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더스 지은이: 시드니 셀던/ 옮긴이: 이현우 출판사: 지원북클럽 마이더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환상 속의 도시 프리기아의 왕. 축제와 열광의 신 디오니소 스의 신탁을 받아 손에 닿는 모든 것들을 황금으로 바꾸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 지금 까지 사용하던 모든 물건들에 손을 대자 황금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마이더스는 놀라 운 성공을 거두는 '기적의 손'을 의미한다.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 고린도후 서 13장 8절 프롤로그 나는 지금 가슴에 붉은 글씨로 72316이라고 새겨진 하얀 색 수의를 입고 있다. 가슴 에 새겨진 번호는 무척 중요하다. 그것은 나를 지칭하는 고유번호이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는 아무도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따라서 내가 달고 있는 번호를 착각하면 여러 가지 불이익이 생길 수도 있다. 전등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정오의 햇빛처럼 강렬하다.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간이지 만 이곳에서는 불을 끄지 않는다. 첫날밤에는 불을 끄기 위해 스위치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3평방미터 내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었다. 전구를 돌려서 불을 끄려는 생각 도 해 보았지만 전등이 너무 높은 곳에 달려 있어서 손이 닿지 않았다. 바하마의 날씨는 언제나 무덥다. 이곳에 에어컨이 있을 거라고는 처음부터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풍기 정도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조차 너무 낭만적인 생각이었다. 뜨거운 열대야 때문에 밤새 잠을 설친 나는 얼굴을 씻기 위해 세면대로 걸어갔다. 침대에서 세면대까지는 정확히 두 걸음 반이 걸린다. 그리고 변기까지는 세 걸음이면 넉넉하게 도달한다. 세면대의 수도가 고장났다는 사실은 이곳에 들어오던 날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수 도꼭지를 돌리는 순간 그것이 여전히 고쳐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이다. 나는 날마다 다섯 번 이상 그것을 확인한다. 변기에 고인 물로 얼굴을 적셨다. 변기에 고인 물도 미지근하다. 플라스틱 컵으로 물을 떠서 간단하게 양치질을 끝마쳤다. 거울 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눈앞에 거울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머리카락을 매만진다. 잠시동안이라도 외출할 일이 생길 것을 기대하면서... 나는 다시 세 걸음을 걸어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아미보셤 호텔에 있는 내 방의 소파가 그리운 시간이다. 그 곳에서 그녀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찔한 사랑을 나누던 기억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하지만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침대에는 매트리스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철제로 엮은 스프링 위에 나무로 짠 판이 있고 그 위에 얇은 카키색 담요가 깔려 있다. 담요의 느낌은 매우 거칠다. 내가 아직 어렸을 때 해군에 근무하던 아버지가 이것 과 똑같은 재질의 담요를 집으로 가지고 온 적이 있다. 아무튼 이 침대와 담요는 무척 불편하다. 물론 나는 앞으로 더욱 불편한 장소에서 생활하게 될지도 모른다. 얼마 있 지 않아 이곳 구치소에서 지역 교도소로 이감될 것이다. 그녀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나는 그녀가 내 아이를 낳아 주기를 원했다. 실제로 그녀의 몸 속에는 아직도 나의 정액이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을지 모른다. 나 의 의학적 지식에 따르면 한 번 사정된 정액은 최고 12일 동안이나 살아있을 수 있다 는 것이 임상적으로 실증된 바 있다. 그녀는 항상 나를 이용했을 뿐 한 번도 사랑한 적은 없다. 나는 항상 그녀에게 이용당하면서도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와 나는 몇 년 전에 만난 이후로 항상 같은 장소에서 생활했다. 나는 그녀가 다른 몇 명의 남자들과 잤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는 성격이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 을 만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나는 버클리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마음이 약한 편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시 체를 앞에 놓고 메스로 난도질하는 일이 몹시 힘들었다. 메스로 피부를 가르는 기분 은 마치 버터를 칼로써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사람의 피부에 칼을 들 이대는 일에 익숙하게 되었고 몇 년 후에 나는 유능한 의사가 되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아칸소 주립병원의 성형 외과의로 재직하고 있을 때 였다. 그 당시에 나는 맡은 일에 열중하는 사람이었다. 나에게는 다른 사람과 교제 를 하는데 바탕이 될 만한 것들이 별로 없었다. 물려받은 유산도 별로 없었고 늘 업무 에 쫓기고 있었기 때문에 저명한 인사들과 친분을 나눌 만한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시즌에 시에서 주선하는 자선 파티가 열렸을 때 그들이 나를 초대 한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미국에서 의사가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직업군에 속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명 인사들이 모이는 파티에 초대될 만큼 내가 성공을 거 두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유명 인사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평판을 얻은 것은 부잣집 여자들의 늘어진 피부를 젊고 생명력이 있는 피부로 이식하는 성형 외과의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내 환자 가운데 한 명일지도 모르는 누군가가 초대 인사의 명단에 내 이름을 올려 놓았기 때문에 나는 그 파티에 참석할 수 있었다. 신문지상에서나 만날 수 있는 쟁쟁한 사람들을 직접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최소한 나에게는 그랬다. 파티장 곳곳에는 경호원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고 상원의 회에서 청문회를 주재하는 정치인들이 친절하고 부드러운 얼굴로 정치계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 준다. 그들 중에서 차기 대통령이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잇는 대형 기념 케이크가 마련되고 아름다 운 여배우들이 웨이트리스로 등장하면서 상냥한 미소를 짓는다. 기사거리를 남보다 한 발 앞서서 얻어야 하는 신문기자들은 유명 인사들이 무심하게 지껄이는 말들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내가 그들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나는 턱시 도를 차려 입고 파티에 참석했다. 그리고 푸르고 투명한 눈으로 환하게 미소짓고 있 는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나에게 접근했다. 처음 부터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눈길에 빠진 나는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었다. 난 벌써 사랑의 포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단숨에 나를 사로 잡을 만큼 매력적인 그녀를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 다. 그녀는 클라크 상원의원의 보좌관이었다. 아름다운 여성 보좌관. 그녀는 분명히 이 자리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대통령의 정책에 대해 요란하게 논쟁을 벌이는 정부관료들. 의회의 결정을 지켜보는 기자들과 방청객 들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미국의 외교 문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 나는 마 치 국무장관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열심히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파티가 끝날 때까지 나는 그녀가 국방정책 토론회에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녀를 통해 미국의 정책을 바꿀 수도 있다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날 이후로 한 남자의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 다는 사실을...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났을 때, 그녀는 내 아파트에서 팬티와 몸이 비치는 얇은 가운 만을 걸친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파트의 불은 모두 꺼져 있었지만 거리의 가로등 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창문을 통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그 빛은 사물들의 윤곽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밝았다. 우리는 밤새 실랑이를 벌였다. "왜 그래요. 앤소니?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다는 거죠?" "그런 게 아니에요. 나는 단지 당신을 무척 사랑하기 때문에 걱정하는 겁니다." 나는 누군가 은밀한 대화를 엿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 지만 그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걱정이라는 거죠? 나에게는 꿈이 있어요.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 한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당신이 나와 함께 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당신이 결 정해야 할 문제예요. 하지만 난 당신을 사랑하고 또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당신이 도와주기를 원한다구요. 그밖에 또 뭐가 있겠어요?" 그녀는 나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조금 전에 내가 느꼈던 뜨거운 열기를 다시 떠올리도록 만드는 입술이었다. "또 뭐가 있겠냐구요? 그렇지 않아요. 레베카." 나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리면서 말했다. "아. 나도 알아요.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이라는 걸... 나는 마키아벨리의 신봉자는 아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그의 말이 적당하게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운명 은 여신과 같아서 난폭하게 다루어야만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거예요. 일단 운 명에 이끌려 다니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그녀의 뜻에 휩쓸릴 수밖에 없어요." 그녀는 나를 응시하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미 그 웃음에 저항할 힘 을 잃고 있었다. 그 웃음 속에는 한 남자의 나약함을 비웃는 경멸감이 숨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순간에 지금이야말로 내가 운명의 여신에게 휩쓸리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눈 앞에 있는 운명의 여신을 난폭하게 다룰 만큼 용기 있는 남자가 되지 못했다. "당신을 사랑해요. 레베카. 나는 당신 이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 요." 나는 매우 간절한 태도로 말했다. 나의 간절함이 오히려 그녀의 신경을 자극한 것 같았다. 그녀는 갑자기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녀는 치마를 입 고 화장대 앞에 서더니 거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쳐다 보았다. "난 당신이 이런 사람이라는 걸 몰랐어요. 이 세상을 집어삼킬 정도로 야망이 있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하지만 그렇게 사랑에 매달려서 어쩌겠다는 거예요? 나는 당신과 하루 종일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요. 나에게는 야망이 있다구요. 왜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그렇지 않아요. 난 당신을 이해하고 있어요. 그것이 당신의 꿈이라는 걸... 하지 만 조금만 더 생각하면 그것이 얼마나 허황된 생각인지 알 수 있어요. 당신은 너무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슬픔이나 고통을 조금씩 줄여가 기 위해 노력해 보세요. 한꺼번에 모든 일을 이루려고 하는 것 너무 위험한 생각이에 요." "하지만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내 앞을 가로막는 사람도 절대 용서 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의 야망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면 그건 당신의 영혼을 병들게 할 겁니다. 당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희생된 사람들을 보면서 비웃을 수도 있어요.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겠죠. 당신이 선택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당신의 영혼을 조금씩 죽게 할 겁니다." "앤소니. 당신은 내 야망 때문에 자신이 희생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요? 그렇다면 한 가지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어요. 당신은 왜 지금 나와 함께 있는 거죠?" "그건..." 그녀는 냉정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나의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동안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그건 바로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말이 떨어지자 그녀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일 부러 다름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에게 나의 슬픈 표정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다가오더니 가만히 등을 쓰다듬었다. 나는 그녀의 따스하고 부드러 운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난 내 몫의 고통을 모두 치렀다고 생각해요. 난 이제 더 이상 고통을 참으면서 살지 않을 거예요. 내가 빼앗긴 것들을 다시 되찾 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앤소니." 그녀의 목소리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운명 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나의 마음을 전부 읽 고 있는 것 같았다. "날 도와줄 수 있죠?" 나는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허리를 약간 숙이더니 내 이마에 키스했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녀는 이 말을 남기고 나의 아파트를 떠났다. 나는 창문을 통해 그녀가 떠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매우 똑똑한 여자였다. 그녀는 지금 타오르는 야망으로 인해 이성을 잃고 있 었다. 재난의 순간이 언제 다가 올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파멸이 반드시 찾아올 거라는 사실을 예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야망 때문에 한 순간에 몰락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곁을 떠날 수 없다.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에게 최후의 순간이 다가온다면 그녀는 고통을 참기 힘들 것이다. 그 고통을 내 손으로 멈 추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그런 고통을 맛보도록 할 수는 없다. 그녀가 돌아간 직후에 나는 탈진감을 느끼며 침대에 쓰러졌다. 나는 침대 옆에 놓 인 탁자를 더듬어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작은 약병에서 수면제 세 알을 꺼내 꿀꺽 삼 켰다. 잠을 청하기 위해 침대에 누웠지만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이곳에서 보내 는 하루하루는 너무나 따분하다. 하지만 얼마후에는 매우 바빠질 것이다. 검찰은 나 를 일급 살인죄로 기소하고 사법 당국은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재판을 열 것이 다. 나는 플로리다 주의 법률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지만 강철 침대는 마치 나의 그 런 생각을 비웃듯이 요란하게 삐걱거린다. 재판은 마치 벌집이라고 쑤신 것처럼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 것이다. 그녀의 음모가 모두 드러났을 때, 우리 두 사람은 아미보셤 호텔 특실에 숨어 있었 다. 호텔로 들이닥친 경찰들은 아직 우리가 있는 곳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습관처 럼 커피잔을 기울이면서 해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외로움은 전염이 되는가? 아마 그럴 것이다. 나는 그녀를 쳐다보면서 몹시 외로운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외로움의 늪에 파묻힌 채 살아오고 있었다. 그 래서 과거의 그늘진 삶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던 것이다. 그녀에 대한 사랑은 급류처럼 세차게 흐르다가도 잔잔한 바다처럼 넓게 퍼지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도저히 그녀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항상 그녀의 의지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으며 내 감정조차 내 뜻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을 때, 나는 내 손으로 운명을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 했다. 내 사랑에 대한 최후의 결정은 오직 나만의 의지에 따라야 한다. 결코 그녀를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길 수는 없다. 그녀에 대한 나의 뼈아픈 사랑과 연민이 자꾸만 머 리를 어지럽혔다. 나는 몸을 뒤척이면서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커 다란 침대의 한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그녀의 신경을 자극한 것 같았다. 그녀 는 조용히 침대를 향해 다가오더니 내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말초신경으로 전해지는 자극을 느끼면서 그녀를 안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침묵속 에서 격렬하게 서로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경찰은 지금 우리를 찾기 위해 호텔을 마구 뒤지면서 수색 작업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당신에게 미안해요. 앤소니.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계 획대로만 되었다면 당신과 함께 행복한 일생을 보낼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녀는 아직 자신의 운명에 대해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운명은 항상 삶에서 번개 처럼 순식간에 지나가고 남아있는 마음 속에는 검게 탄 흔적만을 남기는 것이다. 그것 은 기다리거나 미련을 가질 만한 조금의 사간도 주지 않고 재빨리 지나가 버린다.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나는 이미 모든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어요. 레베카. 난 지금 당신이 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커다란 위안을 얻을 수 있어요." 그녀의 머리카락이 너무나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부 드러운 느낌을 받는 건 너무 낯선 일이다. 나는 항상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약 간 단단하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가늘고 윤기가 감돌았지만 고 집스럽고 억세었던 것이다. "당신은 너무나 좋은 사람이예요. 언제나 내게 잘 대해 주었어요." "그렇지 않아요. 레베카." "앤소니. 당신을 사랑해요." 나는 이 순간에 그녀가 진정한 사랑을 깨닫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녀는 지금까지 나를 이용했다. 하지만 지금은 순수하게 나를 사랑하고 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사랑해." 나는 그녀의 귀를 만지면서 속삭였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 았다. 우리는 언제 경찰이 문을 부수고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몇 시간 동안이나 열정적인 정사를 나누었다. 아마 그것이 우리가 최고급 침대의 깔끔한 시트 위에서 벌이는 마지막 정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는 동안 그녀는 포근한 잠에 빠져들었다. 잠자 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매우 평온해 보였다. 나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권총을 집었 다. 나는 그녀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것은 나의 의무이자 운명이었 다. 마침내 경찰이 들이닥쳤을 때, 내 손에는 금방 발사된 권총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으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잠자듯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턱과 이마 사이에 좁은 구멍을 남기면서 관통한 총알은 벽에 꽃처럼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 놓았다. 그녀의 피가 이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겨 놓은 무늬였다. 총알 이 관통한 머리 부분에서는 끈적끈적한 혈액이 심장의 박동에 따라 규칙적으로 흘러나 오고 있었다. 나는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살인죄로 기소되었다. 나는 모든 범죄 사실을 시인했다. 이 사건을 맡은 담당 건사는 내가 살의를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 추궁했다. 나는 그 사실도 시인했다. 나는 분명히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 만약 내가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역시 나의 선택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변호사는 나의 정신 감정을 의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에 아주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그녀를 총으로 쏘아서 죽인 것이다. 나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스멀거리는 죽음의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하지만 이 냄새가 그다지 싫은 것은 아니다. 이것은 나 의 길이고 내가 선택한 운명이다. 정상참작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검사는 사형을 구형할 것이고 배심원들은 결코 무죄를 판결하지 않을 것이다. 벨이 울렸다. 이제 담당 검사를 만나야 할 시간이다. 제 1 장 하버드 기숙사 늦은 시간. 그러나 하버드 대학의 기숙사는 좀처럼 불이 꺼지지 않았다. 로라 해리 슨이 거주하고 잇는 여학생 기숙사 건물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건물 각 층마다 불꺼 진 방은 거의 없었다. 건물 두 동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야구 경기장의 조명 라이트 처럼 밝게 주변을 비추었다. 창문에서 일제히 쏟아지는 빛 때문에 기숙사 입구에서부터 건물까지의 도로는 마치 대낮처럼 환했다. 기숙사 정원을 거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간간이 경비 직원들 이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기숙사의 당직실에서는 주임사감이 책상에 앉아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올해로 마흔이 넘은 노처녀였다. 성격이 워낙 깐깐한 편이어서 학생들은 모두 그녀의 호통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다. 그녀가 오늘 당직을 선다는 것은 이미 학생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다. 외출했던 학생들은 그녀가 당직을 서는 날에는 일찍 귀가해야만 했다. 귀가 시간을 지키지 않거나 혹은 외박을 하는 학생에게는 철저하게 규칙에 따라 벌점 처리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당직 주임이 오늘따라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경비직원들은 모두 가벼운 산책을 하거나 짝을 지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정문의 경비실로 모여든 직원들은 당 직 주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혹시 애인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존의 말이 떨어지자 경비 직원들은 모두 요란한 웃음을 터뜨렸다. 주임사감의 몸매 가 어떻다느니 과거에 있었던 젊은 경비직원과 스캔들을 일으켜 승진에 실패를 했다느 니 하는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니 벌써 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제 몇 시간만 있으면 경비 직원들도 교대를 하게 될 것이다. 경비 직원들이 정문 경비실을 떠나 정기적으로 순찰을 돌고 있는 도중에도 기숙사 건물 곳곳에서는 밝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하버드 대학생들이 세계적인 수재들 로 인정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마치 꺼지지 않는 불빛같은 그들의 지성에 대한 열정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학문에 대한 열정은 근대로부터 이어지는 모든 인문 주의 토양의 핵심정신이었고 하버드는 그 정신을 중심으로 많은 세계적인 수재들을 키 워내는 지성의 전당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기숙사는 세계 각지에서 하버드를 향해 꿈을 키워온 수재들이 생활하는 공간이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그들의 감각과 이성을 토대로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 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기숙사 건물 전체를 감싸고 있던 정적이 순식간에 깨어지고 말았다. 귀청을 찢어 버릴 듯한 굉음이 들렸던 것이다. 하버드 기숙사 전체는 이 굉음으로 인해 당장 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분위기가 되었다. 복도로 나온 학생들은 저마다 놀란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경비원들은 일제 히 건물 당직실로 뛰어가고 밤새 졸음을 참지 못해 책상 위에서 엎드린 채 잠을 청하 던 당직 주임사감도 굉음에 놀라 벌떡 일어섰다. "무슨 일이에요?" 숨을 헐떡이면서 달려온 경비 직원에게 당직 사감이 소리를 질렀다. "뭔가 무너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소리가 계속 들리고 있잖아요." "지금 다른 직원들이 조사하고 있습니다." 사감은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서둘러 복도로 나갔다. 사감이 복도로 나가자 학 생들은 저마다 웅성거리면서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학생 들의 태도였다. 그들은 조금도 동요하거나 불안한 듯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즐 거운 듯이 마음껏 몸을 흔들면서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사감은 아직도 커다랗게 들려 오는 굉음을 자세히 들어보기 시작했다. 당직 사감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나 폭발음이 아니었다. 강렬한 비트의 록음악이었던 것이다. 당직 사감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 다. 사감은 복도에서 음악을 즐기고 있던 학생들을 노려보면서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 다. "누구야? 누가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거야?" 학생들은 저마다 쥐죽은 듯이 당직 사감의 화난 목소리에 반응했다. 몇 명의 학생들 은 방으로 들어갔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냥 조용히 복도에 서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방으로 들어간 학생들의 방에서도 강렬한 록음악이 터져나오기 시작 했다. 학생들은 마치 무언가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시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직 사감은 록음악의 홍수에 묻힌 채 어쩔 줄을 몰랐다. 하버드 기숙사는 록음악의 공연장 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로라 해리슨은 기숙사 침대 위에서 록음악에 몰두하고 있었다. 로라는 커다란 헤드 폰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 로라의 머리가 요동칠 때마다 헤드폰의 연결선이 덩달아 춤 을 추었다. 로라는 노래를 따라부르면서 흥겹게 머리를 흔들었다. 강렬한 록의 비트가 기숙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로라는 단지 두 개의 귀를 통해서만 음악을 느 낄 뿐이었다. 헤드폰에서 심장으로 전달되는 강렬한 록의 비트를 느끼면서 로라는 자 유를 느끼고 있었다. 로라가 눈을 지그시 감고 머리를 흔들어대는 동안 더욱 커다란 진동으로 춤을 추던 헤드폰 연결선은 당장이라도 오디오에서 빠질 것만 같았다. 오디오의 헤드폰 잭을 정 확히 꽂지 않으면 헤드폰에서도 음악이 들리지만 스피커에서도 음악이 흘러나왔던 것 이다. 로라의 몸놀림 때문에 이미 헤드폰의 잭이 약간 빠진 상태였지만 그녀는 그 사 실을 조금도 알지 못했다. 음악은 자유를 만든다. 음악을 듣고 있으면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공간을 만들 수 있다. 그 공간은 오직 자유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로라는 음악이 만들 어 주는 자유를 누리면서 두 눈을 감고 몸을 흔들었다. 그녀의 방에서 흘러나온 강렬 한 록음악 때문에 다른 방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로라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더욱이 자신의 실수로 인해 기숙사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는 사실 조차 모른 채 계속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하버드 기숙사는 건물 전체가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경 비직원들은 학생들을 방으로 돌려 보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으며 방송실에서는 당직 사감이 연신 학생들에게 경고 방송을 내보냈다. 만약 이 방송이 없었다면 학생들의 열 광은 더욱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것이다. "지금부터 복도에서 계속 소란을 피우는 학생들은 무조건 벌점 10점을 부과하겠습니 다. 그에 따르는 불이익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겠습니다. 모두 방으로 들어가서 음 악을 끄도록 하세요!" 처음에는 경비직원들의 성화에도 말을 듣지 않던 학생들이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주 임사감의 말을 듣고는 갑자기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시끄럽던 기숙사 건물 전체가 조용하게 되자 주임사감은 학생들의 방마다 이어진 스피커를 통해 경고방송을 내보냈 다. "오늘의 사태에 책임을 질 학생이 있다면 내 직함을 걸고 말하건대 내일 당장 기숙 사를 떠나야 할 겁니다." 하지만 로라는 자신의 방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주임사감의 경고방송조차 듣지 못했 다. 로라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여전히 강렬한 음색을 쏟아놓고 있었다. 로라의 방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경비직원들이 로라의 방문을 아무리 세게 두드 려도 안에서는 전혀 기척이 없었다. 경비직원은 급히 방송실로 내려가 주임사감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주임사감님. 문이 안에서 잠겨 있기 때문에 열리지 않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라 도..." "그 방의 학생은 대체 누구죠?" 사감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물었다. "경영학부 신입생 로라 해리슨입니다." "로라 해리슨? 그 재벌의 말괄량이 손녀딸 말입니까?" "맞습니다." "어서 열쇠를 찾아서 올라가 봅시다." 경비직원은 경비실에 있던 열쇠를 급히 찾아내었다. 로라 해리슨이 있는 방의 복도 에서는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로라 해리슨의 방에서 울려 퍼지는 록음악은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로라 해리슨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혹시 자살이라도 한 게 아닐까?"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던 학생들 사이에서 불안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들은 모두 걱정스러운 얼굴로 로라의 방문을 쳐다보았다. 그들 가운데 몇 명은 로라 해리슨과 매우 친한 사이였다. 샐리는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주임사감이 계단으로 올라오는 동안 학생들은 저마다 예상되는 로라 해리슨의 모습 에 대해 한 마디씩 던지고 있었다. 주임 사감이 복도에 모습을 나타내자 학생들은 못 마땅한 듯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왜 방으로 안 들어가고 있어요? 어서 들어가세요!" 주임사감이 신경질적으로 호통쳤다. 그런데 복도에 서 있던 학생 중에 한 명이 불안 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자살했다면..." 순식간에 학생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로라 해리슨이 자살했다는 소리는 기숙사 전 체로 퍼져나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조용히 하세요!" 주임사감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녀 자신도 점차 자신이 없었다. 주임사감은 마음속으로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사 감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흘렀다. 사감은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으면서 열쇠꾸러미를 바라보았다. 로라 해리슨의 방 열쇠를 찾는 시간이 매우 길게 느껴졌다. 주임사감의 머리 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되고 있었다. 열쇠를 찾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사감은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만약 로라 해리슨이 정말로 자살을 했다면?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주임사감은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싶었다. 자꾸 만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학생들은 고조된 목소리로 빨리 문을 열라고 재촉했다. 그들은 모두 로라 해리슨을 걱정하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경비직원이 사감에게 말했다. "열쇠를 잘못 쥐고 있습니다." "아, 그런가요?" 정신을 차린 사감은 몹시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임사감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는 직원에게 말했다. "당장 학생들을 모두 자기 방으로 들여보내요." 주임사감의 눈빛에서 예사롭지 않은 느낌을 받은 직원들은 학생들을 모두 방으로 들 여보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지금부터 30초 안에 방으로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벌점을 부과하겠어요. 그러니까 어서 방으로 들어가요." 벌점은 다음 학기의 기숙사 생활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학생들은 벌점 을 부과하겠다는 말을 듣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기 방으로 흩어졌다. 학생들은 방 으로 들어간 채 고개를 내밀고 사감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감이 날카로운 눈빛 으로 쏘아보자 학생들은 고개를 집어넣었다. 주임사감은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직원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긴장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마침내 열쇠를 들고 있던 사감이 방문을 열었다. 잠시 후에 문이 열리자 귀청을 찢 어 버릴 듯한 강렬한 록음악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문을 밀치고 들어선 주임사감은 강렬한 비트의 록음악이 얼굴을 때리기라도 한 듯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사감은 침 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사감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비명을 질렀 다. "오! 로라 해리슨!" 기숙사에 있던 사람들이 로라 해리슨에 대해 걱정한 것은 하버드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거나 미쳐 버리는 학생들을 종종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성적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학생들이 공부에 열중하다가 자살하는 일은 가끔씩 벌어졌다. 그리고 성적이 뛰어나고 엘리트 의식이 강한 학생일수록 그런 일을 할 가능성은 더욱 높았다. 지난 해에도 학점의 부담 때문에 두 명의 남학생이 자살했고 여학생 한명은 자살을 기 도하다가 병원에 입원했다. 그 여학생은 지금쯤 두꺼운 <물리학 2>의 교재를 베개 삼 아 편안하게 잠자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로라 해리슨이 자살했을 거라는 추측은 맞지 않았다. 그리고 미친 것도 아니 었다. 당직 사감이 로라 해리슨을 보고 깜짝 놀란 것은 침대 위에서 헤드폰을 쓰고 온 몸을 흔들어대는 그녀의 모습 때문이었다. 당직 사감은 그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당황 했다. 기숙사 학생들은 자살하거나 미쳐 버린 줄 알았던 로라 해리슨이 침대 위에서 신나 게 춤을 추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밤새도록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다음날부터 로라 해리슨은 기숙사에서 고개조차 들지 못할 정도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야만 했다. 식사 시간이 로라 해리슨에게는 가장 괴로웠다. 로라가 식사를 하기 위해 학생 식당 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그녀를 본 다른 학생들이 저마다 조소가 섞인 웃음으로 대했다. 그녀를 쳐다보는 수천 개의 눈동자를 단지 두 개의 눈동자로 맞서는 일은 몹시 힘들었 다. 그래도 로라 해리슨은 한 끼도 굶지 않고 식당으로 내려가서 밥을 먹었다. 로라의 성격이 이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녀의 낙천적인 성격과 자신감에 찬 기질 때문이었다. 한 번은 하버드 광장을 지나갈 때 한 남학생이 로라 해리슨을 조소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로라 해리슨은 자신이 먹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그 남학생의 콧잔등에 문질 러 버렸다. 로라는 그 누구도 자신을 비웃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인간은 그 누 구도 타인으로부터 비웃음의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로라의 생각이었다. 그 것은 그녀가 경영 이론을 전공하면서도 철학과 역사에 대해 많은 양의 책을 읽었던 것 과도 관련이 있었다. 로라 해리슨은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이후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그녀는 칸트에서 싸르트르에 이르기까지 철학서적들을 독파했으며 경제학뿐 만 아니라 정치학이나 사회학의 중요한 저서들도 읽었다. 하버드 대학에서 학술 세미 나가 열리면 그곳을 빠짐없이 찾아가서 열띤 질문과 토론을 벌이곤 했다. 로라 해리슨은 어린 시절부터 친구가 별로 없다는 것과 일찍이 부모를 잃고 할아버 지 슬하에서 자랐다는 점을 매우 슬프게 생각했다. 어렸을 때에는 내성적인 자신의 성 격에 대해서 많은 불만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일에 대해서 열정을 갖 길 원했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행동하면서 자신을 애써 변화 시킨 것이다. 로라 해리슨이 다시 한 번 대학에서 유명하게 된 것은 록앤롤 사건 이후로 3년이 지 나고 졸업을 얼마 앞두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은 하버드 대학에 여자 기 숙사가 생긴 이래 가장 커다란 화제를 불러모은 '로라 해리슨의 결투'로 명명되었다. 그것은 제니퍼 학생감과 결투를 벌인 사건이었다. 그 당시에 의대 졸업반이었던 제 니퍼 학생감은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학생들로부터 많은 불만을 사고 있었다. 그 별명 이 마녀라는 것만으로도 제니퍼의 성질이 어떤지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로라 해리슨은 테니스 연습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학생감실에 서 제니퍼가 큰 소리로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잘못을 저지르고 마녀 학생감 에게 혼줄이 나고 있는 것이다. 제니퍼의 못된 성질을 잘 알고 있던 로라는 갑자기 호 기심이 생겼다. '누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마녀가 저렇게 날뛰는 걸까?' 로라 해리슨은 문을 살며시 열고 학생감실을 몰래 들여다보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제니퍼가 펜싱용 칼을 든 채 어린 일학년 학생을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학생은 고개를 숙인 채 엉엉 울고 있었다. 제니퍼가 어린 학생을 노리고 칼을 치 켜드는 순간 로라 해리슨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학생감실로 뛰어들었다. 제니퍼를 향해 용감하게 돌진한 로라 해리슨은 들고 있던 테니스 라켓을 마구 휘둘 렀다. 로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제니퍼는 들고 있던 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로라가 휘두르는 테니스 라켓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다닐 수밖에 없었다. 흥분 한 로라 해리슨은 울고 있던 어린 여학생이 매달려서 말릴 때까지 멈추지 않고 라켓을 휘둘렀다. 얼마 후에 로라가 정신을 차리고 제니퍼 학생감을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정말로 마 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로라의 라켓에 맞아서 얼굴이 퉁퉁 붓고 멍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제니퍼 학생감에게 야단을 맞고 있던 여학생은 펜싱부에 속해 있었다. 그 여학생이 밤마다 기숙사에서 요란하게 펜싱 연습을 했기 때문에 같은 방을 쓰고 있던 룸메이트들은 커다란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가 룸메이트들이 불 만을 토로하자 그 여학생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일으키면서 칼로 소파를 마구 찔러 버 렸다. 그래서 룸메이트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제니퍼 학생감에게 방을 바꾸어 달라 고 요청했던 것이다. 제니퍼 학생감은 펜싱부의 여학생을 부른 다음 칼을 빼앗고 혼을 내주고 있었다. 하 지만 그런 사정을 전혀 모르는 로라 해리슨은 그 광경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지 제 니퍼가 칼로 불쌍한 어린여학생을 위협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테니스 라켓 으로 용감하게 대들었던 것이다.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제니퍼는 로라에게 당장 징계 위원회에 회부하겠다고 윽박질 렀다. 로라는 고의가 아니었다고 열심히 빌었다. 용서를 구하고 또 애원하고 온갖 연 극을 다해서라도 일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나 제니퍼는 로라를 제대 로 쳐다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로라 해리슨의 결투' 사건은 제니퍼 학생감의 요청에 따라 당직 사감의 보고서를 통해 교수 위원회에 제출되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교수 위원회에 참석한 로라의 지도 교수 제임스 프로스트는 매우 큰 곤혹을 치르게 되었다. 제임스 프로스트는 세계의 석 학들이 모이는 하버드 대학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경영학 교수였다. 그 리고 자신의 제자를 보호하는 일에도 대단히 열성적이었다. 학문에 대한 열정과 제자 에 대한 사랑은 그 어떤 교수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기숙사에서 약간의 소란을 피웠다고 해서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을 징계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제임스 교수는 총명한 제자인 로라 해리슨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로라가 기숙 사에서 마녀와 결투를 벌이던 날 밤에도 제임스 교수는 로라의 졸업논문에 빠져 있었 다. 제임스는 로라의 이론이 매우 훌륭하고 독창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로라 의 논문은 수석을 차지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수한 학생을 더 욱 보호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이 발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제임스 교수님, 그건 학칙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전통을 지키기 위 해서라도 앞으로 이런 일은 없어야 합니다." 결국 이 사건에 대한 교수들 간의 언쟁은 논쟁으로까지 비화되었고 제임스는 자신의 교수직을 걸고 맞섰다. 제임스의 적극적인 태도에 대해 처음에는 다른 교수들도 의아 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점점 제임스의 신념에 찬 말을 들으면서 그의 의견에 동의하 는 교수가 늘어났다. "로라 해리슨은 매우 훌륭한 학생입니다. 이번에 졸업논문 심사를 통한 소견에 따르 면 그녀는 매우 뛰어난 의견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줄곧 학기 내내 수석을 차지했고 학내의 활동에도 열심이었습니다. 로라 해리슨이 기숙사에서 저지른 행동은 그 결과를 통해 본다면 처벌의 대상을 넘어서는 중대한 일이었습니다. 전통을 존중하는 하버드의 정신을 벗어난 일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결과만을 중시 하는 사고 방식에 젖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녀는 절대로 고의적으로 그런 일을 저 지른 게 아니었습니다. 로라 해리슨이 본의 아니게 물의를 일으킨 건 사실이지만, 만 약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고 징계를 당해야 한다면 그것은 내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라 해리슨을 징계하려거든 먼저 나를 징계하십시오." 교수 위원회에 참석한 다른 교수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임스 교수의 태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철학을 강의하는 브레들리 교수가 작은 목소리로 물어 보았다. "이것이 제자를 변호하는 나의 마지막 발언입니다." 제임스는 다른 교수들의 눈동자를 쳐다보면서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불꽃처럼 타오 르는 그의 눈빛을 대하던 다른 교수들은 일제히 그의 시선을 피했다. 제임스는 흐릿한 미소를 입가에 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절반은 성공했다고 느꼈다. "좋습니다." 잠시 후에 교수 위원회에 참석한 교수들은 제임스의 주장에 모두 동의했다. 결국 제 임스는 무사히 자신의 제자를 보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라 해리슨에게 아무런 징계 를 내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로라에게 돌아간 징계의 내용은 기숙사에서 내쫓는 것이 었다. 하버드 대학생이 기숙사에서 추방당하는 것은 매우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교수 위원회가 열리고 있을 때, 로라 해리슨은 혼자서 기숙사 주위를 산책하고 있었 다. 기숙사 주위의 울창한 숲은 한여름에도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 덕택에 로라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에서 산책을 즐기며 생각에 잠겼다. 대학 시절을 마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언제 그렇게 많은 시간들이 흘러갔는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매우 놀라웠다. 로라는 작은 의자에 앉아서 늘 바라보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홀가분한 마음이었지만 교수 위원회의 결정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학위를 얻는 건 단지 형식일 뿐이야." 로라 해리슨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위로하고 있었다. "난 할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게 될 거야. 학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경험과 실력을 쌓는 것이 보다 중요해." 그렇게 생각하자 로라 해리슨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 다. 졸업과 동시에 취업해야 할 처지였다면 대학에서의 징계는 로라 해리슨에게 매우 치명적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럴 경우엔 학위가 반드시 필요할 뿐만 아니 라 대학 생활의 전부가 사회 생활을 위한 평가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로라는 할아버 지의 유일한 상속녀이자 장차 그 사업의 대를 이을 예비 경영자였다. "그래도 이 사실을 할아버지께서 아신다면 매우 실망하실거야..." 로라는 의자에서 일어나 기숙사 현관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자꾸만 무거운 한숨이 나왔다. "로라 해리슨, 전보가 왔어요." 기숙사에서 근무하는 검은 피부의 다정한 직원이 로라를 불렀다. "전보? 어디에서 온 거죠?" "바하마라고 적혀 있군요." 로라는 바하마라는 말을 듣고 미소를 지으면서 직원의 손에 들려 있던 전보를 재빨 리 받아들였다. "그래요? 할아버지가 보낸 거군요." "아! 세계적인 호텔을 운영하고 계신다는... 아주 기쁘겠어요. 로라 해리슨. 여기 소포도 있는 걸요." "고맙습니다." 로라는 인사를 마치기 무섭게 계단으로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직원이 다 급한 목소리로 로라를 불렀다. "로라, 제임스 교수님의 호출이에요. 지금 당장 교수님의 연구실로 가 보세요." "알았어요." 로라의 모습은 벌써 계단에서 사라지고 다만 목소리만이 메아리처럼 들릴 뿐이었다. 로라는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서 할아버지가 보낸 전보를 읽어 보았다. 나의 사랑하는 로라 해리슨에게 생일을 축하한다. 건강하거라. 바하마에서 메드닉 해리슨. 로라는 전보를 읽다가 고개를 돌려서 달력을 쳐다보았다. 오늘이 자기의 생일인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며칠 전에 벌어진 떠들썩한 사건으로 인해 로라는 자기의 생일 도 잊어버렸던 것이다. 로라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면서 커다란 선물 상자를 열어 보았 다. 로라는 상자를 열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할아버지가 보낸 선물은 눈부신 실 크로 만든 붉은색 드레스였다. 가슴 선이 깊게 패어 있었고 허리로 내려갈수록 좁아졌 다. 로라는 거울 앞에서 드레스를 몸에 비추어 보았다. 이제 막 스물세 살이 된 자신 의 모습이 어쩐지 어른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거울 앞에 서 있던 로라는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비로소 로라는 제임스 교수가 자신을 불렀다는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수화기를 귀 에 대자 제임스 교수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로라 해리슨?" 로라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왜 말이 없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교수님, 죄송해요. 지금 당장 그리로 가겠어요. 할아버지께서 드레스를 보내셨는데 입어 보고 있느라 잠시 정신이 없었어요." 로라는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제임스 교수 특유의 호탕한 웃음 소리가 수 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허허, 그렇다면 로라는 지금 고귀한 귀부인처럼 우아한 옷차림이겠군. 나도 보고 싶은데?" "아니에요. 지금 막 드레스를 벗고 있었어요." "그렇다면 천사처럼 아름다운 모습이겠군." 제임스 교수가 장난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로라는 몹시 당황한 나머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빨리 와 주었으면 좋겠어, 로라." "알겠습니다. 교수님." 로라는 드레스를 옷장에 걸어두고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바지를 입으면서 그녀는 터 지는 웃음을 참지 못해 침대 위로 넘어지면서 마구 웃었다. "우와! 내가 교수님 앞에서 옷을 벗고 있다는 말을 하다니..." 잠시 후에 로라는 기숙사 정문을 나와 교수 연구실로 이어지는 길로 접어들었다. 그 녀는 교수 연구실로 들어가서 제임스 교수의 방으로 올라갔다. "교수님, 저 로라 해리슨이에요." 로라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어서 들어오게." 제임스 교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리자 로라 해리슨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제임스 교수의 연구실은 매우 복잡했다. 여기 저기에 놓여 있는 수많은 서류들과 사방 을 둘러싼 서재는 저절로 제임스 교수에 대한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래도 햇빛이 잘 들어오는 창문이 있었다. 로라는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울 창한 나뭇잎 사이로 멀리 캠퍼스의 전경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편히 앉도록 하게." 제임스 교수는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친절하게 말했다. 로라는 의자에 앉아 서 공손하게 팔을 모았다. "로라 해리슨?" "네." "이번에 졸업논문 심사 결과가 발표되면 어떻게 할 계획이지?" 로라는 약간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교수 위원회의 결과에 대해 말할 거라고 생 각했는데, 제임스 교수가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바하마로 가서 할아버지에게 사업을 배울 생각이에요." 로라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제임스 교수는 아주 나지막하고 심각한 태도로 이야기를 해 나갔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일찍 돌아가서 사업을 배우도록 해." "무슨 말씀이죠, 교수님? 제가 하버드에서 쫓겨나는 건가요?" 제임스 교수는 로라의 놀라는 표정을 바라보면서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게 아니야, 로라. 난 이미 졸업논문 심사에서 로라의 논문을 수석으로 결정했 어. 그런 의미에서 난 로라를 빨리 일선으로 내쫓고 싶은 심정일 뿐이야." 제임스 교수는 미소를 곁들이면서 자연스럽게 교수 위원회의 결정을 전달하고 있었 다. 로라는 제임스 교수의 말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단번에 깨달았다. "미안한 일이지만 교수 위원회에서 로라를 기숙사에서 내 보내기로 결정했어. 그건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후에 학생들이 진로를 결정할 때 특히 기숙사에서 생활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중요한 평가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버드의 학생들은 반드시 기숙사에서 생활하려고 노력했다. 더욱이 아담스 하우스나 엘리어트 하우스처 럼 이름난 기숙사에서 생활한 것은 학생들에게 커다란 자랑거리가 되는 일이었다. 그 런 상황에서 로라 해리슨이 레드클리프 여학생 기숙사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매우 불행 한 일이었다. 하지만 로라는 반가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교수님께서 절 그렇게 까지 생각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해요." 로라는 진심으로 제임스 교수의 배려에 대해 고맙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주말에 당장 바하마로 가겠어요." 제임스 교수는 다시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피우는 파이프 담배의 향긋한 냄새 가 연구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로라는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대해 주는 제임스 교수 에게 뭔가 보답이라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제임스 교수는 대화의 공백을 재치있게 채워 나갔다. "그런데 로라, 무슨 파티라도 있었나? 왜 갑자기 드레스를 입어 보고 있었지?" "오늘이 제 생일이라 바하마에 계신 할아버지께서 선물로 드레스를 보내오셨어요." 제임스 교수는 회전의자의 등받이에 싣고 있던 몸을 일으키면서 로라에게 축하의 말 을 전했다. "생일을 축하하네. 정말로 파티를 열어야 하겠는걸."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교수님." 제임스 교수의 고마움에 어떻게 보답하는 것이 좋을까 하고 생각하던 로라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교수님을 바하마로 초대하셨어요." 제임스 교수는 매우 놀라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로라는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교수님의 도움으로 수석의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어요. 거기에 대한 보답의 차원에 서 바하마로 초대하신 거예요." "오, 로라. 너무나 고마운 선물이군. 바하마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휴양지거든." 제임스 교수는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는 듯이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라는 자 신이 수석을 했다는 제임스 교수의 말을 듣고 내심 할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제임 스 교수와 여담을 나누면서도 로라는 줄곧 자신이 수석했다는 사실을 빨리 할아버지에 게 알려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로라는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고 하면서 제임스 교수의 방에서 나왔다. 