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시인의 사회 지은이/톰 슐만, 옮긴이/김미정, 펴낸이/오종만 출판/도서출판 모아 겨울 입학식 웰튼 아카데미는 미국 동부의 명문 고등학교였다.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이 학교는 매우 높은 진학률로 미국 전역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 명성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버몬트주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언덕 밑에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학교 주위에는 멀리 떨어진 언덕 밑에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학교 주위에는 수령이 얼마나 되는 지도 모를 원시림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계절별로 물새 떼들이 수많은 무리를 지어 나는 강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강 위를 유유히 날고 있는 새들은 지금 막 입학식을 거행하고 있는 젊은 학생들의 마음과도 같이 자유로운 이상을 향해 하늘을 마음껏 날고 있었다. 입학식은 고색 창연한 석조 건물의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긴 통로 양쪽으로 3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두 단정한 교복 차림으로 앉아 있었고, 뒤쪽에는 학생들의 부모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앉아서 입학식이 시작될 때를 기다렸다. 모두가 상기된 얼굴이었고, 어떤 학부모들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웰튼 아카데미에 자기의 아들을 보냈다는 사실에 거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좌우를 둘러보는 학부모도 보였다. 이윽고 엄숙한 분위기를 조금씩 흔들어 놓는 스코틀랜드식 백파이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권위 있는 예복 차림의 키작은 노인이 조심스럽게 촛불을 들고 입구에 나타났다. 그 뒤로는 이 학교의 재학생 대표로 뽑힌 니일 페리, 찰리 랄튼, 리차드 카멜론, 조지 흡킨스 등이 교기를 드높이 든 채 순서대로 문으로 들어왔다. 역시 예복 차림의 교사들에 이어 이날의 신입생들이 뒤를 따라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니일 페리 등의 선발된 학생들은 교기를 받쳐든 채 교회 맨앞의 연단까지 나아갔다. 한결 같이 굳은 표정이었다. 자못 흥분된 분위기인가 하면 무엇인가 초조하고 기대에 부푼 듯한 복잡한 표정들이었다. 눈빛만이 빛나고 있을 분이었다. 학생들의 맨 뒤로 들어온 것은 역시 예복 차림의 모두 나이가 상당히 많은 노인들이었다. 웰튼 아카데미 만큼이나 완고하고 강압적이며 태풍에도 흔들리지 않을 강인함을 보이는 게일 노란 교장은 60대로 막 접어든 백발의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었다. 노인답지 않게 튼튼한 두 다리로 버티고 선 그는 연단 저쪽에서 학생들의 엄숙한 행진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노란 교장은 행진이 끝나자 때를 맞추고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친애하는 학부모 여러분, 그리고 학생 제군!" 우렁찬 그 목소리는 무대 위에서 마이크도 없이 관객한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려는 배우의 대사처럼 교회 안을 쩡쩡 울렸다. 그는 노인이 들고 있는 촛불을 가리키며 큰소리로 명확하게 말했다. "이 촛불이 지식의 빛입니다." 그 말에 노인이 촛불을 받쳐든 채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교회를 가득 채운 일동이 예의를 갖추며 박수를 보냈다. 이 때 니일 페리 등의 학생들이 기를 내려놓은 다음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백파이프 연주자들도 연단의 구석쪽 정해진 자리에 가서 조용히 앉았다. <전통>, <명예>, <규율>, <최상> 등 교기에 새겨진 글씨대로 신입생들의 자유로운 생활과 이상, 희망, 용기 등을 강압하는 웰튼 아카데미 수업의 테이프가 끊기는 순간이었다. 촛불을 들고 있는 노인은 맨 앞줄로 갔다. 신입생 중에 가장 어린 학생들이 그 앞줄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초에는 불이 켜 있지 않았다. 노인이 어린 학생들의 맨 끝 통로 쪽에 앉은 학생을 향해 조심스럽게 허리를 굽혔다. 촛불이 그 학생의 초한테로 옮겨 붙었다. 그 학생이 옆에 앉은 학생한테 촛불을 옮겨 붙이는 방법으로 촛불은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었다. 그 광경에 맞추어 노란 교장이 다시 말했다. "지식의 빛은 나이든 사람으로부터 젊은이한테로 그 맥을 이어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노란 교장은 어린 학생들의 손에 의해 조심스럽게 지식의 빛이 이어져 나가는 광경을 바라보며 더욱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우수한 신입생 여러분. 금년 1959년이라는 해는 우리 웰튼 아카데미의 설립 1백 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지금부터 1백년 전인 1859년에도, 이 교회 안에 앉아 있던 41명의 소년들한테 제군들이 신학기를 맞을 때마다 매번 받게 되는 질문과 똑같은 질문이 주어 졌습니다." 노란 교장이 그 대목에서 잠깐 말을 중단했다. 계산된 이유였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연설에 대한 효과를 극대화시켰다. 그는 압도당한 분위기 때문에 겁먹은 듯이 움츠러든 신입생들의 얼굴을 천천히 휘둘러보며 더욱 언성을 높였다. "그런데 제군!" 신입생들은 그게 자기한테 하는 지적인 것처럼 더욱 겁먹은 표정이 되며 목을 움츠렸다. 당장 노란 교장의 입에서 너! 하는 지적이 떨어질 것만 같았던 것이다. "내가 이 자리에서 묻거니와, 네 개의 기둥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나?" 순간적으로 물을 끼얹은 듯한 긴장감이 스쳐 간 다음이었다. 한 학생이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게 신호인 듯이 또 다른 학생들이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네 개의 기둥>이란 노란 교장의 위엄과 함께 웰튼 아카데미를 상징하는 가장 오만하고 가장 무서우며 가장 엄격한 정신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일어서는 학생들이 많아지자 팽팽했던 긴장이 무너지고 있었다. 일어선 학생들은 일제히 부동자세가 되었다. 니일 페리를 비롯한 모든 학생이 차렷자세를 취했을 때였다. 꼭 한 학생만이 아직 앉아 있었다. 토드 앤더슨이었다. 유일한 웰튼 아카데미의 교복을 아직 입지 않은 그는 몹시 수줍은 얼굴로 주저할 뿐이었다. 자신의 의지로는 어떤 사소한 일도 해본 일이 없는 듯 보였다. 연신 주위를 둘러보면서도 아직 동료들처럼 일어서지 못하는 토드 앤더슨. 이를 곁에서 보다 못한 그의 어머니가 신호를 보냈다. 겉으로는 부드럽게 하는 것 같았으나 그러면서도 거칠게 무릎으로 밀어낸 것이다. 토드 앤더슨은 여전히 앉은 채 어떤 행동의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괴로운 표정으로 곁에서 씩씩하게 대답하는 동료들의 모습을 응시했다. "전통! 명예! 규율! 최상!" 학생들의 힘찬 대답에 만족한 노란 교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많은 학생들이 앉는 바람에 잠시 분위기가 어수선했으나 이내 엄숙해졌다. "본 웰튼 아카데미가 설립된 그 해에, 본 웰튼 아카데미에서는 다섯 명의 학생이 졸업했습니다." 약간은 쉰 듯하면서도 우렁찬 노란 교장의 목소리는 교회 안을 온통 울리며 구석구석 퍼져 나갔다. 평소에도 높은 목청이 그 소리는 마이크를 통해 더욱 증폭되었다. "그리고 지난 해에는...." 그의 말이 계속되었다. "51명의 졸업생들이 웰튼 아카데미 둥지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75퍼센트의 학생이 아이비 리그 대학에 진학하는 영예를 얻었던 것입니다."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교회를 가득 채운 박수 소리는 노란 교장의 업적을 칭송하는 것이었고, 아들들의 옆에 자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앉아 있던 부모들은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듯이 열광적이었다. 선발된 기수였던 네 명 가운데 녹스 오버스트릿과 찰리 랄튼은 양친 사이에 끼어 앉아 있다가 열광적인 분위기에 압도되어 힘차게 박수를 쳤다. 두 학생 역시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16세의 한창 때인 청소년 이였다. 그들의 이미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짧게 깎은 머리를 모두 세운 녹스는 개방적으로 웃는 이미지의 얼굴에 몸집이 단단한 근육으로 뭉쳐져 있었고, 찰리는 상류층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아주 잘 생긴 미남이었다. 둘이 다 부티 나는 이미지와 멋지고 스마트한 모습이었다. "이와 같은 업적은...." 노란 교장의 우렁한 연설은 잠깐 잠깐의 여유를 둘러가며 분위기를 한 껏 고조시켰다. "우리 웰튼 아카데미의 교육방침 그대로 열성적으로 실천했기 때문에 주어진 선물인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바로 부모님들께서 소중한 아이들을 본 웰튼 아카데미에 보내시는 이유이며, 그리고 본 웰튼 아카데미가 미국 전체에서도 빛나는 최고의 대학 진학 예비 교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노란 교장은 예측했던 것처럼 기다렸던 것처럼 박수갈채가 터지는 동안 조용히 입다물고 지켜본 후에 다시 계속했다. 이번에는 신입생 쪽을 분명한 눈빛으로 응시하면서 말을 이었다. "신입생 제군!" 신입생들은 또 다시 긴장된 가슴을 교복 상의 속에 숨겨야 했다. "제군들의 성공의 요체는 실로 아까 발했던 바 그 <네 개의 기둥>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울러 7학년으로 진학한 제군들한테도 적합한 말인 것입니다." 토드 앤더슨은 확실히 다른 학생들 같지 않았다. 노란 교장의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자신을 향한 것인 양 겁먹고 두려운 표정으로 일관했다. 같은 또래의 가장 수줍음 타는 소녀보다도 오히려 더욱 부끄러워하며 시종 움츠려 들었다. 노란 교장은 재학생 가운데 한 학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전체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질문이 떨어질 차례였다. "방금 말함 <네 개의 기둥>은 본 웰튼 아카데미의 모토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말은 제군의 앞으로의 생애에 있어서 분명한 초석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면... 웰튼 소사이어티 회원 후보자인 리차드 카멜론." "네!" 네 명의 기수 가운데 한 명이었던 학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창피라도 당한 듯한 표정이었다. 특이하게 노란빛인 짙은 머리를 단정하게 기르고 얼굴에 주근깨가 유독 많은 작은 키의 리차드 카멜론이었다. 하지만 창피 당한 듯해 하는 그의 표정과 반대인 것이 카멜론 부모의 표정이었다. 그들은 카멜론이 전체 학생 중에서 최초로 노란 교장의 부름을, 그것도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받은 사실에 자랑스러운 미소를 얼굴에 가득히 짓고 있었다. "카멜론, 전통이라는 게 뭔지 말해 보게." 카멜론은 약간 망설였으나 이내 씩씩하게 대답했다. "전통이라는 것은 미스터 노란 교장 선생님을, 학교를, 국가를, 조국을 그리고 가족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웰튼의 전통은 가장 높은 것입니다!" "좋아, 카멜론." 노란 교장의 두 번째 질문을 받은 것은 조지 흡긴스였다. 웰튼 소사이어티 회원 후보자라는 거창한 호칭과 함께 그에게 떨어진 질문은 명예에 대한 것이었다. 조지 흡킨스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명예란 위엄을 갖고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좋다, 흡킨스! 소사이어티 회원 후보자 녹스 오버스트릿." "네!" 벌떡 일어선 녹스 역시 기수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규율이란 무엇이지?" "그것은,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교장 선생님을 존경하는 것을 뜻합니다. 규율은 마음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맙네, 오버스트릿." 노란 교장은 카멜론이 대답할 때와는 약간 다른 표정이었다. 부족한 눈치였다. 카멜론은 첫번째로 교장 선생을 꼽은 데 비해 녹스는 부모님을 꼽았던 것이다. "그럼 이번에는 웰튼 소사이어티 회원 후보자 니일 페리군." 그때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은 녹스의 양쪽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격려하는 듯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지명 받은 니일 페리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학생들에 비해 독특한 모습이었다. 교복의 왼쪽 앞가슴에 주렁주렁 달린 휘장이 특히 다른 학생과 다르게 보였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한테 수여되는 휘장이 한두 개도 아니게 달려 있었던 것이다. 단정한 머리 스타일에 맑고 빛나는 두 눈동자, 정연한 이목구비와 함께 그가 어느 정도의 모범생인 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었다. 그는 무엇인가 불만스럽다는 듯한, 그러면서 약간은 화난 듯한 눈빛으로 노란 교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최상에 대해서 설명해 보게, 니일 페리군." 니일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최상이란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최상이란 것은 학내외에 관계없이 가능한 모든 성공에의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니일은 우등생답게 막힘 없이 대답했다. 그 질문이 자기한테 떨어지리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답을 암기한 것처럼 특별한 억양도 없이 자연스러운 대답이었다. 그는 노란 교장의 어떤 반응이 있기 전에 스스로 자리에 앉았다.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연단의 노란 교장을 응시했다. 그의 아버지 페리는 아들의 앞에 앉은 채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여러분!" 노란 교장은 좀더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제군들은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었던 노력을 본 웰튼 아카데미에서 하게 될 것입니다...." 학생들의 시선에 호기심이 가득 담기며 일제히 노란 교장의 이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 보답으로 우리들 전부가 제군들에 대해 기대하는 성공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에에... 우리 모두가 경애하던 국어 과목 담당의 포티우스 선생님이 퇴직하셨기 때문에, 이 기회에 새로 전입해 오신 선생님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노란 교장은 선생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며 계속했다. "존 키팅 선생입니다. 키팅 선생께서는 이 학교의 명예로운 졸업생이기도 하고 또한 지난 수년 동안에 걸쳐 런던의 명문교인 체스터 스쿨에서 교편을 잡으신 분입니다." 선생들이 앉은 줄 중간 저쪽에서 한 선생이 일어서며 고개를 약간숙여 소개에 답례했다. 바로 존 키팅 선생이다. 그의 등장과 함께 웰튼 아카데미에 새로운 변혁이 시도되리라는 예고편이었다. 30대 중반 정도의 나이로 보였다. 갈색 눈동자와 함께 머리카락 역시 갈색이었다. 키나 몸집이 모두 중간쯤으로 보이는 보편적인 사내의 모습이었다. 언뜻 보기에 학구파적인 이미지가 풍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다만 한 가지, 새로 부임한 키팅 선생에 대해 다른 학부모들이 눈에 나타난 기대감과 다른 표정의 한 명이 있었다. 니일의 아버지 페리였다. 페리는 키팅의 첫인상에 매우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이것 역시 키팅의 등장과 함께 웰튼 아카데미의 어떤 불행을 예고하는 듯했다. 키팅과 학생, 학교 사이에 페리의 아들인 니일과 학교와 키팅 사이에, 나아가서는 완고하고 봉건적인 웰튼 아카데미의 강압과 권위주의적인 학업 관례에 대한 커다란 도전이 예고되고 있는 것이다. 노란 교장이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성대하고 뜻깊은 신입생 환영식을 마치기에 앞서서, 본 웰튼 아카데미의 교장인 나는 이 연단에 한 분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웰튼 졸업생 가운데 현재 가장 고령자이신 그 분을 이 연단에 모시겠습니다." 청중들 전체의 상당한 관심 속에 노란 교장은 한 노인을 소개해서 연단으로 나오도록 했다. 그는 1886년도 웰튼 아카데미 입학 자인 최고령의 알렉산더 카마이클 주니어였다. 80세도 훨씬 지났을 백발의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양쪽에서 얼른 부축해 주려는 손길을 뿌리쳤다. 거만해 보이는 태도였다. 하지만 측은해 보이도록 느리고 고통스러운 발걸음을 연단을 향해 옮겨 놓았다. 교회 안의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경의의 박수를 보냈다. 연단에 도착한 노인을 마이크 앞에서 뭐라고 지껄였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부축해 주려는 손길을 뿌리쳤던 거만함만이 있을 뿐 남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조차 못하도록 늙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서 자신이 웰튼 아카데미 출신이라는 자존심을 빼버리면 그는 아마도 이미 죽은 시체였을 게 분명했다. 이 날의 신입생 환영식은 그 노인의 소리없는 지껄임을 끝으로 모두 끝나게 되었다. 사춘기의 방황 웰튼 아카데미는 백년 동안의 완고한 전통을 지켜오는 동안 세월의 흐름과 함께 비바람과 씻긴 건물이었다. 또한 그 건물과 함께 오직 엄격한 규율만을 절대적으로 고수하는 전통이야말로 웰튼 아카데미와 바깥 세계와의 사이를 완벽하게 분리시키고 있었다. 환영식을 마친 노란 교장은 교회 밖에서 학부모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학부모와 학생이 작별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흡사 예배 끝낸 다음 먼저 밖으로 나와 교인들을 대하는 목사 같은 모습이었다. 찰리 랄튼은 힘껏 어머니를 포옹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껴안기에 앞서서 눈가에까지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려야 했다. 그들 재학생 역시 기숙사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신입생과 다름없이 모처럼 만난 부모와의 작별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녹스 오버스트릿은 아버지와 작별 인사를 했다. 아버지는 애정이 담뿍 담긴 시선으로 아들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여기저기서 비슷한 작별 인사가 벌어지는 가운데 처음부터 특이하게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니일의 아버지 페리였다. 그는 전체 학부모 중에 자신만이 가장 뛰어난 우월감에 젖어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시종일관 굳은 표정이었다. 거만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키팅선생을 볼 때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아들과 작별하는 순간까지도 그의 표정이나 눈빛에는 자상함이나 깊은 애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다만 아들 니일의 교복 가슴에 주렁주렁 달린 휘장만이 중요한 모양이었다. 다른 아버지들과는 다르게 오직 그 성적우수자 휘장만을 바라보며 거듭 똑바르게 손질해 주었다. 그와 같은 행동으로 보아 니일 보다 휘장이 더욱 중요했고, 휘장이 없는 니일은 무의미한 듯해 보였다. 토드 앤더슨의 경우도 현장에서 독특하게 보였다. 그는 땅바닥에 솟아나 온 돌맹이를 구두 끝으로 뽑아 내려는 모양이었다. 그의 부모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데 정신이 빠져 아들의 존재까지 잠깐 망각한 듯했다. 아들에 대한 사랑과 보살핌, 걱정보다는 어떡하든 아들을 명문교에 보내면 그만이라는 허영된 부모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무심코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던 토드는 깜짝놀랐다. 노란 교장이 닿을 듯이 가까이 있었다. 언제 다가왔는지도 몰랐다. 그는 토드의 명찰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앤더슨군!" 토드는 어쩔 줄을 몰랐다. "대선배의 뒤를 계승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 깊은 일이지." "!..." "자네의 형님은 우리 학교의 최우수 학생 중의 한 사람이었거든." "고, 고맙습니다." 토드의 목소리는 목구멍 속으로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노란 교장은 토드의 곁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 그는 몇몇 부모들과 악수를 나누거나 혹은 목례를 하며 돌아다녔다. 이윽고 그가 다가간 곳에는 니일과 그의 아버지인 페리가 서 있었다. 그는 니일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었다. "니일군. 자네한테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지." "고맙습니다." 니일은 토드와 달리 웃으면서 얼른 말했다. 그 뒤 아버지인 페리는 의연히 입을 열었다. "이 아이라면 그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리라고 봅니다. 그렇지, 니일?" 페리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한 다음 니일의 동의 구했다. 아버지의 그와 같은 말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것인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잇는 니일이었다. 그것은 완전한 강요였다. 거역할 수도 없고 거역해서도 안되는 지상의 명령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16년 동안을 그와 같은 속에서 살아온 니일이었다. 지금의 그는 아버지에 의해 길들여지고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는 한 마리의 순한 양이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니일은 그렇게 대답하도록 강요되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사전에 불가능이 였듯이 니일의 사전에 불응이나 자기의 의사표시라는 단어는 들어 있지 않았다. 복종뿐이었다. 자신의 희망이나 뜻과 관계없이 아버지에게 복종해야만 했다. 1959년 미국의 청소년들은 오늘날과는 달리 엄격한 학교 교육과 가정 지도를 받아야 만했다. 그런 교육은 부유층 청소년일수록 더욱 심했다. 가정과 부모, 학교와 규칙 그리고 교장 선생의 봉건적이고도 억압적인 사고방식은 한창 웅지를 펼쳐야 할 청소년들에게는 숨통 막히는 일이었다. 자신의 소신대로 학과를 선택할 수 없을 뿐더러 반항을 한다거나 말대꾸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니일은 아버지의 말씀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니일의 그런 심정을 잘 안다는 듯 노란 교장은 다시 한번 니일의 어깨를 두드려 준 후에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니일 또래의 학생들은 훨씬 나은 편이었다. 더 어린 학생들은 그렇지 못했다. 난생 처음 집과 부모로부터 떠나 기숙사의 규칙대로 살아야 된다는 현실이 어린 학생들의 마음을 슬프게 만들었다. 눈물이 글썽해져서 어머니한테 매달리는 학생의 모습도 보였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들을 떼어놓기 위해 쩔쩔매는 부모들이 있는가 하면 우악스럽게 위협하는 광경도 보였다. 소년들은 자유롭게 떠들고 웃거나 사랑 받으며 살아온 집을 떠났고, 이날부터 버몬트주의 으시시한 원시림에 둘러싸인 웰튼 아카데미가 집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막혔다. 40명이나 되는 주니어 반의 학생들이 기숙사 계단을 급히 내려가려고 아우성이었다. 그때 15명의 시니어 반 학생들이 그 사이를 비집고 올라가려다 보니 계단에서는 잠시 대단한 소란이 일어났다. 그 광경을 본 교사가 소리쳤다. "조용히들 걷도록, 제군!" 그는 강한 스코틀랜드 억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자 주니어 반의 한 학생이 얼른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마카리스터 선생님. 죄송합니다." 계단을 내려간 학생들은 웰튼 아카데미 기념 전시실로 들어갔다. 신입생들은 거기서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노란 교장과의 개인 면담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웰튼 아카데미의 한 가지 전통이었다. 잠시후 문이 열리자 다섯 명의 학생이 조용히 줄을 섰다. 노란 교장은 신입생과의 면담에 앞서서 다섯 명의 모범적인 재학생을 불러들였다. "오버스트릿, 니일, 랄튼, 앤더슨, 카멜론 들어가거라." 그들을 불러 들어가도록 한 사람은 헤이거 박사였다. 그때 피츠와 믹스가 은근한 목소리로 잡담을 나누었다. "전학온 녀석이 있다지?" "그래." "누구야?" "앤더슨이란 놈이지. 토드 앤더슨 말야." 그들은 주의하며 잡담을 나누었지만 노련하고 경험 풍부한 헤이거 박사의 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피츠 하고 믹스, 두 사람 모두 감점이다." 무뚝뚝한 선언에 두 소년은 서로 마주보았다. 피츠가 재빨리 혀를 낼름했다. 그와 동시에 헤이거 박사의 두번째 선언이 피츠를 강타하려는 듯이 날아왔다. "피츠, 넌 다시 한번 감점이다!" 백발의 노인이었지만 날카롭기가 매와 같은 눈과 누구보다 예민한 귀를 가진 헤이거 박사였다. 위압적이고 규칙만을 중요시하는 오랜 교직 생활의 잔해였다. 헤이거 박사가 호명한 다섯 명의 학생은 그의 뒤를 따랐다. 교장의 여비서이기도 한 미세스 노란의 책상 앞을 지나 교장실로 들어갔다. 교장실로 들어간 그들은 교장과 마주 대하도록 놓여 있는 의자 앞에 나란히 섰다. 교장은 책상 저쪽 의자에 앉아 있었다. 위압감을 가중시키려는 의도인 것처럼 한 마리의 사냥개가 노란 교장의 옆에 도사리고 앉아 학생들을 노려보았다. "어서 오게, 제군." 노란 교장은 제일 먼저 랄튼한테 말을 걸었다. "아버님은 근황이 어떠신가?" "좋습니다." 다음은 오버스트릿이었다. "가족들은 새집으로 모두 이사를 하셨나?" "네." "그래?" "한 달쯤 전입니다." "그거 멋지군. 훌륭한 저택이라고 들었네." 노란 교장은 젊은이처럼 씨익 미소지었다. 그는 어떤 질문이 떨어질지 겁에 질린 채 잔뜩 주눅든 소년들이 보는 앞에서 사냥개의 등을 쓰다듬었다. 과자를 먹이기도 했다. 그의 질문은 다섯 명 중에 가장 겁에 질리고 초조해 하는 앤더슨 한테로 향했다. "앤더스군." 앤더슨은 더욱 긴장했다. "자네 이 학교는 처음이지?" "네에." "웰튼에서는 성적과 함께 본인의 희망사항을 들어본 후에 교장인 내가 과외활동을 할당해 주고 있어. 이곳의 과외활동은 수업과 조금도 다름없이 진지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안 그런가, 제군!" "그렇습니다!" 앤더슨을 빼놓은 네 명의 학생이 합창하듯 대답했다. 훈련 중인 군인들과 흡사했다. 노란 교장은 네 명의 신상명세서를 꺼내기에 앞서서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되는 집회에 결석하면 감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단호하게 말했다. 그가 상세히 파악해서 밝힌 네 명의 신상명세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니일=웰튼 학생협회 준회원, 화학클럽, 수학클럽, 학생연감 작성. 오버스트릿=웰튼 학생협회 준회원, 학교신문, 축구, 교우자제회. 랄튼=학교신문, 근로봉사단, 축구, 보트. 카멜론=웰튼 학생협회 준회원, 토론클럽, 보트, 근로봉사단, 변론클럽, 명예위원회. 이와 같은 과외활동은 그들이 웰튼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에 부여받은 것들이었다. 전입생인 앤더슨도 무엇인가 과외활동을 교장한테 부여받아야 되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네 명 가운데 카멜론이었다. 노란 교장은 다시 앤더슨 향해 말했다. 그의 눈에 보인 앤더슨의 수줍고 겁먹은 모습이야말로 자신의 틀에 적절히 맞출 수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한 게 분명했다. "앤더슨군. 배린 크레스트 학교에서의 군의 기록에 의하면... 자네한테는 축구와 근로봉사, 학생연감 정도로 되어 있더군. 그 외에 내가 미리 알아둘 일이라도 있나?" 앤더슨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곧바로 서 있을 뿐이었다. 마음으로는 어떤 하고 싶은 말이 막상 입을 통해 바깥으로 나와 주지 않아 쩔쩔매는 모습이었다. "무엇이든 좋아, 앤더슨 군. 모두 말해 보게." 결국 앤더슨은 몹시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가, 가능, 가능하다면 전...전...보트가..." "보트?" "네. 보트가 ...좋, 좋겠습...니다." 앤더슨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목구멍 속으로 기어들어가려 했고, 그것을 입밖으로 끌어내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했지만 허사였다. 그는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가늘게 떨었다. 노란 교장은 그토록 겁먹은 학생을 아직 본 기억이 없는 듯했다. 가정 환경으로 미루어 앤더슨이 왜 그토록 모든 일에 두려움부터 앞서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앤더슨군, 보트라고 했나?" "네." "하지만 서류의 기록을 보면 자네는 베린 크레스트에서 축구를 한 것으로 되어 있던데 말인가?" 앤더슨은 또, 그보다 더욱 더듬거려야 만했다. "그, 그건... 그건 분명하암니다만...그렇지만 전, 저는..." 모기소리만 했다. 니일을 비롯한 네명의 동료학생들까지 안스러워 졌을 정도였다. 앤더슨의 이마와 콧등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배어 나고 있었다. 너무 주먹을 불끈 쥐었기 때문에 손 마디마디가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동료 학생들이 곁에서 지켜보지 않았다면 앤더슨은 그렇게 조차 지탱할 수 없었을 게 분명했다. 이미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던 것이다. 노란 교장은 앤더슨과 대화를 더 이상 지속시킬 필요가 없으며, 자신이 일방적으로 과외활동을 선택하도록 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알겠네, 앤더슨 군. 우리 웰튼 아카데미에서는 축구를 희망한다는 뜻이겠지? 좋아!" 앤더슨의 표정은 치밀어 오르는 슬픔 때문에 몹시 창백해져 있었다. 니일은 그러한 앤더슨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기숙사 방에 새로 전학해 온 학생이 들어오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학생이 바로 앤더슨일 거라는 확신과 함께 몹시 신경이 쓰였다. 교장실을 나온 다음이었다. 다른 학생보다도 니일은 앤더슨에게 관심을 가지며 얼른 그에게로 다가갔다. 앤더슨은 아직도 슬픔으로 인해 창백해진 얼굴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이!" 니일은 앤더슨한테 바싹 다가가며 손을 내밀었다. "난 니일 페리야. 우리 새로운 룸 메이트가 된 모양이야." "난 토드 앤더슨." 앤더슨이 여전히 창백한 얼굴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거운 침묵이 찾아 들었다. 그들은 잠시 말없이 나란히 걸었다. "전학해 오기 전엔 베린 크레스트에 있었다지?" 니일이 먼저 말을 걸었다. "그랬어." "왜 거기서 전학했지?" "형 때문야." "형엉?" "이 학교를 다녔거든." "아아, 그렇군! 네가 바로 그 앤더슨 이구나." 니일은 감탄하고 있었다. 웰튼 아카데미에 들어온 후 앤더슨의 형에 대해서 여러 차례 들어온 니일이었다. 노란 교장을 비롯해서 선생들까지 앤더슨의 형이 얼마나 모범생이었나를 칭찬했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께서는..." 앤더슨은 여전히 낮고 움츠러드는 소리로 말했다. "처음부터 나도 이 학교에 보내고 싶어 하셨어." "그런데?" "난 별로 성적이 좋지 않은 평이었어. 어쩔 수 없이 성적을 올리기 위해 그 학교에 가야만 했어." "성적 올려 웰튼 아카데미로 오기 위해 베린 크레스트에?" "으응." "그래 거기서 최하위 상을 받았단 말야?" 니일은 그 말에 결코 다른 뜻이 없음을 보이기 위해 환하게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그렇지만 앤더슨 여기서도 베린 크레스트에서와 같은 일이 있어 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게 좋아. 무슨 뜻인지 알겠니?" "나도 알아, 그건." 기숙사의 현관 홀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학생들의 개인 사물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신학기의 시작과 함께 기숙사의 방을 옮기게 된 니일이었고 그는 새로운 룸 메이트가 된 앤더슨과 함께 각각 자기 짐을 챙겨 지정된 방을 찾아갔다. 기숙사 모든 방이 다 그렇듯이 두 사람이 사용하도록 두 개의 침대와 책상이 있는 비좁은 편이었다. 앤더슨과 달리 그런 소규모의 방에 이미 익숙해 있는 니일이었다. "좁은 방이라 답답하지만 말야. 그래서 여기가 즐거운 나의 집이지!" 그는 짓궂게 소리내어 웃으며 방으로 들어섰다. 좁은 방에 어떻게 두 개의 침대와 책상, 클로젯을 집어넣을 수 있었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니일은 들고 온 짐을 한 쪽 침대 위에 함부로 집어던졌다. 그때였다. 카멜론의 노랑머리가 문으로 불쑥 들어왔다. "새로운 놈과 같은 방을 쓴다지?" "그래." "되게 멍청한 녀석이라지?" 니일을 향해 멋대로 지껄이던 카멜론은 갑자기 어이쿠! 소리치며 도망치듯 가 버렸다. 니일과 함께 있는 앤더슨을 발견했던 것이다. 앤더슨은 묵묵히 니일과 다른 침대에 자신의 짐을 내려놓았다. 교장실에서의 슬프고 창백해진 얼굴이 거의 정상 상태로 돌아와 있었는데, 그는 카멜론의 짓궂은 비아냥거림에 대해 무신경한 표정이었다. 오버스트릿과 랄튼, 믹스 등이 그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이, 니일. 너 하기강습에 다녔다는 소문이던데 정말이니?" 랄튼이 그렇게 물었다. "아아, 화학 말이군." "정말이니." "그래. 아버지가 예습해 두라고 하셔서 했어." 니일에게 그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이라면 어떤 일이든 그것이 설령 자신의 생애를 파멸의 구렁이로 몰아가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해도 니일은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역시 그랬구나." 랄튼은 계속해서 말했다. "믹스는 라틴어를 완벽하게 마스터했고, 나는 국어에 대해 한번도 실패하지 않았어. 그래서 말인데, 니일. 너만 동의한다면 스터디 그룹을 만들고 싶은데?" "그것도 좋지." "그런데?" "카멜론한테서도 실은 그런 권유가 있었거든." "그 녀석이?" "으응. 누구든 그애하고 함께 공부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이라도 있니?" 니일의 말에 랄튼이 웃으면서 되물었다. "녀석이 잘하는 과목이 대체 뭐냐구. 알랑거리기나 하는 거?" "그만 해 둬라. 녀석은 네 룸 메이트 아니냐구." 니일의 충고에 랄튼은 더욱 못마땅해하는 표정이 되었다. "쳇, 알 게 뭐람!" 그러는 동안에도 앤더슨은 묵묵히 짐정리만 했다. 그때 믹스가 앤더슨 한테로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우리 서로 초면이군. 난 스티븐 믹스라고 해." "토드 앤더슨야." 이어 녹스와 랄튼 역시 앤더슨을 환영한다는 마음의 표시로 먼저 악수를 청했다. 그들이 서로 이름을 소개한 다음 니일이 그들한테 앤더슨의 형에 대해서 말을 꺼냈다. "니들 말야, 앤더슨의 형이 누군지 생각해 봤니?" 모두들 니일을 바라보았다. "바로 우리가 수없이 들었던 제프리 앤더슨, 알겠니?" "알아, 그래애? 그러니까, 졸업생 대표에다 국민 영예 연구자인 그 제프리 앤더슨 말이군..." 랄튼은 놀랐다는 듯이 앤더슨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들뿐 아니라 웰튼 아카데미의 재학생 전원이 제프리 앤더슨을 알고 있었다.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믹스는 고개를 끄덕이는 앤더슨을 향해 웃으며 한마디했다. "어쨌든 좋아, 앤더슨. 네가 이 웰튼 '지옥학교'에 오게 된 것을 환영한다." 이번에는 랄튼이 앤더슨한테 넌지시 충고했다. "소문을 들어서 아마 알고 있을 거야, 앤더슨. 사실 그대로야. 여긴 지독하게 엄격한 곳이라구. 믹스 같은 천재라면 무슨 별다른 문제도 없겠지만 말야." "이 녀석이 왜 이러고 있는지 알겠니?" 믹스는 랄튼을 노골적으로 가리키며 덧붙였다. "나한테 라틴어를 배우고 싶어 아첨하고 있는 거야." "그것 뿐이 아냐." 랄튼이 믹스의 말에 얼른 끼여들며 계속했다. "라틴어뿐이 아냐. 영어와 삼각함수도 도움이..." 문득 들려 온 노크 소리가 찰리의 다음 말을 중지시켰다. 일제히 문 속을 바라보았다. "방문은 열렸어!" 이 방의 주인인 니일이 밖을 향해 소리 쳤다. 문이 열렸다. 무심코 그 쪽을 바라보던 니일은 소스라치도록 놀랐다. 거기서 들어오고 잇는 사람은 친구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 페리였던 것이다. "어, 어떻게..." 니일은 계속 당황하며 그러나 주위의 동료들을 의식하자 얼굴에 미소를 나타내려고 노력했다. 그때 학생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안녕하세요'하고 페리한테 경의를 표했다. "모두들 앉아라. 모두 어떻게들 지냈지?" 언제나 마찬가지로 무표정한, 그보다 돌처럼 차가운 얼굴의 페리였다. 오직 명령할 뿐이고, 자신의 그 명령에 복종해야 된다고 사고 방식으로 무쇠처럼 단단해진 그의 모습이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일제히 대답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니일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대해 갑자기 밀려드는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언제나 완고한 아버지였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학생들의 집안은 완고한 보수집안이었기에 아버지는 권위의 상징이었다. 니일도 아버지만 대하면 몸이 굳어지는 것이었다. 참교사 참교육 페리의 출현은 니일에게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지시를 내리기 위한게 분명했다. 페리는 긴장되면서도 어쩐지 불쾌한듯이 바라보는 아들의 앞으로 걸어갔다. 아들은 친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완고한 아버지를 만나는 일이 반갑지 않은 게 분명했다. "니일, 난 네가 너무 많은 과외활동을 한다고 생각한다." "네에?" "그 문제 때문에 조금전 노란 교장과 조용히 얘기했다." 니일 뿐 아니라 모두가 페리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난 네가 너무 많은 과외활동에 시달리지 않도록 학생연감 만드는 일을 내년으로 미루어 달라고 노란 교장에게 부탁했다." 그것 뿐이었다.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는 듯했다. 전적으로 일방적인 선언이었다. 페리는 그 말만을 남긴 채 되돌아 방을 나가려 했다. "하지만 아버지!" 니일이 갑자기 볼멘 소리로 크게 불렀다. "뭐냐, 니일." "난 부편집장이란 말예요!" 니일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페리의 양쪽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하지만 이내 평소의 차가운 표정이 되어 짧게 말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들에 대한 진정으로 미안해 하는 사랑의 말과 표정이 아니었다. 윽박지르기 위한 엄포가 분명했다. "아버지, 그건 적당한 일이 아니예요. 나한테도...." 니일은 갑자기 얼버무렸다. 무섭게 쏘아보는 페리의 두 눈에 그만 겁먹었기 때문이었다. 페리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눈짓으로 니일을 문가로 오도록 한다음 짐짓 다른 학생들한테도 점잖고 예의 바른 어른으로 비치도록 양해까지 구했다. "어떠냐. 모두들. 잠깐 니일과 얘기해도 되겠지? 그럼 실례한다." 학생들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토록 무서운 아버지를 둔 니일이 평소 쾌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페리는 니일을 밖의 복도로 데리고 나온 다음 방문을 닫았다. 그는 곧바로 말할 수 없는 분노와 함께 니일을 꾸짖기 시작했다. "니일, 아버지한테 반항하는 버릇을 어디서 배웠냐?" "반항이 아니고...." "닥쳐라! 그건 반항이야." "그렇지 않아요. 아버지. 