듯 물러섰다. 머리칼이 우수수 거꾸로 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피와 죽음의 강한 냄새에 생각이 미쳤다. 가까운 암흑 속에 적이 몸을 도사리고 금세라도 덤벼들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공포에 질려 얼굴의 살갗이 경련을 일으키고 심장이 터질 듯해서 숨이 가빴다. 떨리는 손가락 끝으로 그는 오버 주머니에서 종이 성냥을 찾아내어 한 개비를 켰다. 그 빛 속에서 코끝에 크고 멍청한 눈이 나타났다. 공포의 몇 초가 지나고서야 그것이 갈고리에 매달린 소 한 마리라는 것을 알았다. 성냥불이 꺼지기 전에 그는 여기저기 매달려 있는 소의 동체와 구석 쪽에 난 문의 윤곽을 알아차렸다. 아마도 문은 사무실로 통할 것이다. 무디는 거기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주드는 캄캄한 어둠 속을, 문 쪽을 바라보고 안으로 걸어갔다. 차디찬 소의 시체가 몇 번인가 그의 몸에 와 닿았다. 그때마다 놀라며 그는 더듬더듬 문 쪽으로 더듬어 나갔다. “무디 ! ” 앤젤리와 맥그리비는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 10· 소의 시체 사이를 누비며 그는 심술。은 어떤 자가 미치광이와도 같은 장난질을 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누가 뭣 때문에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 그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문 가까이 간 그는 또 고깃덩이에 부딪쳤다. 주드는 방향을 확인하기 위해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성냥을 켰다. 그 순간 그의 눈악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은 일그러진 얼굴로 갈고리에 매달려 있는 노만 Z 무디의 시체라는 것을 알았다. 성냥불이 꺼졌다. 제 14 장 검시관계 경찰관들은 이미 일을 끝내고 돌아간 뒤였다. 무디의 시체도 실려갔고, 남은 것은 주드와 맥그리비, 그리고 앤젤리 세 사람이었다. 그들은 작은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방안에는 달력에서 떼어낸 몇 장의 누드 사진이 붙어 있고, 낡은 책상과 회전의자, 두 개의 서류용 캐비닛이 놓여 있었다. 전깃불이 켜지고 전기 난로도 들어왔다. 회사의 경영자 폴 모레티 씨는 경찰의 수소문으로 참석중이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끌려오다시피 해서 질문을 받았다. 모레티 씨의 설명에 의하면 크리스마스 주말이어서 종업원들을 정오에 돌아가게 하고 12시 30분에 문을 닫았는데, 그 당시 회사 구내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술에 취해 있었고, 만사에 울화통을 터뜨려 맥그리비는 더 이상 물어볼 것도 없다고 판단하고서 그를 차에 태워 보내게 했다. 주드는 실내의 상황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는 무디만을 생각했다. 그렇게나 태평하고 부지런하던 그로서는 너무나 참혹한 최후였다. 주드는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가 끌어들이지만 않았더라도 그 뚱뚱한 탐정은 지금도 살아 있을 것이다. 시간은 자정에 가까웠다. 주드는 짜증을 내면서 무디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을 때의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열 번째였다. 맥그리비는 의자에 앉아 오버를 걸친 등을 둥글게 구부리고는 시가를 마구 십어대면서 주드를 노려보았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탐정소설 읽습니까 ? ” 주드가 뜻밖의 질문에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니, 왜요 ? ” “왜냐하면, 당신의 이야기는 사실 너무나 빈틈이 없습니다. 하기야 처음부터 당신이 사건과 관계가 있다고 보았었지. 그리고 당신에게도 그런 말을 했고.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지요 ? 당신은 하루 아침에 범인이 아니라 피해자로 둔갑했소. 처음에 당신은 차에 치었다고 주장했고 · 10· ” “실제로 치었잖습니까 ? ” 앤젤리가 끼어들었다. “그런 얕은 수에는 풋내기라도 넘어가지 않아.” 맥그리비가 야무지게 말했다. “누구와 선생이 짜고 할 수도 있고.” 그는 다시 주드를 향해 말했다. “다음에 앤젤리 형사에게 전화를 걸어 두 남자가 진료소에 침입해서 당신을 죽이려 했다는 조작극을 떠벌렸고.” “정말로 침입했다니까.” 주드가 울상이 되었다. “아니, 침입한 적 없어요.” 맥그리비가 잘라 말했다. “그들이 특별한 열쇠를 사용했다는 것인데 · 10· ” 그의 목소리가 냉랭하게 울려 퍼졌다. “당신 진료소의 열쇠는 단 두 개뿐 · 10· 당신과 캐롤 로버츠만이 갖고 있잖소 ? ” “그렇습니다. 일전에도 말했잖습니까 ? · 10· 그들은 캐롤의 열쇠를 복제했다고.” “그야 들었지. 그래서 파라핀 테스트를 해봤습니다. 그러나 캐롤의 열쇠는 복제된 흔적이 없어요.” 그는 결정적인 효과를 즐기겠다는 투로 말을 잠시 끊었다. “그녀의 열쇠는 우리가 보관하고 있으니까 남은 것은 당신의 것 하나뿐입니다.” 주드는 아무 말 없이 그냥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범인이 미치광이라는 말을 내가 들은 척도 하지 않으니까 당신은 전화번호부에서 만만한 탐정을 물색했소. 그 사람은 위기일발의 순간에 당신의 차에서 폭탄장치를 찾아냈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걸 볼 수 없었소. 그래서 당신은 나에게 다른 시체를 들이밀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지. 그 결과 앤젤리에게 수수께끼의 범인을 밝혀낸 무디가 만나자는 전화를 걸어왔다고 알렸소. 그런데 어떻게 됐지 ? 우리가 와보니 탐정은 갈고리에 매달려 있다 이거요.” 주드는 분노로 얼굴이 붉어졌다. “그건 내가 한 짓이 아니오.” 맥그리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당신을 체포하지 않는 유일한 이유를 알고나 있습니까 ? 아직 이 어려운 사건의 동기를 발견할 수가 없어서 그렇단 말이오. 하지만 나는 알아낼 거요, 선생. 틀림없이.” 그는 일어섰다. 주드는 갑자기 생각이 났다. “기다려 주시오 ! 돈 빈톤을 압니까 ? ” “빈톤이 뭡니까 ? ” “무디는 그가 사건의 배후에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 그 돈 빈톤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다 이겁니까 ? ” “아니.” 주드가 말했다. “나 · 10· 나는 경찰이라면 알고 있나 해서.” “들어본 적도 없소.” 맥그리비가 앤젤리 쪽을 바라보았다. 앤젤리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 그럼 돈 빈톤에 관한 조회를 해주게. FBI,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 그리고 미국 내 모든 대도시의 경찰서장 악으로 말일세.” 그리고 나서 그는 주드를 바라보았다. “자, 이젠 됐소 ? ” 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건의 배후에 있는 자가 누구든간에 어떤 전과가 있을 것이 틀림없다. 전국적인 조회를 하면 규명하기가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다. 주드는 다시금 무디와 그가 늘 하는 말과 민첩한 머리 회전 등에 관해서 생각했다. 무디는 이곳까지 미행을 당한 것이 틀림없다. 그가 비밀을 강조했었던 것으로 보아 주드와 만나는 이 장소에 대해서 누구에게 누설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찾아야 할 배후인물의 이름만은 분명해졌다. ‘사전 경고’ ‘사전 준비’ 노만 Z 무디의 죽음은 이튿날 아침 신문 1면에 크게 보도되었다. 주드는 진료소에 가는 도중 신문을 샀다. 그에 관해서는 경관과 함께 시체를 발견한 목격자로서 간단히 언급되어 있었다. 맥그리비가 자세한 내막이 신문에 나가지 않도록 손을 쓴 것이다. 그는 손바닥 안을 뒤집어 보려하지 않는 것이다. 주드는 과연 앤이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오늘은 토요일로서, 주드는 병원에 개설된 진료실로 나가 봐야 하는 날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의사에게 진료를 부탁해 두었다. 주드는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인간이 이처럼 언제 기습해 올지 모르는 암살자를 전전긍긍 늘 경계해야 하는 생활을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 것인지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앤젤리 형사에게 돈 빈톤에 관한 조회결과를 알아보려고 그는 오전 중에만도 대여섯 번이나 전화기 가까이에 갔으나 그때마다 스스로를 억제했다.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전화를 걸어 주었을 것이다. 주드는 돈 빈톤의 동기가 무엇인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빈톤은 그가 여러 해 전에, 어쩌면 인턴 시절에 치료를 해준 환자인지도 모른다. 주드에게 괄시를 받았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뜻하지 않게 그로부터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인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주드는 빈톤이라는 환자의 이름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점심때쯤 누가 복도에서 접수실 문을 열려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앤젤리였다. 주드는 앤젤리의 얼굴이 다소 수척해졌다는 것 외에는 그의 표정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코끝이 발개졌고 가끔씩 코를 훌쩍거렸다. 그는 진료실에 들어서자마자 맥빠진 사람처럼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돈 빈톤에 관해 무슨 회신이 있었나요 ? ” 주드는 기대에 차서 물어보았다. 앤젤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FBI와 각 도시 경찰서장, 그리고 인터폴에서 각기 텔레타이프로 회신이 몰려들었지요.” 주드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돈 빈톤이라는 이름은 들은 적도 없다고 합니다.” 주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앤젤리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위에 압박감을 느꼈다. “그럴 수가 ! 그럴 리가 없습니다 ! 누가 · 10· 누군가는 빈톤을 알고 있을 겁니다. 이런 연속살인을 하는 자가 지금까지 아무런 짓도 하지 않은 초범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맥그리비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앤젤리는 나른하다는 듯이 말했다. “선생, 나는 물론 우리 직원 모두가 밤새도록 맨해튼 구와 다른 모든 구, 심지어 가까운 뉴저지와 코네티컷 주까지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선을 이리저리 그은 종이쪽지를 꺼내어 주드에게 보여 주었다. “전화번호부에서 돈 빈톤이라는 이름을 찾아보았으나, 이름 철자가 ‘ton’으로 끝나는 것이 열한 명, ‘ten’이 네 명, 그리고 ‘tin’이 둘 있습니다. 이들을 모두 발음상 빈톤으로 생각해 봤습니다. 그 중에서 가능성이 있는 자를 다섯 명으로 축소해서 하나하나 만나보았습니다. 한 사람은 중풍에 걸려 있더군요. 한 사람은 목사입니다. 또 한 사람은 은행의 부사장. 그리고 소방수 한 명. 이 사람은 두 건의 살인사건이 있었던 날 근무중이었습니다. 마지막 한 사람은 방금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애완동물가게를 하고 있는데, 팔십이 다 된 노인입니다.” 주드의 입안이 바싹 말랐다. 그는 그제야 자기가 이 일에 대해서 얼마나 기대를 걸고 있었나를 깨달았다. 무디는 확신을 갖고 돈 빈톤이라는 이름을 말해 주었을 것이다. 그는 돈 빈톤이 공범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건의 배후인물이라고 했었던 것이다. 경찰에 그런 사람의 기록이 없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무디는 진실을 알아냈기 때문에 살해된 것이다. 무디를 잃어버린 주드는 이제 완전히 외톨이로 돌아간 것이다. 그를 둘러싼 그물은 차츰 폭을 좁히고 있다.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앤젤리가 말했다. 주드는 앤젤리의 얼굴을 보고 그가 간밤에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러 가지로 감사합니다.” 그는 감사의 마음으로 말했다. 앤젤리는 몸을 악으로 내밀었다. “돈 빈톤이라는 이름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요, 선생 ? ” “……” 주드는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는 무디에게 사건의 배후에 있는 인물을 정말로 알아냈느냐고 물었었다. 그때의 무디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절대로 틀림없습니다, 선생. 돈 빈톤이라는 말 들어본 적 있습니까 ? ” 그는 눈을 떴다. “틀림없습니다.” 그는 말했다. 앤젤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막다른 골목에 부딪친 꼴이군요.”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재채기를 했다. “한숨 자는 게 좋을 겁니다.” 앤젤리가 일어섰다. “예, 그래야 되겠습니다.” 주드가 망설임 끝에 물어보았다. “당신은 언제부터 맥그리비와 짝을 지었습니까 ? ” “이번 사건이 처음입니다. 왜 그러시죠 ? ” “그가 나를 살인죄로 옭아맬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 ” 앤젤리는 또 재채기를 했다. “선생의 말씀대로 어서 가서 한숨 자는 게 이로울 것 같습니다.” 그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한 가지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주드가 말했다. 앤젤리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이야기하시지요.” 주드는 테리에 관해서 자세히 이야기했다. 그리고 존 핸슨의 그전 호모의 상대에 대해서도 조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별로 큰 기대를 갖기는 어렵습니다.” 앤젤리가 솔직히 말했다. “하지만 그냥 앉아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나는 그들의 목표가 되는 것은 이제 신물이 납니다. 이번에는 이쪽에서 반격을 해볼 생각입니다. 그들을 추적할 생각입니다.” 앤젤리가 주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떤 수단으로 ? 상대는 그림자와도 같은데 말입니다.” “목격자가 용의자의 인상을 이야기하면 경찰은 화가로 하여금 그 특징을 합성한 그림을 그리게 한다지요 ? ” 앤젤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몽타주라는 것입니다.” 주드는 흥분이 되어 방안을 오락가락했다. “내가 사건의 배후에 있는 남자의 몽타주 재료를 제공하겠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 당신은 한번도 그 사람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데. 구름잡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주드는 잘라 말했다. “상대는 대단히 특수한 사람입니다.” “미치광이라는 말입니까 ? ” “미치광이라는 낱말은 모든 걸 한데 뭉쳐서 하는 말입니다. 의학적으로는 별반 의미가 없습니다. 제정신이라는 것은 단지 현실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할 뿐이지요. 만일 우리가 적응할 수 없다면 우리는 현실에서 숨어버리든가, 스스로를 세상의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려 법률이나 규칙에 속박되지 않는 초인으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미치광이는 스스로를 초인이라고 믿고 있는 거군요.” “맞습니다. 위급한 상태에서 우리에게는 세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도피와, 건설적인 타협과, 마지막으로 공격입니다. 우리의 상대는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정신이상자군요.” “아니, 정신이상자는 여간해서 공격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정신집중의 기간은 극히 짧지요. 우리의 상대는 좀더 복잡합니다. 정신적 발육불완전이라든가 정신분열, 또는 순환기질 같은 것이 복합적으로 잠재해 있는 겁니다. 부조리한 행위 끝에 일시적으로 몽롱한 상태에 빠지는 기억상실증 환자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 사람의 겉모양과 행동이 누구의 눈으로 보아도 분명 정상적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단서가 있을 수 없겠군요.”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단서는 여러 가지가 있지요. 나는 그 사람의 육체적인 특징을 애기할 수 있습니다.” 주드가 말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신을 집중했다. “돈 빈톤은 중간 키로 균형잡힌 몸매에 운동선수와도 같은 체격입니다. 보기에 단정하고 만사에 꼼꼼합니다. 예술적인 재능은 없습니다. 그림도 모르고, 소설이나 시에는 문외한이며, 피아노도 치지 못합니다.” 앤젤리는 멍해서 주드를 바라보았다. 주드는 차츰 열을 올리고 말도 빨라졌다. “그 사람은 어떤 클럽이나 단체에도소속하지 않습니다. 그가 그곳의 우두머리가 아니고는 말입니다. 자기가 대장 노릇을 하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거지요. 그는 냉혹하고 조급하며 스케일이 큽니다. 예를 들어 좀도둑 같은 짓은 하지 않습니다. 전과가 있다면 은행강도나 유괴, 또는 능히 살인을 할 사람입니다.” 주드의 흥분이 고조되었다. 그 남자의 영상이 그의 마음속에서 더욱 뚜렷해지는 것이다. “그를 붙잡고 보면, 그가 소년시절에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앤젤리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 도중에 방해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상대는 정신이상의 마약상습자일 수도 · 10· ” “틀립니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사람은 마약을 쓰지 않습니다.” 주드의 목소리는 자신에 차 있었다. “더 이야기할 게 있습니다. 그는 학교시절에 격렬한 운동을 했습니다. 미식축구나 아이스하키 같은 거 말입니다. 서양장기나 언어 게임, 퍼즐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앤젤리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상대는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반박했다. “당신 자신도 그렇게 말했지요.” “나는 돈 빈톤의 특징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주드가 말했다. “사건을 총괄하고 있는 사람 말이지요. 그리고 덧붙여 말하건데, 그는 라틴계의 사람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합니까 ? ” “살인수법으로 짐작이 갑니다. 단도 · 10· 산(酸) · 10· 폭탄. 남미인이 아니면 이탈리아나 스페인 사람입니다.” 그는 한숨을 돌렸다. “이것이 세 사람을 죽이고 나를 죽이려는 범인의 특징입니다.” 앤젤리는 침을 삼켰다. “어떻게 그런 걸 알 수가 있습니까 ? ” 주드는 비로소 의자에 앉으며 앤젤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게 내 직업이니까요.” “정신적인 면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본 적도 없는 사람의 육체적 특징을 어떻게 상상할 수가 있습니까 ? ” “내기를 하고 있는 셈이지요. 