교수 연구실 을 내려오다가 로라는 멀리 보이는 캠퍼스 전경을 쳐다보았다. 이제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로라를 보호하고 학문을 익히도록 해 주었던 교정, 그곳을 떠나자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제임스 교수는 창가에서 로라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제임스 교수는 로라와 같은 하버드의 수재를 자신의 제자로 삼은 생각을 애써 떨치고 있었다. 로라의 앞에는 일생 동안 학문을 연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잘 가거라, 로라 해리슨." 로라의 모습은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제임스 교수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산책을 하던 로라 해리슨은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기숙사의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로라는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할아버지의 목소 리를 듣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할아버지, 저 로라 해리슨이예요." 로라 해리슨의 목소리는 매우 들떠 있었다. "그래? 내 손녀딸이로구나." 메드닉 해리슨의 목소리는 아주 감이 멀게 느껴졌다. 막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듯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지금이 도대체 몇 시인데 전화를 하는 거냐? 할아버지는 지금 잠을 자야만 하는 시간이야. 내일 아침에 다시 통화하면 안 되겠니, 로라?" "그럴 수 없어요, 할아버지. 내일은 아마 전화할 시간도 없을 거예요." "뭐가 그렇게 바빠서 전화할 시간도 없다는 게냐?" "내일은 비행기를 타야만 하거든요. 아마 얼마 후에는 전 벌써 그곳에 도착해 있을 거예요." "무슨 말이냐? 내일 그곳을 떠나다니?" 메드닉 해리슨의 목소리가 약간 놀란 듯이 높아졌다. "그래요, 할아버지." "반가운 소식이구나. 그런데 학교는 어떻게 하고?" 메드닉 해리슨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는 저도 졸업을 하게 되었어요. 모르셨어요?" 로라 해리슨은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잠시 숨을 돌린 다음 계속 말을 이었다. "졸업논문 심사에서 수석을 했어요. 그래서 일찍 바하마로 돌아가서 할아버지 옆에 서 일을 배우고 싶은 마음 뿐이에요." 메드닉 해리슨은 아주 기분이 좋아졌다. "오, 그래. 정말 반가운 소식이구나. 내 손녀딸이 벌써 그렇게 성장해서 수석을 차 지하다니... 아주 잘했다. 로라. 네가 무척 자랑스럽구나." "고마워요, 할아버지. 바하마로 돌아가면 저에게 일을 맡겨 주실 거죠?" "사업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란다." "하지만 전 할아버지의 유일한 상속자인 걸요?" "서두르지 말거라." 메드닉 해리슨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다음에 내심 로라의 마음을 떠보기 라도 하듯이 화제를 돌렸다. "좋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이나 하는 게 어떠냐, 로라? 내가 한 번 알아볼까? 그리고 아직 할아버지는 너에게 사업을 맡길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말이다. 난 여자는 아무도 안 믿어, 알겠니?" 메드닉은 비꼬는 듯한 투로 말했다. 하지만 로라는 어느 누구보다도 할아버지의 마 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대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오직 자신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로라는 약간 어깨를 으쓱하면서 할아버지의 말을 받았다. "하지만 할아버지, 전 하버드에서 경영학을 전공 했는 걸요? 게다가 수석 졸업생이구 요." "난 네가 배운 그 알량한 경영 이론들이 이곳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걸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어. 이론과 실전의 경험은 아주 달라. 어쨌든 나중에 이야기를 하 자. 할아버지는 너무 지쳤어." "알겠어요, 할아버지. 그럼 내일 제가 그곳으로 떠나는 것에 찬성해 주시는 거죠?" "그렇게 해라. 네가 누군데 반대를 하겠니?" 로라는 매우 기뻤다. 할아버지가 당장 눈 앞에 있었다면 어렸을 때처럼 그 품에 안 기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부탁이라니?" "사실은 교수님 한 분을 바하마로 초대했어요." "그래?" "졸업논문을 심사한 제임스 교수님에게 꼭 보답을 해 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먼저 이번 여름에 그곳에서 휴가를 보내면 좋겠다고 권했어요." "벌써 할아버지가 승낙을 했다고 말했겠지?" 로라는 이미 할아버지가 모든 것을 승낙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로라는 자신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아 주는 할아버지가 무척 고맙게 느껴졌다. "맞아요, 할아버지. 그 대신에 교수님에게 회사의 경영상태에 대해 몇 가지 조언을 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제임스 교수라면 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야. 이미 학계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 니까... 좋다. 그 교수를 초대하는 것은 허락하마. 하지만 내가 경영하는 호텔에 대해 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어. 아무리 경영학 박사라고 해도 실전에 서 잔뼈가 굵은 경영자들과는 비교될 수 없어. 그러니까 공연히 내 사업에 대해 이래 라 저래라 참견하지 않도록 하거라." "죄송해요, 할아버지. 하지만 이 손녀딸 체면도 좀 생각해 주셔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제임스 교수님의 컨설팅 비용은 사실 엄청나게 비싸다구요. 할아버지의 사업에 도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로라. 제임스 교수를 초대하는 건 기꺼이 허락하겠다. 하지만 만약 그 사람이 호 텔 운영을 방해할 정도로 이러쿵 저러쿵 조언을 하려 한다면 아마 서로 부담이 될 게 다. 그렇게 되면 그 교수뿐만 아니라 너도 내 사무실 근처에 얼씬 거리지 못하도록 당 장 쫓아낼 거야. 알겠니?" "알았어요, 할아버지." "괜찮다. 그런데 로라, 빨리 드레스를 입은 네 모습을 보고 싶구나." "조금만 기다리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만 주무세요, 할아버지." "그래. 밤이 늦었으니 일찍 자거라." 로라는 전화를 끊은 후에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유난히 밝았던 별들도 그날 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매우 흐린 날이 될 것만 같은 밤이었다. 로라는 남은 짐을 정리하기 위해 기숙사 현관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메드닉 해리슨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침대주위의 탁자에 놓여 있는 스 탠드 불을 켰다. 잠시 밝은 빛 때문에 눈이 부셨다. 눈을 가늘게 뜬 메드닉의 시선이 탁자위에 놓인 사진들로 향했다. 로라의 어린 시절을 담고 있는 사진이 그 속에 들어 있었다. 금발을 곱게 기른 귀여 운 소녀가 아직은 활기 넘치던 시절의 할아버지 품에 안겨서 즐거운 듯이 웃고 있었다. 다시 스탠드의 불을 끄고 나서 메드닉은 두 손을 가지런히 가슴 위에 얹고 기나긴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지난 과거의 추억들이 영화처럼 펼쳐졌다. 누구 나 나이를 먹으면 그럴 것이다. 날마다 잠들기 전에 자신이 살아왔던 지난 시절들을 한 편의 영화처럼 편집해 보려는 욕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메드닉 해리슨. 그에게도 남들보다 행복했던 젊은 시절이 있 었다. 화려한 명성과 부를 누리던 시기에 메드닉은 장래가 유망한 청년 사업가로서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의 생활은 거의 매주 세계각지에 흩어져 있는 자신의 호텔을 순회하면서 경영실적을 점검하는 것이었다. 호텔업으로 성공의 가두를 달리던 젊은 실업가 메드닉 해리슨은 해마다 휴가철이면 바하마에 있는 자신의 호텔에 와서 휴가를 보냈다. 그 일이 언제였을까. 메드닉은 자신의 나이도 제대로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기억력 이 쇠잔해 있다는 점이 몹시 안타까웠다. 그 아름다운 바하마의 여름을 생각하면 이제 는 나이가 일흔 살이 넘은 메드닉도 가슴이 마구 뛰었다. 메드닉이 휴가를 보내기 위해 바하마에 도착했을 때, 호텔에는 유명한 영화배우가 투 숙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던 여배우 니콜이 영화를 촬 영하기 위해 바하마로 왔던 것이다. 그녀가 해변을 거닐고 있는 모습을 보았던 메드닉 은 당장 넋이 나갈 정도로 빠져 버리고 말았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처럼 아름다운 금발을 휘날리며 해변을 걸어가던 니콜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메드닉은 숨을 조용히 몰 아쉬었다. 메드닉은 매우 정중한 태도로 니콜에게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 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보름달이 뜨던 날 밤, 호텔 수영장 근처에 있는 정원에서는 거대한 파티가 벌어졌다. 메드닉은 니콜의 손에 가벼운 키스를 했던 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랑에 빠진 메드닉은 영화 촬영이 끝나는 날까지 항상 니콜과 동행했다. 니콜도 항 상 예절 바르게 행동하는 메드닉에게 점점 더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바쁜 일정을 보내면서도 가끔씩 두 사람은 서로를 만나면서 보다 가까운 사이로 발전할 수 있었다. 바하마의 해변에서 니콜과 메드닉은 뜨거운 키스를 나누고 사랑의 와인을 들면서 미 래를 약속했다. 두 사람은 그 이후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고 장래의 세계적인 재벌과 결혼했던 니콜은 더없이 행복한 여성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 었다. 두 사람은 처음에 행복한 결혼 생활을 즐겼다. 그 행복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니콜과 메드닉은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사랑을 나누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안 락한 침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니콜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메드닉은 점차 사업 에는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간혹 사업상 어려운 문제가 생겨도 니콜은 메드닉을 결코 놓아 주지 않았다. 니콜이 아들 앤드류를 낳던 해부터 메드닉은 다시 사업에 열 중하면서 호텔 운영을 정상적으로 돌려 놓았다. 앤드류가 태어난 후에 메드닉은 니콜이 더 이상 영화배우로 활동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메드닉이 자꾸만 은퇴를 강요하자 니콜은 남편의 행동에 대해 불만을 터뜨렸 다. 니콜이 메드닉의 아내가 되기로 결심한 것도 결혼 후의 연기활동을 적극 지원하겠 다던 메드닉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러나 메드닉은 니콜이 첫 아이를 출산하자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 "니콜,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 평범하게 살아갈 수는 없어?" "당신이 약속했잖아요, 저에겐 연기 활동이 전부였어요." 두 사람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메드닉은 사업의 확장으로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항상 니콜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내 의 은퇴, 그것이 메드닉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는 아내가 오직 앤드류를 기르는 일 에만 신경을 쓰길 원했다. 공개 석상에서도 메드닉은 그런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선뜻 꺼냈다. "이것이 아내와 아들을 위해 최선은 다하고 있는 저의 모습입니다." 결국 니콜은 남편의 반대로 인해 영화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니콜의 은퇴는 영화 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영화계에서 은퇴한 니콜은 그 후의 생활 에 쉽게 적응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계속 은막의 화려한 생활을 떠올리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화려했던 지난 시절을 송두리째 도난당한 기분이었다. 니콜은 침체된 자신을 돌보는 것조차 어려운 정도로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그리고 조금씩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메드닉이 사업상의 이유로 일 주일에도 며칠씩 집을 비울 때가 많아질수록 젊은 니콜은 짙은 고독감에 젖어 들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회의가 밀려오자 남편에 대한 애정도 점점 식어가게 되었다. 메드닉은 출장에서 돌아올 때마다 항상 술에 취한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발가에 술 병이 이리저리 널려 있는 광경을 보게 되자, 그는 아내의 손도 잡기 싫어졌다. 이렇게 얼마간의 세월이 흐르자 두 사람의 관계는 거의 부부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상태로까지 나아갔다. 메드닉이 출장에서 돌아온 어느 날이었다. 메드닉은 아내와 아들을 위해 스위스에 서 구입한 선물을 잔뜩 들고 즐거운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몹시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여기 저기 흩어진 술병으로 인해 거실 전체 가 온통 위스키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침실에서는 재즈가 흐르고 있었고 낯선 남자 의 것으로 보이는 옷들이 침실 바닥을 향해 하나씩 벗겨져 있었다. 그 중에는 니콜의 블라우스와 속옷들도 보였다. 재즈의 선율속에서 니콜이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생생하 게 들렸다. 메드닉은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마구 소리를 지르면서 자신의 침대 위에서 니콜과 정사를 벌이던 남자를 내쫓았다. 술에 취한 니콜은 그대로 쓰러지면서 정신을 잃어버 렸다. 다음날 아침 당장 메드닉 해리슨은 변호사를 불러서 이혼 서류를 준비하라고 지시했 다. 온통 분노에 휩싸인 메드닉은 위자료를 한 푼도 지불하지 않은 채 변호사를 통해 니콜에게 이혼 서류에 서명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니콜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메드닉의 집에서 쫓겨난 니콜은 얼마 후에 또다시 아이를 낳았다. 메드닉은 그 사실 을 알고 있었지만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는 것을 부정했다. 니콜이 청구했던 생활비 와 양육비 또한 일체 지불하지 않았다. 알콜 중독으로 니콜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도 메드닉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니 콜의 친척들이 소송을 걸겠다고 협박까지 했지만 메드닉은 냉정한 태도로 아무런 요구 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랑했던 여자로부터 배신을 당했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던 메드닉은 오랫동안 고통 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사업가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메드 닉은 고통을 잊기 위해서라도 점점 더 사업에 열중했으며 그가 경영하는 호텔은 결혼 전보다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메드닉은 아내와 이혼한 후로 어떤 여자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메드닉의 이혼 소식 이 재계에 알려지면서 여러 곳에서 다시 청혼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호텔들과 어린 아들 앤드류뿐이었다. 메드닉은 아들 앤드류를 훌륭한 사업가로 키울 생각이었다. 재혼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으 며 앤드류가 성장하게 되자 모든 기대를 아들에게 걸었다. 앤드류에 대한 그의 애착은 몹시 강했다. 앤드류가 아직 어렸을 때에도 메드닉은 자 신의 출장길에 아들을 데리고 다녔다. 이런 앤드류도 아버지의 품에 안긴 채 눈빛을 반짝이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저도 아빠의 일을 도울 거예요." 그러나 앤드류가 상급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메드닉의 곁을 떠나자 그들 사이에는 거 리감이 생기게 되었다. 앤드류가 열여덟 살이 되던 해, 방학을 이용해 바하마를 찾아 온 그는 아버지와 크게 다투었다. 성인이 된 앤드류는 사업에 뜻을 두기보다는 배우가 되기를 희망했다. 메드닉은 매우 화를 내면서 앤드류의 결정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으 나 결국 아들의 생각을 꺾지 못했다. 앤드류는 아버지로부터 사업가의 기질을 물려받지 못했다. 오히려 어머니였던 니콜 로부터 물려받은 재능이 빛나는 아이였다. 앤드류는 멋진 청년으로 성장했지만 그가 배우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할 때마다 메드닉은 잊혀진 과거의 기억이 자꾸만 떠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앤드류가 연극 무대에 뛰어들었다는 소식을 접한 메드 닉은 당장 앤드류에게 바하마로 돌아오라는 불호령을 내렸다. 그러나 앤드류는 아버지 의 명령을 거절하고 말았다. 그 후로 몇 년 동안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던 앤드류는 브 로드웨이에서 각광받는 배우로 성장하게 되었다. 앤드류의 이름이 잡지와 신문에 오르 내리면서 그가 과거 유명했던 여배우 니콜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세간에 오르내리기 시 작했다. 평론가들은 저마다 니콜의 남성적 부활이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앤드류 의 연기력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어느 여름날 앤드류는 열애 중인 극단의 여배우 줄리와 함께 바하마로 아버지를 만 나기 위해 찾아왔다. 앤드류는 자신이 얻은 명성의 영광을 아버지인 메드닉 해리슨에 게 바치고 싶었다. 비록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하고 그 뜻을 거절한 채 자신의 인생을 찾아나섰지만 이제는 아버지도 자신의 생각을 이해할 거라고 그는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줄리와의 결혼도 허락받고 싶었다. 그러나 메드닉은 아직도 앤드류의 결정이 틀렸다고 믿었다. 게다가 앤드류가 여배우 와 결혼하다니... 메드닉은 도저히 앤드류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당 장 바하마로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메드닉은 앤드류가 줄리와 결혼하는 것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메드닉의 손에 날아온 전보는 앤드류가 줄리와 결혼을 할 예정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결코 바하 마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내용이 전부였다. "이런! 빌어먹을 녀석. 모든 걸 너 혼자 결정했으니 알아서 하거라. 그리고 이제부 터 나를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메드닉 해리슨은 앤드류의 결혼식장에도 가지 않았으며 그 후로도 전혀 아들의 얼굴 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같은 극단의 여배우 줄리와 결혼한 앤드류는 매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메드닉 해리슨은 앤드류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줄리 또 한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다. 메드닉 해리슨은 앤드류와 줄리를 싫어했다기보다는 배 우라는 그들의 직업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 후 메드닉 해리슨은 앤드류가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찾아가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앤드류는 연극의 리허설을 위해 아내와 갓 태어난 딸과 함께 보스턴으로 가던 도중 빗길에서 의문의 자동차 사고로 죽고 말았다. 앤드류 일가의 자동차 사고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서진 자동차를 정밀하게 조사한 경찰은 브레이크 고장으로 내리막길에서 멈추지 못해 언덕을 굴렀다 고 발표했다. 하지만 보험회사에서는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앤드류의 자동차는 사고가 나기 사흘 전에 정기검사를 받았고 서류에는 브레이크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검사를 담당했던 사람도 브레이크에 이상이 없었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그렇지만 자동차는 휴지조각처럼 구겨진 채 언덕 아래로 뒹굴었고 앤드류와 줄리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러나 그들의 딸만은 아무런 상처없이 살아있었다. 경찰이 어린 아이를 발견했을 때 그 아이는 부서진 차로부터 50미터 정도 떨어진 수풀에서 비 에 젖은 채 울고 있었다. 경찰은 차가 언덕에서 굴러 떨어질 때 아이가 튕겨져 나왔을 거라고 결론지었다. 그 래서 아이는 기적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의문이었다. 비가 오고 있었기 때문에 자동차의 창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그리고 부서진 자동차에 도 문은 그대로 달려 있었다. 모두 닫힌 상태였고 운전석의 문만이 열려진 채 심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유아용 안전벨트를 사용한 흔적도 남아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어린 아기가 굴러떨어지는 자동차에서 어떻게 튕겨져 나올 수 있었을까? 그것도 상처 하나 없이... 메드닉 해리슨은 아직도 그것이 의문스러웠다. 하지만 그저 궁금증 정도로 만족했 다. 떠난 자식에 대해 더 이상 미련을 갖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사고 현장에서 튕겨져 나온 아이가 이제는 어느덧 숙녀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바로 로라 해리슨이 다. 세계적인 호텔업계의 재벌 손녀 로라 해리슨. 이제 메드닉에게는 로라 해리슨만이 유일한 혈육이자 자신의 유일한 상속자로 남아있다. "로라. 이제는 하버드를 졸업하고 바하마로 돌아올 나의 손녀 로라 해리슨. 네가 벌써 그렇게 컸구나.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이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던 시간은 방학뿐이었지. 그렇지만 그것도 다행이었다. 네가 하버드에 입학한 첫해의 방학이었 던가... 그 이후로 넌 한 번도 바하마에 올 수가 없었잖니. 난 네가 몹시 그리웠단다. 그런데 벌써 졸업하고 이 할아버지 곁으로 돌아오는 구나. 나의 유일한 혈육..." 메드닉 해리슨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어린 로라 해리슨은 매우 총명한 아이였다. 로라 해리슨은 우유부단한 성격이었던 자기 아버지와는 달리 빠른 판단력과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로라 해리슨이 아홉 살 때였다. 자신의 생일조차 잊어버리고 사업에 열중하다 밤늦 게 집으로 돌아왔던 메드닉 해리슨은 매우 놀라고 말았다. 집의 불은 모두 꺼져 있었 고 아무리 불러도 가정부도 로라 해리슨도 대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순간 무슨 사 고가 난 거라고 느꼈던 메드닉은 불안한 마음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스위치를 찾아 거실의 불을 켜려는 순간 주방에서 갑자기 불꽃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메드닉은 몹시 당황하면서 불이 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불꽃은 뜨거운 열기를 내뿜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에 메드닉이 비로소 정신을 차렸을 때, 성냥을 든 로라가 대형 케이크가 실린 수레를 끌고 거실로 나오는 것이었다. 메드닉이 보았던 것은 생일 축하 케이크에서 흔 들리는 불꽃이었다. "아니? 이게 무신 일이냐?" 메드닉이 몹시 당황하면서 물었다. "할아버지의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빛나는 눈을 반짝이면서 수레를 끌고 나오던 로라 해리슨이 말했다. 로라는 자기 키 만한 수레를 밀고 있었다. 메드닉은 깜짝 놀라면서 로라를 바라보았다. "로라. 나는 무슨 사고라도 난 줄 알았다. 할아버지를 걱정하게 하면 어떻게 하 니?" "미안해요, 할아버지. 깜짝 놀라게 해 드리고 싶었어요. 어서 촛불을 끄세요." 메드닉은 오랜만에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오! 로라. 정말 고맙구나." 로라는 어린 아이답지 않게 점잖은 모습으로 할아버지를 대했다. 메드닉은 수레로 다가가서 촛불을 불어 껐다. 촛불이 꺼지자 메드닉은 다시 한 번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방이 갑자기 환해지면서 요란한 폭죽이 터지고 생일 축하 노래가 들려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색깔의 풍선들과 꽃들로 장식된 거실에서는 가정부와 집사, 정원사 들이 모여서 외로운 노인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메드닉은 몹시 의아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대체 이런 일을 누가 꾸민 거지?" "제가 했어요, 할아버지." 로라가 할아버지의 소매를 잡아 끌면서 말했다. 하지만 메드닉은 도무지 그 말을 믿 을 수가 없었다. "사실입니다. 메드닉 해리슨 씨. 믿기 어렵겠지만 로라가 생일 파티의 모든 계획을 세웠어요." 집사가 로라 해리슨을 향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사실이냐, 로라?" 로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다만 미소만 짓고 있었다. 메드닉은 로라를 번쩍 안아들고 입맞춤을 해 주었다. 로라는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을 할아버지에게 건네 주었 다. "축하해요, 할아버지." "오! 고맙구나." 메드닉은 선물을 받아들고 다시 한 번 손녀에게 키스했다. 그날은 메드닉 해리슨에 게 있어 평생 잊지 못할 날이 되었다. 아내와 헤어진 이후 처음으로 매우 만족스러운 생일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잠자리에서 메드닉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옆자리에 함 께 누워서 자던 로라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20년 후에는 사랑하는 손녀 딸에게 자신의 사업을 물려 주기로 결심했다. "로라, 너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재능이 있구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로라가 하버드 대학에 진학해서 케임브리지로 떠난 이후에 메드 닉은 자신의 몸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이제는 왕성하게 사업을 꾸려갈 수 없을 만큼 늙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메드닉은 자신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는 것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나이를 먹는 만큼 하루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자신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메드닉은 자신의 상속자인 로라가 빨리 성장하기만을 바랐다. 메드닉은 로라가 서둘러 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의 사업을 물려받기를 원하고 있었지 만, 그것은 뜻한 대로 쉽게 이루어질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로라 해리슨이 매우 총명 하기는 했지만 사업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많은 연륜과 경험이 필요했던 것 이다.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메드닉은 외부의 경쟁자들이나 회사 내부에서 경영권을 노리는 임원들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순 살이 넘은 나이로 세계 각지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호텔들을 직접 경영 한다는 것은 사실 무리였다. 그래서 현재 메드닉은 바하마의 아미보셤 호텔에 자신의 전용층을 두고 생활하면서 매달마다 세계 각지에 흩어진 호텔들의 지배인을 불러들여 서 사업을 이끌어 나가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메드닉이 이끄는 뉴월드 호텔그룹은 회 장이 직접 호텔을 돌면서 경영 상태를 확인하던 상황에서 단지 보고만을 받는 것으로 경영 방식이 변하게 되었다. 그러한 경영 방식은 메드닉이 건강상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받아들인 것이었다. 메 드닉이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각 호텔의 지배인들은 마치 그곳의 영주처럼 전 권을 장악하고 모든 회계 장부를 독자적으로 꾸려갈 수 있었는데, 그것은 메드닉에게 있어 커다란 위협이자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스위스의 그랜드 호텔에서는 지배인이 고의적인 부실 경영과 대차대조표 서 류의 조작을 통해 호텔의 주가를 떨어뜨리고 떨어진 주식을 마구 사들여 대주주로서 경영권을 장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바하마에 있는 메드닉으로서는 사태가 어떻게 돌 아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가 전적으로 믿을 수 잇는 사람이라고는 바하마에 있는 아미보셤 호텔의 부지배인 프레디뿐이었다. 프레디는 어려서부터 호텔에 들어와 잡일을 하다가 부지배인의 위치까지 승진한 사 람이었다. 메드닉은 열심히 일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 부지배인의 위치까지 오 른 프레디를 매우 신뢰하고 있었다. 메드닉은 그랜드 호텔의 지배인으로 프레디를 파견했고 얼마 후에 그 호텔은 다시 정상적인 경영상태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메드닉 해리슨은 프레디를 더욱 신 뢰하게 되었고 그를 다시 아미보셤 호텔로 불러들여 총지배인의 자리를 주고 자신의 오른팔처럼 여기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메드닉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메드닉은 거의 칩거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 고 있었다. 바하마 아미보셤 호텔의 전용층에 한정되어 있는 자신을 대신해서 누군가 가 세계 각지를 젊었을 때의 자신처럼 돌아다니기를 원했다. 그러나 로라는 아직 그만한 연륜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메드닉이 가만히 앉 아서 로라가 성숙하기만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메드닉이 그 좁은 공간 속에서도 지 난 몇 년 동안 세계 각지의 호텔을 아무런 문제없이 이끌고 있었던 것은 또 한 명의 믿을 만한 직원이 있기 때문이었다. "레베카 더글라스..." 메드닉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레베카 더글라스는 3년 전부터 메드닉의 비서로 채용되어서 근무하고 있는 젊고 유능한 여성이었다. 그 당시에 메드닉은 리차드 스티 븐슨 상원의원의 추천으로 클라크 상원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던 미모의 여성 레 베카를 자신의 비서로 채용했다. 어떤 측면으로 보나 레베카는 매우 뛰어난 여자였다. 미모와 지성을 겸비하고 있던 레베카는 모든 일을 거의 완벽하게 처리해 나갔다. 레베카에 대한 믿음이 쌓여가자 메 드닉은 그녀를 중심으로 자신의 업무를 처리해 나갔다. 레베카가 맡았던 일은 메드닉과 그의 회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것들이었다. 레베카 는 세계 각지에서 들어오는 각종 보고 서류들을 정리하고 검토하면서 지난 달의 실적 과 대비한 적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보고서의 전체적 인 신뢰도를 측정하기 위해 각 호텔의 특성을 미리 분석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건강의 악화 때문에 세계 가지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를 일일이 검토할 수 없었던 메 드닉은 레베카가 정리한 서류를 통해 뉴월드 그룹의 호텔 상황을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레베카와 더불어 일하기 시작한 이후로 메드닉은 아무런 문제도 없이 자신의 아성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로라가 성장할 때까지 레베카가 잘만 해 준다면..." 실제로 뉴월드 그룹에 대해 메드닉 회장 다음으로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은 레베 카 더글라스뿐이었다. 메드닉은 레베카가 로라 해리슨을 잘 가르칠 수 있을 거라고 생 각했다. 게다가 이 두 여자는 서로 닮은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들 두 사람이 잘 어울릴 수만 있다면... 메드닉은 뉴월드 그룹의 미래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자신의 인생 전체에 거쳐 치밀하게 준비되어 온 거대한 음모와 소용돌이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 2 장 사랑의 시작 바하마의 아름다운 해변선을 따라 벌써 태양이 힘차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잔잔한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으며 아침 일찍부터 휴양지로 몰려든 관광객들로 인해 붐비기 시 작했다. 바하마의 웨스턴 롱 비치가 한눈에 들여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아미보셤 호텔 의 17층 전용실에서는 메드닉이 아직까지도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이미 메드닉의 침실 밖에서는 경호원들이 오전 6시에 있는 임무 교대를 마친 상태였 고 개인 비서 레베카 더글라스와 주치의 앤소니 프레이저가 출근을 마친 상태였다. 총 지배인 프레디는 각 부서의 부서장 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자신의 사무실에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레베카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밤새 날아온 팩스를 정리하면서 정신이 없었다. 시계는 7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레베카는 서둘러 앤소니를 호출했다. 전화기에서 앤소 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앤소니입니다." 레베카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간밤에 잘 잤나요?" 어쩐지 앤소니의 목소리는 약간 힘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레베카, 지난 밤에는 너무 즐거웠어요. 언제 다시 그런 선물을 받아볼 수 있을지..." 레베카는 앤소니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사무적인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업무 중이에요. 그러니까 용건만 간단하게 말하겠어요. 붕대는 언제 풀 죠?" "아마 내일이면 풀 수 있을 겁니다." 앤소니가 상기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요. 그렇다면 내일 밤에 다시 만나기로 해요. 바로 그 장소에서 말이에요." "알겠습니다." 레베카는 전화를 끊으려고 하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다는 듯이 다시 수화기를 귀에 대고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요, 앤소니." "무슨 일이죠?" "오늘 오전에 회장님을 정기 검진할 때 설마 주사 놓는 걸 잊어버리지는 않겠죠?"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레베카는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그녀는 손에 든 팩스 뭉치를 챙겨 들고 복도를 나 섰다. 복도에 서 있던 경호원들이 일제히 레베카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했다. 복 도를 따라 걸어가던 레베카가 멈추어 선 곳은 경호실장의 사무실 앞이었다. 레베카는 가볍게 방문을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사무실에서 약간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레베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경호실장 마틴이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려 놓고 있었다. 마틴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레 베카를 발견하다 잠시 당황한 듯이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틴, 좋은 아침이에요." "어서 오세요, 레베카.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되면 내가 보고 하기 위해 찾아갈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레베카가 경호실장으로부터 업무 보고를 받는 시간은 7시 30분이었다. 물론 레베카 가 경호실장의 방으로 와서 보고를 받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경호실장 마틴은 1분도 늦지 않은 7시 30분 정각에 레베카의 사무 실 문을 두드렸고 엄격한 업무 확인을 받았다. 때로는 호통을 들었고 때로는 칭찬을 받아가면서 열심히 근무했다. 그런데 레베카가 오늘따라 보고 시간이 되기도 전에 경호실장의 사무실을 방문한 것 이다. 이것은 일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경호실장 마틴은 매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레베카는 푹신한 소파에 앉으면서 다리를 꼬았다. 그 순간 레베카의 짧은 치마가 위 로 말려 올라가면서 길고 하얀 허벅지가 환하게 드러났다. 레베카는 그런 자세로 물끄 러미 마틴을 응시했다. "마틴, 오늘은 보고할 필요가 없어요." 평소의 레베카와는 말투가 달랐다. 그렇지만 마틴은 지금 레베카의 말이 귀에 들어 오지 않았다. 소파에 앉은 그녀의 쭉 뻗은 다리에 온 신경이 가 있었던 것이다. 가슴 선이 깊이 패인 블라우스의 안쪽에서 풍만한 육체가 숨을 쉬고 있었다. 금발에 진한 화장 또한 미녀 레베카의 자태를 눈부실 정도로 빛나게 하고 있었다. 경호실장 마틴은 레베카의 농염한 모습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마틴, 경호실의 예산 편성에 대해 이의가 없나요?" 그 말을 들었던 마틴은 매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6개월 전부터 경호실의 예 산이 상승하기는 했지만 다른 직원들에게는 일체의 보너스도 올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 었다. 당황한 마틴은 꼬리가 잡힌 게 아닌가 걱정하면서 다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전혀 이의가 없습니다." 레베카는 꼬고 앉았던 다리를 슬며시 바꾸면서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 다. "경호실 예산 사용내역을 볼 수 있을까요?" 마틴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횡령이 들통났 을 거라는 생각에 매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레베카는 그러한 마틴의 눈동자를 정면 으로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레베카는 마틴의 시선을 놓치지 않으면서 담배를 꺼냈다. 그녀는 매우 익숙한 동작 으로 탁자 위에 있는 라이터를 집어들었다. 담배를 문 레베카는 길게 한 모금의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마틴은 점점 더 당황하는 기색을 나타내었다. "서류 정리가 미처 되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요염한 태도로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레베카의 면전에서 마틴은 온몸의 기운이 모두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레베카의 말은 한 가닥 희망을 안겨 주는 것이었다. "오늘 저녁까지는 할 수 있겠죠?" "물론입니다. 레베카." 마틴은 안도의 한숨을 돌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마틴은 레베카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퍼지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너무나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좋아요. 그렇다면 오늘 저녁 9시까지 서류를 들고 내 별장으로 찾아와 주세요." "알겠습니다." 레베카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문을 향해 걸어갔다. 마틴이 레 베카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동안 레베카가 뒤로 돌아서면서 의미심장하게 한 마디 말 을 덧붙였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레베카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긴장이 풀린 마틴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틴 의 머리 속에는 온통 장부에 대한 생각이 가득 차 있었다. 위조한 서류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마틴은 사무실을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잠시 후에 마틴은 책상 위에 두 다리를 올려 놓은 다음 생각에 잠겼다. 영수증을 조 작하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한꺼번에 6개월 동안의 영수증을 모두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 앞이 캄캄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레베카의 별장으로 나를 불렀을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하라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마틴은 레베카의 이상한 행동이 몹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평소의 레베카라면 공적 인 업무와 사적인 일을 완벽하게 구분하면서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레베카는 마틴을 결코 한 번도 자신의 집에 초대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일이 많을 때에는 자신의 사무 실에서 야근을 하거나 밤을 세워 업무를 끝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레베카 가 자신의 집으로 일거리를 들고 가는 모습은 아직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마틴은 조금 전에 보았던 레베카의 모습에서 갑자기 커다란 의혹을 느꼈다. 그 행동 은 일종의 유혹과도 같은 것이었다. 마틴은 어쩌면 이 일이 자신을 궁지로 몰아 놓으 려는 레베카의 달콤한 유혹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마틴의 생각은 점점 더 이 상한 상상으로 빠져들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회장님?" 레베카는 결재를 받기 위한 서류를 들고 메드닉의 침실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그녀 는 두 손으로 주스 잔이 올려져 있는 쟁반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 겨드랑이 사이 에는 검은색 서류철이 끼워져 있었다. 레베카는 메드닉의 침대 옆에 있는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쟁반을 내려 놓고 겨드랑이 사이에서 서류철을 뽑아들었다. 메드닉의 눈 앞에서 레베카는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듯이 창문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뒤로 하고 서 있었다. 뛰어난 미모와 윤곽이 뚜렷한 얼굴에는 지성미와 함께 요염한 향기까지 풍겨 나왔다. 그녀의 몸매에서 나타나는 실루엣을 보면서 메드닉은 항상 레 베카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다고 투정을 부리기도 했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평소의 메드닉이었다면 아침에 신선한 꽃향기를 맡는 듯한 기분으로 레베카와 몇 마 디 대화를 주고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별로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레베카가 들어왔을 때, 메드닉은 여전히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조금 전부터 잠에 서 깨어나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겨 있던 메드닉은 아무런 생각이 없 는 사람처럼 그저 레베카를 응시할 뿐이었다. 건강이 악화된 이후로 항상 즐거운 마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던 메드닉 해리슨이었 다. 하지만 오늘의 그는 어쩐지 달라 보였다. 메드닉은 무언가 깊은 사색에 빠졌다가 막 깨어난 사람처럼 보였다. 지난 몇 년 동안 아침마다 만났기 때문에 레베카는 메드닉의 상태를 너무나 잘 읽어 낼 수 있었다. "이제 야채 주스는 질색이야, 레베카. 아침엔 커피를 마시고 싶어. 한 잔 줄 수 없 겠어? 제발 부탁이야." 레베카는 다정하게 메드닉의 침대 위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 감기에 걸린 소년을 대 하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회장님, 커피는 회장님의 건강상 절대로 안 된다는 걸 잘 아시잖아요. 어린 아이처 럼 투정을 부리시면 안 돼요, 알겠죠?" 레베카는 탁자 위에 놓인 주스 잔을 들고 메드닉을 부축하면서 일으켰다. 마치 엄마 가 어린 아이에게 주스를 먹이듯이 레베카의 행동은 매우 자연스럽고 친근해 보였다. 노인은 레베카의 손길에 따라 몸을 일으켰다. 레베카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회장님, 조금 힘드시더라도 아침엔 이걸 드셔야 해요." 메드닉은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베카는 조심스럽게 주스 잔을 기울 였다. 노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레베카가 먹여 주는 야채 주스를 천천히 마셨다. 텁텁한 야채 찌꺼기들이 메드닉의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내려갔다. 벌써 3년 전부터 매일 아침 9시에 레베카는 메드닉에게 업무를 보고하기 위해 그의 침실을 방문하고 있었다. 레베카가 업무 보고를 할 때에는 아무도 이곳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레베카에게는 이 시간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고 그것은 메드닉 해 리슨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메드닉은 지난 밤 사이에 올라온 각지의 호텔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고 그날의 업무 를 지시했다. 중요한 결정 사항에 대해서는 언제나 레베카가 문안을 작성해서 메드닉 의 결제를 받았다. 항상 똑같이 반복되는 업무 가운데에서 언제부터인가 레베카는 자신이 직접 메드닉 이 아침마다 마시는 주스 잔을 들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침실에 들어오자 마자 업무를 시작하기 이전에 회장에게 주스를 먹여 주었다. 까다로운 성격의 메드닉도 아 름다운 여비서의 행동이 그다지 싫지 않았다. 메드닉은 가끔씩 그런 레베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레베카도 그런 메드닉의 행동을 전혀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레베카는 회장을 만나기 전의 자기 모 습에 대해 항상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옷을 바꾸어 입었으며 날씨에 따 라 달라지는 화장술 그리고 더욱 메드닉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은 아침의 신선함을 더욱 잘 느끼게 해 주는 레베카의 향수 냄새였다. 그렇다고 두 사람의 관계가 홀로 된 노인과 요염한 여비서 사이에 있을 법한 비밀스 러운 관계는 아니었다. 단지 메드닉은 자신의 비서가 자랑스럽기도 하고 손녀딸처럼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베카도 회사의 상사라기보다는 할아버지 를 대하는 듯한 기분으로 자연스럽게 메드닉을 대했다. 메드닉이 주스를 다 마시자 레베카는 빈 잔을 탁자 위에 올려 놓고 굳어지기 시작한 노인의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메드닉은 레베카가 가지고 온 서류철을 들여다보면서 결재란에 자신의 서명을 기입하기 시작했다. 메드닉은 조금은 색다른 농담을 곁들이면서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결재를 마무리했 다. 그는 서류철을 덮고 길게 침대 위에 드러누우면서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레베카?" 회장의 다리를 주무르던 레베카는 문득 손을 멈추고 메드닉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 회장님." "특실을 하나 예약해 둬." "중요한 손님이 오시나요?" "물론이지. 아주 특별한 손님이 올 거야." "혹시 저도 아는 분인가요?" 레베카가 의아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마 레베카도 무척 좋아하게 될 거야." 레베카는 메드닉의 기분이 매우 좋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메드닉의 이야기는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레베카는 다시 침대 위에 걸터 앉아서 메드닉의 다리를 주 무르기 시작했다. "매우 궁금하군요, 회장님." 레베카는 활짝 웃으면서 회장을 바라보았다. "음, 내 손녀 로라 해리슨이 오기로 했어." 메드닉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레베카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마치 억지로 웃음을 잃지 않으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레베카는 메드닉을 향해 여전히 활짝 웃는 얼굴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어머, 그래요? 축하해요, 회장님. 그러고 보니까 벌써 졸업할 때가 되었군요." "그렇지. 그 어린 아이가 벌써 대학을 졸업할 때가 되었어. 세월이 참 빠르군." 메드닉은 지난 과거를 떠올리기라도 하듯이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눈을 감았다. 그 런 메드닉의 표정을 바라보던 레베카는 탁자 위에 놓인 사진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린 시절의 로라 해리슨이 사진속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레베카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 졌다. 잠시 동안 메드닉과 레베카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레베카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로라 해리슨이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게 된 것이다. 메드닉의 다리를 주무르는 레베카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무거운 정적을 깨는 듯한 웃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레베카는 비로소 자신이 매우 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허허." 메드닉이 눈을 뜬 채 웃고 있었다. 레베카는 회장을 향해 시선을 보내면서 다시 미 소를 지었다. "레베카." "네, 회장님." "그 아이가 너무 기특하단 말이야."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하루라도 빨리 사업을 돕고 싶다는 거야.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아이가 아주 당돌 하게 말이야." "로라 해리슨 양은 경영학을 전공했으니까 회장님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 요." "그 알량한 경영이론들이 실전에서 과연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레베카도 잘 알고 있잖아. 그런 것들은 모두 말장난이라는 것을..." "물론이에요, 회장님." "하지만 레베카, 나는 로라를 아주 혹독하게 훈련시킬 생각이야. 내 사업을 이어받 으려면 절벽을 기어오르는 호랑이가 될 필요가 있거든. 안 그래, 레베카?" "물론입니다. 회장님이 이룩하신 사업을 이어가려면 그 정도의 훈련은 당연히 있어 야죠." 두 사람은 함께 가벼운 미소를 주고 받았다. 잠시 후에 메드닉은 다시 눈을 감고 사 색에 잠겼다. 그러한 메드닉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레베카의 얼굴에는 미 묘한 감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여성으로서 가질 수 있는 일종의 질투심을 연상시키는 표정이었다. 레베카는 메드닉의 다리를 주무르던 손길을 멈추었다. 레베카는 메드닉 회장이 결재 한 서류를 확인하기 위해 일어섰다. 레베카는 서류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며칠 후에 있 을 주요한 행사에 대한 결재가 빠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회장님?" "무슨 일인가?" "원로 영화배우 길버트 씨 부부가 골동품 스키를 헐리우드 박물관에 기증하는 행사 를 우리 호텔에서 갖고 싶다고 제의를 해 왔습니다. 그 스키는 길버트 부부가 함께 출 현했던 영화에서 사용한 소품입니다. 하지만 그 행사를 열려면 먼저 회장님의 결재가 필요합니다." "영화배우 길버트 씨라... 그래, 그렇군. 내가 그 서류에 결재를 하지 않았지." 레베카는 서류철을 다시 메드닉 앞으로 내밀었다. 메드닉은 그 서류철을 바라보면서 한참 동안이나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서류에는 영화배우 길버트 부부의 행사에 관한 건이라고 적혀 있었다. 메드닉은 갑자기 영화배우라는 말에 신경이 쓰였다. 배우라는 말만 들어도 진절머리 가 날 정도로 싫어했던 메드닉이었다. 그는 갑자기 니콜과 앤드류에 대한 생각이 떠오 르기 시작했다.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메드닉은 과거의 기억이 자꾸만 떠오르려는 것을 억누르 려고 애를 썼다. 어쩔 수 없는 과거, 그것은 그에게 고통 그 자체였던 것이다. 메드닉 은 고래를 흔들면서 애써 자신의 정신적인 고통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괜찮으십니까, 회장님?" "음, 괜찮아." 메드닉은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프레디를 떠올렸다. 프레디는 자신이 가장 신임하고 있는 호텔의 지배인이었다. 사실 관행에 따른다면 프레디가 아미보셤 호텔의 업무를 결정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메드닉은 프레디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 다. "아미보셤 호텔에 관한 일이라면 프레디에게 맡기면 되잖아, 레베카. 내가 왜 굳이 그런 사소한 일까지 신경을 써야하는 거지?" 레베카는 마치 메드닉의 반응이 어떠할 것인지 미리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이 또박또박 대답하기 시작했다. "이번 행사는 각계 각층의 저명한 인사들이 참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회장님의 결 재가 필요한 이유는 먼저 수많은 인사들의 신변 보장과 경호를 위해서 충분한 예산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길버트 부부가 기증할 스키의 가격이 몇 십만달러를 호가하는 골동품이기 때문에 도난을 방지하기 위한 보안장치와 도난시 의 배상을 위한 귀중품 보험을 따로 들어야 합니다. 그것도 회장님의 이름으로 직접 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 번째는 행사가 진행되기 위해서는 이미 예약되어 있는 손님들 이외에는 일반 투숙객을 거의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일은 프레디 보다는 회장님의 결재가 필요합니다." 레베카의 말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것이었다. 레베카의 말을 듣고 나서 메드닉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바하마와 스키라... 별로 어울리지 않는군." 메드닉은 다시 두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레베카는 아무런 표정이 없는 얼 굴로 눈을 감고 있는 메드닉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레베카의 그러한 표정에 서도 무엇인가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랑과 증오가 뒤섞인 과거 가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는 침묵의 골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 메드닉의 얼굴에는 길버트 부부의 스키 기증식 행사에 대해서 무엇인가 이해하지 못 하겠다는 듯한 표정이 담겨 있었다. 얼마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메드닉은 드디어 눈을 뜨고 레베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왜 하필이면 바하마지? 그리고 우리 호텔을 선택한 이유는 뭐지, 레베카? 이곳은 헐 리우드와 별로 상관이 없는데 말이야.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거야?" 열대의 바하마와 스키가 어울리지 않듯이 아미보셤의 메드닉 해리슨과 헐리우드의 영화배우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대였다. 과거에 메드닉이 헐리우드의 영화배우를 만 났던 것은 파국의 시작이었다. 메드닉은 그 아픈 기억을 결코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길버트 부부는 처음 결혼했을 때 신혼 여행을 이곳 바하마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혼 50주년을 맞는 기념여행으로 다시 한 번 바하마에 올 생각을 하고 있습니 다. 그리고 그 기념일에 맞추어서 스키 기증식을 이곳에서 열려고 하는 겁니다, 회장 님." 레베카는 말을 마치고 나서 메드닉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메드닉은 그저 눈 을 감고 있었다. 메드닉은 여전히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메드닉의 생각 이 길어지자 레베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길버트 부부의 초대인 명단에는 리차드 상원의원도 들어 있습니다. 리차드 상원의 원은 회장님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얼마 전에 리차드 상원의원이 연락을 했는데 이 번 파티에 참석하면서 회장님을 한 번 만나뵙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중요하게 의 논할 일도 있다고 덧붙이셨습니다." 메드닉은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에 눈을 뜨면서 입을 열었다. "행사는 언제 있을 예정이지?" "일 주일 후에 있을 겁니다." 메드닉은 안경을 끼고 볼펜을 집어들었다. "좋아, 지금부터 일반 투숙객의 신상을 모두 파악해 두도록 해. 신원이 불명확한 손 님의 예약은 받지 말도록 하고... 그리고 경호실에 지시해서 모든 보안에 만반의 준비를 기하도록 해. 성대한 파티도 물론 계획되어 있겠지?" "네, 회장님." "그래, 레베카가 나서서 아주 특별한 파티를 기획해 보는 거야. 모든 사람들의 기억 에 남도록 깜짝 놀랄 만한 파티를 여는 거지. 특별히 생각하고 있는 거라도 있나, 레 베카?" 미소를 곁들인 메드닉의 질문에 레베카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웃으면서 대 답했다. "바하마에 킹콩이 등장하는 건 어떨까요, 회장님?" "아주 훌륭해." 메드닉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레베카에게 서명한 서류를 넘겨 주었다. "편히 쉬십시오, 회장님." "수고하게." 레베카는 서류철을 들고 방을 나섰다. 레베카가 방을 나간 다음 혼자 남은 메드닉 해리슨은 자리에서 일어나 발코니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오래 전부터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던 메드닉은 거의 대부분의 사간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서 지냈다. 발코니에는 메드닉이 쉬기 편한 안락의자가 놓여 있었다. 메드닉은 안락의자에 몸을 맞기고 몇 시간이고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자신의 의자에 맞추어 숨을 쉬었 다가 내뱉기를 반복했다. 바다를 바라보던 메드닉 해리슨은 갑자기 음악이 듣고 싶어졌다. 의자 옆에 놓여 있 는 탁자 위에는 소형 카세트 라디오가 놓여 있었다. 카세트 라디오는 메드닉의 유일한 친구였다. 카세트 라디오의 전원 버튼을 누른 메드닉은 안락의자에 앉은 채 소형 카세 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빠져들었다. 작은 스피커를 통해 삼박자 풍의 왈츠 곡이 흘러나왔다. 메드닉은 왈츠의 리듬에 맞 추어 안락의자를 흔들었다. 