다만 내 생각은...." "또 말대꾸!" 니일은 그만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넌 네 친구들 앞에서 애비한테 말 대답까지 했다." "!...." "앞으로 또 다시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말대답 하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아버지... 그건 제가 말대답을 하려는게 아니었어요." "뭐라구?" "다만...." 이미 겁에 질린 니일의 목소리는 입속에서 흔적도 없이 잦아들 듯이 모기소리만 해졌다. "다른 말을 않겠다." 니일은 아버지를 빤히 그러나 겁먹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의과대학만 졸업하면 된다. 그런 다음에는 어떤 일이든 네 마음대로 해도 상관하지 않겠다.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네 마음대로 해. 하지만 그 전까지는 내가 하라는 대로 해!" "!...." "알겠느냐?" 니일은 자기의 발길을 말없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 감히 눈들어 아버지를 마주 볼 수도 없었다. 어떠한 경우라도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거나 주장해서는 안된다는 억압당한 잠재의식이 그를 한없이 나약한 존재로 만들었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네 어머니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을 테지?" 페일은 자신의 지나친 욕심을 위장하기 위해 그럴 때마다 니일의 어머니를 앞에 내세웠다. "네." 니일은 힘없이 대답했다. "됐다. 모두 다 네 어머닐 위한 거다." "네, 아버지. 아버지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니일의 마음 속에서는 순간적인 반항심이 일어났었다. 하지만 죄책감과 함께 어떤 형태이든 무섭게 떨어질지도 모를 벌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어떻게도 자신의 불만을 나타낼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니일은 한마디 더 했다. "아버지께서는 항상 저를 사랑하고 보살펴 주십니다." 비로소 페리의 사납던 표정이 평소의 냉정한 이미지로 돌아왔다. "넌 착한 아이다, 니일.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 해라. 네가 필요한 거라면 아마존 강의 악어라도 잡아다 주마. 단 의과대학에 가기 위해서 필요한 거라면 말이다. 내 말 알겠지? "네." 니일은 돌아서서 걸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절망에 가까운 슬픔과 원망이 함께 뒤엉킨 눈길이었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이 순간처럼 원망스럽고 무서웠던 적이 없었다는 느낌이 들어 몹시 서글펐다. 니일이 다시 방으로 들어온 것은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다음이었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아주 태연한 표정을 보였다. 누구도 방금 전의 일에 대해 아는 체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분명히 동료의 한 명이 그 부모로부터 숨쉴 수 조차 없도록 구속당하는 광경을 목격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심으로는 누군가 그 문제에 대해 먼저 말할 때를 기다렸다. 그 말을 먼저 거내기 위해 입을 연것은 녹스였다. "니일." 니일은 동료들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무엇 때문에 니네 아버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지 모르겠구나?" 녹스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또 있어. 넌 무엇 때문에 거역하지 않고 복종만 하는 거니? 그건 맹종밖에 안돼. 그 정도의 거역이라면 나쁘다고 생각할 수도 없는데 말야." 니일은 잠시 침묵했다. 아버지의 무서운 모습 앞에서는 감히 자신의 뜻조차 피력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동료들한테까지 듣고만 있을 수는 없는 그였다. 그는 동료들의 충고 아닌 비난에 가까운 말에 대해 우습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아주 흥미로운 일이구나?" "뭐가?" 녹스였다. "너희들이 부모님한테 반항하는 것처럼 왜 못하느냔 말이지? 미래의 변호사님이나 미래의 은행가님들이?" 그러는 동안에 스스로 분노를 느낀 니일은 방안을 왔다갔다 했다. 짐짓 못마땅해 했던 동료들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더욱 화난 니일이 학교연감 문제로 학교에 맡은 기념뺏지를 가슴에서 떼어내더니 책상 위에 내동댕이쳤기 때문이었다. 녹스가 얼른 니일한테로 다가가며 말했다. "그러지 마, 니일. 난 적어도 부모님에 대해 내 멋대로는 안굴어." 니일은 여전히 비웃었다. "물론 그럴 테지! 모든 일에 부모님의 말씀만이 진실이니까. 언젠가 넌 아버지의 법률사무소에 당당히 취직하게 되겠지?" 니일은 계속해서 랄튼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마찬가지야. 어차피 목숨이 붙어 있을 동안 은행에서 융자 신청에 대해 인허가나 하고 있게 되겠지." "그건 나도 알아. 나 역시 그따위 일들이 마음에 안들어. 하지만 내가 하고 싶던 말은...." "너도 똑 같겠지? 그렇다면 다시는 나와 우리 아버지의 일에 끼어들어 이러니 저러니 말하지 마. 내 말 알겠지?" 니일은 진정으로 화내며 차갑게 쏘아 붙였다. 녹스는 그만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다, 니일. 그건 그렇고, 어쩔 셈이니?" "생각할 필요도 없어." "?...." "연감편집을 그만두는 거야. 그밖에 뭐가 또 있겠어, 까짓것!" 그때 가만히 있던 믹스가 돌연 웃는 표정을 지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내 생각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 같아." 모두 믹스의 얼굴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사실 연감 같은 것은 노란 교장을 상대로 해서 점수 따겠다는 녀석들이나 모인 집합체니까 말야. 니일 생각은 어때?" "제기랄! 내가 왜 이런 따위의 일을 걱정해야 되는지 모르겠어!" 니일은 못마땅해서 소리치며 주먹으로 베개를 두세 차례 후러친 다음 천정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이 순간 니일의 동료들 역시 그의 실망과 허탈감 같은 상태를 공감하며 잠시 침묵 속으로 가라 앉았다. 이윽고 자꾸낮게 가라앉던 침묵으로부터 동료들을 건져내어 준 것을 랄튼이었다. 그는 둘러보며 힘차게 말했다. "내 생각엔 기분전환을 필요로 할 땐 라틴어가 최고야. 니일 어때. 오늘 밤 여덟 시 내 방에서 말야." "좋았어." 니일이었다. "앤더슨. 너도 생각 있으면 함께 와라." "그러는게 좋겠다." 랄튼이 곁에서 거들자 앤더슨은 그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럼 이따가 보자." "알았어." 방의 주인인 니일과 앤더슨을 남겨둔 채 각각 자기의 방으로 돌아갔다. 다시 짐 정리하는 앤더슨을 바라보던 니일은 자신이 팽개쳤던 뺏지를 다시 집어들었다. 앤더슨이 집어든 것은 액자에 끼워진 사진이었다. 그의 양친과 함께 웰튼 아카데미에 혁혁한 명성을 남긴 제프리, 실제보다 나이가 들어보이는 소년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양친은 제프리 쪽에 더욱 진한 애정을 표시하고 있었다. 무심코 그 사진을 들여다 보던 니일은 한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사진 속의 앤더슨은 가족들과 약간 떨어져 홀로 있었다. 한 장의 사진 속에서 앤더슨이 가족들한테 어쩐지 소외당하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니일은 자기 침대로 가서 누우며 솔직한 질문을 던졌다. "앤더슨, 네 아버지는 어때?" "비슷해." "우리 아버지 하고?" "으응." "정말이니?" "아, 아냐. 아무것도...." 앤더슨은 갑자기 얼버무렸다. "앤더슨, 잘 들어 봐." "?...." "만일 모든 학생들과 즐겁게 어울리고 싶다면 말야, 무슨 말이든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히 말해야 돼. 마음씨 고운 사람이 이 지구를 계승하게 되리라는 말도 있기는 하지만 이걸 알아야 해. 지구를 계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하버드에 입학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야. 이 뜻 알겠지?" 앤더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니일은 손에 뺏지를 잔득 움켜 쥐면서 말을 계속했다. "저 빌어먹을 아버지가!...." 그러다 말고 비명소리를 냈다. 움켜진 뺏지 뒷면의 핀끝이 엄지손가락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찔린 손가락에 핏방울이 솟아나는 광경을 본 앤더슨이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니일은 피가 솟아난 엄지손가락을 물끄러미 내려보았다. 신기한 발견이라도 한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피를 보고 있었다. 그 순간에는 어떤 아픔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니일은 그 뺏지를 한 번 힘껏 내동댕이치고 말았다. 앤더슨이 깜짝놀랐을 정도였다. 대망의 신학기 수업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니일과 그의 동료들은 목욕탕을 바쁘게 들락거렸다. 놀랍도록 빠른 속도였다. 옷을 벗었는가 하면 어느틈에 벌써 다 씻은 다음 옷 입고 목욕탕을 나가는 것이다. "7학년 녀석들 말야." 니일이 찬물로 얼굴을 씻으며 말했다. 지방질이 두툼함 것도, 근육질의 몸집도 아닌 그의 체격은 나약하면서도 일면 강인해 보였다. "지금가지도 어린 아이처럼 긴장하고 있다니깐." "나도 그런 기분야." 앤더슨이었다. 그는 옷도 다 벗지 않은 채 이날 있을 수업과목의 책을 뒤적거리는 중이었다. "걱정할 거 없어. 처음엔 누구나 다 그런 거니까 말애." 앤더슨은 가만히 있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되게 마련야.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가 하는 문제는 생각할 것도 없어. 다만 마지막에는 반드시 그렇게 될 뿐야. 그게 전부야." 학생들은 서둘러 옷입은 다음 철학 실험실을 향해 소리내며 뛰어갔다. 니일과 앤더슨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철학 실험실에 도착했을 때 먼저 와있는 녹스, 랄튼, 믹스, 카멜론 등의 모습이 보였다. 강단에 서 있는 안경낀 선생은 교과서를 여기저기 넘기고 있는 중이었다. 이윽고 선생의 위엄있는 목소리가 실험실 안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과제에 대해서 말하겠다." 학생들은 일제히 선생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너희들은 각자 자유과제 리스트에 실려 있는 것 가운데 세 건의 실험을 선택한다. 그런 후에 한 건씩의 실험에 대한 레포트를 제출하는 것이다. 제1장 말미의 과제 가운데 20문제가 오늘의 과제다. 그 실험에 대한 레포트를 내일까지 제출토록 한다." 선생의 말을 귀로 들으며 교과서를 들추어 보던 랄튼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해서 오버스트릿을 바라보더니 이어 맥없이 좌우로 고개를 젖고 있었다. 학생들 가운데 꼭 한 사람 당황하지 않았던 학생은 앤더슨뿐이었다. 그는 교과서의 내용이나 선생의 말에 대해 아주 태연했다. 선생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하지만 앤더슨을 제외한 다른 학생들은 제 1장 말미부분의 20문제에 대한 뒷부분부터의 이야기를 이미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다음 수업은 마카리스터 선생의 차례였다. 마카리스터 선생은 라틴어 담당이었다. 특히 스코틀랜드 억양의 라틴어 교사는 전 미국 뿐 아니라 근대교육사에서 둘도 없는 독특한 존재였다. 수업이 시작되었을 때였다. 마카리스터는 신학기 첫날의 수업인데도 앞으로의 수업방침이나 방향 같은 것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거라고 생각한 게 분명했다. 교과서를 펼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본문으로 들어간 것이다. "먼저 명사의 격변화부터 시작하도록 한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발음대로 따라서 해보도록. 아브리고바...." 그는 하나의 단어를 놓고 계속 반복해서 발음했다. 그는 칠판 앞을 왔다갔다 하며 지치지도 않은 듯이 계속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거의 필사적으로 따라서 발음했다. 온 시간을 거의 그 단어발음으로 마친 마카리스터였다. "내일의 수업은 이 명사에 관한 시험을 볼 테니까 각자 충분히 공부해 오도록." 그와 동시에 학생들 사이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동료들끼리 서로 마주보는 눈길에 조차 한숨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수업이 끝났을 때였다. "저 놈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해! 내일 당장시험이라니 말도 안돼. 도저히 불가능해. 아무도 외울 수 없을 테니 말야." 랄튼의 불만은 대단했다. 특히 청각이 약한 귀 때문에 라틴어 발음소리를 놓칠까봐 걱정이 앞을 가렸던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라틴어에 남달리 자신이 있는 믹스가 은근히 말했다. "걱정할 거 하나없어." "뭐라구?" "법칙만 알고 나면 어렵지 않아" "무슨 법칙?" "내가 가르쳐 줄 테니까 오늘 밤에 같이 공부하자." "믿어도 되는 거겠지. 믹스?" "날 뭘로 보니?" "알았어. 너만 믿는다." 다음 수업은 헤이거 박사의 수학시간이었다. 어느 과목이든, 어떤 선생이든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그 중에서도 학생들이 꺼려하는게 헤이거 박사의 수학 시간이었다. 과목 자체의 이미지처럼 머리가 아플 정도로 복잡해서 언제나 전전긍긍 하는 학생들이었다. 헤이거 박사의 수학교실 벽은 한면 전체가 수학 도표로 완전히 도배되고 있었다. 교과서 역시 학생들이 들어가기 전에 각자의 책상에 이미 펼쳐져 있을 정도였다. "삼각함수의 학습에 있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정확성이다." 헤이거 박사는 그 말로 이날의 포문을 열었다. "분명히 말해 두겠다...." 학생들은 모두 긴장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숙제를 잊은 학생한테는 최종성적에서 1점 감점당하게 된다. 그리고 미리 말해 두겠는데 절대로 나를 만만하게 보지 말도록 할것." 엄포를 놓은 헤이거 박사는 이어 코사인의 정의를 누군가 내리도록 했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카멜론이었다. 카멜론은 선생님들에게 확실히 잘 보이려는 기질이 있었다. "코사인(Cosine), 즉 여현이라고 하는 것은 삼각함수의 하나이며, 직각삼각형의 한 예각을 낀 밑변과 빗변과의 비를 그 각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좋아, 카멜론군." 헤이거 박사의 질문은 그런 식으로 쉴사이 없이 퍼부어졌다. 조금이라도 허술한 대답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질문하기 위해 어깨 위로 올려지고, 그럴 때에 학생들은 딱딱하게 일어서서 대답했다. 앉은 채 대답하는 것은 거의 드문 일이었다. 대답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즉시 엄한 질책이 떨어졌디. 학생들은 자연히 긴장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날의 수업이 끝났을 때는 앤더슨조차 신음소리를 냈을 정도였다. "이 이상 앞으로는 1분도 못견딜 것 같아." 앤더슨의 고백이었다. 그러자 헤이거 박사에 대해 그 보다 잘알고 있는 믹스가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할 거 없어, 앤더슨." "어째서?" "첨엔 누구나 다 그렇거든." "그럼?...." "너도 우리처럼 헤이거의 수업에 곧 익숙해지게 될 거야." "정말?" "우선 방법을 익히면 돼. 그 다음부터는 편해져." "난 여섯 걸음 정도 뒤떨어진 기분이 들어." 다음 수업은 국어과목이었다. 앤더슨은 더 말하지 않았다. 국어교실에 들어간 그는 지친듯이 의자에 앉아 교과서를 되는 대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국어교실에 들어간 학생들은 새로운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새로 전임해온 키팅 선생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웰튼 아카데미 졸업생이라는 점에 학생들은 촛점이 맞추어졌다. 자신들의 장래를 거기서 찾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였다. 또 한 가지는 그가 아직 젊다는 사실이었다. 헤이거 박사 같은 노인에 비해 40대 중반 정도인 키팅에 대해 학생들이 은근한 친밀감을 갖는 것은 지나치게 엄격하고 규칙만을 주장하는 늙은 권위 주의자에 비해 젊은 비팅 선생은 한결 융통성이 있을 거라는 보편적이면서도 타당성 있는 예측 때문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수업시간이 되었는데 키팅은 아직 교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학생들은 모두 어떻게 된거지? 하는 표정들이었다. 나지막한 휘파람 소리가 복도에서 들려온 게 그때였다. 곡조는 정확히 알아볼 수 없었다. 학생들은 자신과 관계없는 한낱 휘파람 소리라며 건성으로 들어넘겼다. 휘파람 소리는 더욱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교실문까지 접근했다. 그런 다음이었다. 문이 열리더니 거기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가 바로 키팅임을 알아차린 학생들은 재빨리 자세를 고쳐앉았다. 그가 교실로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그는 분명히 노란 교장이 소개한 키팅 선생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교실에 들어선 키팅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학생들의 눈에 비친것은 건달처럼 휘파람을 낮게 불고 있는 괴상한 선생의 모습 뿐이었다. 잠시 학생들의 멍청해진 모습을 둘러 보던 키팅이 다시 움직였다.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한마디 없이 학생들 사이의 통로를 지나 뒷쪽 출입문으로 가고 있었다. 여전히 휘파람을 불면서 였다. 학생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새로 부임되온 선생이라면 당연히 어떤 순서가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마디 없이 건달처럼 휘파람이나 불며 앞문으로 들어왔다가 뒷문으로 나가버리려 하고 있는 모습에 학생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반 전체 학생들이 앉은 채 몸을 비틀어 괴상한 선생의 행동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어 서로 마주보기도 했다. 키팅은 그대로 교실을 나가버린 게 아니었다. 잠깐 모습을 감춘 듯하던 그가 뒷문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나와." 학생들은 그 말을 미처 알아듣지 못했다. "이리나와." 이번에도 반문조차 못하며 어리둥절했다. "모두들 이리 나와. 그러는 게 좋을거야." 비로소 학생들은 알아들었다. 하지만 더욱 당황했다.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뚱딴지 같은 선생의 태도에 학생들은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었다. 그는 분명히 학생들을 밖으로 불러내고 있었다. 이유도 목적도 모른다.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신분과 선생의 관계를 생각하기 시작하게 만든 것은 잠시가 지난 다음이었다. 그들은 하나둘씩 움직였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끌려가는 표정으로 책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뒷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누구도 이후 어떤 일이 생기게 될지 예측하지 못하는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신선한 충격 도깨비처럼 학생들을 불러낸 키팅은 기념 전시실에 모두 모이도록 했다. 학생들은 키팅의 앞에 약간 둥근 형태로 모여선 채 아직 어떤 느낌도 정확히 받지 못했다. 니일 등도 마찬가지로 궁금증과 함께 비난이 섞인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모든 일이 즉흥적인 듯했다. "오오, 선장이여! 우리의 선장이여!" 느닷없이 키팅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도 마찬가지였다. 자칫 농담이나 학생들을 시험하기 위한 장난으로 오해할 수도 있었다. 적어도 키팅과 그의 수업 방침에 대해 한가지도 모르는 학생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열정적인 목소리로 느닷없이 그런 시귀절을 암송한 키팅은 조용히 학생을 둘러보았다. "지금 내가 읊은 시구는 누구 시에서 인용했는가? 아는 사람 누구지? 없어?" 한 학생도 손을 들지 않았다. 아직 모두가 어리벙벙해진 모습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자신들이 보고 있는 괴짜가 정말 선생인지 확신을 갖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키팅은 괴짜인데다 바보스러워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상대의 폐부를 찌르는 듯한 눈초리로 학생들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좋다, 젊고 용기 있는 학자 제군!" 그는 힘찬 목소리로, 그러면서도 끈질긴 투지가 엿보이는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지금의 그 시는 윌터 휘트먼의 것이다. 에이브라함 링컨을 칭송하는 뜻에서 썼던 시의 한귀절이다. 지금부터 내 수업 시간에 너희들은 나를 키팅 선생이라 불러도 좋지만... 오오, 선장이여! 우리 선장이여! 라고 불러도 좋다." 키팅의 말에 학생들은 또 한번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괴짜 같은 말인가 싶어 웃음이 또 터져나오기 직전이었다. 선생이면 선생이지 선장은 뭐란 말인가. 그는 윌터 휘트먼도 아니고 에이브라함 링컨은 더욱 아니지 않는가. 그는 학생들로 하여금 계속 혼돈에 빠지도록 만들며 말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었다. "나는 가능한 한 소문 거리가 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미리 말해 둘게 있다." 학생들은 미궁에 빠진 듯이 아직 갈피를 잡지 못했다. "여기에 있는 나 키팅은 지금으로부터 수년 전 이곳 웰튼에서 여러분과 같은 학생이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지금과 같이 카리스마적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었음도 밝혀 두기로 하겠다." "?..." "또한 젊은 학생 제군이 나를 규범으로 삼는다 해도 그것은 다만 군들의 학업 점수를 올리는 역할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학생들은 비로소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니일과 그의 가까운 그룹들은 다른 학생보다 빨리 호기심을 가진 눈과 마음으로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키팅의 말이 계속되었다. "지금부터 우리 모두가 보아 두어야 할게 있다. 모두들 벽에 있는 사진을 보기 바란다." 그 벽에는 1800년대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학생들 사진이 걸려 있었다. 모든 사진은 커다란 유리 속에서 각기 나름대로의 개성을 강조하듯 전면을 향한 상대였다. "그러면, 피츠군. 불행한 이름이군, 피츠, 저질이라니." 몇몇 학생들이 쿡 소리 죽여 웃었다. 피츠 역시 어색해 하면서도 입가에는 미소를 지었다. 키팅의 모든 행동을 보고 듣는 이로 하여금 전혀 악의나 고의성이 없음을 이해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키팅은 이어 벽의 사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를 보도록. 지금부터 60년 혹은 70년 전 이 학교에 다녔던 소년들의 사진이다. 자, 자아. 모두 사양하지 말고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도록 해라. 니일의 그룹을 선두로 해서 학생들이 사진 앞으로 다가들었다. 그들은 사진 속의 대선배들을 그러나 지금의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소년들의 갖가지 모습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들여다보는 가운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그들은 어느덧 과거의 지나간 시간을 넘어 현재 눈에 보이는 소년들의 얼굴에 빠져든 것이다. "지금의 제군들과 어디가 어떻게 다른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두 눈에 희망의 빛이 깃들어 있는 것도 똑 같다. 지금의 너희들과 마찬가지야. 자신들의 앞날에 멋진 운명이 기다려 준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때의 그 웃는 얼굴들이 지금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또 희망은?" 학생들은 키팅의 의미심장한 말을 들으면서 무엇인가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럴 수 없도록 진지한 표정으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키팅은 학생들의 분위기를 예의 주시하며 다시 설명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키팅의 이야기는 학생들의 가슴에 벅찬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에 대해 정직한 인생을 살고자 하는 의지가 약했다. 그건 결과적으로 능력을 제대로 발취 못한 결과가 되었다." 성공이라고 하는 전능한 신을 따르는데 급급한 나머지 청춘의 꿈을 허무하게 흘려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은 모든 학생들을 서서히 감동시켜 나갔다. 그는 계속했다. "그들의 대부분이 지금은 수선화의 비료 신세로 이미 끝장났다. 하지만 조금 더, 더 좀 가깝게 다가가서 들여다 보라. 그렇게 하면 그들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귀를 가까이해서...얼굴을 사진 앞으로 더 가깝게, 가깝게..." 학생들은 홀린 듯이 사진 앞으로 닿을 듯이 가까이 가서 어느덧 귀를 기울였다. 그때였다. 분명히 무슨 소리인가 들렸다. 그것은 환상적인 속삭임 같은 느낌의 소리였다. "어떠냐, 무슨 소리가 들리지?" 모두들 귀를 기울였다. 키팅은 학생들의 뒤쪽에 거의 붙어서 있었다. 또 다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 이상하고도 신비로운 목소리에 전율을 느끼며 매료되었을 때였다. 문득 니일이 쿡 웃었다. 신비스러운 그 소리가 들리는 근원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바로 뒤에 서 있는 키팅이 내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학생들은 방금 쿡 웃었던 니일조차 어느덧 신비스러운 또 다른 감정에 빠져든 것이다. "들려 오지 않느냐?"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이 간다는 뜻의 표현이었다. 키팅의 색다른 교육 방법으로 인해 학생들은 형태를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분위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모두들 정적 속에 싸인 채였다. 어떤 학생은 도둑처럼 다가가 사진에 얼굴을 대기까지 했다. 그때 키팅의 쉰 듯한 목소리가 다시 학생들의 귀에 들려 왔다. "카르페 디엠...오늘을 즐기라. 자기 스스로의 인생을 잊혀지지 않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모두들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벽의 사진에 빨려 들었다. 니일, 앤더슨, 믹스, 녹스, 오버스트릿 등등도 모두 같은 상태였다. 그와 같은 광경은 수업 시간이 끝나는 종소리가 들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오늘은 이만 끝내겠다. 젊은 학자 제군들, 다음 시간에." 수업이 끝난 다음이었다. 학생들은 잠시 조금 전까지 깊숙히 빠져들었던 묘한 세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어쩐지 이상한 데가 있는 것 같아." 피츠는 책을 정리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난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 같더라." 녹스는 그렇게 말하며 실제로 몸을 떨기까지 했다. "뭔가 이상한 데가 있어. 확실히 다르거든." 니일은 그러면서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때까지 가만히 있던 카멜론이 불쑥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거 혹시 시험문제에 나오는 거 아닐까?" 키팅의 이색적인 교육에 대한 학생들의 첫 반응이었다. 그들의 말대로 확실히 다른 점이 있었다. 이튿날. 키팅은 국어시간에 교탁 옆의 의장 앉아 있었다. 전날의 이미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하고 차분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수업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제군. 지금부터 이 프리차드판 교과서의 21페이지를 펴면 거기 서문이 있다." 학생들은 키팅이 말한 그 두툼한 책을 펼치자 키팅은 니일에게 그 페이지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를 읽도록 지시했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학박사 J 에반스 프리차드 지음..." 니일이 앉은 채 큰소리로 그 대목을 읽기 시작했다. "시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운율이나 음율 그리고 비유와 같은 사항을 충분히 이해해야 될 필요가 있다. 더구나 몇 가지 점에 대한 충분한 고찰이 필요하다. 그 하나는 '시의 대상'이 얼마나 예술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가이고 다음은 '대상은 얼마만큼 풍부한 것인가'이다..." 학생들은 니일이 이어가는 대로 눈길로 글자를 따라가고 있었다. 키팅이 의자에서 일어나 칠판 앞으로 다가가는 가운데 니일이 계속했다. "하나는 시의 완성도를 꾀하기 위한 것이고 둘은 그 중요도를 판단하기 위한 것이다. 이 질문에 한번 대답한 다음에는 어떤 시의 위대함을 판단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 되는 것이다. 키팅이 칠판에 백묵으로 무엇인가 그리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거기에 따라 어느덧 책에 똑같은 글씨나 선을 긋기 시작했다. "만일 시의 완성도를 횡축에 놓고 중요도를 종축에 놓은 다음, 시의 전체적인 영역을 여기에 끼어서 맞추어 보게 되면 시의 위대함의 그래프가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학생들은 키팅을 따라 열심히 책장에 같은 글씨와 똑같은 도표 등을 그려 넣고 있었다. "바이런의 소네트는 종축의 높이는 높을 지 모르지만 횡축의 넓이는 겨우 평균치에 도달할 뿐이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는 종축, 횡축 어느 족도 매우 높은 점수를 줄 수가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매우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 이유에서 그의 시가 대단히 '위대한 작품이다'라고 판명되는 것이다." 그 동안 키팅은 칠판에 그래프를 그린 다음 거기에 선과 그림자의 표시를 했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가 어떻게 바이런의 소네트 보다 위대한 가를 나타낸 그림이었다. 학생들도 책에 똑같은 모양을 열심히 그렸다. 니일의 낭독은 조용하고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계속 이어졌다. "제군들에게 있어서는,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시를 읽어나가는 가운데 그 평가 방법을 배울 수 잇도록 하고 싶다. 이 채점 방식을 익히게 됨에 따라 여러분이 시를 통해서 얻게 되는 기쁨도, 시에 대한 이해도 더욱 심오하게 될 것이다." 니일의 낭독이 끝났다. 키팅은 학생들에게 니일이 낭독한 프리차드의 서문에 대한 보충설명을 해주었다. 그런데 바로 그 직후였다. "우아하여 하!..." 돌연 키팅의 입에서 커다랗고 괴상한 비명소리 같은 게 터져나왔다. 학생들은 깜짝 놀라며 일제히 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계속 고함치기 시작했다. "그건 엉터리야! 거짓 투성이야! 빌어먹을 것밖에 되지 않는다! 제군, 지금 당장 그 페이지를 찢어 버려라!" 학생들은 더욱 당황했다. 키팅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동료들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다시 키팅의 괴상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상관없다. 전부 찢어 내는 거다! 이건 잠꼬대에 지나지 않아!" 누군가 한 학생이 먼저 키팅의 광란적인 지시에 따랐다. 종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한두 명이 더 찢었다. 나중에는 모든 학생들이 찢어 내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열심히 도표를 그려 넣기까지 했던 페이지를 모두 찢어 버리는 중이었다. 토드 앤더슨은 평소 버릇대로 자를 대고 서문을 칼로 오려내었다. 키팅은 다른 학생과 다른 토드의 그런 행동이 안스러웠다. 키팅은 쓰레기통을 가져오기 위해 교탁 뒤쪽의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때였다. 제각기 소리치며 책을 찢어 내는 소란이 옆교실에 전해지고 말았다. 이에 놀란 마카리스터 선생이 열린 문으로 다가왔다. 유리창을 통해 뜻밖의 광경을 목격한 그는 깜짝 놀라며 교실로 뛰어들었다. "자네들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학생이 책을 그렇게 함부로 찢어 버리다니!..." 학생들은 동작을 일제히 중지하며 키팅이 들어간 탈의실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로서는 어떤 해명도 변명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휴지통을 들고 나오던 키팅과 마카리스터의 눈길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마카리스터가 다시 당황했다. 여유있게 미소짓는 키팅에 비해 함부로 남의 수업 중이 교실에 뛰어든 결과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 계셨군요." 키팅은 여전히 탈의실 문께에 기대선 채 미소짓고 있었다. "난 선생님이 게시지 않는 줄 알고 그만...실례했습니다." 그는 몹시 당황한 낮빛을 감추지 못하며 황망한 걸음으로 키팅의 교실을 나가버렸다. 키팅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쓰레기통을 들고 걸어왔다. "그런 잠꼬대는 당장 구겨서 이 쓰레기통에 쳐넣어라! 쓰레기통 이야말로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리가 있을 가장 적합한 장소인 것이다!" 키팅은 연극조로 말했다. 그러면서 휴지통을 끌어안은 채 통로를 걸으면서 학생들이 찢은 책장을 뭉쳐서 던져 넣도록 했다. 모두들 한 마음이 된 상태였다. 그들은 큰소리로 혹은 소리죽여 쿡쿡거리며 찢어서 멋대로 구겨 버린 것을 키팅이 안고 있는 휴지통 속에 정확히 골인시켰다. 키팅은 학생들이 모두 해치울 때까지 미친 듯이 이지적으로 낮게 소리치고 있었다. "말끔히 찢어내는 거다! 한조각이라도 남겨 주면 안돼! J 에반 스프리차드 문학박사? 참으로 기막힌 저질 녀석이라니까!" 그는 학생들이 던져넣은 종이로 가득찬 쓰레기통을 이번에는 발로 힘껏 걷어차며 냅다 소리쳤다. "제군, 알겠나? 이건 바로 전쟁이란 말이다! 전쟁이라! 너희들 각자의 혼이 지금 위기에 빠져 있다..." 호이포로이 학자들이 말하는 것을 받아 드려 새롭고 맛좋은 과일을 그대로 썩힐 것인가, 아니면 개인적으로 각자가 승리를 거둘 것인가의 싸움이라는 역설이었다. 학생들은 이미 완전히 매료된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 없다. 이 학교로부터 너희들한테 가르쳐 달라고 부탁 받은 것은 몽땅 가르쳐 주마. 하지만 내가 진지하게 가르치면 그 이상의 것도 배울 수 있게 될 것이다. 난 너희들로 하여금 언어를 사랑하며 자비 베푸는 일을 가르칠 생각이다. 왜냐하면..." 누가 어떻게 말하든 언어나 단어에는 이 세계를 변혁시킬 수 있는 힘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문득 생각난 듯이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헌데,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그래, 호이포로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 말의 의미를 아는 사람 누구 없나?" 학생들은 벌써 여러 번째 웃었는데 이번에도 또 웃었다. "어떠냐, 천치 오버스트릿." 학생들이 또 웃었다. "앤더슨, 자네는 인간인가? 아니면 하나의 종이인가?" 모두들 소리내어 웃으며 일제히 앤더슨 쪽을 바라보았다. 앤더슨은 그 바람에 너무 당황하여 고개를 흔들기만 했다. 그때 믹스가 손을 번쩍 들었다. "호이포로이라는 것은 중우들 아닙니까?" "맞았다, 믹스군. 호이포로이란 분명히 그리스어의 중우를 말한다. 하지만 틀렸다." "네에?" "자네는 분명히 중우들이라고 대답했지?" "네..." "바로 그거야, 중우라는 단어는 원래가 복수야. 거기다 '들'을 붙이다니 자네 역시 중우 가운데 하나라는 공언이 되는 것이다." 키팅은 장난치듯 웃었다. 믹스도 따라서 웃었다. "그런데 피츠군." 키팅이 다시 말했다. "자네는 지금 19세기의 이런 문학같은 게 경제학부나 의학부하고는 관계없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것을 우리들이 J 에반스 프리차드씨의 말처럼 공부해서 우리가 음율이나 운율을 배우고, 그 일이 끝난 다음에는 또 다른 야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자, 굿바이 해야만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 말에 피츠는 설마, 하는 듯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키팅의 정적이고도 단호한 목소리가 터져나온 게 그 직후였다.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모두들 주목했다. "바보 같은 소리 마!" 이 대목에서 키팅은 기막힌 재주를 보여 주었다. 몸짓을 섞어서 말로 브란도와 존웨의 성대묘사까지 했던 것이다. 그는 계속했다. "사람이 시를 읽는 다는 것은 그가 바로 인류의 일원이기 때문이며, 인류란 정열이 넘치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의학이나 법률, 은행업 등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분야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시나 로맨스, 사랑, 아름다움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존재하는 것인가? 시야말로 우리 인간들의 삶의 양식인 것이다!" 이어 키팅은 다음과 같은 휘트먼의 시를 낭송했다. 오오, 이 몸 생명이여! 수없이 고뇌하는 이 의문 신앙 없는 것이 장사진을 이루고 도시는 바보들로 넘칠 뿐 어디에 아름다움이 있단 말인가? 오오, 이 몸 생명이여! 대답은 한 가지 네가 거기에 있다고 하는 것 생명이 탄식하고 이 몸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장엄하고 화려한 연극이 계속되고 너 또한 거기에 한 편의 시를 더할 수 있다는 것... 최선을 다해라 키팅과 학생들의 만남은 확실히 특별한 것이었다. 어느덧 학생들은 그에 대해서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신선한 충격과 함께 미지의 또다른 희망을 기대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국어시간이었다. "피츠군, 교과서 542페이지를 편 다음 거기에 실려 있는 시의 앞부분을 읽어보도록." 피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처녀들에...자신을 헛되이 말라' 말입니까?" "맞았어. 옳은 말씀야."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니일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느냐고 킥킥거렸다. "알겠습니다." 잠깐 헛기침을 한 피츠가 읽기 시작했다. 장미꽃 봉오리를 따려면 지금 시간의 흐름은 이토록 빠르니 오늘 붉게 피어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이 장미도 내일에는 시들어지리니 피츠의 낭독이 끝났을 때 키팅이 첫 귀절을 반복했다. "장미꽃 봉오리를 따려면 지금... 이와 같은 감정을 나타낼때 라틴어로는 <카르페 디엠>이라고 한다. 그 의미를 누가 알고 있나?" 이 교실에서 라틴어 하면 당연히 믹스였다. 동료들한테 가르쳐 주기로 약속까지 해놓고 있는 그였다. 그는 당연히 그 대답은 자기의 몫이라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카르페 디엠 말입니까?" "물론이올시다, 선생." "그건 오늘을 즐기라고 하는 뜻입니다." "좋아. 그런데 자넨?...오늘을 즐겨라...으음, 믹스라...