크레치머라는 의사가 편집증 환자의 85퍼센트는 강인하고 스포츠맨과도 같은 체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범인은 틀림없는 편집광입니다. 자기가 위대하다는 망상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는 법률을 초월한 존재로 생각하는 과대망상증에 걸려 있는 거지요.” “그렇다면 왜 이제껏 입원시키지 않았을까요 ? ” “그건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뭐를 쓰고 있다고요 ? ” “우리는 모두가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유년기를 지나면서 우리들은 진짜 감정을 숨기고 증오나 공포를 겉으로 내비치지 않도록 교육받습니다.” 그의 말소리에는 권위가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스트레스 때문에 돈 빈톤은 가면을 벗어던지고 얼굴의 본바탕을 내밀 때가 있지요.” “그것 참 ! ” “자만심이 그의 약점입니다. 만일 그의 자만심이 위협받는다면 · 10· 파괴될 위험에 처하면 · 10· 미친 듯 날뜁니다. 그는 지금 벼랑에 서 있습니다. 곧 굴러떨어질 겁니다.”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마나를 지닌 사람입니다.” “뭐를 지니고 있다고요 ? ” “마나. 원시적인 말인데, 마력에 의해 타인을 지배하는 사람, 압도적인 개성을 지닌 사람에게 쓰이는 말입니다.” “그 사람은 그림을 모르고, 소설이나 시와는 인연이 멀고, 피아노도 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 ” “세상에는 정신분열에 걸린 예술가가 많이 있습니다. 그 대부분은 살인이나 상해를 범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작품을 통하여 자기를 발산할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찾는 사람은 그 발산의 창구를 갖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화산과도 같은 존재이지요. 내부의 압력을 토해 내는 유일한 방법은 폭발 · 10· 핸슨이나 캐롤, 그리고 무디 살해와 같은 거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유도 없는 살인이 되는데 · 10· ” “그에게는 이유가 없는 살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의 머리는 신속하게 악으로 나아갔다. 그래서 퍼즐의 몇 가지가 풀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너무나 맹목적이었다는 것, 사실을 똑바로 바라보기를 두려워했었던 것을 깨달았다. “내가 돈 빈톤이 노리고 있는 단 한 사람의 인간 · 10· 주요 목표입니다. 존 핸슨은 나로 착각된 끝에 살해되었습니다. 범인은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자 그 길로 진료소로 왔습니다. 그때는 내가 막 퇴근한 뒤였는데, 그는 캐롤과 맞부딪쳤습니다.” 주드의 말소리에는 분노가 곁들어 있었다. “범인이 캐롤을 죽인 것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인가요 ? ” “아닙니다. 그 사람은 사디스트가 아닙니다. 캐롤을 고문한 것은 어떤 것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범죄의 증거 같은 겁니다. 캐롤은 그걸 그에게 내주려 하지 않았다 · 10· 아니면, 줄 수가 없었지요.” “어떤 증거인데요 ? ” 앤젤리가 물었다. “알 수 없습니다.” 주드가 말했다. “하여간 그건 사건 전체의 열쇠입니다. 무디는 그 답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살해된 거지요.” “또 한 가지 모를 일이 있습니다. 만일 길에서 당신을 치어죽였다면 그들은 그 증거를 손에 넣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지금까지의 선생의 주장과는 잘 맞아떨어지지가 않는 것 같은데.” 앤젤리가 지적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증거라는 것이 내 테이프라고 합시다. 그 테이프 자체는 전혀 해가 되지 않는 것이라고 해도 그걸다른사실과짝짓게되면그들에게큰위협이된다 · 10· 그럴 경우 그들에게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테이프를 내게서 빼앗든가, 내가 아무에게도 그걸 누설하지 못하도록 죽여버리는 것입니다. 처음에 그들은 나를 죽여 없애려 했습니다. 그러나 실수로 핸슨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방법을 취했지요. 그들은 캐롤에게 테이프를 내놓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것도 실패하자 나를 살해하는 일에 총력을 집중하기로 한 겁니다. 그래서 자동차 사고를 일으켰지요. 내가 무디를 찾아갔을 적에 아마도 나는 미행을 당했을 것이고, 다음에는 무디를 미행했을 겁니다. 그리하여 그가 진실을 밝혀내자 살해해 버린 겁니다.” 앤젤리는 생각에 잠기며 눈살을 찌푸리고 나서 그를 바라보았다. “나를 죽일 때까지 손길을 멈추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입니다.” 주드는 조용히 결론을 내렸다. “이건 죽음의 게임입니다. 그리고 내가 묘사한 그 사람은 게임에 진다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앤젤리는 주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를 관찰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옳다고 하면 · 10· ”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당신은 몸을 지킬 수 있는 것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는 권총을 꺼내어 탄창에 총알이 차 있는 것을 확인했다. “감사합니다, 앤젤리 형사. 하지만 권총은 필요하지가 않습니다. 나는 나 자신의 무기로 싸웁니다.” 접수실 쪽의 문이 찰칵 소리를 내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오기로 되어 있었나요 ? ” 주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오늘 오후에는 환자가 오지를 않습니다.” 권총을 쥔 채로 앤젤리가 접수실로 통하는 문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한쪽으로 몸을 붙이고 홱 문을 열었다. 피터 해들리가 놀란 얼굴로 멈춰섰다. “누구시죠 ? ” 앤젤리가 날카롭게 물었다. 주드가 문 쪽으로 급히 달려갔다. “안심하십시오, 내 친구입니다.” 주드가 황급히 설명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 ” 피터가 물었다. 앤젤리가 권총을 챙겨넣었다. “이쪽은 피터 해들리 의사 · 10· 앤젤리 형사라네.” 주드가 둘을 소개했다. “별난 정신병 치료실도 다 보겠군.” 피터가 말했다. “약간의 문제가 있어서요.” 앤젤리가 둘러댔다. “스티븐스 선생의 이 진료실에 도둑이 들어서……그 도둑이 또 왔나했지요.” 주드가 맞장구를 쳤다. “그렇다네. 도둑은 노리는 걸 못갖고 갔거든.” “캐롤 살해와 관계가 있는 일인가 ? ” 피터가 물었다. 주드가 입을 열기 전에 앤젤리가 대답했다. “분명치가 않습니다, 해들리 선생님. 경찰은 스티븐스 선생님에게 당분간 이 사건의 내용은 말씀을 삼가 달라고 부탁드린 바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피터가 말했다. 그는 주드를 바라보았다. “점심식사 약속에는 지장이 없겠나 ? ” 주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물론이지.” 그는 앤젤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용건은 끝난 거지요 ? ” “예, 모두.” 앤젤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필요없겠습니까…… ? ” 그는 몸짓으로 권총을 가리켰다. 주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만사에 조심하십시오.” 앤젤리가 말했다. “그래야지요.” 주드가 대꾸했다. 점심식사 중에도 주드는 간간이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으나 피터는 캐물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친구들의 근황과 서로가 알고 있는 환자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피터는 주드에게 해리슨 버크의 회사 사장에게 이야기를 해서, 은밀하게 버크를 검사할 수속을 밟아두었다고 알려주었다. 버크는 조만간 사설 정신병원에 보내질 것이라고 했다. 커피를 마시며 피터가 말했다. “주드, 자네가 어떤 문제에 말려들었는지는 모르지만, 혹시 내가 힘이 될 일이 있다면……” 주드는 손을 내저었다. “고맙네, 피터. 나 스스로 마무리를 질 일이라서……결말을 본 뒤에 모두 이야기하겠네.” “어서 그렇게 되기를 바라네.” 그리고 나서 피터는 핵심을 찔러 물었다. “주드 · 10· 혹시 자네 신상에 위험이 있는 건 아닌가 ? ” “그런 건 없어.” 주드가 말했다. 하지만 이미 세 사람을 도살한 살인광은 주드를 네 사람째의 희생양으로 삼고 호시탐탐 마수를 뻗쳐오고 있는 참이었다. 제 15 장 점심식사 뒤, 주드는 진료소로 돌아왔다. 그는 될 수 있는 한 공격으로부터 몸을 드러내지 않도록 신경을 쓰며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는 다시 테이프를 틀어, 무엇이든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없을까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마치 말의 수도꼭지를 튼 것과 같았다. 분출되는 음성은 증오……도착……공포……자기에 대한 연민……과대망상……고독……공허……고통 등으로 차 있었다. 세 시간이 지나서야 주드는 그의 리스트에 첨가할 이름을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핸슨이 동거생활을 한 남자인 브루스 보이드였다. 주드는 핸슨의 테이프를 다시 한 번 레코더에 걸었다. “……처음에 브루스를 만났을 때부터 나는 그가 좋아졌습니다. 나는 그렇게 아름다운 남자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브루스는 수동적인 쪽이었습니까, 아니면 능동적인 ? ” “능동적인 쪽입니다. 그것이 내가 그에게 끌린 이유 중의 하나였습니다. 브루스는 대단히 강한 남자입니다. 실은 나중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것이 곧잘 우리가 다투는 원인이 되었지요.” “왜죠 ? ” “브루스는 자신의 힘이 세다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그는 가끔 뒤에서 다가와 내 등을 툭 쳤습니다. 본인은 애정의 표시로 그러는 거였지만, 어떤 때는 내 등뼈가 부러질 정도로 아팠습니다. 나는 그를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을 받기도 했습니다. 악수를 할 때도 상대방의 손가락이 문드러질 정도로 세게 쥐는 겁니다. 그리고는 미안하다는 티를 내기는 합니다만, 브루스는 남에게 그런 아픔을 안겨주는 것을 재미로 아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는 때려 줄 수도 없었습니다. 힘이 장사니까요……” 주드는 테이프를 멈추고 의자에 걸터앉은 채 생각에 잠겼다. 호모의 패턴은 그가 설정한 살인자의 개념과는 합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드는 핸슨과 관계를 맺었고, 사디스트인데다가 에고이스트가 분명하다. 그는 리스트에 올라 있는 두 이름을 바라보았다. 할리우드에서 사람을 죽이고, 거기에 대해서 한번도 그에게 말을 하지 않은 테리 워시번. 존 핸슨의 마지막 호모의 대상이었던 브루스 보이드. 두 사람 중에 범인이 있다면 · 10· 어느 쪽일까 ? 테리 워시번은 서튼 플레이스의 펜트하우스(빌딩 옥상의 고급주택)에 살고 있었다. 실내 전체가 진한 분홍색으로 꾸며져 있었다 · 10· 벽도 가구도 커튼도. 방안에는 호사스러운 물품이 즐비하고, 벽에는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가득했다. 주드는 테리가 방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마네가 두 점, 드가가 두 점 그리고 르누아르의 그림이 한 점 걸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악서 전화로 테리에게 방문하고 싶다는 말을 해두었다. 테리는 주드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분홍색 엷은 네글리제만 걸치고 있었다. “정말로 와주셨네요.” 테리는 기쁜 듯 말했다.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요 ? 술은 ? ” “아니, 괜찮습니다.” “그럼 나 혼자 축하주를 들께요.” 테리가 말했다. 그녀는 넓은 거실 한 모퉁이의 바(bar)로 갔다. 주드는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테리는 마실 것을 들고 돌아와, 그와 나란히 분홍빛 소파에 앉았다. “당신도 끝내는 와주었군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귀여운 테리에게 저항할 수 없으리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고요. 나도 당신이라면 꼼짝도 못하지만, 주드.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거예요. 명령만 내리신다면. 당신과 비교하면 여지껏 사귀어 온 하찮은 사내들이란 쓰레기만도 못하답니다.” 테리는 잔을 내려놓고 그의 바지 위에 한쪽 손을 올려놓았다. 주드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테리.” 그가 말했다. “나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테리의 마음은 지레짐작으로 움직였다. “알고 있어요, 베이비.”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사랑해 드릴께요.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을 정도로 사랑해 드릴 테니까.” “테리 · 10· 내 이야기를 들어봐요. 누군가가 나를 죽이려하고 있어요.” 그녀의 눈에 조금씩 놀라움의 빛이 번져 갔다. 연기일까 · 10· 진짜인가 ? 주드는 심야 프로에서 본 그녀의 연기를 머리에 떠올렸다. 진짜다. 그녀의 연기는 탓할 것이 없었지만, 지금처럼 진지하지는 않았다. “어머나 ! 누가 · 10· 누가 당신을 해치려 하지요 ? ” “내 환자와 관계가 있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지만 · 10· 도대체 · 10· 왜 ? ” “나도 그걸 알고 싶어요. 당신이 아는 사람 중에 살인을 입에 올린 사람은 없습니까 ? 농담으로라도.” 테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어요.” “돈 빈톤이라는 사람 모릅니까 ? ” 그는 세심하게 테리의 표정을 살폈다. “돈 빈톤 ? 글쎄요. 모르겠네요.” “테리, 당신은 살인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 ” 희미한 전율이 테리의 몸을 달려내려갔다. 그녀의 손목을 쥐고 있던 주드는 그녀의 맥박이 빨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살인은 당신을 흥분시킵니까 ? ” “몰라요.” “생각해 봐요.” 주드가 다그쳤다. “살인을 생각하면 흥분을 일으킵니까 ? ” 그녀의 맥박은 불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아뇨 ! 그런 거 없어요.” “할리우드에서 살해한 사람에 관해서 왜 이야기하지 않았죠 ? ” 별안간 테리는 손을 뻗어 긴 손톱으로 그의 얼굴을 할퀴려 했다. 그는 그녀의 양손을 꽉 잡았다. “망할 녀석 ! 20년이나 전의 일이야……그게 궁금해서 왔군. 나가 ! 나가 ! ” 그녀는 히스테릭하게 울부짖으며 무너져 내렸다. 주드는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테리는 격정적인 살인에 휘말릴 가능성은 없었다. 그 불안정성, 자존심의 완전한 결여 때문에 테리는 딴마음을 먹은 자에게 교묘하게 이용당하기 쉽다. 그녀는 도랑에 떨어져 있는 말랑말랑한 찰흙과도 같다. 그것을 주어든 자는 그녀를 아름다운 조각으로 다듬을 수도 있고, 끔찍스런 무기로 빚을 수도 있다. 문제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주워든 자가 누구냐 하는 거다. 그가 돈 빈톤일까 ? ” 주드는 일어섰다. “실례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는 분홍빛 아파트를 뒤로 했다. 브루스 보이드의 집은 그리니치 빌리지의 공원 가까운 주택지에 있었다. 문을 연 것은 흰 윗도리를 입은 필리핀인 집사였다. 주드가 이름을 대자, 그를 홀에서 기다리게 하고 집사가 안으로 들어갔다. 10분, 15분이 경과했다. 주드는 애써 조바심을 억눌렀다. 그로서는 이곳에 오는 것을 앤젤리 형사에게라도 알려두어야 했었다. 만일 주드의 생각이 틀림이 없다면 금세라도 그의 목숨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적은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집사가 나타났다. “주인님이 만나시겠답니다.” 그가 말했다. 집사는 주드를 2층의 잘 꾸며진 서재로 안내하고 물러갔다. 보이드는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다. 윤곽이 뚜렷한 섬세한 얼굴로, 매부리코에 야무진 입을 가진 호남이었다. 머리칼은 금발인데, 웨이브를 주어 단정하게 빗어넘겨 놓았다. 그는 주드가 방에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키는 6피트 3인치(약 192··) 가량, 풋볼 선수와도 같은 우람한 가슴과 어깨를 갖고 있었다. 주드는 자기가 생각한 범인의 육체적 특징을 머리에 그려 보았다. 보이드는 거기에 맞아떨어졌다. 주드는 다시 한 번 앤젤리에게 전화를 걸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보이드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세련되어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스티븐스 의사라고 하셨습니까 ? ” 그는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브루스 보이드입니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주드가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자 보이드는 쇠뭉치와도 같은 주먹으로 그의 입가를 때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습이었다. 주드는 전기 스탠드에 부딪치며 바닥에 나뒨굴었다. “미안합니다, 선생.” 보이드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별수없는 일이오. 당신은 못된 짓을 했으니까. 일어서십시오. 한잔합시다.” 주드는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바닥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그가 엉거주춤 일어섰을 때 보이드가 이번에는 구두 끝으로 정강이를 찼다. 주드는 몸을 비틀고 또 나뒨굴었다.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주드는 휘몰아치는 고통의 파도 속에서 눈악에 버티고 선 보이드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뭐라고 말을 하려 했으나 말이 되어 나오지를 않았다.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소.” 보이드는 동정이라도 하듯 말했다. “몹시 아플 테니까. 당신이 온 이유는 알고 있소. 조니에 관해서 물어볼 게 있어서겠지.” 주드가 고개를 끄덕이려고 하자 보이드가 그의 머리를 발길로 걷어찼다. 주드의 귓전에 먼 곳에서 부드러운 필터로 거른 듯한 보이드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건 희미하게 들리기도 하고 때로는 멀리 사라지기도 했다. “우리는 그가 당신에게로 가기 전까지는 서로 사랑했었어. 당신 때문에 그는 자기 자신을 비정상으로 생각하게 되었지. 그리고 당신 때문에 그는 우리의 사랑을 불결한 것으로 외면하게 되었단 말이야. 왜 불결하지 ? 그렇게 만든 사람은 당신이야.” 주드는 갈비뼈에 뭔가 딱딱한 것이 와 닿고 격심한 통증이 전신을 휩싸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아름다운 색채로 물들어 보였다. 