자신의 머리까지 맑게 하는 화음이 줄곧 흘러나왔다. 여 러 개의 현악기들이 만들어내는 화음은 마치 메드닉의 온몸 구석구석을 치유하는 치료 제의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메드닉은 건강 상태가 양호했을 때에도 음악을 매우 좋아하는 편이었다. 특히 젊었 을 때에는 재즈의 감미로운 리듬에 깊이 빠져들었다. 클라리넷이나 플롯 같은 관악기 들이 토해내는 재즈의 선율을 들으면 젊은 메드닉은 언제나 열광했다. 어느 정도 숨이 들어가면 메드닉은 꼭 트럼펫 연주를 들었다. 메드닉이 특히 좋아했 던 것은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이었다. 재즈가 메드닉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건 어떻게 보면 그의 젊은 시절과 재즈의 스케일이 비슷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재즈를 무척 좋아했던 메드닉은 특히 빌리 할러데이의 재즈 음악을 즐겨 들었는데, 그가 빌리 할러데이에게 매료된 것은 그녀가 재즈 특유의 리드미컬한 필링에 감미로운 적막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었다. 비록 사업에서는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성공 을 거두었지만 평생을 고독하게 살아온 메드닉은 빌리 할러데이의 인생과 재즈 음악에 담긴 허무감이나 좌절감에 공감을 느꼈고 그것들이 삶의 차원에서 오히려 그윽한 향수 로 승화되고 있는 것을 즐겼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메드닉은 왈츠를 듣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재즈의 선율을 피하고 왈츠를 감상하는 것으로 음악적 취향이 변한 것은 건강 상태가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 하면서 비롯되었다. 재즈는 매우 정열적인 코드와 스케일을 사용하기 때문에 호흡을 맞추면서 음악을 감 상하려면 끊임없이 연주에 맞추어 감정이 고조되는 흥분을 감당할 수 있어야만 했다. 고음으로 올라갔다가 갑자기 처음으로 이어지는 블루노트의 스케일과 끊임없이 반복되 는 싱코페에션 주법 때문에 재즈를 듣는 사람들은 한 순간도 잔잔한 감정으로 감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 메드닉은 건강 상태가 나빠진 이후로는 듣기 편하고 리듬이 한결 안정된 왈츠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비록 재즈에서 왈츠로 취향을 바꾸기는 했지만 메 드닉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여전히 매우 높았다. 메드닉이 카세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왈츠에 열중하고 있을 때, 한 젊은 청년이 아침 식사를 들고 발코니로 들어섰다. 정중하게 허리를 굽힌 젊은이는 탁자 위에 식사 를 내려 놓기 시작했다. 청년이 아침 식사를 차려 놓자 메드닉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면서 그에게 호의를 나 타낸 후에 손짓으로 물러가도록 했다. 하지만 그 청년은 약간 뒤로 물러났을 뿐 돌아 가지 않고 발코니로 막 들어서는 또 다른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무런 기척이나 노크도 없이 발코니로 들어선 사람은 메드닉의 주치의 앤소니 박사 였다. 앤소니 박사는 발코니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메드닉을 향해 다가섰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밤새 잘 주무셨나요?" "앤소니, 벌써 10시가 넘었나?" "아닙니다. 오늘은 제가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들어왔을 뿐입니다. 회장님." "오, 앤소니. 난 아침부터 좋은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메드닉은 앤소니를 무시하고 탁자 위로 손을 내밀어서 수프가 담긴 그릇을 열었다. 그리고 수저를 들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제가 방해가 되었다면 정말로 죄송합니다. 하지만 회장님께서 아침 식사를 어떻게 드시는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내가 아침 식사를 계속 남긴다고 그러는 모양인데, 이것을 좀 보게. 이렇게 잘 먹 고 있지 않나." "네, 정말 잘 드시는군요." 앤소니는 메드닉의 안락의자 옆에서 선 채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곳은 너무나 전 망이 좋은 장소였다. 나도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날 정도였다. 앤 소니는 갑자기 야릇한 충동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 얼마 남지 않았어. 나에게도 이런 곳에서 편히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올 거 야.' 앤소니는 해변에 펼쳐진 모래사장을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메드닉이 식사를 거의 마쳤을 때, 앤소니는 시선을 돌려서 메드닉을 바라보았다. 앤 소니는 늙어 버린 메드닉의 모습을 바라보자 갑자기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불쌍한 노인. 언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생명줄을 붙잡고 살아가려고 애 쓰고 있다니...' 앤소니는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물끄러미 메드닉을 응시했다. 아칸소 주립병원에서 근무하던 젊고 유능한 앤소니를 주치의로 추천한 사람은 바로 레베카였다. 레베카가 메드닉의 비서로 일하기 시작한 지 꼭 2년째 되던 어느 여름이었다. 앤소니는 레베카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의 매력에 온통 사로잡히고 말았다. 첫 만남에서부터 앤소니는 레베카의 미모와 지성에 매료되었고 그녀 특유의 능력에 반해 있었다. 메드닉의 주치의를 맡기 전부터 앤소니는 완전히 레베카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앤 소니는 이미 레베카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베카와 앤소니는 몇 년 전에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리던 날 처음 만났다. 그리고 며칠 후에 앤소니는 레베카의 집으 로 초대를 받았다. 앤소니가 집에 도착했을 때 레베카는 마침 샤워를 마친후였다. 방금 샤워를 마친 젊 은 여성의 촉촉하게 젖은 육체에서는 싱그러운 향기가 감돌았다. 지한 향기가 코를 자 극하자 앤소니는 거의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물에 젖은 레베카의 기다란 황금빛 머리 카락도 앤소니에게는 매우 환상적인 모습으로 보였다. "잘 오셨어요, 앤소니 박사님." 레베카는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지도 않은 채, 가까이 다가왔다. 레베카는 샤워를 마 친 후의 알몸을 커다란 타올로 감싸고 있었다. 앤소니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지만 레베카는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앤소니는 다알리아 꽃다발을 레베카에게 전해 주었다. 레베카의 향기는 다알리아 꽃 향기와 어우러지면서 앤소니를 완전히 취하게 만들어 버렸다. 레베카는 곧장 주방으로 들어가서 미리 준비해 놓았던 포도주를 들고 돌아왔다. 앤 소니는 포도주를 들고 걸어오는 레베카의 풍만한 몸매를 보면서 마른 침을 꿀꺽 삼켰 다. "자, 앤소니. 우리의 사업과 미래를 위하여..." 앤소니는 레베카가 따라 준 포도주를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러자 곧 짙게 깔린 재 즈의 선율이 거실 전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재즈는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에 가 로놓여 있었던 어색함을 모두 앗아가 버렸다. 레베카는 뜨거운 숨길을 내뿜으면서 앤소니의 목에 한 쪽 팔을 감았다. 앤소니도 레 베카의 허리를 어루만졌다. 두 사람은 이제 하나의 몸이 되기 위한 준비에 들어서고 있었다. 재즈의 음색이 조금씩 장중한 저음에서 고음으로 올라가자, 두 사람이 느끼는 흥분도 점점 더 고조되고 있었다. "제가 왜 박사님을 초대했는지 아세요?" 서로의 몸을 구석구석 탐닉하고 있을 때, 레베카가 앤소니의 귓볼에 대고 작은 목소 리로 속삭였다.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매우 중요한 일이겠지요." "저는 매우 중대한 사업을 계획하고 있어요." "그게 뭐죠?" 앤소니는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레베카는 잠시 뜸을 들이면서 점점 더 가 까이 앤소니의 귓볼에 입술을 가져갔다. 레베카는 앤소니의 귓볼을 가볍게 깨물면서 입맞춤을 한 뒤에 대답했다. "박사님의 경력이 제 마음에 꼭 들었어요." "무슨 말이죠?" 레베카는 대답을 하는 대신에 앤소니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대었다. 앤소니는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언제든지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제가 모두 해 드리겠어요." 레베카가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신선한 풀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레베카의 향기가 앤소니를 더욱 자극했다. 레베카는 더욱 적극적으로 앤소니를 애무했다. 앤소니의 손이 레베카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러자 그녀의 허리는 활처럼 휘어졌 다. 레베카는 앤소니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 해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레베카의 몸을 감싸고 있던 타올이 벗겨지면서 풍만한 육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앤소니는 자 기 앞에 서 있는 여자가 천사라고 생각했다. 셔츠를 벗는 동안 앤소니는 자기 앞에 드러난 아름다운 레베카의 육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앤소니의 상체가 드러나자 레베카는 자신의 가슴을 그이 상체에 밀착시켰다. '제 침실을 구경하고 싶지 않으세요?' 레베카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앤소니는 레베카를 번쩍 안아들었다. 그리 고 가볍게 키스를 주고받으면서 레베카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앤소니의 몸이 안긴 레베카가 방문을 열자 화려한 색깔의 불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왔 다. 레베카의 침실에는 수많은 색깔의 촛불들이 은은하게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레베카의 침대는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앤소니는 파란색 시트가 깔린 침대 위 에 레베카를 내려 놓았다. 그러자 레베카는 앤소니의 허리띠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레베카의 입술이 목덜미에서부터 가슴을 타고 아랫부분까지 내려오는 동안 앤소니는 마치 시간이 영원히 정지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남성을 부드럽게 마사지하던 레베카는 앤소니를 침대 위에 눕혔다. 레베카의 입술이 앤소니의 몸 위를 움직이면서 재즈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변주곡을 연주하듯이 이곳 저곳을 움직이고 있던 레베카의 입술이 앤소니로 하여금 순간순간 흥분을 감추지 못하 는 탄성을 질러대도록 만들었다. 레베카는 그 약한 음악들이 더욱 고조될 수 있도록 점점 더 깊이 구석구석을 애무했 다. 앤소니는 포로가 되어 버린 아테네의 전사처럼 레베카의 입술에 자신의 몸을 완전 히 내 맡기고 있었다. 레베카의 입술이 자신의 온몸을 부드럽게 애무하고 있는 동안 앤소니는 점점 더 깊 게 비음을 토해냈다. 앤소니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상태에 이르자 레베카는 애무 를 멈추고 앤소니의 상체를 약간 일으켰다. 앤소니는 레베카의 아름다운 육체를 마음 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앤소니는 레베카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그녀의 육체를 애무 하기 시작했다. 남자의 입김이 부드럽게 가슴을 자극하자 이미 한껏 흥분해 있던 레베카가 탄성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앤소니의 입술은 목덜미에서 풍만한 유방을 향해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다. 레베카의 유두가 곧게 일어서면서 앤소니의 입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앤소 니가 입술로 유두를 애무하자 레베카의 허리가 점점 더 활처럼 휘면서 독특한 비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앤소니, 이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 레베카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앤소니의 머리를 두 손으로 힘껏 끌어 당겼다. 두 사람은 깊은 키스를 나누면서 한몸이 되었다. 앤소니의 허리가 레베카를 향해 깊고 부 드럽게 다가가자 레베카는 그의 허리를 더욱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앤소니의 허리 움직임이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육체는 온통 뜨거운 열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앤소니는 사정을 늦추기 위해 허리의 움직임을 적절히 조절 하면서 체위를 바꾸었다. 레베카의 눈빛은 거의 환상적이 경험을 하듯이 부드럽게 움 직이는 앤소니의 허리 움직임에 맞추어 초점이 흔들리고 있었다. 절정에 달할 무렵 앤소니의 하체 위로 말을 타듯이 올라가 레베카는 능숙한 히프의 움직임으로 깊게 밀려 올라오는 앤소니의 남성을 좌우로 흔들면서 자극했다. 앤소니의 남성위에서 더욱 격정적인 비음을 토해내던 레베카의 육체가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길고 빛나는 금발의 머리카락이 춤을 추듯이 흔들렸다. 두 사람은 거의 똑같이 절정에 도달했다. 절정의 순간 온몸에 힘이 빠져나간 레베카 는 앤소니의 몸 위로 늘어졌다. 레베카는 앤소니의 가슴 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지면서 뜨거운 키스를 보냈다. 두 사람은 너무나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관계를 마친 두 사람은 함께 욕실로 들어가서 샤워했다. 마치 단 한번의 사람으로 깊은 연인 관계가 된 듯한 느낌을 가지 고 서로의 몸을 닦아 주었다. 앤소니는 그 당시의 추억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에 나누었던 레베카와의 대화도 역시 잊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앤소니는 레베카에게 더욱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베카는 어쩐 일인지 점점 앤소니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앤소니 는 더욱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앤소니의 간절함이 절정에 달할 무렵에야 레 베카는 마치 어린 아이를 달래듯이 그의 소원을 하나씩 들어 주었다. 물론 뜨거운 정 사와 함께... 앤소니는 매일 밤마다 레베카와 함께 있기를 원했다. 앤소니는 서서히 레베카의 포 로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앤소니가 자신에게 완전히 빠져 버린 사실을 확인한 후 에 레베카는 자신의 계획 속에 그를 포함시키기 시작했다. 앤소니는 레베카의 품에서 도저히 탈출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는 레베카의 음모 속으로 너무 깊이 개입하게 되었다. 앤소니는 이미 레베카의 분 신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앤소니." 메드닉이 그릇을 내려 놓으면서 앤소니를 불렀다.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나?" 한참 동안이나 레베카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던 앤소니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메드닉 이 말했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앤소니가 머리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내가 환자가 아니라 마치 자네가 환자인 것 같군." "벌써 음식을 다 드셨군요. 오늘은 기분이 무척 좋으신 것 같습니다, 회장님." 앤소니는 미소를 지으며 가방 속에서 청진기를 꺼냈다. 메드닉은 라디오를 끄고 나 서 입을 열었다. "나야 언제나 기분이 좋지. 자네가 이렇게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야. 자네는 병원 의 늙은 간호사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어. 기분이 좋다가도 그 여자들이 와서 주사 한 번만 놓고 가면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거든." 메드닉은 앤소니의 청진기를 쳐다보면서 못마땅한 기분을 노골적으로 밝혔다. "이런 건 보기도 싫으니까 당장 치워 버리는 게 좋겠어." 앤소니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회장님, 맥박을 측정하기 위해서 청진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 잖아요." "맥박은 무엇 때문에? 어제도 재어 보았잖아. 도대체 나에게서 뭘 알아내려는 거 야?" "그야 건강 상태죠. 그게 제가 하는 일이니까요." 앤소니가 다시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하지만 메드닉은 특유의 고집스러운 노인의 표정을 지으면서 앤소니를 쳐다보았다. "잘 들어, 앤소니.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 고 난 침실에서 여기까지 산책한 게 고작이야. 그게 전부라구. 그게 그렇게 스트레스 를 받을 만한 일인가? 맥박까지 재어야 하는 일이냐구?" "그게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뭐야?" 메드닉의 목소리가 마치 화가 난 것처럼 약간 높아졌다. 앤소니는 메드닉을 바라보 면서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 "알고 계시겠지만 회장님께서는 지금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으십니다. 의사인 저 로서는 환자를 돌보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시잖습니까?" 하지만 메드닉은 고집을 꺾지 않고 앤소니를 노려보았다. 앤소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청진기를 가방 속에 집어넣고 나서 주사를 준비했다. 앤소니가 주사기 를 꺼내자 메드닉도 이 정도의 승리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조용히 소매를 걷어올렸다. 아무리 고집이 센 메드닉이었지만 건강의 문제에 관해서는 의사의 말을 듣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환자는 의사의 말에 따라야 한다는 것은 천하의 메드닉에 게도 어절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이건 무슨 주사지?" "일종의 영양제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피를 맑게 해 주는 주사라고 할 수 있죠." 메드닉은 앤소니가 자신의 팔에 주사를 놓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주사기로부터 누런 액체가 반짝거리는 금속성 바늘을 타고 그이 혈관으로 흘러 들어갔다. 메드닉은 점차 약기운이 퍼지면서 갑자기 기분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메드닉은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앤소니가 투여하는 주사약의 성분이 어떤 것인지 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주사를 맞고 나면 금방 기분이 나 른해 진다는 사실 그리고 온몸에 힘이 쭉 빠져 버린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었다. 그리 고 언제나 주사를 맞고 나면 한동안 깊은 잠에 빠졌다가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깨어났 다. 그렇게 잠에서 깨어나면 신기하게도 마치 청춘을 되찾기라도 한 것처럼 활기가 생겼 다. 메드닉은 그런 활기를 느끼기 위해서 주사 맞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반복되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바하마를 향해 날아가는 비행기가 거대한 구름 사이를 뚫고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 지만 비행기는 수줍은 듯이 이내 다시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하늘 위에서 생기는 기 류의 변화 때문에 가끔씩 비행기의 기체가 좌우로 흔들렸다. 그럴 때마다 기내의 승무 원들은 승객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기내 방송을 했고 승객들은 갑자기 놀란 표정에서 이내 곧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바하마로 향하는 보잉 747기에는 수백 명의 승객들이 저마다 휴가를 보내기 위해 가 족이나 연인들과 함께 탑승해 있었다. 로라 해리슨은 비행기의 창가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바라본 광경은 온통 하얀 구름층뿐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의 긴장감과 착륙할 때의 경이로운 광경을 제외한다면 비행기 여행의 오랜 고단함은 바로 여기에서 오는 것이다. 오랫동안 똑같은 광경이 계속되자 로라는 지루함을 느꼈는지 창밖을 바라보는 것을 그만두고 주변으로 시선을 옮겼다. 비행기를 타고 있는 승객들의 표정은 매우 밝아 보 였다. 가족 단위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 간혹 바하마의 원주민으로 보이는 황갈색 피부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승객들은 바하마의 해변으로 휴가를 떠나는 관광객들이었다. 그 사 람들은 모두가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관광객들은 서로 즐거운 듯 이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다정하게 속삭이는 연인들과 여행이 피곤한지 잠에 빠져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기내의 통로에는 젊은 여승무원들이 쉴새 없이 오가면서 승객들의 시중을 들고 있었 다. 로라는 그런 모습들이 너무도 정다운 것처럼 보였다. 날마다 학점과 경쟁에 시달 리던 생활에서 정말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 번은 어떤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더니 그칠 줄 모르고 계속 울어대었다. 아이의 엄마처럼 보이는 여자가 달래 보기도 하고 안고 일어나 기내를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그 아이는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그런데 여승무원이 장난감을 갖다 주자 어린아이는 언제 울었느냐는 듯이 울음을 그 쳤다. 그 아이의 부모는 매우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했고 승무원은 괜찮다고 하 면서 더 필요한 장난감이 있으면 부탁하라고 대답했다. 매사에 호기심이 많아서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던 로라는 그동안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을 발견했다. 비행기의 승객들 대부분은 휴가 때문인지 두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이 함께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로라의 바로 옆좌석에 앉아 있는 검은 머리 카락의 건장한 남자는 로라처럼 혼자서 여행하는 것 같았다. 그는 휴가를 즐기는 관광객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한시간 동안이나 계속 <뉴욕 타 임즈>의 기사를 읽고 있었다. 때마침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던 로라는 그 남자를 자세 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검은색 곱슬머리에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1미터 80정도의 키를 한 강인한 근육질 의 잘 생긴 남자였다. 그 남자는 무더운 여름날에도 정장을 하고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매고 있었다. 윤이 반질거리는 갈색 구두는 잘 손질되어 있었다. 로라 해리슨은 고개를 창문으로 돌리면서도 그 남자가 눈치를 채지 않도록 조심하면 서 계속 관찰했다. 그러면서 이 남자에 대한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리기 위해 노력했 다. '아마도 이 사람은 어떤 사업을 하고 있을 거야. 사업차 바하마에 가는 게 틀림없 어.' 로라는 먼저 그 남자가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업가가 아니라 회사의 업무 때문에 출장을 가는 샐러리맨이라면 바하마로 날아가면서 휴양객이 된 기분을 느 끼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아마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소매를 걷어올린 채 구 두를 아무렇게나 벗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옆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처럼 정장을 깨끗하게 차려 입은 모습에 넥타이를 목까지 올려맨 모습은 평소에 그런 옷차림을 하면서 적응이 되지 않았으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사람은 일단 사업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렇지 않다면 굳이 옷을 그렇게 차려 입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정장을 차려 입은 것은 바하마의 날씨를 고려할 때 매우 답답해 보일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이 사람은 기내에서 누군가를 상사로 두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 기 때문에 직장 상사에 대한 예의로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 입고 있어야 하는 처지인지 도 모른다. 로라가 그 남자의 직업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상상하고 있는 동안, 그 남자는 열심히 읽던 <뉴욕 타임즈>를 덮었다. 그리고 상의를 벗어 좌석의 옷걸이에 걸어 놓고는 자 리에서 일어나더니 통로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로라는 고개를 돌려서 잠시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뒷모습은 옆에서 보던 모습과는 달리 더 멋있어 보였다. 그가 통로를 따라 걸어가자 승무원이 와서 뭐 라고 말을 걸었다. 그 남자는 뭔가를 묻는 듯했고 그러자 승무원은 친절하게 웃으면서 통로의 끝 쪽을 가리켰다. 그 남자는 정중하게 승무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통로 끝을 향해 걸어갔다. 잠시 후에 그 남자가 통로 끝으로 사라지자 로라는 갑자기 호기심이 생겨났다. 그녀 는 옆에 걸어 놓은 그의 양복 윗도리에 대한 호기심을 억제할 수 없었다. 로라는 조심 스럽게 주위를 살펴보았다. 다른 승객들은 저마다의 일에 바쁜 듯이 로라의 행동에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로라는 슬며시 좌석에 걸려 있는 양복 상의에 손을 가져갔다. 로라의 손이 상의를 슬쩍 젖혔을 때 양복의 안주머니 위에는 그 남자의 이름으로 보이는 글자가 새겨져 있 었다. "다니엘 블레이크." 로라는 낮은 목소리로 다니엘 블레이크라고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어디에서 많이 들 어 본 듯한 이름이었다. 다니엘 블레이크. 어쩐지 결코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이름이 었다. 로라는 왜 그 이름이 그렇게 낯설지 않은가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 이유 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로라는 계속 그 이름을 중얼거려 보았지만 점점 더 알 수 없는 기억이 머리 속에서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로라의 눈에 조금 전 그 남자가 보고 있던 <뉴욕 타임즈>가 보였다. 로라 는 그 잡지를 집어들고 아까 그 남자가 보았던 경제면의 기사를 펼쳤다. 그곳에는 '다 니엘이 이끄는 블레이크 그룹'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와 있었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로라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바로 자신의 옆자리에 안장 있던 사람이 바로 유능하기로 소문난 재계의 거물 다니엘 블레이크였던 것이다. 비로소 로라의 머리 속에서 맴돌던 기억이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 기억 속에 서 다니엘 블레이크는 경제계에서 매우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일 뿐만 아니라 거의 신화 적인 인물로 기록되어 있었다. 하버드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로라는 다 니엘의 성공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사람을 바로 옆자리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놀라움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비슷한 사람일 수도 있었다. 로라는 자기 옆자리에 앉아 있던 그 남자의 얼 굴을 정면에서 바라본 적이 없었다. 옆모습만 본 것을 가지고 그가 재계의 거물 다니 엘 블레이크라고 단정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 이른 판단인지도 몰랐다. 호기심이 많은 로라는 어쨌든 그 사람의 진정한 정체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 사 람이 올 때까지 약간 긴장된 상태로 재미있는 생각을 하면서... 바하마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무슨 일을 할 것인가? 로라는 곧바로 아미보셤 호텔 로 향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을 둘려보고 갈 것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로라는 일단 바하마에 도착하면 호텔로 향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자신의 추억이 깃들 어 있던 곳을 먼저 방문하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세운 다음에 할아버지가 계신 호텔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앞으로 계속 바하마에 머물면서 할아버지의 사업을 배우며 지낼 생각을 하니 로라의 가슴은 점점 더 벅차 오르면서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유일한 혈육 메드닉 할 아버지의 곁으로 돌아간다는 것과 드디어 자신이 호텔 사업을 이어받을 수 있게 되었 다는 것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아주 경이롭기만 했다. 로라는 가방에서 꺼낸 작은 손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벌써 이렇 게 나이를 먹은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할아버지는 항상 로라에게 이런 말을 했었 다. "네 안에는 항상 너를 지켜 주는 그 무엇이 있단다. 그것은 바로 너 자신이지. 스 스로를 긍정하면서 낙관적인 자세로 모든 일을 처리하거라. 그게 바로 너의 모습이 다." 로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지금까지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도 그녀는 줄곧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품고 지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말대로 항 상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낙관적이고 낙천적으로 생활하려고 노력했다. 로라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동안 드디어 옆자리에 앉았던 남자가 다시 돌아왔다. 그 순간에도 생각에 빠져 있던 로라는 그 남자가 돌아온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로라는 계속 창쪽을 바라보면서 앞으로의 바하마 생활에 대해 희망적인 생각 들을 품고 있었다.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이름의 그 남자는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다시 <뉴욕타 임즈>를 펼쳐 들었다. 로라는 인기척을 느끼면서 그 남자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달 았다. 로라는 용기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만이 옆자리에 앉은 남자의 얼굴을 정면에 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다. 로라는 할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중국제 옥구슬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실수로 흘린 것처럼 그 옥구슬을 옆자리에 앉아있는 남자의 발 밑으로 떨어뜨렸다. 다니엘은 자신의 구두에 부딪힌 다음 통로 쪽으로 굴러가는 옥구슬을 재빠른 동작으 로 잡았다. 대단히 순발력이 빠른 행동이었다. "이 옥구슬은 용의 여의주로군요." 그 남자의 안목은 정확했다. 그 구슬에 대해 아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가 용의 여의주를 손에 들고 로라를 바라보았다. 그이 얼굴이 정면으로 들어왔다. 로라는 그 남자를 향해 약간은 수줍은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로라를 바라보면서 옥구슬을 전해 주던 다니엘은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으면 서 밝은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서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에 다니엘과 로라는 약간 수줍은 듯한 기색으로 원래의 자세로 돌아갔다. 다 니엘은 다시 잡지를 펼쳐 들었고 로라는 창문으로 고개를 돌려서 구름을 바라보았다. 로라는 블레이크 그룹의 총수 다니엘과 이 남자의 얼굴이 닮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가 정말로 블레이크 그룹의 총수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보다 로라 해리슨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옆자리의 나자가 누구이든 간 에 생각했던 것보다 미남이었으며 예절 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로라는 그 남자의 민첩한 행동과 부드러운 미소에서 풍겨나오는 여유가 마음에 들었다. 바하마와 관계된 자신의 사업에 대해 구상하면서 줄곧 잡지를 읽고 있었던 다니엘은 로라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아주 좋은 느낌을 받았다. 특히 그녀가 보기 드문 미인이라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그녀의 모습에서는 어쩐지 지적인 향기가 풍기고 있 었다. 다니엘은 갑자기 옆자리의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자신에 대해 매우 놀랐다. 다 니엘은 사실 지금까지 여자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니엘이 독신주의자인 것은 아니었다. 금욕주의자는 더더욱 아니었 다. 수많은 여성들이 그의 매력에 이끌려 청혼을 해 오기도 했지만 결혼에 대해 한 번 이라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직까지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던 것 이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옆자리에 앉은 여자의 모습이 다니엘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니엘의 입장에서는 놀라운 변화였다. "무슨 재미있는 기사라도 있나요?" 로라가 먼저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다니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뉴욕 타임즈>를 덮으면서 로라를 바라보았다. "지난 16년 동안 스물세 명의 사람을 살해한 사람이 있군요." 다니엘의 말에 로라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굉장한 살인마로군요.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죠?" "꼭 그렇게 살인마라고까지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살인의 충동과 파 괴의 속성을 지니고 살아가니까요." 다니엘은 살인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했다. 그 대답이 너무나 태연했기 때문에 로라는 다니엘의 말을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건 무슨 말이죠?" "그 사람은 이 사회에서 대학 교육을 마친 인텔리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런 의미에서 그 사람이 범행을 저지른 수법도 또한 매우 지능적이었지요." "대학가지 졸업한 지능적인 살인자라고 해서 살인마가 아니라는 건가요?" 로라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경우에는 살인마라고 부르기보다는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것이 올바를 것 같 군요. 그는 지금 시골에 은거하면서 자신의 사상에 대해 집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리고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얼마 전에 그 사람이 <뉴욕 타임즈>에 보낸 편지가 여기 실려 있습니다. 그 편지에서 그는 자신이 살해한 사람들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반드시 죽어야 만 하는 이유를 밝혀 놓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밝힌 살인 행위에 대한 이유들 이 매우 논리적이고 타당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매우 논리적으로 자신의 살인 행 위가 정당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의 논리를 쉽게 깨뜨리지 는 못하고 있지요." 다니엘은 로라의 눈을 로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하고 있었다. 로라는 다니 엘의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로라의 머리 속으로 이 삶은 확실히 다른 사람 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다는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다니엘은 로라의 눈을 정면에서 똑 바로 응시하면서 매우 설득력 있게 그 살인자의 논리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살인은 살인이고 죄는 죄이며 타인의 목숨을 앗아간 행위는 반드시 그 대가를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보기에 그 사람은 너무 머 리가 똑똑해서 미쳐 버린 것 같군요. 그 사람은 자신을 변호하기 보다는 자신의 죄를 회피하려 하고 있어요." "글쎄요, 미친 사람은 그가 아닐지도 모르지요." "무슨 뜻이죠?" "우리는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미친 사람이고 그 사람 혼자만이 정상인 사람일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그럴 경우에 그를 단죄하는 것은 다수의 미친 사람들이 만들어낸 악법이 되겠지요." "그건 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군요." "우리가 이 사회에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와 각 개인들의 존재 가치는 과연 어디로부 터 오는 것일까요? 또 우리는 이 사회에서 악이라고 말하는 부분들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들은 왜 악이고 우리는 왜 선이 되는 걸까요? 한 번 생각 해 보세요. 독립기념일에 수소폭탄을 개발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발표하는 국가에 대 해 박수를 치는 사람들이 정상인으로 대우를 받는 시대가 지금이 아닌가요? 수많은 인 명을 앗아가게 될지도 모르는 폭탄의 제조를 저지하기 위해 어떤 사람을 죽여야 한다 면 거기에 대해 우리는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할까요?" 다니엘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로라는 일단 말문이 막혔다. 무엇인가 대답을 해야만 할 것 같은데 마땅히 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로라는 결국 화제 를 돌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가 보죠?" "아닙니다. 물론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긴 했지만 그것이 직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사업을 하고 있나요?" 로라는 일부러 모른 체하면서 물어 보았다. "뉴욕에 본사를 둔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참, 인사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다니엘이라고 합니다." 로라는 드디어 상대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로라는 반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 로라 해리슨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그런데 다니엘이라는 이름은 그다지 낯 설지 않군요. 혹시 <월 스트리트 저널>의 유명인사 동정란에 자주 등장하는 그 다니 엘 씨가 아닌가요?" "제가 유명인사라는 사실은 미처 몰랐습니다." 다니엘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로라의 표정에는 이 사람이 다 니엘 블레이크 총수가 분명하다는 확신이 엿보였다. "사실이군요. 만나게 되어서 정말 영광이에요. 다니엘씨." 정말로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사실을 확인한 로라는 이번에는 손을 내밀면서 악수를 청했다. 다니엘은 그녀의 손등에 가벼운 키스를 보냈다. "당신에 대한 평가는 정말로 굉장해요. 언제인가 기회가 닿으면 당신의 경영방식을 꼭 들어보고 싶어요." "당신처럼 아름다운 미인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어쩔줄을 모르겠군요. 기회가 닿 는다면 꼭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당신은 어디로 가세요?" "바하마의 롱 비치 해변으로 갑니다." "어머, 잘 되었군요. 저도 그쪽으로 가는 중이거든요. 그런데 바하마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거죠?" "사업상 일이 있어서 가는 길입니다. 그곳에는 과거에 저에게 무척 잘 대해 주던 친 구분이 호텔을 운영하고 계시죠. 그분을 만난 지도 무척 오래 되어서 찾아가는 겁니 다." "어떤 분이시죠?" "그분의 이름은 메드닉 해리슨이라고 합니다." 다니엘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로라는 다니엘의 입에서 메드닉 해리슨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마음 속으로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외면으로 드러 내지 않았다. "그렇군요. 저도 그분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메드닉 해리슨 씨는 세 계 도처에 유명한 호텔을 많이 소유하고 계시죠. 전 바하마에 있는 그분의 호텔에서 며칠동안 머무를 계획이에요." "당신은 휴가를 보내기 위해 바하마를 방문하는 거군요." 로라 해리슨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마침 잘 되었군요. 호텔에 도착하면 제가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군요. 어떠신지 요?" "정말 영광이겠어요." "아닙니다. 저도 이렇게 훌륭한 미인과 함께 여행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로라는 그 말을 듣고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잠시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로 라는 창밖을 내다 보면서 어떤 말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다시 다니엘을 향해 고개 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롬부스가 가장 먼저 첫발을 내딛은 곳이 바로 이곳 바하마였다 는 사실을 혹시 알고 계세요?" 로라의 질문에 다니엘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 당시에 그가 신고 있던 신발이 아마 나이키였다지요?"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로라는 다니엘의 재치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로라는 갑자기 그의 유머에 한 가지 말을 덧붙이고 싶었다. "그가 나이키를 신고 최고급 호텔에서 며칠 밤을 묵었다지요?" 두 사람은 또다시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미보셤과 같은 사람에게 물어 봐야 할 겁니다." 다니엘의 재치가 로라의 관심을 더욱 자극했다. "그 사람이 바하마에서 호텔업이라도 했었나 보죠?" "맞아요, 로라. 그 사람이 바로 바하마에 처음으로 호텔을 지은 사람이에요." 다니엘은 역사적인 사실을 밝히기라도 하듯이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라구요? 아미보셤이 말인가요?" "그렇다니까요." "다니엘 씨, 뭔가를 잘못 알고 계신 거 아니에요? 그 사람은 책에 등장하는 해적인 걸요?" 로라의 말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래요,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하마에 처음으로 호텔을 지은 사람이에 요. 바로 그 해적이 말입니다." "어머나, 세상에!" 로라는 매우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니엘은 아미보셤 호텔의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로라, 그런 상식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당신이 나에게 배워야 할 겁니다. 어 때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다니엘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로라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다니엘 씨. 그리고 그 아미보셤이 지은 호텔보다 더 훌륭한 호텔은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지을 수 없을 거에요." "혹시 그 호텔이 지어진 이유를 알고 있나요? 아미보셤은 사랑하는 연인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그 호텔을 지었어요. 그건 아주 낭만적인 이야기입니다. 아미보셤은 세계 를 통틀어서 나 다음으로 멋을 아는 남자일 겁니다." 다니엘이 가슴을 펴면서 말했다. "그래요. 제 생각에도 아미보셤은 아직까지도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 다음으로 아름다웠던 그녀를 말이에요." 로라 해리슨이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라의 재치있는 언변에 다니엘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다니엘은 그런 식으 로 한층 높은 유머를 구사하는 로라가 무척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귀여운 소녀를 만나고 있는 것처럼, 로라를 바라보고 있으면 다정하고 따스한 감정이 저절로 솟아났 다. 무엇보다도 다니엘의 가슴을 뛰게 만든 것은 로라로부터 풍겨나오는 향기였다. 로라 에게는 세상에서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그녀만의 독특한 체취가 풍겼다. 잠시 동안의 대화 속에서 다니엘은 로라가 매우 지적이고 냉철하면서도 따스한 마음 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하마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화려한 외모에 내 적인 면모까지 갖추고 있는 여자를 만난 것은 어쩌면 커다란 행운이라는 생각이 다니 엘의 머리를 스치면서 지나갔다. 비행기는 잠시 후에 바하마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바하마 인근 의 해변은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모래사장 위로 수 영복 차림의 사람들이 바다를 거닐고 있었다. 그 뒤로는 울창한 열대림이 우거져 있었 다. 제 3 장 바하마 바하마의 국제공항은 수많은 비행기들로 붐비고 있었다. 로라와 다니엘은 착륙을 알 리는 기내 방송을 들으면서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친절하기로 유명한 항공사 소속의 스튜어디스들이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여기 저기에서 바 하마의 해변 광경을 지켜보던 승객들이 탄성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로라 양은 어느 호텔에서 묵을 계획입니까?" 다니엘이 로라를 쳐다보면서 물어 보았다. "글쎄요. 아직은 호텔을 예약해 놓지 않았군요. 그 대신 선착장 부근에 제가 잘 알 고 있는 분이 계세요. 저는 일단 그분을 만나러 가야 할 것 같군요." 로라는 아직까지 다니엘에게 자신의 신분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나 쉽게 자신의 신분을 알려 주는 것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니엘 씨는 호텔을 예약해 놓으셨겠네요?" "네, 저는 아미보셤 호텔로 갈 겁니다." "그래요? 아미보셤 호텔은 요리가 아주 맛있다고들 하는데..." "물론이죠. 특히 그 호텔의 스페셜 코스는 세계 어느 나라의 호텔 요리보다 훌륭하 지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그건 나중에 알게 되실 거예요." 비행기가 공항의 활주로를 향해 하강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바퀴가 활주로의 노면에 닿으면서 비행기의 속력이 줄어 들었다. 안전벨트를 풀고 먼저 일등석의 손님들이 기 내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다니엘과 로라는 다른 승객들과 함께 출입구를 향해 나갔다. "안녕히 가십시오." 스튜어디스가 매우 다정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공기가 아주 좋군요, 로라 양." "이곳의 공기는 아마 달나라에서도 수입해 갈 정도일 걸요?" 두 사람은 활짝 웃으면서 바하마의 공항 통로를 따라 걸어갔다. 공항에서 짐을 찾는 동안 두 사람은 내내 함께 행동했다. 먼저 짐을 찾았던 로라가 전화를 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다니엘은 자신의 짐을 찾은 후에 공항 입구에서 로라가 돌아오기를 기 다렸다. "우린 여기에서 헤어져야겠군요." "여행 동안 즐거운 대화를 나누게 되어서 기뻐요." "이건 제 명함입니다. 명함 뒷면에 제가 기거할 호텔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습니다. 시간이 되면 한 번 찾아 주십시오." "대단히 감사합니다, 다니엘 씨." 그 사이에 택시가 다가와서 두 사람 앞에 정차했다. "제가 짐을 옮겨 드리지요." 다니엘은 친절하게도 로라의 짐을 택시 트렁크에 실어 주었다. 택시의 뒷좌석에 몸 을 실은 로라는 출발 직전의 택시를 세우고 창문을 열었다. "아미보셤 호텔은 아직도 변함없을 거예요." 다니엘 브레이크는 로라를 태운 택시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잠시 후에 다니엘은 프랭크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서둘러 공중전화가 있는 곳으로 걸 어갔다. 다니엘은 스탠포드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정치학을 전공한 그는 학위를 딴 이후에도 계속 공부에 뜻을 두고 있었으나 그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작은 건설회사 가 경기 부진으로 인해 부도를 낸 다음부터 사업에 뜻을 두고 진로를 바꾼 진취적인 청년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명석했던 다니엘을 대학 교수로 키울 작정이었 다. 그가 어렸을 때에는 가정 형편이 매우 좋은 편이어서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별다 른 무리없이 가정 교사를 두고 공부했다. 다니엘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 등을 직접 연주할 수 있도록 지도했고 특히 미술에도 재능을 나타내었던 어 린 다니엘에게 그림을 가르치기도 했었다. 건설회사의 부도를 막지 못해 지병을 앓던 아버지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나 자 다니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업 일선으로 뛰어들었다. 다니엘은 사업에 뛰어든 지 꼭 10년 만에 삼십대 초반의 나이로 성공한 최고 경영자의 그룹에 포함될 수 있었다. 다니엘이 이처럼 맨손으로 일어나 젊은 사업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의 낙 천적인 기질과 진취적인 성격 그리고 새로운 일에 대한 모험심이 무엇보다도 크게 작 용한 덕분이었다. 다니엘은 사업에 있어서 특히 위험성과 수익성이 정비례한다는 사실 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문제들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반드시 성공을 거두어 내 는 승부사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다니엘은 가장 먼저 쓰러져 가는 작은 컴퓨터 회사를 인수하면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아이디어 관리와 창조적인 소프트웨어 개발 능력이 고갈된 컴퓨터회사를 싼값에 인수해서 기업의 획기적인 운영관리 소프트웨어 개발에 착수했다. 프로그램 사업은 작은 자본으로 커다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분야였기 때문에 젊은 다니엘에게 대단히 매력적인 일로 다가왔다. 특히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것은 마치 예 술가가 작품을 창작해내는 것처럼 애정과 노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그가 기획한 운 영관리 소프트웨어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니엘이 경영하는 블레이크 소 프트사는 착실히 성공의 가두를 달리기 시작했다. 블레이크 소프트사의 사업이 정상궤도에 올라선 다음부터 점점 가속도가 생겨나자 다니엘은 다시 경영난에 빠져있던 굴지의 건설회사를 인수함으로써 급성장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 당시에 건설회사를 인수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전반적인 불경기의 여파로 인해 건설회사의 경영 상태는 급속히 악화되고 있었으며 산더미처럼 쌓인 자재의 재고부담도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그 기업을 인수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니엘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건설회사를 인수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것은 매우 모험적이고 위험한 일이었지만 다니엘은 특유의 뛰어난 감각과 지도력 으로 경영난을 해소하고 미국의 50대 재벌 그룹의 하나로 자신의 기업을 성장시키는 일에 성공할 수 있었다. 블레이크 그룹의 최고 경영자 다니엘은 이미 젊고 유능한 사업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도 저명인사 대우를 받고 있었던 그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룹의 최고 경영자답지 않게 정직하고 검소한 생활을 해 나갔다. 그것은 모두 어려서부터 몸에 익힌 다니엘의 성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그 렇기 때문에 출장을 다닐 때에도 혼자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다. 수십 명의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여행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다니엘은 특히 정의심이 강하고 모험과 낭만을 즐기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자신의 주변에서 발생하는 각종 사건에 대해서도 외부의 힘을 빌리지않고 직접 처리하는 성격 의 소유자였다. 다니엘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그가 가족처럼 여기는 사람이 있었다. 다니엘 의 비서로서 그의 개인적인 일뿐만 아니라 사업에 관련된 일까지 모든 잡다한 업무를 도맡아서 처리하고 있는 프랭크는 다니엘보다는 열 살 가량 나이가 많았지만 언제나 진심으로 젊은 다니엘을 존경하고 있었다. 프랭크는 다니엘과 관계된 일이라면 목숨까 지 걸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프랭크의 출신은 전직 경찰이었다. 그러나 성격이 워낙 강직했기 때문에 경찰 조직 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사설 탐정이 된 인물이었다. 그런 프랭크가 다니엘과 인연을 가질 수 있었던 계기는 그가 어떤 살인 사건을 수사하던 중에 생긴 일 때문이었다. 오래 전에 다니엘의 친구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그 사건을 담당 하게 된 프랭크는 다니엘을 만나서 죽은 친구에 대한 주변의 생활을 조사하던 중 그의 추리력이 자가보다 더욱 뛰어나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프랭크는 다니엘이 뛰어난 두뇌로 사건을 해결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다니엘도 역시 일을 처리하는 프랭크의 태도와 용기를 보면서 호감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계 기로 해서 두 사람은 매우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그 이후로 프랭크는 다니엘의 비서 로서 가족처럼 생활하면서 여러 가지 모험을 함께 겪어 오는 인생의 동반자가 된 것이 다. 프랭크는 카드로 점을 치고 있다가 다니엘의 전화를 받았다. 카드로 점치는 것은 그 가 탐정 생활을 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버릇이었다. 카드가 운명을 좌우하는 건 아니 었지만 프랭크는 카드의 점괘를 통해 나타나는 자신의 느낌을 하나의 지표로써 중요하 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프랭크는 계속 카드를 넘기면서 다니엘의 말을 듣고 있었다. "미안해요, 프랭크. 나 혼자만 바하마의 해변을 즐기게 되어서 말이에요. 그 동안 나에게 특별한 연락이라도 온 것이 있나요?" 프랭크는 잠시 동안 메모철을 뒤적거린 후에 수화기에 입을 대고 말하기 시작했다. "미국 무역협회의 마이클 이사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었습니다. 다음 주일에 있을 정 기 세미나에 참석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리차드 상원의원이 전화를 했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말하지 않았지만 내 예감으로는 매우 중요한 일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뭐, 다른 것들은 특별한 게 없군요. 다니엘, 그런데 갑자기 바하마에는 무슨 일 로 간거죠?" 프랭크는 블레이크 그룹의 총수 다니엘에게 회장님이라는 경칭을 쓰지 않았다. 프랭 크와 다니엘은 서로의 이름을 부를 만큼이나 매우 친근한 사이였던 것이다. "이번에 바하마에 가면 리조트 건설 계획에 대해 구상을 해 보려고 해요. 그곳에서 며칠 동안 지내면서 지리를 익히고 가능하면 사업계획서를 작성할 생각입니다." "다니엘, 바하마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그런 건 걱정하지 말아요, 프랭크. 바하마에는 내가 과거에 신세를 졌던 분이 있어 요. 메드닉 해리슨 싸가 호텔을 운영하고 있지요. 아미보셤 호텔에 도착하면 그분과 만나서 투자에 관한 이야기도 좀 나눌 생각이구요. 그런데 당신을 지금 뭘 하고 있었 죠?" 다니엘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프랭크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손에 든 카드를 펼쳤다. 탁자 위에 놓인 카드를 보는 순간 프랭크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카드 점괘가 아 주 나빴던 것이다. "카드 점을 치고 있었어요." "오, 그래요? 점괘가 어떤가요?" "음, 별로 좋지는 않군요. 그리고..." 프랭크는 서둘러 카드를 정리하면서 다니엘의 이번 여행이 결코 순조롭지 않을 거라 는 예감을 하고 있었다. 프랭크는 잠시 동안 망설였다. '이 사실을 다니엘에게 말해야 할 건가? 아니야. 다니엘은 그런 걸 믿지 않아. 나 의 충고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을 게 분명해.' 이런 생각을 하던 프랭크는 다시 입을 열었다. "메드닉 해리슨 씨에 대해 이제 생각이 나는군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세상에 모습 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 대략 4년전부터 인 것 같군요. 내 생각이 맞는다면 아마 그럴 겁니다. 그렇죠, 다니엘? 나도 그 사람을 꼭 한 번 만나보고 싶군요." "그래요. 나중에 당신도 메드닉 해리슨 씨를 만나볼 기회가 있을 거예요. 우리가 이번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면... 그때는 프랭크, 당신도 바하마에 올 수 있을 거예요."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요. 고마워요." 다니엘은 전화를 끊고 나서 잠시 기계를 들여다보았다. 시차를 계산해 본 후에 다니 엘은 다시 워싱턴으로 전화를 걸었다. 몇 차례 신호음이 들린 후에 누군가 전화를 받 았다. "안녕하세요, 리차드 상원의원 집무실입니다." 수화기를 통해 부드러운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니엘은 정중한 목소리 로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라고 합니다. 