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과밤 지은이:시드니 셀던/오호근 옮김 출판사:영림카디널 아침 제1장 드미트리가 물었다. "스텐포드 씨, 우리가 미행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알고있어." 그는 지난 24시간 동안 계속 미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스텐포드와 드미트리, 그리고 동 행하는 젊은 여인은 가벼운 여름 옷차림으로, 아침부터 붐비는 관광객들 틈에 두드러지지 않게 섞여 보 려고 했다. 그러나 고색창연한 옛 성이자 요새였던 쎄인트 폴 드방스같이 작은 마을에서 남의 눈에 띄 지 않고 움직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리 스텐포드가 미행자들을 알아차리게 된 것은 그들이 눈도 한번 마주치지 않고 딴청을 부리면서 관심 없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 디를 가도 그 중 한 사람은 그림자처럼 반드시 나타났다. 해리 스텐포드를 미행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 다. 180센티가 훨씬 넘는 키에 바람에 날리는 흰 머리칼,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표정의 귀족적인 얼굴. 그는 눈에 번쩍 띄는 갈색 머리의 젊은 미녀와 순백색의 셰퍼트, 그리고 개인 경호원인 드미트리 카민 스키와 함께 걷고 있었다. 앞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드미트리는 196센티의 키에 우람한 체격이었다. 이 작은 마을에서 우리를 놓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 스텐포드는 생각했다. 누가, 왜 자신을 미행하는 지 잘 알고 있는 그는 위험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는 항상 자신의 본능적 감각으로 살아왔다.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는 반드시 자신의 '감'에 의존했고 그 결과 세계적인 부호가 되었다. 월간 포브스 지는 스텐포드 기업의 순자산가치를 60억 달러로 평가했고, 포츈 500 지는 70억 달 러라고 주장했다. 월 스트리트 저널과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즈, 그리고 바론지 등 유수한 경제지들은 세 계 굴지의 스텐포드 기업을 창업하고 발전시킨 해리 스텐포드의 신화적인 경영능력과, 경기변동과 자본 시장의 흐름에 대한 탁월한 감각을 파헤쳐 보려고 저마다 심층 기획기사로 실었었다. 그러나 그의 실체 는 여전히 베일 속에 가려져, '스텐포드의 신화'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해리 스 텐포드가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정력의 소유자라는 것이었다. 그는 지칠 줄 몰랐다. '한 건 올리지 못하면 하루를 낭비하는 것이다.'라는 신조로 쉬지 않고 스텐포드 기업을 키워나갔다. 경쟁자 들이나 부하 직원들, 또는 가까이 지내던 그 누구도 그의 정력과 추진력을 따라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업는 신화적 존재가 된 것이다. 그는 스스로 신앙인이라고 자처했다. 전능한 신의 존 재를 믿는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자신에게 적대적인 자들이 망하는 것이 바로 그 신의 뜻이라고 믿었다. 해리 스텐포드는 너무나 유명했기 때문에 신문이나 잡지에 하루라도 그의 이름이 오르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인간적인 면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언론 매체에는 그이 성공담, 사치스 러운 생활의 단면, 자가용 비행기와 요트, 플로리다 주의 호브 만, 모로코, 뉴욕주의 롱아일랜드, 남불 해 안 등 곳곳에 있는 그의 저택들, 그리고 보스턴 만 가까이에 있는 그의 본가인 로즈 힐이라는 어마어마 한 저택에 관한 기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 해리 스텐포드의 수수께끼는 밝혀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젊은 여자가 물었다. 미행자들에게 신경을 쓰던 스텐포드는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길 건너편에서 남녀 한 쌍의 미행조가 막 한사람을 교대시키고 있었다. 위험이 다가온다는 불안 을 느끼면서도 스텐포드는 자신의 사생활이 침해당하는 것에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자신만의 시 간을 가질 때 즐겨 찾던 이곳까지 그들의 감시망이 뻗친 것이었다. 쎄인트 폴 드 방스는 중세기부터 이어온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남불 해안의 칸느와 니스 중간쯤에서 내륙으로 들어가 알프스 산맥을 올라가는 S자 형의 길을 따라 오르면 높은 언덕 위에 그림 같은 마을이 나온다. 주변에는 꽃과 과수원, 그리고 소나무 숲으로 덮인 구릉과 계곡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이름 난 화가들의 화실, 품위 있는 박물관과 화랑, 그리고 수준 높은 골동품점으로 알려진 이 마을에는 끊임 없이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스텐포드 일행은 그랑드가로 꺾어들었다. "박물관에 가볼까?" 스텐포드가 여자에게 물었다. "좋아요, 선생님." 그녀는 스텐포드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애썼다. 여태까지 해리 스텐포드와 비슷하다고 견줄만한 사람조차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이런 사람을 만나 같이 여행한 얘기를 하면 친구들은 믿지 않으려고 할거야. 섹스 기술은 모르는 게 없다고 자신했었는데...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이렇게 즐기다가 내가 먼저 지쳐버리면 어쩌지? 그들은 언덕길을 올라가 매그트 재단 미술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샤갈, 보나르 같은 십여 명의 저명한 화가의 작품을 둘러보며 천천히 걸었다. 그림을 쳐다보다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린 해리 스텐포드는 한 쪽 구석에서 미로의 작품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미행조의 여자요원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여자 에게 고개를 돌렸다. "소피아, 시장해?" "네, 하지만 좀 기다려도 괜찮아요." 너무 나서면 안돼... "좋아. 그럼 콜롬브 도르에서 점심식사를 하자구." 16세기에 마을 입구에 지어진 건물을 호텔과 식당으로 개조한 콜롬브 도르는 스텐포드가 즐겨 찾는 곳이었다. 그는 소피아와 함께 정원의 수영장 옆 야외 테이블에 자리잡았다. 정원에는 격조 높은 조각 작품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그의 옆에는 순백색 셰퍼드 프린스가 경계의 눈초리로 사방을 둘러보며 바닥에 앉아 있었다. 프린스는 해리 스텐포드의 등록상표와 같이 항상 따라다녔다. 그 개는 해리 스텐포 드의 명령 한마디에 사람을 물어 죽일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아무도 그 소문을 검증해 보려는 사람은 없었다. 드미트리는 입구 쪽 테이블에 혼자 앉아 드나드는 사람들을 조심스럽게 관찰하고 있었 다. 스텐포드가 소피아에게 물었다. "내가 주문해 주는 게 어때?" "그러는 게 좋겠어요." 해리 스텐포드 는 자신이 미식가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는 신선한 쌜러드와 생선요리 2인분을 주문했다. 주요리가 나 왔을 때 콜롬브 도르의 여주인 조아나 제드가 미소 지으며 스텐포드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안녕하세 요? 스텐포드 씨. 음식이 괜찮습니까?" "제드 부인, 모든 게 훌륭합니다." 모든 게 잘 될 수밖에. 그는 생각했다. 난쟁이들이 거인을 쓰러뜨릴 수 있나? 어림도 없지... 소피아가 입을 열었다. "이곳은 처음이에요. 이렇게 아름다울 줄 몰랐어요." 스텐포드는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바로 어제 니스에서 드미트리가 그녀를 데리고 왔었다. "스텐포드 씨, 데려왔습니다." "무슨 문제는 없었나?" 스텐포드가 물었다. "전혀 없었습니다." 드미트리 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는 니스의 네그레스코 호텔 로비에서 소피아를 발견하고 접근했었다. "실례합니다. 영어를 하십니까?" "무슨 일이지요?" 짙은 이태리 액센트가 섞인 영어로 소피아가 대답 했다. "내가 모시는 분이 아가씨를 저녁식사에 초대하길 원하십니다." 그녀의 안색이 달라졌다. "내가 그런 여자로 보여요? 난 이름있는 배우라구요." 도도한 표정으로 소피아가 말했다. 실상 싸구려 이태리 영화 에 대사없이 얼굴만 잠깐 나타낸 것과, 또 한번 두 줄짜리 대사의 단역을 맡은 게 그녀의 영화배우 경 력의 전부였다. "나는 모르는 사람의 저녁 초대에 응할 수 없어요." 드미트리는 주머니에서 백 달러짜리 지폐 뭉치를 꺼내 그 중 다섯 장을 소피아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분은 아주 후한 성품의 점잖은 신사 입니다. 자신의 요트에서 혼자 지내는 게 외로워서 당신을 초대하는 겁니다." 소피아의 표정이 거부감에 서 호기심으로 변하고, 그 다음에는 솔깃한 표정으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침 출연하던 영화가 끝났고, 다음 영화는 아직 촬영이 시작되지 않았어요..." 그녀는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분과 저녁식사하는 게 어려울 것은 없지요." "잘 생각했습니다. 그분이 좋아하실 겁니 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쎄인트 폴 드 방스." 드미트리의 선택은 마음에 들었다. 이십대 후반의 이태리 여자. 약간 고양이 형의 관능적인 얼굴에 풍 만한 몸매였다. 테이블 맞은편의 소피아를 쳐다보던 해리 스텐포드는 결단을 내렸다. "소피아, 여행 갈 생각 있어?" "그럼요, 저는 여행하는 걸 무척 좋아해요." "좋아. 그럼 같이 여행하자 구. 잠깐 실례해야겠어. 연락을 좀 해야되거든." 그는 소피아를 테이블에 남겨 두고 식당을 나와 화장실 근처에 있는 공중전화를 찾았다. 동전을 넣고 다이얼을 돌렸다. "해상 무선통신 교환을 부탁합니다." 잠 시 후, "해상 교환입니다." 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블루 스카이 호와 교신을 부탁합니다. 번호는 WBL 980..." 자신의 요트와 5분간 통화한 다음, 전화를 끊고 다시 니스 공항 번호를 돌렸다. 두 번째 통화는 훨씬 더 짧았다. 통화를 끝내고 식당으로 돌아온 스텐포드는 입구에 앉아있던 드미트리에게 나직하게 무엇인가 지시했고, 드미트리는 즉시 밖으로 나갔다. 테이블에 돌아온 스텐포드는 소피아에게 말했다. " 그럼 나가볼까?" "그래요." "우선 마을을 들러보고 집에 가서 여행계획을 세우지."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먼 하늘의 구름은 강한 햇빛에 분홍빛을 띠고, 구름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은빛 햇살이 거리를 밝게 비추었다. 두 사람은 프린스와 함께 그랑드가를 천천히 걸어 엘리제가 에 있는 아름다운 12세기 교회 건물을 지나, 마을 한복판에 있는 빵집에 다다랐다. 방금 구어낸 빵을 사 자며 스텐포드는 소피아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빵을 사들고 밖으로 나왔을 때 미행조 중 한 사람 이 교회 건물을 쳐다보면서 서성이는 게 눈에 띄었다. 어느새 드미트리가 나타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 다. 해리 스텐포드는 빵을 소피아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먼저 집으로 가 있어. 잠깐 볼일 좀 보고 올 라갈게." "그러지요." 그녀는 미소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세 요." 스텐포드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드미트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뭣 좀 알아냈나?" "그들 중 남녀 두 사람은 라 콜르로 가는 길에 있는 르 아모우 호텔에 묵고 있습니다." 해리 스텐포드는 그 호텔 을 잘 알고 있었다. 과수원의 농가를 개축한 호텔로 쎄인트 폴 드 방스 서쪽으로 2킬로도 안되는 가까 운 곳에 있었다. "그럼 또 한 사람은?" "마 다르티니 호텔입니다." 옛 귀족의 저택을 개조한 호텔로서 마을 서쪽으로 3킬로 떨어진 언덕 위에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손댈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해리 스텐포드의 저택은 화강암 조각으로 포장된 좁은 마차길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된 드 카세트가 의 고색창연한 저택들 사이에 있었다. 석재에 회벽이 어우러진 그의 저택은 모드 5층으로 되어 있었다. 거실은 3층에 있었고, 1층에는 차고와 포도주 창고로 쓰는 동굴이 있었다. 돌계단을 올라가면 침실과 서 재가 나오고 지붕에는 베란다가 있었다. 집 안은 값비싼 골동품과 아름다운 화초로 장식되어 있었다. 스 텐포드가 저택에 들어왔을 때 소피아는 침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왜 그렇게 오래 걸렸어요?" 그녀가 낮게 속삭였다. 소피아 마테오는 영화에 가끔 단역으로 출연하는 것만으로는 수입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급 콜 걸 생활을 해왔다. 돈을 많이 낸 고객과 잠자리를 같이할 때는 상대를 만족시키는 방법으로 흔히 자신 의 오르가즘을 연출해 왔다. 그러나 스텐포드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의 기교는 다양했고 정력은 끝이 없었다. 그의 끈질긴 애무에, 절정에서 내려오다가 다시 올라가고 또다시 올라가는 자신을 어쩔수 없었다. 오랫동안 계속되던 애무가 드디어 끝나고 두 사람의 숨결이 가라앉았을 때, 소피아는 남자의 가 슴에 얼굴을 묻으며 만족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영원히 이대로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럴 수 있다면 얼 마나 좋겠나... 속으로 중얼거리는 스텐포드는 마음은 무거웠다. 스텐포드 일행은 마을 입구의 드 골 장군 광장에 있는 르 카페 드라 플라스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요 리도 훌륭했지만 위험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식사를 즐긴다는 것이 스텐포드의 미각을 한층 더 돋구었 다. 식사가 끝나자 그들은 스텐포드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는 미행조가 따르기 쉽도록 의도적으로 천천 히 걸음을 옮겼다. 새벽 1시, 스텐포드 저택을 길 건너편에서 감시하던 사람은 저택의 조명등이 하나 둘 씩 꺼지고, 마침내 건물 전체가 어둠에 싸이는 것을 확인했다. 새벽 4시 30분, 해리 스텐포드는 소피아가 잠들어 있는 침실에 소리없이 들어갔다. 그녀를 가볍게 흔 들며 속삭였다. "소피아...?" 눈을 뜬 소피아는 스텐포드를 올려다보면서 기대에 찬 미소를 지었다. 다음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눈이 크게 떠졌다. 스텐포드가 옷을 차려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어요?" "아니, 아무 일도 없어. 여행을 좋아한다고 했 지? 지금 당장 여행을 떠나는 게 어때?" 소피아는 잠이 확 깼다. "지금 당장이요?" "그래. 조용히 준비 하라구." "하지만..." "서둘러야 돼." 15분 후, 해리 스텐포드와 소피아, 그리고 드미트리와 프린스는 아래층 차고를 향해 돌계단을 내려갔 다. 안에는 갈색 르노 한 대가 있었다. 드미트리는 조용히 차고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저택 앞길에는 스텐포드의 흰색 코니쉬가 주차되어 있었고 인적은 전혀 없었다. "아무도 없어요." 스텐포드는 소피아에 게 고개를 돌렸다. "장난 좀 쳐야겠어. 우리 둘이서 자동차 뒷좌석에 타고 드러눕는 거야." 소피아가 눈 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래야 되죠?" "내 사업의 경쟁자들이 나를 미행하고 있거든." 그는 진지한 표정 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큰 거래 한 건이 마무리되고 있는데 그 때문에 나를 추적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 내 움직임을 그들이 정확하게 포착하면 내가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되거든." "잘 알겠어요." 소피아 가 대답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그녀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5분 후, 갈색 르노는 마을 입구를 빠져 나가 니스로 향하는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길가 벤치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니스 쪽으로 달려가는 갈색 르노를 발견했다. 운전석에는 드미트리 카민스키가 앉아 있 었고 그 옆 자리에 프린스가 보였다. 그는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문제가 생겼 습니다." "무슨 일인가?" "갈색 르노 한 대가 스텐포드 저택을 나와 니스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드미트 리 카민스키가 운전하고 옆에는 흰 셰퍼드를 태우고 있습니다." "차 안에 스텐포드는 없었나?" "안 보였 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자의 경호원이 이런 시간에 곁을 떠난다는 것은 말도 안 돼! 그리고 그 개도 스텐포드 옆을 떠날 때가 없어! 스텐포드의 코니쉬는 아직도 길에 주차되어 있나?" "그대로 있습 니다. 차를 바꿔 탄 게 아닐까요?" "글세, 뭔가 심상치 않아. 즉시 공항에 연락해 보라구." 5분 후, 그는 니스 공항의 관제사와 통화하고 있었다. "스텐포드 씨의 전용기 말입니까? 맞습니다. 한 시간 전에 도착해서 벌써 급유가 끝났습니다." 미행조 의 두 사람은 즉시 니스 공항으로 출발했고, 또 한 사람은 캄캄한 스텐포드 저택을 계속 감시하며 남아 있었다. 자동차가 쎄인트 폴 드 방스에서 멀어지자 스텐포드는 일어나 좌석에 앉으며 소피아에게 말했 다. "이제는 일어나도 돼." 드미트리에게 고개를 돌리고 지시했다. "니스 공항으로 가! 서둘러야 돼!" 제2장 30분 후, 니스 공항 활주로에는 자가용 보잉 727기 한 대가 이륙 지점으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관제탑에서는 관제사들이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저 친구, 빨리 이륙하겠다고 어지간히 안달하는구만. 조종사가 벌써 세 번이나 이륙 허가를 재촉했어." "자가용이군. 누구 소유지?" "그 유명한 해리 스텐포 드야." "또 한 10억 달러쯤 벌어들일 건수가 생긴 게지." 관제사들은 잠시 잡담을 멈추고 막 이륙하는 중형 리어 제트기의 항로를 확인한 다음 마이크를 잡았다. "보잉 895 P기... 여기는 니스 공항 관제탑... 이륙 승인... 이륙 승인... 풍속, 좌측에서 5노트... 이륙 후 우회해서 140으로 항로를 잡을 것." 해리 스텐포드의 전용기 조종사와 부조종사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서로 마주보았다. 조종사가 마이크 를 들었다. "로져, 보잉 895 P기 이륙 준비 완료... 이륙 후 우회해서 항로 140..." 잠시 후 비행기는 굉음과 함께 활주로를 달려 먼동이 트는 잿빛 하늘을 가르며 떠올랐다. 이번에는 부조종사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륙 성공... 보잉 895 P기... 고도 1천 미터... 고도 1천 5백에서 우회할 것 임..." 마이크를 놓고 그는 조종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휘유, 대체 무슨 일일까요? 무조건 서둘러 이륙하 라고 다그치니..." 조종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뭣 때문에 그러든 우리 소관이 아니잖나? 그저 하라 는 대로 비행기만 조종하면 그만이지. 뒤쪽에는 별문제 없겠지?" 부조종사는 일어나 조종실 문을 열고 객석을 들여다보았다. "지금 쉬고 있는 중이에요." 공항으로 달려간 미행조는 관제탑으로 전화를 걸었다. "해리 스텐포드 씨의 자가용 비행기가 아직 그 곳에 있습니까?" "아뇨, 방금 이륙했는데요." "이륙 신고에 행선지가 기재되었지요?" "물론입니다." "어 디로 갔습니까?" "뉴욕의 케네디 국제공항으로 되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는 동료에게 고개를 돌 렸다. "케네디로 간 게 분명해. 즉시 연락해서 도착하기 전에 수배를 마치라구." 갈색 르노는 몬테칼로 외곽을 지나 이태리 국경으로 달리고 있었다. 스텐포드가 입을 열었다. "이봐, 드미트리 그자들을 따돌린 게 확실해?" "걱정 마세요. 지금쯤 엉뚱한 데서 헤매고 있을 겁니다." "좋아." 그제야 스텐포드는 좌석에 등을 기대고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이제 한숨 돌린 셈이었다. 미행조는 이륙 한 비행기를 추적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속으로 지금의 상황을 점검해 보았다. 그들이 무엇을, 언제 알 아내느냐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늙은 사자가 쓰러지기를 기다리며 쫓아 다니는 자칼 무리와 같이 자신 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들은 해리 스텐포드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여태 까지 그와 같은 실수를 범한 자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뤘고 이번에도 상황이 끝나면 누군가가 크게 후 회할 것이다. 해리 스텐포드는 여느 기업가가 아니었다. 국가 원수들과 교분을 가지고 여러 나라의 경제 를 흔들 수 있는 재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보잉 895 P기는 마르세이유 상공을 날고 있었다. 조종사가 마이크를 들었다. "마르세이유 관제탑... 여 기는 보잉 895 P기... 항로 190에서 230으로 변경할 것임... 승인 요망..." "로져." 동이 튼 다음 갈색 르노는 이태리 국경을 넘어 산 레모에 도착했다. 이 아름다운 해변 휴양지의 추억 은 해리 스텐포드에게 각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옛날의 산 레모가 아니었다. 그때는 최고급 호텔 과 레스토랑이 즐비했고, 턱시도를 입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카지노에서 엄청난 재산의 주인이 순식간 에 바뀌었었다. 이제는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셔츠 차림으로 떠들어대는 싸구려 도박장만 남았고 옛날의 품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차는 국경에서 20킬로쯤 떨어진 항구로 접어들었다. 항구에는 요트용 부두가 두 곳 있었다. 동쪽의 쏠 레 부두, 그리고 서쪽으로는 콤뮤날레 부두에서는 요트 조종사가 알아서 접안하게 되어 있었다. "어느 부두로 갈까요?" 드미트리가 물었다. "콤뮤날레 부두로 가!" 스텐포드가 지시했다. 보는 눈이 적을수록 좋겠지... "알았습니다." 잠시 후, 르노는 부두에 정박해 있는 블루 스카이 호 옆에 멈췄다. 60미터 길이 에 유선형으로 강력한 엔진을 장착한 스텐포드 소유의 요트였다. 선장 바카로와 열두 명의 선원들이 갑 판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선장이 빠른 걸음으로 내려와 차에서 내리는 스텐포드 일행을 맞았다. "스텐포드 씨, 안녕하셨습니까?" 바카로 선장이 말했다. "우선 짐을 싣고..." "짐은 없소. 즉시 출발합시 다." "알겠습니다." "잠깐!" 선원들을 둘러보던 스텐포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저 맨 끝에 있는 친구 말 이오, 새로 채용했소?" "그렇습니다. 선실 관리를 담당하던 젊은 친구가 카프리에서 병으로 하선했기 때 문에 저 사람을 그 자리에 채용했습니다. 추천서 내용이 아주..." "당장 내보내시오." 스텐포드가 말을 막 았다. 선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당장 말씀입니까?" "한 달 월급을 주고 내보내면 되잖소. 서둘러 떠납시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바카로 선장이 대답했다. 부두 주변을 둘러보면서 스텐 포드는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위험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럴 때 낮선 사람을 옆에 두고 싶지 않았다. 바카로 선장과 나머지 선원들은 벌써 여러 해 동안 블루 스카이에 서 일해왔기 때문에 믿을 수 있었다. 소피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드미트리가 무작위로 골랐으니 그녀가 위험인물일 가능성은 없었다. 충실한 경호원인 드미트리는 벌써 몇 번이나 그의 생명을 구했었다. "내 곁을 떠나지 마!" 드미트리에게 말했다. "알았습니다." 스텐포드는 소피아의 팔을 잡아 주면서 말했다. "자, 이제 올라가자구." 드미트리 카민스키는 갑판 위에서 출항 준비를 서두르는 선원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눈을 돌려 항구 전체를 둘러보았지만 조용하기만 했다.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움직이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다. 엔진 시동을 걸고 닻을 올린 다음 블루 스카이 호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장이 스텐포드에게 다가왔 다. "스텐포드 씨, 행선지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없으셔서..." "그랬군..."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 었다. "바카로 선장, 포르토피노로 갑시다." "알겠습니다." "참, 그리고 지금부터 모든 무선교신을 중단하 시오." 바카로 선장은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 "무선교신 없이 항해하라구요? 알았습니다. 하지만 만약..." "걱정말고 지시대로 하시오. 그리고 이 배에 설치된 무선전화도 쓰지 말도록 조치하시오." 스텐포드가 덮어버리듯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포르토피노에서 1박 하시겠습니까?" "그 때 가서 결정할 거요." 해리 스텐포드는 소피아에게 요트 내부를 구경시켰다. 블루 스카이 호는 그가 가장 아끼는 자랑거리 였기 때문에 사람들을 초대해서 과시하기를 좋아했다. 정말 아름답고 사치스러운 요트였다. 호화롭게 꾸 며진 스텐포드의 침실은 별도의 응접실과 사무실로 연결되어 있었고, 품위 있게 장식된 사무실은 웬만 한 도시의 시장실보다 더 넓었다. 한쪽 벽에는 전자장치가 연결된 대형지도가 설치되어 있었고, 작은 요 트 모형이 배의 위치와 항로를 알려 주었다. 침실에서 대형 미닫이 유리문을 열면 베란다로 연결되었는 데, 그곳에는 일광욕할 때 쓰는 긴 등받이 의자와 야외용 식탁 세트가 있었다. 베란다 끝 부분은 티크 원목 난간으로 둘러져 있었다. 파도가 심하지 않은 날이면 스텐포드는 으레 이 베란다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그 밖에도 실크 벽지에 사치스러운 욕실이 딸린 손님용 침실이 여섯 개나 있었고, 귀한 책으로 가 득 찬 서재는 코아 원목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열여섯 명이 함께 식사할 수 있는 넓은 식당과 완벽한 설비를 갖춘 체련실도 있었다. 또한 포도주 창고며, 여럿이 즐길 수 있는 영사실도 갖춰져 있었다. 해리 스텐포드는 포르노 영화 수집광으로 엄청난 양의 필름을 소장하고 있었다. 요트의 내부장식은 실내장식 가들이 감탄할 정도였고, 벽에 걸린 그림들만 모아도 훌륭한 미술 박물관이 될 수 있었다. "자, 이쯤하고..." 스텐포드가 소피아에게 말했다. "아직 좀더 볼게 남았지만 그건 내일 둘러보지." 그 녀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세상에! 이런 요트가 있다니... 이건, 이건 꿈속에 나오는 작은 도시 같아요!" 스텐포드는 감탄하는 소피아를 쳐다보면서 미소 지었다. "자, 선원이 침실로 안내해 줄 거야. 쉬고 있어. 나는 해야 될 일이 좀 있거든." 해리 스텐포드는 사무실로 들어가 벽의 전자지도에 배의 위치를 확인했다. 블루 스카이 호는 리구리 아 해상에서 북동쪽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아직은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를 거야. 그는 생각했다. 아마 케 네디 공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포르토피노에 도착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야. 1만 1천 미터 상공에서 조종사는 항로 변경을 승인하는 무선교신을 듣고 있었다. "보잉 895 P기... DIN 40 상부 항로 진입 요청 승인... 진입 요청 승인..." "로져, 여기는 보잉 895 P기... DIN 40 상부 항로 에 진입 개시." 그는 부조종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젠 케네디에 접근할 때까지 별일 없겠어." 조종사 는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객실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우리 승객은 잘 있어요?" 부조종사가 물었다. "글쎄, 좀 시장해 보이는데." 제3장 리구리아 해안은 이태리의 리비에라로 불린다. 프랑스 국경에서 동남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뻗어 제노 바를 지나 라 스페지아까지 이어진다. 길게 뻗은 이 그림 같은 해안과 주변 섬에는 역사책이나 이야기 책에 자주 나오는 포르토피노, 베르나자, 사르디니아, 엘바, 그리고 코르시카 같은 지명을 찾아볼 수 있 다. 블루 스카이는 포르토피노 항에 접근했다. 멀리서 보아도 언덕이 올리브 나무, 소나무, 싸이프러스, 그리고 종려나무로 뒤덮인 포르토피노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해리 스텐포드는 소피아, 드미트리와 함 께 갑판에서 다가오는 해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포르토피노에 자주 오셨어요?" 소피아가 물었다. "몇 번 왔었지." "그럼 집은 어디세요?" 그건 알 것 없어. "소피아, 포르토피노에서 즐겁게 지낼 수 있을거 야. 정말 아름다운 곳이거든." 바카로 선장이 다가왔다. "스텐포드 씨, 선상에서 점심을 드시겠습니까? 준비시킬까요?" "아니오. 점심은 스플렌디도에서 하겠소." "알겠습니다. 그러면 점심식사 후에 즉시 출발 하도록 준비할까요?" "그럴 필요 없소. 이 아름다운 곳을 좀 즐깁시다." 바카로 선장은 이해할 수 없다 는 표정이었다. 정신없이 서두르던 해리 스텐포드가 금세 천하태평인 듯 경치를 즐기겠다는 게 아무래 도 이상했다. 게다가 무선교신을 중단한다? 거 참... 블루 스카이 호가 포르토피노 외항에 닻을 내리자 스텐포드는 소피아, 드미트리와 함께 모터 보트를 타고 육지로 향했다. 아담한 포구 같은 포르토피노에는 언덕을 올라가는 단 하나의 길 양쪽으로 아기자 기한 작은 상점들과 야외 카페가 늘어서 있었다. 자갈밭 해변에는 작은 어선 몇 척이 끌어올려져 있었 다. 스텐포드가 소피아에게 말했다. "저 언덕 위에 있는 호텔에서 점심을 할거야. 전망이 아주 좋은 곳이 지..." 부둣가에 대기하고 있는 택시를 가리켰다. "택시에 먼저 타고 기다리라구. 잠시 후에 갈테니까." 그녀의 손에 리라 지폐 뭉치를 쥐어 주었다. "그러지요." 떠나가는 소피아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스텐 포드는 드미트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전화 좀 해야겠어." 요트에서 교신하면 추적당하는 게 두렵겠지. 드미트리는 생각했다. 부두 근처에 공중전화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전화로 다가간 스텐포드는 그 중 하나에 동전을 넣고 교환을 불렀다. "교환, 스위스 제네바의 유니온 은행 본점 부탁합니다." 한 여자 가 비어 있는 공증전화로 다가왔다. 드미트리는 그녀가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도록 전화 박스 앞을 막 아섰다. "실례합니다." 여자가 말했다. "전화 좀..." "지금 이 번호로 전화가 오기로 되어 있소."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 그러세요?" 옆 박스에서 통화하고 있는 스텐포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다려 봐도 소용없을 거요." 드미트리가 냉랭하게 말했다. "그 양반은 길게 통화할 거요." 여자는 실망한 표정 으로 돌아서 갔다. "여보세요? 피터?" 드미트리는 통화하는 스텐포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피터, 문제가 좀 생겼어." 스텐포드는 공중전화 박스의 문을 닫았다. 그는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고, 드미트리는 더 이 상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몇 분 후 통화를 끝낸 스텐포드는 수화기를 올려놓고 박스에서 나 왔다. "스텐포드 씨,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드미트리가 물었다. "점심이나 하러 가지." 스플렌디도는 포르토피노의 대표적인 명소였다.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은 이 호텔은 그림 같은 해안 경치와 에메랄드 빛 바다를 내려다 보는 기막힌 전망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호텔은 상류사회 고객만 상대하고 그에 걸맞는 품위를 철저히 유지했다. 스텐포드와 소피아는 레스토랑의 베란다에 자리잡았다. "내가 주문해 줄까?" 스텐포드가 물었다. "이곳에는 이 지방 특유의 요리가 유명하거든." "좋아요." 소피 아가 대답했다. 스텐포드는 트레네테라는 파스타를 전채요리로 시키고, 송아지 고기 요리와 포카치아라 는 그 지방 특유의 간을 한 빵을 주문했다. "그리고 1988년도 산 슈람버그 포도주 한 병을 가져오게." 그는 소피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얼마 전 런던에서 열린 국제 포도주 품평회에서 대상을 받은 포도주 야. 그 포도원은 내 소유지." "복도 많으셔라." 소피아가 말했다. 복 받아서 그런 포도원이나 요트가 굴 러 들어오는 줄 알아? "이 세상엔 온갖 맛있는 것이 많은데 골고루 즐겨 봐야 되지 않겠어?" 그는 소피 아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먹는 것만이 즐거운 건 아니지만..." "정말 대단한 분이세요." "칭 찬해 주니 고맙군." 젊은 여자가 자신에게 매료되는 것을 느낄 때 스텐포드는 피가 끓어 올랐다. 소피아 는 자신의 딸보다 어렸기 때문에 그는 여느 때보다 더 흥분하기 시작했다. 식사가 끝나자 그는 웃음 띤 얼굴로 소피아에게 말했다. "그럼 요트로 돌아가서 좀 쉴까?" "좋아요!" 절륜한 정력의 소유자 해리 스 텐포드. 그의 애무는 정열적이고 능란했다. 자존심 강한 그는 자신의 만족보다도 상대를 만족시키는 데 더 신경을 썼다. 그는 여성의 성감대를 잘 알고 있었고, 절묘한 애무로 언제나 상대방을 환희의 절정으 로 끌어올렸다. 두 사람은 오후 내내 스텐포드의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오래 계속되던 사랑놀음이 끝 나고 스텐포드가 옷을 입을 때 소피아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누워 있는 그녀를 남겨 두고 스텐포드는 브리지로 바카로 선장을 찾아갔다. "스텐포드 씨, 사르디니아로 향할까요?" 선장이 물었다. "우선 엘바 섬에 들러야겠소." "알았습니다. 뭐 부족한 것은 없습니까?" "없소." 스텐포드가 말했다. "모든 게 만족스 럽소." 그렇게 말하면서 스텐포드는 식었던 흥분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소피아가 있는 침실로 다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블루 스카이는 엘바 섬에 도착해 포르토페라리오에 닻을 내렸다. 비행기가 미국 영공에 들어서자 조종사는 지상 관제소와 교신을 시도했다. "뉴욕 관제소... 뉴욕 관제 소... 여기는 보잉 895 P기... 260항로에서 240항로로 하강 승인 요청..." 잠시 후 뉴욕 관제소의 답신이 들려왔다. "로져, 고도 4천 미터로 하강 승인... 이후부터는 케네디 공항 관제탑의 지시를 받을 것... 주파 127.4로 교신할 것." 객실 쪽에서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프린스, 좀 가만히 있어! 자, 착하 지? 착륙할 때는 안전벨트를 매야 되잖아." 부조종사의 목소리로 들려왔다. 네 사람이 보잉 895 P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비행기에서 내리는 사람을 놓치지 않 고 볼 수 있도록 사방에서 감시하고 있었다. 비행기 출입문이 열리고 30분이 지나도록 조종사, 부조종 사, 그리고 순백색 셰퍼트 한 마리 외에는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포르토페라리오는 엘바 섬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거리에는 품위 있고 세련된 상점이 늘어섰고, 언덕 위에는 16세기에 플로렌스 공작이 건축한 요새가 아직도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요새 아래쪽 비 탈에는 18세기에 지은 건물들이 들어차 있었다. 해리 스텐포드는 벌써 여러 번 이곳에 왔었다. 나폴레옹 이 유배생활을 했던 이 섬에 올 때마다 그는 묘하게도 편안함을 느꼈다. "나폴레옹이 살던 집을 구경할 까?" 그가 소피아에게 물었다. "나는 잠시 후에 갈 테니까, 먼저 가 있으라구." 스텐포드는 드미트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소피아를 데리고 데이 물리니 빌라로 먼저 가게." "알겠습니다." 그는 소피아와 드미트 리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시간이 없었다. 비행기는 벌써 케네디 공항에 도착했 을 것이고 자신이 타지 않았다는 게 확인되면 이 부근에서 대대적인 수색이 벌어질 것이다. 나를 추적 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리겠지... 스텐포드는 생각했다. 그 동안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야. 그는 부두 근처의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갔다. "런던으로 국제통화 부탁합니다." 교환원에게 말했다. "바클리즈 은행 본점, 171..." 30분 후, 스텐포드는 데이 물리니 빌라에서 소피아와 드미트리를 만나 함께 요트로 돌아왔다. "먼저 올라가 있어." 소피아에게 말했다. "전화 한 통화하고 갈게." 소피아는 공중전화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 을 쳐다보면서 생각했다. 왜 요트에 있는 전화를 쓰지 않고 공증전화를 찾아다니지? 전화 박스 안에 들 어가 해리 스텐포드는 수화기를 들었다. "국제통화 부탁합니다.... 동경의 스미토모 은행 본점..." 15분 후, 그는 몹시 불편한 표정으로 요트에 돌아왔다. "오늘 밤 여기서 주무시겠습니까? 닻을 그대로 내려 둘까 요?" 바카로 선장이 물었다. "그러지." 다음 순간 그는 생각을 바꿨다. "아니, 즉시 사르디니아로 출발합 시다." 사르디니아 섬 북단, 리구리아 해를 바라보는 스메랄다 해안은 경치가 뛰어나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곳의 작은 마을 포르토 체르보에는 유럽의 저명한 재력가들의 별장이 모여 있었다. 언덕 비탈 곳곳에 보이는 호화로운 별장들 대부분이 유명한 건축가 알리 칸의 설계로 지어졌다. 블루 스카이가 부두에 닿 자마자 스텐포드는 공중전화를 찾았다. 드미트리가 뒤따라가 전화 박스 앞을 지켜섰다. "로마의 이태리 운행 본점..." 전화 박스 문이 닫혔다. 통화는 거의 30분 동안 계속 되었다. 통화를 마치고 박스에서 나오 는 스텐포드는 침통한 표정이었다. 드미트리는 무슨 일인지 점점 더 궁금해졌다. 스텐포드는 소피아와 함께 해변에 있는 리치아 디카바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이번에도 스텐 포드가 주문했다. "전채는 말라레두스로 하지." 종이같이 얇은 밀가루 반죽을 겹겹이 쌓은 사르디니아 특유의 요리였다. "그리고 주요리는 포체두가 좋겠어." 월계수 잎과 향신료를 넣고 요리한 어린 통돼지 구이였다. "포도주는 베르나치아, 그리고 후식은 세바다스로 하지." 얇은 반죽 속에 치즈와 레몬 껍질을 다져 넣고 튀긴 다음, 설탕과 쌉쌀한 꿀을 뿌린 독특한 음식이었다. "정말 훌륭한 선택이십니다." 정중하 게 고개를 숙인 다음 주방 쪽으로 돌아서면서 웨이터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마주앉은 소피아와 얘기를 나누던 스텐포드는 시선이 레스토랑 입구에 미쳤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 입구 가까운 테이블에 앉은 두 남자가 자신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더운 여름날 점심때였지만 그들은 짙은 색 정장 차림이 었다. 아예 관광객으로 가장할 생각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벌써 나를 발견한 게 아닐까? 나와는 무관 한 사람들인지도 모르지... 내가 긴장해서 신경이 너무 예민해진 거 아냐? 소피아는 말을 계속하고 있었 다. "여태 여쭈어 보지 못했는데... 어떤 일을 하세요?" 스텐포드는 대꾸하지 않고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자신이 누군지 전혀 모르는 젊은 여자와 대화하는 게 재미있게 느껴졌다. "난 벌써 은퇴했어." 한참만에 대답했다. "이제는 그저 여행이나 다니면서 살고 있지." "그럼 아무도 없이 혼자 다니세요?" 그녀는 스텐포드의 처지를 동정하는 표정이었다. "정말 외롭겠어요." 스텐포드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 신히 참았다. "그래, 정말 외롭지. 소피아를 만난 건 행운이었어." 소피아가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도 당신을 만난 것을 행운으로 생각해요." 그 때 두 남자가 레스토랑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스텐포드 의 눈에 띄었다. 점심식사가 끝나자 스텐포드 일행은 부두 쪽으로 돌아갔다. 스텐포드는 두 사람보다 앞서가 공증전화 를 찾아 박스로 들어갔다. "파리의 크레디 리오네 은행 본점..." 그를 지켜보던 소피아가 드미트리에게 말했다. "정말 훌륭한 분이에요." "아무도 따라갈 수 없는 분이지요." "스텐포드 씨와 일한 지 얼마나 됐 어요?" "2년 넘었소." "저런 분과 일하다니... 정말 운이 좋았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대답하고 드 미트리는 공중전화로 다가가서 박스 문을 등지고 지켜 섰다. 이번에는 스텐포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 었다. "르네? 내가 왜 전화했는지 알고 있잖아... 그래... 맞아... 정말? 그렇게 하겠어? ...정말 고마워, 이 빚은 꼭 갚을게!" 스텐포드의 표정이 더없이 밝아졌다. "아니... 여기서는 안 돼! 코르시카에서 만나는 게 어때... 좋아... 그곳에서 나는 바로 보스턴으로 돌아가면 돼... 르네, 고마워." 스텐포드는 수화기를 내려놓 았다.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잠시 서 있다가 이번에는 보스턴으로 전화했다. "피츠제랄드 변호사 사무실 입니다." 여비서가 대답했다. "나 해리 스텐포드요. 피츠제랄드 씨 빨리 대주시오." "아, 스텐포드 씨! 공 교롭게도 지금 피츠제랄드 씨는 휴가 중이십니다. 혹시 다른 변호사..." "딴 사람은 필요 없소. 내가 내일 보스턴으로 돌아가니, 월요일 아침 9시에 로즈 힐로 오라고 전하시오. 내 유언장과 공증인도 데려오라고 하시오." "연락을 해보도록..." "이봐! 해보는 건 필요없어. 무조건 내 말대로 해야 돼!" 수화기를 내려놓 고 스텐포드는 그 자리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화 박스 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이미 생각을 굳혔다. "소피아, 아직 볼일이 남았어. 먼저 피트리자 호텔로 가서 기다리지." "그럴게요." 그녀는 의미 있는 미 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세요." "곧 갈게." 스텐포드와 드미트리는 소피 아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블루 스카이로 돌아가자구." 스텐포드가 말했다. "빨리 이곳을 떠나야겠어." 드미트리는 놀란 표정이었다. "그럼 소피아는..." "걱정할 것 없어. 그 몸매로 어딜 가든 굶기야 하겠나?" 요트로 돌아온 스텐포드는 즉시 바카로 선장을 불렀다. "코르시카로 가야 되겠소." 그가 말했다. "즉시 닻을 올립시다." "스텐포드 씨, 지금 막 기상예보를 받았습니다. 폭풍이 다가온다는 예보였습니다. 아무 래도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항구에서..." "바카로 선장! 난 지금 떠나야겠소." 바카로 선장은 주저했다. "항해가 무척 힘들겁니다. 리베치오가 다가오는 게 확실합니다." 리베치오는 소나기를 동반한 세찬 남서 풍으로 파도가 심해지는 폭풍 현상을 가리켰다. "어쨌든 떠나야겠소." 르네와 코르시카에서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었다. 스텐포드는 드미트리에게 지시했다. "내일 코르시카에서 로마로 갈 헬리콥터를 빌려 놓게. 저기 공중전화를 쓰도록 해." "알았습니다." 드미트리 카민스키는 부두로 내려가 전화 박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20분 후, 블루 스카이 호는 닻을 올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4장 그의 우상은 조지 부시 대통령 시절 부통령이던 댄 퀘일이었다. 정치가로서 기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선거 유세에서 아름다운 아내와 귀여운 자녀들 사진만 앞세운 좀 멍청하기로 정평이 난 정치가였지만 그는 무조건 퀘일을 좋아했다. "남들이 퀘일을 뭐라고 평하든 상관없어. 정치인 중에 가치관이 제대로 정립된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어. 가정과 가족관계가 인간에게 제일 중요한 거야.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이 완전히 무너져 버리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되겠어? 안 그래도 요즘 젊은 애들은 전통적인 가 족관을 아예 무시하잖아? 결혼도 안 하고 동거생활에 들어가고, 게다가 아이까지 낳고... 참, 말도 안 돼. 그러니 범죄가 늘어날 수밖에. 만약 댄 퀘일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면 난 적극적으로 지지할 거야." 실상 그는 투표권이 없었다. 말도 안 되는 법조문 때문에 투표도 할 수 없다니... 어쨌든 그는 퀘일의 열 광적인 지지자였다. 그는 네 자녀를 두었다. 막내는 여덟 살 난 아들 빌리였고 그 위로 열 살, 열두 살, 열네 살 난 딸들, 에이미, 클라리사, 그리고 수잔이었다. 그는 아이들을 무척 사랑했고 그들과 함께 시간 을 보내는 것을 무엇보다도 보람된 것으로 생각했다. 주말은 아이들을 위해 시간을 다 바쳤다. 야외에서 바비큐를 해주고, 같이 놀아 주고, 영화나 운동경기에 데려가고, 숙제도 도와주었다. 동네 아이들도 그를 따랐다. 남의 집 아이라도 항상 따뜻하게 대했기 때문이었다. 고장난 자전거나 장난감을 고쳐 주고 가족 피크닉에 자주 초대하는 그를 동네 아이들은 '파파'라고 불렀다. 어느 화창한 토요일 오전이었다. 그는 아내와 딸들과 함께 야구장 관중석에 앉아 야구경기를 보고 있 었다.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쪼이고 푸른 하늘에 흰 뭉게구름이 흘러가는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여덟 살 난 막내 아들 빌리가 타석에 들어가 있었다. 유니폼에 헬멧을 쓰고 방망이를 치켜 든 빌리는 제법 야구 선수답게 보였다. 옆에 앉은 아내와 딸들을 둘러보면서 그는 흐뭇한 표정이었다. 우리보다 더 행복한 가 정은 없을 거야! 왜 우리같이 살지 못하고 가정파탄을 일으키고 난리들이지? 8회 말, 투 아웃에 만루 상 황이었다. 볼 카운트는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 빌리는 긴장된 표정으로 다음 투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빌리! 힘을 내! 담장을 넘겨 버려!" 빌리는 투수의 동작을 주시했다. 낮고 빠르게 들어오는 공을 보고 힘껏 방망이를 휘둘렀으나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스트라이크! 아웃!" 구심 이 소리쳤다. 8회는 득점 없이 끝났다. 관중들의 환호와 실망의 한숨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빌리는 침 통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서 공수교대하는 동료 선수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다시 소리쳤다. "빌 리, 괜찮아. 다음에 본때를 뵈주면 돼!" 빌리는 아버지를 쳐다보면서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수비하러 가 려고 글러브를 들고 나서는 빌리의 팀 감독인 존 카튼이 막아섰다. "넌 이제 빠져." 그가 말했다. "감독 님, 하지만..." "잔말 말고 들어가라구." 빌리의 아버지는 아들이 경기에서 교체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 았다. 아니, 이럴 수가... 한 번 실수했다고 교체하다니. 말도 안 돼! 만회할 기회를 한 번 이라도 더 줘 야 되잖아? 아무래도 내가 감독을 만나 얘기 좀 해야 되겠어. 바로 그 순간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 번호를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내가 주말에 일하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면서... 마지못 해 그는 안테나를 뽑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화기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는 그가 대답할 기 회도 주지 않고 몇 분 동안 계속되었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듣고 있던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예, 잘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여보,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요?" 아내가 물었 다. "별일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이번 주말에는 일을 해야 되겠어. 내일 아이들에게 바베큐를 해준다고 약속했는데... 거 참." 아내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여보, 마음쓰지 마세요. 당신은 언제나 아이들을 잘 돌보잖아요? 중요한 일이 생겼는데 한 번쯤 약속을 미뤄도 괜찮아요." 일이 중요해서 그런 게 아니 야! 당신과 아이들을 위해서야... 댄 퀘일은 내 심정을 이해할 거야. 그는 생각했다. 갑자기 손등이 몹시 가려워져서 긁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가렵지? 일간 피부과 의사를 찾아가 봐야겠어. 존 카튼은 동네 슈퍼마켓의 부지배인 이었다. 오십 대 초반 나이에 우람한 체격의 카튼은 아들이 동 네 소년 야구단의 뛰어난 선수였기 때문에 팀 감독이 되었다. 그의 팀은 빌리가 여러 번 실수하는 바람 에 그날 시합에서 참패했다. 저녁에 슈퍼마켓 영업을 끝내고 집으로 가려고 주차장에 들어섰을 때 낯선 남자 한 사람이 다가왔다. 손에 무언가 들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카튼 씨 아니십니까?" "그런데요?" "말씀드릴 게 있는데, 잠깐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영업은 끝났는데요..." "아, 슈퍼마켓 얘기가 아닙 니다. 내 아들 얘기입니다. 빌리는 오늘 시합 도중에 교체되고, 앞으로는 선수로 기용하지 않을 거라는 당신의 말에 몹시 낙담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빌리의 아버지요? 그 애가 선수로 기용된 것 자체가 잘 못된 거요. 야구선수의 자질이 없어요." 빌리의 아버지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카튼 씨, 그건 속단입 니다. 내 아들은 내가 잘 알아요. 사실은 야구에 대단한 소질이 있어요. 당신도 그 애의 자질을 인정하 게 될겁니다. 다음 토요일 시합에서..." "빌리는 다음 시합에 뛸 수 없소. 오늘 교체되었잖소." "하지만..." "이미 결정된 것이오. 더 이상 얘기할 게 없어요. 다른 얘기가 없으면..." "아니, 얘기가 더 있어요." 빌리 의 아버지는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의 포장을 풀었다. 야구 방망이였다. 그는 애원조로 말을 이었다. "이게 오늘 빌리가 쓰던 방망이입니다. 좀 보세요. 이렇게 흠집이 났잖아요? 이런 방망이로 공을 제대로 때릴 수 있겠어요? 그러니 다시 한번..." "이봐요, 선생! 방망이가 어떻게 되었든 상관없소. 빌리는 기용할 수 없소." 빌리의 아버지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생각을 바꿀 수 없습니까?" "그럴 수 없소." 존 카튼의 손 이 자동차 문 앞에 닿았을 때, 빌리의 아버지는 뒷유리창을 방망이로 내리쳤고, 유리창은 산산조각이 났 다. 깜짝 놀란 카튼은 말을 더듬었다. "아니, 이, 이게... 무, 무슨 지, 짓입니까?" "준비 운동이었지..." 말 하고 나서 그는 방망이를 치켜들어 카튼의 한 쪽 무릎을 내리쳤다. 카튼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무릎 을 움켜쥐고 고통으로 어쩔 줄 몰랐다. "다, 당신 미, 미쳤구만... 사, 사람 살려!" 빌리의 아버지는 몸을 숙여 그에게 얼굴을 바짝 디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한 번만 더 소리질러 봐. 성한 무릎도 박 살내 주지!" 카튼의 얼굴은 고통과 두려움으로 일그러졌다. "내 아들이 토요일 시합에 출전 못하면 당신 과 당신 아들은 살아 남지 못할 거야! 알아듣겠어?" 카튼은 비명을 삼키며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참, 이 일은 아무에게도 말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나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내 동료들 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그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보스턴행 밤 비행기를 타는 데 시간은 충분했다. 그의 손등이 가렵기 시작했다. 일요일 아침 7시, 조끼까지 입은 정장차림으로 값비싼 가죽 서류가방을 든 그는 보스턴의 코플리 관 장을 지나 스튜아트가를 걸었다. 잠시 후 컨벤숀 회관을 지나 보스턴 신탁회사 빌딩에 도착했다. 건물 로비에 들어선 그는 경비원 책상으로 다가갔다. 사무실을 임대하고 있는 기관이 수십 개에 달하는 이 건물에서 현관 경비원이 직원들 얼굴을 일일이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굿 모닝!" 그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제가 도와 드릴 일이라도..." 그는 한숨부터 쉬었다. "당신이 도와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소? 멍청한 친구가 깜빡 잊은 일을 나보고 해결하라니... 내가 일요일이면 일하고 싶어서 전화만 기 다리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이요." 경비원은 고개를 저으며 동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기분 이해합니 다." 건물출입 기록부를 내밀었다. "여기 서명하시지요." 서명을 마치고 그는 엘리베이터로 갔다. 찾던 사무실은 5층에 있었지만 그는 6층 단추를 눌렀다. 6층에서 비상계단을 내려가 5층 복도를 천천히 걸었 다. '렌퀴스트, 렌퀴스트, 피츠제랄드 법무법인' 간판이 붙은 문을 찾아냈다. 복도에 인적이 없는 것을 확 인한 다음 서류가방에서 작은 송곳과 철사조각을 꺼냈다. 5초만에 잠겼던 문이 열었고, 그는 안으로 들 어가 소리없이 문을 다시 잠갔다. 문 안쪽의 대기실은 보스턴의 저명한 법무법인답게 보수적 취향으로 품위 있게 꾸며져 있었다. 그는 잠시 사방을 둘러본 다음 사무실 안쪽 서류철이 보관된 기록실로 들어 갔다. 그곳에는 알파벳 순서로 표시된 강철제 서류 캐비넷이 늘어서 있었다. R-S 표시가 붙은 캐비넷 서랍을 당겨 보았지만 잠겨 있었다. 그는 가방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대강 맞을 것 같은 열쇠 한 개 를 골랐다. 플라이어와 쇠줄도 꺼낸 다음 열쇠를 구멍에 넣고 양쪽으로 움직였다. 잠시 후 열쇠를 빼내 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양쪽에 희미한 흠집이 나 있었다. 그는 플라이어로 열쇠를 고정시키고 흠집난 부분을 쇠줄로 조심스럽게 쓸어냈다. 다시 열쇠를 구멍에 넣고 움직여 본 다음 쇠줄로 쓸어내는 작업을 몇 번 되풀이했다. 그는 어느새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흥얼거리던 노래가 무엇인지 깨 달았을 때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머나먼 곳, 낯선 땅, 낯선 이름... 저 멀리 바다 건너... 낯선 땅, 낯선 이름이 나를 부르네... 부르네. 잠시 그는 달콤한 공상에 잠겼다. 가족들과 휴가여행을 가야겠어. 정 말로 멋있는 곳으로 가야지. 하와이가 어떨까? 아이들이 무척 좋아할 거야... 드디어 캐비넷 서랍이 열렸 다. 찾고 있던 서류철을 발견하는 데는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가방에서 소형 펜탁스 카메라를 꺼내 작 업을 시작했다. 10분 만에 모두 끝내고 서류철을 서랍에 넣었다. 가방에서 크리넥스 화장지 몇 장을 꺼 내 냉수기 물에 적신 다음 손이 닿은 캐비넷 부위를 꼼꼼히 닦아냈다. 캐비넷을 다시 잠그고 복도로 나 가면서 출입문도 잠갔다. 6층으로 걸어 올라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빌딩 밖으로 나갔다. 제5장 해가 기울기 시작할 때 바카로 선장이 거실로 스텐포드를 찾아왔다. "스텐포드 씨." "무슨 일이오?" 선장은 벽에 걸린 전자지도를 가리켰다. "아무래도 기상 상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풍속이 갑자기 높아지 고 있습니다. 리베치오의 중심세력이 우리가 접근해야 되는 보니파시오 해협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오늘 밤은 이 부근 항구에 대피하고 내일 다시..." 스텐포드가 선장의 말을 막았다. "블루 스카 이 호는 첨단시설을 갖춘 요트고 당신은 기량이 뛰어난 선장이잖소? 난 당신을 믿으니 계속 항해하시 오." 바카로 선장은 잠시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스텐포드 씨.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고 맙소, 선장." 해리 스텐포드는 요트 안의 사무실에 앉아 내일 해야 될 일을 생각했다. 코르시카에서 르네를 만나 교섭을 마무리 지으면 심각한 문제는 모드 해결될 것이었다. 오후에 헬리콥터로 나폴리에 가서 전세기 로 보스턴으로 직행할 생각이었다. 이제 모든 게 해결될 거야. 앞으로 48시간이면 내 왕국은 다시 철옹 성이 되는 거야. 단지 48시간이면... 새벽 2시, 배가 심하게 요동치고 세찬 바람 소리가 들려 스텐포드는 잠을 깼다. 전에도 험한 바다를 항해해 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심한 폭풍은 처음이었다. 바카로 선장의 예측은 정확했다. 해리 스텐포 드는 침대 옆의 고정된 가구를 붙들고 간신히 일어나 전자지도에 다가갔다. 블루 스카이는 보니파시오 해협에 들어서 있었다. 몇 시간이면 코르시카에 도착하겠군... 몇 시간이면 안전한 항구에 닻을 내릴 거 야. 그는 생각했다. 그 이후의 상황은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서류가 베란다에 흩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스텐포드가 바람에 날아가는 서류를 집으려다 배가 기우뚱거리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바다에 빠졌을 가능성을 시사 했다. 드미트리 카민스키가 바다로 떨어지는 스텐포드의 뒷모습을 보고 수화기를 들었다. "스텐포드 씨 가 물에 빠졌어!!!" 제6장 코르시카의 경찰국장인 프랑소와 뒤레 경감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 섬에 몰려든 수많은 관광 객 주에 여권을 잃어버린 사람, 돈지갑을 잃어버린 사람, 그리고 어린아이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세르젠 카사롱가가 근처의 나폴레옹 대로에 있는 좁은 경찰서에는 하루 종일 자질구레한 여러 일로 찾아오는 사람들로 붐볐다. "돈지갑을 소매치기 당했어요..." "배편을 놓쳤어요. 아내는 벌써 타고 있었는데..." "길거리에서 시계를 샀는데, 속이 텅 비었어요..." "약국에 내가 필요한 약이 없어요..." 불평 과 하소연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런 데다 이번에는 익사사고가 발생했다. "지금 시간이 없단 말이야!" 부 하 경찰관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밖에서 기다리고들 있는데요?" 부하가 말했다. "뭐라고든 대답해 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뒤레 경감은 젊은 여자 친구와의 밀회시간이 늦어지는 게 짜증스러웠다. '그 빌어먹 을 시체를 다른 섬으로 가져가!'하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코르시카 경찰의 총수였 다. "할 수 없군."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잠시 만나 주지." 잠시 후 부하 경찰관이 바카로 선장과 드미트리 카민스키를 데리고 들어왔다. "거기 앉으시오." 뒤레 경감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두 사 람이 의자에 앉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말해 보시오." 바카로 선장이 입을 열었다. "저도 정확하 게 모릅니다. 그 자리에 없었거든요." 그는 드미트리 카민스키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사람이 현장을 목 격했습니다. 직접 들어보는 게 좋겠습니다." 드미트리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엄청난 일입니다. 그분은 제가 모시는... 모시던 분입니다." "모시다니? 어떤 관계였소?" "저는 그분 의 개인 경호원, 체력 단련사, 그리고 운전사로 일했습니다. 어젯밤 우리 요트가 폭풍을 만났습니다. 아 주 심한 폭풍이었죠. 그분은 긴장을 풀려고 저에게 안마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안마가 끝났을 때 수면제 를 찾아가지고 돌아왔을 때 그분은 한 손에 서류 뭉치를 들고 있었는데 바람에 한두 장이 날렸습니다. 서류를 집으려고 난간에 손을 놓는 순간 그분은 중심을 잃고 바다로 추락했습니다. 제가 달려갔지만 손 쓸 시간이 없었습니다. 즉시 바카로 선장에게 연락하고 구조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선장은 위험을 무릅쓰 고 폭풍 속에서 배를 멈춘 다음 한참만에 그분을 찾아냈습니다. 하지만 너무 늦었지요... 그분이 익사한 다음이었습니다." "거 참, 안됐소." 뒤레 경감은 건성으로 말했다. 바카로 선장이 입을 열었다. "시체가 바람과 파도에 밀려 배에 접근했습니다. 그나마 운이 좋았던 거지요. 어쨌든 유해를 본국으로 보내야 하 는데 경찰의 허가가 필요합니다." "그야 간단한 일이오." 아직 집에 돌아가기 전에 여자 친구와 한잔 할 시간이 있었다. "당장 사망확인서와 시신의 출국허가서를 작성시키겠소." 그는 펜을 집어들었다. "사망 자 성명은?" "해리 스텐포드입니다." 펜을 잡은 손이 갑자기 멈췄다. 뒤레 경감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해리 스텐포드라구?" "그렇습니다." "바로 그 유명한 해리 스텐포드 말이오?" "맞습니다." 갑자기 뒤레 경감의 얼굴이 밝아졌다.