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목 : 시드니 셀던의 기록적인 초 베스트셀러! 내일이 오면 (If Tomorrow Comes) 시드니 셀던 著 / 정성호 譯 꿈같은 사랑, 화려한 변신! 시드니 셀던의 기록적인 초 베스트셀러! 아름답고 지적이며 우아한 여주인공 트레이시 휘트니, 명문가 후계자와의 결혼을 앞두고 행복의 절정에 있던 그녀에게 닥친 갑 작스런 불행과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끔찍한 함정들. 달콤하고 황홀했던 첫사랑은 깨지고 트레이시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어 살인미수범으로 투옥되는데... 마피아의 음모, 여자 감옥의 특수한 사랑 편력, 그리고 특별사 면, 복수의 칼을 갈며 세계 제1의 사기꾼으로 변신한 트레이시 휘 트니, 아름다운 사기꾼 트레이시는 런던, 파리, 암스테르담 등 세 계 곳곳을 누비며 사기행각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지만 절대로 선한 사람의 돈은 갈취하지 않는다.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꾸며지는 꿈같은 이야기들, 사악한 인간 집단에 대한 통쾌한 복수, 그리고 숨돌릴 틈을 주지 않는 스피디 한 전개로 독자들을 완전히 사로잡는 시드니셀던의 기록적인 초베 스트셀러! "죽음의 벼랑에 서서 궁지에 몰린 채 살아가는 아름다운 여주인 공을 통해 독자들은 달콤한 사랑의 세계에 끌려들어가게 된다. 셀 던은 독자들을 매료시킴과 동시에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것을 장기로 삼는데 이 작품에서는 절묘한 수법으로 그 양쪽을 모두 체 험하게 해준다. 독자로서는 놓칠수 없는 작품이다!" - [유나이티드 프레스 인터내셔널] 紙 "로맨스, 사악한 인간, 서스펜스, 그 모든 것을 짜 넣으면서 그 위에 또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흥분 을 만끽한 다음에는 성찬의 웃음이 흘러 나올 것이다." - [리치몬드 타임즈] 紙 "주인공으로 트레이시 휘트니는 시드니셀던이 창작한 가장 새로 운, 그리고 아마도 궁극적인 여주인공일 것이다." - [덴버 포스트] 紙 "겁나고 무서워서 다시 다음 페이지를 펴보게 된다. 트레이시는 어떤 여자일까? 독자들에게는 잠못이루는 밤이 될 것이다." -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 紙 옮긴이의 말 이 작품은 전세계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 시드니 셀던 의 출세작 [내일이 오면] (If Tomorrow Comes) 의 완역본이다. 시드니 셀던을 죄많은 작가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을 한 번이라도 읽으면 다른 소설은 싱거워서 읽을 수가 없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미국 제일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시드니 셀던이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자 독자들에게 준 영향은 일찍이 독서계에 없었던 크나큰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은 남김 없이 번역 출간되게 되었는데,그 작품 하나 하나가 조금도 뒤지는 작품이 없이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이다. 요즘 들어서는 텔레 비전 미니시리즈물로 안방 극장에 그의 작품이 소개되고 있지만, 물론 원작과는 상이한 점이 많이 있다. 이 작품은 단 한 줄을 읽기 시작하면 절대로 책을 놓을 수가 없 는 작품이다. 아름답고, 지적이며, 우아한 여주인공 트레이시 휘트니, 그녀의 첫사랑은 달콤하고 황홀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혼식을 며칠 앞둔 어느 냅薇?손목시계 를 들여다 보았다. 8시 20분이었다. 필8?보냈다. 제일 먼저 입행이 허가되는 것은 고참인 부기계원이다. 그는 경보 기옆에 서서 동료들이 전부 들어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끝나면 문을 잠그도록 되어 있다. 오전 8시 30분 정각에 트레이시 휘트니는 빠릿빠릿한 태도로 동료 행원들과 함께 화려한 로비로 들어갔다. 레인 코트를 벗고 모자를 벗은 다음 부츠를 갈아 신는 동안 동료들이 날씨에 대해 투덜거리 는 것을 혼자 즐겁게 듣고 있었다. "지독한 바람 때문에 우산이 못쓰게 되어 버렸다니까." 출납계원이 불평을 늘어 놓고 있었다. "덕분에 흠뻑 젖었지 뭐야!" "마케트 스트리트는 온통 강이 되어 오리가 두 마리나 헤엄치고 있더라니까." 출납계장이 농담을 했다. "일기예보로는 앞으로 일주일 동안이나 이런 식이라더군. 정말 플 로리다에라도 가고 싶군 그래." 트레이시는 미소를 지으며 자기 자리로 향해 갔다. 그녀는 전신환 최근까지는 사람의 손 을 필요로하는 대단히 복잡한 작업이었다. 그런데 컴퓨터의 출현이 이런 상황을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막대한 액수의 돈이 즉각 오고가게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트레이시의 업무는 야간에 송금되어 온 환어음을 컴퓨터에서 꺼내 서 다른 은행으로 역시 컴퓨터로 보내는 일이었다. 모든 거래는 코드번호화되어 있었으며, 또한 불법적인 침입자를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바꾸게 되어 있었다. 매일 수억달러가 자기화(磁氣化)되어서 트레이시의 손 을 통과하는 셈이다. 보람있는 일이었다. 지구상의 비지니스의 동맥에 소위 싱 싱한 피를 공급해 주는 것이다. 찰스 스탠호프 3세와 만나기까지는 이 업무가 트레이시에게 있어서는 최대의 즐거움이었다. 필라델피 아 신탁은행에는 강력한 국제부가 있었고, 점심 시간이 되면 트레 이시는 동료들과 그날의 움직임을 화제로 삼았다. 언제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얘기들을 들을 수가 있었다. 부기계장인 데보라가 모두에게 가르쳐 주었다. "터키에 대한 1억 달러의 협조 융자를 우리 은행도 체결했다 구 " 부행장 비서인 마에 트렌튼이 자못 비밀스러운 얘기를 한다는 듯 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아침의 중역 회의에서 페루에 대한 새로운 융자단에 참가하 기로 결정했어. 착수금만 해도 5백만 달러가 넘는다니까 " 냉소적인 존 크레이튼이 끼어들었다. "멕시코인 구제자금으로 5천만 달러를 준비하기로 한 모양인데 그 밀입국자 녀석들은 한푼의 값어치도 없다구..." "웃기는 얘기로군. 미국을 황금의 노예라고 비난하는 나라가 언제 나 제일 먼저 손을 비비면서 돈을 꾸러 온다니까." 트레이시는 생각하면서 말을 이었다. 이 화제야말로 트레이시와 찰스를 만나게 해주었고, 그 토론이 두 사람을 맺어주게 되었던 것이다. [4] 제목 : 제2장 필라델피아 2월21일 금요일 오전8시 [2/9] 찰스 스탠호프 3세와 최초로 만난 것은 그가 내빈으로 초청받은 금융에 관한 심포지엄 회의장에서였다. 찰스는 그의 증조부가 창립 한 투자회사를 경영하고 있었으며, 트레이시가 근무하는 은행과 빈 번하게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의 강연이 끝난 뒤에 트레이시는 찰 스에게 면회를 요청했다. 제3세계의 국가들이 전세계의 은행들이나 서방측 정부로부터 빌린 천문학적인 숫자의 돈을 지불할 능력에 대 한 그의 분석을 납득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찰스는 처음에는 반농담조로 대꾸했으나 눈 앞의 아름다운 여성이 세차게 내뿜는 열렬한 공격에 차츰 빨려 들어갔다. 토론은 오래된 레스토랑인 '북바인더'에서의 점심식사로까지 이어졌다. 처음에 트레이시는 찰스 스탠호프 3세에게서 별다른 매력을 느끼 지 못했었다. 하기야 그는 독신으로, 그와 결혼하게 되는 여성은 필라델피아 제일의 혼처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 찰스는 올해 나이 35세로, 부호에다 필라델피아에서는 유수한 명 문의 자제였다. 신장은 178센티 미터, 머리칼은 모래색, 눈은 짙은 갈색, 고지식한 학자 풍이었다. 트레이시는 그에 대해서 그저 따분 하고 돈많은 부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트레이시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찰스가 테이블 위 로 몸을 내밀고 얘기를 걸어 왔다.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내가 태어났을 때 병원에서 아기가 바뀌었 다고 확신하고 있다구요." "네, 뭐라구요?" "아무튼 나는 우리집에서는 돌려놓은 자식이죠. 그래서 그런지 내 가 생각하기에는 돈이 인생의 전부, 이 세상의 전부가 아닌 것 같 습니다. 아 참, 내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아버지에게는 비밀입 니다." 그의 소탈한 면이 좋았다. 트레이시는 그 점에서 약간 마음이 끌 (이런 남자와 내가 결혼하면 어떻게 될까... 미국 굴지의 명문 출 신 남자와?) 그런 생각이 얼핏 트레이시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트레이시의 아버지도 일생을 걸고 하나의 기업을 쌓아 올렸으나 스탠호프 가문에 비한다면 하잘 것 없는 쓰레기 같은 것이었다. (스탠호프 가문과 휘트니 가문은 한데 섞일 수가 없지. 물과 기름 이라구. 스탠호프 가문은 기름인 셈이지. 어머나 왜 내가 이렇게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 혼자서 멋대로 생각하는군. 한 남 자가 식사에 초대했다고 해서 혼자서 벌써 결혼 생각을 하고 있으 니 어이가 없군. 두 번 다시 만날 사람도 아닌데.)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그때 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저녁에 혹시 시간이 있으시면 함께 식사라도..?" 필라델피아에는 구경할 것과 하고 싶은 일이 눈 앞이 어지러울 정 도로 많이 있었다. 토요일 밤, 트레이시와 찰스는 발레를 보거나 리카르도 무티가 지 휘하는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의 연주를 들으러 갔다. '제노즈'의 보 도 옆테이블에서 치즈스테이크를 사먹고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격식 이 높은 레스토랑 '카페 로얄'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두 사람은 헤 드하우스 스퀘어에서 쇼팽을 즐기고, 또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필라 델피아 미술관이나 로댕 박물관을 돌아다녔다. 트레이시는 '생각하는 사람'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찰스를 힐끗 쳐다보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당신과 꼭 닮았어요." 찰스는 운동에 무관심했으나 트레이시는 너무나 좋아해서 일요일 아침에는 웨스트 리버 드라이브나 스쿠드킬 강변의 산책로를 조깅 토요일에는 태극권 도장에 다니며 완전히 지쳐 쓰러질 정도로 착 실하게 한 시간 가량 수련을 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찰스의 아파트 로 갔다. 찰스는 요리의 명인이었다. 또한 손님에게 대접하는 것을 좋아했 모로코 요리나 중국 요리, 또는 프랑스 요리를 이것저것 만들어서 트레이시에게 대접했다. 찰스는 트레이시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꼼꼼한 남자였 언젠가 그녀가 저녁식사에 15분 늦은 적이 있었는데, 찰스가 그 일로 화를 냈기 때문에 그날 밤의 데이트를 망쳐 버린 일이 있었 다. 그날부터 트레이시는 그와의 약속시간은 꼭 지켜야겠다고 마음 속으로 맹세했다. 트레이시 쪽은 섹스는 거의 경험이 없었으나 찰스의 잠자리매너는 그의 평상시 태도와 마찬가지였다. 여기저기 신경을 쓰면서 실수없 이 적절하게 처신하고 있었다. 언젠가 침대에서 트레이시는 대담한 행동으로 반웅해 보았다. 그러자 찰스는 상당히 충격을 받은 것처 럼 보였다. 그래서 트레이시는 자기가 변태가 아닐까 하고 걱정을 하기도 했다. 임신은 예상밖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인 것이 되자 트레이 시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찰스는 그때까지 결혼이란 말을 입에 담 은 적이 없었으며, 그녀 쪽에서는 아기를 구실로 그에게 결혼을 강 요하는 따위의 짓은 조금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임신 중절은 그러나 또 다른 하나의 선택도 똑같이 고통으로 생각되었다. 사생 아를 키울 수가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과연 태어나는 아이에게 있 어서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녀는 어느 날, 저녁식사가 끝난 뒤, 찰스에게 털어놓고 얘기하 기로 했다. 그날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스튜를 만들었는데 신경이 곤두서서 요리를 태워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태운 음식을 찰스 앞 에 내놓으면서 미리 연습한 대로 서론부터 말하려고 했으나, 서론 같은 것은 완전히 잊어 버리고 당돌하게 주워 섬기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찰스 난... 아이가 생겨 버렸어요." 긴 침묵이 흘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트레이시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자 찰스가 가로막았다. "결혼합시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자 트레이시의 가슴에 맺혀있던 응어리가 단번에 스르르 녹아 "책임을 지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하고 결혼할 의무 같은 건 없 다구요." 찰스는 손을 들어서 가로막았다. "아니, 나는 당신하고 결혼하고 싶은 거야, 트레이시. 당신이라면 내 아내로 나무랄 데가 없어." [5] 제목 : 제2장 필라델피아 2월21일 금요일 오전8시 [3/9] 찰스는 말을 음미하듯이 덧붙였다. "하기야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좀 놀랄 테지만 말이야." 그리고는 싱긋이 웃고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트레이시는 조용히 물었다. "어째서 부모님이 놀라시죠?" 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트레이시, 앞으로가 큰 일이라니까. 스탠호프가의 누군가가 결혼 할때는 말이야, 상대방은 으레 같은 계층에서 고르기로 정해져 있다 구. 이 도시의 고급 주택가, 메인렌드에 저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말이야." "그렇다면 당신의 부인은 벌써 정해져 있겠군요?" 트레이시가 넘겨짚고 이렇게 말했다. 찰스는 트레이시를 끌어안았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돼. 내가 선택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 하니까 말야. 금요일에 부모님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구. 우리 부 모님과 부딪쳐 보는 거야." 9시 5분전, 은행내의 웅성거림이 한층 더 높아졌다. 행원들의 말투 가 빨라지고 동작도 기민해졌다. 5분 후의 개점을 앞두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어야 한다. 정면 현관의 유리창 너머로 차가운 빗속에서 손님들이 보도에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트레이시는 은행 내의 중앙부에 정연히 늘어선 6개의 테이블의 금 속용기에 경비원이 새로운 출납 전표를 넣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 다. 고객에게는 그 사람 전용의 자기(磁氣)부착 코드 번호가 쓰여져 있는 출납 전표가 미리 주어져 있는데 그것을 사용하면 출입금은 자동적으로 그 사람의 구좌로 들어가지만, 이 전표는 그것을 잊어 버리고 오는 손님을 위한 것으로 누구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 되어 있는 것이었다. 경비원은 곁눈질로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고 바늘이 9시를 가 리키자 문까지 걸어가서 거창한 몸짓으로 자물쇠를 풀었다. 은행의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로부터 몇시간 동안 트레이시는 컴퓨터에 매달려 다른 것은 아 무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전신환은 모든 코드가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를 이중으로 체크하게 되어 있다. 예금자로부터 지불 의뢰가 있으면, 트레이시가 그 예금자의 구좌 번호와 금액과 지불선의 은행 이름을 확인한다. 은행은 각각 독자적인 코드 번호를 갖고 있으며, 그 번호는 세계의 주요 은행을 포괄한 비밀 명부에 게재되어 있다. 오전 중에는 시간이 물흐르듯이 지나갔다. 트레이시는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 머리를 손질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미용사인 래리 보트에 게 예약을 해 놓았다. 그의 서비스 요금은 비쌌지만 그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을 것이다. 찰스의 부모에게 자신의 최고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니까. (찰스의 부모님 마음에 들도록 노력해야지. 부모가 고른 그의 약혼 자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말자. 나만큼 찰스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여자는 이 세상에 없을걸?)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오후 1시, 트레이시가 막 레인코트를 걸치려고 했을 때 클라렌스 데스몬드 수석부행장으로부터 자기 방으로 오라는 호출이 있었다. 데스몬드는 언제 보아도 빈틈없는 중역다운 모습의 사나이였다. 텔 레비전에서 은행 광고를 한다면 그는 은행의 대변인으로 나무랄 데 없는 적격자일 것이다. 단정한 옷차림, 중후하고 양심적이며 권위를 풍기는 분위기, 신뢰할 수 있는 인간의 전형이었다. "우선 그리 앉아요, 트레이시." 데스몬드는 말했다. 행원 전원의 퍼스트 네임을 알고 있다는 것이 그의 자랑이었다. "짓궂은 날씨지, 안 그래요?" "네." "하지만 날씨야 어떻든 간에 은행의 업무는 절대로 차질이 생겨서 는 안되니까." 데스몬드는 서두를 이렇게 꺼내놓고 이야기가 궁해지자 몸을 앞으 로 쑥 내밀고는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신은 찰스 스탠호프 씨와 약혼을 했다면서요?" 트레이시는 깜짝 놀랐다. "우리들은 아직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았는데요. 그런데 어떻 게...?" 데스몬드는 빙긋이 웃었다. "스탠호프가의 일은 무엇이든지 다 뉴스가 되니까. 참 잘된 일이군 요. 당신은 은행 일은 계속할 생각이겠지요? 물론 신혼 여행을 다녀 온 뒤의 일이겠지만. 은행으로서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소. 당신은 유능한 행원이니까 말이오." "그 문제라면 찰스와 의논을 해 놓았어요. 제가 원한다면 계속 근 무해도 좋다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데스몬드는 만족스러운 듯이 미소를 지었다. 스탠호프 앤드 썬즈사 는 금융계에서도 가장 중요한 투자 기관이다. 스탠호프 기업과의 거 래를 데스몬드의 지점이 독점할 수 있다면 엄청난 이윤이 굴러 들 어올 것은 뻔하다. 부행장은 의자에 다시 몸을 기대며 계속 말을 이 "신혼 여행에서 돌아오면 당신을 승진시킬 생각이오. 물론 급료도 상당히 올라갈 것이오." "감사합니다. 정말 기뻐요." 트레이시는 자신의 지금까지의 업적을 인정받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랑스러운 마음이 솟아 올랐다. 찰스에게 한시라도 빨리 이 소식을 알리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신들이 마치 공모라도 해서 자신을 행복감으로 때려 눕히려 하고 있다고까지 생각되었다. 부친인 스탠호프 씨는 아들과 마찬가지로 찰스라는 이름으로 리텐 하우스 스퀘어의 호화로운 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그곳 은 그 고장 의 명소이기도 하며 트레이시도 몇번인가 지나치며 밖에서 바라본 일이 있다. (이렇게 호화로운 저택이 지금 내 인생의 일부가 되려 하고 있어.) [6] 제목 : 제2장 필라델피아 2월21일 금요일 오전8시 [4/9]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트레이시는 신경이 날카로와져 있었다. 모처럼 손질한 아름다운 머 리모양이 습기 탓으로 엉망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옷도 네 번씩이나 바꿔 입어 보았다. 단순한 복장이 좋을까? 정장 을 하고 가야 할까? 트레이시는 돈을 절약해서 '워너 메이커초에서 산 이브생로랑 옷을 한 벌 가지고 있었다. (그 옷을 입으면 낭비벽이 심하다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포스트 본'의 바겐세일에서 산 옷을 입고 가면 자기 아들이 신분이 낮은 여자와 결혼한다고 생각할 거야. 그것이 그 사람들의 사고방식일 테 니까 말야.) 그녀가 마지막에 가서 결정한 것은 간단한 회색 울 스커트에 흰 실크 블라우스를 받쳐 입는 것이었다. 거기에다 어머니가 크리스마 스 때 선물해 준 가느다란 금목걸이를 하기로 했다. 저택의 현관문은 제복을 업은 집사가 열어 주었다. "안녕하십니까, 트레이시 양?" (집사가 벌써 내 이름을 다 알고 있군 그래. 이건 좋은 징조일까 아니면 나쁜 징조일까?) "코트를 맡아드릴까요?" 그녀는 페르시아 융단에 빗방울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집사가 그녀를 대리석 복도로 안내했다. 은행의 두 배는 될 것 같 아 보이는 넓이였다. 트레이시는 정신이 아찔해지며 어찌할 바를 몰 (아차! 내가 실수했구나! 입고 오는 옷을 잘못 골랐어. 역시 이브생 로랑을 입고 와야 하는 건데...) 서재에 들어갈 때 팬티 스타킹이 발목부터 줄이 가기 시작했다. 하 지만 마침 그때 눈 앞에 찰스의 부모가 나타났다. 부친인 찰스 스탠호프 씨는 60대 중반으로 엄격한 얼굴을 하고 있 었다. 공을 이루고 명성을 얻은 성공인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는 데, 그의 아들도 30년 후에는 그러한 풍모를 지니게 될 것 같았다. 눈은 찰스와 똑같은 짙은 갈색이고, 팽팽한 턱, 가장자리가 희어진 머리칼-트레이시는 당장 그가 좋아졌다. (이분이라면 태어날 아이의 이상적인 할아버지가 될 수 있을 거 야.) 찰스의 어머니도 인상 깊은 용모를 하고 있었다. 몸집은 작고 뚱뚱 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위엄이 서려 있었다. (신뢰할 수 있을 것 같은 외모야. 이분도 틀림 없이 훌륭한 할머니 가 되어 줄 거야.)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스탠호프 부인은 트레이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찾아와 줘서 기뻐요, 찰스한테 우리들 세 사람만의 시간을 조금 얻어 놓았어요. 괜찮겠지요?"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않소?" 찰스의 부친이 쏘아 붙였다. "자, 앉아요... 트레이시라고 했지?" "네." 양친은 장의자에 나란히 앉아 트레이시와 마주 보았다. (나는 마치 심문을 당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자 트레이시의 뇌리에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하느님은 말이다. 네 힘에 겨운 일은 절대로 부과하지 않으신단 다. 한 걸음씩 전진해 나가거라.) 그녀의 첫걸음은 우선 나약하게 미소를 짓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마침 팬티 스타킹의 풀린 올이 무릎까지 와 있어서 양손으로 그곳을 가리면서 웃어 버렸다. "그건 그렇고! 아가씨와 찰스는 결혼하기를 원하고 있단 말이지?" 스탠호프 씨는 부드럽게 말했다. '원하고 있다'는 말이 트레이시의 마음을 흐트러뜨려 놓았다. 찰스 는 양친에게 결혼하기로 했다고 얘기했을 것이다. "네." 트레이시는 대답했다. "아가씨는 찰스와 사권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았지요?" 스텐호프 부인이 물었다. 트레이시는 분한 마음을 억눌렀다. (생각했던 대로군. 마치 나를 심문하는것 같애.) "분명히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스탠호프 부인." "사랑이라고?" 스탠호프 씨가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부인이 다시 말했다. "솔직히 말하겠어요, 트레이시 양. 찰스한테서 이 얘기를 들었을 때는 남편도 나도 굉장히 놀랐다우." 그렇게 말하고는 부인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었다. "물론 샤로트에 대해서는 찰스한테 들었겠지요? 네, 그래요. 찰스 와 샤로트는 함께 자라났어요. 그 두 사람은 정말로 사이가 좋답니 다. 솔직히 말하자면, 금년에는 약혼 발표가 있을 거라고 모두들 기 대하고 있었답니다." 부인은 트레이시의 표정을 읽으려고 했다. 샤로트가 어떤 여성인지 묻지 않아도 트레이시는 잘 알 것만 같았 그녀가 어떤 여성인지 머리 속으로 그릴 수가 있었다. 스탠호프가 의 이웃. 돈이 많고, 찰스와 같은 계급에 속해 있으며 승마를 좋아 하여 우승 경험이 여러번 있고 "가족에 대해서 좀 얘기해 주겠소?" 스탠호프 씨가 재촉하듯이 말했다. [7] 제목 : 제2장 필라델피아 2월21일 금요일 오전8시 [5/9] (이게 뭐람? 마치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심야 영화의 한 장면 같 애. 나는 리타 헤이워즈가 맡은 가냘픈 처녀이고, 케리 그랜트가 연기하는 부친과의 첫대면 장면을 연기하고 있는 거야. 그 다음에 는 음료수가 필요한데. 옛날 영화에서는 보통 이런 장면에서 집사 가 음료수를 들고 들어와서 한숨 돌리게 해 주는데...) 트레이시는 절망을 느끼며 생각했다. "어디서 태어났나요?" 스탠호프 부인이 물었다. "루이지애나입니다. 아버지는 기계공이었습니다." 그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지만 트레이시는 말하고 싶었다. 이제 는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었고, 아버지는 트레이시의 자랑이었다. "기계공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뉴올리언즈의 조그만 하청 공장부터 시작하여 그 분 야에서는 상당한 회사로 키워 놓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5년 전 에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그 사업을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그 회사에서는... 그러니까 어떤 것을 만들고 있나요?" "배기관이라든가 자동차 부품 등 여러가지입니다." "과연." 그들의 말투에서 트레이시는 긴장을 느꼈다. (이 사람들과 친밀해지는 데는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트레이시는 자문했다. 그녀는 자기를 비난하는 듯이 응시하고 있는 두 개의 얼굴에 유혹 이라도 당한 듯 어리석은 말들 을 떠벌이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저희 어머니를 좋아하시게 될 거예요. 어머니는 미인인 데다가 총명하고 매력적이니까요. 남부 출신입니다. 키는 작지만 요, 아마 부인과 비슷할 거예요..." 거기까지 말하고는 더 이상 얘기를 계속할 수가 없어서 무거운 침 묵이 흘렀다. 여기서 트레이시는 바보스럽게도 웃어 보였으나 부인 의 시선과 마주치자 미소가 싹 사라져 버렸다. 부루퉁한 얼굴로 입을 연 것은 스탠호프 씨였다. "찰스의 말에 의하면 아가씨는 임신하고 있다고 하던데?" (맙소사! 그 사실만은 절대로 말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 양친의 태도는 명백히 임신을 비난하고 있었다. 이 문제에는 자기 의 아들이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처럼. '그건 수치스러운 일이야!' 하고 그녀에게 다짐을 받는 듯한 태도 "무엇을 입고 왔어야 했는지 이제야 알겠구나. 옛날에 간통죄를 지은 여자가 입던 그 특별한 복장을 하고 올 걸 그랬어 !)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최근의 일은 나는 잘 모르지만..." 스탠호프 부인이 말을 꺼냈으나 거기서 말을 끊었다. 마침 그때 찰스가 방에 들어온 것이다. 트레이시는 자신의 인생에서 이처럼 제3자가 뛰어드는 것을 기쁘 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안녕?" 찰스가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환담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트레이시는 벌떡 일어나서 그에게 달려갔다. "좋았어요, 찰스." 그녀는 힘껏 그를 껴안으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다행이에요, 찰스. 당신이 부모님을 닮지 않아서요. 절대로 저런 사람들 같이 되어서는 안돼요. 저 두 사람은 편협하고, 공연히 거 만을 떨고, 차가운 사람들 같아요.) 등 뒤에서 조심스러운 헛기침 소리가 들려 왔다. 집사가 음료수롤 들고 서 있었다. (어떻게든 잘 될 거야. 이 영화는 해피 엔드로 끝날 거니까.) 트레이시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저녁 식사는 대단한 진수성찬이었다. 그러나 트레이시는 신경이 곤두서서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은행 업무나 정치, 비 참한 세계정세 등을 화제로 삼았으나 겉치레만 꾸미는 식의 겉도는 양친의 본심은 목소리를 높여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너는 결혼하기 위해서 우리 아들 을 함정에 빠뜨린 거야.' (이유야 그럴듯하지. 자기 아들의 결혼 상대자가 될 여자를 걱정 할 권리야 있겠지. 언젠가는 찰스는 회사를 물려받게 될 테니까, 사장에게 걸맞는 아내를 갖는 건 중요한 일이니까.) 그래서 트레이시는 자신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내가 그 이상적인 아내가 꼭 되어야 해.) 테이블 밑에서 냅킨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그녀의 손 을 찰스가 다 정스럽게 붙잡고 미소지으며 살짝 윙크했다. 그러자 트레이시의 마 음이 갑자기 밝아졌다. "트레이시와 나는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찰스가 말했다. "안돼 !" 스탠호프 부인이 말을 가로막았다. "우리 집안에서는 조촐한 결혼식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찰스, 네 결혼을 축복하고 싶어하는 친구들이 수십 명이나 있다는 걸 잊 어서는 안된다." 부인은 트레이시를 바라보고 배 근처의 부풀은 곳에 눈길을 멈추 "어쩌면 결혼식 초대장을 당장이라도 보내야 할 것 같구나." 그리고 생각난 듯이 덧붙였다. "아가씨가 양해해 준다면 말이지만." "네, 네, 물론입니다." 트레이시가 대답했다. 결혼식은 기정 사실인 것이다. (나에게 이의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스탠호프 부인이 말했다. "외국에서도 손님이 을 테니까 너희들은 이 집에서 머물러야 할 거야." 스탠호프 씨가 물었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정했지?" 찰스는 싱긋이 웃었다. "그건 비밀입니다. 아버지." 찰스는 트레이시의 손 을 꽉 잡았다. [8] 제목 : 제2장 필라델피아 2월21일 금요일 오전8시 [6/9] "그렇다면 얼마 동안 신혼 여행을 가 있을 작정이냐?" "글쎄요.. 한 50년쯤 가 있을 생각인데요." 찰스가 농담으로 얼버무렸다. 트레이시는 그 대답이 무척 마음에 저녁 식사가 골나자 네 사람은 서재로 자리를 옮겨서 브랜디를 마 셨다. 트레이시는 참나무로 둘러친 멋진 방안을 둘러 보았다. 서가 에는 가죽 장정의 책, 벽에는 코로의 작품이 두 점, 코플레이의 조 그만 그림, 레이놀즈의 작품 등이 걸려 있었다. 만약 찰스가 한푼 도 없는 거지였다 하더라도 트레이시에게 불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 자신도 지금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역시 이 정도로 유복하다면 앞으로의 생활도 틀림없이 즐거울 것이라는 사 찰스가 트레이시를 페어마운트 파크의 조그만 아파트에 데려다 준 것은 거의 한밤중이 가까워서였다. "오늘 밤의 대면이 당신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었다면 좋겠어, 트 레이시. 어머니와 아버지는 원래 머리가 구식이라서 그래." "아니에요. 무척 친절한 분들이었어요." 트레이시는 거짓말을 했다. "잠깐 들어갔다 가지 않을래요, 찰스?" 그녀는 찰스의 품에 힘껏 안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서 이런 말을 듣고 싶었다. '사랑해, 트레이시. 이 세상에 우리들 두 사람을 떼어놓을 수 있 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그 대신 찰스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밤에는 안 돼. 내일 아침에 해야할 일이 너무나 많아서." 트레이시는 낙담의 빛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물론 그렇겠죠, 찰스." "그럼, 내일 만나자구." 찰스는 가볍게 키스를 하고는 그녀가 지켜 보는 가운데 현관 입구 로 사라져 갔다. 아파트는 불바다였다. 그리고 화재경보기의 요란한 음향이 정적을 깨뜨렸다. 트레이시는 벌떡 뛰어 일어났다. 몽롱한 머리로 어둠 속 에서 연기 냄새를 맡아 보았다. 벨은 계속 울려대고 있었다. 그것이 전화의 호출음이라는 것을 차 츰 깨닫게 되었다. 침대 옆의 시계는 새벽 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 찰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하고 당황한 그녀는 수화 기를 잡아챘다. "여보세요?" 남자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 왔다. "트레이시 휘트니 양입니까?" 그녀는 망설였다. 외설스러운 장난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 "누구신데요?" "여기는 뉴올리언즈 경찰서의 밀러 경사입니다. 트레이시는 휘트 니양이시지요?" "네." 그녀는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안됐습니다만 나쁜 소식입니다." 이 말을 듣자 그녀의 수화기를 쥔 손이 굳어졌다. "당신의 어머님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요... 아니, 어머니가 사고라도 당했나요?" "돌아가셨습니다. 휘트니 양." "거짓말 말아요"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정말로 지독한 장난 전화다. 어딘가에 서 정신병자가 걸고 있는 거야. 어머니한테 나쁜 일 같은 것이 일 어날 리가 없다. 틀림없이 살아 있을 거야. (사랑해요, 정말, 엄마.) "이런 방법으로 알려 드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만." 전화의 목소리가 말했다. 이것이 바로 현실인 것이다. 악몽과 같은 현실이 지금 여기에 있 는 것이다. 그녀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고와 혀가 얼어붙어 버 경사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여보세요?... 휘트니 양?... 여보세요...?" "아침 첫 비행기로 그곳에 가겠습니다." 그녀는 아파트의 조그만 부엌에 앉아서 어머니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다. 죽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어떤 경우에 도 굽히지 않고 힘차게 살아왔다. 그들 두 사람은 친밀하고 사이좋 은 모녀였다. 트레이시는 어린 소녀 시절부터 무슨 일이든 어머니 와 의논을 해 왔다. 학교나 남자 친구의 일, 나중에는 연애문제 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 사업체를 인수하겠다는 요청이 많이 들어왔다. 어머니는 여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 제 시되었으나, 사업체를 양도하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남편이 이렇게까지 쌓아 올린 회사를, 고생의 결정체를 내던지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해서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업을 훌륭하게 꾸려 나가고 있 (아아, 엄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엄마. 이젠 찰스와도 만나줄 수 가 없게 됐군요. 손자의 얼굴도 볼 수 없겠군요.) 트레이시는 흐느껴 울었다. 그녀는 커피를 끓이고 있었으나 어둠 속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 사 이에 식어 버렸다. 트레이시는 찰스가 너무나도 보고 심었다. 전화 를 걸어서 당장 와 달라고 하고 싶었다. 부엌의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30분이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찰스를 깨우고 싶지는 않았 다. 뉴올리언즈에 가서 전화를 걸기로 하자. 이 일 때문에 혹시 결혼식 예정이 바뀌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순간, 그녀는 죄책감에 사로 잡혔다. 이런 순간에 자기 일만 생 밀러 경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 도착하시는 대로 택시를 잡아 타고 경찰서까지 와 주십시 오." (왜 경찰서로 오라는 걸까? 무엇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 까?) 뉴올리언즈 공항의 혼잡한 인파 속에 서서 트레이시는 여행 가방 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밀고 당기고 하는 여행자에게 둘러 싸여 있으려니까 그녀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회전대에 놓여 있 는 가방을 잡으려고 했으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제 곧 직면해야 하는 절망을 생각하자 그녀는 점점 더 신경질적으로 되어 갔다. 무 슨 착오일 거라고 자신에게 타일러 보기도 했으나 머리 속에서는 아까의 경사의 그 말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9] 제목 : 제2장 필라델피아 2월21일 금요일 오전8시 [7/9] '안됐습니다만 나쁜 소식입니다.. 어머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휘 트니 양... 이런 방법으로 알려 드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만...' 가까스로 가방을 찾아 들고 택시에 오른 트레이시는 경사에게서 들은 행선지를 알렸다. "사우스브 로드가 715번지까지 부탁합니다." 운전사는 백미러로 그녀를 힐끗 보고는 싱긋이 웃었다. "경찰서 말인가요?" 대답은 하지 않았다. 지금은 잡담할 계재가 아니다. 트레이시의 머리속은 극도로 혼란된 상태였다. 택시는 시내를 향해 달렸다. "여기는 축제 관광차 오셨습니까?" 운전사가 계속 떠들어대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운전사가 무슨 얘 기를 하고 있는지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뿐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다니 !) 운전사의 잡담이 귀에 들려오기는 했지만 말이 되어서 머리에 들 어오지는 않았다. 몸이 굳어서 좌석에 앉아 스쳐가는 낯익은 광경 들을 공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프렌치 쿼터까지 접근해서야 비로소 그녀는 시끄러운 소음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미쳐 날뛰는 군중의 소음으로 흡사 폭도의 무리가 큰 소리로 의미를 알 수 없는 고대의 기도문을 외쳐대고 있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겠는데요." 운전사가 그녀에게 말했다. 트레이시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가면 을 쓰거나, 용이나 거대한 악어, 이교도 등으로 분장한 수 백, 아 니 수 천 명의 군중이 차도와 보도를 뒤덮은 채 시끄러운 불협화음 을 내고 있었다. 육체와 음악과 퍼레이드 카와 춤이 혼연일체가 된 "자동차가 녀석들에게 뒤집혀지기 전에 내리는 편이 낫겠습니다. 마르디 그라 축제가 다 뭐 말라 비틀어진 건지?" 운전사가 말했다. 그렇구나! 벌써 2월이구나! 도시 전체가 수난절의 시작을 축하하 는 달이다. 트레이시는 가방을 손에 들고 택시를 내려 길 모퉁이에 섰다. 그러나 다음 순간, 미친 듯이 춤을 추는 군중 속으로 말려들 어 갔다. 어쩐지 기분이 나빴다. 마녀들의 야회-수백 명의 복수의 여신들이 트레이시의 어머니의 죽음을 축하하는 듯한 무시무시한 소동을 일으켰다. 가방은 손에서 나꿔 채여져 어디론가 사라져 버 렸다. 악마의 가면을 쓴 뚱뚱한 사나이에게 안겨져 키스 세례를 받 았다. 사슴이 가슴을 움켜 잡고,팬더곰이 등 뒤에서 포옹하고는 그 녀를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트레이시는 뿌리치고 도망치려고 몸부림을 쳤으나 허사였다. 신들 린 것처럼 춤을 추는 군중에 둘러싸여 의식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난장판 집단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 도 망칠 방법이 없었다. 가까스로 조용한 거리로 빠져나왔을 때 트레 이시는 히스테리가 폭발하기 직전에 와 있었다. 가로등에 기대어 심호흡을 하면서 정신이 평정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에 그녀는 경찰서로 향했다. 밀러 경사는 외근으로 수척해진 얼굴에 떨떠름한 표정을 띤 중년 남자였다. 첫눈에 봐도 그의 근무의 고충을 금세 알 수 있었다. "공항까지 마중나가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밀러 경사는 트레이시에게 사과했다. "도시 전체가 동원된 축제라서요. 어머님의 유품을 조사한 결과, 연락해야할 사람이 당신 밖에 없었습니다." "부탁합니다. 경사님. 우리 엄마한테.. 엄마한테 도대체 무슨 일 이 있었는지 가르쳐 주세요." "사인은 자살입니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 오한이 꿰뚫고 지나갔다. "그런 일이...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어요. 어째서 엄마가 자살 을 해야 했죠? 그처럼 건강했는데요... " 트레이시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당신에게 남겨 놓은 편지가 여기 있습니다." 시체안치소는 썰렁하니 무미건조하고 을씨년스러웠다. 트레이시는 희게 칠한 길다란 복도를 지나 넓고 텅 빈, 방으로 안내되었다. 하 지만 이곳이 사람이 없는 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체로 가 득차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유해도 있었다. 흰 옷을 입은 직원이 벽 쪽으로 다가가서 핸들을 손으로 잡고 엄 청나게 큰 서랍을 끄집어냈다. "보시겠습니까?" (싫어요! 그런 상자에 든 생명이 없는 시신 같은 건 보고 싶지 않 아요!) 그녀는 그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화재경보기가 울려 퍼지 던 몇시간 전의 꿈 속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저 화재경보기의 벨을 현실로 만들어 주세요, 하느님. 그리고 전 화쪽을 꿈으로 해 주세요. 그러면 엄마의 죽음도 꿈이 될 테니까 요.) 트레이시는 느릿느릿 관으로 다가갔다. 한 걸음마다 마음이 비명 을 질러댔다. 드디어 보았다. 자기를 낳고 키우고 웃고 사랑해 주 었던 영혼이 없는 육체를. 그녀는 몸을 굽혀 어머니의 뺨에 키스를 했다. 뺨은 차갑고 마치 고무 같았다. 트레이시는 속삭였다. (오, 어머니! 무슨 일이죠?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었어요?) "검시 해부를 해야 합니다." 직원이 말하고 있다. "자살 시체에 관한 주법임이다." 도리스 휘트니의 유서에는 자살의 동기는 적혀 있지 않았다. [10] 제목 : 제2장 필라델피아 2월21일 금요일 오전8시 [8/9] 사랑하는 트레이시에게 부디 용서해 주기 바란다. 큰 실수를 저질렀다. 너에게까지 피해 를 입힐 수는 없었다. 이 길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너를 진심으로 어머니로부터 유서는 서랍 속의 시체처럼 생명감이 없고 의미도 분명치 않았다. 오후 동안에 장례식 준비를 하고, 트레이시는 택시로 집으로 향했 다. 마르디 그라 축제의 요란한 소음이 먼 곳에서 들려 왔다. 여러 가지 괴물들이 괴상한 의식을 진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휘트니 가의 주택은 고지대의 주택지의 가든 구에 있으며, 빅토리 아 양식의 건물이었다. 뉴올리언즈의 대부분의 주택들과 마찬가지 로 목조건물이었다 지반이 해발보다 낮기 때문에 지하실은 없었다. 트레이시는 그 집에서 자랐다. 지난 몇 년 동안은 살지 않았지만 그곳은 따뜻하고 안락한 추억으로 넘쳐 흐르고 있었다. 택시가 천 천히 집 앞에서 멈춰 서고, 차에서 내린 그녀는 잔디밭 위에 세워 놓은 표찰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판매가: 뉴올리언즈 부동산 회사'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그리운 우리 집을 어떻게 팔 수 있겠니? 우리 가족 세 사람의 행복이 하나 가득 담겨 있는 집인걸.' 어머니는 입이 닳도록 말했었다. 가슴의 설레임을 느끼면서 트레이스는 목련나무 밑을 지나 현관 앞에 섰다.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스페어 키는 아직도 가지고 있었 다. 중학교 1학년 때 받은 것을 부적으로써, 자신을 언제나 맞아들 여주는 이 안식의 장소에 대한 추억으로써 줄곧 간직해 왔던 것이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던 그녀는 깜짝 놀라서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가구가 모두 사라지고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수많은 아름다운 골동품들이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집은 주인에게 버림받은 알맹이 없는 조개 같았다. 트레이시는 미 친듯이 방에서 방으로 뛰어 다니며 믿을 수 없다는 느낌에 사로잡 혔다. 마치 갑작스러운 재난이 닥쳐온 것 같았다. 그녀는 이층으로 뛰어 올라가 자신의 인생의 태반을 보낸 침실 입구에 서 보았다. 텅 빈 방이 공허하게 마주 노려보고 있었다. (오 하느님!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현관의 초인종이 울렸기 때문에 멍청한 기분으로 계단을 내려갔 휘트니 자동차 부품회사의 공장주임인 오토 슈미트가 현관 앞에 서있었다. 배는 불툭 튀어 나왔지만 몸은 레일처럼 가늘고, 얼굴은 주름 투성이인 노인으로 흐트러진 흰 머리칼이 머리의 벗겨진 부분 을 둘러싸고 있었다. "아가씨. 지금 방금 연락을 받았습니다. 뭐라고..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그는 심한 독일어 사투리로 말했다. 트레이시는 그의 손 을 힘껏 움켜 잡았다. "오토씨, 이렇게 와 주셔서 고마워요. 들어오세요." 그녀는 텅 빈 거실로 그를 안내했다. "미안합니다. 앉을 만한 곳이 없어서요." 그녀는 사과의 말을 했다. "마룻바닥에 앉으셔야겠네요." "네, 상관 없구 말구요." 두 사람은 마주보고 앉았으나 너무나 분노에 찬 나머지 눈은 서로 상대방을 보고 있지 않았다. 오토 슈미트는 트레이시가 철이 들기 전부터 아버지 회사에서 일 해온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그를 더할 수 없이 신뢰하고 있었다는 것을 트레이시는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사업을 인수한 뒤에도 슈미트는 그대로 남아서 일해왔다. "오토 씨, 무슨 일이 있었나요? 경찰에서는 자살이라고 하지만 아 저씨께서도 아시다시피 어머니가 자살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자 갑자기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 있었다. "어머니가 어디 아프신 곳이라도? 지병은 없었을 텐데요...?" "아닙니다. 그런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구요." 오토 슈미트 공장주임은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분한 표정으로 먼 곳 을 바라 보았다. [11] 제목 : 제2장 필라델피아 2월21일 금요일 오전8시 [9/9] 트레이시는 한 마디 한 마디 음미하면서 말했다. "오토 아저씨는 엄마가 이렇게 된 이유를 알고 있지요?" 그는 눈물에 젖은 푸른 눈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최근에 있었던 일을 아가씨한테는 알리지 않았지요? 걱 정할까 봐서요." 트레이시는 미간을 찌푸렸다. "걱정거리가 뭔데요? 들려 주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오트 슈미트는 닳아 떨어진 팔소매에서 뻗어나온 팔을 크게 벌렸 다가 다시 오므렸다. "조 로마노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조 로마노요? 아니요. 그런데 왜요?" 오토 슈미트 공장주임은 눈을 깜박거렸다. "6개월 전에 그 로마노가 어머님께 접근해 와서 회사를 사겠다고 제의했습니다. 어머님은 팔 생각이 없다고 거절했지만, 그러자 놈 은 실질 가격의 10배의 값을 불렀기 때문에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답니다. 어머님은 무척 기뻐하고 계셨습니다. 받은 돈을 각종 채권에 투자하면 그 이자로 아가씨와 두 분이서 평생 편안하게 살 수 있다면서요. 그것으로 어머님은 아가씨를 놀라게 해 줄 생각이 었지요. 나도 잘 됐다고 기뻐했었습니다. 나는 3년 전부터 언제든 지 그만둘 마음을 먹고 있었으니까요,트레이시 양, 그런데 그만두 고 뭐고 할 수가 없게 되었답니다. 로마노 녀석은..." 오토는 내뱉듯이 말했다. "로마노는 어머니에게 얼마 안 되는 계약금만 지불했을 뿐인데, 눈덩이처럼 불어난 거액의 부채가... 지난 달 지불 최종 기한이 되 어 버린 것입니다." 트레이시는 초조해하며 재촉했다. "계속해 얘기해 주세요, 오토 아저씨.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나 요?" "로마노가 부품 공장을 인수하고는 놈은 직원 모두를 해고시키고, 일을 꾸미기 위해서 자기 부하들을 데려왔습니다. 그리고는 놈은 회사를 몽땅 팔아 먹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든 자산을 매각하고, 수많은 비품을 구입한 뒤 그것들을 팔아 먹으면서도 지불은 하지 않았던 거예요. 납품업자들은 지불이 늦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업자들은 아가씨의 어머님과 거래를 하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으니까요. 밀린 대금의 독촉을 받았을 때, 어머님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비로소 깨닫고, 로마노에게 해명 을 요구했지요. 그러자 놈은 어머님에게 더 이상 거래할 생각이 없 으니까 회사는 다시 돌려주겠다고 말했던 겁니다. 그때는 이미 회 사는 자산 가치를 상실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어머님은 50만 달러 의 부채를 떠맡게 되었고, 지불 능력은 없어진 상태였어요. 아가 씨, 어머님이 회사를 살리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나도 아내도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답니다. 하지만 아무리 몸부림쳐 보아도 헛일이었습니다. 파산 선고를 받았어요. 놈들이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가 버렸답니다. 회사도, 이 집도, 자동차까지도 말예요." "아아, 어쩌면 그럴 수가!" "게다가 또 있습니다. 지방 검사가 어머님을 사기죄로 기소하여 실형판결을 요구하겠다는 사실을 알려 왔습니다. 그 통고를 받은 날, 어머님은 돌아가신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오르는, 억누를 길이 없는 분노가 트레이 시를 덮쳤다. "하지만 어머님이 취조 때 모든 사실을 얘기하고... 그자가 한 짓 을 설명했다면... " 늙은 공장주임은 고개를 흔들었다. "조 로마노는 엔소니 올사티라는 사람의 심복입니다. 올사티는 뉴 올리언즈를 지배하고 있는 사나이입니다. 로마노가 이전에도 같은 수법으로 회사를 횡령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내가 알아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습니다. 설사 어머님이 로마노와 법정에 서 싸운다고 해도 결심까지는 몇년이나 걸릴 것이고, 실제로 소송 을 걸 수 있는 돈도 없었습니다." "어째서 어머니는 나한테는 한 마디도 그런 에기를 하지 않았죠?" 그것은 비통한 절규이고, 어머니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절규이 기도 했다. "어머님은 자존심이 강한 분이셨으니까요, 얘기한다고 해서 아가 씨가 무엇을 어쩔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 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트레이시는 분개하여 그렇게 생각했다. "조 로마노를 만나보고 싶어요. 어디로 찾아가면 되죠?" 오토 슈미트는 전적으로 반대였다. "놈에 대해서는 잊어 버려야 합니다. 놈의 세력이 얼마나 큰지 아 가씨는 잘 모를 겁니다." "그의 집이 어디죠, 오토 씨?" "잭슨 스퀘어에 집이 있는데, 가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겁 니다. 트레이시 양, 내 말을 믿으셔야 합니다." 트레이시는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까지의 자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증오 '였다. (조 로마노에게 꼭 어머니를 죽인 대가를 치루게 하고 말테다.) 트레이시는 마음 속으로 맹세했다. [12] 제목 : 제3장 그녀는 전화를 끊고 침대에 똑바로 누웠다 [1/7] 제 3 장 시간이 필요하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작전을 세울 시간이 필요 한 것이다. 트레이시는 약탈당한 집에서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아서 매거진 거리에 있는 조그만 호텔에 묵기로 했다. 멀리 떨어진 프렌치 쿼터 쪽에서는 아직도 난장판 소동이 계속되고 있었다. 프런트에 있는 접 수계원이 여행 가방을 들고 있지 않은 트레이시를 보고 의심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선불로 부탁합니다. 하룻밤 묵는 데 40달러입니다." 트레이시는 호텔 방에서 클라렌스 데스몬드 수석부행장에게 전화 를 걸어, 사정이 있어서 2, 3일쯤 직장에 못나가게 되었다는 것을 부행장은 소리치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요.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누군가에게 대신 일을 시킬 테니까 말이오." 그는 자기가 얼마나 친절하게 대해 주었는가를 트레이시가 찰스 스탠호프에게 전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다음에 찰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찰스? 오, 찰스..."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트레이시? 어머니가 오전 내내 당신을 찾 있었어. 둘이서 여러 가지로 의논할 게 많이 있으시대." "미안해요, 찰스. 난 지금 뉴올리언즈에 와 있어요." "어디라구? 뉴올리언즈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 말이 트레이시의 목에 가시처럼 박혔다. 그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달라졌다. "아아, 저런! 미안해, 트레이시.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군 그래. 어머님께서는 아직 젊으실 텐데?" (너무나 젊었어요.) 억울한 생각이 치밀어 올랐기 때문에 트레이시는 큰 소리로 말했 "네, 그래요. 아직 한창 나이셨다구요." "무엇이 원인이었지? 당신은 괜찮아?" 무엇 때문인지 트레이시는 찰스에게 어머니의 죽음이 자살이었다 고는 차마 얘기할 수가 없었다. 놈들이 어머니에게 한 끔찍스러운 짓을 모조리 큰 소리로 외쳐대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자제했다. (이건 나 혼자만의 문제야. 찰스를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 트레이시는 이렇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찰스. 나는 괜찮으니까요." "내가 그리로 갈까, 트레이시?" "괜찮아요. 그 마음만으로도 고마워요. 나 혼자서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어요. 내일 장례식을 치르고 월요일에는 필라델피아로 돌아갈 생각이에요." 그녀는 전화를 끊고 침대에 똑바로 누웠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천장의 지저분한 방음 타일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로마노... 넷... 다섯.. 조 로마노... 여섯... 일곱... 그에게 대가를 치루게 해야 한다. 트레이시에게는 명확한 계획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조 로마노 의 행위를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어머니의 원수를 갚을 방법을 어떻게 해서든 찾아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트레이시는 오후 늦게 훌쩍 호텔을 나와서 캐널 거리로 가 어떤 전당포 앞에서 멈추었다. 유행에 뒤떨어진 초록색 차양이 달린 모자 를 쓴 혈색이 나쁜 남자가 카운터 위에 쳐진 철망 안쪽에 앉아 있 "어서 오십시오." "저어... 권총을 한 자루 사고 싶은데요." "어떤 모델로요?" "저 ... 그러니까... 리볼버를." "32 구경과 45 구경이 있는데요...?" 트레이시는 지금까지 권총같은 것은 손에 잡아본 적조차 없었다. "32 구경이면 좋겠어요." "32 구경이라면 229달러로 스미스 앤드 웨슨의 좋은 물건이 있습 니다. 차터 암즈는 159달러구요." 그녀는 현금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좀 더 싼 것은 없나요?" 그러자 점원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싸구려는 장난감이라구요, 아가씨. 하지만 좋습니다. 32구경을 150 달러에 드리지요. 게다가 탄창까지 끼워서요." "그것으로 주세요." 트레이시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점원은 등 뒤의 테이블 위에 있 는 무기상자로 가서 권총을 골랐다. 그리고 그것을 카운터로 가지고 "사용법은 알고 있나요?" "그냥... 방아쇠를 잡아 당기기만 하면 되지 않나요?" 점원은 투덜거렸다. "탄환을 장전하는 법도 가르쳐 드릴까요?" 트레이시는 아니, 괜찮다. 그것을 사용할 의도는 없으며 누군가를 겁내주고 싶을 뿐이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그런 말을 하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그만두기로 했다. "네, 부탁합니다." 그녀는 점원이 탄창에 총알을 집어 넣는 것을 보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트레이시는 지갑을 꺼내서 돈을 헤아렸다. "당신의 이름과 주소가 필요합니다.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니까요." 이름, 주소,경찰. 그 말을 듣고 트레이시는 한순간 아연해졌다. 조 로마노를 총으로 위협하는 것은 범죄 행위인 것이다. (하지만 범죄자는 그 쪽이지 내가 아니라구.) 초록색 채양 때문에 눈이 노랗게 보이는 점원이 말했다. "이름은요?" "스미스예요. 조안 스미스요." 점원은 카드에 기록했다. "주소는요?" "도먼 거리, 도먼 거리 30의 20번지예요." 얼굴도 쳐들지 않은 채 점원이 말했다. "도먼 거리에는 30의 20번지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강 한가운데 가 되어 버리니까요. 50의 20번지로 해 둡시다." [13] 제목 : 제3장 "정말 흥분시켜주는 아가씨군." [2/7] 점원은 영수증을 그녀 앞으로 밀어보냈다. 트레이시는 '조안 스미스'라고 서명했다. "이젠 다 되었나요?" "좋습니다." 점원은 조심스럽게 권총을 철망 밖으로 밀어 내보냈다. 트레이시는 총을 한참 동안 응시하고 있다가 이윽고 그것을 집어 들고 핸드백 속에 쑤셔 넣고는 몸의 방향을 바꿔 서둘러 점포 밖으 로 나왔다. "아, 아가씨. 지금 그 권총에는 총알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잊지 마세요!" 점원이 뒤에서 소리쳤다. 잭슨 스퀘어는 프렌치 쿼터의 중심에 있는데, 그곳에는 장엄한 센 트루이스 대성당이 축복이라도 하듯이 우뚝 솟아 있다. 성당은 광장 에 있는 고풍스러운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인데, 정원은 높은 생나무 울타리나 우아한 목련나무로 가려져 있어서, 바깥 거리의 교통 소음 에서 차단되어 있었다. 조 로마노는 광장에 접한 저택들 중 어딘가 에 살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주위가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문제의 축제 소동은 찰스 거리를 이동 중이었다. 트레이시의 귓속에서 그녀가 뉴올리언 즈에 도착하자 마자 말려들어간 대혼란이 멀리 산울림처럼 울려퍼 트레이시는 목표로 하는 집을 관찰하며 어둠 속에 서 있었다. 핸드 백에 들어 있는 권총의 무게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녀가 세운 계획은 아주 단순했다. 조 로마노에게 어머니의 누명을 벗기도록 설 득하는 것이다. 거절당하면 총으로 위협해서 자백서를 쓰게 한다. 그녀가 그것을 밀러 경사에게 가지고 가면 로마노는 체포당하고, 어 머니의 명예는 회복될 것이다. 트레이시는 찰스가 옆에 있어 주었으면 얼마나 마음 든든할까 하 고 생각했다. 그러나 혼자서 결행하는 것이 최상인 것이다. 찰스는 제외시켜 두어야 한다. 모든 것이 해결되고 조 로마노가 투옥당하고 난 다음에 모든 것을 그에게 얘기해 주도록 하자, 통행인이 한 사람 다가왔다. 트레이시는 그 사람이 지나가고 도로 가 텅 비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집으로 다가가서 현관의 초인종을 눌렀다. 반응이 없다. (로마노는 아마 마르디 그라 축제 동안에 어딘가의 무도회에라도 갔나 보군. 좋아, 기다려 주지, 네놈이 집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마.) 트레이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현관의 불이 켜지고,문이 열 리더니 입구에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의 용모에 트레이시는 당황했 다. 그녀는 사악한 인상을 뚜렷하게 새기고 있는 전형적인 갱의 얼 굴을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가 않았 다. 자기 바로 앞에 서 있는 것은 대학 교수로 착각할 정도로 온화 한 표정을 지닌 매력적인 남성이었던 것이다. 목소리는 낮고 상냥했 "어서 오십시요.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조셉 로마노 씨이신가요?" 트레이시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인지요 아가씨?', 그의 태도는 정말 친절하고 매력적이었다. (어머니가 이 남자에게 사기를 당한 것도 무리는 아니구나.)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저어... 잠시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요, 로마노 씨." 로마노는 그녀의 용모를 한참 동안 관찰했다. "좋습니다. 자아, 들어 오시죠." 트레이시는 번쩍번쩍 빛나는 아름다운 장식품이 가득 들어찬 거실 로 안내되었다. 조셉 로마노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한테서 훔쳐낸 돈으로 이렇게 호화스럽게 살고 있는 거야.) 트레이시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한잔 하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소. 아가씨도 들겠소?" "아뇨, 괜찮아요." 로마노는 신기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떤 용무로 나를 만나러 오셨나요...?" "나는 트레이시 휘트니입니다. 도로시 휘트니의 딸입니다." 로마노는 멍청한 표정으로 트레이시를 응시하고 있다가 한참만에 야 그의 얼굴에 알겠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아, 알겠습니다. 어머님 얘기는 들었습니다. 참 안 됐습니다." (안됐다고!) 어머니의 죽음을 불러 일으킨 장본인의 말이 '안됐다'는 한 마디라 니 ! "로마노 씨, 지방 검사는 어머니가 사기를 쳤다고 믿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어머니 의 협의를 벗겨 주십시오." 로마노는 어깨를 추슬러 보였다. "마르디 그라 축제 중에는 일을 하지 않는 주의라서요, 내 신앙에 위배된단 말씀이요." 로마노는 바로 걸어가서 술을 두 잔 섞기 시작했다. "아가씨도 좀 마셔 봐요. 기분이 좋아질 테니까." 트레이시에게는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핸드 백을 열고 권총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총구를 로마노에게 겨누었 "무엇이 나를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지 말해 드릴까요, 로마노 씨? 당신이 나의 어머니한테 한 짓을 정확하게 고백하는 일이에요." 조셉 로마노는 뒤를 돌아다보고는 자기를 겨냥하고 있는 권총을 "그것을 저쪽으로 돌려요, 아가씨. 총이 오발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말이오." "오발이 아니라 정통으로 불을 뿜는 다구요. 내가 말하는 대로 회 사를 어떻게 도산시켰는가를 솔직하게 적어요. 우리 어머니를 자살 로 몰아넣은 경위를 있는 그대로 쓰라구요!" 트레이시가 지켜보는 가운데 로마노의 검은 눈에 경계의 빛이 떠 "아아, 그래? 내가 거절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런 짓을 하면 당신을 죽이겠어요!" 트레이시는 손에 들고 있는 권총이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당신은 사람을 죽일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 휘트니 양." 로마노는 글라스를 든 채 트레이시에게 다가와서 성실한 듯한 상 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전혀 관계가 없다니까... 아가씨 어머니의 죽음과는 말이야. 믿어줘, 나는... " 로마노는 술을 트레이시의 얼굴에 뿌렸다. 눈에 알콜이 따갑게 스며드는 것을 그녀가 느낀 그 순간, 권총은 옆으로 뿌리쳐졌다. "아가씨의 어머니가 나한테 숨기고 있었던 것이 있구만. 이런 매력 적인 딸이 있다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거든." 로마노가 말했다. 로마노가 그녀의 양팔을 붙잡고 뒤로 조르기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게 된 트레이시는 공포에 떨었다. 도망치려고 몸부림쳤으나 로마 노가 뒤에서 끌어안은 채 그녀를 벽에다 힘껏 밀어 붙였다. "배짱이 좋군. 마음에 들었어. 정말 흥분시켜 주는 아가씨군." [14] 제목 : 제3장 넌 진짜 남자와 섹스해 본 적이 없을 테지.[3/7] 로마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트레이시는 상대의 몸에 힘이 넘치는 것을 느끼고 발버둥을 치려고 했으나 점점 더 조여드는 통에 꼼짝 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럴듯한 자극을 구하러 찾아온 거지? 응? 알겠어. 이 조 아저씨 가 만족시켜 주지." 트레이시는 비명을 지르려고 했으나 나온 것은 신음 소리 뿐이었 "놔 줘요!" 로마노는 블라우스를 잡아 벗겼다. "야아, 이거 굉장한 유방이로군 그래 !" 로마노는 쉰 목소리로 말하고 젖꼭지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자아, 좀 더 몸부림을 치라구, 아가씨 ! 온몸이 오싹오싹해지는 군." "비켜요!" 로마노는 더욱 강하게 끌어 안았다.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트레 이시는 마루에 넘어졌다. "넌 진짜 남자와 섹스해 본 적이 없을 테지?" 그렇게 말하면서 로마노는 그녀 위에 걸터앉아 체중을 가해 꼼짝 못하게 하고 트레이시의 넓적다리를 손으로 더듬어 올라 왔다. 트레 이시가 최후의 저항으로 손발을 버둥거리고 있을 때, 어느 순간 손 가락이 권총에 닿았다. 그녀가 그것을 꽉 움켜쥐자 돌연 커다란 소 리가 났다. "앗! 빌어먹을!" 로마노가 소리치고 움켜잡고 있던 힘이 갑자기 느슨해졌다. 희뿌연 안개 속에서 트레이시는 로마노가 옆구리를 움켜쥐고 자신의 몸 위 에서 마루로 굴러 떨어지는 무서운 광경을 보았다. "나를 쏘았어... 이 미친 년이 나를 쏘았어... " 트레이시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기 분이 나빠지면서 눈도 무엇에 찔린 듯한 아픔으로 보이지 않게 되 다리를 질질 끌면서 방의 끝쪽까지 비틀비틀 걸어가서 문을 밀어 열었다. 욕실이었다. 그녀는 휘청거리면서 세면대를 손으로 더듬어 찾아서 차가운 물을 가득 받아 얼굴을 씻고서, 눈의 아픔이 가시고 시력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거울을 들여다 보니까 눈은 충혈 되어 광기에 차 있었다. (큰일이야. 내가 살인을 저질렀어 !) 트레이시는 거실로 뛰어 돌아왔다. 조 로마노가 바닥에 누워 있고, 피가 새하얀 융단을 물들이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핏기 없는 얼굴로 그를 내려다 보았다. "미안해요.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방심한 듯이 그녀는 말했다. "구급차를..." 숨을 헐떡거리면서 로마노가 중얼거렸다. 트레이시는 책상 위의 전화로 달려가서 교환수를 불렀다. 말을 하 려고 했지만 목이 잠겨서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교환수, 구급차를 빨리 좀 보내 주세요. 주소는 잭슨 스퀘어 4의 21번지입니다. 중년 남자가 총을 맞았습니다!"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 놓고 조 로마노를 내려다 보았다. (오, 하느님, 제발 죽지 않게 해 주세요. 저는 죽일 생각은 전혀 없 었습니다.) 트레이시는 기도를 하고 로마노가 살아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로마노의 눈은 감겨 있었으나 호흡 은 아직 있었다. 그런 그에게 트레이시는 말했다. "구급차가 지금 여기로 오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녀는 그곳을 나왔다. 트레이시는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이 두려워서 애써 뛰지 않도록 했다. 찢겨진 블라우스를 감추기 위해 자켓으로 가슴께를 가렸다. 로마노 저택으로부터 4블럭 떨어진 곳에서 그녀는 택시를 잡기로 했다. 대여섯대 지나쳐 간 택시는 모두 미소를 머금은 행복해 보이 는 손님들을 태우고 있었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다가오더니 눈깜 짝할 사이에 구급차는 트레이시 앞을 지나쳐 로마노의 저택 쪽으로 질주해 갔다. (여기서 빨리 도망쳐야 해.)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그녀 앞쪽 길 모퉁이에서 택시가 멈추고 손님이 내렸다. 트레이시 는 놓치지 않으려고 그 택시 쪽으로 달려 갔다. "운행중이죠?" "가는 장소에 따라서요. 손님은 어디로 갑니까?" "공항까지요." 그녀는 숨을 죽이고 대답을 기다렸다. "타시오!"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트레이시는 구급차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구 급차가 너무 늦게 도착해서 로마노가 죽어 버리면 어쩌나? 그러면 나는 살인자가 된다. 총을 놓아 둔 채로 도망쳐 나왔으니까 지문이 남아 있을 것이다. 로마노가 강간을 하려고 해서 저항하는 사이에 권총이 발사되었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믿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조 로마노옆에 내버리고 온 권총은 트레이시가 산 물건인 그로부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경과했을까? 30분? 한 시간? 어쨌든 가능한한 한시라도 빨리 뉴올리언즈로부터 탈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축제는 재미있었나요?" 운전사가 물었다. 트레이시는 입 안에서 우물거렸다. "네에?... 아, 네." 그녀는 손거울을 꺼내서 옷매무새를 고치려고 했다. 조 로마노에게서 자백을 얻어내려고 한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모든 것이 빗나가 버린 것이다. (찰스에게는 어떻게 얘기하면 좋을까?) 그는 충격을 받겠지만 알아듣도록 설명하면 이해해 줄 것이다. 어 떻게 해야 좋을지 찰스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택시가 뉴올리언즈 국제 공항에 도착하자 트레이시는 기묘한 생각 이 들었다. (여기에 내린 것이 정말로 오늘 아침이었을까? 모든 일이 단하루 사이에 일어났단 말인가?) 어머니의 자살... 축제 행렬에 말려들어 갔을 때의 공포.. 남자의 신 음 소리... '나를 쏘았어.., 이 미친년이...' 트레이시는 대합실 쪽으로 걸어가면서 모두로부터 비난의 시선을 받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에 떨었다. (이것이 바로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이로구나.)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트레이시는 조 로마노의 상태가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그가 어느 병원으로 옮겨졌는지도 알 수가 없었고, 또 알아볼 방법도 없었다. [15] 제목 : 제3장 말하라니까.밤새껏 날 기다리게 할 셈이야 [4/7] (틀림 없이 살아날 거야. 나와 찰스는 어머니의 장례식에 돌아올 것이고, 조 로마노도 무사하겠지.) 트레이시는 새하얀 융단 위에 로마노가 쓰러지고 흘러나오는 피가 융단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광경을 자신의 뇌리에서 떨쳐 버리려 고 애썼다. 한 시라도 빨리 찰스에게로 돌아가야지. 트레이시는 델타 항공의 카운터로 다가갔다. "필라델피아 행 다음 편을 한 장, 2등으로 부탁합니다." 여직원이 컴퓨터에 입력했다. "그것이라면 304편입니다. 운이 좋으시군요. 마침 좌석이 하나 남 아 있네요." "출발은 언제입니까?" "20분 후입니다. 지금 마침 탑승 수속 중입니다." 트레이시가 지갑을 막 열려고 했을 때 제복 차림의 경찰관 두 명 이 그녀 양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중 한 사람이 말했 "트레이시 휘트니 양?" 한 순간 그녀의 심장이 딱 멈췄다. (이 자리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야.) "네, 그렇습니다만..." "당신을 채포하겠소." 그리고 트레이시의 손목에 차가운 강철 수갑이 찰칵 채워졌다. 모든 일은 슬로우 템포의 영화처럼 전개되었다. 공항에서 만인이 주시하는 가운데 경찰관에게 연행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트레이 시는 마치 타인을 보듯이 객관시하고 있었다. 운전석과의 사이가 철 망으로 가로막힌 흑백의 순찰차 뒷좌석에 그녀는 태워졌다. 경찰차는 시동을 걸자 빨간 램프를 점멸시키고 사이렌을 요란스럽 게 울려대면서 질주했다. 트레이시는 바깥에서 보이지 않도록 좌석 에 몸을 파묻었다. 나는 살인자다. 조 로마노는 죽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발적인 사고였다. 어떤식으로 사건이 발생했는지 를 설명해 줘야 한다. 믿어 줄 것이다. 아니, 믿게 만들어야 한다. 트레이시가 연행된 경찰서는 뉴올리언즈의 서쪽에 해당하는 알저 지구에 있었으며, 꿈도 희망도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위압감을 느끼 게 하는 건물이었다. 취조 대기실은 초라한 복장을 한 사람들로 붐 비고 있었다. 매춘부, 뚜쟁이, 날치기, 그리고 그 피해자들이 우글거 트레이시는 경사의 책상 앞으로 끌려나가고, 그녀를 체포한 경관이 "트레이시 휘트니. 용의자입니다. 경사님. 도망치려는 것을 공항에 서 체포했습니다." "난 도망치려고 한 것이 아니예요... " "수갑을 벗기게." 수갑이 벗겨짐과 동시에 트레이시는 떠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고였습니다. 죽일 생각은 꿈에도 없었어요. 그 사람이 강간하려고 해서... " 그녀는 자제를 할 수 없게 되어 히스테리를 일으키며 악을 썼다. 경사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무뚝뚝하게 질문했다. "당신 이름은 트레이시 휘트니가 맞소?" "네, 그렇기는 합니다만..." "집어 넣어 !" "안됨니다! 잠깐만요!" 그녀는 애원했다. "전화를 걸어야겠어요. 나에게도... 나에게도 전화를 할 권리는 있 잖아요!" 경사는 투덜거렸다. "허허, 괘나 많이 알고 계시는군 그래. 교도소는 몇번째지, 아가 씨?" "그렇지 않아요. 이것은..." "한번 정도는 괜찮지. 3분 이내야. 상대방의 전화 번호를 말해 봐 요." 그녀는 신경이 곤두서 있었기 때문에 찰스의 전화 번호가 입에서 잘 나오지를 않았다. 필라델피아의 국번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던 (2-5-1이었던가?) 아니다. 그게 아니다. 그녀는 마구 몸이 떨려 왔다. "이봐요, 아가씨, 빨리 말하라니까. 밤새껏 나를 기다리게 할 셈이 야?" (2-1-5이다. 그래, 맞아.) "215의 555의 301입니다." 경사는 다이얼을 돌리고 수화기를 트레이시에게 건네주었다. 호출 음이 울리고 있었다.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지만 응답이 없었다. (찰스는 집에 있을 텐데.) 그때 경사가 말했다. "벌써 시간이 다 됐소." 경사는 그녀에게서 수화기를 빼았으려고 했다. "제발 부탁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트레이시의 목소리는 비명에 가까웠다. 그때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찰스는 깊이 잠들기 위해 밤에는 호출음을 끊어 놓는 것이 다. 공허한 호출음을 들으면서 그녀는 찰스에게 연락할 방법이 두절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사가 물었다. "끝났소?" 트레이시는 그를 올려다보며 멍청하게 대답했다. "네, 끝났어요." 셔츠 차림의 경관이 트레이시를 별실로 데려가서 지문과 조서를 받고는 유치장에 그녀를 넣고 자물쇠를 잠갔다. 안에는 트레이시 뿐 "청문은 내일이요." 경관은 그렇게 말하고 트레이시를 혼자 남겨 두고 떠나갔다. (모든 것이 악몽인 거야. 오, 제발 부탁합니다. 하느님. 이것이 전 부 꿈이라고 해 주세요.) 트레이시는 기도를 했으나 악취가 풍기는 간이 침대도, 유치장 구 석의 칠이 벗겨진 변기도, 쇠 창살도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 고뇌의 밤은 느릿느릿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았다. (찰스와 연락만 닿으면...) 그를 만난 이후로 오늘날까지 지금처럼 찰스를 절실하게 필요로 한 적은 없었다. (처음부터 그이와 의논을 해야만 했어. 그랬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 나지 않았을 텐데.) 아침 6시에 교도관이 귀찮은 얼굴로 아침 식사를 가져 왔다. 커피 는 미지근하고 오트밀은 차가웠다. 트레이시는 음식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가슴이 꽉 막혀 있었던 것이다. 9시에 여교도관이 나타났다. "자아, 나갈 시간이야, 아가씨." 그리고는 여교도관이 유치장 문을 열었다. "전화를 좀 걸게 해 주세요. 매우 중요한..." [16] 제목 : 제3장 아직도 뭐가 뭔지 전 잘 모르겠는데요 [5/7] 트레이시가 부탁했다. "나중에 해." 여교도관이 가로막았다. "판사를 기다리지 않게 하는 게 좋을 걸, 심술사나운 작자니까 말 이야." 트레이시는 여교도관을 따라 법정으로 들어갔다. 