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제목:마지막 리허설 지은이:시드니 셀던 출판사:영림카디널 1 20년 후의 남편 에디 페커는 자신의 인생이란 괴물이 드디어 구렁텅이로 굴러 떨어지는 걸 느끼면서 이스트 108번가에 있는 나이트 클럽에 들어섰다. 그곳에는 주 름을 잡은 청바지에 커다란 가슴이 도드라져 보이는 하얀 블라우스를 걸친 여자들이 많았다. 그 여자들은 하이힐을 또각거리면서 이스트 할렘에서나 볼 수 있는 여자들처럼 클럽 안을 흐느적거리며 걷거나 탐스런 엉덩이를 사정없이 흔들면서 춤을 췄다. 하지만 에디는 검정 레이스 브레지어에 감 싸인 가슴을 지닌 그녀들과 춤을 추고 침대로 직행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섹스를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녀들은 젊고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에디의 초조하고 불안한 인생은 아직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이트 클럽은 음탕한 스페인어 만화와 세 개비에 25센트인 말보로나 켄 트 가치 담배, 5달러를 내면 재빨리 작은 봉지에 덜어주는 마리화나, 그리 고 50달러만 지불하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22구경 권총 따위를 파는 장소 였다. 에디는 두려움과 호기심이 뒤섞인 눈을 굴리면서 나이트 크럽 안으로 들 어갔다. 그곳에는 좀도둑들이 훔쳐온 부품들로 만든 고성능 대형 오디오가 이스트 103번가를 뒤흔들어 버릴 듯이 음악을 토해내고 있었다. 어깨에 끈이 달린 작은 가방을 걸쳐멘 에디가 바 쪽으로 들어서자 누군 가가 그의 어깨를 쳤다. 그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금발의 환한 얼굴이 술 냄새와 함께 다가왔다. - 아, 신디. 에디는 긴장해 있었던 탓에 목이 쉰 듯한 꺽꺽한 음성으로 말했다. - 여기는 어쩐 일이죠? 한때 그와 깊이 사귄 적이 있는 신디 윌슨이 술잔을 들어 보이며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에디는 반가웠으나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이 여 자는 아직도 날 사랑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전문직 여성답지 않은 차림새도 여전했다. 젖가슴을 팽팽하게 감싸고 있 는 짙은 초록색 티셔츠에 도발적인 미니 스커트를 입고 있는 그녀는 약간 취해 있었다. 스커트 아래로 죽 뻗어내린 미끈하고 탄탄한 다리는 지금도 보기 좋았다. 그녀와 즐겼던 강렬한 기억들이 순간적으로 그의 아랫배를 훑어내듯이 지나갔다. 신디는 보기 드물게 열정적인 여자여서 남자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하복부 아래가 조금 뻣뻣해지는 걸 느꼈다. 그녀는 허드슨 강변에 있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근무하는 커리어 우먼 이었고 미인이었으며, 무엇보다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 있는 근사한 주택에 살 수 있을 만큼 부자였다. 소문에 의하면 미시시피 출신의 면화업계 거물 인 아버지한테서 5억 달러 정도의 유산을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반면에 돈이라고는 주머니에 있는 22달러 외에는 한푼도 없는 에디는 겨 우 단역에나 가끔 출연하는 무명 연극 배우인데다가 병든 어머니와 3만 달 러나 되는 빚이 있었다. 게다가 에디는 이제 막 인생의 시커먼 구렁텅이에 한 발을 내딛는 상태였다. - 술 한잔하려고.....당신은 어쩐 일이오? 재력과 미모를 갖춘 그녀 곁에는 언제나 젊고 근사한 남자들이 파리떼처 럼 들끓고 있었기 때문에 에디는 그녀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 나도 한잔 하려구요. 그래 그 슈퍼모델..... 음, 이름이 뭐더라? 그래, 수 지 다이아하고는 잘되고 있나요? 수지 다이아란 이름까지 들먹였지만 빈정거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 는 더욱 가까이 다가와서 가슴과 허벅지와 아랫배로 그를 밀어붙였다. 잘 하면 가늘고 긴 손으로 그의 가랑이 사이까지 만져줄 기세였다. - 신디. 이분은 누구지? 근사하게 생긴 사나이가 다가오더니 흰 이빨을 드러내면서 에디를 물어 뜯을 듯이 노려보며 웃었다. 사내는 신디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서 전심 전력을 다하고 있는 중인지 신디 옆에 충직한 세퍼트처럼 딱 붙어섰다. 그 어떤 남자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엿보이는 것 같아서 에디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 아. 내 친구. 에디 페커. 연극 배우예요. 이쪽은 맨해튼에 사무실을 갖 고 있는 변호사인데 이름은..... 신디가 변호사 친구의 이름이 무어라고 소개했지만 에디는 그냥 흘려듣 고 말았다. 두 사람은 악수를 했다. - 연극 배우라......참 독특한 직업이군요. 변호사가 약간 비꼬는 듯한 묘한 억양으로 말했다. - 변호사란 직업도 그렇죠. 대다수 사람들한테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 은 변호사를 필요악이라고 하더군요. - 그런가요? 하하하! 혹시 사냥 좋아하십니까? - 사냥이라면? - 말 그대로 동물 사냥이죠. 좋아하시면 언제 우리 롱아일렌드에 가서 기러기 사냥이나 한번 합시다. 새벽 안개를 맞으며 사냥총을 들고 기러기 를 기다리는 맛이 그만이죠. 가진 거라곤 돈 몇 푼과 변호사 자격증밖에 없을 녀석이 슬슬 돈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녀석은 틀림없이 최근에 개장한 롱아일랜드 컨트리클럽 회 원권도 갖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회원권을 자랑하고 싶어서 좀이 쑤시 는지도 모르지. - 여자 사냥이라면 몰라도 기러기라면 사양하겠습니다. - 말씀을 재미있게 하시는군요. 그럼 맨해튼에 있는 헬스클럽은 어떻습 니까? 우린 잘 맞을 것도 같은데.....운동은 뭘 좋아하십니까? 얘기를 더 듣고 있으면 아마도 가랑이 사이에 끼우고 있는 고급 속옷까 지 끄집어내서 자랑할 것 같았다. 에디는 쓴 입맛을 다시며 신디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철저한 속물덩어리 를 어떻게 찾아냈는지 그녀에게 묻고 싶어서였다. 적어도 신디는 이런 속 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신디가 그의 심증을 파악하기라도 한 듯 좀더 바짝 다가와서 팔짱을 꼈 다. - 그만 가주겠어요? 오늘은 에디와 한잔 해야겠어요. 미안해요. - 신디! 이런 상황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호사가 얼굴을 붉히며 당 황해 했다. 잘 나가는 맨해튼의 변호사가 보잘것없는 무명 배우한테 밀렸 다는 것 때문에 크게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변호사는 에디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더니, 신디에게 상냥한 인사를 남기고는 바람처럼 밖으로 사라 져 버렸다. - 욕심하고 간사한 머리통 외에는 가진 게 없는 사람인데 하도 졸라서 같이 온 것뿐이에요. 그래도 일은 제법 잘한다는 소문이 나 있어요. 신디가 지겹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고는 말했다. - 신디, 미안하지만 오늘은 안 돼. 일이 있소. 내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 오. 그는 가능하면 어서 신디 곁을 떠나고 싶었다. 그녀와 같이 있으면 아픈 추억이 되살아나기 때문이었다. - 내가 살게요. 당신도 외로운 것 같은데....... 그건 맞는 말이었다. 갑자기 형편이 어려워진 이후로 그는 여자에. 특히 사랑에 굶주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젓고 바텐더가 있는 쪽을 바라 보았다. 그는 쟈니라는 남자를 만나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는 바텐더에게 다가가서 쟈니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 쟈니는 왜 찾는 거야? 얼굴이 고릴라처럼 털로 뒤덮인 거대한 체구의 바텐더는 작은 눈을 치켜 뜨고 에디를 위협하듯이 쏘아보았다. - 만날 일이 있어서 그래. 에디는 건달 같은 말투로 대답했다. - 무슨 일로 찾느냐고 묻잖아? 바텐더는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절대 가르쳐주지 않을 것처럼 대꾸했 다. - 가르쳐주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내가 그냥 돌아갔다는 걸 쟈니가 알 면 분명 화를 낼걸. 에디는 진짜 건달처럼 상체를 흔들면서 어깨에 걸쳐멘 가방끈을 추스렸 다. 바텐더의 눈길이 그의 가방에 잠시 머물렀다가 그의 얼굴로 다시 옮겨 왔다. - 좋아. 잠시 자리를 비운 거니까 30분 후에 다시 오면 만날 수 있을 거 야. - 그럼. 그때 다시 오지. 에디는 돌아섰다. - 나한테 잠시 시간 좀 내줘요. 신디가 다시 그의 팔짱을 꼈다. - 잠시라면 좋소. - 밖으로 나가요. 호텔도 좋고. 시간이 없으면 당신 차도 좋아요. 그녀의 술기운 오른 눈이 남자를, 에디를 찾고 있었다. 그녀의 피부는 벌 써 화끈거리고 있었다. 이미 뜨거워졌을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떠올리자 그의 몸도 후끈 달아올랐다. 에디는 신디를 좋아하고 있었다. 아니 어느 면 에서는 사랑하고 있었다. 다만 결혼이란 문제 때문에 그 관계가 계속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의 결혼 상대는 점성가로부터 점찍음을 받은 수지 다이아라는 세계적 인 톱모델이었으므로 신디를 비롯한 다른 여자들과의 결혼은 불가능한 것 으로 여기고 있었다. - 그런데 에디. 요즘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죠? 혹시 당신이 연극에 출연하나해서 열심히 신문 기사와 연극 포스터를 찾아봤지만 모두 헛수고 였어요. - 노력은 하고 있지만 통 출연 요청이 안 들어와서 개점 휴업 상태요. 에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으나 그 어조에는 씁쓸함이 담겨 있 었다. 그는 신디를 만나게 해준 연극 <투탕카문의 노래>에 단역으로 출연 한 이후 전혀 배역을 맡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벌써 10개월이 다 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요즘 몹시 어려웠다. 10개월 전 비비안 버몬트 극장에서 연극 <투탕카문의 노래>마지막 공연 이 막을 내렸을 때. 한 여자가 무대 뒤로 투탕카문의 신하 역을 맡았던 사 람을 찾아왔는데 그녀가 바로 신디 윌슨이었던 것이다. 화사한 꽃다발을 두 손에 들고 있는 그녀는 이렇게 이렇게 생긴 신하에 게 꽃다발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그 신하의 연기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고 하면서 꼭 만나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렇게 해서 불려나온 에디에게 그녀는 꽃다발을 전하면서 자신을 신디 윌슨이라고 소개하고는 연기가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 혹시 면화업계 거부의 따님....... 얼떨떨해 있던 에디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신디는 대답 없이 미소만 지었다. - 맞군요? <뉴욕 타임스>의 유명 인사 동정란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몇 번 읽은 적이 있소. 당신이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은 그 신디 윌슨 맞 소? - 맞아요. 제가 그 신디 윌슨이에요. 그녀가 미소와 함께 조용히 대답했다. 그러자 에디의 주위에 몰려 있던 배우들이 나직한 탄성을 내고는 일제히 에디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 이, 이렇게 유명한 분을 만나다니 영광이오! 에디는 너무 당황하고도 기쁜 나머지 어쩔 줄을 모르면서 말까지 더듬었 다. 에디 역시 미국 최고의 신부감인 억만장자 신디 윌슨에 대해서 잘 알 고 있었던 것이다. - 괜찮다면 시간 좀 내주실래요? 좋은 연기를 보여주신 패커 씨께 식사 를 대접하고 싶어요. - 동료들과 약속이 있지만 당신의 초대라면 사양하지 않겠소. - 고마워요. 그럼. 신디가 다가와서 스스럼없이 에디의 팔짱을 꼈다. 그 순간, 에디는 비틀 했다. 황홀한 나머지 현기증을 느끼면서 정신을 잃을 뻔했던 것이다. - 아아, 내게도 이런 행운이 오다니! 에디는 신디와 함께 브루클린 다리 아래에 있는 선상 레스토랑에 앉아서 도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미국 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인 신디와 마주앉아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맞아, 난 술에 잔뜩 취해 있는 거야. 그래 서 환상적인 꿈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게 틀림없어' 라고 생각하고는 자신의 허벅지를 힘껏 꼬집었다. 그리고는 엄청난 아픔 때문에 비명을 질 렀다. 순식간에 이스트리버의 환상적인 야경에 푹 빠져 있던 손님들의 모 든 시선이 그들에게 모아졌다. 에디는 사태를 깨닫고는 헛기침을 했지만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우아 한 미소를 지으며 에디를 바라보는 신디 역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날 밤이 늦도록 술을 마시고 헤어졌다. 그것이 첫 번째 만 남으로 그들은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롱아일랜드 북쪽 해 안에 있는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바닷가재 요리로 식사를 끝내고 '우리 별 점 보러 갈까요?' 하고 신디가 말했을 때가 다섯 번째 만남이었다. - 이곳에 유명한 점성술사가 살거든요. 혹시 재키 스탠우드라고 들어보 셨나요? - 재키라면 매년 연초에 그 해 미국 운과 세계의 주요 사건을 점치는 사 람이잖소? - 맞아요. 바로 그 유명한 재키 스탠우드가 이곳에 살고 있어요. 일어나 요. 같이 가서 점이나 보자구요. 신디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 점은 안 믿는데.....어떤 점을 볼 생각이요? 신디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매혹적으로 웃었다. - 우리의 미래. - 미래? - 우리가 결혼해서 잘살 수 있나 볼 거예요. - 방금 결혼이라고 했소? 에디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해서 반문했다. - 왜, 나와 결혼하기 싫어요? - 그런 게 아니오....만약 점괘가 나쁘게 나오면 어쩔 생각이오? 재키의 점성술은 잘 맞기로 유명하잖소. - 염려 마세요. 이건 그냥 재미로 보는 거니까요. 그보다 점괘가 나쁘다 고 날 차버릴 생각이나 마세요. - 당신이 나를 떠나지 않는 한 나는 절대 당신을 떠나지 않을거요. 두 사람은 휴양지 끝쪽 해변에 있는 재키의 집에 찾아갔다. 신디가 미리 연락을 해놓았기 때문에 쉽게 재키를 만날 수 있었다. 날카로운 인상의 그녀는 어떻게 보면 50세쯤 된 중년 여성처럼 보이고 어떻게 보면 70세는 돼보이는 이상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온통 붉은 카펫과 벽지로 실내를 장식한 방으로 두 사람을 데리 고 가서 마주앉았다. 그곳에는 촛불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으며 그녀의 책 상 위에 있는 커다란 수정 구슬을 예언자처럼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쏘는 듯한 재키의 시선이 두 사람을 차례로 스쳐간 뒤 잠시 수정 구슬에 모아졌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시선이 에디에게 옮겨왔다. - 수지 다이아란 사람을 알고 있나요? 재키가 물었다. - 네, 지금 같이 연극을 하고 있습니다. 모델이지만 연극을 몹시 좋아하는 수지 다이아는 지금 <투탕카문의 노 래>에서 주연 여배우로 활약하고 있었다. - 그녀를 사랑하고 있나요? - 사랑이라뇨?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습니다. - 하지만 당신은 수지 다이아와 결혼하게 될 거예요. - 예? 말도 안 돼요. 난 그녀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냥 얼굴이나 아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물론 매력이 넘치는 여자이긴 하지만 사랑하지는 않습 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여기 있는 신디 윌슨입니다. 에디는 항의라도 하듯이 음성을 높였다. - 세계적인 톱모델인 수지 다이아와 결혼을 한다? 내가? 싫지만은 않은 점괘였으나 에디는 터무니없는 점괘에 머리를 흔들었다. - 난 점괘에 나온 대로 당신의 미래에 대해 말할 뿐이에요. 믿고 안 믿 고는 당신의 판단에 따르는 거죠. 재키가 조용하게 대꾸하고는 시선을 신디에게로 옮겼다. - 당신은 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군요. 결혼도 생각하고 있구요. 하지만 그 결혼은 어려울 것 같아요. 흐릿한 조명 아래였지만 신디의 안색이 조금 변하는 것이 보였다. - 왜 그렇죠? 힘없는 신디의 음성이 물었다. - 그것이 당신의 운명이기 때문에 그래요.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두 사 람이 노력하면 다시 만날 수는 있을 거예요. 만약 그때 다시 만난다면 행 복하게 오래오래 살 거예요. - 그게 언제쯤이죠? 재키 스탠우드의 시선이 다시 수정 구슬로 옮겨졌다. - 20년쯤 뒤에. - 너무 긴 시간이에요. 재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 방법이 없을까요? 동양에서는 이런 경우에 어떤 대비책을 알려준다고 들었는데요. 재키가 조용하게 웃었다. - 운명에 대비할 순 없어요. 그런 건 대부분 사기예요. 이 남자를 당신 곁에 두고 싶으면 이 남자가 미국을 떠나지 못하게 해요. 꼭 떠나야 한다 면 두 사람이 같이 가야 해요. 이 남자는...... 재키는 잠시 말을 멈추고 에디를 쳐다보았다. - 대통령이 될 운명을 타고났어요. 에디는 순간, 가슴속에서 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게 정말 내 운명이란 말인가?' 에디가 아주 어릴 때부터,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 그의 아버지는 대통 령이 되는 태몽을 꾸고 자신을 낳았다는 말을 종종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도 술에 취한 아버지한테서 가끔 '대통령 나 리, 나중에 정말 대통령이 되면 나 좀 잘 봐줄 거죠?' 라는 말을 듣곤 했었 다. 신디의 놀란 얼굴이 에디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 미국 대통령이 되는 건가요? - 유감스럽게도 그건 점괘에 나오지 않아요. 하지만 미국이 아닐 것 같 은 생각이 드는군요. - 혹시 내가 연극 배우라서 그런 점괘가 나오는 게 아닐까요? 배우는 극중에서 대통령도 하고 수지 다이아 같은 톱모델과 결혼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지 않습니까? 에디가 이렇게 묻자 재키가 잠시 신디를 바라보았다. 신디의 슬퍼하는 표정을 읽은 재키는 조용하게 대꾸했다. - 그럴지도 모르죠. - 맞아요. 그렇죠? 내가 배우라서 그런 점괘가 나온 거지요? 인생은 연 극이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에디는 확답을 받으려는 듯이 물었으나 재키는 미소만 지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에디는 신디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 그만 갑시다. 처음부터 점괘에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잖소. 재키 스탠우드의 집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해변을 적시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두 사람은 점성술사의 말을 믿지 않기로 했지만 20세기 최고의 예언자로 꼽히는 그녀의 말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굵직한 예언들 은 벌써 수십 차례나 실현된 예가 있었던 것이다. 신디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 당신이 수지 다이아와 결혼하고 대통령이 된다는 건 기쁜 일이에요. 좋은 일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당신을 사랑하는 난 슬퍼요. 어쩔 줄 모르겠 어요. 처음에는 점성술사의 말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라 없는 내 자 신이 몹시 미워요. 그녀는 재키 스탠우드를 찾아간 것을 가슴 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 신디, 걱정 말아요. 대통령이 되고 수지 다이아의 남편이 된다는 건 연 극적 상황이라고 아까 얘기했잖소? 난 항상 당신 곁에 있을 거요. - 고마워요, 에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포옹을 하 고 키스했다. 낮 동안의 뜨거운 열기를 간직하고 있는 해변의 온도는 적당 했으며 모래사장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두 사람은 천천히 모래 위로 쓰러 져 서로를 애무했다. 그들은 태어날 때 그대로의 알몸으로 변해서 따스하면서도 부드러운 모 래 위를 굴러다니며 때로는 한없이 부드럽게, 때로는 싸움을 하듯이 서로 를 원했다. 그리고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야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서 별 이 떨어져 내리는 듯한 밤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었다. - 에디, 앞으로 혼자서 외국에 가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마세요. 고개를 든 신디가 에디의 땀에 젖은 가슴을 쓸며 반쯤 걱정이 담긴 음성 으로 말했다. - 그래요. 갈 일이 생기면 꼭 당신과 함께 가도록 하겠소. - 고마워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어요. 당신을 내 곁에 붙 잡아두는 것은 당신이 나보다 더 나은 수지 디이아와 결혼하는 것을 막는 것이고, 또 대통령이 되는 걸 막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말예요. - 그런 걱정은 말아요, 신디. 정 그렇게 걱정이 된다면 우리 내일 당장 결혼하는 게 어떻겠소? - 정말이에요? 괜찮겠어요? 수지 다이아와 대통령이 되는 걸 포기할 수 있겠어요? 몸을 일으킨 그녀가 확인하듯이 물었다. - 물론 괜찮소. - 좋아요. 그럼 우리 내일 당장 결혼해요. - 좋소.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결혼해서 운명이라는 걸 거부해버리는 거 요. 재키 스탠우드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자구. 두 사람은 굳은 약속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처럼 깔깔거리며 알몸 그대로 물 속을 향해 달려갔다. 이튿날, 아침 일찍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교회로 가서 목사 앞에 섰다. 하 객도 없고 예복도 입지 않고 올리는 간소한 결혼식이었지만 두 사람은 이 결혼식이 제발 무사히 끝나기만을 간절히 기원했다. 건장하고 쾌활해 보이는 젊은 목사는 두 사람을 번갈아 살펴보고는 식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 에디 패커, 당신은 신디 윌슨을 아내로 맞이하겠습니까? 목사가 그를 바라보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에디가 '네'! 하고 힘차게 대답 하려는 그 순간, 갑자기 젊은 목사가 가슴을 움켜쥐며 쓰러졌다. 목사는 단 상 아래 마룻바닥으로 굴러떨어진 채 두 손으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몹시 괴로워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현실이었다. - 어, 어서 병원, 병원으로! 목사가 얼굴이 벌겋게 충혈이 되어서 괴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 아, 알았어요. 당황한 에디는 재빨리 목사를 들쳐업고 밖으로 달려나가면서 그들의 결 혼식이 순탄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들은 결혼식 대신 병원에서 목사를 지켜보며 한숨을 내쉬어야 했고, 목사한테는 돌발성 심장발작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 첫 번째로 시도한 결혼식은 무산되고 말았다. 결혼식을 하기 위해서 그들이 다시 만난 것은 꼭 2주일 뒤였다. 센트럴 파크에서 만난 그들은 보트와 자전거를 타며 아이들처럼 즐긴 뒤에, 풀턴 마켓 부근에 있는 작은 교회로 차를 몰았다. 처음 시도했던 결혼식 때와는 달리 에디는 신디에게 줄 반지를 준비했고 신디는 눈부시게 하얀 웨딩 드레스가 담긴 종이가방을 가지고 있었다. 결 혼 증명서를 얻기 위한 결혼식이기는 하지만 여자라면 다 그렇듯이 신디 역시 웨딩 드레스를 입고 싶어했기 때문에 그녀가 15만 달러나 되는 거금 을 들여서 특별히 주문한 것이었다. 풀턴 마켓에 거의 다 왔을 무렵에 신디는 무언가 시커먼 것이 갑작스럽 게 다가오는 걸 느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직감하고 몸을 웅크렸 고, 에디는 반대편으로 핸들을 재빨리 꺽었다. 쿵! 하는 소리가 나고 차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순간적인 충격 때문에 잠 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그들이 눈을 떴을 때는 온통 생선 비린내가 진 동했다. - 어머, 내 웨딩 드레스! 정신을 차린 신디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웨딩 드레스를 썩어가는 생 선들이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차문 밖에는 풀턴 마켓에서 나오던 소형 생선 트럭이 보도 블록을 들이받고 엎어져 있었다. 그들은 지독한 냄새 때문에 정신을 차리자마자 밖으로 뛰어나와서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다친 데는 없었으나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 다. 그들은 풀턴 마켓 앞 냄새나는 콘크리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 후, 신디가 슬픔에 잠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 에디, 아무래도 내 욕심이 지나쳤던 것 같아요. 이제 더 이상 결혼하자 고 하지 않을께요. 에디는 신디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 신디, 기운을 내요. 꼭 좋은 방법이 있을 거요. - 아녜요, 당신은 대통령이 되고 수지 다이아와 결혼할 운명이에요. 우리 는 그냥 친구로 지내기로 해요. 그러다 20년쯤 뒤에 다시 만나서 행복하게 잘살면 되잖아요? 신디의 크고 아름다운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 신디........ 에디는 신디를 꼭 안아주며 그 눈물에 키스했다. 그러면서 이 눈물이 이 별의 눈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꼭 8개월 전의 일이 었다. 신디는 에디와의 짧은 사랑을 회상하는 듯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 다. 사람들이 당신의 재능을 너무 몰라보는 것 같아요. 하지만 당신은 꼭 유 명한 배우가 될 거예요. 난 그걸 믿고 있어요. - 고맙소. - 혹시 돈이 필요하다면 아무런 조건 없이 줄 수 있어요. 신디가 그의 기분을 고려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녀는 에디가 어려운 형편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심으로 그를 도와주고 싶었 다. - 돈이라구? 에디는 이렇게 반문하면서 '그래, 우선 급한 대로 3만 달러만 줘!' 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뱅글거렸으나 꾹 참았다. 부자인 신디에게 3만 달러는 아 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그에게 잇어서 3만 달러는 생명과도 바꿀 만한 액 수였다. - 지금 당장 수표를 끊어줄 수도 있어요. 10만 달러쯤 드릴까요? 아니면 백만 달러? 그 이상도 드릴 수 있어요. 그녀는 핸드백에서 수표책을 꺼내들며 20년 후의 남편한테는 아낌없이 돈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에디는 침을 꿀꺽 삼켰다. 눈 한번 딱 감고 고개만 끄덕이면 백만 달러 란 엄청난 돈이 그의 수중에 들어온다. 그 돈이면 그의 인생이 당장에 장 밋빛으로 변한다. 그는 지금 어머니 병원비와 싸구려 아파트의 임대료도 석 달이나 밀려 있는 처지였다. 아아, 이 여자 신디는 정말 괜찮고 사랑스런 여자인데......수지 다이아만 아니라면, 그 터무니없는 대통령만 아니라면! 에디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수 없는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머 리를 저었다. - 아냐, 신디. 좀 어렵기는 하지만 지낼 만해. 도와주고 싶으면 20년 후 에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그때 도와줘도 늦지 않을 거야. - 알았어요. 신디는 슬픔에 잠긴 음성으로 대답하고는 에디의 어깨에 머리를 내려놓 았다. 그리고 갑자기 에디의 얼굴에 두 손을 대더니 감정이 복받치는 듯한 격정적인 키스를 퍼부었다. - 에디, 사랑해요, 사랑해. - 에디, 그만! 제발 그만해! 위험해! 에디는 브레이크를 밟으며 어두컴컴한 골목으로 핸들을 꺾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번에는 그의 몸 구석구석을 더듬었다. - 참을 수 없어요! 말리지 말아요! 에디는 끼익! 하는 소리가 나도록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커다란 쓰레기통 을 들이받고 말았다. 에디는 차를 세우고 신디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둘 다 너무 서두 르고 있었기 때문에 입술과 이가 제멋대로 부딪쳤다. 신디가 레버를 당겨 서 조수석을 뒤로 넘기자 에디는 그녀의 스커트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매끄러우면서도 탄탄한 허벅지와 그 안쪽에 숨어 있는 팬티가 만져졌다. 손바닥 가득 부드러운 음모를 만지자 그녀는 한쪽 무릎을 세웠다. 그녀의 음모가 금색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 사랑해요, 에디! 사랑해! 그녀는 갈증에 허덕이는 것처럼 보채며 자신의 크고 탄력 있는 젖가슴 쪽으로 에디를 당겨 안았다. 그녀의 젖가슴은 여전히 풍만했으며 돌기는 금방 딱딱하게 솟아 올라왔 다. 에디는 그 돌기를 입안에 집어넣고 굴렸다. 신디가 신음 소리와 함께 '어서요!' 하고 재촉했다. 신디의 손이 미끄러져 내려오더니 그의 바지 벨트를 풀러내고 다리를 들 어서 바지와 팬티를 한꺼번에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이윽고 그는 신디의 손바닥만한 팬티를 벗겨내고 그녀 위로 올라갔다. 그의 그것은 신디의 가늘고 긴 손가락에 잡혀 있다가 그녀의 몸 속으로 서 서히 밀고 들어갔다. 신디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견디는 것 같은 신음 소 리를 내면서 그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그녀의 열기가 그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전해져오는 것 같았다. 그는 뜨 거운 혀로 그녀의 귀와 귓밥, 그리고 목을 차례로 핥아주었다. 그녀는 엉덩이를 세차게 움직이면서 손가락을 세워서 그의 허리를 끌어 안으며 매달렸다. 그 바람에 신디의 손톱이 그의 등을 파고들었다. 그래도 에디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온몸에 땀을 흘리면서 움직였다. 흘러내리는 땀이 역시 땀으로 번들거리는 그녀의 얼굴과 가슴에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나는 신디의 미끈한 다리 한쪽은 계기반에 걸쳐 져 있고 다른 한쪽 다리는 창문 쪽으로 뻗어 있었다. 그 자세가 불편했던 그녀는 에디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이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들 은 마지막을 위해서 힘차게 움직였다. 이윽고 두 사람은 신음 소리와 함께 온몸을 부르르 떨며 서로를 끌어안 았다. 그때, 갑자기 플래시 불빛이 차안을 훑었다 2 탈출 지그시 눈을 감고 격렬한 여운을 음미하던 두 사람은 처음에는 플래시 불빛이 자신들을 비추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다 뭔가 이상해서 눈을 뜨 자 불빛과 함께 금속 빛을 발하는 총구가 보였다. 신디가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옷으로 몸을 가리자 플래시 불빛은 자비라 도 베풀 듯이 잠시 사라졌다. 하지만 총구는 여전히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 경찰이다. 빨리 옷을 입어라. 어둠 속에서 사내의 거친 음성이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창밖으로 뉴 욕 경찰 제복이 희미하게 보였다. - 거, 경찰이라구요? 경찰이 무슨 일이죠? 당황한 신디가 겁먹은 음성으로 물었다. - 시끄러! 라이브 쇼는 끝났으니까 어서 옷을 입는 게 좋을 거야. - 몸매 하나는 죽이던데 좀더 공연하게 놔둘 걸...... 누군가 아쉽다는 듯이 킥킥거리며 떠들어댔다. 하지만 신디가 옷도 다 입기 전에 차문이 벌컥 열리며 경찰관이 얼굴을 들이밀고는 두 사람을 무지막지하게 차 밖으로 끄집어냈다. 한 경찰관이 차안에서 에디의 작은 가방을 끄집어내어 가방을 열었다. 에디는 순간적으로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가방은 나이트 클럽의 쟈니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받은 거라 그 안에 뭐가 들었는 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정상적인 물건은 아닐 것이었다. 경찰관이 가방 속에서 신문지에 싼 것을 꺼내어 그것을 풀었다. 그 안에 서 나온 것은 작은 비닐 봉지에 담긴 하얀 분말이었다. 봉지를 찢어서 내 용물을 조금 맛본 경찰관이 회심의 미소를 떠올렸다. 에디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변했다. 막연한 두려움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 마약이야, 당장 체포해! 두 사람이 뭐라고 변명하거나 항의할 틈도 없이 수갑을 채운 경찰관들은 그들을 순찰차에 태워 19관구 경찰서로 끌고 갔다. 자신을 제리 시포라고 밝힌 사복 경관이 먼저 에디의 신상을 일일이 물 어 기록하고 나서 신디에게로 얼굴을 돌리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 이름이 뭐요? 댄서 아가씨. 몸매가 아주 죽이는데. 