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무너지다 하 저자 : 시드니셀던 옮긴이 : 신현철 출판사 : 북@북스 초판발행 : 2001년 7월 14일 봉사자 : 전우석 동국대학교 정보관리학과 4학년 시드니 셀던 (SIDNEY SHELDON) 시드니 셀던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나 17세에 영화의 도시 할리우드로 진출,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로 군림하였으며, 25세에는 브로드웨이에서 3편의 뮤지컬을 동시에 히트시키는 등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시드니 셀던은 오스카상, 토니상, 에미상, 에드거 앨런 포 상을 수상한 유일한 작가로서, 지금까지 전서계에 작품이 가장 많이 번역된 작가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현재 시드니 셀던은 로스엔젤레스 팜스프링스에서 살고 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텔 미 유어 드림s], [여자는 두 번 울지 않는다.], [천사의 분노], [내일이 오면] 등이 있다. 하늘이 무너지다 하늘이 무너지다 THE SKY IS FALLING 하 시드니 셀던 지음/ 신현철 옮김 북@북스 내 어깨 위의 천사 알렉산드라에게 하늘이 무너지다 하 15 위험한 문으로 들어서다...11 16 뒤셀도로프의 테디 베어...33 17 악마와의 동업...50 18 브뤼셀의 희생자들...67 19 안개 속의 러시아...87 20 샤샤 쉬다노프...114 21 러시아의 비밀...133 22 크라스노야르스크-26...168 23 친구는 없다...194 24 쫓고 쫓기는 사람들...208 25 악의 종말...246 에필로그...265 작가 후기...271 옮긴이의 말...272 하늘이 무너지다 15 위험한 문으로 들어서다 마침내 다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다나가 현관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그녀를 반겨준 것은 달레이 부인이 손수 장식한 아름답고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였다. 비로소 다나는 크리스마스가 얼마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이 장식 좀 보세요." 달레이 부인이 자랑스럽게 손가락으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가리켰다. "아름다운 트리군요." "케말이 이걸 직접 만들었답니다." 옆집에 세든 남자가 텔레비전 화면으로 두 여자와 크리스마스 트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나는 달레이 부인의 뺨에 키스를 했다. "고맙습니다, 달레이 부인." 달레이 부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유,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그런데 케말은 지금 어디에 있어요?" "자기 방에 있을 거예요. 그런데 당신에게 두 번 전화가 왔었어요, 에반스 양. 허드슨 부인이 전화를 걸었는데, 당신 화장대에 있는 메모지에 전화번호를 적어놓았어요. 그리고 다른 한 통은 당신 어머니한테서 왔구요. "고마워요." 다나는 달레이 부인에게 인사를 한 후에 서재로 들어갔다. 케말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케말이 다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녕, 다나. 돌아왔군요." "그래." 다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나는 우리가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낼 줄 알았다구요." 케말이 다나를 향해 다가오면서 말했다. 다나는 케말을 꼭 끌어안았다. "맞았어.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우리가 함께 보내는 크리스마스와는 바꿀 수가 없을 테니까.... 그 동안 어떻게 지냈니?" "아주 좋았어요." 케말이 활기차게 대답했다. "달레이 아줌마가 좋아?" 다나는 케말을 응시하면서 물었다. "아줌마는 짱이예요." 케말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지금은 전화를 두 군데 걸어야 한단다. 이따가 보자." 다나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 전화부터 먼저 걸어야겠군.' 다나는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웨스트포트에서 그 일이 있었던 후로 어머니와 이야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엄마는 어째서 그렇게 몰상식하고 예의도 없는 사람과 결혼했을까? 지난 몇 년 동안 혼자 잘 살고 있었으면서....' 여러 번 전화벨이 울린 후에 어머니의 녹음된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우리는 지금 외출 중입니다.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신호음이 들리면 말씀을 해주세요." 잠시 후에 신호음이 울렸다. "메리 크리스마스, 엄마." 다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 다음에 다시 파멜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나, 당신이 돌아와서 정말 기뻐요!" 파멜라 허드슨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런데 여행은 어땠나요? 성과가 있었어요? 제프가 여기 없다는 말도 들었어요. 어쨌거나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만나서 하기로 해요. 사실은 로저와 내가 내일 일찌감치 크리스마스 저녁 만찬을 열 생각이예요. 그래서 몇 사람을 초대했는데 당신과 케말도 만찬에 참석했으면 해요. 제발 다른 계획이 있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다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예요. 사실 저는 아무런 계획도 없어요. 정말 가고 싶은걸요. 초대해주셔서 고마워요. 파멜라, 그리고 감사드릴 일이 또 있어요. 달레이 부인 말이예요. 너무 훌륭해요." "잘 되었군요. 그 말을 들으니까 나도 기뻐요. 당신에게 도움이 된 것 같아서.... 그럼 내일 저녁 5시까지 오면 돼요. 편한 옷차림으로 오셔도 괜찮아요. 다나가 이곳에 있었다면 미리 초청장을 보냈을 텐데.... 시간이 없어서 말이죠." 파멜라는 잠시 후에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윈스롭 사건 말이에요." 다나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모르겠어요.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일에 매달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파멜라가 다정한 목소리로 위로했다. "지금은 모두 잊어버려요. 그리고 편안하게 쉬도록 해봐요. 내일 두 사람을 기다리겠어요." 크리스마스날 오후에 다나와 케말은 허드슨 저택에 도착했다. 다나는 차분하게 초인종을 눌렀다. 세자르가 현관으로 나와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에반스 양! 뵙게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세자르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세자르는 다시 케말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케말 도련님도...." "안녕하세요, 세자르." 케말이 세자르를 쳐다보면서 인사했다. 다나는 재빨리 세자르에게 아름답게 포장한 선물을 내밀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세자르." "아니, 제 건가요? 저에게 선물을 주시다니....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세자르는 뜻밖에 선물을 받게 되자, 말을 더듬거렸다. "저는 무슨 말을.... 정말 친절하시군요, 에반스 양." 그 거인은 다나의 예상대로 얼굴을 붉혔다. 다나는 세자르에게 두 개의 선물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건 허드슨 부부에게 드리는 선물이에요. 당신이 전해주세요." "네, 에반스 양, 제가 이 선물들을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 갖다 두겠습니다. 허드슨 씨와 부인께서는 지금 거실에 계십니다." 세자르는 두 사람을 거실로 안내했다. 다나와 케말이 거실로 들어가자, 파멜라가 밝게 소리쳤다. "드디어 왔군요! 이렇게 와주어서 정말 기뻐요." "저희도 그런걸요." 다나는 파멜라의 환대에 응답했다. 파멜라는 케말의 오른쪽 팔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나, 케말이.... 어머나, 정말 멋지군요!" 다나는 이를 드러내면서 싱긋 웃었다. "그렇죠? 우리 사장님이 애를 써주셨어요. 아주 친절한 분이랍니다. 케말은 이 팔이 무척 마음에 든 것 같아요. 덕분에 케말의 인생이 바뀌었어요." 파멜라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 같았다. "다나, 나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뻐요." 로저도 케말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한다, 케말." 케말이 의젓한 태도로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허드슨 씨." 로저 허드슨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다나를 돌아보았다. 무엇인가 긴히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사실 오늘 당신을 초대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어서요. 하나는 파멜라가 당신을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에게 꼭 알려주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오." 그 순간 다나는 몹시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윈스롭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가 분명했다. "다른 손님들이 도착하기 전에 당신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소, 다나." 로저 허드슨이 이렇게 말하면서 부인을 쳐다보자. 파멜라는 재빨리 케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말했다. "케말, 나와 함께 저 방으로 가겠니? 신기한 물건들과 예쁜 그림을 보여줄게." 두 사람이 거실에서 나가자, 로저 허드슨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바로 테일러 윈스롭에 관한 일이오. 전에 내가 테일러 윈스롭이 자신의 친구들에게 공적인 생활에서 은퇴할 거라고 알린 뒤에, 곧바로 러시아 대사로 임명을 받았다는 말을 했었는데, 기억하고 있소?" "네, 대통령께서 강력하게 권하셔서...." "처음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소. 그런데 사실은 말이오, 아무래도 테일러 윈스롭이 러시아 대사로 자신을 임명해 달라고 대통령에게 강력히 요청했던 것 같소. 스스로 공적인 생활에서 완전히 물러나겠다고 말한 후에 러시아 대사 자리를 자청하더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오." 다른 손님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다나와 케말 이외에 크리스마스 만찬 초대를 받은 사람은 모두 열두 명이었다. 저녁 만찬은 아주 훌륭했으며 시종일관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다. 후식을 먹고 난 뒤에 사람들은 모두 거실로 들어갔다. 벽난로 앞에는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가 우뚝 서있었다.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는 모두를 위한 선물들이 예쁘게 포장되어서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선물을 받아들면서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선물이 들어 있는 포장지를 뜯을 때마다 웃음이 터졌다. 케말의 선물이 가장 많았다. 케말은 컴퓨터 게임기, 롤러 블레이드, 스웨터, 장갑, 비디오 테이프 들을 받게 되자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시간은 꿈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다나는 지난 며칠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다나는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 자리에 없는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제프. '제프가 이 자리에 함께 있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텐데...." 제프를 위해 사 놓은 크리스마스 선물은 아직까지도 선반 위에 쓸쓸히 놓여 있었다. 그러나 플로리다는 너무나 멀었다. 다나 에반스는 앵커석에 앉아서 11시 뉴스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리차드 멜턴이 공동 진행자 자리에서 뉴스를 검토하고 있었다. 다나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제나 제프가 채우던 자리에 모리 폴스타인이 앉아 있었다. 다나는 제프가 없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리차드 멜턴이 다나를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자리를 비우니까 보고 싶더군요, 다나." 다나는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리차드. 나도 보고 싶었어요." "요즘 들어서 자리를 비우는 날이 잦더군요. 별다른 일은 없는 거죠?" 리차드 멜턴이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그럼요." 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차드 멜턴은 마치 무엇인가를 할 이야기가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말했다. "나중에 밥이나 먹으러 가죠." "케말에게 먼저 가봐야만 해요." "그래요. 우리는 언제든지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요." 그 순간 다나의 머릿속에서 조안 시니시의 절박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어디 다른 곳에서 만나야만 해요. 나는 감시당하고 있는 것 같아요." 리차드 멜턴이 다나를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당신이 아주 굉장한 기삿거리를 조사하고 잇는 줄 알아요. 나에게 털어놓을 생각 없어요?" "아직은 말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리차드." 다나는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대답했다. "당신이 너무 자주 자리를 비워서 엘리어트 사장이 무척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공연히 이상한 소문이나 말썽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아요, 다나." "당신에게 몇 마디 충고를 하지. 말썽거리를 애써 찾아다니지 마시오. 분명히 약속하지." 다나는 더 이상 리차드 멜턴의 말에 정신을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엘리어트 사장은 사람들을 쉽게 해고하죠." 리차드 멜턴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빌 켈리는 화재가 일어나 그 날 사라졌어요. 월급도 받지 않고 그냥 없어졌죠." 다나의 생각은 자꾸만 다른 곳으로 빠졌다. 그러나 리차드 멜턴은 계속 떠들어대고 있었다. "난 새로운 앵커와 함께 일하고 싶지 않아요." "그 사고의 목격자는 미국인 여행자, 랠프 벤자민 씨입니다." '그래서 난 유타 주까지 찾아갔어. 그런데 그 사람은 장님이었어.' "다섯, 넷, 셋, 둘...." 아나스타샤 만이 다나에게 손짓을 하고 잇었다. 카메라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스튜디오에 울려 퍼졌다. "다나 에반스와 라차드 멜턴이 진행하는 WTN 11시 뉴스입니다." 다나는 카메라를 향해서 미소지었다. "안녕하세요. 다나 에반스입니다." 마침내 방송이 시작되었다. "오늘 알링톤에서 윌슨 고등학교에 다니는 세 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경찰은 그들의 사물함을 조사해서 상당량의 마리화나와 훔친 권총을 포함한 다양한 무기들을 발견했습니다. 이 사건은 홀리 랩이 취재를 했습니다." 미리 취재를 해놓았던 녹화 테이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여유가 생기자, 다나의 머릿속에서 또 다시 경찰관의 말이 맴돌았다. "우리는 그림 절도업들을 많이 다루어 보지는 못했소. 하지만 그들의 범행 수법은 언제나 똑같소. 우리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바로 그것이오." 마침내 방송이 끝났다. 리차드 멜턴이 다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따가 좀 만날래요?" "오늘 밤은 안 돼요, 리차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리차드 멜턴은 아쉬운 듯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알았어요." 다나는 리차드 멜턴이 제프에 대해서 묻고 싶어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질문을 던지는 대신에 인사를 했다. "내일 봐요." 다나도 의자에서 일어섰다. "잘 가요, 여러분." 다나는 스튜디오에서 나와 자신의 사무실로 갔다. 다나는 사무실 의자에 앉아서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에 접속한 다음, 다시 테일러 윈스롭에 대한 무수한 기사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다나는 우연히 수많은 웹 사이트들 가운데 하나에서 나토 대사를 역임했던 프랑스의 정부 관료 마르셀 팔콘에 대한 기사를 발견했다. 그 기사에는 마르셀 팔콘이 테일러 윈스롭과 함께 무역 협정을 협상했던 것으로 나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협상을 하던 도중에 마르셀 팔콘은 관직에서 은퇴했다. 그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돌발적인 것이었다. '프랑스 정부를 대표해서 협상을 하던 도중에 은퇴를 하다니? 왜 그랬을까?' 다나는 다른 웹 사이트를 찾아보았지만, 마르셀 팔콘에 대한 더 이상의 정보는 나와 있지는 않았다. '이건 좀 이상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는 게 좋겠어.' 다나는 인터넷 검색을 마치고 시계를 쳐다보았다. 벌써 새벽 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유럽에 전화를 걸기에는 너무나 이른 시각이었다. 다나는 서둘러 아파트로 돌아왔다. 달레이 부인이 다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늦어서 미안해요, 일이...." "괜찮아요. 오늘 밤에 방송하는 걸 보았어요. 항상 그렇지만 오늘은 더욱 멋지더군요, 에반스 양." 달레이 부인이 다나를 반기면서 말했다. "고맙습니다." 다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뉴스란 뉴스가 죄다 그렇게 끔찍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돍아가는 건지...." 달레이 부인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케말은 어때요?" "그 작은 악당은 잘 지내고 있어요. 카드 놀이를 했는데, 그 악당이 나를 무찌르도록 해주었지요." 다나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잘 하셨어요. 고마워요. 달레이 부인. 내일 늦게 오고 싶으시면...." "오, 아니에요. 내일은 일찍 와서 당신을 학교와 일에서 해방시켜 주겠어요." 다나는 달레이 부인이 돌아가는 것을 배웅했다. '정말 보석 같은 분이야. 마치 나를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군.' 다나는 진심으로 고마웠다. 갑자기 다나와 휴대폰이 울렸다. 다나는 재빨리 뛰어가서 전화를 받았다. "제프?" "메리 크리스마스, 내 사랑." 제프의 목소리가 다나의 몸을 촉촉하게 적셨다. "내가 너무 늦게 전화를 했나?" "아니에요. 늦지 않았어요. 레이첼은 어떤가요?" "일단 퇴원을 해서 집으로 돌아왔어." "그랬군요." '그녀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말이지.' "지금 간호사가 함께 와서 레이첼을 보살피고 있어. 하지만 레이첼은 내일까지만 간호사를 둘 생각이야." 다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질문을 던졌다. "그런 다음에는?" "검사 결과에 따르면 암세포가 다른 곳까지 퍼진 걸로 나왔어. 레이첼은 아직 내가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제프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요. 미안해요, 재프. 내 말이 너무 이기적으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레이첼을 돌볼 수 있는 누구 다른 사람은 없나요? 당신 말고 형제나 아니면 가까운 친척이라도...." "레이첼에겐 아무도 없어, 다니. 그녀는 완전히 혼자 남았어. 게다가 지금은 잔뜩 겁에 질려 있어. 그녀는 낯선 사람을 집에 두고 싶어하지 않아. 솔직히, 내가 떠나면 레이첼이 어떻게 행동할 건지 나도 모르겠어." '그리고 당신이 계속 그곳에 있으면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나도 모르겠어요.' "의사들은 당장이라도 화학요법을 실시하자는 거야." 제프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치료가 얼마나 오래 걸릴 것 같아요?" "넉 달 동안 3주일마다 치료를 받아야 해." '넉 달이라고?' "매트가 나에게 휴직계를 제출하라고 하더군. 이렇게 되어서 정말 미안해, 다나." '미안하다고? 그게 무슨 의미일까? 회사에 대해서 미안하다는 걸까? 레이첼에 대해서 미안하다는 거야? 아니면 우리의 생활이 엉망이 된 것이 미안하다는 말일까? 아니,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어떻게 내가 이렇게 이기적일 수 있지?' 다나는 자기 자신에게 반문했다. '그 여자는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 "나도 미안해요." 다나는 결국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아니야, 다나. 당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어. 당신에겐 오직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이야." 제프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모든 일이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제프, 잘될 거예요. 믿어요." 다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다나, 누구에게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이야? 레이첼과 제프에게? 아니면 제프와 나에게?' 제프는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었다. 제프는 레이첼이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레이첼은 잠옷과 가운을 입고 있었다. 희미한 불빛을 받고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병을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웠다. "다나였나요?" 레이첼이 조용히 물었다. "그래." 제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첼이 제프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가엷은 사람.... 이번 일이 당신들 두 사람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고 있는지 나도 잘 알고 있어요." "아니야."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나는.... 나는 당신 없이 이런 상황을 견딜 수가 없어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제프. 지금은 당신이 필요해요. 조금만 더 내 곁에 있어요." 다나는 아침 일찍 사무실에 도착해서 다시 인터넷에 접속했다. 두 개의 기사가 다나의 관심을 끌었다. 그 기사들은 평범한 내용이었지만 둘 다,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다. 첫번째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빈센트 만치노 이탈리아 무역 통상 장관이 미국 대표 테일러 윈스롭과 무역 협정을 협상하던 도중에 갑자기 사임했다. 만치노 전 장관의 보좌관이었던 이보 발레가 그 자리를 인계 받았다. 두 번째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브뤼셀에 있는 나토의 특별 고문인 테일러 윈스롭이 후임자와의 교체를 요청하고 워싱턴의 집으로 돌아갔다. 마르셀 팔콘의 사임과 빈센트 만치노의 사임 그리고 테일러 윈스롭의 사임은 뜻밖의 일이었다. '그들이 서로 관련이 있었을까? 우연의 일치였을까?' 그것은 정말 흥미로운 일이었다. 다나는 제일 먼저 로마에 있는 이탈리아 제1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근무하는 도미니크 로마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나! 정말 반가워요.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로마에 가야 할 일이 생겼어요. 당신과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우와! 무척 신나는 소식이군요. 오래간만에 당신을 만나다니.... 그런데 무슨 일이 있나요?" 다나는 잠시 동안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곳에 도착해서 말하는 게 낫겠어요." "언제 올 가예요?" "토요일." "좋아요. 넉넉한 사이즈의 옷을 준비하도록 해요. 내가 맛있는 파스타를 잔뜩 준비해 놓을 테니까...." 도니니크 로마노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다나는 브뤼셀의 샤펠리에 거리에 있는 나토 본부의 출판부에서 근무하고 잇는 장 송베이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 다나 에반스에요." "다나! 사라예보 이후, 처음이로군요. 정말 반가워요. 언제 그곳으로 돌아갈 거예요?" 로마에 있는 도미니크 로마노가 브뤼셀의 장 송베이유는 모두 다나가 사라예보에 있을 때 만났던 특파원들이었다. 그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전쟁터에서 함께 취재하면서 형제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제각기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다나는 마음속으로 사라예보의 황폐한 거리를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아니라면, 결코 그곳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뭘 도와줄까요, 동지?" "다음 주에 이삼 일 정도 브뤼셀에 가야 할 일이 있어요. 좀 만나줄래요?" 장 송베이유가 궁금한 듯이 물었다. "아니에요." 다나는 재빨리 부인했다. "좋아요. 그렇다면 단지 관광이 목적이다. 그 말인가요?" 장 송베이유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의심스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셈이에요." 다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장 송베이유가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그날을 기대하죠. 나중에 봐요." "그래요." "매트 베이커가 당신을 찾고 있어요." "곧 가겠다고 전해줘요, 올리비아." 두 통의 전화를 더 걸고 난 후에 다나는 매트 베이커의 사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다나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매트 베이커는 다짜고짜 본론을 말했다. "어쩌면 우리에게 운이 따를지도 모르겠소. 어젯밤에 우리가 바라던 일의 실마리가 될 것 같은 이야기를 들었소." 다나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래요?" "그 남자 이름이...." 매트 베이커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종이 한 장을 들어올리면서 말을 이었다. "뒤셀로프에 디에터 잔더라는 남자가 있소. 그 사람이 테일러 윈스롭과 어떤 종류의 사업을 같이 했다는 거요." 다나는 열심히 매트 베이커의 말에 정신을 집중했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분명히 그들 사이에 매우 좋지않은 일이 벌어졌소. 그들은 심하게 다투었고, 잔더가 윈스롭을 죽이려고 칼로 찔렀다는 거요. 내 생각에 따르면 좀 더 자세히 알아볼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인 것 같소." "정말 그렇군요. 당장 알아보도록 하겠어요, 매트." 그들은 몇 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에 다나는 매트 베이커의 사무실을 떠났다. '그런데 내가 무슨 수로 그 남자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더 찾아낸담?' 갑자기 다나의 머릿속에서 잭 스톤과 FRA가 스치고 지나갔다. '잭 스톤이라면 무엇인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FRA라면 막강한 정보기관이니까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다나는 잭 스톤이 적어주었던 개인 전용 전화번호를 찾아서 전화를 걸었다. 잭 스톤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흘러나왔다. "잭 스톤입니다." "다나 에반스에요." "안녕하세요, 에반스 양. 무슨 일이십니까?" "뒤셀도르프에서 거주하고 잇는 잔더라는 이름의 남자에 대한 자료를 찾고 있어요." 다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디에터 잔더 말입니까?" 잭 스톤은 이미 디에터 잔더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네. 그 사람을 아나요?" "우리는 그를 잘 알고 있지요." 잭 스톤이 대답했다. 다나는 '우리' 라는 표현을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그 사람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요. 나에게 이야기를 좀 해줄 수 있나요?" "테일러 윈스롭과 관련된 일입니까?" "그래요." 다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테일러 윈스롭과 디에터 잔더는 사업적인 동료였습니다. 그런데 디에터 잔더는 주가 조작 혐의로 감옥에 들어갔죠. 잔더가 감옥에 있는 동안, 그의 집에 불이 나서 아내와 세 명의 아이들이 죽었습니다. 잔더는 그 일을 배후에서 조종한 것이 테일러 윈스롭이라고 비난했습니다." '테일러 윈스롭과 그의 아내 또한 화재로 죽었어.' 다나는 충격을 감추지 못한 채, 수화기에 귀를 바싹 갖다대었다. 화제로 인해 죽다니....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이상한 일이었다. "잔더는 아직 감옥에 있나요?" 다나는 다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아닙니다. 작년에 석방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잭 스톤이 차분히 대답했다. "그렇군요?" "다음 용건은?" "없어요. 고마워요.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다나, 제가 이런 정보를 알려주었다는 것은 우리 두 사람만의 비밀입니다. 물론 잘 알고 계시겠지만 말이죠." "잘 알고 있어요." 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제 세 가지 가능성이 있어.' 다나는 잔더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뒤셀도르프의 디에터 잔더. 로마의 빈센트 만치노. 브뤼셀의 마르셀 팔콘. 먼저 뒤셀도르프로 가보자.' 갑자기 인터폰이 울리면서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3번으로 허드슨 부인이 전화를 하셨어요." "고마워요." 다나는 서둘러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파멜라는 이제 허물없는 친구처럼 가끔씩 전화를 주고받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파멜라?" "안녕, 다나. 갑작스럽게 연락을 해서 미안해요." "그런데 무슨 일이죠?" "방금 가까운 친구 한 명이 방문했어요. 그래서 로저와 내가 그 친구를 위해서 다음 주 수요일에 작은 파티를 열려고 하는데.... 제프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은 건 알고 있지만, 당신 혼자라도 그 자리에 참석했으면 좋겠어요. 그 친구도 당신을 만나면 무척 좋아할 거예요. 시간이 되겠어요?" 파멜라는 파티에 다나를 초대했다. "죄송하지만 그럴 수가 없네요. 내일 제가 뒤셀도르프로 떠나거든요." 다나는 정중하게 거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오, 아쉽네요." 파멜라는 몹시 안타까운 것 같았다. "그런데, 파멜라...." "말해봐요." "제프는 한참 동안 이곳에 없을 거예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에 파멜라가 조심스레 말했다. "다나, 모든 일이 잘 되기만을 빌게요." "네, 저도 그럴 거라고 믿고 있어요."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해요.' 16 뒤셀도르프의 테디 베어 그 날 밤에 다나는 델레스 공항으로 가서 뒤셀도르프를 향해 떠나는 루프트한자 비행기에 올라탔다. 비행기를 타기 직전, 다나는 카멜 방송국에서 근무하는 스테판 무엘러에게 전화를 걸어서 자신이 지금 그곳으로 가고 있다고 알렸다. 그는 사랑예보에서 만났던 또 다른 특파원이었다. 다나의 머릿속은 온통 매트 베이커로부터 들은 말로 가득 차 있었다. '만약 디에터 잔더가 테일러 윈스롭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다면....' 그런데 옆자리에서 독일어가 들렸다. "구텐 아벤트(안녕하세요)? 이히 하이세 헤르만 프리드리히(나는 헤르만 프리드리히입니다). 독일은 처음 방문하시는 겁니까?" 다나는 몸을 돌려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쳐다보았다. 단정한 옷차림을 한 오십 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었으며, 숱이 많이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다나는 옆자리의 남자에게 인사했다. "아하, 미국인인가요?" "네, 미국인이에요." "많은 미국인들이 뒤셀도르프에 갑니다. 거긴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독일인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저도 그렇게 들었답니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이 화재로 죽었어.' "이번이 첫번째 방문인가요?" "네." '그게 우연의 일치일 수 있을까?' "거긴 정말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물론 당신도 잘 알고 있겠지만, 뒤셀도르프는 라인 강을 사이에 두고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지요. 좀더 전통이 있는 지역은 강 오른쪽으로...." '스태판 무엘러가 디에터 잔더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현대식 건물이 있는 지역은 강 왼쪽입니다. 다섯 개의 다리가 양쪽을 잇고 있어요." 헤르만 프리드리히는 다나 쪽으로 조금 가깝게 몸을 기울였다. 그러고 나서 다시 질문을 던졌다. "뒤셀도르프에서 살고 있는 친구를 방문하는 모양이죠?" '그래,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프리드리히는 더욱 가까이 몸을 기대었다. "혼자 온 거라면, 제가 좋은 곳을 알고 있는데...." "네? 조금 전에 뭐라고 하셨죠? 아, 아니에요. 그곳에서 남편을 만날 거랍니다." 헤르만 프리드리히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그렇군요.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마침내 루프트한자 비행기는 뒤셀도르프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입구에는 택시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다나는 택시를 타고 시내 중심가에 있는 브라이덴바체 호프로 향했다. 브라이덴바체 호프는 아주 우아한 분위기의 호텔이었다. 특히 로비가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다나가 호텔 로비로 들어가자, 프론트 데스크에서 근무하는 직원이 정중하게 그녀를 맞이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에반스 양. 뒤셀도르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고마워요." 다나가 숙박부에 서명하는 동안, 호텔 직원은 수화기를 집어들더니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객실 정리가 아직 되지 않았다구요? 이런.... 서둘러요. 손님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호텔 직원은 전화를 끊은 후에 다시 다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프렐라인(아가씨). 손님이 묵으실 방이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답니다. 식당에서 간단하게 뭘 좀 드시고 계시면, 방이 정리되는 대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음식은 저희가 제공하겠습니다." 이런 호텔에서 미리 예약한 소님이 묵을 객실을 아직까지도 정리하지 못했다는 게 이상했다. 하지만 다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제가 식당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두 명의 전기 기술자들이 다나가 예약한 호텔 객실에 걸려 있는 벽시계 속에 카메라를 장치하고 있었다. 30분 뒤, 다나는 호텔 방에서 여행 가방을 풀고 있었다. 다나는 먼저 카멜 방송국에 전화를 걸었다. "도착했어요, 스테판." "다나! 당신이 정말로 왔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할 거예요?" 스테판 무엘러가 반가운 듯이 말했다. "당신과 같이 했으면 싶어요." "우리 쉬프첸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8시 어때요?" "좋아요." 다나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막 문으로 향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다나는 핸드백을 열고 휴대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안녕, 다나. 잘 지내지?" "난 잘지내요, 제프." "지금 어디에 있어?" 제프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독일이에요. 지금 뒤셀도르프에서 묵고 있어요. 마침내 뭔가 알아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나, 조심해. 제기랄! 내가 당신 곁에 있어야만 했는데...." '그레요, 당신은 내 곁에 있어야 해요.' 그러나 다나는 그 말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레이첼은 어때요?" 다나는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레이첼은 화확요법 치료 때문에 기운을 잃고 있어. 그건 상당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야." 제프가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다나는 차마 말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무슨 결정을 내리기는 아직 일러, 화화요업이 효과가 있으면, 병세가 좋아질 수도 있어." "제프, 그녀에게 꼭 안부를 전해줘요." "알았어. 내가 당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다른 일은 없어?" 제프는 몹시 안타까운 것 같았다. "고마워요. 난 괜찮아요." "내일 다시 전화할게. 사랑해, 다나. 나는 단지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당신은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니까...." "사랑해요, 제프." "잘 있어." 레이첼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침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가운 차림으로 머리에 수건을 감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다나는 어때요?" "잘 지내고 있어, 레이첼. 다나가 당신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더군." 제프는 레이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당신을 무척 사랑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레이첼은 제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도 그녀를 몹시 사랑하고 있어." 레이첼은 천천히 걸음을 올기더니 제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제프는 레이첼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신과 나도 서로를 깊이 사랑하지 않았었나요, 제프? 그런데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제프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대답했다. "이런 게 바로 인생이겠지. 삶이라고 해도 좋고.... 어쨌거나 운명은 우리 두 사람을 갈라놓았어." "나는 모델로서의 명성에 정신이 팔려서 모든 걸 잊고 살았어요. 이런 일을 당할 줄도 모르고 말이죠." 레이첼은 눈물을 참으려고 애썼다. "레이첼...." "제프, 나는 이제 두 번 다시 모델 일을 하지 못하겠죠? 화려한 무대에 설 수도 없고...." 제프는 두 팔을 벌려서 레이첼을 끌어안았다. "레이첼, 당신은 다시 건강을 찾을 거야. 화학요법은 반드시 효과가 있을 거야." 제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레이첼을 위로했다. "그래요, 제프. 당신이 내 곁에 있어서 정말 고마워요. 나는 혼자서는 이런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 당신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예요." 레이첼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제프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쉬프첸은 뒤셀도르프의 명소 가운데 하나인 아름다운 레스토랑이었다. 스테판 무엘러는 쉬프첸으로 들어오다가 다나를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다나! 마인 고트(세상에).... 사라예보에서 헤어진 후로 처음 만나는 셈이군요." 스테판 무엘러가 다나를 향해 다가오면서 말했다. "그렇군요. 그때가 아득히 먼 옛날 같죠? 당신은 사라예보에 있을 때보다 훨씬 좋아 보여요." "무슨 일 때문에 여기까지 왔소? 축제를 구경하러 왔나요? 아니면 무슨 취재라도 있어요?" "아니에요. 사실은 얼마 전에 친구를 찾아달라는 어떤 사람의 부탁을 받았어요." 종업원이 테이블 가까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음료수를 주문했다. "그 친구가 누구죠?" 스테판 무엘러가 궁금한 듯이 물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디에터 잔더예요, 스테판. 혹시 들어본 적이 있나요?" 스테판 무엘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남자라면 이곳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그는 꽤 유명한 사람이에요. 증권가에서 아주 커다란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죠. 그는 주식 투자를 해서 억만장자가 된 뒤에 몇 명의 주주들에게 사기를 쳤다가 체포되고 말았어요. 그건 아주 어리석은 일이었죠. 20년 형은 받아야 마땅했는데, 강력한 연줄을 통해서 겨우 3년 형을 선고받았죠. 물론 자신은 끝까지 무죄라고 주장했지만...." 다나는 스테판 무엘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디에터 잔더가 그렇게 말했어요?" "누가 알겠어요? 법정에서 그는 테일러 윈스롭이 자신에게 모든 누명을 뒤집어 씌우고 수백만 달러를 빼돌렸다고 항의했어요. 그건 정말 볼 만한 재판이었죠. 디에터 잔더는 재판정에서 테일러 윈스롭이 자신에게 수억 달러로 추정되는 아연 광산에 함께 투자하자는 제의를 했다고 주장했어요. 그의 주장에 따르면, 윈스롭은 잔더를 전면에 내세워서 철저하게 이용한 셈이죠. 디에터 잔더는 아연 광산을 개발하는 회사를 설립해서 수백만 달러에 해당하는 주식을 여러 사람에게 팔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그 광산에서 나오는 것이 아연이 아니라 소금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죠." "소금이라니?" 다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연은 없었어요. 윈스롭은 주식을 팔아서 받은 돈을 고스란히 챙길 수 있었고, 잔더는 유죄 판결을 받았어요." "배심원들이 잔더의 증언을 믿지 않았군요?" "만약 잔더가 테일러 윈스롭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고소했다면, 배심원들이 그 말을 믿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곳에서도 테일러 윈스롭은 거의 신적인 인물이었으니까요. 게다가 그 일에 테일러 윈스롭에 개입되었다는 특별한 증거도 없었어요." "그렇게 된 일이군요." 스테판 무엘러는 호기심이 가득 찬 눈빛으로 다나를 바라보았다. "왜 이번 일에 흥미를 갖는 거죠?" 다나는 얼른 둘러대었다. "이미 말했잖아요, 어떤 친구가 나에게 잔더를 찾아달라고 부탁했어요." 잠시 후에 종업원이 다가와서 식사 주문을 받았다. 식사는 깔끔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식사가 끝나자, 다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잘 먹었어요. 내일 아침에 거울을 들여다보기가 두렵네요. 하지만 정ㅁ라 맛있는 저녁이었어요." 스테판 무엘러는 다나를 호텔 앞에 내려주었다. "다나, 테디 베어 인형을 알고 있죠? 그 인형이 마가렛 스테프라고 이곳에 사는 여자에 의해서 처음으로 고안되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나요?" "그랬나요? 난 전혀 몰랐어요." "이곳의 특산품이었던 그 작은 장난감 곰이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되었죠." 스테판 무엘러가 다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다나는 스테판 무엘러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런데 다나, 여기에는 정말로 무서운 곰도 있어요. 그리고 그 곰은 아주 위험하죠. 디에터 잔더를 만나면 조심하도록 해요.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테디 베어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는 아주 사나운 곰이에요." 잔더 일렉트로닉스 인터내셔널사는 뒤셀도르프 외곽에 위치한 산업 단지 안에 있었다. 다나는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로비에 서 있는 세 명의 안내 요원들 가운데 한 명에게 다가갔다. "잔더 씨를 만나려고 합니다." "미리 약속을 하셨나요?" "네. 제 이름은 다나 에반스예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안내 요원은 즉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뒤 안내 요원은 의아스러운 눈길로 다나를 쳐다보았다. "죄송하지만 언제 약속을 하셨나요?" "며칠 전에...." 다나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죄송합니다만, 비서의 말에 따르면 그런 약속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요? 어떻게 된 일이죠?" 안내 요원은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사전에 약속하지 않으면 잔더 씨를 만나실 수가 없습니다." 안내 요원은 테이블 위에 잔뜩 쌓여 있는 편지 더미로 눈길을 돌렸다. 다나는 난감하여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런데 한 무리의 직원들이 정문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다나는 안내 데스크에서 물러나와 재빨리 그들 틈에 끼었다. 직원들은 우르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다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어떻게 하지? 잔더 씨가 몇 층이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네." 여자들 가운데 한 명이 친절하게 대답했다. "4층이에요." "고마워요." 다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 여자에게 인사를 했다. 4층에서 내린 다나는 젊은 여자가 앉아 잇는 책상을 향해 걸어갔다. "디에터 잔더 씨를 만나려고 왔어요. 제 이름은 다나 에반스예요." 젊은 여자가 얼굴을 찡그리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잔더 씨를 만나려면 미리 약속을 해야만 합니다." 다나는 그 여자에게 몸을 숙이고 위협적으로 속삭였다. "잔더 씨에게 지금 당장 나와 만나주지 않으면, 그 분과 그 분의 가족들에 대한 추문이 미국 텔레비전 방송국에 보도될 거라고 전해줘요. 그 말을 전하면 당장 나와 만나고 싶어할 테니까...." 비서는 몹시 당황해서 다나를 쳐다보았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다나는 비서가 사장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다나는 비서실을 둘러보았따. 세계 도처에 있는 잔더 일렉트로닉스의 공장 사진들이 액장에 들어 있었다.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윈스롭 가족이 살해당한 나라들이야.' 