나이가 지긋한 판사가 판사석에 앉아 있었다. 머리와 손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판사 앞에 서 있는 것은 지방 검사인 에드 토퍼였다. 반백의 곱슬머리를 짧게 깎은 40대의 호리호리한 사나이로 차가워 보이는 검은 눈을 하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의자에 앉혀지고, 한참 뒤에 정리가 큰 소리로 낭독했 "트레이시 휘트니 및 그 원고(原告)들." 그러자 트레이시는 어느 틈엔가 판사석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판사는 머리를 상하로 혼들면서 눈 앞에 놓여 있는 서류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바로 이때다!) 사건의 진상을 누군가에게 설명하려면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영 영 불가능하다. 트레이시는 떨지 않도록 양손을 꽉 움켜쥐었다. "재판장님, 그것은 살인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쏜 것은 사고였습 니다. 겁을 주려고 한 것뿐입니다. 그 사람이 나를 겁탈하려고 했기 때문에... " 지방 검사가 가로막았다. "재판장님, 나는 재판 시간을 공연히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여성은 32구경 권총으로 무장하고 로마노 씨 댁에 침입하여 50만 달러 상당의 르느와르의 그림을 훔쳤습니다. 로마노 씨가 현장을 덮 치자 그녀는 무자비하게 권총을 쏜 다음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도 망쳤습니다." 트레이시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무슨... 무슨 당치도 않은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트레이시는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지방 검사가 딱 잘라서 말했다. "로마노 씨에게 상처를 입힌 권총을 압수해 놓았습니다. 그녀의 지 문도 그 권총에 묻어 있습니다." (상처를 입혔다니 !) 그렇다면 조 로마노는 살아 있는 것이다! 나는 살인을 저지른 것 은 아니다. "그녀는 그림을 훔쳐 가지고 도주했습니다. 그것은 이미 장물아비 의 손에 들어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트레이시 휘트니에게 는 살인 미수, 무장강도죄가 적용되어야 할 것이며, 보석금으로 50 만 달러를 요청합니다." 재판장은 완전히 동요한 채 우두커니 서 있는 트레이시를 바라보 "당신은 대리인을 세우겠습니까?" 트레이시의 귀에는 그 소리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재판장은 목청을 돋구었다. "변호사가 있습니까?" 트레이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나는 절 대로..." "변호사를 고용할 돈이 없습니까?" 은행에 자기 명의의 직원적립예금이 있었다. 그리고 찰스도 있다. "저는... 아닙니다. 재판장님. 그러나 무슨 말인지 전혀..." "당 법정에서 당신에게 변호사를 선임해 주겠습니다. 50만 달러의 보석금 대신에 당신은 수감됩니다. 그럼 다음 소송."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이건 모두 오해예요. 나는 절대로..." 트레이시는 자기가 어떻게 법정을 나왔는지 전혀 기억이 없었다. 관선 변호인은 페리 포프라는 사나이였다. 나이는 30대 후반으로 딱딱하지만 머리가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푸른 눈에는 동정을 담 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한눈에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변호사는 유치장으로 들어오자 간이 침대에 걸터 앉아 얘기를 시 "알겠습니다. 이 도시에 와서 불과 24시간 사이에 엄청난 소동을 일으킨 여성이 바로 당신이군요." 변호사는 빙긋이 웃었다. "하지만 당신은 행운아인 셈이오. 형편없는 사격 솜씨 덕분에 총알 이 급소를 벗어나서 로마노 씨는 살아 있으니까 말이오." 그는 파이프를 꺼냈다. "피워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에요." 변호사는 파이프에 담배를 담고 불을 붙인 다음 연기를 뿜어내면 서 트레이시를 관찰했다. "당신은 목숨을 내걸고 범죄를 저지르는 타입으로는 보이지 않는 군요, 휘트니 양?" "물론 아닙니다. 맹세코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예요." "그렇다면 나를 좀 납득시켜 주십시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처음부터 차근차근 말이오. 서두를 필요가 없으니까 요." 변호사가 말했다. 트레이시는 말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페리 포프 변호사는 그녀 의 얘기를 한번도 중단시키지 않고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그녀가 자 초지종을 끝까지 얘기하고 나자 변호사는 유치장 벽에 등을 기대고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저런 죽일 놈 봤나!" 페리 포프 변호사는 조그만 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 "나는 검사가 하는 말이 무슨 얘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트레이시의 얼굴에는 혼란된 표정이 생생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림같은 것은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그건 뻔한 일이지요. 조 로마노는 어머님을 이용한 것과 같은 방 법으로 당신을 또 봉으로 잡은 겁니다. 당신은 보기 좋게 녀석의 함 정에 빠진 겁니다." "아직도 뭐가 뭔지 전 잘 모르겠는데요." [17] 제목 : 제3장 '힘을 내서 악당들을 때려 눕힙시다' [6/7] "그렇다면 상황을 설명해 드리지요. 로마노는 50만 달러의 보험을 걸어 놓은 르느와르의 그림을 어딘가에 감춰 버리고, 시치미를 뚝 떼고 보험금을 청구할 것입니다. 보험 회사는 로마노가 아니라 당신 을 추궁하겠지요, 모든 것이 잠잠해진 다음 그는 개인 수집가에게 그 그림을 팔아서 또 50만 달러를 챙기려는 속셈입니다. 당신은 아 무 것도 모르는 아마추어인데다가 자기 발로 찾아들어 왔으니까 놈 은 지금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겠지요. 그건 그렇고 권총으로 위협 해서 자백을 받아냈다 해도 그것이 법적으로 무효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까?" "그건... 그렇겠군요. 다만 내가 그에게 진상을 고백시킬 수 있다면, 누군가가 조사에 착수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파이프의 불이 꺼져서 변호사는 다시 불을 붙였다. "당신은 어떻게 그의 집안으로 들어갔나요?" "현관의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그러자 로마노 씨가 나와서 들어 오 라고 했습니다." "그의 얘기와는 좀 엇갈리는군요. 그의 말로는, 당신이 집의 뒤쪽 창문을 깨고 그곳으로 침입했다고 하더군요. 실제로 창문이 깨져 있 었답니다. 그리고 그는 경찰서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르느 와르의 그림을 몰래 훔쳐내 가려고 하는 당신을 붙잡으려고 했더니 당신이 총격을 가하고 도주했다구요." "그건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나는... " "하지만 거짓말이라고 해도, 그가 그렇게 주장하고 있고, 사건은 그의 집에서 일어났으며 당신의 총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신 이 상대로 하고 있는 인간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까?" 트레이시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현실적인 상황을 얘기해 드리겠소, 휘트니 양. 이 도시는 올사티 패밀리한테 완전히 장악되어 있습니다. 앤소니 올 사티의 승낙 없이는 아무 것도 진전되지 않습니다. 빌딩 건축, 도로 포장, 매춘,도박 행위, 마약에 이르기까지 무슨 일을 하려고 해도 올 사티의 허가가 필요합니다. 조 로마노는 올사티의 살인 대원으로 고 용되어 지금은 그의 조직의 두목 격으로 승진해 있습니다." 변호사는 기가막히지 않냐는 표정을 짓고 얘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당신은 로마노의 집으로 제 발로 찾아가 그를 저격했습니 다." 트레이시는 피곤해서 녹초가 된 채 멍하니 앉아서 듣고 있었다. 간 신히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 얘기를 믿지 않는 건가요?" 그러자 변호사는 빙긋이 웃었다. "너무나 바보스러워서 오히려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 어요." "나를 도와주시는 거죠?" 변호사는 말을 조심스럽게 골라 가면서 했다. "해 봅시다. 그들을 투옥시킬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해 봅시다. 이도시는 그들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으며 판사도 대부분 그들의 말대로 움직입니다. 만일 재판이 열린다면 당신은 두번 다시 햇빛을 보지 못하도록 매장당하고 말 것입니다." 트레이시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페리 포프 변호사를 보 "만일 재판이 열린다면... 이라니요?" 포프는 침대에서 일어나 좁은 유치장 안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나는 배심원들 앞에 당신을 세우고 심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요, 잘들으세요. 악인들의 조종을 받는 배심원들이기 때문입니다. 올사 티한테 매수당하지 않은 판사가 꼭 한 사람 있습니다. 헨리 로렌스 판사입니다. 당신의 사건이 로렌스 판사의 귀에 들어가도록 조치를 취하면 반드시 당신을 위해 유리한 거래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것은 그다지 정당한 수단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판사에개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그분도 나와 마찬가지로 올사티를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로렌스 판사를 우리 편으로 끌어넣을 수 있도록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선결 문제입니다." 페리 포프 변호사는 트레이시가 찰스에게 전화를 걸 수 있도록 주 선해 주었다. 전화 저쪽에서 찰스의 비서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 "스탠호프 사무실입니다." "해리어트 양, 트레이시 휘트니예요. 저기... " "어머 ! 스탠호프 씨는 당시과 연락을 취하고 싶어하고 계셨어요, 휘트니 양. 하지만 당신의 연락처를 몰라서요. 스탠호프 부인이 결 혼식 준비 건으로 꼭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주세요." "해리어트 양, 스탠호프 씨를 바꿔 주시겠어요?" "죄송합니다. 휘트니 양. 그분은 회의가 있어서 휴스턴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연락처를 알려 주시면 연락이 닿는 즉시 당신에게 전화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감옥으로 전화를 해 달라고 할 수는 없다. 어쨌든 무엇보다 사정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다시 전화하겠어요," 트레이시는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내일이다. 내일이 되면 꼭 찰스에게 모든 일을 설명해야지.) 트레이시는 힘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오후가 되자 트레이시는 먼저보다 넓은 유치장으로 옮겨졌다. 따끈따끈하고 맛있는 저녁식사가 밖으로부터 사임되어지고 조금 뒤에 싱싱한 꽃다발이 배달되었다. 꽃다발에 딸려 온 카드를 펼쳐 보니 이렇게 씌어 있었다. '힘을 내서 악당들을 때려 눕힙시다. -페리 포프.' 페리 포프는 다음날 아침 면회를 왔다. 변호사의 얼굴이 밝았기 때 문에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았다. "운이 좋았습니다." 변호사는 설명했다. "로렌스 판사와 토퍼 지방검사의 사무실을 다녀오는 길입니다. 토 퍼검사는 울상을 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래는 성립되었습니다." "거래라니요?" "당신의 모든 사정을 로렌스 판사에게 얘기했습니다. 판사는 당신 이 죄를 인정하면 형을 가볍게 하겠다는데 동의해 주었습니다." [18] 제목 : 제3장 함정에 빠진것이다.파멸당하려 하고 있는..[7/7] 트레이시는 충격을 받아 변호사를 응시했다. "죄를 인정하다니요? 하지만 나는 아무 것도..." 변호사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내 얘기를 끝까지 들어요, 죄를 순순히 시인함으로써 당신은 유리 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판사는 당신이 그림을 훔치지 않았 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로렌스 판사는 조 로마노가 어떤 인간인 지 알고 있기때문에 내 얘기를 믿은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죄를 인정한다면 나는 어떤 형벌을 받게 되나요?" 트레이시는 쭈뼛거리며 물었다. "로렌스 판사는 당신에게 징역 3개월의 판결을... " "징역이라구요!" 것입니다." "잠깐만요! 그러나 판결에는 집행유예가 붙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전과... 전과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요?" 페리 포프는 한숨을 쉬었다. "로마노 측이 당신을 무장강도와 살인미수 두 가지 죄목으로 고소 를 한다면 우선 10년 징역은 면할 수가 없을 걸요." (10년씩이나 갇혀있게 된다니 !) 페리 포프 변호사는 인내심 깊게 트레이시를 지켜보고 있었다. "당신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의 조언 을 하는 것 뿐입니다. 여기까지 진전시킨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입 니다. 판사도 검사도 즉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래에 응해야만 합니다. 하기야 누군가 다른 변호사를 부탁한다면... " "그런 짓은 하지 않아요." 이 남자는 성실하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미 친 짓을 한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서 모든 일을 해준 것이다. 찰스 에게 연락만 닿을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 그러나 지금 당장 결정하 지 않으면 안된다. 집행유예가 붙은 3개월형으로 이 사건이 끝난다면 오히려 행운이 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난... 난 거래에 응하겠어요." 트레이시는 말했다. 그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쥐어짜내는 것 같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상당히 머리 회전이 빠르시군요." 법정에 나갈 때까지 전화 통화가 금지되었다. 트레이시 옆에는 에드 토퍼 검사가, 그 반대쪽에 페리 포프 변호사 가 서 있다. 판사석에 앉아 있는 것은 50대의 근엄한 얼굴의 재판관 으로서 얼굴은 매끈매끈하며 주름살이 없고 더부룩한 머리칼은 단 정하게 손질이 되어 있었다. 헨리 로렌스 판사가 트레이시에게 말했다. "당 법정에서는 피고의 주장의 번복 즉 무죄로부터 유죄를 인정한 다는 보고를 받았다. 틀림없습니까?" "네, 재판장님." "당사자는 전원 동의합니까?" 페리 포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재판장님." "검찰측은 동의합니다. 재판장님." 지방검사가 말했다. 로렌스 판사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몸을 앞으로 내밀고 트레 이시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 보았다. "우리 위대한 국가가 병들어 있는 이유의 하나는 법의 눈을 피하 여 죄를 벗어난, 천벌을 받아 마땅한 인간들이 으스대며 활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을 조소하는 자들도 상당수가 있습니다. 국가의 재판 제도의 몇가지가 범죄자를 방자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러나, 이곳 루이지애나 주에서는 그와같은 방자한 행위는 결코 방치 해 두지 않습니다. 설사 미수로 끝났다 하더라도 냉혹한 살인 계획 을 감행했다고 한다면 그 자는 당연히 중죄 범으로서 벌해져야 한 다고 믿는 바입니다." 트레이시는 온몸에 소름끼치는 공포감을 느꼈다. 페리 포프에게 시 선을 보내자 변호사의 눈은 재판장을 노려 보고 있었다. "피고는 이 도시의 선량한 시민, 유능하고 박애주의자로서 널리 알 려져 있는 인물을 살해하려고 했던 것을 인정했습니다. 피고는 50만 달러에 상당하는 미술품을 훔치는 도중에 그를 저격한 것입니다." 판사의 목소리가 더욱 신랄함을 더해갔다. "따라서, 본 법정은 피고가 미술품을 전매하여 얻은 돈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앞으로 15년간은 그와같은 부정한 돈을 쓰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즉, 향후 15년간 피고는 남루이지애나 여성교도소에 수감될 것입니다." 트레이시의 머리 속에서 법정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질나쁜 농담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재판관은 안성맞춤의 배우가 연기했 으나 그는 다른 대본을 잘못 읽은 것이다.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되는 트레이시는 잘못을 정정하려고 페리 포프를 보았다. 그러나 그 관 선 변호사는 시선을 피하고 서류가방 속의 서류를 만지작거리기 시 트레이시는 문득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포프의 마수가 꼼 짝할 수 없게 트레이시를 옭아매고 있는 것이다. 로렌스 판사는 일어나서 서류를 집어 챙기기 시작했다. 트레이시는 뭐가뭔지 영문을 모르는 채 망연히 서 있었다. 정리가 트레이시의 옆으로 와서 팔을 움켜잡았다. "따라와요." "싫어요!" 트레이시는 절규했다. "싫어요, 부탁이에요! 너무합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속 임수입니다. 재판장님, 저... " 그녀는 판사석을 올려다보았다. 정리가 더욱 힘을 주어 팔을 잡아당겼다.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정당한 수속에 따른 재판에 의해서 트레이시는 유죄를 선고 받은 것이다. 함정에 빠진 것이다. 파멸당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함정에 빠져버린 것이다. [19] 제목 : 제4장 당신을 만나고 싶어요.제발 이곳으로 [1/2] 제 4 장 트레이시 휘트니의 범죄와 판결에 대한 뉴스는 '뉴올리언즈 쿠리 에'지의 제1면에 얼굴 사진과 함께 보도되었다. 전국적인 통신망이 이 사건을 문제삼아서 특전으로서 각 신문사에 전송했기 때문에 트 레이시는 텔레비전 방송 기자들의 열띤 취재대상이 되었다. 법정에 서 주립 교도소로 이송되었을 때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굴욕감에서 카메라를 피하느라 얼굴을 가렸으나 카메라는 집요하게 그녀를 쫓 조 로마노만으로도 뉴스가 되는데 미모의 무장강도가 곁들여서 사 건은 더욱 더 센세이셔널하게 되었던 것이다. 트레이시는 자기를 둘러싼 인간이 모두 적으로만 여겨졌다. (찰스가 구출해 줄거야. 아아, 부탁합니다 하느님. 찰스가 저를 구 출하도록 해 주십시요. 아기를 감옥에서 낳을 수는 없습니다.) 이튿날 오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경사는 전화사용을 허가했다. 여비서 해리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탠호프 사무실입니다." "해리어트 양, 트레이시 휘트니입니다. 스탠호프 씨 좀 바꿔 주세 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휘트니 양." 비서의 말투에서 낭패하는 모습이 느껴졌다. "저어...스탠호프 씨가 계신지 알아보겠습니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오랫동안 기다린 뒤에야 트레이시는 겨우 찰 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트레이시는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찰스..." "트레이시? 트레이시?" "네. 그래요. 아아, 얼마나 연락을 하고 싶었는지 몰라요... " "나는 미칠 것 같았어, 트레이시 ! 이곳 신문에는 당신을 형편없이 깎아내리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나와 있다구. 그런 것은 한 마디도 믿지 않지만." "그건 모두 사실이 아니예요. 사실은 하나도 없어요. 나는..." "왜 내게 연락을 하지 않았지?" "전화했어요. 하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나는... " "지금 어디서 전화를 걸고 있는 거야?" "나는... 지금 뉴올리언즈의 유치장에 있어요, 찰스, 나는 아무 잘못 도 하지 않았는데 교도소로 보내지려고 하고 있어요." 공포때문에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 알겠어? 내 말을 잘 들으라구. 신문에는 당 신이 사람을 권총으로 쐈다고 나와 있어. 그건 사실이 아니겠지?" "쏘았어요, 하지만 그것은... " "그럼 사실이군." "보도된 것과는 상황이 달라요.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진실을 설명하겠어요, 나는... " "트레이시, 당신은 그림 도둑과 살인 미수죄를 시인한 거야?" "네, 하지만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무슨 짓이야! 그렇게 돈이 궁했다면 내게 의논했으면 좋았을 것 아니야... 살인까지 해 가면서... 믿을 수가 없군! 우리 부모님들은 도 대체 어떻게 생각하겠어?'필라델피아 데일리뉴스'의 조간에 톱기사 로 다루어졌더군. 스탠호프 가문이 이런 천박한 추문에 말려든 것은 처음 있는 일이야." 자제하는 목소리에도 불쾌감이 엿보이고, 찰스가 얼마나 당황해하 고 있는가를 알 수 있었다. 트레이시는 그를 최후의 희망으로 삼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찰스까지도 적대적인 발언을 하고 있다. 그녀는 소리치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당신을 만나고 싶어요. 제발 이곳으로 와 주세요. 당신이라면 모 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미칠 것만 같은, 길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내가 그곳에 가 보았자 해결방법같은 것은 없을 것 같군. 당신이 그처럼 여러가지 죄를 시인한 이상, 우리 가문은 이런 추문에 더 이 상 말려들고 싶지 않아. 당신도 그 점은 잘 알고 있을 거야. 충격이 너무나 크군. 지금이니까 한 마디 하겠는데, 아무래도 나는 당신이 라는 사람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 한 마디 한 마디가 망치로 내려치는 것 같았다. 눈앞이 캄캄해졌 다. 이토록 깊은 고독을 느낀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나를 걱정해주 는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요, 아기는?" "어떻게든 최선의 방법을 골라서 당신이 처치해주지 않겠소? 나쁘 게 생각지 말아요, 트레이시. 자업자득이니까." 찰스는 냉랭하게 내뱉었다. 그리고 전화는 뚝 끊겨 버렸다. 트레이시는 말 없는 수화기를 움켜쥔 채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등 뒤에서 다른 죄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얘기가 끝난거야, 아가씨? 나도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야 한다 구." 유치장으로 돌아온 트레이시에게 여교도관이 알렸다. [20] 제목 : 제4장 그녀는 찰스와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2/2] "내일 아침 이곳을 나가요. 새벽 5시에 출발이니까 준비를 해요." 면회인이 있었다. 오토 슈미트였다. 불과 하루만에 대하는 얼굴인 데도 갑자기 굉장히 늙어 보였다. 몸의 상태도 좋지 않아 보였다. "아내 몫까지 위로를 해 드리러 왔습니다.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당 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만은 잘 알고 있습니다." (찰스에게서 그런 말을 듣고 싶었어 !) "아내와 둘이서 내일 어머님의 장례식을 치루겠습니다." "아아, 고마워요. 부탁합니다. 오토 씨." (내일의 장례식은 우리들 모녀의 장례식이기도 하구나,) 트레이시는 그런 생각이 들자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날 밤, 유치장의 비좁은 침상에 누워서 천정을 노려보며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머리 속에서 찰스와의 대화를 몇번씩 곱씹어 보았다. 그는 나에게 변명의 기회도 주지 않았다. 뱃속의 아기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교도소에서 출산한 여자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 것은 자기와는 동떨어진 어딘 가 먼 다른 혹성에서의 일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자기 가 그 당사자가 된 것이다. '어떻게든 최선의 방법을 골라 처치해 주지 않겠소?' 찰스는 비정하게 내뱉었다. 트레이시는 아기를 낳고 싶었다. (그러나, 낳는다해도 내가 키우게 해주지는 않겠지. 15년의 징역을 이유로 내게서 아이를 빼앗아 갈 거야. 아이에게도 어머니에 대해서 는 일체 말해주지 않을 거야.) 이런 저런 일을 생각하노라니 트레이시의 눈에서는 눈물이 끊임 없이 흘러 내렸다. 새벽 5시, 트레이시의 유치장에 남자 교도관이 여자 교도관을 대동 하고 들어왔다. "트레이시 휘트니?" "네." 트레이시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주 이상하게 들렸기 때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루이지애나 주 형사법원의 명에 의해 당신은 남루이지애나 여자 교도소로 이송된다. 자, 출발이다." 유치장 속의 기나긴 복도를 걸어가자 유치인들이 양쪽에서 야유를 보내며 놀려댔다. "멋진 여행이 되기를 빌겠어, 아가씨." "그림을 숨겨놓은 곳 을 가르쳐 줘, 트레이시. 나랑 절반씩 나누자 구." "교도소에 가거든 꼬마 어네스틴을 찾아봐. 뒷바라지를 잘 해줄테 니까 말이야." 어제 찰스와 얘기를 나눈, 전화가 있는 곳 을 지나칠 때 트레이시 는 찰스에게 작별을 고했다. (안녕 찰스!) 트레이시는 안뜰로 나갔다. 창에 쇠창살을 댄 노란색의 죄수 호송 버스가 시동을 걸어놓은 채 멈춰 서 있다. 차에 올라타자 이미 6명 의 여죄수가 앉아 있었고, 무장한 두 사람의 교도관이 지키고 있었 다. 트레이시는 동승자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반항적인 얼 굴, 지겹다는 표정의 얼굴, 절망적인 얼굴 등 제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 그녀들이 살아온 지금까지의 인생은 일단 여기서 끝난 이제부터는 모두가 사회로부터 추방되어 동물처럼 우리 안에 감금 되는 것이다. 트레이시는 이 사람들은 어떤 죄를 범한 것일까. 나같 이 무고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한 내 얼굴의 표정은 그녀들에게 어떤 식으로 비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버스는 한없이 달렸다. 차 안은 무덥고 불쾌한 냄새가 떠돌고 있었 으나 트레이시는 상관하지 않았다. 다른 동승자에 대해서도 창 밖으 로 펼쳐지는 초록색의 전원 풍경도 그녀의 의식 밖이었다. 트레이시 는 다른 시간과 공간을 여행하고 있었다. 아득한 어린시절로 생각을 달리고 있었다 양친과 함께 바닷가에 있다. 아버지가 그녀를 끌어안고 바다로 들어간다. 물이 트레이시의 어깨까지 왔다. 비명을 지르니까 아버지는 말했다. '무서워하지 말아, 트레이시.' 그리고 아버지는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그녀를 던져 넣었다. 얼굴 이 물 속에 잠겨 숨을 쉴 수 없게 되어 공포감에 사로잡힌 트레이 시를 아버지가 끌어 올렸다. 그리고는 또 다시 바다 속에 던져지고, 끌어 올려지고 ... 그 순간부터 트레이시는 물에 대한 공포심을 갖게 되었다... 대학의 강당은 학생과 그 부모, 친척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졸업 생 대표였던 그녀는 15분간의 연설을 했다. 선인의 지혜를 찬양하면 서 꿈이 넘치는 미래에 대하여 언급하고 고매한 이상주의를 부르짖 었다. 학장으로부터 트레이시에게 전미국대학의 성적이 우수한 졸업 생만이 가입할 수 있는 '파이 베타카파 클럽'의 열쇠가 증정되었다. '이것을 맡아 주세요.' 트레이시가 그렇게 말하며 열쇠를 건네주었을 때의 어머니의 자랑 스러운 표정... '필라델피아로 가기로 했어요, 엄마. 은행에 취직이 결정되었어요.' 친구인 앤 말러가 나타났다. '필라델피아는 마음에 들 거야, 트레이시. 문화적인 시설이 여러 가지로 갖추어져 있고, 경치도 좋고, 게다가 여성이 부족하단다. 알 겠지? 이곳에 오면 여성은 값이 올라간다는 얘기야. 어때, 우리 은 행에 취직하지 않겠어?' 트레이시는 출렁이는 천정의 그림자를 응시하면서 몽상을 계속했 (어떤 여자라도 내 혼처를 부러워할 거야.) 찰스만한 신랑감은 좀처럼 구할 수가 없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자 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찰스와 사랑을 나누 고 있었다. 사랑의 장면이 눈 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이봐! 너에게 말하고 있는 거야. 귀가 멀었어? 빨리 내리라구!" 트레이시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노란색의 죄수 호송차 안에 있 었다. 버스는 음울한 석벽이 둘러쳐진 곳에 멈춰 서 있었다. 길다란 담벼락이 5백 에이커나 되는 농장과 산림을 둘러싸고, 남루이지애나 여자 교도소를 형성하고 있었다. "내렷! 이곳이 새로운 너의 집이야" 교도관이 말했다. 이곳이야말로 이 세상의 산 지옥이었던 것이다. [21] 제목 : 제5장 소녀가 몸이 아픈 듯이 얼굴이 새파랗게.. - 1 제 5 장 무표정한 얼굴에 머리칼을 흑갈색으로 물들인 뭉툭한 체격의 교 도감독관이 새로 들어온 여죄수들에게 훈시를 했다. "너희들 중에 몇사람은 상당히 오랫동안 이곳에 있게 될 것이다. 훌륭하게 복역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깥 세상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버리는 것이다. 좋고 나쁜 것은 자기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이 곳에는 규칙이 있으니까 그것에 따라야 한다. 기상, 노동, 식사, 변소에 가는 것 등 모두 지시대로 행동해야 한다. 규칙을 위반했다 가는 죽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이곳의 평화가 유지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말썽꾸러기의 취급법은 충 분히 알고 있다는 것을 경고해 두겠다." 여감독관은 죄수들을 둘러보고 트레이시에게 시선을 멈췄다. "지금부터 신체 검사를 실시하겠다. 그것이 끝나면 샤워를 하고, 각자에게 감방이 할당되어진다. 내일 아침 작업 분담이 통고될 것 이다. 이상." 여감독관은 휙하니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트레이시의 옆에 서 있던 소녀가 몸이 아픈 듯이 얼굴이 새파랗 게 질린 채 말했다. "실례지만 저어 " 여감독관은 당장 제자리로 돌아왔다. 분노 때문에 얼굴이 일그러 져 있었다. "닥쳐 ! 그 입을 찢어놓기 전에 닥치지 못해 ! 허가를 받았을 때 외에는 아가리를 벌리면 안된다! 알겠나? 모두들 마찬가지야, 이 병신들아!" 그 서슬이 시퍼런 태도와 말투에 트레이시는 충격을 받았다. 여 감독관은 방 한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두 사람의 여교도관에게 손 짓을 했다. "이 병신들을 데리고 나가." 트레이시는 다른 죄수들과 함께 길다란 복도로 끌려나가 흰 타일 을 바른 커다란 방으로 인도되어 갔다. 지저분한 가운을 입은 뚱뚱 한 중년남자가 진찰대 옆에 서 있었다. 여교도관 하나가 "정렬!"하고 구령을 외치고 죄수들을 일렬로 늘 어서게 했다. 가운을 걸친 사내가 말했다. "나는 의사인 그라스코다. 빨리 옷을 벗어라!" 죄수들은 영문을 몰라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중 한사 람이 질문했다. "어디까지 벗으면 " "벗으라는 말의 의미도 모르는 거야, 응? 입고 있는 것을 벗는 거야,모조리 말이야." 죄수들은 느릿느릿 벗기 시작했다. 타인을 의식하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화를 내고 있는 사람도 있고, 될대로 되라고 자포자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트레이시의 왼쪽에 서 있는 40대 후반의 여자는 분 노로 몸을 떨고 있었다. 오른쪽에 있는 것은 애처로울 정도로 말라 빠진, 여드름 투성이의 17세 가량 된 소녀였다. 의사는 열의 선두에 있는 죄수에게 명했다. "진찰대에 누워서 다리를 등자에 올려 놓아." 죄수는 망설이고 있었다. "자아, 빨리 ! 뒷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잖아." 그녀가 말한대로 하자 의사는 검시경을 여죄수의 음부에 삽입하 고 속을 들여다보면서 질문을 했다. "성병에 걸린 적이 있나?" "없는데요." "흐음, 그래? 결과는 금세 아니까 거짓말을 해도 소용 없어." 두 번째 죄수가 진찰대에 올라갔다. 의사가 같은 검시경을 삽입 하려고 했기 때문에 트레이시가 엉겁결에 소리쳤다. "잠깐만요!" 의사는 손 을 멈추고 깜짝 놀란 듯이 트레이시를 쳐다 보았다. "뭐야?" 전원이 응시하는 가운데 트레이시는 말했다. "선생님은 검사기를 소독하지도 않았잖아요?" 그라스코 의사는 트레이시를 아래 위로 핥듯이 훑어보고 차갑게 "허허 ! 여기에 산부인과 의사가 있었구만. 병균이 걱정되서 그 러는 거겠지? 그렇다면 줄의 맨 끝에 가서 서 있어." "뭐라구요?" "귀가 먹었어? 응? 뒤에 가서 줄을 서라니까!" 트레이시는 영문을 모르는 채 줄의 맨마지막에 가서 섰다. "자아, 그럼 다시 계속하겠다." 의사는 그렇게 말하고 역시 같은 검시경을 진찰대 위의 죄수에게 삽입했다. 그 순간 트레이시는 자기가 줄의 맨마지막에 세워진 진 의를 깨달았다. 전원에게 사용한, 소독하지 않은 검시경으로 나를 마지막으로 진찰할 속셈이다. 트레이시는 화가 불끈불끈 치밀어 올 라왔다. 이 의사는 우리들을 개별적으로 진찰하면 되는데도 일부러 벌거벗겨 놓고 모욕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모두들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의사의 비인간적인 대우를 감수하고 (만일, 모두가 함께 항의를 하면 어떨까...) 트레이시의 차례가 왔다. "진찰대에 올라가시지, 여의사 선생." 트레이시는 망설였으나 따를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진찰대에 올 라가 눈을 감았다. 다리가 양쪽으로 벌려지고 차가운 검시경이 그 녀의 내부를 후비고 돌아 다녔다. 난폭하게 다루는 바람에 통증이 심했다. 고의로 아프게 하고 있는 것이다. 트레이시는 이빨을 악물 고 통증과 굴욕을 참았다. "매독이나 임질에 걸린 일은?" 의사가 질문했다. "아니요, 걸린 적 없습니다." 임신중이라는 사실을 이 의사에게 알리고 심지는 않았다. 이런 비인간적인 의사가 뭘 알겠는가. 이곳 교도소장에게 이놈의 극악무 도한 행동을 고발해야 한다. 검시경이 난폭하게 뽑혀 나갔다. 그라스코 의사는 양손에 장갑을 끼면서 말했다. "이것으로 앞쪽은 끝났다. 다시 한번 정렬해서 몸을 앞으로 굽혀 라.이번에는 너희들의 똥구멍 검사야." [22] 제목 : 제5장 샤워를 끝내자 벌거벗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2 트레이시는 자신도 모르게 질문이 입밖에 나왔다.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 건가요?" 그라스코 의사는 트레이시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그 이유를 가르쳐 주지, 여의사 선생, 똥구멍은 말이지, 최고의 은폐처란 말이다. 지금까지 너회들같은 여자들로부터 마리화나와 코카인을 산더미처럼 찾아 냈다구. 자아, 빨리 앞으로 몸을 숙여!" 그리고는 의사는 죄수들의 항문에 손가락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트레이시는 속이 메슥거리고, 정말로 담즙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 라서 당장이라도 토할 것만 같았다. "여기서 토해만 봐라. 그랬다가는 네 얼굴을 구토물 속에다 처박 아 줄테니까." 의사는 교도관들에게 명령했다. "샤워실로 데리고 가. 이것들 냄새 때문에 견딜 수가 있어야지." 여죄수들은 벌거벗은 채 옷과 속옷을 들고, 다른 복도로 지나서 콘크리트를 바른 커다란 방으로 끌려갔다. 그곳 은 샤워실로서 칸 막이도 없고 12개의 샤워 꼭지가 달려 있을 뿐이었다. "옷들은 방구석에 놓아둬." 교도관이 지시했다. "샤워를 해라. 소독 비누를 써야 한다.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 지 깨끗이 씻어야 한다. 머리카락도 깨끗이 감아야 해." 트레이시는 꺼골꺼끌한 시멘트 바닥을 걸어가서 샤워장으로 내려 갔다. 물줄기가 피부를 찌를 듯이 차가웠다. 그녀는 몸을 힘주어 문지르면서 생각했다. (아무리 깨끗이 씻어 보았자 나는 이제 두번 다시 깨끗한 몸이 될 수 없어. 이곳에 있는 것은 어떤 종류의 인종들일까? 다른 사람 들에 대해서도 이런식으로 대하고 있을까? 이런 곳에서 15년 동안 을 어떻게 지낸단 말인가?) 한 교도관이 성난 목소리로 명령했다. "이봐, 너 ! 시간이 됐어. 나와!" 트레이시가 나오자 다른 죄수가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너무 오 래 사용해서 닮아빠진 타월을 건네받아 트레이시는 그것으로 젖은 몸을 닦았다. 죄수 전원이 샤워를 끝내자 벌거벗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의복 공 급실로 끌려갔다. 선반에는 옷들이 개어져 있었고, 라틴 아메리카 계의 죄수가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이 라틴 아메리카인이 죄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이즈에 맞는 회색 죄수복을 건네주었다. 죄수 복은 두 벌로서, 팬티, 브래지어, 양말, 잠옷이 두벌씩, 그리고 생 리대, 헤어브러쉬, 세탁자루가 지급되었다. 여교도관들의 감시를 받으면서 죄수들은 옷을 입었다. 그것이 끝나자 사진 촬영실로 이동했다. 삼각대 위에 카메라가 장치되어 있고 모범수가 사진을 찍었다. "저곳에 서요, 벽을 등지고." 트레이시는 벽까지 걸어갔다. "얼굴을 좀더 들고. " 그녀는 카메라를 응시했다. 찰칵. "이번에는 얼굴을 우측으로 돌리고. " 지시대로 따랐다. 찰칵. "왼쪽으로." 찰칵. "다음에는 저쪽 테이블로 가요." 테이블 위에는 지문 채취용 도구가 갖춰져 있었다. 트레이시의 손가락에 잉크가 묻혀진 다음 하나씩 하나씩 흰 카드에 찍혀졌다. "왼쪽 손을. 이번에는 오른쪽 손. 그곳에 있는 걸레로 잉크를 닦 아내.당신은 끝." (그렇다. 그말 대로다. 나는 끝이다. 있는 것은 번호 뿐. 이름도 없으며 얼굴도 없다.) 트레이시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까 남자교도관이 그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휘트니지? 소장이 너와 얘기를 하고 싶다고 하신다. 따라 와!" 트레이시의 마음이 갑자기 희망으로 설레이기 시작했다. 찰스가 드디어 손을 써준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믿고 의지했던 대 로 그는 나를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찰스는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충격을 받고 전화로는 지독한 소리를 했던 거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깊이 생각해 보니까 역시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을 깨달은 거야. 찰스는 교도소장을 면회하고 나에 대한 판결이 터 무니 없는 오해였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을 것이다. 나는 석방되는 트레이시는 또 다른 복도로 끌려가서 남자와 여자교도관이 배치 되어 있는 육중한 문을 두 개 통과했다. 두 번째 문을 통과했을 때, 그녀는 놀라서 까무러칠 뻔했다. 그곳에 있던 죄수는 트레이시 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몸집이 큰 여자였다. 키가 아무 리 적게 잡아도 180센티,체중도 백 킬로 이상은 나갈 것이다. 펑퍼 짐한 얽은 얼굴에 잔인해 보이는 노란색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 녀는 트레이시의 양팔을 꽉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유방을 밀어 붙여왔다. "이봐요." 덩치 큰 여자가 교도관을 불렀다. "귀여운 신참인걸, 나하고 같은 방을 쓰게 해 주지 않겠어?" 지독한 스웨덴 사투리였다. "유감스럽게도 이 계집애의 방은 이미 배정되어 있다구, 바사." 괴력의 소유자인 그 죄수는 트레이시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더듬 었다. 트레이시가 얼굴을 돌리자 그녀는 껄껄거리며 웃기 시작했 "좋았어, 좋았어. 귀여운 것 같으니라구. 빅 바사님과는 나중에 만나자.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말이야. 게다가 도망갈 곳도 없 고." 이윽고 소장실에 닿았다. 트레이시는 기대감으로 머리가 어찔어 찔했다. 찰스가 와 있을까? 아니면, 대신 고문 변호사를 보냈을까? 소장 비서가 교도관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장님이 만나보고 싶어 하시니까 여기서 기다려요." 조지 브래니건 소장은 여기저기 홈집투성이의 책상에 서류를 펼 쳐놓고 열심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나이는 40대 중반의 마른 체격 으로 신경질적인 얼굴에 연한 갈색 눈은 움푹 들어가 있어서 일에 지쳐있는 것처럼 보였다. [23] 제목 : 제5장 "너무 거칠게 다루지 말게." - 3 브래니건 소장은 남루이지애나 여자교도소에 취임한 지 5년이 된 다. 근대교도소 관리학자이고 동시에 이상주의자이기도 했던 그는 취임하자 감옥의 개선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 의욕은 금세 꺾이고 말았다. 전임자들이 모조리 좌절했던 것처럼. 교도소는 본래 한 감방에 두 사람씩 수용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것이 지금은 4명에서 6명까지 수용하고 있다. 어느 곳의 교도소 에서나 비슷한 수용상황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미국의 교도 소는 어디나 죄수들로 흘러 넘치고 교도인원 부족의 악순환이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수천 명의 죄수가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이 그냥 감금되어 있다. 증오를 증대시키고, 음모를 발전시키고, 복수심을 심어줄 뿐인 대책 없는 제도가 아닌가. 그러나 한심스럽게도 그것 이 현실인 것이다. 소장은 인터폰으로 비서에게 일렀다. "알았소. 안으로 들여보내요." 교도관이 소장실의 문을 열고 트레이시를 방안으로 데리고 들어 브래니건 소장은 눈 앞에 있는 여성을 쳐다 보았다. 칙칙한 색깔 의 죄수복을 입고, 심신의 피로로 얼굴은 수척해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트레이시 휠트니는 아름답게 보인다. 이 사랑스럽고 정직해 보이는 얼굴을 얼마나 오래 유지해 나갈 수가 있을까 하고 브래니 건 소장은 생각했다. 소장은 지금 눈 앞에 서 있는 죄수에게 특별 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그녀의 사건은 신문에서 읽었으며 전력도 조사해 본 것이다. 초범인데다가 살인을 한 것도 아닌데 징역 15년 은 지나치게 무겁다고 느껴졌다. 고소인이 조셉 로마노라는 사실도 이 판결에 의문을 품게 했다. 그러나, 사실이야 어떻든 소장은 단순한 신병의 보관자에 불과하 다. 제도를 위반할 수는 없었다. 그는 제도라는 커다란 톱니바퀴의 일개 부품에 불과한 것이다. "자아, 우선 앉아요." 소장은 트레이시에게 말했다. 트레이시는 의자에 앉을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무릎이 매우 쇠 약해져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찰스가 여러 가지로 손을 써준 것을 내게 얘기해 주고, 언제 석방되는가를 가르쳐 줄 것이다. "당신의 기록 문서를 조사해 보았소." 소장은 얘기하기 시작했다. (찰스가 그렇게 하도록 요청한 것이구나.) "무척 오랫동안 이곳에 있어야 하겠더군. 당신의 판결은 15년으 로 되어 있으니까." 소장의 말을 이해하는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뭔가가 잘못되고 있는 것이다. "저, 저어... 차, 찰스를 만나보신 것이 아닙니까?" 긴장한 나머지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소장은 어안이 벙벙해서 그녀를 보았다. "찰스라니?" 이 면회는 찰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온 몸의 기운이 쭉 빠져 버렸다. "제발 소원입니다. 꼭 제 말을 들어 주세요. 저는 무고합니다. 저는 이곳에 감금당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에요." 소장은 이 말을 몇 번이나 들었을까?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나는 무고합니다.' 소장은 말했다. "법정은 당신을 유죄라고 판결했소. 당신에 대한 최선의 조언은 되도록 마음 편하게 지내도록 노력하라는 것 뿐이오, 판결을 받아 들이고 나면 당신도 정신적으로 훨씬 편해질 게요. 교도소에는 시 계는 없소. 있는 것은 달력 뿐." (이곳에 15년 간이나 갇혀 있을 수는 없어.) 트레이시는 절망적으로 생각했다. (오히려 죽어버리는 편이 나을 거야. 아아, 하느님 ! 죽게 해 주 세요.하지만 죽을 수도 없겠군요. 아기까지 죽여버리는 것이 되니 까요. 아아,찰스! 당신의 자식이에요. 왜 나를 구해주러 오지 않는 거죠?) 이 순간 트레이시는 찰스가 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찰 스를 미워했다. "특별히 어려운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러니까, 우리들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만나러 와요." 브래니건 소장은 말했다. 그렇게 얘기하면서도 입에서 나오는 말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를 소장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이 아가씨는 젊고, 아름답고, 발 랄하다. 감옥안의 동성연애자들이 굶주린 야수처럼 그녀를 덮칠 것 이다. 그녀를 집어넣을 만한 안전한 감방은 하나도 없다. 대부분의 감방에서 완력이 강한 여죄수가 남자 역할을 맡으며 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브래니건 소장은 신참 죄수가 야간에 강간당한다는 소문을 들은 일이 있다. 샤워실에서, 화장실에서, 심지어는 복도에서 추행이 벌 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소문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무슨 일을 당했어도 희생자는 침묵을 지키기 때문이다. 그 렇지 않으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브래니건 소장은 부드럽게 말했다. "착실하게 복역을 하도록 해요. 복역 태도에 따라서는 12년, 혹 은..." "싫어요!" 그 비명은 절망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자포자기의 몸부림이기도 소장실의 벽이 사방에서 다가와 자신을 깔아뭉개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트레이시는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 악을 쓴 것이다. 교도관이 황급히 달려와서 그녀의 양팔을 꽉 움켜잡았다. "너무 거칠게 다루지 말게." 브래니건 소장은 교도관에게 명했다. 그리고 부하가 골고 나가는 여죄수의 뒷모습을, 무력감을 느끼면서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감방의 가운데 복도를 몇개 씩이나 지나가야만 했다. 양쪽의 감방에는 온갖 인종의 여자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흑인, 백 인, 황인종 등. 그녀들은 트레이시가 지나가자 참으로 각양각색의 악센트로 아우성을 쳐댔다. 무슨 소리인지 트레이시는 전혀 알아들 을 수가 없었다. "핏슈 나이트..." "프렌치 메이트..." "프래쉬 미이트..." 할당된 감방에 도착했을 때 트레이시는 겨우 여죄수들의 아우성 소리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프레쉬 미이트..." 신선한 고기. 맛있어 보이는 신참 죄수. [24] 제목 : 제6장 난.. 난 이런 침대에서 잘 수 없어요. - 1 제 6 장 C옥사에는 60명의 여죄수가 수용되어 있었다. 한 감방에 3씩이었 악취가 풍기는 길다란 가운데 복도를 걸어가는 트레이시를 쇠창 살 너머로 바라보는 얼굴은 가지각색이었다. 무관심한 사람이 있는 가 하면, 정욕을 번뜩이는 사람, 증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사람. 트레이시는 어딘가 모르는 이상한 나라의 물바닥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조금씩 깨어나는 먼 꿈 속의 다른 세계에 속한 기분이었다. 한껏 소리친 절규 때문에 상한 목구멍의 상처가 쓰라려 왔다. 소장실에의 호출은 헛된 희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마저 끊기고 아무 것 도 남아 있지 않다. 있는 것은 이 지옥같은 곳에서 앞으로 15년 동 안 갇혀 지내야 한다는 미칠 것 같은 현실 뿐이었다. 여교도관이 감방의 문을 열었다. "들어가!" 트레이시는 눈을 깜박거리면서 감방 안을 둘러 보았다. 등 뒤에서 문이 철커덕하고 잠기는 소리가 났다. 이곳에 살게 되는 것이다. 감방은 침대 4개를 겨우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비좁았고, 깨진 거 울이 달린 작은 탁자가 한 개, 4인용의 조그만 캐비닛, 방구석에 좌 판이 없는 변기가 있었다. 죄수들이 뚫어질 듯이 트레이시를 응시하고 있었다. 푸에르토리코 인 죄수가 입을 열었다. "신참이 하나 들어왔군." 그 목소리는 낮고 쉬어 있었다. 이마에서 목에 걸쳐 검붉은 칼자 국이 없었다면 이 여자는 미인으로 보였을 것이다. 또한 눈을 보지 않으면 14세 정도로도 보였다. 땅땅한 중년의 멕시코 여인이 말했다. "만나서 반갑군. 무슨 짓을 하고 들어왔지?" 트레이시는 온몸이 움츠러 들어서 대답조차 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 한 사람은 흑인 여자였다. 신장은 족히 180센티는 되며, 미간이 좁고, 조심성이 많아 보이고, 차고 매서운 얼굴을 하고 있다. 머리를 밀어버렸기 때문에 어두운 감방에서 그 머리 가죽이 빛나고 "저쪽 끝이 네 침대야." 트레이시는 침대로 가 보았다. 매트리스는 지독하게 더러웠다. 몇 사람인지 모를 이전 사용자들의 배설물이. 배어 있다. 만져볼 엄두 조차 나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자제력을 잃고 소리를 질 "난,. 난 이런 침대에서는 잘 수 없어요." 뚱뚱한 멕시코 여자가 히죽히죽 웃었다. "싫다면 그곳에서 자지 않아도 괜찮아. 나와 함께 자고 싶어서 그 래,아가씨?" 트레이시는 이 감방 속에 떠돌고 있는 공기를 깨닫자 오싹 소름 이 끼쳤다. 몸에 고통을 느낄 정도의 충격이었다. 세 명의 죄수가 그녀의 몸을 애무하듯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맛있어 보이는 신참, 신선한 고기' 트레이시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의 오해일 거야. 아아, 하느님 ! 이것이 오해이기를 바랍니다...)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저... 누구에게 말하면 새로운 매트리스를 얻을 수 있을까요?" 트레이시는 당황해서 말했다. "하느님 ! 하긴 요즘은 이 근처에서는 통 찾아 볼 수가 없지만 말 이야." 흑인 여자가 웅얼웅얼 말했다. 트레이시는 다시 한번 매트리스를 보았다. 몇 마리의 거무틱틱한 커다란 바퀴벌레가 함부로 기어다니고 있다. (이런 곳에 있을 수는 없어. 미쳐버리고 말거야.) 트레이시의 마음 속을 읽기라도 한듯이 흑인 여자가 말을 걸었다. "따를 수밖에는 방법이 없어." 소장의 말이 귀를 윙윙 울려왔다. '당신에 대한 최선의 조언은 되도록 마음 편하게 지내도록 노력 하라는 말 뿐이다...' 흑인 여자가 말했다. "나는 꼬마 어네스틴이야." 그리고 커다란 흉터가 있는 여자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것이 로라구. 푸에르토리코인이지. 이 뚱보가 멕시코인인 파우 리타. 너의 이름은?" "나는... 나는 트레이시 휘트니예요" 하마터면 이렇게 말할 뻔했다. '트레이시 휘트니였습니다'라고. 자신의 육체로부터 지금까지의 트레이시 휘트니가 빠져나가 버리 는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다음으로 실제로 구토증과 발작이 엄습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어서 침대 가장자리를 힘껏 움켜쥐고 쓰 러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디서 왔지?" 멕시코 여자가 물었다. "미안합니다. 나는.. 나는 지금 얘기할 기분이 아니라서요." 트레이시는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대로 더러운 침대에 쓰러져서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차가운 땀방울을 닦아냈다. (임신 탓이다. 아기를 가졌다는 것을 소장에게 얘기했어야 했다. 깨끗한 감방으로 옮겨줄 것이다. 어쩌면 혼자 쓰는 감방으로 옮겨줄 지도 모른다.)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복도에서 울려왔다. 여교도관이 감방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서둘러 문 쪽으로 갔다. [25] 제목 : 제6장 그것은 절망의 행위이며 행복의 몸짓이었다 - 2 "저어, 죄송하지만 소장님을 뵙고 싶습니다만, 저는... " "찾아오라고 전해주지." 교도관은 눈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답했다. "급한 용건입니다. 저는... " 트레이시는 주먹을 입에 갖다 대고 비명을 억눌렀다. "어디 아픈게 아니야?" 푸에르토리코인이 물었다. 트레이시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그냥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서 한동안 매트리스를 노려보다가는 이윽고 천천히 몸을 뉘였다. 그것은 절망의 행위이며 항복의 몸짓이었다. 트레이시는 눈을 감았다. 눈에서 쉴새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트레이시의 열번째 생일날은 가슴이 울렁거리는 흥분의 날이었다. "앙트와느로 식사를 하러 가자." 아버지가 말했던 것이다. '앙트와느'-그것은 마법의 이름을 가진 별세계로서 미와 매혹과 부의 상징이었다. 아버지가 그곳에 갈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하지 않 다는 것을 트레이시는 알고 있었다. "내년에는 가족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게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몇 번씩이나 되풀이된 상투어였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앙트와느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새로 맞춘 초록빛 드레스를 입고 있다. "당신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나는 너무 자랑스러워. 뉴올리언즈 최고의 미인 두 사람을 동반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모두가 나를 부 러워 할테지." 앙트와느에서의 하룻밤은 모든 것이 꿈, 아니 그 이상으로 멋진 순간 이었다. 우아한 동화의 나라라고 하면 좋을까. 새하얀 식탁보 와 냅킨, 황금색과 은색으로 채색된 반짝반짝 빛나는 식기류-모든 것이 우아했다. (이 곳은 궁전일 거야. 임금님과 여왕님이 계시는 곳 말이야.) 트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자 흥분이 되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화려하게 차려입은 남성과 여성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 신에게 맹세했다. 어른이 되면 매일 저녁 이런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신 분이 되고 말겠어. 물론 아빠와 엄마도 함께 동반해야지.) "전혀 먹지를 않는구나 트레이시." 어머니가 말했다. 어머니를 기쁘게 해 주려고 트레이시는 입안 가득히 음식을 퍼 넣었다. 케이크에 열개의 초가 세워지고, 웨이터가 축가를 틀어 주 었다. 다른 손님들도 일제히 돌아보고 박수를 쳐주었기 때문에 트레 이시는 진짜 공주님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식당 밖을 전차가 땡땡 울리면서 지나갔다. 요란스럽고 끈질긴 벨이 울렸다. 흑인인 어네스틴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저녁 시간이야." 트레이시는 눈을 떴다. 동 전체의 감방문이 차례 차례로 꽈당 꽈 당 하고 열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그대로 침대에 누운 채 계속 꿈을 꾸고 싶었다. "아! 식사시간이라니까." 푸에르토리코인이 말했다. 먹는다는 생각을 하니까 속이 메스꺼웠다. "난 배가 고프지 않아요." 뚱보인 멕시코 여인 파우리타가 말했다. "상관 없어. 너의 사정과는 관계 없는 거야. 그놈들이 식사라고 하면 누구나 모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죄수들은 감방에서 복도로 나가 줄을 서고 있었다. "이봐, 나가는 것이 좋을 거야. 그러지 않으면 혼쭐이 날테니까." 어네스틴이 충고했다. (움직이고 싶지 않아. 여기 이대로 누워 있고 싶어.) 트레이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그녀들은 문 밖으로 나 가 두 줄로 늘어섰다. 키가 작고 옆으로만 살이 붙고, 머리칼을 금 발로 염색한 여교도관이 침상에 누워 있는 트레이시를 발견했다. "이봐, 너! 벨소리가 안 들렸어? 그곳에서 나오지 못해 !" "저는 배가 고프지 않아요. 실례를 용서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여교도관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거친 발걸음으 로 감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쿵쾅거리면서 트레이시의 침대로 다가 "너는 네가 누군줄 알고 있기나 한 거야? 룸 서비스라도 기다리 고 있는 거냐? 빨리 나가서 줄서지 못해! 이번 일은 보고하지 않겠 지만 다음번에 다시 한번 그랬다가는 독방에 처넣을 테니까 그리 알아. 알겠어?" 트레이시는 도통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래서 할 수 없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죄수들의 줄 쪽으로 걸어갔 다. 옆에서 있는 것은 흑인 여자였다. "어째서 내가..." "입닥쳐 ! 정렬중에는 잡담 금지라구." 꼬마 어네스틴은 입가장자리만 움직여서 트레이시에게 경고했다. 죄수들은 좁고 음침한 복도를 지나고 두 군데의 방호문을 지나 대식당으로 갔다. 그곳에는 나무로 만든 커다란 테이블과 의자가 가 득 놓여 있었다. 길다란 서비스 카운터에는 자신들의 식사를 타려고 차례를 기다리는 죄수들의 행렬이 늘어서 있었다. 그날의 메뉴는 다랑어 스튜, 시들어 빠진 완두콩, 색깔이 나쁜 카 스타드 케이크, 그리고 재탕한 커피나 합성주스의 양자 택일이었다. 줄을 따라 움직여 가자 양철 그릇에 정말로 맛없어 보이는 음식이 주걱으로 내던져지듯이 담겨졌다. 급사역을 맡은 죄수는 같은 말을 주워대고 있었다. [26] 제목 : 제6장 침대에 드러누운채 꼼짝도 않는것을 목격하 - 3 "줄을 흐뜨러 뜨리지 말고, 자아, 다음... 줄을 흐트러 뜨리지 말고, 자아, 다음..." 트레이시는 식사를 받아든 뒤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디에 앉아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꼬마 어네스틴을 찾아 보았 으나 흑인 여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트레이시는 푸에르토리코인인 로라와 뚱보인 멕시코 여자 파우리타가 있는 자리로 걸어갔다. 테이 블에서는 20명 가량의 죄수들이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다. 트레이시 는 자기 그릇을 내려다 보고는 그것을 옆으로 밀어 버렸다. 담즙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파우리타가 재빨리 트레이시의 그릇을 붙잡고 말했다. "먹고 싶지 않지? 내가 먹을께." 다음에 로라가 말했다. "이봐, 먹어둬.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살아남을 수가 없어." (오히려 그편이 좋겠어. 죽는 편이 차라리 낫겠어. 여기서 이렇게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생활을 견디어 내는 걸까? 얼마나 이곳에 있었을까? 몇 개월? 몇 년? 저 악취가 풍기는 감방 에서, 저 바퀴벌레가 들끓는 매트리스 위에서...) 그렇게 생각하자 비명이 터져나올 것 같아 트레이시는 턱을 누르 고 필사적으로 참았다. 멕시코 여자가 말하고 있었다. "네가 먹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놈들은 너를 독방에 처넣을 거야." 트레이시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였는지 다시 다짐했다. "움막을 말하는 거야. 그곳에 혼자 갇히게 되는 거라구. 설마 그 곳에 가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멕시코 여자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이런 곳이 처음인 모양이군. 그렇다면 좋은 것을 가르쳐 주지. 꼬마 어네스틴은 이곳을 지배하고 있어. 그러니까 그녀와 친해두면 지내기가 훨씬 편할 거야." 죄수들이 식당에 들어가고 나서 30분 후, 벨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 퍼지고, 전원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우리타는 자기 옆의 식기에서 재빨리 완두콩을 훔쳤다. 트레이시도 줄을 서고, 얼 마 뒤 죄수들은 각자의 감방으로 돌아갔다. 저녁 식사가 끝난 것이 다. 오후 4시였다. 소등까지 앞으로 5시간이나 참지 않으면 안된다. 트레이시가 감방에 돌아가 보니 꼬마 어네스틴은 먼저 돌아와 있 었다. 트레이시는 막연하게 식사시간 동안에는 어디에 가 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트레이시의 눈에 좌판이 없는 변기가 들어왔다. 그것을 사용하고 싶었지만 세 사람의 눈 앞에서 볼일을 볼 수도 없었다. 소등때까지 참기로 하자. 트레이시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 앉았다. 꼬마 어네스틴이 말했다. "너는 저녁식사를 안 했다면서? 바보스러운 짓이야." (이떻게 알았을까? 그리고 그것이 자기와 무슨 상관이람?) "소장님과 면회를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나요?" "종이에 써서 신청하면 되지. 어차피 그런 것은 교도관의 화장실 화장지 밖에 되지 않겠지만 말이야. 놈들은 소장을 만나고 싶어하는 죄수는 모두들 말썽꾸러기 라고 믿고 있으니까." 흑인 여자는 트레이시에게 다가왔다. "이곳에는 말썽거리가 우글우글하다구. 네게 필요한 것은 그 말썽 거리를 해결해 주는 친구란 말이야." 흑인 여자는 금이빨을 내보이며 싱긋이 웃었다. 상냥한 목소리가 "교도소 안을 잘 알고 있는 사람말이야." 트레이시는 히죽히죽 웃고 있는 흑인여자를 을려다 보았다. 얼굴 만이 천정에 떠올라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키가 큰 것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저것이 기린이라는 동물이야." 아버지가 가르쳐 주었다. 트레이시가 오스본 공원에 갔을 때의 일 이다. 트레이시는 공원을 무척 좋아했다. 일요일이면 종종 가족 셋 이서 취주악 연주회를 들으러 외출하고 그것이 끝나면 수족관이나 동물원으로 갔던 것이다. 우리 속의 동물을 천천히 구경하며 다녔 "아빠, 저 동물들은 갇혀있는 것을 싫어하지 않을까? 응?" "그렇지 않을 거야, 트레이시. 이곳에서의 생활을 즐기고 있을 거 야. 시중을 들어주고, 먹이를 주고, 더구나 습격해 오는 적들도 없으 니까 말이야." 아버지는 웃으면서 그렇게 얘기해 주었지만 트레이시는 동물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를 열고 도망치게 해줄까 하고 생각했던 (저렇게 갇혀 있는데 즐거울 리가 없어. 나같으면 싫을걸.) 오후 8시 45분. 옥사 내에 예보 벨이 울려 퍼졌다. 같은 방의 세 사람의 죄수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트레이시는 아무 것도 하지 않 "15분 안에 잘 준비를 하는 거야." 푸에르토리코인인 로라가 말했다. 여자들은 벌거벗고 잠옷으로 갈 아 입었다. 블론드로 염색한 여교도관이 감방 앞을 지나갔다. 트레이시가 침 대에 드러누운 채 꼼짝도 않는 것을 목격하자 그녀는 멈춰섰다. "옷을 벗지 않아?" 여교도관은 소리를 치고 나서 어네스틴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직 가르쳐 주지 않았어?" "아니, 얘기했어." 여교도관은 트레이시에게 시선을 옮겼다. "말썽꾸러기에게 본때를 보여줄 방법은 모두 준비되어 있어. 여기 서는 규칙에 따르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 좋을걸. 그렇지 않으면 걸 어다니지 못하게 해 주겠어." 경고를 뒤에 남기고 여교도관은 가버렸다. 멕시코 여자인 파우리타가 충고했다. [27] 제목 : 제6장 "넌, 아주 멋진 몸매를 갖고 있구나." - 4 "저것이 시키는대로 하는 것이 좋을 거야. '늙은 강철팬티'는 심 술궂은 여자니까." 트레이시는 침대에서 일어나 동료 죄수들에게 등을 돌리고 천천 히 옷을 벗어 나갔다. 팬티 외에는 모두 벗고 꺼끌꺼끌한 잠옷을 머 리에서부터 뒤집어써서 입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 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넌, 아주 멋진 몸매를 갖고 있구나." 파우리타가 감탄한 듯이 말했다. "흐음, 홀딱 반할만한 몸매군." 로라도 맞장구를 쳤다. 트레이시는 소름이 쫙 끼쳤다. 어네스틴이 다가와서 트레이시를 내려다 보았다. "우리들은 친구니까 내가 네 뒤를 돌봐 주겠어." 흑인 여자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몸을 휙하니 돌리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내버려둬요! 당신들 모두, 나는... 나는 그런 것과는 관계 없어 요." 흑인 여자는 킬킬거리고 웃었다. "언젠가 너는 우리들이 원하는 역할을 맡게 될 거야." 멕시코 여자도 말했다. "시간은 충분히 있으니까 말이지." 그때 불이 꺼졌다. 어둠은 트레이시의 큰 적이었다. 그녀는 온몸을 긴장시키면서 침 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당장이라도 습격을 당할 것 같은 살기 가 느껴졌다. 지나친 신경과민일까? 과도한 긴장 탓으로 모든 것에 강박관념이 뒤따른다. 그냥 위협만 할 생각이었을까? 어쩌면 세 사 람은 트레이시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 그녀들의 행동에서는 불길한 조짐이 엿보였다. 트레이시는 교도소에서는 동성애가 성행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그런 것은 특수한 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교도소 측 이 그와 같은 행위를 묵과할 리 없지 않은가. 자신에게 타일러 보았지만 계속 의혹은 남았다. 트레이시는 밤새 깨어 있기로 결심했다. 가령, 누군가가 유혹해오면 큰 소리로 도움 을 청하자. 간수가 달려오면 이 여자들도 내게 손을 댈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다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방심만 하 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트레이시는 암흑 속에서 침대 끝에 앉아서 주위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세 사람의 여자가 각기 한 번씩 변기로 갔다가 볼일을 보 고 자기 침대로 돌아갔다. 트레이시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변 기를 사용했다. 물을 홀려 보내려고 했으나 고장이 나서 작동하지 않았다. 견딜 수없을 정도로 악취가 심했다. 트레이시는 서둘러 자 신의 침대로 돌아와 앉아 있던 자리에 다시 앉았다. (이제 조금만 참으면 밝아질 거야. 아침이 되면 소장을 만나는 거 야. 임신했다는 얘기를 해야겠어. 그러면 다른 개인용 감방으로 옮 겨줄 테지.) 트레이시의 몸은 긴장감으로 뻗뻗하게 굳어 있었다. 이따금 침대 에 누우면 금세 무언가가 목위를 기어다닌다. 숨을 죽이고 비명이 새어나가는 것을 억제했다. (아침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참아야지. 아침이 되면 모든 근심 거리가 사라질 거야.) 트레이시는 일분마다 계속 같은 생각을 했다. 새벽 3시, 트레이시는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쓰러 지듯이 잠이 들었다. 트레이시는 잠에서 퍼뜩 깨어났다. 한 개의 손이 입을 틀어막고 두 개의 손이 트레이시의 유방을 움켜쥐고 있었다. 일어나서 소리치 려고 하자 잠옷과 팬티가 찢겨져 나갔다. 넓적다리 사이에 몇 개의 손이 기어들어와서 그녀의 가랑이를 벌렸다. 트레이시는 손 을 뿌리 치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쳤다. "무서워하지 말아." 어둠 속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상처는 입히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트래이시는 소리가 나는 쪽을 발로 걷어찼다. 발이 근육질의 몸에 "아이쿠! 이 빌어먹을 년 같으니라구. 이년을 바닥으로 끌어내려!" 헐떡이는 목소리가 말했다. 맹렬한 펀치가 트레이시의 안면을 구타하고, 뒤이어 다시 한방이 명치 끝을 강타했다. 누군가가 몸 위에 올라타 트레이시를 바닥에 고정시켰다. 그 사이에도 몇개의 손이 트레이시의 음부를 계속 주물 러대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여자들의 손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으나, 곧 누군가 에게 붙들려서 쇠창살에 힘껏 머리가 부딪쳐졌다. 코에서 코피가 흘 러 나왔다. 트레이시는 콘크리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또 다시 손 발이 꼼짝 못하게 고정되어졌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미친 사람처럼 저항했으나 결국은 세 사람의 여자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차가 운 손과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신체 구석구석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트레이시의 다리가 크게 벌려지고 딱딱하고 차가운 물체가 그 사 이로 삽입되었다. 도움을 청하려고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어 보았지만 아무런 효과 도 없었다. 입 가까이에 누군가의 팔이 있어서 트레이시는 그것을 덥썩 물고 힘껏 물어 뜯었다. 억누른 비명 소리가 났다. "이 죽일 년이 !" 펀치가 또 다시 안면에 퍼부어지고...트레이시는 고통 속으로 깊이 깊이 가라앉아 갔다. 그리고, 마침내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게 되어 커다란 벨소리에 트레이시는 의식을 되찾았다. 벌거벗은 채 감방 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 쓰러져 있었다. 세 사람의 동료 죄수는 각자의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복도에서 '강철팬티'가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28] 제목 : 제6장 어떻게든 최선의 방법을 골라서 알아서... - 5 "기상! 모두들 일어나!" 감방 앞을 지나가던 여교도관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트레이시를 발견했다. 여기 저기에 핏자국이 묻어 있고, 얼굴은 얻어맞아서 부 어 오르고, 한쪽 눈은 떠지지 않을 정도로 퉁퉁 부어 있다. "도대체 너희들은 무슨 짓을 한 거지?" 여교도관은 문을 열고 감방 안으로 들어왔다.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겠지." 어네스틴이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여교도관은 트레이시의 옆으로 와서 발로 툭툭 걷어찼다. "이봐! 일어나! 일어나라니까!', 트레이시는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네, 알겠습니다. 일어나겠습니다. 여기서 나가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 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온몸이 고통의 비명을 질러대고 있는 것이다. 여교도관이 트레이시의 팔을 잡고 상체를 안아 올렸다. 너무나 심 한 격통으로 의식이 다시금 흐려졌다. "무슨 일이 있었지?" 떠지는 한쪽 눈을 통해서 동료들이 긴장해서 자신의 대답을 기다 리고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나는... 나는..." 트레이시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좀처럼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정 신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을 때는 동물적인 방위 본능이 작용하고 "침대에서 떨어져서..." 여교도관은 채찍질하듯이 말했다. "건방진 인간은 딱 질색이야. 그것을 깨달을 때까지 독방에 처넣 을 수밖에 없겠군." 독방은 망각의 공간이며, 어머니의 태내로 회귀하는 시간이기도 트레이시는 어둠 속에서 혼자 남겨졌다. 지하방은 비좁고, 아무 것도 없었으며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얇은 매트리스가 깔려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악취를 풍기는 변소용 구멍이 뚫려 있다. 트레이시는 암호 속에 누워서 먼 옛날에 아버지가 가르쳐 준 포 크송을 흥얼거렸다. 발광 직전에 있다는 것을 그녀 자신은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다.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잘 알 수가 없었으나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상처받은 몸의 통증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서 부상을 입은 거야. 엄마가 치료해 줄거야.) 트레이시는 조그맣게 어머니를 불렀다. "엄마... " 대답이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의 자세로 그곳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에 잠이 캔 것은 48시간 뒤였다. 격통은 가까스로 그냥 아픔 으로 되고, 아픔은 상처만을 남기고 가벼워져 있었다. 트레이시는 눈을 떴다. 그러나 주위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캄캄하기 때문에 방의 윤곽조차 파악할 수가 없었다.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의사에게 업혀 갔을 때의 아득한 이야 기 소리가 생각났다. "...늑골이 부러지고 손목에도 금이 갔어. 단단히 테이프를 감아 고정시켜... 타박상이나 열상도 심하군. 그러나 이것은 자연히 낫겠 지... 유산을 했군... " 아아, 그렇다. "불쌍한 내 아기. 그년들이 죽인 거야. 내 아기를." 그녀는 중얼거렸다. 트레이시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아기를 위해 그리 고 지옥에 떨어진 자신을 슬퍼하면서. 불합리한 일이 버젓이 통하는 저주스러운 이 세상을 원망하면서. 트레이시는 오싹오싹 추운, 시커먼 어둠 속에서 앓은 매트리스 위 에 누워 자신을 이런 꼴로 만든 인간들에 대한 증오로 몸을 부들부 들 떨고 있었다. 증오의 감정이 활활 불타오르며 모든 것을 녹여버리고 단 한가지 것에 집중되었다. 복수였다. 그것은 자신에게 직접 상처를 입힌 같 은 방에 있는 세 사람의 여죄수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 들도 자기와 같은 희생자인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은 사나이들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 조 로마노, "네 어머니가 숨기고 있던 것이 있었군. 이런 매력적 인 딸이 있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구..." 앤소니 올사티, "조 로마노는 앤소니 올사티라는 사나이의 심복 부하입니다. 올사티는 뉴올리언즈를 지배하고 있는 인간입니다..." 페리 포프, "유죄를 인정하면 당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 헨리 로렌스 판사, "앞으로 15년간 피고는 남루이지애나 여자교도 소에 수감된다..." 이 4명이 증오해야 할 적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찰스도. 그는 나의 변명에 귀를 기울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돈이 필요했으면 내게 의논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이 기회에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나는 당신이라는 인간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어떻게든 최선의 방법을 골라서 알아서 처치해줘... 그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야만 한다.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지금 으로서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그러나 복수는 반드시 실행하고 말 "내일."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내일이 온다면." [29] 제목 : 제7장 자유의 몸이 될거라는 헛된 희망을 품었으나- 1 제 7 장 몇시 몇분과 같은 시간이 무의미해졌다. 독방에는 빛이 들지 않아 서 밤낮의 구별도 할 수 없었고 자기가 얼마나 혼자서 감금되어 있 었는지 짐작을 할 수도 없었다. 이따금씩 문 밑의 조그만 틈새로부 터 차가운 식사가 차입된다. 트레이시는 식욕은 없었지만 어거지로 남김없이 먹었다. (먹어야 돼.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어.) 푸에르토리코인인 로라가 한 말의 의미를 트레이시는 지금 철저 히 음미하고 있다. 살아남는 것이다. 복수를 하기 위해서 지금은 힘 을 비축해야 한다. 트레이시가 지금 처해있는 상황은 누가 보아도 절망적이었다. 15 년간의 징역형에 처해지고, 돈도 없고 친구도 없고, 이 세상에 의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트레이시에게는 밑 바닥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힘이 있었다. (끝까지 살아남을 테야. 살아남아서 그 원수들과 대결하는 것이 다. 나의 무기는 단 한 가지, 그것은 용기이다.)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선조들이 지금까지 계속 살아온 것처럼 그녀도 계속 살아나갈 것 이다. 트레이시는 영국인과 아일랜드인과 스코틀랜드인의 피를 물려 받았고, 각자의 훌륭한 특성을 물려받고 있었다. 