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전설적 인물인 해리 스텐포드의 죽음은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될 것이고, 자신이 그 뉴스의 중심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자신의 명성을 최대한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생 각에 잠겼다. "언제쯤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할 수 있을까요?" 바카로 선장이 물었다. "글세, 절차가 좀 복잡해서..." 언론매체에 알려지면 기자들이 달려오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인터뷰에 선장도 참여시 키는 게 좋을까? 아냐, 그럴 필요 없어. 나 혼자 해야 돼! "할 일이 제법 많거든요..."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작성해야 되는 서류도 한두 가지가 아니고... 최소한 1주일, 그 이상 걸릴지도 모르겠소." 바카로 선장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1주일 이상 걸린다구요? 하지만 조금 전에 아주 간 단..." "법 절차는 엄격하게 지켜야 되는 것이오." 뒤레는 근엄한 표정으로 선장의 말을 막았다. "서둘러 서 될 일이 아니잖소." 그는 다시 펜을 집어들었다. "해리 스텐포드 씨의 가족관계는?" 바카로 선장은 드미트리를 쳐다보았다. 드미트리 카민스키가 말했다. "우선 보스턴에 있는 스텐포드 씨의 변호사에게 연락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변호사가 누구요?" "렌퀴스트, 렌퀴스트, 피츠제랄드 법무법인입니다." 제7장 간판은 '렌퀴스트, 렌퀴스트, 피츠제랄드 법무법인'으로 되어 있었지만 렌퀴스트 두 사람은 세상을 떠 난 지 오래되었다. 싸이몬 피츠제랄드만 칠십육 세의 나이에도 아직 건강하게 살아 있었다. 법무법인을 총괄하는 그는 밑에서 일하는 육십 명이 넘는 변호사들의 대부 격이었다. 깡마른 체구에 백발이 성성한 머리칼, 그리고 군인 같은 꼿꼿한 자세의 걸음걸이가 그의 특징이었다. 피츠제랄드는 걱정스러운 표정으 로 방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비서에게 다가갔다. "스텐포드 씨가 전화했을 때 나를 그렇게 급 히 만나야 되는 이유는 전혀 밝히지 않았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피츠제랄드 씨. 월요일 아침 9시에 로즈 힐 자택에서 유언장을 가지고 만나자고만 했습니다. 공증인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알았어. 슬론 변호사를 들어오시라고 해." 스티브 슬론은 법무법인에서 가장 촉망받는 젊은 변호사였다. 하바드 법대 출신이었고 큰 키에 날렵 한 체격, 금발에 장난기 어린 눈매의 슬론은,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항상 남들이 편안하게 느끼도록 행 동했다. 그는 또한 창의적이고 탁월한 기량을 갖춘 변호사로서 법무법인의 골칫거리 사건들을 도맡았고, 언젠가는 싸이몬 피츠제랄드의 후계자가 될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나에게 스티브 같은 아들이 있었 다면... 피츠제랄드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스티브 슬론이 들어왔다. "뉴화운드랜드에 연어낚시 가 신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스티브가 물었다. "급한 일이 생겨서 돌아왔어. 스티브, 거기 좀 앉게. 문제가 생겼어." 스티브가 한숨을 쉬었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네요." "해리 스텐포드 건이야." 해리 스텐포드는 법무법인의 가장 중요한 의뢰인이었다. 스텐포드 기업과 수많은 계열회사를 돌보는 법 무법인이 여럿 있었지만, 해리 스텐포드의 개인 변호사 일은 '렌퀴스트, 렌퀴스트, 피츠제랄드'가 맡고 있 었다. 그러나 싸이몬 피츠제랄드말고는 이 법무법인의 변호사 중 그 누구도 해리 스텐포드를 만나본 적 이 없었고, 그것은 오히려 스텐포드의 신화를 변호사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했다. "그 사람이 또 무슨 일을 저질렀어요?" 스티브가 물었다. "그 친구가 죽었어." 스티브의 안색이 달라졌다. "아니, 뭐라구요?" "지금 막 코르시카의 프랑스 경찰이 팩스 전문을 보내왔어. 어제 스텐포드가 요트에서 바다로 떨어져 익 사했다는 거야." "이런 세상에!" "자네는 해리 스텐포드를 만난 적이 없지만 나는 지난 30년 동안 그 사 람의 개인 변호사였어. 몹시 까다로운 사람이었지..." 피츠제랄드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해리 스 텐포드의 기억을 더듬었다. "해리 스텐포드는 단순한 인물이 아니었어... 겉으로는 누구든 설득해 내는 매력적인 성격이었지만 , 경쟁자나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을 무너뜨리고 짓밟는 것을 즐기는 잔인 한 면도 있었지... 독사를 어르는 사람과 코브라의 특성을 동시에 갖춘 인물이었어." "정말 특이한 인물 이었군요." "그러니까, 한 30년 전쯤... 정확하게 31년 전에 나는 이 법무법인에 들어왔지. 그 당시 렌퀴 스트 씨가 스텐포드의 변호사였어. 자네는 사람들이 흔히 '보통사람이 아니야.' '거물로 타고났다.'고 말하 는 것을 실제로 느껴본 적이 있나? 해리 스텐포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어. 보통 사람은 흉내도 낼 수 없는 특출한 인물이었지. 끝없는 정력과 야심을 가진 인물이었어. 운동신경도 탁월했지... 대학에서는 권 투선수로 이름을 날렸고 폴로는 최고 수준의 고수였어. 하지만 젊었을 때부터 스텐포드는 괴팍스럽고 냉혹한 성격을 드러냈지... 나는 그처럼 자비심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사람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어. 탐욕스러운 늑대처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성격이었어. 경쟁자를 파산지경으로 몰아넣는 것을 즐기 는 게 틀림없었지. 그 때문에 자살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았어." "그런 괴물도 있어요?" "그런 면만 보면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이 틀림없지. 하지만 뉴기니아에는 고아원을, 봄베이에는 병원을 세우고 자선기관에 수백만 달러를 익명으로 기부하기도 했어. 대체 어떤 행동을 할지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어." "어떻게 그처럼 부자가 되었지요?" "자네 희랍 신화를 좀 아나?" "조금은 기억합니다만..." "그럼 오이디푸스 얘기를 알겠구만?" 스티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를 차지하려고 아버지를 죽인 얘기 말씀입니까?" "맞아. 해리 스텐포드도 그 비슷한 경우야. 어머니를 차지하려고 아버지를 설득해서 아버지를 회사에서 몰아냈지." 스티브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피츠제랄드 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말을 이었다. "해리의 아버지는 1930년대 초반에 이곳 보스턴에서 자그마한 식품 가게를 하나 더 냈고, 몇 년 후에는 식품점 체인으로 성장했지. 해리가 대학을 졸업하자 그의 아버지는 그를 사업에 참여시키기로 하고 임원으로 고용했어. 야심 만만한 해리는 식품점 체인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어. 꿈이 너무 컸거든... 냉동육을 공급받기보다는 비육우 목장과 도살장을 직접 경영하려 했고, 농 토를 확보해서 채소류도 직접 생산하고, 식품가공 공장을 세워 통조림을 만들어 공급한다는 식이었어. 아버지는 생각이 달랐지... 두사람 사이에 의견충돌이 잦았어. 그러던 와중에 해리는 기발하고도 엄청난 계획을 아버지에게 제시했지. 새로운 대형 슈퍼마켓 체인을 세우고 식품이나 생활필수품은 물론이고 자 동차, 부품, 가구, 심지어 보험상품까지 할인가격으로 팔고 회원제를 도입해서 연회비를 받는다는 계획 이었어. 아버지는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뛰었지. 그러나 얌전하게 그냥 물러날 해리가 아니지... 자신의 계획을 밀고 나가려면 아버지를 회사 경영에서 물러나게 해야 되겠다고 결정했어. 얼마 동안 고분고분 하게 아버지 말을 듣는 척하다가, 아버지에게 휴가여행을 떠나도록 권유했지. 그리고 아버지가 자리를 비우자 다른 주주들과 이사들을 설득하기 시작한 거야. 해리의 설득력은 정말 감탄할 정도였어... 모드 그의 계획에 매료되었었지. 회사의 이사였던 삼촌과 숙모를 설득하고 나서 다른 주주와 이사들 포섭작 전에 들어갔어. 점심에 초대하고, 버지니아 주로 여우사냥을 같이 가고, 골프도 같이 쳤지. 아내에게 꽉 쥐어 지내는 한 이사의 아내를 유혹해서 정을 통하고 그녀를 시켜 그 이사가 자신의 계획에 동의하도록 한 적도 있었어. 그러나 결정적인 대주주는 바로 자신의 어머니였지.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아무도 모르 지만, 결국 아버지를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는 데 어머니의 동의를 받아 냈어." "어떻게 그럴 수 가..." "휴가에서 돌아온 해리의 아버지는 그제야 가족과 동업자들이 자신을 회사에서 몰아낸 것을 알게 되었지." "세상에!" "그게 전부가 아니야. 해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어. 아버지가 사무실에 들어가려 하 자 경비원을 시켜 아버지의 출입을 막았지. 이게 모두 해리가 삼십 대 초반이었을 때 벌어진 일이야. 회 사 직원들은 그를 '얼음 같은 사나이'라고 불렀지. 하지만, 스티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돼. 스텐포드 기업이 오늘날 세계 최대의 비공개 기업으로 성장한 것은 해리 스텐포드 혼자서 해낸 거야. 이제 스텐 포드 기업은 목재, 화학, 통신, 전자 등 각 부문에서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고 보유 부동산만 해도 엄청나지. 그 동안 기업의 주식은 모두 해리의 소유가 되었고..." "정말 대단한 인물이군요." "대단 했지... 여자관계도 마찬가지였어." "결혼은 했었어요?" 싸이몬 피츠제랄드는 옛날 생각에 잠겨 말없이 앉아 있었다. 한참만에야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해리 스텐포드의 아내 에밀리템플은 내가 본 중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어. 두 사람은 2남 1녀를 두었지. 에밀리는 플로리다 주 호브 만 지역의 명문가 출 신이었어. 남편을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에 해리가 사방에 염문을 뿌리고 다녀도 모른 체하며 참고 살았 었지. 하지만 그녀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사건이 생겼어. 에밀리는 로즈마리 넬슨이라는 젊고 아름다 운 여자를 아이들 보모로 채용했었어. 젊고 예쁜 여자라면 건드리지 않고는 못배기던 해리는 로즈마리 에게 집적거리기 시작했지. 그녀는 해리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했고, 여지껏 여자를 유혹하는데 실패한 적이 없었던 해리는 몸이 달아올랐어. 어떻게든 그녀를 함락시키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던거야. 오랫동안의 끈질긴 유혹과 사랑의 고백 끝에 결국 로즈마리를 침실로 끌어들였지. 공교롭게도 그녀는 바로 임신했고 할수없이 의사를 찾아갔어. 마침 그 의사의 사위가 신문기자였는데 로즈마리를 임신시킨 사람이 바로 해리 스텐포드라는 것을 알아내고 신문에 가십기사를 냈지. 그 기사는 엄청난 스캔들의 시 작이었어. 이곳 보스턴을 잘 알잖아? 신문, 잡지마다 연일 그 기사로 채워졌어. 어딘가 그때 기사를 모 아 놓은 게 남아 있을 거야." "그럼 낙태시킨 겁니까?" 피츠제랄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해리는 낙태 시키라고 했지만 로즈마리가 말을 듣지 않았어. 아주 심하게 다투었지. 해리는 로즈마리에게 그녀만을 사랑하고 결혼할 테니 일단 낙태수술을 받으라고 설득했어. 똑같은 말을 수십 명의 여자에게 했겠지만... 그렇게 다투는 소리를 아내 에밀리가 들은 거야. 다음날 밤 에밀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 "저런... 그 럼 로즈마리는 어떻게 됐어요?" "로즈마리 넬슨은 종적을 감췄어. 그 후 위스컨신 주 밀워키의 쎄인트 죠세프 병원에서 딸을 낳고 줄리아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해리 스텐포드에게 편지를 보내왔었거든... 아마 답장도 쓰지 않았을 거야. 그때 해리에겐 벌써 새 애인이 생겼었고, 로즈마리는 안 중에도 없었거든." "세상에! 그렇게 파렴치한..." "더 심한 비극은 그 다음에 벌어졌지. 아이들은 어머니 의 죽음이 아버지 때문이라고 믿었어. 아이들은 열 살, 열두 살, 그리고 열 네 살이었어. 어머니의 죽음 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만 아버지에게 제대로 항의라도 하기에는 너무 어렸지. 아이들은 아버지를 증오하기 시작했고, 해리는 자신이 아버지를 몰아낸 것처럼 언젠가 아이들에게 당할까 봐 두려워졌어. 그럴 가능성을 아예 없애버리려고 생각을 짜냈지. 아이들을 각기 멀리 떨어진 기숙학교에 보내고, 여름 방학에는 동떨어진 것의 캠프로 보냈어. 어떻게든 함께 보내는 시간을 줄이려고 했지. 용돈도 주지 않았 어. 아이들 학비와 용돈은 에밀리가 그들 이름으로 남긴 약간의 신탁기금으로 마련되었어. 그러면서도 해리는 당근과 채찍으로 아이들을 다스렸지... 막대한 유산 상속을 당근으로 내밀었다가 조금이라도 말 을 듣지 않으면 상속권 박탈이라는 채찍을 들었어." "지금 아이들은 어떻게 됐어요." "맏아들 타일러는 일리노이 주 순회재판소 판사로 시카고에 있지. 둘째 우드로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어. 그저 플레이 보 이야. 플로리다의 호브 만에서 폴로 경기에 돈을 걸거나 도박 골프로 세월을 보내고 있지. 몇 년 전 대 중식당 웨이트리스 출신 여자를 데리고 놀다가 그녀가 임신하자 결혼식을 올렸어. 모드 그 소식에 깜짝 놀랐었지. 막내이자 하나뿐인 딸 캔달은 성공한 패션 디자이너야. 프랑스 사람과 결혼해서 뉴욕에 살고 있지." 피츠제랄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티브, 코르시카에 가본 적 있나?" "없는데요." "당장 그곳에 좀 가줘야겠네. 현지 경찰이 해리 스텐포드의 유해를 붙잡고 있어. 무슨 이유로 그러는지 분명치 않아. 자네가 가서 빨리 송환되도록 교섭을 해보게." "그러지요." "오늘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으면..." "항공편 을 잡아 보겠습니다." "고맙네, 자네만 믿겠어." 파리에서 코르시카행 소형 비행기로 갈아탄 스티브 슬론은 파리 공항에서 사온 코르시카 여행안내 책 자를 펼쳤다. 그 책에서 코르시카가 험한 산뿐이고 평지가 거의 없다는 것, 항구다운 항구는 아작시오뿐 이라는 것, 그리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출생지라는 것 등을 앍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통 계 수치와 정보가 실려 있었지만 그 섬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는 책 내용으로는 짐작도 할 수 없었 다. 비행기가 코르시카에 접근하면서 고도를 낮추자 섬을 둘러싸고 있는 흰 암벽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그 유명한 도버의 '흰 절벽' 같은 절경이었다. 아작시오 공항에서 비행기를 내리자 스티브 슬론은 택시 로 드골 장군 광장과 기차역을 잇는 나폴레옹 대로를 따라 경찰서로 향했다. 이미 시신을 파리로 운반 할 비행기를 대기시켰고, 파리에서 보스턴으로 가는 항공편도 수배해 놓았다. 이제 시신의 출국허가만 받으면 일을 마치고 돌아갈 수 있었다. 스티브는 나폴레옹 대로에 있는 관공서 건물 앞에 내렸다. 2층의 경찰서 안내소로 들어가 그곳을 지 키는 경사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무슨 일로 오셨지요?" "이곳 최고 책임자가 어느 분이십니까?" "뒤레 경감이십니다." "그분을 좀 만나뵈려고 왔습니다." "무슨 용무로 그러십니까?" 경사는 자신이 영어 로 대화할 수 있는 게 자못 자랑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스티브는 명함을 꺼냈다. "나는 고인이 된 해리 스텐포드 씨의 변호사요. 그분의 시신을 찾아가려고 왔소." 갑자기 경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잠시 기다 려 보세요." 경사는 건물 안쪽에 있는 뒤레 경감의 사무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방 안은 세계 각국에 서 몰려든 신문, 방송, 통신 기자들로 가득했고, 모드 한꺼번에 질문 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경감님, 스 텐포드 씨가 왜 그런 악천후에 항해를 했습니까? 더 안전한 방법이..." "어떻게 자신의 요트에서 바다로 추락할 수 있..." "혹시 타살 가능성은 없습니..." "사인 규명을 위한 부검은..." "요트에 동승했던 사람은 누구..." "여러분, 잠깐만..." 뒤레 경감이 두 손을 쳐들고 말했다. "잠시 진정하세요, 여러분. 이래서는 대 화가 불가능합니다." 방을 가득 메운 기자들이 자신의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긴장하는 것을 보면 서 그는 속으로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혹시나 하고 바라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이 사건을 적절하 게 이용하면 특진 정도는 어렵지 않을 거야... 경사가 다가와서 그의 귀에 속삭였다. "경감님..." 몇 마디 더 한다음 스티브 슬론의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을 본 뒤레 경감은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만날 시간이 없어." 그는 딱 잘라 말했다. "내일 아침에 나 찾아오라구 해. 10시에 오라구 전해." "알겠습니다." 밖으로 나가는 경사의 뒷모습을 보면서 뒤레 경 감은 생각했다. 한창 각광을 받고 있는데 웬 방해꾼이야? 그는 미소 띤 얼굴로 기자들을 향했다. "참, 조 금 전에 무슨 질문을 했지요?" 안내소로 돌아온 경사는 스티브 슬론과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글세, 그 렇지만 경감님은 지금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습니다. 내일 오세요. 아침 10시에 오시라는 말씀입니다." 스티브 슬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내일까지 기다리라구요? 말도 안 돼! 나도 바쁜 사람이오." 경사는 스티브의 항변에 눈도 깜박하지 않았다. "선생, 좋을 대로하세요. 내일 다시 찾아오든가, 그냥 돌 아가든가..." 스티브 슬론은 난감했다. "좋소. 내일 다시 오지요. 이렇게 시간이 걸릴 줄 모르고 호텔 예 약도 안 했는데... 어디 추천할 만한 호텔없소?" "아, 물론 있지요. 파리로에 있는 콜롬바 호텔이 좋습니 다. 그리로 가보시지요." 스티브가 잠시 머뭇거렸다. "정말 오늘 경감을 만날 수는..." "내일 아침 열시에 봅시다." 스티브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왔다. 사무실에서는 뒤레 경감이 즐거운 마음으로 쏟아지는 기자 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었다. 텔레비전 기자가 물었다. "어떻게 이 사건이 단순한 사고였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까?" 뒤레는 카메라가 자신의 얼굴 정면에 자리잡은 것을 확인하고 대답했다. "이 비극적인 사 고엔 목격자가 있었습니다. 스텐포드 씨의 선실은 베란다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심한 바람에 중요한 서류 몇 장이 베란다로 날렸고, 스텐포드 씨는 그것을 주우려다 중심을 잃고 베란다 난간 밖으 로 추락한 것입니다. 그분의 경호원은 그 상황을 목격하고 선장과 함께 배를 멈추고 즉시 구조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시신이나마 건질 수 있었습니다." "부검 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잘 아시다 시피 코르시카는 작은 섬입니다. 여기서는 정식 부검을 할 수 있는 시설이나 설비가 없습니다. 그러나 검시관은 익사가 틀림없다고 했습니다. 폐가 해수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외의 상처나 타살 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시신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본국 송환허가가 날 때까지 시체 보 관실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사진기자 한 사림이 물었다. "경감님, 이 인터뷰 장면을 찍어도 괜찮겠지 요?" 뒤레 경감은 잠시 생각해 보는 척했다. "좋습니다. 여러분의 취재 활동을 방해할 수는 없으니..." 그 의 얼굴에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스티브 슬론은 호텔을 잡고 나서 노트르 담가에 있는 라 폰타나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그날 더 이상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천천히 식사를 마치고 마을을 둘러보았다. 지중해 연안의 뛰어난 경치 를 자랑하는 아작시오는 나폴레옹의 출생지라는 명성으로 여느 관광지보다 더 이름이 알려졌다. 아마 해리 스텐포드 마음에 꼭 드는 마을이었을 거야. 스티브는 생각했다. 막 시작된 휴가철의 코르시카는 몰려든 관광객으로 붐볐다. 거리는 불어, 독어, 영어, 이태리어, 그리고 일본어로 떠들면서 활보하는 관광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녁이 되자 스티브는 라 보카치오 레스토랑 에서 이태리 요리를 먹은 다음 호텔로 돌아갔다. "혹시 무슨 메모 없습니까?" 행여나 하고 물어보았다. "없는데요." 방에 들어간 그는 침대에 누워 해리 스텐포드의 일생을 회상하던 싸이몬 피츠제랄드와의 대 화를 떠올렸다. 그럼 낙태시킨 겁니까? 아니, 해리는 낙태시키라고 했지만 로즈마리가 말을 듣지 않았 어. 아주 심하게 다투었지. 해리는 로즈마리에게 그녀만을 사랑하고 결혼할 테니 일단 낙태수술을 받으 라고 설득했어. 똑같은 말을 수십 명의 여자에게 했겠지만... 그렇게 다투는 소리를 아내 에밀리가 들은 거야. 다음날 밤 에밀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 에밀리가 어떻게 자살했는지 궁금했다. 한참 더 뒤척 거리다 간신히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10시, 스티브 슬론은 경찰서에 정각에 도착했다. 어제 만났던 경사가 여전히 안내소를 지 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무슨 일로 오셨지요?" 스티브는 또다시 명함을 건넸다. "뒤 레 경감과 10시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잠시 기다리세요." 경사는 일어나 건물 안쪽의 사무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경찰 정복 차림의 뒤레 경감은 이태리의 RAI 텔레비전 기자들과 인터뷰 중이었다. 그는 카메라를 마주보면서 말했다. "내가 이 사건의 수사를 지휘하게 되면서 가장 먼저 신경 쓴 것은 스텐포 드 씨가 타살된 것이 아니고 불행한 사고였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자가 물었다. "그럼 타살되었을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고 단정하십니까?" "한치의 의혹도 없습니다. 스텐포드 씨는 불행한 사 고를 당한 것입니다." 촬영기사가 말했다. "지금 자세가 좋습니다. 그대로 계세요... 각도를 바꾸고 좀더 접근해야 겠습니다." 그 틈에 경사가 다가와서 스티브 슬론의 명함을 건네면서 속삭였다.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요." "왜 그렇게 센스가 없나?" 뒤레가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지금 내가 한가하게 그 친구나 만날 상황이야? 내일 다시 오라구 해!" 오늘도 세계 각국에서 수십 명의 기자들이 찾아온다 는 연락을 받았다. 그 중에는 러시아나 남아프리카에서 온다는 기자들도 있었다. "내일로 미뤄!" "알았습 니다." "경감님, 준비되었습니까?" 촬영기사가 물었다. 뒤레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시작합시다." 드디 어 경사가 안내소로 돌아왔다. "슬론 씨, 안됐지만 뒤레 경감님은 오늘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답니다. 워낙 바빠서..." "나도 바쁜 사람이오." 스티브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스텐포드 씨 시신의 출국 허가서에 서명만 해주면 귀찮게 굴지 않고 바로 떠나겠다고 전하시오. 복잡한 일이 아니잖소?" "그게 그 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경감님은 코르시카 경찰의 총책임자로서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또..." "그럼 누군가가 대리로 서명하면 될 게 아니오?" "슬론 씨 그건 안됩니다. 뒤레 경감님만이 그 허가서에 서명할 수 있습니다." 스티브 슬론은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물었다. "그럼 언제 경감 을 만나볼 수 있겠소?" "내일 아침에 다시 와보십시오." 다시 와보라는 말이 여운을 남겼다. "좋아요. 그 렇게 하지요." 스티브의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건 그렇고, 사고 현장을 목격한 증인이 있다고 들 었는데... 스텐포드 씨의 개인 경호원 드미트리 카민스키 맞습니까?" "맞습니다." "만나서 얘기 좀 해야 되겠는데 어디에 묵고 있는지 아십니까?" "오스트레일리아에 있습니다." "그런 호텔도 있어요?" "그건 호텔이 아닙니다." 경사는 딱하다는 표정이었다. "대양주에 있는 오스트레일리아를 몰라요?" 스티브의 목소리가 갑자기 올라갔다. "아니, 이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를 진술도 제대로 받지 않고 이곳 경찰이 외 국으로 떠나도록 허락했다는 말이오?" "뒤레 경감님이 직접 진술을 받았습니다." 스티브는 어이가 없었 다. "고맙소. 잘 알겠소." "천만에요." 호텔로 돌아온 스티브는 즉시 싸이몬 피츠제랄드에게 전화했다. "아무래도 여기에 하루 더 묵어야 되겠습니다." "스티브, 왜 자꾸 지연되는 거지?" "경찰 책임자가 너무 바쁘다고 해서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지금 휴가철이 시작돼서 관광객이 몰려들었거든요. 그 친구, 잃 어버린 여권을 찾아주느라고 바쁜 모양입니다. 어찌됐든 내일은 마무리 짓고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즉시 연락하도록 하게." 일이 지연되는 게 짜증스러웠지만 스티브 슬론은 이 섬이 싫지 않았다. 코르시카는 거의 5백 킬로에 달하는 아름다운 해변과 높이 솟아 7월까지도 흰 눈이 덮인 산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원래 이태리 영토였지만 프랑스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두 나라의 문화가 섞여 독특한 분위기를 이루었다. 싼 칼루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할 때 해리 스텐포드에 대한 피츠제랄드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그처럼 자비심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사람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어. 탐욕스러운 늑대처럼 끈질기게 물고 늘 어지는 성격이었어. 해리 스텐포드는 죽어서도 계속 말썽을 일으키고 있군. 스티브는 속으로 중얼거렸 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신문 판매대에 멈춰 월 스트리트 저널 지를 훑어보았다. 1면 톱 기사는 '스텐 포드 왕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였다. 신문 값을 치르고 돌아서는데 다른 신문들의 톱 기사가 눈에 들 어왔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신문 모두의 1면 톱 기사가 스텐포드의 죽음에 관한 것이었고, 거기엔 뒤레 경감의 사진과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이것 봐라! 이러느라고 바쁘기도 했겠지. 어디 두고 보자! 다음날 아침 9시 45분, 스티브 슬론은 경찰서에 도착해서 안내소로 들어갔다. 경사는 자리에 없었고, 안쪽에 있는 뒤레의 사무실 문은 열려 있었다. 그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아침 기자회견을 앞두고 뒤레 경감은 경찰정복 차림을 점검하고 있었다. 불쑥 들어온 스티브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불어로 말 했다. "무슨 일이오? 여긴 허락없이 들어올 수 없소. 빨리 나가시오!" "나는 뉴욕 타임즈 기자입니다." 스티브가 말했다. 뒤레 경감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지면서 영어로 돌아왔다. "아, 그러세요? 어서 들어오 세요. 성함이 뭐라고..." "존즈. 존 존즈입니다." "존즈 씨, 마실 것이라도 좀 드시겠습니까? 커피? 코냑?"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자, 그럼 좀 앉으세요." 뒤레의 표정이 엄숙하게 바뀌었다. "이 아름답고 조 용한 섬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을 취재하러 오신 것으로 압니다. 스텐포드 씨 같은 분이 그렇게 되다니..." "유해는 언제 본국으로 송환됩니까?" 스티브가 물었다. 뒤레 경감은 한숨을 쉬었다. "글세. 아 직도 시간이 좀 걸리겠습니다. 갖추어야 할 서류가 워낙 많고, 스텐포드 씨 같은 유명인사의 유해를 소 홀하게 다룰 수도 없고... 잘 아시겠지만 모든 절차를 다 밟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요." 스티 브가 말했다. "한 열흘? 아니, 2주일쯤 걸리겠습니다." 그 때쯤이면 언론매체의 관심도 사라지겠지. "이 게 내 명함입니다." 말하고 나서 스티브는 뒤레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을 받아 본 뒤레는 갑자기 안 색이 달라졌다. "당신은 변호사 아니오? 신문기자가 아니잖소?" "그래요. 나는 해리 스텐포드 씨의 변호 사요." 스티브 슬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분의 유해를 송환하도록 출국허가서에 즉시 서명해 주시 오." "아, 나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뒤레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도저히 그럴 수는..." "내일 떠나도록 해주시오." "그건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내일 당장..." "그 렇다면 파리의 상급기관에 문의해 보시는 게 좋을 거요. 스텐포드 기업은 프랑스에 여러 개의 대형공장 을 갖고 있소. 이런 일로 이사회가 그 공장들을 다른 나라로 옮긴다는 결정이라도 하면 파리 정부의 입 장이 난처해지지 않겠소?" 뒤레 경감의 표정이 또 한번 달라졌다. "그, 그야 그렇지만, 스텐포드 기업의 결정에 내가 왈가왈부할 수 없잖습니까?" "난 할 수 있소." 스티브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일 스 텐포드 씨의 유해가 떠날 수 있도록 조치하시오. 만약 또 문제가 생기면 당신은 상상도 못할 곤경에 빠 질 거요." 스티브는 대답도 듣지 않고 문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잠깐! 슬론 씨! 며칠만 기다려 주시 면 그 때는..." "내일이오" 복도에서 스티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 시간 후, 스티브의 호텔 방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슬론 씨?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스텐포드 씨의 유해를 즉시 송환 할 수 있도록 모든 절차를 끝냈습니다. 제가 특별히 배려해서 전례없는 빠른 시간에 해결했다는 점을..." "고맙소. 파리로 갈 전세기가 내일 아침 8시에 대기하기로 했소. 그 때까지 서류는 모두 준비되겠지요?" "물론입니다. 안심하십시오. 제가 각별히..." "좋소." 스티브는 수화기를 내렸다. 통 화를 끝낸 뒤레 경감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조금만 더 기다려 주지. 1주일쯤 더 각광을 받을 수 있었는데... 해리 스텐포드의 유해를 실은 비행기가 보스턴의 로간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영구차가 대 기하고 있었다. 장례식은 사흘 후로 결정되었다. 스티브 슬론은 싸이몬 피츠제랄드를 찾아갔다. "그래, 그 친구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군. 아주 감격스러운 재회가 되겠군." 피츠제랄드가 말했다. "재회라니요?" "그래, 볼 만할 거야. 해리 스텐포드의 아들, 딸이 다 모인다는 소식이야. 아마 축제 분위기가 될걸? 타 일러, 우디, 그리고 캔달, 모두가 아버지를 증오했거든... 제8장 타일러 스텐포드 판사는 시카고의 WBBM 텔레비전 방송에서 뉴스를 처음 들었다. 꼼짝도 하지 않고 화면을 응시하던 그는 가슴이 쿵쾅거렸다. 아버지의 요트, 블루스카이 호의 사진을 배경으로 뉴스 해설 이 나오고 있었다.. "...악천후를 무릅쓰고 코르시카로 항해하던 중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하셨습니다. 해 리 스텐포드 씨의 개인 경호원 드미트리 카민스키 씨가 사고 현장을 목격했지만 손쓸 틈도 없이 순식간 에 바다로 추락했다고 합니다. 해리 스텐포드 씨는 금융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실력자로 알려..." 텔레 비전 화면에 타일러의 과거의 기억이 교차되었다. 그는 어두운 추억에 잠겨들었다. 한밤중에 높은 언성으로 다투는 소리에 그는 잠이 깼다. 열네살 때였다. 한동안 다투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복도로 나가 아래층으로 연결된 계단으로 다가갔다. 아래층 거실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심하게 다투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는 어머니를 아버지가 때리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텔레비전 화면이 바뀌었다. 해리 스텐포드가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레이건 대통령과 악수하는 사 진이었다. "...대통령을 자문하는 금융산업 특별 자문위원회의 중심 인물로서 해리 스텐포드는 과거 행정 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타일러는 로즈 힐 저택 앞마당에서 동생과 풋볼을 하고 있었다. 우디가 공을 잘못 던져 건물 벽 아래 떨어졌다. 쫓아가서 공을 집어 들었을 때 열려 있던 유리창 틈으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당신 을 사랑한단 말이야. 잘 알고 있잖아!" 그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사과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너무 기뻐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대답하는 목소리의 주인공 은 자신의 보모인 로즈마리였다. "당신은 훌륭한 가정이 있잖아요?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세요!" 갑자 기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타일러는 어머니를 더없이 사랑했지만 로즈마리 역시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접근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화면의 배경사진이 계속 바뀌었다. 해리 스텐포드와 영국의 대처수상,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 고르 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해설가는 계속 말하고 있었다. "...이 전설적인 기업가는 세계 지도자들과 만 났을 때나 공장 근로자들과 대화할 때나 항상 스스럼없이..." 아버지의 서재를 지나갈 때 로즈마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떠나겠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건 안 돼! 떠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거야. 로즈마리,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조금만 참고 견디면 나는 당신과 결혼..." "난 그럴 수 없어요. 당신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어요. 그리고 애기는 낳을 거예요." 그날 저녁, 로즈마리는 로즈 힐 저택을 떠났다." 화면이 다시 바뀌었다. 교회 건물에서 관이 들려 나와 영구차에 실리고 스텐포드 가족이 옆에 서 있 는, 오래 전 텔레비전에 보도되었던 필름이었다. "...해리 스텐포드와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텐포 드 부인은 자신의 건강상태를 비관한 나머지 스스로... 경찰 당국은 자살로 결론 내리고... 해리 스텐포드 는..." 한밤중에 아버지가 들어와 타일러를 흔들어 깨웠다. "타일러, 일어나! 아주 안 좋은 일이 생겼어." 열 네 살의 타일러는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너희 어머니가 사고를 당했어." 그건 거짓말이었다. 어머니는 사고를 당한 게 아니고 아버지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와 로 즈마리의 관계를 알게 되자 자살했기 때문이었다. 스텐포드 부인의 자살은 언론매체를 흥분시켰다. 보스 턴 전체가 떠들썩해졌고, 가십 잡지와 저질 신문은 연일 추측기사로 지면을 채웠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 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학교에 가면 다른 아이들이 놀려댔고,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들을 아끼던 단 두 사람을 한꺼번에 잃은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이 아버지 때문이었다. "우리 아버지건 아니건 상관없어." 캔달이 흐느끼며 말했다. "난 아버지를 증오해!" "나도 증오해!" "나도 마찬가지야!" 아이들은 가출할 것을 상의했지만 너무나 막막했다. 할수없이 집에 남게되자 함께 아버지와 담판을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타일러가 대표로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와는 같이 살 수 없 어요. 따로 살게 해주세요." 해리 스텐포드는 냉랭한 표정으로 타일러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야 어렵지 않지." 3주일 후 아이들은 제각기 다른 기숙학교로 보내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이들은 점점 서로 멀어졌고 아버지를 만날 기회도 드물었다. 신문기사나 텔레비전 뉴스에서 아버지가 화려한 여자를 동반하거나 저명인사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는 게 고작이었다. 가족이 모드 모이는 것은 아버지의 표현으로 '행사'가 있을 때뿐이었다. 크리스마스나 추수감사절 같은 명절에 기자들에게 스텐포드 가족의 단란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런 행사였다. '행사'가 끝나면 즉시 각자의 학교 로 돌아간 다음 '행사' 때까지 혼자 지내야만 했다. 타일러는 최면에 걸린 듯 꼼짝도 않고 텔레비전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세계 각국에 세워 진 스텐포드 기업의 공장들 스케치를 배경으로 해리 스텐포드의 사진이 나타났다. "...비공개 기업으로는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창업자인 해리 스텐포드는 신화적인 인물로... 창업자이며 절대 주 주였던 해리 스텐포드가 사망한 상황에서 스텐포드 기업의 장래가 어떻게 될지 월가 전문가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자녀가 세 명 있지만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유산이 어떻게 분배될지, 회사 경영은 누 가 맡게 될 것인지..." 타일러가 다섯 살 되던 해였다. 어린 그에게 집이 굉장히 크게 느껴졌고 혼자서 이방, 저방 돌아다니 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집무실만은 출입이 금지되었었다. 중요한 회의가 그곳에서 열린다는 것 을 타일러는 알고 있었다. 정장 차림의 권위 있게 생긴 어른들이 아버지와 함께 드나드는 것을 보았다. 바로 그방에 출입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한번 들어가 보지 않고는 견딜수 없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외출 한 다음 몰래 집무실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넓은 집무실은 집 안의 다른 방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타일 러는 엄청나게 큰 책상과 가죽 의자를 둘러보면서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는 저 의자에 앉을 수 있을 거 야. 아버지처럼 거물이 돼야지. 책상 위에는 중요하게 보이는 서류가 널려 있었다. 타일러는 책상을 살 피면서 뒤로 돌아가 가죽 의자에 앉아 보았다. 세상 모두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도 거물이 된 거야. "너 거기서 뭘 하는 거야!" 깜짝 놀라 타일러가 고개를 들었을 때 노한 표정의 아버지가 들어왔다. "누가 거기에 앉으라고 했어?" 어린 타일러는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저... 그냥... 그냥 기분이 어떤가 하고... 앉아..." 아버지는 가까이 다가와서 소리쳤다. "넌 그럴 자격이 없어. 아무도 내 의자에 앉을 수 없단 말이야! 절대로 안 돼! 자, 빨리 여기서 나가! 다시는 들어오면 안 돼!" 타일러가 훌쩍거리며 2층으 로 올라가자 어머니가 그의 방에 들어왔다. 어머니는 타일러를 감싸안고 달랬다. "타일러, 울지마. 그만 그쳐. 별일도 아니잖아." "어떻게 별일이 아니에요?" 타일러는 계속 훌쩍거렸다. "아버지는 나를 미워하 잖아요." "아냐. 그럴 리가 있니? 아버지는 너를 미워하지 않아." "그런데 왜 의자에 한번 앉아 봤다고 그렇게 야단이에요?" "타일러, 그건 아버지의 의자잖아? 누구라도 거기에 앉는 걸 싫어하시잖니." 그래 도 타일러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를 꼭 껴안고 말을 이었다. "얘야, 내가 결혼했을 때 너 희 아버지는 나도 스텐포드 기업의 주주가 되어야 한다고 한 주를 내 이름으로 주었단다. 그때는 재미 로 그랬었지. 그 주식을 너에게 줄게. 네 이름으로 신탁해 두면 네가 어른이 됐을 때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이제 너도 스텐포드 기업의 주주가 된거야. 어때? 괜찮지?" 스텐포드 기업의 발행주식 수는 백 주 였고, 이제 타일러는 1퍼센트의 주주가 된 것이었다. 나중에 아내가 타일러에게 주식을 양도했다는 말을 들은 해리 스텐포드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 타일러가 그 주식으로 뭘 어떻게 한대? 날 몰아내고 회사 를 차지하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타일러 스텐포드 판사는 텔레비전을 끄고 그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에 들었던 뉴스를 되씹어 보면서 뿌듯한 만족감을 느꼈다. 아들이란 대체로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성공하려고 하지만, 타일러 스텐포드는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성공하려고 노력했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이 판 사가 되어 어머니를 살해한 죄로 아버지를 재판하는 꿈에 시달려왔다. "피고를 사형에 처하되. 전기의자 에서 집행할 것을 판결함!" 때로는 교수형, 총살형, 독가스형 등 다른 방법으로 처형판결을 내렸다. 꿈이 거듭되면서 점점 더 현실과 구별하기 어려워졌다. 어머니의 자살 직후, 아버지는 타일러를 미시시피 주에 있는 군사교육 학교에 보냈다. 학교의 엄격한 군기와 극심한 개인행동의 제약은 몹시 견디기 어려웠다. 첫해에 타일러는 몇 번이나 자살할 것을 심각 하게 생각해 보았지만, 그때마다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에 이를 악물고 참았다. 어머니는 죽일 수 있었지 만 나는 죽일 수 없어! 교관들은 타일러를 각별히 심하게 다루었고,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의도에 의한 것이라고 타일러는 확신했다. 학교생활이 힘들수록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은 커져갔다. 1년에 한두 번 명 절 때 집에서 가족들과 모였지만 아버지와의 관계는 점점 더 냉랭해졌다. 동생들도 명절이면 집에 돌아 왔지만 형제간의 우애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버지가 의도적으로 그들을 떼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오랜만 에 집에서 만나도 세 남매는 낯선 사람들처럼 서먹서먹했고, 빨리 명절 '행사'가 끝나기만 기다렸다. 타 일러는 아버지가 수십억 달러의 재산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과 우디, 그리고 캔달에 게 지급되는 학비와 약간의 용돈은 모두 어머니가 남긴 재산에서 나온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타일러는 아버지의 엄청난 재산의 상속권이 자신과 형제들에게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쉽게 재산을 물려줄 아 버지가 아니었다. 난 변호사가 필요해 그러나 당장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좋아! 내가 변호사가 되겠어. 타일러는 생각했다. 법과대학에 진학하겠다는 타일러의 계획을 듣고 아버지가 말 했다. "그래, 변호사가 되겠다구? 그러면 스텐포드 기업에 취직이라도 될 것 같아?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스텐포드 기업 근처에는 나타나지도 마!" 타일러가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을 땄을 때 보스턴에서 개업했더라면 집안의 명성에 힘입 어 유수한 기업들의 자문 변호사가 될 수 있었고, 빠른 시간 안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타일 러는 아버지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결국 시카고에서 개업하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힘들었다. 집안 배경을 철저히 감춘 타일러는 수준 높은 의뢰인에게 접근할 수도 없었다. 당 시 시카고 지역은 민주당 지역조직이 주 정부와 카운티 정부, 그리고 시 정부까지 장악하고 막강한 영 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타일러는 쿠크 카운티(시카고를 포함한 일리노이 주 동북부의 군)의 변호사 협 회가 민주당 조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법조계를 좌지우지한다는 것을 깨닫고, 협회에 가입한 다음 부지런히 인맥을 찾았다. 그러다 검찰청의 검사보로 임용되었고, 명석한 판단력과 성실성을 갖춘 타일러 는 얼마 되지 않아 검찰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그는 수많은 범법자들을 처벌하는 데 두각 을 나타냈고, 재판에서 유죄판정을 받아내는 데는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타일러는 승진가도를 달렸고, 검사로서의 발군한 경력 때문에 젊은 나이에 쿠크 카운티 순화재판소 판사로 임용되었다. 이제는 아버 지도 자신의 능력을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타일러의 착각이었다. "네가? 아니, 네가 순회재판소 판사가 되었다구? 말도 안 돼! 나 같으면 너한테 빵 만들기 대회의 심사도 맡기지 않을 거 야!" 타일러 스텐포드 판사는 작은 키에 약간 살찐 편이었다. 상황 판단이 빠른 그의 눈빛은 항상 빛났고 굳게 다문 입은 만만치 않은 의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아버지의 빼어난 용모와 사람을 압도하는 개성은 이어받지 못했지만, 타일러는 깊고 울려나오는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판사의 목소리로는 제격이었다. 타일러 스텐포드는 혼자 있기를 좋아했고 동료들과도 깊은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이제 겨우 사십 대 초반이었지만 오십도 넘은 사람으로 보였다. 그는 자신이 유머감각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 조금 도 개의치 않았다. 웃고 떠들며 살기에는 현실이 너무나 각박한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의 유일한 취미 는 체스를 두는 것이었다. 매주 한 법씩 체스 클럽에서 내노라는 강자들과 체스를 두었고, 그때마다 반 드시 이겼다. 법관으로 그는 탁월했다. 동료 판사들 모두가 그의 기량을 높이 평가했고, 어려운 재판을 맡아 조언이 필요할 때는 그를 찾았다. 아무에게도 집안에 관한 얘기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바 로 그 유명한 스텐포드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타일러 스텐포드 판사의 사무실은 시카고의 26번가와 캘리포니아가의 교차점에 있는 시카고 형사법원 건물에 있었다. 돌계단을 올라가 웅 장한 돌기둥 사이로 출입문이 나 있는 고전적인 14층 석조건물 이었다. 형사법원 건물은 시카고에서 가 장 험악한 동네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었다. 건물 입구에는 '법원 명령에 의해 모든 출입자는 몸수색을 받을 것' 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바로 그 건물 안에서 타일러는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다. 강도사 건, 절도사건, 강간사건, 총격사건, 마약사건, 살인사건 등 재판은 끝없이 이어졌다. 항상 엄격한 판결을 내리기 때문에 타일러는 '교수형 판사'로 알려졌다. 범죄자들은 예외없이 가난했다든가, 어린 시절이 불 우했다든가, 부모가 이혼했다는 등의 다양한 이유로 법의 선처를 호소했지만 타일러는 그런 핑계를 받 아들이지 않았다. 죄는 반드시 죄 값을 치뤄야 된다는 신념으로 엄격한 판결을 내렸다. 그러면서 마음 한구석에 항상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이 무겁게 자리잡고 있었다. 타일러 스텐포드 판사의 동료들은 그의 사생활에 대해 전혀 몰랐다. 한 번 결혼했다가 얼마 되지 않 아 이혼했고, 하이드 파크 지역의 킴바크가에 있는 침실 세 개짜리 작은 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는 것말 고는 아는 게 없었다. 하이드 파크 지역은 고풍스러운 주택과 건물이 잘 보존되어 시카고에서 품위 있 는 주택가로 알려져 있다. 1871년의 대화재로 시카고 대부분이 타버렸지만 그 지역만은 운 좋게도 화재 를 면했었다. 동네에서도 타일러는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없었고, 이웃들도 그에 대하여 아는 게 없었 다. 청소나 세탁은 매주 세 번씩 찾아오는 파출부가 해주었지만, 장을 보거나 집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 하는 것은 타일러 스스로가 해결했다. 그는 규칙적인 사람으로 여간해서는 자신의 생활 리듬을 바꾸지 않았다. 토요일이면 반드시 가까운 쇼핑센터나 미스터 G 슈퍼마켓, 또는 57번가에 있는 메디치 식품점 에서 장을 보았다. 때때로 타일러는 피치 못할 상황에서 동료 판사들의 부인들과 만나게 되었다. 부인들은 그가 무척 외 로운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친구를 소개시키겠다, 저녁식사에 초대하겠다 수선을 떨었지만 그는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 "마침 그날 저녁에 선약이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무슨 일로 저녁마다 그렇게 선약이 많 은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초대받을 때마다 정중하게 거절했다. "타일러는 법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동 료 판사 한 사람이 그의 아내에게 말했다. "아직도 이혼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야. 여자를 만나는 데 전혀 관심이 없거든. 첫 결혼생활이 아주 불행했었다고 들었어." 동료 판사의 추측은 정확했다. 이혼 한 다음 타일러는 그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 그러다가 리를 만났고 그 순간 타일 러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다. 리는 빼어난 용모에 예민한 감각과 따뜻한 마음씨를 가졌다. 타일러가 인 생의 반려자로 원하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리를 사랑했지만 리도 그를 사랑하는지는 알 수 없 었다. 유명한 모델인 리에게는 구애하는 부자들만도 여럿 있었다. 게다가 리는 사치스러운 취향을 갖고 있었다. 타일러는 리가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는 것을 거의 단념하고 있었다. 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과의 경쟁에서 이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황은 갑자기 달라졌다. 상 상도 못하던 재산을 상속받게 된 것이다. 이제 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줄 수 있었다. 타일러는 순회 재판소장을 찾아갔다. "아무래도 보스턴에 다녀와야겠는데, 내가 맡은 사건 중 급한 것 몇 개를 다른 사 람에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걱정 말게.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재판소장이 흔쾌히 승낙했다. "타 일러, 남들은 잘 모르지만 나는 자네 부친이 누구신지 알고 있었어. 정말 안됐어. 그렇게 훌륭한 아버지 가 비명에 가시다니..." 타일러는 대답이 없었다. 그날 오후, 타일러 스텐포드 판사는 보스턴으로 떠났다. 비행기 좌석에 앉았을 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날,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 너의 그 지저분한 비밀을 다 알고 있어! 제9장 파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여름으로 접어든 7월,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에 길 가던 사람들은 뛰 기 시작했고, 아무리 택시를 잡으려고 쫓아다녀도 그 많던 택시가 비 오는 순간 모두 사라져 버린 듯 찾아볼 수 없었다. 패션의 거리로 알려진 쌍또노레가 한 모퉁이의 회색빛 대형 건물 안에서는 비 오는 거리보다 훨씬 더 심한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건물 안의 강당에는 대여섯 명의 모델들이 옷을 반쯤 벗은 채 당황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좌석배치를 하는 직원들과 무대장치를 마무리 짓느라고 망치질하는 목수들로 시끌벅적했다. 하나같이 목청을 높여 소리쳐 말했기 때문에 귀가 멍멍할 정도로 시끄러웠다. 태풍의 눈 한복판에서 집안 정돈을 하는 사람처럼 오늘의 주인공 캔달 스텐포드 르노는 계 속 일어나는 사고와 문제를 수습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패션 쇼가 시작될 시간이 이제 네 시간 밖에 남지 않았는데 무엇 하나 제대로 진행되는 게 없었다. 재앙:생각지도 않던 거물급 인사가 갑자기 뉴욕에서 날아와 쇼를 참관하겠다는데 자리를 낼 수가 없 다. 비극:강당의 오디오 설비가 고장났다. 참사:최상급 모델 한 사람이 갑자기 병으로 쓰러졌다. 위기:화장 전문가 두사람이 분장실에서 다투기 시작했고 시간에 맞춰 모델들 화장을 끝내는 것이 불 가능해 보였다. 재난:짧은 스커트 모드가 실밥이 풀려 나왔다. 캔달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모드 잘 돌아가는군. 패션 쇼 준비과정은 이런 게 정상이지... 캔달 스 텐포드 르노는 언뜻 보면 패션 모델처럼 보였다. 사실 그녀는 한때 이름을 날리던 모델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면 머리의 금장식으로부터 단순한 디자인의 샤넬 구두에 이르기까지 품위 있고 세련된 멋 을 풍기고 있었다. 몸매와 자세, 화장과 메니큐어의 색깔, 웃고 말하는 모습, 그 모드가 상류사회의 우아 한 여성으로 돋보였다. 화장을 하지 않은 그녀의 얼굴은 평범했지만, 캔달은 알맞은 화장을 하지 않고는 절대로 남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도 그녀의 평범한 얼굴을 본 사람은 없었다. 캔달은 정 신없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무대 조명이 왜 저 모양이야? 장님이 설치했나?" "배경색을 감색으로 바 꾸라구." "안감이 밖으로 처졌잖아! 빨리 고쳐!" "모델들이 북적거리는 무대 뒤에서 화장하고 머리를 손 보게 하면 안 돼! 룰루보고 별도의 분장실을 찾아주라고 해!" 패션 쇼의 감독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캔 달, 30분은 너무 길어요! 25분 이상 길어지면 관객들이 지루하게 느껴요. 아무래도 시간을..." 캔달은 하 던 일을 멈추고 감독을 쳐다보았다. "스콧, 그럼 어떻게 하자는 말이야?" "의상 중 몇 가지를 빼고 나 서..." "그건 안 돼! 좋아, 그럼 모델들에게 좀 빨리 걸으라고 하면 되겠어." 큰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 르는 바람에 고개를 돌렸다. "캔달, 피아가 어디로 사라졌어요. 피아가 입을 예정이던 진회색 정장을 태 미에게 입힐까요?" "아니, 그건 대나에게 입혀! 태미는 고양이 무늬의 정장을 입으라고 해." "그럼 회색 져지 투피스는요?" "모니크가 좋겠어. 그 옷을 입을 때 반드시 진회색 스타킹을 신어야 한다고 주의 줘 야 해." 캔달은 출연복 차림의 모델들이 폴라로이드 사진이 어지럽게 붙어 있는 판을 들여다보았다. 준 비가 끝나면 출연 순서대로 사진을 정리 할 것이었다. 사진들을 훑어 보면서 마지막으로 공연 순서를 점검했다. "아무래도 순서를 좀 바꿔야겠어. 우선 베이지 색 카디건으로 시작해야겠어. 그 다음은 투피 스, 실크 저지 드레스가 따라나가는 게 좋겠어. 다음은 야회복, 그리고 별도의 상의가 있는 칵테일 드레 스를 내보내고..." 홍보 담당자와 고객 담당자가 나타났다. "캔달, 좌석배치에 이견이 많아요. 소매업자와 저명인사들의 좌석을 섞어버릴까요, 아니면 별도로 배정할까요?" 홍보 담당이 말했다. "저명인사와 보도 진을 섞어 배치할 수도 있잖아요?" 캔달은 더 이상 대꾸할 기력이 없었다. 벌써 이틀 동안 한잠도 못자 고 패션 쇼 준비에만 몰두해 왔었다. "알아서들 해봐요." 그녀가 말했다. 캔달은 소란스러운 강당 내부를 둘러보면서 잠시 후 시작될 패션 쇼, 그리고 자신의 디자인에 박수 갈채를 보낼 세계 각국의 저명인사 들이 모인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이게 모두 아버지 덕이야! 내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을 거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캔달은 어릴 때부터 자신은 디자이너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때 벌써 남다른 디자인 감각을 가지 고 있었다. 가지고 놀던 인형의 옷을 직접 만들어 입혔고, 다른 아이들은 그녀의 인형 옷을 부러워했다. 어머니에게도 자신이 만든 인형 옷을 자랑스럽게 보였고 그때마다 어머니는 기쁜 표정으로 캔달을 껴안 아 주며 말했다. "정말 훌륭하구나! 넌 정말 소질이 있어. 언젠가는 유명한 디자이너가 될거야." 캔달은 어머니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대학에서도 그녀는 그래픽 디자인, 구조 설계, 공간개념의 연출, 색상의 배합 등을 배우는 데 열중했다. "패션 디자이너가 되는 지름길은," 한 선생의 조언이었다. "우선 모델이 되는 거야. 그래야 일류 디자이너들과 접촉하게 되고 그들을 잘 관찰하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 캔 달이 아버지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을 때 아버지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네가 뭘 하겠 다구? 모델? 정신없는 소리하지 마!" 대학을 졸업한 캔달은 보스턴의 로즈 힐로 돌아갔다. 어머니도 안 계신데 나라도 집안 살림을 돌보아 야지. 그녀의 생각이었다. 집안은 하인들만도 열 명이 넘었지만 아무도 살림을 책임질 사람이 없었다. 해리 스텐포드는 자주 집을 비우고 다녔기 때문에 하인들은 제멋대로 행동하고 낭비가 심했다. 캔달은 엉망이 된 가계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살림살이를 계획성 있게 정비하고, 파티를 열 때는 여주인으로서 손님 접대에 정성을 다하는 등 아버지가 신경 쓰지 않도록 애썼다. 그만하면 아버지가 자신의 노력을 인정해 줄 것으로 생각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버지의 신랄한 비난밖에 없었다. "누가 저런 멍청한 요리 사를 고용하랬어? 당장 내보내!" "새로 들여왔다는 식기 세트가 왜 이 모양이야? 도대체 네 안목이 그 수준밖에 안 돼?" "누가 내 침실을 허락도 없이 단장하라고 했어? 거긴 발도 들여놓지 마!" 캔달이 하는 일은 한 가지도 아버지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폭군과 같은 아버지의 냉혹한 성격 때문에 결국 캔달은 집에서 더이상 버틸 수 없었다. 원래 따뜻한 가정이 아니었고, 어머니의 사망 후 더욱 냉랭해진 아버지 는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아이들을 다스리는 것밖에 몰랐다. 어느 날 저녁, 캔달은 아버지가 손님에게 하 는 말을 우연히 들었다. "내 딸아이는 얼굴이 말상이고 너무 볼품이 없어. 멍청한 놈이라도 한 명 낚으 려면 돈 좀 들게 생겼어."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캔달은 뉴욕으로 떠났다. 뉴욕에 도착한 캔달은 우선 호텔 방을 잡았다. 자, 이제 정말 뉴욕에 왔어. 앞으로 어떻게 한다? 어떻 게 해야 디자이너가 되지? 패션계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는데, 무슨 수로 말을 붙이나? 생각하던 캔달 은 한 교수의 말을 떠올렸다. 맞아. 우선 모델로 시작하는 거야. 그러면서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다음날 아침, 캔달은 직업별 전화번호부를 뒤져 모델 소개업소의 명단을 만들고 각 업소를 찾아다 니기 시작했다. 내 생각을 정직하게 털어놓아야지. 캔달은 생각했다. 디자인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일할 거라고 말할 거야. 명단의 첫 업소를 찾아갔다. 책상에 앉은 중년 여자가 물었다. "무슨 일로 왔지요?" "난 모델이 되려고 찾아왔습니다." "여자란 모두 모델이 되고 싶어한단 말이야. 아가씨, 그냥 돌아가는 게 좋겠어." "예? 그게 무슨..." "키가 너무 커서 안 되겠어." 캔달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곳의 책임자를 만나게 해주세요." "내가 바로 책임자야. 이 업소는 내 소유지." 대여섯 개 업소를 더 찾아가 보았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키가 너무 작아서 안 되겠는데." "너무 말랐어..." "너무 살쪘어..." "너무 어려서..." "나 이가 너무 많아서..." "우리가 찾는 타입이 아니야." 