잠시 후에 비서가 사장실에서 나오더니 말했다. "잔더 씨가 뵙고 싶어하십니다." 비서의 말투는 몹시 퉁명스럽고 딱딱했다. "하지만 두 분이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몇 분밖에 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아주, 아주 예외적이니까요." "고마워요." 다나는 비서에게 인사를 한 후 사장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제가 다나 에반스입니다." 디에터 잔더는 거대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정직해 보이는 얼굴과 부드러운 갈색 눈을 가진 몸집이 큰 남자였다. 나이는 아마도 육십 대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다나는 스테판이 들려주었던 테디 베어 이야기를 상기했다. 디에터 잔더가 다나를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누구인지 알겠군. 사라예보의 특파원이었지." "맞아요." 다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나에게 뭘 원하는지 모르겠소. 비서에게 내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고 하던데...." "앉아도 될까요?" 다나가 디에터 잔더를 응시하면서 말했다. "좋소." "저는 테일러 윈스롭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다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디에터 잔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에 대해서? 도대체 무엇을 알고 싶은 거요?" "저는 어떤 조사를 하고 있어요, 잔더 씨. 저는 테일러 윈스롭과 그의 가족들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간에 의해 살해된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디에터 잔더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당장 이곳에서 나가주면 좋겠소." "당신은 그와 함께 사업을 했었죠. 그리고...." "나가!" 디에터 잔더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잔더 씨, 저와 개인적으로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은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서 이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게 될 거예요. 당신은 지금 테일러 윈스롭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어요. 저는 공정하게 일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한 당신의 입장을 듣고 싶어요. 디에터 잔더는 한참 동안이나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그의 음성에는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테일러 윈스롭은 비열한 놈이오. 그는 영리했소. 너무나 영리했어. 그는 나에게 누명을 씌웠소. 그리고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내 아내와 아이들이 죽었소. 그것도 너무나 비참하게 말이오. 그 당시에 내가 집에 있었다면.... 가족을 구할 수 있었을 거요." 디에터 잔더의 목소리는 고통으로 인해 가늘게 떨렸다. "내가 그 남자를 증오한 것은 사실이오. 내가 테일러 윈스롭을 죽였다고? 그건 아니오. 내가 할 말은 끝났소." 디에터 잔더는 테디 베어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잘 가시오, 에반스 양." 다나는 매트 베이커에게 전화를 걸었다. "매트, 난 지금 뒤셀도르프에 있어요. 당신이 옳았어요. 어쩌면 이제 가닥을 잡았는지도 모르겠어요. 디에터 잔더는 테일러 윈스롭과 사업을 같이 했어요. 그리고 윈스롭이 자신에게 누명을 씌워서 감옥에 보냈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그의 집에 불이 나서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죽었더군요." 매트는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매트는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가족들이 화재로 죽었단 말이오?" "사실이에요." 다나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테일러 윈스롭과 매들린 윈스롭이 죽은 것과 똑같군." 매트가 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맞아요. 내가 그 사건에 대해서 말했을 때, 당신도 잔더의 눈빛을 보았어야만 했어요." "딱 들어맞지 않소? 잔더는 윈스롭 일가를 모두 죽이기에 충분한 동기를 갖고 있소. 역시 살해설을 주장한 당신의 말이 옳았어. 하지만 나는.... 나는 아직도 믿을 수 없소.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야." "매우 그럴 듯한 추론이긴 해요. 하지만 매트, 아직 증거가 없어요. 나는 두 군데를 더 돌아다녀야 해요. 내일 아침에 로마로 떠나겠어요." "알겠소." 다나는 조심스럽게 한 마디 덧붙였다. "하루나 이틀 정도면 될 거예요." "몸 조심해요." "그래야죠." FRA 본부에서는 세 명의 남자가 대형 벽걸이 텔레비전을 통해서 다나가 호텔 방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두 군데를 더 돌아다녀야 해요. 내일 아침에 로마로 떠나겠어요. 하루나 이틀 정도면 될 거예요.... 다나의 말소리가 너무나 생생하게 들렸다. 그들은 다나가 수화기를 내려놓고 욕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텔레비전 화면이 욕실 선반에 숨겨놓은 카메라로 바뀌었다. 다나가 옷을 벗기 시작했다. 다나는 블라우스를 벗고 브래지어를 벗었다. "어이, 저 커다란 가슴 좀 보라구!" "아주 풍만한데?" "잠깐. 치마와 팬티까지 벗고 있어." "우와, 저 엉덩이를 봐! 한 번 만져보고 싶은 걸? 이봐, 아가씨! 앞쪽으로 다시 돌아봐!" 그들은 마치 다나가 앞에 있기라도 하듯이 킬킬거리며 음란한 농담을 던졌다. 잠시 후에 다나는 샤워실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화면에 수증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당분간은 별 볼일 없어. 11번으로 맞추도록 해." 레이첼은 화확요법 치료를 받을 때마다 지옥처럼 고통스러웠다. 한통의 항암제를 정맥 주사로 맞는 데 모두 4시간이 걸렸다. 영 박사는 미리 제프에게 충고했다. "레이첼 양에게는 매우 견디기 힘든 시간이 될 것입니다. 구역질이 나고 탈진하고 머리카락이 빠지는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치료의 부작용으로 인해서 몸과 마음이 황폐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여자의 경우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죠." "알겠습니다." 오후가 되자 제프는 레이첼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옷 갈아입어. 우리 함께 드라이부나 하자." "제프, 나는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 "무조건 내 말을 들어, 레이첼." 30분 후에 그들은 가발 가게에 들어가 있었다. 가발을 고르던 레이첼은 미소를 지으면서 제프에게 말했다. "모두 아름다워요. 당신은 긴 게 좋아요? 아니면 짧은게 좋아요?" "나는 둘 다 좋아." 제프가 미소지으면서 대답했다. "당신이 이 가발을 쓰다가 싫증이 나면 다시 검은 머리나 빨간 머리로 바꾸지, 뭐." 제프는 레이첼을 응시하다가 부드럽게 한 마디 덧붙였다.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나는 지금 당신의 모습이 제일 좋아." 레이첼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나도 지금 당신 모습이 좋아요." 17 악마와의 동업 도시마다 제각기 나름대로의 특색이 있지만, 로마에는 세계의 어느 도시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함이 있었다. 로마는 인류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었다. 현대 문명은 로마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난 수세기에 걸친 영광스러운 역사의 흔적 속에 현대적인 대도시가 둥지를 틀고 있었다. 로마는 언제나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서 움직였다. 서둘러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서 열두 살에 이곳을 처음 방문했던 이후로, 다나가 로마를 다시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하자 다나의 머릿속에는 지나간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나는 로마에서 지낸 첫날에 대한 기억을 도저히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 다나의 가족들은 로마인들이 초기 기독교인들을 잡아서 사자의 먹이로 던졌던 콜로세움 경기장을 찾아갔다. 콜로세움 경기장을 구경한 후에 다나는 무려 일주일 동안이나 나쁜 꿈에 시달려야만 했다. 다나와 부모님은 바티칸과 스페인 계단을 둘러보았다. 다나는 트레비 분수에 이탈리아 동전을 던지면서 제발 부모님이 싸우지 않도록 해달라고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무런 말도 없이 모녀를 버리고 사라졌을 때, 다나는 그 분수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느꼈다. 다나의 가족들은 로마인들의 공중 목욕탕이었던 카라칼라에서 오페라를 관람했다. 그 당시에 카라칼라에서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델로를 공연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나가 결코 잊지 못할 아름다운 밤이 되었다. 다나는 비아 베네토에 있는 유명한 도네이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었고, 거리에 붐비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찬란한 햇빛을 받으면서 걸어다니는 로마인들은 한결같이 멋지고 행복한 것처럼 보였다. 다나는 로마와 로마 사람들을 흠모했다. '인생이란 참으로 이상한 거야. 수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 위험한 살인자를 쫓아서 내가 다시 로마에 오게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어?' 디나는 택시를 타고 피아자 나보나 근처에 있는 시세로니 호텔에 도착했다. "본 지오르노." 시세로니 호텔 지배인이 직접 마중을 나오면서 다나에게 인사말을 했다. "우리 호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에반스 양. 이틀 동안 묵을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다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정확히 모르겠어요." 지배인은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손님을 위해서 거실이 딸린 아름다운 방을 준비했습니다. 무엇이든지 필요한 게 있으시면, 즉시 저희에게 알려주십시오." '이탈리아는 매우 친절한 나라야.' 문득 다나는 이웃에 살았던 도로시와 하워드 와톤 부부를 떠올렸다. "그들이 어떻게 내 이름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단지 나와 계약을 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직접 사람을 보냈단 말입니다." 충동적으로 다나는 와톤 부부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다나는 교환원에게 이탈리아노 리프리스티노 회사를 연결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회사에 근무하는 하워드 와톤 씨와 통화하고 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그분의 이름은 철자가 어떻게 되시죠." 다나는 하워드의 철자를 알려주었다. "감사합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다나는 5분이나 기다렸다. 마침내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하워드 와톤이라는 분은 계시지 않습니다." 다나의 머릿속에서 와톤 부부가 남긴 음성이 맴돌았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이라고, 내일까지 로마에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나는 이탈리아 제1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앵커로 일하는 도미니크 로마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나예요. 로마에 도착했어요, 도미니크." "다나! 반가워요. 언제 만날 수 있나요?" 도미니크 로마노는 몹시 반가운 듯이 말했다. "당신만 괜찮다면 지금이라도." "어디에서 묵고 있어요?" "시세로니 호텔이에요." "택시를 타고 운전기사에게 토울라까지 가자고 해요. 내가 미리 그곳에 도착해서 당신을 기다릴 테니까...." 비아 델라 루파 거리에 있는 토울라는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이었다. 다나가 도착했을 때, 로마노는 이미 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본 지오르노. 총알이 날아다니지 않는 평화로운 곳에서 당신을 만나니까 정말 기쁘군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도미니크." 도미니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참으로 무익한 전쟁이었죠. 그 어떤 전쟁보다도 더욱 끔찍했어요. 그런데 다나, 당신은 지금 로마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잇는 중이에요?" "어떤 남자를 만나려고 왔어요." 다나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 행운아가 누구죠?" 도미니크가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 "빈센트 만치노." 순식간에 도미니크 로마노의 표정이 딱딱하게 변했다. "무슨 일로 그 사람을 만나려는 거죠?" "어떤 사건 하나를 조사하는 중이에요. 어쩌면 아무런 일도 아닌 것으로 밝혀질 수도 있지만.... 혹시 만치노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어요? 나에게 좀 알려주세요?" 다나가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도미니크 로마노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도미니크는 신중한 표정으로 다나를 쳐다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빈센트 만치노는 이탈리아 무역 통상부 장관이었어요. 만치노의 출신 배경에는 마피아가 있었죠. 어두운 과거는 그가 평생 떨쳐버릴 수 없는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죠. 정치계에서 승승장구하던 만치노는 갑자기 매우 중요한 직책에서 물러났어요. 하지만 그 이유는 아무도 몰라요." 도미니크 로마노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다나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빈센트 만치노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가 뭐죠? 빈센트 만치노가 미국에서도 그렇게 유명한 인물이 되었는지는 미쳐 모르고 있었네요." 다나는 일부러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회피했다. "빈센트 만치노가 무역 통상부 장관직을 그만둘 무렵에, 테일러 윈스롭이 그와 함께 정부 대표로 무역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요, 결국 테일러 윈스롭은 다른 사람과 그 협상을 마쳐야 했지만요," "혹시 그 당시에 테일러 윈스롭이 로마에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러 이었는지 알고 있나요?" 도미니크 로마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에 대답했다. "두 달 가량 되었을까? 그 기간 동안 만치노와 윈스롭은 친한 친구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도미니크 로마노는 말을 끊었다가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 틀어졌죠." "뭐가요?" "누가 알겠어요? 온갖 소문이 떠돌아다녔죠. 빈센트 만치노에게는 피아라고 하는 외동딸이 있었어요. 단 한밖에 없는 자식이었는데, 갑자기 그 딸이 실종되었죠. 그 일 때문에 만치노 부인은 신경 쇠약에 걸리고 말았죠. 그 후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빈센트 만치노의 딸이 실종되었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납치를 당했나요?" "아니에요. 그녀는 단지, 뭐랄까...." 도미니크 로마노는 적절한 단어를 찾으려고 말을 더듬거렸다. 다나는 초조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냥 실종되었어요. 살졌다니까요. 아무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요." "그래요?" 다나는 의아스러운 듯이 반문했따. "정말이지, 피아는 로마에서 보기 드문 미인이었는데...." 도미니크 로마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만치노 부인은 어디에 있나요?" "소문에 따르면, 만치노 부인은 무슨 요양소 같은 곳에 있다고 들었어요." "거기가 어딘지 알아요?" "아니, 나는 몰라요. 그리고 당신도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말아요." 종업원이 테이블로 다가오더니 허리를 굽혔다. 도미니크 로마노가 다나에게 말했다. "나는 이 레스토랑 음식을 잘 알고 있죠. 내가 당신 대신에 음식을 주문해도 되겠어요?" "그렇게 해요." "이봐요." 도미니크 로마노는 종업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프리마, 파스타 파지올리, 도포, 아보가도, 아브라치오 아로스타콘 폴렌타." "그라찌에(고맙습니다)." 토울라의 음식은 아주 훌륭했다. 다나는 천천히 이탈리아 음식의 풍요로운 맛을 음미했다. 다나와 도미니크 로마노는 한참 동안이나 가벼운 마음으로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헤어질 때가 되자, 로마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다나, 그런데 한 가지 충고할 게 있어요.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섣불리 빈센트 만치노에게 접근하지 말아요. 빈센트 만치노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에요. 당신이 어떤 질문은 해도 받아주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만약 그 사람이...." "그 사람은 잊어버려요." "고마워요, 도미니크. 충고를 해주어서...." 빈센트 만치노의 사무실은 비아 사르드나에 잇는 현대적인 건물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건물은 소유주도 바로 빈센트 만치노였다. 웅장한 대리석이 깔린 로비에는 건장한 체격의 경비원이 버티고 있었다. 다나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경비원은 날카로운 눈길로 다나를 쳐다보았다. "부오나 지오르노. 무슨일입니까, 아가씨?" "제 이름은 다나 에반스입니다. 빈센트 만치노 씨를 만나려고 왔습니다." "사전에 약속을 하셨습니까?" "아뇨." "그렇다면 돌아가십시오." "중요한 용건이 있어요. 그분에게 테일러 윈스롭에 관한 일이라고 전해주세요." 경비원은 잠시 동안 다나를 관찰하듯이 훑어보다가, 마지못해 수화기를 들었다. 경비원은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더니 다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다나는 침착하게 빈센트의 만치노의 반응을 기다렸다. '과연 무슨 소득이 있을까?' 잠시 후에 전화벨이 울리자, 경비원은 재빨리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어떤 사람이 전화로 경비원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 같았다. 경비원은 다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층으로 올라가십시오. 그곳에 가시면 누군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프레고(천만에요)." 다나의 기대와는 달리, 빈센트 만치노의 사무실은 몹시 허름한 인상을 주었다. 빈센트 만치노는 낡고 찌그러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나이는 육십 대 가량 되었을까? 빈센트 만치노는 그다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체격에 어깨가 떡 벌어진 남자였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얇은 입술, 완고하게 보이는 매부리코. 빈센트 만치노는 소름이 오싹 끼칠만큼 차갑고 냉혹한 눈빛으로 다나를 노려보았다. 다나는 용기를 내어서 빈센트 만치노를 마주 바라보았다. 빈센트 만치노의 책상 위에는 금테 액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 속에는 열 여섯 살 가량 되어 보이는 소녀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 매혹적인 미소를 지니고 있는 아름다운 소녀였다. 빈센트 만치노가 다나에게 입을 열었다. "테일러 윈스롭에 대한 일로 찾아왔소?"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굵었다. "네. 그 일에 대해 묻고 싶은 말이...." 하지만 다나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빈센트 만치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놈에 대해선 할 말이 아무것도 없소. 시뇨리나(아가씨). 그놈은 화재로 인해 죽었소. 그놈은 지옥으로 떨어졌고, 그의 아내와 자식들도 틀림없이 지옥으로 떨어졌을 거요." 그는 몹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잠깐 의자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만치노씨?" 다나는 빈센트 만치노를 응시하면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빈센트 만치노의 입에서 '안 돼!' 라는 말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빈센트 만치노는 턱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가끔씩 화가 나면, 예의를 차리는 것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소. 자리에 앉으시오." 다나는 빈센트 만치노의 맞으편 의자에 앉았다. "만치노 씨와 테일러 윈스롭 씨는 두 나라의 무역 협정에 대해 협상을 진행한 적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랬소." "그리고 두 분은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되셨죠?" 다나가 질문을 던졌다. "그렇소, 잠깐 동안은 친구였다고 할 수 있지." 빈센트 만치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다나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사진을 힐끗 바라보았다. "따님인가요?" 하지만 빈센트 만치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름답군요." "그렇소, 정말 아름다웠지." 다나는 의아해하며 빈센트 만치노를 바라보았다. '정말 아름다웠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따님이 지금 살아 있지 않나요?" 빈센트 만치노의 시선이 다나를 따갑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무슨 대답을 할 것인지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빈센트 만치노가 입을 열었다. "물론 살아 있소. 하지만 차라리 죽은 것보다 못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지." 빈센트 만치노가 주먹을 불끈 쥐면서 소리쳤다. "나는 테일러 윈스롭을 내 집으로 초대했소. 그는 우리와 함께 식탁에 앉아서 빵을 나누어 먹었소. 나는 테일러 윈스롭에게 내 친구들을 소개했지. 그런데 그런 나에게 테일러 윈스롭이 어떤 보답을 했는지 아시오?" "테일러 윈스롭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요?" "그는 나의 아름다운 딸을 임신시켰소.그 애는 겨우 열여섯 살이었소. 그 애는 다른 사람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내가 테일러 윈스롭을 죽이기라도 할까봐 몹시 두려워했소.그래서 그 애는....그 애는 낙태를 했소." 빈센트 만치노는 낙태라는 말이 끔찍한 저주라도 되듯이 나지막이 내뱉었다. "테일러 윈스롭은 그런 사실이 공개되는 것을 두려워했소. 그래서 그는 피아를 의사에게 보내지 않았소. 그렇소. 그놈은.... 그놈은 내 딸을 도살업자에게 보냈소." 빈센트 만치노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도살업자는 그 애의 자궁을 갈가리 찢어놓았소. 겨우 열여섯 살인 내 딸을 말이오...." 빈센트 만치노는 분노로 인해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테일러 윈스롭은 내 딸만을 죽인 게 아니오. 그는 내 손자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 그리고 그 뒤에 태어날 손자들까지 죽인 거요. 그 놈은 만치노 가의 미래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말았소." 빈센트 만치노는 격앙된 감정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깊이 들이 마셨다. "이제 그놈과 그놈의 가족들은 그놈이 지은 죄의 대가를 치른 것이오." 다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묵묵히 빈센트 만치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지금 내 딸은 수녀원에 있소, 시뇨리나. 나는 두 번 다시 그 애를 보지 않을 것이오. 그렇소. 나는 테일러 윈스롭과 함께 일을 한 적이 있소." 빈센트 만치노의 차가운 회색빛 눈동자가 다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따. "그러나 그것은 악마와의 동업이었소." '자, 이렇게 해서 윈스롭 가족을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는 용의자가 두 명이 되었군.' 다나는 빈센트 만치노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따. '이제 마르셀 팔콘을 만날 일만 남았어.' 벨기에로 향하는 KLM 기내에서, 다나는 누군가 자신의 옆자리로 옮겨 앉는 것을 느꼈다. 다나는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스튜어디스에게 좌석을 바꿔 달라고 부탁해서 다나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젊고 매력적인 남자였다. 그 남자는 다나를 바라보면서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 소개를 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제 이름은 데이비드 헤이네스입니다." 그 남자는 영국식 억양이 섞인 말투로 인사했다. "다나 에반스예요." 데이비드 헤이네스는 다나가 유명한 앵커인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다나의 이름을 듣고도,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비행기를 타기에 좋은 날씨로군요. 그렇죠?" "네." 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 남자는 이야기를 하면서 곧 다나로부터 눈길을 떼지 못했다. "브뤼셀은 사업 때문에 가는 건가요?" 데이비드가 다나를 쳐다보면서 질문을 던졌다. "그런 목적도 있지만, 관광도 하고 싶어요." "그 곳에 친구들이 있나요?' "네, 몇 명의 친구들이 브뤼셀에서 살아요." "저는 브뤼셀을 손바닥처럼 환하게 알고 있죠." '재미있는 일인데? 이 남자는 지금 나를 유혹하려는 걸까? 맞아. 다시 생각해보니까, 비행기를 탈 때마다 남자들이 나에게 말을 걸었어. 이 사실을 제프에게 말해줘야지.' 다나는 머릿속에 제프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 순간 문득 다나는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이는 지금 레이첼과 함께 있지.' 옆자리의 남자가 다나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당신의 얼굴이 어쩐지 낯이 익어요." 다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그런 말을 많이 듣는답니다." 마침내 비행기가 브뤼셀 공항에 착륙했다. 다나는 서둘러 비행기에서 내렸다. 데이비드는 공항 터미널에 서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서 다나의 동정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감시의 손길은 잠시도 다나를 놓치지 않았다. 탑승객들이 공항 로비에서 빠져나갔을 때, 데이비드 헤이네스가 다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다나는 택시를 잡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에반스 양, 자동차가 기다리고 있습니까?" "아니에요, 하지만 전...." "제발 부탁입니다. 아름다운 숙녀분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데이비드 헤이네스는 장난스럽게 허리를 숙였다. 다나는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고 말았다. 데이비드 헤이네스는 다나를 데리고 검은색 리무진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운전기사가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제가 호텔 앞에 내려드리겠습니다." 데이비드 헤이네스가 다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데이비드 헤이네스가 운전기사에게 지시를 내리자, 리무진은 서서히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브뤼셀에는 처음 오시는 겁니까?" "네." 다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타고 잇던 리무진이 하늘색을 칠한 쇼핑 상가 앞을 지나가고 있을 때, 데이비드 헤이네스가 다나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특별한 쇼핑 계획이 없으시다면, 여기 허버트 갤러리를 한 번 들러보십시오. 추천할 만한 곳이랍니다." "아주 멋있는 곳이군요." 데이비드 헤이네스가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잠깐 멈춰요, 찰스." 잠시 후에 리무진이 멈추자, 데이비드 헤이네스가 손을 들어올리더니 어린 소년이 오줌을 누고 있는 청동상을 가리켰다. "저게 바로 그 유명한 '오줌싸개 소년'의 동상입니다." 데이비드 헤이네스가 다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동상 중의 하나죠."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내 아내와 아이들이 죽었소. 그것도 너무나 비참하게 말이오. 그 당시에 내가 집에 있었다면...." 가족을 구할 수 있었을 거요." "오늘 저녁에 다른 약속이 없다면, 제가...." "미안해요. 저는 좀 바쁠 것 같군요." 매트 베이커는 엘리어트 크롬웰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엘리어트가 매트를 호출했던 것이다.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뉴스를 진행해야 할 중요한 실무진이 두 명이나 자리를 비우고 있네, 매트. 도대체 제프는 언제 돌아오는 건가?" "잘 모르겠습니다, 엘리어트 사장님. 제프는 지금 전 부인의 병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업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제프에게 차라리 휴직계를 내라고 말했습니다." "알겠네. 그런데 다나는 브뤼셀에서 언제 돌아오지?" 그 순간 매트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엘리어트 크롬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엘리어트 크롬웰은 다나가 지금 브뤼셀에서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이 사람에게 결코 그 사실을 말한 적이 없어.' 18 브뤼셀의 희생자들 북대서양 조약 기구인 나토의 본부는 레오폴드 3 건물에 자리잡고 있었다. 건물 위에는 검은색, 노란색, 붉은색이 수직으로 그려진 벨기에 국기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다나는 테일러 윈스롭이 나토 고문직을 조기 사임한 것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 일이 끝나면 곧 바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나는 이내 나토 본부가 수많은 알파벳 약자들이 난무하고 있는 거대한 미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16개 회원 국가들의 대표들이 거주하는 사무실 이외에도 NAC, EAPC, NACC,ESDI, CJTF, CSCE 등의 약자가 붙어 있는 사무실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다나는 나토의 출판부로 들어가서 기자실에 있는 장 송베이유를 찾았다. 장 송베이유는 다나의 모습을 보자, 몹시 반색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다나!" 장 송베이유가 다나를 향해 다가오면서 말했다. "안녕, 장." 다나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브뤼셀까지 왔어요?" "기사를 쓰고 있어요, 정보가 좀 필요해서...." "아하, 나토에 대한 기사로군." 장 송베이유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글쎄요. 어떤 면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겠죠." "그게 무슨 뜻이죠?" 장 송베이유의 얼굴에 의아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테일러 윈스롭은 미국 고문의 자격으로 나토에서 근무하고 있었으니까...." 다나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맞아요, 테일러 윈스롭은 자신이 맡은 직책을 훌륭하게 수행했죠. 테일러 윈스롭은 보기 드물게 뛰어난 사람이었죠. 그의 가족이 그런 끔찍한 비극을 당하다니.... 정말 불행한 일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한 가지 알고 싶은 게 있어요." 다나는 장 송베이유를 응시하면서 말했다. "그래요? 혹시 테일러 윈스롭에 대해서 알고 싶은 건가요?" 장 송베이유는 궁금한 듯이 다나를 쳐다보았다. "테일러 윈스롭이 나토 고문직을 조기에 사퇴했다고 하더군요. 그 이유를 알고 싶어요." "이유는 아주 간단해요." 장 송베이유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대답했다. "그게 뭐죠?" 다나는 그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텡이러 윈스롭은 자신의 목적을 모두 달성했어요. 그래서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죠." 다나는 몸시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윈스롭이 여기에서 직무하는 동안, 어떤 일이.... 뭔가 주목할 만한 일이 없었나요? 혹시 그 사람과 관련된 추문이라도 들어본 적 없었나요?" 장 송베이유는 깜짝 놀란 눈빛으로 다나를 쳐다보았다. "어림도 없어요!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요?" 다나는 재빨리 변명했다. "아니에요. 내가 들은 바에 따르면, 약간 불화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불화라니?" "테일러 윈스롭과 여기 있던 어떤 사람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다는 거예요." 장 송베이유는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니까 사적인 성격의 불화라는 말인가요?" "그래요." 다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잘 모르겠군요. 어디 한번 알아보도록 하죠." 장 송베이유가 입술을 오므리면서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장...." 다음날 아침에 다나는 장 송베이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테일러 윈스롭에 대해서 알아낸 것이 있나요?" "미안해요, 다나. 최선을 다해서 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다나는 장 송베이유의 대답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다나는 몹시 실망하고 말았다.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여기까지 왔는데 공연히 헛걸음을 하게 된 셈이군요, 다나." "장,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나토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마르셀 팔콘이 갑자기 사임하고 프랑스로 돌아간 적이 있죠?" "네." "그 일을 어떻게 된 일이죠? 사실 평범한 일은 아니잖아요?" 다나는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맞아요. 마르셀 팔콘도 임기가 많이 남아 있었죠. 그래요. 그랬던 것 같아요." "그가 왜 사임을 했을까요?" "이곳에서는 다 아는 비밀이에요. 불행한 사고가 있었죠. 그의 아들이 뺑소니 사고로 사망했어요." 장 송베이유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대답했다. "그래요? 그 자동차의 운전자는 어떻게 되었나요? 경찰이 그 사람을 체포했나요?" "그건 아니에요. 뺑소니 사고가 발생한 직후에 그 사람이 경찰서로 가서 자수했어요." '역시 또 다른 죽음이 있었다.' 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그 뺑소니 사고를 냈던 운전자의 이름은 안토니오 퍼시코였어요. 그런데 우연하게도 그 사람은 테일러 윈스롭의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었죠." 다나는 갑자기 온몸에 차가운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테일러 윈스롭과 마르셀 팔콘의 관계에 대해 의문이 생겼던 것이다. "그래요? 그렇다면 퍼시코는 지금 어디에 있죠?" "성 질레스 교도소. 그 교도소는 브뤼셀에 있어요." 장 송베이유는 마치 사과를 하듯이 덧붙였다. "더 이상 도울 수가 없어서 미안해요." 다나는 즉시 워싱턴으로 전화를 걸어서 안토니오 퍼시코에 대한 자료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얼마 후에 자료가 도착했다. 다나는 서둘러 워싱턴에서 보낼 팩스를 일기 시작했다. 그 팩스는 자동차 사고 기사를 담고 있었다. 안토니오 퍼시코: 테일러 윈스롭 대사의 운전기사. 안토니오 퍼시코는 가브리엘 팔콘을 자동차 사고로 숨지게 한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피해자 가브리엘 팔콘은 국제 연합에 프랑스 대사로 파견되어 있던 마르셀 팔콘의 아들이다. 안토니오 퍼시코는 벨기에 법정에서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성 질레스 교도소는 브뤼셀 중심부와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곳은 성과 비슷한 작은 탑들이 우뚝 솟아 있는 하얀 건물이었다. 다나는 성 질레스 교도소를 찾아내기 전에 먼저 전화로 안토니오 퍼시코를 인터뷰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다나는 성 질레스 교도소의 소장실로 들어갔다. "퍼시코를 면회하러 오셨습니까?" "네." "좋습니다." 간단한 확인 조사를 마친 후에 다나는 교도관의 안내를 받으면서 안토니오 퍼시코가 기다리고 있는 면회실로 들어갔다. 안토니오 퍼시코는 체격이 작고 얼굴이 창백한 남자였다. 그는 뭔가 불안한 듯이 녹색 눈을 커다랗게 뜨고 끊임없이 얼굴 근육을 씰룩 거렸다. 잠시 후에 다나가 면회실로 들어가자, 안토니오 퍼시코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마침내 와주셨군요! 어서 나를 이 감옥에서 꺼내주세요." 다나는 깜짝 놀라면서 안토니오 퍼시코를 쳐다보았다. "나는 당신이 기다리는 사람이 아닌 것 같군요.... 미안합니다. 당신을 꺼내드리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에요. 당신을 실망시켜 정말 유감이군요. 안토니오 퍼시코는 의아스러운 듯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다나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나를 만나러 찾아왔습니까? 그들이 사람을 보내서 나를 꺼내준다고 약속했어요." "나는 가브리엘 팔콘의 죽음에 대해서 당신에게 물어보려고 찾아 왔어요." 가브리엘 팔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안토니오 퍼시코는 몹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안토니오 퍼시코의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다. "그 일이라면 나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어요. 나는 정말 결백해요." 안토니오 퍼시코가 머리를 흔들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당신은 그 당시에 스스로 자동차를 운전했다고 자백을 했잖아요." "거짓말을 한 거예요." 안토니오 퍼시코가 고개를 떨구면서 말했다. 다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질문을 던졌다. "왜 그랬죠? 무엇 때문에 그런 거짓말을 한 거예요?" 안토니오 퍼시코는 다나의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돈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가브리엘을 죽인 사람은 바로 테일러 윈스롭이에요." 얼마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다나가 침묵을 깨면서 말했다. "그 이야기를 해보세요." 안토니오 퍼시고의 얼굴이 더욱 심하게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그 사건은 금요일 밤에 일어났어요. 그 당시에 윈스롭 부인은 런던에 있었구요." 안토니오 퍼시코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윈스롭 씨는 혼자 자동차를 운전하고 앙시엔느 벨지끄 나이트 클럽으로 가셨어요. 제가 그곳까지 태워다 드리겠다고 했지만, 윈스롭씨는 직접 운전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셨어요." 안토니오 퍼시코는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잠시 동안 말을 멈추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죠?" 다나가 궁금한 듯이 재촉했다. "윈스롭 씨는 술에 만취해서 집으로 돌아왔어요. 아주 늦은 시각이었죠. 그런데 윈스롭 씨는 나에게 갑자기 자동차 앞으로 어떤 소년이 뛰어들었다고 말했죠. 운전하는 도중에 소년을... 소년을 치었다는 겁니다. "그 소년이 바로 가브리엘 팔콘인가요?" "맞아요. 윈스롭 씨는 세상에 소문나는 게 두려워서 자동차를 세우지 않고 계속 운전을 했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혹시 누군가 그 사고를 목격하고 경찰에게 자동차 번호를 알려준 것은 아닐까 하고 불안해하더군요. 물론 윈스롭 씨는 외교관 면책 특권이 있어서 구속되지는 않겠지만, 만약 그 사고 소식이 외부로 퍼져나가면 러시아 계획이 망쳐질 거라고 말했어요." 다나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러시아 계획이라뇨?" "네. 윈스롭 씨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요." "그런데 러시아 계획이라는 게 도대체 뭐죠?" 안토니오 퍼시코는 다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건 나도 잘 모르죠. 나는 다만 윈스롭 씨가 전화로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뿐이에요. 그 당시에 윈스롭 씨는 꼭 미친 사람 같았어요." 안토니오 퍼시코는 심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윈스롭 씨는 수화기에 대고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어요. '러시아 계획을 계속 진행시켜야만 해. 지금 구만두기에는 이미 늦었어.' 나는 그말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그게 무슨 말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나요?" 다나는 의아스러운 듯이 질문을 던졌다. "네." 안토니오 퍼시코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윈스롭 씨가 그 밖에 다른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할 수 있겠어요?" 안토니오 퍼시코는 잠시 동안 생각을 정리했다. "가끔씩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아요. '모든 조직들이 자리를 잡았어.'" "어떤 조직을 의미하는 걸까요?" 다나는 윈스롭이 말했던 조직이 어떤 것인지 무척 궁금했다. 안토니오 퍼시코는 고개를 들어올리더니 다나를 쳐다보았다. "그건 나도 알 수가 없어요. 하지만 윈스롭 씨의 태도로 볼 때, 매우 중요한 말처럼 들렸어요." 다나는 안토니오 퍼시코가 하는 말들을 모조리 기억 속에 저장했다. "퍼시코 씨, 그런데 어째서 당신이 그 사고의 책임을 모두 떠맡았던 거죠?" 순식간에 안토니오 퍼시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미 말했잖아요. 나는 돈을 받았어요. 테일러 윈스롭 씨는 나에게 아주 매력적인 제안을 했어요. 막약 내가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사고를 내었다고 거짓 자백을 하면, 1백만 달러의 돈을 주겠다고 했던 겁니다.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가족을 보살펴주겠다고도 했어요. 그리고 일류 변호사를 고용해서 가벼운 처벌을 받도록 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안토니오 퍼시코는 이를 악물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나는 바보처럼 그 제의를 받아들였죠. 테일러 윈스롭 씨를 굳게 믿었어요." 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그런데 이제 테일러 윈스롭 씨가 죽었으니까, 나는 평생을 감옥에서 보낼 수밖에 없겠군요. 누가 내 말을 믿어 주겠어요?" 안토니오 퍼시코는 몹시 절망스러운 표정이었다. 다나는 안토니오 퍼시코의 고백을 듣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오랫동안 헤어날 수가 없었다.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했나요?" 다나는 간신히 말을 이었다. "물론이죠. 테일러 윈스롭 씨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경찰에게 우리가 한 거래를 죄다 털어놓았어요." 안토니오 퍼시코가 비통해하며 말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무척 후회하고 있었다. "그런데요?" "모두들 나를 비웃더군요. 내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퍼시코 씨, 이제부터 내가 몇 가지 매우 중요한 질문을 할 거에요. 대답을 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하세요." "무슨 질문이죠?" "아들을 죽인 운전자가 테일러 윈스롭이라는 말을 마르셀 팔콘에게 했나요?" "네. 감옥에 들어오게 되자, 나의 선택이 몹시 어리석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마르셀 팔콘에게 전화를 걸었죠. 그리고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어요. 그 사람이라면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안토니오 퍼시코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되자, 마르셀 팔콘이 무슨 말을 하던가요?" 다나는 초조한 듯이 질문을 던졌다. "그 사람이 한 말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그 놈과 그 놈의 가족을 모조리 지옥으로 보내고 말겠어.'" 그 순간 다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맙소사! 이제 가능성이 세 명으로 늘어났어. 파리로 가서 마르셀 팔콘을 만나는 게 좋겠어.' 비행기는 도시의 상공을 가로지르면서 날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다나는 이미 비행기 안에서 파리의 매력을 물씬 느끼고 있었다. 파리는 불빛의 도시, 연인들의 도시였다. 파리는 결코 혼자 올 만한 곳이 아니었다. 마침내 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했다. 파리에 도착하자, 다나는 가슴이 저릴 정도로 제프가 그리워졌다. 파리의 거리는 온통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다나는 플라자 아테네 호텔의 로비에서 메트로 6 텔레비전전전 방송국에 근무하는 장 폴 허버트를 만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르셀 팔곤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고 있어요?" "물론이죠. 파리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그 사람에 대해서 말해줄래요?" "마르셀 팔콘은 무척 유명한 인사입니다. 미국인들이 잘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소위 거물이라고 할 수 있죠." "그 사람은 주로 무슨 일을 하죠?" "팔콘은 거대한 제약 회사를 소유하고 있어요. 몇 년 전에 작은 회사들이 부당 사업 거래로 그를 고소했지만, 정계의 폭넓은 인맥 덕분에 아무런 탈도 없이 무사히 넘어간 적도 있죠. 팔콘은 정계와 재계에서 실력을 인정받았어요. 프랑스의 수상이 팔콘을 나토의 대사로 임명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만두었잖아요. 그 이유가 뭐였죠?" 다나가 궁금한 듯이 물었다. "아주 끔찍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었죠. 