지혜, 용기, 의지. (나의 선조는 기근이나 전염병이나 홍수에서도 살아 남았어. 그러 니까 나도 이 산 지옥을 극복해 보이고 말겠어.) 지옥의 독방 속에 있는 그녀의 내부에는 양치기가 있었다. 사냥꾼 이 있었다. 농부, 상점주인, 의사, 교사들, 그녀의 신체의 일부인 선 조들이 모여 있었던 것이다. "당신들을 절대로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트레이시는 암호 속에서 속삭였다. 그녀는 탈옥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체력을 회복하는 일이다. 뛰어오르거나 달리거나 하는 운동을 하기에는 독방은 지나치게 좁았으나 태극권의 연습에는 충분했다. 이것은 몇백년 전부터 중국 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투 준비를 위한 병사들의 전투술이었다. 훈 련을 하는데도 장소를 많이 차지하지 않고 더구나 전신의 근육을 단련시켜 준다. 트레이시는 어둠 속에서 일어나 우선 준비 운동에 들어갔다. 모든 움직임에 의미와 호칭이 있다. 전투적인 '악마타도술'로부터 시작하여 다음에는 온건한 '집중의 술'로 들어갔다. 그 움직임은 자제적이고 우아하고 매우 완만하다. 사범의 구령을 생각해 냈다. (기를 환기하고, 활력을 자극하고, 산처럼 무겁게 시작하고, 새의 깃털처럼 가벼워 진다.) 트레이시는 기가 손끝까지 전해지는 것을 느끼고, 더 나아가 정신 을 집중시켜 유선형으로 이행해 갔다. (새의 꼬리를 잡는다. 황새가 된다. 원숭이를 튕겨낸다. 호랑이와 대치한다. 손을 구름으로 삼아 생명의 물을 순환시킨다. 흰뱀을 기 게하고 호랑이를 탄다...) 한 바퀴 도는데 한 시간이 걸리고, 수련이 끝나자 트레이시는 녹 초가 되었다. 이 운동을 오전과 오후에 두 차례씩 반복하여 체력의 회복과 증강에 힘썼다. 육체를 단련하고 있지 않을 때는 정신을 훈련 했는데 암흑 속에 누워서 수학의 난해한 방정식을 풀거나, 머리 속에서 은행의 컴퓨터 를 작동시키거나, 시를 낭독하거나 학생 시절에 공연한 연극의 대사 를 암송하거나 했다. 트레이시는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악센트를 나누어 구사하는 역할을 맡았을 때는 개막 전날까지 몇 주일씩이나 연습에 몰두하곤 했었다. 영화계의 관계자로부터 할리우드의 스크린 테스트를 받아보지 않 겠느냐는 제의를 받은 적도 있었다. "싫어요. 그러고 싶지 않아요. 무대에 올라가다니, 내 분수를 지켜 야죠." 트레이시는 그렇게 거절했다. 찰스의 목소리가 생각난다. "필라델피아 데일리 뉴스의 조간 톱기사였어." 찰스와의 추억은 잊어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의 문은 지금 은 닫아두어야 한다. 트레이시는 자신의 머리 속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한 문답을 생각 "질문... 가르치려고 해도 절대로 불가능한 것을 세 가지 들어보 라." "해답 : 1.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차이를 자녀에게 가르치는 2. 태양의 주위를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을 벌에게 이해시키는 3.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차이를 고양이에게 설명하는 것." 그러나 트레이시가 가장 숙고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어떻게 원 수를 쓰러뜨리느냐 하는 것이었다. 한 사람씩 차례로 해치우는 것이 다. 소녀시절의 게임을 회상했다. 한손을 하늘로 뻗어 올리면 태양 을 덮어 감출 수가 있다. 적들은 내게 그 게임을 적용한 거야, 한 손을 들어 내 인생을 암흑 속으로 밀어 떨어 뜨리려고 했다. 이번에 는 너희들이 벌을 받을 차례다. 트레이시는 모르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몇사람의 죄수가 이 독방 감금때문에 정신적으로 돌아버렸다. 그러나 그런 것은 그녀와는 관 계가 없었다. 7일째 되는 날, 독방의 문이 열리고 갑자기 빛이 방안으로 비쳐 들어왔기 때문에, 트레이시는 이번에는 강렬한 빛 탓으로 눈이 보이 지 않았다. 교도관이 방 밖에 서 있었다. "일어 섯. 계단을 올라가." 교도관은 부축을 해 주려고 트레이시에게 다가갔으나 놀랍게도 그녀는 훌쩍 일어서더니 자기 발로 걸어 나왔다. 독방에서 나올 때 의 죄수라고 하면 쇠약해 있던가, 반항하던가의 어느 쪽인데 이 죄 수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이 장소에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 그렇 다. 자신감에 넘친 위엄까지 풍기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빛 속에 서서, 눈이 빛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어쩌면 이렇게 예쁘게 생겼을까. 빌어먹을! 조금만 화장을 하면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겠어. 조금 편의를 제공해 주면 어떻게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생각한 교도관은 큰 소리로 말했다. "당신같은 미녀가 이런 곳에 갇혀 있으면 안 되지. 나와 사이좋게 지내기만 하면 이런 고생은 두번 다시 시키지 않겠어." 트레이시가 교도관을 뚫어질 듯이 노려보았기 때문에 그 눈을 빨 려들어간듯이 보고 있던 그는 당황해하면서 자신의 음란한 공상을 황급히 포기하기로 했다. 교도관은 트레이시를 윗층으로 데리고 가서 여교도관에게 인계했 여교도관은 쿵쿵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아이쿠 냄새야! 안에 들어가서 샤워를 해 ! 옷을 불태워 버려야 겠어." 차가운 샤워는 기분이 좋았다. 머리를 감고, 꺼끌꺼끌한 빨랫비누 머리에서 발끝까지 말끔히 씻어냈다. 7일간의 독방에서의 때를 깨끗이 씻어내고 몸을 닦고 새로운 의 복으로 갈아 입은 트레이시에게 여교도관이 말했다. "소장이 너를 만나고 싶다고 하더군." 이전에 이 말을 들었을 때 트레이시는 자유의 몸이 될 거라는 헛 된 희망을 품었으나, 이미 그런 풋내기가 아니다. [30] 제목 : 제7장 여자도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있었다. - 2 트레이시가 소장실로 들어갔을 때 브래니건 소장은 창가에 서 있 "그리 앉아요." 그렇게 말을 걸고 그녀가 지시에 따르자 계속해서 얘기하기 시작 "워싱턴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느라고 자리를 비우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에 돌아와서 당신에 관한 보고서를 읽어 보았소. 구태여 독방에 집어넣을만한 일도 아니었던 것 같던데." 트레이시는 소장을 응시하면서 앉았다. 그 표정으로부터는 소장도 그녀의 마음의 움직임을 읽을 수가 없었다. 소장은 책상 위에 펼쳐 놓은 서류에 시선을 떨어 뜨렸다. "보고서에 의하면 당신은 동료 죄수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되어 있는데?"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브래니건 소장은 잘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을 하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죄수들이 감 옥에서 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용서할 수는 없는 입장이오. 당신에게 몹쓸 짓을 한 죄수들을 벌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당신의 증언이 필 요하오, 당신에 대한 보호책을 강구해 주겠소. 자아, 무슨 일이 있었 고 누가 그랬는지를 정확하게 얘기해 줘요." 트레이시는 소장의 눈동자를 들여다 보았다.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침대에서 자다가 굴러 떨어진 것 뿐입니 다." 소장은 트레이시를 한동안 찬찬히 뜯어 보았다. 그의 얼굴에 실망 의 빛이 떠올랐다. "분명히 그렇소?" "네, 그렇습니다." "생각이 변하지 않을까?" "네, 변하지 않습니다." 브래니건 소장은 한숨을 쉬었다. "좋소. 그것이 당신의 결심이라면. 다른 감방으로 옮겨줄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 "저는 다른 감방으로 옮기고 싶지 않습니다." 소장은 설마하는 듯한 표정으로 트레이시를 보았다. "뭐라고? 이전의 감방으로 돌아가고 싶단 말이오?" "네, 그렇습니다." 소장은 영문을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내가 이 여죄수를 잘못 본것일까? 틀림없이 자신이 원해서 이렇게 된 것이리라, 매조키즘이 라는 증세다. 정말 여자 죄수들이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은 오로 지 신만이 알 수 있다. 그는 어딘가 좀 더 평범한, 정상적인 남자 교도소에 근무하기를 절실히 원하고 있지만, 아내와 어린 딸 아이가 이 곳 을 마음에 들어하고 있다. 숙소는 쾌적하고 옥사 주위에는 비 옥한 농장이 펼쳐져 있다. 가족들로서는 목가적인 전원에서 생활하는 것 같겠지만 소장 자 신은 하루 24시간,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죄수들과 얼굴을 맞대고 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소장은 눈 앞에 앉아있는 젊은 여죄수를 향해서 창피스러운 듯이 "잘 알았소. 두번 다시 말썽을 일으키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네, 알겠습니다." 이전의 감방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사실은 트레이시에게 있어서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감방 내에 발을 들여 놓은 순간 이곳에서 저질 러진 능욕이 생각나고, 공포로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세 사람의 여 죄수는 작업에 나가 부재중이었다. 트레이시는 자신의 침대에 드러 누워 천정을 올려다 보며 작전을 궁리했다. 천정에서 벽, 그리고 바 닥을 둘러보고 침대 옆구리에서 시선을 멈췄다. 느슨해져 있는 금속 봉을 빼내어 매트리스 밑에 감췄다. 오전 11시에 점심식사를 알리는 벨이 울리자 트레이시는 제일 먼저 복도로 나가서 줄을 섰다. 식당에 가자 푸에르토리코인인 로라와 멕시코 여자인 파우리타가 입구 가까운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네스틴의 모습은 보 이지 않았다. 트레이시는 모르는 사람들의 테이블에 앉아서 맛없는 음식을 조 금씩 씹어 삼켰다. 오후에는 감방 안에서 혼자 지내고 있으려니까 2 시 45분에 세 사람의 동료수가 돌아왔다. 파우리타는 트레이시를 발견하고 약간 놀라는 모습이었으나 곧 싱긋이 웃었다. "그래, 그래. 내게로 다시 돌아왔구나. 귀여운 새끼 고양이. 요전 의 행위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지?" "좋아, 좋아, 더 멋지게 해주지." 로라가 말했다. 여자들이 던져대는 모욕을 트레이시는 일부러 못들은 체하고 있 목표는 흑인 여자였다. 꼬마 어네스틴이야말로 트레이시가 이 방 으로 다시 돌아온 유일한 이유인 것이다. 어네스틴을 신뢰할 이유같 은 것은 없다.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여자였다. 그러나 지금 트 레이시에게는 그 흑인 여자가 필요한 것이다. '좋은 것을 가르쳐 주지. 꼬마 어네스틴은 이 곳 을 지배하고 있 어... ' 그날 밤 소등 15분 전의 예보벨이 울려 퍼지자 트레이시는 침대 에서 일어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수치심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발가벗은 트레이시를 보고 멕시코 여자가 낮고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풍부하고 탱탱하게 치솟아오른 유방, 길게 쭉 뻗 은 다리, 그리고 크림색의 넓적다리가 눈이 부시다. 푸에르토리코 여자도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잠옷을 입고 침대 에 누웠다. 불이 꺼지고 감방이 어둠에 감싸였다. 대충 30분이 지나갔다. 트레이시는 암호 속에서 세 여자의 숨소리 에 귀를 곤두세우고 있었다. 건너편에서 파우리타가 속삭여왔다. "오늘밤이야말로 엄마가 정말로 귀여워해 줄께. 자아, 잠옷을 벗 어라 아가." "그것을 먹는 법을 가르쳐 주지. 잘 배워야 해." 로라가 쿡쿡거리고 웃었다. 흑인 여자는 말이 없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게 된 파우리타와 로라가 그녀의 침대로 돌진해 오는 것을 알아차리자 트레이시는 반 격에 나섰다. 손에 숨겨 들고 있던 금속봉을 있는 힘 껏 휘두르자 한쪽 여자의 얼굴에 맞았다. 고통에 찬 비명 소리가 들렸다. 또 하 나의 그림자에게 옆차기를 가하자 확실한 반응과 함께 그림자는 바 닥에 쓰러졌다. "다시 한번 다가와 봐. 이번에는 죽여 버릴테니까." 트레이시는 어둠 속의 그림자에게 말했다. "제기랄!" 두 사람이 다시 다가오는 기척이 들렸기 때문에 트레이시는 금속 봉을 휘둘렀다. 그러자 갑자기 어둠 속에서 어네스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그만해 둬. 내버려 두라구." "어니, 난 피투성이라구. 이년에게... " "내 말을 안 듣겠다는 거야?" 오랜 침묵이 흐른 다음 이윽고 두 사람의 여죄수는 숨을 거칠게 쉬면서 자신의 침대로 돌아갔다. 트레이시는 침대로 돌아가 누우면 서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꼬마 어네스틴이 말을 걸어왔다. "너 배짱 한번 두둑하구나." 트레이시는 대꾸하지 않았다. "소장한테 밀고를 하지 않았더군." 어네스틴은 그렇게 말하고 어둠 속에서 한참 동안 웃다가 다시 계속 했다. "밀고를 했다면 지금쯤은 송장이 되어 있겠지."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라고 트레이시도 생각했다. "너는 어째서 다른 감방으로 옮겨 달라고 소장에게 부탁하지 않 았지?" 역시 그런 얘기까지 이 흑인 여자의 귀에 들어가 있다. "이곳에 돌아오고 싶었기 때문이죠." "허허? 그건 또 어째서?" 어네스틴의 목소리에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울림이 담겨 있었다. 트레이시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당신이라면 나의 탈옥을 도와줄 수 있을 테니까요." [31] 제목 : 제8장 아주 멋진 아가씨를 소개하고 싶다고 하는데- 1 제 8 장 여교도관이 와서 트레이시에게 알렸다. "면회다. 휘트니." 트레이시는 설마하는 표정으로 여교도관을 보았다. "면회라고요?" 도대채 누구일까? 아아, 그래. 틀림없이 찰스일 거야. 이제서야 겨우 그가 와 준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어. 나에게 절실하게 도움 이 필요했을 때는 오지 않았는걸. '그래, 난 두 번 다시 그이가 필요하지 않아. 다른 누구도.' 트레이시는 여교도관의 뒤를 따라가면서 그렇게 다짐하고 있었다. 면회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전혀 면식이 없는 남자가 작고 거친 나무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 남자의 외모는 완전히 추악한 용모의 전형이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잘 안되는 키가 작고 뚱뚱한 체격이었다. 코는 길고 뾰족했으며, 입가에는 빈정대는 듯한 표정이 줄곧 어려 있었다. 이마는 툭 튀어나오 고 두꺼운 안경 렌즈가 날카로운 갈색 눈을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 하고 있었다. 남자는 일어나려고 하지도 않고 말했다. "나는 다니엘 쿠퍼라는 사람입니다. 소장에게 당신과의 면회를 허가 받았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트레이시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는 IIPA의 수사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IIPA란 국제보험보호협회 의 약자입니다. 우리 고객인 한 보험회사가 조셉 로마노씨 집에서 도난 당한 그림의 보험계약을 맺고 있었습니다." 트레이시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그 일이라면 드릴 말씀이 없군요. 저는 훔치지 않았으니까요." 트레이시는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훽 돌아서 나가려고 하는데 쿠퍼 의 다음 말이 그녀를 멈추게 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보험 수사원을 돌아다 보았다. 순간, 전 신경을 긴장시켰다. "그림을 아무도 훔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속은 겁니다. 휘트니 양." 트레이시는 천천히 그를 쳐다보며 면회실 의자에 앉았다. 다니엘 쿠퍼가 이 사건과 관계를 갖게 된 것은 3주일 전의 일이었다. 맨해턴에 있는 IIPA본부에 호출 명령을 받아 갔더니 상사인 JJ. 레이 놀즈가 그의 사무실로 불러 말했다. "부탁이 있네, 댄." 다니엘 쿠퍼는 댄이라고 격의없이 부르는 것을 상당히 싫어했다. "설명은 간략히 하겠네." 레이놀즈는 그렇게 말을 꺼냈는데 그것은 진심이었다. 다니엘 쿠퍼를 대하면 공연히 신경이 곤두서는 것이다. 실은 협회에 있는 모든 사람들 이 그와 함께 있으면 신경을 곤두세우며 그를 대했다. 다니엘 쿠퍼는 괴 짜다. 왠지 불쾌감을 주는 남자라고들 입을 모아 평하고 있었다. 다니엘 쿠퍼는 달팽이처럼 자기만의 껍데기 속에 들어가 타인과는 단 절된 마음으로 사는 남자였다. 그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또 아내는 있 는지 자식이 있는지 그런 것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다. 마음을 터놓고 얘 기를 나누는 친구도 없을 뿐만 아니라, 협회에서 여는 파티나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런 독불장군을 레이놀즈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 것은 이 남자에게는 믿기 어려울 만큼 탁월한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여받은 임무에 관해서는 과감하고 끈덕지게 달라붙는 기질이 있고, 컴퓨터 같은 명석한 두뇌로 대처해 나갔다. 다니엘 쿠퍼는 혼자 힘으로 협회의 전 조 사원이 한 것보다 더 많은 보험금 사기를 폭로하고 도난당한 상품을 회 수하고 있었다. 상사인 레이놀즈는 이 쿠퍼라는 사내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하고 생각하면서 그냥 이렇게 책상 맞은편에 앉아 그가 기분나쁜 갈색 눈으로 쳐다보기만 해도 몹시 불쾌해지는 것이다. 레이놀즈는 말했다. "단골 회사가 50만 달러짜리 그림의 보험 계약을 맺고 있는데 " "르느와르의 작품 말씀이군요. 장소는 뉴올리언즈, 보험을 계약한 것 은 조 로마노, 훔친 여자는 트레이시 휘트니이고 그녀는 유죄가 선고되 어 징역 15년 판결을 받았다. 그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바로 그 건 이죠?" '정말 소름끼치는 녀석이야! 이것이 다른 녀석의 말이었다면 허세라고 생각했을 텐데...' 레이놀즈는 생각했다. "자네 말 그대로일세." 레이놀즈는 떨떠름하게 인정했다. "그 휘트니라는 여자가 분명히 그림을 어딘가에 숨겼을 거야. 그걸 찾 아야 해. 조속히 착수해 주게." 쿠퍼도 대답도 하지 않고 사무실을 나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 는 레이놀즈는 늘 그렇듯 생각에 잠겼다. '저 소름끼치는 녀석의 비밀이 무엇인지 밝혀 내고야 말겠어.' 쿠퍼는 50명이나 되는 직원들이 나란히 앉아 컴퓨터를 조작하고, 보고 서를 작성하고 전화를 받고 있는 사무실을 성큼성큼 가로질러 걸어갔다. 모두들 분주하게 일하고 있었다. 어느 책상 곁을 지나칠 때 한 동료가 말을 걸어왔다. "로마노 건을 담당할 거라며? 잘됐군. 뉴올리언즈에서는 " 쿠퍼는 눈길도 주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어째서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걸까? 목소리를 크게 내어 대꾸하고 싶을 만큼 모두가 귀찮게 말을 걸어온다. 그것이 이 사무실의 게임이 되어 있다. 모두가 쿠퍼의 수수께끼를 해 명하여 정체를 밝혀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금요일에 저녁식사라도 할까, 댄?" "댄, 자네가 독신이라면 우리 집사람이 아주 멋진 아가씨를 소개하고 싶다고 하는데, 어때?" 모두들 내가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 어떤 사람과도 사귀고 싶 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왜 모르는 걸까? "딱 한잔만 하세..." [32] 제목 : 제8장 죽은 사람은 입을 다문채 매장되어 있지 않다-2 하지만 다니엘 쿠퍼는 딱 한 잔이 결국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가벼운 한 잔이 식사가 되고, 저녁식사를 나누며 우정이라는 것이 움트고, 우정은 자기 신상이나 비밀 등을 털어놓게 하는 마력이 있는 것이다. 그 건 정말 위험한 짓이다. 다니엘 쿠퍼는 언젠가 누군가가 자신의 과거를 폭로해 내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과거는 죽은 사람과 함께 매장된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 죽은 사람은 결코 입을 다문채 매장되어 있지 않다.' 스캔달 지는 2, 3년에 한 번 꼴로 밝혀지지 않고 처리된 사건들을 파헤 쳐 보도한다. 그럴 때면 다니엘 쿠퍼는 며칠 동안 자취를 감춘다. 이때만 은 술을 퍼마시고 곤드레 만드레로 취하는 것이다. 다니엘 쿠퍼는 만일 고백할 수만 있다면 정신과 의사에게라도 찾아가 보고 싶었지만, 도저히 자기 과거를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먼 옛날의 참 극을 보도한 신문 조각을 쿠퍼는 지금까지도 보관하고 있다. 지금은 색이 바랜 자기의 과거, 즉 물적 증명은 아무에게도 발각되지 않도록 방에 깊 숙이 숨겨 놓았다. 쿠퍼는 스스로를 징계하기 위해서 때때로 그것을 꺼내 보곤 한다. 하지만 기사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뇌리 속에서 선명히 빛 나고 있었다. 쿠퍼는 적어도 하루에 세 번은 샤워를 하던가 욕탕 물에 잠기는 버릇 이 있었다. 그렇게 해도 여전히 말끔한 기분은 될 수 없었다. 사후의 지 옥과 지옥불의 응보를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현세에서의 구원은 속죄 하는데 힘쓰는 수 밖에 없다고 믿고 있었다. 뉴욕 시경을 지원했으나 신 장이 10센티 부족하다는 육체적 결함 때문에 불합격되어 하는 수 없이 민간 수사요원이 되었다. 쿠퍼는 자기 일을 법을 무너뜨린 사람을 찾아 내는 사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은 신의 보복의 사자이고 악한 일 을 하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분노를 떨어뜨리는 신의 사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과거에 대한 속죄이고 내세에 대한 준비였던 것이 다. 쿠퍼는 서둘러 로마노 사건에 착수하기로 했다. 우선 비행기를 타는 것 이다. 하지만 그 전에 샤워를 하지 않고는 갈 수가 없다. 다니엘 쿠퍼는 뉴올리언즈로 갔다. 이 도시에 5일간 머물면서 필요한 사항을 전부 조사해 두었다. 조 로마노, 그가 대부로 모시는 앤소니 올사 티, 페리 포프 변호사, 헨리 로렌스 판사 등에 대한 것이다. 쿠퍼는 트레 이시 휘트니의 법정 심문과 판결문 사본을 읽어 보았다. 밀러 경사를 면 회하여 트레이시 휘트니의 모친이 자살했다는 휘트니 상사가 무너지게 된 진상을 알아냈다. 이렇게 정보를 얻어 들으면서 조사하는 동안 다니엘 쿠퍼는 메모는 하 지 않았다. 메모하지 않아도 쿠퍼는 모든 회화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빠짐 없이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트레이시 휘트니는 99퍼센트 억울한 죄를 뒤집어 쓰고 있다는 확신을 갖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다니엘 쿠퍼는 아직 조사 결과에 만족하지 않는 완벽주의자였다. 그 다음에는 필라델피아로 가서 트레이시 휘트니가 근무하고 있던 은 행의 상사인 클라렌스 데스몬드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찰스 스탠 호프 3세에게는 회견을 거절당했다. 이렇게 하여 마주 앉아 있는 여성을 만나게 되었고 이 여자는 그림 따 위는 훔치지 않았다는 100퍼센트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제 보고서의 전문이 완성된 것 같다. "로마노는 당신을 계략에 빠뜨린 것입니다. 휘트니 양. 조 로마노는 그 그림의 도난을 날조할 계획을 갖고 있었을 겁니다. 당신은 그 녀석이 어 떤 식으로 일을 꾸밀까 기회를 보고 있던 참에 마침 놈의 집에 찾아가 이 일이 쉽게 이루어지도록 도와 준 이 된 것입니다." 트레이시는 자기의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나의 억울한 죄를 증명할 수 있다. 내 혐의에 열쇠를 쥐고 있는 조 로마노에 대한 증거를 충분히 잡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이 소장 이나 지사에게 그것을 증언해 준다면 나는 이 지긋지긋한 악몽에서 구출 되는 것이다. 트레이시는 갑자기 숨이 탁 막혀 왔다. "그럼 저를 구해 주시는 겁니까?" 다니엘 쿠퍼는 당황했다. "구해주다니요?" "방면되는 것이." "천만에요." 돌아온 말은 고압적인 거절이었다. "천만에요라구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내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있 다는 것을 아신다면 " '왜 모두들 이렇게 생각이 단순할까?' "제 임무는 이미 끝났습니다." 쿠퍼는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옷을 벗고 샤워 실로 들어갔다. 머 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싹싹 씻어내고 그 다음에 뜨거운 물줄기를 온 몸에 뿌렸다. 30분 간의 알찬 입욕이었다. 몸을 타올로 닦고 옷을 입자마 자 보고서 작성을 시작했다. 수신인 J.J.레이놀즈 문서번호 Y-72-830-412 발신인 다니엘 쿠퍼 항목 르느와르 작품 '카페 드 드쥬의 두 여인'... 캔버스에 그린 유화트 레이시 휘트니는 예의 그림 도난건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이 본인의 결론이다. 조 로마노는 애초부터 강도를 날조할 의도를 갖고 보험에 들어 보험금을 교묘하게 가로채고 그 그림을 개인수집가에게 전매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그 그림은 이미 국외로 반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그림은 잘 알려진 작품이기 때문에 모든 상거래와 법률 등의 조건이 좋은 스위스에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큼. 스위스에서는 미술품을 선의 로 구입했다고 하면, 설령 그것이 나중에 장물이라는 것이 밝혀져도 정부 는 그 소지를 허가하기 때문이다. 권고:로마노의 범죄에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므로 본 헙회의 고객은 보험증권에 기재되어 있는 금액대로 지불해야만 한다. 그리고 트레이시 휘트니에게 그림의 회수나 배상을 기대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그녀는 이 그림 건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숨겨놓은 재산 따위도 없기 때문 이다. 덧붙여 그녀는 남루이지애나 여자교도소에 향후 15년간 복역하게 되어 있는 형편이다. 다니엘 쿠퍼는 잠시 펜을 멈추고, 트레이시 휘트니를 생각했다. 남자라 면 누구나가 그녀를 미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쿠퍼는 특별한 흥미도 갖 지 않고 지금부터 15년 사이에 그녀는 어떻게 변해 버릴까 생각해 보았 으나, 이건 자신과는 관련없는 일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그는 보고서에 사인을 하고는 다시 한번 샤워를 할 시간이 있는지 없 는지 생각했다. [33] 제목 : 제9장 그럼 여자에들에게 무슨 일을 시키고 있었지?-1 제 9 장 늙은 강철팬티(죄수들이 심술궂은 교도감독관에게 붙인 별명)는 트레이 시 휘트니에게 세탁반 작업을 할당했다. 교도소에는 35종의 노동작업이 있다. 세탁반은 그 가운데에서도 최악의 작업이었다. 세탁실은 항상 숨이 꽉 막힐만큼 후덥지근했다. 세탁기와 다림질대가 줄을 이루어 나란히 놓 여져 열기를 뿜어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세탁물이 운반되 어 온다. 따라서 그곳에서의 작업은 세탁기에 세탁물을 넣었다가 빼고, 넣었다가 빼고를 반복하는 것이 끝나면 바구니에 가득 채워 넣어서 다림 질대까지 운반하는 것으로 육체만을 혹사하는 단순노동이었다. 작업 개시는 오전 6시. 두 시간에 한번 꼴로 10분간 휴식이 있다. 1일 9시간의 작업이 끝나면 모든 죄수들이 파김치가 되어 풀썩 쓰러질 정도 가 되는 가혹한 작업이다. 트레이시는 아무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묵 묵히 기계적으로 이 작업에 임하면서 자기 생각에 의지를 집중시키고 있 었다. 꼬마 어네스틴은 트레이시가 세탁반 일을 할당받자 무의식중에 말했다. "늙은 강철팬티가 너를 노리고 있어." 그러자 트레이시는 대꾸했다. "그런 여자가 무슨 짓을 하든 이젠 관심 없어." 어네스틴은 다시 한번 당혹감을 느꼈다. 자기가 지금 상대하고 있는 여 자는 바로 3주 전에 이 교도소에 왔을 때만 해도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의 그 풋나기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무엇이 그 녀를 이토록 변화시킨 것일까? 어네스틴은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싶 었다. 트레이시가 세탁반 일을 한 지 8일째 되는 오후, 교도관이 와서 말했 다. "이곳 작업을 그만두고 취사장 일을 해." (모두들 하고 싶어하는 취사장 일인데.) 교도소에는 두 종류의 식사가 있다. 죄수들이 먹는 것은 고기와 야채를 잘게 썬 조각과 핫도그와 콩 요리, 그리고 어거지로 목구멍에 퍼 넣어야 할 정도로 맛없는 냄비구이 요리이다. 반면에 교도관이나 교도소의 직원 들은 직업 요리사가 만든 식사를 한다. 그 메뉴는 스테이크에서부터 신선 한 생선, 돼지와 양의 갈비구이, 닭고기 요리, 신선한 야채와 과일, 그리 고 맨 마지막에 맛있는 디저트까지 곁들여진다. 취사장 담당 죄수들은 이 런 요리를 옆에서 거들어 주기 때문에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이점 이 있었다. 트레이시가 취 사장에 들어가니 거기에 어네스틴이 있었다. 트레이시는 역시 그랬구나 하고 생각했다. 트레이시는 어네스틴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고마워." 친근한 척 인사를 하는 것은 그다지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어네스틴은 입 속으로 중얼거릴뿐 뭐라고 확실히 말하지 않았다. "그 늙은 강철팬티가 어떻게 내가 이곳으로 옮기는걸 허락했지?" "그녀는 이제 우리들을 지도하거나 할 수 없어." "그녀가 어떻게 됐어?" "우리에게는 탄탄한 조직이 있어. 교도관이 심술궂게 군다거나 문제를 일으키면 얼마든지 갈아치울 수가 있지." "소장이 우리들의 요구를 들어 준 거야?" "흥! 소장 따위는 관계 없어." "그럼 어떻게 해서... " "간단해. 내쫓고 실은 교도관이 근무하는 시간에 소란을 일으키는 거야. 불평 불만이 터져 나오지. 그러는 사이에 죄수 한 사람이 보고를 하지. 늙은 강철팬티가 자기의 그곳을 만졌다고 말이야. 다음 날이 되면 이번에 는 다른 죄수가 그녀의 잔인한 처사를 호소하는 거야. 그러는 동안에 또 다른 죄수가 소란을 피우기 시작하지. 감방에서 라디오같은 것이 없어졌 다고 말이야. 그런데 그 라디오는 늙은 강철팬티 방에서 발견되었다고 할 작정인 거지. 일이 그렇게 되면 늙은 강철팬티는 다른 곳으로 배치가 되 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어? 다시 말해서 이곳 교도소를 책임지고 관리 하는 것은 교도관이 아니야. 우리들이지." "너는 무슨 일로 여기에 들어오게 된거지?" 트레이시가 그렇게 물어본 것은 대답에 흥미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 고참 여죄수와 친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심었던 것이다. "나 어네스틴은 어설픈 짓은 하지 않아, 정말이야. 여자애들을 많이 데 리고 있었어." 트레이시는 어네스틴을 쳐다보고 주저주저하며 물었다. "그럼 여자애들에게 무슨 일을 시키고 있었지?" "매춘일거라고 생각하지?" 어네스틴은 입을 크게 벌리고 껄껄 웃었다. "틀렸어. 모두 거대한 저택에서 하녀살이를 하는 거야. 나는 그 소개소 를 했어. 그런 여자들이 20명도 넘게 있었어. 부자들이 하녀를 구하는데 매우 고심하는 세상이었거든. 그래서 나는 일류신문에 호화스런 광고를 많이 냈지. 그것을 보고 전화로 신청해 온 사람들에게 나는 여자들을 소 개해 주었어. 여자들은 그 집 내부 사정을 대충 알게 되면 주인이 일로 출장을 가거나 집을 비울 때를 노렸다가 은식기와 보석, 그리고 모피, 그 밖에 돈이 될만한 물건을 모두 싹싹 긁어모아 행방을 감추는 수법이었 어." 거기까지 말하고는 어네스틴은 한숨을 쉬었다. "그 도난품을 처분한 수입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면 기절초풍을 할걸?" "그런데 어쩌다 붙잡혔지?" "운명의 여신이 변덕을 부린거야. 여자 한 명이 시장의 집에서 점심식 사 급사 노릇을 하고 있었어. 그 집에 노부인 한 명이 초대받아 왔는데 그녀가 바로 그 하녀의 전 주인이자 피해자였던 거지. 들통이 나고 붙잡 혀서 그녀가 몽땅 불어 버린 거야. 그 결과, 여기에 이렇게 어네스틴이 있게 된 거라구." 두 사람은 요리용 스토브 옆에 서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나는 교도소에 오래 있을 수 없어. 담 밖에서 처리하고 싶은 일이 약 간 있거든. 탈옥을 도와주지 않겠어? 나..." 트레이시는 소리를 죽여 털어놓았다. "자아, 양파를 자르지 않았어. 오늘 저녁은 아이리쉬 스튜야." 그렇게 말하고 어네스틴은 자리를 떴다. [34] 제목 : 제9장 어떠한 형태로든 성행위는 엄격히 금지된다 - 2 교도소의 비밀 정보망은 믿기 어려울 만큼 면밀하게 펼쳐져 있었다. 죄수들은 무슨 사건이든 그 일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정보를 얻고 있었다. '쓰레기 쥐'라고 불리우는 그룹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메모 조각 을 줍기도 하고 전화를 몰래 엿듣기도 하고, 소장 앞으로 온 편지를 훔쳐 읽기도 하여, 온갖 정보를 입수해서 그것을 꼼꼼히 정리한다. 그렇게 해 서 정리된 정보는 유력한 죄수들에게 돌려진다. 어네스틴은 정보 회람리 스트의 선두에 위치하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다른 복역수들만이 아니라 간수들까지도 어네스틴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같은 감방의 죄수인 멕시코 여자와 푸에르토리코 여자는 어네스틴이 트 레이시의 비호자가 되었다고 믿고는 전혀 건드리지 않게 되었다. 트레이 시는 어네스틴이 언제 간교한 목소리로 자기에게 구애해 올지를 염려했 다. 하지만 그 흑인 여자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주었다. (이상한 일이군.) 트레이시는 의아스러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신참 죄수에게 배포되는 10페이지 가량의 팸플릿의 규칙 제 7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어떠한 형태로든 성행위는 엄격히 금지된다. 한 감방에는 4명 이상 수 용하지 않는다. 두 명 이상의 죄수가 한 개의 침대에 같이 올라가면 안된 다.' 그러나,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얘기라서 죄수들은 그 팸플릿을 '감 옥 농담집'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몇 주일이 지나가는 사이에 트레이시는 매일 새로운 복역자들, 즉 신출내기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 러면 매일 같은 일이 되풀이 된다. 성적으로 순진한 초범자들은 잠시도 지탱하지 못한다. 남자역의 동성연 애자들이 오들오들 겁에 질린 신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드라마는 무대에서 용의주도하게 연출된다. 적의에 넘치는 무서운 이 세 계에서 우선 다정하게 대해 주는 것이 이 남자역이다. 남자역의 죄수는 희생자를 오락실로 불러들인다. 그래서 함께 텔레비전을 보면서 신참의 뒤로 팔을 돌린다. 신참은 유일한 친구를 화나게 하지 않으려고 그것을 허락한다. 그러는 동안에 다른 죄수들은 나가고 그들 둘 만이 되면 신참 은 적적해져 그 상태에서 남자역과 더욱 친밀해진다. 결국에는 신참 쪽이 이 유일한 친구를 잃지 않으려고 무슨 짓이든 하게 되는 것이다. 고분고분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죄수들 여럿이 몰려와 능욕을 보인다. 교도소에 들어와 있는 90퍼센트의 여죄수는 좋든 싫든 들어온 지 30일 이내에 동성애 행위를 강요당한다. 트레이시는 등골이 오싹해져 어네스틴에게 물었다. "교도소 당국은 어째서 묵인하고 있지?" "그것이 관례이니까." 어네스틴은 설명했다. "어디든지 똑같애, 트레이시. 천 2백명이나 되는 여자들이 사내로부터 격리되어 있는데 오히려 아무 짓도 하지 않는 쪽이 이상한 거지. 하지만 말이야, 우리들은 성욕만으로 그런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야. 힘이 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야." 감옥의 내막을 샅샅이 알고 있는 듯한 이 여자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 었다. "죄수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야." 어네스틴은 계속 이야기했다. "교도관 중에도 악질이 있어. 싱싱한 죄수들 중에는 약물 중독자가 있 지. 이따금 그 죄수가 약이 떨어져 안절부절 못하고 비지땀을 흘리며 온 몸을 떨어대지. 그 순간에 여교도관이 등장하는 거야. 헤로인을 입수해주 는 대신에 약간의 보답을 원하는 거지. 무슨 말인지 알겠지? 신참은 여교 도관이 말하는 대로 하는 대신에 단번에 지위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거야. 남자 교도관은 더욱 악질이지. 그놈들은 감방 열쇠를 갖고 있으니까 밤이 되면 맘대로 들어와 찍어 놓고 있던 여자를 범해. 임신하는 경우도 있지 만 그 나름대로의 특전을 얻을 수 있어. 놈들에게 몸을 맡기는 것만으로 이익이 손에 들어오기도 하고, 보이프랜드와 면회할 수도 있지. 이건 '물 물교환'이라고 부르고 있어. 전국에 있는 교도소 어디에서나 통용되고 있 는 일이야." "두려운 일이군." "살아남기 위해서들 그러는 거야." 천정에서 들어오는 빚이 어네스틴의 파르스름하게 밀어 버린 머리에서 반사되고 있었다. "여기서는 껌을 씹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 왠지 알어?" "왜지?" "그 껌을 문의 열쇠 구멍에 채워서 막아 버리기 때문이야. 그러면 열쇠 가 잘 걸리지 않게 되어 죄수들은 밤중에 서로의 감방을 왕래할 수 있게 되거든. 우리들은 우리들이 따르고 싶은 규칙만 따르는 거지. 여기서 고 분고분 잘 따르는 여자들은 바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은 요령이 좋은 여자 인 거야." 교도소 안에서 일어나는 정사는 그야말로 화려했다. 연인끼리의 약속은 바깥 세계보다도 더욱 엄밀히 지켜졌다. 이 부자연스러운 세계에서 자연 의 섭리에 거역하는 남편과 아내가 탄생하여 그 관계가 계속 연출되는 것이었다. 남자역의 죄수는 이름까지 바꾼다. 어네스틴은 어니로, 테시는 텍스로, 바바라는 보브, 캐더린은 캐리로 바꾸는 것이다. 남자역은 머리를 짧게 깍든지 밀어 부치고 거의 모든 일을 하지 않는다. 아내역을 하는 여 자는 자기의 남편역을 위해서 세탁과 수선, 다림질을 하는 것이 정해져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 트레이시의 같은 방 죄수인 로라와 파우리다는 어 네스틴의 마음을 끌어 보려고 서로 아내역을 맹렬하게 경합하고 있었다. 질투는 매우 격렬해서 폭력행위로까지 가는 사태도 빈번히 일어났다. 아 내역이 다른 남자역에게 반해 있다든가 뜰 같은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목격이라도 한 날에는 남편역은 정신이상이 아닌가 하고 생 각될 정도로 울화통을 터뜨린다. [35] 제목 : 제9장 섹스는 낮밤을 가리지 않고 행해지고 있었다 -3 러브레터라는 애정 표현도 일상적인 일로 '쓰레기 쥐' 여죄수가 배달을 맡고 있었다. 편지는 연 모양의 작은 삼각형으로 여러번 접어져 브래지어 나 구두 속에 숨긴다. 트레이시는 그 연모양의 편지가 죄수들이 식당에 출 입할 때와 작업장에 들어가면서 스쳐 지나칠 때 등에 건네지는 광경 을 몇 번인가 목격했다. 여죄수와 교도관의 연애 장면도 몇번인가 보았다. 그건 절망과 고통과 복종심에서 생성된 비참한 사랑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 같았다. 복역자는 교도관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먹는 것, 베푸는 것, 게다 가 목숨마저도. 트레이시는 결코 누구에게도 특별한 감정은 품지 않겠다 고 자신에게 단단히 타일렀다. 섹스는 낮밤을 가리지 않고 행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샤워실, 화장실,감 방 등 장소 또한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밤이 되면 철창 너머로 오랄섹스 가 교환된다. 교도관의 애인이 된 여죄수들은 야간에 감방에서 자유롭게 되어 교도관이 숙직하는 곳을 들락거렸다. 소등이 되면 트레이시는 침대에 누워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이 지긋 지긋한 사랑의 신음 소리를 차단시켰다. 어느 날 밤의 일이었다. 어네스틴이 침대 밑에서 싸라기같은 것이 들어 있는 상자를 꺼내어 그것을 감방 밖의 복도에 여기저기 뿌려대기 시작했 다. 그러자 다른 감방에서도 같은 행동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뭘하고 있는 거야?" 트레이시가 물었다. 어네스틴은 트레이시를 돌아다 보며 꾸짖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와는 관련 없는 일이야. 침대에 잠자코 누워 있어. 조용히 자고 있으 면 돼." 몇 분이 지나자 신참이 들어온 가까운 감방에서 공포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아! 싫어! 그만 둬. 잘못했어, 용서해줘 ! 부탁이야 제발 저리로 가!"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 짐작을 한 트레이시는 기분이 역겨워졌다. 그 절규는 그 후에도 잠시 동안 계속되더니 마침내 단념한 오열로 바 뀌어 갔다. 트레이시는 눈을 다부지게 감고 증오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여죄수들은 어째서 이렇게 서로를 괴롭히고 있는 걸까? 트레이시는 자신 이 교도소 안에서 비정한 인간으로 변신했다고 생각하고 일어나 보니 얼 굴에 눈물 자국이 말라 붙어 있었다. 트레이시는 자기 감정을 어네스틴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리라고 결심하 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물었다. "싸라기 같은 것은 왜 뿌렸어?" "경보 장치야. 그렇게 뿌려 두면 교도관이 살금살금 걸어와도 발소리가 들리니까." 범죄자들 사이에서 교도소에서 복역하는 것을 '대학에 간다'고 말하는 이유를 트레이시는 금세 깨닫게 되었다. 교도소 안에서는 여러 가지 일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모두 일상 생활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상식밖의 일 이다. 교도소는 생각할 수 있는 온갖 타입의 범죄전문가 집단이었다. 그 들은 사기, 소매치기, 술이 만취한 사람으로부터 금품을 우려먹는 방법 등의 정보를 서로 교환한다. 서로 최신의 속임수를 갖고 모여서 밀고자나 미끼로 삼는 수사관에 대한 정보를 교환한다. 안뜰에서 휴식중이던 어느 날 아침의 일이었다. 트레이시는 선배 격인 죄수가 젊은 죄수들 앞에서 우쭐거리며 소매치기 강의를 하고 있는 것을 들었다. 모두 진지한 태도로 듣고 있었다. "진짜 프로는 콜롬비아에서 온 사람들이야. 수도인 보고타에는 '10개의 방울학교'라고 불리우는 강습소가 있는데, 500달러만 지불하면 소매치기 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하더군. 그곳에서는 천정에 인형을 매달아 가르친대. 인형에게 옷을 입히고 10개의 주머니에 금이나 보석을 감추어 놓는 거야."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요? 선배님?" "그럼. 있고 말고. 모든 주머니에는 방울이 달려 있거든. 그 빌어먹을 주머니 전부에서 방울 소리를 전혀 울리지 않고 안에 든 것을 훔쳐내지 않으면 졸업 할 수가 없는 거야." 푸에르토리코인인 로라가 한숨을 쉬었다. "나도 한 사람 알고 있지. 그 사람과는 자주 일을 나갔으니까. 오버코트 를 입고 양손을 밖에 내놓고 인파 속 을 걷는 거야. 그 사이에 그 사람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주머니를 정신없이 뒤져대더군 " "그 사람은 어떤 수법을 썼지?" "진짜 솜씨야. 밖에 나와 있는 오른손은 가짜 손이었어. 그 사람은 코트 사이로 진짜 손 을 내밀어 그것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통행인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패스포트나 동전 지갑을 빼내더군." 오락실에서도 강의가 열리고 있다. "보관함 열쇠를 슬쩍 바꿔 치는 수법도 재미있어." 어떤 베테랑이 말했다. "역 근처를 돌아 다니다가 할머니가 여행가방과 큰 손짐을 보관함에 넣 으려고 애쓰고 있는 광경을 찾는 거야. 그 광경이 어쩌다 눈에 띄면 재빨 리 다가가 도와주며 열쇠까지 채워주는 거야. 하지만 상대에게 건네줄 때 는 비어 있는 보관함의 열쇠로 바꾸어 주는 거지. 할머니가 가기를 기다 렸다가 보관함에서 물건을 꺼내어 도망가는 수법이야." 어느 날 오후의 일이다. 매춘과 코카인 소지죄로 교도소에 들어온 두명 의 여죄수가 아직 17세도 되지 않은 순진한 신참 소녀와 안뜰에서 이야 기를 나누고 있었다. "현행범으로 잡혔어. 실수를 한거지." 연상인 여자가 꾸짖고 있었다. "얼마를 받겠다고 말하기 전에 남자 몸에 찰싹 붙어서 총을 갖고 있는 지를 확인해야지. 그리고 무엇을 해주겠다는 것도 절대로 네가 먼저 말하 면 안돼. 남자에게 무엇을 원한다고 말하게 해야만 해. 그렇게 하면 만일 남자가 경관이라는 것이 밝혀져도 위법인 미끼 수사가 성립되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 다른 한 명의 프로가 덧붙였다. "맞았어, 그리고 남자 손을 주의깊게 살펴야 해. 남자가 노동자인 척한 다면 남자 손이 거친지 그렇지 않은지 보는 거야. 그것이 요령이야. 사복 경관은 이 방법 저 방법으로 노동자로 가장하고 나타나지만 매끄러운 손 을 보면 당장 정체를 알 수 있지." [36] 제목 : 제9장 내게서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4 시간의 흐름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시간은 그냥 째깍째깍 흐르 고 있을 뿐인 것이다. 트레이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격언을 떠올렸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내게 질문하지 않는다 해도 그 해답은 명 백하다. 하지만 설명해야 한다면 설명할 수는 없다." 교도소의 일과는 항상 정해져 있었다. 오전 4:40 예보 벨 오전 4:45 기상 및 착의 오전 5:00 아침식사 오전 5:30 감방으로 돌아감 오전 5:55 예보 벨 오전 6:00 작업반별 정렬 오전 10:00 운동장에서 체조 오전 10:30 점심식사 오전 11 :00 작업반별 정렬 오후 3:30 저녁식사 오후 4:00 감방으로 돌아음 오후 5:00 휴식 오후 6:00 감방으로 돌아음 오후 8:45 예보 벨 오후 9:00 소등 규칙은 매사에 관련되어 있었다. 전죄수가 동시에 식사하는 것을 의무 화해 놓았고, 정렬해 있을 때에 개인적 잡담은 용납되지 않았다. 화장도 구는 감방 내의 작은 사물함에 5개 이상 둘 수 없고, 침대 정리는 아침식 사 전에 끝내야 하며 낮에는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어야 한다. 교도소에는 독자적인 음악이 있다. 요란한 벨소리, 시멘트 바닥을 걸을 때 나는 소리, 철창문의 철컥하고 닫히는 소리. 낮 동안에 있었던 일에 대한 비밀스런 잡담, 한밤중의 절규... 교도관이 휴대하고 있는 워키토키 의 칵칵대는 금속음, 식사 때에 쟁반이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높은 담장 과 그 안에 감돌고 있는 고독감과 증오심. 이것이 음악의 무대 장치가 된 다. 트레이시는 모범수가 되었다. 육체가 감옥의 일과에서 들리는 소리에 자동적으로 반응하게 된 것이다. 점호시 감옥의 철창이 닫히는 소리와, 기상시 철창문이 열리는 소리, 그리고 작업 개시를 알리는 벨 소리와 작 업종료시의 벨 소리. 트레이시의 육체는 감옥에 갇힌 죄수였지만 정신은 자유로이 탈옥을 위한 계획에 몰두하고 있었다. 복역수들은 외부로 전화를 걸 수 없었지만 한 달에 두 번은 5분에 한 하여 전화를 받는 것이 허용되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오토 슈미트의 전화 를 받았다. "굳이 말해 보았자 소용 없는 일이겠지만, 꽤나 훌륭한 장례식이었답니 다. 장례 비용은 제가 그럭그럭 지불했어요, 트레이시 양." 슈미트는 머뭇거리며 이야기했다. "고마워요, 오토 아저씨, 대단히 고맙습니다." 두 사람 모두 더 이상 나눌 말이 없었다. 트레이시에게는 그 전화 이외에는 걸려온 것이 없었다. "이봐, 바깥 세계의 일 따위는 전부 잊어버려 ! 이제는 밖에 나가 보았 자 아무도 없을 테니까." 어네스틴이 충고했다. (그렇지 않아. 꼭 만나야 할 인간들이 있어. 조 로마노. 페리 포프. 앤소 니 올사티. 찰스 스탠호프 3세.) 트레이시는 이를 갈며 생각했다. 트레이시가 빅 바사와 다시 만난 것은 뒷쪽에 있는 운동장에서였다. 뒷뜰은 장방형의 넓은 땅으로써 교도소의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수형자들은 매일 아침 30분간 이곳에서 운동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었 다. 그곳 은 탁 터놓고 뭐든지 이야기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장소 중의 하 나로 죄수들이 점심식사 전에 무리를 지어서 최신 뉴스와 소문 등의 정 보를 서로 교환하는 장소이다. 맨 처음 그곳에 나갔을 때 트레이시는 문득 소중한 자유를 얻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탁트인 바깥 공기와 접촉했기 때문이다. 머리 바로 위에 는 그립기만 했던 태양이 밝게 빛나고 푸르른 하늘에는 흰구름이 떠다니 고 있었다. 그리고 자유로이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의 굉음도 들렸다. "어이 ! 오랫만이야." 갑자기 뒤에서 소리가 났다. 트레이시가 뒤를 돌아다 보았다. 교도소에 도착하던 날 만났던 몸집이 큰 스웨덴 여자가 서 있었다. "너에게 혹인 남편이 붙어 있지만." 트레이시가 재빨리 그녀의 곁을 지나치려고 하자 빅 바사는 트레이시 의 팔을 바이스(공작물을 끼워 나사로 죄어 움직이지 않게 고정시키는 기 계 )같은 힘으로 붙잡았다. "내게서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자아, 얌전히 굴어." 스웨덴 여자는 거친 숨을 내뿜었다. 빅 바사는 트레이시를 벽에다 밀어 붙이고 그 거대한 몸집으로 서서히 바짝바짝 밀어붙여 왔다. "징그러워 ! 떨어져 !" "정말 기분좋게 누가 혀로 애무해 준 적이 있어? 내 말의 의미를 알아 들었지? 내가 가르쳐 주지. 한 번 해 주면 그 다음부터는 나 없이는 못살 겠다고 할걸?" 트레이시의 등 뒤에서 평소에 귀에 익은 컬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네스틴이 온 것이다. "이 빌어먹을 계집년아, 그 더러운 손 떼지 못하겠어?" [37] 제목 : 제9장 누군가의 육체,모두 누군가와 관계를 갖고 - 5 어네스틴이 주먹을 움켜쥐고 그곳에 딱 버티어 서 있었다. 눈은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밀어붙인 대머리가 태양에 눈부시게 반사되고 있었다. "너는 이 여자를 귀여워해주기엔 모자라는 사내야, 어니." "아하 그래? 그럼 진짜 사내 맛을 보여줄까?" 흑인 여자의 분노가 폭발했다. "다시 한 번 쓸데없이 트레이시를 찝쩍거렸단 봐라. 그땐 그 냄새나는 네 똥구멍을 튀겨 먹어 버릴 테니까." 그 자리의 공기가 살벌하게 얼어붙었다. 두 명의 체격이 큰 여자가 증 오심을 드러내며 노려보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나 때문에 싸우려고 하고 있는 거야.)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과 동시에 자신은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어네스틴이 전에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곳 감옥에서는 말이야 싸움을 하든지, 관계를 맺든지, 끝장을 보는 길 밖에는 없어. 적은 철저하게 해치우지 않으면 자기가 당하고 말지.' 뒤로 물러난 것은 빅 바사 쪽이었다. 스웨덴 여자는 분한 듯이 어네스 틴을 노려 보았다. "넌 여기에 꽤 오래 있을 거지? 나도 오래오래 있을 거야. 아무튼 나중 에 다시 만나자." 그녀는 떠나가기 전에 협박을 남기고는 획 몸을 돌려 가버렸다. 어네스틴은 여전히 홍분한 채 그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건 구제할 길 없는 야만인이야. 혹시 시카고에서 환자 전부를 살해 한 간호부 사건을 기억하고 있어? 청산가리를 가득 섞어서 주사를 맞히 고는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는 그 사건? 그 자비 의 천사가 너에게 성욕을 느낀 거야. 더러운 인간! 휘트니, 너에게는 보호 자가 필요해. 저 년은 계속 집적거릴 거야." "내가 탈옥하는 것을 도와주지 않겠어?" 벨이 울렸다. "식사 시간이야." 어네스틴은 그렇게 대답할 뿐 탈옥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 았다. 그날 밤, 침대에 누운 채 트레이시는 어네스틴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생 각을 해 보았다. 그 흑인 여자는 결코 자기에게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지만 트레이시는 그녀를 믿고 있지는 않았다. 어네스틴과 두 명의 같은 방 죄수가 자기에 게 한 처사를 그렇게 쉽게 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트레 이시에게는 이 호인 여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저녁 식사 후, 한 시간은 오락실에서 보낼 수가 있어서 여죄수들은 텔 레비전을 본다든가 잡담을 한다든가 최신간 잡지나 신문을 읽을 수가 있 었다. 트레이시는 잡지를 대충 뚫어보면서 엄지 손가락으로 한 장씩 넘기 다가 갑자기 한장의 사진이 나오는 페이지에서 못을 박은듯 눈이 고정되 었다. 그건 찰스 스탠호프 3세의 결혼식 광경을 찍은 사진으로 신랑신부 가 팔짱을 끼고 성당에서 걸어 나오며 행복에 겨운 미소를 띠고 있는 장 면이다. 트레이시는 무거운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얼굴에 행복의 미소를 띤 찰스의 사진을 보자마자 가슴이 오그라들고 숨이 가빠오며 통 증이 치밀었다. 마침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차가운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사진의 남자와 인생을 함께 보내 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나를 배신하고 그 사기꾼들이 나를 파멸 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을 방관하고, 배속의 아기까지 외면해 버렸다. 그것은 다른 시간, 다른 장소인 별세계의 일인 것 같았다. (그건 분명히 환상이었어. 지금이 현실인 거야.) 트레이시는 탁 소리를 내며 잡지를 거칠게 덮어 버렸다. 면회날이 되면 어느 여죄수에게 친척이나 친구가 면회를 오는 지 알수 가 있다. 면회가 있는 죄수들은 샤워를 하고 말끔한 옷을 입고 화장까지 하기 때문이다. 면회실에서 돌아올때 어네스틴은 항상 만면에 웃음을 머 금고 상당히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알이 와 주었어. 알은 면회를 잊지 않고 꼭 온단 말이야. 내가 석방되 는 날이 빨리 오기를 고대하고 있대. 웬지 알아? 난 말이야, 다른 여자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서비스를 그에게 해 주거든." 어네스틴은 트레이시에게 말했다. 트레이시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얘기는... 섹스 얘기야?" "당연하지, 교도소 안에서의 일은 바깥 세상에서의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야. 이곳에서는 말이야 때로는 온기가 느껴지는 육체가 필요한 거야. 손을 대주고 사랑하고 있다고 말해주는 누군가의 육체. 모두 누군 가와 관계를 갖고 싶은 거야.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도 또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 해도 문제가 되지는 않아. 그냥 그 순간만으로 충분한 거야,난 말 이야, 밖에 나가면... 싹 변신하는 거야. 매우 섹시한 여자로. 알겠어?" 어네스틴은 호탕하게 웃어 제꼈다. 트레이시는 평소에 의문이 가는 점이 있었는데 지금이 그것을 물어볼 기회라고 생각했다. "어니, 내가 한 말을 비밀로 지켜주었는데, 그 이유가 뭐지?" 어네스틴은 어깨를 으쓱했다. "시시한 얘기는 집어 치워 !" "난 정말 알고 실어. 네 친구들은 너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지 하지. 네가 명령하는 대로 말이야." 트레이시는 신중하게 말을 골라가며 질문을 했다. "그래 맞아. 모두들 뜨끔한 맛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데 왜 내게는 명령하지 않는 거지? 왜지?" "그래서, 불만이다 이거야?" "아니, 그냥 이유를 알고 싶을 뿐이야." 어네스틴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좋아. 그럼 정직하게 가르쳐 주지. 너는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갖 고 있어." 어네스틴은 트레이시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38] 제목 : 제9장 그 여자의 성에 대한 발동이 없어져서 굿바이-6 "아니, 이상한 뜻으로 생각하지는 말아. 너에게는 품위라는 것이 있어. 진짜배기 기품 말이야. 이건 내 본심인데 '보그,나 '다운 앤드 컨트리'같 은 잡지에나 나오는, 곱게 몸치장을 하고 은주전자에서 홍차를 따르는 맑 고 상쾌한 부인같은 기품이 너에게는 있어. 너는 그런 사회에 어울리는 사람이야. 이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네가 바깥세상에서 무엇에 연 루되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지만 내 짐작으로는 악당들에게 속 은 것 같이 생각되는군." 어네스틴은 트레이시를 말끔히 쳐다보다가는 멋적은 듯 말했다. "난 말이야, 태어나서부터 지금껏 정말 고상한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 어. 헌데 너는 정말 고상해." 어네스틴이 얼굴을 외면했기 때문에 그 다음 말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있잖아... 너의 아기 건은 내가 잘못했어. 난 정말로..." 그날 밤 소등이 된 후 트레이시는 침대에 누운 채로 어네스틴에게 속 삭였다. "어니, 난 탈옥하고 싶어 도와주지 않겠어? 부탁이야." "졸려 죽겠어. 부탁이니까 입좀 다물고 있어주지 않겠어?" 어네스틴은 트레이시에게 교도소에서 사용되고 있는 초보적인 은어를 가르쳐 주었다. 안뜰에서 여죄수들이 한데 뭉쳐 왁자지껄 정신없이 떠들 어대고 있었다. "이 남자역이 회색의 여자에게 벨트를 떨어뜨렸어, 그런데 그 이후 그 녀를 긴스푼으로 먹이게 하지 않을 수 없었어..." "그 여자라면 쇼트였겠지만 눈보라 속에서 붙잡혀서 돌순경이 푸줏간으 로 데리고 간 거야. 그래서 그 여자의 성에 대한 발동이 없어져서 굿바이 루비도 라는 이야기야." 완전히 종잡을 수 없는 횡설수설이라서 트레이시는 화성인의 말을 듣 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애기인지 도저히 못 알아 듣겠어." 트레이시는 말했다. 어네스틴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배를 쥐고 웃었다. "그래, 너는 영어도 못 알아듣니? 남자역이 벨트를 떨어뜨렸다는 말은 여자역으로 전향했다는 뜻이야. 회색이라는 것은 너같은 백인을 말하는 것이고. 긴스푼으로 먹인다는 말은 애지중지해주지 않으면 안 되니까 접 근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의미. 쇼트라는 것은 형기가 끝나가고 있다는 말이고, 눈보라 속에서라는 것은 헤로인을 복용하고 있다는 뜻이고, 돌순 경이라는 것은 규칙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매수할 수 없는 사람...그리고 푸줏간이란 교도소의 의사라는 의미야." "루비도 라던가 성에 대한 발동이란?" "넌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루비도 라는 것은 가석방이고 성에 대 한 발동이란 형기 만료일이란 뜻이야." 트레이시는 그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도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다음 날, 어네스틴과 빅 바사가 안마당에서 격돌했다. 교도관의 입회하 에 여죄수들은 소프트볼에 홍이 나 있었다. 타석에 서 있던 빅 바사는 투 스트라이크에 이어 총력을 다한 삼구째를 힘껏 날려 트레이시가 수비하 고 있는 1루로 질주했다. 빅 바사는 기를 쓰고 돌진하여 트레이시를 들이 받아 그녀 위로 넘어졌다. 그리고 트레이시의 사타구니를 손으로 더듬으 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싫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오늘 밤 어때 응? 만족스럽게 사랑 해 줄께." 트레이시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 그녀로부터 벗어나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 버둥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빅 바사의 몸이 쑥 위로 들리워졌다. 어 네스틴이 스웨덴 여자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끌어올려 목구멍을 힘껏 조 르고 있었다. "이 천벌을 받을 창녀야! 내가 경고했을텐데 !" 어네스틴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는 손톱으로 빅 바사의 얼굴을 할퀴고 눈도 찔러 댔다. "눈이 안보여 ! 아무 것도 안 보여 !" 빅 바사는 죽는다고 아우성이었다. 스웨덴 여자는 손으로 더듬어서 어네스틴의 가슴을 붙잡자마자 힘껏 비틀었다. 두 사람은 서로 때리고 손톱으로 할퀴며 맹렬히 싸움을 시작하 여 네 명의 교도관이 달려와 떼어놓을 때까지 격투를 벌였다. 교도관들이 두 사람을 떼어놓는 데는 5분이나 걸렸다. 두 사람 모두 진료소로 옮겨졌 다. 어네스틴이 감방으로 돌아온 것은 밤이 으슥해진 후였다. 로라와 파 우리타가 서둘러 어네스틴의 침대로 가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괜찮아?" 트레이시는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멀쩡해." 어네스틴은 활기차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불투 명하게 흐려져 가고 있어서 어네스틴이 상당히 심한 타격을 받았다는 것 을 말해주었다. "나는 어제 가출소 연락을 받았어. 이 감옥에서 나가는 거야. 한데 네가 문제야. 그 살인마는 너를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도망칠 방법은 없어. 그 년은 너를 범하고 난 후에 반드시 죽일 거야."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침상에 엎드린 채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침내 어네스틴이 입을 열었다. "이제 이럭저럭 의논할 때가 온 것 같군. 네가 이 더러운 지옥에서 어 떻게 나가야 하는가를." [39] 제목 : 제10장 내일부터는 가정교사가 오지 않게 될꺼야 - 1 제 10 장 "내일부터는 가정교사가 오지 않게 될 거야." 브래니건 소장은 아내에게 알렸다. 스우 엘렌 브래니건은 깜짝 놀라 남편을 보았다. "왜요? 쥬디는 에미하고 매우 잘 지내지 않았어요?" "알고 있어. 하지만 쥬디는 형기가 끝났어, 내일 아침에 석방돼." 브래니건 부부는 쾌적한 관사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주거지 는 브래니건 소장이 직책으로 인해 얻은 편의 중의 하나였다. 그 밖에도 요리사, 가정부, 운전사가 한 명씩 있고 그리고 다섯 살난 딸 에미의 가 정교사를 맡아줄 사람을 모범수 중에서 고용하는 편의가 허용되어 있었 다. 사용인들은 모두 신용할 수 있었다. 5년 전 이곳에 부임했을 때 브래니 건 부인은 교도소의 부지 내에서 생활하는 것에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전 과자들 을 고용인으로 쓴다는 것은 한층 걱정이 되어 불안해서 못견디겠 다고 불평을 했었다. "죄수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보장하죠? 한밤중에 우리들 의 목을 조르지 않는다는 보장은요?" 부인은 강경하게 버텄다. "그런 짓은 할 리가 없어. 만일 사건이 생겨 내가 그들에게 불리한 보 고서를 작성해서 올린다면 그들에게 좋을 리가 없으니까." 브래니건 소장은 아내를 안심시켰다. 소장은 아내를 납득시킬 수는 없었지만 간신히 설복시켰다. 그녀의 두 려움은 근거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범수들은 좋은 인상을 주려고 무척 고심하여 조금이라도 형기가 단축되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실 로 성실하게 일했다. "쥬디라면 에미의 시중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브래니건 부인은 불만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쥬디의 갱생을 바라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막상 떠나게 되자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에미의 다음번 가정교사가 정직한 사람이라는 보증은 없다. 어린애의 목 을 조르는 악녀의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다. "여보, 쥬디의 후임자로 적당하다고 점찍어둔 사람이라도 있어요?" 소장은 그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다. 딸을 잘 돌보아줄 모범수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소장은 트레이시 휘트니가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트레이시의 범죄에 관해서는 아무래도 수긍이 가지 않았던 것이 다. 15년의 경험을 쌓아온 범죄학자로서 죄수들의 성격을 꿰뚫어 볼 재능 이 있다는 것이 그의 자랑거리이다. 지금까지 접해 온 죄수들의 절반 이 상은 상습범이고, 그 이외에는 격정에 치우쳐 죄를 범했다든가,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여 투옥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트레이시 휘트니는 그 어느 쪽 부류에도 속하지 않았다. 억울하 다는 그녀의 주장에 감정이 혼들려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범죄자는 모두 가 자신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소장이 마음에 걸린 것은 트레이시 휘트 니를 감옥으로 보낸 사람들의 존재였다. 브래니건 소장은 정치와의 관계 는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었지만 주지사가 회장을 맡고 있는 뉴올리언즈 시민위원회의 임원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트레이시를 감옥으로 보낼 음모에 가담한 전원을 알고 있었다. 조 로마노는 마피아이고 두목인 앤소니 올사티의 자식과 같은 존재이 다. 트레이시 휘트니의 담당 변호사인 페리 포프는 놈들에게 매수되어 있 다. 헨리 로렌스 판사도 마찬가지이다. 트레이시 휘트니의 판결은 정당하 지 못한 냄새가 짙게 풍겼다. 브래니건 소장은 드디어 마음을 정했다. 그래서 아내에게 말했다. "응, 적임자가 있어." 교도소의 취사장에는 골방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는 작은 식탁과 네개 의 의자가 놓여 있어서 웬만큼 프라이버시가 지켜질 수 있는 유일한 장 소였다. 어네스틴과 트레이시는 10분간의 휴식시간 중에 그 방에 앉아 커 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렇게 서둘러서 여기에서 나가려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텐데, 그 걸 얘기해 주지 않겠어?" 어네스틴이 재촉했다. 트레이시는 주저했다. 어네스틴을 믿어도 될까?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다. "그건... 내 가족과 나에게 처참한 짓을 한 악당들이 있어. 그 놈들에게 복수를 해야만 해." "그래? 어떤 일을 당했는데?" 트레이시는 천천히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한 마디 한 마디에 고통을 되씹으면서. "나의 어머니를 죽였어." "누구지? 그 악당이?" "이름을 대도 너는 모를 거야. 조 로마노 페리 포프, 헨리 로렌스 라는 판사, 그리고 앤소니 올사티." 어네스틴은 기가 막혀 입을 멍청히 벌리고 트레이시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럴 수가! 나를 놀리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트레이시는 놀랐다. "아는 사람들이야?" "알고 있느냐고?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망할 놈의 뉴올리언즈에서는 올 사티와 로마노의 허락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그 놈들에게 손을 대서는 안돼.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리고 마니까." 트레이시는 억양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미 이렇게 " 어네스틴은 주위를 휙 돌아보고 귀를 기울여 듣고 있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했다. "넌 미쳤든지 아니면 바보든지 둘 중의 하나야. 암흑가의 두목들을 상 대로 싸우려고 하고 있는 거라구!" 어네스틴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 놈들의 짓은 잊어버려. 그것이 현명한 일이야." "아니, 잊을 수는 없어. 절대로 잊지 못해. 난 이곳에서 나가지 않으면 안돼. 가능할까?" 어네스틴은 한동안 입을 꼭 다물고 있다가 마침내 입을 열고 선언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안마당에 나가서 이야기하자." [40] 제목 : 제10장 나는 꼭 성공하고 말겠어. 해내고 말겠어. - 2 안마당으로 나온 트레이시와 어네스틴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 진 한쪽 구석으로 가 둘이서만 이야기를 했다. "지금까지 탈옥을 시도한 사람은 모두 열두 명이었어. 두 사람은 사살 되었고 나머지 열 명은 붙잡혀서 다시 돌아왔지." 어네스틴은 말했다. 트레이시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관제탑에서는 기관총으로 무장한 교도관이 24시간 체제로 감시하고 있 고, 게다가 놈들은 비정하기 짝이 없지. 도망치는 죄수가 있으면 놈들은 일의 수고를 덜기 위해서 발견하는 즉시 사살해 버리는 거야. 담에는 전 기가 흐르는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고 겨우 돌파해서 기관총을 피했다고 해도 사냥개를 끌고 모기의 방귀 소리까지 뒤쫓을걸. 수 마일 떨어진 곳 에는 경찰서가 있어서 탈옥수가 있다는 연락이 들어오면 총과 서치라이 트를 탑재한 헬리곱터를 띄우는 거야. 그리고 발견되어 데리고 돌아올 때 는 죄수가 살아있든지 죽어있든지 그들에게는 상관없어. 놈들은 오히려 죽이고 싶어할 거야. 그 쪽이 탈옥을 기도하는 다른 죄수에 대한 본보기 가 되니까." "하지만 그런 것을 다 알면서도 탈옥을 시도하는 사람은 있지?" 트레이시는 완강히 버티었다. "외부에서 안내하는 사람, 친구가 있어서 총이나 돈이나 옷같은 것을 몰래 받은 경우도 있었지. 도주용 차량까지 준비되기도 했었어." 어네스틴은 다음 효과를 노려 잠시 말을 중단했다. "하지만 붙잡혔지." "나는 붙잡히지 않아." 트레이시는 자신에게 맹세하듯 말했다. 여교도관이 다가왔다. 트레이시와 시선이 마주치자 말을 전했다. "브래니건 소장이 부르신다. 무척 급한 일이라고 하셨어." "내 딸을 돌봐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좋을 대로 해요.하 고 싶지 않으면 거절해도 괜찮으니까." 브래니건 소장이 말을 꺼냈다. (딸을 돌봐달라고?) 트레이시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탈옥할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소장 관사에서 일을 하면 교도소 내의 사정에도 더 밝아지게 될 것이다. "하겠습니다. 그 일을 시켜 주세요." 트레이시는 대답했다. 조지 브래니건 소장은 기뻐했으나 동시에 눈 앞의 여성에게 뭔가 낯선 광채가 스치고 지나간 것을 느꼈다. "좋소. 시간당 60센트로 계산하여 월말에 교도소의 당신 구좌에 입금 시키겠소." 죄수는 돈을 사용할 수가 없고 저축한 돈은 석방시에 지급된다. (월말까지 여기에 있을 생각은 조금도 없어.) 트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소장에게는 활기차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일해 줘요. 교도감독관에게 작업표를 받도록 하시오." "감사합니다. 소장님." 브래니건 소장은 트레이시를 보며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무엇 인지 자기도 확실히 모른채 그냥 이렇게 말을 끝냈다. "용건은 그것 뿐이오." 트레이시가 소장 딸의 가정교사가 되었다는 뉴스를 어네스틴에게 전하 자 흑인 여자는 생각에 몰두해 있다가 마침내 말했다. "소장이 너를 모범수로 간주하고 있다는 의미야. 교도소 내의 사정도 보다 잘 알 수 있게 될 거야. 거기서 일하면 조금은 너의 계획을 실행하 기가 쉬워질지도 몰라."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까?" 트레이시는 물었다. "방법은 세 가지가 있어. 어느 쪽이든간에 모두 위험하기는 하지만 첫 째는 살짝 빠져나가는 방법. 밤에 껌을 감방과 복도의 열쇠 구멍에 꽉 채 워서 막아버려. 그렇게 하고 안뜰로 나가 철조망에 모포를 두툼하게 씌워 서 뛰어 넘어가서는 무조건 쏜살같이 내빼는 거야." 사냥개와 헬리콥터로 추격당할 것이다. 경비원이 발포한 탄환이 자기몸 을 찢으며 관통하는 것을 느끼며 트레이시는 무의식중에 몸을 부르르 떨 었다. "다른 방법은?" "두 번째는 위협 탈옥이야. 총으로 인질을 위협하여 인질을 방패로 삼 아 탈옥을 시도하는 것이지. 이 방법은 붙잡혔을 때에는 다시 시합이 속 행돼." 트레이시의 이해가 안되는 듯한 표정을 본 어네스틴은 그 뜻을 설명했 다. "그러니까 너의 형기가 2년에서 5년 가량 추가된다는 뜻이야." "그럼 세 번째 방법이라는 것은?" "도보 탈출이야. 이 방법은 야외 작업을 하는 모범수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지. 일단 밖으로 나가서 무작정 계속 걸어가면 돼." 트레이시는 이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돈도 자동차도 숨을 장소 도 없이는 이 방법도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점호시에 내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금방 수색을 시작할 텐데?" 어네스틴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완벽한 탈옥 계획 따위는 있을 리가 없어. 그러니까 지금까지 여 기에서 탈주한 사람이 없지. 그렇지 않겠어?" (나는 꼭 성공하고 말겠어. 나는 기필코 해내고 말겠어.) 트레이시는 마음 속으로 굳게 맹세했다. 트레이시가 브래니건 소장의 관사에 들어간 아침은 마침 그녀가 이교 도소에 들어온 지 5개월 째가 되는 날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일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트레이시는 소장 부인과 아이를 만나는데 무척 신경 을 쓰고 있었다. 가정교사직은 자유 세계로의 열쇠를 쥐는 것이 되기때문 이다. [41] 제목 : 제10장 흥분과 긴장탓으로 구슬같은 땀이 흐르는것 -3 트레이시는 넓고 정갈하고 분위기가 좋은 식당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 아 기다렸다. 흥분과 긴장 탓으로 구슬같은 땀이 겨드랑이 아래로 흐르 는 것이 느껴졌다. 엷은 장미빛 홈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입구에서 나타 나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여자는 의자에 앉으려다 도중에 마음이 변했는지 다시 일어섰다. 브래 니건 부인은 30대 중반의 밝은 얼굴을 한 금발의 부인이었지만 그 태도 는 차분해 보이지 않았다. 브래니건 부인은 마르고 신경질적인 타입으로 여죄수를 다루는데 자신이 없었다. 가정교사역을 맡아 줄 여죄수에게 감 사해야 할지 그냥 간단히 지시만 하면 되는 것인지, 친구같이 대해야 할 지 죄수로서 취급해야만 할지, 스우 엘렌은 마약 상습복용자나 도둑이나 살인자들 가운데에서 생활해 가는 방식에 아직도 익숙해져 있지 않았다. "내가 브래니건의 아내예요. 딸 에미는 다섯 살입니다. 그 나이에는 매우 활달하지요. 한시도 눈을 떼지말고 지켜주고 도와주세요." 부인은 빠른 어조로 말했다. 부인은 트레이시의 왼쪽 손의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결혼 반지를 끼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런 것이 특별한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 다. (특히 하층 계급에서는.) 스우 엘렌은 생각했다. 그래서 잠시 사이를 두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아이가 있나요?" 트레이시는 유산해 버린 아기를 생각했다. "아니요, 없습니다." "그래요." 스우 엘렌은 눈 앞의 젊은 여성으로 인해 완전히 혼란이 생기고 있었 다. 자기가 예상하고 있던 가정교사와는 전혀 다른 타입이었기 때문이 다. 이 여죄수는 우아한 분위기마저 자아내고 있었다. "에미를 데리고 올께요." 부인은 서둘러 방에서 나갔다. 트레이시는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별장 풍의 큰 집에 아름 다운 가구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다. 틀에이시는 사람 사는 집에 발 을 들여놓은 것이 마치 몇 년만의 일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곳이 야말로 세계의 일부인 것이다. 그 자유로운 세계의. 스우 엘렌은 아이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왔다. "에미, 이분은..." 죄수를 부를 때 이름과 성의 어느 쪽을 말해야만 할까? 부인은 대충 불렀다. "이분은 트레이시 휘트니." "으응." 에미가 말했다. 엄마를 빼닮은 용모에 영리한 엷은 갈색 눈이 귀여워 보였다. 미인 타임은 아니었지만 티없이 해맑은 그 점이 귀여운 아이였 다. (나를 따르게 해서는 안 돼.) "나를 돌봐주러 새로 온 사람이야?" "너의 엄마를 거들어주고 너를 돌봐줄 거야." "쥬디는 석방되어 나갔어요. 알고 있죠? 당신도 금방 석방되나요?" (나는 다른 방법으로 곧 나가게 된다.) 트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에미에게는 다른 말을 했다. "난 여기에 오랫동안 계속 있을 거란다." "그것 참 다행이네요." 스우 엘렌은 기쁜 듯이 말했다. 하지만 곧 실수를 깨닫고는 얼굴을 붉 히며 입술을 물었다. "말하자면 그러니까..." 부인은 말꼬리를 흐리면서 부엌 쪽으로 돌아가 트레이시가 해야 할일 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에미의 식사를 도와 주세요, 아침식사를 만들어 먹고 오전 중에는 놀 이상대가 되어 주세요. 점심식사는 요리사가 만든 것을 여기서 먹여 주 세요. 점심식사가 끝나면 에미는 낮잠을 잡니다. 그 뒤에 농장을 산책하 는 겁니다. 식물이 자라는 것을 아이에게 보여 주는 것은 좋은 교육이겠 죠?" "그렇습니다." 농장은 옥사 반대 방향에 있었고 20에이커의 토지에 야채와 과수가 모 범수에 의해 정성껏 재배되고 있었다. 그리고 관개용의 커다란 인공 연 못이 있고 주위는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곳에서 일한 5일간은 트레이시에게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생활이었 다. 