이렇게 1주일이 지나가자 캔달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명단의 업소가 이제 한 곳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파라마운트 모델즈'는 뉴욕 최고의 모델 소개 업소였다. 캔달이 그곳에 들어갔을 때 안내원 책상은 비어 있었다. 안쪽 사무실에서 통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월요일은 괜찮아요. 하지만 그 이상은 어쩔 수 없어요. 그녀는 화요일부터 3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정이 잡혀 있거든요."캔달은 사무실로 다가가서 살짝 열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품 위 있는 정장 차림의 여자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알았어요. 어떻게든 해보지요." 록샌 메리낙은 수화기 를 내려놓고 캔달에게 고개를 돌렸다. "안됐지만 당신 타입을 찾는 게 아니에요." 캔달은 애원하듯 말했 다. "나는 어떤 타입으로든 변신할 수 있어요. 키도 더 크게 보일 수 있고 작게 보일 수도 있어요. 더 어 리게 보이거나 나이 들어 보이는 것도 문제없어요. 더 날씬하게 보일 수..." 록샌은 손을 들어올리면서 말했다. "잠깐, 그게 문제가 아니..." "그저 한번 기회만 달라는 거예요. 정말 소원이에요." 록샌은 잠시 주저했다. 이 모델 지망생은 열성도 대단했지만 뛰어난 몸매를 갖고 있었다. 얼굴은 특별히 아름답지 않 았지만, 전문가의 화장으로 장점을 살려내면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다. "약간의 경험이라도 있어요?" "물론이지요. 여태껏 옷을 입고 살아왔잖아요." 록샌은 그 말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좋아요. 그럼 당신의 포트폴리오를 좀 봅시다." 캔달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포트폴리오라니요?" 록샌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봐요, 아가씨. 모델 지망생이 포트폴리오가 뭔지도 모른다니... 자신의 얼굴과 몸매를 가장 돋보이게 나타낸 사진들 모음을 말하는 거예요. 모델이라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해요. 모 델을 계약할 때 포트포리오만 보고 결정하는 게 대부분이에요." 록샌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우선 인물 사진이 두 가지 필요해요. 웃는 얼굴과 심각한 표정의 사진 말이에요. 좀 돌아서 봐요." "그러지요." 캔 달은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더 천천히." 록샌은 캔달의 몸매를 자세히 살폈다. "나쁘지 않은데... 수영 복 차림이나 내의 차림의 사진도 한 장 준비해요. 몸매가 가장 돋보이는 것으로 골라와요." "두 가지 다 준비할게요." 캔달은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록샌은 캔달의 순수한 열정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당신은... 전형적인 모델 타입은 아니지만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 인사는 성공한 다음에나 해요. 모델 노릇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에요. 보통 어렵지 않아요." "아무리 어려워도 꼭 해낼 거예요." "두고 봅시다. 아직 이르기는 하지만 모델 등용 경쟁에 참 여하도록 주선하겠어요. 부딪쳐 보면 의외로 좋은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등용이라뇨?" "등용 경 쟁이란 신인 모델들을 광고주들에게 선보이고 그들 중에서 선발하는 것이지요. 여러 소개업소에서 신인 들을 보내요. 약간 자존심 상하는 방법이지만 당장 기회를 잡으려는 생각이면 가장 빠른 방법이 될 수 있어요." "걱정 마세요. 부딪쳐 볼게요." 그것이 모델 생활의 시작이었다. 캔달이 열 번도 넘게 등용 경쟁에 참여한 다음에야 디자이너 한 사 람이 그녀에게 흥미를 보였다. 처음 그 디자이너와 만나 패션 쇼에 관한 얘기를 시작했을 때, 캔달은 너 무 긴장한 나머지 말이 많아져서 하마터면 디자이너의 기분을 상하게 할 뻔했다. "정말 선생님 드레스가 마음에 들어요. 제가 입으면 아주 돋보일 거예요. 물론 어떤 여자가 입어도 멋 있겠지요. 워낙 디자인이 훌륭하니까요. 하지만 특별히 저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긴장 때문에 말을 더듬었다. 디자이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은 다음 물었다. "패션 쇼에 처음 출연하는 게 맞지요?" "그렇 습니다." 그는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좋소. 한번 해보시오. 이름이 뭐라고 했소?" "캔달 스텐포드입 니다." 혹시 그 유명한 스텐포드와 어떤 관계냐고 묻지 않을까 했지만 디자이너는 무심하게 고개만 끄덕 였다. 모델 생활이 쉽지 않다는 록샌의 말은 정확했다.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캔달은 수없이 거절당하 고, 등용 경쟁에서 시간만 낭비하고, 오랫동안 일이 생기지 않아 전화 울리기만 기다리는 데 익숙해졌 다. 드디어 일이 생기면 새벽 6시부터 화장을 하고 이른 촬영을 끝낸 다음 계속해서 다른 촬영장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들어가는 게 보통이었다. 어느 날 밤, 하루종일 촬영으로 시달 리다가 집에 들어온 캔달은 거울을 들려다보고 신음소리를 냈다. "이걸 어째? 내일 촬영은 글렀잖아. 눈 이 이렇게 부어 올랐는데 어떻게 촬영을 하지?" 모델 한사람이 말해 주었다. "얇게 썰은 오이 조각을 눈 에 붙이고 자면 부기가 가라앉을 거야. 아니면 뜨거운 물에 우려낸 홍차 봉지를 식힌 다음 15분 동안 눈에 덮어봐. 효과가 있을 거야." 그 말대로 아침에는 눈의 부기가 완전히 가라앉았다. 캔달은 인기있는 모델들이 부러웠다. 록샌이 그들의 꽉 찬 일정을 조정하느라고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하는 것을 볼 때 부럽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미셀이 혹시 시간이 나면 스카시 사의 광고를 하겠다 고 했었어. 지금 전화해서 미셀이 하루 시간을 낼 수 있다고 해. 그 다음은..." 캔달은 얼마 되지 않아 자 신이 입고 출연할 의상을 절대로 비판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명한 사진작가들과 얼굴을 익히 고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최고 수준의 사진으로 채웠다. 항상 모델용 가방에 직업상 필요한 물건을 넣고 다녔다. 갈아입을 옷, 화장품, 매니큐어 용품, 그리고 장신구 등이었다.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릴 때 머리 칼을 거꾸로 늘어뜨리면 숱이 많게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뜨거운 롤러로 머리칼을 웨이브 지게 하는 요령도 터득했다. 그러나 배울 것은 끝이 없었다. 캔달은 항상 촬영에서 불평하지 않고 열심히 일 했기 때문에 사진작가들이 모드 좋아했다. 하루는 사진작가 한 사람이 그녀를 불러 요령 한 가지를 가 르쳐 주었다. "캔달 촬영에 들어가면 웃는 표정으로 찍는 것은 마지막으로 미루어야 돼. 처음부터 웃으 면 화장한 얼굴에 잔주름이 생기기 때문이야." 드디어 캔달의 인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대부분 의 모델들처럼 조각해 놓은 듯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더 세련되고 우아한 면이 돋보였다. "캔달은 품위 있는 모델이야." 어느 광고업자의 말이었다. 적절한 표현이었다. 모델 생활이 안정되면서 캔달은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때때로 데이트는 했지만 누구와도 가까워 지지 않았다. 모델로서는 성공한 편이었고 일은 계속 생겼지만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원래의 목표와는 아직도 거리가 멀었다. 어떻게든 일류 디자이너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잡아야 되는데... 캔달은 초 조한 심정이었다. "지금부터 4주간 일정이 꽉 찼어." 록샌이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캔달, 인기가 아주 좋아졌어!" "록샌, 나는..." "캔달,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어?" 록샌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뭐라구?" "이제 모 델 소개업소에서 독립해야겠어요." 모델이면 누구나 소개업소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한다. 인기만 있으면 자신이 원하는 일만 골라 할 수 있고 수입도 훨씬 많았다. 그러나 모델이라고 아무나 쉽게 독립할 수는 없었고 최고 수준의 모델 몇 명만이 그럴 수 있었다. 록샌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독립한다고 쉽게 일이 생기는 게 아니잖아. 수없이 시도해 보았지만..." "난 독립할 거예요." 록샌은 캔달의 얼굴에서 단호한 결 심을 읽을 수 있었다. "정말 결심을 한 거야?" "그래요." 록샌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연습과 준 비를 제대로 해야 돼. 우선 빔을 타고 걷는 연습을 시작해야 돼." "빔을 탄다구요?" 록샌은 자세히 설명 했다. 그날 오후 캔달은 폭과 두께가 10센티가 되는, 길이 2미터의 다듬어진 목재를 사왔다. 샌드페이퍼로 표면을 매끄럽게 갈아낸 다음 거실 바닥에 놓았다. 그 위를 걸어보려다가 처음 몇 번은 중심을 잃고 떨 어졌다. 이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데... 그래도 끝까지 해볼 거야! 캔달은 계속 연습했다. 다음날 아침에는 발 앞꿈치로 목재 위를 걷는 연습을 시작했다. 앞꿈치를 사뿐히 내리고... 발가락이 닿는 것을 확인하 고... 뒤꿈치를 내리고... 연습이 계속되면서 하루가 다르게 익숙해졌다. 대형 거울 앞에서 음악에 맞추어 걷는 연습도 했다. 머리 위에 책 한 권을 올려놓고 떨어뜨리지 않고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연습을 계속 했다. 반바지에 운동화 차림에서 야회복 정장으로 순식간에 갈아입는 연습도 빼놓을 수 없었다. 어느 정 도 자신이 생긴 캔달은 록샌을 찾았다. "아직은 좀 무리일지도 모르지만." 록샌이 말했다. "웅가로가 개 인 계약을 할 수 있는 모델을 찾고 있어. 내가 너를 추천했더니 한번 보자고 했어." 캔달은 마음이 설레 기 시작했다. 웅가로는 몇 안 되는 최상급 디자이너였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주, 캔달은 웅가로의 패션 쇼가 열리는 장소에 도착했다. 가슴은 두근거렸지만 겉으로는 태연 하게 행동했다. 웅가로는 캔달이 입을 옷을 건네주면서 미소 지었다. "잘해봐요." "고맙습니다." 캔달은 소개업소로부터 독립하고 얼마 안 돼 일류 모델이 되었다. 다른 모델들도 그녀의 능력과 품위를 인정했 다. 웅가로의 패션 쇼는 대성황이었고, 캔달은 하루 사이에 몇 안 되는 일류 모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 때부터 패션계의 거물급 디자이너들과 접촉이 잦아졌다. 이브쌍 로랑, 홀스튼, 크리스챤 디오르, 돈나 캐런, 칼빈 클라인, 랄프 로린, 쎄인트 존 등 기라성 같은 디자이너들이 캔달에게 출연교섭을 해왔고, 그 녀는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패션 쇼 출연과 사진 촬영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파리에서는 일류 디자이너들의 패션 쇼가 1월과 7월에 집중적으로 열렸다. 반면 밀라노에서는 3월부터 6월까지 패션 쇼 시즌이었고, 동경에서는 4월과 10월에 중요한 패션 쇼가 열렸다. 전세계를 누벼야 하는 정신없이 바쁜 일정 속에서 캔달은 패션 세계의 첨단을 달리는 모델 생활을 만끽했다. 모델로 일하면서도 캔달은 디자인에 관한 부분을 예사로 넘기지 않았다. 유명 디자이너의 옷을 입고 패션 쇼에 출연할 때도 만약 자신이 디자이너라면 무엇을 다르게 할지 검토해 보았다. 몸매를 최대한 살리면서 옷을 몸에 맞추는 방법도 터득했고, 천의 질감에 따라 디자인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재단에서부터 가봉, 그리고 옷을 완성시킬 때까지의 공정을 빠짐없이 익혔다. 여자들이 어느 부 위를 감추려 하고 어느 부위를 노출시키기 좋아하는지도 이해하게 되었다. 밤이면 집에서 자신이 생각 했던 디자인을 스케치했고 그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계속 솟아났다. 어느 날 캔달은 매그닌 백화점 의 구매담당 중역에게 자신의 스케치를 내보였다. "이게 누구의 디자인입니까?" 그는 감탄하는 표정이었 다. "내가 했어요." "아주 좋은데요. 아니, 아주 훌륭해요." 2주일 후 캔달은 돈나 캐런의 보좌역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패션 산업의 상업적 측면을 배우려는 생 각이었다. 그러면서 집에서는 디자인 연습을 계속해 1년만에 자신의 패션 쇼를 개최했다. 패션 쇼는 어 처구니없는 실패로 끝났다. 캔달의 디자인은 평범하다는 평을 받았고 새로운 디자이너로서 주목받지 못 했다. 계절이 바뀐 다음 다시 한번 시도해 보았지만 좌석도 메울 수 없었다. 내가 언젠가는 유명한 디자 이너가 될 거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셨잖아. 캔달은 생각했다. 혹시 그 말만 믿고 내가 착각했던 게 아닐 까?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생각에 잠겨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던 캔달은 번뜩 자신의 잘못을 깨 달았다. 아니, 난 모델들이 입을 옷만 디자인했잖아! 정작 옷을 사 입을 사람은 직장여성들이나 가정주 부들인데... 멋있으면서도 편안하고, 세련되면서도 실용성 있는 그런 옷을 디자인해야 돼! 그로부터 1년 동안 캔달은 새로운 개념으로 디자인에 몰두했다. 드디어 세 번째 열린 패션 쇼는 대성황을 이루었고, 캔달은 삽시간에 유명 디자이너로 인정받게 되었다. 캔달은 로즈 힐에 가기를 꺼렸다. 1년에 한두 번 마지못해 집에 갈 때마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점점 더 나빠졌다. 해리 스텐포드는 자식들에게 여전히 냉랭하게 대했고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그래, 아직 사내 하나도 꿰차지 못했단 말이지? 정말 대책이 없군. 네 나이가 몇 살인지는 알고 있어?" 캔달은 어느 자선 무도회에서 마크 르노를 만났다. 그는 월 스트리트의 대형 증권회사 국제부에서 외 환거래를 담당하고 있었다. 큰 키에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몸매에 잘생긴 프랑스인이었다. 다섯 살 연하였지만, 예의바르고 매력적인 르노를 만난 순간 캔달은 그에게 마음이 끌렸다. 그는 다음날 저녁 에 데이트를 신청했고 그날로 두 사람은 깊은 관계가 되었다. 그 다음부터 두 사람은 하루도 떨어져 있 는 날이 없었다. 어느 날 밤, 두 사람이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마크가 말했다. "캔달, 난 이제 당신 없이 는 못 살 것 같아." "나도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나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캔달은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캔달... 당신은 디자이너로서 크게 성공했는데 난 평범한 월급쟁이잖아. 언젠가 나도..." 캔달은 손가락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그건 쓸데없는 생각이에요. 당신은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주고 있 어." 그 해 크리스마스 때, 캔달은 로즈 힐로 마크를 데려가 아버지에게 소개했다. "이 친구와 결혼하겠다 구?" 해리 스텐포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사기꾼인지도 모르면서 결혼을 해? 네가 내 유산을 상속받게 된다는 생각에 덤벼드는 게 틀림없어!" 캔달이 마크 르노와 결혼할 생각 을 굳히는 데 더 이상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다. 두 사람은 다음날 커네티컷 주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마 크와 결혼한 다음부터 캔달은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한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당신 아버지에게 쥐어 살 필요 없어" 마크가 말했다. "그 양반은 엄청난 재산을 무기로 사람들을 자신의 뜻대로 조정하는 것밖에 몰라. 우리 그 재산에 신경 쓰지 말자구." 마크의 말에 캔달은 진심으로 감동을 받았다. 마크는 남편으로서 흠잡을 데가 없었다. 항상 자상하게 아내의 입장을 생각해 주고 부부간의 예의도 깍듯이 지켰다. 캔달은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더 이상 뭘 바라겠어? 과거의 불행은 이제 다 지나간 거 야! 게다가 아버지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일류 디자이너로 성공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패션 세계에 자신의 기량을 과시하게 될 것이었다. 밖에는 비가 멈췄다. 조짐이 좋았다. 패션 쇼는 대성공이었다. 쇼 프로그램이 끝난 다음 음악이 울려 퍼지고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 데 캔달은 중앙으로 나가 답례했고, 관중 모드가 일어나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다. 캔달은 직장에서 여 가를 낼 수 없었다. 관중들이 모두 떠나고 사무실로 돌아와서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직원 한 사람 이 들어와서 말했다. "편지가 왔어요. 누군가 직접 전하고 갔습니다." 직원이 건네주는 갈색 봉투를 받아 든 캔달은 가슴이 철렁했다. 열어보지 않아도 그 속의 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친애하는 르노 부인, 부인이 성원해 주시던 야생동물 보호협회는 또다시 적자운영에 들어갔습니다. 급 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10만 달러가 즉시 필요합니다. 쥬리히의 크레디트 스위스 은행 계좌번호 804072-A에 전신환으로 자금을 보내주십시오. 발신인 성명도, 서명도 없었다. 캔달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듯 꼼짝 않고 편지만 들여다보았다. 아 무리 줘도 끝이 없을 거야... 영원히 이 협박에 시달릴 거야. 또 한사람의 직원이 사무실로 헐레벌떡 들 어왔다. "캔달, 정말 뭐라고 말해야 할지... 방금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어." 또 무슨 일이 벌어졌지? 캔달 이 물었다. "무슨 소식인데?" "방금 룩셈부르그의 TELI 라디오 뉴스에서 해리 스텐포드 씨가 죽었다는 보도가 나왔어. 익사래." 너무나 뜻밖의 소식에 캔달은 어안이 벙벙했다.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받 아들이는 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 아버지는 내가 디자이너로서 성공한 것과 살인자라는 것 중 어느 쪽 을 대견하게 생각하실까? 이제는 알 기회가 없어졌어. 아버지의 죽음 후 처음 떠오른 생각이었다. 제10장 페기 말코비치는 우드로(애칭 우디) 스텐포드와 결혼한 지 벌써 2년이 넘었지만 플로리다 주 호브 만 지역의 이웃들은 아직도 그녀를 '그 웨이트리스'로 불렀다. 우디와 처음 만났을 때 페기는 레인 포레스 트 그릴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었다. 우디는 호브 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총각이었다. 어마어마한 스텐포드 저택에 살던 우디는 조각해 놓은 듯 잘생긴 얼굴에 활동적이면서 매력이 넘치는 성격이었다. 우디는 호브 만, 필라델피아, 그리고 뉴욕의 롱아일랜드 등에서 내노라는 명문가 처녀들의 관심의 초점 이었다. 그런 우디가 평범한 용모에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막노동자의 딸과 갑자기 결혼했다는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모두들 우디가 다른 여자와 결혼할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충격이 더 컸었다. 이미 우디에게는 미미 카슨이라는 아름답고 교양 있는 애인이 있었다. 산림업 재벌의 상속녀인 그녀는 우디를 애타게 사랑하고 있었고, 우디가 그녀와 결혼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모두 생각하고 있었다. 호브 만의 상류사회에서는 하인들 얘기나 가십거리로 삼고 서로의 사생활을 들추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지만, 우디가 너무 엉뚱한 결혼을 했기 때문에 입에 오르내리지 않 을 수 없었다. 우디가 페기 말코비치를 임신시켰기 때문에 결혼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아무도 페 기의 임신을 우디가 그녀와 결혼해야 되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세상에! 젊은 총각이 어쩌 다 여자를 임신시킬 수도 있지. 그렇다고 어떻게 웨이트레스와 결혼을 해?" 결국 역사가 되풀이된 셈이 었다. 28년 전, 호브 만은 스텐포드 집안의 스캔들로 떠들석했었다. 이곳의 뿌리 깊은 명문가 출신인 에 밀리 템플은 남편 해리 스텐포드가 아이들 보모를 임신시킨 것을 알고는 자살했었다. 우디 스텐포드는 자신이 아버지를 증오한다는 사실을 굳이 감추려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우디가 아버지에 대한 반감으로 이렇게 엉뚱한 결혼을 고집한 게 아닌가도 생각했다. 28년 전, 아버지의 행각에 비하면 자신은 떳떳하게 행동한다고 강조한 것일 수도 있었다. 결혼식에 참석한 유일한 하객은 뉴욕에서 날아온 페기의 오빠 후프였다. 페기보다 두 살 위인 그는 뉴욕 시 브롱스 지역에서 제과점 직원으로 일했다. 큰 키에 곰보자국이 있는 깡마른 얼굴의 후프는 심 한 브룩클린 사투리로 말했다. "자네는 운이 좋았어. 페기는 훌륭한 심부감이야." 결혼식이 끝나자 후프 가 우디에게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디가 표정없이 대답했다. "내 동생을 잘 돌봐 줘야 돼." "그렇게 할 거야." "그래, 그래야지." 처남 매부가 된 제과점 직원과 세계 최고 재산가의 아들 사이에 대 화는 그게 전부였다. 결혼 4주 후, 페기는 유산하고 말았다. 호브 만 지역은 상류사회의 주택지로 명성이 높았지만 그중에서도 쥬피터 섬이 최상의 주택가였다. 섬과 육지 사이는 연안항로였고 섬동쪽은 대서양에 접해 있었다. 개인의 사생활이 철저히 보장되는 곳 이었다. 자신의 사생활이 공개되거나 침해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부유층만 모여 사는 쥬피터 섬에는 가 구당 경찰관 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았다. 그곳 주민들은 재력을 과시하려고 떠벌이는 것을 싫어했다. 대부분 평범한 중산층이 타는 자동차를 타고 다녔고, 6, 8미터짜리 요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곳의 명문 가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호브 만 지역의 상류사회에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웠다. 우드로 스텐포드가 그 웨이트레스와 결혼한 다음 사람들은 그녀를 과연 상류사회에 받아들여야 할지 논란을 벌였다. 호브 만 지역의 상류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은 앤소니 펠레티에 부인이었다. 그 사회에서 분 규가 생기면 대부분 그녀의 판정으로 해결되는 여왕 같은 존재였다. 펠레티에 부인은 호브 만 지역을 돈밖에 모르는 졸부나 하루아침에 출세한 사람들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큰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판단에 수준이 떨어지는 사람이 호브 만에 저택을 구입하고 이사 오면 즉시 자신의 운전기사 편 으로 최고급 가죽 여행가방을 보내주었다. 그 지역 상류사회가 이사온 사람을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않 겠다는 표현이었다. 어느 자동차 정비공 출신의 졸부가 호브 만에 이사 왔을 때의 경우가 펠레티에 부 인 주변 사람들이 즐겨 얘기하는 대표적인 일화였다. 그 졸부가 이사 오자마자 펠레티에 부인은 예의 가죽가방을 보냈었다. 한참 만에야 그 뜻을 알아차린 졸부의 아내는 깔깔 웃었다. "웃기고 있네! 그 할 망구가 우리를 쫓아낸다구? 노망난 게 틀림었어." 그러나 예기치 않았던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집 수리를 하려고 일꾼을 찾아도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고, 식품을 배달해 달라고 하면 원하는 물건은 항상 품절이었으며, 컨트리 클럽의 회원이 되는 것은 고사하고 괜찮은 레스토랑에 예약 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아무도 그들 부부와는 말도 하지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결국 이사 온 지 석 달만에 그들은 집을 팔고 이사 할 수밖에 없었다. 우디가 웨이트리스와 결혼했다는 소식에 호브 만의 이웃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페기 말코비 치 같은 여자를 상대해 주지 않는 것은 간단했다. 그러나 남편인 우디 역시 그들 사회에서 제외시키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과연 우디 부부가 어떤 대우를 받을지 내기를 거는 사람들도 있었다. 처음 몇 주 동안은 지역행사나 만찬에 초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우디는 원래 그 지역에서 인 기 있는 젊은이였고, 그의 외가는 호브 만 지역을 개발한 명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웃들은 우디와 페기를 집으로 초대하기 시작했다. 웨이트리스 출신인 페기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 "그녀는 뭔가 특출 한 면이 있을 거야. 안 그러고야 우디가 결혼할 생각을 했겠어?" 그러나 페기를 만나본 사람들은 모두 실망했다. 그녀는 예의범절을 차릴 줄 몰랐고, 무식했으며 개성도 없었다. 옷차림마저 유치하기 짝이 없 는 페기를 보면서 사람들은 '싸구려'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우디를 잘 아는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가 없었다. "도대체 뭘 보고 저런 여자와 결혼했지? 어떤 여자라도 골라잡아 결혼할 수 있었잖아!" 우디 와 페기를 처음 초대한 사람은 미미 카슨이었다. 그녀는 우디의 결혼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상류 사회 숙녀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오랜 친구의 결혼을 축하해 줘야 된다고 생각했다. 미미 카슨의 가까운 친구들은 그녀를 위로했다. "미미, 우디는 잊어버려! 시간이 흐르면 잊게 되 거야." "내 불행을 참고 살 아갈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을 잊지는 못할 거야." 그녀는 대답했다. 우디는 페기와의 결혼을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녀와의 결혼이 실수였다고 느꼈지만 자신의 실수 때문에 페기가 불행해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는 남편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문제는 결혼할 때까 지의 페기의 환경이 우디 자신이나 주변 친구들과 너무나 다른 데 있었다. 페기의 오빠 이외의 사람과 는 만나는 것조차 거북하게 느꼈고, 매일 오빠와 전화거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난 오빠가 옆에 있었으 면 좋겠어요." 어느 날 페기가 말했다. "그럼 며칠이라도 여기 와서 같이 지내는 게 어때?" "그건 안 되 잖아요." 그녀가 화가 난 표정으로 우디를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오빠는 직장이 있는데." 파티에 초 대받아 가면 우디는 페기가 대화에 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그녀는 대화의 내용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결국 한 쪽 구석에서 입을 다문 채 불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게 고작이었다. 우디의 가까운 친구들은 그가 비록 어마어마한 스텐포드 저택에서 살지만 아버지와는 절연하다시피 사이가 나쁘다는 것과, 어머니가 남긴 신탁재산에서 지급되는 얼마 되지 않는 수입으로 생활한다는 것 을 알고 있었다. 우디는 폴로 경기를 광적으로 좋아했다. 그러나 필요한 말 여러 필을 구입할 처지가 못 되었기 때문에 친구들의 말을 빌려 타고 경기에 출전했다. 폴로 경기에서는 기량에 따라 각 선수의 등 급을 매긴다. 열 골 선수가 최고수였는데, 우디는 아홉 골이었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마리아노 아구에레, 텍사스의 위키 엘 에펜디, 브라질의 안드레스 디니즈 등 세계적인 선수들과 시합해 보았다. 전세계에 열 골 선수는 열두 병밖에 없었고, 우디는 자신이 열세 번째가 되려는 야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우디가 왜 그렇게 열 골 선수가 되려고 기를 쓰는지 아나?" 친구 한 사람이 다른 친구에게 말했다. "그의 아버지가 열 골 선수였거든." 미미 카슨은 우디가 폴로에 필요한 말을 구입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말을 구입한 다음 다른 사람 명의로 우디에게 빌려 주도록 주선했다. 그 녀의 친구들은 왜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면서 우디를 돕느냐고 물었다. "우디를 기쁘게 해줄 수 있다면 난 최선을 다할 거야." 미미의 대답이었다. 새로 이사온 사람이 우디의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의 친구들은 애매하게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실상 우디는 내기 골프로 용돈을 벌었고, 폴로 경기에도 돈을 거는 건달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 다. 다른 사람의 말을 빌려 타고 폴로 경기에 출전했고, 남의 요트로 경주했을 뿐만 아이라, 때로는 남 의 아내도 빌리는 빚투성이 인생이었다. 페기와의 결혼생활은 파경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우디는 그 사 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페기."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파티에 가면 대화에 참여하도록 좀더 노 력하는 게 좋겠어." "뭐 때문에 그래야 돼요? 어차피 당신 친구들은 날 사람 취급도 안하잖아요." "그럴 리가 있나? 그건 오해야." 호브 만 문학 동호인 모임은 매주 그곳 컨트리 클럽에서 있었다. 상류사회의 부인들이 오전 11시에 모여, 최근 화제에 오르는 책에 대하여 토론하고 점심식사를 하는 모임이었다. 그 주의 모임에서 토론이 끝나고 모두 식당으로 들어갔을 때 웨이터장이 펠레티에 부인에게 다가왔다. "우드로 스텐포드 씨 부인 이 오셨습니다. 점심식사에 합석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지 못했다. 한 참만에 펠레티에 부인이 말했다. "들어오시라고 해요." 잠시 후 페기가 들어왔다. 머리도 제대로 손질했 고, 제일 좋은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며 서있었다. 펠레티에 부 인은 가볍게 목례하면서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스텐포드 부인, 안녕하세요?" 약간 마음이 놓인 페기가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펠레티에 부인, 안녕하십니까?" "뭔가 잘못 아신 것 같습니다. 이미 점심 시 중을 드는 웨이트리스가 있습니다." 말을 끝낸 펠레티에 부인은 고개를 돌리고 페기 쪽은 아예 쳐다보지 도 않았다. 오후에 페기의 얘기를 듣고 우디는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 "그 할망구가 내 아내를 그렇 게 취급하다니!" 그는 페기를 감싸 안았다. "페기, 다음에 그런 곳에 가고 싶으면 나한테 먼저 얘기해. 그런 행사에는 초대받아야만 갈 수 있는 거야." "난 그런 줄 몰랐어요." 페기의 시무룩한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괜찮아. 그런 건 이제 잊어버려. 오늘 저녁 블레이크 집에 초대 받았잖아. 거기서는..." "난 안 가요!" "하지만 간다고 벌써 통보했잖아." "혼자 가세요." "나 혼자 갈 수는..." "어쨌든 난 안 갈 거예 요." 할수없이 우디는 혼자 파티에 갔다. 그 다음부터는 애써 페기를 파티나 행사에 데려가려고 하지 않 았고 혼자서 다녔다. 점점 우디의 귀가시간이 늦어졌고, 페기는 그가 여자들과 어울려 다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다가 우디는 큰 사고를 당했고, 그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사고는 폴로 경기 중에 일어났다. 우디는 자신의 팀 1번 공격수였다. 상대 팀의 수비수가 공을 걷어내 려고 채를 휘두르다가 우디의 말 앞다리를 쳤다. 말이 앞으로 쓰러지 정오 제13장 "줄리아 스텐포드라구?" 모두 동작을 멈추고 서로 쳐다보았다. "이건 말도 안 돼!" 우디가 소리쳤다. 타일러가 말했다. "우선 서재로 가자구. 일단 만나봐야 될 거 아냐?" 그는 클라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서재로 안내해 주겠소?" "알겠습니다." 젊은 여자 한 사람이 서재로 들어오다가 그 자리에 멈췄다. 어색하고 불안한 표정이었다. "저... 제가 여기 잘못 온 게 아니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잘못 온 게 틀림없어!" 우디가 소리쳤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야?" "전, 줄리아 스텐포드입니다." 그녀는 긴장으로 말을 더듬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사실대로 말해 봐요."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나의 어머니는 로즈마리 넬슨이고 해리 스텐포드가 내 아버지입니다." 모두들 눈을 마주쳤다. "그럼 증거가 있소?" 타일러가 물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킨 다음 말했다. "글쎄요... 물적 증거를 대라면 보여 드릴 게 없는데요." "물론 없겠지." 우디가 말했다. "참 당돌한 아가씨군. 증거도 없이 어떻게..." 캔달이 끼어들었다. "당신이 나타난 것이 우리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돼요. 당신 말이 진실이라면 우리는... 우리 사이는 의붓자매간이 되잖아요." 줄리아가 끄덕였다. "당신이 캔달이지요?" 그녀는 타일러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타일러가 맞지요?" 그리고 우디를 쳐다보았다. " 당신은 우드로, 모두들 우디로 부르지요." "피플 잡지만 읽어도 그 정도는 다 알게 되어 있어." 우디가 빈정거렸다. 타일러가 말했다. "아마 우리 입장을 잘 이해할 것이라 생각하오. 어떤 형태라도 당신이 줄리아라는 증거가 없으면 우리는 당신을 의붓 동생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소."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건 내가 잘 알지." 우디가 말했다. "돈 때문이라는 게 뻔하잖아." "나는 돈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녀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난 내 가족을 찾아보려고 왔을 뿐이예요." 캔달은 줄리아를 유심히 관찰했다. "지금 어머니는 어디 계시지요?" "벌써 돌아가셨어요. 그러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듣고..." "그제야 우리를 찾아올 생각이 났다는 말이지..." 우디가 말했다. 타일러가 물었다. "자신의 신원을 밝힐 법적 증거가 없다고 했지요?" "법적 증거요? 글세, 없는 것 같아요. 난 증거 같은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하지만 내 어머니한테서 듣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사실들을 알고 있어요." "예를 들면 어떤 건데요?" 마크가 물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어머니가 집 뒤쪽에 있던 온실 얘기를 해 주셨어요. 어머니는 워낙 화초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그곳에서 시간 보내기를 즐기셨대요." 우디가 끼어들었다. "그 온실의 사진은 잡지에만도 여러번 나왔잖아." "그 밖에 또 들은 게 뭐가 있소?" 타일러가 물었다. "아, 정말 여러 가지 있어요. 어머니는 여기 세 분과 함께 행복했던 시절 얘기를 자주 하셨어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어릴 때 세 분을 백조 모양의 보트에 태우고 놀던 얘기도 하셨고, 그때 한 사람이 물에 빠질 뻔했다는 얘기도 하셨어요. 그게 누군지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요." 우디와 캔달은 타일러를 쳐다보았다. "내가 빠질 뻔했었소." 타일러가 말했다. "또 세 분을 데리고 파노이 홀 쇼핑 센터에 갔던 얘기도 들었어요. 한 사람을 잃어버려 무척 당황했었다고 하셨어요." 캔달이 말했다. "내가 그날 길을 잃었었어요." "좋소. 다른 기억은 없소?" 타일러가 물었다. "어머니가 여러분을 유니온 오이스터 하우스에 데려가서 처음으로 생굴을 사주셨는데, 모두 배탈이 나서 혼이 났다는 얘기도 하셨어요."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세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말이 없었다. 그녀는 우디에게 말했다. "어머니는 당신을 데리고 찰스타운 해군 부두로 옛 전함 컨스티투션 호를 구경하러 갔었다고 하셨어요.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어도 당신은 더 있겠다고 고집을 부려 할수없이 억지로 끌고 집에 돌아갔다고 하셨어요." 이번에는 캔달에게 고개를 돌렸다. "보스턴 식물원에 갔을 때, 당신이 꽃을 꺾는 바람에 연행될 뻔 했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캔달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맞아요!" 이제 세 사람은 점점 그녀의 얘기에 끌려 들어갔다. "쌀렘 마녀 박물관에 갔던 얘기도 들었어요. 그곳에서 모두 겁에 질려 구경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하셨어요." 캔달이 말했다. "우리는 그날 밤 잠도 잘 수 없었어요." 다시 우디의 차례였다. "어느 크리스마스 때, 어머니가 당신을 퍼블릭 공원에 데려가 스케이트를 타게 했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그때 당신은 넘어져 이가 부러졌지요. 그리고 당신은 일곱 살 때, 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져서 다리에 큰 상처를 입고 여러 바늘 꿰매기도 했다고 하셨어요. 아직도 그 상처가 있을 거라고..." 우디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흉터가 아직도 남아 있지." 그녀는 계속 얘기했다. "누군가 한 사람이 개에 물린 적이 있다고 했어요. 누군지는 잘 기억나지 않아요. 어머니는 그 사람을 안고 병원 응급실로 뛰어갔다고 하셨어요." 타일러가 끄덕였다. "그때 나는 그 아픈 광견병 예방주사를 맞아야 했지." 줄리아는 거침없이 말을 계속했다. "우디, 당신이 여덟 살 되었을 때 집을 나간 적이 있지요? 할리우드로 가서 배우가 되겠다고요. 격노한 아버지는 당신을 방에 가두고 식사도 못하게 하셨구요. 어머니가 밤중에 몰래 당신에게 음식을 갖다 주셨다더군요." 우디는 말없이 끄덕였다. "그 밖에 무슨 얘기를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나는..." 그녀는 갑자기 뭔가 생각해 냈다. "참, 내 손가방에 사진이 한 장 있어요." 그녀는 손가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캔달에게 건넸다. 모두 캔달 옆으로 모여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사진에는 어릴 때의 세 사람과 보모 차림의 아름다운 젊은 여자가 있었다. "어머니가 주신 사진이에요." 타일러가 물었다. "그 밖에 어머니가 남긴 것이 더 있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것도 없어요. 어머니는 해리 스텐포드와 관계 있는 물건은 모두 없애버렸어요." "하지만 당신이 남아 있잖아." 우디가 말했다. 그녀는 상기된 표정으로 우디에게 말했다. "당신이 믿거나 말거나 난 상관하지 않겠어요. 내 진심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난... 그저..."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타일러가 말했다. "캔달이 말한 대로 당신이 갑자기 나타난 것은 우리한테 상당한 충격이오. 누구라도 난데없이 어떤 사람이 나타나 의붓 형제간이라고 하면 충격을 받는 게 당연하지 않소? 우리 입장도 이해할 수 있겠죠? 우리한테 시간을 주시오. 좀 상의해 봐야 되겠소." "물론이지요. 이해합니다." "지금 어디에 묵고 있소?" "트레몬트 호텔입니다." "그럼, 일단 호텔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소? 운전사에게 모셔다 드리라고 하겠소. 내일이라도 연락할 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요." 그녀는 잠시 세 사람을 둘러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들이 어떻게 생각하시든... 여러분은 내 가족이에요." "내가 배웅할게요." 캔달이 말했다. 줄리아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혼자 가겠어요. 난 이집 구석구석을 다 알 것 같아요." 세 사람은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캔달이 말했다. "이제 형제가 한 사람 더 생긴 셈이 됐군요..." "난 믿을 수 없어." 우디가 말했다. "내 생각으로는..." 마크가 끼어들었다. 갑자기 모두가 큰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타일러가 손을 들어 모두의 말을 막았다. "이런다고 무슨 해결책이 생기는 게 아니야. 우리는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돼. 지금 나타났던 '줄리아'는 재판을 받는 셈이고 우리가 바로 배심원 격이야. 그녀가 유죄인지 무죄인지 우리가 결정하는 거야. 그러나 그 결정 역시 재판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두의 의견이 일치해야 돼.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안 돼." 우디가 끄덕였다. "옳은 말이야." 타일러가 말했다. "그렇다면 우선 내 의견부터 말하지. 난 그녀가 가짜라고 생각해." "가짜라구요? 어떻게 가짜일 수가 있어요?" 캔달이 말했다. "가짜라면 어떻게 우리가 어릴 때 있었던 일을 그렇게 자세하게 알 수 있죠?" 타일러가 대답했다. "캔달, , 우리가 어렸을 때 집에서 일하던 하인이 몇 명이나 됐지?" "그건 왜요?" 캔달이 물었다. "몇 십 명은 되었을 거야. 맞지? 그들 중 상당수가 방금 왔던 '줄리아'가 말한 내용을 알려줄 수 있었을 거야. 오랜 세월 동안 거쳐간 수많은 하녀, 운전사, 요리사 등도 그런 내용을 알 수 있어. 그 사진도 그 중 누군가가 그녀에게 주었을 수 있어." "그렇다면 누군가와 짜고 계획적으로 줄리아 행세를 한다는 말이에요?" "맞아. 그리고 그건 한 사람일 수도 있고 더 많을 수도 있지." 타일러가 말했다. "지금 그녀가 엄청난 유산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잊으면 안 돼." "그녀는 돈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잖아요." 마크가 말했다. 우디는 코웃음 쳤다. "물론 말이야 그렇게 하지." 그는 타일러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가짜라는 것도 증명하기 어렵지 않아?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있어." 타일러가 침착하게 말했다. 모두들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떤 방법이지요?" 마크가 물었다. "내일 말해 주지." 싸이몬 피츠제랄드가 물었다. "그럼 이제 와서 줄리아 스텐포드가 나타났단 말입니까?" "자칭 줄리아 스텐포드라는 여자가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타일러가 대답했다. "그럼 가짜라고 생각하십니까?" 스티브 슬론이 물었다. "가짜가 틀림없습니다. 증거라고 내놓은 게 고작 우리 형제가 어렸을 때의 일화 몇 가지와 낡은 사진 한 장뿐입니다. 그런 얘기를 아는 사람만도 열 명이 훨씬 넘을 것이고 그들 중 누구라도 로즈마리 넬슨과 우리 형제가 찍은 사진을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 중 한두 사람과 짜고 줄리아 행세를 하는지도 모릅니다. 하여간 그녀가 가짜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겠습니다." "그걸 어떻게 증명하지요?" 스티브가 물었다. "간단합니다. DNA 검사를 해보면 되니까요." 스티브 슬론은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렇게 하려면 선친의 유해를 다시 파내야 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타일러는 싸이몬 피츠제랄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게 법적으로 문제가 되겠습니까?" "이런 이유라면 별문제 없이 법원에서 유해발굴 허가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당사자가 DNA 검사를 받는 데 동의할까요?" "아직 그 얘기는 안 했습니다. 검사를 받지 않겠다고 하면 결과를 두려워한다는 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자신이 줄리아 스텐포드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되겠지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유해를 발굴하는 게 꺼림칙합니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진실을 밝혀내려면 그 방법밖에 없잖습니까?" 싸이몬 피츠제랄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좋습니다." 그는 스티브에게 고개를 돌렸다. "스티브, 유해발굴 건을 맡아주겠나?" "물론입니다." 그는 타일러를 보고 말을 이었다. "법원의 허가를 받아내는 절차를 잘 아실 테지만... 우선 직계 유족 중 한 사람이 법원 검사관실에 발굴 신청서를 내야 됩니다. 이 경우 세 분 남매 중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신청서에는 발굴하려는 이유가 명기되어야 합니다. 이유가 타당하다고 인정되면 검시관이 장의사로 직접 통보해 줍니다. 발굴 현장에는 검시관실 직원이 반드시 입회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럼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타일러가 물었다. "허가를 받는데 3, 4일은 잡아야 됩니다. 오늘이 수요일이니까... 내주 월요일이면 발굴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습니다." 타일러가 말했다. "그리고 DNA 검사를 맡아줄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꼭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재판에서 증거로 채택될 수 있는 공신력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혹시 추천할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잘 아는 사람 중에 페리 윙거라는 전문가가 있습니다. 이곳 보스턴에 사는데, DNA 전문가로서 전국적으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내가 연락해 보지요." "고맙습니다. 좀 부탁하겠습니다. 이런 일은 빨리 매듭지어야 모두 마음이 편해질 테니까요." 다음날 아침 10시, 타일러는 우디와 페기, 그리고 캔달과 마크가 모여있는 서재로 들어섰다. 낯선 남자 한 사람이 타일러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자, 인사들 하지. 이분은 페리 윙거 씨야." 타일러가 말했다. "무슨 일로 오셨는데요?" 우디가 물었다. "이분은 DNA 감식 전문가야." 타일러가 대신 대답했다. "DNA 감식 전문가가 우리 일과 무슨 관계가 있어요?" 캔달이 물었다. 타일러가 대답했다. "때 맞추어 나타나서 의붓동생이라고 주장하는 그 여자가 가짜라는 것을 밝히려는 거야. 그런 사기에 쉽게 넘어갈 수는 없지." "그러면 발굴을 해야 하잖아?" 우디가 말했다. "맞아. 벌써 발굴 허가를 받으라고 변호사에게 부탁해 놓았어. 그녀가 정말 의붓동생이라면 DNA 검사로 밝혀질 거야. 아니라면 그 역시 증명되는 거고." 마크가 말했다. "난 도대체 DNA라는 게 뭔지 짐작도 못하겠어요." 페리 윙거가 헛기침을 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DNA는 한마디로 말해 유전적 특성을 가진 미세한 입자입니다. 그 속에는 각 개인의 독특한 유전인자가 들어 있지요. DNA는 혈흔, 정액, 침, 모근, 심지어는 뼈에서도 추출할 수 있습니다. 사망한 지 50년이 지난 시신에서도 DNA가 추출된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간단한 검사로군요." 마크가 말했다. 페리 윙거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DNA 검사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PCR 검사는 3일이면 끝나는 비교적 간단한 검사고, 더 복잡한 RFLP 검사는 최소한 6주에서 8주까지 걸립니다. 이 경우 PCR 검사만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검사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 캔달이 물었다. "몇 단계를 거쳐야 됩니다. 우선 표본을 추출한 다음 DNA를 잘게 자릅니다. 가늘게 잘라진 DNA를 젤리 위에 놓고 전류에 연결시키면 길이에 따라 정리됩니다. 전류가 통하면 DNA 조각들이 양극을 향해 움직이기 때문에 몇 시간 그대로 놔두면 조각들 길이에 따라 정리되는 것입니다." 그는 강의하듯 설명하기 시작했다. "알칼리성 화학약품으로 DNA 조각을 분해한 다음 그것을 순수 나일론 판 위로 옮깁니다. 그 판은 방사능..." 그의 설명은 듣는 사람들의 이해의 한계를 이미 넘어 있었다. "그 검사가 얼마나 정확합니까?" 우디가 그의 말을 끊었다. "친자관계가 아니라는 부정적 결론이 났을 때는 백 퍼센트 정확합니다. 긍정적인 결론의 경우는 정확도가 99.9퍼센트입니다." 우디는 타일러에게 물었다. "형, 형은 현직 판사잖아. 이런 경우 법 해석을 어떻게 하는 거야? 만에 하나 그 여자가 아버지의 친자식이라 하더라도 그녀의 생모와 아버지는 결혼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아버지의 유산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할 수 있지?" "법에 따르면," 타일러가 설명했다. "그녀가 아버지의 친자식이라는 게 확인되면 우리와 꼭 같은 상속권을 가지게 되어 있어." "그렇다면 DNA인지 뭔지 검사를 빨리 해서 가짜라는 것을 밝혀내야 돼!" 타일러, 우디, 캔달, 그리고 마크는 트레몬트 호텔 레스토랑의 별실에 모여 앉았다. 페기는 로즈 힐에 남아 있겠다고 함께 오지 않았다. "무덤을 파헤친다니... 난 그런 얘기 하는 데 가고 싶지 않아요." 그녀가 말했었다. 이제 네 사람은 자칭 줄리아 스텐포드와 마주앉았다. "왜 그런 검사를 해야 되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이간 아주 간단한 검사요." 타일러가 말했다. "당신의 피부에서 DNA 표본을 채취하고 아버지 것과 비교하는 거요. DNA 입자를 비교하면 친자 여부를 알 수 있소. 그러나 당신이 이 검사를 끝까지 거부하면..." "난... 아무래도, 난 내키지 않는데요..." "왜 내키지 않소?" 우디가 다그쳤다. "글쎄요..." 그녀는 한번 몸서리치고 나서 말을 이었다. "아버지의 유해를 발굴하고 시신에서 표본을 추출한다는 게..." "당신 주장을 증명하려는 거 아니오?" 그녀는 네 사람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난 여러분이 내 말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라는 말이오?" "이대로 내 말을 믿어줄 수는 없나요?" "그럴 수 없소." 타일러가 대답했다. "검사 결과를 봐야만 되겠소."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좋아요. 검사 받겠어요." 해리 스텐포드의 유해발굴 허가를 받아내는 것은 예상외로 어려웠다. 할수없이 싸이몬 피츠제랄드가 검시관에게 직접 전화했다. "난 못하겠어! 싸이몬, 왜 시신을 다시 꺼내야 된단 말이야? 그렇게 되면 또다시 떠들썩해진다는 것을 몰라? 이름 없는 사람도 아니고 바로 해리 스텐포드의 시신이잖아. 이 얘기가 흘러 나가면 언론매체가 발칵 뒤집힐 거야." "마빈, 이건 수천, 수억 달러가 걸린 중요한 일이야. 언론에 알려지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하면 되잖아?" "이렇게까지 하지 않고 다른 방법은 없어?" "달리 해결할 방법이 있으면 왜 이렇게 부탁하겠나? 그 여자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거든..." "그런데 유족들은 안 믿는다는 말이야?" "맞아." "싸이몬,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 여자가 가짜로 보이나?" "솔직하게 말해서 모르겠어. 어찌됐든 내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 그 누구의 의견도 중요한 게 아니야. 그녀가 상속인으로 인정받으려면 법원은 증거를 요구할 것이고, DNA 검사 외에는 방법이 없잖아." 검시관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난 해리 스텐포드를 잘 알지. 저승에서 펄펄 뛰고 있을지도 몰라. 유해발굴 허가를 준다는 게..." "그럴 수밖에 없잖아." 검시관은 한숨을 쉬었다. "할수없지... 부탁 한 가지 들어주겠나?" "물론이지." "제발 이 얘기가 흘러 나가지 않도록 철저하게 보안조치를 해주게. 기자들이 난리 법석을 떠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철저하게 비밀을 지킬 것을 약속하지. 직계 가족만 참관하도록 하겠네." "언제 발굴할 생각이야?" "월요일쯤 했으면 좋겠어." 검시관은 또 한번 한숨을 쉬었다. "좋아. 장의사에 통보하지. 싸이몬, 자네 부탁이니까 들어주는 거야." "고마워. 잊지 않을게." 월요일 아침 9시 마운트 오번 공동묘지 안, 해리 스텐포드의 묘소가 있는 구역에는 '보수공사 중'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지고 출입이 통제되었다. 타일러, 페기, 캔달, 마크, 줄리아, 싸이몬 피츠제랄드, 스티브 슬론, 그리고 검시관실의 콜린스 박사가 해리 스텐포드의 묘소를 둘러싸고 있었다. 공동묘지 직원 네 사람이 땅을 파고 있었고 페리 윙거가 그 옆에 대기하고 있었다. 드디어 드러난 관을 네 사람이 지면 위로 끌어올렸다. 그 중 책임자가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됩니까?" "관을 열어 주시오." 피츠제랄드가 말했다. 그는 페리 윙거에게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1분 이상 걸리지 않을 겁니다. 피부에서 표본만 추출하면 끝납니다." "좋아요." 피츠제랄드는 일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열어요." 네 사람은 관 뚜껑을 열기 시작했다. "난 보고 싶지 않아요." 캔달이 말했다. "우리가 꼭 지켜봐야 돼요?" "왜 그래? 볼 건 봐야지." 우디가 말했다. 모두가 긴장된 표정으로 관 뚜껑이 열리고 옆으로 치워지는 것을 보고 있다가 열린 관 속을 들여다보았다. "이런 세상에!" 캔달이 소리쳤다. 관은 텅 비어 있었다. 제14장 로즈 힐로 돌아온 타일러는 전화에 매달려 여러 차례 통화를 거듭했다. "피츠제랄드는 언론이 눈치채지 못했다고 했어. 공동묘지 관리인도 그런 소식이 언론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거든. 검시관은 콜린스 박사에게 입을 다물라고 지시했고, 페리 윙거는 말 안해도 비밀을 지킬줄 아는 사람이야." 우디는 타일러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망할년이 어떻게 그런 재주를 부렸지? 그렇게 하고도 무사할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지?" 그는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혹시 '설마 그 여자가 그랬을라구'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겠지?" 타일러가 입을 열었다. "우디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이야. 아무도 이런 짓을 할 사람이 없어. 그녀는 완벽한 계획을 세운 다음 나타난 게 틀림없어. 그리고 혼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야. 누군가 돕는 사람이 있어. 그게 대체 누군지 짐작도 안 가는군."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캔달이 물었다. 타일러가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종잡을 수가 없어. 확실한 것은, 그녀가 상속자로서 상속권을 주장할 것이고 우리가 인정해 주지 않으면 법원에 제소할 거라는 거야." "제소하면 상속권을 인정받을 가능성이 있어요?" 페기가 물었다. "그럴 가능성이 많지. 그녀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거든. 우리들 중에도 그 얘기를 믿는 사람이 있잖아." "그래도 어떻게든 해볼 방법이 있지 않겠어요?" 마크가 끼어들었다. "경찰에서도 아무 단서가 없는 데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더군." 타일러가 말했다. "게다가 경찰은 이 사건을 떠들어댈 수가 없는 처지야. 만약 이 사실이 언론에 흘러 나간다면 수많은 정신병자들이 시체를 찾았다고 아우성 칠 테니까 말이야." "경찰에게 가짜 줄리아를 수사해 달라고 할 수도 있잖아!" 우디가 말했다. 타일러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경찰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야. 어디까지나 우리 집안..."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생각에 잠긴 채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무슨 얘기야?" "사립 탐정을 고용해서 그녀의 정체를 밝혀낼 수는 있어." "거 참, 괜찮은 생각인데. 어디 일을 맡길 만한 사립 탐정을 알고 있어?" "아니. 이 지역에는 아는 사람이 없어. 하지만 싸이몬 피츠제랄드에게 부탁할 수도 있지. 아니면..." 그는 잠시 주저했다. "내가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시카고의 검사장이 자주 일을 맡기는 사립 탐정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아주 유능한 탐정이라고 하더군." 마크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 사람한테 이 일을 맡을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게 어때요?" 타일러는 모두를 둘러보았다. "모두 동의한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지." "밑져야 본전이잖아요." 캔달이 말했다. "그 친구를 고용하려면 상당히 비쌀텐데." 타일러가 말했다. 우디가 코웃음 쳤다. "비싸다구? 이번 일에는 수십억 달러가 걸려있잖아." 타일러가 끄덕였다. "참 그렇지. 네 말이 맞아." "그 사람 이름이 뭐예요?" 타일러는 이마를 찌푸리면 기억을 더듬었다. "정확하게 기억이 안나는데... 심슨... 씨몬스... 아냐, 이런 게 아니었어. 비슷하지만 이건 아냐. 지금 시카고 검사장에게 전화해서 물어봐야 되겠어." 모두들 타일러가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누르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2분 후, 타일러는 시카고의 지방 검사보와 연결되었다. "난 타일러 스텐포드 판사요. 검사장실에서 수시로 사립탐정을 고용해서 일을 시킨다는데 , 아주 뛰어난 사람이라고 들었소. 그 사람 이름이 씨몬스라던가... 내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수화기에서 상대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프랭크 티몬스 말씀이로군요." "맞아. 바로 티몬스야." 타일러는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며 미소지었다. "내가 그 사람에게 직접 연락하고 싶은데 전화번호 좀 주시겠소?" 전화번호를 메모지에 적은 다음 타일러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는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자, 이제 다들 동의한다면 내가 이 티몬스라는 사람에게 전화하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오후,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거실에 클라크가 들어와 말했다. "티몬스 씨가 찾아오셨습니다." 사십 대로 보이는 한 남자가 들어왔다. 흰 살결에 권투선수같이 탄탄한 몸집이었다. 코는 부러졌던 흔적이 역력했고, 두 눈은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타일러와 우디를 번갈아 보고 물었다. "스텐포드 판사이십니까?" 타일러가 끄덕였다. "내가 스텐포드 판사요." "프랭크 티몬스입니다." 그가 말했다. "티몬스 씨, 거기 좀 앉으시오." "고맙습니다." 그는 자리에 앉았다. "판사님이 직접 전화하셨었지요?" "그렇소." "솔직히 말해서 제가 어떻게 도와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전 이 지방에는 전혀 아는 사람도 없는데요." "이건 이 지방 일도 아니고, 법원과 관계되는 일도 아니오." 타일러가 설명했다. "당신은 젊은 여자 한 사람의 배경을 조사해 주기만 하면 되는 거요." "전화로 말씀하신 대로 의붓동생이라고 주장한다는 그 여자 말씀인가요? DNA 검사를 할 수 없다면서요?" "그렇소." 우디가 말했다. 그는 모두를 둘러보았다. "여러분들은 그녀가 의붓동생이라고 믿지 않는 모양이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그렇게 믿지 않소." 타일러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 우리의 의붓동생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오. 그래서 당신에게 그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달라고 하는 것이오." "좋습니다. 저는 이런 경우 일당 1천 달러와 실제 비용을 청구합니다." 타일러가 말했다. "일당 천 달러?" "그까짓 것 지불하겠소." 우디가 끼어들었다. "그 여자에 대해 알고 계신 모든 것을 제게 말해 주십시오." 캔달이 말했다. "아는 게 별로 없어요." 타일러가 말했다. "그녀는 물적 증거라고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업소. 처음 나타나서 우리에게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들었다는 옛날 이야기를 늘어놓았소. 그리고..." 티몬스는 타일러의 말을 막았다. "잠깐, 그녀의 어머니가 누굽니까?"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라고 주장하는 여자는, 바로 우리가 어렸을 때 보모였던 로즈마리 넬슨이오." "그 로즈마리 넬슨은 어떻게 됐지요?" 