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늘이 무너지다( SKY IS FALLING ) (상) 지은이: SIDNEY SHELDON 출판사: 북@북스 출판년도: 2001년 7월 14일 봉사자: 한양대학교 전자전기공학부 3학년 김남훈 저자소개: 시드니 셀던(SIDNEY SHELDON) 시드니 셀던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나 17세에 영화의 도시 할리우드로 진출,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로 군림하였으며, 25세에는 브로드웨이에서 3편의 뮤지컬을 동시에 히트시키는 등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시드니 셀던은 오스카상, 토니상, 에미상, 에드거 앨런 포 상을 수상한 유일한 작가로서, 지금까지 전세계에 작품이 가장 많이 번역된 작가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현재 시드니 셀던은 로스엔젤레스 팜스프링스에서 살고 있다. 그의 주요작품으로는 "텔 미 유어 드림s", "여자는 두 번 울지 않는다", "시간의 모래밭", "게임의 여왕", "천사의 분노", "내일이 오면"등이 있다. 프롤로그 모든 운영자들에게 보내는 기밀 문서(읽은 후에 즉시 파기할 것) -위치: 기밀 -날짜: 기밀 삼엄한 경호를 받고 있는 어두운 지하실. 12개국을 대표하는 열두명의 남자들이 비밀리에 모였다. 그들은 띄엄띄엄 여섯 줄로 놓은 커다란 의자에 앉아서 한 남자의 말에 신중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남자는 지금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심각하고 진지했다. "여러분에게 우리 모두가 깊이 우려하던 커다란 위험 요소가 곧 제거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드리게 되어서 기쁩니다. 이 자리에서 자세히 설명드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앞으로 24시간 안에 전 세계가 그 일을 알게 될 테니까요. 이제 우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문들은 계속 열려 있을 것입니다. 이제 경매를 시작해봅시다. 제가 먼저 가격을 제시할까요? 좋습니다. 1억 달러입니다. 2억 달러 없습니까? 좋습니다. 2억 달러입니다. 자, 그렇다면 3억 달러 없습니까?" 1 의문의 살인 사건 12월의 차가운 바람이 한차례 불고 지나가자,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이 떨렸다. 그녀는 백악관에서 한 블록 정도의 떨어진 펜실베이니아 가를 서둘러서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귀에 끔찍스러운, 귀를 찢을 듯이 날카로운 공습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곧 이어 죽음의 폭탄을 떨어뜨릴 준비를 마친 폭격기들이 머리 위를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우뚝 발걸음을 멈춘 그녀는 온몸이 빳빳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공포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 사이에 그녀는 폐허와도 같은 사라예보의 거리로 돌아가 있었다. 사방에서 폭탄이 떨어지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두 눈을 꼭 감았지만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광경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늘은 시뻘건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자동 소총이 발사되는 소리, 천둥처럼 울리는 전투기 소리, 그리고 박격포가 쿵쿵 울리는 소리가 그녀의 귀를 먹먹하게 했다. 옆에 있는 높은 건물이 무수한 시멘트와 벽돌 그리고 먼지 조각을 쏟아내며 와르르 무너졌다. 뽀얗게 먼지 구름이 일어났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죽음의 표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미친 듯이 우왕좌왕 달렸다. 그러나 아무도 그 끔찍한 지옥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멀리서, 아주 멀리서 한 남자의 음성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괜찮습니까?"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녀는 눈을 떳다. 어느덧 흐릿한 겨울 햇살이 내리쬐는 펜실베이니아 가로 돌아와 있었다.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던 요란한 제트기 소리와 앰뷸런스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아가씨......괜찮습니까?" 그녀는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여전히발 밑이 빙빙 돌고 머리가 몽롱했다. "네, 전......전 괜찮아요?" 남자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잠깐만요! 이런, 당신이군요. 다나 에반스 맞죠! 난 당신의 열광적인 팬이에요. 매일 밤 WTN을 시청하고 유고슬라비아에서 당신이 전하는 뉴스는 모두 보았지요." 남자는 잔뜩 흥분하여 떠들기 시작했다. "그건 정말 짜릿하고 흥미로운 일이었을 거예요. 현장에서 전쟁을 취재하는 것 말이에요, 그렇죠?" "그래요." 다나 에반스는 목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머릿속에서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들이 어지럽게 맴돌았다. '그래요...... 사람들이 갈가리 찢겨져나가고, 어린아이의 몸뚱어리가 벽에 패대기쳐지고, 몸의 일부가 붉은 강물 위로 떨어져내리는 것을 보는 건 정말 흥분되는 일이죠.' 다나 에반스는 갑자기 복부에 칼로 찌르듯이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실례합니다." 그녀는 몸을 돌려서 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다나 에반스는 꼭 석 달 전에 전쟁이 한창 벌어지는 유고슬라비아를 취재하고 돌아왔다. 그런데도 그곳에서의 기억이 여전히 너무나 생생했다. 공습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할 수 있고 새들이 기저귀는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듣는 것이 꿈만 같았다. 사라예보에는 웃음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단지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박격포 소리와 그 뒤를 잇는 비통한 비명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존 던(역주: 17세기 영국의 유명한 시인)이 옳았어.' 평화로운 겨울 풍경이 펼쳐지는 창 밖을 내다보며 다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인간은 동떨어진 별개의 섬이 아니야. 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야. 우린 모두 똑같은 흙과 우주의 먼지로 만들어졌으니까. 우린 같은 시대, 같은 시간을 함께 살아가고 있어. 우주의 보이지 않는 손이 다음 시대를 향해서 가차 없는 청소를 시작한 거야.' 산티아고에서는 열 살 난 소녀가 친할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하고 있다...... 뉴욕에서는 한 쌍의 젊은 연인이 은은하게 타오르는 촛불 옆에서 키스를 하고 있다...... 플랜더즈에서는 열일곱 살 난 소녀가 태어나자마자 죽일 아기를 낳으며 몸부림을 치고 있다...... 시키고에서는 소방관이 불타는 건물에서 고양이를 구해내기 위해서 목숨을 건다...... 상파울루에서는 경기장의 관람석이 무너지면서 수백 명의 축구 팬들이 죽었다...... 피사에서는 한 어머니가 첫걸음을 떼는 어린아이를 보면서 기쁨의 탄성을 지른다....... '이 모든 일들이 불과 60초 이내에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야.' 다나는 생각했다. '그동안에는 시간은 계속 똑딱똑딱 흘러가고 우리는 결국 똑같이 알 수 없는 영원의 세계 속으로 떠밀려가는 거야.' 스물일곱 살인 다나 에반스는 키가 크고 다소 마른 편이었다. 유달리 목이 길고 팔 다리가 날씬한 그녀를 보면 청순하면서도 날렵한 느낌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하나로 묶은 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그믐밤처럼 새까맣게 빛났으며 커다란 회색 눈동자는 총명하게 반짝거렸다. 동그스름하면서도 부드러운 얼굴, 사람을 끄는 따뜻한 미소는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다나 에반스는 어릴 적부터 군인 기지에서 성장했다. 육군 대령인 그녀의 아버지는 여기저기로 군인 기지를 옮겨다니는 무기 교관이었다. 그런 환경은 어린 다나에게 새로운 것에 대한 모험심과 도전 의식을 길러주었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호기심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든 겁이 없었다. 사춘기를 지나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다나는 더욱더 그런 자신의 성격을 누를 수가 없었다. 아름답고 가녀린 다나가 남들이 다들 두려워하는 일을 서슴없이 해치울 때면, 모두들 혀를 내두르곤 했다. 풋내기 여기자인 다나가 끔찍한 인종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유고슬라비아로 취재를 떠나게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전 세계의 사람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터의 한복판에서도 보도를 하는 아름답고 젊은 매력적인 여자에게 매혹당했다. 그리고 그녀가 전하는 전쟁 보도에 귀를 기울였다. 소식을 전하는 다나의 등 뒤로 종종 폭탄이 떨어지기도 했다. 이제 다나 에반스는 어디들 가든지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수군거림을 느껴야만 했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온 다나 에반스는 하루아침에 유명해진 자신을 발견하고 당혹스러웠다. 급히 펜실베이니아 가를 따라 내려가면서 백악관 앞을 지나친 다다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서둘러야겠군. 이러다가 약속 시간에 늦겠어.' <워싱턴 트리뷴 엔터프라이즈>사는 NW거리 6번 구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회사는 인쇄 공장, 편집국, 사무국, 텔레비전 방송국 등 네 개의 별도 건물을 갖고 있는 거대한 언론 기업이었다. 워싱턴 트리뷴 네트워크의 텔레비전 스튜디오는 네 번째 건물의 6층에 있었다. 그곳은 언제나 활기가 넘쳤다. 칸막이로 구분된 공간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내는 요란한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여섯 개의 통신사와 연결된 팩스로 끊임없이 세계 각지에서 보내오는 새로운 뉴스들을 토해냈다. 그 엄청난 운영 규모를 볼 때마다 다나는 경탄하며 짜릿한 전율을 느끼곤 했다. 바로 이곳에서 다나는 제프 코너스를 만났다. 스키를 타다가 사고를 당해서 팔을 다치기 전까지 촉망받는 메이저리그의 선발 투수였던 제프는, 이제 WTN의 무선 방송에서 스포츠 해설자로 일하면서 동시에 <워싱턴 트리뷴 신디케이트>지의 스포츠난에 일일 칼럼을 쓰고 있었다. 삼십 대 초반인 제프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했다. 우락부락하고 거친 남성미보다는 소년처럼 곱상하고 깨끗한 용모에 편안하고 느긋한 매력을 풍겼다. 하지만 전직 운동 선수답게 군살이라고는 하나 없는 그의 몸은 단단하고 강인했다. 지금도 아침마다 달리기를 거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서로 만난 지 며칠 만에 제프와 다나는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이제 그들은 결혼과 서로의 장래에 대해서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였다. 다나가 사라예보에서 돌아오고 난 후 그 석 달 동안에 워싱턴에서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숨가쁘게 진행되었다. 워싱턴 트리뷴 엔터프라이즈사의 전 소유주인 레슬리 스튜어트가 회사를 매각하고 자취를 감추었으며, 국제적인 매스컴 거물인 엘리어트 크롬웰이 회사를 인수했다. 매트 베이커와 엘리어트 크롬웰이 직접 참여하는 방송국의 아침 회의가 막 시작되려던 참이었다. 다나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매트의 보좌관인 애브 라스맨이 황급히 그녀를 맞았다. 애브 라스맨은 빨간 머리에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섹시한 여자였다.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당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어서 들어가세요." 애브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회의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다나를 격려해주려는 듯이 한쪽 눈을 찡끗했다. "고마워요. 애브." 다나는 애브에게 미소를 지으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타원형의 탁자를 중심으로 모두들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매트 국장님....... 엘리어트 사장님......." "늦었잖소." 매트 베이커가 불쾌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툴툴거렸다. 사십 대 초반인 매트 베이커는 작달막한 키에 회색 머리카락이 약간 벗겨진 중년 남자였다. 남들보다 두뇌 회전이 빠르고 활동적인 성격 탓에 무슨 일이든 늦장을 피우는 것을 참지 못하고 곧잘 신경질을 부렸다. 매트 베이커는 잠자리에서 입던 옷을 그대로 걸치고 나온 듯, 후줄근하게 구겨진 옷을 입고 있었다. 다나는 과연 그가 저 옷을 한 번이라도 갈아입기는 한 건지 언제나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방송가 주변에서는 꽤 능력 있는 인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리고 워싱턴 트리뷴 엔터프라이즈사의 텔레비전 방송국인 WTN의 운영 책임을 맡고 있었다. 이 회사의 사장이자 소유주인 엘리어트 크롬웰은 육십 대로 접어든 정력적인 사업가였다. 사교적이고 친절한 성품으로 방송계와 정계에 폭넓은 인맥을 형성하고 있는 그는 필요하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엘리어트는 여러 나라에 방송국과 신문사, 출판사 등을 거느린 억만장자였지만, 그가 어떤 방법으로 막대한 재산을 성취했는지에 대해서는 제각기 다른 여러 가지 설명들이 있었다. 무슨 정보든 순식간에 퍼지는 매스컴의 세계에서 엘리어트 크롬웰은 정확한 배경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인물이었다. 어쨌든 지금 그는 미국 언론계의 유력 인사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엘리어트는 다나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던지며 입을 열었다. "매트 말이 우리가 다시 경쟁 방송사의 프로그램을 시청률에서 눌렸다는군. 축해해요. 다나. 당신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계속 올라가고 있소." "그 말을 들으니 저도 기쁘군요, 엘리어트 사장님." "다나, 나는 매일 밤 여섯 개 방송사의 뉴스를 모두 청취하고 있소. 하지만 당신이 진행하는 뉴스는 확실히 다른 뉴스들과 다르더군. 정확하게 왜 다른지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마음에 드오. 계속 잘 해주길 바라오. 당신의 능력을 믿겠소." 하지만 다나는 엘리어트 크롬웰에게 그 이유를 말해줄 수 있었다. 다른 뉴스 방송들은 단지 알려진 사실만을 보도할 뿐, 수백만의 시청자에게 진심으로 이야기를 걸려고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나는 자신의 뉴스 방송을 개인적 대화의 장소로 만들 결심을 했다. 그리하여 어느 날 밤은 남편을 잃고 외로워하는 젊은 부인을 마음 속에 떠올리며 이야기를 했고, 그 다음날 밤은 꼼짝하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있는 병자를 상대로 이야기를 했으며, 그 다음날 밤은 집과 가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느 낯선 곳에 혼자 출장을 나온 고독한 봉급쟁이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했다. 다나에게 수많은 시청자들은 얼굴을 알 수 없는 익명의 대중이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구체적이고 특별한 존재였다. 다나의 뉴스 방송은 사적이고 친밀하게 들렸으며 시청자들은 그걸 좋아하고 그에 호응했다. "당신이 오늘 밤 인터뷰에 흥미로운 초대 손님을 부른 걸로 아는데......." 매트 베이커가 말했다. 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리 윈스롭을 초대했어요." 게리 윈스롭은 모든 미국 여성들이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남성상이었다. 미국 내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유명한 가문의 일원인 게리 윈스롭은 최고 명문 사립 고등학교를 거쳐서 하버드 대학의 정치학부를 차석으로 졸업했다. 또한 대학시절부터 대학 신문사 발행인으로 맹렬한 활약을 보이기도 했다. 아직 짧은 연륜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을 압도하는 강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대중들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남자인 게리 윈스롭을 미국의 자랑으로 여기며 사랑했다. "하지만 게리 윈스롭은 좀처럼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인터뷰에 동의하지 만들었지?" 크롬웰이 놀랍다는 듯이 물었다. "글쎄요. 별로 어렵지 않았어요. 우리는 같은 취미를 갖고 있거든요." 다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순간 크롬웰의 짙은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게 정말인가?" 다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요, 저는 모네와 반 고흐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을 좋아하고 게리 윈스롭은 그들의 그림을 사는 것을 좋아하죠. 사실 전에도 게리 윈스롭을 인터뷰한 적이 있어요. 그때 이후로 우리는 약간 친분이 있었죠. 먼저 기자가 게리 윈스롭의 최근 생활을 취재한 테이프를 내보내기로 했어요. 그래서 그걸 오늘 오후에 만들기로 했죠. 그런 다음에 제 인터뷰 방송이 나갈 거예요." "훌륭하오." 크롬웰이 밝게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텔레비전 방송국이 최근 기획하고 있는 새로운 프로그램인 "범죄 추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프로그램은 다나가 직접 연출하고 앵커까지 맡을 예정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사회 곳곳에서 행해지고 있는 부정 행위를 고발하고, 잊혀진 미해결 범죄들을 해결하기 위한 관심을 촉구하려는 두 가지 목적을 띠고 있었다. 그러므로 상당히 도전적이고 위험한 시도일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진행자인 다나의 능력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다른 많은 방송국에서도 비슷한 프로그램들이 방영되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철저하고 회의적인 매트가 위험성을 상기시켰다. "그러니 그들보다 좋은 소재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저는 아주 흥미로운 사건으로 시작을 했으면 합니다. 단숨에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으로 말이죠......." 다나는 머릿속에서 정리한 생각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때 인터폰이 울렸다. 매트 베이커가 거칠게 인터폰을 눌렀다. "전화 돌리지 말라고 했잖아. 뭔가?" 애브의 목소리가 인터폰에서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에반스 양에게 온 전화입니다. 케말의 학교에서 보호자를 찾고 있습니다. 회의 중이신 걸 알지만 급한 일인 것 같아서요." 매트 베이커가 짜증스런 눈길로 다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1번 선을 받아봐요." 다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벌써부터 심장이 거세게 쿵쾅거렸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여보세요.......네, 네. 케말은 괜찮나요?" 그녀는 수화기에 귀를 기울였다. "네....... 알겠어요....... 네, 곧 가죠."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뭐가 잘못됐소?" 매트가 물었다. "아니요. 지금 당장 학교로 와서 케말을 데려가라는 연락이에요." 엘리어트 크롬웰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이 사라예보에서 돌아올 때 데리고 온 소년 말이로군." "네."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이었군." "그래요." 다나는 내키지 않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 아이가 빈 터에서 지내는 것을 당신이 발견했다고?" "맞아요." 다나가 말했다. "그 아이가 병이나 뭐 그런 거에 걸려 있었소?" "아니요." 다나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때의 일은 이야기조차 하기 싫었던 것이다. "케말은 한쪽 팔을 잃었어요. 폭탄에 날아가버렸죠." "그리고 당신이 그 아이를 양자로 삼았나?" "아직 공식적으로는 아니에요, 엘리어트. 하지만 그럴 생각이에요. 이제부터는 내가 그 아이의 보호자예요." "이거 원, 그렇다면 어서 그 아이한테 가보시오. '범죄 추적'에 대해서는 나중에 의논합시다." 케말이 다니는 테오도르 루즈벨트 중학교는 워싱턴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사립학교들 중의 하나였다. 이런 학교에 케말 같은 세르비아 인이 다닌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충격이었다. 하지만 다나는 케말에게 최고의 교육 환경을 제공해주고 싶었다. '어쩌면 지나친 욕심이었는지도 몰라.' 학교로 달려가면서 다나는 내내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학교에 도착한 다나는 곧장 교감실을 찾아갔다. 교감인 베라 코스토프는 깐깐한 얼굴에 일찍 머리가 세어 반백이 된 오십 대의 여자였다. 교감은 몹시 불쾌한 얼굴로 책상에 앉아 있었고, 케말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케말은 열두 살이었지만, 나이에 비해 키가 작고 말랐으며 얼굴빛이 창백했다. 헝클어진 금발과 각진 턱은 고집 센 인상을 주었다. 소년의 오른팔이 있어야 할 자리엔 빈 소메가 달려 있었다. 커다란 방안에 혼자 앉아 있는 케말의 모습은 더욱 왜소하고 가엾게 보였다. 다나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 교감실의 분위기는 차갑고 무거웠다. "안녕하세요, 코스토프씨." 다나는 애써 밝게 웃으며 교감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케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케말, 잘 지냈니?" 하지만 케말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자신의 신발만을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다나가 계속 말을 이었다. "네,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에반스 양." 코스토프 부인이 다나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다나는 잠시 그 종이를 들여다보고 어리둥절했다. 그 종이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보드자, 피즈다, 즈보스키, 푸카티, 네자콘스키 트로크, 움레티, 테페스. 다나는 고개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하지만 저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이건 세르비아어가 아닌가요, 그렇지요?" 코스토프 선생이 빠르게 말했다. "맞습니다. 나는 한때 세르비아에게 지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세르비아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케말에겐 불행한 일이죠. 거기 적힌 것이 케말이 학교에서 쓰는 말들입니다." 교감 선생의 얼굴이 분노롤 시뻘겋게 물들었다. 교감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세르비아의 트럭 운전사들도 그런 천박한 말은 쓰지 않습니다. 나는 이 어린아이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케말은 나를 '피즈다'라고 불렀습니다." 다나가 눈살을 찡그리며 물었다. "피.......뭐라구여?" "물론 나는 케말이 우리나라에 온 지 얼마 안 됐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케말이 감당하기 어려운 커다란 불행을 겪었다는 사실도 말이죠. 그래서 배려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 이 아이의 행동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이 아이는 끊임없이 말썽거리를 만들어냈어요. 나는 오늘 아침에 이 아이를 나무랐습니다. 그러자 이 아이가....... 이 아이가 나를 모욕했어요. 이런 심한 말로......." 교감 선생은 너무 분해서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는 것 같았다. 다나가 재치있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이 아이를 위해서 얼마나 애쓰셨는지 잘 알겠습니다. 코스토프 선생님, 하지만......." "말씀드린 대로, 나는 충분한 배려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계속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군요." "알겠습니다." 다나는 케말을 흘낏 바라보았다. 소년은 부루퉁한 얼굴로 여전히 신발을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번 일을 끝으로 더 이상 말썽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코스토프 부인이 말했다. "물론 그래야죠.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다나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케말의 성적 통지표를 드리죠." 코스토프 선생은 서랍을 열고 성적 통지표를 꺼내서 다나에게 건네주었다. "고맙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내내, 케말은 침묵을 지켰다. "케말,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다나가 조용히 물었다. "왜 언제나 말썽을 일으키는 거지? 왜 교감 선생님께 그런 말을 쓴거니?" "나는 그 선생님이 세르비아어를 모르는 줄 알았어요." 케말은 잔뜩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침내 그들은 다나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다나가 말했다. "나는 방송국으로 다시 가야만 해, 케말. 혼자 있을 수 있지?" "당근." 처음 케말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 다나는 케말이 그녀가 한 말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대답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것이 어린 소년이 사용하는 은어 중의 하나임을 알게 되었다. '당근'은 '네'를 의미했다. '짱'은 이성을 묘사하는 말로써 아주 선정적이고 유혹적인 걸 뜻했다. 멋지고 예쁘고 좋고 짜릿한 것은 전부 '짱'이었다. 다나는 코스토프 교감이 준 성적 통지표를 꺼냈다. 통지표를 들여다보면서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역사 D, 영어 D, 과학 D, 사회 F, 수학 A. 다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 맙소사, 어떻게 해야 한담?' 마침내 다나가 입을 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지금은 회사에 가봐야 해. 방송에 늦었거든. 이따 보자." 다나에게 있어서 케말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다나와 제프가 함께 있을 때, 케말은 얌전하게 행동했으며 사랑스럽고 생각이 깊고 귀여운 소년이었다. 주말마다 다나와 제프는 케말을 위해 워싱턴을 벗어나서 재미있는 장소를 찾아가곤 했다. 그들은 깜짝 놀랄 만한 야생 동물들과 외국에서 온 거대한 곰이 있는 국립 동물원에 갔다. 국립 항공 우주 박물관을 찾아갔을 때, 케말은 천장에 매달아놓은 라이트 형제의 첫 번째 비행기 모형을 보았다. 그 다음에는 유인 우주 실험실로 가서 달에서 가져온 암석을 만져보기로 했다. 또한 그들은 케네디 센터와 원형 극장을 찾아가기도 했다. 다나는 틈틈이 맛있는 음식도 사주었다. 치즈가 잔뜩 얹어 있는 피자와 맥스텍의 타코(역주: 멕시코 요리, 고기, 치즈, 양상추 등을 넣고 튀긴 옥수수빵), 조지아 브라운 가게의 프라이드 치킨 등,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은 빼놓지 않고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 케말은 두 사람과 함께 하는 모든 순간들을 즐거워했다. 심지어 다나와 제프를 거의 숭배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다나가 일 때문에 집에 함께 있지 못하게 되면, 케말은 순식간에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다. 그는 적의적이고 반항적인 문제아가 되었다. 더 이상 새로운 가정부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다나가 회사에서 돌아오면, 아이를 돌보는 사람들은 케말과 함께 보낸 밤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제프와 다나는 케말이 그렇게 돌변하는 이유를 알아내려고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쩌면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지도 몰라.' 다나는 어린 케말의 마음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끔찍한 두려움이 무엇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WTN 저녁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다나와 함께 공동으로 뉴스를 진행하는 리차드 멜턴, 그리고 제프 코너스가 그녀 옆에 나란히 앉았다. 다나 에반스는 침착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유럽에서 들어온 기사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외신에 의하면, 프랑스와 영국은 여전히 광우병 문제를 놓고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렝에서 르네 리노 기자의 보도입니다." 조종실에 있던 연출자 아나스타샤 만이 지시를 내렸다. "중계 방송." 프랑스 시골의 한 장면이 텔레비전 화면에 전송되었다. 이 틈을 타서 스튜디오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남자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손을 흔들며 앵커석으로 다가왔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 저녁 뉴스를 맡고 있는 야심만만한 젊은 프로듀서, 톰 호킨스가 말했다. "다나, 게리 윈스롭과는 구면이죠?" "그럼요." 직접 보면 게리 윈스롭은 사진으로 볼 때보다도 훨씬 잘생긴 미남이었다. 마음속까지 환하게 비추는 듯한 맑고 푸른 눈, 자극적이면서도 따뜻한 미소는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풍겼다. "다시 만났군요, 다나. 초대해줘서 고맙소." 게리 윈스롭의 목소리는 굵은 저음이면서도 힘에 넘쳤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다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여섯 명의 여자 비서들이 스튜디오 안을 얼쩡거리며 어떻게든 잠시라도 더 머물러 있을 수 있는 핑계거리를 찾고 있었다. '게리 윈스롭이라면 분명히 이런 광경에 익숙할거야.' 다나는 여자들의 반응을 지켜보는 게 재미있었다. "윈스롭 씨, 당신이 나올 부분은 몇 분 뒤에 시작될 거예요. 제 옆에 앉는 게 좋겠죠? 이쪽은 리차드 멜턴이에요." 두 남자는 악수를 나누었다. "제프 코너스는 이미 알고 계시죠?" "물론, 알고 있죠. 당신은 경기를 해설하는 대신 운동장에서 공을 던졌어야 할 사람이에요. 정말 안타깝군요." "동감입니다." 제프가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프랑스에서 보내온 중계 방송이 끝날 때쯤 되자, 그들은 광고 방송을 준비했다. 게리 윈스롭은 의자에 앉아서 광고 방송이 끝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조종실에서 아나스타샤 만이 말했다. "스탠 바이, 녹화 테이프를 돌릴 겁니다." 아나스타샤가 숫자를 세었다. "셋.......둘.......하나......." 그녀는 집게 손가락을 펴서 시작 사인을 보냈다. 모니터 위로 조지타운 미술관의 외부가 투영되었다. 해설자가 작은 마이크를 손에 든 채,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조지타운 미술관 옆에 서 있습니다. 지금 이 안에서는 게리 윈스롭 씨가 이 미술관에 5천만 달러를 기부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화면이 바뀌면서 조지타운 미술관의 널찍한 내부가 나타났다. 조지타운 미술관은 워싱턴 시의 자랑으로, 가장 중요한 문화 장소 중에 하나였다. 이번 행사는 단순한 기부금 전달이 아니라, 문화계와 사교계 인사들을 위한 커다란 파티처럼 기획되었다. 그러므로 이 도시의 유명 인사들, 각계 각층의 관리들, 고위 성직자들이 모두 초대되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보면 게리 윈스롭의 폭넓은 인간관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전국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나온 기자들은 게리 윈스롭을 둘러싸고 있었다. 미술관 관장인 모간 오먼드가 그에게 커다란 기념 명판을 건네주었다. "윈스롭 씨, 미술관과 이 자리를 찾아주신 많은 손님들, 그리고 미술관 위원들을 대표해서 당신의 크나큰 호의에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카메라 불빛이 사방에서 번쩍였다. 게리 윈스롭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이 기부금이 젊은 화가들의 창작 활동에 도움이 되고 나아가 그들의 재능을 세상에 알리는 데 쓰여지기를 바랍니다." 그들을 둘러싸고 서 있던 사람들로부터 우렁찬 박수가 터져나왔다. 아나운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상은 조지타운 미술관에서 빌 토랜트입니다. 스튜디오 나와주세요. 다나?" 카메라에 붉은 불빛이 들어왔다. "고마워요, 빌." 다나가 활짝 미소를 지으며 게리 윈스롭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이 자리에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게리 윈스롭 씨가 나와주셨습니다. 게리 윈스롭 씨를 직접 모시고 그 막대한 기부금의 목적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를 갖게 되어서 정말 기쁘군요." 카메라가 뒤로 이동하면서 카메라 앵글을 크게 잡자, 게리 윈스롭의 모습이 화면에 투영됐다. 다나가 말했다. "윈스롭 씨, 기부하신 5천만 달러는 박물관 측에서 그림을 구입하는 데 쓰이나요?" "아닙니다. 그 돈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자신들이 가진 재능을 보여줄 기회를 얻지 못한 미국의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할 새로운 기금으로 쓰일 것입니다. 또한 기금의 일부는 이 도시에 사는 어린이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쓰일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청소년들이 예술을 접해볼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성장합니다. 그들은 아마 위대한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들에 대해서는 들어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이 새전트, 호머, 그리고 레밍턴 같은 미국의 예술가들을, 우리의 유산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기부금은 젊은 예술가들의 창작 의욕을 고취시키고 청소년들이 예술에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게리 윈스롭은 자연스럽고 거침없는 태도로 설명했다. 그의 힘찬 목소리를 들으면 누구나 그를 실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다나는 생각했다. '상원 의원에 출마할 계획이라는 소문이 있던데요, 윈스롭 씨. 사실인가요?" 게리 윈스롭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런 소문은 제가 열 살 때부터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별로 놀랄 일도 아니죠." 게리 윈스롭의 농담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전통 있고 명망 있는 윈스롭 가문의 아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언젠가는 정치에 입문할 것이라는 기대 속에 자라났던 것이다. "그런데 저는 최근에 와서야 그 일을 진지하게 고려해보고 있습니다."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말씀이군요. 그런데 저희가 비공식적으로 조사한 바로는, 당신에 대한 지지도가 높았습니다." 게리 윈스롭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가문은 오랫동안 공직에 봉사를 해온 전통이 있습니다. 제가 이 나라를 위해서 무언가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이 무슨 일이든지 기꺼이 부름에 응할 것입니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윈스롭 씨." "고맙습니다." 상업 광고가 나가는 동안, 게리 윈스롭은 작별 인사를 하고 스튜디오를 떠났다. 다나 옆에 앉아 있던 제프 코너스가 말했다. "정말 멋진 사람이야. 유머 감각도 있고 공인으로서 책임감도 있고, 의회에는 저런 사람이 더욱 많이 필요해." "지당하신 말씀." "어쩌면 그를 복제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건 그렇고, 케말은 어때?" 다나는 몸을 움츠렸다. "제프, 인간 복제 문제를 들먹이면서 동시에 케말 이야기를 꺼내지는 말아줘요. 참을 수가 없어요." "오늘 아침에 학교에서 무슨 문제가 생긴 거야?" "그래요, 하지만 오늘만이 아니에요. 내일도......." 이때 아나스타샤 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에 다시 방송 시작합니다. 모두들 준비하세요. 셋....... 둘....... 하나......." 유리창 위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다나는 텔레프롬프터(역주:텔레비전용 프롬프터 기계. 극본의 대사 따위가 보이는 장치)를 쳐다보았다. "제프 코너스와 함께 하는 스포츠 시간입니다." 제프가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오늘 밤 메릴린 배지션이 워싱턴 불렛에서 패배를 당했습니다. 주안 하워드가 뛰어난 활약을 펄치고 게오르규 무레산과 라시드 월랙이 파란을 일으키는 것을 도왔지만 상황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자존심과 함께 침몰했습니다......." 그날 밤 새벽 2시. 저명 인사들이 모여 사는 워싱턴 시의 북서쪽 구역에 있는 게리 윈스롭의 저택. 커다란 창문을 통해 비쳐 들어오는 달빛 아래에서 가면을 쓴 두 명의 남자가 거실 벽에 걸어놓은 그림들을 떼고 있었다. 한 사람은 론 레인저 가면을 썼고 다른 사람은 캡틴 미드나잇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 없이 느긋하게 작업을 진행했다. 이상하게도 누군가에게 들킬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미술 애호가로 소문난 게리 윈스롭의 저택에는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이 잔뜩 걸려 있었다. 지금 이들이 훔치고 있는 그림들도 최근에 미술 경매에서 가장 비싼 값으로 거래되어 화제를 모은 작품들이었다. 그들은 액자 틀에서 떼어낸 전리품을 커다란 배낭 속에 집어 넣었다. 론 레인저 가면이 물었다. "순찰이 몇 시에 다시 오지?" 캡틴 미드나잇이 대답했다. "4시." "그렇게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다니 우리로선 고맙지 뭐야, 안 그래?" "물론이지." 벽에서 그림을 떼어내던 캡틴 미드나잇이 떡갈나무 목재가 깔린 바닥 위로 액자를 떨어뜨렸다. 커다란 소리가 거실에 울려퍼졌다. 두 남자는 하고 있던 동작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조용했다. 론 레인저가 말했다. "다시 해봐. 더 크게 소리를 내보라구." 캡틴 미드나잇이 벽에 걸려 있던 다른 그림을 떼내어 마룻바닥 위로 힘껏 내던졌다. 요란하게 한밤의 정적이 깨졌다. "자, 아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두고 보자." 이층 침실에서 잠자고 있던 윈스롭은 시끄러운 소리에 불현듯 잠을 깼다. 그는 침대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정말로 무슨 소리를 들은 걸까, 아니면 꿈을 꾼 걸까? 그는 잠시 동안 귀를 기울였다. 조용했다. 설마 하면서도,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복도로 걸어나와서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그러나 복도의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집 안의 전기가 다 나간 것 같았다. "이봐요, 거기 아래에 누구 있소?" 아무 대답도 없었다. 어둠에 휩싸인 계단을 더듬더듬 내려간 그는 복도를 지나 거실 문 앞에 이르렀다. 게리 윈스롭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가면을 쓴 두 명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도망갈 생각도 하지 않고 태연히 서 있었다. "도대체 당신들 뭘 하고 있는 거요?" 론 레인저가 그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안녕, 게리. 잠을 깨워서 미안하군. 잠이나 다시 자게." 순간 그의 손에 소음장치가 부착된 권총이 보였다. 론 레인저는 방아쇠를 두 번 당겼다. 그리고 게리 윈스롭의 가슴에서 뿜어져나오는 붉은 피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도망치거나 소리 지를 틈도 없었다. 게리 윈스롭은 입을 딸 벌린 채, 바닥에 쓰러졌다. 론 레인저와 켑틴 미드나잇은 마룻바닥 위로 쓰러진 게리 윈스롭을 만족스런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에 그들은 몸을 돌려서 다시 그림을 떼어내는 작업을 계속했다. 2 윈스롭 가의 비극 다나 에반스는 사정없이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몸을 일으키려고 애쓰면서 흐릿한 눈으로 침대 옆의 시계를 바라보니 새벽 5시였다. 그녀는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다나......." "매트?" "스튜디오까지 얼마나 빨리 올 수 있소?" "무슨 일이에요?" "당신이 여기 오면 그때 알려주겠소." "곧 갈게요." 15분 후, 급히 옷을 갈아입은 다나는 이웃에 사는 와톤의 아파트 문을 두드렸다. 도로시 와톤은 마음씨 좋은 중년 부인으로 자식도 없이 남편과 단둘이 살고 있었다. 케말과 함께 살게 된 이후로 다나는 급한 일이 생길 때면 종종 도움을 청하곤 했다. 가운을 입은 도로시 와톤이 문을 열었다. 그녀는 초조해 보이는 다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나, 뭐가 잘못됐어요?" "이런 부탁을 해서 미안해요, 도로시, 하지만 급히 방송국으로 나오라는 전화를 받았어요. 미안하지만 오늘 아침에 케말을 학교까지 좀 데려다주겠어요?" "아유, 그럼요. 기꺼이 그럴께요." "정말 고마워요. 케말은 7시 45분까지 학교에 도착해야 해요. 그리고 아침을 먹어야 하구요." "염려하지 말아요. 내가 챙길 테니까. 어서 가봐요." "고마워요." 다나는 진심으로 고마웠다. 애브 라스맨은 벌써 사무실에 나와서 졸린 얼굴로 다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트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다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매트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매트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끔찍한 소식이 있소, 게리 윈스롭이 오늘 새벽에 살해당했소." 다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앞이 아찔하면서 현기증이 일었다. "뭐라구요? 누가?" "그의 집에 도둑이 든 것 같소. 강도들이 아래층으로 내려온 그를 죽이고 그 집에 소장되어 있던 그림들을 훔쳐갔소." "오, 안돼오!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다나는 친절하고 따뜻하며 매력적인 자선가를 떠올리며, 가슴에 저려오는 고통을 느꼈다. 매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이....... 맙소사....... 벌써 다섯 번째 비극이군요." 다나는 어리둥절해서 매트를 쳐다보았다. "무슨 뜻이죠, 다섯 번째 비극이라고요?" 매트는 깜짝 놀라서 다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다나가 모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렇군. 그때 당신은 사라예보에 있었지.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전쟁에 비하면 작년 한 해 동안 윈스롭 가문에 일어난 일 같은 건 사실 그다지 중요한 뉴스감이라고 할 수도 없었을 거요. 다나, 당신도 게리 윈스롭의 아버지인 테일러 윈스롭을 잘 알고 있겠지?" "그럼요, 테일러 윈스롭은 러시아 주재 미국 대사였잖아요. 테일러와 그의 아내는 작년에 화재로 죽었다고 들었어요." "당신 말이 맞소.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라오. 윈스롭 부부가 죽은지 두 달 후에 장남인 폴이 자동차 사고로 죽었소. 그리고 그 사건이 있은 후 불과 6주 만에 딸 줄 리가 스키 사고로 죽었다오. 연속되는 비극이었지." 매트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그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인 게리가 죽었소." 다나는 현기증을 느끼며 침묵을 지켰다. "다나, 미국에서 윈스롭 가는 마치 살아 있는 전설과도 같은 최고의 명문가요. 만약 우리 나라에 왕족이 있었다면, 윈스롭 가가 그 왕관을 차지했을 거이오. 그들의 재력과 영향력은 막강했소. 그들의 자선 사업과 공직 봉사는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하오. 테일러 윈스롭은 부통령 후보에까지 올랐던 인물이오. 그리고 게리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상원 의원에 출마할 계획이었소. 당선이 확실한 후보자였지. 모두 그를 좋아했으니까 말이오. 그런데 이제 그는 죽었소. 일 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명문가 중의 한 가문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오." "나.......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매트가 기운차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잘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거요. 당신이 이 사건에 대해서 20분 동안 특별 방송을 할 예정이니까 말이오." 게리 윈스롭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은 전 세계에 충격의 파문을 던졌다.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는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각국 정치 지도자들의 반응을 내보냈다. "희랍의 비극과 같은 소식이오......." "믿을 수가 없습니다......." "심술궂은 운명의 장난......." "전 인류의 끔찍한 손실......." "가장 크고 밝은 빛이 사라졌다......." 사람들의 화제는 온통 게리 윈스롭의 죽음에 대한 것뿐이었다. 방송과 신문에도 계속해서 게리 윈스롭의 사진이 실렸다. 비통한 슬픔의 물결이 온 나라를 덮쳤다. 게리 윈스롭의 죽음은 최근 들어 그의 가문에 연달아 일어난 비극적인 다른 죽음들에 대한 기억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다나는 침울한 목소리로 제프에게 말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윈스롭 가문 말이야. 