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소개) * 시드니 셀던(Sidney Sheldon) 시드니 셀던은 지금까지 세계 30여 개국에서 1억부 이상 책이 팔린 초베스트셀러 작가이며, 그의 모든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진 진기록을 갖고 있다.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난 그는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힘들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때 호텔보이로 일하면서 작곡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작곡가로 성공학 가망성이 없자 17살의 나이에 할리우드 가서 고생 끝에 꿈에도 그리던 시나리오 작가가 되었다. 제2차 대전 때 공군 조종사로 복무하고 제대한 뒤 다시 뮤지컬과 시나리오를 써서 크게 성공한다. 그 뒤 우연한 기회에 첫번째 소설 (벌거벗은 얼굴)을 쓰게 되었다. 이 작품이 미국추리작가협회상을 받고 베스트셀러가 되자 그 뒤부터는 계속 소설을 쓰고 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깊은 밤 깊은 곳에), (시간의 모래밭), (별빛은 쏟아지고)등이 있다 (작가의 말) " writing stories for young readers was a new experience for me. I hope these stories would help broaden their knowledge of the world and their understanding of life But, most of all, I hope they would have fun reading my stories." Sidney Sheldon " 어린 독자들을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이 내게는 새로운 체험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독자들이 지식을 넓히고 인간사회를 폭넓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의 글을 재미있게 읽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시드니 셀던 (프롤로그) "조심해!" 조종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뉴욕 주 북부 상공, 12인승 제트 여객기 실버 애로우(은빛 화살)는 아팔라치아 산맥을 넘어 불어오는 강풍에 휘말려 장난감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조종사와 부조종사는 아래쪽으로 불어대는 강한 바람에 기수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실버 애로우는 정밀하게 설계되고 제작된 훌륭한 비행기였다. 그러나 바로 조금 전부터 엔진 성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호화로운 객실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승객 가운데 한 사람이 조종석으로 다가왔다. "연료 공급선에 이상이 생긴 모양이오. 엔진 출력이 계속 떨어지고 있소." 조종사는 보통 때 같으면 그에게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위급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그 승객은 비행기를 설계하고 제작한 장본인이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재벌의 창업자이자 회장인 마쓰모토 요네오. 조종사가 말했다. "이제 엔진이 아주 꺼져 버릴 겁니다." 모두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앞은 보이지 않았고, 구름 아래는 날카롭게 솟아오른 봉우리들이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비행기는 이미 엔진 출력이 떨어져 산봉우리를 넘을 수가 없었다. 점점 고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쓰모토 요네오는 잠시 계기판을 들여다보고는 아내 에이코가 있는 객실로 되돌아갔다. 그녀는 불안해하는 기색도 없이 평화롭고 의연한 표정이었다. 그는 아내가 두려움에 흔들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내의 손을 잡자 그녀는 애정 어린 눈빛으로 미소지었다. 마쓰모토 요네오는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일생은 화려했으며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맨손으로 시작한 마쓰모토 그룹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마쓰모토 그룹은 세계 각지에 열두 개의 공장과 수천 명의 고용인이 있었다. 그룹 총수인 마쓰모토는 직원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았다. 그는 갓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를 창업하던 절은 시절을 회상했다. 전자공학도로 재능을 인정받던 마쓰모토 요네오. 여러 회사에 취직할 것을 제안해 왔지만, 애인 에이코는 그에게 스스로 사업을 해 보라고 권했다. 처음 5 년 동안은 에이코와 갓 태어난 아들 마사오를 부양하는 것만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마쓰모토 요네오가 선택한 길은 험난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불타는 야망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무엇 하나 주저함이 없이 사업에 열중했다. 회사는 서서히 성장하기 시작해 크게 번창했다. 마쓰모토 그룹은 다른 회사들을 인수하기 시작했고, 어느덧 세계를 주름잡는 거대한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비행기, 컴퓨터, 카메라, 라디오, 텔레비전 등 수많은 제품을 생산하는 세계적 재벌이 탄생한 것이다. 그는 하늘을 찢어 놓는 듯한 천둥과 번개에 놀라 생각에서 깨어났다. 곧이어 대형 로켓이 지나가는 것처럼 환한 번개 기둥이 밤하늘을 밝혔다. 그 순간 사람들은 사방을 둘러싼 뾰족한 산봉우리들을 볼 수 있었다. 천둥과 번개가 그치고 모든 것이 다시 어둠 속에 잠겼다. 마쓰모토 요네오는 잡고 있던 아내의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들은 몇 분 뒤면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들 부부에겐 마쓰모토의 뒤를 이을 사랑하는 아들 마사오가 있었다. 마사오는 마쓰모토 제국을 이어받아 훌륭하게 이끌어 갈 것이다. 다시 한번 섬광이 번쩍이자 그들은 눈앞에서 지옥을 보는 듯했다. 눈 덮인 산봉우리와 끓어오르는 듯한 검은 구름들, 무섭게 달려들고 있는 거대한 산허리, 그리고 채 몇 초가 지나지 않아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 소리와 함께 수천 조각의 불덩이가 터져 나왔다. 이윽고 깊은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 끝없는 적막함을 날려 보내려는 듯 세찬 바람만이 울부짖고 있었다. 1 "커피 더 드려요?" "아뇨, 됐어요." 뉴욕 주에서 1 만 1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경치 좋은 도쿄의 근교. 이 곳에 살고 있는 마쓰모토 마사오는 아침 식사 중이었다. 총기 있는 눈에 감정이 풍부한 얼굴의 마사오는 열 여덟 살이었다. 큰 키에 체격이 좋은 잘생긴 젊은이였다. 아버지의 강인함과 어머니의 부드러움을 같이 이어받은 그는 아주 특출한 인물이었다. 고등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함 마사오는 아버지를 닮아 지도자적 기질을 타고났다. 고등 학교에서는 야구부 주장을 맡았었고,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춤추기를 즐겨서, 숙제가 없는 날엔 도쿄 시내 신주쿠의 디스코장에 가서 즐기기도 했다. 마쓰모토 가문은 세계적인 재벌이었지만 마사오는 별로 티를 내지 않았다. 그는 사람의 인간성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늘 친구들이 많았다. 마사오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올바른 태도와 신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는 고결한 이상을 위해 싸우고, 때로는 목숨까지 바치는 사무라이를 존경했다. 곧 대학에 진학할 마사오는 잠시 도쿄에 있는 마쓰모토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전자공학 분야의 재능을 물려받은 그는 자신의 새로운 구상을 언젠가는 실현시킬 생각이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 갈 무렵 고모부인 사토 데루오와 고모 사치코가 나타났다. "어서 오세요, 고모부, 고모." 마사오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들을 맞이했다. 고모가 그의 팔을 다정하게 잡으면서 말했다. "마사오야!" 마사오는 고모 사치코를 좋아했다. 사치코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인정이 많고 마음씨가 고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사람들을 반기고, 먹을 것을 주고, 즐겁게 해 주었다. 마치 작은 새처럼 잠시도 자리에 앉아 있지 않고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마사오는 그 때문에 고모를 보면 항상 벌새가 연상됐다. 반면 고모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토 데루오는 키가 크고 몸이 깡마른 사람이었다. 새까만 머리카락, 깡마른 몸과 얼굴, 얄팍한 입술 메마른 감정의 소유자라고 마사오는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고모부의 냉정하고 이해타산적인, 아니 거의 잔인하다 싶을 정도의 그 성격이 거슬렸다. 마쓰모토 사치코와 결혼한 것도 막강한 마쓰모토 가문 때문이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어찌 됐든 마사오의 아버지는 데루오에게 회사의 재정 담당 이사라는 중책을 맡겼다. 그러나 데루오는 항상 불만에 찬 표정이었다. 그의 머리가 뛰어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마사오가 불안하게 느끼는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이룩한 업적의 질적인 면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고모부 데루오는 오로지 이익에만 연연했다. "아침 드셨어요?" 마사오가 물었다. "응." 데루오의 얼굴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아주 좋지 않은 소식을 가져왔다." 순간 마사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무슨 일인데요?" "네 부모님이 어젯밤 비행기 추락사고로 돌아가셨다. 이제 막 연락 받았다." 마사오는 그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고모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다니, 그럴 리가 없어! 얼마나 정정하셨는데! 이건 악몽이야. 꿈에서 깨면 그만이야.'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고통 없이 돌아가셨다는 구나." 데루오가 말했다. 그러나 마사오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겪었을 공포와 고통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난" 마사오는 현기증이 났다. 정신을 가다듬으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어디 도대체 어디에서 사고가 난 거죠?" "미국 동부에 있는 아팔라치아 산맥이란다. 새로 세운 공장 준공식에 참석하러 가시다가 그만 변을 당하신 모양이야." 그는 조카를 팔로 감싸 안았다. "내일 아침 미국으로 떠나야 한다. 유해를 모셔 와야 장례식을 치르지." 마사오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마사오는 고모 부부와 얼마 동안 이야기했는지도 모르고 혼자 생각에 잠겼다. 그들은 온갖 말로 마사오를 위로하려고 애썼지만 마사오에게는 모두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부모님은 그의 마음속에 살아 숨쉬면서 그와 얘기하고, 아껴 주고, 함께 미래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우리 회사가 왜 이렇게 빨리 성장하는지 아니, 마사오? 그건 우리가 딴 사람들보다 일을 더 잘하기 때문이야. 정성을 들여 일하기 때문이지. 우리가 일본인으로 태어난 건 참으로 행운이야. 다른 나라에서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경우가 아주 많단다. 그건 그들이 자신만을 생각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일본인은 달라. 우리는 모두 한 가족이고, 한 사람에게 좋은 것은 모두에게 좋다고 생각한단다.' 마사오는 열두 살 때 아버지에게 했던 얘기가 생각났다. "아버지,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얘기해 봐라, 마사오." "바람이 약하게 부는데 어떻게 풍차가 돌아가는지 아세요?" "응, 알지." "그럼, 자동차가 시속 90킬로미터나 100킬로미터로 달릴 때 그 바람을 엔진 동력에 이용하면 연료를 절약할 수 있잖아요?" 아버지는 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거 아주 흥미 있는 생각이구나." 그런 다음 아버지는 마사오에게 동력손실비율의 법칙과 기계공학에서의 역학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마사오의 생각은 아주 엉뚱한 것이었지만, 아버지는 아주 훌륭한 것을 생각해 내기라도 한 것처럼 대해주었다. 마침 그 때 미국에 있는 마쓰모토 공장 전체를 관리하는 총지배인 히다카 구니오가 잠시 도쿄에 들렀다. 그 날 저녁 식사시간에 아버지는 아들이 그런 생각을 한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마사오는 금방 어린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덩치 크고 인정이 많은 히다카 구니오는 마사오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면 항상 상담자 역할을 해 주었다. 그는 도쿄에 들를 때면 잊지 않고 꼭 마사오의 선물을 사 왔다. 모두 그의 상상력과 꿈을 키워 줄 수 있는 정성 어린 선물이었다. 히다카는 올 때마다 마사오와 마쓰모토 그룹의 사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언젠가는 네가 사장이 될 거야."라고 히다카 구니오는 말했다. "그러니까 회사에 관한 것은 뭐든지 배워 둬야 돼." "우리 조카를 혼동시키지 말아요." 고모부 데로우는 히다카에게 말했다. "마사오는 아직 학교도 마치지 않았소. 그러니까 지금은 공부에만 전념하는 게 좋아요." 그러면 마사오의 아버지는 미소지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 말이 다 옳아. 먼저 학교를 마친 다음에 마쓰모토 그룹에 들어와 일을 배우는 거야." 어느 날 오후, 히다카 구니오가 미국으로 출발하기 전에 마쓰모토 요네오를 찾아왔다. "가까운 장래에 마사오를 미국으로 보내시는 게 좋을 겁니다." 마사오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네. 내 아들이 열 여덟 살이 되면 그 때 함께 자네한테 가지" 그것이 꼭 1년 전의 일이었다. '이제 열 여덟 살이 되었는데, 난생 처음 가는 미국 여행이 부모님의 유해를 가져오기 위한 길이라니' 마사오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눈물이 계속 흘렀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마사오와 고모 부부는 회사 비행기로 뉴욕을 향해 출발했다. 보통 때였더라면 미국에 간다는 사실에 잔뜩 흥분되어 있을 마사오였다. 아버지는 미국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마사오, 미국에는 큰 도시와 농장, 고층 빌딩과 목장, 산과 호수가 많이 있단다. 유럽 50개가 모인 것 같은 나라야." 아버지가 말했다. "한 주가 마치 한 나라와 같아서 주마다 독특한 개성이 있단다." 그러나 지금 미국으로 가고 있는 마사오의 심정은 비통하고 슬프기만 할뿐이었다.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슬픔을 함께 나눌 형제도 없었다. 마사오는 이젠 옛날로도 되돌아갈 수 없고, 그의 인생이 엄청나게 바뀌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앞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는 고모와 고모부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위로해 주는 그들이 고맙게 생각되었다. 최소한 자신이 완전히 외톨이가 아니라는 사실에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 "안전 벨트를 매 주십시오. 곧 착륙하겠습니다." 비행기가 케네디 공항에 착륙하자 그들은 통관 수속을 밟았다. 수속하는 동안 마사오는 미국의 분위기에 얼떨떨해졌다. 커다란 건물 안은 많은 관광객과 귀국하는 미국인들로 붐볐다. 사람들이 얘기하는 소리가 이상하고 생소하게 들려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몇 년씩이나 영어 공부를 해 온 그였다. 그런데도 영어로 말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없다니! 마치 기관총 쏘듯 말이 쏟아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천천히 말한다면 좋을 텐데' 드디어 통관 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회사의 리무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이 히가시라는 운전사는 인상이 험악하고 레슬링 선수같이 덩치가 엄청난 사람이었다. 차 트렁크에 짐을 싣고 나자 데루오가 말했다. "이제 북부로 갈 거야. 사고 지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호숫가에 회사 별장이 있거든. 오늘밤은 거기서 지내도록 하자. 내일은 부모님의 유해를 모실 준비를 해야 할거야." 마사오는 '부모님의 유해'라는 말이 너무 끔찍하게 들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히가시는 복잡한 공항을 빠져 나와 북쪽으로 차를 몰았다. 화창한 봄 날씨는 따뜻했고 시골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스쳐 지나가는 따뜻한 바람에 나뭇잎이 반짝이며 몸을 떨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경치가 오히려 마사오를 더 슬프게 했다. 사랑하는 부모님이 비극적으로 돌아가셨다는 데도 꽃이 만발하고 사람들은 웃고 떠드는 것이다. 라디오에서는 경쾌한 노래가 계속 흘러나오고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되는 것이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마사오는 슬픔에 깊이 잠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산으로 난 도로를 따라 한가로이 누워 있는 마을이며 농장이며 숲을 지나 두 시간 동안 계속 달렸다. 자동차가 '웰링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씌어진 표지판이 붙어 있는 작은 마을을 지나치자 데루오가 말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15분 뒤 그들은 별장에 도착했다. 별장은 품위 있는 4층의 전원주택이었다. 회사의 귀빈을 접대할 때 이용하던 그 별장은 산기슭에서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는 시중들어 줄 사람이 없는데 어떡하지?" 데루오가 마사오에게 미안한 듯 말했다. "우리가 갑자기 오는 바람에 그랬어. 하루 이틀쯤은 우리 손으로 해결할 수 있겠지? "예, 고모부." 마사오가 말했다. 히가시는 짐을 집안으로 옮겨 놓고 마사오를 2층 침실로 안내했다. 널찍한 침실은 바로 호수와 주변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오는 테라스로 연결되어 있었다. 한쪽에는 큰 벽난로가 있었고,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가구와 편안해 보이는 커다란 침대가 있었다. 마사오가 갖고 온 집을 풀고 있는데 데루오와 사치코가 들어왔다. "내일 모든 준비를 끝내고 모레는 도쿄로 돌아갈 예정이다." 데루오가 말했다. "고마워요, 고모부." "잠 좀 자도록 해라." "예." 사치코는 마사오를 끌어안으면서 속삭였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네가 꿋꿋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실 거야." "그러겠어요." 마사오는 약속했다. '꿋꿋해야 돼.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필요한 게 있으면" 사치코가 말했다. "우리 침실은 홀 바로 밑에 있으니 연락해라." 그러나 마사오는 그저 혼자 있고 싶었다. 혼자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지냈던 행복한 추억을 더듬어 보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마사오는 추억을 되씹으며 밤을 꼬박 새웠다. 아버지와 배를 타고 낚시하러 간 적이 있었다. 날씨는 따뜻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으며, 짭짤한 바다 내음이 산들바람에 실려왔다. 아버지는 옛날 가난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사오, 난 성공하기로 결심했단다. 나는 돈이나 성공 그 자체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고 싶었지" 그는 따뜻한 부엌에 앉아 저녁밥을 짓는 어머니를 보고 있었다. 언제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 그 눈보라치던 날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다. "글쎄, 네가 태어났을 때는 아주 추운 겨울이었는데 돈이 없어 방에 불도 때지 못할 형편이었지. 그러다 어느 날 밤 무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쳤단다. 네가 자지러지게 울어대길래 우리는 담요를 하나 더 덮어 주고, 카펫 조각까지도 갖다 덮어 주었지. 기온이 더 내려가자 우리는 네가 감기에 걸릴까 봐 온갖 것을 다 덮어 주었단다. 외투며 담요, 심지어 베개가지 말이야. 네가 숨막혀 죽지 않은 게 기적이라니까." 밤새도록 추억에 사로잡혀 있던 마사오의 귀에는 어머니의 부드러우면서도 맑은 웃음소리와 굵직하면서도 진지함이 배어 있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이제는 다시 만나 볼 수도 없고, 만지거나 안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그러나 자신의 가슴속에 부모님은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새벽 하늘이 밝아 올 무렵, 사치코가 마사오의 침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침대에 잠잔 흔적이 없는 것을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사오,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놓았다." 마사오는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요, 고모. 하지만, 배가 안 고파요." "뭘 좀 먹어야 해. 그래야 기운을 차리지." "그래요. 먹을게요." 그는 사치코를 따라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데루오는 이미 식탁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잠 좀 잤니?" "예." 그러나 뜬눈으로 밤을 새운 마사오였다. 마사오가 자리에 앉자 사치코가 밥을 앞에 갖다 놓았다. 순간 마사오는 놀랍게도 배가 몹시 고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밥을 맛있게 먹는 것이 부모님께 죄스럽게 생각되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데루오가 말했다. "오늘 아침에 손님 한 분이 오실 거야." 마사오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손님이라구요?" "와타나베 다다오 씨가 오신다."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바로 아버지의 개인 변호사라는 것이 기억났다." "그분이 왜 오시는 거죠?" 마사오가 물었다. "아버지의 유언장을 갖고 올 거야." 데루오는 마사오의 안색이 달라지는 것을 보고 말을 이었다. "네 기분은 나도 잘 알겠다. 하지만, 마사오, 마쓰모토 그룹은 세계적인 대기업이야. 누군가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야 돼. 후계자를 지명했을 거야." "예, 그렇겠죠." 마사오는 이해하려 했지만 마쓰모토 그룹의 사업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오직 그 그룹을 세우고 발전시킨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아버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와타나베 다다오는 11시 정각에 도착했다. 삐쩍 마르고 표정이 전혀 없는 와타나베는 나이를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그는 정확하고 빈틈없이 행동했다. 마사오와 고모 부부에게 먼저 애도의 뜻을 표한 다음 와타나베는 즉시 유언장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네 사람은 서재로 들어갔다. 와타나베는 책상 앞에 앉았고, 세 사람은 안락의자에 앉았다. 와타나베는 유언장을 읽기 시작했다. 그 내용에 귀를 기울여야 했지만, 아직까지도 깊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마사오는 그저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유언장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와타나베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으나, 밤을 꼬박 새운 마사오의 눈꺼풀은 내려앉기 시작했다. 변호사가 손바닥으로 책상을 탁치는 바람에 마사오는 깜짝 놀라 정신이 들었다. "그게 다입니다." 와타나베가 말했다. "요약하면, 마쓰모토 그룹과 그에 딸린 모든 권리와 재산을 마쓰모토 마사오가 이어받는다는 겁니다. 만일 마사오가 예기치 않은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경우에는 사토 데루오가 모든 권리를 이어받게 됩니다." 변호사의 말에 충격을 받은 마사오는 잠이 완전히 달아나 버렸다. 내가 세계적인 대그룹의 회장이라고!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물론 마사오가 회사를 경영할 수 있을 때까지는 고모부 데루오가 회사를 맡아 운영하며 사업전반에 관한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너무나 엄청난 이야기라서 마사오는 정신이 멍했다. 고모부 데루오의 말을 듣기 위해 정신을 집중시켜야만 했다. "아버님께서 아주 현명하게 일을 처리하셨구나." 데루오가 말했다. "네가 그분의 사업을 이어받아야지. 마사오, 내가 힘을 다해 도와주마." 고마운 마음으로 마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고모부만 믿겠습니다." 와타나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전 이제 돌아가 봐야 합니다. 유언장은 제가 즉시 법원에 등록하도록 하죠." 사치코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마사오를 쳐다보았다. "너 아주 피곤해 보이는구나. 잠 좀 더 자는 게 좋겠다." "예, 그럴까 봐요." 마사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면부족과 긴장이 겹쳐 현기증을 느꼈다.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 한꺼번에 닥쳐온 것이다. 마사오는 변호사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2층 침실로 올라갔다. 몹시 피곤했기 때문에 옷도 벗지 않고 그냥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는 이내 잠이 들어 버렸다. 마사오가 눈을 떴을 때는 캄캄한 밤이었다. '하루가 그냥 지나갔구나.' 장례 준비에 바쁜 고모부를 도와야 했는데 너무 오래 자 버린 것이다. 고모부에게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사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아직도 잠이 덜 깼지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내일이면 도쿄로 돌아갈 것이다. 친구들이 미국이 어떻드냐고 물으면 비행기와 집과 호수만 보고 왔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마쓰모토 그룹을 경영하게 되면 다시 미국을 방문해 아버지가 보여 주고 싶어하셨던 것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재에서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마사오는 서재 쪽으로 다가갔다. 고모와 고모부가 서로 언성을 높이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사오는 들어가려다가 고모부 입에서 자기 이름이 나오는 것을 듣고 멈칫했다. 일부러 엿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고모가 뭐라고 하자 고모부가 버럭 화를 냈다. "말도 안 돼! 나도 회사를 키우는 데 한몫 했어. 회사에다 내 인생을 갖다 바쳤단 말이야. 나는 회사를 이어받을 권리가 있어." "데루오, 오빠는 당신한테 아주 잘해 주셨잖아요. 오빠가" "당신 오빠는 날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았어 단 한 번도 말이야! 제대로 인정했다면 어린 마사오에게 몽땅 물려주었겠어?" "마사오는 오빠 아들이잖아요." "그 애는 아직 어린애야. 어린애가 어떻게 회사를 운영할 수 있어?" "물론 지금은 그렇지만 장래에는 할 수 있잖아요. 당신이 도와준다면 그 애가" "바보 같은 소리 마, 사치코. 나한테서 회사를 빼앗아 갈 텐데 내가 왜 마사오를 도와준단 말이야? 안 되지. 그건 너무 불공평해. 난 가만있지 않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잖아요. 유언장에는" "유언장에는 마사오가 죽을 경우 내가 마쓰모토 그룹을 이어받게 되어 있어." "하지만, 문제가" "문제는 아무 것도 없어. 마사오만 죽으면 돼." 2 마사오는 너무 놀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귀가 의심스러웠다. 고모부는 자신을 냉혹하게 죽일 생각인 것이다. 고모는 반대하겠지만, 아마 남편의 뜻을 꺾지 못할 것이다. 평소 남편의 말이라면 꼼짝 못 하는 고모였다. 순간 마사오는 서재에 들어가 고모부와 정면으로 부딪혀 볼까 생각했다. 그러나 거구의 운전사 히가시의 얼굴이 떠오르고, '여기는 시중들어 줄 사람이 없는데^36,36^우리가 갑자기 오게 돼서 말이야.' 이렇게 큰 저택에 고용인들이 없다는 것은 상식 밖이었다. 그렇다면 데루오가 일부러 그들을 잠시 내보냈을 것이다. 유언장의 내용을 짐작하고 고모부는 자신을 처치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 게 틀림없다. 히가시는 데루오의 음모를 실행할 하수인일 것이다. 거구의 히가시는 운전사라기보다는 암살 전문가 같은 인상이었다. 가슴이 어찌나 쿵쾅거리는지 고모와 고모부가 그 소리를 들을 것만 같았다. 마사오는 발소리를 죽이고 서둘러 2층 침실로 올라갔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마사오는 데루오가 거대한 마쓰모토 그룹을 몽땅 차지하는 데 유일한 방해물이었다. 마사오에게 회사를 부당하게 빼앗겼다고 데루오는 믿고 있었다. 그러나 마사오는 고모부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쓰모토 그룹을 세우고 발전시킨 사람은 바로 아버지였다. 데루오가 동참하게 된 것은 고모인 사치코 때문이었으며, 아버지는 그에게 중책을 맡겼다. 그런데도 이제 데루오는 마사오를 죽이려 하는 것이다. '유언장에는 마사오가 죽을 경우 마쓰모토 그룹을 이어받을 사람은 나라고 되어 있어.' 어떤 식으로 죽이려 할까? 데루오 자신이 의심받지 않으려면 사고나 자살로 위장해야 할 것이다. 자살 동기는 뻔했다. 마사오는 고모부가 경찰에게 설명하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 오는 것 같았다. '그 가엾은 아이는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신 충격에 그만 자살하고 만 겁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죽일 생각일가? 어떤 방법으로?' 마사오는 발코니 너머로 어둠이 짙게 깔린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순간 해답이 떠올랐다. 호수에 빠트려 죽이려 할 것이다. 데루오는 마사오를 유인해서 배에 태워 호수로 나가 히가시와 함께 어제 데루오는 내일 아침에 일본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 말은 곧 오늘 밤 마사오를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별장을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 그렇지만 어디로, 누구한테 간단 말인가? 마사오는 돈도 없고, 미국에 아는 사람도 없다. 게다가 영어로 말이 통할지도 자신이 없었다. 케네디 공항에서 사람들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해 당황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건 당했을 때 해결해야지.' 무엇보다 급한 일은 빨리 이 곳을 탈출해서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깊은 산 속에 떨어져 있는 별장 주변에는 인가가 하나도 없었다. 문득 이 곳으로 오던 길에 본 작은 마을이 생각났다. '웰링턴'이라는 이름이 머리 속에 번개처럼 떠올랐다. 마을에는 경찰이 있을 것이다. 경찰에 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면 보호를 받을 수 있겠지. 그러나 급한 것은 별장을 빠져나가는 일이다. 마사오는 발소리를 죽이며 문 쪽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을 열었다. 