차 안에서 그짓을 하다가 끌려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시포는 빈정거렸다. - 고문 변호사에게 전화해야겠어요. 변호사가 오기 전에는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어요. 그리고 당신의 무례한 말투도 기억해 두겠어요. 신디가 단호하게 말하자 시포는 의외라는 듯이 잠시 멈칫하다가 전화기 를 밀어주었다. 마약 소지자와 라이브 쇼를 한 여자였지만 제법 품위가 있 어 보였다. 그러나 시포는 다시 이죽거렸다. - 당연히 전화하셔야겠지. 자, 마음대로 걸어요. 아가씨, 영국 여왕님께라 도 전화할 생각인 모양인데 여왕님께서 바쁘셔서 도와줄 수 있을까? 그렇 지 않아도 아들, 며느리 때문에 걱정이 많으실 텐데. - 빈정거리지 말아요. 당신 지금 큰 실수하고 있는 거예요. 신디는 억양으로 봐서 아일랜드계 경찰관이 분명한 시포에게 차갑게 쏘 아주고는 고개를 돌렸다. 시포는 계속 빈정거렸다. - 아가씨, 내가 실수하고 있다고? 난 아가씨와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아 가씨 가슴도 더듬지 않았고 아가씨가 이자와 그짓 하는걸 훔쳐보지도 않았 다구. 신디는 쓰레기처럼 더러운 입을 가진 작자와 더 이상 얘기하기 싫어서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확하게 15분이 지난 뒤에 한 손에 가방을 든 잘생긴 중년 사내가 들어서자 그녀는 시포를 노려보았다. 시포는 그 중년 사내를 보고는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중년 사내는 바로 뉴욕에서 가장 유능한 변호사 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 라이얼 헤리스였던 것이다. 잠시 신디와 이야기를 나눈 변호사가 에디에게 다가오더니 물었다. - 윌슨 양께 패커 씨에 관한 이야기는 대충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마약이 든 가방을 운반하게 된 겁니까? 그것도 고순도의 필로폰 5백 그램 씩이나 말입니다. 에디는 얼굴을 찡그리며 이마를 덮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말했다. - 심부름을 한 것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가방을 주면서 나이트 클럽 의 쟈니에게 전해달라고 해서 그것을 전하려고 하다가 체포된 겁니다. 에디는 사실대로 말했다. - 윌슨 양은 패커 씨가 연극 배우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 그렇습니다. - 마약 운반을 왜 하신 겁니까? - 빚이 좀 있는데 못 갚으니까 그쪽에서 이 일을 제안한 겁니다. - 빚이 얼마나 됩니까? - 8개월쯤 전에 3만 달러를 빌려 썼습니다. 어머니 병원비 때문에.......심 장 수술을 하셨죠. 지금도 병원에 계십니다. 에디는 망설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 그의 모친은 수술 후유증 때문에 지속적인 치료를 받이야 하는 상태였다. - 그렇군요. 상상이 됩니다. 처음부터 패커 씨가 마피아의 돈을 쓴 게 큰 잘못이었습니다. 8개월 전에 3만 달러를 빌렸다면 지금쯤은 10만 달러 정 도로 빚이 불어나 있을 텐데요? 에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아마 그럴 겁니다. - 윌슨양께 도움을 청해보셨습니까? 에디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자 라이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포 경관을 향해 다가갔다.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시포가 얼른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 당신이 신디 윌슨양한테 성희롱을 했다고 하는데 맞습니까? 그럼, 저 여자가 그 신디 윌슨? 시포는 이렇게 반문하면서 신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채 3초도 되지 않아서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아아, 이게 무슨 악몽인가? 미국 최고의 신부감이자 억만장자인 그 유명한 신디 윌슨을 몰라봤던 것 이다. - 시포 경관, 당신을 성희롱죄로 고소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마 당신 은 해직을 당하고 파산하게 될 겁니다. 라이얼이 협박조로 말하자 멍하니 앉아 있던 시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 다. 건드려도 너무 잘못 건드렸던 것이다. 여기서 우물쭈물 거리면 변호사 의 말대로 목이 달아난 채 길거리로 나 앉게 된다. 거리를 헤매는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스쳐갔다. 시포는 신디에게 다가가서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녀에게 있을 것 같은 착한 마음에 호소해 보는 길밖에 없을 것 같아서였다. 차갑던 그녀의 표정이 풀어졌다. - 좋아요, 용서해 주겠어요. 하지만 다음부터는 주의하는게 좋을 거예요.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구에게라도 말이에요. 당신의 태도는 다른 경찰관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거예요. - 명심하겠습니다. 시포는 다시 한번 사과를 하고는 자리로 돌아와서 에디한테 질문을 몇 가지 했다. 시포의 주눅든 얼굴을 지켜보던 에디의 시선은 그 뒤쪽 벽에 붙어있는 수사본부 회람에 고정되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에디가 존경하는 배우인 마틴 그로스의 실종에 관한 회 람이었다. 뉴욕 경찰국 보고서 제 2213호 사건: 배우 마틴 그로스 실종. 신상: 남자. 57세. 185센티미터. 81킬로그램. 푸른 눈. 특이 사항 없슴. 사건 경위: 1997년 10월 22일. 22시경 공연 후 귀가 도중 실종. 재산 변 동 없음. 원한 관계없음. 연락처: 맨해튼 경찰국장 존 치버. - 패커 씨, 패커 씨. 시포가 몇 번을 참을성 있게 부르자 그제서야 에디가 그를 바라보았다. -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죠? - 패커 씨, 협조해 주셔야 합니다. 지금 패커 씨는 마약 소지 혐의로 체 포된 상태입니다. 성질이 급한 시포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겨우 억누르고 말했다. 그는 이 제까지 이렇게 수줍은 아가씨 같은 표정과 말투로 피의자를 신문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악몽이었다. - 제기랄, 나도 이제 은퇴할 때가 된 것 같아! - 죄송합니다. 벽에 붙은 회람을 읽다가 그만........그런데 마틴 그로스 씨 를 아직 찾지 못했나요? 시포는 신음과 함께 한숨을 쉬었다. - 그가 유명 인사라서 회람을 붙여 놓기는 했지만 우리는 사실 포기한 상태입니다. - 단서가 전혀 없나요? - 회람에 담긴 내용 외에는 전혀 없습니다. - 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 우리도 그걸 알고 싶은 겁니다. 마틴 그로스는 무명 배우인 에디를 거의 유일하게 챙겨주던 사람이었다. 지난번 연극 <투탕가문의 노래>에 단역으로나마 출연 할 수 있었던 것도 마틴이 챙겨준 덕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틈이 나는 대로 연기 지도까지 해 주었기 때문에 에디는 마틴을 은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틴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바람 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마틴의 실종을 두고 일부 매스컴에서는 우울증에 걸려 있던 그가 자살했 을 가능성이 높다고 떠들어댔지만 에디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마틴은 분명히 살아 있을 것이다. 그는 쉽게 자기 자신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오래 전에 마틴과 했던 대화가 에디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 마틴, 항상 이렇게 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당신을 도울 일이 있 다면 힘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그러자 농담을 좋아하는 마틴이 웃으며 말했다. - 생명이 위험한 경우라도 말인가? - 물론입니다. 그래도 당연히 도와야죠. - 하하하! 이거 정말 마음이 든든한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네 한테 아주 큰 사례를 하겠네. 하하하,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하네. 마틴과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하자 어떻게든 그를 찾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에디의 생각일 뿐이었다. 미국 전역에 퍼져있는 엄 청난 수의 경찰관들과 유능한 FBI 요원들도 찾아내지 못한 마틴을 그가 무슨 수로 찾아낸단 말인가? 시포는 다시 질문을 시작했으나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에디는 이내 유치장으로 옮겨졌다가 이튿날 오전 9시에 신디가 내준 만 달러의 보석금 덕분으로 19관구 경찰서를 벗어날 수 있었다. 경찰서 앞에 서 신디가 기다리고 있는 걸 본 에디는 경찰서 뒷문으로 빠져 나왔다. 그는 신디를 볼 면목이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 신디에게 신세지지 않으 려면 그녀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마피아의 마약을 5백 그램이나 경찰에 빼앗겼으며, 또 나이 트 클럽의 쟈니라는 자에 대해 시포 경관에게 말했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처지였다. 꾸물거리다가는 마피아한테 잡혀서 '콘크 리트 팬티'를 입고 바닷속에 처박히는 신세가 될 것만 같았다. 그는 어딘가 로든 도망을 가야 했다. 그는 매니저인 존슨을 떠올렸다. 무명 배우였지만 다른 배우들처럼 매니 저는 있었다. 그는 먼저 존슨의 사무실로 연락도 없이 무작정 찾아갔다. 안면이 있는 여비서 뒤에 있는 존슨의 방문은 그를 거절이라도 하는 듯이 굳게 닫혀 있 었다. - 존슨 씨, 계신가요? 제가 찾아왔다고 전해주시겠습니까? 만약 안 만나 주시면 내일까지라도 이곳에 앉아서 기다릴 겁니다. 인기 있는 유명 배우들을 관리하기에도 바쁜 존슨은 이런 방식이 아니면 절대 만나주지 않는 다는걸 잘 아는 에디는 반은 협박조로 말했다. - 알았어요. 존슨 씨께 잘 말씀드려 볼께요.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매력적인 여비서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 고마워요. 제가 나중에 근사한 식사 한번 대접할게요. - 그러세요. 에디는 정확하게 두 시간을 소파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은 뒤에야 존슨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에디, 잘 있었나? 그래, 무슨 일인가? 존슨이 매니저다운 말투로 말했다. - 일자리가 필요합니다. 배우한테 배역을 찾아주는 게 매니저들이 하는 일 아닙니까? 존슨은 몸을 뒤로 젖히고는 에디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 좋아, 에디. 나도 자네한테 배역을 찾아주고 싶지만 자네는 그리 잘 팔 리는 배우가 아니야. - 전 어떻게든 꼭 일을 해야 합니다. 집세도, 어머니 병원비도 석 달이나 밀려 있어요. 어떻게든 이번에는 꼭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에디는 한숨을 내 쉬며 처량하게 말했다. 그러자 잠시 궁리를 하던 존슨 이 말했다. - 일이 하나 있기는 한데...... - 뭡니까? 말해 보세요. - 뮤지컬<마이 페어 레이디>를 공연하는 극단이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 국으로 떠나야 하는데 아직 단역 배우 하나를 못 구했어. 그곳에 가면 최 소한 6주 정도는 머물러야 할거야. 어때, 한 번 해보겠어? - 아, 그래요? 당연히 해야죠. 그는 즉시 대답했다. 일이 잘되어가고 있었다. 생명의 위험을 느껴야 하 는 미국에 잇는 것보다는 외국에 나가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설사 그곳 이 독재정치로 유명한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국이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 만 만 달러의 보석금을 지불한 상태여서 출국이 될지 잘 알 수가 없었다. - 아주 급했던 모양이군 그래. 출연료는 주당 천 달러일세. 주당 천 달러면 그렇게 섭섭한 액수는 아니었다. - 언제 떠나죠? - 오늘 오후 5시 비행기야. 가려면 지금 당장 짐을 꾸려야 될거야. 일이 착착 잘 진행되고 있었다. 어쩐지 이번 여행에서는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점성술사 재키 스탠우드가 한 이야기가 새삼 그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녀는 에디가 미국이 아닌 다른 곳의 대통령이 될 거라고 했었다. 에디는 점성술사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으 로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 인생은 순식간에 황금빛으로 변하는거야! 에디는 슬그머니 미소를 짓다가 경찰서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신디를 떠올렸다. - 신디.......미안해. 그는 신디를 사랑하고 있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라는 걸 잘 알고 있 었고, 그녀도 자신의 이런 마음을 이해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신디, 점성술사 말대로 20년 후에 다시 만나면 그때는 신디를 행 복하게 해줄게!' 진심으로 신디를 사랑하고 있는 에디는 저린 가슴을 안고 공항으로 갔 다. 그리고 그곳의 스낵바에서 햄버거와 콜라로 식사를 한 후에, 어머니한 테 전화를 걸었다. 입원비가 석 달이나 밀려있는 처지여서 그런지 한참을 기다린 다음에 연 결이 되었다. 에디는 어머니의 입원실이 냄새나는 화장실로 옮겨졌다고 해 도 할말이 없었다. 사실 병원 측에서 쫓아내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 에디냐? 잘 지내고 있는 거냐? 심장 수술 이후로 더욱 탁해진 음성이 들려왔다. - 예, 저예요. 어머니도 잘 지내고 계시죠? - 내가 잘 지내고 있을 것 같니? 넌 매일매일을 즐기며 사니까 잘 모르 겠지만 난 하루 종일 냄새나는 침대에 누워서 한숨만 내 쉬고 있다. 수술 후에 성격이 약간 이상해진 어머니는 에디한테 시비조로 말했다. - 죄송해요. 자주 찾아 뵙지도 못하고. -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길래 병원에 한번 다녀갈 시간도 없는 거냐? 에 디, 설마 어떤 년한테 푹 빠져서 에미를 아예 잊은 건 아니겠지? - 그럴 리가 있겠어요? 제가 좀 바빠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주세요. - 그래 그래. 사랑하는 에디야 언제 올 거니? 너 내가 쿠키 좋아하는 거 알고 있지? 연갈색으로 적당히 구워낸 쿠키 말이다. - 그럼요. 나중에 쿠키 사 가지고 찾아뵐 테니까 건강하게 잘 계세요. 에디는 대사도 몇 마디 없는 단역을 맡아서 외국에 간다는 말은 하지 않 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 옆에 있는 간이 의자에 앉은 에디는 어머니 생 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보죠? 에디 옆에 앉아 있던 건장하고 잘생긴 젊은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 아, 예...... - 죄송합니다만, 본의 아니게 전화 내용을 들었습니다. 아, 참 이거 초면 에 제가 괜한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아, 아닙니다. 편찮으신 어머니를 병원에 두고 떠나자니 마음이 너무 아파서 그만........ - 네, 어디 멀리 가시는 모양이죠? -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국에 갑니다. 전 배우인데, 그곳에서 뮤지컬 공 연을 하거든요. - 아, 뮤지컬 배우시군요? 반갑습니다. 뮤지컬이라면 저도 아주 좋아하거 든요. 그런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 아, 에디 패커입니다. 이번에 공연하는 뮤지컬 제목은<마이페어 레이 디>입니다. 시간이 되면 꼭 한번 오십시오. - 그러죠, 저는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국 육군 중위 마이크 머서입니다. 이번에 미국에서 휴가를 즐기고 귀국하는 길이죠. - 아, 군인이셨군요? - 그렇습니다. 그런데 골드다이아코스트에는 처음 가시는 겁니까? - 예, 그렇죠. 실은 그래서 걱정입니다. 그 나라 군인 앞에서 이런 이야 기를 하는 것은 실례겠지만 골드다이아코스트가 유명한 독재국가라서....... - 독재국가라......그렇죠. 청년은 우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 저도 어쩔 수 없는 나라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에디는 마이크 머서 중위가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머서 중위가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내밀면서 일어섰다. 출국 절차가 시작되고 있었다. - 제 집이 존스톤시에 있거든요. 꼭 한번 연락 주십시오. 제가 한 잔 사 겠습니다. - 고맙습니다. 머서 중위와 악수를 나누고 헤어진 에디는 낯익은 동료 배우들 틈에 섞 여서 여권과 비행기표를 창구에 내밀었다. 에디를 한번 흘긋 본 뒤에 여권을 살펴본 담당 직원은 멈칫했다. 보석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모니터에 '출굴 가능-출국 정지시키지 말 것' 이라는 문구가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문 일이어서 담당 직원 은 다시 한번 에디를 바라보았다. -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에디는 목이 탔지만 태연하게 물었다. - 아닙니다. 일상적인 확인입니다. 담당 직원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혹시 잘못된 게 아닌가 해서 자료 입 력을 다시 했다. 하지만 역시 '출국 가능-출국 정지시키지 말 것' 이라는 붉은 글씨가 나타났다. 잠시 모니터를 노려보던 담당 직원은 이런 일 때문에 쓸데없이 머리를 썩일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그와는 전혀 상관이 없 는 저 위의 어느 은밀한 곳에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잘못 끼여들게 되면 골치만 아파지는 것이다. 담당은 에디의 여권에 스탬프를 탁! 소리가 나도록 찍어주었다. 보석금 문제 때문에 가슴을 졸였던 에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골드다 이아코스트 에어라인 747-200b에 탑승했다. 에디의 좌석은 기체 뒤쪽인 63J였다. 유명한 배우들은 1등석에 앉았지만 무명 배우인 에디는 기체의 소음이 심한 3등석에 배당되었다. 하지만 이런 게 인생이란 것 정도는 알고 있는 에디는 조금도 불만이 없었다. 언젠가는 그도 널찍한 1등석에 앉아서 최고급 서비스를 받으며 여행할 날이 있을 거 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바로 옆좌석에 매력적인 젊은 여자가 방금 앉았기 때문에 좌석과는 상관없이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청바지에 연갈색 체크 무늬 남방을 걸친 수수한 차림에 어깨에는 카메라 가방처럼 보이는 것을 메고 있었다. 플로리다의 햇볕에 그은 것 같 은 초콜릿빛 피부는 섹시하고 건강해 보였으며 어깨에서 살랑거리는 굵은 웨이브의 금발도 보기 좋았다. 게다가 자리에 앉기 위해서 에디의 눈앞으 로 지나간 엉덩이는 보기 드물게 동그랗고 탄탄해서 남자들로 하여금 오금 을 저리게 할만큼 매력적이었다. 3 기내 섹스 에디가 먼저 인사를 하자 그녀는 <밀워키 저널>의 기자 재닛 애시포드 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 너무 아름다우셔서 기자가 아니라 배우를 하셔야겠는데요. - 그래요? 칭찬으로 들어도 되겠죠? 언젠가 어느 신문에선가 당신에 대 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 거 같아요.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빌리지 보이스>지에서 봤을 거예요. 맞죠? 그녀가 연푸른색으로 빛나는 이지적인 큰 눈을 깜박이면서 말했다. 하얀 치아가 드러나는 미소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 하, 이거참..... 그런 적이 있죠. 아마 4년 전인가 봅니다. <런던에 가다 >라는 연극에서 단역을 맡았었는데 담당 기자가 잘 보았는지 몇 줄 기사 를 써줬었죠. 어쨌든 무명 단역 배우를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디는 그녀의 놀라운 기억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쑥 스러워서 헛기침을 했다. - 골드다이아코스트에는 취재하러 가시는 건가요? - 네, 관광산업과 정치에 대한 기사를 다루어볼 생각예요. 골드다이아코 스트는 독재국가이긴 하지만 세계적인 관광도시이기 때문에 기삿거리가 많 죠. 현재 계획으로는 한두 달 정도 머물면서 취재도 하고 휴가도 즐길 거 예요. - 아, 휴가 좋죠. 특히 골드다이아코스트 같은 멋진 관광지에서의 휴가는 누구나 꿈꾸는 거죠. 관광산업에 대한 기사는 어떤 내용일지 대충 짐작이 가는데 정치 기사는 어떤 내용일지 잘 모르겠군요. 재닛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추어서 말했다. - 잔혹한 몽상가이자 권력의 화신인 지중해의 거부 젤린도 보르딘 대통 령에 대해서 쓰려고 해요. 부자나라의 독재자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사람들 이 많거든요. - 그럼 직접 보르딘 대통령을 만나게 되나요? - 취재를 하자면 그래야겠죠. 그런데 패커 씨는 골드다이아코스트에는 처음 가시는 건가요? - 네, 처음입니다.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나라여서 기대가 큽니다. 관광 할 시간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새삼 에디를 지켜보며 다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 패커 씨, 에디라고 불러도 될까요? - 그럼요. 그렇게 불러주시면 오히려 기쁘겠습니다. - 좋아요, 에디. 그럼 저도 재닛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녀는 달콤한 미소와 함께 속삭이듯 말했다. - 그, 그러죠, 재닛. 그녀의 미소에 마음이 흔들린 그는 말까지 더듬었다. '이 여자가 지금 유혹하는 걸까? 무명 배우인 나를?' - 에디, 혹시 누군가를 많이 닮았다는 얘기 들은 적 없어요? - 제가요? 처음 듣는 소리인데요? 제가 누군가를 많이 닮았습니까? 에디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 누구를 닮았는지 잘 기억이 안 나네요. 나중에 생각나면 알려 드릴게 요. - 누군지 궁금한데요. - 그보다 에디... 그녀가 그의 귀에 후, 하고 뜨거운 입김을 뿜어내면서 말했다. - 혹시 기내 섹스란 말 들어보셨어요? - 처, 처음 듣는데요. 당황한 에디는 얼굴을 붉혔다. - 우리 한번 해볼래요? - 서, 설마 여기서 하자는 건 아니겠죠? 에디는 주위에 있는 승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 물론이에요. 화장실이 있잖아요.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릴 테니까 와서 문을 다섯 번, 두 번 연속으로 두드리세요. 알았죠? 아주 스릴 있을 것 같 지 않아요? 아아..... 에디의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재닛은 그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한쪽 눈 을 찡긋하고는 뒤에 있는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 이런 걸 행운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이건 좀....... 에디는 머릿속으로는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전 혀 망설이지 않았다. 건강한 젊은 남성인 그의 몸은 너무나 매력적인 여성 에게 뜨겁게 반응하고 있었다. 어서 화장실로 달려가서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식히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그는 주변의 승객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만 같아서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일어섰다. 화장실 앞으로 다가가서 그녀가 시킨 대로 문을 두드 렸다. 문손잡이에 써 있는 글씨가 열림으로 바뀌었다. 그는 재빨리 문을 열 고 안으로 들어갔다. 비좁은 화장실 안이라 그가 들어서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딱 붙어버렸 다. 그녀의 달콤한 향내와 매혹적인 체취가 코에 와 닿았다. - 아아......에디, 어서 안아줘요......내 몸은 너무 뜨거워서 폭발래 버릴 것 만 같아요. 그녀의 입김이 그의 귓가에서 맴돌더니 곧장 입으로 다가와 숨이 막힐 듯한 키스를 퍼부었다. - 재닛, 천천히, 천천히....... 에디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가 더 서두르고 있어서 그녀의 연갈색 체크 무늬 남방의 단추를 잘 벗겨낼 수가 없었다. 이런 일이 처음 이라 첫 경험을 하는 사내아이처럼 몹시 흥분하고 있었다. 남방을 벗겨내자 커다란 젖가슴을 가리고 있는 여름용 브래지어가 드러 났다. 브래지어를 끌어내리고 허리를 구부려서 팽팽하게 솟아오른 젖가슴 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러자 재닛은 나른한 신음 소리를 내면서 청바지를 엉덩이 아래로 끌어내리고 뚜껑을 덮은 변기 위에 앉아 자세를 낮춰주었 다. 그리고 다리를 들어서 청바지를 벗어버렸다. 하얗고 미끈한 그녀의 다 리 한쪽은 세면기 위에 얹혀졌고 다른 한쪽 다리는 온몸으로 번지는 쾌감 때문에 발뒤꿈치를 들고 힘을 주었다. 에디는 자그마한 돌기를 입안에 넣고 굴리면서 다른 한 손으로 허벅지 사이를 가리고 있는 손바닥만한 팬티 속으로 집어넣었다. 에디가 그녀의 음모를 부드럽게 만지자 재닛은 신음소리와 함께 몸을 떨었다. 그녀는 꿈 틀거리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마침내 그녀의 손이 움직여 그의 바지 벨트를 풀더니 팬티까지 한꺼번에 벗겨냈다. - 어서, 에디...... 어서요! 갈증난 사람처럼 헐떡이는 그녀를 보자 에디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 를 번쩍 안아들은 그는 자세를 바꾸었다. 자동차에서 할 때 주로 이용하는 소로 마주앉는 자세였다. 그녀의 손이 내려오더니 부풀어 오른 에디의 남성을 꽉 쥐었다가 부드럽 게 쓰다듬었다. 그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두 손으로 동그란 엉덩이 위에 있는 가는 허리를 안자 그녀가 몸을 움직였다. 재닛의 허리는 마치 살이 있는 별개의 생물체처럼 꿈틀거렸다. 이윽고 에디의 남성이 그녀의 몸 속 깊은 곳으로 서서히 밀고 들어갔다. - 에디, 에디.....좋아요, 에디! 재닛이 신음을 토해내면서 그의 어깨에 두 손을 얹고 헐떡였다. 이미 땀 으로 번들거리는 그녀의 몸을 힘껏 안으며 그는 열심히 움직였다.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두 사람은 잠시 멈칫했으나 대답은 하지 않고 운동을 계속했다. 그러자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스튜어디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 손님, 손님, 지금 비행기가 태풍권을 지나고 있습니다. 어서 좌석으로 돌아가셔서 안전벨트를 매주시기 바랍니다. - 아, 알았어요. 재닛이 억눌린 것 같은 음성으로 헐떡이면서 겨우 대답했다. 아닌게아니 라 기체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몸이 좌우로 쏠렸지만 그들 은 그런 움직임이 전혀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주는 색다른 자극 때 문에 온몸을 떨었다. 그들은 거대한 비행기의 진동을 전신으로 느끼면서, 비행기의 풍만한 육체와 섹스를 하는 듯한 느낌을 가졌다. - 아아! 에디, 태풍이래요. 태풍......좋죠? - 좋아, 재닛. 정말 대단해! 대단해! 에디로서는 처음 느껴보는 엄청난 쾌감이었다. 이때, 재닛이 가늘게 눈을 치켜 뜨고 한쪽 손으로 벗어놓은 청바지 주머 니를 뒤지더니 그 속에서 작은 주사기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주사기 와 비슷한 형태로 되어 있었지만 의료용 주사기처럼 단순한 물건은 아니었 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그 주사기를 손에 든 그녀는 이를 지그시 깨물었 다. 전신으로 번져오는 쾌감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실수할 것 같아서 였다. 그녀 역시 그간 느껴보지 못한 쾌감 때문에 참을 수가 없을 정도였 다. 그녀는 에디, 에디! 하고 부르면서 그의 왼쪽 엉덩이에 주사기를 대고 버튼을 살짝 눌렀다. 피슉! 하는 압축 가스 분출음이 미세하게 나면서 순간적으로 주사기 속 에 든 지름 2밀리리터, 길이 4밀리미터의 트랜지스터 부품 같은 원통형 물 건이 압력에 의해 피부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하지만 에디는 이제 막 절 정을 향해 달리고 있는 쾌감 때문에 엉덩이 쪽의 통증 같은 것은 오래 느 낄 수 없었다. 재닛은 주사기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 고개를 숙여서 에디의 왼쪽 엉 덩이 부분을 살펴보았다. 이물질은 얇은 피부 막 속에 갖혀 있어서 자세히 들여다보아야만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안전하게 박혀 있었다. 만족할 만한 상태였다. 이제는 에디와 전력을 다해서 사랑을 하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그녀도 기내 섹스는 처음인데다가 그 강렬한 자극 때문에 여기에서 섹스를 중단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게다가 에디는 지칠 줄 모 르는 힘을 가진 남자였다. 그녀는 더욱 격렬하게 움직이며 절정을 향해서 질주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서로를 세차게 끌어안고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듯 몸을 떨었다. - 아, 아....... 재닛은 이렇게 신음소리를 내면서 에디의 어깨를 물고 꽉 끌어안았다. 다시 밖에서 '손님, 손님. 괜찮으신가요?' 하면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아 까 그 스튜어디스의 음성이었다. 밖에서 신음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가쁜 호흡 때문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대신 그들은 뜨거운 숨을 몰아쉬면서 나른한 쾌감 을 즐겼다. 먼저 재닛이 화장실을 나가고 잠시 기다렸다가 에디가 화장실을 나갔다. 그러자 스튜어디스가 뭔가 눈치를 챘는지 이상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에디는 스튜어디스한테 살짝 윙크를 하고 좌석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재닛 과 에디 두 사람은 곧 피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에디는 잠결에 한두 번 왼쪽 엉덩이에 박힌 이물질 때문에 통증을 느끼 고 손으로 쓰다듬기는 했으나 곧 잊어버렸다. 4 젤린도 보르딘 1945년 4월 13일은 루치아노 보르딘에게 있어서는 지상 최고의 날이었 다. 4월 13일 오전 9시 30분에 골드다이아코스트의 수도인 존스톤에서 그 의 아들이 태어난 것이었다. - 하하! 이놈이 내 아들이야, 아들! 루치아노는 깊은 잠에 빠져든 아이를 안고서 신기한 듯이 자꾸 너털웃음 소리를 냈다. 그는 자신이 한 여자의 남편이 되거나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인생이란 것이 그렇듯이 어느 날 갑자기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만 것이었다. 그것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쓰레기더미에서 생명의 새싹이 피어난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신기하기만 했다. 그는 스스로를 구제 불능의 악취나는 쓰레기라고 여기면서도 그곳에서 헤어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평화롭게 잠 이 든 아기를 내려다보면서도 신기하다는 것 외에 다른 감정은 없었다. 아홉 살 때 첫 번째 살인을 해서 감화원에 수감된 것을 시작으로 서른세 살이 된 지금까지 감별소 수감이 7회, 교도소 수감이 5회인 루치아노는 그 간 다섯 건의 살인을 저질렀으며 그의 총에 맞아죽은 사람은 모두 일곱 명 이나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거리를 활보하고 또 신기한 눈으로 아기까지 볼 수 있는 건 미성년자 법 덕택이었다.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국의 법은 살 인을 했을지라도 피고가 미성년자이면 감화원에서 18개월만 복역하면 됐 다. 그 이후에 네 건의 살인을 더 했다고 해도 역시 18개월씩만 썩고 나오 면 되기 때문에 루치아노는 건재할 수 있었다. - 루치아노, 우리 아기 예쁘죠? 침대에 누워 있는 그의 아내 주리가 평소와는 달리 조용히 물었다. 그녀 는 웬일인지 아기를 낳은 이후로는 수다를 떨어대지 않고 있었다. - 음, 이뻐. - 루치아노, 앞으로 아기를 어떻게 키울 건지 생각해 봤어요? 설마 당신 처럼 교도소나 드나드는 살인자로 키울 생각은 아니겠죠? 루치아노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녀한테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 다. - 왜요? 나는 바른 말 좀 하면 안 되나요? 주리가 눈을 똑바로 치켜뜨고 대들 듯이 말했다. - 이 여편네가 애를 낳더니 돌아버렸나? 누구 보고 살인자라고 떠드는 거야? - 내 말의 핵심은 우리 아기를 앞으로 어떻게 키울 거냐는 거예요. 알아 들어요? - 어떻게 키우긴 뭘 어떻게 키워? 되는 대로 키우는 거지. 나도 그렇게 컸고, 우리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그렇게 컸단 말이야. 그러니까 괜히 쓸데 없는 수작 말아. 아내가 갑자기 침대에서 일어나 똑바로 앉더니 딱 부러지는 어조로 말했 다. - 만약 그따위 사고방식으로 이 아기를 키울 생각이라면 지금부터 나와 아기를 볼 생각 말아요. 분명히 말하지만 내 아이를 살인자로 키울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루치아노는 코웃음을 쳤다. - 그래서 나와 헤어지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 못할 거 없죠. 아기를 위해서라면! - 망할 년! 어디서 대들고 그래! 어디 그 따위 소리 한번 더 지껄여봐! 