그렇다면, 이 시인은 무슨 이유에서 이와 같은 시를 썼다고 생각하나?" 그때 학생 중에서 누군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뭔가 급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죠." 학생들이 소리죽여 웃는 소리가 여러 곳에서 들렸다. "틀려!" 조용해졌다. "틀려, 틀렸어! 그게 아냐. 우리들이 바로 구더기의 먹이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키팅의 더욱 커진 목소리가 교실 안을 갑자기 압도하며 계속되었다. "우리들이 경험할 수 있는 봄이나 여름, 가을 등의 횟수는 어쩔 수 없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아직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우리는 누구할 것없이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어느 날엔가 호흡을 멈추고…… 그리고 차가운 시체로 변해 죽어갈 수밖에 없다." 키팅의 말은 학생들을 새삼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의 교육방법은 확실히 특별한 것이었다. 적어도 관습적이고 완고한, 개인주의를 일체 용납하지 않고 있는 지금까지의 교육방침에 위반되는, 즉 봉건적인 틀을 과감하게 집어던지고 있음을 알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그날 오후. 동료들한테 라틴어를 가르치기로 약속된 믹스는 샤워 도중 곁의 학생한테 물었다. "오늘 밤 함께 공부하기로 한 거 말야. 언제가 좋을까?" "저녁식사 끝난 후에 바로 하는 것이 게 좋을 거야." 그때 녹스가 믹스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이미 샤워를 끝낸 다음 옷입고 목욕탕을 나오는 중이었다. "미안하다, 믹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난 못 가게 됐어." "왜?" "외출허가가 나왔거든." "그래애?" "으응. 덴베리씨 집에 가서 저녁식사를 하게 됐어." "덴베리씨이?" 피츠가 관심을 나타내며 물을때 카멜론이 수다스럽게 끼어들었다. "굉장하구나, 너어! 그 사람 우리 하교의 대선배 맞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말좀 해 봐라. 어떻게 알게 됐지?" 녹스는 의외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우리 아버지하고 서로 친한 사이야. 헌데 그 사람 나이가 90세 정도는 됐을 테지?" 니일도 곁에서 거들고 나섰다. "그게 무슨 상관이니. 어떤 음식이 나오든 우리가 기숙사에서 먹는 정체불명의 고기보다야 나아도 백 번 낫겠지, 안그래?" "전적으로 동감한다!" 찰리는 박수까지 치며 큰소리로 말했다. 앤더슨은 혼자서 무엇인가 곰곰히 생각하는 중이었다. 기숙사로 돌아온 니일은 혼자서 생각에 잠긴 앤더슨을 다가가며 물었다. "앤더슨,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알아맞추면 1페니 주겠니?" "내 생각은 그런 큰돈을 걸 정도도 못돼." 앤더슨은 웃으며 곁에 앉는 니일을 잠깐 바라보았다. "스터디 그룹에는 어떡할래? 참가해야지?" "난 안될 것 같아." "어째서?" "고맙지만 아무래도 역사를 공부하는게 좋겠어." "네 생각이 꼭 그렇다면 할 수 없지. 하지만 앤더슨, 아무 때라도 생각이 바뀐다면 널 우리 그룹에 넣어 줄께." "고마와." 니일이 방에 나가자 다시 혼자가 된 앤더슨은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 멀리 불길처럼 타는 태양이 학교의 넓은 캠퍼스를 에워싼 커다란 나무들 저쪽으로 서서히 내려앉아 가는 중이었다. 앤더슨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태양은 저토록 타는 듯이 붉고 큰데 자신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작은가 하는 불만이 문득 끓어 올랐던 것이다. 지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던 앤더슨은 다시 강한 의혹에 사로잡혔다.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무섭도록 공부해야 되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책상에 펼쳐 놓은 노트에 무엇인가 커다랗게, 또한 되는대로 글씨를 커다랗게 써넣은 글씨는 '오늘을 즐겨라'라는 뜻밖의 내용이었다. 그 뜻이 무엇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없는 앤더슨이었다. 그는 길게 한숨쉬며 그 노트장을 찢어 꼭꼭 구긴 다음 휴지통에 던져넣고 말았다. 키팅의 신선한 충격은 학생들을 계속 매료시켰다. 외출허가로 던베리 집의 저녁식사에 초대받은 녹스 오버스트릿은 외출 준비를 끝낸 다음 남은 시간을 기념전시관에서 보냈다. 그는 웰튼 아카데미의 선배 학생들 사진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오버스트릿군, 준비 다됐나?" 그를 안내하기로 된 헤이거 박사가 뒤에서 물었다. "네, 선생님." 그는 헤이거 박사의 뒤를 따라 건물 정면에 세워둔 자동차로 걸어갔다. 학교에서 산림용으로 굴리는 스테이션 웨건이었다. "단풍이 매우 아름답군요. 그렇죠 선생님?" "단풍, 그렇군." 오버스트릿은 유명한 명문인 던베리의 저택으로 가는 동안 오버스트릿은 공연히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수고를 끼쳐드려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학교로 돌아가때는 던베리씨의 자동차를 타고 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헤이거 박사는 대답없이 정면만을 주시했다. 이윽고 웅장한 저택 앞에 웨건이 정차했다. 오버스트릿은 침착하려고 노력하며 현관으로 걸어갔다. 콜로니얼 양식으로 건축한 온통 하얀 색깔의 웅장한 저택이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안쪽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아가씨였다. 테니스 유니폼 차림의 그녀는 아름다운 금발이었고 나이는 오버스트릿보다 한두 살 정도 연상인 아름답고 눈이 확 트이도록 아름다운 처녀였다. "안녕." 티없이 맑게 웃는 그녀의 미소에 오버스트릿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빛나는 푸른 눈동자에 그만 넋이 빼앗긴 듯이 멍청해지고 황홀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으응...안...녕." 그는 당황한 나머지 그렇게 더듬거렸다. "체트를 만나려고 왔어?" 그때 눈길을 떨어뜨리던 오버스트릿는 거기서 더욱 새롭고 놀라운 목표물을 발견했다. 거기엔는 그녀의 날씬하면서도 움켜잡고 키스하고 싶도록 통통한 다리가 있었던 것이다. "체트를 찾아왔지?" 그녀의 다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대답조차 잊은 오버스트릿이다. "역시 체트지?" 체트가 누군지, 눈앞의 황홀한 그녀가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는 지금의 오버스트릿이었다. 겨우 고개를 쳐들었던 그의 눈에 그녀의 뒤로한 부인이 나타났다. "던베리 부인이십니까?" 그는 그 부인을 향해 물었지만, 부인의 앞에 있던 처녀는 갑자기 깜짝놀라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던베리 부인이냐구?" "녹스 너 왔구나." 던베리 부인의 말이었다. 처녀는 비로소 알아차리자 생긋 웃어보인 다음 넓은 계단 쪽으로 살라졌다. 던베리 부인은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서 오너라, 녹스. 안그래도 기다리고 있던 중이다." "안녕하세요." 오버스트릿은 던베리 부인을 건성을 뒤따랐다. 그의 두 눈과 마음은 계단 쪽으로 사라지는 처녀의 뒷모습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도깨비에 흘린 듯했다. 던베리 부인은 오버스트릿을 넓은 서재에 있는 남편에게 데려다 주며 수다스럽게 그가 왔음을 알렸다. 던베리는 친구의 아들인 오버스트릿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는 어디하나 꼬집어내어 험잡을 데없이 완벽한 정장차림이었다.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버스트릿은 여전히 매혹당한 처녀의 자리인 계단으로부터 두 눈을 끌어당기지 못했다. "네 아버지 모습을 쏙 빼 닮았구나. 그래, 아버진 요즘 어떠시지?" "건강하십니다." "그래?" "최근 제너럴 모터스와의 관계로 큰 소송을 끝내셨습니다." "그렇군. 자네 역시 아버지를 따라 법조계로 나갈 테지? 참, 내딸 버지니아를 만난 적이 있던가?" "따님이라면, 그럼...아까 현관에서 본 그...." 오버스트릿은 다시 한 번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한번 본 것만으로도 영원히 잊어버릴 수 없다고 느꼈던 그 처녀가 던베리의 딸 버지니아로 들었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던베리는 큰소리로 딸을 부르며 오버스트릿과 인사를 나누도록했다. 오버스트릿의 가슴은 더욱 요란한 소리를 내며 뛰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오버스트릿은 어느 틈에 커다란 실망을 가슴에 안으며 다시 계단 쪽을 바라보았다. 버지니아는 15세 정도로 보이는 귀여운 소녀였다. "안녕. 난 버지니아야." "안녕." 오버스트릿은 건성이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하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때 넓은 계단에 있는 처녀의 매력적인 두 다리가 보이자 그곳에 박힌 듯이 정지하고 말았다. 당장 달려가 두 다리 앞에 무릎 꿇어 입맞출 수 있게 허락해 줄 것을 간청하고 싶은 목마름이었다. 던베리는 오버스트릿에게 푹신한 가죽 소파에 앉을 것을 권했다. "오버스트릿, 너 혹시 알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네 아버지하고 내가 공동으로 다툰 일이 있었던 재판에 대해서 말이다. 알고 있니?" "네, 네에?"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오버스트릿은 당황하며 되물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계단 쪽에서 더욱 놀라운 광경을 포착하고 있었다. 거기서 지금 예의 처녀가 큰키의 건장한 사내와 함께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자네한테는 그 말을 들려주지 않은 모양이군." 던베리는 기분이 몹시 유쾌한 모양이었다. 그는 오버스트릿이 다른 데에 정신팔려 건성인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오버스트릿의 정신을 혼란시킨 처녀는 남자와 같이 그가 있는 서재로 들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줄도 모르는 던베리는 언젠가 있었다는 그 재판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을 꺼내놓고 있었다. "세상에 태어난 후 처음으로 맡게 된 가장 큰 재판이었는데, 그때는 다 틀렸다고 생각했지. 완전히 단념한 상태였는데 자네 아버지가 느닷없이 들이닥쳤지 뭔가. 글쎄 극비밀리에 화해를 시켜 주겠다는 거야. 조건이 뭔지 알겠나?" "그, 글쎄요...." "글쎄, 우리 측 의뢰인이 수수료 전액을 지불하는 조건이라는 거야. 네 아버진 역시 대단한 녀석이었다니까, 그때는!" 던베리는 자신의 무릎을 탁 치면서 계속 두 남녀에 넋을 빼앗긴 오버스트릿한테 다시 물었다. "그 때 내가 어떻게 대답했을 것 같은가?" "예에? 그, 그건...." "난 다 줘버렸다네. 그 때 우리 측은 물에 빠진 사람처럼 지푸라기라도 붙잡아야 될 판국이었지 뭔가. 결국 자네 부친한테 수수료 전액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네." 던베리는 지나칠 정도로 유쾌한 듯이 웃어 제꼈다. 비로소 분위기를 어느정도 파악한 오버스트릿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마주 웃어 보였다. 상대편인 아버지 친구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눈과 마음은 조금도 변함없이 두 남녀를 향해 집중된 상태에서 였다. 그때 처녀의 짝으로 보이는 남자가 던베리한테 물었다. "아버지 차를 좀 빌려도 되겠죠?" 던베리가 사용하는 승용차는 최고급 뷰이크였다. "네 차는 어떡하고? 그리고 너, 예의범절도 잊었단 말이냐?" 그는 계속해서 오버스트릿과 그들 남녀를 소개했다. "오버스트릿, 쟤가 어리석은 내 아들 녀석 체트야. 그리고 그의 여자 친구 크리스 노엘양이지. 이 쪽은 녹스 오버스트릿이다." 오버스트릿은 비로소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그와 함께 커다란 실망의 덩어리가 머리 위에 떨어져 짓눌리는 기분이 되고 말았다. 그 매력적인 아름다운, 입맞추고 싶어 목마른 두 다리를 가진 금발 머리 처녀에게 임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버스트릿과 크리스가 미소를 주고 받을 때 체트는 건성이고 못마땅한 투로 불쑥 한마디했다. "안녕, 오버스트릿." 오버스트릿은 나오지 않은 미소를 지으며 건성으로 응답했다. 덴베리 부인은 저녁 식사 준비 때문에 서재를 나갔다. "아버지, 왜 그런 일을 큰 문제처럼 말씀하시죠?" 그러는 체트의 시건방진 태도는 오버스트릿의 비위에 완전히 거슬렸다. 크리스 같은 미인이 어째서 그런 건달같은 녀석과 사귀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짖궂은 운명의 장난만 같았다. 던베리는 점잖게 말했다. "내가 특별히 너한테 스포츠카를 사 주지 않더냐. 그랬는데도 느닷없이 이 애비의 자동차를 빌려달라니까 그렇지 않느냐." "그게 아녜요, 아버지." "뭐라구?" "큰 차를 타야할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지? 무슨 이유냐?" "그래야 크리스의 어머니를 안심시킬 수 있긴 때문예요. 내 말이 맞지, 크리스?" 체트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크리스의 동조까지 구했다. 그러면서 위협하는 굳은 표정을 짓자 크리스는 얼굴이 빨개지며 더듬거렸다. "그건 그, 그렇지만... 하지만 이젠 괜찮아요." "그렇지 않아, 크리스. 허락해 주세요, 아버지." 체트는 건장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응석부리듯 다시 간청했다. "부탁예요, 아버지. 어차피 오늘 밤에는 그 차를 타실일이 없으니 무방하지 않습니까. 이 아들의 운전실력을 믿지 못하시는 건 아닐테죠?" 던베리는 체트의 부탁을 쉽사리 들어 줄 눈치가 아니었다. 그들 부자가 자동차 문제로 실갱이 하는 동안 오버스트릿과 크리스, 버지니아 등은 무엇인가 이야기 거리를 찾기 위해 열심히 생각했다. "참...." 오버스트릿이 겨우 입을 열었다. "크리스, 지금 어느 학교에 다니는 중이지?" "릿지웨이 하이스쿨에 다녀." 크리스는 오버스트릿의 질문으로부터 피하려는 듯이 돌아서며 버지니아한테 다른 질문을 했다. "지니, 지금 다니는 헨리 홀은 어떻지?" "그냥 그런 편이야." "헬리 홀은 웰튼 아카데미하고 자매학교지?" 크리스는 지니한테 물으며 오버스트릿 쪽을 잠깐 바라보았다. "그럴 거야." "지니, 너 니네 학교에서 하는 연극에 출연하니?" "그럴거야." 크리스는 오버스트릿을 다시 돌아보며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웰튼 아카데미와 자매학교인 헨리 홀에서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을 공연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오버스트릿의 관심은 그것과 전혀 다른 데에 있었다. 그는 대답 대신 가장 중요한 질문을 재빨리 던졌다. "크리스, 어떻게 체트하고 사귀게 되었지?" 그는 체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어떤 분노 같은 것을 느꼈다. 멋진 데는커녕 덩치만 크고 형편없는 녀석을 크리스가 사귀고 있다는 자체에 대한 분노였다. 크리스는 웬지 체트 쪽을 경계하는 듯한 표정으로 재빨리 대답했다. "체트는 우리 학교의 축구선수야. 나는 치어리더고. 전에 그는 웰튼엘 다녔는데 성적 때문에 퇴학당하고 말았어." 그럼 그렇지, 제깐 놈이 싶은 오버스트릿이었다. 그는 무엇 때문에 그따위 쓸모 없는 녀석과 사귀느냐, 세상에 좋은 남자는 얼마든지 있으니 당장 교제를 끊어라 등등의 충고를 머리 속으로 그렸다. 당장 그 말을 진지하게 크리스한테 해 주고 싶었다. 사랑의 여신은 오버스트릿으로 하여금 그럴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주지 않았다. 체트가 그들의 곁으로 걸어왔던 것이다. 그는 결국 아버지를 설득 시킨 게 분명한 얼굴이었다. "됐어, 크리스. 어서 가자." "알았어." 크리스는 미소와 함께 작별의 말을 오버스트릿한테 했다. "즐거웠어, 오버스트릿." 그것 뿐이었다. 미소도 잠깐 뿐 이내 돌아서더니 체트와 손잡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도 즐거웠어, 다음에 또 만나도 되지, 크리스라는 말이 오버스트릿의 입안에서 떨리며 매돌고 있을 뿐이었다. 15세의 귀엽고 수줍음 타는 버지니아의 존재는 이 때의 오버스트릿한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버지니아 편에서 가깝에 있는 사내를 의식하며 공연히 가슴 조이며 수줍어 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녁식사 때까지 여기 그냥 있을거야?" 버지니아가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오버스트릿은 얼른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버지니아는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체트가 아빠 자동차를 타려는 이유가 있어." "...." "그 차는 아무 데서나 세울 수 있거든." 버지니아는 얼굴을 붉혔다. 그 말의 뜻을 알기 때문인 듯 싶었다. 아무데나 자동차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은, 연관지어 생각할 때 다른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이때의 버지니아는 자동차 안에서 뜨겁게 키스하는 남녀를 연관지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단순한 상상이 아니었다. 실제였다. 창문을 통해 바깥에서의 어떤 장면이 오버스트릿의 눈에 들어왔다. 거의 동시에 같은 광경을 목격한 버지니아는 보라는 듯이, 그러나 더욱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돌렸다. 던베리의 최고급 승용차에 타고 있는 체트와 크리스였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끌어 안는가 싶더니 이미 뜨겁고도 긴 키스로 불꽃을 피워올렸다. 오버스트릿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부러움과 난생 처음 느껴보는 질투심 때문이었다. 그는 크리스를 체트 같은 녀석한테 빼앗긴 기분이었다. 뜨겁게 입술을 포갠 녀석의 한 쪽 손이 크리스의 젖가슴을 더듬더니 이어 스커트 자락으로 접근하는 것을 보자 두 눈에서 불이 번쩍였다. 꽃피는 첫사랑 대략 두 시간 정도 지나간 다음이었다. 기숙사 로비에 들어서는 오버스트릿은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기진맥진한 모습에 발걸음까지 금방 허물어질 것만 같았다. 마침 거기에는 그의 동료들이 있었다. 니일, 카멜론, 믹스, 랄튼, 피츠 등이 수학공부를 하는 중이었다. 그 중에 믹스와 피츠는 쉬는 동안 광석라디오를 열심히 조립하는 중이었다, 힘없이 들어오더니 소파에 깊숙히 주저앉는 오버스트릿을 발견한 랄튼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저녁식사는 어땠니?" "...." "아무래도 너 총알이라도 삼키고 온 사람 같은 표정이구나. 그래, 요리는 뭐가 나왔길래? 웰튼 특제의 정체불명 고기는 아니었겠지?" "최고였어!" 갑자기 오버스트릿이 부르짖듯이 말했다. 그 바람에 다른 동료들도 일제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정말 최고였어!" 오버스트릿은 계속해서 노골적으로 털어놓았다. "세상에 그토록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가 있을 줄은 몰랐어.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였어. 정말야!" 니일이 얼른 그에게로 다가가며 근심스러운 듯이 들여다보았다. "야, 오버스트릿. 너 지금 정신이 올바로 붙어 있는 거니? 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오버스트릿은 질문과 관계없이 넋두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말야, 그녀는 원숭이 같은 체트 던베리 녀석하고 이미 뜨거운 사이였어!" "그거 유감스러운 일이구나." 오버스트릿의 장탄식에 대한 동정 어린 반응이었다. "그렇지 않아. 이건 결코 유감이 아냐." "그럼 뭐지?" "비극야!" 오버스트릿은 커다란 목소리로 부르짖듯이 말하며 주먹이라도 휘두를 기세였다. "야, 오버스트릿. 그런 미인이 어째서 그런 저능아하고 연애를 한다는 거니?" "누가 아니래. 좋은 여자들은 모두 저질 녀석들한테 붙는 법인가 봐." "그 아인 잊어버리기로 하는 게 좋겠다. 자, 새교과서를 가지고 와서 27번 문제를 풀어봐." "잊어버리라니, 그건 절대로 불가능해. 수학 같은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지금." "봐라, 오버스트릿. 너 말야...." 타이어를 잠시 길에서 미끄러뜨린 것이며, 그래서 타이어의 각도에서 삼각함수를 구한 다음 원래의 길로 되돌아오면 된다는 것이 믹스의 그럴듯한 말이었다. 오버스트릿이 소리쳤다. "닥쳐, 믹스! 세상에 먹힐 말을 해야지!" 카멜론도 고개를 젓자 믹스는 미안한 듯이 씨익 웃었다. 오버스트릿은 주변을 서성대며 마음을 잡지 못했다. 이윽고 그는 동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무엇인가 해결책을 찾아낸 듯한 표정이었다. 그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재빨리 말했다. "그녀를 잊어야 한단 말이지? 아니 잊으라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거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서 한 말이니?" "그럼 달리 좋은 방법이라도 있단 말이니?" 피츠였다. 돌연스러운 광경이 벌어졌다. 오버스트릿이 문득 피츠의 앞에 마치 프로포즈라도 하려는 듯이 무릎을 끓는 것이다. 그리고 간곡한 음성이 되었다. "피츠, 나에게 희망은 오직 너 뿐이야! 제발 부탁이다. 진정 너밖에 없어!" 오버스트릿은 과장된 함숨까지 섞어서 애원하듯, 간청하듯 말하며 똑바로 쳐다보았다. 다음 순간이었다. 갑자기 피츠가 밀어붙이듯 떠밀자 오버스트릿은 소파에 털썩 엉덩방아를 찧었다. 다른 학생들은 잠시 동안의 공백을 넘기고 다시 수학공부를 시작했다. 이윽고 믹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선언했다. "오늘 밤 공부를 여기서 끝내기로 한다." 그는 다시 모두에게 말했다. "내일은 분명히 숙제가 더 많아지게 될 가능성이 높아. 물론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말야." 모두들 책을 정리할 때 카멜론이 니일한테 넌지시 물었다. "참, 앤더슨은 왜 안왔지?" "역사공부가 하고 싶다더라." "아, 오버스트릿." 카멜론은 다시 그를 향해 조롱하는 투로 말했다. "기운 내는 거야. 아직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지 않겠니. 언젠가 그 아이를 뺏아올 기똥찬 방법이 생겨날지도 모르지만야, 그 시를 생각해. 오늘을 즐기라라는 거 말야." 오버스트릿은 체념한 듯이 다시 살펴보면 그것과는 정반대인 듯한 얼굴에 약간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쨌든 일단 안정을 되찾은 모습으로 동료들과 같이 로비를 떠나 기숙사의 자기방으로 걸어갔다. 식당의 교직원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였다. 새로 부임한 직후인데도 벌써 심상치 않은 소문을 뿌리고 있는 키팅이 즐거운 표정으로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그는 자신의 독특하고도 신념적인 교육 방법이 학생들한테 먹혀 들어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처음에는 그 자신도 망설여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완고하고 강압적인 교육만을 전통으로 자랑삼은 학교 측으로부터의 거부는 이미 각오한 바였다. 문제는 학생들이었다. 피교육자인 그들이 키팅의 새롭고 도전적인 혁신적이면서도 전위적인 교육방식을 거부할 경우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게 된다. 그 문제를 가장 걱정했던 키팅이다. 다행이라기 보다는 가슴 뛰도록 벅찬 일이었다. 학생들은 예측대로 처음 거센 거부반응을 보이는 듯했지만 간단히 돌아섰다. 어느덧 키팅의 교육방법에 신선한 충격을 받아 완전히 빨려들고 있는 것이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라틴어 교사인 마카리스터가 조용히 키팅의 옆자리로 다가왔다. 그는 빈 의자를 당겨다 놓으며 먼저 양해를 구했다. "방해되지 않을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키팅은 웃어보인 다음 계속 식사했다. "그런데...." 마카리스터는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키팅은 뭐죠? 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까지만 해도 키팅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전혀 몰랐다. "아주 재미있더군요." "네에?" "그 수업 말입니다." "!...." "난 깜짝 놀랐죠. 난리라도 터진 줄 알고 달려갔지 뭡니까. 글쎄." "아아." 키팅은 비로소 마카리스터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는 순간적으로 의아해 하던 것에서 알았다는 표정으로 잇달아서는 그게 뭐가 어떠냐는 식으로 표정이 바뀌었다. 마카리스터는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대단히 흥미 있어 보이는 수업이더군요." 키팅은 말없이 웃으며 그를 바라본 다음 여전히 눈앞의 요리를 기분 좋게 입 속에 쳐넣듯이 넣으며 씹기 시작했다. 마카리스터는 어색해 하면서도 침착한 표정이 되었다. "혹시 내가 선생님을 놀라게 해드렸는지도 모르겠군요. 만일 그랬다면 사과드리죠." 키팅의 말에 마카리스터는 정색을 했다. "아니, 천만에요. 사과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그는 머리를 흔들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의 입 안에는 정체불명의 요리인 고기가 가득 들어갔다. 학생들이 가장 의문시하고 거북스러워 하면서도 그 말에 끌려 정신없이 먹어대는 정체불명의 고기였다. "하긴...." 키팅이 입 안의 고기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대단히 매력적인 수업이라고 할 수는 있죠. 다만...." 마카리스터는 두 눈만으로 키팅을 바라보았다. "방향이 완전히 빗나갔다는 점만 제외하곤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키팅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그 특유의 미소를 보이면서 여유 있게 말했다. "진심으로?" "그래요." 잠시 침묵과 함께 음식을 삼키는 소리가 몇 번 있는 다음 마카리스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선생께서는 학생들로 하여금 예술가 되도록 꼬시는 아주 위험한 일을 했다고 봅니다." ?...." "앞날 어느 땐가 학생들은 자신이 모짜르트나 렘브란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테죠." 키팅은 그래서? 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되면 말입니다. 녀석들은 그때에 가서야 비로소 후회하게 될 거라 이겁니다." "그건 예술가가 아니죠." 키팅은 단호하면서도 부담없는 억양에 미소를 띄며 계속했다. "선생님은 지금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습니다." "내가?...." "물론. 내가 학생들한테 가르치는 것은 <자유스러운 사색가>가 되라는 뜻뿐입니다." "그래요?" 키팅은 확신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카리스터는 더욱 놀라는 표정이었다. "정말 놀랍군요. 나이 겨우 16세인 아이들이 벌써 자유스러운 사색가라니 말입니다." 마카리스터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가당키나 한 말이냐는 듯이 분명했다. "마카리스터." "네, 키팅." "난 선생께서 그런 식으로 비꼬기 잘하는 분이라고는 아직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려." "이건 비꼬는게 절대 아닙니다." "?...." "어디까지나 현실주의에 입각한 겁니다." "현실주의?...." "어리석은 몽상을 품고 자유롭게 된 영혼이 있다고 한다면 그걸 나한테 보여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있다면?" "난 그 보답으로 행복한 남자를 보여드리죠." 마카리스터는 나름대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키팅의 수업방법이나 태도는 소극적인 영웅심에 사로잡힌 철부지 태도였다. 마치 자신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근대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참교육자라고 자부하는 한 엉터리 선생을 보는 느낌조차 들 정도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전면적으로 키팅의 교육방법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은게 마카리스터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뭔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새로운 사실을 보게 되는 사람의 공통된 의문점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관심을 가진 게 사실이었던 것이다. 마카리스터는 어느덧 태도와 표정을 바꾸었다. "어쨌든 선생의 강의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기대가 가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왜죠?" "재미있을 것 같아서죠." "그래요?" "물론." "그런 식으로 생각해 주는 사람이 선생 말고도 또 많이 있어 준다면 좋겠군요." "앞으로 생기겠죠." "그렇게 생각합니까?" "네." "좋습니다." 그들은 더 말하지 않았다. 마침 식상의 한 쪽에 있는 니일 그룹의 모습이 키팅의 눈에 보였다. 그는 그의 충실하고 기대감이 가는 제자들을 향해 슬쩍 윙크를 보냈다. 영문모르는 니일은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이내 곁에 있는 믹스 등과 뭐라고 지껄이기 시작했다. 키팅의 온 얼굴 가득히 그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가 번져나가고 있었다. 니일이 한가지 흥미 있는 소식을 가져왔다. 그는 두툼한 책 한권을 들고 있었다. "얘들아, 이리 보여 봐." "뭔데 그래?" 그의 그룹들이 하나둘씩 주위로 모여들었다. "이건 정말이지 믿어지지 않는 뉴스야." "뉴스?" "그래. 내가 뭘 찾아냈는지 아니?" 니일은 숨을 몰아쉬며 계속했다. "도서관에서 다른 책을 찾던 중에 이걸 발견했어. 뭔지 알아? 키팅 선생님 연감이라구." "그래애?" 니일은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동료들 앞에서 그 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여길 봐. 축구팀 주장, 연감편집원, 케임브리지행 확실... 무엇이든지 가능하다는 얘기일까?" 그 다음 니일이 읽은 것은 더욱 흥미 있는 내용이었다. "여자의 허박다리를 사랑하는 남자, 죽은 시인의 사회...." 동료들이 그 연감을 뺏으려 하며 한마디씩 했다. "여자의 허벅다리를 사랑하는 남자라구?" 랄튼이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결국 키팅 선생은 옛날부터 불량기가 있었다는 얘기 아닐까아?" 그래 오버스트릿이 핵심적인 질문을 꺼냈다. "헌데, 죽은 시인의 사회란 뭘 말하는 거지?" 오버스트릿은 웰튼 재학 당시의 키팅의 사진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가 다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연감에 그 그룹의 사진이 실려 있지 않았나?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그룹 말야?" "그런건 없었어." "이상하군." 그때 랄튼이 갑자기 다급해진 목소리로 낮게 소리쳤다. "노란야! 그가 왔어!" 이미 노란 교장이 그들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니일은 급히 연감을 테이블 밑으로 숨겼다. 그의 손에서 카멜론한테로, 다시 앤더슨한테로 전달된 것이다. 다행히 노란 교장은 연감을 발견하지 못했다. 노란 교장은 니일을 바라보며 엄숙하게 물었다. "수업이 즐거운 모양이군 그래, 니일 페리군." "네. 매우 즐겁게 생각합니다." "헌데 키팅 선생은 어떤가, 재미있는 교사지?" "네, 선생님. 그렇지 않아도 방금 키팅 선생님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좋아. 우리 학교로서도 키팅 선생이 와 준 걸 기쁘게 생각한다, 선생은 로즈 장학금 수여자였다." 학생들은 그게 자신의 일 인양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팅은 옥스포드대학 재학생 중에서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 주는 장학금을 탔던 것이다. 노란 교장은 더 말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였다. 니일과 랄튼, 믹스와 피츠, 앤더슨과 카멜론 등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키팅을 발견했다. 스포츠 코트 차림에 스카프를 감은 그는 여러 권의 책을 든 채 캠퍼스의 잔디를 가로질러 가는 중이었다. "키팅 선생님!" 니일이 급히 불렀다. 그는 키팅에 대해서 상당한 호기심과 함께 존경심을 품었다. 그의 연감을 발견하자 그런 생각들이 더욱 강해져 가슴까지 설래 정도였던 것이다. 키팅은 알아들은 게 분명한데도 못들은 척 그대로 걸어갔다. 니일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그 생각에 얼른 키팅의 호칭을 바꾸어 다시 불렀다. "오오, 선장이여! 우리 선장이시여!" 그의 생각이 적중했다. 비로소 키팅이 걸음을 멈추더니 뒤로부터 학생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려 주었다. 그에게 가까이 갔을 대에 니일이 먼저 물었다. "선생님, 죽은 시인의 사회란 게 뭐죠?" 순간 키팅의 얼굴이 상기되는 듯했다. 제자들 앞에서 어떤 일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낀게 분명했다. 니일이 다시 말했다. "옛날의 연감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니일의 설명은 키팅의 짧은 말로 중단되었다. "어떤 거든 조사했다는 건 좋은 일이지." 키팅은 이미 방금 전에 부끄러움과 그 충격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그런데요, 선생님. 죽은 시인의 사회가 뭐죠?" 니일이 다시 묻자 키팅은 문득 주위를 경계하듯 둘러보았다.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고 학생들 뿐임을 확인한 후에 비로소 낮게 대답했다. "그건 비밀 조직야. 지금의 학교당국이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지만, 결코 환영하진 않을 거야." 학생들은 어느덧 숨을 죽였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키팅은 다시 주위를 경계한 다음 다짐하듯 물었다. "너희들 비밀을 지킬 수 있겠니?" 그 질문에 찬동하지 않을 학교생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죽은 시인의 사회에 대해서 말해 주지." 학생들은 일제히 숨죽이며 키팅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건 산다는 것의 정수를 흡족할 정도로 맛보려는 조직이야. 지금 이 글귀는 솔로의 인용인데, 회합 때마다 그걸 읽곤 했지." 소수 인원이 참가하는 그룹인데 학교 근처에 있는 동굴 속에 보여 순서대로 셀리나 솔로, 휘트먼 같은 시인의 작품 및 자작시 등을 낭송하는 모임이었다는 것이었다. 신비의 동굴 속에서 시낭송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기쁜 환희의 순간이어서 모두가 마법에 걸린 듯했다는 키팅의 말에 특히 니일은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그는 회상에 잠기며 반짝이는 키팅의 눈빛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니까요, 남자 동지들 몇 명이 동굴 속에 모여 몰래 시를 읽었다는 겁니까?" 오버스트릿이었다. "남자들뿐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냥 읽기만 하는 게 아니라 혀끝에 벌꿀을 묻혀 놓은 것처럼 시를 낭송한 거야. 여자들은 꿈꾸는 듯한 도취경에 빠졌고 정신이 고양되며... 그리고 그곳에는 신들조차 나타났었어." 학생들이 온통 현혹된 가운데 니일이 다시 물었다. "그 모임의 이름은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혹시 죽은 시인의 작품만을 읽었다든가 그런...." "아냐." "네?" "시라면 종류를 가리지 않았어." 그런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조직에 가입하려면 죽어야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네에!" 학생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든 공인받지 못한 회원이었고, 공인받은 회원이 되려면 일생을 통해 견습회원을 지낼 의무가 부여되었다는데, 키팅 역시 그 조직의 병아리 회원이었다는 설명이었다. 그 말에 학생들은 다시 한 번 깜짝놀랐다. 최후의 회합이 15년 전에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 사실이었다. 설명을 마친 키팅은 다시 한번 주위를 휘둘러 경계했다. 그는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았음을 확인한 다음에야 학생들의 곁을 떠나가던 곳으로 다시 걸어갔다. "좋아. 오늘 밤 가보겠어!" 니일은 호기심과 함께 충동적인 필요성을 느끼는 모습을 힘차게 말하고 있었다. "니네들도 같이 가겠지?" 니일이 동료들을 휘둘러보며 물었다. "그 동굴이 어디 있는데?" "내가 알고 있어. 강건너 끝쪽에 있어." "거리가 멀 텐데?" 이 때부터 각자의 의견이 분분했다. 찬반이 엇갈리는 상태였다. 누구도 니일만큼 강력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니일은 가급적이면 모두 함께 가고 싶었다. 그 중에 카멜론이 약간 문제였다. 그는 남다른 데가 있었던 것이다. "자, 그럼 함께 가고 싶은 사람은 지금 말해." 니일의 말에 제일 먼저 랄튼이, 그 다음에 오버스트릿이 동의했다. 피츠와 카멜론을 난처한 듯이 서로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니들은 왜 그래, 좋지 않니?" 그러자 랄튼이 말했다. "피츠는 성적평점이 별로 좋지 않거든." 맨처음 지원한 학생 외에는 거의 모두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키팅의 말에서 학교당국이 알게 될 경우 가만있지 않게 되리라는 점을 이미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니일은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 결과 카멜론은 주의 깊게 한다는 전제하에 동의했다. 역시 결정짓지 못하는 오버스트릿에 대해서는 랄튼이 그럴듯한 미끼를 던졌다. "봐라, 녹스. 크리스의 맘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도 좋아. 도움이 될 거라구." "정말야?" 오버스트릿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였다. "키팅의 말을 듣고서도 그래?" "어떤?" "여자 아이들은 꿈꾸는 듯한 지경에 빠진다고 했잖아." 때마침 수업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캠퍼스를 울렸다. 니일은 연신 친구들을 설득하기 위해 정신없었다. "어때서 그래, 모두 가자." 몇몇 학생은 교실 쪽을 향해 도망치듯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니일의 말을 거절하기 난처했던 참에 종소리가 구원해 준 것으로 생각하는 눈치들이었다. "너도 가자, 으응?" 그때 현관 앞에서 헤이거 박사가 소리쳤다. "자네들 거기서 뭐해! 종소리도 못들었나?" 니일은 여전히 친구들을 설득시키기에 정신없었다. 부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동굴 속의 비밀모임으로 가득차 있을 뿐이었다. "안들리나!" 헤이거 박사가 다시 화난 음성으로 소리쳤다. 니일은 여전히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그는 친구들을 따라 현관으로 가면서까지 설득 직전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와 같은 사실이 학교당국에 알려질 경우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무서운 질책이 떨어지리라는 사실조차 망각한 니일의 그같은 행동은 실로 위험천만이었다. 실제로 헤이거 박사가 그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녁식사 후. 니일은 자습실에서 앤더슨을 설득하고 있었다. "아까 얘기했던 모임에 너도 같이 가자." 그는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도록 음성을 낮추었다. 앤더슨은 고개를 저었다. "봐, 앤더슨. 언제든, 또 누구든 너 자신을 기억해 준다고 생각하면 안돼. 넌 전입생이기 때문에 아무도 몰라. 너 역시 친구들과 별로 말을 하지 안잖아." "그건 그래. 하지만 난 가고 싶지 않아." "왜? 넌 키팅 선생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니? 한번 해보고 싶지도 않아?" 그때 학생지도주임인 헤이거 박사가 곁을 지나치자 니일은 얼른 책읽는 시늉을 했다. "갈 수는 있지만..." 앤더슨은 여전히 안스러울 정도로 망설이고 있었다. "뭐가 문제지?" "난 읽는 게 싫어." "무슨 소리야?" 니일은 눈길 떨구는 앤더슨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키팅이 말했잖아, 모두 순서대로 시를 낭송한다고, 난 그게 싫어." "넌 혹시 어떻게 된 거 아냐? 왜 낭송이 싫단 거지? 그게 그 모임의 목적이고, 또 자신을 표현하는 게 싫단 말야?" 니일은 이 기회에 어떡하든 앤더슨을 끌어들여 발표력을 길러 주기로 결심했다. 