복도는 텅 비어있었다. 그래도 히가시와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우악스러운 히가시의 팔이 눈에 떠오르지 소름이 끼쳤다. 마사오는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하나씩 내려갔다. 서재에서는 사람 소리가 여전히 들려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세 사람 목소리였다. 데루오가 히가시를 불러들인 것이 틀림없다. 세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뻔했다. 마사오는 부엌으로 다가갔다. 문은 잠겨져 있지 않았다. 잠시 뒤 집 밖으로 나온 마사오는 마을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서 달려갔다. 마을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면서 마사오는 잠시 발을 멈추고 별장에서 무슨 소동이라도 벌어지지 않았나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사오가 빠져 나온 것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차 소리만 들리면 재빨리 숨을 준비를 하며 마사오는 웰링턴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나무 사이를 우수수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와 귀뚜라미, 개구리, 베짱이 같은 벌레 우는소리만 요란할 뿐 주위는 적막한 어둠에 싸여 있었다. 마사오는 별장에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지금쯤 이야기를 다 마쳤을지도 모른다. 미국 영화와 텔레비전 쇼를 많이 본 마사오는 경찰을 부르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사토 데루오는 경찰에 구속될 것이다. 한 시간 남짓 걷자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웰링턴은 아주 작은 시골 동네였다. 아담한 쇼핑 센터, 채소 가게, 세탁소, 약국이 서로 나란히 붙어 있었다. 모두 문이 닫혀 있었다. 큰 도로는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마사오는 그 길을 따라 걸어갔다. 그러자 '경찰서'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아담한 벽돌 건물이 나타났다. 마사오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젠 살아나게 된 것이다. 서둘러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넓은 대기실이 나타났다. 정복 차림의 경관 한 사람이 책상에 앉아 뭔가 쓰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고 마사오를 쳐다보았다. "무슨일로왔지?" 그의 말이 너무 빨라서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마사오는 멍하니 경관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무슨일로왔지?" 경관이 짜증스런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마사오는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말했다. "아저씨, 조금만 천천히 말씀해 주시면" 그제서야 경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무슨 일이지?" 하고 또박또박 묻는 것이었다. "제 목숨이 위험해요." 경관이 뭐라고 웅얼거렸는데, 마사오의 귀에는 마치 '빈민굴에는 아무도 안 산다'는 말처럼 들렸다. 물론 그 말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경관은 수화기를 들고 짧게 통화를 하더니 마사오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복도 오른쪽 첫 번째 방으로 가 봐라. 경위님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제서야 마사오는 경관이, '경위님께 전화해 보겠다'라고 말했다는 것을 알았다. "감사합니다." 마사오는 복도를 따라 갔다. 첫 번째 방문에서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가 책상에 앉아 뭔가 적고 있었다. 얼굴은 주름살 투성이였으며 입은 옷도 구겨지고 지저분했다. 계속되는 힘든 근무에 시달린 표정이 역력했다. "자리에앉아." 고개도 들지 않고 경위가 빠르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마사오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 있었다. 경위가 그제야 마사오를 쳐다보았다. "영어 할 줄 아나?" "약간요." "그럼, 거기 앉아." 마사오는 자리에 앉았다. 미국 사람들이 단어를 연달아 빨리 말하지만 않으면 알아듣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뒤 경위는 서류를 옆으로 밀쳐 놓고 마사오에게 눈길을 돌렸다. "좋아. 난 매트 브래니건 경위야. 무슨 일이지?" "저는" 마사오는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할말이 너무 많았다. "사고가 났었어요. 고모부가 날 죽이려고 해요." 말이 너무 앞뒤가 없었다. 마사오는 다시 정리해서 말했다. "제 부모님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제가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았는데, 고모부가 그 회사를 빼앗으려고 해요. 제가 죽어야 고모부가 회사를 차지할 수 있거든요." 마사오의 입에서는 말이 술술 흘러 나왔다. "운전사도 고모부와 한패^36^예요. 둘이서 짜고 저를 물에 빠트려 죽인 다음 자살로 위장하려는 거죠. 두 사람은" 경위가 손을 저었다. "잠깐! 처음부터 다시 얘기해봐.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마사오는 자신이 너무 빨리 말했기 때문에 경위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아주 천천히 다시 말했다. "전 경찰의 보호가 필요해요. 고모부가 절 죽이려 한다구요." "그래 고모부가 너를 위협했니?" "아뇨. 하지만, 고모부가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엿들었어요. 절 물에 빠트려 죽이고 사고로 위장하려고 해요." "고모부가 직접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니?" "아뇨. 꼭 그렇게 얘기한 것은 아녜요. 고모부는" "그럼, 고모부가 너를 물에 빠트려 죽이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거구나?"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절 어떻게 죽이려는지 알아요." 마사오는 다시 흥분하기 시작하면서 말이 점점 빨라졌다. "좀 진정해!" 브래니건 경위가 말했다.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그러니까 널 물에 빠트려 죽일 거라는 것은 네 짐작이고, 네 고모부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 "꼭 그렇게 말한 건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말했지?" "제가 죽어야 한다고요." 경위는 마사오의 표정을 관찰하고 있었다. "너한테 그렇게 말했니?" "아뇨. 고모한테요. 운전사한테는 나중에 말했어요." "운전사한테 뭐라고 말했는데?" 마사오는 잠시 망설였다. "그것은 모르겠어요."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구나?" "예. 하지만, 두 사람이 저를 죽일 의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아요. 그래서 제가 도망을 쳤죠." "어디서 도망쳐 온 거니?" "북쪽에 있는 프랑스식 별장에서요." "그럼, 네 고모부는 지금 거기 있니?" "예. 고모와 운전사 히가시도 함께 있어요. 히가시가 진짜 운전사인지도 의심스러워요. 제 생각에는 고모부가 절 죽이려고 고용한 것 같아요." "네 생각에?" "예."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닌데." "알아요. 저를 보호해 주세요." "너 몇 살이지?" 마사오는 별걸 다 물어 본다고 생각했다. "열 여덟 살인데요." 경위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널 도와줄게. 고모부 이름이 뭐지?" "사토. 사토 데루오." 경위는 종이에 뭔가를 적었다. 경위는 종이에 뭔가를 적었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라. 곧 돌아올 테니까. 커피라도 마실래?" "아뇨." 마사오는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어서 이 악몽이 끝나기만 빌었다. 브래니건 경위는 10분 후에 돌아왔다. "이젠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 잘 될 테니까." 순간 마사오는 안도감으로 맥이 탈 풀리며 현기증이 났다. "경위님, 정말 고맙습니다. 제가 도쿄로 돌아갈 수 있게 비행기표 한 장만 구해 주신다면 도착하는 즉시 돈을 부쳐 드릴게요." "그럴 필요는 없어." 브래니건 경위가 말했다. "이런 경우에 쓸 수 있는 예산이 있으니까." "고모부는 어떻게 되는 거죠? 당장 감옥에 가둘 건가요?" "적절하게 처리될 거야. 재판 절차를 거쳐야지." 마사오도 그쯤은 알고 있었다. 그는 '페리 메이슨'(페리 메이슨이라는 변호사가 주인공인 법정 추리물)이라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자주 보았었다. 미국은 법이 준엄한 나라다. 이젠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다. 위험이 사라진 것이다. "예, 경위님." 마사오가 말했다. "저도 알고 있어요." 그 때 갑자기 복도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면서 데루오와 히가시가 안으로 들어왔다. 마사오는 제 눈을 못 믿겠다는 듯 두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사오! 고모와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무슨 사고라도 난 줄 알았다." 데루오는 브래니건 경위에게 고개를 돌렸다. "경위님, 연락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결국 마사오는 경찰에게 속은 셈이었다. 경위는 마사오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마사오를 믿는 척하면서 데루오가 올 때까지 기다린 것뿐이었다. '내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한 내가 잘못이지. 대기업의 중역이며 이름난 사업가인 데루오를 지금 내가 살인자로 고발한다면 누가 믿겠는가? 페리 메이슨이라도 안 믿을 거야.' 브래니건 경위가 말했다. "이렇게 가출하는 애들을 돌려보내는 게 한 달에 열두 건이나 됩니다. 애들 나이가 나이라서요." 데루오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요. 게다가 마사오는 아직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는 하던가요?" 브래니건 경위는 끄덕였다. "예. 그리고 선생과 운전사가 자기를 물에 빠트려 죽일 거라는 황당무계한 얘기를 하더군요." 데루오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마사오를 바라보았다. "이런 의사의 진찰을 받게 해야겠어요." 그는 마사오 쪽으로 다가갔다. "내 몸에 손대지 마!" 마사오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리고는 브래니건 경위에게 몸을 돌려서 말했다. "경위님, 제발 살려 주세요! 저 두 사람은 절 죽일 거^36^예요." 경위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널 죽이지 않을 거야. 네 고모부는 널 잘 돌봐 주고 싶어하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이젠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아." 거구의 운전사가 마사오의 팔을 잡았다. "자, 갑시다." 히가시가 말했다. 마사오는 다시 한 번 애원했다. "경위님, 저 사람들이 절 못 데려가게 해주세요. 일본으로 돌아가게 해 주세요." "우리가 일본으로 돌아가게 해 줄 거야." 데루오가 달래듯 말했다. "네가 치료받도록 해 줄게." 데루오는 경위에게 인사를 했다.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저 애가 좋아졌으면 합니다."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데루오가 말했다. 매트 브래니건은 두 사람이 마사오를 데리고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불쌍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상도 좋고, 고모부가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맹랑한 이야기만 빼면 아주 정상적인 아이 같았다. 사토씨가 점잖은 사업가라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 애는 환각제나 헤로인 같은 약물을 복용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브래니건은 소년의 고모부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나온 데루오와 히가시는 리무진으로 마사오를 끌고 갔다. 히가시는 우악스러운 손으로 마사오의 팔을 움켜잡고 꼼짝 못 하게 하고 걸었다. 도저히 도망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런 소동을 벌이다니, 창피한 줄 알아라." 데루오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히가시는 마사오를 운전석 옆에 밀어 넣었다. 마사오 양쪽으로 데루오와 히가시가 올라탔다. 마사오는 어떻게 이 위기를 벗어날까 하는 생각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냥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 차가 별장 앞에 멈추는 순간 다시 탈출해 봐야 된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보다는 빨리 뛸 자신이 있다. 그렇다면 그 때 갑자기 팔이 따끔했다. 데루오가 마사오의 팔에서 주사바늘을 빼고 있었다. "무슨 짓이에요?" 마사오가 소리쳤다. "진정제를 좀 놓았다." 데루오가 달래듯이 말했다. "마사오, 넌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난 네가 정말 걱정스럽다. 네 고모와 난 이번 사고가 나면서부터 너에 대해 그 점을 걱정해 왔다. 네가 바보 같은 행동을 할까 봐 우리는" 별안간 말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 오는 것 같으면서 데루오의 얼굴이 마사오의 눈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머리가 무거워졌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마취제를 놓은 게 분명했다. 아니면,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없애 버리려는 건지도 모른다. "당신" 그러나 혀가 굳어지면서 말이 되지 않았다.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캄캄해졌다. 3 의식이 돌아온 마사오는 눈을 떴다. 어느 낯선 방에 누워 있었다. 머리가 띵하고 지끈지끈 아팠다. 얼마 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불안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마사오는 누운 채로 생각해 보았다. 어떻게 이 곳에 오게 되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브래니건 경위의 이야기, 데루오와 히가시가 들어와 차로 끌고 갔던 것이 생각났다. 자리에 일어나 앉자 머리가 핑 돌았다. 잠시 그대로 앉아 현기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창문이 없고 천장이 경사진 것으로 보아 별장 꼭대기의 다락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참나무로 만든 방문은 튼튼하고 단단해 보였다. 출입구 쪽으로 다가가서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문은 밖에서 잠겨 있었다. 빠져 나갈 길이 전혀 없었다. 그 때 문득 마사오는 자신이 러닝 셔츠와 팬티만 입고 있음을 알았다. 두 사람이 마사오의 겉옷을 벗겨 버린 것이다. '옷 없이는 도망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구나' 마사오는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자신의 옷을 벗겨 버린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섬뜩하게 떠올랐다. 데루오와 히가시는 경찰의 눈에 띄도록 마사오의 옷을 차곡차곡 개어 가짜 유서와 함께 호숫가에 갖다 놓을 것이다. 데루오는 용의주도하게 계획했을 테지. '불쌍한 제 조카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 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 오는 바람에 마사오는 흠칫했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마사오를 감시하는 히가시일 것이다. 그 거구에 대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도 마사오는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아무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마사오는 자신을 살해하는 대가로 히가시가 얼마를 받기로 했는지 궁금해졌다. 아마 상당한 금액일 것이라고 생각됐다. 그러나 데루오한테는 그게 문제가 아닐 테지. 마사오만 죽는다면 엄청난 재산을 차지하게 될 데루오가 아닌가!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자물쇠 여는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히가시가 출입구에 버티고 섰다. 순감 그를 밀치고 달아나 볼까 했지만, 몸무게만 해도 마사오하고는 비교가 안 되었다. "이리 나와." 히가시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잠깐 뱃놀이하러 가야 돼." 마사오가 생각한 그대로였다! 데루오와 히가시는 깊은 호수 한가운데에다 그를 빠트려 죽일 계획인 것이다. 마사오의 시체는 영원히 발견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히가시가 다가와 마사오의 팔을 꼼짝 못 하게 움켜잡았다. "가자." 히가시는 마사오를 복도로 끌고 나갔다. 별장의 위층인 4층 복도였다. 히가시의 강철같은 손이 마사오의 팔을 아프도록 움켜쥐고 있었다. "내 말 좀 들어봐요." 마사오는 필사적으로 말했다. "날 놓아준다면 고모부보다 훨씬 더 많은 보수를 드릴게요. 내가 도쿄로 돌아가면" "입 닥쳐." 히가시가 으르렁거렸다. "정말" 히가시는 손에 힘을 주면서 계단 쪽으로 등을 떠밀 듯 끌고 갔다. 3층에 이르자 발코니 너머 멀리 호수가 내려다 보였다. 갑자기 호수가 무시무시하게 보였다. 잠시 뒤면 호수에 던져져서 시체조차 찾을 수 없게 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어이없이 당할 수만은 없다. 품위 있게 높이 자란 소나무 한 그루가 발코니 가까이에 가지를 드리운 모습이 마사오의 눈에 들어왔다. 순간 마사오의 가슴은 희망으로 두근거렸다. 도망칠 기회가 생긴 것이다. 실패할 확률이 높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밖에 없다. 만일 실패하면 모든 게 끝이다. 그러나 이판사판 아닌가! 마사오의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발코니 가까이 이르렀을 때 마사오는 일부러 넘어지는 척 했다. 그러자 히가시의 몸도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사오는 있는 힘을 다해 히가시를 밀쳤다. 히가시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마사오는 벌떡 일어나 발코니로 총알같이 달려갔다. 그러나 아래를 내려다본 마사오는 순간 멈칫했다. 아래쪽 땅까지의 높이가 최소한 15미터는 될 것 같았다. 만일 그대로 떨어진다면 즉사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소나무뿐이었다. 마사오는 소나무 가지로 손을 뻗었다. 가지를 힘껏 잡아당기며 소나무로 몸을 날리려는 순간 히가시가 뒤에서 마사오의 발을 붙잡았다. 마사오는 몸부림쳤지만 소용없었다. 히가시가 팔로 목을 조이기 시작하자 마사오는 숨이 콱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마사오는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치며 간신히 히가시의 손을 벗어났다. 히가시는 마사오를 노려보며 다시 다가왔다. "여기서 아^36^예 죽여 버릴 테다." 히가시가 씩씩댔다. 히가시는 팔을 벌리고 마사오를 잡으려 했다. 마사오는 재빨리 몸을 피했다. 히가시의 손에 잡히면 끝장이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마사오는 일부러 오른쪽으로 천천히 돌았다. 소나무 쪽과 반대 방향이었다. 히가시가 가까이 다가오자 마사오는 갑자기 방향을 바꾸고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발코니 난간으로 재빨리 뛰어오른 마사오는 다시 나뭇가지를 움켜잡았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히가시가 번개같이 달려와 마사오의 발을 잡아당긴 것이다. 나뭇가지를 잡은 마사오의 손 힘이 점점 빠지기 시작했다. 이젠 끝장이다. 히가시는 이제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고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려고 그는 난간 위로 올라섰다. 순간 육중한 히가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난간이 무너져 내렸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마사오는 히가시의 몸이 난간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비명을 지르며 땅에 떨어진 히가시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의 머리는 부자연스럽게 몸에서 뒤틀려 있었다. 나뭇가지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마사오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심호흡을 했다. 난간은 무너져 없어졌고, 밑으로 뛰어내리기에는 너무 높았다. 아차 하면 마사오도 히가시와 같은 운명이 될 것이다. 마사오는 천천히 가지에서 가지로 옮겨가며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음이 점점 조급해져 갔다. 데루오가 히가시의 비명을 들었다면 어느 순간에 나타날지 모른다. 만일 여기서 다시 잡힌다면 꼼짝없이 당하게 된다. 그러나 마사오는 침착하게 나뭇가지를 하나씩 집어 가며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오랜 시간을 나뭇가지에만 신경 쓰다 보니 마침내 땅이 바로 밑에 보였다. 땅으로 뛰어내린 마사오는 움직이지 못하고 잠시 그대로 누워 호흡을 가다듬었다. 온몸이 쑤셔 오기 시작했다. 그대로 땅바닥에 누워 쉬고만 싶었으나 한시라도 빨리 그 곳을 벗어나야만 했다. 그렇지만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갈 만한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브래니건 경위에게 다시 찾아갈 수는 없었다. 다시 데루오에게 연락해서 자신을 데려가게 할 게 뻔하다. 게다가 이제는 사람이 죽었다. 마사오에게 책임을 몽땅 씌울지도 모를 일이다. 속옷 바람으로 마사오는 일어서면서 곰곰이 생각해 봤다. 돈도, 입을 옷도 없고 목숨까지 위험했다. 그 때 갑자기 집안 계단 쪽에서 불빛이 켜지는 것이 보였다. 마사오는 재빨리 몸을 돌려 무턱대고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환하게 떠 있는 보름달 아래 마사오는 계속 달렸다. 별장의 상황이 매우 궁금했다. 데루오가 히가시의 시체를 발견했을까? 그래서 날 찾고 있는 건 아닐까? 마사오의 생각에 대답이라도 하듯 뒤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 왔다. 마사오는 재빨리 길 옆 덤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잠시 뒤 낯익은 리무진이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나타냈다. 데루오가 운전대에 앉아 천천히 차를 몰면서 길 양쪽을 살피고 있었다. 마사오는 몸을 바짝 웅크리고 앉아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엔진 소리가 사라지자 마사오는 덤불 속에서 나와 다시 걷기 시작했다. 10분 뒤 자동차 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마사오는 재빨리 옆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데루오가 별장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데루오는 마사오가 아직 별장 근처 어딘가에 숨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마사오는 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웰링턴에 도착한 마사오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마을 변두리 쪽으로 걸어갔다. 경찰을 찾아가는 어리석은 짓은 다시 할 수 없다. 마사오는 어디로 갈 것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길잃은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찾아갈 곳이 없었다. 히가시와 싸우느라고 기운을 다 빼앗긴 마사오는 휴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 쉬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여기서 멈칫거리다가는 데루오에게 잡힐 것이고,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하며 마사오는 밤새도록 걷고 또 걸었다. 한 발자국이라도 데루오한테서 멀어질수록 그만큼 위험도 멀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마사오를 쓰러지지 않고 버티게 해 준 것은 데루오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였다. 데루오는 마사오의 부모님 유해가 어떻게 매장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직 마사오가 정당하게 물려받은 재산을 가로챌 생각밖에 없었다. 마사오는 부모님의 장례식만큼은 성대하게 치르리라고 마음먹었다. 어떻게 해서든 부모님의 유해를 일본으로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데루오 아니라 그 누구라도 그를 막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될지 마사오는 막막하기만 했다. 분명한 것은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그 일을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차가운 밤 공기에 속옷만 입은 마사오는 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옷을 얻어 입을 만한 곳도 없었고, 몸을 따뜻하게 할 방법도 없었다. 농가 앞을 지나가던 마사오는 따뜻하고 포근한 잠자리에 누워 자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이대로 얼마나 더 걸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앞이 캄캄했다. 설사 마사오의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을 만나더라도 데루오에게 대항하는 그의 말을 믿어 준다는 보장은 없었다. 대기업의 중역인 데루오에 비하면 마사오는 한낱 어린 소년에 불과하다. 데루오는^56,36^영어로 뭐라고 하더라^36,23^'영향력'이 있는 저명 인사인 것이다. 브래니건 경위가 마사오의 말을 믿지 않은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덫에 걸려 꼼짝달싹 못 하는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마사오는 어느 조그만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큰 길에 모여 북적대고 있었다. 순간 자신을 잡으려는 사람들인 줄 알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떠들고 웃는 것으로 보아 마을의 축제가 있는 날인 것 같았다. 당황한 마사오는 눈에 띄지 않게 길 한편으로 비켜섰다. 무슨 행사가 있는지 살펴볼 생각이었다. 길 한복판에는 팬츠와 러닝 셔츠만 입은 사람들이 최소한 스물 네 명 정도 서 있었고, 길 양편으로 옷을 제대로 입은 사람들이 모여 서 있었다. 무슨 일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가 없어서 마사오는 자세히 살폈다. 어떤 남자가 군중을 헤치고 나와 사람들 등에 번호표를 붙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제서야 마라톤 대회가 시작되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순간 마사오는 자기도 참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선수들과 차림새가 같은 마사오가 몸을 숨기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지쳐 있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거의 탈진 상태였다. 밤새도록 걸어 더 이상 걸을 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마사오는 숨어서 쉬었다가 사람들이 모두 떠난 다음에 계속 가기로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데루오의 리무진이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더 이상 피할 곳도 없는 상황에 데루오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 순간에 데루오의 눈에 띌지 모른다. 마사오는 재빨리 선수들 틈에 끼어들었다. 번호표를 나누어 주고 있던 사람이 마사오를 흘긋 쳐다보았다. "늦어서 출전하지 못할 뻔했잖아! 곧 출발할 거야." 잠시 뒤 마사오의 등에도 번호표가 붙어졌다. 선수들은 각자 자리를 찾아 출발 신호를 기다렸다. 마사오는 데루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선수들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경주에 정말 참가할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데루오가 지나갈 때까지만 선수들 틈에 끼어 있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출발을 알리는 권총이 하늘을 향해 올려지는 순간 검은색 리무진이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마사오는 다른 선수들 틈에 섞여 앞으로 달려나갔다. 리무진이 선수들 옆으로 오자 몸을 구부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리무진은 천천히 선수들 옆을 지나갔다. 밤새도록 걸어 지칠 대로 지쳤지만 데루오가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대열에서 빠져나가기가 두려웠다. 다른 선수들 틈에 끼어 있는 것만이 안전하게 숨는 방법이었다. 마사오는 빠져나갈 생각을 버리고 계속 달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보폭을 넓게 잡고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젊고 몸이 탄탄한 마사오는 얼마 되지 않아 몸에 리듬이 붙었다. 다른 선수들을 둘러보았다. 마사오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있었고, 마사오와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도 있었다. 그는 이 대회가 해마다 열리는 대회인지, 어떤 목적의 경기인지, 경기가 끝나면 어떤 행사가 있는지 등등 여러 가지가 궁금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그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선수로 뛰는 동안은 안전하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선수들이 마사오를 지켜 주는 보호막이었기 때문이다. 마사오는 호흡이 다시 안정되면서 다리에 힘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조금 속력을 내어 앞서 가는 몇몇 사람을 따라잡았다. 거리가 어느 정도 되는 경주인지 모르기 때문에 속도 조절이 어려웠다. 거리는 5킬로미터일 수도 있고, 10킬로미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다시 속력을 내자 앞서 가는 사람들을 추월했다. 얼굴에 부딪혀 오는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맘껏 들이마시며 달리는 것은 상쾌한 기분이었다. 마사오를 앞서 달리고 있는 선수는 모두 여섯 명이었다. 마사오는 다시 속력을 내서 한 명을 따라잡았다. 이제 다섯 명이 남았다. 그 다음에는 네 명 세 명 이제 마지막 두 사람과 함께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속력을 더 내기 시작했다. 마사오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속력을 냈다. 숨이 턱턱 막히며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이렇게 얼마나 달릴 수 있을 것인지 자신이 없었다. 이 경주에서 꼭 우승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우승을 하건 꼴찌를 하건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렇지만 계속 뛸 수밖에 없었다. 경주에 참가한 이상 반드시 우승해야 된다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2등은 필요 없다. 속력을 좀더 내면서 마사오는 드디어 선두로 나섰다. 