모든 게 너무나 극적이잖아. 그들의 죽음도 그렇지만 그들의 생애 또한 놀라울 뿐이야. 온 가족이 모두 그렇게 훌륭하고 완벽할 수 있을까? 그렇게 엄청난 부자이면서 화목한 가정에 성실한 부모, 똑똑한 자녀들까지....... 때로는 윈스롭 가문에 대한 칭찬들이 모두 거짓된 언론의 조작이 아닐까 의심스러워." "그렇지만 그것은 사실이야. 게리는 진정한 스포츠 맨이었고 커다란 후원자였어. 안타까운 일이지. 아마도 신이 완벽한 그 가정을 질투하신 모양이야." 제프는 머리를 흔들었다. "장남인 폴도 훌륭한 청년이었지만, 특히 게리는 그 집안의 자랑거리였어. 그를 만난 사람은 누구든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지. 그런데 쓰레기 같은 좀도둑들에게 살해당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다음날 아침에 스튜디오로 가는 차 안에서, 제프가 다나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다나, 레이첼이 여기 워싱턴에 있어." "그런데라고?" 어떻게 그렇게 태연히 말할 수 있지. 정말 뜻밖이로군. 너무나 뜻밖이야." 다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제프는 한때 일류 모델 레이첼 스티븐스와 결혼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다나는 텔레비전 광고와 잡지 표지에서 종종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레이첼 스티븐스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특히 햐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 모습은 뭐라고 말할 수 없이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아마도 머릿속이 텅 비어 있을거야. 그 여자에게 필요한 건 두뇌 따위가 아니라 얼굴과 육체뿐일 테니까.' 레이첼 스티븐스의 아름다운 사진을 볼 때마다 다나는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다나는 레이첼이 단지 풍만한 가슴만을 자랑하는 그런 모델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강렬한 성적 매력을 뛰어 넘는 독특한 개성이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눈빛은 지적이고 총명했다. 언제인가 다나는 제프와 함께 전 부인인 레이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당신의 결혼 생활은 어땠어요?" "처음엔 아주 좋았지." 제프가 다나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두 사람은 커다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레이첼은 나에게 매우 헌신적이었어. 야구를 싫어하면서도 내가 경기하는 것을 보려고 시합이 있을 때마다 야구장에 찾아오곤 했으니까. 야구를 싫어한다는 걸 제외하면, 우린 공통점이 아주 많았어." '물론 그랬겠지.' 다나는 은근히 질투심이 났다. "레이첼은 정말 아름다운 여자였어. 흠 잡을 데라고는 하나도 없었지. 특히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촬영이 있을 때면 레이첼은 다른 모델들을 위해서 요리를 했어." '경쟁자를 제거하는 데 상당히 좋은 방법이로군. 다른 모델들은 아마 파리처럼 가치가 떨어졌을걸.' "뭐라고?" "아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아무튼, 우린 5년 동안 결혼 생활을 했어." "그러고 나서는요?" "시간이 갈수록 레이첼은 점차 각광받는 모델이 되었지. 물론 수입도 엄청났어. 그녀의 스케줄은 언제나 꽉 차 있었고, 직업상 전 세계를 돌아다니지 않을 수 없었어. 이탈리아.......영국....... 자메이카....... 태국...... 일본....... 안 가는 데가 없었지. 그러는 동안 나는 전국을 돌면서 야구 경기를 했어. 결국 우리가 함께 있지 못하는 시간이 아주 많아졌지. 우리는 서로 시간을 맞출 수 없었거든. 조금씩 조금씩 사랑의 마법이 약해졌고." 다음 질문은 제프가 아이들을 좋아했기 때문에 당연히 나올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왜 아이를 갖지 않았죠?" 제프는 쓴 웃음을 지었다. "아이는 낳는 건 모델의 몸매를 망치는 일이니까. 어느 날, 헐리우드에서 가장 뛰어난 감독들 중의 하나인 로데릭 마샬이 그녀를 불렀지. 여주인공으로 쓰겠다면서 말이야. 레이첼은 헐리우드로 갔어." 제프는 망설이다가 말을 계속했다. "일주일 후에 레이첼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혼을 요구하더군. 우리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느낀 거야. 나는 동의할 수 밖에 없었어. 이미 우리 사이는 회복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야. 그렇게 하려면 두 사람 중에 누군가 자신의 일을 포기해야만 하는데, 그 당시에는 어느 쪽도 그럴 생각이 없었거든. 결국 이혼을 해주었지.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 팔이 부러졌어." "그리고 당신은 스포츠 해결자가 된 거구요. 레이첼은 어때요? 그녀는 영화에서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잖아요?" 다나는 신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날카로운 자신의 어조에 스스로 깜짝 놀랄 정도였다. 제프는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주목을 받지 못했지. 하지만 연기는 아주 잘했어......." "당신들은 여전히 우호적으로 지내나요?" 다나는 마치 추궁하듯이 물었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지난번에 그녀가 나에게 전화했을 때, 우리 이야기를 했지. 레이첼은 당신을 만나보고 싶다고 하더군." 다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제프, 나는 생각해보지 않아서......." "레이첼은 정말 좋은 여자야, 다나. 우리 모두 같이 점심을 먹자구. 당신도 레이첼을 좋아하게 될거야." "물론 그렇겠죠." 다나는 일단 제프의 말에 동의했다. 그때는 조만간 레이첼을 만날 기회가 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리고 다나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도 달랐다. '그런데 난 바보들과 이야기하는 데 익숙하지 못한걸.' 그 바보는 다나가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윤기 흐르는 긴 금발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레이첼 스티븐스는 키가 크고 늘씬했다. 매끄러운 그녀의 피부는 이런 한겨울에 지중해 해변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갈색으로 윤이 났다. 그 때문인지 레이첼이 서 있는 곳은 우중충한 겨울이 아니라, 찬란하게 빛나는 여름처럼 느껴졌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힐끗힐끗 그녀를 돌아보기에 바빴다. 다나는 방송국과 집만 왔다갔다하느라 창백하고 생기 없게 보일 자신의 얼굴이 새삼스럽게 후회스러웠다. 다나는 한눈에 그 여자가 싫어졌다. "다나 에반스, 이 사람이 레이첼 스티븐슨야." 다나는 생각했다. "'레이첼 스티븐스, 이 사람이 다나 에반스야.' 이렇게 말했어야 하는 게 아니야?" 멍하니 서 있는 다나 앞에서 레이첼 스티븐스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무슨 말인가 하고 있었다. "사정이 허락하는 한, 사라예보에서 보내오는 당신의 방송을 빼놓지 않고 들었답니다. 정말 거짓말 같은 이야기들이었죠. 당신이 얼마나 가슴 아파하는지 알 수 있었어요. 우린 당신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었답니다." '이렇게 재치 있고 진심 어린 칭찬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고맙습니다." 다나가 어색하게 말했다. "어디 가사 점심을 먹는 게 어때?" 제프가 물었다. 그러자 레이첼이 선뜻 제안했다. "말레이 스트레이츠라는 근사한 음식점이 있어요. 듀폰 써클에서 두 블록만 가면 되죠." 레이첼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걱정스런 표정으로 다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타이 음식을 좋아하나요?" '진짜로 내 걱정을 해주는 것 같군 그래.' "네." 제프가 미소를 지었다. "좋아. 가보자구." 레이첼이 말했다. "여기에서 그리 멀지 않아요. 우리 걸어가죠?" '이렇게 얼어붙은 듯이 추운 날씨에 걷자고?' 다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이 여자는 아마 눈 속에서 벌거벗고도 걸을 수 있을거야. 남들에게 자신의 멋진 몸매를 과시할 수만 있다면 말이야.' 그들은 듀폰 써클을 향해서 출발했다. 두 사람과 나란히 길을 걷다보니, 다나는 점점 더 기분이 불쾌해졌다. 마치 자신이 불청객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이 초대에 응한 것이 후회되었다. 타이 음식점은 만원이었다. 요즘 워싱턴은 뉴욕과 마찬가지로 오리엔탈 푸드가 대유행이었다. 십여 명 정도의 사람이 바에 앉아서 테이블이 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급사장이 부산스럽게 다가왔다. "세 사람이 앉을 자리가 필요해요." 제프가 말했다. "예약을 하셨습니까?" "아니요, 하지만 우린......." "죄송합니다, 예약을 하지 않으셨다면......." 다음 순간 급사장은 제프를 알아보았다. "코너스 씨, 이렇게 뵙게 되다니 기쁘군요." 그런 다음 그는 다나를 쳐다보았다. "에반스 양, 이거 정말 영광인데요." 급사장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오래 기다리시게 될까봐 걱정이군요." 마지막으로 레이첼에게 시선이 향한 급사장의 얼굴이 밝게 빛났다. "스티븐스 양! 정말 반갑습니다. 당신이 중국에서 활동을 벌일 예정이라는 기사를 읽었어요." "중국에 갔었어요, 솜차이. 하지만 돌아왔죠." "굉장하군요." 급사장은 다나와 제프에게 몸을 돌렸다. "여러분이 앉으실 자리는 물론 있구말구요.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급사장은 일 분도 안 돼서 세 사람을 중앙에 있는 가장 좋은 테이블로 안내했다. 날마다 방송을 진행하는 다나와 제프보다도 레이첼의 미소가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게 틀림없었다. '나는 이 여자가 싫어.' 다나는 생각했다. '이 여자가 정말 싫어.' 그들이 자리에 앉자, 제프가 말했다. "아주 좋아보이는걸, 레이첼. 당신은 뭘 입든지 잘 어울려." "계속 너무 오랫동안 여행을 했어요. 그래서 이제 한동안 쉬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레이첼은 제프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날 밤 당신과 내가 함께......." 다나는 메뉴판에서 번쩍 고개를 들며 물었다. "우당 고랭이 뭐죠?" 레이첼이 다나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건 코코넛 우유에 담근 새우 요리예요. 이 집에서 아주 잘하는 요리예요." 그녀는 다시 제프를 향해서 몸을 돌렸다. "그날 밤 우리가 윈했던 것을 하기로 결정을......." "라크사는 뭐죠?" 레이첼을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그건 향료를 친 국수 스프예요." 그녀는 다시 제프에게로 몸을 돌렸다. "당신의 생각을 말해봐요......." "포 피아는요?" 레이첼이 다나를 돌아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야채와 같이 프라이팬에 볶은 지카마 요리죠." "그래요?" 다나는 지카마가 무엇인지 더 이상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잠시 후에 다나가 처음 보는 이국적인 요리가 나왔다. 다나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식사를 계속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놀랍게도 자신이 레이첼 스티븐스를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레이첼은 따뜻하고 매력적인 여자였다. 아름다운 미로를 지닌 대분분의 여자들과는 달리, 레이첼은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전혀 오만하게 굴지 않았고 이기적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지적이고 솔직했다. 웨이터에게 태국어로 직접 식사 주문을 하면서도 잘난 척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레이첼의 행동은 우아하고 자연스러웠다. 그녀와 함께 있으며 마치 덩달아 귀족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어떻게 제프가 이런 여자와 헤어질 수가 있었지?" 다나는 의아스러웠다. "워싱턴에는 얼마나 있을 건가요?" 다나가 물었다, "내일 떠나야 해요." "이번엔 어디로 가는 거지?" 제프가 궁금한 듯 물었다. 레이첼은 망설이며 말했다. "하와이예요. 하지만 나는 정말로 지쳤어요, 제프. 심지어 이번 여행을 취소하는 것까지 생각했으니까요." "그래도 취소하지는 않았잖아." 제프가 새삼스럽게 지적했다. 레이첼은 한숨을 쉬었다. "네, 그러지 않았죠." "언제 돌아오게 되나요?" 다나가 물었다. 레이첼은 한참 동안 다나를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말했다. "한동안 워싱턴에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다나. 나는 당신과 제프가 정말로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라고 있어요." 레이첼의 말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다나가 먼저 말했다. "나는 할 일이 좀 있어요. 두 분이 먼저 가세요." 레이첼이 손을 내밀어서 다나의 손을 잡았다.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요." "나도 그래요." 다나가 말했다. 놀랍게도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다나는 제프와 레이첼이 거리를 떠나 걷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늘씬하고 우아한 자태의 레이첼과 날렵하고 키가 큰 제프는 잘 어울렸다. 누구든 그들을 보면 잘 어울리는 완벽한 연인이라고 생각할 것이었다. '정말 아름다운 한쌍이야.' 그녀는 생각했다. 12월 초였으므로 워싱턴은 한창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수도 워싱턴의 거리는 온통 크리스마스 전구들과 호랑가시나무 화환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거의 모든 길모퉁이마다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구세군들이 서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종을 흔들고 있었다. 인도마다 얼음처럼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걸어가는 쇼핑객들로 북적거렸다. '때가 됐구나.' 다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쇼핑을 시작할 때가 된거야.' 다나는 자신의 선물을 줘야 할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녀의 어머니, 케말, 상사 매트, 그리고 물론 매력적인 남자 친구 제프도 빼놓을 수 없었다. 다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워싱턴에서 가장 큰 백화점중의 하나인 헤치 백화점으로 향했다. 그곳은 길을 막는 다른 사람들을 거칠게 팔꿈치로 밀치면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러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쇼핑을 마친 다나는 선물을 갖다 두기 위해서 다시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녀의 아파트는 조용한 주택 지역인 커버트 가에 있었다.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의 가구들이 딸려 있고, 침실 하나, 거실, 부엌, 욕실, 그리고 케말이 침실로 쓰는 서재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나는 선물을 벽장 속에 넣고 행복한 마음으로 작은 아파트를 둘러보았다. '제프와 내가 결혼을 하면 이보다 더 넓은 집이 필요하겠지. 어쩌면 아기방이 있어야 할지도 몰라.' 다나가 스튜디오로 돌아가기 위해서 막 나서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머피의 법칙이군.' 다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다나, 잘 있었니?" 그녀의 어머니였다. "안녕하세요, 엄마. 전 막 나가려던......." "어젯밤에 친구들과 네 방송을 들었단다. 아주 잘하더구나." "고마워요." "그렇지만 우리 생각엔 네가 뉴스를 조금 밝게 할 수도 있을 것 같더라." 다나는 한숨을 쉬었다. "뉴스를 밝게 한다구요?" "그래. 네가 정한 주제들은 모두 너무 무겁더구나. 즐겁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주제를 찾을 수가 없니?" "그러도록 해볼게요, 엄마." "그게 더 나을거야. 그건 그렇고, 이번 달 생활비가 아주 조금 모자라는구나. 네가 한 번 더 엄마를 도와줄 수 있겠니?" 다나의 아버지는 수년 전에 실종되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곧 다나의 어머니는 라스베가스로 이사를 갔다. 어머니는 언제나 생활비가 모자라는 것 같았다. 매달 다나가 어머니에게 부쳐주는 돈만으로는 항상 살기가 빠듯하다고 불평을 했다. "도박을 했나요, 엄마?" "무슨 소리냐." 에반스 부인은 분개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스베가스는 물가가 아주 비싼 도시야. 내가 얼마나 알뜰하게 살고 있는데 도박이라니. 그건 그렇고, 언제 이 엄마를 만나러 이곳에 올 거니? 킴발을 만나고 싶구나. 그 애를 꼭 데려와야 한다." "그 애의 이름은 케말이에요, 엄마. 그리고 당장은 이곳을 떠날 수가 없어요." 수화기 저쪽 끝에서 가벼운 실망이 느껴졌다. "떠날 수가 없단 말이냐? 내 친구들은 모두 네가 단지 하루에 한두 시간만 일하면 되는 직장에서 근무를 하고 있으니 얼마나 행운이냐고 말들을 한단다." 다나는 체념한 듯이 대답했다. "그냥 제가 운이 좋은 것뿐이에요." 앵커우먼으로서 다나는 매일 아침 9시면 텔레비전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하루 중의 많은 시간을 국제 전화에 매달려서 런던, 파리, 이태리, 그리고 다른 외국에서 끊임없이 보내오는 새로운 정보들을 살펴보는 데 보냈다. 나머지 시간들은 연이은 제작 회의와 엄청난 양의 뉴스 검토, 그리고 어떤 뉴스를 방송하고, 어떤 순서로 진행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 바쳤다. 그녀는 두 개의 저녁 뉴스 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다. "네가 그렇게 편한 직장에 다닌다니 좋구나. 얘야." "고마워요, 엄마." "조만간 엄마를 보러 오겠지. 그렇지?" "네, 그럴게요." "그 남자 애를 빨리 보고 싶어서 기다릴 수가 없구나." '그래, 엄마를 만나는 건 케말에게도 좋은 일이 될 거야.' 다나는 생각했다. '그 애에게 할머니가 생기는 거니가. 그리고 제프와 내가 결혼을 하면, 케말에겐 다시 진짜 가족이 생기는 거야.' 다나가 아파트 복도로 걸어나왔을 때 옆집 문이 열리면서 와톤 부인이 나타났다. "저번 날 아침에 케말을 돌봐주셔서 고마웠어요, 도로시. 정말로 감사해요." "뭘, 내가 좋아서 한 일인걸. 앞으로도 그런 일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부탁해요. 가끔씩 케말 같은 아이를 돌보는 것은 나에게도 즐거운 일이에요." 도로시 와톤과 그녀의 남편 하워드는 일 년 전에 이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그들은 캐나다 사람이었고 쾌활한 사십 대의 중년 부부였다. 하워드 와톤은 기념물을 수리하는 기술자였다. 어느날 밤,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세상 그 어떤 도시를 찾아봐도 워싱턴만큼 좋은 곳이 없습니다. 어디에서 여기만큼 많은 일거리를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없구말구요." 와톤 부인 역시 확인하듯 남편의 말을 이었다. "하워드와 나는 둘 다 워싱턴이 그렇게 마음에 들 수가 없어요. 정말이지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니까요." 다나가 사무실로 돌아오자, 그녀의 책상 위에는 방금 인쇄된 '워싱턴 트리뷴'지가 놓여 있었다. 신문 첫 페이지는 온통 윈스롭 가문에 대한 기사와 사진들로 채워져 있었다. 다나는 한참 동안 그 사진들을 내려다보았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일 년도 안 되는 사이에 가족 다섯 사람이 모두 죽었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워싱턴 트리뷴 엔터프라이즈사의 사무국 건물에 있는 어느 중역실, 개인 전용 전화를 통해 은밀한 대화가 오고 가고 있었다. "방금 지시를 받었어요." "좋습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그림들은 어떻게 하라고 할까요?" "불태워버려요." "모두 다요? 수백만 달러어치는 될 텐데요?" "모든 게 완벽하게 끝나야 해요. 실수는 용납할 수가 없어요. 당장 그것들을 불태워버려요." 다나의 비서 올리비아 와킨스의 목소리가 인터폰을 통해서 흘러나왔다. "3번의 전화가 와 있습니다. 남자 분이 벌써 두 번이나 전화를 하셨어요." "누구라고 하던가요, 올리비아?" "헨리 씨랍니다." 토머스 헨리는 테오도르 루즈벨트 중학교의 교장이었다. 다나는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두통을 가라앉히려고 한쪽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그리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안녕하세요, 헨리 씨." "안녕하십니까, 에반스 양. 시간을 내서 저를 만날 수 있을지 알고 싶군요." "그럼요. 한두 시간 후에 제가......." "지금은 어떤가요, 괜찮으시다면." "알겠습니다. 제가 곧 가죠." 3 케말의 네메시스 케말에게 학교는 견딜 수 없이 혹독한 시련이었다. 미국으로 이제 막 건너온 케말은 영어가 서툴러서 학교 수업을 잘 따라갈 수 없었다. 게다가 다른 아이들보다 체격도 작았고 여자 아이들 앞에서는 수줍어서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그의 별명은 '꼬맹이', '새우' 그리고 '피라미' 였다. 학교 수업 중에서 케말이 흥미있어 하는 과목은 단지 수학과 컴퓨터뿐이었고, 그 과목들에서 케말은 언제나 가장 놓은 점수를 받았다. 특별 활동으로 참가하고 있는 체스 클럽에서도 케말은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미국에 오기 전까지는 축구를 좋아해서 동네 아이들과 시합을 하곤 했지만, 학교 축구 대표팀에 지원하려고 갔을 때, 축구 코치는 케말의 빈 소매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다, 우린 너를 받아들일 수가 없구나." 퉁명스러운 거절은 아니었지만, 케말은 큰 충격을 받았다. 케말의 네메시스(역주: 복수의 여신)는 리키 언더우드였다. 점심 시간에 학생들 중 일부는 학교 식당 대신에 넓은 안뜰에서 식사를 하곤 했다. 그런데 리키 언더우드는 한쪽 구석에 숨어서 혼자 점심을 먹고 있는 케말을 용케도 찾아내어 번번이 괴롭혔다. "야, 고아 새끼야. 네 교활안 양 엄마가 언제 널 왔던 곳으로 되돌려 보낸다니?" 케말은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너에게 말하고 있잖아, 병신아. 설마 그 여자가 널 계속 이곳에 둘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 여자가 왜 널 데려왔는지 사람들은 다 알아. 그 여자는 유명한 종군 기자야. 전쟁터에서 팔 병신을 구해오면 다른 사람들 눈에 얼마나 멋지게 보일지 알고 있었던 거라고." "개 새키!" 케말이 고함을 질렀다. 케말은 벌떡 일어나서 리키에게 덤버들었다. 리키의 주먹이 케말의 복부에 꽂히고, 다음에 케말의 얼굴을 쳤다. 케말은 땅바닥에 쓰러져서 고통으로 몸을 움츠렸다. 리키 언더우드가 비웃으며 말했다. "언제든지 한 대 더 맞고 싶거든, 나에게 말만 하라구. 되도록 빨리 하는게 좋을 거야. 넌 이미 끝난 인생이니까 말이야." 케말은 의혹을 지우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물론 리키 언더우드가 말한 것을 믿지 않았지만.......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다나가 나를 돌려보내면 어떻게 하지? 리키의 말이 맞아.' 케말은 두려움에 떨었다. '나는 병신이야. 다나가 이런 나를 보살피는 게 다른 사람들 눈에 왜 놀랍지 않겠어?' 부모와 누이들이 사라예보에서 살해되었을 때, 케말은 자신의 인생이 그만 끝났다고 믿었다. 얼마 후에 그는 파리 외곽에 있는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그곳의 생활은 악몽처럼 끔찍했다. 매주 금요일 오후 2시가 되면, 고아원의 아이들은 모두 줄을 서서 그들을 입양하고 집으로 데려가 미래의 양부모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매주 금요일이 다가오면 아이들 사이에서는 거의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흥분과 긴장이 높아졌다. 아이들은 몸을 씻고 단정하게 옷을 갈아입었고, 어른들이 줄 앞을 지나갈 때마다 자신이 선택되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그러나 언제나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었다. 미래의 양부모들은 케말을 보면 나지막이 수근거렸다. "보세요, 저 애는 팔이 하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들은 케말 앞을 조용히 지나쳤다. 금요일마다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었지만, 다른 고아들과 함께 줄지어 서서 양부모들을 맞이할 때마다 케말은 계속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다른 아이들을 선택했다. 그 자리에 서서, 못 본 척 외면을 당하면서, 케말의 마음속은 점점 증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누구든 마찬가지야.' 케말은 절망했다. '나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케말은 가족이 생기기를 어느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바랐다. 그는 그렇게 되기 위해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어느 금요일, 케말은 고아원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착하고 상냥한 아이인지 알려주려고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 다음 주 금요일엔 자신은 선택이 되든 안 되든 관심이 없으며 오히려 자신을 데려가는 그들이 행운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는 척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제발 자신을 선택해서 데려가라고 말없이 애원하면서 호소하듯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금요일마다 언제나 다른 아이들이 선택되었고 그 아이들은 멋진 집과 행복한 가족이 있는 곳으로 떠났다. 마치 기적처럼, 다나가 그 모든 상황을 바꾸어놓았다. 그녀는 집없이 사라예보의 거리를 떠돌며 지내는 케말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었다. 적십자 단체에 이끌려 프랑스의 고아원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 탄 후에, 케말은 다나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나는 고아원으로 전화를 했고 케말은 미국으로 와서 그녀와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케말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 실현된 것이었고, 심지어 케말이 상상했던 것보닫도 훨씬 더 즐거운 생활이었다. 케말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는 그동안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했던 게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다른 양부모가 그를 선택했다면, 다나와 함께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이제 케말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 그를 아껴주고 있었다. 다나는 다정하고 이해심이 깊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솔직하고 대등하게 대해주었다. 케말이 전쟁터에서 겪은 그 처참한 비극을 자기도 안다는 식의 어설픈 동정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케말의 아픈 과거를 그대로 존중해줄 뿐이었다. 케말은 마음속 깊이 진심으로 다나를 사랑했다. 그러나 항상 마음한 구석에는 리키 언더우드가 심어놓은 그 끔찍한 두려움이 떠나지를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다나의 생각이 바뀌어서 그가 간신히 탈출한 악몽 같은 고아원으로 그를 다시 돌려보낼 것만 같았다. 케말은 매번 같은 꿈을 꾸곤 했다. 꿈 속에서 그는 고아원에 돌아가 았었고, 금요일이었다. 미래의 양부모들이 차례차례 고아들을 조사했고, 다나도 그들 틈에 있었다. 다나가 케말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보기 싫은 꼬마 애는 팔이 하나밖에 없군요." 그리고 그녀는 발걸음을 옮겨서 케말의 옆에 있는 남자 아이를 선택했다. 그 순간 케말은 눈물을 흘리면서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케말은 자신이 학교에서 말썽을 부리면 다나가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말썽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리키 언더우드나 그의 친구들이 다나를 욕하는 것은 절대로 참을 수가 없었다. 리키 패거리들은 케말의 가장 예민한 부분이 다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나를 욕하는 횟수가 많아졌고, 따라서 싸움의 횟수 또한 늘어났다. 리키는 늘 이렇게 케말을 놀려댔다. "야, 가방은 다 쌌냐, 새우야? 오늘 아침 뉴스에서 너의 개 같은 양 엄마가 너를 유고슬라비아로 돌려보낼 거라고 말하던데." "조 보스티!" 케말은 소리쳤다. 그렇게 해서 싸움이 시작되곤 했다. 케말은 종종 눈에 멍이 들고 몸 이곳저곳에 타박상을 입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다나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 케말은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리키 언더우드가 한 말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두려웠다. 케말은 교장실에 앉아서 다나가 오기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다나가 이번에 내가 한 일을 들으면, 나를 사라예보나 고아원으로 보내버릴 거야.' 케말의 심장이 마구 뛰었다. '이제 내 인생은 끝이야.' 케말은 비참한 기분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다나가 토머스 헨리의 교장실로 들어갔을 때, 교장은 험상궂은 얼굴로 방 안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케말은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에반스 양. 앉으십시오." 다나는 케말을 힐낏 바라보고 의자에 앉았다. 토머스 헨리가 책상 위에서 커다란 칼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아주 중대한 발표라도 하는 것처럼 엄숙하게 선언했다. "선생님 한 분이 이걸 저 애한테서 뺏었습니다." 다나는 케말을 홱 돌아보면서 화가 나서 소리쳤다. "왜 그랬니?" 그녀는 분노해서 물었다. "왜 이런 걸 학교에 가져왔냐구?" 케말은 다나를 쳐다보며 침울하게 대답했다. "저에게는 총이 없잖아요." "케말!" 다나는 교장 선생을 향하여 몸을 돌렸다. "선생님과 단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교장 선생님?" "그러시죠." 그는 케말을 돌아보면서 딱딱하게 말했다. "복도에서 기다리거라." 케말은 일어나서, 마지막으로 그 칼을 한번 힐끗 바라보더니 밖으로 나갔다. 다나가 입을 열었다. "교장 선생님, 케말은 이제 겨우 열두 살입니다. 그 아이는 지금껏 인생의 대부분을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누이들을 죽인 폭탄이 쉴새없이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지냈습니다. 본인도 그 폭탄에 맞아 한쪽 팔을 잃었구요. 제가 사라예보의 전쟁터에서 케말을 발견했을 때, 그 아이는 아무것도 없는 빈 터에서 혼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곳에는 수백 명의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이 마치 짐승처럼 살고 있답니다." 그녀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마침내 폭격은 멈추었지만, 그 아이들에게는 여전히 집도 없고 희망도 없습니다. 그 아이들이 적에게 대항해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칼이나 돌맹이 아니면 총을 갖는 것입니다. 물론 그걸 갖게 될 만큼 운이 아주 좋다면 말이죠." 다나는 잠시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 아이들은 항상 겁에 질려 있습니다. 케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케말은 좋은 아이입니다. 그 아이는 단지 이곳이 안전한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의 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의 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 아이가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거라고 제가 대신 약속드리겠습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토머스 헨리가 말문을 열었다. "좋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나에게 변호사가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당신이 내 변호를 해주십시오, 에반스 양." 다나는 간신히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기꺼이 해드리죠." 토머스 헨리가 한숨을 쉬었다. "케말과 한번 이야기를 해보십시오. 단단히 타이르도록 하세요. 하지만 그 아이가 또다시 이런 짓을 저지른다면, 유감이지만 저로서는......." "아이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교장 선생님." 케말은 복도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으로 가자." 다나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저 사람들이 제 칼을 가졌어요?" 다나는 더 이상 대답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케말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난처하게 해서 미안해요, 다나." "오 케말, 그렇게 잘 알면 처음부터 난처한 일을 만들지 말았어야지. 다행히도 교장 선생님은 너를 퇴학시키지 않기로 결정했어. 하지만 그것도 단 한 번 뿐이야. 봐라, 케말......." "알았어요. 칼은 더 이상 가져가지 않겠어요." 아파트로 돌아오자, 다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당장 방송국으로 돌아가야 해. 조금 있다가 너를 돌봐줄 사람이 올거야. 오늘밤에 너와 내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어야 할 것 같구나." 저녁 방송이 끝나자마자, 나란히 앉아 방송을 진행하던 제프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나에게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야, 나나? 표정이 아주 어두운걸." "케말 때문이에요. 오, 제프. 도대체 그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오늘 다시 교장실에 불려가야 했어요. 벌써 두 명의 가정부가 그 애 때문에 그만두었어요." "다나, 그 아이는 똑똑하고 영리한 아이야. 단지 사랑으로 지켜봐 줄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라고." 제프가 다정하게 다나를 위로했다. "그렇겠죠, 제프? 내가 그 아이를 데려온 게 끔찍한 실수가 아니었기를 바랄 뿐이에요." 저녁 늦게 다나가 아파트로 돌아오자, 케말이 풀죽은 얼굴로 주춤주춤 서재에서 걸어나왔다. 다나가 조용히 말했다. "앉아라. 우린 이야기를 해야만 해. 너는 규칙을 지키는 것을 배우고 학교에서 싸우는 것을 그만두어야 해. 다른 남자 아이들이 너를 힘들게 하고 괴롭힌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너는 그 아이들과 잘 지내도록 노력해야 해. 네가 계속 말썽을 일으키면 교장 선생님이 너를 퇴학시킬 거야." "상관없어요." 케말은 고집 세게 말했다. "나는 상관 있어. 나는 네가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하길 바래. 그리고 그렇게 되려면 교육을 받지 않고는 불가능해. 교장 선생님은 너에게 기회를 주었어. 하지만......." "엿이나 먹으라지." "케말!" 자신도 모르게 다나는 케말의 뺨을 쳤다. 하지만 즉시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케말은 뚫어져라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불신과 증오의 표정이 가득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케말은 서재로 달려가더니 소리내어 문을 쾅 닫았다. 이때 전화벨이 울렸다. 다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제프였다. "다나......." "제프, 나....... 지금은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너무 혼란스러워요." "무슨 일이야?" "케말 말이에요. 그앤 정말 구제불능이에요!" "다나....... 케말의 입장이 되어야 해." "뭐라구요?" "케말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을 해보란 말이야. 다나, 당신을 사랑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 '그 아이의 입장이 돼보라구?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다나는 절망적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내가 케말의 감정을 알 수가 있어? 나는 끔찍한 과거를 겪은 열두 살짜리 외팔이 고아 소년이 아니야.' 다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그 아이의 입장이 돼보라구.' 제프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나는 뭔가 결심한 듯이 벌떡 일어나서 침실로 갔다. 그리고 방문을 닫은 뒤에 벽장 문을 열었다. 케말이 이곳에 오기 전까지 제프는 일주일이면 삼사 일을 그녀의 아파트에서 보내곤 했다. 아직까지도 그의 옷가지 몇 점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벽장 안에는 몇 벌의 바지와 셔츠, 넥타이, 스웨터 한 벌, 그리고 스포츠 재킷 한 벌이 있었다. 다나는 그 옷들 중 몇 개를 꺼내서 침대 위에 놓았다. 그리고 다시 서랍장으로 걸어가서 제프의 팬티와 양말을 꺼냈다. 그런 다음에 그녀는 옷을 모두 벗었다. 그녀는 왼손으로 제프의 팬티를 잡고 입기 시작했다. 그녀는 곧 균형을 잃고 방바닥에 쓰러졌다. 두 번 더 시도를 한 끝에야 겨우 그 옷을 입을 수가 있었다. 다음에 그녀는 제프의 셔츠 하나를 집어들었다. 모든 동작을 왼손만으로 하려니 생각보다 훨씬 힘 들었다. 불과 몇 분 동안에 세 번이나 실패한 끝에 셔츠에 몸을 집어넣고 단추를 잠글 수 있었다. 그녀는 바지를 입기 위해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 앉아야만 했고 지퍼를 올리는 데에도 한참 애를 먹었다. 그리고 제프의 스웨터를 입는 데 다시 2분이 걸렸다. 마침내 옷 입는 일이 끝났을 때, 다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것이 케말이 매일 아침 겪어야만 하는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건 단지 시작일 뿐, 이제부터 케말은 한 손으로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머리를 빗어야만 한다. 그것이 현실이다. 과거는 어땠을까? 전쟁의 공포 속에서 살면서, 케말은 아버지, 어머니, 누이, 그리고 친구들이 차례차례 살해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제프의 말이 옳아.' 다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너무 성급하게 많은 것을 기대했던 거야. 그 아이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시간이 더 필요해. 나는 절대로 그 아이를 포기할 수가 없어. 우리 아버지는 어머니와 나를 버렸지만 나는 결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아이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만약 열세 번째 계명이 있다면 이런 것이겠지.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버리지 말아라.' 천천히, 다시 자신의 옷을 입으면서, 다나는 케말이 몇 번이고 즐겨 듣던 유행가 가사를 생각했다. 그것들은 브리트니 스피어스, 백스트리트 보이즈, 림프 비즈킷의 노래였다.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요", "오늘 밤 당신이 필요해요", "언제까지나 나를 사랑해줘요", "내가 원하는건 단지 당신과 함께 있는 것", "나는 당신이 필요해요' 그 가사들은 모두가 외로움과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나는 케말의 성적 통지표를 집어들었다. 케말이 대부분의 수업에서 형편없는 점수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수학에서만큼은 A를 받았다. '중요한 건 A야.' 다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케말은 수학을 뛰어나게 잘해. 거기에 케말의 미래가 있는 거야. 다른 성적들은 차차 좋아질 거야.' 다나가 서재 문을 열었을 때, 케말은 두 눈을 꼭 감고 눈물 자국으로 얼룩진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다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다음 몸을 숙여서 케말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미안해, 케말." 다나는 속삭였다. "나를 용서해주렴."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날이 될 거야.' 다나는 마음속으로 희망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다나는 케말을 저명한 정형외과 의사인 윌리암 윌콕스 박사에게 데려갔다. 케말을 진찰한 후, 윌콕스 박사는 다나와 둘이서만 면담을 했다. "에반스 양, 그 아이에게 인공 팔을 달아주려면 2만 달러 정도가 듭니다. 그러나 문제는 비용이 아닙니다. 이제 케말은 겨우 열두 살입니다. 그 아이의 신체는 열일곱 살이나 열여덟 살이 될 때가지 계속 성장할 것입니다. 아이의 몸이 커지면 인공 팔도 따라서 커져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만든 인공 팔은 겨우 몇 달밖에 착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금전적으로 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다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박사님." 밖으로 나온 다나는 케말에게 말했다. "미안하다, 케말. 다른 방법을 찾자." 다나는 케말을 학교에 내려주고 스튜디오로 향했다. 여섯 블록 정도 갔을 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매트요, 오후에 경찰서에서 윈스롭 살해사건에 대한 기자 회견이 있을 거요. 당신이 그걸 맡아주시오. 카메라 맨을 보내주겠소. 경찰은 미궁에 빠졌소. 소문은 시시각각 켜져가는데, 경찰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소." "2번으로 시장님 전화가 와 있습니다." 비서가 알렸을 때, 경찰서장 댄 버넷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버넷은 딱딱하게 대답했다. "1번으로 주지사님과 통화 중이라고 말해." 그는 다시 수화기를 귀에 댔다. "네, 주지사님. 알고 있습니다....... 네, 주지사님. 제 생각엔....... 우리가 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빠른 시일 내로....... 그렇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주지사님." 그는 수화기를 쾅 내려놓았다. "백악관 공보담당관님이 1번으로 전화하셨습니다." 오전 내내 이런 식이었다. 그날 오후, 워싱턴 시내에 있는 인디아나 가 300번지의 무니시펄 센터의 기자 회견장은 언론과 보도 기관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콱 찼다. 경찰서장 버넷이 기자 회견장 앞으로 걸어나왔다. "조용히 해주십시오, 여러분." 버넷은 모두들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의 질문을 받기 전에,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게리 윈스롭의 참혹한 죽음은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입은 커다란 손실입니다. 우리는 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잡을 때까지 수사를 계속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질문을 받겠습니다." 한 기자가 일어났다. "버넷 서장님, 경찰에서 어떤 단서를 찾았습니까?" "새벽 3시경에 한 목격자가 게리 윈스롭 씨의 집 앞 도로에서 두 명의 남자가 흰색 벤을 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행동을 수상하게 생각한 목격자는 그 차 번호를 외워두었습니다. 나중에 조사해보니, 도난당한 트럭의 번호판이었습니다." "그 집에서 없어진 게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10여 점의 값진 그림들이 없어졌습니다." "그림 이외에 도난당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현금과 보석은 어떻습니까?" "집 안에 있던 현금과 보석은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도둑들은 단지 그림만 훔쳤습니다." "버넷 서장님, 그 집에는 경보 시스템이 있지 않나요, 그렇다면, 경보 시스템이 켜졌을 텐데요?" "집사의 말에 따르면, 밤에는 경보 시스템이 항상 켜져 있었답니다. 하지만 강도들은 경보 시스템을 교묘하게 피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아직 어떤 방법을 썼는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강도들이 그 집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까?" 버넷 서장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것이 의문점입니다. 집에는 강제로 침입한 흔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 그 해답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집 안 내부에 협력자가 있었을 수도 있겠군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게리 윈스롭 씨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오랫동안 근무한 사람들로 신원이 확실합니다."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 집 안에는 게리 윈스롭 씨 혼자 있었나요?" "우리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교용인들은 없었습니다." 다나가 큰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도난당한 그림들의 목록을 갖고 있나요?" "갖고 있습니다. 모두 유명한 그림들입니다. 그림 목록을 미술관, 그림 중개상 그리고 수집가들에게 배부했습니다. 그 그림들 중 하나가 나타나는 즉시, 사건은 해결될 것입니다." 다나는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의자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살인자들도 분명히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 감히 그 그림들을 팔려고 하지 않겠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림을 훔쳤을까? 살인을 청부받았을까? 그리고 왜 돈과 보석은 가져가지 않았을까? 이건 뭔가 이치에 맞지를 않아.' 게리 윈스롭의 장례식이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커다란 규모로 자랑하는 내셔널 처어치에서 거행되었다. 위스콘신과 메사추세츠 가는 차량이 통제되었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정부 기관원들과 경찰들이 엄중한 경계를 펼쳤다. 