모두들 어색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우디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우리 아버지와 관계가 있었고, 임신하게 되었소. 그 후, 이곳을 떠나 딸을 하나 낳았답니다. 그리고는 소식이 끊어졌어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여자가 그때 그 딸이라고 주장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요." "별로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 없군요." 그는 앉은 채 생각에 잠겼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들었다. "좋습니다. 어떻게든 한번 해보지요." "최선을 다해 주시오." 타일러가 말했다. 티몬스는 먼저 보스턴 시립 도서관으로 갔다. 28년 전 해리 스텐포드와 보모 로즈마리 넬슨의 염문, 그리고 에밀리 스텐포드의 자살로 이어지는 스캔들에 관한 기사들... 장편소설 만큼이나 많은 양을 단숨에 읽었다. 도서관에서 나온 그는 싸이몬 피츠제랄드를 찾아갔다. "저는 프랭크 티몬스입니다. 지금..." "티몬스 씨, 기다리고 있었소. 당신의 수사에 협조해 달라는 스텐포드 판사의 부탁이 있었소. 가능한 한 도움이 되도록 해보겠소." "해리 스텐포드가 혼외정사로 낳은 딸을 추적해야 됩니다. 지금 스물여덞 살이라는 게 정확합니까?" "그렇소. 그녀는 1967년 8월 9일 위스컨신 주 밀워키 시의 쎄인트 죠세프 병원에서 태어났소. 이름은 줄리아요." 피츠제랄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병원에서 퇴원한 다음 그 모녀가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소. 나도 그 이상은 아는 게 없소. 별로 도움 되지 못해서 미안하오." "아니, 고맙습니다. 그만하면 수사의 실마리는 잡은 셈입니다." 밀워키 시 쎄인트 죠세프 병원의 원무과장은 도허티 부인이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한 오십 대 중반의 여자였다. "물론 기억납니다." 그녀가 말했다. "그런 일을 어떻게 잊겠어요.? 스캔들로 온통 떠들썩했지요. 그 기사를 싣지 않은 신문은 하나도 없었어요. 기자들은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되자 가만 두지 않았죠." "퇴원한 다음 아기를 데리고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그건 몰라요. 주소를 남기지 않았거든요." "도허티 부인, 입원비는 다 계산하고 떠났습니까?" "사실 다 못내고 떠났지요." "어떻게 그 옛날 일을 그렇게 자세히 기억하시지요?" "너무나 사정이 딱했어요. 바로 그 의자에 앉아 눈물을 글썽거리며 입원비가 부족하다고 하소연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해요. 일부만 내고 나머지는 벌어서 갚겠다고 사정했어요. 나는 병원 규정을 어기는 것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해도 좋다고 했지요. 출산 후 몹시 약해진 그녀의 딱한 사정을 듣고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럼 나머지 병원비는 갚았습니까?" "아니요. 티몬스 씨, 거의 30년 전의 일을 어떻게 다 기억할 수 있겠어요?" "도허티 부인, 환자들의 진료기록은 모두 보존되어 있지요?" "물론입니다. 로즈마리 넬슨의 기록을 찾아볼까요?" 그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로즈마리에게 도움이 될 일이라고 하셨지요?" "그녀에게 더없이 중요한 일입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세요." 도허티 부인은 자료실로 떠났다. 15분 후 그녀는 서류철을 들고 돌아왔다. "여기 찾았어요. 로즈마리 넬슨의 진료기록과 입,퇴원 서류 모두가 보존되어 있어요. 입원비를 송금했을 때의 주소는 네브라스카 주 오마하 시의 엘리트 타이핑 써비스 사로군요." 오마하 시에 있는 엘리트 타이핑 써비스 사는 비서직 전문 소개업소였다. 사장은 육십 대의 오토 브로드릭 씨였다. "임시직 비서를 소개한 게 어디 한둘이오?" 그가 말했다. "한 달에도 수십 명에 달하는데 그 옛날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겠소?" "그 사람은 좀 특별한 경우였습니다. 이십 대의 미혼여성으로 몸이 약했습니다. 이곳에 왔을 때는 막 아기를 낳고..." "아, 로즈마리 얘기로군!"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지요?" "난 사람 이름을 잘 알려진 단어나 용어에 연결시키는 버릇이 있소. 그래서 즉시 로즈마리 얘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소." "전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그 당시 베티 데이비스가 주연한 유명한 영화가 개봉되었었소. 제목이 '로즈마리의 아기'였지. 그런데 로즈마리라는 이름의 젊은 여자가 갓 낳은 아기를 데리고 와서 직장을 구했소. 그러니 난 영화제목과 그녀 이름을 자연스럽게 연결지어 기억하게 된 것이오." "로즈마리 넬슨이 여기서 얼마 동안 일했습니까?" "글세... 1년쯤 있었을 거요. 어느 날 신문기자 한 사람이 우연히 그녀의 정체를 알아냈소. 그 순간부터 기자들은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소. 할수없이 그녀는 한밤중에 몰래 달아나버렸소." "브로드릭 씨, 로즈마리 넬슨이 이곳을 떠난 다음 어디에 정착했는지 아십니까?" "아마 플로리다로 갔을 거요. 따뜻한 곳으로 가고 싶어 했거든요... 내가 잘 아는 소개소에 추천서를 써 주었소." "그 소개소 이름이 기억나십니까?" "물론이오. 게일 에이전시요. 그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는건 플로리다에 태풍이나 폭풍이 자주 오기 때문에 게일(비바람이 심한 현상)이라는 이름과 바로 연결되기 때문이오." 스텐포드 유가족을 만난지 열흘 후 티몬스는 보스턴으로 돌아왔다. 미리 전화로 알렸기 때문에 모두들 그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티몬스가 자리에 앉자 유가족들은 그를 마주보고 앉았다. "티몬스 씨, 뭔가 알아냈다고 전화로 얘기했지요?" 타일러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는 가방을 열고 서류철을 꺼냈다. "정말 흥미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도무지..." "거두절미하고 결론부터 말해 봐요." 우디가 그의 말을 끊었다. "그 여자가 진짜요, 아니요?" 그는 우디를 쳐다보았다. "스텐포드 씨, 잠시만 참으시지요. 제 말을 순서대로 들어야 이해가 되실 겁니다." 타일러가 눈짓으로 우디를 나무랐다. "그게 좋겠소. 천천히 자초지종을 말해 보시오." 티몬스는 서류철을 뒤적거리면서 말했다. "스텐포드가의 보모였던 로즈마리 넬슨은 위스컨신 주 밀워키 시에서 여아를 분만했습니다. 아버지는 해리 스텐포드. 그녀는 얼마 되지 않아 밀워키를 떠나 네브라스카 주의 오마하 시로 이사했습니다. 그곳에서는 엘리트 타이핑 써비스 사에서 임시직 비서로 일했습니다. 그녀를 고용했던 사람 말이 기후 때문에 고생이 심했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 그녀는 플로리다 주로 갔습니다. 그곳의 게일 소개소를 통해 임시직 비서 자리를 구했던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녀는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계속 옮겨 다녔습니다. 10년 전까지 인디애나 주 하몬드 시에 살았던 것을 확인했지만 그 다음은 종적이 묘연해졌습니다." 잠시 말을 멈추고 티몬스는 고개를 들었다. "아니, 그게 다요?" 우디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고작 10년 전에 살던 곳을 확인했을 뿐이고 그 후론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는 얘기요?"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티몬스는 가방에서 다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로즈마리 넬슨의 딸, 줄리아 스텐포드가 열일곱 살 되었을 때 운전면허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마크가 물었다. "인디애나 주에서는 운전면허를 신청할 때 지문을 등록해야 됩니다." 그는 들고 있던 서류를 내밀었다. "이게 바로 진짜 줄리아 스텐포드의 지문입니다." 타일러의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알았어! 지문이 일치한다면..." 우디가 말을 가로챘다. "그렇다면 진짜 의붓동생이라는 뜻이지." 티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래서 휴대용 지문 감식기를 가져왔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감식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지금 여기 있습니까?" 타일러가 말했다. "이 근처 호텔에 묵고 있소. 이 일을 마무리 지을 때까지 이곳에 남아 있으라고 매일 전화로 설득하던 중이오." "이제 마각이 드러날 거야!" 우디가 말했다. "빨리 호텔로 가자구!" 30분 후 그들은 트레몬트 호텔에 도착해서 줄리아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녀가 문을 열자 모두 안으로 들어갔다. 반쯤 채워진 여행가방이 침대 위에 있었다. "지금 떠나려는 거예요?" 캔달이 물었다. 줄리아는 그들을 둘러보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겠어요. 애당초 내가 올 곳이 아니었나 봐요." 타일러가 말했다. "우리가 충격을 받은 것을 이해할 수 있잖소? 난데없이..." 줄리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내가 나타난 그때부터 내 말은 한마디도 곧이 듣는 사람이 없었어요. 모두들 내가 돈 때문에 찾아왔다고 생각했지요. 난 유산에 대한 생각은 해본 적도 없어요. 난 단지 내 가족을 찾으려 했던 것뿐이었어요. 난... 더 말해 봤자 소용없을 테니까 그만두겠어요." 그녀는 다시 여행가방에 옷을 챙기기 시작했다. 타일러가 말했다. "이분은 프랭크 티몬스 씨요. 사립탐정이오." "그래서요? 날 체포하겠다는 건가요? 사립탐정이 여기에 왜 나타난거죠?" "그런 게 아닙니다." 티몬스가 말했다. "우리는 줄리아 스텐포드가 열일곱 살 되던 해에 인디아나 주 하몬드 시에서 운전면허를 취득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랬어요. 운전면허를 받은 게 죄라도 되나요?" "천만에요. 그런 게 아니고..." "요는," 타일러가 끼어들었다. "신청서에 줄리아 스텐포드의 지문이 있다는 거요." "그게 어쨌다는 거예요? 무슨 뜻..." 우디가 말했다. "당신 지문과 대조해 보겠다는 말이오." 줄리아의 표정이 싹 달라졌다. "안 돼요! 난 그런 짓은 할 수 없어요!" "그럼, 지문 대조를 거절하겠다는 말이오?" 타일러가 물었다. "절대로 안 해요." "왜 안하겠다는 겁니까?" 마크가 물었다. 줄리아는 격앙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여러분 모두가 나를 죄인 같이 취급하잖아요? 난 그런 취급 받는 건 견딜 수 없어요. 가족 찾는 것을 단념하더라도 더 이상 말도 하기 싫어요. 난 그냥 떠나겠어요." 캔달이 달래듯 말했다. "당신이 우리 형제라는 것을 증명할 기회잖아요. 우리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확실하게 결론을 내는 게 좋지 않아요?" 줄리아는 선 채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러지요. 빨리 끝내도록 해요." "좋아요. 그럼, 티몬스 씨..." 타일러가 말했다. "알았습니다." 티몬스는 휴대용 지문 감식기를 탁자에 올려놓고 지문 채취용 잉크 통을 열었다. "자, 이쪽으로 와서..." 모두 탁자로 다가가는 줄리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티몬스는 그녀의 손을 잡고 손가락에 잉크를 묻힌 다음 흰 종이에 지문을 찍었다. "다 됐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끝났지요?" 그는 지문이 채취된 종이와 운전면허 신청서 사본을 나란히 놓았다. 모두 가까이 다가가서 들여다보았다. 한눈에 같은 지문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건... 정말... 똑같은데..." 캔달은 감격한 표정으로 줄리아를 바라보았다. "줄리아, 난 잃었던 동생을 찾았어!" 줄리아는 눈물을 흘리면서 미소를 띠었다. "처음부터 그렇다고 하지 않았어요?" 모두들 한마디씩 해댔다. "정말 희한한 일이야!" "그 오랜 세월이 지나고야..." "왜 로즈마리는 연락도 하지 않았지?" "우리가 너무 심했어. 정말 미안하게 됐어." 줄리아가 활짝 웃는 얼굴로 말했다. "미안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이제 모든 오해가 다 풀어졌잖아요." 우디는 줄리아의 지문이 채취된 서류를 집어들고 신기하다는 듯 들여다보았다. "세상에! 이건 10억 달러짜리 서류야." 그는 서류를 주머니에 넣었다. "이 서류를 영구보존할 수 있도록 동판을 떠야겠어." 타일러가 모두에게 말했다. "이제 의붓동생을 찾았으니 축하 파티라도 열어야겠어. 일단 모두 로즈 힐로 돌아가자구." 그는 미소 지은 얼굴로 줄리아에게 말했다. "집에 가서 줄리아를 환영하는 파티를 열어야지. 우선 숙박료를 계산하고 여기서 나가지." 줄리아는 형제들을 한 사람씩 둘러보면서 말했다. "정말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어요. 드디어 난 가족을 찾은 거예요." 30분 후 그들은 로즈 힐에 도착했고 줄리아는 배정된 침실에서 짐을 풀기 시작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아직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아래층 거실에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줄리아는 그 동안 마녀사냥을 당하는 기분이었을 거야." 타일러가 말했다. "마녀사냥이나 마찬가지였잖아요." 페기가 말했다. "그걸 어떻게 견뎌냈는지... 나 같으면 어림도 없었을 거예요." 캔달이 말했다. "이제 모든 게 달라진 상황에서 잘 적응해야 할 텐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지." 우디가 말했다. "샴페인과 캐비아가 싫증나지 않도록 신경 쓰며 사는 거지." 타일러가 일어났다. "난 유산 상속자가 한 사람 늘어났더라도 줄리아가 우리의 의붓동생으로 밝혀진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 올라가서 뭔가 필요한 게 없는지 알아봐야겠어." 그는 2층으로 올라가서 복도를 따라 줄리아의 방으로 갔다. 문을 두드리며 큰소리로 불렀다. "줄리아?" "열려있어요. 들어오세요." 타일러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 쳐다보았다. 잠시 후 타일러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두 팔을 벌리면서 미소 지었다. "마고! 우린 해냈어! 완벽하게 해낸 거야!" 그가 말했다. 밤 제15장 그는 체스의 고수답게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여느 체스 게임이 아니었다. 수십억 달러가 걸린 유례없이 엄청난 도박을 시도했고 이제 그 도박에서 이긴 것이었다. 그는 도박에서의 성공이 가져다 줄 엄청난 부와 권력을 생각할 때 세상 모두를 얻은 것 같았다. 아마 아버지도 큰 거래를 성공시켰을 때 이런 기분이었겠지... 하지만 이건 아버지가 성공했던 그 어느 것보다 더 큰 도박이었어. 난 유례없는 완전범죄를 계획했고 감쪽같이 성공한 거야. 사실 그 모든 것은 리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아! 리처럼 아름답고 멋있는 사람은 없을거야!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벨몬트로에 있는 베르린이라는 게이 바(동성연애자들이 모이는 바)에서 처음 만났다. 큰 키에 근육질 체격, 그리고 금발 머리... 리는 타일러가 처음 보는 아름다운 남자였다. "내가 한잔 사도 될까요?" 이 한마디로 두 사람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리는 타일러를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요." 두어 잔 더 마신 다음 타일러가 말했다. "우리 집으로 가서 한잔 더하는 게 어때요?" 리는 미소 지었다. "난 좀 비싼데요." "얼마나 비싸죠?" "하루 저녁에 5백 달러." 타일러는 주저하지 않았다. "갑시다." 두 사람은 타일러의 집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리는 타일러의 정신적, 육체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부드럽고 따뜻하게 대하면서도 타일러의 감정을 예민하게 파악하고 그를 완벽하게 만족시켰다. 타일러는 여태까지 만났던 그 누구보다도 리에게 마음이 끌렸다. 한번도 느끼지 못한 뜨거운 감정이 솟아올랐다. 날이 밝았을 때 타일러는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져 있었다. 전에는 종종 카이로나 비쥬 같은 시카고 지역의 게이 바에서 젊은 남자들을 만나 하룻밤을 같이 보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생각이 없어졌다. 리 외의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갖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아침식사를 준비하면서 타일러가 물었다. "오늘 저녁에는 뭘 했으면 좋겠어?" 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타일러를 쳐다보았다. "오늘 저녁? 난 선약이 있어." 타일러는 명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리, 난 우리 두 사람이..." "이봐, 타일러. 난 값비싼 프로잖아. 돈을 많이 내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상대한다는 말이야. 난 당신을 좋아하지만 아무래도 당신은 나를 잡아 둘 처지가 못 되는 것 같아." "난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줄 수 있어." 타일러가 말했다. 리는 웃으며 말했다. "정말? 난 멋있는 하얀 요트를 타고 남불 해안의 명승지를 유람하는 게 소원이야. 그렇게 해 줄 수 있어?" "리, 난 네가 아는 사람들의 재산 모두를 합한 것보다 훨씬 더 부자야." "그래? 직업이 판사라고 했잖아?" "맞아. 하지만 난 가까운 장래에 거부가 될 거야. 상상도 못할 엄청난 재산이 생길 거란 말이야." 리는 타일러를 감싸 안았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타일러. 다음 주 목요일이 비어 있으니까 그 때 만나면 되잖아. 거, 달걀이 맛있어 보이는데..." 그렇게 시작되었다. 전에도 타일러에게 돈이 중요하긴 했지만 그때부터 돈은 더욱 절실해졌다. 리와의 관계를 유지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리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갖는 것을 견디기 어려웠다. 어떻게 해서든 나 혼자 리를 차지해야 돼! 열두 살 되었을 때 타일러는 자신이 호모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날 학교 친구와 키스하고 서로 몸을 만지는 장면을 아버지에게 들켰다. 격노한 아버지가 소리쳤다. "우리 집안에 호모 새끼가 생겼단 말이야? 말도 안 돼! 이제 나에게 들켰으니 앞으로 한번만 더 그러면 가만두지 않을 테다!" 타일러는 결혼한 적이 있었다. 문제는 그 결혼이 해리 스텐포드의 변태적인 계획으로 추진되었다는 데 있었다. "너에게 소개시킬 사람이 있어." 아버지가 타일러에게 말했다. 로즈 힐에 가족들이 모여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낸 다음이었다. 캔달과 우디는 벌써 떠났고 타일러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때 아버지가 폭탄선언을 했다. "너, 당장 결혼해야겠어." "결혼이요? 난데없이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난 그런 생각도..." "잔소리 마, 이 호모 자식 같으니라구! 널 보고 사람들이 수군거린단 말이야. 이대로 놔둘 수는 없어. 집안 망신이야. 네가 결혼을 하면 그런 얘기는 쑥 들어갈 거다." 타일러는 강하게 반발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요. 결혼하고 안 하는 건 내 문제예요." "타일러, 난 네가 스텐포드 가문을 이어 가기를 기대하는 거야. 나도 이제 은퇴를 생각해야 되는 나이가 됐잖아? 머지않아서..." 아버지는 말꼬리를 흐렸다. 당근과 채찍을 꺼낸 것이었다. 나오미 슐러는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평범한 외모였지만 상류사회에 끼어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자였다. 스텐포드가의 재력과 명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녀는 타일러 판사는 고사하고 주유소 직원이었다 하더라도 그와의 결혼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상 해리 스텐포드는 나오미를 데리고 잔 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왜 그렇게 평범한 여자와 관계를 맺었는지 물었을 때 그는 "그저 별 생각없이 그랬어."라고 대답했다. 그는 나오미에게 곧 싫증이 났고 타일러와 짝지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해리 스텐포드는 한번 마음먹으면 반드시 뜻대로 고집을 관철하는 성격이었다. 결혼식은 두 달 뒤에 있었다. 단출한 결혼식-하객이 150명밖에 되지 않았다-을 마친 신랑, 신부는 자메이카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어처구니없는 신혼여행이었다. 첫날밤에 나오미는 소리쳤다. "세상에! 이런 사람을 남자라고 결혼하다니! 그 사타구니의 물건은 뭐 때문에 달고 다녀요?" 타일러는 그녀를 설득해 보려고 진땀을 흘렸다. "우리 사이에 섹스만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취향대로 서로 간섭하지 않고 살면 되잖아. 같은 집에 살아도 섹스는 각자 원하는 상대를 찾을 수 있어." "말 한번 잘했어요. 내가 어떻게 하든 상관 말아요." 나오미는 타일러에 대한 보복심리로 쇼핑에 몰두했다. 시카고의 가장 비싼 상점들을 휩쓸고도 성에 차지 않아 자주 뉴욕으로 쇼핑 여행을 떠났다. "내 수입으로는 당신이 쇼핑으로 낭비하는 지출을 감당할 수 없어." 참다못해 타일러가 말했다. "그럼 수입을 늘리면 되잖아요. 아내가 필요한 물건을 사는데 남편은 지불할 의무가 있어요." 견디다 못한 타일러는 아버지를 찾아가서 사정을 털어놓았다. 해리 스텐포드는 싱글거리며 말했다. "여자라는 건 돈이 들어가게 되어 있어. 이제 실감나지? 잘 구슬리면서 사는 수밖에 없잖겠어." "아버지, 하지만 지금 당장 돈이 좀..." "너는 언젠가는 엄청난 돈을 갖게 될 텐데 뭘 구래?" 타일러는 재산을 상속받을 때까지 지출을 절제하라고 나오미를 설득해 보았지만, 그녀는 그 '언제'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생각에는 타일러가 재산을 한푼도 물려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나오미는 타일러를 짜낼 때까지 짜낸 다음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위자료로 타일러의 은행계좌에 남아있던 전액을 받고는 떠나버렸다. 타일러의 이혼 소식을 들은 해리 스텐포드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결혼해서도 그 호모 버릇을 못 고친 모양이야." 아버지는 어떻게든 타일러를 난처하게 만들고 깎아 내리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법정에서 타일러는 재판을 주관하고 있었다. 법원 서기가 재판장석으로 다가와서 귓속말을 했다. "판사님, 죄송합니다만..." 타일러는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가?" "지금 급한 전화가 와 있습니다." "뭐? 전화가 왔다구? 당신 정신이 있어, 없어? 지금 재판 중이라는 걸..." "판사님 부친의 전화입니다. 급한 일로 직접 통화를 해야만 된다는 말씀입니다." 타일러는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해리 스텐포드라 하더라도 이런 상식 밖의 행동을 할 권리는 없었다. 그냥 무시해 버릴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급한 일이라면... 타일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판을 15분 간 휴정하겠소." 타일러는 서둘러 사무실로 들어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아버지?" "타일러, 이렇게 전화해서 방해되지 않았는지 모르겠구나." 완전히 놀리는 말투였다. "지금 재판 중이었는데 방해가 안 될 리가 있어요? 어떻게..." "그럼 벌금형이라도 내리고 끝내버리면 되잖니." "아니, 그런..." "좀 심각한 일로 네 도움이 필요하다." "무슨 일인데요?" "이곳 요리사가 아무래도 제 주머니를 챙기는 것 같아." 타일러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화가 치밀어 올라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니, 그런 일로 재판 중에 절 불러냈다는 말이에요?" "넌 판사잖아. 그 친구는 법을 어기고 있어. 네가 보스턴에 와서 로즈 힐에서 일하는 자들 모두를 점검해 줘야겠어. 대부분이 도둑질하고 있을 거야." 타일러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참아냈다. "아버지, 그런 일로..." "요즘 직업소개소의 추천은 믿을 수 없단 말이야." "지금 재판 중이라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어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지금 뭐라고 했지?" "지금 재판 중이라..." "타일러, 나를 또 실망시키지는 않겠지? 피츠제랄드를 불러내 유언장 내용을 변경해도 괜찮을까?" 또다시 당근과 채찍이 나타났다. 돈... 수십억 달러의 상당부분이 아버지가 타계하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었다. 타일러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전용 비행기를 보내 주시면..." "그런 것은 바라지도 마! 이봐, 판사님. 고분고분 내 말만 잘 들으면 언젠가는 그 비행기가 네 것이 되잖아. 잘 생각해 봐. 그때까지는 일반 항공편으로 다니라구. 잔소리 말고 빨리 보스턴으로 와!" 아버지는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타일러는 참담한 심정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나를 이렇게 괴롭히고 무시해 왔어. 맘대로 하라지! 난 안 갈 거야. 절대로 안 가! 그날 밤, 타일러는 보스턴행 비행기에 앉아 있었다. 해리 스텐포드는 로즈 힐 저택에 모두 스물두명을 고용하고 있었다. 개인 비서, 집사, 청소부, 하녀, 요리사, 운전사, 정원사 등 다양한 고용인들과 개인 경호원도 한 사람 있었다. "하나 같이 도둑놈들이야. 예외가 없어." 해리 스텐포드는 시카고에서 달려온 아들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사립탐정을 고용하거나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면 되잖아요?" "네가 있잖아." 아버지가 말했다. "넌 판사가 맞지? 수많은 범죄 사건을 재판하잖아? 네가 판단해 보라구." 해리 스텐포드는 판사의 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집사나 운전사 대하듯 타일러를 부리려고 했다. 타일러는 어릴 때 살던 저택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실내공간... 우아하고 세련된 가구와 장식... 벽에 걸린 값비싼 그림...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시카고의 초라한 주택과 비교할 때 딴 세상 같았다. 나는 이 집에서 살 권리가 있어! 그는 생각했다. 언젠가는 내가 차지할 거야. 타일러는 가장 오랫동안 이 저택에서 일한 집사 클라크와 먼저 얘기한 다음 고용인 모두를 한 사람씩 차례로 만나보았다. 그들의 이력서와 추천서를 면접 내용과 대조해 보았다. 그들 중 대부분이 최근에 고용된 사람들이었다. 해리 스텐포드 같이 까다로운 사람 아래서 일하는 것은 보통 어렵지 않았기 때문에 로즈 힐에 고용된 사람들 대부분이 며칠 견디지 못했다. 하루 이틀만에 그만두거나 해고당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 중 몇 사람이 허락없이 음식과 물건을 남용한 것이 드러났고, 한 사람은 알콜 중독증세가 있었다. 타일러는 심각한 문제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개인 경호원인 드미트리 카민스키가 심상치 않았다. 해리 스텐포드는 드미트리 카민스키를 체력 단련사 겸 경호원으로 고용했다. 검사와 판사로서 수많은 형사사건을 다루어 온 타일러는 사람을 보는 감각이 뛰어났다. 드미트리와 얼굴을 마주치는 순간 타일러는 범죄형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최근에 해리 스텐포드의 경호원이 사직했기 때문에 보스턴의 직업소개소 추천으로 드미트리가 고용되었다. 큰 키의 드미트리 카민스키는 군살 없는 근육질의 우람한 체격이었다. 그는 심한 러시아 액센트가 섞인 영어로 말했다. "부르셨습니까?" "그랬소." 타일러는 의자를 가리켰다. "거기 좀 앉으시오." 타일러는 드미트리의 이력서를 들춰보았지만 최근에 러시아에서 왔다는 것말고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러시아에서 태어났소?" "그렇습니다." 그는 약간 불안한 표정이었다. "어느 지방이오?" "그루지아입니다." "왜 고향을 떠나 미국으로 왔소?" "여기는 기회의 나라 아닙니까?" 드미트리가 대답했다. 무슨 기회를 노리는 걸까? 타일러는 생각했다. 드미트리의 애매한 태도가 왠지 마음에 걸렸다. 20분 동안 드미트리를 면접해 본 타일러는 그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타일러는 서로 알고 지내던 F.B.I.의 프레드 매스터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프레드, 부탁 한 가지 들어줄 수 있겠어?" "좋지. 그 대신 내가 시카고에 갔다가 속도위반으로 딱지를 떼면 책임지고 해결해 줄 거야?" "프레드, 장난이 아니야." " 무슨 부탁인지 들어보자구." "6개월 전쯤 미국으로 건너온 러시아인 한 사람의 배경을 알아보려고 그래." "잠깐, 그건 C.I.A. 관할 아냐?"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C.I.A.에는 아는 사람이 없거든." "나도 없는데..." " 프레드, 이번 일을 도와주면 나는 자네에게 큰 빚을 지는 거야." 프레드 매스터슨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좋아. 그 사람 이름이 뭐야?" "드미트리 카민스키." "그럼 이렇게 해보지. 워싱턴의 러시아 대사관에 내가 잘 아는 사람이 있어. 카민스키에 대한 정보가 대사관에 있다면 그 사람을 통해 얻어낼 수 있을 거야. 대사관에서도 모른다면 어쩔 수 없어." "그렇게 해 주면 정말 고맙겠어." 그날 저녁, 타일러는 로즈 힐에서 아버지와 저녁 식탁에 마주앉았다. 그는 아버지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좀 부드러워지고 인간적인 따뜻함과 약점을 드러내기를 속으로 기대해 왔다. 그러나 해리 스텐포드는 자신만만하고 정력적인 모습으로 나이를 먹었다는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영원히 살 것 같아. 타일러는 생각했다. 우리 형제들보다 훨씬 오래 살 거야. 식사 때의 대화는 완전히 일방통행이었다. "어제 하와이의 전력회사를 인수하는 계약을 맺었어..." "내주에는 암스텔담으로 가야 되겠어. GATT 규정 때문에 문제가 좀 생겼는데 직접가서 해결하고 와야겠어..." "국무장관이 내달 중국 방문 때 동행하자고 하는데..." 타일러는 입을 열 틈이 없었다. 식사가 끝나자 아버지가 일어서면서 물었다. "고용인들 조사하는 건 어떻게 됐어?" "아직 조사가 덜 끝났어요." "빨리 끝내도록 해. 꾸물거리지 말고." 해리 스텐포드는 밖으로 나갔다. 다음날 아침, F.B.I.의 프레드 매스터슨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타일러?" "아, 프레드." "자네, 사람 한번 잘 골랐어." "무슨 소리야?" "드미트리 카민스키는 폴로프루드넨스카야의 행동대원이었어."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설명해 줄게, 들어 봐. 최근 모스코 시에서는 여덟 개의 마피아 조직이 판을 치고 있어. 서로 구역 다툼을 하느라고 1930년대의 시카고가 무색할 지경이야. 그 중 가장 세력이 강한 조직은 체첸 마피아와 폴로프루드넨스카야 마피아지. 카민스키는 바로 폴로프루드넨스카야의 행동대원이었어. 적대하는 마피아 조직원이나 범죄활동에 방해되는 자들을 처치하는 역할이었어. 미국으로 오기 전에 체첸 마피아의 두목급 한 사람을 암살하라는 명령을 받았었지. 카민스키는 명령을 수행하기 전에 암살 대상자를 만나 많은 돈을 받고 자취를 감추었어. 폴로프루드넨스카야 마피아는 이 사실을 알고 카민스키를 처단하라는 명령을 내렸지. 러시아의 마피아에겐 특별한 살인 의식이 있지. 우선 처단 대상의 손가락을 자르고 한동안 피를 흘리며 고통을 받게 한 다음 머리에 한 방 쏘아 죽이는 거야." "아니 그런 끔찍한..." "카민스키는 교묘하게 국외로 탈출해서 미국으로 온 거야. 그러나 러시아의 마피아 조직은 아직도 그를 추적하고 있어. 절대로 단념하지 않을 거야." "정말 믿어지지 않는군." 타일러가 말했다. "그게 다가 아니야. 러시아 경찰은 몇 건의 살인사건의 혐의자로 카민스키를 지목하고 그를 수배중이야. 그의 소재를 아는 사람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오히려 나에게 부탁하던걸." 타일러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이런 사건에 끼어들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공연히 외국의 형사사건에 끼어들 필요가 없지. "글쎄, 나는 모르겠어. 알고 지내는 러시아 사람이 좀 알아봐 달라고 한 것 뿐이야. 프레드, 정말 고마워." 타일러는 드미트리의 방으로 갔다. 포르노 잡지를 보고 있던 드미트리는 타일러가 들어오자 잡지를 덮고 일어났다. "지금 당장 짐을 싸고 이곳을 떠나시오." 드미트리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내 말을 못 알아들은 모양인데, 구체적으로 말하지. 오늘 해지기 전에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러시아 경찰 당국에 당신의 소재를 통보하겠소." 드미트리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내 말 알아들었소?" "알겠습니다." 타일러는 드미트리의 방을 나와 아버지를 찾았다. 이 얘기를 들으면 아버지도 깜짝 놀랄거야. 내 직감으로 조사해 보지 않았다면 큰일날 뻔했잖아. 아버지가 앉아 있는 서재로 들어갔다. "고용인들에 대한 모든 조사가 끝났어요." 타일러가 말했다. "그 결과..." "그래? 잘했어. 데리고 잘 만한 젊은 남자 아이는 찾았나?" 타일러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버지, 어떻게 그런..." "타일러, 넌 호모야. 넌 언제까지나 호모로 남을 거야. 어떻게 너 같은 게 내 핏줄로 태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어. 이제 시카고 시궁창에 있는 네 애인에게 돌아가라구." 타일러는 꼼짝않고 그 자리에 서서 자제력을 잃지 않았다. "알았어요." 더 이상 말하면 분노가 터져 나올까봐 몸을 돌렸다. "그래, 고용인들을 조사해 본 결과 뭔가 중요한 게 있었어?" 타일러는 고개를 돌리고 잠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뇨." 그는 다시 한번 천천히 말했다. "아무것도 없었어요." 타일러는 드미트리를 다시 찾아갔다. 드미트리 카민스키는 여행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곧 떠날 겁니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떠나지 않아도 괜찮소. 생각을 바꿨소." 드미트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무슨 말인지..." "떠날 필요가 없다는 말이오. 아버지의 개인 경호원으로 남아 있으라는 말이오." "그럼... 러시아 쪽 일은 어떻게..." "일단 덮어두겠소." 드미트리는 경계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생각을 바꿨지요?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당신은 내 눈과 귀가 되는 거요. 난 아버지 측근에서 일어나는 일을 빠짐없이 알려줄 사람이 필요하오." "내가 왜 그런 역할을 해야 됩니까?" "당신이 내 말대로 하면 나는 러시아 경찰이나 범죄조직에 당신의 소재를 알리지 않을 것이고, 게다가 당신을 부자로 만들어 줄 것이오." 드미트리 카민스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퍼졌다. "그럼 남기로 하지요." 이렇게 체스 게임은 시작되었다. 졸 하나를 움직인 것이었다. 벌써 2년이 지났다. 그 동안 드미트리는 수시로 아버지의 근황을 알려왔다. 대부분 아버지의 여자 관계나 사업에 관한 가십들이었다. 타일러는 드미트리를 정보원으로 포섭한 것이 공연한 짓이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그를 러시아 경찰에 넘겨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 때 사르디니아에서 드미트리가 그 운명적인 전화를 걸어왔고, 드디어 엄청난 도박에 이기게 된 것이다. 지금 당신 아버지가 블루 스카이 호에 있어요. 당신 아버지가 조금 전에 보스턴의 개인 변호사 사무실로 전화했습니다. 오는 월요일에 피츠제랄드 씨를 만나 유언장을 바꾼답니다. 타일러는 여태까지 아버지로부터 받아온 수모와 학대를 되씹으며 치를 떨었다. 유언장 내용을 바꾸면 내가 그 동안 참아온 보람이 없어지잖아!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어! 유언장을 못 바꾸도록 하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드미트리, 일요일에 다시 전화하시오." "알았습니다." 타일러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이제는 차가 뜰 차례였다. 제16장 일리노이 주 쿠크 카운티의 순회재판소는 항상 폭력사건, 방화사건, 강간사건, 마약사범, 살인사건 등 다양한 형사사건 피의자들로 붐볐다. 타일러 스텐포드 판사는 한 달에 최소한 대여섯 건의 살인사건을 다루었다. 대부분의 사건은 정식 재판을 거치지 않고 마무리되었다. 피의자가 변호사를 통해 형량이 낮은 죄목으로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면 검찰은 이를 대부분 받아들였다. 정식 재판에 소모되는 예산과 인력을 절감하고 태부족인 교도소 시설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배려였다. 검찰과 피의자 변호인이 합의를 본 경우 스텐포드 판사의 승인을 받으면 형이 확정되었다. 할 베이커의 경우는 예외였다. 할 베이커는 원래 착한 사람이었지만, 운이 나빴다. 열다섯 살 때 형이 식품점 터는 것을 도와 달라고 했었다. 할은 형을 말려보았지만 소용이 없었고, 할수없이 형을 따라갔다. 범죄 현장에서 운 나쁘게도 경찰과 마주쳤고 형은 재빨리 달아났지만 할은 체포되었다. 그 때문에 2년 동안을 소년원에서 보냈다. 형기를 마치고 출감한 할은 다시는 범법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 한 달 후, 한 친구가 귀금속 가게에 같이 가자고 했다. "내 여자 친구에게 줄 반지를 사야겠어." 가게로 들어가자 그 친구는 권총을 꺼내들고 소리쳤다. "목숨이 아까우면 손 들고 벽으로 돌아서!" 직원들이 경보기를 울리고 반항하는 바람이 그 중 한 사람이 친구의 총에 맞아 즉사했다. 그 친구는 달아났지만 할 베이커는 무장 강도죄로 체포되어 징역형을 받았다. 베이커가 감옥에서 복역하고 있을 때, 헬렌 고완이라는 사회 봉사원이 우연히 그의 재판기록을 읽어보았다. 복역 중인 죄수들이 형을 마친 다음 사회에 다시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 주던 그녀는 베이커에게 동정심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그를 찾아갔다. 두 사람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고 베이커가 출감하자마자 결혼했다. 그 후 5년 사이에 그들은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할 베이커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헌신적이었다. 그러나 전과기록 때문에 정상적인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그는 할수없이 생계를 위해 아직도 범죄에서 손을 떼지 않은 형을 도와 일했다. 불운하게도 베이커는 절도 현장에서 다시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장은 타일러 스텐포드 판사였다. 재판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피고 베이커는 전과가 있었고, 어릴 때 소년원에 수감되었던 전력도 있었다. 게다가 이번 사건에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피고의 유죄가 명백했다. 검찰측 직원들은 스텐포드 판사가 몇 년 형을 언도하느냐에 내기를 걸고 있었다. "최고 형량을 내릴 게 틀림없어!" 한 사람이 말했다. "징역 20년일 거야. 스텐포드는 '교수형 판사'로 유명하잖아." 할 베이커는 자신의 변호를 직접 맡았다. 자신은 죄를 지을 의도가 없었고, 주변의 상황 때문에 억울하게 범인으로 지목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재판장 앞에서 말했다. "재판장님, 저는 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실수였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아내와 네 명의 자식이 있습니다. 판사님도 제 가족을 한번 만나보시면 제 가정이 얼마나 화목하고 사랑이 넘치는지 바로 알게 되실 겁니다. 저는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려다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타일러 스텐포드는 재판장석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듣고 있었다. 할 베이커의 넋두리가 끝나면 즉시 형을 언도할 생각이었다. 이런 한심한 친구가 있나? 그 상투적인 작전으로 빠져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할 베이커의 최종 변론이 끝나가고 있었다. "...따라서, 존경하는 재판장님, 제가 비록 법을 어긴 것은 사실이지만 저의 동기는 순수했다는 것을 참작해 주십시오. 제 가정을 지키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제 가족이 저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는 더 이상 말씀 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제가 실형을 받고 수감되면 제 처와 자식들의 생계가 막연합니다. 제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실형을 언도 받지 않는다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든지 저의 죄값을 치르겠습니다. 판사님, 제 가족을 계속 보살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기꺼이..." 바로 그 대목에서 타일러 스텐포드는 영감이 떠올랐다. 그는 피고를 새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어떤 일이라도 기꺼이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타일러는 드미트리 카민스키를 만났을 때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약간의 은혜를 베풀어 두면 언젠가는 쓸모가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베이커의 변론이 끝나자 타일러 스텐포드 판사가 말했다. "베이커 씨, 이 사건에는 고의성보다는 불가항력적 요인이 더 많다는 게 본 재판장의 견해요. 더군다나 부양가족 수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소. 따라서 본 재판장은 피고에게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합니다. 그 대신 피고는 매년 6백 시간의 공공봉사 활동을 해야 됩니다. 봉사 활동은 내가 직접 지시하겠으니 내 사무실로 오시오." 검사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두 사람은 판사실에서 마주앉았다. "아직도 내가 당신을 아주 오랜 세월 교도소에 보내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할 베이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판사님, 법정에서 하신 말씀은..." 타일러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당신의 변론 중 나를 정말 감동시킨 게 무엇인지 알고 있소?" 할 베이커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잘 모르겠는데요." "당신이 진심으로 가족을 아끼는 마음씨였소." 타일러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그 마음씨에 감동을 받았소." 베이커의 얼굴이 밝아졌다. "판사님, 그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저에게는 세상에서 제 가족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저는..." "그렇다면 그 가족과 헤어져야 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겠지? 당신을 교도소로 보내면 아이들은 아버지를 잃고 자라날 것이고, 아내는 결국 다른 사람과 재혼하지 않겠소? 내 말 뜻을 알겠소?" 베이커는 곤혹스런 표정이었다. "판사님, 저... 저는 무슨 말씀인지 잘..." "나는 당신의 가족을 위해서 집행유예를 선고했소. 나의 관대한 판결을 고마워 할 줄 알았는데..." 베이커는 당황했다. "아니, 판사님! 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정말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감사한다면 그 마음을 증명할 때가 올 거요. 내가 필요할 때 당신에게 뭘 좀 부탁할 수도 있다는 말이오."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좋소. 당신은 5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소. 앞으로 5년 동안 나에게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행동을 보이면 그 때때는..." "무엇이든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때가 되면 당신에게 부탁할 것이 생길 거요. 어찌됐든 이 얘기는 우리 두 사람만 알고 있어야 되오." 할 베이커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죽는 한이 있어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좋소. 잘 가시오. 행운을 빌겠소." 타일러가 말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드미트리 카민스키가 타일러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당신 아버지가 조금 전에 보스턴의 개인 변호사 사무실로 전화 했습니다. 오는 월요일에 피츠제랄드 씨를 만나 유언장을 바꾼답니다. 타일러는 우선 현재의 유언장 내용을 확인해야만 했다. 이런 때를 대비해서 할 베이커에게 관용을 베푼 것이었다. "...법무법인의 이름은 '렌퀴스트, 렌퀴스트, 피츠제랄드'요. 서류를 복사해서 내게 가져오시오." "예, 잘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열두 시간 후 해리 스텐포드의 유언장 사본이 타일러의 손에 들어왔다. 유언장을 읽은 타일러는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우디, 캔달과 자신이 유산 전부를 상속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월요일에 유언장을 바꾼다? 우리에게 한 푼도 남기지 않겠다는 속셈이 분명해! 설레던 가슴에 분노와 증오가 끓어올랐다. 그 유산을 미끼로 우리를 일생 꼼짝 못하게 했잖아! 그 엄청난 유산은 우리가 받아야 돼! 우리는 받을 권리가 있어. 유언장을 바꾸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드미트리가 다시 전화했을 때 타일러는 결단을 내렸다. "오늘 밤에 그를 처치하시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만약 내가 살인혐의를 받게 되면..." "정신 바짝 차리고 치밀하게 하면 되잖소. 항해 중인 요트 안에서 처치한다면 감쪽같이 해치울 수 있을 거요." "알겠습니다. 일이 다 끝나면 어떻게 할까요?" "즉시 나에게 전화하시오. 돈과 오스트레일리아행 항공권은 미라 보내 주겠소." 얼마 기다리지 않아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지시대로 처치했습니다. 감쪽같이 잘되었습니다." 타일러는 가슴이 쿵쾅거렸다. "어떻게 처치했는지 자세히 말해 보시오. 그때 상황을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모두 얘기하시오." 드미트리의 얘기를 들으면서 타일러는 그 장면 하나하나를 연상할 수 있었다. "코르시카로 항해하는 도중에 심한 폭풍을 만났습니다. 그가 선실에서 나를 찾았습니다. 마싸지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어떻게 됐소?" 타일러가 재촉했다. 드미트리는 기우뚱거리는 요트 위에서 난간을 잡고 한 걸음씩 해리 스텐포드의 선실로 다가갔다. 문을 두드리자 잠시 후 스텐포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스텐포드는 마싸지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허리 아래쪽이 문제야." "곧 풀어 드리겠습니다. 힘을 빼고 편안하게 엎드려 계십시오." 드미트리는 테이블로 다가가서 스텐포드의 등에 마싸지용 기름을 발랐다. 그런 다음 익숙한 솜씨로 허리 아래쪽에 굳어 있는 근육을 손가락으로 마싸지하기 시작했다. 굳었던 근육이 차츰 풀어지면서 허리의 통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금새 기분이 좋아지는군. 자네 마싸지 솜씨는 정말 훌륭해!" 스텐포드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마싸지는 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드미트리가 손을 떼었을 때, 해리 스텐포드는 반쯤 잠들어 있었다. "이제 더운 목욕을 준비하겠습니다." 드미트리가 말했다. 그는 휘청거리며 욕실로 갔다. 뜨거운 해수를 욕조에 틀어 놓고 침실로 돌아왔다. 스텐포드는 마싸지 테이블에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스텐포드 씨..." 해리 스텐포드는 눈을 떴다. "목욕 준비가 끝났습니다." "지금 목욕할 생각이..." "오늘 밤 푹 주무시려면 더운 목욕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는 스텐포드를 테이블에서 일으켜 부축하고 욕실로 안내했다. 드미트리는 해리 스텐포드가 욕조에 들어가 편한 자세로 길게 앉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쳐들던 해리 스텐포드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드미트리 카민스키의 차가운 눈초리와 마주쳤다. 그 순간, 본능적으로 드미트리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안 돼!" 스텐포드는 소리치면서 몸을 일으켰다. 드미트리는 두 손으로 해리 스텐포드의 머리를 잡고 물 속으로 눌렀다. 스텐포드는 몸부림치면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드미트리의 완력을 당할 수 없었다. 드미트리는 숨이 막힌 스텐포드가 계속 물을 먹도록 머리를 물속에 누르고 있었다. 스텐포드의 폐가 욕조의 해수로 가득 차면서 저항이 줄어들다가 드디어 동작이 완전히 멈췄다. 드미트리는 잠시 가쁜 호흡을 진정시키고 스텐포드의 선실로 돌아갔다. 요동 치는 요트 안에서 드미트리는 휘청거리며 스텐포드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서류 몇 장을 집어들고 베란다로 통하는 유리문을 열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그는 서류를 베란다에 뿌리고 몇 장은 바다에 던졌다. 그런 다음, 드미트리는 욕실로 돌아가 스텐포드의 시신을 욕조 밖으로 꺼냈다. 잠옷과 가운을 입히고 발에는 슬리퍼를 신긴 다음 베란다로 옮겼다. 베란다 난간에서 잠시 주저하다가 시신을 바다로 밀어냈다. 속으로 5초를 센 다음 수화기를 들고 소리쳤다. "스텐포드 씨가 물에 빠졌어!!!" 드미트리가 아버지를 살해한 얘기를 들으면서 타일러는 성적 쾌감을 맛보는 느낌이었다. 숨이 막혀 바닷물을 삼키면서 공포에 시달리다가 몽롱하게 의식을 잃고 죽어가는 아버지의 느낌을 직접 경험하는 것 같았다. 드디어 체스 게임은 끝났어! 타일러는 생각했다. 다음 순간 그는 생각을 바꿨다. 아니야,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거야! 외통수로 완벽하게 이길 거야. 제17장 체스 게임을 마무리 지을 외통수는 우연한 계기에 떠올랐다. 아버지의 유언장 내용을 생각해 볼수록 타일러는 우디와 캔달이 자신과 꼭 같은 지분을 상속받는 게 불공평하다고 느껴졌다. 우디와 캔달은 나와 같은 지분을 상속받을 자격이 없어! 내가 아니었으면 그들은 한푼도 못 받았을 게 아닌가? 나 때문에 유산을 받게 되었는데... 이건 공평하지 않아! 하지만 유언장이 공개되면 도리가 없잖아... 타일러는 옛날에 어머니로부터 스텐포드 기업 주식의 1퍼센트인 한 주를 물려받았다. 그때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타일러가 그 주식으로 뭘 어떻게 한 대? 날 몰아내고 회사를 차지하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타일러는 생각했다. 우디와 캔달이 아버지 소유의 스텐포드 기업 주식의 3분의 2를 물려받게 되면, 내가 주식 3분의 1에다 한 주 더 가지고 있는 것으로 어떻게 경영권을 확보하겠어? 순간 묘안이 번뜩 떠올랐다. 자신의 착상이 너무나 기발했기 때문에 타일러 스스로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상속인이 더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유언장에는 유산을 모든 직계 비속에게 균등하게 분배하도록 명시되어 있습니다. 선친이 보모로 일하던 사람을 임신시킨 일을... 딸을 낳아 줄리아라고... 만약 그 줄리아가 나타나면 상속인은 네사람이 되는 거야. 타일러는 생각했다. 그녀의 지분을 내 지분에 보태면 50퍼센트가 넘고, 그러면 내가 스텐포드 기업의 경영권을 독차지할 수 있어. 드디어 난 아버지의 의자에 앉는 거야. 로즈마리는 벌써 세상을 떠났고 딸아이에게 생부 얘기를 했을 리가 없어. 스텐포드라는 이름과 연결되는 게 싫어서 자취를 감췄잖아? 그렇다면 진짜 줄리아가 나타날 리가 없어. 마고 포즈너가 적격이었다. 두 달 전 타일러는 마고 포즈너를 법정에서 처음 만났다. 법원 서기가 재판정을 가득 메운 방청객들에게 말했다. "자, 조용해 주십시오. 지금부터 쿠크 카운티 순회재판소의 재판이 시작됩니다. 재판장은 타일러 스텐포드 판사님입니다.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 타일러는 사무실을 나와 재판장석에 자리잡고 앉았다. 그는 재판 일정표를 들여다 보았다. 첫 사건은 상해 및 살인 미수로 기소된 마고 포즈너의 사건이었다. 검사가 일어섰다. "재판장님, 이 피의자는 대단히 위험한 인물입니다. 이런 사람이 시카고 거리를 활보하도록 놔둘 수는 없습니다. 저희 검찰은 피의자의 수많은 전과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절도, 사기, 매춘 등 유죄판결을 받은 것만도 여러 건 있습니다. 그녀는 악명 높았던 핌프 라파엘이 거느리던 창녀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금년 정월 그녀는 라파엘과 말다툼을 하다가 살해할 목적으로 라파엘과 다른 창녀 한 사람을 총으로 쏘았습니다." "두 사람 다 죽었소?" 타일러가 물었다. "아닙니다, 재판장님. 하지만 두 사람은 중상을 입고 아직도 병원에 입원 중입니다. 마고 포즈너가 가지고 있던 권총은 등록도 되지 않은 무기였고, 그 무기를 소지한 것만도 죄가 됩니다." 고개를 돌려 피의자를 쳐다본 타일러는 내심 깜짝 놀랐다. 검사의 논고에 비쳐진 피의자의 모습과 실제의 모습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다. 우아한 옷차림에 매력적인 이십 대 후반의 여자였다. 세련된 분위기를 연출하는 그녀의 모습은 살인미수 혐의자라고 믿기 어려웠다. 이렇기 때문에, 타일러는 속으로 혀를 찼다. 사람이란 겉모습만 보고는 모르는 거란 말야. 그는 검찰측과 변호인측 논고와 변론을 들으면서 피의자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딘가 누이동생 캔달을 연상시키는 분위기였다. 재판절차가 끝나자 배심원들은 협의에 들어갔다. 네 시간도 되지 않아 그들은 법정에 돌아와서 혐의사실 전체에 대한 유죄평결을 내렸다. 타일러는 피의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에서 우발적이거나 불가항력인 요인을 찾아볼 수 없었소. 따라서 피의자는 드와이트 교도소에서 5년간 복역할 것을 판결하겠소. 다음 사건." 마고 포즈너가 법정을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타일러는 왜 그녀가 캔달을 연상시키는지를 깨달았다. 그녀의 눈이 짙은 회색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스텐포드 가족의 특징이었다. 타일러는 드미트리로부터 전화가 걸려올 때까지 마고 포즈너를 잊고 있었다. 체스 게임의 초반전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제 중반전에 들어간 것이다. 타일러는 치밀하게 앞으로 둘 수를 계획했다. 게임을 완벽한 승리로 이끌려면 마지막 외통수를 두기까지는 서두르지 않아야 했다. 타일러는 드와이트 교도소로 마고 포즈너를 찾아갔다. "날 기억하시오?" 타일러가 물었다.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못 알아보겠어요? 날 여기에 보낸 장본인이잖아요." "그래, 여기서 지내기가 어떻소?" 타일러가 물었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이런 지옥같은 곳에 사람을 처넣고는 지내기가 어떠냐구요?" "그럼 출감할 생각이 있소?" "어떻게 출감... 아니, 지금 날 놀리는 게예요?" "놀리는 게 아니라 심각한 얘기요. 난 당신을 출감시킬 수 있소." "아니, 정말이요? 그렇게 해줄 거예요? 정말 고맙습니다.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모르겠네요. 나가기만 하면 그 때는..." "그 대신 내 부탁을 들어줘야 되오." 마고 포즈너는 의미 있는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부탁을 들어 드릴게요." "난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오." 그녀의 표정이 달라졌다. "판사님, 대체 무슨 부탁이에요?" "내가 누구를 좀 놀려주려고 하는데, 당신 도움이 필요한 거요." "놀려주다니요?" "당신은 다른 사람으로 가장하고 연기만 해 주면 되는 거요." "다른 사람으로 가장하라구요? 글쎄, 내가 연기를 할 수 있을지..." "잘만 하면 출감은 물론이고 2만 5천 달러를 벌 수 있을 거요." 그녀의 안색이 밝아졌다. "좋아요." 주저하지 않고 대답이 나왔다. "그런 돈을 받는다면 누구 흉내든지 내겠어요. 대체 누구로 가장하면 되는 거예요?" 타일러는 몸을 숙여 설명하기 시작했다. 타일러는 자신의 보호감찰 아래 마고 포즈너를 출감시켰다. 그는 순회재판소장에게 설명했다. "알고보니 마고 포즈너는 상당한 자질이 있는 미술가랍니다. 지금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내가 실형을 선고했지만 가능한 한 이런 사람을 갱생시키는 게 우리 사법부의 임무가 아닙니까?" 재판소장은 한편 놀라면서도 감동을 받았다. "타일러, 나도 동감이네. 정말 훌륭한 생각을 했군." 타일러는 마고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그로부터 5일간 스텐포드 가족에 대한 모든 것을 가르쳤다. "너의 오빠 이름은?" "타일러와 우드로프." "우드로프가 아니고 우드로야." "알았어요... 우드로." "그의 애칭이 뭐지?" "우디." "언니가 있나?" "있어요. 이름은 캔달, 패션 디자이너입니다." "언니는 결혼했나?" "프랑스 사람과 결혼했어요. 그 사람 이름은... 마크 르노와입니다." "르노와가 아니고 르노야." "르노, 알았습니다." "어머니의 이름은?" "로즈마리 넬슨. 어머니는 스텐포드가의 보모로 일했습니다." "왜 스텐포드가를 떠났지?" "해리 스텐포드가 그녀를 덮치는 바람에..." "마고! 그게 무슨 소리야!" 타일러가 눈을 흘겼다. "내 말은 해리 스텐포드와의 관계로 임신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스텐포드 부인은 어떻게 되었지?" "자살했어요." "어머니가 스텐포드가의 아이들 얘기를 해주었지?" 마고는 잠시 생각했다. "생가 안 나?" "당신이 백조 모양의 보트에서 물에 빠진 적이 있었어요." "물에 빠진 게 아냐!" 타일러가 말했다. "물에 빠질 뻔한 거야." "알았어요. 우디가 식물원에서 꽃을 꺾다가 모두 연행될 뻔한 적이 있었어요." "그건 우디가 아니고, 캔달이었어." 타일러는 사정없이 마고를 다그쳤다. 밤늦도록 마고가 각본을 완벽하게 소화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 개가 캔달을 물었어요." "캔달이 아니고 내가 물렸어!" 그녀는 눈을 비볐다. "너무 피곤해서 생각이 잘 안나요. 이젠 지쳤어요. 잠 좀 자고 나서 계속해요." "지금 잘 시간이 없단 말이야!" "언제까지 이렇게 계속할 거예요?" 그녀가 물었다. "완벽하게 각본을 소화할 때까지야. 자, 계속하자구." 이런 대화가 반복되면서 마고가 완벽하게 각본을 소화할 때까지 타일러는 멈추지 않았다. 며칠 후, 마고는 타일러의 모든 질문에 하나도 틀리지 않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타일러도 만족했다. "이제야 준비가 끝났어." 타일러는 이렇게 말하면서 마고에게 서류 몇 장을 건넸다. "이게 뭐지요?" "별 것 아냐. 그냥 거기 서명만 하면 돼." 타일러가 대답했다. 그 서류는 그녀의 소유가 될 스텐포드 기업의 주식 모두를 한 법인에게 넘기는 양도증서였다. 그 법인은 타일러 스텐포드가 백 퍼센트 주주인 또 다른 법인의 백 퍼센트 자회사였다. 따라서 그녀의 주식 양도가 타일러에게 연결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타일러는 마고에게 현금 5천 달러를 건넸다. "나머지 2만 달러는 일이 다 끝난 다음에 줄 거야." 타일러가 말했다. "당신이 줄리아 스텐포드라고 모두 믿게 되었을 때, 잔금을 지불할 거야." 마고가 로즈 힐에 나타났을 때 타일러는 의도적으로 그녀를 의심하는 척했다. 의심하는 척하면서 결국 진짜라고 확신시켜 줄 기회를 만들고 증거를 조작하려는 속셈이었다. 아마 우리 입장을 잘 이해할 것이라 생각하오... 어떠한 형태로든 당신이 즐리아라는 증거가 없으면 우리는 당신을 의붓동생으로 받아들이기 어렵... ...난 그녀가 가짜라고 생각... ...우리가 어렸을 때 집에서 일하던 하인이 몇 명이나 됐지?... 몇 십 명은 되었을 거야, 맞지? 그들 중 상당수가 방금 왔던 '줄리아'가 말한 내용을 알려줄 수 있었을 거야... 그 사진도 그 중 누군가가 그녀에게 주었을 수 있어... 지금 그녀가 엄청난 유산을... 타일러가 DNA 검사를 주장한 것도 그의 치밀한 계획의 일부였다. 그는 할 베이커를 시켜 아버지의 시신을 발굴해서 없애버리도록 지시했다. 사립탐정을 고용하자고 한 것 역시 기발한 착상이었다. 형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시카고 검찰청에 전화를 걸었다. 난 타일러 스텐포드 판사요. 검사장실에서 수시로 사립탐정을 고용해서 일을 시킨다는데, 아주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들었소. 그 사람 이름이 씨몬스라던가... 내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아, 프랭크 티몬스 말씀이로군요. 맞아. 바로 티몬스야... 내가 그 사람에게 직접 연락하고 싶은데 전화번호 좀 주시겠소? 실상 그는 할 베이커에게 연락했고, 그를 프랭크 티몬스로 소개시켰다. 처음에는 할 베이커에게 줄리아 스텐포드를 조사하는 척만 하라고 시킬 생각이었으나, 베이커가 제대로 조사한 결과를 보고하는 것이 훨씬 더 신빙성이 있을 것 같았다. 따라서 베이커는 마지막 부분만 빼고는 제대로 조사했고, 형제들은 그의 조사 결과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타일러의 계획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었다. 