트레이시는 황량한 옥사의 담장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이 농장을 거닐 고 전원의 신선한 공기를 맘껏 마시며 즐겼다. 그러나 머리 속은 탈옥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에미의 시중을 들고 있지 않을 때에는 교도소 내에서 지내게 된다. 매 일 밤 교도관이 감방으로 데려다 주고 열쇠를 잠그고 떠난다. 교도소 취사장 내에서의 아침식사가 끝나자마자 트레이시는 소장의 관 사로 가서 에미의 아침식사 준비를 한다. 트레이시는 찰스로부터 여러 가지 요리를 배웠고 소장집의 식료품 보관소에는 솜씨를 발휘할 수 있는 재료가 얼마든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에미는 오트밀이라든가 과일 을 넣은 시리얼 같은 간단한 아침식사를 좋아했다. 식사가 끝나면 트레 이시는 게임을 하기도 하고, 책을 읽어 주기도 했다. 고심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자기 엄마가 해 주었던 놀이를 에미에게 그대로 전하면 되었 기 때문이다. 에미는 인형극 놀이를 좋아했다. 그래서 트레이시는 소장의 낡은 양말 로 여러 가지 인형을 만들어 보았는데 막상 만들어 놓고 보니 모양이 형 편 없었다. 그러나 에미는 "와아, 예뻐요."라고 말하며 좋아했다. 트레이시는 인형 속에 손을 집어 넣고 다양한 악센트를 넣어 인형극을 했다. 프랑스어로 이탈리아어로 또는 독일어로 하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 에미가 가장 재미있어한 것은 파우리타식의 명랑한 멕시코어 발음이었 다. 트레이시는 즐거움에 넘쳐 있는 에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 아이와 너무 깊이 정이 들면 안돼. 이 아이는 내가 탈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니까.) 에미의 오후 낮잠이 끌나자마자 두 사람은 상당한 거리를 산책했다. 그리고 트레이시는 지금까지 몰랐던 교도소부지를 샅샅이 관찰했다. 모든 출입구를 두루 살펴보고 감시탑 경비의 근무 상황과 교대 시간 등 을 저쪽에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신중히 체크했다. 그렇게해서 명백해진 것은, 어네스틴과 둘이서 검토한 탈옥 계획 중에는 아무 것도 가능성이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결론이었다. [42] 제목 : 제10장 함께 지낼 수 있는 날이 무척이나 기다려 - 4 "이 교도소에 물건을 반입하는 서비스 트럭이 있을 거야. 거기에 숨어 서 탈주를 시도한 사람이 있을까? 우유나 식료품을 운반하는 트럭이 가 끔 보이던데..." "몰랐어? 어떤 반입차량이나 들어을 때와 나갈 때 모두 정문에서 철저 하게 검문한다는 것을?" 어네스틴은 냉정하게 말했다. 어느 날, 아침식사를 하면서 에미가 말했다. "난 트레이시 아줌마가 참 좋아요. 엄마가 되어 주지 않을래요?" 그 말을 듣자 트레이시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 가슴이 아팠다. "엄마는 한 사람으로 충분해. 두 사람은 너무 많단다." "난 두 사람 있으면 좋겠어요. 내 친구 샐리의 아버지는 두 번 결혼했 어요. 샐리에게는 엄마가 둘 있어요." "너는 샐리와는 다른 아이야. 빨리 먹어야지." 트레이시는 차갑게 말했다. 에미는 머쓱해져서 트레이시를 보았다. "나 별로 배고프지 않아요." "알았어. 그럼 책을 읽어 줄까?" 트레이시가 책을 읽기 시작하자 에미가 작고 고사리같은 손 을 그녀의 손에 갖다 대었다. "무릎 위에 올라 앉아도 돼요?" "안돼." (사랑은 부모에게서나 실컷 받으렴. 나를 좋아하면 안돼. 그렇게 되면 내가 곤란해진단다.)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감옥 내에서의 일과로부터 해방되어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동안, 어쩐 일인지 밤을 지내기가 고통스러워졌다. 트레이시는 감방으로 돌아와 동물처럼 우리 속에 갇혀 버리는 것이 매우 싫어진 것이다. 어둠속에서 옆 감방에서 들려오는 수상쩍은 비명 소리에는 아직도 무감각해 질 수가 없었다. 신음 소리가 들려오면 트레이시는 턱이 바스러질 만큼 이를 악물 고 참아야 했다. (오늘 밤만 하룻밤만 더 참자.) 트레이시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밤에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이다. 제1단계는 교도소에서 도망쳐 나가는 것. 제2단계는 조 로마노, 페리포 프, 헨리 로렌스 판사, 앤소니 올사티를 어떻게 단죄하느냐 하는 것. 제3 단계는 찰스를 어떻게 단죄하느냐 하는 것. 하지만 그것은 생각만으로도 고통 그 자체였다. (때가 오면 반드시 실행하고 말겠어.) 트레이시는 마음 속으로 맹세했다. 빅 바사의 마수에서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점점 확실하 게 다가왔다. 거대한 스웨덴 여자는 스파이를 풀어서 트레이시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트레이시가 오락실로 들어가면 몇 분 후에는 빅 바사가 모습을 나타내고, 안마당으로 나가면 금방 뒤따라 오는 식이었 다. 어느 날, 빅 바사가 트레이시 곁으로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오늘은 유난히 예뻐 보이는군, 아가야. 함께 지낼 수 있는 날이 무척이 나 기다려 지는걸." "날 좀 내버려둬." 트레이시는 모질게 밀쳤다. 완력이 세어 보이는 거대한 몸집의 여자는 빙긋이 웃었다. "후후, 이제 곧 너의 흑인 창녀는 석방되어 나갈 거야. 그렇게 되면 나 와 같은 감방이 되도록 준비해 놓겠어." 트레이시는 그 소름끼치는 스웨덴 여자를 쏘아 보았다. 빅 바사는 끄덕였다. "알겠어?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야. 아마 알아 두는 것이 좋을걸?" 트레이시는 이제는 시간의 여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네스틴이 석방되기 전에 탈옥에 성공해야 한다. 에미가 좋아하는 산책은 갖가지 들풀들이 흩어져 있는 목초지를 거니 는 것이었다. 산책로 옆에 관개용의 커다란 인공 호수가 있었다. 호수의 주변은 낮은 콘크리트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찰랑 넘치도록 담겨진 물 이 수문에서 저만치 아래의 깊이로 폭포가 되어 떨어지고 있었다. "수영하고 싶어요. 트레이시 아줌마, 괜찮죠?" 에미가 물었다. "이곳에서는 수영을 하면 안 된단다. 이 물은 관개용 물이거든" 트레이시는 딱 잘라 대답했다. 그 차갑고 웬지 오싹하는 느낌의 인공 호수를 보자 트레이시는 부르르 몸이 떨려 왔다. 아버지가 그녀를 어깨에 태워 바닷속에 들어갔기 때문에 트레이시는 무서워서 비명을 질렀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하며 차가운 물 속으로 집어넣었다. 얼굴이 물에 잠겨 숨을 쉬기가 어려워지고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그 소식을 듣는 순간, 트레이시는 역시 상당 히 동요가 되었다. "이번 토요일부터 일주일이 지나면 난 이곳을 나가게 돼." 어네스틴이 말했다. 그 말은 트레이시의 전신에 얼음물을 끼얹은 것 같은 충격을 주었다. 어네스틴에게는 스웨덴 여자가 자신에게 한 말을 아직 하지 않았지만 어 쨌든 이제는 어네스틴은 트레이시를 지켜 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 스 웨덴 여자는 트레이시를 자기 감방으로 옮기게 할 수 있는 충분한 영향 력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브래니건 소장에게 호소하는 방법뿐인데 만약 그렇게 했다가는 감옥 내의 전 죄수가 자기에 게 달려들어 죽이려 들 것이라는 사실을 트레이시는 알고 있었다. (감옥에서는 싸워 이기든지, 관계를 맺든지, 아니면 탈옥하는 수밖에는 없어.) 그녀는 이미 최후의 방법을 선택하고 있었다. 트레이시와 어네스틴은 재차 탈출 계획의 검토에 들어갔다. 하지만 실 행 가능한 의견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자동차도 없고 밖에서 안내해 주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다면 붙잡히는 것은 시간 문제야, 그렇게 되면 상황이 더욱 나빠지지. 머리를 식히면서 상황이 좋아지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나, 머리를 식힐 여유 따위는 없다는 것을 트레이시는 알고 있었 다. 빅 바사에게 쫓기게 된다. 그 거대한 여자가 꾸미고 있는 일을 생각 하면 트레이시는 당장이라도 미쳐버리고 말 것 같았다. 어네스틴이 석방되기 일주일 전 토요일 아침, 브래니건 부인이 에미를 데리고 뉴올리언즈로 주말을 보내기 위해 떠났기 때문에 트레이시는 임 시로 교도소 취사장 작업에 배치되었다. "가정교사 일은 나가지 않아?" 어네스틴이 물었다. "오늘은 쉬어." "나도 그 애를 본 적이 있어. 정말 귀여운 꼬마더군." "착한 아이지." 트레이시는 무관심하게 대답했다. "여기서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기뻐. 나는 절대로 이곳으 로 돌아오지는 않겠어. 알과 내가 담 밖에서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비켜 !" 그 때 웬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트레이시가 뒤를 돌아보자 세탁실의 한 남자가 교도관의 제복과 시트 류를 산더미처럼 쌓은 거대한 짐수레를 밀며 왔다. 남자가 출입구로 가는 것을 트레이시는 이상한 듯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바깥 세상에 나가면 알과 둘이서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일 알겠지? 뭔가 보내줄 것이 있으면... " "아니, 세탁실 트럭이 여기서 뭘하고 있지? 여기에는 세탁실이 없잖아." "으응, 그건 교도관들의 세탁물이야." 어네스틴은 웃었다. "전에는 교도관들이 죄수들에게 세탁물을 맡겼는데 단추는 전부 떨어져 버리고, 솔기는 터지고, 욕지거리를 수놓과 셔츠는 오그라들고, 천에는 이 상한 칼자국들을 내 놓았지. 그러니까 참다못해 교도관들은 외부의 세탁 소에 옷을 맡기는 거야." 어네스틴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트레이시는 이미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탈출 방법이 발견된 것이다. [43] 제목 : 제11장 빨리 끝내고 싶어. 잡히면 나도 혼날테니 - 1 제 11 장 "여보, 더 이상 트레이시에게 에미를 맡기는 것은 고려해 봐야겠어요." 브래니건 소장은 신문에서 눈을 떼고 얼굴을 들었다. "왜? 무슨 일이 있었어?"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트레이시는 에미를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요. 그녀는 어린애 보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나봐요." "에미에게 심술이라도 부렸다는 거야? 때렸다든가 소리를 질렀다든가?" "아니요 " "그럼?" "어제 말이에요. 에미가 달려가 트레이시에게 안기려고 했어요. 그런데 트레이시는 에미를 밀쳐냈어요. 내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에미가 트레이 시에게 너무 달라붙어 있으려 한다는 거예요. 사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요." 브래니건 소장은 껄껄 웃었다. "분명히 당신이 질투를 하고 있는 것 같군. 난 에미의 가정교사로서 트 레이시 휘트니가 적임자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녀가 정말 문제가 되는 행 동을 하면 그때 내게 알려줘. 즉시 해결해 줄 테니까." "알았어요, 여보." 하지만 스우 엘렌은 여전히 트레이시 휘트니에 관해 의문을 지울 수없 었다. 바늘을 들어 하고 있던 자수를 다시 시작했다. 문제는 여전히 해결 되지 않은 상태였다. "힘들겠다니, 뭐가 문제지?" "전에도 말했지? 정문을 통과하는 어떤 트럭이든 경비원들의 철저한 조 사를 받는다고." "하지만 트럭은 바스켓 가득히 세탁물을 싣고 있어. 세탁물을 몽땅 내 려서 하나 하나 검사를 하지는 않을 거 아냐?" "그렇게 할 필요는 없겠지. 빈 바스켓이 세탁실에 운반되면 교도관의 업회하에 세탁물이 넣어지니까." 트레이시는 딱 멈추어 선 채로 생각에 잠겼다. "어네스틴, 누가 5분간만 교도관의 주의를 돌려줄 수 없을까?" "그러면 어떻게 하려고?" 어네스틴은 말을 중단하고 마침내 빙긋 웃으며 아이디어가 떠오른 듯 환한 얼굴이 되었다. "누군가가 교도관의 눈 앞에 맛있는 음식을 놓아주는 사이에 너는 그 세탁물 속에 숨어들어 간다는 생각이군." 어네스틴은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 방법이라면 성공할 수 있을 지도 몰라." "그럼 도와주겠어?" "알았어. 도와주지. 빅 바사의 허를 찌를 최후의 기회야." 트레이시 휘트니가 탈주를 기도한다는 정보는 삽시간에 죄수들 사이에 서 퍼져 나갔다. 탈옥은 모든 죄수의 관심사이고 동경의 대상이다. 누군 가가 시도해 볼 때마다 죄수들은 자신에게도 그런 용기가 있다면 하고 긴장하여 지켜본다. 그러나 경비원이 있고, 사냥개가 있고, 헬리콥터가 뜬 다. 그리고 결국 탈옥수는 원래 자리로 되돌려지게 되는 것이다. 어네스틴의 지도 아래 탈주 계획은 착착 준비가 진행되었다. 어네스틴 은 트레이시의 몸 치수를 재고 로라가 장신구실에서 옷감을 슬쩍해오고, 파우리타가 다른 옥사의 봉제반 죄수에게 옷을 만들어줄 것을 부탁했다. 구두 한 켤레가 의류실에서 반출되고 옷에 어울리는 색으로 염색되었다. 모자와 장갑, 그리고 핸드백까지 마치 마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어디에선 가 모여들었다. "이젠 신분증명서를 만들어야 해. 크레디트 카드 두 개 쯤과 운전 면허 증이 필요해." 어네스틴이 트레이시에게 말했다. "어떻게 하면 손에... " 어네스틴은 싱긋 웃어 보였다. "이 베테랑 어네스틴에게 맡겨 둬." 다음 날 저녁 무렵, 어네스틴은 트레이시에게 제인 스미스라는 명의로 된 세 종류의 유명한 크레디트 카드를 건네주었다. "자아 다음은 운전면허증이야." 어느 날 밤, 트레이시는 감방 철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가 감방에 침입해 오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침대에서 발딱 일어나 공격 자세 를 취했다. 그때 속삭이는 소리가 났다. "휘트니? 따라와." 그것은 모범수 릴리안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야?" 트레이시는 물었다. 어네스틴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날아왔다. "엄마가 깨우는데 이유를 묻는 멍청한 애가 어디 있어? 조용히 해. 아 무 것도 묻지 말아." 릴리안이 부드럽게 말했다. "빨리 끝내고 싶어. 잡히면 나도 혼날테니까. 빨리와." "어디로 가는데?" 릴리안의 뒤를 따라가면서 트레이시는 물었다. 두 사람은 어두운 복도 를 따라 계단 쪽으로 향했다. 계단을 다 내려가자마자 교도관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 서둘러 복도를 내려가 어떤 방에 도착했다. 그곳은 트레 이시가 이 교도소에 처음 왔을 때에 지문을 채취하고 사진을 찍은 방이 었다. 릴리안이 문을 열고 속삭였다. "들어가." 트레이시가 릴리안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자 안에는 다른 복역수 가 기다리고 있었다. "벽 쪽으로 등을 돌리고 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날아왔다. 트레이시는 위가 꽉 조여지는 느낌으로 벽을 등지고 섰다. "카메라를 봐. 찍는다! 편안히 있어."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걸.)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이렇게 긴장한 적은 없었 다. 찰칵,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났다. "사진은 내일 나와." 사진반 복역수는 말했다. "운전 면허증 사진이야. 자아, 이제 가자. 빨리." 트레이시와 릴리안은 처음 온 길을 되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릴리안 이 말했다. "감방을 옮긴다면서?" 트레이시는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뭐라고?" "몰랐어? 너는 빅 바사의 감방으로 옮겨진다고 하던데." [44] 제목 : 제11장 이 귀여운 것이 드디어 내 것이 되는 거야 - 2 어네스틴과 로라, 그리고 파우리타가 트레이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잘 됐어." '몰랐어? 너는 빅 바사의 감방으로 옮겨진다고 하던데' "옷은 토요일에는 완성될 거야." 파우리타가 말했다. 어네스틴이 석방되는 날이다. (그 날까지는 꼭 나가야 한다.)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어네스틴이 낮게 속삭였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세탁물을 가지러 오는 것은 토요일 오후 2시야. 너는 1시 30분에는 세탁실에 들어가 있는 것이 좋겠어. 교도관은 걱정하 지 말아. 로라가 다른 방에서 적당히 시간을 끌 테니까. 파우리타가 세탁 실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옷도 거기서 건네주고 핸드백 속에는 신분증명서와 그 밖의 것들이 들어있을 거야. 네가 숨은 트럭이 교도소 정문을 빠져나가는 것은 2시 15분쯤 일거야." 트레이시는 숨막히는 기대와 불안으로 흥분되었다. 탈출 이야기를 하기 만 해도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되돌아 올 때는 네가 죽어 있든 살아 있든 상관없어... 그들은 일을 쉽 게 하려고 죽이고 싶어하지 ' 앞으로 2, 3일 후, 트레이시는 자유로의 탈주를 결행하게 된다. 그녀는 아무런 환상도 품고 있지 않았다. 성공할 가망은 없다. 결국은 발견되어 되돌아 올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실행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과 단단히 약속을 했던 것이다. 어네스틴과 스웨덴 여자 빅 바사가 트레이시를 둘러싸고 서로 반목하 고 있다는 것은 모든 죄수가 다 알고 있었다. 트레이시가 빅 바사의 감방으로 옮겨진다는 것도 절반쯤은 알고 있었 다. 그런데도 트레이시의 탈주 계획을 빅 바사에게 밀고한 사람이 없는데 는 이유가 있었다. 스웨덴 여자는 나쁜 소식을 싫어했다. 게다가 나쁜소 식과 나쁜 소식을 전해준 사람을 혼동하여 일부러 전해준 사람을 괴롭히 는 것이었다. 그래서 빅 바사는 트레이시의 탈주 계획을 결행하는 날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비밀을 말해 준 것은 트레이시의 운 전 면허증 사진을 찍어준 모범수였다. 빅 바사는 기분이 나쁠 만큼 아무 말도 없이 그 소식을 듣고 있었다. 듣고 있는 사이에 스웨덴 여자의 거대한 몸뚱아리는 풍선처럼 더욱 더 부풀어오르는 것 같았다. "몇 시에 나가지?" 빅 바사가 한 말은 그것 뿐이었다. "오늘 오후 2시. 세탁실에서 세탁물을 넣는 바스켓 바닥에 숨을 거야." 빅 바사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는 비틀거리며 여교도 관에게 가서 말했다. "브래니건 소장을 만나야 겠어. 지금 당장." 트레이시는 밤새도록 눈 한번 붙일 수 없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불 쾌하기까지 했다. 교도소에서 지낸 이 몇 개월은 하염없이 길고 긴 나날 이었다. 침대에 누운채 어둠을 응시하자 지난 일들이 주마등같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난 동화속의 공주가 된 기분이야, 엄마. 이렇게 행복한 사람이 또 있을 까?' '그래 ! 너와 찰스가 결혼한다니!' '신혼여행은 어디로 갈 예정이니?' '속였군! 이 빌어먹을 년.' '당신 어머니는 자살하셨습니다...' '난 너를 잘 몰랐어 ' 찰스가 신부에게 웃음을 띄우고 있는 결혼식 사진 그건 몇 만년 전 의 일이었을까? 몇 광년 전의 다른 세계의 일일까? 아침을 알리는 벨이 층격파같이 옥사 안에 울려 퍼졌다. 트레이시는 오 래 전부터 침대에서 일어나 있었다. 어네스틴이 그런 트레이시의 모습을 보고는 말했다. "기분은 어때, 응?" "좋아." 트레이시는 거짓말을 했다. 입 안은 바싹 마르고 심장은 불규칙하게 고 동치고 있었다. "자아, 우리 두 사람은 오늘 여기서 나가는 거야." 트레이시는 침을 삼키기도 힘들었다. "응." "소장 관사에서 1시 30분에 나올 수 있는 것은 틀림없지?" "그건 문제 없어. 에미는 항상 점심 식사 후에는 낮잠을 자곤 하니까." 파우리타가 말했다. "늦으면 안돼. 모든 것이 다 물거품이 되고 말아." "시간 안에 꼭 돌아을께." 어네스틴은 자기 매트리스 아래로 손 을 넣어 뭉쳐진 돈다발을 꺼냈다. "밖에 나가면 움직이는데 돈이 필요할 거야, 2백달러밖에 안 되지만 조 금은 도움이 될 거야." "어네스틴! 뭐라고 고마움을 전해야 할지... "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돼. 갖고 있어." 트레이시는 아침 식사를 억지로 입에 쑤셔 넣었다. 머리는 욱신거리고 몸의 온갖 구석의 근육도 긴장되어 있었다. (오늘 하루를 버틸 수 있을까? 오늘은 어떻게든 끝까지 견디어 내야 할 텐데...)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식당 안은 어색한 침묵 속에 긴장이 맴돌고 있었다. 그것이 자기 때문 이라는 것을 트레이시는 알아 차렸다. 사정을 알고 있다는 표정들과 속삭 임이 모두 자신을 둘러싼 것이었다. 탈옥이 현실로 이루어지려 하고 있 고, 그 드라마를 연기하는 히로인은 자신인 것이다. 몇 시간이 지나면 자 신은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다. 아니면, 시체가 되든지.아침 식사를 먹다 남긴 채 일어나 트레이시는 브래니건 소장의 관사로 향했다. 교도관이 복 도 문의 열쇠를 열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빅 바사와 탁 얼굴을 마주치게 되었다. 스웨덴 여자는 트레이시를 보면서 싱긋 웃었다. (이 여자는 간이 떨어질 만큼 놀랄걸?)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한편 빅 바사는, 이 귀여운 것이 드디어 내 것이 되는 거야. 하고 생각 하고 있었다. 오전 중의 시간은 거북이걸음처럼 느릿느릿 지나갔다. 트레이시는 안절 부절못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렇게 끝없이 계속되는 것일까. 트레이시는 에미에게 책을 읽어 주었지만 자기가 무엇을 읽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했 다. 창문 너머로 브래니건 부인이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45] 제목 : 제11장 신경이 흥분되어 게임 따위를 할 여유는 - 3 "트레이시 아줌마, 우리 숨바꼭질해요." 신경이 흥분되어 게임 따위를 할 여유는 없었지만 소장 부인의 의혹을 사지 않기 위해서는 보통 때와 다름없이 행동해야 할 것같았다. 트레이시 는 억지로 미소를 띠었다. "좋아, 네가 먼저 숨으렴, 에미." 두 사람은 방갈로 앞의 정원에 있었다. 아주 멀리 세탁실이 있는 건물 이 보였다. 오후 1시 30분 정각에 저곳으로 가는 거다. 외출용 옷으로 갈 아입고 1시 45분에는 커다란 세탁용 바구니 바닥에 누으면 그 위로 제복 이랑 내의류가 덮여질 것이다. 2시에 세탁소 점원이 와서 바구니를 트럭 에 실을 것이다. 2시 15분에는 트럭은 교도소 정문을 통과하여 세탁소가 있는 마을 근교로 갈 것이다. (운전수에게는 발견되지 않아. 운전석에서 트럭 뒤는 보이지 않으니까. 트럭이 마을에 도착하여 신호대기로 정차했을 때를 엿보아 뒷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거야. 침착하게 행동하는 거야. 그리고는 어떤 버스에든 올라타는 거야.) "날 찾을 수 있어?" 에미가 불렀다. 꼬마는 목련나무 뒤에 절반쯤 몸을 숨기고 있었다. 입 가에 손을 대고 자못 이상한 듯이 킥킥거리며 웃고 있었다. (이 애와 헤어지기는 싫어. 내가 여기에서 나가도 다시 만나고 싶은 두 사람이 있다. 머리를 밀어버린 흑인 여자 어네스틴과 어린 꼬마 에미.)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이 말을 듣는다면 찰스 스탠호프도 놀라서 눈이 휘둥그래질 것이다. "자아, 찾으러 간다. 에미." 트레이시는 말했다. 브래니건 부인은 집안에서 두 사람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것을 지켜 보고 있었다. 트레이시의 동작이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오늘 오전 내내 트레이시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시계만 쳐다보고 에 미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해야겠어. 점심식사때 말해야지. 트레이시를 다 른 여자와 바꿔 달라고 그에게 말해야지.) 스우 엘렌은 결심했다. 정원에서 트레이시와 에미는 돌차기와 공기를 하며 놀았다. 그러다 싫 증이 나자 트레이시는 다시 책을 읽어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12시 30분이 되고 에미의 점심식사 시간이 왔다. 트레이시의 행동 개시 시간이 된 것이다. 트레이시는 에미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럼 저는 옥사로 돌아가겠습니다. 사모님." "뭐라고요? 아 참! 내가 얘기하지 않았나요? 트레이시, 오늘은 중요한 손님들을 접대해야만 해요. 일행이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하시기 때문에 에 미는 점심 식사를 할 수 없어요. 오늘은 당신이 에미 시중을 들어줘요." 트레이시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필사적으로 억누 르고 있었다. "저어... 곤란한데요, 사모님." 브래니건 부인의 태도가 싹 바뀌었다. "뭐라고요? 곤란하다니, 그게 무슨 뜻이죠?" 트레이시는 부인의 얼굴에 떠오른 분노를 보고 당황하며 생각했다. (이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돼. 남편을 불러 나를 감방으로 되 돌려 보내게 할 거야.) 트레이시는 공포를 억누르며 미소를 지었다. "저어, 제 얘기는 에미가 아직 점심을 안 먹었기 때문에 배가 고플 거 라는 말씀입니다. 사모님." "요리사에게 준비시켜 두었어요. 2인분 도시락을요. 목초지에서 즐거운 산책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것을 갖고 가서 들어요. 에미 너 피크닉 좋 아하지? 그렇지 아가야?" "응, 피크닉 굉장히 좋아해." 에미는 트레이시를 올려다 보며 재촉했다. "갈 수 있죠, 트레이시 아줌마? 가는 거죠?" (안돼 ! 그럴 수 없어 ! 아냐아냐, 갈 수 있어. 침착해야 해. 아직은 여 유가 있으니까.) '1시 30분에 꼭 세탁실로 와야 해. 늦으면 안 돼.' 트레이시는 브래니건 부인의 얼굴을 보았다. "저어, 몇 시에 에미를 데리고 오면 되죠?" "아, 대략 3시 경에요. 그때쯤에는 손님들이 돌아가고 없을 거예요." (트럭도 돌아가고 없을 거야.) 하늘이 트레이시의 머리 위에서 무너져 내렸다. "저는..." "괜찮아요? 어째 안색이 안 좋군요." (그래, 그렇게 말하자.) 아프다고 말하면 된다. 그리고 병원에 가면. 하지만... 그렇게 하면 거기 서 붙잡혀 이것저것 검사를 받을 것이다. 그렇게되면 지정된 시간까지 풀 려나지 못할 것이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브래니건 부인은 트레이시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만." (아무래도 거동이 수상하군. 가정교사를 바꿔 달라고 조지에게 딱 부러 지게 충고해야겠어.) 소장 부인은 결심했다. 에미의 눈동자는 기쁨으로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제일 큰 샌드위치를 아줌마한테 줄께요. 재미있게 놀아줄 거지요?" 트레이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요인들 일행의 방문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윌리엄 하버 주지사 스스로 가 이곳 여자교도소를 복역수갱생위원회 맴버에게 안내하며 돌아다녔다. 그것은 브래니건 소장이 일 년에 한 번은 치뤄야하는 채무이기도 했다. "내부를 깨끗이 청소해 두고 여죄수들에게도 밝은 표정을 지으라고 얘 기해 두게나, 소장. 그렇게 하면 예산이 증액될 테니까." 지사는 설명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무렵, 교도관장으로부터 죄수들에게 명령이 하달되었 다. "마약, 칼 종류, 그리고 자위 도구들은 모두 제거해 버릴 것." 하버 주지사와 그 일행은 오전 10시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맨 처음에는 교도소 내부를 시찰하고, 다음에 농장을 보고 돌아와 소장 관사에서 점심 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빅 바사는 마음이 초조해져 있었다. 소장에게 면회 신청을 했더니 비서 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소장님은 오늘 아침 대단히 바쁘셔요. 내일이라면 어떻게든 해보겠지 만..." "내일이라구? 엿이나 먹어라. 난 지금 당장 만나고 싶어. 매우 중요한 용건이라구." [46] 제목 : 제11장 큰 소리로 외치며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 4 빅 바사는 분노를 터뜨렸다. 교도소에는 무시할 수 없는 죄수가 항상 몇 명쯤은 있다. 빅 바사가 그 중의 한 명이었다. 교도소 직원들은 이 스웨덴 여자의 영향력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빅 바사는 폭동을 선동한 적도 있고 동시에 진압한 적도 있 다. 전세계 어느 교도소든지 복역수 리더의 협력 없이는 정상적인 운영을 할 수 없다. 빅 바사는 그런 리더의 한 사람인 것이다. 빅 바사는 소장실 옆 방에서 의자에 앉아 거대한 몸집을 쑥 내밀고 1 시간이 넘게 기다리고 있었다. (완전히 추악한 동물이군. 보는 것 만으로도 소름이 끼쳐.) 소장의 비서는 생각했다. "앞으로 얼마 정도 걸리지?" 빅 바사가 재촉했다. "오래 걸리시지는 않을 거에요. 이곳을 시찰중인 일행과 동행하고 있으 니까요. 오늘 아침은 유난히 바쁘셔요." "내 용건은 더욱 급한 일이야."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며 빅 바사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12시 43분이었 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군.) 구름 한점 없이 따뜻하고 쾌청한 날씨에 속삭이는 듯한 미풍이 향기로 운 냄새를 나르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인공 호수 옆의 잔디 위에 식탁보 를 펼쳤다. 에미가 즐거운 표정으로 달걀 샐러드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트레이시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1시를 가리키고 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오전의 시간은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지나갔는데 오 후에는 질풍처럼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 트레이시는 뭔가 방법을 빨리 생 각해 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 세계로의 최후의 기회를 시간에 빼앗겨 버리는 것이다. 1시 10분. 소장실의 대기실에서 소장 비서는 수화기를 놓자마자 빅 바 사에게 말했다. "미안합니다만 소장님은 오늘은 아무래도 시간을 내기가 무리라고 하시 는군요. 다른 날로 약속을..." 빅 바사는 거칠게 일어섰다. "나를 만나지 않으면 위험해, 그 이유는..." "내일 면회 준비를 하겠어요." 빅 바사는 기세좋게 말하기 시작했다. "내일이면 이미 늦는다구!" 그러나 빅 바사는 말을 멈추었다. 소장 본인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는 정보이다. 밀고자는 반드시 사고를 당할 운명에 놓인다. 그건 복역수의 리더라고 해도 피할 수 없는 불문율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빅 바사는 포 기할 수가 없었다. 트레이시 휘트니가 자기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빤히 알 면서 부러운 듯 방관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빅 바사는 옥사 내의 도서실 에 들어가 방안의 긴 테이블 한쪽에 앉아 종이에 갈겨썼다. 여교도관이 다른 여죄수의 용건을 처리하려고 통로 저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곁눈으 로 보고 빅 바사는 그 메모를 테이블에 놓아둔 채 도서실을 나왔다. 다시 되돌아 온 여교도관은 메모를 발견하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녀 는 내용을 두 번 읽었다. '오늘 세탁실 트럭을 엄중히 점검해 보시오.' 서명은 없었다. 이게 무슨 못된 장난이람? 여교도관으로서는 조사할 방 법이 없었다. 그녀는 전화기를 들었다. "교도관장님깨 연락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 1시 15분. "왜 먹지 않아요, 트레이시 아줌마?" 에미가 말했다. "내 샌드위치를 먹고 싶어서 그래요?" "아냐! 내버려 둬." 트레이시의 어조는 생각 외로 쌀쌀해져 있었다. 에미는 먹는 것을 중지했다. "화났어요, 트레이시 아줌마? 화내지 말아요. 난 아줌마가 너무 좋아요. 내가 화나게 한 건 아니죠?" 에미의 둥글고 귀여운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화내지 않았어." 이 애는 악마다. "아줌마가 먹지 않으면 나도 먹지 않을래요, 우리 공놀이해요, 트레이시 아줌마." 그렇게 말하자마자 에미는 자기 주머니에서 고무공을 꺼냈다. 1시 16분. 가야 할 시간이다. 세탁실까지 적어도 15분은 걸린다. 서두르 면 아직 가능성이 있다. 저 멀리서 추수 중인 모범수들의 모습이 눈에 들 어왔다. 순간, 트레이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머리 속이 반짝 트였다. "공놀이하고 싶지 않아요, 아줌마?" 트레이시는 일어섰다. "좋아. 새로운 공놀이를 하자. 누가 더 멀리 공 을 던질 수 있는지 시합 하는 거야. 먼저 내가 던질깨. 그 다음은 네가 던져." 트레이시는 딱딱한 고무공을 쥐자 작업중인 사람들 쪽으로 힘껏 던졌 다. "와아, 대단해요. 저렇게 멀리까지 날아갔어요." 에미가 좋아 날뛰면서 말했다. "내가 공을 갖고 오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트레이시는 말했다. 그렇게 말하자마자 트레이시는 달리기 시작했다. 하늘에 운을 맡기고 최후의 기회를 타고 날아가듯 들판을 달렸다. 1시 18분이 되어 있었다. 등 뒤에서 에미의 부르는 소리가 돌렸지만, 더 이상 상대해 줄 시간 따 위는 없었다. 추수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이제 다른 방향으로 이동중이 다. 트레이시가 큰 소리로 외치자 모범수들은 멈춰 섰다. 그 사람들에게 다다랐을 때 트레이시는 숨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어떻게 된 거야?" 작업중이던 사람 중 한 명이 물었다. "저어... 아무 것도 아니에요." 트레이시는 헐떡이는 숨을 조절했다. "저기 어린애가 보이죠? 저 여자애를 어느 분이 좀 돌봐 주세요. 저는 매우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요." 멀리서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나서 트레이시가 뒤를 돌아다보니 에미가 인공 호수를 둘러싼 콘크리트 담 위에 서 있었다. 아이는 손을 흔 들었다. "나좀 봐요, 트레이시 아줌마." "안돼 ! 내려와!" 트레이시는 큰 소리로 외치며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에미를 지켜보았 다. 소녀는 담 위에서 두세 발짝 걷다가는 갑자기 발을 헛딛어 인공 호수 에 빠지고 말았다. "어머나!" 트레이시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어떻게하면 좋지? 하지만 선택 의 여지는 없다. (저 애를 구하러 갈 수는 없어. 지금은 할 수 없어. 누군가가 구해주겠 지 뭐. 나는 나 자신을 구해야만 해. 이 지옥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나는 죽고 말 거라구!) 1시 20분. 트레이시는 휙 돌아서서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작업 중인 사람들 이 등 뒤에서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트레이시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 았다. 공중을 날아갈 듯이 달려 신발이 벗겨지고 울퉁불퉁한 지면에 발이 찢겨지는 것에도 전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심장의 고동이 무섭게 뛰고 폐는 부풀어 터질 것 같았지만 그래도 트 레이시는 열심히 달렸다. 인공 호수를 둘러싼 담에 도착하자 트레이시는 그 위로 뛰어 올랐다. 저만치 아래 쪽에서 에미가 수면에 얼굴을 내밀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고 있었다. 일초도 헛되이 보낼 수는 없다. 트레이시는 소녀를 향해 뛰 어 들었다. 그리고 몸이 물에 잠기기 시작했을 때 트레이시는 퍼뜩 정신 이 들었다. (어머나! 어떻게 하지? 난 수영을 못 하는데!) [47] 제목 : 제12장 뉴올리언즈 8월25일,금요일 오전10시 -1 ?2부 제 2 부 제 12 장 뉴올리언즈 8월 25일, 금요일 오전 10시 뉴올리언즈 제일상업은행의 출납계원인 레스터 토렌스는 평소에 자부 하고 있는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여자를 유혹하는 실력과 고객의 질을 평 가하는 능력이었다. 레스터는 1마일쯤 떨어진 곳에서도 창녀를 식별해 낼 수 있었는데, 창 녀를 구워삶아 공짜로 놀아나는 것을 각별한 기쁨으로 여겼다. 고독한 미 망인들은 특히 다루기가 쉬운 먹이였다. 미망인들은 나이와 외모와 재산정도가 천차만별이었으며, 고독한 정도도 각기 큰 차이가 있었다. 그녀들은 일단 레스터가 던진 미끼에 걸려들면 곧 그의 창구에 모습을 나타냈다. 만약 예금잔액 이상의 수표를 끊었을 경우, 레스터는 그러한 미망인에게 친절을 베풀어 부도가 나지 않도록 결제일을 연기시켜 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신세를 진 미망인들은 레스터에게 조용한 곳 에서 저녁식사를 대접하겠다고 초대해 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레스터의 여성 고객들의 대부분은 그에게 도와줄 것을 호소했고, 비밀 이야기까지도 서슴없이 털어놓았다. 여성고객들이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 는 이유는 가지각색이었다. 남편 몰래 돈을 빌어 쓰는 여성이 있는가 하 면, 부도를 막기 위해 뛰어다니는 여성, 이혼에 관해 고민하고 있는 여성, 그러한 여성들의 고민을 풀어주는 것은 그로서는 쉬운 일이었다. 레스터 는 굶주린 여성 고객들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 너무나도 재미있었다. 자신 역시 그들을 통해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문제의 금요일 아침, 레스터는 터무니없이 입을 크게 벌렸다. 그 여자 가 은행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는 재빠르게 목표물을 노렸다. 기가막 히게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윤기있는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스 웨터에 타이트 스커트를 입은 그 모습은 라스베가스의 무용수도 부러워 할 정도로 훌륭한 몸매였다. 은행에는 4개의 창구가 있는데, 이 미녀는 그 창구들 하나씩에 시선을 보내며 어떤 창구로 갈까 망설이고 있었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레스 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혹하는 듯한 미소를 보냈다. 그녀는 암시라도 받 은 듯이, 레스터의 창구 앞으로 걸어왔다. 레스터는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캐시미어 스웨터를 비집고 튀어나온 젖가슴을 힐끔거리면서 레스터는 생각했다. (귀여운 아가씨, 내가 해주고 싶은 것은 말이야.) "저어, 저에게 곤란한 일이 생겼는데요." 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레스터가 지금까지 들은 것 중에서 가장 듣기 좋은 남부 악센트였다. "그때문에 저는 여기 있는 것이랍니다. 곤란한 일을 도와드리기 위해 말입니다." 레스터는 성실하게 보이도록 노력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네에, 제발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저어... 저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지 뭐예요." 레스터는 참으로 보호자다운, 무엇이든 의뢰해도 좋다는 미소를 띠었 다. "당신처럼 아름다운 분이 실수를 저지르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군 요." "그런데, 실제로 저지르고 말았어요." 미녀의 아름다운 갈색 눈은 당황하여 크게 벌어졌다. "저는 조셉 로마노의 비서예요. 실은 일주일 전에 새로운 당좌예금 수 표첩을 만들어 놓으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지 뭐예요. 그 런데 오늘 마침내 수표가 떨어졌어요. 이 일이 그분께 알려지면 저는 어 떻게 될지 몰라요... "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으나 부드럽게 술술 나왔다. 레스터는 조셉 로마노의 이름을 그냥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로마 노는 은행의 고액 거래선이었다. 그의 공식적인 공공연한 예금액은 많지 않았으나 다른 사람의 명의로 된 뒷돈은 신음이 나올 정도로 엄청난 액 수였다. (로마노라는 놈, 비서 취미는 꽤 괜찮구만.) 레스터는 생각하면서 다시금 상냥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래요? 그러나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미세스...?" "아뇨, 미스입니다. 하트포드라고 합니다. 루린 하트포드요." (호오 독신이라!) 운이 꽤 좋은 날이다. 레스터는 일이 잘 풀려 나가리라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당신을 위해 지금 곧 새로운 수표첩을 주문해 드리겠습니다. 2, 3주내 에는 받아 보실 수가..." 미녀는 희미하게 한숨을 쉬었다. 레스터에게 있어서는 무한한 희망을 안겨 주는 기분 좋은 음악소리였다. "안 돼요. 그때가 되면 너무 늦어요. 로마노 씨는 다른 일로도 제게 매 우 화가 나 있어요.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지 가 않아요. 이해할 수 있으시겠어요?" 미녀는 상체를 앞으로 굽혀 풍만한 유방을 창구에 닿게 누르면서 간절 한 목소리로 말했다. "새로운 수표첩을 급히 서둘러 준비해 주신다면 특별 지불이라도 기꺼 이 하겠습니다만." 레스터는 애석하다는 듯이 말했다. "흐음... 미안합니다만 루린, 그건 불가능에 가까운... " 레스터의 앞에 서 있는 미녀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모 습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 일로 인해서 전 해고당할 지도 몰라요. 부탁 드립니다... 저어, 무슨 일이라도 하겠어요." 그 말은 레스터의 귓가에 음악처럼 울렸다. "그러면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세요. 급히 서둘러 작성하도록 전화로 신청해 두겠습니다. 그러면 월요일에는 입수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레스터는 또박또박 말했다. "어머나, 됐어요!" 미녀의 목소리는 감사에 넘쳐 있었다. "작성되면 신속하게 사무실로 우송해 드리도록 하지요." "제가 직접 받으러 오겠어요. 로마노 씨에게 저의 과실을 드러내 보이 고 싶지 않거든요." 레스터는 관대하게 미소지었다. "과실같은 것이 아니지요, 루린. 인간은 누구든 깜빡 잊어버리는 수가 있는 거니까요." 미녀는 사랑스럽게 미소지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월요일에 다시 찾아 뵙겠어요. 그때 계실거지요?" "전 언제나 이 창구에 있습니다." 레스터는 죽지 않는 한 월요일에는 출근하지 않으면 안된다. 미녀는 레스터에게 눈부신 미소를 던지며 은행에서 천천히 나갔다. 그 뒷모습도 충분히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레스터는 콧노래를 흥 얼거리며 수납 캐비넷에 가서 조셉 로마노의 구좌 번호를 찾아보고서 전 화로 새로운 수표첩을 긴급으로 신청했다. [48] 제목 : 제12장 이 끔찍한 경험의 충격에서 빠져 나오지 - 2 칼멘 거리에 면한 그 호텔은 뉴올리언즈에 있는 다른 수 백개의 호텔 들과 거의 다를 것이 없었다. 흔해빠진 평범한 호텔이기 때문에 트레이시 는 그곳을 선택한 것이다. 트레이시가 일주일 동안 체재하고 있는 방은 싸구려 가구로 장식된 작은 방이었지만 그래도 감방에 비하면 궁전 같았 다. 은행에서 호텔로 돌아온 트레이시는 검은 머리칼의 가발을 벗고 손가 락으로 자신의 풍부한 머리를 풀어헤친 다음, 콘택트렌즈를 빼고 마지막 으로 두꺼운 화장을 지웠다. 트레이시는 등걸이 의자에 앉아 크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는 순조 로웠다. 로마노의 거래 은행을 찾는 것은 간단했다. 어머니의 유품 속에 서 조 로마노가 발행한 수표를 찾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조 로마노라고? 놈에겐 손 댈 수 없어." 어네스틴은 그렇게 말했었다. 어네스틴이 틀린 거야. 조 로마노가 제일 먼저야. 그리고 그 다음으로 한 사람씩 차례로 해치워 나가는 거야. 트레이시는 조용히 눈을 감고서 자신이 여기까지 이르게 된 기적과도 같은 상황을 회상했다... 차갑고 캄캄한 물이 머리 위를 덮었다. 트레이시는 물에 빠져 공포에 떨었다. 물 속에서 손이 에미에게 닿았으므로 그녀를 붙잡고 수면으로 끌 어 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에미가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발버 둥치는 바람에 오히려 두 사람은 물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트레이시의 폐는 파열되어 버릴것만 같았다. 소녀가 필사적으로 달라붙는 바람에 좀 처럼 수면으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체력이 한계에 달한 것을 깨달았다. (살아나갈 수가 없어. 이렇게 죽는구나.) 그런 생각이 언뜻 스쳐지나갔다. 그때 어디선가 희미한 소리가 들리고 에미의 몸이 트레이시에게서 떨 어졌기 때문에 그녀는 힘껏 외쳤다. "안돼 ! 안된다구!" 힘센 팔이 트레이시의 허리를 감았고 남자의 목소리가 "이젠 괜찮아요. 마음을 편히 가져요, 살려줄 테니까." 트레이시가 반광란 상태가 되어 둘러보니 에미는 남자의 팔에 안겨 있 었다. 곧 두 사람은 물에서 끌어 올려졌다. 그리고... 그 정도의 사건은 조 간에 조그맣게 실리고 그냥 묻혀버릴 사건일텐데 헤엄도 칠 줄 모르는 여죄수가 자기 목숨도 돌보지 않고 물에 빠진 아이를 구했고, 그 아이의 부친이 교도소장이라는 사실로 인해서 하룻 밤 사이에 신문, 텔레비전의 해설자들이 트레이시를 히로인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하버 주지사가 친히 브래니건 소장을 대동하고 교도소 병원을 방문하여 트레이시를 문 병했다. "당신은 정말 용기있는 행동을 보여 주었소. 처와 내가 얼마나 당신에 게 감사하고 있는지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소장은 말했다. 그 목소리는 감동으로 목이 메일 것 같았다. 트레이시는 이 끔찍한 경험의 충격에서 빠져 나오지 못해 아직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에미는 어때요?" "그 애는 곧 회복될 거요." 트레이시는 눈을 감았다. (에미의 신상에 만약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난 견딜 수 없을 거야.) 아이는 사랑을 원한 것뿐인데 자신은 그 아이에게 전혀 상냥하게 대해 주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트레이시는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모처럼 의 탈주 기회가 이 사건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어 버렸지만 그녀는 같은 일이 또 다시 일어난다 해도 마찬가지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건에 관한 간단한 상황 조사가 있었다. "제가 나빴어요, 아빠. 공놀이를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트레이시 아 줌마가 공을 주우러 뛰어 갔어요.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는데 제가 멋대로 벽에 올라가 트레이시 아줌마를 보려고 하다가 연못에 빠져 버린거에요. 그런데 트레이시 아줌마가 살려주었어요, 아빠." 에미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날 밤은 건강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병원에서 묵었고 다음 날 아침 트레이시는 소장실로 호출되어 갔다. 보도진들이 트레이시를 기다리고 있 었다. 보도관계자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미담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UPI와 AP 등의 통신사는 특파원을 파견했고 지방 텔레비전 방송 국은 취재팀을 보냈다. 그날 저녁에는 트레이시의 영웅적 행위가 세세하게 보도되어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타임'과 '뉴스위크' '피플'지 같은 일류 주간 지들은 물론 미국 전역의 일간지들이 그 사건을 크게 보도했다. 매스컴에 서 계속 이 사건이 보도되자 트레이시 휘트니를 특별 사면하라는 내용의 편지와 전보가 거대한 파도처럼 교도소로 밀어닥쳤다. 하버 주지사는 그 문제에 대하여 브래니건 교도소장에게 의논을 했다. "트레이시 휘트니는 장기수로 복역중입니다." 브래니건 소장은 설명했다. 주지사는 신중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전과가 없지 않소 소장." "그렇습니다. 주지사님." "여기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녀를 풀어주라는 압력이 이만저만이어 야지." "아,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지사님." "물론 우리들은 일반 대중에게 떠밀려 교도소를 운영해서는 안되지." "물론 그건 그렇습니다." "하지만 말이오, 휘트니는 실로 훌륭하게 용기를 발휘하여 정말로 영웅 이 되었소." 주지사는 공평함을 강조하는 어조로 말했다. "동감입니다." 브래니건 소장은 동의했다. 주지사는 잎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피운 후에 말했다. "당신 의견은 어떻소, 소장?" 조지 브래니건은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지사님도 아시다시피 이번 사건은 저와는 매우 개인적인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도움을 받은 것은 바로 제 딸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제쳐 두더라도 트레이시 휘트니는 범죄자 타입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녀가 사회에 나가도 사회에 해를 끼치리라고는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할 수 없 습니다. 저의 진정한 요망은 그녀에게 특별 사면을 허락해 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주지사에게는 멋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는 차기에도 주지사에 입후보할 심산이었다. (이 사건을 선거 전략에 이용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걸.) 정치는 전적으로 타이밍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49] 제목 : 제12장 "넌 운이 좋은 계집이야. 그러나 너도 곧 - 3 트레이시 문제를 남편과 상의한 뒤에 브래니건 부인은 트레이시에게 말했다. "트레이시, 남편과 의논해 보았는데요. 이곳 관사에서 우리와 함께 살면 어때요? 예비 침실도 있고 언제라도 에미의 뒷바라지를 부탁할 수도 있 으니까요." "감사합니다. 그런 말씀을 듣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군요." 트레이시는 진심으로 감사를 담아 승낙했다. 소장 부인의 제안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트레이시는 매일 밤 감방에 틀어 박혀야 하는 굴욕에서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에미와의 관계도 완 전히 달라졌다. 에미는 더욱 더 트레이시를 따랐고 트레이시도 전과는 달 리 정성껏 애정으로 에미를 돌봐 주었다. 실은 트레이시 자신도 이 활발 하고 사랑스러운 소녀와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웠다. 게임을 하거나 텔레비 전으로 디즈니 영화를 보거나 함께 책을 읽거나 하는, 정말 한가족과 같 은 생활이었다. 그러나 트레이시가 일이 있어 옥사로 가면 아무래도 빅 바사와 맞닥뜨 리게 된다. "넌 운이 좋은 계집애야. 그러나 너도 곧 보통 죄수 취급을 당하여 이 곳으로 돌아오게 될 거야. 그렇게 만들고 말테니 두고 봐." 빅 바사가 이를 갈았다. 에미를 구조해낸 사건이 있은 지 3주일 후 트레이시와 에미가 정원에 서 술래잡기를 하고 있는데 브래니건 부인이 집에서 급히 뛰어 나오더니 트레이시에게 말했다. "트레이시, 남편에게서 방금 전화가 왔는데요. 소장실에서 당장 만나고 싶다는군요." 트레이시는 갑작스런 공포에 떨었다. (나를 감방으로 다시 돌려보내려는 것은 아닐까?) 빅 바사가 영향력을 행사한 걸까? 아니면 브래니건 부인이 나와 에미 가 너무 친밀한 것을 질투라도 낸 것일까? "알겠습니다. 부인." 트레이시가 소장실로 들어가자 브래니건 소장은 입구에 서서 맞아 주 었다. "자, 그곳에 앉아요." 트레이시는 소장의 말투에서 자기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읽어내려 했 다. "당신에게 들려줄 긴급 뉴스가 있소." 소장은 흥분된 모습으로 한 호흡 쉰 다음에 계속했다. "나도 지금 막 받은 참이오. 루이지애나 주지사로부터의 명령서를 말이 오. 당신에게 특별 사면이 내려왔소. 그것도 즉시 집행되는 것이오." (이건 꿈이 아닐까, 내가 소장의 말을 제대로 들은 걸까?) "당신에게 분명히 해둘 점이 한 가지 있소. 당신이 구출한 것이 마침내 딸이었다는 이유에서가 아니오. 모범 시민이 취할 행동을 본능적으로 해 낸 것에 대한 조치인 것이오. 모든 상황을 상정해 보아도 당신이 출옥하 더라도 사회에 나가서 해를 끼치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소." 소장은 마지막으로 미소띤 얼굴로 덧붙였다. "당신이 떠나면 에미가 쓸쓸해할 것이오. 우리들도 그렇지만." 트레이시는 입이 얼어붙은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만약 소장이 진상을 알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트레이시는 도망 자가 되고 소장은 무장한 부하들을 시켜 나를 추적했을 것이다. "당신은 내일 아침 출감이오." (나에게도 햇빛이 드는 날이 찾아온 거야!) 트레이시는 자신이 자유의 몸이 된다는 것을 실감할 수가 없었다. "저어, 저... 뭐라고 말씀드려야 좋을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돼요. 이곳의 모두가 당신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어요. 출감하게 되면 훌륭한 행동을 하는 시민이 되리라고 처와 같이 기대하고 있겠소." 역시 석방은 사실인 것이다. 나는 자유로운 몸이 되는 것이다. 트레이 시는 맥이 탁 풀려 의자의 등받이에 겨우 몸을 기대고는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확고했다. "전하고 싶은 일이 참 많습니다. 소장님." 트레이시의 감옥에서의 마지막 날, 동료 한 사람이 그녀를 만나러 왔 다. "출소한다면서?" "덕분에." 그녀의 이름은 베티 프란시스라고 했다. 갓 40대가 된 아직 아름답고, 자존심이 강해 보이는 여자였다. "밖에 나가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뉴욕에 가서 이 남자를 만나 봐. 콘래드 모건이라고 하는 사람이야." 그렇게 말하며 베티는 트레이시에게 이름이 적힌 메모지를 살그머니 건네주었다. "전과자들의 갱생 사업을 하고 있는 남자야." "고마워요. 하지만 나에게는 필요 없을 것 같군요." "만일을 위해서야. 이 주소를 갖고 있어." 2시간 후, 텔레비전 카메라의 조명 세례를 받으며 트레이시는 교도소 문을 나섰다.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나, 에미가 브래니건 부인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와 트레이시의 품 안에 뛰어드는 해 프닝이 일어났기 때문에 카메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소리를 내며 돌기 시작했다. 이 순간이 영상이 되어 저녁 뉴스에서 보도되었다. 자유! 그것은 트레이시에게 있어서는 단순히 추상적인 단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이고 손에 닿는 것이며 즐기고 씹을 수 있는 것 이었다. 자유라는 것은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것, 식사때 줄을 서지 않아 도 되는 것, 벨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생활이었다. 그리고 따뜻한 목욕, 맛있는 수프, 감촉이 부드러운 속옷, 아름다운 드레스이고 하이 힐을 신을 수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번호가 아닌 자기 이름을 사용 할 수 있는 것, 자유란 빅 바사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것이고 집단폭행의 공포로부터도, 죽고 싶을 정도로 지루한 감옥의 일과에서도 벗어나는 것 이다. 트레이시가 새로 발견한 자유이지만 그것을 실제로 누리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길을 걸을 때에도 트레이시는 다른 통행인에게 부딪치 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교도소 안에서는 다른 여죄수와 부딪치는 것이 대소동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트레이시가 좀처럼 잘 적응할 수 없었던 것 은 적의 부재라고 하는 이 자유로운 사회의 상황이었다. 협박하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트레이시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자기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트레이시는 네명의 남자들에게 관한 정확한 정보를 될 수 있는 한 풍 부하게 수집했다. 필라델피아에서 찰스 스탠호프 3세는 트레이시의 석방 소식을 전하는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있었다. (여전히 아름답군.) 찰스는 생각했다. 그녀를 보고 있자니 그러한 범죄를 저질렀다고는 도 저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찰스는 방 저편에 앉아 뜨개질에 골몰하고 있는 아내를 보았다. (나의 선택이 잘못 되었을까?) 다니엘 쿠퍼는 뉴욕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트레이시의 석방을 알리 는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있었다. 쿠퍼는 트레이시의 석방에 조금도 관심 이 없었다. 텔레비전의 스위치를 끄고는 거의 완성되고 있는 서류에 다시 금 매달렸다. [50] 제목 : 제12장 아마 틀림없이 지금쯤은 더 요염하게 변했 -4 로마노는 크게 웃으면서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있었다. (휘트니라는 계집년은 운이 좋았군. 저 계집애에겐 감옥 생활이 좋은 경험이 되었겠지. 아마 틀림없이 지금쯤은 더 요염하게 변했을걸. 아무 튼 언젠가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 로마노는 너무나도 만족스러운 상태였다. 르느와르의 그림은 이미 쥐 리히의 개인 수집가에게 넘어갔다. 보험회사가 50만 달러를 지불하고, 게다가 그림 중개상으로부터 20만 달러가 들어 왔다. 당연한 일이지만 로마노는 앤소니 올사티에게 배당금을 상납했다. 올사티와의 관계에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올사티와의 거래에서 속여먹은 자들의 신상에 일어난 일을 로마노는 잘 보아왔기 때문이다. 월요일 정오, 루린 하트포드로 변장한 트레이시는 뉴올리언즈 제일상 업은행에 다시 나타났다. 은행은 그 시간이 가장 고객이 많이 몰려 혼잡 하다. 레스터 토렌스의 창구 앞에는 5, 6명이 열을 지어 있었다. 트레이 시가 줄을 서자 레스터가 그녀를 발견하곤 반가운 듯이 인사를 했다. 이 날의 트레이시는 지난 금요일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다. 트레이시의 순서가 되자 레스터는 들뜬 어조로 말했다. "자아, 쉽지는 않았지만 당신을 위해서 이렇게 준비해 놓았습니다. 루 린." 루린의 얼굴이 빛나며 행복에 찬 표정이 되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최고로 멋진 분이에요!" "그렇습니까? 아, 이것이 부탁하신 수표입니다." 레스터는 서랍을 열어 안에서 신중하게 수표가 든 상자를 꺼내어 트레 이시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입니다. 4백장 정도됩니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어머나, 충분해요. 로마노 씨가 엉망으로 쓰지만 않는다면요." 트레이시는 레스터를 가만히 쳐다보면서 한숨을 지었다. "당신은 생명의 은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예요." 그 말을 듣고 레스터의 다리 사이에서 그의 남성이 불끈 고개를 쳐들 었다. "루린, 인간이란 서로에게 베풀며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어요?" "정말 그래요, 레스터." "어때요, 당신 자신의 구좌를 만드는 것은. 제가 잘 관리해 드리겠습 니다. 진심이에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어요." 트레이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때요. 어딘가 조용한 장소에서 식사라도 하면서 이야기하지 않겠어 요?" "좋아요." "어디로 연락하면 될까요, 루린?" "아녜요. 제가 연락을 드릴께요, 레스터." 트레이시는 창구에서 물러났다. "저어, 잠깐만!" 다음 손님이 창구에 나타나 당황한 레스터 앞에 동전 꾸러미를 왕창 내려 놓았다. 은행 대합실 중앙에는 테이블이 4개 있고 입금전표와 출금전표가 테이 블의 용기 안에 들어 있다. 매일 이 시간이면 많은 사람들이 테이블에 몰려들어 열심히 전표에 써넣는다. 트레이시는 레스터의 눈길에서 벗어 나자 앞의 손님이 써넣고 비워진 테이블에 끼어 들었다. 레스터가 트레 이시에게 건네준 상자에는 8권의 수표첩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트레이 시에게는 수표 그 자체는 아무래도 좋았다. 수표첩 뒤에 붙어 있는 입금 전표가 목적이었다. 트레이시는 수표첩에서 주의 깊게 입금전표를 떼내어 몇분 후에는 80 장의 입금전표를 손에 쥐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신 경을 쓰면서 20장의 입금전표를 테이블 위의 용기 안에 집어넣었다. 같 은 방법으로 다음 테이블에도 20장의 입금전표를 놓았다. 몇 분도 채 되 지 않아 나머지 입금전표를 전부 각 용기에 집어 넣었다. 입금전표는 백 지였으나 종이 끝에 코드 번호가 자기화(磁氣化)되어 있어 컴퓨터가 자 동적으로 그 번호를 읽어내고 고객의 이름을 추정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이때 불특정 다수의 손님이 조셉 로마노의 코드번허가 기록된 전표로 예금하게 되므로 돈은 모두 컴퓨터에 의해서 조셉 로마노의 구좌 에 넣어지게 된다. 은행에서 일한 경험에서 트레이시는 자신이 뿌린 80 장의 입금전표가 이틀 이내에 전부 사용되고 이 이상 사태가 발각되기까 지는 적어도 5일은 걸릴 것이라고 계산했다. 그 정도의 시간이면 계획을 실행하는 데는 충분하다. 호텔로 돌아가는 도중에 트레이시는 백지 수표첩을 휴지통에 던져 넣 었다. 이제 조셉 로마노는 수표첩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것이다. 트레이시는 다음으로 뉴올리언즈 홀리데이 여행사로 찾아갔다. 카운터 안에 있던 젊은 여자가 응대하러 나왔다. "어서오세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저는 조셉 로마노의 비서입니다. 로마노 씨 명의로 리오데자네이로행 항공편을 예약하고 싶은데, 금요일에 출발하는 것으로요." "한 사람입니까?" "네, 통로 측 일등석으로 흡연석으로 해 주십시오." "돌아오는 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편도로 해 주세요." 그 여직원은 자기 책상의 컴퓨터를 항해 돌아 앉았다. 몇초도 되지 않 아 그녀는 말했다. "예약되었습니다. 팬 아메리카 항공의 일등석 한 사람. 금요일 오후 6 시 35분에 출발하는 728면입니다. 마이애미를 경유하게 됩니다." "로마노 씨도 만족해하실 것 같군요." 트레이시는 대리점 직원에게 감사를 표했다. "요금은 192달러가 되겠습니다. 현금 지불입니까, 아니면 크레디트 카 드입니까?" "로마노 씨는 언제나 현금 결제예요. 목요일에 티켓을 로마노 씨의 사 무실로 보내 주시면 그 자리에서 지불해 드릴겁니다." "바쁘시다면 내일이라도 보내드릴 수 있는데요." "아니요. 로마노 씨는 내일은 계시지 않습니다. 목요일 오전 11시에 될까요?" "알겠습니다. 그러지요. 주소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조셉 로마노. 포이드라스 거리 217번지. 408호실입니다." 여직원은 그것을 메모했다. "알겠습니다. 목요일 오전 중에 도착할 수 있도록 책임지고 배달해 드 리겠습니다." "11시 정각에요. 부탁드립니다." 트레이시는 한번 더 강조했다. [51] 제목 : 제12장 어떻게해서든 그녀를 유혹하려고 필사적 - 5 그 거리를 반 구획 정도 걸어간 곳에 아크메 가방 가게가 있었다. 진 열장에 진열되어 있는 가방을 바라보면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점원이 곧 다가왔다. "어서오세요. 어떤 가방을 찾으시는지요?" "남편의 여행 가방을 사고 싶어요." "마침 잘 오셨습니다. 할인판매 중인 상품이 있어요. 품질이 좋으면서 도 가격이 싼 제품들이 다량..." "아뇨. 싸구려는 안돼요." 트레이시는 딱 잘라 말했다. 벽에 진열되어 있는 비톤 여행가방 앞에서 트레이시는 멈춰 섰다. "이게 좋을 것 같군요. 부부가 함께 여행가는 거예요." "아, 그러세요7 이 가방이라면 남편께서도 마음에 들어하실 것입니다. 싸이즈가 세 종류 있습니다. 어떤 것으로 드릴까요?" "하나씩 3개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카드로 하실 건가요 아니면 현금으로?" "배달해 주시면 그 자리에서 지불하겠어요. 이름은 조셉 로마노입니 다. 목요일 오전 중에 남편의 사무실로 배달해 주실 수 있겠어요?" "물론이죠, 부인." "정확히 오전 11시예요." "제가 책임지고 배달시키겠습니다" 갑자기 생각난 듯이 트레이시는 덧붙였다. "저어... 그리고 말예요. 금장으로 이니셜을 넣어 주시겠어요? J.R.이 라고 넣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런 일쯤이야 얼마든지 해 드리죠, 미세스 로마노." 트레이시는 밝게 웃어 보이며 점원에게 로마노의 사무실 주소를 말해 주었다. 가방 가게를 뒤로 하자 곧 가까이에 있는 웨스턴 유니온 우체국에 가 서 리오드자네이로 코파카바나 해안에 면한 리오 오슨 팔레스 호텔 앞으 로 전보를 쳤다. "금주 금요일부터 2개월간 특실을 예약함. 수신인 지불 전보로 답신을 원함. U.S.A.루이지애나, 뉴올리언즈, 포이드라스 거리 217번지 408허실 조셉 로마노." 3일 후, 트레이시는 은행에 전화를 걸어 레스터 토렌스를 부탁했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트레이시는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실 거에요, 레스터, 저는 루린 하트포드라고 하 는데요. 로마노 씨의 비서인... "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레스터는 헛기침을 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기억하지 못하다니요 루린, 나는 매일... " "정말이세요? 어머나 기뻐요. 당신은 매일 많은 고객들을 상대하시는 분이라서 기억하지 못하실 줄 알았어요." "당신은 특별한 분이니까요." 레스터는 어떻게해서든 그녀를 유혹하려고 필사적이었다. "함께 식사하기로 한 약속 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니신가요?" "잊어버리다니요. 고대하고 있답니다. 다음 주 화요일에는 시간이 어 떠세요, 레스터?" "좋아요!" "기대하고 있겠어요. 아참! 전 정말 멍청한 여자예요. 당신과 이야기 하고 있으면 용건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니까요. 로마노 씨가 예금잔 고를 조사해 달라고 하시던데 잠깐 조회해 주실 수 있겠어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곧 조사해 드리겠습니다." 평소같으면 레스터는 구좌 명의인의 생년월일을 물어보거나 조회인에 게 신분증명 서류를 제시해 받으나 지금의 경우에는 그런 것이 필요없 다. 그녀와의 데이트를 위해서라면 못할 짓이 없는 것이다. "그대로 기다려 줘요, 루린," 레스터는 한껏 부드러움을 담아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그는 컴퓨터로 조셉 로마노의 예금잔고를 확인했다. 레스터는 명세표 를 보고 깜짝 놀랐다. 최근 며칠 사이에 로마노의 구좌에는 막대한 금액 이 입금되어 있었던 것이다. 로마노는 지금껏 자기 명의의 구좌에는 그 렇게 거액의 예금은 갖고 있지 않았었다. 레스터는 대체 어떻게 된 것일 까 하고 의문을 갖게 되었다. 이건 커다란 거래가 얽혀 있군. 루린과의 식사 때 슬쩍 물어 봐야지. 사소한 비밀 정도라면 그녀도 숨기려 들지 않겠지. 레스터는 전화로 돌아왔다. "당신은 보스에게 여러가지 일로 시달리는 것 같군요. 로마노 씨의 구 좌에는 30만 달러가 조금 넘는 금액이 입금되어 있습니다." 그는 트레이시에게 말했다. "네, 맞아요. 제게 말씀하신 액수와 일치하는군요." "차라리 정기예금이나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 상태 로 두면 이자도 붙지 않으니까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대로 두고 싶어하세요." 트레이시는 부드럽게 거절했다. "알겠습니다." "신세를 많이 졌어요, 레스터. 정말 고마워요." "잠깐만요! 화요일 데이트 건인데, 장소 문제 같은 것은 제가 사무실 로 연락을 드릴까요?" "아뇨, 제가 다시 전화 드릴께요." 트레이시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앤소니 올사티 소유의 근대적인 고층 사무실 빌딩은 포이드라스 거리 에 우뚝 솟아 한 면은 강에 또 한 면은 거대한 루이지애나 수퍼 돔에 면 해 있어 4층 전체를 올사티의 회사인 퍼시픽 무역상사가 사용하고 있었 다. 이 4층 제일 안쪽에는 올사티 개인 사무실이, 그 옆쪽으로 로마노의 사무실이 위치해 있다. 두 사람의 사무실을 연결하는 객실에는 보통 4명 의 젊은 접수원 아가씨가 대기하고 있다. 올사티의 친구와 거래 상대를 접대하기 위해 고용되어 있는 것이다. 올사티의 사무실의 정면 입구에는 보스를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거대한 체구의 두사나 이가 지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때에 따라서 보스의 운전사가 되기도 하 고 맛사지사가 되기도 하고 심부름꾼이 되기도 한다. 이 목요일 아침, 올사티는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 비밀 도박장과 외설 인쇄물, 매춘 등 퍼시픽 무역상사가 경영하는, 엄청나게 큰 이득을 보는 돈벌이에서 모여진 경리 서류를 보고 있었다. 올사티는 60대 후반의 추악하게 생긴 남자였다. 상체는 엄청나게 크고 뚱뚱한데 비해 하반신은 기묘하게 빈약해서 서있는 모습이나 앉아 있는 모습이 개구리처럼 보였다. 얼굴은 상처 투성이인데다가 술취한 거미가 비틀거리면서 거미줄을 친 것 같은 상흔이 잔뜩 뒤덮여 있으며 입은 이 상하게 컸고, 눈은 까맣고 동그랗다. [52] 제목 : 제12장 그는 저를 데리고 가준다고 약속해놓고는 -6 머리는 15세 때에 탈모증으로 벗겨진 이후로 검은색 가발을 쓰고 있었 다. 가발장착도구는 매우 나빴으나 마피아의 보스에게 그것을 직접 대놓 고 진언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올사티는 냉철한 도박꾼의 눈을 하고 일체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얼굴 표정도 눈과 마찬가지로 끔찍히 귀여워하는 다섯명의 딸들을 볼 때 외에는 무표정했다. 이 마피아 보스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것은, 그의 목소리 였다. 삐거덕거리는 듯한 탁한 목소리로서 이것은 그가 스물한 살의 생 일에 철사로 목이 졸려 숨이 끊어질 뻔했던 때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올사티가 겨우 숨을 돌이키게 되자 두 사람의 보디가드는 그 다음 주 시 체 안치소에 누워 있는 처지가 되었다. 올사티는 화가 나면 날수록 목이 쉬어 낮고 컬컬한 목소리가 되었기 때문에 부하들은 알아 듣는데 곤혹을 치루어야 했다. 올사티는 뇌물과 총과 협박으로 자기 영지에 군림하는 암흑가의 왕이 다. 그는 뉴올리언즈의 암흑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 결과 엄청한 부를 수중에 장악하고 있었다. 국내의 다른 패밀리 보스들도 그에게는 경의를 표하며 무엇이든 조언을 구하곤 했다. 그날 그 순간 앤소니 올사티는 만족스런 기분에 젖어 있었다. 그는 비 스터 호반에 위치한 아파트에 숨겨 놓은 애인과 아침식사를 같이 하고 사무실로 막 들어온 참이었다. 올사티는 1주일에 세 번쯤 애인의 아파트 에 들르고 있었다. 오늘 아침의 방문은 그야말로 최고였던 것이다. 애인 이 다른 여자라면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을 침대에서 해 주었으므로 올 사티는 자기를 굉장히 사랑하고 있으므로 그런 행위를 해 주었겠지 하고 감격해하고 있었다. 올사티의 조직은 기가 막히게 잘 짜여져 있었다. 문제는 거의 일어나 지 않았다. 문제가 커지기 전에, 아예 작은 싹일 때에 뽑아 버리면 일은 간단하게 해결된다는 철학을 올사티는 적용하고 있었다. 올사티는 자신 의 철학을 조 로마노에게 피력한 적이 있다. "어떤 작은 문제라도 방치해 두면 안돼. 반드시 큰 일이 되고 마니까. 눈사람처럼 점점 불어나서 힘에 부치게 된다구. 조장들 중에서 가장 많 은 배당을 원하는 녀석이 있으면, 제까닥 잘라버려. 알았지 조? 눈사람 처럼 커지기 전에 말이야, 시카고에서 어떤 수완가가 찾아와 뉴올리언즈 에서 조그만 장사를 하고 싶다고 자네에게 허가를 구했다고 해. 그 조그 만 장사가 곧 커져서 네 벌이를 잡아먹고 말 거야. 그러니까 승낙해놓고 그가 다시 나타나면 없애 버리는 거야. 눈사람은 위험해. 알았지?" 로마노는 올사티의 충고를 명심했다. 올사티는 로마노를 아껴 주었다.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올사티 가 로마노를 발견했을 때 로마노는 뒷골목에서 술꾼들에게 공갈을 치며 붙어먹고 사는 깡패였다. 올사티가 인물을 알아보고 그를 조직에 끌어들 이자 로마노는 두드러지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로마노는 민첩하고 머리가 좋은데다가 무엇보다도 정직했다. 로마노는 불과 10년만에 올사티의 오른팔로 급성장했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는 '패 밀리'의 모든 사업에 손을 대고 있고 보스의 명령에만 복종하고 있었다. 올사티의 개인 비서 루시가 노크를 하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대학 출신의 24세로서 지방의 미인 콘테스트에서 여러번 우승한 경력이 있는 미녀였다. 올사티는 젊은 미녀를 주위에 거느리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었다. 올사티가 책상의 시계를 보니 10시 45분이었다. 정오까지는 아무에게 도 방해받고 싶지 않다고 루시에게 말해 두었던 것이다. 올사티는 불쾌 한 듯이 말했다. "뭐야!"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사장님. 지지 듀프레 라고 하는 여성에게서 전 화가 와 있습니다. 매우 화가 나 있는 것 같습니다만 무슨 용건인지 제 겐 말하지 않습니다. 사장님께 개인적으로 얘기하고 싶다고 합니다. 목 소리를 들으니 뭔가 중대한 용건인 것 같습니다만." 올사티는 그대로 앉은 채 두뇌 컴퓨터에서 그 이름을 찾았다. (지지 듀프레 라는 여자라고?) 일전에 라스베가스에서 방으로 부른 여자인가? (아냐, 지지 듀프레 라는 이름이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력이 좋은 것은 올사티가 자랑으로 삼는 것중 하나인데도 말이다. 호기심이 생긴 올사티는 수화기를 받아들 고 루시에게 나가라고 손 을 혼들어 신호했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앤소니 올사티 씨이신가요?" 프랑스 악센트가 섞인 목소리였다. "그렇소만." "아아, 당신에게 연락이 닿아서 다행이에요, 올사티 씨 !" 루시가 말한대로였다. 이 정신나간 여자는 완전히 신경질적으로 떠들 어댔다. 올사티는 흥미를 잃고 수화기를 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전화의 목소리가 부르짖었다. "그 사람을 막아 주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아가씨, 지금 누구 얘기를 하고 있는 거요? 나는 바쁜 몸이오." "그러니까 조, 조 로마노 말이에요. 그는 저를 데리고 가 준다고 약속 을 해놓고는 글쎄... 알고 계시죠?" "뭐라고? 당신은 조에게 불만이 있는 거로군. 그렇다면 조에게 얘기하 시오. 나는 그를 지키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 사람은 제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를 내버려두고 브라질 로 가 버린다는 걸 방금 알게 되었어요. 그 30만 달러의 절반은 제것이 었는데... " 올사티는 갑자기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30만 달러라니, 그게 뭐요?" "은행 구좌에 숨겨놓은 돈 말이에요. 그 돈은... 그러니까 빼돌린 돈 이라고 할까 " 엔소니 올사티의 흥미가 더욱 커졌다. "부탁이에요. 조에게 얘기해 주세요! 브라질에 나도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이에요! 전해 주시는 거죠?" "알았소." 엔소니 올사티는 약속했다. "잘 말해 주겠소." 조셉 로마노의 사무실은 뉴올리언즈에서도 유행의 최첨단을 걷는 실내 장식가가 장식한 것으로써, 백색과 크롬으로 이뤄진 초현대적인 것이었 다. 색채 비슷한 것이라고는 벽에 걸려있는 프랑스 인상파 화가가 그린 값비싼 3점의 그림 뿐이었다. 로마노는 취미가 고상하다는 것이 자랑거리다. 뉴올리언즈의 빈민가에 서 태어나 악전고투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를 몸에 익혔다. 로마노는 그 림을 보는 눈을 키우고, 음악을 감상했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때는 소무리에-포도주 담당의 웨이터-와 길게 얘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포 도주에 관한 지식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조셉 로마노가 자신을 자랑 스럽게 여기는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동료들이 완력을 사용해 서 살아남아 있는 곳에서 로마노는 머리를 사용해서 성공을 거둬왔다. 앤소니 올사티가 뉴올리언즈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조셉 로마노가 그것을 대행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로마노의 비서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미스터 로마노, 리오데자네이로행 비행기표가 배달되어 왔습니다. 대 금을 지불하기 위해 수표를 끊어도 될까요? 대금과 교환으로 인도하도록 되어 있는데요." (리오데자네이로행 비행기라고?) 로마노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 잘못된 것이겠지. 배달원에게 그렇게 말해요." 제복을 입은 배달원이 사무실 입구에 서 있었다. [53] 제목 : 제12장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시는 것을 느낄 수 있 -7 "저는 이 주소의 조셉 로마노 씨에게 이것을 전해드리라는 지시를 받 고 왔습니다." "그렇소? 그렇다면 그 지시를 한 사람이 실수를 한 것이겠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요? 항공회사의 신식 PR 전술인가?" "아닙니다. 다만 저는... " "어디 구경이라도 합시다." 로마노는 배달원에게서 비행기표를 받아들고 자세히 살펴 보았다. "금요일에 출발이군. 