교회 안에서는 미합중국의 부통령과 열 두 명의 상원 의원들과 하원 의원들, 대법원 판사, 두 명의 각료, 그리고 전 세계에서 조문을 온 정부 고관들이 장례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과 보도 기관의 헬리콥터들이 하늘에서 맴돌았다. 교회 밖의 거리에는 게리 윈스롭을 애도하기 위해서, 혹은 교회 안에서 거행될 장례식을 구경하기 위해서 찾아온 수백 명의 구경꾼들이 몰렸다. 사람들은 단지 게리의 죽음만이 아니라 명문 윈스롭 가의 비극적인 운명을 애통해했다. 다나는 두 명의 카메라 맨과 함께 그 장례식을 취재했다. 교회 안은 죽은 듯이 잠잠했다. "우리는 신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목사가 기도를 하고 있었다. "윈스롭 일가는 그들의 삶을 희망을 심는데 바쳤습니다. 그들은 학교와 교회, 그리고 집 없는 이들과 배고픈 이들에게 수억 달러를 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들의 시간과 능력을 아낌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게리 윈스롭 씨는 위대한 가문의 전통을 따랐습니다. 왜 숱한 업적과 자선을 실행한 그들이 그토록 잔인하게 우리 곁을 떠나야만 했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 그들이 남긴 흔적이 영원히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은 정말로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사랑은 언제나 자랑스럽게.......' '신이 계신다면 그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끔찍하게 죽게 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날 밤에 다나의 어머니가 전화를 했다. "친구들과 함께 네가 장례식을 취재하는 것을 보았단다, 다나. 잠깐 동안 말이야, 네가 윈스롭 가에 대해서 말할 때였는데, 네가 곧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보이더라." "그랬어요, 엄마. 사실이 그랬어요." 다나는 그날 밤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간신히 잠이 들었을 때, 그녀는 화재와 자동차 사고와 권총이 발사되는 장면이 어지럽게 뒤섞인 악몽을 꾸었다. 한밤중에, 그녀는 소스라치며 잠에서 깨어나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일가족 다섯 명이 일 년이 안 돼서 죽었잖아? 그게 이상하지 않단 말이야?' 4 치킨 리틀 "무슨 말을 하려는 거요, 다나?" "매트, 나는 불과 1년 사이에 한가족 다섯 명이 모두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너무나 믿기 힘든 우연의 일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다나, 내가 당신을 좀더 잘 알지 못했다면, 정신과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치킨 리틀(역주: 끊임없이 재앙이 임박했다고 경고하는 사람)이 내 사무실에서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고 말할 거이오. 지금 당신은 윈스롭 가의 죽음에 어떤 음모가 있다는 거요? 도대체 그 음모의 배후가 누구라는 거요? 피델 카스트로? CIA? 올리버 스톤? 맙소사, 저명 인사가 살해될 때마다 매번 백 가지도 넘는 음모설이 나오는 것을 모른단 말이오? 지난 주에는 어떤 남자가 여기와서는 린든 존슨이 아브라함 링컨에 의해 살해된 것을 자신이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합디다. 워싱턴은 어떻소? 끊임없는 음모설에 파묻혀 있소." "매트, 우린 '범죄 추적'을 준비하고 있잖아요. 당신도 시청자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을 수 있는 소재로 시작하기를 원하지 않았나요? 만일 내 생각이 맞는다면, 이게 바로 그거예요." 매트 베이커는 잠시 의자에 앉아서, 다나의 말을 검토했다. 마침내 그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괜히 시간 낭비를 하고 있군." "고마워요, 매트." 건물 지하에 있는 워싱턴 트리뷴사의 자료실에는 열람하기 좋도록 잘 분류된 수천 개의 자료 테이프들과 기사들이 가득 차 있었다. 거무스름한 피부를 가진 매력적인 사십 대의 여인, 로라 리 힐이 책상에 앉아서 테이프들을 분류하고 목록을 만들고 있었다. 다나가 안으로 들어가자, 로라는 고개를 들고 다나를 쳐다보았다. "안녕, 다나. 당신이 취재한 장례식 방송을 봤어요. 정말 잘하더군요." "끔찍한 비극이지 않아요?" "끔찍하죠." 다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로라 리 힐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런데 뭘 도와줄까요?" "윈스롭 일가에 대한 자료 테이프를 보고 싶어요." "특별한 거라도 있어요?" "아뇨, 그냥 그 일가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알고 싶어서요." "윈스롭 가문에 대해서라면 내가 말해줄 수 있어요. 한마디로 그들은 성자였어요."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더군요." 다나가 말했다. 로라 리 힐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자료들을 모두 검토하려면 시간이 꽤 많이 걸릴 거예요, 다나. 그들을 다룬 보도 자료가 일 톤은 될 테니까요." "잘됐네요, 난 바쁘지 않아요." 로라 리 힐은 다나를 텔레비전 모니터가 올려져 있는 책상으로 안내했다. "잠깐 기다려요." 로라가 말했다. 로라는 5분 후에 두 팔 가득 테이프를 안고서 돌아왔다. "우선 이것들부터 보도록 해요. 더 가져올게요." 다나는 높이 쌓인 테이프 무더기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정말로 치킨 리틀일지도 몰라. 하지만 내 생각이 옳다면.......' 다나는 비디오 기계 속으로 테이프를 밀어넣었다. 아찔할 정도로 잘 생긴 남자가 텔레비전 화면에 떠올랐다. 조각처럼 단정하고 강인한 몸매, 사자 갈기처럼 풍성하고 검은 머리카락, 맑고 푸른 눈동자, 그리고 굳센 턱을 가진 남자. 젊은 시절의 테일러 윈스롭이었다. 그의 옆에는 어떤 소년이 서 있었다. 실황 중계 요원의 설명이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불우한 어린이들을 위해 여러 시설을 설립한 테일러 윈스롭 씨가 또다시 야외 체험 캠프장을 세웠습니다. 그의 아들 폴은 이곳에서 아버지와 함께 캠프장의 개막식을 지켜보며 기쁨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곳은 테일러 윈스롭 씨가 건설하고 있는 캠프장들 중에서 열 번째 캠프장입니다. 그는 앞으로 최소한 열두 개 이상의 캠프장을 더 지을 계획입니다." 다나는 버튼을 눌러서 화면을 바꾸었다. 드문드문 회색 머리카락이 섞힌, 나이든 테일러 윈스롭이 정부 고관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방금 나토의 고문으로 임명됐습니다. 테일러 윈스롭은 몇 주 이내에 브뤼셀로 떠날 것입니다......." 다나는 테이프를 바꾸었다. 백악관 앞의 잔디밭이 나왔다. 테일러 윈스롭이 연설 중인 대통령 옆에 서 있었다. "저는 그를 FRA, 즉 연방 조사국의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위원회는 전 세계 모든 개발도상국들을 돕는 일에 헌신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조직을 이끌 사람으로서 테일러 윈스롭보다 더 나은 적격자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화면이 바뀌면서 로마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의 전경이 비춰졌다. 테일러 윈스롭이 비행기에서 내리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는 정부의 고위 관료들이, 이탈리아와 미국 간의 무역 거래를 협상하기 위해 도착하는 테일러 윈스롭 씨를 환영하기 위해서 나와 있습니다. 테일러 윈스롭 씨가 대통령의 위임을 받아서 이곳에 온 것은 이번 협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으로써......." '저 사람은 못 하는 것이 없었군.' 그녀는 다시 테이프를 바꾸었다. 테일러 윈스롭이 파리의 대통령 궁에서 프랑스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있었다. "프랑스와의 획기적인 무역 협정이 지금 막 테일러 윈스롭에 의해서 조인되었습니다......." 다나는 또 다른 테이프로 바꾸었다. 테일러 윈스롭의 아내인 매들린이 한 무리의 소년 소녀들 앞에 서 있었다. "매들린 윈스롭 여사는 오늘 학대받는 어린이들을 위한 새로운 보호 센터를 시에 헌납했습니다......." 윈스롭 가의 아이들이 버몬트 주 메사추세츠에 있는 자신들 소유의 대농장에서 뛰어노는 테이프도 있었다. 다나는 다음 테이프를 밀어넣었다. 백악관에 있는 테일러 윈스롭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의 뒤에는 아내와 잘 생긴 두 아들, 게리와 폴 그리고 아름다운 딸 줄리가 서 있었다. 대통령이 자유 메달을 테일러 윈스롭에게 수여하고 있었다. "우리 나라를 위해 그가 바친 아낌없는 헌신과 수많은 놀라운 업적들을 기리기 위해서 모든 국민을 대신하여 이 자유의 메달을 테일러 윈스롭에게 수여합니다." 그리고 줄 리가 스키를 타는 장면이 나왔다....... 게리가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기금을 설립하고....... 다시 백악관에 있는 대통령 집무실이 나왔다. 보도 기관들로 집무실은 꽉 차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테일러 윈스롭과 그의 아내가 대통령 옆에 서 있었다. "저는 방금 테일러 윈스롭을 새 러시아 주재 대사로 임명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윈스롭 씨가 조국에 바친 무수한 공적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가 골프를 치면서 일생을 보내는 대신에 이 자리를 수락해준 것에 대해서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기자들이 소리내어 웃었다. 테일러 윈스롭이 대통령을 놀렸다. "제 골프 게임을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대통력 각하." 또 다시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행복한 순간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이후부터는 재앙이 줄을 이었다. 다나는 새로운 테이프를 집어넣었다. 콜로라도 주 아스펜에 있는 불타버린 집이 화면에 나타났다. 여자 방송 기자가 화재로 파괴된 집을 가리켰다. "아스펜의 경찰서장은 끔찍한 화재로 윈스롭 대사와 그의 아내 매드린, 두 사람이 모두 죽었음을 확인했습니다. 소방 당국은 오늘 새벽에 화재 신고를 받고 15분이 채 안 돼서 도착을 했지만, 그들은 구하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소방서장 나겔 씨의 말에 따르면, 불은 전기 누전으로 일어났다고 합니다. 대사와 대사 부인은 자선 사업과 국가에 대한 봉사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다나는 다른 테이프를 끼웠다. 프랑스 리베라 해안가의 절벽을 따라 이어진 도로가 나왔다. 취재 기자의 마이 흘러나왔다. "바로 이 굽어 돌아가는 길이 폴 윈스롭의 자동차가 미끄러져서 산중턱으로 굴러떨어진 지점입니다. 검시소의 검시 결과, 그는 사고의 충격으로 즉사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목격자는 없었습니다. 경찰은 사고 원인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운명치고는 너무나 얄궂게도, 겨우 두 달 전에는 폴 윈스롭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콜로라도 주 아스펜에 있는 그들의 집에서 화재 사고로 죽었습니다." 다나는 다른 테이프를 찾아냈다. 알래스카 주 주노에 있는 한 산의 스키 활주로가 화면 가득 떠올랐다. 두툼하게 옷을 껴입은 뉴스 기자가 말하고 있었다. "여기는 지난 밤에 일어났던 스키 사고의 현장입니다. 관계 당국은 스키 챔피언인 줄리 윈스롭이 왜 폐쇄된 활주로에서 밤에 혼자 스키를 타고 있었는지 알아내지 못한 가운데, 계속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꼭6주 전인 9월에는 줄리의 오빠 폴이 프랑스에서 자동차 사고로 죽었으며, 올해 6월에는 그녀의 부모님인 테일러 윈스롭 대사와 그의 아내가 화재 사고로 숨졌습니다. 아마도 줄리 윈스롭은 연속되는 가정의 불행으로 인해 어떤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습니다. 대통령께선 줄리 윈스롭의 죽음에 조의를 표했습니다." 테이프를 바꾸었다. 워싱턴D.C. 북서쪽의 주거 지역에 있는 게리 윈스롭의 저택이었다. 기자들이 저택 주변을 빽빽이 에워싸고 있었다. 저택 앞에서 기자가 보도를 하고 있었다. "비극적인, 믿을 수 없는 사건이 재연되었습니다. 명문 윈스롭 가의 마지막 남은 구성원, 게리 윈스롭이 강도의 총에 살해당했습니다. 오늘 새벽 경비원이 비상등이 꺼져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가 윈스롭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총알을 두 발 맞았습니다. 도둑들은 값나가는 그림들을 훔치기 위해서 집 안으로 침입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로서 게리 윈스롭은 올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윈스롭 가의 마지막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한참 동안 의자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누가 이런 식으로 한 훌륭한 가문을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했을까? 누가? 무슨 이유로?' 다나는 하트 새너티 빌딩에서 상원 의원 페리 레프와 만날 약속을 했다. 레프는 정직하고 열정적인 사십 대 초반의 남자였다. 다나가 들어오자 그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뭘 도와줄까요, 에반스 양?" "의원님이 테일러 윈스롭과 가깝게 활동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소. 우리는 여러 개의 위원회에 대통령 각하로부터 임명을 받았었소." "저도 돌아가신 분에 대한 공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레프 상원 의원님. 하지만 사적으로는 어떤 분이었는지요?" 레프 상원 의원은 잠시 다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기꺼이 말해주리다. 테일러 윈스롭은 내가 만났던 가장 훌륭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소. 내가 가장 크게 감명받은 것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그의 진실한 태도였소. 그는 진심으로 사람들을 배려했소. 그리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자신의 뜻을 실천했소. 나는 언제나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것이오. 그의 가족에게 일어난 저 소름끼치는 불행은 생각조차 하기 싫소." 다나는 테일러 윈스롭의 비서들 중의 한 명인 낸시 파친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주름진 얼굴과 슬픈 눈빛을 갖고 있는 육십 대 여인이었다. 테일러 윈스롭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기 직전까지 그의 비서로 근무했던 사람이었다. 지금은 은퇴하여 혼자 살고 있었다. "당신은 오랫동안 윈스롭 씨를 위해서 일하셨죠?" "15년을 그분 밑에서 일했습니다." "그 정도의 기간이면, 윈스롭 씨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겠네요." "그럼요, 물론이죠." 다나는 질문을 던졌다. "저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어요. 그는 어떤?" 낸시 파친이 다나의 말을 잘랐다. "그분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제가 정확하게 말해줄 수 있어요, 에반스 양. 10년 전에 내 아들 로드리게스가 심각한 중병에 걸렸었죠. 이 사실을 알게 된 테일러 윈스롭 씨는 그 아이를 윈스롭 가의 주치의에게 데리고 가서 모든 치료비를 대주었어요. 결국 내 아들이 죽었을 때, 윈스롭 씨는 장례 비용을 대신 치러주고 나를 위로하느라고 유럽 여행을 보내주었죠." 낸시 파친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고 말 소리가 떨렸다. "그분은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고귀한 사람이었어요. 그런 분이 죽다니......." 다나는 한때 테일러가 이끌던 연방 조사국의 국장인 빅터 부스터 장군과 약속을 했다. 부스터는 처음엔 다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거절했지만, 다나가 테일러 윈스롭에 대해서 취재 중인 것을 알고, 그녀와의 면담을 허락했다. 아침 일찍부터 다나는 메릴랜드 주 포트 메드에 있는 연방 조사국으로 차를 몰았다. 연방 조사국 본부가 세워져 있는 10만 평가량 되는 땅 주변은 경비가 매우 삼엄했다. 줄지어 늘어선 위성 접시는 울창한 숲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다나는 울타리 쪽으로 차를 몰았다. 25미터 높이의 울타리 꼭대기에는 철사를 파도 모양으로 엮은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보초실을 지키는 무장한 경비에게 이름을 밝히고 운전 면허증을 제시하자, 입장이 허락되었다. 잠시 후에 그녀는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전기장 문에 다가갔다. 그녀가 다시 이름을 밝히자,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그녀는 거대한 하얀색 본부 건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갔다. 민간인 복장을 한 어떤 남자가 건물 밖에서 다나를 맞이했다. "제가 부스터 장군님의 사무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에반스 양." 그들은 개인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부터 긴 복도를 따라서 사무실들이 나란히 붙어 있는 복도 끝 쪽으로 갔다. 그들은 두 명의 비서가 책상에 앉아 있는 커다란 사무실로 들어갔다. 비서 중의 한 명이 말했다. "장군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에반스 양. 안으로 들어가세요." 여자가 단추를 누르자, 안쪽 사무실로 통하는 문이 짤깍 소리를 내며 열렸다. 넓고 커다란 사무실은 천장과 벽을 완벽하게 방음 처리한 것 같았다. 키가 크고 마른 편인 매력적인 사십 대 남자가 다나를 맞이했다. 남자는 다나에게 손을 내밀면서 친절히 말했다. "저는 잭 스톤 소령입니다. 부스터 장군님의 부관이죠." 그가 책상 뒤에 앉아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이분이 부스터 장군님이십니다." 빅터 부스터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흑요석처럼 검은 눈동자를 가진 아프리카계 미국 흑인이었다. 면도를 한 그의 머리가 천장의 불빛 아래에서 반짝거렸다. "앉으시오." 그의 음성은 낮고 굵었으며 불쾌하게 들렸다. 다나는 의자에 앉았다.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장군님." "테일러 윈스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소?" "네. 제가 원하는 건......." "그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꾸며대고 싶은 거요, 에반스 양?" "글쎄요, 저는......." 장군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당신네 빌어먹을 기자들은 고인을 조용히 쉬게 놔둘 수가 없는 거요? 당신들은 모두 죽은 시체를 헤집으며 추문을 파헤치는 코요테 무리요." 충격을 받은 다나는 입을 다물었다. 옆에 서 있던 잭 스톤이 당황하여 다나를 쳐다보았다. 다나는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부스터 장군님, 저는 추문을 들추는 일에는 아무 관심도 없음을 맹세합니다. 저도 테일러 윈스롭이 전설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그분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장군님께서 제게 무언가 정보를 주신다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부스터 장군이 앞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나는 당신이 찾는 그 빌어먹을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소. 다만 한 가지는 말해줄 수 있소. 그 남자는 당신의 말대로 전설적인 인물이었소. 테일러 윈스롭이 FRA의 책임자로 있을 때, 나는 그의 밑에서 일했소. 그는 이 기관의 역대 책임자 중에서 최고의 국장이었소. 모든 사람이 그를 존경했소. 그와 그의 가족에게 일어난 일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비극이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보도 기관을 좋아하지 않소, 에반스 양. 나는 당신들을 무책임한 부류로 생각하오. 나는 사라예보에서 취재하는 당신의 보도를 보았소. 동정심을 자극하는 당신의 유약한 방송은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소." 다나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제하고 있었다. "저는 당신을 돕기 위해서 그곳에 있었던 게 아닙니다. 장군님, 저는 죄 없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리기 위해서 거기에 있었던 것이고......." "당신이 무슨 생각을 했던지, 나와는 상관없소. 당신의 정보대로, 테일러 윈스롭은 이 나라의 위해한 정치가였소." 그는 다나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만일 당신이 그의 평판을 훼손하려고 한다면, 수많은 적을 만나게 될 것이오. 당신에게 몇 마디 충고를 하지. 말썽거리를 애써 찾아다니지 마시오. 분명히 약속하지. 서툰 짓을 했다간 조만간 지옥에 떨어질 것이오. 잘 가시오, 에반스 양." 다나는 잠시 장군을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절하신 말씀, 무척 고맙군요, 장군님." 그녀는 성큼성큼 사무실을 나왔다. 어쩔 줄 모르고 옆에 서 있던 잭 스톤이 급히 그녀를 쫓아나왔다. "제가 밖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복도로 나온 다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에 기가 막힌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장군은 언제나 저런 식인가요?" 잭 스톤이 한숨을 쉬었다. "그분을 대신해서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분은 약간 돌발적인 데가 있으시죠.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은 아닙니다." "정말인가요? 저는 진심이라고 느꼈는데요." "아무튼, 진위야 어떻든지 간에, 미안합니다." 잭 스톤이 다시 사과한 뒤, 몸을 돌리려고 했다. 다나는 재빨리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당신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때마침 12시가 다 되었어요. 어디 가서 저와 점심이라도 드시지 않겠어요?" 잭 스톤은 장군이 있는 사무실 문쪽을 힐낏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그럼 한 시간 후에 K거리에 있는 콜로니얼 식당에서 뵙도록 하죠." "좋아요. 고마워요." "미리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에반스 양." 잭 스톤은 다나가 기다리고 있는 식당으로 걸어들어왔다. 점심 시간이 약간 지났기 때문에 식당 안은 거의 절반 정도 비어 있었다. 잭 스톤은 잠시 입구에 서서, 식당 안에 혹시라도 그를 알아볼 만한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런 다음에 다나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가까이 다가왔다. "제가 당신과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부스터 장군은 내 엉덩이를 걷어차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부스터 장군은 훌륭하신 분입니다. 강인하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며 업무 처리 능력이 매우 뛰어난 분입니다." 잭 스톤은 잠시 망설이다가 한 마디 덧붙였다. "장구께서 보도 기관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유감스럽습니다." "괜찮아요. 이미 당한 일이니까요." 다나가 냉담하게 말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당신과 미리 학실하게 해둘 일이 있습니다. 에반스 양. 이 대화는 전적으로 비공개를 원칙으로 해야 합니다. 저를 만났다는 사실조차 외부에 알려서는 안 됩니다." "이해해요. 약속할게요." 그들은 쟁반을 들고 갖가지 음식이 길게 늘어서 있는 진열대로 갔다. 그리고 자신들이 먹을 음식을 직접 골랐다. 그들이 다시 자리에 앉았을 때, 잭 스톤이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이 우리 조직에 대해서 나쁜 인상을 갖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좋은 사람들입니다. 다만 제1선에 몸담고 있어서 조심해야 할 게 많을 뿐이죠. 우리 조직은 특히 개발도상국들을 돕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점은 이해해요." 다나가 말했다. "테일러 윈스롭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싶습니까?" 다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본론부터 말씀드리죠. 사실 제가 테일러 윈스롭에 대해서 들을 이야기는 모두가 지나치게 좋은 것들뿐이었어요. 마치 성인 같더군요. 저는 그 점이 오히려 못마땅해요. 인간이라면 반드시 어떤 결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더구나 테일러 윈스롭처럼 정치계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적이 있을 만도 한데......." 잭 스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먼저 그분의 장점을 말하죠. 테일러 윈스롭은 제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주위 사람들에게 깊은 배려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제 말은 진심으로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직원들의 생일이나 결혼 기념일을 잊지 않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적극적으로 도와주셨죠. 그분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분을 존경했습니다. 그분은 예리하고 날카로운 통찰력을 갖고 있었고 무슨 일이든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해결사였습니다. 또한 맡은 일은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가정에 충실한 분이었죠. 그분은 아내를 사랑했고 자식들을 사랑했습니다." 잭 스톤은 말을 멈추었다. "그럼 단점은 뭐였죠?" 잭 스톤은 내키지 않는 듯 입을 열었다. "테일러 윈스롭은 여자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자석과도 같았습니다. 사실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죠. 핸섬하고 부유하며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었으니까요. 그분을 만나는 여자들마다 저항하기 힘든 매력에 끌렸던 게 사실입니다." 그는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때때로, 테일러 씨는....... 빠져들었습니다. 실제로 몇 가지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죠. 하지만 정말로 심각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은 매우 비밀스럽게 처리되었고, 결단코 가족에게 상처 주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스톤 소령님, 테일러 윈스롭과 그의 가족을 죽일 만한 이유를 가진 사람이 있을까요?" 잭 스톤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뭐라고요?" "그렇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숙적을 만드는 법이니까요." "에반스 양....... 당신은 윈스롭 일가가 살해당했다고 말하는 겁니까?"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에요." 다나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잭 스톤은 잠시 동안 다나의 말을 생각해보는 듯했다. 그런 다음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오. 아닙니다. 그건 말도 되지 않아요. 테일러 윈스롭은 살아있는 동안 결코 누구에게도 상처를 입힌 적이 없습니다. 당신이 그의 친구나 그가 관련된 단체와 인터뷰를 해보았다면, 그 사실을 깨달았을 겁니다." 다나는 솔직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제가 알아낸 것들을 말씀드리죠. 테일러 윈스롭은......." 잭 스톤이 한쪽 손을 들어올렸다. "에반스 양, 저는 더 이상 알 것도, 모를 것도 없습니다. 저는 어떻게든 정치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저에게 해가 미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당신을 최대한 도울 수 있습니다. 제 말뜻을 이해하시겠죠?" 다나는 당혹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솔직히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저는 당신이 이 일에서 완전히 손 떼기를 바랍니다. 그러지 않고 계속 조사하겠다면, 부디 몸 조심하십시오." 말을 마친 잭 스톤은 일어나서 식당을 떠났다. 다나는 그 자리에 앉아서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니까 테일러 윈스롭에게는 적이 없었다는 거지. 어쩌면 내가 이 사건의 방향을 잘못 잡고 있는지도 몰라. 테일러 윈스롭이 적을 만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된 걸까? 그의 자식들 중의 한 명에게 문제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의 아내에게?' 다나는 제프에게 잭 스톤 소령과 함께 점심을 먹으며 나눈 대화를 들려주었다. "흥미로운데,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윈스롭 가의 자제들을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얘길 좀 하고 싶어요. 폴 윈스롭은 해리어트 버크라는 이름의 아가씨와 약혼을 했어요. 두 사람은 거의 일 년 동안 함께 지냈죠." "두 사람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 제프는 잠시 말을 끊고 주저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다나, 내가 당신을 백 퍼센트 신뢰하는 것을 잘 알고 있지?" "물론이죠, 제프" "하지만 만일 이번에 당신이 잘못 생각한 거라면 어떻게 하지? 사고는 언제나 일어나게 마련이야. 드물기는 하지만 윈스롭 가의 연속된 죽음도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어. 당신, 이번 일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모할 거야?" "그렇게 오래 매달리진 않을 거예요." 다나는 제프에게 약속했다. "나는 단지 조금 더 확인하려는 것뿐이에요." 해리어트 버크는 워싱턴 시 북서쪽에 있는 우아한 복층 아파트(역주: 상하층을 한 가구가 쓰게 되어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녀는 삼십 대 초반으로 날씬한 금발 미인이었으며, 신경질적인 미소를 띠고 있었다. "바쁠 텐데 시간을 내줘서 고마워요." 다나가 먼저 인사를 했다. "사실 나는 왜 당신과 만나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에반스 양. 폴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했죠?" 해리어트 버크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래요," 다나는 신중하게 단어를 선택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의 사생활을 캐려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과 폴은 결혼을 전제로 오랫동안 약혼 중이었어요. 그래서 당싱이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그를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랬으면 좋겠군요." "나는 폴 윈스롭에 대해서 조금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요, 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해리어트 버크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휠씬 부드러워졌다. "폴은 예전에 내가 만났던 어떤 사람과도 달랐어요. 그는 삶에 대한 강한 열정을 갖고 있었죠. 그는 친절하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했어요. 그리고 매우 밝은 사람이었죠. 너무 심각해지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어요. 함께 있으면 덩달아 행복해지고 즐거워지는 그런 사람이었죠. 우린 10월에 결혼할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그녀는 이야기를 중단했다. "폴이 사고로 죽었을 때, 나는....... 내 인생이 끝났다고 느꼈어요." 그녀는 다나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아직도 그렇게 느껴요." 다나가 말했다. "미안해요. 이런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군요. 하지만 혹시 그에게 적이 있었는지, 누군가 그를 죽일 만하 이유를 가진 사람이 있는지, 알고 있나요?" 해리어트 버크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조용히 다나를 응시했다. "폴을 죽인다고요?" 목이 메어서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당신이 폴을 알았다면, 그런 질문은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다나의 다음 인터뷰 대상은 줄리 윈스롭 밑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집사, 스티브 렉스포드였다. 그는 품위 있는 외모를 지닌 중년의 영국인이었다.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에반스 양?" "줄리 윈스롭 양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말씀하시죠." "줄리 윈스롭 양 밑에서 얼마나 오래 일하셨나요?" "4년하고 9개월입니다." "그녀를 위해서 일하는 건 어땠나요,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죠?" 그는 추억을 더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윈스롭 양은 무척 상냥하고, 모든 면에서 사랑스러운 분이었습니다. 아가씨의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줄리 윈스롭 양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나요?"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미안하지만 다시 말씀해주겠어요?" "윈스롭 양에게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잖아요....... 예를 들면 사귀다가 차버린 남자라든지, 아니면 누군가 윈스롭 양이나 그녀의 가족을 헤치려는 사람이 있지 않았을까요?" 스티브 렉스포드는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줄리 양은 그런 원한을 살 사람이 아닙니다. 아가씨는 결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힌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시간과 재산을 바쳐 다른 사람을 도왔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가씨를 사랑했습니다." 다나는 잠시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의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 아니, 그녀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모두 진심이었다. '내가 지금 무슨 빌어먹을 짓을 하고 있담?' 다나는 자신의 생각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내가 마치 다나 돈키호테 같잖아. 풍차만 없을 뿐이야.' 조지타운 미술관의 관장인 모간 오먼드가 다나의 다음 상대였다. "게리 윈스롭 씨에 대해서 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구요?" "그렇습니다. 저는 그분의 죽음이 이상해서......." "그분의 죽음은 끔찍한 손실입니다. 국가적으로 우리는 가장 훌륭한 예술 후원자를 잃었습니다." "오먼드 씨, 예술계에도 많은 경쟁이 있지 않나요?" "경쟁이라구요?" "예를 들자면 때때로 여러 사람이 같은 예술 작업을 하거나 뛰어들어서......." "물론입니다. 하지만 윈스롭 씨의 경우에는 결코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엄청난 미술 애호가이며 미술품 수집가였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돈이 많아서 닥치는 대로 미술품을 수집하는 그런 부류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탁월한 식견과 감식력을 지닌 분이었죠. 그분이 인정한 미술가는 반드시 후에 이름을 떨치곤 했습니다. 평범한 미술 전문가들보다 더 뛰어난 판단력이었죠. 동시에 그분은 여러 미술관에 매우 많은 후원을 했습니다. 단지 우리 미술관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있는 모든 미술관에 말입니다. 그분의 꿈은 모든 사람들이 보다 쉽게 위대한 예술을 접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진정한 미술 애호가라고 할 수 있죠." "혹시라도 그에게 적이 있다면......." "게리 윈스롭 씨에게요? 천만에요. 절대로,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나가 마지막으로 만날 약속을 한 사람은 15년 동안 매들린 윈스롭 부인의 하녀로 일했던 로잘린드 로페즈였다. 지금 그녀는 남편과 함께 그들 소유의 캐터링(역주: 음식 제공업)업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다나가 용건을 꺼냈다. "시간을 내주셔서 고마워요, 로페즈 부인. 매들린 윈스롭 부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가엾은 부인. 그분은.......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친절한 분이셨어요. 상냥하고 아름답고 품위 있는, 완벽한 숙녀였죠." '고장난 녹음기처럼 똑같은 소리가 다시 시작되는구나. 이젠 지긋지긋해.' 다나는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분은 정말이지 너무나 끔찍하게 돌아가셨어요." 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당신은 윈스롭 부인과 오랫동안 함께 생활하신 걸로 아는데요?" "오, 그렇답니다. 아가씨." "혹시 부인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거나 아니면 적으로 만든 사람이 있었나요?" 로잘린드 로페즈는 깜짝 놀라서 다나를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녀는 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적이라고요? 아니에요, 아가씨. 모든 사람들이 부인을 좋아했는걸요." '고장난 녹음기라니까.' 다나는 씁쓸하게 입을 다물었다.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다나는 생각에 잠겼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이상하긴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우연의 일치가 분명해.' 다나는 매트 베이커를 만나려고 그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애브 라스맨이 그녀를 보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언제나처럼 화사하고 섹시한 모습이었다. 다나는 내심 그녀가 착하기는 하지만 약간 멍청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안녕, 다나." "매트가 나를 기다리죠?" "그래요, 들어가봐요." 매트 베이커가 고개를 들고 사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다나를 바라보았다. "셜록 홈즈, 오늘은 어떤가?" "원점이에요, 매트, 내가 틀렸어요. 그 사건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다른 걸 알아봐야겠어요." 5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동기 다나의 어머니 에일린이 뜻밖의 전화를 걸어왔다. "다나, 얘야. 네가 깜짝 놀랄 소식이 있단다." "뭔데요, 엄마?" "놀라지 마라. 내가 결혼을 했단다." 다나는 어리둥절해서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물었다. "뭐라고요? 결혼을 했다니요?" "그렇다니까. 내가 코네티컷에 있는 웨스트포트로 친구를 만나러 가지 않았겠니. 그런데 친구가 나에게 아주아주 멋진 남자를 소개해 주었단다. 우린 한눈에 서로 반해버렸지." "저는....... 저는 정말 기뻐요, 엄마. 잘됐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그 사람은 말이야......." 에일린은 킥킥 웃었다. "내가 뭐라고 잘 표현할 수가 없구나. 하지만 그는 좋은 사람이란다. 너도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될 거야." 다나는 호기심이 생겨서 물었다. "엄마가 그 사람을 안 지 얼마나 됐는데요?" "서로를 알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란다, 얘야. 우린 정말 너무 잘 어룰려. 엄만 무척이나 행복하단다." "직업은 갖고 있어요?" 다나가 물었다. "제발 내 친정 아버지처럼 굴지 좀 말거라. 물론 그는 직업이 있어. 매우 성공적인 보험 모집인이란다. 이름은 피터 톰킨스야. 웨스트포트에 아름다운 집을 갖고 있단다. 너와 킴발이 여기에 와서 그 사람을 한번 만났으면 정말 좋겠구나. 올 거지?" "물론이죠." "피터는 널 무척 만나고 싶어한단다. 그 사람은 네가 얼마나 유명한지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하느라 신났단다. 바쁘겠지만 꼭 오거라. 분명히 오겠다고 약속할 수 있지?" "네, 엄마." 이번 주말에는 방송이 없으므로 문제 될 일이 없었다. "케말과 함께 가죠.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할게요." 수업이 끝난 케말이 차에 올라타자, 다나가 말했다. "이번 주말에 너는 할머니를 만나게 될 거야. 우리는 진짜 가족이 되는 거야, 케말." "도프." 다나는 미소를 지었다. "도프는 좋다는 말이겠지?" 토요일 아침 일찍, 다나와 케말은 코네티컷을 향해서 차를 몰았다. 이번 주 내내 다나는 커다란 기대를 갖고 웨스트포트로 가는 여행을 고대해왔다. 다나는 즐거운 목소리로 케말에게 약속했다. "이번 여행은 우리 모두에게 정말 멋진 경험이 될 거야.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언제나 손주들을 버릇없이 만들게 마련이지. 그게 아이의 호감을 사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거든. 앞으로 너는 가끔 그분들과 지낼 수 있을 거야." 케말이 불안한 듯 물었다. "다나도 거기 있을 거죠, 저와 함께?" 다나는 케말의 한 손을 꼭 쥐었다. "물론이지. 항상 너와 함께 있을 거야." 피터 톰킨스의 집은 블라인드 브룩 거리에 있는 아담하고 오래된 교외의 단독 주택으로서, 집 앞에는 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와, 근사하네요." 워싱턴의 딱딱하고 삭막한 주택들만 보아온 케말이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다나는 케말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헝클어뜨렸다. "네 마음에 든다니 기쁘구나. 여기가 바로 네 할머니 댁이야. 그러니까 앞으로 종종 이곳에 놀러오도록 하자." 집의 현관문이 활짝 열리고 에일린 에반스가 문 앞에 나와섰다. 예전에 에일린의 미모가 어떠했는지 암시라도 하듯이, 그녀의 얼굴에는 아직까지도 과거의 아름다움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나온 역경은 어쩔 수 없는지 그녀의 얼굴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역주: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주인공 도리안은 나이를 먹지 않고, 대신 그의 초상화가 나이가 든다)처럼, 그녀의 미모는 점점 세월에 가려졌다. 그 대신 그녀의 아름다움은 딸 다나에게 고스란히 물려졌다. 에일린의 옆에는 활짝 미소를 띤 쾌활한 얼굴의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에일린이 재빨리 달려와서 다나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다나, 얘야! 그리고 이쪽은 킴발이로구나!" "엄마....... 킴발이 아니라 케말이에요." 피터 톰킨스가 다가와서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바로 그 유명한 다나 에반스로군요. 그렇죠? 나는 내 고객들을 만날 때마다 새로 결혼한 내 부인의 딸이 다나 에반스라고 자랑을 한답니다. 그럼 모두들 좋아하죠." 그는 몸을 돌려서 케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아이가 바로 그 남자 아이로군." 문득 그는 케말이 한쪽 팔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봐, 당신, 나에게 이 아이가 불구자라는 말은 안 했잖아." 피터 톰킨스는 케말의 감정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큰소리로 떠들었다. 다나는 피가 싸늘하게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케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았다. 피터 톰킨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 아이가 그런 일을 당하기 전에 우리 회사에 보험을 들었더라면, 아마 지금쯤은 꼬마 갑부가 되었을 텐데." 피터 톰킨스는 어색한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태연하게 현관 쪽으로 돌아섰다.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분명히 배가 고플 텐데." 다나는 딱딱하게 대꾸했다. "이젠 배가 고프지 않아요." 그녀는 에일린을 쳐다보았다. "미안해요, 엄마. 케말과 나는 워싱턴으로 돌아가겠어요." "미안하다, 다나. 나는......." "나도 미안해요. 엄마가 큰 실수를 저지른 게 아니길 빌어요. 행복한 결혼 생활 하세요." "다나......." 다나의 어머니는 다나와 케말이 자동차에 올라타고 떠나가는 모습을 어쩔 줄 몰라 하며 바라보았다. 피터 톰킨스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자동차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내가 뭐라고 말했다고 그래?" 에일린 에반스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에요, 피터. 아무것도 아니에요." 케말은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다나는 가끔씩 케말을 힐낏 바라보았다. "미안해, 얘야. 세상에는 마땅히 지켜야 할 예의가 뭔지 모르는 사람도 있단다. 네가 이해해라." 케말이 씁쓸하게 말했다. "그 사람 말이 맞아요. 나는 불구자예요." 다나가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너는 불구자가 아니야. 팔, 다리가 몇 개인가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해서는 못써.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보고 판단해야 해." "그래요, 그럼 나는 뭐죠?" "너는 생존자야. 그리고 나는 네가 자랑스러워. 너도 알고 있다시피, 그 매력남께서 한가지는 정확하게 지적했어. 나는 무척 배가 고파. 너는 관심이 없을지도 모를겠지만, 내 눈엔 저 앞에 맥도널드 가게가 있는 것이 보이는구나." 케말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잘됐어요." 케말이 잠자리에 든 후, 다나는 거실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한동안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에 그녀는 텔레비전을 틀고 이리저리 뉴스가 나오는 채널을 찾아서 버튼을 눌렀다. 방송마다 온통 게리 윈스롭의 죽음에 대해서 다루고 있었다. "훔친 차량이 살인자들의 신원을 밝히는 실마리가 되기를 바라며......." "두 발의 총알이 발사되었습니다. 경찰은 단서를 찾기 위해서 모든 총포상을 조사하고 있으며......." "주로 상류층이 거주하는 북서쪽 구역에서 게리 윈스롭의 잔혹한 살인범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으로......." 