마고 포즈너는 완벽하게 줄리아 역을 해냈고, 지문을 대조함으로써 아무 의심의 여지없이 줄리아가 되었다. 난 유산 상속자가 한 사람 늘었더라도 줄리아가 우리의 의붓동생으로 밝혀진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 올라가서 뭔가 필요한 게 없는지 알아봐야겠어. 2층으로 올라가서 복도를 따라 줄리아의 방으로 갔다. 문을 두드리며 큰소리로 줄리아를 불렀다. 열려 있어요. 들어오세요. 타일러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 쳐다보았다. 잠시 후 타일러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두 팔을 벌리면서 미소 지었다. 마고! 우린 해냈어! 완벽하게 해낸 거야! 제 18장 렌퀴스트, 렌퀴스트, 피츠제랄드 법무법인 사무실에서 스티브 슬론과 싸이몬 피츠제랄드가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이 나라 덴마크가 뭔가 잘못되고 있어!'하는 표현이 기억납니까?" "왜? 뭔가 석연치 않은 게 있어?" 피츠제랄드가 물었다. 스티브가 한숨을 쉬었다. "글쎄요, 확실하게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스텐포드 가족을 대할 때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싸이몬 피츠제랄드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자네만 그런 게 아냐."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한 가지 의문이 계속 남아요. 싸이몬,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해답이 안 나오거든요." "무슨 의문인데?" "스텐포드 유족들이 줄리아를 자칭하고 나선 여자의 진위를 가리려고 해리 스텐포드의 시신을 DNA 검사를 해보려고 했잖아요. 따라서 누군가 그 시신을 없애버린 것은 그녀의 DNA와 해리 스텐포드 것을 대조할 수 없도록 한 것이 분명해요. 그러니까 만약 그녀가 가짜일 경우 그녀밖에는 시신을 없앨 동기를 가진 사람이 없는 게 되지요." "그래서?" "그런데 프랭크 티몬스라는 사립탐정은 그녀가 줄리아 스텐포드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하는 지문을 발견해 냈어요. 제가 직접 시카고 검찰에 조회해 본 결과 티몬스는 신뢰할 만한 사립탐정이라는 게 확인되었어요. 그렇다면 대체 누가 해리 스텐포드의 시신을 발굴했고,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해답이 안 나와요." "바로 그게 몇십 억 달러짜리 의문이지. 만약..." 인터폰이 울렸다.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론 씨, 전화 왔습니다." 스티브 슬론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슬론 씨, 나는 스텐포드 판사요. 오늘 오전에 로즈 힐로 좀 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스티브 슬론은 피츠제랄드와 눈을 맞추었다. "알았습니다. 한 시간 후면 되겠습니까?"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스티브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스텐포드 저택에서 호출입니다." "또 무슨 요구가 나올까?" "아마 상속 절차를 서둘러 그 엄청난 유산을 빨리 손에 넣고 싶어서 그러겠지요." "리? 나 타일러야. 어떻게 지냈어?" "잘 지내고 있어." "그 동안 네가 무척 보고 싶었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타일러, 나도 널 보고 싶었어." 그 말에 타일러는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했다. "리, 정말 엄청난 소식이 있어. 지금 전화로 얘기할 수는 없지만, 너를 정말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게 되었어. 나와 만나서..." "타일러, 난 지금 좀 바빠. 날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하지만..." 전화가 끊어졌다. 타일러는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래도 날 보고 싶지 않았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거야. 그는 생각했다. 우디와 페기 외의 스텐포드 유족들 모두가 로즈 힐의 거실에 모였다. 스티브 슬론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스텐포드 판사는 편안한 표정이었다. 캔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왠지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뉴욕에서 와 옆에 앉아 있었다. 스티브는 마크를 다시 한번 살펴 보았다. 아내보다 몇 년 연하인 마크는 뛰어난 용모였다. 마지막으로 줄리아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새로운 형제들 사이에 차분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누구든지 하루아침에 수십억 달러를 상속받게 되었다면 좀 흥분하는 게 정상이 아닐까? 스티브는 생각했다. 그들의 얼굴을 차례로 둘러보면서 그들 중 누가 해리 스텐포드의 시신을 없애버렸을지, 만약 그랬다면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타일러가 입을 열었다. "슬론 씨, 나는 일리노이 주의 상속법은 잘 알고 있지만, 매사추세츠 주는 어떤지 잘 모릅니다. 우리는 상속 절차를 조금이라도 빠르게 할 방법이 없는지 알고 싶습니다." 스티브는 미소 지었다. 싸이몬과 내기할 걸 그랬어. 그는 타일러에게 고개를 돌렸다. "스텐포드 판사님,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타일러가 다시 말했다. "스텐포드 가문의 이름을 내세우면 좀 빨라질 수 있지 않을까요?" 그건 맞는 말이야. 스티브는 생각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더 빨리..." 계단 쪽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입 닥치지 못해, 이 바보같은 년! 네 말은 한마디도 더 듣기 싫어. 알아들었어?" 우디와 페기가 계단을 내려와 거실로 들어왔다. 페기의 얼굴은 부어 올랐고, 한 쪽 눈은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싱글거리는 우디의 두 눈은 부자연스럽게 반짝였다. "어이, 모두들 안녕하슈. 잔치가 다 끝난 건 아니지요?" 모두들 페기의 몰골에 충격을 받았다. 캔달이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예요. 난 그저... 기둥에 부딪쳤어요." 우디가 자리잡고 앉자 페기는 옆에 따라 앉았다. 우디는 그녀의 손을 잡고 친절하게 물었다. "당신 정말 괜찮아?" 페기는 고개만 끄덕이고 입을 열지 못했다. "좋아." 우디는 다른 사람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 그 동안 무슨 얘기를 했지요?" 타일러는 찌푸린 얼굴로 우디를 쳐다보았다. "지금 슬론 씨에게 상속 절차를 빨리 할 수 있는가 묻고 있던 중이야." 우디는 계속 싱글거렸다. "그렇게 되면 좋지요." 그는 페기에게 말했다. "여보, 당신도 새 옷 좀 장만하고 싶지 않아?" "난 새 옷이 필요 없는데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래 맞아. 당신은 어디 외출할 데도 없잖아."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너무 내성적이거든. 남들과 대화할 줄도 몰라. 안 그래, 여보?" 페기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내가 따라가 보겠어요." 말하고는 캔달이 일어나 뒤따라 나갔다. 이런 세상에! 스티브는 생각했다. 남들 앞에서 아내를 저렇게 취급한다면 단둘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할까? 우디는 스티브에게 고개를 돌렸다 "피츠제랄드 법무법인에 들어간 지가 얼마나 되었소?" "5년 되었습니다." "그 법무법인이 어떻게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의 개인 변호사 역할을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해왔는지 이해가 안 돼요." 스티브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듣기에도 선친같은 의뢰인은 대하기 힘들었다고 하더군요." 우디는 코웃음 쳤다. "대하기 힘들었다구? 아버지는 발이 둘 달린 괴물이었소. 그는 우리 형제들 모두에게 별명을 붙였어요. 나를 찰리로 불렀지요. 꼭두각시 인형극으로 이름난 애드가 버건의 꼭두각시 이름을 딴 거요. 캔달은 얼굴이 길다고 포니라고 부르고, 타일러는..." 스티브는 듣기가 거북했다. "그런 얘기는 좀..." 우디는 다시 싱글거렸다. "괜찮소. 수십억 달러의 상속은 어떤 상처라도 치유할 수 있을 거요." 스티브가 일어났다. "자, 그럼 다른 말씀이 없으면 난 사무실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는 빨리 밖으로 나가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캔달은 욕실에서 부어 오른 얼굴에 얼음찜질을 하고 있는 페기를 찾았다. "페기 괜찮아요?" 페기가 말했다. "정말 괜찮아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난... 조금전에 내가 실수했던 것 같아요." "페기, 사과할 필요 없어요. 당신은 당연히 화를 내야만 돼요. 언제부터 우디가 때리기 시작한 거예요?" "우디가 때린 게 아니에요." 페기가 우겼다. "내가 기둥에 부딪친 거예요." 캔달은 좀더 가까이 다가섰다. "페기, 왜 이렇게 당하면서도 참는 거예요?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페기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난 참고 견뎌야 돼요." 캔달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왜 그래야 하죠?" "우디를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페기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우디도 날 사랑해요. 보통 때는 절대로 그렇게 행동하지 않아요. 문제는 우디가 때때로 이성을 잃는 데 있어요." "마약을 복용했을 때 말이지요?" "아니요!" "페기..." "아니요!" "페기..." 페기는 잠시 주저했다. "그래 맞아요." "언제부터 그랬지요?" "결혼 직후부터 그랬어요." 페기의 목소리가 떨렸다. "모든 게 폴로 경기에서 시작되었어요. 우디는 경기 도중 낙마해서 심하게 다쳤어요.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는 동안 통증이 심했기 때문에 진통제를 많이 쓰게 되었지요. 바로 그때부터 시작된 거예요." 그녀는 캔달에게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그건 우디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병원에서 준 진통제 때문에 중독된 거예요. 우디는 퇴원한 후에도 계속 마약을 찾게 되었어요. 그리고 내가 끊으라고 말할 때마다 날 때리는 거예요." "페기, 어쩌자고 그렇게 당하고만 있어요? 우디는 도움이 필요한 거예요. 그걸 모르겠어요? 당신 혼자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어요. 우디는 심한 중독자이잖아요. 요새 무슨 마약을 복용해요? 코카인?" "아니오." 잠시 주저했다. "헤로인." "맙소사! 전문가의 도움을 받도록 해보지도 않았어요?" "물론 해봤지요." 그녀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정말 여러번 시도했었어요. 벌써 세 번이나 마약중독자 요양원에 입원했었어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요양원에 들어갔다 나오면 얼마 동안은 멀쩡하다가 또다시 시작했어요. 아무리 해도 끊지 못할 것 같아요." 캔달은 페기를 감싸 안았다. "페기, 정말 미안해요. 그렇게 고생하다니..." 페기는 억지로 미소 지었다. "우디는 틀림없이 정상으로 돌아갈 거예요. 우디 스스로도 노력하고 있어요. 정말이에요." 잠시 말이 끊어졌다. 페기의 얼굴이 밝아지면서 다시 말했다. "우리가 결혼했을 때 우디는 정말 다정하고 우리 사이에 웃음이 떠난 적이 없었어요. 외출했다가 돌아올 때면 재미있는 선물도 사오고..." 페기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난 우디 없이는 못살 거예요!" "내가 도울수 있는 게 있으면..." "고마워요." 페기가 말했다.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캔달은 잡고 있던 페기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앞으로는 우리 자주 만나 얘기해요." 캔달은 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는 화려한 꿈이 있었지. 내가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하면 우디는 세계 최고의 운동선수가 될 거라고 큰소리쳤지. 정말 안타까워. 우디는 그렇게 될 자질이 충분했는데 이런 꼴이 되다니... 캔달이 혼자 고개를 저었다. 우디와 페기 중 과연 누가 더 딱한 사람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계단을 다 내려오자 클라크가 편지 한 통을 들고 다가왔다. "캔달 아가씨, 실례합니다. 방금 편지가 배달되었습니다." 그는 편지를 캔달에게 건넸다. 캔달은 놀란 표정으로 편지를 건네 받았다. "이 편지가 어디서..." 물으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고마워요, 클라크." 봉투를 열고 편지를 읽던 캔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럴 수가!" 신음하듯 내뱉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현기증으로 어지러워졌다. 꼼짝않고 계단 난간을 잡고 서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잠시 후 캔달은 창백해진 얼굴로 거실에 들어갔다. 스티브 슬론은 이미 떠났고 다른 사람들도 각자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크..." 캔달은 억지로 태연한 척했다. "잠시 나하고 얘기할 수 있어요?" 캔달의 창백한 얼굴을 쳐다보면서 마크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럼 우리 방으로 올라갈까?" 타일러가 캔달에게 물었다. "무슨 문제가 생겼어?" 그녀는 억지로 미소 지었다. "아니, 아니에요, 오빠. 아무 일도 없어요." 캔달은 마크의 손을 잡고 2층으로 올라가 그들의 침실로 들어가서 분을 닫았다. 마크가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캔달은 말없이 편지를 내밀었고, 마크는 그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르노 부인. 우선 축하 드립니다. 우리 야생동물 보호협회에서는 부인이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다는 소식에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인께서 우리 일에 얼마나 갚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지 잘 알기 때문에 앞으로도 우리 일을 계속 지원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열흘 이내에 알고 계시는 저희 쥬리히의 은행계좌로 미화 1백만 달러를 입금시켜 주십시오. 빠른 시일 안에 은행을 통한 부인의 회답을 기다리겠습니다. 전에 온 편지와 마찬가지로 E자 가운데 부분이 깨어져 나간 타자기를 사용한 게 분명했다. "망할 자식들!" 마크가 분통을 터트렸다. "내가 로즈 힐에 온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마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떤 신문이든 사회면을 읽어봤으면 쉽게 알 수 있지." 그는 편지를 한번 더 읽어보았다. "이렇게 계속 당할 수는 없어! 경찰에 수사를 의뢰해야겠어." "안 돼요!" 캔달이 소리쳤다. "경찰을 개입시킬 수는 없어요. 이제 너무 늦었어요. 그렇게 되면... 모든 게 끝나는 거예요. 모두 끝난단 말이에요." 마크는 캔달을 끌어안고 팔에 힘을 주었다.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 무슨 수가 생기겠지." 하지만 캔달은 아무 방법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6개월 전 어느 화창한 봄날, 그 서고가 일어났다. 캔달은 커네티컷주 리지필드로 친구의 생일 파티에 갔었다. 사람들과 얘기하면서 샴페인 한 잔을 마셨다. 그러다가 갑자기 남편과 뉴욕 시내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이 생각났다. 시계를 들여다본 캔달은 당황했다. "맙소사!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을 줄이야... 마크가 눈이 빠지게 기다리겠어." 캔달은 서둘러 작별인사를 하고 차를 몰았다. 뉴욕 시로 돌아오는 고속도로는 통행량이 많아 지체될 것 같았기 때문에 그녀는 좁은 시골길을 택했다. 시속 80킬로의 속도로 달릴 때, 갑자기 길이 급하게 굽은 곳이 나왔다. 도로 오른편에는 자동차 한 대가 정차하고 있었기 때문에 캔달은 반사적으로 왼편으로 핸들을 꺾었다. 바로 그 순간 방금 꺾은 들꽃 다발을 든 여자가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캔달은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이미 늦었다.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은 어렴풋하게밖에 기억할 수 없었다. 자동차 왼쪽 범퍼에 그 여자가 부딪치면서 충격을 느꼈다. 캔달은 자동차를 급정거 시켰다. 온몸이 떨려왔지만 캔달은 문을 열고 쓰러진 여자에게 달려갔다. 그 여자는 피투성이가 되어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캔달은 잠시 몸이 굳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고 쓰러진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맙소사!" 캔달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구역질이 나면서 토할 것만 같았다. 캔달은 그 자리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인적이 없었고, 자동차가 다가오는 기미도 없었다. 죽었잖아! 캔달은 생각했다. 이젠 내가 어떻게 해줄 수가 없어. 내 잘못이 아니었지만, 결국 나는 음주운전과 과실치사혐의로 기소될 거야. 지금 혈액검사를 하면 알콜성분이 검출될 거야. 그러면 감옥에 가게 돼. 캔달은 누워 있는 여자의 시신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는 서둘러 자신의 차로 돌아갔다. 자동차의 앞 범퍼 왼쪽은 우그러졌고, 혈흔도 묻어 있었다. 이 차를 어디든 발견되지 않을 곳에 감추어야겠어. 캔달은 생각했다. 경찰이 가해차량을 찾을 거야. 그녀는 차를 몰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곳을 떠나 뉴욕으로 돌아오는 동안 그녀는 계속 백미러로 뒤를 살폈다. 싸이렌 소리와 함께 경고등을 번쩍거리며 경찰차가 쫓아올것만 같았다. 캔달은 96번가에 있는 자신의 차고로 차를 몰았다. 차고 주인 쌤이 직원 한 사람과 얘기하고 있었다. 캔달은 차를 세운 다음 내렸다. "르노 부인, 안녕하세요?" 쌤이 말했다. "안... 안녕하세요?" 캔달은 몸이 떨려 이가 마주칠까 봐 걱정스러웠다. "오늘 저녁에는 다시 안 나가실 거지요?" "네. 주차 좀 시켜 주세요." 직원이 앞 범퍼를 들여다보았다. "르노 부인, 여기가 심하게 우그러졌는데요? 핏자국도 있는 것 같아요." 두 사람은 캔달을 쳐다보았다. 캔달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말했다. "그럴 거예요. 난... 시골길에서 사슴 한 마리를 치었어요." "그만하기가 다행입니다." 쌤이 말했다. "내 친구 한 명은 사슴과 부딪쳐 자동차가 엉망이 됐어요."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 사슴도 온전하게 남지는 못했지요." "그냥 주차만 시켜 주세요." 캔달이 말했다. "알았습니다." 캔달은 차고를 나오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아직도 앞 범퍼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캔달이 마크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그는 캔달을 감싸안고 말했다. :이런 세상에! 당신한테 어떻게 그런 일이..." 캔달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난... 난 어쩔 수 없었어요. 그녀가 갑자기 길로 튀어나오는 바람에 피할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아마... 들꽃을 꺾으려고..." "쉬! 그만 얘기해. 난 그게 당신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 불가항력이었잖아. 경찰에 신고해야 되겠어."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난... 그 자리에 남아 경찰이 오기를 기다려야 했어요. 마크, 난 그 순간 너무 당황해서 사고현장을 그냥 떠나 버린 게예요. 이제 이 사건은 뺑소니 사건이 됐어요. 하지만 그녀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녀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어요. 그 처참한 얼굴을 보면서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어요." 마크는 캔달이 진정될 때까지 그녀를 감싸 안고 있었다. 한참 만에 흥분이 가라앉은 캔달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마크... 꼭 경찰에 신고해야 돼요?" "그게 무슨 뜻이야?" 캔달은 울먹거리며 말했다. "어차피 상황은 끝났잖아요. 안 그래요? 어떻게 해도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는 없어요. 그런데 내가 벌을 받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요? 내가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왜 그냥 없었던 일로 덮어두면 안 돼요?" "캔달, 만에 하나 당신이 그랬다는 게 밝혀지면..." "밝혀질 리가 없잖아요? 목격자는 아무도 없었어요. 내가 만약 체포되어 징역을 살게 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았어요? 내 사업과 내가 여태껏 이루어 온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희생한다고 달라질 게 뭐 있어요? 왜 이미 끝난 일 때문에 그런 희생을 치러야만 돼요?" 그녀는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마크는 캔달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쉬! 그만 해. 좀더 생각해 보자구." 다음날 조간신문에 뺑소니 사건은 크게 보도되었다. 그 사고로 사망한 여자가 다음날 뉴욕에서 결혼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기사거리로 흥미를 끌었다. 뉴욕타임즈는 사회면 보도기사로 다루었지만 데일리 뉴스와 뉴스데이는 애절한 인간 드라마로 확대 보도했다. 신문기사를 읽은 캔달은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속으로 수없이 '만약'을 되풀이해 보았다. 만약 커네티컷으로 친구 생일 파티에 가지 않았다면... 만약 짐에 일이 생겨 그대로 있었더라면... 만약 그 샴페인 한 잔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 여자가 몇 초 전이나 몇 초 후에 꽃을 꺾었더라면... 나 때문에 한 여자가 죽었잖아! 캔달은 그 여자 가족들, 그리고 그녀 약혼자의 슬픔을 생각할 때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경찰은 뺑소니 사건의 단서를 찾고 있으며 현장 목격자의 신고를 기다린다고 했다. 나에게 연결시킬 수는 없을 거야. 캔달은 생각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행동하기만 하면 될 거야. 캔달이 차를 가지러 차고로 갔을 때,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핏자국은 다 닦아냈습니다." 그가 말했다. "범퍼를 수리해 드릴까요?" 참 그래야지. 왜 그 생각을 진작 못했을까? "그래요. 좀 고쳐 주세요." 그녀를 쳐다보는 직원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캔달은 자신이 너무 예민해진 게 아닌가 생각했다. "쌤과 어젯밤에 얘기했는데," 그가 말했다. "좀 이상해서요. 지금은 사슴이 나돌아 다니는 계절이 아니잖아요." 캔달은 가슴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입 안이 갑자기 말라붙는 듯 말하기도 어려웠다. "그건... 아주 작은 사슴이었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요." 캔달은 차를 몰고 나가면서 등뒤로 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캔달이 사무실로 들어가자 비서 나딘이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니, 무슨 일이 있었어요?" 캔달이 흠칫했다. "무... 무슨 일이라니?" "안색이 좋지 않아요. 어디 아프세요? 커피라도 좀 갖다 드릴까요?" "그래. 커피나 마시지. 고마워." 캔달은 거울로 다가갔다. 거울에 비쳐진 창백한 얼굴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내 얼굴만 봐도 내가 저지른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어! 나딘이 뜨거운 커피를 가지고 들어왔다. "자, 커피를 마시면 기분이 좀 좋아질 거예요." 그녀는 다시 캔달의 안색을 살폈다. "정말 괜찮아요?" "난... 어제 사고가 있었어." 캔달이 말했다. "그래요? 누가 다쳤어요?" 길바닥에 누워 있던 그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냐, 난... 내가 사슴을 치었어." "그럼 차는 어떻게 되었어요?" "지금 수리 중이야." "그럼 보험회사에 연락해야 되겠네요." "나딘, 필요 없어. 연락하지 마." 나딘이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 것을 캔달은 볼 수 있었다. 그로부터 이틀 후, 첫 편지가 날아들었다. 친애하는 르노 부인, 저는 극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는 한 단체의 책임자입니다. 저는 부인이야말로 우리 단체를 기꺼이 도와 주실 분이라는 생각으로 이 편지를 드립니다. 우리는 야생동물 보호에 앞장서는 단체입니다. 특히 야생 사슴이 계속 죽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우선 5만 달러를 쥬리히에 있는 크레디트 스위스 은행의 804072-A 계좌로 입금시켜 주십시오. 상황이 긴박하니 5일 내로 보내셔야 되겠습니다. 편지에 서명은 없었다. 타자로 친 편지에는 E자의 가운데 부분이 깨어진 듯 E자 모두가 온전치 못했다. 봉투 속에는 편지와 함께 뺑소니 사고를 보도한 신문기사가 들어있었다. 캔달은 편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말투는 정중했지만 협박하는 게 분명했다. 캔달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마크 말이 옳았어. 그녀는 생각했다. 진작 경찰에 신고했어야 하는 건데... 그러나 이제는 너무 늦었다. 이미 때를 놓친 것이었다. 만약 지금 발각되면 명예실추는 물론 사업도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고 징역을 살 게 분명했다. 캔달은 점심시간에 은행으로 갔다. "5만 달러를 스위스로 송금하려는데요..."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간 캔달은 그 편지를 마크에게 보였다. 마크는 충격으로 안색이 달라졌다. "아니, 이런! 어떤 놈이 이런 편지를 보냈지?" "누군지 짐작도 안 가요." 캔달은 몸을 떨고 있었다. "캔달, 누군가가 알아냈어." 캔달은 더 심하게 몸을 떨었다. "그때 아무도 없었는데... 마크, 난 어떻게 해야 되지요?" "가만있어 봐. 찬찬히 생각해 보자구. 뉴욕에 돌아와서 어떻게 했어? 구체적으로 말해 봐." "아무 일도 없었어요. 난... 난 그저 차를 차고에 넣고 나서..." 캔달이 말을 멈췄다. 르노 부인, 여기가 심하게 우그러졌는데요? 핏자국도 있는 것 같아요. 마크는 캔달의 표정이 달라지는 것을 알아챘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캔달이 천천히 대답했다. "차고 주인과 직원 한 사람이 있었어요. 내 차 앞 범퍼가 우그러지고 피가 묻은 것을 보았어요. 난 사슴 한 마리를 치었다고 했는데, 그들 말이 사슴과 부딪쳤다면 차가 더 심하게 부서졌을 거라고 했어요." 문득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마크..." "뭔데?" "내 비서 나딘 말이에요. 나딘에게도 같은 얘기를 했는데 아무래도 믿지 않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 그들 세 사람 중 한 사람일 거예요." "반드시 그렇지도 않아." 마크가 천천히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캔달, 거기 좀 앉아서 내 말을 들어 봐. 그들 중 한 사람이 당신을 수상하게 생각했다면 가까운 사람들에게 얘기했을 가능성이 높아. 그 사건은 신문마다 크게 보도되었잖아. 누군가가 들은 얘기와 신문 기사를 연결시켰을 거야. 이 편지는 일단 당신을 시험하려고 보낸 걸거야. 그러니까 오늘 돈을 송금한 것은 돌이킬수 없는 실수였어." "왜요?" "잘 생각해 봐. 이제 그들은 뺑소니 사건의 범인으로 확신하게 되었어. 돈을 보낸 게 당신이 그 일을 저질렀다는 증거가 되는 거야." "맙소사!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요?" 마크 르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녀석들의 정체를 알아내야 되는데... 한 가지 방법이 있어. 내가 한번 부딪쳐 볼게." 다음날 아침 10시, 캔달과 마크는 보스턴 제1투자은행 부행장인 러쎌 기본스를 찾아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기본스가 물었다. "쥬리히의 크레디트 스위스 은행의 한 계좌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어떻게요?" "그 계좌가 누구의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기본스는 손으로 턱을 만졌다. "혹시 범죄사건에 관계된 계좌입니까?" 마크가 황급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런 건 왜 물으시지요?" "왜냐면 돈세탁이나 스위스나 미국의 법을 어긴 사실이 입증되기 전에는 스위스 은행의 계좌번호로 그 임자를 알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위스 은행이 개인의 비밀을 철저히 지켜주는 것으로 명성이 높다는 것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미안합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캔달과 마크는 마주보았다. 캔달은 절망적인 표정이 역력했다. 마크가 일어섰다.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와 드리지 못해서 오히려 미안합니다." 기본스는 두 사람을 복도까지 전송했다. 캔달이 그날 저녁, 차고에 들어갔을 때 쌤이나 직원은 보이지 않았다. 캔달은 직접 차를 주차하고 작은 사무실 옆을 지나치다가 타자기 한 대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잠시 멈추고 타자기를 쳐다보면서 E자 가운데가 깨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확인해 봐야 되겠어. 그녀는 생각했다. 캔달은 사무실 문 앞에서 멈칫거리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 위의 타자기로 다가가는 순간, 갑자기 쌤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르노 부인." 그가 말했다. "뭐 도와드릴 게 있습니까?" 캔달은 깜짝 놀라 돌아섰다. "아니에요. 난 지금... 막 차를 주차시켰어요. 내일 또 봐요." 캔달은 서둘러 사무실을 나갔다. "안녕히 주무세요, 르노 부인." 다음날 아침, 캔달이 차고 사무실을 다시 지나갈 때 타자기는 그 자리에 없었다. 대신 개인용 컴퓨터 한 대가 그 자리에 있었다. 쌤은 캔달이 컴퓨터를 유심히 쳐다보는 것을 눈치챘다. "어때요, 좋지 않습니까? 우리 차고도 20세기 문명의 혜택을 좀 입을 때가 된 것 같아서요..." 하기여 쌤이 편지를 보냈다면 그까짓 컴퓨터쯤이야... 그날 저녁 마크에게 쌤 얘기를 털어놓았다. "그야, 가능성이 있지. 하지만 증거는 없잖아." 마크가 말했다. 월요일 아침, 캔달이 사무실에 들어왔을 때, 나딘은 벌써 출근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르노 부인, 기분이 좀 좋아지셨어요?" "그래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어제가 내 생일이었어요. 남편이 준 선물 좀 보시겠어요?" 그녀는 옷장으로 다가가 사치스러운 밍크 코트를 꺼냈다. "정말 멋있지요?" 제19장 줄리아 스텐포드는 쌀리와 함께 사는 것이 즐거웠다. 쌀리는 명랑하고 항상 긍정적이었다. 결혼에 한 번 실패한 다음부터는 남자와 깊은 관계를 갖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 그러나 줄리아는 쌀리가 말하는 '깊은 관계'의 정의가 어떤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녀는 주말이면 새로운 남자와 데이트를 즐겼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결혼한 남자와 데이트 하는 것이 속 편해." 쌀 리가 털어놓았다. "그들은 죄의식을 느끼기 때문에 항상 친절하고 선물이라도 사주려고 안달이지. 하지만 독신남자는 달라. '이 친구 왜 아직도 결혼 못했지?'라는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어." 어느 날 쌀리가 줄리아에게 물었다. "너 요즘 한 번도 데이트하는 걸 못 봤는데, 그렇게 아무도 없어?" "전혀 없어." 줄리아에게 추근거렸던 남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쌀리, 난 그저 데이트를 즐기려고 데이트하는 건 싫어. 내가 정말 좋아하고 가깝게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면 즐거울 수가 없어." "내가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어!" 쌀 리가 말했다. "너도 그 사람이 마음에 들거야. 이름은 토니 비네티야. 네 얘기를 했더니 소개해 달라고 계속 졸라댔어." "난 지금 데이트 할 생각이..." "내일 저녁, 8시에 데리러 오기로 했어." 토니 비네티는 농구선수 같이 키가 컸다. 그러나 왠지 호감이 가는 외모였다. 숱이 많은 짙은 색 머리에 활짝 웃는 얼굴로 줄리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쌀리가 과장한 게 아니었군! 이렇게 멋있는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고맙습니다." 줄리아가 대답했다. 그의 칭찬이 싫지 않았다. "휴스톤즈 레스토랑에 가본 적 있어요?" 휴스톤즈는 캔사스 시에서 제일 좋다는 레스토랑이었다. "없는데요." 실상 줄리아의 처지에서는 휴스톤즈 같은 비싼 레스토랑을 드나들 수 없었다. 최근에 월급이 올랐지만 자신의 수입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오늘 그곳에 예약했어요."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토니 혼자서 자신에 관한 얘기를 떠들어댔다. 하지만 줄리아는 개의치 않았다. 토니는 매력적이고 명랑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 아주 기막힌 멋쟁이야! 쌀리가 말했었다. 지나친 과장은 아니었다. 음식은 최고급이었고 줄리아는 오랜만에 맛있는 요리를 즐겼다. 후식으로 줄리아는 초콜릿 수플레를 시켰고, 토니는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식사가 끝나고 커피를 마시면서 줄리아는 생각했다. 이제 자기 아파트로 가자고 할 차례가 됐는데, 만약 그런다면 따라가야 되나?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첫 데이트부터 그럴 수는 없지. 날 아주 싸구려 여자로 보게 될 거야. 다음에 또 만난다면... 웨이터가 계산서를 가져왔다. 토니가 들어오면서 말했다. "맞는 것 같은데..." 그는 계산서의 내역을 한 가지씩 따졌다. "당신은 전채로 파테를 주문했고, 주식은 바닷가재가 맞지요?" "그래요." "그런 다음 프랜치 후라이와 쌜러드, 그리고 후식은 수플레, 맞지요?" 줄리아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랬어요..." "알았어요." 그는 잠시 속으로 계산한 다음 말했다. "이 계산서에서 당신 몫은 50달러 40쎈트요." 줄리아는 충격을 받았다. "뭐라고 하셨지요?" 토니는 싱글거렸다. "요즘 개성이 강한 여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난 잘 알고 있어요. 남자들에게 의존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잖아요. 자, 그럼." 그는 선심 쓴다는 듯 말했다. "팁은 내가 모두 내지요." "정말 미안해. 잘될 줄 알았는데..." 쌀리가 말했다. "토니는 정말 매력적인 남자거든. 앞으로 종종 만날 거야?" "내 주머니 사정 때문에 안 되겠어." 줄리아가 대답했다. "그럼 또 한 사람이 있는데, 내가 소개할게. 이 사람은 아주..." "쌀리, 그러지 않아도 돼. 난 지금 데이트 생각이..." "나한테 맡겨 둬." 테드 리들은 삼십대의 매력적인 남자였다. 그는 역사 유적지인 스트로베리 힐에 있는 제니즈 레스토랑으로 줄리아를 데려갔다. 그곳은 전통적인 크로아티아 음식으로 유명한 레스토랑이었다. "쌀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되겠소." 리들이 말했다. "당신같이 아름다운 사람을 소개해 주었으니까..." "고맙습니다." "내가 광고대행사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까?" "못들었는데요." "나는 캔사스 시에서 제일 큰 광고대행사를 가지고 있어요. 나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아, 그러세요. 저는..." "우리는 전국적으로도 이름난 기업들을 의뢰인으로 확보하고 있어요." "그러세요? 난 잘..." "그럼요. 우리는 유명인사, 다국적은행, 재벌기업, 연쇄점..." "글쎄, 나는..." "...슈퍼마켓 연쇄점. 우리 회사는 모든 분야에서 의뢰인을 확보하고 있어요." "참 굉장..." "내가 어떻게 사업을 일으켰는지 얘기할까요?"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그는 계속 자랑을 늘어놓았다. 줄리아는 입을 열 기회가 한 번도 없었고, 그의 화제는 테드 리들 외에는 없었다. "그 사람은 아마 너무 긴장해서 그랬을 거야." 쌀리가 무안한 듯 변명했다. "그 사람이 긴장했다구? 속이 불편했던 건 바로 나야. 테드 리들이 태어난 날부터 어떤 것이라도 그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 "제리 맥킨리!" "뭐라구?" "제리 맥킨리 말이야. 이제 막 생각났어. 한때 내가 알던 여자와 데이트 했었지. 그 여자는 제리에게 홀딱 빠졌었어." "쌀리, 생각은 고맙지만 그만둬." "지금 전화해 봐야겠어." 그 다음날 저녁, 제리 맥킨리가 찾아왔다. 그는 잘생긴 용모에 따뜻하면서도 세련된 매너를 가지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줄리아와 마주쳤을 때, 그가 말했다. "다른 사람 소개로 첫 데이트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나도 사실은 좀 내성적인 편이기 때문에 쑥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여자 입장은 더 어렵겠지요?" 줄리아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두 사람은 스테이트가에 있는 에버그린이라는 중국 식당으로 갔다. "당신은 건축설계 사무소에서 일한다고 들었어요. 아주 흥미 있는 직장이라고 생각해요. 대부분 사람들은 건축설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상대방 생각도 해줄 줄 아는 사람이야. 줄리아는 생각했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저녁식사는 유쾌하게 끝났다. 제리와 대화의 꽃을 피우면서 줄리아는 점점 더 그에게 마음이 끌렸다. 그녀는 과감하게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집에 가서 한잔 더 하시겠어요?" 줄리아가 물었다. "아니, 그럴 것 없이 내 아파트로 갑시다."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있어요?" 그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줄리아의 손을 잡았다. "내 아파트로 가야 도구가 다 있거든요." "도구라구요? 무슨 도구?" "채찍과 쇠사슬 말이에요." 헨리 웨슨은 피터스, 이스트만, 톨킨 건축설계 사무소와 같은 건물에 있는 회계법인의 대표였다. 줄리아는 1주일에 두세 번은 그와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쳤다. 그는 예의바르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삼십 대 중반 나이, 연한 금발에 검은 테 안경을 쓴 지적인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서로 가볍게 목례하는 정도의 인사가 어느새 '안녕하세요.'가 되고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로 발전했다. 몇 달이 지나자 드디어 '시간 나실 때 저녁식사라도 같이하는 게 어떻습니까?'에 다다랐다. 그는 숨을 죽이고 줄리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줄리아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헨리 웨슨은 첫 데이트에서 사랑에 빠졌다. 그는 줄리아를 캔사스의 최상급 레스토랑 중 하나인 EBT로 안내하면서 그녀와 데이트하는 게 즐겁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헨리 웨슨은 저녁식사 동안 자신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하지 않았다. "나는 바로 이곳, 캔사스 시에서 태어났어요. 아버님도 여기서 태어나셨지요. 도토리가 나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 들어봤어요?" 줄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회계사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대학을 졸업하자 비글로, 벤슨 금융회사에 취직했어요. 얼마 전에 독립해서 회계법인을 세웠어요." "아주 잘됐군요." 줄리아가 말했다. "내 얘기는 그게 전부예요. 이제 줄리아 얘기를 들어봅시다." 줄리아는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억만장자의 사생아예요. 아마 내 아버지 이름을 들어봤을 거예요. 최근에 익사했다는 뉴스로 떠들썩하잖아요? 나도 그 엄청난 유산의 상속권이 있어요. 그녀는 품위 있게 꾸며진 레스토랑 내부를 둘러보았다. 이런 식당쯤은 몇 개라도 살 수 있을 거야! 유산을 상속받는다면 캔사스 시 거의 전부를 살 수도 있을 거야! "줄리아,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어요?" 줄리아가 한동안 아무 말도 않자 헨리가 물었다. "아, 참. 미안해요. 나는 위스컨신 주 밀워키 시에서 태어났어요. 아...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단둘이서 살았어요. 어머니의 직장 때문에 우리는 자주 이사 다녔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나는 이곳에 정착해서 일자리를 구한 거예요." 적당히 꾸며 대는 것도 쉽지 않군! 헨리 웨슨은 테이블 위로 줄리아의 손을 잡았다. "그러면 여태까지 남자의 사랑과 보호를 받은 적이 없었군요." 그는 몸을 당기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지금부터 언제까지나 당신을 보호해 주고 싶어요." 줄리아는 헨리의 말에 깜짝 놀랐다. "내 사고방식이 너무 구식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얘기를 하기에는 너무 이르잖아요?" "이제 곧 나를 잘 알게 될 겁니다. 나는 실없는 말은 하지 않아요." 집에는 쌀 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땠어?" 쌀리가 물었다. "첫 데이트 재미있었어?" 줄리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아주 예의바르고 따뜻한..." "그 사람 너한테 홀딱 반한 거야!" 줄리아는 미소 지었다. "그 사람 나한테 청혼한 것 같아." 쌀리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뭐라구? 청혼한 것 같다니? 세상에! 청혼했으면 했고 안 했으면 안 했지, 한 것 같은 게 뭐야?" "헨리는 나를 언제까지나 보호해 주고 싶다고 했어." "그건 청혼이야!" 쌀리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건 확실한 청혼이야. 빨리 받아들여! 그 사람 생각이 바뀌기 전에 받아들이고 결혼식을 올려야 돼!" 줄리아가 웃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급해? 난 아직 결혼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내 말만 들으면 돼! 집으로 초대하는 거야. 음식 준비는 내가 알아서 할게. 그 사람에게는 네가 만들었다고 하면 되잖아." 그 말에 줄리아는 다시 웃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어. 내가 정말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초대한다면 내 음식솜씨로는 중국음식이라도 시켜와야 되겠지만 식탁이라도 내 손으로 정성껏 예쁘게 차릴거야." 두 번째 데이트에서 헨리는 결혼 얘기를 더 적극적으로 했다. "이곳 캔사스 시만큼 아이들 낳고 키우기 좋은 곳은 없을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문제는 줄리아가 헨리의 아이를 낳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데 있었다. 그는 착하고 예의바르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쌀리와 상의해 보았다. "헨리가 계속 결혼하자고 졸라대." 줄리아가 말했다. "네 생각은 어때?" 줄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헨리와 데이트하면서 낭만적이거나 흥분했던 적이 있었는가 되새겨 봤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헨리는 착하고 예의바르고 믿을 수 있는..." 쌀 리가 웃으며 줄리아의 말을 끊었다. "한마디로 무미건조한 사람이라는 말이지?" 줄리아는 변명조로 말했다. "반드시 무미건조하다고는 할 수..." 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미건조한 사람이 틀림없어. 결혼해!" "뭐라구?" "서둘러 결혼하란 말이야. 착하고 무미건조한 남편감이 그렇게 흔한 줄 알아?" 줄리아와 쌀리는 빠듯한 수입으로 생계를 꾸려 가는 게 쉽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는 월급에서 세금과 기타 부과금을 제하고 나면 아파트 임대료와 차량유지비, 식비, 그리고 옷을 갖추는 것도 쉽지 않았다. 줄리아는 제일 작은 일제 도요타를 몰고 다녔지만, 때로는 차량유지비로 수입의 대부분을 없애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갖고 있지 않은 쌀리에게 돈을 빌리기 일쑤였다. 어느 날 저녁, 줄리아가 외출복을 갈아입을 때 쌀리가 물었다. "또 헨리와 데이트하는 거야? 맞지? 오늘 저녁은 어디 가기로 했어?" "오늘은 음악회에 가기로 했어. 클레오 레인의 연주가 있대." "헨리가 아직도 결혼하자고 졸라대?" 줄리아는 잠시 주저했다. 실상 헨리는 만날 때마다 결혼하자고 졸랐다. 자신이 결정을 내려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선뜻 그의 청혼을 받아들일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머뭇거리다가 기회를 놓치지 마!" 쌀리가 경고했다. 쌀리 말이 맞아. 줄리아는 생각했다. 헨리 웨슨은 훌륭한 남편감이야. 착하고 예의바르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잖아... 그만하면 충분한 거 아냐? 줄리아가 밖으로 나가려 할 때, 쌀리가 소리쳤다. "네 검은색 구두 좀 신어도 되니?" "그럼." 말하고 줄리아는 나갔다. 쌀리는 줄리아의 침실에 들어가 옷장문을 열었다. 빌리려던 구두는 선반 위에 놓여 있었다. 구두를 집으려다가 그 옆에 있던 종이상자를 건드렸고, 상자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상자 속에 있던 물건들이 흩어졌다. "이런..." 쌀리는 바닥에 흩어진 종이를 줍기 시작했다. 대부분 신문기사 스크랩과 잡지기사들, 그리고 사진이었다. 수백 장이나 되어 보이는 기사와 사진 모두가 해리 스텐포드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 때 방문이 열리면서 줄리아가 다시 들어왔다. "내가 깜빡 있고..." 바닥에 흩어진 사진과 기사 스크랩을 보고 줄리아는 말을 멈추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미안해." 쌀리가 말했다. "구두를 집으려다 이 상자를 떨어뜨렸어." 줄리아는 얼굴을 붉히며 몸을 구부려 흩어진 사진과 기사를 상자에 주워 담았다. "난 네가 유명한 재산가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많은 줄 몰랐어." 줄리아는 아무 대꾸없이 상자를 정리하고 있었다. 사진 여러 장을 주워 모으다가 금으로 만든 작은 하트 모양의 펜던트를 발견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줄리아에게 남긴 물건이었다. 줄리아는 그 펜던트를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쌀 리가 의아한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줄리아?" "왜?" "어째서 해리 스텐포드에게 관심을 가졌지?" "내가 관심이 있었던 게 아냐. 이건... 어머니가 남긴 것들이야." "아, 그래." 쌀리는 그래도 납득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녀는 기사 한 장을 집어들고 읽었다. 가십 잡지의 기사였다. '재벌총수, 보모를 임신시키다... 사생아 출산... 모녀 함께 종적을 감추다!'라는 머릿기사가 눈에 띄었다. 줄리아를 다시 한번 쳐다본 쌀리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이런 세상에! 네가 바로 해리 스텐포드의 딸이구나!" 줄리아는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저으면서 상자를 계속 정리했다. "왜 대답이 없어? 내 말이 맞지?" 줄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제발 이러지 마! 난 그런 얘기 하고 싶지도 않아." 쌀리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언성을 높였다. "그런 얘기는 하기도 싫다고? 아니, 자기가 세계적으로 이름난 억만장자의 딸인데, 그런 얘기는 하기도 싫다고? 줄리아, 너 정말 제 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쌀리, 이봐..." "아니, 해리 스텐포드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잘 알잖아. 수십억 달러는 될 거야."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네가 그 사람 딸이라면 상관이 있고말고. 넌 상속권자야. 이제 유족들과 만나 네가 누구라는 것을 밝히기만 하면..." " 안 돼." "안 된다구?" "넌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줄리아는 침대에 걸터 앉았다. "해리 스텐포드는 아주 고약한 인간이었어. 그는 어머니를 버렸고 나도 얼굴조차 마주친 적이 없어. 어머니는 그를 증오했고 나도 그 사람 이름만 들어도 몸서리쳐져." "그렇게 많은 유산을 남겼는데 몸서리쳐진다구? 말도 안 돼. 그럴때는 그 사람을 관대하게 이해해 줘야 되는 거야." 줄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난 그 사람 유산에 상관하기 싫어." "줄리아... 막대한 재산의 상속권을 가진 사람이 이런 쓰러져가는 아파트에 살면서 임대료 낼 때면 돈을 꾸어야 되고, 옷을 사려면 싸구려 할인매장이나 찾아다녀야 하는 생활을 한다는 건 말이 안 돼. 네 가족이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몹시 언짢아 할 거야." "그들은 내가 살아 있는지조차 몰라." "그렇다면 네가 나서서 알려야 하는 거 아냐?" "쌀리..." "왜?" "그 얘기는 더 이상 하지 마." 쌀리는 한동안 줄리아를 쳐다보았다. "좋아. 하지 않을게. 참, 내 월급날까지 1, 2백만 달러쯤 빌려줄 수 있겠어?" 밤 제20장 타일러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지난 24시간 동안 계속 리에게 전화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누구 와 같이 있을까?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생각할수록 커지는 질투심으로 그는 안절부절 못했다. 그는 수 화기를 다시 들고 다이얼을 눌렀다. 한참 동안 신호가 울려도 대답이 없었다. 할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 으려는 순간 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리!! 그 동안 잘 있었어?" "누구지?" "리! 나야 나! 타 일러야." "타일러?" 잠시 말이 끊어졌다. "아, 그래. 잘 있었어?" 리의 반응에 타일러는 약간 실망하지 않 을 수 없었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그저 그랬지." 리가 대답했다. "내가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 있을 거라고 말했던 것 생각나?" "그랬었나?" 리는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전에 내게 하얀 보트를 타고 남불 해안의 명승지를 유람하는 게 소원이라고 했었지?" "그래서?" "내달쯤 남불 해안으로 떠나는 게 어때?" "아니, 정말이야?" "물론이지. 장난이 아니야!" "글쎄... 그럴 수 있을까? 갑자기 요트를 가진 친구라도 생겼어?" "내가 요트를 구입할 거야." "이봐, 판사님, 뭐 이상한 것 먹은 거 아냐?" "이상한 것 이라니? 아니, 그런 게 아니고, 나한테 돈이 좀 생겼어. 엄청난 액수가 말이야." "남불 해안을 유람한다? 거 참 괜찮은 생각인데... 좋아. 같이 가기로 하지!" 타일러는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좋아. 정말 즐거 운 여행이 될거야. 그럼, 그 때까지는..." 다른 사람을 가까이하지 말라고 하려다가 그런 일은 입에 올리 기도 싫어 그만두었다. "내가 곧 다시 연락할게."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침대에 걸터 앉았다. 좋아. 같 이 가기로 하지! 리와 함께 멋있는 호화 요트를 타고 명승지를 찾아 세계를 돌아다니는 환상에 사로잡 혔다. 이젠 리를 놓아주지 않을 거야. 타일러는 직업별 전화번호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존 알든 요트 보스턴의 상업용 부두 근처에 있었다. 타일러가 들어서자 영업부장이 다가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제가 도와 드릴 게 있으면 말씀하시지요." 타일러는 그를 쳐다보면서 별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요트 한척 구입하러 왔소." 이제는 억만장자가 된 기분으로 태연하게 말할수 있었다. 아버지의 요트 블루 스카이 호가 상속재산으로 될 것이 분명했지만 형제들과 함께 사용하기는 싫었다. "대형 요트 말씀입니까, 아니면 돛으로 항해하는 소형 요트 말씀입니까?" "글쎄, 나는... 대형과 소형이 어떻게 구분 되는지 잘 모르겠소. 하지만 그 요트로 세계 일주를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다면 대형이어야 되겠 군요." "그리고 흰색이어야 되오." 영업부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알겠습니다. 대강 얼마나 큰 요트를 생각하십니까?" 블루 스카이 호의 길이는 60미터였다. "길이가 70미터 정도는 되어야겠소." 영업부장은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아, 그러십니까. 그렇게 큰 요트는 가격이 대단히 높을 텐데... 성함이 어떻게..." "타일러 스텐포드 판사요. 내 아버지가 해리 스텐포드요." 영업부장의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가격은 문 제가 아니오." 타일러가 말했다. "물론 그러시겠지요. 스텐포드 판사님, 저희가 모든 사람이 부러워 할 만한 요트를 찾아 드리겠습니다. 물론 흰색으로요. 우선 매물로 나온 요트의 사진첩을 드릴 테니 천천히 검토해 보시고, 그 중 맘에 드는 요트가 있으면 즉시 연락 주십시오." 우디 스텐포드는 폴로 경기용 말 생각에 빠져들었다. 여태까지 한번도 자신의 말을 타고 경기에 출전 해 본 적이 없었다. 항상 남의 말을 빌려 탔었다. 하지만 이제 어떤 명마라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는 미미 카슨에게 전화했다. "당신이 가진 폴로용 말 모두를 사겠어." 우디가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잠 시 미미 카슨의 말을 듣다가 계속했다. "그래, 맞아. 모두 한꺼번에 사겠다는 말이야. 장난이 아냐. 그 래..." 통화는 30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았을 때, 우디는 싱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페기 를 찾아 밖으로 나갔다. 페기는 베란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우디의 손찌검으로 그녀의 얼굴은 멍투성이였다. "페기..." 그녀는 지친 표정으로 우디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요?" "나와 얘기 좀 해. 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페기는 말없이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디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말했다. "난 내가 형편없는 남 편이었다는 걸 잘 알아. 내가 한 짓들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아. 하지만 이제부터는 모든 게 달라질 거야. 이제 우리는 부자가 됐잖아. 엄청난 재산을 갖게 된 거라구. 이제부터는 당신을 호강시켜 줄 수 있어." 그는 페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정말 마약을 끊을게. 정말이야. 그렇 게 되면 우리 결혼생활은 완전히 달라질거야." 페기는 우디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낮은 목소리 로 물었다. "우디, 정말 달라질 수 있어요?" "그럼. 내가 맹세하지. 물론 전에도 맹세하고 나서 다시 마 약으로 돌아간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절대 그러지 않을 거야. 나도 더 이상 계속하면 끝장이라는 것 을 잘 알고 있어. 최고의 요양원에 입원해서 완전히 회복될 수 있는 치료를 받을 거야. 나도 이 지옥 같 은 생활에서 벋어나고 싶어. 페기..." 그의 목소리가 점점 애원조로 변했다. "나 혼자서는 할 수 없을 것 같아. 당신도 잘 알잖아..." 페기는 한참 쳐다보다가 그를 감싸 안았다. "잘 알고말고요..." 페기는 속삭였 다. "너무나 잘 알아요. 내가 도울게요..." 마고 포즈너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타일러는 서재에서 그녀와 만났다. 문을 닫은 다음 타일러가 말했다. "마고, 그 동안 수고 많았어. 정말 잘해 주었어." 그녀는 미소 지었다. "나도 재미있었어요.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그녀의 얼굴에 장난기가 떠올랐다. "아예 배우가 되는 게 어떨까 생각 중이에요." 타일러도 미소 지었다. "정말 연기력이 대단하더군. 그리고 이번 연극은 대성공이었지." "그랬지요." "자, 이건 약속했던 돈이야." 그는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시카고행 비행기표도 들어 있어." "고마워요." 타일러는 시계를 보았다. "비행기를 놓치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되겠어." "알았어요. 정말 판사님께 감사 드리고 싶어요. 감옥에서 나오고, 이런 재미있는 일에 돈까지 생겼으니, 모두 판사님 덕분이에요." 타일 러는 다시 한번 미소 지었다. "모두 잘 되었으니 서로 좋은 일 아니겠어? 그럼 잘 가라구." "고마워요." 타일러는 마고가 짐을 싸러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쳐다보면서 생각했다. 체스 게임은 끝났어. 장군! 외 통수야! 마고 포즈너가 짐을 다 챙기고 가방을 닫을 때 캔달이 들어왔다. "줄리아, 잠깐 얘기 좀..." 캔달은 침 대 위에 놓인 여행가방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지금 뭘 하는 거지?" "난 집에 갈 거예요." 캔달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아니, 지금? 왜 그렇게 서두르지? 난 줄리아와 좀더 시간을 갖고 그 동안 못했던 얘 기를 더 하고 싶었는데..." "나도 그러고 싶지만,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지요." 캔달은 침대 모서리에 걸 터앉았다. "줄리아를 만난 건 정말 기적이야. 그 오랜 세월을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지내왔잖아." 마고는 계속 가방을 챙겼다. "그래요. 이건 기적이나 마찬가지예요." "아마 지금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겠지? 평 범한 생활을 하다가 한순간 누군가가 10억 달러를 쥐어 주면 인생이 갑자기 달라지지 않겠어?" 마고는 손동작을 멈췄다. "뭐라구요?" "내 말은..." "10억 달러라고 했어요?" "그래.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우리 모두 그 정도는 상속받을 거야." 마고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우리 모두가 10억 달러를 상속 받는 다구요?" "그럼, 모르고 있었어?" "몰랐어요." 마고는 천천히 말했다. "아무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어요." 마고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캔달, 당신 말이 맞아요. 서로 좀더 친해지기 위해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타일러는 베란다에서 구입할 요트를 고르느라 사진첩을 뒤적이고 있었다. 클라크가 다가와 말했다. "스텐포드 판사님, 실례합니다. 전화가 왔습니다." "여기서 받지." 시카고의 퍼씨 재판소장의 전화였다. "타일러?" "예, 타일러입니다." "깜짝 놀랄 소식이 있네." "뭔데요?" "자네가 수석판사로 임명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나?" 타일러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렇게 되면 내게는 큰 영광이지 요." "자네를 수석판사로 임명하기로 했네!" "난... 뭐라고 말해야 될지..." 뭐라고 말해 줘야 되나? 억만 장자가 지저분한 시카고의 순회재판소에 앉아 범죄자들의 형량 선고나 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해? 난 내 요트로 세계를 유람해야 하기 때문에 판사 노릇 할 시간이 없다고 할까? "시카고로 언제 돌아올 수 있나?" "시간이 좀 걸리겠어요." 타일러가 말했다. "여기 정리해야 될 일이 제법 많아요." "알았네. 일 끝 나는 대로 빨리 오라구. 모두들 기다리니까." 기다리다가 목이 빠지지 않을까? "그럼 나중에 뵙죠." 타일 러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시계를 보았다. 마고가 공항으로 떠날 시간이었다. 그는 작별인사를 하려고 2층 으로 올라갔다. 