마치 그의 머릿속에 반짝이는 빛으로 아롱진 무지개가 들어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가 당신에게 사랑의 방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개입하라는 권한을 부여했지 ? 당신은 신처럼 치료실에 도사리고 앉아 누구라도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는 유죄의 선고를 내렸단 말이야.” ‘그건 달라.’ 주드의 마음 한 구석에서 그런 대답이 나왔다. ‘핸슨은 그전에는선택의 기회를 갖지 못했어. 나는 선택의 기회를 준 거야. 그리고 그는 당신을 선택하지 않은 것뿐이이야.’ “조니는 죽었어.” 버티고 선 우람한 거인이 말했다. “당신은 나의 조니를 죽게 했어.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죽여 주지.” 주드는 다시금 귀 뒤쪽을 걷어채이는 감각을 느꼈다. 그 순간 그는 스르르 무의식의 나락으로 미끌어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음 어느 한 구석에서 스스로가 죽어가는 과정을 마치 남의 일처럼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작은골 속의 독립된 지능의 작은 일부분만이 의식을 지니고서 허약해지는 사고의 빛을 지탱해 주었다. 주드는 자기의 추측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했다. 그는 범인은 검은 머리칼의 라틴계의 인물로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금발이었다. 범인은 동성연애자가 아닐 것으로 확신했었는데, 그것도 틀린 생각이었다. 그는 범인을 마침내 찾아냈지만, 그 때문에 이제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주드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제 16 장 그의 마음 아득한 한 구석에서 그에게 통신을 보내고 대단히 중요한 사항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전하려 하고 있었지만, 두개골 깊숙한 곳의 아픔이 너무나 심해서 주드는 다른 일에 관해서 도저히 주의를 기울일 수가 없었다. 어딘가 가까운 곳에서 상처입은 야수와도 같은 울부짖음 소리가 들렸다. 고통에 허덕이면서 주드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낯선 방안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방 한쪽에서 브루스 보이드가 애처로울 정도로 흐느껴 울고 있었다. 주드는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견디기 어려운 통증으로 해서 그는 자신이 어떤 학대를 받았는가를 생각해 내고는 갑자기 포악한 노여움에 휩싸였다. 보이드는 주드가 움직이는 기척을 느끼고 뒤돌아보았다. 그는 침대 가까이로 걸어왔다. “자업자득이오.” 그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쓸데없는 참견만 하지 않았다면 조니는 지금도 무사히 나와 살고 있을 겁니다.” 주드는 자기도 모르게, 오랫동안 잊어 깊은 곳에 묻혀 있었던 보복의 본능에 충동을 받아 보이드의 목젖을 향하여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보이드의 목에 감기자 혼신의 힘을 다하여 죄었다. 보이드는 그걸 부리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냥 선 채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내버려두고 있었다. 주드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건 마치 눈물의 샘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주드의 양손에서 힘이 빠졌다. ‘이게 무슨 짓이람 ! ’ 그는 생각했다. ‘나는 의사가 아닌가. 병자가 한 짓을 탓하여 그를 죽이려 하다니.’ 지금 주드가 바라보는 보이드는 호되게 당해서 뭘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어린아이 같았다. 갑자기 주드는 의식의 한 구석에서 그에게 보내려던 통신이 무엇인가를 알았다. 브루스 보이드는 돈 빈톤이 아닌 것이다. 만일 빈톤이었다면 아직도 목숨을 부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보이드로서는 살인은 어림도 없다. 범인의 특징과 달랐던 것은 당연한 것이다. 주드는 그 결말에 야릇한 위안 같은 것을 느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조니는 살아 있을 거요.” 보이드가 울면서 같은 말을 했다. “조니는 여기에서 나와 함께 살고, 내가 그를 지켜줄 수가 있었을 텐데.” “나는 존 핸슨에게 당신과 헤어지라는 말은 하지 않았소.” 주드는 겨우겨우 말을 입밖에 냈다. “그가 스스로의 생각으로 한 겁니다.” “거짓말 ! ” “존이 나에게 오기 전부터 당신과 그와의 사이는 원만치가 못했던 겁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마침내 보이드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맞소. 우리들은 싸움이 잦았지.” “존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의 본능이 쉴새없이 그로 하여금 처자식에게로 돌아가도록 명령을 내렸던 겁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존은 이성간의 정상적인 애정에 다시 눈을 뜬 거지요.” “맞소.” 보이드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니도 늘 그런 말을 했소. 나는 그냥 투정인 줄로만 알았지.” 그는 고개를 들어 주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느 날 그는 나를 버렸습니다. 여기에서 나가 버렸지요. 나를 그만 사랑하기로 한 것이지.” 그의 목소리는 절망으로 차 있었다. “사랑을 그만둔 게 아닙니다.” 주드가 말했다. “친구로서의 우정은 그대로였습니다.” 보이드는 뚫어지게 주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를 도와주시겠소 ? ” 그의 눈은 필사적이었다. “도와주시오. 정말 도와달라고 ! ” 그것은 고뇌의 울부짖음이었다. 주드는 잠시 보이드를 바라보았다. “좋아요.” 주드는 말했다. “도와드리리다.” “내가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 ” “정상이고 뭐고 없습니다. 사람은 나름대로 자기 자신만의 정신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똑같은 인간은 존재하지 않아요.” “선생은 나를 이성에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까 ? ” “그건 당신이 진정으로 그것을 원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정신분석요법을 곁들이면 효과가 크지요.” “만일 실패한다면 ? ” “원래부터 동성연애자로 태어난 것을 밝힐 수 있다면 적어도 당신은 지금보다도 마음 편히 거기에 적응할 수가 있겠지요.” “치료는 언제부터 받을 수 있겠소 ? ” 보이드가 물었다. 주드는 급히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는 어느덧 환자를 치료하는 데 대한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으나, 그는 24시간 내에 죽을지도 모르는 입장이었다. 더구나 돈 빈톤이 어떤 자인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그의 리스트의 마지막 용의자인 테리나 보이드도 살인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출발점에 되돌아와 있었다. 만일 그의 분석이 정확하다면 지금쯤 범인은 잔인한 분노에 치를 떨고 있을 것이다. 다음의 공격은 금세라도 개시될 것이다. “월요일에 전화를 걸어 주십시오.” 주드가 말했다. 아파트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주드는 자기가 살아남을 기회가 어느 정도일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 가능성은 아무래도 많지가 않았다. 돈 빈톤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손에 넣으려는 것을 주드가 갖고 있다면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 돈 빈톤이라는 자는 누구란 말인가 ? 어째서 경찰에 그의 전과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일까 ? 다른 이름을 사용하고 있단 말인가 ? 아니다. 무디는 분명히 ‘돈 빈톤’이라고 말했었다. 주드는 마음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택시가 흔들릴 때마다 격한 통증이 그의 상처입은 몸을 휩쓸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살인과 살인미수를 종합해서 공통된 패턴을찾아보려고 머리를 짰다. 단도를 사용한 습격, 고문에 의한 잔학한 살해, 뺑소니, 자동차에 장치한 폭탄, 교살……정해진 패턴은 없다. 오로지 잔인과 포악성이 있을 뿐이다. 주드는 다음에 어떤 방법으로 누가 죽음을 몰고 들이닥칠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가장 습격을 받기 쉬운 곳이 진료소가 아니면 아파트일 것이다. 그는 앤젤리의 충고를 머리에 떠올렸다. 방안의 모든 출입구에 보다 튼튼한 자물쇠를 설치해야겠다. 그리고 도어맨인 마이크와 엘리베이터 보이인 에디에게도 충분히 경계를 해달라고 부탁을 해두어야겠다. 이 두 사람은 믿을 수 있다. 택시는 아파트 건물 악에 멎었다. 도어맨이 택시의 문을 열었다. 전혀 본 적이 없는 낯선 사람이었다. 제 17 장 도어맨은 곰보에 움푹 패인 검은 눈을 갖고 있는, 살갗이 가무잡잡한 남자였다. 목에 오래 된 상처자국이 있었다. 마이크의 제복 윗도리를 입고 있었으나 그에게는 작아보였다. 택시는 달려가 버리고 주드는 그 남자와 둘만이 되었다. 그는 갑자기 채인 곳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제기랄 ! 지금은 안된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마이크는 ? ” 그가 물었다. “휴가를 갔습니다, 의사 선생님.” ‘의사 선생’……이 사람은 그를 알고 있는 것이다. 마이크가 휴가라고 ? 이 추운 12월에 ? 남자의 얼굴에 잠시 만족스러운 미소가 스쳤다. 주드는 바람이 몰아치는 거리를 바라보았으나,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도망칠 궁리를 해보았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성공의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의 몸은 구타에 의한 타박상으로 호흡을 하는 것조차 힘에 겨웠다. “사고를 당하신 모양입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무척 부드러웠다. 주드는 대답을 하지 않고 아파트의 로비로 걸어들어갔다. 그는 에디의 도움을 기대할 생각이었다. 도어맨도 주드의 뒤를 따라 로비로 들어왔다. 에디는 엘리베이터 속에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주드는 엘리베이터쪽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고통이 뒤따랐다. 그는 여기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가는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이 남자와 단둘이 되어서는 안된다. 남자는 목격자를 두려워할 것이다. “에디 ! ” 주드가 불렀다. 엘리베이터 안의 남자가 뒤돌아보았다. 주드로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도어맨을 그대로 약간 축소한 듯한 남자인데, 단지 목의 상처가 없었다. 둘이 형제간이라는 것이 분명했다. 주드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서 걸음을 멈추었다. 로비에는 아무도 없었다. “올라갑니다.” 엘리베이터의 남자가 말했다. 그 얼굴에는 그의 형제와 마찬가지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스쳤다. 이것이 끝내는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죽음의 얼굴인 것이다. 주드는 두 사람이 모두 살인의 주모자는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고용된 암살자인 것이다. 그들은 로비에서 그를 해치울 생각일까 ? 아니면, 그의 방을 선택할까 ? 방일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방이라면 시체가 발견되기까지 도주할 시간이 넉넉하다. 주드는 관리인실 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캐츠 씨에게 볼일이 있네 · 10· ” 덩치가 큰 남자가 그의 악길을 막아섰다. “관리인은 바쁩니다, 선생님.”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베이터 안의 남자가 말했다. “자, 올라갑시다.” “싫소.” 주드가 말했다. “나는 · 10· ” “그가 하라는 대로 하시오.” 그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었다. 그때 갑자기 차가운 공기가 쏟아져 들어오며 로비의 현관문이 열렸다. 오버를 입은 두 남자와 두 여자가 웃고 떠들며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시베리아보다 더 지독하네요.” 여자 하나가 말했다. 그 여자와 팔장을 낀 사나이는 동그란 얼굴에 중서부 사투리를 썼다. “이런 밤에는 짐승도 나다니지 못하겠는걸.” 그들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왔다. 도어맨과 엘리베이터 남자가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번째 여자가 입을 열었다. 몸집이 작고 금발이며 남부 사투리를 썼다. “정말 멋진 밤이었어요. 고마워요, 모두들.” 그녀는 남자들을 돌려보내려 했다. 두 남자가 반대했다. “술 한잔 주지 않고 그냥 내쫓을 셈인가 ? ” “늦었어요, 존.” 처음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또 한 남자가 말했다. “한 잔만 마시고 갈 거야.” “글쎄……” 주드가 숨을 죽였다. ‘부탁이오 ! ’ 금발이 양보했다. “그럼 딱 한 잔만이에요, 아셨죠 ? ” 그들이 웃으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몰려들어왔다. 주드도 급히 그들 틈에 섞였다. 도어맨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뚝 선 채 형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 남자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문을 닫았다. 엘리베이터는 올라가기 시작했다. 주드의 방은 5층이었다. 이 남녀들이 그전에 내린다면 주드는 궁지에 빠진다. 그들이 5층 이상으로 올라간다면 그는 방으로 달려들어가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전화로 구조를 요청할 여유를 가질 수가 있다. “몇 층입니까 ? ” 몸집이 작은 금발이 킥킥 웃었다. “내가 얼굴도 모르는 남자를 둘씩이나 끌고 들어가면 남편이 뭐라고 할까 ? ” 그녀는 엘리베이터 남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10층.” 주드는 숨을 몰아쉬면서 그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던 자신을 깨달았다. 그도 뒤따라 말했다. “5층.” 엘리베이터 남자는 끈기를 갖고 아무런 내색 없이 5층에서 문을 열었다. 주드는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다시 닫혔다. 주드는 고통으로 휘청대며 자기의 방으로 향했다. 열쇠를 꺼내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들이 죽이러 오기까지는 기껏 5분 가량의 여유밖에 없었다. 그는 문을 닫고 체인을 걸려고 했다. 체인이 떨어져 나와 손에 매달렸다. 그것은 이미 잘라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체인을 내던지고 전화기 쪽으로 몇 발자국 내디뎠다. 어지러웠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고통과 맞섰다. 그 동안에도 귀중한 시간이 무심히 지나갔다. 고통을 견디며 그는 비척비척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전화를 걸려 하는 유일한 사람은 앤젤리였다. 하지만 앤젤리는 아파서 집에 틀어박혀 있다. 더구나 뭐라고 하지 ? ‘갑자기 도어맨과 엘리베이터 보이가 바뀌고 나를 죽이려 한다’고 ? 그는 자기가 수화기를 든 채 우두커니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마터면 보이드에게 죽을 뻔한 뒤다. 그들은 몰려와 멍하니 서 있는 그를 발견할 것이다. 주드는 도어맨의 눈의 표정을 머리에 떠올렸다. 예상을 뒤엎고 그들의 허를 찔러야 한다. 하지만 · 10· 어떻게 ? 그는 로비를 비추는 소형 TV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로비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금 격렬한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가물거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지친 마음을 독하게 먹으며 문제에 정신을 집중하려고 발버둥쳤다. 긴급사태다. 그렇다……긴급하다. 긴급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래야 한다……또 눈악이 가물거렸다. 그의 시선이 수화기에 멈추었다. 긴급……그는 숫자만을 읽을 수 있게끔 다이얼을 눈악에 가까이 갖다댔다. 그리고 고통을 이겨내며 천천히 다이얼을 돌렸다. 다섯 번 벨이 울리고 나서야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드는 입을 움직였지만 말이 제대로 되어 나오지를 않았다. 그의 눈에 TV 모니터의 영상이 비쳤다. 양복 차림의 두 남자가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시간을 다 써버리고 말았다. 두 남자는 발소리를 죽이고 주드의 방 가까이 가서 문 양쪽에 위치를 잡았다. 몸집이 큰 로키가 가볍게 문의 손잡이를 돌려 보았다. 잠겨 있었다. 그는 셀룰로이드 카드를 꺼내어 자물쇠에 가만히 끼워넣었다. 그는 동생에게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하고, 둘은 소음장치를 한 권총을 꺼내들었다. 로키가 카드를 자물쇠에 대고 꽉 누르자 문은 간단히 열렸다. 그들은 권총을 겨누고 거실로 들어갔다. 두 사람 악에는 세 개의 문이 있었다. 거실에서는 주드가 보이지 않았다. 동생인 닉이 첫번째 문을 열려고 했는데, 그것도 잠겨 있었다. 그는 형을 보고 싱긋 웃었다. 그는 총구를 자물쇠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문은 소리도 없이 열렸다. 두 사람은 빈틈없이 몸을 사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도 주드는 없었다. 닉이 옷장을 살펴보는 동안 로키는 거실로 되돌아왔다. 주드는 이 아파트 자기의 구역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기에 독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여서 두 사람은 서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죽일 때까지의 시간을 즐기기라도 하듯 일부러 늑장을 피우는 것 같았다. 닉은 두 번째 문을 열려고 했다. 역시 잠겨 있었다. 그는 권총을 쏘아 자물쇠를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는 서재였다.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웃더니 마지막 문으로 접근했다. TV 모니터 악을 지날 때 로키가 동생의 팔을 잡았다. TV 모니터에는 세 남자들이 급히 로비로 들어오는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 중의 둘은 흰 인턴 가운을 입고 운반대를 밀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은 의사인 듯 가방을 들고 있었다. “제기랄 ! ” “침착해, 로키. 누가 급한 병에 걸린 거야. 이 건물에는 100개가 넘는 방이 있어.” 그들은 빨려들어가듯 화면을 지켜보았다. 두 인턴이 운반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은 안쪽으로 사라지고 문이 닫혔다. “잠깐 기다려 보자.” 닉이 말했다. “무슨 사고가 있었나 ? 그렇다면 경찰이 뒤따라올 텐데.” “재수없군 ! ” “걱정할 것 없어. 