다나의 마음 한구석에서, 무언가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는 몇 시간 후에야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다나는 문득 무엇이 자신을 괴롭혀왔는지 깨달았다. '돈과 보석들이 눈에 띄는 곳에 놓여 있었어. 왜 살인자들은 그걸 가져가지 않았을까? 과연 그들이 노렸던 게 돈이었을까?' 다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커피 포트의 물이 끓는 동안 버넷 서장이 했던 말을 꼼꼼하게 되새겼다. "도난당한 그림들의 목록을 갖고 있나요?" "갖고 있습니다. 모두 유명한 그림들입니다. 우리는 그림 목록을 미술관, 그림 중개상, 그리고 수집가 들에게 배부했습니다. 그 그림들 중 하나가 나타나는 즉시, 사건은 해결될 것입니다." '강도들은 분명히 그 그림들을 훔친다 하더라도 쉽게 팔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거야. 너무 유명한 그림들은 처분하기가 어려운 법이지.' 다나는 생각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그렇다면 그 강도들이 남몰래 혼자서 명화를 즐기고 싶어하는 어느 부유한 수집가의 조종을 받았다는 뜻일 수가 있지. 하지만 왜, 어떤 사람이 그렇게 끔찍한 강도의 손에 자신을 던지는 무모한 짓을 했을까? 월요일 아침에 케말이 잠에서 깨어나자, 다나는 아침 식사를 차려주고 학교까지 태워다주었다. "좋은 하루 보내거라, 케말." "안녕, 다나." 다나는 케말이 학교 정문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다음에 인디아나 가에 있는 경찰서로 차를 돌렸다. 다시 눈이 내리고 있었고 거리에는 냉혹한 겨울 바람이 사납게 불고 있었다. 게리 윈스롭 살인 사건의 담당자인 파닉스 윌슨 형사는 세상 물정에 익숙한 염세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그가 얼마나 노련한 형사인지를 보여주는 몇 개의 흉터 자국이 나 있었다. 윌슨 형사는 자신의 책상 앞으로 다가오는 다나의 고개를 들어서 바라보았다. "인터뷰는 사절이요."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게리 윈스롭에 대한 어떤 새로운 정보가 생기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자 회견장에서 듣게 될 것이오." "나는 질문을 하기 위해서 온 게 아니에요." 다나가 말했다. 그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다나를 쳐다보았다. "오호, 정말이오?" "정말이에요. 나는 도난당한 그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어요. 당신은 그 그림들의 목록을 갖고 있죠, 그렇죠?" "그래서 나더러 어쩌란 말이오?" 나에게 한 장 복사를 해줄 수 있나요?" 윌슨 형사는 의심스러운 듯이 물었다. "이유는? 무슨 꿍꿍이속이오?" "도둑들이 뭘 가져갔는지 알고 싶어요. 방송으로 내보낼지도 모르구요." 윌슨 형사는 잠시 다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건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그 그림들이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질수록, 살인자들이 그림을 팔 기회는 더 적어질 테니까." 그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놈들은 열두 개의 그림을 가져갔소. 하지만 그 집에는 남아 있는 그림들이 더 많았다오. 그림을 모두 가져가기엔 놈들이 너무 게을렀던 게 아닌가 싶소. 요즘은 쓸 만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렵소. 목록을 한 장 복사해 갖고 오리다." 윌슨 형사는 몇 분 후에 두 개의 복사 서류를 갖고 돌아왔다. 그는 그것을 다나에게 주었다. "이게 도난당한 그림들의 목록이오. 그리고 이건 다른 그림들의 목록이오." 다나는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른 목록이라뇨?" "게리 윈스롭이 소장했던 그림들의 목록 말이오. 살인자들이 남겨둔 그림들이 포함되어 있소." "어머, 고마워요.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복도로 나와서, 다나는 두 개의 목록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머릿속이 혼란하고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다나는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걸어나와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경매업체인 크리스티 경매소로 향했다. 눈은 점점 더 많이 쏟아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려고 나왔던 사람들이 선물 가방을 들고 총총걸음으로 따뜻한 집과 사무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다나가 크리스티 경매소에 도착하자, 지배인은 금세 다나를 알아보았다. "이런! 영광입니다, 에반스 양.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다나는 지배인에게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두 개의 그림 목록을 갖고 있어요. 누가 그 그림들의 가치를 말해주시면 고맙겠어요." "기꺼이 도와드리죠. 우리의 기쁨이니까요. 이쪽으로 오세요." 두시간 후에 다나는 매트 베이커의 사무실에 있었다. "매우 이상한 일이 진행되고 있어요." 다나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다시 치킨 리틀의 음모설로 돌아가는 건 아니겠지?" "정말이라구요." 다나는 매트에게 두 장의 서류 중에서 보다 긴 서류를 건네주었다. "거기에 게리 윈스롭이 소장했던 모든 예술품 목록이 들어 있어요. 나는 방금 그 그림들의 가치를 크리스티 경매소에서 감정 받았어요." 매트 베이커는 목록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봐, 내가 아주 대단한 인물들을 보고 있군 그래. 빈센트 반 고흐, 할스, 모네, 피카소, 마네." 매트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어떻다는 거요?" "이제 이 목록을 봐요." 다나는 도난당한 그림들의 목록이 적혀 있는, 다른 서류를 매트에게 건네주었다. 매트는 소리내어서 그림의 목록을 읽었다. "카밀 피사로, 마리 로렌신, 폴 클레, 마리스 우트리로, 헨리 레바스트, 그래서 당신이 말하고 싶은 게 뭐요, 다나?" 다나는 천천히 설명했다. "전체 소장품 목록에 들어 있는 그림들 중에는 한 점당 일천만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는 그림들이 수두룩해요." 다나는 잠시 말을 끊었다. "하지만 다른 목록에 들어 있는 그림들, 그러니까 도난당한 그림들은 한 점당 불과 이십만 달러밖에 나가지 않죠. 그 이하의 가치를 지닌 그림들도 있구요." 매트 베이커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렇다면 강도들이 값이 덜 나가는 그림들을 가져갔다는 말이군?" "그렇죠." 다나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매트, 그들이 전문전인 털이범이라면, 주변에 있는 현금과 보석들도 가져갔을 거에요. 물론 어떤 사람이 그들을 고용해서 현금이나 보석보다 더 값나가는 그림만 훔치게 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 목록을 보면, 그들은 그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런데 왜 그들이 고용되었을까요? 사건 당시에 게리 윈스롭은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그를 죽였을까요?" "당신은 강도짓이 무언가를 은폐하기 위한 속임수였고, 그들이 윈스롭의 집에 숨어 들어간 진짜 이유는 살인이었다고 말하는 거요?" "그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이에요." 매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생각해봅시다. 테일러 윈스롭이 적을 만들었고 살해되었다고 가정해 보자구. 왜 누가 그의 가족을 전부 없애버리고 싶어하는 거지?" "모르겠어요. 그게 바로 내가 알고 싶은 거예요." 워싱턴에서 가장 존경받는 정신과 의사인 알먼드 도이치 박사는 넓은 앞이마와 탐색하는 듯한 파란 눈동자를 가진 위압적인 인상의 칠십 대 남자였다. 그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다나를 힐낏 바라보았다. "에반스 양이오?" "네,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박사님. 정말로 매우 중요한 용건으로 박사님을 꼭 만나야만 했습니다." "그 정말로 매우 중요한 용건이 뭐요?" "박사님께서도 윈스롭 일가에게 일어난 불행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죠?" "물론 알고 있소. 끔찍한 비극이었지. 너무 많은 사고들이 일어났소." 다나가 말했다. "만일 그 일들이 사고가 아니 라면요?" "뭐요? 무슨 말을 하는 거요?" "그들이 모두 살해되었을 가능성을 말하는 거예요." "윈스롭 일가가 살해당했단 말이오? 그건 매우 무리한 가정 같구려, 에반스 양. 매우 무리한 가정이오." "그렇지만 가능한 일이죠."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들이 모두 살해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요?" 무슨 단서라도 있소?" "그건....... 그건 그냥 직감이에요." 다나는 솔직히 고백했다. "알겠소, 직감이라......." 도이치 박사는 다나를 관찰하듯 유심히 바라보았다. "나는 사라예보에서 보내온 당신의 방송을 보았소. 당신은 훌륭한 기자더군." "고맙습니다." 도이치 박사는 팔꿈치를 책상에 대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파란 눈이 깜빡도 하지 않고 다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신은 끔찍한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소. 맞소?" "맞아요." "강간을 당하고, 살해당하는 사람들과 죽임을 당하는 아기를 취재하면서......." 다나는 마음속에서 경계등이 켜지는 것을 느끼면서, 박사의 말을 들었다. "당신은 분명히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소." 다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랬어요." "당신이 그곳을 떠나서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 지 얼마나 됐소, 5,6개월쯤?" "석 달이에요." 박사는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도시 생활에 적응하기에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군. 그렇지 않소? 당신은 틀림없이 당신이 목격했던 끔찍한 살인들에 대해서 악몽을 꾸었을 거요. 그리고 이제 당신의 잠재 의식이 상상을 하기......." 다나는 박사의 말을 끊었다. "박사님, 전 편집증 환자가 아닙니다. 증거를 갖고 있진 않지만, 윈스롭 일가의 죽음이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다고 믿을 만한 근거를 갖고 있어요. 제가 박사님을 찾아온 이유는, 박사님이 저를 도와줄 수 있다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돕는단 말이오? 어떻게 말이오?" "동기가 필요해요. 일가족 모두들 없앨 정도의 동기라면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나요?" 도이치 박사는 다나를 쳐다보면서 두 손을 깍지 꼈다. "물론, 그런 극단적인 폭력에 대한 전례들이 있기는 하오. 대대로 이어져 온 원한 관계....... 피의 보복. 이탈리아에서 마피아는 적수의 일가족을 몰살시키는 것으로 유명하지. 혹은 마약이 관계되었을 가능성도 있소. 가족을 덮친 끔찍한 불행을 복수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렇지 많으면 이성을 잃어버린 미치광이의 짓일 수도......." "그런 상황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아요." 다나가 말했다. "그렇다면 물론,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동기가 있소, 바로 돈이지." '돈이야.' 그것은 다나가 이미 짐작했던 바였다. 테일러 & 앤더슨 법률 사무소의 책임자인 월터 칼킨은 25년 이상을 윈스롭 가의 변호사로 책임을 맡았다. 윌터 칼킨은 관절암 때문에 다리를 절룩거리는 노인이었지만, 약해진 것은 그의 신체일 뿐, 정신은 여전히 예리했다. 그는 잠시 다나를 날카롭게 관찰했다. "내 비서 말로는 당신이 윈스롭 가의 재산에 대해서 알고 싶어한다던데?" "그렇습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훌륭한 가족에게 일어난 일이 나는 믿어지지 않소. 믿어지지가 않아." "저는 변호사님이 윈스롭 가의 법률적인 문제와 재정적인 일을 처리하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소이다." "칼킨 씨, 작년에 어떤 이상한 일이 없었나요?" 그는 다나를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의미로 이상하다는 건가요?" 다나는 신중하게 말했다. "말씀드리기 죄송하군요. 하지만 그 가족들 중의 누군가가....... 협박을 받고 갈취를 당했다면 칼킨 씨가 알았겠죠?" 잠시 사무실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당신 말은 , 만일 그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큰 액수의 돈을 주고 있었다면 내가 그것을 알고 있었을 거란 뜻이오?" "네." "그랬을 테지, 그랬을 거요." "그럼, 그런 일이 있었나요?" 다나가 재빨리 물었다. "없었소, 아무것도. 도대체 어떤 비열한 짓을 상상하는 거요? 분명히 말하지만 그런 생각은 조롱거리밖에 될 수가 없소." "하지만 일가족이 모두 죽었어요.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 말이죠. 이상한 일이 아닌가요?" 다나는 포기하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그들의 재산은 틀림없이 수십억 달러에 이들 테죠. 저에게 누가 그 돈을 상속받게 되는지 알려주시면 정말 고맙겠어요." 다나는 변호사가 알약이 들어 있는 병의 뚜껑을 열고, 알약을 하나 꺼내서 물과 함께 꿀꺽 삼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에반스 양, 우린 고객과 관련된 일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소. 하지만......." 그는 잠시 망설였다. "이번 경우엔, 그렇지만, 해가 될 일이 없을 것 같군요. 내일 방송이 나가기로 되어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물론,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동기가 있소, 바로 돈이지." 순간 다나의 귓가에 도이치 박사의 말이 맴돌았다. 월터 칼킨이 다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 게리 윈스롭이 죽음으로써......." '네?" 다나는 박사의 다음 말을 기다리면서 숨을 죽였다. "윈스롭 가의 전 재산은 자선 단체에 기부되었소." 6 시큐어 라인 방송 요원들이 분주하게 저녁 뉴스를 내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나는 A스튜디오의 앵커석에 앉아서 마지막 남은 몇 분 동안, 방송에 내보낼 소식들을 다시 점검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계속해서 통신사와 정보원 등을 통해서 들어오는 뉴스들이 꼼꼼히 검토되고, 선택되거나 배제되었다. 다나 옆에 있는 앵커 책상 앞에는 제프 코너스와 리차드 멜턴이 앉아 있었다. 아나스타샤 만이 셋, 둘, 하나 숫자를 센 다음, 집게손가락으로 사인을 보냈다.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붕붕 울렸다. "WTN, 11시 뉴스입니다. 다나 에반스." 다나는 카메라를 향해서 미소지었다. "리차드 멜턴." 멜턴이 카메라를 보면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포츠에 제프 코너스와 기상 정보에 마빈 그리어입니다. 곧 11시 뉴스를 시작하겠습니다." 다나가 카메라를 향해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다나 에반스입니다." 리차드 멜턴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저는 리차드 멜턴입니다." 다나는 텔레프롬프터에 떠올라 있는 글을 읽었다.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경찰이 오늘 저녁 도심의 술집에서 한 강도를 추적했습니다." '첫번째 테이프 돌려." 화면에 공중을 나는 헬리콥터의 내부가 나타났다. WTN 헬리콥터의 조종석에는 전직 해군 조종사였던 노먼 브론슨이 앉아 있었다. 그의 옆자리에는 앨리스 베이커가 있었다. 카메라 앵글이 바뀌었다. 헬리콥터 아래쪽의 땅 위에 세 대의 경찰차가 나무와 충돌한 한 대의 세단을 둘러싸고 있었다. 앨리스 베이커가 상황을 보도했다. "펜실베이니아 가에 있는 할리 주점에 들어간 두 명의 남자가 점원을 협박해서 현금을 탈취하려고 하면서 추적이 시작되었습니다. 점원은 협박에 저항했고 경찰을 호출하는 비상벨을 눌렀습니다. 강도들은 달아났지만 경찰은 용의자의 차가 나무에 충돌할 때까지 7킬로미터를 추적했습니다." 추적 장면이 방송국 텔레비전 헬리콥터에 의해 찍혔다. 다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매트가 해낸 최고의 일은 새 헬리콥터를 사도록 엘리어트를 설득한 거야. 새 헬리콥터 덕분에 우리 방송국의 보도가 아주 차별적으로 돋보이는데.' 앞으로 세 개의 방송이 더 남아 있었다. 연출자가 잠깐 쉬어가는 신호 음악을 내보냈다. "음악 뒤에 바로 우리가 들어갈 거예요." 다나가 말했다. 상업 광고 방송이 나갔다. 리차드 멜턴이 다나에게로 몸을 돌렸다. "밖에 내다봤어요? 날씨가 엉망이에요." 다나는 미소를 띠었다. "알아요, 우리 불쌍한 기상 요원이 엄청난 협박 편지를 받게 되겠죠." 카메라에 붉은 불빛이 들어왔다. 텔레프롬프터가 잠깐 텅 비어 있더니, 다시 테이프가 돌아가면서 지문이 뜨기 시작했다. 다나가 지문을 읽기 시작했다. "섣달 그믐날에 저는......." 다나는 읽기를 멈추고 어리둥절해져서 그 뒤의 나머지 글자들을 눈으로 쫓았다. 모니터엔 이런 글이 띄워져 있었다. 당신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해마다 새해를 축해해야 할 이유가 두 배로 되겠죠. 제프가 텔레프롬프터 옆에서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고 있었다. 다나는 카메라를 쳐다보면서 어색하게 더듬거렸다. "잠시....... 잠시 광고 방송이 있겠습니다." 카메라의 붉은 불이 꺼졌다. 다나는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제프?"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를 와락 끌어안았다. "대답을 해줘야지?" 제프가 물었다. 다나는 제프를 더욱 힘주어 끌어안으면서 속삭였다. "네, 좋아요, 제프." 둘러선 사람들 사이에서 터져나온 박수 소리가 스튜디오 안을 울렸다. 뉴스가 끝나고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제프는 잔뜩 흥분해서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어? 성대한 결혼식을 할까, 조촐한 결혼식을 할까, 아니면 중간 정도로 할까?" 어린 소녀였을 때, 다나는 자신의 결혼식에 대해서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길고 긴 면사포에 레이스가 달린 아름다운 하얀 웨딩 드레스를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꿈꾸었다. 그녀가 보았던 영화에서처럼....... 결혼식 전의 떠들썩한 준비와 흥분....... 참석할 손님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무슨 요리를 낼 것인지 선택하고.......신부 들러리들....... 교회....... 친구들이 모두 모일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도. 그날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날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무시 못 할 현실이 있었다. 제프의 음성이 다나를 추억에서 깨어나게 했다. "다나?" 그는 다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일 내가 성대한 결혼식을 한다면, 엄마와 엄마의 새 남편을 초대해야만 하겠지. 케말을 다시 상처받게 할 수는 없어.' 다나는 재빨리 생각했다. "간단하게 해요." 제프는 의외인 듯 깜짝 놀랐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게 해. 당신이 원하는 게 내가 원하는 거니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케말은 환호성을 질렀다. "제프 아저씨가 우리와 함께 살게 된다는 거예요?" "그렇단다. 우리 모두 함께 사는 거야. 이제야말로 너에게 진짜 가족이 생기는 거지." 몇 시간 동안이고, 다나는 케말의 옆에 앉아서 흥분에 가득 찬 목소리로 그들의 미래를 이야기했다. 그들 세 사람이 이제 함께 살게 될 것이다. 함께 휴가를 즐기고, 언제나 함께 있게 될 것이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케말이 잠들자, 다나는 자신의 침실로 들어가서 컴퓨터를 켰다. '아파트, 아파트를 찾아야지. 침실 두 개, 욕실 두 개, 거실, 부엌, 식당으로 쓸 공간, 사무실 겸 서재로 쓸 공간도 필요할지 몰라. 찾는데 너무 어렵진 않아야 할 텐데.' 문득 다나는 게리 윈스롭의 비어 있는 저택을 생각했다. 그러자 생각이 그쪽으로 빠져버렸다. '그날 밤에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누가 비상벨을 껐을까? 침입한 흔적이 없었다면, 그럼 강도들은 어떻게 집안으로 들어간 걸까?"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움직이며 '윈스롭'을 쳤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렇게 꺼림칙하게 만드는 거지?' 다나는 자료실에서 이미 본 것과 똑같은 자료들이 모니터에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지역주의>미 합중국>워싱턴 D.C.>주 정부>정책들>연방 조사국 윈스롭, 테일러- 러시아 대사로 공직에 근무했으며 이탈리아와의 중요 무역 협정을 협상했다....... 윈스롭, 테일러- 자수 성가한 억만 장자 테일러 윈스롭은 조국을 위해 헌신했다....... 윈스롭, 테일러- 윈스롭 일가는 학교, 도서관, 그리고 저소득 지역을 위한 프로그램ㅇ르 지원하는 여러 단체들을 세웠다....... 윈스롭 일가와 관련된 사이트만 마흔다섯 개가 있었다. 하지만 내용은 거의 비슷비슷한 것 같았다. 다나가 윈스롭 가에 대해 조사하기를 그만 포기하고, 마땅한 아파트가 있는지 알아보려고 마음을 바꿔 먹었을 때, 무작위적으로 늘어놓은 졍보의 한 단락이 그녀의 눈을 사로잡았다. 윈스롭 테일러- 소송, 조안 시니시, 전직 비서로서 테일러 윈스롭에게 소송을 걸었다가 나중에 취하함. 다나는 그 단락을 다시 읽었다. '무슨 소송이었을까' 다나는 몹시 궁금했다. 그녀는 윈스롭과 관련된 웹 사이트를 여러 개 더 접속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어떤 종류든지 간에 소송에 관한 것은 더 이상의 언급이 없었다. 다나는 조안 시니시의 이름을 입력했다. 모니터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시큐어 라인(보안 전선)이오?" "그렇습니다." "그 물건이 검사되고 있는 웹 사이트를 보고 싶소." "즉시 조처하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다나는 케말을 학교에 태워다준 후에 사무실로 들어와서 바로 워싱턴 시의 전화번호부를 찾았다. 조안 시니시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녀는 메릴랜드 주 전화번호부, 버지니아 주 전화번호부를 조사했다....... 없구나. '아마 이사를 간 모양이구나.......' 다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때 뉴스 프로그램 연출자인 톰 호킨스가 다나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우리가 어젯밤에 또다시 경쟁사를 시청률에서 눌렀어요." "잘됐군요." 그 순간 다나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톰, 전화 회사에 누구 아는 사람 있어요?" "그럼요. 전화 신청할 거예요?" "아니에요. 어떤 사람의 전화번호가 등록되어 있는지 알고 싶어서 그래요. 혹시 당신이 알아볼 수 있어요?" "이름이 뭔데요?" "시니시. 조안 시니시예요." 톰은 미간을 찡그렸다. "조안 시니시라고요? 왠지 들어본 이름 같은데?" "테일러 윈스롭과 소송에 휘말린 적이 있는 여자예요." "아하, 맞아요. 이제 기억나네요. 일 년 전이었어요. 당신은 사라예보에 있었을 때죠, 아마? 나는 뭔가 대단히 흥미로운 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소송이 너무나 빨리 잠잠해지더라구요. 그 여자는 아마 지금쯤 유럽 어디에서 살고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찾을 수 있는지 노력해볼게요." 15분 후에 올리비아 와킨스가 알려주었다. "톰의 전화예요." 다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톰?" "조안 시니시는 아직 워싱턴에 살고 있어요. 들록하지 않은 그녀의 전화번호를 입수했어요. 당신이 원한다면 알려줄게요." "굉장해요." 다나는 재빨리 펜을 집어들고 말했다. "불러줘요." "5-5-5-2-6-9-0." "고마워요, 톰." "인사는 그만둬요. 대신 언제 점심이나 사요." "물론이에요." 이때 갑자기 사무실 문이 열리고 텔레비전 뉴스 작가인 딘 울리히, 로버트 펜윅 그리고 마리아 토보소, 이렇게 세 사람이 들어왔다. 로버트 펜윅이 말했다. "오늘밤은 피로 얼룩진 뉴스가 되겠어요. 두 건의 열차 파손 사고, 한 건의 비행기 사고, 한 건의 산사태 소식이 있어요." 네 사람은 그때까지 들어온 뉴스들을 읽으면서 검토하기 시작했따. 두 시간 후에 회의가 끝나자, 다나는 조안 시니시의 전화번화가 적힌 종이 쪽지를 들고서 그 번호대로 눌렀다. 어떤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시니시 양의 집입니다." "시니시 양과 통화할 수 있을까요? 제 이름은 다나 에반스입니다." 여자가 말했다. "통화할 수 있는지 물어보겠습니다. 잠깐 기다리세요." 다나는 기다렸다. 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나지막하고 주저하는 듯한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시니시 양인가요?" "그런데요?" "제 이름은 다나 에반스입니다. 저는......." "당신이 그 다나 에반스라구요?" "아....... 네, 맞아요." "어머나! 저는 매일 밤 당신이 진행하는 방송을 보고 있어요. 전 당신의 열렬한 팬이에요." "고마워요. 그 말을 들으니 정말 기쁘네요. 몇 분만 시간을 좀 내줄 수 있을까요? 시니시 양, 당신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당신이요? 저와 말이죠?" 여자의 목소리가 깜짝 놀라며 즐거워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래요,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어머, 그럼요. 여기로 오시겠어요?" "그게 좋을거 같네요. 언제가 편하겠어요?" 그 순간 여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아무 때나 상관없어요. 저는 하루 종일 여기 있으니까요." "내일 오후는 어때요, 2시쯤으로 약속하면?" "좋아요." 여자는 다나에게 주소를 알려주었다. "내일 봐요." 다나는 인사를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내가 왜 이 일에 계속 매달리는 거지? 아무튼,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야.' 약속했던 오후2시가 다가오자, 다나는 프린스 가에 있는 조안 시니시의 고층 아파트로 자동차를 몰고 갔다. 제복을 입은 경비원이 건물 현관에 서 있었다. 다나는 위압적인 건물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어떻게 평범한 비서 출신의 여자가 이런 엄청난 집에서 살 수 있는 여유가 생겼을까? 복권이라도 당첨되었단 말인가?' 다나는 차를 주차시키고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에 안내원이 앉아 있었다. "도와드릴까요?" "시니시 양을 방문하기로 약속을 했는데요. 다나 에반스예요." "네, 에반스 양. 시니시 양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펜트하우스(역주: 고층 호텔이나 아파트 등의 꼭대기 층으로 최고급 귀빈실)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시면 됩니다. A실입니다." '펜트하우스라고?' 꼭대기층에 도착한 다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나와서 A실의 현관 벨을 눌렀다. 유니폼을 입은 하녀가 문을 열었다. "에반스 양이신가요?" "네." "들어오세요." 조안 시니시는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거대한 테라스가 붙어 있고 방이 열두 개나 되는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하녀가 다나를 긴 복도를 지나서 흰색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넓은 거실로 안내했다. 자그마하고 날씬한 여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다나가 거실로 들어오자, 의자에서 일어섰다. 다나는 조안 시니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으므로 미리 어떤 예상을 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다나를 맞기 위해서 일어선 여자는 다나의 기대와는 너무나 딴판이었다. 조안 시니시는 키가 작고 흐릿한 갈색 눈동자에 두꺼운 안경을 쓴 평범한 외모의 여자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수줍고 거의 알아듣기가 어려울 만큼 작았다. 조안 시니시는 다나 에반스를 직접 만난다는 기쁨에 약간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유명한 사람을 만나다니 정말 기뻐요, 에반스 양." "만나줘서 고마워요." 다나도 인사를 했다. 다나는 조안 시니시와 함께 테라스 가까이에 있는 커다란 흰색 소파위에 앉았다. "지금 막 차를 마시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좀 드시겠어요?" "고마워요." 조안 시니시는 몸을 돌려서 거의 알아듣기 어려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레타, 차를 좀 준비해줄래요?" "네, 아가씨." "고마워요, 그레타." 어색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다나는 생각했다. '조안 시니시라고 하는 이 여자와 화려한 펜트하우스는 전혀 어울리지가 않아. 어떻게 시니시가 이런 곳에서 살 수 있는 여유가 생겼을까? 테일러 윈스롭의 소송을 취하하게 만든 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소송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래서 난 당신의 방송을 빼놓지 않고 보았어요. 나는 당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조안 시니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나는 당신이 사방에서 무서운 폭탄이 터지고 총탄이 빗발치는 사라예보에서 방송했던 때를 기억해요. 나는 항상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봐 두려웠어요." "솔직하게말하자면, 나도 그랬어요." "그건 분명히 끔찍한 경험이었을 거예요." "네, 어떤 면에서는 그랬어요." 그레타가 차와 케이크를 얹은 쟁반을 갖고 들어왔다. 그녀는 쟁반을 두 여자의 앞에 있는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내가 따를게요." 조안 시니시가 말했다. 다나는 조안이 차를 잔에 따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케이크 드시겠어요?" "아뇨, 고마워요." 조안 시니시는 다나에게 찻잔을 건네준 다음, 자신의 잔에 차를 따랐다. "말씀드렸듯이, 나는 당신을 만나서 정말 기뻐요, 하지만 난.......당신이 나와 하고 싶다는 말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못하겠군요." "테일러 윈스롭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게 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조안 시니시의 손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하면서 뜨거운 차가 그녀의 무릅 위로 쏟아졌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다나는 몹시 당황해서 물었다. "괜찮아요?" "네. 난....... 난 괜찮아요." 그녀는 냅킨으로 자신의 스커트를 가볍게 두드렸다. "나....... 나는 당신이 원하는 걸 몰라요......." 그녀의 말꼬리가 희미하게 늘어졌다. 거실 분위기가 갑자기 무겁고 부자연스럽게 바꾸었다. 다나가 말했다. "당신은 테일러 윈스롭의 비서였어요, 그렇지 않나요?" 조안 시니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하지만 저는 일 년 전에 윈스롭 씨의 비서직을 그만뒀어요. 당신을 도울 수 없어서 미안해요." 이제 여자는 거의 온몸을 떨고 있었다. 다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 사람을 만나서 테일러 윈스롭 씨에 대해 너무나 좋은 이야기들을 들었어요. 그래서 당신도 그런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순간 조안 시니시의 얼굴에 안도하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오, 그럼요, 그런 이야기라면 물론 해드릴 수 있죠. 윈스롭 씨는 훌륭한 분이셨어요." "그분과 얼마나 오랫동안 일했나요?" "거의 3년이오." 다나는 시니시를 안심시키려고 미소지었다. "그건 분명히 멋진 경험이었을 거예요." "네, 네. 그랬어요, 에반스 양." 조안 시니시는 휠씬 더 안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그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더군요." 갑작스런 두려움이 다시 조안 시니시의 눈동자에 떠올랐다.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 말은 그렇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건 실수였어요, 정말이에요. 내가 실수를 했어요." "어떤 실수를 했는데요?" 조안 시니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내가 윈스롭 씨가 어떤 사람에게 말한 것을 잘못 알고 오해했어요. 그때는 내가 너무 바보같이 굴었어요. 지금도 내 자신이 부끄러워요." "당신은 소송을 걸었지만, 그를 법정에 새우지는 않았죠?" "네. 그분은....... 우리는 소송을 화해했어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요." 다나는 호화로운 펜트하우스를 다시 한 번 힐낏 둘러보았다. "알겠어요. 어떻게 화해를 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조안 시니시는 당황해서 더듬거렸다. "아뇨, 미안해요. 그건 정말 비밀이에요." 다나는 무엇이 이 겁 많은 여자로 하여금 테일러 윈스롭 같은 거인에게 소송을 걸게 했으며, 왜 이 여자가 그 말을 꺼내는 것을 두려워하는지 의아스러웠다. '도대체 이 여자가 두려워하는 게 무엇일까?' 거실에는 한참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조안 시니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나를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었다. 다나는 조안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니시 양......." 조안 시니시가 소파에서 튕기듯 일어섰다. "더 이상은 말할 수 없어요, 미안해요....... 다른 일이 없으시다면, 에반스 양......." "이해해요." 다나가 말했다. '나도 다른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테이프를 기계 속에 밀어놓고 동작 단추를 눌렀다. 내가....... 내가 윈스롭 씨가 어떤 사람에게 말한 것을 잘못 알고 오해했어요. 그때는 내가 너무 바보같이 굴었어요. 지금도 내 자신이 부끄러워요. 당신은 소송을 걸었지만, 그를 법정에 세우지는 않았죠? 네. 그분은....... 우리는 소송을 화해했어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알겠어요. 어떻게 화해를 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아뇨, 미안해요. 그건 정말 비밀이에요. 시니시 양...... 더 이상은 말할 수 없어요, 미안해요....... 다른 일이 없으시다면, 에반스 양....... 이해해요. 테이프가 끝났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다나는 결혼해서 살 아파트를 구하기 위해서 부동산 중개업자와 약속을 했다. 하지만 어전 시간을 낭비했을 뿐이었다. 다나와 중개업자는 조지타운, 듀폰 써클, 그리고 아담스 모간 구역을 샅샅이 돌아다녔다. 어떤 아파트는 너무 작고, 어떤 것은 너무 크고, 어떤 것은 너무 비쌌다. 오후가 되자, 다나는 벌써 포기하고 싶어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부동산 중개업자가 장담했다. "당신이 원하는 아파트를 꼭 찾을 테니까요." 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길 바래요." '되도록 빨리요.' 다나는 조안 시니시를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녀가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이길래, 테일러 윈스롭이 그토록 사치스런 펜트하우스와 오직 신만이 알고 있는 다른 대가를 치른 것일까? 그녀는 내가 어떤 말을 하려고 했어.' 다나는 생각했다. '분명히 그랬어. 다시 그녀를 만나봐야만 되겠어.' 다나는 조안 시니시의 아파트에 전화를 걸었다. 그레타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그레타, 다나 에반스예요. 시니시 양과 통화를 하고 싶어요." "죄송합니다. 시니시 양은 아무 전화도 받지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다나 에반스가 전화했다고 전해줘요, 그리고 내가......." "죄송합니다, 에반스 양. 시니시 양은 전화를 받지 않으십니다." 전화가 뚝 끊겼다. 다음날 아침에 다나는 케말을 학교에 태워다주었다. 얼어붙은 하늘에, 창백한 태양이 막 나오고 있었다. 도시의 거리 모퉁이마다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구세군들이 서서 종을 울리고 있었다. '섣달 그믐달이 오기 전에 반드시 우리 세 사람이 지낼 아파트를 찾아야만 해.' 다나는 내내 그 생각을 하면서 차를 몰았다. 스튜디오에 도착하자, 다나는 오전 시간을 제작진과 함께 회의를 하면서, 카메라로 녹화한 장면을 내보내야 할 부분과 진행할 이야기를 의논하며 지냈다. 그 중에는 특별히 잔혹한 미해결 살인 사건도 들어 있었다. 다나는 그 순간 윈스롭 일가의 죽음을 떠올렸다. 그녀는 다시 조안 시니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시니시 양의 집입니다." "크레타, 매우 중요한 일 때문에 시니시 양과 꼭 이야기를 해야만 해요. 다나 에반스가 전화를 했다고 전해......." "시니시 양은 당신과 얘기하고 싶지 않으시답니다, 에반스 양." 전화가 뚝 끊겼다. '이제 어떻게 하지?' 다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다나는 매트 베이커를 찾아갔다. 애브 라스맨이 다나를 맞았다. "축하해요! 다나! 소식 들었어요. 이제 결혼식만 남았군요." 다나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애브가 부러운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얼마나 낭만적인 청혼이에요." "그 낭만적인 남자가 내 애인이지 뭐예요." 다나는 자랑스런 표정을 애써 숨기지 않았다. 갑자기 애브는 몸을 세우며 은밀한 충고를 하듯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다나, 결혼식이 끝난 후 배우자에게 실망한 사람에게 전문가가 이런 충고를 했어요. 밖으로 나가서 통조림 깡통들을 잔뜩 산 다음에 그것들을 자동차 트렁크에 넣어두라구요." "무엇 때문에?" "그 사람 말로는, 어느 날 자동차를 몰고 나가서 일상에서 조금 벗어난 즐거움을 누린 다음에 집에 늦게 돌아오고 싶을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그때 만약 제프가 어디에서 뭘 하다가 이제 왔느냐고 물으면, 당신은 단지 그 통조림들을 보여주고 이렇게 말하면 된다는 거죠. '쇼핑했어요' 그러면 그는......." "고마워요, 애브. 매트, 만날 수 있어요?" 다나는 애브의 말을 중간에서 가로막았다. "아참, 당신이 와 있다고 전할게요." 잠시 후, 다나는 매트의 사무실 안에 있었다. "앉아요, 다나, 좋은 소식이 있소. 방금 시청률 조사기관인 닐슨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소. 우리가 어젯밤에 경쟁 프로그램을 다시 때려 눕혔더군." "잘됐네요. 매트, 내가 테일러 윈스롭의 전 비서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매트가 씨익 웃었다. "과연 처녀자리인 사람은 결코 대충 눈 감고 넘어가는 법이 없군. 그렇지 않소? 당신이 나에게 말했을......." "알아요. 하지만 이 말만은 들어야 해요. 테일러 윈스롭 밑에서 일할 때, 그 비서는 그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어요. 하지만 그가 그녀와 화해했기 때문에 법정까지 가지는 않았죠. 지금 그녀는 비서 봉급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초호화판 아파트에서 살고 있어요. 틀림없이 소송 화해의 대가가 아주 컸을 테죠. 내가 윈스롭의 이름을 언급하자, 그 여자는 겁에 질렸어요. 분명히 겁에 질렸다고요. 그 여자는 마치 자신의 생명이 위협이라도 받고 있는 듯이 행동했어요." 매트가 침착하게 물었다. "그 여자가 생명을 위협당하고 있다고 말했소?" "아니요." "그 여자가 테일러 윈스롭이 두렵다고 말했소?" "아니요, 하지만......." "그렇다면, 그 여자가 폭력적인 남자 친구나 침대 밑에 숨어 있는 강도를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르지. 당신이 확실하게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소, 안 그렇소?" "하지만......." 다나는 매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았다. 매트의 말이 옳았다. 지금은 더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요.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매트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 뒤로 몸을 깊숙이 묻었다. "좋소, 닐슨 조사에 따르면......." 조안 시니시는 WTN 저녁 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다나가 말을 조사하고 있었다.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범죄율이 지난 12개월 동안 27퍼센트 감소했습니다. 범죄율이 가장 크게 감소한 곳은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디트로이트로서......." 조안 시니시는 다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다나의 눈을 바라보면서, 필사적으로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나의 방송 전부를 보았고,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이 되자,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7 또 하나의 죽음 월요일 아침에 다나는 조금 늦게 사무실로 출근했다. 케말이 늦잠을 잔 데다가 자동차가 말썽을 부렸다.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올리비아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다나. 이름을 밝히지 않는 어떤 여자가 당신 찾는 전화를 세 번이나 했어요." "전화번호를 남겼나요?" "아니요, 다시 전화하겠다고 했어요." 30분 후, 올리비아가 알렸다. "그 여자가 다시 전화했어요. 연결할까요?" "좋아요." 다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제가 다나 에반스인데요. 누구신지......." "조안 시니시예요." 다나의 맥박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마침내 조안 시니시가 전화를 했다. 몇 번이나 전화해도 거부하던 여자가 스스로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다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네, 시니시 양......." "아직도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초조하게 불안하게 들렸다. "네, 아주 무척이오." "좋아요. 당신과 이야기하겠어요." "내가 당신 아파트로 갈 수......." "안 돼요!" 그녀가 크게 당황하며 급히 소리쳤다. "어디 다른 곳에서 만나야만 해요. 나는.......나는 감시를 당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어디든지 당신이 정해요. 어디로 갈까요?" "공원에 있는 동물원의 조류 사육장이오. 한 시간 안에 올 수 있어요?" "그럴게요." 겨울의 동물원은 눈에 띄게 황량했다. 얼음처럼 싸늘한 12월의 바람이 도시에 휘몰아쳐서 사람들을 집 안으로 꽁꽁 숨게 만들었다. 다나는 조류 사육장 앞에서 추위에 몸을 떨며 조안 시니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물원 안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조차 없었다. 다나는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한 시간 이상이 지나갔다. '15분만 더 기다려보자.' 15분이 지나자 다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30분만 더, 그리고 가버리겠어.' 30분 후에 다나는 생각했다. '그녀가 생각을 바꾼 거야.' 다나는 꽁꽁 얼고 젖은 채, 사무실로 돌아왔다. "전화 온 데 없었어요?" 다나는 기대를 갖고 올리비아에게 물었다. "여섯 통이 걸려왔어요. 책상 위에 메모를 올려놓았어요." 다나는 올리비아가 적어놓은 메모를 보았다. 조안 시니시의 이름은 그중에 없었다. 다나는 조안 시니시의 아파트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열두 번 울릴 때까지 듣고 있다가 다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마 그녀가 다시 생각을 바꿀지도 몰라.' 다나가 두 번 더 전화를 걸었지만, 조안 시니시의 전화를 응답이 없었다. 다나는 아파트로 가보아야 할지 어떨지 고민했지만 결국 가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다시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야겠지. 내가 너무 재촉하면 오히려 두려워할지도 몰라.' 다나는 그러는 편이 더 나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안 시니시로부터 더 이상 연락은 없었다. 다음날 새벽 5시, 다나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체첸의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열두 구가 넘는 러시아인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반란군이 물러가고 있다는 러시아 정부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전투가 계속 벌어지고 있습니다....... 다음은 지역 뉴스입니다. 한 여인이 자신이 사는 펜트하우스 아파트 30층에서 떨어져 숨졌습니다. 희생자는 조안 시니시라는 이름의 여인으로서 러시아 대사를 지낸 테일러 윈스롭의 전직 여비서였습니다. 경찰은 사고 원인을 조사 중입니다." 순간 다나는 동작을 멈추고 우뚝 섰다. 마치 얼어붙은 듯이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매트, 내가 만나려고 했던 그 여자 기억하죠, 조안 시니시라고, 테일러 윈스롭의 전직 여비서 말이에요?" "알지, 그 여자가 어떻다는 거요?" "그 여자가 아침 뉴스에 나왔어요. 죽었어요." "뭐라고?" "어제 아침에 조안 시니시가 전화로 나에게 급히 만나자고 했어요. 나에게 말해줄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면서요. 나는 한 시간이 넘게 동물원에서 그녀를 기다렸죠. 그런데 그녀가 끝내 나타나지 않았어요." 매트는 다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와 통화할 때, 그녀는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고 말했어요." 매트 베이커는 의자에 앉아서 턱을 긁적거렸다. "맙소사, 도대체 무슨 빌어먹을 일이 벌어진 거야?" "나도 모르겠어요. 조안 시니시의 하녀를 만나보려고 해요." "다나......." "네?" "조심해요. 부디 조심해요." 다나가 아파트 현관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며칠 전과 다른 경비원이 근무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제 이름은 다나 에반스예요. 시니시 양이 죽었다고 해서 왔어요. 너무 끔찍하고 슬픈일이에요." "네, 그렇습니다. 좋은 부인이었습니다. 언제나 조용하고 거의 외출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를 찾아오는 손님이 많았었나요?" 다나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연스럽게 물었다. "아닙니다, 천만에요. 은둔하다시피 했는걸요." "어제 근무 중이셨나요, 그러니까......." 다나는 적당한 단어를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니까 그 사고가 일어난 날 말인가요? 