기분이 상한 루치아노는 아내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 여자는 억, 하는 소 리와 함께 침대에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제기랄, 망할 년 같으니라구! 주리의 입에서 조금씩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시는 걸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루치아노는 간호사를 불러 아내를 부탁하고 병원을 나왔다. 그리 고 가까운 술집에 들어가서 말없이 술을 마시며 생각했다. '그래, 난 쓰레기 같은 살인자일 뿐이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살인자란 말야!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야? 그래, 난 내 아들도 살인자로 키울 거 야!' 하지만 루치아노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사랑스런 아들이 일생의 대부분을 교도소에서 비참하게 보내거나 길거리 어느 곳에서 총에 맞아 죽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 내 아들까지 살인자가 되게 할 순 없어! 결심을 한 그는 아는 형사를 찾아가서 말했다. - 나한테도 이제 아들 녀석이 생겼단 말입니다. 여기 오는 동안 아들 녀 석 이름까지 지었죠. 젤린도라구요. 그래서 말인데, 그 녀석까지 나 같은 살인자로 키울 수는 없다 이겁니다. 난 정말이지 녀석을 훌륭하게 키우고 싶습니다. -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루치아노. 그간 자네를 수없이 보아왔지 만 자네가 이렇게 바른 말을 하는 건 처음이야. 그래, 어떻게 도와줄까? - 아시다시피 범죄 조직이란 곳이 한번 빠져들면 나오기가 힘이 들잖습 니까. 그러니까 나를 잡아넣든가 어쩌든가 해서 그곳에서 나를 좀 빼내달 란 말입니다. 지형적으로 이탈리아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국에 는 마피아와 조직과 체계가 유사한 범죄 조직이 존재하고 있었다. - 흠, 자네를 잡아넣는 건 식은 죽 먹기야. 그렇지 않아도 몇 가지 혐의 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기는 싫다네. 사실 이제는 자네를 잡아넣는 것도 지쳤어. 그보다 자네가 나를 좀 도와주면 어떻겠나? - 어떻게 말입니까? - 인포머가 되어달란 말야. 대신 난 자네의 자립을 적극 도와주겠네. 어 떤가? - 정보 제공자라면. 그건 배신 아닙니까? - 조직을 떠나는 건 배신이 아닌가? - 그것과는 좀...... 어쨌든 좋습니다. 정보 제공자가 되죠. 대신 사례비는 두둑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루치아노는 정보 제공자가 되었고 아내도 그의 노력을 인정 했다. 그래서 루치아노는 전과 다름없이 조직의 일을 하면서도 행복해 했 다. 젤린도가 태어난 지 벌써 다섯 해가 된 어느 오후에, 루치아노는 앞집 남자와 개똥 문제로 큰소리로 다투었다. 앞집에 사는 커다란 개가 하필이면 그의 집 잔디에다가 늘 똥을 싸놓고 는 했던 것이다. 그 잔디는 루치아노가 시간이 날 때마다 아들 젤린도와 노는 곳이었기 때문에 루치아노는 좀 흥분한 상태였다. 그들이 말다툼하는 모습을 아내와 이제는 제법 소년 티가 나는 다섯 살 짜리 젤린도가 현관에서 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던 젤린도가 눈 을 찡그리더니 집안으로 들어가서 뭔가를 바지춤에 찔러 넣고는 여전히 다 투고 있는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가만히 그들을 올려다보더니 '이 나쁜놈! 하면서 바지춤에 찔러 넣었던 걸 뽑아들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자그마한 권총이었다. 루치아노가 항상 서랍 속에 숨겨 놓는 호신용 권총인데 어떻게 찾았는지 그걸 들고 나왔던 것이다. - 젤린도, 안 돼! 루치아노가 소리치며 말릴 새도 없이 젤린도가 방아쇠를 거푸 당겼다. 앞집 남자가 총 소리와 함께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한 방은 가슴에 다른 한 방은 머리통에 박혀서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젤린도는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 누구든지 우리 아빠한테 덤비면 이렇게 맛을 보여주겠어!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어린 젤린도의 이 말에 질려서 슬금슬금 뒷걸음질 을 쳤다. 심장과 머리에 제대로 총알을 맞은 앞집 남자는 즉시 병원으로 이송되었 지만 죽고 말았다. 루치아노 일가는 1주일 후, 그곳을 떠나 다른 동네로 이 사했다. 살인 사건이 있은 후, 루치아노와 그의 아내는 젤린도의 교육문제로 고 심했다. 그리하여 하루 빨리 범죄 조직에서 벗어나 다른 나라로 가는 수밖 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루치아노는 결론을 내린 뒤, 형사를 찾아갔다.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제보 를 하고 두둑이 돈을 받아내 미국으로 날아가기 위해서였다. 루치아노는 형사에게 골드다이아코스트의 지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조 직의 보스 토마스 보나노를 체포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말하고 미국 달 러로 10만 달러를 요구했다. - 아무리 토마스 보나노라고 해도 10만 달러는 너무 많아. 3만 달러 정 도면 어떻게 마련해 보겠네. 나도 윗사람과 절충을 해야 한다고. - 3만 달러라......이봐요, 난 목숨을 걸었단 말이오! 보나노는 과거에 살인 청부업자로 이름을 날리다가 현재는 표면상 광산 업을 하는 사람으로 항상 시거를 태우고 있어서 '미스터 시거' 라고 불리는 무서운 사나이였다. - 그렇다면 좋아. 5만 달러, 그 이상을 원한 다면 우리 거래는 없었던 걸 로 하지. - 좋습니다. 그럼 내일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도록 하죠. 루치아노는 형사와 악수를 하고 일어섰다. 됐어! 더러운 내 인생과는 이제 작별이야. 그는 좋은 기분으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타마로 강변로로 가기 위해서 좌 회전을 했다. 그때, 갑자기 우측에서 거대한 트럭 한 대가 달려나오며 앞을 가로막았다. 루치아노는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트럭 밑으로 빨려들어 가던 그의 차가 겨우 멈추었다. 트럭에는 고개를 내민 채 낄낄거리고 있는 운전수 녀석의 얼굴이 보였 다.. 이런 개자식! 머리통을 날려버리겠어! 조수석 밑에 숨겨둔 권총을 꺼내들고 문을 열었다. 그러나 건장한 사내 들의 모습이 보이는가 싶더니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고 루치아노는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서른한 시간 뒤에 루치아노의 아내인 주 리는 전화를 받았다. - 여기는 존스톤시 경찰국 강력계입니다. 시체 한 구가 들어왔는데 루치 아노 보르딘 씨인지 확인해 주셔야겠습니다. - 바, 방금 시체라고 했나요? 그, 그럼 남편이 죽었단 말인가요? - 말씀드렸다시피 직접 확인을 한 뒤라야 확실한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곳에 오셔서 프레스턴 형사를 찾으십시오. 전화를 건 사내는 상대방의 기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사무적으로만 말 했다. - 아, 알겠습니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젤린도를 안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존스톤시 경찰국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강력계 프레스턴 형사는 그녀가 젤린도를 데리고 사무실로 들어서 자 금방 알아보고 손짓을 했다. - 이쪽으로 오십시오. 프레스턴은 그들 모자를 지하로 안내했다. 그곳은 시체실이었다. 형사는 시체실 입구에서 젤린도를 내려다보더니 여경관한테 잠시 맡기는 게 좋겠 다고 했다. 주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젤린도에게 말했다. - 금방 올 테니까 경찰관 누나하고 잠시 이곳에 있어라. - 알았어. 젤린도는 무언가 눈치를 챈 것처럼 전혀 보채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 다. 주리를 데리고 들어간 프레스턴 형사가 스테인레스 스틸로 만든 커다란 상자 하나를 끄집어내더니 시체의 얼굴 부분을 덮고 있는 하얀 천을 걷어 냈다. 그곳에 아직 냉동이 안 된 한 사내의 여기저기 찢어진 얼굴이 있었다. 입에 커다란 소시지 같은 걸 물고 있는 그 사내는 분명히 루치아노였다. 아아! 그녀가 갑자기 몰아치는 현기증 때문에 휘청거리자 프fp스턴이 부축해 주었다. - 루치아노 보르딘 씨가 맞습니까? 눈물을 닦은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맞아요. 그런데 저건 뭐죠? 그녀는 죽은 남편의 입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 그, 그건... 프레스턴은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얼굴로 망설이다가 시체의 아랫부분을 덮고 있는 천을 걷었다. 루치아노의 아랫배 밑은 온통 붉은 피투성이였고 그곳에 있어야 할 루치 아노의 남성이 없었다. 루치아노는 자신의 잘려진 남성을 물고 있었던 것 이다. 주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미동도 않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 수사를 더 해봐야 알겠습니다만, 보통 범죄 조직에서 배신자를 처형할 때 쓰는 수법입니다. 부인, 괜찮습니까? 프레스턴이 주리의 어깨를 흔들었다. - 괜찮아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녀는 눈물을 닦고 밖으로 나가더니 젤린도를 안고 들어왔다. - 부인! 놀란 프레스턴이 소리쳤다. - 괜찮아요, 형사님. 이 아이는 봐야 해요. 이 아이도 자기 아버지의 모 습을 봐야 한다구요. - 하지만 이건 좀... 아이 교육에도 안 좋습니다. - 괜찮아요. 비키세요. 내 자식이니 내 맘대로 하게 해줘요. 프레스턴은 할수없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 봐라, 젤린도. 여기에 누워 있는 사람이 누구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젤린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여기에 이렇게 죽어 있는 사람은 바로 네 아버지란다. 잘 봐 두어라, 젤린도. 나쁜 사람들이 네 아버지를 이렇게 만들었단다. 네 아버지는 이제 다시는 깨어나지 못해. 앞으로는 못 볼 테니까 잘 기억해 두어라. 주리는 한참을 그렇게 젤린도와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그제서야 젤린도 의 창백한 얼굴이 풀리더니 울음이 터졌다. - 그래, 그래. 실컷 울어라. 주리는 젤린도를 꼭 끌어안고 같이 울음을 터뜨렸다. 1주일 후, 주리는 젤린도와 함께 미국 뉴욕행 비행기에 탔다. 죽은 루치 아노가 원한 대로 모자는 외국으로 가고 있는 것이었다. 음모 5 미국은 주리에게 아주 낯선 곳이었지만 그래도 루치아노가 남겨놓은 재 산이 많은 편이어서 그들 모자가 지내는 데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젤린도는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거의 아무런 특징이 없는 그저 그런 학 생이었다. 성적도 신통치 않았고 교우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으며 여자 문 제는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외톨이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젤린도는 변했다. 그것은 그가 우연히 사우스 브롱 크스를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그곳에는 크레이지 조, 입회식, 살인, 죽음의 시가지. 헬 에인절, 영 시너즈, 골드 어쌔신즈, 새비지 노마드 등의 단어가 퍽유와 갓템 등과 함께 난무하는 곳이었다. 젤린도는 그 단어들 중에서 특히 골드다이아코스트계 갱들의 모임인 골 드 어쌔신즈(황금 암살자들)를 좋아했으므로 자연스럽게 그곳에 가입하고 입회식을 치렀다. 입회식을 치른 뒤 골드 어쌔신즈의 정례 주말 파티에 젤린도가 참석했을 때, 한 매력적인 여자가 접근해 왔다. 늘씬한 키에 가무잡잡한 피부색을 지닌 그녀는 신입 회원인 젤린도를 마 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열다섯 살이 되도록 여자와 별다른 접촉을 해본 일이 없는 젤린도는 기분이 좋아져서 여자와 춤을 추었다. 그러는 동안 몇몇 동료 갱들이 젤린도를 보면서 킥킥거렸으나 젤린도는 그것을 무시했다. 조금 뒤에 여자와 더 가까워지자 젤린도는 여자의 스커 트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매끈한 스타킹에 감싸인 허벅지가 만져지 고, 그리고 이게 무엇인가? 젤린도의 손에 와 닿은 것은 커다란 남성이었다. 그러니까 그 여자는 남 자였고 동료들은 그런 사실을 알고는 킥킥거렸던 것이다. 바로 그때, 죽은 아버지의 입에 물려 있던 아버지의 성기가 머리를 스쳐 갔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이런 개자식! 속았다는 걸 안 젤린도는 주먹으로 녀석을 후려쳐서 바닥에 쓰러뜨리고 는 가발을 벗기고 옷을 찢어버렸다. 그리고 발가벗겨진 채 기절해 버린 녀 석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동료들은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그저 구경꾼이 되어서 신입 회원의 행 동을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젤린도는 장식장 위에 있는 텔레비전을 번쩍 들어서 그것으로 녀석의 얼 굴을 내려쳤다. 녀석의 얼굴은 형체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피투성이가 되었고 죽어버렸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젤린도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개자식 죽여버리겠어!' 하고 외치며 주머니에서 잭나이프를 꺼내들었 다. 그리고 녀석의 성기를 잘라낸 다음,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것을 녀석의 입을 벌리고 쑤셔 넣었다. 그러자 동료 갱들의 눈에서 존경의 빛이 떠올랐 다. 그는 어쨌든 본의 아니게 입회식을 폼나게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젤린도는 '크레이지 골드' 라는 별명을 얻었고 동료 갱들에 게 인기 있는 멤버가 되었다. 하지만 사건이 일어난 지 꼭 2주일 후에, 그는 경찰에 체포되어 소년원 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젤린도는 이튿날부터 1960년대의 소년원에 수감된 다른 애들처럼 낮에는 소년원 농장이나 산에서 밭을 갈거나 나무를 파내는 작업을 했다. 일은 매우 힘들었지만 젤린도는 견딜 만했다. 그러나 그건 잠 시였다. 소년원은 갱생의 장소가 아니라 벌을 받는 장소였다. 거의 매일 심한 중 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만약 일을 하지 않으면 독방에 수감되거나 일을 할 때까지 지독하게 두들겨 맞았다. 이런 것들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원래 체격이 좋은 젤린도였지만 그도 소년원 생활을 하면서 몸무게가 10킬로그램이나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젤린도는 끊임없이 싸웠다. 젤린도는 무엇보다 소년원에서 유행하고 있는 동성애를 혐오했다. 소년원에서는 화장실 같은 곳에서 힘없는 아이를 보면 괜한 트집을 잡고 는 빙 둘러싼다. 그러면 아이는 공포심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 된다. 이 호모 녀석들은 아이를 욕실로 데리고 들어가서 애널섹스를 하고 펠라치오를 일일이 시킨다. 그건 지옥이었다. 여섯에서 열 명 정도를 상대 해야 하기 때문에 힘없는 아이는 바짝 말라서 나중에는 병자가 되었다. 어느 날, 젤린도가 화장실을 갔을 때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그를 에워쌌 다. - 젤린도, 네 항문은 황금으로 만들어졌다는 소문이 있던데? 불도저라고 불리는 녀석이 젤린도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 무슨 개소라야? 젤린도는 녀석들이 자신을 벼르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잔 뜩 경계했다. - 오늘은 네 잘난 항문을 봐야겠어. 불도저가 손짓을 하자 녀석들이 한꺼번에 덤벼서 그를 붙잡고 바지를 벗 겨냈다. 그는 악을 쓰며 주먹을 휘둘렀지만 녀석들의 힘 앞에는 소용이 없 었다. 곧 엄청난 통증이 엉덩이에 느껴지면서 젤린도는 뱃속이 뒤집어지는 걸 느꼈다. 아침과 점심에 먹은 음식이 모두 입 밖으로 나와 녀석들의 몸에 튀었다. 그러자 녀석들은 지저분한 놈이라고 욕을 하면서 떨어져 나갔다. 어떤 놈은 침까지 뱉었다. 젤린도가 정신을 차려보니, 녀석들은 건들거리며 의기양양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개자식, 죽여버리겠어! 젤린도는 주머니에서 숟가락으로 만든 칼을 꺼내어 움켜쥐었다. 그것은 틈이 날 때마다 시멘트에 정성스럽게 갈아서 만든 것이어서 날이 제법 날 카롭게 서 있었다. 녀석들 중의 하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젤린도가 칼을 들고 있다 고 소리쳤다. 그 순간, 젤린도는 녀석들을 향해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갔다. 녀석들이 우왕좌왕하는 것이 보였다. 그는 불도저 녀석의 목을 끌어안음과 동시에 녀석의 옆구리에 칼을 깊숙이 박아 넣었다. 칼을 쥔 그의 손까지 들어간다 싶을 정도로 깊이 찔러 넣었다. 그만큼 젤린도의 분노는 컸다. 불 도저는 비명을 지르며 더러운 바닥으로 쓰러지더니 울컥 피를 토해냈다. - 내 엉덩이 노리는 놈 있으면 나와봐! 나와, 모조리 죽여주겠어! 젤린도가 외치자 다른 녀석들은 겁에 질려서 그대로 도망쳤다. 녀석들은 그제서야 젤린도의 별명이 왜 크레이지 골드인가를 알 수 있었다. 결국 젤 린도는 3년이 지난 뒤에야 소년원을 나올 수 있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오자 그의 어머니인 주리와 골드 어쌔신즈의 멤버들이 그를 반겨주었다. 하지만 그간 많은 수가 소년원과 교도소로 끌려들어갔기 때문에 아는 얼굴은 몇 되지 않았다. 멤버들은 그가 소년원에서 숟가락 나이프로 불도저란 녀석을 해 치운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 존경심을 갖고 그를 대했다. 그들은 젤린도한테 골드 어쌔신즈의 두목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젤린도는 잠깐 생각했다. 그가 소년원에서 들은 바로는 현재 사우스 브 롱크스를 지배하고 있는 세력은 새비지 노마드와 골드 어쌔신즈일 정도로, 그가 수감되어 있던 3년 사이에 골드 어쌔신즈는 큰 세력으로 부상해 있었 다. - 만약 선배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면 우리는 조만간 사우스 브롱 크스를 지배할 수 있을 겁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젤린도는 쉽게 승낙했다. 사실 이것은 그가 바라던 바였다. 그리고 그는 골드 어쌔신즈를 조직적으로 잘 키울 자신이 있었다. 이튿날, 그는 사우스 브롱크스에서 캠페인을 벌였다. 그것은 그들의 아지트 창문에 현수막 하나를 내건 것뿐이었지만 그 효과 는 엄청나게 컸다. 현수막에는 '마약 중독자와 마약 판매인은 72시간 내에 사우스 브롱크스를 떠나라!' 라고 씌어 있었다. 겉에서 보기에는 마약 퇴치를 위한 캠페인이었으나 사실 그 현수막은 최 후의 공식적인 통고였다. 많은 수의 마약상들이 떠났으나 설마 하는 생각 에 꾸물거리고 있던 자들은 72시간 뒤에 차례차례 사살되기 시작했으며, 다시 24시간 뒤에는 사우스 브롱크스에서는 마약상들을 찿아볼 수가 없었 다. 이렇게 해서 골드 어쌔신즈는 독점적인 마약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게 되었으며 그들의 재정 상태는 훨씬 좋아졌다. 대신 경찰에서는 젤린도를 체포하기 위해서 총력을 기울였다. 이번에 체 포되면 최소한 5년 이상은 교도소에 처박혀 있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 는 젤린도는 궁리 끝에 국경을 넘어서 멕시코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곳에 서 돈을 주고 적당히 만든 서류를 이용해서 멕시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 다. 그가 사관학교에 들어간 이유는 멕시코란 곳이 따분했기 때문이었다. 죽 음의 시가지라고 불리는 사우스 브롱크스에서 온 그에게 있어서 멕시코는 흐느적거리는 사람들 위로 졸리운 햇빛이 하루 종일 내리쬐는 곳이었다. 어쨌든 사관학교는 그래도 견딜 만했기 때문에 처음의 장난스런 생각과 는 달리 열심히 생도 생활을 했으며, 4년 후에는 멕시코 육군 소위로 임관 했다. 그리고 5년 후에는 멕시코 육군기병대 대위로 빠르게 진급했다. 그런데 문제는 젤린도가 대위 진급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 다. 젤린도는 그 무렵 멕시코에서의 따분한 생활이 싫어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인생의 새로운 돌파구를 찿으려고 하던 중이었기 때문 에 대위 진급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 후텁지근한 어느 날, 그러니까 젤린도가 멕시코 육군에 전역 신청 서를 제출할 기회만 엿보고 있던 바로 그 즈음. 그는 골드다이아코스트에 서 온 딘 왓슨 대령을 만남으로 해서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을 맞게 되었 다. 물론 당시에는 그저 돌파구를 찿은 정도로 여겼지만 사실 딘 왓슨은 그 에게 커다란 행운을 가져다준 사람이었다. 멕시코 육군에 한 달 간 파견 온 왓슨 대령을 담당한 장교가 바로 젤린 도였다. 왓슨 대령의 방문 목적이 비공식적으로는 관광이었으므로 젤린도 는 가이드 역할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왓슨과 어울릴 수가 있었다. 그날, 젤린도가 아카풀코 해변에서 오렌지 주스를 마시면서 자신이 골드 다이아코스트 공화국 출신이라고 밝힌 것은 왓슨 대령이 실력자란 걸 알았 기 때문이었다. 젤린도의 직속상관인 기병대장이 은밀하게 알려준 바에 따 르면 왓슨 대령은 골드다이아코스트의 대통령인 로버트 왓슨의 친조카이며 보안부대장 겸 경호실장이었다. 이 말을 기병대장에게 처음 들었을 때, 젤린도의 머리는 그야말로 고속 모터처럼 급속하게 회전했다. 무료하기 짝이 없는 멕시코를 벗어날 수 있 는 돌파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그 말이 정말이오? 왓슨 대령은 즉각 호기심을 나타냈다. - 예, 존스톤 출신입니다. 다섯 살 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미국으로 이민 을 떠났죠. - 그런데 어떻게 멕시코 육군이 된 거요? 왓슨 대령의 작은 눈이 탐색하듯이 가느스름해졌다. - 그건 말입니다....... 젤린도는 잠시 망설였지만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어차피 보안부대장 인 왓슨이 조사를 하면 그의 이력 정도는 그대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었 다. - 실은 미국에서는 발을 붙이고 살 수사 없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골드 어쌔신즈를 아십니까? - 사우스 브롱크스에 있는 골드다이아코스트계의 갱단 이름 아니오? 그 럼 그 갱단의 멤버였소? - 예, 혹시 크레이지 골드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왓슨이 등나무 의자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 바람에 오렌지 주스가 조금 엎질러졌다. 그는 골드 어쌔신즈와 크레이지 골드에 대해서 알고 있 었다. 그는 크레이지 골드가 지나치게 폭력적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수하에 도 그런 뛰어난 부하가 하나쯤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그럼 당신이 크레이지 골드? 젤린도 보르딘? 골드 어쌔신즈의 보스 자리를 마지막으로 사라진 바로 그 사람이란 말이오? - 그때 국경을 건너 멕시코로 온 겁니다. - 음, 크레이지 골드라......이거 반갑소. 우리 악수 한번 합시다. - 영광입니다. - 최근에 사우스 브롱크스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소? - 아니오. - 당신이 장악한 마약 시장을 기반으로 골드 어쌔신즈가 사우스 브롱크 스를 지배하고 있소. - 그렇습니까? 젤린도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 어쨌든 그때는 철이 좀 없었죠. 무모하고 폭력적이고 단순해서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왓슨 대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 맞는 말이오. 왓슨은 젤린도가 마음에 들었다. 이런 것을 스스로 깨달을 줄 아는 사람 이라면 그에게 큰 힘이 될 것 같았다. - 멕시코 육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소? - 쉬운 질문이 아니군요......골드다이아코스트는 2천 년의 역사를 운운하 고 있지만 사실은 2차대전 이후의 신생국가라고 보는 게 현실적이죠. 그리 고 아직은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좋은 말로는 정치적 태동기 이고 나쁜 말로는 정치적 혼란기에 빠져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소? - 미국식 민주주의가 현재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기 때문에 일단은 어 느 정도의 브레이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왓슨은 미소를 떠올렸다. - 브레이크라.......적절한 표현이야. 왓슨은 젤린도의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현재의 골드 다이아코 스트의 정치적 혼란은 무절제한 민주주의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 젤린도, 나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갑시다. 그곳에서 나를 도와주시오. 젤린도는 일부러 대답을 하지 않았다. - 그곳에서 제가 할 일이 있습니까? -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나라의 군은 정치와 마찬가지로 아직은 체계적이 지도 않고 능력 있는 군인도 그리 많지 않소. 만약 당신처럼 능력 있는 군 인이 고국으로 돌아온다면 우리 군의 발전에 큰 힘이 될 거요. 어떻소? 고 국에서 보안부대 일을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보안부대라면 어느 나라이건 힘을 쓸 수 있는 권력 기관이다. 여기에다 대통령의 조카인 왓슨 대령이 후원자가 되어 준다면 조만간 골드다아코스 트에서 실력자로 부상할 수도 있다. 일생에 몇번 찿아오지 않는 아주 중요 한 기회였다. 젤린도는 내심으로는 쾌재를 부르며 승낙했지만 겉으로는 생각해 보겠다 고 말했다. - 좋소, 어차피 나도 멕시코에서 휴가를 즐기고 떠나야 하니까 그때까지 결정해 주시오. 하지만 나는 젤린도 대위가 나와 같이 가는 것으로 알고 있겠소. - 알겠습니다. - 그럼 우리 잘해봅시다. 두 사람은 다시 굳은 악수를 했다. 그리고 3일 후, 왓슨 대령은 멕시코 주재 골드다이아코스트 대사관에서 보내온 서류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 다. 그것은 젤린도의 출생에서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기록이 상세하게 담긴 서류였는데 그는 젤린도가 다섯 살 때 권총으로 이웃집 남자를 쏴 죽인 기 록을 보고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가 느낀 젤린도다운 행동이기 때문이 었다. 젤린도는 멕시코 육군사관학교를 2등으로 졸업했으며, 졸업후의 복무 평점도 대단히 우수한 편이었다. 돈과 여자 문제는 깨끗해서 나무랄 데가 없었다. 공금 횡령이나 뇌물을 받은 적도 한 번도 없어서 오히려 왓슨 대령이 이러한 친구를 데려가도 괜 찮을까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골드다이아코스트에서는 부정이 상례화되어 있어서 정치인과 공직자를 포함한 거의 모든 사람이 크고 작은 부정에 연 루되어 있었던 것이다. 왓슨 대령이 멕시코에 입국한 지 22일 만에 왓슨과 젤린도가 탑승한 점 보기가 존스톤에서 남쪽으로 31킬로미터 떨어진 존스톤 국제공항에 착륙을 시도하자 젤린도는 감회 어린 시선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다섯 살 때, 어 머니 손에 이끌려서 떠난 후 꼭 23년 만의 귀국이었다. 그때 기억으로는 공항이 자그마하고 허름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뉴욕의 케네디 공항과 별다를 게 없을 정도로 크고 훌륭했다. - 소감이 어떻소? 왓슨이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 조국을 위해서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새삼 드는군요. 의외의 대답에 왓슨은 역시 자신이 사람을 잘 골랐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공항 귀빈실을 통과해서 나오자 두 대의 리무진이 기다리고 있었 다. 그들은 곧장 대통령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대통령궁은 존스톤 중심가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미국의 백악관을 모방해 서 지었는지 색도 하얗고 모양도 비슷했다. 다만 그 규모가 약간 작았다. 젤린도는 잠시 비서실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비서 한 명이 다가오더니 왓슨 대령이 부른다면서 따라오라고 했다. 젤린도는 일어서서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넥타이까지 맨 자신의 정장 차 림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나무랄데가 없었다. 키 177센티미터 체중 75킬로그램, 얼굴은 잘생긴 편이며, 머리칼은 이탈리아 출신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약간 갈색이 섞인 검정색이었다. 긴장 때 문에 꽉 쥔 주먹은 크고 완강했으며, 두 다리는 튼튼해 보였다. 그는 그 튼튼한 두 다리와 주먹을 가지고 비서를 따라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로버트 왓슨 대통령과 딘 왓슨 대령 둘만이 앉아 있었 다.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국의 제3대 대통령인 왓슨 대통령은 65세란 나이 보다 약간 늙어 보이는 편이었으며 인상은 온화했다. 그러나 건강 상태는 좋아 보이지 않았고 최근의 정치 불안 때문인지 표정도 썩 밝은 편이 아니 었다. 왓슨 대통령은 최근에 언론 탄압 문제로 야당과 언론의 집중적인 공격 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격의 주 대상에는 바로 왓슨 대령도 포함돼 있었다. 사실 대령이 멕시코를 비공식적으로 방문했던 것도 잠시 소나기를 피해보자는 의도에서였다. - 각하,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군복을 입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젤린도는 구두 뒷굽을 부딪치며 절도 있게 인사했다. 대통령이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 만나게 되어서 반갑소, 젤린도 대위, 왓슨 대령한테서 얘기 들었소. 칭 찬이 대단하더군. 앞으로 왓슨 대령과 함께 나라를 위해서 힘써주시오. - 알겠습니다. 각하. 각하와 이 나라에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특히 각하 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습니다. - 고맙소, 부탁하오. 대통령은 만족해서 미소를 지었다. 이제까지 그가 임명한 사람들 중에는 그 누구도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겠다는 이야기를 한 사람이 없었던 것 이다. 미국식 민주주의에 길들여진 그들 대부분한테는 충성이란 개념이 없 었다. 이렇게 해서 젤린도는 그 자리에서 보안부대 부사령관 겸 대통령궁 경호 실 차장으로 임명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계급은 1계급 진급에 불과한 소령 이었으나 그 점에는 전혀 불만이 없었다.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국은 육군 이 3천 명. 공군이 7백 명. 해군이 1천3백 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준장이 최 고 계급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골드다이아코스트에서는 계급이란 건 거의 무의미했다. 누가 더 권력과 가까운 자리에 있느냐가 중요했다. 젤린도는 먼저 국내의 정치 상황 파악을 위해서 1개월 간 집중적인 투자 를 한 후, 야당 지도자이며 신민주주의당 당수인 앤드루 메이너드를 지목 했다. 금년 58세이며 하버드 대학 출신 정치인인 메이너드는 다른 정치인들에 비해서 훨씬 깨끗했고, 또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인물로 왓슨 대통령 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그가 그렇게 집요한 공격을 할 수 있는 것은 왓슨 대통령의 무능과 골드다이아코스트의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의 침 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미국 측에서 보다 유능하고 친미적인 메 이너드를 차기 대통령 감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 앤드루 메이너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느 날, 젤린도가 왓슨 대령에게 물었다. 대령의 얼굴이 금방 일그러졌 다. - 눈엣가시야. - 그럼 제거해 버릴까요? 왓슨의 안색이 변했다. - 그건 곤란해. 우리는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약소국이야. 만약 섣 부른 행동을 했다가는 미국의 공격을 견디어낼 재간이 없어. 그자는 미국 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어. - 하지만 메이너드를 제거하지 않고는 왓슨 대통령께서 더 이상 정치 생 명을 연장할 수 없을 겁니다. 대령은 신음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음.....그건 맞는 말일세. 메이너드를 필두로 한 야당과 언론의 공세는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뿐입니다. - 하지만 말일세, 너무 위험해. 자칫 잘못하면 우리까지 끝장이 날 수 있 어. 게다가 그 친구는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사람들의 눈에 많이 노 출되어 있다네. 메이너드는 최근의 총공세로 인한 과로 때문에 병원에 입원해 있었으며, 앞으로 최소한 1주일 정도는 더 입원해 있어야 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 자한테 맡겨두십시오. 