스티븐스는 아무데도 못 가.” 그때 문이 열리며 의사를 선두로 두 사람의 인턴이 운반대를 밀고 들어왔다. 두 암살자는 권총을 재빨리 주머니에 감추었다. 의사가 형제에게로 다가왔다. “죽었소 ? ” “누가 ? ” “자살자 말이오. 죽었소, 살았소 ? ” 암살자들은 우물쭈물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방을 잘못 안 게 아닙니까 ? ” 의사는 두 사람 곁을 그대로 지나쳐 침실의 문을 열려고 했다. “잠겨져 있어. 부숴버려야 하니 도와주시오.” 두 형제가 멍하니 지켜보는 악에서 의사와 인턴이 합세하여 어깨로 문을 밀어붙였다. 의사가 침실로 달려들어갔다. “운반대 ! ” 그는 주드가 누워 있는 침대로 갔다. “괜찮소 ? ” 주드는 눈을 떠 초점을 맞추려고 애썼다. 그리고 실낱 같은 목소리로, “병원.” 하고 말했다. 두 암살자는 좌절감에 젖어 지켜보고 있었다. 인턴들이 운반대를 침실로 밀고 들어와 익숙한 솝씨로 주드를 옮기고 모포를 덮었다. “꺼져야겠어.” 로키가 말했다. 의사는 두 사람이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창백하고 초췌한 얼굴로 운반대에 누워 있는 주드를 내려다보았다. “어떤가, 주드 ? ” 그의 목소리는 무척 걱정스러웠다. 주드는 미소를 지으려고 했으나, 그건 웃음이 되지 않았다. “괜찮아.” 그가 말했다. 그 말소리는 자신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고맙네, 피터.” 피터는 친구의 얼굴을 살펴보며 인턴에게 신호를 보냈다. “자, 가세 ! ” 제 18 장 병실은 달랐지만 간호사는 같은 여자였다. 잔소리가 많은 여자다. 주드가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시야에 들어온 것이 침대 곁에 앉아 있는 그 간호사였다. “정신이 드셨군요.” 그녀는 자못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해리스 선생님께서 만나시겠답니다. 정신이 드셨다는 말을 전하고 오겠습니다.” 그녀는 쌀쌀맞은 태도로 병실을 나갔다. 주드는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팔과 다리의 반사작용이 더디기는 했지만 장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교대로 눈을 감고서 한쪽 구석의 의자에 초점을 맞춰 보려고 애썼다. 의자가 좀 흐릿하게 보였다. “진찰을 해볼까 ? ” 주드가 눈을 치켜떴다. 세이머 해리스 의사가 방안에 들어서고 있었다. 해리스 의사가 쾌활하게 말했다. “자네는 이제 단골이 됐구먼. 상처를 꿰매는 데만도 얼마가 드는지 아나 ? 할인요금으로도 말일세……그래, 푹 잤나 ? ” 의사는 침대머리에 앉았다. “아기처럼 푹. 뭘 주사했었나 ? ” “진통제지.” “몇 시나 됐지 ? ” “정오.” “그래 ? ” 주드가 말했다. “그럼 퇴원을 해야지.” 해리스 의사는 들고 온 서류철에서 진료 카드를 빼냈다. “우선 무슨 이야기를 할까 ? 뇌진탕에 관해 ? 열상(裂傷)이나 타박상 ? ” “이젠 괜찮아.” 의사는 카드를 다시 제자리에 끼웠다. 그리고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자네는 신체적으로 상당히 쇠약해진 상태일세.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 이상이야. 철이 들었다면 며칠 동안 이 침대에서 쉬는 것이 어떨까 ? 그리고 한 달 가량 휴가를 가는 게 좋겠는데.” “고맙네, 세이머.” 주드가 말했다. “고맙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 달갑지 않다는 뜻인가 ? ” “할 일이 있다네.” 해리스 의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서 가장 처치곤란한 환자가 누군지 아나 ? 의사라네.” 그는 단념한 듯 화제를 바꾸었다. “피터는 밤새도록 여기에 있었네. 돌아가서도 한 시간마다 전화를 걸어 오더군. 자네를 걱정하고 있는 거야. 그는 간밤에 누군가가 자네를 해치려 하는 것 같더라고 말하던데.” “아시다시피 의사라는 건 · 10· 상상력이 과잉상태지.” 해리스는 잠시 주드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자네는 정신분석 의사, 나는 단순한 벤 케이시라고. 자네가 무슨 행동을 하려는지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군 · 10· 하지만 나는 찬성하기 어려운걸. 최소한 2。3일이라도 입원해 있을 수는 없겠는가 ? ” “그럴 수가 없어.” “고집불통이구먼. 좋아, 내일 퇴원하게나.” 주드가 반대하려고 했지만, 해리스 의사가 그걸 막았다. “그 이야기는 그만두세. 오늘은 일요일이야. 자네를 두드려 팬 작자도 휴식이 필요하겠지.” “세이머……” “그리고 또 하나. 성가신 마누라쟁이 같은 소리네만, 먹을 것은 제때에 찾아먹는가 ? ” “별로.” 주드가 말했다. “좋아. 간호사를 시켜 24시간 내에 자네를 살찌게 만들라고 명령을 내려두지. 그리고 주드……” “왜 ? ” “몸조심하라고. 자네 같은 단골을 잃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말을 남기고 해리스 의사는 밖으로 나갔다. 주드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눈을 감았다. 그릇 소리가 나서 그가 눈을 떠보니 예쁜 아일랜드계의 간호사가 식사를 실은 손수레를 밀고 왔다. “잠을 깨셨군요, 스티븐스 선생님.” 하고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몇 시요 ? ” “6시입니다.” 그는 반나절을 잠으로 보낸 것이다. 간호사는 쟁반에 식사를 옮겨놓고 있었다. “오늘 저녁은 성찬이랍니다 · 10· 칠면조도 있고요. 내일은 크리스마스 이브지요.” “그렇군.” 그는 별로 식욕을 느끼지 않았으나, 한입 맛을 보자 갑자기 시장기를 느꼈다. 해리스 의사가 모든 전화를 차단시켰기에 그는 조용히 누워 체력을 회복하고 기력을 충실히 할 수가 있었다. 내일 그는 모든 힘을 짜내게 될 것이다. 이튿날 아침 10시에 세이머 해리스 의사가 기운차게 주드의 병실로 들어왔다. “우리의 귀중한 환자는 좀 어떠신가 ? ” 그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상당히 사람다워졌는걸.” “음, 이젠 좀 살 것 같아.” 주드가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야. 면회인이 있는데 만나겠나 ? ” 피터겠지. 노라도 함께 왔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가 입원하자 자주 드나들고 있는 것이다. 해리스 의사가 말을 이었다. “맥그리비 경사야.” 주드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네와 꼭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더군. 그는 이리로 오고 있는 중인데, 자네가 깨어 있기 바라던걸.” 그를 체포할 생각일 것이다. 앤젤리가 집에서 누워 있는 동안 맥그리비는 주드를 유죄로 얽어넣을 증거를 멋대로 날조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맥그리비에게 붙잡히면 벗어날 가망은 없다. 맥그리비가 도착하기 전에 달아나야 한다. “간호사에게 이발사를 보내달라고 일러주겠나 ? ” 주드가 말했다. “면도를 좀 해야겠네.” 그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렸던지 해리스 의사가 의아스러운 눈으로 주드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으면 맥그리비가 해리스 의사에게 뭔가를 귀띔해서 그러는 것은 아닐는지 ? “그러지.” 의사가 나갔다.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주드는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이틀밤의 숙면은 기적적인 효과를 나타냈다. 약간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곧 괜찮아질 것이다. 신속히 움직여야 했다. 옷차림을 바꾸는 데 3분 걸렸다. 주드는 문을 한 뼘 가량 열고 방해가 될 사람은 없는지 살펴보고는 계단 쪽으로 갔다. 계단으로 막 한 발을 내디뎠을 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맥그리비가 나오더니 그가 빠져나온 병실 쪽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맥그리비는 잰 걸음이었으며, 그 뒤를 제복을 입은 경관과 형사가 둘 따랐다. 주드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 구급차 출입문 쪽으로 갔다. 병원에서 한 블록 가량 떨어진 곳에서 택시를 세웠다. 병실에 들어선 맥그리비는 주인 없는 침대와 빈 옷장을 발견했다. “뒤쫓아라 ! ” 그는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아직 멀리는 못 갔을 거다.” 그리고 전화기를 움켜쥐었다. 전화는 곧 경찰서 교환대로 연결되었다. “맥그리비다.” 그는 급히 말했다. “전지역에 수배해. 지급이야……스티븐스 의사, 이름은 주드, 남자, 백인, 나이……” 택시는 주드의 진료소가 있는 건물 악에 섰다. 주드에게는 이제 안전한 장소는 없었다. 아파트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다. 어느 호텔에라도 묵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위험한 줄 알면서도 진료소에는 꼭 한 번 들러야 했다. 어떤 전화번호가 필요했던 것이다. 주드는 운전사에게 돈을 주고 로비로 들어갔다. 몸의 마디마디가 쑤셨다. 그는 급히 걸었다. 시간은 조금밖에 허용되지 않았다. 진료소에 누군가가 숨어 있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누가 그를 잡느냐가 문제였다. 경찰이냐, 아니면 암살자냐. 진료소에 도달하자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안쪽의 진료실은 웬지 낯설고 차디찬 느낌을 주었다. 주드는 다시는 이곳에서 환자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환자들을 너무나 많은 위험에 몰아넣을지도 모른다. 주드는 그의 생활을 엉망으로 만든 돈 빈톤이라는 존재에 분노를 느꼈다. 그는 암살자 형제가 돌아가 그를 죽이지 못했다는 보고를 하고 있는 광경을 그려보았다. 돈 빈톤의 성격에 대한 그의 판단이 정확하다면 돈 빈톤은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금세라도 공격이 가해질지 모른다. 주드는 앤의 전화번호를 찾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병원에서 두 가지 일을 생각해 냈던 것이다. 앤의 몇 번에 걸친 예약은 죽은 존 핸슨 바로 악이었다. 그리고 앤과 캐롤은 여러 번 잡담을 나눈 적이 있다. 그때 캐롤은 자기도 모르게 중대한 정보를 앤에게 누설했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앤도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자물쇠를 따두었던 서랍에서 주소록을 꺼냈다. 앤의 전화번호를 찾아 다이얼을 돌렸다. 세 번 벨이 울리고 특징이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교환입니다. 몇 번에 연결할까요 ? ” 주드는 번호를 말했다. 잠시 뒤 교환이 말했다. “번호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전화번호부를 찾아보시든가 번호 안내에 문의해 보십시오.” “고맙소.” 주드는 수화기를 놓았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며칠 전 전화 서비스가 한 말을 생각해 냈다. 전화 서비스는 그의 환자 전부에게 연락을 취할 수 있었으나, 앤에게만은 연락할 수 없었다고 했다. 번호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주드는 전화번호부를 찾아보았으나, 그녀 남편의 이름이나 그녀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어떻게든 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앤의 주소를 적었다. 뉴저지 주 베이언 우드사이드 애버뉴 617번지. 15분 뒤 주드는 렌트카 회사의 지점에 들러 차를 빌렸다. 카운터 뒤에 ‘우리는 랭킹 2위, 더욱 분발하자’라고 쓰여 있었다. ‘우리는 비슷한 처지’라고 주드는 생각했다. 2。3분 뒤 주드는 차를 몰고 차고를 나왔다. 거리를 한 블록 돌아 미행당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는 조지 워싱턴 다리를 건너 뉴저지로 향했다. 베이언에도착하자그는주유소에들러길을물었다.“다음 모퉁이를 좌회전하십시오 · 10· 세 번째 거리입니다.” “감사합니다.” 주드는 차를 달렸다. 다시 앤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의 고동이 빨라졌다. 앤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한다 ? 앤의 남편은 집에 있을까 ? 주드는 왼쪽으로 돌아 우드사이드 애버뉴로 접어들었다. 그는 번지를 살펴보았다. 그 블록은 900번대 숫자의 번지였다. 거리의 양편에는 낡은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는 700번대의 블록 쪽으로 차를 몰았다. 집들은 더욱 작고 초라했다. 앤은 아름다운 숲에 둘러싸인 저택에 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부근에는 나무다운 나무 한 그루 눈에 뛰지 않았다. 앤이 일러준 주소에 다다랐을 때 주드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617번지는 잡초가 무성한 빈터였다. 제 19 장 주드는 빈터 곁에 차를 세우고 좌석에 앉은 채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애썼다. 전화번호가 틀린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번지수를 틀리는 것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둘 모두 틀리게 가르쳐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앤은 그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녀가 자기의 전화번호와 주소에 관하여 거짓말을 했다면 달리 또 어떤 일에 거짓말을 했을까 ? 주드는 그녀에 관해서 실제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검토해 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는 앤에 관하여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녀는 갑자기 누구의 소개도 없이 진료소를 찾아와 치료를 해달라고 했었다. 그리고 4주일 동안이나 드나들면서도 솔직하게 자기의 문제를 털어놓는 걸 회피하더니만 갑자기 외국에 나간다는 말을 꺼낸 것이다. 앤은 진료비를 매번 현금으로 지불했기에 그녀를 추적해 볼 방법이 없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무엇 때문에 환자를 자처했다가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일까 ? 답은 하나였다. 그것에 생각이 미쳤을 때 주드는 가슴이 저려왔다. 만일 누군가가 그를 살해할 것을 계획한다면 · 10· 진료소에서 보내는 그의 일상적인 움직임을 파악하고 싶다면 · 10· 진료소의 내부사정을 알고 싶다면 · 10· 환자로 가장해서 드나드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 ? 앤은 그걸 한 것이다. 돈 빈톤이 그녀를 잠입시킨 것이다. 그녀는 필요한 것을 알아내고는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고 자취를 감추었다. 모두가 가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얼마나 손쉽게 거기에 넘어갔던가. 그녀가 돈 빈톤에게로 돌아가 보고를 할 때에, 명색이 정신분석의에다가 인간 심리의 전문가를 자처하는 호색한 멍청이라고 하며 자기를 웃음거리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를 죽일 기초 조사를 하러 온 여자에게 눈이 멀 정도로 반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남의 성격을 판단하다니. 그는 미국 정신의학협회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가 ? 앤이 그를 찾아온 것은 정말로 문제가 있어서였고, 신원을 감춘 것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되는가 ? 그럭저럭 문제는 스스로 해결이 되었기에 그녀는 정신분석의의 도움이 필요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주드는 그 생각이 지나치게 호의적인 해석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앤에게는 ‘X’ 양(量)만큼의 미지의 사항이 있었다. 주드는 그 미지의 양 속에 사건에 대한 답이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녀 스스로의 의지에서가 아니라 강요된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자기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앤을 위기에 빠진 공주로, 자기는 화려한 갑옷을 입은 기사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녀가 진정으로 살인자의 악잡이 노릇을 한 것일까 ? 어떻게든 그것만은 알아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남루한 코트를 입은 노파가 도로 반대쪽 집에서 나와 주드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그는 차를 돌려 조지 워싱턴 다리 쪽으로 돌아갔다. 주드 뒤쪽으로 차들이 무리를 지어 달리고 있었다. 그 속에 그를 미행하고 있는 차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행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 적은 그가 있는 장소를 알고 있는데. 그렇다고 그는 가만히 숨을 죽이고 적에게서 올 공격을 기다리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스스로 공세를 취함으로써 적의 허를 찌르고, 돈 빈톤의 화를 돋구어 거기에서 치명적인 실책을 유도해 내야 한다. 그것도 맥그리비가 자기를 붙잡기 전에 해야 한다. 주드는 맨해튼을 향해 차를 달렸다. 유일한 열쇠는 앤이었다 · 10· 그런데 그녀는 자취를 감추고 아무런 단서를 남기지 않았다. 내일 모레쯤은 그녀는 다른 나라에 가 있을 것이다. 주드는 갑자기 앤을 찾아낼 수 있는 하나의 기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리스마스 이브여서 팬암 사무실은 세계 각지로 떠나는 여객기 좌석을 구하려는 여행자와 여행 예정자들로 법석을 이루고 있었다. 주드는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헤치다시피 하고 카운터로 가서 지배인을 만나야겠다고 말했다. 카운터 안에 있는 제복 차림의 아가씨가 직업적인 미소를 띠우고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지배인은 전화를 받고 있었다. 주드는 카운터 곁에 서서 서로 더 큰소리로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듣고 있었다. “5일에 인도에 가려는데요.” “파리는 춥지 않을까 ? ” “리스본에 도착하면 차를 빌리고 싶소.” 주드는 비행기를 타고 달아나 버리고 싶었다. 그는 자신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로에 지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돈 빈톤에게는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패거리가 있는 모양이었으나, 주드는 혼자였다. 돈 빈톤에 대해서 어느 정도나 승산이 있단 말인가 ? “무슨 일이신지요 ? ” 주드가 고개를 들었다. 키가 크고 죽은 사람처럼 얼굴이 창백한 사람이 카운터안쪽에 서서 물었다. “나는 프렌들리(친절하다는 뜻)입니다.” 그 재미있는 이름이 주드의 얼굴에 반응을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주드는 의무적인 미소를 보냈다. “찰스 프렌들리라고 합니다. 무슨 일이신지요 ? ” “나는 스티븐스라는 의사입니다. 환자를 찾고 있습니다. 유럽 어느 나라엔가로 가는 비행기편을 예약했습니다만.” “성함은 ? ” “블레이크. 앤 블레이크입니다.” 그는 망설였다. “아마도 앤터니 블레이크 부부로 나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행선지가 어디입니까 ? ” “예 · 10· 잘 모르겠습니다.” “예약은 오전편입니까, 오후편입니까 ? ” “사실은 당신 항공사 비행기인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주드가 말했다. 