내가 무엇때문에 리오데자네이로에 가야하는 거 지?" "꽤나 멋진 질문이군." 앤소니 올사티의 쉰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느 틈엔가 배달원의 뒤에 올사티가 와 있었다. "무엇때문에 가는 거지, 조?" "어떤 얼간이가 실수를 했나봐요, 토니." 로마노는 배달원에게 비행기표를 돌려주었다. "썩 챙겨가지고 돌아가라구, 그리고..." "서두를 필요는 없네." 앤소니 올사티는 비행기표를 배달원에게서 낚아채더니 내용을 살펴보 았다. "일등석에다 통로 쪽의 흡연석이군. 금요일의 리오데자네이로행. 편도 뿐이군." 로마노는 웃었다. "누군가가 착각을 한 거라구요." 로마노는 비서를 돌아보고 말했다.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서 당신들이 잘못 알았다고 야단을 쳐둬요. 덕 택에 비행기표가 없어서 난리를 치는 녀석이 어딘가에 있겠군." 그때 비서 보조인 조린이 방으로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로마노 씨. 여행가방이 배달되어 왔습니다. 사인을 해도 좋겠습니까?" 조셉 로마노는 어안이 벙벙해서 비서 보조를 응시했다. "무슨 가방말이지? 난 가방같은 것은 주문한 적이 없는데." "그것을 이리로 가져와 봐." 엔소니 올사티가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누군가 미쳐도 단단히 미친 모양이군." 조셉 로마노는 말했다. 배달원이 고급 여행 가방을 세개 씩이나 들고 들어왔다. "이건 또 뭐야? 난 주문하지 않았다구." 배달원은 배달 전표를 점검했다. "조셉 로마노 씨 앞. 포이드라스거리 217번지 408호로 되어 있습니다 만." 조셉 로마노는 화를 벌컥냈다. "뭐라고 적혀있건 내가 알게 뭐야! 주문을 한 적이 없다구. 모두들 챙 겨가지고 썩 꺼지지 못하겠어?" 올사티는 가방을 조사해보고 있었다. "허허, 이것은 자네 이름의 머릿글자가 아닌가, 조?" "뭐라구요? 이게 어찌된 일이지?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누군가의 선 물일지도 " "자네 생일이라도 되었나?" "아닙니다만... 여자들이란 무턱대고 선물같은 것을 하기 좋아하잖아 요. 당신도 잘 알지 않습니까, 토니?" "그건 그렇고 브라질에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앤소니 올사티는 물었다. "브라질이라구요?" 조셉 로마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누군가가 장난을 치고 있는 겁니다. 토니." 올사티는 희미하게 미소지으면서 비서와 두 사람의 배달원 쪽으로 얼 굴을 돌렸다. "모두들 이 방에서 나가게." 두 사람만을 남겨두고 문이 닫히자 올사티가 입을 열었다. "자네의 은행 잔고가 얼마나 되지, 조?" 조 로마노는 얼떨떨한 얼굴로 두목을 쳐다보았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천 5백 달러에서 2천 달러 사이겠지요. 왜 그러 십니까?" "아니, 그냥 생각이 나서 물어본 걸세. 하여간 은행에 전화를 걸어서 확인해 보게나." "무엇 때문에요? 나는.." "조회해 보란 말이야, 조." "알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속이 편하다면요." 로마노는 인터폰으로 비서를 불렀다. "제일상업은행의 고객부장에게 전화를 걸어줘요." 1분 후에 여자 행원이 전화에 나왔다. "여보세요? 난 조셉 로마노요. 내 당좌예금의 현재 잔고가 얼마나 되 지요? 내 생일은 9월 14일이요." 앤소니 올사티는 또 하나의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얼마 뒤 고객부장이 전화를 받았다. "기다리셨습니다. 미스터 로마노. 오늘 아침 현재 선생님의 당좌예금 의 잔고는 31만 9백 5달러 35센트입니다." 로마노는 자기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라구요?" "31만 9백 5달러 " "야, 이 미친놈아! 내 구좌에 그런 거금이 들어가 있을 리가 없어 ! 너희들이 잘못 안 거야. 책임자와 얘기를 해야겠어..." 로마노는 큰 소리로 악을 썼다. 앤소니 올사티가 수화기를 내려놓자 로마노는 자신의 손에서도 수화기 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느꼈다. "그 돈들은 어디서 긁어모은 거지, 조?" 조셉 로마노의 얼굴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하, 하느님에게 맹세코... 토니 ! 나는 그 돈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 가 없습니다." "허허,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저, 정말로 믿어주셔야 합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는 겁니다." "자네에게 홀딱 반한 누군가겠지," 올사티는 실크를 씌운 팔걸이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 조셉 로마노 를 오랫동안 뚫어 질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준비가 모두 끝났다는 얘긴가? 리오까지의 편도 비행기표에다 새 여 행가방...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생각이었군 그래?" "아닙니다!" 로마노의 목소리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제발 부탁입니다. 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 까? 나는 지금까지 당신의 명령대로 따라왔고, 당신을 친아버지처럼 존 경해 왔습니다." 로마노는 어느 새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비서가 방으로 들어왔다. 비서는 봉투를 손에 들고 있었다. "방해를 해서 죄송합니다. 미스터 로마노. 국제전보가 와 있는데요. 사인이 필요하답니다." 함정에 빠진 동물적인 본능으로 조셉 로마노는 말했다. "지금은 안돼. 바빠서 손을 놓을 수가 없어." "이리 줘 봐." 앤소니 올사티는 그렇게 말하고 비서가 방을 나가 문을 닫기 전에 의 자에서 일어났다. 올사티는 전문을 읽고, 그리고나서 로마노의 눈을 뚫 어지게 응시했다. 그 목소리는 쉬어있고 무척 낮았기 때문에 로마노로서도 알아듣기가 힘들 정도였다. 올사티의 목소리가 귀에 울려왔다. "전문을 읽어주겠네, 조. '이번주 금요일부터 2개월간 저희들의 팔레 스 호텔 특실을 예약하신 것을 확인합니다. 리오데자네이로코파카바나 해안, 리오 오슨 팔레스 호텔'이라고 적혀있군. 몬탈반드라는 지배인의 사인까지 되어있는걸? 조, 이것은 자네의 예약문의에 대한 답전이군. 하 지만 이제는 필요 없게 되었지, 안 그런가?" [54] 제목 : 제13장 "빌어먹을! 하필이면 게임이 있는 날에!" - 1 제 13 장 요리사인 앙드레 기리안은 주방에서 스파게티 아라 카르보나리와 이태리 풍 샐러드, 서양배의 토르테 등의 요리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쾅쾅하는 커다란 기계소리가 났는가 했더니 얼마 뒤, 실내 에어컨의 기분좋은 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이윽고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게 되었다. 앙드레는 발로 쿵쿵 마루를 구르고는 자신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게임이 있는 날에 !" 앙드레는 배전반이 설치되어 있는 창고로 서둘러 가서 전원 스위치를 차 례로 건드려 보았다.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아아, 포프 씨가 화를 내겠군. 그것도 열화처럼 ! 앙드레는 그의 주인이 금요일 밤마다 즐기는 주 1회의 포커 게임을 얼마나 고대하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몇년 전부터 관례가 되어 있었으며 매회 같은 멤 버의 엘리트들이 한곳에 모이는 것이다.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으면 이 저택 의 더위는 견디기가 어렵다. 아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뉴올리언즈의 9 월은 문명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태양이 진 다음에도 열기와 습기로 숨 이 막힌다. 앙드레는 주방으로 돌아오자 시계를 보았다. 오후 4시였다. 손님들이 오 는 것은 오후 8시다. 앙드레는 주인인 페리 포프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에어컨 고장을 보고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주인이 오늘은 종일 법정에 매달려 있게 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주인님은 항상 바쁘시지.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휴식이 필요한 거야. 그 런데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 앙드레는 주방 서랍에서 검은 표지의 조그만 전화번호부를 꺼내서 번호 를 확인하고는 다이얼을 돌렸다. 세 번의 호출음 뒤에 금속성의 억양이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에스키모 에어컨디셔닝 서비스센터임니다. 지금 시간에는 수리기 사가 모두 출장중입니다. 이름과 전화 번호와 용건을 알려 주시면 될 수 있 는 한 빨리 이쪽에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삑 소리가 나면 말씀해 주십시요." (이거 뭐야!) 기계를 향해서 얘기를 하게 하는 나라는 미국 밖에는 없을 것이다. 젠장! 귀에 거슬리는 삑-하는 금속음이 앙드레의 귀에 들려왔다. 그는 수화기에 대고 얘기를 했다. "여기는 페리 포프의 자택입니다. 주소는 찰스 거리 42번지. 에어컨이 고 장났습니다. 가능한한 빨리 기사를 파견해 주십시요. 최대한 빨리요!" 앙드레는 수화기를 꽝하고 내려놓았다. (알겠어, 바쁘겠지, 이 정도의 무더위라면 시내 전체의 에어컨이 고장났을 걸. 이 염병할 놈의 열기와 습기를 제거하려면 에어컨도 보통 힘든 일이 아 니겠지. 아무튼 빨리 와 주었으면 좋겠는데...) 포프 씨는 신경질이 심하다. 그것도 남을 못살게 달달 볶는 스타일이다. 앙드레 기리안은 이 저택의 요리사로 일하기 시작한 지 3년이 되는데,주 인의 마음속을 구석구석까지 잘 알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야. 그 젊은 나이에 이처럼 출세를 하다니 !) 페리 포프는 참으로 얼굴이 넓적한 인물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가 손가락을 탁하고 튕기면 누구나가 벌떡 뛰어 일어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집안의 온도는 쑥쑥 상승해갔다. (허허, 무더워지는군. 빨리 고치지 않으면 큰일나겠는걸.) 앙드레는 다시 자신의 일을 시작했다. 샐러드용 살라미와 치즈를 종이처 럼 얇게 썰기 시작했으나 오늘 밤의 모임이 비참한 결과로 끝나지나 않을 까 하는 두려운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30분 후에 뒷문의 벨이 울렸을 때, 앙드레의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 으며 주방은 오븐 속과 같았다. 요리사는 서둘러 뒷쪽의 문을 열었다. 작업복 차림의 수리기사 2명이, 도구상자를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한 사람은 키가 큰 흑인이고 또 한 사람은 아주 키가 작은 백인으로 낮잠을 자다가 나온 듯이 졸리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뒷쪽 차도에 작업 트럭이 주차해 있었다. "댁의 에어컨이 고장났다면서요?" 흑인이 물었다. "네! 당신들이 와 줘서 살았어요. 빨리 수리를 시작해줘요. 곧 손님들이 들이닥칠 테니까요." 흑인은 찌는 듯한 주방으로 들어와 토르테를 굽는 냄새를 킁킁하고 맡았 다. "냄새가 기가 막히군요." "빨리 고쳐줘요!" 앙드레가 재촉했다. "그럼 에어컨실로 가 봅시다." 키가 작은 백인이 말했다. "어디지요?" "이쪽입니다." 앙드레는 두 사람을 데리고 종종 걸음으로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는 창고 까지 안내했다. "이건 꽤나 고급 장치인걸, 랄프." 흑인이 동료에게 말했다. "그렇군, 알. 요즘에는 이런 것은 만들지를 않지." "그런데 왜 고장이 난 거요?" 앙드레 기리안이 물었다. 두 사람은 그를 돌아다 보았다. "우리들은 지금 방금 도착한 길이라구요." 백인인 랄프가 비난하듯이 말했다. 랄프는 무릎을 꿇고. 바닥 부분의 작 은 문을 열고 회중전등을 꺼내어 엎드려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한동안 살펴 보더니 다시 몸을 일으켰다. "여기는 고장난 곳이 없군." "그렇다면 어디가 고장이란 말입니까?" 앙드레가 물었다. "콘센트의 어딘가가 합선이 되어 있을 겁니다. 그때문에 에어컨 장치 전 체가 합선이 되었겠죠. 에어컨의 통기 구멍은 몇 개나 있습니까?" "각 방마다 한 개씩이에요. 그러니까, 전부 아흡 군데겠지요." "그것이 고장의 원인이겠군. 아마 변압기에 지나치게 부담이 갔을 겁니다. 그것을 찾아 봅시다." 세 사람은 함께 홀로 돌아왔다. 거실에 들어섰을 때 알이 말했다. "포프 씨라는 분은 정말로 대단한 저택을 갖고 계시군요." 거실에는 엄청나게 값비싼 서명이 들어간 골동품류가 깨끗이 진열되어 있고, 마루에는 차분한 색깔의 페르샤 융단이 깔려 있었다. 거실의 좌측은 정식 만찬용의 대식당이고, 우측에는 커다란 방이 있고 녹색의 커다란 게임 용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 방의 한 구석에 있는 둥근 테이블에는 이미 저녁 식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의 수리기사가 그방으로 들어가서 회중전등으로 벽 위쪽에 있는 에어컨의 통기 구멍을 비추었다. [55] 제목 : 제13장 보이프렌드의 나체를 위에서 아래로 부드럽-2 "흐음." 흑인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포커용 테이블 바로 위의 천정을 올려다 보았 다. "이 방의 위쪽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지붕밑 방이에요." "조사해 봅시다." 앙드레의 뒤를 따라서 두사람은 지붕밑 방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세로로 길고 천정이 낮은, 거미줄 투성이에다 먼지가 잔뜩 쌓인 방이었다. 알은 벽에 설치해 놓은 배전 상자로 다가가 그곳에 뒤엉켜 있는 배선을 꼼꼼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아아!" "뭘 좀 알아냈습니까?" 앙드레는 빨리 알고 싶었다. "콘덴서입니다. 습기 탓이군요. 이것 때문에 이번 주에는 백 건이 넘는 고 장이 일어났다구요. 이건 완전히 타버렸군요. 이것을 교환해야겠어요." "아아, 큰일났군. 교환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립니까?" "금방 됩니다. 밖의 트럭에 신품 콘덴서가 실려 있으니까요." "부탁합니다. 서둘러 주세요. 얼마 안 있으면 주인님이 돌아오신단 말입니 다." 앙드레가 애원했다. "뒷일은 우리들에게 맡겨 두세요." 흑인이 장담했다. 세 사람이 함께 주방으로 돌아갔을 때 앙드레가 사정 얘기를 했다. "샐러드 드레싱을 만들어야 해요. 지붕밑 방에는 당신들 둘이서 찾아갈 수 있겠지요?" 흑인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당신은 맡은 일이나 열심히 해요.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 서 할 테니까." "아, 고맙습니다. 이 신세는 잊지 않겠습니다." 앙드레는 수리기사들이 트럭으로 돌아가서 커다란 자루 두 개를 안고 오 는 것을 보고 있었다. "무엇이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르세요. 언제든 나를 불러요." 요리사는 두 사람에게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수리기사는 윗층으르 요리사는 주방으로 돌아갔다. 랄프와 알은 지붕밑 방에 도착하자 자루를 열고 알맹이를 끄집어내기 시 작했다. 접었다폈다 하는 조그만 캠프용 의자, 강철 날이 달린 드릴,샌드위 치 접시, 맥주깡통이 두개, 희미한 곳에서도 멀리 볼 수 있는 12*40배의 망 원경, 아세틸, 프로마진액 4분의 3밀리 그램을 주사한 두 마리의 쥐였다. 두 사람은 작업에 착수했다. "어네스틴은 나를 자랑스럽게 여길 거야." 알은 작업을 시작하면서 밝게 웃었다. 처음에 알은 그 아이디어에 완강하게 반대했었다. "그런 생각은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좋아, 여보, 나는 페리 포프같은 인간 과는 관계하고 싶지가 않아. 그 잘난 녀석에게 걸려들어 보라구. 두번 다시 햇빛 구경하기는 힘들 테니까 말이야." "여보, 그 녀석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그 변호사 녀석은 앞으로 아무도 괴롭힐 수가 없게 된다구요." 두 사람은 벌거벗은 채 어네스틴의 아파트의 물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번 일로 당신은 얼마나 벌게 되지?" 알이 물었다. "돈벌이 같은 것은 아니라고 했잖아요. 내 마음이 후련해질 뿐이라구요. 그녀석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악질적인 놈이니까." "어이, 이보라구. 악질적인 놈은 이 세상에 얼마든지 우글거리고 있어. 그 녀석들은 일일이 어떻게 처치하겠다는 거야?" "그렇다면 솔직히 얘기하죠. 이번 일은 친구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친구라면, 트레이시 말이야?" "그래요." 알은 트레이시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트레이시가 특사로 석방되던 날 세 사람이 함께 식사를 했었다. "그녀는 확실히 좋은 사람이야. 그건 틀림없어." 알은 인정했다. "하지만 무엇때문에 그녀를 위해 우리가 위험한 짓을 해야 하는 거지?" "도와주지 않으면 안돼요. 그렇지 않으면 트레이시는 당신의 절반만큼도 도움이 안되는 사람에게 부탁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구요. 그래서 붙 들리기라도 하면 그 애는 또 다시 교도소로 돌아 가야 하고." 알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어네스틴을 이상스러운 듯이 들여다보았다. "당신에게는 그 일이 그렇게도 중요한 일이란 말이야?" "그렇다니까요, 여보." 설명을 해보았자 알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실제로 트레이시가 감옥으로 다시 끌려가 빅 바사의 자비에 몸을 맡긴다는 것은 어네스틴으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트레이시 를 걱정한다는 것은 어네스틴 자신을 걱정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녀는 트레 이시의 비호자였기 때문에 가령 트레이시가 빅 바사의 손에 넘어간다면 그 것은 다름 아닌 어네스틴 자신의 패배를 의미한다. 그래서 어네스틴은 말했다. "그래요. 무척 중대한 일이에요, 여보. 해 줄거죠?" "어쨌든 나 혼자서는 힘들어." 알은 투덜거렸다. 아무래도 어네스틴의 승리인 것 같았다. 그녀는 장신에다 딱 벌어진 보이 프랜드의 나체를 위에서 아래로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올드 랄프가 2, 3일 전에 석방되었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두 사람의 수리기사가 땀과 먼지로 뒤범벅이된 지저분한 모습으로 주방 으로 돌아온 것은 6시 30분이 조금 지나서였다. "모두 고쳤나요?" 앙드레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꽤나 힘이 들었소이다. 당신도 알겠지만 이집의 콘덴서는 직류와 교류의 스위치가 달려 있어서..." 알이 설명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요. 아무튼 수리가 되었나요?" 앙드레는 짜증스럽다는 듯이 말을 막았다. "그렇습니다. 콘덴서를 새것으로 바꿨으니까 5분만 지나면 신품처럼 작동 할 걸요." "그것 참 다행이군요! 여기 식탁 위에 청구서를 놓고 가면... " 랄프가 고개를 흔들었다. [56] 제목 : 제13장 녀석은 머리가 좋으니까 물고기라도 꼬이고-3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회사에서 청구서를 보내올 테니까 요."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앙드레는 두 사람이 자루를 들고 뒷쪽의 비상구로 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리사의 시계에서 벗어나자 두 사람은 안뜰 쪽으로 돌아가서 에어 컨의 콘덴서가 들어있는 옥외의 문을 열었다. 랄프가 회중전등을 비추고 알 이 2시간 전에 끊어 놓았던 전선을 다시 이었다. 에어컨장치는 즉시 작동하 기 시작했다. 알은 콘덴서에 붙어있는 서비스 증서의 전화번호를 베꼈다. 잠시 후에 알 이 그 번호로 전화를 걸자 에스키모 에어컨디셔닝 서비스의 녹음소리가 들 려왔다. "여기는 찰스 거리 42번지의 페리 포프 자택입니다. 에어컨은 고쳤습니다. 직원을 파견해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가 되시기를!" 매주 금요일 밤에 개최되는 페리 포프 자택에서의 포커 게임은 참가자 전원이 고대하는 행사가 되어 있었다. 참가자는 언제나 똑같이 엄선된 그룹 -앤소니 올사티, 조셉 로마노, 헨리 로렌스 판사, 시의회 의원 한 사람, 주 의회 상원의원 한 사람, 그리고 물론 이 저택의 주인이다. 판돈은 높고, 음 식은 호화롭고, 모여있는 전원이 권력을 내세워 못된 짓을 하는 악랄한 인 간들이었다. 페리 포프는 침실에서 스포츠 셔츠에 맞추어 흰 실크 바지에 다리를 집 어넣고 있었다. 이제부터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공연히 기분이 좋아져서 저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요즘에 와서 승운이 계속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나의 인생 그 자체가 커다란 승리지.) 변호사는 생각했다. 뉴올리언즈에서 법률상의 특혜가 필요할 때 페리 포프는 참으로 믿을 만 한 변호사였다. 올사티 패밀리라는 강력한 힘의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민완 변호사로 알려져 있었으며 교통위반 딱지부터 마약매매, 심지어 는 살인사건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이라도 취급했다. 인생은 참으로 즐거웠 다. 앤소니 올사티가 새로운 손님을 데리고 도착했다. "조셉 로마노는 두번 다시 포커는 하지 않을 거야." 올사티는 모두의 앞에서 선언했다. "모두들 알고 있겠지만 이쪽은 뉴하우스 총경이요." 총경은 모두와 악수를 하며 한 바퀴 돌았다. "마실 것은 사이드보드 위에 있으니까 자유롭게 마음에 드시는 것으로 드 세요." 페리 포프는 말했다. "저녁식사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조촐하게 시작해 볼까요?" 그들은 녹색 펠트를 씌운 테이블을 둘러싸고 의자에 앉았다. 올사티는 조 셉 로마노의 자리를 뉴하우스 총경에게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부터 그 자리는 당신이 사용하도록 하시오." 사나이들중 한 사람이 새로운 카드의 봉을 뜯고 있는 사이에 포프는 포 커 칩의 분배를 시작했다. 변호사는 뉴하우스 총경에게 룰을 설명했다. "검은 칩 한개가 5달러, 적색 칩 한개가 10달러입니다. 청색 칩은 50달러 이고 흰색은 100달러로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500달러의 칩을 사가지고 시 작합니다. 판돈은 세 번까지 올릴 수 있고 게임의 선택은 선의 권한으로 되 어 있습니다." "좋습니다." 총경은 말했다. 앤소니 올사티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카드를 나눠요, 시작합시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올사티가 재촉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페리 포프는 조셉 로마노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서 좀이 쑤셨으나 지금 그 화제를 꺼내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올사티는 언젠가 때가 오면 자기에게 의논할 것이다. 올사티는 암담한 심정이었다. (나는 조셉 로마노를 아들처럼 보살펴 주었다. 녀석을 신임해서 나의 심 복으로까지 삼았다. 그런데도 그 배은망덕한 녀석이 나를 등 뒤에서 찌르다 니 ! 그 녀석의 애인이라는 프랑스 여자가 전화를 걸어주지 않았더라면 녀 석은 감쪽같이 돈을 빼가지고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녀석은 이제 두 번 다시 도망칠 수는 없어. 바다 속에 있으니까 말이야.녀석은 머리가 좋으 니까 물고기라도 꼬이고 있을 테지.) "토니, 설건가 죽을 건가?" 앤소니 올사티는 게임 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테이블 위에서는 거액의 돈 이 오고가고 있다. 앤소니 올사티는 질 때마다 더욱 더 기분이 나빠졌다. 돈을 잃기 때문이 아니다. 어떤 일이든간에 지는 쪽에 있는 것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올사티는 자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승리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승리자만 이 그와같은 위치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지난 6주일 동안 페리 포프가 지 나치게 승운을 타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 밤에야말로 그 흐름을 바꿔보이겠 다고 앤소니 올사티는 마음 속으로 결심하고 있었다. 게임의 선택은 선의 권한이었기 때문에 각자가 선이 되었을 때 자기가 잘하는 게임을 선택했다. 각자가 특기로 게임을 해 나갔으나 오늘밤 앤소니 올사티는 무엇을 선택해도 계속 지기만했다. 그래서 올사티는 판 돈을 올리 고, 우격다짐으로 잃은 돈을 만회하려 들었다. 자정 가까이가 되어 요리사인 앙드레가 준비한 식사를 하려고 잠시 휴식 을 취하고 있을 무렵에는 올사티는 5만 달러 정도를 잃고 있었다. 승자의 선두는 포프였다. 음식은 훌륭했다. 다른 때 같으면 올사티는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이 밤참 을 즐겼을 텐데 오늘 밤에는 초조해하면서 곧장 포커 테이블로 돌아가려고 했다. "아직 음식에 전혀 손도 대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토니?" 페리 포프가 말했다.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아서." 올사티는 그의 옆에 놓여있는 은제 커피포트에 손을 뻗어 빅토리아 왕조 풍의 도자기 잔에 커피를 따랐다. 그리고 그 커피잔을 든 채로 포커 테이블 에 앉자 재촉하듯이 모두를 바라보았다. 잃은 돈을 만회하려고 초조해하고 있는 것이다. 올사티가 커피를 저으려고 하자 잔 속에 작은 티끌이 들어가 있는 것이 보였다. 기분이 나쁘다는 듯이 올사티는 그것을 스푼으로 건져 자세히 살펴보았다. 회반죽이 벗겨져서 떨어진 것같기도 했다. 천정을 쳐다 보려고 얼굴을 들자 이마에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찍 찍거리며 무언가가 뛰어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위에서 무엇이 뛰어 돌아다니고 있나?" 앤소니 올사티가 물었다. 페리 포프는 뉴하우스 총경을 상대로 한창 우스갯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중이었다. "미안합니다만, 뭐라고 말씀하셨소?" 뛰어다니는 소리가 이제는 뚜렷하게 들려왔다. 회반죽 가루가 녹색의 펠 트 위에 뽀얗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신은 쥐를 기르고 있소?" 상원의원이 물었다. "우리 집에는 쥐같은 것은 없습니다." 페리 포프는 화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는지 똑똑히 알아 봐야지." 올사티가 신음 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좀더 큰 회반죽 파편이 녹색 펠트 위에 떨어져 내렸다. "앙드레에게 살펴보고 오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식사가 끝난 것 같으니까 게임을 다시 계속할까요, 여러분?" 포프는 말했다. 앤소니 올사티는 자기의 바로 위에 있는 천정의 작은 구멍을 꼼짝 않고 노려보고 있었다. "잠깐만 기다리게. 위에까지 올라가 보세." "무엇때문에요, 토니? 앙드레에게 시키면 될텐데요." 올사티는 이미 의자에서 일어나 계단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다른사람 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다가 황급히 올사티의 뒤를 쫓아갔다. "아마 다람쥐가 지붕밑 방에 숨어들어 갔을 겁니다. 요즘같은 계절에는 어디에 가든 다람쥐가 있으니까요. 어쩌면 겨울에 대비해서 도토리라도 숨 기고 있을 겁니다." 페리 포프의 추측이었다. 변호사는 자신의 농담에 혼자서 재미있어했다. 지붕밑 방의 입구까지 도달해서 올사티가 문을 밀쳐 열었고 페리 포프가 불을 켰다. 방안을 두 마리의 쥐가 미친듯이 뛰어다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게 뭐야? 쥐가 있잖아!" 페리 포프는 말했다. 앤소니 올사티는 변호사의 탄식같은 것에는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올사티는 방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지붕밑 방 한 가운데에는 캠프용 의 자가 놓여 있고, 샌드위치 접시와 빈 맥주깡통이 얹혀 있었다. 의자 옆의 마 루에는 망원경이 놓여 있었다. 올사티는 성큼성큼 다가가서 그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집어들고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그는 먼지가 쌓인 마루에 무릎을 꿇고, 천정에 뚫어진 작은 구멍을 틀어막고 있는 나무 조각을 빼냈다. 올사티는 그 구멍에 눈을 갖다 댔다. 바로 밑에 카드 테이블이 똑똑히 내려다 보였다. 페리 포프는 지붕밑 방의 한 가운데서 안절부절못하고 얼어붙은 듯이 서 있었다. "누가 이런 구닥다리 세간들 을 여기다 갖다 놓았을까? 앙드레 녀석에게 따끔하게 물어봐야지," 올사티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나서 천천히 무릎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 다. "이건 너무한데 ! 천정에 구멍이 뚫려 있는걸. 요즘 공사장 인부들은 엉 터리군." 페리 포프는 엎드려서 구멍을 들여다 보았다. 그 순간 자신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어서서 동료들을 둘러보자 모두 들 경멸의 눈으로 변호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들 그러십니까?" 페리 포프는 말했다. "당신들은 설마하니 내가...? 여러분, 내가 이런 짓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제발 부탁입니다. 모두들 절친한 친구들이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변호사는 손을 입으로 가져가서 손톱 끝을 물어뜯기 시 작했다. 올사티가 불쌍한 희생자의 팔을 가볍게 두들겼다. "그렇게 겁먹을 필요는 없네." 마피아 두목의 목소리는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페리 포프는 오른손 엄지의 살을 필사적으로 물어뜯고 있었다. [57] 제목 : 제14장 그렇지만,전...저로서는 뭐라고 대답할수가-1 제 14 장 "이제 두 사람을 골탕먹였지, 트레이시? 거리의 소문으로는 너의 친구 페리 포프인가 하는 변호사는 이젠 개업할 수 없다고 하더군. 그건 정말 비참한 사고였다나봐." 어네스틴이 유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녀들은 로얄 스트리트의 보도에 가게를 차려놓은 카페에서 카페오레를 마시며 스낵을 먹고 있었다. 어네스틴은 낄낄거리는 웃음을 멈출 줄 몰랐다. "넌 정말 머리가 좋아. 나하고 함께 장사나 하지 않겠어? 부탁이니 날 도와줘." "고마워 어네스틴. 하지만 나에겐 아직 계획이 남아 있어." 어네스틴은 활기를 띠며 물었다. "다음엔 누구 차례지?" "로렌스야. 판사인 헨리 로렌스." 헨리 로렌스는 루이지애나 주의 리스빌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변호사로서 법조계에서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법률가로서의 재능은 없었으나, 그는 중 요한 특질을 두 가지 갖고 있었다. 준수한 외모와 변화무쌍한 윤리관이었 다. 법률가 로렌스의 철학은 법률은 가느다란 작은 나뭇가지 같아서 의뢰인 의 요구에 의하여 어떤 모양으로든지 굽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사상의 소유자였으므로 뉴올리언즈로 이사온 지 얼마 안 되어 헨리 법률 사업이 특수한 의뢰인을모아들여 번창해간 것은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는 경범죄나 교통사고를 다루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중죄나 살인사건 까지도 손대게 되었다. 거물로 지목될 무렵부터는 로렌스는 배심원을 매수 하기도 하고, 목격자의 증언을 의혹적인 것으로 왜곡시키기도 하고, 사건 을 유리하게 이끌어가기 위해 뇌물을 바치는 일 등 그 방면에서 베테랑이 되어 있었다. 요컨대 그는 앤소니 올사티와 똑같은 타임의 인간이었이므로 이들 닮은 인간들끼리의 삶이 서로 교차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피아 세계에 있어서 영광스런 결합이었다. 로렌스는 올사티 패 밀리의 앞잡이가 되었고, 적당한 시기를 골라 올사티가 그를 판사로 밀어 올렸던 것이다. "네가 어떤 식으로 로렌스 판사를 덫에 걸리게 할 건지 짐작도 안가. 놈 은 돈도 있고 권력도 갖고 있어. 도저히 말도 걸어볼 수 없잖아." 어네스틴이 말했다. "돈과 권력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말도 못 걸어 볼 건 없 어." 트레이시는 어네스틴의 말을 정정했다. 트레이시는 용의주도한 계획을 짜놓고 있었으나 로렌스 판사의 비서실에 전화를 건 순간 실행 내용을 변경하기로 했다. "로렌스 판사님과 얘기하고 싶은데요." 비서가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로렌스 판사님은 자리에 안 계십니다." "언제쯤 돌아오실까요?" 트레이시는 물었다. "그건 잘 알 수 없는데요." "매우 중요한 용건입니다. 내일 아침이면 계실는지요?" "아뇨, 로렌스 판사님은 출장중이십니다."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제쪽에서 연락할 방법이 있을까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판사님은 외국을 시찰 중이시거든요." 트레이시는 실망했다. 그런 감정이 목소리에 나타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말했다. "알았습니다. 어디로 출장가셨는지요?" "판사님은 국제사법 심포지움에 참석하기 위해서 유럽에 가계십니다." "그것 참 유감이군요." 트레이시는 말했다. "누구신지요?" 트레이시는 머리를 재빨리 회전시켰다. "나는 엘리자베스 로웬 더스틴이라는 사람입니다. 미국변호사협회의 남 부지부 의장으로 있습니다. 이달 20일에 뉴올리언즈에서 연례 행사인 수상 식을 겸한 만찬회를 열게 되는데 우리들은 금년도 최고의 인물로 헨리 로 렌스 씨를 선정한 것입니다." "어머나 굉장한 일이군요. 하지만 판사님은 그날까지는 못 돌아오십니 다." 비서는 말했다. "유감이군요. 우리는 판사님의 그 유명한 연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로렌스 판사님은 우리들의 위원회에 서 만장일치로 선정되었어요." "판사님도 수상식에 참석할 수 없는 것을 퍽 애석하게 생각하실 거예요." "그렇겠지요. 아시겠지만 이것은 대단히 명예로운 상이랍니다. 과거에도 우리 나라에서 가장 고명한 판사들이 선출되어 왔습니다. 아, 좋은 수가 있어요! 좋은 방법이 생각났습니다. 판사님께서 가볍게 수상 소감을 테이 프로 녹음해 주시면 두세 마디 감사의 말씀으로 충분합니다만, 어떻 겠습니까?" "그렇지만, 전... 저로서는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군요. 스케줄이 꽉차 있어서요 " "전국에 텔레비전으로 방영되고, 신문에도 보도될 거예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로렌스 판사의 비서는 판사가 매스컴 취재나 보 도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가 아는 한에서는 이번 여 행도 매스컴의 취급을 겨냥한 것이었다. 비서는 말했다. "아마도 판사님은 두세마디 정도라면 녹음할 시간을 마련할 수 있을겁니 다. 제가 전하지요." "어머나, 그거 참 다행이에요. 그것만 있으면 완벽한 시상식이 되겠지 요." 트레이시는 감격한 듯이 말했다. "판사님께 코멘트를 부탁하고 싶은 특별한 사항이라도 있습니까?" "네, 있어요. 우리가 부탁드리고 싶은 말씀은 " 트레이시는 입 속으로 우물거렸다. "그게 좀 복잡해서 직접 판사님께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58] 제목 : 제14장 몰래 만나다니? 무슨 얘기요? - 2 "그게 좀 복잡해서 직접 판사님께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순간 침묵이 흘렀다. 판사의 비서는 딜레머에 빠져 있었다. 보스의 여행 일정은 절대로 누설하지 말라는 엄명을 받고 있었다. 한편 이 영광스런 수 상식의 수상소감을 발표할 기회를 놓치기라도 하면 틀림없이 자기는 비난 을 받을 것이다. 비서는 말했다. "원래는 아무 것도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만 이같은 명예스런 상을 받 는 것은 판사님도 바라던 일이라고 생각되어 알려 드립니다. 모스크바의 러시아 호텔에 연락해 보십시요. 앞으로 5일 간은 그곳에 체재하시고, 그 후에는..." "아, 잘 됐군요! 곧 바로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더스틴 씨." 전보는 모스크바의 러시아 호텔에 체재 중인 헨리 로렌스 판사 앞으로 보내졌다. 첫 번째 전문은 이러했다. "차기 사법평의회 회합 장소 서두르면 이쪽에서 수배 가능. 형편좋은 일 시의 희망 알리도록. 기타는 전회대로. 발신인 보리스" 이튿날 제2신이 배달되었다. 내용은 이렇다. "귀하의 면밀한 여행계획서 수령. 동생의 비행기 무사 앵커리지 경유당 지 도착. 여행중 분실한 패스포트 돈 회수 안심 바람. 스위스 호텔에 일주 일간 체재중 은행에 가서 차장에게 직접 예금의 조건 교섭 예정. 발신인 보리스" 최후의 전문은 이랬다. "동생은 이번 여행중 러시아의 법률가들과 우호 친선을 희망. 새 패스포 트 나오는대로 지중해의 선박 수배 및 승무원 인선함. 자세한 사항 결정 후, 스위스에서 동생이 즉각 연락함. 러시아의 법률 서적 입수되면 도서관 용으로 구입을 할 것.발신인 보리스" 소비에트 내무성 인민위원회의 직원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다시 전보 가 배달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이상의 전보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 자 소련 공안당국은 미국인 헨리 로렌스의 체포에 나섰다. 심문은 주야로 쉬지 않고 열홀 간 계속되었다. "당신은 누구에게 정보를 전했지?" "무슨 정보 말이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도통 영문을 모르겠군." "우리는 계획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야. 당신에게 계획서를 건네준 사람은 누구지?" "무슨 계획서 말이오?" "소비에트의 원자력잠수함의 계획서." "당신들은 정신이 돌았군. 소비에트의 잠수함에 대해 내가 뭘 알고 있다 는 거지?" "그걸 당신한테서 들으려는 거야. 당신이 몰래 만나고 있는 것은 누구 지?" "몰래 만나다니? 무슨 얘기요? 나에겐 비밀 따위는 없소." "좋아, 그러면 보리스라는 인물에 대해서 말해 보시오." "보리스? 보리스가 누구요?" "스위스 은행의 당신 구좌에 예금한 남자 말이야." "스위스 은행의 구좌라니, 무슨 소리요?" 취조를 담당한 소련 관리들은 격노했다. "당신은 구제할 수 없는 바보로군!" 소련인들은 말했다. "당신을 한번 본보기로 징계해야 겠어. 우리 위대한 조국을 전복시키려 고 획책하고 있는 미국 스파이들의 좋은 본보기가 될 거야." 미국 대사가 헨리 로렌스와의 면회를 허가받은 무렵에는 판사의 체중은 7 킬로그램이나 줄어 있었다. 로렌스 판사는 자기를 체포한 사람들이 잠자게 해준 것이 언제였는지 기 억해내지 못할 정도였고 그의 외모도 이제는 겁먹고 떨고 있는 가련한 포 로로 변해 있었다. "어째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한단 말입니까. 나는 당당한 미국 시민 이오, 나는 판사요. 제발 부탁이야. 나를 여기서 나가게 해주시오." 판사는 초췌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입니다." 대사는 로렌스를 격려해 주었지만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대사 는 로렌스 판사를 비롯한 사법위원회 일행이 2주일 전에 소비에트에 도착 했을 때 마중을 나갔었다. 대사가 그때 본 남자가 지금은 눈 앞에서 머리 를 조아리고 아첨하고, 겁에 질린 동물로 변해 있다. 도저히 똑같은 인물 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러시아인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이 판사를 스파 이라고 부른다면 누구든지 스파이가 될 수 있을 거야.) 대사는 이상스렵기만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대사는 마음 속으로 혼자말 을 했다. (본보기로 징계하기에 훨씬 더 적당한 자를 나는 많이 알고 있는데.) 대사는 공산당 정치국 서기장에게 회견을 신청했다. 요구가 받아들여지 지 않자 다른 정치국원에게 따졌다. "나는 정식으로 항의합니다. 우리나라의 헨리 로렌스 판사에 대한 귀국 의 조치는 용납하기 어려운 점이 많소. 우리나라에서 명성있는 인물을 스 파이로 칭하는 것은 심히 유감이오." 대사는 강경하게 항의했다. "말하고 싶은 것은 그뿐입니까? 자, 이것을 봐 주시겠습니까?" 정치국원은 냉랭하게 말했다. 대사는 그것을 대충 훑어보더니 당혹하여 얼굴을 들었다. "뭐가 어떻다는 겁니까, 이걸 가지고?" "그럴까요? 그러면 다시 한번 읽어 보시면 어떨까요? 암호는 해독되어 있습니다." 정치국원은 대사에게 해독한 전문 카피를 건네주었다. 4번째 낱말마다 강조점이 찍혀 있었다. "차기 사법 평의회 회합 장소 서두르면 이쪽에서 수배 가능 형편좋은 일 시의 희망 알리도록 기타는 전회 대로 발신은 보리스" "귀하의 면밀한 여행 계획서 수령. 동생의 비행기 무사 앵커리지 경유 당지에 도착. 여행중 분실한 패스포트 돈 회수 안심 바람 스위스의 호텔에 1주간 체재중 은행에 가서 차장에게 직접 예금 조건 교섭 예정. 발신인 보 리스" "동생은 이번의 여행중 러시아의 법률가들과의 우호친선을 희망 새로운 패스포트 나오는 대로 지중해의 선박 수배와 승무원 인선함 자세한 사항 결정 후 스위스에서 동생이 즉각 연락함. 러시아의 법률책 입수되면 도서 관용으로 구입을 할 것. 발신인 보리스" (나는 형편없는 얼간이가 될뻔 했군.) 대사는 그렇게 믿어 버렸다. [59] 제목 : 제14장 얼마나 기묘한 낱말인가? 기쁘다느니, - 3 대사는 그렇게 믿어 버렸다. 보도진과 일반인은 재판정에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다. 피고는 스파이 임 무를 띠고 소비에트 연방에 파견되어 왔다는 것을 최후까지 완강히 부인했 다. 당국은 그에게 보스의 이름을 털어놓기만 하면 관대한 조치를 취해주겠 다고 약속했으나 로렌스 판사는 혼을 팔더라도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실제로 보스같은 것은 없으니까. 다음 날, 프라우다는 사실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악명 높은 미국인 스파이 헨리 로렌스 판사는 스파이 죄목으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시베리아에서 14년간 강제 노동 판결이 내려졌다.' 미국에서 정보 수집을 맡고 있는 각 기관은 이 로렌스 사건에 당혹했다. CM와 FBI 시크릿 서비스, 그리고 재무부 사이에 소문이 엇갈렸다. "그는 우리 정보국 사람이 아니야." CIA는 말했다. "재무부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재무부는 그 사건과의 어떤 관계도 부정했다. "당치도 않아. 로렌스는 우리 부에는 협력하고 있지 않아. 그 더러운 손 을 쓰는 FBI 사람들이 또 다시 우리 영역에 참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사람은 모르는데." FBI는 말했다. "그는 정부나 국방정보국의 특명이라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국방정보국은 다른 기관과 마찬가지로 전혀 아무런 관련도 없어 아랑곳 하지 않기로 했다. "노코멘트" 각 기관 모두가 자신의 기관 이외의 다른 기관이 헨리 로렌스 판사를 파 견한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그의 근성은 찬양 받을만하다구. 불굴의 혼이 있어. 자백하 기는커녕 관계자의 이름하나 누설하지 않았으니 말이야. 솔직하게 말해서 그런 요원이 우리 기관에 많이 있었으면 좋겠어." CIA 국장은 말했다. 앤소니 올사티는 매사가 잘 풀려나가지 않고 있었다. 어째서 일이 이렇 게 되었는지 이 마피아 두목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생애에서 재수가 없 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 로마노의 배신을 비롯해서 페리 포프의 배반, 그리고 이번에는 판사까지 사라져 버렸다. 스파이라느니, 정보라느 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모두 올사티라는 기계의 중요한 일부를 감당하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진정으로 신뢰하는 부하들이었던 것이다. 로마노는 패밀리를 관리하는데는 귀신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 뒤 올 사티는 조직을 관리할 후임자를 아직껏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직의 운영이 해이해졌으므로 이전같으면 절대로 표면에 나타나지 않았던 불평 불만을 공 공연히 입밖에 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앤소니 올사티도 나이 를 먹었으니 부하를 통솔할 수가 없게 되었다느니, 조직이 붕괴되어 가고 있다느니 하는 소문이 돌게 되었다. 결정적인 것은 뉴저지로부터의 전화였다. "이봐, 골치아프게 되었다면서? 도와줄 용의가 있네." "골치 아픈 일 따위는 없어. 분명히 약간의 말썽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벌써 해결됐어." 올사티는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가 입수한 정보와는 다른 것 같은데? 소문으로는 자네 동네가 문란 해져서 통제할 사람이 없다던데." "내가 통제하고 있어." "아마도 자네에게 짐이 너무 무거운 것 같아. 자넨 일을 너무 많이했어. 슬슬 쉴 때가 되지 않았나?" "여기 내 구역이야. 아무한테도 빼앗길 수 없어." "어이, 앤소니 당신한테서 빼앗다니, 누가 그런 말을 했어? 우리는 도와 주고 싶은 거야. 동부 패밀리의 보스들이 다같이 협의해서 자네를 돕기 위 해 우리 패거리를 보내주기로 결정한거야. 서로 오랜 동지들이 아닌가. 나 쁜 일이야 일어나겠어? 그렇잖은가?" 앤소니 올사티의 등줄기에 공포의 전율이 뻗쳤다. 다른 패밀리에게 도움 을 받으면 한 가지 나쁜 점이 있다. 조그만 도움이 큰 신세를 진 것이 되고, 그것이 이윽고 눈덩이처럼 커지 며 엄청나게 불어나는 것이다. 어네스틴이 저녁 식사로 준비한 새우 수프가 렌지 위에서 보글보글 소리 를 내고 있었다. 어네스틴과 트레이시는 알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 었다. 9월의 더위는 그 누구의 신경도 짜증나게 한다. 알이 작은 아파트에 돌 아오자 어네스틴은 큰 소리로 외쳐댔다. "어디서 뭘 꾸물대고 있었어? 모처럼 마련한 식사가 다 엉망이 되어 버 렸잖아. 나도 트레이시도 화가 나 있단 말이야." 느닷없이 잔소리를 듣게 됐는데도 알은 행복감에 넘쳐 있었으므로 신경 쓰지 않았다. "쫄다구들 얘기를 들어보고 다녔어. 자아, 내 얘기나 들어봐. 조직의 쫄 다구들이 올사티에게 반기를 드는 바람에 뉴저지에서 다른 패밀리가 와서 그의 영역을 인수하게 되었다는군." 알은 환한 웃음을 떠올리며 트레이시 쪽을 보고 말했다. "당신은 그 악당들을 멋지게 골탕먹인거야." 트레이시의 눈을 들여다보더니 알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기쁘지 않아. 트레이시?" (얼마나 기묘한 낱말인가! 기쁘다느니, 행복하다니 하는 단어.)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트레이시는 그 낱말이 의미하는 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까? 보통 사람들이 품는 정상적인 감정을 다시금 가질 수 있게 될 것인가? 그때 이후 줄곧 자나깨나 트레이시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어머니와 자 기가 당한 일에 대한 복수뿐이었다. 그리고 복수가 거의 완료된 지금, 트 레이시의 마음은 텅 비어 있다시피 했다. 행복이라고 하는 말과는 한참이 나 동떨어져 있었다. 다음날 아침, 트레이시는 꽃집에 들렀다. "앤소니 올사티에게 꽃을 배달해 주었으면 하는데요. 하얀 카네이션으로 장의용 화환을 부탁합니다. 하얀 리본도 달아주세요. 리본에는 이렇게 써 주세요. '고히 잠드소서 !'라고". 트레이시는 다음과 같은 사인을 한 카드도 첨가했다. "도리스 휘트니의 딸로부터." [60] 제목 : 제15장 10월7일, 화요일, 오후4시/필라델파아-1 ?3부 제 3 부 제 15 장 필라델피아 10월 7일, 화요일, 오후 4시 드디어 찰스 스탠호프 3세를 심판할 때가 되었다. 복수가 끝난 4명은 원래 타인이다. 그러나 찰스는 옛날 애인이며 불행히도 태어나지 못한 아 기의 아빠. 자기 형편만 생각하고 아기와 엄마를 버린 비정한 사나이이 다. 어네스틴과 알이 뉴올리언즈 공항까지 트레이시를 전송나와 주었다. "네가 떠나면 쓸쓸해질 거야. 네 덕택에 거리가 밝아졌어. 그럴 수만 있 다면 시장으로 입후보시키고 싶어." 어네스틴은 말했다. "필라델피아에 가면 뭘 할 거지?" 알이 물었다. 트레이시는 사실의 절반쯤만 얘기했다. "전에 근무했던 은행에서 일을 하게 될거야." 어네스틴과 알은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그들은... 그... 네가 돌아오는 걸 알고 있어?" "아니. 하지만 나는 부지점장이 잘 봐 주었으니까 아무 문제도 없을 거 야, 숙련된 컴퓨터 오퍼레이터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거든." "그렇군. 잘되면 좋겠는데... 연락 주기 바래. 알고 있지? 앞으로는 귀찮 은 일에 말려들면 안된다는 걸." 30분 후, 트레이시는 필라델피아 행 비행기 승객이 되어 있었다. 트레이시는 힐튼 호텔에 투숙하여 욕실 증기를 이용해 한벌 뿐인 옷을 다림질했다. 이튿날 아침 11시에 은행에 들어가 클라렌스 데스몬드의 비 서에게로 갔다. "잘 있었어요, 마에?" 비서는 마치 유령이라도 보는 듯 트레이시를 바라보았다. "트레이시 ! 저어... 잘 지냈어요?" 비서는 어디다 시선을 두어야 좋을지 몰라하며 말했다. "보시는 바와 같이 건강해요. 데스몬드 씨는 계신가요?" "저어... 그러니까... 가 보고 올께요. 잠깐 실례해요." 비서는 의자에서 일어나 허둥지둥 부지점장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녀는 돌아왔다. "들어가 보세요." 트레이시가 부지점장실의 문으로 향하자 비서는 뒤로 물러서며 길을 비켜 주었다. (도대체 저 아가씨는 왜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거지?) 트레이시는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클라렌스 데스몬드는 자신의 책상 옆에 서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데스몬드 씨. 이렇게 돌아왔습니다." "무슨 일로 왔소?" 그의 말투는 냉담했다. 마치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듯한 말투 였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트레이시는 당황했다. 준비해온 말도 나오지 않고 흥분된 감정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저어... 저를 최고의 컴퓨터 오퍼레이터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래서 저는 다시... " "직장에 다시 복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요?" "네, 그래요. 제 능력은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으니까요. 아직도 저는... " "미스 휘트니." 이미 트레이시라고도 불러주지 않았다. "유감이지만, 당신이 원하고 있는 것은 전혀 고려해 볼 가치가 없소. 당 신 자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우리 은행의 손님이 무장강도및 살인 미 수 등으로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나온 전과자와 거래해 주리라고 생각하 는 것은 좀 억지가 아니오? 우리 은행의 신용을 손상시키는 일이기도 하 고. 당신의 전과 기록으로는 어느 은행에서도 고용하지 않을 것이오.그러 니까 당신 자신의 조건에 적합한 일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이렇게 말하는 것에는 사사로운 감정은 일체 없다는 것을 이해해주기 바라오." 트레이시는 부지점장의 말을 들으며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으나 차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건 자기를 추방자나 전염병 환자 취급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은행으로서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 당신은 가장 유능한 행원 중의 한 사람이니까.' 이 남자는 예전엔 이렇게 말하며 자기를 추켜세웠었다. "볼일이 아직 남았소, 미스 휘트니?" 그 말은 퇴거 명령이었다. 반론하고 싶은 말은 태산같았지만 말해보았자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트레이시는 깨달았다. "없습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트레이시는 홱 돌아서서 얼굴이 새빨개진 채 사무실을 나왔다. 전 행원 이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비서인 마에가 소문을 퍼뜨렸을 것 이다. 전과자가 돌아왔다 라고 수치심이 끓어올랐으나 트레이시는 얼굴을 곳곳이 쳐들고 의연하게 출구로 걸어갔다. (나를 이런 식으로 취급한다고 해도 난 결코 좌절하지 않아. 나에겐 아 직 프라이드라는 것이 남아 있어. 이것만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어.) [61] 제목 : 제15장 이제 더이상 속아넘어가지 않겠어.치졸한 - 2 트레이시는 완전히 맥이 빠져 하루종일 호텔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직 장 복귀를 무조건 환영해 줄 것으로 믿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지금의 나는 악명 높은 범죄자인 것이다. '필라델피아 데일리 뉴스의 톱기사였어.' (흥! 필라델피아 따위가 뭐가 대단해 !)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이 도시에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그것을 끝마치고 나서 이 도시를 떠나는 거다. 그리고 뉴욕으로 가자. 그곳이라면 수많은 낯선 사람들 속 에 섞여버릴 수 있다. 그렇게 결심하자 트레이시는 다소 기분을 진정시킬 수가 있었다. 그날 저녁, 트레이시는 '카페 로얄'에서 저녁이나 먹자고 마음을 먹었 다. 오전 중의 부지점장과의 회견으로 기분이 우울했기 때문에 부드러운 불빛 속에서 기분좋은 음악이 흐르는 우아한 분위기에 젖어 있고 싶었던 것이다. 보드카 마티니를 주문하여 웨이터가 테이블로 가져오자 트레이시 는 얼굴을 들었다. 그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맞은편 좌석에 찰스 와 그의 부인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아직 트레이시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트레이시가 맨 처음 생각한 것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빨리 사라지는 것이었다. 아직은 찰스와 마주 대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계획을 실행에 옮길 기회가 올 때까지는 만나서 는 안되는 것이다. "주문하실 요리는 정하셨습니까?" 웨이터가 물었다. "저어...글쎄요, 좀더 기다려 주시겠어요?" 나갈 것인가, 그대로 있을 것인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트레이시는 찰스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들어온 찰스는 마 치 낯선 타인 같았다. 혈색이 나쁘고 말라빠진, 중년의 대머리 남자가 등 을 구부리고 따분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믿을 수없었 다. 예전에 자기가 사랑하고, 품에 안기고, 장래를 약속했던 사랑스런 모 습은 어느 구석에도 없지 않은가. 그의 부인 쪽으로 시선을 옮기니 찰스 와 똑같이 따분한 표정을 한 얼굴이었다. 서로를 영구히 가두어 놓고, 시 간 속에 묶여 꼼짝달싹할 수 없는 남녀의 모습이 보였다. 부부는 서로 한 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고 그저 거기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들 부부의 앞날에는 끝이 없는 무미건조한 나날이 있을 뿐이라고 트레이시는 확신 할 수 있었다. 사랑도, 즐거움도 없어 보였다. (저것이 찰스가 받은 벌이구나!) 트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 그녀를 결박하고 있던 어둡고 깊은 마음의 사슬에서 해방된 느낌이었다. 시간의 경과가 가 져온 변화가 트레이시의 복수심마저도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웨이터에게 눈짓을 하고 말했다. "주문하고 싶은데요." 복수는 이것으로 끝났다. 과거는 마침내 매장되어 버린 것이다. 트레이시는 그날 밤 호텔로 돌아와 생각해 보았다. 은행에 근무할 때 행원 기금을 적립하고 있었으니까 자기 몫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 액 수를 계산해 보았다. 1,375달러 65센트가 되었다. 클라렌스 데스몬드에게 편지를 썼더니 이틀 후에 비서인 마에로부터 답장이 왔다. '친애하는 미스 휘트니, 의뢰하신 사항에 관해 데스몬드 씨의 지시에 따라 다음과 같이 알려드 립니다. 행원 기금의 정신에 입각하여 귀하의 적립금은 일반기금으로 흡 수되어 있습니다. 귀하에게 아무런 개인적인 악의도 품고 있지않다는 것 을 데스몬드 씨는 전하고 싶다고 합니다. 수석 부지점장 비서 마에 트렌튼 트레이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은행이 나의 돈을 도둑질하다니, 더구나 그러한 처사를 기금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둥 진부한 말로 정당화 하려 하고 있다! 비록 액수는 얼마 안되지만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아닌 가. 트레이시는 격분했다. (이젠 더 이상 속아넘어가지 않겠어. 치졸한 놈들!) 트레이시는 필라델피아 신탁은행의 낯익은 입구밖에 서 있었다. 옅은 화장을 하고 턱에는 붉은 상처자국을 냈으며 길고 검은 가발을 쓰고 있 었다. 어떤 불의의 사태에 이르렀을 때 행원들은 붉은 상혼을 상기할 것 이다. 변장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5년간이나 함께 일했던 낯익은 행원들 앞에서 트레이시는 알몸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체가 탄 로나지 않게 조심해야지. 트레이시는 핸드백에서 병뚜껑을 꺼내어 구두 속에 넣고는 다리를 절름거리면서 은행으로 들어갔다. 시간을 신중하게 선택한 덕분에 역시 은행 안은 고객으로 붐비고 있었다. 트레이시가 절름 거리며 고객 서비스창구로 가자 그 안쪽에 있던 남자가 통화를 끝내고 응대하러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오랫만에 대하는 편협하고 비굴한 존 크레이튼이다. 이 남자는 유태인 을 싫어하고, 흑인을 싫어하고, 푸에르토리코인을 아주 싫어했다. 싫어하 는 순서는 꼭 이대로는 아니지만 재직 중에 트레이시는 이 남자 때문에 늘 짜증이 났었다. 지금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있지만 트레이시를 알아차 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세뇨르. 나, 지금 곧 당좌예금 구좌를 만들고 싶은데요." 트레이시는 멕시코 사투리로 말했다. 복역중 몇 개월이나 귀에 익숙하 게 들었던 동료 파우리타의 발음을 흉내낸 것이다. 크레이튼의 얼굴에 금세 경멸의 표정이 떠올랐다. "이름은?" "리타 곤잘레스입니다." "얼마를 예금하실 건가요?" "10달러 정도." 그 말을 들은 크레이튼의 목소리에 냉소의 울림이 보태졌다. "수표? 아니면 현금?" "현금입니다." 트레이시는 핸드백에서 꼬깃꼬깃 구겨진 절반은 찢어진 10달러 짜리지 폐를 꺼내어 크레이튼에게 건네주었다. 행원은 흰 서식용지를 내던지듯이 내주었다. "이것을 기입해 주세요." 트레이시는 자신의 필적을 남겨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눈살을 찌푸렸다. "저어, 죄송합니다 세뇨르. 나 손을 다쳤답니다. 내 대신에 저어, 써주시 지 않겠습니까? 미안합니다." 크레이튼은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 (요 불법 입국한 까막눈아!) [62] 제목 : 제15장 잠깐만 보기만 하려고 하는데요. 세뇨르. - 3 (요 불법 입국한 까막눈아!) "리타 곤잘레스라고 했던가요?" "예에." "주소는?" 트레이시는 묵고 있는 호텔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어머니의 처녀적 성씨는7" "같은 곤잘레스에요. 자기 숙부와 결혼하셨으니까요." "그래? 생일은? 당신 것 말이요." "12월 10일입니다. 1958년 생이구." "태어난 곳 은 ?" "씨우맛드 드 멕시코입니다." "멕시코시 말이군. 여기에 사인해 줘요." "왼손밖에 사용할 수가 없는데... " 트레이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펜을 들고 서투르게 알아보기 어려운 사인을 했다. 존 크레이튼은 예금전표를 기입했다. "이것은 임시 수표장이요. 인쇄된 수표장은 3, 4주일 이내에 우송해 주 겠어요." "참으로 고맙습니다. 세뇨르." "천만에." 크레이튼은 손님이 은행을 나가는 것을 지겹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염병할 멕시코인들!) 컴퓨터에 부정이 침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트레이시는 컴퓨 터 전문가이다. 필라델피아 신탁은행이 안전책을 수립할 때, 그 시스템 작성에 참가했었다. 그 트레이시가 이번에는 안전책을 빠져나갈 쪽으로 돌아선 것뿐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은 컴퓨터 대리점을 찾는 일이다. 트레이시 정도의 오퍼레이터라면 그곳의 단말기를 사용하여 은행의 컴퓨터 정보를 끌어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은행에서 몇 구획 떨어진 곳에 컴퓨터 대리점이 있었다. 가게 안에 고 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일에 충실한 점원이 트레이시 쪽으로 걸어왔다. "어서 오십시요 뭘 도와드릴까요?" "잠깐 보기만 하려고 왔는데요, 세뇨르." 점원의 눈길은 컴퓨터 게임에 신이 나 있는 10대 소년의 모습에 멈추 었다. "잠깐 실례합니다." 점원은 급히 사라졌다. 트레이시는 전화 회선에 접속되어 있는 눈 앞의 탁상용 컴퓨터 앞으로 갔다. 그것을 이용하여 은행의 컴퓨터 시스템으로 침입하는 것은 간단하다. 그러나 정확한 비밀 코드를 알아내야 한다. 더욱이 비밀 코드는 매일 바 뀐다. 비밀 코드를 결정하는 회의에는 트레이시도 참석했었다. "비밀 코드는 계속 바꾸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침입할 수 없게 말입 니다. 다만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겐 역시 간단한 것이 좋을 것입니다." 부지점장은 그 자리에서 그렇게 말했었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최종적으로 결정된 코드는 1년의 4계절과 당일 의 날짜를 조합하는 것이었다. 트레이시는 단말기를 향해 필라델피아 신탁은행의 코드를 두드렸다. 삐- 하는 속음이 났기 때문에 트레이시는 전화 수화기를 단말기에 붙 은 변환기 위에 얹었다. 그러자 작은 스크린은 환하게 빛났다. '코드를 말하시오.' 오늘은 10일이다. '가을 10' 트레이시는 두드렸다. '그 코드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컴퓨터의 스크린은 꺼져 있었다. (은행은 코드를 바꾼걸까?) 곁눈질로 살펴보니, 아까 그 점원이 다시 이쪽으로 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트레이시는 다른 컴퓨터로 이동하여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들여다보고 통로를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녔다. 점원은 걸음을 멈췄다. (어차피 놀러 온 손님이겠지.) 그때 잘 차려입은 일행 두 사람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는 서둘러 그쪽 으로 갔다. 트레이시는 다시 탁상용 컴퓨터로 돌아갔다. 트레이시는 자기가 저 클라렌스 데스몬드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는 틀에 박힌 관습에 따라 살아가는 인간이므로 그다지 복잡한 코드는 채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4계절과 날 짜를 조합한다는 최초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어떤 식으 로 바꾸었을까? 코드부호를 완전히 바꾸어 버리면 모든 것이 복잡하게 되기 때문에 아마도 계절만을 바꾸었을 것이다. 트레이시는 다시 컴퓨터를 두드렸다. '코드를 말하시오.' '겨울 10' '그 코드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또 다시 스크린은 어두워졌다. (잘되지 않는구나.) 트레이시는 낙담했다. (한번 더 해 보자.) '코드를 말하시오.' '봄 10' 스크린은 잠시 어두워졌으나, 다음 메시지가 나타났다. '계속하십시오' 역시 계절만 바꾸었을 뿐이다. 트레이시는 재빨리 두드렸다. '국내금전취급' 즉각 은행의 메뉴, 즉 이용할 수 있는 취급 종류가 스크린에 나타났다. '어느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A 예금 B 송금 C 보통예금 인출 D 지점간 송금 B 당좌예금인출 트레이시는 B를 골랐다. 스크린은 어두워지고 다음에 새 메뉴가 나타 났다. [63] 제목 : 제15장 체험하지 못한 막막한 절망감을 안게 되었 -4 '전송할 금액은?' '송금할 곳은?' '어떤 구좌에서?' 트레이시는 두드렸다. "일반기금에서 리타 곤잘레스 구좌에, 금액을 두드릴 단계에서 약간 망설여졌다. (유혹에 넘어갈 것 같아.)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컴퓨터 회선이 연결된 지금은 무제한의 액수를 인출할 수 있는 것이다. 수 백만 달러도 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도둑이 아니다. 트레이시가 원하는 액수는 정당하게 받을 권리가 있는 금액뿐이 다. 트레이시는 1,375달러 65센트라고 두드리고 리타 곤잘레스의 구좌번호 도 추가해서 입력시켰다. 스크린이 환하게 빛났다. '송금은 완료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수속할 것이 있습니까.' '없음' '업무완료.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돈은 무사히 송금될 것이다. 똑같은 절차로 은행간을 매일 2백20억 달러나 되는 액수가 오고가는 것이다. 점원이 얼굴을 찌푸리고 또 다시 트레이시 쪽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그 녀는 서둘러 키를 눌러 스크린을 꺼버렸다. "이 기계가 필요하십니까?" "아뇨, 고맙습니다. 컴퓨터 사용법을 잘 모르겠군요," 트레이시는 사과하듯이 말했다. 컴퓨터 대리점을 나오자 트레이시는 길모퉁이에 있는 약국에서 은행으 로 전화하여 출납계장을 부탁했다. "안녕하셔요, 리타 곤잘레스라고 합니다. 나의 당좌예금을 뉴욕의 제일 하노버 은행으로 전송하고 싶은데요. 부탁합니다." "구좌번호를 말씀해 주실까요, 곤잘레스 씨?" 트레이시는 번호를 알려줬다. 1시간 뒤 트레이시는 힐튼 호텔을 나와 뉴욕으로 향했다. 이튿날 아침 10시 뉴욕의 제일 하노버 은행이 업무를 개시함과 동시에 리타 곤잘레스는 자기 구좌에서 돈을 인출하고 있었다. "모두해서 액수가 얼마나 됩니까?" 리타 곤잘레스로 분장한 트레이시가 물었다. 창구계는 조사하고 나서 말했다. "1,385달러 65센트입니다." "아, 틀림없군요." "은행수표로 드릴까요, 곤잘레스 씨?" "아뇨,괜찮아요. 은행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현금으로 갖고 가겠어 요." 트레이시는 말했다. 트레이시는 교도소에서 석방될 때 국가에서 지급되는 규정액 2백 달러 와 에미를 돌봐준 급료로 약간의 돈을 받아쥐고 있었다. 거기에다 은행에 서 인출한 적립금을 합쳐도 그녀에겐 금전적인 여유같은 것은 없었다. 빨 리 취직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트레이시는 렉싱톤 가의 싸구려 호텔에 묵으면서 컴퓨터 오퍼레이터자 리를 얻으려고 뉴욕의 각 은행에 지원 서류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오래지 않아 컴퓨터가 그녀의 적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트레이시의 인생은 이제는 공적(公的)인 것이 되어 있었다. 컴퓨터의 데 이타 뱅크에는 그녀의 과거가 자세하게 입력되어 있어 정확하게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누구에게든지 그 정보가 전달되는 것이다. 트레이시의 범 죄 이력이 노출된 순간, 그녀의 지원은 자동적으로 기각되었다. '당신 경력으로는 어느 은행에도 취직하지 못할 것이오.' 클라렌스 데스몬드가 말한 대로였다. 보험회사나 기타 컴퓨터 관련 업종에도 트레이시는 수십 차례 지원해 보았다. 회신에는 매번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채용 불가'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다른 일이라도 해야겠군.) 트레이시는 뉴욕 타임즈를 사서 구인 광고를 훑어보았다. 무역회사 비서직을 구한다는 광고가 게재되어 있었다. 트레이시가 면접실로 들어선 순간 인사부장이 말했다. "이런, 아가씨는 분명 텔레비전에서 본 얼굴이군. 교도소에서 아이를 구 해주지 않았어요?" 트레이시는 뒤돌아 도망쳐 나왔다. 다음 날 트레이시는 5번가의 삭스 피프스 백화점에 어린이용품 판매원 으로 채용되었다. 급료는 은행보다 훨씬 낮았으나 그럭저럭 지낼 만한 액 수였다. 일하기 시작한 지 이틀 째에 트레이시를 알아본 신경질적인 손님이 어 린 아이를 익사시킬 뻔한 죄수를 채용했다며 현장 주임에게 항의하며 소 란을 피우는 바람에 변명할 여지도 없이 트레이시는 즉각 해고되었다. 분하게도 그 남자들-트레이시가 복수를 한 그 남자들-이 역시 트레이 시의 운명을 바꾸어 놓고 만 것이다. 그자들 덕분에 트레이시는 만인이 다 아는 죄인으로 추방자로 되어 버렸다. 너무도 불공평한 처사에 트레이 시는 몸도 마음도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면 좋단 말인가! 그녀는 교도소 안에서도 체험하 지 못한 막막한 절망감을 안게 되었다. 그날 밤, 이제 얼마나 남았나를 보려고 지갑을 털어보니 구석에서 쪽지 가 떨어졌다. 분명히 석방되던 날에 여죄수 베티 프란시스가 건네주었던 메모지 같았다. '콘래드 모건 보석상. 뉴욕 시 6번가 640번지, 베티는 이렇게 말했었다. '범죄자의 갱생에 애쓰고 있는 사람이야. 감옥에 있던 자에게 원조의 손을 뻗치고 싶은 거지.' [64] 제목 : 제15장 모건은 우아한 손가락으로 또닥 소리를 냈 -5 콘래드 모건 보석상은 품위가 넘치는 분위기의 점포로서밖에는 제복 차림의 도어맨이, 안에는 무장한 경비원이 지키고 있었다. 점포 그 자체는 수수한 내장을 하고 있었으나, 진열되어 있는 보석류는 훌륭하고 비싼 것뿐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트레이시는 점원 아가씨에게 말을 걸었다. "콘래드 모건 씨를 뵙고 싶습니다만." "약속하셨습니까?" "아뇨, 저어... 친구에게서 콘래드 씨를 만나라는 권유를 받았기에."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트레이시 휘트니 라고 합니다." "그럼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아가씨는 수화기를 들더니 무슨 말인지 트레이시가 알아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수화기를 놓고는 트레이시에게 말했다. "모건 씨는 지금은 만날 시간이 없답니다. 저녁 6시쯤에 오시라고 말씀 하십니다만." "알았습니다. 고마워요." 트레이시는 인사를 하고 보석상점을 나왔다. 밖으로 나왔으나 갈 곳도 없어 하염없이 보도에 서 있었다. 뉴욕에 온 것은 잘못이었다. 콘래드 모건 씨가 도와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애당초 타인인 것을. (그는 나에게 설교를 늘어놓고 잔돈푼이나 적선해 주는 것이 고작일거 야. 그까짓것 아무려면 어때. 그러나 누구한테든 시혜를 받는 것은 질색 이야. 어떻게든 스스로 해 볼 테야. 콘래드 모건 따위를 알게 뭐야!) 트레이시는 정처없이 거리를 건들거리며 돌아다녔다. 5번가의 반짝반짝 눈부신 갖가지 전시장, 수위들이 지키고 있는 파크 거리의 고급 아파트들, 렉싱톤 거리와 3번가의 쇼핑객으로 붐비는 상점가 등을 멍청히 지나쳤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하염없이 계속 걷기만 했다. 그러나 오후 6시가 되자 어느새 5번가로 되돌아와 콘래드 모건 보석상점 앞에 서 있었다. 도어맨 은 없고 문에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트레이시는 될대로 되라는 기분으로 쾅쾅 두드리고 나서 거기서 떠나려고 할 때, 놀랍게도 문이 확 열렸다. 온화해 보이는 인물이 입구에 서서 트레이시를 보고 있었다. 머리는 대머 리였고 귀언저리에만 머리털이 남아 있었다. 흑인 타임으로 보이는 붉은 얼굴이었으나 파란 눈만 반짝반짝 생기를 띠고 있다. 마치 동화에 나오는 귀여운 도깨비 같았다. "휘트니 양이오?" "네 . " "콘래드 모건이오. 어서 들어오지 않겠소?" 트레이시는 사람이 없는 점포 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리고 있었소. 내 사무실로 갑시다. 그편이 얘기하기가 쉬울 테니 까." 콘래드 모건은 말했다. 모건은 가게 안을 지나 닫혀있는 문쪽으로 트레이시를 안내하고 그문 을 잠갔다. 사무실에는 고급 가구류가 비치되어 있었다. 사무실이라기보 다는 주택처럼 책상 같은 것은 없었고 침대의자와 의자, 그리고 편안하게 배치된 테이블뿐이었다. 벽에는 거장들의 그림이 즐비하게 걸려 있었다. "뭘 마시겠소? 위스키, 꼬냑, 아니면 세리주?" 콘래드 모건은 말했다. "아, 괜찮습니다." 트레이시는 갑자기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이 남자가 뭔가 해줄 거라는 달콤한 생각을 한 번은 버렸으나, 어쩌면 뭔가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는 기대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베티가 당신을 찾아가라고 하더군요, 모건 씨. 베티가 그러더군요. 당 신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신다고..." 트레이시는 교도소라는 말까지임에 담지는 못했다. 콘래드 모건은 손 을 깍지끼었다. 그 순간 트레이시는 그의 손톱이 아 름다운 색깔의 매니큐어로 칠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참 안 됐어요, 베티는 그렇게도 성품이 좋은 아이였는데 운이 나빴던 거예요." "운이 나빴다니요?" "네, 붙잡혀 버렸으니까요." "저어... 저로서는 무슨 얘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니 간단한 거예요, 미스 휘트니. 베티는 내 일을 도와주고 있었습니 다. 신변을 충분히 조심하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가엾은 베티는 뉴올리 언즈에서 온 어떤 운전사와 사랑에 빠져 버린 거예요. 그래서 자기자신이 일을 시작했다가 말예요. 그러다가 그... 붙잡혀 버린 거지요." 트레이시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베티는 여기 점원으로 일했나요?" 콘래드 모건은 의자 등받이를 한껏 젖히고 앉아 너털웃음을 웃더니 마 침내 눈물까지 찔끔거렸다. "아니 아니, 그렇지 않아요. 베티는 전혀, 아무 것도 당신에게 설명해 주지 않은 모양이구려." 모건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모건은 의자에 기댄 채 양손의 손가락을 마주합쳐 뾰족하게 끝을 세웠 다. "나는 아주 수입이 괜찮은 부업을 하고 있다오, 미스 휘트니. 이익분을 동업자와 절반씩 나누어 갖는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하지요. 그 동업자란 누구냐 하면, 말하자면 당신같은,.. 아, 이런! 나쁘게 생각지는 말아요... 교 도소를 경험한 사람들 을 말하는 건데, 이런 사람들과 일하고 있어서 훨 씬 잘 되어가고 있어요." 트레이시는 점점 더 이해할 수가 없어서 조심스럽게 보석상의 안색을 살폈다. "보시다시피 나는 매우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요. 나의 단골손님들은 모두 다 대단한 부자들이지요. 손님들과 나는 친구가 되고 그들은 나를 신용하게끔 됩니다." 모건은 우아한 손가락으로 또닥 소리를 냈다. "이 손님들이 여행하는 날을 나는 알고 있답니다. 이런 험악한 세상에 보석류를 갖고 여행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요. 대개가 금고에 넣어 집 에 놓아두는 거지요. 내가 손님들에게 보석 방호대책을 권하고 있는 정도 라니까요. 나는 그들이 어떤 보석을 갖고 있는가 정확하게 알고 있다오. 어떻게 아느냐 하면, 내가 판 보석이니까 아는 수밖에. 그래서... " 트레이시는 무의식중에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모건 씨." "설마, 벌써 돌아가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더 이상은 듣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되어서요. 혹시 저에게 말씀 하시고 싶은 것은... " [65] 제목 : 제15장 호텔방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녀의 다리는 - 6 "그렇소. 당신이 짐작하는 대로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트레이시는 뺨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범죄자가 아니에요. 취직을 부탁하려고 여기에 온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일을 부탁하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아가씨, 불과 1시간이나 2시간 안에 끝나는 일이에요. 보수는 2만 5천 달러를 약속할 수 있어요. 세금 없이 말이오. 당연한 얘기지만." 모건은 짓궂게 웃었다. 트레이시는 울화가 치미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흥미 없어요. 돌아가겠습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모건은 일어섰고 트레이시에게 도어를 가리켰다. "이건 알아두기 바래요, 미스 휘트니. 아주 조금이라도 잡힐 위험이 있 다면 난 이런 일엔 손대지 않아요. 나도 신용이 소중한 사람이니까." "걱정마세요. 아무에게도 입밖에 내지 않을 테니까." 트레이시는 냉랭하게 내뱉었다. 모건은 히죽이 웃었다. "얘기할 것도 없으니까. 그렇지 않소? 결국 당신이 뭐라고 얘기해 보았 자 아무도 진실로 믿지 않을 테니까. 안그렇소? 난 콘래드 모건이니까 말 이오. 당신 마음이 변하면 그때는 연락해요. 가장 좋은 시간은 오후 6시 이후요. 그럼, 전화를 기다리겠소." "헛수고 하지 마세요." 트레이시는 그렇게 대꾸해 주고는 밖으로 나와 땅거미 지는 저녁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호텔 방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녀의 다리는 분노와 흥 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호텔의 벨 보이에게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오라고 일렀다. 누구와도 얼굴을 대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콘래드 모건과의 회견으 로 울화가 치밀고 있었다. 그 보석상도 역시 나를 죄인 취급한 것이다. 남루이지애나 여자교도소에 있는 비참하게 내동댕이쳐진 죄수들과 동렬 에 놓고 취급한 것이다. 나는 그런 여자 중 한 사람은 절대로 아니다. 트 레이시 휘트니인 것이다. 컴퓨터 오퍼레이터이고 법을 준수하는 선량한 시민인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도 나를 고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트레이시는 침대에 누웠으나 앞일을 생각하니 밤새도록 잠을 이룰 수 가 없었다. 