죽은 시인의 사회 기숙사의 홀에서 취침 전 의식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학생들이 복도를 왕래했다. 책과 베개를 각각 양쪽 손에 들고서였다. 니일은 수건을 어깨에 걸친 채 오버스트릿의 등을 탁 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만의 암시였다. 방에 들어온 니일은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물건을 발견했다. 낡고 손때가 묻은 시선집이었다. 그가 표지를 열었을 때 거기에 나타난 것을 지극히 평범한 글씨체였다. 'J 키팅' 니일은 서명 밑의 글자를 낮은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내용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학생들의 마음은 초조했다. 드디어 기숙사 여기저기에 불이 꺼지기 시작했다. 완전하게 준비를 갖춘 학생들이 하나 둘씩 기숙사 뒤쪽의 늙은 단풍나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겨울용 코트에 모자, 장갑낀 손에 각각 손전등을 완벽하게 갖추고 그 외에 필요한 장비를 갖춘 상태였다. 모두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고 발소리도 죽였다. 하지만 기숙사 뜰에 있는 사냥개를 속일 수는 없었다. 무서운 사냥개는 벌써 알아차리고 으르렁거렸다. 녀석한테 발각 당하면 매사는 끝장 이였다. 그러나 죽으란 법은 없었다. 피츠의 기지로 위기를 벗어났다. "착하지, 그래..." 그는 얼른 다가서며 개의 입에 비스켓을 먹였다. 또 한줌 듬뿍 사냥개의 주위에 뿌려서 거뜬히 문제를 해결했다. 그의 번뜩이는 재치가 없었더라면 그 밤의 모임을 이루어질 수 없었다. "모두 출발이다." 니일이 낮게 속삭였다. 그들은 일제히 발소리를 죽여가며 잔디밭을 가로질러 갔다.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자지 않고 있던 헤이거 박사가 밖으로 나왔지만, 비스켓 공세로 얌전해진 광경에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밤바람이 차갑게 불고 있었다. 탁 트인 캠퍼스의 잔디밭을 통과한 다음 문제의 동굴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왠지 기분 나쁜 원시림 속에 그 동굴은 있었다. 랄튼이 맨 앞에 서서 갔고 그 뒤로 니일등이 차례로 뒤따르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앞서서 가던 랄튼이 갑자기 휙 돌아서며 괴상한 소리를 냈다. "우우! 내가 바로 죽은 시인이다." 바로 뒤따라가던 믹스가 질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니일이 랄튼에게 장난치지 말도록 충고했다. 문제의 동굴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어쩐지 등골이 오싹하고 머리칼이 곤두서는 기분이었지만, 여러 명이었기 때문에 성큼 성큼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눈뜬 채 코를 베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깜깜한 동굴 속이었다. 그들은 우성 주위에서 닥치는 대로 나무들을 모아 놓고 불을 피웠다. 지독한 연기가 잠시 일었지만 이내 바싹 마른 나무에 불이 붙었다. 불꽃이 빨갛게 타올랐다. 얼어붙었던 동굴 속의 사방이 점차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마치 엄숙하고 경건한 성역에 들어선 것처럼 모두 긴장된 분위기였다. 이윽고 니일이 모두를 대표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이제부터 죽은 시인의 사회 웰튼교 지부의 재결성을 엄숙하게 선언한다. 이 회합에 모이는 자는 나와 여기에 모인 신입 회원들이다." 니일은 앤더슨에 대해 낭송하지 않고 기록하는 서기로 임명한다는 대목을 빼놓지 않았다. 계속해서 니일은 키팅에게서 빌어온 헨리 데이비드 솔로의 전통적인 개회시구를 낭송했다. "내가 수풀에 틀어박힌 이유, 그것은 대지에 뿌리내린 생활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니일은 그 다음 부분을 생략하고 끝부분을 낭송했다. "나는 사려깊게 살고 싶다. 사는 것의 정수를 마음 속 깊이 맛보고 싶다." 랄튼이 끼어들면서 찬성이오! 하고 커다랗게 소리쳤다. 니일이 다시 낭송했다. 생활이 아닌 것은 모두 털어버리자. 우리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우리의 인생에 후회를 남기지 말자. 니일은 계속해서 오버스트릿으로 하여금 맹세의 선언문을 낭송하도록 지시했다. 오버스트릿은 니일이 건네 준 책을 받아든 다음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긍지를 가지고 꿈을 향해서 매진하면 놀랄 만큼 빨리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오버스트릿은 갑자기 눈빛을 빛내며 소리쳤다. "바로 이거야! 난 분명하게 크리스라고 결정하겠어!" 랄튼이 오버스트릿으로부터 책을 나꿔채며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닥쳐, 녹스! 이건 진지한 모임이란 말야!" 이어 그는 자신이 그 책의 한곳을 펼친 후에 사랑의 시를 낭송했다. 우아한 처녀의 사랑이 있고 성실한 남자의 사랑도 있고 두려움 모르는 젖먹이의 사랑도 있다. 어느 살아도 한결 같이 태고적 옛날부터의 것 그러자 지고지순의 사랑은 사랑 속의 사랑이라고 할만한 사랑은 성모 그 사람의 사랑보다 깊은 사랑은 끝모르는 상냥하고 정열적인 그 사랑은 길에 쓰러진 취객이 같은 동료에 대해 품은 사랑... 랄튼은 거기서 웃으며 피츠한테로 읽던 책을 넘겨주었다. "나의 아내는 이곳에 잠들다, 나의 아내는 이곳에...그리고 이 몸도! 지은이는 존 드라이든, 1631년 생, 1700년 사망. 이 사람은 유모어 감각하고 담쌓은 모양이지?" 피츠는 쿡쿡 소리죽여 웃었다. 다른 학생들도 큰소리로 웃었다. 다시 랄튼이 읽기 시작했다. 이 내게 사랑을 가르칠 셈인가? 차라리 내게 지혜를 구할지니 나는 사랑의 명예학 박사 만일 사랑의 신 되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분명 내게 가르침을 청할지니 모두들 큰소리로 웃자 니일이 진지해 질 것을 호소했다. 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니일은 대표자답게 모든 순서를 정확히 제시했다. 맨 처음 각자 가져온 것을 꺼내놓도록 했는데 옷을 펼쳐놓은 위에는 각자 먹을 것들이 쏟아졌다. 과일과 비스켓, 반쯤 베어먹다 남은 빵조각까지 이었다. 이들은 어느덧 분위기에 완전히 빠져들고 있었다. "조용히 해.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에 귀를 기울여 주기 바래." 니일은 잠시 소란해진 분위기를 바로 잡았다. 그가 먼저 심각한 표정을 짓자 다른 학생들도 덩달아 심각해지며 그를 주목했다. 니일은 낮은 목소리로 뭔가 으시시한 비밀이 숨겨진 이야기를 하기시작했다. "비오는 진흙 같이 어두운 밤이었어. 몇몇이 테이블을 둘러싸고 재잘거리는 중이었지. 그리고 때가 늦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어느덧 모두가 니일의 이야기에 깊숙히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데 사방이 너무 조용해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아 무서웠지." 니일은 더욱 그 이야기 속으로 친구들을 끌어들였다. 동굴 안에서는 기침 소리하나 들리지 않았다. 실제로 이야기 속의 한 사람이 된 듯이 모두 긴장된 것이다. "갑자기 창문에 미친 사람이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 거야. 그런데 사실은 어땠는지 아니? 재잘거리던 그녀들은 실제로는 컵깨지는 소리조차 듣지 못한 거야." 니일의 말이 끝나자 모두들 한숨을 쉬었다. 감쪽 같이 속았다는 기분 때문이었다. 누군가 우우 하고 못마땅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때였다. "이건 진짜야!" 카멜론이 불쑥 나섰다. 그는 무엇인가 니일의 그것보다 더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했다. 모두가 그 쪽을 바라보았다. "그 얘기보다 더한 건데..." 카멜론은 한껏 분위기를 잡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떤 젊은 부부가 운전하며 밤길을 가고 있었는데 그런데 갑자기 한 미친 사람이..." 한껏 분위기를 잡으려는 카멜론의 이야기는 더이상 계속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마구 때려부순 거겠지." 듣고 있던 한 학생이 다음 말을 가로챘다. "이건 그 얘기가 아냐!" 카멜론은 필사적으로 소리치며 손을 내저었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건 내가 전에 너한테 들려 준 얘기야, 멍청아." 동굴 안이 와아 웃는 소리로 가득 찼다. 모처럼 한 건 해보려던 카멜론은 망신만 당한 격이 되고 말았다. 그때 랄튼이 또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자 모두들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한 소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인이...밤중에 계단을 내려가던 중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졌어. 왜 그랬을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벌써 소복한 여인이 밤중에 시뻘건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모습의 연상과 함께 목을 잔뜩 움츠리는 모습도 보였다. 때와 장소가 그들에게 평소보다 비할 수 없는 커다란 공포심을 느끼도록 한게 분명했다. "그런데 말야..." 랄튼은 갑자기 그때까지의 표정보다 더욱 무섭게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계속했다. "목에 가시가 걸렸다는 거야." "너무 했다아!" 모두들 한마디씩 했다. 그 전에 망신만 당했던 카멜론은 아예 야유를 보냈다. "목에 걸린 가시가 되게 큰 거였나 보군." 그러면서 공연히 긴장했던 자신을 머쓱하게 느끼는 학생도 있었다. 그때 다음 순서로 일어선 학생이 오버스트릿이었다. 녹스 오버스트릿은 다른 학생들처럼 앉은 자리에서 하려는 게 아니었다. 모두의 주목을 더욱 받으려는 듯이 천천이 걸어서 정면에 우뚝 섰다. "다음은 네 차례야?" 누군가 묻자 오버스트릿은 확실한 대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대단한 건가 본데?" "기대해 보자구." 한마디씩 했을 때였다. 오버스트릿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있었다. 판형이 커다란 잡지 같은 데의 중간쯤에 접은 채 끼어 있는 화보 같은 것이었다. 천천히 그것을 폈다. 세 등분으로 접혀진 것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는 눈길, 궁금해 지켜보는 눈길이 엇갈렸다. 한쪽이 펼쳐졌다. 순간 탄성이 터져나왔다.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이었다. 활짝 웃고 있는 여인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기막힌 미인이었다. 두번째 페이지의 그림이 나타났다. 그러자 이번에는 더욱 커다란 탄성 소리가 거의 전체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나왔다. 뜻밖에도 그것은 벌거벗은 여인의 상체였다. 옆으로 비껴 앉은 알몸의 여인은 대단히 섹시한 글래머였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얼굴에 이어 목을 타고 내려간 부위의 젖가슴은 모기만 해도 눈이 부셨다. 가장 모범된 처녀의 상징, 여체의 신비를 여지없이 드러내며 탄력 있게 솟아올라 약간 위로 향해 정상에 숨막히게 만드는 유두가 도톰하게 붙어있었다. 마지막 세번째 페이지에는 아슬아슬한 부위만을 가린 여인의 하반신이었다. 묘한 자태로 가장 심각한 부분만을 겨우 가린 글래머의 사진이었는데 학생들의 눈에 실물보다도 더욱 충격적이었다. "와아!" "우우!" 모두들 야단이었다. 니일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지금껏 한마디는커녕 수줍음 때문에 겉돌기만 했던 앤더슨조차 진한 관심에의 미소를 활짝 짓고 있었다. 오버스트릿은 커다란 여인의 알몸을 가슴께로부터 아래쪽으로 늘어뜨려 모두가 보도록 해놓은 다음 감정을 잡으며 자작시를 읊기 시작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내게 행운을 가르쳐 준 그녀 그녀는 내게 사랑을 주었고 그 사랑은 그렇게 큰 것이었네 나로부터 행운 그 사랑... 여기저기서 묘한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이 순간 그들은 언제나 곁에 있었는데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한 친구의 천재적인 재능을 비로소 발견한 듯했다. 더러는 그가 다시 천천히 접는 알몸의 여인이 보고 싶어 고개를 숙이는 모습도 보였다. 어울려 웃던 니일이 다시 책을 펼쳤다. "이건 로우 테네시의 시야." 다시 분위기가 차분해진 가운데 니일이 테네시의 시를 낭랑한 목소리로 읊기 시작했다. 나의 친구여 세계에 대한 희망은 아직 늦지 않았네. 동물처럼 우린 항상 움직이고 달처럼 항상 환하네. 우린 그래도 우리 마음의 하나의 고통소리처럼 우리를 허기지게 하는 것은 찾으려는 욕망과 당신에게는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네. 니일의 진지한 낭송에 모두들 침묵하며 바라볼 뿐이었다. 다음으로는 피츠가 책을 니일에게서 옮겨 받았다. 예기치 않았던 일이 피츠로 인해서 일어나려하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 같지 않았다. 피츠는 돌연 묘한 자세를 취하더니 아프리카 풍의 리듬을 넣어 맞추며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술창고에 살찐 흑인 애송이 한 명 술창고의 왕, 흔들흔들 갈 짓자 걸음 저 쪽으로 비틀, 이 쪽으로 비틀, 마침내 테이블에 부딪쳤다네. 손에 든 빗자루 손잡이로 두들기네, 빈 술통을 둥 둥 둥 둥 비단 우산도 함께 두둥 두두둥 그리고 생겨난 믿음이 보였다네 신의 계시가 모두들 비웃고 난리 쳐도 우리들은 꼼작도 않아 그리고 보았다네, 흑인이 어둠 깊숙이에서 기어나와 깊은 수풀을 가르는 황금으로 빛나는 한 줄기 길... 동굴 안의 분위기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 시가 지니는 감각적인 리듬 때문이었다. 그 감각은 학생들은 황홀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리듬에 맞추어 춤추고 익살맞은 행동을 하면서 껑충껑충 뛰거나 꼽추처럼 괴상한 춤을 추었다. 광란하는 듯한 분위기는 학생들을 바보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벌써 그들은 아프리카의 어느 원주민이라도 된 듯이 괴성을 지르며 자신의 다리나 머리를 철썩철썩 때리며 정신없이 몸을 흔들어댔다. 동굴을 나오고 있는 그들 일행은 미친 무리 같았다. 백인 여자를 붙들어 마지막 축제를 즐기는 원주민과 흡사했다. 누군가 언제 준비했는지 하모니카를 불었다. 닥치는 대로 손에 들고 장단을 맞추었다. 숲을 지나는 동안 그들을 내내 그렇게 광란의 도가니에 흠뻑 빠졌다. 주위는 아직 캄캄한 밤이었지만 머지 않아서 여명의 빛이 대지를 비치게 될 것이다. 학생들은 기숙사가 보이기 직전쯤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쯤 얌전해져 있었다. 그들은 각자 도둑처럼 민첩하게 움직여 자기의 방으로 들어갔다. 기숙사 안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고요했다. 니일은 아직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완전한 자유인으로서의 동굴 안의 분위기가 자꾸만 그를 흥분시키는 것이었다. 시간의 의미 키팅의 시간이었다. 간밤 동굴에 가서 주은 시인의 사회를 재건한 학생들은 피곤 때문에 연신 하품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 새로운 도전으로 벅찬 가슴을 안고 있었다. 키팅은 학생들이 전에 없이 피곤해 하는 광경에 대해 의아심이나 궁금증을 갖지 않았다. 그럴 때도 있다는 생각하는 듯했다. 그가 학생들한테 처음 제시한 문제가 있었다. "사람한테는 말이 있다. 모두들 알고 있지?" "네." 니일이 반전체를 대표하듯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것도 하나의 위대한 발명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감하나?" "네." 역시 니일의 대답이었다. "좋다. 그렇다면, 그 말이 발명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거기까지 말한 키팅은 손가락으로 니일을 가리켰다. 물을 것도 없이 언어가 발명된 이유를 대답해 보라는 뜻이었다. 상식적인 질문이라 생각한 니일은 상식적인 대답을 했다. "사람한데 언어가 발명된 이유는, 그러니까 사람 상호간의 의사소통을 위해서 아닙니까?" "틀렸다."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니일은 물론 다른 학생들도 모두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니일은 애매한 표정으로 키팅을 바라보았다. "정답은 그게 아니다. 아울러 네 대답은 정확히 틀렸다." "말이 무엇 때문에 발명되었느냐. 어디에 사용하기 위해서인가...하면 말이다. 그건 바로 여자를 꼬시기 위해서 발명되었다." 모두들 어이가 없었다. 니일도 어이가 없었다. 키팅의 재치에 또 한번 멋지게 당했다고 생각하며 빙그레 웃었다. 여기저기서 야유비슷한 그러면서도 뜻밖이라는 의미의 탄성소리가 터져나왔다. 키팅은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이 태연하게 계속했다. "잘 듣도록." 학생들은 또 다시 키팅한테 빨려들고 있었다. "너희들한테 어떤 여자를 꼬셔야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누구보다도 오버스트릿의 두 눈이 빛나고 있었다. "가장 주의해야 될 점은 게으름은 금물이라는 사실이다. 하기야 너희들이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되는 레포트에 있어서도 여자꼬시는 이상으로 게으름은 금물이지만 말이다." 학생들은 와아 웃었다. 어느 틈에 졸음에 쫓기던 눈빛들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키팅의 그럴듯한 궤변이 사춘기 소년들의 호기심을 묘하게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키팅은 다시 월터 휘트먼의 시를 읽었다. 종교상의 신조나 교육을 잠시 뒤로 하고 모든 어려움을 배제하고 나는 말하도록 하겠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원초의 에네르기를 가지고... 키팅은 덧붙여 설명했다. 그러나 양친이나 문화적인 전통 및 모든 시대에 따라 조건지어진 종교적 신조와 교육이라는 것은 그리 쉽게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편견과 습관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게 되는 영향 등을 떨쳐 버릴 수이겠나?" 키팅은 자신의 질문에 대해서 자신이 해답을 내놓았다. "그 대답은 다음과 같다. 즉 우리는 새로운 견해를 찾아내기 위한 노력을 한시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이것이다." 학생들은 키팅의 설명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때였다. 지금껏 침착하게 설명하고 있던 키팅이 별안간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어느 틈에 옆에 있던 교탁 위로 펄쩍 뛰어올라 우뚝선 것이다. 그런 자세로 학생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자, 내가 무엇 대문에 이렇게 올라 왔다고 생각하지? 누구도 좋으니 대답해 보라구." 랄튼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선생님께서는 높은 곳을 좋아하시는 거 아닙니까?" "미안하지만 틀렸다. 삐익!" 키팅은 퀴즈문제 시간에 맞추지 못했을 때에 나오게 되는 것과 거의 똑같은 소리를 입으로 냈다. 발로는 보턴 밟는 시늉까지 했다. 니일이 언어 발명에 대해 대답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었다. 유명한 코미디언 못지 않게 멋진 연기를 해내고 그것으로 학생들을 웃기는 것이다. "멋지게 틀렸습니다요, 녜에." 학생들은 어느덧 그 말에 깊은 감동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키팅의 그러한 행동에 깊이 공감하게 된 것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세계도 다르게 보인다는 키팅의 말에 학생들은 진심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은 믿고 싶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믿을 수 없다는 것 같은데, 그럼 좋다. 자, 자아. 어서 순서대로 이 위로 올라와서 한번 내려다보도록." 제일 먼저 니일이 앞으로 나가 교탁 위로 거뜬히 올라갔다. 대신 키팅이 바닥으로 뛰어내리자 하나둘씩 교탁 위로 올라갔다. 가서 내려다보았다. 교실 안은 잠시 그것으로 소음에 흔들렸다. 앤더슨 한 명만을 제외한 전원이 한번씩 교탁위로 올라간 다음 높은 곳에서 교실을 휘둘러보았다.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게 있다는 그것을 또 다른 방향에서 생각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키팅은 교탁에서 내려와 제자리로 돌아가는 학생들을 향해 계속해서 설명했다. "설령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도, 바보스럽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을 때에는 지은이의 생각에만 주의를 기울이면 절대로 안된다. 스스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주의해야만 되는 것이다." 키팅은 계속했다. 이번에는 또 다른 표정으로 였다. 학생들의 가슴 속을 꿰뚫어 깨우쳐 주려는 듯한 분위기를 말하는 것이다. "너희들의 목표는, 자신의 소리를 찾아내는 데에 있다. 찾는 일을 뒤로 물려놓으면 물려놓은 그만큼 자신의 목소리를 찾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키팅은 솔로의 말을 인용했다. '대다수의 인간은 조용한 절망의 일생을 보내고 있다.' "무엇 때문에 그래야만 되는가? 그 보다는 새로운 땅으로 발을 들여놓는게 옳지 않겠나? 그런데..." 말을 잠시 중단한 키팅은 문득 괴상한 소리를 질러 학생들을 갑자기 의아하게 만들었다. 그런 다음에는 다시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오며 불쑥 입을 열었다. "너희들한테 레포트 외의 과제를 한 가지 내겠다." 금방 학생들의 입에서 에에, 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한창 심각한 분위기로 몰고 가놓고는 느닷없이 과제 얘기를 꺼냈기 때문이며, 숙제를 좋아하는 학생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키팅은 개여치 않았다. "여러분 모두가 자신들 나름대로의 시를 한편씩 짓도록 한다." 다시 학생들이 모두 한마디씩 불평을 나타냈다. "각자 지은 시는 월요일 이 시간에 직접 낭독하도록 한다." 이번에는 여기저기서 에이, 우우 하는 등의 불만에 찬 소리가 교실 안을 가득채왔다. 각자 자작시 한 편을 지어야 된다는 것만도 부담스러웠다. 하물며 모두의 앞에서 직접 낭독해야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 날은 수업이 일찍 끝났다. 녹스 오버스트릿은 한 가지 계획이 있었다. 그에게 무엇보다도 심각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기숙사를 빠져나가 어떤 장소에 갈 결심이었다. 그는 주변을 경계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전거에 탄 채 캠퍼스 안을 천천히 돌았다. 빠져나갈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교문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였다. 재빨리 주위를 살펴보았다. 마침 그를 보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힘껏 페달을 밟았다. 목적지는 릿지웨이 스쿨이었다. 그리스 때문이다.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이내 도착한 다음 다시 동정을 살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웰튼 아카데미 사람이 한명도 없어야 된다는 점이었다. 세 대의 버스에 학생들이 올라타고 있었다. 첫버스에 올라탄 것은 유니폼을 멋지게 차려입은 밴드부원들이었다. 두번째 버스에 타는 것은 운동복을 입은 풋볼 선수들이었다. 마지막 세번째 버스에 오버스트릿의 시선이 갑자기 집중되었다. 거기에 올라타고 있는 것은 치어리더들이었고, 크리스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크리스는 주위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체트에게로 뛰어가더니 펄쩍뛰어 그 가슴에 안겼다. 체트한테 힘껏 안긴 다음 대담하게 키스를 한 다음 몹시 유쾌한 표정으로 웃으며 동료 치어리더들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오버스트릿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튕겼다. 가슴이 뒤고 그 소리가 자신의 귀에까지 들렸다. 달려가 체트와 한판 대결할 확신이 없고 보니 그야말로 속수무책인 그는 윌튼 아카데미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던베리의 집에서 처음 크리스를 만난 이후 오버스트릿은 그녀하고의 재회를 애타게 꿈꾸고 있었다. 첫눈에 반해서 지금까지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두번째로 크리스를 보았을 때의 상황은 전혀 기대밖에 광경이었다. 그녀가 체트하고 뜨겁게 키스하는 광경을 보려고 학교를 빠져나간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에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곰곰이 궁리했다. 그것은, 자신의 입에서 크리스가 홀딱 반할 수 있는 말이 나와줄 수는 없을까 하는 고민이기도 했다. 나름대로의 개인적인 이유와 형편이 있는 학생들이 모여 함께 지내는 기숙하였다. 오버스트릿이 크리스 때문에 고민하고 앤더슨은 나름대로, 또한 모든 학생들이 각자 개인적인 여러 생각과 고민 등을 억누르며 생활하는 곳이기도 했다. 저녁 무렵이었다. 앤더슨은 기숙사의 자기 방에 혼자 있었다. 침대에 엎드린 채 무엇인가 열심히 쓰는가 하면 그것을 찢어 휴지통에 버리는 일을 반복했다. 키팅이 내준 시짓기 숙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니일이 밖으로부터 급히 뛰어든 것이 그때였다. 그는 전 같지 않았다. 몹시 흥분한 듯이 얼굴이 온통 상기된 채 들어오자 마자 들고 있던 책을 책상에 되는 대로 던졌다. "이거 봐, 앤더슨. 드디어 난 발견했다." "발견?" "맞았어." "뭐를?" 앤더슨은 영문 몰라 어리둥절하며 니일을 바라보았다. "내가 하고 싶었던 거야! 지금이라도 하고 싶어. 이게 바로 나에게 있어서의 진실된 정열의 대상이란 말야. 알겠니?" 니일은 아직 어리둥절해 있는 앤더슨한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한여름 밤의 꿈..." 종이를 받아든 앤더슨이 중얼거리듯 읽었다. 그는 이게 뭐냐는 듯이 니일을 바라보았다. "연극. 너도 알지?" "알긴 알지. 그런데..." 너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앤더슨의 표정이었다. "헨리 홀에서 이 연극공연이 있어. 거기 쓰여 있지? '오디션 있음'이라고 말야." "그런데?" "내가 거기 출연하는 거야!" 니일은 소리치며 침대 위로 뛰어올라갔다. "사물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부터 난 연극이 하고 싶었어. 지난 여름에도 하기 공연 오디션에 나갈 생각이였었다구. 아버지한테 말해 봤자 거절당했을 테지만 말야." "그런데 이번엔 허락해 주실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중요한 건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 처음으로, 비록 아버지가 뭐라든 상관없이, 뭔가를 진심으로 하고 싶어하는 거야. 그 일을 하겠다는 결심을 굳힌 게 중요하단 말야." 니일은 계속해서 연극대본의 몇 대목을 연기하는 큰소리로 읽었다. 더할 수 없이 기쁜 표정으로 허공에 대고 주먹을 흔들어 대면서 였다. 앤더슨은 더욱 걱정되는 듯이 물었다. "하지만 니일,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는데도 그 연극을 하는 게 괜찮을까?" 앤더슨은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있었다. 그가 보이에 니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중요한 건 배역을 따내는 일야. 걱정은 그 다음이지." 니일은 전에 없이 흥분되어 큰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니일, 오디션 정도는 미리 말씀 드려야 되지 않을까? 나중에 들켜서 반죽음 당하는 거 아냐?" 그것 역시 앤더슨 자신의 처지에 대한 근심이었다. 그러나 니일은 단호했다. 이번 일에 대해서만은 아버지가 알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앤더슨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건 무리야 너도 알지?" "그만둬, 앤더슨! 우려나 불가능하다, 그런 따윈 말야." "그래도 니일, 혹시 허락해 줄지 모르는데 먼저 아버지한테 부탁하는 게 좋지 않을까?" "웃기는 말야." 니일은 웃었다. "그렇지만 전에 안된다고 했을 테니까 이번에도 역시..." "야아, 넌 도대체 어느 편이지? 내편야, 아니면 아버지 편야? 난 지금껏 한 번도 연극에 나가보지 못했어. 그러나 약간이라도 마음편하게 생각해 줄 수 없겠니?" "미안해, 니일." 앤더슨은 사과하며 미안한 얼굴을 책으로 옮겼다. 다시 연극대본을 잠시 읽던 니일이 새로운 기분으로 앤더슨에게 물었다. "너 오늘 저녁에 있을 모임에 참석할 거지?" "그러려고 생각해." 니일은 어두운 표정이 되며 책을 덮는 엔더슨을 고나심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너 설마...키팅 선생의 말을 전혀 이해 못하는 건 아닐 테지?" "무슨 뜻야?" "죽은 시인의 사회에 참여한다는 것은, 마음이 자극 받고 휘저어지는 거라고 할 수 있어. 하지만 지금의 네 얼굴은 휘저어진 시궁창 같아." "날더러 그만두라고? 그러라는 거니?" 내성적인 앤더슨이 분개하는 표정이었다. "그 반대야 참여하길 원해, 하지만 자발적으로 참여해야만 돼. 그냥 회원의 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된단 뜻야." 갑자기 앤더슨이 니일로부터 등을 보이며 돌아앉았다. "네가 날 감싸주려는 마음은 고맙게 생각해. 그렇지만...난 너하고 다르단 말야." 니일이 뭔가 말하면 학생들이 귀를 기울여 준다는 것이다. 모두가 따르기 때문이며, 그렇지만 자신은 다르다는 앤더슨의 볼멘 소리였다. "그럴 리가." 니일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앤더슨이 그런 생각을 품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최종적으로 앤더슨한테 당부했다. "어쨌든 내 연극은 네가 이래라 저래라 할 문제가 못되니까 그냥 내버려 둬. 나도 스스로쯤은 돌볼 수 있으니 말야. 무슨 뜻인지 알겠니?" 그말에 대해 앤더슨은 확실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알 것도, 그런가 하면 모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은 밤에 함께 모이는 일에만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되었다. 축구 연습이 있는 날이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 회원들은 자신이 동굴을 완전히 소유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앞으로 죽은 시인의 사회를 영구적으로 활성화시킬 결심이었지만 그게 과연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는 아직 실감하지 못했다. 니일은 스스로 연극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이번만큼은 세상에 태어나 최초로 자신의 뜻대로 할 작정이었고 그럴 수 있다는 사실에 몹시 두려우면서도 만족했다. 조심스러우나마 인간의 긍지와 존재가치를 비로소 느끼게 된 듯했기 때문이었다. 오디션에 가기 앞서서 그는 동료들한테 말했다. "난 이제부터 오디션에 가봐야 되겠어. 니들 행운을 빌어주지 않겠니?" "행운을!" 믹스와 피츠, 카멜론이 행운을 빌어 주었지만. 앤더슨은 말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있잖니, 지금까지는 전혀 살아 있지 않았던 것 같은 기분야." 니일이 떠난 다음 랄튼이 쓸쓸한 표정으로 한 말이었다. 그는 아주 심각한, 그러면서도 커다란 공허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투로 계속했다. "난 말야, 벌써 여러해 동안이나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모험한단다.라고 말해보지 못했어. 내 존재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무너져도 몰랐던 거야. 그런데 니일은 자신이 하고픈 일을 하고 있어. 오버스트릿도 마찬가지야. 크리스라는 멋진 목표를 가지고 있거든." 그 말에 오버스트릿은 신음소리처럼 대꾸했다. "목표라고? 하지만 그건 필수품일뿐야. 그보다 믹스, 넌 우리 그룹에서 두뇌나 마찬가지야. 그럼 대답해 봐." "뭘?" "죽은 시인들은 나 같은 사람을 어떻게 말하지?" "로맨티스트란 건 말야, 그건 정열적인 실험가라는 뜻이야. 일정한 지점에 안착할 때까지 여러 방면에 손을 내미는 거라구." 카멜론이 노랑머리 밑으로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아무리 그렇지만 다 소용없어 왠지 알아? 이 웰튼에는 실험가가 끼어들 자리도 없으니 말야." 그와 비슷한 시간 노란교장과 키팅 사이에 또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서 노란 교장이 키팅을 바라보았다. "할 얘기가 있소, 키팅 선생." 교장의 출현으로 방금까지 키팅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마카리스터가 얼른 자리를 피했다. 그곳은 키팅의 강의실이었다. 노란교장은 천천히 강의실 안을 들러본 다음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최초로 교단에 섰던 장소가 바로 이 강의실이었소. 최초라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은 일이오." "여기서 가르치셨다는 건 아직 몰랐습니다." 키팅은 의외라는 듯이 노란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입학하기 훨씬 전에 이 강의실에서 국어를 강의했는데, 그만둘 때는 몹시 아쉬웠었소." 노란은 잠깐 말을 끓었다. 그는 본론을 꺼내기 위해 키팅을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입이 훨씬 무겁게 열렸다. "난 최근 당신의 수업방법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소." 키팅은 교장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공소한 태도를 가진 채였다. "또 당신의 강의는 이 학교에서 처음이라는 것도 알 거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물론, 교장인 내가 당신의 고유영역인 수업방법에 대해 경고따위는 않겠소." "제 기술은 그게 전부입니다. 교장선생님." "그리고, 지난번 그 광경은 또 뭐요?" "뭐 말이죠?" "학생들을 바깥에 세워두고 행진시킨 거 말이오." "아, 그건..." 키팅은 잠깐 당혹했으나 이내 신념을 되새기며 계속했다. 그는 수업시간에 학생들을 밖으로 끌어내 행진을 시켰었다. 각자의 특이한 걸음걸이가 거기서 나타났고, 거기에 자신감을 갖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건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어떤 이유란 말이오?"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행위죠." "내가 세부적으로 질문하면 그 근거를 제시할 수 있겠소?" 키팅은 그 질문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교장이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 선생의 고유영역을 침해하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단호히 말했다. "전 제 생각과 소신대로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키팅 선생, 그 학생들은 당신의 나이만큼 늙지 않았소." "!..." 키팅은 입을 다물었다. 이미 두 사람의 대화 자체가 물과 기름임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이 학교에는 분명한 전통이 있소. 또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반드시 명문대학에 가야 하오. 그러기 위한 전통과 원칙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될 거요." 협박에 가깝도록 엄격한 교장의 말이었다. 키팅은 이미 자신의 혁신적인 교육방법에 대한 압력이 가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몹시 불쾌한 일이었다. 웰튼 아카데미의 전통이나 원칙에 대해서는 교장의 깨우침이 구태어 필요치 않았다. 그 자신 재학 시절 귀가 닳도록 들어왔었다. 그걸 벗어 던지고 싶은 게 키팅의 희망이고 야만이었는데, 거기에 이미 적신호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독재자 "저 선생이 축구코치야?" 축구장으로 가던 피츠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두들 동감이라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축구장에 먼저 와있는 여러개의 축고공과 또 수억인가 들어 있음직한 상자 같은 물건을 들고 기다리는 키팅 선생을 발견한 것이다. 모두는 의아한 표정을 어쩌지 못하고 키팅 선생이 기다리고 있는 축구장 잔디 위에 모였다. "좋다. 제군. 모두 그 자리에 앉도록." 국어선생은 체육코치가 되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상대가 키팅 선생이기 때문에 학생들은 남다른 호기심과 의아심을 느꼈다. 선배이자 현재는 선생인 키팅에 대한 학생들의 고나심은 확실히 대단한 것이었다. "스포츠에 몰두한 사람들은 어떤 종목이 좋으니 등등 갖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키팅 선생은 학생들 앞을 왔다갔다 하며 말을 계속했다. "모든 운동종목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중요한 것은, 타인이 있음에 의해서 자신이 남보다 뛰어날 수 있다는 점이라고 본다. 나처럼 재능이 뛰어난 남자가 있었다. 프렌트라는 사람이다. 그가 뭐라고 했는지 알겠나?" <스포츠가 있기 때문에 나는 시인이나 철학자, 웅변가일 수 있다.> 이 말을 인용한 키팅 선생은 학생들로 하여금 준비된 종이 한 장씩 가지고 일렬로 정렬시켰다. 학생들은 앞으로 벌어질 어떤 일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찬 채 눈빛을 빛냈다. 그들은 키팅 선생한테 의문의 종이를 한 장씩 받았다. 키팅 선생은 일렬로 정렬한 맨 앞 하교생으로 부터 약3미터 떨어진 지점에 축구공을 갖다 놓았다. 앤더슨은 여전히 용기없어 줄의 맨 뒤에 가서 서 있으면서도 가슴을 조였다. "지금부터 읽은 다음 공을 차도록 한다. 더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 알 수 있겠지?" 학생들은 괴상한 축구연습에 대해 아직 어떤 확실한 느낌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들은 키팅 선생의 지시대로 했다. 선두에 섰던 학생이 공 앞으로 걸어갔다. "승산없는 싸움에 도전, 패배할 줄 모르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 그와 함께 공을 힘껏 찼다. 하지만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공을 골문을 완전히 벗어나고 말았다. "상관없다. 골인 보다 중요한 것은 노력이다." 다음 공을 같은 지점에 놓은 키팅 선생은 처음 가져왔던 상자 속에서 탁상용의 소형 전축을 꺼냈다. 이어 거기에 클래식 음악을 볼륨 높게 틀어 놓으며 소리쳤다. "제군, 리듬을! 리듬을 타라!" 다음은 오버스트릿 차례였다. 그는 들고 있는 종이에 적힌 시를 큰소리로 읽었다. "그들하고만 있을 수 있게 되기 위하여! 사람은 어디까지 인내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기 위하여!" 그와 함께 달려들며 힘껏 공을 걷어찼다. 그는 마음속으로 그 공이 크리스를 먼저 차지한 체프 녀석으로 생각하며 걷어찬 것이다. 다음 차례는 믹스였다. "고문과 독약과 세상의 편격적 평판에 분연히 맞서기 위하여!" 믹스는 힘껏 소리치고 또한 힘껏 걷어찼다. 누구보다도 힘찬 슈팅모습이었다. "참된 신이 되기 위하여!" 랄튼은 있는 힘을 다했지만 공은 골포스트 위로 훨씬 높게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때였다. 한 쪽에서 그런 광경을 관심 깊게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마카리스터였다. 키팅의 교육방법에 대해 그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시작부터 특이한 축구연습을 지켜보던 마카리스터는 미소를 지었다. 놀랐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기숙사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행이었다. 시간 때문에 앤더슨의 차례까지 오지 않았다. 어떻게 남들처럼 공을 찰 수 있을 것인가를 놓고 고심하던 그의 안에서 안도의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하지만 키팅을 앤더슨의 그런 상태를 이미 간파하여 소리쳤다. "안심은 금물이다, 앤더슨. 분명히 네가 차게 될 순서는 올 것이야!" 그만 얼굴이 빨개진 앤더슨은 공연히 화가 났다. 자신에 대해서였다. 그는 기숙사로 돌아오자 사납게 문을 닫으며 침대에 벌렁 드러눕고 말았다. "빌어먹을!...." 그때 앤더슨의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책상 위에 있는 종이에 적힌 글씨였다. 월요일의 숙제로 자신이 시를 짓다 중단한 것이었다. 그 종이를 집어들고 생각 떠오르는 한 귀절을 얼른 첨부해 써넣었다. 