프렌들리 씨의 눈에서 애교의 빛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조사해 볼 방법이 없는데요.” 주드는 갑자기 낭패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긴급한 일입니다. 그녀가 출국하기 전에 찾아내야만 합니다.” “팬암에서는 매일 한 편 이상을 암스테르담, 바르셀로나, 베를린, 브뤼셀, 코펜하겐, 더블린, 뒤셀도르프,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리스본, 런던, 뮌헨, 파리, 로마, 샤논, 슈투트가르트, 비엔나로 내보내고 있습니다. 다른 항공사도 대략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다른 항공사도 하나하나 알아보셔야 할 겁니다. 그러나 행선지와 출발시간을 모르고는 헛수고일 겁니다.” 프렌들리 씨는 신경질적인 표정이 되었다. “그럼, 실례 · 10· ” 그가 걸음을 옮겼다. “잠깐만 ! ” 주드가 말했다. 어떻게 하면 이것이 그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설명해 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를 죽이려는 사나이의 단서를 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데. 프렌들리 씨는 노골적으로 달갑지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뭡니까 ? ” 주드는 억지로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며, 그런 자신을 증오했다. “컴퓨터의 정보 시스템 같은 것은 없습니까 ? ” 그가 물었다. “승객의 이름을 간단히 알 수 있는……” “항공편 번호를 모르면 속수무책입니다.” 프렌들리는 가버렸다. 주드는 카운터에 기대어서서 침울해졌다. 장기판은 외통수였다. 그가 진 것이다. 어디에서도 돌파구는 보이지 않았다. 이탈리아 신부들 무리가 들어왔다. 길고 헐렁한 검은 신부옷에 검은 모자를 쓴 그들은 마치 중세기에서 빠져나온 사람들 같았다. 각기 허름한 여행가방이나 상자, 또는 선물하기 위한 과일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이탈리아어로 크게 떠들며, 일행 중에서 가장 젊어 보이는 18。19세 가량의 청년을 놀려대는 것 같았다. 주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야유소리를 들으며, 휴가가 끝나 로마로 돌아가는 길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혹시 앤도 로마로 가는 것은 아닌지……또 앤의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찼다. 신부들은 카운터로 가까이 갔다. “E molto bene di ritornare a casa.” “Si, d’accordo.” “Signore, per piacere, guardatemi.” “Tutto va bene ? ” “si, ma · 10· ” “Dio mio, dove sono i miei biglietti ? ” “Cretino, hai perduto i biglietti.” “Ah, eccoli.” 승려들은 항공권을 가장 젊은 승려에게 맡겼다. 청년은 수줍은 듯 카운터의 아가씨에게로 가까이 갔다. 주드는 출구 쪽을 보았다. 회색 오버를 입은 덩치 큰 남자가 문 악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청년 신부는 카운터 안의 여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Dieci. Dieci.” 여직원은 멍하니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은 영어 실력을 총동원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10. 빌레타. 항공권.” 그는 항공권을 아가씨에게 내밀었다. 여직원은 환하게 웃고 나서 열 개의 항공권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신부들은 일제히 말이 통한 청년을 치켜세우는 소리를 지르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주드는 더 이상 거기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조만간 그는 적과 대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천천히 방향을 바꾸어 신부들 곁을 지나가려 했다. “Guardate che ha fatto il Don Vinton.” 주드는 우뚝 섰다. 얼굴에 확 피가 솟구쳐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는 막 말을 입 밖에 낸 둥글넓적하고 키가 작은 신부 곁으로 되돌아가서 그의 팔을 꽉 잡았다. “실례합니다만 · 10· ” ‘돈 빈톤’이라고 하셨지요 ? ” 신부는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부리치고 가려고 했다. 주드는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잠깐만 ! ” 그가 말했다. 신부는 불안한 얼굴이 되었다. 주드는 될 수 있는 대로 조용히 말하려고 애썼다. “돈 빈톤. 누가 돈 빈톤입니까 ?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십시오.” 이제 모든 신부가 주드에게 시선을 모았다. 몸집이 작은 신부가 일행을 둘러보고 말했다. “E un americano matto.” 신부들은 흥분을 하며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카운터 저쪽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는 프렌들리 씨의 모습이 보였다. 프렌들리가 카운터의 문을 열고 그에게로 걸어왔다. 주드는 조급한 마음을 애써 억제했다. 그는 신부의 팔을 놓고 상체를 가까이 하고는 똑똑하게 말했다. “돈 빈톤.” 몸집이 작은 신부는 잠시 주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곧 얼굴의 긴장이 풀리더니 웃는 얼굴이 되었다. “돈 빈톤.” 지배인이 험한 얼굴을 하고 빠른 걸음으로 들이닥쳤다. 주드는 기분을 복돋워주듯 신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부는 청년을 가리켰다. “Don Vinton · 10· ‘보스’.” 갑자기 퍼즐이 풀렸다. 제 20 장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근차근 말씀하십시오.” 앤젤리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인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주드가 말했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답을 알아냈습니다 ! ” 전화로나마 앤젤리의 목소리를 듣자 그는 마음이 놓이면서 허둥거리며 말했다. “나를 죽이려는 자를 알아냈습니다. 돈 빈톤이 누군지를 알았습니다.” 앤젤리의 목소리가 의아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는 끝내 돈 빈톤을 찾아낼 수가 없었는데요.” “그게 왜 그랬는지 아십니까 ? 돈 빈톤은 이름이 아니라 · 10· 어떤 인물이냐가 문제이지요.” “좀더 알기 쉽게 말씀해 주십시오.” 주드의 목소리는 흥분 때문에 떨렸다. “돈 빈톤은 이름이 아닙니다. 이탈리아어입니다. ‘보스’라는 뜻이지요. 무디는 그걸 나에게 말하려 한 겁니다. ‘보스’가 나를 노리고 있는 거지요.”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를 않는군요, 선생.” “영어로는 의미를 모릅니다.” 주드가 말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어로 말하면 · 10· 감을 못 잡겠습니까 ? 보스가 지휘하는 살인조직 같은 거.” 전화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라 코사 노스트라 말입니까 ? ” “그자 말고는 그런 무기를 쓰는 암흑가의 보스가 또 없잖습니까 ? 산(酸)이라든가, 폭탄이라든가 · 10· 총등 ! 그리고 내가 상대는 남부 유럽 계통이라고 한 말 기억하십니까 ? 바로 이탈리아인입니다.” “막연하군요. 어째서 라 코사 노스트라가 당신을 죽이려 하지요 ? ” “그건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정말입니다. 틀림없어요. 무디가 한 말과도 부합됩니다. 그는 여러 명의 암살자들의 나를 노리고 있다고 말했었습니다.” “여지껏 그런 엉뚱한 주장은 들어본 적이 없군요.” 앤젤리가 말했다. 그러나 그는 사이를 두고 말했다. “그렇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주드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만일 앤젤리마저 믿어 주지 않는다면 달리 의지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누구에게라도 이야기를 했나요 ? ” “아닙니다.” 주드가 대답했다. “말해서는 안됩니다 ! ” 앤젤리의 목소리가 긴장했다. “당신의 생각이 틀림없다면 당신의 생명이 위험합니다. 진료소나 아파트 가까이로 가서도 안됩니다.” “안 가겠습니다.” 주드는 약속했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 “맥그리비가 나에 대한 체포영장을 뗀 걸 알고 있습니까 ? ” “예……” 앤젤리가 애매하게 대답했다. “맥그리비에게 체포되면 당신은 경찰서에 도착하기 전에 반드시 살해될 겁니다.” 제기랄 ! 그렇다면 그가 맥그리비에게 품고 있었던 의구심은 정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맥그리비가 사건의 주모자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맥그리비를 움직이는 자가 있다……돈 빈톤, 맥그리비의 보스이다. “듣고 있습니까 ? ” 주드는 입안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예.” 회색 오버를 입은 남자가 전화 박스 밖에서 이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전에 본 사람은 아닐까 ? “앤젤리 씨……” “왜 그러십니까 ? ” “나는 그들의 대부분을 모릅니다. 어떤 얼굴을 가진 녀석들인지도 몰라요. 그들이 붙잡힐 때까지 나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가 있지요 ? ” 전화 박스 밖의 남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앤젤리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함께 FBI로 갑시다. 알 만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가 위험이 사라질 때까지 선생을 보호해 줄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 ” 앤젤리의 목소리에 자신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주드는 고마웠다. 그는 무릎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있는 곳은 ? ” “팬암 빌딩 1층 로비의 전화 박스입니다.” “거기에 계십시오. 주위에 사람이 많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곧 그리로 가겠습니다.” 찰칵 소리가 나고 앤젤리가 전화를 끊었다. 그는 위 속 깊은 곳에 묵직한 불쾌감을 느끼면서 수사과의 책상 위에 수화기를 놓았다. 그는 별별 살인이나 강간범, 또는 변절자들을 다루는 데 이골이 나고,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보호피막 같은 것이 생겼지만, 지금도 인간의 품위와 인간성만은 믿으려고 했다. 하지만 악덕 경찰관만은 별도였다. 악덕 경관은 경찰 전원을 부패시키고, 훌륭한 경찰관이 싸우고 목숨을 바쳐 획득한 것을 파괴한다. 수사과는 출입하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이야기 소리로 시끄러웠지만, 그는 전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두 정복 경관이 수갑을 채운 덩치 큰 술주정뱅이를 데리고 방안을 지나갔다. 경관 하나는 눈두덩이가 검게 멍이 들었고, 다른 하나는 손수건으로 피투성이의 코끝을 누르고 있었다. 제복의 옷소매가 반은 찢어져 매달려 있었다. 그 옷은 수선대금은 경관 스스로 물어야 한다. 그들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목숨을 건 각오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신문의 기삿거리가 되지도 못한다. 기사가 되는 건 부정한 경찰관이다. 한 부정한 경찰관은 전체에 누를 끼친다. 그 자신의 동료들을 욕보인다. 그는 노곤한 몸을 일으켜 낡은 복도를 지나 서장실 쪽으로 걸어가, 형식적으로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담뱃불로 지져 곰보가 다 된 낡은 책상을 악에 하고 버텔리 서장이 앉아 있었다. 방안에는 사복을 한 두 사람의 FBI 조사원이 있었다. 버텔리 서장이 문 열리는 소리에 이쪽을 바라보았다. “결과는 ? ” 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습니다. 물품감식반의 말에 의하면 그가 수요일 오후에 와서 증거품인 캐롤 로버츠의 열쇠를 빌려갔다가 그날 밤 늦게 반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파리핀 검사에서 반응이 없었던 거지요 · 10· 그는 그 열쇠를 써서 스티븐스 의사의 진료실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감식반은 그가 이 사건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별로 의심도 하지 않은 겁니다.” “지금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 ” 젊은 FBI 요원이 물었다. “아뇨. 미행을 붙였지만 놓치고 말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스티븐스 의사를 따라붙었을 겁니다.” 다른 FBI가 말했다. 버텔리 서장이 그 FBI에게 물었다. “스티븐스 의사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있겠소 ? ” 상대방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보다 먼저 그가 의사를 찾아낸다면 · 10· 가망은 전혀 없습니다.” 버텔리 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먼저 찾아내야 하오.” 그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앤젤리도 끌고 와야 해. 어떤 방법이라도 좋소.” 그는 부하 형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놈을 잡아, 맥그리비 ! ” 경찰의 무선은 단편적인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10……여기는 10……모든 순찰차는 5를 찾아라……” 앤젤리는 스위치를 껐다. “내가 선생을 모시러 온 걸 누가 알고 있습니까 ? ” “아무도 모릅니다.” 주드가 잘라 말했다. “라 코사 노스트라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겠지요 ? ” “당신 외에는.” 앤젤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조지 워싱턴 다리를 건너 뉴저지로 향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졌다. 얼마 전에 이곳을 달렸을 때는 주드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은 앤젤리가 곁에 있음으로 해서 더 이상 쫓기는 듯한 초조감은 없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는 느긋한 만족감을 느꼈다. 앤젤리가 시키는 대로 주드는 렌트카를 맨해튼에 버리고 앤젤리가 운전하는 표식이 없는 경찰차를 탄 것이다. 앤젤리는 팔리세이즈 인터스테이트 파크웨이 북쪽을 향하여 차를 몰아, 오렌지버그에서 파크웨이를 벗어났다. 그들은 올드 태펀으로 가까이 가고 있었다. “용케도 진상을 캐냈군요, 선생.” 앤젤리가 말했다. 주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둘 이상의 남자가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곧 알아차렸어야 했지요. 직업적인 암살자를 부릴 수 있는 것은 범죄조직밖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무디는 내 차 속에서 폭탄을 발견했을 때 이미 그런 걸 눈치챘을 겁니다. 그들은 모든 무기를 동원할 수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앤. 그녀는 주드를 죽이는 데 준비활동을 담당한 일원이었다. 그렇게 단정을 하면서도 · 10· 그는 앤을 증오할 수가 없었다.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그녀만은 미워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앤젤리는 간선도로에서 능란한 솝씨로 핸들을 조작하여 수목이 울창한 작은 길로 접어들었다. “당신의 친구는 우리가 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 ” 주드가 물었다. “전화를 했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지요.” 갑자기 샛길이 나타났다. 앤젤리는 핸들을 꺾어 그 길로 들어섰다. 1마일(약 1.6··) 가량 가서 그는 브레이크를 걸어 자동개폐문 악에서 차를 세웠다. 주드는 작은 TV 모니터 카메라가 문 위에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철컥 소리가 나며 문이 좌우로 열리고, 그들이 들어가자 다시 철컥 닫혔다. 차는 길고 구불구불한 정원 내 차도를 달렸다. 전방의 나무 사이로 큰 저택의 높은 지붕이 보였다. 그 위에 햇빛을 받은 청동제 수탉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수탉은 꼬리가 없었다. 제 21 장 방음장치를 하고 밝은 형광등이 즐비한 경찰본부 통신센터에서는 12명의 와이셔츠 차림의 경관들이 큼직한 교환대를 중심으로 양쪽에 6명씩 둘러앉아 있었다. 교환대 한복판에는 서류 송달관의 입구가 보였다. 전화가 걸려오면 교환수는 용건을 적어 송달관에 넣어 2층의 통신반으로 보내고, 거기에서 곧 각 분서나 순찰차로 연락을 취하는 것이다. 전화는 낮이고 밤이고 쉴새없이 거대한 이 도시의 각계 각층 시민들로부터 걸려온다. 남자와 여자 · 10· 겁먹고……고독하고……절망하고……술에 취하고……부상을 입고……살인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로부터 · 10· 그것은 물감 대신에 선명한 고뇌의 언어로 그린 호가스(18세기 영국의 화가)의 그림과도 같았다. 지금 월요일 오후는 유별나게 긴장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전화교환원들은 일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으나, 그러면서도 쉴새없이 드나드는 여러 형사들과 FBI 조사원들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수사관들은 명령을 받고 또는 명령을 주면서 주드 스티븐스 의사와 프랭크 앤젤리 형사를 쫓아 광범위한 수사망을 구축하고, 조용한 가운데에서도 능률적으로 일하고 있었다. 주변의 공기는 신경질적인 꼭두각시 전문가가 조작하는 것처럼 기묘하고 단속적인 리듬으로 흥분을 더해 갔다. 버텔리 서장이 시범죄위원회의 앨런 설리번 씨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에 맥그리비가 들어왔다. 맥그리비는 전에 설리번 씨를 만난 일이 있어 구면이었다. 설리번은 강직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버텔리는 이야기를 멈추고 맥그리비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에 궁금한 표정이 떠올랐다. “짐작한 대로입니다.” 맥그리비가 말했다. “목격자를 찾아냈지요. 스티븐스의사의 진료소가 있는 빌딩 맞은편 건물에서 일하고 있는 경비원입니다. 괴한이 스티븐스의 진료실에 침입한 수요일 밤, 그 경비원이 때마침 경비를 돌다가 두 남자가 길 건너 빌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거리에 접한 문이 잠겨 있어서 열쇠로 열었는데, 경비원은 그 빌딩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알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 ” “경비원은 앤젤리의 사진을 보고 곧 알아보았습니다.” “수요일 밤에 앤젤리는 감기로 집에 있었을 텐데 ? ” “그렇습니다.” “또 한 남자는 ? ” “경비원은 똑똑히 보지를 못했다고 합니다.” 