팔 다리가 마치 피스톤처럼 움직였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마을 한길에 '결승전=정기 마라톤 대회'라고 쓴 현수막이 있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이 바싹 뒤를 쫓아오자 마사오는 마지막 힘을 다해 결승선을 통과했다. 순간 사람들이 그를 에워싸고 박수를 치기도 하고 악수를 청하기도 했다. 모두들 축하한다는 말을 하는 것 같았으나, 말이 너무 빨라서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여기 좀 보세요." 하는 소리에 마사오가 고개를 들어보니 텔레비전 카메라가 촬영하고 있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은 마사오의 등을 두들기고 손이라도 잡아 보려고 법석이었다. "올림픽에 나가도 되겠어요" "틀림없이 기록을 갱신했을 거요" "이 근처에 사나요^5,5,5,236^" 사람들은 마사오가 마치 무슨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대했다. 그만큼 마라톤 대회가 이 마을의 중요한 행사임이 분명했다. 마사오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대회였다. 이 경기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마사오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천천히 말해 주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품위 있게 생긴 한 남자가 마사오 쪽으로 걸어와서 손을 쳐들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주목해 주십시오!" 그러자 시끄럽게 떠들던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오늘은 우리 모두에게 아주 뜻 깊은 날입니다. 우리 마을이 영예롭게도 대통령의 전국 체력 향상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이 훌륭하고 뜻 있는 행사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도 올해로 3 년째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은" 마을 대표로 보이는 그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할 절호의 기회라는 듯 연설을 늘어놓았다. 마사오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얌전하게 서서 연설이 빨리 끝나 떠날 수 있게 되기만 기다릴 뿐이었다. 그런데 기대 밖의 일이 벌어졌다. 연설이 끝나자 남자는 마사오에게 몸을 돌렸다. "자, 우리 마을을 대표해서 당신의 영광스런 승리를 축하하는 상금을 드리겠소." 그리고는 백 달러짜리 수표를 건네주는 것이었다. 마사오에게는 기대하지 않았던 행운이었다. "감사합니다." 마사오는 말을 더듬었다. "저" 적당한 영어 단어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기쁩니다." 다시 한번 박수가 터져 나왔다. 행사가 끝나자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사오는 손에 든 수표를 들여다보았다. 무엇보다도 옷을 사는 게 급했다. 마사오는 청바지와 밝은 색 셔츠를 입고 같은 또래로 보이는 금발머리에게 다가갔다. 마사오는 수표를 들고 천천히 말했다. "미안하지만 어디서^5,5,5,236^" 현금으로 바꾼다는 영어 구절이 생각나지 않았다. 영어 공부를 더 착실히 해 두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다행히 운이 좋았다. 그가 마사오의 생각을 알아차린 것이다. "현금으로 바꾸고 싶다고? 바로 저 모퉁이에 있는 은행으로 가면 되지. 같이 가자. 내가 안내해 줄게." "미안해서 어쩌지? 고마워." "너 여기 처음이지?" 길을 건너면서 금발머리가 물었다. "응." "어디서 왔니?" "도쿄." "아, 그래. 나는 짐 데일이야. 네 이름은 뭐니?" "마사오" 마사오는 멈칫했다. "하라다 마사오." "만나서 반갑다, 마사오." 두 사람은 은행에 도착했다. 그러나 마사오는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증명서나 서류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계적인 대재벌의 상속자인 마사오이지만, 지금은 한푼 없는 거지 신세였다. 백 달러짜리 수표가 전 재산이었다. "같이 들어가자." 짐 데일이 말했다. 금발머리는 마라톤 우승자가 자기 친구라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은행으로 들어갔다. 마사오를 출납 창구로 안내한 짐 데일은 은행원에게 말했다. "퍼킨스 씨, 안녕하세요? 제 친구가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고 싶다는데요." 출납 직원이 마사오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 마라톤에서 1 등한 애로구나." 마사오는 그녀를 한참 쳐다보았다. 그녀의 말이 빨랐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시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마라톤에서 1 등한 애라구." 그제야 무슨 말인지 이해한 마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수표를 받은 은행원은 20 달러 짜리 지폐 다섯 장을 세어 마사오에게 건네주었다. "여기 있다. 백 달러야." 마사오는 돈을 받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 정도이면 식사도 하고 옷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짐 데일에게 말했다. "옷을 사고 싶은데, 혹시" 짐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지. 가자." 잠시 뒤 마사오와 짐 데일은 백화점에 들어섰다. "이게 우리 마을에서 제일 큰 백화점이야." 짐 데일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주 근사하구나." 마사오는 예의를 차리려고 말했다. 마사오가 일본에서 자주 다니던 백화점하고는 비교할 수 없이 작은 가게였다. 그러나 지금 마사오에게는 충분한 곳이었다. 정장, 청바지, 티셔츠 등 많은 옷이 진열돼 있는 의류부로 짐이 마사오를 안내했다. 청바지와 티셔츠를 골라 좁은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입어 보았다. 썩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대로 입을 만했다. 어쨌든 다시 옷을 입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사겠어요." 마사오는 점원에게 말했다. 다음 문제는 식사였다. "이 곳에 피자 집 있니?" 마사오는 짐 데일에게 물었다. 짐 데일이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뭐라고?" 자신의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한 마사오는 다시 천천히 말했다. "피자 집." 짐 데일의 얼굴이 붉어졌다. "물론 있지. 루이기라는 아주 근사한 데가 있어. 난 말이야, 일본 사람들은 음 일본 음식만 먹는다고 생각했거든." 마사오는 소리내어 웃었다. "항상 그렇지는 않아. 난 햄버거나 핫도그, 피자도 좋아해." "좋았어. 날 따라와!" 루이기 피자 집은 웃고 떠드는 고등 학생들로 시끌벅적 했다. 순간 마사오는 고향이 그리워졌다.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땅에 와 있는 이방인 신세가 몹시 울적했다. 짐 데일이 이상하다는 듯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뭐 잘못됐니?" "아냐, 괜찮아. 피자 냄새가 아주 좋은데." 마사오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피자가 나왔다. 삽시간에 해치우고 또 주문해서 세 개나 먹었다. "너 참 대단히 잘 먹는구나." 짐 데일이 말했다. "뭐라구?" "아주 식성이 좋다는 이야기야. 아마 많이 뛰어서 그럴 거야." '달리기'라는 말에 마사오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걱정이 다시 몰려왔다. 여기서 나가면 짐은 안전하고 아늑한 자기 집, 자기 가족에게로 돌아가겠지만 마사오는 가 곳이 없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옮겨 다녀야 한다. 지금으로서는 데루오와 별장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리 떨어지는 것이 상책이다. 이 곳은 위험하다. 작은 마을이었기 때문에 이방인인 마사오는 눈에 띄기 쉽다. 빨리 대도시로 가서 많은 사람들 틈에 섞이면 오히려 숨기가 편할 것이라 생각했다. "여기서 뉴욕까지는 거리가 어느 정도 되니?" 마사오가 물었다. "기차로 두 시간쯤 걸려." 짐 데일이 시계를 보았다. "20분 뒤에 출발하는 기차가 있는데" 마사오는 그 기차를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4 마사오가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한 사실을 처음 알게된 사람은 사치코였다. 저녁 뉴스 시간에 마사오가 나온 것을 우연히 본 것이다. 사치코는 남편을 불러, 두 사람은 선 채로 텔레비전을 지켜보았다. 데루오는 아침에 선수들 옆을 지나갔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 속에 마사오가 숨어 있었다니! 독 안에 든 쥐였는데! 마사오가 그렇게 빠져나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속옷 바람으로 돈 한푼 없이 도망친 마사오였다. 그에게 찾아갈 만한 친구나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마사오를 잡는 건 시간 문제였다. 하지만, 느긋하게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하루 빨리 마사오를 없애 버려야 했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찾아내야 했다. 사토 데루오가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는 사립 탐정이 있었다. 영악하고 맡은 일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해결하는 전문가로서, 이름은 샘 콜린스였다. 돈이 생기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마다 않는 사람이었다. 냉혹한 성격에다가, 무슨 일이든 끝장을 보고 만다는 그에 대한 소문이 데루오의 구미를 당겼다. 그는 수화기를 들고 샘 콜린스의 전화번호를 돌렸다. 만하튼에 도착한 마사오는 너무 복잡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웬일인지 그렇게 낯선 느낌은 아니었다. 큰 빌딩과 시끌벅적한 소리, 엄청난 사람들과 차도를 꽉 메운 차량 홍수, 도쿄와 다를 게 없었다. 그리고 미국 영화를 많이 보았기 때문에 라디오 시티 뮤직 홀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록펠러 센터와 같은 건물들은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 마사오는 별장에서 도망쳐 나온 이후 처음으로 마음이 놓였다. 이 거대한 도시에서 한 사람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거리는 바쁘게 출근하는 사람, 친구를 만나러 가는 사람, 지하철을 타러 가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 속에서 마사오는 그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떠밀리며 방황하기 시작했다. 높이 걸린 커다란 전광판을 한참 바라보다 마사오는 브로드웨이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는 일제 트랜지스터 라디오, 카메라, 텔레비전, 녹음기 등을 파는 가게가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 중 마쓰모토 그룹 제품도 많았다. 마사오는 자랑스러움으로 가슴이 부듯해지면서도, 한편 그룹의 상속 때문에 벌어진 일이 생각났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제각각의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미국은 전 세계의 인종이 모여 사는 나라라는 말이 실감났다. 제각기 다른 전통과 문화와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살고 있는 것이다. 상전 유리창에 스페인어, 불어, 독어, 일어 표시판이 붙어 있는 곳도 있었다. 날이 점점 어두워졌다. 이제는 잠잘 곳을 찾아야 했다. 길거리에서 으슥한 곳을 찾아 마사오는 주머니의 돈을 세어 보았다. 남은 돈은 모두 60 달러였다. 여관비가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돈을 아껴야 했다. 어떻게 해서든 일자리를 구해 돈을 좀 모은 다음 도와 줄 사람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마사오는 마쓰모토 그룹의 미국 내 영업을 총괄하는 히다카 구니오가 생각났다. 그는 캘리포니아 주의 로스앤젤레스에 있었다. 문제는 뉴욕에서 로스엔젤레스까지는 무료 5천 킬로미터나 되는 미국의 서쪽 끝이라는 데 있었다. 하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곳에 가야했다. 히다카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기꺼이 마사오를 도울 것이었다. 그는 마사오의 아버지를 좋아했고, 마쓰모토 가문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히다카를 생각하기만 해도 마사오는 다소 위안을 받았다. 뉴욕에 잠시 머물면서 캘리포니아에 갈 여비를 벌기로 했다. 접시 닦기나 허드레 심부름, 청소 같은 일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 일자리를 구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살아남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만큼 위험도 적어질 것이다. 결국 데루오도 마사오 죽이려는 것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토 데루오는 그렇게 호락호락 물러설 위인이 아니었다. 노련한 체스의 명수가 한 수 한 수 심사숙고하여 두어나가듯 모든 일을 치밀하게 계획해 온 극 쉽게 포기할 리 만무했다. 데루오는 샘 콜린스를 만났다. 콜린스는 소문대로 영악하고 끈질긴 인상을 주었다. 딱 벌어진 어깨에 눈은 교활하게 반짝이고, 권투 선수 같은 얼굴은 고집스럽고 끈질긴 인상이었다. 한 쪽 귀는 아^36^예 뭉개져 있었고, 코뼈는 너무 자주 부러져서 치료를 포기한 것 같았다. "여러 사람이 당신을 추천했소." 데루오가 말했다. "난 떠벌리지 않고 일할 사람이 필요하오." "그게 바로 나의 원칙입니다. 일은 철저히 마무리 짓고, 입은 봉해 버리는 거요." "좋소. 난 사내아이를 찾고 있소. 내 조카요. 신경쇠약 증세가 있는 아이지요. 찾아서 데려오시오." "왜 도망을 쳤죠?" "그것은 당신이 알 필요 없소." "그 이유를 안다면 도움이 될텐데" "여기 사진을 주겠소. 그 애는 돈도 없고 친구도 없소. 그렇게 멀리 가지도 못했을 거요." "거리를 방황하는 일본 애를 찾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죠." 데루오는 샘 콜린스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 애를 우습게 봤다가는 일을 그르칠 거요. 어떻게 해서든 숨으려 할 테니까." "좋습니다.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겠군요. 만일 그 애가" "안 되오. 하루 빨리 찾아야 되오. 그 애를 찾아 주면 사례비도 두 배로 주고, 거기다 5 만 달러를 보너스로 주겠소." 탐정이 침을 꿀꺽 삼켰다. "5 만^5,5,5,236^" "그렇소. 그리고 당신이 알아야 할 게 한가지 있소. 그 애는 이미 한 사람을 살해했소. 만일 당신이 정당방위로 그 애를 죽인다면" 데루오는 잠시 멈췄다가 의미 심장하게 덧붙였다. " 당신에게 책임을 묻지 못할 거요. 또 그렇게 되더라도 약속한 보너스는 그대로 주겠소." 샘 콜린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선금으로 1천 달러를 주시오." "물론. 꼭 찾아 주시오!" "나만 믿으십시오." 그러나 데루오는 쉽게 사람을 믿지 않았다. 못 찾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그만 믿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사립 탐정이 떠나자 사토 데루오는 그대로 앉아 눈을 감고 해야 할 일들을 생각했다. 그는 마사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내가 마사오라면 어디로 갔을까? 어디로 가서 숨었을까? 인구가 1천만 명인 만하튼으로 갔을 것이다. 그래, 바로 만하튼이야. 그렇다면 제아무리 유능한 탐정이라도 마사오를 쉽게 찾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또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콜린스가 실패해도 확실하게 성공을 보장할 방법이 있었다. 체스의 명수인 데루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야말로 간단하면서도 감탄할 만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마사오는 몇 시간도 안 되어서 잡히게 될 것이다. 밤의 만하튼은 참으로 흥미로웠다. 수백만 개의 전등으로 온 도시가 밝혀졌다. 불 켜진 마천루와 광고 게시판, 커다란 전광판, 환한 불빛의 상점들, 끝없는 자동차 행렬이 내뿜는 헤드라이트 빛이 어울려 휘황찬란하였다. 마사오는 록펠러 센터에서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브로드웨이의 극장가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연극 배우들이 식사하는 곳으로 유명한 사디스 레스토랑을 지나, 세계에서 가장 큰 시립 도서관 앞에 서서 거대한 돌사자를 쳐다보았다. 5번가(뉴욕 시의 번화가)에는 로드 앤 테일러, 버그도프 굿만, 삭스 피프스 애버뉴 같은 화려한 의류백화점이 있었다. 그 많은 옷을 보자 갑자기 어머니가 그리워졌다. 어머니가 이런 데서 쇼핑하는 것이 눈에 선했다. 그러나 이제는 영원히 떠나가 버리셨고,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허전함이 마사오의 마음 속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살아남아야 했다. 그 자신뿐만 아니라 부모님들을 위해서라도. 갑자기 허기가 지면서 마사오는 저녁때가 이미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많은 식당이 밀집해 있는 7번가에 이르자 모두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마사오는 황금빛 아치가 세워진 낯익은 맥도날드 햄버거로 들어섰다. 마치 도쿄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햄버거 하나 주세요." "이게해릴까요?" 하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도쿄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마사오는 웨이트리스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뭐라고요?" "이게해리느냐고요? 덜익은보통잘익은?" 마사오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마침 옆자리에 앉아 햄버거를 한입 가득 베어 먹고 있는 꼬마가 보였다. "저 저, 저런 걸로 주세요." "알았어요." 그녀는 몸을 돌리며 주방장에게 소리쳤다. "햄버거 하나, 덜 익힌 걸로." 아! 어느 정도 익히기를 원하냐고 물었던 거로군. "프라이스?" 마사오는 다시 당황했다. '프라이스가 뭐지?' 그러나 감자 튀김 한 접시가 그 꼬마 앞에 놓여 있는 걸 보고 모험을 해 보기로 했다. "프라이스." 그가 대답했다. 마사오의 짐작은 맞았다. 다시 햄버거와 감자 튀김을 주문했고, 나중에는 초코 밀크셰이크 식사를 끝냈다. "죄송하지만" 마사오는 웨이트리스에게 말을 걸었다. "잘 곳을 찾고 있는데요, 비싸지 않은 호텔을 아시는 데가 있습니까?" "이 근처에는" 웨이트리스가 또 발리 말하기 시작하자 얼른 다시 물었다. "죄송하지만 좀 천천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아, 그러지요. 이 근처에 호텔이 많긴 하지만 밤에는 좀 위험해요. 이스트 사이드 쪽으로 가 보면 괜찮은 데가 있을 거^36^예요." "정말 고맙습니다." 맥도날드에서 나온 마사오는 이스트 사이드로 걸음을 옮겼다. 버스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냥 걷기로 했다. 구경할 것이 정말 많았다. 거리 구경에 정신이 팔려 자신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조차 잊을 정도였다. '뉴욕 시를 속속들이 다 구경하려면 몇 년이 걸려도 모자라겠어.' 마사오는 생각했다. '내일은 일자리를 찾아봐야지. 데루오도 곧 날 찾는 걸 단념하게 될 거야. 그 때는 내 자리를 다시 찾아야지. 결국은 내가 이길 거야!' 랙싱턴 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마사오의 마음에 드는 깨끗한 호텔이 있었다. 만하튼에는 수천 개의 호텔이 있었다. 데루오가 그 많은 호텔들을 모두 뒤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곳이라면 안전하겠지. 마사오는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에는 거의 사람이 없었다. 일본인 종업원이 프런트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본 마사오는 순간적으로 도망치고 싶은 충돌을 느꼈다. 데루오가 일본인 조직을 이용해서 추적해 오면 어떻게 할까? 뉴욕에 사는 일본인들이 만든 단체나 조직을 통해 그를 추적해 올지도 모른다. '내가 너무 예민해진 모양이야.' 마사오는 생각했다. 모든 사람이 다 적일 수는 없다. 마사오는 프런트로 갔다. "방 하나 주세요." 마사오가 일본어로 말하자 종업원도 일본어로 대답했다. 그러자 모국어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일본어야말로 문화인의 언어였다. 얼마나 알아듣기 쉬운가! 마사오는 쓸데없이 단서를 남길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숙박부에 가명으로 기재한 다음 방으로 올라갔다. 방은 작고 좁았지만 깨끗하고 값이 쌌다. 마사오는 침대에 누워서 지난 며칠간의 일을 더듬어 보았다. 부모님을 앗아간 비행기 추락사고, 미국으로의 여행, 운전사인 히가시의 죽음으로 끝난 별장에서의 그 끔찍한 사건. 속옷바람으로 도망쳤던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생각하다가 마사오는 잠이 들었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살 때문에 마사오는 눈을 떴다. 몸과 마음이 한결 가뿐했다. 시계를 보니 11시였다. 열두 시간이나 잔 것이다! 복도 끝에 있는 공동 욕실에서 세수를 하고 어제 산 단벌 옷을 입었다. 일자리를 구하는 대로 옷을 몇 벌 더 사야 했다. 마사오는 미국식으로 아침을 먹기로 했다. 오렌지 주스와 베이컨, 계란, 팬 케이크를 먹을 생각이었다. 어젯밤 호텔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보아둔 커피 숍이 생각났다. 마사오는 늦은 아침을 먹으려고 그 곳으로 향했다. 커피 숍이라면 카운터 뒤에서 일할 자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모퉁이에서 마사오는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렸다. 그 때 트럭 한 대가 여에 있는 신문 판매대에 와서 멈췄다. 트럭 뒤에 타고 있던 남자가 석간 신문 한 뭉치를 보도로 집어던졌다. 그 때 신호등이 파란색으로 바뀌어 사람들은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사오는 발이 얼어붙은 듯 꼼짝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신문 1 면에 '경찰, 운전사를 살해한 청년을 찾고 있다.'라는 제목과 함께 자신의 사진이 크게 실려 있었던 것이다. 사토 데루오가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5 순식간에 모든 사람의 표적이 된 것이다. 마사오는 벌거벗은 채 조명을 받고 서 있는 느낌이었다. 이젠 더 이상 마음놓고 사람들 틈에 숨어 지낼 수 없었다. 범인으로 몰려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조차 신문에 난 사진과 대조해 보려고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살인'이라는 단어가 충격적이었다. 히가시가 죽은 것은 순전히 우발적인 사고였다. 그 사실은 누구보다도 데루오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마사오를 살인범으로 몰아 올가미를 조이려는 음모가 틀림없었다. 만일 경찰에 체포된다면 평생 감옥살이 아니면 사형 당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데루오가 회사를 부당하게 빼앗아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정복을 입은 경찰관이 다가오자 마사오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길거리도 이제는 마음놓고 다닐 수 없었다. 백인들 속에서 동양인인 마사오는 사람들 눈에 쉽게 띌 게 뻔했다. 뉴욕에는 일본인이 모여 사는 구역이 있었다. 한순간 일본인이 많은 그 구역으로 가 숨어야겠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망설여졌다. 경찰이 가장 먼저 그 구역을 조사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형사들이 사진을 대조하며 거리나 음식점, 호텔 등을 샅샅이 수색할지도 모른다. '안 돼, 거기는 위험해.' 안전한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것도 두려웠다. 지나가던 경찰관이 마사오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사오는 천천히 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갈 곳이 없었다. 전혀 희망이 없어 보였다. 경찰의 거대한 수사망이 자신을 찾고 있었다. 운 좋게 경찰의 수사망을 벗어난다 해도 데루오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세계로 퍼져 있는 마쓰모토 그룹의 조직은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데루오는 그 조직을 이용해서 마사오를 계속 추적할 것이다. 순간 마사오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느 누구도 마사오가 숨으리라고 생각지 못할 그런 곳이 있다. 데루오조차도 전혀 예상하지 못할 곳이다. 마사오는 처음으로 한 줄기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공중전화 박스 안으로 들어가서 두툼한 전화번호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마쓰모토 그룹의 뉴욕 공장은 라과디아 공항에서 가까운 퀸스(뉴욕 시 동부지역)의 공업 지대에 있었다. 그날 오후 2시, 마사오는 공장 관리 사무실에 나타났다. 버스에서 내려 거대한 마쓰모토 빌딩 앞에 선 마사오는 아버지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커다란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그의 피난처가 될 곳이었다. 중요한 편지를 숨기는 방법으로 책상 위에 다른 편지들과 함께 섞어 놓았다는 사람 이야기를 전에 읽은 적이 있었다. 아무도 그 속에 중요한 편지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신이 여기 숨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데루오나 경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사오는 전화로 인사 담당 이사인 왓킨스를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비서가 내미는 신청서를 받아 든 마사오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름: '진짜 이름은 쓸 수 없음' 주소: '없음' 전화번호: '없음' 출생지: '미국 출생 아님' 직업: '도망자' 직원이 수백 명인 마쓰모토 공장에서 일하겠다는 것은 정말 괜찮은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장벽이 있을 줄이야^5,5,5,456^ 비서가 빤히 쳐다보았다. "뭐가 잘못됐나요?" "아, 아닙니다." 마사오가 서둘러 대답했다. 그리고 신청서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해서든 여기에 취직을 해야한다. 여기 말고는 갈 데가 없다. 게다가 캘리포니아로 히다카 구니오를 찾아갈 차비도 마련해야 한다. 고개를 들자 계속 쳐다보는 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마사오는 이력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름은 하라다 마사오. 출생지는 일리노이 주의 시카고, 현 주소는 와이엠시에이로 기록했다. 경력란에는 유령 회사 이름 여섯 개에 시카고, 디트로이트, 덴버의 적당한 주소를 적었다. 회사에서 이력서에 기재된 사항을 모두 확인하려면 몇 주일이 걸릴 것이고, 그 때쯤이면 자신은 이 곳에 업을 것이다. 10분 뒤, 마사오는 왓킨스의 방으로 들어갔다. 인사 담당 이사는 두터운 입에 뚱뚱한 중년 남자로, 가발을 쓴 표시가 뚜렷이 났다. 마사오의 이력서를 자세히 읽던 왓킨스가 말했다. "나이에 비해 경력이 아주 많군." 마사오는 순간 당황했다. 내가 경력을 너무 많이 적었나? 왓킨스가 머리를 저었다. "이런 회사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당연한 말이었다. 그런 회사들은 애초부터 없었으니까. "아주 작은 회사들이라서 그러실 겁니다." 왓킨스가 혀를 차며 말했다. "미안하네, 젊은이. 우리는 전문가 수준의 기술자만 채용하고 있네." '안 된다'고 해서 그냥 물러날 일이 아니었다. 생명이 걸려 있는 문제였다. "이사님, 저도 기술자입니다." 마사오의 목소리는 필사적이었다. "부탁입니다. 일하게 해 주세요." "난" 그 때 와이셔츠 차림의 남자가 서류더미를 안고 들어왔다. "이 서류를 토니에게 보내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그건 그렇고, 이 젊은이가 전자 공학 기술자라고 우기는데, 당신이 몇 가지 물어 보겠나?" 왓킨스가 말했다. 남자가 마사오를 쳐다보았다. "그러죠." 왓킨스가 마사오에게 고개를 돌렸다. "데이비스씨는 수석 엔지니어일세." "전자 공학 분야에서 일했다고?" 데이비스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럼, 회로 시스템을 조립할 줄 아나?" "물론이죠." 평소에 전자 공학에 관심이 많아 열심히 공부한 마사오로서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마사오는 전문 용어를 차근차근 영어로 번역하면서 말했다. "먼저 기판 위에 원하는 회로 도면을 입힌 다음 부품을 조립합니다. 트랜지스터, 저항기, 콘덴서, 소형 집적회로인 IC회로들이죠. 그리고 필요 없는 부분을 녹여 내기 위해 그 기판을 산성 용액에 살짝 담가 둡니다. 그런 다음" "됐네!" 데이비스가 한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왓킨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 친구 아주 대단합니다. 몇 달 안 가 제 자리까지 넘볼 것 같은데요. 잘 해 보게!" 데이비스가 방을 나갔다. 왓킨스가 말했다. "자네를 채용하지." 마사오의 가슴은 기쁨으로 벅차 올랐다. "고맙습니다." "마침 조립 라인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하던 참이야. 보수는 일 주일에 250 달러로 시작하지." 마사오는 엔화로 환산해 보았다. 거의 5 만 2천엔이나 되었다. 일 주일만 일하면 캘리포니아에 갈 여비는 충분할 것 같았다. 왓킨스가 계속 말했다. "사회보장 번호가 있어야겠는데." 마사오가 멍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신분증이라고는 전혀 없지 않은가! "전 저" 마사오는 재빨리 둘러댔다. "아버지가 갖고 계시는데 지금 어디 가셨어요. 돌아오시면 가져올게요." "좋아. 자, 자네가 일할 곳으로 가 보세." 왓킨스는 마사오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전에 여기서 일한 적 있나?" "없어요." "거 참 이상하다." 왓킨스가 말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야." 그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마쓰모토 공장은 최첨단 시설에 내부는 아주 넓고 깨끗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아버지가 이 모든 것을 이룩했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또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마쓰모토 요네오가 이 사람들 모두에게 직장을 주었다는 생각에 뿌듯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마쓰모토 공장은 마사오에게 직장이 아니라 일시적인 은신처요, 피난처였다. 조립 라인에는 남녀 공원 백여 명이 일하고 있었는데 대다수가 일본인이었다. 마사오는 조장에게 인사했다. 조장은 키가 작고 마른 몸에 뭔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이름이 오스카 헬러였는데 첫인상이 썩 좋지 않았다. 마사오를 탈의실로 데려간 헬러는 흰 작업복을 던져 주었다. "자, 받아. 작업할 때는 꼭 이 옷을 입도록 해. 알겠나?" "예." "따라와." 두 사람은 자시 조립 라인으로 되돌아왔다. 헬러가 빈자리를 가리켰다. "저기서 일하도록 해. 잠깐이라도 농땡이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어, 알겠나?" "알겠습니다." "그럼, 가서 일을 시작해." 마사오는 조장이 걸어가다가 일하는 아가씨의 엉덩이를 툭 치는 것을 보았다. 움찔한 아가씨가 화를 내자 헬러는 큰 소리로 웃으며 그대로 지나갔다. 마사오는 몹시 화가 났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조장이 되었을까? 마사오 마음대로 한다면 당장 내쫓아야 될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사오는 그에게 뭐라고 입도 뻥끗할 수 없는 처지였다. 여기서 일하게 된 것만 해도 큰 다행으로 알아야 했다. 마사오는 조립 라인을 살펴보았다. 시설은 도쿄의 공장과 똑같았다. 대량 생산 시스템의 우월성이 증명된 것이다. 세계 어디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라 해도 작동법을 잘 아는 마사오로서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는 인쇄된 회로가 기판 위에 입혀지고 그 회로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산으로 제거되는 공정을 지켜보았다. 