그러나 다음 귀절이 영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일어서서 침대 곁을 서성거리며 머리를 짜내고 있을 때였다. 복도에서 갑자기 소리가 있었다. "해냈다! 야아, 모두 들어봐! 해냈단 말야! 드디어 배역을 얻었다구!" 니일의 감격한 목소리였다. 그는 축구 연습 대신 연극 <한여름 밤의 꿈>오디션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는 앤더슨이 있는 방으로 뛰어들어오며 다시 소리쳤다. "봐, 앤더슨! 나 요정 팩의 역할을 받았어. 팩 역을 할 거란 말이야!" "네가 팩을?" 앤더슨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농담하지 마!" 그 소리와 함께 문이 열며 몇몇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니일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되자 일제히 환성을 터뜨렸다. "니일, 넌 해냈구나! 축하한다. 니일!" "고맙다, 앤더슨 난 비로소 자신의 세계에 들어왔어. 들어왔다구. 나한테도 할일이 생겼으니 말야." "하여튼 축하한다. 니일." 모두들 방에서 나간 다음이었다. 니일은 책상 앞에 앉으며 타자기를 꺼내 놓았다. "뭘 할 거야?" 앤더슨이 이상히 여기며 물었다. "쉿!" 니일은 들뜬 얼굴로 연신 미소를 지으며 계속했다. "그건 지금 생각할 참야. 실은 허가증을 제출해야 되거든." "부모님의?" "그래." "니일, 그런데 자신이 자신을 허가할 참야?" "그게 아냐. 아버지하고 노란 교장의 허가증이 있어야 해." "니일, 너 설마...." 위조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하는 뜻이었다. "조용히 해, 앤더슨. 지금부터 그걸 생각해야만 되거든." 니일은 문득 연극 중의 한 대목 대사를 큰소리로 외우더니 이윽고 타이프를 치기 시작했다. 앤더슨은 머리를 흔들었다.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자신에 대한 생각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숙제인 시를 끝마쳐야 되기 때문이다. 월요일. 예고 된대로 각자가 자작시를 학생들 앞에서 낭독해야 되는 키팅의 국어시간이었다. "모두 준비해 왔을 줄 믿는다." 키팅의 말에 학생들의 반응이 두 가지로 엇갈렸다. 자신있게 미소짓는 축과 불안해하는 모습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앤더슨은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초조해 하는 모습인 채 어쩔 줄을 몰랐다. 키팅이 첫번째로 지시한 학생은 녹스 오버스트릿이었다. 그는 약간 망설이는 듯했으나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가 지어온 시를 낭독했다. 사랑스러움이 떠도는 그 미소여 눈가에 어린 눈부신 광채 그렇지만 우리 인생은 완벽하다 우리 마음은 충만 되어 있다 알고 있는 것들은 다만 갑자기 오버스트릿은 입을 다물었다. 이어 계면적은 얼굴이 되어 키팅을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이건 바보 같은 시였습니다." 그는 거기서 중단하며 제자리로 들어갔다. "아니다, 녹스. 멋진 시야. 노력한 흔적이 뚜렷하다." 키팅은 전체 학생들을 향해 힘차게 말했다. "지금 녹스가 읽은 시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시를 쓰고자 할 때에 중요하며 아울러 거의 모든 노력에도 중요한 것, 사랑이나 아름다움, 진실 및 정의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시를 말만으로 끝내서는 안되며, 시는 음악이나 사진, 아니 식사준비 때에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사물에도 그 나름의 게시가 포함되어 있고, 시는 가장 흔한 일상생활의 모든 일에 존재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흔한 것은 절대로 아니며, 하늘에 관해서 쓰거나 소녀의 미소에 대해서 써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키팅은 듣고 있는 학생들을 감동시키며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 점에 주의하기 바란다. 모처럼 시를 쓰려면 제군들의 시심으로 구제의 날이든 종말의 날이든 그것 외에 어떤 날이라도 상관없으니까, 그런 것들을 눈에 생생하도록 그려 주기를 바란다." 그 결과가 모두들 기쁘게 하고, 흥분되게 만들 수 있는 내용이라면 어떤 내용의 시라도 환영하며, 만일 그 시가 영감으로 가득차 있다면, 끝없는 생명이 무한정 계속되는 것이라는 기분을 다소라도 맛볼 수 있게 만들어 줄 것이라 했다. 듣고 있는 동안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키팅의 강의에 대해 이 시간처럼 감명이 깊었던 때도 없었던 듯했다. 확실히 다른 선생 같지 않았다. 키팅의 강의에는 살아서 꿈틀대는, 약동하는 무엇이 있음을 모두는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오오 선장이여! 우리 선장이여!" 랄튼이 그러면서 신중하게 물었다. "수학 속에도 시는 존재하고 있습니까?" 몇몇의 학생이 손으로 입을 막아 쿡쿡거렸다. "물론이다. 랄튼 군!" 키팅은 개의치 않으며 신념이 가득한 어조로 모두에게 말했다. "수학에는 엘레강스가 있다. 만일 누구든 시를 쓸수 있게 되기만 한다면 이 혹성을 굶주리게 만들어버릴 테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시는 절대로 있어야만 하며, 만일 단순할 뿐인 생황의 한 장면에서 문득 멈추고 거기에 깃든 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경우, 모두는 인생이 안겨 주는 무엇을 그대로 버리는 결과라는 것이다. 키팅은 설명에 이어 다시 순서를 진행시키려 했다. "다음엔 누가 낭송할 텐가?" 이어 몇 명의 학생들이 자작시를 낭송한 다음이었다. 문득 키팅이 앤더슨의 곁으로 걸어갔다. 자신에게 낭송하도록 지시가 떨어질까봐 전전긍긍하는 참이던 앤더슨의 낯빛이 벌써 창백해졌다. "모두들 앤더슨 군의 얼굴을 보도록. 이토록 괴로운 얼굴이라니 말야. 자, 앤더슨 앞으로 나가라. 그리고 너의 그 슬픔을 있는 그대로 토해 내도록 해라." 모두가 앤더슨을 바라보았다. 더욱 불안에 휩싸인 앤더슨은 비틀대며 겨우 앞으로 걸어나갔다. 사형수가 단두대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측은한 떨림이 그의 전신에 나타나고 있었다. 그는 시를 써왔느냐는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키팅이 그를 또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기 시작했다. "잘 들어 봐." 모두가 주목한 가운데 키팅이 계속해서 말했다. "넌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은 가치없고 타인한테 수치스러움을 드러낼 뿐이라고 생각하는 구나, 그렇지?" 앤더슨은 겨우 시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오늘은 너의 내면에 잠재된 게 과연 얼마나 멋진가 그걸 나타내 보이겠니?" 이어 키팅은 칠판을 향해 빠른 걸음을 옮겼다. 거기 칠판에 백문으로 재빨리 휘갈겨 쓴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나는 세계의 지붕 위에서, 야만스러운 포효를 울린다. 윌터 휘트먼.> 키팅은 모두에게 포효의 뜻을 설명했다. 커다랗게 소리치거나 혹은 우는 것이라고 설명한 다음 불쑥 앤더슨을 앞으로 나오도록 했다. 앤더슨은 훨씬 더 불안하고 두려운 얼굴이 되며 지시대로 따랐다. "앤더슨, 난 너한테 이 야만적인 포효가 어떤 것인지 실제로 보여줄 것을 부탁한다." 앤더슨은 깜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물었다. "포효를, 제가요?" "맞았어. 소리를 쳐. 힘껏. 와아 하고." 쩔쩔 매던 앤더슨의 입에서는 겨우 들릴 정도의 와아, 소리가 겁에 질린 채 나왔을 뿐이었다. 일제히 그 쪽을 주시했다. "한 번 더! 그리고 더 크게!" "와아!" "더 크게!" "와아!" 어느덧 키팅이 신들린 듯이 소리치고 있었다. 순간 앤더슨은 제 정신이 아닌 채 자신도 모르게 한껏 커다랗게 소리쳤다. "와아!!" 키팅의 얼굴에 비로소 만족한 표정이 나타났다. "됐다, 앤더슨. 아주 좋았어. 지금의 그 고함소리 속에는 분명히 야만인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었다." 키팅을 따라 앤더슨과 가까운 학생들이 박수를 쳤다. 앤더슨은 그것만으로 벌써 전신에 힘이 다빠진 듯이 어깨가 축 늘어진 자세였다. 다음 순간 키팅은 돌연스러운 행동으로 앤더슨을 당황할 겨를도 없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앤더슨, 문 위에 휘트먼의 초상화가 걸려 있지?" "네." "그걸 보고 무엇을 연상하지?" "그건...." "생각하지 마라. 퍼뜩 떠오른 것만 말하라." 키팅의 말이 갑자기 빨라진 것만으로도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된 앤더슨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미친 사람입니다." "광인이란 말이지?" "네." "어떤 광인이지? 생각하지 말고 대답하라." "그건...머리가 이상한 광인입니다." "상상력을 구사해. 머리에 최초로 떠오르는 게 뭐지? 아무리 바보 같은 내용이라도 좋다. 그러니 어서 대답해봐." "저어...그건 땀을 흘리며 이를 드러낸 광인입니다." 교실 안에서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모두가 긴장된 채 숨을 죽였다. 전체 학생 중에 가장 내성적이고 가장 소극적이며 항상 두려움에 잠겼을 뿐인 앤더슨이다. 그러한 앤더슨에 대한 키팅의 방법은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학생들은 앤더슨이 키팅의 방법에 의해 점차 동화되어가는 광경을 분명히 목격했다. "봐라, 앤더슨. 네 속에 있는 시인이 눈을 떴다. 그러니 이번에는 눈을 감아라. 감고 뭐가 보이는지 말해 봐. 자아. 어서." 키팅도 미친 사람 같았다. 그는 덤벼들듯 앤더슨에게 다가서며 자신의 손으로 앤더슨의 두 눈을 무자비하게 가렸다. "어서 말해!" "눈을 감았...습니...다." "말해!" "바로 옆에 그 남자가 잠깐 보였습니다." "땀을 흘리며 이를 드러낸 광인은 어떻게 됐나?" "땀을 흘리고 이를 드러낸 그 광인은...." 앤더슨은 키팅에 의해 손바닥으로 두 눈이 가려진 채 어느덧 필사적이 되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랄만한 발전이었다. "그렇다! 어서 말해. 땀흘리고 이를 드러낸 광인은?" "나의 뇌수조차 녹여버릴 것만 같은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실 안에서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있었다. "훌륭하다, 앤더슨! 그 남자한테 이번에는 뭔가를 시켜라. 행동에 리듬을 주는 거야." 갑자기 앤더슨의 입에서 잔뜩 겁먹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남자는 내게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목을 조리려고...." "무슨 소리야?" "정말입니다, 선생님...." 계속해서 앤더슨은 키팅과 마주 소리치기 시작했다. "진실이라는 것은 반드시 다리가 드러나고 마는 모포 같은 겁니다!" 그러고 있는 앤더슨의 얼굴에 괴로운 분노의 표정이 나타났다. 몇몇 학생들 사이에서 가벼운 웃음 소리가 들린 것이 그때였다. 순간 키팅이 소리쳤다. "웃고 있는 놈 따윈 여기서 꺼져버려! 난 모초에 관한 얘기가 더 듣고 싶다!" 키팅은 거기서 앤더슨의 눈을 가렸던 손을 땠다. 앤더슨은 그러나 눈을 뜨지 않았다. 계속 감은 채 이번에는 자신에 대해 웃은 학생들에 대고 도전하는 듯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펼쳐 봐도 아무리 끌어당겨 봐도 그 모포는 우리 가운데 어느 한사람 조차 확실하게 덮어주지 않고 있습니다." "계속해!" 키팅이 소리쳤다. "걷어차도, 때려도, 어떻게 해도 되지 않는...." "멈추면 안돼, 앤더슨. 계속하는 거야." "우는 소리를 내면서 이 세상에 태어나던 그 날부터...죽음으로 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울거나, 절규하거나 신음하거나, 이 진실이라는 이름의 모포는 다만 머리만을 덮어 주고 있을 뿐입니다!" 필사적으로 그런 말들을 하고 난 앤더슨은 한동안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키팅이 가까이 다가가며 부드럽게 말해 주었다. "잊지 말아라. 앤더슨. 이게 즉 마법이다." 갑자기 니일이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도 온통 감동으로 가득차 있었다. 다른 학생들도 이어 니일처럼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앤더슨은 깊은 한숨과 비로소 얼굴에 미소를 나타냈다. 그가 웰튼 아카데미에 전학온 후 최초로 보여주는 자신감에 넘치는 미소였다. "감사합니다." 앤더슨은 역시 자신 있는 걸음을 자기의 자리로 옮겨 놓고 있었다. 그 수업이 끝났을 때 제일 먼저 다가가 손을 잡아준 것은 니일이었다. 그의 진실된 격려에 앤더슨은 새롭게 태어난 기분이었다. 개성연습 그날밤. 죽은 시인의 사회의 회원들이 동굴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랄튼을 중심으로 해서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앉아 있었다. 전과 달리 섹스폰을 가지고 온 랄튼은 회원들의 중앙에 앉은 채 할일 없는 사람처럼 커다랗게 입벌려 하품을 했다. 니일이 늦게 동굴 안으로 들어온 게 그때였다. 그는 낡은 램프를 손에 들고 있었다. "이걸 보라구." 니일의 말이었다. "그건 또 뭐니?" "이게 바로 램프라는 거다." 피츠가 니일 대신 믹스한테 말해 주었다. 니일이 램프의 갓을 떼어냈다. 그러자 이상한 모형의 작은 물건이 나타났다. 색을 칠해 놓은 하나의 조각상이었다. 니일은 모두를 둘러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자, 여러분! 지금부터 이것을 이 동굴의 신으로 삼겠다." 니일은 뾰족한 못이 머리 위로 솟아나 있는 조각상을 뒤쪽의 약간 높은 곳에 올려놓았다. 이어 그 못에 초를 꽂고 불을 켰다. 조각상의 모습이 상세히 드러났다. 붉고 푸른 색이 칠해 있는 작은 북치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비록 색깔은 바랬어도 그 얼굴은 무척이나 고귀해 보였다. 그 때 랄튼이 헛기침을 했다. 모두들 그게 신호인 듯이 랄튼을 향해 돌아앉았다. "제군, 이것은 찰리 랄튼이 지은 즉흥시입니다." 그 말에 이어 음조도 맞지 않는 높은 음의 멜로디를 한 차례 부른 후 그치는 랄튼이었다. 잠시 동안의 침묵에 이어 그는 갑자기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웃음...눈물...비틀거리고 중얼거리며...더 할만한 것은 많이 있다. 어 할만한 것은..." 거기서 랄튼은 다시 섹스폰을 두세 소절의 어떤 멜로디를 연주했다. 그는 완전히 분위기를 압도해 나갔다. 연주에 이어 이번에는 돌연 전보다 빠른 속도로 말하기 시작해서 모두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혼돈을 설계하고 혼돈을 꿈꾸고 울고 하늘을 향해 춤추고 할만한 것은 더욱 많다! 더욱 많다아! 동굴안이 갑자기 무거운 침묵에 가라앉았다. 랄튼은 섹스폰을 고쳐잡더니 연이어 사람의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은 멜로디를 그럴듯하게 불기 시작했다. 그의 연주가 계속됨에 따라 학생들의 얼굴에서는 믿을 수 없어하던 표정이 가시고 있었다. 음악에 완전히 도취된 랄튼은 이윽고 길게 연결되는, 그래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만 같은 멜로디를 마지막으로 감동적인 연주를 끝냈다. 그런데 학생들은 아직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음악에 심취된 채 묵묵히 앉아 감동을 되새기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그와 같은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니일이었다. "랄튼, 정말 최고다. 어디서 그렇게 훌륭한 연주를 익혔니?" "부모님은 나한테 클라리넷을 배우도록 했지만 난 그게 정말 싫었어." 섹스폰이 클라리넷 보다 훨씬 격조높은 음을 낸다는 그의 말에 모두들 탄성소리를 냈다. 그때 느닷없이 벌떡 일어난 녹스 오버스트릿이 괴로워하며 큰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난 도저히 참지 못해!" 모두 그 쪽을 바라보았다. "만일 크리스하고 다시 만날 수 없게 된다면, 스스로 내 목숨을 끊고 말 테다!" "진정해, 녹스." 랄튼이었다. "싫어." "뭐라구?" "난 지금껏 진정하고 있었어. 하지만 지금 곧 어떤 것도 안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오버스트릿은 갑자기 동굴에서 뛰쳐나가려 했다. "어디로 가?" 뜻하지 않은 일 때문에 이날의 모임은 거기서 끝나게 되었다. 심각해진 오버스트릿이 어쩌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모두 그의 뒤를 따라 동굴로부터 학교로 향한 것이다. 크리스한테 전화한다고 했고, 거기서 지독한 모욕이라도 당할 경우 충분히 그런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고 지레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오버스트릿은 그 길로 기숙사 안의 공중전화 앞까지 내달았다. "어떤 일이 생긴다 해도 꼭 전화하고 말겠어!" 뒤따라 달려온 친구들에게 말한 오버스트릿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모두들 그를 둘러싸듯 해서 그가 다이얼 돌리는 것을 마음 조이며 지켜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오버스트릿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누구세요?" 그러나 무슨 일인가. 곁에 있는 친구들의 귀에까지 들리도록 정확한 것은 크리스의 음성이었고, 그와 동시에 오버스트릿은 기겁하듯 놀라며 수화기를 올려놓은 것이다. 그는 곧 친구들을 돌아보며 변명처럼 애매하게 말했다. "그녀가 좋아하지 않을 거야. 그래 던베리가의 사람들이 싫어할게 분명해! 그럼 난 부모한테 살해당할지도 몰라..." 누구하나 반응하지 않았다. 모두가 실망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 볼 뿐이었다. 결국 오버스트릿은 자신이 얼마나 바보였는가를 깨달은 듯이 불평스럽게 말했다. "알았어, 제기랄! 좋아, 카르페 디엠이다. 죽는다 해도 좋다구!" 오버스트릿은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예, 누구세요?" 역시 크리스의 목소리였다. 이번에는 오버스트릿도 그냥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아, 크리스. 나야." "나?..." "녹스, 녹스 오버스트릿." "녹스?" "기억하지?" "아앙, 알겠어. 이렇게 전화해 줘서 기뻐." "정말야?" 오버스트릿은 재빨리 손으로 송화구를 막으며 돌아섰다. "전화해 줘서 기쁘다는 겨야!" 그는 흥분된 목소리로 친구들한테 말하고 재빨리 다시 전화를 연결했다. "실은 나도 전화할 생각이었어." 명랑한 크리스의 목소리에 오버스트릿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크리스는 계속했다. "그랬는데 전화번호를 몰랐지 뭐야, 글쎄 실은 좋은 소식이 있어." "?..." "체트의 부모님이 여행을 떠나셨거든. 그래서 이번 주말에 체트가 파틸 열거야. 어때, 녹스. 파티에 와 주지 않겠어? "좋아." "와 줄 거야?" "가겠어!" 오버스트릿의 얼굴은 더욱 진한 기쁨과 흥분에 휩싸였다. "그런데 녹스." "응?" "실은 체트의 부모님께는 말하지 않았으니까 비밀로 해야 돼. 물론 누구라도 함께 올 사람이 있으면 같이 오도록 해." "물론 가겠어. 그래, 가고 말고, 고마워, 크리스." 전화를 끊고 난 오버스트릿은 돌연 커다랗게 소리쳤다. 벽에 기댄 채 두주먹을 앞으로 불끈 쥐어 내밀며 포효한 다음 들뜬 음성으로 모두에게 말해 주었다. "니네들 믿겠니? 크리스가 나한테 전화를 하려고 했었다니 말야! 그녀가 뭐랬는지 알아? 같이 파티에 가겠단 말야!" 친구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좀더 현실적으로 판단했다. 크리스가 이미 던베리의 아들인 체트의 애인이라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너 정말 크리스가 널 파티에 데려갈 거라고 믿는 건 아닐테지?" 차갑게 들리는 랄튼의 말에 일순간 당혹해 하는 오버스트릿이었다. 하지만 그는 발작적으로 자신의 뜻을 털어놓았다. "그건 나도 알아. 크리스는 체트의 애인야. 하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아. 정말야. 난 그딴거 상관하지 않겠어!" "무슨 뜻이지?" "가장 중요한 건, 그녀가 내 생각을 해 줬다는 사실야." "죽겠군...!" 랄튼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이걸 알아야지. 불과 한번밖에 만나지 않았던 날 생각해 준다는 거말야." 오버스트릿은 황홀한 꿈에 도취되어 가고 있었다. 친구들이 걱정해 주는 진심조차 그에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젠 됐어!" 오버스트릿은 계속 열에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건 모든 일이 다 잘될 수 있다는 징조야. 그래, 그거야. 크리스는 이제 내거야아!" 그의 친구들은 그가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되지 않기를 바랄 뿐 누구도 그 자리에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니일은 뜻밖의 장소에서 앤더슨을 만났다. 기숙사 앞의 돌담에 혼자 기대앉아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발견한 것이다. "거기 앤더슨이지?" 대답이 없었다. 니일이 다가갔을 때 코트도, 입지 않은 채 추위에 덜덜 떨고 있는 앤더슨이 거기에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앤더슨은 역시 몹시 슬픈 듯한 표정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야? 몹시 추워 보이는데 혼자 이런 곳에 있다니 이상하잖아?" 니일이 진심으로 걱정하며 묻자, 앤더슨은 비로소 탄식하듯 말했다. "오늘이 내 생일야." "그래? 그런 얘길 이런 곳에서 하다니 어쨌든 생일 축하한다. 앤더슨? 물론 선물은 받았을 테지?" 지독한 추위로 앤더슨의 이빨이 소리내며 부딪쳤다. 그는 대답 대신 곁에 있는 한 상자를 가리켰다. "이건..." 니일은 그게 어떤 물건인지 이내 알아차렸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똑 같은 문방구 상자였던 것이다. "내게 있는 것하고 똑 같군." "작년에도 생일날 선물로 받았던 물건야." 앤더슨은 갑자기 화가 나서 거칠게 투덜대기 시작했다. "부모는 나한테 어떤 걸 선물했는지도 몰라! 기가 막히다니가...정말 어이가 없어." 니일은 앤더슨이 그러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재빨리 생각했다. 앤더슨의 마음을 어떤 방법으로든 위로해 주는 게 현명하다는 생각이었다. "앤더슨, 내 생각엔 말야...너한테 새문구 세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셨을 거야. 분명히, 그건. 그런 생각 때문에 너한테..." 어떡하든 위로하려는 니일의 말을 앤더슨이 가로막았다. "몰라서 하는 소리야." "?..." "우리 부모님의 자식은 형 하나 뿐이라구. 형 생일날만 돼 봐, 온통 집안이 떠들썩하게 수선들을 피워댄다니까!" 앤더슨은 울분을 터뜨리듯 말하고 있었다. 그는 새삼 기분 나쁜 듯이 문구 세트를 노려보았다. 이어서 그는 다시 슬픈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맨처음 받았을 때도 이건 기쁜 선물이 아니었어." 니일은 다시 생각했다. 또 다른 방법이 필요했으며, 무엇인가 앤더슨의 울적해진 마음을 확 풀어줄 수 있는 게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좋은 생각이 얼른 떠올라 주지 않았다. 니일은 우선 떠오르는 대로 문득 말투를 천하게 바꾸었다. "봐라, 앤더슨. 선물의 가치를 그렇게 따지면 안돼." "뭐야?" "쉽게 말해서, 기상천외한 선물이라고 할 수 있잖니." "니일!..." 이렇게 훌륭한 고급 문구 세트를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말야, 흔해빠진 축구공이나 야구 방망이 자동차 따윈 생각도 않을 테니까." "그건 그럴지도 몰라." 니일의 그 말에 앤더슨은 기분이 약간 나아지는 듯했다. 그는 문득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난 말야, 부모라면 무조건 자식을 모두 사랑한다고 믿었어. 선생님도 그렇게 가르쳤고 선생님이 읽도록 권한 책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거든, 그래서 굳게 믿었던 거야. 그렇지만 틀린 생각이었어." "!..." "형이라면 또 모르지, 부모님이 그렇게 무조건 사랑했을 게 분명해. 하지만 난 아냐. 난 조금도 사랑해 주지 않았어." 니일은 앤더슨이 그토록 내성적이고 소극적이며 겁많은 아이가 된 이유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와 함께 자신도 알 수 없을 어떤 반항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앤더슨." 니일은 한가지 멋진 생각을 힘내고 있었다.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지?" "안들어. 그보다 기분나빠." "하지만 또 내년에도 같은 선물일 테지?" "분명히 그럴 거야." "지금 너한테는 이것과 같은 게 있지?" "으응." "그럼 이건 필요도 없구나?" "그래."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이 있어. 뭔지 알겠니?" 니일이 문구세트를 집어들면서 말했을 때였다. 앤더슨은 뭔가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니일, 그럼 넌 지금..." 설명은 필요치 않았다. "바로 그거야, 앤더슨." 앤더슨의 얼굴에 미소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일치되었다. 이제 곧 하려는 어떤 일에 대한 기대 같은 것 때문에 가슴이 부풀기까지 했다. 그것은 매우 통쾌하면서도 멋진 한 순간이 되리라는 생각에 공감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더 말하지 않았다. 니일 문구세트를 들고 일어서는 광경에 앤더슨은 더욱 신나는 표정 지었다. 그런 다음이었다. 니일에 의해 문구세트가, 앤더슨의 생일 선물이 돌연 어두운 허공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비행접시 같았다. 하지만 그 비행접시는 이내 공중분해 되고 있었다. 뚜껑이 열림 그 안에 있던 물건들이 한 가지씩 튕겨지듯 나오며 허공을 비행하기 시작했다. 니일 보다도 앤더슨이 더욱 기쁜듯이, 신기한 듯이,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불만을 성의 없는 부모한테 갚아 주는 복수라는 듯이 온 얼굴 가득히 미소가 번져나가고 있었다. 뜻밖의 소식이 키팅 선생 시간에 학생들을 기다렸다. 모두들 교실로 들어가려 할 때 그 소식을 전해 준 것은 카멜론이었다. "모두 안뜰로 나오래." "키팅 선생이?" "그럼 누구겠어." "또 무슨 일이지?" 학생들은 불평도 환영도 아닌 한마디씩을 중얼거리며 안뜰로 나갔다. 그곳에서는 먼저 나간 키팅 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군!" 키팅 선생이 모두들 둘러보며 언제나 처럼 힘있게 입을 열었다. "제군들이 쓴 시를 봤다. 그 결과 시 가운데 각자의 개성이 결여된 매우 나쁜 요소가 포함된 사실을 발견했다." 키팅은 궁금해하는 학생들 앞으로 피츠, 카멜론, 오버스트릿 등을 불러내었다. 그들을 일렬로 세우는 이유를 짐작이나마 할 수 있는 학생은 누구도 없었다. "지금부터 내가 넷을 헤아리면 이뜰을 한 바뀌 돌도록 한다. 생각은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 점수하고는 무관하니 말이다." 이어 키팅은 하나, 둘 셋, 넷까지 헤아리 다음 네 명이 동시에 풀발토록 지시했다. 네 명은 영문도 모르는 채 일제히 걷기 시작했다. 그들은 벽에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 정면을 바라보며 정지했다. 하지만 키팅은 그들에게 계속 걷도록 했다. 훈련병에게 실시되는 제식훈련하고는 양상이 크게 다른 광경이었다. 일정한 규칙에 강요받지 않고 각자의 개성대로 걷는 모습을 실로 각양각색이 어서 인간 각자의 개성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아직도 영문을 모르며 키팅과 함께 계속해서 걷는 네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네 명의 구두소리는 군대의 행진 대처럼 안뜰에 울려 퍼졌다. 처음에는 각자의 발이 맞지 않고 엉망이었지만, 계속 걷는 동안에 잘 훈련된 군인처럼 어느덧 정확히 발이 맞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키팅이 기쁜 듯이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바로 이거야! 이제 무슨 뜻인지 알겠나? 보라구! 하나, 둘, 셋..." 키팅은 그러면서 구두소리에 맞추듯이 손뼉을 쳐댔다. "어떠냐, 여러분. 키팅 선생의 시간이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니?" 이윽고 키팅은 네 명을 멈추도록 한 다음 확신에 가득찬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군들도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맨처음 녹스 오버스트릿과 피츠는 다른 두사람과 전혀 맞지 않는 동작으로 시작해었다. 피츠는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상태로, 오버스트릿은 약간 꺼벙한 느낌을 주는 걸음이였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네 명의 걸음걸이가 맞아들어가기 시작했고, 보는 사람이 손벽을 쳐서 선동하자 그 변화가 더욱 기증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했다. "내가 이 실험을 하게 된 목적이 있다. 그건 피츠와 오버스트릿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을 것인가 하는 게 아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누구든 타인과 가까이 있을 경우 자신만이 내면세계 및 신념을 굳게 지키기 어렵다는 사실이 그 실험으로 성공되었다는 키팅의 설명이었다. 학생들은 비로소 키팅의 목적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만일 그 가운데 자신은 충분히 독자적으로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사람이 있으면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 보라는 것이었다. 즉 학생들은 키팅에 동화되어 자신도 모르게 함께 손벽을 쳤던 것이다. 키팅은 계속 설명했다. "인간한테는 다른 사람이 받아 줄 것을 원하는 강한 욕구가 있다. 하지만 자신이 독특한 개성이나 타인하고의 차이점을 인정해야만 하기 때문에 까다롭다고 해도 말이다." 그는 로버트 프루스트의 말을 인용했다. '숲 속에서 두 갈래의 길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길을 택했다.' 이날의 수업도 대성공이었다. 학생들은 종이 울린 다음에도 한동안 꼼짝않고 선 채 키팅의 설명을 음미했을 정도였던 것이다. 황홀한 순간 그날 밤. 죽은 시인의 사회 회원들은 동굴 속에 있었다. 앤더슨, 니일, 카멜론, 피츠, 믹스 등이 모여 모닥불 주위로 둥글게 앉아 있었다. 짙게 내려앉은 안개가 동굴 속에까지 새어들어 왔고 숲의 나무들이 바람에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이 밤의 모임은 랄튼이 제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본인이 아직 나타나지 않자 카멜론이 심하게 투덜거렸다. "랄튼 녀석 어찌된 셈야? 모이라 더니 자기는 나타나지도 않고 말야." 그 시간에 오버스트릿은 크리스가 말한 체트의 파티에 가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는 중이었다.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결국은 랄튼이 나타나기 전에 니일이 개회 선언을 하고 말았다. "내가 숲 속에 틀어박혀 있어야 하는 이유는, 대지에 깊숙히 뿌리내리고 싶었기 때문일 뿐...사려 깊게 생의 정수를 마음속 깊이 맛보기 위하여..." 문득 숲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니일은 말을 멈추며 귀를 기울였다. 니일 뿐아니고 모두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바람소리가 아니었다. 모두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다가 갸우뚱했다. 그런 소리가 이런 시간에 숲에서 들린다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그것은 분명히 어떤 젊은 여자의 웃음소리였다. 더구나 그 소리는 동굴을 향해 다가오더니 이윽고 동굴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무것도 안보이잖아."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동굴 안으로 울려 퍼졌다. 모두 깜짝 놀라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의문은 곧 풀렸다. "이제 다왔어. 바로 여기야." 뜻밖이었다. 랄튼이 두 여자와 함께 모닥불에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들 와 있군." 랄튼이었다. 젊은 두 여자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이상한 분위기에 매료되어 미소를 지었다. 학생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랄튼은 보라는 듯이 금발의 예쁘게 생긴 아가씨 어깨를 감싸듯 안으며 소개했다. "이 쪽은 글로리아, 그리고 저 쪽은 티나야." 티나라고 소개를 받은 검은 머리에 아름다운 두 눈을 가진 아가씨는 몹시 어색한 표정과 함께 들고 있는 캔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랄튼은 다시 두 여자한테 친구들을 소개했다. "글로리아, 그리고 티나, 여기 있는 친구들은 죽은 시인의 사회 미공인 회원들이지." "이상한 사회도 다 있네? 무슨 뜻인지 설명해 주겠지?" 글로리아였다. "그건 비밀이라고 했잖아." "정말이지 엉뚱한 사람도 다 보겠다니깐." 글로리아는 언뜻 보기에도 정숙한 여자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교태가 섞인 콧소리를 내며 서슴없이 랄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학생들은 도깨비에라도 홀린 듯이, 신기한 무엇을 발견하고 있는 듯이 멍청해져서 바라볼 뿐이었다. 분명히 연상의 여자들이었다. 최소한 스무 살은 됐거나 지났음직 했다. 모두 랄튼이 어디서 그런 여자들을 꼬셔 왔는가에 대해 일제히 관심을 집중시켰다. 랄튼이 글로리아한테 아예 몸을 완전히 기대자 학생들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봐,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 찰리 랄튼은 모두를 향해 자랑스러운 투로 말을 계속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의 정열적인 체험 정신을 깊히 존중하기 위해서 나는 이 시간부터 찰리 랄튼이라는 이름을 완전히 버리도록 하겠다. 그러니 이 시간부터는 나를 누완다라고 불러 주면 고맙겠다." 학생들은 야릇하게 킥킥 웃는 두여자를 비로소 발견한 듯이 가볍게 탄성 소리를 냈다. "우리까지도 찰리라고 부르면 안된단 말이니?" 글로리아는 더욱 대담하게 랄튼의 목을 팔로 휘감았다. "누완다란 무슨 뜻야?" "내가 충분히 생각하고 검토한 끝에 만든 이름야." "난 춥단 말이야..." 글로리아는 완전히 몸을 랄튼한테 밀착시키고 있었다. "나무 가지를 더 모아다가 불을 피워야겠어." 믹스가 그렇게 말하자 다른 친구들도 동의하며 함께 동굴에서 나갔다. 랄튼은 심상치 않은 표정이 되더니 동굴의 한쪽 벽으로 가서 얼굴에 흙칠을 했다. 이어 그는 유혹적인 눈길로 글로리아를 응시했다. 그때 두 여자는 자기들끼리 무엇인가 낮게 속삭이며 심상치 않은 미소를 조용히 흘렸다. 바야흐로 수상쩍은 일을 계획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때 동굴 밖 숲에서는 학생들이 불피울 수 있는 나뭇가지를 모으고 있었다. 언제 나왔는지 랄튼도 함께였다. "야, 랄튼." 니일이 부르자 흙을 칠한 랄튼이 인디언 같은 얼굴로 재빨리 정정했다. "누완다라니깐." 니일은 웃으며 정정해 주었다. "좋아, 누완다. 대체 어떡할 작정으로 이러는 거니?" "복잡하게 생각할 거 하나 없어. 네가 여자들을 데려오는 일에 적극적으로 반대한다면 문젠 다르지만 말야." "물론 결사 반대는 아니지만...그런데 어디서 그 여자들을 만났지?" "축구장 근처에 있는데 나한테 말을 걸어오는 거야. 이 학교에 흥미가 있다나, 그래서 우리의 모임에 데려온 거라구. 그것 뿐야." 랄튼이 능글맞을 정도로 태연히 말하자 곁에 있던 카멜론이 물었다. "헨리 홀에 다니는 학생야?" "학생 같진 않아." 랄튼의 대답이었다. "그럼 이 근처에 살고 있나?" "이봐, 카멜론. 자꾸 물어서 뭘 어쩌겠다는 거니? 저 여자들은 니네 엄마가 아냐, 알지? 그런데 설마 벌써부터 겁을 집어먹고 그러는 건 아닐 테지?" "내가 두려워해? 천만에, 당치도 않은 소리. 난 말야...난 그냥 같이 있는 광경을 혹시 들키기라도 하면 좋지 않다는...그래, 큰일이라는 생각 때문에..." 카멜론은 태연한 척하려 했으나 분명히 겁먹은 얼굴이었다. 난생 처음, 그것도 밤중에 수상쩍은 곳에 여자들과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기대와는 상반된 공포심이었다. 그때 동굴 쪽에서 글로리아가 이쪽을 향해 소리쳤다. "얘들아, 거기서 모두들 뭐하고 있는 거니?' "땔감을 모으는 중야!" 랄튼이 마주 소리쳤다. 카멜론은 빨리 동굴로 가자고 속삭였다. "카멜론, 너 조심하는 게 좋아." "뭐라구?" "걱정할 거 하나 없어. 아무리 진한 짓을 해도 뒷탈이 생길 여자들은 아니니까 쓸데없는 소릴랑은 삼켜 두는 게 좋아, 멍청아." "뭐야? 말 조심해, 랄튼!" "랄튼이 아냐. 누완다야!" 잠시후 그들은 나무를 구해서 다시 동굴로 들어왔다. 거의 꺼져가던 모닥불에 나무를 넣자 불길이 활활 새롭게 피어올랐다. 글로리아와 티나는 다시 은밀한 시선을 교환했다. 무언의 약속을 다짐하는 게 분명했다. 자신보다 아래인 남자 학생들을 상대로 짜릿한 순간을 맛보고 싶어하는 관능적 의미가 담긴 듯했던 것이다. "오버스트릿 말야, 그 녀석 지금쯤 재미 좋을까? 피츠였다. "가엾은 녀석..." "지금쯤 묵사발이 됐을지도 몰라. 상대는 풋볼 선수랬잖아."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걱정이야." 니일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녹스 오버스트릿. 죽은 시인 사회 회원들이 동굴에 있을 때였다. 오버스트릿은 자전거에 올라타고 힘껏 페달을 밟았다. 교정을 빠져나가 그 길로 던베리의 저택까지 직행했다. 한껏 차려입은 양복을 다시 손질한 그는 뛰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현관의 벨을 눌렀다. 집안에서 시끄러운 소음이 밖에까지 훤히 들려 오는 중이었다. 소음 때문에 초인종 소리조차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두번째로 응답이 없자 오버스트릿은 문을 앞으로 당겨 보았다. 다행히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긴장된 마음에서 안으로 들어서던 그는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의 광경에 깜짝 놀랐다. 상상을 초월하도록 대담하면서도 놀라운 파티가 한창 고조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의 눈에 맨 먼저 들어온 광경이 있었다. 현관과 가까운 소파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은, 한쌍의 남녀가 애정 영화의 한 장면처럼 뜨겁게 포옹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에로틱한 광경이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집안에 있는 의자나 소파 심지어 홀에 양탄자 위에서까지 온통 뒤엉킨 남녀의 다 드러난 몸뚱이가 뒹굴고 여기저기서 이상야릇한 특히 여자들의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한결 같이 주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이 있을 뿐이고, 현재의 행위가 중요할 뿐이라는 듯한 난잡한 분위기였다. 어떤 여자는 거의 알몸인채 사내의 품에 안겨 노골적인 애무에 허리를 뒤로 꺽으며 기묘한 소리를 토해 내기도 했다. 오버스트릿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눈앞이 캄캄했다. 당연히 그 자리에 서서 어느 광경도 똑똑히 바라보지 못했다. 눈길은 마음놓고 보낼 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크리스가 부엌으로부터 나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찌된 일인지 전날에 곱게 다듬어졌던 머리카락이 몹시 헝크러진 모습이었다. "크리스!" 오버스트릿은 앞뒤 가릴 것없이 구원의 여신을 만난 듯이 소리쳤다. 다행히 크리스는 그를 금방 알아보았다. "어머, 어서와. 언제 왔어?" "방금..." "와 줘서 반가워, 오버스트릿. 누구하고 함께야?" "나 혼자야." "그럼 버지니아가 어디 있을 테니 찾아봐." "그게 아니고, 난 너한테...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오버스트릿은 더듬거리면서도 집안이 떠나갈 듯이 시끄러운 음악 소리 때문에 언성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난 체트한테 가 봐야 돼. 그럼 즐겨 봐. 맘껏." 크리스는 더 듣지도 않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순간 오버스트릿은 맥이 탁 풀렸다. 그런 꼴이 되려고 찾아간 그가 아니었다. 전화 통화를 했을 때만 해도 크리스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다. 완전히 패배자가 됐다는 생각이 그를 괴롭게 했다. 쉽게 떨쳐 버릴 수 없는 괴로움이었다. 버지니아를 만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차라리 오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이 그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넋빠진 사람처럼 어슬렁거리던 그는 어느 곳에선가 몇 명의 젊은이가 서서 얘기하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곁에서는 또 한쌍의 남녀가 농도 깊은 키스신을 연출하고 있었다. 남자는 연거푸 여자의 스커트 자락을 들추고 들어가려 했다. 그럴 때마다 여자의 속살이 엉덩이까지 드러났으나 한사코 여자에 의해 거절당하고 있었다. 