그의 아들이 브뤼셀에서 술에 취한 운전사가 모든 자동차에 치어서 숨지고 말았거든요. 단 하나뿐인 아들이었어요. 똑똑하고 잘생긴 젊은이였죠. 팔콘은 그 충격을 감당할 수가 없었어요. 그는 당장 나토를 떠나서 파리로 돌아왔지요. 게다가 그의 아내는 신경 쇠약에 걸렸어요. 팔콘 부인은 지금 칸느에 있는 요양원에서 살고 있어요." 장 폴 허버트는 걱정스러운지 다나를 바라보았다. "다나, 만약 팔콘에 대한 기사를 쓸 생각이라면, 기사 내용을 신중하게 생각하도록 해요. 팔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빚을 갚는 사람이에요." 장 폴 허버트가 조심스럽게 당부했다. 마르셀 팔콘과 면담 약속을 얻어내는 일에 꼬박 하루가 걸렸다. 마침내 다나는 마르셀 팔콘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마르셀 팔콘이 다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내가 당신을 만나기로 한 것은 당신의 사라예보 보도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오, 마드모아젤." "고맙습니다." 파란 눈을 지닌 마르셀 팔콘은 상당히 위압적이고 강한 인상을 풍겼다. "자, 의자에 앉아요. 그런데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소?" 마르셀 팔콘은 몹시 날카로운 느낌을 주었다. "아드님에 대한 일을 물어보고 싶어요." 다나는 마르셀 팔콘을 응시하면서 직설적으로 말했다. "아, 그렇군." 마르셀 팔콘의 눈빛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건 아주 비극적인 사건이었어요." "그렇소. 불행한 일이었지. 가브리엘은 아주 훌륭한 아이였소." "아드님을 친 운전자는...." "자가용 운전기사였소." 마르셀 팔콘이 다나의 말을 가로막았다. 다나는 당혹스러운 가운데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몇 가지 매우 중요한 질문을 할 거예요. 대답을 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하세요." "무슨 질문이죠?" "아들을 죽인 운전자가 테일러 윈스롭이라는 말을 마르셀 팔콘에게 했나요?" "네. 감옥에 들어오게 도자, 나의 선택이 몹시 어리석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마르셀 팔콘에게 전화를 걸었죠. 그리고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어요. 그 사람이라면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모든 사실을 알게 되자, 마르셀 팔콘이 무슨 말을 하던가요?" "그 사람이 한 말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그 놈과 그놈의 가족을 모조리 지옥으로 보내고 말겠어.'" 그런데 지금 마르셀 팔콘은 마치 진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팔콘 씨, 당신이 나토에 계실 때, 테일러 윈스롭 씨를 만난 적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다나는 마르셀 팔콘의 얼굴을 지켜보면서 아주 작은 표정의 변화라도 잡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마르셀 팔콘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렇소, 같이 일을 했었지." 마르셀 팔콘의 목소리는 아주 침착했다. '그게 다예요?' 다나는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그렇소, 같이 일을 했었지." '도대체 이 사람의 진심은 뭐야?' "팔콘 씨, 제가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어도 되게...." 하지만 이번에도 마르셀 팔콘은 다나의 말을 도중에서 잘랐다. "유감스럽게도 아내는 지금 휴가 여행 중이오." "그의 아내는 신경 쇠약에 걸렸어요. 팔콘 부인은 지금 칸느에 있는 요양원에서 살고 있어요." 마르셀 팔콘은 지금 완전히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더욱 중요한 어떤 이유 때문에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이 분명했다. 플라자 아테네 호텔의 객실로 돌아온 다나는 매트에게 전화를 걸어서 지금까지 알아낸 사실을 알려주었다. "다나, 도대체 언제 돌아올 거요?" "한 군데 더 가야 할 곳이 생겼어요, 매트. 브뤼셀에 있는 테일러 윈스롭의 운전기사가 한 말에 의하면, 윈스롭은 러시아 계획이 혹시라도 잘못되지나 않을까 무척 불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무슨 말인지 한 번 알아보려고 해요." "그렇다면 모스크바까지 가겠다는 거요?" "그래요. 모스크바에 있는 윈스롭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겠어요." "맙소사! 하지만 엘리어트 크롬웰 사장은 당신이 빨리 방송국 스투디오로 복귀하기를 원해요. 아무튼 팀 드류가 우리 특파원으로 모스크바에서 머물고 있소. 그에게 당신을 만나라고 지시하겠소. 그가 도움이 될 거요." 매트가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하루나 이틀 정도면 러시아를 떠날 수 있을 거예요." "다나?" "네?" "내 말을 명심해요. 부디 몸조심하도록 해요." 고마워요. 하루나 이틀 정도면 러시아를 떠날 수 있을 거예요. 다나? 네? 내말을 명심해요. 부디 몸조심하도록 해요. 테이프가 끝났다. 다나는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달레이 부인." "어머, 에반스 양." 달레이 부인이 전화를 받았다. "그곳은 아직까지도 오후인가요?" "네. 정말 반가워요." "모두들 어떻게 지내나요?" "우리는 모두 잘 지내고 있답니다." "케말은 어때요? 별다른 일은 없죠?" "그럼요. 아무런 일도 없어요. 당신을 보고 싶어해요." "저도 케말이 몹시 보고 싶어요. 케말 좀 바꿔 주실래요? 목소리를 듣고 싶거든요." "케말은 지금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다나는 깜짝 놀라서 대답했다. "그랬죠. 그 총각이 학교에서 돌아온 후에 무척 피곤한 것처럼 보이더군요. 그래서 내가 낮잠을 좀 자라고 말했어요. 잠을 푹 자고 나면 좀 나아지겠죠." "그랬군요.... 잠을 깨우지는 마세요. 케말에게 내가 사랑한다고 전해주세요. 내일 다시 전화할게요. 러시아에서 곰 한 마리를 갖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해주세요." "곰이라구요? 어머나! 케말이 무척 좋아하겠군요." 다나는 로저 허드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로저, 이런 부탁을 드리기 미안하지만, 당신의 도움이 몹시 필요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하겠소." "저는 이제 모스크바로 갈 예정이에요. 그곳에 가서 하디 대사를 만나고 싶어요. 혹시 당신이 하디 대사를 알고 계시지 않을까 해서 연락을...." 다나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부탁했다. "물론 잘 알고 있소." "저는 지금 파리에서 머물고 있어요. 소개장을 써서 제가 묵고 있는 호텔로 팩스를 보내주시면 정말 고맙겠어요." "나에게 그보다 더 좋은 생각이 있소. 내가 하디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 당신을 만나달라고 부탁하겠소." 로저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마워요, 로저. 정말 고마워요." 섣달 그믐날 밤이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면, 오늘이 바로 다나와 제프가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다나는 마음이 몹시 우울해졌다. 다나는 애써 우울한 마음을 떨쳐버리기 위해 노력했다. '금방 모든 게 잘될 거야.' 다나는 코트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호텔 도어맨이 가까이 다가오면서 물었다. "택시를 불러드릴까요, 에반스 양?" "아니에요."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지만, 다나가 갈 만한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장 풀 허버트는 가족을 만나러 고향으로 내려갔다. '여기는 혼자 있을 도시가 아니야.' 다나는 어쩐지 몹시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다나는 제프와 레이첼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어두운 거리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연히 문이 열려 있는 작은 교회 앞을 지나치게 되었을 때, 다나는 충동적으로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정결하고 조용한 교회 안에서 오랜만에 평온한 기분을 느꼈다. 다나는 신도석에 앉아서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자정 무렵이 되었을 때, 다나는 다시 거리로 나왔다. 파리 시내 전체에서 요란한 폭죽 소리와 환호성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제프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다나는 몹시 괴로운 심정이었다. '혹시 레이첼과 사랑을 나누고 있는 건 아닐까? 제프는 전화도 하지 않았어. 이렇게 중요한 날 밤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바로 그 시각, 다나가 묵고 있는 호텔 방에서 아까부터 어디선가 전화벨 소리가 계속 울리고 있었다. 그 소리는 다나가 두고 나간 가방 속의 휴대폰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나가 플라자 아테네 호텔로 돌아온 것은 새벽 3시였다. 다나는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벗은 후에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그녀를 버리고 떠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프가 그녀를 버렸다. 버림받은 기억이 악몽처럼 그녀의 기억 속에서 줄달음치고 있었다. '슬퍼하지 말자.' 다나는 다짐했다. '그래, 오늘은 제프와 내가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날이야. 하지만 그게 어떻다는 거야? 오, 제프! 왜 전화도 하지 않는 거예요?' 다나는 울다가 잠이 들었다. 19 안개 속의 러시아 다나는 사비나 항공사 소속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모스크바에 도착하기까지는 3시간 30분이 걸렸다. 비행기의 내부를 둘러보던 다나는 승객들 대부분이 따뜻한 옷을 입고 있으며, 선반 위의 수화물 칸에는 모피 코트와 모자, 스카프 등이 잔뜩 올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더 따뜻하게 옷을 입을 걸 그랬어.' 다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기껏해야 하루 이틀이면 러시아를 떠날 수 있을 거야.' 다나는 머릿속에서 안토니오 퍼시코의 말을 잠시도 지울 수가 없었다. "윈스롭 씨는 꼭 미친 사람 같았어요. 윈스롭 씨는 수화기에 대고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어요. '러시아 계획을 계속 진행시켜야만 해. 지금 그만두기에는 이미 늦었어.' 나는 그 말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윈스롭이 진행하던 그 계획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을까? 조직들이 모두 자리를 잡았다는 건 도대체 무슨 뜻이지? 그리고 얼마 후에 대통령은 테일러 윈스롭을 모스크바 주재 러시아 대사로 임명했어. 어떻게 해서든지 러시아에서 이 비밀을 풀 수 있는 정보를 얻어야만 해. 반드시 비밀을 밝히고 말 거야.' 다나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다나가 깜짝 놀랄 정도로 쉬에르메티보 국제 공항은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추운 한겨울에 러시아를 방문하는 거야?' 다나는 공항 안을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드은 대부분 털옷을 걸치고 있었다. 화물로 보낸 가방을 찾기 위해 기다리던 다나는, 어떤 남자가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누군가 내가 여기 오는 것을 알고 있었어.' 다나는 머리를 갸우뚱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그 남자가 다나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나 에반스 양이시죠?" 그는 진한 슬로바키아 사투리를 사용하고 있었다. "네...." 다나가 그 남자를 향해 고개를 들리자, 그는 활짝 미소지으며 소리쳤다. "저는 당신의 열령한 팬입니다! 하앙 당신의 프로그램을 보고 있어요." 그 순간 다나는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어머, 그렇군요. 저의 팬이라니.... 고맙습니다." "저를 위해서 사인을 해주시겠어요?" 그는 종이 한 장을 다나에게 내밀면서 쑥스럽게 말했다. "물론이죠." 다나는 선뜻 허락했다. "그런데 제가 지금 갖고 있는 펜이 없네요." "제 펜을 쓰면 돼요." 다나는 새로 생긴 금장 펜을 꺼내서 멋지게 사인을 한 뒤, 종이를 그 남자에게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남자는 활짝 웃으면서 소리쳤다. 다나가 금장 펜을 다시 핸드백 속에 넣으려는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착 치면서 지나갔다. 다나는 그만 펜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금장 펜이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지자, 다나는 얼른 손을 뻗어서 펜을 집어들었다. 금장 펜의 껍데기가 부서져 있었다. '수리를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쉬운 마음으로 금장 펜을 다시 가방 속에 집어넣으려고 하다가 다나는 무엇인가 이상한 것울 발견했다. 그 순간 다나는 잠시 행동을 멈추고 펜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가느다란 구리선이 부서진 틈 사이로 보였다. 다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구리선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소형 도청 장치가 딸려나왔다. 다나는 깜짝 놀라서 도청 장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있는 장소를 그들이 항상 알고 있었던 까닭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겠어. 하지만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지? 그 이유가 무엇일까? 도대체 왜 나를 감시하는 거야? 그 금장 펜은 이름을 알 수 없는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았던 것이었다. 다나는 마음속으로 금장 펜과 함께 받았던 한 장의 카드를 떠 올렸다. 친애하는 다나, 부디 안전한 여행이 되기를. 일당들로부터. 그 당시에 다나는 매트나 혹은 방송국 내의 동료 직원들이 몰래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다나는 도청 장치를 바닥으로 집어던진 후에 마구 짓밟았다. 도청 장치는 금방 부서지고 말았다. 격리된 관찰실. 갑자기 전자 지도 위에서 떠 있던 신호가 사라졌다. "제가랄?" 다나를 감시하던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도청 장치가 부서지면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다나의 행동을 추적할 수가 없게 되었다. "다나?" 어떤 남자가 다나를 부르고 있었다. 다나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WTN 모스크바 특파원 팀 드류가 서 있었다. "팀 드류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리셨나요? 늦어서 미안해요. 저 밖은 완전히 교통 지옥입니다." 팀 드류는 키가 크고 혈색이 좋았다. 나이는 아마도 사십대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그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다나에게 말했다. "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워두었어요. 매트는 당신이 잘 해야 이틀 정도 머무를 거라고 말하더군요." "사실이에요." 그들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모스크바로 들어가는 도로는 마치 영화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도시 전체가 온통 하얀 눈에 휩싸여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워요!" 다나가 하얀 눈으로 뒤덮인 거리를 둘러보면서 소리쳤다. "다행이군요." "모스크바에 얼마나 있어요, 팀?" 다나는 팀 드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2년 입니다." 팀 드류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대답했다. "여기가 마음에 들어요?" 조금은 으스스하죠. 옐친은 항상 기대에 못 미치고, 블라디미르 푸틴에겐 뭘 기대햐야 할 것인지 아무도 모르고 있으니까요. 국가가 운영하는 수용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는 노숙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죠." 팀 드류는 무단으로 도로를 가로지르는 사람을 피하기 위해서 다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걱정이군요." "세바스토폴 호텔에 객실을 예약했어요, 다나.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그곳에서 묵도록 해요." "그 호텔은 어떤 곳이죠?" 다나는 궁금한 듯이 질문을 던졌다. "관광객을 상대하는 전형적인 호텔 가운데 하나죠." "그렇군요." "그곳에는 층층마다 반드시 경비를 세워놓고 있죠." 거리마다 팀 코트와 두툼한 스웨터 그리고 겨울 외투를 입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팀 드류는 얇은 모직 외투 하나만을 달랑 걸치고 있는 다나의 모습을 흘끗 쳐다보았다. 모스크바의 추위를 견디기에는 너무나 얇은 옷이었다. "다나, 두터운 옷을 좀 사는 게 어때요? 좀더 따뜻한 옷을 입지 않으면 얼어죽기 쉽상이에요." 팀 드류가 걱정스러워하며 제안했다. "괜찮을 거예요. 하루나 이틀 정도면 떠날 테니까요." 다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잠시 후에 붉은 광장과 크레물린 궁이 보였다. 크레물린 궁은 모스크바 강의 왼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궁은 아주 웅장한 느낌을 주었다. "어머나! 대단하네요." 다나가 감탄했다. "그렇죠. 만약 저 벽들이 모두 말을 할 줄 안다면, 엄청난 비명 소리를 내지를 겁니다." 팀 드류가 친철하게 설명했다. "그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건출물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죠. 리틀 보로비츠키의 언덕을 가로질러서...." 다나는 그러나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전부터 다시 곰곰히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안토니오 퍼시코가 일부러 거짓마을 한 것이라면 어떻게 하지? 테일러 윈스롭이 소년을 죽였다는 고백이 그저 안토니오 퍼시코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라면? 그렇다면 러시아 계획도 죄다 거짓말이 아닐까?' "저 붉은 광장 밖에 동쪽 벽이 있습니다. 관광객들이 출입하는 입구는 서쪽 벽에 있죠." '하지만 어째서 테일러 윈스롭은 필사적으로 러시아에 가고 싶었던 것일까? 단지 러시아 대사로 부임한다는 것은 그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인물에게 있어서 별다른 의미가 없었을 텐데.... 반드시 무슨 사연이 있을 거야.' "여기는 지난 수백 년 동안 러시아의 권력이 깃들여 있던 곳입니다. 폭군 이반 황제와 스탈린 그리고 레닌과 흐루시초프가 모두 여기에서 러시아를 호평했어요." 마침내 그들은 세바스토풀 호텔에 도착했다.팀 드류는 호텔의 현관 앞에 자동차를 세웠다.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고마워요, 팀." 다나가 자동차에서 내리자, 얼음처럼 날카로운 돌풍이 기다렸다는 듯이 불어닥쳤다. "어서 호텔 안으로 들어가요." 팀 드류가 자동차 안에서 소리쳤다. "알겠어요." "잠시 후에 내가 당신 짐을 안으로 갖다놓도록 할게요. 그런데 오늘 저녁에 다른 일이 없으면, 저녁이나 같이 하죠." "고마워요." 다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꽤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회원 전용 클럽이 있어요. 아마도 당신 마음에 들 거예요." "기대가 되는군요." 세바스토폴 호텔 로비는 아주 크고 화려했으며,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로비 정면에 설치된 프론트에는 여러 명의 직원들이 앉아 있었다. 다나는 프로트로 다가갔다. "다(네)." 그 직원이 고개를 들었다. "제 이름은 다나 에반스예요. 예약을 했어요." "아하, 네. 에반스 양." 그는 잠시 동아 다나를 쳐다보더니 다소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여기 숙박부에 기록을 해주시겠습니까? 저에게 여권을 주세요." 그는 재빨리 다나에게 숙박부를 내밀었다. 다나가 숙박부에 기록하기 시작하자, 직원은 로비의 건너편 구석에 있는 한 남자를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나는 직원에게 숙박부를 돌려주었다. 잠시 후에 팀 드류가 다나의 짐을 들고 로비로 들어왔다. 팀 드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다나를 찾았다. "팀!" 다나가 손을 흔들면서 팀 드류를 불렀다. "나중에 VIP 내셔널 클럽에서 만나요." 팀 드류는 프론트 앞에 짐을 내려놓고 다시 밖을 나갔다. 볼품없는 제복을 입은 건장한 여자가 다가오면서 말했다.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한때는 분명히 아름다웠을 것 같은 객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낡고 초라했으며 곰팡이 냄새가 풍겼다. 난방 시설이 가동되고 잇는 것 같기는 했지만, 방 안의 공기는 여전히 썰렁했다. 다나를 안내했던 여자가 객실까지 짐을 날라주었다. "수고했어요." 다나는 그 여자에게 팀을 주었다. "감사합니다." 그 여자는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한 후에 문을 닫았다. 다나는 수화기를 들고 전화번호를 눌렀다. "미국 대사관입니다." 전화 교환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디 대사님 부탁합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다나는 전화가 연결되기를 기다리면서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로저 허드슨 씨가 하디 대사에게 미리 연락을 했을까?' "하디 대사님 사무실입니다."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디 대사의 비서인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다나 에반스입니다. 하디 대사님과 통화를 할 수 있을까요?" "용건을 말씀하시겠어요?" 비서가 사무적인 투로 말했다. "음.... 개인적인 일인데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잠시 후 하디 대사가 수화기를 들었다. "에반스 양?" "네." "모스크바에 오실 것을 환영합니다." 하디 대사가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로저 허드슨으로부터 당신이 올 걸이라는 전화를 받았소."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 "제가 직접 찾아뵙고 말씀을 드려도 될까요?" 다나는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무론이오. 어디보자, 잠깐...." 하디 대사는 일정을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일 아침은 어떻겠소? 10시면 되겠소?" "그럼요, 고맙습니다." "좋소. 그 때 봅시다." 다나는 유리창 너머로 매서운 겨울 바람 속을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래, 팀의 말이 맞아. 아무래도 좀더 따뜻한 옷을 사는 게 좋겠어.' GUM 백화점은 다나가 투숙한 호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거대한 백화점 내부에는 의류에서 가전 제품에 이르기까지 값싼 물건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다나는 여성용품 매장으로 들어갔다. 먼저 붉은색 모직 코트를 구입한 후에 다시 그 코트와 잘 ㅇ울리는 목도리를 구입했다. 옷을 고르고 값을 치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20분밖에 되지 않았다. 다나가 다시 호텔 방으로 돌아왔을 때, 휴대폰이 올렸다. 제프였다. "다나, 섣달 그믐날 밤에 당신에게 전화했었어. 어쩐 일인지 당신이 전화를 받지 않더군.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당신 목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미안해요, 제프. 미안해요." '제프는 그날을 잊어버린 게 아니었어! 오, 제프!' "지금은 어디에 있는 거야, 다나?" "모스크바예요." 다나는 제프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일은 잘 되어가고 있어?" "그럼요. 제프, 레이첼의 상태는 어떤가요. 좀 차도가 있나요?" "뭐라고 말하기는 아직 일러. 의사들은 내일 새로운 치료 요법을 사용하려고 해. 그저 꾸준히 치료하고 있을 뿐이야. 며칠 내로 결과가 나올 거야." 제프가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치료는 분명히 효과가 있을 거예요. 그러기를 바래요." 다나는 제프를 위로했다. "거긴 춥지?" 제프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말해도 믿지 않을 거예요. 나는 벌써 인간 고드름이 되었어요." 다나는 소리내어 웃었다. "내가 함께 있으면서 당신을 녹여주고 싶어." 그들은 5분 가량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다나는 레이첼이 제프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제프가 아쉬운 듯이 말했다. "가봐야 해, 다나. 레이첼이 날 필요로 해." '나도 당신이 필요해요.' 그러나 다나는 그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사랑해요, 제프." "사랑해, 다나." 노빈스키 블바르 19-23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미국 대사관은 몹시 낡은 건물이었다. 러시아인 경비들이 대사관을 지키고 있었다. 대사관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참을성 있게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나는 그대를 행렬을 지나쳐서 경비병에게 이름을 밝혔다. 경비병은 일지를 들여다보더니 다나에게 안으로 들어가도 좋다고 손을 흔들었다. 대사관 현관에는 미국 해군 한 명이 총을 손에 든 채, 방탄 유리 상자 안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제복 차림의 미국인 여자 경비가 다나의 핸드백 안을 조사했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고마워요." 다나는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다나 에반스예요." "대사님께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에반스 양. 절 따라오십시오." 책상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말했다. 다나는 그 남자를 따라서 긴 복도를 지나 대기실로 통하는 대리석 계단 몇 개를 올라갔다. 마침내 하디 대사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사십 대 초반의 매력적인 여성이 미소를 지으면서 다나를 맞이했다. "에반스 양, 반가워요. 저는 대사님의 비서인 리 홉킨스에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대사님이 기다리고 계신답니다." 다나는 문을 열고 하디 대사의 사물실로 들어갔다. 에드워드 하디 대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다나에게 다가왔다. "에반스 양." "안녕하세요.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디 대사는 키가 크고 인상이 서글서글한 사람이었다. 전형적인 정치가다운 태도가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뭘 좀 드시겠소?" "아니요, 고맙습니다. 괜찮아요." "앉으시오." 다나는 의자에 앉았다. "로저 허드슨에게 당신이 올 것이라는 말을 듣고 반가웠소. 아주 흥미로운 시기에 오셨소." 하디 대사가 다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네?" 다나는 의아해하며 반문했다. "이런 말을 하긴 싫지만, 어차피 우리끼리 하는 말이니까.... 나는 이 나라가 도저히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일시에 몰락하는 것 같아서 두렵소." 하디 대사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요?" 다나는 조바심을 내면서 하디 대사의 말을 기다렸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곳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곳이고, 에반스 양. 이 나라는 800년이나 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소. 그런데 우리는 그 역사가 허망하게 무너지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 있을 뿐이오. 범죄자들이 온 나라를 쥐고 흔들고 있소." 다나는 궁금하다는 듯이 하디 대사를 쳐다보았다. "어떤 뜻이죠?" 하디 대사는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이 나라의 법에 따르면, 두마. 그러니까 의회에 속한 의원들은 어떤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도 기소될 수 없도록 되어 있소. 그 결과 오늘날 러시아 국회에는 감옥에서 복역했던 전과자들과 청부 범죄자 등 온갖 종류의 중죄로 수배받고 있는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있소. 하지만 그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법의 제재를 받고 있지 않소. 그게 냉엄한 현실이오." 하디 대사는 몹시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믿을 수가 없군요." 다난가 두 눈을 커다랗게 뜨면서 말했다. "그렇소. 러시아 국민들은 훌륭하오. 그러나 그들의 정부는.... 글쎄...." "가슴 아픈 일이군요." "그렇소. 참, 무슨 일로 오셨다고 했죠, 에반스 양?" "테일러 윈스롭 씨에 대해 대사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사실 저는 윈스롭 가문에 대한 기사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하디 대사는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정말 끔찍한 비극이었소." "네." '똑같은 반응들이야.' 하디 대사는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다나를 쳐다보았다. "그 이야기라면 세상 사람들이 질리도록 알고 있지 않소?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 같은데...." 다나는 신중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저는 보다 개인적인 시각에서 테일러 윈스롭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테일러 윈스롭의 진짜 모습이 어떠했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여기에서 사귄 그의 친구들은 누구인지 말이죠. 혹시라도 그에게 적이 있었다면...." "적이라고 했소?" 하디 대사는 깜짝 놀라면서 눈을 크게 떴다. "네. 혹시 테일러 윈스롭에게 적이 있었나요?" 다나는 예리하게 질문을 던졌다. "아니오. 모든 사람들이 테일러를 좋아했소. 아마도 테일러는 러시아를 거쳐가 역대 대사들 중에서 최고의 대사일 거요. 러시아 공격자들까지도 테일러 윈스롭에게 호의적이었소." 하디 대사가 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테일러 윈스롭과 함께 일을 한 적이 있었나요?" 다나는 하디 대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렇소. 한 1년 동안 테일러 윈스롭 밑에서 부차관보로 근무한 적이 있었소." "하디 대사님, 테일러 윈스롭이 러시아에서 관계했던 일에 대해서 혹시 알고 계시는 게 있는지...." 다나는 어떤 표현을 써야 할지 생각하면서 잠시 동안 말을 끊었다. "러시아에서 관계했던 일이라니?" 하디 대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이를테면 '모든 조직들이 자리를 잡았다.'는 그런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계시나요?" 하디 대사가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니까 당신의 말은 이곳에서 사업적인 거래나 정치적인 거래가 있었다는 말이오?" "정확한 의미는 저도 알지 못해요." 다나는 솔직하게 실토했다. "나도 역시 모르는 일이오. 그리고 나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소." 하디 대사는 잠시 동안 머리를 숙였다가 들었다. "지금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사람들 중에서 혹시 윈스롭 대사와 함께 근무했던 사람이 있을까요?" 다나는 하디 대사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오, 물론이오. 조금 전에 당신이 만났던 리 홉킨스도 테일러 대사의 비서였소." "제가 그 여자분과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까요?" "그건 아무런 상관이 없소. 내가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의 이름을 알려주겠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고맙습니다." 다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여기 있는 동안은 항상 조심해야만 하오, 에반스 양. 모스크바 거리는 온통 범죄가 들끓고 있으니까 말이오." 하디 대사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렇다고 하더군요." "수돗물은 절대로 마시지 마시오. 심지어 러시아 사람들도 마시지 않소. 아, 그리고 외식을 할 때에는 메뉴를 꼼꼼히 살피시오. 그렇지 않으면 시키지도 않은 값비싼 음식들이 식탁에 나오는 경우도 있으니까 말이오." "알겠습니다." "만약 쇼핑할 생각이 있으면 아르바트가 가장 좋은 곳이오. 그곳의 상점에는 없는 물건이 없소. 그리고 택시 탈 때에는 항상 조심하시오. 낡고 오래된 택시를 타도록 해요. 새로운 택시는 대부분 사기꾼들이 운전하는 차요." 하디 대사가 다나를 쳐다보면서 충고했다. "고맙습니다. 명심하죠." 잠시 뒤, 다나는 대사의 비서인 리 홉킨스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작은 방에서 단둘이 앉아 있었다. "테일러 윈스롭 대사와는 얼마나 오랫동안 함께 일하셨죠?" 다나가 리 홉킨스를 응시하면서 질문을 던졌다. "8개월이에요. 알고 싶은 게 뭔가요, 에반스 양?" "윈스롭 대사가 러시아에 있을 때, 혹시 적을 만들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리 홉킨스는 깜짝 놀라면서 다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적이라구요?" "그래요. 이런 자리에 있다 보면, 때때로 사람들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일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청탁한 사람이 싫어할 줄 알면서도 부탁을 거절해야 한다거나.... 그러니까 윈스롭 대사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는 않았을 거라는 말이죠." 리 홉킨스는 머리를 흔들었다. "당신이 뭘 찾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에반스 양.... 테일러 윈스롭 씨에 대해서 좋지 않은 기사를 쓸 생각이라면, 이곳에서 당신을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예요. 차라리 그냥 돌아가도록 해요. 테일러 윈스롭 씨는 제가 만나보았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친절하고 사려깊은 분이셨어요." '다시 똑같은 장면이 반복되고 있어.' 다나는 실망감을 느꼈다. 그 다음 2시간 동안, 다나는 테일러 윈스롭이 대사로 재직했을 때 함께 근무했던 다섯 명의 사람을 만났다. "테일러 윈스롭 씨는 지혜로운 분이었어요.... 정말로 사람들을 좋아하셨죠.... 언제나 직원들을 배려했어요.... 적이라구요? 아니, 천만에요...." '시간 낭비야.' 다나는 씁쓸한 마음으로 결론을 내렸다. 잠시 후에 다나는 하디 대사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소?" 하디 대사가 딱딱한 목소리로 물어다. 더 이상 친절하게 다나를 대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하디 대사는 다나를 경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뇨, 전혀...." 하디 대사가 다나에게 몸을 기울였다. "난 당신의 의도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소, 에반스 양." "무슨 뜻이죠?" "처음에는 그저 당신이 테일러 윈스롭에 대해서 일상적인 취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소. 그런데 부정적인 증거들을 수집하는 것이라면 그만두도록 하시오. 당신은 대사관 직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소. 우리는 모두 윈스롭을 좋아했소. 그건 나도 역시 마찬가지요. 있지도 않은 추문을 찾아서 무덤을 파헤치지 마시오. 당신이 이곳에 온 목적이 그것이라면, 이제 그만 떠나시오." 하디 대사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러죠." 다나가 하디 대사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러나 다나는 아직까지 러시아를 떠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크레믈린 궁 맞은 편에 있는 VIP 내셔널 클럽은 회원 전용으로 운영되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그곳에서는 카지노도 운영하고 있었다. 팀 드류는 레스토랑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다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다나." "늦어서 미안해요." "괜찮아요. 이곳이 마음에 들 겁니다. 여기는 모스크바를 움직이는 최상류층들이 모이는 장소랍니다. 만약 이곳에 폭탄이 떨어진다면 러시아 정부는 하루 아침에 마비가 될 거예요." 식사는 생각 이상으로 훌륭했다. 그들은 캐비어가 곁들여진, 메밀가루로 만든 러시아식 팬 케이크부터 시작해서 빨간 순무가 들어간 수프, 호두 소스를 얹은 그루지아 철갑 상어 요리, 살짝 튀긴 쇠소기와 볶음밥을 차례차례 먹었다. 그리고 후식으로는 부드러운 치즈 파이가 나왔다. "음, 정말 맛있어요. 난 러시아 음식은 형편없다고 들었는데.... 전혀 소문과 다르군요." 다나가 감탄했다. "사실입니다. 이건 러시아 음식이 아닙니다. 이 작은 오아시스에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맛볼 수 있는 특별식이죠." 팀 드류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여기에서 삶이란 어떤 것이죠?" 다나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마치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화산 옆에 서서 뜨거운 용암이 분출하기를 기다리는 것과 비슷하죠. 언제 화산이 터질 것인지는 아무도 몰라요. 국가 권력을 장악한 사람드이 나라의 부를 독차지하고 있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헐벗은 채 굶주리고 있어요. 혁명이 시작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랍니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오직 신만이 알겠죠." "그렇군요." "하지만 공정하게 말하자면 그게 다는 아니에요. 러시아는 아주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어요. 러시아 문화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훌륭해요. 그들은 볼쇼이 극장, 대사원, 푸쉬킨 박물관, 러시아 발레단, 모스크바 서커스단 등 수많은 문화적 재산을 갖고 있어요. 러시아에서는 전 세계 국가들의 출간 부수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책들이 출한되고 있고, 러시아 국민들의 1년 평균 독서량은 미국 국민의 세 배나 되죠." 팀 드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무 쓸모도 없는 쓰레기들을 읽는지도 모르겠지만요." 다나가 냉담하게 말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죠. 아무튼 현재로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중간 단계에서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어요. 서비스는 나쁘고 화폐 가치는 형편없고, 범죄만 끔찍하게 늘어났어요." "저런!" "내가 실수한 것 같구요. 당시의 기분을 우울하게 만들려는 게 아니었는데...." 팀 드류가 다나를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아니에요. 그런데 팀, 테일러 윈스롭을 잘 아나요?" 다나는 손을 내저으면서 팀 드류를 안심시켰다. "인터뷰 때문에 몇 번 만난 적이 있었죠." "테일러 윈스롭이 어떤 큰 계획에 연루되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테일러 윈스롭은 러시아에 있는 동안 수많은 프로젝트에 관여했어요. 그건 아주 당연한 일이죠. 미국을 대표하는 대사였으니까...." "내가 묻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뭔가 다른 것에 대해서 들은 게 없나요?" 다나는 조바심을 내었다.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 건가요?" "매우 복잡한 어떤 것.... 예를 들자면 모든 조직들을 제자리에 세워야만 하는 그런 계획 말이에요." 팀 드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겠군요." "테일러 윈스롭은 모스크바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을 했겠죠?" "특별히 가깝게 지냈던 러시아 사람이 몇 명 있을 거예요. 그들과 이야기를 해봐요." 팀 드류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그게 좋겠어요." 다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에 종업원이 다가오더니 계산서를 내밀었다. 팀 드류는 계산서를 꼼꼼히 살핀 후에 다나에게 그것을 보여주었다. "여기 계산서는 다 이래요. 터무니없는 바가지 요금이죠. 하지만 따지지 않고 그냥 순순히 내는 게 좋아요." 팀 드류는 계산서에 적힌 금액을 지불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모스크바 거리를 따라 걸었다. "총을 갖고 다니나요?" 갑자기 팀 드류기 다나에게 물었다. "천만에요.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죠?" 다나는 몹시 당황해서 팀 드류를 쳐다보았다. "여기는 모스크바니까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거든요. 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어디 좀 함께 갈 데가 있어요." 팀 드류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5분 후에 그들은 총기 상점 앞에서 내렸다. 다나는 다양한 종류의 총기들이 놓여 잇는 진열대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위험해도 난 총을 갖고 다니진 않겠어요." 다나가 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잠깐 안으로 들어가죠." 팀 드류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총기 상점 안에는 상상할 수 없는 온갖 종류의 무기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다나는 두리번거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구나 와서 총을 구입할 수가 있나요?" "돈만 있으면...." 팀 드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그런데 진열대 뒤에 서 있던 상점 주인이 팀 드류에게 러시아어로 중얼거렸다. 팀 드류는 상점 주인에게 어떤 물건을 주문했다. "다." 상점 주인은 진열대 밑으로 손을 집어 넣더니 작은 원통형 물건을 꺼냈다. "이건 어디에 쓰는 거죠?" 다나가 궁금한 듯이 물었다. "당신에게 꼭 필요한 거죠. 후춧가루 분사기." 팀 드류는 그것을 집어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 단추를 누르기만 하면, 악당들은 감히 당신을 괴롭히지 못할 겁니다." "그렇지만 나는...." 다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말을 믿어요. 어서 집어넣어요." 팀 드류가 불쑥 후춧가루 분사기를 내밀면서 말했다. "고마워요." 다나가 웃으면서 말했다. 팀 드류는 지갑을 꺼내면서 값을 치렀다. 잠시 후에 그들은 총기 상점에서 나왔다. "모스크바의 나이트 클럽이 어떤지 한 번 가보겠어요?" 팀이 다나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좋아요." "자, 갑시다." 츠베르스카야 거리에 있는 플라이트 나이트 클럽은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갖추고 있었다. 다나와 팀 드류는 나이트 클럽으로 들어갔다. 잘 차려입은 러시아 남녀들이 먹고 마시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파국에 처한 경제 문제는 완전히 딴 세상 이야기 같군요." 다나가 소감을 말했다. "맞아요. 그런 것들은 저 밖의 거리에 있는 걸인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죠." 새벽 2시에 다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호텔로 돌아갔다. 참으로 긴 하루였다. 프론트에 잇는 여자가 투숙객들의 출입을 일일이 기록하고 있었다. 자기 방으로 들어온 다나는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달빛 속에서 하얗게 반짝이며 떨어지는 눈들이 마치 한 장의 그림 엽서처럼 아름다웠다. '내일이야.' 다나는 다짐하듯이 중얼거렸다. '내일이면 무엇이든지 윤관이 잡히겠지.' 남자는 제트기의 요란한 소음을 듣고 있었다.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서 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 제트기가 건물과 충돌이라도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남자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쌍안경을 들고 창가로 걸어갔다. 자가용 비행기 한 대가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작은 공항에 착륙하기 위해 서서히 고도를 낮추면서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활주로를 제외하고는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추운 겨울. 이곳은 시베리아였다. 그 남자가 부하에게 말했다. "자, 중국이 첫번째로 도착했군." 그는 부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리 친구 링 왕은 두 번 다시 오지 못할 거라고 하더군. 지난번에 회의가 열렸을 때, 빈손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고국에서 불행한 환영 인사를 받은 모양이야. 점잖은 사람이었는데...." 그 순간 두 번째 자가용 비행기가 그 남자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그 남자는 미처 비행기 표식을 알아보지 못했다. 비행기가 착륙한 후에야, 그는 고성능 망원경을 통해 활주로에 내리고 있는 남자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 중에서 몇 명은 노골적으로 권총을 꺼내들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녀석들이야. 아주 난폭하지." 또 다른 자가용 비행기가 활주로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아직도 올 사람이 열둘이나 남았군.' 그는 생각했다. '내일부터 협상이 시작되면,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던 최대의 경매가 벌어질 거야. 이번 경매를 망칠 순 없어. 만사가 다 순조롭게 끝나야 해.'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부하에게 지시했다. "메모를 하도록...." 모든 작전 요원들에게 보내는 기밀 문서 (읽은 후에 즉시 파기할 것) -목표물을 밀착 감시할 것. -목표물의 행동을 보고할 것. -목표물을 제거할 수 있도록 항상 대기할 것. 20 샤샤 쉬다노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다나는 팀 드류에게 전화를 걸었다. "팀?" "잠은 잘 잤어요, 다나?" "네, 어제는 아주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하디 대사에게 다른 이야기를 좀 들었나요?" 팀 드류가 물었다. "아뇨. 아무래도 내가 하디 대사의 기분을 언짢게 만든 것 같아요. 팀, 나와 만나서 이야기를 좀해요." "좋아요. 택시를 타고 트리플리니 프로이즈 가 1-4번지에 이는 보이르스키 클럽으로 와요." 팀 드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어디라구요?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가...." 다나가 되물었다. "보이르스키 클럽으로 오세요. 택시 기사가 알 거예요. 무조건 낡은 택시를 타도록 해요." 팀 드류가 충고했다. "알았어요." 다나는 차가운 바람이 부는 호텔 밖으로 걸어갔다. 너무나 추워서 당장이라도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새로 구입한 붉은색 털 코트를 입은 것이 무척 다행스러웠다. 