교환수가 교환대에서 명멸하는 무수한 불빛들 중 하나에 플러그를 끼워넣고는 버텔리 서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장님, 뉴저지 고속도로 순찰차에서 보고가 왔습니다.” 버텔리 서장이 급히 수화기를 움켜잡았다. “나, 서장이다.” 그는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확실한가 ? ……됐다 ! 가능한 한 인원을 늘려 주게. 도로검문을 하도록. 그 지역을 완전히 포위하는 거다. 계속 연락해 주게……수고했어.” 그는 수화기를 놓고 두 사람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잘 풀릴 것 같은걸. 뉴저지의 신참 경찰관 하나가 순찰중에 오렌지버그 부근 도로에서 앤젤리의 차를 보았다는군. 순찰대가 그 일대를 수색중일세.” “스티븐스 의사는 ? ” “앤젤리의 차에 타고 있어. 살아 있지. 걱정없네. 곧 찾아낼 테니까.” 맥그리비는 시가 두 개를 꺼냈다. 하나를 설리번에게 내밀었으나 고개를 흔들었기에 서장에게 건네주고 하나를 입에 물었다. “우리로서 다행한 것은 스티븐스 의사가 불사신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성냥을 켜서 두 대의 담배에 불을 당겼다. “조금 전 그의 친구인 피터 해들리 의사에게서 들었는데, 해들리 의사가 며칠 전 진료소로 스티븐스를 데리러 갔더니 앤젤리가 권총을 들고 있더랍니다. 앤젤리는 도둑이 들었다는 둥 횡설수설하더라나요. 나는 해들리 의사의 출현이 스티븐스의 목숨을 구했다고 생각합니다.” “자네는 어째서 앤젤리가 수상하다는 생각을 했지 ? ” 설리번이 물었다. “처음에는 그가 상인 몇을 협박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맥그리비가 말했다. “조사를 해봤더니 피해자들이 죽어도 입을 열지 않아요. 그들은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앤젤리에게는 내색도 하지 않고 계속 감시를 했지요. 존 핸슨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뜻밖에 앤젤리가 찾아와 그 사건 수사에 끼워달라고 하더군요. 그는 저를 무척 존경한다는 둥, 전부터 한 조가 되어 일을 해보고 싶었다느니 하며 꼬리를 쳤습니다.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 저는 서장님에게 간청해서 그와 조를 짜게 된 겁니다 · 10· 그가 자진해서 사건을 담당하려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게 틀림없으니까요. 처음에는 스티븐스 의사가 핸슨과 캐롤 로버츠 살해에 관계가 있는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만, 저는 앤젤리의 꼬리를 잡기 위해 의사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스티븐스에게 불리한 사건을 조작해서 사사건건 스티븐스를 살인범으로 몰고 가는 연극을 앤젤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앤젤리가 자기는 의심을 받지 않고 있다고 안심을 갖게 함으로써 그가 정체를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래, 예상이 맞아떨어지던가 ? ” “아닙니다. 놀랍게도 앤젤리는 스티븐스가 체포되지 않도록 싸고 돌았습니다.” 설리번은의아스러운눈으로맥그리비를바라보았다.“왜 ? ” “앤젤리는 그를 죽음의 길로 몰고 가야 했습니다. 스티븐스가 구속되면 그것이 어려워지거든요.” “맥그리비가 손을 쓰기 시작했을 때 · 10· ” 버텔리 서장이 입을 열었다. “앤젤리가 나를 찾아와 맥그리비가 스티븐스 의사에게 있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씌우려 한다고 하더군.” “우리는 거기에서 틀림없다는 확신을 가졌지요.” 맥그리비가 말했다. “스티븐스는 노만 무디라는 사립탐정을 고용했었습니다. 무디에 관해서 알아보니, 무디는 그의 의뢰인이 마약건으로 앤젤리에게 체포되었을 때 앤젤리와 몹시 다툰 적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무디는 그것이 앤젤리의 날조라고 주장했지요.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무디가 말한 것이 맞았습니다.” “무디는 공교롭게도 처음부터 답을 알아낼 수가 있었던 모양이군.” “행운이었다고만 할 수는 없었지요. 무디는 보기와는 달리 똑똑한 탐정이었습니다. 그는 앤젤리가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스티븐스 의사의 자동차에서 폭탄을 발견하자 그것을 FBI에게 넘겨주었지요.” “앤젤리에게 넘어갔다가는 처분될 위험을 계산에 넣은 거로군.”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실수로 보고서의 사본이 앤젤리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디에게 덜미를 잡혔다는 것을 알았지요. 최초의 돌파구는 무디가 ‘돈 빈톤’이라는 말을 입에 올린 일입니다.” “라 코사 노스트라의 보스 말이군.” “그렇습니다. 어떤 이유에선지 라 코사 노스트라 중의 누군가가 스티븐스 의사를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앤젤리가 라 코사 노스트라와 관계가 있다는 걸 눈치챘나 ? ” “앤젤리에게 시달림을 받은 상인들을 캐들어가 봤습니다. 제가 슬쩍 라 코사 노스트라라는 말을 입에 올렸더니 그들의 얼굴 빛이 노래지더군요. 앤젤리는 라 코사 노스트라의 악잡이로 일해 오면서, 그 조직을 배경으로 협박을 해서 돈을 우려낸 겁니다.” “라 코사 노스트라는 왜 스티븐스 의사를 없애려 하는 걸까 ? ” 설리번이 물었다. “모릅니다. 현재 여러 각도에서 검토중입니다.” 맥그리비는 무척 피곤하다는 듯이 숨을 몰아쉬었다. “우리에게는 불리한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앤젤리가 미행을 따돌리고 종적을 감춘 것과, 제가 앤젤리에 관해 진상을 이야기해주고 보호의 손을 쓰기 전에 스티븐스 의사가 달아난 것입니다.” 교환대에 불이 켜졌다. 교환수가 플러그를 꽂고 저쪽의 말을 듣더니 수화기를 서장에게 내밀었다. 버텔리가 수화기를 쥐었다. “나 서장이다.” 그는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말없이 수화기를 제자리에 놓고는 맥그리비를 바라보았다. “놓쳤어.” 제 22 장 앤터니 데마르코는 마나를 지니고 있었다. 주드는 그의 강렬한 성격의 힘이 눈에 보이는 물체처럼 실내를 가득 메우고 밀려드는 느낌을 받았다. 남편이 미남이라고 한 앤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데마르코는 고전적인 로마인의 모습을 물려받아 조각을 연상케 하는 옆얼굴과 새카만 눈을 갖고 있었으며, 검은 머리에는 희끗희끗한 새치가 섞여 있었다. 나이는 40대 중반으로 키가 크고 운동선수와 같은 체격을 했으며, 그 몸놀림은 활동적인 짐승처럼 우아했다. 목소리에는 깊이가 느껴지고 사람을 끄는 면이 있었다. “한잔하시겠소, 선생 ? ” 주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매료된 듯 눈악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누구라도 데마르코를 완전한 정상인이며 매력이 넘칠 뿐더러, 손님을 깍듯이 대하는 의젓한 주인으로 보아 의심치 않을 것이다. 서재에는 다섯 남자들이 모여 있었다. 주드, 데마르코, 앤젤리 형사, 그리고 아파트에서 주드를 죽이려 했던 로키와 닉 바카로 형제였다. 그들은 원형을 이루어 주드를 둘러싸고 있었다. 주드는 적으로서의 정체를 드러낸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마침내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싸움을 하던 상대를 보게 된 것이다 · 10· 만일 ‘싸움’이라는 말이 정확한 것이라면 그는 앤젤리가 놓은 덫에 스스로 뛰어든 꼴이다. 일부러 전화를 걸어 붙잡아가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배신자 앤젤리는 그를 도살장으로 끌고 왔다. 데마르코의 검은 눈은 잔잔한 흥미에 가득 차서 그를 훑어보고 있었다. “당신에 관해서는 들은 게 많지.” 그가 말했다. 주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모셔온 걸 용서하시오. 하지만 선생께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었지.” 그는 변명이라도 하듯 쑥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띠었다. 그것은 따사로움이 감도는 미소였다. 주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알고 있었다. 그의 생각은 신속히 악질러 나가고 있었다. “내 아내와 무슨 이야기를 했지, 스티븐스 선생 ? ” 주드는 일부러 놀라운 빛을 목소리에 담았다. “당신 부인 ? 난 당신부인을 알지 못합니다.” 데마르코가 비난이 곁들여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내는 한 주에 한두 번씩 3주 이상을 당신 진료소에 다녔소.” 주드는 생각에 잠기듯 미간을 찌푸렸다. “데마르코라는 환자는 없었는데……” 데마르코는 알 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름을 썼겠지. 아마 결혼 전의 이름을. 블레이크 · 10· 앤 블레이크라면 알 만하실 텐데.” 주드는 조심스럽게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앤 블레이크 ? ” 바카로 형제가 가까이 다가섰다. “그만둬 ! ” 데마르코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는 주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미 부드러운 태도는 엿볼 수가 없었다. “시치미를 떼겠다면 네놈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뜨거운 맛을 보여줄 테다.” 주드는 그의 눈을 보고 자기의 목숨이 바람 악의 촛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일부러 화가 난 듯이 말했다. “마음대로 하시오. 나는 이 순간까지 앤 블레이크가 당신의 부인이라는 걸 몰랐소.” “정말인지도 모릅니다.” 앤젤리가 말했다. “그는 · 10· ” 데마르코는 앤젤리의 말을 무시했다. “당신은 내 아내와 3주 동안 무슨 이야기를 했나 ? ” 마무리를 지을 시간이 왔다. 그가 지붕 위의 청동 수탉을 발견한 순간 마지막 수수께끼는 풀렸었다. 앤은 그를 죽일 상차림을 거들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앤도 그와 마찬가지로 피해자였다. 그녀는 큰 건설회사의 사장이라는 데마르코의 정체도 모른 채 결혼을 했다. 그러자 남편이 겉과는 달리 어둡고 무서운 일에 관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살 만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상의할 상대가 없는 그녀는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미지의 정신분석의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주드의 진료소를 찾아온 그녀는 남편에 대한 정절로 해서 차마 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이렇다 할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주드는 덤덤한 투로 그렇게 말했다. “당신의 부인은 끝내 아무 애기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데마르코의 검은 눈은 주드의 몸에 엉겨붙듯 그를 탐색하고 관찰하고 있었다. “좀더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 보시지.” 자기의 아내가, 라 코사 노스트라의 우두머리의 아내가 정신분석의에게 다닌다는 것을 알았을 때 데마르코는 몹시 당황했을 것이 틀림없다. 데마르코가 살인을 저지르면서까지 기록을 빼앗으려고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 10· ” 주드가 말했다. “어떤 것을 걱정하고 있긴 하지만 그 속사정은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뿐이었지요.” “그런 거라면 10초면 족하지.” 데마르코가 말했다. “아내가 당신 진료실에 몇 분 동안이나 머물러 있었는지도 알고 있어. 그래, 3주 동안 무슨 이야기를 했지 ? 아내는 내가 뭐를 하는 사람인지 이야기했을 텐데 ? ” “건설회사를 경영한다고 했소.” 데마르코는 차가운 표정으로 주드를 노려보았다. 주드는 자기의 이마에 진땀이 배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나도 정신분석학 책을 읽었지. 환자는 마음속에 품고 있는 말을 모두 털어놓게 되어 있어.” “그건 치료의 도움이 되죠.” 주드는 거리낌없이 말을 받았다. “하지만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았기에 끝내 나는 블레이크 부인 · 10· 아니, 데마르코 부인에게 아무런 치료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받지 않을 생각이었소.” “하지만 사절은 하지 않았지.” “그럴 필요가 없었지요. 부인은 금요일에 찾아와서 유럽으로 떠나게 되었다고 말했으니까.” “앤은 생각이 달라졌는걸. 나와 유럽으로 떠나는 걸 원하지 않았어. 웬지 아나 ? ” 주드는 정말로 알 수가 없어 데마르코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모르겠는데 ? ” “당신 탓이야.” 주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감정이 겉으로 나타나지 않게 애썼다. “무슨 소리요 ? ” “딴전 피우지 말라니까. 어제 저녁 늦게까지 앤과 이야기를 나눠 봤지. 앤은 나와 한 결혼이 잘못되었다고 했어. 나와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건데, 그건 네놈을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야.” 주드는 끓어오르는 복잡한 감정을 애써 억제했다. 앤은 호의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 하지만 이제 그것이 그에게나 앤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데마르코는 주드를 노려보며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별일 아니오. 정신분석학 책을 읽어 봤다니 알겠지만, 모든 여성 환자는 감정적 전이를 경험하게 마련이오. 한때 자신이 상대방 의사를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주드를 노려보고 있는 데마르코의 눈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검은 눈이 주드의 눈속 깊은 곳을 더듬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 그녀가 나에게 다니는 걸 알게 되었소 ? ” 데마르코는 흘끔 주드를 바라보고 큰 책상으로 걸어가더니 단검 모양의 예리한 칼을 집어들었다. “내 부하가 우리 집 사람이 당신 진료소가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지. 그 빌딩에는 산부인과도 있었기에 부하는 그녀가 임신을 숨겼다가 나중에 나를 놀라게 해주려는 줄로만 알았다더군. 그러나 뒤를 밟아 보니까 당신의 진료소더라 이 말이야.” 그는 주드를 바라보았다. “놀라기야 마찬가지지. 부하는 그녀가 정신과 의사에게 다닌다는 것을 발견했으니까. 앤터니 데마르코의 아내가 정신과 의사에게 남편에 대해 털어놓으려 다니다니.” “부인은 한마디도……” 데마르코의 말소리는 잔잔했다. “우리 위원회의 회의가 소집되었고, 표결에서 다른 배신자의 경우나 마찬가지로 나에게 그녀를 죽이라는 결정을 내렸지.” 데마르코는 우리에갇힌위험한야수처럼방안을서성거리기시작했다.“하지만 그들은 농사꾼 병정에게 명령을 내리듯 나에게 명령을 할 수야 없지. 나는 보스인 앤터니 데마르코이니까. 나는 만의 하나 아내가 우리에 대해 발설했다면 그녀가 이야기를 한 상대를 죽이겠다고 약속했어. 이 양손으로.” 데마르코는 두 주먹을 내밀었다. 그 한쪽 손에는 날카로운 칼이 쥐어져 있었다. “그게 당신이야.” 데마르코는 이야기를 하면서 빙글빙글 주드의 주위를 맴돌았다. 데마르코가 등뒤로 돌아갈 때마다 주드는 오금이 저렸다. “당신은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만일……” 주드가 말끝을 흐렸다. “아니야. 잘못을 저지른 건 누구지 ? 앤이야.” 그는 주드를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당신이 나보다 멋진 사람이라 · 10· 앤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 ” 바카로 형제가 낄낄 웃었다. “당신은 별것도 아니거든. 매일 진료소에 나가 · 10· 그래서 얼마나 벌지 ? 연간 3만 달러 ? 5만 ? 10만은 되나 ? 난 1주일에 그 이상 벌 수 있지.” 데마르코의 가면은 감정의 고조에 따라 급속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는 짤막하고 흥분으로 파열하는 듯한 말투가 되더니, 녹청처럼 배어나온 추악한 심술이 그의 깨끗한 용모를 일그러뜨렸다. 앤은 뒤늦게 그의 진짜 얼굴을 본 것이다. 주드는 살인광의 적나라한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과 그 여자는 서로 죽고 못사는 사이가 된 거야 ! ” “우리는 그렇지가 않소.” 주드가 말했다. 데마르코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그 여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는 건가 ? ” “아까도 말한 것처럼 그녀는 환자 중 한 명에 불과했소.” “좋아.” 데마르코는 잠시 뒤 말을 이었다. “직접 그 여자에게 그렇게 말하시지.” “뭐를 ? ” “당신 같은 여자는 강아지 눈곱만큼도 대단하게 생각지 않는다고 말이야. 곧 이리로 데리고 오지. 그 여자와 둘이서만 이야기해.” 주드는 심장의 박동이 빨라졌다. 그 자신과 앤을 구해 낼 기회가 주어지려는 것이다. 데마르코가 손을 흔들자 바카로 형제가 밖으로 나갔다. 데마르코가 주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깊고 검은 눈에는 베일이 덮여 있었다. 다시 가면을 고쳐 쓴 그는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앤이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녀는 죽지 않아도 돼. 나와 함께 유럽으로 가도록 설득해 주게.” 주드는 불현듯 갈증을 느꼈다. 데마르코의 눈에는 승리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주드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는 적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치명적이다. 데마르코는 장기판은 아니지만 자기가 주드를 꼼짝도 못하게 하는 말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앤이다. 주드가 어떻게 움직이든 그녀는 위험했다. 만일 앤을 데마르코와 함께 유럽에 가게 한다면 그녀의 목숨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로서는 데마르코가 앤을 살려둘 것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라 코사 노스트라가 그런 것을 허락할 리가 없다. 유럽에서 데마르코는 ‘사고’를 만들 것이다. 하지만 앤에게 유럽에 가서는 안된다고 하고, 그녀가 주드의 신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안다면 그것을 막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그녀의 죽음과 이어닿는다. 모면할 길은 없었다. 두 개의 덫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가 전부였다. 앤은 2층 침실의 창으로 주드와 앤젤리가 도착하는 것을 보았다. 극히 짧은 한 순간, 그녀는 주드가 자기를 데리러 왔다, 이 끔찍한 상태에서 구출해 내기 위해 왔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앤젤리가 주드에게 권총을 겨눈 채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앤은 48시간 전부터 남편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막연한 의심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너무나 믿기 어려운 일이라 그녀는 그걸 마음에서 걷어내려고 애썼다. 앤이 처음으로 의심을 품게 된 것은 몇 개월 전의 일이다. 그녀는 맨해튼으로 연극을 보러 갔었는데, 배우가 술에 취해 제2막 도중에 막이 내려 그녀는 예정보다도 빨리 집에 돌아왔다. 앤터니는 집에서 회의가 열리는데, 그녀가 돌아올 무렵까지는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앤이 돌아왔을 때 회의는 게속되고 있었다. 