이어서 회로판에 구멍이 뚫리고 부품들이 끼워졌다. 다시 컨베이어 벨트로 옮겨져 전선과 구리 부분이 납으로 자동 용접 되었다. 이런 과정을 마사오는 이미 수도 없이 보아 왔다. 마사오의 자리 왼쪽은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고, 오른쪽은 어린 아가씨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일본인이었다. 중년 남자가 고개를 돌려 마사오를 쳐다보았다. "어서와요." "고맙습니다." 마사오가 대답했다. 그리고 옆의 아가씨를 쳐다본 순간 마사오는 숨이 콱 막혔다. 너무나 예쁜 아가씨였다. 갸름한 얼굴에 눈빛이 다정하면서도 지적으로 보였다. 나이도 마사오와 비슷해 보였다. 마사오와 눈이 마주친 아가씨가 미소지었다. "어서 오세요." "고맙습니다." "저는 도이 사나에^36^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맑았다. "난 마사오입니다." 마사오는 잠시 머뭇거렸다. "하라다 마사오." 고개를 든 마사오는 맞은편에서 노려보고 있는 헬러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래도 저 사람이 문제가 될 것 같군.' "빨리 일하는 게 좋을 거^36^예요." 사나에가 속삭였다. "헬러씨는 누구든지 노는 꼴을 못 보는 사람이거든요.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마사오가 말했다. 사나에가 보는 앞에서 부품을 집어 든 마사오는 조립을 하기 시작했다. 선천적으로 손재주가 좋은 그는 동작 하나하나가 신속하고 정확했다. 사나에는 놀란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처럼 정확하고 능숙하게 일하는 사람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댁은 아주 솜씨가 좋군요." 사나에가 말했다. "고마워요." 마사오는 손으로 하는 일을 좋아했다. 그러나 이런 단순 작업은 얼마 되지 않아서 싫증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훨씬 더 어려운 일에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서 일하는 것은 공장 근로자로 위장하여 숨는 것이 안전했기 때문이다. 손가락은 자동적으로 부품을 조립하고 있었지만, 마사오의 생각은 딴 곳에 가 있었다. 지금 당장 급한 문제는 신분증이 없다는 것과 잠자리였다. 마라톤 우승 상금 백 달러도 거의 다 써버렸다. 봉급은 다음 주나 되어야 나올 텐데, 몇 달러 남은 돈으로 그 때까지 버티기 어려울 것 같았다. 휴식 시간은 오전과 오후에 각각 한 번씩 있었다. 오후 휴식 시간에 마사오는 공장에 익숙해지려고 한 바퀴 돌아보았다. 몇몇 공원들과 이야기해 보니 모두 맡은 일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유능해 보였다. 몇 마디 가볍게 주고받은 대화를 통해서도 마사오는 그들이 이 회사의 직업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도 참 기뻐하실 텐데.' 마사오는 생각했다. 유일한 문제는 조장인 오스카 헬러였다. 그는 공원들을 못살게 구는 사람이었다. 공원들은 헬러가 두려워서 가능한 한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헬러 같은 사람이 어떻게 조장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는지 의문스러웠다. 작은 실수를 했다고 여공원에게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헬러를 볼 때 마사오는 나서서 말리고 싶었다. 그러나 마사오로서는 두드러지지 않게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5시에 종이 울리자 하루 일과가 끝났다. 탈의실로 몰려 간 공원들은 흰 작업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마사오는 옷을 갈아입은 사나에를 쳐다보았다. 너무나 아름답고 우아했다. 더 사귀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퇴근을 했지만 마사오는 남들과 처지가 달랐다. 그들은 돌아갈 집이 있었지만 마사오는 갈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길에서 밤을 새울 수도 없었다. 경찰과 데루오가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잠잘 방을 구해야 했다. 골목길을 따라 걷던 마사오는 허름한 여관을 발견했다. 여관 입구의 차양이 낡아서 너덜거렸다. 마사오는 안으로 들어섰다. 홀은 오랫동안 청소 한번 안 했는지 몹시 지저분했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따분한 표정의 종업원이 책상에 앉아 저속한 소설을 읽고 있었다. 마사오는 종업원에게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빈 방 있습니까?" "예." 종업원은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얼마죠?" "하루치, 일 주일치, 한 달치가 있는데요." 마사오는 이런 곳에서 한 달씩이나 머무는 사람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일 주일 있을 건데요." 그제서야 종업원이 고개를 들었다. "하룻밤에 10 달러, 일 주일엔 60 달러고 선불입니다." 여관비를 내려면 동전까지 모두 털어야 했지만 마사오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낮에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은 별 위험이 없지만, 밤에는 숨을 곳이 필요했다. "좋아요." 마사오가 말했다. "방을 주세요." 종업원이 선반에서 열쇠를 꺼내어 마사오에게 건네 주었다. "짐은 없습니까?" "예." 그러나 종업원은 태연했다. 마사오는 어떤 사람들이 이런 여관에 머무는지 궁금해졌다. '인생의 패배자들 삶을 포기한 사람들이겠지.' "217 호입니다. 한 층만 올라가요." "고맙습니다." 마사오는 계단을 올라갔다. 바닥의 카펫은 닳아서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었고 벽은 온통 낙서투성이였다. '킬로이가 여기 머물다 떠난다. 냄새가 지독해서 도저히 못 참겠다 메리는 존을 사랑한다. 존은 브루스를 사랑한다 도와주세요! 여기서 나가게 도와 주세요 바퀴벌레 천국' 복도와 홀이 누추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마사오와 방보다는 나았다. 지금까지 마사오는 넓고 깨끗한 방에서만 살아 왔다. 그것도 아름다운 정원과 전원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 좋은 방이었다. 자신이 쓰던 화장실만한 여관방은 초라하고 더러웠으며, 싸구려 가구는 그나마 성한 데가 없었다. 금이 간 유리창 밖으로는 벽돌담이 내다보였다.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설 수 있을 정도로 비좁은 욕실에는 녹슨 세면기와 샤워기가 있었고, 변기의 플라스틱 덮개는 깨어져 있었다. 침대보도 일 주일은 바꾸지 않은 것 같았다. 방을 한번 휘둘러 본 마사오는 이 삭막한 곳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막막했다. 어쨌든 하룻밤은 보낼 수 있겠지. 저녁 먹을 돈도 없거니와 사람들 눈에 뛸 게 두려워 밖에 나가고 싶지도 않은 마사오는 방에서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해 보았다. 먼저 당면한 문제들을 다시 검토했다. 1. 돈이 없다. 2. 친구도 없다. 3. 남의 나라에 와 있다. 4.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고 경찰에 지명 수배되어 있다. 5. 데루오는 자신을 찾아 죽이려고 한다. 너무 한심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마쓰모토 요네오의 아들, 마쓰모토 마사오가 이대로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목숨이 있는 한 끝까지 싸울 생각이었다. 6 다음 날 아침 일찍 마사오는 가능한 한 사람들 눈에 띄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출근했다. 마사오는 흰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자기 자리로 갔다. 사나에도 벌써 출근해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컨베이어가 움직이자 마사오는 하나씩 지나가는 회로판에 신경을 집중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배가 너무 고파서 집중시킬 수가 없었다. 난생 처음 겪는 고통이었다. 이미 다섯 끼를 거른데다 앞으로 얼마나 더 굶게 될지 모른다. 남아 있던 돈은 여관비로 다 썼고, 봉급은 다음 주에나 나올 것이다. 전에는 배고픔에 대해 생각도 못했다. 잘 먹는 사람은 음식에 별로 신경쓰지 않지만, 굶는 사람은 먹을 것밖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점심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마사오는 사람들이 밥 먹으러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공장 옆골목 간이 식당차에서 수프, 샌드위치, 커피, 도넛 등으로 점심을 때우는 사람들도 있었고, 집에서 도시락을 싸온 사람도 있었다. 공장 한켠에는 아담하게 잘 가꾼 소공원이 있었다. 화창한 날씨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공원 벤치에 모여 점심을 먹고 있었다. 마사오는 한족 구석에서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점심 안 드세요?" 고개를 돌려보니 사나에였다. "전 저 예." 마사오가 말했다. "아침을 많이 먹었거든요." 돈이 없어서 굶었다고 말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잠시 마사오를 쳐다보던 사나에가 상냥하게 말했다. "생각이 달라지면 제 샌드위치를 좀 들어 보세요. 많이 싸왔거든요." "아뇨, 괜찮아요." 넓죽 받아먹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는 거지가 아니라 마쓰모토 요네오의 아들이었다. 사나에는 동료들이 있는 벤치로 걸어갔다. 마사오는 그가 본 여자 중에서 사나에가 제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어떤 남자가 사나에 옆에 가서 앉자 마사오는 순간 질투를 느꼈다. 그러나 부질없는 감정이다. 그는 경찰에 쫓기는 몸이다. 하루하루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밖에는 다른 생각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이 회사는 '마사오'의 것이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마사오'를 위해 일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마사오는 어이없게도 빵 한 조각 사 먹을 돈이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반쯤 먹다 만 샌드위치가 벤치에 놓여 있는 것이 눈에 확 들어왔다. 순간 달려가서 한 입에 틀어넣고 싶은 것을 마사오는 겨우 참았다. 종이 울렸다. 다시 작업할 시간이다. 사나에는 틀림없이 뭔가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사오가 공장에 들어올 때부터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자부심이 강해 보이는 마사오는 남다른 면이 있었다. 마사오의 인상이 공원 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런데 일은 숙련된 기술자와 같았다. 사나에는 그 젊은이에게 자꾸 신경 쓰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먼저, 넉넉한 환경에서 자란 것 같은데도 이틀 동안 계속해서 같은 옷만 입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사나에를 더욱 궁금하게 하는 것은 그가 불안해 하고 지쳐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전혀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나에는 다른 사람들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는 마사오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배고픈 표정이 역력했다. 사나에의 호기심은 점점 더해 갔다. 마사오는 사나에가 자신을 곁눈질로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가 마사오와 눈길이 마주치면 얼른 딴 데로 시선을 돌렸다. 휴식 시간인 오후 3시가 되자 공원들은 일손을 놓고 간식을 사러 우르르 간이 식당차로 몰려갔다. 마사오는 텅 빈 벤치에 가서 앉았다. 뱃속에서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배고픔을 잊으려고 애쓰면서 빨리 휴식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데 사나에가 다가왔다. 플라스틱 커피 잔 두 개와 도넛 두 개를 손에 들고 있었다. "같이 먹지 않을래요?" 사나에가 말했다. 마사오는 사나에를 쳐다보다 그냥 거절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 허기져 있었다. "고맙습니다." 점잖게 대답한 마사오는 커피 잔과 도넛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사나에가 먼저 먹을 때까지 기다려 도넛을 먹었다. 꿀맛이었다. 마사오는 한입에 먹어치우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대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뜨거운 커피의 맛을 일품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서 아무 말 없이 먹고 마셨다. 사나에는 마사오를 눈여겨 쳐다보았다. 마사오에게는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강렬함이 있었다. 솔직하고 다정해 보였으나, 쉽게 속을 털어놓지 않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고향이 어디^36^예요?" 사나에가 물었다. 마사오는 순간 머뭇거렸다. "도쿄." '시카고'라고 적은 이력서를 볼 일은 없을 거야! "우리 부모님 고향도 도쿄^36^예요." 사나에가 말했다. "일본에 가 본 적 있어요?" "아뇨." 고향 얘기에 마사오는 향수에 젖어 한숨을 쉬었다. "일본은 참으로 아름다운 나라^36^예요." 마사오는 다시 일본 땅을 밟아 볼 수 있을지, 고향집에 다시 가 볼 수 있을지 아득하기만 했다. "그렇겠죠." 사나에가 말했다. "나중에 저도 꼭 한번 가 보고 싶어요." 사나에가 물었다. "부모님도 여기 사세요?" 마사오는 다시 머뭇거렸다. 사나에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사실대로 말하기에는 아직 위험 부담이 많았다. "예." 그러나 이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 비록 돌아가시긴 했지만 마음 속에는 언제나 부모님이 계셨다. 하루 속히 부모님께 편안한 안식처를 마련해 드려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마사오는 사나에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갑자기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마사오의 사나에에 대한 감정은 친구 이상의 것이었다. 그러나 안 될 일이다. 그런 생각은 마사오의 처지에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 마사오는 오직 한 가지, 생존만을 생각해야 했다. 그 때 휴식 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그 날 저녁 마사오는 돈 문제를 해결했다. 여관 근처의 상가 지역을 지나가던 마사오는 커다란 쇠구슬 세 개가 문 위에 매달려 있는 전당포를 보았다. 마사오에게 귀중품이라고는 열 여덟 살 되던 생일날 아버지가 선물로 주신 손목시계 하나밖에 없었다. 21금 시계였지만 아버지의 선물이라는 데 의미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계를 맡기고 돈을 꾼다는 생각은 꿈에도 한 적이 없었으나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마사오는 한참 망설이다가 전당포 안으로 들어갔다. "이 시계를 맡기고 돈을 빌리고 싶은데요." 마사오가 말했다. "나중에 다시 찾으러 올 겁니다." '일이 잘 해결된다면' 마사오는 생각했다. 일이 잘못되면 감옥에 가거나 죽게 될 것이고, 그 때는 시계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전당포 주인은 소형 확대경으로 시계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물건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시계군. 얼마를 빌리고 싶소?" "500 달러요." 주인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많아." "300 달러요." "250 달러." "좋아요." 마사오가 말했다. 그 돈이면 버스를 타고 캘리포니아로 갈 차비는 충분히 될 것 같았다. 마사오는 진작부터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히다카 구니오를 만나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마사오는 전당포 주인이 돈을 세는 것을 쳐다보았다. 주인이 돈과 함께 전표를 건네 주었다. "이것은 전표요. 유효 기간은 6개월, 그 기간이 지나면 처분할 거요." 6개월! 마사오는 6일 후에도 계속 살아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고맙습니다." 마사오가 말했다. "찾으러 올 거^36^예요." 마사오는 시계를 한 번 더 쳐다본 다음 돈을 주머니에 넣고 전당포를 나왔다. 마사오는 여관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일본 식당으로 향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먹어야 했다. 음식 생각만으로도 입에 군침이 돌았다. 허기져서 기진맥진한 마사오는 음식을 시켰다. 된장국과 돈가스, 밥과 야채 절임, 새우 튀김 두 접시를 정신없이 먹고 후식으로 싱싱한 과일까지 먹었다. 마침내 배부르게 먹고 나자 마사오는 다시 태어난 듯했다. 모든 게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다. 그 다음 며칠은 조용히 지나갔다. 너무나 조용한 나날이라 마사오는 자신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였다. 그는 매일 신문을 샅샅이 훑어 가며 읽었다. 날이 갈수록 자신을 살인범이라는 기사가 1 면에서 2 면으로 넘어가더니 마침내는 아주 사라져 버렸다. 마사오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집중 조명을 받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없어졌다. 경찰은 다른 업무로 정신 업을 것이고, 데루오도 곧 지쳐서 포기하게 될 것이다. 마사오는 아침 일찍 일어나 여관 가까이에 있는 조그만 커피숍에서 식사를 하고 출근했다. 회사에 들어설 때마다 마사오는 뿌듯했다. 아버지의 채취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 말고도 출근이 즐거운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바로 사나에였다. 밤에 혼자 있을 대도 사나에만 생각했다. 사나에가 일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즐거웠다. "안녕하세요?" 하는 사나에의 상냥한 아침인사는 기분 좋은 하루를 예고해 주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조장의 눈을 피해 잡담도 나누고 점심 시간과 휴식 시간에도 함께 지낼 정도로 친해졌다. 보면 볼수록 사나에가 더 좋아졌다. 사나에는 자기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태어나기 바로 전에 미국에 오셨대." "아버님은 무슨 일을 하시니?" "화가야. 아니, 화가였었지. 관절염 때문에 지금은 일을 못 하시거든." 사나에가 말했다. "그래서 네가 회사에 다니는 거구나?" "응. 부모님을 모실 사람이 나밖에 없거든. 난 의과대학에 들어가려고 했었어. 언젠가는 꼭 들어갈 거야." 사나에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여기서 일하는 게 괜찮니?" 마사오가 물었다. "그럼. 딱 하나만 빼고" 사나에는 헬러를 턱으로 가리켰다. "안 좋은 사람이야." "동감이야. 저 사람만 없다면 일하는 분위기가 훨씬 더 좋을 텐데." "네 얘기 좀 해 봐." 사나에가 말했다. 별다른 뜻 없이 하는 말이었지만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마사오는 모두 다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모든 것을 다 말하고 함께 의논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은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마사오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할 말이 별로 없어. 난 전자공학에 관심이 많은데, 일을 배우기에는 이 회사가 좋을 것 같아서 들어온 거야." 사나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난 널 죽 지켜봤어." "그래?" 사나에는 마사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넌 일을 배울 필요가 없던데." "난" 사나에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싶은 생각은 굴뚝 같았지만 마사오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사나에를 위해서였다. 사실을 알게 되면 그녀도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데루오의 음모에 어떻게 대응할지 대책도 못 세운 처지였다. 마사오는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사나에에게 데이트를 신청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함께 저녁도 먹고 영화 구경도 가고 디스코에도 가고 싶었다. 그러나 마사오는 그럴 수가 없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아무래도 쉽게 눈에 띌 염려가 있었다. 또 사나에를 자신의 문제에 끌어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사나에는 마사오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사오의 태도는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아직까지 데이트 신청이 없는 것이다. 남자 친구가 없다는 것도 은연중에 알려 주었고, 마사오에게 딴 여자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사오는 밖에서 따로 만나는 데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젊은이였다. 뉴욕 메츠와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야구 경기는 두 사람의 고민을 자연스럽게 해결해 주었다. 마사오는 사나에와 같이 갈 수 있는 곳이 한 군데 생각났다. 바로 야구장이었다. 수만 명의 관중이 모이는 야구장이라면 그 속에서 그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뉴욕 타임스 신문의 스포츠 난에서 네츠와 필리스의 야구 경기가 쉬애 스타디움에서 열린다는 기사를 보자 야구광인 마사오는 구경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우상처럼 좋아하는 선수들이 즐비한 두 팀의 경기를 실제로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아침 일찍 일어난 마사오는 입장권을 사러 쉬애 스타디움으로 갔다. 거대한 스타디움에는 표를 사려는 사람들로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마침내 마사오 차례가 되자 표 파는 사람이 물었다. "몇 장이오?" 마사오는 무심코 대답했다. "두 장." 마사오는 자기가 왜 입장권을 두 장이나 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유는 간단했다. 사나에와 함 께 구경을 가고 싶었던 것이다. 마사오는 걱정이 앞섰다. 사나에가 싫다고 하면 어떡하지? 야구를 좋아하지 않거나 다른 약속이 있다면? 마사오는 오전 내내 그 생각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정오가 되자 두 사람은 나무 밑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사실 마사오는 상황을 봐서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말이 불쑥 튀어나오고 말았다. "내일 열리는 야구 경기 입장권이 두 장 있는데, 야구 좋아하니?" "아주 좋아해." 그녀는 말했다. 사실은 야구를 싫어했다. 사나에는 얼굴에 웃음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잘 됐어. 메츠와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경기야. 터그 맥그로(유명한 마무리 투수)도 나오고, 메츠의 선두 타자는 리 마질리야." 사나에에게는 외계인들 얘기처럼 들렸다. "아주 신나겠는데." 사나에는 어디를 가든 상관 없었다. 마사오와 함께 있는 게 즐겁고, 또 그가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남자라는 것만이 중요했다. 의아한 점은 마사오에게 감도는 긴장감, 그리고 그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 거의 동물적 본능 같은 경계심이었다. 항상 뭔가에 쫓기듯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괜한 생각이겠지만 어떤 때는 '겁에 질린'사람 같아 보였다. 하여간 뭔가 마사오를 괴롭히는 문제가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마사오가 빨리 마음의 문을 열고 그 문제를 상의하기를 바랐다. 지금은 마사오가 즐겁다면 얼마든지 야구장에 함께 갈 각오가 되어 있었다. 쉬애 스타디움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한 곳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일본의 야구장들도 큰 편이었으나 쉬애 스타디움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 동안 이름만 들었던 선수들이 모두 경기장에 나와 있었다. 마사오는 사나에에게 그 중 한 사람을 가리켰다. "덕 아웃에서 나오는 저 큰 사람 보이지? 스티브 헨더슨인데 메츠의 중견수야." "응, 보여." 사나에가 맞장구를 쳤다. "저기 좀 봐! 프랭크 태버리스야. 유명한 유격수지." 사나에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요." "크레이그 스원이 저기 나온다! 저 사람이 메츠의 선발 투수인가 봐."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선공이었다. 필리스의 선두 타자는 피트 로즈, 그 다음은 2루수 매티 트리오, 그리고 3루수 마이크 슈미트순이었다. 마사오는 야구 경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사나에는 마사오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열광적인 사람은 처음이었다. 마사오는 다 큰 청년이었지만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열정이 남아 있었다. 바로 그런 점이 사나에의 마음을 끌었다. "저기 좀 봐!" 마사오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레그루진스키야!" "아, 그래?" 사나에가 웃었다. '팬(fan)'은 '광적인(fanatic)'에서 나온 말이었다. 사나에는 대부분 야구 팬들이 자기 고향 팀을 열렬히 응원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사오는 두 팀 다 응원하는 것이었다. 어느 팀이 이길 것인가에는 관심이 없었다. 투수가 공을 던지가 안타를 치고 수비하는 그 자체를 즐겼다. 9 회말에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져 사나에는 충격을 받았다. 점수는 2:2 동점이었다. 공격 팀 메츠는 투 아웃에 만루였다. 야구를 잘 모르는 사나에조차도 아주 긴장된 순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티브 헨더슨이 타석으로 걸어나오자 관중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모두 일어나 승리 타점을 기대하면서 박수를 치고 환성을 지르며 응원했다. 바로 그 순간에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진 마사오가 사나에에게 다급히 말했다. "여기서 나가자!" 사나에가 무슨 일인지 물어 볼 틈도 없이 두 사람은 관중석을 빠져 나와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사나에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마사오가 자리를 뜨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들려 왔다. 뭔가 상황이 달라진 모양이었다. "안 돼! 빨리!" 굳은 얼굴로 마사오는 사나에의 팔을 잡고 달렸다. 사나에는 뒤를 돌아보았다. 정복 경찰관들이 돌아다니면서 두 사람이 막 지나온 입구의 양쪽에 앉은 사람들을 차례로 훑어보고 있었다. 잠시 후 출구와 연결된 지하도에 도착한 두 사람은 서둘러 택시를 잡아탔다. "경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보고 싶지 않아?" 사나에가 물었다. "그런 건 상관 없어." 그러나 마사오의 얼굴에서 사나에는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다. 심각한 일이 틀림없다. 다음 날 아침 회사에 출근한 마사오는 여느 때와 다름없어 보였다. "어제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나와서 미안해." 마사오가 사나에에게 말했다. "메츠가 이겼던데, 아주 재미있었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투였다. 사나에는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가 안 갔다. 마사오를 괴롭히는 게 무엇인지 안다면 도움을 줄 수도 있을 텐데. 그렇다고 바로 물어 보기에는 아직 그렇게까지 허물 없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든 그를 도와 주고 싶었다. 점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헬러가 안으로 들어왔다. "손님이 오셨는데." 사나에가 말했다. 그 말에 마사오도 고개를 들었다. 사토 데루오가 걸어 오고 있었다. 7 순간 마사오는 온몸이 얼어붙은 듯 그대로 서 있었다. 데루오가 숨어 있는 것을 알고 잡으러 온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데루오는 작업 현장을 둘러보면서 헬러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제야 데루오의 방문이 자신과 관계없다는 것을 알았다. 데루오는 아직 마사오를 못 보았다. 그러나 이대로 있다간 곧 마주치게 될 것이다. 마사오는 순간 결단을 내렸다. 데루오와 헬러가 가까이 다가오자 회로판을 팔꿈치로 건드려 떨어뜨려 놓고 얼른 작업대 밑에 엎드려 흩어진 부품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이봐!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헬러가 호통쳤다. "죄송합니다." 마사오가 웅얼거렸다. 꿇어 엎드려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푹 숙이고 부품들을 하나씩 주워 모았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숨이 가빠졌다. 데루오 눈에 띈다면 꼼짝없이 잡히고 말 것이다. 데루오의 말 한 마디면 모든 공원들이 그를 잡으려 들 것이다. 마사오는 흘긋 올려다보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사나에와 눈이 마주쳤다. 사나에는 그가 일부러 회로판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것을 보았다. "이제 다 갔니?" 마사오가 속삭이듯 물었다. "갔어." 출입구 쪽을 흘긋 쳐다보고 사나에가 말했다. 마사오는 천천히 일어났다.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니?" 사나에가 부드럽게 물었다.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사나에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아냐." 마사오가 말했다. "그냥 실수였어." 그 말은 자신이 듣기에도 어색했다. 사나에가 마사오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에는 그에 대한 믿음과 우정이 어려 있었다. 마사오는 억지로 다시 일을 시작했지만, 며칠 간이라도 안전하게 느껴졌던 마음의 평온함이 깨져 버렸다. 대신 서서히 분노가 꿇어 올랐다. 사토 데루오는 마치 회사가 자기 것처럼 행동했다. 사실 마사오만 없다면 회사는 당연히 그의 것이었다. 마사오는 이렇게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문이 열릴 때마다 마사오는 출입구를 쳐다보았다. 데루오가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사나에는 마사오의 그런 행동이 이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도와 줄 수 있도록 마사오가 스스로 말해 주기를 기다리며 지켜 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마사오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그는 자신이 침묵하는 게 사나에를 섭섭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야기할 수 없었다. 데루오는 그 날 오전에 다녀간 뒤로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하루이틀 별일 없이 지나면서 조금씩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다. 데루오가 온 것은 의례적인 공장 시찰이었다. 마사오가 여기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이제 데루오가 다시 나타날 일은 당분간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것이 전보다 더 안전할 수도 있겠군.' 마사오는 생각했다. 금요일은 봉급날이다. 마사오는 일 주일치를 받아 캘리포니아로 떠날 생각이다. 