영하 29도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맙소사! 영하 29도라니...." 숨을 쉴 때마다 다나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호텔 현관 앞에 반짝거리는 택시 한 대가 서 있었다. 다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서 다른 승객이 택시를 탈 때까지 기다렸다. 그 다음에 도착한 태기는 훨씬 낡아보였다. 다나는 서둘러 그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 운전사가 백미러를 통해 다나를 쳐다보았다. 다나는 천천히 목적지를 말했다. "티리... 트릴리 1-4번지...." 다나는 심호흡을 했다. "프로이지...." 택시 운전사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보이르스키 클럽으로 가실 겁니까?" "다." 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잠시 후에 택시가 출발했다. 그들은 얼어붙은 거리를 따라서 많은 자동차들이 오고 가는 도로를 달렸다. 택시의 차창 밖으로 사람들이 종종걸음을 치면서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도시 전체가 흐릿한 회색 베일에 덮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단지 날씨 탓만은 아니야.' 다나는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보이르스키 클럽은 현대적이고 안락하게 꾸며져 있었다. 팀 드류는 창가 의자에 안장서 다나를 기다릭 있었다. 가죽 위자와 소파들은 아주 푹신했다. "당신이 제대로 찾아올 줄 알았어요." 팀 드류가 씩 웃었다. "운전사가 영어를 할 줄 알던걸요." 다나는 맞은 편의 의자에 앉으면서 대답했다. "운이 좋았군요. 어떤 운전사는 심지어 러시아 말조차 할 줄 모르죠." "세상에!" 다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택시 운전사들 중에는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에서 취직을 하기 위해 모스크바까지 찾아온 사람들도 있어요. 어쨋거나 이 나라가 제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뿐이에요. 이 나를 보면 서서히 죽어가는 공룡을 연상하게 돼요. 당신은 러시아가 얼마나 큰 나라인지 알고 있나요?" 팀 드류가 다나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정확하게는 몰라요." 다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면적은 미국의 두 배나 되죠. 모두 13개의 표준 시각을 사용하고 14개의 나라들과 국경을 서로 맞대고 있어요." "놀랍군요." 다나는 건성으로 대답한 후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팀, 나는 테일러 윈스롭과 관계가 있었던 러시아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요." "그렇다면 러시아 정부 내의 모든 사람들을 만나야 할 거예요." 팀 드류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요. 하지만 테일러 윈스롭이 특별히 더 가깝게 지낸 사람드이 있었을 거예요. 나를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다나는 고개를 들고 팀 드류를 가만히 응시했다. "내가 알기로는 테일러 윈스롭과 관계가 있었던 사람들 중에서, 아마도 샤샤 쉬다노프가 가장 가까웠을 거예요." 팀 드류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샤샤 쉬다노프가 누구죠?" "국가 경제 개발부 장관이에요. 샤샤 쉬다노프와 테일러 윈스롭은 공적으로 도움을 주고 받았으며, 사적으로도 아주 친하게 지냈다고 들었어요." 팀 드류는 다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래요?"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건가요, 다나?" "나도 모르겠어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나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국가 경제 개발부는 오제르나야 거리에 있는 거대한 붉은 색 벽돌 건물에 위치하고 있었다. 다나는 국가 경제 개발부에 도착했다. 현관에는 두 명의 러시아 경찰들이 서 있었다. 제복을 입은 경비원이 책상에 앉아 있었다. 다나는 책상을 향해 걸어갔다. 경비원이 고개를 들었다. "도브리 다이엔(안녕하세요)?" 다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인사를 던졌다. 경비원이 러시아어로 뭐라고 말하기 시작하자, 다나는 황급히 손을 흔들면서 제지했다. "실례합니다. 나는 샤샤 쉬다노프 장관님을 만나러 왔어요. 내 이름은 다나 에반스라고 해요. 워싱턴 트리뷴 네트워크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경비원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서류를 뒤적거리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사전에 장관님과 면담 약속을 하셨습니까?" "아뇨. 하지만...." "그렇다면 약속을 하셔야만 합니다. 미국 사람입니까?" "네." 경비원은 용지 한 장을 꺼내더니 다나에게 내밀었다. "기록을 해주십시오." 다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오늘 오후에 장관님을 만날 수 있나요?" 경비원이 눈을 깜빡거렸다. "미국인들은 언제나 서두르는군요. 지금 어느 호텔에서 묵고 있습니까?" "세바스토폴 호텔이에요. 그냥 몇 분만 시간을...." 다나는 초조한 듯이 말했다. "나중에 연락이 갈 겁니다. 도브리 다이엔." 경비원이 종이 위에 호텔 이름을 적었다. "하지만...." 다나는 경비원이 얼굴이 단단하게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알았어요. 기다리죠. 도브리 다이엔." 다나는 오후 내내 전화벨이 울리기를 기다리면 호텔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오후 6시에 다나는 팀 드류에게 전화를 걸었다. "쉬다노프는 만났어요?" 팀 드류가 물었다. "아뇨.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하더군요." 다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애태우지 말아요, 다나. 당신은 다른 별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거니까...." 다음 날 아침 일찍 다나는 다시 국제 경제 개발부를 찾아갔다. 어제의 그 경비원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도브리 다이엔." 다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도브리 다이엔." 경비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쉬다노프 장관님에게 저의 메시지를 전했나요?"." "이름이?" "다나 에반스예요." "어제 메시지를 남겼다구요?" 경비원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요. 당신에게...." 다나는 경비원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받으셨을 겁니다. 접수한 메시지는 모두 장관님에게 전달되니까요." 경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쉬다노프 장관님의 비서는 만나도 되나요?" 다나는 몹시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약속을 하셨습니까?" 경비원은 고개를 들고 다나를 쳐다보았다. "아뇨." 다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불가능합니다." 경비원이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대답했다. "언제 장관님을 만날 수 있...." "연락이 갈 겁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다나는 테츠키 마이르 어린이 백화점에 들어가서 구경을 했다. 매장 한쪽에 게임용품들을 잔뜩 모아 놓은 것이 보였다. 컴퓨터 게임용품만 따로 진열해 놓은 선반도 있었다. '케말이 좋아하겠지.' 다나는 선반에 놓여 있던 게임용품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정도로 가격이 비쌌다. 하지만 다나는 그 게임용품을 구입했다. 케말이 무척 기뻐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호텔로 돌아온 다나는 다시 전화벨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오후 6시가 되자, 다나는 모든 희망을 버렸다. 더 이상 전화를 기다리는 걸 포기하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방에서 막 나가려고 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다나는 서둘러 방을 가로질러 달려가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다나?" 팀 드류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말해요, 팀." "아직까지도 좋은 소식이 없어요?" "네. 유감스러운 일이죠...." 다나는 답답한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저런! 당신이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어요. 그건 바로 오늘 밤의 발레 공연이죠. 러시아 발레단에서 지젤을 공연할 거예요. 관심 있어요?" "당연하죠." "1시간 안으로 당신을 데리러 가겠어요?" "고마워요." 발레 공연은 크레믈린 궁 안에 있는 6천 석 규모의 의회장에서 열렸다. 마법에 걸린 듯 매혹적인 밤이었다. 음악은 아주 완벽했으며, 춤도 환상적이었다. 제 1막이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이윽고 막간의 휴식 시간을 알리는 불이 켜지자, 팀 드류가 재빨리 일어섰다. "나를 따라와요, 다나. 빨리...." 이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에요." 다나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조금만 있으면 당신도 알게 될 거예요." 다나는 팀 드류의 안내를 받으면서 이층으로 올라갔다. 다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다나는 여섯 개의 테이블 위에 캐비어가 담긴 그릇과 얼음에 채운 보드카 병들이 차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보다 먼저 도착한 문화 애호가들은 분주하게 음식을 먹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나라에요. 이 나라 사람들이야말로 공연을 즐기는 방법을 제대로 알고 있군요." 다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팀을 향해 돌아섰다. "이건 상류층이나 누리는 생활이에요, 국민의 30퍼센트가 극빈 생활을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요." 팀이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말했다. 다나와 팀 드류는 사람들을 피해서 창문 쪽으로 움직였다. 잠시 후에 조명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제2 막이 시작될 시간이에요. 자, 내려갑시다." 팀 드류가 말했다. "그래요." 제 2막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러나 다나는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온갖 생각들 때문에 마음 놓고 공연을 감상할 수가 없었다. "테일러 윈스롭은 비열한 놈이오. 그는 영리했소. 너무나 영리했어. 그는 나에게 누명을 씌웠소." "그렇소. 불행한 일이었찌. 가브리엘은 아주 훌륭한 아이였소." "테일러 윈스롭은 내 딸만을 죽인 게 아니오. 그는 내 손자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 그리고 그 뒤에 태어날 손자들까지 죽인 거요. 그 놈은 만치노 가의 미래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말았소." 발레 공연이 끝나자, 다나와 팀 드류는 다시 자동차에 올라탔다. 팀 드류가 다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오늘 밤 내 아파트에서 지내지 않겠어요?" 다나늘 고개를 돌려서 새삼스레 팀 드류를 바라보았다. 팀 드류는 분명히 매력적이고 지적이고 따뜻한 남자였다. 그러나 그는 제프가 아니었다. 다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고마워요, 팀. 하지만 안 돼요." 팀 드류는 무척 실망스러운 표정이었다.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내일은 어때요?" "미안해요.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움직여야만 해요." '그리고 나에겐 이미 미치도록 사랑하는 다른 사람이 있는 걸요.' 다음날 아침 일찍 다나는 다시 국가 경제 개발부를 찾아갔다. 여전히 그 경비원이 책상에 앉아 있었다. "도브리 다이엔." "도브리 다이엔." "내 이름은 다나 에반스에요. 장관님을 만날 수 없다면, 보좌관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요?" 다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약속을 하셨습니까?" 경비원이 사무적인 어투로 물었다. "아뇨. 하지만...." 경비원은 다나에게 용지 한 장을 내밀었다. "먼저 기록을 하고...." 다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다나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다나...." "제프?" 그들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마치 유령의 그림자처럼 레이첼이 서 있었다. 그들은 마음속에 담긴 말을 자유롭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레이첼은 죽음을 목적에 두고 있는 병자였다. 그들의 대화는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다음날 아침 8시에 다나는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샤샤 쉬다노프 장관의 사물실로부터 걸려온 것이었다. 굵은 목소리의 남자가 말했다. "다나 에반스 양입니까?" "네." 다나는 그 남자의 말을 기다렸다. "나는 쉬다노프 장관님의 보좌관인 에릭 카르바바입니다. 장관님과 만나기를 원하십니까?" "그래요!" 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그것은 다나가 너무나 간절히 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나는 마음속으로 '약속을 하셨습니까'라는 말이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남자는 그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 "정확히 1시간 후에 경제 개발부로 오십시오." '마침내 쉬다노프 장관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일까?' "알았습니다. 정말 고마운...." 그러나 전화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한 시간 뒤, 다나는 또 다시 거대한 붉은 색 별돌 건물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다나는 낯익은 경비원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경비원이 고개를 들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도브리 다이엔?" 다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도브리 다이엔." 다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도브리 다이엔." "무슨 일입니까?" "내 이름은 다나 에반스입니다. 쉬다노프의 장관님을 만나러 왓는데요." 다나는 경비원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미안합니다. 사전에 약속이 없으면...." 경비원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약속이 되어 있어요." 다나는 짜증이 솟구치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네?" 경비원은 의심스럽다는 듯이 다나를 쳐다보았다. "분명히 약속을 했단 말이에요." 다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경비원은 수화기를 들더니 잠깐 통화를 했다. 그런 다음에 다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3층입니다." 경비원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러헤 덧붙였다.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샤샤 쉬다노프 장관의 사무실은 아주 크고 낡았다. 마치 1920년대 초반에 꾸며진 방처럼 보였다. 두 명의 남자가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다나가 사무실로 들어가자, 두 명이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이가 좀더 많은 사람이 다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내가 쉬다노프 장관이오." 샤샤 쉬다노프는 오십 대 정도의 나이로 보였다. 샤샤 쉬다노프는 키가 작고 체격이 아주 단단한 인상을 주었다. 회색 머리카락과 창백하고 둥근 얼굴, 마치 무엇인가 탐색이라도 하듯이 끊임없이 방안을 둘러보는 날카로운 갈색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다나 에반스입니다." 다나는 샤샤 쉬다노프 장관에게 정중히 인새했다. 샤샤 쉬다노프 장관은 러시아식 억양이 심하게 느껴지는 영어로 말했다. "여기는 내 동생 보리스 쉬다노프요." 샤샤 쉬다노프가 다른 남자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에반스 양?" 보리스 쉬다노프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다나는 인사를 하기 위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보리스 쉬다노프는 형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 그는 형보다 10년은 더 젊게 보였다. 보리스 쉬다노프는 매부리코와 단단한 턱을 지니고 있는 남자였는데, 밝은 청색이 감도는 아르마니 양복에 회색 헤르메스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보리스 쉬다노프의 영어에는 전혀 러시아식 억양이 느껴지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보리스 쉬다노프는 무척 세련된 듯한 인상을 주었다. "보리스는 미국에서 잠깐 나온 거요. 보리스는 미국 워싱턴 D.C. 주재 러시아 대사관에서 근무하고 있소." 샤샤 쉬다노프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당신의 방송을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에반스 양." 보리스 쉬다노프가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다나는 싱긋 미소지었다. "자, 그렇다면 뭘 도와들릴까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샤샤 쉬다노프가 다나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아니, 문제라고 할 건 전혀 없습니다. 저는 단지 테일러 윈스롭에 대해서 장관님께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온 거예요." 다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용건을 밝혔다. "테일러 윈스롭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이 있단 말이오?" 샤샤 쉬다노프는 다나를 쳐다보았다. "저는 장관님께서 테일러 윈스롭과 함께 일했고, 사적으로도 종종 만난 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나는 샤샤 쉬다노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래서?" 샤샤 쉬다노프가 신중하게 반문했다. "그 일에 대한 장관님의 개인적인 견해를 듣고 싶어요." "무슨 말을 하라는 거요? 테일러 윈스롭은 조국을 위해 헌신했던 아주 훌륭한 대사였소." 샤샤 쉬다노프의 언성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다. "테일러 윈스롭은 러시아에서 무척 인기가 높았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아, 그렇죠. 모스크바에 있는 대사관들은 자주 파티를 연답니다. 테일러 윈스롭은 항상...." 보리스 쉬다노프가 러시아어로 동생을 야단쳤다. 보리스 쉬다노프는 약간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숙였다. "테일러 윈스롭 대사는 때때로 우리가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했소. 테일러 윈스롭은 사람들을 좋아했소. 물론 러시아 사람들도 그를 좋아했소." 샤샤 쉬다노프가 다시 다나에게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테일러 윈스롭은 나에게 이런 말도 했어요. 만약 할 수만 있다면...." 보리스 쉬다노프가 다시 참견했다. "몰차트!" 샤샤 쉬다노프가 동생의 말을 가로막았다. 보리스 쉬다노프는 금방 입을 다물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다나 에반스양. 테일러 윈스롭은 매우 훌륭한 대사였소." 샤샤 쉬다노프가 다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다나는 고개를 돌려서 보리스 쉬다노프를 쳐다보았다. 그는 분명히 다나에게 뭔가 말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테일러 윈스롭 대사가 여기에 있는 동안 무슨 말썽에 휘말린 적은 없나요?" 다나는 다시 샤샤 쉬다노프를 쳐다보았다. "말썽이라니? 그런 일은 전혀 없었소." 샤샤 쉬다노프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대답했다. "그래요?" 다나는 재빨리 반문했다. 샤샤 쉬다노프는 슬며시 다른 곳으로 얼굴을 도리면서 다나의 시선을 피했다. 다나는 생각했다. '거짓말을 하는 거야!' 다나는 다시 한 번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렇다면 장관님, 왜 누군가가 테일러 윈스롭과 그의 가족을 살해했는지 그 이유가 짐작이 가십니까?" 단번에 샤샤 쉬다노프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좋아! 효과가 있었어!' "그게 무슨 말이오? 살해를 당했단 말이오? 테일러 윈스롭이? 아니, 난 모르겠소." 샤샤 쉬다노프는 완강하게 머리를 흔들면서 부정했다. "전혀 짐작이 가지 않나요?" 다나는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사실은...." 보리스 쉬다노프가 입을 열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전혀 없소. 테일러 윈스롭은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소." 샤샤 쉬다노프가 또다시 동생의 말을 잘랐다. 샤샤 쉬다노프가 은으로 만든 상자에서 담배를 꺼내자, 보리스가 형에게 불을 붙여주었다. "달리 더 알고 싶은 것이 있소?" 샤샤 쉬다노프가 다나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다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가면서 쳐다보았다. '이 사람들, 뭔가 숨기고 있어.' 다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무엇을? 이건 마치 탈출할 길이 없는 미로 속을 헤매는 것같아.' "아뇨." 다나는 보리스 쉬다노프에게 재빨리 시선을 던지면서 천천히 말했다. "만약 생각나는 게 있으시면, 연락을 좀 주세요. 저는 내일 아침까지 세바스토플 호텔에 있을 거예요." "미국으로 돌아가나요?" 보리스 쉬다노프가 궁금한 듯이 물었다. "네. 내일 오후 비행기로 떠날 예정이에요." "저어...." 보리스 쉬다노프가 다시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형을 흘끗 쳐다보더니, 그 순간 입을 굳게 다물고 말았다. "안녕히 계세요." 다나가 말했다. "잘 가시오." 샤샤 쉬다노프가 말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보리스 쉬다노프가 말했다. 호텔로 돌아온 다나는 매트 베이커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기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긴 했는데..... 매트,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밝힐 수가 없어요. 몇 달을 더 여기에서 지낸다고 하더라도 유용한 정보를 얻지는 못할 것 같아요. 내일 미국으로 돌아가겠어요." 여기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긴 했는데.... 매트, 도대체 그것인 무엇인지 밝힐 수가 없어요. 몇 달을 더 여기에서 지낸다고 하더라도 유용한 정보를 얻지는 못할 것 같아요. 내일 미국으로 돌아가겠어요. 테이프가 끝났다. 쉬에르메티보 국제 공항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로비에서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다나는 줄곧 감시당하고 있다는 불쾌한 느낌을 받았다. 다나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특별히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저기 어딘가에 있어.'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다나는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21 러시아의 비밀 달레이 부인과 케말은 덜레스 공항에서 다나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행기각 활주로에 착륙하자, 다나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다나는 자신이 케말을 생각보다 훨씬 더 그리워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케말을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안녕, 다나. 돌아와서 기뻐요. 그런데 러시아 곰은 가지고 왔어요?" 케말이 말했다. "물론이지. 그런데 어떻게 하니? 돌아오는 길에 그만 달아나고 말았어. 여긴 너무 춥다나?" 다나는 케말을 품에 안고 쓰다듬었다. "정말 보고 싶었어요." "나도 네가 무척 보고 싶었단다. 그런데 케말, 너에게 줄 다른 선물이 있단다." "어떤 선물이죠?" "네가 좋아할 만한 게임용품이야." 다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야, 신난다! 이제부터 집에 있을 거죠?" 케말은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씩 웃었다. "아마도 그럴 거야." "그것 참 좋은 소식이네요, 에반스 양. 우리는 당신이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기쁘답니다." 달레이 부인이 미소를 지었다. "저도 돌아와서 기뻐요." 다나가 말했다. 아파트로 향하는 자동차 안에서 다나가 말했다. "요즘은 네 새로운 팔이 어떠니, 케말? 그 팔이 점점 익숙해지고 있니?" "짱이에요." 케말이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기쁘구나. 학교 생활은 어때?" 다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케말을 쳐다보았다. "최악은 아니에요." "이제 싸우지는 않지?" "네." 케말이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구나, 케말." 다나는 케말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쳐다보았다. 케말은 어딘지 모르게 달라 보이고, 많이 차분해 보였다. 완전히 다른 아이로 변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케말은 이제 행복한 아이처럼 보였다. 아파트에 도착하자, 다나는 미안해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방송국에 가봐야 할 것 같구나. 하지만 저녁에 돌아올거야." "알겠어요. 빠리 돌아오셔야 해요." 케말이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우리 모두 함께 저녁을 먹어야지. 맥도날드에 가서 헴버를 먹자." '종종 제프와 함께 가곤 했잖니.' 그러나 다나는 뒷말을 꿀꺽 삼켰다. "좋아요." 케말은 몹시 행복했다. 거대한 WTN 건물로 들어서면서 다나는 그동안에 시간이 마치 100년은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다나는 서둘러 매트 베이커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는 도중에 대여섯 명의 동료들로부터 인사를 받았다. "돌아왔군요, 다나. 보고 싶었어요." "네, 마침내 돌아왔어요." 다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인사했다. "와, 이게 누구야? 여행은 즐거웠어요?" "좋았어요. 고마워요." "당신이 없으니까, 예전 같지 않더라구요." 마침내 다나는 매트 베이커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매트는 이미 다나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살이 빠졌군. 볼품이 없어졌는걸?" 매트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고마운 말이네요, 매트." 다나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대답했다. 매트는 졌다는 듯이 두 손을 들었다. "자, 앉으라구." 다나는 의자에 앉았다. "잘 지냈어요?" "물론이지. 그런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소?" "네. 별로...." "그건 그렇고, 당신이 없는 동안 우리 프로그램의 시철률이 계속 하락했소." 매트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까 어쩐지 우쭐해지는데요?" "당신이 왔으니까 엘리어트 사장도 기뻐할 거요. 당신 걱정을 많이 하더라구." 매트는 자신이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30분 가량 이야기를 나누었다. 올리비아가 호들갑스럽게 떠들었다. "돌아온 것을 환영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올리비아는 한숨을 쉬는 시늉을 하면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에반스 사무실입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올리비아가 고개를 돌려서 다나를 쳐다보았다. "허드슨 부인이 전화를 걸었어요. 용케 돌아오신 걸 알았군요. 어떻게 할까요?" "내 방으로 돌려주세요." "네." 다나는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가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파멜라." "다나. 마침내 돌아왔군요! 다행이에요. 우리는 정말 걱정했어요. 지금 러시아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곳이니까.... 그런 곳에서 어떻게 지냈어요?" 파멜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알아요. 러시아에 있는 친구가 나에게 후춧가루 분사기를 사주던 걸요." 다나는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빨리 당신을 만나고 싶어요, 다나. 로저와 나는 당신이 오늘 오후에 우리 집을 방문했으면 해요. 함께 차를 마시고 싶은데.... 시간이 되겠어요?" "네." "오후 3시가 어떨까요?" "좋아요." 다나는 오전 동안 저녁 뉴스를 준비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오후 3시가 되었다. 다나는 허드슨 부부의 저택에 도착했다. 세자르가 현관에서 다나를 맞이했다. "에반스 양! 정말 반갑습니다. 어서 오세요." 세자르의 얼굴에 커다란 미소가 번졌다. "고마워요, 세자르. 그동안 잘 지냈어요?" 다나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요." "허드슨 씨 부부는요?" "두 분은 지금 거실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코트를 받아 드릴까요?" 세자르가 친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고마워요." 다나는 코트를 벗어서 세자르에게 맡겼다. 세자르는 다나를 거실로 안내했다. 다나가 들어가자, 로저와 파멜라가 동시에 외쳤다. "다나!" 파멜라 허드슨이 다정하게 다나를 끌어안으면서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길을 잃은 방랑자가 돌아왔도다." 로저 허드슨이 말했다. "피곤한 것 같소." "일반적인 여론이 그렇더군요." "앉읍시다. 어서 앉아요." 로저가 말했다. 하녀가 차와 비스킷, 핫케이크, 크로와상이 담겨 있는 쟁반을 들고 왔다. 파멜라가 차를 따랐다. 그들은 모두 의자에 편안히 앉았다. 로저 허드슨이 궁금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에게 말해주시오." "유감스럽게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어요. 그저 암담하기만 했죠." 다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파멜라가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디에터 잔더라는 남자를 만났는데, 자신이 테일러 윈스롭 때문에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다고 말하더군요. 감옥에 있는 동안 그 사람으 가족이 화재로 죽었어요." "세상에!" "디에터 잔더는 가족의 죽음이 테일러 윈스롭 때문이라며 원망했죠." 다나가 차분히 설명했다. "그렇다면 그 남자에게 윈스롭 일가를 모두 죽일 만한 동기가 있는거잖아요." 파멜라가 다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맞아요. 하지만 그럴 만한 사람이 있어요." 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누구죠?" "프랑스에서 마르셀 팔콘이라는 사람을 만났어요." "마르셀 팔콘?" "네. 그의 외아들이 뺑소니 자동차에 치여 죽었죠. 테일러 윈스롭의 운전기사가 자수를 했는데, 지금 그 운전기사는 테일러 윈스롭이 자동차를 운전했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다나는 안토니오 퍼시코가 했던 이야기를 두 사람에게 들려주었다. "마르셀 팔콘은 브뤼셀에 있는 나토 위원이었소." 로저 허드슨이 천천히 말했다. "네. 그리고 운전기사는 마르셀 팔콘에게 그의 외아들을 죽인 사람이 테일러 윈스롭이라고 말했어요." "그것 참.... 일이 점점 더 재미있게 되어가는군." 로저 허드슨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한 가지 더 있어요. 혹시 빈센트 만치노라는 사람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나요?" 다나는 로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없소." 로저 허드슨이 고개를 저었다. "빈센트 만치노는 마피아 출신의 정치가예요. 그런데 테일러 윈스롭이 그의 딸을 유혹해서 임신시킨 후에 돌팔이 의사에게 보냈죠. 그녀는 그 위사에게 어설픈 낙태 수술을 받았어요. 지금 그 딸은 수녀원에 있고, 그녀의 어머니는 커다란 충격을 받아서 요양원에 있다고 하더군요." "세상에...." "그러니까 세 사람 모두 테일러 윈스롭에게 복수할 만큼 강한 동기가 있다는 거죠." "일이 더욱 복잡하게 되어가는군." "하지만 그걸 증명할 만한 방법이 없어요." 다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미국에서는 전혀 흠잡을 데 없는 성자로 알려진 테일러 윈스롭이 정말로 그 모든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단 말이오? 믿기 어려운 일이군요." 로저가 심각한 얼굴로 다나를 쳐다보았다.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로저. 내가 당사자들에게 직접 들었으니까요. 누구든지 그들 중에서 한 사람이 이 연속 살인 사건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어요. 그리고 놀랄 만큼 훌륭하게 이 모든 일들을 조종하고 잇는 거지요." "그럴 만한 가능성이 충분하군." "맞아요. 하지만 이 일의 실마리가 될 만한 단서가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들 세 사람은 제각기 너무나 다르고, 공통점이 전혀 없어요. 모든 일들이 너무나 세밀하고 치밀하게 진행되었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빈틈을 찾을 수가 없어요. 그 죽음에는 목격자가 한 사람도 없어요." 다나는 실망스러운 듯이 고개를 저었다. "무리한 설정인 줄은 알지만, 그 사람들 모두 함께 공모해서 테일러 윈스롭에게 복수한 것은 아닐까요?" 파멜라가 물었다. "그렇지 않을 거예요. 내가 만난 그들은 제각기 자기 나라에서 엄청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무슨 일을 하든지 독자적으로 행동하려고 할 거예요. 굳이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으니까요." 다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겠지." "하지만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범인이에요." '하지만 어떤 사람이?' 문득 다나는 손목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죄송하지만, 이만 실례를 해야겠네요. 케말과 함께 맥도날드에 가서 저녁을 먹기로 약속했거든요. 지금 서두르지 않으면 케말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거예요." "어머! 아이와의 약속은 지켜야죠. 와주어서 고마워요, 다나." 파멜라가 손을 흔들었다. "차 잘 마셨습니다. 두 분의 격려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려요." 다나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월요일 아침에 케말을 태우고 학교로 향하는 자동차 안에서 다나가 말했다. "오, 케말! 이런 일상적인 일드이 정말 그리웠단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어." "나도 기뻐요." 케말이 하품을 했다. 문득 다나는 케말이 아침부터 계속 하품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젯밤에는 푹 잤니?" 다나가 걱정스러워하며 물었다. "아아, 그런 것 같아요. 한 번도 깨지 않았으니까요." 케말은 다시 하품을 했다. "학교에선 뭘 하니?" 다나가 물었다. "끔찍한 역시 시간과 지루한 영어 시간을 제외하고 말이죠?" "그래." "축구를 해요." 케말이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너무 무리하면 안 돼. 알지, 케말?" "네." 다나는 옆자리에 앉아 있는 소년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케말은 힘이 몽땅 빠져버린 것처럼 보였다. 요즘 들어서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고 얌전했다. 다나는 케말을 의사에서 데리고 가야 하는 게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케말의 기운을 북돋울 수 있는 비타민 알약을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다나는 손목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저녁 방송을 위한 제작 회의가 30분 후에 있을 예정이었다. 아침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다나는 마침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온 듯한 편안함을 느꼈다. 전에는 단조롭게 느껴지던 일상이 새롭고 즐겁기만 했다.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온 다나는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잇는 편지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다나는 서둘러 편지 봉투를 열었다. 편지에는 이런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에반스 양. 당신이 원하는 정보를 갖고 있소. 모스크바에 있는 소이우즈 호텔에 당신 이름으로 예약을 해두었소. 지금 당장 오시오. 어느 누구에게도 이 일에 대해서 말하지 마시오. 다나는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해 봉투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보낸 사람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수신인의 이름만 젹혀 있을 뿐이었다. 다나는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편지를 거듭 읽었다. "당신이 원하는 정보를 갖고 있소." 이 편지는 분명히 속임수였다. 만약 러시아에 다나가 찾는 대답을 해줄 사람이 있었다면, 어째서 그녀가 러시아에 있을 때에는 잠자코 있었을까? 다나는 샤샤 쉬다노프 장관과 그의 동생 보리스 쉬다노프를 만났을 떼의 일을 떠올렸다. 보리스는 다나에게 어떤 말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샤샤는 계속해서 동생의 행동을 저지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다나는 의자에 앉아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이 편지가 내 책상 위에 놓여지게 된 걸까? 도대체 누가?' 우편을 통해서 전달된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우표도 소인도 찍혀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나는 몹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감시당하는 걸까? 더 이상 신경쓰지 않는 게 좋겠어.' 다나는 그렇게 마음을 정했다. '집에 돌아가면 이걸 찢어버려야지.' 다나는 그날 저녁 시간을 케말과 함께 보냈다. 다나는 케말이 틀림없이 자기가 사준 컴퓨터 게임에 열중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케말은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저녁 9시가 되자, 끄덕끄덕 졸기 시작했다. "졸려요,다나. 자러가겠어요." "그래라. 잘 자." 다나는 케말이 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보는 사이에 너무나 많이 변했어. 케말은 완전히 다른 아이가 된 것 같아. 앞으로는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내도록 해야지. 만약 케말에게 문제가 있는 거라면. 그게 무엇인지 찾아내야만 해.' 스튜디오로 떠날 시간이 되었다. 아파트 옆집에 세든 남자가 텔레비전전 화면을 지켜보면서 녹음기에 대고 말했다. "목표물이 방송을 하기 위해서 방송국으로 떠났다. 아이는 잠이 들었다. 가정부는 바느질을 하고 있다." 카메라에 붉은 불빛이 들어오고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안녕하세요. 다나 에반스와 리차드 멜턴이 진행하는 WTN 11시 뉴스입니다." 다나는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미소지었다. "안녕하세요, 다나 에반스입니다." 카메라가 다나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리차드 멜턴을 잡았다. "리차드 멜턴입니다." 다나는 침착하게 뉴스를 읽었다. "오늘 밤 뉴스는 말레이시아에서 발생한 끔찍한 비극으로 문을 열겠습니다...." '그래. 바로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야. 더 이상 아무런 가치도 없는 정보 때문에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방송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다나가 다시 아파트로 돌아갔을 때, 케말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달레이 부인에게 저녁 인사를 한 다음 다나는 침실로 들어갔지만, 좀 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당신이 원하는 정보를 갖고 있소. 모스크바에 잇는 소이우즈 호텔에 당신 이름으로 예약을 해두었소. 지금 당장 오시오. 어느 누구에게도 이 일에 대해서 말하지 마시오." 다나는 생각했다. '이것은 분명히 함정이야. 그걸 빤히 알면서도 모스크바로 돌아가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하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어떻게 하지? 누가 이 모든 음모를 꾸민 걸까? 무슨 이유로?' 편지는 보리스 쉬다노프가 보냈을 가능성이 컸다. '만약 그가 정말로 무언가 알고 있다면?' 무수히 떠오르는 생각들로 다나는 밤을 세웠다. 아침이 되자, 다나는 로저 허드슨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 편지에 대해서 말했다. "맙소사!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로저 허든슨의 목소리는 몹시 흥분한 것처럼 들렸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마침내 누군가 윈스롭 가문에 일어난 불행한 사고에 대해서 진실을 말할 각오를 한 것일 수도 있소."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다나, 몹시 위험할 수도 있소. 나는 러시아로 가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소." "제가 러시아로 가지 않는다면, 영원히 이 일에 대한 진실을 밝힐 수 없을 거예요." 로저 허드슨은 잠시 동안 주저하다가 말했다. "나도 당신 생각이 옳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용기 있는 사람이오. 하지만...." "조심하겠어요. 이제 와서 안 갈 수는 없어요." 다나의 태도는 아주 완강했다. "알았소. 계속 연락하도록 하시오." 로저 허드슨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약속하겠어요, 로저." 다나는 여행사를 통해 모스크바 왕복 항공권을 구입했다. 화요일이었다. '일정이 오래 걸리지 말아야 할 텐데....' 다나는 모스크바 체류 기간이 길어지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리고 매트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글을 남겼다. 아파트로 돌아온 후에 다나는 달레이 부인에게 말했다. "어떻게 하죠? 내가 다시 집을 비우게 되었어요. 러시아로 출장을 가야 하기 때문에.... 이틀이면 될 거예요. 케말을 부탁드려요." "그런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말아요, 에반스 양. 우리는 잘 지낼 거랍니다." 어떻게 하죠? 내가 다시 집을 비우게 되었어요. 러시아로 출장을 가야 하기 때문에.... 이틀이면 될 거예요. 케말을 부탁 드려요. "그런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말아요, 에반스 양. 우리는 잘 지낼거랍니다." 어떻게 하죠? 내가 다시 집을 비우게 되었어요. 러시아로 출장을 가야 하기 때문에.... 이틀이면 될 거예요. 케말을 부탁드려요. 그런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말아요, 에반스 양. 우리는 잘 지낼거랍니다. 테이프가 끝났다. 이웃 남자가 텔레비전전전 앞을 떠나서 급히 어딘갈 전화를 걸었다. 그는 다나가 러시아로 떠날 예정이라는 사실을 보고했다. 모스크바 행 에어 로플로트 비행기에 탑승하면서 다나는 생각했었다. 낮익은 광경이군. 어쩌면 내가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인지도 모르지. 이런 함정일 수도 있어. 하지만 만약 모스크바에 문제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사람이 진짜로 있다면, 나는 반드시 수수께끼를 밝혀 내고 말 거야.' 다나는 장거리 여행에 대비해서 의자 뒤로 편안히 몸을 기대었다. 다음 날 아침, 비행기는 낯익은 쉬에르메티보 국제 공항에 착륙했다. 다나는 짐들을 찾고 나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거리를 향해 걸어갔다. 여행자들이 길게 줄을 서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나도 매서운 바람을 맞으면서 줄을 섰다. 지난번에 러시아에서 구입한 따뜻한 털 코트를 입고 온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45분이 지나자, 마침내 다나의 차례가 돌아왔다. 그런데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다나를 밀치면서 앞으로 나가려고 했다. "안 돼요." 다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남자가 무서운 눈길로 다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탈 택시예요." 그 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뒤로 물러났다. 다나는 재빨리 택시에 올라탔다. "다?" 택시 운전사가 물었다. "소이우즈 호텔로 가주세요." 그런데 택시 운전사가 몸을 돌리더니 다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죠?" "정말로 그곳에 갈 생각인가요?" 택시 운전사가 더듬거리는 영어로 물었다. "왜 그러죠? 무슨 문제가 있나요?" 다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그곳은 별로 좋지 못한 호텔이에요. 외국인들에게는 특히 위험하죠." 다나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정말 그곳에 갈 생각이야? 그래! 이제 돌아가긴엔 너무 늦었어.' 운전사가 다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나는 자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대답했다. "그래요. 그곳으로 가주세요." 운전사는 어깨를 으쓱거린 후에 기어를 올리고 눈 속에 갇혀 있는 차량들 속으로 들어갔다. 다나는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들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나의 마음속에서 경계의 빨간불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만약 그 호텔에 예약이 되어 있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이 모든 일들이 어리석은 바보짓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야?' 소이우즈 호텔은 모스크바 외곽에 있는 레보베레쯔나야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곳은 주로 생활이 어려운 노동자 계층이 모여 사는 구역이었다. 