의원님께서 나에게 전화를 부탁 한다는 메시지를 남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의원님이 지금 그곳에 계신다면 통화를 하고 싶군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곧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수화기를 통해 잠시 동안 음악소리가 들렸다. 다니엘은 그 음악이 매우 사무적인 리 듬으로 들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에 곧바로 리차드 상원의원의 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리차드 상원의원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의원님.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오, 다니엘! 그동안 안녕하셨소. 프랭크로부터 당신이 바하마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 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바하마에는 무슨 일로..." "사업 때문에 가는 중입니다." 다니엘은 리차드의 다음 말을 기다리면서 오른손으로 들고 있던 수화기를 왼손으로 바꾸어 들었다. "아, 그래요? 잘 되었군요. 나도 얼마 후에는 바하마로 가는데 그곳에서 당신을 만 나면 되겠구요. 그런데 당신은 메드닉 해리슨 씨에 대해서 잘 알고 있나요? 다니엘, 혹시 메드닉 해리슨 씨와 관계된 사업 때문에 바하마로 가는 건 아닌가요?" 리차드 상원의원이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다니엘은 사업에 관해서는 좀처럼 어느 누구에게도 잘 말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는 애써 그런 대화를 줄이고 싶어졌다. "해리슨 씨는 저도 몇 번밖에 만난 적이 없습니다, 의원님. 최근에 만난 것도 벌써 몇 년 전입니다. 그것도 보스턴에서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만났습니다." 다니엘이 정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짧은 시간에 재벌그룹으로 성장한 다니엘은 이미 상당한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으며 경제계뿐만 아니라 정치계의 거물들과도 친분이 두 터웠다.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 내가 사업상으로 메드닉 해리슨 씨에게 한 가 지 제안을 했습니다. 그분은 내 제안이 아주 훌륭하다면서 기꺼이 5만달러짜리 수표를 써 주더군요. 아직 그분에게 신세진 것을 갚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블레이크 그룹이 지금과 같이 급속도로 성장하기 이전의 일이었다. 메드닉 해리슨은 4년 전에 블레이크 그룹이 건축업계에 뛰어들 때 다니엘에게 아무런 담보도 없이 5만달러를 제공했다. 블레이크 그룹의 현재 형편으로 본다면 사실 5만달러 정도 는 아무것도 아닌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다니엘이 지금처럼 성공한 사업가 가 되기 이전이었다. "그래요, 이해할 수 있어요." 리차드는 메드닉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니엘의 말에 솔직히 공감을 나타내었다. 메드닉은 리차드 상원의원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리차드는 메드닉을 세간에 무수한 소문을 뿌리는 이색적인 인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의원님은 무슨일로 바하마에 오시는 거죠?" "나는 길버트 부부의 파티에 포대를 받았어요. 더구나 나는 이번 파티가 메드닉 해 리슨 씨가 운영하고 있는 아미보셤 호텔에서 열린다는 사실에 매우 큰 기대를 걸고 있 어요. 그래서 특별히 그 파티에 맞추어 모든 일정을 조절했어요. 나는 며칠 후에 그 곳에 도착하게 될 거예요. 난 당신이 국회에서 미국 건설산업에 대한 증언을 해 주기 를 바라고 있어요. 자세한 것은 나중에 만나서 이야기를 하도록 합시다." "알겠습니다. 의원님. 그럼 바하마에서 만나기로 하죠." 다니엘은 인사를 한 후에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그리고 짐을 들고 공항 입구를 향 해 걸어갔다. 잠시 후에 택시가 미끄러지듯이 다니엘 앞에 정차했다. 택시 기사는 다 니엘의 짐을 트렁크에 실은 후에 목적지를 물어 보았다. "손님, 어디까지 가십니까?" "아미보셤 호텔." 다니엘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다니엘을 태운 택시는 로라가 떠난 반대 방향으로 출 발했다. 택시 안에서 바라본 바하마 해변의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저녁 노을에 물 든 하늘이 세상 저편으로 잠들고 있었다. 택시가 달려가는 방향으로 푸른 수목들이 길 게늘어서 있었고 가슴 속까지 파고드는 시원한 바다 바람이 다니엘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있었다. 다니엘은 갑자기 로라의 모습을 떠올렸다. 로라의 아름다운 모습이 다니엘의 마음을 들뜨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미모와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 그리고 무엇보다도 잘룩하게 들어간 허리와 굳게 뻗은 늘씬한 다리가 그의 머리속에 떠올랐다. 다니엘은 로라의 존재가 무척 궁금했다. 하지만 다니엘은 로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 이 아무것도 없었다. 로라는 자기자신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단 지 이름이 로라 해리슨이라는 것 이외에는... 프랭크는 다니엘의 전화를 끊고 나서 다시 한 번 카드로 점을 쳐 보았다. 처음에 보 았던 점괘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프랭크는 다시 카드를 펼쳤던 것이다. 과거에는 아주 잘 나가는 경찰관이었고 훌륭한 탐정으로도 이름을 날렸던 프랭크는 자신의 경력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프랭크가 카드점을 보기 시작한 것 은 무척 오래 전의 일이었다. 15년 전에 사촌으로부터 카드점을 배운 이후 장난삼아 하던 것이 이제는 거의 일상 생활로 굳어지게 되었다. 프랭크는 경찰관 시절에도 매일 아침마다 카드점을 보고 그날의 기분을 추스르곤 했 다. 탐정 시절까지만 해도 아침 식사후에 줄곧 보았던 카드점이었지만 지금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오전이든 오후든 하루에 한두 번 정도 점을 쳤다. 프랭크는 또다시 무 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역시 카드 점괘가 아주 좋지 않게 나왔다. 두 번이 나 연속적으로 최악의 점괘가 나온 적은 별로 없었다. 과거에 그가 경찰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딱 한 번 그런 적이 있었다. 그날은 프랭 크에게 있어서 최악의 날이었다. 아침부터 반장에게 모욕적인 말을 들었을 뿐만 아니 라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총기를 오발하는 사고를 저질렀던 것이다. 그리고 다 잡았 던 범인도 눈 앞에서 놓쳐 버렸다. 그 이후로 이렇게 나쁜 카드점이 연속적으로 두 번 나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려고 이러는 거지?" 프랭크의 예감은 별로 틀려 본 적이 없었다. 프랭크는 그 순간 크게 울려대는 전화 벨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총소리를 듣고도 놀란 적이 없었던 프랭크였다. 하지만 그는 지금 총소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전화벨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던 것이다. "여보세요?" "프랭크? 자네 집에 있었군. 나 하베이야." 수화기를 통해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프랭크는 갑자기 낯익은 그 목소리가 어쩌면 매우 반갑지 않은 소식을 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가 웬일인가, 하베이? 이렇게 전화를 다하다니..." "어쩐지 자네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네, 프랭크. 그건 그렇고 오늘은 카드 점괘가 어 떤가?" "최악이야." 하베이는 프랭크이 기분이 카드점에 따라 변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베이 는 그러한 프랭크의 성격에 항상 잘 적응하는 스타일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베이는 프랭크에게 위로하는 투로 충고 한 마디를 던졌다. "그런 일에 너무 신경쓰지 말게. 자네가 옷을 벗던 날보다 더 나쁜 날은 아마 없을 테니까..."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를 한 거지?" "아주 중요한 일이 있네, 프랭크. 자네 곧바로 우리집으로 찾아와 줄 수 있겠나?" 하베이는 매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프랭크는 하베이에게 무슨 절박한 일이라도 생긴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의리가 강한 프랭크는 친구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언 제든지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중요한 일이라면 내가 가야 하겠지. 기다리고 있게." 프랭크는 전화를 끊고 나서 곧바로 외출할 준비를 했다. 문단속을 하고 나오던 중에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카드가 또다시 눈에 들어왔다. 프랭크는 다시 카드 중에 한 장을 뒤집어 넘겼다. 그 카드를 확인한 순간 프랭크는 가벼운 신음소리를 내었다. "이런!" 다이아몬드 4, 불길한 숫자가 튀어나온 것이다. 잠시 후에 프랭크는 검은색 세단에 몸을 실었다. 그는 불길한 생각을 떨쳐 버리기 위해 재빨리 자동차를 몰았다. 하지만 운전을 하면서도 자꾸만 마지막 카드가 떠올라서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잊어버려. 잊어야 한다구. 카드 점괘만 믿고 살다간 노이로제로 죽고 말겠군." 프랭크는 오늘의 점괘가 자꾸 마음에 걸렸지만 애써 그 사실을 잊으려고 고개를 흔 들었다. 그래도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평소에는 잘 듣 지도 않던 음악 채널로 주파수를 맞추어 놓고 볼륨을 크게 틀었다. 그리고 애써 신바 람이 난 사람처럼 자동차를 몰기 시작했다. 하베이는 앉아 있던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무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 서 커피포트로 다가갔다. 하베이는 약간의 커피를 컵에 따랐다. 그리고 뒤로 돌아서 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베이는 프랭크가 도착할 때까지 그렇게 서 있었다. 하베이는 프랭크가 경찰에서 일하고 있을 때 만난 친구였다. 그 당시에 하베이는 특 종 제조기라는 별명이 붙어다닐 정도로 훌륭한 기자였다. 하베이는 정경유착의 고리를 파헤친 특집 기사를 게재하면서 거물급 의원들과 재벌들을 무더기로 구속시킨 경력도 갖고 있었다. 특종에 대한 그의 감각은 대단히 날카로운 것이었다. 그는 아무리 사소 한 일이라도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다. 하베이는 비교적 작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연약해 보이는 약골처럼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하베이의 눈빛만큼은 매우 날카로웠기 때문에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최근에 그는 프리랜서로 일하면 서 각종 신문에 특종거리를 보도하고 있었다. 프랭크와 하베이가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은 처참한 살인사건 때문이었다. 하베이가 <뉴욕 타임즈>의 기자로 있을 때, 뉴욕 슬럼가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슬 럼가 19번 도로에서 자동차에 타고 있던 한 사람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사건의 특징이 있다면 자동차 차체에 하얀색 페인트로 '더러운 백인놈들'이라는 낙 서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 사건은 이후 아주 고질적인 흑인 탄압의 고리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 순찰을 돌고 있던 경찰관이 사건의 현장에 나타났다. 그런데 경찰이 사건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곳을 지나가던 흑인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은 우연히 사건 현 장에 있는 자동차를 보게 되었다. 호기심이 많은 소년은 자동차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 가섰다. 그러다가 소년이 발견한 것은 자동차 옆에 떨어져 있던 권총 한 자루였다. 흑인 소년이 자동차 옆에 떨어진 권총을 집어들었을 때, 경찰이 막 도착했던 것이다. 경찰은 그 흑인 소년이 권총을 들고 있는 모습을 정확히 목격했다. 곧바로 경찰들은 총을 꺼내들고 흑인 소년을 겨냥했다. 그 소년은 깜짝 놀라면서 반항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뜻으로 두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흑인 소년은 그 자리에서 현장범으로 검거되었다. 곧바로 경찰에 의해서 그 흑인 소 년에 대한 구속영장이 신청되었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한 지 정확히 이틀이 지난 후에 경찰은 그 사건을 인종분쟁에 의한 살인사건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경찰의 수사는 그것으로써 사실상 종결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흑인 소년이 백인 남자를 살해하다.' 모든 신문들이 경찰의 발표만을 믿고 그 사건을 특종으로 보도했다. 언론이 그 사건 을 크게 다루기 시작하자 뉴욕 시민들은 더욱더 인종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 어갔다. 그리하여 미국 전역에서는 거의 날마다 도처에서 흑백간의 유혈 충돌과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 그 당시에 프랭크는 사건 현장이 있던 곳의 관할 경찰관이었다. 프랭크는 그 살인 사건에서 몇 가지의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제기는 매번 상관으로부터 묵 살당했다. 프랭크는 흑인 소년이 현장에서 체포될 때 총을 만지고 있기는 했으나 그 자체가 현 장범이라고 과대 선전하는 것은 인권을 매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결정적으로 경찰이 제시하고 있는 증거가 총에 묻어 있는 흑인 소년의 지문이었다. 하지만 만약 소년이 총으로 누군가를 살해했다면 총에 묻어 있는 소년의 지문이 온통 페인트칠이 되어 있 는 차 내부나 차체에서는 왜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 커다란 의문이었다. 프랭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 흑인 소년은 학교에서 공부를 아주 잘하고 열심히 하는 우등생이었고 주변 사람들의 그 소년에 대한 평판도 아주 좋은 편이었다. 프랭크 가 직접 그 소년을 취조했을 때에도 그 흑인 소년은 착하고 순진한 일반적인 소년들과 똑같았다. 물론 취조 과정에서 상사의 개입 때문에 취조 담당자가 다른 사람으로 대체 되긴 했지만, 그 소년은 분명히 경찰의 발표와는 달리 불량한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않 았으며 마약을 하지도 않는 착실하고 순진한 아이였다. 프랭크는 몇 가지 사실을 들어 상부에 수사상의 이의를 제기했지만 검찰에서는 그러 한 사실들을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하베이가 프랭크를 찾아온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 다. 다른 모든 신문들은 그 사건을 인종 갈등에 의한 살인이라고 낙인찍고 있었다. 하지만 하베이만큼은 다른 각도에서 그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베이는 죽은 사람이 증권가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통해 일정한 추리를 해 나갔다. 증권가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의 주변, 그 주변으로부터 원한 관계를 살만 한 관계의 범위를 차츰차츰 넓혀 보았다. 그리고 포위망을 좁혀 나가면서 피살자에게 투자를 의뢰했던 사람들에 대해 조사를 착수했다. 그 결과 마피아와 손이 닿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정치계의 인물이 그 사람에게 대규 모 투자를 의뢰했었다는 사실이 하베이에 의해 밝혀졌다. 하베이는 죽은 사람이 투자 금을 회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살해된 것으로 보았다. 그가 가지고 있던 의문들은 거의 맞아떨어졌다. 하베이와 프랭크의 만남은 이 사건을 통해 처음 맺어지게 되었다. 하베이는 경찰들에게 집요하게 질문했지만 경찰의 수사는 철저하게 보안이 유지되고 있었다. 프랭크도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함부로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에 상황은 점점 더 흑인 소년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검찰은 사건을 종결시키 려고 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 흑인 소년을 일급 살인혐의로 기소할 예정이었다. 그 흑인 소년이 살인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던 프랭크는 그 순간에 결단 을 내려야만 했다. 억울한 어린 소년을 감옥에 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프 랭크는 하베이가 일하는 신문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들을 전해 주었다. 다음날 아침에 하베이는 프랭크가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충격적인 기사를 내보냈고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곳곳에서 경찰의 수사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흑 인 단체들이 거세게 항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며칠 후에 검찰은 소년에 대한 기소를 포기했고 경찰은 즉시 재수사에 착수했다. 그 리고 살인범은 하베이의 생각대로 마피아의 사주를 받은 전문 킬러의 소행으로 드러났 다. 프랭크의 자동차가 창문을 통해 보이기 시작하자 하베이는 현관으로 걸어갔다. 프랭 크가 초인종을 누르자 하베이는 즉시 문을 열어 주면서 반갑게 프랭크를 맞았다. "이렇게 빨리 달려올 줄은 몰랐는걸?" "하베이,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난 자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줄로만 알았지 뭐야." "걱정하지 말게, 프랭크. 난 아주 멀쩡해." 프랭크는 하베이의 모습을 대충 훑어본 후에 말을 이었다. "그렇긴 하군.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프랭크, 몹시 재미있는 도구를 보고 싶지 않은가?" "무슨 정력 증강 도구라도 구했나 보군." "이쪽으로 와 보게, 프랭크." 하베이가 서재를 향해 걸어가면서 말했다. 프랭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하베이의 뒤 를 따라갔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몰랐지만 하베이의 얼굴에는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 다는 것이 드러나 있었다. 프랭크는 누가 어떻게 말하든 쉽게 동요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형사로 일하는 동안 이미 수많은 일들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권총 살인 사건이 벌어지면 시체를 일일이 확 인해야 하는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때로는 목이 잘려 나간 시체를 보기도 했고 형체 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부서진 사람의 머리를 보기도 했었다. 어떤 때에는 미국 부통 령의 사생활까지 깊숙이 개입한 적도 있었고 그래서 신변의 위협도 항상 그의 뒤를 따 라다니던 적이 있었다. "도대체 뭘 보여 주려는 거야?" 프랭크는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지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억지로 여 유를 부리는 듯이 애쓰면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하베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물건들이 난잡하게 널러져 있는 자신의 서재로 들어갔다. 한쪽 면에는 벽으로 향한 책상이 있었고 반대편에는 책장이 놓여 있었다. 책장에 책 들은 무척 많이 꽂혀 있었지만 벌써 몇 달 동안이나 정리를 하지 않은 것처럼 아무렇 게나 널려 있었다. 책상 위에는 부품들을 조립하다 만 것 같은 금속상자가 놓여 있었 고 그 주위로 전선과 작은 칩들이 널려 있었다. 하베이는 금속 상자를 집어들더니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바로 이거야." 프랭크는 그렇게 큰 금속 상자가 무슨 일에 쓰이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게 뭔데?" 하베이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프랭크를 바라보면서 금속 상자의 껍데기를 벗겨 내기 시작했다. 금속 상자의 껍데기는 나사를 미리 풀어 놓은 것처럼 손쉽게 자신의 내부를 드러내면서 벗겨졌다. 하베이는 금속 상자로부터 조심스럽게 몇 개의 부품을 빼고 갈아 끼우더니 작업을 멈추고 다시 껍데기를 씌웠다. 그것을 바라보던 프랭크는 더 이상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까짓 금속 상자를 보여 주려고 날 여기까지 부른 건가? 도대체 그게 뭔데 그러 나?" 하베이는 프랭크의 조급한 태도에 여유있게 미소를 보내면서 손바닥을 마주쳤다. "좋아, 이제부터 보여 주지." 하베이는 그 기계에 전원을 연결하고 나서 스위치를 켰다. 그러자 잠시 동안 지직거 리는 시끄러운 잡음이 들려왔다. 주파수가 맞지 않아서 생기는 불협화음이 프랭크의 귀를 자극했다. 프랭크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하베이를 바라보았다. 하베이는 주파수 조정장치를 작동시키고 다이얼을 돌려서 불협음이 생겨나지 않는 곳으로 바늘을 맞추었다. 무전기의 주파수를 맞추는 과정처럼 소리가 어디에서는 아주 크게 어디에서는 아주 작게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무슨 말인지 분명히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하베이는 다시 조심스럽게 금속 상자의 조절기를 만졌다. 잠시 후에 그 기계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베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프랭크를 쳐다보았다. "유나이티드 저지 은행이죠?" 사십대 정도 되었을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그렇습니다." 은행의 직원인 듯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입금 확인을 하고 싶은데요." "계좌번호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110993-383-384745입니다." 통화하는 사람들 사이에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나서 은행직원인 듯한 여 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밀번호는 어떻게 되나요?" "13357입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잠시 동안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베이는 기계의 음향을 조금 줄이고 나서 프랭 크를 향해 돌아섰다. 프랭크는 깜짝 놀라면서 하베이를 응시했다. "이건 은행직원과 고객이 서로 통화하고 있는 전화 내용이 아닌가?" "맞아, 유나이티드 저지 은행의 한 고객이 은행직원에게 입금 확인을 하고 있는 내용 이지." "이렇게 큰 도청기는 처음 보았는걸? 우리가 사용하는 건 이렇게 크지 않아. 이건 아주 구석기 시대의 유물일 거야." "그렇지 않아, 프랭크. 자네는 세상 물정을 좀 알아야하겠네. 이 물건은 전자상가에 서 200달러만 주면 살 수 있는 걸세. 여기에 특별히 내가 고안한 고성능 주파수 스캐 너 수신기를 장착하면 아마 경찰이 사용하는 물건보다 열 배는 기능이 좋아질걸? 이걸 5분만 듣고 있어도 우리는 경찰보다 열 배나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단 말이야. 그것 도 경찰이 도청하고 있는 거리의 반경보다 두 배는 더 멀리..." 하베이의 말이 끝나고 나서 잠시 후에 기계로부터 다시 은행 직원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6000달러가 입금되었습니다." "입금자가 누구죠?" "입금자는 존 밀러 씨입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가 끊어졌다. 프랭크는 놀란 듯이 잠시 그 자리에 멍청하게 서 있었다. 프랭크 도 전화를 도청해 본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도청을 하기 위해서는 직접 전화기에 도 청장치를 하거나 아니면 음파의 떨림을 감지하는 매우 값비싼 기계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하베이는 너무나 손쉽게 그것도 책상 앞에 앉아 라디오를 들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것이다. "프랭크, 만약 우리가 범죄자라면 우리는 이 짧은 대화를 통해 범죄에 필요한 상당량 의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을 거야." 프랭크는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도대체 하베이가 왜 이런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일까? 무슨 단서라도 잡고 특종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이 기계를 통해서 자네가 말하고 싶은 게 뭔가?" 프랭크는 더 이상 궁금증을 견딜 수가 없어서 하베이에게 다그쳐 물었다. 하베이는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 커다랗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건 사실 내 장난감이야. 나는 이 기계를 통해 가끔씩 기삿거리가 될 만한 것을 찾아내기도 한다네." "이거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군." "프랭크, 내 말을 잘 듣게. 나는 오늘도 이 라디오 스캐너 수신기를 가지고 장난을 하다가 우연히 어떤 남자와 어떤 여자가 통화하는 내용을 엿듣게 되었어. 그래서 자네 를 부른 거야." "자네가 도청한 대화 속에 내 옛날 마누라의 이름이라도 나온 건가? 그것이 도대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어서 부른거야?" "맞아, 자네와 관계가 있는 이름이 분명히 나왔어. 물론 자네 마누라의 이름은 아니 었지만..." 프랭크는 그 말을 들으면서 몹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베이는 계속해서 프랭크 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자네 마누라의 이름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자네와 아주 가까운 사람의 이름이 분명 히 나왔네." "나와 가까운 사람이라면..." "그래,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이름이 나왔지." "다니엘이 어떤 남자와 여자의 불륜에 개입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자네, 농담할 때가 아닐세. 다니엘은 지금 어떤 위험한 일에 연루되어 있단 말이 야." "세상에!" 하베이가 도청한 전화 내용에 다니엘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에 대해서 프랭크는 기분 이 별로 좋지 않았다. "처음에는 나도 깜짝 놀랐어."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에 연루되어 있다는 건가? 좀 간단하게 말을 해 줄 수는 없 겠나?" "원한다면 직접 들려 주지." 하베이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주머니 속에서 소형 녹음기를 꺼냈다. 그것은 하베이 가 항상 휴대하고 다니는 물건이었고 처음 만났을 때도 가지고 있었다. "이건 바하마에서 걸려온 전화를 녹음한 거야. 수신자를 알 수는 없지만 전화의 내 용으로 보아 상당히 고위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네. 나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혹시 어떤 기사거리가 나오지 않을까하고 즉시 녹음을 시작했어." 하베이가 다른 주머니에서 테이프를 꺼내 소형 녹음기 속에 집어 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녹음기의 스피커를 통해 또렷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만 손을 떼는 게 좋겠어. 내가 빠져 있어야만 앞으로 위험이 닥쳐도 뒷일을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뒷처리를 맡겠어. 그리고 선거도 다가오고 있어." 중년 남자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이번 일만 잘 성사된다면 앞으로 5년 동안 당신은 해마다 오백만달러씩을 현금으로 지불받을 수 있을 거예요. 그 정도의 돈이라면 당신은 아마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 갈 수도 있을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삼십대 후반쯤 되었을 여자가 말했다. "그건 무슨 말인지 알아.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보안이야. 한 순간의 실수 로 보안이 누설되기라도 하면 모두가 끝장이라구. 내 말을 잘 들어. 블레이크 그룹의 다니엘 회장이 메드닉 해리슨과 사업에 관계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바하마로 간다는 말을 들었어. 그 다니엘이란 작자는 매우 눈치가 빠른 사람이야. 특히 조심해야 할 거야." "그건 이미 입수한 정보예요. 하지만 그보다 더욱 커다란 문제가 있어요. 메드닉 해리슨의 손녀 로라 해리슨이 이번 학기에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어요. 곧바로 바하마 로 돌아온다는 정보예요. 아마 지금쯤 벌써 도착했을지도 몰라요. 게다가 그녀는 제 임스라는 교수까지 바하마로 불러들였어요. 그래서 말인데 우리의 계획을 조금만 더 앞당기는 것이 좋겠어요." "그 점에 관해서는 미리 계획하고 있지 않았나? 너무 걱정하지 마. 자세한 것은 나 중에 만나서 이야기를 하지." "알겠어요. 그럼 나중에 봐요." 녹음 테이프의 내용은 거기서 끝나고 있었다. 하베이는 녹음기를 끄고 나서 프랭크 를 향해 입은 열었다. "어때? 프랭크. 내가 자네를 만나자고 한 이유를 알겠나?" "대충은 알겠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지?" 프랭크는 하베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하베이는 단호한 태도로 대답했 다. "음모야!" "음모?" "바하마에서는 분명히 어떤 음모가 진행되고 있어. 다니엘이라는 이름과 메드닉 해 리슨이라는 이름 그리고 의원 선거라는 말들이 오고간 것을 보면 상당히 커다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해." "대단한 특종거리를 하나 잡았다 이거군." "난 곧바로 바하마로 떠난 거야. 자네 말대로 정말로 이건 어쩌면 대단한 기사거리 가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하베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프랭크는 하베이가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 는 이유를 아직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자네가 특종을 잡는 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그걸 몰라서 묻나?" 잠시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하베이는 프랭크를 쳐다보면서 계속 말을 이어나 갔다. "다니엘! 바하마에 있는 다니엘이 걱정된다는 거지, 이사람아! 무슨 음모에 말려들지 도 모르니까... 그래서 자네를 통해 미리 경고를 하려는 거였어." "당장 다니엘에게 알려야겠군." "나와 함께 바하마로 가는 게 어떻겠나?" "고맙네. 하지만 자네가 나를 보자고 한 데에는 그 이상의 어떤 일이 있는 것 같은 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보지 않겠나?" "자네가 왕년에 뛰어난 탐정이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군." "어서 말해 보게." "알았네." 하베이는 선반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선반 위에는 작은 서류봉투가 놓여 있었다. 서류를 개봉하기에 앞서 하베이의 표정에는 약간의 갈등이 떠오르고 있었다. 특종을 잡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에게도 밝히지 말아야 할 혼자만이 비밀이 들어 있기 때문이 었다. 민완기자, 특히 베테랑 기자 일수록 철저한 정보관리는 물론 비밀 유지에 있어 서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지켜야 할 원칙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하베이는 다니엘이 어떤 음모에 빠져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 에 프랭크에게 자신의 정보를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바하마의 메드닉 해리슨에 대해 사전 조사를 해 보았네." 하베이가 서류봉투를 열면서 말을 꺼냈다. 하베이는 봉투를 열고 낡은 잡지들에서 오려낸 기사들과 몇 장의 복사물들 그리고 사진들을 꺼냈다. "메드닉 해리슨은 최근 3년 동안 전혀 세간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어. 재계의 거 물치고는 너무 조용하게 지낸 편이지. 메드닉 해리슨이 은둔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항 간에는 무수한 소문이 떠돌았네. 심지어는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니까..." 그리고 나서 하베이는 사진을 한 장 집어들었다. 사진 속에는 요염한 미소를 지소 있는 여자가 들어 있었다. "이 여자는 레베카 더글라스야. 메드닉의 비서지. 레베카는 지금 메드닉을 대신해 서 모든 공식적인 업무들을 대행하고 있어. 비록 모든 일들이 메드닉의 결재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녀가 뉴월드 그룹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은 아주 대단하다고 할 수 있네. 실제로 호텔업계 황제의 대리자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지." 하베이는 다시 또 한 장의 사진을 집어들었다. 그 사진에도 역시 아름다운 미모의 여자가 들어 있었다. "이 여자는 로라 해리슨이야. 로라 해리슨은 메드닉의 손녀 딸이지. 그리고 그녀는 뉴월드 그룹의 유일한 상속자야. 로라의 부모는 그녀가 어렸을 때 교통사고로 사망했 어. 그녀도 함께 그 사고 차량에 타고 있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 하베이는 신문에서 오려 놓은 기사를 프랭크에게 보여 주었다. 그 기사는 오래되어 서 색이 바랜 상태였다. "이건 그 당시 사건에 대한 신문기사인데 그 교통사고에는 여러 가지 의문점이 도사 리고 있었네. 대재벌의 유일한 상속자가 갑자기 죽어 버렸기 때문에 신문에서 여러 가 지로 말을 만들어 내었을 수도 있지만..." 프랭크는 하베이로부터 자료를 건네받았다. 프랭크는 로라의 사진을 집어들고 유심 히 바라보았다. 사진 속의 로라는 매우 아름다운 여자였다. 로라의 모습을 들여다보 고 있던 프랭크는 갑자기 이상한 사실을 발견했다. "닮았군." 프랭크가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무슨 말이지?" "닮았어." "누가 누구를 닮았다는 건가?" "로라와 조금 전의 그 레베카라는 여자 말이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하베이는 두 여자의 사진을 서로 비교해 보면서 말했다. "글쎄?" 하베이는 프랭크의 지적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하베이는 다시 봉투 속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냈다. "다니엘 씨가 바하마로 간 것은 무슨 일 때문이지?" "새로운 사업을 구상한다고 했는걸?" 프랭크는 다니엘과 전화로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말했다. "혹시 투자상의 문제 때문에 바하마로 떠난 것은 아닌가?" "맞아. 리조트 건설에 투자할 것을 생각해 본다고 말했어." "프랭크, 사업상의 문제라면 사실 나는 문외한이긴 하지만 최소한 메드닉 해리슨 씨 와의 거래를 신중하게 고려해 보겠네." "그게 무슨 말인가? 메드닉은 세계적인 호텔업계의 황제가 아닌가?" "그건 맞는 말일세. 하지만 그가 정말 황제인지 아닌지는 이제 두고봐야 할 일이 되 었네." 하베이는 조금 전에 봉투에서 꺼낸 서류를 프랭크에게 내 밀었다. 프랭크가 서류를 보고 있는 동안 하베이의 말이 이어졌다. "최근에 난 메드닉 해리슨 씨의 재정 상태에 대해 조사해 보았네. 메드닉 해리슨은 지금 재정적인 압박이 매우 심한 상태야. 은행측에서도 뉴월드 그룹의 재정 상태에 대 해 심각한 의문을 품고 있어. 은행에 있는 친구를 통해 내가 조사해 본 바로는 현재 메드닉 해리슨 씨의 신용이 바닥을 달리고 있다는 거야. 그래서 모든 대출을 중지하고 있다고 하더군. 그리고 그보다 더욱 커다란 문제가 또 하나 있지." "그게 뭐지?" 프랭크는 서류에서 눈을 돌리면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질문했다. "이 자료를 얻기 위해 나는 조금 불법적인 방법을 이용했다는 것을 이해해 주게." "귀중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는 없지. 도대체 이게 무슨 자료인가?" "메드닉 해리슨의 주식 매각 정보일세." "정말 대단하군. 어떻게 기간 투자가들의 개인 주식 매각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 "그건 자네에게도 비밀이야. 하지만 어쨌든 메드닉 해리슨은 최근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뉴월드 그룹의 주식을 매각하기 시작했네. 공개된 기업에서 경영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전체 주식의 최소한 30에서 50퍼센트 이상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라는 사실을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런데 메드닉이 소유하고 있는 주식은 이미 위험 수위에 가까워지고 있어." "메드닉이 새로운 사업을 하려고 하는 거겠지." "그게 아니야, 프랭크. 이것은 메드닉 해리슨이 뭔가 다른 일을 꾸미고 있는 게 아 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물론 자네 말대로 회사를 처분한다든가 아니면 다른 사 업을 시작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기에 그는 이미 너무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프랭크는 하베이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다가 말이 끝나자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하베이는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메드닉 해리슨과 뉴월드 그룹의 주위에서 어떤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네." 하베이는 잠시 동안 프랭크를 바라보면서 말을 멈추었다. 프랭크는 하베이의 말에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하베이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나는 바하마로 가서 이번 음모를 파헤칠 생각이야. 이번 일은 퓰리처 수상감이 될 수도 있으니까..." "자넨 정말 뛰어난 기자로군." "그런데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네. 나는 이번 음모의 규모가 상당할 거라고 생각해. 정계의 고위층과 많은 유명 인사들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르지. 프 랭크,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기꺼이 돕도록 하지. 바하마로 간 다니엘이 위험에 처할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군.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다니엘이 알면 그대로 지켜보고 있지는 않을 텐 데..." "프랭크, 다니엘을 보호하고 그를 둘러싸고 다가오는 검은 먹구름이 있다면 함께 헤 쳐나가 보는 게 어떤가? 과거의 형사 프랭크로 다시 태어나는 게 좋지 않겠어?" 프랭크는 잠시 동안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바로 하베이에게 미소를 지 어 보였다. "좋아, 하베이." 그리고 두 사람은 힘껏 손바닥을 마주치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택시가 아미보셤 호텔의 정무에 정차하자, 예복을 차려입은 도어맨이 정중한 태도로 문을 열고 다니엘에게 인사했다. "아미보셤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다니엘은 그가 열어 준 문을 통해 내렸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급 호텔답게 서비스 가 최고라는 느낌을 받았다. "역시 편안하군요." 그가 현관을 통해 프론트로 들어서자 지배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다니엘 씨, 만나게 되어서 무척 반갑습니다. 바하마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 니다." 그는 아미보셤 호텔의 지배인 프레디였다. 다니엘은 잠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호텔의 지배인이 자신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몹시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니 엘은 그 문제에 대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다니엘은 다른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지배인의 인사를 정중하게 받아들였다. 다니엘 은 아마도 메드닉 해리슨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유명하신 분을 이렇게 뵙게 되다니 정말로 영광입니다. 여행은 즐거우셨는지요?" 호텔 지배인 프레디가 친절하게도 다니엘에게 다시 한 번 환영의 뜻을 밝혔다. "네, 아주 좋았습니다." 다니엘도 매우 공손하게 대답했다. "저는 이 호텔의 지배인으로 있는 프레디라고 합니다. 바하마가 온통 다니엘 씨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날씨도 매우 화창하지 않습니까?" 프레디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기 때문에 다니엘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 다니엘은 호 텔의 분위기가 매우 아늑하다는 것과 지배인 프레디의 첫인상이 매우 좋다는 것이 마 음에 들었다. "그렇군요, 프레디씨. 아미보셤 호텔은 오늘처럼 화창한 날씨에 매우 어울리는 곳이 군요. 아주 아름다운 호텔입니다." 다니엘은 진심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호텔의 경관은 과연 거듭 칭찬해도 모자랄 정도로 훌륭했다. "감사합니다. 다니엘 씨. 이 호텔의 구조와 조형미로 말씀을 드리자면 거의 완벽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멋지군요. 마치 고대의 조형미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호텔 주위를 돌아보던 다니엘은 자신의 느낌을 한 마디 덧붙였다. "분위기도 매우 조용하구요." 프레디는 다니엘의 말을 듣고 새삼스럽게 자신이 지배인으로 있는 호텔의 주변을 살 펴 보았다. 그리고 나서 프레디는 마치 다니엘의 말을 통해 조용한 호텔의 분위기를 새삼스럽게 느낀 듯이 대답했다. "이제 보니 그렇군요. 아주 뛰어난 감각을 지닌 분이군요." 역시 다니엘의 관찰력은 매우 뛰어났다. 하지만 다니엘이 호텔의 분위기가 조용하다 고 말한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오히려 호텔의 분위기는 매우 침체되어 있는 듯한 느 낌이었다. 다니엘은 호텔의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정원과 건물 곳곳에서 경비원처럼 보이는 몇 명의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다 니엘은 이곳이 일반적인 관광지의 호텔과는 달리 경호가 매우 엄중하다는 사실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다니엘이 경비원처럼 보이는 한 사람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이 호텔에는 워낙 저명한 인사들과 부유층 손님들이 많이 방문 하기 때문에 그들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곳보다도 더 경비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있을 행사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떤 행사를 말하는 거죠?" 다니엘이 지배인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그리고 그 행사가 어떤 행사인지 매우 궁금 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길버트 부부가 헐리우드 박물관에 스키를 기증하는 행사가 있습니다. 그 스키는 영 화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수십만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증식 행사 때문에 세계 각지로부터 유명 인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메드닉 해리슨 회장님이 오늘부터 특별히 경비에 만전을 기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바하마에서 스키 기증식을 한다구요? 그건 이상한 일이군요. 바하마와 스키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게다가 그 정도 가격의 스키라면 경매를 통해 팔아도 될 텐데, 왜 굳이 박물관에 기증을 한다는 거지요?" "그건 저도 잘 모르는 일입니다. 정 알고 싶으시다면 회장 비서실의 레베카 더글라 스 양에게 물어 보십시오." 다니엘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무언가 궁금한 것이 더 있다 는 얼굴로 프레디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프레디 씨,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는데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죠. 어떤 겁니까?" "이번에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이 호텔의 소유주인 메드닉 해리슨 씨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메드닉 해리슨 씨의 건강이 아주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왔는 데 근황은 어떤지요?" 다니엘은 이번 여행 내내 메드닉 해리슨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다니엘의 질문 에 프레디는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궁금한 듯이 아무 말없이 프레디의 대답 을 기다렸다. 그러자 프레디는 잠시 후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을 드리는 게 좋겠군요. 사실은 저도 최근에 메드닉 해리슨 씨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메드닉 해리슨 씨는 지금 건강이 몹시 좋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지금 까지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있을 정도입니다. 저도 전화 통화 이외에는 전혀 만날 수 없 는 형편입니다. 제가 보고해야 할 모든 업무도 비서인 레베카 더글라스 양을 통해서 일을 처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그렇군요." 다니엘은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호텔의 지배인이 메드닉 해리슨을 만나지 못했을 정도라면 메드닉의 건강 상태가 어떨 것인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메드닉 해리슨이 그런 상태라면 거대한 뉴월드 그룹은 과연 누가 이끌고 있는 것인가? 다니엘은 매우 심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메드닉 해리슨 씨에게 조만간 만나고 싶다고 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프레디 씨." "알겠습니다. 즉시 회장님에게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전망이 아주 좋은 객 실에서 묵을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프레디 씨."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즐거운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프레디는 다니엘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한 다음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다니엘은 종 업원을 따라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면서 프레디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지배인은 매우 열심히 일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아미보셤 호텔의 운영을 총괄하는 사람으로는 매우 성실하고 아주 적당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가 최근 얼마 동안 메드닉 해리슨을 전혀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었다. 다니엘은 아미보셤 호텔의 특실로 안내되었다. 종업원은 다니엘에게 편의를 제공하 기 위해 여러 가지를 설명해 주었다. 다니엘은 종업원에게 약간의 수고비를 건네 주었 다. 그러자 급사는 자신의 주머니 속에서 황금빛 열쇠를 꺼내더니 다니엘에게 건네 주 고 방을 나섰다. 다니엘은 창문을 통해 펼쳐진 바하마의 해변을 감상하면서 서서히 자신의 짐을 풀기 시작했다. 로라 해리슨은 공항에서 다니엘과 헤어진 다음 곧장 선착장으로 향했다. 선착장에는 많은 배들이 닻을 내리고 정박중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특히 돋보이는 요트가 있었는 데 요트의 측면에는 '메드닉 해리슨 호'라고 적혀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즐겨타던 작은 배도 있었다. 선착장으로 들어선 로라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배를 향해 다가갔다. '로라 해리슨 호'는 로라 해리슨이 스무 해 생일을 맞았을 때 할아버지가 선물한 작고 아담한 요트 였다. 로라는 이 배를 무척 좋아했다. 요트의 색깔이 과거에는 하얀색이었으나 이제는 달 라져 있었다. 바다색과 아주 잘 어울리는 푸른색이 로라 해리슨 호의 전면에 칠해져 있었다. 로라는 그 배에 올라가서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배를 만져 보기도 하 고 배에게 말을 걸어 보기도 했다. "반갑구나, 로라 해리슨. 그동안 잘 있었니?" 로라는 조그맣게 중얼거리면서 요트를 어루만지다가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오른 사 람처럼 선실을 바라보았다. 로라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선실을 향해 걸어갔 다. '로라 해리슨 호'는 밖에서 볼 때에는 아주 작아 보였으나 선실 내부는 아주 넓은 배였다. 로라는 선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요트의 내부에는 예전에 자신이 사용하던 고전적인 침대와 책상이 그대로 놓여 있었 다. 조금은 달라진 모습도 여기 저기에서 눈에 띄었다. 가장 많이 달라진 것은 간단 하게 술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바가 한 쪽 구석에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선실 곳곳에는 꽃이 장식되어 있었고 한 쪽 벽에는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오디오가 걸려 있었다. 그 순간 로라는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던 과거의 추억들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방학이면 로라 해리슨 호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로라는 머리 속 으로 스쿠버 다이빙 장비를 가지고 먼 바다의 섬으로 가서 다이빙을 즐겼던 시절을 떠 올렸다. 로라는 할아버지와의 추억에 빠져들었다. 때로는 할아버지와 함께 먼 바다까 지 낚시를 나가기도 했던 그 시절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로라가 선실 내부에서 과거의 아름다웠던 추억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가 선 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로라는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리자 매우 궁금했지만 일부 러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선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누굴까? 로라는 과거에 자신 과 함께 생활했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런데 매우 낯익은 목소리가 로라 의 귓가에 들려왔다. "아니, 이게 누구야? 로라 해리슨 아니야?" 그 목소리를 들었던 로라는 뒤로 돌아서면서 활짝 미소를 지었다. "어머, 곤잘레스 아저씨!" 선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할아버지의 유일한 친구이자 선착장의 배들을 관리하고 있는 곤잘레스였다. 곤잘레스는 캘리포니아 출신의 선원으로 젊은 시절 메드닉과 인연 을 맺은 이후로 줄곧 메드닉 해리슨의 옆에서 그의 별장과 배를 관리하는 충실한 관리 인이었다. 로라는 곤잘레스를 마치 메드닉 할아버지와 같이 잘 따랐다. "반가워요, 곤잘레스 아저씨." 로라는 매우 반가운 얼굴로 곤잘레스와 포옹을 나누었다. "아저씨는 예전보다 훨씬 더 젊어지신 것 같아요." "로라야말로 이젠 정말 숙녀가 된 것 같군. 기억하고 있어? 어렸을 때에는 무서워서 배에 올라타지도 못했던 거 말이야. 아마 첫 번째 항해 때에는 바지에다 오줌을 쌌었 지, 안 그래?" 곤잘레스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세요." 로라가 수줍은 듯이 머리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잠시 후에 로라와 곤잘레스는 바닷 바람을 맞기 위해 선실에서 나와 갑판으로 올라갔다. 로라는 곤잘레스의 손을 잡고 아 무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과거의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렸다. 부모가 없는 로라 해리슨에게 곤잘레스는 마치 친아버지처럼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로라의 마음이 울적할 때에는 요트에 태우고 바다를 달리면서 외로움을 달래 주기도 했었다. 메드닉 해리슨 할아버지가 사업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출장을 다녀야 했던 어린 시 절에 로라는 거의 모든 시간을 곤잘레스와 함께 보냈다. 로라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 면서부터 곤잘레스와 보내는 시간이 점차 줄어들기는 했지만 방학이 되면 언제나 즐거 운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이였다. "할아버지는 만나 보았니?" "아니, 아직 만나지 못했어요." "그렇다면 공항에서 곧바로 여기로 온 거야?"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이곳이 가장 먼저 보고 싶었어요." "나중에 할아버지가 서운해 하시면 어떻게 하려구 그랬니?" 로라는 곤잘레스 아저씨의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다니엘과 함께 호텔 에 들어서기는 싫었다. 자신의 신분이 밝혀지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부끄러웠기 때 문이었다. 지금까지 만났던 남자들 중에서 처음으로 좋은 감정을 느낀 남자였기 때문 에 로라는 그 남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여유를 가지고 싶었다. 로라는 곤잘레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화제를 바꾸었다. "아주머니는 잘 계신가요?" "늘 그렇지 뭐. 그 여자는 아직도 나를 들들 볶는다구." "아주머니도 보고 싶어요." "그런데 로라, 바하마에는 무슨 일로 온 거야?" "얼마 후에 졸업을 하거든요. 지금부터는 이곳에 살면서 할아버지의 사업을 도울 생 각이에요." "그거 잘 되었구나." 곤잘레스는 갑자기 몸을 돌려서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햇살이 지는 광경이 마치 한 사람의 인생을 그대로 보여 주기나 하듯이 슬퍼 보였다. 해는 날마다 뜨고 지지만, 사 람의 인생이란 어떻게 보면 해가 뜨고 지는 하루와 같이 너무 빠르게 흘러갔다. 로라는 곤잘레스의 눈빛 속에서 황혼이 물든 바다를 찾아 볼 수 있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비친 하얗게 넘실거리며 밀려오는 파도가 흔들리는 노년기의 불안한 마음을 담아내고 있었다. 곤잘레스는 아마도 과거를 회상하고 잇는 것이 분명했다. "메드닉 할아버지 말이다." "말씀하세요, 아저씨." 로라는 곤잘레스의 마음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먼 바다만을 바라보면서 아무런 말도 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곤잘레스의 마음을 이해하면 서 로라는 아주 조용히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곤잘레스는 로라의 할아버지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메드닉은 항상 넘치는 활력으로 잠시도 쉬지 않고 세계 도처에 널려 있는 자신의 사무실을 오고 가면서 중요한 일들을 처리했다. 메드닉은 항상 다른 사람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기획하고 몸으로 부딪히면 서 해결했다. 그리고 언제나 독창적이며 새로운 아이디어로 자신의 사업을 번창시켰 다. 그런 메드닉 해리슨의 진취적인 힘이 현재까지 뉴월드 그룹을 이끌었던 가장 커다 란 원동력임을 곤잘레스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곤잘레스는 자신의 모든 노력을 오직 사업에만 쏟아붓는 인생을 살았던 메드닉을 떠 올렸다. 그러한 메드닉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의 가치는 자신의 사업에 대한 공헌에 의 해 결정되었다. 곤잘레스는 그런 메드닉의 성격을 때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그래 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사업가는 오로지 사업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곤잘 레스는 메드닉으로부터 배웠다. 그러나 곤잘레스가 지금 걱정하고 있는 건 메드닉이 과연 어린 로라 해리슨에게 어 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로라가 아무리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손녀딸이라고 해도 사업을 진행하는 메드닉의 성격이라면 로라도 예외가 아닐 거라는 걱정이 들었다. 메드닉이라면 무척 엄격하게 로라를 가르칠 것이다. "로라 해리슨, 메드닉 할아버지는 훌륭한 사업가란다." 곤잘레스는 한참 동안이나 침묵을 지키다가 불쑥 한 마디를 던졌다. 로라는 그 말의 뜻을 스스로 생각해 내려고 하는 듯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곤잘레스의 속뜻을 알 리가 없었던 로라는 그 뜻을 전혀 깨달을 수가 없었다. 로라는 곤잘레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저씨, 그게 무슨 뜻이에요?" "사업가는 오로지 사업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뜻이지." 곤잘레스는 로라가 '사업가는 오로지 사업만을 위해서 인간적인 측면을 상실할 수 도 있다는 뜻이지'라고 받아들이기를 원했다. 그러면서 먼 바다를 바라보던 자신의 시선을 로라의 맑은 눈으로 가져갔다. 로라의 눈빛에는 아직도 그 말의 뜻을 잘 모르겠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곤잘레스 는 갑자기 후회스러운 마음이 생겨났다. "아니야, 내가 엉뚱한 말을 했구나." 곤잘레스는 로라도 그러한 기준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라도 사 업을 배우고 호텔을 경영하기 위해서는 사업가들의 기질을 익혀야만 하고 때로는 그 기질에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며 타인의 목숨까지도 사업의 용광로 속으로 밀어넣는 잔인함을 지녀야 한다. 하지만 로라는 본성이 착하고 여린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곤잘레스는 로라 의 그러한 측면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곤잘레스는 로라가 어느 누구보다도 메드닉의 사업을 이어받을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 다고 긍정적인 생각을 품었다. 갑자기 5곤잘레스의 머리 속에서 4년전의 일이 떠올랐다. 로라가 고등학교를 졸업하 고 집에 돌아와 있을 때, 메드닉 해리슨과 곤잘레스는 거실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 었다. 곤잘레스는 메드닉에게 있어서 유일한 친구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종종 자기 사업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곤 했다. 그날도 메드닉은 회사를 합병하는 문제나 새로운 사업에 참여하는 문제 그리고 회사 를 이끄는 방식 등에 대해 곤잘레스에게 말하고 있었다. 물론 그 옆에는 로라도 함께 있었다. 로라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커다란 흥미를 나타내었다. 그러면서도 할아 버지의 이야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 당시에 메드닉은 곤잘레 스에게 여러 나라의 대사들을 초청하는 파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봐, 곤잘레스. 별장에서 아주 성대한 파티를 열어야겠어. 그런데 프레디는 지금 관광청 업무 때문에 캘리포니아에 가 있어. 자네가 이번 파티를 준비해 줄 수 있겠 나?" "하지만 저는 사실 파티에 대해서는 별로 알지 못하는 걸요. 그 일을 맡을 수가 없 어요." 곤잘레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데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로라가 불쑥 끼여들었다. "할아버지, 제가 곤잘레스 아저씨와 함께 파티를 준비하겠어요." 사업에 있어서 파티는 매우 중요한 행사였다. 그리고 그 만큼이나 여러 가지 실수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라는 아주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메드닉은 곤란하다는 듯한 얼굴로 로라를 바라보았다. 