제가 사우스 브롱크스식으로 처리하겠습니다. - 그럼 항문에 말뚝이라도 박고 사살해 버릴 생각인가? - 그건 애들이나 하는 짓이죠. 맡겨두시겠습니까? 젤린도가 왓슨 대령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불안한 표정으로 눈알을 굴리던 왓슨은 할수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실수 없이 처리해 주게. 절대 실수해선 안 되네. - 염려 마십시오. 젤린도는 자신 있게 대답하고 직접 앤드루 메이너드가 입원해 있는 병원 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메이너드의 담당 의사인 그레그 바턴을 불러냈 다. 그는 올해 51세의 저명한 내과 의사로, 얼마 전에는 잡지 <행복한 남 편>의 표지 모델로 등장할 정도로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바턴이 그의 차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자 젤린도는 그를 차 안으로 불러 들였다. 차 안으로 고개를 들이민 바턴은 '줄리!' 하고 소리쳤다. 젤린도의 부하가 한 손으로 목을 틀어잡고 있는 여자는 그가 끔찍이도 사랑하는 올 해 스물한 살의 대학생 딸인 줄리였던 것이다. -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너희들 누구야? 분노한 바턴이 소리쳤다. 젤린도가 조용하게 말했다. -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해줬으면 좋겠어. 이걸 앤드루 메이너드의 링거에 넣으면 돼. 젤린도는 마약이 든 주사기 열네 개를 꺼내보였다. - 무슨 소리야? 당신들 누구야? 난 그런 짓은 절대 못해! - 그래?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젤린도가 표정의 변화라고는 조금도 없이 이렇게 말하고는 주머니에서 속에는 쇠뭉치가 든 자그마한 고무방망이를 꺼내어 갑자기 줄리의 오른쪽 어깨를 후려쳤다. 줄 리가 비명을 지르자 젤린도의 부하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 다. 줄리의 오른팔은 금방 의자 옆으로 축 늘어져서 건들거렸고 부서진 어 깨에서 핏방울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 다음은 왼팔이야. 그 다음은 얼굴이고, 그리고 그 다음은 당신 아내 차 례가 되겠지. 당신도 알겠지만 메이너드 같은 쓰레기는 처분해야 해. 그렇 지 않으면 우리 골드다이아코스트는 떠벌이들 때문에 끝장나고 말아. 당신 한테도 애국심 같은 게 있다면 우리가 시키는 대로하는 게 좋아. 얼굴이 하얗게 질린 바턴은 어쩔 줄을 몰랐다. 엄청난 공포 때문에 두 다리가 후둘거렸다. - 어쩌겠나, 바턴? 젤린도가 다시 물었다. 겁에 질린 바턴은 이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사랑하는 딸과 아내의 목숨 을 보장할 수 없겠다고 느꼈다. 그에게 있어서 가족은 그의 전부였다. 가족 이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 시,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 좋아, 바턴, 당신은 애국자야. 후세에 많은 사람이 당신의 이름을 기억 할 거야. 젤린도는 소리 없이 웃고는 주사기를 바턴의 손에 건네주었다. - 머리 좋은 의사 양반이니까 잘 알겠지만 하루에 두 개씩, 퇴원할 때까 지 열네 개를 모두 주사해야 해. 우리가 항상 지켜보고 있다는 걸 잊진 않 겠지. 의사 양반? 바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젤린도가 다정하게 말하자 그는 온몸에 돋는 소름 때문에 흠칫 몸을 떨었다. - 하루에 두 개는 너무 많은 양입니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바턴은 메이너드를 걱정했다. 젤린도가 빙긋이 미소를 떠올렸다. - 당신이 그런 것까지 걱정하다니 의외로군. 내 생각에는 당신 딸과 아 내를 더 걱정해야 할 것 같은데...... 안 그런가. 의사 양반? - 마, 맞습니다. 1주일 후, 병원을 퇴원한 메이너드는 훨씬 가뿐해진 기분으로 집에 돌아 왔다. 발신자가 뉴욕의 사우스 브롱크스인 텔렉스 두 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 번째 텔렉스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었다. 앤드루 메이너드 귀하 귀하께서 요청하신 대로 물건을 발송했는데 아직 입금이 되지 않고 있 습니다. 입금이 되면 귀하께서 요청하신 물건이 다시 발송될 것입니다. 빠른 입금을 부탁합니다. 하얀 천사 드림 두 번째 텔렉스도 첫 번째 텔렉스와 내용은 비슷했다. 앤드루 메이너드 귀하 귀하의 행동에 실망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빠른 입금을 부탁드립니다. 만약 입금이 되지 않는다면 유감스럽게도 모종의 조치를 취하는 수밖에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하얀 천사 드림 메이너드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는 내용이 왜 자신한테 전송되었는 지 전혀 알 수가 없었으나, 이 텔렉스 내용을 도청한 골드다이아코스트 주 재 미국 대사관의 정보 참사관인 레이놀즈는 고개를 갸웃했다. 미국 대사 관 지하에 있는 감청실에서는 골드다이아코스트의 주요 기관 대부분을 도 청하고 있었다. 앤드루 메이너드가 사우스 브롱크스의 마약을? 쉽게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에서 공부를 한 메이너드가 유학 시절 에 마약에 빠져들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매우 심각한 문제라는 판단을 내리고 즉시 본국에 보고했다. 병원에서 퇴원한 그날 저녁 메이너드는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퇴원할 때와는 달리 몹시 몸이 피로하고 기분이 나빴다. 그 래도 메이너드는 나아지겠지 하고 생각하며 견디었다. 그러나 갈수록 피로 는 더 심해졌다. 한밤중에는 이상한 환상 같은 것까지 보일 정도로 괴로웠 다. 밤새 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던 메이너드는 날이 밝자 비서진에 의해서 다 시 병원으로 옮겨졌다. 담당 의사는 전과 같이 그레그 바턴이었다. 그는 메이너드를 진찰하고는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 이 증세는 전형적인 마약 중독 증세입니다. - 뭐라구요? 마약 중독이라구요? 말도 안 되오! 메이너드가 비서진과 바턴한테 소리쳤다. - 진정하십시오. 간단하게 소변검사만 해봐도 금방 결과가 나옵니다. 그레그 바턴은 즉시 간호사를 불렀다. 그리고 잠시 후, 결과는 비서진을 참담하게 했다. 메이너드는 틀림없는 마약 중독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자들이 몰려왔으며, 그날 석간과 이튿날 조간 에는 '야당 지도자 앤드루 메이너드, 마약 중독자로 밝혀져......'란 제목의 기사가 야당을 공습이라도 하듯이 퍼부었다. 특히 야당색을 띠고 있는 일 부 언론에서는 메이너드의 마약 중독 사건은 조작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의문을 제기했는데, 메이너드의 집으로 전송된 텔렉스 두 장은 그런 의문 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1개월 후, 존스톤 외곽에 있는 도시 펄레이디의 작은 공원에서 그레그 바턴의 시체가 발견되었 3미터 가량 되는 나무에 등산용 밧줄로 목을 맸는데, 여러 가지 주변 정 황과 검시자와 부검의의 법의학적 판단에 따라 자살로 처리되었다. 그리고 이틀 후에는 그레그 바턴의 딸 줄 리가 자신의 장애를 비관하는 유서를 써 놓고 역시 펄레이디의 작은 공원에서 목을 매었다. 줄리 역시 여러 가지 정황과 법의학적 판단에 따라 자살로 처리되었다. 그녀가 남긴 유서에는 최근에 다친 오른쪽 어깨 때문에 오른팔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처지를 비관하고 있었으며 또한 아버지를 잃은 데 대한 슬 픔도 담겨 있었다. 왓슨 대령과 함께 젤린도 소령이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서자 왓슨 대통령 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띠며 손을 내밀었다. 대통령은 최근 며칠 사이 에 눈에 띄게 안색이 좋아졌고 얼굴에는 미소가 떠날 날이 없었다. - 어서들 오게. 군복 차림인 왓슨 대령과 젤린도 소령은 거수 경례를 하고는 대통령과 힘주어 악수했다. - 앤드루 메이너드가 마약 중독자였다니, 정말 상상도 못했던 일일세. 대통령이 여담이라도 꺼내듯이 먼저 말했다. - 마약 중독자 주제에 국민들을 기만했으니 그 죄가 큽니다. 왓슨 대령이 맞장구를 쳤다. - 그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 - 마약 중독자 재활 센터에 입원해 있습니다. 상태가 아주 심해서 최소 한 1년 이상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의사의 진단이 있었습니다. 젤린도가 대답했다. - 그럼 메이너드의 정치 생명은 끝장이군. 어쨌든 안됐어. 똑똑한 친구였 는데... 대통령은 말끝을 흐렸다. - 어쨌든 메이너드 씨가 없기 때문에 야당은 중심을 잃고 한동안 헤맬 겁니다. 이런 상태라면 차기 대통령 선거가 우리에게 매우 유리해집니다. 야당이 전열을 정비하려면 최소한 1년 이상은 걸려야 할뿐더러 또 메이너 드 같은 인물을 찾아낼 가능성도 거의 없는 상태입니다. 득의에 찬 왓슨 대령이 힘있게 외치듯이 말했다. - 그럼 왓슨 대령의 말은 차기에도 내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건가? 대통령의 입은 귀밑까지 벌어져 있었다. - 거의 확실합니다. - 미국의 반응은 어떤가? 대통령은 왓슨 대령과 젤린도 소령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대통령은 내심 미국의 반응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 앤드루 메이너드가 마약 중독자였다는 사실에 놀란 것은 분명한데 아 직 공식적인 반응은 없습니다. 텔렉스를 포함한 증거물이 있어서 이렇다 할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왓슨 대령이 대답했다. - 좋아. 어쨌든 수고 많았네. 언제 나하고 술이나 한잔 하세. 그럼 그만 가보게. 대통령은 두 사람과 악수했다. - 젤린도 소령, 정말 수고 많았네. 원하는 게 있으면 얘기해 보게. 그간 수고한 대가로 보너스를 주려는 거니까 서슴지 말고 말하게. 왓슨이 젤린도의 어깨를 다정하게 안으며 말했다. - 별로 필요한 건 없습니다만 굳이 도와주시겠다면 미국에 계신 제 어머 니를 모셔오고 싶습니다. - 그런 일이라면 자네가 알아서 해. 아 그렇군! 어머니를 모셔오자면 근 사한 집이 있어야겠군. 좋아, 이걸 받게. 왓슨은 지폐뭉치가 담긴 작은 가방 하나를 건네주었다. - 사실 자네한테 주려고 준비해 온 10만 달러일세. 집도 사고, 근사한 자 동차도 사고, 또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결혼도 하게. 그 정도의 돈이 면 자네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걸세. -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그런데 아직 일이 좀 남았습니다. - 일이 남다니? 다 잘된 게 아닌가? 왓슨 대령이 눈을 치켜떴다. 그러면서 동시에 비릿한 피 냄새가 풍기는 것 같아 얼굴을 찌푸렸다. 어쩐지 젤린도 소령의 몸에서는 항상 피 냄새가 감도는 것 같았다. 6. 대통령 젤린도 보르딘 - 사소한 일입니다만 만약을 위해서 처리해야 합니다. 깨끗이 마무리할 테니 염려 마십시오. 하지만 그들 다섯 명에게 만 달러씩 지불하고 싶습니 다. - 음... 5만 달러가 필요하다는 얘기군. 마무리는 소령이 직접 하겠지? - 네, 그렇습니다. - 그렇게 하지. 5만 달러는 곧 마련해 주겠네. 그럼 부탁하네. 대령은 젤린도를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 젤린도의 치밀한 계획과 과감한 일처리 방식은 오히려 대령이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대령은 말로만 듣 던 사우스 브롱크스식이 어떠한 것인가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대령과 헤어진 젤린도는 부하 다섯 명과 함께 펠레이디에 있는 숲이 무 성하게 우거진 산으로 등산을 하러 갔다. 정상에 거의 다다랐을 때, 젤린도 는 등산복 차림의 부하들을 멈추게 하고 커다란 구덩이를 파라고 지시했 다. 그곳은 인적이 거의 없는 곳으로 험준하고 나무가 무성한 곳이었다. 부하들은 즉시 삽과 곡괭이로 땅을 팠다. 얼마간 시간이 흘러 구덩이가 제법 깊어지자 젤린도가 권총을 꺼내들고 조용하게 말했다. 8 연극 배우 쾌청한 날씨의 존스톤 국제공항에 뉴욕발 점보기가 착륙하기 위해서 서 서히 하강하면서 랜딩기어를 내리고 있었다. 이윽고 바퀴가 지면을 살짝 스치고는 활주로를 굴러갔다. 창문을 통해서 밖을 내다보고 있던 에디는 '드디어 왔다.'고 생각했다. 에디는 골드다이아코스트에서 그의 인생이 크게 변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비행기에서 아주 매력적인 재닛 애시포드와 기내 섹스를 한 것도 그런 예감이 들도록 하는 데 일조했다. 그는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최근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은 그를 분명히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는 것 같았다. - 에디, 다시 연락 줄 거죠? 재닛이 그에게 호텔 전화번호와 방 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건네며 물었 다. - 물론입니다. 재닛. 두 사람은 가볍게 포옹을 하고 공항 입구에서 헤어진 다음 각자의 버스 에 올랐다. 에디 일행이 탄 버스가 출발하자 국립 보르딘 극장의 지배인이 앞으로 나와서 인사를 했다. - 골드다이아코스트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공화국 국민들을 대신해서 이렇게 오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존스톤 시내로 들어서자 세계적인 관광도시답게 크고 화려한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뉴욕의 맨해튼 못지않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거리와 건물 곳곳에 '보르딘'이란 단어가 붙어 있다는 것이었다. 보르 딘 대로, 국립 보르딘 대학교, 국립 보르딘 극장, 보르딘 빌딩, 국립 보르딘 병원, 국립 보르딘 박물관등 거리 곳곳은 보르딘이란 이름으로 온통 도배 되어 있었다. 더하여 콧수염을 기른 젤린도 보르딘 대통령의 거대한 초상 화들이 건물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감시라도 하듯이 내려다보고 있었 다. 뿐만 아니라 높이가 30미터는 되는 거대한 금동상까지 서 있어서 버스 안의 많은 사람들은 이 모습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하지만 에디와 그의 동료들은 큰소리로 웃는 실례는 범하지 않았다. - 저 위대한 보르딘 각하의 금동상은 표면 1센티미터를 전부 금으로 씌 운 세계 최고의 금동상입니다. 국립 보르딘 극장 지배인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는데 아닌게아니라 햇빛을 받아 거대하게 번쩍이는 그 모습은 장관이었다. 다만 그 번쩍이는 반사광 때문에 거리에서 수많은 교통사고가 일어나고 국민들의 시력이 심 각하게 손상되고 있다는 사실이 숨겨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의 금 생산국답게 이것과 동일한 크기의 금동상이 두 개나 더 만들어지고 있었다. - 이보게 에디. 에디의 옆 좌석에 앉은 동료가 문득 말했다. - 저 보르딘 대통령 얼굴 좀 봐, 자네하고 너무 닳지 않았어? 자네한테 콧수염만 붙이면 그대로 위대한 독재자 보르딘 대통령 각하라고 해도 믿을 거야. - 에이, 그런 소리 말아. 난 무자비한 독재자는 싫어. 에디는 이렇게 말했지만 젤린도 보르딘 대통령이 자신과 너무 닳았다는 걸 깨닫고는 기분이 묘해지는 걸 느꼈다. 쿠퍼는 50살이 넘었지만 결혼을 하지 않았다. 일부러 결혼을 안 한 것이 아니라 주변에 언제나 여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결혼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 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바람둥이는 아니었다. 다만 그는 다른 독신 남성 처럼 여자들과의 데이트를 즐기는 편이었다. 쿠퍼는 냉혹할 정도의 차가움 과 로맨틱함을 동시에 지닌 인물이었다. 그가 미국 배우들의 뮤지컬<마이 페어 레이디>를 관람하게 된 것은 순 전히 최근에 만난 트레이시 에번스 때문이었다. 어떤 정치인 모임에 참석 했다가 우연히 만난 트레이시는 그가 이제까지 만난 그 어떤 여성보다 아 름답고 특별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쿠퍼는 그녀의 요구를 거절 할 수가 없었다. 쿠퍼 입장에서는 지금 한가롭게 객석에 앉아서 뮤지컬을 구경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대통령의 심장 수술에 관한 고민으로 꽉차 있었기 때문에 그는 건성으로 트레이시 옆에 앉아 있었다. 만약 젤린도 대 통령이 권력을 잃는 다면 쿠퍼 자신도 같은 운명이 되어 결국에는 생명까 지 잃게 될 게 틀림없었다. 정말 난처한 상황이었다. 박수를 치던 트레이시가 문득 쿠퍼의 옆구리를 찌르며 무대를 가리켰다. - 저기 보세요, 저 배우 말예요. 대통령 각하와 너무 똑같이 생기지 않았 나요? 저 배우한테 각하 옷을 입히면 그냥 각하라고 해도 되겠네요. 뮤지컬에는 흥미가 없던 쿠퍼는 무심코 고개를 들어서 무대위의 배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쿠퍼는 그 자세에서 한동안 움직일 줄을 몰랐다. 배우 한테 콧수염만 붙이면 그대로 젤린도 보르딘 대통령이라고 해도 모든 사람 이 속아넘어갈 것 같았다. 쿠퍼의 머리가 재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 그래, 그거야! 젤린도 대통령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 방 법이 너무도 대담한 방법이어서 쿠퍼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만약 저 배우가 젤린도 대통령이 심장 수술을 받는 동안 대통령 행세를 한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쿠퍼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트레이시에게 말했다. - 트레이시, 난 일 때문에 그만 돌아가봐야겠어. 미안해. - 그런게 어딨어요. 모처럼 왔는데.......하지만 일 때문이라면 할 수 없지 요. 그만 가 보세요. 쿠퍼. 처음에는 샐쭉한 표정이던 그녀는 곧 쾌활하게 말했다. - 고마워, 트레이시. 다음에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 - 네, 어서 가보세요. 쿠퍼는 곧장 무대 뒤쪽에 있는 분장실로 가서 젤린도 대통령과 닳은 그 배우를 기다렸다. 그 배우는 이내 나타났으나 쿠퍼는 할 말을 잃고 배우를 계속 바라보기만 했다. 이 배우는 젤린도 대통령을 닮은 정도가 아니었다. 자기 앞에 존경하는 대통령 각하가 서 있는 것이라고 여기고 싶을 정도였다. - 안녕하세요? 에디가 먼저 인사를 했다. 쿠퍼가 악수를 청했다. - 에디 패커 씨, 나는 당신의 열렬한 팬이오. 그래서 이렇게 무례를 저질 렀소. 용서해 주시오. 팬이 찾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에디는 기뻤다. - 무례라니 천만의 말씀입니다. 반갑습니다. - 방금 당신의 연기를 보았소. 아주 인상적이었소. - 고맙습니다. - 사실은 패커 씨의 연기가 너무 훌륭해서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국의 위대한 통치자이신 젤린도 보르딘 대통령 각하께 패커씨를 소개하고 싶소. 대통령께 당신 이야기를 했더니 꼭 한번 데려오라는 말씀이 계셨소. 에디는 드디어 자신에게 행운이 시작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 영광입니다. 극단 모두가 초대되었나요? - 아닙니다. 패커 씨, 당신만 초대하는 겁니다. - 좋습니다. 곧 준비하겠습니다. 에디가 준비를 하는 동안 쿠퍼는 대통령에게 전화를 했다. - 각하,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각하와 똑같이 생긴 배우가 있습니다. 쿠퍼의 음성은 흥분 때문에 떨리고 있었다. - 나를 닮은 자는 있을 수 없어! 그건 내가 허락 할 수 없어! 대통령이 고함을 질렀다. - 물론 각하처럼 잘생기거나 품위가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닮은 점이 아주 많습니다. 제 생각에는 한번 만나보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각하의 대역으로 말입니다. 쿠퍼가 재빨리 말했다. - 대역이라구? 그래, 그럼 좋아. 어디 그 배우란 녀석을 한번 보자구. 에디는 검은색 리무진 뒷좌석에 쿠퍼와 함께 앉았다. 리무진은 곧장 대 통령궁으로 향했다. 리무진은 쿠퍼의 지시대로 정문이 아닌 후문으로 들어 갔다. 쿠퍼는 될 수 있으면 에디가 다른 사람의 눈에 드러나지 않기를 바 라고 있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대통령의 서재로 에디를 안내했다. 젤린도 대통령은 초조한 듯 서성거리고 있다가 에디를 보고는 놀라서 움 직이지 못했다. - 에디 패커 씨입니다. 어떻습니까? 쿠퍼가 말했다. - 정말 놀라운 일이군. 자네 말이 맞았어. 이 친구가 바로 나잖아? 젤린도가 소리쳤다. - 좀 닮은 것 같기는 합니다. 각하. 에디가 말했다. - 조금이라구? 자네의 코밑에 콧수염만 붙이면 아무도 구별하지 못할 거 야. 젤린도는 이렇게 말하고는 좀더 가까이 다가와서 에디를 찬찬히 살펴보 았다. - 정말 믿기 어렵군. 어떻게 이렇게 똑같이 닮을 수가 있단 말인가? 젤린도는 흥분했다. - 패커 씨, 잠시 실례해도 될까? - 물론입니다. 에디는 쿠퍼와 대통령이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옆방으로 가는 대통령과 쿠퍼를 지켜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 각하 어떻습니까? 쿠퍼가 물었다. - 해볼 만은 한데......문제는 시간이 흐르면 발각될 우려가 있다는 거야. 만약 저자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모를 때는 어떻게 하나? - 그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조금도 염려 마십시오. 제가 항상 곁에서 저자의 행동과 말투 하나하나를 가르치고 감시하겠습니다. 그리고 각하와 가까운 사람은 저밖에 없으니 저 얼굴에 콧수염을 붙이고 각하의 말투와 버릇을 집중적으로 가르친다면 아무도 모를 겁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다른 사람 앞에 나서지 않도록 하면 되지요. 젤린도는 한동안 생각하다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방법이 최선책이었 다. - 그래, 좋아. 저자와 교섭을 해보게. 서재로 돌아온 두 사람은 에디에게 새삼스럽게 다정한 미소를 지어보였 다. - 쿠퍼 대령이 자네 칭찬을 많이 하더군. - 예, 괜찮은 평을 받은 적도 있지요. 사실 롱 아일랜드 주간지에서는 저 를 보고...... 에디는 신이 나서 말했다. 골드다이아코스트의 대통령이 직접 칭찬하는 것이 어디 흔히 있는 일이겠는가? - 에디, 다른 일 좀 해보고 싶지 않은가? - 일이라뇨? - 내 밑에서 말이야. - 각하의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저는 이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극단과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그만둘 수 없습니다. - 그렇겠지, 하지만 이 일이 더 흥미 있을 걸세. 한 두 달 정도만 하면 엄청난 보수도 받을 수 있고. 말일세. - 하지만 저는 지금 극단을 떠날 수 없습니다. - 30만 달러 주겠네. 에디는 혹시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해서 반문했다. - 방금 30만 달러라고 하셨나요? - 그렇다네. 두 달 간 일해 주는 대가로 자네에게 30만 달러를 지불하겠 네. 에디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침을 삼켰다. - 제가 할 일이 뭐죠? 젤린도가 미소를 띠었다. - 아주 간단한 일일세. 자네는 그저 콧수염만 하나 붙이고 왔다갔다하면 돼. - 그럼, 두 달 간 콧수염만 붙이고 있으면 30만 달러를 주시겠다는 건가 요? - 그런 셈이지. 재미 삼아서 내 대역을 해보라는 걸세. 젤린도가 에디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 난 몇 주 동안 외국으로 비공식적인 출장을 가야하는데 국민들이 내가 안 보이면 걱정을 하거든. 자네도 아는지 모르지만 국민들은 나를 대단히 아끼고 존경하고 있지. 그러니까 자네가 할 일은 내가 없는 동안에 대통령 궁에 남아서 나처럼 행동만 해주면 되는 거야. - 하지만 각하의 가까운 친구분들은 알아채지 않겠습니까? - 아니 그렇지 않아. 젤린도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에게는 친구 같은 건 거의 없었다. 그에게는 그저 그의 비위를 맞추어 아부하는 사람들만이 있 었다. - 하지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에디는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젤린도가 미소를 짓더니 금고에서 현금 20만 달러를 꺼내 에디에게 주었 다. - 선금일세. 일이 잘되면 보너스로 10만 달러를 더 줄 수도 있어. 어때 해보겠나? 20만 달러를 받아든 에디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20만 달러는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처음 만져보는 엄청난 액수였다. 이 돈이면 어머니의 병원비와 빚을 갚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최소한 10만 달러가 더 생긴다.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조금도 없는 것이다. 이윽고 에디가 대 답했다. - 좋습니다. 해보겠습니다. 젤린도는 에디에게 악수를 청했다. - 좋아, 그럼 잘 부탁하네. - 그럼 호텔에 가서 짐 좀 챙겨 가지고 오겠습니다. - 그럴 필요 없네. 내 옷을 그냥 입으면 돼. - 하지만 극단에 그만둔다고 말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연 도중에 그냥 사라져서는 안 되는..... - 그런 거라면 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시오. 쿠퍼가 말했다. - 그럼 일은 언제부터 시작하죠? - 언제부터 시작하냐구? 젤린도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 벌써 시작하고 있잖아? 내 생각에는 말일세. 에디 자네는 이 일을 즐 기면서 할 수 있을 것 같단 말야. 자. 저쪽 방에 가서 옷들을 입어보게. - 그러죠. 에디가 젤린도의 침실로 걸어 들어가자 젤린도가 물었다. - 일이 끝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죽여버려야겠죠. 쿠퍼가 대답했다. 9 또 다른 배역 - 어디 맞는지 입어보시오. 쿠퍼가 옷장 가득 들어차 있는 군복 중에서 한 벌을 골라 에디에게 주었 다. 에디는 시키는 대로 했다. 옷들은 마치 에디를 위해서 맞추어둔 것처럼 아주 잘 맞았다. 에디와 젤린도 대통령은 신기하게도 신체 치수까지 똑같 았던 것이다. - 완벽하군. 쿠퍼는 감탄했다. - 자, 이제 이걸 붙여보시오. 쿠퍼는 상자 한 개를 내밀었다. 그속에는 젤린도 대통령의 것과 같은 모 양의 콧수염이 다섯 개나 들어 있었다. 에디는 그 중에서 하나를 꺼내어 코밑에 붙였다. 그러자 쿠퍼 앞에는 또 한 명의 젤린도 보르딘 대통령 각하가 서 있는 게 아닌가? 오랜 세월 젤린 도를 그림자처럼 보좌해 온 쿠퍼가 보기에도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정말 신기한 일이야! - 혹시 각하와 쌍둥이 아니오? 쿠퍼가 농담을 진담처럼 물었다. - 그럴 리가 있나요? 제 어머니는 시카고 태생인데요. - 좋소. 그럼 이제부터는 각하의 말투와 버릇을 배워야 하오. 자, 교관한 테 직접 배우도록 하지. 쿠퍼는 에디를 데리고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젤린도 대통령 은 에디를 쳐다보더니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소리쳤다. - 참, 이건 바로 나로군! 정말 신기한 일이야. 어디 한번 걸어보게, 에디. 에디가 방을 가로질러 걸음을 옮겼다. - 아니야, 틀렸어. 이렇게 하는 거야! 젤린도가 소리치고는 직접 행군하듯이 성큼성큼 걷는 걸음걸이를 보여주 었다. - 이게 바로 내 걸음걸이일세. 똑같이 할 수 있겠나? - 저는 배우입니다. 어떤 흉내든지 낼 수 있습니다. 에디는 젤린도의 걸음처럼 걸어보였다. - 제법 비슷하군. 자, 이제 자네 말하는 걸 들어봐야겠어. 자, 나를 따라 해 보게. 자, 조심해. 내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죽는 수밖에 없어! 에디가 따라했다. - 그게 아니야! 젤린도가 소리쳤다. - 그건 간드러진 계집애 목소리잖나? 감정이 그대로 들어가야 한단 말 야. 자신감 같은 감정 말이야. 나는 너 같은 작자는 언제라도 죽일 수 있다 는 생각을 할 때의 감정 말이야! 에디가 다시 하자 젤린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 좀 나아지긴 했지만 많이 연습해야겠네. 나는 이제 곧 떠나야 하니까 이제부터는 쿠퍼 경호실장과 함께 연습하도록 하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자네는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위대한 지도자 젤린도 보르딘 대통령 각하 라는 사실을 잊으면 절대 안 되네. 문제가 생기면 언제라도 쿠퍼 경호실장 과 의논하도록 하게. 경호실장은 항상 자네 곁에 그림자처럼 붙어서서 도 와줄 거야. -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원래 배우잖습니까? 연기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 그렇지, 자네는 배우지. 젤린도는 중얼거리면서 머지않아 시체가 되어서 누워 있을 에디의 모습 을 떠올리고는 소리 없이 웃었다. 멍청이 배우놈 따위 하나 죽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 그럼 자네가 이번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것으로 알고 모든 일을 맡 기겠네. 젤린도 대통령이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 만일 일이 잘못되면 우리 둘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걸 명심하게. 자네 도 알겠지만 아직 우리는 이 골드다이아코스트를 더 지배해야만 해. 최소 한 10년은 더 말야. 그 후에는 이 나라에서 사는 것도 좋고 아니면 경치 좋은 휴양지에서 살아도 좋겠지. 그때쯤이면 내 재산은 아마 100억 달러 정도로 불어나 있을 걸세. 물론 자네한테도 어느 정도는 분배할 생각이고. - 감사합니다, 각하. 쿠퍼는 이렇게 대답했지만 젤린도의 욕심이 지나치다는 생각을 했다. 그 는 사실 몇 년 내에 은퇴해서, 플로리다 해변에 있는 별장에서 편안한 여 생을 보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 꿈은 아득하게만 느 껴졌다. - 국민들한테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절대 안 돼. 조금도 틈을 주지 않고 눌러야 돼. 그들은 조금만 틈이 생겨도 잡초처럼 기어 오르거든. 그리고 반 항하는 놈들이 있으면 모조리 잡아다가 죽여버려야 해. - 잘 알고 있습니다. - 내가 병원에 있는 기간은 길어야 2개월이야. 그 배우 녀석이 그 동안 사람들을 잘 속여만 주면 되는 거고. 그렇게 되면 내가 심장 수술을 받았 다는 건 아무도 모르게 될 걸세. - 의사와 간호사들은 어떻게 할까요? 젤린도가 기분 나쁜 미소를 떠올렸다. -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게. - 그렇게 하죠. 의사와 간호사도 모두 죽여야 뒤탈이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대통령도 그것을 바라고 있을 것이었다. - 자, 그럼 나는 병원으로 가겠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후문으로 빠 져나갈 걸세. 그리고 이건 노파심에서 하는 얘기인데, 그 멍청이 배우 녀석 을 단 한시도 혼자 둬서는 안 돼. 의심받을 만한 짓은 절대 못하게 해야 하네. 강심장의 잔혹한 독재자 젤린도 대통령도 뭔가 두려운지 말이 많아지고 있었다. - 걱정 마십시오. - 만약 수술이 잘못되어서 내가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자네는 그 배우놈 을 처치하고 해외로 망명하게. 젤린도는 새삼 비장한 표정이 되어서 말했다. -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각하. 쿠퍼가 확신에 차서 힘차게 말했다. - 나도 그렇게 믿네. 두 사람은 굳은 악수와 포옹을 하고 헤어졌다. 그날 저녁, 에디는 푹신한 젤린도 보르딘 대통령의 침대에서 잠을 청했 다. 밤 12시경이 되자 침실문이 열리며 나이트 가운 차림의 두 여자가 소 리 없이 들어와서는 가운을 벗어버렸다. 놀랍게도 두 여자는 가운 속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아서 그녀들의 미 끈한 알몸이 부드러운 조명 아래 그대로 드러났다. 에디는 숨을 죽이며 여자들을 지켜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침이 꿀꺽하고 넘어갔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름다운 두 여자의 알몸을 한꺼번에 보고 있는 것이었다. 두 여자가 침대로 다가와서 그의 양옆으로 누웠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아니 어떻게 해야 할까? 에디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 어서 난감했다. - 각하, 주무시나요? 달콤한 음성이 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한 여자의 손이 그의 가슴을 더 듬었고 다른 여자의 손은 곧장 그의 팬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아아... 에디의 몸은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판단을 할 수가 없어서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누워 있었다. - 아이, 우리가 왔는데 주무시는 거예요? - 피곤해서 그러세요? 그렇다면 가만 누워계세요. 그녀들은 애교를 부리며 그의 옷을 팬티까지 모두 벗겨내서 알몸으로 만 들어 버리고 정성스런 애무를 시작했다. 에디는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젤린도 대통령이 평소에 이렇게 여자와 즐 겼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비록 외국에서 활동하고 잇지만 그래도 항상 고국을 걱정하고 있는 수지 는 가슴이 벅차 오르는 걸 느꼈다. - 결국에는 그렇게 되지 않을까? - 각하, 너무 멋져요. 각하가 이렇게 멋져 보이기는 처음이에요. 수지는 감격에 겨운 듯 갑자기 에디의 목을 끌어안더니 입에 키스를 했 다. 그러자 에디는 그 달콤한 충격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20세기 최고의 여인인 수지 다이아와 키스를 하다니! 에디는 자신의 입술을 가만히 만져보았다. 다행히도 그 달콤함에 녹아버 리지는 않았다. - 이 키스는 그 보답이에요. 전에는 제가 각하에게 좀 무뚝뚝하게 대했 었는데, 이제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시죠? - 수지가 키스를 해줄 줄 알았으면 진작에 나도 민주화 운동을 할 걸 그 랬어. 