그러나 사나에와 헤어질 생각을 하니 괴로웠다. 정말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마사오는 그녀에게 떠난다는 말도 없이 밤 도둑처럼 사라져야만 했다. 언젠가는 모든 것을 밝힐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잡히지 않는다면. 금요일 오후 늦게 출납계 창구 앞에는 봉급을 받으려고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사나에는 줄을 앞쪽에 섰고 마사오는 그보다 몇 사람 뒤에 섰다. 사나에가 봉급봉투와 인쇄물 한 장을 같이 받는 것이 보였다. 무심코 인쇄물을 들여다보던 사나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재빨리 마사오에게 다가와서 속삭였다. "여기서 어서 빠져 나가야 돼!" 마사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뭐라고?" "빨리! 날 따라와." 걸으면서 사나에는 손에 든 인쇄물이 마사오에게 보이도록 들어 주었다. '현상 수배자'라고 서 있는 마사오의 사진이었다. 회사에서 봉급과 함께 이 인쇄물을 모든 공원들에게 나누어주고 있었다. 사나에는 마사오의 팔짱을 끼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행동하며 뒷길로 통하는 옆문으로 걸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있는 힘을 다해 뛰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오히려 이 자리에서 잡힐지도 모른다. 마사오는 공장에서 일 주일 동안 일하면서 사람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들이 마사오가 현상 수배자라는 사실을 어느 순간에 알게 될지 모를 일이다. 마사오는 침착하게 걸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저놈 잡아라!' 하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가까스로 옆문에 다다른 두 사람은 밖으로 빠져나왔다. "여기서 헤어져야 되겠어." 마사오가 말했다. 앞으로 숨을 만한 곳이 있을지 막연하기만 했다. 데루오는 미국에 있는 모든 마쓰모토 공장에 그 전단을 돌릴 것이니, 이제 마사오에게 안전한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어디로 갈 건데?" "모르겠어." 두 사람은 공장 뒷길을 따라 걸었다. "우리 집에 가자." 사나에가 말했다. "거기는 안전할 거야." 마사오는 고개를 저었다. "너까지 이 일에 끌어들일 수는 없어." 사나에가 말했다. "이미 끌려 들어간걸." 마사오는 잡히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만 골똘해서 사나에의 말을 깊이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나하고 같이 가자." 사나에가 다시 말했다. "안 돼." 마사오는 사나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실을 말해 줄 때가 된 것이다. "나는 경찰에 쫓기고 있어." 길게 한숨을 내쉰 다음 덧붙였다. "살인 혐의로 말이야." 사나에는 잠시 마사오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사오, 정말 살인을 했니?" "아니." 사나에는 미소를 지었다. "그럴 줄 알았어." 마사오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자, 가자." 사나에의 가족이 살고 있는 곳은 마사오가 묵었던 여관에서 2킬로미터쯤 떨어진 낡은 아파트였다. 넓지 않은 아파트의 내부는 아늑하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으며, 일본 미술품이 많았다. 벽마다 걸려 있는 아름다운 풍경화를 보자 아버지가 화가라던 사나에의 말이 떠올랐다. 사나에와 마사오가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사나에의 부모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 도이 부부는 오랫동안 미국에서 생활했지만 몸에는 일본의 전통적인 예의범절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사나에가 마사오를 소개하자 두 사람은 옛날 식으로 깍듯이 인사하며 그를 맞았다. 사나에는 아직도 젊은 시절의 미모가 남아 있는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사나에도 나이 들면 우아한 어머니의 모습 그대로일 것 같았다. 모녀는 너무 닮아서 마치 한 사람의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보는 듯했다. 도이 씨는 마르고 예민하게 생긴 얼굴에 체구가 작은 사람이었다. 마디가 불거진 그의 손을 보면서 마사오는 그가 더 이상 벽에 걸려 있는 것과 같은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사나에가 말했다. "제 친구 마사오가 지금 곤경에 처해 있는데, 이 애는 잘못이 없어요." 마사오에게 고개를 돌렸다. "말씀드려." 마사오는 난처했다. 사실대로 다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자신이 마쓰모토 마사오라는 것은 밝힐 수가 없었다. 집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서운 음모를 낯선 사람한테 말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건 어디까지나 마사오 집안의 문제였다. 세 사람은 마사오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나에는 그를 믿어 주었지만, 이제 사나에와 그 가족에게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그녀는 두 번 다시 그를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아픈 상처를 남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마사오는 아가 사나에에게 했던 이야기를 머리에 떠올렸다. 말을 자꾸만 바꾸다 보면 스스로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 차라리 한 번 써먹은 거짓말을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저는 부모님을 따라 미국에 왔습니다." 마사오가 입을 열었다. "잠깐 볼일을 보러 온 것이기 때문에 바로 도쿄로 돌아갈 예정이었죠. 하지만, 전 이 나라가 좋아서 아버지께 좀더 있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그러다가 심한 언쟁을 벌이게 되었고 전 그만 몰래 도망을 쳤습니다." 거짓말을 그럴싸하게 꾸며대느라 마사오의 머리는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절 찾으려고 사람까지 고용했죠. 결국 고용인과 맞붙어 싸우게 되었는데, 그가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높은 데서 떨어져 버렸어요. 그 사람은 죽었어요. 경찰은 제가 죽인 줄 알고 지명 수배를 한 겁니다." 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사나에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음 아주 일이 공교롭게 뒤엉켰군. 그 사람의 죽음은 사고였다는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우연한 사고였어요." 적어도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경찰서에 가서 사실을 밝혀야지." 마사오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는 저를 일본으로 끌고 가실 거^36^예요." 도이는 아내와 딸을 쳐다보았다. "이 문제는 좀더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겠다." 같은 시각, 마쓰모토 공장의 인사담당 이사실에서는 큰 소동이 벌어졌다. 인사담당 이사인 왓킨스와 조장인 헬러가 샘 콜린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샘 콜린스는 데루오가 마사오를 잡으려고 고용한 사립 탐정이었다. 세 사람은 마사오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이 친구가 틀림없소?" 샘 콜린스가 물었다. "확실해요." "확실하고말고요." 왓킨스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 주에 내가 직접 고용했는걸요. 그 친구는" 그 때 헬러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현상금이 많은가요?" "아주 많지." 샘 콜린스가 말했다. 그는 찌부러진 코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그 애가 혹시 갈 만한 곳을 알 수 있을까요?" 왓킨스는 머리를 흔들었다. "모르죠. 사람들 얘기로는 사진을 보자 그냥 도망쳐 버렸다고 하더군요. 봉급도 안 타고 그냥 달아나 버렸다니까요." 갑자기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래! 봉급 타러 다시 올지도 모르겠네요. 그 땐 우리가" 탐정은 코웃음을 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오. 얼마나 영리한 앤데 다시 나타난단 말이오? 어림없소." "잠깐만!"헬러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애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두 사람은 빨리 얘기해 보라는 듯 헬라를 쳐다보았다. "그 애와 친하게 지내던 듯이 사나에라는 여자애가 있는데, 아까 그 둘이 함께 나간 것을 본 사람이 있어요. 그 애를 다그치면 어디로 갔는지 알아 낼 수도 있을 겁니다." 탐정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 도이라는 아가씨가 어디서 사는지 아시오?" "그거야 간단하지요." 왓킨스는 캐비닛으로 다가가서 문을 열고 인사 카드를 뒤적였다. "여기 있군요 도이 사나에." 그는 탐정에게 주소를 알려 주었다. "그 애를 찾기만 한다면," 샘 콜린스는 천천히 말했다. "우리 모두 부자가 될 거요." 잠시 후 탐정은 자리를 떴다. 한편, 도이의 아파트에 있던 마사오는 위험이 닥쳐 오는 것도 모르고 사나에의 가족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도이의 말투는 강경했다. "경찰에 자진 출두하여 사실대로 얘기하는 게 제일 좋은 것 같네. 또 부모님 따라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아. 부모님께서 크게 걱정하실 게 아닌가?" 거짓말을 한 마사오는 자신이 판 함정에 빠져 버린 꼴이 되었다. 더 이상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아무튼 지금은 돌아갈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돌아가겠죠. 하지만, 지금은 안 돼요." "나도 저이와 같은 의견이에요." 도이 부인이 말했다. "도망다닌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오히려 문제가 악화될 수도 있어요." 마사오는 다소곳이 이야기만 듣고 있는 사나에를 바라보았다. 사나에는 그가 일본으로 가는 걸 원치 않았지만, 마사오의 입장이 더 곤란해지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사나에는 마사오의 말처럼 문제가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 정도 문제로 공장에 현상 수배문까지 돌린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훨씬 더 심각한 내막이 있는 게 틀림없다. 그러나 사나에는 마사오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사나에가 말했다.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좋은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알 테니 스스로 결정하는 게 좋겠어요." 마사오는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나에가 너무나 고마웠다. "캘리포니아에 친구가 있어요." 마사오가 말했다. "그를 찾아가면 도와 줄 거^36^예요." "정말 믿을 수 있는 친군가?" 도이가 물었다. "예, 이름은 히다카 구니오^36^예요. 그는" 무심코 '아버지 회사 사람'이라고 말할 뻔한 마사오는 얼른 말꼬리를 돌렸다. "마쓰모토 회사에 다녀요."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했다! 도이 씨는 앉은 채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경찰이 자네를 찾고 있다 그렇다면 뉴욕에서 무사히 빠져 나가는 게 문제구만." "예, 그렇게 쉽지가 않을 거^36^예요." "전혀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도이가 말했다. 마사오가 앞으로 다가앉으며 기대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요?" 바로 그 때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 열어! 경찰이다!" 마사오는 깜짝 놀라며 몸이 굳어 버렸다. 나머지 세 사람도 놀란 표정으로 서로 쳐다보았다. "빨리," 사나에가 속삭였다. "침실로 가!" 마사오는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여러분까지 이 일에 끌어들여" "침실로 가요, 빨리!" "문 열어!" 잠시 머뭇거리던 마사오는 결심한 듯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방으로 들어간 다음에야 사나에는 문을 열었다. 샘 콜린스가 그녀를 밀치며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 애 어디 있소?" 탐정이 다그쳤다. 도이가 침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누가 어디 있다는 거요?" "누군 누구요, 시치미떼지 마시오." 샘 콜린스는 신분증을 내밀었다. "난 형사요. 남자애를 찾고 있소." 마사오의 사진을 꺼내 든 콜린스는 사나에 눈앞에 거칠게 디밀었다. "아가씨와 함께 여기 왔지?" "아뇨." 사나에가 말했다. "그런 적 없어요." 탐정은 사나에를 노려보았다. "공장에서 그 애와 함께 나간 것을 알고 있어. 본 사람이 많아." "그래요, 같이 나온 건 사실이에요." 사나에가 차분히 대답했다. "하지만, 곧 헤어졌어요." "헤어졌다고? 그 애는 어디로 갔나?" "난 몰라요." 샘 콜린스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아가씨, 좀 살펴봐도 되겠지?" 도이가 벌떡 일어섰다. "그럴 순 없소. 여기는 개인 집이오. 누구든지 이렇게 침입할 권리는 업소. 영장을 제시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러나 콜린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사토 데루오가 마사오를 잡아 오면 거액을 주기로 약속한 이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찾아내야 했다. 누가 막는다고 해서 물러설 그가 아니었다. 재빨리 군용 권총을 뽑아든 콜린스는 가로막은 노인을 옆으로 밀쳐 버렸다. 총을 겨눈 채 마사오가 들어간 침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세 사람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금방이라도 총소리가 들려 올 것만 같았다. 사나에는 자꾸만 끔찍한 생각이 떠올랐다. '마사오가 형사에게 두들겨 맞아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마사오가 도망치려다가 실수로 형사를 죽인다 두 사람이 맞붙어 필사적으로 싸운다.' 침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그러나 사나에에게는 견디기 힘든 침묵이었다. 이윽고 샘 콜린스가 거실로 되돌아왔다. 혼자였다. 총을 집어넣는 콜린스의 얼굴엔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정말 함께 오지 않았나?" 콜린스가 사나에에게 물었다. 한시름 놓은 사나에는 태연한 척했다. "그렇다니까요. 헤어졌다고요." 콜린스는 실망한 표정으로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그는 직감으로 분명히 마사오가 여기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어디 갈 만한 곳도 모르나?" 사나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런 말을 하기는 했는데" "무슨 말?" "그 사람한테 친구가 있다고 했거든요." "그래?" "그러니까 그 친구를 찾아갔을지도 모르죠." "그 친구가 어디 있다고 하던가?" "그냥 브루클린에 있는 디스코장에서 일한다고 했어요." "브루클린? 좋아. 고마워." 샘 콜린스는 허겁지겁 아파트를 나섰다. 세 사람은 급히 침실로 뛰어들어갔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세 사람은 손님용 침실과 욕실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마사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비상계단 쪽의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마사오는 흔적조차 없었다. "아주 가 버린 모양이야." 도이가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사나에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이제 다시는 마사오를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8 사토 데루오는 의자에 앉아 샘 콜린스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브루클린에 있는 디스코장이란 디스코장은 모두 뒤졌지만 그림자도 보이지 않더군요." "그 여자 애가 당신을 속인 거요." 데루오가 침착하게 말했다. 데루오의 태도는 의외였다. 불같이 화를 낼 것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전혀 뜻밖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24시간 안에 당신이 그 애를 잡게 될 거요." 샘 콜린스는 데루오를 쳐다보았다. "그 애가 어디 있는지 아신다는 말씀입니까?" 데루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하지만, 방법이 있지. 그러니까 당신은 전화 옆에서 기다리기만 하시오. 그 애가 어디 있는지 알려 줄 테니까." 데루오의 목소리는 냉랭하게 변해 있었다. "실수할 수 없는 마지막 기회요." "아니, 전" "그만 가 보시오." 샘 콜린스는 아무 말 못 하고 물러나왔다. 지금까지 그는 깡패, 살인자, 정신병자, 변태성욕자 같은 위험한 사람들을 상대해 왔다. 그러나 언성도 높이는 법이 없는 데루오는 왠지 냉혹하고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었다. 데루오가 냉랭하게 말을 끊을 때 샘 콜린스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듯했다. "그럼, 연락 주십시오." 샘 콜린스가 말했다. 데루오는 콜린스가 떠난 뒤에도 석상처럼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지금까지 마사오는 그의 손을 교묘하게 빠져나갔다. 쫓기면서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데루오는 해결 방법을 생각해 냈다. 마사오를 찾기 위해서는 보다 논리적 방법이 필요했다. 그것은 마쓰모토 회사의 컴퓨터를 이용하는 것이다. 마쓰모토 회사의 컴퓨터로 마쓰모토 마사오를 잡는다는 생각에 데루오는 빙그레 웃음을 띠었다. 우선 전화로 연락한 다음, 한 시간 후 데루오는 마쓰모토 회사의 컴퓨터실에서 오퍼레이터에게 일을 지시하고 있었다. 데루오는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구체적으로 설명했고, 오퍼레이터는 자료를 입력시키고 컴퓨터를 작동하기 시작했다. 데루오는 오퍼레이터에게 마사오의 습관, 취미,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말해 주었다. 마사오와 체스 게임을 해 본 데루오는 자기 조카가 어떻게 생각하고 반응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컴퓨터에게는 그런 것도 입력이 되었다. "두 시간 후에 돌아오시면 필요한 정보를 뽑아 놓겠습니다." "좋아." 데루오는 컴퓨터실을 나왔다. 그는 남은 시간에 거대한 공장을 둘러보며, '이게 모두 내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 곳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있는 모든 마쓰모토 공장이 다 그의 손 안에 들어올 것이다. 사치코가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데루오는 자신의 생각이 정당하다는 것을 아내에게 설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데루오는 아내에게 히가시가 사고로 죽었다고 하지 않았다. 대신 마사오가 그를 죽였다고 말했다. 그 말은 사치코를 설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마사오를 히가시의 살인범으로 신고한 것은 실수였다. 마사오를 하루빨리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마사오를 경찰 손에 넘기는 것은 그에게 이로울 게 하나도 없었다. 자신의 손으로 마사오를 처치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그래서 사립탐정까지 고용한 것이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컴퓨터가 실수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두 시간 후에 데루오는 컴퓨터 실로 들어갔다. "벌서 다 뽑아 놓았습니다." 오퍼레이터가 말했다. "원하시는 정보는 여기 다 있습니다." "수고했소. 고맙소." "천만에요." 사무실로 돌아온 데루오는 프린트 용지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마사오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취미 등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마사오가 즐겨 먹는 음식은 햄버거와 피자다. 그런 음식을 파는 식당들을 잘 감시할 것. 핀볼을 좋아하니 실내 오락장 주변을 감시할 것. 볼링을 좋아하므로 모든 볼링장에 마사오의 사진을 뿌려 놓을 것. 미국 서부영화와 이탈리아 영화를 좋아하므로 그런 종류의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을 감시할 것. 사람을 풀어 공항과 기차역, 버스 정류장을 지키고 있을 것. 이렇게 한다면 사실상 뉴욕을 빠져 나갈 수 있는 길은 전혀 없었다. 컴퓨터에 의해 마사오는 독 안에 든 쥐가 된 셈이었다. 그러다 프린트 용지 맨 마지막에 찍혀 있는 두 항목에 데루오의 눈길이 쏠렸다. '사람들 눈에 띄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심해질 것임. 일본인 구역으로 숨어 들어갈 가능성이 높음. 통계적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지역^36,36^그리니치 빌리지의 일본인 거리. 만일 뉴욕을 빠져나간다면 로스앤젤레스나 샌프란시스코로 갈 확률이 가장 높음.' 데루오는 마지막 두 항목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의자 깊숙이 몸을 젖힌 데루오는 생각에 잠겼다. 그는 마사오와 체스 게임을 하듯 두뇌 싸움을 하고 있었다. 마사오와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했다. 만일 내가 마사오라면 어떻게 할까? 어떻게 뉴욕을 빠져 나가려고 할까? 순간 데루오의 머릿속에 묘안이 떠올랐다. 아주 간단했다. 마사오가 도망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마사오가 숨을 곳은 없었다. 포위망이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가능한 한 빨리 뉴욕을 빠져 나가야 했다. 도이의 아파트에 나타났던 탐정들을 생각하자 마사오는 사나에와 그 부모까지 자신의 문제에 끌어들였다는 생각에 몸서리 쳤다. 사나에는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고 도와주었다. 마사오는 사나에와 탐정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에 비상계단으로 건물을 빠져 나온 것이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여관으로 돌아가기는 두려웠다. 수사가 이 지역에 집중될 거라고 생각했다. 백인 사회에서 일본인 얼굴은 표가 나지 않을 리 없었다.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니치 빌리지의 일본인 구역으로 가는 것이다. 마사오는 지하철을 탔다. 시끄럽고 지저분하며 무례한 사람들이 많은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쿄의 지하철과는 너무 달랐다. 마사오는 그리니치 빌리지 역에서 내렸다. 그러나 빌리지에 일본인 구역이 있다는 이야기를 사나에한테 들었지만, 정확히 어딘지는 몰랐다. 마사오는 자전거를 타고 배달 가는 소년에게 물었다. "미안하지만, 일본인 구역이 어딘지 아니?" "5킬로미터저쪽내려면왼쪽돌면블리커가다와요." 그러나 무슨 말인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마침 그가 서 있는 곳이 서점 앞이었다. 안으로 들어간 마사오는 뉴욕안내서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안내서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가게를 나온 마사오는 10번가를 따라 걸었다. 눈에 일본어 간판이 들어왔다. 그러자 불안하던 마음이 한결 가라앉았다. 여기서는 자신이 그렇게 두드러져 보이지 않을 것이다. 물론 데루오도 이 곳을 그냥 지나치진 않을 것이다. 이 지역의 호텔과 하숙집을 샅샅이 뒤지게 하거나 거리마다 사람들을 풀어 놓았을지도 모른다. 또, 햄버거 가게나 피자 집, 이탈리아 영화관 같은 데도 감시하고 있을지 모른다. 따라서 그런 곳의 출입은 피할 생각이었다. 마사오는 데루오보다 한 걸음 앞서야 된다고 생각했다. 빌리지에 있더라도 데루오가 생각도 못 할 장소만 찾아갈 생각이었다. 마사오는 피자 집, 햄버거 가게, 오락실 앞을 그대로 지나쳤다. 대신 즉석식품 판매점에서 샌드위치를 사서 들고 나왔다. 그리고 미국 서부영화를 밤새도록 상영하는 영화관과 이탈리아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 앞을 그대로 지나쳐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마사오는 블리커 가에서 프랑스 영화를 밤새도록 상영하는 작은 극장 앞에 멈춰 섰다. 마사오는 주위를 한번 둘러본 다음 표를 사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프랑스 말은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였지만 잡히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마사오는 자리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내용도 모른 채 영화를 보았다. 동시상영을 했는데 마사오는 한 편이 끝나고 다음 편이 시작될 무렵 잠이 들었다. 낮에는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니까 아무래도 덜 위험했지만, 사람이 별로 없는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했다. 아침에 잠이 깬 마사오는 온몸이 뻣뻣한 게 쥐가 날 지경이었다. 스크린에서는 여전히 같은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프랑스 영화는 사랑을 빼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문득 사나에 생각이 났다. 언젠가 일이 다 해결되면 사나에를 찾아가 고맙다는 인사를 할 생각이었다. 거리로 나온 마사오는 햇살에 눈이 부셔 얼굴을 찡그렸다. 인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사람들 틈에 끼어든 마사오는 경찰이 있는지 주위를 살피며 걸어갔다. 이 근처에서 오래 머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버스 정류장, 공항, 기차역마다 데루오가 사람을 풀어 놓았을 것이 확실하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문득 마사오는 미국 대륙을 횡단할 운전사를 구하는 광고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생각났다. 만일 그런 일만 있다면 뉴욕을 빠져 나가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다. 마사오는 길 모퉁이에 있는 신문 가판대에 가서 (데일리 뉴스)와 일어판 신문인 (오.시.에스. 뉴스)를 각각 한 부씩 샀다. 커피 숖으로 들어간 마사오는 자리를 잡고 앉아 신문 구인란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았다. (데일리 뉴스)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오.시.에스. 뉴스)의 구인란을 살펴보던 마사오는 한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일본인 할머니를 로스앤젤레스에 모셔다 줄 젊은 운전사를 구함. 비용은 전액 부담하겠음.' 뉴욕을 빠져 나갈 절호의 기회였다.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히다카 구니오를 만날 생각을 하자 마사오의 가슴은 갑자기 희망으로 부풀어올랐다. 광고를 조심스럽게 오려 낸 마사오는 아까 샀던 안내서를 꺼내 위치를 확인했다. 마사오는 광고의 주소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자신을 채용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마사오는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아마 병들고 나이 많은 할머니일지 모른다. 그 할머니를 로스앤젤레스까지 무사히 모셔다 드린 다음 볼일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사오는 자신을 죽이고 마쓰모토 그룹을 통째로 빼앗으려 한 데루오를 용서할 수 없었다. 가문의 명에를 걸고 복수할 생각이었다. 10분 후에 마사오는 고풍스러운 아파트에 도착했다. 다시 한번 구인광고를 들여다보았다. 아파트 호수는 1B였다. 마사오는 자신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극장에서 새우잠을 자는 바람에 옷은 형편없이 구겨져 있고, 구두는 먼지투성이였다. 바지 뒤끝에 구두코를 한번 문지르고 심호흡을 크게 하고 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일을 꼭 따내지 않으면 정말 큰일이다. 생명이 달린 일이었다. 한동안 1B호 아파트 앞에서 망설이던 마사오는 마침내 문을 두드렸다. 전통적인 기모노를 입은 할머니가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무슨 일이지요?" 할머니가 물었다. "신문 광고를 보고 찾아왔는데요." 마사오가 말했다. 잠시 마사오를 쳐다보던 할머니가 말했다. "아, 이리 들어와요." '잘 풀릴 것 같은데!' 마사오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캘리포니아로 모셔다 줄 사람을 구한다고 하셨죠?"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차는 있는데, 내가 운전할 수가 없어." 마사오가 말했다. "전 할머니를 도와 드릴 수 있어요. 제가 로스앤젤레스까지 할머니를 모셔다 드릴게요." 그 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 친구, 아주 친절하군." 마사오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사나에의 아파트에서 도망치기 직전에 들었던 목소리였다. 뒤돌아보니 샘 콜린스가 서 있었다. 그의 손에서 권총이 마사오를 겨누고 있었다. "당신이 어떻게^5,5,5,236^" 순간, 가슴이 철렁하면서 함정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루오의 추리가 한 수 더 높았던 것이다. 마사오가 필사적으로 뉴욕을 빠져 나가려 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정상적인 통로는 모두 봉쇄했다. 오직 남아 있는 방법이라면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인데, 신분증이 없는 마사오로서는 자동차를 빌릴 수 없었다. 따라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데루오는 이 모두를 예측하고 미끼를 던졌다. 마사오의 입맛에 맞는 광고를 뉴욕의 유일한 일어판 신문인 (오.시.에스. 뉴스)에 낸 것이다. 그리고 마사오는 미끼를 덥석 물어버렸다. 마사오는 속아 넘어간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전 잘못한 게 없어요." 마사오는 사립 탐정 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그 사람이 죽은 건 사고" "닥쳐!" 오른손에 권총을 든 채 샘 콜린스는 왼손으로 백 달러짜리 지폐를 한 장을 꺼내 노파에게 주었다. "수고했소. 고맙소." 그리고는 마사오에게 말했다. "가자."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제발!" "성가시게 굴지 마. 넌 체포된 거야." "날 경찰서로 데려갈 건가요?" "그야 물론이지." 샘 콜린스는 권총으로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밖으로 나가. 빨리!" 노파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라는 듯 고개를 돌리고 사라졌다. 마사오는 노파를 원망하지 않았다. 백 달러라면 노파에게는 상당히 큰 돈일 것이다. 또 자기가 한 일이 마사오에게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지 알 턱이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노파를 데루오가 이용한 것뿐이었다. 샘 콜린스는 마사오에게 총을 겨눈 채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콜린스는 지나가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총을 마사오의 옆구리에 바싹 갖다대었다. 도로변에 낡은 초록색 시보레 자동차가 한 대 서 있었다. "허튼 수작 하지 마!" 콜린스가 경고했다. "널 죽여서 데려가든 살려서 데려가든 난 아무 상관이 없어. 넌 살인범으로 지명 수배됐어. 알아듣겠지?" 마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총을 겨눈 채 운전석으로 들어가 앉은 샘 콜린스는 마사오를 옆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문 닫아." 콜린스가 명령했다. "얌전하게 말 잘 들어!" 마사오는 차 문을 닫았다. "옳지, 그래, 착하지." 샘 콜린스는 시동을 걸었다. "편하게 기대고 앉아. 