갈색 페인트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건물은 낡고 구질구질하게 보였다. "제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운전사가 물었다. 아주 잠깐 동안이지만, 다나는 망설였다. 그러나 곧 단호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다나는 서둘러 운전사에게 요금을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다나는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에 떠밀리듯이 작고 초라해 보이는 호텔 로비로 들어갔다. 나이 많은 여자가 책상에 앉아서 잡지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다나가 들어서는 소리가 들리자, 그 여자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손님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다나는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다?" "예약이 되어 있을 거예요. 다나 에반스...." 다나는 그 여자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숨을 죽였다. "다나 에반스.... 그래요. 하루 동안 예약이 되어 있군요." 잠시 후에 그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뻗어서 열쇠 하나를 꺼냈다. "402호. 4층이에요." 그 여자는 다나에게 열쇠를 건네주었다. "숙박부는 어디에 있죠?" 다나는 의아스러운 듯이 물었다. "숙박부는 없어요. 지금 방값을 내세요." 그 여자가 고개를 흔들면서 대답했다. 다나는 또다시 경고등이 깜박거리는 것을 느꼈다. '외국인이 숙박부를 기재하지 않아도 되는 호텔이 러시아에 있단 말인가?' 무엇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5백 루블이에요." 그 여자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처 환전을 하지 못했어요. 나중에 지불하겠어요." "그럴 수는 없어요. 지금 당장 주세요." "그렇다면 카드는 어떨까요?" 다나는 몹시 당황해서 물었다. "안 돼요. 카드는 안 받아요. 지금 주세요. 달러도 받아요." 그 여자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알았어요." 다나는 핸드백 속에 손을 넣어서 지폐 다발을 꺼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을 내밀더니 지폐의 절반을 가져갔다. '그 돈이라면 이 허름한 호텔을 살 수도 있겠군.' 다나는 씁쓸한 심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엘리베이터는 어디에 있죠?" "그런 건 없어요." 여자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 그래요...." 다나는 무거운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잠을 누가 들어야 하는지는 물으나마나였다. 다나는 가방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호텔 방은 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비참했다. 작고 초라한 방에 커튼은 찢어져 있었으며 침대는 흐트러진 채, 정리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보리스는 어떻게 연락하겠다는 거야?' 다나는 착찹한 마음으로 방을 다시 둘러보았다. '이건 단지 짓궂은 장난일 수도 있어. 하지만 누가 이렇게 번거로운 수고를 한단 말이야?' 다나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서 먼지가 뿌연 창문으로 밖의 거리를 내려보았다. '나는 정말 지독한 바보야. 며칠 동안 여기에서 이렇게 앉아 있어야 할지도 몰라. 그리고 아무런 일도 없으면....' 그런데 톡톡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나는 심호흡을 하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제 다나는 수수께끼를 해결하든지, 수수께끼가 없다는 것을 밝히든지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다나는 문을 열었다. 하지만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나는 마룻바닥에 놓여 있는 편지 봉투를 발견했다. 재빨리 편지를 집어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다나는 서둘러 봉투 안에 들어 있는 종이를 꺼냈다. 그 종이에는 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다나는 암호같은 글자를 쳐다보면서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했다. 문득 다나는 여행 가방을 열고 지난번에 샀던 여행 안내서를 꺼냈다. VDNKh. USSR 그 글씨는 구 소련 연방의 경제 박람회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여행 안내서에는 박람회장의 주소가 젹혀 있었다. 그날 저녁 8시. 다나는 택시를 부렀다. "경제 박람회장으로 가주세요. 공원에 있나요?" 다나는 자신의 러시아 발음에 자신이 없었다. "VDNKh? 그곳은 완전히 폐쇄되었는데...." 택시 운전사가 고개를 돌리더니 다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다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래도 가실 겁니까?" "네." 택시 운전사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경제 박람회장을 향해 출발했다. 모스크바 북동쪽 지구에 커다란 공원이 있었다. 관광 안내서에 따르면, 이곳은 구 소련 연방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한 박람회장이었는데, 풍부한 전시물드이 설치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러시아 경제가 붕괴되면서 재정이 삭감되고 공원은 몰락한 소련 경제의 상징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임시로 지어졌던 건물들은 부서졌으며 공원은 황폐하게 변했다. 다나는 택시 기사에게 한 움큼의 달러를 건네주었다. "이거면 되겠어요?" "다." 택시 운전사는 달러를 받아들고 재빨리 떠났다. 다나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칼날처럼 매서운 겨울 바람이 부는 공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나는 가까운 곳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서 보리스 쉬다노프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다나는 마음속으로 동물원의 조류 사육장 근처에서 조안 시니시를 기다렸던 일을 떠올렸다. 그 당시에 조안 시니시는 다나를 만나려고 하다가 비참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혹시 보리스도?' 갑자기 다나의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호르시 비체르니." 몸을 휙 돌린 다나는 깜짝 놀라서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다나는 당연히 보리스 쉬다노프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리스 쉬다노프 대신에 눈앞에는 샤샤 쉬다노프 장관이 서 있었다. "장관님! 설마 편지를 보낸 사람이 장관님이라곤 전혀...." "어서 나를 따라오시오." 샤샤 쉬다노프가 짤막하게 말했다. 샤샤 쉬다노프는 빠른 걸음으로 공원을 가로지르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나는 잠시 동안 망설이다가, 곧 그의 뒤를 따라서 걸음을 재촉해다. 샤샤 쉬다노프는 재빨리 공원 끝에 있는 작고 거친 통나무 카페로 들어갔다. 샤샤 쉬다노프는 제일 뒤쪽에 있는 칸막이로 가려진 의자에 앉았다. 다나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카페에는 한 쌍의 남녀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 다나는 샤샤 쉬다노프의 맞은 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더러운 앞치마를 걸친 심드렁한 표정의 웨이트리스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다?" "드바 코페, 포짜루이스타." 샤샤 쉬다노프가 주문을 했다. "설마 당신이 다시 러시아로 올 거라고 확신하지 못했는데.... 당신은 무척 끈질기군요. 때로는 그런 점이 위험을 자초할 수도 있소." 샤샤 쉬다노프는 다나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장관님은 편지에서 제가 원하는 것을 말해줄 수 있다고 썼어요. 정말 그런가요?" "그렇소." 커피가 나왔다. 샤샤 쉬다노프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잠시 침묵을 지켰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당신은 테일러 윈스롭과 그의 가족이 살해된 것이 아닌지 알고 싶다고 했소." 샤샤 쉬다노프가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나의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역시 그랬군요. 제 짐작이 맞았어요." "그렇소." 그 대답은 섬뜩한 한숨과 함께 흘러나왔다. 다나는 갑자기 온몸에 흐르는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당신은 누가 그들을 죽였는지도 알고 있나요?" "물론이오." 다나는 심호흡을 했다. "누구죠?" 샤샤 쉬다노프가 손을 들어올리더니 다나를 제지했다. "당신에게 모든 걸 말해주겠소. 하지만 우선 당신이 나를 위해 어떤 일을 해야만 하오." 다나는 샤샤 쉬다노프를 쳐다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죠?" "나를 러시아 밖으로 빼내주시오." 샤샤 쉬다노프가 다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러시아를 떠나겠다는 말인가요?" "그렇소." "왜죠?" 다나는 의아해서 물었다. "나에겐 이곳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오." "그냥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타면 되잖아요? 이제는 러시아에서도 해외 여행이 자유로운 걸로 알고 있는데...." "친애하는 에반스 양, 당신은 정말 순진하군요. 정말 순진해...." 사실 지금은 옛 소련처럼 엄격한 통제가 없소. 그러나 내가 만일 당신 말대로 한다면, 그들은 내가 공항 근처까지 가기도 전에 나를 죽이고 말 거요." "세상에...." "모든 벽마다 여전히 귀가 있고 눈이 있소. 지금 나는 몹시 커다란 위험에 빠져 있소.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오." 샤샤 쉬다노프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다나는 당혹스러웠다. "저는...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저는 그런 방법을 몰라요." "반드시 해야만 하오. 당신이 방법을 찾아야만 하오. 지금 내 생명이 위험하오." 다나는 잠시 동안 생각을 정리한 후에 말했다. "미국 대산관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건 안 돼!" 샤샤 쉬다노프가 날카롭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인데...." "미국 대사관에도 첩자가 있소. 당신과 당신이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이 일을 알아선 안 되오. 미국 대사관은 나를 도울 수가 없소." 갑자기 다나는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지금 다나의 능력으로는 러시아의 고위직 장관을 외국으로 빼낼 만한 능력이 전혀 없었다. '나에겐 도저히 방법이 없어.' 그러나 다음 순간 다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은 전부 샤샤 쉬다노프, 이 남자의 계략일지도 모라. 샤샤 쉬다노프는 테일러 윈스롭의 죽음에 대한 정보를 아무것도 가지고 잇지 않은 거야. 단지 미국으로 달아나기 위한 수단으로 나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야.' 이번 여행은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도움을 드릴 수 없어서 미안하군요, 쉬다노프 장관님. 저에겐 그럴 만한 능력도 없고, 솔직히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다나는 그 말을 끝으로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다나의 얼굴에는 분노의 기색이 어려 있었다. "기다리시오! 증거를 원하는 거요? 그렇다면 당신에게 증거를 보여주겠소." 샤샤 쉬다노프가 다급히 말했다. 그는 다나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증거 말이죠?" 샤샤 쉬다노프는 한참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가 정말 원하지 않는 일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구려." 샤샤 쉬다노프는 우울한 얼굴로 일어섰다. "나와 함께 갑시다." 30분 후에 그들은 국제 경제 개발부에 있는 샤샤 쉬다노프 장관의 사무실로 통하는 비밀 통로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지금부터 당신에게 하는 말은 내가 사형을 당할 수도 있는 기밀사항이오. 하지만 나에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소." 사무실에 도착하자, 샤샤 쉬다노프가 말했다.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이렇게 덧붙였다. "여기에 잇다간 내가 죽임을 당할 테니까...." 다나는 샤샤 쉬다노프가 벽 속에 장치한 거대한 금고 앞으로 걸어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샤샤 쉬다노프는 금고 번호를 맞추고 문을 연 다음, 그 안에서 두터운 책을 꺼냈다. 샤샤 쉬다노프는 그 책을 자신의 책상 위로 옮겼다. 책 표지에는 붉은 글씨로 'Klassifitsirovann'gy' 라고 적혀 있었다. "이것은 러시아의 특급 기밀 정보요." 샤샤 쉬다노프 장관이 다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는 천천히 책을 펼쳤다. 다나는 샤샤 쉬다노프가 책장을 넘기는 것을 옆에서 유심히 바라보았다. 각각의 책장마다 폭격기, 로켓, 요격 미사일, 공대지 미사일, 자동화기, 탱크 그리고 잠수함 등의 컬러 사진들이 실려 있었다. "이게 뭐죠?" 다나는 그 책에 실려 있는 무기들을 쳐다보았다. "이것은 러시아가 보유한 군수품들이오." 샤샤 쉬다노프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다나가 보기에도 사진 속의 무기들은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러시아는 1천 기 이상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 2천 기 이상의 핵탄두, 7천 대의 전략 폭격기 들을 보유하고 있소." 샤샤 쉬다노프는 책장을 넘기면서 다양한 무기들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엄청난 무기들이군요." "얼, 아크리드, 아피드, 아냅, 아처.... 이것은 모두 미국에 대응하기 위한 우리의 핵무기들이오." "정말, 정말 대단하군요." 다나는 도저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지금 다나는 러시아의 특급 군사기밀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가 보유하고 있는 군대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소, 에반스 양. 우리는 위기에 직면했소." "무슨 뜻이죠?" "러시아 정부는 군인들에게 봉급을 지불할 만한 돈이 없소. 따라서 군대의 사기도 매우 낮소. 대통령은 거의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미래는 더욱 암울할 뿐이오. 그러니까 군대는 어쩔 수 없이 과거로 돌아가련는 것이오." "저는... 저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군요. 어떻게 이것이...." 다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러시아가 초강대국이었던 시절, 우리는 미국보다 더욱 많은 무기들을 만들었소. 그 무기들은 지금 창고에서 낮잠을 자고 있소." "이 무기들을 어떻게 할 건가요?" "수십 개의 나라들이 그것들을 간절하게 원하지." "세상에...." "지금 러시아가 보유하고 잇는 무기들은 상상할 수 없는 가치를 갖고 있소." "장관님, 러시아가 처한 문제는 이해하지만...." 다나는 샤샤 쉬다노프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은 단순히 러시아만의 문제가 아니오." 샤샤 쉬다노프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슨 뜻이죠?" 다나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샤샤 쉬다노프를 쳐다보았다. "혹시 당신은 크라스노야르스크-26이라는 도시에 대해서 들어본적이 있소?" "아뇨." 다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이 모르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오. 그곳은 어떤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기 때문이오.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드은 공식적으로 이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죠?" "나중에 알게 될 거요. 내일 내가 당신을 그곳으로 데리고 가겠소." "크라스노야르스크-26으로 간다구요?" "그렇소. 내일 정오에 아까 그 카페에서 만납시다." 샤샤 쉬다노프는 다나의 팔을 꽉 잡았다. "결코 어느 누구에게도 이 일에 대해서 말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그건 나 혼잔만이 아니라 당신까지도 위험하게 만드는 일이니까...." 샤샤 쉬다노프의 강한 손힘이 다나의 팔을 아프게 눌렀다. "알겠소?" "네." "오르보페노, 약속했소." 정오에 다나는 경제 박람회 공원에 있는 작은 카페에 도착했다. 다나는 카페 안으로 들어가서 샤샤 쉬다노프 장관이 오기를 기다렸다. 30분이 지났지만 샤샤 쉬다노프는 나타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걸까?' 다나는 초조하고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샤샤 쉬다노프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도브르 다이엔." 마침내 샤샤 쉬다노프가 나타났다. "어서 오세요." 다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자, 갑시다." "어디로 가는 거죠?" "먼저 쇼핑을 해야만 하오." 샤샤 쉬다노프가 다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쇼핑?" 다나는 잘못 들었난 싶어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소." 샤샤 쉬다노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일단 여기에서 나갑시다. 나중에 설명을 해주겠소." 샤샤 쉬다노프가 뒤로 돌아서면서 말했다. 다나느 급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어째서 쇼핑을 한다는 거죠?" "당신을 위해서...." 샤샤 쉬다노프가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저는 필요한 게 없어요." 하지만 샤샤 쉬다노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택시를 세웠다. 그들은 택시가 쇼핑 센터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침내 택시가 쇼핑 센터에 도착하자, 샤샤 쉬다노프가 요금을 지불했다. "이쪽으로...." 샤샤 쉬다노프가 말했다. 그들은 대여섯 개의 상점을 지나쳐서 안쪽으로 걸어갔다. 자극적이고 섹시한 속옷들이 진열된 가게가 보일 때까지 그들은 계속 걸어갔다. 샤샤 쉬다노프는 그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요." 샤샤 쉬다노프는 앞장서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다나는 얇고 자극적인 옷들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여기에서 뭘 하는 거죠?" 다나가 의아스러운 듯이 물었다. "당신은 옷을 갈아입어야만 하오." 판매 여점원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샤샤 쉬다노프와 여직원은 러시아어로 빠르게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여점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후에 여직원은 진분홍 미니 스커트와 리본이 달린 블라우스를 갖고 돌아왔다. 그 블라우스는 몸에 착 달라붙어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다." 샤샤 쉬다노프가 여점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뭐죠?" 다나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샤샤 쉬다노프는 다나를 돌아보았다. "당신이 입을 것들이오." 다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싫어요!" "에반스 양...." "저는 절대로 그 옷을 입지 않겠어요." "이 옷으로 가아입으시오." 샤샤 쉬다노프가 목소리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도대체 당신은...." 다나를 그를 노려보았다. "입어야만 하오." 샤샤 쉬다노프의 목소리는 아주 단호했다. "어째서?" "곧 알게 될 거요." 다나는 노출이 심한 옷들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이 남자는 색정광이야. 나에게 이런 옷을 입혀서 뭘 하려는 걸까?' 샤샤 쉬다노프는 다나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어떻게 할 거요?" 다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좋아요." 다나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은 후에 거울을 바라보던 그녀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마치 창녀처럼 보이는군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소." 샤샤 쉬다노프가 다나를 쳐다보면서 지적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어제부터 얼굴에 화장하러 갑시다." "장관님...." 다나는 마치 애원하듯이 샤샤 쉬다노프를 바라보았다. "갑시다." 샤샤 쉬다노프가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여점원은 다나가 입고 있었던 옷들을 종이 가방 속에 넣어서 돌려주었다. 다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천박하고 야한 옷차림을 숨기기 위해 기다란 털 코트로 몸을 가렸다. 그들은 다시 거리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일제히 다나를 쳐다보았다. 남자들은 다나를 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한 노동자가 다나에게 윙크를 했다. 다나는 자신의 처지가 몹시 비참하게 느껴졌다. "이곳이오." 마침내 샤샤 쉬다노프가 걸음을 멈추면서 말했다. 다나는 고개를 들고 미용실을 바라보았다. 샤샤 쉬다노프가 먼저 미용실 안으로 들어갔다. 다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샤샤 쉬다노프르 따라서 미용실 안으로 들어갔다. 샤샤 쉬다노프가 카운터를 향해 걸어갔다. "아노 티옴니." 샤샤 쉬다노프가 말했다. 미용실 직원이 그에게 빨간색 립스틱과 연지를 보여주었다. "사비르쉬엔스트바." 샤샤 쉬다노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나를 향해 돌아섰다. "화장을 하시오. 아주 진하게...." 다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뇨, 사양하겠어요." "사양하다니?" "당신이 무슨 장난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장관님, 저는 그 장난에 끼어들지 않겠어요. 저는 결코...." 샤샤 쉬다노프의 눈이 다나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이것이 단순한 장난이 아나라는 사실을 당신에게 분명히 확인시켜주도록 하겠소, 에반스 양. 크라스노야르스크-26은 완전히 폐쇄된 도시요." 샤샤 쉬다노프는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폐쇄되었다구요? 함부로 접근할 수 없다는 뜻인가요?" 다나는 의아스러운 듯이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렇소. 나는 그곳을 통과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제한된 몇 사람 중의 하나요. 아주 극소수의 외부인만이 매춘부를 데리고 그곳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소." "매춘부라니...." 다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내가 경비병들의 의심을 사지 않고 당신을 그곳으로 데려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그것뿐이오. 경비병들에게는 고급 보드카니 음식 따위를 뇌물로 주어야만 하오. 이제 나의 계획에 관심이 있소? 그렇지 않으면 여기에서 그만두겠소?" '폐쇄된 도시? 경비병들? 도대체 얼마나 어마어마한 지역이기에?' 별로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다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저는 관심이 있어요." 22 크라스노야르스크-26 군용기 한 대가 쉬에르메티보 공항의 특별 전용 활주로에서 기다리고 잇었다. 다나는 승객이 자신과 샤샤 쉬다노프 장관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어디로 가는 거죠?" 다나가 물었다. 샤샤 쉬다노프가 우울한 미소를 지었다. "시베리아로...." '시베리아.' 다나는 아랫배가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오, 세상에...." 비행기는 4시간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날아갔다. 다나는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상황을 조금이라도 짐작하기 위해 샤샤 쉬다노프 장관과 대화를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샤샤 쉬다노프 무서운 얼굴로 입을 굳게 다문 채,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에 비행기가 어디인지도 모를 작은 공항에 착륙했다. 얼어붙은 활주로에 미끈한 세단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나는 생전 처음 보는 황량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여기에서 얼마나 벌죠?" '그리고 언제 돌아가게 되죠?' "별로 멀지는 않소. 우리는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해야만 하오." 샤샤 쉬다노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나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다. "뭘 조심하죠? 도대체 무엇을?" 그들은 기차역처럼 보이는 곳까지 자동차를 타고 갔다. 중무장을 한 여섯 명의 경비병들이 정거장 앞에 서 있었다. 다나와 샤샤 쉬다노프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경비병들의 시선이 일제히 다나에게 쏠렸다. 그들은 착 달라붙는 옷을 입은 다나의 몸을 눈길로 더듬듯이 끈적끈적하게 훑어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이 다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능글맞게 웃었다. "티 베추지!" "카카야 크라시바야 첸시나!" 샤샤 쉬다노프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서 러시아어로 몇 마디 하자, 경비병들이 모두 소리내어 웃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싶지도 않아.' 다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려고 노력했다. 샤샤 쉬다노프가 먼저 기차에 올라탔다. 다나는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갔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기차의 내부는 마치 냉동실처럼 추웠다. '얼어붙은 황량한 툰드라 지대 한복판에서 기차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 마침내 기차의 엔진에 시동이 걸렸다. 몇 분 후에 기차는 산 가운데를 통과하는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터널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다나는 기차 주위를 스치듯이 지나가는 바위 덩어리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지금 무시무시한 악몽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다나는 샤샤 쉬다노프 장관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제 우리가 가는 곳이 어디인지 말해주시겠어요?" 그 순간 기차가 심하게 요동을 치면서 멈춰 섰다. "바로 여기요." 샤샤 쉬다노프가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100미터 가량 떨어진 거리에 있는 기묘한 모양의 시멘트 건물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그 건물 앞에는 이중으로 가서 철조망이 세워져 있었으며, 중무장을 한 군인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다나와 샤샤 쉬다노프가 문 앞으로 걸어가자, 군인들이 부동 자세로 경례를 했다. "어서 나에게 팔짱을 끼고 웃으면서 키스하시오." 샤샤 쉬다노프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세상에! 나중에 내가 이 이야기를 해도 제프는 결코 믿지 않을 거야' 이제 다나에게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나는 샤샤 쉬다노프의 팔에 팔짱을 끼면서 그의 뺨에 키스했다. 다나는 마치 술에 취한 여자처럼 억지로 소리내어 웃었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다정하게 팔짱을 낀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군인들이 부러운 시선으로 아름다운 매춘부와 걸어가는 샤샤 쉬다노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다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서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들이 들어온 그 건물은 지하로 내려가는 승강장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닫혔다. 엘리베이터가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 다나가 궁금한 듯이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죠?" "지금 우리는 산 아래로 내려가는 거요." 엘리베이터가 점점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나 밑으로 내려가는 거죠?" 다나가 신경질적으로 다시 물었다. "지하 200미터." 샤샤 쉬다노프가 대답했다. "우리가 지하 200미터 아래로 가고 있다는 말이군요? 저 밑에 뭐가 있죠? 비밀기지라도 있나요?" 다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곧 알게 될 거요." 몇 분이 흐르자, 엘리베이터가 점차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멈추더니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다 왔소. 에반스 양." 샤샤 쉬다노프 장관이 말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 기다란 복도처럼 생긴 통로가 나타났다. 통로 끝에는 육중한 철문이 달려 있었으며, 또 다른 경비병들이 서 있었다. 샤샤 쉬다노프 장관은 그들과 친숙하게 인사를 나누면서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봉투를 슬쩍 건네주었다. 아마도 보드카인 것 같았다. 경비병들은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문을 열어주었따. 다시 기다란 복도가 펼쳐쳤다. 복도를 따라서 6미터 가량 걸었을 때, 다나는 커다란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다나의 눈앞에 갑자기 상점들과 음식점들, 극장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지하 도시가 펼쳐졌던 것이다. 그곳은 땅 밑에 있다는 사실 말고는 모든 것이 지상의 풍경과 똑같았다. 길 양쪽에는 높은 건물과 복잡한 기계 설비들이 늘어서 있었으며, 수많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도로에는 자동차 대신에 전철이 돌아다녔다. 높은 천장에 설치되어 있는 조명이 태양처럼 환한 빛을 던지고 있었다. 다나는 불현듯이 그들 중에서 코트를 입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운 바람이 느껴졌다. 다나는 샤샤 쉬다노프를 향해 돌아섰다. "우리가 지금 산 아래에 있는 건가요?" "그렇소." 샤샤 쉬다노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다나는 자기 앞에 펼쳐진 이 놀라운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궁금한 게 있소?" "도대체 이해가 안돼요. 이곳의 이름이 뭐죠?" "이미 당신에게 말했잖소. 크라스노야르스크-26이라고...." 샤샤 쉬다노프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긴 뭐하는 곳이죠? 방공호 같은 건가요?" 다나가 의아스러운 듯이 물었다. "그 반대요." 샤샤 쉬다노프는 모호하게 대답했다. 다나는 다시 현대적인 건물을 쳐다보았다. "장관님, 이 장소의 진짝 목적이 뭔가요?" 샤샤 쉬다노프는 다나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설명을 해주겠소. 하지만 당신의 입장에서 보면 차라리 모르는 게 더욱 좋았을 거요." "그게 무슨 뜻이죠?" "이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당신의 안전은 결코 보장할 수 없소." 샤샤 쉬다노프가 냉혹한 시선으로 다나를 응시했다. "세상에...." 다나는 다시 새롭게 경고등이 깜빡거리는 것을 느꼈다. "혹시 플루토늄에 대해서 알고 있소?" "거의 아는 게 없어요." 다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플루토늄은 원자폭탄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 핵탄두의 연료요. 크라노스야르스크-2은 그 풀루토늄을 만들기 위한 오직 한 가지 목적으로 존재하는 곳이오." "이 도시 전체가 그렇다는 말인가요?" "그렇소. 1천 명의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이곳에서 살면서 열심히 일하고 있소, 에반스 양. 처음에 그들에게는 최고의 음식과 의복 그리고 집이 제공되었소. 구 소련 연방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생활을 누렸찌. 당연히 가난한 러시아 과학자들은 기꺼이 이곳으로 들어왔소." 다나는 너무나 놀라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샤샤 쉬다노프는 잠시 동안 다나를 쳐다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들에겐 예외없이 한 가지 제한 조건이 붙어 있소." "그게 뭐죠?" "평생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는 조항을 받아들여야만 하오." "그러니까 당신 말은...." "이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밖으로 나갈 수 없소. 영원히 말이오. 그들은 바깥 세상과 완전히 격리된 채, 살아가야만 하는 거요. 이 격리된 지역에서 말이오." "어떻게 그런 일이...." "몇 명의 책임자를 제외하고는 외부와 연락조차 할 수 없소." 샤샤 쉬다노프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나는 거리를 따라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눈을 깜빡거렸다. '말도 안 돼! 이건 현실이 아니야. 공상 과학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니....' "이 사람들이 플루토늄을 만드는 곳이 어딘가요?" 다나가 샤샤 쉬다노프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잠시 후에 보여주겠소." 전철이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갑시다." 샤샤 쉬다노프가 전철에 올라타면서 말했다. 다나도 재빨리 전철에 올라탔다. 그들이 타고 잇던 전철은 번잡한 거리 중심가를 지나서 희미한 불빛이 비치는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다나는 생각했다. '이 도시를 건설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과 엄청난 노력이 들었을까?' 인간의 능력으로 이 황량한 시베리아 벌판에 이런 거대한 지하 도시를 세운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몇 분이 지나자, 터널 안의 불빛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전철이 정차했다. 전철은 눈부시게 불을 밝힌 거대한 공장의 입구에 서 있었다. "내립시다." 그들은 서둘러 전철에서 내렸다. 다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대한 동굴 안에는 세 개의 원자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원자로 두개는 조용했지만 세 번째 원자로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작동하고 잇는 중이었다. 기술 요원들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 기계들은 사흘마다 한 개의 핵 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양의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가 있소." 샤샤 쉬다노프가 말했다. "엄청난 규모군요." "저 원자로는 아직까지도 1년에 500킬로그램의 플루토늄을 생산하고 있소. 그것은 무려 1백개의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는 양이지. 저 옆에 보이는 저장실에 축해놓은 플루토눔의 가치는 로마 황제의 몸값보다 비쌀 정도요." 샤샤 쉬다노프가 작동 중인 기계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장관님, 그렇게 많은 플루토늄이 있다면 어째서 아직까지도 계속해서 플루토늄을 만들고 있는 거죠? 더 이상 필요할 것 같지 않은데...." 다나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우리는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소." 샤샤 쉬다노프가 착찹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네?" "이 원자로를 끌 수 없는 것은 플루토늄이 러시아의 도시들을 지탱하고 잇는 동력이기 때문이오." "동력이라니?" 다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약 원자로가 멈춘다면, 러시아 도시들은 일제히 전기가 나가고 난방이 꺼질 것이오. 그리고 사람들은 순식간에 얼어 죽을 것이오." "섬뜩하군요. 만약...." 샤샤 쉬다노프가 다나의 말을 제지했다. "아니, 그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소." "그게 뭐죠?" "최근 어려운 럴시아의 경제 상황 때문에 정부는 이곳에서 일한ㄴ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에게 더 이상 봉급을 지불하지 못하고 있소. 그들은 벌써 몇 달째 봉급을 받지 못했소." "왜죠?" 다나가 질문을 던졌다. "러시아의 재정 상태가 몹시 악화되었기 때문이오. 몇 년 전에 제공받은 아름다운 집들이 낡아가고 있지만, 돈이 없어서 수리를 하지 못하는 처지요. 거리에 넘쳐나던 사치품들도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었소. 이제는 생활필수품까지도 부족한 형편이오." "저런!" "이곳의 생활은 천적으로 외부에서 공급되는 물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소. 만약 식량 공급이 중단된다면 꼼짝없이 굶어죽을 수밖에 없단 말이오. 여기 사람들은 점점 절망에 빠지고 있소. 참으로 아이러닉하지 않소? 값으로 따지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양의 플루토늄이 저장되어 있는 이곳에서, 사람들이 무기력하게 굶주리고 잇다는 것이...." "그래서 당신은 그들이 이 플루토늄을 다른 나라에 팔지도 모른다는 것인가요?" 다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테일러 윈스롭은 러시아 대사가 되기 전에 친구들로부터 크라스노야르스크-26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소. 그들은 비밀리에 테일러 윈스롭과 접촉하면서 거래를 제의했던 거요. 테일러 윈스롭은 조국과 정부에게 배신당했다고 느끼는 몇 명의 과학자들과 자세히 이야기를 나눈 후에 열성적으로 이 사업에 뛰어들었소. 하지만 그건 매우 복잡한 사업이었소. 테일러 윈스롭은 모든 조직들이 자리잡을 때까지 기아려야만 했소." 샤샤 쉬다노프 장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당시에 윈스롭 씨는 꼭 미친 사람 같았어요. 가끔씩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아요. 모든 조직들이 자리를 잡았어."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다나는 숨을 헐떡 거렸다. "그 후의 일을 간략하게 말하자면, 테일러 윈스롭은 자진해서 러시아 주재 미국 대사가 되었소. 테일러 윈스롭과 그의 사업 파트너는 몇 명의 과학자들과 짜고서 리비아, 이란, 이라크, 파키스탄, 북한 그리고 중극 등의 날에 플루토늄을 밀반출하기 시작했소." '결국 전 세계적인 조직들이 자리를 잡은 것이군! 테일러 윈스롭이 그토록 러시아 대사직을 맡고 싶어했던 이유는 단지 그 모든 일들을 진행하기가 용이한 자리였기 때문이었어.' "그래서 테일러 윈스롭은 러시아 대사가 되었군요." "그렇소. 물건을 빼돌리는 건 매우 쉬운 일이었소. 테니스공 하나 크기 정도의 플루토늄이면 핵폭탄 하나를 만들기에 충분한 양이니까 말이오. 에반스 양, 테일러 윈스롭과 그의 사업 파트너는 그 일을 하면서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였소. 그들은 모든 일들을 매우 교묘하게 처리했소. 그래서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소." 샤샤 쉬다노프 장관의 목소리는 침통하게 들렸다. "이제 러시아는 과자 가게에 불과한 신세가 되었소. 단지 그 가게의 진열장에는 과자 대신에 핵폭탄, 탱크, 전투기 그리고 미사일 통제 시스템 등이 즐비하게 놓여 있다는 사실만이 다를 뿐이오." "그렇게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테일러 윈스롭은 왜 살해되었죠?" 다나는 자신이 듣고 있는 말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업이 점점 규모가 커지게 되자, 테일러 윈스롭은 그만 욕심이 생겼소. 결국 테일러 윈스롭은 혼자 사업을 독점하기 위해 궁리하기 시작했지. 그의 사업 파트너는 테일러 윈스롭이 어떤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걸 눈치챘소. 그래서 그를 죽인 거요." 샤샤 쉬다노프가 다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왜 그의 가족들까지 모두 죽였죠?" "그건 테일러 윈스롭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사업 내용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그렇군요." "테일러 윈스롭과 그의 부인이 화재로 죽은 후에, 그의 아들 폴은 그 사업 파트너를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려고 했소. 그래서 그는 폴까지 죽인 거요. 일이 그렇게 되자, 그 사람은 혹시라도 테일러 윈스롭의 다른 자식들까지 플루토늄의 비밀을 알고 있을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없애버리기로 작정했소. 그래서 그는 윈스롭의 자식 두 명을 더 죽였고, 그들의 죽음을 사고사와 강도의 짓으로 위장했던 거요." 다나는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샤샤 쉬다노프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테일러 윈스롭의 사업 파트너가 누구죠?" 샤샤 쉬다노프 장관은 고개를 흔들었다. "더 이상 캐묻지 마시오, 에반스 양....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하오. 당신이 나를 러시아 밖으로 빼내주면, 그 후에 그 이름을 말해주겠소." 샤샤 쉬다노프 장관은 자신의 손목 시계를 힐낏 바라보았다. "이제 떠나야만 하오." 다나는 하루 24시간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치명적인 플루토늄을 생산하면서 돌아가는 핵 원자로를 바라보았다. "미국 정부가 크라노스야르스크-26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다나가 질문을 던졌다. "아, 물로니오." "그런데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있는 건가요?" "그들은 겁에 질려서 이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못하고 있소. 미국 정부는 필사적으로 크라스노야르스크-26에서 가동되고 있는 핵 원자로를 치명적이지 않은 어떤 것으로 전환시킬 방법을 찾고 있소. 그러는 도안...." 샤샤 쉬다노프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그들은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샤샤 쉬다노프 장관이 다나를 쳐다보면서 물었따. "FRA를 알고 있소?" 다나는 샤샤 쉬다노프를 바라보면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네." "그들도 이 일에 관련되어 있소." "뭐라구요?" 그 순간 다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비로소 다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부스터 장군이 나에게 이 일에서 손을 떼라고 경고했구나.' 지상에 도착한 그들은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갔다. 샤샤 쉬다노프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이곳에 내 아파트가 있소. 그곳으로 갑시다." 그들은 거리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약간 떨어진 곳에서 다나처럼 선정적인 옷을 입은 한 여자가 남자의 팔에 매달려 가는 것이 보였다. "저 여자는...." 샤샤 쉬다노프 장관이 무뚝뚝한 음성으로 다나의 말을 막았다. "내가 이미 말했잖소. 특정한 몇 사람에게는 매춘부를 데려오는 것이 허리되어 있다고 말이오. 그러나 밤이 되면 매춘부들은 경비병들이 감시하는 수용 시설로 되돌아가야만 하오. 그들은 지하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절대로 알아선 안 되기 때문이오." 다나는 대부분의 상점 진열대가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최근 어려운 러시아의 경제 상황 때문에 정부는 이곳에서 일하는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에게 더 이상 봉급을 지불하지 못하고 있소. 그들은 벌써 몇 달째 봉급을 받지 못했소. 러시아의 재정 상태가 몹시 악화되었기 때문이오. 거리에 넘쳐나던 사치품들도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었소." 길 모퉁이에는 높은 건물이 서 있었다. 그런데 그 건물 꼭대기에는 시계 대신에 커다란 기계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다나는 그 기계 장치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저게 뭐죠?" "가이거 계수관(방사능 측정기)이오. 원자로에 문제가 생겼을 때 경고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소." "그렇군요." 그들은 아파트 건물이 줄지어 서 있는 거리로 방향을 틀었다. "내 아파트가 여기에 있소. 우리는 잠시 동안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하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을 거요. FSB가 모든 사람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소." "FSB요?" "그렇소. 전에는 KGB라는 이름으로 불렸지. 구 소련 연방이 무너지면서 이름이 바뀌었ㅅ. 하지만 변한 것은 오직 이름뿐이오." 그들은 샤샤 쉬다노프의 아파트로 들어갔다. 그 아파트는 제법 컸지만 어쩐지 몹시 초라하게 보였다. 그래도 과거에는 아주 화려했을 것 같았다. 커튼에는 구멍이 나 있었으며, 바닥에 깔려 있는 양탄자는 낡고 지저분했다. 다나는 의자에 앉아서 샤샤 쉬다노프가 FRA에 대해서 했던 말을 곰곰히 생각해따. 다나는 제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건 본질을 은폐하기 위한 가면일 뿐이야. FRA의 진짜 기능은 외국 정보 기관들을 염탐하고 그들의 대화를 도청하는 거야." 다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테일러 윈스롭은 한때 FRA의 국장이었고 비터 부스터와 함께 근무한 적이 있었다. 비터 부스터 장군은 이상할 정도로 다나를 경계했다. "당신네 빌어먹을 기자들은 고인을 조용히 쉬게 놔둘 수가 없는 거요? 당신들은 모두 죽은 시체를 해집으며 추문을 파헤치는 코요테 무리들이오." 빅터 부스터 장군은 어떤 살인이라도 추진할 수 있는 거대한 비밀 조직을 지휘하고 있었다. 잭 스톤은 다나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제가 당신과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부스터 장군은 내 엉덩이를 걷어차려고 할 것입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당신과 미리 확실하게 해둘 일이 있습니다, 에반스 양. 이 대화는 전적으로 비공개를 원칙으로 해야 합니다. 저를 만났다는 사실조차 외부에 알려서는 안 됩니다." FRA 첩자들은 세계 도처에 깔려 있었다. 