아닙니다." "그럼 그녀와 함께 누가 있었는지 모르시겠네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여기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을 테죠?" "오, 물론이죠. 데니스가 근무 중이었습니다. 경찰이 그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지요. 그는 가엾은 시니시 양이 떨어졌을 때 용건이 있어서 밖에 나가 있었답니다." "시니시 양의 하녀인 그레타와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죄송합니다만,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다고요? 왜요?" "그 여자가 떠났거든요." "어디로요?"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말했어요. 충격이 엄청났던 모양이에요." "혹시 집이 어디라고 말하던가요?" 경비원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뇨, 그런 말은 전혀 들은 바가 없습니다." "지금 시니시 양의 아파트에 올라가 있는 사람이 있나요?" "없습니다." 다나는 재빨리 생각했다. "저희 WTN에서 시니시 양의 죽음을 취재하려는데요. 혹시 제가 다시 그 아파트를 봐도 될까요? 며칠 전에도 여기 왔었거든요." 경비원은 잠깐 생각하는 것 같더니 곧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셔도 별 문제는 없을 것 같군요. 다만 제가 당신과 함께 올라가야만 될 것 같습니다." "그게 좋겠어요." 두 사람은 말없이 펜트하우스가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그들이 탄 엘리베이터가 30층에 도착하자 경비원이 열쇠를 꺼내서 A실의 아파트 문을 열었다. 다나는 아파트 내부로 걸어 들어갔다. 내부는 정확히 다나가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조안 시니시가 없어진 것만 제외하면 너무나 똑같아.' "특별히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까, 에반스 양?" "아니요." 다나는 거짓말을 했다. "단지 제가 기억하고 있던 모습을 되살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다나는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간 다음, 베란다 쪽으로 향했다. "그 불쌍한 부인이 떨어진 곳이 바로 거기랍니다." 경비원이 알려주었다. 다나는 거대한 베란다로 나가서 그 끝에까지 걸어갔다. 1미터 높이의 안전벽이 베란다를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 누구든지 우연한 사고로 그 위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나는 크리스마스 쇼핑 차량들로 혼잡한 아파트 아래쪽의 거리를 내려다보면서 생각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잔인한 짓을 한 걸까?" 경비원이 그녀의 옆에 와서 섰다. "괜찮습니까?" 다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네,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다른 걸 더 보시겠어요?" "아니요, 충분히 봤어요?" 도심자에 있는 경찰서의 대기실은 범죄인, 술 취한 사람, 매춘부, 그리고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지갑을 잃어버리고 절망한 관광객들로 붐볐다. 특히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가까워오면서 경찰서는 더욱 분주하고 바빠진 것 같았다. "마커스 에이브람스 형사님을 만나려고 왔는데요." 다나는 대기실에 앉아 있는 수위에게 말했다. "오른쪽으로 세 번째 문입니다." "고마워요." 다나는 고개 숙여 인사한 다음, 복도를 따라서 걸어갔다. 에이브람스 형사의 방문은 열려 있었다. "에이브람스 형사님?" 그는 블록 튀어나온 올챙이 배에 피곤해 보이는 갈색 눈을 가진 몸집이 거대한 남자로, 지금 한창 캐비닛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는 다나를 어깨 너머로 돌아보았다. "그렇소만?" 에이브람스 형사는 곧 자기 방문 앞에 서 있는 여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다. "당신이 다나 에반스로군요. 뭘 도와드릴까요?" "당신이 조안 시니시......." 다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되풀이했다. "조안 시니시 사고를 맡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렇소." "그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그는 한 손 가득 서류를 쥐고서 책상 의자에 털썩 앉았다. "별로 할 얘기가 없소. 그건 우연한 사고이거나 자살이오, 우선 앉아요." 다나는 에이브람스가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누가 그녀와 함께 있었나요?" "그 하녀뿐이었소. 부엌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했소.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더군." "그렇다면 제가 어디로 가야 그 하녀를 만날 수 있을까요?" 그는 의아한 얼굴로 잠깐 생각하더니, 아주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 여자가 오늘밤 뉴스에 나오겠군, 그렇소?" 다나는 그에게 미소지었다. "맞아요." 에이브람스 형사는 다시 캐비닛으로 걸어가서 그 안에 들어 있는 서류 몇 장을 뒤적거렸다. 그는 카드 하나를 꺼냈다. "여기 있군. 그레타 밀러. 코네티컷 가 1180번지. 이거면 되겠소?" 20분 후 다나는 코네티 컷 가를 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길 옆에 죽 늘어서 있는 집들의 주소를 확인하면서 천천히 자동차를 몰았다. 1170.......1172.......1174.......1176.......1178....... 1180번지는 주차장이었다. 다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레타 밀러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마치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당신은 정말로 시니시라는 그 여자가 누군가의 손에 살해되었다고 믿는 건가?" 제프가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물었다. "제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먼저 전화를 걸어서 급히 만나자고 약속한 다음에, 곧바로 자살을 저지르지는 않아요. 아무래도 그녀가 나에게 어떤 말을 하는 걸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게 분명해요. 그래서 나를 만나기 전에 입을 열 수 없도록 막은 거라구요. 이건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유령 사냥개 같아요. 아무도 그 개가 짖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아무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거죠." 제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이거 점점 겁이 나는걸. 나는 당신이 꼭 이 일을 계속해야만 하는 것인지 모르겠어." "제프, 이제 와서 그만둘 수는 없어요. 조안 시니시는 나 때문에 목숨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반드시 밝혀내야만 해요." "당신 생각이 맞다면, 다나. 지금까지 모두 여섯 며의 사람이 살해된 거야." 다나는 목구멍이 콱 메어오는 느낌으로 간신히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요,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 하녀가 가짜 주소를 남기고 사라져버린 거예요." 다나는 매트 베이커에게 그동안의 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내가 조안 시니시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 조안은 무척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어요. 하지만 분명히 그녀는 자살한 게 아니에요. 누군가 그 베란다에서 그녀를 밀어서 떨어뜨렸어요." "우리에겐 아무 증거도 없잖소." "그래요, 하지만 내 판단이 옳다고 확신해요. 내가 처음 조안 시니시를 만났을 때, 그녀는 아주 명랑했어요. 적어도 내가 테일러 윈스롭의 이름을 언급하기 직전부터 말이죠. 그런데 내가 테일러 윈스롭의 전설적인 신화를 조사사는 동안, 그런 모습을 보인 사람은 처음이에요. 조안 시니시가 그에게 정말로 불리한 어떤 큰 약점을 쥐고 있지 않는 한, 윈스롭 같은 남자가 비서에게 그런 큰 돈을 주었을 리가 없어요. 분명히 치명적인 협박과 공갈이 있었어요. 무언가 수상한 일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고요." 다나는 매트 베이커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매트 베이커는 언론계와 방송계에게 마당발로 통하는 인물이었다. 모르는 사람은 매트 베이커의 추레한 행색만 보고 무시해버리기 일쑤지만, 사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사건의 실마리든 제공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다나는 매트 베이커에게 졸라대듯이 말했다. "매트, 예전에 테일러 윈스롭과 함께 일하다가 문제가 있었던 사람을 혹시 알아요? 누군가 이 사건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리낌없이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을까요?" 매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당신 스케줄을 조정할 수 있겠소?" "그러도록 해볼게요." 한 시간 후, 매트 베이커가 전화를 했다. "목요일 12시, 로저 허드슨과 조지타운에 있는 그의 집에서도 만나도록 약속을 해놨소." "고마워요, 매트. 정말이에요." "당신에게 미리 경고해야만 하겠소, 다나......." "네?" "허드슨이 꽤 거칠게 굴지도 모르오."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도록 노력할게요." 그날 저녁에 매트 베이커가 막 사무실을 나가려고 할 때, 엘리어트 크롬웰이 들어왔다.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나? 자네와 다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니야, 그리고 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네. 그녀가 조사하고 있는 테일러 윈스롭의 일을 말하는 걸세." "그렇군요." "다나는 작은 일을 크게 부풀리고 있어. 그녀가 괜히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하네. 나는 테일러 윈스롭과 그의 가족을 잘 알았었지. 그들은 모두 참으로 훌륭한 사람들이야." 매트베이커는 알았다는 듯이 금방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다나가 계속 조사한다고 해서 그들의 명성에 해를 끼칠 일은 없겠군요." 엘리어트 크롬웰은 잠깐 매트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런 다음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다나의 조사 활동을 계속 나에게 보고하게." "시큐어 라인(보안 전선)이오?" "그렇습니다." "좋소. WTN에서 보내온 상당한 양의 정보가 우리 쪽으로 들어오고 있소. 당신의 정보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이라고 확신하오?" "확신합니다. 사무국 건물로부터 곧장 들어오는 것이니까요." 8 로저와 파멜라 수요일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다나는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그녀는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아파트 건물 앞에 이삿짐 차가 서 있고 인부들이 부지런히 가구를 옮기고 있었다. 다나는 깜짝 놀랐다. '누가 이사를 가는 걸까? 이사 간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 다나는 의아스러웠다. 다나가 사는 아파트에는 빈방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거주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몇 년씩 머무른 장기 임대자였다. 다나가 식탁 위에 시리얼을 놓았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도로시 와톤이었다. "다나, 당신에게 전해줄 소식이 있어요." 와톤 부인이 흥분함 목소리로 말했다. "하워드와 내가 내일 로마로 이사를 가게 됐어요." 다나는 순간 어리둥절해서 와톤 부인을 쳐다보았다. "로마로요? 내일 떠난다구요?" "믿어지지 않죠? 지난 주에 어떤 남자가 하워드를 찾아왔어요. 사실 이건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비밀이에요. 남편이 나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아무튼, 어젯밤에 그 남자가 전화를 걸어와서는 하워드에게, 지금 받는 봉급의 세 배를 줄 테니 이탈리아에 가서 자기 동료와 함께 일하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했지 뭐예요." 도로시는 한껏 들떠 있었다. 다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말했다. "어머, 멋진....... 멋진 일이네요. 우린 하워드 씨 내외가 그리워질거예요." "우리도 당신들이 보고 싶을 거예요." 그때 하워드가 문으로 다가오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벌써 도로시가 그 소식을 다 말했을 테죠?" "네, 축하드려요. 하지만 두 분은 평생 여기에서 사실 계획을 세우지 않으셨나요? 이렇게 갑작스럽게......." 하워드는 다나의 질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쾌하게 떠들어댔다. "나로서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에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죠. 큰 회사랍니다. 아주 커요. 이탈리아노 리프리스티노.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복합 기업체 중의 하나입니다. 훼손된 유물을 복구하는 자회사를 갖고 있지요. 그들이 어떻게 내 이름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단지 나와 계약을 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직접 사람을 보냈단 말입니다. 물론 로마에는 수선이 필요한 유물이 많지요. 그 사람들은 심지어 우리 아파트의 나머지 계약 기간에 지불해야 할 임대료까지 대신 내주었어요. 그래서 우린 보증금을 돌려 받았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이라고는, 내일까지 로마에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바로 우리가 오늘 아파트를 나가야만 한다는 뜻이죠." 다나는 순간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슬쩍 하워드를 떠보았다. "예사롭지 않은 일이군요. 안 그래요?" "그 사람들, 어지간히 바쁜가 봅니다." 하워드가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다나는 다시 물었다. "짐 싸는 것 좀 도와드릴까요?" 이번에는 도로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꼬박 밤을 세우며 짐을 정리했거든요. 이곳에서 쓰던 대부분의 물건은 자선 단체로 보낼 거예요. 하워드가 새로 받게 될 봉급이면, 지금보다 훨씬 더 여유 있게 지낼 수가 있어요." 다나는 미소지었다. "계속 연락하며 지내요, 도로시." 한 시간 후에 와튼 부부는 자신들이 살던 아파트를 떠나서 로마로 향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다나는 올리비아에게 부탁을 했다. "회사 하나를 좀 알아봐줘요." "그럼요." "이탈리아노 리프리스티노라는 회사예요. 로마에 본부가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좋아요." 삼십 분 후, 올리비아는 다나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여기 있어요. 그 회사, 유럽에서 가장 큰 기업체 중의 하나예요." 다나는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내가 과민했던 거야. 이런 일까지 의심을 하다니. 아무래도 내 신경이 지나치게 예민해진 모양이야. 어쩌면 하워드 씨로부터 나중에 연락이 올지도 몰라. 그럼 케말을 데리고 로마 여행이나 해볼까?" "잘됐어요. 그 말을 들으니 기쁘네요." 올리비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민간 기업체가 아니에요." "설마?" "그래요. 이탈리아 정부가 소유한 국영 기업체예요." 그날 오후, 다나가 케말을 학교에서 태우고 집에 데려다주었을 때, 안경을 낀 중년 남자가 와톤의 아파트로 이사를 들어오고 있었다. 목요일. 다나가 로저 허드슨과 만날 약속을 한 그 날은 아침부터 끔찍하게 일이 꼬였다. 첫 번째 말썽은 뉴스 제작 회의 때에 일어났다. 로버트 펜윅이 이마를 찌푸리면서 말했다. "오늘밤 방송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아요." "무슨 일인지 말해봐요." 다나가 말했다. "우리가 아일랜드로 기자들을 보낸 거 알죠?" 오늘밤에 그 필름을 쓸 예정이었잖아요?" "네, 그런데요?" "우리 기자들이 체포됐어요. 갖고 있던 장비는 모두 압수당하구요." "정말이에요?" "다나, 난 아일랜드 사람에 대해서는 결코 농담 같은 거 하지 않는다구요." 그는 다나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또 하나 있어요. 이건 부정 혐의를 받고 있는 워싱턴의 은행가에 대한 우리의 톱 기사예요." 다나는 기사를 흘끗 보면서 말했다. "나도 알아요. 훌륭한 기갓거리죠. 우리 방송국의 독점 기사이기도 하구요. 대단한 반응을 일으킬걸요." "바로 그걸 우리 법률 고문들이 죽여버렸어요." "뭐라구요?" "은행가로부터 명예 훼손죄로 고소를 당할까봐 겁내더라구요. 그런 비슷한 전례가 있다는 거예요." "감탄스럽기 그지없군요." 다나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게 끝이 아니에요. 오늘밤 우리가 생방송으로 인터뷰를 하기로 한 살인 사건의 목격자 말이에요......." "그런데요......." "그 사람이 마음을 바꿨어요. 나오지 않겠대요." 다나는 신음 소리를 냈다. 아직 오전 10시도 되지 않았다. 다나가 오늘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로저 허드슨과의 약속뿐이었다. 뉴스 제작 회의를 마치고 다나가 사무실로 돌아오자, 올리비아가 알렸다. "11시예요, 에반스 양. 이런 험악한 날씨에 허드슨 씨와의 약속을 지키려면 지금 출발해야 할 거예요." "고마워요, 올리비아. 2시나 3시까지는 돌아오겠어요." 다나는 창문 밖을 쳐다보았다. 다시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코트와 스카프를 걸치고 문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에반스 양......." 다나는 몸을 돌려서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3번에 당신을 찾는 전화가 왔어요." 다나는 고개를 흔들며 재빨리 말했다. "지금은 안 돼요. 나는 빨리 나가야만 해요." "케말의 학교에서 온 전화예요." "뭐라구요?" 다나는 급히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여보세요?" "에반스 양입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토머스 헨리 교장입니다." "네, 헨리 교장 선생님. 케말은 괜찮나요?"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정말로 모르겠군요. 이런 말을 하게 되어서 정말 유감입니다만, 케말은 퇴학당했습니다." 다나는 충격을 받고 몸이 얼어붙었다. "퇴학당하다뇨? 왜요? 그 애가 무슨 짓을 했죠?" "아마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만 될 거 같습니다. 에반스 양이 학교로 와서 그 아이를 데려갔으면 좋겠군요." "헨리 교장 선생님......." "여기 오시면 설명을 해드리죠, 에반스 양. 그럼 이만." 다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한동안 케말도 학교에 잘 적응하는 것 같았는데.' 올리비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요? 에반스 양.......?" 다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괜찮아요, 올리비아. 이 한 통의 전화로 오늘 아침은 정말 멋지게 마무리가 되었어요." "내가 해줄 일이 없나요?" "나를 위해서 특별 기도를 올려줘요." 그 날 아침에 리키 언더우드는, 다나가 케말을 학교에 내려주고 손을 흔들며 차를 몰고 떠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리키 언더우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리키의 엄마는 그에게 한 번도 저런 미소를 지어준 적이 없었다. 리키는 외팔이 세르비아인 주제에 케말이 워싱턴에서도 가장 유명한 앵커인 다나 에반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케말이 그를 지나쳐서 걸어가자, 리키가 말했다. "야, 이게 누구야. 전쟁 영웅이잖아. 내가 척 보니까, 네 양 엄마는 욕구불만인 게 틀림없어. 너의 하나밖에 없는 그 손으로 저 여자 거기를 만져주는......." 케말은 앞뒤 생각할 것 없이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발을 들어서 리키의 사타구니 사이를 걷어찼다. 그리고 리키가 비명을 지르면서 허리를 꺾자, 케말은 왼쪽 무릎을 치켜올려서 리키의 코를 부러뜨렸다. 붉은 피가 공중으로 뿜어져나왔다. 케말은 땅바닥 위에서 신음하는 리키의 몸뚱이 위로 허리를 구부렸다. "다음 번엔 널 죽여버릴 거야." 다나는 테오도르 루즈벨트 중학교로 최대한 속력을 높여서 자동차를 몰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의아스러웠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간에, 교장 선생님에게 케말을 학교에 남게 해달라고 부탁해야만 해.' 토머스 헨리는 교장실에서 다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케말은 교장 선생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교장실 안으로 들어가면서, 다나는 전에도 이와 똑같은 상황이 있었음을 상기했다. "어서 오십시오, 에반스 양." 다나는 인사를 생략하고 급히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당신의 아드님이 다른 소년의 코와 광대뼈를 부러뜨렸습니다. 그 아이는 앰뷸런스에 실려서 응급실로 갔습니다." 다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교장 선생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죠? 케말은 팔이 하나뿐인데." 토머스 헨리는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다리는 두 개죠. 이 아이는 무릎을 써서 그 아이의 코를 부러뜨렸습니다." 케말은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다나는 케말에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비난하듯이 물었다. "케말,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니?" 케말은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아주 간단했어요." 교장 선생이 굳은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하는 말의 뜻을 이해하십시오, 에반스 양. 지금까지 이 아이가 보여준 행동은....... 저로서는....... 저로서는 어떻게 설명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우리가 케말의 행동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것이 유감입니다. 죄송하지만 이 아이에게 더 적합한 학교를 찾아보십시오." 다나는 열심히 케말을 변호했다. "교장 선생님, 케말은 먼저 싸움을 걸지 않습니다. 만약 케말이 싸움을 했다면, 분명히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거에요. 케말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시면 안 될까요? 앞으로는 절대로......." 토머스 헨리는 단호하게 다나의 말을 끊었다. "우린 이미 결정했습니다. 에반스 양." 그는 최후 판결을 내리고 있었다. 다나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좀더 이해심이 많은 학교를 찾아보죠. 가자, 케말." 케말은 의자에서 일어나서, 교장 선생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다나는 케말의 팔을 잡아끌다시피 하면서 교장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두 사람은 침묵 속에 복도를 걸어갔다. 다나는 손목 시계를 쳐다보았다. 이미 약속 시간엔 늦었고, 케말을 맡길 곳도 없었다. '케말을 데리고 갈 수밖에 없겠어.' 두 사람이 차에 올라탔을 때, 다나는 비로소 케말에게 물었다. "좋아, 케말. 어떻게 된 일이지?" 케말은 리키 언더우드가 했던 상스러운 말을 다나에게 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다나. 내 잘못이에요." '이 아이는 너무 거칠어.' 허드슨 저택은 조지타운의 상류층 지역에서도 6천 평이나 되는 광대한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그 집은 조지아 양식풍의 3층짜리 대저택으로, 거리에서 바라보면 단연 눈에 띄었다. 저택의 외관은 하얀색이었고 저택의 입구까지는 넓은 자동차 길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다나는 저택 앞에서 차를 세우고, 케말을 바라보았다. "케말, 나와 함께 들어가자." "왜요?" "여기 밖에 있으면 너무 추울거야.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도 없고 말이야. 어서." 다나는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케말은 머뭇거리면서 다나의 뒤를 따라왔다. 다나는 케말을 돌아보며 다짐했다. "케말, 나는 매우 중요한 인터뷰를 하러 여기 온 거야. 그러니까 네가 조용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으면 좋겠어, 알겠니?" "알았어요." 다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서글서글한 인상을 풍기는 거구의 남자가 문을 열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이 집의 집사인 것 같았다. "에반스 양이십니까?" "네. 다나 에반스입니다." "저는 세자르입니다. 허드슨 씨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세자르는 의아한 눈빛으로 케말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다나에게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곧 공손하게 물었다. "두 분의 코트를 받아드릴까요?" 잠시 후 세자르는 두 사람의 옷가지를 받아서 현관에 있는 손님용 벽장에 걸었다. 케말은 자신보다 한참 키가 큰 세자르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아저씨는 정말 크군요. 키가 얼마나 돼죠?" 다나는 당황해서 속삭였다. "케말! 버릇없이 굴면 안 돼." "허허, 괜찮습니다, 에반스 양. 저는 이런 질문에 아주 익숙해져 있답니다." "아저씨가 마이클 조단보다 더 큰가요?" 케말이 다시 물었다. 집사는 미소지었다. "그런 것 같구나. 내 키는 2미터 13센티미터란다. 자아, 이쪽으로 오시죠." 집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는 무척 넓고 길었다. 단단한 떡갈나무가 바닥에 깔린 복도는 화려한 골동품 거울과 대리석 탁자로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벽을 따라 매달린 선반에는 귀중한 명나라 대의 금속 공예품이나 도자기들이 놓여 있었다. 이 집의 주인은 값비싼 골동품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다나와 케말은 세자르의 뒤를 따라서 긴 복도를 지나, 연한 노란색 벽지와 하얀색 목재로 꾸며진 거실로 들어갔다. 그 방에는 편안하고 커다란 쇼파, 정교한 조각이 새겨진 앤 왕조 말기의 탁자, 그리고 연한 노란색 비단을 씌운 셰라틴(역주: 영국의 가구 설계가 셰라틴의 이름을 딴 것임)풍의 팔걸이가 달린 안락 의자 같은 가구들이 갖춰져 있었다. 모두가 유서 깊고 값비싼 물건들뿐이었다. 세나토르 로저 허드슨과 그의 아내 파멜라는 주사위 놀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세자르가 다나와 케말을 소개하자, 의자에서 일어섰다. 차가운 회색 눈동자를 가진 로저 허드슨은 완고한 인상을 풍기는 오십 대 남자였다. 로저 허드슨은 다나에게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에는 상대방을 날카롭게 관찰하는 듯한, 경계의 빛이 어려 있었다. 다나는 왠지 마음이 서늘해졌다. 아름답고 우아한 파멜라 허드슨은 남편보다 조금 더 젊어보였다. 그녀는 남편과는 달리 따뜻하고 너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색이 바랜 엷은 금발과 잔주름이 진 얼굴에서 화장으로 감출 수 없는 나이의 흔적이 엿보였다. "늦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다나는 우선 사과부터 했다. "다나 에반스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아들, 케말입니다." "로저 허드슨이오. 이쪽은 내 집사람, 파멜라요." 다나는 이미 인터넷을 통해 로저 허드슨의 신상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그의 아버지는 허드슨 산업이라는 작은 철강회사의 소유주였다. 일찍부터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은 로저 허드슨은 그 회사를 전 세계적인 복합기업체로 성장시켰다. 그는 억만장자였고 상원의 원내 총무를 역임했으며 한때 군사 위원회를 이끌기도 했었다. 얼마 전에 사업에서 은퇴한 그는 현재 백악관의 경제 정책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로저 허드슨은 스물다섯 살의 나이에 사교계의 미인 파멜라 도넬리와 결혼했다. 그들 두 사람은 워싱턴 사교계의 저명 인사였으며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다나는 케말을 쳐다보았다. "케말, 이분들은 허드슨씨와 허드슨 부인이시란다." 다나는 로저 허드슨에게 말했다. "아이와 함께 와서 죄송합니다. 사실은......." 파멜라 허드슨이 다나의 말을 가로막았다. "신경쓰지 말아요. 우린 케말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답니다." 다나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고 있다고요?" "그래요, 여기저기에 당신 기사가 많이 나왔었죠, 에반스 양. 당신이 케말을 사라예보에서 구해냈다고 하더군요. 참 훌륭한 일을 했어요. 그건 좀처럼 하기 어려운 일인데 말이죠." 로저 허드슨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다나와 이야기하는 게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무얼 좀 들겠어요?" 파멜라 허드슨이 물었다. "전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다나는 사양했다. 그들은 케말을 바라보았다. 케말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앉으세요." 로저 허드슨과 그의 아내는 소파에 앉았다. 다나와 케말은 그들 맞은편에 놓여 있는 편안한 소파에 앉았다. 케말은 충실한 심복처럼 다나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었다. 마침내 로저 허드슨이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이 왜 나를 찾아왔는지 그 이유를 확실히 모르겠소, 에반스 양. 매트 베이커가 나에게 당신을 한번 만나달라고 부탁하더군.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 거요?" "테일러 윈스롭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로저 허드슨은 이마를 찌푸렸다. "그에 대한 무엇을 말이오?" "저는 허드슨 씨가 그분과 상당히 가깝게 지냈다고 들었습니다." "개인적인 친분 관계는 아니었소. 나는 그가 러시아 주재 대사로 있을 때, 그를 만났소. 그때 나는 군사 위원회의 의장이었소. 러시아 군의 군사력을 평가하러 그곳에 갔었지. 테일러는 우리 위원회의 위원들과 이틀인가 사흘간 함께 보냈소. 그게 전부요." 테일러 윈스롭씨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허드슨 씨?" 잠시 신중한 침묵이 흘렀다. "솔직히 털어놓는다면, 에반스 양, 나는 그 어떤 인간적인 매력에도 그다지 영향받지 않는 사람이오. 다른 사람처럼 호들갑스럽게 그를 평가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 하지만 굳이 한 마디 해야 한다면, 나는 그 남자가 매우 유능하다고 생각했소." 그들의 대화가 따분한지 케말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나 방 안을 가만히 돌아다녔다. "혹시 테일러 윈스롭 씨가 러시아 대사로 있을 때 어떤 문제에 휘말린 적이 있었나요?" 로저 허드슨은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다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군. 어떤 종류의 문제 말이오?" "무엇이든지.......그가 누군가를 적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을 알고 싶습니다. 정말로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적 말이에요." 로저 허드슨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반스 양,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었다면, 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이 그 일을 알았을 거요. 테일러 윈스롭은 매우 공적인 생활을 한 사람이오. 이번에는 내가 묻고 싶소. 도대체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뭐요? 테일러 윈스롭은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이 아니오." 다나는 어색하게 설명을 했다. "저는 어쩌면 테일러 윈스롭이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도 살해될 정도의 동기가 될 만한 어떤 일을 누군가에게 한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드슨 부부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다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다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제 말이 터무니없는 억지처럼 들리는 것은 알지만, 한 가족이 일년 안에 모두 사고로 죽었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요?" 로저 허드슨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에반스 양, 나 정도 나이가 되면 이 세상에 일어나지 못할 일이 없다는 걸 깨닫게 마련이오. 그러나 이건....... 당신이 이렇게 말하는 근거가 뭐요?" "확실한 증거를 말씀하시는 거하면, 제가 가진 증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실 이런 질문을 받는 게 나로서는 전혀 뜻밖의 일은 아니라오. 이미 오래 전부터......." 허드슨은 주저하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 곧 딱딱하게 말했다. "아니, 별 말은 아니었소. 신경쓰지 마시오." 두 명의 여자는 의아한 눈빛으로 로저 허드슨을 쳐다보았다. 파멜라가 부드럽게 말했다. "말을 꺼내놓고 하지 않는다면, 그건 에반스 양에게 예의가 아니에요. 하려던 말이 뭐였죠, 여보?" 로저 허드슨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오." 그는 다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모스코바에 있었을 때, 윈스롭이 러시아인들과 어떤 은밀한 거래에 관련되어 있다는 소문을 들었소. 그러나 나는 소문 따위는 상관하지 않소. 그리고 당신은 그럴 것이라고 믿소, 에반스 양. 누가 어느 자리에 있던 나쁜 소문은 돌게 마련이오." 그의 말투는 거의 비난처럼 들렸다. 다나가 미처 그의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거실 옆의 서재에서 무언가 깨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파멜라 허드슨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난 쪽으로 급히 걸어갔다. 로저와 다나도 부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서재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명나라 왕조 대의 파란색 도자기가 바닥에 떨어져서 산산조각이 나 있었고, 케말이 그 옆에 멍하니 서 있었다. "오, 하느님." 순간 다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케말, 어떻게......." "사고였어요." 케말은 고개를 숙이며 변명했다. 다나는 허드슨에게 몸을 돌렸다. 다나의 얼굴은 당황해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정말이지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당연히 배상을 해드리겠습니다. 저는......."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집 개들은 더 심한 짓도 하는걸요." 파멜라 허드슨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로저 허드슨의 얼굴은 냉정하고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는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그의 아내가 눈짓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다나는 바닥에 흩어진 도자기 조각들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아마도 내 십 년치 봉급만큼 비쌀 거야." 다나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만 거실로 돌아가죠. 여기는 세자르에게 치우라고 하겠어요. 자, 걱정하지 말아요." 파멜라 허드슨이 제안했다. 다나는 케말을 데리고서 허드슨 부부를 따라갔다. "내 옆에 얌전히 있어." 다나는 화가 나서 케말에게 명령했다. 그들은 다시 거실 의자에 앉았다. 로저 허드슨이 케말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쩌다가 팔을 잃었지, 얘야?" 다나는 노골적인 질문에 깜짝 놀랐지만, 케말은 주저하지 않고 서슴없이 대답했다. "폭격으로요." "알겠다. 네 부모님은 어떻게 되었니, 케말?" "두 분은 공중 폭격으로 누이들과 함께 돌아가셨어요." 로저 허드슨은 투덜거렸다. "망할 놈의 전쟁." 바로 그때 세자르가 안으로 들어왔다. "점심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점심 식사는 아주 맛있고 훌륭했다. 이 집의 안주인인 파멜라는 참으로 따뜻하고 매력적인 여자였다. 반면 로저 허드슨은 무뚝뚝하고 좀처럼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나요?" 파멜라 허드슨이 다나에게 물었다. "'범죄 추적'이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작할까 검토하고 있어요. 범죄를 저지르고 도주한 용의자를 공개 수배하고 죄 없이 감옥에 갇힌 사람을 도우려는 프로그램이죠." 로저 허드슨이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실랄한 어조로 말했다. "워싱턴이야말로 그런 프로그램을 시작하기에 적합한 곳이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범죄를 저리르고도 놓은 자리에 앉아서 고결한 온갖 종류의 범죄를 저지르고도 높은 자리에 앉아서 고결한 척하는 엉터리 사기뿐들이 가득하니까 말이오." "로저는 정부의 조사위원회 휘원직을 몇 개 맡고 있어요." 파멜라 허드슨이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로저 허드슨이 툴툴거렸다. "옳고 그름의 차이는 검은 옷에 묻은 얼굴처럼 알아보기가 어렵소. 가정에서부터 아이들에게 옳고 그른 것을 가르쳐야만 해. 요즘 학교에서는 확실하게 그것을 가르치지 않소." 파멜라 허드슨이 다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다나, 로저와 내가 토요일 밤에 작은 파티를 열 거랍니다. 우리가 초대하면 응해주겠어요?" "남자 친구가 있죠?" "네. 제프 코너스예요." 로저 허드슨이 말했다. "당신 방송국의 스포츠 뉴스 아나운서 말이오?" "네." "그 사람 인상이 나쁘지 않더군. 몇 번 본 적이 있소. 한번 만나보고 싶소." 다나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분명히 제프도 오고 싶어할 거예요." 다나와 케말이 허드슨 저택을 떠나려고 할 때, 로저 허드슨은 다나를 옆으로 불렀다. "솔직히, 에반스 양, 나는 윈스롭 가족에 대한 당신의 음모설이 순전히 헛된 상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매트 베이커의 부탁도 있으니, 조사를 해보고 무언가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찾을 수 있는지 알아보겠소." "고맙습니다, 허드슨 씨." 솔직히, 에반스 양, 나는 윈스롭 가족에 대한 당신의 음모설이 순전히 헛된 상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매트 베이커의 부탁도 있으니, 조사를 해보고 무언가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찾을 수 있는지 알아보겠소. 테이프가 끝났다. 9 베일 속의 FRA 그들은 '범죄 추적' 프로그램의 소재를 결정하기 위해 오전 회의를 진행 중이었다. 다나는 여섯 명에 이르는 취재원들과 함께 회의실에 있었다. 이때 올리비아가 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었다. "베이커 씨가 당신을 찾고 있어요." "일 분 안에 가겠다고 전해줘요." "다나, 어서 오세요. 보스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고마워요, 애브. 오늘따라 얼굴이 좋아보이네요." 애브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속삭였다. "마침내 숙면을 취했어요. 마지막으로 잠을 푹 잔 것이......." "다나? 왔으면 당장 이리 들어와요." 매트가 안에서 고함을 질렀다. "다음에 얘기해요." 애브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다나는 매트이 사무실로 들어갔다. "로저 허드슨과 만난 것은 어떻게 되었소?" "내 말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내 생각ㅇ르 엉뚱한 상상이라고 생각하던걸요." "그 사람은 미스터 친절이 아니라고 미리 말하지 않았소." "과연 쉽게 친해질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그의 아내는 사랑스럽더군요. 국장님도 워싱턴 사회의 부패상에 대해서 그 부인이 하는 말을 들어봤어야 하는 건데요. 한번 기회를 가져보세요." "알고 있소. 허드슨 부인은 훌륭한 숙녀지." 다나는 사무국 건물 안에 엘리어트 크롬웰의 응접실로 뛰어 들어갔다. "어서 오시오." 엘리어트 크롬웰이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다나는 의자에 앉았다. "케말은 어떻소?" 다나는 주저하다가 말했다. "요즘, 유감스러운 문제가 생겼어요." "그래요? 무슨 문제가?" "케말이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어요." "이런! 퇴학을 당했단 말이오? 그 이유가 뭐요?" "싸움을 해서 어떤 남자 아이를 병원으로 실려보냈죠." 엘리어트 크롬웰은 갑자기 껄걸 웃었다. "미안, 미안하오. 하지만 케말이 한 손으로 멀쩡한 남자 아이를 때려눕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서 나도 모르게.......하하하, 하지만 정말 대단한 녀석이오. 어쨌든 유감스런 일이군." 다나는 케말을 옹호했다. "전 분명히 케말의 잘못이 아니라고 믿어요. 케말은 팔이 하나라는 이유로 놀림을 많이 받았어요. 게다가 인종적인 차별까지......" 엘리어트 크롬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아이에겐 아주 견디기 힘든 일일 테지." "그래요. 전 그 애에게 인공 팔을 달아줄까도 했어요. 하지만 그것도 문제가 있더군요." "케말이 몇 학년이오?" "칠 학년이에요." 엘리어트 크롬웰이 잠깐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혹시 링컨 사립학교에 대해서 들어봤소?" "오, 그럼요. 하지만 그곳은 사립학교들 중에서도 가장 입학하기가 까다롭기로 유명하죠. 케말 같은 아니는 받아주지 않을 거예요." 다나는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사실 케말의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도 걱정스럽구요." "그 학교와 관계 있는 몇몇 사람을 알고 있소. 내가 부탁을 해 보면 어떻겠소?" "뜻밖이라서....... 정말 고맙습니다." "나로서도 기쁜 일이오." 그날 늦게 엘리어트 크롬웰이 다나를 불렀다. "당신에게 전해줄 좋은 소식이 있소. 링컨 사립학교의 교장 선생에게 이야기했더니 기초적인 시험만 치르고 케말이 입학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소. 내일 아침까지 그 아이를 데려갈 수 있겠소?" "물론이죠. 전......." 다나는 잠깐 목이 메었다. "오, 믿을 수가 없어요! 너무나 기뻐요. 정말이지 감사드려요. 정말 고마워요. 엘리어트 사장님." "나야말로 당신에게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시오, 다나. 당신이 이 나라로 케말을 데려온 것은 훌륭한 일이었소. 당신은 정말 특별한 사람이오." "전....... 고마워요. 고맙습니다." 크롬웰의 사무실을 나오면서 다나는 생각했다. '세상엔 형편없는 인간도 많지만, 이렇게 친절한 사람도 많아.' 링컨 사립학교는 거대한 에드워드 시대풍의 건물과 작은 세 개의 부속 건물, 넓고 잘 꾸며진 운동장, 고르게 잔디가 깔린 경기장을 갖추고 있는 훌륭한 학교였다. 이곳에는 워싱턴에 살고 있는 유명 정치인들과 사업가들의 자녀들이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반드시 부모들의 돈과 사회적 지위만을 기준으로 입학생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링컨 사립학교는 다양한 재능과 경험을 가진 학생들을 폭넓게 받아들이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배타적이고 부유한 백인 중산층 자제들이 다니는 테오도르 루즈벨트 학교보다 훨씬 진보적이고 민주적이었다. 적어도 미국의 지도자가 될 사람이라면 인종적 차별이나 사회적 편견ㅇ르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학교의 철칙이었다. 교문 앞에 서서 다나는 케말을 타일렀다. "케말, 여긴 워싱턴에서 제일 좋은 학교야. 너는 이 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어. 하지만 배우려는 긍정적인 자세를 가져야만 해.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당근이죠." "그리고 절대로 싸움을 해선 안 돼." 케말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나와 케말은 로아나 트롯 교장을 만나러 교장실로 찾아갔다. 로아나 트롯 교장은 상냥하고 호감이 가는 여자였다. "환영합니다." 그렇게 말문을 연 로아나 트롯 교장은 케말을 돌아보았다. "너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 젊은 총각. 우린 모두 네가 이곳에서 잘 지내기를 바란단다." 다나는 케말이 무언가 응답하기를 기다렸지만, 케말이 묵묵히 있자 대신 인사를 했다. "케말은 무척 이곳에 오고 싶어했답니다." "잘됐구나. 넌 우리 학교에서 아주 좋은 친구들을 사귀게 될 거야." 이번에도 케말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때 나이 든 여자 선생님 한 분이 교장실로 들어왔다. 트롯 교장이 말했다. "이분은 베키란다. 베키, 여긴 케말이에요. 이 아이에게 학교 구경을 시켜주겠어요?" 선생님들과 인사하도록 말이에요." "그러지요, 이쪽으로 오너라, 케말." 케말은 간청하듯이 다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체념한 얼굴로 베키를 따라서 문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에 다나는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케말에 대해 미리 말해두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케말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어요. 케말은......." 트롯 교장은 부드럽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에반스 양. 엘리어트 크롬웰씨가 케말의 성장 배경과 지금 상태를 말해주었지요. 저는 그 아이가 보통 아이들이 으레 겪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든 경험을 했다는 걸 이해합니다. 우린 그 아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다나는 진심으로 고마웠다. 트롯 교장은 미소를 띠었다. "테오도르 루즈벨트 중학교로부터 그 아이의 성적표 사본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성적을 향상시킬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겠죠." 