만약 그랬다면 키스가 아니라 수지와 결혼도 할 수 있었을 거야. - 각하는 정말 많이 변하셨어요. 얼굴도 전보다 훨씬 젊어 보이고 밝아 지셨고, 또 농담도 잘하시고. 수지는 이렇게 말하면서 에디를 새삼스럽게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 그러고 보니 각하하고 제가 아는 어떤 사람하고 많이 닮은 것 같아요. 에디는 그 어떤 사람이 자기가 아닐까 생각하며 물었다. - 내가 누군가와 닮았다는 건가? 그게 누구지? - 연극 배우인데 저와 같이 공연한 적이 있는 사람이에요. - 그 행복한 남자의 이름이 뭔지 궁금하군. 이름도 알고 있나? - 에디 패커요.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는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헤 어지고 말았어요. 착하고 어리숙한, 어떻게 보면 바보 같기도 한 남자였어 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호감이 갔거든요. 수지는 문득 눈길을 바다 멀리로 돌렸다. 바람이 그녀의 긴 금발을 흩날 렸다. 그녀는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천천히 머리를 쓸어 올렸다. - 에디란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에디는 가슴이 젖어드는 걸 느꼈다. - 그랬지만 기회가 없었어요. 주변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또 자칫 잘못하면 스캔들에 휘말리기 때문에..... 그래서 뉴욕의 배우들이 여기 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극장으로 찾아가 봤어요. 그런데 글쎄...... 수지는 갑자기 눈물을 글썽였다. - 수지, 왜 그러지? - 그 사람이 실종되었다는 거예요. 첫날 공연만 마치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는 거예요. 경찰에도 신고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대요. 그래서 그 사 람들은 모두 에디 패커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수지는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 아아, 수지는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에디는 그녀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 수지, 내 생각에는 그 에디란 사람은 죽지 않았을 것 같아. 수지가 그 렇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죽어서는 안 되거든. - 그럴까요? - 좋은 방법이 있어. 수지 혹시 재키 스탠우드란 사람을 아나? - 점성술사 말예요? - 맞아, 그 사람한테 지금 당장 전화해서 알아보는 거야. 에디 패커란 남 자가 죽었나 살아 있나를 말이야. - 그게 좋겠어요. 전화는 에디가 했다. 잠시 후, 전화 저쪽에 재키가 나오자 에디는 자신을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국의 젤린도 보르딘 대통령이라고 밝히고 수지 다이아를 바꾸어 주었 다. 수지는 재키가 시키는 대로 생년월일 등을 불렀다. 그러자 재키가 에디 패커의 생년월일도 물었다. 수지가 난감한 얼굴로 에디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에디의 생년월일을 알 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젤린도 대통령으로 변장을 하고 있는 에디 가 직접 나서서 밝힐 수도 없는 일이었다. 조금 후에 수지가 다시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 에디의 생년월일을 재키가 알고 있어요. 어느 유명한 사람과 같이 온 일이 있어서 적어놓은 게 있다는군요. - 그게 정말인가? 그거 아주 잘됐군. 일이 생각보다 잘 풀리고 있었다. 잠시 후, 수화기를 내려놓은 수지는 잔뜩 들떠서 말했다. - 제가 에디와 결혼할 운명이래요. 글쎄, 그리고 지금은 어느나라의 대통 령이 되어 있을 거래요. 이 말이 믿어지나요? 이 말을 믿어야 하는 건가 요? 수지는 좋아하면서도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 나는 믿소. 수지. - 잘 믿어지지는 않지만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제가 그 사람하고 결 혼하게 되면 각하께서도 축하해 주실 거죠? - 그럼, 당연히 수지와 에디의 앞날을 축하해 줘야지. - 고맙습니다. 각하. - 그런데, 에디가 어느 유명한 여류 명사와 같이 왔었다는데 그 여자가 누굴까요? 수지는 그것이 걱정되는 것 같았다. - 단순한 사업 관계로 알던 사람이 아닐까? -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 두 사람이 결혼할 운명이라면 그런 건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 같 아. - 각하는 언제나 저한테 좋은 말씀만 해 주시는군요. 그녀는 새삼 에디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말을 이었다. - 정말 에디와 각하와는 너무 많아 닮았어요. 마치 그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예요. 그래서 각하께 더 친밀함을 느끼는 것 같아 요. 에디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다. 수지, 내가 바로 에디 패커요. 사랑하는 나를 안고 싶으면 안아도 되오! 수지, 어서 나를 안아요. 그러나 수지는 에디를 안지 않았다. - 각하, 죄송해요. 제가 너무 수선을 부렸죠? - 천만에 말씀, 난 수지 같은 아름답고 젊은 여성과 같이 있는 것만으로 도 너무 즐거워. 얼마 전에 수지가 굉장한 수집가라는 소문을 들었는데....... 에디는 분위기를 바꾸려고 화제를 돌렸다. - 네, 각하. 오래 된 물건을 모으는 게 취미예요. 주로 이집트의 골동품 들을 모으고 있죠. 전에 뉴욕에서 <투탕카멘의 노래>라는 연극에 출연했 던 것도 사실은 이집트 골동품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출연했던 거예요. 그런데 하나 아쉬운 게 있어요. - 그게 뭐지? - 꼭 갖고 싶은 것이 잇는데 그걸 아직 못 구했거든요. 각하는 잘 모르 시겠지만 미국 배우 중에 마틴 그로스라는 분이 있어요. - 난 그 사람 잘 아는데. 수지가 의외라는 듯이 반문했다. - 각하께서 마틴 그로스 씨의 팬인가 보죠? - 그, 그런 셈이지. 에디는 실수할 뻔했다는 걸 깨달았다. - 그 마틴 그로스 씨가 소장하고 있는 골동품 중에 이집트의 처녀상이 있거든요.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나임의 처녀상' 이라고 불리는 것인 데, 순결한 처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학계에서는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죠. 그 처녀상을 마틴 그로스 씨가 가지고 있어요. 그 처녀 상을 저한테 팔라고 애원했지만 그로스 씨는 깨끗이 거절했어요. 그분도 나임의 처녀상을 가장 아끼기 때문에 절대 팔 수가 없다는 거예요. 3백만 달러를 제시햇지만 역시 거절당하고 말았어요. - 그런 일이 있는 줄은 몰랐소. 그런데 마틴 그로스 씨는 실종 상태가 아니던가? 매스컴에서 마틴 그로스 씨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 은데. - 맞아요, 각하. 그로스 씨는 지금 전혀 행방을 알 수가 없는 상태죠. 어 쨌든 그로스 씨가 무사했으면 좋겠어요. 에디도 잠시 마틴 그로스 씨가 무사하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 미국 대사관 지하에 있는 옐로 박스에서는 회의가 열리고 있었는데, 참 석자들의 얼굴이 매우 밝아 보였다. - 보르딘 대통령의 수술은 완료됐지만 상태는 그리 양호한 편이 아닙니 다. - 마네킹은 대통령궁에서 임무를 완수했으며 두통 역시 모든 일을 잘하 고 있습니다. - 현재 골드다이아코스트에서는 언론 검열이 해지된 것을 필두로 해서 민주화의 바람이 일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우리의 계획이 잘 진행되고 잇다는 증거입니다. - 아직 우리의 일은 산재해 있으나 이런 방식대로 진행이 된다면 우리는 골드다이아코스트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킬 수 있을 겁니다. - 경호실장인 쿠퍼 대령에 대해서 말해 보시오. - 쿠퍼 대령의 방해 가능성은 아직 우려할 정도는 아닙니다. 또한 만약 의 경우 쿠퍼 대령을 제거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오히려 혼란이 가중 될뿐더러 후에는 우리 미국의 국제적인 입장이 난처해질 우려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능한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개입은 자제해야 합니다. - 맞습니다. 직접적인 개입은 후에 우리 미국의 입장을 아주 곤란하게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런 곤란한 경우를 많이 경험한 바 있습니다. 따 라서 앞으로는 그런 경험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 땅콩의 성능은 어떻소? - 땅콩은 가장 최근에 본부에서 개발한 것으로 30일 동안 사용할 수 있 는 고성능 건전지를 장착하고 있기 때문에 땅콩의 성능에 대해서는 염려하 지 않으셔도 됩니다. 설명을 보태자면 땅콩은 인체 내의 일부 단백질을 전 해질로 분해해서 에너지화하기 때문에 크기에 비해서 그렇게 오랫동안 사 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인체에 영향은 없습니까? - 단백질 분해량은 하루에 1그램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땅콩이 장착된 곳에서 집중적으로 단백질이 분해될 경우에 는 피부에 지름 1센티미터 정도의 함몰이 일어날 우려가 있습니다. 원칙적 으로 땅콩은 혈액에서 단백질을 공급받기 때문에 인체에 혈액 공급이 원활 하지 않을 경우에는 함몰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 그렇다면 땅콩이 발각될 우려도 있겠군요? -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땅콩은 엉덩이 부위에 장착하게 되어 있고, 또 그곳은 감각이 둔한 곳이어서 예민한 사람이 아니면 땅콩을 찾아낼 가 능성이 적습니다. 현재 땅콩을 장착한 두통은 감각이 둔한 편에 속합니다. - 땅콩의 기능이 정지할 수도 있습니까? - 특별히 강한 외부 충격에 의해 파손되는 경우 외에 땅콩의 기능이 정 지되는 경우는 단 한 가지뿐입니다. 땅콩을 장착한 사람이 욕조 속에 들어 갔을 경우에는 기능이 정지됩니다. 그러나 욕조에서 나오면 기능은 다시 살아납니다. - 그럼 샤워할 때는 어떻습니까? - 부분적으로 잡음이 발생하면서 전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지만 그래 도 내용을 파악할 수는 있습니다. - 결론적으로 물에는 제한을 받는다는 것이군요? - 그렇습니다. - 어쨌든 우리에게 놀라운 땅콩을 선사한 본부한테 감사해야겠군요. 13 젤린도의 동물원 대통령궁으로 돌아온 에디는 미국에 있는 신디 윌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그녀의 어딘가 힘이 없는 음성이 건너오자 에디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 다. - 여보세요, 여보세요? 에디는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 신디, 에디요. - 에디? 에디? 지금 어디예요? 대체 경찰서에서는 어떻게 된 거죠? 신디는 총알처럼 질문을 퍼부어 댔다. - 어디 갇혀 있는 건 아니죠? 고문 변호사한테서 당신이 마피아한테 빚 을 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돈 갚았어요. 그러니까 조금도 걱정하지 말고 이리로 오세요. - 신디, 노무 고맙소. - 에디, 지금 우는 거예요? - 그래요, 신디. 당신은 나에게 너무나 잘해줬는데 난 신디에게 아무 것 도 해줄 수 없는 게 마음이 아프오. 당신을 사랑하면서도 당신한테 아무런 사랑도 줄 수 없는 게 속상하오! 에디는 가슴이 무너지는 듯했다. - 그래요, 에디. 잘 알고 있어요. 울지 말아요. 에디. 당신이 자꾸 울면 나도 슬퍼진단 말예요. 이윽고 신디도 울음을 터뜨렸다. - 신디, 됐소. 그만 울어요. 그리고 난 잘 있으니까 조금도 걱정 말아요. 늦어도 두 달쯤 후에는 미국에 돌아갈 수 있으니까 그때 봐요. - 에디, 지금 당신 어디 있는 거죠? -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국이오. 뮤지컬 공연 때문에 와 있는 거니까 두 달 후쯤에는 돌아갈 수 있소. 에디는 무심코 대답을 해버렸다. - 알겠어요. 그럼 에디, 무사히 공연 마치고 돌아오세요. 사랑해요, 에디. 그녀의 음성에 다시 울음기가 섞였다. - 신디, 잘 있어요. 에디는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한동안 멍하니 창 박을 내다보면서 가만히 있었다. 신디의 헌신적인 사랑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잠시 후, 에디는 거실을 나왔다. 산책이나 하면서 우울한 기분을 달래볼 까 해서였다. 정원을 거닐던 그는 갑작스런 큰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의 앞에서 병사 두 명이 '충성' 하고 경례를 한 것이었다. 그들 뒤로는 녹색 페인트로 칠해진 견고한 철문이 있었다. 에디는 그 철문 안쪽이 궁금했다. - 문 뒤에는 뭐가 있나? 병사 둘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 문 뒤에 뭐가 있느냐고 물으셨습니까? - 그래. - 동물원이죠. 각하의 개인 동물원. 그 철문은 젤린도의 동물원에서 외부로 통하는 문이었으나 에디가 그것 을 알 리가 없었다. - 문을 열어라. 들어가 봐야겠다. - 예, 각하. 병사가 비켜서서 열쇠를 구멍에 집어넣고 돌리자 철컥하고 문이 열렸다.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에디는 젤린도가 대체 어떤 동물 을 기르고 잇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곧 그것은 의문으로 변했다. 동물은 보통 지상에서 기르는데 지하에 동물원이 잇다는 게 이상했다. 곧 그 의문은 풀렸다. 그가 계단을 다 내려오자 그의 시야에 드러난 비 참한 상황은 젤린도의 동물원이 어떠한 곳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곳은 죄수들로 가득 차 있는 감방이었다. 감방은 모두 마흔 개 가량 되어 보였으며 그곳에는 모두 대여섯 명씩의 죄수가 누더기를 입은 모습으 로 들어차 있었다. 병사 세 명과 장교 한 명이 당황한 얼굴로 달려왔다. 그 중 중위 계급장 을 단 장교가 말했다. - 각하, 각하께서 오신다는 연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 아, 괜찮다. 에디는 첫 번째 감방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 이 사람들 죄목이 뭔가? 중위는 당황해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곳의 죄수들은 바로 젤린도 보 르딘 대통령의 명령으로 체포되었기 때문에 중위가 그것을 알 리가 없었 다. 중위는 등에 식은땀을 흘리며 어떻게든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 저, 그. 글쎄요. 저......각하, 아시겠지만 이자들 모두가 흉악범들입니다. 대부분 교수형이나 총살형을 당할 놈들이지요. - 이 많은 사람들 모두가 사형선고를 받았단 말인가? 이 감옥에는 대체 몇 명이나 수감되어 있나? - 정확히 231명이 수감되어 있습니다. - 그럼 231명 모두를 사형시킨다는 건가? 에디는 뭔가 잘못되어 있다고 느꼈다. 그는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이제 겨우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년 죄수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 넌 죄목이 뭐냐? 비참할 정도로 말라버린 소년은 그를 노려보더니 날카롭게 말했다. - 당신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말했다가 사형선고를 받았다.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에디는 이번에는 노인에게 물었다. - 당신은 왜 잡혀왔소? - 정말 모르는 거요. 아니면 괜히 심심해서 우리를 갖고 노는 거요? 당 신 차가 지나갈 때 침을 뱉었다고 잡아온 거 아냐? - 그래서 사형선고를 받았단 말이오? - 그렇소. 에디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악몽이라고 생각했 다. 젤린도 대통령이라는 인간이 대체 어떻게 된 인간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에디는 231명의 죄수한테 모두 확인을 했다. 놀랍게도 그들 모두 젤린도 대통령에게 모욕적인 행동을 했다는 이유, 또는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이 유로 체포되어서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였다. 에디는 종이와 펜을 꺼내서 죄수 전원을 즉각 석방하라는 명령서 한 장 을 작성해서 간수장인 중위에게 전했다. - 각하, 정말 이렇게 하실 겁니까? 중위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그가 아는 대통령은 도저히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대통령이 벌써 치매에라도 걸린 건가? 중위는 머리를 흔들었다. -물론이다. 즉각, 전원 석방하라. 그리고 석방자들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조처를 취하라. 모든 석방자한테는 위로금과 교통비로 천 달러 씩을 지불하라. 돈이 부족하면 비서실에서 받아 가도록, - 예, 각하. 에디는 마이크를 받아들고 말했다. - 여러분, 그간 부당하게 갇혀서 많이 고생하셨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이 절대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제 모두 귀가하셔서 가족의 품으로 돌 아가시기 바랍니다. 감방에는 일제히 환호성이 터졌다. 그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에디의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죄수들 중에 한 명이 다가와서 젤린도에게 악수를 청했다. 노인은 용모 는 형편없었지만 눈빛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 각하의 달라진 모습을 보니 기쁘기 그지없소. 이 주커만을 다 풀어주 니 말이오. 이제 이 땅의 민주화를 꿈꿀 수 있게 되었소. - .......... 에디는 주커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서 우물거렸다. - 중위, 모두 다 풀어주었겠지? - 예, 한 명만 남기고 모두 석방시켰습니다. - 그 사람은 왜 석방하지 않았지? - 외국인이기 때문에 별도의 명령이 있기 전에는 석방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석방시키지 않았습니다. - 그곳으로 안내해! 중위가 앞장섰다. 외국인은 40호 감방에 단독 수감되어 있었다. 긴 머리에 누더기 같은 옷 을 걸친 모습은 여느 죄수와 다를 바가 없었다. 철창 앞에는 죄수에 대한 간단한 기록이 붙어 있었다. 국적: 미국 직업: 연극 배우 성명: 마틴 그로스 무심코 그것을 읽던 에디는 기겁했다. 마틴 그로스가 이곳에 갇혀 있었 던 것이다.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당장 저 죄수를 석방하라! 중위는 겁에 질려서 총알처럼 움직였다. 곧 안으로 들어간 중위는 죄수 를 부축해서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죄수가 겨우 고개를 들고 에디를 바라보았다. - 이, 이것 봐, 보르딘 대통령 나리, 왜 나를 나오라고 하는 건가? 그렇게도 찾던 마틴 그로스가 틀림없었다. - 마틴 그로스 씨, 석방시켜 주려는 거요. 에디는 마틴과 기쁨에 찬 해후를 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할 수 없어서 안 타까웠다. - 날 석방시켜 준다고? 마틴의 얼굴이 서서히 밝아졌다. - 정말 날 석방시켜 준다는 거요? - 그렇습니다. 마틴 씨. 마틴 씨가 수감된 이유는 뭔가요? 에디가 중위에게 물었다. - 각하, 벌써 잊으셨습니까? 자칭 민주평화수호단인가 뭔가 하는 평화기 사단에 자금 지원을 하다가 체포됐잖습니까? - 그랬군, 당신이 그런 짓을 했소? - 맞소, 내가 그랬소. 그래서 석방할 수 없다는 거요? - 아니오, 석방하겠소. 중위, 이 사람에게 옷과 천 달러를 주고 미국행 비행기표를 사주도록, 지금 당장! - 알겠습니다, 각하. - 마틴 씨, 혹시 에디 패커라고 알고 있소? - 에디 패커? 연극 배우 에디 패커 말이오? -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가 바로 에디 패커요. - 에디 패커? 그러고 보니 당신과 에디 패커가 좀 닳은 것도 같소. - 패커 씨를 만나거든 안부를 전해주시오. 실은 당신을 석방하는 건 패 커 씨 때문이기도 하니까. - 패커의 덕이라구요? 그렇다면 내가 그 사람한테 아주 큰 신세를 진 게 되는군요. - 그럼 마틴 그로스 씨, 잘 가시오. 행운을 비오. - 패커와 당신은 어떤 관계요? - 난 그냥 팬일 뿐이오. 마틴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중위와 함께 감옥을 나갔다. 에디가 뒤에서 손을 흔들었다. 14 땅 콩 쿠퍼 대령은 초조한 듯 서성거리다가 전화기를 끌어당겨서 수화기를 들 었다. 한 시간 전에 들은 소식에 의하면 대통령의 수술경과가 나빠지고 있 었다. 신호음이 가고 전화 저쪽에서 이내 담당 의사가 전화를 받았다. - 쿠퍼 대령이오. 수술 경과는 어떻소? - 아직 모릅니다. - 그럼 각하께서 어떻게 된다는 건가? -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만, 수술 도중에 호흡 장애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뇌에 어떤 영향을 줒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 모든 장비를 동원해서 검사하고 있습니다. 쿠퍼는 자신도 모르게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 그럼, 뭐요? 각하께서 소생할 가능성이 없다는 건가? - 현재로서는 뭐라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앞으로 48시간은 지켜봐야 합니다. - 최선을 다해주시오. 만약 각하께 이상이 생긴다면 당신을 포함한 수술 팀 전원은 무사하지 못할 거요. -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의사는 공포에 질려서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 잠깐, 당신 설마 허튼 수를 쓰는 건 아니겠지? - 예? 허튼 수라니요? - 각하를 없애버리려는 생각은 아니겠지? - 무, 무슨 그런 말씀을! 대령님, 저는 맹세코 최선을 다 했습니다. 정말 억울합니다. 의사의 음성은 거의 울음에 가까웠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일 수도 있지. 그럼 부탁하네. 쿠퍼는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만약 젤린도 대통 령이 사망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쿠퍼 그 자신의 운명도 끝장난 다. 그는 아마 순식간에 성난 군중들에 의해 끌려나간 뒤, 형장으로 가기도 전에 돌에 맞아죽고 말 것이다. 길거리에서 죽은 개처럼 끌려 다닐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자, 냉혈한인 그도 조금 두려웠다. - 그렇다면 아예 외국으로 도주를? 도주를 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지금 이대로 공항에 나가서 비행기만 타면 된다. 누군가 그를 알아보면 급한 일로 출장을 간다고 하면 된다. 아니면 젤린도 대통령의 전용 비행기를 타고 멕시코나 남미 쪽으로 날아갈 수도 있다. 10억 달러에 달하는 그의 재산은 침묵의 금고인 스위스 은행에 있기 때문에 돈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특히 남미 쪽에서는 안전한 주거지를 보장받는 데 거의 문제가 없다. 그곳에서 고대 이집트 왕이 부럽 지 않을 정도로 잘살 수 있다. 하지만 쿠퍼는 그런 생각은 아직 좀 이르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도 최소 한의 의리라는 게 있었다. 어쨌든 좀더 경과를 지켜본 뒤에 결정하는 게 옳을 것 같았다. 그는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독한 위스키를 한 잔 마셨다. 이튿날, 출근을 하자마자 부관한테서 보고를 받은 쿠퍼는 벌컥 화를 내 면서 책상을 내려쳤다. - 뭐라구? 죄수들을 모두 석방했다구? 그것도 돈까지 줘서? 부관은 대통령의 명령으로 젤린도 동물원의 죄수 전원을 석방 했다는 사 실을 보고했다. - 완전히 미쳤군! - 예? - 아냐, 각하께 그러는 게 아니다. 쿠퍼는 대통령 집무실로 달려갔다. - 대체 어젯밤에는 무슨 짓을 한 거요? 내가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그런 일을 저지르면 어쩌자는 거요? 쿠퍼는 참을 수가 없었다. - 죄수 석방에 대한 얘기인가요? 에디가 뻔뻔스럽게 물었다. - 그렇소. - 아, 그거라면 내가 아니라 거리의 어린아이들이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 다. 그곳에 수감되어 잇는 사람들 모두는 아무런 죄도 없이 끌려와서 사형 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대령님도 알다시피 난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성인입니다. 내 소신에 따라, 그 사람들을 석방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 문에 석방했을 뿐입니다. 이건 또 무슨 궤변인가? 쿠퍼는 어이가 없었다. - 당신은 단지 내가 시키는 대로 대역을 할뿐이라는 걸 잊은 모양이군. - 잊지 않았습니다. 난 내 자신이 대역이라는 걸 잘 기억하고 있어요. 쿠 퍼 대령님. 정 내가 못마땅하면 이 자리에서 젤린도 대통령의 옷을 벗어놓 고 이곳을 나가겠습니다. 계약을 파기하면 되잖습니까. 나도 이 일을 하면 서 잘못된 것을 보고도 참느라고 울화병이 다 생길 지경이란 말입니다. '제기랄, 이 광대 녀석이 또! 쿠퍼는 에디에게 또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 됐소, 하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합시다. 나중에 대통령 각하가 돌아오시면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소? 내 입장도 좀 헤아려주시 오. 쿠퍼는 화가 치밀었지만 한 발 물러섰다. 광대 녀석이 정말 돌아간다고 나서면 모든 일은 여기서 틀어져 버리는 것이다. - 좋습니다. 앞으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에디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대답했다. - 그럼 이만. 쿠퍼가 나가고 나자 아름다운 금발 여자 한 명이 들어와서 말했다. - 각하, 준비됐습니다. - 준비라니? 에디는 반문했다. - 깜빡 잊으신 모양이신데 매주 수요일 오전에는 안마를 받으시잖아요? 설마 제가 안마사라는 것도 잊으신 건 아니시겠죠? - 아, 그렇지? 내가 깜빡했군. - 그럼 따라오시죠. - 그러지. 에디는 미녀의 유혹을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안마란 걸 아직 한 번도 받아본 일이 없는 그는 그것을 한번 경험해 보고 싶었다. 안마사를 따라간 방에는 거품을 뿜어내고 있는 황금색 욕조와 안마대, 화장대, 사우나 같은 것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 각하, 안녕하세요? 안마할 준비를 하던 미모의 여자 한 명이 인사를 했다. 그러고 보니 그 녀는 얼마 전에 그의 침실에 들어왔던 여자 중의 한 명이었다. 그녀는 미 소와 함께 다가오더니 에디를 소파에 앉게 하고 팬티까지 남김없이 벗겨주 었다. 환한 대낮에 그것도 두 미모의 여자 앞에서 벌거벗은 에디는 아무래 도 어색해서 머뭇거렸으나 한편으로는 야릇한 기분 대문에 기대에 부풀었 다. 여자는 알몸에 가운을 입혀주더니 안마대로 안내했다. - 각하, 이곳에 누우시죠. - 아, 그러지. 어느새 부드러운 옷감으로 만든 란제리 스타일의 옷으로 갈아입은 안마 사와 여자는 에디의 몸에 향기가 짙은 크림을 바르고는 강하게 에디의 전 신을 주물렀다. 그리고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는 가끔 그 녀의 부드러운 옷감에 감싸인 탐스런 젖가슴으로 에디의 전신을 쓸어주기 도 했다. 특히 허벅지와 아랫배 부분에 집중적인 안마를 해서 그의 남성은 힘차게 솟아 있었다. 에디는 근육이 풀어지면서 말할 수 없이 기분이 좋아 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동안 자신이 얼마나 긴장하면서 나날을 보냈는 지를 깨달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매일을 젤린도 대통령이 되어서 살 수만 있다면 얼 마나 좋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매일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여자들 속에 묻혀서 살며 수많은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리며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지상 천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는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 각하, 이제 욕조로 들어가시죠. - 그러지. 에디는 시키는 대로 거품이 부글부글 뿜어지고 있는 황금색 욕조에 몸을 담갔다. 따뜻한 물과 거품들이 온몸을 두드리듯이 감싸자 너무도 기분이 좋아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여 자들이 물 속으로 들어와서 그의 몸에 비누칠을 하고 구석구석 닦기 시작 했다. 슬며시 눈을 뜬 에디는 여자들이 모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 으로 변해 있는 걸 보고 조금 당황했다. 그녀들의 탐스런 젖가슴이며 허벅 지 사이의 은밀한 부분이 거품들 사이로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당황한 에디는 헛기침을 하고는 눈을 꼭 감아버렸다. 여자들이 양쪽에서 그를 안아오자 그녀들의 젖가슴과 허벅지의 탄력이 그대로 느껴졌다. 마치 부드러운 피부로 만들어진 침대 속에 누워있는 느낌이었다. - 각하,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신가요? 나른한 비음이 섞인 음성으로 한 여자가 묻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의 한 손이 그의 남성을 물 속에서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그것은 다시 힘차 게 솟아올라왔다. - 무, 무슨 소리지? 에디는 당황해서 우물거렸다. - 오늘은 피곤하신가요? 다른 여자가 그의 뺨에 키스를 하면서 물었다. - 아니, 피곤하지 않아. 에디는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 그럼 즐겁게 해드릴께요. 각하..... 여자가 에디의 한 손을 그녀의 젖가슴으로 가져갔다. 탄력 있고 큰 젖가 슴이 손바닥 가득 만져졌다. 다른 한 여자는 그의 입술에서부터 키스를 하면서 목으로 가슴으로 점차 내려왔다. - 이, 이래서는 안 되는데...... 에디는 자신이 점차 타락해 가는 것만 같아서 괴로웠다. 하지만 그의 몸 이 말을 안 듣고 있었다. 그의 엉덩이 부분을 손으로 쓸어주던 안마사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멈칫했다. - 왜 그러지? 에디가 물었다. - 각하의 왼쪽 엉덩이에 뭔가 딱딱한 것이 들어 있어요. - 무슨 소리야? 안마사가 그의 손을 끌어다가 왼쪽 엉덩이 부분에 대주었다. 뭔가 자그 마한 것이 손가락 끝에 만져졌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부터 왼쪽 엉덩이 부분에 뭔가 이물질이 들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걸 깨달았다. - 이게 뭘까? 종양 같은 건가? - 종양 같은 건 아니고 어떤 자그마한 물체가 피부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아요. 틀림없이 종양은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각하. 제 손가락 감각은 믿을 만 하거든요. 에디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이런 물건이 엉덩이에 들어 있는 것인 가? 그는 혹시 쿠퍼 대령과 젤린도 대통령이 그를 감시하거나 아니면 어떤 위해를 가할 목적으로 집어넣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에디는 슬며시 겁이났다. 누군가 버튼만 누르면 엉덩이를 순식간에 날려버리는 폭탄일 수 도 있는 것이다. 그것도 지금 당장이라도 말이다. 그렇게 되면 끔찍하게도 엉덩이가 없는 인간이 되고 만다. 수지 다이아와의 결혼은 물론이고 신디 윌슨도 만날 수 없다. 그건 상상하기도 싫은 엄청난 비극이다. 그는 갑자기 엉덩이 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것만 같았다. - 아, 이제야 생각났어. 그건 말이야 체내 건강을 체크하기 위해서 며칠 전에 집어넣은 최신 의료기구인데 그만 깜빡했군. 에디는 그것을 당장 제거해 버리기로 하고 만약을 생각해서 거짓말을 했 다. - 네, 그러셨군요. - 자, 누가 그걸 지금 당장 꺼내줘야겠는데. - 병원에서 꺼내는 게 아니구요? - 간단한 거니까 아무나 꺼내도 돼. 에디는 욕조에서 일어나 안마대에 엎드렸다. - 자, 안마사. 얼른 꺼내. 작은 면도칼 같은 것으로 살짝 흠집만 내면 빠 져 나오는 거니까. - 아, 알겠습니다. 안마사는 좀 겁이 나는지 주춤거렸다. - 어서. 에디의 다그침을 듣자 그녀는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면도칼을 들고 왼손 으로는 피부와 함께 엉덩이 속의 자그마한 물체를 집었다. 그리고 살짝 면 도칼을 갖다대자 피부가 절개되면서 아주 작은 원통형 물체가 튀어나왔다. 에디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두 여자가 엉덩이 부위에 약을 바르기를 기다 렸다가 안마대에서 내려왔다. - 각하, 그럼 오늘은 그냥 가시는 건가요? 안마사가 아쉬움에 가득 찬 음성으로 물었다. - 그래 오늘은 일이 좀 많아서 안 되겠어. 다음 기회에 좀 여유 있게 시 간을 보내도록 하지. 옷을 입은 그는 대통령 집무실로 돌아와서 그 물체를 살펴보았다. 검정 색으로 빛나는 그것은 트렌지스터의 부품처럼 보일뿐, 그가 알아낼 수 있 는 물건이 아니었다. 에디는 그것을 책상위에 그냥 놓아둘까 하다가 만약 을 생각해서 화장실 변기에 던져 넣고 물을 내렸다. * 미국 대사관 지하에 있는 옐로 박스에서는 긴급 회의가 열렸다. 팀장인 렌덜 페퍼가 심각한 어조로 운을 떼었다. - 땅콩이 두통의 몸에서 제거되었소. - 언제 제거되었습니까. - 약 한 시간 전이오. - 어떻게 발각이 된 걸까요? - 안마사 때문이었소. 자, 들어보시오. 렌덜 페퍼가 테이불 위에 놓인 녹음기를 작동하자 에디와 안마사의 대화 가 생생하게 흘러나왔다. - 현재 땅콩의 행방은 알 수 있습니까? - 수신 상태로 볼 때 갑자기 잡음이 심하게 발생한 후 수신이 완전히 끊 어진 것으로 보아 물 속에 던져버린 게 아닌가 생각되오. 두통이 우리의 정체를 알아냈을까요? - 땅콩이 작동 불능 상태가 되기 전의 대화를 분석해 봤지만 그런 징후 는 보이지 않소. 물론 이것은 순수하게 대화만을 분석했을 때의 경우요. - 혹시 쿠퍼 대령 측에서 땅콩에 관해서 알아냈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 그 부분에 대해서는 좀더 신중한 분석이 필요하지만 현재로서는 없소. -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아직 한 개의 땅콩이 남아 있소. 