그때 오버스트릿을 발견한 덩치 큰 놈이 술취한 눈으로 바라보며 불쑥 말을 걸어왔다. "매트 샌더슨의 동생이냐?" "아니..." 오버스트릿을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이, 보브!" 상대는 친구인 듯한 사내한테 엉뚱한 말을 건넸다. "이 자식 좀 봐. 매트 샌더슨 닮았지?" "동생야?" 보브라는 사내가 묻자 오버스트릿은 다시 아니라고 얼른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커다란 수난이 시작된 사실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상황은 기괴하게 진행되었다. 그들은 오버스트릿을 무조건 매트 샌더스라는 정체 불명의 사내 동생으로 인정해 놓은 다음 곁으로 불러 이상한 의식을 시작했다. 술마시기 위한 곤드레 의식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세 명의 덩치 큰 사내들은 무조건 술잔 세 개를 준비한 다음 거기에 술을 부었다. "매트를 위해서 건배!" 오버스크릿은 그곳으로부터 도망치거나 빠져나갈 용기가 없었다. 원래 공부만을 알고 있는 그였다. 덩치크고 우악스러운 그들의 비위를 거슬리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크리스로 인해 충격받은 그는 될대로 되라, 식으로 술잔을 들며 맞장구를 쳤다. "매트를 위해서!" 그들이 술을 단숨에 들이키자 오버스트릿은 얼떨결에 똑같이 행동했다. 순간 숨이 막히고 입안에 불길이 당겨진 듯했다. 그가 마신 술은 독한 위스키였던 것이다. "요즘 매트는 어떻게 지내나?" 한 사내가 다시 물었다. "정, 정말이지 난 모르는 사람...정말 몰라." 상대는 완전히 매트의 동생으로 결정지어 놓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잔에 술을 채웠다. "천하장사 매트를 위해 건배!" 일제히 술잔을 쳐들며 오버스트릿을 재촉했다. 기가 막힐 일이었다. 그래도 따라 할 수밖에 없는 오버스트릿은 딱한 입장이었다. "처, 천하장사 매, 매트를 위하여..." 심하게 기침이 나오는 데도 불구하고 두번째 잔을 단숨에 들이키자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으며 더욱 심한 기침이 터져나왔다. 그런 식으로 잇달아서 세 잔이나 되는 독한 술을 들이킨 오버스트릿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 빠져 휘청거렸다. 필사적인 노력 때문에 정신은 겨우 유지했지만 몸이 자신의 의지를 무시한 채 멋대로 흔들거렸다. "매트한테 안부 전해, 알았지?" "아, 알았어어..." 건장한 운동선수들은 거뜬했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은 오버스트릿뿐이었다. 그는 겨우 몸의 중심을 유지하는 가운데 방향도 없이 집안을 돌아다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분위기도 변했다. 대낮보다 밝던 불빛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대부분 술취한 남녀가 나름대로 구석진 곳에, 혹은 되는 대로 뒤엉켜 그야말로 에로 영화의 그룹 섹스 장면 같은 광경이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집안을 돌아다니던 오버스트릿의 발길에 채이는 게 있었다. "누구얏!" 거의 동시에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깜짝 놀라며 내려다보았다. 발밑에 한 쌍의 남녀가 뒤엉켜 있는 것을 비로소 발견했다. 그가 본 장면 중에 가장 난잡한 모습이었다. 그럴 수도 있으리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광경에 오버스트릿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여자의 풍만한 젖가슴은 완전히 드러난 채였고, 그 위에 엎드린 사내가 이번에는 여자의 팬티를 거의 다 끌어내리기 직전이었다. 언뜻 그 여자의 하반신의 중요한 부위에 짙은 숲이 오버스트릿의 눈에 들어왔고, 그는 그런 상태에 있는 사내의 한쪽 다리를 걷어 찬 셈이었던 것이다. "미, 미안해." 급히 사과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말이 제대로 되어 입밖으로 나와 주지 않았다. 머리 속이 현란해졌다. 확실히 충격을 받았다. 그는 에라 모르겠다라는 듯이 눈에 보이는 소파로 가서 털석 주저앉고 말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의 손에는 위스키 잔이 들려 있었다. 그는 털썩 주저앉은 다음 그 위스키를 또 들이켰다. 그동안 벌써 술에 익숙해진 탓일까. 처음처럼 목구멍이 따갑거나 기침이 나오지 않았다. 그보다는 짜릿하게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맛이 기분이 갑자기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또 마신 탓인지 어느덧 매우 대담해진 마음이었다. 바로 곁의 왼쪽에 있는 뒤엉킨 덩어리 쪽에서 여자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괴상한 소리였다. 짐승이 어떤 상태에서 내는 소리 같기도 했다. 오른쪽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대담하게 바라보았다. 좀 특이한 광경이었다. 거기서는 여자가 남자의 위에 웅크리듯 이상하게 하고 있었다.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여자는 뭐라고 중얼거리거나 아니면 괴상한 신음소리 같은 것을 내면서 몸을 뒤틀었다. 그녀의 손은 남자의 혁대를 풀고 그 속에 깊숙히 들어가 있었다. 더 자세히 보면 남자의 손은 앉은 듯이 웅크린 여자의 하반신 밑에 들어가 이상하게 움직이고 거기에 따라 그녀가 몸을 괴로운 듯이 뒤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음악소리도 이젠 거의 잦아들고 있었다. 드디어 음악이 멈추었을 때, 놀랍게도 넓은 집안은 온통 남녀의 신음소리로 가득 찼다. 믿을 수 없었다. 오버스트릿은 얼른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돌연 무엇이 다리를 눌러 왔기 때문에 쉽게 일어설 수가 없었다. 내려가 보았다. 한 남녀가 뒤엉킨 채 굴러 와 거기에 있었다. 주위를 완전히 망각한 채 타오르는 욕정에 정신을 못차리는 광경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정확치 않았지만, 밑에 깔린 여자가 허리를 묘하게 마치 훌라춤이라도 추는 하와이 여자처럼 돌며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오버스트릿은 점차로 대담해지고 있었다. 당황과 초조, 놀라움에서부터 벗어난 그는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며 그런 광경을 여유 있게 둘러보았다. 비로소 완전한 알몸으로 남자한테 애무 받는 여자도 있음을 깨달았다. 너무 격정적이었다. 그 사내는 알몸의 여자를 무릎 위에 엉거주춤 앉힌 자세로 괴상한 몸짓을 했고, 여자는 때로 자지러질 듯이 등을 활처럼 휘어지게 하며 심하게 헐떡거렸다. 머리를 보아도 타오르는 욕정에 꿈틀대는 광경뿐이었다. 오버스트릿은 어느 틈에 자기만 파트너가 없다는 사실에 분했다. 파트너가 있었다면 그들처럼 멋진 섹스 게임을 벌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아쉬움에 어금니를 물던 그는 다시 오른쪽에 있는 남녀 쪽으로 천천히 눈길을 옮겨갔다. 그곳 남자는 여자의 몸을 먹어버리려는 듯했다. 입술에서 목으로 다시 풍만한 젖가슴을 멋대로 헤치며 정신없이 빨아 댔다. 아이가 젖먹는 듯한 소리가 뚜렷이 들렸다. 뜻밖에, 오버스트릿 옆에 그대로 쓰러지는 게 있었다. 술에 취한 탓인지, 어떤 환각 상태에 순간적으로 빠졌는지는 알수 없었다. 분명히 사람, 그것도 여자가 느닷없이 앉아 있는 오버스트릿의 무릎 위로 쓰러져 온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한 여자가 그의 무릎을 베고 소파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상태였다. 처음 어리둥절했던 오버스트릿은 다음 순간 그게 여자임을 알아차리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자세히 들여다보던 순간 그는 더욱 커다랗게 놀라고 말았다. 술취해 잠자는 듯이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여자는 금발이었다. 그것 뿐이 아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이 오버스트릿으로 하여금 순간적인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하게 위험 직전까지 몰고 같다. 크리스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녀가 얌전히 두눈을 감은 채 마치 키스를 기다리는 듯이, 아니면 더 적극적인 자극을 애타게 기다리는 듯이 무릎에 누워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눈을 의심한 것도 순간적이었다. 분명히 크리스였다. 다만 그녀가 무엇 때문에, 무엇을 기다리기 위해 그렇게 자신의 무릎을 벤 채 눈감고 있는지 통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내 오버스트릿의 머리 속은 빙글빙글 돌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나 싶어 새삼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와 함께 다시 눈에 들어온 광경은 오버스트릿을 더욱 곤욕스럽게 만들었다. 타는 듯이 빨간 크리스의 입술뿐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어떤 입술이 닿으면 정열적으로 반응할 것 같은 입술이 있고 또 다른 것도 있었다. 술 탓인지 고의적인지 알 수 없지만, 크리스의 윗옷섬이 많이 헝클어진 상태였다. 부풀어오른 두 개의 젖가슴이 거기에 있었는데, 봉오리만이 옷으로 가려졌을 뿐 탄력있는 젖가슴 거의 전부가 드러난 상태였다. 여자들이 그토록 신기하고 관능적이며 누르면 터질 듯한 젖가슴을 가졌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것은 신비롭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희미한 불빛에 보이는 그 살갗은 매우 자극적이었다. 다시 얼굴을 보았다. 분명히 무엇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르르 감은 두 눈과 약간 열린 입술 사이로 하얀 이가 비쳤다. 그것은 황홀하면서도 외설적인 광경이었다. 몸보다 가슴이 더욱 걷잡을 수없이 떨렸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야 좋을 것인가, 그런 기회는 평생에 한 번 뿐이다. 크리스는 지금 내가 어떻게 해 줄 때만을 기다리는 게 분명해. 수없는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그때 문득 키팅의 확신에 찬 말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기회를 놓치지 마라! 놓치고 나면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보라. 지금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를..." 오버스트릿은 다시 크리스의 젖가슴을 뚫어지도록 응시했다. 누완다의 용기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보다 자신도 모르는 강렬한 마력 같은 게 오버스트릿의 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때 크리스의 입에서 탄식하는 듯한, 애타게 기다리는 게 분명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또한 그 소리는 오버스트릿의 어떤 감정을 극도로 자극했다. 순간 오버스트릿은 천천히 상체를 굽혔다.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해 왔다. 향기 좋은 술냄새와 크리스의 신비로운 체취가 섞여 의식이 몽롱하도록 향긋한 냄새이었다. 조금 더 허리를 굽혔다. 서로의 입술이 막 닿기 직전이었다. 조금만 더 움직이면 두 입술은 분명히 포개지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서둘러 허리를 펴고 말았다. 왜 그랬는지,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의 손길이 목덜미를 뒤로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그때 다시 크리스의 입에서 묘한 더할 수 없이 에로틱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주위를 둘러 살폈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크리스의 입술과 무릎에 느껴지는 감각과, 그녀의 거의 드러난 젖가슴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오버스트릿의 몽롱해진 의식은 어느덧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 지조차 느끼지 못하도록 만들고 말았다. 그는 불타는 눈으로 노려보며, 천천히 팔을 뻗고 있었다. 무엇을 하려는지 자신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 손길은 크리스의 목덜미에 이르기 전에 잠깐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만졌다. 순간 세찬 흡인력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이어 목덜미를 도둑처럼 쓰다듬은 다음 탄력 있는 가슴을 향해 미끄러져 내려갔다. 크리스의 입에서 낮게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녀는 깊이 잠든 것 같지 않았다. 자신의 가슴에 닿는 손길을 느끼는 게 분명했다. 손길이 볼록한 가슴에 닿는 순간 파르르 경련을 일으킨 게 그 증거였다. 뒤에 가서 알게 된 일이지만, 그녀는 그 손길이 애인 체트의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반응을 나타냈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오버스트릿이었다. 잠시 손길이 그 황홀한 주위를 맴돌았다. 옷 위로 감싸듯 쥐어 보려고 하는 가하면 손끝으로 조금씩 눌러보기도 했다. 어디든 조금만 힘을 주어 누르면 금방 튕겨오를 듯한 탄력이 있었다. 크리스의 입에서 다시 연하게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녀는 더욱 적극적인 접촉이나 자극을 애타게 기다리는 듯했다. 오버스트릿의 가슴속 어느 깊은 곳으로부터 소리 없이 표효하는 소리가 울려 나왔다. 그의 손끝도 몹시 떨렸다. 금방 덥석 움켜쥐고 싶은 욕망과 함께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 그것들을 몰아내려는 관능적이고도 동물적인 욕정이 한꺼번에 뒤엉켜 머리 속을 윙윙거렸다. 어느 순간이었다. 오버스트릿은 다시 크리스의 얼굴 위로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훨씬 대담해져 있었다. 어떤 행위에도 겁내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이고 있었다. 이윽고 어느 지점에서 두 사람의 입술이 살짝 닿았다. 순간 오버스트릿은 몸서리를 쳤다. 전기에 감전된 듯이 흠칠 놀랐다. 하지만 처음처럼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대담하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크리스의 입술은 그의 입술을 거부하지 않았다. 어느덧 조금씩 열며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버스트릿은 거기서 용기를 얻은 듯이 힘껏 밀어붙이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어이, 저길 좀봐!"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오버스트릿이 미처 확실히 알아듣지 못했는때 두번째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런 체트 애인이잖아?" 오버스트릿이 드디어 알아차리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세 번째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남의 애인을 가로채는 저 녀석을 뭐야!" 크리스 역시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튕겨오르듯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와 오버스트릿의 눈이 마주쳤다. "어머나, 넌..." 오버스트릿은 어떻게도 할 수 없었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돌리자 또 다른 광경이 보였다. 덩치 큰 체트가 식식거리며 다가드는 모습이었다. 안돼, 도망쳐야 돼, 아니면 넌 맞아 죽게 돼. 돌아서 도망쳐... 소용이 없었다. 오버스트릿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윽고 체트의 우악스러운 손에 의해 멱살이 잡혔다. "이런 나쁜 자식 같으니! 감히 어디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오버스트릿은 체트의 성난 주먹 한 방에 저만치 뒤로 떠올라 바닥에 나가 떨어졌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다시 달려든 체트는 동댕이쳐진 오버스트릿의 위에 타고 앉아 마구 주먹을 날렸다. "체트!" 크리스가 비명을 지르며 뜯어말리려고 쩔쩔맸다. 오버스트릿은 한마디 변명도 못한 채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 되고 말았다. "그만해!" 크리스도 결사적이었다. "사람을 그렇게 때리면 어떡해! 아주 죽일 작정야?" "놔 둬, 크리스. 이런 자식은 패죽여야 해!" 체트는 성난 야수처럼 소리치고 있었다. "글쎄 그만 좀 해애!" 크리스는 커다랗게 소리치더니 드디어 두 사람의 사리로 끼어들며 양편으로 떼어놓았다. 오버스트릿은 흠뻑 얻어맞은 상태에서 비틀비틀 겨우 몸을 일으켰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닦을 입장도 되지못했다. "미, 미안해...나도 모르게 그만..." 그는 겨우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닥쳐!" 체트였다. "아직 덜 맞았냐? 더 맞아야 알겠어?" "제발 그만좀 해. 얘가 뭘 어쨌다는 거야?" 체트는 크리스의 말을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크리스한테도 잔뜩 화가 난 그였다. 오버스트릿의 애무와 키스를 고스란히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체트는 그 분풀이까지 오버스트릿한테 퍼붓고 있었다. "야! 더 터지고 싶잖다면 썩 꺼져 버려!" 체트는 금방이라도 표범처럼 덤벼들 기세였다. 크리스가 재빨리 중간에 끼어들어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곳을 피해 비틀비틀 문 쪽으로 향해 걸어갔다. "또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면 죽여버릴 테다." 그의 뒤에 대고 체트가 사납게 소리쳤다. 이 날은 웰튼 아카데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전교생을 강당에 집합하라는 지시가 노란 교장으로부터 내려졌는데, 니일 등 죽은 시인의 사회 그룹들은 아직 그 이유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학교 신문의 내용에 열중할 뿐이었다. 거기에는 저에 없던 특별 광고 기사가 실렸다. 그 문제 때문에 학교 측이 크게 당황한 나머지 단호한 조치를 취하기 위하여 전교생을 강당에 집합시킨 것이다. 니일, 앤더슨, 믹스, 카멜론, 랄튼 그리고 잔뜩 얻어맞아서 퉁퉁붓고 멍든 얼굴을 감추려는 오버스트릿은 학교 신문을 펼쳐 놓고 저희들끼리 무엇인가 수군거렸다. 간밤 동굴에서 여자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웠던 랄튼은 누구보다 피로한 기색이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글로리아라는 여자를 안아 보려 했으나 곡절 끝에 실패하다 보니 심신이 극도로 피로했던 것이다. 노란 교장이 나타나자 학생들은 얼른 학교 신문을 감추며 다른 학생들과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노란 교장은 매우 성난 걸음으로 강단에 오른 다음 손짓으로 학생들이 다시 자리에 앉도록 했다. "금주 웰튼 신문에..." 노란 교장은 헛기침을 하면서 장중하게 말했다. "웰튼에도 여학생이 필요하다는 독단적이고도 모독적이라고 할 기사가 실렸다...." 일제히 긴장하는 가운데 학교 신문을 만드는 주역 멤버인 니일 등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로소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러한 일은 시간 낭비라고 해서 그냥 덮어둘 수는 절대로 없는 일이다. 맹세코 어떤 일이 있어도 범인을 색출, 규칙에 따라 처벌할 작정이다..." 분위기는 더욱 긴장되었다. 학교 신문과는 무관한 학생들조차 노란 교장의 단호한 말에 긴장된 얼굴이었다. 니일 등은 이크 싶은 표정으로 숨을 죽였다. 노란 교장은 하지만 이 기회에 문제의 기사가 실리게 된 자초지종을 알고 있는 학생의 자수에 대해서는 선처할 것임을 밝혔다. 그 학생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순간이 웰튼 아카데미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임을 밝힌다는 선언을 강력하게 했다. 조용했다. 물을 끼얹은 듯했다. 입을 굳게 굳게 다문 채 반응을 기다리는 노란 교장의 시선이 학생들에게로 곧장 향하더니 이윽고 파고들 듯이 느릿느릿 휘저갔다. 그러나 역시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누구 하나 손드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모종의 준비를 해 두고 있는 니일의 그룹도 침묵을 지켰다. 그들은 자신이 해 놓은 일에 대해 나름대로 어떤 긍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조용한 강당 안의 침묵이 갑자기 깨어졌다. 돌연 어디선가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침묵 때문인지 강당 안을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커다랗게 들렸다. 강당 안에 그것도 학생들 사이에 전화기가 있을 리 없기 때문에 노란 교장은 이내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현실적인 어떤 일은 그의 생각을 뛰어넘고 말았다. 그 안에 전화기가 있었다. 찰리 랄튼이었다. 그는 미리 준비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 뜻밖에도 전화기가 있었다. 주위에 있던 다른 학생들이 깜짝 놀라며 웅성거렸다. "웰튼 아카데미입니다. 아, 계십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모두의 귀에 들리도록 일부러 큰소리로 말한 그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노란 교장을 향해 곧바로 말했다. "교장선생님, 전화왔습니다." 정중한 랄튼의 말투에도 불구하고 노란 교장의 얼굴은 격심한 노여움 때문에 시뻘겋게 된 상태였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랄튼은 씩씩거리는 노란 교장을 향해 다시 커다랗게 말했다. "하느님으로부터의 전화입니다. 그 분께서는 웰튼에도 여학생이 들어와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금방 강당 안이 폭소로 가득 찼다. 맙소사! 하며 두손으로 머리를 움켜쥐듯 하는 니일 등과 달리 영문을 모르는 학생들은 기상 천외의 코미디를 보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랄튼은 끝까지 침착했다. 그는 보라는 듯이 다시 수화기에 대고 몇 마디 더하는 듯하더니 침착하게 수화기를 내려놓고 있었다. 찰리 랄튼이 교장실로 직행하도록 벼락같은 명령이 떨어진 것은 매우 당연한 귀결이었다. 노란 교장은 아직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치 못해 랄튼의 주위를 서성거렸다. 랄튼은 여전히 자신만만한 얼굴에 미소까지 나타내고 있었다. 솔직히 두려운 상태였지만, 두 다리가 후둘후둘 떨리도록 무서웠지만 그렇게 가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미 노란 교장의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을 결심이었다. 아무리 퇴학 처분이라는 흉기를 들이대고 협박해도 굳세게 버틸 작정이었다. "너 말고 또 누가 있지?" 몇 번째 반복되는 질문이었다. "아무도 없습니다." 노란 교장이 노려보았다. "저 혼자서 계획한 일입니다." "어떻게 너 혼자서 그런 기사를 학교 신문에 냈지?" "교정을 보다가 다른 기사를 배고 거기에 제가 쓴 기사를 바꿔넣은 겁니다." "이봐, 랄튼." 지나치게 화난 노란 교장은 오히려 침착해져 보였다. 그는 빈정거리려는 듯이 보였다. "혹시 말야, 이 학교에서 퇴학당할 목적으로 그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했다면 그건 오산야." "?..." "그런 생각 때문에 일을 저지른 학생은 너 뿐이 아냐. 지금까지 여러 명이나 나타났단 말야. 하지만 모두 실패했지. 너 역시 다를 바 없다는 걸 명심해라." 거기까지 말한 노란 교장은 돌연 태도를 바꾸더니 랄튼으로 하여금 책상에 두 팔을 짚고 엎드릴 것을 매섭게 명령했다. 늙었지만 아직 기력이 왕성한 노란 교장은 저고리를 벗어 젖혔다. 교장실에는 특수한 학생들을 떡패듯 두둘겨패는데 아주 적합한 물건이 있었다. 두꺼운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마치 밥주걱을 몇 배로 확대해 놓은 모양이어서 가히 그 충격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큰소리로 수를 세도록 한다." 매질이 시작되었다. 두툼한 나무판대기 같은 게 철썩 내려치는 순간 랄튼은 엉덩이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비굴하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 물었다. "하나." "철썩!" "두울." 첫번째보다 두번째는 더욱 아팠다. 노란 교장은 팔을 휘둘러 치는 횟수가 더해감에 따라 팔에 힘이 용솟음치는 모양이었다. 넷까지 세었다. 랄튼의 목소리는 목구멍 속으로 기어들어 가려 했다.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일그러졌다. 매질은 언제까지 계속될지 아무도 몰랐다. 맞는 랄튼도 때리는 노란 교장도 몰랐다. 어느 한편이 굴복하기 전까지는 강행될 가능성이 높았다. 일곱번째 세었을 때였다. 랄튼의 엎드린 두 눈에서 굵은 눈물 방울이 툭 떨어졌다. 일곱,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헤아려!" 겨우 모기 소리만 하게 일곱, 여덟에서 열까지 갔을 때였다. 랄튼의 엉덩이 뿐아니라 목소리까지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랄튼군." 교장의 목소리가 믿을 수 없게 부드러워졌다. "..." "그래, 아직도 그 일을 너혼자 했다고 고집할 테냐?" 랄튼은 이제 화가 나 있었다. 맘대로 때려 보라지, 내가 이 걸로 죽진 않을 테니까, 하는 반항심으로 아픈 엉덩이 못지 않게 분노가 들끓었다. 그는 단호히 대답했다. "혼자서 했습니다." "그래? 좋다. 그렇다면 이건 알겠지. 죽은 시인의 사회란게 뭐지? 그 멤버가 누구누군지 밝혀라." 랄튼은 문제가 거기까지 왔구나 싶어 은근히 놀랐다. 어떤 녀석이 고자질 한게 분명하다고 느껴지자 친구들의 얼굴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한편 교장실 밖의 다른 곳에 있는 니일 등은 친구의 아픔에 대해 잔득 겁에 질린 상태였다. 랄튼의 비명 섞인 소리가 들려 올 때마다 등골에 소름이 오싹했다. 필사적인, 그보다 안간힘을 다해서 버티고 있는 랄튼은 의식이 흔미해지는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금니를 악물었다. "어서 대답해!" "맹세합니다." "뭘 말이지?" "저 혼자서 한 일입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그것도 제가 만들어 낸 저만의 서클입니다." 노란 얼굴 표정이 순간적으로 사납게 일그러졌다. 이어 다시 그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 자신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떻게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는 최후의 통첩처럼 똑똑히 말했다. "분명히 말해 두겠다." 랄튼은 그쯤에서 매질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너 외에 또 다른 멤버가 있는 사실이 밟혀질 경우, 그 때는 모두 퇴학 처분을 내릴 것이다. 아울러 너 혼자만 이 웰튼에 남게 될 텐데, 그래도 상관없지?" "..." "일어섯!" 랄튼은 태연히 보이려고 노력하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느껴진 지독한 아픔과 치욕 대문에 와락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필사적으로 참아야만 했다. 끝으로 노란 교장은 한가지 특별한 아량을 베풀겠다는 듯이 랄튼에게 말했다. 랄튼은 귓등으로 들은 후 교장실을 나왔다. 무지무지한 아픔 때문에 제대로 일어서기조차 힘들었지만, 그 정도에서 끝났다는 안도감에 다소는 위로가 되었다. 그가 교장실을 나왔을 때였다. 언제 왔는지 니일, 앤더슨, 피츠, 믹스 등이 기다리고 있다가 조용히 다가오며 뒤따랐다. "어떻게 됐니?" 니일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친구가 받은 고통과 치욕에 공감하고 있었으며, 또한 죽은 시인의 사회에 대한 애착심 때문에 심리적인 부담을 가장 크게 안고 있었다. 랄튼은 대답없이 절룩거리며 자기의 방으로 향했다. "많이 아프지?" "..." "혹시 퇴학..." "아니." 랄튼은 짧게 퇴학은 아니라고 밝혔다. "그럼 어떻게 됐니?" 니일은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친구의 고통과 치욕은 물론 또 다른 문제를 걱정하는 것이다. 랄튼은 자기방 앞에까지 가서야 돌아서며 친구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관계자 전원의 이름을 밝힌 다음 전교생에 대한 반성문을 쓰면 용서해 준다는 거야." 노란 교장이 특별히 배려하는 듯이 제시한 조건이 그것이었다. 랄튼은 이어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니일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니. 그러기로 했니?" "그만해 둬." "?..." "누가 뭐래도 난 누완다란 말야, 니일. 알겠니?" 랄튼은 친구들의 얼굴을 휘익 둘러보더니 방으로 들어가 거칠게 방문을 닫아 버렸다. 니일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미소를 지었다. 친구의 아픔을, 치욕을 모르는데 아니었다.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랄튼의 용기에 대해 진심으로 찬사를 보냈다. 그가 모든 비밀을, 매맞는 게 두려운 나머지 모든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 굳건한 의지에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집중력을 길러라 진실한 마음과 마음이 맺어지는데 무거운 짐이라느니 하는 말은 삼가해 주오 사랑은 형편에 따라서 바뀌는 게 아니고 지우려 해도 지우기가 어려운 것이니 그래 사랑은 지워지지 않는 흔적 같아서 태풍이 몰아쳐도 미동조차 않는 사랑은 거대한 바다에 떠 있는 배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별 그 고상함은 알려져 있어도 그 무한한 가치는 측정하기 어려우니... 랄튼이 열 대의 지독한 매질을 당했던 그 밤이었다. 키팅 선생이 예고도 없이 기숙사로 랄튼을 찾아왔다. "랄튼, 나좀 보자." "키팅 선생님." 랄튼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이 휘둥그래졌다. 키팅은 대뜸 심상치 않은 말을 꺼냈다. "어리석은 연극이었어, 그건." "네에?" "강당에서 말야." 키팅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엄숙하게 들렸다. 이미 그 뜻을 알아차린 랄튼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키팅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 말씀을...교장선생님 편을 드시는 건가요?" 키팅이 대답하기 전에 랄튼이 계속해서 물었다. "선생님은 카르페 디엠, 그리고 생의 정수를 마음 속 깊이 느껴 보라고 하셨죠?" "그랬지." "그럼 그게 무슨 뜻이죠?" "그것과는 달라." "어떻게요?" "생의 정수를 진정으로 느끼게 되는 것과 자기 자신이 좋다고 우겨대는 것하고는 달라..." 대담성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신중함이 요구될 대도 있다는 것이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구별을 할 수 있어야 된다는 키팅의 말이었다. "그렇지만..." 랄튼은 더듬거렸다. "그렇지만 전...선생님, 전..." 키팅이 어물거리는 랄튼의 다음 말을 무시하듯 입을 열었다. "잘 들어, 랄튼." "?..."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는 일은 현명한 행동이 아냐. 용기 있는 행동도 물론 아니고 말야." 즉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웰튼 아카데미에서는 다른 학교에서 누릴 수 없는 특전이 아직 남았다는 키팅의 말을 랄튼은 얼른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뜻이죠?" 은근히 약이 오른 랄튼은 예를 들어보도록 키팅을 다그쳤다. "말해줄까?" "물론이죠." "다른 건 놔두고라도 나한테 강의를 받을 수 있다는 것, 그게 특전이 아니겠니?" "그럼은요." 랄튼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를 나타났다. 키팅의 얼굴에서도 엄숙함이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학생들의 다정한 형님 같은 표정이 자리잡았다. 그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초조하게 지켜보는 니일 등의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제군들." 일제히 키팅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뜻을 드높이게, 알겠지?" "췽!" 일제히 대답했다. 키팅은 이번에는 짖궂은 친구와도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곧장 돌아서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다음날 국어 시간에도 키팅은 또 새로운 수업 방식을 동원해서 학생들을 열광시켰다. '대학' 키팅의 백묵으로 칠판에 커다랗게 휘갈긴 글자였다. "제군들." 그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은 대학교에서의 생활을 풍요롭게 결실 맺기 위해서는 어떤 기술이 과연 필요한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읽어보지 않은 책을 분석하는 방법'이라는 테마에서 학생들의 호기심은 한껏 곤두섰다. "대학이란 시에 대한 너희들의 애정을 파괴할 수도 있다. 다분한 분석이나, 해부, 비평 등등으로 비추어 알 수 있다. 하지만 대학은 너희들한테 다양한 문학의 장르를 가르쳐 주기도 한다. 그 많은 문학 작품 중에는 반드시 읽어야 할 뛰어난 작품도 있지만 인간을 병들게 하는 나쁜 작품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키팅은 이야기하면서 칠판 앞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다시 저쪽에서 이쪽으로 걸어다녔다. "만일, 현대의 소설이라는 주제의 강의를 듣고 있다고 치자. 너희들은 학기 동안 계속 감명 깊은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이나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등의 세계 문학사에 빛나는 명작들을 읽어야 할 게 분명하다. 그렇긴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야기에 심취된 표정으로 계속했다. 학생들의 두 눈은 호기심으로 한없이 빛나고 있었다. "만일 어떤 책을 불과 한 페이지밖에 읽지 않았는데, 그 책의 추잡함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며 머리 속을 더럽히는 것보다는 아예 군대에 자원입대하는 편이 좋다는 판단이 내려졌다고 하자." 여기서 키팅은 두 가지 의문을 제시했다. "세상이 온통 끝나 버린 듯이 절망할 것인가?" "F학점이라도 기꺼이 받을 수 있을까?" 그 의문점을 미리 연습해 두자는 것이었다. 학생들의 눈빛은 더욱 빛났다. 커다란 기대에 가득찬 가슴도 한없이 부풀었다. 그만큼 어떤 강의에 열중했던 시간이 언제 또 있었던가 싶을 정도였다. "학기말 최종 리포트인 '의심스러운 얼굴'을 꺼내 그 표지에 인쇄된 문구를 읽어보도록 하자. 거기서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가 강렬한 여자 크리스틴과 그녀가 간절히 바라는 사교계로의 데뷔에 대한 꿈을 이룩시켜 주기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하는 농기구 외판원 프랭크와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에 리포트를 쓰게 되는데..." 먼저 내용을 레포트에 반복해서 적을 필요는 없다고 기록하는 한편, 실제로 통독했다는 점을 교수가 알도록 해야 되는 만큼 표지에 소개된 줄거리의 요약을 적당히 섞어서 기록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놓은 다음에는 잔뜩 허풍을 떨어대면 되는 거야." "어떻게요?" 한 학생이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예를 들겠다. 그러니까..." 키팅은 실제로 다음과 같은 리포트 내용을 예로 들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지은이의 박진감 넘치는 필력으로 묘사된 부모의 사랑과 현대 프로이트 학파의 이론 사이에서 발견하게 되는 유사성이다. 크리스틴은 마치 엘렉트라이고 아버지는 타락한 외디프스나 마찬가지이다." 그런 식으로 쓰면 된다는 키팅의 설명은 학생들의 가슴에 쉽게 전달되었다. 그 책 내용의 밑바닥에 흐르는 아베슈 라테슈난의 사상과 기이하게도 일치된다는 사실인 것이다. 라테슈난이 고행끝에 얻은 엄청난 결과를 상세히 기술해 놓은 것을 검토해 보면, 부모를 버리게 되는 원인은 머리가 세 개달린 괴물, 다시 말해서 돈과 야심 그리고 사회적 성공에 대한 지나친 욕심 때문이라는 사실이 명백하다는 것을 특히 강조했다. 키팅은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그런 다음으로는 어떤 게 그 괴물을 살찌도록 만드는지, 어떻게 해야 괴물의 머리를 잘라 버릴 수 있을까 등등의 여러 문제에 대하서는 라테슈난의 주장을 음미해 보면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맨끝에 이르러서는 교수의 뛰어난 문장과 함께 의심스러운 세 얼굴을 소개해 준 교수의 용기를 칭찬해 주면 된다는 결론이었다. "응, 선장님!" 믹스가 최초로 질문하기 위해 손을 번쩍 쳐들었다. "뭐지?" "라테슈난이라 하는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를 때에는 어떡해야 되죠?" "라테슈난은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다, 믹스, 필요할 경우 그 대신으로 다른 인물을 꾸며내면 된다. 잘난 척하는 교수들 가운데는 그런 위대한 인물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말할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래놓으면 믹스 너 역시 나하고 똑같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된다." 키팅은 이어 교탁에 있던 종이를 쳐들고 다음과 같은 평점 내용을 큰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라테슈난의 간접적인 언급은 풍부한 통찰력으로 매우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위대하면서도 망각되어 가는 이 동양의 거인을 본인 외에도 기억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다." '평점 A플러스.' 키팅은 그 종이를 다시 교탁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계속했다. "자아, 수준에 미달하는 책을 읽지 않고서도 분석하는 것은 학년 말 시험으로 돌리기로 하겠다. 그러니 각자 연습을 충분히 해두도록, 또한 그 외에도 대학의 시험에는 몇 군데나 되는 함정이 있다." "그게 어떤 겁니까?" 니일이었다. "그걸 지금 당장에 시험치르도록 하겠다. 각자 답을 쓸 용지와 연필을 준비하도록." 이어서 키팅은 각자한테 문제지를 한 장씩 나누어주었다. 그런 후에 스크린을 설치하고 자신은 학생들의 뒤로 갔다. 슬라이드 영사기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어 다시 말했다. "맘모스 대학이라고 하는 곳은 말이다. 웰튼에서 도저히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생물이 자라고 있는 악덕의 도시이다. 그 생물의 이름은 바로 여자이다." 키팅은 잠깐 웃은 다음 설명을 이어 나갔다. "여자라는 이름의 생물은 위험스러울 정도로 우리들의 정신 집중을 방해하는 존재이다. 그렇지만 잘 들어라..." 여자라는 생물 이야기가 학생들의 호기심에 더욱 부채질을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 시험에서는 너희들이 그런 점에 있어서도 익숙해 질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해 두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 시험의 결과는 성적에 방영되는 것이니만큼 이점 특별히 명심하도록 해라." 시험이 시작되었다. 학생들이 답안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키팅은 그들의 뒤에서 영사기에 슬라이드를 기운 다음 스위치를 넣었다. 핀트 조정이 끝나자 스크린에 나타난 것은 아름답고도 매력적인 어느 여대생의 팬티가 살짝 드러났다. 아슬아슬하게 중심부분만을 겨우 가린 손바닥만한 천조각의 일부가 보인 것이다. 답안지를 작성하던 학생들의 시선이 스크린으로 집중됐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차 하면 재빨리 답안지로 되돌아 왔다. 키팅은 벌써 알아차리며 넌지시 충고했다. "정신 집중, 집중! 그래야 문제를 풀 수 있다. 이제 남은 시간은 20분뿐이다." 그는 슬라이드를 다른 것으로 바꾸어 넣었다. 이번의 광경은 더욱 흥미를 끌만한 것이었다. 잡지의 광고 같은 데서 흔히 보게 되는 광경이다. 즉 전신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속옷으로 겨우 가리고 있는 미녀였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노부라였기 때문에 유방이 똑똑히 보이고 있었다. 