갈 길이 머니까." 경찰서로 가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데루오에게 데려갈 모양이었다. 마사오는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고 있었다. 데루오에게 다시 잡히는 날이면 모든 게 끝장이다. "고모부가 얼마나 준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보다 더 많이 드릴 수 있어요. 난 마쓰모토 그룹의 대주주^36^예요." 사립 탐정은 소리내어 웃었다. "그것 참 재미있군. 네 고모부는 자기가 대주주라고 생각하던데" 마사오가 말했다. "만일 날 도와 준다면" "잊어버려! 난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모를뿐더러, 또 알고 싶지도 않아. 단지 널 찾아 네 고모부에게 넘기면 내 임무는 끝나는 거야. 난 일을 쉽게 할 수도 있고 어렵게 할 수도 있지. 일을 어렵게 하면 넌 다치게 돼. 물론 모든 게 너한테 달려 있지만." "아저씨는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마사오가 말했다. "날 놓아 준다면 부자를 만들어 드릴게요." 샘 콜린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난 벌써 부자야." 사실이 그랬다. 데루오를 두 번째 만났을 때 그가 말했다. "보너스 5 만 달러는 착수금일 뿐이오. 내 조카를 데려다 준다면 당신을 부자로 만들어 주겠소." 데루오가 한 밑천 만들어 준다고 약속한 이상 손 안에 들어온 보물을 놓아 줄 수는 없었다. 잘만 하면 이런 짓도 안 하면서 남은 인생을 편안히 살 수 있게 된 콜린스였다. 그는 언제나 플로리다에서 보트 타고 낚시나 하며 살기를 원했다. 아내나 애인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만이다. 플로리다에는 예쁜 아가씨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어 왔다. 콜린스에게 필요한 것은 돈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엄청난 돈이 생기게 된 것이다. 낡은 청바지와 때묻은 티셔츠를 입고 있는 마사오를 흘끗 쳐다본 콜린스는 생각했다. '저 꼴에 날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데루오에게 마사오를 넘겨 줘야 했다. 데루오는 정말 빈틈이 없었다. 어떤 미끼를 던져야 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콜린스는 마사오 앞으로 팔을 뻗어 사물함에서 위스키 병을 꺼냈다. 마개를 딴 콜린스는 독한 술을 병째 들이켰다. 이제 술 한잔 할 여유가 생긴 것이다. 마사오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의 모습이 측은하게 보였다. 마사오의 불운이 샘 콜린스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 셈이었다. 한 모금 더 들이켠 콜린스는 병을 마사오에게 내밀었다. "한 모금 마셔봐. 긴장이 풀릴 거야." "아녜요." 샘 콜린스는 싫으면 그만두라는 듯 병을 사물함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가 말문을 다시 열었다. "네가 그럴 만한 짓을 했으니까 고모부가 그렇게 화를 내시겠지." 그러나 마사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콜린스는 생각했다. '저 애를 넘겨 주면 내 일은 끝나는 거야.' 콜린스는 손에 쥐게 될 고액의 수표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꼭 수표일 필요는 없다. 현금이라도 좋다. 세금도 없는 돈이다. 플로리다보다는 남태평양의 섬으로 여행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 곳에는 아가씨들이 모두 예쁘면서 고분고분하다고 한다. 돈, 바로 그게 문제였다. 돈만 있으면 왕같이 살 수 있는 판이었다. 지금까지도 돈 때문에 고생을 하지는 않은 콜린스였지만, 이번에는 항상 그리던 일확천금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옆의 젊은이가 바로 성공의 열쇠였다. 콜린스는 마사오를 흘끗 쳐다보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마사오는 도망칠 궁리에 바빴다. 콜린스에게 도와 달라고 사정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는 허튼 수작 하면 가차없이 총을 쏘겠다고 경고했다. 콜린스는 이제 도망간 살인범을 잡은 영웅이 될 판이었다. 차에서 뛰어내릴 생각도 해 보았지만 옆구리에 들이댄 총 때문에 불가능했다. 마사오가 문을 열고 뛰어 내리기도 전에 콜린스의 총이 불을 뿜을 것이다. 마사오는 먼지가 뿌옇게 앉은 차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조지 워싱턴 다리'라는 글씨 앞에 화살표가 그려져 있는 표지판이 보였다. 저 다리만 건너면 도망갈 기회는 사라진다. 북부 뉴욕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타면 쉬지 않고 계속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허드슨 강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조지 워싱턴 다리가 멀리 보였다. 이제 마사오에게는 3분 정도의 탈출 시간이 남아 있었다. 콜린스를 슬쩍 훔쳐 본 마사오는 그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설사 총이 업다 해도 힘으로 그와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다. 신호등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푸른색 신호등이 붉은색으로 바뀌는 찰나였다. 콜린스는 신호등이 바뀌기 전에 지나가려고 액셀러레이터에 힘을 주려 했다. 그 때 순찰차가 옆에 와서 멈추는 바람에 콜린스는 급히 저지하고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괜히 말썽 일으키지 말자.' 샘 콜린스는 생각했다. '이 일만 끝나면 큰 부자가 될 텐데 조심해야지.' 마사오는 신호를 기다리며 옆의 순찰차를 쳐다보았다. 두 명의 경찰관이 타고 있었다. 마사오는 두 사람에게 도와 달라고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그러나 경찰의 지명 수배를 받고 있었다. 경찰 역시 그의 편은 아니었다. 뭔가 탈출할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신호등이 언제 바뀔지 모른다.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마사오가 탐정에게 말했다. "술을 한 모금 마셔도 될까요? 좀 마셔 보고 싶은데요." "그럼. 술을 마시면 긴장이 풀린다니까. 꺼내 마시라구." 사물함을 연 마사오는 위스키 병을 꺼내 코르크 마개를 잡아 뺐다. 술병을 든 마사오는 신호등을 지켜 보았다. 붉은색 신호등이 푸른색으로 바뀌자 마사오는 잔뜩 긴장했다. 콜린스가 액셀러레이터에 발을 올려놓았다. 이제 모든 것이 시간을 얼마나 잘 맞추느냐에 달려 있었다. 차가 앞으로 나가려는 순간 마사오는 손에 들고 있던 위스키 병을 샘 콜린스의 머리에 대고 들이부었다. 당황한 콜린스가 마사오에게 몸을 돌렸다. "도대체 무슨 짓이야?" 콜린스가 술병을 빼앗느라고 핸들을 놓았다. 번개같이 두 손으로 핸들을 움켜잡은 마사오는 있는 힘을 다해 왼 쪽으로 틀었다. 콜린스의 차는 순찰차를 뒤에서 들이받았다. 차에 타고 있던 경찰이 샘 콜린스를 노려보다가 소리를 질렀다. "차를 옆으로 대시오." 샘 콜린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는 먼저 이 일을 처리하고 나서 마사오를 흠씬 때려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차를 길 옆에 댄 콜린스는 경찰관들이 화난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차에서 내리시오." 차에서 내린 샘 콜린스의 태도는 아주 공손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가 말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됐습니다. 자동차 수리비는 제가 당연히 물어 드려야죠. 손이 핸들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콜린스의 몸에서는 지독한 술 냄새가 났다. 경찰관이 동료에게 말했다. "이 사람 음주 운전하다가 우리 차를 들이받은 것 같은데." "아닙니다." 샘 콜린스가 부인했다. "난 술을 마시지 않았어요. 이 애가 장난을 친 거죠. 내 머리에 위스키를 쏟아 부었단 말입니다." "어떤 애가요?" 샘 콜린스는 고개를 돌렸다. 마사오는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9 생활이 평온하면 시간 가는 것이 편안하다. 그러나 문제가 많을 때 시간은 적이다. 마사오에게 시간은 적이었다. 그는 데루오를 너무 과소평가했다. 시간이 지나면 데루오가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데루오는 마사오가 죽을 때까지 쫓아다닐 태세였다. 지금도 데루오는 사무실이나 공장, 또는 별장 뒤뜰을 거닐며 음모를 꾸미고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체스를 둘 때면 데루오는 항상 마사오를 이겼다. 그러나 이번 한 판만은 달랐다. 마사오의 목숨이 걸린 싸움이었다. 콜린스의 시보레가 경찰차를 들이받는 순간, 차에서 몰래 빠져 나온 마사오는 오던 방향으로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데루오의 하수인에게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걸었다. 생각 같아서는 달리고 싶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다. 그는 본능적으로 사람들이 벅적거려 혼잡한 만하튼의 중심가를 향해 걸었다. 그러나 뚜렷한 목적지가 없었다. 그리니치 빌리지나 여관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도대체 갈 곳이 없엇다. 마사오가 도망친 사실이 데루오의 귀에 들어가면 거리에 사람들이 쫙 깔릴 것이다. 데루오는 마쓰모토 그룹의 모든 자원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 자신의 일에 방해되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아끼지 않을 것이다. 지금 마사오를 잡으려고 경찰과 마쓰모토 그룹의 보안 요원들, 게다가 사립 탐정을 얼마나 고용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사오 혼자 그 막강한 추적자들을 피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편들어 줄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로스앤젤레스에는 히다카 구니오가 있으니까. 마사오는 한때 좋았던 시절을 회상했다. 아버지는 히다카 구니오를 신뢰하고 아꼈다. 어떻게 해야 그와 만날 수 있을까? 전화로는 마사오가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어떻게든 만나야 했다. "앞 좀 잘 보고 다녀!" 갑작스런 목소리에 깜짝 놀라 마사오는 고개를 돌렸다. 긴 회색 제복을 입은 호텔 도어맨과 부딪혔던 것이다. "미안합니다." 마사오가 사과했다. 도어맨은 연방 호루라기를 불며 줄 서 있는 손님들에게 택시를 불러 주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자신이 아메리카스 로의 힐튼 호텔 앞에 왔다는 것을 알았다. 마사오의 눈길이 문득 한 곳에 머물렀다. 바로 호텔 앞이었다. '로스앤젤레스'라는 푯말이 붙어 있는 그레이하운드 버스 한 대가 호텔 입구에 서 있었다. 사람들이 버스에 오르고 있었다. 마사오의 주의를 끈 것은 승객이 모두 일본인이라는 사실이었다!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일본인 관광단이었다. 마사오는 놓쳐선 안 될 기회라고 생각했다. 우선 상황을 살폈다. 운전사가 버스 만 앞에 서서 차에 오르는 승객의 이름과 좌석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다. 마사오는 버스에 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버스에 탄단 말인가? 분명히 관광단이 전세낸 버스일 텐데 승객 명단에도 없는 마사오를 태워 줄 리 만무했다. 잠시 궁리를 하던 마사오는 서둘러 힐튼 호텔의 로비로 들어갔다. 넓은 로비는 들어오고 나가는 관광객과 손님들로 매우 복잡했다. 로비 복판에는 관광객의 이름표가 붙은 가방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네 명의 벨보이가 가방을 버스 짐칸에 옮겨 다 실었다. 아직 10여개의 가방이 남아 있었다. 순간 마사오는 방법이 떠올랐다 바로 가방 있는 곳으로 걸어가서 가방 하나의 이름표를 확인했다. '다나카 요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마사오는 로비를 가로질러 호텔 내부 교환 전화가 줄지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끝에 있는 전화기를 들었다. 교환원이 나왔다. "뭘 도와 드릴까요?" "예. 다나카 요시오씨를 방송으로 찾아 주시겠습니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잠시 후 로비의 대형 스피커에서 금속성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다나카씨 다나카 요시오씨는 구내 전화박스로 가셔서 전화 받으시기 바랍니다." 땅딸막한 남자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여보세요?" 그와 등을 돌린 마사오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다나카 씨?" "예, 예" 다나카가 대답했다. "다나카 요시오 씨 맞습니까?" "그렇습니다만, 누구십니까?" "저는 국제전화 담당자입니다. 다나카 씨한테 일본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런데 잠깐 지체되고 있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버스가 떠" "잠깐만 기다리시면 될 텐데요." "회사에서 온 전화인가요?" 다나카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선생님." "그럼, 기다리시지요." "감사합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마사오는 다나카 앞을 지나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짐 싣는 일은 거의 끝나고 있었다. 줄지어 섰던 승객들도 거의 다 승차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데루오의 하수인들은 아마 일반 버스 터미널에서 마사오를 찾으려 할 것이다. 마사오가 관광버스에 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마사오는 버스 문으로 다가갔다. 운전사가 물었다. "손님 이름은?" "제 이름은 요시오" 바로 그 때 땅딸막한 사람이 버스 쪽으로 뛰어오는 게 보였다. 마사오는 새파랗게 질렸다. 헐레벌떡 마사오를 지나쳐 다나카는 운전사에게 말했다. "다나카 요시오요!" 운전사는 그 이름을 명단에서 확인하고 표시했다. 마사오는 옆에 서서 그 작은 일본인이 버스에 오르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운전사가 타자 버스는 바로 출발했다. 마사오는 한참을 그냥 서 있었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다니!' 잘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하소연할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문득 사나에가 보고 싶었다. 자신을 숨겨 주고 형사에게 거짓말까지 해 가며 보호해 주려 한 사나에가 얼마나 잘해 주었는지 생각났다. 마사오는 밀어 닥치는 슬픔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 때 경찰관이 호텔 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자신을 유난히 쳐다보는 것 같았다. 자격지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물쭈물할 때가 아니었다. 재빨리 몸을 돌린 마사오는 사람들이 북적대는 호텔 로비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로비를 가로질러 호텔 옆문을 통해 다시 밖으로 나왔다. 마사오는 숨을 곳이 필요했다. 그러나 막막하기만 했다. 마사오는 96번가의 독일식 레스토랑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독일 음식을 싫어했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그 식당을 선택했다. 마사오는 데루오의 생각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마사오의 습관을 잘 알고 있는 데루오는 그가 갈 만한 곳이면 모두 사람들을 풀어 놓았을 것이다. 그래서 마사오는 자신이 평소에 좋아하지 않던 곳을 의도적으로 찾아다녔다. 데루오가 추적하지 못하도록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했다. 구석 자리에 앉아 좋아하지도 않는 독일식 소시지를 먹으며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는 똑같았다. 모든 길이 막혀 있는 이 도시에서 어떻게든 탈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심코 창 밖을 내다보던 마사오는 커다란 냉장 트럭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직도 기회는 있었다! 한 시간 후, 뉴저지의 부두 근처에 있는 트럭 하역장에 도착한 마사오는 사람들 눈에 잘 안 띄는 곳에서 주변 상황을 살폈다. 적어도 50대 정도의 대형 트럭들이 즐비하게 서 있고 일꾼들이 짐을 싣고 있었다. 온갖 종류의 물건이 다 있었다. 트럭에 싣는 화물을 주로 가구류, 화학약품, 식품, 의료기구 등이었다. 물론 책이며 텔레비전, 목재와 의류도 있었다. 지방이나 크고 작은 도시, 농장, 항구 등 전국을 누비며 물건들을 실어나르는 이 트럭들이야말로 미국의 생명줄이었다. 마사오는 한참 동안 짐 싣는 광경을 지켜 보았다. 절차가 모두 같았다. 트럭에 가득 짐을 실으면 뒷문을 올리고 자물쇠를 채웠다. 그리고 운전사와 조수가 타면 트럭은 목적지로 출발했다. 구경할 만큼 한 마사오는 주위를 서성거리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보기로 했다. 마사오는 짐을 싣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이 트럭은 어디로 갑니까?" "커넥티컷이오." 그 쪽은 뉴욕과 너무 가까웠다. "감사합니다." 마사오는 다른 트럭을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이 트럭은 어디로 갑니까?" "보스톤이오." 방향이 달랐다. 마사오는 계속 묻고 다녔지만 대개가 메인 주거나 필라델피아, 워싱턴, 델라웨어 등이었다. 마땅한 트럭이 없었다. 마사오가 가정용 가구를 싣고 있는 대형 트럭 앞에 이르렀을 때는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지만 물어 봤다. "실례합니다. 이 트럭은 어디로 갑니까?" 고개도 들지 않고 인부가 귀찮은 듯 대답했다. "로스앤젤레스." 마사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로스앤젤레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 트럭에 타야 했다. 마사오는 인부들이 가구를 조심스럽게 트럭에 싣는 모습을 보았다. 트럭에는 짐이 거의 차 있었다. 다 싣고 나면 짐칸은 꽉 차 버릴 것이다. 마사오가 어떻게든 끼어 들어가면 몸을 웅크리고 오랜 여행을 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대륙을 횡단하는 데 6,7일이 걸리는데 그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트럭 안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어.' 마사오는 생각했다.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해서 히다카 구니오를 만나 그의 도움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다. 네 명의 일꾼은 무거운 가구를 큰 수레에 실어서 경사로를 따라 트럭의 짐칸으로 올리고 있었다. 마사오는 시간을 잘 맞춰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너무 일찍 트럭에 올랐다가는 사람들에게 발견될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고 너무 기다리다가는 타기도 전에 트럭 문이 닫혀 버릴 염려가 있었다. 몇 명의 트럭 운전사들이 하역장 건너편에 있는 식당에서 나오고 있었다. 순간 먹을 것이 떠오르고 마사오는 침을 꼴깍 삼켰다. 지금은 독일 음식이건 무엇이건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사오는 식당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가서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주문해서 가져오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럴 수만 있다면 대륙을 횡단하는 며칠 동안 트럭 안에서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고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마사오는 그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일분 일초가 아쉬웠지만 마사오는 식당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트럭이 언제 떠날지 모른다. 마사오는 서둘러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시끄러운 식당 안은 연기가 자욱했고 트럭 운전사들로 테이블이며 긴 카운터까지 꽉 차 있었다. 마사오는 카운터 앞에 섰다. 여자 종업원 한 명이 열대여섯 정도의 손님들을 상대로 주문도 받고 음식도 나르면서 여유 있게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마음이 급한 마사오는 그녀를 급히 불러댔다. 손님의 잔에 커피를 따르고 난 여종업원이 다가왔다. "뭘 드시겠어요?" 마사오는 무엇을 주문할 것인지조차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커다란 메뉴 판을 올려다본 마사오가 말했다. "햄버거 하나 주세요." "알았어요." 주문을 받은 종업원은 주문지에 표시를 하고 돌아섰다. "치즈 샌드위치도 하나 주세요." "알았어요." 다시 돌아서려는 종업원을 향해 마사오가 말했다. "또 닭고기 샌드위치도요." 이번에는 종업원이 마사오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제 다 됐어요?" "아뇨." 마사오는 재빨리 계산해 보았다. 6, 7일간 하루에 두 끼씩만 먹어도 충분할 것이다. 마사오는 다시 메뉴판을 올려다보았다. "계란 샐러드 샌드위치, 콘드 비프 샌드위치, 미트로프 샌드위치, 햄 샌드위치, 칠면조 샌드위치, 스위스 치즈 샌드위치, 로스트 비프 샌드위치, 살라미 샌드위치, 베어컨 토마토 샌드위치, 그리고 볼료나 샌드위치도 하나 주세요." 여종업원의 입이 딱 벌어졌다. 이윽고 그녀가 물었다. "마실 것은요?" "예, 코카콜라 캔으로 열두 개 주세요." 여종업원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보통 식욕이 아니네요." 마사오는 여종업원이 주방 카운터에 주문지를 올려놓는 것을 보았다. 적어도 이번 여행에서는 그렇게 배가 고프다거나 목은 마르지 않을 것 같았다. 음식 냄새를 맡자 더욱더 배가 고팠다. 파이 한 조각과 커피를 시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에게는 단 1분의 시간도 허비할 여유가 없었다. 어서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계산대 근처에 앉아 있던 마사오는 트럭 운전사들이 음식값을 계산하면서 주고받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찰리 ,어느 쪽으로 갈 거야?" "털사. 석유 시추용 부속품을 배달하러 가네." "나도 거기서 오는 길인데, 날씨가 아주 안 좋아." "토니, 트럭은 새로 샀나?" "내년에나 바꾸게 될 걸세. 마누라가 이번에 수술 받았거든." "거 참, 안됐군." "그래. 요즈음은 잘못 아프면 뽕빠진다니까." 마사오는 주문도 받고 돈도 받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는 여종업원을 보면서 속으로 외쳤다. '빨리, 어서 빨리!' 마사오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여종업원이 말했다. "다음에 나올 거^36^예요." "고마워요." 바로 그 때 마사오 뒤편의 계산대 쪽에서 말소리가 들려 왔다. "지금쯤이면 다 실었을 거야. 자 이제 로스앤젤레스를 향해 밟아 보자구." 마사오는 얼어붙는 것 같았다. 바로 자신이 타야할 트럭 운전사와 조수가 돈을 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가 가서 화물 인수증에 사인하고 오지요." 조수가 말했다. 마사오는 안절부절못하며 주방 쪽을 바라보았다. 주문한 샌드위치가 막 포장되는 중이었지만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트럭 운전사와 조수는 이미 문을 나서고 있었다. 마사오는 후다닥 일어나서 서둘러 뒤쫓아 나갔다. 여종업원이 외쳤다. "이봐요 여기 샌드위치 가져가요!" 그러나 마사오는 그대로 달려갔다. 트럭은 아직 그 곳에 서 있었고 마지막 몇 개의 짐을 싣고 있었다. 언제 일꾼들이 트럭 뒷문을 올리고 자물쇠를 채울지 모른다. 몰래 타려면 지금이 좋았다. 그러나 일꾼들이 트럭 옆에 둘러서서 운전사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 몰래 트럭에 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문득 지금까지 도망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여러 번 놓치고 맛보았던 좌절감이 되살아났다. 지금 상황으로 보아 또다시 절호의 기회를 놓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사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가까운 트럭에서 뭔가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 쪽으로 쏠렸다. 커다란 샹들리에가 운반용 수레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땅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물건을 떨어뜨린 일꾼이 재수없다는 듯 투덜댔고, 몰려온 일꾼들과 운전사들이 웃으며 놀려 댔다. 순간, 마사오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재빨리 트럭으로 뛰어갔다. 주위를 한번 둘러본 다음 트럭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재빠른 동작으로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의자와 탁자, 소파 등을 헤치고 속으로 들어갔다. 트럭은 마사오가 생각했던 것보다 길었다. 커다란 소파 뒤에 숨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이 곳에 숨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마사오는 식당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샌드위치와 마실 것들을 생각하자 너무나 아까웠다. 그러나 지나간 일이었다.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 마사오는 마쓰모토 왕국의 주인이다. 잠시 후 트럭 뒷문을 올리는 소리와 함께 마사오는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이윽고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들리고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마사오는 캘리포니아의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길에 오른 것이었다. 10 마사오는 교토의 한 레스토랑에 앉아 있었다. 흰 식탁보가 덮인 테이블에는 금젓가락이 놓여 있었다. 넓은 레스토랑에 손님이라고는 마사오 한 사람뿐이었다. 주위는 아주 평화롭고 조용했다. 간간이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만 들려 올 뿐이었다. 웨이터가 쟁반을 들고 테이블로 다가왔다. 쟁반에는 생선 요리가 담겨져 있었다. '특별히 손님을 위하여 마련한 요리입니다.' 웨이터가 말했다. 요리는 맛있어 보였고 그는 배가 고팠다. 마사오는 젓가락으로 생선 한 토막을 집어 입에 넣었다. 순간 그 생선이 독을 빼지 않은 복어라는 것을 깨달았다. 웨이터를 쳐다보았다. 기분 나쁜 웃음을 짓고 있는 웨이터는 다름 아닌 데루오였다. 마사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달려나갔다. 고케데라 사원의 이끼 정원이 나왔다.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 왔다. 마사오가 중얼거렸다. '점심 시간인데 마을로 가서 뭐 좀 먹어야겠어.' '안 된다. 안 돼.' 아버지가 말렸다. '저 마을은 위험해. 차라리 여기서 굶는 게 더 나을 거야.' '하지만, 아버지, 전 배도 고프고 목도 말라요.' 어머니가 양 손에 쥐고 있던 것을 건네 주면서 말했다. '이걸 마시렴.' 그것은 눈이었다. 주위를 둘러본 마사오는 눈덮인 일본 북부 산악지대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추위로 온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마사오는 트럭 안의 냉기로 잠에서 깨어났다. 이가 딱딱 마주쳤다. 방금 꾼 꿈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꿈 속에서처럼 허기가 지고 목이 말랐다. '그래도 여긴 안전하잖아.' 마사오는 생각했다. 아무리 춥고 배가 고파도 상관없었다. 얼마든지 이겨 낼 수 있었다. 데루오를 이기려면 이 정도는 참아야 했다. 배고픔과 목마름은 그냥 참을 수밖에 없었지만 추위는 막을 수 있었다. 마사오는 어둠 속을 더듬어 탁자에 덮여 있는 두꺼운 담요를 찾아 내 몸에 둘렀다. 얼마나 오래 잤는지, 트럭이 어느 정도 달려왔는지, 지금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알 수 없었다. 마사오는 그가 배운 미국의 지리를 생각해 보았다. 뉴욕의 서쪽에는 펜실베이니아, 오하이오, 인디애나, 일리노이 주가 이어져 있다. 일리노이 주까지라야 광활한 미국 대륙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지금도 이렇게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른데 과연 도착할 때까지 견뎌 낼 수 있을까?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5천 킬로미터 떨어진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트럭 문을 열리지 않을 것이다. 꼼짝없이 트럭 속에 갇혀 있어야 했다. 트럭이 규칙적으로 흔들리며 달리자 마사오는 다시 잠이 들었다. 담요를 푹 뒤집어 쓴 채 꿈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가루이자와에 있는 여름 별장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교토의 긴카쿠 사원도 뒤져 보았지만 부모님은 없었다. 도쿄의 아사쿠사 신사에도 없었고 어느 틈에 요론 섬에서 낚싯배를 타고 있었다. 정어리와 농어, 참치, 오징어, 방어, 게 등이 배 안에 가득 차 있었다. 사나에도 꿈에 나타났다. 캄캄한 해변가에서 사나에가 소리치고 있었다. '그들이 쫓아와요. 잡히면 안 돼요. 발견되면 생명이 위험해요.' 그러다 사나에는 사라지고 밝은 불빛이 마사오의 얼굴에 쏟아졌다. 남자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거기 숨은 줄 다 알고 있어!" 마사오는 잔뜩 웅크리고 보트 안으로 몸을 숨기려고 했다. 그러나 계속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 왔고 주변이 대낮처럼 밝혀져 있었다. 눈을 뜨자 순간 마사오는 이건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웬 남자가 마사오의 얼굴에 손전등을 비추고 있었다. "야, 임마. 일어나! 이리 나와!" 마사오는 깜짝 놀라 일어나 앉았다. 트럭은 뒷문이 열린 채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다. 벌써 캘리포니아에 도착했을 리가 없다. 뭔가 일이 잘못된 모양이다. 여기 숨어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감쪽같이 숨은 줄로만 알았는데. 그런데 누가 몰래 타는 것을 본 사람이 있어 경찰이나 데루오에게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빠져 나갈 길이 전혀 없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쪽으로 걸어 나왔다. 온 몸이 쑤시고 저렸다. 트럭 운전사가 서 있었다. 트럭에서 뛰어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트럭이 멈춰 있는 곳은 고속도로 옆에 있는 화물계량소였다. 계량소 사무실 앞에는 경찰 순찰차가 서 있었다. "제가 트럭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아셨어요?" 마사오가 물었다. 운전사가 말했다. "간단한 계산이야. 하역장을 떠나기 전에 반드시 트럭의 중량을 재게 돼 있어. 그리고 중간에 화물계량소에 들러 중량을 초과하지 않았는지 다시 확인을 하도록 되어 있지." 운전사는 초대형 계량기를 가리켰다. "뉴저지 주를 떠날 때보다 지금 70킬로그램이나 더 많이 나가더라구." 어이없게도 이런 일로 잡히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허기와 갈증이 한꺼번에 몰려오자 현기증으로 마사오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맞은편에 순찰차가 눈에 들어왔다. "저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그 때 다리가 후들거리며 쓰러질 뻔했다. 운전사가 마사오를 살피며 말했다. "이봐! 괜찮아?" "예." "너 밥먹은 게 언제냐?" "저 잘 모르겠어요." 마사오는 솔직히 대답했다. "우선 너 밥부터 먹어야겠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하지. 넌 이틀이나 트럭 속에 갇혀 있었다." 운전사가 손을 내밀었다. "난 알이야." 마사오도 손을 내밀었다. "저는 마사오^36^예요." 운전사가 조수를 소개했다. "여기는 피터야." "안녕하세요?" "먼저 좀 씻어라." 알이 말했다. 세 사람은 화물계량소 맞은편에 있는 큰 음식점으로 갔다. 얼마나 기운이 빠졌는지 마사오는 몸을 추스르기가 힘들었다. 마사오가 비틀거리자 알이 옆에서 부축해 주었다. 도망칠 생각이 있었더라도 그럴 기운이 없었다. "네가 한 짓은 불법이야." 알이 마사오에게 말했다. "예." 마사오가 살인범으로 거액의 현상 수배자라는 사실을 운전자가 안다면 어떻게 나올까? 