당돌하게 나서는 로라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메드닉은 로라 해리슨이 그 일을 잘 처리할 수 없을 거라고 생 각하는 것 같았다. "로라, 파티에 입을 드레스는 가지고 있니?" "없어요." 로라 해리슨은 그제야 지신에게는 파티용 드레스조차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 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곧 준비할 수 있어요." "파티를 어떻게 준비하는지는 알고 있니?" "물론 잘 알고 있어요. 프레디 아저씨가 준비하는 것을 이미 여러 번이나 보았으니 까요. 저에게 맡겨 주세요, 할아버지." 로라가 자신있게 말했다. 하지만 곤잘레스도 로라가 파티를 잘 진행할 수 있을지 걱 정하고 있었다. 드디어 파티를 위한 본격적인 준비 과정에 들어갔을 때, 곤잘레스는 깜짝 놀라고 말 았다. 로라가 파티의 준비를 위해 연회장을 돌아 다니는 것을 보았던 곤잘레스는 자신 의 걱정이 전혀 쓸데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로라는 요리사의 선정과 요리 메뉴의 점검, 파티에 사용할 장식들과 테이블보의 색상 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점검했으며 파티에서 음악을 연주할 실내악단의 의상과 곡목 들도 사전에 확인하면서 각국에서 찾아올 손님들을 위해 그 나라에 맞는 민요를 레파 토리에 첨가시키는 철저한 일면도 보여 주었다. 종업원의 의상도 새로 맞추고 그날 손 님들에게 대접할 칵테일과 포도주 그리고 최고급 위스키에 이르기까지 모두 로라가 직 접 지휘를 했던 것이다. 드디어 파티가 시작되었을 때, 로라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손님들과 어울렸다. 곤잘레스는 파티 석상에서 로라가 몇 차례의 위기를 슬기롭게 넘기는 것을 지켜 볼 수 있었다. 파티에 초대되었던 이탈리아 대사가 로라 해리슨에게 춤을 신청했다. 그날따라 이탈 리아 대사는 술에 많이 취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로라와 춤을 추면서 마구 허리 를 더듬어 그녀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처음에 로라는 약간 몸을 빼면서 뒤로 물러났지만 이탈리아 대사는 로라를 자극시키 려는 듯이 몸을 더욱 밀착시키고 점차 히프까지 손을 내려서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면 서 그는 로라의 귀에 입을 갖다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로라는 매우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곤잘레스는 로라를 위기에서 구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데 로라는 그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이탈리아 대사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로라는 대사를 향해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다가 갑자기 스텝을 잘못 밟은 듯 이 구두의 뾰족한 굽으로 이탈리아 대사의 발을 밟아 버렸다. 이탈리아 대사가 얼굴을 찡그리자, 로라는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죄송해요, 대사님. 잠시 자리에 앉아 계시면 제가 마실 것을 갖다 드리겠어요." 그리고 나서 로라는 그 자리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곤잘레스는 처음으로 로라의 위 기 대처능력을 알아 보았고 평범한 소녀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만약 다른 소녀였다 면 그런 봉변을 당하고 곧바로 울음을 터뜨리거나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드레스를 벗 어던져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로라는 계속 파티장에 남아 있으면서 자신의 임무를 충실하게 처리했다. 로 라는 파티가 무르익어 갈수록 다른 준비 상태를 점검했고 한 가지라도 부족한 점이 없 는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얼마 후에 곤잘레스는 로라가 또 하나의 위기에 직면한 것을 목격했다. 파티에 초대 된 아랍인들이 돼지고기와 술을 먹지 않고 야채만 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파티 음 식을 물끄러미 지켜보고만 있었다. 로라는 매우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았 다. 곤잘레스가 로라에게 다가갔을 때, 그녀는 다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에게 모두 맡겨 주세요." 그리고 나서 로라 해리슨은 서재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서재에서 나온 로라는 밝은 표정으로 다시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런데 얼마 후에 여러 가지 요리를 가득 실은 트럭이 도착했다. 그 요리들은 모두 인근의 아랍식당에서 주문한 것이었다. 아랍인들은 모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모든 손님들이 돌아가고 파티가 완전히 끝났을 때, 로라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할아버 지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눈치를 채지는 못했지만 곤잘레스는 무뚝뚝한 메드닉의 얼굴 에 부드러운 미소가 슬며시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곤잘레스는 그 당시의 로라 해리슨을 생각하고 있었다. 로라를 마치 손녀처럼 생각 하고 누구보다도 사랑했기에 그는 로라가 메드닉의 사업을 이어받는다는 말에 무척 신 경이 쓰였던 것이다. 곤잘레스는 로라에게 사업가란 어떤 사람이라는 말을 할 자격이 전혀 없었다. 하지 만 적어도 메드닉을 보면서 느꼈던 사업가의 기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려 주고 싶 은 생각이 들어서 몇 마디를 던졌던 것이다. 하지만 로라는 현명하기 때문에 충분히 그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곤잘레스는 그런 로라를 믿고 싶었다. 그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눈가에 고 인 물기를 닦아내었다. "아저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로라가 잠시 옛날 생각에 빠져 있던 곤잘레스를 향해 물어 보았다. 곤잘레스는 로라 를 향해 말했다. "로라, 네가 할아버지와 함께 있게 된 것은 아주 반가운 소식이다. 게다가 지금은 할아버지 옆에 누구보다도 로라가 있어야 할 순간이야. 나는 아주 기쁘게 생각한단 다." 로라는 자신을 그렇게 믿어 주는 곤잘레스 아저씨의 마음이 아주 고마웠다. "할아버지는 어떤가요? 요즘도 낚시를 즐기시나요?" "아니야. 할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으시단다. 벌써 몇 개월 동안이나 선착장에 나 오는 일이 없었어." "하지만 제가 전화를 했을 때에는 항상 건강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셨는 걸요?" "그건 네가 무엇인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구나. 내가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세 달이 넘었단다." 곤잘레스는 다시 먼 바다를 바라보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로라는 그말을 들으면 서 매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얼마전에 전화통화를 할 당시의 할아버지 목소리 는 아주 건강했다. 그러나 벌써 세 달 동안이나 외출하지 않았다니... "선착장에 나오시지 않은 것은 세 달 동안이지만, 아마도 사업에 관련된 출장을 떠나 시지 못한 것은 꽤나 오래 되었을 거야." "그렇다면 할아버지의 사업은 누가 맡아서 하고 있어요?" "지금은 레베카 더글라스라는 여비서가 뉴월드 그룹의 업무를 주관하고 있지." "결코 믿을 수가 없어요. 할아버지가 그렇게 건강이 악화되셨다면 벌써 저에게 연락 을 취하셨을 거예요." "로라도 할아버지의 성격을 잘 알잖아. 그분은 다른 사람이 자기에 대해 걱정하거나 자기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을 가장 싫어하거든. 어쨌든 할아버지는 지 금 아미보셤 호텔의 전용층에 있는 침실에서만 주로 생활하고 있다는 거야. 그곳은 말 이 침실이지 사실상 병실이나 다름이 없지 않겠니? 그것도 1년 전부터는 주치의를 데 려다 놓고 날마다 치료를 받고 있으니까 말이야." 곤잘레스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로라는 갑자기 할아버지가 몹시 걱정되기 시작했 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어서 할아버지를 만나야 할 것 같아요. 곤잘레스 아저씨." "그래, 로라.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어." 로라는 요트에서 내린 후에 곧장 아미보셤 호텔로 향하는 택시를 잡았다. 로라의 머 리 속에서 순간적으로 곤잘레스 아저씨의 말을 떠올렸다. 믿을 수 없어. 1년 전부터 주치의를 두고 벌써 몇 달 동안이나 낚시터에도 나오지 않았다니... "좀 빨리 가 주세요." 로라는 택시 운전사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택시가 해변가의 도로를 따라 점차 속력 을 높이기 시작했다. 로라는 공항에서 내려서 호텔로 곧장 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얼마나 걱정하셨을까? 그래, 이렇게 나쁜 손녀딸을 두셨기 때문에 병석 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숨기려 했던 거야. 할아버지는 나를 믿지 않고 계셔. 내가 얼 마나 부족한 손녀인지..." 로라는 아미보셤으로 향하는 가로수길을 접어들면서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제 4 장 유혹의 그림자 택시가 아미보셤 호텔의 정문 앞에 정차하자 도어맨들이 문을 열기 위해 다가왔다. 로라는 서둘러 택시의 문을 열고 현관으로 달려갔다. 도어맨들은 매우 당황한 표정으 로 현관을 향해 달려가는 아름다운 여자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현관 주위에 서 있던 경비원들이 로비에 있는 다른 경비원들에게 무전기로 연락을 취했다. 로라는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전용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로 무작 정 달려갔다. 하지만 무전기로 연락을 받았던 경비원들이 엘리베이터 앞으로 달려오는 로라를 제 지했다. "이것은 회장님 전용 엘리베이터입니다. 호텔 관계자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습니 다." 그 경호원은 로라 해리슨이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경호원의 체격은 로라보다 두 배 나 더 컸으며, 어깨가 딱 벌어진 청년이었다. 로라는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경호원을 노려보면서 소리쳤다. "이봐요, 내가 누군지 알아요? 나는 메드닉 회장님의 손녀에요. 지금 할아버지를 만 나러 가는 거라구요." "안 됩니다, 아가씨." 경호원은 매우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아가씨가 아니라 로라 해리슨이에요. 메드닉 할아버지의 손녀라구요. 어서 나 를 올려 보내 주세요." "저는 다만 임무에 충실할 따름입니다. 아가씨의 신분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올라가 실 수 없습니다." 로라는 몹시 흥분했지만 할아버지의 호텔에 와서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위해서라도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로라는 정중하게 다시 경비원을 설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녀는 자신의 지갑에서 학생증을 꺼낸 후에 경 비원에게 보여 주었다. "보세요. 제가 로라 해리슨이에요. 이젠 되었나요?" "로라 해리슨 양, 그 신분증으로는 당신이 메드닉 해리슨 회장님의 손녀딸이라는 사 실을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확인 절차를 밟아 주십시오. 저는 아무도 이곳에 들여보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당신 이름이 뭐죠?" "저는 조지라고 합니다." "조지, 지금 이 사실을 할아버지가 아시면 매우 화를 내실 거예요. 당신은 일자리를 잃어 버리게 될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기 전에 어서 나를 올려 보내는 게 좋을 거예 요." 그러나 조지는 로라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눈동자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잠시 동안 로라와 조지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실례하겠습니다." 조지와 대치하고 있던 로라의 귀에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라는 뒤를 돌아 보았다. 거기에는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저는 이 호텔의 경호실장 마틴입니다. 아가씨께서 메드닉 해리슨 회장님의 손녀가 맞는지 확인을 해야겠습니다. 신분증을 보여 주십시오." 로라 해리슨은 손에 들고 있던 신분증을 내밀었다. 마틴을 그 신분증을 확인하고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로라 해리슨 양." "이제 확인이 되었나요? 지금 당장 저를 할아버지 방으로 안내해 주세요." 마틴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정중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사전에 허락을 받지 않았다면 아무도 들여 보내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 습니다. 당신이 메드닉 해리슨 회장님의 손녀라고 해도 저로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먼저 허락을 받아야만 하니까요." 로라는 매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누가 그런 명령을 내렸죠?" 로라가 몹시 화난 얼굴로 다그쳤다. "비서실의 레베카 더글라스 양입니다." "누구라구요?" "레베카 더글라스 양입니다!" 로라 해리슨은 그 순간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레베카는 비서실의 자기 책상에 앉아서 무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잇는 모습이었 다. 가끔씩 깊은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창문 쪽으로 나 있는 발코니를 내려다보면서 팔짱을 끼고 서 있기도 했다. 그녀는 힐끗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미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 지났지만 레베카는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다. 레베카는 자기 책상으로 돌아와서 컴퓨터에 전원을 연결 했다. 파랗게 떠오르는 모 니터가 켜지자 레베카는 잠시 한숨을 쉬고 나서 길버트라는 파일을 열어 보았다. 파일 에는 길버트라는 파일을 열어 보았다. 파일에는 길버트 부부의 행사에 초대된 사람들 의 명단이 적혀 있었고 그들이 예약해 놓은 방들과 호수가 적혀 있었다. 헐리우드에서 명성을 날리는 배우들뿐만 아니라 리차드 상원의원을 비롯한 내노라 하는 정계와 재계의 명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든 아미보셤 호텔 최대의 축제를 앞에 두 고 레베카는 몹시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베카는 지금까지 자신이 치밀하게 진행 했던 계획의 성패가 단 몇 주일 안에 결정될 거라는 점에 대해서 약간 흥분하고 있었 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레베카는 호흡을 가다듬고 전화기를 집어들었 다. "레베카입니다." "저는 경호실장 마틴입니다." "무슨 일이에요?" "지금 난처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레베카 양의 허락을 받아야 할 일이 있어서..." "무슨 일이죠? 어서 말해 봐요." "지금 로비에는 메드닉 해리슨 회장님의 손녀딸 로라 해리슨 양이 와 있습니다. 당 장 할아버지의 전용층으로 올라가서 회장님을 뵙고 싶다고 합니다." "뭐라구요?" "하버드 대학에 다니던 손녀딸이 지금 호텔 로비에 와 있습니다. 회장님을 만나기 위해..." "절대로 그럴 수 없어요. 지금 회장님께서는 저녁 식사를 끝내시고 막 잠이 드셨어 요." 레베카는 몹시 당황하면서 말했다. 로라가 도착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로라 해리슨 양이 자꾸만 완강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 지 잘 모르겠습니다." "당장 프레디를 바꾸세요. 프레디에게 로라 해리슨을 설득하라고 해요, 어서!" "프레디 지배인님은 자리에 안 계십니다." "그렇다면 무조건 이렇게 말해요. 할아버지께서는 주사를 맞고 지금 막 잠이 드셨다 고... 그리고 일단 방을 잡아 놓았으니까 그곳에 가서 쉬라고 하세요. 할아버지는 내 일 오전에 만날 수 있게 해 준다고 말이에요. 빨리 처리하고 올라와서 보고하세요. 알았어요?" "예.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레베카 양." 마틴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레베카는 화를 내면서 수화기를 세차게 내려 놓았다. "마틴, 이 멍청한 녀석!" 레베카는 항상 마틴의 우유부단한 일처리 방식에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 었다. 마틴의 임무는 아미보셤 호텔에서 메드닉 해리슨의 전용층에 대한 경호를 담당 하는 것이었다. 메드닉의 전용층은 뉴월드 그룹의 모든 업무를 관장하는 중심부와도 같은 곳이다. 전용층에서는 뉴월드 그룹을 이끄는 핵심적인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만큼이 나 매우 중요한 업무들이 진행되고 있었고 모든 일들이 거의 집중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 대한 경호는 매우 삼엄한 것이었고 24시간 동안 교대로 경호되고 있었 다. 다른 호텔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뉴월드 그룹의 정보체계는 완벽했다. 컴퓨터 결재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업무는 화상 회의실이 있는 19층에 서 거의 처리되었다. 19층은 아미보셤 호텔의 가장 꼭대기층으로 메드닉 해리슨의 침실과 경호실도 그곳 에 위치하고 있었다. 18층에는 중요한 업무를 처리하는 사무실과 컴퓨터실 그리고 직 원용 휴게실과 식당이 있다. 17층에는 지배인실을 비롯한 아미보셤 호텔과 관련된 업 무를 처리하는 사무실이 있었고 16층이하부터 호텔 객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미보셤 호텔에 들어서서 17층까지는 일반 엘리베이터를 통해 출입할 수 있었지만 18층과 19층은 전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만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전용 엘리베이터에는 항상 경호원이 배치되어서 출입하는 사람들을 확인하고 통제했다. 레베카는 길버트 부부의 행사에 맞추어 경호실을 확대 개편하는 문제와 함께 자신의 계획을 진행하려면 마틴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서 빨 리 마틴을 자신의 휘하에 두기 위해 오늘 밤 9시에 마틴을 자신의 집으로 불렀던 것이 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레베카의 계획이 자질을 빚지 않도록 위해서는 반드시 성사되 어야 하는 일이었다. "어서 마틴을 내 사람으로 만들어 놓아야 해. 오늘 밤, 바로 오늘 밤에 말이야." 레베카는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장고의 문을 열어서 시원한 냉수를 한 잔 마셨 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길게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그녀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 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경호실장 마틴이었다. 마틴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이 없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지시대로 로라 해리슨 양을 설득시켰습니다." 마틴은 마치 상사를 대하듯이 레베카에게 매우 정중한 태도로 예의를 차리고 있었다. 레베카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서 마틴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로라 해리슨 양을 24시간 철저하게 감시하도록 하세요. 경호원들을 시켜서 말이에요. 메드닉 해리슨 회장님의 손녀라고 함부로 전용층을 돌아다녀선 곤란하니까 요. 물론 그녀가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하는 것 아시겠죠?" "물론입니다. 말씀대로 처리하겠습니다." "다니엘이라는 자가 도착했지요?" 레베카가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그 사람에게도 경호원을 붙이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제임스 교수라는 사람이 며칠 내로 방문할 거예요. 그 사람은 메드닉 해리 슨 회장님께서 직접 초청장을 보냈어요. 그 사람도 역시 똑같은 조치를 취하도록 하세 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틴은 레베카의 명령에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마틴의 충실한 태도에 레 베카의 목소리도 조금 부드럽게 변하기 시작했다. "제가 지적한 그 세 사람이 절대로 제 허락없이는 메드닉 해리슨 회장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어떤 일이 있어도 전용층으로 올라오는 일이 절대로 있어서 는 안돼. 아까 있었던 일은 아주 잘 처리했어요. 앞으로 더욱 더 경호원들에게 외부 인은 절대로 이곳에 올라올 수 없다는 걸 주지시키세요." 고개를 끄덕이던 마틴이 몹시 궁금한 것이 있다는 표정으로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레베카." "무슨 일인가요?" "로라 양은 메드닉 해리슨 회장님의 손녀딸 아닙니까?" 레베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레베카가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자 마틴이 계 속해서 입을 열었다. "로라 해리슨 양을 경호하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할아버지의 전용층을 방문하는 것 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마틴!" 레베카가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네." 마틴이 눈을 크게 뜨면서 놀란 듯이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레베카는 이럴 때 마틴과 같은 사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상황을 이해시키기 위해 설명하 기 보다는 보다 철저하게 명령에 따르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은 누구의 지시를 받고 있지요?" 레베카의 목소리는 다시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레베카 양의 지시를 받고 있습니다." "경호실은 어느 부서의 지시를 받게 되어 있지요?' "비서실의 지시를 받고 있습니다." "얼마 후에 길버트 부부의 행사가 열린다는 것을 알고 계시겠지요?" "그렇습니다." "알고 있다면 그런 질문은 당분간 피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네, 알고 있습니다." 마틴은 레베카의 완강한 태도에 그만 기가 질려 버렸다. 오늘밤이면 자신의 부정행 위가 모두 탄로나서 직업을 잃어 버리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마틴은 하루 종일 그 일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이만 돌아가세요." "알겠습니다." 마틴은 비서실에서 나서기 위해 몸을 돌렸다. "잠깐만 기다려요." 레베카가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듯이 다급하게 마틴을 불러 세웠다. 마틴은 다시 뒤로 돌아서서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마틴의 눈에 보이는 레베카의 표정은 조금 전의 레베카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엄격한 상관의 표정이 아주 편안한 연인처럼 변해 있었다. 그런 레베카의 모습을 본 마틴은 몹시 당황했다. "왜 그러시죠?" "저녁 9시 약속을 잊지 마세요." 레베카는 마치 사랑하는 연인의 귓가에 속삭이듯이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는 이내 마틴의 눈을 피했다. 마치 수줍은 처녀가 남자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난 다음의 모습처럼... 마틴은 잠시 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다시 출입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레 베카는 마틴이 비서실에서 빠져 나가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 목덜미에서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레베카는 비서실의 에어컨이 멈추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레베카는 손수건으 로 땀을 닦았다. 이미 땀이 몸 구석구석에서 배어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더운 줄도 모르고 있었다니..." 레베카는 에어컨 타이머를 다시 조정하고 기온을 낮게 맞추어 놓았다. 이내 실내가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찼다. 레베카는 앤소니에게 전화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 늘 하루 동안 벌어진 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앤소니와 상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레베카는 전화기를 집어들고 번호를 눌렀다. 잠시 후에 신호음이 들리더니 앤소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앤소니입니다." "제가 전화했어요." 레베카가 다급한 목소리로 앤소니를 불렀다. "무슨 일이 있나요?" "일을 빨리 서둘러야만 해요, 앤소니.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예요?" "염려하지 말아요, 레베카. 그건 내가 잘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요." 앤소니가 마치 엄마의 잔소리에 대꾸하는 소년처럼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일이 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어요. 지금 이 호텔엔 메드닉 해리슨 회장의 손녀딸 로라가 와 있어요. 아마 내일이 되면 할아버지를 만나게 해 달라고 경찰이라도 부를 거예요." 레베카의 목소리는 조금 전의 마틴을 대하던 엄중한 태도와는 전혀 달랐다. 레베카 는 조급한 목소리로 앤소니를 재촉했다. "염려하지 말아요, 레베카. 이제 붕대만 풀면 다 끝나요." "완벽한가요?" 레베카가 의심스러운 듯이 질문했다. "내 실력에 대해 의심하는 건가요? 똑같이 만들기 위해 다섯 번이나 수술을 했다구 요. 외형적으로는 완벽해요. 문제는 그 역할을 어떻게 잘 소화해 내는가 하는 점에 달려 있어요." 앤소니의 목소리는 매우 자신있게 들렸다. 비로소 레베카도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그건 나에게 맡겨요. 우리는 3년 전부터 이 일을 계획하고 있었어요. 그는 뛰어난 배우이고 모든 습관들에 대해서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어요. 그리고 모든 관계들에 대 해서도 그렇구요." "하지만 로라 해리슨은 쉽지 않을 텐데요?" 앤소니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레베카는 길게 한숨을 한 번 쉬고 나서 말하 기 시작했다. "그게 가장 커다란 문제에요. 로라 해리슨이 예정보다 일찍 바하마로 돌아오게 된 것이 우리의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에요. 하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어요. 우리는 지금 부터 매우 위험한 곡예를 해야만 해요. 전 당신이 잘해 줄 거라고 믿어요, 앤소니." "그래요. 우리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앤소니가 레베카를 대하는 태도는 마치 연인을 달래는 듯 했다. 레베카는 앤소니의 말을 듣고 난 후에야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레베카는 몹시 긴장하고 있었지만 모든 일 이 잘 성사될 거라는 희망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레베카는 수화기를 내려 놓고 퇴근 준비를 서둘렀다. 메드닉 회장의 주치의로 일하는 앤소니의 사무실 내부는 아주 간단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책상 한 개와 구급용 침대, 각종 의학서들이 꽂혀 있는 책장 그리고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는 구급약품과 도구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물론 메드닉 회장의 건강을 위 해 비치된 각종 영양제와 응급약품 및 고혈압 치료제 등이 벽면에 있는 캐비닛에 들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아주 깔끔한 인상을 풍길 수 있도록 잘 정돈 되어 있었다. 앤소니는 전화를 끊고 나서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길게 한숨을 쉬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난 앤소니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계 바늘은 7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앤소니는 조심스럽게 사무실 문을 안에서 걸었다. 그리고 사무실의 불을 모두 껐다. 순식간에 앤소니의 사무실은 아무도 없는 빈 방처럼 어둡게 변했다. 앤소니는 어둠에 아주 익숙한 사람처럼 약품들이 진열되어 있는 캐비닛을 향해 걸어갔다. 그 자리에 멈추어 선 앤소니는 힘껏 캐비닛을 왼쪽으로 열었다. 캐비닛이 서서히 움 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앤소니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밝혔다. 캐비 닛이 있던 자리에는 작은 문고리가 달려 있었다. 앤소니는 그 문고리에 열쇠를 맞추고 왼쪽으로 돌렸다.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앤소니는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작은 밀실이었다. 앤소니는 손을 더 듬어서 작은 전등불을 켜고는 자신이 들어온 벽면으로 캐비닛을 다시 옮겨 놓았다. 그 리고 밀실 안에서 벽문을 다시 닫아 걸었다. 밀실의 내부는 마치 수술실을 연상시키는 온갖 수술 도구들이 널려 있었다. 수술 침 대 위에는 한 남자가 얼굴에 붕대를 감고 드러누워 있었다. 아마도 마취에서 아직 깨 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남자는 앤소니가 안으로 들어와서 불을 켜고 캐비닛을 옮 기는 동안에도 아무런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는지 그대로 가만히 누워 있었다. 앤소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제 마취가 풀릴 시간이 3분 남았다. 앤소니는 서서 히 거울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계속 쳐다 보았다. 앤소니는 레베카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싫은 일이었다. 그는 오직 레베카의 사랑을 얻기 위해 이 일에 뛰 어들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획하면서 밀실을 만들고 수술실을 꾸민 것도 모두 레베카의 솜씨였다. 앤소니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과거에 대해 생각했다. 비록 3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앤소니의 머리 속을 스쳐가는 기억들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다양한 것이었다. 사람의 육성을 그대로 흉내내면서 그 사람의 행동과 버릇까지도 몇 번만 보면 거의 완벽하게 복제할 수 있는 연극배우 출신의 한 남자와 함께 지난 1년 동안이나 이곳 밀 실에서 지내왔다는 생각을 하자 앤소니는 갑자기 거울에 비친 자신이 무서워졌다. 앤소니는 쓴 웃음을 지어 보았다. 자기 자신은 누구보다도 자기 자시에게 친근한 법 이다. 거울 속의 앤소니는 실제의 앤소니를 향해서 웃고 있었다. 하지만 앤소니의 마 음을 전혀 그렇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낯설었던 것이다. 욕 망에 이끌리는 초라한 모습.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미 너무나 깊이 레베카의 음모에 개입되어 있었 던 것이다. 앤소니는 욕망의 끝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앤소니는 매우 긴장된 태도로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환자를 향해 돌아섰다. 이제 곧 그의 실력이 세상에 빛을 드러낼 때가 된 것이다. 얼굴에 붕대를 감고 있던 환자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앤소니가 발바닥을 손가락으로 간지럽히자 환자가 즉각적으로 반응을 나타내었다. 앤소니는 마취가 다 풀렸다고 생각했다. 환자는 오랜 동면에서 깨어난 것처럼 몸을 조 금씩 움직였다. "깨어났군요." 앤소니가 반가운 듯이 말을 걸었다. 그러나 환자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앤소니는 수술용 침대를 약간 세워서 환자를 일으켜 앉혔다. 앤소니는 탁자에서 수술용 가위를 집어 들었다. 수술용 가위는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불빛을 받으면서 번뜩였다. 잠시 후에 앤소니는 환자의 등뒤로 돌아가서 천천히 가위를 들이대었다. 앤소니와 환자의 정면에는 커다란 벽면 거울이 새롭게 탄생할 인간을 환영하기라도 하듯이 번뜩 이고 있었다. 앤소니가 환자의 얼굴을 싸맨 붕대를 천천히 풀어헤쳤다. 그 순간에도 환자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제법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앤소니는 마치 무슨 귀중한 보물을 다루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붕대를 풀어 헤쳤다. 환자의 얼굴을 감쌌던 붕대가 거의 풀려 나가자 턱에서부터 환자의 얼굴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앤소니는 천천히 마지막으로 환자의 얼굴에 감겨 있던 붕대를 풀 어헤쳤다. 마침내 환자의 얼굴이 흐린 불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직은 웃거나 찡그리지 마십시오." 앤소니는 벽면에 걸려 있는 거울에 나타난 환자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앤소 니는 한참 동안이나 아무런 말도 없이 환자의 얼굴을 보고 가만히 서 있었다. 환자의 얼굴에 무슨 잘못된 점이라도 있는지 자세하게 살펴보았던 것이다. 앤소니가 환자의 얼굴을 조사하는 동안, 환자는 계속 의사의 눈만을 뚫어지게 쳐다보 고 있었다. 무언가 앤소니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눈빛이었다. 앤소니는 손으로 목덜미의 주름을 만져 보았다. 수술은 대성공이었다. 목덜미의 주 름살까지 완벽하게 재현했던 것이다. 앤소니는 활짝 웃으면서 환자에게 말을 하기 시 작했다. "축하합니다, 메드닉 해리슨 회장님. 수술이 완벽하게 끝났습니다. 기분이 어떻습니 까? 마음에 드십니까?" 앤소니가 성공적인 수술을 했다는 표정과 말투를 섞어가면서 물어 보았다. 하지만 거울 속의 메드닉 해리슨은 입을 다문 채 미소를 지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레베카의 별장은 해변에서 약간 떨어진 언덕에 위치하고 있었다. 목재로 지어진 고 전적 형태의 별장 입구에는 온통 무성한 수풀로 뒤덮여 있었다. 깊은 밤의 정적을 깨 는 풀벌레들이 계속 울어대고 있었고 해변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에 수풀이 서걱거리 면서 부딪히는 소리가 또 하나의 파도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현관에는 작은 전등이 숨을 죽이면서 바람에 흔들렸다. 전등 주위로는 빛을 찾아온 온갖 해변의 곤충들이 저마다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별장 뒤쪽으로는 바하마 의 해변이 드넓게 펼쳐져 있어서 창가의 발코니에서는 해변의 전경을 한눈에 즐길 수 있었다. 레베카는 샤워실에서 온수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름에도 차가운 물보다는 미지 근한 온수로 목욕을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향비누의 거품이 그 녀의 피부를 감싸고 있는 동안 레베카는 자신이 숲속에 들어와 있다는 상상을 하곤 했 다. 레베카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의 비밀은 사실 향수가 아니라 바로 이 비누에 있었다. 거품 목욕을 하고 나면 며칠씩 자신의 몸에서 촉촉한 수풀의 향기가 흘러나오기 때문 에 그녀는 이 온수욕을 좋아했던 것이다. 욕탕에 앉아 있는 레베카의 모습은 아까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한가롭게 여유를 즐기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갑자기 거실에서 전화 벨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레베카는 커다란 목욕수건으로 몸을 감싼 채 거실로 나와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일이 잘 끝났습니다." 수화기에서 앤소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아주 흥분 한 상태였다. "어떻게 되었나요?" "아주 완벽합니다. 나의 예상보다 상태가 더욱 좋아요." "축하해요, 앤소니!" 레베카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앤소니는 레베카가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 행복을 느꼈다. "지금 약간의 분장을 하고 있어요. 이제 마음을 놓아도 됩니다." "아주 잘했어요, 앤소니. 정말 잘 되었어요." 레베카는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레베카는 너무나 좋은 나머지 소리를 지를 뻔했다. 하지만 지금은 침착해야 할 때였다. 정작 중요한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레베카도 잘 알고 있었다. 레베카는 모든 일들이 예정대로 되어간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성을 되찾았다. 계획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아주 냉철한 감정을 유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그 법칙에 철저히 순응하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레베카는 샤워를 마치고 거실로 들어와서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계는 8시 30분을 가 리키고 있었다. 레베카는 기초 화장을 가볍게 하고 나서 가장 섹시한 색깔의 립스틱을 골라 진하게 발랐다. 레베카는 옷장으로 걸어가서 실크 드레스를 꺼내 입었다. 실크 드레스는 허벅지의 선이 깊게 패여 있어서 아주 요염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녀는 화장대 위에 있 는 향수병을 꺼내 목덜미에 향수를 발랐다. 이미 자신의 몸에서는 비누향이 풍겨 나오 고 있었지만 그녀는 오늘만을 짙은 향수를 뿌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레베카는 거실로 들어가서 탁자 위에 있는 포도주와 두 개의 잔을 확인했다. 거실의 타자 주변에는 서너 개의 양초를 놓았다. 양초는 은은한 빛깔을 내는 노란색에서부터 밤의 정취를 불러일으키는 파란 양초, 정열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붉은색 양초까지 두루 갖추었다. 오디오 위에도 몇 개의 양초가 놓여 있었고 장식장의 선반 위에도 몇 개의 양초가 놓여 있었다. 현관 근처에도 양초가 배열되어 있었다. 레베카는 양초들이 놓여 있는 곳에 각각 불을 붙일 성냥을 하나씩 갖다 놓고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블루스 연주 음악을 조용히 들으면서 9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마틴은 레베카의 별장을 향해 자동차를 몰고 있었다. 마틴은 서둘러 지난 6개월 동 안의 경호실 예산 사용 지출내역 자료를 정리하면서 거의 정신이 나가 있었다. 서류를 위조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틴은 한 번도 자기에게 이런 곤혹을 치 르도록 하지 않았던 레베카가 이번에는 단단히 벼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 다면 자신의 별장으로 직접 보고를 하러 오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틴은 그래도 호텔의 업무시간 외의 시간을 이용해서 자신을 불러준 레베카에 대해 약간 고마운 마음까지 품고 있었다. 하지만 마틴의 심정은 자동차를 몰고 있는 이 시 간에도 여전히 불안했다. 레베카가 이 서류를 보고 난 후에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레베카의 별장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불빛이 보이자 마틴 은 갑자기 자동차를 멈추었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서 이마의 땀을 닦고 불어오는 바닷 바람에 더위를 식혔다. 그는 땀을 닦으면서 자신이 미리 준비한 서류를 천천히 읽어보 았다. 시계는 8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틴은 서둘러 다시 자동차를 몰았다. 레베카 는 마틴의 자동차가 집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도 마틴 은 몹시 긴장하고 있을 것이다. 레베카는 이미 마틴의 반응에 대해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마틴이 자동차의 시동을 끄고 내리자, 레베카는 현관을 열어 주었다. 마틴은 정중한 태도로 레베카에게 인사를 한 후에 안으로 들어섰다. 마틴이 들어선 거실은 아주 은은 한 양초가 타오르고 있었다. 너무 어둡지도 너무 밝지도 않았다. 상대방의 표정을 읽 기에는 아주 좋은 조명이었다. 레베카는 친절한 태도로 마틴을 소파로 안내했다. 마틴은 소파에 앉아서 다소 긴장 된 표정으로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보고 서류는 준비되었나요?" "여기 있습니다." 마틴은 서류를 꺼내서 레베카에게 전해 주었다. 레베카는 아주 진지하게 그 서류를 살펴보았다. 마틴은 그 시간이 아주 길게만 느껴졌다. 마틴은 레베카가 서류를 읽어 보고 있는 동안 거실의 곳곳에 시선을 두고 분위기를 읽으려고 노력했다. 은은한 분위기의 양초가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 아직 불은 붙이지 않았지만 마치 불을 붙여 달라고 조르는 것처럼 놓여 있는 가지각색의 양초들 그리고 은은하게 깔려 나오는 블루스 음악 등이 마틴의 감정을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마틴의 정신이 거실의 분위기에 팔려 있는 동안 레베카는 정곡을 찌르는 말을 던졌다. "마틴, 호텔에서 근무하신지는 얼마나 되었죠?" "지난 2년 동안 일했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이 서류로 내일 오전에 회장님에게 보고를 해도 되겠어요?" 마틴은 그 순간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예산 사용내역의 결재에 대한 것만큼은 지금까지 한 번도 회장님에게 결재를 올린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레베카 양, 예산 사용내역은 예전에도 비서실에서 직접 결재하시지 않았습니 까?" "이번부터는 조금 달라졌어요. 모든 일을 회장님께서 직접 결재하시기로 했어요. 특히 인사 문제에 관해서도 말이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틴은 정신이 아찔했다. 레베카가 자신의 비리를 눈치채고 회장 님에게 보고를 하려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틴은 해고를 당하는 것이 너무나 두 려웠다. 레베카가 다시 서류를 쳐다보자, 마틴의 눈에는 갑자기 레베카가 메드닉 해리슨 회장 의 권위보다 더 높은 권좌에 오른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마틴은 다급하게 사정하 기 시작했다. "레베카, 한 번만 양해를 해 주십시오. 이번에는 제가 큰 잘못을 했습니다. 제발..." "닥치세요. 회사의 공금을 이렇게 근거없이 횡령해 놓고 경호실장 자리에 앉아 있겠 다는 게 말이나 돼요? 경호실은 회장님께서 가장 아끼는 부서예요. 부하직원을 이렇게 못믿게 되어서야 어떻게 회장님께서 마음 편하게 일을 하실 수 있겠어요. 안 그래요?" " 맞습니다. 제가 일자리를 잃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동안 저는 회장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걸 정도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회장님의 경호를 위 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결과 회장님께서도 저를 신뢰하셔서 경호실장의 자리에 앉히신 것을 잘 압니다. 제가 일자리를 잃는 것은 당연하지만 회장님께서 저를 신뢰했던 그 믿음만큼은 제가 저버리지 않도록 이 사실을 알리지는 말아 주십시오. 회장님을 실망 시켜 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레베카..." 마틴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그는 마치 메드닉 해리슨 회장의 면전에서 용서를 구하고 있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베카는 마틴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마틴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처 럼... "마틴,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뿐만 아니라 비서인 저도 회장님을 실망시켜 드 리고 싶지 않은 건 마찬가지니까요. 하지만 이 점만은 분명히 알아 두세요. 지금 당 신이 저지른 일은 엄격히 말해서 일자리를 내 놓아야 할 정도예요. 이것이 실수이든 아니면 고의적인 횡령이든 당신은 모종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예요. 어떻게 하시겠 어요?" 마틴은 더욱 레베카 앞으로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저는 오직 경호 업무만 해 왔습니다. 제가 일자리를 잃는다면 앞으로 제 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과거에는 운동 선수였다는 이유만으로도 직업 을 얻기가 어려웠습니다. 다행히 메드닉 해리슨 회장님의 경호원으로 일하게 되어서 열심히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번 일을 회장님에게 보고하지만 말아 주신다면 어떤 것 으로든 은혜를 갚고야 말겠습니다." 레베카는 일이 너무나 순조롭게 진행되어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틴을 자기 편으 로 포섭하는 것은 어쩌면 대단히 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확실한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레베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마 틴은 계속 중얼거리면서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그 순가 레베카는 마틴을 바라보면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틴의 눈에서 뜨거운 눈 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마틴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베카는 마틴의 모습을 보면서 측은한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마틴은 매우 단순한 사람이었다. 이 정도라면 앤소니를 자기 편으로 만들었던 방법을 쓰지 않고서도 마틴 을 자기 손아귀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생겼다. 레베카는 계속 침묵을 지키면 서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확신이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이 들었다. 만약 마틴의 속마음이 정말로 이렇게 진실하고 약하다면, 만약 나중에 큰 일이 벌어 질 경우 나를 쉽게 배신할지도 모른다. 마음이 약한 사람일수록 쉽게 감동하고 쉽게 배신하는 법이기 때문에... 내가 마틴을 구해 주더라도 그는 언제나 나의 은혜만을 위해서 충성을 다할 사람도 아니다. 그는 또다시 횡령을 저지를 수 있고 더욱 교묘한 방법으로 나를 속일지도 모 른다. 지금은 마틴이 순진한 척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할 까? 무작정 정의롭고 착하면 순진한 성격은 정말로 쓸모없는 거라는 사실을 레베카는 잘 알고 있었다. 레베카는 마틴은 공금을 마음대로 횡령하긴 했지만 사실 마음만은 너무 순진하기 때문에 작은 그릇밖에는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머리 속에서 내리고 있었다. 레베카는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마틴에 대한 일종의 연민을 애써 가라앉혔다. 레 베카는 마틴이 지금 한 편의 연극을 공연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틴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그의 연극보다 더욱 훌륭한 연극을 이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녀 는 과거에 앤소니를 사로잡았던 방법보다 더욱 확실하게 마틴을 옭아맬 수 있는 방법 을 떠올렸다. 레베카는 서서히 더욱 커다란 대어를 낚기 위해서 미끼를 던지기 시작했다. "오, 마틴. 이제 그만 울어요. 제가 너무 했군요." 레베카는 손수건을 들고 마틴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녀는 마치 실의에 빠진 연인 을 달래듯이 마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마틴, 제발 울지 알아요. 제가 너무했어요." 레베카는 마틴이 보기에 정말로 마음이 약한 여자였다. 마틴은 자신의 연극이 성공 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마틴은 어린 아이처럼 자기 옆으로 다가와서 위로하고 있 는 레베카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조금 더 애절하게 흐느꼈다. 레베카는 마틴 의 머리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없이 그의 머리카락에 자신의 얼 굴을 묻었다. 마틴은 레베카의 몸에서 은은히 풍겨 나오는 향기에 점점 더 취하고 있었다. 마틴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서 레베카의 목덜미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레베카는 고개를 천천히 뒤로 젖힌 채 서서히 파고드는 마틴의 숨결을 느끼고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마틴. 당신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음악이 아무래도 필요 할 거예요." 레베카는 마틴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천천히 일어나 오디오가 있는 장식장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미리 준비해 둔 조용한 음악을 틀었다. 순식간에 거실의 분위기는 농도 짙은 카페로 변한 느낌이 들었다. 마틴의 정신은 오로지 레베카의 날씬한 몸매에 빠져 있었다. 레베카는 미리 준비해 둔 성냥에 불을 당겨서 촛불에 불을 붙였다. 촛불에 불이 붙으면서 실내는 점점 온화 한 분위기로 변하기 시작했다. 레베카는 다시 마틴을 향해 걸어가며 두 손을 벌렸다. 마틴은 레베카의 품으로 들어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베카는 마틴의 얼굴을 가슴에 묻고 소파로 넘어졌다. 마틴과 레베카는 가볍게 입을 맞추고 서서히 농도 짙은 키스로 옮아갔다. 레베카의 혀가 마틴의 입 속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가자 마틴은 더욱 깊게 자신의 입 속으로 그 녀의 모든 것을 빨아 들였다. 그러면서 마틴은 서서히 적극적인 태도로 돌변했다. 입을 맞춘 상태의 두 사람은 서서히 소파에서 일어났다. 레베카는 마틴의 넥타이를 벗기고 드레스 셔츠의 단추를 서서히 풀었다. 마틴의 상체가 거의 드러나자 그는 레베 카의 드레스 지퍼를 등뒤에서 서서히 풀어 내렸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두 남녀의 호흡은 아주 가파르게 변해갔다. 마틴은 레베카의 알 몸을 번쩍 들어안고 소파 위에 앉았다. 마틴의 허벅지 위에 앉은 레베카는 서서히 마 틴의 심벌이 자기의 몸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면서 길게 탄성을 질렀다. 마틴은 아주 능숙하게 레베카를 이끌었다. 작은 소파 위에서 마틴은 정상위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소파에 등을 기댄 마틴과 그 위에서 허리를 움직이던 레베카는 천천 히 자세를 바꾸어 가면서 깊은 애정을 나누었다. 갑자기 탁자 위에 있던 컵들이 바닥으로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마틴은 거칠게 레베 카를 탁자 위에 눕혔다. 그리고 더욱 세차게 허리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레베카는 더욱 크게 신음을 터뜨렸고 마틴의 숨소리도 역시 더욱 거세게 변해갔다. 두 사람이 절정에 오르는 순간 마틴은 레베카의 육체를 번쩍 들어 올렸다. 레베카는 두 손은 마틴의 목에 감고 두 다리를 마틴의 허벅지에 걸친 상태가 되었다. 두 사람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레베카는 마틴의 허리 움직임에 따라 비음을 지르면서 그의 품에 안겼다. 마틴의 몸 에서 송글송글한 땀이 솟아났다. 절정에 달하는 순간 마틴은 레베카를 끌어안고 소파 에 주저 앉아 버렸다. 두 사람은 소파에 누워서 마지막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관계가 끝난 후에도 두 사람은 서로 알몸이 된 채 소파 위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정사를 마치자 마틴은 매우 행복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레베카가 바라던 그대 로였다. "마틴." "말해 보세요, 레베카." 그들은 아주 다정한 연인 사이가 된 것처럼 입술을 가까이 대고 대화를 하기 시작했 다. "당신은 아주 멋진 남자예요." "레베카, 당신이야말로 내가 만난 여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입니다." "고마워요, 마틴. 그런데 한 가지 제안을 해도 되나요?" 마틴은 뜨거운 키스로 대답을 대신했다. "당신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어요. 제 말만 잘 듣는다면 말이에요." "무슨 일이죠?" "당신의 월급을 지금보다 두 배나 더 올려 주겠어요." 마틴은 레베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어리둥절했다. "월급을 두 배로 올려 주다니?" "아니, 월급뿐만 아니라 보너스까지 두 배로 지급할 수 있어요." 마틴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었다. 레베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궁금해하는 마틴을 쳐다보면서 다시 말을 꺼냈다. "한 가지 비밀만 지켜 주면 됩니다." 마틴은 갑자기 레베카의 입에서 비밀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매우 놀라는 듯한 표정 을 지었다. 그러면서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자 레베카의 손가락이 마틴의 입을 막았다. "어려운 게 아니에요. 사실은..." 마틴은 자신의 귓볼에 다가오는 레베카의 입김에 서서히 취해갔다. 마틴은 레베카라 는 여인을 얻고 그녀를 정복한 것이 매우 행복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한 남자로 서 신뢰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아주 기뻤다. 자신의 약점을 감싸주고 또 많은 돈을 벌 게 해 준다니... 마틴은 그렇게 자신의 연극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레베카의 음모에 말려 들 어간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알지 못했다. 레베카는 마틴의 머리 꼭대기에서 서서 인 형극을 조종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 5 장 죽음을 부르는 고속도로 공항의 대합실에는 새벽부터 비행기를 타려는 승객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이 되자 단체 여행객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고 공항 내부의 대합실은 마치 시장처 럼 복잡하게 되었다. 한 남자가 공항의 출입문을 열고 들어섰다. 키가 커다란 그 중년 남자는 검은 선글 라스를 낀 모습이 잘 어울렸다. 가벼운 옷차림에 오른쪽 어깨에 가방을 둘러맨 것으로 보아 그 중년 남자는 영락없는 여행객으로 보였다. 그는 비행기표의 예약을 확인하기 위해 탑승권을 발급하는 곳으로 걸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공항 여직원이 그 남자를 쳐다보면서 친절하게 물었다. 선글라스를 낀 중년 남자는 주위를 의식하듯이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대답했다. "바하마행 비행기표를 예약했습니다." "귀하의 성함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피터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 남자는 초조한 듯이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공항 여직원은 별 로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듯이 컴퓨터 모니터에 나온 승객의 명단을 살펴보기 시작했 다. 이내 피터의 명단을 확인한 여직원은 그에게 비행기표를 전해 주었다. 그 남자는 사십대 초반의 나이였지만 건장한 체격에 건강미가 넘치는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활주로에는 수많은 비행기들이 줄을 지어 이륙하거나 착륙하고 있었다. 여름 휴가철은 여행의 성수기였기 때문에 공항의 활주로는 거의 뉴욕의 러시아워를 떠올릴 정도로 복잡했다. 그만큼이나 이착륙하는 비행기들도 많았고 승객 또한 많이 이동했 다. 그 남자는 자신이 탈 비행기에 올랐다. 스튜어디스의 친절한 목소리로 인사하자 그 남자는 정중한 태도로 대답하는 여유를 보였다. 그는 자신의 비행기표에 적혀 있는 좌 석을 찾기 위해 승무원에게 부탁했다. "이코노미 클라스 좌석 47 A입니다. 좀처럼 찾기가 어렵군요." 멋진 중년 남자의 정중한 부탁을 받은 스튜어디스는 친절하게 그를 좌석 47 A로 안 내해 주었다. 그리고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 달라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 좌석을 안 내받은 그 남자는 상의를 벗어서 옷걸이에 걸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착 용했다. 잠시 후에 비행기가 힘차게 이륙하기 시작했다. 5분 정도 지나자 승무원들은 승객들 에게 안전벨트를 풀어도 좋다고 말했다. 그 남자는 안전벨트를 풀고 조금 더 느긋한 자세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왜 이 비행기를 탔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단순한 여행객 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는 전문적으로 여행을 즐기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비즈니 스맨도 그리고 어떤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이봐, 피터!" 스스로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무언가에게 쫓기고 있거나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하는 경우가 많았다. 피터도 역시 그런 경우에서 예외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피터는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는 말을 꺼냈다. "피터! 넌 네 인생을 결코 허비해선 안 돼. 정말로 멋지게 살다가 죽어야 해. 단 한 번만이라도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살다가 가야 한다구. 네가 살아온 삶을 돌아보라구. 네가 가야 할 곳은 오직 하나야. 너의 인생을 새롭게 만들었던 곳, 아니, 너의 인생을 아주 망쳐 버린 곳, 그곳으로 가는 거야. 바하마로... 신은 나를 이렇게 함부로 내팽개 치지 않을 거야." 그는 스스로 자신이 이렇게 비참한 신세로 살아갈 사람이 아니라고 자위했고 시간이 날 때마다 새로운 사업과 새로운 일들을 꿈꾸었다. 하지만 지난 시간 동안 피터는 손 을 대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했다. 피터의 낙천적인 성격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벌써 길거리로 나앉아 버렸을 것이다. 그는 언제인가는 자신이 크게 성공할 거라고 지금도 믿고 싶었다. 그는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오래 전에 피터는 중고 자동차 매매업을 시작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사업은 끊 임없이 이어지는 자동차 업계의 불황으로 인해 계속 실패를 거듭했다. 피터는 초라한 월세 아파트에서 항상 집세를 걱정하며 지내야 했고 급기야는 부도를 막지 못하고 도 주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 당시에 피터는 항상 술에빠져 있었다. 그는 독한 보드카를 입에 달고 살았다. 하지만 언제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 이 비행기를 타고 바 하마로 향하는 피터의 마음도 그 무렵의 심정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피터는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계획한 것을 추진하는 일에는 대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 나에게 필요한 건 휴식이야. 그리고 나서 다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거 야." 피터는 자기를 답답하게 했던 그 지긋지긋한 도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일단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당장 그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그래, 이 지저분한 도시를 떠나는 거야.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지? 아무래도 멋진 일을 만들 수 있는 곳이 좋겠는데..." 