그러나 땅콩을 또다시 두통의 몸에 넣을 경우 다시 안마사한테 발각될 우려가 있소. 참고로 말하면 두통은 1 주일에 1회, 매주 수요일 오전에 안마를 받소. - 당장 땅콩을 두통의 몸에 넣을 경우 최소한 1주일은 땅콩을 사용할 수 있다는 얘기군요. - 그렇소. - 땅콩을 두통의 몸에 다시 넣을 수 있는 가도 문제요. 다시 마네킹이 작전을 펴는 것말고 다른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렌덜 페퍼는 5분 기다렸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 좋소, 그럼 마네킹이 다시 두통의 몸에 땅콩을 넣도록 하지. 하지만 마 네킹의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는데..... 그들은 전적으로 마네킹의 능력에 맡겨야 하는 현실이 답답해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15 유혹의 비밀 에디가 점심식사를 끝내고 집무실로 돌아오자, 쿠퍼 대령이 들어와서 레 이 에번스한테서 전화가 왔다고 알려주었다. - 아, 처남이오? 에디가 전화를 받자, 쿠퍼는 전화기에 달린 스피커 기능 버튼을 눌렀다. - 예, 대통령 각하. 식사는 하셨습니까? - 방금 하고 오는 길이오. - 요즘 각하에 대한 평이 좋아지고 있는 거 아십니까? 언론 검열 해제 이후, 불법 구금되었던 죄수들까지 석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각하의 인 기가 갑자기 치솟아 오르고 있습니다. 다음 차기 선거에는 정식으로 대통 령 선거를 치른다 해도 승산이 있을 겁니다. 에번스는 몹시 기분이 좋은 듯 들떠서 말했으나 대화 내용을 옆에서 듣 고 있는 쿠퍼는 얼굴을 찌푸렸다. - 그렇소? 하하하. 어쨌든 나도 기분이 좋소. 그런데 무슨 일이오? - 아, 대통령 각하, 지난번에 만난 <밀워키 저널> 기자 재닛 애시포드 양 기억하십니까? - 아, 기억나오. - 그분이 다시 인터뷰 요청을 하는데 어떻겠습니까? 시간이 괜찮으시면 해주시죠. - 시간만 오래 끌지 않는다면 별문제 있겠소? 잠시만 기다려 보시오. 내 오늘 일정을 확인해 보겠소. 에디는 이렇게 말하고 쿠퍼를 바라보았다. - 오후 일정은 어떤가? - 오후 5시에 관광협회 사람들을 만나시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각하. - 그럼 재닛 양을 만나도 되겠군. - 그렇습니다, 각하. 쿠퍼는 별로 탐탁지 않은 표정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 오늘 일정은 여유가 있다는군요. 재닛 양을 보내주시오. - 감사합니다, 각하. 30분 이내에 도착하도록 재닛 양에게 연락하겠습니 다. 그로부터 정확히 30분 후에 재닛은 비서의 안내를 받아서 대통령 집무실 로 들어왔다. 그녀는 오늘따라 더 아름다워 보였다. 눈부시게 하얀 투피스와 진주 목 걸이는 그녀를 우아하면서도 섹시해 보이게 했다. 타이트한 스커트 길이는 핫팬츠처럼 짧아서 그녀의 미끈한 다리가 잘 드러나 있었다. - 각하, 안녕하셨어요? 이렇게 자꾸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 별소리를.......자, 그쪽으로 앉으시오. 그래 오늘은 어떤 질문을 할건가 요. 너무 예민한 질문은 삼가 줬으면 좋겠소. 하하하. 에디는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 물론입니다, 각하. 전세계 여성들이 각하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걸 집 중적으로 물어볼 생각이에요. 그럼 각하. 시작하겠습니다. 각하께서는 아름 다운 여성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그녀는 의자에 다리를 꼭 붙이고 앉은 자세에서 다리를 꼬았다. - 아름답다는 건 좋은 거요. 그것이 사람이건 꽃이건 상관없이 말이오. 난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혈압이 높아지지. 애시포드 양, 지금 내 혈압이 높아지고 있는데 혹시 알고 있소? - 호호호, 각하께서는 농담도 잘하세요. 각하께서는 여성의 성형 수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음, 지나치지만 않다면, 찬성하오. 어쨌든 아름다운 여자들이 많다는 건 좋은 일이니까. - 결국 찬성하신다는 이야기군요? - 그렇소. 다만 지나치지 않아야 한다는 걸 전제로 했을 경우에 말이오. - 그럼 마이클 잭슨 같은 가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그 사람은 대단한 가수지만 성형 중독자라고 할 수 있지. - 성형 중독자라구요? 아주 독특한 표현 방법이시군요. 이때 쿠퍼가 대화에 끼여들었다. - 가, 각하. 저는 일이 있어서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쿠퍼가 일어서더니 슬그머니 집무실을 나갔다. 그러자 재닛과 에디는 교 감이 형성된 공범처럼 미소를 지었다. - 그럼 각하....... 재닛이 새삼스럽게 에디에게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말했다. - 각하, 제가 각하를 몹시 좋아하고 있는 걸 아시나요? 재닛은 이렇게 말하면서 포개놓았던 한쪽 다리를 내려놓고 살짝 무릎을 벌렸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녀의 허벅지 안쪽에 숨막히는 금발이 그대로 드 러나 있지 않은가? 커튼에 여과된 부드러운 햇살이 허벅지 안쪽에 비치자 금빛으로 빛나는 음모와 여성의 그 섬세한 부분이 그대로 보였다. 재닛은 팬티 속에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 아아..... 에디는 가빠지는 호흡을 진정시키며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남성이 바지 속에서 팽팽하게 솟아올랐다. 재닛은 다시 무릎을 붙이고 에디에게 매혹적인 미소를 보내며 매끄러운 혀로 빨간 입술을 천천히 핥았다. - 각하, 저 좀 안아주시겠어요? 재닛이 나른한 음성으로 말하며 두 손으로 양쪽 젖가슴을 끌어 올렸다. - 저는 참을 수가 없어요. 어서요 각하...... 에디는 벌떡 일어섰다. 재닛 애시포드, 매력적인 저 여자만 만나면 비행기에서 그랬듯이 그는 섹스에 관한 한 절제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 가, 각하.......저, 저기 문을 잠그세요...... 재닛은 이렇게 말하고 그의 목에 매달렸다. 에디는 재닛을 번쩍 안아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서류와 골드다이아코스트의 98년도 경제 연감이 그 녀의 엉덩이 밑에 깔렸다. 스커트를 걷어올리고 바지를 벗어내렸다.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에디는 곧장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들어갔다. 그 녀가 그의 그것을 움켜쥐었다. - 아아.....어서요!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그의 남성에 와 닿는 섬세한 피부 감각이 에디를 더욱 서두르게 했다. 재닛도 열심히 움직였다. 그녀는 신음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이를 악 물었다. 그만큼 에디는 대단한 남자였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주사기처럼 생긴 발사기를 꺼냈다. 그리고 온몸을 점 령한 쾌감 때문에 실수를 하지 않도록 이를 악물면서 에디의 오른쪽 엉덩 이에 발사기를 대고 버튼을 눌렀다. 슈욱! 하는 미세한 발사음과 함께 약간 따끔한 통증이 있었으나 에디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는 온몸으로 정상을 향해서 달려가는 데에만 열중 하고 있었다. 이윽고 재닛도 그의 목을 세차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만 자제력을 잃고 아아아! 하고 신음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러자 집무실문 밖에서 비서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 각하, 무슨 일이 있습니까? 비서였다. - 아니, 인터뷰가 지루해서 그래. - 네에...... 두 사람은 옷을 입으며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고 얼굴이 빨개졌다. - 각하, 좋았어요? - 재닛, 정말 대단했어. - 저도 그래요. 각하같이 대단한 남자는 처음이에요. 언제 한번 밖에서 만났으면 좋겠어요. 불가능하겠지만 말예요. 이건 그녀의 진심이었다. 가능하다면 근사한 해변의 휴양지에서 단 하루 만이라도 에디와 함께 보내고 싶었다. - 기회를 한번 만들어보도록 하지. - 그럼 이만 인터뷰를 끝내죠, 각하. - 좋을 대로. 에디는 미소를 지었다. - 이만 가보겠습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 재닛, 잘 가시오. 재닛 애시포드는 집무실문 밖에서 에디의 배웅을 받았다. * 미국 대사관의 옐로 박스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 마네킹이 땅콩을 무사히 두통에게 넣었으며 현재 땅콩은 정상으로 작 동 중입니다. - 최소한 1주일은 아무 걱정 없이 땅콩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 마네킹의 능력에는 감탄을 금치 못할 뿐입니다. * 에디는 재닛 애시포드를 보내놓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의 손가락이 움직임에 따라 모니터에 글이 떠올랐다. 제목: 마지막 리허설 극본: 에디 패커 에디는 <마지막 리허설>이란 제목으로 글을 쓰고 있었다. 그는 이 대본 이 큰 성공과 더불어 그를 스타로 만들어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 에 과감하게 글을 시작할 수 있었다. 대본은 아직까지 단 두 편밖에 써본 일이 없고, 또 그 두 편마저 제대로 발표되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는 쓰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내용은 그가 젤린도 보르딘 대통령의 대역을 맡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어서 있는 그대로, 경험한 그대로 써내려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에디의 머릿속에는 이미 대본의 내용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 의 손가락은 마치 춤을 추듯이 키보드 위를 날아다녔다. 그리고 두 시간 후, 에디는 놀랍게도 20페이지 분량의 원고를 만들어놓 았다. 쿠퍼는 제1육군병원으로 직접 찾아갔다. 젤린도 대통령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멍청한 의사 녀석은 대통령의 상태가 나아지지 않는 다는 말만 계속 떠벌리고 있을 뿐이어서 쿠퍼는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담당 의사 녀석의 안내로 젤린도 대통령이 누 워 있는 병실로 갔다. 대통령은 산소호흡기를 달고서 죽은 듯이 누워 있었 다. - 가망이 없는 건가? 쿠퍼가 침통한 어조로 물었다. - 가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좀더 기다려 보는 수 밖에 없습니다. 운이 좋으면 내일 당장이라도 깨어나실 수 있고 그렇지 않 으면 한 달이 될 지... 의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 영영 못 깨어날 수도 있다는 건가? - 죄송합니다만, 그렇습니다. - 제기랄! 쿠퍼는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뱉어냈다. - 어쨌든 각하를 살려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총살이야. 알았나? 쿠퍼는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 어, 어쨌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겁에 질린 의사가 부들부들 떨면서 대답하자, 쿠퍼는 죽은 듯이 누워 산 소호흡기 소리만 내고 있는 대통령을 내려다보면서 손으로 얼굴을 쓸어보 았다. 따뜻한 얼굴을 만지자 기분이 묘해졌다. '이 사람아, 잔혹한 독재자답게 어서 일어나. 그렇게 빈약한 심장을 갖고 독재자 노릇을 했다는 건가? 자, 어서 일어나. 당신은 죽어서는 절대 안 되 는 인물이란 말야. 왠지 알아? 그건 그간 당신이 죽인 수많은 사람들이 저 세상에서 당신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야. 만약 당신이 죽으 면 죽은 그 순간부터 당신의 영혼은 영원히 고통 속에서 헤매게 될 거란 말이야. 자, 젤린도 보르딘, 내가 기다리고 있잖아. 못난이처럼 굴지 말고 어서 일어나라구. 그래야 또 못마땅한 녀석들을 모조리 끌어다가 신나게 고문도 하고 죽여버릴 게 아닌가 말야!' 쿠퍼는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사우스 브롱크스의 건달로 마감할 인생을 이만큼이나 끌어준 게 여기 이렇게 누워 있는 이 못난 작자인 것이 었다. 그는 이 못난 작자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또 사랑하고 있었다. 쿠퍼는 의사에게 반은 협박조로 다시 한번 부탁하고는 병원을 나와서 대 통령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망설이다가 에디를 만나러 갔다. - 의논할 게 있소. 쿠퍼는 차를 타고 오면서 궁리했던 걸 말하기 시작했다. - 혹시 젤린도 보르딘 대통령이 될 생각 있소? - 무슨 소리입니까? 영문을 모르는 에디가 반문했다. - 내 말은 대통령의 대역을 계속해서 맡을 생각이 있느냐는 거요. 대역 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나라를 통치해 볼 생각이 있느냐는 거요.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소? - 그러니까 이 나라에 살면서 계속 대통령 대역을 맡으라는 얘기입니까? - 바로 그거요. 엄청난 돈과 아름다운 여자를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진 짜 독재자가 되란 거요. 에디는 말을 알아들었다. 하지만 워낙 갑작스런 일이어서 그런지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 보르딘 대통령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 아직은... 아니오. 하지만 그럴 수도 있소. 만약 그렇게 되면 당신이 대 통령 역할을 계속 맡아달라는 거요. 에디는 그제서야 흥분되기 시작했다. 내가 대통령이 된다?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국의 대통령이? 정말 재키 스탠우드의 말대로 진짜 대통령이 된단 말인가? 잠시 침묵을 지키며 생각에 잠겼던 에디는 고개를 들었다. - 쿠퍼 대령님, 난 아무래도 대통령감은 아닙니다. 난 그저 무명 배우일 뿐이에요.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또 미국인인데다가 미국에는 늙은 어 머니가 계시고... 그는 스스로를 냉정하게 돌아보았다. '대통령? 그것이 과연 나와 어울리는 건가? 내가 대통령이 될 능력이 있 는 건가? '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설사 점성술사의 말대로 대통령이 된다고 해 도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쫓겨나거나 비참하게 사살될 게 틀림없었다. - 에디, 어렵게 생각할 건 없소. 당신은 배우잖소? 그것도 아주 뛰어난 배우 아니오? 나는 사실 당신의 연기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소. 하지만 당 신이 지금까지 맡은 역은 단역 아니었소? 이제 당신은 당신 생애 최고의 역을 맡은 거요. 한 나라를 다스리는 역할 말이오. 이보다 더 좋은 배역이 어디 있겠소? - 사실 그 동안 즐거웠던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내가 정말 젤린도 대통령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죠. - 물론 그랬을 거요. 하지만 그건 시작에 지나지 않소. 이제부터가 진짜 요. 당신은 젤린도 대통령이 누리던 것의 10퍼센트도 채 누리지 못했단 말 이오. 그리고 미국에 계시는 어머니라면 이쪽으로 모셔와서 살면 되지 않 겠소? -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십시오. 쿠퍼의 제안은 그를 유혹하기에 충분했으나 한편으로는 너무나 허황된 것이기에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 좋소. 나중에 또 의논합시다. 쿠퍼는 조금은 아쉬워하면서 집무실을 나갔다. 16.보르딘 부인 저녁 식사를 끝낸 에디는 보르딘 부인의 방으로 갔다. 부인은 에디를 보 고 아주 반가워했다. - 어머, 당신! 그렇지 않아도 만나러 갈 참이었어요. 잠옷 차림인 그녀가 달려오더니 어린아이처럼 그의 목에 매달렸다. - 자, 잠깐만... 당황한 에디는 그녀한테서 재빨리 떨어져서 헛기침을 했다. 그녀가 탐스 런 젖가슴이 아련하게 보일 정도로 얇은 잠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 가 처음 보았을 때처럼 여전히 완숙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서 에디로 하여금 가슴이 두근거리게 했다. - 오빠한테 얘기 들었어요. 당신이 언론 검열을 해제하고 불법 구금된 죄수들을 석방했다면서요? 아주 잘하셨어요. 당신을 다시 봤어요. 당신이 참 존경스러워요. - 고맙소. 내가 그 동안 잘못한 일을 바로잡은 것뿐인데 이렇게 칭찬해 주니 참 고맙소. - 당신 참 많이 변하셨다는 거 알아요? 아무리 봐도 당신의 예전의 모습 이 아니에요. 자, 이쪽으로 앉으세요. 보르딘 부인은 에디를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소파로 안내했다. - 거리에 나가면 이제는 국민들이 당신을 칭찬하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 어서 기뻐요. 솔직히 전에는 모두 당신을 욕하는 소리 밖에는 들을 수가 없었거든요. - 대체 어떤 욕들이었는지 한번 듣고 싶소. - 당신, 듣고도 화 안 내실 거죠? - 화라니 당치도 않아. 걱정하지 말고 얘기해 줘요. 에디는 가볍게 웃었다. 보르딘 부인은 옆자리로 바짝 다가앉더니 에디한테 팔짱을 꼈다. 그러 자 에디는 그녀의 매혹적인 체취 때문에 기분이 묘해졌다. - 그 욕들이라는 건 나쁜 놈, 죽어야 할 놈, 지옥에나 떨어져라, 지옥에 서 온 독재자, 국민들의 피를 빠는 흡혈귀, 도둑놈, 사기꾼, 강도...... 엄청나 게 많았어요. 당신, 기분이 나쁜 건 아니죠? - 그러니까 세상의 나쁜 욕은 나 혼자서 다 듣고 있었다는 얘기 아니오? - 실은 그래요. 하지만, 이제는 아니라는 거 아시죠? - 염려 말아요. 나는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으니까, 사실 내가 당신을 찾 아온 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좀 들으려고 온 거요. 당신은 오빠한테 들어서 세상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에디는 이 나라에 대해서 좀더 알고 싶었다. - 그래요, 사실 당신은 너무 아부꾼들에게만 둘러싸여 있어서 세상 돌아 가는 걸 잘 모를 거예요. 그런데 뭘 알고 싶으신 거죠? - 현재 우리나라에서 차기 대통령감으로 지목할 만한 인물로는 누가 있 을까? - 그런 사람이라면 음, 당신이 얼마 전에 감옥에서 석방한 주커만이라는 분이 있어요. 그런데 당신 벌써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거예요? 그럼 다음 에는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는 건가요? 당신 참, 잘 생각하셨어요. 그간 항상 당신을 보면 가슴이 조마조마 했거든요. 언제 암살 같은 걸 당 할지 몰라서 말예요. - 넘겨짚지 마시오. 그런데 주커만이라고 했나? 에디는 젤린도의 동물원에서 본 주커만을 곧 기억해 냈다. 눈빛이 남다 른 노인이었다. - 주커만 씨라면 정치 경륜도 있고 최근에 노벨 평화상 후보가 되기도 한 능력 있는 정치인이죠. 선거만 공정하게 이루어진다면 당선이 유력한 후보예요. 61세란 나이도 적당하구요. 에디는 주커만을 기억해 두었다. - 다른 사람이 또 있소? - 제 오빠 레이 에번스요. 나라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왔고 또 정계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죠. - 그렇군, 그럼 국방장관은 어떤 사람이오? - 국방장관 피터 엘리엇이라면 당신이 더 잘 알잖아요? 무능하기 때문에 국방장관 자리에 앉혔다고 했잖아요? - 내 이야기는 국민들이 국방장관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거요. - 엘리엇은 괜찮은 사람이죠. 사실 내각에서 쓸 만한 사람이라면 엘리엇 한 사람밖에 없을 거예요. 국민들 평도 괜찮고요. - 그렇군. - 그런데 당신, 오늘은 제가 절대 그냥 보내지 않을 거라는 거 잘 아시 죠? 보르딘 부인이 갑자기 그의 팔을 꽉 붙잡았다. - 아, 아니. 안 되는데........ 에디는 팔을 빼려고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 안 되긴 뭐가 안 된다는 거죠? 전 당신의 아내예요. 당신의 품에 안길 권리가 있다구요. 지난 1년 간 그렇게 외롭게 만들었으면 이제 생각 좀 해 줘야 되는 거 아닌가요? 그녀는 가슴에 맺힌 게 많았는지 단숨에 말해 버렸다. - 그래, 그건 미안하오. 내가 사과하리다. - 그간 저는 밤마다 당신이 들어오기를 기다렸어요. 문이 바람에 조금만 흔들려도, 복도에서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당신이 오시나보다 하고 가슴이 설레곤 했다구요. 보르딘 부인은 이내 크고 아름다운 눈에서 눈물을 떨어뜨렸다. - 그간 미안했소. 용서해 줘요. 에디는 난감했다. 젤린도 보르딘 대통령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는 처지여 서 더욱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 자, 이제 이리 오세요. 그녀는 에디를 끌고 침대로 갔다. - 이곳에 가만히 앉아계세요. 그녀는 에디를 침대에 앉혀놓고는 그의 앞에 서더니 갑자기 옷을 벗어버 렸다. 보르딘 부인의 미끈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탐스런 젖가슴과 가는 허리, 그리고 손바닥만한 팬티가 겨우 가리고 있는 하복부와 죽 뻗어 내린 다리, 모든 것이 순식간에 드러났다. 그리고 그녀는 팬티마저 두 손으로 끌 어내렸다. - 전 당신 거예요. 어서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자, 손을 이리 주세요. 그녀는 에디의 한 손을 끌어다가 자신의 탐스런 젖가슴에 가만히 댔다. - 이, 이러면 안 되는데..... - 자, 어서 안아주세요! 에디는 허둥거렸다. 그렇다고 벌떡 일어설 수도 없었다. 만약 이러한 상 태에서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은 그녀한테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남의 아내인 젤린도 대통령의 부인을 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 너무 오랜만이라서 사랑하는 방법을 잊으셨나요? 그녀는 다가오더니 그의 머리를 껴안았다. 그러자 그녀의 탐스런 젖가슴 이 그의 얼굴을 지그시 눌렀다.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그녀의 가는 허리 와 탄탄하면서도 곧게 뻗어 내린 허벅지가 있었다. 에디는 호흡이 가빠지 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만지고 싶은 유혹이 그를 사로잡았다. - 자, 잠깐! - 아, 안돼요. 어떤 일이 있어도 이대로는 당신을 보내드릴 수가 없어요. 그녀는 그의 머리를 더 꼭 껴안았다. -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니 날 좀 놔줘요. - 거짓말 마세요. 10분이면 돼요. 10분, 더 이상 요구하지 않을게요. 보르딘 부인은 에디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안고 키스했다. 에디는 얼떨결에 키스를 당하고는 아찔해서 잠시 현기증을 일으켰다. 그때,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보르딘 부인이 손가락으로 쉬 하는 모습을 만들어 보였으나 누군가가 계 속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더니 '누구세요?' 하고 물었다. - 저, 쿠퍼 대령입니다. 각하께서 여기 계시죠?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각하를 급히 모셔가야 합니다. - 아, 대령. 잠시만 기다리시오. 부인 나중에 또 오겠소. 요즘은 일을 좀 제대로 하려고 해서 그런지 너무 바빠. - 알았어요. 할 수 없죠. 당신 요즘 많이 힘드시죠? 좀 쉬면서 하세요. 실망 때문에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남편을 위로하는 캐롤을 보면서 에디 는 감동을 금치 못했다. 이런 여자를 구박하는 젤린도 대통령 그자는 대체 어떻게 된 인간이란 말인가? 에디가 보르딘 부인의 방을 나오자 쿠퍼가 새삼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 다. - 쿠퍼 대령님,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세요.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요. 쿠퍼가 피식 실소를 지었다. - 누가 이상한 짓을 했다고 했소? 만약에 했다고 해도 아무 상관없소. - 어떻게 그런 말을? - 각하는 캐롤 부인이라면 고개를 내젓소. 이혼을 고려하던 중이었소. 그 런데 그 방에는 왜 들어갔소? 쿠퍼가 물었다. - 연기를 완벽하게 하기 위해서 들어갔던 것뿐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방 을 너무 안 찾아도 이상한 거 아닙니까? 에디는 둘러댔다. - 원래 그런 부부니까 앞으로는 그러지 않아도 되오. - 대령님은 왜 날 그렇게 급히 찾은 겁니까? - 그냥 당신이 안 보여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해서 찾았던 거요. - 도망이라도 갔을까봐 그런 거 아닙니까? - 무, 무슨 그런 소리를? 쿠퍼틑 사실 에디가 도망을 간 게 아닌가 해서 그렇게 요란을 떨었던 것 이다. - 난 도망가지 않습니다. 일을 끝내고 돈을 받기 전에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 그건 그렇고 내 제안에 대해서 생각 좀 해봤소? - 대통령 역할을 계속 해달라는 거 말입니까? 그건 더 생각해 보겠습니 다. 내 인생이 걸린 문제라서 쉽게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 그렇겠죠. 하지만 좀 빨리 결정을 내려주시오. - 그러죠. 나도 대통령 자리에 관심이 많습니다. 에디가 이렇게 말하자 쿠퍼의 표정이 밝아졌다. - 그래, 잘 생각했다. 광대 친구. 쿠퍼는 에디 패커 정도는 얼마든지 그의 마음대로 다룰 자신이 있었다. 그는 에디가 말을 듣지 않으면 그의 가족들을 협박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언제까지나 골드다이아코스트를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자면 얼른 캐롤 부인을 대통령궁에서 쫓아낸 뒤에 에디를 결혼 시켜야 한다. - 혹시 이곳에 와서 만난 여자 중에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었소? 쿠퍼는 운을 떼어보았다. - 여자라구요? 갑작스럽게 그렇게 질문을 하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 르겠습니다. - 여자가 없다면 내가 아주 괜찮은 여자를 소개해 주려고 그러는 거요. - 글쎄요......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긴 한데...... - 그게 누구요? 우리나라 사람이요? - 그렇습니다. - 그거 의외로군. 그래, 누구요? - 수지 다이아요. - 수지 다이아? 수퍼모델 수지 다이아를 말하는 거요? - 네, 그녀가 마음에 듭니다. 에디는 장난스런 심정으로 말했다. - 당신한테 너무 과하지 않소? 쿠퍼는 광대 녀석이 노는 꼴이 가소로웠다. 무명 배우 주제에 세계적인 모델이 웬 말인가? - 지금 비웃는 겁니까? - 아, 아니오. 그런 게 아니오. - 골드다이아코스트의 대통령이라면 당연히 그 정도 여자와는 결혼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럼 대령님은 대통령이 그저 그런 여자와 결혼하기를 바 라는 겁니까? - 아, 맞는 얘기요. 그렇다면 내가 직접 다리를 놓아볼까? 그렇지 않아도 수지 양이 패션 쇼를 끝내고 파리로 돌아가기 전에 각하를 한번 만나고 싶 다고 연락이 왔소. 그러고 보니 광대 녀석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녀석이 대통령 신분으 로 결혼을 하려면 수지 다이아 정도는 돼야 어울릴 것이다. - 아, 그렇습니까? 그게 언제죠? - 내일 오후 5시요. - 잘됐군요. 그럼 기회를 봐서 운을 한번 떼어보겠습니다. - 그보다는 보르딘 부인과 이혼을 먼저 하는 게 순서 아니오? - 이혼을요? 보르딘 부인과 결혼도 안 했는데 무슨 이혼을 한단 말입니 까? 그런 것은 대령님이 알아서 처리해 주십시오. - 알겠소. 직접 손을 쓰도록 하겠소. 쿠퍼는 고개를 끄덕였다. - 너무 서둘지는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랬다가는 국민들의 평이 나빠 질 수도 있으니까요. 에디는 보르딘 부인이 정말 이혼을 당해서 대통령궁을 쫓겨날까봐 걱정 하고 있었다. - 옳은 말이오. 일이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서 쿠퍼는 기분이 좋았다. 그래 서 새삼스럽게 에디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 우리가 이제야 동지가 된 것 같소. 앞으로 힘을 합쳐서 골드다이아코 스트 공화국을 잘 이끌어 나가도록 합시다. - 그러죠, 쿠퍼 대령님. 우리는 잘해낼 수 있을 겁니다. 에디도 그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17.적과 동지 오전 9시에 집무실에 나온 에디는 몸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몸살 기운이 있는 것 같았다. 바쁜 일정에다가 대본을 하루에 두 시간씩 집중해서 쓰고 있었기 때문에 몸에 무리가 온 것 같았다. 에디는 침실로 돌아가서 그냥 쉴까 하다가 안마를 떠올렸다. 그거라면 몸의 피로를 풀어내는 데 최고일 것 같았다. 그는 토요일 오전인데도 불구하고 안마사를 부르라고 비서에게 말했다. 안마사는 곧 달려왔다. - 각하, 부르셨습니까? - 그래, 지금 안마 준비 좀 해줘야겠어. 아무래도 몸살이 오는 것 같아. - 그러시죠, 각하. 몸의 피로를 풀어내는 데는 안마만한 게 없죠. 안마사는 모처럼 인정을 받게 된 것이 좋아서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그녀는 이제 그녀에게도 행운이 왔다고 생각했다. 전에도 어느 안마사 하 나가 대통령의 칭찬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고급 아파트 한 채를 얻는 행운 을 얻었던 것이다. 그녀는 에디의 옷을 벗긴 다음 안마대에 엎드리게 하고는 향기가 짙은 크림을 몸에 듬뿍 발랐다. - 각하, 혹시 요즘 몸에 좋은 약을 드시고 계시나요? - 왜 그런 걸 묻지? - 각하의 몸이 전보다 훨씬 좋아졌거든요. 마치 젊은 사람 같아요. 안마사는 그 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 괜한 아부 아닌가? 30대인 에디 패커와 50대인 젤린도 보르딘의 몸에 차이가 나는 것은 당 연했기에 에디는 얼버무리려고 했다. - 각하, 그럴 리가요. 감히 제가 어떻게... - 그래, 알았으니 어서 시작하지. 그녀의 손길이 구석구석을 돌아다니자 몸의 피로가 한꺼번에 풀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에디의 몸을 주무르던 여자가 손길을 멈칫했다. - 각하, 이번에는 오른쪽에 의료기구를 넣으셨군요? - 의료기구? 나른한 쾌감을 즐기던 에디는 반문했다. - 각하의 오른쪽 엉덩이에 전에 만졌던 것과 똑같은 것이 만져지는데요? 에디는 안마사가 이끌어주는 대로 엉덩이 부위를 만져보았다. 그러자 전 의 것과 똑같은 것이 만져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것이 자꾸 몸 속에 들어 있는 것인가? 21 에디와 에번스, 머서 중위 대통령궁 정문과 비서실을 무사히 통과한 에번스와 머서 중위는 비서의 안내를 받아서 대 통령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저쪽에서 다가오던 쿠퍼가 그들을 발견하고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했다. - 에번스 씨, 요즘은 자주 오십니다. 대통령궁에 기삿거리가 많은가 보죠? - 각하께서 요즘 민주화에 부쩍 관심이 많아지신 것 같아서 이번에는 아예 정치부에 있 는 마이크 머서 기자를 데려왔소. - 아, 그렇습니까? 앞으로 잘해봅시다. 머서 기자. 쿠퍼 대령의 눈이 잠시 머서 중위를 살펴보았다. - 어쩐지 기자라기보다는 군인 같은 인상을 주는군요? 에번스와 머서 중위는 가슴이 뜨끔했다. 생각보다는 날카로운 눈매였다. - 그렇소? 그럼 머서 기자를 아예 국방부 출입 담당 기자로 발령 낼까요? - 그건 좋을 대로 하시죠. 에번스 씨, 그럼 각하께서 기다리실테니 어서 가보시죠. - 그럼, 이만. 그들은 비서의 안내를 받아서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머서 중위는 사진으로만 보던 젤린도 보르딘 대통령이 바로 눈앞에 있자,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리고 본능적으로 구두 뒷굽을 붙이며 경례를 하려다가 에번스의 제지를 받고는 정신을 차렸 다. 대통령이 다가와서 에번스한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고는 머서를 가리키며 물었다. - 에번스 씨, 어서 오시오.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구요? - 아, 머서 기자, 각하께 인사드리게. - <엘 티엠 포>의 정치부 기자 머이크 머서입니다, 각하. - 반갑소, 좋은 기사 부탁하오. 에디는 머서 중위와도 악수했다. 그리고 그들은 비서실 여직원이 내온 향기 좋은 홍차를 마시며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다. 이윽고 비서실 직원이 모두 나가자 에디가 머 서 중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 머서 중위, 와줘서 고맙네. 내가 중위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불렀네만, 그 전에 한 가 지 물어보세. 최근에 내가 내린 조처들 그러니까 언론 검열 해제와 불법 구금되었던 죄수들 의 석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 그, 그건....... 머서 중위는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 머서 중위, 어려워하지 말고 대답해 보게. - 각하께서 현재 일련의 민주화 조처를 취하고 계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머서 중위는 잔뜩 긴장한 탓에 이마에서 땀이 났다. - 그래, 그렇다면 중위는 이러한 조처가 옳다고 생각하나? - 그렇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럼, 자네의 동료 장교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 동료 장교들도 모두 각하가 잘하신 거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 그렇군, 이해해 주니 고맙네. 하지만 머서 중위, 내게도 어려움이 있네. 대통령이라고 해서 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란 말일세. 난 사실 언론 검열 해제와 불법 구금되었 던 죄수들을 석방했다는 것 때문에 일부의 지탄을 받고 있기도 하네. 이게 바로 우리나라의 현실이네. 