길 건너에 서 있는 경찰차를 생각하자 새삼 부르르 몸이 떨렸다. "추워?" "아니에요." 햇살은 너무나 따사로웠다. 어둠 속에 갇혀 지낸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전에는 상상도 못 했었다. 식당은 부산하게 먹고 마시며 떠드는 트럭 운전사들로 시끌벅적했다. 알은 마사오를 화장실로 데려갔다. 거울을 들여다본 마사오는 며칠 사이에 변한 자기 몰골에 깜짝 놀랐다. 온몸이 먼지투성이인데다 홀쭉해진 얼굴은 몹시 지친 표정이었다. 마사오가 대충 씻고 나자 알은 식당으로 데려갔다. 음식 냄새에 마사오는 정신까지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세 사람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알과 피터는 놀란 표정으로 마사오가 먹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수프 한 접시를 순식간에 먹어치운 마사오는 햄버거 샌드위치와 감자 튀김 한 접시를 비웠고, 다시 치즈버거 샌드위치와 감자 튀김을 더 주문해서 깨끗이 먹어치웠다. 마지막으로 사과 파이와 아이스크림, 그리고 커피를 마셨다. "맙소사!" 알이 감탄한 듯 말했다. "난'트럭 운전사들'이 많이 먹는다 해도" "내가 먹은 음식값은 있어요." 마사오가 말했다. 알은 싱긋 웃었다. "괜찮아. 그렇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공짜로도 먹을 만하지." 알은 담배를 피워 물고 마사오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마사오는 순간 긴장하기 시작했다. 올 것이 온 것이다. 알이 조용히 물었다. "너 왜 도망치는 거지?" 마사오는 억세 보이는 트럭 운전사들로 북적대는 식당을 둘러보았다. 알에게 사실대로 말해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데루오의 음모를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알이 다른 운전사들을 설득해서 마사오를 도와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사오는, "전 학교가 싫어서 도망쳤어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친구를 찾아가려고요." 하고 말했다. 두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될지 망설이면서 마사오를 쳐다보았다. 마사오는 조마조마해서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다. 두 사람이 경찰에 넘기면 그 때는 끝장이다. 꼼짝없이 데루오의 손에 붙잡힐 것이다. 갑자기 알이 큰 소리로 웃었다. "너를 나무랄 생각은 없다. 나도 너만할 땐 그랬으니까. 젠장, 트럭 몰고 다녀도 의사들보다 돈을 더 잘 번다구." 마사오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럼 절 캘리포니아까지 데려다 주시는 겁니까?" "그러지, 뭐." 그 말에 마사오는 날아갈 듯 기뻤다. "정말 고맙습니다." 마사오가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죠?" "인디애나 주 한복판이야. 3일 후면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할 거야. 자, 이제 떠나지." 같은 날 오후 늦은 시간, 북부 뉴욕 웰링턴 마을의 매트 브래니건 경위는 절도사건 보고서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 때 형사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시간 좀 있으세요?" 자리에서 일어서며 브래니건은 기지개를 켰다. 아침 8시에 출근했던 그는 피곤해서 그만 퇴근할 생각이었다. "제리, 내일 아침에 보면 안 되겠나? 오늘도 늦으면 캐시가 날 가만두지 않을 걸세." 제리는 머뭇거렸다. "그러시겠죠. 그럼, 내일 아침에 말씀드리지요." 제리가 몸을 돌렸다. "잠깐." 매트 브래니건이 말했다. "무슨 일인데?" "약 2주 전에 실버 애로우라는 제트 여객기가 이 부근에 추락한 것을 기억하시죠?" 물론 브래니건 경위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쓰모토 요네오와 그 아내, 그리고 조종사 두 명을 합하여 모두 네 명이 사망한 사고였다. "응. 그런데?" "그게 사고가 아니었어요." 브래니건이 제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방금 연방항공국에서 보낸 임시보고서를 받았는데 연료 탱크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는군요. 살인사건이에요." 순간 매트 브래니건은 온몸이 오싹했다. "그거 확실한가?"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누군가 고의로 비행기를 추락하게 만든 거죠. 연료에 이상이 없었다면 비행기가 고도만 높여도 그 정도 폭풍에 추락할 리가 없다는 겁니다." 제리는 보고서 내용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나 브래니건 경위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사오의 말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제 부모님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제가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았는데 고모부가 회사를 빼앗으려고 해요. 제가 죽어야 고모부가 회사를 차지할 수 있거든요.' 그 때는 복잡한 가정문제로 가출한 소년이 약물을 복용하고 횡설수설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데루오에게 연락했던 것이다. 그 때 브래니건은 데루오와 운전사에게 끌려가는 마사오의 모습에서 묘한 연민 같은 것을 느꼈었다. 겉으로는 착하고 말쑥하게 생긴 젊은이였다. 그런 다음 데루오의 전화를 받고 놀랐던 일이 생각났다. '조카가 운전사를 살해했소. 또 살인을 할지도 모르니 그 애를 찾아야 합니다.' 데루오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 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사람을 보는 눈만큼은 정확하다고 자부해 온 브래니건 경위였다. 그의 눈에는 마사오가 그럴 아이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건 현장을 조사한 브래니건은 사토 데루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보고서의 내용대로라면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비행기를 고의로 추락시킨 범인이 있다면 동기가 있을 것이다. 마쓰모토 그룹의 t아속은 충분히 동기가 될 만했다. 만일 마사오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마사오를 위험속으로 밀어넣은 거나 다를 바 없었다. 브래니건은 자리에 앉아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여러 가지 정보가 급히 필요했다. 그는 제리에게 말했다. "마쓰모토 그룹에 대해 빨리 조사해 주게. 마쓰모토 요네오가 살아 있을 때 대주주가 누구며, 도 지금은 누구인지. 회사 변호사를 만나 보는 게 좋겠지. 내일 아침까지 보고해 주도록 하게." 밤이었다. 높이 떠 있는 보름달 아래 트럭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알과 피터 사이에 기어 앉은 마사오는 멀리 보이는 농가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인디애나 주^36^예요?" 마사오가 물었다. "일리노이 주야." 피터는 사물함에서 낡은 지도를 한 장 꺼냈다. "지금 여기야." 피터는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우리는 미조리 주와 오클라호마를 가로질러 텍사스의 모퉁이를 지나 뉴 멕시코 주, 애리조나와 네바다를 그쳐 캘리포니아로 들어간다. 거리가 대략 3천2백 킬로미터 정도 되지." 마사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렇게 먼데 3일만에 도착할 수 있어요?" "그래서 밤낮을 쉬지 않고 달리잖니. 때문에 운전사가 두 명 필요한 거야. 교대로 운전해야 하거든." 마사오는 다시 차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미국은 정말 넓군요." 마사오가 말했다.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네요." 그러나 마사오는 일본만큼 아름다운 나라는 없다고 생각했다. 정상에 눈덮인 산과 아름다운 호수, 강과 폭포,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벚나무 아래 앉아 꽃놀이를 즐기는 사람들도 볼 수 없고, 오키나와의 아름다운 해변에서 친구들과 어울릴 수도 없다. 마사오는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문제는 살아 돌아가느냐 죽어서 돌아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데루오는 마사오를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그의 손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마치 숨바꼭질하듯 두 사람의 두뇌 싸움이 되어 버렸다. 데루오는 마사오가 잡히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확신했다. 결국은 잡힐 것이고 자신의 생각대로 처치하게 될 것이다. 데루오는 마쓰모토 그룹의 보안 책임자인 하야시 노부오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사오가 공중으로 증발하지 않았다면 찾을 수 있는 거요. 우리 손으로 찾아야 해요. 미국 경찰이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해. 경찰에 신고한 건 내 실수였소. 이건 집안의 문제요." "잘 알겠습니다." "가능한 방법은 다 동원하시오. 뭐든지 아낄 것 없소. 내 조카를 찾기만 하시오." 무표정한 데루오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 앤 위험한 놈이오. 이미 한 사람을 죽였소. 만일 살려서 데려올 수 없다면 죽여서라도 데려오시오." 매트 브래니건 경위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새벽 3시가 되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아내가 깨지 않도록 살그머니 침대에서 빠져 나왔다. 그러나 그가 움직이는 소리에 잠이 깬 아내가 스탠드를 켰다. "왜 그래요, 매트? 소화가 안 돼요?"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했어. 나 때문에 멀쩡한 애가 죽게 되었는지도 몰라." 브래니건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애를 살인범에게 내준 꼴이 된 것 같아." "확실한 게 아니잖아요?" "몇 시간 후면 알게 될 거야. 하지만, 예감이 좋지 않아. 만일 사실이라면 지금쯤 그 애는 죽었을 수도 있어. 그런 실수는 일생 나를 괴롭힐 거야." "잠시 눈을 좀 붙여 보세요. 확실치도 않은 것을 고민만 하고 있을 수 없잖아요?" 그러나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트 브래니건 경위가 출근했을 때 벌써 보고서가 그의 책상에 놓여 있었다. 브래니건은 보고서를 두 번 읽었다. 한 번은 빨리, 그리고 두 번째는 한자 한자 아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놀랍게도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마사오는 대 마쓰모토 그룹의 후계자였다. 유언장에는 그러나 마사오가 죽을 경우 데루오가 모든 재산을 물려받게 된다고 되어 있었다. 단돈 10 달러를 빼앗기 위해서, 도는 위스키 한 병 때문에 살인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하물며 값을 계산할 수도 없는 세계적인 대그룹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야 사토 데루오는 사전에 유언장의 내용을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비행기를 추락하게 만들어 먼저 마쓰모토 요네오를 처치한 다음 마사오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민 것이다. 데루오의 계획은 브래니건의 도움으로 거의 성공할 뻔했다. 도움을 청하러 온 마사오를 살인범에게 넘겨 주지 않았던가. 마사오가 아직 살아 있다면 반드시 구해 줄 의무가 있었다. 먼저 마사오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는 게 필요했다. 브래니건은 만하튼의 경찰 컴퓨터 통제실의 오퍼레이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매트 브래니건 경위입니다. 열여덟 살 된 일본인 마쓰모토 마사오를 지명 수배한다는 공문이 있었는데 아직도 유효한지 알아봐 주시겠습니까? "전화를 끊지 말고 기다리세요." 잠시 후 오퍼레이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수배령은 아직 해제되지 않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브래니건 경위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수배령이 아직 해제되지 않았다면 마사오를 잡지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데루오보다 먼저 마사오를 찾아야 한다. 시간을 다투는 일이었다. 브래니건은 수화기를 들었다. "마쓰모토 그룹에 관한 서류는 모두 찾아 주게." 5분 후 경위는 도이 사나에에 대한 헬러의 보고서를 읽었다. 보고서를 다 읽고 경위는 밖으로 나왔다. 퀸스에 있는 마쓰모토 공장으로 차를 몰았다. 사나에는 마사오를 좀처럼 잊을 수 없었다. 마사오가 뭔가 자꾸만 숨기려던 것으로 보아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게 분명했다. 최선을 다해 도와 주고 싶었지만 벌써 더나가 버렸다. 그의 생사조차 알지 못했다. 야구 경기장에서 양 팀 모두 응원하며 즐거워하던 마사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의 웃음과 다정한 모습이 그리워졌다. "사나에!" 갑자기 부르는 소리에 마사오 생각에서 깨어났다. 고개를 들어 보니 조장인 헬러가 앞에 서 있었다. "왜요, 헬러 씨?" "왓킨스 씨가 널 찾으신다. 당장 가 보도록 해." "예." 사나에는 인사담당 이사실로 들어갔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옆에는 낯선 손님이 있었다. 경찰관이라는 것을 직감한 사나에는 경계심으로 긴장하기 시작했다. 왓킨스가 말했다. "사나에, 이분은 브래니건 경위시다. 너하고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신다." 왓킨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브래니건 경위가 말하면서 사나에를 바라보았다. "자, 앉아요." 자리에 앉은 사나에는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아가씨와 마사오가 친구라고 하던데?" "아녜요, 경위님." 사나에는 딱 잡아뗐다. 브래니건 경위는 미심쩍은 듯 사나에를 바라보았다. "정말인가? 여기서 함께 일했지?" "예." "근무중에도 서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 "예." 브래니건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매일 점심을 같이 먹을 때는 이야기했겠지?" 이미 뒷조사를 하고 찾아온 게 분명했다! "마사오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요." 사나에는 단호하게 말했다. "사나에, 나는 마사오를 도와 주려고 왔어. 지금 그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어." '그래요, 당신을 때문이죠.' 사나에는 생각했다. "지금 어디로 갔는지 아나?" 사나에는 브래니건을 쳐다보았다. 그 질문에는 숨길 게 없었다. "아뇨, 저도 몰라요." 매트 브래니건은 사나에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사오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말은 진실로 들렸다. 브래니건은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사나에를 만나면 마사오를 찾을 단서를 잡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었다. 사나에가 정말 마사오의 행방을 모른다면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데루오가 먼저 마사오를 찾아 낼지도 모른다. 브래니건은 그럴 경우 어떻게 되는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브래니건은 자신이 마사오를 도우려고 한다는 것을 사나에가 믿도록 해야만 했다. "도망치도록 아가씨가 도와 주지 않았나?" "아뇨." "아가씨는 지금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있어. 경리부에서 마사오의 사진을 받아 보자마자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기 전에 그와 함께 공장을 빠져 나갔어. 그리고는 아가씨 집으로 같이 갔지. 샘 콜린스라는 사립 탐정이 집에 들이닥쳤을 때 아가씨가 마사오가 도망치도록 도와 준 거지." 사나에는 입술을 꼭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브래니건은 잠시 사나에의 표정을 살폈다. "마사오가 누군지 알고 있나?" 사나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이름은 하라다 마사오에요." 브래니건은 그 말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가씨는 그가 도망 다니는 이유를 알고 있나?" "예, 마사오는 일본에 가기 싫은데 아버지가 억지로 데려가려고 하신대요." 그것은 마사오가 한 이야기였다. 브래니건 경위는 순간 결단을 내려야 했다. 데루오가 살인범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었으나, 자신의 생각을 밝히지 않고서는 사나에의 협력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내 말 좀 들어 봐." 브래니건이 말했다. "마사오의 진짜 이름은 마쓰모토 마사오야. 이 회사 이름이 바로 그의 아버지 이름에서 딴 거지." 사나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브래니건을 쳐다보았다. "마사오가 마쓰모토 가족이란 말이에요?" "아들이지." "그럴 리가" "내 말 좀 들어 봐. 마사오의 아버지는 살해됐어. 그래서 마사오가 마쓰모토 그룹의 상속인이야." 사나에는 경계의 눈으로 브래니건을 한참 쳐다보았다. 그의 말뜻을 음미해 보았다. "그런데 함정이 있어. 마사오가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되는 경우 그의 고모부가 모든 것을 차지하게 되어 있다는 거야. 이미 다섯 사람이 살해됐어. 마사오도 데루오 손에 살해될지 몰라." "그럴수가!" 사나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브래니건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일부러 그런 거짓말을 꾸며 낼 이유가 없었다. 사토 데루오가 공장에 왔던 날이 생각났다. 마사오는 작업대 밑으로 얼굴을 숨기고는, '이제 갔니?' 하고 물었지. 또 경찰이 나타나자 경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허겁지겁 야구장을 빠져 나왔던 일이 생각났다. 그 뒤 아파트로 콜린스가 찾아오자 어디론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사나에는 마사오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데루오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을 풀어놓았어." 브래니건 경위가 말했다. "마사오는 의지할 데가 없어. 사나에, 데루오의 하수인이 먼저 찾으면 마사오는 죽게 돼. 그렇게 되면 아무도 손쓸 수가 없어. 그래서 내가 먼저 마사오를 찾아야 돼. 하지만, 어디서 찾아야 될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어디로 간다고 했는지 알기만 해도" "캘리포니아^36^예요." 사나애는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자기도 모르게 말이 나온 것이다. "캘리포니아 '어디'?" 브래니건이 흥분한 목소리로 다그쳐 묻자 사나에는 갑자기 조심스러워졌다. '브래니건의 이야기가 만에 하나 사실이 아니라면? 브래니건이 데루오의 하수인이면 어떡하지?' "몰라요." 사나에가 말했다. 순간 브래니건의 얼굴에 실망하는 표정이 완연했다. "무슨 단서가 될 만한 말을 하지 않았나? 누구 이름이나 도와 줄 마한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마사오는 히다카 구니오라는 친구가 있다고 했었다.' 사나에는 브래니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뇨.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요." 브래니건의 말을 믿고 마사오를 잡히게 할 수는 없었다. 매트 브래니건 경위는 한숨을 쉬었다. "유감이군. 어쨌든 수고했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혹시 나중에라도 생각나는 게 있으면 이리로 연락을 해 줘." 브래니건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게 내 명함이야." 사나에는 명함을 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브래니건에게 연락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11 "이제 로스앤젤레스에 거의 다 왔다." 알이 말했다. 마사오는 로스앤젤레스에 다 왔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자동차 여행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미국은 50개의 주로 되어 있고 주마다 독특한 개성이 있다는 아버지의 말씀 그대로였다. 뉴욕의 항구, 대초원, 애리조나 주의 메마른 사막을 차례로 구경했다. 캘리포니아 주의 푸르른 초목과 무르익은 과일, 그리고 활짝 핀 꽃은 고향 생각이 절로 나게 했다. 트럭이 농장과 목초지를 지나자 주택과 공장들이 띄엄띄엄 나타났고, 뒤이어 작은 마을을 지나 도시 근교에 들어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로스앤젤레스 중심가에 고층빌딩이 밀집해 잇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로스앤젤레스는 만한튼에 비해 고층 빌딩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깨끗하고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도시였다. 무서운 악몽이 시작된 뒤 마사오는 처음으로 마음이 놓였다. 데루오와 뉴욕 경찰로부터 벗어나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것이다. 히다카 구니오는 반드시 도와 줄 것이다. 히다카 구니오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으면 어떻게 해야할지 좋은 생각을 해낼 것이다. 6일 간 트럭을 타고 오면서 마사오는 알과 피터와 친해졌다. 두 사람은 아내와 아이들 이야기를 들려 주었고, 그런 이야기로 미국 노동자들의 사고방식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마사오를 친절하고 관대하게 대해 주었고, 성격이 단순하면서도 솔직했다. 그들과 친해지면 좋은 친구가 되겠지만 적이 되면 무서운 상대가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마사오의 영어 발음이 어색하다 싶으면 두 사람은 큰소리로 웃었다. 별로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넌 'r' 발음을 정확하게 해야 돼." 피터가 마사오에게 말했다. "네 'r' 발음은 'l'처럼 들리거든. 예를 들자면 'rice(쌀)'를 'lice(이)' 라고 발음한단 말이야. rice는 사람이 먹는 것이고, lice는 사람 머리에 기어 다니는 것이라구." 마사오는 그들이 일본어를 발음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봤지만 그 때부터 발음에 좀더 신경을 썼다. 마사오가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은 노동조합을 보는 두 사람의 시각이었다. 샘과 피터는 둘다 전미국 트럭운전사조합에 가입해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조합이지." 알이 자랑했다. "우리는 24시간 안에 미국을 굴복시킬 수 있다구." "무엇 때문에 그러지요?" 마사오가 물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 말은 고용주가 조합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야." 마사오는 일본 노동자들의 가치관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회사는 가정과 같아요. 회사는 죽을 때까지 노동자들을 돌봐 주니 노동자는 해고될 걱정이 없지요. 회사가 잘되면 노동자도 따라서 잘 사는 거^36^예요. 그러니까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죠." "제각기 사는 게 가지가지군." 피터가 말했다. 그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났다. 로스앤젤레스의 중심가가 점점 가까워지자 알이 말했다. "시간 맞춰 도착하겠군." 트럭은 고속도로를 벗어나 산 페드로 가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몇 분 지나서 엄청나게 넓은 트럭 하역장에 도착했다. 알은 트럭을 부드럽게 정지시키고 엔진을 껐다. 알이 마사오에게 말했다. "자, 이젠 됐지?" "예, 고마웠어요. 이젠 괜찮을 거^36^예요." "잡히지 않도록 조심해." 피터가 말했다. 놀란 마사오는 피터를 쳐다보았다. "나를 잡는다고요?" "잡히면 넌 다시 학교로 되돌아가야 될걸." "아, 예" 마사오는 말을 더듬었다. "조 조심할게요." 마사오는 자신이 한 말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마사오는 트럭에서 내렸다. "두 분께 정말 감사드려요. 은혜를 잊지 않을게요," 두 사람으로선 그 말뜻의 깊이를 알 순 없었겠지만, 마사오는 정말 크게 감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이미 죽은 몸인지도 몰랐다. 마사오는 보답할 수 있는 날이 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언젠가 도쿄에 오시게 되면 제가 특별히 모시겠습니다." 알과 피터는 꾀죄죄한 마사오가 특별히 대접하는 것을 그려 보며 싱긋이 웃었다. "그거 아주 고마운 말인데." 알이 말했다."하지만, 레인체크를 받기로 하지." "레인체크라니요?" "그건 초대를 다음에 받겠다는 뜻이야. 몸조심해." "걱정 마세요." 마사오가 말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어려운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트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일본인 일꾼 한 사람이 짐차에 마쓰모토 텔레비전 세트를 싣고 있었다. 그는 트럭에서 내리는 마사오를 보았다. 한참 동안 마사오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의 주인공이 트럭에서 내린 젊은이인 것을 확인하고 허겁지겁 사무실의 유료전화기로 달려갔다. 교환수가 나오자 말했다. "뉴욕의 사토 데루오 씨가 지정 통화를 하고 싶은데요" 할리우드는 마사오의 기대에 훨씬 못 미쳤다. 그는 항상 할리우드를 으리으리하고 황홀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존 웨인과 험프리 보가트, 제임스 캐그니, 케리 그랜트, 찰리 채플린이 노닐던 곳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실망스러웠다. 물론 마릴린 먼로, 그레타 가르보, 클린트 이스트우드, 브루스 리 같은 전설적인 배우들의 이름을 차례로 보도에 새겨 놓은 곳은 있었다. 그러나 할리우드 대로는 청소를 한 번도 하지 않았는지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대로변에는 조그만 아케이드와 피자 가게, 점치는 집, 싸구려 술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마치도쿄 시내 긴자 거리를 싸구려로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내기 여기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거야.' 마사오는 생각했다. 그는 공중전화가 있는 약국으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마사오는 카운터에 있는 아가씨에게 말했다. "전화번호를 알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죠?" "411로 전화하세요." 안내 전화번호는 뉴욕과 같았다. "고맙습니다." 공중전화 박스에 들어간 마사오는 다이얼을 돌렸다. "안내 전화입니다. 말씀하세요." "예, 수고하십니다. 할리우드에 있는 마쓰모토 공장의 전화번호를 알고 싶은데요." "철자를 하나씩 말했다. 잠시 후 교환수는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조금 있다가 다이얼을 돌렸다."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안녕하세요? 마쓰모토 그룹입니다." 마사오는 심장의 고동이 빨리지는 것을 느꼈다. 이름만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안녕하세요?" 마사오는 대꾸했다."히다카 구니오 씨와 통화를 하고 싶은데요." "감사합니다.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다른 목소리가 들려 왔다. "히다카 씨와 사무실입니다." 이제 곧 히다카와 통화를 하게 될 것이다. "히다카 씨를 바꿔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히다카 씨는 출장가셨습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겠습니까?" 마사오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전" 히다카를 직접 만나야만 했다. "언제 돌아오실 예정인데요?" "금요일에 돌아오실 겁니다." 꼬박 3일을 기다려야 된다는 말이 아닌가! "집 전화번호를 알 수 없을까요? 아주 중요한 일인데요." "미안합니다. 그것은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전할 말씀은 없습니까?" "예. 제가 제가 다시 전화를 걸도록 하죠." 마사오는 힘없이 공중전화 박스를 나섰다. 또 3일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하기만 하면 바로 히다카를 만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에 3일을 더 기다리는 것은 3 년이나 마찬가지로 생각되었다. 히다카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이 악몽에서 벗어나기만을 학수 고대하고 있는데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참고 기다릴 수밖에 딴 방법이 없었다. 로스엔젤레스에서는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데루오는 아직 뉴욕에서 마사오를 찾고 있을 것이다. 히다카가 돌아올 때까지 한적한 곳에 여관을 정해 놓고 낮에는 관광다니며 시간을 보내면 될 것이다. 마사오는 디즈니랜드와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꼭 보고 싶었다. 5천 킬로미터 떨어진 뉴욕에서는 데루오가 통화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마사오가 로스앤젤로스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지금 막 받았소. 사람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고용하시오. 특히 집중적으로 찾아볼 장소는 한적한 곳에 있는 작은 역관, 디즈니랜드, 유니버설 스튜디오, 이 세 곳이오." 사토 데루오는 마사오가 나타날 가장 유력한 장소를 한군데 생각해 냈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그 곳만은 데루오가 직접 나설 참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 마사오가 찾아갈 만한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었다. 바로 히다카 구니오였다. 데루오는 마사오보다 먼저 히다카를 만날 생각이었다. 저녁이 되자 마사오는 할리우드의 카후엔가 대로변에서 떨어진 한 작은 여관에 묵기로 했다. "며칠 있을 겁니까?" 종업원이 물었다. "일 주일.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일어난 마사오는 여관을 나섰다. 그가 떠난 지 5분 후에 마사오의 사진을 든 두 사나이가 나타났다. 종업원에게 마사오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맞아요," 종업원이 말했다. "지금 막 나갔어요." 종업원은 숙박부를 보았다. "이름은 하라다 마사오^36^예요. 여기서 일 주일 머물 거랍니다." 두 사나이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서로 쳐다보았다. "여기서 기다리면 되겠지." 그들이 말했다. 두 사람은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게 홀 한 구석으로갔다. 그러나 그들은 한없이 기다리게 될 것이다. 마사오는 데루오가 캘리포니아에 사람을 풀어 놓은 줄은 모르고 있었지만 동물적인 본능이 위험을 피하도록 했다. 처음부터 마사오는 그 여관에 들어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매일 여관을 바꾼다면 추적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사오는 내의와 청바지, 티셔츠와 손수건, 그리고 양말을 샀다. 헌 옷은 가게 화장실에 버렸다. 짐은 없을수록 좋았다. 선셋 대로변의 핫케이크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디즈니랜드로 가는 차편을 알아보았다. 3일 동안 기다리고 있을 바에야 구경이나 실컷 해 볼 생각이었다. 여관방에 앉아 걱정한다고 해서 무슨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30분 후 마사오는 디즈니랜드로 달리는 버스에 타고 있었다. 할리우드가 실망스러웠다면, 디즈니랜드는 환상적이었다. 디즈니랜드는 10 만여 평의 부지에 세워진 동화 속의 세계였다. 환상 속의 환상세계 같았다. 일하는 사람만 해도 거의 6천 명이나 되었고 구경거리도 쉰네 가지나 되었다. 마사오는 어디서부터 구경을 해야 할지 몰랐다. 먼저 메인 스트리트에서 관광 마차를 탔다. 다른 세상, 다른 시대 같았다. 밀림 탐험선을 타고 악어가 입을 벌리고 덤벼드는 것도 보았다. 