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케말은 매우 영리한 아이예요."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그 아이의 수학 성적은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요. 다른 과목에서도 나아질 수 있도록 노력해봅시다." 다나는 친절한 말에 용기를 얻어서 부탁했다. "팔이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그 아이게겐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에요. 저는 그게 문제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트롯 교장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래야죠." 케말이 학교 구경을 마치고, 두 사람이 다시 자동차에 올라탔을 때, 다나가 말했다. "너는 이 학교를 좋아하게 될 거야." 케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아름다운 학교야, 그렇지 않니?" 케말은 내뱉듯이 대꾸했다. "무시." 다나는 자동차를 멈추었다. 그리고 힐난하듯이 케말에게 물었다. "너는 도대체 왜 그러니? 이번에는 또 뭐가 불만인 거지? 학교가 너무 좋아서? 선생님들이 너무 친절해서?" 케말은 목이 메어서 간신히 말했다. "그 학교엔 테니스장과 축구장이 있는데....... 나는 할 수가 없잖아요......" 케말의 눈에 눈물이 가득히 고였다. 다나는 케말을 감싸안았다. "미안하다. 얘야."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집했다. '이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어.' 허드슨 부부는 조촐한 모임이라고 말했지만, 토요일 밤에 허드슨 저택에서 열린 파티는 모두들 정장을 차려입고 참석하는 성대한 만찬이었다. 아름다운 방마다 국방 장관을 포함해서 여러 명의 의원들, 연방 준비위원회의 의장, 그리고 독일 대사 같은 미국의 수도를 움직이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오늘 만찬을 위해 다나는 어깨에 얇은 끈이 달린 검은색 드레스를 차려입었다. 다나와 제프가 도착했을 때, 로저와 파멜라는 입구에 서서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다나는 두 사람에게 제프를 소개했다. "나는 당신의 스포츠 칼럼과 뉴스를 즐겨보고 있소." 로저 허드슨이 말했다. "고맙습니다." 파멜라가 우아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세요." 손님들은 대부분 유명한 인사들이었고 두 사람은 환대를 받았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다나와 제프의 방송을 즐겨보고 있으며 좋아한다고 말했다. 잠시 두 사람만 남게 되었을 때, 다나는 제프에게 속삭였다. "맙소사, 여기 참석한 사람들 명단이 바로 이 나라를 움직이는 거물급 인사들 명단이군요." 제프는 다나의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당신이 여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명 인사야." "말도 안 돼요. 난 그저......." 바로 그때, 다나는 빅터 부스터 장군과 잭 스톤 소령이 그들 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안녕하세요, 장군님." 다나가 말했다. 부스터 장군은 다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퉁명스럽게 물었다. "여기서 또 만났군! 또 무슨 빌어먹을 수작을 하고 있소? 도대체 이 여자는 안 끼는 곳이 없구만." 다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건 사교적인 모임이오. 나는 보도기관이 초대받은 줄은 미처 몰랐소." 장군이 딱딱거리며 말했다. 다나의 옆에 서 있던 제프가 화를 내며 부스터 장군을 노려보았다. "그만 하십시오! 우리는 정식 초대를 받고......." 부스터 장군은 제프의 말을 무시했다. 그리고 다나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또다시 말썽을 일으킬 생각이라면 내가 당시에게 약속한 말을 잊지 마시오." 그리고는 성큼성큼 다른 방으로 걸어갔다. 제프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장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기랄, 저 사람이 도대체 무슨 일로 저러는 거야?" 잭 스톤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저, 정말 미안합니다. 장군님께선 가끔 이러시죠. 언제나 융통성이라곤 없으시답니다." "알 만하군요." 제프가 차갑게 말했다. 그날의 만찬은 환상적이었다. 긴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 앞에는 아름답게 손으로 쓴 메뉴가 놓여 있었다. 철갑 상어알과 가벼운 보드카 크림 치드를 곁들인 러시아식 전체 요리 하얀 송이버섯과 녹색 아스파라거스로 만든 묽은 수프 보스턴 시금치, 말린 후추 열매를 곁들인 비스마르크식 오리 간 요리와 비네갈 드레싱 하얀 크림과 샴페인 소스로 맛을 낸 메인 주에서 나는 구운 바닷가재 요리 구운 감자들 곁들인 소의 연한 허릿살 요리와 버터에 살짝 익힌 야채 요리 오렌지 리큐어와 초콜릿이 들어간 따뜻한 초콜릿 수플레와 초콜릿을 입힌 호두 캔디 그야말로 호사스러운 연희였다. 다나는 자신의 자리가 로저 허드슨의 바로 옆자리인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파멜라가 나를 위해서 일부러 배려를 해준 모양이구나." 다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파멜라에게 케말이 링컨 사립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들었소." 다나는 미소를 지었다. "네. 엘리어트 크롬웰 사장님이 주선을 해주었죠. 그분은 정말 좋으신 분이에요." 로저 허드슨은 잠깐 망설이다가 다시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닐지 모르지만, 테일러 윈스롭이 러시아 주재 대사로 가기 직전에 공적인 생활에서 완전히 은퇴하겠다는 말을 가까운 친구들에게 했다고 하오." 다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 다음에 러시아 대사직을 수락했단 말인가요?" "그렇소." '이상하군. 정말 이상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제프가 다나에게 물었다. "당신이 어떻게 했길래, 부스터 장군이 당신에게 그런 무례한 태도를 보이는 거지?" "장군은 내가 윈스롭 가의 죽음을 조사하는 게 못마땅한 거예요." "어째서?" "장군은 이유를 말하지 않았어요. 그저 으르렁대기만 하죠." 제프는 천천히 말했다. "장군이 정말로 당신을 물어뜯는다면, 그저 으르렁대는 것보다 휠씬 심각한 일이 벌어질 거야. 그를 적으로 삼는 건 현명하지 않아." 다나는 의아스러운 얼굴로 제프를 올려다보았다. "왜요?" "그는 연방 조사국, FRA의 국장이야." "알아요. 그들은 개발도상국들이 현대적 생산 기술을 갖추도록 돕고 그리고......." 제프는 냉담하게 다나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실제로 산타클로스 노릇을 하지." 다나는 어리둥절해서 제프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건 본질을 은폐하기 위한 가면일 뿐이야. FRA의 진짜 기능은 외국 정보기관을 염탐하고 그들의 대화를 도청하는 거야. 참 웃기는 일이지 'Frater'라는 말은 라틴어로 형제라는 뜻인데, 그 기관은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모든 기관의 맏형인 셈이니까 말이야. 그리고 그 맏형은 철저하게 모든 사람을 감시하고 있는 게 분명해. 심지어 NSA보다 더 베일에 가려져 있어." 다나는 무언가를 떠올리며 씁쓸하게 말했다. "테일러 윈스롭은 한때 FRA의 국장이었어요." "나는 당신에게 될 수 있는 한 부스터 장군과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충고하겠어." "노력할게요." 제프는 다나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오늘밤 케말을 봐줄 사람을 구하느라 애를 먹었겠군. 그러니 당신이 집에 빨리 가야 한다면 어서......." 다나는 다정하게 제프 쪽으로 몸을 기댔다. "그럴 순 없어요. 그 사람은 내가 갈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하지만 난 기다릴 수가 없는걸요. 제프, 어서 당신 집으로 가요." 제프는 싱긋 웃었다. "나는 당신이 결코 그 말을 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제프는 메디슨 가에 있는 4층짜리 건물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제프는 다나를 침실로 이끌었다. "우리가 더 큰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 좋을 텐데. 케말도 자기 방이 있어야만 해. 우린......." "그런 이야기는 그만 하는 게 어때요?" 다나가 약간 쉰 목소리로 은밀하게 속삭였다. 제프는 힘껏 다나를 끌어안았다. "좋은 생각이야." 제프는 뒤로 팔을 둘러서 두 손을 다나의 엉덩이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다나는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제프는 서서히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어깨 끈이 벗겨지면서 스르르 드레스가 밑으로 흘러내렸다. 소녀처럼 자그맣고 봉긋한 가슴이 드러났다. "다나,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몸매를 갖고 있다는 거 알아?" "그럼요, 모두들 그렇게 말하던걸요.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에요. 내가 옷을 벗겨줄까요?" "그렇게 해줘." 다나는 제프에게 바싹 몸을 기댄 채, 그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옷깃이 벌어지면서 제프의 단단한 가슴이 드러나자, 다나는 신음 소리를 내며 그의 가슴을 부드럽게 입술로 핥았다. 그리고 제프의 허리띠를 찾아서 손을 아래로 더듬어 내려갔다. 제프는 한 손으로 다나의 가슴을 움켜쥐고 그녀의 귓불에 입을 맞추었다. "당신이 바람둥이 처녀라는 거 알아?" 다나는 미소지으며 제프를 살짝 흘겨보았다. "사실이에요." 제프가 옷을 다 벗자, 다나는 먼저 침대에 들어가서 그를 기다렸다. 침대 앞에 우뚝 선 제프의 몸매는 완벽한 그리스의 조각 같았다. 다나는 어서 빨리 따뜻한 그의 팔에 안기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그는 너무나 육감적이고도 섬세한 연인이었다. "당신을 너무나 사랑해요." 다나가 가까이 다가오는 제프를 향해 속삭였다. "사랑해, 내 사랑." 제프가 다나의 품에 안기려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당신 거야? 아니면 내 거야?"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다.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제프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내 거로군. 내버려두자구." "한번 받아봐요. 중요한 전화일지도 모르잖아요." "그래, 알았다구." 제프는 투덜거리며 마지못해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전화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순간 그의 목소리가 변했다. "아니야, 괜찮아.......말해봐.......물론이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냥 스트레스일 거야." 통화는 5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좋아.......그러니까 마음을 편히 가져....... 그래, 좋아.......잘 자, 레이첼." 제프는 전화를 끊었다. '레이첼이 전화를 걸어오기에는 너무 늦은 시각 아냐? 지금 한밤중이잖아.' "레이첼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어요, 제프?" "아무것도 아니야. 요즘 레이첼이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과로했나봐. 단지 휴식이 좀 필요한 모양이야. 괜찮아지겠지." 제프는 다나를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가 어디까지 갔더라?" 다나는 빙그레 웃으며 제프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두 사람의 벌거벗은 몸이 자연스럽게 포개지면서 마법이 시작되었다. 다나는 윈스롭과 조안 시니시와 장군과 가정부와 케말과 학교 같은 모든 문제를 잊어버렸다. 환희에 가득 찬 열정적인 세계가 그녀 앞에 펼쳐졌다. 제프는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게 다나의 몸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두 손과 입술로는 다나의 몸 구석구석을 더듬었다. 순간순간마다 다나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절정의 순간이 다가오자, 다나는 두 다리로 제프의 허리를 꽉 조이면서 큰 소리로 열에 들뜬 비명을 질렀다. 제프는 다나의 신음 소리에 호을하듯이 더욱 빠르고 힘차게 몸을 움직였다. 얼마 후, 다나는 아쉬운 듯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드디어 신데렐라가 호박을 타고 돌아가야만 하는 시간이 왔군요. 그런데 난 마법이 풀리는 걸 원치 않으니 어쩌죠?" "당신같이 예쁜 공주님께 호박이라니! 즉시 백마가 끄는 마차를 대령하지." 이렇게 말하며 제프는 장난스럽게 다나를 번쩍 안아서 자신의 배위에 올려놓았다. 다나는 그를 내려다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벌써 대령한 것 같은데요. 한 번 더 어때요?" 다나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인력 알선 업체에서 나온 일일 가정부는 짜증을 부리면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이 몇 시인줄 아세요? 새벽 1시 반이에요. 최소한 12시에는 돌아오실 줄 알았어요." 그 여자는 다나를 비난하며 시계를 가리켜보였다. "미안해요. 빠져나올 수가 없었어요." 다나는 가정부에게 정해진 수당 외에 얼마의 돈을 더 주었다. "택시를 타도록 해요. 지금 이 시간에 걸어가면 위험해요. 내일 밤에 봐요." 가정부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에반스 양, 당신이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당신이 집에 올 때까지 케말은 저녁 내내 나를 괴롭혔어요. 그 아이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예요." "고마워요, 잘 가요." 다나는 케말의 방으로 들어갔다. 케말은 그때까지도 자지 않고,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안녕, 다나." "벌써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이 아닌가? 꼬마 친구." "다나가 집에 오는 걸 기다렸어요. 재미있었어요?" "그래, 재미있었어. 하지만 네가 보고 싶었단다." 케말은 컴퓨터를 껐다. "앞으로 매일 밤 외출한 건가요?" 다나는 케말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를 잠깐 생각한 다음, 부드럽게 대답했다. "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노력할게, 케말." 10 끊임없는 의혹 월요일 아침에 다나의 사무실로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다나 에반스 양입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조엘 허슈버그 박사입니다. 어린이 재활재단에 있죠." 다나는 어리둥절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요?" "엘리어트 크롬웰 씨께서 당신 아들이 인공 팔을 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다나는 한순간 기억을 더듬었다. "네,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아요." "크롬웰 씨로부터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재단은 전쟁으로 고통당한 세계 여러 나라의 어린이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설립되었죠. 크롬웰 씨의 얘기에 따르면, 당신의 아드님은 분명히 우리 재단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됩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아이를 데리고 한번 이곳으로 나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전....... 오, 그럼요, 물론이죠." 그들은 오후에 만날 약속을 했다. 케말이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다나는 흥분해서 떠들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너에게 새 팔을 만들어주실 박사님을 만나러 갈거야. 좋지 않니?" 케말은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모르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게 진짜 팔은 아니잖아요. 가짜 팔을 단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요?" "하지만 거의 진짜 팔과 비슷할 거야. 괜찮지, 친구?" "좋아요!" 사십 대 후반의 조엘 허슈버그 박사는 조용하고 성실해 보이는 잘 생긴 남자였다. 그와 인사를 나눈 후, 다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박사님,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비용 부담이 얼마나 되는지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전에도 케말이 아직 성장 중이기 때문에 해마다 새로운 팔로 바꿔주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 허슈버그 박사는 다나의 이야기를 중단시켰다. "에반스 양, 전화로 미리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 어린이 재단은 특별히 전쟁의 상처를 입은 나라의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앞으로 발생하는 모든 비용은 전적으로 우리가 부담할 것입니다." 다나는 안도감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정말 잘됐어요."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마음속으로 기도를 드렸다. '신이여, 엘리어트 크롬웰을 축복하소서.' 허슈버그 박사는 다시 케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 어디 좀 볼까, 얘야?" 30분 뒤, 허슈버그 박사는 다나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이 아이에게 딱 맞는 새로운 팔을 맞춰줄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는 차트를 끌어내리며 말했다. "우리에게는 두 종류의 인공 팔이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 기존의 의수와 최신 기술을 결합시킨 것으로, 비교적 자유롭게 작동이 가능합니다. 여기 차트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인공 팔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고 손이 달려 있습니다." 그는 잠깐 말을 끊고 케말을 바라보면서 미소지었다. "진짜 팔처럼 보일 만큼 훌륭하단다." 케말이 물었다. "그거 움직이나요?" 허슈버그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케말, 네 손이 마치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든 적은 없니? 그러니까 지금은 없는 이쪽 손 말이야." "그런 적이 있어요." 케말이 순순히 대답을 했다. "그래, 그거야. 네가 손이 있다고 착각할 때마다, 손의 움직임을 기억하고 있던 근육은 자동적으로 근육 신경에 신호를 보낸단다. 바꾸어 말하면, 손이 움직인다고 생각할 때마다 손을 폈다 오므렸다 할 수 있게 된다는 거야." 케말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정말 그렇게 될 수 있단 말인가요? 그렇다면 어떻게....... 어떻게......제가 그 팔을 떼었다 붙였다 할 수가 있죠?" "그건 아주 간단하단다, 케말. 그냥 인공 팔을 잡아당기기만 하면 돼. 빨판처럼 네 어깨에 달라붙도록 되어 있거든. 팔 안쪽으로 가느다란 나일론 끈이 달려 있을 거야. 인공 팔을 착용한 채로 수영을 할 수는 없지만, 그 밖의 다른 일들은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어. 신발이나 마찬가지란다. 밤에는 벗고 아침에는 신는 거야." "무게는 얼마나 돼죠?" 다나가 물었다. "대략 280그램에서 450그램 사이입니다." 다나는 눈을 반짝이며 케말을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니, 운동? 한번 시도해볼 만하지?" 케말은 터질듯한 흥분을 감추기 위해서 애를 썼다. "진짜처럼 보여요?" 허슈버그 박사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진짜처럼 보일 거야." "짱이에요!" "지금까지 너는 왼손만 사용했지.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왼손잡이라는 걸 잊어버려야만 해. 물론 다소 시간이 걸릴 거야. 케말. 우린 당장이라도 너에게 꼭 맞는 팔을 줄 수가 있어. 하지만 네가 그 팔을 너의 신체 일부로 받아들이는 방법과 인공 근육에 신호를 보내는 방법을 배우는 동안은 정기적으로 담당 의사의 진찰을 받아야만 해." 케말은 깊이 숨을 내쉬었다. "멋져요." 다나는 케말을 꼭 끌어안았다. "잘될 거야, 케말. 잘될 거야." 다나는 솟아오르는 눈물을 간신히 참았다. 허슈버그 박사는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한 번 따뜻하게 미소지었다. "자, 일하러 갑시다."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다나는 엘리어트 크롬웰을 찾아갔다. "엘리어트 사장님, 방금 허슈버그 박사와 만나고 오는 길이에요." "잘됐군. 케말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소." "그렇게 될 것 같아요. 저는 이번 일을 어떻게, 정말이지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나, 전혀 고마워할 것 없소.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쁜 일이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만 나에게 알려줘요." "그러겠어요." "진심으로 고마워요." "꽃다발이에요!" 올리비아가 커다란 꽃다발을 안고 다나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어머, 너무 아름다워!" 다나는 그 화려한 꽃다발을 보며 감탄했다. "그런데 누가 보냈을까?" 다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살펴보았다. 꽃다발에는 카드가 담긴 봉투가 매달려 있었다. 다나는 카드를 꺼내서 읽었다. 친애하는 에반스 양에게, 우리 친구가 짖는 것은 물어뜯는 것보다 더 나쁘답니다. 꽃이 마음에 들기를. 잭 스톤. 다나는 잠깐 동안 카드를 꼼꼼하게 들여다보았다. '흥미로운걸.' 다나는 생각했다. '제프는 장군이 물어뜯으면, 짖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쁘다고 말했어. 어느쪽이 옳은 걸까?' 다나는 잭 스톤이 자신의 직업을 싫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상사 또한 좋아하지 않았다. '잊지 않도록 하죠.' 다나는 FRA에 있는 잭 스톤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톤 씨? 고맙다는 말을 전하려고요, 아름다운 꽃을......." "사무실에 있습니까?" "네, 저는........" "전화 드리겠습니다." 뚜뚜거리며 전화를 끊긴 신호음이 들려왔다. 3분 후에 잭 스톤이 전화를 걸어왔다. "에반스 양, 방금 전에는 죄송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따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우리의 친구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편이 우리 두 사람을 위해서 더 좋으니까요. 저는 어떻게든 그의 태도를 고쳐보려고 노력했습니다만, 너무나 완고하더군요. 절대로 생각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라서 말이죠. 혹시라도 저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당신에게 제 개인 휴대폰 번호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언제든지 저와 연락이 닿을 것입니다." "고마워요." 다나는 그가 불러주는 번호를 받아적었다. "에반스 양......." "네, 말하세요." "잊지 마십시오, 조심해요." 그날 아침에 잭 스톤이 사무실에 출근했을 때, 부스터 장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잭, 에반스라는 그 계집은 어쩐지 앞으로 큰 화근 덩어리가 될 것 같네. 그 여자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도록 해. 그리고 나에게 계속 보고하도록." 부스터 장군은 잭 스톤에게 다나를 철저하게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다나의 태도가 몹시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명령대로 시행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나에게 꽃다발을 보낸 것이었다. 다나와 제프는 텔레비전 방송국의 중역 전용식당에 앉아서 케말의 인공 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나가 잔뜩 들뜬 목소리로 열심히 말했다. "정말 흥분이 돼요. 이번 일로 모든 상황이 완전히 바뀔 거예요. 그 동안 케말은 자신이 남들보다 열등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호전적으로 행동한 게 틀림없어요. 하지만 이젠 모든 게 변할 거예요." 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아이는 분명히 무척 기쁠 거야. 난 알 수 있어." "그리고 놀라운 것은 어린이 재단이 그에 따르는 모든 비용을 책임진다는 거예요. 할 수만 있다면......." 그때 제프의 휴대폰이 울렸다. "잠깐만, 미안해, 다나." 그는 통화 단추를 눌렀다. "여보세요?....... 어......." 그는 다나를 힐낏 쳐다보았다. "아니야.......괜찮아....... 말해봐......." 다나는 통화 내용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그래....... 알아....... 좋아....... 아마 심각하진 않을 거야. 하지만 어쩌면 의사를 만나야 할지도 모르지. 지금 어디에 있지? 브라질? 거기에도 좋은 의사가 있을 거야. 물론이야....... 이해해...... 아니야......." 통화는 끝도 없이 계속될 것 같았다. 마침내 제프가 말했다. "몸조심해. 안녕." 그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다나는 일부러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레이첼이에요?" "응. 조금 신체적인 문제가 생겼나봐. 리오에서 촬영을 취소했다는 군. 전에는 그런 일이 한번도 없었어." "몸이 좀 아프다고 해서 왜 레이첼이 당신에게 전화하는 거예요, 제프? 당신이 그녀와 무슨 상관이 있길래." "달리 전화를 걸 만한 사람이 없거든. 레이첼은 외톨이야." "잘 있어요, 제프." 레이첼은 전화를 끊고 싶지 않았지만 마지못해 인사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창 밖을 묵묵히 쳐다보았다. 멀리 수갈로프의 전망이 보이고 아래로 그림처럼 아름다운 이파네마 해변이 펼쳐져 있었다. 레이첼은 침실로 들어와서 누웠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이 피곤했다. 그날의 기억이 그녀의 머릿속을 필름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아침부터 그녀는 눈부신 해변에서 매혹적인 자세를 취하며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의 상업 광고를 촬영하고 있었다.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지만, 모델인 레이첼에게는 늘상 있는 일이었다. 정오 무렵이 되었을 때, 감독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마지막 자세는 좋았어요. 하지만 한 번 더 합시다." 레이첼은 당연히 그러자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저도 모르게 그녀의 입에서는 다른 대답이 튀어나왔다. "싫어요. 미안해요. 난 할 수 없어요." 감독이 깜짝 놀란 눈으로 레이첼을 쳐다보았다. 모델이 감독의 요구에 거절한다는 것은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뭐라구요?" "너무 피곤해요. 좀 쉬어야겠어요." 그녀는 재빨리 돌아서서 호텔로 달아나듯이 걸어갔다. 그리고 혼자 있을 수 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온몸이 떨리고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내 몸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거지?' 이마에서는 열이 나고 식은땀이 흘렀다. 레이첼은 전화로나마 제프의 따뜻한 목소리를 듣고 나니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그에게 축복이 있기를. 그는 언제나 나를 위해 같은 자리에 있어 주었어. 내가 유일하게 믿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야.' 침대에 누우며, 레이첼은 생각했다. '우린 좋은 시간을 함께 즐겼고, 함께 나누었어.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를 버리고 떠날 수 있었을까? 모든 게 내 잘못이야.' 레이첼은 후회스런 마음으로 그들의 결혼 생활이 어떻게 해서 끝이 났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그들의 파국은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오면서 시작되었다. "레이첼스티븐스 씨입니까?" "그렇습니다." "로데릭 마샬 씨가 전화를 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레이첼은 온몸이 떨려오면서 얼굴 근육이 굳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로데릭 마샬이라고? 그 사람은 헐리우드에서 가장 중요한 감독들 중의 한 명이야.' 감독이 한창 잘 나가는 일류 모델에게 전화를 한다면 그것은 뻔한 일이었다. 헐리우드가 그녀를 부르는 것이었다. 잠시 후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스티븐스 양이오?" "그렇습니다." "로데릭 마샬이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소?" 레이첼은 이미 로데릭 마샬이 만든 영화를 여러 편 보았다. 그의 영화는 예술적이면서도 대중적인 재미를 갖추고 있어서 많은 관객들을 모으곤 했던 것이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마샬 씨." "나는 당신 사진을 계속 관심 있게 보아왔소. 우리 폭스 영화사에선 당신이 와 주었으면 하오. 헐리우드로 와서 스크린 테스트를 해볼 의향이 있소?" 레이첼은 잠깐 동안 주저하면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제가 연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아직 한 번도 연기를......." "걱정하지 마시오. 그 점은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얼마나 빨리 이곳으로 올 수 있겠소?" 레이첼은 빽빽하게 짜여진 자신의 촬영 스케줄을 떠올렸다. "3주요." "좋소. 당신 일정에 맞춰서 스튜디오를 조정해놓겠소." 레이첼은 전화를 끊는 순간, 제프와 상의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괜찮을 거야.' 그녀는 생각했다. '어쨌든 지금까지 우린 거의 같이 있을 시간이 없었으니까.' "헐리우드라고?" 제프가 되물었다. "맞아요. 정말 근사할 거예요, 제프." 레이첼은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한동안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 열심히 해봐. 당신은 크게 성공할 거야." "제프, 나와 함께 갈 수 있어요? "여보, 우리 팀은 월요일에 클리블랜드에서 시합이 있고, 그런 다음에는 워싱턴으로, 다음엔 시카고로 가야 해. 아직 치러야 할 경기가 많이 남아 있어. 선발 투수 중 한 명이라도 자리를 비우면 텀에서 좋으하지 않을거야." "너무하군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려고 애를 썼다. "우리 두 사람, 결코 함께 생활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렇죠, 제프?" "사실 좀 그렇게기는 하지." 레이첼은 어떤 말을 더 하려고 했지만, 생각을 바꾸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야.' 로스엔젤러스 공항에서 레이첼은 영화사에서 나온 사람의 마중을 받고 리무진에 올라탔다. 레이첼은 청바지에 흰샌 면 티셔츠를 입고 빨간 손수간으로 긴 머리를 질근 묶고 있었다. 그리고 발에는 가죽으로 된 낡은 샌들을 신고 있었다. 화려한 패션쇼에서 시달린는 모델들은 대개 수수한 옷차림을 즐기곤 했다. "제 이름은 헨리 포드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며 낄낄거리며 웃었다. "어울리지 않죠. 사람들은 저를 그냥 행크라고 부르죠." 리무진은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이 달렸다. 헨리 포드는 레이첼에게 쉴새없이 떠들어댔다. "헐리우드에는 처음인가요, 스티븐스 양?" "아니요, 여러 번 이곳에 왔었어요. 마지막으로 온 것은 2년 전이었어요." "아, 여긴 변했지요. 예전보다 더 커지고 더 좋아졌어요. 한번 이곳의 마력에 빠지면,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게 돼죠." '한번 마력에 빠지면.' 레이첼은 그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영화사에서 당신이 묵을 방을 샤토 마르몽에 예약해두었어요. 거긴 정말 유명한 곳이지요." 레이첼은 감명을 받은 척했다. "어머, 정말인가요?" "아, 그럼요. 존 벨루시가 거기에서 죽었지요. 당신도 알다시피, 약물 과용으로요." "저런." "케이블도 그곳에 묵곤 했죠. 폴 뉴먼, 마릴린 먼로도요." 헨리 포드는 마치 가까운 친구라도 되는 듯이 유명한 배우들의 이름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레이첼은 그가 뭐라고 말하든 귀담아 듣지 않았다. 마치 영화 세트를 지어놓은 성처럼 보이는 샤토 마르몽은 선셋 스트립 거리의 북쪽에 있었다. 헨리 포드가 말했다. "2시에 차를 가지고 와서 영화사로 모시겠습니다. 당신이 그곳에서 로데릭 마샬 감독ㅇ르 만날 것입니다." "기다릴게요." 2시간 후에 레이첼은 로데릭 마샬의 사무실에 있었다. 사십 대인 그 남자는 키가 작고 땅딸막했다. 하지만 상당히 정력적이고 활기에 넘치는 것 같았다. 로데릭 마샬은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여기 온 것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요. 나는 당신을 대스타로 만들 예정이오. 내일 카메라 테스트를 합시다. 내 조수들 중 하나를 당신에게 붙여서 당신에게 가장 잘 어울릴 만한 의상실을 안내하도록 하겟소. 당신은 우리가 만들 대작 영화들 중의 하나인 '꿈의 종말'에 나오는 한 장면을 시험삼아 찍게 될 것이오. 내일 아침 7시에 화장과 머리 손질을 하도록 하지. 물론 그런 일은 당신에게 새로운 일이 전혀 아닐 것 같은데, 어떻소?" 레이첼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에요." "여긴 혼자 왔소, 레이첼?" "네." "오늘 밤에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이 어떻소?" 레이첼은 잠깐 생각한 후에 대답했다. "좋아요." "좋소. 그럼 8시에 내가 데리러가겠소." 레이첼은 로데릭 마르셀이 말하는 저녁 식사라는 것이 결국은 온도시를 휘젓고 돌아다니는것임을 알게 되었다. 솔직히 그는 남성적으로 그다지 매력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룻밤 즐길 만한 장소를 찾아내는 데에는 탁월한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로데릭 마르셀은 레이첼에게 말했다. "혹시 갈 만한 곳을 알고 있다면 그곳으로 가도 좋소. 로스엔젤레스에는 세상에서 가장 화끈한 클럽이 몇 개 있다오." 두 사람의 저녁 순례는 요즘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바와 레스토랑, 그리고 선셋 불르바르에 있는 호텔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호텔의 프론트 테스크를 지날 때, 레이첼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테스크 옆에 설치된 유리 진열장 뒤에 벌거벗은 사람이 서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온몸에 그림을 그린 진짜 모델이었다. "근사하지 않소?"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요." "레이첼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잡다한 소음들, 사람들로 붐비는 클럽들을 한바탕 돌고 나자, 레이첼은 완전히 기진맥진했다. 로데릭 마샬은 마지막 순례가 끝난 후, 레이첼을 호텔 앞에 내려주었다. "잘 자요. 내일이면 당신 인생이 완전히 바뀔 거요." 다음날 오전 7시, 레이첼은 어김없이 분장실에 앉아 있었다. 어젯밤의 피로는 까맣게 잊은 채, 방금 피어난 장미 봉오리처럼 싱싱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봅 반 듀셍이 감탄하듯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쉬운 일을 하고도 돈을 받을 수 있을까요?" 레이첼은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화장을 많이 할 필요가 없어요. 자연 그대로도 아름다우니까요. 더 이상 손댈 곳이 없군요." "고마워요." 레이첼이 화장을 끝내자, 이번에는 의상 담당자가 레이첼이 옷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들은 오후가 되기 전에 모든 준비를 마쳤다. 보조 감독이 그녀를 거대한 방음 스튜디오로 아내했다. 그곳에서는 로데릭 마샬과 직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감독은 레이첼을 잠깐 관찰하듯 바라보고 나서 말했다. "완벽하군, 레이첼. 이제부터 우리는 두 가지 테스트를 할 것이오. 우선 당신은 이 의자에 앉아 있어요. 나는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곳에서 몇 가지 질문을 하겠소. 카메라가 돌아가더라도 그냥 당신의 원래 모습 그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하도록 해요." "알았어요. 두 번째는 어떤 거죠?" "내가 지시하는 짧은 연기를 해보이는 거요." 레이첼은 의자에 앉았다. 카메라가 레이첼을 비추기 시작했다. 로데릭 마샬이 카메라 뒤에 섰다. "준비됐소?" "네." "좋아. 긴장을 풀어요. 당신은 잘할 테니까. 카메라. 액션. 좋은 아침이군요." "좋은 아침이에요." "레이첼, 당신은 모델이라고 하던데." 레이첼은 금발을 살짝 뒤로 젖히면서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건 결코 연기가 아니었다. "그래요." "어떻게 해서 모델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열다섯 살 때였어요. 모델 협회 사무국의 사장이 어머니와 함께 레스토랑에 있던 저를 보고는 다가왔죠. 그리고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고, 며칠 후에 저는 모델이 되었죠." 인터뷰는 15분 동안 순소롭게 진행이 되었다. 레이첼은 지성적이면서도 자신만만한 태도로 카메라 테스트에 임했다. "컷! 훌륭해!" 로데릭 마샬 연기 테스트를 위한 대본을 레이첼에게 건네주었다. "잠깐 쉬도록 합시다. 그동안 이 대본을 읽어봐요. 준비가 되면 나에게 말하시오. 그럼 촬영에 들어갈 테니까. 당신은 흥행 보증 수표요, 레이첼.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레이첼은 대본을 읽었다. 그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장면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대본을 읽었다. "준비됐어요." 레이첼은 상대역을 연기할 케빈 웹스터를 소개받았다. 그는 전형적인 헐리우드의 미남형 청년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헐리우드의 무명 배우에 불과했다. 이렇게 카메라 테스트의 상대역이나 해주면서 어떻게든 감독의 눈에 들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좋아, 들어갑시다. 카메라, 액션." 로데릭 마샬이 지시를 내렸다. 레이첼은 케빈 웹스터를 쳐다보았다. "아침에 변호사와 우리 이혼 문제를 상담했어요, 클리프.""나도 들었소. 하지만 여보,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나에게 먼저 말했어야 하는 것 아니오?" "당신에게 말했어요. 지난 일 년 동안 그 얘길 해왔다구요. 우리에게는 이제 결혼 생활이라는 게 없어요. 당신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뿐이에요, 제프." "컷." 로데릭이 외치면서 손을 흔들어보였다. "레이첼, 그의 이름은 제프가 아니라 클리프요." 레이첼은 당황했다. "정말 미안해요." "다시 갑시다. 두 번째." '이건 바로 제프와 나의 이야기야.' 레이첼은 점차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우리에게 더 이상 결혼 생활이라는 게 없어.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지? 항상 떨어져서 각자 바쁘게 생활하고 있으니 거의 만날 시간조차 없잖아. 우린 둘 다 매력적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많은데, 이젠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는 결혼이라는 계약에 묶여서 어떤 관계도 맺을 수가 없다니.' "레이첼!" "미안해요." 다시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카메라 테스트가 끝날 때쯤, 레이첼은 두 가지 결정을 내렸다. 그녀는 헐리우드의 배우들 속에 끼여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혼하고 싶었다....... 지친 몸으로 침대에 누운 레이첼은 지난날을 회상하며 몹시 괴로워했다. '내가 실수한 거야. 절대로 제프와 이혼하지 말았어야 했어.' 화요일 오후, 다나는 케말의 수업이 끝나기 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교문 앞에서 곧바로 케말을 태워서 담당 임상 의사에게로 데리고 갔다. 인공 팔은 진짜처럼 보였고 기능도 아주 훌륭했다. 하지만 케말이 그것에 익숙해지는 데에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커다란 어려움이 있었다. "마치 이물질이 붙어 있는 듯한 느낌일 겁니다." 임상 의사가 다나에게 설명했다. "우리가 할 일은 케말이 이것을 자신의 신체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아이는 다시 양손잡이가 되는 데 익숙해져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대개 두세 달 걸리죠. 미리 주의를 드리지만 그건 아주 힘든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린 잘할 수 있어요." 다나는 의사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에 케말은 인공팔을 부착하지 않고 거실로 나왔다. "어서 떠나요. 학교 갈 준비가 됐어요." 다나는 깜짝 놀라서 케말을 쳐다보았다. "네 팔은 어디 있니, 케말?" 케말은 자신의 왼쪽 손을 들어 보이면서 반항적으로 대꾸했다. "여기 있어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면서 그러니. 네 인공 팔은 어디에 있지?" "그건 쓰레기 장난감이에요. 난 더 이상 그걸 끼지 않을 거예요." "익숙해질 거야, 케말. 난 알 수 있어. 노력해봐야지. 내가 널 도울......." "아무도 나를 돕지 못해요. 나는 쓸모없는 병신이에요......." 그날 다나는 다시 마커스 에이브람스 형사를 찾아갔다. 다나가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바쁘게 보고서를 정리하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그는 얼굴을 들더니 곧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이 빌어먹을 직업에서 가장 진절머리를 내는 게 무엇인지 아시오?" 그는 서류더미를 가리켰다. "바로 이거요. 나도 전에는 재미있는 사격전이 벌어지는 거리로 나갈 수가 있었소. 신참 시절에 말이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종이 뭉치와 씨름을 해야 한다니, 이런, 내가 깜박했군. 당신은 기자요. 그렇지 않소? 내 말을 보도하지는 마시오." "너무 늦었어요." "그런데 오늘은 무얼 도와드릴까요, 에반스 양?" "시니시 사건에 대해서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요. 부검을 했나요?" "형식상." 그는 서류함을 열고 몇 장의 종이를 꺼냈다. "보고서에 뭔가 이상한 것이 있나요?" 그녀는 에이브람스 형사가 서류를 자세히 살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술은 안 마셨고....... 마약도 아니고 ....... 아무것도 없군." 형사는 고개를 들었다. "이건 우울증에 빠진 여자가 모든 걸 끝내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이는군. 안 그렇소?" "그래요." 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나의 다음 목적지는 파닉스 윌슨 형사의 사무실이었다. "안녕하세요, 윌슨 형사님." "아니, 이게 누구야? 유명하신 기자 양반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 무슨 일이시오?" "게리 윈스롭 살인 사건에 대한 무슨 새론운 소식이 있는지 알고 싶어서요." 윌슨 형사는 한숨을 쉬고 코 옆을 긁었다. "전혀 없소. 지금쯤이면 그 그림들 중 하나가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했었지. 우린 계속 그것만 기대했는데 말이오." '내가 당신이라면 처음부터 그런 기대는 하지 않았을 거예요.' 다나는 그렇게 말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다시 물었다. "전혀 단서가 없나요?" "전혀 없소. 그 개자식들은 바람처럼 종적을 감추었소. 그림 절도범들은 별로 많이 다루어본 적이 없지만, 그들의 범행 수법은 거의 언제나 똑같소. 우린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바로 그것이오." "이해할 수 없다니요?" "그렇소. 이 사건은 다른 것들과 달라요." "다르다면....... 어떻게요?" "그림 절도범들은 무기가 없는 사람을 죽이지 않소. 그리고 그놈들에게 게리 윈스롭을 죽여할 이유가 없었소." 문득 그는 말을 끊고 다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혹시 이 사건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소?" 다나는 거짓말을 했다. "아니에요, 조금도요. 단지 궁금해서요. 나는........" 윌슨 형사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좋아요. 가끔 연락이나 해보시오." FRA 본부에 있는 부스터 장군의 사무실에서는 한창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회의 시간이 거의 끝날 무렵, 장군은 잭 스톤에게 몸을 돌리고 물었다. "요즘 에반스는 무슨 짓을 벌이고 있나?' "주변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다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해가될 일은 없을 겁니다. 소용없는 일이니까요." "나는 그 여자가 윈스롭의 뒤를 캐고 다니는 게 싫어. 코드 3으로 넘겨버리게." "언제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어제." 다나가 다음 방송을 준비하고 있을 때, 매트 베이커가 사무실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피곤한듯이 얼굴을 찡그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방금 당신과 관련된 전화를 한 통 받았지." 다나는 가볍게 말했다. "저의 팬들이 저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런가요?' "그 사람은 당신이면 충분한 것 같았소." "네?" "그 전화는 FRA로부터 온 젓이오. 그들은 당신이 게리 윈스롭에 조사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있소. 완전히 비공식적으로 말이오. 그들은 마치 우호적인 제안이라도 하듯이 말하더군. 당신이 남의 일에 끼어들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았소." "그랬단 말이죠?" 다나는 중얼거리면서 매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들이 이 일에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이상가지 않아요? 나는 정부 기관이 요구한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을 거예요. 이 사건은 테일러와 그의 부인이 화재로 숨진 아스펜에서부터 시작이 됐어요. 나는 이제부터 그곳을 가보려고 해요. 그리고 만일 거기에서뭔가 찾아낸다면, 당연히 그게 범죄 추적' 의 멋진 시작을 장식하겠죠" 매트 베이커는 체렴한듯이 탈했다.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겠소?' '하루나 이틀 이상은 걸리지 않을 거예요." 