피터의 머리 속에는 낭만의 섬 바하마라는 화려한 휴양지가 떠올랐다. 그는 20여 년 전에도 바하마를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그에게 꿈을 안겨 주었던 곳... 비록 20년 전의 일이지만 피터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그 시절을 떠올렸다. 하지만 너무나 오래된 일이라 그 기억을 떠올리는 일에는 수많은 기억의 고리들이 필 요했다. 바하마. 피터는 드디어 그 무렵의 일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자신의 머리 속에는 아직도 그 기억이 지워지지 않고 살아남아 있었던 것이다. 피터는 아주 진지한 태도로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피터의 나이는 스물한 살이었다. 막 해병대를 전역하고 일자리를 찾기 위해 도시의 곳곳을 전전하다가 결국 얻은 것이라는 게 아르바이트로나 할 수 있는 자동차 세차였 다. 해병대의 생활이 몸에 밴 피터는 그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6개월 만에 그 만두었다. 다른 직업을 찾기 위해 직업소개소를 전전하던 피터는 어느 날 우연히 신문 광고에 서 바하마 해변의 수상 안전 요원을 선발하다는 문안을 보게 되었다. 피터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하마로 달려갔다. 수상 안전 요원은 곧 피터의 일이었던 것이다. 피터는 당장 바하마로 달려가서 안전 요원 선발 시험에 응시했다. 건장한 체격에 아 주 잘 생긴 용모를 지닌 피터는 인명 구조 심사에 합격해서 바하마의 1급 수상 안전 요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해마다 여름이 찾아오면 피터는 여행객들을 위해 분주하게 일했다. 수상 안전 요원으로 있으면서 피터에게 가장 즐거웠던 일은 젊고 섹시한 여자들을 많이 사 귈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피터는 수상 안전 요원으로 일하면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구했다. 그가 구해 준 여성들은 대부분 피터에게 그날의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다가왔고 피터는 안전관리 업무가 끝나면 주위의 호텔로 바로 찾아가서 그 여자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 을 보냈다. 술을 한두 잔 하면서 대화를 나누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서로 껴안고 춤을 추었 다. 피터가 여자들과 블루스를 한번이라도 추게 되면 여자들은 은근히 그의 품에 안겨 왔다. 그날 밤 피터는 그녀를 자동차에 태우고 해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자신 의 숙소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목숨을 구해 준 대가로 아무런 거리감도 없이 다가오 는 여자들의 육체를 즐겼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대가로만 의미가 있었다. 여자들은 잘 생기고 멋진 피터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의 육체를 던졌지만 마음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피터 와 관계를 가졌던 여자들은 모두가 휴가를 마치고 돌아간 뒤에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피터는 이렇게 사는 자신이 아주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애정행 각을 통해서 피터는 여자를 다루는 기술이 남다르게 발전하게 되었다. 지금은 비록 나 이가 마흔이 넘어선 처지였지만 피터의 그 당시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불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바하마에서 일하는 동안 피터에게는 수많은 여자를 사귈 수 있다는 즐거움과 함께 거액의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피터는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가슴에서 피가 끓어오르는 충동을 느꼈다. 그 일은 자기에게 많은 돈을 벌게 해 준 일이었지만 거꾸로 바하마에서 꽃피우던 자신의 청춘을 영원히 앗아간 일이기도 했다. 그는 어쩔 수 없는 그 현실들을 애써 부인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때의 삶이 지금까지 자기 인생에게 커다란 아픔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바하마에서 지내던 젊은 피터는 마약상들의 밀매를 도와 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처 음에는 밀수꾼들의 해상 밀수를 도와주면서 돈벌이를 했으나 나중에는 직접 밀매에 손 을 대면서 돈을 받게 되었다. 해병대를 나온 피터는 수중 잠수 실력이 남달리 뛰어났던 점 때문에 마약 밀매자들 에게 아주 좋은 대접을 받았다. 그들의 거래는 해안 순찰대의 눈에 잘 뜨이지 않는 바 다 위에서 이루어졌다. 마약 거래자들이 요트를 타고 지정된 장소에 도착을 하면 피터 는 그곳까지 잠수를 해서 다가갔다. 피터가 배 위로 올라가면 그들은 마약 상자를 꺼 내서 피터에게 먼저 확인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피터는 마약 성분을 확인하고 돈 가방을 건네 주었다. 그리고 그 가방을 들고 다시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서 해변의 절벽 부근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피터가 특히 안전하 게 이 일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수상 안전 요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밤늦게라도 해 변가의 출입이 자유로울 수 있었던 이점 때문이었다. 마약 밀매를 도와주면서 피터가 벌어들인 돈은 제법 많아졌다. 하지만 돈이 불어날 수록 피터의 욕망도 더욱 커지게 되었다. 그는 아주 큰 거래가 있던 어느 날 밤 거래 를 마치고 돌아와서 상자를 뜯은 후에 수백 그램의 마약을 훔쳐내었다. 피터가 마약을 훔친 방법은 아주 지능적이었다. 피터는 미리 밀가루의 무게와 마약 의 무게를 비율로 따져서 일률적인 비례표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각각의 마약 봉지 에서 소량의 마약을 꺼내고 그 안에 동일한 무게만큼의 밀가루를 집어넣어서 조심스럽 게 혼합했다. 아주 많은 양의 마약에 소량의 밀가루를 섞는 것은 전문가가 아닌 이상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웠다. 피터는 성공적으로 훔쳐낸 마약을 팔아서 돈을 만들기 위해 직접 마약 판매 루트를 알아 보았다. 거래선을 알아 보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결국 그는 바하마를 찾아오는 휴양객들 중에 마약 중독자가 더러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밤마다 호텔의 나이트 클럽이나 바를 얼씬거렸다. 그는 몇 번의 시도를 통해 소량의 마약을 팔 수 있었다. 피터는 그 일을 통해 아주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거래선을 알아 보고 있는 피터에게 누군가 마약이 필요하다고 접근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마약 거래상의 조직원이었다. 그들이 냄새를 맡고 피터를 감시하던 중에 덜미를 잡기 위해 쳐놓은 덫에 걸려 들었던 것이다. 피터는 자신의 행위가 드러난 사실을 알고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들의 손에 사로잡히 고 말았다. 피터는 피투성이가 된 채 해변의 한적한 별장의 음침한 지하실로 끌려갔 다. 그 당시에 피터는 자기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했었다. 애초부터 피터는 그 들에게 두 손을 모아 애원하듯이 빌어 볼 생각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들의 잔인성을 잘 알고 있었던 피터는 아무리 빌더라도 그들이 결코 살려두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대신에 피터는 그들과 맞서면서 빨리 북이라고 소리쳤다. 피터는 오랜 시간 동안 온갖 고문을 당했다. 피터는 재발 자기를 죽여 달라고 했지 만 마약 밀매조직의 보스는 피터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어째서 날 죽이지 않는 거지?" 천장에 매달린 채, 끊임없이 구타를 당하던 피터가 입을 열었다. 보스는 서서히 피 터 앞으로 다가오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죽여 달라는 건가? 너 하나쯤이야 사실 파리 목숨이지. 하지만 너처럼 용감한 놈을 너무 쉽게 죽이는 건 아까운 일이야. 안 그런가?" "어차피 나는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어떤 협박도 나에게는 안 통할 거야." "피터, 우리 조금은 냉철하게 이야기를 하는 게 어때? 우리 타협을 한 번 해 보자 구." 보스의 말에서 타협이라는 소리를 듣자 그 순간 피터는 생명에 대한 강한 의욕이 다 시 생겨나기 시작했다. 피터에게는 실날처럼 가느다란 희망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피터는 이미 지칠대로 지친 몸이어서 어떤 대화도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놈을 풀어!" 피터와 대화를 나누던 보스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옆에 서 있던 부하들이 피 터를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는 거구가 산더미만한 놈이 다가오더니 양동이에 물을 담 아서 피터의 얼굴에 세차게 부었다. 피터는 물세례를 받고 약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보스는 피터가 어느 정도 정신 을 차리자 다시 말을 걸었다. "한 가지 요구만 들어 주면 일단 목숨은 살려 주겠다. 어떤가?" 피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좋아, 목숨을 살려주고 마약도 돌려받지 않겠다. 그리고 자네가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돈도 주겠어. 현금으로 지불하겠단 말이야." 그 상황에서 피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피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 었다. "좋다. 그런 조건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 "역시 생각한 대로 똑똑한 친구로군." "내가 할 일은?" "살인!" 피터는 깜짝 놀라면서 보스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피터는 건달처럼 살아왔지만 그 의 직업만큼은 인명을 구조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살인이라니...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뉴욕에서 살고 있는 젊은 부부를 없애 주게. 일이 끝나면 자네는 통장으로 입금되 는 돈을 가지고 바하마를 떠나면 끝이야. 자네는 뉴욕에서 살았으니까 지리도 잘 알 거야." 피터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피터는 청부 살인을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그곳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보스는 피터가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 이자 다른 부하들을 시켜서 극진히 대접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열흘의 기간을 두고 피터가 제거해야 할 목표물에 대해 자세히 알려준 뒤에 그를 뉴욕으로 보냈다. 뉴욕으로 날아온 피터는 일 주일 동안 청부 살인을 치밀하게 계획했다. 그는 일단 자신이 죽여야 할 젊은 부부의 일상을 낱낱이 감시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첫날부터 그 들을 미행하던 피터는 두 부부가 동일하게 연극 배우이며 그들이 며칠 후에 공연의 리 허설을 위해 보스턴으로 떠난다는 정보를 알아내었다. 피터는 보스턴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로 자동차를 몰았다. 젊은 부부가 보스턴으로 향 하는 날은 평일이었다. 평일에는 고속도로가 비교적 한적할 것이다. 피터는 보스턴으 로 가는 한적한 고속도로에서 두 사람을 해치우기로 결정을 하고 적절한 장소를 답사 했다. 살인을 예정했던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을 때, 피터는 젊은 부부의 집으로 침입했 다. 피터는 차고로 들어가서 1단계 작전에 착수했다. 피터가 설치했던 것은 유압이 높아지면 브레이크액이 흘러나오도록 하는 장치였다. 1단계 장치를 끝내고 숙소로 돌 아온 피터는 밤새 술을 마셨다. 피터는 생전 처음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살인할 때의 순간보다는 오히려 살인을 기다리는 시간이 더욱 악마적인 것이었다. 피터는 위스키에 진정제를 타서 마 셨다. 아무래도 좀처럼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더구나 새벽이 되자 비까지 내렸다. 청부 살인을 하는 전문가들은 좀처럼 긴장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을 저지르는 순 간까지, 아니 일을 저지른 순간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죽 여야 하는 사람이 자기와 어떤 원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와는 전혀 원한 관계가 없기 대문에 느낄 수 있는 여유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오히려 상대가 왜 죽어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행해지는 살인이기 때문에 살인자를 더욱 편안하게 만드 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청부 살인 전문가들에게 사람의 목숨은 한낱 파리 목숨처 럼 보이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피터는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했다. 새벽의 여명이 서서히 밝아 오자 몹시 피곤했던 피터는 잠시 눈을 붙였다. 피터는 자명종 소리에 기계적으로 잠에서 깨어났 다. 시계는 벌써 7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순간 창밖에서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피터는 간단하게 얼굴을 씻고 젊은 부부의 집 앞에서 대기해 놓은 자동차에 몸을 싣고 기다렸다. 얼마 있지 않아서 젊은 부부가 타고 있는 자동차가 그 집의 차고에서 빠져나왔다. 피터는 비를 맞으면서 마지막 여행길에 오르고 있는 젊은 부부의 검은색 자동차를 따 라가기 시작했다. 젊은 부부의 자동차가 한적한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평일 아침에다 비까지 내려서 인지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은 거의 없었다. 피터는 검은색 자동차와 아주 먼 거 리를 유지하면서 계속 따라갔다. 드디어 검은색 자동차가 가파른 언덕이 길게 이어져 있는 산등성이로 접어들었다. 피터는 점차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비는 점점 더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피터는 긴장된 상태로 젊은 부부의 자동차가 언덕길을 따라 달리다 브레이크가 파열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피터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발생했다. 앞에서 달려가던 검 은색 자동차가 언덕 아래에서 멈추어 선 것이다. 약간 떨어진 채 뒤따르던 피터는 무 슨 일인지 알아 보기 위해 자동차의 속도를 늦추었다. 피터의 시야에 들어온 두 부부는 자동차 안에서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피터 는 계속 서행을 하면서 그들의 생동을 감시했다. 그런데 검은색 자동차에서 내린 남자 가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듯이 자동차의 앞쪽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의 아내도 뒤 따라 차에서 내리더니 남편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 남자는 자구만 자동차의 밑부 분을 들여다보면서 무언가를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피터는 순간적으로 몹시 당황했다. 만약 젊은 부부가 자동차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면... 갑자기 피터는 이번 일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치 밀하게 계획했던 일을 여기에서 허무하게 마칠 수는 없었다. '지켜보다가 여차하면 직접 해치울까? 아니야, 그렇게 하면 아마도 내가 이 고속도로 를 빠져 나가기도 전에 잡힐 거야. 그렇다면 어떻게 하지?' 마침내 피터의 자동차가 검은색 자동차에 거의 닿을 때까지 다가갔다. 어쩔 수 없이 피터는 서서히 자신의 자동차를 검은색 자동차 뒤에 정차시켰다. 그는 자동차에서 내 리며 젊은 부부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피터는 젊은 부부가 서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면서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브레이크에 이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상하군요. 사흘 전에 점검받을 때만 해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젊은 남자는 다시 자동차 밑으로 고개를 들이 밀었으며 여자는 남편이 젖지 않도록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그 순간 피터는 검은색 자동차의 옆을 지나가다가 차 안에 어린 아이가 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갑자기 피터에게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피터는 젊은 부부들이 자 동차를 고치는 사이에 몰래 아이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나서 곧장 자기 차로 달려가서 아이를 싣고 차를 몰기 시작했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여자가 자동차 안을 확인하다가 남편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 큰일났어요! 아이가 없어졌어요! 저 사람이 우리 아이를 데려갔어요!" 남편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속력을 내면서 달려가는 피터의 자동차를 바라보았다. 그는 재빨리 자동차에 올라탔다. 여자도 뒤따라 자동차에 올라탔다. 젊은 남자는 다 급하게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시동이 걸리자 남자는 가속기를 힘껏 밟았다. 피터의 자동차는 이미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아이의 엄마는 미친 듯이 울부짖 었다. 남자는 점점 속력을 높이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속력을 내 는지도 모르는 채 전 속력을 다해 피터를 뒤쫓기 시작했다. 피터의 자동차는 경사가 가파르고 급커브가 많은 산악 도로로 접어들었다. 그는 의 식적으로 검은색 자동차가 거리를 좁혀 오도록 속도를 늦추었다. 검은색 자동차는 무 서운 속도로 피터의 뒤를 추격했다. 피터는 검은색 자동차의 접근을 확인한 후에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급커브길을 돌았 다. 그 뒤로 검은색 자동차도 커브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브레이크에 이상이 생긴 검은색 자동차는 달려오던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그대로 도로를 벗어나 언덕 아래로 튕겨지면서 날아가기 시작했다. 피터는 자동차를 멈추고 언덕 아래를 바라보았다. 젊은 부부가 타고 있던 검은색 자 동차는 언덕 아래로 굴러가다가 커다란 바위에 부딪혔다. 그리고 잠시 후에 요란한 소 리와 함께 불이 나기 시작했다. 젊은 부부가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피터의 옆자리에는 젊은 부부의 아이가 피터를 향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신의 부모가 언덕 아래로 굴러서 죽은 사실도 모르는 채 눈을 커다랗게 뜨고 피터를 응시했던 것이다. 피터는 다시 한 번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의 미소는 티없이 맑게 느껴졌다. 피 터는 이 아이를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청부 살인을 하는 입장 에 서 있는 피터였지만 천진스러운 아이 앞에서는 결코 죽음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이 아이를 어떻게 하지? 지금 죽여야 하나? 빌어먹을! 아이를 죽여야 한다는 조건은 없었잖아!' 피터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그러면서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울 때까지 고민했다. 그리고 결국 아이를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고 살려 두기로 결심했다. 피터는 재빨리 아이를 끌어안고 언덕을 향해 내려갔다. 자동차에 붙었던 불은 거의 꺼져가고 있었고 젊은 부부는 형체조차 알 수 없는 상태로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 피 터는 굴러떨어진 자동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그 아기를 가만히 내려 놓았다. 그리고 재빨리 언덕위로 올라갔다. 피터는 언덕 위로 올라가는 동안 그 아이에 대해 더 이상의 미련을 갖지 않기로 했 다. 아기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생길 위험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다음날 신문에는 그날의 사건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경찰은 젊은 부부가 빗길 에 과속으로 달리다가 급커브에서 미끄러지면서 언덕 아래로 굴러서 사고가 일어난 거 라고 하면서 아기가 차에서 튕겨져 나온 것에 대해서는 기적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그 아기가 뉴월드 그룹 회장의 손녀딸이라는 사실도 커다랗게 보도했다. 피터는 신문을 보면서 그 이름을 잊지 않기로 했다. 뉴월드 그룹 회장의 손녀딸, 로 라 해리슨... 피터가 일을 마치자 그의 은행 계좌에는 약속대로 거액의 돈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 금액은 상대가 피터에게 제시했던 금액의 절반에 불과했다. 피터는 나머지 돈도 모두 달라고 할 작정으로 다시 바하마로 갈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자신은 이미 청부 살인을 저질렀고 자신에게 살인을 교사했던 상대는 매우 위험한 조직이었다. 혼자의 몸으로 그들을 상대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피터는 바하마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정했다. 피터는 그 돈으로 중고차 매매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가지의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바하마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던 것이다. 피터는 그곳으로 가서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피터는 승무원들이 제공하는 음료수를 애써 거절했다. 피터는 아무에게도 방해를 받 고 싶지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기나긴 삶의 과거를 떠올리기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갑자기 피터는 그 당시에 받지 못했던 나머지 돈을 다시 받아내고 싶은 생각이 들었 다. 만약 자신이 살인자라고 밝혀져도 그 사건은 공소 시효가 벌써 지났다. 그리고 증거도 불충분하다. 피터는 아무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기랄! 그놈들이 아직 거기 있을지도 몰라. 오래 전의 일이지만 지금이라도 그 빚 을 받아내야겠어.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곳에서 부자 관광객을 상대로 건수를 올리면 될 거야. 그래, 바하마에서 멋지게 한 건 하는 거야. 호텔에서 멋진 여자들과 함께 관 광을 즐기는 거야." 피터는 간단하게 기내식으로 식사를 마치고 맥주를 마셨다. 피터는 몹시 피곤한 상 태였기 때문에 잠을 자고 싶었다. 그는 스튜어디스에게 수면용 눈가리개를 부탁했다. 잠시 후에 아름다운 금발의 스튜어디스가 다가오더니 마른 수건과 수면용 눈가리개를 건네 주었다. 피터는 잠을 자기 위해 의자 등받이를 뒤로 젖히면서 아까부터 자꾸 무언가를 열심 히 읽고 있던 옆자리의 남자를 힐끗 쳐다보았다. 피터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자는 < 비지니스 위크>를 보고 있었다. 피터는 자신의 옆자리에 멋진 미녀가 아니라 남자가 앉아있는 것을 재수없게 생각하면서 귀찮은 듯이 머리를 돌리고 잠에 빠져 들었다. 하베이는 바하마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비지니스 위크>를 읽고 있었다. 그는 자기 옆에 앉아 있는 남자가 점심을 먹은 뒤에 곧장 잠에 골아떨어진 사실을 조금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이나 기사를 읽던 하베이는 눈이 침침해지자 읽던 잡지를 덮었다. 그리고 힘껏 기지개를 켜면서 딱딱하게 굳어 있는 몸을 풀기 위해 움직였다. 고속으로 날아가 는 비행기는 이제 구름 속을 비행하고 있었다. 하베이는 창문을 통해 하얗게 번지는 구름을 감상했다. 얼마 후에 구름 사이로 아주 흐릿하게 지상이 내려다보이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내 려다본 지상은 거의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을 정도로 작은 점들뿐이었다. 가끔씩 어린 시절에 비행기 놀이를 하면서 하늘에서 비행기를 타고 바라본 땅 위의 장면을 상상하 기도 했지만, 지금 펼쳐지고 있는 장면은 그렇게 멋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거대 한 음모속으로 발을 내딛고 있는 중이었다. 하베이는 무거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훌륭한 민완기자인 하베이는 이번 바하마 여행에 대단히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 하베이는 항상 어떤 일에 달려들 때마다 끊임 없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듯이 팽팽한 긴장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새로운 사건에 대해 진실을 파헤칠 때마다 느껴지는 무한한 호기심의 원천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 까? 하베이는 자기 옆에서 잠을 자고 있는 남자의 코고는 소리를 느꼈다. 그 소리를 들 으면서도 하베이는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하베이는 사소한 것에는 절대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기 생활의 규칙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한 습성이 이미 몸에 배여 있어서인지 옆사람이 아무리 세게 코를 골아도 하베 이는 이마조차 찌푸리지 않았다. 하베이는 오히려 옆사람의 코고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의 사고에 리듬감을 주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레베카라는 여자는 과연 어떤 존재일까?' 하베이는 바하마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전에 워싱턴 대학을 잠시 방문했다. 하베 이가 알아 본 바에 따르면 레베카는 워싱턴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하베이는 필 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곧바로 워싱턴 대학의 학적과 사무실을 찾아갔다. 학적과 사무 실에는 커다란 안경을 코에 걸친 여직원이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하베이 짐머라는 기자입니다. 학적부를 열람해도 되겠습니까?" 그 여직원은 하베이의 신분증을 확인한 후에 학적부를 열람하도록 해 주었다. 하베 이는 정치학부의 학적부를 넘겨 받아서 하나씩 곰곰이 훑어보았다. 그는 레베카 더글라스라는 이름을 찾아보기 위해 서류를 뒤적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하베이는 마침내 레베카 더글라스라는 이름이 정치학부 학적부에 나타나 있 는 것을 발견했다. 하베이는 재빨리 그녀의 기록에 대해 취재를 하기 시작했다. 레베카 더글라스의 신 상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던 도중에 하베이는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발견했다. 레베 카 더글라스라는 이름의 학적부에 붙어 있던 사진은 그가 기억하고 잇는 사진 속의 인 물과 많이 달랐던 것이다. 하베이는 재빨리 가방 속에서 레베카 더글라스의 사진을 꺼냈다. 학적부의 사진이 비록 오래 전의 사진이었지만 가지고 있는 레베카 더글라스의 사진과 분명히 달랐다. 그가 들고 있던 사진과 학적부 속의 사진은 약간 비슷한 용모이기는 했다. 그러나 자신이 가지고 잇는 사진 속의 레베카 더글라스와 학적부에 기록된 레베카 더글라스의 사진은 분명히 다른 사람이었다. 하베이는 깜짝 놀라면서 몇 번이고 다시 사진을 비교해 본 결과, 그 두 사람이 분명 히 다른 사람이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클라크 상원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한 경력이 있는 레베카 더글라스, 그녀는 분명히 워싱턴 대학의 정치학부 출신이다. 그렇다면 도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갑자기 하베이는 무슨 귀신에 홀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다시 정신을 차리 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그는 다시 한 번 학적부를 천천히 열람 해 보았다. 정치학부의 학적부에는 레베카 더글라스라는 여자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하베이는 정치학부의 레베카는 분명히 자신이 조사하고자 하는 그 레베카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베이는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하베이는 학적부의 레베카와 지금 그가 들고 있는 사진속의 레베카가 분명히 어떤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찾고 있는 레베카는 학적부의 레베카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베이는 와이셔츠의 소매를 걷어올렸다. 지금부터 이곳의 모든 학적부를 뒤져서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진 속의 레베카 더글라스를 찾아낸 결심을 했던 것이다. 마침내 하베이는 그 사진 속의 인물을 찾아내었다. 경영학부의 학적부를 열람하던 하베이는 단번에 사진 속의 레베카 더글라스를 알아볼 수 있었다. 하베이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진과 경영학부 학적부 속의 사진을 몇 번이고 다시 대조해 보았다. 두 여자는 똑같은 인물이었다. 학적부의 사진은 그가 가지고 있는 사 진의 레베카 더글라스였다. 그러나 경영학부 학적부에 써 있는 그녀의 이름은 레베카 더글라스가 아니라 엘리자 베스였다. 하베이는 엘리자베스의 학적부를 세밀하게 살펴보았다. 그 중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성명: 엘리자베스. 주소: 워싱턴 대학 기숙사 A동 307호. 교우관계: 기숙사 룸메이트, 정치학부 레베카 더글라스. 게다가 더욱 놀라운 사실은 엘리자베스가 레베카 더글라스와 기숙사에서 한 방을 쓰 던 룸메이트였다는 사실이었다. 하베이는 그녀의 고향이 어디인지 확인해 보았다. 엘 리자베스의 고향은 롱아일랜드였다. 하베이는 커다란 의문에 사로잡혔다. 지금 바하마에 있는 레베카 더글라스는 워싱턴 대학 경영학부를 졸업한 엘리자베스라는 여자였다. 그리고 그녀는 학창 시절에 레베카 더글라스의 친구였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지금 자기 친구의 이름을 쓰면서 행동하고 잇는 것이다. 레베카 더글라스의 본명은 엘리자베스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진짜 레베카 더글라스는 어디에 있을까? 가짜 레베카 더글라스의 실체 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베이는 계속해서 자신의 생 각을 정리해 나갔다. '엘리자베스는 왜 레베카 더글라스가 되어야만 했을까? 그 점을 밝힌다면 모든 것은 아주 쉽게 풀릴 수 있을 거야. 그러나 그것은 지금 당장 밝힐 수가 없어. 따라서 우 회적인 방법으로 접근을 해 나가는 것이 좋겠어.' 엘리자베스가 실제로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이 관건으로 떠올랐다. 만약 하베이가 그 사실을 먼저 밝힐 수 있다면 당연히 레베카 더글라스의 의문을 풀 수 있을 것이다. 하베이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엘리자베스가 어떤 여자인가에 대한 조사를 직접 하 지 않고 프랭크에게 부탁했다. 다니엘 블레이크의 비서로 일하는 프랭크 로시에게 자 기가 알아낸 모든 사실을 말해 주면서 엘리자베스의 주변 인물들을 찾아서 그 인물에 대해 추적해 달라고 의뢰했던 것이다. 프랭크는 엘리자베스에 대해 자세한 신상을 파 악하겠다고 약속했다. 하베이가 레베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동안, 비행기는 바하마의 창공을 향해 힘차게 날아가고 있었다. 제임스 교수는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구름을 응시하면서 느긋하게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제임스 교수는 책을 읽으면서 한가로운 시간을 여유롭게 보내는 중이었다. 그는 바하마 여행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는 듯이 책갈피에 넣어둔 초대장을 자꾸만 들 여다보았다. 그 초대장은 메드닉 해리슨으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제임스의 바하마 여행은 이번 기회가 처음이 아니었다. 제임스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책을 덮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린 시절에 제임스는 여행을 좋아하던 아버지를 따라 바하마의 해변에서 여름 방학을 보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 무렵에는 여느 해변가와 마찬가지로 바하마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가족들과 함께 해수 욕을 즐기는 것이 가장 좋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 제임스는 바하마가 다른 해변들보다는 더욱 매력적인 곳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해변을 둘러싸고 있는 울창한 숲과 깎아지른 듯한 절벽들 그리고 평야처럼 드넓게 펼쳐진 초원이 한창 감수성이 풍부하던 젊은 시절의 제임스에 게는 아주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대학 시절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마련한 스킨 스쿠버 장비들을 가지고 찾아와서 직 접 스쿠버 다이빙을 즐긴 적도 있었다. 대학 내의 스쿠버 다이빙 써클 회원들과 함께 해마다 여름이면 이곳 바하마의 깨끗하고 운치있는 바닷가에서 신비로운 바다 속의 세 계를 구경하던 일이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되었다. 제임스의 아버지도 그가 스쿠버를 즐기는 것에 대해서 적극 지원하였다. 아버지는 제임스가 첫 다이빙을 하기 위해 바하마로 떠나던 날 자신의 아들에게 수심계를 선물 했다. 제임스는 어린 아이처럼 몹시 좋아하면서 그 선물을 받아들었다. 그 당시의 기 억이 아직까지도 눈 앞에 생생했다. 그 후로는 대학원에 진학해서 석사학위 논문을 마친 뒤에 찾아오는 다소간의 여유를 이용해 딱 한 번 스쿠버 다이빙을 즐기러 바하마를 방문했다. 그리고 박사학위 논문을 받기 전까지는 스쿠버 다이빙을 즐길 수가 없었다. 제임스가 스쿠버 다이빙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의 강의에도 잘 나타났다. 그는 학생 들에게 응용 통계학을 설명하면서 바닷속 이론을 강론했다. 대학생들은 그의 바닷속 이론을 들으면서 이해하기 어려웠던 응용 통계학의 이론들을 완전히 소화할 수 있었다. 그는 은유적 기법을 동원해서 학생들을 가리키는 일에 대가라는 소문이 퍼질 정도로 비유와 환유를 아주 잘 이용해 강의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제임스가 드디어 교수가 되었을 때에는 매우 바쁜 생활이 이어졌다. 학생들에게 강 의를 하는 것 이외에도 항상 시간이 날 때마다 끊임없이 학문 탐구에 전념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언제나 열심히 연구하는 교수였다. 제임스는 학계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바하마에 몇 번 다녀간 적이 있 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세미나는 저녁 시간에 열렸기 때문에 제임스는 일찍 그곳에 도 착해서 낮 동안 스쿠버 다이빙을 즐기기도 했다. 제임스에게 스쿠버 다이빙이 주는 매 력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신비로운 감촉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와 바하마의 인연은 이렇게 해서 아주 오랫동안 긴 인연으로 남게 되었다. 지금 바하마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고 있는 제임스 교수는 그런 연유로 마치 새로운 애인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마음이 들떠 있었다. 제임스는 매번 바하마를 방문할 때마 다 공항에서 곧장 아미보셤 호텔로 가지 않고 시장을 방문했다. 택시를 타고 달리다 보면 바하마 고유의 토속 시장이 열리는 시장이 나타났다. 제임 스는 항상 그 좁은 거리 앞에서 택시를 대기시켜 놓고 시장을 구경했다. 제임스는 지 금도 그 광경이 눈에 선하게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후에 공 항을 나설 때의 그 낯익은 거리 풍경은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를 만큼이나 아름다 운 광경이었다. 제임스가 하버드의 교수가 된 것도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너무나 빨리 지 나간 세월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제임스는 자신의 손을 펼쳐 보았다. 이제는 검지 손 가락에 잡힌 굳은 살도 제법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손에 박힌 굳은 살이 말해 주듯이 제임스는 열심히 연구논문을 발표하면서 아주 짧은 시간 내에 경영학부 정교수 로 승진할 수 있었다. 정교수로 부임한 이후에도 제임스는 대학과 학계에서 일이 점점 많아짐에 따라 부담 감과 스트레스도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 그리고 집에 있는 시간에도 연구논문을 집필 한기 위해 밤잠을 못자고 시달려야만 했다. 주말이면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 내야 했고 한 달에 한두 번은 반드시 나이 많은 부모님을 모시고 외식을 해야 한다는 것도 커다란 부담이었다. 그러한 제임스에게 이번 특별 휴가는 막힌 숨통을 열어주는 통풍구와도 같은 것이었 다. 제임스는 텔레비젼도 보지 않고 신문도 읽지 않고 오직 자연이 만든 맑은 공기와 확트인 바다에서 일 주일 동안의 시간을 조용히 보내고 싶었다. 제임스는 생각을 정리하다가 이윽고 엷은 미소를 지었다. 원숙한 지성미를 풍기는 그의 미소는 아주 편안한 인상을 주었다. 제임스와 눈이 마주친 스튜어디스가 그의 미 소에 응답하듯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제임스는 가벼운 손짓으로 그녀를 불러서 음료수 한 잔을 주문했다. 잠시 후에 그녀는 아주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가져왔다. 제임스는 시원한 오렌지 주 스로 목을 축이면서 오랫동안 앓았던 편두통이 사라졌을 때처럼 시원함을 느꼈다. 머 리가 너무 복잡할 때나 논문이 잘 안 써질 때에는 항상 심한 편두통이 찾아오곤 했었 다. 가끔은 편두통이 심해지면서 지독한 경련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두 번 다시는 편두통 따위에 시달리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로라 해리슨이 아미보셤 호텔로 제임스를 초대한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었다. 대학 교수의 한달 봉급으로도 아미보셤과 같은 최고급 호텔에서 일 주일 이상을 묵는다는 것은 몹시 힘든 일이었다. 바하마에는 아미보셤 호텔 이외에도 다른 호텔들이 아주 많았다. 하지만 그 시설이 나 운영방식에 있어서는 다른 호텔들이 아미보셤 호텔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임스는 로라 해리슨이 아미보셤 호텔로 초대했을 때, 매우 기쁜 마음으로 받 아들였다. 하지만 제임스가 그런 제안을 무조건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로라 의 초대를 받아들이면서 아미보셤 호텔의 경영 상태에 대해 조언을 해 주기로 결심했 다. 경영상의 조언, 여행을 떠날 생각을 한 이후로 항상 제임스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 았던 말이었다. 경영학 교수의 입장에서 볼 때 사실 기업을 운영하는 사업가들에게 경 영상의 조언을 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그의 조언 한마디에 의해 기업의 운 명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기업들이 여러 명의 고문을 두고 조언을 들어가면서 합리적인 경영방식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미 기업체들 사이에서 제임스 교수의 조언은 매우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제임스는 정작 자신이 하는 경영상의 조언이라는 것이 기업 활동에 별로 커 다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제임스는 로라의 할아버지 메드닉 해리 슨의 경영 방식에 대해 단지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제임스는 로라 해리슨의 얼굴을 떠올렸다. 제임스는 로라에 대하여 매우 미묘한 감 정을 가지고 있었다. 로라는 아름다운 외모뿐만 아니라 머리도 아주 좋은 수재였다. 그래서 제임스는 특별히 로라를 더욱 아끼고 있었다. 잠시 후에 제임스는 조용한 잠에 빠져들었다. 제임스의 꿈 속에서 바하마의 공항이 보였다. 자신의 짐을 찾아 공항의 출입구를 나서자 로라 해리슨이 마중을 나와 있었 다. 로라 해리슨과 제임스 교수가 인사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화려한 마차가 한 대 다가 와서 멈추었다. 그것은 아주 건장한 백마 두 마리가 이끄는 마차였다. 마차의 실내는 온갖 보석들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고 주위의 사람들은 두 사람을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말의 힘찬 울음 소리와 함께 제임스와 로라 해리슨을 실은 마차는 조금씩 움 직였다. 잠시 후에 마차는 점점 더 속력을 내면서 바하마의 가로수길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꿈에서 본 바하마의 거리는 택시나 버스가 전혀 다니지 않았다. 마차만이 바하마에서 일반적인 교통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한참을 달리던 마차의 마부가 뒤를 돌아보면서 물어 보았다. 제임스는 미소를 지으 면서 외쳤다. "아미보셤 호텔로!" 사실 아미보셤을 이곳 바하마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호텔이었기 때문에 그 곳에서 하룻밤을 묵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랑할 만한 일이었다. 제임스를 한 번 돌 아본 마부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마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는 곧장 바하마의 중심가로 들어섰다. 주위에는 여러 가지 특산품들과 기념품들 을 실은 수레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꽃을 파는 아가씨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 다. 제임스는 어떤 수레 앞을 지나가다가 무엇인가 생각난 듯이 갑자기 마차를 세웠 다. 제임스는 마차에서 내린 후에 기념품이 진열된 수레로 다가갔다. 제임스는 장미꽃을 한 다발 사서 로라 해리슨에게 건네주었다. 그런데 로라 해리슨 이 장미를 받아들자, 그만 꽃다발이 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제임스는 실망하지 않고 다시 더욱 커다란 장미꽃 다발을 사서 로라 해리슨의 품에 안겨 주었다. 하지만 장미 꽃 다발은 제임스의 품에서 로라 해리슨에게 건네지면서 계속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 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제임스는 몹시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그러나 로라 해리슨은 여전 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제임스는 로라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 나 아무리 노력해도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잠시 후에 두 사람을 실은 마차가 드디어 아미보셤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의 분위기 는 우주 활기에 넘쳤다. 제임스는 먼저 마치에서 내린 후에 로라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딛고 서 있던 바닥이 밑으로 꺼지기 시작했다. 제임스는 로라를 끌어안고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로라 해리슨의 비명 소리와 함께 제임스는 적막한 공간으로 한없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제임스는 목청이 터질 정도로 절규했다. 어딘가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자신의 몸 을 추스르기 위해 몸부림을 친 것이다. "손님. 괜찮으십니까?" 제임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를 흔들어 깨운 것은 스튜어디스였 다. 그녀는 제임스에게 시원한 물수건을 갖다 주면서 다시 한 번 몸에 무슨 이상은 없 는지 정중하게 물어 보았다. "잠시 악몽을 꾸었어요.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요." 제임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스튜어디스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 으로 제임스를 쳐다보았다. "손님,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잠시 후에는 비행기가 바하마에 도착합니다." "고맙습니다." 제임스는 자신이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행기는 벌써 바하마의 근해를 날아가고 있었다. 제임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머리를 가볍 게 흔들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향해 힘껏 발을 내딛고 있었다. 제임스가 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빠져나왔을 때, 그의 앞으로 마차가 한 대 다가와서 멈추었다. 그 마차는 힘있게 보이는 두 마리의 검은 말이 끌고 있었다. 말의 힘찬 울 음 소리가 제임스를 유혹하고 있었다. 버스나 택시도 있었지만 제임스는 마차를 이용 함으로써 바하마의 이국적인 정취를 느끼고 싶었다. "자, 이제 출발해 볼까?" 제임스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마차에 올라탔다. 가볍게 흔들리는 마차의 진동을 느끼 면서 제임스는 미소를 지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마부가 뒤를 돌아보면서 물어 보았다. "아미보셤 호텔로!" 제임스는 꿈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랑스럽게 소리쳤다. 마차는 곧장 바하마의 중 심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바하마의 중심가에는 시장이 서고 있었다. 제임스는 어떤 수레 앞을 지나다가 무엇 인가 생각난 듯이 갑자기 마차를 세웠다. 제임스는 마차에서 내려 기념품이 진열된 수 레로 다가갔다. 제임스는 어떤 곳을 여행하면 반드시 그곳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 손수건을 사는 취 미가 있었다. 그러한 취미는 어렸을 때 보이스카웃 대원으로 활동할 때부터 생긴 것이 었다. 제임스는 이미 바하마의 손수건을 몇 장 가지고 있었지만 버릇처럼 다시 바하마 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 빨간색 손수건을 한 장 집어들었다. 제임스는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물건을 파는 상인에게 건네 주고 다시 마차를 향해 돌아섰다. 제임스는 이런 곳에서는 돈을 충분히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 차에 다시 올라탄 제임스는 손수건을 팔에 묶고 마부에게 출발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미보셤 호텔은 매우 아름다웠다. 바하마의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원추형의 지붕이 햇살을 받으면서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제 6 장 변신 프레디는 아미보셤 호텔의 현관으로 들어가다가 로라 해리슨이 입구에서 경호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프레디가 처음 보았을 때, 로라는 무척 화가 난 얼굴로 경호실 소속의 직원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레디가 나타나자 로라는 매우 반가운 표정을 지으면서 다가왔다. 프레디도 웃으면서 다가오는 로라와 다정한 포옹을 나누었다. 프레디는 얼마 후에 로라가 찾아 온다는 소식을 이미 듣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놀라는 표정이 아니었다. "잘 지냈니, 로라?" "프레디 아저씨, 안녕하셨어요?" 프레디와 로라는 다정하게 포옹을 하고 나서 잠시 서로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무척 오랜만에 만난 탓인지 서로의 분위기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게 몇 년 만이지?" "아마 3년이 훨씬 넘었을 거예요. 제가 하버드로 떠난 이후에 한 번도 만나지 못했 으니까요." 로라는 다시 한 번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프레디는 로라가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모습을 줄곧 지켜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매우 총명하고 귀여운 소녀였던 로라는 이제 완전한 숙녀가 되어 있었다. "로라, 너는 이제 성숙한 아가씨가 되었구나, 이거 정말 유감스러운 일인데..." "뭐가요?" 로라의 얼굴에는 호기심 어린 표정이 나타났다. "나에게 멋진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만약 그랬다면 당장 로라 를 내 며느리로 삼았을 거야." 프레디가 웃으면서 농담조로 말했다. 로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진심이 담긴 목소리 로 말했다. "그렇게 말해 주시니 고마워요, 프레디 아저씨. 전 아저씨의 며느리는 될 수 없지만 그래도 아저씨는 저에게 아버지나 다름이 없어요. 할아버지에게는 프레디 아저씨가 아 들 같은 분이니까요." "그래, 로라. 우리는 한 가족이나 다름없어. 그런데 로라, 조금 전에 무슨 일로 화 가 나 있는 것 같던데, 왜 그랬던 거지?" "어제 공항에 도착해서 곧장 할아버지의 선착장에 갔었어요. 그곳에서 곤잘레스 아저 씨를 만났죠. 곤잘레스 아저씨에게 할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랬구나." 프레디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래서 바로 아미보셤 호텔로 달려왔는데, 프레디 아저씨는 자리에 계시지 않았고 경비원이 할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올라가지도 못하게 했어요." 로라는 계속 프레디에게 자신의 불만을 털어 놓았다. "저런... 미안하구나." "그래서 종업원에게 지금 당장 할아버지를 연결해 달라고 요청했죠. 그랬더니 비서 인 듯한 여자가 지금은 할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는 거예요. 주사를 맞고 잠이 드셨다 는 거예요. 그래서 경호실장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그 여자에게 나를 올려 보내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랬더니 그 여자는 전용층에는 근무하는 직원이 아니면 아무도 올라올 수 없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방을 마련해 놓았으니까 기다리라고 했어요. 할아버지가 깨어나면 말씀을 드리겠다고 하면서..."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로라는 잠시 숨을 돌렸다. 로라의 얼굴에 다시 화가 난 표정 이 떠오르고 있었다. 프레디가 진정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로라는 알았다는 듯 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처음에 전 그 여자가 누구인지를 물어 보았어요. 할아버지의 비서로 일하는 레베카 더글라스라고 하더군요. 도대체 레베카 더글라스라는 여자가 누구죠? 전 이곳에 오자 마자 그 레베카라는 여자의 이름을 계속 듣고 있어요." 프레디는 로라의 말을 끊고 이렇게 물었다. "그래, 오늘 할아버지는 만나 보았니?"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제가 이렇게 프레디 아저씨에게 항변을 하지도 않았을 거예 요. 오늘 오전에 만나게 해 준다던 약속을 지금까지 어기고 있어요. 도대체 레베카라 는 여자가 어떤 사람이에요?" 로라는 매우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로라는 분해서 금방 눈물이라도 흘 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레베카 더글라스는 3년 전에 메드닉 회장님의 비서로 채용된 여자야. 그 전에는 국 회에서 클라크 상원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했었지. 아주 능력이 뛰어난 여자로 알려져 있어. 나도 레베카가 정말 대단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어." 프레디는 레베카 더글라스를 처음 만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레베카가 메드닉 회장의 비서로 들어온 것은 로라가 하버드에 입학한 다음이었다. 프레디가 느꼈던 레베카의 첫인상은 매우 지적이고 아름다운 여자라는 것이었다. 레 베카는 클라크 상원의원의 보좌관 출신답게 모든 문제들을 아주 적절하게 해결하는 능 력을 발휘했다. 사교적인 부분에서도 여러 사람과 잘 어울리면서 깨끗한 생활을 유지 해 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사람들이 레베카를 신뢰하고 좋아하 게 되었다. 하지만 메드닉의 건강이 점차 악화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사태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 러가기 시작했다. 메드닉 회장이 직접 처리할 모든 문제들도 레베카의 손을 거쳐 그녀 의 의도대로 처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모든 일은 형식적으로 메드닉 회장의 결재 를 통해 진행되고 있었지만 메드닉의 건강상태에서 그런 문제들을 일일이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메드닉은 이사회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오직 레베카를 통해서 다른 이사회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러한 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시간이 갈수록 회사의 중역 들이 모든 문제를 레베카에게 보고하고 그녀의 결정에 따라 일을 처리해 나갔다. 레베카는 자신의 일을 가로막는 사람들이 있을 때,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반 드시 무슨 이유를 달아서라도 그 사람을 내쫓고 말았다. 레베카는 그런 식으로 회사의 모든 중요한 업무를 장악하고 통제해 나갔던 것이다. 그런 일들이 자꾸만 반복되자 프레디도 레베카에게 점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누 구의 뜻인지는 모르지만 언제부터인가 레베카는 자기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메드닉 회 장을 만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레베카는 아미보셤 호텔의 총지배인 프레디에게도 메드닉 회장과의 면담을 허락하지 않았다. 메드닉 회장이 건강이 악화된 자신의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겠다는 의 사를 표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메드닉 회장의 약해진 모습을 보면 뉴월드 그룹을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기승을 부릴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프레디가 듣기에도 그 말은 제법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프레디는 메드닉 회장이 건강을 회복하면 다시 사람들 앞에 나타날 거라고 믿고 있 었다. 하지만 그러한 상태가 오랫동안 진행되고 있는 것은 결코 대수롭게 넘길 만한 일이 아니었다. 프레디조차도 마지막으로 메드닉 회장을 만났던 것이 벌써 세 달 전이 었던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여자라고 하지만 제가 할아버지를 만나는 일까지 그 여자에게 허락 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 목소리는 매우 높았기 때문에 프레디는 깜짝 놀랐다. "몰론이야, 로라." 프레디는 그렇게 말을 하고 나서도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책임질 수가 없었다. 이미 비서실의 권위는 총지배인의 권위는 총지배인의 권한마저도 뛰어넘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마저도 총지배인의 자리를 오랫동안 유지하기 어려울 수도 있 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메드닉 회장의 신임을 받고 총지배인의 지위에 올라선 자신 이지만 최근 1년 동안의 일들을 지켜보면서 프레디는 점점 자신을 잃어갔던 것이다. "로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거야. 레베카는 오직 회장님의 지시만을 우리에게 전 달할 뿐이니까... 다소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기다리면 회장님을 보게될 거야. 그러니 까 걱정하지 말고..." "그래도 너무하잖아요. 할아버지를 만나면 꼭 이 일에 대해서 따지고 말겠어요." "암, 그래야지." 프레디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일부러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말을 꺼냈다. "그런데 제임스 교수님을 초대했더구나, 로라." "그래요. 지금가지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던 분이에요. 그런데 언제 바하마로 어 실 예정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많이 걸리진 않을 거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오전에 연락이 왔단다. 아마 지금쯤 제임스 교수님이 공항에 도착하셨을 거야." "어머, 그래요? 아주 잘 되었네요." 로라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까 제임스 교수님을 아주 존경하고 있나 보구나, 로라." "그럼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교수님인 걸요?" 프레디와 로라가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아미보셤 호텔의 정문에 마차 한 대 가 도착했다. 하지만 프레디와 로라는 그 사실도 모르는 채 계속 정답게 이야기를 나 누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로라를 부르는 제임스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라는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 로라!" 제임스 교수가 로라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머, 교수님,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몰랐어요." 로라는 제임스 교수의 품에 안기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서둘러 휴가를 받았다. 네 할아버지께서 초청장을 일찍 보내 주시지 않았으면 이렇 게 일찍 오지는 못했을 거야." "교수님, 아미보셤 호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프레디가 정중하게 제임스 교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임스는 약간 당황하면서 프레디를 쳐다보았다. "저는 이 호텔의 총지배인 프레디입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저를 환영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여기 회장님이 보낸 초청장을 가지고 왔습 니다." 제임스가 양복의 상의에서 초청장을 꺼내 프레디에게 주자, 그는 객실을 확인하기 위 해 프론트로 걸어갔다. 로라와 제임스도 나란히 프레디의 뒤를 따라갔다. 프레디는 카운터에서 제임스 교수를 위해 예약된 방의 호수를 알아낸 후에 급사들에 게 말해 주었다. "7층의 특실로..." 짐을 들고 있던 급사들은 총지배인의 명령을 듣고 제임스 교수를 엘리베이터가 잇는 곳으로 안내했다. 로라는 제임스 교수의 팔장을 끼고 함께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그런데 두 남자가 동시에 호텔의 프론트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여행을 하 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들은 바로 피터와 하베이였다. 우연하게도 두 사람은 제임스 교수와 거의 동시에 호텔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들은 프론트에서 방을 하나씩 얻은 후에 각자 자기 방으로 향했다. 잠시 후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로라와 제임스는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즐거운 듯이 대화를 나누었다. "바하마에서 로라를 만나니까 아주 색다른 느낌이 드는 걸?" "저도 그래요, 교수님. 우린 항상 강의실이나 세미나실에서만 만났으니까요." "때로는 내 연구실에서 혼이 난 적도 있고..." "교수님도..." 로라가 부끄러운 듯이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마치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듯 이 한 마디 던졌다. "손수건이 참 예쁘군요." 