일할 곳 은 없고, 돈은 다 떨어져 가고 있다. 트레이시는 우선 두 가지 해결책을 생각했다. 아침이 되면 더 싸구려 숙소로 옮길 것, 또 한 가지 무슨 일이든 찾는 것이다. 일의 내용은 가리지 않기로 했다. 싸구려 숙소는 로워 이스트 사이드에 있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스산한 4층 건물의 방 한개짜리 아파트였다. 종잇장같이 얄팍한 벽을 통해 옆방 사람들이 귀에 익지않은 말로 욕지거리를 하며 다투는 소리가 들린다.거 리에 즐비한 작은 상점가의 창문이나 입구에는 묵직한 철창이 붙어 있었 다. 트레이시는 그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주정뱅이나, 매춘부,그리고 집없는 여자들이 그 거리의 주민인 것이다. 쇼핑가는 도중에 트레이시는 세 번이나 집요하게 달라붙는 사람들과 실랑이를 해야 했다. 두 번은 남자이고, 한 번은 여자였다. (얼마 동안은 참고 살 수 있겠지. 그러나 오래 있을 곳 은 못 돼.) 트레이시는 자신을 타일렀다. 트레이시는 아파트에서 몇 구획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직업소개소 를 찾아갔다. 뚱뚱하고 관록이 있어 보이는 머피 부인이 경영하고 있었 다. 부인은 이력서에서 눈을 들자 의아스럽다는 듯이 트레이시를 바라보 았다. "아가씨같은 사람이 어째서 나한테 왔는지 모르겠군. 당신만한 인재라 면 원하는 회사는 얼마든지 있을 텐데." 트레이시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저에겐 사정이 있어요." 그렇게 전제해 놓고, 머피 부인에게 간단히 사정을 설명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부인은 트레이시가 말을 마치자 무뚝뚝하게 말했다. "컴퓨터 관계 일은 역시 무리겠군. 요즘엔 어떤 회사도 컴퓨터 범죄를 병적으로 두려워하고 있거든. 전과가 있으면 어느 회사도 고용하려 들지 않아요." "그렇지만 저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저는..." "다른 직종이라면 있기는 한데. 판매원 일은 어때요?" 트레이시는 백화점에서 당한 일이 생각났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당 하고 싶지 않았다. "또 다른 일은요?" 부인은 말을 흐렸다. 머피 부인은 생각할 수 있는 직업은 트레이시의 경력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것뿐이었던 것이다. "글쎄..." 부인은 일단 말해 보기로 했다. "당신에게 적합한 일자리는 아니지만, 잭슨 홀이라는 가게의 웨이트리 스 일이 있어요.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 있는데 햄버거를 파는 가게예요." "웨이트리스 일이요?" "그래, 괜찮다면 수수료는 안 받겠어요, 이건 살짝 들은 얘기니까." 트레이시는 자리에 앉은 채 잠시 생각했다. 학생 시절에 아르바이트로 웨이트리스를 한 적이 있었지. 그 때는 즐거웠지. 지금은 사느냐, 죽느냐 의 막다른 길이야. "해 보겠어요." 트레이시는 대답했다. 잭슨 홀은 성미 급하고 시끄러운 손님들과 잔뜩 짜증이 나 있는 요리 사들이 미친 듯이 돌아가는 소란스러운 가게였다. 음식 맛은 제법 좋았고 가격도 웬만했기 때문에 어떤 시간에나 대혼잡을 빚어댔다. 웨이트리스는 쉴 틈도 없이 맹렬히 일해야 했기 때문에 첫날 일이 끝났을 때는 트레이 시는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수입은 얻을 수 있었다. 이틀째, 점심 때 세일즈맨들이 빽빽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음식을 날라 갔더니 그중 한 사람이 갑자기 스커트를 걷어 올렸다. 트레이시는 엉겁결 에 손에 들고 있던 콩조림 그릇을 그 남자의 머리에 끼얹어 버렸다. 이래서 그 직장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트레이시는 머피 부인의 직업소개소에 돌아가서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이거 괜찮을지도 모르겠군. 웰링턴 암스 호텔에서 객실부의 보조원을 모집하고 있어. 거기 한번 가보면 어떨까?" 머피 부인이 말했다. 웰링턴 암스는 파크 가에 면한 작지만 우아한 호텔로서 부자나 저명인 사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담당자와의 면담이 있은 뒤 고용되 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명랑하고 일의 내용은 간단하며 힘들지도 않 았다. 일하기 시작한 지 일주일 뒤, 트레이시는 객실부 사무실로 호출되었다. 호텔의 부지배인도 그 자리에 있었다. "당신은 오늘 827호실을 점검했나?" 객실부장이 트레이시에게 물었다. 문제의 방은 할리우드의 여배우 제니 퍼 말로우가 묵고 있는 방이었다. 트레이시의 임무 중에는 방을 돌며 메 이드들이 제대로 자기 임무를 완수하고 있는가 어떤가를 확인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66] 제목 : 제15장 다만 침대와 타월 확인만 했기 때문에... - 7 "네, 들어갔었습니다." 트레이시는 대답했다. "몇시 쯤에?" "오후 2시였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문제라도 생겼나요?" 부지배인이 끼어 들었다. "오후 3시에 말로우 양이 방에 돌아와 보니 값비싼 다이아몬드 반지가 없어졌더라는군." 트레이시는 자신의 몸이 꼿꼿이 굳어져가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은 그녀의 침실에 들어갔었소, 트레이시?" "네, 모든 방을 점검하는 것이 제 임무니까요." "침실에 반지가 놓여있는 것을 보지 못했소?" "아니... 아니요, 못 본 것 같습니다." 부지배인은 말꼬리를 물고 따지고 들었다. "같다는 것은 확실치는 않다는 말이겠군?" "저는 특별히 보석에 신경을 쓰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다만 침대와 타월 확인만 했기 때문에... " "말로우 양은 방을 나갈 때 반지를 화장대 위에 놓아두었다고 하던데." "저는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그 방엔 접근할 수 없단 말이야. 메이드들은 오랫 동안 이곳에서 일한 사람들 뿐이고..." "저는 반지 따위는 훔치지 않았습니다." 부지배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는 수 없군. 경찰을 불러 조사하도록 해야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소행일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로우 양이 놓은 장소를 착각하고 있든지요." 트레이시는 절규하듯 말했다. "당신의 경력에는... " 부지배인은 말머리를 꺼냈다. 또 그거다. 어디까지나 붙어 다니는 '당신의 경력에는...'이다. "경관이 올 때까지 경비 사무실에 대기하고 있도록!" "네, 알겠습니다." 경비원에게 안내되어 사무실로 향할 때 트레이시는 다시 감옥으로 들 어가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전과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늘 뒤쫓기 는 범죄자에 관한 얘기를 그녀는 읽은 적이 있지만 자신이 그렇게 되리 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자기에게는 죄인이라는 딱지가 붙여졌고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그 딱지대로 사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다. (그 흉한 딱지대로 말이야.) 트레이시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30분 후, 부지배인이 싱글싱글 웃음을 띄우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다행이군. 말로우 양의 반지를 찾아냈소. 반지를 둔 곳 을 잘못 알고 있었다더군. 착각한 거지." 그는 말했다. "잘 됐군요." 트레이시는 차갑게 말했다. 사무실을 나오자 트레이시는 그 길로 콘래드 모건 보석상점으로 갔다. "어처구니없을 만큼 간단한 일이지. 나의 손님 중에 로이스 베라미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녀는 지금 유럽을 여행중이야. 집은 롱 아일랜드 바닷 가의 튀어나온 벼랑 위에 있어. 주말에는 하인들에게 휴가를 주기 때문에 비어 있지. 4시간 마다 한 번씩 경비원이 순찰을 돌고 있지만 말이야. 당 신은 불과 몇 분 내에 그 저택에 침입했다가 나와야 하는 거야." 콘래드 모건은 말했다. 두 사람은 콘래드 모건의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경보장치는 다 파악하고 있고 금고의 다이얼도 알고 있어. 당신이 할 일이라고는 그 집안으로 들어가 보석을 갖고 나오는 일 뿐이야. 당신이 보석을 나에게 건네주면 나는 그것을 새롭게 다시 커트하여 다른 모습으 로 매물로 내놓게 된다는 얘기야." "그렇게 간단하면 어째서 직접 하시지 않습니까?" 트레이시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모건의 푸른 눈이 번쩍 빛났다. "일때문에 시내에서 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 그런 작은 사건이 있 을 때마다 나는 항상 일때문에 시내에서 떠나 있는 거라구." "그렇군요." "당신이 베라미 부인의 보석을 훔쳐내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 고 있다면 그럴 필요는 없다고 단언하겠어. 그녀는 정말 탐욕스럽고 무자 비한 여자야. 세계 각지에 값비싼 물품으로 가득찬 저택을 갖고 있어. 게 다가 그녀는 보석류에 실제 값의 2배나 되는 액수의 보험을 걸어 놓고 있지. 당연히 그 평가는 내가 해 주었지만." 트레이시는 의자 깊숙이 앉아서 콘래드 모건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있 었다. (난 머리가 돌아 버렸나봐. 이렇게 태평스럽게 이 남자와 보석 도둑질 에 관해 의논을 하고 있다니 말이야.) "나는 교도소에는 다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모건 씨." "위험 따위는 없어. 내 일을 도와주고서 붙잡힌 사람은 지금까지는 없 었어. 나와 함께 일하는 동안에는 말이야. 자아, 어때?" 명백했다. '노' 라고 대답할 작정이었다. 보석을 훔치다니, 미친 짓이지 않은가. "2만 5천 달러의 보수라고 말씀하셨죠?" "보석과 맞바꾸며 현찰로 지불할 거야." 거액이다. 그정도만 있으면 앞으로의 인생을 이것저것 생각해볼 여유가 생길 것이다. 트레이시는 자신의 스산한 아파트 생활을 떠올렸다. 거주자 들의 아우성소리, '범죄자를 판매원으로 채용하다니 !'하고 외치던 백화점 손님, '경관을 불러 취조해 봐야겠다'고 위협하던 부지배인의 목소리. 그 럼에도 불구하고 트레이시는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토요일 밤쯤에는 어떨까? 하인들은 토요일 정오에 저택을 나오니까. 당신이 쓸 다른 이름의 운전 면허증과 크레디트 카드를 마련해 두지. 맨 해턴에서 차를 빌려 타고 밤 11시에 도착하도록 롱 아일랜드까지 운전해 가면 돼. 보석을 훔친 후에는 뉴욕으로 돌아와서 차를 돌려보내고. 차는 운전할 줄 알겠지? 그렇지?" 콘래드 모건은 말했다. "네" "그럼 됐어. 그 다음에야 말이야, 아침 7시 45분에 출발하는 세인트 루 이스행 기차가 있어. 그 차에 방을 예약해 두겠어. 당신과는 세인트 루이 스 역에서 만나 거기서 보석과 맞바꿔 2만 5천 달러를 주지." 모건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덤덤하게 말했다. 거절하려면 바로 지금이 그 기회이다. 못하겠다고 말하고 나가면 그만 이다. (하지만 어디로 간단 말인가?) "금발 가발이 필요해요." 트레이시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트레이시가 방을 나가자 콘래드 모건은 어두운 사무실에 앉아서 트레 이시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굉장한 미인이다. 아니, 정말 아름답다. 아 까울 지경이다. 그 저택의 경보장치에 관해서는 실은 자기도 그다지 잘 알고 있지 않다고 그녀에게 말해주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하고 그는 걱 정을 하기 시작했다. [67] 제목 : 제16장 나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 1 제 16 장 콘래드 모건이 선불해준 1,000달러로 트레이시는 블론드 가발 두 개를 샀다. 감색 바지와 슈트, 검정색 작업복 그리고 모조 구찌 여행가방등도 렉싱톤 거리의 노점상에서 구입했다. 거기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 행되었다. 모건이 마련해 주겠다고 약속한 것을 트레이시는 받았다. 엘렌 브란치 명의의 운전면허증, 베라미 부인 저택의 보안장치 일람표, 침실의 금고를 여는 숫자맞춤표, 그리고 세인트 루이스 행 특실 기차표 등이 봉투에 들 어 있었다. 모든 준비를 끝내자 트레이시는 몇가지 안 되는 소지품을 간추려 싸구 려 아파트에서 나왔다. (두번 다시는 이런 곳에 살지 않겠어.) 트레이시는 자신에게 맹세했다. 그리고 렌트카를 빌려 롱 아일랜드로 향했다. 마침내 도둑으로서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그녀는 자기가 하려고 하고 있는 일에 아무래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 았다. 그러나 무턱대고 무서웠다. 붙잡히면 어쩐담? 지금부터 하려고 하 는 일은 과연 이런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는 것일까? '어처구니 없을 만큼 간단해.' 콘래드 모건은 그렇게 말했다. (만약 이것이 위험한 일이라면 모건도 자기 목을 밀어 넣지는 않았겠 지. 그는 자기의 사회적 지위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러고 보니 나에게도 사회적 지위가 있었지. 기막힌 지위지만 말이야. 아주 보잘것없 는 보석한 개만 없어져도 무죄라는 것이 밝혀질 때까지 죄인 취급을 당 하는 지위 말이야.) 트레이시는 씁쓸하게 생각해 보았다. 트레이시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분노에 못 이겨서 하는 거야. 가슴이 끓어올라서 죄를 범하는 거야, 라고. 그러나 그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소용이 없었다. 저택이 위치한 벼 랑에 닿을 무렵에는 신경이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두번이나 차를 길 밖 으로 벗어나게 할 정도였다. (경찰관이 난폭 운전으로 나를 잡을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이 일을 해 내지 못한 이유를 모건에게 변명할 수 있을 텐데...) 트레이시는 차라리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경찰차같은 것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거지 뭐. 필요할 때일수록 경찰은 보이지 않는 거라구.) 트레이시는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있었다. 콘래드 모건의 지시대로 트레이시는 롱 아일랜드만 쪽으로 차를 몰아 갔다. '목표인 저택은 해변가에 서 있어. 빅토리아조 형식의 건물이지. 지나쳐 버리지는 않을 거야" (하느님 ! 제발 그 집을 지나쳐 버리게 해 주세요.) 트레이시는 마음 속으로 빌었다. 그러나 그 저택은 이미 눈앞에 있었다. 악몽 속의 식인 도깨비의 성채 처럼 어둠 속에 우뚝 솟아 있었다.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하필이면 이럴 때 하인들이 휴가 중이람. 모두 모가지시켜 버려야 해.) 트레이시는 분개했다. 트레이시는 큰 버드나무 뒤에 차를 대고 길에서 잘 안 보이는 것을 확 인하고 엔진을 껐다. 들려오는 것은 벌레 소리 뿐, 달리 정적을 방해하는 것은 없었다. 저택은 큰 도로에서 떨어져 있고, 더구나 깊은 밤이라 지나 가는 차도 없다. "그곳 저택은 수목으로 뒤덮여 있어서 가장 가까운 이웃집도 몇 에이커 나 떨어져 있어. 따라서 누구에게도 들킬 염려가 없지. 사설 경비원들이 도는 순찰은 오후 10시에 있고, 다음 차례는 새벽 2시야. 2시의 순찰때까 지는 당신은 충분히 떠나고도 남지.' 트레이시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두번째 순찰을 돌 때까지 3시간이나 있 다. 아니 3시간씩은 필요 없어. 3초만 있으면 차를 빙 돌려서 뉴욕으로 돌아가 이런 어리석은 짓을 잊을 수가 있다. 그러나 돌아간다고 한들 무 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트레이시의 뇌리에 또 다시 지금까지의 장면이 번갈아 나타났다. 백화점 부지배인의 목소리. '안 됐지만 휘트니 양, 우리로서는 손님들의 기분을 상하게 해 드릴 수가 없어요... '컴퓨터 관계 일은 역시 무리겠군. 전과가 있으면 어느 회사도 고용하 려고 하지 않으니까...' '겨우 한두 시간에 보수는 2만 5천 달러. 세금도 한푼 안 떼고 말이야.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면 그럴 필요는 없다고 단언하겠어. 정말 탐욕스럽 고 무자비한 여자니까.' (나는 도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도둑 따위는 아니 야, 진짜 도둑과는 달라. 신경이 돌아버린 바보같은 아마추어지 뭐. 만약 내가 아직도 제정신이라면 시간이 있는 동안에 여기서 도망쳐야 해. 우물 쭈물하고 있다간 경찰 저격반이 달려와 나를 겨냥하고 쏘아서 구멍투성 이가 된 나의 시체를 안치소로 운반하겠지. 신문의 제목이 보이는 것같 아. '가택 침입중이던 위험한 범인 사살되다'라는 글씨가 말이야.)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나의 장례식에는 누가 와서 울어줄까? 어네스틴과 에미? 트레이시는 시계를 보았다. (이런! 큰일이네.) 멍청히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에 20분이 지나 있었다. (행동을 개시해야지. 이곳에 영원히 앉아 있을 수도 없잖아.) 트레이시는 행동을 개시할 수 없었다. 공포로 온몸이 얼어붙어 버린 것 이다. 트레이시는 자신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좌우지간 가서 집 구경이나 하자구. 잠시 말이야.) 트레이시는 크게 숨을 쉬고 차에서 내렸다. 검정색 작업복을 입고 있었 지만 무릎이 와들와들 떨렸다. 트레이시는 천천히 저택으로 접근해갔다. 저택 안은 깜깜했다. (장갑을 잊어버리면 안 돼 !) 트레이시는 손을 뻗어 장갑을 꺼내 그것을 두 손에 썼다. (아아, 어쩌면 좋아. 난 벌써 시작하고 있잖아. 내가 정말로 도둑질하러 들어가고 있는 거야.)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심장의 격렬한 고동 소리가 들리고 다른 소리는 트레이시의 귀에는 들 어오지 않았다. '경보기는 현관 왼쪽에 있어. 다섯 개의 단추니까 금방 알 수 있지. 빨 간 불이 켜져 있을 거야. 경보기가 작동하고 있다는 표시야. 그것을 해제 하는 코드는 3-2-4-1-1. 빨간 불빛이 꺼지면 경보기가 끊어진 거야. 현관 의 열쇠는 이거. 안에 들어가면 반드시 문을 닫아 둘 것. 자아, 이 회중전 등을 받아. 누군가가 차로 지나갈지도 모르니까 집안에서는 어떤 불빛도 켜면 안 돼. 주인의 침실은 2층에 있어, 거기서 왼쪽으로만이 바라보이고 로이스 베라미 부인의 초상화 뒤에 금고가 있다. 열기 쉬운 금고야. 이것 이 그 숫자 맞춤표야.' 트레이시는 아무리 희미한 소리도 놓치지 않으려고 흥분에 떨면서 귀 를 기울였다. 적막하기 그지없다. 트레이시는 경보기에 손을 뻗어 그것이 작동하지 않기를 빌면서 천천히 단추를 눌러 갔다. 빨간 불빛이 꺼졌다. 다음 행동은 트레이시의 인생을 결정하게 된다. 비행기의 파일럿들이 사용하는 말이 머리를 스쳤다. (귀환불능지점 ) 트레이시는 열쇠를 사용하여 현관문을 열고 10분 간격을 두고서 안으 로 들어갔다. 공포로 꼼짝도 못하고 그저 귀를 곤두세운 채 복도에 서있 는데 온몸의 신경이 숨가쁘게 똑딱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택 안은 인기척이라곤 없는 정적에 싸여 있었다. 트레이시는 회중전등을 꺼내어 불을 켜고 계단을 비추며 위로 올라갔다. 이제 이렇게 된 이상, 1초라도 빨리 이 일을 끝마치고 어서 빨리 도망쳐 버려야 하는 것이다. [68] 제목 : 제16장 이 여자는 몸매가 꽤 괜찮군. - 2 2층 복도는 회중전등의 불빛으로 으스스해 보였다. 트레이시가 걸으면 광선이 움직이는데 따라서 벽이 전후좌우로 물결치듯 혼들렸다. 트레이시 는 지나치는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모두 적막 강산이다. 주인의 침실은 복도의 막다른 곳에 있었고 모건의 설명대로 거기서 만이 바라다 보였다. 멋진 침실이었다. 전체가 밝은 핑크 빛이며 거기에 천정이 달린 침대와 핑크빛 장미꽃 장식이 달린 이동식 세면대가 갖추어져 있다. 2인용 팔걸 이 의자와 난로가 있고, 그 바로 앞에는 식사를 할 수 있는 테이블이 놓 여 있었다. (나는 이런 집에서 찰스와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 생각이었어.)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전망창으로 걸어가 밖을 내려다보니 저멀리 만에는 배가 정박되어 있 었다. (하느님 ! 가르쳐 주십시오. 로이스 베라미가 이같은 아름다운 집에서 살고, 나를 거기에 도둑질하러 들어가도록 결정하신 것은 어떤 연유에서 입니까? 어머나, 뭘 이제와서 감상적이 되어 있는 걸까. 도둑질하는 것도 딱 이번 한번 뿐이야. 불과 몇 분만에 끝나고 만다고.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거야.) 트레이시는 창문에서 떨어져 모건이 가르쳐 준 초상화 쪽으로 걸어갔 다. 로이스 베라미 부인이 엄숙하고 오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건이 말한 대로야. 탐욕스럽고 무자비하게 생긴 여자로군.) 그 초상화를 앞으로 당기니 작은 금고가 있었다. 트레이시는 금고를 여 는 맞춤 번호를 외우고 있었다. (우로 3번 돌려 42에서 정지. 좌로 두번 돌려 10에서 정지. 다시 우로 한번 돌려 30에서 정지.) 트레이시는 손이 떨려 두 번이나 다시 돌려야 했다. 찰칵 소리가 나고 금고 문이 열렸다. 금고에는 두툼한 봉투나 서류가 많이 들어 있었는데 트레이시는 그것 들을 무시했다. 안쪽에 있는 작은 선반 위에 세무가죽의 보석 주머니가 놓여 있다. 트레이시는 손을 뻗어 선반에서 보석주머니를 집어들었다. 그 순간, 도난 경보기가 작동을 시작했다. 트레이시가 난생 처음 듣는 것같 은 큰 소리였다. 그 소리는 저택 내의 모든 방향에서 울려대며, 도둑의 존재를 큰 소리로 알리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충격을 받은 나머지 그 자 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떻게 된 거지? 보석에 손을 대면 금고 안의 경보장치가 작동한다는 것을 콘래드 모건은 몰랐던 걸까?) 잽싸게 탈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트레이시는 세무가죽 주머니를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계단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그때 경보기 소리에 겹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다가오는 사이렌 소리였다. 트레이시 는 경악하여 계단 위에 우뚝 서 버렸다. 심장이 마구 뛰고 입속은 바싹바 싹 타들어 갔다. 서둘러 창가로 달려가 커튼을 제치고 밖을 내다보았다. 경찰차가 이 저택의 현관 앞에 멎는 참이었다. 트레이시가 보고 있는 동 안 제복 경관 한 사람이 집 뒤쪽으로 돌아가고 또 한 사람이 현관 쪽으 로 달려갔다. 탈출구는 막혔다. 경보벨은 아직도 계속 울려대고 있다. 그 러자 갑자기 그 소리는 트레이시의 머리 속에서 남루이지애나 여자 교도 소 복도에 울려퍼지는 그 무서운 벨 소리로 바뀌었다.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그런 곳에는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어.) 현관의 초인종이 힘차게 울렸다. 멜빈 더킨 경장은 이곳 씨 크리프 경찰서에 10년간 근무하고 있다. 씨 크리프는 조용한 도시여서 경찰의 임무라고 하면 기물 파손이나 드물게 일어나는 자동차 도둑, 그리고 토요일 밤에 이따금 있는 주정뱅이들의 싸 움을 처리하는 정도였다. 그러므로 베라미 저택의 경보장치가 작동한 것 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이거야말로 더킨 경장이 고대하던 본격적인 도둑 이다. 더킨 경장은 로이스 베라미와는 대면한 적이 있으며 부인이 그림이 나 보석 등 값비싼 수집품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경장은 부인이 부재중에 가끔 저택을 순시하곤 했다. 빈집털이들에게는 안성맞춤 의 표적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한 마리 걸린 것 같은데.) 더킨 경장은 생각했다. 경비 회사로부터 호출이 왔을 때 더킨은 불과 1구역밖에 떨어지지 않 은 곳에 있었다. (요놈이 나의 경력에 빛을 내주겠는걸. 굉장한 빛을!) 더킨 경장은 다시 현관 초인종을 눌렀다. 벨을 3번 울리고 나서 안으로 뛰어 들었다고 보고서에 써넣고 싶었다. 동료가 뒷문을 지키고 있으므로 도둑이 탈출할 통로는 없다. 도둑놈은 저택 안 어딘가에 숨으려 하겠지만 쓸데없는 짓이다. 이 멜빈 더킨경장님 의 눈을 속이고 숨을 수 있는 놈은 있을 리가 없다. 경장이 세 번째 초인종을 누르려고 손을 뻗자 그 순간, 현관 문이 열렸 다. 더킨은 놀라서 그 자리에 우뚝 섰다. 현관에는 훤히 비치는 나이트 가운을 걸친 여인이 서 있었다. 이건 경장의 온갖 상상을 뒤엎은 것이었 다. 팩을 한 얼굴에다 머리에는 캡을 쓰고 있었다. 나이트가운을 입은 여인은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더킨 경장은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어... 그... 당신은 누구십니까?" "엘렌 브란치예요. 로이스 베라미의 손님이죠. 그녀는 유럽에 가 있어 요." "네에, 그건 알고 있습니다. 베라미 부인은 손님이 온다는 얘기를 저에 겐 하지 않았습니다만." 경장은 완전히 당혹했다. 현관 앞의 여성은 그럴 것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스는 그런 사람이에요. 잠깐 실례해요. 이 시끄러운 소음은 정말 참을 수가 없군요." 더킨 경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로이스 베라미의 손님이 경보기에 손을 뻗어 익숙한 손놀림으로 맞춤 번호를 누르자 소리는 멈췄다. "이제야 됐군. 어쨌든 와 주셔서 기뻐요." 여성은 한숨을 돌리고 불안한 듯이 웃었다. "막 침대에 들어가려던 참인데 경보기가 울리기 시작하지 뭐예요. 도둑 이 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저 혼자 뿐이잖아요. 일하는 사람들은 낮에 모두 돌아가 버렸으니까요." "집안을 수색해도 상관없겠습니까?" "좋아요. 어서 그렇게 해 주세요." 경장과 동료는 저택 안을 살펴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는데 몇분 도 채 안 걸렸다. "샅샅이 돌아보았습니다. 경보기가 잘못 작동한 것입니다. 뭔가 잘못되 어 울렸겠지요. 이런 전자기기에는 가끔 있는 일입니다. 경비회사에 전화 하여 조사해 보는 것이 좋으실 것입니다." 더킨 경장은 말했다. "네에, 곧 그렇게 하지요." "그럼 우리는 철수하는 것이 좋겠군." 경장은 동료에게 재촉하듯 말했다. "서둘러 와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이제는 나도 안심하고 잘 수 있겠어 요." (이 여자는 몸매가 꽤 괜찮군.) 더킨 경장은 생각했다. 그리고 또 팩을 벗긴 맨얼굴은 어떨까 하고 제 멋대로 상상해 보았다. 이곳에는 언제까지 계실 겁니까, 브란치 부인." "1, 2주일쯤 더 머물 거예요. 로이스가 돌아올 때까지." "무슨 일이 있거든 언제든지 연락해 주십시요." "고맙습니다. 그렇게 하죠." 트레이시는 순찰차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도한 나머지 잠시 비틀거렸을 정도였다. 순찰차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트레이시는 급히 계단을 달려올라가 욕실에서 발랐던 팩을 씻어내 고 로이스 베라미의 컬러 캡과 나이트 가운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는 자 기의 검정색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현관을 나와 경보기를 신중히 작동시 켰다. 맨해턴으로 돌아가는 길에 절반쯤 와서, 트레이시는 그제야 자기가 취 한 대담한 행위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웃음이 솟아올랐다. 쿡쿡 나오던 웃음이 커다란 웃음이 되고 그 웃음을 그칠 수 없게 되었다. 차를 길가에 세우고 계속 웃었다. 눈물로 얼굴이 흥건해질 때까지 웃었다. 1년만에 웃 어보는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의 통쾌한 웃음이었다. 뭐라고 표현할수 없는 기막힌 쾌감이었다. [69] 제목 : 제17장 정적이 감도는 밤... 경보기를 해제하고 - 1 제 17 장 열차가 펜실베이니아 역을 출발하자 트레이시는 겨우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때까지는 줄곧 완강한 손에 어깨를 붙잡혀 다음과 같이 무 겁게 선고되는 공포에 떨었다. "너를 체포한다." 트레이시는 열차에 타고 있는 승객을 한 사람 한 사람 주의깊게 살펴 보았다. 그러나 수상해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트레이시의 어깨는 긴장이 풀어지지 않고 굳어 있었다. 그 저택에서의 도둑질이 이렇 게 빨리 드러날 리는 없다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만약 들통이 났다해도 그것과 자신을 연결시켜 줄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콘래드 모건이 2만 5천 달러를 가지고 세인트 루이스 역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2만 5천 달러나 되는 돈을 내멋대로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의 돈을 가지려면 은행에서 1년간 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한다. (유렵 여행을 해야지. 파리가 좋겠지?)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아냐, 싫어. 말도 안 돼. 파리는 가지 않겠어. 그곳은 찰스와 신혼여행 을 가기로 약속했던 곳이다. 런던으로 가자. 그곳이라면 해방감을 맛볼수 있겠지.) 베라미 저택에서의 체험은 트레이시의 내면에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마 치 다른 인격이 몸 안에 들어온 것 같은, 마치 새로 태어난 듯한, 신기한 재생감이다. 트레이시는 개인 객실의 문을 걸고 세무가죽 주머니를 열어 안에 들어 있는 것을 꺼내어 보았다. 일곱 가지 빛을 발하며 떨어지는 폭포처럼 보 석이 그녀의 손 안에 떨어졌다.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가 3개, 에메랄드 브로치가 하나, 사파이어 팔찌 한개, 귀고리가 3짝, 거기에 진주와 루비 목걸이가 하나씩이다. (이 보석을 모두 합하면 백만 달러는 훨씬 넘을 거야.) 트레이시는 경탄하고 있었다. 전원지대를 달리는 열차에 혼들리면서 트레이시는 시트에 등을 기대고 지난 밤 이래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차를 빌려서... 씨 크리프의 거리 로 달려... 정적이 감도는 밤... 경보기를 해제하고 집안으로 잠입하여... 금 고를 여는데... 경보기가 울리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나타난 경찰. 도둑을 찾으러 왔는데 속살이 드러나는 나이트 가운을 입은 여자가 팩을 붙인 얼굴로 캡을 쓴 채 나타나리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인트 루이스행 열차의 개인 객실에 앉아 있는 트레이시의 얼굴엔 만 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경찰을 골탕먹인 것은 실로 통쾌한 일이었다. 위험해 처했을 때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쾌감을 맛볼 수 있었다. 자신이 대담하고 영리한 무적의 여인처럼 느껴졌다. 정말이지 절대적으로 훌륭했 다고 까지 생각되었다. 누군가가 그녀의 객실 문을 노크했다. 차장인 것 같다. 트레이시는 서 둘러 보석을 세무가죽 주머니에 넣고 여행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승차권 을 손에 들고 문을 열었다. 복도에는 회색 양복을 입은 두 남자가 서 있었다. 한 사람은 30대 초반 이고 또 한 사람은 그보다 10살 정도는 연상인 것같았다. 젊은 쪽은 호남 형의 스포츠맨 타입인 근육질의 남자였다. 그는 억센 턱에 깜은 콧수염을 길렀고, 안경 안쪽에는 이지적인 푸른 눈이 빛나고 있었다. 연장자 쪽은 더부룩한 머리카락, 뚱뚱한 체형에 눈은 차가운 갈색이었 다. "무슨 일이신가요?" 트레이시는 물었다. "실례합니다." 연장자가 정중하게 대답하면서 검은색 패스포트를 꺼내 신분증명서를 제시했다. <미합중국 연방 수사국(FBI)> "저는 특별수사관 데니스 트레버이고 이 사람은 특별수사관 톰 바워즈 입니다." 트레이시는 갑자기 입안이 바짝 말랐다. 가까스로 억지 미소를 지었다. "저어...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요. 뭔가 잘못 아신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잘못 안 것이 아닙니다." 젊은 남자가 말했다. 부드러운 남부 사투리였다. "몇분 전에 이 열차는 뉴저지 주로 진입했습니다. 도난품을 타 주로 운 반하는 것은 연방법 위반입니다." 트레이시는 눈 앞이 아찔했다. 눈 앞에 붉은 안개가 피어을라 모든 것 이 흐릿하게 보였다. 연장자인 데니스 트레버가 말했다. "여행가방을 열어 주시겠습니까?"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이런 경우를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허세를 부릴 수밖에 없다. "물론 사절하겠어요! 무슨 권리로 이렇게 남의 객실에 들이닥칠 수있는 거죠? 당신들은 이렇게 무고한 시민을 들볶는 일밖에는 할 줄 모르나요? 차장을 부르겠어요." 트레이시는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차장에겐 이미 양해를 구해 놓았습니다." 연장자인 트레버가 말했다. 허세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수사... 수색 영장이 있나요?" 젊은 남자가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들에게는 수색영장 같은 것이 필요 없습니다. 휘트니 씨. 현행범체 포입니다." [70] 제목 : 제17장 그런 정도는 앞으로 그녀의 운명에 비하면 -2 FBl는 그녀의 이름까지 알고 있다. 완전히 꼼짝할 수 없게 조여온 것이 다. 벗어날 방법은 없다. 만사가 끝장난 것이다. 트레버는 트레이시의 여행가방을 열려고 했다. 저지할 방법은 전혀없 다. 트레이시가 지켜보는 가운데 트레버가 가방에서 세무가죽 주머니를 꺼내었다. 주머니를 열어 상대방에게 보여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트레이 시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갑자기 서 있을 힘조차 빠져 버리고 만 것이다. 트레버는 주머니에서 증서를 빼내어 물건과 대조해 보고는 보석 주머니 를 포켓 속에 넣었다. "전부 들어 있군, 톰." "어떻게... 어떻게 알게 되었죠?" 트레이시는 비참한 기분이 되어 물었다. "수사상의 비밀을 함부로 외부에 누설할 수는 없소. 당신을 체포하겠소. 당신은 묵비권과 뭔가 말하기 전에 변호사를 부를 권리가 있습니다. 당신 이 지금부터 말하는 것은 모두 증거로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 겠죠?" 트레버가 말했다. 트레이시의 대답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희미했다. "네." 젊은 쪽인 톰 바워즈가 말했다. "정말 유감이오. 당신의 경력을 알고 있는 이상 정말 유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군요."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연장자인 트레버가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트레버가 수갑을 꺼내며 트레이시의 얼굴을 보았다. "자아, 양손목을 나란히 내어놓으시오." 트레이시는 너무 괴로워서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뉴올리언즈공 항에서 수갑이 채워져 끌려나오자 주위 사람들이 흘끔흘끔 돌아다보던 때의 광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죄송합니다만 꼭 그래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젊은 쪽의 남자가 말했다. "잠시 둘이서 애기하고 싶은데요, 데니스" "좋아." 두 남자는 복도로 나갔다. 트레이시는 절망감에 빠져 멍청하게 맥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단편적으로 들려왔다. "부탁해요 테니스 수갑을 채울 것까지는 없잖아요. 저 여자는 어디로 도망갈 수도 없고..." "자넨 언제까지 보이스카웃에 속한 소년처럼 굴 셈인가? 나처럼 수사국 에 오래 있으면 " "그렇게 거칠게 다루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저 여자는 너무나 충격을 받아서..." "그런 정도는 앞으로의 그녀의 운명에 비하면... " 이 대화의 뒷부분은 트레이시로서는 더 이상 듣기 괴로운 것이었다. 듣고 싶지 않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방으로 돌아왔다. 연장인 남자는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좋소 수갑은 채우지 않기로 하겠소. 다음 역에서 당신을 내려 주겠소. 무선으로 수사국의 차를 불러낼 테니까 이 객실에서 꼼짝 말고 계시오. 알겠소?" 연장자가 말했다. 트레이시는 끄덕였다. 너무 낙담하여 대답할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젊은 남자인 톰 바워즈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동정을 표했다. '뭔가 좀 도와주고 싶소.'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아무 것도 도와줄 것이 없었다. 이제와서는 아무 것도 필요 없다. 너무 늦었다. 나는 현행범으로 잡히고 말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경찰은 나를 미행하여 FBI에 알린 것이다. 수사관은 복도로 나가 차장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바워즈가 트레이시 를 가리키며 뭐라고 말하고 있다. 차장이 끄덕이자 바워즈는 객실의 문을 닫았다. 트레이시에겐 감방 문이 탁하고 닫힌 것처럼 느껴졌다. 달리는 열차의 창을 액자로 하고 평온한 전원풍경이 점차로 사라져간 다. 그러나 트레이시에겐 풍경을 감상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공포에 떨며 넋이 나간 채 앉아 있었다. 열차가 내는 소리와는 다른 굉음이 트레 이시의 귀에서 울렸다. 이번에 들어가면 이젠 끝장이다. 두 번째 범행이 다. 무거운 판결이 떨어질 것이다. 이번에는 소장의 딸을 구조한다는 우 연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 절망적이 고 끝도 없는 기나긴 교도소 생활을 보내야 한다. 빅 바사가 기다리고 있 는 그 지옥같은 곳에서 ! (어디에서 범행이 탄로난 것일까?) 이번 도난 사건을 알고 있는 것은 콘래드 모건 단 한 사람뿐이다. 그가 나를 함정에 빠뜨릴 까닭은 없다. 보석을 FBl에게 내줄 이유도 없을 것이 다.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모건 보석상점의 누군가가 계획을 알아차리 고 경찰에 밀고했을 가능성 정도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해보았자 이제와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체포되고 말았다. 열차가 멈추면 다시금 교도소로 끌려 돌아가게 된다.취 조받고, 재판을 받고 그리고 트레이시는 눈을 꼭 감고 그 이후의 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열차가 속도를 떨어뜨렸다. 트레이시는 충분한 공기를 마시려고 깊이 숨을 들이켰다. 아까의 두 사람이 그녀를 데리러 곧 들어올 것이다. 역이 시야에 들어오고 이윽고 열차는 덜커덩 흔들리며 정차했다. 일어날 시간 이다. 트레이시는 여행가방을 잠그고 코트를 입고 앉았다. 닫혀진 상태인 문쪽에 눈길을 주고 그것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몇 분이 지났다. 두사람 의 수사관은 나타나지 않았다.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트레이시는 그들 이 한 얘기를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다음 역에서 당신을 내려주겠소. 무선으로 수사국의 차를 불러낼 테니 까 이 객실에서 꼼짝 말고 계시오.' 그때 트레이시는 차장의 목소리를 들었다. "전원 승차..." 트레이시는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한 수사관은 플랫폼에서 기다린다고 말했던가. (틀림없이 그런 것 같아.) 이대로 열차 안에 있으면 FBl는 도피죄로 나를 몰아세워 상황이 더욱 더 불리하게 되고 말것이다. 트레이시는 여행가방을 들고 객실 문을 열고 복도로 뛰어 나갔다. 차장이 다가왔다. "당신도 이 역에서 하차하십니까, 아가씨?" 차장이 물었다. "그렇다면 서둘러야죠. 도와드릴께요. 당신같은 분은 짐을 들지 않는 편 이 좋으니까요." 트레이시는 차장을 바라보았다. "나같은 사람이라뇨?" "이상하게 생각하실 것 없어요. 아가씨의 오라버니께서 여동생이 임신 중이니까 잘 보살펴 달라고 나에게 부탁했으니까요." "저의 오라버니요?" "좋은 분들이시더군요. 두분 모두 다. 당신을 정말로 걱정하고 계시더군 요." 세계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차장은 가방을 차량 출구까지 옮겨주고 트레이시가 내려서는 것을 도 와주었다. 열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빠들이 어디로 갔는지 혹시 아시나요?" 트레이시는 소리를 높여 물었다. "아뇨, 모르겠습니다. 두분 은 열차에서 내려 급히 택시를 타고 가시더 군요." 백만 달러 상당의 보석을 갖고 도망친 것이다. [71] 제목 : 제17장 연극에 걸려든 자신이 부끄러워 얼굴은...- 3 트레이시는 즉시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 외에는 그들이 갈만한 장소가 생각나지 않았다. 택시를 탔다는 것은 그들이 자동차도 비행기도 준비해 놓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두 사람은 한시라도 빨리 이도시를 벗어나고 싶어할 것이다. 트레이시는 택시에 올라탔으나 억울하고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몰랐다. 왜 그렇게 쉽게 속아넘어갔는지 자기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들은 정말 멋 지게 사기를 쳤다. 두 사람 모두 능수 능란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빨려 들어간 것이다. 저 딱 들어맞는 엄격한 수사관 역할과 동정하는 역 할의 수사관 연극에 걸려든 자신이 부끄러워 트레이시의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었다. '부탁해요 데니스, 수갑을 채울 것까지는 없잖아요. 저 여자는 어디로 도망갈 수도 없고...' '자넨 언제까지 보이스카웃의 소년처럼 굴 셈인가? 나처럼 수사국에 오 래 있으면...' 수사국? 홍! 그들도 법에 쫓겨다니는 인간들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 보석을 도로 찾는 거다. 이렇게 속아넘어가고 나서 울면서 포기할 수 는 없어. 백만 달러 상당의 보석인 것이다. 빨리 가자. 어떻게 해서든지 공항에서 따라 잡아야 한다. 트레이시는 좌석에서 몸을 내밀며 운전사에게 재촉했다. "좀더 빨리 갈 수 없어요? 부탁이에요. 매우 바쁘거든요." 두 사람은 공항 탑승구 줄에 서 있었다. 트레이시는 두 사람을 얼른 알 아보지 못했다. 톰 바워즈 라고 이름을 댔던 젊은 남자는 안경을 벗어 버 렸고 눈빛은 푸른색에서 회색으로 바뀌어져 있는데다가 콧수염도 온데간 데 없었다. 데니스 트레버라고 한 남자는 더부룩한 머리가 지금은 반들반 들한 대머리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두 사람을 보고 그냥지나치지 는 않았다. 그들은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탑승 구에 거의 다다른 순간 트레이시가 뒤쫓아갔다. "여보세요, 잊으신 것이 있잖아요." 트레이시는 뒤에서 말을 걸었다. 두 사람은 뒤돌아보고 트레이시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젊은 남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당신이 왜 여기 있지? 당신을 연행하기 위한 수사국의 차가 역에 대기 하고 있었을 텐데." 기차에서 쓰던 남부 사투리가 아니었다. "그러면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차를 찾아보시면 어떨까요?" 트레이시가 비꼬며 말했다. "그럴 수가 없소. 다른 사건이 발생했다는 연락을 받았소, 그쪽으로 가 려고 이 비행기를 타는 것이오" 트레버가 설명했다. "얘기는 나중에 하고, 제게 보석을 돌려줘요." 트레이시는 요구했다. "그건 무리한 요구요. 이건 증거품이오. 나중에 수령서를 보내 주겠소" 톰 바워즈가 대답했다. "필요 없어요, 수령서 따위는. 보석을 돌려줘요." "미안하지만 압수한 물건을 되돌려 줄 수는 없는 것이오." 트레버가 말했다. 두 사람은 탑승구에 도달했다. 트레버가 안내계에 탑승권을 건넸다. 다급해진 트레이시가 주위를 돌러보자 공항 경찰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트레이시는 큰 소리로 불렀다. "경찰아저씨 ! 경찰아저씨 !" 두 남자는 깜짝 놀라 서로 마주 보았다. "이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응? 세 명이 함께 체포되고 싶어서 그 래?" 트레버가 기겁을 해서 말했다. 경찰관이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무슨 문제가 생겼나요?" "저어, 별로 문제랄 것은 없구요. 여기 친절하신 두 분이 제가 잃어 버 렸던 매우 소중한 보석을 찾아 주셨거든요. 그것을 건네주시려고 하는 순 간이었어요. 전 이 건으로 FBI에까지 조사를 의뢰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트레이시는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남자는 극도로 당황한 눈으로 서로를 보았다. "이 두 분은 제가 경찰에게 택시까지 안내해 달라고 부탁하면 안심하겠 다고 하시는데, 그렇게 해 주시겠어요?" "별로 어렵지 않은 부탁이군요, 기꺼이 택시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트레이시는 두 남자를 돌아다보았다. "이젠 그 보석을 제게 건네주셔도 괜찮아요. 이렇게 든든한 경찰 아저 씨가 저를 지켜 주시니까요." "아니, 그건 별로 우리들이 호위하는 편이... " 톰 바워즈가 항변했다. "아뇨, 그건 안 돼요. 그렇게까지 신세를 질 수는 없어요. 당신들이 얼 마나 이 비행기를 타고 싶어하시는지 전 알고 있거든요." 트레이시는 말했다. 두 남자는 경찰관을 슬쩍 보고는 체념한 듯이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이 경우 두 사람이 취할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마지못해 톰 바워즈가 포켓에서 세무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거예요!" 트레이시는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바워즈로부터 주머니를 받아 주머 니를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머나, 고마워요. 전부 있군요." 톰 바워즈가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다. "우리들이 목적지까지 보관했다가..." "그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트레이시는 명랑하게 말을 가로막았다. 핸드백을 열어 보석을 집어넣고 5달러짜리 지폐를 두 장 꺼냈다. 트레이시는 두 사람에게 한 장씩 건네주 었다. "이건 제가 드리는 아주 보잘 것 없는 답례예요. 친절에 정말 감사드립 니다." 다른 승객들은 이미 탑숭 을 끝내고 있었다. 탑승구의 담당직원이 두남 자에게 재촉했다. "이미 마지막 안내방송이 끝났습니다. 여러분, 빨리 탑승해 주십시오." "그럼 택시 정류장까지 부탁드립니다." 트레이시는 웃는 얼굴로 경찰관에게 말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 걸으면 서 경찰관에게 즐거운 듯이 말했다. "요즘 보기 힘든 정직한 분들이에요." [72] 제목 : 제18장 언젠가는 이것이 전부 네 것이 될 거야 - 1 제 18 장 미남자 톰 바워즈, 본명 제프 스티븐스는 창가의 좌석에 앉아 이륙하는 비행기에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손수건을 꺼내어 눈에 대고 서 어깨를 들먹이기 시작했다. 연장자인 데니스 트레버, 본명 브렌던 히긴스가 그의 옆자리에 앉아 놀 라서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이, 이봐! 그까짓 것가지고 울 건 없잖아." 브렌던 히긴스는 말했다. 제프 스티븐스는 볼을 타고 내려오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히긴스를 보았다. 놀랍게도 제프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이다. "도대체 왜 그래? 웃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나." 히긴스는 말했다. 그러나 제프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트레이시 휘트니 가 공항에서 그들을 빼돌린 수법은 제프의 사기 인생에서 목격한 가장 멋진 수법이었다. 속임수 중의 속임수, 최고의 사기였다. 보석상 모건은 우리들에게 여자는 아마추어라고 얘기했었지. (이것 참 큰일났군! 저 정도의 아마추어라면 프로가 되면 어떻게 될까.) 제프는 생각했다. 또한 트레이시 휘트니는 제프 스티븐스가 여태까지 만났던 여자들 중 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자였다. 그리고 머리가 좋다. 사기꾼계에서는 최고 의 사기꾼이라고 자부하고 있던 자신이 그녀에게 감쪽같이 당하고 만것 이다. (그녀라면 윌리 삼촌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을 거야.) 제프는 생각했다. 제프를 교육시킨 사람은 숙부인 윌리였다. 제프의 어머니는 농기구사업 으로 성공한 사람의 재산상속인이었으나, 재혼한 남자가 나빴다. 일확천 금만 꿈꾸며 함부로 경박한 사업에 손을 대는, 아첨에 약한 남자였다. 성 공한 사업은 한 가지도 없었다. 그러나 외모는 매력적인 사나이였다. 연 한 갈색의 피부빛에 잘 생긴 남자였으며 얘기도 시원스럽게 잘했다. 결혼 하여 5년쯤 되었을 무렵, 아내가 상속받은 재산을 거의 탕진해 버렸다. 따라서 제프가 철이 든 후의 기억이라고 하면 돈 아니면 부친의 바람기 때문에 말다툼을 하던 양친의 모습이었다. 양친의 비참한 결혼생활을 본 소년은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 그는 남몰래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난 결코 결혼을 하지 않겠어. 절대로!) 윌리 삼촌은 작은 순회흥행 카니발에서 한 자리를 맡고 있었는데 제프 가 사는 오하이오 주 마리온 가까이 을 때는 언제나 제프의 집에 들르곤 했다. 윌리 삼촌은 밝은 성격의 소유자로서 장미빛 미래를 믿는 낙천가였 다. 그리고 스티븐스의 집에 올 때는 언제나 제프에게 가슴 설레는 선물 을 안겨 주었고, 신기한 마술의 비밀도 가르쳐 주었다. 윌리 삼촌은 처음에는 마술사로서 그 카니발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오 락장 한 자리가 파산하자 그것을 이어받게 된 것이었다. 제프가 열네 살때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2개월 후에 새아버지는 19세의 술집 여종업원과 결혼했다. "남자 어른이 독신으로 사는 것은 부자연스런 일이란다." 새아버지는 그렇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소년 제프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어 적개심을 품었다. 새아버지의 냉담함에 배신감을 느꼈던 것이 다. 제프의 새아버지는 세일즈맨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1주일에 3일은 집을 비웠다. 어느 날 밤 계모와 두 사람만 있게 되었을 때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제프는 잠이 깼다. 잠시 후 제프는 부드러운 나체가 피부에 닿는 것을 느꼈다. 제프는 깜짝 놀라 상반신을 일으켰다. "안아줘, 제프. 나 천둥이 무서워." 계모가 속삭였다. "천둥같은 건 치지 않잖아요." 제프는 말을 더듬었다. "천둥이 칠 것 같아. 일기예보에 비가 올거라고 했거든." 계모는 몸을 점차 접근시키며 밀착시켜 왔다. "자아, 좋은 것을 가르쳐 줄께, 제프." 제프는 너무나 당황했다. "알았어요. 아버지 침대로 가면 어때요?" "좋아." 계모는 웃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재미있겠지?" "곧 갈께요." 제프는 약속했다. 계모는 제프의 침대에서 빠져나가 다른 침실로 들어갔다. 제프는 재빨 리 옷을 주워 입었다. 그리고 창으로 빠져나가 캔사스 주의 시메론으로 향했다. 윌리 삼촌의 카니발이 거기서 흥행중이었기 때문이다. 제프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윌리 삼촌에게 가출한 이유를 추궁당하자 그는 단지 이렇게 말할 뿐이 었다. "새엄마와 사이좋게 지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삼촌은 제프의 새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꽤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었 으나 결국 제프는 카니발에 남게 되었다. "어떤 학교에 가는 것보다도 여기에 남는 편이 너에게 좋은 교육이 될 거야." 윌리 삼촌은 그렇게 보증했다. 카니발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세계였다. "우리들은 고지식한 홍행은 하지 않아. 우리들은 사기 연예단이야. 그러 나 잘 기억해 둬, 꼬마야. 손님들이 탐욕스러운 마음을 갖기 전까지는 엉 터리로 해서는 안 돼. 우리들 대선배인 W.C. 힐즈의 히트한 영화에도 그 런 제목이 있었지. '욕심없는 자는 속일 수 없다' 라고 말이야." 윌리 삼촌은 제프에게 설명했다. 제프는 카니발의 성원들과 사이좋게 지냈다. 카니발에는 한창 나이의 여자들도 꽤 있어 모두 제프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제프는 모친을 닮아 품성이 착했고 부친을 닮아 용모가 수려했다. 그래서 주위의 여자들 은 제프의 동정을 둘러싸고 암투를 벌이고 있었다. 결국, 제프를 맨 처음 남자로 만든 것은 귀여운 아크로바트 곡예사였 다. 그 덕분에 그녀는 몇년간이나 다른 여성들에 대해서 우월감을 가질 수 있었다. 윌리 삼촌은 제프가 카니발의 모든 일들 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 주었 다. "언젠가는 이것이 전부 네 것이 될 거야, 그러니까 너는 다른 누구보다 도 이 일을 잘 알아야 해." 삼촌은 소년에게 말했다. [73] 제목 : 제18장 의심스러운 얘기라도 인간의 강한 탐욕이 - 2 제프는 멋진 여섯 마리 고양이의 엉터리 맞추기 게임을 배웠다. 그것은 돈을 낸 손님이 나무 대에 올려놓은 여섯 마리 고양이에게 볼을 맞추어 망 위로 떨어뜨리는 게임으로서 물론 고양이는 세공된 모조 고양이였다. 게임가는 얼마나 간단하게 고양이를 떨어뜨릴 수 있는가를 직접 시범해 보인다. 그러나, 손님이 직접 공을 던질 때는 조각된 고양이뒤에 숨어 있 는 보조원이 버팀목으로 단단하게 받친다. 명투수가 쳤다고 해도 고양이 는 도저히 떨어뜨릴 수 없도록 조작이 되어 있는 것이다. "아, 안타깝게도 위치가 약간 낮았군요. 손님, 힘보다 먼저 정신 통일을 시켜야 하는 거예요." 게임가는 말한다. '힘보다 먼저 정신 통일을' 하는 것이 암호로 되어 있어 게임가가 그말 을 한 순간, 숨어 있는 보조원이 버팀목을 내린다. 거기서 다시 게임가가 시범을 해 보인다. "자아, 잘 떨어지죠?" 그 말이 또 보조원에게 하는 암호로서 다시금 버팀목을 받치라는 의미 가 된다. 여자 친구에게 자기 실력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시골뜨기가 매번 봉이 되어 준다. 어느 날 윌리 삼촌은 제프에게 말했다. "넌 정말 무엇이든 잘 기억하는구나. 솜씨가 좋아. 이젠 슬슬 스킬로를 배워도 되겠구나." '스킬로'를 조작하는 사람은 재주꾼 중의 재주꾼으로 불리고 있으며 카 니발 내에서 실력을 인정받는다. 제일 돈을 잘 벌기 때문에 고급 호텔에 묵고 번쩍번쩍거리는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스킬로 게임이라고 하는 것은, 조작은 간단하다. 커다란 시계를 대 위 에 올려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문자판은 몇 개의 블럭으로 나뉘어 져 각 블럭에는 번호가 붙어 있다. 손님은 돈을 내고 시계 바늘을 돌린 다. 바늘이 멈춘 블럭의 번호가 지워진다. 손님은 또 돈을 걸고 돌린다. 바늘이 멈춘 블럭의 번호가 또 지워진다. 이렇게 블럭의 번호가 모두 지 워지면 손님에겐 막대한 상금을 지불하게 되어 있다. 손님이 이제 조금만 더하면 블럭을 모두 지우는 순간이 되면 바람잡이 한 사람이 주위를 둘 러보며 살짝 손님에게 속삭인다. "당신 운이 좋으니까 나도 한 몫 끼게 해 줘요." 그렇게 말하고 바람잡이는 손님에게 5달러 내지 10달러를 건넨다. "이것을 내 몫으로 해서 같이 걸어줘요. 질 리가 없으니까." 그런 얘기를 듣게 되면 손님은 공모자를 얻은 기분이 되어 자신감이 솟는다. 제프는 손님을 선동하는 데는 명인이었다. 나머지 블럭이 얼마 남지 않 아 승리가 가까워지면 손님의 흥분은 고조된다. "손님, 당신은 이제 맡아놓은 당상이군요!" 제프가 그렇게 큰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손님은 흥분하여 더 많은 돈 을 건다. 그리고 결국 블럭이 하나만 남게 되면 흥분이 최고조에 달한다. 이 때, 손님은 대체로 가진 돈 모두를 걸거나 집에 돌아가 있는 돈을 긁어모아 온다. 그러나, 손님이 이긴 적은 한 번도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배후 조종자 가 바늘을 반드시 '꽝' 블럭에서 정지하도록 조작하는 것이다. 제프는 카니발 특유의 은어를 곧 익혔다. "손톱,이라고 하는 것은 봉이 이기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구경거리 앞에 서서 손님들을 불러모으 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유객꾼'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동료들끼리는 '수 다장이'라고 한다. 이 '수다장이'는 모인 손님의 매상 10퍼센트를 배당받 는다. '슬램'은 가져가 버린 상금을 말한다. '우편배달'은 잔돈으로 부탁을 들 어주는 경찰관을 의미한다. 제프는 '허풍선이'로도 인정받고 있었다. 손님들이 구경거리를 보려고 입장료를 낼 때 제프는 줄줄줄 멋드러지게 지껄여댄다. "자아 자아, 신사 숙녀 여러분! 참 잘 오셨습니다. 입장료의 50퍼센트만 더 내면 바깥에 있는 사진과 그림과 글 그대로의 것을 몽땅 이 텐트안에 서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기의자에 꽁꽁 묶인 젊은 여성이 5만 와트의 전류가 몸에 흘러 고통에 발버둥치는 즉시 그 쇼와는 전혀 관계 없는, 간판에서도 선전하지 않은 특별한 쇼를 함께 구경하실 수 있습니 다. 이 텐트 안에 들어가면 머리털이 곤두서는 끔찍한 것을 볼 수 있습니 다. 그것들은 감히 밖에서는 선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순진한 아이들과 감수성이 예민한 여성들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말에 넘어간 사람들이 특별 요금을 지불하면 제프는 허리가 없는 소녀와 머리가 두 개 있는 갓난 아기를 보여주러 안으로 안내한다. 물론 그것은 거울을 사용한 트릭이다. 가장 벌이가 잘되는 카니발의 사기 중 하나는 '달리는 쥐'이다. 살아있 는 쥐 한 마리를 테이블 중앙에 놓고 그 위에 그릇을 덮는다. 테이블가에 는 10개의 구멍이 나 있고 그릇을 들어 올리면 쥐가 그 구멍 어딘가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손님은 각각 구멍의 번호에 건다. 쥐가 달려들어간 구멍을 고른 사람이 상금을 타게 되는 것이다. "저건 어떤 조작이 되어 있죠, 삼촌?" 제프는 윌리 삼촌에게 물었다. "쥐를 훈련시켜 놓았나요? 윌리 삼촌은 배를 움켜쥐고 웃어댔다. "쥐를 훈련할 시간이 어디 있니? 간단해. 배후 조종자는 아무도 걸지 않은 구멍을 잘 보아 두었다가 그곳을 기름 묻힌 손가락으로 슬쩍 만지 기만 하면 돼. 쥐는 언제나 기름이 묻은 구멍으로 달려가거든." 귀여운 나체 댄서 카렌이,'열쇠 속이기'를 제프에게 제안했다. "토요일 밤 선전을 할 때 당신에게만 특별히, 하고 말하면서 호색가처 럼 보이는 손님에게 내 침대차 열쇠를 팔아 줘. 한 사람씩 비밀스럽게 말 이야." 카렌은 제프에게 말했다. 그 열쇠는 한 사람에게 5달러씩에 팔렸다. 한밤중에는 십여 명의 호색 가들이 카렌의 숙소 주위를 맴돌고 있게 된다. 그 시각, 카렌은 시내의 호텔에서 제프와 함께 재미를 보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속은 것을 알아 차린 봉들이 카니발에 복수하러 몰려가면 카니발은 이미 그곳을 뜬 후가 된다. 그럭저럭 4년을 보내는 동안 제프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에 대해 많 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인간의 탐욕을 자극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 것인 가,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속기 쉬운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았다. 의심스 러운 얘기라도 인간의 강한 탐욕이 의심을 떨쳐 버리고 믿게 만드는 것 이다. 18세가 되자 제프는 눈에 띄는 미남이 되었다. 우연히 그를 스쳐지나가 는 여성이라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회색의 아름다운 눈, 훤칠하게 큰 키, 그리고 검은 곱슬머리에 반하고 말았다. 남자들은 제프의 기지에 넘친 얘기와 소탈한 분위기에 마음을 열었다. 아이들조차 그에게서 마음 이 통하는 친구를 발견해 낸 것처럼 제프를 금방 좋아하는 것이었다. 또한 제프에게 반한 여자 손님들도 줄줄이 끊어지지 않고 쫓아다니는 정도였다. 그럴 때면 윌리 삼촌은 곧잘 설교를 하곤 했다. "요조숙녀에게 손대면 안돼. 모두 보안관 아버지가 있다고 생각해라." [74] 제목 : 제18장 잠깐 들르지 않겠어? 즐겨 보자구. - 3 나이프 던지기 전문가의 아내로 인하여 제프는 카니발을 떠나지 않으 면 안 되게 되었다. 윌리 삼촌의 카니발은 조지아 주의 밀리지빌에 도착하여 텐트를 설치 하고 있었다. 이번 흥행에서는 위대한 조르비니라고 불리는 시실리인인 나이프 던지기가 매력적인 금발의 처와 함께 새롭게 쇼를 공연하게 되었 다. 그 위대한 조르비니가 텐트에서 장비를 손질하고 있는 사이에 그의 처가 자기들 부부가 묵고 있는 거리의 호텔로 제프를 초대했다. "조르비니는 하루종일 바빠. 잠깐 들르지 않겠어? 즐겨 보자구." 금발의 여자는 제프에게 말했다. 그럴듯한 얘기였다. "1시간쯤 뒤에 내 방으로 와." 그녀는 말했다. "왜 1시간씩이나 기다려야 하죠?" 제프가 묻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여러 가지 준비를 하려면 그 정도는 걸린다구." 제프는 호기심을 쌓으며 기다렸다. 그리고 그가 마침내 호텔 방에 도착 하자 그녀는 거의 발가벗은 몸으로 문을 열어 주었다. 제프가 안으려고 하자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속삭였다. "이리로." 욕실에 안내된 제프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욕조에 가득찬 물 속에 여러가지 맛과 향의 젤리가 들어 있었다. "이제 뭐죠?" 제프는 물었다. "디저트지 뭐겠어. 자아, 옷을 벗어. 얼른." 제프는 그대로 했다. "자아 안으로 들어가." 제프는 욕조로 들어가 몸을 담그었다. 그러자,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일 까, 말할 수 없는 감촉이 제프의 몸 전체를 간지르기 시작했다. 미끌미끌 하고 부드러운 젤리가 제프의 몸을 애무했다. 금발의 여자도 욕조로 들어 왔다. "자아, 점심을 먹어야지." 그녀는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서 그녀는 젤리를 핥으면서 제프의 가슴께부터 아랫 부 분을 향해 조금씩 혀를 이동시켜 갔다. "흐음, 정말 맛있어. 딸기향이 가장 좋아..." 그녀의 튀는 듯한 혀의 움직임과 따뜻하고 자극적인 젤리의 감촉이 제 프를 말로 다 할 수 없는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그 애무가 한창 일 때, 욕실의 문이 쾅하고 열리더니 위대한 조르비니가 성큼성큼 들어왔 다. 시실리인은 꼴사나운 아내의 모습과 당황한 제프를 발견하곤 외쳤다. "뚜 세이 우나 쁘따나! 비 아마조 튜티 에 듀에 ! 드베 소노 이미에이 코르테리?" 제프는 무슨 말인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위대한 조르비니 가 나이프를 가지러 방으로 달려가자 제프는 욕조에서 뛰어나와 자기 옷 을 움켜쥐었다. 그의 몸은 달라붙은 오색 젤리로 무지개처럼 빛났다. 창 을 타고 넘어 발가벗은 채로 골목길을 무작정 달렸다. 등 뒤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리고 나이프가 윙윙거리며 머리를 스치고 날아갔다. 피 융... ! 다시금 또 하나. 간신히 사정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다리 밑에서 찐득거리는 젤리와 싸우면서 셔츠 와 바지를 꿰어 입자 제프는 사람들 속으로 파고 들어가 가장 가까운 버 스 정류장으로 서둘러 갔다. 어디로 가는 것이든 상관 않고 맨 처음에 온 버스를 타고 그대로 마을을 떴다. 6개월 후, 제프는 베트남 전쟁터에 있었다. 이 전쟁에 종군한 병사들의 생각은 각양각색이었다. 제프의 베트남전쟁 은 결국 관료주의에의 한없는 경멸과 전쟁수행 책임자들에 대한 원망으 로 막을 내렸다. 전혀 이길 것 같지 않은 전쟁에서 2년을 허비하면서 그 동안 제프는 막대한 돈과 물자와 인명이 헛되이 낭비되는 것에 대단히 놀라고 변신이 빠른 장교들과 정치가들의 배반과 속임수에 진력이나 있 었다. (우리들은 아무도 원치 않은 전쟁에 내몰린 거야. 이건 사기야. 그것도 세계 최대의 사기 행위야.) 제프는 생각했다. 제프는 제대하기 일주일 전에 윌리 삼촌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가니발 은 거의 폐업 직전까지 가 있었다. 과거는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의 수년간은 손에 땀을 쥐는 모험의 연속이었다. 제프에게 있 어서는 지금이야말로 세계가 카니발이고, 거기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 의 봉이었다. 제프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사기 술을 고안했다. 어떤 때는 대통령의 컬러 사진을 1달러에 판다는 광고를 신문에 내고 1달러를 보내 온 마음씨 좋은 사람들에게 대통령의 얼굴이 박힌 10센트 짜리 우표를 엽서에 붙여 보내 주었다. 또 언젠가는 제프는 잡지에 광고를 내어 5달러를 보내는데 앞으로 60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그 후로는 너무 늦다는 취지의 경고 광고를 냈 다. 그 광고에는 5달러를 보내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는 명시하고 있지 않았으나 돈은 전국에서 엄청나게 모여들었다. 배를 좋아했던 제프는 타히티로 향하는 스쿠너 선에 일자리가 있다는 것을 친구가 이야기하자 곧바로 승무원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배는 165피트의 갈색 스쿠너로서 돛을 전부 하나가득 팽팽하게 하면 태양에 반짝반짝 빛나 매우 아름다웠다. 갑판에는 티크재가 붙여지고 선 채는 광택이 있는 긴 전나무재로 덮여 있었다. 메인 살롱에는 12명이나 앉을 수 있고 주방에는 전기 오븐도 있었다. 승무원의 침실은 뱃머리의 방이 사용되었다. 선장에다가 접객원과 요리 사가 1명씩, 갑판원이 5명 있었다. 제프의 임무는 돛을 올리는 것을 돕고 놋쇠로 된 의장품을 닦고 마스터에 올라가 돛을 다는 일이었다. 승객은 8 명이었다. "주인은 홀랜더라는 이 사람이야." 제프의 친구가 가르쳐 주었다. 훌랜더는 루이즈 홀랜더라는 25세의 금발 미인이고 부친은 중앙아메리 카의 반을 소유하고 있을 정도의 대부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승 객은 모두 루이즈 홀랜더 양의 친구이고 승무원들은 그들을 한데 묶어 ' 광대 세트'라고 빈정거렸다. 항해를 떠난 첫날, 제프가 뜨거운 헷살 아래에서 갑판의 놋쇠를 닦고 있는데 루이즈 홀랜더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75] 제목 : 제18장 섹스 상대로서 외에는 전혀 가치가 없잖아 -4 "당신은 새로 들어온 사람이군요." 제프는 올려다보았다. "네 그렇습니다." "이름은?" "제프 스티븐스." "좋은 이름이군요." 제프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내가 누군지 알아요?" "모릅니다." "루이즈 홀랜더. 이 배의 주인이죠." "아, 그러세요. 그럼 제가 이렇게 일하고 있는 것은 당신을 위해서라는 말이 되는군요." 그녀는 제프를 빤히 쳐다보다가 이윽고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겠군요." "그렇다면 제일을 방해하면 당신이 지불하는 급료가 낭비되는 셈이겠군 요." 제프는 다음 놋쇠로 옮겼다. 밤이 되면 승무원들은 자기들 방에서 승객들의 행동을 야유하거나 그 들에 대한 유치한 농담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나 사실은 제 프는 손님들이 부러웠다. 그들의 가문, 학벌, 여유있는 태도, 그 모든 것 들이 부러웠다. 그들은 자산가로 태어나 일류의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자신의 학력은 윌리 삼촌의 카니발이 전부였다. 카니발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 중에 원래는 고고학 교수였다는 사람이 있었다. 근무하던 대학에서 값비싼 발굴품을 훔쳐내어 팔아 목이 잘린 남 자였다. 그 전직 교수와 제프는 곧잘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곤 했다. 교수 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고고학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리는 것이었 다. "과거를 보면 인류의 미래를 읽을 수 있어." 교수는 말했다. "생각해 보렴, 꼬마야. 몇 천년 전의 오랜 옛날에 너와 나와 똑같은 꿈 을 꾸며 오랜 시간 얘기하고, 인생을 살아가며 우리들의 선조들은 낳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교수의 눈은 훨씬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르타고-나는 그 땅을 발굴하러 가고 싶어. 그리스도 탄생 훨씬 이전 에 그곳은 위대한 도시였다. 고대 아프리카의 파리라고 할 수 있는 곳이 지. 시민들은 게임에 흥분하고 목욕을 즐기고 이륜전차 경주에 열광했었 지. 대원형 경기장은 축구장의 5배나 될만큼 넓었어." 교수는 소년의 눈에서 관심의 빛을 읽을 수 있었다. "너, 고대 로마의 정치가 대(大)카트가 원로원에서 연설할 때 언제나 같 은 문구로 연설을 끝맺었다는 걸 아니?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었단다. ' 카르타고는 멸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소원은 결국 현실화되었지. 로마인 은 그 땅을 폐허로 만들어 버리고 그로부터 25년 후에 다시 그 곳으로 찾아와 폐허 위에 위대한 도시를 건설했어. 언젠가 너를 거기로 데리고 가서 발굴작업을 할 수 있으면 좋겠구나 꼬마야." 그런 얘기를 하면서 1년 후에 교수는 알콜 중독으로 죽었다. 그때 제프 는 마음 속으로 맹세했다. 언젠가 나는 꼭 카르타고에 발굴하러 가겠어 요, 교수님. 당신 대신에. 스쿠너가 타히티에 도착하기 전날 밤에 제프는 루이즈 홀랜더의 특별 실로 호출되어 갔다. 루이즈는 훤히 비치는 실크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장님." "당신 호모인가요, 제프?" "그것이 사장님과 무슨 상관이 있나요? 그러나 대답은 '노'입니다. 단 지 여자를 취향에 따라 고르기는 하지만요." 루이즈 홀랜더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어떤 종류의 여성을 좋아하는데요? 매춘부?" "때에 따라 다르죠." 제프는 솔직하게 말했다. "다른 용건이 또 있으십니까?" "으음 그래요. 내일 밤에 저녁 파티를 열거예요. 괜찮다면 들러 줘요." 제프는 잠시동안 그녀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러죠. 구태여 거절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루이즈 홀랜더는 스물 한살이 되기 전에 이미 두 번의 결혼 경력이 있 고 그녀의 변호사가 세번째 남편과의 이혼소송을 마쳤을 때, 이렇게 제프 와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파페티 항에 닻을 내리고 이틀째 되던날 밤, 승객과 승무원들이 육지에 올라가 버리자 제프는 루이즈 홀랜더의 선실에 또 불려 갔다. 그녀는 선 명한 색깔의 실크 파레우를 입고 있었다. 타히티 특유의 허리에 두르는 그 옷은 발목까지 터져 있었다. "이것을 벗고 싶은데 지퍼에 문제가 생겼어요." 루이즈는 말했다. 제프는 다가가서 옷을 살펴보았다. "지퍼같은 건 붙어 있지 않는데요?" 루이즈는 제프에게 얼굴을 돌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떠올렸다. "알고 있어요. 그게 문제라구요." 두 사람은 갑판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열대의 산들바람이 사람의 몸을 축복하듯이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지나갔다. 한때의 쾌락의 폭풍이 지나가자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제프는 팔꿈치로 상체를 일으켜 루이즈를 내려다 보았다. "당신 아버지는 보안관은 아니겠지?" 제프는 물었다. 루이즈는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뭐라고요?" "당신은 내가 처음으로 안은 요조숙녀거든. 윌리 삼촌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잔소리를 들었어. 요조숙녀의 아버지는 모두 보안관이라고 생각 하라고" 그로부터 두 사람은 매일 밤 잠자리를 함께 했다. 루이즈의 친구들은 재미있어 했다. "루이즈의 장난감이야."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이즈가 제프와 결혼할 생각 이라고 말하자 주위 사람들은 놀라서 야단법석들을 떨었다. "부탁이야 루이즈. 그는 어디 출신인지 내력도 모르는 사람이야. 카니발 에서 일하던 남자잖아. 기왕이면 보다 나은 뱃사람과 결혼하는 편이 낫지 않겠니? 그는 핸섬해. 그것은 두말 않고 인정하겠어. 게다가 체격도 훌룽 해. 하지만 섹스 상대로서 외에는 전혀 가치가 없잖아." [76] 제목 : 제18장 앞으로 인생을 당신과 함께 보내고 싶어요 -5 "루이즈. 제프는 아침 식사로서는 좋아. 그러나 저녁식사 타입은 아냐." "너에겐 사회적 지위라는 것이 있어." "노골적으로 말해서 그는 우리와 신분이 너무 다르지 않니?" 그러나 친구들의 어떤 말도 루이즈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제프는 루이즈가 여태까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매력있는 남자였다. 굉장히 멋지 게 생긴 남자는 그녀의 체험으로는 질릴 정도의 멍청이든가 견디기 어려 울 정도의 얼간이로서 시세가 정해져 있다. 그러나 제프는 지성과 유머를 겸비하고 있었으며 그 조화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루이즈가 제프에게 결혼 얘기를 꺼내자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제프 자 신도 깜짝 놀랐다. "왜지? 내 몸이라면 이미 주었잖아. 나에겐 더 이상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매우 간단한 이유야, 제프. 난 당신을 사랑하게 된 거예요. 앞으로의 인생을 당신과 보내고 싶어요." 결혼같은 것은 자기와는 전혀 인연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 기 그렇지 않게 되고 말았다. 루이즈 홀랜더의 겉 모습은 세련된 사교가 였으나 그 그림자 뒤에는 상처받기 쉬운 연약한 소녀의 모습이 가끔씩 엿보였다. (그녀에겐 내가 필요해.) 제프는 생각했다. 안정된 가정생활과 자식들에게 둘러싸인 광경이 갑자 기 멋지게 느껴졌다. 철이 든 이후로는 계속 달려오기만 한 것같은 기분 이 들었다. 이제 슬슬 멈추어도 괜찮을 때가 되지 않았는가. 사흘 후, 두 사람은 타히티의 시 청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이 뉴욕에 돌아가자 제프는 루이즈 홀랜더의 고문 변호사 스코 트 포가티의 사무실로 들러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변호사는 빈틈이 없고 야무져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 작은 입을 보자 제프는 엉덩이 구멍도 작 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사인해 주셨으면 하는 서류가 있습니다만." 변호사는 말했다. "사인이라니요?" "권리포기증서입니다. 당신이 루이즈 홀랜더와의 결혼을 파기했을 경우 의 사항이 간단하게 적혀 있습니다." "루이즈 스티븐스겠죠." "루이즈 스티븐스와 헤어질 경우 그녀의 재산분여의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을 " 제프는 턱의 근육이 딱딱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디에 사인합니까?" "내가 읽는 것을 끝까지 듣지 않아도 팬찮겠습니까?" "괜찮소.. 이봐요, 사람 잘못 보았소. 나는 재산이 탐나서 결혼한 것이 아니오!" "아, 그러시겠죠, 스티븐스 씨 ! 저는 다만 " "사인을 해 주기 바라는 거요, 아니요?" 변호사는 제프 앞에 서류를 내놓았다. 제프는 소정의 위치에 휘갈겨 서 명을 하고 의자를 박차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루이즈의 리무진과 운전사 가 계단을 내려오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프는 차에 올라타면서 씁쓸 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머리 끝까지 피가 올라오도록 화를 낼 필요가 어디 있지? 나는 철이 들고서 지금껏 계속 사기꾼 노릇을 해 왔어. 그리고 이젠 꽤 커다란 정식 벌이를 할 수 있게 되자 주일학교 선생처럼 진지하기 짝이 없는 사 람이 되어 버렸다니.) 루이즈는 맨해턴에서도 최고급 양복점으로 제프를 데리고 갔다. "디너 자켓을 입으면 정말 멋질 거예요." 루이즈가 권했다. 완성된 디너 자켓을 입은 제프는 정말 훌륭했다. 두 사람이 결혼하고 2개월 동안에 5명이나 되는 루이즈의 친구들이 이 매력적인 남자를 유혹하려 들었다. 그러나 제프는 하나하나 모두 무시했 다. 결혼을 망쳐버리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즈의 오빠인 버지 홀랜더가 재프를 최고급 뉴욕 필그림 클럽의 회 원으로 추천해 주었기 때문에 그는 입회를 허락 받았다. 처남의 이름 '버지'는 실은 별명으로서 그가 하버드대학 풋볼팀에서 라 이트태클을 지키고 있을 때 적이 아무리 밀어도 꼼짝도 안하고 버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건장한 체격의 중년 남자로서 해운업,바나나 농장, 소의 방목장, 정육회사 등 제프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업에 손을 대고 있었다. 버지 홀랜더는 거만한 남자로서 노골적으로 제프를 깔 보았다. "자넨 우리와는 출신 계급이 달라. 하지만 침대에서 루이즈를 즐겁게 해주기만 한다면 그걸로 족해. 난 이래 봬도 무척 동생을 사랑하거든." 이런 얘기를 들 을 때마다 제프의 자제심은 당장이라도 곧 폭발해 버 릴 것 같았다. (난 이 더러운 놈과 결혼한 것이 아니야. 루이즈와 결혼한 거지.) 필그림 클럽의 다른 회원들도 한결같이 속물들 뿐이었다. 그들은 모두 제프를 깔봤다. 점심식사는 항상 클럽에서 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는데 그때마다 모두 제프가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카니발 시절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제프는 짓궂게 일부러 과장되게 얘기를 만들어내어 그 들에게 돌려주었다. 제프와 루이즈는 맨해턴 이스트 사이드 지구에 방이 20개나 되는 저택 에서 많은 사용인들과 함께 지냈다. 루이즈는 롱아일랜드와 바하마제도에 도 저택을 갖고 있었고 이탈리아의 사르디니아에는 별장이, 파리의 포치 아베뉴에는 커다란 아파트가 있었다. 요트 외에 고급 승용차를 여러 대 갖고 있었다. 마세라티, 롤스 코니치, 람보르기니, 그리고 다임라. [77] 제목 : 제18장 굉장해! 멋져! - 6 (굉장해 ! 멋져 !) 제프는 생각했다. (하지만 난 병신같아. 비열해.) 