매트 베이커는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해봅시다. " 11 짤은 이별 레이첼은 더 이상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지금 그녀는 플로리다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휴양을 하는 중이었다. 간신히 브라질에서부터 돌아온 이후로 그녀의 몸은 점점 더 나빠졌다. 이제는 단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걸어가는 것만도 힘에 겨울 정도였다. 레이첼은 언제부터 그렇게 자신의 몸이 약해졌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아마 독감에 걸렸을지도 몰라. 제프의 말이 옳았어. 의사를 찾아갔어야 했는데.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면 나아지겠지.......' 레이첼은 따스한 물 속에 몸을 쭉 펴고 누운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가느다란 팔을 따라서 손을 더듬어 내리다가 아름다운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순간 레이첼은 눈을 번쩍 떴다. 손 끝에 혹이 만져졌다. 처음에 그녀는 충격에 빠졌다. 그런 다음엔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어. 암은 절대로 아닐 거야.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아, 운동도 하고 항상 야채와 과일만 먹었어. 가족 중에서 암 환자도 없었어. 나는 건강해. 의사에게 보이긴 할 테지만, 암은 아니야.' 레이첼은 욕조에서 나와서 천천히 몸을 닦았다. 그리고 소파에 주저앉아 전화를 걸었다. "베티 리치맨 모델 사무소입니다. " "베티 리치맨과 통화하고 싶어요. 레이첼 스티븐스라고 전해주세요." 잠시 후 베티 리치맨이 전화를 받았다. "레이첼! 당신 전화를 받으니 안심이야. 얼마나 걱정했다고! 그래, 이제 몸은 괜찮아?' "물론 괜찮아요. 왜 그런 질문을 하죠?" "글쎄, 당신이 리오에서 촬영을 중단했잖아. 당신은 한번도 그런 적이 없어서 말이야. 그래서 내 생각엔......." 레이첼은 소리를 내어서 웃었다. "아니, 아니에요. 그냥 피곤 했을 뿐이에요, 베티. 다시 일을 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는걸요." "그거 잘됐네. 모두들 당신과 계약하려고 난리거든." "어머, 난 언제든 일할 수 있어요. 다음 예정이 어떻게 되죠?' "잠깐만 기다려봐." 잠시 후, 베티 리치맨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다음 촬영이 아루바에서 있어. 다음주에 시작이야. 이번에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진행될거야. 지난번처럼 피곤하게 몰아치지 않을게. 그 사람들은 꼭 당신과 찍고 싶어해." "나는 아루바를 좋아해요. 계약을 하도록 해요." "좋았어. 당신이 건강해서 기뻐." "난 아주 좋아요." "그럼, 구체적으로 진행시켜 보자구." 레이첼은 오후 2시에 그래함 엘진 박사와 면담 약속을 잡았다. "안녕하세요, 엘진 박사님," "어서 와요, 레띠첼. 윌 도와드릴까?' "오른쪽 유방에 작은 멍울이 잡혀요. 그래서......." "이런, 검사는 해봤나요?" "아니요. 하지만 전 그게 뭔지 아는걸요. 별로 수선을 떨 필요도 없어요. 그건 그냥 작은 멍울일 뿐이니까요. 전 제 몸을 잘 알아요. 박사님이 간단한 수술로 그 멍울을 없애주실 테죠." 레이첼은 미소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전 모델이에요. 흉터가 있어서는 안 돼요. 아주 작은 흉터라면 화장으로 감출 수가 있겠지만요. 게다가 다음 주에는 촬영 때문에 아루바로 떠나야 해요. 그러니 수술 날짜를 내일이나 모레로 잡았으면 하는데, 가능할까요?" 엘진 박사는 레이첼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레이첼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침착해보였다. "먼저 진찰한 다음에 세포 검사를 해야만 해요. 어쨌든 좋아요. 수술 날짜는 이번 주 안으로 잡읍시다. 물론 필요하다면 말이오." 레이첼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잘됐어요." 엘진 박사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다른 방으로 갑시다, 괜찮죠? 간호사에게 당신이 입을 가운을 갖고 오도록 하겠소." 15분 후에 엘진 박사는 간호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레이첼의 유방에 있는 멍울을 손으로 더듬었다. "말씀드렸죠, 박사님. 이건 단지 멍울일 뿐이에요." 엘진 박사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글쎄, 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스티븐스 양, 세포 검사를 하는 게 좋겠소. 검사는 바로 여기에서 할 수가 있어요." 엘진 박사가 그녀의 오른쪽 유방에 가느다란 바늘을 찔러 넣었다. 레이첼은 온몸이 오그라드는 듯한 기분이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다 끝났소. 생각처럼 아프지는 않았죠?" "그래요. 그럼 얼마나 빨리......." "이절 지금 연구실로 보내면 내일 오전 중으로 검사 결과가 나올거요. 연락하겠어요." 레이첼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저는 집에 가서 아루바로 떠날 준비를 하겠어요." 집에 돌아온 레이첼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두 개의 여행 가방을 꺼내어 침대 위에 펼쳐놓는 것이었다. 병원에 다녀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다시 기운이 솟는 것 같았다. 그녀는 활기차게 옷장 앞으로 걸어가서 아루바로 가져갈 옷가지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때 레이첼의 집을 청소하고 관리해주는 자넷 로드가 침실로 들어왔다. "스티븐스 양, 다시 여행을 떠나실 건가요?" "그래요." "이번엔 어디로 가죠?' "아루바예요." "어디에 있는 곳인데요?' "베네수엘라 북쪽의 카리브 해에 있는 아름다운 섬이에요. 그곳은 낙원과도 같아요. 눈부신 해변에는 아름다운 호텔들이 줄지어 서 있고 그리고 훌륭한 음식들을 실컷 맛볼 수 있거든요." 자넷은 한숨을 쉬며 눈을 깜박였다. "정말 근사하겠어요." "자넷, 내가 없는 동안은 일주일에 세 번 와줘요." "그럼요." 다음날 오전 9시, 전화벨이 울렸다. "스티븐스 양?" "네." "엘진 박사요." "안녕하세요, 박사님. 수술 날짜를 잡으셨나요?" "스티븐스 양, 방금 검사 결과가 나왔소. 지금 당장 내 진료실로 와 주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은......." "그만. 지금은 듣고 싶지 않아요, 박사님." 수화기 저편에서 의사가 망설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일을 전화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유감스럽게도 당신이 암에 걸렸다는 검사 결과가 나왔어요." 제프가 한창 스포츠 칼럼을 쓰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제프......." 레이첼은 흐느끼느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레이첼, 당신이오? 무슨 문제가 생겼소? 무슨 일이야?' "내가....... 내가 유방암이래요." "오, 세상에. 얼마나 심각한 거요?" "아직 모르겠어요. 엑스 선 촬영을 해야만 해요. 제프, 난 지금 이런 상태를 혼자서 견딜 수가 없어요. 내가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 건 알지만, 당신이 여기로 와 줄 순 없어요?" "레이첼, 난....... 미안해, 난......." "제프, 딱 하루만요. 단지 내가....... 검사 결과를 들을 때까지만 부탁이에요. 날 좀 도와줘요." 그녀는 다시 흐느꼈다. "레이첼......." 제프는 가슴이 아팠다. "레이첼, 그렇게 하도록 해볼게. 기다려, 다시 전화할게," 레이첼은 계속 흐르는 눈물 때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제작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다나는 올리비아에게 알렸다. "올리비아, 콜로라도 주 아스펜으로 가는 아침 비행기를 예약해줘요. 호텔 예약도요. 아, 그리고 차도 빌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알았어요. 그런데 코너스 씨가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고마워요." 다나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제프가 창문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안녕, 제프." 그가 몸을 돌렸다. "안녕, 다나." 그의 얼굴에는 이상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다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제프를 쳐다보았다. "팬찮아요, 제프?" "두 가지 대답이 있어. 그렇다와 아니다. " 다나는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요." 그리고 그녀는 제프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무슨 일이에요?" 그의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레이첼이 유방암에 걸렸어." 다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런....... 정말 유감이에요. 괜찮겠죠?" "레이첼이 오늘 아침에 전화를 했어. 병원에서 암이라는 진단 결과가 나왔대. 그리고 암이 얼마나 진전되었는지 그 결과가 나을 예정이야. 그런데 레이첼은 너무나 겁에 질려 있어. 의사가 검사 결과를 알려주는 순간만이라도 내가 자신의 옆에 같이 있어 주기를 원해. 그래 서 나는 우선 당신과 상의하고 싶었어." 다나는 제프에게로 걸어가서 두 팔로 그를 꼭 끌어안았다. "당연히 당신이 가야죠." 다나는 레이첼과 함께 했던 점심 식사를 떠올렸다. 그때 레이첼은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런데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제프가 다나의 귀에 속삭였다. "하루나 이틀 뒤엔 돌아오겠어." 제프는 매트 베이커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나에게 긴급한 일이 생겼어요 매트. 며칠 자리를 비워야겠어요." "자네에게? 무슨 일이지?' "사실은 레이첼에게 일이 생겼어요." "자네의 전 부인 말인가?" 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방금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저에게 전화를 했더군요." "그것 참 안됐군." "어쨌든 그녀는 지금 위로할 사람이 필요해요. 그래서 오늘 오후에 플로리다행 비행기를 탔으면 해서요." "걱정하지 말고 가보게. 자네 자리는 모리 폴스타인이 채우도록 하겠네. 나에게 상황이 어떤지 알려주고." "그러죠. 고마워요, 매트." 두 시간 후에 제프는 마이애미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다나는 제프와의 짧은 이별을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원래 직업상 두 사람이 떨어져 지내는 일이 종종 있는데다가, 제프의 말대로 이삼 일 후에는 다시 돌아올 거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아스펜으로 곧 출장을 떠날 다나에게 당장 발등에 떨어진 문제는 케말이었다. 이번에는 하루 이상 걸릴 게 분명했으므로 시간제 가정부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그동안 이 집을 거쳐간 가정부들 중에서 하루 이상 참고 견딘 사람이 없었다. "케말을 돌봐줄 믿을 만한사람을 구하지 못하면 아스펜으로 갈 수없어. 하지만 누가 세상에서 가장 화를 잘 내는 남자 아이를 돌보면서 세탁이며 청소를 해낼 수 있을까?" 다나는 문득 파멜라 허드슨이 떠올랐다. 지난번 방문 이후로 파멜라 허드슨은 다나와 무척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로저 허드슨도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무뚝뚝하고 냉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두 부부는 부자들 특유의 여유와 너그러움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푸는 편이었다. 특히 파멜라 허드슨은 다나와 케말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아마 파멜라라면 좋은 가정부를 알고 있을지도 몰라. 그런 부잣집에서는 가정부나 집사들을 많이 쓰게 마련이니까 처음 보는 시간제 가정부보다는 좀더 믿을 만한 사람을 구할 수 있겠지.' 다나는 파멜라 허드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 파멜라. 하지만 제가 잠시 워싱턴을 떠나야만 할 일이 생겨서 케말과 함께 지내며 돌봐줄 사람이 필요해요. 혹시 성자처럼 참을성 많고 성격 좋은 가정부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잠깐 침묵이 흐른 뒤, 파멜라는 상냥하게 말했다. "방금 생각이 났어요. 이름이 메어리 로웨인 달레이인데, 몇 년 전에 우리 집에서 일을 했었지요. 그녀는 보물이에요. 내가 그녀를 찾아서 전화를 해줄게요." "고마워요." 1시간후에 올리비아가 인터폰으로 알렸다. "다나, 메어리 달레이 부인이라는 분이 전화했어요." 다나는 재빨리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달레이 부인인가요?" "네. 저예요." 억센 아일랜드 사투리가 섞인 상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허드슨 부인에게서 당신이 아들을 돌봐줄 사람을 구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맞아요. 제가 하루나 이틀 정도 집을 비워야만 하거든요. 내일 아침 일찍, 그러니까 7시쯤에 우리 집으로 와주실 수 있나요?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요." "그럴 수 있구말구요. 운 좋게도 제가요즘은 잠깐 일이 없거든요." 다나는 달레이 부인에게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 "내일 봐요, 에반스 양." 메어리 달레이 부인은 정확히 다음날 아침 7시에 도착했다. 나이는 오십 대 정도로 보였는데, 몸집은 뚱뚱하지만 행동은 민첩하고 가벼웠다. 항상 싱글벙글 웃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다나와 악수를했다. "만나서 기쁘네요, 에반스 양 저는 시간이 날 때마다 당신 프로그램을 본답니다. " "고맙습니다. " "그런데 이 댁의 젊은 총각은 어디 있나요?" 다나는 서재를 향해서 소리쳤다. "케말, 나와보렴." 잠시 후 케말이 방에서 나왔다. 케말은 달레이 부인을 한번 쳐다보더니 자신이 쓰는 은어로 "썰렁하군"이라고 말했다. 달레이 부인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케말이로구나, 그렇지? 아줌마는 지금까지 케말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단다. 넌 마치 젊은 악당처럼 생겼구나."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케말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앞으로는 이 아줌마에게 네가 먹고 싶은 것은 뭐든지 다 말해야만 한다. 아줌만 훌륭한 요리사거든. 뭐든지 척척 만들어 내지. 우린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케말." '그러길 바래요.' 다나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생각했다. "달레이 부인, 제가 없는 동안 케말과 함께 이 집에서 머무를 수 있으신가요?" "그럼요, 에반스 양." "정말 잘됐어요. 방이 여유가 없는 게 미안하네요. 주무실 곳은......." 달레이 부인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말아요.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소파로 충분하니까요." 마음이 놓인 다나는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럼, 지금부터 저와 함께 케말을 학교까지 데려다주면 어떨까요? 그런 다음에 부인이 1시 45분에 다시 케말을 학교에서 데려오시면 돼요." "그게 좋겠군요." 케말은 다나에게 눈을 돌렸다. "반드시 집으로 다시 돌아올 거죠, 다나?" 다나는 케말을 가볍게 안았다. "물론 돌아오고말고, 케말," "언제요?' "하루, 이틀이면 돌아올 거야." '어떤 해답을 갖고 말이야.' 다나가 스튜디오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책상 위에는 아름답게 포장된 작은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다나는 상자를 보고 한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멋진 금장 펜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함께 들어 있는 카드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친애하는 다나, 안전한 여행이 되기를. 일당들로부터. '친절하기도 하군.' 다나는 꿴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다나가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는 바로 그 시간에, 노동자 복장을 한 낯선 남자와 와톤이 살았던 옛날 아파트 문 앞에 와서 벨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새로운 세입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 남자는 노동자 복장을 한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다음 도로 문을 닫았다. 노동자복장의 남자는 곧장 다나의 아파트로 가서 벨을 눌렀다. 달레이 부인이 문을 열었다. "누구시죠?" "에반스 양이 텔레비전을 수리해 달라고 해서 왔습니다. " "그렇군요. 어서 들어오세요." 달레이 부인은 남자가 텔레비전 앞으로 가서 일을 시작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12 실종 레이첼 스티븐스는 마이애미 국제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비행기에서 내리는 제프를 맞았다. '세상에! 너무나 아름답군. 레이첼이 아프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공항 로비에 서 있는 레이첼을 보며 제프는 감탄했다. 레이첼은 반짝이는 금발에 잘 어울리는 푸른 머리띠를 두르고 아무 무늬도 없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어깨에는 머리띠보다 약간 더 옅은 색깔의 얇은 스웨터를 살짝 걸치고 있었다. 약간 더 마르고 눈처 럼 창백해진 그녀의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방금 내려온 천사처럼 가냘프고 청순하게 보였다. 레이첼이 제프를 꼭 끌어안았다. "오, 제프! 와줘서 고마워요." "당신은 좋아보이는걸." 제프는 먼저 레이첼을 안심시켰다. 그들은 함께 대기하고 있는 리무진을 향해서 걸어갔다. "모두 별일 아닐 거야. 걱정하지 마" "물론이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레이첼이 물었다. "다나는 어떻께 지내요?" 그는 망설였다. 병에 걸린 레이첼에게, 차마 자신이 느끼는 행복을 늘어놓을 수가 없었다. "잘 지내." "다나 같은 여자를 만나다니 당신은 행운아예요. 설마 나 때문에 다나와 불편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겠죠?" "괜찮아. 다나는 오히려 당신 걱정을 많이 했어." "그렇군요. 그런데 내가 다음 주에 아루바에서 촬영 스케줄이 있는 말을 했던가요?" "아루바에서?" "그래요. 내가 왜 그 일을 수락했는지 알아요? 거기가 우리의 신혼 여행지였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머물렀던 호텔 이름이 뭐였죠?" "오랜제스타드."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어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올라갔던 산의 이름은 뭐였죠?" "후이버그였지." 레이첼은 미소를 짓고 나지막이 말했다. "기억하고 있었군요, 그렇죠?" "대개 자신이 신혼 여행을 간 곳은 잊어버리지 않아, 레이첼." 제프는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제프의 팔 위에 얹었다. "거긴 천국이었어요, 그렇지 않아요? 나는 그렇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하얀 해변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제프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햇볕에 얼굴이 그을릴까봐 걱정했었지. 그래서 마치 미라처럼 옷으로 온몸을 휘감았어." 잠깐 침묵이 흘렀다. 레이첼이 불쑥 말을 꺼냈다. "내 인생에서 제일 후회스런 일이었어요, 제프." 제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레이첼을 쳐다보았다. "뭐가?" "우리 사이에 아기를....... 아니, 신경쓰지 말아요. 별 말 아니에요." 레이첼은 제프를 빤히 쳐다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과 함께 아루바에서 지낸 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제프는 못 알아듣는 척 말꼬리를 돌렸다. "그래, 정말 멋진 곳이었지. 뭐든지 할 수 있었어. 낚시, 윈드서핑, 스노클링, 테니스, 골프......." "그런데 우린 그런 것들을 하나도 하지 않았어요, 그렇죠?" "그랬지." "오늘 아침에 엑스 선 촬영이 있어요. 병원에 혼자 가고 싶지 않아요. 나와함께 가줄래요?" "물론이야, 레이첼." 리무진이 레이첼의 집에 도착하자, 제프는 자신의 짐들을 넓은 거실로 옮기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집이 좋은데. 아주 좋아." 레이첼은 두 팔로 제프를 안았다. "고마워요, 제프." 제프는 그녀가 떨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엑스 선 촬영은 마이애미 시내에 있는 암 전문 병원에서 있었다. 간호사가 레이첼을 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환자복으로 갈아입게 했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엑스레이 검사실로 데리고 갔다. 그동안 제프는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15분쯤 걸릴 거예요, 스티븐스 양. 시작해도 될까요?" "네. 결과는 얼마나 빨리 알 수가 있죠?" "그건 담당 의사가 알려드릴 거예요. 내일이면 담당 의사에게 검사결과가 통보될 겁니다. " "내일......." 담당 의사의 이름은 스코트 영이었다. 제프와 레이첼은 그의 사무실로 들어가서 의자에 앉았다. 의사는 잠시 레이첼을 쳐다보고 나서 말했다. "마음이 답답하군요. 나쁜 소식을 알려드리게 되어서 유감스럽습니다, 스티븐스 양." 레이첼은 저도 모르게 제프의 손을 꽉 쥐었다. "어떻죠?' "세포 검사와 엑스 선 촬영을 한 결과, 악성 암세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 레이첼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그게 무슨....... 그게 무슨 뜻이죠?" "유감스럽게도 유방 절제술을 시행해야만 합니다. " "안 돼요!" 순간 본능적으로 그녀의 입에서 절규가 터져 나왔다. "그럴 순 없어요....... 제 말은, 그러니까 뭔가 다른 방법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영 박사는 부드럽게 말했다. "유감이지만, 암이 너무 진전이 됐습니다. " 레이첼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곧 호소하듯이 말했다. "저는 지금 당장은 수술 받을 수가 없어요. 다음 주에 아루바에서 사진 촬영을 하기로 일정이 잡혀 있어요. 그걸 끝내고 나서 수술을 하겠어요." 제프는 의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박사님은 언제 수술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영 박사님?" 의사는 제프에게로 몸을 돌렸다. "되도록 빨리 하는 게 좋습니다. " 제프는 레이첼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전 다른 분의 의견도 듣고 싶어요." "물론 그러실 테죠." 아론 카메론 박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유감스럽지만 제 생각도 영 박사의 생각과 같습니다 유방 절제술을 할 것을 권합니다. " 레이첼은 침착하게 말하기 위해서 애썼다. "고맙습니다, 박사님." 그녀는 제프의 손을 잡고 꼭 쥐었다. "예상했던 일이에요, 그렇죠? " 영 박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첼은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선생님 말씀이 맞는 것 같군요. 나는 단지 할 수 없을......." 말이 끊어지고, 길고 슬픈 침묵이 이어졌다. 마침내 레이첼이 속삭였다. "좋아요. 반드시 필요하다고 확신하신다면......." "가능한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 영 박사가 말했다. "수술을 하기 전에, 성형 외과 의사를 불러서 당신과 함께 당신의 가슴 성형에 대해서 의논할 것입니다. 우리 다 함께 기적을 만들어 봅시다. " 레이첼이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제프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워싱턴 D.C.에서는 아스펜으로 직행하는 비행기가 없었다. 다나는 델타 항공기를 타고 덴버까지 가서, 그곳에서 다시 유나이티드 익스프레스 항공기로 갈아탔다. 나중에 다나는 그 여행에 대해 아무런 기억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다나의 머릿속은 레이첼과 그녀가 겪지 않으면 안 될 고통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제프가 레이첼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다나는 케말에 대해서도 걱정했다. '달레이 부인이 내가 돌아가기 전에 집을 나와 버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케말이 또 말썽을.......' 이때 스피커를 통해서 승무원의 목소리가흘러나왔다. "10분 후에 저희 비행기는 아스펜 공항에 착륙하게 됩니다. 좌석 벨트를 매셨는지 확인해주시고 서 계신 분들은 좌석으로 돌아가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 다나는 이제 자신의 앞에 어떤 일이 펼쳐질 것인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엘리어트 크롬웰이 매트 베이커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다나가 오늘 밤에 방송을 진행하지 않는다고 들었네." "맞습니다. 지금 다나는 아스펜에 있습니다. " "그녀가 주장하는 테일러 윈스롭의 살해설을 추적하느라고 그곳까지 갔단 말인가? " "그렇습니다. " "나에게 계속 상황을 알려주길 바라네." "아무렴요." 매트는 사무실을 나가는 크롬웰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으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사람. 다나에게 왜 관심이 많군. 좀 지나친 것 아니야? '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다나는 곧장 사동차를 알선해주는 렌트카 센터로 걸음을 옮겼다 항공 여객용 버스 승강장에서는 칼 램지 박사가 카운터 뒤에 앉아 있는 직원과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일주일 전에 자동자를 예약했단 말이오. " 직원은 정중하게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램지 박사님 그렇지만 죄송스럽게도 착오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빌려드릴 수 있는 차가 한 대도 없습니다. 밖에 나가시면 공항 버스가 있습니다. 아니면 제가 택시를......." "걱정하지 마시오. " 박사는 내뱉듯이 말하고 돌아서서 성큼성큼 가버렸다 그때 다나가 들어와서 직원 책상 앞에 섰다. "예약을 했는데요, 다나 에반스예요. " "네, 에반스 양.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그는 고녀에게 서류를 내밀어 사인을 받은 다음, 몇 개의 열쇠를 건네주었다. "1번 주차장에 있는 하얀색 렉서스 자동자입니다. " "고마워요 그런데 리틀 넬 호텔로 가는 길을 좀 알려주겠어요? "아주 찾기 쉬운 곳이지요. 바로 시내 중심가에 있거든요. 듀란드가 675번입니다. 분명히 그곳이 마음에 드실 거예요. " "고마워요. " 다나는 디시 한 번 인사를 하고 떠났다. 직원은 다나가 문 밖으로 걸어나가는 것을 계속 지켜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그는 무척 의아스러웠다. 리틀 넬 호텔은 아담한 스위스의 농가풍으로 지어진 건축물로서, 그림처럼 아름다운 아스펜 산맥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다. 호텔 로비에는 천장까지 닿는 거대한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어서 겨울 내내 따스한 불을 피워놓았다. 커다란 창문 너머로는 하얀 눈을 모자처럼 스고 있는 로키 산맥의 봉우리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호텔 로비에는 스키복 차림의 손님들이 소파와 커다란 의자에 둘러앉아서 쉬고 있었다. 다나는 로비를 둘러보며 미소지었다. '제프는 이런 곳을 좋아할거야. 다음에 언제 제프와 함께 와봐야지.......' 숙박부에 서명을 한 후, 다나는 호텔 직원에게 물었다. "테일러 윈스롭 씨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직원은 다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테일러 윈스롭 씨의 집이라뇨? 그곳은 더 이상 없습니다. 완전히 불에 타버렸지요." 다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알아요, 난 단지 그곳을 보려고......." "거긴 이제 재밖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손님이 그 자리를 보고 싶으시다면, 커넌드럼 크리크 밸리로 가세요. 여기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고마워요 가방을 제 방까지 갖다주겠어요?" "물론입니다. 에반스 양 " 다나는 다시 자동차를 세워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커넌드럼 크리크 밸리에 있는 테일러 윈스롭의 저택 부지는 울창한 자연림에 둘러싸여 있었다. 불타버린 그 집은 원래 자연석과 삼나무로 지은 아름답고 우아한 일층짜리 건물이었다. 정원 안에는 커다란 연문이 있고 작은 시냇물이 지나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이곳은 주변의 경관이 뛰어나게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자연 풍경 한복판에 마치 흉칙한 상처처럼 두 사람이 불에 타 죽은 집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다나는 저택 주변을 천천히 걸어 다니면서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상상했다. 다나는 의혹이 담긴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집은 매우 거대한 저택이 분명했다. 틀림없이 많은 문들과 커다란 창문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윈스롭 부부는 집밖으로 탈출하지 못했다. 그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혹시 누군가 윈스롭 부부를 처참하게 살해하고 화재로 위장한 게 아닐까' 하지만 다나는 곧 이런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너무나 무서운 일이었다. '소방서를 찾아가는 게 좋겠어. ' 다나가 소방서 안으로 들어가자. 한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삼십 대 정도로 보이는 그 남자는 키가 크고 신체가 건장했다. 그리고 겨울인데도 운동 선수처럼 햇빛에 그을려 있었다. '아마 스키 슬로프에서 살다시피 하나 봐 ' 다나는 남자의 갈객 피부를 보며 생각했다. "뭘 도와드릴까요?" "테일러 윈스롭 씨의 집이 불에 타버렸다는 기사를 읽었는데. 궁금한 것이 있어서요. " "그렇습니다. 일 년 전의 일이죠 아마 그 일은 이 도시에서 일어난 가장 최악의 사건일 것입니다. " "몇 시쯤에 화재가 일어났나요?" 그는 다나의 질문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한밤중이었죠. 새벽 3시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현장에 도착한 것이 새벽 3시 15분쯤이었지만, 너무 늦었지요. 집이 마치 횃불처럼 타버렸더라구요. 우리는 나중에 불을 끄고 안에서 두 구의 시신을 발견할 때까지 집 안에 누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가슴 아픈 순간이었지요, 정말로." "화재가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 알아냈나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요. 전기 배선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 "전기적인 문제라면 어떤 거죠?" "정확히 모르겠지만, 화재가 일어나기 전날에 어떤 사람이 고장난 전기 배선을 수리하기 위해 그 집으로 전기 기술자를 불렀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모르는군요7' "제 생각엔 화재 경보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다나는 태연한 목소리틀 내려고 노력했다. "수리를 하러 왔다는 그 전기 기술자, 그 사람의 이름을 아나요? " "아니요. 경찰이 알고 있을테죠." "고마워요." 그는 다나를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당신은 이 일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습니까?" 다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 근처의 스키 리조트에서 일어난 화재 사건들에 대한 기사를 쓰고 있거든요." 아스펜 경잘서는 붉은 벽돌로 지은 일층짜리 건물로서, 다나가 묵고 있는 호텔로부터 열두 볼록 정도 떨어져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서장은 다나의 이름을 듣자, 번쩍 고개를 치켜들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다나 에반스라구요, 그 텔레비전에 나오는? " "맞아요." "나는 터너 서장이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오셨소, 에반스 양?" "테일러 윈스롭 씨와 그 부인이 죽은 화재 사건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게 있어서요." "세상에, 얼마나 끔찍한 비극이었던지, 이곳 사람들은 아직도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요." "이해가 가요." "아무렴요, 그들을 구해내지 못한 게 정말 유감이에요." "불이 전기적인 문제로 시작되었다고 들었는데요? "그렇소." "방화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터너 서장은 얼굴을 찌푸렸다. "방화라구요? 오, 그렇지 않소. 그건 분명히 누전으로 인한 화재였어요." "저는 화재가 일어나기 전날 그 집에 왔었다는 전기 기술자를 만나서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이름을 알고 계시죠?" "그건 우리 기록에 분명히 남겨두었소. 내가 알아볼까요? " "그래 주시면 고맙겠어요. " 터너 서장은 수화기를 들고서 짧게 지시를 내린 다음, 다시 다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스펜에는 처음 온 건가요?" "멋진 곳이지요. 스키는 타시오?" "아니요. 전 못 타요." '하지만 제프는 스키를 탈 줄 알아. 언제 우리가 여기 오게 되면.......' 어떤 직원이 들어와서 터너 서장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서장은 그 종이를 다시 다나에게 넘겼다. 그 종이에는 '알 라슨 전기회사, 빌 켈리' 라고 씌어 있었다. "그 회사는 거리 바로 아래쪽에 있어요." "정말 많은 도움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터너 서장님." "천만에, 당신을 만나서 즐거웠소." 다나가 경찰서를 떠나는 순간, 거리 맞은편에 서 있던 한 남자가 재빨리 몸을 돌려 휴대폰으로 어딘가와 통화하기 시작했다. 알 라슨 전기회사는 자그마한 회색 시멘트 건물에 있었다. 소방서에서 본 그 남자의 복제품처럼, 역시 햇빛에 그을린 얼굴이 마치 운동 선수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아스펜의 남자들은 모두 스키를 즐기는모양이군.' 다나는 생각했다. 그 남자는 다나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일어나서 인사했다. 다나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전 빌 켈리 씨와 이야기를 하려고 왔는데요. " 남자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건 바로 내가 원하는 바요. " 다나는 어리둥절해서 남자를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미안하지만 무슨 말이죠? " "켈리 말이오. 그는 실종된 지 거의 일 년이 다 됐어요. " "실종됐다구요?" "그렇다니까요. 그냥 없어졌어요. 말 한 마디 없이 말이에오. 자기 봉급조차 타 가지 않았어요." "그제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할 수 있나요? " "하구말구요. 고 화재가 일어났던 날 아침이었죠. 큰 불이었어요. 아시겠지만, 윈스롭 씨 부부가 그 화재로 죽었지요." 다나는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만약나의 예상이 사실이라면......." "알아요. 그럼 혹시 켈리 씨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가는 데가 없나요?" "전혀요. 계가 말한 그대로, 그냥 사라졌다니까요." 남아메리카의 끄트머리에 있는 외딴 섬은 오전 내내 착륙하는 개인용 비행기들의 소음으로 윙윙거렸다. 회의 시간이 되자, 스무 명 남짓한 참석자들이 엄중한 경비를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새로 지은 이 건물은 회의가 끝나면 바로 폭파할 예정이었다. 사회자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어서들 오십시오 많은 친숙한 얼굴들과 몇몇 새로운 얼굴들을 보니 마음이 기쁩니다. 우리가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 중에 몇 분이 어떤 문제를 걱정하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어서 우리 정체를 드러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아직 그 배신자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배신자는 곧 잡힐 것이며 배신 행위에 대한 마땅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어느 것도, 그 누구도 우리의 길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 참석자들 사이어서 점점 동요가 일어나면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좋습니다. 이제 조용히 경매를 시작합시다. 오늘은 모두 열여섯 개의 짐이 있습니다. 2억 달러에서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입찰 가격을 부를까요? 좋습니다. 2억 달러입니다. 3억 달러 없습니까?" 13 목격자 그날 저녁에 호텔 방으로 돌아온 다나는 갑자기 섬뜩한 기분을 느끼며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모든 것이 똑같아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었다. '짐들이 옮겨진 걸까? 아무래도 내가 신정과민인지도 몰라.' 다와는 얼굴을 찡그리며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에반스 겐 댁입니다. " '고맙게도 달레이 부인이 아직 집에 있구나.' 다나는 달레이 부인의 묵소리를 듣자 너무나 반가웠다 "달레이 부인이시죠?" "에반스 양!" "네, 저예요. 잘 지내셨어요. 케말은 어때요?" "글쎄요, 그 녀석은 완전히 꼬마 악마예요. 하지만 전 그 아이를 잘 다룰 수가 있지요. 내 아들도 그랬거든요." "그러면 모든 게....... 괜찮나요? " "아, 그럼요." 다나는 정말이지 안심이 되는 것을 느꼈다. "케말을 바꿔주시겠어요?" "물론이죠." 다나는 달레이 부인이 서재를 향해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케말, 엄마가 전화하셨다." 잠시 후 케말이 수화기를 들었다. "안녕, 다나.""안녕, 케말, 어떻게 지내니, 얘야?" "좋아요." "새로 다니는 학교는 어떠니?" "좋아요." "달레이 부인과는 잘 지내고 있는 거지?" "네, 아줌마는 짱이에요." 다나는 생각했다. '그 정도가 아니야. 그녀는 기적이야.' "언제 집으로 돌아올거예요, 다나?" "내일 갈 거야. 저녁은 먹었니?" "네, 솔직히 별로 나쁘진 않았어요." 하마터면 다나는 이렇게 소리칠 뻔했다. '케말, 정말 네가 케말 맞니?' 그녀는 케말의 변화를 느끼고 기쁨에 몸을 떨었다. "좋아, 얘야. 내일 보자, 잘 자." "잘 자요, 다나." 다나가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순간 다나는 즐겁게 소리쳤다. "제프! 오, 제프!" 다나는 자신이 세계 어느 곳에서나 통화가 가능한 광역 휴대폰을 구입한 것이 새삼 다행스럽고 기쁘게 생각했다. 제프가 말했다. "당신이 너무도 미치도록 보고 싶어서 전화하지 않을 수 없었어." "나도 당신이 보고 싶어요. 플로리다예요?" "응." "거기 일은 어때요?" "좋지 않아." 그녀는 제프의 목소리에서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제프는 감정을 쉽게 속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프, 말해줘요. 레이첼은 어떻죠?" "사실은, 아주 나빠. 내일 유방 절제술을 받기로 되어 있어." "오, 그럴 수가!" "레이첼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걸 힘들어하고 있어." "너무나 안됐어요." "그래, 불행한 일이지. 다나, 그런데 난 당신과 다시 만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을 것 같아. 내가 당신에게 완전히 미쳐 있다는 말을 했었던가?" "내가 당신에게 미쳐 있는걸요, 제프." "뭐든 필요한 것 없어, 다나?" "당신이오, 당신이 필요해요.' "없어요." "케말은 어때?" "그 아인 잘 지내고 있어요. 새로운 가정부를 구했는데 아주 좋아요. 케말도 잘 따르고요." "그거 좋은 소식인걸. 오, 다나. 다시 만날 때 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나도 그래요.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아요." "항상 몸 조심해." "그럴게요. 그리고 레이첼에겐 정말 뭐라고 위로할 말이 없어요." "내가 당신 마음을 전해줄게. 잘 자요, 내 사랑." "잘 자요." 다나는 여행 가방을 열고 집에서 가져온 제프의 셔츠를 꺼냈다. 제프가 다나의 집에서 지낼 때 즐겨 입던 넉넉한 사이즈의 편안하고 낡은 셔츠였다. 셔츠에서는 희미하게 제프의 체취가 배어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잠옷 속에 제프의 셔츠를 집어넣고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잘 자요, 내 사랑.' 다음날 아침 일찍 다나는 다시 워싱턴으료 날아갔다. 고리고 방송국으로 가기 전에 먼저 집에 들렀다. 달레이 부인은 따뜻하게 그녀를 맞았다. 집 안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부엌에서는 맛있는 스튜 끓는 냄새가 풍겼다. 마치 어릴 적 외할어니 집에 온 것 같다고 다나는 생각했다. 다나의 외할머니는 시골 마을에서도 소문난 살림꾼이었다. "아휴, 당신을 다시 보니 더할 수 없이 기쁘군요, 에반스 양. 당신 아들에겐 정말 두 손 들었다니까요." 다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나는 곧 미소를 머금었다. 부인의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반짝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케말이 아주머니를 너무 힘들게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요." 달레이 부인이 두 손을 흔들었다. "힘들게 했다고요? 조금도 그렇지 않았아요. 그 애가 새로운 팔을 얼마나 능숙하게 사용하는지 저는 정말로 기뻤답니다." 다나는 깜짝 놀라서 부인을 쳐다보았다. "케말이 그걸 착용했어요?" "물론이에요. 그걸 착용하고 학교에 갔지요." "아주머니는 정말 대단한 분이세요. 너무너무 기뻐요." 다나는 문득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전 방송국에 가야만 해요. 오후에 돌아와서 케말을 만날게요." "케말이 당신을 보면 무척 기뻐할 거예요. 그 애가 당신을 무척 그리워하더군요, 물론 당신도 잘 알겠지만요. 어서 가보세요. 여행 가방은 내가 풀어놓을 테니까요." "고마워요, 달레이 부인." 곧장 매트의 사무실을 찾아간 다나는 아스펜에서 자신이 알아낸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매트는 쉽게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화재가 일어난 날, 전기 기술자가 실종됐단 말이오?" "봉급조차 받아가지 않고요." "그런데 그 남자는 화재가 일어나기 전날 윈스롭의 집에 있었다?" "그래요." 매트는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이야기로군. 갈수록 이상하니 말이야." "매트, 바로 그 다음에 폴 윈스롭이 죽었어요. 그는 화재 사고가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프랑스에서 죽었죠. 아무래도 내가 그곳에 가보는 것이 좋겠어요. 혹시 그의 자동차 사고를 목격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매트는 망설이지 않고 동의했다. "좋아, 바로 떠나시오. 참, 엘리어트 사장이 계속 당신에 대해서 물었소. 당신을 염려하더군." "고맙군요." 다나는 가볍게 대꾸했다. 케말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다나는 집에서 케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케말은 인공 팔을 착용하고 있었다. 다나는 아이가 휠씬 더 침착해진 느낌을 받았다. "드디어 돌아왔군요." 케말이 다나를 끌어안았다. "안녕, 얘야. 보고 싶었어. 학교 생활은 어땠니?" "나쁘지 않아요. 여행은 어땠어요?" "좋았어. 너에게 주려고 이걸 가져왔단다." 다나는 케말에게 아스펜에서 구입한 아메리카 원주민이 손으로 짠 작은 가방과 원주민이 신는 뒤축없는 신발을 건네주었다. 그런 다음에 다나는 케말의 눈치를 살피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케말, 미안하지만, 내가 며칠 다시 집을 떠나 있어야 할 것 같아." 다나는 케말의 반응을 기다리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지만, 뜻밖에도 케말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알았어요." 심통이 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멋진 선물을 사올게." 케말이 일부러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떨어져 있는 날들에 대한 보상인가요?" 다나는 미소를 지었다. "너는 이제 칠 학년이야. 법과 대학생이 아니라고." 그 남자는 편안하게 안락 의자에 앉아서, 한 손에 술병을 들고 텔레비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다나와 케말이 저녁 식사가 차려진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달레이 부인은 아일랜드식 스튜처럼 보이는 것을 덜어주고 있었다. "음식이 맛있네요." 다나가 음식을 칭찬했다. "고마워요. 입맛에 맞다니 기쁘구려." "아줌마는 훌륭한 요리사라고 제가 말했잖아요." 케말이 거들었다. 옆집 남자는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 텔레비전으로 훔쳐보는 대신에 자신도 저 사람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학교 얘기 좀 해주렴." 다나가 말했다. "새로운 선생님들이 마음에 들어요. 수학 선생님은 무척 실력이 뛰어나고 친절해요." "정말 잘됐구나." "그리고 이 학교 애들은 전에 다니던 학교 애들보다 훨씬 더 친절해요. 그 애들은 내 새로운 팔이 짱이라고 생각해요." "당연하지." "그리고 같은 반 여자 아이들 중에 정말 예쁜 애가 있는데, 그 애가 날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름이 리지예요." "너도 그 애가 좋니, 케말?" "그 애는 정말 끝내줘요." '케말도 많이 자랐구나.' 다나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밤이 늦어서 케말이 잠자리에 들었을 때, 다나는 달레이 부인이 일하고 있는 부엌으로 갔다. "케말이....... 눈에 띄게 안정을 되찾은 것 같아요.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나는 진심으로 고마웠다. "아니에요. 오히려 부인께서 저에게 큰 기쁨을 주셨어요." 달레이 부인은 따뜻하게 미소지었다. "나는 꼭 내 자식들 중의 하나를 다시 찾은 느낌이지 뭐에요. 그 애들은 이제 모두 다 커버렸죠. 당신도 짐작하겠지만 말이에요. 케말과 나는 서로를 돕고 있어요. 우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요." "정말 감사해요." 자기 방으로 돌아온 다나는 제프의 전화를 기다렸다. 하지만 자정이 다 될 때까지도 제프가 전화를 걸어오지 않자, 그녀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서 제프를 생각했다. '지금 제프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혹시 레이첼과 사랑을 나누고 있는 건 아니겠지.' 