제임스는 자신의 손목에 묶고 있는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쑥스러운 듯이 고 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이건 어린 아이와 같은 취미지. 보이스카웃 시절부터 여행을 갈 때마다 항상 그 지 역의 손수건을 사는 버릇이 있거든." "교수님이 손목에 두른 손수건은 무척 인상적이군요. 바하마에서 구하신 건가요?" "그래, 로라. 호텔로 오는 도중에 시장에서 구입했단다." 제임스가 대답하면서 손수건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로라가 웃으면서 말했다. "교수님, 우리 함께 해변을 거니는 건 어때요? 한 시간 후에요." "그래, 로라. 나도 로라에게 할 말이 있어. 로라가 부탁했던 일에 대해서 사전 조사 를 좀 해 보았거든." "그래요, 교수님. 잠시 후에 뵙겠어요." 로라는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에 즐거운 얼굴로 자기 방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레베카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길버트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길버트는 스키 기증식 행사에 대해서 자세하게 물어 보았고 레베카는 여러 가지 준비 상태에 대해서 상세히 상담을 해 주었다. "당신의 목소리는 정말 매력적이군요, 레베카. 행사장에서 반드시 만나 보았으면 좋 겠습니다." 길버트는 레베카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길버트의 칭찬을 들으 면서 레베카는 사실 기분이 무척 좋았다. 지금 그녀는 여자의 가장 매력이 돋보이는 나이였다. 레베카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보고 싶었다. 그녀는 거울 앞으로 다가가서 자신의 몸매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거울 앞으로 다가가서 자신의 몸매를 천천히 살펴 보았다. 거울 앞에 서 있는 여자는 대단히 관능적인 여자였다. 레베카는 거울 안에 들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말을 걸었다. "레베카 더글라스, 넌 아주 매력적인 여자야. 넌 조만간 세계적인 재벌이 될 거야. 그건 내가 보증할 수 있어. 자, 이제부터 시작이야. 힘을 내야 해!" 레베카가 거울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레베카는 전화기를 집 어들었다. "레베카 더글라스입니다." "경호실장 마틴입니다. 한 가지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마틴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죠?" "지금 막 제임스 교수가 도착했습니다. 7층의 특실에서 여장을 풀고 있습니다. 지 시를 내려 주십시오." "제임스 교수를 하루 종일 감시하도록 하세요. 특히 그가 로라와 함께 함부로 메드 닉 회장님을 만나지 않도록 잘 처리하세요. 전용 엘리베이터의 관리를 소흘히 하면 안 됩니다. 비상계단에도 사람을 배치해서 철저히 감시하세요!" 레베카는 절대로 로라와 메드닉 회장이 서로 만나지 못하도록 하라고 다시 한 번 지 시했다. "알겠습니다. 지시대로 처리하겠습니다." 마틴은 정중하게 대답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레베카는 수화기를 내려 놓으면서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경호실장 마틴이 예상밖으로 자신의 요구를 잘 들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잠시 후에 레베카는 다시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앤소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수술실의 상황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앤소니입니다." "준비는 다 되었나요?" "아주 완벽하게 준비해 놓았어요." "좋아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곳으로 가겠어요." "알겠어요. 기다리겠습니다." 레베카는 전화를 끊고 나서 비서실을 나섰다. 복도에 서 있던 경호원들은 레베카의 모습을 보자 대단히 놀란 표정으로 저마다 고개를 숙였다. 레베카는 복도 끝에 위치한 주치의 앤소니 박사의 사무실 앞에서 멈추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앤소니가 궁금한 듯이 물어 보았다. "저예요, 레베카." "어서 들어오세요." 레베카는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문을 걸어 버렸다. 앤소니는 이미 캐비닛을 옆 으로 밀어서 비밀 수술실의 문을 열어 놓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밀실로 들어갔다. 비밀 수술실에는 어떤 남자가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그는 등을 보이고 있었다. 앤 소니가 그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메드닉 회장님, 뒤를 돌아보시지요." 레베카는 숨을 죽이면서 매우 긴장하고 있었다. 그 남자가 서서히 휠체어를 돌려서 레베카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레베카는 그 남자의 얼굴을 보면서 탄성을 질렀다. "어때요, 레베카?" 앤소니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 이렇게 똑같을 수가!" 레베카는 앤소니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사 람은 분명히 오늘 아침까지 보았던 메드닉 회장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똑같을 수 있을 까? 레베카는 좀처럼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런데 힘없이 휠체어에 앉아 있던 그 노인은 레베카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레베카, 어서 오세요." 그 순간 레베카는 저절로 회장님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너무 놀랐다. 그의 목소리는 메드닉 회장과 너무나도 흡사했던 것이다. "어때요, 레베카? 이정도라면 완벽하지 않나요?" "앤소니, 수고했어요. 정말 너무 완벽해요." 레베카는 활짝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잠시 후 에 막을 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레베카, 내 손녀딸 로라가 찾아왔다고 하는데 어서 만나고 싶군. 왜 이렇게도 보기 가 힘든 거야?" "회장님, 잠시만 기다리시면 곧 만나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레베카가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그래야지. 내가 누군데... 안 그런가, 앤소니?" 이번에는 노인이 앤소니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메드닉 회장님." 그는 정말로 메드닉 회장과 똑같은 목소리를 흉내내고 있었다. 레베카는 모든 일들 이 너무나 잘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애초부터 수술 대상자를 선택할 때, 배우 출신의 인물을 선정한 것은 성대 묘사를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지만 이렇게 까지 똑같을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레베카는 메드닉 회장의 품으로 다가가서 안겼다. 레베카는 회장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제 모든 것이 성공이에요, 회장님!" "괜찮아요, 레베카. 울지 말아요." "회장님은 이 눈물의 의미를 잘 모르실 거예요. 하지만 이제부터 조금씩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거예요." 레베카는 메드닉 회장의 품에 안긴 채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드디어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로라와 함께 해변의 구경하기로 했던 제임스 교수는 방을 나섰다. 로라는 이미 오래 전부터 호텔 로비에서 제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제임스 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로라가 달려와서 팔짱을 끼었다. "교수님." "오, 로라. 이렇게 소란을 피우면 사람들의 눈총을 받게 되잖아." "어때요? 전 교수님 앞에서는 아주 어린 걸요." "그러다가 내가 로라를 좋아하게 되면 어떻게 하지?" "달콤한 로맨스를 즐기면 되잖아요?" "이런, 로라에게 이처럼 당돌한 면이 있었던가?" 그들은 즐겁게 웃으면서 해변을 향해 걸어갔다. 해변가에는 수영복 차림의 젊은 관 광객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비치 볼을 가지고 게임을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 다. 사람들은 저마다 행복해 보였다. 모래 위에서 자유롭게 뛰어노는 사람들은 모든 걱정을 벗어 버린 것 같았다. 해변가에 도착하자 로라는 신발을 벗었다. "교수님도 신발을 벗으세요." "그럴까?" 두 사람은 신발을 벗어서 손에 든 채, 맨발로 해변을 거닐기 시작했다. 시원한 바람 이 불어오자 제임스는 지난 한 해 동안 연구실에서 쌓였던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사라 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교수님, 우리 저쪽으로 가요." 로라가 해변의 실내 카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거기보다는 저쪽이 더 좋겠는걸?" 제임스가 가리킨 곳은 실외 카페였다. 해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그래요, 실내보다는 바닷바람을 맞을 수 있는 곳이 좋겠어요." 로라는 제임스 교수가 가리킨 곳을 향해 달려갔다. "저렇게 청순할 수가..." 제임스는 로라가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해변에서 만나는 로라의 모습은 강의실에서 대하던 로라의 모습과는 또 다른 일면이 있었다. "교수님, 빨리 오세요." 로라가 제임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제임스는 반갑게 손짓을 한 후에 로라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로라는 벌써 해변의 카페에 앉아서 제임스가 다가오는 모습을 물끄 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무엇을 드릴까요?" 카페에서 일하는 종업원이 다가오면서 물어 보았다. "오렌지 주스 두 잔." 제임스가 미소를 지으면서 주문했다. 로라는 바다가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로라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고 있었다. 잠시 후에 종업원이 차가운 오렌지 주스 두 잔을 들고 다가왔다. 제임스는 오렌지 주스를 받아서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로라, 오늘은 무척 화사해 보이는구나. 바하마의 해변에서 로라만큼이나 아름다운 아가씨는 없는걸? 단연 돋보이는 아가씨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제임스가 장난스러운 듯이 말을 걸었다. 로라는 다시 제임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 서 말했다. "교수님도 너무나 멋져요. 강의실에서는 교수님이 이렇게 멋진 분이라는 걸 미처 몰 랐어요." "이런, 내 강의가 그렇게 재미없었나?" 제임스가 웃으면서 말하자 로라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어요." "어떤 질문이니?" "왜 이혼을 하셨는지 알고 싶어요." "이혼?" "그래요, 교수님." 제임스는 로라가 아주 진지하게 물어 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로라는 지금 제임스 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제임스는 로라가 자신을 아주 친근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게 이혼을 왜 했는지 물어 보았던 제자는 로라가 처음이 기 때문이었다. 다른 제자들과 아무리 친하게 지내더라도 그들은 교수의 이혼 경력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결례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로라는 제자로서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친구로서 질문을 해 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제임스는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면서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피아노를 전공했던 사람이야. 지금은 뉴욕 대학에서 전임강사를 하면서 생 활하고 있단다. 내가 그녀와의 결혼을 꿈꾸었던 것도 항상 아름다운 음악을 감상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지. 결국 그녀와 결혼을 했고 난 내 꿈을 실현하면서 행복하게 살았다. 내가 사랑했던 그녀는 정말로 내 모든 것이었지." 로라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제임스를 응시하면서 말을 듣고 있었다. 제임스는 잠시 먼 바다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언제인가 그녀에게 커다란 실망을 하게 되었지. 결혼을 한 후에 그녀는 피 아노를 더욱 열심히 연주하기 시작했어. 처음에는 나도 그녀가 보다 좋은 환경에서 피 아노를 연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 나도 그녀가 자신의 일에 빠지는 것을 반대하지 않아. 하지만 그녀의 연주는 점점 더 시간이 갈수록 자신을 잃어가는 과정이었어. 음 악에 비하면 가정과 남편도 그녀에게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지. 그녀는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음악에 빠져들었어. 난 처음에는 그녀를 설득했어. 음악은 일 상 생활의 모험이 되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음악은 삶의 양식을 깨뜨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존재해야 한다고 말이야. 하지만..." 제임스는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로라의 눈빛에는 제임스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내 말을 도무지 인정하지 않았어. 그녀가 음악을 연주하는 건 너무나 광적 이었던 거야. 그 이후로는 점점 서로간에 벽이 생겨나기 시작했지. 그러면서 서서히 각 방을 쓰게 되고 결국엔 이혼을 하게 된 거야." "너무 슬픈 일이군요, 교수님." "지금 생각하면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지. 내가 왜 이렇게 외로운 삶을 선 택했을까? 그냥 눈 딱 감고 살 수도 있었는데... 하지만 그것이 내 운명이었다고 항상 생각하지. 피할 수 없었던 운명. 그게 바로 지금의 나를 있도록 한 힘이었을 거야." 제임스는 과거를 떠올리면서 고통스러운 듯이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로라는 안타 까운 듯한 표정으로 제임스를 응시했다. "무척 가슴이 아프시겠어요." 로라는 제임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말했다. 제임스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로라의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에 대해 알아보다가 몇 가지 중요한 사실 들을 알게 되었단다." "뉴월드 그룹에 대해서?" "그렇단다. 경영상의 조언을 하기 위해 자료들을 찾아보았지." "무슨 문제가 있나요?" 로라는 어떤 말이 나올 것인지 매우 궁금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제임스의 말에 주 의를 기울였다. "내가 알아본 것은 뉴월드 그룹의 주식에 대한 정보였어. 과거에 메드닉 회장은 회 사 지분을 그룹의 직원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주식을 분산시켜 왔더군. 그것은 너도 잘 알겠지만 아주 좋은 경영방식이야. 그런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뉴월드 그룹은 비교적 주식의 분산이 잘 되어 있는 우량기업으로 알려져 있었어. 주식의 동향 도 최근가지는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면서 안정된 거래 실적을 보여 주었더구나. 그런 데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었어." 제임스의 얼굴이 갑자기 심각하게 변했다. 로라는 몹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제임스 를 쳐다보았다. "어떤 건가요?" 로라는 제임스 교수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메드닉 회장은 최근에 자사의 주식을 대량으로 매각하고 있어." "그건 이미 저도 알고 있어요. 할아버지는 항공사에 투자할 계획이에요. 그래서 현 금이 필요한 거구요." 로라는 그 사실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제임스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하지만 로라, 이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메드닉 회장은 4년 전에 일본의 오사카 유니버셜 기획과 합작으로 쥬라기 공원이나 E.T와 같은 영화를 배경으로 한 테 마파크를 건설하다는 내용에 합의했어. 헐리우드의 인기 영화감독과 손을 잡고 54헥타 르의 부지에 1600만달러를 투자해서 1999년에 개장할 예정이야. 숙박시설과 음식점을 설치해서 연간 천만 명 이상의 관광객을 유치한다는 거대한 계획이지." 제임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음료수를 한 모금 마셨다. 로라는 제임스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마음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건 계획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잖아요." "물론이지. 그러나 연간 300만달러를 투자한다는 것은 아무리 뉴월드 그룹이라고 해 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야. 그런데 이번에는 항공사에 투자를 하겠다고 하는 거야. 그리고 그 자금은 자사의 우량주를 팔아서 마련하고 있는 거야." 로라는 제임스의 말을 유심히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요? 만약 할아버지가 뉴월드 그룹의 전략 업종을 바꾸 실 생각이라면... 할아버지는 원래 한 번 어떤 사업을 구상하면 주변의 모든 조건들을 그것에 맞추는 분이거든요." 하지만 제임스는 로라의 말에 여전히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뉴월드 그룹은 1년 전만 해도 자체 자금으로 꾸려나갈 수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 지금은 여러 은행에서 10억달라 정도의 부채를 지고 있어. 그것도 단기 부채이기 때문에 이미 변제기간이 시작되고 있어. 그렇게 되면 재정상태는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어. 그런데 무리하게 항공사에 투자를 하겠다고 발표하다니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아." 제임스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하지만 투자의 시기에는 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현금이 고정자산으로 묶이게 되니 까 아무래도 부채가 증가할 수밖에 없잖아요." 로라가 제임스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룹의 주식을 매각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 해할 수 없어. 게다가 아까도 말했지만 뉴월드 그룹은 주식의 분산이 비교적 잘 되어 있는 회사야. 그렇기 때문에 최대 주주인 메드닉 회장의 지분율은 43.06%였어. 그런 데 최근에는 33.7%로 떨어졌지. 자칫 잘못하면 경영권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교수님이 말씀한 것처럼 그룹 사원들에게 골고루 분산 된 주식이 있고 저에게도 12%정도의 주식이 있어요. 그 정도라면 비교적 안정적이라 고 할 수 있지 않아요?" 로라는 좀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제임스는 로라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건..." 제임스는 여전히 불안한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로라는 재빨리 제임스의 말 을 가로막았다. "제임스 교수님, 교수님은 지금 휴가를 즐기고 있는 중이에요. 저의 일로 너무 심각 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도 할아버지를 만나서 그 문제에 대해 상의해 볼 생각이에 요. 저는 교수님이 할아버지의 호텔에서 좀더 편안하게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제임스는 비로소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로라. 내가 정말로 좋은 제자를 두었어. 이렇게 멋진 곳에서 휴가를 즐길 수 있다니..." 제임스와 로라는 서로를 마주 바라보면서 활짝 웃었다. 두 사람은 다시 화제를 바꾸 면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는 사이에 바하마의 태양이 어느덧 기울기 시작 했다. 피터는 샤워를 하고 산뜻하게 옷을 갈아입은 후에 방을 나섰다. 그는 일층 로비로 내려가서 종업원에게 카지노가 어디 있는지 물어 보았다. 종업원은 지하층으로 내려가 면 도박을 즐길 수 있다고 대답했다. 피터는 서둘러 지하로 내려갔다 아미보셤 호텔의 카지노로 들어서는 순간 그는 물고 기가 물을 만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피터는 그곳의 분위기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부유층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온갖 종류의 도박에 열중하고 있는 모 습이 그를 흥분하게 만들고 있었다. 블랙 잭과 주사위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게임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었다. 갑자기 주사위놀이에서 돈을 딴 여자가 환호성을 질렀다. 피터는 오직 한 가 지 생각만을 머리 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카지노는 돈 많은 부유한 여자를 유혹하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지. 이곳보다 좋은 곳은 아마도 없을 거야. 저 수많은 여자들을 봐. 돈이 많은 여자들이 도박에 열중하 고 있잖아. 그래, 그 여자들에게 돈 쓰는 법을 가르쳐 주는 거야.' 피터는 현란한 카지노를 둘러보면서 보석으로 몸을 치장한 여자들을 구경했다. 그러 면서도 내내 피터의 머리 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지배하고 있었다. 과연 어떤 여자를 유혹할 것인가? 일단 대상이 정해지면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괜찮은 여자가 좀처럼 눈에 뜨이지 않자, 피터는 블랙 잭이 열리는 테이블을 향해 걸 어가기 시작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슬롯 머신이 잇는 곳을 지나가던 피터는 누 군가와 거세게 부딪혔다. 피터는 잠시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다른 곳을 쳐다보면서 걸었기 때문에 앞에 누 가 있는지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피터는 겨우 중심을 잡고 일어나서 자기와 부딪힌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갈색 머리의 어떤 여자였다. 피터와 부딪힌 그 여자는 슬롯 머신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녀도 몹시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피터는 그 여자의 얼굴을 정면 에서 바라보았다. 나이가 좀 들기는 했지만 아주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푸 른 눈동자 그리고 탄력 있게 생긴 가슴이 그의 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아주 섹시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어머,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다치신 곳은 없나요?" 피터가 여자에게 다가서면서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푸른 눈동자의 여자는 피터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피터는 재 빨리 그 여자의 발 끝에서 머리 끝까지 차림새를 살펴보았다. 물론 그 여자의 시선이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말이다. 피터는 단번에 그 여자가 매우 사치스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여자의 드레스는 값비싼 보석이 박힌 것으로 최고급 의상실에서 맞춘 것이 분명했다. 진주로 장식된 팔 찌와 금빛이 감도는 시계 그리고 아주 영롱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그의 눈을 자극 했다. 피터는 한눈에 이 여자가 매우 부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전 로즈마리라고 해요."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면서 피터에게 악수를 청했다. "저는 샘입니다." 피터는 자기의 본명을 말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이름을 말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신분을 감추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이 호텔에 묵고 계신가요, 샘?" 로즈마리가 매우 친절한 목소리로 물어 보았다. "그렇습니다, 로즈마리. 혹시 당신도?" "아니에요, 저는 근처 별장에 묵고 있어요. 해마다 여름이면 전 혼자서 이곳에 있는 별장을 찾아와요. 바하마의 해변가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정말 반갑군요. 저도 혼자 여행 다니는 것을 좋아합니다. 만나게 되어서 정말 반 갑습니다." 피터가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정말 멋진 분이군요. 동양에서는 이런 것도 인연이라고 하지 않나요?" "아주 훌륭하신 말씀이군요. 당신과 같이 아름다운 분을 만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마치 이렇게 헤어지면 오늘 밤잠이 오지 않을 것만 같군요." "아주 유머가 풍부하신 분이군요. 어쩌면 저도 그런 생각이 들지 모르겠군요." 로즈마리가 피터를 물끄러미 응시하면서 말했다. "그러세요? 이따가 저녁에 잠이 안 오면 제가 연락을 드리지요. 전 초저녁 잠을 즐 기거든요. 시간이 있을 까요?"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저도 초저녁 잠을 즐기는 편이지만 항상 식사 후에 즐기거 든요.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잠이 올 것 같지 않군요." "좋습니다. 저녁 식사라도 함께 하면서 좋은 여행지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군요." 피터는 이 여자에게 자신이 돈 많은 신사라는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 었다. "네, 좋아요. 이 번호로 연락하시면 제가 전화를 받을 거예요." 로즈마리는 피터에게 전화번호를 적은 종이쪽지를 전해 주면서 가볍게 미소를 지었 다. 순순히 자기에게 넘어 오는 여자를 보면서 피터는 이 여자가 돈 많고 외로운 여자 가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그 순간 피터는 너무도 순조롭게 일이 풀린다는 생각에 기분 이 좋았다. "제가 6시에 전화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슬롯 머신으로 행운을 확 인해 보겠습니다. 오늘은 무척 운이 좋은 날이 될 겁니다." "정말 재미있는 분이시군요." "아마 잭 포트가 나올지도 모르지요. 이렇게 아름다운 부인을 만나는 행운이 있었으 니까요." 피터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말했다. "저는 먼저 별장으로 돌아가서 전화를 기다리겠어요." "알겠습니다, 로즈마리." 로즈마리는 피터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유유히 카지노에서 빠져나갔다. 피터는 로 즈마리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내심 일이 아주 잘 풀리는 것이 기뻐서 어 쩔줄을 몰랐다. 로즈마리와 헤어진 후에 피터는 정말로 운수를 시험하기 위해 슬롯 머 신 앞으로 걸어갔다. 피터는 주머니에서 여러 개의 동전을 꺼낸 다음 25센트짜리를 골랐다. 피터의 눈은 그 25센트짜리 동전에 박혀 있었다. 동전은 화려한 조명을 받으면서 더욱 반짝거렸다. "오늘의 재수가 어떤지 어디 한 번 해 볼까?" 피터는 동전을 슬롯 머신의 투입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손잡이를 힘껏 잡아당겼 다. 체리가 나오면 25센트짜리 동전 두 개가 튀어나올 것이고 오렌지 세 개가 나오면 10달러를 벌게 될 것이다. 바아 네 개가 나오면 잭 포트가 터질 것이다. 하지만 레몬 이 나타나면 돈을 잃는다. 피터는 숨을 죽인 채, 슬롯 머신이 돌아가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피터는 마 음 속으로 열심히 '잭 포트'를 외치고 있었다. 그런데 상황은 그가 바라던 대로 되지 않았다. 잠시 후에 슬롯 머신이 멈추자 나타난 것은 재 포트가 아닌 레몬이었다. 하지만 돈 을 잃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건 순전히 재수를 점치기 위해 장난삼아 했던 것이다. 피터는 기분이 나빴지만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건 사실 얼간이나 하는 게임이야. 돈을 잃을 확률이 얼마나 높은데... 그리고 이 런 걸로 행운을 점친다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 오늘 밤은 분명히 재수가 좋을 거야.' 피터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카지노를 나왔다. 카지노에서 나온 피터는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그의 머리 속에는 여전히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로즈마리, 그녀를 어떻게 낚아챌 수 있을까? 그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야!' 피터는 로즈마리 앞에서 결코 가난한 티를 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주 넉넉하고 풍요로운 사람처럼 행동해야만 한다. 식사를 하더라도 구겨진 현금을 내기보다는 빳빳한 수표로 지불을 하는 것이 훨씬 대우가 좋을 것이다. 피터는 자기에게 약간의 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신용카드가 생각났다. 게다가 골드카드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피터는 이런 최고급 호텔에서 돈이나 신용카드를 구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실 제로 아미보셤 호텔과 같이 사회적 지위가 있는 부유층들이 즐겨 사용하는 곳은 경비 가 삼엄한 대신에 사람들이 물건을 방에 아무렇게나 두고 다니는 습성이 있었다. 피터는 제법 명망이 있는 사람의 신용카드를 훔쳐내기로 결심했다. 그는 천천히 엘 리베이터로 향했다. 몇 층을 털까? 기회는 오직 단 한 번뿐이다. 한 번의 기회를 통 해 운이 좋으면 대어를 낚는 것이고 운이 나쁘면 또 한 번의 승부를 걸어야 한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게임이 분명했다. 피터는 엘리베이터에서 몇 층을 누를 것인 지 고심하다가 행운을 상징하는 7층의 어느 방을 털기로 결심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피터는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아미보셤 호텔의 7층은 비교적 조용한 편이었다. 복도 끝에서 노부부가 시끄럽게 떠 들면서 외출하는 모습이 보였다. 피터는 침착하게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 했다. 그런데 어떤 방에서 여자 청소원이 룸서비스를 마치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청소 원은 열쇠로 그 방문을 잠그고 청소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피터는 청소원이 나왔던 그 방을 향해 걸어갔다. 이 방은 분명히 안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청소부가 조금 전에 나왔기 때문에 이 방의 주인은 얼마 동안 돌아오 지 않을 것이다. 피터는 즉시 그 방을 털기로 결심했다. 피터는 신중하게 만능열쇠를 조작해서 문을 여는 일에 성공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 방에는 남자가 혼자 묵 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어디에도 보석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고 현금도 별로 없었다. 피터는 조심스럽게 옷장을 열어 보았다. 옷장 속에는 여행객의 것으로 보이는 양복들 이 몇 벌 걸려 있었다. 피터는 그 중에서 가장 좋아 보이는 옷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옷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두 번째 옷에서도 아무것도 나온 것이 없었 다. 그 옷들은 아직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새 옷들이었다. 그런데 벽과 맞닿은 곳에 걸려 있는 옷은 약간 구김이 가 있었다. 피터는 그 옷의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두툼한 지갑이 손에 잡혔다. 피터는 재빨리 지갑을 열 어 보았다. 그 지갑 속에는 신용카드와 신분증이 들어 있었다. 피터는 지갑을 통째로 자신의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벌써 그의 얼굴은 땀으로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그는 혹시 객실에 또 다른 귀중한 물건들이 없는지 둘러보았 다. 침대가 있는 곳을 지나가다가 피터는 손수건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피터는 손수건을 집어들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 적인 행동으로 그 손수건을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피터는 방을 나서기 전에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바라보았다. 시계는 로즈마리와 약 속한 6시를 향해 힘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제임스와 로라는 나란히 해변가에서 호텔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로라는 제임스의 팔짱을 낀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로라, 우리 저녁이나 함께 할까?" 제임스의 제안에 로라는 금방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제임스는 일부러 시선을 다른 곳 으로 돌리면서 말했다. "무슨 약속이라도 있는가 보구나." 비로소 로라는 난처한 표정으로 제임스를 바라보면서 부끄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실은 교수님, 만나 볼 사람이 있어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건 나중에도 기회 가 있잖아요." 제임스는 약간 서운한 느낌이 들었다. 로라의 태도로 볼 때, 누군가 중요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분명했다. 아마 그 사람이 로라의 남자 친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 다. 제임스는 만날 사람이 누구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그래, 우리는 아직 시간이 많지." 로라는 호텔 입구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제임스와 헤어졌다. 제임스가 먼저 호텔 로 들어가자, 로라는 근처 공중전화를 향해 걸어갔다. 로라는 서둘러 아미보셤 호텔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더니 교환수 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아미보셤 호텔입니다." "다니엘 씨의 방을 연결해 주시겠습니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수화기에서 신호 대기를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동안, 로라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조그맣게 콧노래를 불렀다. 잠시 후에 교환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니엘 베이 씨인가요? 아니면 블레이크 씨인가요?" "블레이크입니다. 다니엘 블레이크!" 로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잠시 후에 연결이 되었는지 다니엘이 직접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다니엘 블레이크 씨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를 기억하시겠어요? 아미보셤의 호텔은 아직도 변함이 없나요?" 다니엘은 바하마 공항에서 헤어지면서 그 말을 던졌던 로라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 로라 해리슨 양!" "이 근처에 들렀다가 전화를 했어요, 어때요? 저녁 식사를 초대받고 싶은데..." 다니엘은 재미있다는 듯이 커다랗게 웃었다. 로라의 당돌한 태도에 대해 약간 놀라 운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좋습니다, 로라. 지금 곧 호텔 식당으로 내려가지요." "알겠어요, 잠시 후에 만나요." 로라는 전화를 끊고 나서 호텔 입구로 들어섰다. 로라가 호텔로 들어가자 검은색 선 글라스를 낀 남자 두 명이 뒤를 따라 들어갔다. 로라는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는 사실 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호텔의 식당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다니엘은 로라를 만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외로운 저녁 시간을 혼자 보내지 않게 되어서 무척이나 기뻤던 것이다. 다니엘은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 입고 너무 진하 지 않은 향수를 뿌렸다. 거울 앞에서 그는 로라를 보고 지을 미소를 먼저 떠올려 보았 다. 그리고 지갑을 확인한 후에 천천히 출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로라 해리슨은 호텔 식당 앞에서 다니엘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니엘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인사를 보냈다. 다니엘도 역시 로라를 바라보면서 조금 전에 거울 앞에서 연습했던 그 미소를 연출해 보였다. "이렇게 멋진 분인지는 미처 몰랐어요." 로라가 다니엘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저도 이렇게 아름다운 분인지 몰랐습니다." 다니엘도 미소를 지으면서 로라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눈길을 마주치면서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았다. "자, 로라. 식당으로 들어 가실까요? 오늘 저녁은 특별한 만찬이 될 겁니다." "좋아요." 로라는 반가운 얼굴로 다정하게 팔짱을 끼었다. 다니엘은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 지만 금방 즐거운 표정을 지으면서 식당으로 들어섰다. 다니엘은 또 한 번 로라의 당 당함에 놀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꾸밈이 없는 성격이 바로 로라의 매력일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으로 들어선 다니엘과 로라는 종업원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의자에 앉았다. 그들 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호텔의 식당은 모든 점에서 완벽했 다. 그랜드 피아노를 치는 재즈 연주가가 있었고 조명까지 아주 훌륭하게 설치되어 있 었다. 게다가 종업원들은 아주 표정이 밝았으며 모두 친절하게 손님들을 대했다. "정말 멋진 곳이에요. 그렇죠, 다니엘?" "그렇군요." 종업원이 다가오더니 두 사람 앞에 잔을 놓아 주었다. 그리고 에피타이저로 나오는 포도주를 한 잔씩 따라 주고 메뉴판을 놓고 돌아갔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다니엘과 로라는 똑같이 이런 인사를 하면서 잔을 들었다. 그리고 서로의 빛나는 눈 을 쳐다보면서 포도주를 음미했다. 그런데 출입구 근처에서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던 남자 두 명이 로라와 다니엘 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들은 이내 전화를 끊고 식당에 서 사라졌다. "이렇게 바하마의 석양을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즐거운 시간이 그렇게 흔하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 건배를 할까요?" 로라가 자기 앞에 놓인 잔을 들면서 말했다. 다니엘도 즐거운 듯한 얼굴로 잔을 들 었다. "해적과 연인을 위해 건배하지 않겠어요?" "좋아요. 그런 뜻에서 건배!" 다니엘과 로라는 잔을 가볍게 들어올려서 건배를 한 후에 포도주잔을 완전히 비웠다. "그런데 로라, 당신은 이곳에 무슨 일로 온 거죠?" "이곳은 원래 저의 고향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어요. 할아버지가 이곳에서 살고 계시거든요." 로라가 대답하자 다니엘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나서 궁금한 듯이 로라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당신의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고 싶군요." "아주 좋은 분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고집불통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할아버지는 아 주 너그러우신 분이죠. 전 할아버지의 그런 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은 할아버지를 무척 사랑하고 있군요. 그렇다면 부모님들은 지금 어디에 살고 계시나요?" 로라는 잠시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호텔 종업원이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오다가 두 사람이 무엇인가 중요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느낌이 들자 다시 뒤로 돌아서서 카 운터를 향해 걸어갔다. "전 아주 어렸을 적에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모두 잃었어요. 그 다음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어요. 할아버지는 매우 무뚝뚝한 분이지만 저는 그분의 마음이 어떻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아요. 할아버지는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진 후부터 그분의 인생에 남은 것은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투쟁뿐이었으니까요." 다니엘은 매우 난처한 표정이었다. 로라는 다니엘의 표정속에서 미안하다는 듯한 기 색을 읽을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어리석은 질문을 한 것 같군요." "괜찮아요. 이젠 저도 다 큰 어른인 걸요?" 로라가 웃으면서 대답하자 다니엘의 표정도 이내 풀렸다. 다니엘은 화제를 바꾸기 위해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는 만나 보셨나요?" "아직 뵙지 못했어요." "무척 바쁘신 분인가 보군요." "그래요." 로라는 짧게 대답하고 나서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다니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 우리 식사를 주문해야죠?" 로라는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그만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니엘도 그러 한 로라의 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그러죠." 다니엘은 손을 흔들면서 종업원을 부르는 손짓을 했다. 종업원이 다니엘의 손짓을 보고 다가와서 주문을 받고 있을 때, 출입구를 통해 걸어 들어오는 여자가 있었다. 하 늘색 옷을 곱게 차려 입고 나타난 미모의 그 여자는 익숙한 동작으로 곧장 다니엘과 로라가 앉아 있는 탁자를 향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로라 해리슨 양?" 하늘색 옷을 입은 여자는 로라를 바라보면서 다정하게 인사를 던졌다. 로라는 그 순 간 매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로라는 지금 말을 걸고 잇는 여자가 누구인지 몹시 궁 금했다. 다니엘도 역시 이 여자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로라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 겠다는 듯이 그 여자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당신은..." 로라는 마음 속으로 어쩌면 이 여자가 레베카 더글라스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로 라는 일부러 조급한 마음을 감추고 태연한 표정으로 물어 보았다. "당신이 레베카 더글라스인가요?" "네, 그래요. 제가 바로 레베카 더글라스입니다." 레베카의 도도한 모습을 보면서 로라는 매우 불쾌한 느낌을 받았다. 이 여자는 왜 이렇게 자신만만한 것인가? 하지만 로라는 이런 자리에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싶 지 않았다. "당신이 나를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곳에 도착한 다음부터 계속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니까요." 로라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잘 절제하고 있는 듯한 음성이었다. "그랬었나요?" 레베카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로라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 다. 레베카와 로라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다니엘은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레베카와 로라를 번갈아 가면서 쳐 다보았다. 레베카는 다니엘의 당황하는 눈빛을 알아차린 듯이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다니엘 씨.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메드닉 해리 슨 회장님의 비서로 있는 레베카라고 합니다." "아, 그렇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레베카." 다니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약간 숙이면서 인사를 보냈다. 레베카도 다니엘을 향해 가벼운 미소를 보냈다. "만나서 반가워요." 레베카는 로라와는 달리 좀 색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였다. 아름답고 교양이 있 어 보이기는 했지만 사람들을 유혹하는 듯한 요염한 미소가 배인 얼굴이었다. 다니엘은 자신을 메드닉 해리슨 회장의 비서라고 소개한 레베카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미보셤 호텔의 지배인으로 일하는 프레디로부터 레베카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다니엘이 생각했던 것보다 그녀는 훨씬 젊고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프레디 씨에게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만나보니 굉장히 놀 랍군요." "놀랍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생각보다 굉장히 아름다운 분이란 걸 알게 되었다는 거죠." "다니엘 씨는 저를 영화에 등장하는 비서들처럼 두꺼운 안경을 끼고 히프가 커다란 중년의 여자라고 생각하셨나 보군요." 레베카가 웃으면서 농담조로 말했다. "그렇지는 않지만 예상밖으로 젊은 분이라는 건 사실입니다. 괜찮다면 우리와 합석 을 하시겠습니까?" 다니엘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아니에요. 전 로라 양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레베카는 다니엘의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하면서 로라를 바라보았다. 다니엘은 레베 카와 로라가 어떤 사이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레베카가 나타날 때부터 로라의 표 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던 것이다. 다니엘은 또다시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긴 장감을 느끼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정말 궁금하군요. 로라 양과는 어떻게 하는 사이죠?" "레베카 양은 우리 할아버지의 비서예요." 로라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니엘을 바라보면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 다. "그래요? 놀라운 일이군요." 다니엘은 처음에 그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곧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을 깨 달을 수 있었다. 로라를 바라보던 다니엘의 눈이 갑자기 커지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로라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당신이 메드닉 해리슨 씨의 손녀라는 건가요?" "제가 바로 메드닉 할아버지의 손녀예요." 로라는 다니엘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대답했다. 그러는 사이에 레베카가 앞 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그래요. 로라 양은 메드닉 회장님의 손녀입니다. 그분의 유일한 혈육인 셈이지요." "미안해요, 다니엘. 미리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로라는 놀라고 있는 다니엘에게 사과의 말을 던졌다. "아니, 미안한 마음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다니엘이 손을 내저으면서 대답했다. 그러는 동안 레베카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계속 미소를 지으면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레베카는 잠시 로라를 쳐다보 고 나서 다시 다니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실례의 말씀을 좀 드려도 될까요, 다니엘 씨?" "물론이죠."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레베카는 즉시 용건을 꺼냈다. 그것은 대단히 놀라운 말 이었다. "메드닉 회장님이 로라 해리슨 양을 만나고 싶어해요." 다니엘은 대답을 하는 대신에 가만히 로라 해리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레베카의 질문은 다니엘에게 한 것이라기보다는 로라에게 간접적인 방식으로 의사를 전달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어하던 로라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고 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은 레베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한 번 로라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어 쩐지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런 순간에 어떻게 행 동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전 괜찮습니다. 어서 올라가서 만나고 오세요, 로라. 저는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겠 습니다." "미안해요, 다니엘." 로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두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 7 장 미로속으로 메드닉 회장의 전용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경비가 삼엄했다. 엘리베이 터를 지키고 잇던 경비원 앞으로 레베카와 로라가 다가섰다. 레베카는 현재 메드닉 회 자의 비서로서 그룹의 모든 사업을 대리하는 책임자였고 로라는 메드닉 회장의 손녀로 서 장래 뉴월드 그룹의 후계자였다. "즐거운 여행이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레베카는 로라에게 약간 교만하게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 아주 즐거웠어요." 로라는 아주 단조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 로라는 레베카를 똑바로 쳐 다보면서 매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경비가 삼엄한 거죠?" "회장님께서 직접 말씀드릴 거예요." 잠시 후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그 안에서 또 다른 경비원의 모습이 나타났다. 경비원은 언뜻 보기에도 건장한 체격에 고도의 훈련을 받은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레베카가 경비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 "회장님의 전용층으로 올라가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대화에서 느껴지는 것은 부탁이나 일상적인 업무상의 대화라기보다는 거 의 명령에 가까운 것이었다. 로라는 다시 한 번 레베카라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레베카는 로라에 비해 나이가 조금 많아 보이는 여자였다. 두 여자는 어떤 면에서 매우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레베카와 로라는 매우 당당하게 행동하면서도 서로를 매우 조심스럽게 경계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동안 로라는 엘리베이터의 좁은 공간에서 감회가 새로운 듯 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레베카가 로라의 기분을 눈치채고 말을 걸었다. "오래간만에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기분이 어떤가요?" "이곳으로 올 때에는 기분이 매우 들떠 있었는데 지금은 기분이 어쩐지 이상하군요. 마치 잘못을 저질러서 교장 선생님한테 불려가는 학생같은 기분이 들어요." 로라는 자신의 기분을 솔직하게 말하고 있었다. "긴장할 거 없어요." 레베카가 마치 로라의 언니라도 되는 것처럼 다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레베카의 입가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조소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도 역 시 어떤 일에 대해 비웃는 듯한 느낌을 엿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긴장이 되는군요." "메드닉 회장님께서는 그동안 로라 해리슨 양을 무척이나 보고 싶어 하셨어요." 레베카의 말에 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엘리베이 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레베카는 조심스럽게 메드닉 회장의 사무실로 걸어갔다. 메드닉 해리슨의 전용층은 사람이 살고 잇지 않은 것처럼 매우 조용한 분위기였다. 방문은 모두 굳게 달려 있었으며 복도에서 얼씬거리는 사람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한눈에 보아도 특별하거나 허가된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통제구역 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레베카가 메드닉 해리슨의 방으로 다가가서 노크를 하자 안에서 지키고 잇던 경비원 이 문을 열어 주었다. 레베카는 그 문을 지나 안쪽에 있는 다른 문으로 걸어갔다. 레 베카는 다시 자신이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나서 문을 열었을 때, 방엣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로라 해리슨, 어서 들어오너라." 레베카는 로라가 방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옆으로 물러섰다. 방으로 들어가는 로라 의 표정이 다시 환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피터는 호텔 입구에서 로즈마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주 멋진 양복을 입고 중 절모를 눌러쓴 채 담배를 피우면서 서 있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급 승용차 한 대 가 나타내는 것이 보였다. 피터는 단번에 그 승용차가 로즈마리의 자동차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자동차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면서 운전석에 탄 여자의 모습이 자세히 보 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면서 호텔의 입구를 향해 차를 몰았 다. 그녀가 호텔 입구에 차를 대자, 도어맨이 운전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는 친 절에 고맙다는 인사로 약간의 팁과 자동차 열쇠를 도어맨에게 준 후에 피터가 있는 곳 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눈에 비친 피터의 모습은 아주 멋있는 중년 남성이었다. 중절모가 아주 잘 어울렸고 훤칠한 키에 넓게 벌어진 어깨가 아직까지도 건장한 남자라는 사실을 드러내 고 있었다. 그녀가 피터 앞으로 다가서자 그는 밝게 웃으면서 인사했다. "여기까지 와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로즈마리..." "저를 기다리고 계셨어요?" 로즈마리는 피터와 인사를 나눈 후에 미소를 지었다. 피터가 왼쪽 팔을 약간 들어올 리자 로즈마리는 자연스럽게 그의 팔을 잡고 호텔로 들어섰다. 피터는 종업원에게 특급 코스를 주문했다. 그러면서 피터는 은근히 자신에 대해 이 끌리는 듯한 눈빛을 보이는 여자를 앞에 두고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식사가 나오는 가운데 두 사람은 천천히 대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피터는 아까부 터 계속 자신에 대해 은근히 과시하는 말만 늘어 놓았다. 그래도 로즈마리는 전혀 지 루하지 않은 듯한 눈빛으로 피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로즈마리는 스스로 매우 약하고 외로운 부유층 여자라는 사실을 밝히는 일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은 피터가 스스로를 아주 능력있는 남자로 포장하고 있는 것과 잘 어울렸다. "젊은 시절에 저는 마도로스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렇게 멋진 꿈을 꾸셨다니 정말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피터가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꺼낼 때마다 로즈마리는 아주 놀라운 표정을 지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부추김에 따라 피터의 어깨는 점점 더 올라가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해군 사관학교를 지원했죠. 부모님께서는 저를 대학교수로 키울 예정 이었는데, 저는 무조건 바다와 같은 남자가 되겠다고 우겼어요." "어린 시절부터 당신은 주관이 아주 뚜렷한 분이었군요. 역시 남자는 주관이 분명해 야 어느 면에서나 성공을 하는 것 같아요." "누구나 다 그런 것은 아니지요." "바하마에는 자주 오셨다구요?" "그렇습니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가 지원한 곳은 바로 해병대였습니다. 해병대 장교로 근무를 하면서 바하마와 인연이 닿게 되었지요." 피터는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그리고 우수에 찬 모습으로 과거를 떠올리듯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그게 벌써 20년 전이군요..." 피터는 계속 해병대 시절의 이야기를 꾸며대고 있었다. 로즈마리는 그의 말을 들으 면서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피터가 해병대 출신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사관학교를 다녔다거나 장교로 복무했다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피터는 해병대에서 사병으로 2년 동안 복무하고 제대한 이후에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결국 바하마에서 해상 안전 요원으로 근무한 것이 고작이었다. 피터는 그 당시의 경험을 살려서 거짓말을 꾸며대 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멋지군요. 바하마에서 당신과 같은 분을 만나게 되다니 정말 영광이에요. 샘." 로즈마리는 술잔을 들면서 피터를 향해 건배를 청했다. "당신 이야기를 계속 해 주세요, 샘. 너무나 재미있어요." "그렇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한 번은 이곳에서 밀수업자들을 소탕한 적이 있었습니 다." "세상에..." 로즈마리는 더욱더 피터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표정이었다. "저는 깊은 밤에 해안을 관측하다가 어떤 물체를 발견했습니다. 거리는 한 20킬로미 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어떤 배 한 척이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지요. 저는 일단 그 배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부하들을 시켜서 그 배를 자세히 감시하라 고 명령했지요. 그런데 갑자기 그 배에서 누군가가 바다에 무엇인가를 빠뜨리는 것이 었습니다." "그게 뭔데요?" 로즈마리가 놀라운 목소리로 물었다. 피터는 더욱 느긋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이 었다. "한 번 알아맞추어 보세요." "저는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어요."