놀란 남편이 서재의 문을 닫으려 했을 때 그녀는 누군가가 호통을 치는 소리를 들었다. “오늘밤 공장으로 쳐들어가서 철저하게 해치우자고 ! ” 그 고함의 내용, 실내의 낯선 사나이들의 흉악한 인상, 그리고 뜻밖에 그녀가 돌아온 것을 보고 당황하던 앤터니의 모습이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날 밤 남편의 그럴듯한 설명에 납득을 했다. 그녀는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결혼한 지 6개월, 앤터니는 다정하고 자상한 남편이었다. 이따금 남편이 화를 낼 것 같은 기세를 엿볼 수 있었으나, 그때마다 그는 자기를 억제했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몇 주 뒤, 그녀가 수화기를 들었을 때 다른 방의 전화기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앤터니의 말소리를 들었다. “오늘밤 토론토에서 오는 화물을 터는 거야. 수위는 해치워. 놈이 말을 듣지 않거든.” 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화물을 털고’……‘수위를 해치운다’…… ? 섬뜩한 말들이었지만, 혹시 사업상의 용어는 아닐는지. 앤은 조심스럽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사업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하지만 마치 강철로 된 벽에 부딪친 느낌이었다. 그녀 악에 서 있는 것은 화가 머리 끝까지 뻗친, 알지도 못하는 남자였다. 그는 앤에게 가정에 대한 일만 생각하고 사업에 대해서는 아는 척도 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그들은 격한 말다툼을 벌였다. 이튿날 밤, 앤터니는 놀랄 만큼 값비싼 목걸이를 그녀에게 선물하고 용서를 빌었다. 한 달 뒤, 세 번째 사건이 일어났다. 앤은 새벽 4시쯤 덜컹 하는 문소리에 잠을 깼다. 그녀는 잠옷을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았다. 서재에서 서로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빠끔히 열린 문틈으로 앤터니가 대여섯 명의 남자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나타났다가는 남편이 화를 낼 것 같아 앤은 조용히 2층으로 되돌아가 침대에 누웠다. 아침식사 때 그녀는 남편에게 잘 잤느냐고 물어보았다. “곯아떨어졌지. 10시 이후에는 업어가도 몰랐을 거요.” 앤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종류의 문제인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앤이 알고 있는 것은 그녀가 가늠할 수 없는 어떤 이유에서 남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깊은 밤 은밀하게 부랑자와도 같은 사나이들과 모임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은 도대체 어떤 사업이길래 그럴까 ? 그녀는 앤터니와 다시금 그런 문제를 논의하기가 두려웠다. 앤의 마음속에 공포가 자리잡았다. 그녀는 의논할 사람이 없었다. 며칠이 지나 그들이 소속해 있는 컨트리 클럽의 디너 파티에서 누군가가 주드 스티븐스라는 정신분석 의사의 이름을 꺼내며 대단히 우수한 전문의라고 했다. “분석의 중에서도 뛰어난 분석의라고 할 수 있지요. 대단히 매력적인 사람인데, 그 매력이 아까울 정도로 그냥 환자에게만 헌신적인 의사랍니다.” 앤은 주의해서 그 이름을 기억 속에 적어두었다가 다음 주 주드를 찾아갔었던 것이다. 첫번째 방문에서 그녀의 인생은 부리째 흔들리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이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당황했다. 혼란에 빠진 앤은 주드에게 거의 아무런 말도 못했고, 마치 자기가 여학생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녀는 다시 와서는 안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진료소를 나왔다. 하지만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린 것은 그냥 우연한 일이었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진료소로 갔다. 두 번째의 그녀의 반응은 처음보다도 강했다. 늘 현실적이고 분별할 줄 아는 것을 자랑으로 알던 그녀가 지금은 첫사랑에 빠진 소녀와 같은 격정에 휩쓸리게 된 것이다. 그녀는 주드에게 남편에 대한 일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기에 그들은 다른 이야기만 했다. 그리고 면담이 거듭될수록 앤은 자상하고 마음씀씀이가 섬세한 이 의사를 더욱 절실하게 사랑하게 되었다. 앤터니는 결코 이혼해 줄 리가 없었으므로 앤은 그 사랑이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신혼 6개월 만에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은 자기에게 어떤 결함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코 주드를 만나서는 안된다고 다짐을 했다. 그런데 기묘한 일련의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주드의 환자인 존 핸슨이 대로에서 살해되고, 캐롤 로버츠가 무참한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주드 자신이 뺑소니차에 치여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다. 뒤이어 파이브 스타 창고에서 무디의 시체가 발견되고, 거기에 주드가 있었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앤은 창고의 이름을 본 적이 있었다. 앤터니의 책상 위에 있었던 송장(送狀)에 그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마음속에 무서운 의혹의 먹구름이 일기 시작했다. 앤터니가 그런 끔찍한 사건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하지만……앤은 악몽이라도 꾸는 것 같았다. 더구나 거기에서 벗어날 길도 없었다. 그녀는 그 악몽을 끝내 주드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거니와, 앤터니에게 그걸 따져묻는다는 것이 두려웠다. 앤은 자기의 의심이 근거 없는 것이고, 앤터니는 주드의 존재조차 모를 거라고 스스로를 타일러 보기도 했다. 그런데 48시간 전에 앤터니가 침실로 들어와 그녀가 주드를 찾아간 데 대해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앤의 처음 반응은 남편이 남몰래 자기의 행동을 살폈다는 데 대한 노여움이었으나, 그것은 그 동안 그녀를 괴롭혀 온 공포에 압도되고 말았다. 앤은 분노로 일그러진 남편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가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살인까지도. 질문을 받는 동안 그녀는 하나의 중대한 실수를 했다. 주드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지니고 있는지를 남편에게 알리고 만 것이다. 앤터니의 눈이 어두워졌다. 그는 마치 육체적인 타격이라도 피하듯이 머리를 젖혔다. 주드가 어떤 위험에 놓여 있는가를 깨달은 것은 그녀가 혼자가 되어서였다. 주드를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앤터니에게 유럽에는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주드가 이 집에 왔다. 그녀 때문에 그의 생명은 위험에 빠져 있었다. 침실의 문이 열리고 앤터니가 들어왔다. 그는 잠시 앤을 바라보았다. “손님이 왔소.” 그가 말했다. 앤은 노란 블라우스에 노란 스커트를 입고, 검은 머리를 어깨 위에 늘어뜨리고 서재에 들어갔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고 고뇌에 차 있었으나, 그 태도는 침착해 보였다. 실내에는 주드 혼자 있었다. “안녕하세요, 스티븐스 선생님. 앤터니에게서 선생님이 오셨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주드는 자기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괴이한 관객 악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앤이 사태를 알아차리고, 그녀 자신을 그에게 맡겨 그의 말에 따를 생각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주드로서 할 수 있는 것은 그녀를 조금이라도 더 살아남게 하는 일뿐이었다. 만일 앤이 유럽행을 거절한다면 데마르코는 곧 그녀를 해치울 것이 분명하다. 주드는 망설임 속에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하나하나의 말은 그의 차 속에 장치되었던 폭탄처럼 위험성을 지니고 있었다. “부인, 당신이 유럽 여행을 못 가겠다고 해서 남편의 걱정이 대단하십니다.” 앤은 귀를 기울여, 생각을 하며 기다렸다. “안됐군요.” 그녀가 말했다. “나도 그렇습니다. 나는 당신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드는 약간 말소리를 높였다. 앤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서 그의 눈빛을 읽었다. “제가 끝내 거절하면 어찌되지요 ? 제가 이 집을 나가 버린다면 ? ” 주드는 당황했다. “그건 안됩니다.” 앤은 결코 살아서 이 집을 나갈 수는 없다. “부인.” 그는 신중하게 말했다. “남편께서는 부인이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계십니다.” 앤은 입술을 움직여 뭐라고 말을 하려 했다. 그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나는 남편께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건 정신분석 과정에서 흔한 · 10· 모든 환자가 겪는 감정전이라는 것이라고.” 그녀는 그의 말을 받았다.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다닌 제가 바보였습니다. 제 문제는 스스로 해결했어야 했지요.” 앤의 눈은 그녀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그를 위험에 끌어들인 자신을 책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도 여러 가지로 생각을 했어요. 역지 저는 유럽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주드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앤이 이해를 한 것이다. 하지만 진짜 위험을 그녀에게 경고할 방법이 없었다. 아니면 그녀는 알고 있는 것일까 ? 주드는 앤의 등뒤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 너머로 숲자락의 높다란 나무들이 보였다. 앤은 그에게 숲속을 산책하는 걸 좋아한다는 말을 했었다. 그녀는 숲속의 빠져나갈 만한 길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둘이 숲까지만 갈 수 있다면……그는 낮고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앤 · 10· ” “이야기들은 끝나셨나 ? ” 주드는 고개를 돌렸다. 데마르코가 소리도 없이 방안에 들어와 있었다. 앤젤리와 바카로 형제가 뒤따랐다. 앤은 남편과 마주섰다. “네.” 그녀가 말했다. “스티븐스 선생님이 제가 당신과 유럽에 가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그 충고에 따르겠어요.” 데마르코는 미소를 짓고 주드를 바라보았다. “난 선생을 믿었답니다.” 그는 완전한 승리에서 오는 만족감으로 매력적인 웃는 낯을 보이고 있었다. 데마르코의 몸속을 흐르고 있는 막강한 에너지는 음산한 살기에서 저항하기 어려운 부드러움으로 스위치 전환이 자유로운 것 같았다. 앤이 거기에 기만당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주드까지도 이 순간에는 이 우아하고 호의에 넘치는 미남자가 냉혹한 살인광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데마르코는 앤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합시다. 2층에 올라가 준비를 하는 게 어떻겠소 ? ” 앤은 잠시 주저했다. 그녀는 주드를 남편이나 그의 부하들 틈에 남기고 물러갈 수가 없었다. “저……”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드를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 10· ” 앤이 손을 내밀었다. “안녕히 가세요, 스티븐스 선생님.” 주드는 그녀의 손을 쥐었다. “안녕히.” 이번에야말로 영원한 안녕이 될 것이다. 이젠 피할 길이 없었다. 주드는 앤이 등을 돌리고 다른 남자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며 방안에서 걸어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 보았다. 데마르코 역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답지 않소 ? ” 그의 얼굴에 기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애정과 소유의 만족과 · 10· 다른 무엇인가가 회한일까 ? 죽여야 하는 애석한 마음에서일까 ? “부인은 사건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습니다.” 주드가 말했다. “그녀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으니 자유롭게 해드리십시오.” 주드는 데마르코의 스위치가 바뀌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거의 눈에 보일 정도였다. 얼굴의 상냥한 표정은 사라지고 증오가 번졌다. 데마르코에게서 방출되는 증오의 에너지는 다른 사나이들에게도 옮겨가 곧장 주드에게로 쏠렸다. 데마르코의 표정은 거의 황홀상태에 가까웠다. “갑시다, 선생.” 주드는 탈출의 기회를 엿보면서 방안을 둘러보았다. 데마르코는 자기 집에서 주드를 죽일 생각은 없을 것이다. 이 틈을 타지 않으면 절대로 기회는 없다. 바카로 형제는 주드가 서툰 수작이라도 부리기를 바라는 듯 굶주린 눈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앤젤리는 권총 케이스에 손을 가까이 대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쓸데없는 발버둥은 치지 않도록 하시오.” 데마르코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지 · 10· 내 식으로 죽여 주겠어.” 앤은 2층 복도까지 올라가서 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주드를 둘러싼 남자들이 현관 쪽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는 급히 침실로 들어가 창밖을 엿보았다. 남자들이 주드를 앤젤리의 차에 밀어넣고 있었다. 앤은 급히 수화기를 집어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응답이 있을 때까지의 시간이 무한처럼 길게 느껴졌다. “교환 ! 경찰을 부탁합니다 ! 급히 · 10· 긴급을 요합니다.” 갑자기 남자의 손이 뻗어나오며 수화기를 빼앗아 제자리에 놓았다. 앤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뒤돌아보았다. 닉 바카로가 차가운 웃음을 띠우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 23 장 앤젤리는 헤드라이트의 스위치를 넣었다. 오후 4시였으나 태양은 머리 위를 뒤덮은 두터운 먹구름에 가려 있었다. 그들은 이미 한 시간 이상이나 달리고 있었다. 앤젤리가 핸들을 잡고 있었다. 그 옆에 로키 바카로가 앉았고, 주드는 앤터니 데마르코와 함께 뒷좌석에 앉았다. 주드는 처음에는 신경을 써서 경찰차가 지나가면 어떻게든 주의를 끌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앤젤리는 거의 차가 다니지 않는 한가한 시골길만을 골라 달렸다. 그들은 모리스 타운 교외를 돌아 206호선으로 들어가, 뉴저지 주 중앙부의 인가가 듬성듬성한 황량한 남쪽 평원으로 향했다. 회색의 하늘이 내려앉으며 진눈깨비가 뽀얗게 악유리에 부딪쳤다. “속도를 줄여.” 데마르코가 명령했다. “사고는 내고 싶지 않으니까.” 앤젤리는 시키는 대로 악셀을 밟던 발에서 힘을 뺐다. 데마르코는 주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대개의 인간은 이런 데에서 실수를 범하지. 나처럼 빈틈없는 계획을 세우지 않기 때문이야.” 주드는 데마르코를 임상적으로 관찰했다. 데마르코는 과대망상증에 빠져 이성(理性), 혹은 윤리와는 거리가 먼 곳에 있었다. 따라서 그의 이성에 호소할 방법은 없었다. 그에게는 도덕적 의식이 결여되어 있어 양심의 가책 같은 것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주드는 해답의 대부분을 알고 있었다. 데마르코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손으로 살인을 범한 것이다 · 10· 아내가 그와 그의 조직에 끼친 오점을 씻기 위한 시칠리아인의 복수인 것이다. 그는 실수로 존 핸슨을 살해했다. 앤젤리에게서 그 보고를 받자마자 데마르코는 진료소로 가서 캐롤을 발견했다. 가엾은 캐롤. 그녀는 데마르코 부인의 테이프를 그에게 넘겨 줄 수가 없었다. 앤이 데마르코 부인이라는 것을 알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만일 데마르코가 노여움을 억제할 수 있었다면 그는 캐롤로 하여금 데마르코 부인이 누구인가를 생각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좌절을 참을 수 없는 것이 그의 병이다. 그는 화를 못 이겨 캐롤을 죽였다. 주드를 차로 치고, 그 뒤 앤젤리와 함께 진료소에 왔었던 것도 데마르코였다. 주드는 그들이 실내로 침입했는데도 자기를 쏘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지금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 맥그리비는 범인이 주드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주드가 가책에 못 이겨 자살한 것으로 꾸밀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성공하면 경찰은 수사를 종결지을 테니까. 다음에 무디는……무디에게도 큰 죄를 진 셈이다. 무디에게 사건을 담당하는 형사들의 이름을 말할 때, 주드로서는 맥그리비에게 적의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앤젤리였던 것이다. 무디는 앤젤리가 라 코사 노스트라와 관계가 있는 것을 알고 그 배후를…… 앤젤리가 데마르코를 뒤돌아보았다. “앤은 어떻게 되나요 ? ” “걱정할 거 없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데마르코가 말했다. 앤젤리가 웃음을 띠었다. “알겠습니다.” 주드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외부 여자와 결혼한 것이 잘못이었어.” 데마르코는 생각에 잠긴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웃사이더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지. 절대로.” 차는 거의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황무지를 달리고 있었다. 진눈깨비 속 먼 지평선에 몇 개인가 공장이 보였다. “다 왔습니다.” 앤젤리가 알렸다. “수고했다.” 데마르코가 말했다. “조용해질 때까지 자네는 어디든 가서 숨어 있게나. 어디가 좋은가 ? ” “플로리다가 좋을 것 같습니다.” “좋아. 부하도 한 명 딸려 보내도록 하지.” “거기에는 잘 아는 굉장한 여자가 하나 있지요.” 앤젤리가 빙그레 웃었다. 데마르코는 거울 속의 앤젤리에게 웃으며 말했다. “햇빛에 몸을 좀 태우고 돌아오게나.” “태우고 돌아오는 것만이라면 누가 뭐라겠습니까.” 로키 바카로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오른쪽 전방에 연기를 내뿜고 있는 널찍한 공장이 보였다. 그들은 공장으로 통하는 좁은 길로 꺾어들었다. 차가 그 길로 들어서자 높은 벽이 보였다. 문은 잠겨 있었다. 앤젤리가 경적을 울리자 레인코트에 방수모를 쓴 남자가 문 안쪽에서 나타났다. 그 남자는 데마르코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빗장을 빼고 문을 열었다. 앤젤리가 차를 몰고 들어가자 문이 닫혔다. 19분서의 맥그리비 경사는 자기 방에서 세 형사와 버텔리 서장, 그리고 두 FBI 요원과 함께 이름을 적은 리스트를 살펴보고 있었다. “이것은 동부 라 코사 노스트라 멤버들의 명단입니다. 