에번스와 중위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 하지만 난 우리나라에 민주화를 정착시키기로 결심했네. 그래서 국군의 날 행사장에서 전격적으로 대통령을 사임할 생각이네. - 네? 에번스와 머서 중위는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에번스가 허둥거리며 물었 다. - 각하, 그, 그 말이 정말이십니까? - 물론이오, 처남. 난 결심했소. 일단은 서열상 제1장관인 국방장관이 정권을 인수해서 과 도선거내각을 구성한 다음에 선거를 통해서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될 거요. 과도선거내각이 안정될 수 있도록 처남이 많은 노력을 해주면 고맙겠소. 에디의 어조는 확신에 차 있었다. - 그래서 머서 중위의 도움이 필요한 거요. 행사 당일에 내가 정권 이양을 발표하면 일단 의 세력들이 나를 체포하려 할 것이오. 나는 그 세력들을 막아줄 사람이 필요하오. - 쿠퍼 대령 말씀인가요? - 그렇소. 쿠퍼 대령은 내가 취하고 있는 민주화 조처를 가장 못마땅해 하는 사람이오. - 알겠습니다. 에번스가 신음처럼 대답했다. - 머서 중위, 어떤가? 나를 도와주겠나? 에디는 머서 중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 가, 각하. 염려 마십시오.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마침 이번 국군의 날 행사에는 전군이 참여하게 되어 있으니까, 그때 쿠퍼 대령 일당을 제지하도 록 하겠습니다. 젊은 동료 장교들 다수도 각하의 뜻에 따라 행동할 겁니다. 머서 중위는 감동을 받은 듯 결의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 중위, 고맙네. 그래, 행사 당일에는 얼마나 군을 동원할 수 있겠나? - 저와 가까운 동료 장교들 대다수가 참여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최소한 2개 대대 이 상, 많게는 3개 대대의 병력이 각하를 도울 수 있을 겁니다. 그 병력들 대부분을 무장시키면 쿠퍼 대령 일당 정도는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습니다. -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네. 그럼 잘해보세. 그리고 쿠퍼 대령은 가능하면 생포해야겠지 만 부득이 하면 사살해도 좋네. - 알겠습니다. - 쿠퍼 대령을 제압한 이후에는 당분간 머서 중위가 대통령궁의 경호실을 맡아서 국방장 관이 과도선거내각을 잘 끌고 갈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어야 할 것이네. - 명심하겠습니다, 각하. - 물론 에번스씨도 국방장관이나 머서 중위가 잘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줘야 할거요. - 물론입니다, 각하. - 그럼 우리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국을 위해서 악수 한번 합시다. 에디와 에번스, 그리고 머서 중위는 굳은 악수를 했다. 22 욕망의 끝 10월 13일, 오전 6시가 되자 보르딘 광장에는 국군의 날 행사를 위한 병력과 차량들이 속 속 모여들었다. 부근의 학교 운동장에서 천막을 치고 잠을 잔 제2연대 제1기병중대의 사병 들은 이른 아침식사를 끝내자마자 빳빳하게 다림질이 된 군복과 새 군화를 지급 받고 부산 하게 움직이며 행사 준비를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소총에 장전할 탄약을 지급 받았다. 그것은 철모를 눌러쓰고 권총까지 찬 머서 중위의 감독 하에 사병 한 명당 30발씩 배당되었다. - 우리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실탄을 지급 받은 중대이다. 오발사고가 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비상 사태 발생 시에는 명령에 따라 대통령 각하를 보호하기 위해서 신속하 게 움직여야한다. 알았나? 머서 중위는 부하들을 돌아보며 낮으나 단호하게 말했다. 부하들은 힘차게 대답했으나 그 들은 왜 자신들이 다른 중대원들과는 달리 실탄을 지급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모르 고 있었다. 그러나 철모 밑에서 빛나는 두 눈으로 부하 중대원들을 돌아보는 머서 중위는 모든 것이 잘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의 중대 이외에 약 열 개 중대가 실탄을 지급 받게 되기 때문에 쿠퍼 대령 정도는 손쉽 게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국의 미래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미래회의 젊은 엘리트 장교들은 머서 중위의 행동에 적극 동조하기로 했던 것이다. 날씨는 좋아 보였다. 우기가 지난 덕분에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이제 모든 준비를 끝낸 제1기병중대원들은 머서 중위의 명령에 따라 보르딘 광장으로 이 동하기 시작했다. 오전 9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계를 들여다본 젤린도 대통령은 마음이 급했으나 의사는 고 개를 저었다. - 각하, 아직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국군의 날 행사에 참석하신다는 건 무리입니다. - 시끄러. 난 무슨 일이 있어도 행사에 참석해야 돼. 경축사를 해야 한단 말이다. 그러니 가 어서 준비하란 말야. 알겠나? 올해는 군 창설 40주년이 되는 해여서 그 의미가 매우 컸다. - 하지만 각하, 무리입니다. 행사 참관 도중에 쓰러지실지도 모릅니다. - 난 그 자리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간다. 알겠나? 의사는 더 이상 이 고집쟁이를 만류할 수가 없었다. 그는 쓰러지거나 말거나 고집쟁이 독 재자를 보내주기로 했다. - 정 그러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 좋아, 어서 내 군복을 가져와라. 시간이 없다. 의사는 옷장에서 젤린도의 군복을 꺼내서 입혀주었다. - 차는 준비됐겠지? - 예, 뒷문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걸음을 옮기려던 젤린도가 의사를 돌아보았다. - 내가 이 병원에서 심장 수술을 한 걸 아는 사람이 모두 몇이지? - 병원장님과 저, 간호사 한 명이 알고 있습니다. - 그럼 전부 셋이군. 그간 수고 많았네. 전부 불러주게. 인사를 하고 가야겠네. - 알겠습니다. 의사는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곧 병원장과 간호사를 데리고 나타났다. 육군 대령인 병원장 과 중위인 간호사가 경례를 했다. - 자, 문을 닫게. - 예? - 안으로 들어와서 문을 닫으란 말이다. - 알겠습니다. 간호사가 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리고 그녀는 헉! 하고 놀라면서 뒷걸음질쳤다. 대통령이 들고 있는 권총을 보았던 것이다. - 가, 각하........ 놀란 간호사가 울먹였다. - 각하, 왜 그러십니까? 병원장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 미안하네. 제군들. 제군들은 죽어줘야겠어. 내가 여기서 심장 수술을 받은 걸 아는 사람 이 있어서는 안 되거든. - 각하, 진정하십시오. 이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우리는 평생 입을 다물겠습니다. 병원장은 이렇게 말하면서 후회했다. 젤린도의 수술을 집도한 의사로서 갈등이 많았던 것 이다. 그는 수술 도중에 젤린도를 감쪽같이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을 수없이 느꼈다. 그가 실 수하는 척하면서 단 한 번만 손을 잘못 놀리면 잔혹한 독재자이자 국민들의 피를 빠는 흡혈 귀이며 도둑놈인 젤린도는 그대로 죽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생명을 존중해야 하는 의사라 는 신분 때문에 실행할 수는 없었다. - 미안하네, 잘 가게. 젤린도는 문 밖으로 달아나려는 간호사를 향해 먼저 방아쇠를 당긴 후, 차례차례 사살했 다. 그리고는 뒷문으로 빠져나와서 리무진을 탔다. 리무진 안에는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 넌 누구냐? - 군의관 재닛 애시포드 대위입니다. 만약의 경우에 각하가 위험할 수도 있으니 잘 모시 라는 명령을 병원장님으로부터 받고 각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바로 암호명 마네킹 재닛 애시포드였다. - 그래? 젤린도는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의사가 보기 드물 정도로 대단한 미인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색시 하면서도 지적인 얼굴과 금발, 풍만한 가슴, 가는 허 리와 탄력 있어 보이는 엉덩이, 그리고 스커트 밑으로 쭉 뻗어 내린 미끈한 다리 등 모든 것이 남자의 가슴을 단번에 뒤흔들 만했다. 게다가 그녀는 그를 향해서 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로 조용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젤린도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그간 수술을 받은 이후 너무 오랬동안 여자를 잊 고 있었던 것이다. 젤린도는 여자가 없으면 단 하루도 잠을 못 자는 사내였는데도 불구하고 그간 용케도 참아왔던 것이다. 젤린도는 아랫배 쪽 허벅지 사이가 불쑥 치솟아 오르는 걸 느꼈다. 그것은 바지 속에서 민망할 정도로 솟아올라왔다. - 각하, 출발하셔야죠? 군의관으로 변장한 재닛이 미소와 함께 조용하게 말했다. - 그래, 어서 가지. 늦어도 10시까지는 보르딘 광장에 도착해야해. 그리고 자네는 이리 좀 와봐. 젤린도는 재닛을 자신의 옆좌석으로 불러 앉혔다. - 각하, 어디 불편하십니까? 재닛은 정말 군의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 그, 그래. 이걸 보라구. 젤린도는 한껏 솟아오른 자신의 남성을 가리켰다. - 이게 너무 불편해서 말야. 이걸 먼저 자네가 치료해 줘야겠어. 젤린도는 그녀의 한쪽 손을 잡아서 자신의 바지춤으로 끌고 갔다. - 하, 하지만 각하....... 재닛은 연기라면 놀라울 정도로 얼굴까지 붉히면서 손을 빼내려고 했다. - 왜 그러나? 의사라면 이런 것도 치료해야 할 게 아닌가? 그럼 내가 이런 상태로 국군 의 날 행사에 참석해야 된단 말인가? - 하지만, 이건 좀........그리고 각하는 심장 수술을 받은 상태라서 혈압이 높아질 일은 가 급적 하지 말아야 합니다. - 내 심장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 없네. 내 심장은 강철 심장이란 말이야. 자 어서! 할 수 없었다. 재닛은 그의 그것을 손으로 만져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젤린도의 손이 곧 장 그녀의 엉덩이 쪽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 참, 탐스런 엉덩이야, 음........ 이렇게 중얼거리던 젤린도는 운전사의 뒤통수를 노려보더니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차단 막이 올라왔다. 운전사는 씩 웃었다. 그는 미국 대사관의 정보팀장인 랜덜 페퍼였다. 그는 이 차에 타고 있던 두 명의 사내를 방망이로 기절시킨 후, 입에는 강력 테이프를 붙여서 병원의 창고에 가두어 버렸던 것이다. - 음, 좋아.....제법이야! 젤린도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바지를 끌어내렸다. 그리고 한 손을 재닛의 스커트 밑으로 집어넣었다. 매끄럽고 탄력 있는 허벅지가 만져졌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자 재닛아 '가, 각하 안 돼요'. 하면서 손을 제지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제스처였다. 젤린도는 더욱 불이 붙어서 그녀의 팬티를 비집고 손을 집어넣었다. 부드러운 음모를 만지자 재닛은 나른한 신음 소리 를 냈다. - 가, 각하......조, 좋아요! - 그래, 나도 이런 기분 처음이야! 넌 오늘부터 당장 대통령궁에서 근무하는 내 주치의가 되는 거다. 알았지? - 아, 알았어요, 각하! 좀더.......더! 재닛은 스스로 가슴을 풀어헤치고 젤린도의 한 손을 끌고 갔다. 젤린도는 예상대로 오래 굶주렸던 탓인지 그녀에게 마구 덤볐다. 이윽고 젤린도가 그녀를 무릎 위로 끌어안았다. 젤 린도의 호흡이 마치 고장난 펌프처럼 불규칙적으로 변했다. - 가, 각하. 안 되겠어요. - 무, 무슨 소리야? - 이대로 관계를 갖다가는 각하께서 사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먼저 심장 기능을 활성화시 키는 주사를 맞으신 다음에 계속하죠. - 난 괜찮은 것 같은데.......좋아,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재닛은 작은 가방에서 주사기를 꺼내들었다. - 이 주사를 맞으시면 심장이 편해지면서 기운이 날 거예요. - 알았어, 얼른 해. 젤린도가 팔을 내밀자 재닛은 바늘을 살짝 찔러 넣고 피스톤을 눌렀다. 바늘을 통해서 피 부 속으로 들어간 소량의 약물이 이내 혈관을 타고 순식간에 젤린도의 체내에 번졌다. 그러 자 젤린도는 갑자기 쏟아지는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면서도 젤린도는 어서 시작하자고 재촉했다. 옷을 다시 입은 재닛은 버튼을 눌러서 운전석의 차단 막을 내렸다. - 됐어요. - 독재자의 모습이 볼 만하군. 꼭 벌거벗은 임금님 같잖아? 보기 싫으니까 얼른 끝내버리 라구. 아랫도리를 그대로 드러낸 채 잠에 빠져 있는 독재자의 모습은 징그럽기까지 했다. 재닛 은 젤린도의 군복과 속옷을 모두 벗겨낸 다음, 가방에서 준비해 온 옷들을 꺼내어 입혔다. 리바이스 청바지와 폴로 티셔츠를 입은 젤린도는 전형적인 미국인처럼 보였다. 재닛은 미소를 짓고는 다시 가방을 뒤져서 1회용 안전면도기와 면도 크림을 꺼내어 젤린 도의 코밑을 깨끗하게 밀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젤린도의 청바지에 위조된 신분증이 든 지갑과 여권, 미국 동전 몇 개와 미국에 있는 극단의 전화번호 등이 적힌 메모지 등을 넣었 다. - 서둘러, 거의 다 왔어. 9시 50분을 가리키고 있는 시계를 들여다본 랜덜 페퍼가 말했다. - 알았어요. 재닛은 휴대전화를 꺼내어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자 전화를 끊고, 다시 전화 번호를 누르고 신호음이 네 번 울리기를 기다렸다가 끊었다. 에디는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진동을 일으키자 진동을 세어보았다. 처음에 세 번, 잠시 기다렸다가 네 번이 울렸다. 성공했다는 재닛의 신호였다. 시계는 9시 5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7분 후면 그가 대 통령직 사임을 발표할 시간이었다. 에디는 가만히 심호흡을 했다. 가슴이 떨려오는 걸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수많은 관객들 이 지켜보는 무대에서 그간 수십 편의 뮤지컬에 참여한 그였지만 뮤지컬 관객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설할 생각을 하니 손에 땀이 났다. 그는 바지 에 슬며시 땀을 닦으며 쿠퍼를 찾아보았다. 쿠퍼 대령은 경호실장답게 귀에 이어폰을 꼽고 한 손에 든 무전기로 부하 경호원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주 광장 동편의 도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동편 도로에서 검은색 리무진 한 대가 나타나자 쿠퍼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9시 55분이었다. 쿠퍼는 리무진을 향해 바삐 다가가면서 대통령 행세를 하고 있는 에디를 슬쩍 바라보았 다. 그러다 에디와 눈이 마주쳤다. 가짜 대통령이 자신를 보고 살짝 웃는 것 같았다. 쿠퍼는 에디에게 손짓을 해서 단상 아래를 가리켰다. 이제 녀석을 체포해서 젤린도의 동 물원에 처박아야 할 시간이었다. 녀석은 그것도 모르고 단상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단상을 향해서 검은색 리무진이 다가와서 멈추었다. 에디가 먼저 리무진을 향해 다가가자 쿠퍼는 제발로 걸어 들어가는군 하면서 비웃었다. 쿠퍼가 에디의 곁에 다가가서 조용히 권총을 빼들었다. 그리고 그 권총을 에디의 옆구리 에 갖다댔다. - 에디, 이제 연극은 끝났다. - 쿠퍼 대령, 무슨 소린가? 에디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 연극은 끝났다고 했어. 이 광대 녀석아! 죽기 싫으면 어서 차안으로 기어 들어가라! - 쿠퍼, 지금 쿠데타라도 일으키겠다는 건가? 감히 네 녀석이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갑자기 에디가 화를 내며 발길질을 하더니 따귀를 때렸다. 바닥으로 쓰러졌다가 황급히 몸을 일으킨 쿠퍼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이 광대 녀석이 돌아버린 게 아니라면 절대 이럴 수가 없는 것이다. - 쿠퍼, 어디 가서 뭘 하다가 이제 나타나서 개수작이야? 내 손에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이 멍청한 녀석! 에디가 계속 다그치자 얼떨떨해 있던 쿠퍼는 리무진 문을 열어 보았다. 그곳에는 청바지 에 폴로 티셔츠를 입은 녀석이 넔을 잃고 멍청히 앉아 있는 게 아닌가? - 멍청한 녀석! 저 녀석이 바로 에디 패커란 놈이다. 알겠나? 도망치는 녀석을 내가 잡으 라고 시킨 거다. 아닌게아니라 녀석은 젤린도 보르딘 대통령한테는 있는 콧수염이 없었다. 쿠퍼는 녀석의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그곳에서 녀석의 지갑과 여권을 꺼내든 쿠퍼는 그것들을 살펴보았다. 모두 에디 패커의 것이었다. -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란 말인가? - 멍청한 녀석, 빨리빨리 처리해. 곧 연설을 시작해야 한다. 알겠나? 쿠퍼는 화가 나서 멍청하게 앉아 있는 젤린도의 뺨을 후려쳤다. 그러자 정신을 차린 젤린 도가 말했다. - 쿠퍼! 준비 다됐나? - 그래 광대 녀석아. 네 녀석을 지하감옥에 처넣을 준비가 다됐다. 네가 도망을 쳤다 이 거지? 화가 난 쿠퍼는 이번에는 젤린도의 복부에 주먹질을 했다. 젤린도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 고 축 늘어져 버렸다. 그러자 운전석에 앉아 있던 사내가 젤린도의 양손에 수갑을 채웠다. - 좋아, 이 멍청한 녀석을 빨리 지하감옥에 처넣도록! 쿠퍼가 화풀이를 하듯 소리쳤다. 그러나 리무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 왜 안 가나? 쿠퍼가 운전사에게 물었다. - 내가 지시한 거다. 기다려라. 쿠퍼, 그 차에 다른 한 녀석을 더 태울 예정이니까. 에디가 말하자 쿠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 다른 한 녀석이라뇨? - 그런 놈이 있다. 쿠퍼 대령, 난 이제 연설하러 가야 하니까 일을 제대로 하도록. 난 요 즘 자네에게 실망이 크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단 말이다. 알겠나? -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각하. 쿠퍼는 혼이 나면서도 다른 한 놈이 누구인가를 궁금해 하면서 단상으로 올라가는 에디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방금 혼이 난 것을 깨닫고 부리나케 단상 앞으로 달려가서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에디는 국방장관의 안내로 마이크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트럼펫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비둘기 떼들이 날아오르고 이번 행사를 총괄하는 육군 준장이 단상 저 아래에서 경례를 했 다. 에디는 자연스럽게 거수 경례로 응답하고 안주머니에 넣어둔 경축사를 꺼냈다. 그 모습을 단상 뒤편 귀빈석에 앉아서 지켜보는<엘 디엠 포> 신문사 사장 에번스는 입에 침이 마르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는 단상 아래에서 중대원들과 함께 쉬어 자세로 서있는 머서 중위를 바라보았다. 머서 중위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믿음 직스러웠다. 이윽고 에디는 경축사를 읽기 시작했다. 경축사는 국군의 날을 축하한다는 것으로 시작해 서 이 나라의 민주화와 야당 지도자인 주커만에 관한 이야기로 서서히 옮겨갔다. 그러자 사 람들은 긴장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간 대통령이 보여준 언론 검열 해제와 불법 구금되 었던 죄수 석방 등의 조처가 있기는 했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대통령을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쿠퍼는 그가 존경하는 유일한 사람인 젤린도 보르딘 대통령 각하가 왜 저러나 하는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 .....그래서 저는 그간의 독재를 반성하고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서 이 경사스런 국군의 날에 대통령직을 사임합니다. 그러자 보르딘 광장은 일시에 침묵에 빠졌다. 10만 명 이상이 모여 있는 광장이 완전히 침묵에 빠진 채 텔레비전 카메라 돌아가는 소리만이 정적을 누비고 있었다. 에디는 군중들이 믿지 않는 것 같아서 다시 한번 말했다. - 저는 그간의 독재를 반성하고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서 대통령직을 사임합니다! 그제서야 기다렸다는 듯이 광장을 뒤흔드는 듯한 환호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그러자 쿠퍼는 자신이 속았다는 걸 깨닫고 단상을 둘러싸고 있는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 - 저자를 체포하라! 대통령을 체포하라고 하자 경호원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 저자는 대통령이 아니고 배우란 말이다! 빨리 움직여라! 어서! 대통령 각하는 지금 차 안에 있다! 빨리 움직이지 않는 놈은 사살하겠다! 쿠퍼가 권총까지 빼들고 다그치자 경호원들은 그제서야 단상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광장에는 순식간에 사람들을 얼어붙게 만드는 요란한 총성이 일제히 울려 퍼졌다. 쿠퍼를 비롯한 경호원들은 납작하게 바닥에 엎드려서 재빨리 상황을 살폈다. 군화 소리가 광장을 울리더니 총을 든 군인들이 단상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벌써 몇몇 경호원들은 체 포를 당했거나 반항하다가 무자비한 구타를 당했으며 두세 명은 총을 맞고 쓰러지고 있었 다. 그리고 단상으로 달려 올라간 일단의 무장 군인들은 재빨리 에디를 둘러싸고 삼엄한 경 호를 했다. 쿠퍼는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대체 어떤 상황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뭔가가 그의 머리를 이겨버리려는 듯이 짓눌렀다. 군홧발이었다. - 쿠퍼 대령, 너를 체포한다. 머서 중위였다. 그는 수갑을 꺼내어 쿠퍼의 두 손을 뒤로 돌려서 채웠다. -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머리통을 날려버리겠다, 대령. 쿠퍼는 중위가 시키는 대로 일어섰다. 그러자 쿠퍼의 눈앞에 그의 보안부대원들이 무장 병사들한테 둘러싸여 무장 해제를 당하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이어서 단상에서 뭔가를 열심히 떠들어대고 있는 에디의 모습도 아련하게 들어왔다. - ....제가 물러난 뒤에는 서열 제1위인 국방장관이 과도선거내각을 구성한 다음 차기 대 통령 선거를 치르는 방식으로 이 나라에 민주화가 정착될 것입니다. 에디가 말을 끝내자 군중들이 지르는 환호성과 함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디는 군 중들을 향해서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단상을 내려왔다. 그의 임무는 이제 끝인 것이다. 에 디는 갑자기 온몸에 피로가 몰려오는 걸 느꼈다. 긴장이 풀리면서 나타나는 증세였다. 하지 만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수갑을 찬 채 머서 중위에게 붙들려 있는 쿠퍼를 향해 다가갔다. - 쿠퍼 대령, 내가 리무진에 다른 한 녀석을 더 태운다고 한 말 기억하나? - 기억하지. 난 그걸 이제야 깨달았지 멍청하게도. 다른 한 녀석이 바로 나란 것을 말이 야. 어쨌든 멋진 솜씨였어. 내 꾀에 내가 넘어간 꼴이지. 쿠퍼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허탈하게 웃었다. - 머서 중위, 수고했네. 이제 경호는 필요 없으니까 여기에 있는 분들을 지켜주게. - 알겠습니다, 각하. 머서 중위는 힘차게 경례를 했다. - 자, 그리고 이건 내 선물일세. 자네가 뮤지컬을 좋아한다고 했던가? 에디는 주머니에서 디스켓 한 장을 꺼내 중위에게 건네주었다. - 그, 그걸 각하께서 어떻게? - 다 아는 수가 있지. 그 디스켓에는<마지막 리허설>이란 제목의 뮤지컬 대본이 들어 있 네. 한번 읽어보게. 곧 유명해질 거니까. 그리고 한 장 복사해서 에번스씨에게 드리게. - 왜 갑자기 이런 걸? - 읽어보면 내가 왜 줬는지 알 수 있을 걸세. 중위 그럼 수고하게. 에디는 쿠퍼를 인계 받아서 젤린도와 함께 리무진에 태웠다. 차안에 있던 재닛 애시포 드와 렌덜 페퍼가 엄지손가락을 세워서 흔들어 보였다. - 어디로 모실까요, 각하? 재닛이 물었다. - 어디로 모실까요, 보르딘 씨? 에디가 재닛의 말투를 흉내내어서 젤린도 보르딘에게 물었다. 그는 이제 완전히 정신이 돌아와 있었으나 아직 무엇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을 못하 고 있는 것 같았다. - 이봐 쿠퍼. 왜 우리가 수갑을 차고 있는 건가? 그리고 대체 이놈들은 뭔가? 이 광대놈 의 낯짝은 알겠지만 말야. 이것도 연기하는 건가? 젤린도는 에디를 턱으로 가리켰다. - 각하, 젤린도 보르딘 대통령 각하. 우린 쫓겨났습니다. 쫓겨났다구요. 이제 각하는 대통 령이 아니고 저는 경호실장이 이니란 말입니다. 알겠습니까? - 무슨 개소리야? 어떤 놈이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른 거야? 당장 끌고 와. 총살시켜 버리 게! 젤린도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쿠퍼도 피곤했는지 대꾸하지 않았다. 자동차는 존스톤시 외곽으로 빠져서 롱몬트 산으로 올라갔다. 해발 5백 미터 정도 올라가 자 핀란드식 통나무집 한 채가 나타났다. 견고하게 지어진 통나무집은 입구를 제외하고는 숲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어서 멀리서 보면 마치 없는 듯이 보였다. - 보르딘 씨, 이 별장이 누구 소유인지 아시오? 자동차가 서자 에디가 물었다. - 난 대통령이다. 이 광대녀석아, 대통령이라고 정중하게 불러라. - 이 별장이 말이오, 바로 에번스 씨 소유요, 알겠소? - 그 망할 내 처남 말인가? 그놈을 진작에 마누라와 같이 죽여 없앴어야 하는 건데. - 자, 안으로 들어갑시다. 당신들이 며칠 동안 지낼 집이니까. - 제기랄, 내 처지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안에 킹사이즈 침대는 있겠지? 난 그게 아니 면 잠을 못 이루는데. 젤린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 침대가 있어도 아마 사용할 순 없을 거요. 당신들한테 침대를 줬다가는 에번스씨가 크 게 화를 낼 테니까요. 그보다는 당신들한테 딱 어울리는 방이 있소. 사방이 밀폐된 아주 튼 튼한 방이오 당신들을 위해서 특별히 손본 거라 아주 마음에 들 거요. 우리는 그 방의 이름 을 '독재자의 마지막 방' 이라고 지었소. 아주 어울리는 이름 아니오? 그들은 젤린도와 쿠퍼를 독재자의 마지막 방에 집어넣고 문을 잠갔다. 곧 이어 안에서 요 란하게 두 사람이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23 명예 대통령 10월 15일 오전 11시, 존스톤 공항에 도착한 에디는 주머니를 뒤지다가 대통령 전용기 조 종사인 빌리 모건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발견하고는 웃음을 지었다. 이제 대통 령 사임을 발표했기 때문에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근사하게 미국으로 귀국하는 것은 다 틀 려버린 일이었다. 그는 그 W족지를 구겨서 휴지통에 던져버리고는 팬아메리칸 항공사 부스 로 다가가서 뉴욕행 비행기표 한 장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참으로 오랬만에 고향으로 돌아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주 오랫동안 험한 객지 생활을 하다가 이제야 겨우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가슴 한편에 숨어 있는 쓸쓸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 나라의 대통령까지 지낸 사람인데 이렇게 외로운 여행객처럼 혼자서 돌아가자니 뭔가가 허전했다. 돈을 지불하고 비행기 티켓을 받아든 그는 돌아섰다. - 에디, 소식도 없이 이렇게 혼자서 귀국하면 어떡해요? 호텔에 전화해 보고 알았잖아요? 활짝 웃는 얼굴로 자신을 나무라는 여자는 재닛이었다. -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소. 그런데 어쩐 일이오? - 그런 질문이 어디 있어요? 배웅 나온 거잖아요. 그들 사이에 갑자기 한 사내가 끼여들었다. - 충성! 머서 중위였다. 그는 에디에게 먼저 경례를 하고는 말했다. - 각하,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 중위, 난 각하가 아니고 그냥 배우요. 각하라는 말은 이제 하지 마시오. - 아닙니다. 당신은 제 마음속의 영원한 각하이십니다. 어제 디스켓에 담긴 대본을 읽어 보고 모든 것을 알았습니다. 각하께서 독재자 젤린도 보르딘의 대역을 맡은 것에서부터 결 국 이 땅에 민주화를 정착시킨 것까지 그 동안의 모든 일을 이제야 겨우 알게 되었습니다. 패커 씨, 골드다이아코스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 중위 젤린도 보르딘 씨와 쿠퍼 대령은 어떻게 했소? - <마지막 리허설>에서처럼 롱몬트 산장에 가서 두 사람을 데려다가 일단 경찰서 유치 장에 수감시켰습니다. 아마, 지금쯤 조사를 받느라고 땀을 빼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각하, 이것을 가져가셔야죠. 중위는 큰 여행가방 하나를 에디에게 건네 주었다. - 이게 뭐요? 가방은 생각보다 묵직했다. 에디는 가방을 열어보았다. 안에는 지폐 냄새가 생생한, 백 달 러 지폐 묶음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렇게 많은 돈을 본 적이 없는 에디는 신음을 삼키고 물었다. - 이게 무슨 돈이오? - 이 돈은 각하께서 대역을 하고 받기로 한 돈의 잔액입니다. <마지막 리허설>에 따르면 패커 씨는 젤린도 보르딘으로부터 선금 20만 달러를 받았고, 잔금 10만 달러를 더 받아야 하는 상태더군요. 그리고 일이 잘 되면 10만 달러외 보너스를 받기로 되어 있구요. 그래서 국방장관님과 에번스 씨, 그리고 임시 각료들이 협의해서 이 돈을 지급하게 된 것입니다. - 20만 달러가 훨씬 넘는 것 같은데? - 맞습니다. 각하께서 워낙 잘하셨기 때문에 보너스를 열 배로 높이기로 임시 각료회의에 서 결정했습니다. - 그, 그럼 백만 달러? - 그렇습니다. 가방 안에 상세한 내역서가 들어 있습니다. 총액은 100만 달러입니다. 자, 그럼 여기에 서명해 주십시오. 머서 중위는 영수증을 꺼내어 내밀었다. - 좋소, 하지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그렇지 않아도 이 나라에는 가난한 사람 들이 많은데 내가 이렇게 많은 돈을 가져가면 그들은 어쩌겠소? - 그건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곧 젤린도와 쿠퍼의 재산 60억 달러와 그간 부 정 축재를 한 자들의 재산 2백억 달러를 환수해서 그것을 빈민 구제 사업과 복지 사업에 쓸 예정입니다. 그렇게 되면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국에서는 빈민을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 그렇다면 아무런 부담 없이 이 돈을 받도록 하겠소. -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극본을 읽다보면 각하를 도와주는 의문의 매력적인 여인이 나오던데 그분이 혹시 이분이신가요? 중위는 재닛을 가리켰다. - 그렇소. 내 친구 재짓 애시포드 양이오. 재닛과 머서 중위는 서로 인사했다. 에디는 극본에는 재닛 일행을 미국 중앙정보부 직원이라는 걸 밝히지 않았던 것이다. - 한 가지 더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대본에 슈퍼모델 수지 다이아 양과 결혼하는 것으로 되어 있던데 정말 그렇게 됩니까? 에디는 미소를 지었다. - 내가 대본을 괜히 준 모양이오. 이렇게 귀찮게 할 줄 알았으면 주지 않는 거 였는데 말 이오. 어쨌든 대답을 하자면 그럴 가능성이 높소. - 몇 가지 더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참겠습니다. 자, 그럼 각하, 저를 따라오 시죠. 지금 많은 분들이 각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 누가 나를 기다린다는 거요? - 가보시면 압니다. 에디는 재닛과 함께 머서 중위를 따라갔다. 줒위는 그들을 대통령과 귀빈들만 이용하는 공항 영빈실로 안내했다. 에디가 안으로 들어서자 국방장관 엘리엇과 에번스가 반갑게 달려 나오며 인사했다. - 각하,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각하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그냥 패커라고 불러주시오. - 아닙니다, 각하. 당신은 우리들의 영원한 각하십니다. 우리는 각하를 그냥 보내드릴 수 가 없어서 대통령 전용기로 미국까지 모시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이건 골드다이아코스 트 공화국의 명예대통령증입니다. 받으시죠. 증정식을 제대로 못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국방장관은 화려하게 장식된 증명서 한 장을 내밀었는데, 증명서에는 에디 패커를 골드다 이아코스트 공화국의 명예대통령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 명예대통령증이라는 게 다 있습니까? 그리고 이런 걸 내가 받아도 되는 겁니까? 에디는 어리둥절하면서도 기뻤다. - 다른 나라에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나라에는 이제부터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 로 각하께서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국을 방문하면 현대통령과 동일한 대우를 받으시게 됩니 다. 그리고 명예대통령 품위 유지비로 매년 24만 달러와 현대통령에 준하는 자동차가 제공 됩니다. 에디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앞으로도 대통령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는 게 아닌가? - 정말 이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여러분, 나는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국을 진정으로 사 랑하는 사람 중의 한 명으로서 절대 이 나라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내게 줄 돈이 있으면 그것을 이 나라를 위해서 쓰시길 바랍니다. 에디는 진심이었다. - 각하, 그 점이라면 조금도 염려 마십시오. 골드다이아코스트는 엄청난 금과 다이아몬드 가 있는 나라입니다. 