제프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어느 날 아침, 18세기 풍의 4기둥식 침대에서 잠이 깬 제프는 가운을 걸치고 루이즈를 찾았다. 아내는 식당에 있었다. (하지만 난 병신같아. 비열해.) 제프의 결론이었다. "슬슬 일자리를 찾아 봐야겠어." 제프는 아내에게 말했다. "어머 왜요? 돈같은 건 필요 없어요." "돈과는 상관없어. 난 하루종일 빈둥대며 먹을 것을 입에 넣어 주는 걸 좋아하는 남자가 아냐. 일하고 싶어." 루이즈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알았어요, 여보. 오빠에게 얘기해 볼께요. 오빠는 주식중매업도 하고 있거든요. 당신 주식 중개인 일을 할 생각 있어요?" "무슨 일이든 좋아." 제프는 중얼거렸다. 제프는 처남의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정해진 시간에 맞 추어 직장을 다닌 적이 없었다. (정해진 시간의 일도 익숙해지면 재미있어지겠지.) 제프는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좋아지지가 않았다. 그래도 일은 계속했다. 수입을 얻어 그것을 아내에게 준다는 형식을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아기 소식은 아직 없나?" 어느 일요일, 여유있게 아침겸 점심을 먹으며 제프는 루이즈에게 물었 다. "곧 생기겠죠 뭐. 저도 기다리고 있어요." "그럼 노력이 부족하다는 얘기군. 좀 더 열심히 해볼까? 자아, 침대로 가실까요 부인." 제프는 필그림 클럽의 점심식사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처남과 그의 동 료 5, 6명의 실업가들이 예약해 둔 자리였다. 버지가 자랑하듯이 얘기했다. "정육회사의 연차 보고서를 막 마쳤다네. 이보게들, 우리 회사는 작년에 비해 수익이 40퍼센트가 상승했다네." "당연한 얘기 아닌가?" 동석하고 있던 한 사람이 웃으면서 말했다. "검사관들을 매수해 두었으니 당연하지. 우리들의 노련한 버지 씨는 수 상쩍은 고기에 최상품 고기의 도장을 찍어 톡톡히 주머니를 부풀리고 있 거든." 남자는 다른 멤버를 둘러보았다. 제프는 충격을 받았다. "사람이 먹는 고기에 그런 일을 하다니. 어린 아이들도 그 고기를 먹고 있을텐데. 농담이겠죠, 형님?" 버지는 능글맞게 웃으며 악담을 늘어놓았다. "요즘은 도덕이란 놈은 한물 갔잖아." 3개월 정도 지나자 제프는 클럽의 회식 동료들의 소행에 대해 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에드 젤러는 리비아에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백만 달러 의 뇌물을 지불하고 있었다. 다국적기업의 사장인 마이크 퀸시는 회사매 매만을 전문으로 하는 탈취꾼으로서 친구들에게 위법적으로 정보를 흘려 주고 주식을 매매시키고 있었다. 회식 동료 중에서 가장 부자인 알란 톰 슨은 자기 회사의 운영 방침을 자신만만하게 불어댔다. "저 더러운 법률이 개정되기 전에는 우리 회사는 연금지급 개시 1년전 에 늙은이들을 모두 모가지시켜 버렸지. 그래서 쓸데없이 낭비할 뻔한 돈 을 꽤나 건졌다구." 모두들 세금을 속이고 보험금 사기를 해먹고 이중장부를 만들어 주머 니를 채우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이놈들은 겉으로 보기엔 멋장이 신사 같지만 카니발 의 사람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어. 하고 있는 짓이 엉터리 사기 게임과 똑같아.) 제프는 생각했다. 그들의 부인들도 똑같이 행동거지가 나빴다.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 면 무엇이든 탐욕스럽게 갖고 싶어하고 남편 눈을 속이며 바람을 피우고 돌아다니기에 바빴다. "쳇! 여편네들이 하고 다니는 짓은 '열쇠 속이기'와 똑같군." 제프는 그들의 짓거리에 기겁을 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자기가 느낀 것을 루이즈에게 얘기하자 그녀는 웃었다. "어린애같은 소리하지 말아요, 제프. 당신 생활이나 즐기세요." 사실 제프는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루이즈와 결혼한 것도 그녀가 제프 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자식이 생기면 생활 이 즐거워지겠지 하고 제프는 생각했던 것이다. "아들과 딸이 한 명씩 있었으면 좋겠어. 이젠 결혼해서 1년이나 되었으 니 생길 때도 되었잖아." "여보, 인내심을 가지세요. 의사선생님께 진찰을 받아 보았어요. 저는 정상이라고 하더군요. 당신도 진찰을 받아 보는 것이 좋겠어요. 괜찮은지 어떤지." 제프는 병원에 갔다. "틀림없이 건강한 아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의사는 보장을 해 주었다. 그러나 루이즈에게는 여전히 아무런 징후가 없었다. 암흑의 월요일이 찾아오고, 제프의 세계는 산산조각으로 깨어졌다. 그 날 아스피린을 찾으려고 루이즈의 약이 들어있는 서랍을 뒤진 것이 그 시작이었다. 제프는 피임약인 필이 가득 들어있는 서랍을 보고만 것이다. 거의 빈 통에 가까운 필 케이스도 있었다. 필 케이스 옆에는 하얀 가루가 들어 있는 약병과 금 스푼이 놓여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는 너무나도 명백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그 월요일의 아주 사소한 시작 에 지나지 않았다. 정오에 제프가 필그림 클럽의 등걸이 의자에 푹 꺼져 앉아서 처남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등 뒤쪽 좌석에서 두 남자가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계속 우겨댔어. 지금 상대하고 있는 이탈리아인 가수의 물건은 25센티가 넘는다고 말이야." 쿡쿡거리는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겠지. 루이즈는 언제나 큰 것을 좋아하니까." (저들이 화제로 삼고 있는 여자는 같은 이름인 다른 여자 얘기겠지.) 제프는 자신에게 그렇게 타일렀다. "아마 그것때문에 루이즈는 카니발 출신과 결혼한 걸 거야. 아무튼 그 것이 첫 번째 이유일 거라구. 루이즈는 그녀석과의 추태를 재미삼아 얘기 해 주더군. 들어도 못 믿겠지만, 일전에 그 남자가 무엇을 " 제프는 벌떡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클럽에서 나왔다. 이렇게 격노한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생전 본적 도 없는 이탈리아 놈을 죽이고 싶었다. 루이즈는 여태까지 몇 명의 놈팽 이들과 놀아났을까? 모두들 그것을 알면서 나를 비웃고 있었다. 네드 젤 러, 그리고 마이크 퀸시, 알란 톰슨과 그 여편네들은 내 인생에 균열이 일어나는 걸 크게 웃으며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둘도 없이 소중하게 여 겼던 아내 루이즈마저 제프는 곧장 짐을 챙겨 떠나려고 생각했다. 그러 나 그렇게 하면 속이 끓어올라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놈들에게 마지 막으로 웃음 거리를 제공해 준다는 건 생각조차 하기 싫다. [78] 제목 : 제18장 나의 멋진 남편,오늘밤은 일찌감치 침대로 -7 저녁때 제프가 귀가해 보니 루이즈는 없었다. "마님은 아침에 외출하셨습니다. 약속이 많이 있다고 말씀하고 나가셨 습니다." 집사인 피켄즈가 말했다. (알고 있어. 그 25센티 짜리 이탈리아 놈과 놀러 간 것이 틀림없어. 어 처구니없는 노릇이군!) 제프는 생각했다. 루이즈가 귀가할 때까지 제프는 가까스로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오늘은 재미있었어?" 제프가 물었다. "아뇨. 언제나처럼 따분한 일 뿐이에요, 여보. 미용실에 가고 쇼핑하고... 당신은 어땠어요?" "결실이 많은 하루였어." 제프의 말은 사실이었다. (여러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거든.) "오빠가 당신은 일을 아주 잘한다고 칭찬하시더군요." "당연하지. 이제부터는 더 잘해 나갈 생각이야." 제프는 잘라 말했다. 루이즈는 남편의 손을 잡았다. "나의 멋진 남편, 오늘 밤은 일찌감치 침대로 들어갈까요?" "오늘 밤은 그만두지. 머리가 아파서 말이야." 제프가 거절했다. 제프는 다음 일주일 동안 계획 짜는 일에 전념했다. 대충 계획의 구도가 잡혔을 때, 클럽에서의 점심식사 도중에 그는 말을 꺼냈다. "여러분들 중에서 컴퓨터 사기에 대해 상세히 아는 분 있습니까?" 제프는 물었다. "왜?" 에드 젤러가 그 이유를 알고 싶어했다. "이번에는 컴퓨터를 사용해서 한탕 할 셈인가?" 그렇게 말하자 일동은 침을 튀기면서 웃어 제꼇다. "아뇨. 그런 것이 아니고 진지한 얘기입니다. 실은 이것이 큰 문제입니 다. 요즘엔 약아빠진 놈들이 다른 사람의 컴퓨터에 침입하여 은행이나 보 험회사나 일반 회사 등지에서 돈을 몰래 훔치고 있습니다." 제프는 강조하며 말했다. "자네가 자세히 아는 것 같군." 버지가 중얼거렸다. "내가 소개받은 인물은 절대로 침입할 수 없는 컴퓨터 장치를 만들기 시작했답니다." "그래서, 자네는 그 컴퓨터에 침입해 보고 싶다는 건가?" 탈취꾼 사장인 마이크 퀸시가 빈정대듯 말했다. "아뇨. 실은 이 신제품이 전망이 있어 보여서요. 그래서 그 사람을 후원 해 주기 위해서 자금을 모으는 것을 도와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혹시 이 중에 컴퓨터를 잘 아는 분이 계시는가 물어본 거죠." "여기엔 그런 사람 없어. 그래도 컴퓨터 범죄를 돕는 일이라면 해도 좋 아. 그렇지, 모두들?" 버지가 음흉하게 웃었다. 일동은 폭소를 터뜨렸다. 이틀 후, 클럽에서 제프는 항상 앉는 테이블을 지나면서 버지에게 변명 조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합류하지 못하겠습니다. 손님과 점심을 같이하기로 되어 있어서요." 제프가 다른 테이블로 옮기자 갑부인 알란 톰슨이 빈정대며 말했다. "녀석은 서커스에서 면회온 털이 난 여자와 함께 식사라도 하려는 거로 군." 약간 등이 굽은 희끗희끗한 머리의 남자가 식당에 들어오고 제프의 테 이블로 안내되었다. "놀랍군!" 다국적 기업 사장인 마이크 퀸시가 말했다. "저 사람은 애커맨 교수잖아?" "애커맨 교수가 누군데?" "아니 뭐야. 자넨 회계 보고서 말고는 아무 것도 읽지 않는군, 버지?바 논 애커맨이라고 하면 지난 달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인물이야. 그는 대통령자문 국가과학평의회의 의장이야. 미국 제일의 두뇌지." "그런 엄청난 인물이 내 매제에게 무슨 용건이 있지?" 제프와 교수는 점심식사 시간 내내 대화에 열중해 있었다. 버지와 그 회식 동료들의 호기심은 점점 더 부풀어 갔다. 교수가 돌아가자 버지는 제프를 자기들의 테이블로 불렀다. "어이, 제프. 아까 손님은 누구야?" 제프는 송구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라뇨.. 바논 말씀입니까?" "그래. 둘이서 무슨 얘기를 했나?" "우리들은... 저어... 별로..." 제프가 대답을 얼버무리려는 것을 동석자 전원이 알아 차렸다. "저는... 저... 그에 관한 책을 한 권 쓰려구요. 매우 흥미로운 인물이니 까요." "자네가 작가라는 건 몰랐군." "아닙니다. 이것이 제 처녀작이 될 겁니다." 3일 후, 제프는 또 다른 손님과 점심식사를 했다. 이번에는 버지도 아 는 인물이었다. "굉장하군! 저건 시모어 자레트야. 자레트 인터내셔널 컴퓨터 회사의 회장이지. 제프 녀석에게 무슨 용건이 있는 걸까?" 이번에도 제프와 그 손님의 대화는 더욱 활기차 보였다. 점심식사가 끝 나자 버지는 제프에게 실토를 재촉했다. "자아, 제프. 자네와 시모어 자레트는 무슨 얘기를 했는가?" "별 얘기 아닙니다." 제프는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잠시 수다를 떨었을 뿐이죠." 그렇게만 말하고서 그 자리를 뜨려고 했기 때문에 버지가 붙잡았다.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같은 동지인데. 시모어 자레트는 보통 바쁜 사람이 아냐. 아무 것도 아닌 수다를 떠느라 그렇게 오랫동안 시간 을 허비할 리가 없지 않은가." 제프는 열을 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사실을 말하죠. 시모어는 우표를 수집하는데 아주 열심이 죠. 그래서 제가 입수할 수 있는 우표에 대해서 이것 저것 얘기하고 있었 습니다." (아직도 거짓말을 하는구나 이 녀석 !) 버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79] 제목 : 제18장 별로 흥미가 없는 것 같아서... - 8 다음 주에 제프는 실업계의 거물인 찰스 바트레트와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그는 세계 최대의 민간투자그룹 바트레트 앤드 바트레트의 대표이 사이다. 테이블 4인조인 버지, 에드 젤러, 알란 톰슨, 그리고 마이크 퀸시는 제 프와 바트레트가 이마를 맞대다시피하고 얘기하고 있는 것을 넋이 나간 듯이 보고 있었다. "자네 매제는 아무래도 최근에 멋진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나보군." 젤러가 중얼거렸다. "녀석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건가, 버지?" 버지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알게 뭐야. 무슨 일인지 추궁해 봐야겠어. 자레트와 바트레트가 흥미를 가질 만한 것이라면 거금이 얽힌 얘기인 것이 틀림없어." 4인조는 바트레트가 일어서서 제프와 굳게 긴 악수를 나누고 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프가 4명의 테이블 곁을 지나치려고 하자 버지 가 그의 팔을 잡았다. "앉아, 제프. 얘기좀 하자구." "사무실에 돌아가 봐야 하는데요?" 제프는 잡힌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자네가 일하고 있는 곳 은 내회사야. 그렇지? 자아 앉게." 제프는 못이기는 척하고 그 자리에 앉았다. "자네 누구하고 점심 식사를 했지?" 제프는 망설였다.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옛날부터 사귄 친구죠." "바트레트가 옛 친구라니?" "그렇습니다." "그럼 자네 옛 친구인 찰스와는 어떤 얘기를 했나, 제프?" "저... 차... 자동차... 얘기입니다. 찰스는 골동품 가치가 있는 자동차를 매우 좋아한답니다. 그래서 4도어 1937년형 패커드에 관한 정보를..." "꾸며대지 말게 !" 버지가 날카롭게 말을 막았다. "자넨 우표수집도 하고 있지 않고, 자동차 세일즈맨도 아냐. 더군다나 책 따위를 쓴다는 건 말도 안돼.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감추고 있는 건 가?" "아무 것도 감추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저는 다만... " "자넨 무슨 자금을 모으고 있지? 그렇지?" 에드 젤러가 물었다. "아니예요, 아무 것도." 제프의 대답은 뭔가 숨기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 것처럼 들렸다. 버지는 통나무같은 팔을 제프에게 얹었다. "이봐 매제. 난 자네 아내의 오빠야. 가족이잖아. 그렇지 않은가?" 버지는 마치 제프를 끌어안을 듯한 기세였다. "그러고보니 자네 지난 주에 절대로 침입 당하지 않는 컴퓨터인가 뭔가 하는 얘기를 했었지? 그 얘기 아냐?" 제프의 표정이 싹 변했으므로 핵심을 딱 들어맞추었다는 것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네에, 실은 그렇습니다." 네 사람은 주저하는 제프를 몰아 세웠다. "그때 에커맨 교수가 관여하고 있다는 걸 왜 말해 주지 않았나?" "여러분들은 별로 흥미가 없는 것 같아서요." "단단히 착각하고 있군. 자금이 필요할 때는 친구에게 부탁하라는 걸 모르나? 우리들은 친구잖아." "교수나 저나 자금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자레트와 바트레트 두 사람 이 충분히... " 제프가 말했다. "자레트나 바트레트는 악독한 고리대금업자야! 자네 뼈까지 갉아먹으려 들걸." 거부인 알란 톰슨이 소리쳤다. 에드 젤러가 말을 받았다. "제프, 친구와 거래하면 손해볼 일도 없지." "모든 준비가 끝났어요. 바트레트 씨가..." 제프는 네 사람에게 말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 계약은 하지 않았잖아?" "아뇨, 아직 하지는 않았지만 구두로 약속을... " "그러니까 준비가 아직 안 된거야. 잘 생각해, 제프. 비지니스 세계에서 는 간단하게 말이 변하는 것이 상식이야." "저는 이 건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얘기해서는 안되는 입장에 있어서 요." 제프는 뻗대며 말했다. "특히 애커맨 교수 이름은 입밖에 낼 수 없습니다. 교수는 정부의 어느 부처와 계약을 맺어 거기에 제약을 받고 있으니까요." "그런 것 정도는 알고 있어." 톰슨이 가볍게 받아 넘겼다. "교수 자신은 이장치가 성공하리라고 믿고 있나?" "그렇게 생각할 정도가 아니라 틀림없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애커맨 교수가 보장하는 것이라면, 우리들도 믿을 수 있지. 그렇지 않 은가 여보게들?" 모두들 똑같이 동의했다. "곤란합니다. 저는 과학자가 아니니까요. 다른 보증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신제품은 어쩌면 아무 가치도 없을지도 모른 다는 것입니다." 제프는 말했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렇지만 만일 가치가 있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제프? 엄청난 돈을 긁어모을 수 있는 거야. 어느 정도인가, 큰가?" "버지, 이 상품의 시장은 전 세계입니다. 그것만으로는 어느 정도의 가 치가 있는지 짐작할 수 없습니다만, 단지 세계 어디에서나 필요로 할 제 품이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어쨌든 사업개시 자금으로 어느 정도가 필요한가?" "2백만 달러는 있어야 하겠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현금으로 25만 달러입니다. 그건 바트레트가 지원해 주기로..." "바트레트는 잊어 버려. 그 녀석은 푼돈밖에 내놓지 않을 거야. 우리들 이 돈을 내겠어. 자아, 그렇지 여보게들?" "아암, 그렇고 말고." 버지는 머리를 들어 탁하고 손가락을 울렸다. 그러자 급사장이 급히 테 이블로 다가왔다. "도미니크, 스티븐스 씨에게 종이와 펜을 갖다 주게." 계약은 즉석에서 이루어졌다. "이 거래는 여기에서 끝내는 거야." 버지가 제프에게 말했다. "이 서류에 자네가 써 넣고 우리들의 권리를 명시해 주게. 그리고 우리 들 전원이 그것에 사인을 하고 나서 내일 아침에 25만 달러 수표를 자네 에게 건네주겠네. 그렇게 하면 되겠지?" 제프는 곤란하다는 듯이 아랫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버지, 저는 바트레트 씨와 계약을... "바트레트같은 놈이 대수야!" 버지는 화를 냈다. "자넨 놈의 여동생과 결혼했나? 아니잖아. 내 여동생하고 결혼했지? 자 아, 쓰게." "우리들은 특허권도 아직 따지 못했고 게다가..." "괜찮으니까 써. 꾸물거리지 말고!" [80] 제목 : 제18장 당연히 죄송스럽다는 듯한 얼굴을 하였으며-9 버지는 억지로 제프의 손에 펜을 쥐어 주었다.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제프는 쓰기 시작했다. 'SUCABA라고 명명된 연산용 컴퓨터에 관한 나의 권리, 상표권 및 이 익금을 도날드 버지 홀랜더, 에드 젤러, 알란 톰슨 및 마이크 퀸시에게 양도함. 이상의 권리에 대한 지불 총액은 25만 달러로 하고 계약과 동시 에 상기 4명의 권리 구입자가 제프 스티븐스에게 25만 달러를 지불하는 것으로 한다. SUCABA는 광범위한 테스트 결과, 값이 저렴하고, 고장이 없고, 현재 시장에 출하되고 있는 어떤 컴퓨터보다도 전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어 있다. SUCABA는 최저 10년간은 정비도,부품 교 환도 필요 없다.' 4명은 제프의 어깨 너머로 그가 쓰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라고!" 에드 젤러가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10년이라고! 그런 견고한 컴퓨터는 아직 시장에 출하된 적이 없어 !" 제프는 계속 써 내려갔다. '권리 인수자들은 애커맨 교수와 내가 그 SUCABA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지 않음을 알고 있고...' "특허권 문제는 우리들에게 맡기게. 특허의 신과 같은 변호사를 알고 있으니까 말일세." 알란 톰슨이 안절부절못하며 재촉했다. 제프는 계속해서 써 내려갔다. "SUCABA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일지도 모르고, 또한 바논 애커맨 교수도 나도 이상에 기재된 이외에 SUCABA에 관한 책임과 보증을 서지 않는다는 것을 구입자에게 설명했음.' 제프는 싸인을 끝내고 서류를 들었다. "이러면 되겠습니까?" "보증기한이 10년이라는 것이 사실인가?" 버지는 물었다. "보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복사해 둡시다." 제프가 말했다. 버지는 제프의 손에서 서류를 채가듯이 빼내어 그것에 사인을 했다. 젤 러, 퀸시, 톰슨의 순으로 사인을 마쳤다. 버지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한 장은 우리들이 보관하지. 또 한 장은 자네가 갖고 있게나. 저 시모 어 자레트와 찰스 바트레트는 달걀을 얼굴에 맞은 듯한 기분이 들겠군. 그렇지 않은가? 이 계약에서 따돌려진 놈들의 찌그러진 얼굴을 빨리 보 고 싶군." 다음 날 오전에 버지는 제프에게 25만 달러의 수표를 건네주었다. "컴퓨터는 어디에 있지?" 버지는 물었다. "정오에 클럽으로 배달하도록 준비시켜 두었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한 자리에 있을 때 받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버지는 제프의 어깨를 톡톡 쳤다. "그래 제프. 자넨 정말 똑똑하구만, 점심식사 때 보세." 12시 정각에 상자를 안은 심부름꾼이 필그림 클럽의 식당에 나타났다. 배달원은 버지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안내되었다. 젤러, 톰슨, 퀸시도 동 석하고 있었다. "이것이 그거로군." 버지가 쾌재를 울렸다. "이런, 굉장하군. 휴대용이잖아I" "제프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톰슨이 물었다. "아무려면 어때, 이것은 이제 우리들 것이야." 버지가 상자를 싸고 있던 포장지를 뜯어냈다. 상자 안에는 보리짚이 채 워져 있었다. 버지는 조심스럽게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들어 올렸다. 네 사람은 숨을 죽이고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발바닥 크기 정도의 정방형 나무틀에 상하로 가는 봉이 붙어 있고 그 봉에 일정 한 수의 구슬이 연결되어 있었다. 잠시 동안 한 사람도 입을 열지 않았 다. "이게 뭐지?" 퀸시가 침묵을 깨고 물었다. 알란 톰슨이 말했다. "주판이야. 동양인들이 계산할 때 사용하는." 갑자기 톰슨의 안색이 변했다. "당했어 ! SUC4BA는 영어 사BACo" 즉 주판을 역으로 쓴 거잖아." 알란 톰슨은 버지를 돌아보았다. "이게 무슨 장난인가?" 젤러가 침을 튀겨가며 말했다. "고장이 없고, 시장에 나와 있는 어떤 컴퓨터보다도 전력을 필요로 하 지 않고... 제기랄! 수표 지불을 정지시켜야해 !" 네 사람은 일제히 전화기로 달려갔다. "발행해 달라고 하신 수표 말씀입니까?" 은행의 출납원은 말했다. "그 건이라면 걱정마십시오. 오늘 아침 스티븐스 씨가 현금으로 바꿔가 셨으니까요." 집사 피켄즈는 당연히 죄송스럽다는 듯한 얼굴을 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스티븐스는 짐을 챙겨 길을 떠난 후였던 것이다. "장기 여행을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녁이 되어 반미치광이가 된 버지는 바논 애커맨 교수와 겨우 연락이 닿았다. "아아, 제프 스티븐스 말입니까? 꽤 재미있는 젊은이더군요. 그래요,당 신의 매제였어요?" "교수님, 당신은 제프와 무슨 얘기를 하셨는지요?" "별로 비밀로 할 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프는 제 얘기를 책으로 쓰 고 싶어했어요. 세상 사람들은 과학자의 인간적인 측면을 알고 싶어한다 고 열심히 말하더군요." 시모어 자레트는 입이 무거운 편이었다. "스티븐스 씨와 제가 얘기한 내용을 알고 싶다구요? 당신도 우표 수집 가인가?" "아뇨. 아닙니다. 저는... " "이곳저곳 냄새 맡고 다녀도 소용없다고 생각하지만 말야, 단 한 장밖 에 현존하지 않는 우표가 있어서 그것을 입수하면 내게 팔아 주겠다고 스티븐스 씨가 약속해 주었소." 그렇게 말하고 나서 시모어 자레트는 전화를 탁하고 끊었다. [81] 제목 : 제18장 고마워요.당신과의 일은 매우 재미있었어요-10 바트레트의 설명도 거의 예상했던 대로였다. "제프 스티븐스와 얘기한 내용 말이오? 아아, 그건 말이지, 나는 골동품 가치가 있는 자동차를 수집하고 있거든. 제프는 4도어 1937년형 패커드 를... " 이번에는 이야기 도중에 버지 쪽에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걱정하지 말게." 버지는 동료들을 달랬다. "그 사기꾼에게서 돈을 도로 찾고 죽을 때까지 감옥의 밥을 먹게 할테 니까. 이것은 엄연히 사기죄가 성립되니까." 일행은 다음으로 포가티 변호사 사무실에 들렀다. "놈은 25만 달러를 등쳐먹고 도망쳤소!" 버지는 변호사에게 말했다. "놈을 남은 일생동안 계속 감옥에 처넣어 두고 싶단 말이오. 체포영장 을 발부할 수 있도록..." "계약서를 보여 주시겠소, 버지?" "이거요." 버지는 포가티에게 제프가 쓴 서류를 건네 주었다. 변호사는 그것을 한 번 쓱 훑어보고 다시 한 번 천천히 읽어갔다. "이 서류에 있는 당신의 사인은 그가 위조한 것입니까?" "아니, 그렇지 않소." 마이크 퀸시가 말했다. "우리들의 자필 사인이오." "여러분들은 이 서류를 미리 한 번 훑어 보셨습니까?" 에드 젤러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물론 읽었지. 우리들은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니까." "정신차리고 들어보세요,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은 계약서에 사 인을 했고, 그 계약서에 의하면 특허도 취득하지 않았고 또 무가치할지도 모르는 물건을 25만 달러의 보증금으로 구입한다고 되어 있는 취지 설명 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 옛 은사님의 말을 빌자면 여러분은 ' 합법적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제프는 네바다 주의 리노에서 이혼수속을 했다. 그곳에 정착하여 살기 로 했을 때 우연히 콘래드 모건을 만나게 되었다. 모건은 윌리 삼촌의 카 니발에서 만나 알게 된 사람이었던 것이다. "제프,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말이야." 콘래드 모건은 얘기를 꺼냈다. "뉴욕에서 세인트 루이스로 가는 기차여행을 하고 있는 젊은 여성이 있 어. 그녀는 많은 보석을 갖고 여행을 하는데..." 제프는 지금 비행기 창을 통해 밖을 바라보며 트레이시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아직도 미소가 남아 있었다. 뉴욕에 돌아온 트레이시는 맨 먼저 콘래드 모건 보석상점으로 갔다.콘 래드 모건은 트레이시를 자기 사무실로 불러들이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양손을 끊임없이 비벼대면서 말했다. "이런... 정말 걱정하고 있었어. 세인트 루이스 역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 "당신은 세인트 루이스 역에는 가지도 않았어요." "뭐라고? 무슨 말이야?" 모건의 푸른 눈은 당황하여 바삐 움직였다. "당신은 세인트 루이스 같은 곳에 갔을 리가 없다는 거죠. 나와 만날생 각 따위는 전혀 없었을 데구요." "말도 안 돼. 갔었어 ! 당신이 보석을 가지고 을 것이기 때문에 나로서 는... " "당신은 두 남자를 고용해서 나에게,서 보석을 탈취해 가려고 했어요." 모건의 얼굴에 동요의 파도가 번져 있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군." "처음에는 그랬죠. 이곳 직원중 누군가가 정보를 홀려 보냈는가 하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당신이었으니까. 당신 은 기차표를 직접 준비하겠다고 나에게 얘기했어요. 그렇다면 내 개인 객 실의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는 얘기죠. 나는 가명을 쓰 고 있었고, 변장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당신이 고용한 남자들은 곧장 나를 알아 봤거든요." 순진을 가장했던 모건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보석을 빼앗겼다고 말할 셈인가?" 트레이시는 방긋 웃었다. "그런데 당신의 하수인은 보석을 빼앗는데 실패했다고 말했겠죠?" 모건의 얼굴에 나타난 이번의 놀란 표정은 진짜였다. "당신은 보석을 갖고 있나?" "그래요. 당신의 동지들은 비행기에 탈때 너무 당황해서 보석을 두고 가버리더군요." 모건은 잠시 살피듯 트레이시의 얼굴을 쳐다 보고 있었다. "잠깐 실례." 그는 전용 도어로 나갔다. 트레이시는 긴의자에 몸을 푹 파묻고 앉아 충분히 편하게 쉬었다. 콘래드 모건은 거의 15분간이나 떠나 있었으나 돌아왔을 때는 완전히 낙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뭔가가 잘못된 모양이구만. 아가씨는 매우 영리하군요, 미스 휘트니.2 만 5천 달러의 보수를 받을 자격이 있소." 모건은 미소까지 띠며 칭찬해 주었다. "보석을 주시오. 그것과 교환하는 데에... " "5만 달러를 받겠어요." "아니, 뭐라고 했소?" "난 이 보석을 두번이나 훔치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그러니까 두번의 보수로 따지면 5만 달러가 되는 것 아닐까요, 모건 씨?" 보석상의 눈은 완전히 빛을 잃었다. "그런 거금을 당신한테 지불할 수는 없소." 트레이시는 일어섰다. "그래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라스베가스에 가면 이 보석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트레이시는 문으로 다가갔다. "5만 달러만 받으면 되겠소?" 콘래드 모건은 물었다. 트레이시는 끄덕였다. "보석은 어디 있소?" "펜실베이니아 역의 보관함 안에 있어요. 당신이 현금으로 돈을 건네주 고 나를 택시에 태워주면 그때 보관함 열쇠를 드리죠." 콘래드 모건은 패배를 자인하듯 한숨을 쉬었다. "하는 수 없지." "고마워요. 당신과의 일은 매우 재미있었어요." 트레이시는 경쾌하게 말했다. [82] 제목 : 제19장 여자도둑의 몸매에 매료되어 뼈가 녹아 버리고 만 제 19 장 다니엘 쿠퍼는 J.J. 레이놀즈의 방에서 열리는 아침 회의 내용에 대해서 예상을 하고 있었다. 일주일 전에 로이스 베라미 저택에서 한밤중에 발생 한 도난 사건에 관한 메모가 어제 전 조사원들에게 전달되어 있었기 때 문이다. 다니엘 쿠퍼는 원래 회의라는 것 자체를 혐오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서 쓸데없는 수다를 듣고 있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짜증스러워지는 것이었다. 쿠퍼는 45분이나 늦게 레이놀즈의 방으로 갔다. 상사가 한창 연설을 하 고 있을 때였다. "참석해 줘서 정말 고맙구만." J.J. 레이놀즈는 빈정거렸다. 아무 대답도 없었다. (이 녀석과 대화를 하려고 해 보았자 시간 낭비지.) 레이놀즈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쿠퍼에게는 빈정거림이 통하지 않았다. 레이놀즈가 알고 있는 한, 다른 어떤 경우에도 이 남자는 자기가 지금 비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었다. 다만 범인을 체포한다는 것 외에는. 범인을 추적하는 일에 관 해서는 이 쿠퍼란 남자는 칭찬받을 만한 천재였다. 부장실에는 세 명의 우수한 조사원이 참석하고 있었다. 데이비드 스위프트와 로버트 쉬퍼, 그 리고 제리 데이비스이다. "베라미 저택에서 한밤중에 일어난 도난사건에 관한 보고서는 모두 대 충 훑어보았을 걸세. 거기에 새롭게 덧붙일 사실이 있네. 로이스 베라미 는 치안본부장의 사촌이라는 사실일세. 그는 매우 화가 나 있어." 레이놀즈 부장은 말했다. "경찰은 뭘 하고 있었답니까?" 데이비스가 물었다. "보도진을 피하고 있어.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경찰은 허둥지둥 희극같 은 짓을 하고 있었던 거야. 경찰은 도둑과 실제로 얘기도 나누었던 거지. 그 저택에서 범인과 마주쳐 뻔히 눈 앞에 보면서 놓치고 만 거야." "그럼 경찰은 범인의 특징을 잘 기억하고 있겠군요." 스위프트가 지적했다. "그들은 여자 범인의 나이트가운 모양만큼은 정말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지." 레이놀즈는 내뱉듯이 대답했다. "그들은 도둑의 몸매에 매료되어 뼈가 녹아버리고 만 것 같아. 녀석들 은 여자의 머리카락 색깔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 머리에는 컬러 캡을 두르고 있었고, 얼굴은 팩으로 덮여 있었다는 거야. 그 멍청이들이 제공 한 진술에 의하면 여자는 20대 중반이고 만지고 싶은 엉덩이와 가슴을 지니고 있었다더군. 이래가지고는 눈꼽만큼의 단서도 잡히지 않지. 즉, 정 보 없이 조사해 나가지 않으면 안 돼. 완전 제로에서 말이야." "아뇨, 단서가 있습니다." 전원이 일제히 적의에 찬 눈으로 쿠퍼를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레이놀즈가 힐문했다. "저는 도둑이 누군인지 알고 있습니다." 전날 아침 보고서를 읽은 쿠퍼는 그의 논리의 제1단계로서 먼저 베라 미 저택을 보아두기로 결심했다. 다니엘 쿠퍼에게 있어서 추론의 방법은 신의 계시에 따르는 것이었다. 어떤 사건에서나 그것이 기본적인 해결 방 법이었다. 사건의 시작에서부터 순서를 새워 생각해가는 것이다. 쿠퍼는 베라미 저택이 있는 롱 아일랜드로 자기가 직접 차를 운전하여 가서 저 택 부근을 한 번 훑어보고는 차에서 내리려고도 하지 않고 그대로 맨해 턴으로 돌아왔다. 필요한 것은 모두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택은 인적 이 드문 곳에 위치해 있었고 가까이에 공공 교통수단이 없기 때문에 도 둑은 차가 없으면 접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쿠퍼는 레이놀즈의 방에 모인 남자들에게 자기의 추리를 설명하고 있 었다. "여자는 아마 증거가 남을 만한 짓을 하지 않기 위해 자기 차를 사용하 지 않고 렌트카나 도난차량을 사용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저는 먼저 렌 트카 회사를 조사해 보기로 했습니다. 여자는 맨해턴에서 렌트카를 빌렸 을 것입니다. 슬그머니 종적을 감추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니까요." 제리 데이비스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모습으로 반론하였다. "농담하는 건가, 쿠퍼? 맨해턴에서는 하루에도 몇천 대나 되는 렌트카 가 대여되고 있어." 쿠퍼는 그 말참견을 완전히 무시하고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렌트카는 전부 컴퓨터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여성이 빌리는 경 우는 비교적 드뭅니다. 문제의 여성은 웨스트 23번가 부두 61번지에 있는 버제트 렌트카 회사에서 세비 카프리스를 빌렸습니다. 범행이 있던 날 밤 8시에 빌렸다가 새벽 2시에 돌려주었더군요." "그것이 범행에 사용된 차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지?" 레이놀즈가 회의적으로 물었다. 쿠퍼는 어리석은 질문에 완전히 질렸다는 듯이 말했다. "주행 거리를 조사해 보았지요. 로이스 베라미 저택으로 가는 거리가 50킬로미터이고 돌아오는 것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50킬로미터입니다. 그 거리는 카프리스의 타코메타와 딱 일치하는 것입니다. 차는 엘렌 브란치 란 명의로 대여되었습니다." "가명이겠지." 스위프트가 아는 척하며 말했다. "그래. 본명은 트레이시 휘트니이지." 그곳에 있던 네 사람의 시선이 쿠퍼에게 쏠렸다. "도대체 어떻게 그 이름을 떠올린 건가?" 쉬퍼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녀는 가명을 사용하고 가짜 주소를 쓰고 있으나 계약서에 사인은 해 야 했습니다. 나는 그 계약서를 빌려다가 지문검출을 의뢰했지요. 트레이 시 휘트니의 지문이 묻어 있더군요. 그녀는 남루이지애나 여자 교도소에 복역한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나는 도둑맞은 르느와르의 그림 건으로 1년 전에 그녀와 만난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고 있고말고. 그 건에 대해서는 자넨 그녀가 무고하다고 했지않 나." 레이놀즈는 말했다. "그 건에서는 그랬지요. 그러나 이번에는 베라미 저택 도난 사건을 저 지른 장본인인 것입니다." 이 후줄근하고 땅딸막한 별 볼일 없는 놈이 이번에도 또 공적을 세웠 군! 그것도 이 놈은 힘도 들이지 않고 손쉽게 해결해 버렸다. 레이놀즈는 질투하고 있는 기색을 나타내 보이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말했다. "진짜 멋지게 처리했네, 쿠퍼. 자넨 정말 훌륭해. 그녀를 체포하도록 경 찰에 통보하여 그녀를 수감시키세." "무슨 죄목으로 말입니까? 차를 빌린 죄로 말입니까? 경찰은 그녀를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증거의 꼬투리가 되는 것이 조금도 없으 니까요." 쿠퍼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모르는 척 내버려두어야 하나?" 쉬퍼가 물었다. "이번에는 그럴 수밖에 도리가 없지. 그러나 그녀가 무슨 짓을 할 지는 알고 있어. 다시 무슨 일인가를 저지르겠지. 그 때에 그녀를 붙잡는거야." 쿠퍼는 말했다. 회의가 마침내 끝났다. 쿠퍼는 샤워를 하고 싶은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가 없었다. 그는 검은 표지의 수첩을 꺼내어 거기다 매우 정성스럽게 적 어 넣었다. '트레이시 휘트니'라고. [83] 제목 : 제20장 그리고, 여자 탐험가라고 할 수 있지. 제 20 장 (난 이미 지금까지의 내가 아니야. 앞으로는 새로운 길을 걸을 수밖에 없어. 하지만 어떤 인생을 걸어가야 하지? 무고한 죄로 울었던 연약한 희 생자로 출발해서 최후에는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인가... 결국은 도둑질... 그 길밖에는 없는 걸까?)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조 로마노, 앤소니 올사티, 페리 포프, 로렌스 판사들의 일을 회상해 보 (아니야, 도둑은 아니야. 나는 복수자인 거야. 그리고, 여성 모험가라고 할 수도 있지.) 경찰과 두 명의 천재 사기꾼, 그리고 배신자인 보석상을 골탕먹이지 않 았던가. 트레이시는 어네스틴과 귀여운 에미를 회상해 보았다. 가슴이 아 팠다. 거의 충동적으로 트레이시는 완구점에 들러 인형극 세트를 사서 그 것을 에미에게 우송했다. 그 소포 뭉치에 곁들인 카드에는 이렇게 적었 '너의 새로운 친구로 삼아 줘. 너무너무 네가 그립다.- 너를 사랑하는 트레이시가.' 다음에는 매디슨 가의 모피점을 찾아가 청여우 목도리를 사서 200달러 짜리 수표와 함께 어네스틴에게 우송했다. 카드에는 짤막하게 이렇게 적 '정말 고마웠어, 어네스틴. ...트레이시가.' (이젠 마음의 빚을 갚은 셈이군.) 트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 이젠 자신이 좋아 하는 곳에 갈 수도 있다.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다. 트레이시는 자신의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축하해 헬무스레이 팰리스 호텔의 객실을 계약했다. 47층의 방에서는 성패트릭 성당이 내려다 보였 고 저 멀리에는 조지 워싱턴교가 바라다 보였다. 돌아보면 불과 몇 마일 밖에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최근까지 살았던 음산한 싸구려 여인숙 거리 가 있었다. (이젠 두 번 다시는 그런 곳에는 살지 않겠어.) 트레이시는 굳게 맹세했다. 호텔의 매니저가 가져다 준 샴페인 뚜껑을 따서 느긋한 기분으로 그것 을 마시면서 맨해턴의 마천루에 지고 있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달이 뜰 무렵에는 트레이시의 마음은 굳어져 있었다. 런던으로 가자. 이제부터는 인생의 참다운 즐거움을 맛볼 차례다. (대가는 이미 치루었으니까. 나에게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어.) 트레이시는 마음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트레이시는 침대에 드러누어 밤 늦게까지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있었 다. 두 사나이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땅딸막한 남자는 보리스 메르니 코프라는 러시아인으로 몹시 어울리지 않는 다갈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또 한 남자는 그와는 반대로 키가 훤칠하고 호리호리한 몸매에 우아한 매무새로 피에트르 네글레스코라고 한다. 이 두 사람은 무엇으로 결부되 어 있는가 하고 트레이시는 흥미를 느꼈다. "체스 시합은 어디서 하게 됩니까?" 뉴스 캐스터가 물었다. "아름다운 흑해 연안의 소치에서 열립니다." 메르니코프가 대답했다. "국제적으로 초일류급 체스 선수인 두분이 서로 타이틀을 주거니 받거 니 하고 있고, 지난번의 승부는 무승부였습니다. 네글레스코 씨에게 묻겠 습니다. 현재로서는 메르니코프 씨가 타이틀을 갖고 있으신데 그로부터 다시 타이틀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입니다." 루마니아인인 네글레스코는 대답했다. "그에게는 이길 가망성이 없습니다." 러시아인인 메르니코프도 승리를 장담했다. 트레이시는 체스 경기 따위에는 전혀 문외한이었지만 두 사람의 태도 가 몹시 교만하게 느껴졌다. 그런 태도가 몹시 못마땅했던 트레이시는 리 모콘의 스위치를 눌러 텔레비전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트레이시는 여행사에 들러 퀸 엘리자베스 2세호의 호화로운 객실을 예약했다. 마치 처음 배로 여행하는 아이처럼 흥분했고, 그로부터 3일 동안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옷과 여행가방을 사들였다. 출항하는 날 아침, 트레이시는 리무진을 빌려 타고 부두로 갔다. 퀸 엘 리자베스 2세호가 정박하고 있는 부두에 도착해 보니 부두는 카메라맨과 기자들로 들끓고 있어 트레이시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오래지 않아 그 혼잡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매스컴 관계자들은 세계를 대표하는 체스의 명인인 메르니코프와 네글레스코와 인터뷰를 하려고 몰 려들어 있었던 것이다. 트레이시는 두 사람 옆을 빠져나와 트랩에 있는 출구에 패스포트를 제시하고 배에 올랐다. 갑판에 오르자 승객담당자에게 티켓을 보이고 선실까지 안내를 받았다. 트레이시의 방은 위치가 좋은데 다가 전용 테라스도 있었다. 엄청난 비용이 들었지만 그만한 값어치는 있 겠지 하고 트레이시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84] 제목 : 제20장 정말 기이한 인연이군요. 옆에 앉아도 짐을 풀고 나서 선실을 나와 복도를 산책해 보았다. 어느 선실에서나 샴페인을 터뜨리는 소리, 떠들며 웃는 소리가 흘러나와 송별 파티가 벌어 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광경을 보고 있자 그녀는 견딜 수 없 을 정도의 적막감에 사로잡혔다. 자신은 전송해주는 사람도 없거니와 사 랑할 사람도 사랑해 줄 사람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지. 스웨덴 여자인 빅 바사가 죽기살 기로 나를 쫓아다녔잖아.) 트레이시는 자신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그리고는 소리내어 웃었다. 트레이시는 갑판으로 올라갔다. 남자들의 추파도 여자들의 질투의 눈길 도 전혀 안중에 없었다. 나지막한 기적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어서 커다랗게 외치는 소리가 들 "전송나온 분들께서는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 목소리에 트레이시의 흥분은 고조되었다. 완전히 미지의 미래를 향 해 항해에 나서려는 것이다. 예인선이 퀸 엘리자베스 2세호를 항구에서 끌어내려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거대한 배는 크게 몸을 떨었다. 트레이시 는 다른 승객들 속에 섞여 갑판에 서서 자유의 여신상이 시계에서 멀어 지는 것을 응시했다. 그리고 나서 배 안을 둘러보며 돌아다녔다. 퀸 엘리자베스 2세호는 길이가 약 270미터, 13층의 높이를 가지고 있으 며 그 자체가 하나의 작은 소도시였다. 레스토랑이 네 개에, 바가 여섯군 데, 댄스홀이 두 개, 나이트클럽이 두 곳, 그리고 바다의 온천 '골든도어' 가 있었다. 또한 다수의 매점, 수영장이 네 개, 체육관이 하나, 골프연습 장이 하나, 조깅용 트랙도 한군데 설치되어 있다. {이 배에서 떠나고 싶지 않게 될 것 같아.) 트레이시는 경탄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트레이시는 작기는 하지만 메인 레스토랑보다 우아한 레스토랑 프린세 스 그릴의 위층을 예약했다. 좌석에 앉으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들은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요." 고개를 들어 보니 FBI를 사칭하던 사나이 톰 바워즈가 그곳에 서 있었 (미치겠군! 저 남자와 만나려고 비싼 돈을 들여 이 배에 탄 것은 아닌 데.)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정말 기이한 인연이로군요. 함께 앉으면 실례가 될까요?" "대단히요." 가짜 FBI 사나이는 뻔뻔스럽게도 트레이시의 바로 앞 좌석에 앉아 상 냥한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들은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것 같군요. 똑같은 목적으로 이 배에 탄 것이니까요." 트레이시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소리죠, 바워즈 씨?" "스티븐스요. 제프 스티븐스가 본명이오." 남자는 격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이 무엇이든 나와는 상관없어요." 트레이시는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잠깐만! 지난번 만났을 때의 일을 해명해야겠소." "해명하고 뭐고 할 것도 없잖아요. 바보 멍청이나 어린애라도 알 수 있 는 줄거리잖아요. 그래요, 실제로 바보인 나도 알 수 있었으니까요." 트레이시는 빈정거리며 말했다. "나는 콘래드 모건에게 빚이 있었죠. 하지만 그를 실망시키고 말았소." 제프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의 태도에는 순진무구한 장난꾸러기 소년같은 매력이 있었다. '부탁해요 데니스, 수갑을 채울 것까지는 없잖아요. 저 여자는 어디로 도망갈 수도 없고...' 트레이시는 냉담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 조금도 즐겁지 않아요. 무엇하러 이 배에 탄 거죠? 나룻배 쪽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말예요?" 제프는 웃었다. "맥시밀리언 피아폰트가 타고 있으니까 이건 나에게 안성맞춤인 나룻배 가 아니겠소?" "그 사람이 누군데요?" 제프는 깜짝 놀라 트레이시를 응시했다. "저런, 당신은 정말로 모른단 말이오?" "뭘 모른단 말예요?" "피아폰트는 세계 최대의 갑부예요. 경쟁상대회사를 밀어내는 것을 취 미로 삼고 있는 남자지요. 놈은 굼벵이 같은 말에만 돈을 거는 주제에 재 빠른 여자를 좋아하죠. 그 양쪽 모두를 잔뜩 소유하고 있지만 말이오. 금 세기 최후의 낭비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오." <연합통신> 04/07 18:11 野3당 금권선거 대책 논의 [85] 제목 : 제20장 그러나 절대 안믿는게 있어요. 그건 "그리고 당신은 그의 남아도는 돈을 축내서 어느 정도 홀가분하게 해주 려는 속셈이란 말인가요?" "사실 그렇게 해줄 생각이지만 우리들 두 사람이서 해야 할 일이 있지 않겠소?" 제프는 트레이시의 반응을 알아보려고 지그시 그녀를 응시했다. "있겠죠, 스티븐스 씨. 안녕을 해야겠죠." 그렇게 말하고 일어나 레스토랑에서 나가는 트레이시를 제프는 멍하니 눈으로 전송할 뿐이었다. 트레이시는 선실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자기 인생 항로에 제프 스티븐 스 라는 남자가 다시 나타나다니, 너무나도 불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 다. 트레이시는 기차 안에서 그들이 '당신을 체포하겠소'라고 말했을 때 의 그 공포감을 털어버리고 싶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저 남자 때문에 모처럼의 여행을 망쳐버릴 수 는 없어. 앞으론 일체 모르는 척해야지.)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갑판으로 나왔다. 하늘은 빌로드에 별을 뿌려놓은 것 같았다. 마법의 천막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 같은 기가 막히게 매혹적 인 밤이었다. 트레이시는 달빛을 받으며 난간에 기대어 파도에 반짝이고 있는 야광충을 황홀한 마음으로 응시하며 달콤한 밤바람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때 또 다시 제프가 옆에 나타났다. "그렇게 서 있는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어요? 항해가 얼마 나 로맨틱한지 믿고 있나요?" "그래요,믿어요. 그러나 절대로 믿지 않는 것이 있지요. 그건 당신이라 는 사람이에요." 트레이시는 그 자리를 뜨려고 했다. "아아, 잠깐만 기다려요. 당신에게 알려줄 뉴스가 있어요. 맥시밀리언 피아폰트가 이 배에 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방금 알아냈어요. 출항 직전 에 취소한 모양이오." "어머나, 그것 참 안 되셨군요. 비용만 허비하고 말았으니." "꼭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지요. 당신은 이 항해에서 다소 용돈이라도 벌고 싶지 않소?" 제프는 트레이시의 반응을 살폈다. (정말 치사한 남자군.) "잠수함이나 헬리콥터를 호주머니에 감추어 두지 않는 이상 도망칠 길 이 없어요." "누가 도둑질을 한다고 했나요? 보리스 메르니코프나 피에트르 네글레 스코 라는 이름을 들은 적 있소?" "있다면 어쩌겠다는 거죠?" "메르니코프와 네글레스코는 체스의 왕위 결정전 때문에 러시아로 향하 고 있는 중이오. 당신이 나의 주선으로 녀석들 둘을 상대로 체스 시합을 하는 것이오. 우린 거금의 돈을 벌 수 있어요. 우리의 작전은 완벽하니 까." 제프는 열중하여 떠벌리기 시작했다. 트레이시는 어이가 없어 제프를 바라보았다. "나보고 두 사람과 체스 시합을 하라구요? 게다가, 작전은 완벽하다구 요?" "그렇고 말고. 하겠어요?" "재미있겠군요. 다만 약간 문제가 있어 보여서 탈이지만." "무슨?" "내가 체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제프는 안심시키듯이 웃었다. "상관없소. 방식은 가르쳐줄 테니까." "이봐요, 혹시 당신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녜요? 충고한 마디 할까요? 실력있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보세요. 그럼 안녕!" 트레이시는 이렇게 내뱉고 돌아섰다. 다음 날 아침 트레이시는 보리스 메르니코프와 딱 마주쳤다. 갑판을 조 깅 중이던 메르니코프가 산책 중인 트레이시와 커브에서 부딪쳤던 것이 "똑바로 보고 다녀요!" 메르니코프는 호통을 치고 그대로 달려가 버렸다. 트레이시는 갑판에 쓰러져 엉덩방아를 찧은 자세로 그가 사라져 가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야만인이로군!" 일어나 먼지를 털고 있는데 승객 담당이 달려왔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아가씨?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만..." "아, 아뇨 괜찮아요. 고마워요." 이 선박 여행은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트레이시가 선실로 돌아가 보니 제프 스티븐스에게 연락해 달라는 메 시지가 6통이나 들어 있었다. 전부를 무시했다. 오후에는 수영과 독서를 즐기고, 마사지를 받았고, 저녁이 되자 바에 가서 식사 전의 칵테일을 마 셨다. 하지만 모처럼의 행복감도 오래가지 못했다. 바에 있던 루마니아인 피에트르 네글레스코가 트레이시를 보자 얘기를 걸어왔던 것이다. [86] 제목 : 제20장 난 섹스의 달인이기도 하지요. "한잔 살 수 있게 해 주시겠습니까, 아가씨?" 트레이시는 당황해서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저어, 글쎄요. 고마워요." "뭘 드시겠습니까?" "보드카 앤드 토닉으로." 네글레스코는 바텐더에게 주문하고 트레이시를 향해 다시 돌아앉았다. "저는 피에트르 네글레스코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마 그러시겠죠. 유명인이니까요. 나는 세계 제1의 체스 선수입니다. 고국에 돌아가면 국가의 영웅이지요." 네글레스코는 트레이시에게 몸을 밀착시켜 자연스레 무릎에 손을 올려 놓았다. "난 섹스의 달인이기도 하지요." 트레이시는 너무나 노골적이고 당돌한 말에 잘못 들었나 하고 되물었다. "무슨 달인이라고요?" "섹스의 달인." 트레이시는 이 남자의 얼굴에 마시던 술을 끼얹어 버릴까 했지만 가까스로 자제했다. 좀더 좋은 것을 생각해 냈다.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 실례하겠습니다." 트레이시는 제프 스티븐스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프린세스 그릴에 있는 그를 발견하고 다가가려고 했는데 마침 어떤 여인과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멋진 이브닝 가운을 입은, 마치 그림에서 빠져나온 듯한 모습의 금발 미인이었다. (사정을 좀 더 알아봐 둘 걸 그랬어.) 트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복도로 나와 버렸다. 30초도 채 안 되어 제프가 쫓아 나왔다. "트레이시... 날 찾고 있는 것이 아니었소?" "모처럼 즐거운 만찬을 방해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녀는 디저트에 불과해요." 제프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래, 무슨 일이오?" "메르니코프와 네글레스코에 관한 이야기, 진심이었나요?" "당연하죠. 그런데, 왜 묻소?" "그 두 사람에겐 예절을 가르쳐줄 필요가 있겠어서 그래요." "동감이오. 녀석들 교육도 시키고 덕분에 돈도 벌지 않겠소?" "좋아요. 어떤 계획을 세워 놓고 있죠?" "당신이 체스로 놈들을 때려눕히는 것이오." "난 진지하게 듣고 있어요." "나도 진지하게 말하고 있소." "말했잖아요. 난 체스는 할 줄 모른다고. 킹도 퀸도 몰라요. 나는..." "걱정할 것 없다고 했지 않소. 두 번의 연습만으로 녀석들을 해치울 수 있소." 제프는 용기를 주었다. "두 사람 모두?" "물론이오. 그렇게 말했지 않소? 당신은 녀석들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거요." 제프는 더블다운 피아노 바에서 보리스 메르니코프 옆에 앉아 있었다. "그 여성은 상당한 실력자예요. 그녀는 비밀리에 여행을 하는 중이지요." 제프는 메르니코프에게 털어놓았다. "여자가 체스를 잘한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 여자들은 생각하는 머리를 가지고 있지도 않은데 말이오." 러시아인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녀의 머리는 달라요. 당신을 쉽게 해치우겠다고 큰 소리를 치던 걸요." 보리스 메르니코프는 큰 소리로 웃었다. "나를 패배시킬 사람은 없소." "그녀는 당신과 피에트르 네글레스코 두 사람을 동시에 상대해 적어도 무승부로 가져갈 수 있다고 장담하고 있어요. 그리고 1만 달러를 걸어도 좋다고 했구요." 보리스 메르니코프는 마시던 것으로 목을 추겼다. "뭐라고? 그런 바보 갱遮淪 적어도 무승부로 가져갈 수 있다고 장담하고 있어요. 그리고 1만 달러를 걸어도 좋다고 했구요." 보리스 메르니코프는 마시던 것으로 목을 추겼다. "뭐라고? 그런 바보 같은! 우리들 두 사람을 동시에 상대한다고? 그... 그 여자는 아마추어가 아니오?" "그래요. 두 분에게 1만 달러씩 걸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바보같은 여자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겠군." "당신이 이기면 그 내깃돈을 어느 그 여자는 아마추어가 아니오?" "그래요. 두 분에게 1만 달러씩 걸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바보같은 여자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겠군." "당신이 이기면 그 내깃돈을 어느 나라에서나 지정한 구좌에 불입할 수 있어요." [87] 제목 : 제20장 둘을 동시에 상대하다니 정말! 러시아인의 얼굴에 탐욕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게 센 여자 기사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어. 더구나 우리들 둘을 동시에 상대하다니 말도 안돼! 젠장, 그 여자 혹시 머리가 돈 여자 아니오?" "그녀는 현금으로 2만 달러를 가지고 있어요." "어느 나라 여자요?" "미국인이지요." "아아, 그럼 알겠군. 미국의 부자들은 모두 머리가 돌았어. 여자는 특히 더 그렇지." 제프는 자리를 뜨려고 하면서 슬쩍 말을 흘렸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피에트르 네글레스코 한 사람과 승부를 하기로 되 었다고 전해 줘야겠군요." "네글레스코가 그녀와 승부하겠다고 했소?" "네. 당신에게 말하지 않던가요? 그녀는 당신들 두 분과 대전하고 싶어 하는데 당신이 겁을 낸다면 " "내가 겁을 낸다고? 이 보리스 메르니코프가 겁을 낸다고? 철저하게 혼을 내줘야겠군. 그 어리석은 승부는 언제 어디서 할 거요?" 러시아인은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녀는 금요일 밤으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배가 바다 위에 있는 마지 막 밤이지요." 보리스 메르니코프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3회 승부의 장소는?" "아뇨. 승부는 단 1회 뿐입니다." "1만 달러나 걸고?" "틀림없습니다." 러시아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그런 거금은 가지고 있지 않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휘트니 양이 원하고 있는 것은 위대한 보리스 메르니코프 명인과 대전할 수 있는 영예뿐입니다. 비록 당신이 진다해도 당신의 사인이 든 사진을 그녀에게 드리면 되는 겁니다. 당신이 이기면 1 만 달러가 들어오게 되지요." 제프는 안심시켰다. "내깃돈은 누가 맡게 되지?" 러시아인은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이 배의 사무장입니다." "좋소." 메르니코프는 마음을 정했다. "금요일 날 밤 10시 정각에 시작하도록 합시다." "그녀가 기뻐할 겁니다." 제프는 러시아인의 곁을 떠났다. 다음 날 아침, 제프는 체육관에서 피에트르 네글레스코에게 말을 걸었 다. "그 여자는 미국인인가? 미국인들은 정말 머리가 비었군." 피에트르 네글레스코는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굉장한 실력의 소유자예요." 피에트르 네글레스코는 경멸하듯 말했다. "굉장한 정도로는 안 되지. 제일 강하지 않고서는. 물론 내가 그 세계 제1이지만." "그러니까 그녀는 당신과 대전하고 싶어하는 겁니다. 만약 당신이 진다 해도 사인이 든 당신의 사진을 주는 것으로 족합니다. 이기면 현금으로 1 만 달러가 손에 들어오구요 " "이 네글레스코는 아마추어 따위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주의요." "...어디라도 원하시는 나라의 구좌에 불입되는 것인데 말입니다." "논할 거리도 못되는 얘기요." "정 그러시다면 그녀에겐 보리스 메르니코프 한 사람하고만 대전하기로 되었다고 전해야겠군요." "뭐요? 그렇다면, 메르니코프는 그 여인과의 대국을 승낙했다는 말이 오?" "그렇고 말고요. 하지만 그녀는 당신들 두 분과 동시에 대국하고 싶어 하거든요." "그, 그런,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겁을 모르는 여자군! 세계의 명인인 우리들 두 사람을 상대해서 이길 수 있다고 지껄여 대다니, 대체 그 여자 는 어떤 여자요? 그 여자 어디 정신병원에서 도망쳐 나온 것 아니오?" 네글레스코는 말문이 막힌다는 듯이 침을 튀겼다. "좀 별난 데가 있긴 합니다만. 하지만 돈 얘기는 틀림없습니다. 현금입 니다." 제프는 고백하듯 말했다. "그 여자를 이기면 1만 달러라고 했소?" "맞습니다." "보리스 메르니코프도 같은 액수를 손에 넣는 건가?" "그가 그녀에게 이기는 경우의 얘기지만 말입니다." [88] 제목 : 제20장 피에트르는 입술을 ┓으며 웃었다. 피에트르 네글레스코는 기세 당당하게 껄껄껄 웃어 제꼈다. "녀석은 이길 거요. 물론 나도 그렇지만." "물론 그러시겠지요. 당연한 말씀이지요." "내깃돈은 누가 맡게 됩니까?" "이 배의 사무장이 맡을 것입니다." (그녀의 돈을 메르니코프 한 사람이 독차지하도록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 피에트르 네글레스코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준비는 다 되어 있소? 장소는 어디고 시간은?" "금요일 밤입니다. 10시에 시작합니다. 퀸즈 룸으로 와 주십시오." 피에트르 네글레스코는 입술을 핥으며 웃었다. "반드시 가겠소." "두 사람 모두 승낙했다고요?" 트레이시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요." "나 열이 좀 나는 것 같아요." "찬 물수건 가져 올께요." 제프는 서둘러 욕실로 가서 타월을 차게 적셔가지고 침대 의자에 누워 있는 트레이시의 이마에 얹어 주었다. "기분이 어떻소?" "정말 죽는줄 알았어요.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두통이 자주 나곤 했소?" "아뇨." "그럼 병은 아니군요. 잘 들어요, 트레이시. 이런 수법의 일을 하기 전 에는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에요." 트레이시는 벌떡 일어나 타월을 던져 버렸다. "이런 수법이라뇨? 이런 일이 또 있었다는 건가요? 나는 세계 최강의 체스의 명인 두 사람을 상대로 승부하는 거예요. 당신에게서 단 한번 배 워가지고 말예요 " "두 번. 당신에겐 타고난 체스의 재능이 있소." 제프가 정정했다. "아무래도 좋아요. 도대체 왜 내가 이런 일에 말려들게 되었는지 모르 겠군요." "간단하지. 서로 거금이 필요하니까 그렇지." "난 거금 따위는 원치 않아요. 이따위 배,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버렸으 면 좋겠어요. 타이타닉호처럼 되면 얼마나 좋을지 모르겠어요." 갑자기 트레이시는 울음을 터뜨렸다. "자아 자, 기분을 가라앉혀요. 이제부터..." 제프는 위로하듯 말했다. "이제부터 재난이 일어나고 말 거예요. 배의 손님 전부가 구경하러 올 거예요." "바로 그것이 중요한 거요." 제프는 밝게 웃었다. 제프는 배의 사무장과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았다. 2만 달러를 여행자 수표로 사무장에게 맡겼고 금요일 밤에 체스대를 두 개 설치해 놓으라고 부탁을 했다. 소문은 순식간에 온 배 안에 퍼져 나갔고 승객들은 제프에 게 정말 할 것이냐고 물어보러 왔다. "그럼요. 이미 확정된 사실입니다." 제프는 꼬치꼬치 묻는 손님들에게 대답하며 덧붙였다.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가엾게도 휘트니 양은 자기가 승리할 거라고 믿고 있지 뭡니까. 실제로 그녀는 자기의 승리에 돈을 걸고 있습니다." "저어, 물어볼 것이 있는데요. 나도 돈을 걸어도 될까요?" 손님 한 사람이 물었다. "되고말고요. 당신이 원하는 액수만큼 거세요. 휘트니 양은 10대1의 승 률이 되면 만족이라고 말했습니다." 100만대 1이란 편이 그야말로 그 승부에 걸맞는 것이 아닐까. 최초의 판돈이 접수된 뒤로 지원자가 봇물처럼 밀려들었다. 승객들뿐만 아니라 고급 선원, 기관사에 이르기까지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게임에 말려든 양상을 띠었다. 판돈은 5달러에서 5천 달러까지 각양 각색으로, 하나같이 러시아인과 루마니아인 쪽에 걸었다. 걱정이 된 사무장이 선장에게 보고했다. "이런 일은 저 역시 처음 체험하는 일입니다. 완전히 선풍을 불러일으 키고 있습니다. 승객의 거의 전원이 내기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제게 맡겨진 돈이 20만 달러에 이릅니다." 선장은 생각에 잠겨 사무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휘트니 양은 메르니코프와 네글레스코를 동시에 상대하겠다고 했지?" "네 선장님." "두 남자가 틀림없는 진짜 피에트르 네글레스코와 보리스 메르니코프 라는 것을 확인했나?" [89] 제목 : 제20장 막이 올랐다. 트레이시의 무릎이 "네에 그럼요. 물론입니다." "명인 두 사람이 일부러 체스에 패해주는 그런 쇼를 부리는 내기는 아 니겠지?" "두 사람의 성격과 위치로 보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들이 그 여성에게 지기라도 한다면 고국에 돌아갔을 때 어떻게 되는가는 명백한 일입니다." 선장은 곤혹스러운듯 얼굴을 찡그리고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휘트니 양과 스티븐스 씨에 관해 뭔가 아는 사실은 없나?" "아뇨, 아무 것도 모릅니다. 다만 그저 제가 본 바로는 두 사람은 따로 따로 여행하고 있는 것 같다는 사실뿐입니다." 선장은 마음을 결정했다. "뭔가 사기 냄새가 풍기기는 하는데, 웬만하면 그만두게 하겠지만.. 나 도 체스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체스에서는 절대로 짜고 하는 일은 불가 능하지. 내가 목숨을 걸고라도 단언할 수 있어. 이 시합을 진행시키게." 선장은 자기 책상으로 다가가 검은 가죽지갑을 꺼냈다. "나는 50파운드를 걸겠네. 명인들 쪽에." 금요일 9시까지 퀸 엘리자베스호의 퀸즈룸은 일등객실 승객들로 만원 을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2등, 3등의 객실 승객 나아가서는 비번인 선원, 기관사들까지 밀어닥쳤다. 제프 스피븐스의 요청으로 이 시합을 위해 두 개의 방이 준비되었다. 체스대 하나를 퀸즈룸 중앙에, 또 하나를 인접한 담화실에 설치토록 했다. 두 체스실은 커튼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기사들이 신경을 쓰지 않게 하고 싶습니다. 관전객들은 어느 한쪽이든 좋아하시는 시합을 택해 이동하지 않도록 해 주세요." 제프는 설명했다. 체스대 주위에는 어느 곳도 관객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빌로드의 로프 가 쳐져 있었다. 관객들은 결코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대국을 바로 눈앞 에서 목격하고 싶어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은 오로지 한 가지, 이 젊고 아름다운 미국 여성으로서는 - 아니, 다른 그 그 누구라 해도 - 체 스의 명인, 네글레스코와 메르니코프 두 사람을 동시에 상대해 양자 모두 물리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제프는 게임이 시작되기 조금 전에 트레이시를 두 사람의 명인에게 소 개했다. 한쪽 어깨가 드러나게 연한 녹색 쉬폰 가운을 입은 트레이시는 그리스시대의 회화 바로 그것이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신비한 표정이 감 돌았다. 피에트르 네글레스코는 위에서 아래로 그녀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당신은 출장한 모든 국내 대회에서 승리를 거두었소?" "네." 트레이시의 대답에 거짓말같은 구석은 전혀 없었다. 네글레스코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 이름은 들은 적이 없는데." 보리스 메르니코프도 마찬가지로 무례했다. "당신네 미국인은 돈의 용도를 모르는 것 같군. 미리 고맙다는 인사를 해두겠소. 이기면 우리 가족들도 기뻐할 테니까." 트레이시의 눈은 짙은 비취색으로 변했다. "당신은 아직 이기진 않았어요, 메르니코프 씨." 메르니코프는 온 방안이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 잘하시는군요, 부인. 나는 당신의 실력은 잘 모르지만 나의 실력 만은 알고 있어요. 나는 명인인 보리스 메르니코프 라는 것을 말이오." 10시가 되자 제프는 빙그르르 둘러보고 양쪽 살롱이 모두 관전객으로 만원이 된 것을 확인했다. "승부 개시 시간입니다." 트레이시는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어째서 이런 지경이 되었 는지 그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절대로 어렵지 않소. 날 믿어요." 제프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제프를 믿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난 머리가 좀 이상해진 모양이야.) 트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세계에서 내노라 하 는 체스의 명인 두 사람을 상대하려 하고 있는데, 자기는 체스에 대해서 는 전혀 문외한이고 겨우 4시간 동안 제프에게 코치를 받았을 뿐인 것이 다. 막이 올랐다. 트레이시의 무릎이 달달 떨려왔다. 메르니코프는 앞으로 의 결과에 기대를 모으고 있는 군중들을 둘러보며 여유있는 웃음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는 승무원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브랜디를 갖다주게. 나폴레옹으로." 제프가 메르니코프에게 말했다. [90] 제목 : 제20장 이 여자를 패배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 "페어플레이로 진행시키고 싶습니다. 당신이 백으로 선수, 그리고 네글 레스코 씨와의 게임에서는 휘트니 양이 백으로 선수입니다만." 명인들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관객들이 숨을 죽이고 응시하고 있는 가운데 보리스 메르니코프는 최 초의 말을 놓았다. (이 여자를 패배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철저하게 몰아붙여야겠 어.) 메르니코프는 힐끗 트레이시를 쳐다 보았다. 체스판을 보고 있던 그녀 는 슬쩍 끄떡이고 나서 자기 말은 움직이지 않고 자리를 떴다. 관객사이 를 뚫고 트레이시는 또 한쪽의 대전자 피에트르 네글레스코가 기다리고 있는 또 하나의 살롱으로 갔다. 거기에도 100명을 밑돌지 않는 관객이 몰 려들어 있었다. 트레이시는 네글레스코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여어, 머리 좋은 아가씨. 보리스를 아직 해치우지 않았나?" "시합 중이에요, 네글레스코 씨." 트레이시는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체스판에 손을 내밀어 보리스 메르니코프가 놓은 것과 똑같이 말을 움직였다. 네글레스코는 트레이시를 올려다보고는 싱끗 웃었다. 1시 간 후에, 마사지 예약을 해 놓았는데 어쩐지 시합이 좀 더 일찍 결말이 날 것 같다. 네글레스코는 체스판에 손을 내밀어 즉석에서 대항하는 수를 썼다. 트레이시는 몇초 동안 체스판을 응시하고는 일어났다. 그녀가 보리 스 메르니코프와의 대국장으로 돌아가는 것을 승무원이 에스코트했다. 메르니코프와의 체스판에서 트레이시는 피에트르 네글레스코가 쓴 수 를 이번에는 그곳에서 되풀이했다. 멀리에 있던 제프가 살며시 고개를 끄 덕이는 것이 보였다. 2분 후, 네글레스코와의 체스판에서 트레이시는 메르니코프의 수를 재 현했다. 네글레스코의 다음 수를 천천히 확인한 다음 트레이시는 보리스 메르 니코프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이 여자는 과연 아마추어는 아니군. 이 여자의 실력을 좀 탐색해 봐야 겠군.) 메르니코프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사실 두 사람의 명인에게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자신들이 만만치 않 은 적과 대국하고 있다는 것을 점점 깨닫기 시작했다. 아무리 교묘한 수 를 놓아도 이 풋내기는 자유 자재로 응전해 오는 것이다. 각기 다른 방에서 대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명인으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사실은 이 두 사람의 대전이었던 것이다. 메르니코프가 트레 이시에 대항해서 쓴 수는 모두 고스란히 네글레스코와의 승부에서 놓아 졌고 네글레스코의 응수는 그대로 메르니코프에게 향해져 있었던 것이다. 대전이 중반에 이르렀을 즈음에 와서는 두 사람의 명인들도 이미 거드 름을 깡그리 내던지고 말았다. 명예를 걸고 싸우고 있었다. 다음 한 수를 두기 위해 방안을 어슬렁거렸고, 초조하게 담배를 피워 물었다. 냉정해 보이는 건 트레이시 뿐이었다. 게임은 4시간이나 계속되었는데도 관객은 손끝하나 까딱 않고 체스판 을 주시하고 있었다. 체스의 명인들은 각자 몇 백개의 정석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대전하는 상대의 유파와 격식과 싸우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이 여자는 네글레스코의 유파를 연구하고 있었군 그래. 녀석이 개인적으로 코치를 한 것이 틀림없어.) 게임이 팽팽해짐에 따라 명인들은 두 사람 모두 트레이시를 해치울 가 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길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대국이 시작된 지 6시간 후인 새벽 4시 쌍방 모두 승산은 없게 되었다. 메르니코프는 체스판을 쳐다보며 숙고한 후 크게 숨을 쉬며 쥐어짜듯 말 했다. "비긴 것을 인정하겠소." 웅성대는 소리를 압도하듯 트레이시는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군중은 떠들썩해졌다. 트레이시는 일어나 옆 방으로 갔다. 자리에 앉으려고 하자 네글레스코 가 침착하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긴 것을 인정하겠소." [92] 제목 : 제20장 아직, 자고 싶지 않아요. 제프 그 순간, 이 방에서도 같은 웅성거림이 번져 나갔다. 군중들은 자신들 이 목격한 일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디선지 모르게 한 여성이 나타나 세 계 제일을 다투는 두 사람의 체스 명인을 동시에 상대해 꼼짝 못하게 만 들었던 것이다. 제프가 트레이시의 옆에 나타나 싱끗 웃었다. "자아 가요. 둘이서 한잔합시다." 트레이시와 제프가 사라진 다음에도 보리스 메르니코프와 피에트르 네 글레스코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넋을 잃은 듯 체스판을 응시하 고 있었다. 트레이시와 제프는 갑판의 바로 올라가 2인용 테이블에 자리잡고 있었 다. "훌륭했소. 메르니코프의 얼굴을 보았소? 심장발작을 일으키는 것이 아 닌가 걱정이 되더구만." 제프가 웃었다. "난 내가 심장 발작을 일으키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수입은 얼마나 돼 요?" 트레이시는 내뱉듯 말했다. "거의 20만 달러. 그 판돈은 배가 서점프톤에 정박하는 아침에 사무장 에게서 받기로 하지. 자아, 그럼 아침 식사 때 식당에서 만납시다." "좋아요." "방으로 돌아가 쉬고 싶군. 선실까지 바래다 주겠소." "난 아직 자고 싶지 않아요, 제프. 마음이 진정되질 않아요. 먼저 가세 요." "당신은 챔피언이니까 그렇겠죠." 제프는 그렇게 말하며 일어섰고 몸을 구부려 트레이시의 뺨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잘 자요, 트레이시." "잘 자요, 제프." 트레이시는 제프가 바에서 나가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잠을 자라고? 도저히 무리야! 나에게 있어 가장 자극적인 밤이었는 걸. 러시아인도 루마니아인도 자만심에 가득차 있었으니까 이런 꼴이 되었지. 제프가 '날 믿어요.'라고 해서 나는 그대로 따랐을 뿐이야. 제프가 좋아서 이런 일을 한 것은 아니야. 제프는 사기의 천재야. 유쾌하고 재미있으며 영리하고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 하지만 남자로서의 그에게 흥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구. 선실로 돌아갈 때 제프는 고급 선원 한 사람과 마주쳤다. "볼 만한 시합이었어요, 스티븐스 씨. 이 명승부에 관한 소식은 이미 무 선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서점프톤에서 보도진이 당신들 두 분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당신은 휘트니양의 매니저입니까?" "아뇨, 그렇지 않소. 이 배에서 알게 된 것 뿐이오." 제프는 가볍게 대답하긴 했어도 마음은 분주히 설레이고 있었다. 자기 와 트레이시가 한데 어울리게 되면 체스의 대국이 짜고 한 것이 아니었 는가 하는 의심을 사기 쉽다. 조사에 착수할 가능성도 크다. 조금이라도 의심을 사기 전에 판돈을 받아 두기로 하자. 제프는 트레이시에게 메모를 남기기로 했다. '돈은 내가 맡고 있겠소. 축하의 조찬은 사보이 호텔에서 들기로 합시 다. 당신은 정말 멋있었소. 제프가.' 그 메모를 봉투에 넣어 승객 담당에게 부탁했다. "이걸 아침 일찍 휘트니 양이 받아 볼 수 있게 해 주게." "알겠습니다." 제프는 사무장의 사무실로 향했다. "일찍 실례합니다." 제프는 이른 아침의 실례를 사과했다. "하지만 이제 몇 시간 후 배가 입항하게 되면 당신은 바빠지시겠지요. 그래서 괜찮으시다면 지금 그 판돈을 정산받고 싶습니다만." "아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 부인은 마법이라도 쓰는 것 아닌 가요?" 사무장은 빙그레 웃었다. "네에,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괜찮으시다면 좀 물어보고 싶은데요, 스티븐 씨. 그녀는 대체 어디서 그런 훌륭한 체스 실력을 쌓았습니까?" 제프는 실토하듯이 상대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전미국 선수권자인 보비 피셔 밑에서 사사받았다고 들었습니다만." 사무장은 금고에서 커다란 마닐라 봉투를 꺼냈다. "이런 많은 현금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부담이 될 텐데요. 같은 액수의 수표를 써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현금 그대로도 좋습니다." 제프는 싱끗 웃었다. [93] 제목 : 설마 내가 독차지하고 도망칠까봐 그런건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배가 잔교에 계류되기 전에 우편선이 오게 되 겠지요?" "네. 오전 6시에 올 예정입니다." "그 우편선에 제가 탈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어머니가 위독하시다고 해서 한 시라도 빨리 늦기 전에 달려가고 싶습니 다." 제프는 소리를 낮추었다. "아아, 그것 참 안 되셨군요. 스티븐스 씨. 알겠습니다. 어떻게 손을 써 보겠습니다. 세관 쪽도 수배해 놓겠습니다." 오전 6시 15분, 제프 스티븐스는 현금이 든 두 개의 마닐라 봉투를 여 행가방에 넣고 배의 사다리를 내려 우편선에 올라탔다. 그는 돌아보며 눈 앞에 솟아 있는 거대한 배의 외관에 마지막 눈길을 보냈다. 이 정기선의 승객들의 대부분은 깊이 잠들어 있다. 제프는 퀸 엘리자베스 2세호가 해 안에 닿기 훨씬 전에 상륙할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참으로 멋진 선박 여행이없소." 제프는 우편선의 승무원 한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요, 대단히 멋있었지요?" 동의하는 목소리가 들려 제프는 그쪽을 쳐다보았다. 트레이시였다. 감 아놓은 로프 위에 걸터앉아 머리카락을 바닷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트레이시! 어떻게 여기에 와 있지?" "글쎄요, 왜 그랬을까요?" 제프는 트레이시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았다. "잠깐! 설마 내가 독차지하고 도망칠까봐 그런건 아니겠지?" "어머나, 그럴 작정이었나요?" 트레이시는 신랄한 어조로 말했다. "믿어줘, 트레이시. 당신에겐 전갈을 남겼어. 사보이 호텔에서 만나자 고 " "흐음, 그랬어요? 당신은 양심도 없어요?" 트레이시는 비꼬는 투로 말했다. 제프는 항변을 하려고 했지만 트레이시의 얼굴을 보자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보이 호텔의 객실에서 그녀는 제프가 돈을 헤아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신 몫은 10만 하고 천 달러요." "고마워요." 트레이시는 싸늘하게 말했다. "트레이시, 내 얘기 좀 들어봐요. 당신은 나를 오해하고 있소. 설명할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소? 오늘 밤 식사를 함께 하면서 얘기하면 어떻겠 소?" 트레이시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레이시, 내 얘기 좀 들어봐요. 당신은 나를 오해하고 있소. 설명할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소? 오늘 밤 식사를 함께 하면서 얘기하면 어떻겠 소?" 