마고의 침실에 들어선 타일러는 그녀가 짐을 다시 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약간 놀 란 표정이었다. "아직 준비가 안 됐어?" 마고는 그를 쳐다보고 미소 지었다. "아뇨. 짐을 풀고 있는 중이 에요. 짐 싸다가 생각해 보니 이곳이 마음에 들어서요. 당분간 여기 남기로 했어요." 타일러는 얼굴을 찌 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곧 시카고행 비행기를 타야 되잖아." "판사님, 비행기 편이 어디 한둘인가 요?" 그녀는 싱글거렸다. "기분 내키면 비행기 한 대쯤 살 수도 있는데요, 뭘." "그게 무슨 소리야?" "나 보고 장난으로 몇 사람 속이는 연극을 해 달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막상 장난이 끝나고 보니 그건 장난이 아니더군요. 내겐 이제 10억 달러를 상속받을 권리가 생긴 거예요." 타일러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장 여기서 나가!" "왜 그래요? 내가 가고 싶을 때 가겠어요." 마고가 말했다. "난 아직은 갈 생각이 없어요." 타일러는 마고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뭘 바라는 거 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 그렇게 나오셨어야지. 내 몫으로 돌아올 10억 달러를 그대로 가로 채려고 했지요? 안 그래요? 난 처음엔 당신이 상속재산을 조금 더 차지하려고 이 연극을 꾸민 줄 알았 어요. 하지만 그게 10억 달러라니! 이건 완전히 차원이 달라요. 난 이제 몇 푼 받고 떠날 생각이 없어 요." 그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클라크가 말했다. "점심 준비가 되었습니다." 마고가 타일 러에게 말했다. "가서 점심 드세요. 난 중요한 일이 있어서 점심식사할 시간이 없어요." 그날 저녁 무렵, 로즈 힐에는 포장된 상자가 줄줄이 배달되었다. 알마니 정장, 스카씨 스포츠 웨어, 조 단 마쉬의 내의 등 최고급 의류가 상자마다 여러벌씩 들어 있었고, 니만 마커스의 쎄이블 코트와 까띠 에의 다이아몬드 팔찌도 있었다. 상자마다 수신인은 줄리아 스텐포드로 되어 있었다. 저녁 5시에 마고가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타일러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지로 참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야?" 타일러가 말했다. 마고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몇 가지 필요한 물건을 샀어요. 생각해 봐요. 당신 누이동생은 우아하게 차려입고 다니잖아요. 나만 초라하게 보일 수는 없죠. 스텐포드 이름만 대면 어떤 상점이라도 그냥 물건을 보내 주는데 놀랐어요. 대금은 알아서 지불해 줄 거죠?" "줄리아..." "줄리아가 아니고 마고예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건 그렇고, 멋있는 요트 사진을 여러장 봤는데 한 척 사려고 그러세요?"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냐." "글쎄, 상관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우리가 함께 여행을 떠날 수도 있잖아요. 새 요트 이름을 '마고'라고 하는 게 어때요? 아니면 '줄리아'로 할까요? 같 이 세계 일주를 하는 것도 좋겠네요. 난 혼자 있는 게 질색이거든요." 타일러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다 음 말했다. "내가 마고를 과소평가 했던 것 같아. 정말 머리 회전이 빠르군." "판사님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건 대단한 칭찬인데요." "그렇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 제 분수를 모르지는 않겠지?" "글쎄요... 판사님은 내 분수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시죠?" "현찰로 1백만 달러." 마고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 했다. "그럼 오늘 주문한 물건들은 그대로 갖는 거예요." "좋아. 그건 별도의 선물로 주지." 마고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좋아요. 그럼 모두 합의한 거예요." "좋아. 돈은 빠른 시일 내에 주도록 할게. 나도 며 칠 내로 시카고에 돌아갈 거야." 그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마고에게 건넸다. "내 집 열쇠야. 집에 가 서 날 기다리라구. 아무도 만나지 말고 이런 얘기도 하면 안 돼." "알았어요." 마고는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좀더 달라고 했어도 괜찮을 뻔했잖아. "곧 떠날 수 있는 비행기 편을 예약해 주 지." "내가 주문했던 물건들은 어떻게 하고요?" "바로 집으로 보내 줄 테니 염려 마." "좋아요. 이번 일 로 우리 두 사람 다 잘된 거지요?" 타일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만족해." 타일러는 로간 국제공항으로 마고를 데리고 갔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마고가 물었다. "다른 사람들 에게 뭐라고 할거예요? 내가 이렇게 갑자기 떠난 이유를 설명해 줘야 되잖아요." "남미에서 온 친한 친 구가 갑자기 입원하게 돼서 달려갔다고 둘러댈 거야." 마고는 아쉬운 듯 타일러를 쳐다보았다. "판사님, 요트 여행을 같이 했더라면 아주 재미있었을 텐데... 좀 섭섭하네요." 탑승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이제 탑승해야 겠어요." "그럼, 여행 잘 하라구." "고마워요. 며칠 후에 시카고에서 만나요." 타일러는 그녀가 비행기에 탑승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비행기가 움직이고 굉음을 내면서 이륙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던 리무진에 탄 타일러는 운전사에게 말했다. "로즈 힐로 돌아가자구." 집에 돌아온 타일러는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 시카고의 순회재판소장 퍼씨에게 전화했다. "타일러, 우리 모두 자네가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네. 언제쯤 돌아올 거지? 자네 승진 축하 파티를 계획하고 있 거든." "곧 일이 끝날 겁니다." 타일러가 대답했다. "그런데, 문제가 좀 생겼어요. 날 좀 도와 주셔야겠어 요." "물론이지. 무슨 문제인데?" "내가 갱생시켜 보려던 전과자 문제예요. 마고 포즈너라는 여잔데, 내 가 돕겠다고 하던 것 기억하십니까?" "기억하고말고. 그 여자가 무슨 문제를 일으켰나?" "정말 딱하게 됐어요. 그녀가 정신질환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자신이 내 누이동생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혔어요. 보 스턴에까지 찾아와서 그런 소리를 하기에 정신차리라고 타일렀더니 날 죽이려고 했어요." "이런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지금 시카고로 돌아갔습니다. 내 집 열쇠를 훔쳐 갔는데, 이제 무슨 짓을 할지 모 르겠어요. 아주 심각한 정신착란증으로 생각됩니다. 우리 형제들을 다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어요. 아무 래도 리드 정신요양원에 입원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팩스로 서류를 보내주시면 서명해서 다시 보내겠 습니다. 정신과 의사와는 내가 직접 통화하지요." "알았네. 타일러, 걱정하지 말게. 내가 바로 처리할 테 니." "고맙습니다. 마고 포즈너는 유나이티드 항공 307편으로 오늘 저녁 8시에 도착할 겁니다. 공항에 사 람을 내보내서 바로 연행하는 게 좋겠어요. 여자라고 깔보면 안 된다고 주의시켜야 됩니다. 리드요양원 의 격리수용시설에 입원시키고 면회도 금지시켜야 될 겁니다." "알았네. 다 알아서 처리하지. 타일러, 그 런 일을 당하다니 정말 안됐군." 타일러는 담담하게 말했다. "판사로서 전과자들을 돕다 보면 별일이 다 생기는 거지요. 그렇다고 그런 노력을 하지 않을 수는 없죠." 저녁 식탁에 모두 모였을 때 캔달이 물었다. "줄리아는 어디 갔어요?" 타일러가 대답했다. "급한 일이 생겨 아까 떠났어. 인사도 못하고 가서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고 하더구나. 남미에서 온 가까운 친구가 쓰러졌는데, 자기가 꼭 돌보아 줘야 한다면서 서둘러 갔다." "하지만 상속 절차도 끝나지 않았는..." "줄 리아는 내게 상속 관계 일체를 위임했어. 그리고 자신 몫의 상속재산은 신탁재산에 편입해 달라고 부탁 했다." 하인이 보스턴의 명물인 대합 수프를 타일러 앞에 놓았다. "아." 타일러가 말했다. "냄새가 아주 좋은데. 오늘 저녁은 특별히 맛있을 것 같군." 유나이티드 항공 307편은 시카고의 오헤어 국제공항 상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정시에 보스턴을 출발 해서 예정대로 시카고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기내 방송이 들려왔다. "신사 숙녀 여러분, 저희 항공기는 지금 곧 착륙하겠습니다. 안전벨트를 매고 좌석 등받침을 제자리로 돌려주십시오." 마고 포즈너는 시카 고로 가는 동안 계속 즐거운 공상에 들떠 있었다. 이제 곧 생길 백만 달러와 최고급의 옷과 보석 등 보 스턴에서 산 물건들을 어떻게 즐길까 하는 공상이었다. 내가 그때 체포되었기에 이런 행운을 잡을 수 있었던 거야! 전화위복이라더니, 정말... 비행기가 착륙하고 공항청사에 멈추자 마고는 손가방을 챙겨 비 행기에서 내렸다. 한 승무원이 그녀의 뒤를 바짝 쫓았다. 밖에는 앰뷸런스 한 대가 있었고, 그 옆에 의 사 한 사람과 흰 유니폼을 입은 두 명의 구급요원이 서 있었다. 뒤따라오던 승무원이 그들을 보고는 손 으로 마고를 가리켰다. 마고가 계단을 다 내려오자 그 중 한 사람이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마고는 그 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지요?" "마고 포즈너 양 맞습니까?" "그런데요. 무슨..." "나는 지머만 박사입 니다." 그는 마고의 팔을 잡았다. "우리하고 같이 가 주어야겠습니다." 그는 마고를 앰뷸런스 쪽으로 끌 었다. 마고는 지머만이 잡고 있던 팔을 뿌리쳤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에요! 왜 이러는 거예요?" 그녀 가 소리쳤다. 두 사람의 구급요원이 양쪽으로 다가와서 마고의 두 팔을 잡았다. "포즈너 양, 조용히 따라 오는 게 좋을거요." 지머만이 말했다. "사람 살려!" 마고가 소리쳤다. "날 좀 도와줘요!" 비행기에서 내리 던 승객들이 모두 걸음을 멈추고 쳐다보았다. "누구 나 좀 도와줘요!" 마고가 소리쳤다. "지금 이 사람들 은 날 납치하는 거라구요. 난 사실 줄리아 스텐포드예요! 난 해리 스텐포드의 딸이란 말이에요!" "물론 그런 줄 알아요." 지머만 박사가 다독거렸다. "이제 좀 진정해요." 승객들은 마고가 소리지르고 발버둥치 면서 앰뷸런스에 실리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앰뷸런스 안에 들어가자 지머만은 주사기를 꺼내 마고 의 팔에 찔렀다. "자, 진정해요." 그가 말했다. "이제 곧 편안해질 거요." "당신들 모두 미쳤어요?" 마고 가 소리쳤다. "안 그러고야 어떻게..." 자신도 모르게 눈꺼풀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앰뷸런스는 문을 닫고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타일러는 그 보고를 받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탐욕스러운 전과자가 정신병원으로 강제 연행되는 장면을 연상해 보았다. 그녀가 평생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조치하려고 마음먹었다. 이제 체스는 정 말 끝났어. 그는 생각했다. 완벽하게 해낸 거야. 아버지는 내가 스텐포드 기업의 경영권을 차지한 것을 알고 저승에서 길길이 뛰겠지. 하여간 이제는 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줄 수 있게 되었어. 모든 것 이 완벽하게 끝난 셈이었다. 그날 있었던 일 모두가 타일러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제 스트레스를 좀 풀어야겠어. 그는 가방을 열고 깊숙이 숨겨 두었던 댐론의 안내책자를 꺼냈다. 책에는 보스턴 시내의 게이 바 몇 군데가 소개되어 있었다. 그는 보일스톤가에 있는 퀘스트라는 바를 선택했다. 그곳에 가려면 서둘러야겠어. 너무 늦으면 재미없거든. 줄리아와 쌀리는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쌀리가 물었다. "어젯밤 헨리와 재미있었어?" "항상 똑같 지 뭐." "계속 무미건조하단 말이야? 결혼 계획은 어떻게 좀 진전이 있어?" "또 그소리야?" 줄리아가 말 했다. "헨리는 정말 착한 사람이지만..."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결혼 상대로는 생각할 수 없어." "헨리가 결혼 상대가 못 될는지는 모르지만," 쌀리가 말했다. "이건 다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녀는 줄리아에게 봉투 다섯 개를 건넸다. 모두가 청구서였다. 줄리아는 하나씩 열어 보았다. 그 중 세 개는 독촉장이었고, 또 하나는 '제3차 독촉장'이었다. 줄리아는 잠시 말없이 청구서를 들여다보았다. "쌀리, 나한테 돈 좀 빌 려줄 수 있어?" 쌀리는 줄리아를 쳐다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뭘 이 해할 수 없단 말이야?" "넌 죽도록 일하고도 네 앞도 추스리지 못하잖아. 전화 몇 통만 해도 몇 백만 달 러가 생길 수도 있는데 말야." "그건 내 돈이 아냐." "어째서 네 돈이 아냐?" 쌀리가 소리쳤다. "해리 스 텐포드가 네 아버지 맞지? 그러니까 넌 그 유산을 상속받을 권리가 있는 거야. 이건 움직일 수 없는 사 실이야." "난 그 일에 상관하고 싶지 않아. 해리 스텐포드가 어머니와 나를 어떻게 취급했는지 말했잖아. 나한테 한푼이라도 남겼을 리가 없어." 쌀리는 한숨을 쉬었다. "빌어먹을... 난 백만장자와 친해졌다고 좋 아했는데..." 두 사람은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줄리아의 도요타가 온데간데 없었다. 멍한 표정으로 빈자리 를 쳐다보던 줄리아가 말했다. "차가 어디로 갔지?" "어젯밤에 틀림없이 여기에 주차시켰어?" 쌀리가 물 었다. "확실해." "그렇다면 누가 훔쳐간 게 분명해." 줄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닐 거야." "그럼 어떻게 된 거지?" 그녀는 쌀리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할부금융사에서 회수해 간 것 같아. 난 벌써 할부금을 세 번이나 못 냈거든." "잘한다!" 쌀리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잘하는군!" 쌀리는 줄리아의 처지가 무척 안타깝게 느껴졌다. 이건 동화에 나오는 얘기 같아. 쌀리는 생각했다. 공주가 자신이 공주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얘기... 하지만 줄리아는 자신이 공주라는 사실을 알고 있 잖아. 쓸데없는 고집 때문에 공주 노릇을 하려고 들지 않는 거야. 그 엄청난 유산을 받을 권리가 있는데 도 할부금을 제대로 못내 자동차를 뺏기다니... 이건 뭔가 잘못됐어. 본인이 그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다 면 나라도 나서 줘야겠어. 결국 나한테 고맙다고 하게 될 거야. 그날 저녁 줄리아가 외출한 다음 쌀리는 종이상자에 든 기사 스크랩을 다시 들춰보았다. 최근 기사에서 스텐포드 유족들이 보스턴 로즈 힐 저택 에 모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주가 궁궐로 가지 않겠다면, 쌀리는 생각했다. 공주가 어디 있다 는 것을 궁궐에 알려야지. 쌀리는 책상에 앉아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봉투의 수신인은 타일러 스텐포드 판사였다. 제21장 타일러 스텐포드는 가석방 중인 마고 포즈너를 시카고의 리드 정신요양원에 입원시키는 서류에 서명 했다. 담당 판사 외에도 세명의 신경정신과 의사의 동의가 필요했지만 그건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것 을 타일러는 잘 알고 있었다. 타일러는 여태까지 진행되어 온 자신의 계획을 차근차근 검토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문제 가 생길 여지가 없었다. 드미트리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잠적했고, 마고 포즈너는 정신요양원에서 여생 을 보내게 되었다. 할 베이커가 남아 있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인간은 누구나 약점이 있기 마련이 고 베이커의 결정적인 약점은 그의 가족이었다. 그럼, 베이커는 절대로 입을 열지 않을거야. 감옥에 가 서 가족과 헤어지게 되는 것을 죽기보다 더 두려워하잖아. 모든 게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 상속 절차가 끝나자마자 시카고로 돌아가서 리를 만나야지. 아예 남불 해안의 쌍 트로페에 집을 사버릴까? 공상이 점점 퍼져 나갔다. 내 요트로 세계를 유람하는 거야. 난 베니스를 꼭 가보고 싶었거든... 포시타노에도 가보고... 카프리도... 케냐에서 사파리 여행을 하고 인도에서는 달빛 아래 타지 마할을 산책해야지. 이게 모두 아버지 덕이야. 그 고약했던 아버지 덕이지. '타일러, 넌 호모야... 어떻게 너 같은 게 내 핏줄로 태 어났는지...' 아버지, 어때요? 호모 아들이 결국 아버지를 몰아냈잖아요? 타일러는 점심식사를 하러 우디 와 캔달이 모여 있는 아래층 식당으로 갔다. "줄리아가 그렇게 갑자기 떠나 버려서 서운해요." 캔달이 말했다. "좀더 같이 지내면서 친해지고 싶었 는데..." "급한 일이 끝나면 즉시 돌아오지 않겠소?" 마크가 말했다. 돌아오고 싶어서 안달이겠지. 타일러 는 생각했다. 하지만 막 포즈너는 절대로 요양원을 떠날 수 없을 것이다. 모두들 유산 상속 후의 계획에 대해 얘기를 주고받았다. 페기가 주저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우디는 폴로용 말 한 떼를 살 거래요." "말 한 떼라니, 내가 무슨 목장을 하는 줄 알아?" 우디가 소리쳤다. "폴로용 말 한 조를 사겠다는 말이 야. 무식하기는..." "미안해요, 여보. 난 그저..." "그럼 입 닥치고 가만있어!" 타일러가 캔달에게 물었다. "넌 어떻게 할 생각이니?" ...우리 일을 계속 지원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열흘 이내에... 1백만 달러를 입 금시켜 주십시오... "캔달?" "아, 나... 나는 사업을 확장할 거예요. 런던과 파리에 새 부티크를 열 계획이 에요." "정말이요? 나도 구경이라도 해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페기가 말했다. 이번에는 캔달이 타일러 에게 물었다. "오빠는 유산을 상속받으면 뭘 할 거예요?" 타일러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거의 자 선사업에 쓸 거야. 도움을 기다리는 훌륭한 자선단체가 꽤 많거든." 그는 형제들의 대화를 건성으로 듣 고 있었다. 장래 계획을 얘기하는 형제들을 쳐다보면서 타일러는 생각했다. 내가 아니었으면 너희들은 한푼도 못 받았을 거야. 타일러는 우디에게 고개를 돌렸다. 우디가 마약 중독자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돈이 생겨도 달라질 게 없을 거야. 타일러는 생각했다. 이제 마음놓고 마약을 살 수 있 게 되었군. 그는 우디가 어디서 마약을 구하는지 궁금했다. 타일러는 캔달을 쳐다보았다. 캔달은 디자이 너로서 성공했고 품위있는 숙녀로 성장해 있었다. 캔달 옆 자리에 앉은 마크는 페기와 얘기하고 있었다. 정말 잘생기고 매력적인 남자야! 왜 남자는 여자와 결혼하는 거지? 마지막으로 페기에게 눈길을 돌렸다. 타일러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페기를 딱하게 생각했다. 우디의 학대를 왜 참고 사는지 이해할 수가 없 었다. 사랑은 맹목적이라더니... 우디와의 결혼생활이 행복할 수 없었을 텐데... 타일러는 지금 자기가 벌 떡 일어나 자신의 치밀한 계획이 어떻게 시행되었는지 다 쏟아놓으면 형제들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궁금했다. 난 스텐포드 기업 주식의 51퍼센트를 확보했어! 난 아버지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무덤에 서 시신을 파내 없애버렸어! 게다가 의붓여동생 행세를 할 여자까지 고용했어! 라고 소리치고 싶은 충동 을 참으며 타일러는 빙그레 웃었다. 혼자만 알기에는 아까운 비밀이었다. 점심식사가 끝난 다음 타일러는 침실에 들어가서 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갔지만 대답이 없었 다. 타일러는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또 다른 사람과 나갔군. 요트로 유람하자는 내 말을 믿지 않 는 것 같아. 두고 보라구. 곧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상속 절차는 왜 이렇게 질질 끄는 거지? 아무래도 피츠제랄드나 그 젊은 변호사 스티브 슬론이란 친구에게 전화로 독촉해야겠어. 노크 소 리가 들려왔다. 밖에는 클라크가 서 있었다. "실례합니다, 판사님. 편지가 왔습니다." 나의 수석판사 임명 을 축하하는 순회재판소장의 편지인 모양이군. "고마워, 클라크." 그는 편지를 건네받았다. 발신인 주소 는 캔사스 시로 되어 있었다. 타일러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잠시 들여다보다가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 했다. 스텐포드 판사님. 저는 판사님에게 줄리아라는 의붓여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려고 이 편지를 씁니다. 줄리아는 돌아가신 해리 스텐포드 씨와 로즈마리 넬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 이곳 캔사 스 시에 살고 있습니다. 주소는 1425 매트캐프로, 3B, 캔사스 시 캔사스 주입니다. 직접 연락을 주신다면 줄리아도 기뻐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줄리아의 친구로부터... 타일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꼼짝 않고 편지를 들여다 보았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안 돼!" 그는 소리쳤다. "이건 안 돼!" 이럴수는 없어! 모든 게 완벽하게 끝난 마당에 이건 말도 안 돼! 이건 가짜인지 도 몰라. 하지만 왠지 편지에 소개된 줄리아는 진짜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제 유산상속권을 주장하려고 나타난단 말이지. 어림도 없어. 그건 내 거야! 타일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히 생각했다. 줄리아는 유산을 상속받을 자격이 없어. 여기에 나타나도 안 돼! 그렇게 되면 내 계획이 한꺼번에 무너져 버린다 구. 이전에 나타났던 줄리아를 어떻게 설명하지?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 돼!" 즉시 처치해 버려 야 돼. 그는 수화기를 들고 할 베이커의 번호를 눌렀다. 제22장 피부과 의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비슷한 증세는 전에도 몇 번 보았지만, 이렇게 심한 것은 처음입 니다." 할 베이커는 손등을 긁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베이커 씨, 이 증세의 원인은 세 가지 중 하나일 겁니다. 이같은 가려움증은 곰팡이 균이나 알레르기, 또는 신경성으로 생깁니다. 그런데 선생의 피부 샘 플을 현미경으로 검사한 결과 일단 곰팡이 균은 없다고 판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직업상 화학약품을 접 한 적도 없다고 하셨으니..." "전혀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난 겁니다. 선생의 증세는 신 경성 피부질환이 분명합니다." "그럼 심각한 겁니까? 치료방법은 있습니까?" "다행히 신경성 피부질환은 치료가 가능합니다." 의사는 사무실 한쪽 구석에 있는 캐비넷에서 연고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아직도 손이 가려우세요?" 할 베이커는 계속 긁어댔다. "아주 심해요. 손에 불이 붙은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 럼, 이 연고를 좀 발라 보세요." 할 베이커는 연고를 짜 손에 바르기 시작했다. 그 즉시 효과가 있었다. "금세 가려움증이 없어졌는데요? 이건 기적 같아요." 할 베이커가 말했다. "좋아요. 그럼 그 약을 계속 쓰도록 하세요. 이제 괜찮아질 거예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정말 이제 살 것 같아요." "그 약은 그냥 가져가시고 더 필요할 때를 생각해서 처방전을 써 드리죠." "감사합니다."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할 베이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타일러 스텐포드 판사를 만난 후, 손이 가렵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뭔가 짓누르고 있던 것으로부터 해방된 느낌이었다. 차 를 차고에 놓고 부엌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계속 휘파람을 불었다. 아내 헬렌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 가 왔었어요." 아내가 말했다. "존스 씨라는데, 아주 급한 일이래요." 그의 손이 다시 가렵기 시작했다. 그는 다른 사람을 폭행한 적은 있었지만 그것은 가족을 사랑했기 때문에 한 짓이었다. 범죄에 빠져들었 던 것도 모두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였다. 할 베이커는 여태까지 자신이 크게 잘못한 일이 없다고 믿 었다. 그러나 이번 일은 달랐다. 이것은 계획적인 살인이었다. 존스 씨에게 전화를 건 베이커는 그 일을 거부했었다. "판사님, 그건 할 수 없어요. 다른 사람을 찾아보십시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당신 가족들 은 잘 지내고 있소?" 캔사스 시행 항공편은 정시에 이륙했다. 스텐포드 판사는 상세한 정보를 알려주었었다. 이름은 줄리아 스텐포드, 주소와 아파트 호수는 이미 알려주었고... 그녀는 당신이 나타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으니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거요. 찾아가서 바로 처치하시오. 그는 택시를 타고 시내로 들어갔다. "날씨 한번 좋군요." 택시 운전사가 말했다. "그래요." "어디서 오셨지요?" "뉴욕이요. 거기서 살지요." "뉴욕은 굉장한 도시잖아요?" "네, 대단한 도시에요. 참, 집수리용 도구를 좀 사야 되는데, 큰 철물점이 어디 있 죠? 거기서 내려 주세요." "알겠습니다." 5분 후, 할 베이커는 철물점 직원에게 말했다. "사냥용 칼이 필 요한데요." "사냥용 칼은 여러 가지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베이커는 날이 15센티 정도 되고, 칼등 이 톱니 모양으로 된 것을 골랐다. "그게 마음에 드십니까?" "이 칼이면 되겠어요." 할 베이커가 말했다. "현금으로 계산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신용카드를 쓰실 겁니까?" "현금이오." 그 다음에는 문방구에 들렀 다. 할 베이커는 매트캐프로 1425번지 아파트 건물을 5분 정도 살펴보았다. 입구와 비상구의 위치를 자세 히 살펴보고 떠났다. 저녁 7시쯤 어둑어둑해질 무렵 베이커는 다시 돌아왔다. 만약 줄리아 스텐포드가 직장에 다닌다면 늦은 시각에야 집에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기다린 것이었다. 아파트에는 경비원이 없 었다. 엘리베이터가 있었지만 그는 비상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의 좁은 공간에 갇혀 있기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3B호는 복도 왼쪽 끝에 있었다. 사냥칼은 상의 안쪽에 테이프로 붙여 놓았다. 할 베 이커는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미모의 젊은 여자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활짝 미 소 짓는 얼굴이었다. "어떻게 오셨지요?" 그녀는 상상했던 것보다 나이가 어려 보였다. 베이커는 왜 스 텐포드 판사가 그녀를 죽이려 하는지 궁금했다. 지금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냐! 그는 명함을 꺼내 그녀 에게 건넸다. "전 닐슨 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이 지역에 우리 회사의 시청률 조사를 맡는 사람이 없어서 참여를 권하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에는 관심 없어요." 그녀는 문을 닫으려 했다. "우린 주당 백 달러를 지급합니다." 반쯤 닫히던 문이 멈추었다. "주당 백 달 러라구요?" "그렇습니다." 다시 문이 활짝 열렸다. "지금 보고 계신 프로그램을 써 주시면 됩니다. 1년 동안 그렇게 해주시는 조건으로 연간 계약을 맺으려는 겁니다." 그럼 5천 달러가 넘잖아! "들어오세요." 그녀가 말했다. 베이커는 안으로 들어갔다. "좀 앉으세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 "알렌, 짐 알렌입니다." "알렌 씨, 어떻게 저를 선택하게 되셨죠?" "저희 회사에서는 임의표본을 만들고 그 중에서 텔레비전 방 송과 무관한 사람을 고릅니다. 시청률 조사의 객관성을 지키려는 것이지요. 혹시 직업이 텔레비전 방송 국이나 프로그램 제작자와 관계가 있는 건 아닙니까?"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오. 전혀 관계없어 요. 계약을 맺으면 구체적으로 제가 할 일이 뭔가요?"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가 작성한 양식에 시청한 프로그램을 표시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컴퓨터로 각 프로그램의 시청 횟수를 집계하고 시청 률을 산출합니다. 시청률 조사에 참여하는 회원은 미국 전역에 퍼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시청률의 지역 분포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참여해 보시겠습니까?" "좋습니다." 베이커는 조사용 서식으로 보이는 서류와 펜을 꺼냈다. "하루에 몇 시간이나 텔레비전을 시청하십니까?" "난 하루 종일 직장에서 일하기 때문에 텔레비전을 볼 시간이 많지 않아요." "하지만 집에 오면 보시지요?" "그럼요. 저녁 뉴스를 듣고 때로는 옛날 영화도 보지요. 라리 킹 뉴스 쇼를 좋아합니다." 베이커는 메모했다. "그 럼 교육방송도 시청하십니까?" "일요일에는 PBS를 봐요." "참, 여기서 혼자 사십니까?" "룸메이트가 있 어요. 지금 외출 중이에요." 예상대로 여자 둘이서만 살고 있군. 손이 다시 가렵기 시작했다. 베이커의 손이 상의 안쪽 테이프로 붙여 놓은 사냥칼 손잡이에 닿았다. 순간 복도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칼에서 손을 뗐다. "그렇게만 하면 연간 5천 달러를 준단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참, 깜빡 잊은 게 있습니다. 현금 외에도 칼라 텔레비전을 선물로 드립니다." "그게 정말이에요?" 복도의 발자국 소리 가 점점 멀어졌다. 베이커의 손이 다시 칼자루에 닿았다. "미안하지만 냉수 한잔 주시겠습니까? 하루 종 일 쏘다니다 보니..." "그럼요." 베이커는 거실 한쪽 구석에 있는 주방으로 걸어가는 그녀를 쳐다보면서 칼을 뽑아 들고 뒤따랐다. "내 룸메이트는 나보다 더 PBS를 좋아해요." 그녀가 컵에 물을 따르며 말했 다. 그녀의 등뒤에 다가선 베이커는 그녀를 내리치려고 칼을 치켜들었다. "줄리아는 나보다 더 지적이거 든요." 칼을 든 베이커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줄리아?" "내 룸메이트 말이에요. 정확하게 말하면 룸메 이트였지요. 어디론가 떠나 버렸어요. 집에 돌아오니 당분간 여행을 떠나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다는 메 모만 있었어요. 어떻게 된..." 물컵을 들고 돌아선 그녀는 칼을 잡고 치켜든 손을 보았다. "아니, 이게..." 그녀의 비명이 건물 전체에 울려 퍼졌다. 할 베이커는 몸을 돌려 밖으로 뛰쳐나갔다. 할 베이커는 즉시 타일러 스텐포드 판사에게 전화했다. "지금 캔사스 시에 와서 그녀를 찾아가 봤는데 벌써 어디론가 떠나 버렸습니다." "뭐라구?" "그녀의 룸메이트가 떠났다고 했습니다." 타일러는 잠시 생 각했다. "아무래도 보스턴으로 올 것 같아. 당신도 즉시 이곳으로 와야겠어." "알겠습니다." 타일러는 수 화기를 내동댕이치고 방 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 계획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었 는데... 어떻게든 그녀를 찾아 처치해야만 했다. 그녀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 설사 상속 절차가 당장 끝나고 자신이 스텐포드 기업의 51퍼센트 주주가 된다 해도 그녀가 살아 있는 한 자신의 입지는 위태로 웠다. 빨리 찾아야 돼! 타일러는 생각했다. 서둘러야 돼!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하지? 클라크가 들어왔 다. "실례합니다, 판사님. 줄리아 스텐포드 양이 판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제23장 줄리아가 보스턴에 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캔달 때문이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던 줄리아는 세련된 의상실 쇼윈도에 걸려 있는 캔달 스텐포드 르노 디자인의 아름다운 드레스를 보았다. 줄리아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동안 그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바로 내 언니가 디자인한 드레스야. 줄리아 는 생각했다. 어머니와 내가 버림받은 것은 언니와는 상관없는 일 아야. 오빠들도 마찬가지지. 갑자기 캔달과 오빠들을 만나보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혼자 살아가던 줄리아는 가족이 그리웠다. 사무실로 돌 아온 줄리아는 맥스 톨킨에게 며칠간 휴가를 달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멋쩍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가불 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톨킨은 미소지었다. "물론이지. 줄리아는 너무 오랫동안 쉬지 않고 일해왔잖아. 가끔 휴가도 가야 돼. 자, 이 돈으로 휴가 잘 보내고 와." 보스턴에 가서 잘 지낼 수 있을까? 내가 혹시 큰 오산을 하는 게 아닐까? 줄리아는 생각했다. 줄리아가 집에 돌아왔을 때, 쌀리는 아직 퇴근 전이었다. 쌀리가 올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줄리아는 결단을 내렸다. 마음먹었을 때 떠나지 않으면 머뭇거리다가 결국 못 가게 될 거야. 즉시 챙기고 쌀리에 게 메모를 남긴 다음, 집을 나섰다.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면서도 줄리아는 자꾸만 의구심이 떠올랐다. 지금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왜 갑자기 보스턴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아니, 갑자기가 아니잖아. 거의 20년 동안 생각하던 일 아냐! 몇 번이나 생각이 바뀌었다. 하지만 만나본 적이 없는 형제들을 만난다는 기대감을 감출 수는 없었다.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언론을 통해 오빠 한 사람은 판사이고 또 한사람은 유명한 폴로 선수, 그리고 언니는 이름난 패션 디자이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두가 뛰어난 사람들이 잖아! 그런데 난 뭐야? 혹시 날 깔보지 않을까... 그들과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줄리아는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보스턴으로 향했다. 보스턴의 싸우스 스테이션에 도착한 줄리아는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잡았다. "어디로 가십니까?" 운전 사가 물었다. 줄리아는 갑자기 당황했다. 원래 로즈 힐로 가자고 할 생각이었으나 입이 잘 떨어지지 않 았다. "잘 모르겠어요." 그녀가 얼떨결에 말했다. 택시 운전사가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글 쎄, 나도 아가씨가 어디로 가야 되는지 모르는데요..." "그럼 시내를 좀 둘러볼 수 있겠어요? 전 보스턴 이 처음이거든요." 운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택시는 썸머가를 따라 보스턴 컴먼 공원에 도착했다. 운전사가 말했다. "이곳이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립공원입니다. 식민지 시대에는 여기서 죄 수들을 공개처형 했다고 합니다." 줄리아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난 겨울이면 아이들에 게 스케이트를 태워 주려고 컴먼 공원에 데려가곤 했지. 우디는 운동 신경이 탁월했어. 줄리아, 네가 꼭 만나봤으면 좋겠어. 우디는 정말 잘생긴 아이였어. 난 항상 그 애가 형제 중에 제일 성공할 거라고 생각 했어. 마치 어머니가 옆에서 이야기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택시는 퍼블릭 가든의 입구가 있는 챨 스가로 접어들었다. 운전사가 말했다. "저기 구리로 만든 오리 상들이 보이지요? 믿기 힘들겠지만 오리 상 하나하나마다 이름이 있답니다." 아이들과 퍼블릭 가든으로 자주 피크닉 갔었지. 입구에는 구리로 된 예쁜 오리 상이 있었는데 모두 이름이 있었지. 잭, 캑, 랙, 넥, 맥, 웩, 팩, 그리고 켁이라고 불렀어. 어린 줄리아는 그 이름들이 너무 재미있어서 어머니에게 그 얘기를 다시 해달라고 졸라대곤 했었다. 줄리아 는 택시의 미터기를 보았다. 택시 요금이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그리 비싸지 않은 추천할 만한 호텔이 있을까요?" "물론이지요. 코플리 광장 호텔이 있을까요?" "물론이지요. 코플리 광장 호텔이 어떻습니 까?" "그럼 거기 좀 데려다 주시겠어요?" "알았습니다." 5분 후, 택시는 호텔 입구에 멈췄다. "즐거운 시 간 보내세요." 즐거운 시간이 될지 아주 불쾌한 시간이 될지는 모르는 일이지. 줄리아는 요금을 지불하 고 호텔로 들어갔다. 카운터에 있는 직원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뭘 도와드릴까요?" 직원이 물었다. "방이 하나 필요한데요." "혼자 묵으실 거지요?" "네." "얼마 동안이나 계실 겁니까?" 줄리아는 주저했 다. 몇 시간? 몇 달? "좀 있어 봐야 되겠는데요." "알겠습니다." 그는 열쇠를 찾아 줄리아에게 건넸다. "4층에 있는 조용한 방입니다. 혼자 쓰시기에는 불편함이 없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줄리아는 숙박부 에 줄리아 스텐포드로 서명했다. 직원이 다시 말했다. "저희 호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방은 좁았지만 깨끗했고, 정돈이 잘되어 있었다. 짐을 풀고 정리가 끝나자 줄리아는 쌀리에게 전화했 다. "줄리아? 이런 세상에! 지금 어디 있어?" "여기 보스턴이야." "너 괜찮아?" 쌀리가 물었다. "그럼, 왜 그래?" "어떤 사람이 우리 집에 왔었는데 널 찾았어. 널 죽이려고 했던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사람이 칼을 빼 들었어... 그 표정은 생각만 해도..." 쌀리는 숨 가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줄리아 스 텐포드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순간 달아나 버렸어." "믿어지지 않아." "그 사람이 시청률 조사로 유명한 닐슨 사 직원이라고 했거든. 그래서 내가 닐슨 사에 전화해서 확인해 봤는데 그런 사람은 없대. 널 해치 려던 사람이 누구일지 뭐 짐작되는 거 없어?" "쌀리, 그게 무슨 소리야? 날 해치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 어? 경찰에 신고했어?" "그럼 신고했지. 하지만 경찰도 나보고 조심하라고 하는 것밖에 별수가 없었어." "어찌됐든 난 아무 탈 없이 잘 있어. 걱정하지 마." 쌀리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알았 어. 네가 무사하다니 안심이야. 줄리아..." "왜 그래?" "너 조심해야 돼. 알았지?" "그래, 조심할게. 걱정 마." 아무래도 쌀리는 상상력이 너무 풍부하단 말이야. 누가 날 해치려 하겠어? "언제쯤 돌아올 거야?" 호텔 직원도 똑같은 질문을 했었다. "좀 있어 봐야 알겠어." "보스턴에는 가족들 만나러 간 거지?" "맞 아." "잘됐으면 좋겠어." "쌀리, 고마워." "수시로 연락해." "그래, 그럴게." 줄리아는 수화기를 내려놓았 다. 그 자리에 서서 앞으로 어떻게 할까 생각해 보았다. 내가 제정신이라면 바로 캔사스행 버스를 타야 되는 거 아닐까? 이렇게 머뭇거릴 걸 무엇 때문에 왔지? 보스턴에 관광하러 온 건 아니잖아. 가족들을 만나보려고 왔잖아. 바로 연락하고 만나볼까? 안 돼... 아냐, 만나야 돼... 침대에 걸터앉은 줄리아는 마음 을 정할 수 없었다. 그들이 날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안 돼. 그들은 틀림없이 반가워 할 거야. 나도 그들을 만나면 반가울 거야. 줄리아는 몇 번이나 수화기를 들었다 놓았 다. 먼저 전화하고 찾아가는 게 순서지. 아냐. 날 만나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지? 옷장으로 가서 제일 좋 은 옷을 꺼냈다. 내친 김에 하지 않으면 영원히 할 수 없을 거야. 줄리아는 결단을 내렸다. 30분 후, 그 녀는 택시를 타고 가족들을 만나러 로즈 힐로 향했다. 제24장 타일러는 눈을 크게 뜨고 클라크를 쳐다보다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줄리아 스텐포드가 찾아왔 다구?" "그렇습니다." 클라크는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난번에 오셨던 줄리아 스 텐포드 양이 아닙니다." 타일러는 억지로 미소 지었다. "물론 아니겠지. 가짜가 틀림없소." "가짜라구요?" "그래, 틀림없이 가짜야.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니까 온갖 사기꾼들이 한몫 잡으려고 설쳐대기 시 작한 거요." "정말 말도 안 됩니다. 경찰에 연락할까요?" "그럴 필요는 없소." 타일러는 재빨리 대답했다. 지금 경찰을 개입시키면 일을 더 그르치게 될 게 분명했다.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소. 들어오라고 해요." "알았습니다." 타일러는 즉시 대응할 수단이 필요했다. 진짜 줄리아 스텐포드가 드디어 나타난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형제들은 모두 외출하고 집에 없었다. 그들이 돌아오기 전에 줄리아를 쫓아 버려야 만 했다. 타일러는 서재로 들어갔다. 줄리아는 서재 한복판에 서서 벽에 걸린 해리 스텐포드의 초상화를 쳐다보고 있었다. 타일러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줄리아를 쳐다보았다. 정말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였 다. 줄리아가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일 줄이야... 줄리아가 돌아서면서 타일러를 보았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타일러 스텐포드 씨 맞지요?" "맞습니다. 누구시지요?" 미소 짓던 줄리아의 안색이 달라 졌다. "벌써 말씀 드린 줄 알았는데... 저는 줄리아 스텐포드입니다." "그래요? 실례입니다만, 진짜 줄리 아 스텐포드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증거요? 글쎄... 그야... 특별한 증거는 없어요. 내가... 난 그저..." 타 일러는 그녀에게 다가서면서 물었다.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됐지요?" "난 이제 내 가족들을 만나야 한다 고 생각했어요." "28년 만에야 그럴 생각이 났단 말이오?" "그랬어요." 그녀의 용모와 말하는 태도에서 타일러는 그녀가 틀림없이 줄리아 스텐포드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진짜 줄리아였기 때문에 타일러 에게는 극히 위험한 인물이었다. 빨리 처치하지 않으면 문제가 심각해질 게 틀림없었다. 타일러는 억지 로 미소 지었다. "당신이 이렇게 갑자기 나타난 게 나에게 얼마나 충격인지 이해할 수 있을 거요. 난데 없이 의붓동생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이해해요. 미안합니다. 먼저 전화라도 드리고 찾아오는 건데..." 타일러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보스턴에는 혼자 왔소?" "네." 그는 재빨리 다음 수를 계획했다. "여 기 온 것을 아는 사람이 있소?" "없어요. 캔사스에 있는 내 룸메이트 쌀리말고는..." "지금 어디에 묵고 있소?" "코플리 광장 호텔이에요" "참 깨끗한 호텔이지... 객실 번호는?" "419호예요." "좋아요. 호텔로 돌아가서 우리가 연락할 때까지 좀 기다려 줘요. 우디와 캔달이 돌아오면 이 소식을 알리고 마음을 진 정시킬 시간을 줘야 하니까. 그들도 나처럼 충격을 받지 않겠소?" "정말 미안해요. 먼저 전화라도..." "괜 찮소. 걱정 말아요. 이제 우리가 만났으니 앞으로 서로 가까워 질 거요." "고마워요." "천만에," 타일러는 그녀의 이름을 입 밖에 내기가 힘들었다. "...줄리아. 호텔로 돌아갈 택시를 부르겠소." 5분 후 그녀는 로 즈 힐을 떠났다. 할 베이커가 보스턴 중심가의 호텔방으로 돌아갔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 세요?" "할?" "판사님, 죄송합니다. 아직도 못 찾았어요.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호텔마다 뒤지고, 공항에 도..." "이 멍청한 사람아! 벌써 나타났단 말이야." "네?" "로즈 힐에 찾아 왔었단 말이야. 지금 코플리 광장 호텔 419호실에 묵고 있어. 오늘 밤에 당장 처치해야 돼. 더 이상 실수하면 안 돼! 알아듣겠어?" "캔사스 시에서 그렇게 된 것은 내 잘못이..." "알아들었어?" "알겠습니다." "그럼 해치우라구!" 타일러는 수화기를 팽개쳤다. 그는 클라크를 찾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클라크, 아까 내 의붓동생이라고 하면서 찾아왔던 젊은 여자 말이야..." "네, 판사님." "그 여자 얘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안 하는 게 좋겠소. 그런 얘기 들으면 공연히 충격만 받게 될 테니 말이오." "잘 알겠습니다, 판사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줄리아는 저녁식사를 하려고 리츠 칼튼 호텔로 갔다. 어머니의 말대로 정말 아름다운 호텔이었다. 일 요일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하러 그 호텔로 갔었지. 줄리아는 호텔 레스토랑에 앉아 어머니가 어린 타일러와 우디, 그리고 캔달을 데리고 있는 모습을 그려 보았다. 나도 그들과 함께 자랐 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이제라도 모두 만나게 되어서 다행이야. 그녀는 자신이 의붓형제들을 찾 아온 것을 어머니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타일러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냉랭한 태도에 약간 충 격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건 당연하잖아! 생면부지의 사람이 나타나서 '내가 당신의 누이동생이오.' 했을 때, 충격을 받지 않을 사람이 있겠어? 하지만 곧 오해가 다 풀릴 거야. 줄리아는 생각했다. 식사가 다 끝나고 계산서를 받았을 때, 줄리아는 속으로 놀랐다. 이렇게 돈을 쓰다가는 큰일나겠어. 최소한 캔사스 로 돌아갈 여비는 남겨둬야 되잖아. 코플리 광장 부근을 지나갈 때, 보스턴 야경을 관광하는 버스가 막 떠나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순간, 그 버스를 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어머니가 살던 보스턴을 볼 수 있는 데까지 보고 싶었다. 할 베이커는 코플리 광장 호텔 로비에 들어섰다. 그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태연하게 계단을 통해 4층으로 올라갔다. 이번에는 실수해서는 안 될 상황이었다. 419호실은 복도 한가운데 있었다. 베이커는 복도를 조심스럽게 살피고 아무도 업는 것을 확인한 다음, 방문을 두드렸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는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스텐포드 양?"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송곳을 꺼냈다. 익숙한 솜씨로 문을 따는데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베이커는 안으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스텐포드 양?" 그는 욕실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역시 비어 있었다. 주머니에서 사냥칼을 꺼내 들고 의자를 문 옆에 옮겨 놓고 앉아 불을 끈 채 기다렸다. 한 시간 이상 기다렸을 때,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할 베이커는 벌떡 일어나 칼을 쥐고 문 뒤로 몸을 숨겼다. 곧이어 열쇠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문 뒤에서 베이커는 칼을 치켜들고 줄리아 스텐포드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방 안에 들어서면서 전등 스위치를 켰다. "정 그러시다면 들어오세요." 기 자들 한 무리가 그녀를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제25장 코플리 광장 호텔의 야간 당직 지배인인 고든 웰만은 자신도 모르게 줄리아의 생명을 구했다. 그는 저녁 6시에 근무를 시작하면서 우선 호텔 투숙객 명단을 점검했다. 줄리아 스텐포드라는 이름을 보고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해리 스텐포드가 사고로 사망한 다음, 보스턴의 신문에서는 스텐포드 가족에 대한 기사가 그칠 날이 없었다. 그 중에도 옛날 해리 스텐포드와 보모의 혼외정사, 그리고 뒤이 은 에밀리 스텐포드의 자살에 관한 스캔들 기사가 큰 부분을 차지했었다. 해리 스텐포드에게는 줄리아 라는 사생아가 있다고 보도되었다. 그녀가 비밀리에 보스턴에 왔다는 소문도 있었다. 며칠 동안 최고급 물건들을 사들이고 나서 남미로 떠나 버렸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줄리아 스텐포드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바로 우리 호텔에 투숙하다니! 고든 웰만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는 부하직원에게 말했 다. "이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 난리가 날게 아닌가? 그러면 우리 호텔이 거저 광고되는 거라구." 잠시 후 그는 신문사로 전화를 걸었다. 줄리아가 관광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 로비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모여들어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비로 들어오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고 둘러쌌다. "스텐포드 양, 난 보스턴 글로브지 기자입니다. 우리는 당신을 찾고 있었어요. 하지만 보스턴을 떠났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어떻게 된..." 텔레비전 카메라가 그녀에게 초점을 맞췄다. "스텐포드 양, 나는 WCVB-TV 기자입니다. 우리는 당신 의..." "스텐포드 양, 나는 휘닉스지 기자입니다. 우리는 당신이 유산상속..." "스텐포드 양, 이쪽을 좀 보 세요! 자, 웃어요. 고맙습니다." 플래시가 터졌다. 줄리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런 세상 에! 가족들이 내가 매스컴을 타려고 떠들어댄 것으로 오해하겠어. 그녀는 기자들을 둘러보았다. "미안하 지만, 나는 할말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녀는 엘리베이터로 다가갔다. 문이 열리자 기자들은 그녀를 따라 엘리베이터 안으로 몰려들었다. "피플지에서는 당신이 살아온 과정을 특집으로 내고자 합니다. 가족들과 30년 가까이 남남으로 살아온 느낌은..." "당신이 남미로 떠났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앞으로 보스턴에서 살 계획..." "왜 로즈 힐에 묵지 않고 이 호텔..." 줄리아는 4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려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기자들은 계 속 따라왔고, 그들을 따돌릴 방법이 없었다. 줄리아는 열쇠로 방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면서 전등 스위치를 켰다. "정 그러시다면 들어오세요." 문 뒤에서 칼을 들고 숨어 있던 할 베이커는 당황하지 않 을 수 없었다. 그는 기자들이 몰려들어오자 재빨리 칼을 주머니에 넣고 자연스럽게 기자들 틈에 섞였다. 줄리아가 기자들에게 말했다. "좋아요. 한 사람씩 질문하세요.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다 할게요." 베이커 는 일이 글렀다고 판단하고 슬그머니 밖으로 빠져나갔다. 스텐포드 판사의 반응이 두려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줄리아는 거의 한 시간동안 기자들의 질문에 응했다. 드디어 그들은 모두 떠났고 그녀는 문을 잠그고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텔레비전과 신문 모두가 줄리아 스텐포드에 관한 기사로 채워졌다. 신문을 읽던 타일러 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잠시 후, 우디와 캔달이 내려와 아침 식탁에 앉았다. "줄리아 스텐포드를 자칭하 는 여자가 나타났다구?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돼!" 우디가 말했다. "가짜가 틀림없어." 타일러 가 말했다. "실은 이 여자가 어제 로즈 힐에 찾아왔었다. 돈을 요구하길래 한마디로 거절하고 돌려보냈 지. 이렇게 매스컴을 이용해서 떠들어댈 줄은 몰랐어.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까." 그는 싸이몬 피츠제랄드에게 전화했다. "오늘 아침 신문 보았습니까?" "봤습니다." "이 사기꾼이 자 기가 우리 의붓동생이라고 하면서 보스턴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어요." 피츠제랄드가 물었다. "경찰에 고 발하는 게 어떻겠소?" "안 돼요! 그렇게 되면 점점 더 시끄러워질 겁니다. 피츠제랄드 씨께서 직접 만나 조용히 이곳을 떠나라고 설득해 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알았소, 스텐포드 판사. 우리가 만나보지요." "고맙습니다." 싸이몬 피츠제랄드는 스티브 슬론을 불렀다. "스티브, 문제가 좀 생겼어." 스티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알고 있어요. 저도 아침 뉴스도 듣고 신문도 보았거든요. 대체 그 여자는 누구지요?" "그야 막대 한 해리 스텐포드 유산을 한몫 차지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겠지. 스텐포드 판사는 우리에게 그녀 를 만나 조용히 이곳을 떠나도록 설득해 달라고 하더군. 그 일을 자네가 좀 맡아 주겠나?" "기꺼이 맡겠 습니다." 스티브가 말했다. 한 시간 후, 스티브는 줄리아의 호텔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연 줄리아는 낯 선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미안합니다만, 난 이제 더 이상 기자들과 만날 수 없어요. 나 는..." "나는 기자가 아닙니다. 좀 들어가서 얘기해도 될까요?" "누구신데요?" "내 이름은 스티브 슬론입 니다. 나는 해리 스텐포드 개인 변호사 업무를 관장하는 법무법인의 변호사입니다." "아, 그러세요? 그렇 다면 들어오세요." 스티브는 안으로 들어갔다. "기자들에게 당신이 줄리아 스텐포드라고 말했습니까?" "저는 기자들이 몰려오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어요. 갑자기 몰려들어 질문을 퍼붓는 바람에 그 만..." "어쨌든 당신이 해리 스텐포드의 딸이라고 주장했지요?" "그래요. 해리 스텐포드가 내 아버지예 요." 스티브는 비아냥거리는 투로 물었다. "물론 증거가 있겠지요?" "아뇨." 줄리아는 천천히 말했다. "물 적 증거는 없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스티브가 다그쳤다. "어떤 형태로든 증거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는 거짓 증거를 대기만 하면 그녀의 정체를 폭로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증거는 아무것 도 없어요." 줄리아가 대답했다. 그녀를 쳐다보는 스티브의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기대했던 가짜 줄리아와는 딴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꾸밈없이 솔직하게 들렸다. 지 적 수준이 높은 사람이야. 이런 사람이 어떻게 증거도 없이 해리 스텐포드의 딸이라고 주장하고 나섰 지? "그렇다면 유감스럽지만," 스티브가 말했다. "빨리 보스턴을 떠나 달라는 스텐포드 판사의 말씀입니 다." 줄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뭐라구요?" "빨리 보스턴을 떠나 달라는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에 요? 난 아직 가족들도 다 만나보지 못했어요." 그래. 계속 버티겠단 말이지... 스티브는 생각했다. "이봐 요. 당신이 누군지, 뭣 때문에 줄리아를 사칭하는지 모르겠지만, 계속 이러다가는 처벌을 받을 수도 있 어요. 다른 사람을 사칭하는 것은 형법을 위반하는 거요. 당장 보스턴을 떠나 더 이상 스텐포드 가족을 귀찮게 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소. 하지만 계속 고집 부리면 경찰에 고발할 수밖에 없소." 그의 말에 줄리아는 충격을 받았다. "경찰에 고발한다구요? 난... 도무지 왜 그런..." "어떻 게 할지 결정하시오." "가족들이 날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했나요?" 줄리아는 망연 자실한 표정이 었다. "아주 좋게 표현해서 만나지 않겠다고 했소."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좋아요. 그들 생각이 그렇다면 난 캔사스로 돌아가겠어요. 다시는 그들에게 연락도 하지 않을 테니 염려 마세요." 캔사스라 구? 사기 한번 치려고 정말 멀리서 왔군. "잘 생각했소." 그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줄리아를 쳐다보았 다. 아무래도 뭔가 석연치 않은 게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럼, 여행 잘 하시오." 줄리아는 대답 이 없었다. 스티브는 사무실로 돌아와서 싸이몬 피츠제랄드를 찾았다. "스티브, 그 여자를 만났나?" "만나서 얘기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더군요." "잘됐어. 스텐포드 판사에게 전화해야겠군." "하지만 싸이몬, 아직 납득이 안 가는 게 있어요." "그게 뭐지?" "개가 짖지 않았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셜록 홈즈 가 수사하다가 단서를 잡은 얘기를 기억하세요? 단서는 당연히 벌어졌어야 할 일이 벌어지지 않은 데 있었어요." "그게 이 일과 무슨 상관이 있지?" "그녀는 아무 증거도 없이 보스턴까지 찾아왔잖아요." 피 츠제랄드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아무 증거도 없다는 사실이 그녀가 가짜라는 증거 아닌가?" "그 반대입니다. 그녀가 왜 단 한 가지의 증거도 없이 캔사스 시에서 보스턴까지 달려와서 자신이 해리 스텐포드의 딸이라고 주장했겠습니까?" "스티브, 요즘 머리가 이상한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그녀는 멀쩡했어요. 조금도 비정상적인 면을 볼 수 없었습니다. 직접 만나보시면 제 생각에 동의하실 겁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남아 있어요." "뭔데?" "해리 스텐포드의 시신은 왜 없어졌 지요? 누가 그랬을까요? 또 해리 스텐포드의 익사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인 드미트리 카민스키는 왜 사 라졌지요? 그리고 전에 나타났던 줄리아 스텐포드는 어디로 종적을 감췄지요?" 싸이몬 피츠제랄드는 눈 살을 찌푸렸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지?" "스텐포드가의 유산을 둘러싸고 모종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 는 느낌입니다. 수수께끼를 풀면 그 음모가 밝혀지겠지요. 우선 두 번째 나타난 줄리아와 좀더 얘기해 봐야겠습니다." 스티브가 말했다. 스티브 슬론은 코플리 광장 호텔 로비의 카운터로 다가갔다. "줄리아 스텐포드 양에게 전화 좀 해주시 겠습니까?" 호텔 직원이 말했다. "미안합니다. 줄리아 스텐포드 양은 조금 전에 계산을 마치고 떠났습니 다." "혹시 연락처를 남기지 않았습니까?" "남기지 않았는데요." 스티브는 실망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더 이상 어찌해 볼 방법이 없었다. 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어. 그는 스스로 위안했다. 그 여자는 가짜일 수도 있잖아. 이젠 다 지나간 일이야. 그는 호텔 정문을 나섰다. 도어맨이 어떤 부부에게 택시를 잡아주는 게 눈에 띄었다. "나 좀 봅시다." 도어맨이 고개를 돌렸다. "택시를 잡아드릴까요?" "아 니, 뭣 좀 물어봅시다. 오늘 아침에 줄리아 스텐포드 양이 나가는 걸 보았소?" "그럼요, 모두들 쳐다보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녀는 이제 유명해졌거든요. 제가 택시를 잡아드렸습니다." "혹시 어디로 갔는지 기억 납니까?" 말은 가볍게 했지만 스티브는 초조한 심정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물론입니다. 제가 택시 운전사에게 행선지를 말해 줬으니까요." "그래, 어디로 갔소?" 스티브는 점점 초조해졌다. "싸우스 스테 이션의 고속버스 터미널로 갔습니다. 그런 부잣집 딸이 고속버스를 타는 게 아무래도..." "택시 좀 빨리 잡아줘요!" 스티브는 인파로 붐비는 터미널 안을 헤집고 다니면서 줄리아를 찾았다. 하지만 그녀는 눈에 띄지 않 았다. 벌써 떠나 버렸잖아... 그는 생각했다. 버스의 출발을 알리는 구내방송이 들려왔다. "...경유, 캔사스 시행 버스가 곧 출발..." 스티브는 정신없이 승차장으로 달려갔다. 막 버스에 오르려는 줄리아를 발견했 다. "잠깐! 기다려요!" 스티브가 소리쳤다. 고개를 돌린 줄리아는 놀란 표정이었다. 스티브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얘기 좀 해야겠어요." 줄리아는 냉랭하게 대답했다. "난 당신과 더 이상 할 얘기 없어요." 그 녀는 몸을 돌려 버스에 타려고 했다. 스티브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잠깐만 기다려요. 정말 중요한 예기 가 있어요." "지금 버스가 떠나잖아요." "다음 버스를 타면 돼요." "내 가방은 이미 실렸는데요?" 스티브 는 짐을 싣고 있던 포터에게 소리쳤다. "이 사람은 임신 중인데 문제가 생겨서 급히 병원에 가야 됩니 다. 이 사람 가방 좀 찾아줘요. 빨리요!" 포터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본 다음 말했다. "알았습니다." 그 는 서둘러 버스의 짐칸을 활짝 열고 물었다. "어떤 가방입니까?" 줄리아가 스티브에게 물었다. "뭘 어떻 게 하겠다는 거예요?" "나도 모르겠어요." 스티브가 대답했다. 줄리아는 잠시 그를 쳐다본 다음 결단을 내렸다. "거기, 바로 그 가방이에요." 포터가 줄리아의 가방을 들어냈다. "앰뷸런스를 부를까요? 제가 도 와 드릴 건 없습니까?"