앞으로 민주화가 정착되면 세계 최고의 부국이 될 자신이 있습니다. 그 때가 되면 각하께 좀더 많은 경비를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 세계 최고의 부국이 될 수 있다니 반가운 말입니다. - 그리고 각하, 미국에 도착하시면 아시겠지만 에번스 씨가 각하께 특별한 선물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에번스씨가 직접 고른 선물입니다. - 에번스 씨, 뭔지는 모르지만 고맙습니다. 에디는 에번스의 특별한 선물이 무엇인지 궁금했으나 묻지는 않았다. - 그런 말씀 마십시오. 각하께서 기뻐하시면 좋겠습니다. - 그럼, 가시지요. 국방장관과 에번스가 에디를 대통령 전용기 쪽으로 안내했다. - 에디, 나도 같이 미국으로 가야겠어요. 화상을 입어서 여기서 일하기는 틀렸거든요. 재닛이 속삭였다. - 화상? - 얼굴이 너무 알려져서 이 나라에서는 일을 하기가 어렵다는 거예요. 에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대통령 전용기는 보잉 727기였다. 에디 일행은 기장과 승무원들의 영접을 받으며 기내로 들어갔다. 비행기는 호화스러웠으며 30~40명이 앉 을 수 있는 넓은 특등석 좌석과 침대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에디는 국방장관과 에번스, 머서 중위와 차례로 악수했다. 그들은 이내 눈시울을 붉히더니 울음기가 섞인 어조로 말했다. - 각하,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우리 국민들은 각하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 나도 이 나라에 민주화가 정착이 되는 것 같아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 에디는 그들과 다시 일일이 포옹했다 그리고도 그들은 고난을 함께 겪은 동지처럼 잡 은 손을 놓을 줄 몰랐다. 비행기의 엔진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그들은 손을 흔들며 비행 기를 내려갔다. - 감동적인 이별이었어요. 재닛이 말했다. - 맞소, 내 일생에 있어서 가장 보람된 일이 될 거요. - 좋은 일을 한다는 건 즐거운 거죠. 에디는 안전벨트를 매고 푹신하고 편안한 의자에 기댔다. 그러자 조종사의 음성이 흘러나 왔다. - 각하, 이륙준비가 끝났습니다. - 그래, 수고 좀 해주게 에디는 정말 대통령이 된 것처럼 말했다 아름다운 스튜어디스가 다가오더니 물었다. - 각하, 필요하신 게 있으신지요? - 난 뜨거운 커피 한 잔이면 되겠는데. 당신은? - 위스키와 소다수가 좋겠어요. 재닛이 말했다. - 알겠습니다, 각하. - 에디, 정말 대통령이 된 기분이겠어요. 모두들 꼬박꼬박 각하라고 부르잖아요? - 정말 그렇소. 재닛, 솔직히 말하면 불편하기보다는 좋소. 에디는 가볍게 웃었다. - 아, 그러고 보니 저도 당신한테 줄 게 있군요. 그녀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는 가방을 열어서 작은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 열어보세요. 에디가 봉투를 열자 그 속에서 70만 달러 짜리 수표 한 장이 나왔다. - 우리가 드리기로 한 사례비 50만 달러에 보너스 20만 달러가 추가된 거예요. - 고맙소, 재닛. 난 정말이지 갑자기 이렇게 많은 돈이 생기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엄 청난 돈이 그냥 마구 굴러 들어오는군요. - 아름다운 황금 여신이 당신한테 반했나 보죠? - 그런 것 같소. 에디는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그간 벌어들인 돈을 가만히 계산해 보았다. 젤린도와 계약 때 받은 선금이 20만 달러, 후에 일을 완료하고 받은 돈이 110만 달러, 재닛으로부터 받은 돈이 70만 달러, 그리고<마지막 리허설>로 받은 돈이 40만 달러, 그러니까 두 달도 안 되는 사이에 에디는 240만 달러를 벌어들인 것이다. 게다가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국으로부터 받 기로 한 연금과 대본 인세 약 50만 달러를 합하면 약 3백만 달러를 벌어들인 셈이다. 신디 윌슨이나 수지 다이아의 재력에 비하면 하찮은 액수에 불과하나 그는 어쨌든 미국이 라는 나라에서도 부자로 살아갈 수 있게 된 셈이다. 이런 생각을 하던 에디는 뉴욕에 도착하면 돌아갈 집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월세 아파트는 그의 짐과 함께 날아가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에디는 실소를 했다. - 왜 웃죠? - 뉴욕에 내 몸 하나 쉴 집이 없다는 게 떠올랐기 때문이오. - 당장 하나 사면되지 무슨 걱정이에요?. 당신은 이제 부자잖아요. - 그렇지? 에디는 곧 매니저인 존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 존슨? 저 에디입니다. 안녕하세요? - 아, 에디.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뉴욕에 도착했나? - 아닙니다. 세 시간 후쯤에 케네디 공항에 도착할 겁니다. 저, 부탁이 있어서 전화드렸습 니다. 뉴욕에 도착하면 당장 들어갈 집이 없어서 말입니다. 당신이 나서서 지금 당장 집을 좀 구해줬으면 좋겠는데요. - 무슨 소리야? 자네한테 집이 없다니? 아직 얘기 못 들었나?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 으 리으리한 집이 있잖아. - 무슨 소리죠? 좀 알아듣게 말해 보세요. 에디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 아, 아직 못 들은 모양이군 그래. 그저께 저녁에 에번스라는 사람이 자네에게 집을 한 채 사주라고 돈을 보내와서 내가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 있는 집을 한 채 사두었네. - 에번스가요? 에번스의 선물이 무엇인지 에디는 이제야 알 수 있었다. - 그래요? 그곳에 있는 집들은 모두 비쌀 텐데요? - 물론 비싸지, 백만 달러나 하니까. - 배, 백만 달러요? - 그래, 자네 집은 전에 재클린 오나시스가 살던 곳과도 아주 가깝고 신디 윌슨양의 집과 도 가깝네. 전망도 그만이고. 아, 에번스씨가 자네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하더군. 자네가 한 일을 생각하면 백만 달러 짜리 집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자네의 건강과 행운을 빈다 고 했네. 자네 대체 그 나라에서 뭘 했길래 백만 달러 짜리 집을 선물 받은 건가? 그런 일 거리가 있으면 나한테도 하나 소개해 주게. - 자연히 아시게 될 겁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 그래, 될 수 있으면 빨리 오게. 자네를 찾는 사람들 때문에 내가 골치가 다 아플 지경 이니까 말일세. 요 며칠 사이에는 정치부 기자들까지 자네를 찾고 있다네. 어쨌든 자네가 얼 른 와서 얼굴을 내밀어야 해결이 될 걸세. 그럼 뉴욕에 도착해서 보세. 존슨은 즐거운 비명처럼 한바탕 쏟아 놓고는 전화를 끊었다. - 정말 부러워요. 에디, 난 돈 같은 것에는 그렇게 관심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에 디를 보니 부럽네요. 좋은 집과 좋은 차, 그리고 조만간 얻게 될 아주 예쁜 아내......그렇죠. 에디? 당신도 좋죠? - 그렇소. 재닛. 너무 좋소. 나도 내 행운이 믿기지 않을 정도요. 이윽고 보잉 727기는 케네디 공항을 선회하더니 착륙했다. 비행기가 멈추고 기장과 승무 원들이 모두 나와서 배웅했다. - 각하, 안녕히 가십시오. 다시 모시게 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 그래요, 수고했소. 에디는 기장을 비롯한 승무원들 모두와 악수를 하고 트랩을 내려왔다. 그러자 단정한 차 림의 사내들이 다가오더니 인사를 하고는 명함을 내밀었다. 한 사람은 국무성의 의전과장이 었고 다른 한 사람은 공항의 의전과장이었다. - 무슨 일이십니까? 에디가 의아해서 물었다. - 패커 씨를 정중하게 모시기 위해서 왔습니다. 이리로 오십시오. - 나를요? 왜요? -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패커 씨는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국의 명예대통령이고 또 우리 미국을 위해서 아주 큰일을 하셨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에디는 문득 머리가 아파 오는 걸 느꼈다. '이, 이게 아닌데.' 하지만 에디는 재닛과 함께 공항 귀빈실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 다리고 있었다. 신문과 텔레비전 기자들에서부터 카메라맨까지 모두 에디가 나타나자 눈을 빛내며 달려들 기세를 취했다. 에디는 갑자기 도망치고 싶어졌다. 그는 타고난 자유인이었다. 골드다이아코스트의 명예대통령도 좋지만 그것이 속박이 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에디는 재닛에게 눈짓을 하고는 화장실을 잠시 다녀오겠다고 하면서 일어섰다. 기자와 카메라맨들 이 아쉬워하는 눈으로 일제히 에디를 바라보았다. 재닛이 뒤따라왔다. - 재닛, 난 이런 분위기는 딱 질색이라서 도망쳐야겠는데 당신은 어쩌겠소? - 좋죠. 나야 어차피 들러리도 못 되는 데 차라리 그게 낫죠. - 그럼, 시작합시다. 그들은 각각 화장실로 들어가서 창문을 넘었다. 저쪽에서 창문을 가뿐하게 넘는 재닛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달려오더니 그의 무거운 돈 가방을 같이 들어주었다. 그들은 길낄거 리며 택시를 타는 곳으로 빠져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 앞으로 대형 리무진 한 대가 미 끄러지듯 다가오더니 검은 양복 차림의 운전 기사가 내렸다. - 에디 패커 각하가 맞으시죠? 운전 기사는 한 손에 에디의 사진을 들고 에디와 비교해 보면서 말했다. - 맞군요. 저는 각하의 운전 기사 겸 경호원인 토미 키넌입니다. 인사드립니다. 각하를 모 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운전 기사는 정중하게 자신의 소개를 하고는 차 문을 열어주었다. - 그럼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 있는 내 집도 알고 있소? - 운전 기사라면 당연히 알아야죠. 먼저 사시던 아파트에서 짐도 찾아서 옮겨놨습니다. 약간의 돈 문제는 집사가 일단 처리했습니다. - 집사가? -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국에서 고용한 집사가 각하를 모시게 되어있습니다. - 아, 그렇소? 그럼 당신의 고용주도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국이오? - 그렇습니다, 각하. 재무부에서 고용했습니다. 각하를 잘 모시는 게 제 임무입니다. - 흠, 그렇소? - 에디, 지금 한가하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아요. 저길 보세요. 아까 귀빈실에서 본 기자와 카메라맨들이 그를 부르며 새카맣게 몰려오고 있었다. 경험이 없는 에디는 그들을 보자 겁이 덜컥 났다. 여기서 우물거리다가는 기자들한테 밟 혀서 질식할 것 같았다. 에디는 운전 기사가 짐을 싣기를 기다렸다가 재빨리 재닛과 함께 차에 탔다. 이어서 리무진은 미끄러지듯이 달려나갔다. - 따돌리기가 만만치 않을 텐데요? 저들은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뉴욕 기자들이라구 요. 취재를 위해서는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갈 수 있는 체력을 지닌 사람들이죠. 재닛이 뒤를 돌아보면서 걱정스럽게 말했다. - 에디, 이제 당신은 큰일났어요. 보통 사람이 아니라구요. 당산은 대단한 유명인이 됐어 요. 보실래요? 재닛은 장담하듯이 말하고는 텔레비전을 켰다. 그러자 질주하는 리무진의 뒷모습이 나타 나면서 기자의 설명이 이어졌다. -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국의 대통령 전용기로 방금 공항에 도착한 에디 패커 씨를 태운 리무진은 현재 맨해튼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아, 아주 빠른 속도로 JFK 고속 버스를 앞지르고 있습니다. 잠시 후에는 퀸즈 미드 타운 터널을 통과해서 맨해튼으로 접어들 것 같 습니다. - 이 리무진이 바로 우리가 탄 이 차라구요. 이제 알겠죠? 이렇게 생중계를 하고 있잖아 요? 에디는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면서 텔레비전을 흥미있게 지켜보았다. 화면이 NBC 보도국으로 바뀌더니 낯익은 진행자가 말했다. - 패커 씨는 왜 기자 회견을 피하고 있는 겁니까? - 아마도 피로에 지친 탓이라고 여겨집니다. 패커 씨는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국에서 너 무나 큰일을 했기 때문에 쉬고 싶을 것입니다. - 패커 씨와 같이 있는 여자는 누구죠? 둘이 사귀는 사이인가요? - 아름다운 여성이 동승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나 누구인지 정확하게 파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재닛이 한숨을 내쉬었다. - 이러다가는 직장에서 쫓겨나겠어요. 맨해턴에 들어서서 적당한 곳에 내려주세요. 내가 알아서 저 사람들을 따돌리고 도망칠 테니까요. - 알았소, 재닛. 그 동안 고마웠소. 에디는 재닛에게 악수를 청했다. - 우리 약속은 어떻게 되는 거죠? 언제 한 번 만나기로 한 거 말예요. 지금 헤어지면 다 시는 당신을 만나지 못할 것 같은데. 재닛은 에디를 똑바로 쳐다보며 손을 잡고 꼭 쥐었다. 그 손은 차안이 냉방 중인데도 불 구하고 뜨거웠다. - 약속이라면? 에디는 '아차' 했다. 그는 재닛과 한 약속이 있었다. 에디는 잠시 생각했다. 그녀의 말대로 지금 헤어지면 다시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 여기서는 어때요? - 좋소. 에디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 - 키넌, 좀더 맨해튼을 돌다가 집으로 갔으면 좋겠소. - 알겠습니다. 각하. 에디는 버튼을 눌렀다. 차단 막이 운전석 뒤쪽에서 스르르 올라갔다. 그러자 널찍하고 아 늑한 공간이 확보되었다. 그들은 먼저 와인을 한 잔씩 하고는 서로를 뜨거운 눈으로 지켜보며 옷을 벗었다. 차안이 었지만 그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모두 벗어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끌어안 고 격렬한 애무를 시작했다. 너무 서둘러서 이가 딱딱 부딪쳤다. 이윽고 에디는 재닛을 가만 히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참으로 아름답고 능력 있는 여자였다. 그는 그녀의 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칼을 쓸 어올리며 말했다. - 재닛, 난 당신을 영원히 못 잊을 거야. - 나도 그래요., 에디. 만남은 짧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오랫동안 기억할 거예요. 어서요, 에디! 그녀가 힘차게 에디를 끌어안으며 매끈한 다리로 다시는 놓지 않을 것처럼 에디를 감았 다. 에디는 그녀의 허벅지를 쓸어 올리며 서서히 그녀를 향해서 들어갔다. - 에디, 에디....... 그녀는 이별이 슬픈지 더욱 세차게 그를 끌어안았다. 에디는 천천히 그러면서도 힘있게 움직였다. 그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재닛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는 온몸에서 땀 이 흐르도록 그녀를 사랑해 주었다. 그리고 20분 후, 재닛 애시포드는 리무진에서 내리더니 골목 안쪽으로 달려갔다. 에디는 재닛이 달려가는 걸 지켜보면서 속으로 안녕, 하고 말했다. 그녀는 골목이 꺽어지는 곳에서 돌아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환한 미소가 슬픔에 잠겨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에디는 가슴이 저려오는 걸 느꼈다. 리무진은 스르르 움직였다. 그녀도 골목 안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안녕, 나의 천사. 그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24 새로운 시작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에디가 눈을 떴을 때, 낯선 중년 사내가 머리맡에 서 있었다. 깜짝 놀란 에디는 벌떡 일어나면서 외쳤다. - 당신 누구요? 사내는 조용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 각하, 어제 인사드렸는데 잊으셨나 보군요. 집사인 빌 렌트입니다. - 아, 렌트. 미안하오. 익숙지가 않아서 그랬소. 항상 혼자서 깨어나던 버릇이 있어서 말 이오. 그런데 무슨 일이오? - 벌써 10시입니다, 각하. 일어나실 시간이 지났고, 또 마틴 그로스 씨와 수지 다이아 양, 그리고 존슨 씨께서 여러 번 전화하셨습니다. - 전화를?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들 알았지? 에디는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준 사실이 없기 때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 그게 유명세라는 거 아닐까요? - 유명세? 어쨌든 알겟소. 그런데 렌트. - 네, 각하. - 앞으로 나한테 각하라고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소. 그냥 패커라고 불러요. 난 그게 편하 고 좋소. - 하지만 저를 고용한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국의 재무부에서는 꼭 각하라고 부르라고 지시했습니다. 패커라고 부르는 게 편하단 말이오. - 전 반드시 각하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계속 각하라고 부르겠습니다. 집사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 렌트, 분명히 들어요. 만약 앞으로 나를 각하라고 부르면 당장에 해고될 줄 아시오. 그 리고 이 말은 키넌에게도 전하시오. - 정 그러시다면 할 수 없죠.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렌트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나간 뒤에 침대에서 내려온 에디는 맨발로 부드러운 카 펫을 밟고 걸어가서 블라인드를 열었다. 맑고 투명한 햇살이 환상적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림 같은 전망과 쾌적한 공기는 여기가 과연 뉴욕일가 싶을 정도로 좋았다. 에디는 먼저 마틴 그로스에게 전화했다. - 에디? - 예, 접니다. 그간 안녕하셨죠? - 나야, 잘 있지. 텔레비전을 보고 자네가 돌아왔다는 걸 알았네. 자네한테 어떻게 신세를 갚지? 그때 그 젤린도의 동물원을 찾은 사람이 젤린도로 변장한 자네라는 걸 텔레비전을 보 고서야 알았네. 에디, 고맙네. 자네는 내 생명의 은인일세. 어떻게 신세를 갚아야 할지 모르 겠네. - 신세는요.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로스 씨가 저를 돌봐주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 도 아닙니다. - 그래서 말인데, 자네, 수지 다이아 양과 곧 결혼할 예정이라며? - 그런 말은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 이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일세. 이제 자네는 스타가 아닌가? 스타에게는 비밀이란 게 있을 수 없단 말이지. 어쨌든 그래서 나는 자네의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나임의 처녀상 을 주고 싶은데 어떤가? - 나임의 처녀상을요? 그건 그로스 씨께서 대단히 아끼시는 물건 아닙니까? 또 게다가 굉장한 고가 품이기도 하구요. - 아니야, 이런 물건은 주인이 따로 있는 법이야. 나임의 처녀상은 수지 다이아 양에게 잘 어울리는 물건이지. 받아주게. 에디는 기뻤다. 수지가 그렇게 갖고 싶어하는 걸 그가 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는 나임 의 처녀상을 들고서 수지에게 청혼하는 모습을 그리며 흐뭇한 미소를 떠올렸다. - 대신 나도 부탁이 있네. 마틴이 말했다. - 말씀해 보십시오. - <마지막 리허설>에 나를 주연으로 써 주게. 물론 감독의 허락이 있어야겠지만 자네의 부탁이면 감독도 거절하지 못할 걸세. 어떤가? 에디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그는 대본가로만 만족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 고 그가 주연을 맡는 것보다는 연기력이 월등한 마틴이 맡는 것이 흥행에도 좋을 것 같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 에디, 어떤가? 어려운가? - 아, 아닙니다. 선배님이 주연을 맡을 수 있도록 힘을 쓰겠습니다. - 그래, 고맙네. 아, 그리고 나임의 처녀상은 내가 사람을 시켜서 지금 곧 자네 집으로 보 내주겠네. - 감사합니다, 그로스 씨. - 그럼 나중에 보세. 에디는 이번에는 수지 다이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자마자 전화 저쪽에서는 기 다렸다는 듯이 수지의 음성이 전해져왔다. - 에디? - 그렇소, 수지. - 나쁜 사람! 나를 그렇게 속이니까 기분이 좋던가요? 수지의 귀여운 투정이 전화선을 타고 구슬처럼 굴러왔다. 그녀와 대화할 때마다 느기는 건데, 그녀는 상대방을 아주 기분 좋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 미안하오, 수지. 그대는 어쩔 수가 없었소. 사실대로 말하고 청혼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때는 자칫 잘못하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나로서는 수지를 속일 수박에 없었소. - 에디, 방금 청혼이라고 그랬나요? 수지의 음성이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 그렇소, 수지. - 에디, 그렇다면 지금 당장 저에게 청혼해 주시겠어요? - 안 되오. 그렇게 할 수는 없소. 잠시 침묵이 흘렀다. - 왜 안 되지요? 왜 그럴 수 없다는 거죠? 수지가 항의라도 하듯이 물었다. - 사랑하는 당신한테 전화로 청혼할 수는 없소. 직접 찾아가서 하겠소. - 나쁜 사람, 남을 놀리는 게 취미인가요? 지금 너무 놀라서 제 심장이 세차게 뛰는 소리 가 들리지 않나요? - 아, 정말 천둥소리처럼 들리는군. 그러다 비가 올까 두렵소. 에디는 가볍게 웃었다. 그는 오후 늦게 불루밍데일리 백화점 옆에 있는 근사한 레스토랑인 그린 아일랜드에서 수 지를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존슨은 왕성한 활동력을 지닌 매니저답게 그가 전화를 하기도 전에 다시 전화를 해왔다. - 에디, 아직도 안 일어난 건가? - 아니 일어났습니다. 이제 막 나가려던 참입니다. - 에디, 이쪽으로 먼저 와줘야겠어. 지금 여기에서 자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1개 소대 병력은 된다구. 자네가 와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어. 그리고 감독도 자네를 빨리 만나고 싶어 해. - 알겠습니다. 곧 가도록 하겠습니다. 에디는 정말 바쁘다는 걸 실감했다. 그는 늦은 아침 식사를 끝내자마자 존슨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차안에서 병원에 있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 에디, 에디냐? 자랑스런 내 아들 에디가 맞지? - 맞습니다, 어머니 아들 에디예요. - 그런데 네가 무슨 일을 했길래 텔레비전에서 그렇게들 난리를 치는 거냐? 이 병원에서 도 온통 네 이야기뿐이란다. - 내일 찾아뵙고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머니. - 오늘 오는 게 아니고 내일이란 말이지? - 죄송합니다, 어머니. 내일 뵙겠습니다. 에디는 전화를 끊고 이번에는 신디 윌슨에게 전화했다. 그녀의 음성은 의외로 차분했다. - 에디, 난 당신이 곡 성공할 줄 알았어요. 명예대통령이기는 하지만 대통령이 되긴 했잖아요? 이젠 수지 씨와 결혼할 일만 남아 있군요. 아무튼 두 분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살길 바랄게요. 그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 신디, 신디 듣고 있소? 신디, 나도 어쩔 수 없는 우리 사이가 가슴이 아파...... - 알고 있어요, 에디. - 결혼식 때 꼭 불러주실 거죠? - 물론이오, 신디. 그리고 그간 여러 가지로 도와준 것 고마웠소. - 아녜요, 오히려 내가 고마워요. 에디. 전 지금 당신의 집을 내려다보면서 전화를 받고 있어요. 사실 아침에 당신이 블라인드를 열고 햇빛을 받으며 서 있는 것도 다 보았어요. 어 딘 가로 여러 번 전화를 하더군요. 난 그때마다 내게 오는 전화인가 해서 가슴을 졸였는데 아니었어요. 갑자기 신디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 아아, 미안해 신디.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에디는 가슴이 아팠다. - 신디, 미안하오.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을 뿐이야. 나를 여러 번씩 찾은 사람들이어서 어쩔 수가 없었소. - 아녜요, 에디.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이렇게 투정을 부리고 있어요. 나 참 못났죠? 에디? - 신디, 난 당신한테 미안할 뿐이야. 그의 경호원 겸 운전 기사인 키넌이 손짓으로 창 밖을 가리켰다. 리무진은 이미 존슨의 사무실이 있는 빌딩 앞에 서 있었다. - 에디, 그럼, 이만 끊을게요. 잘 있어요. 세월이 오래 지난 뒤에 다시 만나요. 그때는 절 대 헤어지지 말아요, 에디. 그가 무어라고 할 사이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에디는 수화기를 들여다보며 괴로운 음성 으로 중얼거렸다. - 안녕, 신디. 안녕. 키넌이 차 문을 열어주었다. - 패커 씨, 올라가셔야죠. 저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알았소. 에디는 한숨을 내쉬고는 존슨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카메 라 플래시가 터지며 기자들이 몰려와 질문을 퍼부어 댔다. 눈부신 조명 때문에 땀이 날 정 도였다.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국에는 어떤 계기로 가시게 된 겁니까? - 수지 다이아 양과 결혼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 <마지막 리허설>은 직접 겪은 일을 쓴 거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 수지 다이아 양과는 언제 결혼하실 겁니까? - 한때 미국 최고의 신부감으로 꼽히는 신디 윌슨양과 사귄 것으로 알고 있는데 헤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질문은 끝이 없었다. 에디는 도저히 사람들을 헤치고 나갈 수가 없었다. 이때, 누군가가 그의 뒤로 다가오더니 완강한 힘으로 기자들을 밀어냈다. - 자, 비키시오. 이분은 배우이기도 하지만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국의 명예대통령이시기 도 합니다. 예의를 갖추어 주십시오. 어느새 나타난 키넌의 힘과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기자들은 길을 열어주었다. - 고맙소, 키넌. 그는 키넌의 뒤를 따라 겨우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안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텔 레비전 카메라가 돌아가고 조명이 에디의 얼굴을 향해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 에디! 존슨이 기자들 틈에서 겨우 손과 얼굴만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 에디, 보다시피 이곳은 완전히 업무 마비 상태야. 빨리 손을 쓰라구. 잘못하면 난 파산 하고 말겠어! 존슨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 알겠습니다. 에디는 이렇게 대답했지만 경험이 없는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그러자 키넌 이 나섰다. - 자, 모두 조용히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자꾸 늦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질문은 한 사람한테 한 번씩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아, 제가 누구냐구요? 저는 패커 씨의 경호원입니다. 기자들은 잠시 웅성거렸지만 곧 조용해졌다. 사무실이 조용해지자 존슨의 사회로 기자 회 견이 시작되었고, 자그만치 다섯 시간 후에야 겨우 끝났다. 기자들이 모두 돌아가자 녹초가 되어 앉아 있는 에디에게 누군가가 인사를 청했다. - 패커 씨, 안녕하십니까? 톰 케리입니다. 이제야 겨우 내게 차례가 돌아왔군요. 브로드웨이의 유명한 감독 톰 케리의 얼굴을 에디는 잘 알고 있었다. - 반갑습니다, 감독님.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기쁩니다. 두 사람은 지쳤지만 굳은 악수를 했다. - 훌륭한 작품을 쓰신 작가를 직접 만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읽은 대본 중에서 최고였습니다. 아마 금세기 최고의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 지나친 칭찬입니다. 에디는 말은 이렇게 했으나 최고의 감독에게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 아닙니다. 정말 뛰어난 대본입니다. 배역, 무대 설정, 대사까지 모두 나무랄 데가 없습 니다. 이제 최고의 배역을 찾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극장에서 배우들을 심사할 예정인데 간 이 가시겠습니까? - 좋습니다, 일어나시죠. 주연 배우로 점찍어 놓은 사람이 있습니까? - 아직은 없습니다. - 그럼, 마틴 그로스 씨가 어떨까요? 그분이라면 잘할 것 같은데요. - 아, 좋죠. 그런데 그로스 씨가 수락할까요? 오랫동안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후로 성격이 좀 변했다는 얘기가 들리던데. -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 마십시오. 내가 말하면 꼭 할 겁니다. - 그럼, 주연은 그로스 씨로 하죠. 두 사람은 만족해서 배우들이 심사를 기다리고 있는 극장으로 떠났다. 레스토랑 그린 아일랜드로 에디가 들어서자 이미 와서 기다리고있던 수지 다이아가 얼굴 가득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 에디! 그녀는 탄성처럼 불렀다. - 수지, 얼마만이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것 같지 않소? 난 아직도 골드다이아코스트 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할 때가 있소. - 너무 고생 많았어요. 저도 골드다이아코스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신한테 감사하고 있어요. 두 사람은 샴페인을 마시며 골드다이아코스트의 자유와<마지막 리허설>을 위해서 건배했 다. - 이제 우리 둘을 위해서 건배할까요? 수지가 잔을 들어 보였다. - 그전에 먼저 할 일이 있소, 수지. 에디는 그가 가져온 상자를 들어서 조심스럽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 열어봐요. - 이게 뭐죠? 호기심이 가득 찬 눈을 반짝이며 수지는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 이, 이건? 그녀는 나직한 탄성을 질렀다. 상자 속에서 그녀가 그렇게도 갖고 싶어하던 나임의 처녀 상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나임의 처녀상을 꺼내어 살펴보았다. 순결하고 아름다 운 처녀의 모습이 신비로울 정도로 잘 담겨 있는 처녀상은 조명을 받아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 나임의 처녀상은 청혼 선물이오., 수지. 내 청혼을 받아주겠소? 에디는 새삼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 무, 물론이지요. 받아들이겠어요. 이렇게 귀한 것을 청혼 선물로 주다니, 받아도 되는 건가요? 그녀는 나임의 처녀상이 3백만 달러 이상 나가는 고가품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 물론이오, 수지. 수지는 나임의 처녀상을 상자에 조심스럽게 집어넣고는 에디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 너무 행복해요, 에디! 25 결혼 뉴욕 주립극장에 올려진 뮤지컬 <마지막 리허설>은 대성공이었다. 한 달 간 계속된 공연 전회가 매진이었다. - 에디, 정말 훌륭한 대본이야. 에디가 대본을 잘 써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성공할 수 있 었던 거야. 주연을 맡은 마틴이 공연을 끝내고는 흥분해서 에디에게 말했다. 배우 경력 40년이 넘는 마틴이지만 그는 아직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둔 뮤지컬에서 공연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 모두 감독님과 그로스 씨, 그리고 존슨 씨께서 잘해주신 덕분입니다. - 축하하네, 에디. 이런 추세로 가면 뉴욕에서만 최소한 3년은 공연할 수가 있네. 하지만 난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네. 내일 당장 전 세계 순회 공연을 준비해야겠네. 그렇게 되 면 에디, 자네 수입은 최소한 3백만 달러 이상이 될 거야. 엄청나지? 자, 그럼 모두 사디 레 스토랑으로 가세. 우리의 에디 패커가 중대한 발표를 한다고 했으니까. 존슨의 말이 끝나자 배우들은 모두 에디를 둘러싸고 브로드웨이의 사디 레스토랑으로 몰 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기자들과 카메라맨과 평론가들이 모여서 <마지막 리허설>에 관한 이 야기로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레스토랑 안쪽에 특별히 마련된 기자 회견장 을 바라보는 걸 잊지 않았다. 오늘은 바로 에디 패커와 슈퍼모델 수지 다이아가 기자 회견을 자청한 날이기 때문에 세 계 각지에서 모여든 기자들로 레스토랑이 들끓고 있었다. 특히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국의 텔레비전 방송국인 GDC에서는 단순한 기자 회견일 뿐 인데도 불구하고 위성 생중계 방송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윽고 에디와 수지가 레스토랑 안쪽에서 모습을 들어내자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에디와 수지는 눈이 부시게 새하얀 양복과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모두들 감탄을 할 만 큼 잘 어울렸다. 에디와 수지가 마이크 앞에 나란히 섰다. -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먼저 이렇게 찾아주신 여러분께 감사 드리면서, 저 에디 패커는 수지 다이아와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발표합니다. 박수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카메라 플래시가 어지럽게 터졌다. 두 사람은 카메라맨들의 요청에 의해 키스를 하고는 행복에 겨운 환한 미소를 떠올렸다. - 신혼 여행은 어디로 갈 생각입니까? 한 기자가 물었다. - 골드다이아코스트 공화국으로 갑니다. 에디와 수지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