트레이시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잘됐군. 8시에 데리러 오겠소." 제프 스티븐스가 그날 저녁 호텔로 가서 트레이시를 찾자 객실 담당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미스 휘트니는 오늘 오후 일찍 체크아웃하셨습니다. 행선 . 8시에 데리러 오겠소." 제프 스티븐스가 그날 저녁 호텔로 가서 트레이시를 찾자 객실 담당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미스 휘트니는 오늘 오후 일찍 체크아웃하셨습니다. 행선 지는 남기지 않았군요.""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배가 잔교에 계류되기 전 에 우편선이 오게 되겠지요?" "네. 오전 6시에 올 예정입니다." "그 우편선에 제가 탈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어머니가 위독하시눗?잔교에 계류되기 전 에 우편선이 오게 되겠지요?" "네. 오전 6시에 올 예정입니다." "그 우편선에 제가 탈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어머니가 위독하시다고 해서 한 시라도 빨리 늦기 전에 달려가고 싶습니 다." 제프는 소리를 낮추었다. "아아, 그것 참 안 되셨군요. 스티븐스 씨. 알겠습니다. 어떻게 손을 써 보겠습니다. 세관 쪽도 수배해 놓겠습니다." 오전 6시 15분, 제프니 다." 제프는 소리를 낮추었다. "아아, 그것 참 안 되셨군요. 스티븐스 씨. 알겠습니다. 어떻게 손을 써 보겠습니다. 세관 쪽도 수배해 놓겠습니다." 오전 6시 15분, 제프 스티븐스는 현금이 든 두 개의 마닐라 봉투를 여 행가방에 넣고 배의 사다리를 내려 우편선에 올라탔다. 그는 돌아보며 눈 앞에 솟아 있는 거대한 배의 외관에 마지막 눈길을 보냈다. 이 정기선의 승객들의 대부분은 깊이 잠들어 있다. 제프는 퀸 엘리자베스 2세호가 해 안에 닿기 훨씬 전에 상륙할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참으로 멋진 선박 여행이없소." 제프는 우편선의 승무원 한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요, 대단히 멋있었지요?" 동의하는 목소리가 들려 제프는 그쪽을 쳐다보았다. 트레이시였다. 감 아놓은 로프 위에 걸터앉아 머리카락을 바닷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트레이시! 어떻게 여기에 와 있지?" "글쎄요, 왜 그랬을까요?" 제프는 트레이시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았다. "잠깐! 설마 내가 독차지하고 도망칠까봐 그런건 아니겠지?" "어머나, 그럴 작정이었나요?" 트레이시는 신랄한 어조로 말했다. "믿어줘, 트레이시. 당신에겐 전갈을 남겼어. 사보이 호텔에서 만나자 고 " "흐음, 그랬어요? 당신은 양심도 없어요?" 트레이시는 비꼬는 투로 말했다. 제프는 항변을 하려고 했지만 트레이시의 얼굴을 보자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보이 호텔의 객실에서 그녀는 제프가 돈을 헤아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신 몫은 10만 하고 천 달러요." "고마워요." 트레이시는 싸늘하게 말했다. "트레이시, 내 얘기 좀 들어봐요. 당신은 나를 오해하고 있소. 설명할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소? 오늘 밤 식사를 함께 하면서 얘기하면 어떻겠 소?" 트레이시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잘됐군. 8시에 데리러 오겠소." 제프 스티븐스가 그날 저녁 호텔로 가서 트레이시를 찾자 객실 담당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미스 휘트니는 오늘 오후 일찍 체크아웃하셨습니다. 행선 지는 남기지 않았군요." [94] 제목 : 뭐야. 내게 뭔가를 팔아먹을 생각이군. 제 21 장 어느 날 트레이시는 낯모르는 인물로부터 자필 초대장을 받았 다. 훗날이 되어서야 안 일이지만 그것이 트레이시의 인생을 바꾸 어놓아 버렸다. 제프 스티븐스한테서 자신의 몫을 나누어 받은 트레이시는 사 보이 호텔을 나와 파크 거리에 있는 다른 호텔로 옮겼다. 그곳은 주거용의 조용한 호텔로 방은 넓고 쾌적했고 무엇보다도 서비스 가 최고였다. 런던에 머문 지 이틀 째 되던 날 보이가 그 초대장을 트레이시 의 방까지 전하러 왔다. 서식이 훌륭한 자필의 멋진 초대장이었 다. '우리의 공통의 친구가 우리들이 서로 알고 지내는 편이 득이 될 것이라고 권하더군요. 오늘 오후 4시에 리츠에서 차라도 한 잔 어떻겠습니까? 흔해빠진 것 같아 멋은 없지만, 나는 가슴에 빨간 카네이션을 달고 가겠습니다.' 편지 마지막에 '군터 하르토크'라고 서명이 되어 있었다. 난생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그 글의 내용을 무시할 작정이었는데 점점 더 호기심이 생겨서 트레이시는 4시 15분에는 리츠 호텔의 우아한 대 식당 입구에 가 있었다. 상대방은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이는 60세 가량. 갸름하고 빈틈없어 보이는 얼굴에 유쾌한 분위기의 남자였다. 아무리 봐도 특별히 맞춘듯한 고급스러워 보이는 회색 양복을 입고 옷깃에는 빨간 카네이션을 꽂고 있었다. 트레이시가 남자의 테이블로 다가가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인사를 했다. "초대를 받아들여 주셔서 참으로 영광입니다." 남자는 고전적 스타일의 매너에 따라 의자를 당겨 그녀가 앉는 것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트레이시는 완전히 기분이 들뜨게 되었 다. 마치 다른 세계의 인간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의 저 의가 무엇인지 트레이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호기심에 이끌려 이곳에 왔습니다. 그런데 혹시 잘못 아신 것 은 아니신지요. 다른 트레이시 휘트니와 혼동한 것은 아닌가요?" 트레이시는 정직하게 말했다. 군터 하르토크는 싱끗 웃었다. "내가 듣고 아는 한에서는 트레이시 휘트니 양은 당신 외에는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저에게서 무엇을 듣고 싶으십니까?" "우선 차라도 마시면서 얘기하지 않겠소?" 차를 주문하자 얇게 썬 달걀, 오이, 치킨을 끼운 소형 샌드위치 가 나왔다. 그 다음 갓 구어낸 페스트리에 고형 크림과 잼을 바른 것이 홍차와 함께 나왔다. 두 사람은 먹으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공통의 친구라고 하셨는데..." 트레이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콘래드 모건말입니다. 가끔 그와 함께 일을 하지요." (나는 딱 한번 그와 함께 일을 했지요, 그리고 그는 나를 속이 려고 했고.) 트레이시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모건은 당신의 찬미자예요." 군터는 얘기하기 시작했다. 트레이시는 다시 세밀하게 사나이를 관찰했다. 차림새는 귀족적 이고 품위가 흘렀다. 경제적으로도 풍족해 보였다. (나에게 무슨 용건이 있는 걸까?) 트레이시는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자가 용건을 꺼내기만을 고대했다. 그런데 상대방은 좀처럼 핵심에 접근하려 들지를 않았다. 콘래드 모건에 관해서도 그 이상은 언급하지 않았 고, 트레이시와 자신의 공통의 이익이란 건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트레이시에게는 이 만남이 즐겁고 흥미 깊은 것이었다. 군터는 자기의 성장 과정을 얘기했다. "태어난 곳은 뮌헨이지요. 아버지는 은행가였어요. 상당히 유복 했기 때문에 나는 미술품이나 골동품에 둘러싸여 응석을 부리면 서 자랐지요. 어머니가 유태인이었는데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을 때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리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전재산을 몰수 당했지요. 그리고 양친은 폭격으로 인해 돌아가셨소. 나는 친구의 도움을 얻어 독일을 탈출해 스위스에 밀입국했지. 그리고 전쟁은 끝났지만 독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소. 그리고는 런던 으로 이주해 마운트 거리에서 작은 골동품상을 열었소. 일간 나의 가게에 들러주지 않겠소?" (뭐야, 그런 얘기였군. 내게 뭔가를 팔아먹을 생각이군 그래.) 예상은 빗나갔다. 트레이시는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95] 제목 : 이남자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가 짐작이 군터는 수표로 계산을 하면서 상냥하게 말했다. "햄프셔에 작은 별장을 가지고 있어요. 주말에 친구 몇 사람이 오기로 되어 있는데 어때요, 합류하지 않겠소?" 트레이시는 대답을 망설였다. 이 남자는 생전 처음 대하는 타인 인 것이다. 이 남자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트레이시에게 잃을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초대를 받아들 이기로 했다. 매혹에 넘치는 주말이었다. 군터 하르토크는 작은 시골 별장이라고 말했지만, 천만에 말씀. 30에이커나 되는 영지에 세워진 17세기 왕조 때의 대저택이었다. 군터는 독신으로 하인을 제외하면 혼자 살고 있었다. 그는 트레이 시에게 이곳 저곳 집 주위를 안내했다. 외양간에는 여섯 필의 말 이 있었고, 중뜰에는 닭이며 돼지가 사육되고 있었다. "이러니 우선 굶지는 않지요. 자아, 그럼 나의 진짜 취미를 보 여 주기로 하겠소." 군터는 이렇게 말하고 비둘기들을 많이 기르고 있는 비둘기 집 으로 트레이시를 안내했다. 군터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귀엽고 아름다운 비둘기들을 봐요. 푸른 기운이 도는 회색의 것이 있지요? 저놈이 마고랍니다." 군터는 그 비둘기를 붙들어 안았다. "넌 정말 난폭하구나, 알고 있니? 이 비둘기는 다른 비둘기를 괴롭히지만 제일 영리해요." 군터는 비둘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는 살며시 내려놓았다. 비둘기의 빛깔은 참으로 볼 만했다. 청색과 흑색, 겨자 무늬의 청색과 회색, 전체가 은빛인 것 등 갖가지였다. "흰 비둘기는 한 마리도 없군요." 트레이시는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전서구는 흰 것이 없지요. 하얀 털은 금방 빠져 버리거든. 어 쨌든 평균 시속 65킬로미터로 날으니까." 트레이시는 군터가 비타민을 배합한 특별한 모이를 비둘기에게 먹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것들은 훌륭한 혈통들이지요. 전서구는 800킬로미터나 떨어 진 자기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소?" 군터가 말했다. "굉장하군요." 다른 손님들도 마찬가지로 내노라하는 사람들이었다. 장관 부 부, 백작, 장군과 그 여자 친구들, 젊고 아름다우며 상냥한 인도의 왕녀. "나를 V.J. 라고 불러줘요." 왕녀는 거의 억양이 없는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금실을 짜넣은 진홍빛 사리를 입고 트레이시가 본 적도 없는 멋진 보석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나의 보석들 대부분은 금고에 보관해 두고 있지요. 요즈음 도 둑들이 우굴거려서 말예요." V.J.는 뽐내듯 말했다. 일요일 오후, 런던으로 돌아오려는 트레이시를 군터가 만류하며 서재로 초대했다. 두 사람은 찻쟁반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트레 이시는 도자기에 차를 따르면서 말했다. "군터 씨, 어떤 목적에서 저를 초대해 주셨는지 짐작이 가지 않 는군요. 하지만 이유는 어떻든 굉장히 즐거웠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기뻐요, 트레이시." 그렇게 말하고는 군터는 덧붙였다. "당신을 줄곧 관찰하고 있었소." "알고 있었어요."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갈 작정이오?" 트레이시는 대답이 궁했다. "그, 글쎄요. 어떻게 할지 아직 뚜렷하게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들 두 사람이 파트너가 되어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골동품 얘기를 하시는 건가요?" 군터는 소리내어 웃었다. "아니 아니, 그런 것이 아니오. 그런 짓을 하고 있으면 당신의 특별한 재능을 썩히는 것이 되지. 당신이 콘래드 모건을 보기좋게 놀려주었다는 얘기를 들었소. 그야말로 멋진 솜씨였소." "군터 씨, 그건 모두... 지난 일입니다." "그럼 앞으로는? 특별한 계획은 없다고 했는데, 장래의 문제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소? 돈이 좀 있다고 해도 언젠가는 바닥이 나 고 마니까. 나와 손잡고 일하지 않겠소? 나는 부호들과의 국제 사 교계에 얼굴이 통해요. 자선 무도회나 수렵회, 요트의 선상 파티 등에 자주 참석하고 있으니까. 부자들의 동향을 나는 잘 알고 있 다오." [96] 제목 : 그와의 만남은 부담없고 편했다 "그것이 저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당신을 그 황금같은 친구들에게 소개하는 거요. 대단한 황금이 오, 트레이시. 그리고 나는 당신이 입수하는 보석이나 미술품을 개인적으로 처분할 수 있소. 그러니까 남을 착취해서 부를 쌓아올 린 놈들을 골탕먹이는 일이라고 생각해도 좋소. 이익은 모두 절반 으로 하고, 어떻겠소?" "대답은 '노'예요." "마음이 변하면 언제라도 전화해줘요." "마음이 변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군터 씨." 그날 저녁 트레이시는 런던으로 돌아왔다. 트레이시는 런던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루 가브로시나 빌 벤트 레이즈나 코인 듀 후에서 식사를 즐겼고, 연극을 구경하고 난 후 에는 드론즈로 가서 진짜 아메리칸 햄버거나 핫첼리를 마구 먹어 치웠다. 국립극장이나 왕립오페라 극장에는 물론, 크리스티나 소 더비의 경매장에도 나가보았다. 해로드나 포트눔 메이슨즈에서 쇼 핑을 했고 해처즈나 포일즈와 W.H. 스미스 등의 서점에서 책을 훑어보기도 했다. 어떨 때는 운전사가 딸린 차를 빌려서 햄프셔에 있는 체튼 그렌 호텔까지 나들이하여 마음껏 주말을 즐겼다. 멋진 서비스, 호화로운 설비가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호화스러운 취미에는 그에 상응하는 비용이 든 다. '돈이 아무리 있어도 언젠가는 바닥이 나 버리지요.' 군터가 충고한 대로였다. 자기 돈은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은 아 니며 앞으로의 생활을 위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트레이시 자신도 깨닫기 시작했다. 트레이시는 그 후에도 몇 번씩이나 주말에 군터의 시골 별장에 초대되어 갔다. 그와의 만남은 부담이 없고 편했다. 어느 토요일 저녁 식사 때 하원의원 한 사람이 트레이시를 보 고 말했다. "나는 진짜 텍사스인을 직접 만나본 적이 없어요, 휘트니 양. 그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트레이시가 즉석에서 벼락부자 부인의 행동을 연출해 보이자 모인 사람 모두가 박장대소했다. 그런 다음 잠시 후, 트레이시와 군터 두 사람만이 남게 되자 그 가 말했다. "그 절묘한 연기를 이용해 약간 재산을 모아 볼 생각은 없나?" "난 배우가 아니예요, 군터." "당신은 자신을 너무 과소 평가하고 있어. 런던에 파커 앤드 파 커란 보석상회가 있는데 말이야, 그곳은 아주 지독한 곳이야. 말 하자면, 손님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 특기인 보석상이지. 트레 이시는 그 텍사스 미망인의 연기로 나에게 보석상을 응징할 아이 디어를 주었어." 군터는 그 아이디어를 트레이시에게 들려주었다. "하지 않겠어요." 트레이시는 거절했다. 그러나, 그 아이디어에 관해 생각할수록 잘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자꾸만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트 레이시는 수개월 전의 모험을 회상해 보았다. 롱아일랜드에서는 경찰관을, 퀸 엘리자베스 2세호에서는 체스의 명인을 두 명씩이 나, 그리고 배후 조종자인 제프 스티븐스마저도 빼돌렸다. 그 모 든 것들이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스릴로 넘치는 일들이었다. 그 자 극이 지금은 거의 잊혀져 가고 있다. "할 수 없어요, 군터." 트레이시는 자신에게 다짐이라도 하듯이 거절했다. 그러나 그 어조는 전처럼 단호하지는 못했다. 런던은 10월이라는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따뜻했고 영국인들도 여행자와 마찬가지로 빛나는 태양의 혜택을 입으려고 밖으로 나 왔다. 따라서 정오 경의 트라팔가 광장, 차링 크로스, 피카디리 서 커스 부근은 대단히 교통 체증이 심했다. 그 혼잡 속을 흰색 리무 진이 옥스포드 거리에서 뉴본드 거리로 돌아들어 로랜드 카르티 에, 게이거즈, 그리고 로얄 스코틀랜드 은행 앞을 빠져나갔다. 이 윽고 어느 보석상 앞에 다다르자 리무진은 정차했다. 현관 정면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느낌의 간판이 걸려 있었다. ' 파거 앤드 파커'였다. 리무진에서 제복을 갖춰 입은 운전사가 내리더니 재빨리 뒤쪽 으로 돌아가 승객을 위해 문을 열었다. 사슨 미용실에서 머리를 매만진 것처럼 보이는 금발의 젊은 여성이 차에서 내렸다. 짙은 화장을 했고 흑담비 코트 속에 몸에 꼭 끼는 이태리제 니트 드레 스를 입은 것이 날씨와 전혀 어울리지를 않았다. "가게는 어느 쪽이죠, 아저씨?" [97] 제목 : 이 가게는 보석만 아니라 호스트 클럽도 그녀는 물었다. 그 목소리는 그야말로 카랑카랑하고 귀에 거슬 리는 텍사스 사투리였다. 운전사는 입구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쪽입니다." "고마워요 아저씨. 대충 시간을 보내고 계세요. 별로 오래 걸리 지는 않을테니까." "이 구역을 빙빙 돌아야 될 것 같습니다. 이곳은 주차가 허용되 지 않습니다." 텍사스 여인은 운전사의 등을 탁하고 두드리며 말했다. "좋도록 해요, 아저씨." 운전사는 질겁을 했다. 이런 굴욕도 영락할 대로 영락한 렌트카 의 운전사 노릇을 하고 있으니까 참을 수밖에 없다. 운전사는 미 국인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특히 텍사스 사람이라면 아주 싫었다. 하는 짓이 야만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게다가 돈 많 은 야만인은 더욱 꼴사나웠다. 그러나 운전사는 자기 승객이 텍사스 주의 깃발인 론 스타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까무러치도록 놀랄 것이다. 트레이시는 보석상점의 쇼윈도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점검하고 밝은 미소를 지으며 성큼성큼 큰 발걸음으로 출입문 쪽으로 향했 다. 제복차림의 도어맨이 재빨리 문을 열었다. "좋은 날씨입니다, 마담." "여어 안녕, 멋쟁이 총각. 이 가게는 보석만 파는 것이 아니라 호스트 클럽도 하고 있나 보군?" 텍사스 여인은 자신의 농담에 깔깔대며 웃었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도어맨을 뒤로하고 그녀는 강한 향수 내음 을 풍겨대며 보석점 안으로 들어갔다. 모닝코트를 입은 세일즈맨 아더 칠톤이 손님을 맞으러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마담, 뭘 찾으십니까?" "그럴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죠. P.J.가 말예요. 생일 선물을 직접 고르라고 하길래 온 거예요. 뭐가 있죠?"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라도 있으신가요, 마담?" "어머, 당신들 영국인들이란 언제나 몹시 성급하군요." 그녀는 요란스럽게 깔깔대며 세일즈맨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모닝코트의 사나이는 간신히 평정을 유지했다. "그렇군, 에메랄드 정도가 좋겠지. 파파 P.J.는 내가 에메랄드를 사면 기뻐할 거예요." "그러시다면 이리로 오시죠..." 칠톤은 에메랄드가 가득 진열되어 있는 진열장이 있는 쪽으로 트레이시를 안내했다. 금발의 여자는 무시하듯 그것을 쳐다보았 다. "아휴, 쪼그맣군. 이건 갓난아기가 아니야. 좀더 큰 마마나 파파 같은 건 없어요?" 칠톤은 화가 치미는 것을 간신히 누르며 말했다. "3만 달러나 나가는 것도 있습니다만." "미용사에게 주는 팁 정도군 그래. 파파 P.J.는 말예요, 내가 그 렇게 작은 것을 사가지고 돌아가면 자기가 모욕당했다며 화를 낸 단 말예요." 여자는 깔깔대며 웃었다. 칠톤은 파파 P.J.가 배가 나온 뚱뚱보로 이 여자와 마찬가지로 아니꼽고 더러운 녀석일 것이라고 멋대로 상상했다. 헌 짚신도 짝 이 있는 법이니까. (돈이란 것은 어째서 가질 자격도 없는 것들에게 몰려가는 걸 까.) "얼마정도 예산을 잡으셨습니까, 마담?" "귀찮으니까 큰 것 100으로부터 시작하는 게 어때요?" 칠톤은 어안이 벙벙했다. "큰 것 100이라면...?" "아니, 당신들 킹스 잉글리쉬(상류계급의 영어)를 쓰는 줄 알았 더니. 큰 것이라고 하면 1,000이잖아요. 그러니 1,000이 100이면 10만이 되죠." 칠톤은 군침을 꿀꺽 삼켰다. "네에, 그렇군요. 그러시다면 아마 저어, 지배인과 말씀을 나누 시는 편이 좋으시리라고 생각됩니다만." 지배인인 그레고리 할스턴은 언제나 고가품의 판매에 관한 한 자기가 맡겠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파커 앤드 파커는 매상권장제 도라는 것을 취하고 있어 종업원들에게도 불만은 없었다. 하물며 이와 같은 품위가 없는 손님은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도 않아서 칠톤은 기꺼이 지배인에게 넘기기로 했다. 칠톤이 카운터 뒤쪽에 있는 초인종을 누르자 창백하고 비실비실한 사나이가 허겁지겁 가게 안쪽에서 나왔다. 지배인은 기발한 모습을 하고 있는 금발 여인을 힐끗 쳐다보고, 이 여자가 돌아갈 때까지 단골 손님은 제 발 오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마음 속으로 빌었다. [98] 제목 : 어마 수상해라. 이봐요 괜찮아요? 칠톤은 소개를 시작했다. "지배인님, 손님은 저어,... 뭐라드라... 미세스...?" 칠톤은 손님 쪽을 향했다. "베네크예요. 마리 루 베네크. P.J. 베네크의 아내예요. 모두들 P.J. 베네크는 잘 알고 있겠죠?" "물론입니다." 그레고리 할스턴은 첫눈에도 천박해 보이는 손님에게 억지 미 소를 지었다. "베네크 부인은 에메랄드를 구하고 있습니다, 지배인님." 지배인인 그레고리 할스턴은 에메랄드 진열대를 가리켰다. "이쪽에 있는 것이 그 에메랄드의..." "손님께서 원하시는 에메랄드는 10만 달러에 상당하는 가격의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그레고리 할스턴의 얼굴에는 진짜 웃음이 떠올랐다. 정말 재수가 좋은 날이군. "저어 말예요, 제 생일날에 P.J.가 말예요. 내 마음에 드는 걸 사라고 했단 말예요." "그렇습니까. 그러시다면 저와 함께 안쪽으로 가실까요?" 할스턴은 완전히 말투를 바꾸었다. "어머, 수상해라. 이봐요, 괜찮을까요?" 금발 여인은 낄낄대며 웃었다. 할스턴과 칠톤은 얼굴을 마주 쳐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할스턴은 자물쇠가 걸려있는 방으로 손님을 안내해 문을 열었 다. 두 사람이 휘황하게 밝게 비치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자 지배 인은 조심스럽게 안에서 자물쇠를 잠그었다. "특별히 귀한 손님을 위해 가장 값비싼 보석은 이곳에 보관하 고 있습니다." 지배인은 점잔을 빼며 말했다. 방 한가운데에 진열대가 놓여 있고 엄청난 다이아몬드와 루비, 에메랄드 등이 기절할 만큼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아, 이것이라면 훨씬 보석답군요. 이곳은 P.J.의 마음에도 들 것 같군요." "뭐 마음에 드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마담?" "글쎄요, 어느 것으로 할지 망설여지는군요." 트레이시는 에메랄드가 들어있는 보석 케이스 쪽으로 다가갔다. "이것을 좀 자세히 보여주겠어요?" 할스턴은 또 하나의 작은 열쇠를 호주머니에서 꺼내 진열장을 열고 에메랄드 케이스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빌로드 케이스에 10 개의 에메랄드가 들어 있었다. 할스턴은 손님이 제일 크고 프라티 나로 장식한 브로치를 집어드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P.J.라면 이것이 내게 꼭 어울린다고 말해 줄 거예요." "마담은 상당히 눈이 높으시군요. 이것은 콜롬비아산 10캐럿 짜 리입니다. 흠집도 없을 뿐만 아니라..." "흠집이 없는 에메랄드란 없어요." 할스턴은 깜짝 놀라 잠시 말을 더듬었다. "마, 마담이 말씀하시는 대로입니다. 제, 제가 말씀드린 의미 는..." 할스턴은 손님의 눈빛을 비로소 알아 차렸다. 그것은 여인이 지 금 손안에 들고 굴리며 음미하고 있는 보석과 완전히 똑같은 녹 색이었다. "좀더 골고루 갖추고 있습니다만 " "아아, 좋아요, 상관 마세요. 이것으로 정하겠어요." 불과 3분도 채 안 걸린 상담이었다. "진짜 물건을 보실 줄 아시는군요." 할스턴은 그렇게 말했다. 그런 다음 천천히 덧붙였다. "달러라면 10만 달러가 되겠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지불해 주시 겠습니까, 마담?" "걱정 마세요, 아저씨. 여기 런던에도 예금해 둔 은행이 있어요. 내 개인용 수표를 쓰겠어요. 그러면 P.J.가 나에게 다시 지불해 주 거든요." "그러시겠지요. 그 보석은 잘 크리닝해서 부인의 호텔로 보내드 리도록 하지요." 에메랄드를 크리닝할 필요는 없었지만 손님의 수표를 확인하기 까지는 보석을 내놓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대단히 많은 보석상이 교활한 사기꾼에게 걸려든다는 것을 할스턴은 알고 있었고, 그 자 신은 단 한 번도 1파운드라도 속아넘어간 일은 없다는 것을 자랑 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99] 제목 : "P.J도 마음에 들어 할 거에요." "에메랄드를 어디로 보내드릴까요?" "도치의 올리버 메셀 특실을 이용하고 있어요." 할스턴은 다짐하듯 말했다. "도체스터 호텔을 말씀하시는군요?" "난 올리버 엉망진창 호텔이라고 부르죠. 아랍인들 뿐인 호텔이 라 싫다고 하는 사람이 많지만요, P.J.는 그들과 장사를 하고 있거 든요. 언제나 이렇게 말하곤 하죠. 석유는 국가이다 라고요. 베네 크는 수완가거든요." 텍사스 여인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시다마다요." 할스턴은 정중하게 대답했다. 텍사스 여자가 수표장에서 한 장을 뜯어내 사인을 하는 것을 할스턴은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버클리 은행의 수표였다. 안성 맞춤이었다. 그곳에는 이 여자의 잔고를 확인해 줄 친구가 있었 다. 할스턴은 수표를 받았다. "내일 아침에 제가 에메랄드를 갖고 가겠습니다." "P.J.도 마음에 들어 할 거예요." 텍사스 여자는 생끗 웃었다. "그러시리라 믿습니다." 할스턴은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출구로 손님을 안내했다. "랄스턴 씨..." 지배인은 자기 이름을 잘못 말한 것을 고쳐주려고 했지만 곧 마음을 고쳐 먹었다. 신경쓸 것 없지 않는가? 다행히도 이 손님과 는 두 번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테니까. "무슨 일이신지요, 마담?" "며칠 후 오후쯤에 내 방으로 놀러와요. 당신도 P.J.를 좋아하게 될거예요." "그러시겠죠.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오후에는 일을 해야 하므 로..." "그것 참 안 됐군요." 텍사스 여자는 가게를 나섰다. 할스턴이 밖을 내다보자 흰색의 리무진이 미끄러지듯 달려와 운전사가 안에서 뛰어나왔고 그녀를 위해 뒤쪽 도어를 열었다. 금발 여자는 할스턴을 돌아보며 엄지를 들어올려 신호를 하더니 차에 올라타고 떠나 버렸다. 할스턴은 자기 사무실로 돌아가 수화기를 들고 버클리 은행의 친구에게 다이얼을 돌렸다. "여어 피터, 지금 이곳에 10만 달러 수표가 있는데 말이야. 미 세스 루 베네크라는 여자의 명의로 된 거네. 괜찮겠나?" "이대로 기다리게나." 할스턴은 기다렸다. 요즘은 불경기여서 수표가 진짜이길 비는 마음뿐이었다. 보석상 주인인 파커 형제는 무자비한 녀석들이어서 매출이 나쁜 것이 불황 탓이 아니라 할스턴의 책임이기라도 한듯 늘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매상이 많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래도 다른 보석상에 비하면 짭짤하게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그것 은 파커 앤드 파커는 보석의 크리닝부문을 보유하고 있었고 크리 닝에 맡겨진 보석이 손님에게 돌려질 때는 원래의 것보다 뒤지는 것으로 되돌려 주는 식의 재주를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손님들로 부터 불평이 많이 나왔지만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 람도 없었다. 피터가 다시 전화에 나왔다. "문제없어, 그레고리. 수표를 지불하고도 충분히 남을 만한 예 금이 되어 있네." 할스턴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고맙네, 피터." "천만에!" "다음 주에 점심이라도 어떤가? 내가 한턱 내겠네." 다음 날 아침 수표는 인출 수납되었고 콜롬비아산 에메랄드는 신원보증이 되어 있는 배달원에 의해 도체스터 호텔의 P.J. 베네 크 부인 앞으로 배달되었다. 그날 저녁, 폐점 직전에 비서가 그레고리 할스턴에게 알렸다. "베네크 라는 분이 와 계십니다. 지배인님." 할스턴의 기분은 침울해졌다. 텍사스 여자는 브로치를 반환하러 온 것이다. 인수를 거절할 수는 없을 것이다. [100] 제목 : 제기랄 여자들이란! (제기랄 여자들이란! 미국인은 별수 없다니까, 특히 텍사스인들 은!) 할스턴은 억지로 미소를 떠올리며 나갔다. "어서 오세요, 베네크 부인, 주인께서 그 브로치가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하셨는지요?" 텍사스 여인은 장난기 있게 웃었다. "당신의 예감은 빗나갔군요. P.J.는 정말 홀딱 반해버렸어요." 할스턴의 기분은 저절로 노래라도 흥얼거릴 정도로 들떴다. "마음에 드셨습니까?" "마음에 들었느냐구요? 한개 더 구해서 한쌍의 귀고리를 만들 라고 하는 거예요. 그것과 똑같은 것을 사게 해 줘요." 그레고리 할스턴의 얼굴이 흐려졌다. "죄송합니다만 그건 약간 문제가 있습니다. 베네크 부인." "이봐요, 문제라니요?" "부인께 판 것은 특별한 보석이었습니다. 똑같은 에메랄드는 없 습니다. 좀 다른 스타일이기는 하지만 멋진 세트가 있습니다. 그 것을..." "다른 스타일은 필요 없어요. 내가 사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에 메랄드 한쌍이에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베네크 부인, 10캐럿짜리 콜롬비아산으로 흠이 없는 것은..." 할스턴은 손님의 얼굴을 살피면서 말했다. "흠집이 없는 것에 가까운 것은 좀처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손을 써 봐요. 어딘가에 하나쯤 있을 것 아녜요." "사실 말입니다만 그 정도의 보석은 저희들도 좀처럼 구하기가 힘듭니다. 형태, 빛깔 등 완전히 같은 것을 찾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요." "텍사스에서는 이렇게 말하죠. '불가능이란 약간 시간이 걸린다 는 것' 이라고. 토요일이 내 생일이에요. P.J.는 내게 에메랄드 귀 고리를 하게 해주고 싶은 거예요. P.J.는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무 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고 마는 성미거든요."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같은..." "그 브로치는 얼마였죠? 아아, 10만 달러였죠? 같은 것을 또 하 나 찾아내 주기만 한다면 그이는 20만이라도 30만이라도 지불해 줄 거예요." 그레고리 할스턴은 재빨리 계산해 보았다. 그 에메랄드의 복제 품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P.J.가 그 값으로 20만 달러를 지불해 준다면 상당한 돈벌이가 되는 것이 아닌가. (사실 그 이익금을 내 주머니에 쓱싹 집어넣는 것도 가능하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한 지배인은 기운차게 말했다. "어떻게든 찾아보도록 하죠, 베네크 부인. 런던의 다른 보석상 점에 현재 없는 것만은 확실합니다만 언제 같은 에메랄드가 팔려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제가 광고를 내볼 테니까 결과를 기다려 주 십시요." "주말까지는 어떻게 해 봐요. 당신이 날 위해 애써주면 그이는 틀림없이 35만 달러는 지불해 줄 거예요." 금발의 여자는 그렇게 말을 남기고 검은 담비 코트를 휘날리면 서 물러가 버렸다. 그레고리 할스턴은 마치 백일몽에 젖어있는 기분으로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운명의 여신이 10만 달러의 에메랄드를 35만 달러로 사려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금발의 유치한 여자를 자기에게 보내 주셨다. 이는 실수입이 25만 달러나 되는 장사인 것이다. 그레고 리 할스턴은 이 거래에 관해서는 주인인 파거 형제의 손을 번거 롭게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두 번째의 에메랄드를 10만 달 러에 판 것으로 기재하고 나머지는 착복해 버리면 되는 것이다. 25만 달러의 이득은 앞으로 인생에 있어 윤택한 생활을 보장해 줄 것이다. 이제 해야 할 일은 베네크 부인에게 판 것과 한쌍을 이룰 에메 랄드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석 발굴은 할스턴이 예상한 것보다도 훨씬 곤란한 작업이었다. 동업자인 보석상들에게 여기저기 연락을 해보았지만 구하고 있는 것에 해당하는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런던타임즈와 파이넨셜 타임즈에 광고를 내고 크리스티나 소더비, 그리고 열 개 이상의 중매 대리점에도 문의해 보았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이나 할스턴은 조악하건 고급품이건 온갖 에메랄드의 정보 홍수에 맞 닥뜨렸지만 그가 구하고 있는 그런 에메랄드는 끝내 나타나지 않 았다. 출력이 끝났습니다. [Enter]를 누르십시오. [101] 제목 : 마담. 하지만 맡겨주세요. 수요일에 베네크 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P.J.가 독촉하고 있어요. 찾아냈나요?" 텍사스 여인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뇨, 아직입니다. 마담. 하지만 맡겨 주세요. 어떻게 해서든 힘써 보겠습니다." 할스턴은 필사적으로 상대를 달랬다. 이틀 후인 금요일에 또 전화가 걸려왔다. "내일이 내 생일이에요." 부인은 할스턴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이제 며칠만 있으면 어떻게 될 것입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신경쓰지 않아도 돼요. 내일 아침까지 에메 랄드가 발견되지 않으면 당신한테서 산 것을 돌려주겠어요. P.J.가 말예요... 전 행복해요. 그 대신 토지를 사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서섹스란 곳을 알고 있나요?" 할스턴은 식은 땀을 흘리면서 큰 소리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베네크 부인! 당신은 서섹스가 마음에 드실 리가 없습니다. 시 골 저택이 싫으실 것입니다. 지독한 곳이에요. 중앙난방 설비도 없구요..." 그는 간청하다시피 했다. "당신한테만 고백하겠는데요 사실 난 토지보다 귀고리가 탐이 나요. P.J.는요, 에메랄드를 한쌍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40만 달러 를 지불해도 괜찮다고 했어요. P.J. 얼마나 완고한 고집장이인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부인이 털어놓고 나섰다. (40만 달러!) 할스턴은 손가락 사이에서 돈이 흘러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었다. "믿어 주십시오. 저는 전력을 다해 애쓰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더욱 간청하는 어조가 되었다. "내가 정하는 일이 아니에요. 그이 마음대로죠." 부인은 이렇게 말하곤 전화를 끊어 버렸다. 할스턴은 운명을 저주하면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와 꼭 같은 10캐럿 짜리 에메랄드를 어디서 찾아내라는 것인가? 이런저런 생 각에 잠겨 있었으므로 인터폰이 세 번씩이나 울리는 것도 알아차 리지 못했다. 단추를 누르며 호통치듯 말했다. "무슨 일이야?" "마리사 백작부인이라는 분으로부터 전화가 와 있습니다. 지배 인님. 에메랄드 광고에 관한 문의입니다." 또 장난이라! 할스턴은 아침부터 열 통에 이르는 전화를 받았지 만, 모두가 엉터리 정보였다. 지배인은 수화기를 들자 퉁명스럽게 말했다. "여보세요." 이탈리아어 악센트가 섞인 상냥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에메랄드를 사고 싶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만." "조건이 맞는다면 삽니다. 아시겠어요?" 할스턴은 초조함을 끝내 감추지 못했다. "몇 십년 동안 저희 집안에 전해오는 에메랄드가 있습니다. 대 단히 애석하지만 사정이 생겨서 내놓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어 요." 그런 얘기엔 이제 신물이 난다. 어차피 또 허탕일 것이다. (크리스티의 가게에 다시 한번 연락을 취해 보자. 소더비에도. 물건이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10캐럿 짜리 에메랄드를 찾으신다고 하셨죠?" "네 그렇습니다." "전 10캐럿 짜리 녹색 콜롬비아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할스턴은 말을 하려고 했지만 흥분하여 목이 막혀 소리가 나오 질 않았다. "뭐, 뭐라고 말씀하셨죠? 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요. 나는 10캐럿 짜리 녹색 콜롬비아산 에메랄드를 가지고 있어요. 관심이 있으신가요?" "글쎄요. 이쪽에 들르셔서 그 보석을 보여주시層린 恪또?뿐이었다. 이 이상 더 애를 태우면 폭발할지도 모를 지경 이었다. "남편의 사업 개시에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요. 사실은 팔아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백작 부인은 염려스러운 듯한 웃는 얼굴을 보였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도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백 작 부인. 부군을 돕는다는 것은 아내된 분의 숭고한 임무이십니 다. 한데 그 에메랄드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할스턴은 성급하게 말했다. "여기 가지고 있어요." 백작 부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 호주머니에서 티슈에 싼 보 석을 꺼내어 할스턴에게 건넸다. 그것을 본 순간, 할스턴의 마음 은 높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지금까지 그토록 애태우며 찾던 훌 륭한 콜롬비아산 10캐럿짜리 에메랄드인 것이다. 게다가 빛깔도 그렇고 크기와 모양까지도 베네크 부인에게 판 것과 너무나도 비 슷해 그 차이를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완전히 똑같은 보석은 아니야. 구별할 수 있는 것은 감정 사뿐이겠지.) 할스턴은 손이 떨렸다. 평정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할스턴은 에메랄드를 뒤집어 아름다운 커트를 바라보며 아무렇 지도 않은 척하고 말했다. "하아, 굉장한 보석이군요." "훌륭하죠. 몇 십년 동안 애지중지해온 보석이에요. 내놓는 것 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군요." "부인께서는 올바른 일을 하고 계십니다. 주인어른의 사업이 성 공한 다음에는 다시 그보다 훌륭한 보석을 살 수 있지 않겠습니 까." 할스턴은 자못 이해한다는 투로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당신은 대단히 친절하신 분이 시군요." "친구에게 부탁을 받고 여기저기 찾고 있었습니다, 백작 부인. 저희 상점에는 이것보다 훌륭한 보석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 친구 가 부인이 소유하고 있는 것과 같은 보석을 찾고 있어서 말입니 다. 이 보석이라면 그는 6만 달러는 내줄 것입니다." 백작 부인은 한숨을 쉬었다. "만약 6만 달러에 이걸 팔아버린다면 할머니는 무덤에서 부활 해 나오실 거예요." 할스턴은 입을 오무렸다. 좀더 비싼 값으로 사도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웃는 얼굴을 보였다. "그럼 이렇게 하십시다. 친구를 설득해서 10만 달러까지 내놓도 록 하지요. 굉장한 거금이지만 그는 이 보석을 원할 데니까..." "글쎄요, 그런 정도밖에 안 되나요?" 백작 부인은 말했다. 그레고리 할스턴의 가슴은 높이 뛰었고 심장이 빠르게 고동쳤 다. "괜찮으시겠죠? 수표장을 가져왔으니까 당장이라도 지불해 드 리겠습니다..." "글쎄요, 그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가 않군요." 백작 부인의 목소리는 가라앉았다. 할스턴은 그런 부인을 쳐다보며 물었다. "문제라면...?" "저어, 설명해 드렸듯이 남편이 새 사업을 시작하는데 지금 당 장 35만달러가 필요해요. 10만 달러는 가지고 있지만 25만 달러가 모자란답니다. 그래서 이 에메랄드로 그 나머지를 보충하고 싶었 던 거예요." 할스턴은 머리를 저었다. "백작 부인, 이 세상에 그런 값비싼 에메랄드는 없습니다. 믿어 주세요. 10만 달러도 정상 가격보다 훨씬 높은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렇겠지요, 할스턴 씨. 하지만 그 돈으로는 남편을 도울 수가 없어요." [104] 제목 : 허둥지둥 사무실로 들어가 도어를 잠그고 눈앞에 백작 부인은 이렇게 말하고 일어섰다. "역시 이건 딸에게 주기 위해 남겨 두어야겠습니다." 부인은 가늘고 나긋나긋한 손을 내밀었다. "와 주셔서 고마웠습니다." 할스턴은 격심한 갈등을 느끼며 그곳에 버티고 선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저어, 잠깐만요 부인." 그의 내부에서 강한 욕심과 상식이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 지만 이윽고 마음을 정한 듯이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보십시오, 백작 부인. 어떻게든 해보기로 하지 요. 저의 손님이 15만 달러를 내놓는 것으로 하시면...?" "25만 달러가 아니면 안 돼요." "그럼 20만 달러는 어떠십니까?" "25만 달러입니다." 부인은 한 푼도 양보하지 않았다. 할스턴은 자기가 꺾이기로 했 다. 그래도 15만 달러의 이득은 남길 수 있다. 거래가 깨져 이득 이 한푼도 없어지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별장이나 배는 꿈 에 그리던 것보다 작아질 테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한 재산은 된 다. 파커 형제에게는 자기를 부당하게 혹사한 보복이 되기도 한 다. 하루나 이틀이 지나면 사표를 내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내주 엔 이미 코트 다 쥬르 행이다. "좋습니다." 할스턴은 말했다. "어머나 기뻐요. 그러시다면 저도 기꺼이 건네 드릴 수 있습니 다." (넘겨 주지 않을 리가 없지! 욕심장이 여편네 같으니라구!) 할스턴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불평 따위를 늘어놓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앞으로의 인생 설계가 되어 있으니까. 할스턴은 다시 한번 에메랄드를 힐끗 쳐다보고 호주머니에 집 어넣었다. "저희 상점의 수표를 써 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할스턴은 수표에 금액을 써넣고 사인을 하여 백작 부인에게 넘 겨주었다. 그는 현금화될 수 있는 40만 달러의 수표를 P.J. 베네크 부인으로부터 수령할 예정으로 되어 있다. 실수입 15만 달러의 이 득이다. 할스턴은 이미 남프랑스의 따뜻한 햇살을 얼굴에 느끼고 있었 다. 택시를 타고 상점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눈깜짝할 사이였다. 할스턴은 이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의 베네크 부인의 기 뻐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는 부인이 원하는 보석을 손에 넣 게 해 주었을뿐만 아니라 황량한 샛바람이 모질게 불어대는 서섹 스의 시골 생활을 체험하지 않아도 되게끔 해주었던 것이다. 할스턴이 신바람에 들떠 상점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말단 세일 즈맨인 칠톤이 기다렸다는 듯이 손님을 소개하려고 했다. "지배인님, 손님이 오셔서 뭔가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할스턴은 기분좋게 부하를 물리치면서 말했다. "나중에, 나중에!" 손님 따위를 응대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이제는 없는 것이다. 아니 아니 이제부터 계속 없는 것이다. 앞으로는, 미래에는 자기 가 손님이 되는 것이다. 에르메스나 구찌나 랑방에서 쇼핑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할스턴은 허둥지둥 사무실로 들어가 도어를 단단히 잠그고 눈 앞에 에메랄드를 놓고 다이얼을 돌렸다. 교환수가 나왔다. "도체스터 호텔입니다." "올리버 메셀 특실로 연결해 줘요." "누구와 통화하시겠습니까?" "P.J. 베네크 부인을 대줘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할스턴은 상대를 기다리는 동안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교환이 다시 나왔다. "죄송합니다만 미세스 베네크는 체크 아웃하셨습니다." "그러면 옮겨간 방으로 연결해 줘요." [105] 제목 : 전화를 끊자 손가락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베네크 부인은 저희 호텔에서 체크아웃하셨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부인은..." "프런트를 바꿔드릴테니 그쪽과 얘기해 보세요." 사나이가 나왔다. "여긴 프런트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어, P.J. 베네크 부인은 어느 방에 머물고 계십니까?" "베네크 부인은 오늘 아침 우리 호텔에서 체크아웃하셨습니 다." 뭐가 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급한 볼일이라도 생겼 는지 모른다고 할스턴은 자신을 타일렀다. "부인의 연락처를 가르쳐 주시오. 나는..." "죄송합니다. 연락처에 대한 메모는 남기지 않으셨는데요." "그럴 리가. 전갈을 남겼을 텐데요?" "아뇨, 제가 직접 확인했으므로 틀림없습니다. 연락처를 남겨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이마를 세차게 얻어맞은 듯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할스 턴은 천천히 수화기를 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어떻게든 베 네크 부인에게 연락을 취하여 에메랄드를 입수한 것을 알려야 한 다. 또한 동시에 마리사 백작부인으로부터 25만 달러의 수표를 되찾아 놓아야 한다. 할스턴은 서둘러 사보이 호텔로 전화를 걸었다. "26호실로 연결해 줘요." "누구를 찾으십니까?" "마리사 백작부인이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레고리 할스턴은 교환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전에 뭔 가 엄청난 재난이 덮쳐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가공할 예감에 떨 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마리사 백작부인은 체크 아웃하셨습니다." 전화를 끊자 손가락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간신히 다이얼을 모두 돌리자 은행을 호출했다. "부기계의 계장을 불러주시오... 급히 부탁합니다! 수표 지불 을 정지해야 해요." 하지만 역시 이미 때는 늦었다. 그는 10만 달러에 판 똑같은 에메랄드를 25만 달러에 사들였던 것이다. 그레고리 할스턴은 사 무실 의자에 쓰러지듯 파묻혔고 파커 형제에게 어떻게 변명할까 하고 머리를 썩히고 있었다. 제 22 장 그 체험은 트레이시에게는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었다. 트레이시는 이튼 광장 45번지의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조지아 시대의 저택을 구입했다. 낡은 건물이기는 하지만 장엄하고 쾌적 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드넓고 화려한 정원에는 계절마다 수 많은 꽃이 어지러이 피었다. 가구와 뜰의 장식품은 군터의 도움 으로 갖추어졌다. 이 저택은 완성하기 전부터 이미 런던의 명소 의 하나가 될 정도였다. [106] 제목 : 트레이시는 순식간에 사교계의 스타가 되었다 군터는 사람들에게 트레이시를 대부호의 미망인이라고 소개했 다. 죽은 남편은 무역으로 재산을 축적했다는 사전 선전을 해 놓 았다. 트레이시는 순식간에 사교계의 스타가 되었다. 미인이며 교양이 있고 상냥한 덕분에 때를 놓치지 않고 파티 등의 초대장 이 산더미 같이 날아들었다. 그러한 교제를 즐기며 그녀는 가까운 이웃 나라들을 여행했다. 프랑스, 스위스, 벨기에,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며 그 때마다 군터와 함께 돈을 벌어 들였다. 트레이시는 군터의 교육을 받아 전유럽의 왕족이나 귀족의 가 계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는 전문서적을 숙독했다. 또한 그녀는 카멜레온처럼 변장과 분장의 전문가가 되었고, 필 요한 악센트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패스포트도 여섯 사람 몫을 가지고 있었다. 가는 나라에 따라서 영국의 공작 부인으로 변장하거나 프랑스인 스튜어디스가 되기도 했으며, 남 아메리카인의 상속인 행세를 하기도 했다. 그와 같은 도둑 여행 을 하며 1년쯤 지나자 평생 쓰고도 남을 만큼의 돈이 모아졌다. 트레이시는 여죄수를 구제하는 단체에 익명으로 거금을 기부하 거나, 어머니 회사의 공장 주임이었던 오토 슈미트에게 매월 충 분한 액수의 돈이 송금되도록 조치를 취해 놓았다. 이미 그녀에 게는 이 직업에서 발을 뺄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녀는 다 른 사람들의 등을 쳐서 재빨리 성공한 자들에게 도전하기를 좋아 했다. 매번 연출하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대담하고 스 릴있는 행동이 마약처럼 작용해 트레이시는 끊임없이 보다 큰 스 릴에 도전했다. 트레이시에게는 하나의 신조가 있었다. 그것은 죄없는 사람을 결코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트레이시의 덫에 걸려드는 인간 은 욕심장이거나 부도덕하거나 혹은 그 양쪽 모두인 사람들 뿐이 었다. (내게 감쪽같이 속았다고 해서 자살하는 그런 사람은 한 사람 도 없어.) 트레이시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고, 그것이 도움이 되기도 했 다. 유럽의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대담하고도 엉뚱한 사기 사건 에 관한 보도가 신문 지상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트레이시는 온 갖 분장으로 변신하며 출몰했으므로 경찰은 사기나 교묘한 절도 를 자행하고 있는 여자절도단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국제경찰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07] 제목 : "즐거운 마음으로 고대하고 있겠어요." 국제보험보호협회의 맨해턴 본부에서 방범부장인 J.J. 레이놀 즈가 다니엘 쿠퍼를 불러 말했다. "귀찮은 일이야. 유럽에서 많은 단골들이 피해를 입고 있네. 여자절도단의 소행인 것 같아. 보험회사들이 출혈이 너무 심하다 고 아우성들이야. 일당을 빨리 붙들어 달라는 거야. 국제경찰도 우리들에게 협력을 요청하고 있어, 댄, 자네의 임무일세. 오전 중에 파리로 출발해 주게." 마운트 가에 있는 스코트라는 레스토랑에서 트레이시는 군터와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맥시밀리언 피아폰트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있나, 트레이시?"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어디서 들었을까? 맞다, 제프 스 티븐스가 퀸 엘리자베스 2세호 선상에서 이렇게 말했었지. '우리들은 같은 목적으로 이곳에 탄 것 아닌가요? 맥시밀리언 피아폰트 라는.' "그 사람. 굉장한 부자죠?"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지. 녀석은 회사를 매수하여 그 회사를 벗겨먹는데 전문가야." '조셉 로마노가 회사를 인계받자 놈은 모두를 잘라버리고 자기 수하의 사람들을 끌어 들였어요. 그리고 회사를 몽땅 껍찔째 벗 겨버리고... 모두 빼돌려 버렸어요. 회사, 이 집, 당신 어머니의 자동차마저도 ' 군터는 이상한 시선으로 트레이시를 쳐다보았다. "트레이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괜찮아?" "아아, 네. 아무렇지도 않아요." (인생이란 때로는 불공평하게 이루어져 있어요. 그것을 공평하 게 만드는가 아닌가는 그 사람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어요.)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맥시밀리언 피아폰트에 관해서 좀 더 얘기해 주세요." "세번째 아내와 헤어진 지 얼마 안되어 지금은 독신이지. 당신 이 이 신사와 알고 지내게 되면 유익할 거야. 그는 오리엔트 특 급을 예약해 두고 있어. 이번 주 금요일에 출발하는 런던발 이스 탄불 행이지." 트레이시는 생끗 웃었다. "난 오리엔트 특급은 타본 적이 없어요. 재미있을 것 같네요." 군터도 미소로 답했다. "좋아. 맥시밀리언 피아폰트는 최고의 소장품을 소유하고 있는 데 이 콜렉션은 아무리 적게 평가해도 2천만 달러는 될 거야. 러 시아 황제들을 도락에 빠져들게 한 명공(名工) 파바쥬가 손으로 깎은 달걀형의 보석이지." "나에게 그 달걀 몇 개를 슬쩍 가져오라는 거군요?" 트레이시는 흥미가 솟아 물어보았다. "그렇게 해서는 그 다음에 그것을 어떻게 하죠, 군터? 너무나 유명해서 팔아버릴 수도 없을 것 아니에요?" "개인 수집가를 알고 있어, 트레이시. 당신이 보석알을 슬쩍해 오면 내가 그 둥우리를 찾는다 이거지." "괜찮을 것 같군요." "맥시밀리언 피아폰트는 접근하기 쉬운 남자가 아니지. 그런데 금요일에 출발하는 오리엔트 특급에는 베니스 영화제에 참석할 다른 두 명의 봉이 객실을 예약해 두었더군, 그들을 속이는 것은 갓난아기의 팔을 비트는 것보다도 쉬울 거야. 실바나 루아디라고 알고 있어?" "이탈리아의 영화배우 말이에요? 물론 알고 말고요." "그녀의 남편이 알베르토 포르나티지. 이류 대작에만 손을 대 는 영화프로듀서야. 포르나티는 흥행 수입의 몇 퍼센트를 지불해 주겠다며 배우나 제작진들을 싸게 혹사하고, 실제로는 이익을 독 점하는 것으로 유명한 사나이지. 따라서 자기 아내에게 값비싼 보석을 사줄 재력은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야. 또한 외도가 탄로 날 때마다 그 무마 조로 값비싼 보석을 와이프에게 선물하곤 하 지. 실바나는 보석상을 차려도 될 만큼 여러 가지 보석을 가지고 있어. 어쨌든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즐거운 마음으로 고대하고 있겠어요." 트레이시는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108] 제목 : 녹색눈동자는 순결해보였고, 천진난만한 얼굴은 베니스 심프론 오리엔트 특급은 매주 금요일 오전 11시 44분에 런던의 빅토리아 역을 출발한다. 도중에 브로뉴, 파리, 로잔느, 밀라노, 베니스에 정차한 다음 이스탄불까지 달리는 국제 장거리 열차다. 출발 30분 전이 되면 터미널의 플랫폼 입구에 접수 카운 터가 조립되고 제복을 입은 두 명의 직원이 붐비는 손님들을 헤 치고 빨간 카펫을 깔아 나간다. 오리엔트 특급의 새 경영자는 19세기 말의 철도여행 황금시대 를 그대로 재현하려고 영국 프로만차나 식당차, 바 살롱차, 침대 차 등을 당시대로 복제하여 운행하고 있었다. 1920년대 그대로의 금테두리가 들어있는 마린 블루의 제복을 입은 승무원이 트레이시의 여행가방 두 개와 화장품 케이스 한 개를 객실로 운반해 주었다. 방은 생각한 것보다 좁아 약간 실망 했다. 꽃무늬로 짠 모헤어 커버가 씌워져 있는 일인용 의자가 놓 여 있었다. 카펫도, 침대에 올라가기 위한 계단도 똑같은 녹색의 펠트로 덮여 있어 마치 과자 상자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었다. 트레이시는 은제 양동이에 담긴 작은 샴페인에 곁들여 있는 카 드를 집어들었다. '열차 지배인 올리버 아우벨트로부터.' (축하용으로 받아두기로 하지요. 맥시밀리언 피아폰트를 곯려 줄 때까지.) 트레이시는 그렇게 작정했다. 제프도 이 수집광을 속이지는 못 했다. 그 우쭐하기 좋아하는 사기꾼 제프 스티븐스의 코를 납작 하게 해주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다. 트레이시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트레이시는 좁은 객실에서 짐을 풀고 필요한 옷만 옷걸이에 걸 었다. 트레이시는 여행을 위한 것이라면 기차보다도 팬 아메리칸 항공의 제트기를 좋아하지만 이번 여행은 특별한 자극이 있을 것 같았다. 정각에 오리엔트 특급은 역을 출발했다. 트레이시는 의자에 기 대어 창가에 스치는 런던 남부의 풍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오후 1시 15분, 포크스턴 역에 닿았다. 승객들은 여기서 페리 호로 갈아타고 해협을 건너 브로뉴로 간다. 그곳에서 다시 다른 오리엔트 특급을 타고남으로 향하는 것이다. 트레이시는 승무원에게 말을 걸었다. "맥시밀리언 피아폰트 씨도 열차를 타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 데요. 어느 분이신지 가르쳐주실 수 있나요?" 차장은 머리를 저었다. "가르쳐드리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지만 그럴 수가 없군요. 그 분은 객실을 예약하고 요금도 지불해 놓으셨지만 승차하지 않았 습니다. 대단히 변덕이 심한 분인 것 같군요."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여배우인 실바나 루아디와 그 남 편 영화프로듀서가 있으니까. 페리호로 도버 해협을 건너 프랑스 북부의 브로뉴에 도착하자 승객은 대륙의 오리엔트 특급으로 갈아탔다. 운이 나쁘게도 이번 열차에서도 트레이시의 객실은 비좁았으며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바람에 트레이시는 더욱 더 불쾌해졌다. 갈아탄 뒤 줄곧 객실에 틀어 박혀 계획을 짜고 있던 트레이시는 오후 8시가 되자 드레스 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오리엔트 특급에서는 정장으로서 이브닝 드레스의 착용을 권장 하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반짝거리는 비둘기빛 쉬폰 가운을 택했 고, 스타킹도 구두도 같은 회색 계열로 통일했다. 몸에 지닌 보 석은 옷에 어울리는 진주로만 했다. 그렇게 하여 자기 모습을 거 울에 비추고 오랫동안 찬찬히 점검했다. 녹색 눈동자는 순결해 보였고, 천진난만한 얼굴은 순진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거울이란 사기꾼이야.) 객실을 나선 트레이시는 핸드백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것을 주으려고 무릎을 구부려 재빨리 도어의 핸들을 바깥 쪽에서 확인 했다. 이중 자물쇠였다. (이것이라면 문제없어.) 트레이시는 식당차로 향했다. 이 열차에는 식당차가 3량이 있 었다. 어느 차량이나 좌석에는 깔끔한 커버가 씌워져 있고 놋쇠 촛대에서는 부드러운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109] 제목 : 어느날, 비명소리와 함께 객실 도어를 두드리는 트레이시가 처음 들어간 식당차에는 빈 자리가 몇 개 있었다. 급사장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혼자이십니까, 마드모아젤?" 차안을 둘러보며 트레이시는 말했다. "친구가 오기로 했는데 와 있지 않는 것 같군요." 트레이시는 이어 다음 차량으로 건너갔다. 아까 그곳보다 붐볐 지만 그래도 몇 개의 빈자리가 있었다. "어서 오십시요. 혼자이십니까?" 급사장이 인사를 했다. "아뇨, 누군가를 찾고 있어요. 여기도 없군요." 트레이시는 세 번째 식당차로 들어갔다. 테이블이 모두 차 있 었다. 급사장이 입구에서 만류했다. "죄송합니다. 기다려 주셔야겠습니다, 마담. 그러나 다른 식당 차에는 빈 자리가 있습니다." 차안을 둘러보니 제일 먼곳 모퉁이 자리에 목표의 인물이 있었 다. "괜찮아요. 친구를 찾아냈어요." 트레이시는 이렇게 말하고 급사장의 옆을 지나 안쪽 좌석으로 걸어갔다. "저어 실례합니다만, 좌석이 만원이라서요... 합석 좀 해도 괜 찮으시겠어요?" 트레이시는 정말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트레이시의 매력적 인 자태를 한눈에 느낀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네에, 어서 앉으십시오 전 알베르토 포르나티입니다. 이쪽은 아내인 실바나 루아디구요." "트레이시 휘트니라고 합니다." 이번엔 진짜 여권을 사용하고 있었다. "오오, 미국인이시군요. 난 영어에 능숙한 편이랍니다." 알베르토 포르나티는 키가 작고, 대머리에 뚱보였다. 어떻게 실바나 루아디가 포르나티 같은 사나이와 결혼했는지 두 사람이 결혼한 지 12년이 지난 지금까지 줄곧 로마인들은 그 문제를 화 제로 삼아왔다. 실바나 루아디는 고전적인 미인으로 균형잡힌 몸 매를 가지고 있어 여배우가 되기 위해 태어난 듯한 그런 여성이 었다. 오스카와 실버 팜 수상자이며 언제나 좋은 배역의 출연 교 섭을 받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이 여배우가 지금 몸에 지니고 있는 물건의 가격을 평가해 보았다. 이브닝 가운은 바렌티노에서 5천 달러쯤 할 것이 다. 장식하고 있는 보석은 100만 달러 가까이되지 않을까? 군터 의 말을 회상해 보았다. '외도가 탄로날 때마다 녀석은 점점 더 비싼 보석을 아내에게 선물하고 있지. 실바나는 보석상을 차릴 만큼 다양한 보석을 수 집하고 있을 거야.' "오리엔트 특급을 타는 것은 처음이신가요?" 트레이시가 자리에 앉자 포르나티가 말을 걸어왔다. "네, 그렇습니다." "그러셨군요. 이 여행은 여러 가지 전설이 얽혀 있는 대단히 로맨틱한 열차여행이지요." 포르나티의 눈은 탐욕스럽게 젖어 있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이 있답니다. 예를 들어 대(大)무기상 인 바지르 자하로프 경에 얽힌 에피소드는 유명하지요. 그는 오 리엔트 특급을 자주 이용했는데 언제나 7호실을 좋아했지요. 어 느 날, 비명 소리와 함께 다급하게 그의 객실 도어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지요. 열어보니 스페인의 젊은 공작부인이 그의 품으 로 쓰러져 들어오는 것이었어요." 포르나티는 거기서 한번 호흡을 쉬고 로르팬에 버터를 발라 한 입 베어 물었다. "남편인 공작이 그녀를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양가의 부모 들이 결정한 결혼이었는데 가련한 딸은 자기 남편이 미친 사람이 라는 것을 그때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하로프 경 은 공작의 난폭한 짓을 제지시키고, 울부짖는 부인을 다정하게 달래었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의 로맨스가 싹텄고 그것 이 40년이나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어머나, 멋진 얘기군요." 트레이시는 그렇게 말하면서 얘기에 매료된 듯 눈을 크게 떴 다. [110] 제목 : 자하로프는 7호실, 공작부인은 8호실 "그렇죠? 그로부터 그들은 매년 오리엔트 특급을 이용하여 밀 회를 거듭했습니다. 자하로프는 7호실, 공작 부인은 8호실을 예 약해서요. 공작부인의 남편이 죽자 두 사람은 공공연히 결혼식을 올렸지요. 그는 사랑의 징표로 부인에게 선물을 했습니다. 놀랍 게도 그것은 몬테카를로의 카지노였습니다." "어머나, 정말 멋진 로맨스군요, 포르나티 씨." 실바나 루아디는 돌덩이처럼 꼼짝 않고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 었다. "어서 드십시오." 포르나티는 트레이시에게 권했다. 알베르토 포르나티는 한 접시 한 접시 모두 먹어치우고 아내가 남긴 것까지 먹어버렸다. 물론 먹으면서도 입은 쉴새 없이 움직 이고 있었다. "당신은 아마도 여배우신가 보죠?" 포르나티는 물었다. "아네요, 당치도 않아요. 저는 그저 한낱 여행자에 불과해요." 트레이시가 웃으면서 대답하자 포르나티도 미소를 지어 보였 다. "아름다워요. 당신은 여배우가 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워요." "이분은 여배우가 아니라고 하잖아요." 실바나가 가로막아 대화가 중단되었다. 알베르토 포르나티는 그런 아내의 질투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지껄였다. "나는 영화제작을 하고 있습니다. 아실 줄 압니다만, '용감한 사람들' '타이탄 대 수퍼맨' 등을 제작했지요." "저는 영화를 잘 보지 않아서요." 트레이시는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테이블 아래서 포 르나티가 굵직한 다리를 트레이시에게 밀어붙여 왔다. "그러시다면 내 작품을 어디서 한번 보여드리도록 할까요?" 실바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얼굴이 창백해졌다. "당신은 로마에 가본 적이 있습니까?" 포르나티는 트레이시에게 밀어붙이고 있던 다리를 아래 위로 움직이면서 물어왔다. "사실은, 베니스에 가본 뒤에 로마로 갈 예정입니다." "그것 참 멋지군! 그렇다면 모두 함께 저녁 식사라도 합시다. 괜찮겠지, 여보?" 포르나티는 실바나를 힐끗 쳐다보고 얘기를 계속했다. "아피아 가도를 따라 아담한 별장이 있는데 말예요. 토지가 넓 어 10에이커나..." 포르나티가 그 넓이를 나타내려고 양손을 벌리다가 그레비소스 가 들어있는 그릇에 부딪쳐 아내의 무릎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고의인지 우연인지 트레이시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실바나 루아디는 벌떡 일어나 드레스에 묻은 얼룩을 쳐다보았 다. 그리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떠들어대며 식당차에서 황급히 나 가버렸다. 승객들의 시선은 모두 그녀에게 쏠렸다. "어머나, 죄송해서 어쩌죠? 그런 멋진 드레스를 망쳐 버렸으 니." 트레이시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자기 아내에게 창피를 준 이 남자에게 트레이시는 뺨을 한대 올려치고 싶었다. (이런 치사한 남자라면 아무리 보석을 받는다 해도 위안이 되 지 않겠군. 좀 더 긁어내야 하겠어.) 트레이시는 생각하고 있었다. 포르나티는 한숨을 지었다. "또 한 벌 사주면 돼요. 아내의 자제력을 잃은 태도를 마음에 두지 말아요. 이 포르나티를 질투하고 있는 거니까." "화를 낼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화를 내신 거죠." 트레이시는 야유를 미소로 감추었다. 포르나티는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그래요, 맞아요. 분명히 말해 내가 인기가 있으니 할 수 없는 일이죠." 트레이시는 눈 앞에 있는 땅딸막한 남자의 당치도 않는 말에 웃음을 터뜨리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참아야 했다. "저도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어요." 포르나티는 이번에는 테이블 위에서 트레이시의 손을 쥐었다. "포르나티는 당신을 좋아해요. 굉장히 말예요. 당신은 무슨 일 을 하고 계신가요?" [111] 제목 : 힐끗힐끗 트레이시의 몸매를 탐색했다 "나는 변호사의 비서일을 하고 있어요. 저금을 모두 털어 여행 을 하는 중이지요. 유럽의 어디에선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해서요." 포르나티는 툭 불거진 눈으로 힐끗힐끗 트레이시의 몸매를 탐 색했다. "당신이라면 문제없겠어요. 내가 장담할 수 있어요. 나는 다정 한 사람을 돌봐주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라오." "어머나, 정말 친절한 분이시군요." 트레이시는 쑥스러운듯 말했다. 포르나티는 목소리를 낮추었 다. "식사가 끝나면 당신 객실에서 그 문제에 대해 의논해 볼까 요?" "그건 좀 어색하지 않을까요?" "왜요?" "당신은 유명인이잖아요. 이 열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 나 다 알아보지 않을까요?" "당연한 일이죠." "당신이 제 객실로 들어가는 것을 사람들이 보면... 그래요, 분명히 오해가 생길 거예요. 당신의 객실이 저의 객실과 가깝다 면... 몇 호실이세요?" "E70호실이죠." 포르나티는 기대에 찬 눈으로 트레이시를 쳐다보았다. 트레이시는 한숨을 지었다. "제 방은 다른 차량이에요. 베니스에서 만나면 어떨까요?" 포르나티는 싱끗 웃었다. "좋겠군. 아내도 함께 지만 그녀는 하루 종일 방안에 틀어박혀 있을 테니까. 그녀는 햇빛에 얼굴을 드러내 놓을 수가 없어서 말 이오. 베네치아에 가본 적은 있소?" "처음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둘이서 토르셀로 갑시다. 상당히 아름다운 작 은 섬인데 로간다 치프리아니라는 이름의 멋진 레스토랑이 있어 요. 그 건물은 작은 호텔로도 사용하고 있지요. 단 둘이서 오붓 하게 즐길 수 있는 곳이오." 포르나티의 눈이 반짝였다. 트레이시는 바람둥이 영화 제작자 를 응시하고는, 이윽고 알겠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대단히 재미있을 것 같네요." 거기까지 말하자 다음은 말하지 않겠다는 듯이 눈을 내리 깔았 다. 포르나티는 상체를 기울여 트레이시의 손을 단단히 쥐고 다시 귓가에 대고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진짜 흥분을 체험시켜 주겠소." 30분 후, 트레이시는 자기 객실로 돌아왔다. 오리엔트 특급은 승객이 잠들고 있는 동안에 파리, 디존, 바라 베로 밤의 어둠을 꿰뚫고 질주했다. 승객들의 여권은 저녁에 차 장이 거두어갔다. 국경을 넘는 수속을 일괄해 대행하는 것이다. 새벽 3시 30분, 트레이시는 소리도 없이 객실에서 나왔다. 타 이밍이 가장 중요하다. 열차는 이윽고 스위스 국경에 접어들었고 로잔느에 닿는 것이 5시 21분,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도착하는 것 이 오전 9시 15분 예정으로 되어 있었다. 파자마 위에 가운을 걸치고 스폰지빽을 가지고 트레이시는 주 의깊게 복도를 걸어갔다. 이제는 익숙해진 두근거리는 긴장감이 온몸을 감쌌다. 이 열차에는 객실 내에 화장실이 없고, 각 차량 의 후미에 마련되어 있다. 누군가가 물으면 여성용 화장실을 찾 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무와도 맞닥뜨리 지 않고 무사히 지나갔다. 차장이나 포터는 이른 아침을 수면 시 간에 할당하고 있는 것이다. 트레이시는 아무런 문제 없이 E70호실에 이르렀다. 소리를 내 지 않도록 문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트레 이시는 스폰지백을 열어 금속의 소도구와 작은 주사기를 꺼내 일 에 착수했다. 그로부터 10분 후에 트레이시는 자기 객실로 돌아왔고 30분 후 에는 산뜻하게 씻은듯한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 잠을 자 고 있었다. [112] 제목 : 귀를 찢을 들한 비명이 몇 번이나 오전 7시, 오리엔트 특급이 밀라노에 도착하기 2시간 전, 귀를 찢는 듯한 비명이 몇 번씩이나 차 안에 울려 퍼졌다. 비명은 E70 호실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는데 너무나 날카로운 절규에 차 안의 모든 사람이 일어나게 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고 승객들 이 각 객실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는 속을 헤치며 차장이 황급히 E70호실로 들어갔다. 실바나 루아디는 반쯤 미쳐 날뛰었다. "큰일났어요! 도와줘요. 보석이 모두 없어졌어요! 이 더러운 열 차는 도둑놈 투성이야!" "다른 손님들이... 조용히 해 주십시오." 차장은 말했다. 그러자 오히려 실바나의 목소리는 한 옥타브 가 량 높아졌다. "흥, 조용히 하라구? 이 거지 발싸개같으니라구! 100만 달러 이 상이나 되는 보석이 도난당했단 말이야."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는데? 문에는 자물쇠가 잠겨 있었고 나는 잠귀가 밝은 편이지. 누군가가 침입했다면 나는 곧 잠을 깼 을 거야." 알베르토 포르나티가 말했다. 차장은 한숨을 쉬었다. 이전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으므로 어떤 수법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밤중에 누군가가 복도로 몰래 숨어들어 열쇠 구멍을 통해 에테르를 주사기로 주입시킨다. 자물 쇠 따위는 프로의 입장에서는 어린애를 속이는 것이나 마찬가지 로 아무런 장해도 되지않는다. 도둑은 살며시 도어를 닫고 객실을 몽땅 뒤져 목표했던 물건을 훔쳐 가련한 희생자들이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 자기의 객실로 돌아가는 수법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점이 한가지 있었다. 지금까지의 경우에는 열 차가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도난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도둑은 도망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도난 사건 뒤 하차한 사람은 없었으며 따라서 보석은 아직 열차 안에 있는 것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보석은 틀림없이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훔 친 사람은 아직 이 열차에 타고 있으니까요." 차장은 포르나티에게 약속했다. 차장은 밀라노 경찰에 전화를 걸기 위해 서둘러 앞쪽으로 이동 해 갔다. 오리엔트 특급이 밀라노 역에 도착하자 20명 이상의 경찰관과 사복 형사들이 플랫폼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경찰관들은 승객도 짐도 열차에서 내리지 말라고 지시했다. 사건 담당인 루이지 리치 경감이 직접 포르나티의 객실에 승차 했다. 실바나 루아디의 히스테리한 모습은 점점 도를 더해갔다. "내가 가지고 있던 보석은 모두 저 케이스에 들어 있었어요. 그 리고 하나도 보험에 들어있지 않아요." 여배우는 아우성을 그치지 않았다. 경감은 텅빈 보석 케이스를 자세히 점검했다. "당신은 어젯 밤에 확실히 보석을 여기에 넣었단 말씀이죠, 부 인?" "물론이죠, 확실해요. 매일 밤 그 안에 보관해 두니까요." 수만 명을 열광시키는 동그란 눈동자에 커다란 눈물 방울이 맺 혀 있는 모습을 보고 리치 경감은 이 미인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 과도 맞서리라고 결심했다. 경감은 객실 도어로 다가가 자물쇠 구멍에 코를 대고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에테르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도난이 있었 던 것은 확실하다. 괘씸한 무법자는 반드시 체포하고야 말겠다. 리치 경감은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부인. 이 열차에서 보석을 반출할 수는 없어요. 우리들이 도둑을 붙잡아 당신의 보석을 돌려드리도록 하 겠습니다." 리치 경감은 모든 면에서 자신이 있었다. 탈출구는 단단히 닫혀 있었으므로 범인이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형사는 승객들을 한사람씩 역의 대합실로 데려가 꼼꼼히 신체 검사를 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승객이 많았으므로, 그들은 이 모욕 적인 취급에 분노를 터뜨렸다. "죄송합니다. 100만 달러에 상당하는 보석이 도난당했습니다." 리치 경감은 승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일히 해명했다. [113] 제목 : 몇봉지의 마리화나와 코카인이 5온스 승객들이 각자의 객실에서 나가자 형사들은 객실을 샅샅이 조 사했다. 한치도 소홀히 하지 않는 철저한 수색이었다. 이 사건은 리치 경감에게 있어서 공로를 세울 절호의 기회이다. 그는 이 기회를 크게 이용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잃어버린 보석 이 발견되면 승진과 승급과 연결된다. 경감의 상상력은 불타오르 듯이 번지고 있었다. 실바나 루아디는 대단히 고맙게 여기며 틀림 없이 나를 초대하여... 리치 경감은 더욱 힘이 솟아 부하를 다그쳤 다. 트레이시의 객실에 형사가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부인. 도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승객 전원을 조 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동행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만..." "도난 사건이라고요!" 트레이시는 깜짝 놀란 듯이 말했다. "이 열차에서 말인가요?" "죄송하지만 그렇습니다." 트레이시가 객실을 나서자 두 형사가 재빨리 들어와 여행용 가 방을 열었고 안의 짐들을 꼼꼼히 조사했다. 4시간에 걸친 조사 결과 몇 봉지의 마리화나와 코카인이 5온스, 나이프가 1개에 총이 1정 발각되었다. 하지만 실종된 보석은 그림 자도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열차를 구석구석 조사했나?" 그는 부관인 경위에게 다짐하듯 물었다. "경감님, 저희들은 한치도 빈틈없이 조사했습니다. 기관실, 식당, 그리고 바, 화장실과 침실도 빠짐없이 점검했습니다. 승객뿐만 아 니라 승무원의 수하물까지 자세하게 조사했습니다. 이 열차 안에 는 보석은 없다고 저는 맹세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부인이 착각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리치 경감은 그들이 연극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식당차의 웨트레스들도 실바나 루아디가 전날 밤 저 녁 식사 때 눈이 부실 만큼의 보석으로 몸 치장을 하고 있었다고 입을 모아 증언하고 있었다. 오리엔트 특급의 대표가 밀라노로 날아왔다. "이 이상 열차를 붙잡아 두면 곤란합니다. 열차시간이 너무 오 래 지연되고 있소." 대표는 주장했다. 리치 경감의 패배였다. 더 이상 열차를 잡아둘 수는 없다. 경감 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미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단 하나 생 각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면 도둑이 밤새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 는 동료에게 열차에서 보석을 던져 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 술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타이밍으로 말하면 불가능할 것이다. 도둑이 미리 복도에서 차장이나 승객이 없어지는 시간을 알고 인 수 인계 지점을 결정해 둘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진정 경감의 해결능력을 넘어선 미스테리였다. "열차를 출발시켜." 경감은 결국 명령을 내렸다. 경감이 원통한 듯 지켜보는 가운데 오리엔트 특급은 천천히 역 을 벗어났다. 리치 경감의 승진과 승급의 꿈은 깨지고 말았다. 뿐 만 아니라 실바나 루아디와의 눈부신 정사에의 기대도. 아침 식사 때의 대화는 도난에 관한 화제로 계속되었다. "최근 수년 동안 제일 가슴 떨리는 사건이었어요." 여학교 교사가 점잖을 빼며 실토했다. 그녀는 작은 다이아몬드 알갱이가 붙어 있는 금목걸이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걸 잃어버리지 않아 다행이에요." "다행이었군요." 트레이시는 무겁게 끄덕였다. 알베르토 포르나티가 식당으로 찾아와 트레이시를 찾아내자 서 둘러 다가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론 알고 있겠죠? 하지만 도난의 쓰라린 괴로움을 당한 것은 이 포르나티의 아내였다는 것을 알고 있나 요?" "어머나, 그래요!" "그렇소!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소. 갱들이 객실에 침입해서 나에게 마취가스를 맡게 했소. 이 포르나티는 자고 있는 동안 죽 음을 당할뻔 했다오." "어머나, 무서운 일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