학생들은 그만 필사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답안지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럴수록 두 눈은 자꾸자꾸 스크린을 향해 달려가려 했다. 키팅의 얼굴에 유쾌해 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그는 심한 갈등에 사로잡힌 학생들의 내부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슬라이드를 바꾸어 넣었다. 거의 알몸으로 드러낸 채 도발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미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동굴 속에서 보았던 그것보다 더욱 대담한 포즈였다. 유방의 매력을 최대한의 관능미로 승화시켰을 뿐아니라 하반신까지 신비로운 곳이 살짝 비치는 광경이었다. 그리스 조각상의 나체의 여자도 등장했다. 조각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실물보다 오히려 더욱 생동감이 넘쳤다. 특히 정교하게 다듬어 놓은 양쪽 유방 뿐아니라 여성의 성기는 마치 살아있는 여성의 그것을 방불케 했다. 키팅은 물론 고의적이었다. 학생들의 집중을 길러 주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아예 벌거벗은 여자의 장면이 등장했을 때는 가벼운 탄성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터져나왔다. 물론 그와 같이 외설스러운 광경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한마디로 스크린에 나타나는 광경은 미녀들의 홍수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색다른 여성의 모습도 나타났다. 육체의 노출은 전혀 없고 얼굴 표정만 클로즈업되었는데 그 장면이 너무나 섹시했다. 학생들은 그와 같은 악조건 하에서도, 그야말로 필사적이었다. 단 한 사람만이 달랐다. 그는 처음부터 다른 학생들처럼 열중하고 있지 않는 모습이었다. 스크린에 나타난 미녀의 홍수 때문도 아니었다. 바로 녹스 오버스트릿이다. "크리스...크리스, 크리스..." 오버스트릿은 계속해서 답안지에 그 이름만을 쓰며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것이다. 처음으로 느껴본 이성에의 그리움과 크리스의 영상이 사춘기의 녹스 오버스트릿의 마음을 혼란 속으로 빠뜨리고 있었다. 그리운 자유 니일은 열심이었다. 지나칠 정도였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스스로 결정한 일에 대해 열중하다 보니 새롭게 태어난 느낌이 들었다. 웰튼 아카데미의 캠퍼스는 버몬크의 추운 겨울에 둘러싸인 채 찬바람에 시달렸다. 가을철이면 장관을 이루는 주변의 나무들도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채 세찬 바람이 불어오면 휘파람을 불었다. 연극의 공연이 눈앞에 다가온 니일의 마음은 시시각각 들뜨고 흥분되었다. 그의 인생 모두를 거기에 걸고 있는 모습이었다. 학과 시간 외에는 모든 시간을 연극 연습에 할애하며 전력을 경주했다. 추위 때문에 죽은 시인의 사회 모임을 가질 수 없었다. 학교 측의 날카로운 경계에도 영향을 받긴 했다. 찰리 랄튼이 대표로 매질을 당한 이후 그들은 특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니일의 곁에는 언제나 룸 메이트인 앤더슨이 있었다. 연극 '한여름밤의 꿈' 중에서 요정 팩의 역할을 맡은 니일은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 전대미문의 배역을 해낼 결심이었다. 또한 호랑이보다 무서운 아버지를 피한다는 스릴이 그를 더욱 흥분시켰다. 세상에 태어나 16년 동안 복종만 해 왔다. 시키지 않는 일은 감히 엄두도 못냈던 게 지금까지 니일이 살아야 했던 억압받는 삶이었다. 니일은 지금도 앤더슨과 함께 한 곳을 걸으면서 신들린 사람처럼 연극 대사를 외우고 있었다. "여기다, 이 악당 같으니. 난 검을 뽑아 놓고 기다리는 중이다!" "에잇, 곧 가겠다!" 같이 있던 앤더슨이 그 다음 대사를 읽어 주었다. "그렇다면 나를 따라 오너라, 더 넓은 곳으로." 니일은 바람 소리에 대항하듯 커다랗게 소리쳤다. "이 얼마나 멋지냐구!" "...." 앤더슨은 니일과 달리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어딘가 불안해하는 표정을 완전히 씻어 버리지 못했다. "이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일 거야. 분명히 말야!" "..." "인간들 각자의 인생이, 이것이 반 정도 만이라도 가슴 뛰게 만들 수 있다면 좋은 편이겠지." 앤더슨은 여전히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난 말야, 많은 역할을 맡기만 하면 멋진 인생을 수십가지도 더되게 살아갈 수 있다구!" 니일은 활기찬 동작과 함께 돌담벽 위로 날렵하게 뛰어올랐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렇게 진실하게 생존해 있다는 기분이 드는 건 정말이지 태어난 후로 처음이야. 앤더슨, 너도 연극을 해보면 깨닫게 될 거야." 니일은 다시 날렵한 동작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참, 앤더슨." "?..." "너 리허설에 오지 않겠니?" "아니." "왜?" "그냥..." "와보면 재미있는 일도 생기게 될 거야." "뭐라구?" "여자애들도 많거든." "..." "그 중에도 하미어역을 하는 여자는 얼마나 귀엽게 생겼는지 몰라." 니일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짖궂은 미소를 얼굴 가득히 떠올렸다. 앤더슨은 처음과 다름없는 표정이었다. "공연은 보러 가겠어. 그건 약속하지." "이봐, 앤더슨. 넌 대체 뭘 망설이는 거야?" 니일은 앤더슨을 놀리는 듯이 싱겁게 웃었다. "참, 내가 어느 대목까지 하다 그만 뒀지?" 앤더슨은 그 대목을 어렵지 않게 찾아내었다. "여기야. 음. 거기 있느냐?" 갑자기 니일이 연출가라도 된 듯이 앤더슨을 향해 소리쳤다. "힘을 더 줘서 해!" "음, 거기 있느냐?" "좋았어. 바로 그거야." 앤더슨은 얼떨결에 그 대사를 억지로 커다랗게 외운 다음 스스로 당황하고 있었다. 니일은 한껏 기분이 좋아졌다. 날아갈 것 같았다. 그의 모든 생각은 오직 하루밖에 남지 않은 연극 공연에 집중된 상태였다. 연극이 끝난 다음의 일에 대해서는 아예 냉각의 심연 속으로 던져 버리고 말았다. 이 순간의 그로서는 그 다음에 인류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만 같은 상태였다. 뜻밖의 사실이 이 순간 어디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조차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의 그와 같이 들뜬 행동이 이미 어떤 불행한 상태를 잉태하게 되었는지 그 여파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전혀 깨닫지 못하며 들떠 있었다. 앤더슨과 헤어진 니일이 기숙사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여전히 무대에 서 있는 기분으로 온갖 몸짓과 대사를 섞어 가며 커다랗게 소리치거나 혹은 춤추듯 방으로 들어서던 니일은 깜짝놀랐다.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아버지...!" 니일은 겨우 그렇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다른 생각은 해볼 겨를도 없었다. 눈앞에 잔뜩 성난 아버지가 버티고 서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이미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넌 도대체 어떻게 된 아이냐?" "..." "너한테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있는 애비를 이렇게 실망시키다니!" "아버지..."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짓을 당장 집어치워라." "네에?" "연극놀이 말야." 아버지 역시 분노로 인해서 몸을 떨고 있었다. 니일이 하려는 연극에 대한 편견이 시시한 연극놀이로 생각하는 그로서는 더할 수없는 분노를 느끼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분노는 니일의 또 다른 분노를 자아내도록 만들었지만, 그러나 니일의 분노는 오히려 복종을 재촉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그렇지만 전...아버지, 전..." 아버지가 갑자기 더욱 화를 냈기 때문에 니일의 더듬거리던 말이 그나마 끊기고 말았다. "내 말에 대꾸하지 마라!" 그것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태어나서 지금껏 자신의 주장을 한번도 피력하지 못했다. 자기의 뜻이나 주장 등을 말하는 것은 바로 반항이고 말대꾸였기 때문이다. 이미 16세가 되어 인생과 삶의 가치를 논하게 된 지금에도 그것은 변함이 없었다. 품 속에 안긴 어린양과 같이 무조건적인 복종만이 강요되고 있는 것이다. "니일, 너 들어 봐라. 도대체 그런 짓이나 하며 시간을 낭비해서 어쩔 셈이냐?" 이어 아버지는 아들의 자백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누구냐?" "네에?" "너한테 그런 장난을 가르친 사람말야." "그런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다. 어서 대답이나 해." 그는 질문에 대답할 여유도 주지 않으며 몰아붙였다. "키팅 선생이냐?" "아녜요, 아버지." "키팅이라는 그 선생이지?" "아무도 아무도 아닙니다. 전 다만 학점도 모두 A이고 해서..." 니일의 대답은 다시 거친 아버지의 말에 끊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어디서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는가를 화난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맥스 부인한테서 들었다고 했다. 자기의 조카딸이 니일과 연극을 하게 됐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는 즉석에서 잘못 안 모양이라고, 자기네 아들은 연극 같은 것 하지 않는다고 점잖게 대답했다. 즉 아들 덕분에 아버지가 거짓말쟁이가 되고 말았다고 화난 음성으로 털어놓았다. 니일조차 아버지의 그 심정이 어떨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당장 그만 두도록 해라!" 아버지의 마지막 명령이었다. 너무 근엄해서 감히 거역할 수 없는 통첩이었다. 니일은 전 같지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벌써 굴복하고 말았을 테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의 모든 희망을 거기에 걸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버지..." 니일은 애원하는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전 그 연극에서 주연 자리를 맡고 있어요. 제가 나가지 않으면 그 연극은...그리고 공연도 이제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지금에 와서 어떻게 그럴수..." "네가 맘대로 했던 일 아니냐!" 아버지는 더욱 화를 내며 버럭 소리쳤다. 그 바람에 니일은 들고 있던 것을 떨어뜨릴 뻔했다. "너 끝까지 반항할 생각은 아닐 테지?" "제가 어떻게...하지만 아버지, 이번 한번만..." "안돼!" "..." "지금 당장 연극을 그만두는 거다, 알았지?" "..." "대답해! 알았지?" 아버지가 벌컥 고함치는 바람에 니일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버지." 비로소 아버지의 얼굴에서 분노가 사라지고 있었다. "여기서 더 이상 애비를 실망시키지 마라!" "알겠습니다." 니일은 아버지가 방에서 나가버린 다음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꼼짝않고 서 있었다. 무엇이, 무슨 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머리 속을 윙윙대며 지나가는 게 있을 뿐이었다. 온몸에 진땀이 배어 났고, 두 눈에서 굵은 물방울 같은 것이 한두 방울 구르듯 발등으로 떨어져 내렸다. 헤이거 발사가 식당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죽은 시인의 사회 멤버들이 거기에 모여서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연극연습 때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아버지 때문에 아직 나타나지 않은 니일을 제외한 전원이었다. 헤이거 박사는 그들이 식사하는 모습에서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무슨 일이지, 랄튼?" "네?' "식사하는 모습이 이상하군. 뭐가 잘못됐나?" "아뇨." "그럼 자네들 모두는 원래부터 왼손으로 식사를 했나?" "아뇨." 멤버들은 전과 달리 왼손을 사용해서 기묘하고 힘들어 보이는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아, 그거요.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헤이거 박사님." 녹스 오버스트릿이 모두를 대표하듯 정중하게 말했다. "충분한 이유란 뭘 말하고 있는 거지?' "오랜 습관으로부터 벗어나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기 위해서죠." "그 습관을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단 뜻인가?" "생활이 기계화되어 정신적인 성장을 억제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헤이거 박사는 그들이 원래와 같은 방법으로 식사하도록 말했다. 오랜 습관에서 벗어나려 들지 말고, 그보다 습관이나 올바로 기르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 오버스트릿은 즉시 대답했다. 하지만 헤이거 박사가 식당을 나가자 잠깐 사용하는 척했던 오른손에서 재빨리 왼쪽 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니일이 몹시 괴롭고 슬픈 표정으로 식당에 들어온 게 그때였다. "왜 그래?" 랄튼이 먼저 알아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버질 만났어." "학교에서?" "기숙사에서, 조금 전에." 랄튼은 이미 뭔가 짐작하며 연극을 단념할 것이냐고 물었다. 니일은 아직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랄튼이 한가지 제안을 했다. "내 생각엔 말야, 키팅 선생님한테 의논해 보는 게 좋겠다." "뭘 어쩌겠다고?" "최소한 조언은 해줄거야." "어떤 조언을?" "또 아니, 네 아버지한테 대신 얘기해 줄지." "필요 없어." "어째서?" "소용없을 테니까." "그래도 일단 한번 의논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니?" 니일은 자신의 마음을 결정지을 수 없어 어두운 얼굴로 묵묵히 식사를 했다. 그런 니일의 모습을 본 친구들은 한없이 우울했다. 니일은 친구들과 함께 꼭 한번 키팅 선생이 사용하는 방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짖궂은 친구들, 특히 랄튼의 호기심 대문에 거의 강제로 끌려가다 시피 했었다. 니일은 남의 방에 몰래 들어가는 따위의 일은 정당하지 못한 행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몰래 남의 방에 들어가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는 니일의 충고에도 랄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호기심에 가득찬 눈으로 마치 사냥개가 무엇인가 찾아낼 때 코를 킁킁거리는 것과 비슷한 동작을 보이며 방안의 이것저것을 두루 살폈다. 문앞에는 푸른 색깔의 작은 가방이 놓여 있었다. 몇 권인가 되는 책이 침대 위에 되는 대로 널려져 있었다. 방을 나가기 전까지 그 책들을 보았던 게 분명했다. 그때였다. 책상으로 다가간 랄튼이 거기에 놓여 있던 사진첩을 집어들었다. 20대 정도로 생각된 아름답게 생긴 여인의 사진이 유리 속에 곱게 간직되어 있었다. 랄튼은 신기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휘파람을 불었다. "이걸 좀 봐!" 그는 사진 옆에 쓰다가 중단한 편지가 놓여 있는 것을 가리켰다. 니일의 계속된 충고에도 불구하고 랄튼이 작게 소리내어 그 편지를 읽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키팅의 이미지를 새롭게 느끼도록 해 주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사랑하는 제시카.' 네가 없을 때는 가끔 외롭게 느껴진다. 이런 기분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네 모습이 담긴 사진을 조용히 들여다본다거나 아니면 눈을 감은 상태에서...타는 듯이 빛나는 너의 미소를 눈앞에 그려 볼 수밖에...그렇지만 나의 상상력은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에 다만 희미한 영상을 떠올릴 수 있을 뿐... 아아, 네 모습이 그립다. 그리고 뜻대로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너 제시카한테... 랄튼은 매우 재미있어 하면서 계속 읽어 나갔다. 처음 적극적으로 만류했던 니일이었다. 하지만 그 편지 내용이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그와 함께 제시카라는 미지의 여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어떤 여자일까, 키팅과 어떤 관계일까, 서로 사랑하는 사이겠지, 그들은 언제부터 알게 됐을까 등등... "야, 니일." 랄튼이 불쑥 말을 걸어왔을 때 니일은 깜짝 놀랐다. "낭만적이지?" 랄튼은 신기한 사실을 발견한 탐험가 같은 얼굴을 한채 니일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글쎄..." "그럼 아니란 말이니?"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닌데 그리 관심이 많니?" "그래도 신기하잖아, 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어. 키팅 같은 사람한테 이렇게 잘 생긴 애인이 있다니 믿을 수 없거든." "이제 그만 나가자." 니일은 역시 궁금했다. 그렇지만 다른 아이들 앞에서 내색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머뭇거리는 랄튼의 등을 떠밀다시피 해서 키팅 선생님의 방을 나오고 말았다. 아버지와 아들 존 키팅의 방은 지붕 밑의 다락방 같은 곳이었다. 좀처럼 마음을 결정할 수 없는 니일이었지만, 시간적으로 너무 촉박했기 때문에 언 제까지 망설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키팅 선생으로부터 확실한 대답을 듣거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아버지의 완고하고 사나운 성격으로 보아 연극에 출연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리라는 생각 이 니일로 하여금 그토록 주저하게 만들었다. 마음은 그럴수록 더욱 다급하고 초조해졌다. 가만히 시간만 보내고 있을 수는 없 었다. 어떻게든 대책을 강구해야만 되었다. 아버지한테 직접 부딪친다는 것은 화약을 지고 불길 속에 뛰어드는 거나 같음을 누 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니일이었다. 아무리 용기백배 한다 해도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하고 무모한 일이었다. 달리 묘안이 없고보니 낭떠러지 위에 선 기분에 빠진 니일이었다. 그는 랄튼의 충 고를 다시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다. 궁여지 책이기도 했지만 그 역시 키팅 선 생에 대한 남다른 신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결국 니일은 생각을 그 방 향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막상 생각을 그렇게 정해 놓았을 때 니일은 새삼 키팅 선생이라면 좋은 방법을 제 시해 줄 수도, 그보다 나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 하는 기대감과 함께 서둘러 그 의 방으로 향했다. 니일이 갔을 때 키팅은 방에 혼자 있었다. 방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그의 독특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문은 열려 있습니다." 니일은 조용히 들어섰다. 방안은 밝지 않았다. 책상 위의 스탠드만을 켜 놓은 채 그 앞에 앉아 무엇을 하고 있는 키팅의 뒷모습을 니일은 잠시 바라보았다. "누구..." 키팅이 돌아보았다. "접니다. 선생님." "자네로군, 니일." "네." "어떻게?" 니일은 방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지난번 랄튼으로 인해 몰래 들어왔던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무엇보다도 키팅 같은 선생한테는 그런 방이 너무 좁다는 생각 이 들었다. "방이 너무 좁군요. 선생님." "그래?" 키팅은 그의 특유한 미소를 얼굴에 떠올렸다. 바보스럽게, 그러면서도 막상 접하다 보면 한없이 친근감을 느끼도록 해 주는 미소였다. "왜 이렇게 좁은 방밖에 받지 못하셨죠?" "학교에서?" "네. 선생님한테는 방이 너무 좁은 것 같아요." 키팅은 다시 미소지었다. "학교 당국이 알아서 하겠지." "네?" "세간살이를 너무 많이 들여놓고 있으면 내가 교육에 집중할 수 없게 되리라고 생 각했는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니?" "전 이해할 수 없어요." "뭘 말이지?" "왜 이렇게 좁은 곳에 계셔야 되는 지요." 니일은 우선 자신의 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넓고 호화로운 저택이었다. 아버지의 서재 하나만 해도 키팅 선생의 방보다 세 배는 됨직 했다. 수많은 학생들 에게 존경받는 선생이 그토록 협소한 공간에서 지내야 된다는 사실을 니일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니일은 자기의 느낌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선생님." "뭐지?" "오늘을 즐겨라, 하는 목표를 가지고 계시다면서요..." "그래서?" "세계를 바라보기 위해 이런 곳에서부터 바깥으로 뛰쳐나가야 된다고 생각했습니 다." "그래?" 키팅은 뜻밖이라는 듯이 니일을 응시했다. 그 역시 다른 학생보다 니일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그랬지만 특히 티없이 맑은 정신과 매사에 적극성을 보이는 모범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니일." "..." "네가 말하는 그 세계라면 난 분명히 보고 있다. 아주 새로운 세계를 말야." 니일은 가만히 있었다. "또한 이 학교와 같은 곳이라면 설령 저질이라고 해도 나와 같은 선생이 한 사람 정도는 필요하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그것은 농담이었다. 니일도 키팅도 그렇게 생각했다. 키팅이 그렇게 말하며 웃는 것은 스스로의 농담에 대한 자신의 웃음이었다. "그런데 니일군." 키팅이 거기서 방담을 끝내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거지, 예고도 없이?" "상담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으음, 혹시 내 교육 방법에 대한 내용이니?" 니일은 이미 정색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그 방에 들어와 있는지, 키 팅한테 어떤 말을 하고 그로부터 어떤 대답을 들어야 될 것인가에 대한 생각과 함께 자신도 모르게 심각해진 것이다. "교육 방침에 대한 건 아닙니다." "그럼 개인적인?" "네. 중요한 문제입니다." "너한테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가. 니일?" "저요..." 니일은 한숨을 길게 몰아쉰 다음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헨리 홀에서 하는 연극에 제가 출연한다는 건 아시죠?" "들은 것 같군." "그걸 아버지께서 당장 그만두라고 하셨습니다." "으음!..." 키팅은 이미 문제가 어느 정도 삼각한가를 짐작하기 시작했다. "머리 속에서는 카르페 디엠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이건 마치 감옥 에 갇혀 있는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키팅의 표정 역시 니일만큼 긴장된 상태였다. 그가 평소 보고 느꼈던 니일의 이미 지가 지금은 전혀 반대였기 때문이다. "그 연극은 지금의 저의 모든 것입니다. 진심으로 그 연극을 하고 싶습니다. 진심 으로 그 연극을 하고 싶습니다. 키팅 선생님! 물론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뜻도 알고 있지만..." 어느덧 니일은 몹시 슬픈 표정을 바뀌며 말끝을 흐렸다. 키팅은 니일의 두 눈에서 불빛이 반짝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희 가정은 찰리 랄튼네처럼 부유하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아버지께 서는 장래의 제 인생을 이미 모두 결정해 놓고..." 니일은 목이 메었다. 두 눈에 가득 눈물이 고였다. 새삼 자신의 인생에 대한 회의 같은 비관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자신이 왜 그런 상담을 할 수밖에 없는 가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슬픔과 비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 놓고 저한테는...저한테는 어떻게 무슨 일을 하고 싶으냐고 묻지도 않으십니 다." 니일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니일." 키팅은 가장 침착하고 한없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이미 니일의 가슴 속을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그런 내용을 아버님께 말씀드렸니?" 니일은 너무 격해진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중이었다. "연극에 대한 너의 그 정열 말이다." "아뇨." "어째서?" "그건 농담으로 하는 말씀이시죠?" "..." "그렇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아직 모르시는 겁니다. "뭘 말이지?" "제가 만일 그런 말을 할 경우 전 즉석에서 살해당하고 말게 될 겁니다." "설마!..." 키팅은 깜짝 놀랐다. 그런 정도로 심각한가 싶어 다시 한번 니일을 바라보았다. 니일은 분명히 살해당할 거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누가 누구를, 아버지가 아들을 연극한다고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싶어 등골에 오싹 전율을 느끼기까지 했다. 키팅은 자신의 그러한 내면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그래서는 안된다는 판단과 함께 조금도 변하지 않은 표정으로 진지하게, 그러면서도 니일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침착 하게 만들기 위해 가볍게 말을 던졌다. "니일." "..." "듣고 보니 이런 생각이 드는 구나. 너 역시 네 아버지를 상대로 해서 연극하는 결 과라고 말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니일은 조용히 눈물글썽한 채 앉아 있었다. 키팅은 앞의 제자를, 그보다 이제 한창 긍지를 펴야만 될 희망찬 청소년을 자신의 혈육처럼 애정이 담긴 눈으로 응시해 주었 다. "니일, 내 생각을 말해 주마." "..." 니일은 측은하도록 간절한 눈빛으로 키팅을 마주보았다. "너한테 너무 과중한 짐이 주어져 있다는 건 알았다. 확실히 감당키 어려울 것이 다. 하지만 생각을 충분히 고려해 보렴" "어떤..." "오해는 하지 마라, 내가 하는 말에 대해서." 키팅은 그런 전제와 함께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그런 일을 일단 진지하고 분명하게 아버지한테 털어놓는 거야." "그럼 어떻게 되죠?" "네 자신의 가장 솔직하고 진실한 면모가 과연 어떤 것인가를 아버지께서 이해하실 수 있도록 해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그렇지만..." 니일은 그것으로 키팅의 뜻에 동의할 수 없었다. 적어도 자신이 생각하고 아는 아 버지와 키팅이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아버지하고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전 분명히 알고 있어요. 아버지가 어떻게 대답하실지..." "그래?" "연극에 대한 너의 정열을 따위는 일시적인 변덕이며 홍역과 다름없는 것이다. 언 젠가는 말끔히 잊어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실 겁니다. 그리고 끝에 가 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시겠죠..." 니일은 자조하듯 그러나 더욱 비탄에 빠져서 말을 계속했다. "우리 모두 너에 대한 기대를 걸고 있다. 네가 연극을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네 자신을 위해서란다 하고 말씀하실 게 분명합니다. 의심의 여지조차 없습니다." 키팅은 나름대로 어떤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니일의 그와 같은 말은 하소연도 넋 두리도 아닌 가장 순수한 진실이며, 실제로 그 말대로 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 만 큼 거기에 가장 합당하고 정당한 방법의 제시가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다." "알겠다, 니일, 네 말대로 그게 정말 변덕이나 홍역같은게 아니라고 확신한다면..." 니일이 재빨리 말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 난 널 믿고 있다. 그러니까 그 사실을 아버지께 증명해 보이는 거야." "아버지께요?" "정열과 노력을 기울여서 말야." "그렇지만..." "이것이야말로, 그렇지, 이번의 그 연극이야말로 네가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것임을 아버지가 깨달으시도록 보여드리는 거야." "그런 다음에는 요?" "만일, 이건 어디까지나 만일이다. "네에." "그래도 네 뜻처럼 일이 잘 안된다고 할 경우에는..." "경우에는?" "그래, 니일. 너도 이제 머지 않아 18세가 된다. 무슨 뜻인지 알겠니? 그 나이가 되면 좋아하는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18세요?" 키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요, 도대체 연극은 어떻게 되는 거죠?" 니일은 이제 슬픈 눈물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격정이 스치고 지나간 얼굴에 눈물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고, 이번에는 더욱 강한 의지로 번뜩이고 있는 것이다. "키팅 선생님. 연극은 바로 내일 밤에 공연합니다. 그런데 18세 얘길 하시다뇨!" "그런 게 아냐." "네?" "아버지께 말씀드리는 거야." "키팅 선생님!" 니일은 낮은 소리로 마치 절규하듯 물었다. "방법이 그거 하나 뿐입니까? 다른 방법은, 그보다 더욱 간단한 방법이 없겠습니 까?" 키팅은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다는 표현의 안타까운 방법이었다. 대신 그는 자신의 말에 대한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터질 듯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우선 내 질문에 대답해라." "..." "넌 자기 자신한테 정직해지고 싶지?" "하지만 그건..." "대답해 봐." "그렇습니다." "됐어. 그렇다면 방법은 그거 하나 뿐이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얘기 또한 하나 뿐이다, 니일. 이해 할 수 있겠니?" 침묵이 찾아왔다. 예상도 생각도 안했던 그 침묵은 비교적 오래 두 사람을 붙잡아 놓고 있었다. 침묵하는 동안 니일은 나름대로 어떤 생각에 도달하고 있었다. 이윽고 니일이 가라앉고 있는 침묵을 깨뜨렸다. "알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키팅 선생님." 키팅은 갑자기 확신감으로 가득찬 니일의 얼굴을 천천히 눈을 들어 바라보았다. "겨우 마음을 정했습니다." "결심이 섰니?" "네, 선생님." "됐다. 됐어, 니일." 키팅은 씩씩하게 걸어나가는 니일의 뒷모습을 향해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 같은 시간의 일이었다. 니일의 멤버들인 랄튼, 오버스트릿, 피츠, 앤더슨, 카멜론 등은 또 다른 곳에 모여 나름대로의 자기 일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오버스트릿은 혼자 구석진 곳에 쭈그리고 앉은 채 입 속으로 무엇인가 열심히 중얼 거렸다.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였다. 던베리의 집에서 체트한테 흠씬 얻어터진 게 오 히려 크리스에 대한 기폭제가 되었다. 지금도 그는 혼자 쭈그리고 앉아 그녀한테 보내 그녀를 감동시켜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는 싯귀를 안간힘을 써 엮어 나갔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시만큼은 필연적으 로 완성시킬 결심이었던 것이다. 앤더슨 역시 떨어져 앉아 무엇인가를 신중하게 쓰고 있었다. 각양 각색이었다. 카 멜론은 교과서를 펼쳐 놓고 공부하는 중이었고, 피츠는 책에 있는 내용을 선별해서 벽에다 열심히 낙서하는 중이었다. 오버스트릿은 자신이 쓰고 있던 것을 제쳐놓으며 한쪽에 있는 앤더슨에게로 다가갔 다. "지금 쓰고 있는 게 뭐지?" "나도 모르겠어." 앤더슨의 대답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무슨 소리야. 네가 쓰고 있는 것도 모르다니?" "아마 시 같은 걸 거야." "수업을 준비하는 거니?" "글쎄..." "또 모르겠다 이거야?" "모르겠어." "졌다, 졌어. 하긴 나도 내가 지금 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머리가 돌아버린 것 같애." 앤더슨은 오버스트릿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크리스 때문이겠지 하는 질문이 담겨 있었다. 일동 중에 카멜론이 먼저 기숙사로 돌아갔다. 다른 학생들에 비해 어딘가 다른 점 이 있는 그였다. 그는 소등시간 전에 기숙사로 들어가지 않았다가 만일 들통났을 경 우를 겁내고 있는 것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 대해서도 특히 항상 조바심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자신의 이익 을 위해 어떤 일도 불사할 수 있는 비교적 이기주의적인 성격이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오버스트릿은 갑자기 투덜거리며 지금껏 끙끙대며 지어낸 시가 적힌 종이를 펼쳐 들고 있었다. "이걸 크리스한테 보여 주고 그녀가 읽게만 만들어도 좋겠는데 말야!" 곁에서 그 광경을 본 피츠가 끼여들었다. "뭐가 걱정이니, 네가 직접 읽어 주면 되지." "뭐라구?" "누완다를 봐. 그 방법으로 성공했다니깐." "전날 동굴에서 그랬잖니. 글로리아한테 누완다가 시를 읽어 줬거든." "그랬더니?" "말도 마. 당장 글로리아가 누완다한테 안겨들더라니까." "그래애?" "그렇다니깐." 오버스트릿은 갑자기 굳은 표정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어떤 느낌 때문이었다. "정말 그랬단 말이지?" 오버스트릿은 재확인하기 위해 피츠에게 물었다. "다른 애들도 다 봤어." "그렇구나!..." 그때 모두들 서둘러 기숙사를 향하기 시작했다. 카멜론처럼 조심성이 지나치지는 않았지만 역시 규칙을 위반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남은 것은 오버스트릿 뿐이었다. 그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숙사나 어떤 규 칙이 아니었다. 오직 크리스 뿐이었다. 누완다가 시를 읽어 주어 그 매력적인 글로 리아를 홀딱 반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날카로운 충격을 받았다. 그는 곰곰히 생각했다. 누완다에 비해 뒤질게 하나도 없다고 확신했다. 그가 글로리아라는 여자를 그런 방법으로 끌어들였다는 데 나라고 못할 게 있느냐 싶어 괘씸하기까지 했다. 그는 이윽고 커다랗게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누완다 녀석이 정말로 그 일을 했다는 데 내가 왜 못해. 좋다. 나도 해내고 말겠 어. 두고봐. 크리스는 내것이 될 테니깐!..." 확신으로 가득찬 음성이었다. 사실 겪을 만큼의 시련을 이미 겪는 오버스트릿이었 다. 크게 잘못한 것도 없다는 자신의 생각으로서는, 그런데 묵사발이 되도록 체트한 테 터졌다는 그게 모두 크리스 때문이라는 생각은 오버스트릿을 하여금 중단할 수 없 는 애착심을 갖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반항의 이유 결심한 이상 조금도 지체할 수 없는 오버스트릿이었다. 그는 결행의 순간을 그 이튿날로 당장 정했다. 망설이며 시간을 글면 그만큼 손해 라고 생각했다. 크리스가 체트와의 관계를 그만큼 더 계속 시킬 수 있고, 그것은 두 사람의 친밀도를 가중시킬 뿐이라고 생각했다. 체트녀석 벌써 크리스를 건드린 건 아닐까, 설마 그럴까, 아냐, 어쩌면 그게 사실일 지도 몰라, 그렇지 않고서야 여자애가 그렇게 농도짙은 키스는 할 순 없을 텐데... 그런 오버스트릿의 불안한 의문이 결행을 독려했다. 그의 유일한 교통 수단을 애 용하는 자전거였다. 웰튼 아카데미에서 크리스가 다니는 릿지웨이 하이스쿨가지는 삽시간에 달려갈 수 있는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단단한 결심한 오버스트릿은 두 가지 선물을 준비했다. 그동안 끙긍거리며 머리를 자낸 자작시와 한송이 장미꽃이었다. 단정하게 옷을 차 려입은 다음 그것들과 가슴 속의 크리스에 대한 애정을 간직한 채 힘껏 자전거의 페 달을 밟았다. 마음 때문인지 웰튼 아카데미의 교문을 막 벗어났는가 싶었는데 벌써 릿지웨이 하 이스쿨의 교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결심이 식기전에 라는 목표와 함게 녹스 오버스 트릿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주위 풍경은 웰튼 아카데미와 확실히 다른 점이 많았다. 거의 전학생이 자신보다 는 부모의 만족을 채우기 위해 엄격한 규율 속에서 신음하며 꿈도 이상도 체념할 수 밖에 없는 웰튼 아카데미에는 남학생 뿐이었지만 여기는 남녀공학이었다. 완전히 다른 분위기 였다. 남녀공학이라는 사실이 그랬고, 그래서인지 막 등교하고 있는 학생, 특히 여학생들 의 자유분방한 광경이 이방지대처럼 느껴졌다. 오버스트릿은 망설이지 않고 현관을 지나 목도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여기저기서 재잘거리는 여학생들, 바삐 걷는 날씬한 다리, 유난히 젖가슴이 커서 움직임에 따라 부담스럽게 흔들리는 여학생, 개인 사물함에 무엇인가를 넣기 위해 깊숙히 허리굽힌 여학생의 스커트 속으로 드러난 삼각팬티 등등 그야말로 완전한 이방지대를 방불케 했다. 오버스트릿은 바쁜 시선으로 복도를 휘둘러 보았다. 일층에 있는 많은 여학생가운데서 크리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저어..." 그는 마침 다가오는 여학생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지?" 상대편 여학생은 진한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 눈매나 입술 등의 이미지 가 어쩐지 크리스와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사람을 찾는데..." "누군데?" "크리스 노엘이라고..." "아아, 걔."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어떤 사인데? 애인? 아님 그냥 엔조이나 하는 거야? 걔한텐 이미 애인이 있는 것 같던데?" 그 여학생은 몹시 수다스러운 성격임이 분명했다. 그뿐아니라 공연히 오버스트릿 을 향해 노골적인 유혹의 눈길까지 보냈다. 이쪽에서 한 마디만 던지면 당장 키스에 응해줄 듯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오버스트릿은 그게 아니 었다. "지금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지?" 그 여학생은 입술을 잠깐 내밀더니 이내 쌀쌀맞게 대답했다. "이층으로 가 봐." "고마와." "난 리즈라고 해." "리즈..." 오버스트릿은 앞뒤볼 것없이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크리스 는 자기의 사물한 앞에 서서 어떤 여학생과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크리스!" 오버스트릿이 소리치자 이쪽을 돌아보는 크리스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얼른 다가오더니 오버스트릿을 복도의 구석진 곳으로 데리고 갔다. "녹스!..." 그녀는 몹시 당황해서 주위를 경계하며 말했다. "대체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거야. 지금 제정신야?" "크리스." 크리스는 다시 누가볼까 두려운 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과하려고 왔어." "뭐라구?" "전날 밤에 있었던 그 일 말야." "무슨 소리야?" "사과하는 뜻에서 이걸 가지고 왔어. 받아 줘." 오버스트릿은 가지고 갔던 꽃송이를 내밀었다. 하지만 받지를 않았다. 확실히 무 엇인가 크게 두려워 하는 표정일 뿐이었다. "뭘 모르는구나." "?..." "체트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되는지 알기나 해?" 크리스의 표정과 말투는 전날의 그런게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또 하나의 별개였 다. 그녀는 계속해서 질린 듯이 말했다. "체트가 여기 있는 널 보면 죽여버릴 거야. 그래도 모르겠어?" 오버스트릿 역시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가슴을 온통 채웠기 때문에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크리스, 내 말을 들어 줘." "뭐라구?" "난, 난 말야..." "어서 돌아가." "아냐. 난 널, 그래, 널 사랑하고 있어.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은 체트같은 사내가 아냐. 바로 나라구. 알겠어? 그러니 이 꽃다발하고 시를 받아줘..." "녹스!" 크리스가 오버스트릿의 다음 말을 가로챘다. "너 혹시 어떻게 된 거 아니니? 제정신으로 이러는 거야?" 