지금도 어디선가 나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나는 갑자기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긴 모습으로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샤샤 쉬다노프가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떠날 시간이오. 아직까지도 나를 이 나라 밖으로 데리고 나갈 수 있는 방법을 모르겠소?" "알았어요. 방법을 찾아보겠어요. 시간이 조금 필요해요." 마침내 비행긱가 모스크바에 착륙했다. 공항에는 두 대의 자동차가 미리 대기하고 있어다. 샤샤 쉬다노프 장관은 다나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나는 치아카 아파트에서 친구와 함께 지내고 있소. 내가 그곳에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고 있소. 소위 당신들이 말하는 '안전 가옥'이지. 여기에 주소를 적었쏘. 나는 더 이상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소. 오늘 져녁 8시에 이곳으로 오시오. 당신의 계획을 들어보고 싶소." 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겠어요." 다나가 소이우즈 호텔 로비로 돌아오자, 카운터에 안자 있던 여자가 다나를 무서운 눈길로 노려보았다. '저 여자를 뭐라고 탓할 수는 없어. 나라고 해도 이런 옷을 입은 여자를 보면 이상하게 생각했을 테니까....' 다나는 생각했따. '어서 빨리 이 끔찍한 옷을 벗어버려야지.' 방으로 들어간 다나는 재빨리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로저 허드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나는 수화기를 통해 울리는 벨소리를 들으면서 초조하게 기도했다. '제발 받아요. 제발 전화를 받으라구요.' 잠시 후에 세자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드슨 씨 댁입니다." "세자르, 허드슨 씨 계세요?" 다나는 온몸이 바싹 긴장되었다. "에반스 양! 반갑습니다. 네. 허드슨 씨는 집에 계세요." "바꿔주시겠어요?" "물론이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다나는 안도감에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샤샤 쉬다노프를 러시아 밖으로 피신시킬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로저 허드슨밖에 없었다. 로저 허드슨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이 잇을 뿐만 아니라, 신뢰할 수도 잇는 인물이었다. 잠시 후에 로저 허드슨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나?" "로저! 통화를 하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무슨 말이오? 괜찮소? 지금 어디 있는 거요?" "저는 모스크바에 있어요. 마침내 테일러 윈스롭과 그의 가족이 살해된 이유를 찾았어요." "맙소사! 어떻게 당신이 그런 일을...." 로저 허드슨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만나서 말씀을 드리겠어요, 로저. 다시 부담을 드려서 미안하지만, 저에게 문제가 생겼어요." 다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제라니?" "미국으로 탈출하기를 원하는 러시아 고위 관리가 있어요. 그의 이름은 샤샤 쉬다노프에요. 여기에 있으면 그의 생명이 위험해요. 그가 모든 진실을 알고 있어요. 우리는 그 사람을 러시아에서 탈출시켜야만 해요. 그것도 빨리요! 당신이 도와줄 수 있나요?" "다나, 우리 두 사람 모두 이런 일에 관여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죠? 두 사람 모두 말썽에 휘말릴 수 있소." "나는 내키지 않소, 다나." "이런 일에 끌어들여서 미안해요. 하지만 달리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빌어먹을! 나는...." 로저 허드슨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부탁이에요, 로저...." "좋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를 미국 대사관으로 데려가는 거요. 우리가 그를 미국으로 데려오기 위한 계획을 세울 때까지는 그곳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할 거요." "샤샤 쉬다노프는 미국 대사관으로 가려고 하지 않아요. 그는 그들을 믿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소. 내가 전용 전화를 대사에게 그의 신변 보호를 부탁하겠소." "알겠어요." "그런데 지금 샤샤 쉬다노프는 어디에 있소?" "그는 치아카 아파트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어요. 친구와 함께 지낸다고 했어요. 저는 곧 그를 만나러 갈 거예요." "좋소, 다나. 당신이 그를 데리고 곧장 미국 대사관으로 가시오. 절대로 늦장을 피우거나 해서는 안 돼요. 어쩌면 당신까지 위험하게 될수도 있소." 다나는 로저 허드슨 같ㅇㄴ 든든한 후원자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고마웠다. 로저 허드슨이 아니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고마워요, 로저. 진심으로 고마워요." "부디 몸조심하시오, 다나." "네." "나중에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고마워요, 로저. 진심으로 고마워요. 부디 몸조심하시오, 다나. 네 나중에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테이프가 끝났다. 저녁 7시 30분, 다나는 소이우즈 호텔의 종어원 전용 출입구로 몰래 빠져나갔다. 다나는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서 뒷골목을 재빠리 걸어갔다. 털 코트로 단단히 몸을 감쌌지만, 차가운 겨울 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두 블록 정도를 걸어간 다나는 주위를 살펴보면서 뒤를 밟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했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다나는 첫번째 거리 모퉁이에서 택시를 잡았다. "다?" 택시 운전사가 물었다. "치아카 아파트로 가주세요." 다나는 택시 운전사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15분 후에 택시는 평범한 아파트 건물 앞에 도착했다. "기다릴까요?" 택시 운전사가 물었다. "아뇨." 다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샤샤 쉬다노프 장관은 아마도 자동차를 갖고 잇을 것이다. 다나는 지갑에서 몇 달러를 꺼내서 택시 운전사에게 주었다. 다나는 택시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본 후에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아파트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나는 손에 쥐고 있던 쪽지를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2BE. 다나는 허름한 계단을 따라서 이층으로 올라갔다. 주위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계단 끝에 긴 복도가 있었다. 다나는 문에 붙어 잇는 호수를 확인하면서 천천히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5BE... 4BE... 3BE.... 마침내 다나는 2BE호에 도착했다. 그런데 2BE호의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무슨 일이지?' 그순간 다나는 몹시 긴장했다. '혹시 겁에 질려서 어디론가 도망친 게 아닐까?' 다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조금 더 열고 안으로 들어가다. 아파트의 내부는 어두컴컴했다. "장관님...."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쉬다노프 장관님?"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바로 앞에 침실이 있었다. 다나는 침실로 다가갔다. "쉬다노프 장관님...." 어두운 침실 안으로 들어가던 다나는 어떤 물체에 발이 걸려서 그만 바닥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손바닥에 물컹하고 축축한 것이 만져졌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다나는 벽을 더듬어서 스위치를 찾았다. 스위치가 켜지고 방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다나의 두 손은 온통 붉은 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마룻바닥에는 다나가 걸려서 넘어진 물체가 쓰러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샤샤 쉬다노프의 시체였다. 샤샤 쉬다노프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비스듬히 드러누워 있었다. 그의 가슴은 온통 피투성이였으며, 목에는 길게 베어진 상처가 역력하게 드러났다. "아악!" 다나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문득 침대 위를 쳐다본 다나는 그곳에 한 여자의 시체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여자는 얼굴에 투명한 비닐이 씌워져 있었다. 아마도 질식당한 것 같았다. 다나는 자신도 모르게 문을 향해서 엉금엉금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정신없이 아파트 계단으로 달려갔다. 그는 맞은 편에 있는 한 아파트 창문에 서서 소음장치가 부착된 서른 발짜리 AR-7 소총을 들고 있었다. 60미터 거리까지 정확하게 조준할 수 있는 고배율 망원경이 달린 총이었다. 그는 전문가답게 아주 조용하고 침착하게 움직였다. 이번 일은 아주 간단했다. 그 여자는 금방 건물 밖으로 나올 것이다. 그는 여자가 두 구의 시체를 발견하고 까무러질 듯한 공포에 휩싸이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는 그녀가 죽을 차례였다. 아파트의 문이 거칠게 열리자, 그는 침착하게 소총을 어깨 위로 들어올렸다. 망원경을 통해서 다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는 신중하게 다나가 정확히 과녁 한가운데로 오도록 조준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방아쇠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버스 한 대가 아파트 앞에 정차하면서 표적을 가려버렸다. 저격수는 다급하게 보이지 않는 목표물을 향해 총을 쏘아댔다. 수십 발의 총탄이 버스의 지붕에 명중했다. 단번에 버스의 지붕이 날아가고 말았다. 총탄 몇 개가 건물 벽에 박혔지만, 표적은 멀쩡했다. 사람들이 일제히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저격수는 빨리 이곳을 떠나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여자는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걱정할 것 없어. 다른 놈들이 여자를 처리하겠지.' 거리에는 여전히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다나는 조금도 추위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다나는 극도의 공포에 빠져 있었다. 다나는 두 블록 가량 떨어진 곳의 호텔 안으로 무조건 뛰어들었다. "전화! 전화가 어디있어요?" 다나는 프론트 데스크에 있는 직원을 향해 물었다. 그 직원은 피투성이가 된 다나의 두 손을 보고 겁에 질린 듯이 뒤로 물러섰다. "전화!" 다나의 목소리는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그 직원은 불안한 표정으로 로비 구석에 있는 전화 박스를 가리켰다. 다나는 다급하게 전화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다나는 지갑에서 전화카드를 꺼낸 후에 떨리는 손가락으로 전화번호를 눌렀다. "미국으로 전화하려고 해요." 다나의 두 손이 마구 떨리고 있었다. 다나는 교환원에게 자신의 카드 번호와 로저 허드슨의 전화번호를 불러주고 잠시 기다렸다.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흐른 뒤, 세자르의 목소리가 흘러나왓다. "허드슨 씨 댁입니다." "세자르! 허드슨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다나의 목에서 쉰 듯한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에반스 양?" 세자르가 어리둥절해했다. "빨리요, 세자르! 빨리...." 로저 허드슨이 전화를 받았다. "다나?" "로저!" 다나의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렷다. "그 사람이... 그사람이 죽엇어요. 그들이 그와 그의 친구를 죽였어요." "뭐라구? 오, 세상에.... 다나. 어떻게 그런 일이.... 당신은 괜찮소?" "네.... 하지만 그들이 저를 죽이려고 해요." 다나가 다급하게 말했다. "자, 내 말을 잘 들어요. 자정에 워싱턴으로 떠나는 에어 프랑스 항공기가 있소. 내가 당신 이름으로 예약을 해두겠소. 지금 당장 메트로풀 호텔로 가시오. 그 호텔에는 정기 운행하는 버스가 있소. 그 버스를 타시오. 절대로 택시를 타지 마시오." 로저 허드슨이 재빨리 말했다. "고마워요, 로저." "혹시 당신을 미행하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시오. 항상 사람들 틈에 섞여 있도록 해요. 내가 직접 공항으로 마중나가도록 하겠소. 부디 조심해요, 다나!" "알았어요, 로저. 정말 고마워요." 다나는 전화를 끊고 잠깐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미칠 듯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다나는 피로 얼룩진 채, 바닥에 쓰러져 있던 샤샤 쉬다노프와 그의 친구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다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전화 박스에서 걸어나왔다. 프론트에 있는 직원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다나를 쳐다보았다. 다나는 착가운 바람이 부는 거리로 나섰다. 택시 한 대가 다나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택시 운전사가 러시아어로 다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에요." 다나가 머리를 흔들었다. 다나는 서둘러 거리를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먼저 묵고 잇는 호텔로 돌아가야만 했다. 전화를 끊었을 때, 로저 허드슨은 파멜라가 현관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다나가 모스크바에서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소. 마침내 윈스롭 가문이 살행당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하더군." 파멜라가 냉정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즉시 조치를 취해야만 하겠군요. 그 여자를 없애버리도록 해요." "벌써 지시를 내렸소. 저격수를 보냈는데, 아무래도 일이 잘못된 것 같소." 파멜라는 경멸하는 듯한 시선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멍청이, 그 여자를 러시아에서 해치우는 건 너무 위험해요. 그렇게 되면 누군가 의심을 품고 또다시 이 사건을 조사하려고 할지도 모르잖아요. 차라리 이곳으로 불러들인 후에 해치우도록 해요. 그리고 로저...." "응?" "확실하게 사고처럼 위장하도록 하세요." 23 친구는 없다 래번 힐. 영국에 위치하고 있는 FRA 본부는 붉은 글씨로 적혀 있는 출입 금지 경고문과 높다란 철조망으로 인해 세상과 격리되어 있었다. 경비는 물샐 틈이 없을 정도로 아주 삼업했다. FRA 본부에는 유럽 대륙에서 발신되는 모든 국제 전화와 영국 내의 국초단파 전화 통화를 도청하는 위성 안테나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FRA 본부 중앙에 있는 한 콘크리트 건물 안에서 네 명의 남자들이 커다란 화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자를 비추도록 해, 스코티." 스코티는 서둘러 기계 장치를 조작했다. 잠시 후에 다나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났다. 다나는 소이우즈 호텔의 자기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여자가 돌아왔어." 그들은 다나가 황급히 피묻은 손을 닦고 옷을 벗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이봐, 시작한다." 한 남자가 이를 드러내면서 씩 웃었다. 그들은 다나가 옷을 벗는 장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제기랄! 한 번 하고 싶어 죽겠네." 또 다른 남자가 다급하게 방으로 들어오면서 말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찰리. 시체랃 좋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무슨 말이야?" 찰리가 의아스러운 듯이 물었다. "그 여자는 곧 사고로 죽을 테니까...." 다나는 옷을 갈아입고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직 약간의 시간적인 이유가 았었다. 불안감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끼면서 다나는 서둘러 로비로 내려갔다. 데스크에 앉아 있던 뚱뚱한 여자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나는 다시 거리로 나갔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날씨는 추웠다. 잠시도 쉬지 않고 세찬 바람이 불었다. 택시 한 대가 다나 앞에서 멈추었다. "택시?" 다나는 생각했다. "자정에 워싱턴으로 떠나는 에어 프랑스 항공기가 있소. 내가 당신 이름으로 예약을 해두겠소. 지금 당장 메트로폴 호텔로 가시오. 그 호텔에는 공항까지 정기 운행하는 버스가 있소. 그 버스를 타시오. 절대로 택시를 타지 마시오." "아뇨." 다나는 추운 거리를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따뜻한 집과 사무실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이 다나를 밀치면서 지나갔다. 자동차들이 다니고 있는 도로 모퉁이에 도착한 다나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길을 건너기 위해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렸다. 그 순간 다나의 등을 누군가 강하게 떠밀어다. 순식간에 다나는 트럭이 달려오는 거리로 나가떨어졌다. 다나는 얼음처럼 차가운 도로 바닥에 등을 대고 쓰러졌다. 다나는 공포에 질린 채 그녀를 향해 빠르게 달려오는 거대한 트럭을 바라보았다.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하양게 질린 트럭 운전사가 있는 힘을 다해 핸들을 돌렸다. 트럭은 다나 옆을 살짝 비키면서 지나갔다. 다나는 눈앞이 깜깜하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져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거대한 타이어의 날카로운 마찰 소리가 다나의 귀를 멍하게 만들었다. 갑자기 다나의 눈에 다시 하늘이 보였다. 트럭 운전사는 잔뜩 욕설을 퍼부으면서 트럭을 몰고 가버렸다. 다나는 비틀거리면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다나가 일어설 수 있도록 부축해 주었다. 다나는 자신을 떠밀었던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보기 위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연이었을까? 누군가 고의로 그랬을까?' 다나는 여러 번 심호흡을 하면서 침착하려고 애를 썼다. 다나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그녀에게 러시아어로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사람들이 다나를 향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다나는 밀려드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을 수 없는 공포심을 느꼈다. "메트로폴 호텔이 어디 있죠? 누가 좀 가르쳐 주세요." 다나가 간절하게 물었다. 대여섯 명의 소년들이 앞으로 나섰다. "우리가 안내해 드리겠어요." 메트로폴 호텔의 로비는 아주 따뜻했다. 다행스럽게도 호텔 로비는 안전한 것처럼 보였다. 늦은 시가이었지만 호텔 로비는 관광객들과 사업가들로 붐비고 있었다. "혹시 당신을 미행한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시오. 항상 사람들 틈에 섞여 있도록 해요. 내가 직접 공항으로 마중나가도록 하겠소." 다나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다나를 미행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다나는 프로트로 걸어가서 호텔 직원에게 물었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가 몇 시에 있죠?" "30분 후입니다, 가스파짜." 호텔 직원이 친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마워요." 다나는 숨을 헐떡이면서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끔찍한 두려움을 떨쳐버리려고 애썼다.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누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걸까? 도대체 왜? 케말은 안전할까?' 호텔 직원이 다나에게 다가오면서 말했다. "공항 버스가 도착했습니다." 다나는 제일 먼저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승객들의 동태를 살필 수 있도록 일부러 제일 뒤에 있는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공항 버스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유럽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그리고 몇 명의 미국인이 타고 있었다. 그런데 통로 건너편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다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나는 숨이 가빠지는 것으 느꼈다. '얼굴이 낯익어. 계속 나를 미행한 것일까?' 1시간 후에 버스가 쉬에르메티보 공항에 도착했다. 다나는 맨 마지막으로 공항 버스에서 내려와 황급히 공항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에어 프랑스 창구 앞으로 걸어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에어 프랑스 항공사의 직원이 친절하게 물었다. "다나 에반스라는 이름으로 예약되어 있나요?" 다나는 목이 졸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만약 비행기표가 없다면... 예약이 되어 있지 않다면... 로저가 비행기표를 예약하겠다고 했는데....' 다나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제발... 제발....' 에어 프랑스 항공사의 직원이 다나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네, 있군요. 여기 항공권이 있습니다. 요금은 이미 지불하셨어요." '고마워요, 로저.' "고마워요." "비행기는 예정대로 출발합니다. 2시 20분 비행기입니다. 1시간 10분 후에 이륙합니다. "쉬고 있을 만한 휴게실이 있나요?" 하마터면 다나는 '특별히 사람들이 많은 휴게실'이라고 말할 뻔했다. "이쪽 통로 끝에서 아래층으로 내려가시면 오른쪽에 있습니다." "고마워요." 다행스럽게도 휴게실은 사람들로 붐볐다. 행동이 이상하거나 위협적으로 보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다나는 의자에 걸터 앉았다. '잠시 후면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안전하게 가고 있을 거야.' "2시 20분 발 워싱턴 행 에어 프랑스 항공기가 3번 출구에서 탑승 중입니다. 승객 여러분은 여권과 항공권을 준비하십시오." 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3번 출구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다나를 감시하고 있던 남자가 휴대폰에 대고 말했다. "목표물이 3번 출구로 가고 있다." 로저 허드슨은 재빨리 수화기를 들고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자가 2시 20분 발 에어 프랑스 항공기에 탑승했다. 내가 직접 공항에서 여자를 만나겠다." "그런데 그 여자를 어떻게 하실 겁니까?" "뺑소니 사고로 처리할 생각이다." 비행기는 순조롭게 이륙해서 구름 한 점 없는 4만 5천 피트 상공을 날아가고 있었다. 비행기에는 빈 좌석이 하나도 없었다. 다나의 옆좌석에는 미국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이 입을 열었다. "나는 그레고리 프라이스입니다. 제재업을 하고 있지요." 그레고리는 사십 대의 나이에, 기다란 얼굴과 밝은 회색 눈에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여긴 참 대단한 나라가 아닙니까?" "플루토늄은 원자 폭탄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 핵탄두의 원료요. 크라노스야르스크-26은 그 플루토늄을 만들기 위한 오직 한 가지 목적으로 존재하는 곳이오." "확실히 러시아는 미국과 많이 달라요. 하지만 조금만 지내면 금방 익숙하게 되죠." "1천 명의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이곳에서 살면서 열심히 일하고 있소." "물론 러시아 사람들은 프랑스 사람들처럼 요리를 잘하지는 못해요. 그래서 저는 사업상 러시아에 올 때마다 항상 먹을 것을 알아서 챙겨오지요. 다른 생활필수품들도 가지고 옵니다." "이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밖으로 나갈 수 없소. 영원히 말이오. 그들은 바깥 세상과 완전히 격리된 채, 살아가야만 하는 거요. 이 격리된 지역에서 말이오." "그런데 러시아에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사업 때문인가요?" 다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릭 그 남자에게 대답했다. "휴가예요." 남자는 깜짝 놀라면서 다나를 바라보았다. "러시아에서 휴가를 보낼 생각을 하다니? 그것도 이렇게 추운 겨울에...." 승무원이 음식을 실은 카트를 밀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순간 다나는 자신이 무척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음식을 먹은 거이 언제였는지 기억할 수도 없었다. "버번을 한 잔 하시고 싶으면 저에게 부탁하세요. 진짜 좋은 것이 있습니다, 아가씨." 그 남자가 말했다. "사랑하겠어요." 다나는 머리를 흔들면서 손목 시계를 쳐다보았다. '한두 시간 후면 워싱턴에 착륙할 거야.' 에어 프랑스 220기가 덜레스 공항에 착륙했다. 네 명의 남자들이 공항 유리문에 기대고 서서 사람들이 비행기의 이동 트랩을 따라 내려오기 시작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남자들은 이제 여자가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들 가운데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피하 주사는 잊어버리지 않았겠지?" "그래." "여자를 록 크리크 공원으로 데리고 가. 두목이 뺑소니 사고로 위장하길 원하니까...." "좋아." 그들은 다시 출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두터운 외투, 파카, 목도리, 장갑 등으로 단단히 몸을 감싼 승객들이 한꺼번에 출구로 빠져 나오고 있었다. 잠시 후에 출구로 나오는 승객들의 흐름이 끊겼다. 하지만 그들이 목표로 삼고 있던 여자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한 남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직접 들어가서 여자가 무슨 일로 지체하는지 알아봐야겠군." 그는 서둘러 비행기의 이동 트랩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공항 청소 직원들이 바쁘게 뒤처리를 하고 있었다. 남자는 비행기 통로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곳에 남아 있는 승객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화장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화장실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막 비행기에서 떠나려고 하는 승무원에게 물었다. "다나 에반스 양의 좌석이 어디입니까?" 승무원은 깜짝 놀란 얼굴로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다나 에반스? 그 유명한 텔레비전전전 앵커우면 말인가요?" "네." "그녀는 이 비행기에 탑승하지 않았어요. 그것 참 안타까운 일이군요. 한번 꼭 만나보고 싶었는데...." 그레고리 프라이스가 다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제재사업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아십니까, 아가씨? 나무들은 다들 알아서 저절로 자란답니다. 우리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자연이 우리에게 돈을 벌어다주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거죠." 기내에 안내 방송이 울려퍼졌다. "잠시 후에 비행기가 시카고의 오헤어 공항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승객 여러분은 안전벨트를 착용하시고 의자를 똑바로 세워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통로 건너편에서 어떤 여자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요. 당신 의자를 똑바로 세워요. 난 죽을 때 몸을 뒤로 젖히고 죽기 싫단 말이에요." 그 여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죽음'이라는 말이 다나의 목을 조였다. 아파트 벽으로 날아와서 박히던 총탄들과 무거운 기세로 돌진하던 트럭이 다나의 눈앞에 떠올랐다. 다나는 기적처럼 살아남은 아슬아슬한 순간들을 생각하면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몇 시간 전데 다나는 온몸을 덜덜 떨면서 쉬에르메티보 국제 공항 라운지에 앉아 있었다. 다나는 몇 번이고 자신을 향해서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고 중얼거렸다. '결국 선이 승리할거야. 악은 결코 이길 수 없어.' 그러나 무엇인가 자꾸만 다나의 마음을 괴롭혔다. 다나가 누군가와 주고받았던 대화가 자꾸만 그녀의 신경을 자극했다. 무엇인가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이 무엇이었는지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집중할수록 생각은 자꾸만 미끄러졌다. '매트와 나누었던 대화였나? 샤샤 쉬다노프 장관? 팀 드류?' 다나는 자꾸만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비행기의 이륙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워싱턴 D.C.행 에어 프랑스 220기가 잠시 후에 이륙합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여권과 항공권을 준비하십시오." 다나는 위자에서 벌떡 일어나 3번 출구로 향했다. 에어 프랑스의 직원에게 여권을 제시하려던 순간, 갑자기 다나는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다나가 샤샤 쉬다노프 장관과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였다. "나는 치아카 아파트에서 친구와 함께 지내고 있소. 내가 그곳에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고 있소. 소위 당신들이 말하는 안전 가옥이지. 여기에 주소를 적었소." 다나는 샤샤 쉬다노프의 은신처를 오직 로저 허드슨에게만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직후에 샤샤 쉬다노프는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처음부터 로저 허드슨은 테일러 윈스롭과 러시아 사시에 모종의 검은 거래가 있었다는 사실을 은근히 암시했었다. "내가 모스크바에 있었을 때, 윈스롭이 러시아인들과 어떤 은밀한 거래에 관련되어 있다는 소문을 들었소. 아무 일도 아닐지 모르지만, 테일러 윈스롭이 러시아 주재 대사로 가기 직전에 공적인 생활에서 완전히 은퇴하겠다는 말을 가까운 친구들에게 했다고 하오. 아무래도 윈스롭이 러시아 대사로 자신을 임명해 달라고 대통령에게 강력히 요청했던 것 같소. 스스로 공적인 생활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한 후에 그런 일을 하다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오." 곰곰히 생각해보니, 허드슨 부부와는 너무나 짦은 시간에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된 셈이었다. 아무리 다나가 유명한 앵커라고 해도 정계와 재계의 최고 거물급 인사인 허드슨 부부가 다나와 케말에게 그토록 친절하게 대한다는 것은 몹시 이상한 일이었다. 파멜라는 수시로 다나에게 전화를 걸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집으로 초청했다. 그리고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다나의 모든 일을 도와주려고 했다. 다나 또한 자신이 겪었던 일을 로저와 파멜라에게 꼬박꼬박 알려주었다. 다나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인 자신이 너무나 미웠다. 결국 그들은 다나의 모든 행동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다나에게 접근했던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로저 허드슨이 테일러 윈스롭의 비밀에 싸인 사업 파트너였던 것이다. 아메리카 에어라인 항공기가 시카고의 오헤어 공항에 착륙했을 때, 다나는 창문 밖을 물끄러미 응시하면서 무엇인가 수상한 것이 없는지 살펴보았다. 다나의 신경을 자극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방이 무척 조용했다. 다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에 비행기에서 내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다나의 신경안 극도로 날카로운 상태였다. 공항 건물로 들어가는 동안, 다나는 가능한 한 많은 승객들 사이에 섞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다나의 마음은 무척 초조했다. 어서 전화를 걸어야만 했다. 로저 허드슨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다나는 바늘 방석에 앉은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닥칠 위험 따위는 별로 문제 되지 않았다. 다나가 초조하고 불안에 떠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케말이었다. 지금 케말은 로저 허드슨 부인인 파멜라가 소개시켜준 가정부와 함께 있었다. 그 가정부도 그들과 한 패일 것이다. '만약 달레이 부인 때문에 케말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면?' 다나는 케말에게 벌어질 일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케말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만 했다. '시카고에서 워싱턴까지 가는 동안 케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오! 이럴 때 제프가 워싱턴에 있었다면....' 그 순간 다나의 머릿속에 잭 스톤이 떠올랐다. 그러면 충분히 다나와 케말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잭 스톤은 처음부터 다나에게 호의적이었다. 그의 상관인 부스터 장군과는 전혀 다른 인물 같았다. '그 사람은 그들과 한패가 아닐 거야.' 다나는 생각했다. "저는 어떻게든 정치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해가 미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저는 당신을 최대한 도울 수가 있습니다. 제 말뜻을 이해하시겠죠?" 다나는 구석에 있는 공중 전화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가방을 열고 잭 스톤으로부터 받은 개인 전용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꺼내어 서둘러 번호를 눌렀다.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잭 스톤이 받았다. "잭 스톤입니다." "다나 에반스예요. 지금 곤경에 처해 있어요. 저를 좀 도와주세요." 다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무슨 일입니까?" 잭 스톤이 놀라며 물었다. "지금은 사정을 다 말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어떤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고 쫓아오고 있어요." "다나, 누가 당신을 따라오고 있나요?"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내 아들... 케말, 그 애가 걱정스러워요. 당신이 그 애를 보호할 수 있을까요?" 잭 스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이는 지금 집에 있나요?" "네." "즉시 당신 집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지금 괜찮습니까? 누군가 당신을 죽이려고 한다니요?" "그래요. 그들은... 그들은 두 번이나 나를 죽이려고 했어요." 잠시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당신이 있는 곳이 어디죠?" "시카고의 오헤어 공항에 있는 아메리카 에어라인 터미널이에요. 제가 여기를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지금 있는 곳에서 꼼짝도 하지 말고 가만히 계십시오. 당신을 보호할 만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케말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하지 마세요." 잭 스톤의 차분한 목소리를 듣고, 비로소 다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고마워요." 다나는 전화를 끊었다. 잭 스톤은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즉시 인터폰을 눌렀다. "목표물이 방금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자는 오헤어 공항의 아메리카 에어라인 터미널에 있다. 여자를 잡아라." "알겠습니다." 잭 스톤은 부관에게 몸을 돌렸다. "부스터 장관은 언제 극동에서 돌아오지?" "오늘 오후입니다." "제기랄! 부스턴 장군이 돌아와서 이 일을 눈치채기 전에, 그 빌어먹을 것을 처치해버려." 24 쫓고 쫓기는 사람들 다나의 휴대폰이 울렸다. 다나는 떨리는 손으로 재빨리 휴대폰을 열었다.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던 전화였는가? 다나는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재빨리 말했다. "제프?" "안녕, 다나." 제프, 그의 익숙한 목소리가 마치 포근한 담요처럼 다나의 온몸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다나는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오, 제프!" 다나는 자꾸만 몸이 떨렸다. "잘 지내지?" '잘 지내냐구요? 오, 제프!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나는 지금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어요.' 그러나 다나는 제프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제프는 다나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다. 다나가 지금 처한 위급한 상황을 설명한다고 해도, 제프는 너무 먼 곳에 있었다. 다나는 차라리 제프를 걱정시키지 않는 편이 훨씬 낫겠다고 생각했다. "난... 난 괜찮아요." "지금 어디 있는 거지? 나의 자랑스러운 방랑자 양반? 설마 중국에가 있는 건 아니겠지?" 제프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여긴 시카고예요. 내일 워싱턴으로 돌아갈 거예요." '그런데 언제쯤 당신은 나와 함께 있을 거예요?' "무사히 돌아왔군. 솔직히 당신이 러시아에 있는 동안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연락도 잘 안 되고...." 다나는 간신히 그 말을 삼키면서 물었다. "레이첼은 어때요?" "레이첼은 좋아. 마음도 점차 안정되는 것 같아." "보고 싶어요, 제프." 갑자기 레이첼의 침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잠옷을 입은 레이첼이 거실로 나오고 있었다. 제프를 부르려고 하던 레이첼은 그가 통화하는 것을 보고 그만 입을 다물었다. 제프는 전화에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도 그래. 오, 다나. 당신과 함께 있다면...." "보고 싶어요, 제프." "나도 그래.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랑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이 보고 싶어." 비록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다나는 제프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오, 제프! 정말 사랑해요." 그 순간 다나는 등골이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가까운 곳에 있는 한 남자가 다나를 유심히 노려보는 것 같았다. 다나의 심장이 킁킁거리면서 박동하기 시작했다. "제프, 만약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발 잊어버리지 마세요. 내가 언제나 당신을...." 다나의 목소리가 몹시 떨렸다. "그게 무슨 말이지?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다니?" 제프는 즉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아무것도 아닝에요. 그냥.... 이젠 전화를 끊어야만 해요. 하지만... 별다른 일은 없을 거예요." "다나, 당신에게 어떤 일이 생기면 절대로 안 돼! 나에겐 그 무엇보다도 당신이 필요해. 지금까지 당신보다 더욱 사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당신을 잃는다면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거야. 제발 몸조심해요." 두 사람의 전화 내용을 듣던 레이첼은 재빨리 침실로 돌아가서 조용히 문을 닫았다. 다나와 제프는 10분 가량 통화했다. 마침내 전화를 끊으면서 다나는 생각에 잠겼다. '정말 다행이야. 제프와 작별 인사를 할 기회를 가졌으니까....' 다나는 그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남자는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으로 다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잭 스톤이 보낸 사람이 이렇게 빨리 도착했을 리는 없어. 어떻게 해서든지 여기를 빠져나가야만 해.' 다나의 이웃에 사는 남자가 다나의 아파트 문을 두드렸다. 달레이 부인이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죠?" "반드시 케말을 집에 잡아두도록 해요. 아무래도 애가 필요할 것 같으니까...." "알겠어요." 달레이 부인은 문을 닫은 후에 큰 소리로 케말을 불렀다. "케말!" "네?" "오트밀을 먹어야지, 얘야." 달레이 부인은 부엌으로 가서 오트밀 그릇을 꺼낸 뒤 씽크대 서랍에서 '부스파'라는 상표가 붙어 있는 약봉지를 꺼냈다. 서랍 바닥에는 빈 약봉지들이 잔뜩 널려 있었다. 달레이 부인은 먼저 두 봉지를 꺼냈다가, 잠시 동안 망설인 후에 다시 한 봉지를 더 꺼냈다. 달레이 부인은 그 가루를 오트밀에 섞고 살짱 설탕을 뿌렸다. 케말이 거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여기 있다, 얘야. 맛좋고 따끈따끈한 오트밀이란다." "별로 배고프지 않아요." "먹어야 한다, 케말." 달레이 부인이 케말을 보면서 말했다. 케말은 그만 깜짝 놀랐다. 달레이 부인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너무나 차갑고 날카로웠기 때문이었다. "네 엄마한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니? 그럴 거야?" "아뇨." "그래, 착하구나. 엄마 생각을 하면 다 먹을 수가 있을 거야." 달레이 부인은 오트밀이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케말은 의자에 앉아서 오트밀을 먹기 시작했다. '케말은 적어도 6시간 동안은 쿨쿨 잠들어 있을 거야. 그 다음에 케말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지시를 기다려야지.' 달레이 부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나는 몹시 초조한 듯이 공항을 서성거렸다. 문득 옷을 파는 상점이 보였다. '변장을 하자.' 다나는 재빨리 상점 안으로 들어가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상점 안에는 별로 수상한 점이 없었다. 손님들은 분주하게 상품으로 고르고 있었으며, 직원들은 손님들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다나는 조심스럽게 거리를 대다보았다. 갑자기 다나의 시선이 어딘가에 고정되었다. 다나는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었다. 모자를 눌러쓴 두 명의 남자가 상점 입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무전기를 들고 있었다. '그들이야! 그런데 어떻게 해서 내가 시카고에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낼 수 있었을까?' 다나는 침착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다나는 직원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여기에서 나갈 수 있는 다른 문이 있나요?" 상점 직원이 고개를 흔들면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뒷문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직원들만 이용할 수가 있답니다." 다나는 목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다나는 다시 한 번 입구에 서 있는 남자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지금 다나를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여기에서 빠져나가야만 해.' 다나는 필사적으로 방법을 찾아보았다. '방법을 찾아야만 해.' 갑자기 다나는 선반에 걸린 옷을 집어들고 입구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깐만 기다려요. 그 옷은 계산하지 않았어요...." 상점 직원이 다나를 쳐다보면서 다급하게 소리쳤다. 다나는 문을 향해 계속 걸어갔따. 상점 입구에 서 있던 두 명의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삑! 다나가 문을 통과하는 순간, 드레스에 부착된 라벨의 전자 장치가 센서에 감지되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경비원이 다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두 명의 남자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더니 뒤로 물러섰다. "잠깐만요, 아가씨." 경비원이 다나를 제지했다. "무슨 일이죠?" "미안하지만 나와 함께 다시 상점 안으로 들어가셔야 하겠습니다." 다나는 경비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내가 그래야 하죠?" 다나는 일부러 경비원에게 항의했다. "도대체 지금 그걸 몰라서 묻는 거요? 상점에서 물건을 슬쩍한ㄴ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오. 참, 대단히 뻔뻔스러운 아가씨로군." 경비원은 다나의 팔을 붙잡더니 상점 안으로 잡아끌었다. 두 명의 남자는 몹시 당황해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좋아요. 자백하죠. 내가 물건을 슬쩍했어요. 어서 감옥에 넣으라구요." 다나는 경비원을 향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쇼핑을 하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상점을 관리하는 지배인이 경비원에게 물었다. "이 여자가 옷을 훔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경비원이 손으로 다나를 가리키면서 대답했다. "이런! 경찰을 부르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기는데...." 지배인은 인상을 쓰면서 다나를 슬쩍 쳐다보았다. 지배인은 단번에 다나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맙소사! 다나 에반스!"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저 사람이 바로 다나 에반스야...." "밤마다 뉴스를 진행하는 여자를 말하는 거야?" "사라예보 전쟁터에서 전쟁 속보를 전하던 그 여기자?" 지배인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에반스 양. 아무래도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머! 아니에요. 내가 물건을 쓸쩍했어요. 나를 체포해도 좋아요." 다나가 다급하게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다. "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옷은 그냥 가지세요, 에반스 양." 지배인이 미소를 지었다. "그게 무슨 뜻이죠?" 다나는 도지히 믿을 수 없어 지배인을 바라보았다. "모든 일은 우리가 알아서 조용히 처리하겠습니다. 에반스 양도 이런 일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겠죠? 어쨌거나 우리 옷이 마음에 드셨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나를 체포하지 않겠다구요?" 다나의 예상은 그만 빗나가고 말았다. '안 돼요! 어서 나를 체포하세요!' "당연하죠. 그 옷값 대신에 사인이나 한 장 해주십시오. 이곳을 방문하신 기념으로 상점 입구에 걸어놓을게요." 