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스티브가 가방을 들고 두 사람은 터미널을 빠져 나왔다. "참, 아침식사 했어요?" "난 배고프지 않아요." 줄리아가 대답했다. "그래도 뭘 좀 먹는 게 좋을거요. 홀 몸이 아니잖소?" 두 사람은 비바 레스토랑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스티브와 마주앉은 줄리아는 아직도 그와 처음 만났 을 때의 불쾌한 감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식사 주문이 끝나자 스티브가 물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 는 점이 있어요. 자신의 신분을 밝힐 아무런 증거도 없이 어떻게 해리 스텐포드 유산의 상속권을 주장 하려 했죠?" 줄리아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난 상속권을 주장하러 로즈 힐에 갔던 게 아니에요. 아버지 는 나에게 한푼도 남기지 않았을 거예요. 난 그저 가족들을 만나보고 싶었어요. 그들이 나를 만나려고 하지 않을 줄은 몰랐어요." "출생증명이나 당신의 신분을 밝힐 수 있는 다른 어떤 증거라도 없어요?" 줄 리아는 집에 있는 기사 스크랩을 생각했으나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것도 없어요." "좋아요. 당신이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이분은 싸이몬 피츠제랄드 씨입니다." "줄리아 스텐포드예요." 피츠제랄드의 얼굴에는 그녀를 의심하 는 기색이 역력했다. "거기 좀 앉으시오." 줄리아는 조금이라도 못마땅한면 벌떡 일어날 자세로 의자 모 서리에 걸터앉았다. 피츠제랄드는 그녀를 찬찬히 관찰했다. 눈동자는 스텐포드가 특유의 짙은 회색이었 다. 하지만 짙은 회색빛 눈동자를 가진 사람은 수백만 명은 될 것이다. "당신이 로즈마리 넬슨의 딸이라 고 주장했소?" "그건 주장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에요. 나는 로즈마리 넬슨의 딸입니다." "어머니는 어디 계시오?" "벌써 몇 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아, 그것 참 안됐소. 어머니에 대해서 얘기해 주겠 소?" "싫어요." 줄리아가 말했다. "어머니 얘기는 하기 싫어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그냥 가 겠어요." "이봐요, 우리는 지금 당신을 도우려는 거요." 스티브가 말했다. 줄리아는 스티브에게 고개를 돌렸다. "도와 준다구요? 내 가족들은 나를 만나보려고도 하지 않고, 당신들은 나를 경찰에 고발하겠다 고 했잖아요? 그런 도움은 필요 없어요." 그녀는 몸을 돌려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스티브가 소리쳤다. "잠깐만! 당신이 정말 줄리아 스텐포드라면 해리 스텐포드의 딸이라는 증거가 반드시 있을 거요." "그런 건 없다고 벌써 말했잖아요." 줄리아가 대답했다. "어머니와 나는 오래 전에 해리 스텐포드를 잊고 살기 로 했었어요." "어머니는 어떻게 생긴 분이었소?" 싸이몬 피츠제랄드가 물었다. "정말 아름다웠어요." 줄 리아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더 이상 아름답고 품위 있는..." 문득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 "참, 어 머니 사진을 갖고 있어요." 그녀는 자신의 목걸이에서 하트 모양의 금으로 만든 작은 펜던트를 빼내 피 츠제랄드에게 건넸다. 펜던트를 받아 든 피츠제랄드는 줄리아를 잠시 쳐다보다가 펜던트를 열었다. 펜던 트 안 한 쪽에는 해리 스텐포드의 사진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로즈마리 넬슨의 사진이 있었다. 아래쪽 에는 'R.N에게... 사랑하는 H.S.로부터. 1967년.'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싸이몬 피츠제랄드는 꼼짝 않고 한 참 동안 펜던트를 들여다보았다.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스텐포드 양, 우리 가 사과해야 되겠소." 그는 스티브에게 고개를 돌렸다. "줄리아 스텐포드 양이 틀림없어." 제26장 캔달은 페기와의 대화를 마음속에서 떨쳐버릴 수 없었다. 페기 혼자서는 우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 다고 생각했다. ...우디 스스로도 노력하고 있어요. 정말이에요. 우리가 결혼했을 때 우디는 정말 다정했 고... 난 우디 없이는 못살 거예요! 아무래도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해. 캔달은 생각했다. 어떻게든 내가 도와야겠어. 친오빠 아냐? 직접 만나서 얘기해야겠어. 캔달은 클라크를 불렀다. "우디 오빠 지금 집에 있 어요?" "네. 2층 침실에 계십니다." "알았어요." 페기가 멍투성이의 얼굴로 식당에 내려왔던 장면이 되살 아났다. 어떻게 된 거예요? ...기둥에 부딪쳤어요... 여태까지 어떻게 그런 학대를 받으면서 참고 살아왔 는지 모르겠어... 캔달은 2층으로 올라가 우디의 방문을 두드렸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우디? 안에 있어 요?" 그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쌉쌀한 아몬드 냄새가 진동했다. 잠시 방 안을 둘러본 다음 욕 실 쪽으로 다가갔다. 욕실문은 열려 있었고 그 안에 우디가 보였다. 그는 알루미늄 호일에 싸인 헤로인 가루를 라이터 불로 데우고 있었다. 열을 받은 헤로인이 액화되고 증발하면서 연기가 났다. 우디는 빨대 를 입에 물고 그 연기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캔달은 욕실 안으로 들어서면서 말했다. "우디, 뭘 하는 거 예요?" 그는 캔달에게 고개를 돌리고 싱글거렸다. "어? 너였어?" 다시 헤로인 연기를 빨대로 들이마셨 다. "그만 좀 해요! 세상에!" "왜 그래? 소리칠 것 없어. 이걸 뭐라고 하는지 알아? 용을 쫓는다고 해. 저 연기가 용트림하면서 올라가는 게 보이지?" 그는 계속 싱글거렸다. "오빠! 제발 나하고 얘기 좀 해 요." "좋지, 무슨 얘기일까? 돈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해. 우리 모두가 억만장자니까. 왜 그렇게 얼 굴을 찌푸리고 있지? 날씨도 기막히게 좋고 즐길 것만 생각하면 되잖아?" 우디의 눈동자가 비정상적으 로 번뜩였다. 우디를 쳐다보던 캔달의 얼굴에 연민의 빛이 떠올랐다. "우디, 난 페기와 오랫동안 얘기했 어요. 폴로 경기에서 심하게 다쳤을 때 병원에서 준 진통제 때문에 오빠가 마약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얘기 들었어요." 우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어. 덕분에 이렇게 좋은 걸 알게 된거지." "좋다구요? 이 건 오빠 일생일대의 비극이에요. 이대로 계속하면 오빠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이래요?" "어떻게 되긴? 인생을 더 즐길 수 있게 되는 거지." 캔달은 그의 손을 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빠는 도 움이 필요해요." "내가? 난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어. 이렇게 멀쩡하잖아." "멀쩡하지 않아요! 오빠, 내 말 잘 들어봐요. 오빠는 아직도 젊어요. 앞으로 계속 이러면 인생을 망치게 돼요. 그렇게 되면 오빠의 인생 만 망치는 게 아니고 페기도 엄청난 불행을 겪게 될 거예요. 여태까지 오빠는 페기를 학대했잖아요. 그 녀는 오빠를 더없이 사랑하기 때문에 그 큰 고통을 참으며 살아온 거예요. 오빠의 인생을 망치면 페기 의 인생도 함께 망치는 거예요. 지금 당장 결심하고 마약에서 벗어나야 돼요. 더 이상 계속하면 돌이킬 수 없이 깊이 빠져들고 말아요. 마약을 왜, 어떻게 시작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언제, 어떻게 끊느냐 가 중요한 거예요." 우디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캔달..." 그는 지그시 캔달을 쳐다보더니 뭔가 말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말해봐요, 오빠!" 우디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난... 네 말 이 다 맞아. 나도 끊고 싶어. 끊으려고 해본 게 한두 번이 아니야. 이를 악물고 끊으려 했지만, 그게 안 돼." "안 되기는... 반드시 끊을 수 있어요!" 캔달이 힘주어 말했다. "반드시 끊을 수 있어요. 나도 도울게 요. 이제부터 나도 페기와 함께 오빠 옆을 지키며 도울게요. 그런데 도대체 헤로인을 어디서 구하는 거 예요?" 우디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그걸 모르고 있었단 말이야?" 캔달은 고개를 저었다. "그 걸 어떻게 알아요?" "페기가 공급해 줘!" 제27장 싸이몬 피츠제랄드는 줄리아의 펜던트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있었다. "줄리아, 나는 어머니를 잘 알 았어. 정말 착한 사람이었지. 스텐포드가의 아이들에게는 친어머니같이 자상한 보모였고, 아이들도 무척 따랐지." "어머니는 그들을 더없이 사랑했어요." 줄리아가 말했다. "제게도 틈만 나면 아이들 얘기를 해 주었어요." "어머니가 해리 스텐포드와의 스캔들에 휘말린 것은 정말 비극이었어. 그때 얼마나 떠들썩했 었는지 지금은 상상도 못할 거야. 보스턴에서 그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지. 해리 스텐포드는 도 무지 수습할 생각도 않고 방관하는 태도였어. 그러니 어머니는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지." 그는 천천 히 고개를 저었다. "그 후 어머니가 어린 딸을 데리고 얼마나 고생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 "어 머니는 말할 수 없이 고생하셨어요. 기가 막힌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해리 스텐포드를 사랑 했던 것 같아요." 그녀는 스티브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가족들이 날 만나려고 조차 않는 거예요." 두 변호사는 서로 눈길을 마주쳤다. "내가 설명하지요." 스티브가 말했다. 그는 잠시 생각한 다음,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한 여자가 나타나서 자신이 줄리아 스텐포드라고 주 장했어요." "그건 말도 안 돼요!" 줄리아가 말했다. "내가..." 스티브가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잠깐요, 내 말을 다 들어봐요. 가족들은 사립탐정을 고용해서 그녀의 신분을 확인해 보았어요." "그렇다 면 가짜라는 게 드러났을 거 아녜요?" "가짜가 아니고 진짜로 판명되었어요." 줄리아는 어처구니가 없다 는 표정이었다. "뭐라구요?" "그 사립탐정은 줄리아 스텐포드가 열일곱 살 때 인디애나 주에서 운전면허 를 신청하면서 찍은 지문을 구해 왔어요. 그 지문이 자신이 줄리아 스텐포드라고 주장한 여자의 지문과 일치하기 때문에 모두들 그녀를 진짜 줄리아 스텐포드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줄리아는 점점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난... 난 인디애나 주에는 가본 적도 없는데요." 피츠제랄드가 말했다. "줄리아, 아 무래도 해리 스텐포드의 엄청난 유산을 노리고 누군가가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소. 그 때문에 지금 줄리아의 신분에 대한 논란이 생긴 거요." "어떻게 그런 일이!" "그 음모를 꾸민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줄리아 스텐포드가 둘이 된 상황을 그대로 보고 있지는 않을 거요." 스티브가 말했다. "진짜 줄리아 스 텐포드를 제거해야만 그 음모가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할 거요." "그 '제거' 한다는 뜻이..." 줄리아는 순 간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니, 이럴 수가!" "뭔가 생각나는 게 있소?" 피츠제랄드가 물었다. "이 틀 전에 내 룸메이트에게 전화했더니 겁에 질려 있었어요. 어떤 남자가 우리 아파트에 찾아와 칼을 빼 들고 그녀를 죽이려 했다는 거예요. 아무래도 내 룸메이트를 나로 착각한 것 같다고 했어요." 줄리아는 말을 계속하기가 힘들었다. "누가...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요?" "아마, 가족 중 한 사람일 겁니다." 스티 브가 말했다. "가족이 왜 그런..." "엄청난 유산 때문이지요. 며칠만 지나면 상속 절차가 마무리되거든 요."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아버지는 나를 딸로 인정하지도 않았잖아요. 그런 사람이 나에게 무슨 유산을 남겼겠어요." 피츠제랄드가 말했다. "사실은 줄리아의 신분만 확인된다면 대략 10억 달러 정도의 유산을 상속받게 되어 있소." 줄리아는 곧바로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 만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10... 10억 달러라구요?" "그렇소. 누군가가 줄리아의 몫을 차지하려는 거요. 그 때문에 신변이 위험해진 거요." "그랬군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줄리아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난 이 제 어떻게 해야 되지요?" "우선 해서는 안 될 것부터 정리해 봅시다." 스티브가 말했다. "호텔로 돌아가 면 안 돼요. 우리가 이 음모를 밝혀낼 때까지 나타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 캔사스로 돌아가서 이 일이..." 피츠제랄드가 말했다. "줄리아, 내 생각으로는 이 일이 끝날 때까지 이곳 보스턴에 남아 있는 게 좋겠소. 남의 눈에 띄지 않고 묵을 수 있는 곳을 수배하겠소." "내 집에 묵는 게 어때요?" 스티브가 말했다. "아무도 줄리아가 내 집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할 거예요." 두 사람은 줄리아의 대답을 기다 렸다. 줄리아는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좋아요." 줄리아가 천천히 말했다. "아 버지가 익사 사고로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건 익사사고가 아니었 을 겁니다." 스티브가 말했다. "아무래도 누군가 계획적으로 살해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어요." 스티브는 줄리아를 데리고 사무실 건물 지하 차고로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아요." 스티브가 말했다. "앞으로 며칠 동안은 집에서 지내면서 외출을 삼가는 게 좋겠 어요." 그는 스테이트가를 따라 차를 몰았다. "점심식사를 해야 되잖아요." 줄리아는 미소 지으며 말했 다. "내 얼굴만 보면 음식 생각이 나세요? 만나기만 하면 식사 얘기가 나오니..." "조용한 식당을 알아요. 글로스터가에 있는 오래된 레스토랑이지요. 그곳엔 우리를 알아볼 만한 사람이 없을 거예요." 레스팔리에는 19세기에 지은 우아한 벽돌건물에 자리잡은 레스토랑이었다. 보스턴에서 가장 좋은 곳 이었다. 두 사람이 들어가자 지배인이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스티브가 말했다. "이쪽으로 오 시지요. 창가에 전망 좋은 테이블로 안내하겠습니다." "창가보다는," 스티브가 말했다. "벽 쪽 테이블을 주면 좋겠소." 지배인은 눈을 껌뻑거렸다. "벽 쪽 테이블요?" "그래요. 우리 단둘이만 있고 싶어요." "알 겠습니다." 그는 구석진 테이블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곧 웨이터를 보내겠습니다." 줄리아를 쳐다보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아! 스텐포드 양 아니십니까? 이렇게 찾아 주셔서 영광입니다. 신문에서 사진을 보았습니다." 줄리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스티브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스티브가 갑자 기 소리쳤다. "이런 세상에! 아이들을 차에 두고 왔잖아. 어서 가보자구!" 그는 지배인에게 고개를 돌렸 다. "우선 마티니 칵테일 두 잔을 주문해 주시오. 올리브는 넣지 말고... 곧 돌아오겠소." "알겠습니다." 지배인은 서둘러 밖으로 나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줄리아가 물 었다. "무조건 이곳을 떠나야 돼요. 저 친구가 신문기자에게 전화 한 통만 하면 이곳은 금세 난리가 날 거요. 다른 곳으로 갑시다." 두 사람은 달톤가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에 가서 점심식사를 주문했다. 스티브가 줄리아를 바로 쳐다 보며 물었다. "유명인사가 된 기분이 어때요?"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마세요. 난 지금 몹시 불안하다구 요." "그럴 게예요." 스티브는 멋쩍은 듯 말했다. "미안합니다." 그는 어느새 줄리아에게 마음이 끌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의 행동이 그녀에게 얼마나 불쾌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슬론 씨, 내가 정말... 정말 내 신변이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그냥 스티브라고 불러요. 맞아요. 아무래도 위험한 것 같아요. 하지만 며칠만 지나면 위험은 사라질 거예요. 상속 절차가 끝나면 누가 이 음모를 꾸몄는지 밝혀질 겁니다. 그 때까지 난 줄리아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거예요." "고마워요. 정말 그렇게 생각 해 주니 뭐라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테이블로 다가오던 웨이터가 그들의 표정을 보고 방해하지 않으려고 되돌아갔다. 집으로 차를 몰면서 스티브가 물었다. "보스턴에 처음 왔어요?" "처음이에요." "보스턴은 알고 보면 흥미 있는 도시입니다." 차가 존 핸콕 빌딩을 지나치고 있었다. 스티브는 건물의 첨탑을 가리켰다. "저기 첨탑에 번쩍이는 불빛 보여요?" "그런데요?" "저게 바로 일기예보예요." "불빛이 번쩍이는 게 어떻게..." "그게 재미있는 거지요. 불빛이 청색으로 계속되면 날씨가 청명하다는 뜻이고, 청색이 깜빡거리면 곧 구 름이 다가온다는 신호예요. 그리고 적색으로 바뀌면 비가 올 것이라는 뜻이고, 적색이 깜빡거리면 비가 온다는 뜻이지요." 두사람은 하바드 교를 건넜다. 스티브는 속력을 줄였다. "이 다리가 보스턴과 캠브리 지 시를 연결합니다. 정확하게 364.4스무트 길이의 다리지요." 줄리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스티브는 싱글거렸다. "사실대로 말한 거예요." "대체 스무트가 뭐예요?" "스무트라는 것은 올리버 리드 스무트라는 사람의 키를 한 단위로 하는 계측법이에요. 정확하게 그의 키는 1미터 70.5센티였어요. 처음에는 농담으로 시작되었는데, 1958년에 이 다리를 수리하면서 스무트로 기록했어 요." "정말 희한한 얘기네요." 줄리아가 말했다. 벙커 힐 기념탑을 지날 때 줄리아가 물었다. "아, 바로 저기서 그 유명한 벙커 힐 전투(미국 독립전쟁 때 치열했던 전투)가 벌어졌던 모양이지요?" "아니오." 스티브가 대답했다. "그럼 어떻게 된 거예요?" "그 유명한 벙커 힐 전투는 실상 브리드 힐에서 벌어진 거예요." 스티브의 집은 뉴버리 공원 지역에 있었다. 아담한 2층집은 현대적으로 편안하게 꾸며져 있었다. "여 기서 혼자 사세요?" 줄리아가 물었다. "그래요. 1주일에 두 번씩 파출부가 오죠. 전화해서 며칠동안 오지 말라고 해야 되겠어요. 파출부도 드나들지 않는 게 좋아요." 줄리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렇게 신경 써 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진심이에요." "천만에요. 도울 수 있어서 나도 기쁘게 생각해요. 자, 침실 을 안내할게요." 그는 2층에 있는 손님용 침실로 줄리아를 안내했다. "어때요? 불편한 것이 없어야 할 텐데..." "아니 훌륭해요." 줄리아가 말했다. "먹을 것을 좀 사와야 되겠어요. 대개 밖에서 식사하기 때문 에 냉장고가 텅 비었을 겁니다." "내가 저녁이라도..." 줄리아는 말을 멈췄다. "아니, 안 그러는 게 좋겠 어요. 내 룸메이트 말이 내 음식솜씨는 살인적이라고 했거든요." "음식은 내가 제법 합니다." 스티브가 말했다. "요리는 내가 담당할게요." 그는 줄리아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천천히 말했다. "난 여태까지 누구 를 위해서도 요리해 본 적이 없어요. 이번이 처음입니다." 서두르지 마! 공연히 서두르다가 실망할 수도 있잖아. 처음 만난 여자를 벌써 어쩌겠다는 거야? 그는 생각했다. "자, 짐을 풀고 편안하게 옷을 갈아입 어요. 여기는 절대 안전하니까 마음놓아도 돼요." 줄리아는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미소 지었다. "고마워 요." 옷을 갈아입은 줄리아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스티브는 아래층을 구석구석 안내했다. "저기 텔레비 전과 비디오가 있고, 오디오 시스템은 이쪽에 있어요. 어려워 말고 쓰도록 하세요." "모든 것이 완벽하네 요." 줄리아는 생각했다. 스티브도 완벽한 사람 같아! "자, 그럼 별다른 일이 없으면..." 스티브가 말했다. 줄리아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주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 난 사무실에 돌아가 봐야겠어요. 의문은 많은데, 한 가지도 풀리지 않고 있잖아요. 이제 본격적으로 조사해 봐야겠어요." 줄 리아는 문 쪽으로 돌아서는 스티브를 불렀다. "스티브?" 그가 돌아섰다. "무슨 일이죠?" "내 룸메이트에 게 전화하면 안 될까요? 내 걱정을 많이 하고 있을 텐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안 돼요. 어디 로든지 전화하면 안 돼요. 그리고 집 밖에는 한 발짝도 나가면 안 돼요. 이건 줄리아의 생명이 달린 거 예요." 제28장 "나는 닥터 웨스틴이오. 지금 이 대화를 녹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알고 있습니다." "이제 마음이 좀 진정됐소?" "진정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요." "왜 그렇게 화가 나는 거요?" "난 이곳에 올 이유가 없어요. 난 정신이 말짱하다구요. 날 미쳤다고 뒤집어씌운 거예요." "누가 그랬소?" "타일러 스텐포드요." "타일러 스텐포드 판사 말이오?" "맞아요." "그분이 왜 그랬다고 생각하시오?" "돈 때문이지요." "당신이 돈을 많이 가지고 있었소?" "아뇨. 내 말은... 그게 아니고... 난 엄청난 돈을 받게 되어 있었어요. 타일러 스텐포드는 나에게 현금 백만 달러, 그리고 밍크 코트와 보석 도 보내 주겠다고 했어요." "스텐포드 판사가 왜 그런 약속을 했소?" "처음부터 설명할게요. 난 사실은 줄리아 스텐포드가 아니고, 마고 포즈너예요."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 당신은 자신이 줄리아 스텐포 드라고 주장했지 않소?" "그건 사정이 있었어요. 사실 난 줄리아 스텐포드가 아니에요. 내가 줄리아 스 텐포드 행세를 한 것은 스텐포드 판사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기 때문이에요." "그분이 왜 그렇게 시켰 소?" "그렇게 해서 내가 해리 스텐포드의 유산을 상속받고, 그것을 타일러 스텐포드에게 넘긴다는 계획 이었어요." "그렇게 하면 현금 백만 달러와 밍크 코트, 그리고 보석을 주겠다고 했단 말이오?" "지금 내 말을 못 믿겠어요? 좋아요. 그걸 증명할 수 있어요. 타일러 스텐포드가 나를 로즈 힐로 불렀어요. 로즈 힐은 보스턴에 있는 스텐포드 본가의 이름이에요. 난 그 집을 구석구석까지 기억할 수 있고,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도 잘 알게 되었어요." "지금 당신이 스텐포드 판사에게 대해서 엄청난 내용의 고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물론이지요. 하지만, 그 사람은 현직 판사니까 내 고발은 별로 효과가 없겠지 요?" "그렇지 않소. 당신의 고발 내용을 철저하게 조사해 볼 거요." "좋아요. 그런 교활한 인간은 나 대 신 이곳에 입원시켜야 돼요. 난 빨리 여기서 나가고 싶다구요." "물론 나말고도 두 사람의 전문의를 더 만나봐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좋아요. 내가 이렇게 정신이 말짱한데 겁날 게 뭐 있겠어요." "오 늘 오후에 닥터 기포드가 오실 거요. 그분과 만나본 다음 어떻게 할 건지 결정하겠소." "빠를수록 좋아 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어요." 여간수가 점심식사를 가지고 와서 말했다. "지금 막 닥터 기포드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한 시간 후에 오시겠다고 했어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마고는 닥터 기포드가 나타나기를 벼르고 있었다. 이제는 모 든 것을 털어놓고 타일러 스텐포드에게 복수할 차례였다. 내가 진상을 다 밝히면 타일러 스텐포드는 체 포되고 나는 자유의 몸이 될 거야.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 생각만으로 짜릿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유의 몸이라구? 그게 무슨 자 유야? 난 다시 길거리를 헤매야 되잖아! 가석방을 취소하고 날 도로 감옥으로 보낼 수도 있어! 마고는 식판을 벽에 내동댕이쳤다. 나쁜 놈들! 날 이렇게 취급하다니! 어제까지만 해도 난 백만 달러를 받게 되 었었는데... 오늘은 이런 곳에 수감... 아니, 가만있어 봐! 순간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묘안이 떠올랐다. 너무나 절묘한 발상이었기 때문에 마고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런 세상에! 내가 왜 이러고 있었지? 내 가 줄리아 스텐포드라는 건 이미 증명됐잖아! 증인도 있어. 스텐포드 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프랭크 티몬스가 내 지문이 줄리아 스텐포드와 같다고 증명했잖아. 내가 줄리아 스텐포드인 게 틀림없는데 마 고 포즈너로 돌아갈 필요가 없지. 내가 멍청했어. 그러니 이런 곳에 끌려들어 왔지... 그녀는 간수를 부 르는 벨을 눌렀다. 여간수가 들어오자 마고가 소리쳤다. "난 기포드 박사를 당장 만나야 돼요!" "알고 있 어요. 닥터 기포드는 30분 후에 오기로..." "지금 당장 만나야 돼요! 당장 말이에요!" 마고의 흥분된 표정 을 본 여간수가 말했다. "좀 진정해요. 내가 연락해 볼 테니..." 10분 후 프란즈 기포드 박사가 마고를 찾 아왔다. "나를 만나자고 했소?" "그렇습니다." 얌전해진 마고는 미소 지었다. "선생님, 사실 제가 연극을 좀 했어요." "어떤 연극을 했소?" "말씀드리기 쑥스럽습니다. 사실 저는 제 오빠 타일러에게 화가 났었 어요. 그래서 오빠를 골려 주려고 연극을 했었지요. 지금 생각해 보니 홧김에 철없이 행동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제 연극은 그만 두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보스턴의 로즈 힐 말이에요." "아침에 닥터 웨스턴과 얘기했던 기록을 읽어보았소. 당신은 마고 포즈너이고, 누군가가 당신이 미쳤다고 모함한 거라 는 주장을..." 마고는 웃었다. "그게 바로 제 연극이었어요. 오빠를 골려 주려고 한 짓이에요. 사실 저는 줄리아 스텐포드입니다." "그걸 증명할 수 있소?" 바로 마고가 기다리던 질문이었다. "물론이지요!" 마고 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타일러가 내 신분을 증명했어요. 프랭크 티몬스라는 사립탐정을 고용했는데, 그 사람이 어렸을 때의 내 지문을 찾아냈지요. 지문을 대조한 결과 내가 줄리아 스텐포드라는 것이 밝 혀졌어요.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었어요." "사립탐정 프랭크 티몬스라구요?" "맞아요. 그 사람은 시카고 검찰청 일을 많이 한다고 들었어요." 기포드는 잠시 마고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지금 하는 얘기가 확실 한 거요? 당신은 마고 포즈너가 아니고 줄리아 스텐포드란 말이오?"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프랭크 티 몬스라는 사립탐정이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는 말이오?" 그녀는 미소 지었다. "벌써 증명했는 걸요. 검찰청에 연락하면 그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기포드가 끄덕였다. "좋소. 그렇게 해보겠소." 다음날 아침 10시. 닥터 기포드는 여간수의 안내를 받아 마고를 다시 찾아왔다. "안녕하시오?" "선생 님, 안녕하세요?" 마고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프랭크 티몬스와 연락이 되셨나요?" "그렇소. 다시 한번 당신의 주장을 확인해 봐야겠소. 스텐포드 판사가 어떤 음모를 꾸미는 데 당신을 고 용했다는 말은 전혀 근거가 없는, 당신이 지어낸 얘기가 확실합니까?" "틀림없습니다. 오빠를 골려 주려 고 연극을 했던 겁니다. 이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요. 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프랭크 티몬스 가 당신이 줄리아 스텐포드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닥터 기포드는 여간수에 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다시 복도 쪽으로 손짓했다. 큰 키에 날렵한 체격의 흑인 남자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마고를 쳐다본 다음 다시 말했다. "내가 프랭크 티몬스요. 나한테 물어볼 게 있습니까?" 그는 마고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제29장 패션 쇼는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모델들은 우아한 걸음으로 무대를 드나들었고, 새 의상이 나타날 때 마다 열광적인 박수가 터져 나왔다. 대연회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좌석은 모두 채워지고 뒤에는 많 은 관객이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무대 뒤가 소란스러워졌다. 캔달은 무슨 일인가 하고 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정복 경찰관 두 사람이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캔달의 가슴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경 찰관 한 사람이 물었다. "캔달 스텐포드 여사시지요?" "그렇습니다." "마사 라이언의 살인 혐의로 당신 을 체포하겠소." "안 돼!" 캔달은 비명을 질렀다. "그건 고의가 아니었어요! 돌발적인 사고였어요! 제발... 제발..." 그녀는 온몸을 떨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악몽은 계속 찾아왔다. 난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도저 히 견딜 수 없어! 어떻게든 해결해야겠어. 캔달은 생각했다. 그녀는 마크와 상의하고 위로를 받고 싶었 다. 그러나 남편은 뉴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여보, 난 직장이 있잖아. 더 이상 휴가를 낼 수 없 는 처지야." "마크, 이해해요. 나도 며칠만 지나면 뉴욕으로 돌아갈 거예요. 패션 쇼 준비도 해야 되니까 요." 캔달은 아침에 뉴욕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떠나기 전에 반드시 페기와 얘기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우디의 얘기가 마음에 걸렸다. 우디는 모든 것을 페기 탓으로 돌리고 있어. 캔달은 베란다에서 페기를 만났다. "굿모닝." 캔달이 말했다. "굿모닝." 캔달은 페기와 마주앉았다. "좀 얘기할 게 있어요." "무슨 얘긴데요?" 입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우디와 얘기했었어요. 중독증세가 아주 심한 것 같아요. 우디 말이 당신이 헤로인을 공급해 준다더군요." "우디가 직접 그랬어요?" "네." 한동안 말이 끊어졌다. "그건 사실이에요." 캔달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뭐라구요? 세상에... 난 이해할 수가 없어요. 우디가 마약을 끊게 하려고 애썼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계속 헤로인을 공급해 주었단 말이에 요?" "정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군요." 페기는 쓰디쓴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들은 별세계 에서 사는 사람들이에요. 난 우디의 아이를 가졌을 때, 싸구려 식당 웨이트리스였어요. 우디가 나와 결 혼할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어요. 그가 왜 나하고 결혼한 줄 아세요? 자기가 아버지와는 다른 인간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려고 그런 거예요. 어찌됐든 결혼한 다음에도 주변 사람들은 나를 쓰레기 취급 했어요. 내 오빠 후프가 결혼식에 왔을 때도 모두들 그 옆에는 가려고도 하지 않았죠." "페기..." "사실 나는 당신 오빠가 결혼하자고 했을 때, 어안이 벙벙했어요. 임신한 아이가 우디의 아이인지도 분명치 않 았다구요. 난 아내로서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지만, 그건 불가능했어요. 모든 사람이 나를 계속 웨이트리 스로 취급했어요. 난 유산했던 게 아니에요. 낙태 수술을 받은 거예요. 그렇게 하면 우디가 이혼하자고 할 줄 알았는데 그런 얘기가 나오지 않았어요. 우디에게 내 존재는 자신이 가장 인간적이고 진보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심볼 같은 것이었어요. 유명한 디자이너님, 난 그렇게 취급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요. 나도 당신들과 마찬가지의 인간이에요." 페기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캔달의 가슴을 찔러왔다. "그럼 우디를 사랑한 게 아니에요?" 페기가 말했다. "우디는 잘생기고 재미있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폴로 경기에서 심하게 다친 다음부터 모든 게 달라졌어요. 병원에서 진통제를 투여했지만 퇴원하면 더 이상 복용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죠. 하지만 어느 날 밤, 통증이 심해져 내가 마약을 주었어요. 그때부 터 통증이 찾아올 때마다 마약을 주곤 했죠. 얼마 되지 않아 우디는 통증에 관계없이 계속 마약을 찾게 되었어요. 내 오빠가 마약판매책이기 때문에 필요한 헤로인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어요. 난 우디가 애 걸하도록 만들었어요. 때로는 그가 진땀을 흘리고 쩔쩔매는 것을 보려고 일부러 마약이 떨어졌다고 말 하기도 했어요. 고귀하신 우드로 스텐포드 씨가 나 없이는 살 수 없게 된 거지요. 마약이 필요할 때는 고귀하기는 커녕 밑바닥 인생의 마약중독자일 뿐이었어요. 난 일부러 우디가 나를 때리도록 행동했어요. 그러나 우디는 마약이 필요했기 때문에 언제나 백배사죄하고 제발 마약을 구해달라고 애원했어요. 만약 우디가 마약을 완전히 끊는다면 나는 그에게 아무 소용없는 존재가 되겠죠. 하지만 그에게 마약이 필요 한 이상 내 손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어요. 그는 해리 스텐포드의 아들이고 난 싸구려 웨이트리스이지만 내 손을 벗어날 수 없어요." 페기의 말에 캔달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우디는 마약을 끊으려고 여 러번 시도했어요. 중독증세가 심해지면 주변 사람들이 그를 중독자 요양원에 입원시켰지요. 난 면회할 때마다 위대한 스텐포드 가문의 아들이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았어요. 치료가 끝나고 퇴원하면 나는 달콤한 선물을 준비하고 기다렸지요." 캔달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당 신은 인간도 아니야! 당장 여기서 떠나요." "안 그래도 떠날 거예요! 나도 떠날 생각을 한 지 오래예요." 그녀는 싱글거렸다. "물론 빈손으로 떠날 수는 없지요. 얼마나 내놓을 거예요?" "얼마가 됐든," 캔달이 말했다. "당신에게는 과분할 거예요. 빨리 여기서 떠나요!" "알았어요." 페기는 세련된 보스턴 액센트로 말했다. "내 변호사가 스텐포드가의 변호사에게 연락할 겁니다." "페기가 정말 떠난 거야?" "그래요." "그럼 이제부터는..." "우디, 이제는 공급해 줄 사람이 없어진 거 예요. 견뎌 낼 수 있겠어요?" 그는 캔달을 잠시 쳐다본 다음 미소 지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꼭 해낼 거야." "그래요. 오빠는 할 수 있어요." 우디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캔달, 정말 고마워. 나는 도저히 페기를 쫓아 버릴 용기를 낼 수 없었을 거야." 캔달은 미소 지었다. "남매간에 서로 돕는다는 게 이런 거 아니에요?" 그날 저녁, 캔달은 뉴욕으로 떠났다. 패션 쇼가 1주일 후로 다가왔다. 패션은 뉴욕 시의 주요 산업이 었다. 뉴욕의 성공적인 패션 디자이너는 세계 각국의 경제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디자이너가 소재 를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그 효과는 널리 퍼져 나갔다. 인도의 목화 농장으로부터 스코틀랜드의 양모 가 공업, 중국과 일본의 잠사업계가 모두 영향을 받았다. 돈나 캐런, 칼빈 클라인, 그리고 랄프 로렌 등 유 명 디자이너들은 양모업계나 잠사업계에 크게 영향을 미쳤고, 이제 캔달도 그 위치에 올라섰다. 다음 번 코티 상은 그녀가 받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코티 상은 패션 디자이너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명예였다. 캔달 스텐포드 르노는 바쁘게 지냈다. 9월이면 수많은 소재가 도착했고, 10월까지는 그 중 원하는 것 을 골라야 했다. 12월부터 1월까지는 새로운 의상을 디자인하는 기간이었고, 2월이 되면 그 디자인을 고 치고 다듬었다. 3월이면 가을 의상을 선보일 패션 쇼가 열렸다. 캔달 스텐포드 디자인 사는 뉴욕의 7번 대로 550번지에 있었다. 같은 건물에 빌 블라스 사와 오스카 드 라 렌타 사가 입주해 있었다. 다음 패션 쇼는 브라이언트 공원에 세워질 대형 텐트에서 가질 예정이 었다. 천 명 이상의 관객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였다. 캔달이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비서인 나딘이 말 했다. "반가운 소식이에요. 패션 쇼 표가 모두 팔렸대요." "고마워." 캔달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녀의 생각은 다른 데 가 있었다. "참, 그리고. 책상 위에 편지가 있을 거예요. 아까 메신저가 배달했어요." 그 말에 캔달은 흠칫했다. 서둘러 책상으로 다가가서 편지를 집어 들었다. 발신인은 뉴욕시 파크 애비뉴 3000번지 야생동물 보호협회로 되어 있었다. 캔달은 한동안 그 봉투를 들여다보았다. 파크 애비뉴에는 3000번지가 없었다. 캔달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열고 읽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르노 부인. 스위스 은행에 의하면 우리 협회의 계좌에 요구했던 1백만 달러가 입금되지 않 았다고 합니다. 부인의 무성의 때문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액수는 유감스럽게도 5백만 달러로 증가했습 니다. 이 액수가 곧 지급된다면 더 이상 부인에게 지원을 요청하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앞으로 15 일 내에 우리 계좌에 입금시켜 주십시오. 만약 그 때도 돈이 입금되지 않으면 유감스럽지만 우리는 경 찰 당국에 연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명한 사람은 없었다. 캔달은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보면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5백만 달러라고! 그건 불가능해. 무슨 재주로 그 시일 내에 그런 거금을 마련한단 말이야. 처음부터 경찰에 자수하지 않 은 게 큰 실수였어. 그녀는 생각했다. 그날 밤, 마크가 집에 돌아왔을 때 캔달은 편지를 보여 주었다. "5백만 달러라구?" 그가 소리쳤다. "이 건 말도 안 돼!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는 날 잘 알고 있어요." 캔달이 말했다. "바로 그게 문제예요. 빠른 시일 내에 돈을 마련해야 되는데... 어떻게 하죠?"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혹시 은행에서 당신이 받을 유산을 담보로 돈을 빌려 줄지도 몰라. 하지만 그렇게 하는 건 좀..." "마크, 이건 내 인생이 걸린 문제예요. 우리 두 사람 인생이 걸린 중대한 문제라구요. 은행에 찾아 가서 돈을 빌려 달라고 해봐야겠어요." 조지 매리웨더는 뉴욕 유니언 은행의 부원장 중 한 사람이었다. 육십 대 초반의 그는 창구 직원으로 부터 시작해, 오랜 세월 동안 은행에 근무하면서 착실히 한걸음씩 승진해 왔다. 그는 야심만만한 사람이 었다. 머지않아 나는 이사가 되겠지. 그 다음에는 대표이사? 회장? 그의 달콤한 공상이 전화벨 소리에 깨졌다. "캔달 스텐포드 르노 부인이 찾아오셨는데요." 그는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캔달은 오랫동안 유명 은행의 주요 고객이었고, 이제 곧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 중 한 사람이 될 것이었다. 그는 오 랫동안 해리 스텐포드를 고객으로 유치하려고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 "들어오시 라고 해." 매리웨더는 비서에게 말했다. 캔달이 방 안에 들어오자 매리웨더는 미소 띤 얼굴로 일어나 악 수를 청했다. "이렇게 찾아주셔서 정말 반갑습니다." 그가 말했다. "좀 앉으시지요. 커피라도 드시겠습니 까? 아니면 더 강한 것도 있습니다." "고맙지만 괜찮습니다." 캔달이 말했다. "아버님이 작고하신 데 대 하여 심심한 조의를 표합니다." 그는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지 요?" 그는 그녀가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제 그녀가 상속받은 수십억 달러를 유니언 은행에 관리시 키려... "대출을 좀 받으러 왔어요." 그는 눈을 깜빡였다. "지금 뭐라고 하셨지요?" "난 5백만 달러가 필 요해요." 매리웨더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그녀의 상속 지분이 최소한 10억 달 러는 넘을 것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상속세를 공제하더라도... 그는 미소 지었다. "그러십니까? 그야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부인은 오랫동안 우리 은행의 주요 고객이셨으니까요. 어떤 담보를 제공하실 겁니까?" "난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저도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내 상속 지분을 담보로 제공하고 대출을 받고 싶습니다." "그러십니까? 그럼 상속 절차가 다 끝났습니까?" "아니오. 하지만 며칠 있으면 끝날 겁니다." "좋습니다." 그는 몸을 앞으로 당겼다. "대출을 위해서는 유 언장 사본이 필요합니다." "알았어요." 캔달이 말했다. "그건 문제없어요." "그리고 부인의 상속 지분 액 수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정확한 액수는 나도 모르는데요." 캔달이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은행법 은 아주 까다롭습니다. 상속 절차는 경우에 따라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그 절차가 끝 난 다음에 오시면 그 때는..." "난 지금 돈이 필요해요." 캔달은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거 참, 우 리 은행은 부인이 필요로 하시는 것을 다 해드리고 싶지만," 그는 두 손을 쳐들었다. "유감스럽게도 규 정 때문에 어쩔 수..." 캔달은 벌떡 일어났다. "잘 알겠습니다." "상속 절차가 끝나는 대로..." 캔달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캔달이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 나딘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얘기할 게 있어요." 캔달은 나딘의 얘기 를 들을 기분이 아니었다. "무슨 일인데?" 캔달이 물었다. "내 남편이 조금 전에 전화했었어요. 이번에 파리로 전근 가게 되었대요. 그래서 나도 따라가야 할 것 같아요." "그럼... 파리로 간다고?" "네. 정말 좋은 소식 아니에요? 이 직장을 떠나고 싶지는 않지만, 남편을 따라가야 되지 않겠어요? 파리에 가더라 도 계속 연락할게요." 바로 나딘이었어. 하지만 그걸 증명할 방법이 없잖아. 처음에는 밍크 코트를 구입 하더니 이젠 파리로 간단 말이지. 하기야 5백만 달러를 손에 쥐면 세계 어느 곳에서라도 살 수 있겠지. 어떻게 해야 되지? 내가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해도 그녀는 분명히 잡아뗄 거야. 아니, 더 내놓으라고 할 지도 몰라. 아무래도 마크와 상의해야 되겠어. 그 때 캔달의 조수 한 사람이 들어왔다. "캔달, 나한테 맡 긴 새 디자인에 대해 얘기 좀 해야 되겠어요. 아무래도 종류가 부족한 것 같은..." 캔달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미안해요. 난 지금 몸이 불편해요. 집에 가야겠어요." 조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하지 만 지금 패션 쇼 준비가 한창..." "미안해요..." 캔달은 그 자리를 떠났다. 캔달이 돌아왔을 때, 집에는 아 무도 없었다. 마크는 야근 중이었다. 캔달은 아름답게 꾸며진 실내를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들은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때까지 그만두지 않을 거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흡혈귀처럼 빨아낼거야. 마크 말이 맞았어. 그날 바로 경찰에 자수했어야만 했어. 이제 나는 범죄자가 됐어. 아무래도 자수해야 될 것 같아. 조금이라도 용기가 남아있을 때 자수하는 거야. 그녀는 자수했을 경우에 자신과 마크, 그리 고 가족들에게 미치게 될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언론매체가 떠들썩해질 것이고, 견디고 힘든 재판 과정, 그리고 감옥살이로 이어질 것 같았다. 디자이너로서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할 수는 없어. 이러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아. 캔달은 생각했다. 허탈한 심정으로 캔달은 마 크의 서재로 들어갔다. 그곳 벽장에 타자기가 있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타자기를 선반에서 내 려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종이를 끼워 놓고 경찰에 보낼 자백서를 찍기 시작했다. 수신:뉴욕시 경찰국장 내 이름은 캔달... 갑자기 그녀의 손이 멈췄다. 찍혀진 활자 E의 가운데 부분이 깨져 있었다. 제30장 "마크, 왜 그런 짓을 했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캔달은 부르짖었다. "그건 당신 탓이야." "아 니에요. 벌써 말했잖아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건 사고..." "난 교통사고 얘기를 하는 게 아니 야. 캔달 스텐포드라는 유명 디자이너를 말하는 거지. 사업에 크게 성공하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남편과 같이 있을 시간이 없는 아내 말이야." 캔달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렇지 않아요. 난 아무리..." "캔달, 당신은 항상 자기밖에 몰랐어. 어딜 가도 당신만이 각광을 받았지. 나는 푸들처럼 당신 뒤를 졸졸 따라 다니는 신세였어." "그건 말도 안 돼요!" 캔달이 말했다. "왜 말이 안 돼? 당신은 언제나 패션 쇼 때문에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고 가는 곳마다 신문, 방송에 떠들썩하게 보도되었잖아. 하 지만 난 그 동안 혼자 집에서 당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려야 했어. 모든 사람이 나를 '캔달의 남편'으로 만 생각하는 게 얼마나 불쾌한 줄 알아? 난 아내다운 아내가 필요했어. 하지만 너무 미안해 할 건 없어. 당신이 집을 비우고 돌아다닐 때 난 다른 여자들과 실컷 재미 봤으니까." 캔달의 굳은 얼굴은 창백해졌 다. "난 여자다운 여자들과 즐긴거야. 그들에게 나는 소중한 존재였어. 당신처럼 겉만 화려하고 속은 텅 빈 여자가 아니란 말이야." "그만해요!" 캔달이 소리쳤다. "당신이 사고 낸 얘기를 들었을 때 난 당신과 헤어질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지. 그때 내 심정을 솔직하게 말해 줄까? 난 당신이 그 편지를 받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즐거웠어. 내가 '캔달의 남편'으로 받은 수모를 조금이나마 보상받는 느낌이었지." "더 이상 듣기 싫어요! 당장 짐싸서 여기서 나가요.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요!" "오라고 해도 오지 않을 거야. 그래, 정말로 경찰에 자수할 생각이야?" "어서 내 앞에서 없어져요!" 캔달이 소리쳤다. "당장 떠나란 말이에요." "알았어. 떠날 거야. 파리로 돌아가야겠어. 아, 사랑하는 당신... 걱정 말아요. 당신이 협박 운운하지 않는 한 나도 교통사고 얘기는 꺼내지 않을 테니..." 한 시간 후 마크 르노는 뉴욕을 떠났 다. 다음날 아침 9시, 캔달은 스티브 슬론에게 전화했다. "안녕하십니까? 르노 부인. 무슨 일이신지요?" "오늘 오후에 보스턴으로 가겠어요." 캔달이 말했다. "고백할 게 있어요." 스티브 슬론과 마주앉은 캔달은 창백한 얼굴에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몸이 굳어 버린 듯 꼼짝않고 앉아 입을 열지 못했다. 스티브가 먼저 말했다. "뭔가 고백할 게 있다고 하셨지요?" "그래요. 난... 내가 사람을 죽였어요." 그녀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건 사고였지만, 난... 현장에서 도망쳤어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계속 흐느꼈다. "난 죽은 그녀를 길에 남겨 두고... 그냥 도망쳤어요." "좀 진정하세요." 스티브 가 말했다. "차근차근 처음부터 얘기해 보세요." 캔달은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캔달의 얘기는 거의 30분이 걸렸다. 얘기가 끝났을 때 스티브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면 이제 경 찰에 자수하겠다는 말입니까?" "그래요. 사고 직후에 자수했어야 했는데... 늦었지만 이제라도 자수하겠 어요. 난...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어요." 스티브는 잡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 사건은 고의성이 없는 사고였고, 르노 부인이 자수한다면 재판부도 관용을 베풀 겁니다." 캔달은 계속 흐느끼면서 감정을 주체 하지 못했다. "어떻게 되든 속 시원하게 털어놓을 거예요." "남편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녀가 고개 를 들었다. "어떻게 하다니요?" "협박으로 돈을 갈취하는 것은 심각한 범죄 행위입니다. 여태까지 갈취 당한 돈을 입금시킨 스위스 은행 계좌 번호를 알고 계시잖습니까? 고발하시면 그 즉시..." "안 돼요!" 캔 달은 단호하게 말했다. "난 그 사람 이름도 듣기 싫어요. 자기 편한 대로 살도록 내버려둬요. 나는 내가 할 일만 하겠어요." 스티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그럼 경찰서로 함께 가시 죠. 오늘 밤은 유치장에서 보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곧 보석으로 석방될 겁니다." 캔달은 쓴 웃음을 지었다. "이제 여태까지 못해본 일을 하게 되었네요." "그게 뭐죠?" "죄수복 줄무늬로 드레스를 디자인해 봐야겠어요." 그날 저녁, 스티브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줄리아에게 오후에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줄리아는 충격을 받았다. "남편이 아내를 협박하고 돈을 갈취했단 말이에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말을 멈 추고 잠시 스티브를 쳐다보았다. "스티브, 어려움 당한 사람을 도우며 사는 게 정말 보람 있겠네요." 스 티브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러다가는 내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겠어! 스티브 슬론은 커피 끓는 냄새와 베이컨 굽는 냄새에 눈을 떴다. 잠이 덜 깬 채로 침대에서 벌떡 일 어났다. 파출부가 왔나? 당분간 오지 말라고 했는데... 그는 가운을 걸치고 슬리퍼를 신고는 서둘러 주방 으로 갔다. 줄리아가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스티브가 들어서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굿모닝." 명랑한 목소리였다. "달걀은 어떻게 하는 게 좋아요?" "글쎄... 스크램블이 좋겠소." "좋아요. 베이컨과 달 걀 스크램블은 내 특기예요. 사실 제대로 할줄 아는 것은 그것밖에 없어요. 난 요리에 전혀 소질이 없다 고 말했었죠?" 스티브는 미소 지었다. "앞으로는 당신이 직접 요리할 필요가 없잖아요. 원한다면 요리사 를 몇 백 명이라도 고용할 수 있을 텐데..." "스티브, 정말 그렇게 많은 유산을 내가 상속받게 되나요?" "그럼요. 당신의 상속 지분은 10억 달러 이상 될 거요." 줄리아는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10억 달 러요?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아요." "그건 사실이요." "스티브, 이 세상에 남아도는 돈이 그렇게 많겠어 요?" "그야 당신 아버지가 이 세상 돈의 상당 부분을 독차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요." "난... 난 정말 뭐라고 해야 할지..." "그럼 내가 말해도 되겠어요?" "물론이지요." "지금 달걀이 타고 있 소." "어머나, 이걸 어째!" 그녀는 급히 가스불을 껐다. "이건 안 되겠어요. 다시 할게요." "그럴 필요 없 어요. 베이컨은 그대로 먹을 만할 테니..." 줄리아는 웃었다. "정말 미안해요." 스티브는 찬장으로 다가가 씨리얼 한 통을 꺼냈다. "베이컨과 씨리얼로 아침을 때우는 게 어때요?" "좋아요." 줄리아가 대답했다. 그는 씨리얼을 그릇 두 개에 나누어 붓고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냈다.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앉았다. "가 끔이라도 음식 준비를 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줄리아가 물었다. "깊은 관계의 여자가 있느냐는 질문인 가요?" 줄리아는 얼굴을 붉혔다. "그런 뜻이에요." "그런 사람은 없어요. 전에 한 여자와 2년 동안 사귀 었는데 결국 성격차이로 헤어졌어요." "그거 참 안됐군요." "줄리아는 어때요?" 스티브가 물었다. 그녀는 속으로 헨리 웨슨을 떠올렸다. "그런 것 같지 않아요." 스티브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것 같지 않다는 게 무슨 뜻이지요?" "설명하기가 좀 어려워요. 우리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결혼하자고 하 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또 한 사람은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그렇군요. 줄리아, 상속 문제가 마무리되면 캔사스로 돌아갈 생각입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어요. 처음 여기 왔을 때는 모 든 게 생소했지만, 어머니가 항상 보스턴 얘기를 했기 때문에 점점 이곳이 익숙해지는 것 같아요. 어머 니는 여기서 태어났고 이곳을 항상 그리워했어요. 나는 지금 고향에 돌아온 셈이잖아요. 살아 계실 때 아버지를 만나보지 못한 게 섭섭해요." 해리 스텐포드를 만났다면 상처만 받았을 거야! 스티브는 생각했 다. "아버지를 잘 아세요?" "모릅니다. 아버지는 싸이몬 피츠제랄드 씨만 만났어요." 두사람은 그렇게 한 시간이 넘도록 얘기를 주고받았다. 서로를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는 편한 상대로 느꼈다. 스티브는 줄리아가 보스턴으로 오기 전에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 주었다. 줄리아 스텐포드를 자 칭하는 여자의 도착, 텅 빈 스텐포드의 무덤, 그리고 드미트리 카민스키의 증발 등이었다. "정말 믿기 어 려운 일이에요!" 줄리아가 말했다. "누가 음모를 꾸몄을까요?" "아직은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 그 음모 를 밝히려고 조사 중입니다." 스티브가 말했다. "어찌됐든 이곳은 안전할 거예요. 모든 게 밝혀질 때까지 이곳에 있도록 해요." 줄리아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도 이곳이 안전하고 편하게 느껴져요. 정말 고마 워요." 스티브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 생각을 바꾸었다. 그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출근하려면 빨리 옷 을 갈아입어야 되겠어요. 할 일이 많거든요." 스티브는 사무실에서 피츠제랄드와 마주앉았다. "좀 진전이 있나?" 피츠제랄드가 물었다. 스티브는 고 개를 저었다. "아직도 오리무중입니다. 이 음모를 꾸민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선 드미 트리 카민스키를 추적했습니다. 그는 코르시카에서 파리를 거쳐 오스트레일리아로 갔습니다. 시드니 경 찰에 문의했더니 카민스키가 오스트레일리아에 입국한 것을 알고 깜짝 놀라더군요. 인터폴에서도 수배 되어 있었어요. 지금 시드니 경찰이 카민스키를 찾고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해리 스텐포드가 우리 사무실로 전화해서 유언장을 바꾸겠다고 말한 순간 스스로 사형선고를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누군가가 유언장을 바꾸지 못하도록 결단을 내렸을 겁니다. 사고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드미트리 카민스키 밖에 없으니 그가 나타나야만 사건의 실마리가 풀릴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경찰에 수사를 의뢰해 보는 게 어떨까?" 피츠제랄드가 말했다. 스티브는 고개를 저었다. "싸이몬, 우리는 심증밖에 없잖습니까. 지금 상 황에서 확실한 범죄행위는 누군가가 묘지에서 시신을 파내고 유기했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누가 묘지를 건드렸는지도 모르잖아요." "그럼 스텐포드 유족들이 고용했다는 그 사립탐정은 어떻게 된 거지? 그 사람이 가짜 줄리아의 지문을 확인했다고 했잖은가?" "프랭크 티몬스 말씀이지요. 벌써 세 번이나 전 화했는데 통화를 못하고 메모만 남겼어요. 오늘 저녁 6시까지 연락이 없으면 제가 직접 시카고로 가보 겠습니다. 아무래도 그 사람은 음모에 깊이 개입된 것 같아요." "그럼 가짜 줄리아가 유산을 상속받으면 그 지분을 어떻게 하려고 했을까?" "제 육감으로 이 음모를 꾸민 사람이 그녀가 상속 지분을 양도하는 형식으로 서류를 완벽하게 만들어 놓았을 것 같습니다. 명목상 제3의 신탁기금으로 편입한다든가 하는 편법을 썼을 겁니다. 전 유족 중 한 사람이 이 음모를 꾸민 거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그들 중 캔달은 혐의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피츠제랄드에게 뺑소니 사건에 관한 캔달의 고백을 얘기했다. "만 약 그녀가 음모를 꾸몄다면 지금과 같은 시점에서 그런 고백을 할 리가 없습니다. 최소한 상속절차가 마무리 되고 재산을 분배받을 때까지는 기다렸을 겁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도 제외시킬 수 있습니다. 그는 좀스러운 협박이나 하는 인간이지 이렇게 엄청난 음모를 계획하고 시행할 만한 위인이 못됩니다." "그럼 나머지 유족 중에 누구란 말인가?" "우선 스텐포드 판사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카고 지 역 변호사협회의 친구에게 스텐포드 판사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꽤 명망이 높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수석판사로 임명되었다고 하더군요.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가짜 줄리아가 나타났을 때, 그는 아무래도 가짜 같다고 했고, 반드시 DNA 검사를 해야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여러 상 황을 볼 때 그는 이런 일을 꾸밀 사람같지는 않습니다. 가능성은 우디에게 있습니다. 마약에 중독된 것 이 확실하고, 그렇다면 많은 돈이 필요했을 겁니다. 그의 아내 페기도 조사해 보았는데 이런 음모를 꾸 밀 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녀의 오빠가 암흑가와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서 좀더 생각해 볼 생각입니다." 스티브는 인터폰으로 비서를 불렀다. "보스턴 경찰의 마이클 케네디 경위를 대줘요." 몇 분 후 인터폰이 울렸다. "케네디 경위가 나왔습니다." 스티브는 수화기를 들었다. "경위님, 전화로 실례 합니다. 저는 렌퀴스트, 렌퀴스트, 피츠제랄드 법무법인의 스티브 슬론 변호사입니다. 지금 해리 스텐포 드의 유산 상속 때문에 친척 한 사람을 찾고 있는데 좀 도와 주시겠습니까?" "슬론 씨.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기꺼이 도와 드리지요." "그러면 뉴욕 시 경찰에 연락해서 우드로 스텐포드 부인의 오빠에 관 한 기록이 있는지 좀 알아봐 주시겠습니까? 이름은 후프 말코비치입니다. 브롱스 지역 어딘가의 제과점 에서 일한다고 합니다." "그야 간단하지요. 곧 알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점심식사 후, 싸이몬 피츠제랄드는 다시 스티브의 사무실에 들렀다. "무슨 진전이 있나?" 그가 물었다. "진전이 별로 없어서 답답합니다. 이 음모를 꾸민 사람은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던 것 같습니다." "요즘 줄리아는 어떻게 지내나?" 스티브는 미소 지었다. "잘 지내고 있어요." 스티브의 말투가 평소와 달랐다. 싸이몬 피츠제랄드는 스티브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줄리아는 정말 매력적인 여자야. 안 그 래?" "그렇고 말구요. 정말 매력적이에요!" 한 시간 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슬론 씨,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시드니 경찰의 맥피어슨 경감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경감님." "슬론 씨가 찾던 사람이 발견되었습니다." 스티브는 바 짝 긴장했다. "정말 반가운 소식입니다. 즉시 혐의자인도 정차를 밟아 미국으로 소환..." "아니, 서두를 필요 없습니다. 드미트리 카민스키는 사망했습니다." 스티브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뭐라구요?" "조 금 전에 그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손가락이 잘려 나가고 여러군데 총상을 입었더군요." 러시아의 마피 아에겐 특별한 살인 의식이 있지. 우선 처단 대상의 손가락을 자르고 한동안 피를 흘리며 고통을 받게 한 다음 머리에 한 방 쏘아 죽이는 거야. "잘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경감님." 또 막다른 골목이야! 