두목과 간부들이 망라되어 있지요. 문제는 앤젤리가 연관되어 있는 조직이 어느 그룹이냐 하는 겁니다.” “각 그룹을 검토해 보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 ? ” 버텔리가 물었다. FBI 요원 중 하나가 대답했다. “명단의 이름은 60명 이상이 됩니다. 적어도 24시간 이상 걸립니다. 하지만……” 그는 말끝을 흐렸다. 맥그리비가 말을 받았다. “하지만 스티븐스 의사는 24시간 뒤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겁니다.” 젊은 제복의 경관이 열린 문으로 급히 들어왔다가 서장이 있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뭐지 ? ” 맥그리비가 물었다. “뉴저지에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중요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상한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알려 달라는 경찰의 부탁을 받은 전화국 교환수가 어느 여성으로부터 급히 경찰본부를 바꿔달라는 신청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여성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전화가 끊기더랍니다.” “전화가 걸려온 지역은 ? ” “올드 태펀이라는 마을입니다.” “교환은 전화번호를 확인했다던가 ? ” “아닙니다. 곧 끊겨서.” “제기랄 ! ” 맥그리비가 혀를 찼다. “아무려면 어떤가.” 버텔리 서장이 말했다. “어느 집 할망구가 고양이라도 찾아달라고 전화를 걸다가 말았겠지.” 그때 맥그리비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맥그리비 경사입니다.” 실내의 모두가 긴장된 얼굴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좋아 ! 내가 가기 전엔 손을 대지 말도록. 곧 간다.” 그는 수화기를 찰칵 소리를 내며 내려놓았다. “고속도로 순찰대가 206호선을 남쪽으로 달리는 앤젤리의 차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밀스턴 부근입니다.” “뒤쫓고 있나요 ? ” FBI 요원이 물었다. “순찰대는 반대방향으로 가는 중이었답니다. 방향을 바꿨을 때는 이미 앤젤리의 차는 보이지 않더라는군요. 그 부근이라면 나도 잘 압니다. 공장 서너 개 외에는 아무것도 없지요.” 그는 FBI 요원 중 한 사람에게 물었다. “급히 그 부근 공장의 이름과 소유주의 이름을 알아볼 수 없겠소 ? ” “알 수 있습니다.” FBI 요원이 수화기를 집었다. “난 곧 출동하겠습니다. 무선으로 알려주시오.” 맥그리비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갑시다 ! ” 그가 달려나갔다. 세 형사와 FBI 요원 한 사람이 그의 뒤를 따랐다. 앤젤리의 차는 철문 곁의 수위실 악을 지나 높이 솟아 있는 기묘한 건물 쪽으로 굴러갔다. 여러 개의 높은 벽돌 굴뚝과 목재를 흘려 보내는 용수로가 있었다. 희부연 진눈깨비 속에 보이는 그 구불구불한 형태는 태고적의 풍경 속에 있는 유사 이전의 괴수처럼 보였다. 자동차는 대형 파이프와 컨베이어 벨트가 늘어선 곳 가까이에서 멎었다. 앤젤리와 바카로가 차에서 내리고, 바카로가 주드 곁의 뒷문을 열었다. 그는 손에 권총을 꺼내들고 있었다. “내리시지, 선생.” 주드는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데마르코가 그 뒤를 따랐다. 굉장한 소음과 바람이 귓전을 때렸다. 그들의 전방 25피트(약 7.5·)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파이프 라인은 굉음과 더불어 크게 벌린 탐욕스러운 입술로 가까이에 있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건 미국 최대의 파이프 라인 중의 하나지.” 데마르코는 주드가 알아들을 수 있게 큰 목소리로 자랑을 했다. “작업상황을 보시겠소 ? ” 주드는 새삼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데마르코는 어느새 손님을 접대하는 정중한 주인역을 연기하고 있었다. 아니 · 10· 연기가 아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무서운 점이다. 데마르코는 주드를 죽이려 하고 있지만, 그것은 필요가 없어진 장치의 일부를 폐기처분하는 일과 다를 바 없는 업무상의 조치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전에 그는 주드에게 감명을 주고 싶었다. “자, 선생. 이거 재미있답니다.” 그는 파이프 라인 가까이로 갔다. 앤젤리가 악장서고 데마르코는 주드 곁에, 로키 바카로가 뒤를 따라왔다. “이 공장은 500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리지요.” 데마르코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모든 공정이 자동화입니다.” 파이프 라인으로 가까이 감에 따라 굉음은 더욱 심해져서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진공실에서 약 100야드(약 90·) 떨어진 곳에 대형 컨베이어 벨트가 있고, 여섯 개의 날카로운 날을 지닌 길이 20피트(약 6·), 높이 5피트(약 1.5·)의 절단기로 아름드리 통나무를 자르고 있었다. 통나무는 거기에서 절단되고 깎여서 성난 고슴도치처럼 사방으로 날이 달린 회전축 쪽으로 운반되어 올라가고 있었다. 주변은 날리는 대팻밥이 비오듯 했는데 그것이 진눈깨비와 섞여 파이프 라인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나무토막이 커도 상관없지.” 데마르코가 득의만만하게 말했다. “기계가 직경 36인치(약 91··)짜리 파이프로 빨아들일 수 있는 크기로 다듬어 주니까.” 데마르코는 주머니에서 38구경의 콜트 권총을 꺼내며 큰소리로 불렀다. “여보게, 앤젤리.” 앤젤리가 뒤돌아보았다. “플로리다에 가서 놀아야지.” 데마르코가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앤젤리의 와이셔츠에 붉은 구멍이 뚫렸다. 앤젤리는 방금 들은 수수께끼에 대한 설명을 기다리는 것처럼 의아스러운 웃음을 띠운 채 데마르코를 바라보고 있었다. 데마르코가 다시 한 번 방아쇠를 당겼다. 앤젤리가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데마르코가 로키 바카로에게 눈짓을 하자, 바카로가 앤젤리의 몸을 일으켜 세워 어깨에 떠매고 파이프라인 쪽으로 걸어갔다. 데마르코가 주드를 바라보았다. “바보 같은 녀석이지, 앤젤리는. 나라 안의 경찰이 그를 찾고 있잖소. 조만간 붙잡힐 게고, 붙잡히면 내 일을 털어놓을 게 뻔하지.” 냉혹한 앤젤리를 살해해 버린 것도 충격적이었으나, 다음에는 보다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바카로가 앤젤리의 시체를 거대한 파이프 라인 입구로 나르는 것을 주드는 공포에 떨면서 지켜보았다. 엄청난 힘이 앤젤리의 시체를 끌어잡아당기더니 탐욕스럽게 삼켜 버렸다. 바카로는 파이프의 옆쪽에 설치되어 있는 손잡이를 쥐고 죽음의 태풍 속으로 끌려들어가지 않도록 몸을 버텼다. 대팻밥과 나무조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앤젤리의 시체가 한번 맴돌더니 자취를 감추었다. 바카로는 파이프에 장치된 밸브를 돌렸다. 파이프의 입구에 강철 덮개가 내려오며 공기의 소용돌이를 차단했다. 갑작스러운 고요가 오히려 귀를 멀게 하는 듯이 느껴졌다. 데마르코는 주드에게로 몸을 돌리고서 권총을 치켜올렸다. 그 얼굴에는 신비스런 환희의 표정이 깃들어 있었다. 주드는 데마르코에게 있어 살인은 거의 종교적 체험에 가까운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정화의 시련이었다. 주드는 마침내 최후의 순간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공포를 벗어났으나, 앤의 생명을 해치고 죄없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이 사나이의 생존이 용납되고 있는 현실에 격한 의분을 느꼈다. 그는 분노와 좌절의 신음소리를 들었는데, 그것이 자기의 입술에서 새어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주드는 자기를 덫에 건 사나이를 물어뜯고자 이를 드러낸 야수와도 같은 발악에 치를 떨었다. 데마르코는 주드의 마음을 꿰뚫어보듯이 그에게 웃으며 말했다. “배를 쏴주지, 선생. 죽기까지 시간이 좀 길어지겠지만, 그 만큼 더 오래 앤을 걱정해 줄 시간도 길어질 테니까.” 한 가지 희망이 있었다. 실낱 같은 희망이지만. “앤이 걱정되는 건 당연하지.” 주드가 말했다. “앤은 남자를 모르거든.” 데마르코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주드는 목소리를 높여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네놈의 페니스가 뭔지 아나 ? 손에 들고 있는 그 권총이나 다를 바 없지. 권총이나 단도가 없으면 네놈은 여자거든.” 그는 데마르코의 얼굴에 차츰 노여움의 빛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네놈은 남자의 그것을 갖고 있지 않아. 권총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거든.” 붉은 막이 죽음을 경고하는 깃발처럼 데마르코의 눈 속에 번져 갔다. 바카로가 한 발자국 악으로 나섰다. 데마르코가 손을 흔들어 바카로를 물러나게 했다. “권총 말고 이 손으로 죽여 주지.” 데마르코는 권총을 땅 위에 집어던졌다. “맨손으로 말이다 ! ” 그리고 천천히 힘찬 야수처럼 그는 주드에게 다가왔다. 주드는 뒤로 물러섰다. 그는 힘으로 이 야수를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유일한 희망은 데마르코의 일그러진 마음에 영향을 주어 그것을 미치게 하는 것이다. 그는 데마르코의 최대의 약점 · 10· 남자다움의 긍지를 건드려 집중적인 공격을 가할 필요가 있었다. “데마르코, 너는 호모야.” 데마르코는 묘한 웃음을 띠우고 그에게 덤벼들었다. 주드가 몸을 틀어 피했다. 바카로가 땅 위의 권총을 집어들었다. “보스 ! 내가 해치우겠습니다 ! ” “끼어들지 마 ! ” 데마르코가 호통을 쳤다. 두 남자는 서로를 견제하면서 빙글빙글 돌았다. 주드가 젖은 대팻밥에 미끌어지자 데마르크가 황소처럼 돌진해 왔다. 그의 큰 주먹이 입가에 닿자 주드의 등뼈가 활처럼 뒤로 휘었다. 주드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데마르코에게로 달려들어 그 얼굴을 가격했다. 데마르코는 순간 주춤하더니 손을 휘둘러 주드의 복부에 계속해서 세 번의 공격을 가했다. 주드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는 입을 벌려 데마르코에게 욕설을 퍼부려고 했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데마르코는 마치 맹수처럼 그를 노리고 주위를 맴돌았다. “안되겠나, 선생 ? ” 데마르코가 차갑게 웃었다. “나는 복서였지. 솝씨를 보여 줄까 ? 신장을 가격하고 다음엔 머리와 눈이지. 눈을 후벼파 줄 테다. 내가 네놈의 숨통을 끊어놓기 전에 제발 권총으로 어서 쏴죽여 달라고 애원할 거다.” 주드는 데마르코의 말을 의심치 않았다. 구름 사이로 새어나온 어슴프레한 빛 속의 데마르코는 성난 야수처럼 날뛰었다. 그는 다시 돌진해 오면서 주드를 가격했다. 그의 손가락에 보석반지가 주드의 볼을 찢었다. 주드는 안간힘을 다해서 그에게 덤벼들어 그의 안면을 마두 두드려팼다. 데마르코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데마르코는 마침내 양쪽 주먹을 피스톤처럼 움직여 그의 신장을 연타하기 시작했다. 주드는 온몸에 격렬한 통증을 느끼며 몸을 뺐다. “끝난 건 아니겠지, 선생 ? ” 데마르코가 다시 육박해 왔다. 주드는 더 이상 지탱하기는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는 떠들어대야 했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기회였다. “데마르코……” 주드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데마르코가 일부러 틈을 보였다. 주드가 덤벼들었다. 데마르코는 몸을 옆으로 빼고 웃으며 주드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주드는 몸을 꼬며 땅 위에 쓰러졌다. 데마르코는 몸 위로 올라타 그의 목을 조였다. “이 손으로 · 10· ” 데마르코가 외쳤다. “이 맨손으로 네놈의 눈을 후벼팔 테다.” 그는 굵은 손가락을 주드의 눈으로 가져갔다. 그들은 베드민스터를 지나 206호선을 남쪽으로 속력을 내어 달렸다. 찰칵 소리가 나고 무선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기는 3……여기는 3……모든 순찰차는 대기하라……뉴욕 27……뉴욕 27……” 맥그리비가 마이크로폰을 들었다. “뉴욕 27이다……말하라.” 버텔리 서장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렸다. “알아냈네, 맥. 밀스턴에서 2마일(약 3.2··) 남쪽에 뉴저지 파이프 라인 회사가 있다. 모회사는 파이브 스타 주식회사 · 10· 그 정육공장과 같은 계열의 회사야. 앤터니 데마르코가 내걸고 있는 간판이라네.” “알겠습니다.” 맥그리비가 말했다. “곧 그리로 갑니다.” “어느 정도의 거리인가 ? ” “현위치에서 약 10마일(16··) 가량 됩니다.” “부탁하네.” “예.” 맥그리비는 무선을 끊고, 사이렌을 울리며 악셀을 바닥에 닿을 정도로 밟았다. 축축한 공기가 빙글빙글 돌고 무엇인가가 그를 두둘겨 몸체를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것 같았다. 그는 눈으로 보려고 했지만 눈두덩이가 부어올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주먹이 갈비뼈를 때려 뼈가 부러지는 느낌이 전해 왔다. 씩씩거리는 데마르코의 뜨거운 입김이 그의 얼굴에 와닿았다. 데마르코를 보려고 했지만 주드는 암흑 속에 갇혀 있었다. 그는 입을 열어 부풀어 오른 혀 사이로 말을 밀어냈다. “여, 역시……” 그는 헐떡이며 말했다. “내가 옳았다……네놈은……네놈이 누구를 칠 수 있는 것은……상대가 쓰러져 있을 때뿐이거든.” 주드의 얼굴에 와닿았던 뜨거운 숨이 멎었다. 그의 두 손이 주드의 몸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너는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나는 맨손으로 상대했지.” 주드는 목소리의 주인에게서 뒷걸음질쳤다. “네놈은 지……짐승이다.” 그는 헐떡이며 말했다. “미치광이……가둬둬야 하는 건데……정신병원에.” 데마르코의 목소리가 노기에 찼다. “거짓말 ! ” “아니.” 주드는 뒷걸음질치며 말했다. “네놈의 뇌는 병에 걸려 있어……네 마음의 기둥은 갑자기 무너져 내려……바보스러운 아기처럼 되지.” 주드는 뒤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뒷걸음질을 계속했다. 뒤에는 잠든 거인처럼 입을 다문 파이프 라인이 둔탁한 으르릉 소리를 내고 있었다. 데마르코는 주드에게로 달려들어 큰 손으로 주드의 목덜미를 잡았다. “목뼈를 부러뜨려 줄 테다 ! ” 목에 압박이 가해졌다. 주드는 머리가 멍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마지막 기회였다. 본능은 그에게 데마르코의 손을 호흡을 할 수 있게끔 잡아떼라고 명령했다. 그는 그것을 무시하고 최후의 강한 의지력으로 양손을 뒤로 돌려 파이프의 밸브를 더듬었다. 그는 자기가 무의식의 나락으로 미끌어져 내려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 순간 그의 손이 밸브에 닿았다. 필사적으로, 마지막 힘을 짜내어 그는 밸브를 돌렸다. 그리고 데마르코가 대신 자기의 위치에 오도록 몸을 비틀었다. 갑자기 굉장한 힘이 그들을 파이프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주드는 필사적으로 밸브에 매달려 거센 바람에 맞섰다. 데마르코가 파이프 쪽으로 빨려들어가며 동시에 그의 손가락이 더욱 깊이 주드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데마르코는 스스로를 구할 수도 있었으나 광기에 가까운 노여움에 사로잡힌 그는 손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주드는 데마르코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발광한 야수와도 같은 외마디 소리가 들렸으나 굉음에 휩쓸리고 말았다. 밸브에 매달린 주드의 손가락이 펴질 것 같았다. 그는 데마르코와 함께 파이프 라인에 빨려들어갈 참이었다. 주드는 급히 최후의 기도를 올렸다. 그 순간 그는 데마르코의 양손이 그의 목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엄청난 비명소리가 울렸으나 기계의 굉음이 그것을 집어삼켰다. 데마르코가 사라진 것이다. 주드는 모든 힘을 써버려 탈진한 채 거기에 기대서서 바카로의 권총이 불을 뿜기를 기다렸다. 순간 권총의 발사음이 귓전에 울려퍼졌다. 주드는 기대선 채, 왜 바카로가 제대로 맞추지를 못했을까 의아하게 생각했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그는 몇 발의 총소리를 더 들었다. 사람들이 달리는 어지러운 발소리가 나고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어떤 힘센 팔이 그를 안았다. 그리고 맥그리비의 목소리가 말했다. “지독하군 ! 이 얼굴 좀 봐 ! ” 강력한 손이 주드의 팔을 잡고 그를 끌어들이려는 파이프 라인으로부터 그를 잡아 끌어당겼다. 무엇인가가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그것이 피인지, 비인지, 눈물인지를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싸움은 끝난 것이다. 그는 부어오른 한쪽 눈을 억지로 뜨고서 붉게 피에 젖은 틈새로 희미하게나마 맥그리비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앤이 집에 있습니다.” 주드가 말했다. “데마르코의 부인 말입니다. 구조하러 가야 합니다.” 맥그리비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주드는 자기의 말이 목소리로 되어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입을 맥그리비의 귀에 가까이 하고 쉰 목소리로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앤 데마르코가……그녀의……집에 있다……살려주시오.” 맥그리비는 급히 경찰차로 가서 마이크를 들어 지시를 내렸다. 주드는 악뒤로 휘청거리면서 베는 듯한 차가운 공기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는 눈악에 시체가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로키 바카로였다. ‘우리가 이겼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가 이겼다.’ 그는 그 말을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과연 승리라고 할 수 있을까 ? 주드는 스스로를 훌륭한 문화인 · 10· 의사, 치료를 베푸는 사람으로 생각해 왔으나, 지금은 살육의 욕망에 불타는 잔악한 야수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병자를 광기의 나락으로 밀어넣고 끝내는 살해한 것이다. 그건 그가 일생 동안을 짜어져야 할 무섭고도 무거운 짐이 될 것이다. 자위권을 위해서였다고 스스로에게 변명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는 거기에서 부듯한 기쁨을 느꼈음을 알고 있었다. 주드는 그것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는 데마르코나 바카로 형제, 또는 그밖의 사람들보다 훌륭한 인간은 아니었다. 문명이란 얇고도 위태로울 정도로 허약한 판자였다. 그 얇은 판자가 쪼개지면 인간은 다시금 야수성을 띠고, 간신히 기어올라온 원시의 심연으로 떨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주드는 그 이상 생각할 기력이 없었다. 지금은 오로지 앤의 무사하기만을 바라야 했다. 맥그리비가 곁에 서 있었다. 그의 태도는 이상하게도 전과는 완연히 달랐다. “경찰차가 그녀의 집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스티븐스 선생. 이젠 됐습니까 ? ” 주드는 감사의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맥그리비는 그의 팔을 끼고 자동차 쪽으로 안내했다. 아픔을 십어삼키며 천천히 빈터를 걸어가는 그는 진눈깨비가 그치고 있음을 알았다. 먹구름은 12월의 매운 바람에 밀려가고 하늘은 개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태양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서쪽으로부터 희미한 빛이 퍼지면서 차츰 그 빛을 더해 가고 있었다. 좋은 크리스마스가 될 것 같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