지배인이 미소를 지으면서 제안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한 여자가 소리쳤다. "나도 사인을 해주세요!" "부탁합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저기를 봐! 다나 에반스야." "사인을 해주시겠어요, 에반스 양!" "당신이 사라예보에 있을 때, 남편과 나는 매일 밤마다 당신 뉴스를 보았다우." "당신 덕분에 전쟁을 생생하게 실감했다니까요." "나도 사인을 해주세요." 다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또다시 깊은 절망감에 빠졌다. 다나는 다시 입구를 쳐다보았다. 두 명의 남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버티고 있었다. 그 순간 다나의 머릿속에서 번개처럼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다나는 사람드을 향해서 몸을 돌렸다. "좋아요. 여러분에게 제안을 하나 하겠어요. 우선 밖으로 나가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도록 하죠. 지금 머리가 좀 아파서.... 그 다음에 여러분 모두에게 사인을 해드리겠어요." 다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이걸 받으세요. 어쨌거나 정말 고마워요." 다나는 상점 지배인에게 다시 옷을 돌려주었다. 다나는 등 뒤에 수 많은 사람들을 거느린 채, 문을 향해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오자, 두 명의 남자는 몹시 당황하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어느 분을 먼저 해드릴까요?" 다나는 천천히 사람들을 향해서 돌아섰다. 사람들은 저마다 팬과 종이를 내밀었다. 다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두 명의 남자는 거북한 표정을 지으면서 여전히 상점 입구에 서 있었다.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주면서, 다나는 조금씩 공항 출입문까지 움직였다. 사람들은 여전히 다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두 명의 남자는 도저히 다나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택시 한 대가 다가오더니 공항 입구에서 멈춰 섰다. 다나는 그 택시에서 어떤 손님이 내리는 것을 보았다. '기회는 지금뿐이야!' 다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고마워요. 이제 가야만 해요." 다나는 재빨리 택시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택시는 수많은 차량들 속으로 사라졌다. 잭 스톤은 로저 허드슨과 통화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허드슨 씨, 여자가 우리의 손에서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빌어먹을! 그 따위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죄송합니다." "지금 당장 여자를 없애버려!" "걱정하지 마십시오. 택시 번호를 알고 있습니다. 여자는 멀리 달아날 수가 없습니다." "나를 또다시 실망시키지 말게." 로저 허드슨은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시카고 도심 한복판에 있는 카슨 파리에 스코트 & 컴퍼니는 쇼핑을 하는 사람들로 인해 번잡하게 붐비고 있었다. 스카프 매장 직원이 포장한 선물 상자를 다나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아주 투명한 유리 상자였다. "현금으로 계산하시겠어요? 아니면 수표로 계산하시겠어요?" "현금으로...." '나의 흔적을 남겨서는 안 돼.' 선물 상자를 받아들고 입구까지 걸어갔던 다나는 문득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모자를 눌러쓰고 손에 무전기를 들고 있는 남자 두 명이 문 밖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보는 순간, 다나는 입술이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다나는 다시 카운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빠뜨리고 가신 게 있나요, 손님!" 상점 직원이 친철히 물었다. "아니에요. 혹시... 여기에서 나갈 수 있는 다른 문이 있나요?" "네, 손님. 여러 개의 문이 있답니다." 다나는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런 소용도 없을 거야. 그들이 모든 출입구를 지키고 있을 게 뻔해.' 이번에는 정말로 빠져나갈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다나는 낡고 초라한 녹색 코트를 입을 여자 한 명이 유리 상자에 들어 있는 스카프에서 눈길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다나는 천천히 그 여자를 향해 걸어갔다. "이 스카프는 정말 아름답죠?" 다나는 스카프가 담긴 유리 상자를 내밀었다. "그래요." 그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들은 두 명의 여자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금 그들의 표적은 아무런 소용도 없는 짓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모든 출입문을 막고 있었다. "나는 당신이 입고 있는 코트가 아주 마음에 들어요. 그건 내가 좋아하는 녹색이에요." 다나가 그 여자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낡은 옷인걸요.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이 훨씬 예뻐요." "어때요? 나와 코트를 바꾸지 않겠어요? 만약 그 코트를 나에게 준다면, 이 스카프도 드리겠어요." 다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제안했다. 그 여자는 너무나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두 남자는 여자들의 대화가 길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날씨 한 번 더럽게 춥군. 빌어먹을! 여자가 빨리 나와서 그만 끝내도록 해주면 좋을 텐데...." 무전기를 들고 잇던 남자가 투덜거리면서 말했다. 그 남자의 동료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저 여자가 우리 손에서 도망칠 수는 없...." 갑자기 남자는 말을 멈추고 기가 막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두 여자가 서로 코트를 바꾸어 입고 있었다. "맙소사! 표적이 달아나기 위해 기를 쓰고 있군. 다른 여자와 코트를 바꾸고 있어. 정말 지겨운 여자로군." 무전기를 든 남자가 씨익 웃었다. 두 명의 여자가 잠시 동안 옷 진열대 뒤로 사라졌다. 남자가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변화가 생겼다. 우리의 표적이 붉은색 코트에서 녹색 코트로 바꾸어 입었다.... 잠깐! 표적이 네 번째 문으로 향하고 있다. 놓치지 말도록!" 두 명의 남자가 네 번째 출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잠시 후에 그들 가운데 한 남자가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표적을 발견했다. 즉시 자동차를 대기하도록...." 그들은 표적이 문을 열고 나와서 차가운 거리로 나가는 것을 바라 보았다. 녹색 코트로 몸을 감싼 여자는 거리를 따라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재빨리 여자의 뒤를 추격했다. 여자는 택시를 부르기 위해 모퉁이에서 멈추어섰다. 갑자기 한 남자가 여자의 팔을 붙잡았다. "택시는 필요없어. 우리가 당신을 위해서 좋은 자동차를 대기시켜 놓았지." 여자는 몹시 당황하면서 그들을 쳐다보았다. "누구세요? 무슨 일이죠?" 남자들 가운데 한 명이 그 여자를 빤히 응시했다. "젠장! 우리가 속았어. 다나 에반스가 아니잖아!" "당연하죠." 여자는 몹시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남자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 후에 여자를 놓아주고 다시 그 상점으로 돌아갔다. 한 남자가 무전기를 눌렀다. "표적이 틀렸다. 표적이 틀렸다. 내 말 알아들었나?" 다른 남자들이 즉시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다나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나는 너무나 끔찍한 악몽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들이 다나를 죽이기 위해 노리고 있었다. 다나는 죽음의 위협에 사로잡힌 채, 두려움으로 거의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택시에서 내린 다나는 뛰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어디로 가려는 생각도 없이 무작정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다나는 파티용품을 파는 상점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 상점 입구에는 이런 글씨가 적혀 있었다. 환상의 나라 어떤 경우에도 어울리느 환상적인 옷들을 구비하고 있습니다. 다나는 재빨리 그 상점으로 들어갔다. 상점 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의상과 가발 그리고 화장품 들이 가득 차 있었다. "뭘 도와드릴까요?" '어서 경찰을 불러요. 그들에게 누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고 말해주세요.' "아가씨?" "아.... 그래요. 금발 가발을 보여주세요." 문득 다나는 정신을 차렸다. "이쪽으로 오세요." 잠시 후에 다나의 머리카락이 치렁치렁한 금발로 변했다. 다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머나! 금발로 바꾸니까 사람이 확 달라보이네요." 직원이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그게 바로 내가 바라는 거예요.' 다나는 현금으로 계산을 한 후에 다시 거리로 나갔다. "오헤어 공항으로 가요." 다나가 택시를 올라타면서 말했다. '케말을 구해야만 해.' 다나의 결심은 확고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레이첼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안녕하세요? 영 박사님? 그런데... 마지막 검사 결과가... 나왔나요?" 제프는 레이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제프는 레이첼이 몹시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전화로 말씀하셔도 돼요. 잠깐만 기다려요." 레이첼은 잠시 제프를 쳐다보면서 심호흡을 한 후에 침실로 전화를 들고 들어갔다. 제프는 희미하게 레이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말씀하세요, 박사님." 얼마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제프가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어서 침실로 들어가려고 할 때, 레이첼이 다시 거실로 나왔다. 레이첼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효과가 있대요! 제프, 암세포들이 죽었어요. 새로운 치료 방법이 효과가 있었어요!" 레이첼은 몹시 흥분하면서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말했다. "좋아! 정말 잘되었어, 레이첼...." 제프가 기쁜 듯이 말했다. "2주일 가량 더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이제 위기는 넘겼애요." 레이첼의 목소리는 기쁨으로 넘쳐 흘렀다. "너무나 기뻐, 레이첼. 축하를 해야지. 내가 당신과 함께...." "그런 건 안 돼요." 레이첼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제프는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더 이상 당신 도움은 필요하지 않아요, 제프." "알아. 난 우리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제프, 이제 그만 당신이 떠나기를 원해요." 제프는 깜짝 놀라면서 레이첼을 쳐다보았다. "레이첼, 이유가 뭐야?" "오, 제프. 당신 기분을 상하게 만들고 싶진 않지만, 이제 난 회복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다시 일을 시작해야죠. 그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에요. 나의 원래 모습이기도 하죠. 매니저에게 당장 전화를 걸어서 일거리가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어요." "하지만 레이첼...." "당신과 함께 여기에 있는 건 답답해서 싫어요. 그동안 나를 도와주어서 고마워요, 제프. 그 점에 대해서는 정말로 고맙게 생각해요. 하지만 이젠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이에요. 나는 일하고 싶어요. 다나가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는 걸 아요. 부탁이에요. 당신도 떠나고 싶어하잖아요?" 제프는 잠시 동안 레이첼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레이첼은 제프가 침실로 들어가서 짐을 싸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20분 후에 제프는 가방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레이첼은 열심히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베티. 2주일만 있으면 본격적으로 활동할 수 있어요.... 알아요. 멋있잖아요?" 제프는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 레이첼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레이첼은 제프에게 손을 잠깐 흔들어 보이고는 다시 전화기를 향해 몸을 돌렸다. "내 조건을 말하겠어요.... 근사한 열대 지방에서 촬영할 수 있도록...." 제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뒤로 돌아섰다. 레이첼은 제프가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문이 닫혔다.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베티와 전화 통화를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냥 혼자 떠들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제프가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레이첼은 창문을 향해 다가갔다. 지금까지 그녀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한 남자가 떠나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영 박사의 말이 아직까지도 레이첼의 귓전에서 맴돌고 있었다. "스티븐 양, 유감지만 좋지 않은 소식입니다. 새로운 치료 방법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암세포가 다른 조직으로 전이 되었습니다.... 진행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한 달이나 두 달이면...." 레이첼은 헐리우드의 감독 로데릭 마르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당신은 여기 온 것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요. 나는 당신을 대스타로 만들 예정이오." 레이첼은 또다시 참기 어려운 고통이 시작되는 것을 느꼈다. '로데릭 마르셀 감독이 방금 내가 한 연기를 보면 아주 만족스러워할 거야.' 다나가 타고 있던 비행기가 워싱턴 덜레스 공항에 착륙했다. 다나는 서둘러 비행기에서 내렸다. 승객들은 무리를 지어서 수화물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나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수상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다나의 신경은 아주 날카로운 상태였다. 다나는 공항 밖으로 나가서 택시에 올라탔다. 다나는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낸 후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금발의 가발이 다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다나는 다시 손거울을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지금 당장 케말을 구해야만 해. 그런데 어떻게 해야 케말을 구할 수 있을까?' 무슨 좋은 방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나는 케말을 그대로 방치할 수가 없었다. 케말은 악몽을 꾸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목이 말랐다. 케말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런데 거실에서 달레이 부인이 어떤 사람과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케말은 아직까지 잠을 자고 있어요. 내가 그 애에게 수면제를 먹였거든요." 케말은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이제 아이를 깨워야 하지 않을까?" 어떤 남자가 말했다. "잠을 자는 동안 옮기는 게 나을 거야." 또 다른 남자가 말했다. "그냥 여기에서 해치워도 돼요. 그런 다음에 시체를 치우면 되니까...." 달레이 부인의 차가운 목소리였다. 갑자기 케말은 잠이 확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잠깐은 살려둬야 해. 에반스를 잡기 위한 미끼로 사용할 셈이야." 케말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심장이 거칠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에반스는 지금 어디에 있어요?" "우리도 확신한 건 몰라요. 하지만 그 여자가 케말 때문에 이곳으로 올 거라는 건 확실해요." 케말은 재빨리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달레이 부인이 지금 자리를 죽이려고 하는 것 같았다. '돼지! 하지만 나를 그렇게 쉽게 해치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지. 사라예보에서도 난 죽지 않았어. 여기에서 허무하게 죽지는 않아.' 케말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렷다. 그리고 미친 듯이 옷을 입기 시작햇다. 케말은 의자 위에 놓아두었던 인공 팔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손이 미끄러지면서 인공 팔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케말의 귀에는 그 소리가 마치 천둥 소리처럼 커다랗게 느껴졌다. 케말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이 우뚝 섰다. 그러나 밖에 있는 사람은 여전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케말은 인공 팔을 부착하고 서둘러 옷을 입었다. 케말은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의 외투는 다른 방에 있었기 때문에 가지고 올 수가 없었다. 케말은 얇은 옷차림으로 창문 위에 올라섰다. 이빨이 딱딱 소리를 내면서 부딪혔다. 화재가 낫을 때, 지상으로 대피할 수 이는 비상 사다리가 보였다. 케말은 거실 창문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지 않도록 허리를 숙이면서 조심조심 사다리를 내려갔다. 마침내 케말은 지상에 닿았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2시 45분이었다. 꼬박 반나절 동안이나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케말은 거리를 향해 달려갔다. "꼬마를 묶어두는 게 좋겠어.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서 말이야." 한 남자가 서재의 문을 열었다. 그는 서재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봐, 애가 어디 있지?" 두 명의 남자와 달레이 부인은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케말이 달아다는 것을 보았다. "아이를 붙잡아!" 케말은 다리에 점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악몽을 꾸고 있는 거야!' 케말은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칼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다리가 저절로 휘청거렸다. 3시에 문들 닫으니까, 그 전에 학교에 도착해야만 해. 그곳에 가면 안전할 거야. 다른 아이들이 있으면 감히 나를 해치지 못할 테니까....' 케말은 이를 악물고 학교로 달려갔다. 빨간 신호등이 켜져 있었다. 케말은 신호를 무시하고 자동차들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곧장 거리를 가로질렀다. 자동차가 경적을 울리면서 급하게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들렸다. 케말은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뛰었다. '켈리 선생님이 경찰에게 전화를 해 줄거야. 그렇게 되면 다나를 보호하겠지.' 케말은 가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가슴에서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케말은 다시 한 번 손목 시계를 힐끗 바라보았다. 2시 55분이었다. 학교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두 블록만 더 가면 돼. 학교 안으로 들어가면 나는 안전할거야.' 케말은 생각했다. '아직까지 수업을 하고 있겠지.' 드디어 케말은 학교 앞에 도착했다. 케말은 교문 앞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교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갑자기 강철같이 단단한 손이 케말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오늘은 토요일이야, 이 바보야." "여기에서 세워주세요." 다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해다. 택시는 다나의 아파트에서 두 블록 가량 떨어진 곳에서 멈추었다. 다나는 택시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나는 온몸의 신경을 바싹 곤두세운 채, 무엇인가 수상한 것이 없는지 조심스럽게 거리를 살펴보았다. 다나는 아파트를 향해 다가갔다. '케말은 안전할 거야. 잭 스톤이 그 애를 보호하고 있을 테니까....' 아파트가 서 있는 모퉁이에 도착하자, 다나는 정면 계단을 피해서 건물 뒤쪽으로 통하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뒷골목은 황량했다. 다나는 아파트 뒷문으로 들어가서 조용히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잠시 후에 다나는 이층에 도착했다. 그녀는 갑자기 발걸음을 딱 멈추었다. 아파트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순식간에 두려운 생각이 다나를 엄습했다. 다나는 허둥지둥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케말!"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나는 아파트 안을 미친 듯이 돌아다니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잭 스톤은 어디에 있지? 케말은 어디에 있는 거야?' 문득 다나는 부엌 씽크대 바닥에 약봉지가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게 뭐지?" 다나는 약봉지를 집어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봉직 바닥에 하얀 가루가 약간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다나는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런 약이 어디에서 난 걸까? 이건 무슨 약이지?' 다나는 재빨리 부엌 선반과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두 번째 서랍을 여는 순간, 서랍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그 안에 담겨 있던 내용물이 쏟아졌다. 하얀 가루약이 담겨 있는 약봉지 몇 개가 나타났다. 다나는 그 중에서 하나를 집어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다나는 약봉지에 적혀 있는 글씨를 읽어보았다. 부스파 15mg 정제 NDC D087 D833-32 다나는 몹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게 뭘까? 달레이 부인이 복용하는 약일까? 혹시 달레이 부인이 케말에게 이걸 먹인 게 아닐까?' 다나는 약봉지를 다시 자신의 코트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이것 때문에 케말의 행동이 변했던 것일까?' 다나는 그동안 케말의 행동을 떠올려보면서 서둘러 아파트에서 빠져나갔다. 뒷문을 통해서 거리로 나간 다나가 모퉁이를 돌았을 때,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한 남자가 모퉁이 반대편에 있는 동료에게 무전기로 연략했다. 다나는 길을 가다가 워싱턴 약국을 발견했다. 그녀는 얼른 약국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 에반스 양.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약사가 다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네, 코티나. 이 약이 무슨 약인지 궁금해서...." 다나는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약봉지를 꺼냈다. "부스파로군요. 신경 안정제예요. 물에 녹으면 색깔이나 맛이 전혀나지 않죠." 약사가 상표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 약은 무슨 작용을 하죠?" 다나가 궁금해서 물었다. "이건 신경 안정 효과가 있는 약이에요. 우울증이나 불안감을 해소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죠. 물론 과다 복용하면 졸립고 몸이 나른한 상태가 되죠." "케말은 지금 낮잠을 자고 있어요. 깨울까요? 그 총각이 학교에서 돌아온 후에 무척 피곤한 것처럼 보이더군요. 그래서 내가 낮잠을 좀 자라고 말했어요." 다나는 비로소 지금까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달레이 부인은 파멜라 허드슨이 보낸 사람이었다. '케말.... 반드시 그 나쁜 여자의 손에서 케말을 구출하고 말겠어.' 다나는 케말이 당한 일을 생각하면서 치를 떨었다. "고마워요, 코티나." 다나가 약사에게 말했다. "천만에요, 에반스 양." 다나는 약국에서 나온 후에 다시 거리로 나섰다. 두 명의 남자가 다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에반스 양, 잠깐 이야기를...." 다나는 몸을 돌려서 무조건 달리기 시작했다. 남자들이 다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다나는 그 남자들을 따돌릴 수가 없었다. 그들 손에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잠시 후에 다나는 거리 모퉁이에 도착했다.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망설여졌다. 그런데 교차로에서 어떤 경찰이 밀리는 차량들을 정리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도로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이봐요!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어서 돌아가요, 아가씨." 다나는 그말을 무시한 채, 계속 경찰을 향해서 달려갔다. "아가씨, 신호를 위반했잖소! 빨리 돌아가도록 해요!" 두 명의 남자는 모퉁이에 그대로 우두커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당신, 정신이 나갔소?" 경찰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닥쳐요!" 다나는 경찰의 얼굴을 힘껏 후려쳤다. 화가 치민 경찰이 다나의 팔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당신을 체포하겠소." 경찰은 다나를 도로 가장자리로 끌고 갔다. 경찰은 다나의 팔을 붙잡은 채,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경찰서까지 연행해야 할 사람이 있다. 지금 당장 이곳으로 순찰차를 보내라." 다나를 쫓아오던 두 남자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서로 얼굴만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다나는 그들을 쳐다보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순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더니, 잠시 후에 경찰차 한 대가 다나 앞에 멈추어섰다. 두 남자는 무기력하게 다나를 태운 경찰차가 떠나 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다나는 경찰서에 도착했다. 다나는 당당한 태도로 경찰에게 요청했다. "최소한 전화 한 통 걸 수 있는 권리는 있겠죠?" 경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경사는 다나에게 전화기를 내밀었다. 다나는 재빨리 전화번호를 눌렀다. 한 남자가 마구 몸부림치는 케말을 붙잡고 리무진이 있는 곳으로 끌고 갔다. 리무진은 당장이라도 출발할 수 있도록 시동을 걸어놓고 대기 중이었다. "놔줘요! 빨리 이걸 놓으란 말이에요!" 케말이 발버둥을 치면서 반항했다. "입 닥쳐, 꼬마야." 네 명의 해병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아저씨랑 뒷골목으로 들어가기 싫단 말이에요!" 케말은 목청이 터질 정도로 고함을 질렀다. 그 남자는 몹시 당황하여 케말을 쳐다보았다. "뭐라구?" "제발 저를 뒷골목으로 데려가지 마세요. 저는 그런 일이 싫어요." 해병들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 아저씨가 저에게 5달러를 주면서 함께 뒷골목으로 들어가자고 해요. 하지만 저는 가기 싫어요." 케말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해병들을 쳐다보았다. "이런! 더러운 변태...." 해병들이 주먹을 불끈 쥐면서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런게 아니야! 잠깐 기다려. 당신들은 오해를...." 그 남자가 뒷걸음을 치면서 말했다. "그래. 우리가 상대해주마. 이 나쁜 자식아! 당장 그 아이를 잡고있는 더러운 손을 떼지 못해?" 해병들 가운데 한 명이 그 남자를 향해 다가오면서 말했다. "지금 나는...." 그 남자는 손을 내저으면서 변명했다. 해병들이 그 남자를 빙 둘러쌌다. 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올리면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케말은 재빨리 달아났다. 피자를 배달하는 소년이 길 가에 자전거를 세운 다음, 맞은편에 있는 집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케말은 재빨리 그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껏 자전거의 폐달을 밟았다. 피자 배달 소년이 몹시 당황하여 뒤에서 큰 소리로 곰하을 질렀지만, 케말은 순식간에 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지고 말았다. 한편 해병들은 점점 원을 좁히면서 남자를 향해 다가섰다. 경찰서. 유치장의 문이 철컹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나가도 좋습니다, 에반스 양. 보석 석방입니다." 다나는 생각했다. '매트가 보석금을 지불했구나! 전화하길 잘했어. 매트가 나를 풀어주기 위해 즉시 손을 쓴거야.' 다나는 문을 향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나는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 우뚝 멈워 서고 말았다. 공항에 다나를 추격했던 남자들 가운데 한 명이 문 앞에 버티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 남자는 다나에게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이제 자유로운 몸이오, 아가씨. 그러니까 나와 함께 갑시다." 다나는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경찰들은 저마다 다른 일을 처리하기에 바빴다. 다나에게 관심을 갖고 잇는 경찰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다나는 비명을 지를까 생각도 했지만, 금방 체념하고 말았다. 남자가 재빨리 다나에게 다가와서 옆구리에 뭔가 차갑고 딱딱한 것을 들이되었기 때문이었다. "순순히 나를 따라오는 게 좋을 거야." 남자는 다나의 팔을 힘주어 꽉 붙잡더니 출구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나는 제대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에 그들은 경찰서 밖으로 나왔다. 그 순간 남자는 몹시 당황하여 걸음을 멈추었다. WTN 텔레비전전전 방송국 직원들이 경찰서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이쪽을 봐요, 다나...." "다나, 당신이 경찰 뺨을 때린 게 사실이에요?" "무슨 일인지 상황을 설명하겠어요?" "경찰이 당신을 괴롭혔나요?" "벌금을 내야 하나요?" 사방에서 카메라 불빛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서둘러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왜 그래요? 당신 얼굴이 뉴스에 나가는 게 싫은가요?" 다나가 그 남자를 비웃었다. 남자는 어느새 도망쳤다. 매트 베이커가 다나에게 다가오면서 말했다. "다나, 이 빌어먹을 곳을 빠져나가자구!" 그들은 WTN 건물에 있는 매트 베이커의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엘리어트 크롬웰과 매트 베이커 그리고 애브 라스맨은 충격을 받고 입을 굳게 다문 채, 벌써 30분 동안이나 다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FRA 역시 이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그래서 부스터 장군은 내가 이 일에 대해 조사하고 다니는 거을 막으려고 했던 거예요."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요. 도대체 우리가 테일러 윈스롭에 대해서 얼마나 잘못 알고 있었던 거요? 미국에서 성자처럼 추앙받고 있는 그런 인물이.... 지금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오. 이건 우리끼리 해결할 문제가 아니란 말이오. 나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백악관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오. 당장 법무장관과 FBI에 전화를 겁시다. 엘리어트 크롬웰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어트 사장님, 그건 무리예요.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증거라고는 로저 허드슨에 대한 나의 진술뿐이에요, 누가 나의 말만 듣고 그런 엄청난 일을 믿으려고 하겠어요?" 다나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증거가 없나요?" 애브 라스맨이 잔뜩 긴장하면서 물었다. "러시아에 있는 샤샤 쉬다노프의 남동생이 있어요. 그는 모스크바 대사로 미국에 근무하고 있으니까, 쉽게 러시아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거예요. 보리스만 찾을 수 있다면 모든 사실들에 대해 증언할 수 있을거에요. 일단 실마리는 잡혔지만, 전체적인 상황은 이제부터 밝혀야 해요." 다나가 차분히 설명했다. "당신 혼자의 힘으로 이 모든 사실을 밝혀내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오, 다나. 이제 간신히 한 고비를 넘겼는데, 다시 한 고비를 넘어야 하는군." 매트 베이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면서 감탄스러운 눈빛으로 다나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매트, 케말은 어떻게 하죠? 어디에서 케말을 찾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나는 긴장한 눈빛으로 매트를 응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다나. 우리가 아이를 찾아보겠소. 그동안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고에 당신이 숨을 만한 장소를 마련해야겠소." 매트 베이커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아파트를 쓰도록 해요. 아무도 당신이 그곳에 숨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할 거예요." 애브 라스맨이 말했다. "고마워요, 애브." 다나는 다시 매트 베이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매트, 케말을...." "지금 당장 FBI에 연락을 하겠소. 그리고 당신이 무사히 애브의 아파트에 도착할 수 있도록 운전사를 붙여주겠소, 다나. 모든 일이 잘 해결될 거요. 소식이 있으면 내가 곧바로 당신에게 연락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요." 얼음철머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케말은 불안한 시선으로 계속 뒤를 확인하면서 달려갔다. 다행스럽게도 케말을 따라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다나에게 가야만 해.' 케말은 필사적으로 폐달을 밟았다. '그 사람들이 다나를 해치게 할 수는 없어.' 하지만 아직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WTN 방송국이 워싱턴 시내 반대쪽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전거로 간다면, 도착하기 전에 해가 저물 것 같았다. 버스 정거장에 도착하자, 케말은 자전거에서 내린 후에 풀밭 위로 자전거를 내던졌다. 버스가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케말은 호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 넣었다. 호주머니 속은 텅 비어 있었다. 돈이 한 푼도 없었던 것이다. 케말은 지나가는 행인에게 몸을 돌렸다. "죄송합니다, 돈을 좀...." "꺼져, 꼬마야." 케말은 길 가던 여자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죄송합니다. 버스 요금이 필요한데...." 여자는 케말을 뿌리치면서 그대로 지나쳤다. 케말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서 외투도 없이 덜덜 떨었다. 케말을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버스 요금을 꼭 구해야만 해.' 케말은 자신의 인공 팔을 떼어서 얼른 감추었다. 한 남자가 잔뜩 어깨를 움츠리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케말은 일부러 팔이 없는 어깨가 잘 보이도록 하면서 그 남자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아저씨. 버스를 탈 수 있도록 돈을 좀 주실래요?" 남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남자의 시선이 케말의 축 늘어진 오른쪽 소매로 쏠렸다. 금방 남자의 표정이 부드럽게 변했다. "그래." 남자는 케말에게 1달러를 주었다. "고맙습니다." 케말은 인사를 하면서 그 돈을 받아들었다. 남자가 다시 길을 가는 것을 보고, 케말은 재빨리 인공 팔을 다시 끼웠다. 버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드디어 해냈어.' 케말은 몹시 기뻤다. 바로 그 순간 케말은 뒷덜미에서 따금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몸을 돌리는 순간, 눈앞이 흐려지면서 모든 것이 뿌옇게 보였다. 케말은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안 돼! 안 돼!' 케말은 의식을 잃고 차가운 땅바닥 위로 쓰러졌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에요?" "의식을 잃었나요?" "아이는 괜찮아요?" "내 아들은 당뇨병 환자요." 한 남자가 말했다. "어서 빨리 아이를 병원으로 데려가야겠소." 나마자는 케말을 번쩍 안아들더니 미리 대기하고 있던 리무진으로 옮겼다. 애브 라스맨의 아파트는 워싱턴 북서쪽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곳은 현대적인 설비가 갖추어진 고급 아파트였다. 아파트의 내부는 요즘 유행하는 동양풍의 검은색 가구들과 하얀색 양탄자로 꾸며져 있었다. 다나는 이리저리 서성거리면서 초조한 심정으로 전화벨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케말은 무사할 거야. 그들이 케말을 해칠 이유가 없어. 그래, 괜찮을 거야. 도대체 케말은 어디에 있는 거지? 왜 아직까지도 케말을 찾지 못하는 거야?'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다나는 수화기를 낚아채듯이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하지만 다나는 신호음만을 들을 수 있었다.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비로소 다나는 그 전화벨 소리가 휴대폰에서 울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나는 마음이 놓였다. 서둘러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제프?" 로저 허드슨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소, 다나. 케말은 내가 보호하고 있소." 다나는 마치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다나는 몸을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로저...." 다나는 신음하듯이 속삭였다. "내가 얼마나 더 이곳에 있는 친구들을 통제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들은 케말의 팔을 마저 자르고 싶어서 안달하고 있어. 자, 어떻게 하겠소?" "안 돼!" 다나는 비명을 질렀다. "당신이... 당신이 원하는 게 뭐죠?" "난 그저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야." 로저 허드슨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난...." "다나, 지금 바로 우리 집으로 오시오. 하지만 조건이 있소. 당신 혼자 왔으면 좋겠군. 만약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온다면, 케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나는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로저!" "30분 안으로 오도록 하시오." 전화가 끊어졌다. 다나는 여전히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다나는 두려움으로 인해 온몸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케말에게 무슨 일이 생겨선 안 돼! 절대로!' 다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매트 베이커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자동 응답기가 전화를 받앗다. "매트 베이커의 사무실입니다. 저는 지금 자리에 없습니다. 메시지를 남겨주시면 돌아오는 대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삑! 신호음이 울렸다. 다나는 심호흡을 한 후에 용건을 말했다. "매트, 방금... 방금 로저 허드슨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어요. 그 사람이 케말을 잡아두고 있어요. 나는 지금 그 집으로 갈 거예요. 케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발 서둘러주세요. 경찰을 불러요. 빨리!" 다나는 문을 열고 나갔다. 애브 라스맨은 매트 베이커의 사무실에서 편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매트의 책상 위의 몇 통의 편지를 올려놓았다. 그런데 매트 베이커의 전화기에서 메시지가 녹음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불빛이 반짝거렷다. 애브 라스맨은 매트 베이커의 비밀번호를 눌러서 녹음된 내용을 확인했다. 다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애브 라스맨은 조용히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다음에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면서 삭제 단추를 눌렀다. 마침내 비행기가 덜레스 공항에 착륙했다. 제프는 다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내내 제프는 다나의 목소리에서 느꼈던 이상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만약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발 잊어버리지 마세요. 내가 언제나 당신을...." 다나의 말이 계속 제프의 마음을 괴롭혔다. 제프는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다나는 휴대폰을 받지 않았다. 제프는 서둘러 다나의 아파트로 달려갔다. 마구 문을 두드렸지만, 역시 응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제프는 택시를 타고 WTN으로 향했다. "어머나, 제프! 반가워요." 애브 라스맨이 호들갑을 떨면서 말했다. "고마워, 애브." 제프는 서둘러 매트 베이커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매트 베이커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마참내 돌아왓군. 그래, 레이첼은 어떤가?" 제프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다행이군." 제프는 다시 숨 돌릴 틈도 없이 질문을 던졌다. "다나는 지금 어디에 있죠?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요." 매트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맙소사! 지금까지 자네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일이죠?" "다나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말이야?" "어서 말 좀 해보세요." 제프가 다급한 목소리로 매트를 재촉했다. 애브 라스맨은 닫힌 문 뒤에서 바싹 귀를 대고 그들의 말을 엿듣고 있었다. 애브 라스맨은 대화 내용을 토막토막 엿들을 수 있었다. "다나의 생명을 노리는... 샤샤 쉬다노프... 크라스노야르스크-26... 케말... 로저 허드슨...." 애브 라스맨은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말이 오고 가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자기 책상으로 돌아가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잠시 뒤, 애브 라스맨은 로저 허드슨관 통화했다. 매트 베이커의 설명을 듣고, 제프는 기가 막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요." "모두 사실이야." 매트 베이커가 단언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지금 다나는 애브의 집에 잇어. 내가 애브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보라고 지시하겠네." 매트 베이커가 인터폰은 누르는 순간,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잇는 애브 라스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매트 베이커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제프가 지금 여기에 있어요. 제프는 다나를 찾고 있어요. 그러니까 제 생각에 따르면... 다나를 그곳에서 데리고 나오는 게 좋겠어요 사람들이 저의 아파트로 갈 테니까.... 알았어요. 제가 알아보죠, 허드슨씨. 만약...." 매트와 제프는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애브 라스맨은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재빨리 몸을 돌렸다. 매트와 제프가 무서운 눈빛으로 애브 라스맨을 노려보고 있었다. "애브.... 당신이 다나를 팔아먹다니...." 매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 당장 허드슨의 집으로 가보겠어요. 자동차가 필요해요." 제프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매트를 쳐다보았다. 매트는 창 밖으로 흘끗 시선을 던졌다. "지금은 이미 틀렸어. 시간에 맞춰 허드슨의 집에 도착하는 건.... 도로가 차들로 꽉 막혀 있어." 그 순간 그들의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의 날개 소리가 들렸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WTN 헬리콥터가 막 옥상에 착륙하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25 악의 종말 다나는 애브 라스맨의 아파트에서 나와 택시르 잡았다. 하지만 영원히 허드슨의 집에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거리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혼잡했다. 자동차들이 도로를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늦게 도착하면 어떻게 하지?' "빨리 서둘러요." 다나가 택시 운전사에게 호소했다. 택시 운전사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백미러를 통해 다나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이 차는 비행기가 아닙니다." 다나는 뒷자리에 앉아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곰곰히 생각했다. 다나는 두려움으로 인해 온몸이 덜덜 떨렸지만, 머리는 점차 맑아졌다. '지금 쯤이면 매트가 나의 메시지를 받고 경찰을 불렀을 거야. 내가 그곳에 도착할 무렵이면, 이미 경찰도 와 있을 거야. 만약 경찰이 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시간을 끌어야만 해. 경찰이 올 때까지....' 다나는 핸드백을 열었다. 