스위스식 나무 위의 집에도 올라가 보았다. 또 뉴 올리언스 광장에서는 유령 저택에 들어가 특수한 장치로 움직이는 무시무시한 유령을 보고 감탄하기도 했다. 환상의 나라에 들렀다가 매터혼의 봅슬레이(급 커브가 있는 코스를 따라 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놀이)를 타고, 모터보트로 스몰월드(각국의 민속의상을 입은 인형을 보트에서 구경하는 것)도 구경했다. 뒤이어 스카이웨이를 따라 '미래의 나라'로 가서 해저 탐험선을 탔다. 공원이 문 닫을 때가 가까워지자 마사오는 몹시 피곤했다. '곰의 나라'와 '개척의 나라'를 구경하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다음에 와서 구경하겠다고 다짐하고 그만 떠나기로 했다. 마사오는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모르고 있었다. 열두 명이나 마사오를 찾아 공원 안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관람객들 덕분에 마사오는 발견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일은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구경해야지.' 마사오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곳에 가서 닥쳐올 위험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할리우들로 돌아온 마사오는 선셋 대로에 있는 여관에 투숙했다. 그는 디즈니랜드에서 오후 내내 핫도그, 팝콘, 아이스크림 같은 것만 먹고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다. 배가 고팠다. 마사오는 다시 아무도 그를 찾을 리 없는 독일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선셋 대로 북쪽에 위치한 식당 건너편에 디스코장이 있었다. 마사오는 순간적인 충동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지옥을 연상케 했다. 섬광 조명이 무대를 가로질러 번쩍거리고, 리듬이 강한 디스코 음악을 온몸이 떨리도록 크게 틀어 놓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높은 데 설치된 무대 위에서는 여자 무용수들이 춤을 추고 있었고, 그 아래에서는 여남은 쌍의 남녀가 엉켜 몸을 흔들고 있었다. 예쁜 일본인 아가씨가 마사오에게 접근해 왔다. "춤 출래요?" 마사오는 춤추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마사오는 과거에 디스코장에 가는 것을 즐겼는데, 이 점을 데루오가 노리고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이 아가씨가 일본인이기 때문에 마사오를 찾는 사람들로부터 매수당했는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마사오는 정중하게 말했다. "아, 아닙니다. 전 나갈 겁니다." 그는 밖으로 나왔다. 마사오는 미행자가 없는 것을 확인하려고 한참 동안 걸어다니다가 여관으로 들어왔다. 마사오는 지쳐 있었지만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아직도 이틀이 지나야 히다카 구니오가 돌아오는 것이다. '아침에 다시 전화해야지.' 마사오는 생각했다. '혹시 연락을 해 줘서 빨리 돌아올지도 몰라.' 마사오는 알과 피터와 함께 했던 미국 횡단 여행을 생각했다. 또 매터혼과 잠수함을 떠올렸다. 디스코장에서 만났던 일본인 아가씨도 생각했다. 그 아가씨도 한 패일까? 사나에도 떠올려 보았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사나에도 잠을 이를 수 없었다. 한참 동안 어둠 속에서 뒤척거렸다. 아무래도 잠이 오지 않자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걸치고, 잠든 어머니와 아버지가 깨지 않게 조심하며 주방으로 갔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커피를 끓여 식탁에 앉아 마시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 날 오후 온갖 나쁜 소문들이 마쓰모토 공장을 휩쓸고 다녔다. "얘, 너 아니?" 사나에 옆에서 일하던 사람이 물었다. "여기서 일하던 그 남자애가 마쓰모토 마사오라며? 그리고 사토 씨가 새 총수가 된다고 하더라." 그 말에 사나에는 충격을 받았다. 형사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 말이 사실이라면 현재 마사오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 또 데루오의 손에 먼저 잡힌다면 마사오가 죽을 것이라는 형사의 이야기가 다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형사의 말이 속임수라면? 매트 브래니건 경위가 마사오를 살인범으로 몰아 체포하기 위한 술수라면? 사나에는 전화기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아주 좋아하는 사람의 목숨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었다. 형사가 주고 간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혹시 나중에라도 생각나는 게 있으면 이리로 연락을 해 줘요.' 하고 말했었다. 사나에는 두 번이나 전화기를 들려다 그만두었다. 어쩌면 자신의 행동이 결정적인 실수가 될지도 모른다. 과연 누가 마사오 편이고, 또 누가 적이란 말인가? 다음 날 아침 마사오는 여관을 나와서 전화할 곳을 찾았다. 여관 로비에 있는 전화는 단서가 될 우려가 있었다. 마사오는 마쓰모토사의 히다카 구니오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어제 전화했던 사람입니다." 마사오가 말했다. "정말 꼭 히다카 씨를 만나야 합니다. 좀 일찍 돌아오시게 연락 할 수 없을까요?" "미안합니다만, 내일까지는 못 돌아오십니다." 또 하루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전해 드릴 말씀이 있다면" "고맙습니다. 다시 전화드리도록 하죠." 하루 동안 숨어 있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24시간 후면 모든 것이 깨끗이 해결될 것이다. '유니버설 스튜디오나 구경해야겠다. 거긴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쉽게 눈에 띄지 않을 거야.' 세계 곳곳에서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구경하러 온 수 백명의 관광객이 글래머 트램(궤도 열차)을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인, 이탈리아인, 프랑스인, 스웨덴인 등이 뒤섞여 각자 자기 나라 말로 떠들고 있었다. 마사오는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 섞이면서 마음이 놓였다. 안내원이 말했다. "관람객 여러분, 준비하십시오. 글래머 트램에 오르시면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이제 곧 모험의 세계로 출발하겠습니다." 글래머 트램은 오렌지색과 흰색 열차 3량을 연결한 것이었다. 열차는 지붕이 줄무늬가 있는 철판이었고, 양 옆은 틔어 있었다. 트램이 멈춰 서자 올라가 앉았다. 주위의 관람객들을 둘러보았지만 마사오에게 특별히 관심을 갖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트램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예쁜 안내원 아가씨가 안내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찾아 주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지금까지 2천 6백만 명의 관람객들이 이 곳을 다녀갔으며, 오늘도 여러분을 모시게 된 것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처음 문을 연 것은 1951 년 래믈이" 마사오는 안내 방송을 귀담아 들을 수가 없었다. 트램이 지나가는 곳에는 신기한 구경거리가 많았다. 갑옷을 입고 기사로 분장한 배우, 비키니 수영복 차림의 아가씨들과 카우보이 복장을 한 배우들도 있었다. 트램이 스튜디오 뒤쪽으로 돌아가자 옛날 남부의 대저택이 나타났다. 앞에서 보는 저택은 매우 아름다웠다. 그러나 트램이 뒤로 돌아가자 앞만 멀쩡할 뿐 뒤쪽은 나무 기둥들만 볼썽 사납게 서 있었다. 트램이 나무 다리를 건너는데 중간쯤에서 갑자기 다리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겁에 질린 승객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트램이 가까스로 다리를 건너자 다리는 원위치로 돌아갔다. 마을을 배경으로 한 평화스러운 호수 옆을 지나갔다. "여기는 아미티빌입니다." 안내원이 말했다. 그녀는 호수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자, 보세요.!" 트램을 향하여 달려오고 있는 물체가 있었다. 모든 관람객들의 눈이 그리로 쏠렸다. "상어다!" 거대한 인조 상어가 트램을 향하여 다가왔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상어는 물 속으로 사라지더니 다시 나타나 이번에는 낚시꾼 모형이 있는 보트를 들이받았다. 보트가 뒤집어지면서 상어는 낚시꾼을 물고 물 속으로 사라졌다. 영화 '조스'를 본 적이 있는 마사오는 다시 한번 극적인 장면을 즐길 수 있었다. 호수가 가까이 다가간 트램이 곧장 호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놀란 관람객들이 모두 비명을 질렀다. "여기는 홍해입니다." 안내원이 말했다. "이제 호수가 두 쪽으로 갈라지는 것을 구경하시겠습니다." 트램이 호수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하자 기적처럼 물이 양쪽으로 가라졌다. "이 기적은 순전히 전자장치에 의한 것으로, 길이가 200 미터, 폭이 75 미터, 깊이가 2 미터 정도인 호수 밑에 설치된 기계 장치가 3분 이내에 4 만 갤런의 물을 뺄 수 있습니다. 지금은 구약성서 시대와는 달리 글래머 트램을 타고 편안하게 건너가실 수가 있습니다." 오전 코스에서는 스턴트맨이 불타는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모습도 구경할 수 있었다. 또 로봇이 관람객들을 향해 레이저 빔을 마구 쏘아대는 우주 전쟁에도 직접 참여하고, 눈사태를 지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로버트 와그너의 분장실도 구경했다. 문제가 생긴 것은 관람객을 위한 공연장에서였다. 새와 생쥐의 묘기를 보고 있던 마사오는 문득 누군가 자기를 지켜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던 마사오는 출입구 옆에 서 있던 남자와 눈길이 마주쳤다. 지난 2주 동안 위험한 고비를 수없이 넘긴 마사오는 그가 데루오의 하수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모두 세 명이었다. 출입구로 걸어갔다. 그는 사람들을 헤치며 마사오가 앉아 있는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달아날 길이 없었다 .동물들의 묘기가 막 끝나 갈 무렵이었다. 관람객들은 일어서서 박수를 쳤다. 안내원이 말했다. "손님 여러분은 이 쪽으로 나가 주십시오." 관람객들이 출입구로 나가기 시작했다. 마사오는 무대를 향해 달려갔다. 뒤돌아보니 그 남자가 사람들을 헤치며 쫓아오던 남자가 막 출입구로 나오고 있었다. 그가 마사오를 보았다. "거기 서!" 마사오는 달리기 시작했다. 모퉁이를 돌아가다가 하머터면 낙타와 정면으로 부딪힐 뻔했다. "똑바로 보고 다녀!" 낙타를 몰고 가던 사람이 소리쳤다. 앞에 콘크리트 건물이 나타났다. 문에는 빨간 등이 번쩍이며 돌아가고 있었다. 마사오가 문을 열자 또 문이 나타났다. 두 번째 문을 열자 커다란 무대가 나타났다. 한 떼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재빨리 그 속으로 끼어든 마사오는 눈에 띄지 않게 좀더 가운데로 들어갔다. 마사오 바로 옆에 할머니가 서 있었다. 갑자기 허름한 옷을 입은 남자가 할머니의 지갑을 낚아채서 달아나는 것이었다. "저놈 잡아라!" 할머니가 외쳤다. 얼떨결에 그 남자에게 덤벼든 마사오는 그를 잡아 무릎을 꿇렸다. 그 남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이건 대본에 없잖아!" 그 때 성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컷!" 고개를 돌린 마사오는 그제야 영화 촬영중에 끼어든 것을 깨달았다. 감독이 소리쳤다. "빨리 꺼지라고 해! 다시 찍어야 되잖아!" 마사오는 허겁지겁 촬영장을 빠져 나왔다. 밖에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마사오는 불안했다. 그 때 마사오를 뒤쫓던 남자가 모퉁이를 돌아오는 게 보였다. 마사오는 재빨리 창고같이 보이는 큰 건물로 들어갔다. 수천 점의 소품을 보관하는 창고였다. 고대의 검과 현대의 레이저 총, 소방차와 비행기의 동체도 있었다. 가구도 시대별로 갖추어져 있고, 옷도 없는 게 없었다. 마사오는 창고 깊숙이 숨어서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창고로 가까이 다가오는 발 소리가 들렸지만 곧 다시 멀어졌다. 동료들을 부르러 간 모양이다. 마사오는 생각했다. '여기서 어떻게 해서든지 빠져 나가야 해. 하지만 어떻게 빠져 나가지? 스튜디오의 출입구란 출입구는 다 지키고 있을 텐데! 그들은 이 곳을 완전히 봉쇄했기 때문에 나가려 하다가는 꼼짝없이 잡히고 말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빠져 나가야 한다. 내일 히다카 구니오를 만나야만 한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에는 출입구마다 마사오의 사진을 든 사람들이 지켜 서 있었다. 그들은 나가는 관람객들을 빠짐없이 살피고 있었다. 마침 점심 시간이었다. 많은 배우들이 유니버설 스튜디오 주변에 있는 식당에 가느라고 몰려 나왔다. 마사오를 처음에 봤던 남자도 온갖 복장의 배우들을 보면서 정신을 집중하기 어려웠다. 화려한 예복차림의 인도 공주가 지나가고 흑인 노^36^예도 지나갔다. 거인과 난쟁이도 지나갔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이나 분장을 한 얼굴의 어릿광대도 지나갔다. 그 남자는 어릿광대가 밖으로 나가는 것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마사오를 찾느라고 다른 데는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마사오는 공중 화장실에서 어릿광대 옷을 벗은 뒤 화장을 지웠다. 사토 데루오가 곳곳에 사람을 풀어 놓았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여관에 들어가 꼼짝 않고 있다가 아침에 히다카 구니오에게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할리우드 주변에는 사람들이 쫙 깔려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에 바로 글랜데일행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내린 마사오는 한 작은 여관에 들었다. 아침이면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에 마사오는 밤새도록 잠을 설쳤다. 12 사토 데루오는 마사오가 이번에도 교모하게 빠져 나갔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태연했다. 체스에서 중요한 것은 '장군'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외통수'였다. 이번에는 외통수로 몰 작정이었다. 마사오가 영리하다고는 하지만 이번만큼은 자신 있었다. 마사오가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히다카 구니오 한 사람밖에 없다. 그러나 히다카 구니오가 마쓰모토 그룹의 직원인 이상 결국에는 고용주인 사토 데루오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데루오는 마사오를 잡기 위해 히다카를 미끼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데루오는 히다카가 출장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 히다카 씨에게 전화 연락을 해서 날 바꿔 주시오." 데루오는 히다카의 비서에게 명령했다. "예, 사토 씨." 데루오는 히다카의 집무실에서 전화가 연결되기를 기다렸다. 그는 책상 위 담배 상자에서 하바나 시가를 한 대 꺼내 입에 물었다. 비서가 말했다. "히다카 씨^36^예요." "안녕하십니까? 캘리포니아에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미리 알았더라면 출장을 미뤘을 텐데요. 난" "지금 거기가 어디요?" "애리조나 주에서 새로 지을 공장 부지를 찾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건" "언제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올 생각이오?" "계획은 내일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여기 일이 아직 덜 끝났어요. 그래서 월요일에나 돌아갈 생각입니다." "안 돼요. 내일 당장 돌아오시오." "예, 그렇게 하죠." "회사 비행기를 보내겠소." "고맙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구니오가 입을 열었다. "마쓰모토 씨가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 너무나 슬펐습니다. "그래요." 사토 데루오가 말했다. "우리 모두에게 슬픈 일이오. 훌륭하신 분이었소." "정말 그래요. 좋은 친구이기도 했는데, 이제 그분을 다시는 못 뵙게 됐다는 게 너무나 가슴 아픕니다. 마사오와 함께 오셨습니까?" "곧 오게 될 거요." 데루오가 말했다. "내일 만납시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데루오는 만족한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묻었다. '이게 바로 외통수라는 거지.' 히다카 구니오는 불안했다. 예기치 않았던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 혼란스러웠다. 그는 평소 마쓰모토 요네오 부부를 존경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몹시 슬퍼했다. 마사오는 그가 아들처럼 생각하는 아이였다. 그런데 마사오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회사에 떠돌았다.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오라는 사토 데루오의 전화도 이상했지만, 그 다음에 걸려온 전화는 더 이상했다. 구니오가 알지 못하는 무서운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갈 것이다. 그 다음에 벌어질 일은 기다려 볼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아침 9시에 마사오는 여관방에서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도청된다고 해도 더 이상 겁날 것도 없었다. 걱정을 해 봐야 아무 소용 없는 일이었다. 그저 히다카 구니오의 처분만 바랄 뿐이었다. 더 이상 숨을 곳도 없었다. 마사오가 다이얼을 돌리자 귀에 익은 히다카 구니오의 비서가 전화를 받았다. "히다카 씨 방입니다." "어제 전화했던 사람인데요. 히다카 씨 돌아오셨습니까?" "누구라도 전해 드릴까요?" "마사오라고 하세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이윽고 히다카 구니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마사오로구나!" 마사오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드디어 통화가 된 것이다! "히다카 아저씨! 오, 히다카 아저씨! 지금 당장 아저씨를 만나야 돼요. 아저씨를 만날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내 사무실로 와." 히다카 구니오가 말했다. 마사오는 잠시 망설였다. 어디 다른 장소에서 만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공장 주변에는 감시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행동을 아주 조심해야 한다. 이번에도 실수하면 정말 마지막이다. "고모부와 만나셨어요?" 마사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순간 아주 짧은 침묵이 흘렀다. "아니, 만나 보지 못했다." 마사오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데루오가 히다카에게 아직 아무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게 수상했다. 그러나 마사오는 히다카를 믿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히다카의 손에 맡긴 셈이었다. "좋아요. 제가 사무실로 갈게요. 빨리 아저씨를 만나고 싶어요." "그럼, 지금 와."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은 히다카 구니오는 사토 데루오를 쳐다보았다. "잘했소." 데루오가 말했다. "당신은 애리조나로 돌아가서 남은 일을 다 처리하고 오시오. 마사오는 내가 만나겠소." "마사오는 날 꼭 만나고 싶어하는 것 같던데요. 그 애는" "히다카, 이미 내가 말했지만 마사오는 지금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부모님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오. 내 조카니까 내게 맡겨 주시오." "그럼, 그렇게 하지요." 구니오는 고개를 숙인 뒤 사무실을 나갔다. 데루오는 비서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린 다음 의자에 몸을 묻고 기다렸다. 마사오를 맞을 준비는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절대로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마사오는 여관방 전화기 옆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히다카와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사무실로 간다면 사람들 눈에 완전히 노출될 염려가 있었다. 마사오는 자신의 사진이 어떻게 뉴욕 공장에 뿌려졌는지 기억했다. 분명 데루오는 그 사진을 '모든 마쓰모토 공장'에 돌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히다카는 거기에 대해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갑자기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사오는 생각했다. '내가 너무 오래 도망다니다 보니 신경이 날카로워졌나 봐. 이제 모든 게 밝혀질 텐데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아.' 어쨌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히다카 구니오만이 마사오가 기댈 마지막 희망이었다. 순간 히다카에게 다시 전화해서 약속 장소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었다. 그러나 곧 생각을 바꾸었다. '아니야. 그분을 전적으로 믿어야 해.' 마사오는 약속 장소로 향했다. 북할리우드행 버스를 탄 마사오는 마쓰모토 공장에서 세 블록 떨어진 곳에서 내렸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천천히 걸었다. 길거리는 평온하고 정상이었다. 아무도 마사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지나치게 조심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마침내 '마쓰모토' 간판이 당당하게 걸려 있는 거대한 흰색 건물 맞은편에 도착했다. 공장 입구는 평소와 다름없이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마사오는 길을 건너 정문으로 걸어갔다. 거의 문 앞에 다가갔을 때 뒤에서 한 남자의 소리가 들렸다. "거기 서! 꼼짝 마!" 동시에 강철같은 손이 마사오의 팔을 움켜잡았다. 마사오가 히다카 구니오의 사무실로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30분 뒤였다. "나는 마쓰모토 마사오입니다." 마사오는 비서에게 말했다. 본명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 기뻤다. "히다카 씨와 만나기로 약속했는데요." "그렇잖아도 히다카 씨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들어가세요." 데루오의 지시를 받은 비서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마사오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선 마사오는 갑자기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어서 와." 사토 데루오가 말했다.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사오." 그의 옆에는 두 명의 건장한 남자가 서 있었다. 마사오는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데루오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밖에 나가 기다리고 있게. 조카와 단 둘이 할 얘기가 있네." 그들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데루오는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마사오를 바라보았다. "놀랐지?" "난 어디 히다카 씨는 어디 계세요?" "안됐지만 히다카는 떠났다. 우리 일에 그 사람은 필요없어. 우리 둘이서 이야기하면 돼." "난 이야기할 게 없어요." "아, 그래? 하지만, 이야기할 게 있을 텐데, 조카님. 이제까지 내게 애를 먹일 만큼 먹였잖아?" 마사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는 정말 못되게 하고 다녔어.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했단 말이다."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에요. 당신은 도둑이에요. 아버지 회사를 훔치려 하고 있다구요." "회사는 내 것이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 자기 것을 훔치는 사람은 없어." "날 어떻게 할 생각이지요?" "네 아버지와 같이 되도록 해 주지. 회사를 훔친 도둑은 바로 네 아버지야. 내가 아니었으면 회사가 이만큼 클 수도 없었을 거야. 그런데도 네 아버지는 한 번도 날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어!" 데루오의 목소리는 증오에 가득차 있었다. "네 아버지에게 난 먹다 남은 뼈다귀나 던져주는 강아지에 불과했다. 결국 그 뼈다귀가 네 아버지의 죽음을 재촉한 셈이지! 네 아버지는 내게 회사를 남겨야 했어. 나는 회사를 상속받을 자격이 있어!" 분노에 떨던 데루오는 간신히 냉정을 되찾았다.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야. 지금 중요한 것은 내 미래지. 마사오, 넌 내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야. 그러니까 사라져 줘야겠어. 네가 얌전하게만 군다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게 해 주지." 마사오는 우두커니 서서 말없이 데루오를 쳐다보았다. 데루오는 마사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 "이젠 됐어. 데려가." 데루오가 명령했다. 그 때 매트 브래니건 경위가 들어오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사토 씨?" 갑작스런 사태에 직면한 데루오는 깜짝 놀랐다. 살인 청부를 맡은 사람 대신에 형사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브래니건 뒤에 히다카 구니오가 두 명의 정복 경찰관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데루오는 더욱더 놀랐다. "무슨 무슨 일이오?" 데루오가 말했다. "히다카 당신은 어째서 아직 여기 있는 거요?" "브래니건 경위가 있으라고 해서요." 히다카가 말했다. 데루오는 브래니건을 쳐다보았다. "내 회사일에 간섭하다니 이게 무슨 짓이오?" "바로 그 회사 얘기 좀 합시다." 브래니건 경위가 말했다. "이 회사는 당신 것이 아니더군. 내가 유언장을 확인해 보니 이 회사는 여기 있는 당신 조카의 것이 되었더군요." 데루오는 재빨리 둘러댔다. "아, 예, 물론 그렇기는 하지요. 하지만, 저 애는 신경쇠약으로 정신분열 증세가 있소. 당신도 알지만 저 애는 사람을 죽였소." 브래니건 경위는 조용히 대답했다. "아니, 난 모르는 일이오. 그건 당신 이야기일 뿐이오." "그것으로 충분하지요. 제 조카는 의사의 치료가 필요해요. 지금 병원에 가야 됩니다. 자, 이제 모두 나가 주시오." 그러나 아무도 꼼짝하지 않았다. "당신은 이제 끝났소!" 매트 브래니건이 말했다. "끝났다고? 무슨 소리요?" "여기 체포영장을 가져왔소." "데루오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브래니건을 쳐다보았다. "나를 체포한다고? 당신 미쳤소? 무슨 혐의로?" "살인 네 건과 살인미수 한 건이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오!" 데루오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신 지금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거요." "천만에." 브래니건이 말했다. "실수는 당신이 했소. 와타나베 다다오를 만났소. 유언장 내용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서요? 당신은 마쓰모토 씨가 재산의 반은 남겨줄 것으로 기대했지.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자 당신은 회사를 통째 삼킬 계획을 세웠소. 당신은 먼저 비행기 추락사고를 계획하고 성공했지. 그런 다음 남아 있는 유일한 장애물인 마사오를 제거하려 했소." "미쳤군!" "오늘 아침 일찍 난 히다카 씨를 만났소. 그를 이용해서 마사오를 잡으려는 당신의 계획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의논을 하기 위해서였지. 그런 다음 공장 근처에서 마사오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오랜 시간 이야기를 했소." 사토 데루오는 자신감이 되살아났다. 브래니건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 없었다. 이 멍청이들에게는 증거가 없었다. "당신은 정신분열증이 있는 아이의 말을 믿고 있소. 한 조각 증거도 없잖소?" "틀렸어요." 이번에는 마사오가 말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소형 녹음기를 꺼냈다. 버튼을 누르자 데루오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 회사는 내 것이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 자기 것을 훔치는 사람은 없어" 데루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날 어떻게 할 생각이지요? " "네 아버지와 같이 되도록 해 주지. 회사를 훔친 도둑은 바로 네 아버지야" 모두들 그대로 서서 녹음기에서 흘러 나오는 데루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사라져 줘야겠어. 네가 얌전하게만 군다면 고통없이 죽을 수 있게 해 주지" 마사오가 녹음기를 껐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모두 사토 데루오를 쳐다보았다. 데루오는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다. "난 난" 그러나 할 말이 없었다. 녹음기가 할 말을 다 해버린 셈이었다. 브래니건 경위는 두 경찰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늘 오후에 내가 뉴욕으로 데려가겠소." 사람들은 데루오가 끌려나가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 보았다. "이제 고모부는 어떻게 되죠?" 마사오가 물었다. "재판을 받고 유죄 선고를 받겠지. 증거가 분명하니까 실형을 살게 될 거야. 아주 녹음이 잘 되었더군." "물론이죠." 마사오는 자랑스러운 것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마쓰모토 제품인데요." 잠시 후 세 사람은 히다카 구니오의 전용 식당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마사오는 브래니건 경위에게 말했다. "어떻게 이 은혜를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언제 한번 일본 저희 집으로 부인과 함께 놀러 오지 않으실래요?" 브래니건 경위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거 좋은 생각인데" 하마터면 마사오를 죽음으로 몰아 낼 뻔한 일이 생각났다. 다시 천천히 말을 이었다. "꼭 한 번 놀러 가지." 히다카가 물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인가, 마사오?" "우선 부모님의 유해를 고향으로 모셔가서 안장시켜 드려야죠." 히다카 구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해를 우선 뉴욕에서 이리로 모셔오도록 해야 되겠군. 그리고 언제든지 도쿄로 떠날 수 있도록 비행기도 준비해 놓지. 그 밖에 내가 할 일이 뭐 없겠나?" 마사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있어요. 뉴욕 공장에 도이 사나에라는 아가씨가 있어요. 그 아가씨를 승진시켜 주고 봉급도 올려 주었으면 해요." 히다카 구니오는 메모를 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리고 거기 공장에 오스카 헬러라는 조장이 있어요. 그 사람은 해고시켰으면 좋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히다카 구니오가 다시 메모했다. "또 다른 것은?" "예 있어요." 주머니에서 전당표를 꺼내 히다카 구니오에게 건네 주었다. "아버지가 주신 시계를 도로 찾아 주세요." 실버 애로우 제트기에 탄 마사오는 창문을 통해 바깥 경치를 내다보았다. 비행기는 부드럽게 하늘로 솟아 올라 로스앤젤레스 상공을 돌았다. 잠시 후 천천히 기수를 서쪽으로 돌렸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마침내 마사오는 부모님을 모시고 고향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그 동안 미국에서 겪었던 숱한 일들이 머리에 하나하나 떠올랐다. 히가시와 벌였던 그 처절한 싸움이 생각났다. 마라톤 경주와 짐 데일도 생각났다. 그리고 피터와 알. 디즈니랜드와 유니버설 스튜디오. 브래니건 경위. 마사오는 사나에를 생각했다.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미국에 돌아올 생각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