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겁니다. 그 당시에 우리는 여러 가지로 추측을 했지요. 그런 데 갑자기 배가 출력을 높이면서 달아나는 것이었어요. 저는 그 배의 움직임을 보다가 무엇인가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고 생각했죠. 저는 단번에 명령을 내렸습니다. 출동!" 피터는 거기가지 말하고 포도주를 한 잔 마셨다. 로즈마리는 피터의 이야기가 매우 흥미로운 듯이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피터는 빈 잔에 포도주를 따르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는 처음에 불법으로 쓰레기를 처리하는 배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이 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 도망친 배가 바다에 빠뜨린 것은 쓰레기를 담는 비닐봉지가 아니라 어떤 상자같은 것이었으니까요." 로즈마리는 숨을 죽이고 피터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래서 잠수부를 동원해서 그 배가 있던 곳을 조사해 보기로 결정했지요. 그 장소 에 가서 저는 잠수복을 입고 바다속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바다 속에서 수풀들을 헤쳐 가다보니 몇 개의 상자들이 나왔습니다. 저는 그 상자들을 밧줄로 묶고 끌어당기도록 배에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배에 올라와서 그 상자를 열어 보았지요. 그 상자에서 무엇이 나왔는지 아십니까?" 피터는 로즈마리를 향해 질문을 던지고 나서 이빨을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로즈 마리는 잠시 동안 생각하는 듯하더니 잘 모르겠다는 인상을 지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것은 바로 마약이었습니다!" "어머나! 마약이 어떻게..." "그것도 아주 엄청난 양의 마약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피터는 약간 어깨를 우쭐하면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상자 속에 든 마약을 꺼내고 빈 상자를 다시 바다에 빠뜨렸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잠복해서 기다렸죠. 우리는 마약 밀수업자들이 그 정도 양 의 마약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며칠을 기다려도 그 물건을 찾으러 오는 배가 없더군요. 일 주일이 지난 밤이 되었을 때, 우 리는 그만 포기하고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배가 나타난 겁니 다. 우리는 빈 상자를 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들을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은 기관총을 쏘아대면서 저항했지만 우리가 해병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그들의 비 극이었던 거죠." 피터가 거짓말을 늘어 놓는 동안, 로즈마리의 눈동자는 거의 풀리고 있었다. 로즈마 리의 눈은 이미 초점을 잃고 있었다. 그녀는 흥분한 모습을 애써 자제하면서 피터에게 말했다. "당신은 무척 용감하신 분이군요." "이런 말이 생각나는군요. 용감한 자가 미인을 얻는다!" 피터와 로즈마리는 즐거운 듯이 함께 미소를 지었다. 피터는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 면서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나처럼 매력 있는 남자라면 이런 여자 정도야 얼마든지 요리할 수 있어. 내 판단이 맞았어. 그래, 이 여자는 돈 많은 과부인 게 분명해. 오늘은 아마 멋진 밤이 될 거 야.' 피터는 음흉한 눈빛으로 로즈마리를 쳐다보면서 다시 술잔을 들었다. 식도를 타고 흘러내리는 포도주는 피터를 점점 더 흥분하게 만들었다. 로즈마리는 요염한 눈빛으로 이따금식 피터를 쳐다보았다. 식사가 나오자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음식을 먹는 동안에는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피터와 로즈마리는 그저 서로의 행동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피터는 로즈마리의 행동을 보면서 그녀가 정말로 부유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포크와 나이프를 만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물론 고급 포도주가 담긴 잔을 들고 맛을 음미하는 모습도 전혀 싸구려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피터는 그녀가 음식을 먹으 면서 약간씩 소리를 낸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피터에 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피터는 순간적으로 과거를 떠올렸다. 바하마에서 해상안전요원으로 일하는 동안 그 는 수많은 부유층 여자들을 이미 건드려 보았던 경험이 있었다. 그는 부유층 여자들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헤아릴 수도 없이 보았으며, 그 여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고급스러 운 멋을 연출하는 방법도 몸에 익히게 되었다. 그녀들은 거의 소리를 내지 않고 음식 을 먹을 줄 알았으며 술잔을 들거나 놓을 때에도 술잔에 한 줄기의 흔들림이 없었다. 피터는 아주 자연스럽게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래, 이 여자는 부유층 여자가 맞아. 하지만 과부가 분명해. 너무나 오랫동안 혼 자 지냈기 때문에 음식을 먹을 때 소리가 나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거야. 그건 외로움 의 소리이기도 하지.' 피터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로즈마리가 말을 꺼내는 바람에 그는 하마 터면 기침을 할 뻔 했다. "롱 비치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거의 식사를 끝냈다는 듯이 입술을 닦으면서 피터를 향해 물었다. 피터는 음 식이 입 속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대답을 하는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전 롱 비치에 작은 섬을 하나 소유하고 있어요. 그리고 플로리다에도 플랜트 농장 이 있어요. 플로리다도 아주 좋은 고이죠. 저는 일 년에 두 달 정도는 그곳에서 지낸 답니다." 로즈마리가 자신의 재산을 은근히 과시하듯이 말했다. 피터는 그 말을 들으면서 가 슴이 터질 정도로 놀랐다. 로즈마리가 어느 정도 돈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까 지 돈이 많은 여자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로즈마리의 재산이 생각보다 엄청나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입 속에 들어 있던 음식 물을 그냥 삼켜 버렸다. 피터는 자신이 무슨 반응이라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피터는 물을 마시면서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태연한 표정으로 이제서야 다 먹었다는 듯이 입술을 닦았다. 로즈마리의 눈빛은 그런 피터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부인은 상당한 재산가인 것 같군요." "놀라셨나요?" "아닙니다. 저도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는 유산으로 섬을 하나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당신의 섬에 비하면 아주 적지요." 피터도 은근히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듯이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거짓말 이 탄로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디의 무슨 섬인지 재빨리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로즈마리가 물어 보기 전에 먼저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마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자, 먼저 선수를 치기로 결정했다. 그는 계속해서 로즈마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부인의 막대한 재산은 어떻게 생긴 것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피터가 매우 정중한 태도로 물어 보았다. 로즈마리는 피터가 더욱 많은 재산목록을 댈 거라고 예상하고 있다가 그런 질문을 하는 걸 보고 마음 속으로 안심했다. 그리고 역시 자기만큼 재산이 많은 사람은 없을 거라는 태도로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남편이 남겨 놓은 유산이에요. 남편은 제작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너무 일 에만 열중하다가 뇌출혈로 죽고 말았지 뭐예요." 로즈마리가 약간 슬픈 기색을 띠면서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면서 침울한 표정 을 지었다. "아, 그러시군요. 제가 공연한 질문을 했나 봅니다." 피터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마음 속으로는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좋아. 이 정도면 완벽해. 남편도 없고 게다가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잖아.' 피터는 계속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그 많은 재산을 관리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겠군요. 당신이 직접 그 일을 합니까?" "사실은 얼마 전부터 전문관리자를 고용하려고 생각했어요. 전 재산관리나 사업에 대한 경험이 없어서 몹시 불안해요. 사업에 경험이 많은 사람이 제 옆에 있었으면 좋 겠어요. 저에게는 훌륭한 조력자의 도움이 무척 필요하거든요." 로즈마리가 의자에 등을 기대면서 대답했다. 로즈마리의 얼굴에는 쓸쓸한 미소가 어 려 있었다. 피터는 로즈마리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도록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만난 것은 어쩌면 운명인지도 모르겠군요. 안 그래도 저는 요즘 투자할 방 법을 알아 보기 위해 여행을 하고 있답니다." "어머, 그러세요? 저는 그냥 여행만 하는 분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업까지 하고 있군 요." "그렇습니다. 사람이 항상 공기를 마시고 살 듯이 돈도 호흡을 해야 한답니다. 돈 이 호흡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투자입니다. 돈이 스스로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해야 성장할 수 있으니까요." "어마나 , 선생님은 대단히 문학적이시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업을 하다 보면 그 모든 것을 손쉽게 알 수 있게 되는 법입니 다." "저에게도 투자에 관한 조언을 해 주실 수 있나요?" "저는 부인에게 확실한 투자를 주선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부인을 도와 드린다 면 몇 달 안에 재산을 두 배로 늘릴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피터는 매우 자신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로즈마리의 표정이 매우 밝아졌다. "오늘은 우리 두 사람에게 아주 특별한 날인 것 같아요." "그렇습니다." 로즈마리는 술잔을 들고 다시 한 번 건배를 청했다. 피터는 가볍게 팔을 내밀어서 로즈마리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 두 사람은 남은 포도주를 모두 마셨다. "바람을 쐬고 싶어요." 로즈마리가 술기운에 조금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저도 상쾌한 공기를 마시고 싶군요." 피터는 웨이터를 불러서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종업원은 전표를 작성한 후에 서명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피터는 신용카드에 적힌 대로 제임스라고 서명했다. "자동차를 대기시킬까요?" 종업원이 정중하게 물어보자, 로즈마리는 손을 가볍게 흔들면서 아니라고 말했다. 피터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오늘밤처럼 날씨가 좋은 날이면 해변에서 정사는 벌이 는 것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그의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로즈마리의 눈빛은 마치 피터를 향해 불타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피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로즈마리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로즈마리의 의자를 잡아 주면서 그녀가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로즈마리는 일어나면서 자연스럽게 피터와 팔짱을 끼었다. 피터와 로즈마리의 만남은 이렇게 하나의 운명을 만들기 위해 진행되고 있었다. 잠시 후 호텔에서 나온 피터와 로즈마리는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등대에서 비치는 한 줄기 불빛이 해변의 어둠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영화에 나오는 연 인들처럼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두 사람을 향해 부어오고 있었다. 로즈마리는 술기운이 돌아서 어지럽다는 듯이 숨을 크게 쉬었다. 피터는 해변으로 로즈마리를 인도했다. 그리고 밀려오는 파도를 쳐다보면서 바닥에 앉았다. 두 사람은 어디로 보나 중년의 부부처럼 느껴지는 한 쌍이었다. "무척 아름다운 밤이에요." "당신은 그보다 훨씬 아름답습니다." 피터는 살며시 로즈마리의 어깨를 감싸안으면서 말했다. 로즈마리는 피터의 행동이 별로 싫지 않은 듯이 그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대었 다. 피터는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팔에 힘을 주면서 몸을 밀착시켰다. 로즈마 리도 피터의 접근을 허용한다는 듯이 자신의 팔을 그의 허리에 감았다. 그리고 고개를 피터의 어깨 쪽으로 떨구었다. 두 사람은 그런 자세로 잠시 동안 안자 있었다. 로즈마리의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향 기가 피터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음 속으로 대사가 걸린 일은 서두르면 안 된 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건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쉽게 타오른 불이 먼저 꺼지듯 이 섣부른 접근은 섣부른 결과만을 낳게 된다는 사실은 피터가 경험했던 수많은 연애 들 속에서 얻은 철칙 중의 하나였다. 피터가 먼 바다를 바라보면서 환상적인 미래를 상상할 때, 로즈마리의 얼굴이 피터의 목덜미를 스쳤다. 피터는 로즈마리의 행동을 의식하면서 깜짝 놀랐다. 따스하고 부드 러운 그녀의 입술이 자신의 목덜미를 스쳤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순간 피터는 그녀가 취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로즈마리가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피터를 향해 입술을 내밀었다. 피터는 곁눈질로 그녀의 눈을 바라보 았다. 그녀의 눈은 이미 감겨 있었다. 피터는 순간적으로 지금 이 순간이 절호의 기 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얼굴을 돌려서 로즈마리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짧은 순간 동안 로 즈마리는 입술을 벌려서 피터의 모든 것은 다 받아들였다. 피터는 뜨거운 키스를 나누 면서 매우 흥분했다. 그의 욕구가 어느 정도 달아올라서 다음 단계로 향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 없게 되었을 때, 로즈마리는 키스를 멈추고 수줍은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당신에 대해 좀더 알고 싶어요. 내가 묵고 있는 별장으로 가지 않겠어요?"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군요. 나도 당신의 별장을 꼭 구경하고 싶었습니다." 피터는 자신을 바하마로 보낸 신에게 감사했다. 그는 아주 태연하게 행동하면서 로 즈마리를 부축했다. 그는 로즈마리의 얼굴에 가벼운 키스를 하면서 그녀를 일으켰다. 하지만 밤은 몹시 어두웠기 때문에 피터는 그 미소 속에서 야릇한 웃음이 감돌고 있다 는 사실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프랭크는 엘리자베스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승용차를 몰면서 롱 아일랜드로 달려가고 있었다. 날이 점차 어두워지면서 마주 달려오는 자동차들의 강렬한 헤드라이트 불빛이 프랭크의 시야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프랭크는 운전대를 잡은 채 계속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있었다. 이미 오랫동안 운전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꾸만 갈증이 났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이 미리 준비해 간 시원한 얼음물을 마셨다. 프랭크는 담배를 꺼내 물고 깊이 빨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정면을 향하고 있었지만 머리 속에는 온통 레베카라고 하는 여자 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프랭크는 레베카의 부모를 찾아갔을 때를 생각했다. 어렵게 그들을 찾아낼 수 있었 지만, 그 결과는 온통 의문 투성이뿐이었다. 그들은 왜 레베카를 자신의 딸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했을까? "그 애는 우리 딸이 아니에요." "무슨 이유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중년 부부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대답을 망설이고 있었다. 한참 동안이나 망설인 끝 에 레베카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나는 사실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입니다. 우리 부모님이 미국으로 이주해 온 이후로 나는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우리 자식들에게는 결코 인종적인 편견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싶 었지요. 그래서 유대인 방식의 이름을 버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이사를 와서 우리 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살았던 겁니다. 그런데 그 애가 대학에 가면서 우리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그 애는 우리가 떳떳하지 못했다고 비난했어요. 그러더니 종종 집을 나가고 가출을 했습니다. 그 문제로 인해 서로의 벽은 더욱 커졌 지요." 레베카의 아버지는 화가 난 듯이 입을 다물고 등을 돌렸다. 주먹을 굳게 쥐고 있는 그의 오른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프랭크의 처지는 매우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레베카 양은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습니까? 연락은 하십니까?" 프랭크가 다시 질문하자 이번에는 레베카의 어머니가 남편을 대신하면서 입을 열었 다. "그 아이는 멀리 떠나 버렸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곧장 이스라엘로 가서 그곳에 정 착했어요. 우리에게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그 이후로 우리는 그 애의 소식을 알지 못해요. 이스라엘에서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그 애가 혹시 죽어 버린 것이 아 닌가 싶어서..." 레베카의 어머니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목이 메인 듯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중 년의 여인은 갑자기 얼굴을 감싸고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옆에 서 있던 그녀의 남편이 어깨를 감싸면서 프랭크를 쳐다보았다. 슬픔에 젖어 있는 그 눈빛에는 딸에 대한 애증이 깃들어 있었다. 프랭크는 그 눈빛 을 그만 돌아가 달라는 신호로 읽었다. 프랭크는 생각을 정리하면서 결론을 내렸다. 그가 알아낸 곳 중에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레베카 더글라스라는 여자가 현재 미국 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녀는 과연 죽었을까? 수많은 의문들이 프랭크의 머리 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는 머리를 좌우로 가볍게 흔들었다. 아무래도 생각을 다시 정리해야만 할 것 같았다. 자동차의 속도계가 시속 160킬로미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속도를 120킬로미터로 낮추고 천천히 다시 생각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롱 아일 랜드를 지시하는 표지판이 자동차가 달리는 속도에 맞추어 뒤로 물러났다. 그렇다면 메드닉 해리슨 회장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여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 여자는 어떤 이유에서 자신의 신분을 레베카 더글라스로 위장했을까? 그럴 만한 이유가 무엇일까? 레베카 더글라스는 미국을 떠나 생사가 불분명하다. 물론 메드닉 해리슨의 비서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아니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그녀의 신분으로 위장하는 것 이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레베카 더글라스가 미국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메드닉 해리슨의 비서는 무엇 때문에 신분을 위장했을까? 그 이유는 과연 무 엇일까? 프랭크는 엘리자베스라는 여자를 떠올렸다. 그녀에 대해 모든 것이 밝혀지면 모든 궁금증이 모두 풀어질 것 같았다. 프랭크는 힘껏 가속기를 밟았다. 어둠은 점점 더 짙게 깔리고 있었다. 한참 동안 더 달린 끝에 프랭크는 겨우 롱 아일랜드에 도착했다. 프랭크는 약도를 보면서 엘리자베스의 집을 찾아보았다. 그 일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엘리자베스의 집은 롱 아일랜드의 중심부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프랭크는 엘리자베스의 집 근처에 자동차를 세우고 현관을 향해 다가갔다. 집 주위 에는 작은 정원이 있었지만 오랫동안 돌보지 않은 것처럼 황폐하게 변해 있었다. 그 집은 모녀가 살기에는 적당한 크기였지만 별로 넉넉하게 보이지도 않는 주택이었다. 프랭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당당하게 현관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집 의 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그리고 더욱 이상한 것은 프랭크가 현관 앞으로 다가섰을 때였다. 현관 바닥에는 우편물과 신문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프랭크는 가장 밑에 깔 린 신문을 꺼내서 날짜를 읽어 보았다. 벌써 몇 주일 동안이나 집을 비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프랭크는 현관의 초인종을 눌러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아무런 반응이 없었 다. 프랭크는 잠시 동안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롱 아일랜드까지 달려와 서 아무런 성과도 없이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프랭크는 담배불 한 대 꺼내 물었 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가볍게 흔들다가 주머니에서 만능 열쇠를 꺼낸 다 음 익숙한 솜씨로 잠긴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간 프랭크는 잠시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사물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자 그는 주방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주방에 붙어 있 는 작은 전등 스위치를 찾아서 불을 켰다. 프랭크는 두리번거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 다. 작은 거실에는 소파와 텔레비전 그리고 장식장과 몇 개의 기구들이 놓여 있었다. 프랭크는 응접실 선반에 몇 개의 사진들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프랭크는 그곳 으로 다가가서 사진들을 들여다 보았다. 가족의 모습이 담긴 사진인 것 같았다. 그것은 엘리자베스의 어린 시절 사진이었다. 프랭크는 손을 내밀어서 사진을 집어들 었다. 그 사진 속에는 모녀가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프랭크는 낡은 사진을 주머니 속에 찔러넣은 다음 다시 주위를 돌아보았다. 프랭크는 거실을 둘러본 후에 방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프랭크는 조용히 침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면에는 침대가 놓여 있었고 구석진 곳에는 옷장이 자리 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쪽에는 화장대화 서랍장이 놓여 있었다. 프랭크는 서랍장으로 걸어가서 서랍을 열어 보았다. 여러 가지 생활용품들이 어지럽 게 들어가 있었다. 서랍장을 하나씩 열어 보던 프랭크는 맨 마지막 서랍에서 편지뭉치 들을 발견했다. 그는 서둘러 편지들을 일일이 조사해 보았다. 편지들의 대부분은 어머니와 딸 사이 에 오고간 것들이었다. 그는 편지를 훑어보다가 꽤 오래된 듯한 편지를 한 통 발견했 다. 그 편지의 직인은 1975년 6월 15일 보스턴 중앙우체국으로 찍혀 있었고 발신인은 메드닉 해리슨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뉴욕의 시립병원 유전자 연구소에 서 보낸 것이었다. 메드닉 해리슨 씨에게. 귀하가 보내주신 혈액 샘플의 유전자 감식 결과 샘플 A는 샘플 B의 친자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었음. 뉴욕 시립병원 유전자연구소 감식과장 웨더비로부터 편지의 내용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편지를 읽어 본 프랭크는 금방 그 내용 에 대해 호기심을 품게 되었다. 오래 전에 메드닉 해리슨은 누군가의 친자 확인을 의 뢰했다. 과연 그 대상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그 결과가 왜 엘리자베스의 집으로 보내 진 것일까? 안타깝게도 편지에는 수취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프랭크는 궁 금증을 풀기 위해 웨더비 박사를 찾아가 보기로 결정했다. 프랭크는 침실을 나와 작은 방으로 향했다. 그는 아마도 그 방이 엘리자베스의 방일 거라고 생각했다. 엘리자베스의 방에서는 별다른 것이 나타나지 않았다. 프랭크가 엘 리자베스의 방에서 한 가지 발견할 수 있었던 사실은 그녀가 매우 치밀한 성격을 가지 고 잇다는 점이었다. 책꽂이의 책들은 종류별로 잘 분류가 되어 있었고 마치 개인 도서관처럼 스티커로 분류표까지 작성해서 붙여 놓고 있었다. 그는 책상의 서랍을 열어 보았다. 서랍의 내 부도 잘 정돈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엘리자베스는 어떤 물건이 어디에 들어 있어 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지정해 놓고 생활하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의 방에서 나온 프랭크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불을 끄고 거실 을 지나 현관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들이 구독하는 잡지를 살펴보다가 이웃 집을 향해 걸어갔다. 프랭크가 이웃집의 초인종을 누르자 예순 살 정도의 나이를 먹은 할머니가 얼굴을 내밀었다. 할머니는 고개만 내민 상태에서 프랭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누군가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전화국에서 나온 직원입니다." "전화국에서 도대체 무슨 일로?" 할머니가 이상하다는 듯이 프랭크를 쳐다보았다. "저기 보이는 옆집 때문에 왔습니다." "로즈마리 씨의 집 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저 집으로 들어가는 전화선이 고장나서 수리를 해야 하는데 벌써 며칠 동안이나 집에 없는 것 같더군요. 혹시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연락을 할 수 있는 방법이라도 알았으면..." "그 여자는 아마 바하마에 갔을 거예요. 자기 딸이 거기에서 산다고 했거든요. 이 름이 뭐라고 하더라..." 할머니는 로즈마리의 딸 이름을 기억해 내려고 노력했다. "엘리자베스 말인가요?" "그래, 맞아. 그 애의 이름이 엘리자베스였어. 그런데 당신이 그 애를 어떻게 알 지?" 할머니는 갑자기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프랭크를 쳐다보았다. 프랭크는 어색한 표 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아, 저도 이 근처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할머니. 안 녕히 계십시오." 프랭크는 재빨리 인사를 하고 나서 자동차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프랭크 는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이제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로즈마리와 엘리자 베스는 지금 바하마에 있다. 그들은 지금 무슨 이유가 있어서 바하마로 떠난 것이다. 프랭크는 우선 잠을 청하고 내일 보스턴으로 가서 웨더비 박사를 만나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프랭크는 가까운 호텔을 찾기 위해 자동차를 출발시켰다. "글쎄요..." 로라 해리슨은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지만 이내 자신의 느낌을 솔직하게 말하기 시 작했다. "할아버지는 여전하신 것 같아요. 지난 3년 동안 건강이 많이 악화되신 탓인지 건망 증이 심해진 것만 제외한다면..." "건망증이라니? 무슨 말인가요?" "할아버지는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할 때 선물했던 하얀색 페르시아 고양이의 이름을 프리웨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건 할아버지가 기르던 사냥개의 이름인데 말이에요." 다니엘은 로라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전의 일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죠. 그리고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나빠지는 것 이 오히려 정상적인 일입니다." 다니엘은 로라가 할아버지를 만난 후에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지 몹시 궁금했다. 다 니엘은 로라가 돌아오자마자 메드닉 해리슨의 근황에 대해 물어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다니엘의 기대와는 달리 로라는 메드닉의 건강에 대해 걱정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로라가 할아버지의 건강을 몹시 걱정하고 있 다는 것을 알게 되자, 지금 상태에서는 굳이 메드닉 해리슨의 근황에 대해 자세히 물어 보지 않기로 결심했다. "로라 양의 할아버지는 정말 대단한 분이에요. 전세계에 메드닉 회장님의 호텔이 없 는 곳이 거의 없으니까요. 게다가 할아버지는 훌륭한 외교관의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 어요. 모든 정치인들이 세계 각국에서 할아버지의 호텔의 이용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요. 할아버지는 정말로 대단한 분이에요." "얼마 후에는 로라 양이 회사를 경영해야만 할 거예요. 할아버지가 창설한 회사를 손녀가 맡아서 경영한다는 것은 아주 뜻깊은 일이 될 겁니다." 다니엘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로라 해리슨은 매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전 별로 자신이 없어요." "자신감을 가져요, 로라. 당신에게는 약간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 조금 전에 프레디 씨와 로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프레디 아저씨와 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구요?" "네, 그래요. 나는 로라 양이 메드닉 회장님의 손녀라는 사실을 알고 무척 놀랐으니 까요. 프레디 씨는 당신이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더군요. 지금 당장 호텔의 운영을 맡겨도 자기보다 훨씬 더 잘 처리할 거라고 했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당신은 그만한 능력이 있어요." "고마워요, 다니엘." 로라는 다니엘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로라는 메드닉 회장의 상속녀 로서 자신이 뉴월드 그룹을 잘 이끌어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프레디의 평가나 다니엘의 말은 로라에게 커다란 용기를 심어 주는 말이었다. "그런데 나에게 왜 메드닉 해리슨 회장님의 손녀라는 사실을 숨겼던 거죠? 내가 믿 을 수 없는 사람으로 보였나요?" 다니엘은 로라가 진실을 솔직하게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섭섭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다니엘. 제발 오해는 하지 말아 주세요.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은 항상 저를 메드닉 할아버지의 손녀라고 소개했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언제나 저를 할아버지의 손녀로 인식했어요. 제가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사람들은 '저 애가 바로 메드닉 해리슨의 손녀야' 혹은 '저 애가 어떻게 메드닉 해리슨의 손녀일 수 있지?' 라는 식으로 평가했어요. 전 항상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못마땅 했어요. 저는 저 나름대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당신에게 저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던 거예요. 저를 있는 그대로 보아 주기를 원했으니까요." 다니엘은 로라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군요.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그런 식으로 평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 아요." "전 당신이 다니엘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쩐지 저를 메드닉 할아버지의 손녀라 고 소개하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이런 의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신은 혼자의 힘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둔 분이고 저는 메드닉 해리슨 할아버지의 손 녀라는 것 이외에는 전혀 내세울 것이 없는 초라한 여자일 뿐이라는 거예요." 로라는 약간 서글픈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로라..." 다니엘은 탁자 위로 손을 내밀어서 로라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다니엘의 손길을 통 해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여자에요." 다니엘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로라를 바라보았다. 로라의 두 눈이 촉촉하게 빛나고 있었다. 로즈마리는 피터의 몸을 서서히 애무하기 시작했다. 능숙한 솜씨로 혀를 움직이면서 피터의 입술과 목, 가슴 그리고 점점 더 아래로 이동했다. 로즈마리가 남자의 모든 민 감한 부분들을 애무해 나가는 동안 피터의 몸은 황홀감에 젖어들고 있었다. 잠시 후에 피터는 로즈마리를 눕히고 몸을 돌렸다. 로즈마리의 몸은 몹시 뜨거웠다. 피터는 로즈마리의 몸 위로 올라가서 손과 입술로 온몸을 애무했다. 피터는 잠시 행동 을 멈추고 로즈마리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은 매우 뜨거운 여자로군요." 피터는 몸을 아래로 내려면서 로즈마리의 허벅지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 은밀한 곳을 더듬었다. 피터의 몸이 로즈마리의 몸 안으로 들어가면서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 다. 로즈마리가 가느다랗게 신음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천천히..." 피터의 격렬한 움직임이 계속되는 동안 로즈마리는 좌우로 몸을 비틀었다. 피터는 점점 더 흥분이 고조되고 있었다. 로즈마리는 피터의 허리를 잡고 몸을 밀착시켰다. 피터는 능숙한 움직임으로 로즈마리의 허벅지를 붙잡고 더욱 거세게 운동했다. "좋아요, 아주..." 로즈마리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헐떡이고 있었다. 로즈마리는 피터의 움직임에 맞추어 허리를 비틀면서 리듬을 맞추었다. 두 사람의 움직임이 점점 더 빨라지다가 마 침내 절정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지금이에요!" 로즈마리가 소리를 지르면서 몸을 가늘게 떨었다. 로즈마리의 몸이 팽팽하게 긴장하 면서 미세한 경련이 일어났다. 그 순간이 지나자 로즈마리는 오르가슴으로 인해 격렬 하게 몸부림쳤다. 잠시 후에 격렬하게 움직이던 피터의 몸이 일으켜지는가 싶더니 로즈마리의 몸위로 축 늘어졌다. 피터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로즈마리가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간 다음 피터는 침대에서 기어나와 대충 옷을 걸친 채 별장의 발코니로 나갔다. 로즈마리의 별장은 해안과 마주 닿아 있는 절 벽 위에 지어져 있었다. 피터의 발 밑에서 바닷물이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어두운 밤바다에 비치는 달빛의 흐름은 물 속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욕망이 생기게 살 만큼 매혹적이었다. 욕실에서는 문을 열어 놓은 듯이 로즈마리가 샤워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있었 다. 피터는 담배를 물고서 조금전에 나누었던 황홀한 섹스를 떠올렸다. 피터는 만족 을 느끼고 있었다. '로즈마리는 정말로 대단한 여자야. 돈과 여자를 한꺼번에 얻게 되다니... 이런 행 운 이 어디 있겠어? 바하마에 오기를 정말 잘 했어. 피터, 넌 역시 대단한 녀석이야.' 욕실의 물소리가 멈추자 피터는 다시 한 번 로즈마리를 안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로즈마리는 소파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피터는 깜짝 놀라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탁자 위에는 피터의 지갑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로즈마리는 지갑에서 꺼낸 신용카 드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피터는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것은 아미보셤 호텔에서 훔친 지갑이었다. "아, 그건 내 고객의..." 피터가 변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로즈마리의 싸늘한 눈빛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 다. 피터가 말을 멈추자 로즈마리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샘이라고 소개했죠? 그런데 호텔 식당에서는 계산서에 제임스라고 서명했어요. 그리고 지금 이것들은 도대체 뭐죠? 이곳에 무엇 때문에 온 거죠?" 로즈마리는 피터의 얼굴 앞에서 신용카드를 꺼내들었다. "그건..." "닥쳐요!" 로즈마리는 피터가 변명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피터가 할 말을 잃어버리고 입을 다물자 로즈마리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해요, 피터. 당신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곤란한 지경 에 빠져들고 있는지 알아요?" 피터는 마치 무거운 물건으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로 즈마리는 이미 나를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리고 내가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니? 피터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로즈마리는 잠시 동안 피터의 표정을 살피고 나서 말을 계속했다. "그래요. 이곳에 나타났을 때부터 우리는 당신이 피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어 요. 당신도 아마 20년 전의 일을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당신이 죽인 사람들에 대해 서 말이에요." "당신이 그 일을 어떻게..." 로즈마리의 입에서 20년 전의 사진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피터는 커다란 충격 을 받고 휘청거렸다. "그 일은 바로 내가 계획한 일이었어요. 알겠어요, 피터? 바로 내가 모든 일을 꾸민 장본인이라구요." 피터는 비로소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자동차 사고를 위장해서 젊은 부부를 죽인 것도 모두 로즈마리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그녀가 모든 일을 지시했던 것이다. "그렇군. 바로 당신이었어. 당신이 그 작자를 시켜서 나로 하여금 살인을 하도록 만들었어." "흥, 멍청한 인간 같으니..." 로즈마리의 싸늘한 목소리에 잠시 말을 멈추었던 피터는 다시 용기를 내어서 말하기 시작했다. "난 아직도 받을 빚이 남았어. 당신을 약속했던 돈의 절반밖에 보내 주지 않았어. 이제 그 빚을 받아야겠어." 피터는 로즈마리를 향해 다가가면서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로즈마리는 계속 여유있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그 당시에 정말로 멍청한 짓을 했어요. 어린아이를 살려준 것은 우리의 계 획을 모조리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었던 거예요. 그런 후에도 다시 나타나서 돈을 받기 를 바랬나요?" "하지만 아기까지 죽인다는 것은 우리의 계약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어. 그것 때문에 당신의 계획이 망쳐졌다는 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니야. 나는 약속대로 두 사람을 처치 했고 그 대가를 받을 권리가 있다구." 피터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이제 피터는 로즈마리의 코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 다. 피터는 이미 20년 전에 그 남자를 보았던 적이 있었다. 피터의 얼굴이 매우 험악하 게 변했다. 피터는 그 남자를 향해 사나운 기세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나에게 살인을 강요했어. 그리고 내 인생은 모두 엉망이 되어 버렸지." 그러자 그 남자는 피터의 코 앞에 총을 들이대었다. "자네가 이곳에 온 것은 대단히 불행스러운 일이야. 20년 동안이나 기다리면서 진행 했던 우리의 계획이 결실을 맺으려는 순간에 다시 나타나서 우리 일을 망쳐 놓으려고 하다니... 자네와 나는 정말로 악연인 것 같군. 내 손으로 자네를 죽여야 하니까 말이 야." 그 남자는 말을 마치면서 동시에 왼손으로 피터의 늑골을 후려쳤다. 피터는 고통스 러운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 순간 권총을 들고 있는 남자의 오른손 이 다시 허공을 갈랐다. 피터는 둔탁한 무기에 턱을 얻어맞고 엄청난 고통을 느끼면서 나가 떨어졌다. 피터는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피 터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피터가 벽을 짚고 비틀거리면서 일어나자 권총 자루 가 이번에는 뒤통수를 노리고 내려 찍었다. 피터는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그 자리에 털 썩 쓰러졌다. 피터는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두 남녀가 나누는 대화를 들을 수 있었 다. "어떻게 할까요?" "아래도 던져 버려요." 피터는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에 피터는 자신의 몸이 끝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정신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리고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다. 다니엘과 로라의 만남은 몇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다니엘은 로라와 대화를 하 는 동안 그녀가 경영이론과 관계법률에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밤이 깊어가자 다니엘과 로라는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로 올라갔다. 다니엘의 방은 3층이었고 로라의 방은 5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서 잠을 청하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다니엘은 로라를 응시하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어 보았다. "내 방에서 한 잔 더 하겠어요, 로라?" "전 그만..." 로라가 미처 말을 끝내기 전에 다니엘은 그녀를 껴안고 열정적인 키스를 퍼부었다. 로라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다니엘의 키스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두 사람이 키스 를 나누는 동안 엘리베이터는 3층에서 멈추었다가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당신을 사랑해요, 로라." 로라의 방으로 들어선 다니엘은 그녀를 껴안고 다시 뜨겁게 키스했다. 부드럽고 정 열적인 키스였다. 로라는 입술에 감미로운 감촉을 느끼면서 행복한 기분에 빠져들었 다. 다니엘은 로라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하얀 시트 위에 드러누워 있는 로라의 얼굴이 한층 더 아름답게 보여서 다니엘은 그만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다니엘의 손이 옷 속으로 파고 들어올 때 로라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전 사실 경험이 없어요." "중요한 건 우리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는 겁니다." "당신은 내가 본 남자들 중에서 제일 멋진 사람이에요." 로라의 말이 끝났을 때 다니엘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다니엘의 손은 로라 의 몸을 부드럽게 애무하고 있었다. 로라는 모든 것을 잊어버린 채 다니엘을 받아들였 다. 다니엘은 아늑한 로라의 몸을 애무하면서 마치 영혼이 녹아 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 았다. 그는 순결하고 천진난만한 소녀를 한 명의 성숙한 여인으로 바꾸어 놓고 있는 중이었다. 돌이켜보면 몇 광년처럼 아득한 시간을 그는 오직 로라를 만나기 위해 살아 온 것만 같았다. 다니엘의 몸이 로라의 다리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자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이내 다니엘의 존재를 확인하고는 다리에 힘을 풀었다. 다니엘은 로라를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 함부로 다룰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민감한 기분, 숭고 한 정신적인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 여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이런 감정은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이었다. 이것이 사랑일까? 로라를 만난 후에야 비로소 이런 경험을 하게 된 것일까? 나를 참 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은 로라 특유의 감정일까? 아니면 욕망일까? 다니엘은 로라의 몸 깊은 곳에 숨어 잇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다니엘은 조금씩 로라의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 바라보면서 무릎을 꿇 었다. 스탠드의 부드러운 불빛이 그들을 둥글게 에워싸고 있었다. 이것은 사랑의 서 막을 알리는 하나의 의례였다. 다니엘과 로라는 얼굴을 맞대고 손을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니엘의 손은 로라의 젖가슴을 더듬었고 로라의 손은 그의 배와 가슴을 헤매었다. 다니엘은 마구 박 동하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면서 로라의 비밀스러운 곳을 깃털처럼 어루만졌다. 다니엘 은 새롭게 인생을 시작할 수 잇는 낯익은 개간지를 향해 낯선 땅을 헤치고 나가는 기 분이었다. 로라는 부드럽게 애무하는 다니엘의 손길을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더욱 애타 게 받아들이고 싶었다. 지금 그녀가 열중하고 있는 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마침내 다니엘은 로라의 몸 속으로 들어가서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처음에 로라 는 아찔한 고통을 느꼈지만 조금씩 그 고통이 쾌락의 물결로 젖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니엘의 열정 때문에 로라의 새롭고 낯선 땅은 아주 익숙한 곳이 되었다. 로라는 다니엘의 힘과 욕구, 열정과 욕망의 터전이 되었다. 로라는 자기가 지금 어디 에 있는지,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잠시 후에야 로라 는 다니엘이 지금 자기의 몸 속으로 파고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뜨거운 사 랑을 나눈 후에 다니엘이 로라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기분이 어때요?" "아주 좋아요." 로라는 다니엘이 매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로라는 자신이 다니 엘이라는 남자에게 그런 행복감을 안겨 줄 수 있다는 것이 매우 즐거웠다. 로라는 다 니엘의 품에 살며시 안겼다. "저에게 실망하지 않았나요?" 로라가 수줍은 듯이 말했다. 다니엘은 대답을 하기 전에 로라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 었다. "당신은 정말로 사랑스러운 여자요." "전 사실을 알고 싶어요." 로라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에는 누구나 몸이 굳어지는 법이에요. 그것이 오히려 나를 기쁘게 했어요. 나 는 오늘 밤을 통해 당신과 한없이 가까워질 거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다니엘의 말은 매우 솔직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니엘의 솔직한 대답은 로라의 마음 을 매우 평온하게 해 주었다. 로라는 다니엘의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고 비로소 마 음을 놓을 수 있었다. 다니엘은 그러한 로라의 감정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한 잔 하지 않겠어요? 우리의 만남을 자축하는 의미로 축배를 드는 게 어때요, 로 라?" "좋아요." 다니엘은 침대에서 일어나 선반 위에 놓인 술병을 꺼내서 잔에 부었다. 다니엘이 술 잔을 들고 돌아왔을 때 로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당신과 오늘 밤에 사랑을 나누었는지 아세요?" "그 이유는?" 다니엘이 로라에게 술잔을 건네 주면서 물었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어요. 전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할아버지와 함께 살 았어요. 지금까지 할아버지 말고는 그 누구도 당신처럼 가깝게 느낀 적이 없었어요." "당신에게는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군요." 다니엘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잔을 들어올렸다. "우리 두 사람을 위해서..." "우리의 사랑을 위해..." 로라도 잔을 들면서 미소를 지었다. 로라는 이제부터 할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는 것 이외에 도 하나의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다니엘의 아내가 되는 것이었 다. 블레이크 그룹의 총수 다니엘 블레이크와 뉴월드 그룹을 이끄는 로라 해리슨. 뉴 월드 그룹과 블레이크 그룹의 결합. 그런 생각이 로라의 마음을 설레이게 만들고 있었 다. 그 시간에 제임스는 자신의 방에서 노트북으로 하버드 대학의 컴퓨터를 통해 월 스 트리트 증권거래소의 중앙컴퓨터와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다. 해변으로 산책을 나갔을 때, 로라는 메드닉 회장의 일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말라고 했지만 제임스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화가 연결되자 제임스는 자신이 사용하는 ID와 비밀번호를 차례대로 입력했다. 모니터에 잠시 기다리라는 대기 신호가 나타났다. 제임스는 냉장고로 가서 콜라를 가 져온 다음 다시 모니터를 응시했다. 얼마 후에 희미한 신호음과 함께 제임스의 접촉이 승인되었다. "자, 컴퓨터 씨. 최근 6개월 동안에 뉴월드 그룹의 주식을 사들이 기업이나 사람들 의 명단을 보여 줘." 제임스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키보드를 조작했다. 제임스가 엔터 키를 치자 모니터에 는 수많은 기업들과 사람들의 이름이 빠르게 지나갔다. "이런! 너무 많은데..." 제임스는 고개를 흔들면서 중얼거렸다. 뉴월드 그룹의 주식을 사들인 사람들의 명단 이 지나가고 나자 제임스는 콜라를 한 모근 마시고 나서 다시 키보드를 조작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 중에서 뉴월드 그룹의 주식을 5%이상 소유하고 있는 기업이나 사람은?" 제임스는 다시 재빠르게 키보드를 조작한 후에 엔터 키를 눌렀다. 모니터에는 다섯 개의 명단이 나타났다. 제임스는 다섯 개의 명단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캘리포니아 보험회사가 6.75%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고 유니버설 투자신탁이 6.25%, 블레이크 종 합상사가 5.7%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개인 명의로 로즈마리가 5.52%, 리차드 상 원의원이 7.02%를 소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섯 사람이 뉴월드 그룹의 주식을 대략 30%정도나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캘리포니아 보험회사나 유니버설 투자신탁이 뉴 월드 그룹과 같이 안정된 기업에 돈을 투자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제임스는 두 회사를 제외시키고 남은 세 개의 명단을 수첩에 기록했다. 그런 다음에 증권거래소 의 컴퓨터와 접촉을 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제임스는 잠시 후에 다시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리면서 뉴욕에 있는 연방 재무조사국 컴퓨터와 접촉을 시도했다. 연방 재무조사국의 컴퓨터는 모든 기업이나 사람들의 재정 적인 비밀을 낱낱이 간직하고 있는 정보의 보고였다. 이곳으로 들어가면 모든 기업이 나 사람들이 완전히 발가벗겨진 상태로 모니터에 떠오르는 것이다. 제임스는 연방 재무조사국의 컴퓨터와 연결되자 그 부서에 근무하고 있는 친구의 이 름을 빌려서 접촉을 승인받았다. 연방 재무조사국의 컴퓨터에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곳에 기록된 모든 정보에 대해 비밀을 지켜주기 바랍니다. "물론." 제임스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컴퓨터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제임스는 가장 먼저 로즈마리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런데 로즈마리가 누구지?" 제임스의 질문에 컴퓨터는 푸른색 바탕에 떠오르는 글씨로 대답했다. 롱아일랜드 15번가에 거주. 딸 엘리자베스와 단 둘이 살고 있음. 뉴욕 시티 은행에 구좌를 개설. 현재 구좌에 입금되어 있는 금액은 2만달러 정도. "주된 수입원은?" 남편 에릭이 베트남 전쟁에서 사망한 이후부터 국가 유공자 연금으로 생활. 현재 연금의 액수는 연간 1만달러 정도. "다른 사항은?" 공식적인 자료는 없음. "그렇다면 비공식적인 것은 뭐지?" 방송국 드라마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거나 연극 무대의 의상을 만들어주고 아르바이트 로 보수를 받음. "그 이외에는?" 자료가 없음. "정말 이상한 일이군." 제임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연간 1만달러의 연금생활자가 뉴월드 그룹의 주식을 5% 이상 가질 수 있을까? 제임스는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갑자기 열 심히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최근 한 달 동안 은행거래 상황에 대해 보여 주게, 친구." 제임스가 다정하게 명령을 내리자 컴퓨터가 친절하게 대답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연방 재무조사국의 컴퓨터는 빠른 속도로 은행의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컴퓨터와 접 속해서 로즈마리의 거래 상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모니터에 로즈마리의 모든 은행 거래 내역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로즈마리의 계좌에는 최근 한 달 동안 20만 달러 이상의 현금이 입금되었다가 출금 된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 제임스는 그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달 동 안 무려 20만 달러라는 거금이 연금 생활자인 로즈마리의 구좌를 통해 뉴월드 그룹으 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었다. 얼마 동안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제임스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있을 수 없는 일을 본 것처럼... 제임스는 무엇인가 실마리를 풀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 덕거렸다. "그렇군." 제임스는 모니터를 응시하면서 자판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리차드 상원의원에 대해서 말해 보게." 컴퓨터는 리차드에 대한 모든 정보를 털어 놓기 시작했다. 리차드는 현직 상원의원 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퓨처 기획이라는 비상장 주식회사의 주식을 51% 소유하고 있는 실제 소유주였다. 제임스가 자판을 두드릴수록 새로운 사실들이 계속 드러났다. 제임스는 모니터를 보 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퓨처 기획은 넬슨이라는 사람이 대표이사로 등 록되어 있었고 미국 곳곳에 카지노를 소유하고 있는 기업이었다. 물론 로라가 메드닉 회장의 주식을 상속받는다면 리차드 상원의원이 보유하고 있는 정도는 문제될 것이 전 혀 없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메드닉 회장이 최근 주식을 팔고 있는 것과 지금 알아낸 정보를 통해 분명히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고 잇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제임스는 갈증을 느끼면서 콜라를 마셨다. 그리고 다시 마지막 남은 블레이크 종합 상사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다니엘 블레이크에 대해 말해 주게." 뉴욕 스트리트에 거주. 독신. 주거래 은행은 유타이티드 저지 은행. 현재 은행에 예치되어 있는 금액은 15만달러. "다른 사항은?" 블레이크 그룹의 총수. 블레이크 그룹은 자산 규모 27위의 기업으로 미국 내에 24개의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다. 현재 세계 63개국에 걸쳐 지사를 설립. 리차드가 소유하고 있는 퓨처 기획의 힘으로 뉴월드 그룹을 합병한다는 것은 재정 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블레이크 그룹은 사정이 달랐 다. 다니엘 블레이크가 회장으로 있는 블레이크 그룹은 전국에 24개의 계열사를 거느리 고 있는 자산 규모 27위의 대기업으로 뉴월드 그룹을 충분히 떠안을 만한 재정적 능력 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그룹의 핵심 기업이 5%나 되는 뉴월드 그 룹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면 충분히 다른 계열사에서도 비밀리에 뉴월드 그룹의 주식 을 분산 매입할 수 있는 것이다. 제임스는 월 스트리트 증권거래소의 중앙컴퓨터에 다시 접속한 다음 블레이크 그룹 의 모든 계열사들이 사들인 뉴월드 그룹의 주식을 조사했다. 그것은 상당히 많은 시간 이 걸리는 일이었다. 제임스는 단 1%의 주식의 이동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작 업을 계속했다. 제임스가 블레이크 그룹과 관련된 비밀들을 하나씩 밝혀내고 있는 사이에 바하마의 해변에는 어느덧 새벽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해변 근처의 바닥에서 머리가 박살난 한 구의 시체가 떠다니고 있다는 사 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