스티브는 꼼짝 않고 앉아 생각에 잠겼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증인이 없어진 것이다. 드미트리 카민스키의 증언에 건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에 스티브는 허탈한 심정이었다. 인터폰 으로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티몬스 씨 전화입니다." 스티브는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5시 55분이었 다. 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티몬스 씨입니까?" "그렇습니다. 진작 전화 드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지난 며칠 동안 출장 갔었기 때문에 그렇게 됐습니다. 무슨 일로 전화하셨지요?" 우선 어떻게 지문을 날조했 는지부터 말해 주는 게 어때? 스티브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줄리아 스텐포드에 관해서 물어보려고 전 화했었습니다. 최근에 보스턴에 오셨을 때, 그녀의 지문을 대조..." "슬론 씨, 잠깐만요." "네?" "최근에는 보스턴에 간 적이 없는데요" 스티브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티몬스 씨, 이곳 홀리데이 인 호텔의 숙 박부에 당신이..." "누군가가 내 이름으로 등록했던 겁니다." 스티브는 어이가 없었다. 마지막 단서도 그 꼬리를 감춰 버린 것이다. 더 이상 추적해 볼 단서가 없었다. "그럼 누가 당신 이름을 도용해서 숙박했 는지 짐작이 안 갑니까?" "글쎄요. 저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여자가 나 를 보스턴에서 만났다고 하면서 자신이 줄리아 스텐포드라는 것을 내가 입증해 줄 거라고 주장한다기에 찾아가 보니 본 적도 없는 여자였습니다." 실날 같은 희망이 보였다. "그 여자가 누굽니까?" "이름이 포 즈너입니다. 마고 포즈너요." 스티브는 펜을 들었다. "그녀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시카고의 리드 정신 요양원에 있습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정말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천만에요. 무슨 진전이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저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싶습니다. 누군가가 제 이름을 도용하고 다 니는 게 마음에 걸립니다." "알겠습니다." 스티브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마고 포즈너라구? 그날 저녁, 스티브가 집에 돌아가자 줄리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준비를 해 놨어요." 그녀가 말했 다. "정확하게 말하면 준비한 건 아니에요. 중국음식 좋아하세요?" 그는 미소 지었다. "아주 좋아해요." "그럼, 됐어요. 요리를 여덟가지나 시켰어요." 식탁은 생화와 촛불로 꾸며져 있었다. "조사에 진전이 좀 있었어요?" 줄리아가 물었다. 스티브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단서를 한가지 잡은 것 같아요. 이 음모에 개입된 여자가 누군지 알아냈어요. 내일 아침 시카고에 가서 그녀와 직접 얘기해 볼 생각이에요. 잘하면 내일 저녁이면 모든 게 밝혀질 수 있을 거요." "정말 반가운 소식이네요." 줄리아가 말했다. "이 사건이 하루 속히 마무리되었으면 좋겠어요." "나도 그래요." 스티브가 대답했다. 정말 그럴까? 일이 다 끝나고 나면 줄리아는 스텐포드 가족이 되잖아. 그 때는 내가 접근하기도 어려울 텐데... 저녁식사는 두 시간도 더 걸렸지만, 두 사람은 무슨 음식을 먹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오 랫동안 사귀어 온 사람들처럼 화제가 그치지 않았고,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두 사람은 옛날 얘기와 지 금 벌어진 사건에 대하여 화제의 꽃을 피웠지만 장래에 관한 얘기는 무언중에 피해 갔다. 이 사건이 끝 나면 모든 게 달라질 거야. 스티브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시간이 늦어지자, 스티브가 아쉬운 듯 말했다. "자, 그럼 침실로 갑시다." 줄리아의 눈썹이 치켜 올라 가고 눈길이 마주친 두 사람은 웃음을 터트렸다. "내 말 뜻은..." "말 안해도 알아요, 스티브. 잘 자요." "잘 자요, 줄리아." 제31장 다음날 아침 일찍, 스티브는 시카고행 항공기에 탑승했다. 시카고의 오헤어 국제공항에서 택시를 탔 다. "어디로 가십니까?" 운전사가 물었다. "리드 정신요양원으로 갑시다." 운전사는 고개를 돌려 스티브 를 쳐다보았다. "괜찮으세요?" "그럼요. 왜 그러시지요?" "그냥 물어본 겁니다." 요양원에 도착해 스티브는 방문객 안내소의 경비원에게 다가갔다. 경비원이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오셨지요?" "마고 포즈너 양을 만나보려고 왔습니다." "이곳 직원입니까?" 스티브는 그 생각은 미처 못 했었다. "잘 모르겠는데요." 경비원은 스티브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잘 모른다고 했습니까?"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얘기만 들었습니다." 경비원은 책상 서랍을 열고 직원 명단을 꺼냈다. 잠시 훑어본 다음 그가 말했다. "직원 명단에는 그런 사람이 없는데요. 혹시 이곳에 입원해 있는 환자 아닙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그럴 가능성도 있지요." 경비원은 스티브를 다시 한번 훑어본 다음, 다른 서랍을 열고 컴퓨터에서 출력된 환자 명단을 꺼냈다. 그는 명단을 죽 훑어보다가 멈췄다. "포즈너, 마고. 여기 있군." "맞아요." 스티브는 약간 놀랐다. "지금 이곳에 입원해 있는 환자입니까?" "그렇습니다. 친척입니까?" "아닌데요..." "그렇다면 면회할 수 없습니다." "아니, 꼭 좀 만나야 됩니다." 스티브가 말했다. "이건 정 말 중요한 일입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사전 연락 없이는 아무도 환자를 면회할 수 없는 게 이곳 규정입니다." "누가 이곳 책임자입니까?" 스티브가 물었다. "내가 책임자요." "내 말은, 이 요양 원의 최고 책임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킹즐리 박사가 원장이지요." "그분을 좀 만나야겠습니다." "좋 아요." 경비원은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킹즐리 박사님, 안내소의 조입니다. 손님이 찾아왔는데 요." 그는 스티브를 쳐다보았다. "이름이 뭐죠?" "스티브 슬론입니다. 난 변호사요." "스티브 슬론이라는 변호사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스티브에게 고개를 돌렸다. "킹즐리 박사에게 안내 해 줄 사람이 곧 올 겁니다." 5분 후, 스티브는 게리 킹즐리 박사의 사무실로 안내되었다. 그는 오십대였 지만,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였다. "슬론 씨, 무슨 일이지요?" "이 요양원에 있는 환자 한 사람을 만났으 면 합니다. 마고 포즈너라는 환자입니다." "아, 그랬군요. 좀 특별한 환자이지요. 혹시 친척 되십니까?" "아닙니다. 저는 살인사건을 조사하고 있는데, 마고 포즈너를 꼭 만나봐야 합니다. 그녀가 결정적인 증인 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안합니다만, 면회를 허락할 수 없습니다." "꼭 해주셔야 겠습니다." 스티 브가 말했다. "이건 보통 중요한..." "슬론 씨, 제가 도와 드리고 싶어도 어쩔 방법이 없습니다." "왜 그렇 지요?" "마고 포즈너는 지금 감금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접근하면 할퀴고 물어뜯습니다. 오늘 아침에 도 여간수와 의사 두 사람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뭐라구요?" "그녀는 계속 자신의 신분을 혼동하고 있 어요. 마고 포즈너라고 했다가 다음 순간 줄리아 스텐포드라고 우겨대고, 오빠 타일러와 요트의 선원들 을 불러오라고 소리지릅니다. 그녀를 진정시키는 방법은 안정제를 다량 투여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 런 세상에!" 스티브가 말했다. "언제쯤이나 증세가 호전될 것 같습니까?" 킹즐리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계속 관찰해 봐야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증세가 진정될지도 모르고, 그러면 그 때 그녀의 상 태를 재점검해 볼 수 있을 겁니다. 그 때까지는..." 제32장 새벽 6시, 보스턴의 챨스 강을 순찰하는 경찰 경비정에 타고 있던 한 경찰관이 뭔가 떠내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우현 전방에 부유 물체 발견!" 그가 소리쳤다. "원목 토막인 것 같아. 작은 배에 부딪치기라 도 하면 문제가 생기겠는데... 건져내야 되겠어." 건져올린 물체는 나무토막이 아니라 사람의 시신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시신이 방부처리되고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는 것이었다. 경찰관은 시신을 들여다 보면서 중얼거렸다. "방부처리되고 단장까지 한 걸 보니 장례를 치른 시신 같은데, 어떻게 강물에 떠내 려오지?" 마이클 케네디 경위는 경찰 검시관과 통화하고 있었다. "확실한거요?" 검시관이 대답했다. "틀림없소. 이건 해리 스텐포드의 시신이오. 내가 직접 방부처리했잖소? 얼마 전에 묘지 발굴 허가를 받아 파 보았 을 때... 그때 시신이 없어졌다고 신고했잖소?" "묘지 발굴 허가는 누가 신청했소?" "유족들이었소. 스텐 포드가의 개인 변호사인 싸이몬 피츠제랄드 씨가 대리인으로 신청했소." "알았소. 피츠제랄드 씨를 만나 봐야 되겠군..." 시카고에서 보스턴으로 돌아온 스티브는 바로 싸이몬 피츠제랄드의 사무실을 찾았다. "자네, 몹시 피 곤한 것 같군." 피츠제랄드가 말했다. "피곤한 게 아니라 암담한 심정입니다. 싸이몬, 제대로 되는 게 없 어요. 이 사건에 연루된 세 사람의 증언으로 단서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드미트리 카민스 키, 프랭크 티몬스, 그리고 마고 포즈너, 이 세사람 말입니다. 그런데 카민스키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죽 었고, 티몬스는 가짜였고, 마고 포즈너는 정신병 중증으로 면회도 할 수 없는 요양원에 감금되었습니다. 이제 단서를 잡을 가능성은 전혀..." 인터폰으로 피츠제랄드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피 츠제랄드 씨, 케네디 경위가 찾아왔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 마이클 케네디 경위는 탱크 같이 탄탄한 체격의 노련한 형사 반장이었다. "피츠제랄드 씨 맞습니까?" "그렇소. 이 사람은 내 동료 변호사 스티브 슬론이오. 두 분은 벌써 전화로 인사하셨겠군요. 좀 앉으시죠.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해리 스텐포드의 시신이 빌견되었습니다." "뭐요? 어디서?" "챨스 강으로 떠내려 왔습니다. 전에 유족 대리인으로 묘지 발굴 허가를 신청한 적이 있습니까?" "그렇소." "왜 묘지를 발굴하려 했습니까?" 피츠제랄드는 자초지종 을 설명했다. 그의 설명이 끝나자 케네디가 다시 물었다. "그럼 가짜 프랭크 티몬스가 누구였는지 짐작 도 안 되십니까?" "모르겠습니다. 티몬스 자신도 전혀 모르겠다고 했소." 케네디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 다. "일이 점점 복잡하게 얽히는군..." "해리 스텐포드의 시신은 지금어디 있습니까?" 스티브가 물었다. "경찰 검시관실의 시체 보관실에 있습니다. 한눈 팔다가 또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럼 서둘러 해봐야 할 게 있습니다." 스티브가 말했다. "DNA 검사를 해야 됩니다." 그날 오후, DNA 검사가 실시되 었다. 줄리아와 해리 스텐포드의 표본을 비교하는 검사 결과가 나오자 검사관 페리 윙거가 말했다. "표 본들이 일치합니다. 직계 혈연관계가 틀림없습니다." 스티브는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당분간 이 사실을 비밀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스티브 슬론의 전화를 받은 타일러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이런 세상 에!" 그가 소리쳤다. "어떤 놈이 그런 짓을 했단 말이오?" "그걸 알아내려고 조사하는 중입니다." 스티브 가 말했다. 타일러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런 맹추가 있나! 베이커란 놈, 가만두지 않을거야! 어쨌건 일이 더 확대되기 전에 수습해야겠어. "슬론 씨, 아시다시피 나는 최근에 쿠크 카운티 순회재판소의 수 석판사로 임명되었소. 내가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업무가 산적해 있다고 빨리 돌아오라는 전화가 매일 걸려오고 있소. 계속 보스턴에 남아 있을 수는 없소. 상속 절차가 좀더 빨리 마무리되도록 힘써 주시면 고맙겠소." "오늘 아침에도 전화해 보았습니다." 스티브가 대답했다. "넉넉잡아도 앞으로 사흘이면 다 끝 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좋겠소. 그럼 연락을 기다리겠소." "걱정 마십시오, 판사님. 소식이 있는 대 로 즉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스티브는 사무실에 앉아 지난 몇 주 동안 벌어진 사건 경위를 다시 검토해 보았다. 시드니 경찰의 맥 피어슨 경감과의 통화가 떠올랐다. 조금 전에 그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손가락이 잘려 나가고 여러 군 데 총상을 입었더군요. 그게 다가 아닐거야... 뭔가 빠진 게 있어... 스티브는 생각했다. 그는 수화기를 들 고 시드니 경찰청 번호를 눌렀다. 벨이 몇 번 울린 후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맥피어슨 경감입니 다." "안녕하십니까, 경감님. 보스턴의 슬론 변호사입니다. 일전에 통화할 때 깜빡 잊은 게 있어서 전화 했습니다. 드미트리 카민스키의 시신이 발견되었을 때 소지품도 있었습니까?... 그렇습니까?... 서류는 없 었습니까?... 아, 그랬군요... 네... 정말 감사합니다." 통화가 끝났을 때 인터폰으로 비서가 말했다. "2번에 케네디 경위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티브는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경위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 다. 국제전화를 하느라고 그랬습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일전에 말씀하신 후프 말코비치 건입니다. 뉴 욕 경찰에 조회해 보았더니, 그 친구 보통 문제아가 아니더군요." 스티브는 펜을 들고 메모할 준비를 했 다. "무슨 말씀이시죠?" "경찰은 그 친구가 일하는 제과점이 마약 판매의 거점일 거라고 의심하고 있습 니다." 케네디는 잠시 멈췄다가 계속했다. "말코비치가 마약판매책인 것이 분명한데 교묘하게 수사망을 피해 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아직 한번도 마약 관련 사범으로 체포된 적이 없습니다." "그 외에 다른 정 보는 없습니까?" 스티브가 물었다. "경찰은 말코비치 일당이 마르세이유를 거점으로 하는 프랑스 마피아 와 연결되어 있다는 심증을 갖고 있습니다. 또 다른 정보를 입수하면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고맙습 니다, 경위님. 이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스티브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박으로 나갔다. 줄리아가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서둘러 집에 돌아온 스티브는 문을 들어서자마자 그녀를 불렀다. "줄리아, 어디 있어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스티브는 당황했다. "줄리아!" 혹시 납치되거나 살해당한 거 아냐? 불길한 예감이 몰려왔다. 줄리아가 2층 계단 위에서 나타났다. "스티브?"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난 또 무슨 일이라도..." 그의 얼굴이 백짓장 같았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 생겼어요?" "아니, 아니에요." 줄리아는 계단을 내려왔다. "시카고에 갔던 일은 잘됐어요?" 스티브는 고개를 저었다. "소득 이 전혀 없었어요." 그는 시카고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줄리아, 목요일에 유산 상속이 확정될 거 요. 이제 사흘밖에 남지 않았잖소. 이 음모를 꾸민 사람은 그 동안 당신을 제거하려 할 것이 틀림없어 요. 안 그러면 그 사람의 계획이 무산될 테니까 말이요." 줄리아의 안색이 달라졌다. "음모를 꾸민 사람 이 대체 누구일까요?" "내 생각으로는..."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잠깐만요." 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여 보세요?" "난 호브 만의 닥터 티쉬너입니다. 진작 전화 드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며칠 동안 여행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닥터 티쉬너, 전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스텐포드가의 개인 변호사로서 지금 해리 스텐포드의 유산 상속 문제를 관장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로 저에게 전화하셨지요?" "우드로 스 텐포드 씨에 관한 일로 전화했습니다. 그가 선생님의 환자였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닥터 티쉬 너, 우드로 스텐포드 씨가 마약에 중독된 게 맞습니까?" "슬론 씨, 의사는 환자의 사생활에 관해 제삼자 에게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흥미로 알아보려는 게 아닙니다. 지금 중대한..." "어찌됐든, 저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선생이 우드로 스텐포드 씨를 쥬 피터에 있는 하버 그룹 요양원에 입원시킨 적이 있지 않습니까?" 티쉬너는 잠시 주저했다. "그렇습니다. 그건 누구나 볼 수 있는 기록이 남겨진 사실입니다." "고맙습니다. 그 말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수화기 를 내려놓고 스티브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 "이건 믿을 수가 없어!" "뭔데요?" 줄리아가 물었다. "좀 앉아요..." 다음날 아침, 스티브는 로즈 힐로 차를 몰고 있었다. 이제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다. 정말 교묘한 계획 이었어! 성공 일보 직전이었잖아! 만약 줄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직도 성공할 수 있는 거야. 스티 브는 생각했다. 로즈 힐에 도착했을 때, 클라크가 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슬론 씨?" "클라크, 잘 있 었소? 스텐포드 판사님이 집에 계시지요?" "지금 서재에 계십니다. 잠깐만 기다리시면 찾아오셨다고 말 씀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잠시 후 클라크가 돌아왔다. "스텐포드 판사님이 서재에서 기다리십니다." "고맙소." 스티브는 서재로 들어갔다. 타일러는 체스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스티브가 돌아오자 그는 고 개를 들었다. "어서 오시오. 무슨 일입니까?" "드디어 누가 이 음모를 꾸몄는지 알아냈습니다." 잠시 침 묵이 흘렀다. 타일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누구란 말이오?" "좀 충격을 받으실 겁니다. 음모를 꾸민 장본인은 바로 판사님의 동생 우디입니다." 타일러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스티브를 쳐다보았다. "아니, 정말 우디가 그런 음모를 꾸몄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 그건 믿어지지 않는데..." "저도 처 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상황이 우디를 지목하고 있습니다. 호브 만의 닥터 티쉬너하 고도 얘기해 보았습니다. 동생이 마약에 중독된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난... 나도 그런 의심은 했었 소." "마약을 계속 복용하는 데는 엄청난 돈이 필요합니다. 우디는 일정한 수입이 없잖습니까? 그는 유 산의 제일 큰 지분을 차지하려고 계획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짜 줄리아를 고용하고, 판사님이 DNA 검 사를 주장하니까 당황해서 아버지의 시신을 발굴해서 유기한 것입니다. DNA 검사 결과는 보나마나한 것이었을 테니까요. 저는 바로 그 점을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캔사스에서 왔던 그 아가씨는 피 츠제랄드 씨도 진짜 줄리아 같다고 했습니다. 아마 우디도 그걸 알고 누군가를 캔사스 시로 보내 그녀 를 죽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페기의 오빠가 마피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진짜 줄리아가 살아 있는 한, 그의 계획은 성공할 수 없지 않습니까?" "정말 우디가 그랬다는 증거라도 있 소?" "이제 곧 모든 게 밝혀질 겁니다. 제 생각이 틀림없습니다. 판사님, 그뿐이 아닙니다." "그럼 뭐가 더 있다는 말이오?" "난 우디가 스텐포드 씨를 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페기의 오빠를 통하면 하수인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후프 말코비치는 마르세이유 마피아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경찰의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블루 스카이 호의 선원 한 사람만 매수해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오 늘 밤, 이태리로 가서 바카로 선장과 다시 한번 얘기해 봐야겠습니다." 타일러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 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소." 아무리 물어도 바카로는 아는 게 없을 걸. "상속 절차가 끝나는 목요일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타일러가 물었다. "그럼 줄리아는... 그 때까지 그녀가 안전 하겠소? 캔사스에 있다면 위험할 테니 무슨 조치를 취해야 되는 것 아니오?" "걱정 마십시오." 스티브가 말했다. "지금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있습니다. 내 집에 있거든요." 제33장 이건 천우신조야! 타일러는 우연한 행운에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스티브 슬론의 엉뚱한 결론이 줄리아 를 그에게 바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할 베이커 같은 멍청이를 시켰던 게 잘못이지... 이번에는 내가 직접 처치해야겠어. 타일러는 생각했다. 클라크가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스텐포드 판사님. 전화가 왔습니다." "타일러?" 퍼씨 순회재판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타일러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 동안 마 고 포즈너 건이 어떻게 진전되었는지 알려 주려고 전화했네." "어떻게 됐습니까?" "기포드 박사에게 조 금 전 연락을 받았어. 정신분열 증세가 아주 심하다고 하더군. 계속 아우성치고 누구든지 할퀴고 물어뜯 는 바람에 할수없이 격리시설에 감금했다네." 타일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거 참, 안됐군요." "어찌 됐든 그녀는 이제 자네나 자네 가족을 해칠 수 없게 되었어. 이젠 마음놓아도 된다고 알려 주려고 전화 했네." "정말 고맙습니다." 타일러가 말했다. 이번에는 진심이었다. 타일러는 침실로 들어가 리에게 전화했다. 한참 신호가 간 다음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타일러는 많 은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리?" "누구요?" "나야, 나. 타일러라구." 술잔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리, 지금 파티하고 있어?" "맞아. 와서 같이 즐기는 게 어때?" 타일러는 어떤 사람들이 파티에 참석했는지 궁금했다. "그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어. 난 아직 보스턴에 있어. 일전에 얘기했 던 여행 때문에 전화했어. 이제 떠날 준비를 해야 되겠어." 리는 웃었다. "흰색 요트를 타고 남불 해안을 유람하자던 것 말이지?" "그래. 바로 그 얘기야." "좋지. 준비는 무슨 준비야. 아무때나 떠날 수 있어." 장난기 섞인 말투였다. "리, 이건 농담이 아냐." "타일러, 정신 좀 차려. 판사 수입으로 어떻게 그런 요트 를 산단 말이야. 이제 전화를 끊어야겠어. 손님들이 기다려." "잠깐!" 타일러가 소리쳤다. "내가 누군지 알고 하는 말이야?" "그럼. 타일러..." "내 이름이 타일러 스텐포드잖아. 해리 스텐포드가 바로 내 아버지 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날 놀리는 건 아니지?" "아니야. 지금 보스턴에서 유산 상속 절차를 마무리 짓고 있어." "이런 세상에! 바로 그 스텐포드란 말이야? 난 까맣게 몰랐어. 내가 큰 실수를 했군. 뉴스에 서 온통 떠들어댔지만 별로 관심이 없었거든..."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남불 해안으로 같이 여행하 자고 한 것은 진심이지?" "물론이야. 우리 함께 멋진 여행을 할 수 있을 거야." 타일러가 말했다. "네가 그럴 생각이 있다면 말이야." "물론이지!" 리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야, 정말 이건 대단한 뉴스야. 타 일러, 정말 뭐라고 말..." 타일러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리 문제는 해결되었다. 의붓동생만 제거하면 다 끝나는 거야. 그는 생각했다. 그는 서재로 들어가 캐비넷을 열었다. 해리 스텐포드가 수집한 총기를 보관한 곳이었다. 고급 나무상 자를 꺼내 들고 다른 서랍에서 실탄을 꺼냈다. 실탄은 주머니에 넣은 후 나무상자를 들고 침실로 갔다. 문을 잠근 다음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해리 스텐포드가 아끼던 두 자루의 독일제 루거 권총이 들 어 있었다. 타일러는 한 자루를 꺼내 조심스럽게 실탄을 장전하고 남은 실탄과 나무상자를 서랍장에 넣 었다. 한 방이면 끝날 거야. 그는 생각했다. 고등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을 때 타일러는 사격솜씨가 뛰 어났었다. 아버지가 날 군사학교에 보낼 때, 이런 일을 예상하지는 못했겠지. 하여간 고맙군. 타일러는 전화번호부를 뒤져 스티브 슬론의 주소를 찾아보았다. 뉴버리가 280번지 뉴버리 공원. 타일러는 차고로 갔다. 여러 대의 자동차 중에 검은 색 벤츠를 타기로 했다. 그 중 흔히 볼 수 있는 차종이기 때문이었 다. 차고 문을 열고 아무도 없는지 살펴보았다. 로즈 힐은 적막에 싸여 있었다. 스티브 슬론의 집으로 차를 몰면서 타일러는 이제 어떻게 해야 될지 생각해 보았다. 그는 여태까지 사람을 죽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줄리아 스텐포드는 그의 꿈을 실현시키 는 데 마지막 장애였다. 그녀만 제거되면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는 남의 시선을 끌지 않으려고 천천히 차를 몰았다. 뉴버리가에 도착하자 두어 번 스티브 슬론의 집 근처를 돌며 거리를 살폈다. 길가에는 자동차 몇 대가 주차돼 있는 것말고는 인적이 없었다. 타일러 는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주차하고 280번지로 걸어갔다. 문에 다가가 벨을 누르고 기다렸다. 줄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나 스텐포드 판사요." 줄리아가 문을 열었다. 의외라는 표정으로 타일 러를 쳐다보았다. "웬일이세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아니, 그런 게 아니고," 타일러는 가볍게 대답 했다. "스티브 슬론이 줄리아하고 얘기를 좀 하라고 해서 말이오. 여기 있다고 말해 주더군. 들어가도 되 겠소?" "물론이지요. 들어오세요." 타일러는 안으로 들어서면서 줄리아가 문을 닫는 것을 확인했다. 거실 로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스티브는 지금 여기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이태리의 산 레모에 갔어요." "알고 있소."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럼 혼자 있소? 파출부나 누가 함께 있지 않소?" "아뇨. 혼자 있어요. 여긴 안전하잖아요. 뭐 마실 거라도 가져올까요?" "아니, 괜찮소." "저한테 할 얘기가 있다고 하 셨죠?" "줄리아, 네 얘기를 하려고 온거야. 넌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어." "난처하게 만들다뇨?" "넌 나타 나지 말았어야 했어. 정말로 너와는 상관도 없는 엄청난 유산을 한몫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줄 리아는 잠시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난 그럴 권리가..." "넌 아무 권리도 없어!" 타일러가 소리쳤다. "우리 형제가 아버지로부터 엄청난 고통을 받으며 살아온 그 오랜 세월 동안 넌 어디 있었지? 아버지는 핑계만 있으면 우리를 못살게 굴었어. 우린 지옥 같은 세월을 보냈다구. 넌 그걸 겪지 않았잖아. 그래서 넌 유산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거야. 유산은 우리 삼남매 거야." "그럼 나보고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타일러는 웃었다. "어떻게 해야 되느냐구? 네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 벌써 일을 저질렀잖아. 너 때문 에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뻔했다구, 알아?" "무슨 말이에요?" "문제는 간단한 거야." 그는 권총을 꺼내 들었다. "넌 좀 없어져 줘야겠어." 줄리아는 한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왜..." "잔소리 마. 낭비할 시간 없어. 나하고 같이 가 줘야겠어." "내가 안 가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좋을 대로 해! 살아서 따 라오든 시체로 들려 가든 난 상관없으니까!" 줄리아는 대답이 없었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음 순간 옆 방에서 타일러의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좋을 대로 해! 살아서 따라오든 시체로 들려 가든 난 상관없으 니까!' 타일러는 소리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게 무슨..." 스티브 슬론, 싸이몬 피츠제랄드, 케네디 경위, 그리고 두 명의 정복 경찰관이 거실로 들어왔다. 스티브의 손에 녹음기가 들려 있었다. 케네디 경 위가 말했다. "스텐포드 판사, 총을 이리 내놓으시오." 타일러는 순간 흠칫했지만 곧 태연하게 미소 지으 며 말했다. "자, 여기 있소. 난 이 여자가 보스턴을 떠나도록 겁을 주려고 했던 것이오. 이 여자는 줄리 아 스텐포드를 사칭하는 사기꾼이 분명하오." 그는 케네디에게 권총을 건넸다. "아버지의 유산이 탐이 나 사기극을 꾸민 게 틀림없소. 난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소. 그래서..." "스텐포드 판사, 모든 게 다 밝혀졌소." 스티브가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우디가 음모를 꾸몄다고 당신이 말했잖소?" "우디 는 이렇게 치밀한 음모를 꾸밀 능력이 없소. 그리고 캔달은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그럴 리가 없다고 판 단했소. 그래서 당신을 조사하기 시작한 거요. 드미트리 카민스키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죽었지만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수첩에 당신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소. 시드니 경찰에 확인한 사실이오. 당신이 아버지 를 살해하라고 카민스키에게 지시한 게 틀림없소. 바로 당신이 마고 포즈너를 고용해서 줄리아 행세를 하게 하고, 또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그녀가 가짜라고 주장했던 거요. 그래서 DNA 검사를 해야 된다고 주장했고 묘지의 시신을 유기했던 거요. 당신은 가짜 프랭크 티몬스도 고용했잖소? 그리고 줄리아 행세 를 하던 마고 포즈너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자 당신은 그녀를 정신요양원에 감금시켰소." 듣고 있던 타 일러는 방 안을 둘러본 다음 입을 열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침착한 소리였다. "그게 당신의 증거 전부 요? 이건 말도 안 돼! 날 함정에 빠뜨리려고 계획했다는 게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오? 증거라고는 한 가지도 없잖소? 드미트리가 내 전화번호를 갖고 있었던 것은 내가 아버지의 신변이 걱정되어서 그에게 자주 연락하라고 했기 때문일 거요. 그렇게 조심하라고 일렀는데도 변을 당한 거요. 아버지를 살해한 사 람이 아마 드미트리도 죽였을 거요. 경찰은 그 사람을 찾는 쪽으로 수사의 방향을 잡아야 될 거요. 난 진실을 밝히려고 프랭크 티몬스를 불렀소. 누군가가 티몬스를 사칭했지만 그건 나도 몰랐던 일이오. 당 신들이 가짜 티몬스를 찾아내고 나와 공모한 사실을 밝혀내지 못하는 한 그건 증거가 될 수 없소. 그리 고 내 의붓동생 줄리아의 경우 난 그녀가 진짜라고 믿소. 단지 그녀가 갑자기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면 서 엄청나게 비싼 물건을 사들이고 우리 형제를 다 죽이겠다고 하는 바람에 시카고로 돌아가도록 설득 한 거요. 그런 다음 시카고에 연락해서 그녀를 요양원에 입원시키도록 조치했소. 난 이런 일로 스텐포드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리지 않게 하려고 최선을 다한 것뿐이오." 줄리아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 나를 죽 이려고 했잖아요." 타일러는 고개를 저었다. "난 죽일 의사가 전혀 없었소. 당신이 가짜라는 것을 알아채 고 겁을 주어 쫓아 버리려 한 거요."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타일러는 다른 사람들에게 고개를 돌 렸다. "또 다른 측면에서도 이 사건을 검토해야 될 것이오. 음모를 꾸민 사람이 반드시 가족 중 한사람 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는 거요. 집안 내력을 잘 아는 사람이 가짜 줄리아 스텐포드를 내세우고 유족 들이 그녀를 받아들이도록 증거를 조작한 다음 그녀 몫의 유산을 나누기로 했을 수도 있소. 왜 그런 생 각을 해보지도 않았소?" 그는 싸이몬 피츠제랄드를 쳐다보았다. "난 당신과 스티브 슬론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소. 아마 당신들 재산을 다 털어 내도 감당하기 힘들 거요. 여기 있는 모두가 내 증인이오. 그 렇게 되면 당신들은 판단착오한 것을 몹시 후회하게 될 것이오. 난 수십 억 달러를 다 동원하더라도 당 신들을 가만두지 않겠소." 그는 다시 스티브 슬론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신에겐 해리 스텐포드의 유산 상속 절차를 마무리 짓는 게 변호사로서의 마지막이 될 거요. 자, 나를 무기 불법 소지죄로 체포할 거 요? 난 이제 그만 가야겠소." 모두들 엉거주춤하게 선 채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날 체포하지 못한다는 말이군. 자, 그럼 난 가겠소." 그들은 걸어 나가는 타일러 뒷모습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케네디 경위가 맨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런 세상에!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될 수가 있지?" "스텐포드 판사는 큰소 리를 쳐본 거요." 스티브가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법적 증거가 없는 것은 사실이오. 그의 말 이 맞아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난 그가 무너지면서 다 털어놓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를 과소평가했던 것 같습니다." 싸이몬 피츠제랄드가 말했다. "우리 계획이 완전한 불발탄이 됐어. 드미트리 카민스키나 마고 포즈너의 증언 없이는 심증밖에 없잖아." "날 죽이려고 했던 것은 범죄 아니에요?" 줄 리아가 항의했다. 스티브가 대답했다. "그의 변명을 들었잖소? 당신을 가짜로 판단하고 겁을 주려고 했 다는 주장 말이오." "그냥 겁을 주려던 게 아니었어요." 줄리아가 말했다. "날 죽이려 했던 게 확실해요." "맞아요.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지요. 이런 경우를 보고 디킨즈가 '법은 엉망이다.'라고 했을 거요. 우리 계획은 무산되었고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피츠제랄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다가 아니야. 스티브, 우리를 고소하겠다는 타일러의 말은 위협이 아니야. 틀림없이 그렇게 할거야. 그가 음모의 장본인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거야." 모두 떠나가고 줄리 아와 스티브만 남았다. 줄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 미안하게 됐어요.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나에게 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스티브가 말했다. "하지만 그는 피츠제랄드 씨와 고소하겠다고 했잖아요. 정말 그럴까요?" "두고 봐야지요." 줄리 아는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스티브, 내가 좀 도우면 안 되겠어요?" "줄리아가 돕다니, 어떻게?"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난 엄청난 돈을 상속받게 되잖아요? 타일러와 소송이 벌어지면 많은 소 송비용이 필요하게 될 거예요. 내가 기꺼이..." 스티브는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줄리아, 그 마 음은 정말 고맙소. 하지만 당신 돈을 소송비용으로 쓸 수는 없소. 걱정 말아요. 다 잘될 거요." "하지 만..." "글쎄, 걱정 말아요." 줄리아가 몸서리치며 말했다.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악독할 수 있을까?" "오 늘 타일러의 정체를 밝히려고 한 당신의 용기에 정말 감탄했소." "그의 음모를 밝힐 방법이 없다고 했잖 았아요? 그가 나 혼자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면 반드시 나를 제거하려고 할 것이고 그 때 그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거 참, 우리만 정체를 드러낸 셈이 됐군요." 그날 밤, 침대에 누운 줄리아는 스티브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 때문에 그가 난처한 입장이 된 것이 너무나 미안했다. 내가 나타나지 않았어야 했어. 줄리아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에 오지 않았 더라면 스티브도 만나지 못했을 거 아냐? 옆 방에서는 스티브가 줄리아 생각에 잔을 이루지 못하고 있 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줄리아가 점점 멀어져 가는 느낌이었다. 괜한 미련을 가지면 안 돼. 저 벽은 10억 달러 두께야! 타일러는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집으로 차를 몰면서 스티브 슬론의 집에서 벌어졌던 일을 되새겨 보았다. 아무도 그의 재치를 당해 내지 못한 것이었다. 난쟁이들이 어떻게 거인을 쓰러뜨릴 수 있겠어? 그는 생각했다. 한때 아버지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로즈 힐에 도착했을 때, 클라크가 문을 열었다. "스텐포드 판사님, 모든 게 잘 되어가고 있습니까?" "잘되구말구. 클라크, 더 이상 잘될 수 없을 정도야." "뭐 필요하신 건 없습니까?" "아, 샴페인 한잔 마셨 으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곧 가져오겠습니다." 자신의 승리를 혼자서라도 축하하고 싶었다. 모레면 20 억 달러가 생기는 거야. 그는 그 달콤한 말을 되풀이했다. "20억 달러... 20억 달러..." 리에게 전화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리가 그의 목소리를 대뜸 알아들었다. "타일러! 어떻게 지내?" 다정한 목소리였다. "리, 잘 지내고 있어." "타일러,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어." 타일러는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했다. "그랬어? 그 럼, 모레 보스턴으로 올 수 있겠어?" "그건 어렵지 않지... 하지만 왜 모레..." "모레 상속 절차가 마무리 되거든. 유언장이 최종 확정되면 난 20억 달러를 상속받게 되는 거야." "20억... 정말 믿어지지 않는군!" "그 순간을 리와 같이 하고 싶어. 요트를 함께 골라 보는 게 어때?" "타일러, 정말 정신 못 차리겠는걸!" "그럼 올 거야?" "물론이지." 수화기를 내려놓고 리는 계속 중얼거렸다. "20억 달러... 20억 달러..." 제34장 상속 절차가 끝나기 전날, 캔달과 우디는 스티브 슬론의 사무실에 모였다. "왜 우리 두 사람을 오라고 했습니까?" 우디가 말했다. "내일이면 유언장이 최종 확정될 텐데 말입니다." "그 전에 소개해야 될 사 람이 있습니다." 스티브가 말했다. "그게 누구죠?" "줄리아 스텐포드 양입니다." 두 사람 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줄리아는 벌써 만나봤잖아요." 캔달이 말했다. 스티브는 인터폰을 눌렀다. "이제 들어오시 라고 해요." 캔달과 우디는 의아한 표정으로 마주보았다. 문이 열리고 줄리아 스텐포드가 들어왔다. 스티 브가 일어섰다. "이 사람이 두 분의 의붓동생 줄리아입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요?" 우디가 소리쳤 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돼요." "제 말을 좀 들어보세요." 스티브가 차분하게 말했 다. 그는 15분 동안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스티브의 말이 끝났을 때, 우디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타 일러가 그랬다구? 믿을 수 없어!" "그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에 나타났던 여자의 지문과 어렸을 때 의 줄리아 스텐포드 지문에 일치했잖소?" 우디가 말했다. "난 아직도 줄리아의 지문이 찍힌 서류를 가지 고 있단 말이오." 스티브는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정말 그 서류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래요. 좀 우습지만 10억 달러짜리 서류라는 생각이 들어서 보관하고 있었소." "저를 좀 도와 주셔야겠습니다." 스티브가 말했다. 다음날 아침 10시, 렌퀴스트, 렌퀴스트, 피츠제랄드 법무법인의 회의실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 앉았다. 싸이몬 피츠제랄드가 가운데 자리잡았고, 캔달, 타일러, 우디, 스티브, 그리고 줄리아도 앉아 있었다. 그 들 외에도 몇 명의 낯선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피츠제랄드가 그 중 두 사람을 가족들에게 소개했다. "이분이 윌리엄 파커 씨고, 이분은 패트릭 에반스 씨입니다. 이분들은 스텐포드 기업의 고문 변호사이십 니다. 스텐포드 기업의 최근 재무 제표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제가 먼저 유언장 내용을 확인하면 그 다 음부터는 이분들이 회의를 주재하실 것입니다." "빨리 진행합시다." 타일러가 말했다. 그는 혼자 떨어져 앉아 있었다. 내가 상속 재산을 손에 넣으면 네놈들 모두 가만두지 않을 테다. 싸이몬 피츠제랄드가 고 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피츠제랄드 앞에는 '해리 스텐포드-최종 유언장'이라고 쓰여 진 두툼한 서류철이 놓여 있었다. "지금 유족들에게 유언장 사본을 배포하겠습니다. 쓸데없는 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들께 이미 해리 스텐포드 씨의 직계비속이 균등하게 유산을 상속 받게 되어 있다고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줄리아와 스티브의 눈길이 마주쳤다. 엄청난 재산이 생기면 나와는 멀어지겠지... 하지만 축하해 줘야 될 일이야. 스티브는 생각했다. 싸이몬 피츠제랄드가 말을 이 었다. "적은 액수의 유산을 상속받도록 지명된 사람이 십여 명 있습니다만, 모두 합쳐도 얼마 되지 않는 액수입니다." 오늘 오후면 리가 도착하겠지. 공항으로 마중 나가야 되겠어. 타일러는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한 자산을 파악해 보니 스텐포드 기업의 자산은 대략 50억 달러가 됩니다." 피츠제랄드는 윌리엄 파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내용은 파커 씨가 설명하시도록 하겠습니다." 윌리엄 파커는 손가방 을 열고 서류 뭉치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쳐 놓았다. "피츠제랄드 씨 말씀대로 자산은 50억 달러에 이릅니 다. 그러나..." 그는 말을 멈추고 잠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스텐포드 기업의 총부채가 150억 달러가 넘 습니다." 우디가 벌떡 일어났다. "그게 무슨 소리야?" 타일러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이건 말도 안 돼!" 캔달이 말했다. 파커는 지금까지 소개되지 않은 또 한 사람에게 고개를 돌 렸다. "이 분은 레너드 레딩 씨입니다. 증권거래소에 계시지요. 이분의 설명을 들어보시는 게 좋겠습니 다." 레딩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2년 동안 해리 스텐포드 씨는 이자율이 반드시 하락할 것이라고 확 신하고 있었습니다. 과거에도 그는 이자율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채권 투기를 함으로써 엄청난 돈을 벌 었습니다. 그의 예측과는 달리 이자율이 계속 올랐지만 그는 곧 하락할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자금을 빌려 투기의 규모를 늘려 갔던 것입니다. 장기 채권을 사들이려고 엄청난 돈을 빌린 것입 니다. 그러나 이자율은 계속 상승해, 그가 사들인 채권 가격이 떨어지면서 금융 비용만 엄청나게 늘어났 습니다. 처음에는 은행들이 그의 명성과 재산 때문에 채권 투기를 지원했지만, 그가 투기에서 본 손해 를 만회하려고 점점 더 위험부담이 큰 채권에 손을 대기 시작하자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채권 투기에 실패했던 것입니다. 투기에 필요한 자금을 빌릴 때, 빌린 돈으로 매입했던 채권을 담보로 제공했고, 그것이 되풀이되면서 채권 투기를 위한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에반스가 끼어들었다. "그는 피라미드식으로 부채를 증가시킨 것입니다. 그건 불법 행위 였습니다." "맞습니다. 불행하게도 이자율은 역사상 유례없는 상승을 거듭했습니다. 그는 이미 빌린 돈의 이자를 갚기 위해 또다시 돈을 빌리는 악순환을 거듭한 것입니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그의 입만 쳐다 보고 있었다. "해리 스텐포드는 심지어 회사의 퇴직금까지도 자신의 개인 보증으로 인출하여 그 자금을 채권 구입에 썼습니다. 이 역시 법에 금지된 행위입니다. 거래 은행들이 스텐포드 기업의 재무 상태에 대하여 묻기 시작하자 그는 서류상의 자회사들을 설립하고 재무 제표를 조작해서 자산 가치를 부풀렸습 니다. 명백한 사기와 배임 행위입니다. 그는 거래 은행들과 교섭해서 몇 개 은행의 차관단에 의한 구제 금융을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거래 은행들은 그의 제의를 거절했고, 상황을 증권거래소에 보고했습니다. 결국 인터폴까지 개입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거래가 세계 전체에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레딩은 옆에 앉은 사람을 가리켰다. "이분은 프랑스 경찰의 파투 경감입니다. 경감님, 그 다음에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파투 경감은 약간 프랑스 액센트가 섞인 영어로 말했다. "인터폴의 요청에 따라 저희는 쎄인트 폴 드 방스로 해리 스텐포드를 추적했습니다. 세 사람의 형사들이 그를 미행했지만 해리 스텐포 드는 교묘하게 그들을 따돌렸습니다. 인터폴은 유럽 모든 나라의 경찰에 해리 스텐포드를 발견하는 대 로 감시, 보고하라는 전통을 보냈습니다. 그때 그의 범죄 사실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면 아마 체포령을 내렸을 것이고, 그랬다면 프랑스 경찰이 체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디는 충격으로 몹시 혼란스러워 했다. "바로 그거야! 그래서 우리에게 유산을 남긴 거야! 텅 빈 껍데기만 남겼잖아." 윌리엄 파커가 말했 다. "대충 그렇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거래 은행들이 구제 금융을 거절했을 때 부친은 여러분에게 유산 을 남긴다는 유언장을 작성했습니다. 실제로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었지요. 하지만 크레디 리오 네 은행의 르네 고티에가 구제 금융을 약속했습니다. 스텐포드 기업이 회생할 기미가 보인 순간 부친은 유언장을 바꾸어 여러분의 유산 상속권을 없애버리려 한 것입니다." "그럼 요트와 비행기, 그리고 수많 은 저택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캔달이 물었다. "안됐지만," 윌리엄 파커가 대답했다. "해리 스텐포드의 재산은 예외 없이 현금화해서 부채 상환에 충당할 것입니다." 타일러는 몸이 굳어 버린 듯 꼼짝 않고 앉 아 있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악몽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었다. 이제 더 이상 '억만장자 타일러 스텐포 드'가 아니었다. 그저 스텐포드 판사였다. 그는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난... 난 뭐라고 해야 될지... 이제 얘기가 끝났으면 난 그만 실례..." 서둘러 공항으로 가서 리를 만나 여행 계획이 무산된 것을 설명 하려는 생각이었다. 스티브가 말했다. "얘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타일러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물 었다. "무슨 얘기요?" 스티브는 문 옆에 서 있던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열리자 할 베이커가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판사님?" 우디가 프랭크 티몬스로부터 받은 줄리아의 지문이 있는 서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이 결정적인 단서를 잡은 계기가 되었다. "좀 보여줄 수 있습니까?" 스티브가 말했다. 우디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 이었다. "그건 봐서 뭘 할 거요? 그녀의 지문 두 짝밖에 없는 종이 조각인데... 그 지문들은 같은 사람 것이 틀림없었소. 우리 모두가 확인했소." "하지만 프랭크 티몬스 행세를 한 사람이 그녀의 지문을 그 자리에서 채취했지요? 맞습니까?" "그래요." "그렇다면 그 사람이 서류를 만졌을 테니 틀림없이 그의 지 문에 남아 있을 겁니다." 스티브의 예감은 정확했다. 서류에는 할 베이커의 지문이 여러개 찍혀 있었고 컴퓨터로 그 지문의 주인공을 찾아내는 데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스티브는 시카고의 검사장에게 전 화를 걸었다. 즉시 구인장이 발부되고 형사 두 사람이 할 베이커의 집에 나타났다. 베이커는 앞마당에서 아들 빌리와 야구 연습을 하고 있었다. "베이커 씨?" "그런데요." 형사들은 경찰 신분증을 내보였다. "검 사장께서 좀 만나자고 하십니다. 같이 가실까요?" "지금은 갈 수 없습니다." "갈 수 없다뇨?" 형사는 어 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모르겠단 말이오? 지금 내 아들 야구 연습시키는 중이잖소." 검사장은 재판 기록을 상세히 읽어본 다음 마주앉은 할 베이커에게 말했다. "당신은 대단히 가정적인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게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할 베이커는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가 정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근본이 아닙니까? 모든 가정이 화목..." "베이커 씨." 검사장은 몸을 앞으로 당 겼다. "스텐포드 판사의 음모에 참여했던 게 틀림없지요?" "난 스텐포드 판사라는 사람을 모르는데요." " 그럼, 당신 기억을 일깨워 주지. 당신은 그 사람 지시로 프랭크 티몬스라는 사립탐정 행세를 했고, 또한 줄리아 스텐포드라는 여자를 죽이려 했었소." "무슨 말씀인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당신이 지은 죄는 10년 내지 20년 징역형감이란 말이오. 그리고 나는 최고 형량인 20년 징역을 구형할 작정이오." 할 베이커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건 안 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내 아내와 아이들은 어 떻게..." "바로 그거요. 그러나," 검사장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당신이 검찰측 증인으로 진실을 밝힌 다면 검찰은 당신의 처벌을 아주 가볍게 해줄 용의가 있소." 할 베이커는 손등을 긁기 시작했다. "제가... 뭘...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선 자초지종을 다 털어놔요..." 이제 렌퀴스트, 렌퀴스트, 피츠제랄드 법무법인의 회의실에서 타일러와 마주선 할 베이커가 말했다. "판사님,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그를 쳐다본 우디가 소리쳤다. "아니, 프랭크 티몬스 아냐!" 스티브가 타일러에게 말했다. "당신은 바로 이 사람에게 이 사무실에 있던 해리 스텐포드의 유언장을 복사하라고 시켰고, 나중엔 그의 시체를 발굴해서 유기하고 또 줄리아 스텐포드를 죽이라고 지시했잖소?" 한참 만에 야 타일러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이자는 잘 알려진 전과자요. 판사인 내 말은 제쳐 놓고 이자의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소!" "아무 근거도 없이 그의 말을 믿는 게 아니오." 스티브가 말했다. "이 사람을 전에 본 적은 있지요?" "물론이오. 내가 이자의 재판을 담당했었소." "이자의 이름이 뭐죠?" "이자의 이름은..." 타일러는 그 질문의 함정을 알아챘다. "아마 이자는 여러 개의 가명을 쓰고 다녔을 거요." "당신이 재판할 때는 이름이 할 베이커였지요?" "그... 그렇소." "하지만 이 사람이 보스턴 에 나타났을 때, 당신은 가족들에게 그를 프랭크 티몬스로 소개했잖소?" 타일러는 선뜻 말을 둘러대지 못했다. "그건... 내가..." "당신은 할 베이커를 당신 책임하에 가석방시키고 마고 포즈너가 진짜 줄리아라 는 증거를 조작하는 데 이 사람을 이용했지요?" "아니! 난 그런 짓 한 적 없소. 마고 포즈너라는 여자는 로즈 힐에 나타나기 전엔 본 적도 없는 여자요." 스티브는 케네디 경위에게 고개를 돌렸다. "케네디 경 위, 지금 이말 들었지요?" "확실히 들었습니다." 스티브는 다시 타일러에게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마고 포즈너에 대해서도 조사해 보았소. 그녀 역시 당신 주재로 재판을 받았고 당신 책임하에 가석방된 것을 확인했소. 그리고 시카고의 검사장이 오늘 아침 당신의 대여 금고에 대한 수색 영장을 발부 받아 금고 를 열었소. 조금 전에 연락이 왔는데 금고에서 줄리아 스텐포드의 상속 지분을 당신에게 양도하는 서류 를 찾아냈다고 했소. 그런데 그 서류는 가짜 줄리아 스텐포드가 로즈 힐에 나타나기 닷새 전에 서명된 것이었소." 타일러는 어떻게든 이 궁지를 모면해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니, 난... 이, 이건 말도 안 돼!" 케네디 경위가 말했다. "스텐포드 판사, 당신을 살인예비음모죄로 체포하겠소. 당신의 송환 절차가 끝나는 대로 시카고 검찰로 이성할 거요." 타일러는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주변의 화려하던 세계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 같았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소. 지금부터 당신이 말하는 것은 모두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될 수 있소.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고, 심문 과정에 변호사 를 동석시킬 권리도 있소. 변호사 비용을 부담할 능력이 없고 또 당신이 원한다면 심문이 시작되기 전 에 관선 변호인을 선임해 줄 수 있소. 알겠소?" 케네디 경위가 물었다. "알겠소." 다음 순간 타일러의 얼 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너희 손에 재판받을 타일러 스텐포드가 아니야! 난 얼마든지 너 희 손을 빠져나갈 수 있어. "자, 스텐포드 판사. 가볼까요?" 타일러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착하게 말했다. :좋소. 갑시다. 우선 로즈 힐에 돌아가서 몇 가지 소지품이라도 챙긴 다음 떠나도록 해주시오." "그러지 요. 여기 두 경찰관을 로즈 힐까지 동행시키겠습니다." 타일러는 줄리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증오에 가득 찬 그의 눈길에 줄리아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30분 후, 두 경찰관의 감시를 받으며 타일러는 로즈 힐에 도착했다. "몇 분이면 될 거요." 타일러가 말 했다. 두 경찰관은 타일러가 계단을 올라가 그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침실로 들어간 타일러는 서랍장에 있던 권총을 꺼내 실탄을 장전했다. 한 방의 총성이 로즈 힐 저택에 울려 퍼졌다. 제35장 우디와 캔달은 로즈 힐의 거실에 마주앉았다. 주변에는 대여섯 명의 흰 작업복을 입은 일꾼들이 벽에 걸린 그림을 떼어 내고 골동품 가구를 포장하느라고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한 시대가 끝난 거예요." 캔달이 한숨지으며 말했다. "아냐, 새 시대가 시작된 거야." 우디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페기 가 잔뜩 기대했던 상속 지분이 이렇게 된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한 걸." 그는 캔달의 손을 잡았다. "캔달, 넌 괜찮니? 마크 말이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담담해졌어요. 어찌됐건 난 바 쁘게 되었어요. 내 사건의 예비 재판 일정이 2주일 후로 잡혔어요. 그 결과에 따라 장래 계획을 세울 거 예요." "그래, 별일 없이 다 잘될 거야." 우디는 일어섰다. "난 중요한 통화를 할 게 있어." 그는 미미 카 슨에게 소식을 전하기로 작정했었다. "미미." 우디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폴로 경기용 말을 사겠다고 한 것은 취소해야 되겠어.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았어." "우디, 당신 괜 찮아요?" "난 괜찮아. 지난 몇 주 동안은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 그리고 난 페기와 헤어졌어." 한동안 미미는 말이 없었다. "그래요. 그럼 호브 만으로 돌아올 거예요?" "솔직히 말해서 난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우디?" "말해 봐." "어서 이곳으로 돌아와요. 기다릴게요." 애뜻한 목소리로 미미가 말 했다. 스티브와 줄리아는 베란다로 나갔다. "줄리아, 결과가 좋지 않아서 정말 안됐어요." 스티브가 말했다. "당신이 당연히 받아야 했던 유산이 모두 없어졌으니 말이에요." 줄리아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가 아무리 음식 솜씨가 없다 해도 수백 명의 요리사가 필요하지는 않아요." "그럼 보스턴에 와서 아무 소득 도 없었다는 게 실망스럽지 않아요?" 줄리아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스티브, 정말 아무 소 득도 없었다고 생각하세요?" 누가 먼저 움직였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다음 순간 스티브는 줄리아를 감 싸 안고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져 있었다. "난 당신을 처음 봤을 때부터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긴 키스가 끝나자 스티브가 말했다. 줄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난 처음 만났을 때는 빨리 보스턴을 떠나 라고 했잖아요!" 스티브는 무안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참, 내가 그랬었지. 어쨌든 이제 당신은 내 곁 을 떠나면 안 돼요." 줄리아는 쌀리의 말을 떠올렸다. 세상에! 청혼했으면 했고 안 했으면 안 했지, 한 것 같은 게 뭐야? "지금 청혼하는 거예요?" 줄리아가 물었다. 스티브는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물론. 나와 결혼해 주겠소?" "좋아요!" 캔달이 베란다로 나왔다. 손에는 편지 한 장을 들고 있었다. "지금 막 편지를 받았어요." 스티브가 얼 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 또..." "그런 게 아니고 내가 코티 상을 받게 되었다는 통지예요." 우디와 캔달, 그리고 줄리아와 스티브는 식당에 모여 앉았다. 주변에는 일꾼들이 계속 가구와 기물을 포장하거나 해체해서 옮겨 가고 있었다. 스티브가 우디에게 물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계획입니까?" "일단 호브 만으로 돌아갈 거요. 우선 닥터 티쉬너의 진찰을 받고, 몸이 나아지면 폴로 경기에 출전할 거요. 가까운 친구가 내가 탈 말을 빌려주겠다고 했소." 캔달이 줄리아에게 물었다. "캔사스 시로 돌아갈 거예요?" 내가 어렸을 때, 캔사스를 벗어나 아름다운 곳의 멋진 왕자에게 누군가가 날 데려다 주는 꿈을 꾸었었지. 그녀는 스티브의 손을 잡고 대답했다. "아뇨. 난 캔사스 시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그들은 벽에 걸린 해리 스텐포드의 대형 초상화가 내려지는 것을 쳐다보았다. 그 때, 클라크가 곤혹스런 표정으 로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밖에 줄리아 스텐포드 양이 찾아왔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