다나는 갑자기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옆집에 있는 남자가 어딘가로 보고하고 있었다. "모두 조용하다. " 휴대폰이 울렸다. "제프! 어디예요? " "플로리다의 병원이야. 방금 레이첼의 유방 절제술이 끝났어. 암 전문의가 아직 검사를 하고 있어." "오, 제프! 종양이 퍼져 있지 않아야 한 텐데요." "나도 그러길 바래. 레이첼이 나에게 며칠 더 함께 있어 주길 바라고 있어. 그래도 되는지 당신에게 물어보려고......." "물론 그래도 되고말구요. 당연히 그래야죠." "오래 있진 않을 거야. 당신과 전화를 끊은 다음에 매트에게 전화로 알리려고 해. 그런데 거긴 무슨 특별한 일 없어?" 순간 다나는 제프에게 아스펜에서 알게 된 것과 자신이 앞으로 조사할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렇지만 다나는 입술을 꼭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제프는 레이첼의 일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힘들어.' 다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아뇨, 모두 조용해요." "케말에게 사랑한다고 전해줘. 그리고 정말 당신을 사랑해." 제프는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간호사가 그에게 다가왔다. "코너스 씬가요? 영 박사님이 뵙고 싶어하십니다. " 영 박사는 방으로 들어온 제프에게 의자를 권하며 말했다. "수술은 잘됐습니다만, 스티븐스 양에게는 많은 정신적 도움이 필요합니다. 유방 절제술을 받은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렇듯이 스티븐스 양은 자신이 보잘것없는 여자가 되었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수술에서 깨어나면 무척 혼란스러울 겁니다. 그런 두려움이 아주 당연한 것임을 그녀가 알도록 당신이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상황을 빨리 인정해야만 치료를 위한 노력도 효과적으로 기울일 수가 있습니다. " "알겠습니다. " 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 박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암세포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방사선 치료에 들어가게 되면, 스티븐스 양이 느낄 두려움과 절망은 더욱 심해질 겁니다. 매우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 제프는 무슨 일이 펼쳐질지 생각했다. 영 박사가 물었다. "스티븐스 양을 돌봐줄 가족이나 친구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제가 그녀를 돌볼 겁니다. "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제프는 자신이야말로 레이첼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니스로 가는 에어 프랑스 항공기 안은 매우 조용했다. 다나는 컴퓨터를 켜고 광범위하게 수집한 자료들을 다시 살펴보았지만, 결정적인 정보가 될 만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다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증거를 찾아야 해, 증거 없는사건이란 있을수 없어. 가능하다면.......' "즐거운 여행이군요, 그렇죠?" 다나는 옆자리에 앉은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키가 크고 매력적인 용모에 프랑스식 억양이 섞인 영어를 사용하는 젊은 남자가 다나에게 미소지어 보였다. "네, 그렇네요." "프랑스에는 전에도 오신 일이 있나요?' "아니요. 저는 이번이 처음이에요." 남자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래요. 당신은 즐거운 경험을 하게 괼 것입니다. 프랑스는 정말 멋진 나라지요."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에게로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혹시 당신을 안내해줄 친구가 있나요?" "공항에 가면 남편과 세 명의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거, 유감스럽군요." 남자는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몸을 돌리더니 기내 잡지를 뽑아들었다. 다나는 다시 컴퓨터로 시선을 돌렸다. 문득 한 기사가 그녀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자동차 사고로 죽은 폴 윈스롭에겐 열렬한 취미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동차 경주였다. 에어 프랑스 항공기가 니스 공항에 내리자, 다나는 자동차 렌트 사무실을 찾아갔다. "제 이름은 다나 에반스예요. 제가 자동차를......." 직원이 고개를 들었다. "아, 에반스 양. 자동차를 준비했습니다. " 그는 다나에게 계약서를 건네주었다. "여기 사인만 하시면 됩니다. " '그래, 이런 게 바로 진짜서비스야.' 다나는 생각했다. "프랑스 남부 지도가 필요한데요. 혹시 구해줄 수 있나요?' "그럼요, 마드모아젤." 직원은 뒤로 손을 뻗어서 지도를 하나 뽑아냈다. "여기 있습니다. " 다나가 인사를 하고 돌아선 뒤에도 그 직원은 그대로 서서 다나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WTN의 사무국 건물에서, 엘리어트 크롬웰은 매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나는 지금 어디에 있나, 매트?" "프랑스에 있습니다. " "뭔가 찾아낸 것이 있나?' "이제 시작인걸요. 벌써 기대를 하는 건 너무 빠르지요." "걱정스럽군. 다나가 너무 많은 여행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이번 여행은 위험할 수도 있어." 그리고 그는 주저하며 덧붙였다. "너무 위험해." 니스의 공기는 차고 맑았다. 다나는 폴 윈스롭이 죽은 그날의 날씨가 어떠했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시트로엥 자동차를 몰고 시골길을 달려갔다. 그림처럼 예쁜 집들이 서 있는 작은 마을들을 지나서, 절벽을 따라 굽이지는 도로를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폴 윈스롭의 자동차 사고는 바로 보솔레이의 북쪽, 지중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휴양지인 로께브륀느 캡 마르뗑의 고속도로에서 일어났었다. 그 마을이 가까워지자, 다나는 자동차의 속도를 줄이고 가 파르고 험한 모퉁이들을 자세히 살폈다. '저 절벽 어딘가에서 폴 윈스롭이 떨어진 것일 테지. 그런데 폴 윈스롭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누구를 만나고 있었을까? 자동차 경주에 참가했을까? 휴가 중이었을까?아니면 사업 때문에 왔을까?' 다나는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마을로 가면 윈스롭 가의 연속적인 비극의 실마리를잡을수 있을지도 몰랐다. 로께브륀느 캡 마르뗑은 고풍스러운 옛 성과 교회, 역사적인 의미가 담긴 동굴들,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배경으로 점점이 흩어져 있는 화려한 별장들이 한데 어우러져 중세의 분위기를 물씬 자아내는 마을이었다. 마을 가운데로 자동차를 몰고 들어간 다나는 일단 주차를 시키고 경찰서를 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침 가게 밖으로 나오는 한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경찰서가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시겠어요?' 그 남자는 더듬거리는 영어로 서툴게 대답했다. "저는 영어를 못 해요. 그래서 당신을 도와드릴 수가 없어요. 하지만......." 다나는 입을 모아서 천천히 발음했다. "뽈리스, 뽈리스(경찰서)." "아, 위. 라 되지엠므 뤼 아 고슈(아, 알겠어요. 왼쪽으로 두 번째 길에 있습니다)." 남자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메르시(고맙습니다)." "드 리앙(천만에요)." 경찰서는 하얀색 담장이 둘러진 낡고 허름한 건물이었다. 경찰서안에는 경찰관 제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다나가 안으로 들어가자 그는 고개를 들고 인사를 했다. "봉쥬르, 마담." "봉쥬르." "꼬망 쥐 쥬 브 제데(어떻게 오셨나요)?' "영어 할 줄 아세요?"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네." "이곳을 담당하고 있는 분과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그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갑자기 미소지었다. "아하, 프라지에 서장님 말이군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는 수화기를 들고 통화를 했다. 잠시 후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나에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손으로 복도를 가리켰다. "첫번째 방입니다. " "고마워요." 다나는 복도를 걸어가서 첫번째 방문 앞에 섰다. 프라지에 서장사무실은 작고 깔끔했다. 서장은 작고 날렵한 체구에 콧수염을 기른 갈색 눈의 남자였다. 왠지 꼬치꼬치 캐묻기를 좋아할 것 같은 인상이었다. 다나가 들어가자,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서장님." "봉쥬르, 마드모아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제 이름은 다나 에반스예요. 저는 워싱턴 D.C.에 있는WTN 방송국의 기자입니다. 지금 윈스롭 가에 대한 뉴스 계작을 진행하고 있어요. 이곳에 온 것은 폴 윈스롭이 이 근방에서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고 들었기 때문이에요." "그렇습니다. 끔찍했죠! 끔찍했어요. 절벽 도로를 달릴 때는 누구든지 매우 조심해야만 합니다. 아주 위험할 수 있으니까요." "제가 듣기로는 폴 윈스롭이 자동차 경주 중에 사고를 당했다고....... " 서장이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그날은 자동차 경주가 없었어요." "자동차 경주가 없었다고요?" "없었습니다, 마드모아젤. 그 사고가 일어난 날은 제가 일직을 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 자동차 경주는 없었습니다. " "그렇군요. 그럼 현장엔 윈스롭 씨의 자동차만 있었나요?" "위. 마드모아젤." "프라지에 서장님, 시신 부검은 했나요?" "위. 물론이죠." "폴 윈스롭의 혈 중에 알코올 성분이 있었나요?" 프라지에 서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마약은 요?' "아니요." "혹시 그 날 날씨가 어땠는지 기억하시나요?" "위. 비가 내렸죠." 다나는 마지막 질문을 남겨두었지만, 희망을 포기하고 담담하게 물었다. "혹시 사고를 목격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위, 있습니다. " 다나는 서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있다구요?" "한 사람이 목격을 했지요. 윈스롭의 자동차 뒤에서 운전하고 있다가 사고를 목격했답니다." 다나는 마구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목격자의 이름을 알려주신다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그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어요." 서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죠. 알아보겠습니다. " 그는 크게 소리쳤다. "알렉산더!" 잠시 후 부하 경관이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위, 서장님?" "윈스롭 사건의 서류를 갖고 오게." "알겠습니다. " 부하 경관은 다시 급히 방을 나갔다. 프라지에 서장은 다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말이지 불행한 가족입니다. 인간의 삶이란 덧없는 것이죠." 그는 다나를 유심히 바라보면서 미소지었다. 다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서장은 다시 말했다. "그러니 누구든지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만합니다. " 그리고 그는 야룻하게 덧붙였다. "여자도 마찬가지죠. 이곳엔 혼자 오셨습니까, 마드모아젤?" "아니요, 남편과 아이들이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서장은 의자 뒤로 몸을 기대고 않았다. "그거, 유감스럽군요." 부하 직원이 서류를 갖고 돌아오자, 서장은 그 서류를 살펴본 다음에 고개를 고덕이고 다나에게 보여주었다. "그 사고의 목격자는 미국인 여행자, 랠프 벤자민 씨입니다. 진술에 따르면, 그가 폴 윈스롭의 자동차 뒤에서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시엥, 그러니까 개 한 마리가 윈스롭의 자동차 앞으로 뛰어들었답니다. 윈스롭은 개를 치지 않으려고 자동차의 방향을 꺾었고, 그러자 자동차가 크게 미Rm러지면서 절벽에서 떨어져 바닷 속에 빠졌지요. 검시관의 보고에 따르면, 윈스롭은 즉사했습니다. " "벤나민 씨의 주소를 갖고 있나요?" 다나는 한껏 기대에 부풀어서 물었다. "위. " 서장은 다시 서류를 힐낏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미국에 삽니다. 유타 주 리치필드, 터크 가 420번지로군요." 프라지에 서장은 주소를 옮겨쓰고 나서 그 종이를 다나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솟구치는 흥분을누르기 위해서 노력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천만에요, 제 일인걸요." 서장은 아무 반지도 끼지 않은 다나의 맨손가락을 쳐다보았다. "아참, 마담?" "네?" "당신 남편과 아이들에게 인사나 전해주십시오." 다나는 매트71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흥분해서 말했다. 매트, 폴 윈스롭의 사고를 목격한 사람을 찾았어요. 그를 인터뷰하러 가겠어요." "그거 잘했군. 목격자가 어디 살고 있소?' "유타 주 리치필드에요. 그곳에 갔다가 바로 워싱턴으로 돌아가겠어요." "좋소. 그런데, 제프가 전화를 했소." "그래요?" "제프가 전 부인과 함께 플로리다에 있다는 건 물론 당신도 알고 있을 거요." 매트의 목소리는 비난하듯이 들렸다. "알고 있어요. 그녀가 매우 아파요." "제프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운다면, 나는 그에게 휴직계를 내라고 할 수밖에 없소." "그는 곧 돌아올 거예요." 파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좋소. 목격자와의 일이 잘되길 빌겠소." "고마워요, 매트." 다나는 다음에 케말에게 전화를 걸었다. 달레이 부인이 받았다. "에반스 씨 댁입니다. " "안녕하세요, 달레이 부인. 거긴 별 일 없죠?" 다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물었다. "글쎄요, 당신 아들이 지난 밤에 내가 요리하는 것을 돕다가 부엌을 홀랑 태울 뻔했지요." 달레이 부인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지만 그것만 빼고는, 그 앤 잘 지내고 있답니다. " "마음이 놓이네요." 다나는 마음속으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이 여자는 정말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야.' "지금 집으로 올 건가요? 그럼 저녁을 준비해놓고......." "한군데 더 들러야만 해요. 내일이나 모레면 돌아갈 수 있어요. 케말 좀 바꿔주실래요?" "케말은 자고 있어요. 아이를 깨울까요?" "아니, 아니에요." 다나는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워싱턴은 이제 겨우 오후4시일 것이다. "케말이 낮잠을 자는 건가요?" 달레이 부인이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요. 그 총각은 긴 하루를 보냈답니다. 열심히 뛰놀고 열심히 움직였지요." "그 애가 깨어나면 사랑한다고 전하주세요. 곧 돌아가겠다구요." 한 군데 더 들러야만 해요. 내일이나 모레면 돌아갈 수 있어요. 케말 좀 바꿔 주실래요? 케말은 자고 있어요. 아이를 깨울까요?" 아니, 아니에요. 케말이 낮잠을 자는 건가요? 그래요. 그 총각은 긴 하루를 보낸답니다. 열심히 뛰놀고 열심히 움직였지요. 그 애가 깨어나면 사랑한다고 전해주세요. 곧 돌아가겠다구요. 테이프가 끝났다. 유타 주 리치필드는 먼로 산맥의 한가운데에 우묵하게 자리 잡은 쾌적한 주거형 도시였다. 다나는 주유소에 들러서 프라지에 서장이 알려준 주소로 찾아가는 길을 물었다. 랠프 벤자민의 집은 똑같은 모양의 벽돌집들이 줄지어 서 있는 낡은 일층 주택이었다. 다나는 빌린 자동차를 주차시키고 현관으로 걸어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앞치마를 두른 머리가 하얀 중년 여자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죠?" "랠프 벤자민 씨를 만나고 싶은데요." 다나가 말했다. 여자는 다나를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 사람과 약속을 했나요?" "아니요. 전....... 전 단지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른 거에요. 안에 계신가요?" "그래요. 아무튼 들어오세요." "고맙습니다. " 다나는 현관으로 들어가서 여자를 따라서 거실로 갔다. "랠프, 당신에게 손님이 왔어요." 랠프 벤자민이 흔들의자에서 일어나 다나를 향해서 몸을돌렸다. "안녕하세요? 누구신가요?" 다나는 얼어붙은듯이 그 자리에 섰다. 랠프 벤자민은 장님이었다. 14 거대한 도시 주노 다나와 매트 베이커는 WTN 회의실에 마주앉았다. "랠프 벤자민은 프랑스에 있는 아들을 방문한 적이 있어요." 다나는 침착하게 설명을 계속했다. "그런데 어느 날 호텔 방에 둔 그의 서류 가방이 없어졌대요. 서류 가방은 다음날 다시 찾았지만 여권은 없어졌대요. 매트, 여권을 훔쳐서 벤자민의 이름을 도용하고 경관에게 사고를 목격했다고 말한 그 사람이 바로 폴 윈스롭을 살해한 자예요." 매트 베이커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젠 경찰에게 수사를 요청할 때야, 다나. 만약 당신 생각이 옳다면, 우리가 뒤쫓는 그 자는 무참하게 여섯 사람을 살해한 살인마라구. 나는 당신이 일곱 번째 희생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소. 엘리어트사장 역시 당신을 걱정하고 있어. 그는 당신이 이 일에 너무 깊이 개입했다고 생각하고 있소." "아직은 경찰을 부를 수가 없어요." 다나는 강하게 주장했다. "아직은 모든 게 추정일 뿐이에요. 우린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요. 살인자가 누구인지도 전혀 알지 못해요. 왜 살인을 했는지도 모르구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너무 위험해지고 있단 말이야. 나는 당신이 무슨 일을 당하는 걸 원하지 않소." "나도 마찬가지예요." 다나는 솔직하게 자신이 느끼는 불안을 인정했다. 매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이젠 어떻게 할 거지?" 다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줄리 윈스롭에게 진짜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밝혀야죠." "수술은 잘됐어." 레이첼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무균 처리된 하얀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눈에 흐릿하게 제프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게‥‥‥ 없어졌군요?" "레이첼......." "만지기가 두려워요. 나는 이제 더 이상 여자가 아니에요. 어떤 남자도 날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레이첼은 눈물을 참으려고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제프는 그녀의 떨리는 손을 꼭 잡았다. "틀렸어. 나는 결코 당신 가슴 때문에 당신을 사랑한 게 아니었어, 레이첼. 내가 당신을 사랑한 건 당신이 따뜻하고 멋진 마음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었어. 어떤 남자라도 그럴 거야." 레이첼은 억지로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우린 정말로 서로를 사랑했어요, 그렇죠, 제프?" "그래." "나는 바랐어요, 우리가......."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제프가 달래듯이 말했다. 레이첼, 이야기는 나중에 해." 그녀는 제프의 손을 더욱 세게 쥐었다. "혼자 있고 싶지 않아요. 제프. 이번 상처가 완전히 아물 때까지는 싫어요. 제발 나를 떠나지 말아요." "레이첼, 나는 그럴 수가 없어......." "아직은 싫어요. 당신이 떠나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나도 모르겠어요."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자리를 좀 비켜주시겠어요, 코너스 씨." 레이첼은 제프의 손을놓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가지 말아요." 제프는 레이첼에게 약속했다. "곧 돌아올게." 그날 밤늦게 다나의 휴대폰이 울렸다. 다나는 방을 가로질러 뛰어가서 전화를 집어들었다. "다나, " 제프였다. 그녀는 제프의 목소리를 들으며 온몸이 자릿자릿할 정도의 기쁨을 느꼈다. "제프, 당신 어떻게 지내요?" "난 좋아." "레이첼은 어때요?" "수술은잘됐어, 하지만 레이첼이 자살충동을 느끼고 있어." "제프, 여자가 가슴으로 자기 가치를 평가한다는 건 말이 안 돼요. 더구나......" "알아, 나도. 하지만 레이첼은 당신 같은 보통 여자가 아니야. 그녀는 열다섯 살 때부터 계속 겉으로 보이는 외모로만 평가를 받아왔어. 게다가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모델들 중의 하나였어. 지금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모두 끝났다고 생각해. 자신을 마치 불구처 럼 느끼고 있어. 이젠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믿는 게 문제야. 마치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처럼 의욕이 없어." "당신은 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 며칠 더 레이첼과 지내면서 레이첼이 자기 집에서 안정을 취하도록 도울 거야. 의사와 이야기했는데, 암 세포가 다 제거됐는지 검사결과를 아직 지켜봐야 한다는군. 그런 다음에 화학 요법으로 치료를 계속해야 한대." 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당신이 보고 싶어." 제프가 말했다. 다나는 가슴이 저려오는 것을 느끼며 속삭였다. "당신이 그리워요, 내 사랑. 당신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두었어요. 빨리 돌아와줘요." "잘 보관해줘." "그럴게요." "이제 여행은 다 끝난 거야?" "아직 아니에요." "항상 잊지 말고 휴대폰을 켜두도록 해. 전화로 당신을 후끈 달아오르게 할 계획이니까." 다나는 미소를 지었다. "약속하는 거예요?" "약속해. 몸조심하고 잘 있어, 당신." "당신도요." 통화는 끝났다. 다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한참동안 그 자리에 앉은 채, 제프와 레이첼에 대해서 생각했다. 잠시 후에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부엌으로 걸어갔다. 부엌 식탁 앞에서 달레이 부인이 케말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팬 케이크 더 먹을래, 얘야?" "네, 고맙습니다. " 다나는 가만히 서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달레이 부인이 집에 와 있는 짧은 시간동안, 케말은 눈에 띄게 변했다. 그는 침착하고 편안하며 행복해보였다. 다나는 날카로운 질투심에 가슴이 아팠다. '아마 난 케말을 기를 자격이 없는지도 몰라.' 그녀는 하루 종일 그리고 밤늦도록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지내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케말은 그동안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던 것이다. 어쩌면 달레이 부인 같은 사람이야말로 케말에게 꼭 필요한 사람일 거야. 케말에게는 따뜻한 가정이 필요했어. 집에서 항상 자신을 기다려주고 곁을 터나지 않는 사람이.......' 다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애써 떨쳐버렸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케말은 나를 사랑해.' 다나는 식탁에 앉았다. "새로운 학교는 여전히 좋은 거지?" "짱." 다나는 케말의 손을 잡았다. "케말, 미안한데, 내가다시 여행을 가야만 해." 케말은 무관심하게 대답했다. "알았어요." 질투심이 다시 다나의 가슴을 찔렀다. "이번엔 어디로 떠나나요, 에반스 양?" 달레이 부인이 물었다. "알래스카로요." 달레이 부인은 잠깐 생각하더니 환하게 웃으면서 충고했다. "북극 곰들을 조심해요." 워싱턴으로부터 시애틀을 경유해서 알래스카로 가는 비행기 편은 아홉 시간이 걸렸다. 주노 공항에 내려서 다나는 자동차 렌트 사무소를 찾아갔다. "제 이름은 다나 에반스예요, 저는......." "네, 에반스 양. 멋진 랜드로버를 준비했습니다. 10번 구획입니다. 여기에 서명해주십시오." 직원에게서 열쇠를 건네받고 다나는 그 건물 뒤쪽의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주71장에는 숫자가 써진 구획들 안에 십여 대의 차량이 서 있었다. 다나는 10번 구획으로 걸어갔다. 하얀색 랜드로버 뒤에 한 남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서 배기관을 만지고 있었다. 그는 다나가 다가가자 고개를 들었다. "방금 배기관을 조였습니다. 아가씨. 이제 타셔도 좋습니다. " 그는 끙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고맙습니다. " 다나가 말했다. 남자는 다나가 자동차를 몰고 떠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정부 건물의 지하실 안에서 그 남자는 컴퓨터상에 떠오른 전자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하얀색 랜드로버가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는 것을 지켜보면서 누군가71게 천천히 상황을 알렸다. "물건이 스타 힐로 향하고 있다. " 다나는 주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주노는 처음에는 마치 거대한 도시처럼 보이지만, 좁고 구불구불한 거리들은 이 알래스카 주의 수도를 얼음으로 덮인 자연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소도시와 같은 분위기를 띠게 만들었다. 다나는 시내인 워터프론트 거리에 있는 일반 호텔을 찾아갔다. 그곳은 한때 술집이었다. "손님은 스키 타기에 아주 좋은 때에 오셨군요." 호텔의 직원이 다나에게 미소지었다. "눈이 많이 왔지요. 스키는 갖고 오셨나요?" "아니요, 전......." "이런, 바로 옆집이 스키 용품 가게입니다. 분명히 손님 마음에 드실 만한 것들을 골라드릴 것입니다" "고마워요." "거기가 시작하기에 좋겠군." 다나는 짐을 풀어놓고 바로 스키 용품 가게로 갔다. 가게 점원은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수다쟁이였다. 다나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그는 떠들어었다. "안녕. 내 이름은 채드 도노호입니파. 그래요, 정말이지 좋은 가게로 오신 겁니다. " 그는 진열해놓은 스키 중의 한 벌을 가리켰다. "방금 들어온 프리라이더스입니다. 요 녀석들은 제대로 충돌과 점프를 할 줄 알죠." 그는 손가락으로 또 다른 스키를 가리켰다. "에, 또....... 이것은 살로몬 엑스 스크림 9번입니다. 찾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지난 겨울엔 재고까지 바닥이 나서 팔려고 해도 팔 수가 없었지요." 그는 다나의 얼굴에 떠오른 짜증스러운 표정을 보고 급히 옆에 있는 다른 스키를 가리켰다. "그게 아니면 보컬 버티고 G3O이나 오토믹 10.20도 있습니다. " 그는 다나의 얼굴을 기대에 찬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느 것으로 하실지?" "사실, 전 뭘 좀 물어보려고왔어요." 점원의 얼굴에 실망한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물어볼 게 있다구요?" "네. 줄리 윈스롭이 여기에서 스키를 구입했나요?" 그는 다나를 꼼꼼하게 관찰했다. "네, 그분은 언제나 최상급 볼란트 티 파워 스키를 사용했어요. 그 스키를 썩 마음에 들어 했거든요. 이글크레스트에서 그런 끔찍한 사고를 당하다니, 믿어지지가 않았지요." "윈스롭 양은 스키를 잘 탔나요?" 점원은 과장되게 놀라는 시늉을 했다. "잘 탔냐구요? 그 이상이죠. 그녀는 최고였어요. 우승한 대회만도 여러 번인걸요." "혹시 윈스롭 양이 이곳에 혼자 왔었는지 알고 계신가요?" "제가 알고 있는 한, 혼자였어요." 점원은 머리를 흔들었다. "정말 놀라운 것은 그녀가 이글크레스트를 자신의 손바닥처럼 훤히 잘 알고 있다는 거였어요. 해마다 여기에서 스키를 타곤 했거든요. 그런데 글쎄 그런 사고를 당하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안그래요?" 다나는 천천히 말했다. "도저히 있을수 없는 일이죠. " 주노 경찰서는 워터프론트 거리에 있는 여인숙으로부터 두 블록 정도 떨어져 있었다. 다나는 알래스카 주 깃발과, 주노 시 깃발, 그리고 성조기가 걸려 있는 작은 대기실로 들어갔다. 대기실에는 파란색 카펫이 깔려 있었고 파란색 소파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제복을 입은 경찰관이 물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줄리 윈스롭의 죽음에 대한 정보를 좀 얻고 싶습니다. "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브루스 보울러가 당신이 듣고 싶은 말을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바다표범 구조대의 대장이죠. 이층시무실에 있는데 지금은 자리에 없습니다. " "어디로 가야 그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요?" 경관은 자신의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그를 잡으려면 지금 바로 선착장에 있는 행거로 가야만 합니다. 마린 도로를 따라서 두 블록 가세요." "정말 고맙습니다. " 다나는 경찰서를 종종걸음으로 나왔다. 행거는 선착장에 있는 커다란 식당이었다. 그곳은 점심 식사를 하려는 사람들로 무척 붐비고 있었다. 여급이 다나에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지금은 빈 테이블이 없어요. 20분정도 기다리셔야......." "나는 브루스 보울러 씨를 찾고 있어요. 어디 있는지 알아요?" 여급은 고개를 고덕였다. "브루스요? 저 테이블이에요." 다나는 고개를 돌려서 바라보았다. 쾌활한 얼굴에 소박한 인상을 풍기는 사십 대 남자가 혼자 앉아 있었다. "고마워요." 다나는 그를 향해서 걸어갔다. "보울러 씨?" 그는 고개를 들어서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렇소." "제 이름은 다나 에반스예요. 당신 도움이 필요합니다. " 그는 미소를 지었다. "운이 좋구려, 마침 우리 집에 빈 방이 하나 남아 있소. 내가 주디에게 전화를 해두리다. " 다나는 어리둥절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침대와 아침식사를 제공받으며 편안하게 숙박할 수 있는 곳을 찾는 게 아니었소?" "오, 아니에요. 전 줄리 윈스롭에 대해서 당신에게 물어볼 게 있어요." 그는 당황했다. "허참, 미안합니다. 자자, 앉아요. 내 아내 주디와 나는 교외에 작은 여인숙을 운영하고 있지요. 그래서 당신이 방을 구하는 줄 알았지뭡니까. 참 점심은 드셨소?" "아니요, 전......." "그럼, 나와 함께 듭시다. " 그는 친절하게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 다나는 보울러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다나가 주문을 끝내자, 브루스 보울러가 말했다. "줄리 윈스롭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뭔가요?"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요. 그 일이 사고가 아닐 가능성이 있나요?" 브루스 보울러는 이마를 찌푸렸다. "당신 말은 줄리 윈스롭이 자살한 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오?" "아니에요. 제 말은....... 누군가 그녀를 살해할 수도 있지 않았느냐는 뜻이에요." "줄리를 살해한다? 그렇지 않소. 그건 사고였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에게 말해주시겠어요?" "그럽시다. " 브루스 보울러는 잠시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지 생각했다. "여기에는 세 개의 다른 스키 활주로가 있소. 초보자용 활주로인 머스케그. 돌리 바든, 그리고 서도프가 있고....... 좀더 어려운 활주로로 슬루이스복스, 마더로드, 그리고 선댄스가 있소. 또 정말로 어려운 코스로는 인새인, 스프루스, 슈트, 행 텐이 있고 그런 다음에 스티프 슈트가 있소. 그곳이 가장 험한 코스요." "그럼 줄리 윈스롭이 스키를 타고 있던 곳이?" "맞소. 스티프 슈트였소." "그러니까 그녀는 노련한 스키 선수였군요." "정말 그랬소." 잠깐 브루스는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건 솔직히 뜻밖이었소." "뭐가 말인가요?" "그게 말이오, 우린 매주 목요일마다 오후4시부터 9시까지 밤 스키를 탈 수 있게 하고 있소. 그날 밤은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스키를 탔소. 그리고 줄리를 제외하고는 모두들9시까지 돌아왔더랬소. 우린 그녀를 찾아다녔지. 그러다가 스티프 슈트 활주로 밑에서 그녀의 시신을 발견했소. 나무와 충돌했던 거요. 즉사할 수밖에." 밀려드는 공포와 고통을 느끼며 다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녀는 혼자였나요?' "그렇소. 스키를 타는 사람들은 대개 친구나 가족과 함께 여행을 다니지만, 때때로 뛰어난 스키어들은 혼자 마음껏 기교를 부리며 스키를 타고 싶어 하기도 해요. 우리는 스키를 타는사람들에게 위험 지역이니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판을 스키장 이곳저곳에 설치해놓았소. 그런데 줄리 윈스롭은 그 경계선 밖에서 스키를 탔던 거요. 우린 줄리 윈스롭의 시신을 찾느라 무척 애를 먹었소." "보울러 씨, 스키를 타던 사람이 없어지면 어떤 조처를 취하게 되나요?" 브루스 보울러는 어깨를 으쓱했다. "누군가 실종됐다는 신고를 받으면, 우린 그 즉시 지긋지긋한 수색부터 들어가오." "지긋지긋한 수색이라뇨?" "우선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실종된 사람이 그들과 함께 있는지 알아보는 거요. 그 다음엔 술집에 차례차례 전화를 걸어요. 신속하면서 기분 더러운 조사지. 하지만 그렇게 하면, 술에 절어서 술에 골아떨어져 있는 술주정뱅이를 찾느라고 괜히 소동을 피우는 일을 막을 수가 있소. 우리 동료들의 수고도 덜어주고 말이오." "그런데 만약 누군가 정말로 없어지면요?" 다나는물었다. "사라진 사람의 생김새와 스키 실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를 알아보죠. 그리고 카메라를 갖고 있었는지도 항상물어보고." "왜 그걸 물어보죠?" "카메라를 갖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사진을 찍기 좋은 장소를 찾아 다녔을 테니까 말이오. 그것을 실마리로 실종자가 갔을 법한 곳을 찾아낼 수 있소. 또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면 어떤 길을 이용할 것인지도 살피지. 그래도 자취를 찾을 수가 없으면, 그때는 실종된 사람이 스키 경계선 밖에 있다고 보면 돼요. 우린 실종자 수색과 구조를 위해서 알래스카 주 경찰에게 신고를 하고 경찰은 헬리콥터를 띄우는 거요. 보통 네 사람이 수색조 한 팀을 이루는데, 시민 자원봉사자들도 끼어 있소." "많은 인력이 투입되는군요." "물론이오. 하지만 알아둬요. 여기 스키장은 77만 평이나 된다오. 그리고 우린 일 년에 평균 마흔 번의 수색을 하곤 하지요. 그래도 대부분은 성공적이었소." 브루스 보울러는 창문으로 눈을 돌려서 차가운 느낌의 청회색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날도 그러려니 생각했었지." 그는 다시 다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쨌든, 스키 순찰대는 매일 밤 리프트가 정지된 이후에 순찰을 돌지요." 다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체가 듣기론 줄리 윈스롭이 종종 이글크레스트 정상에서 스키를 타곤 했다는데요. 그년에겐 익숙한 코스가 아니었나요?"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그렇소. 하지만 그게 언제나 사고를 예방하진 못해요. 날씨가 흐려질 수도 있고, 방향을 잃을 수도 있소. 아니면 운 나쁜 일을 당할수도 있고 말이오. 가엾게도 줄리 윈스롭은 운이 나빴소." "어떻게 그녀의 시신을 찾았죠?" "메이데이가그녀를 발견했소." "메이데이요?" "우리가 데리고 있는 가장 뛰어난 구조견이오. 스키 순찰대는 검은 래브라도 종 개나 세퍼트와 함께 작업을 해요. 개들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죠. 녀석들은 바람에서 사람의 냄새를 맡고 냄새가 나는 곳으로 달려가서 위 아래로 뛰어다닙니다. 우 리는 사고 현장으로 폭격기를 보내서......." 다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폭격기라뇨?" "아, 눈 자동차를 우린 그렇게 부른답니다. 아무튼 우리는 눈 속에 거의 반쯤 묻힌 줄리 윈스롭의 시신을 그 자동차 뒤에 실어왔소. 세 명의 응급 구조 요원들이 심전도 모니터로 그녀의 심장을 체크하고 그런 다음에 사진을 찍고 장의사를 부르더군. 그 사람들이 그녀의 시 신을 바틀렛 레저널 병원으로 데려갔소." "그럼 아무도 그 사고가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지 모르나요?" 그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우리가 아는 건 그녀가 심보 나쁜 거대한 나무를 만났다는 게 전부요. 상당히 끔찍한 광경이었소." 다나는 브루스 보울러를 쳐다보았다. "제가 이글크레스트 정상을 둘러볼 수 있을까요?" "안 될 게 있겠소? 점심을 마저 먹읍시다, 그런 다음에 내가 안내를 하리다. " 그들은 지프 차를 산 아래쪽에 있는 오두막 집으로 몰았다. 브루스 보울러가 다나에게 말했다. "이 건물은 우리가 인명 수색과 구조 계획을 세우기 위해 모이는 장소요. 우리는 여기로 임대용 스키를 운반하고 원하는 사람에게 스키 강습을 하죠. 자, 이제 이걸 타고산 정상으로 올라갈 거요." 그들은 이글크레스트 정상으로 향하는 타미건 리프트에 올라탔다. "당신에게 경고를 해야 했는데. 이런 날씨엔 말이오, 두툼한 외투, 긴 내의, 그리고 옷을 겹겹이 껴입어야만 해요." 하지만 다나는 외투를 하나 걸쳤을 뿐, 모자조차 쓰지 않았다. 다나는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절, 절대로 잊지 않겠어요." "줄리 윈스롭은 이 리프트를 이용했소. 등짐을 갖고 말이오." "등짐이오?" "그렇소. 눈사태용 삽, 길을 잃었을 때 멀리까지 신호를 보탤 수 있는 조명탄, 그리고 탐사용 지팡이가 들어 있는 배낭이오." 그는 한숨을 쉬었다. "물론, 느닷없이 커다란 나무와 충돌했을 때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들이지만 말이오." 그들은 거의 정상에 이르렀다. 승강장에 도착한 그들이 조심스럽게 리프트에서 내리자, 한 남자가 그들을 맞았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올라왔나, 브루스? 누가 실종됐나?" "아닐세. 친구에게 구경 좀 시켜주려고. 이쪽은 에반스 양이야." 그들은 서로 인사를 교환했다. 다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몸을 녹일 수 있는 오두막이 잔뜩 흐린 날씨 속에 서 있었다. 다나는 이곳에서 있었을 줄리 윈스롭을 떠올렸다. '줄리 윈스롭이 스키를 타기 전에 저기에 갔었을까?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녀의 뒤를 쫓았을까? 누가 그녀를 죽이려고 했을까?' 브루스 보울러가 다나에게로 몸을 돌렸다. "바로 여기 타미건이 이 산의 정상이오. 여기서부터는 모두 내리막 길로 되어 있소." 다나는 몸을 돌려서 눈 아래 끝없이, 끝없이 펼쳐진 눈 덮인 산을 내려다보면서 공포와 추위로 몸을 오싹 떨었다. "추워 보여요, 에반스 양. 이제 그만 내려가는 게 좋겠소." 조금만 더 있다가는 동사라도 할 것 같았다. 다나는 파랗게 언 입술을 달싹거렸다. "고맙습니다."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다나는 문을 열었다. 몸집이 크고 얼굴이 창백한 남자가문 앞 에 서 있었다. "에반스 양입니까?" "네, 제가 에반스예요." "안녕하세요. 제이름은 니콜라스 버든입니다. '주노 엠파이어' 신문사에서 나왔습니다. " "신문사라구요?" "당신이 줄리 윈스롭의 죽음을 조사하고 있다던데요? 그것에 대해서 기사를 쓰고 싶습니다." 다나의 머릿속에 요란스러운 경보음이 울려퍼졌다. "잘못 알고 오셨군요. 전 어떤 조사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남자는 의심쩍은 눈빛으로 다나를 쳐다보았다. "제가 듣기엔......." "우린 스키의 세계라는 프로그램을 찍고 있어요. 이건 단지 그 중의 일부일 뿐이에요." 그는 잠시 서서 무언가생각하더니 말했다. "알겠습니다. 귀찮게 해서 미안합니다. " 다나는 돌아서서 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저 사람은 어떻게 내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았을까? 다나는 주노 엠파이어 신문사에 전화를 걸었다. "수고하십니다. 거기 기자 분과 통화를 하고 싶은데요, 니콜라스 버든이라고......." 다나는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다구요? 네, 알겠습니다." 다나가 짐을 싸는 데는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당장 여기에서 나가서 다른 장소를 찾아야겠어. 안전한곳으로 말 이야.' 갑자기 그녀의 머릿속에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침대와 아침 식사 제공받으며 편안하게 숙박할 수 있는 곳을 찾는 게 아니었소? 운이 좋구려. 마침 우리 집에 빈 방이 하나 낳아 있소. " 다나는 계산을 하러 로비로 내려갔다. 호텔 직원이 그녀에게 여인숙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고 약도도 그려주었다. 정부 건물의 지하실 안에서, 그 남자는 컴퓨터상에 떠오른 전자지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물건이 서쪽 방향, 도심지로 움직이고 있다. " 침대와 아침 식사를 제공받으며 편안하게 숙박할 수 있다는 그 여인숙은 일반적인 알래스카 양식의 일층짜리 짤끔한 건물로서 주노 시내에서 30분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완벽해.' 다나는 쾌적해 보이는 건물을 보면서 안심했다. 현관에서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열리면서 삼십 대의 인상 좋은 여자가 환한 미소를 띠면서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네, 부인의 남편을 만났는데요, 빈 방이 하나 있다고 하시더군요." "맞아요. 제 이름은 주디 보울러예요." "다나 에반스예요." "들어오세요." 다나는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두리번거렸다. 여인숙은 돌로 쌓은 벽난로가 있는 크고 안락한 거실, 하숙인들이 식사를 하는 식당, 욕실이 딸린 두 개의 침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저는 모든 요리를 여기에서 한답니다. " 주디 보울러가 집 안을 안내하면서 말했다 "꽤 쓸 만하거든요." 다나는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제가 기대했던 대로예요." 주디 보울러는 다나가 묵을 방으로 안내해주었다. 방은 깨끗하고 가정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다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여행 가방을 풀었다. 여인숙에는 한쌍의 부부가 더 묵고 있었는데,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누구도 다나가 유명한 앵커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다나는 다시 도심 쪽으로 자동차를 운전했다. 그녀는 클리프 하우스라는 술집으로 들어가서 마실 것을 주문했다. 술집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은 모두 햇빛에 그을리고 건강해보였다. '당연하겠지.' 다나는 눈 덮인 스키장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날씨가 좋네요." 다나는 젊음이 넘치는 금발의 바텐더에게 말을 걸었다. "네. 스키를 타기에 썩 좋은 날씨죠." "당신은 스키를 자주 타나요?" 그는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타죠." "내 생각엔 너무 위험한운동이에요." 다나는 일부러 과장되게 한숨을 쉬면서 말을 이었다. "친구 한 명이 몇 달 전에 여기에서 사고로 죽었거든요." 바텐더는 닦고 있던 유리잔을 내려놓았다. "죽었다고요?" "네. 줄리 윈스롭이오." 그의 얼굴빛이 흐려졌다. "윈스롭 양은 여기에 자주 오곤 했어요. 좋은 여자였는데." 다나는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난 그게 사고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답니다. " 그의 눈이 놀라서 휘둥그레졌다. "그게 무슨 말이죠?" "그녀가 살해되었다는 거예요." "살해되었다구요?"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말도 안 돼요. 그건 사고였어요." 20분 후, 다나는 프로스펙터 호텔의 바에 앉아서 다른 바텐더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날씨가 좋네요." "스키 타기 좋은 날이죠." 다나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내 생각엔 너무 위험해요. 친구 한 명이 여기에서 스키를 타다가 죽었어요. 아마 당신도 그녀를 알지 모르겠군요. 이름이 줄리 윈스롭이에요." "오, 그럼요. 전 그녀를 무척 좋아했어요. 제 말은, 그러니까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조금도 잘난 척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녀는 진짜 소박한 사람이었어요." 다나는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런데 난 그게 사고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답니다. " 그 순간 바텐더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도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요." 다나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래요?" 바텐더는 음모라도 꾸미듯이 몸을 앞으로 숙이며 속삭였다. "그럼요. 저 망할 놈의 별자리 때문이죠." 그녀는 스키를 신고 산의 정상에 서 있었다. 살점이 떨어져나갈 듯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발 밑에 펼쳐진 가파른 골짜기를 바라보면서 내려갔다 올 것인지 망설였다. 갑자기 그녀는 뒤에서 힘껏 떠미는 힘을 느꼈다. 다음 순간 슬로프 위를 맹렬한속도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빠르게 점점 더 빠르게 미끄러져가는 그녀의 눈앞에 거대한 나무가 가까이 다가왔다. 아-악! 나무와 부딪치기 직전, 그녀는 눈을 떴고 비명을 질렀다. 다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줄리 윈스롭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누가 그녀를 죽음으로 몰았던 것일까?' 엘리어트 크롬웰은 참을 수가 없었다. "매트, 도대체 제프 코너스는 언제 돌아오는 건가? 우린 그가 있어야만 해." "곧 올 겁니다. 계속 연락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다나는 어떻게 된 건가?" "지금 알래스카에 있습니다, 엘리어트 사장님. 왜 그러십니까?" "다나가 하루빨리 방송국으로 돌아와야 해. 우리 저녁 뉴스 시청률이 떨어지고 있단 말일세." 매트 베이커는 초조해하는 크롬웰의 얼굴을 힐낏 바라보았다. 그는 엘리어트 크롬웰이 걱정하는 진짜 이유가 과연 그것 때문인지 의아스러웠다. 아침이 되자, 다나는 옷을 단단히 입고 시내 중심가로 들어갔다. 공항에서 탑승할 비행기의 안내 방송을 기다리던 다나는 구석에 앉아 있는 어떤 남자가 이따금씩 그녀를 쳐다보는 것을 눈치챘다. 이상하게도 그의 얼굴은 낯이 익었다. 그는 어두운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다나로 하여금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나는 그게 누구였는지를 기억해냈다. 그녀가 아스펜 공항에서 보았던 다른 남자였다. 그 남자또한 어두운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다나의 기억을 자극한 것은 그의 옷차림이 아니었다. 그들의 태도가 문제였다. 그들은 둘 다 불쾌하고 거만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지금 그 남자는 거의 노골적인 경멸의 시선으로 그녀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다나는 그들의 몸에서 역겨운 피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윈스롭 가문의 비극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다나가 비행기에 탑승하자, 그 남자는 휴대폰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곧 공항을 떠났다. <하권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