다행스럽게도 여전히 후춧가루 분사기를 갖고 있었다. '좋아!' 다나는 순순히 허드슨 부부에게 당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오후 6시. 허드슨의 집에 도착한 다나는 경찰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나는 두려움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처음 다나가 이 집에 왔을 때, 로자와 파멜라는 몹시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들은 다나와 케말에게 너무나 잘 대해주었다. 그런데 그들은 지독한 위선자였으며, 살인을 일삼는 잔혹한 괴물이었다. 바로 그들이 케말을 납치했다. 다나는 참을 수 없는 증오심을 느꼈다. "금방 나오실 건가요? 제가 기다릴까요?" 택시 운전사가 다나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아뇨." 다나는 택시 요금을 지불한 뒤 현관으로 걸어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심장이 마구 뛰고 있었다. 잠시 후에 세자르가 문을 열엇다. 다나를 보자, 세자르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에반스 양." 다나는 불현듯 자신에게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나는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세자르." 세자르는 커다란 손을 내밀더니 다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 "반갑습니다, 에반스 양." 세자르가 조금도 변함없이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반가워요." 다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유순하고 맑은 세자르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다나는 세자르가 반드시 그녀를 도와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세자르는 사악한 주인의 정체를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상냥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다나를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나는 마음이 든든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어느 순간에 세자르의 도움을 요청할 것인지 결정하는 일이었다. 다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말을 꺼냈다. "세자르...." "허드슨 씨가 지금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에반스 양." 세자르가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알았어요." 지금은 적절한 때가 아니었다.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세자르에게 지금까지 벌어졌던 모든 일들을 자세하게 설명할 만큼 틈이 없었다.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세자르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다나는 세자르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나는 처음 이 복도를 걸어갔떤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날 이후로 다나에게는 도무지 현실 같지 않은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던 것이다. 마침내 그들은 서재에 도착했다. 로저는 책상에 앉아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에반스 양입니다." 세자르가 로저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로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다나는 세자르가 뒤로 돌아서 복도를 걸어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당장이라도 다시 세자르를 불러 세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자, 다나.... 안으로 들어오시오." 다나는 서재로 발걸음을 옮기며 로저를 본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솟아올랐다. "케말은 어디 있어요?" 다나가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 그 귀여운 소년." 로저 허드슨이 음산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로저, 경찰이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어요. 만약 케말과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건 바로 당신이...." "글쎄.... 내가 경찰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로저 허드슨이 다나를 향해 뚜벅뚜벅 다가오고 있었다. 로저는 순식간에 다나의 핸드백을 빼앗았다. 그는 핸드백을 열고 안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파멜라가 나에게 당신이 후춧가루 분사리르 갖고 있다고 말해주더군. 이곳으로 오는 동안 아주 많은 궁리를 한 모양이군. 안 그렇소, 다나?" 후춧가루 분사기를 찾아낸 로저 허드슨은 재미있다는 듯이 빙글빙글 웃었다. "재미있는 장난감이군. 어디 한번 써볼까?" 로저 허드슨은 다나가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에 대고 후춧가루를 분사했다. 다나는 고통스러워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로저 허드슨이 껄걸 웃으면서 말했다. "이런! 당신은 아직까지 공통이 뭔지 모르는 모양이군. 다나, 하지만 내가 약속하지. 곧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거야." 다나의 얼굴 위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다나는 후춧가루를 닦아내려고 노력했다. 로저는 다나가 후춧가루를 닦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한 번 그녀의 얼굴에 대고 후춧가루를 분사했다. 다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소리쳤다. "케말을 만나게 해줘요." "물론 그래야지. 케말도 당신을 보고 싶어하더군. 그 아이는 겁을 잔뜩 집어먹었지. 다나, 그렇게 겁에 질린 모습을 나는 처음 보았소. 그 아이는 자기가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땨문이지. 나는 그 아이에게 당신도 곧 죽을 거라고 말해 주었소." "어떻게 그런 짓을...." "당신은 자신이 꽤 영리하다고 생각했겠지. 그렇지 않은가, 다나? 그런데 사실은 말이야. 당신은 너무 순진했어. 우리는 당신을 교묘하게 이용했던 거야. 우리는 러시아 정부 내에서 누군가 우리의 일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챘지. 그건 우리의 정체가 곧 노출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거야. 그래서 그 사람을 제거하기록 결정했지. 그런데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찾을 수가 없었어. 그 사람은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었거든. 절대로 다른 사람을 믿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당신이 고맙게도 우리를 위해서 그 사람을 찾아주었던 거야. 알게소?" 다나의 머릿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샤샤 쉬다노프와 그의 여자 친구 모습이 떠올랐다. "샤샤 쉬다노프와 그의 동생 보리스는 매우 영리했지. 우리는 아직까지 보리스의 행방을 찾아내지 못했어. 하지만 곧 찾아낼 수 있을거야." 로저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저, 케말은 이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제발 그 애를...." "아니야. 내 생각은 달라. 당신이 비참한 최후를 맞은 조안 시니시를 만났을 때부터 나는 당신을 경계하기 시작햇지. 그 여자는 테일러가 러시아 계획에 대해서 전화로 통화하는 내용을 엿들었기 때문이야. 테일러는 조안 시니시가 자신의 비서였기 때문에 그녀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어. 잘못하다가는 애써 쌓아올린 자신의 명성에 금이 갈 수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테일러는 조안 시니시를 해고했어. 하지만 그녀는 부당 해고를 당했다고 하면서 소송을 걸었지. 테일러는 조안 시니시에게 거액을 주었어. 그 문제에 대해 영원히 입을 다물겠다는 조건을 달고 그녀와 타협했던 거야. 그리고 조안 시니시는 아무런 말썽도 없이 잘 지내고 있었어. 그 아름다운 아파트에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리며.... 적어도 당신이 들쑤시고 다니기 전까지는 말이야." 로저 허드슨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그러니까 유감스럽게도 조안 시니시의 사고에 대한 책임은 당신에게 있는 거야." "로저, 잭 스톤도 이 사실을 알고...." 로저 허드슨이 고개를 흔들었다. "잭 스톤과 그의 부하들은 계속 당신의 모든 행동을 감시하고 있었어. 우리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당신을 죽일 수가 있었지. 하지만 당신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공할 때까지 기다렸던 거야. 우리는 당신을 최대한 이용한 거지." "제발 케말을 만날 수 있도록 해줘요." 다나는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너무 늦었어, 다나. 가엾은 케말이 불행한 사고를 당해야 하다니.... 마음이 무척 아프군." 다나는 경악에 찬 눈길로 로저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짓을...." "케말에게는 매우 안된 일이자만, 파멜라와 나는 케말의 불쌍하고 짧은 인생을 근사하고 작은 화재 사고로 끝내주기로 결정했소. 그래서 우리는 케말을 다시 학교로 보냈지. 그 버릇없는 꼬마를 아무도 없는 학교 안에 집어넣은 거요. 아주 작은 유리창만 달려 있는 지하실 바닥에 가두었지...." 다나는 맹렬한 분노가 솟구쳤다. "당신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열한이군. 하지만 결코 당신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 "아니, 모든 일이 잘될 거요. 내가 장담하지, 다나. 도대체 뭘 믿고 있는 거요? 아직까지도 모든 일이 우리의 생각대로 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모하고 있소!" 로저 허드슨은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서 벨을 눌렀다. 잠시 후에 세자르가 나타났다. "네, 허드슨 씨." "자네가 에반스 양을 감시하고 있게. 우연한 사고를 당할 때까지는 살아 있어야만 하네." 세자르는 이런 명령을 듣고도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허리를 숙이면서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네, 허드슨 씨,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그래! 세자르도 한패였어.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잖아? 세자르를 믿었던 내가 바보였어.' 다나는 마치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로저, 내 말을 들어요...." 세자르는 다나의 팔을 붙잡더니 우악스럽게 서재에서 끌어내기 시작했다. "로저!' "잘기사오, 다나." 세자르는 다나를 끌고 리무진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다나는 아득한 절망감으로 눈앞이 깜깜해다. WTN 헬리콥터가 허드슨의 집 가까이로 접근했다. 제프가 노먼 브론슨에게 말했다. "잔디밭 위에 착륙시키게. 그리고...." 우연히 지상을 내려다보던 제프는 세자르가 다나를 끌고 리무진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안 돼! 기다려." 리무진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까?" 브론슨이 제프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리무진을 따라가자구." 리무진은 속도를 내면서 달리고 있었다. 다나는 세자르에게 호소하듯이 말했다. "제발 부탁이에요. 나를 놓아주세요. 당신은 이런 일을 하고 싶지 않을 거예요, 세자르. 나는 알아요, 당신...." "닥쳐, 에반스." 세자르가 거칠게 말했다. "내 말을 들어요, 세자르. 당신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몰라요. 그들은 살인자들이에요. 당신은 선량한 사람이에요. 허드슨이 당신에게 억지로...." "허드슨 씨는 나에게 어떤 일도 강요하지 않아. 나는 허드슨 부인을 위해서 일할뿐이지." 세자르는 백미러로 다나를 쳐다보면서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다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어.'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죠?" "록 크리크 공원으로...." 세자르는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나는 세자르의 속셈을 충분히 알 수가 있었다. '그곳에서 당신을 죽일 거야.' 로저 허드슨, 파멜라 허드슨, 잭 스톤 그리고 달레이 부인은 스테이션 왜건을 타고 워싱턴 국립 공항으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러시아로 떠날 예정이었다. "이미 비행기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조종사가 모스크바까지 우리를 데리로 갈 것입니다." 잭 스톤이 로저에게 말했던. "맙소사! 난 추운 날씨는 질색이야. 그런데 이런 겨울에 러시아까지 가야 한다는 거야? 나를 이렇게 만든 그 빌억먹을 여자는 반드시 지옥으로 떨어져야만 해." 파멜라 허드슨이 화를 내면서 소리쳤다. "그런데 케말은 어떻게 처리할 건가?" 로저 허드슨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20분 이내에 학교에 불이 나도록 장치를 해두었습니다. 꼬마는 지하실에 있습니다. 강력한 진정제 덕분에 아주 얌전하게 되었지요." 잭 스톤이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다나는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록 크리크 공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거리를 지나다니는 자동차들도 드물었다. 로저의 목소리가 다나의 귓전에서 울리고 있었다. "케말도 당신을 보고 싶어하더군. 그 아이는 겁을 잔뜩 집어먹었지. 다나, 그렇게 겁에 질린 모습을 나는 처음 보았소. 그 아이는 자기가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잇기 때문이지. 나는 그 아이에게 당신도 곧 죽을 거라고 말해주었소." 헬리콥터는 계속 리무진의 뒤를 추적하고 있었다. "방향을 바꾸는군, 제프. 아무래도 록 크리크 공원으로 가는 것 같은데?" 노먼 브론슨이 제프에게로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절대로 놓치면 안 돼." FRA 본부. 부스터 장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잭 스톤, 그 녀석이 여기에서 무슨 빌어먹을 짓을 저지르고 있었던 건가?" 부슨터 장군이 보좌관들 가운데 한 명에게 물었다. "제가 보고하겠습니다, 장군님. 스톤 소령은 우리의 정예 요원들 중에 몇 사람을 뽑아서 로저 허드슨과 관련된 일에 투입시켰습니다. 그들은 다나 에반스를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보좌관이 서둘러 컴퓨터를 작동시켰다. 잠시 후에 다나가 벌거벗고 브라이덴바체 호프 호텔의 욕실에서 샤워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부스터 장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제기랄!" 부스터 장군은 보좌관을 향해 몸을 돌렸다. "스톤은 지금 어디에 있나?" "사라졌습니다. 아무랟 허드슨과 함께 미국에서 탈출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부스터 장군은 짤막하게 지시를 내렸다. "빨리 공항으로 가자." 노먼 브론슨이 헬리콥터를 조종하면서 말했다. "그들이 공원으로 가고 있어, 제프. 일단 공원으로 들어가면 나무 때문에 헬리콥터는 착륙할 수가 없네." "어떻게 해서든지 저 자동차를 세워야만 해. 자동차 앞의 도로에 헬리콥터를 착륙시킬 수 있겠니?" 제프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좋아, 하게." 노먼 브론슨이 조종간을 앞으로 밀자, 헬리콥터가 점차 하강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헬리콥터가 도로에 착륙했다. 헬리콥터는 20미터 전방에서 리무진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리무진이 다급하게 멈춰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엔진을 끄게." 제프가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그럴 수는 없어. 만약 저 녀석이...." "당장 엔진을 꺼." 노먼 브론슨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제프를 쳐다보았다. "지금 자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잇는지 분명히 알고 았는 건가?" "아니." 제프가 리무진을 노려보면서 대답했다. 제프의 머릿속에는 오직 다나 생각뿐이었다. 노먼 브론슨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엔진을 껐다. 헬리콥터의 날개가 서서히 회전을 멈추었다. 제프는 조종실 유리창을 통해 리무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세자르가 리무진이 뒷문을 열었다. 그는 다나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으면서 말했다. "당신 친구가 우리를 곤경에 빠드리기 위해 기를 쓰는군." 세자를 주먹을 들어서 다나의 턱을 세게 갈겼다. 다나는 털썩 의자에 쓰러지면서 의식을 잃었다. 세자르는 헬리콥터를 향해서 저벅저벅 다가왔다. "놈이 오는데...." 노먼 브론슨이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맙소사! 저 녀석은 거인이야." 세자르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세자르의 눈빛이 사냥감을 노리고 있는 맹수처럼 사납게 빛났다. "제프, 저 녀석이 총을 갖고 있어. 우리를 죽일 거야." 노먼 브론슨이 어쩔 줄을 모르면서 소리쳤다. "너와 네 두목은 반드시 감옥에 갈 거다, 이 개자식아!" 제프가 세자르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넌 이제 끝장이야. 포기하는 게 좋아." 세자르의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세자르와 헬리콥터의 거리는 15미터 가량 떨어져 있었다. "너는 아마 어린 남자애들을 좋아하겠지." 거리가 10미터로 좁혀졌다. 세자르는 몹시 화가 난 것 같았다. "너는 그 짓을 놓아할 거야. 안 그래, 세자르?" 세자르는 제프를 노려보면서 헬리콥터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5미터. 제프는 엄지손가락을 힘껏 시동 단추를 눌렀다. 헬리콥텁의 거대한 날개가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자르는 미처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눈은 오직 제프를 향하고 있었다. 세자르는 눈빛 속에서 불길처럼 뜨거운 증오심이 타오르고 있었다. 헬리콥터의 날개가 점점 더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제프는 세자르를 더욱 자극했다. 헬리콥터의 문을 향해 달려오던 세자르는, 그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세자르는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턱!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제프는 눈을 감았다. 헬리콥터의 외부가 금방 피와 살점으로 뒤덮였다. 붉은 피가 헬리콥터의 내부에 스며들었다. "토할 것 같아." 노먼 브론슨이 고개를 돌리면ㅅ 말했다. 노먼 브론슨은 다시 헬리콥터의 시동을 껐다. 제프는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세자르의 시체를 흘끗 쳐다보았다. 목이 없는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제프는 서둘러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리진을 향해 달려갔다. 제프는 리무진의 문을 열었다. 다나! 뒷좌석에 쓰러져 있는 다나의 모습이 보였다. "다나.... 다나...." 다나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다나는 제프를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케말이...." 저 멀리 링컨 사립학교가 보이기 시작했다. 리무진을 운전하던 제프가 손을 들어올리면서 다급하게 소리쳤다. "저기를 봐!" 학교 건물에서 검은 연기와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다나의 말대로 놈들이 학교에 불을 질렀어." 제프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 안 돼!" 다나가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케말이 저 안에 있어요. 케말이 지하실에 갇혀 있어요." 잠시 후에 리무진이 링컨 사립학교에 도착했다. 짙은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십여 명의 소방관들이 불을 끄고 있었다. 제프는 리무진에서 내리자마자 화재가 난 곳으로 달려갔다. 한 소방관이 제프를 제지했다. "더 이상 가까이 접근하면 안 됩니다." "저 안에 아무도 없나요?" 제프가 다급하게 물었다. "아무도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토요일이기 때문에.... 지금 막 현관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는 중입니다." "아닙니다. 지하실에 아이가 한 명 있어요." 제프는 현관을 지나서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소방관은 제프를 말릴 틈이 없었다. 건물 안은 온통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제프는 케말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지만, 나오는 것은 오직 기침뿐이었다. 제프는 손수건을 코에 대고 복도를 따라 달려서 지하실과 이어지는 계단으로 향했다. 자욱한 연기가 시야를 막았다. 제프는 계단 난간을 더듬거리면서 지하실로 내려갔다. "케말!" 제프는 목청이 터질 정도로 케말을 불렀다. 하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케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문득 제프는 지하실에서 희미한 형체를 발견했다. 제프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 물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숨을 쉬는 것이 무척 고통스러웠다. 하마터면 제프는 중심을 잃고 케말의 몸 위로 넘어질 뻔했다. 제프는 케말을 흔들었다. "케말! 정신 차려라!" 소년은 전혀 의식이 없었다. 제프는 안간힘을 쓰면서 케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계단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짙은 연기 때문에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만 같았다. 제프는 숨을 쉬는 것이 몹시 힘들었다. 전혀 앞이 보이지 않았다. 제프는 케말을 두 팔로 끌어안은 채, 무거운 기세로 휘몰아치는 검은 연기 사이를 해치면서 비틀비틀 걸었다.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도저히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제프는 계단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제프는 케말을 거의 끌다시피 하면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출구가 있는 곳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프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면서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마침내 부스터 장군이 워싱턴 국립 공항에 도착했다. 부스터 장군은 공항 책임자 네이선 노베로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로저 허드슨은 비행기 안에 있소?" "네, 장군님. 지금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을 겁니다. 벌써 이륙할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이륙을 중지키도록 하시오." "무슨 말이죠?" "관제탑을 불러서 이륙을 중지시키란 말이오." "네. 장관님." 네이선 노베르는 즉시 관제탑을 호출했다. "관제탑, 걸프 스트림 R3487의 이륙을 중지시켜라." "이미 활주로로 진이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습니다." 항공 관제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관제 승인을 취소하란 말이야. 지금 당장!" 네이선 노베로가 버럭 소리질렀다. "알겠습니다." 항공 관제사는 서둘러 마이크를 집어들었다. "걸프 스트림 R3487기에게 관제탑에서 알린다. 이륙 허가를 취소한다. 대기장으로 돌아오라. 이륙을 중지하라. 반복한다. 이륙을 중지하라." 로저 허든슨은 비행기 조종실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뭐라고 떠드는 건가?" "이륙이 지연될 것 같습니다. 이륙을 중지하고 돌아가야만...." "안 돼!" 파멜라 허드슨이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관제탑에서...." "당장 이륙해요. 그런 일에 신경을 쓸 만한 틈이 없어요." "죄송합니다, 허드슨 부인. 무리하게 이륙을 시도하면 저의 조장사 면허가 취소됩니다." 잭 스톤이 조종실로 들어오더니 조종사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었다. "이륙하란 말이야. 우리는 러시아로 간다." 조종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습니다." 비행기는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20초 후에 걸프 스트림 R3487기는 무사히 이륙했다. 공항 책임자는 몹시 당황하면서 걸프스트림 R3487기가 서서히 떠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젠장! 관제탑의 지시를 거부했어." 전화벨이 울렸다. 네이선 노베로는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부스터 장군의 엄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되었소? 이륙을 중지시켰소?" "아닙니다, 장군님. 그들이... 그들이 방금 이륙했습니다. 이제는 이륙을 막을 방법이...."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서 눈부신 섬광과 함께 귀를 찢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지상에 있던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처참하게 부서진 걸프 스트림 R3487기의 잔해가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무수한 잔해들이 끝도 없이 떨어져 내렸다. 보리스 쉬다노프는 공항 저 너머에 있는 들판 끝에서 비행기가 폭발한ㄴ 광경을 한참 동안이나 지켜보았다. 마침내 보리스 쉬다노프는 그 자리를 떠났다. 에필로그 다나의 어머니는 웨딩 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고 그 맛을 음미했다. "너무 달구나. 너무 달아.... 젊은 시절에는 나도 빵을 직접 만들었지. 내가 만든 케이크는 언제나 입에서 살살 녹았단다." 다나의 어머니는 딸을 향해 돌아섰다. "사실이잖니, 애야?" "언제나 입에서 살살 녹았단다."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다나에게 어떤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도록 만들었지만, 이제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요, 엄마." 다나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결혼식은 시청의 판사 앞에서 조촐하게 치러졌다. 다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제프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알렸다.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다나는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를 초대했던 것이다. "얘야, 난 결국 그 끔찍한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단다. 너 케말이 그렇게 화를 냈던 것도 당연해. 그 남자는 정말 무례하고 한심한 작자였어. 이제 나는 라스베가스로 돌아갈 거란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엄마?" "글쎄 그 남자에게 숨겨놓은 아내가 있다지 뭐니. 하긴 그 여자 역시 자기 남편에게 별로 관심도 없는 것 같더구나." "엄마,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래서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단다." 다나는 마음이 몹시 아팠다. 어머니의 말투에는 외로움이 짙개 배어 있었다. 아마도 어머니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을 것이다. "얘야, 나는 외롭단다." 그래서 다나는 어머니를 결혼식에 초대했다. 어머니와 케말은 다정한 할머니와 손자처럼 교회 의자에 나란히 앉아서 수다를 떨었다. 어머니가 이제 케마릐 이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을 보고 다나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곧 자상한 할머니를 갖게 될 거야.' 다나는 너무나 행복해서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제프와 결혼하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큰 기쁨이었지만, 행복은 단지 그것 하나뿐이 아니었다. 화재를 진압한 후에 제프와 케말은 즉시 연기 흡읍으로 인한 호흡 곤란 증세를 치료받기 위해서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들이 병원에 있는 동안 한 간호사가 어떤 기자에게 케말이 겪었던 모험을 장황하게 떠들었다. 모든 언론이 케말을 모험담을 다루었다. 신문에 케말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텔레비전전전 뉴스에도 케말의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케말의 경험담은 책으로 출판되었으며, 심지어 텔레비전 연속극으로 제작하자는 제안까지 나왔다. "좋아요. 다만 제가 주인공을 맡는다는 조건으로 허락하겠어요." 케말이 장난스레 거드름을 피우면서 말했다. 케말은 학교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다. 제프와 결혼함으로써, 다나는 정식으로 케말을 입양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 법적인 양자 입양식이 열렸을 때, 학교 친구들 가운데 절반이 케말을 축하하러 그 자리에 참석했다. 케말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정말로 입양이 된 거예요. 그렇죠?" "그래, 너는 내 아들이야." 다나와 제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바라보면서 케말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이제 한가족이야." "짱이에요." 지난 날에 겪었던 끔찍한 악몽도 점차 희미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세 사람은 이제 한가족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정은 안전하고 평화로운 천국이었다. 다나는 생각했다. '나에게 더 이상은 모험은 없을 거야. 일생 동안 겪고도 남을 만큼 큰 모험을 했으니까 말이야.' 어는 날 아침에 다나가 두 사람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우리 네 사람이 살 수 있는 근사한 아파트를 발견했어요." "세 사람이겠지." 제프가 다나의 말을 고쳐주었다. 다나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우리 네 사람이라니까요." 제프는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다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축하해요. 드디어 아기 아빠가 되셨어요." 케말이 제프의 어깨를 툭축 치면서 장난스럽게 한 마디 덧붙였다. "저는 사내 아이였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같이 놀 수 있을 테니까...." 또 한 가지 좋은 소식이 있었다. '범죄 추적' 프로그램의 첫번째 사건으로 소개되었던 '윈스롭 가문의 비밀'은 놀라운 시청률을 기록했다. 방송 비평가들이 여기저기서 이 프로그램에 대해 무수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전국의 시청자들은 충격과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다나의 활약을 칭찬하는 전화와 편지가 쇄도했다. 그들은 핵무기의 위험성을 일깨워준 프로그램이라고 하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메트 베이커와 엘리어트 크롬웰 사장은 잔뜩 신이 난 것 같았다. "에미 상을 받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게 좋겠소." 엘리어트 크롬웰 사장이 다나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한 가지 슬픈 소식이 있었다. 레이첼 스트븐스가 암으로 사망한 것이다. 텔레프롬프터에 레이첼의 기사가 올라왔을 때 다나는 목이 메어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나는 도저히 읽을 수가 없어요." 다나는 옆자리에 앉아 있던 공동 진행자 리차드 맬턴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결국 다나 대신에 리차드 맬턴이 기사문을 읽었다. "우리 시대 최고의 모델이었던 레이첼 스티븐스가 스물여덟 살의 짧은 나이에 눈을 감았습니다. 레이첼 스티븐슨의 아름다운 모습은 수많은 잡지의 표지를 장식했으며...." 11시 뉴스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워싱턴 주 스포케인에 있는 한 가정집에서 주 방위군이 열여섯 살짜리 매춘부를 살해한 죄목과 다른 열여섯 건의 살인 사건에 대한 혐의로 체포했습니다.... 일흔 살의 철강 재벌이었던 말콤 뷰몽이 시실리에 있는 자택 수영장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뷰몽은 스물다섯 살인 신부와 함께 신혼 여행을 즐기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들의 신혼 여행에는 신부의 두 남동생이 동행했습니다..... 잠시 후에는 마빈 그리어의 기상 예보가 있겠습니다." 마침내 뉴스가 끝났다. 다나는 매트 베이커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요, 매트." "그게 뭐요? 내가 당장 해결해주겠소." "스물다섯 살인 신부와 함께 신혼 여행을 갔다가 수영장에서 빠져 죽었다는 그 억만장자에 대한 기사 말이에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그 속에 숨어 있을 것 같지 않아요?" <끝> 작자 후기 물론 이 책에 실린 내용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창조한 것이다. 그러나 지하에 있는 비밀 도시 크라스노야르스크-26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다. 구 소련 연방은 핵무기를 생산하기 위한 목적으로 열세 개나 되는 비밀 도시들을 건설했다. 크라스노야르스크-26은 바로 비밀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폐쇄되었다. 1958년에 건설되었던 크라스노야르스크-26은 모스크바에서 약 3천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시베리아에 위치하고 이싿. 그곳에서 지금까지 핵무기의 원료로 사용하는 플루토늄을 45톤이나 생산했다. 1992년에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원자로들 가운데 두 개가 가동이 중단됐다. 하지만 나머지 하나는 여전히 가동되고 있는 중이다. 지금도 그 원자로는 1년에 500 킬로그램의 플루토늄을 생산하고 있다. 물론 그 플루토늄은 여전히 핵폭탄 제조에 사용되고 있다. 러시아의 플루토늄 유출은 언론의 쟁점 가운데 하나로 부각되었다. 미국 정부는 러시아 정부와 함께 핵물질 보호를 위한 대착을 강구 중에 있다. 옮긴이의 말 비밀의 열쇠 신현철(문학평론가) 새로운 시대의 문이 열리고 있다. 우리는 지금 21세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미래는 새로운 상상력에서 비롯된다. 시드니 셀던은 새로운 상상력으로 놀라운 환상의 세계를 열어 나간다. 우리는 시드니 셀던이 만드는 환상의 공간을 산책하면서 미래에 대한 꿈을 꿀 수 있다. 하지만 그 환상의 세계는 너무나 현실적이다. 시드니 셀던의 상상력은 항상 탄찬한 현실의 토양 위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베스트 셀러 작가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시드니 셀던의 <하늘이 무너지다>는 전혀 새로운 감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드니 셀던의 작품은 온통 사랑으로 충만하다. <하늘이 무너지다>는 사랑의 깊이를 측정할 수 있는 한 척도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다나와 제프의 사랑을 보면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도 '나'보다는 '또 다른 나'에 대한 사랑과 걱정으로 위기를 극복해 나간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비밀의 열쇠는 바로 나를 희생하는 '이타적인 사랑'에 의새 시작된다. 시드니 셀던의 상상력을 통해 세계를 읽어 나가는 일은 항상 행복하다. 그의 눈길이 언제나 목숨을 걸 정도의 강렬한 사랑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다양한 사건을 통해, 이 세상을 파멸로 이끌어가는 음모와 갈등의 구조 속에서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시드니 셀던이 항상 변함없는 호응과 찬사를 받는 이유는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각기 독특하고 신선한 필체로 끊임없이 손에 땀을 쥐도록 만드는 서스펜스를 불어일으키기 때문이다. 시드니 세던의 작가적 재능과 영감은 언제나 작품 속에서 남김없이 발화된다. 현대의 성자로 추앙받던 테일러 윈스롭 가문의 비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하늘이 무너지다>는 상상을 초월하는 반전과 스릴을 통해 놀라운 사건들을 그려내고 있다. 우리는 테일러 윈스롭 가문에서 발생한 일련의 비극적인 사건들을 통해 자꾸만 케네디 가눔을 연상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시드니 셀던이 현실과 환상의 공간을 교묘하게 엇갈리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시드니 셀던은 현실과 환상이 서로 교감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고 있다. 살인과 음모, 사랑과 증오, 성공과 좌절을 비롯한 시드니 셀던 특유의 문제가 그대로 살아 있는 이 작품은 시종일관 긴장을 늦출 수 없도록 만든다. 환상의 세계 속으로 빠져드는 순간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충격과 생생한 감동을 누릴 수 있다. 일단 책장을 펼치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독자를 빨아들이는 소설이 있다. 간결하고 빠른 전개, 생동감이 넘치는 인물들, 한 장면 한 장면 영화를 보듯이 세밀한 묘사가 이어지는 시드니 셀던의 소서이 바로 그렇다. 저명한 소설가 어빙 윌리스는 시드니 셀던의 작품들을 '도저히 도중에서 포기할 수 없는 놀라운 소설'이라고 평가했다. 시드니 셀던의 열일곱 번째 소설은 노련한 작가의 솜씨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늘이 무너지다>는 시드니 셀던이 그려내는 서사적 구조를 담고 있다. 시드니 셀던은 서사적 묘사에 아주 뛰어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이 제각기 타당성을 갖고 정점을 향해 치닫도록 하는 구성은 생생한 표현 때문에 더욱 커다란 감동을 제공한다. 테일러 윈스롭은 온갖 자선활동을 통해 존경을 받고 있는 성자였지만, 그 이면에는 러시아의 무기를 밀매하는 추악한 무기상인이라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테일러 윈스롭은 두 개의 얼굴을 지니 야누스였던 것이다. 테일러 윈스롭은 나토의 고문과 FRA의 국장, 무역 거래 협정 대표와 러시아 대사를 역임하면서 현대사의 주역으로 떠오른다. 미국 대통령이 테일러 윈스롭에게 자유의 메달을 수여했을 정도로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했던 것이다. 하지만 테일러 윈스롭과 그의 아내 매들린은 콜로라도 주 아스펜에 있는 저택에서 전기 누전으로 발생한 화재로 인해 비참한 죽음을 당한다. 하지만 그것은 윈스롭 가문의 비극을 알리는 서막에 불과했다. 불과 얼마 뒤, 다시 테일러의 장남 폴 윈스롭이 자동차 사로를 당해서 즉사했던 것이다. 불행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알래스카에 위치하고 있는 스키 활주로에서 줄리 윈스롭이 다시 의문의 사로를 당했던 것이다. 윈스롭 가문의 희생자는 네 명으로 늘어난다. 사라예보의 전쟁터에서 종군 기자로 활약하다가 얼마 전에 워싱턴으로 돌아온 다나는 WTN 텔레비전전전 방송국에서 11시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우먼으로 발탁된다. 다나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면서 경재 방송사의 프로그램을 압도한다. 하지만 다나는 전쟁으로 인해 부모와 누이들을 잃은 열두 살 짜리 고아소년 케말을 양자로 입양하면서 난처한 일들을 겪는다. 그러던 도중에 다나는 WTN에서 스포츠 해설을 맡고 있던 제프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제프와 다나는 결혼을 약속한다. 다나는 상원의원에 출말할 예정이었던 게리 윈스롭이 조지타운 미술관에 5천만 달러를 기부하는 것을 계기로 윈스롭 가문에 대해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게리 윈스롭은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기금을 마련했던 것이다. 불과 얼마 후에 게리 윈스롭은 죽임을 당하게 된다. 비극적인 사건이 재연되었던 것이다. 윈스롭 가문의 마지막 남은 구성원이었던 게리 윈스롭은 그림을 훔치던 강도가 쏜 총에 의해 살해당한다. 결국 윈스롭 가문의 일가족 다섯 명은 1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모두 죽은 셈이었다. 다나는 그 사건을 계기로 윈스롭 가문의 비밀을 파헤칠 결심을 하게 된다. 다나는 로저와 파멜라의 도움을 받으면서 윈스롭의 행적을 추적한다. 다나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알래스카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윈스롭 일가의 죽음과 관련된 곳을 조사한다. 다나는 점차 오직 영웅처럼 여겨졌던 테일러 윈스롭이 사실은 부패하고 떳떳하지 못한 사업가였으며, 많은 적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다나의 노력은 번번히 거대한 벽에 부딪히게 된다. 그러다가 다나는 윈스롭이 러시아에서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즉시 러시아로 떠난다. 국가 경제 개발부 장관 샤샤 쉬다노프를 만난 후에 비로소 다나는 서서히 의혹을 풀어나간다. 다나는 샤샤 쉬다노프와 함께 시베리아에 있는 비밀도시 크라스노애르스크-26을 방문한다. 크라스노야르스크-26은 러시아가 핵무기를 만들기 위해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비밀기지였다. 테일러 윈스롭의 정체는 러시아의 무기를 밀매하는 죽음의 상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다나는 죽음의 위협을 받게 된다. 다나가 진실에 다가갈수록 다나를 죽이려는 살인자들의 손길도 더욱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드니 셀던은 현실의 공간을 소설 속에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무기상인 테일러 윈스롭, 상원의 원내 총무를 역임하고 백악관의 경제 정책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로저, 유능한 앵커우먼으로 명성을 쌓고 있는 다나, 뛰어난 미모와 지성을 자랑하는 일류모델 레이첼, 촉망받는 메이저리그 선발 투수였던 제프 등이 펼치는 사랑과 욕망은 우리를 거대한 감동으로 이끈다. 시드니 셀던이 그려내는 촘촘한 사랑의 그물망을 엮으면서 우리는 사랑을 대하는 한 순간, 한 순간이 마지막이라는 인식을 통해 진정한 성숙이 가능하다는 화두를 배울 수 있다. 삶은 양 끝에서 타들어가는 촛불처럼 치열하다. 시드니 셀던은 이 작품 속에 치열한 삶을 아름답게 담아내고 있다. <하늘이 무너지다>는 시드니 셀던의 전작 <여자는 두 번 울지 않는다>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시드니 셀던은 <여자는 두 번 울지 않는다>에서 등장하는 다나를 과감하게 주인공으로 삼았다. 시드니 셀던은 이 작품을 통해 전혀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은 다나가 인터뷰했던 게리 윈스롭이 '우연한 사고'에 의해 살해되는 것을 시발점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여자는 두 번 울지 않는다>와 전혀 다르다. <하늘이 무너지다> 속에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장소들이 등장한다. 시드니 셀던은 러시아의 지하도시 크라스노야르스크-26을 제외하고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그곳을 모두 방문하는 열성을 보였다. 지적이면서도 재미있고 고급스러운 작품이 바로 <하늘이 무너지다>라고 할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의 언어로 번역된 작가로서 기네스 북에 올라가 있는 시드니 셀던은 가장 재미있고 박진감 넘치는 소재로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를 만드는 천부적인 소설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시카고에서 태어난 시드니 셀던은 불과 17세의 나이에 헐리우드로 진출해서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25세에는 브로드웨이에서 세 개의 뮤지컬을 동시에 히트시키는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시드니 셀던은 연극에서 토니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서 영화 <독신남과 사춘기 소녀>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 <벌것벗은 얼굴>로 에드가상을 받았으며 <뉴욕 타임스>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최우수 추리소설'의 영예를 차지했다. <천사의 분노> <게임의 여왕> <신들의 풍차> <깊은 밤 깊은 곳에>는 텔레비전전전전 미니시리즈로 제작되어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며 <내일이 오면> <화려한 혈통> <거울 속의 이방인> <시간의 모래밭> <심야의 추억> <별빛은 쏟아지고> <영원한 것은 없다> <낮과 밤> <텔 미 유어 드림스> <여자는 두 번 울지 않는다> 등의 수많은 독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시드니 셀던이 항상 독자들의 호응과 찬사를 받는 이유는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각기 독특하고 신선한 필체로 끊임없이 손에 땀을 쥐도록 만드는 서스펜스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시드니 셀던의 작가적 재능과 영감은 언제나 작품 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시드니 셀던은 항상 독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글을 쓴다. 그렇기 때문에 시드니 셀던은 언제나 우리에게 감동을 안겨주는 최고의 작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시드니 셀던은 언제나 작품 속에 따뜻한 인간미를 담고 있다. 인간은 서로 동떨어진 별개의 섬이 아니라라는 인식을 하고 있는 시드니 셀던은 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받아들인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흙과 우주의 먼지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같은 시대, 같은 시간을 함께 살아가고 있다. 옮긴이 신현철 경북 영주에서 출생하였으며, 199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에 당선, 현재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슬픈 시학>의 편집 동인으로 참가하고 있으며, 번역서로는 <죽은 병사의 전설> <마르크스와 데리다> <우울한 봄> <쥬라기 엔젤> <치즈 내것 만들기> 등이 있다. 시드니 셀던 장편소설 하늘이 무너지다 <하권> 초판인쇄 2000년 7월 7일/초판 발행 2000년 7월 14일 지은이: 시드니 셀던/ 옮긴이:신현철/ 발행인:김종철/ 펴낸곳: 북@북스 주소: 서울 용산구 한강로 3가 63-1 전화: 790-5999 FAX: 790-6656 등록: 1995년 3월 24일 제03-00986호 http://www.moonhak.co.kr/ e-mail:moonhak@moonhak.co.kr ISBN 89-88182-37-5 ISBN 89-88182-35-9 (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