공교롭게도 그때 요란한 종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주위에 있던 여학생들이 종소리 와 함께 교실을 향해 급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녹스, 제발 부탁야." "!..." "크리스, 나도 알고 있어.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거 말야." "나 시간없어. 빨리 교실로 들어가야 해." "정말 이거 받아 주지 않을 거야?" 크리스의 시선이 꽃송이로 향했다. 어떡해야 좋을 지 몰라 망설이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이내 거칠게 거절했다. "돌아가, 어서!" 크리스는 오버스트릿을 그 자리에 놔둔 채 교실을 향해 뒤어갔다. 순간 오버스트 릿은 눈앞이 캄캄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바져 버린 기분이었다.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 거절당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실 안으로 사라진 크리스의 뒷모습이 아직 그대로 선명했다. 그 순간 오버스트 릿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에 대해 번개같이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방금 크리스가 들어가버린 문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어디서 그와 같은 용기가 생겼는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가 닫힌 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섰을 때 학생들은 모두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행히 아직 교사는 들어와 있지 않았다. 하지만 낯선 남학생의 도깨비 같은 출현은 어느덧 여학생들의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비로소 오버스트릿을 발견한 크리스의 두 눈이 커다랗게 치켜떠졌다. 그와 동시에 소리쳤다. "녹스으! 오오, 세상에. 난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어떻게 네가 이럴 수 있니?" 크리스는 분노에 못이겨 얼굴빛까지 창백해졌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친구들의 모습에 그만 울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닌 오버스트릿이었다. 그는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 았다. "부탁야, 크리스. 이걸 받아 주기만 하면 돼. 그래서 이렇게 온거야. 모르겠어." "노옥스!..." 크리스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상한 역반응이라고 할 수 있었다. 크리스가 그렇 게 화낼수록 오버스트릿은 더욱 대담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모두가 알아듣도록 말했고 준비해 가지고 간 종이를 펴들고 역시 커다란 목소 리로 읽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천국이 만든 소녀, 그 이름은 크리스 노엘. 황금의 살갗과 황금의 머리칼 손가락 끝이 닿을 뿐만으로도 그것은 낙원 입술이 맞닿으면 그 기쁨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모든 학생들은 그와 같은 뜻밖의 광경에 한결 같이 멍해지거나 눈가에 미소를 나타 내기도 했다. 견딜 수 없는 수치감에 크리스는 홍당무가 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 고 말았다. 드디어 수군대거나 소리죽여 웃는 여학생들의 반응이 크리스의 귀에도 들렸던 것이 다. 세상에 태어나 아직 그와 같은 망신을 당해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그것은 많 은 사람들이 지켜본 앞에서 느닷없이 발가벗겨져 가장 부끄러운 곳을 드러낸 것보다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오버스트릿은 용기를 내어 자작시를 계속 커다란 목소리로 낭독했다. 하늘은 여신을 만들었고, 그 이름은 크리스 노엘. 어떻게 만들었을까? 그건 모른다. 하지만, 내 영혼이 비록 무지해도 나의 사랑은 오직 커 간다. 사랑스러움이 더도는 그대의 미소에 눈가에 가득찬 눈부신 빛남, 하지만 내 삶은 충만해 있다. 다만 그 사람이, 살아있음을 아는 것만으로 노골적으로 한숨소리를 내는 여학생이 있었다. 탄성 비슷한 소리도 어디서 들려왔 다. 크리스는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오버스트릿을 바라보았다. 노려보는 것 같 았다. 읽기를 끝낸 오버스트릿은 침착하게 그 종이를 접었다. 철면피라도 된 듯한 행동 이었다. 그는 접은 종이와 꽃다발을 크리스의 책상 위에 천천히 올려놓으며 다시 한 번 뚫어지도록 응시했다. 이윽고 뒤돌아서서 교실을 나오기 직전 그는 매우 중요한 한 마디를 뒤에 남겼다. "널 사랑한다. 크리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크리스의 눈빛에 또 다른 이미지가 스쳤다. 그것은 지금 까지의 그녀의 반응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녹스 오버스트릿의 경우 그것은 사랑앓이 병이었다. 하지만 니일은 그렇지 않았다. 가치나 수준을 논할 수는 없었다. 인간저인 면에서는 두 학생의 당면한 문제를 경중 을 다질 수가 없었다. 키팅으로부터 충고와 권유를 받은 니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니일이 너무나 잘알고 있는 아버지는 키팅이 생각하는 그런 사 람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다. 아들이 열성을 가지고 진심으로 털어 놓았을 때, 그걸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다 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니일이었다. 즉 키팅같은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그와 같은 자신의 내면적인 갈등을 털어놓거나 공개할 수도 없는게 니일의 입장이 었다.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할 수는 있었고 그럴 용기도 있었다. 다만 듣는 키팅이 문제였다. 그로서는 니일의 말을 도저히 알아듣거나 납득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어떤 일이, 어떤 위험이, 그 어떤 시련이 닥친다 해도 감수할 각오가 된 니일이었 다. 연극에 기필코 출연해야 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아버지를 거역하는, 그보다 더 욱 나쁘게 속이는 결과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알고 있는 니일이었다. 그를 다시 갈등으로 몰고간 것은 바로 그 생각이었다. 아버지를 속여서, 속인 댓가 를 어떤 방법으로 치른다 해도 연극을 꼭 하기로 결심한 니일의 마음은 그래서 또 다 른 갈등과 함께 급기야 키팅한테까지 거짓말을 하도록 만들었다. 수업이 끝났을 때였다. 니일은 텅 빈 교실에 외롭게 혼자 남아 있었다. 키팅이 오는 것도 모르고 생각의 심연 속으로 깊숙히 가라앉은 상태로 묵상하는 듯했다. "니일." 묵상하는 듯하던 니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괜찮니?" 키팅은 책상을 돌아 니일의 앞쪽으로 갔다. "네, 선생님." "아버지께 말씀드렸니?" 니일은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해서 듣고 있는 키팅을 의심케 했다. 그렇게 쉽게 네, 하는 대답소리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말이니?" "네." "어떻게, 어제 나한테 얘기했던 그대로?" "네." "으음...그랬구나." "정말이예요." "아버지한테 네 진실을 말씀드렸단 말이지?" "네." "연극에 대한 네 정열을?" "그랬어요." 키팅은 마음 속으로부터 의혹이 커다랗게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니일이 거짓 말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니일 역시 한번 시작한 거짓말에 자신도 모르게 그럴 듯하게 말했다. 시작이 잘못 되거나 빗나갔을 경우 꼐속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을 터였다. 니일이 말했다.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눈치였어요." "!..." "그런데 나중에는 연극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만은 승락해 주셨어요." "아주 잘된 일이구나." 키팅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 네 연극에 직접 와 주시겠다던?" "아, 아뇨. 그건 아녜요." "..." "공연장에는 못오십니다." "그래?" "네. 사업 대문에 출장을 가시기 때문이에요." "어디로?" "시카고요. 그래서 공연에는 오시지 못합니다." 이 순간 키팅은 니일 보다도 더욱 심한 갈등을 느겼다. 그가 니일 또래의 소년이 라면 또 모른다. 곧이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니일의 마음 속을 거의 모 두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당장 니일의 말을 중단시키고, 거짓말을 꾸짖고, 니일의 비겁한 생각이 얼마나 옳지 않은 것인가를 이해시키고, 그래서 안될 경우 뺨이라도 때려주고 싶을 충동을 겨우 웃음으로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니일은 다시 더듬거리지 않고 말했다. "어쨌든...네, 맞아요. 하여튼 제가 앞으로 연극을 계속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게 아주 획기적이구나." "정말예요, 선생님. 물론 조건이 전제되지만요." "조건?" "제가 앞으로도 계속 지금처럼 공부를 잘 하는한은요." "그렇구나." "네, 선생님." 거기까지 오자 키팅은 니일의 거짓말을 나무라거나 꾸짖을 용기가 사라지고 말았 다. 너무 가혹한 형벌을 니일한테 가하는 거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 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눈길을 피하는 니일에 대해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동정심 을 갖기에 이른 것이다. "선생님" 니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정리하며 말했다. "전 그만 방으로 가야겠어요. 공연이 내일이라 최종적로 읽어야 할 것도 있고 해서 요." "그러렴." 키팅은 그 자리에서 꼼작도 하지 않았다. 아끼고 기대한 제자의 그런 못습을 대하 게 되는 교사의 마음이 그토록 아픈 것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니일." 키팅은 전혀 새로운 기분으로 평소처럼 불렀다. "네, 선생님." "내가 가도 될지 모르겠구나." "네에?" "공연에 말야." "아, 네에...물론 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았어. 갈께." "제 친구들도 올 거예요." "그렇겠지." 돌아서서 교실을 나가고 있는 니일의 뒷모습을 키팅은 애써서 바라보지 않으려 했 다. 마지막 기회 리지웨이 하이스쿨로부터 웰튼 아카데미로 돌아오는 길에도 역시 자전거를 이용한 오버스트릿이었다. 갈때하고는 완전히 다른 기분이었다. 그곳에서의 상황이 어땠거나, 아무리 크리스 로부터 모욕을 당했거나, 그것으로 크리스가 영원히 토라진다 해도 그의 기분은 개운 했다. 간절히 하고 싶었던 일을 드디어 해치우고 난 기분이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상관없이 승리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는 자전거를 학교건물 뒤쪽에 붙어 있는 조리실 옆에 세웠다. 상당히 추운 날씨 였지만 기쁨에 가득차 있는 그는 조금도 추위를 느끼지 못하며 성큼 안으로 들어섰 다. 평소에는 잘 드나들지 않는 조리실이었지만 이날은 상관없었다. 누구든 만나기만 하면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는 방금 오븐에서 나온 빵을 한 개 슬쩍 집 어들고 곧장 복도로 나왔다. 방금 전에 수업을 끝낸 친구들이 거기에 모여 있었다. 그 중에 랄튼이 오버스트릿 을 보자마자 큰소리로 물었다. "야아, 녹스! 어떻게 됐니?" "뭐 말야?" "정말 크리스한테 네가 지은 시를 읽어 줬니?" "말씀이라고!" "야, 크리스를 만나긴 만난 거니? 만나지도 못하고 겉돌다가 돌아온 거 아냐?" "사람을 뭘로 보고 하는 소리냐?" "아냐, 농담이었어. 사실은 궁금해서 말야." 오버스트릿은 조리실에서 슬쩍해온 빵의 나머지 한 쪽을 입에 쓰윽 집어넣었다. 그는 어떠냐는 듯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말해 주라, 녹스. 정말 읽어 줬단 말이지?" "그렇다니까." "반응은?" 그 질문에 오버스트릿은 마치 남의 일처럼 건성으로 대답했다. "모르겠어." "뭐라구?" "그냥." "무슨 소리냐, 대체?" "그렇다니깐." 오버스트릿은 대답이 궁색해지자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너네들 오늘 갈 거지?" "어딜?" "연극구경 말야." "그거야 물론이지. 우리가 인간대서야 말이 안되지." "알았어. 같이 가자." 니일의 연극관계로 오버스트릿은 일단 궁지로부터 풀려날 수 있었다. 확실히 그 문제는 모든 학생들의 지대한 관심사였다. 웰튼 아카데미의 학생이 공부 아닌 연극 을 한다는 사실이 마치 기적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 오후 늦게였다. 죽은 시인의 사회 멤버들은 수선스럽게 외출준비를 했다. 키팅 선생을 선두로 해 서 모두 연극을 관람하러 갈 참이었다. "니일이 정말 잘해 낼까?" 누군가가 먼저 물었다. "그럴 거야." "어떻게 알아, 난생 처음 하는 연극일 텐데." "걔라면 믿을 수 있어. 요즘 연극에 완전히 미쳐버린 모습 너희들도 보았지 않니." "대단한 정열이야. 그만큼 노력을 기울였으니 결과는 당연히 멋지게 나타날 거야." "그나저나 니일 아버지가 어떻게 승락해 줬지?" "글쎄...나도 실은 그게 궁금하던 참이었어." 그때 피츠가 나서며 모두를 향해 말했다. "할 얘기가 그렇게들 없니? 어서 갈 준비나 해." "맞는 말이다." 맞장구치며 둘러보던 믹스가 갑자기 말했다. "누완다는 어떻게 된 거야?" "랄튼 말야?" "그래. 왜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거지, 너무 늦으면 니일이 나오는 걸 못볼지도 모 르는데?" "뭔가 할일이 있다고 했어. 빨갛게 칠한다던가 뭐라고 하더군." "빨갛게 칠해?" "그랬어." "어딜?" "나도 몰라." 가만히 있던 카멜론도 몹시 궁금한 눈빛이었다. "랄튼 걔는 너무 엉뚱한 친구라서 도무지 알 수 없다니까." 문쪽에 찰리 랄튼의 모습이 불쑥 나타난 게 그때였다. 그는 마치 연극배우가 무대 에 등장하듯 문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어떻게 된 거야, 랄튼. 우리 모두 기다렸잖아." "준비 좀 하느라고 늦었어." "무슨 준비?" "볼래?" "..." 랄튼은 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는가부터 확인했다. 이어 그는 자신의 샤쓰 앞단추 를 재빨리 풀어헤쳤다. 순간 모두들 눈을 크게 뜨거나 놀라는 소리를 냈다. "그게 대체 뭐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랄튼의 맨살 가슴에는 피빛으로 번개그림이 그려넣어져 있 었던 것이다. 그것은 섬ㅉ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확실히 랄튼이 아닌 다른 사람은 누구도 생각못할 일이었다. 일동 중에 가장 놀란 것은 앤더슨이었다. 자기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 다. "랄튼, 이게 대체 무슨 짓야? 왜 이따위 그림을 가슴에다 그려넣은 거지 흉칙하 게?" "이건 말야..." 랄튼은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인디언의 심볼야." "인디언?" "그래. 남자의 정력을 상징하는 그림야." "그걸 어디에 쓰지?" "아직 모르는 구나. 이걸 가지고 말야, 여자 아이들을 뿅가게 만들어버리는 거야. 이제 알겠니?" 가만히 듣고 있던 피츠가 재빨리 물었다. "하지만 말야, 랄튼." "뭐야?" "어쩌다 실수로 상대가 그걸 보면 어쩌지?" "금상첨화지." "뭐라구?" "효과가 배가 된다아, 이거야. 이제 알겠니?" "야, 랄튼." 카멜론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너 이렇게 된 거 아니니?" 카멜론은 손가락 하나를 펴 머리 위쪽에 동그라미를 두세번 그리며 낯을 찡그렸다. "두고 보면 알게 돼. 그보다 모두 모였으면 이제 출발하자. 키팅 선생님은 어떻게 됐지?" "밖에서 만나게 되겠지." 그들은 우루루 몰려가기 시작했다. 키팅의 인솔로 가는 연극 구경이며, 죽은 시인 의 사회 리더인 니일을 보러 간다는 것은 확실히 이들에게 기대가 큰 것이었다. 뜻밖의 일이 발생한 것이 그 직후의 일이었다. 일동이 막 복도를 지나 문으로 향 할 때였다. 한 학생이 갑자기 소리쳤다. "야, 저기!..." "뭔데?" 모두 걸음을 멈추며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순간 제일 먼저 놀라며 소리 친 것은 녹스 오버스트릿이었다. "크리스!" 사실이었다. 크리스가 거기에 서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크리스?" 오버스트릿은 그녀한테로 다가가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웰튼 아카데미에 크리스 같은 여학생이 찾아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 다. 노란 교장에게 발각당할 경우 풍기문란 운운하는 불벼락이 떨어질 일이었다. 크리스는 의외로 차가운 표정을 지시고 오버스트릿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왜, 내가 오면 안돼?" "그게 아니고, 크리스. 너무 뜻밖이라서..." "넌 맘대로 우리 학교에 들어와도 상관없고, 난 이 학교에 오면 안된다는 거야?" "그게 아니라니까." "듣기 싫어. 너 대문에 내가 얼마나 망신을 당했는지 알아?" "아무래도 안되겠군." 오버스트릿은 주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한 쪽에서 두 눈에 불을 켜 고 지켜보는 친구들의 감시로부터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재빨리 크리스의 팔을 붙잡아 복도를 나갔다. 멤버중에 한 학생은 크리스의 미모에 넋이 빠진 것처럼 정신없이 바라보았다가 랄튼에 의해 끌려가면서도 크리스의 모습을 보았다. 준비를 끝낸 키팅의 모습이 그때 나타났다. 오버스트릿은 밖으로 나오기 직전 키팅을 향해 소리쳤다. "저도 금방 뒤따라 갈께요. 먼저 가세요, 선생님!" 돌아본 키팅은 씩 웃어 준 다음 먼저 밖으로 나갔다. 눈이 내리는 밤풍경은 매우 낭만적인 분위기였다. 크리스는 자기의 자동차를 타고 왔다. 현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그녀의 자동차 가 눈을 맞으며 웅크리고 있는 게 보였다. 오버스트릿은 뭐라고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방문에 대해 불안의 그림자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크리스는 기분이 몹시 나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오버스트릿 역 시 나름대로 커다란 문제를 이미 안고 있었다. 그녀의 등장이 원인이었다. "크리스, 네가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은 보통 문제가 아냐. 웰튼 아카데미는 아주 특별난 학교거든." "그래서?"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해. 너나 할 것없이 엄청난 말썽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르는 일야." "그게 겁나니, 넌?" 크리스의 말은 처음부터 가시가 돋힌 것이었다. "겁난다기 보다는, 그게...골치아픈게 좋을 리 없잖아." "잘 들어, 녹스." "..." "넌 우리 학교에 느닷없이 들이닥쳐서 날 웃음거리로 만들어도 상관없고, 난 여기에 오면 곤란케 된다는 거야?" 크리스는 대단히 화가 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따지려고 온 그녀였다. 거기다 오버스트릿의 그런 말까지 듣게 되자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오버스트릿은 깜작놀라 크리스로 하여금 조용히 말하도록 주의를 주었다. "흥!" 크리스는 그렇게 자신의 불만을 토해 내었다. 오버스트릿은 더욱 난처해진 입장에 서 어떡하든 문제를 원만하게 풀어보려 했다. "오해하지마, 크리스." "오해?" "그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야. 정말야. 절대로 널 웃음거리로 만들 생각은 없었어. 생각해 봐. 그것 말고 달리 너한테 내 마음을 전달할 길이 없잖아." 그는 우울해지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천천히 말했다. "어쨌든...그 일 때문에 너한테 지장이 있었다면 사과하겠어. 진심으로. 정말 미안 하다." "일이 어떻게 됐는지 알기나 해?" "?..." "체트한테 그 일이 알려졌어." "체트라구?" "그래. 넌 아직 모를 거야. 그의 성격을." "그렇지만..." "말 마. 당장 이리로 달려오겠다는 거야." "..." 오버스트릿은 체트가 웰튼 아카데미로 씩씩대며 들이닥치는 광경을 상상했다. "널 당장 작살내겠다는 거야." "그랬구나..." "내가 그걸 막느라고 얼마나 애먹었는지 알기나 해? 온갖 수난과 방법을 총동원했 단 말야. 그래서 겨우 진정시킨 거야." "..." "하지만 또 어떤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몰라. 앞으로 조심하지 않으면 그때는 나로서 도 막을 수 없는 일이 터질테니 명심해." 오버스트릿은 재빨리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크리스의 방문 목적은 이미 알 았다. 하지만 그걸 다시 생각해 보면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 다. 크리스는 오버스트릿을 동정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랑은 경우에 따라 동정하는 마음으로부터 생겨나게 될 수도 있다. 그녀가 오버스트릿의 안전을 걱정한 나머지 그렇게 달려왔다는 것은 의미 깊은 일이다. 오버스트릿은 걱정해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문득 그녀의 교실에서 새빨개진 얼굴 을 두 손으로 가리던 크리스의 모습이 떠올렸다. 그 교실을 나올 때에는 심상치 않 은 느낌이 등에 닿는 듯했던 오버스트릿이었다. "크리스." 오버스트릿은 그것을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건 장난이 아냐. 절대로." "..." "난 널 사랑하고 있어." "처음부터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는데, 넌 내가 누군지 알기나해? 나에 대해서 제 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게 말이나 돼?" 오버스트릿은 그녀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 지 몰랐다. 비관적인 말이 아니 라는 것만 분명할 뿐이다. 실상 크리스 쪽에서는 자신이 순진한 남자의 사랑을 받기 에는 이미 틀린 대담한 여자라는 뜻의 말을 오버스트릿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버스트릿은 저쪽에서 부르는 친구들에게 먼저 가도록 했다. 그들은 자동차로 가 지만 걸어서라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크리스와의, 문제가 그만큼 심각했기 때문이다. "크리스. 내가 널 모른다구?" "그래." "틀렸어." "뭐라구?" "난 널 분명하게 알고 있단 말야. 크리스." 크리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오버스트릿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버스트릿은 더욱 확신에 가득찬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너를 던베리 저택에서 처음 봤을때 이미 알았어. 너야말로 훌륭한 영혼의 소유자 라는 사실을 말야." "그게 다야?" "더 무슨 말이 필요해?" 진심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렇게만 알면 된다는 오버스트릿 나름대로의 결론이었다. "어떻게 그것만 옳다고 주장하지?" "..." "그게 만인 잘못된 거라면 어쩔 테야? 그리고 또 내가 너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다고 한다면 어쩔 셈이지?" "그건 틀렸어." "내가?" "그래. 가장 정확한 증거가 있어." "증거?" "네가 모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나를 찾아와 나의 위험을 알려준 게 바로 그거야. 나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증거야." "기가 막혀서, 정말이지..." 크리스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잊은 듯했다. 그보다는 오버스트릿의 말에 정곡이 찔린 기분이었다. 사실상 오버스트릿한테 어떤 위험이 닥치든 일부러 찾아와서 경고 할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말문이 막히자 화제를 바꾸었다. "어쨌든 난 그만 가야겠어. 갈 데가 있으니까." "어딜 가는데?" "연극구경." "그래? 나도 가는데. 체트와 같이 가는 거야?" "체트라구?" "으응." "농담하지 마. 체트가 연극을 본다면 아마 내일 아침 해가 서쪽에서 떠올를 거다." "그럼 잘됐구나." 오버스트릿은 기다렸다는 듯이 재빨리 말했다. "나하고 같이 가자." 순간적으로 크리스의 얼굴에 어이없이 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너라는 사람은 오버스트릿. 정말이지 체면도 없구나." "그게 아냐, 크리스." "뭐라구?" "들어봐 진심이니." 오버스트릿은 어느새 애원하듯 간곡하게 말하고 있었다. "꼭 한번이라도 좋아. 욕심도 부리지 않겠어." "무슨 뜻이지!" "나한테 기회를 달라는 거야. 그냥 얌전히 앉아서 연극만 감상하기로 약속하겠어." 크리스는 더욱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오버스트릿은 단숨에 말해버렸 다. "만일, 만일 말야. 오늘밤 함께 연극을 보고 난 다음에도 날 좋아할 수 없다면 그 때는 단념하겠어. 진심이야. 그러니까 기회를 줘봐. 그건 할 수 있잖아?" "진심으로 하는 말이지?" "그렇다니까." "정말?" "약속하겠어. 죽은 시인의 사회 명예를 걸고 말야. 그러니 오늘 밤만 나와 같이 있어 줘. 그런 후에 그래도 날 만나는게 싫어진다면 좋아. 네 눈앞에 다시는 나타나 지 않을께. 맹세하지." "하지만...그 사실을 체트가 알게 된다면?" 오버스트릿은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확인했다. 어떡하든 그녀를 놓 치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께." "어떻게?" "그에게 들키지 않도록 할 수 있어." 맨 뒤에 앉았다가 끝나자 마자 제일 먼저 나오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크리 스는 다시 생각해 보는 표정이더니 이내 지금까지에 비해 부드러운 표정으로 바뀌었 다. "정말 약속하는 거지?" "물론 죽은 시인의 사회 명예를 걸고 맹세해." "죽은 시인의 사회?" "응." "그게 뭐지? 죽은 시인의 사회 말야." "그건 내가 맹세할 때에만 사용하는 말야." 크리스는 피식웃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울러 그녀는 오버스트릿에 대해서 확실히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 듯이 입가에 미소를 나타내며 바라보았다. "됐지?" 오버스트릿이 최종적으로 대답을 요구했다. "으응." 크리스는 더 밝은 미소를 그에게 던졌다. "됐어!" 오버스트릿은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었다. 그보다 야호! 커다랗게 외쳐대고 싶었 다. 함께 니일의 연극을 보러가기 이해 크리스가 운전하는 자동차에 오르는 오버스 트릿의 발걸음은 구름을 밟는 듯했다. 어두운 하늘에서는 전히 눈발이 조금씩 춤추며 대지 위에 사뿐사뿐 내려 앉았다. 크리스가 처음 왔을 때보다 약간 많아진 눈발이었다. 그것은 마치 오버스트릿에 대 한 크리스의 마음이 훨씬 호의적으로 바뀐것의 증명처럼 점점 많아지며 두사람의 머 리와 어깨에 조용히 내려 앉았다. 아버지, 아버지 헨리 홀은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맨앞에서 몇 번째 되지않는 의자에 멤버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키팅도 함께였다. 그들은 크리스와 함께 들어와 뒷자리에 앉는 오버스트릿을 향해 승리의 브이자를 그어 보이며 환영의 뜻을 표시했다. 두 사람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연극을 시작되었다. 극중 팩으로 분장한 니일이 괴상한 차림에 꽃과 가시같은 것으로 만든 관을 머리에 쓰고 무대에 등장한 것이 그때였다. 객석에 앉아있던 믹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영하려는 것을 곁의 친구가 급히 잡아당겨 다시 자리에 앉혔다. 팩은 어두운 무대 위에서 주위를 살피다가 요정을 발견하자 서서히 다가가며 말하 기 시작했다. 니일의 대사의 시작이었다. "오오, 넌 요정이지? 대체 어딜 가고 있는 거지?" "들넘고 산건너 또 계곡을 지나 수풀도 가시덤불도 헤치고..." "나는 분부대로 야음을 틈타 소란을 피우는 자. 오베론 양에 대해 까불어서, 웃음 을 달라고 조르는 게 내역할...어린 숫말로 분장하고 콩을 너무 많이 먹어 뚱보가 된 말을 감쪽 같이 속일 수만 있다면..." 확실히 니일은 역할을 충분히 소화시키고 있었다. 니일은 한마디로 자연스럽게 연기를 하고 있었다. 즐거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모 습이 바로 그런 것이라는 증명인 듯했다. 상당히 긴 대사가 거침없이 술술 나오고 있는 그 모습은 기성배우보다 오히려 신선하고 활력이 넘쳤다. 멤버들은 자신도 모르게 니일의 연기에 몰입되어 갔다. 그가 그토록 훌륭하게 해 내리라고까지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대단해!" "누가 아니래, 멋져!" "소질을 타고난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저토록 멋지게 해낼수가 없지!" 멤버들은 저마다 감탄하며 그게 마치 자기의 일인양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열중했 다. 두번째로 등장한 남녀가 던베리의 딸인 버지니아였다. "쉿! 누가 오고 있다." 팩의 말이었다. "어디요?" "금방 들이닥칠 거야." "그럼 어쩌죠?" "바로 여기를 피해야만 해. 자, 어서..." 팩과 그의 상대역인 요정이 재빨리 무대 뒤쪽으로 나가는 곳까지 몸을 피했다. 팩 은 거기 숨은 채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대에 새로 등장한 것은 라이산다였다. 숨어서 보는 팩의 모습이 관객들에게 보 이는 가운데 라이산다와 하미아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무대 중앙에 나오자 나란히 드러눕는 데서부터 대사가 있었다. "하나의 잔디 위에 두 개의 베개면 충분하다. 마음은 하나, 침상도 하나, 두 사람의 가슴 속 진실된 사랑도 오직 하나 뿐..." 라이산다는 하미아의 곁으로 바싹 다가누우려 했다. 멤버들의 시선은 숨어 있는 팩의 모습을 더욱 열심히 응시했다. 길지 않지만 니일의 해낸 팩의 연기가 너무나 감동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안됩니다. 라이산다." 하미아역의 버지니아도 깜찍하게 연기를 하고 있었다. "제발 부탁이에요. 제게서 조금만 떨어져 주세요." "무슨 소리지?" "그렇게 제 몸에 닿을 정도로 가깝게 눕지 마세요. 그러시면 안됩니다. 그렇지만 소원이에요, 라이산다. 사랑과 우정 모두를 소중히 하고 싶으니까 조금만 떨어져 누 워 주세요." 니일의 팩의 연기 때부터 관객들은 완전히 무대에 사로잡혔다. 아마추어들의 연극 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이게 바로 세상에서 말하는 신중함이라는 겁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남녀답게 이 몸의 순결을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그 대목에서는 라이산다의 대사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좀 떨어져서 누우세요. 그럼 이만, 안녕히 주무세요. 소중한 분 그 상냥하 신 생명이 존재하는 한 당신께서 마음이 변하시지 한 분 그 상냥하신 생명이 존재하 는 한 당신께서 마음이 변하시지 않게 하기 위한 기도를 드리겠어요..." 니일은 그동안 무대와 객석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과연 어떻게 역할을 소화시켰는지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관객들의 호응으로 실패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뿐이었다. 그는 열광하는 관객들의 반응을 분명히 보았다. 연기에 열중할 때는 전혀 그럴 겨 를이 없었지만, 무대 뒤쪽으로 퇴장할 때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눈에는 객석 앞쪽에 있는 멤버들이 똑똑히 보였다. 키팅 선생의 모습도 보였 다. 또한 그들이 한결 같이 얼굴 가득히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도, 무엇인가 자 기들끼리 지껄이며 웃어대는 모습도 보였다. 그때였다. 흐뭇한 마음으로 객석을 바라보고 있던 니일의 얼굴표정이 돌연 딱딱하게 굳었다. 그와 함께 경악에 가깝도록 놀라는 눈동자가 객석의 통로 저쪽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이미 그의 가슴 속에서는 커다란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두려움의 소용돌이였다. 그럴수가 없었다. 감쪽같이 지나칠 것으로 믿었던 기대가 이 순간 커다랗게 소리없 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거기 객석 맨 뒤에 우뚝 서있는 사람이 있었다. 코트를 한쪽 팔에 걸친 채 돌부처처럼 굳은 표정으로, 그보다 성난 모습으로 서서 무대를 노려보는 것은 바로 니일의 아버지였다. 분명히 비밀로 했던 니일이었다. 그 비밀은 니일의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어쩌면 살해당할지도 모를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 그게 깨지고 말았다. 아버지의 모습이 헨리 홀에 나타나는 것과 동시에 산산조각이 나며 허공으로 흩어 지고 말았다. 아울러 그 상황은 니일로 하여금 비장한 각오를 하게 만들었다. 이번만큼은 어떤 극한적인 상황이 닥친다 해도 과감히 거기에 맞서겠다는 각오였 다.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도록 두려운 게 사실이었지만, 안간힘을 써 그러한 각오 를 되새기며 이를 악무는 것이다. 라이산다와 하미아의 연극이 막 끝나기 직전이었다. 라이산다가 말했다. "당신의 말대로 따르겠다." "고맙기도 하셔라. 라이산다." "난 여기서 자도록 하겠소. 부디 당신에게 잔뜩 쌓인 피로가 지금부터의 잠으로 인 해 말끔히 씻겨 주기를 바라겠소." "알겠어요, 라이산다. 그 소리의 반은 기도드리고 있는 당신께 바치도록 하겠어요." 그런 다음 라이산다와 하미아는 약간 떨어져 누운 채 깊은 잠속으로 빠져 들어갔 다. 무대 위에는 어울리는 음악이 울려나오고 그 다음 팩이 다시 등장하게 되어 있 었다. "나갈 차례여, 니일." 마음 속의 혼란 때문에 깜빡 망각하고 있던 니일을 함께 하는 동료가 일깨워 주었 다. 니일은 깜짝 놀랐지만 이내 비탄에 빠진 모습이 되었다. 거기서 그리고 무대에 나가지 않는다면 다소라도 문제가 쉽게 풀릴 수도 있을지 몰랐다. "나갈 차례야, 니일." 마음 속의 혼란 대문에 깜빡 망각하고 있던 니일을 함께 하는 동료가 일깨워 주었 다. 니일은 깜짝놀랐지만 이내 비탄에 빠진 모습이 되었다. 거기서 그리고 무대에 나가지 않는다면 다소라도 문제가 쉽게 풀릴 수도 있을지 몰랐다. "뭐하고 있어, 니일." 아직 니일은 어떤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때 객석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니일! 뭐하는 거야. 빨리 나오지 않고!" 그와 함께 일제히 합창하는듯 니일을 외쳐댔다. 니일은 다시 생각할 필요도 없어 졌다. 아버지의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눈이 불을 켠다 해도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 는 엎질러진 물이라는 체념과 함께 다시 비장한 각오로 무대에 나갔다. 이번에는 대사가 없는 장면이었다. 서정적이면서도 여유있는 축하연의 분위기 연 출이었다. 춤을 추거나 혹은 여러 가지의 동작을 요정의 분위기를 내는 것이었다. 일단 무대에 등장한 니일은 다시 팩으로 돌아갔다. 이미 니일 페리가 아니었다. 객석에서 노려보는 아버지도, 열광하는 키팅과 멤버들도 느껴지지 않았다. 날렵하면 서도 시종일관 한없이 기뻐하는 표정으로 오직 연기만을 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객석에서 멤버들과 떨어져 앉아 있던 녹스 오버스트릿은 넌지시 곁에 앉은 크리스 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 역시 무대에서의 연기에 몹시 흥분된 표정으로 빨려들고 있 었다. 결코 어떤 탐욕적인 고의가 있지는 않았다. 진심이었다. 그의 한쪽 손이 조용히 무릎 위에 얹힌 크리스의 속으로 접근했다. 약간 망설이는 듯했으나 이내 그 동작으 로 연결된 것으로 나타났다. 오버스트릿으로서는 기대 이상의 반응이었다. 오버스트리스이 손이 닿았을 때였다.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더욱 대담해졌다. 이번에는 크리스의 손등을 덮듯이 하며 포갰다. 마찬가지였다. 뿌리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과는 정반대였다. 크리스는 연극에 몰두한 채 시선을 무대에 둔 채 손으로 응답해왔다. 적극적인 반 응이었다. 그녀 쪽에서 먼저 오버스트릿의 손을 꼬옥 힘주어 잡아온 것이다. 오버스트릿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자신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그러면서도 격 렬하게 조여오는 감각이 곧장 가슴을 뚫고 들어왔다. 살갖과 피부의 접촉보다는 그 이미지가 더 없이 황홀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때 니일의 무대에서의 춤장면이 끝났다. 니일과 함께 넓은 무대를 돌면서 춤추던 요정역의 무희들이 모두 퇴장했다. 무대 에 남은 것은 팩역의 니일 뿐이었다. 니일의 가슴은 새삼스럽게 긴장되기 시작했다. 무대 위에 홀로서게 되자 전혀 새 로운 사실인 듯이 아버지의 존재가 마음 속에서 되살아났다. 충격적이었다. 모든 관객이 일제히 숨죽이며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만큼 니일의 눈에 커다랗게 들어온 것은 그들 관객이 아니었다. 단 한사람, 바로 아버지였다. 그 존재가 자신을 짓눌러 압사시킬 듯이 클로즈업되 면서 무대를 향해 넘쳐오는 듯했다. 순간 니일은 무엇이나 대항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또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진심을 아버지에게 알려서 그가 깨닫도록 해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이윽고 니일이, 팩이 입을 열자 강당안은 물을 끼얹은 듯이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우리들 그림자의 이 여흥...마음에 드시지 않는다면...이렇게 생각해 주세요...지금까 지는 선잠을 자다가 어렴풋이 보았다...다만 꿈이었다고 생각한다면 마음도 투명하게 하시죠..." 실상 맨 뒤에서 소름끼치도록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아버지를 향한 니일의 가슴 저미는 독백은 다음과 같이 계속되었다. 오늘 밤에 보인 것은 완성 안된 꿈얘기이며 사리분별이 없는 일장춘몽에 불과합니다. 부디 너무 꾸짖지 마시고 용서해 주신다면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 정직한 자 팩에게 뱀과 같은 독설을 퍼붓지 않고 끝내 주신 다면 더할 수도 없는 행복입니다. 니일의 가슴 깊은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아버지에 대한 슬프고 간절한 하소연 이 었다. "...그렇다면 이에 부응해 더 한층 노려하겠습니다...팩은 두마디 하지 않습니다...그러 면 여러분,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괜찮으시다면 손을 벌려서 응답해 주시기 바랍니 다." 니일은 관객들을 향해 두 팔을 크게 벌려 인사했다. 잠깐 동안 니일의 인사말 때 문에 조용했던 관객들이 어느틈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특히 멤버들의 열광은 불같이 뜨거운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막이 내렸다. 관객들은 더욱 우렁찬 박수갈채로 찬사를 보냈다. 멤버들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는 흥분과 열광의 도가니 속으로 휘말려들어가고 있었다. 그중에 제일 먼저 자리 에서 벌떡 일어난 것이 찰리 랄튼이었다. 뒤를 이어 누구의 권유도 필요없이 멤버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팅도 함께였다. 그들이 일제히 환호하며 기립박수를 보내기 시작한 직후였다. 이번에는 여기저기서 다른 관객들이 일어났다. 이윽고 전체 관객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열광 하며 기립박수를 보냈다. 막내린 무대 안에서의 감명도 그에 못지 않았다. 막 뒤에 선 채 두눈을 지긋이 감 고 있는 니일을 연극동료들이 재촉했다. 관객들이 배우들이 다시 나타나 주기를 소 리쳐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특히 팩의 역할을 훌륭히 해낸 니일을 보기원했다. 출연했던 배우들이 중간에 서있는 니일을 선두로 다시 무대에 나타나 깊숙히 허리 굽혀 인사하자 강당 안은 떠나갈 듯했다. 특히 멤버들은 미친듯한 환성과 함께 손바 닥이 아프도록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환호와 박수갈채는 그칠 줄 모르며 계속되었다. 이윽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바져나가기 시작했을 때에도 아직 열광하는 사람 들이 대부분이었다. 배우들 중에는 무대에서 객석으로 뛰어내려가기도 했다. 열광적인 관객들은 무대위로 뛰어올라 격려하는 모습도 보였다. "성공야! 대성공야! 이럴 줄은 상상도 못했다. "무대 뒤에서 니일을 비롯한 배우들이 기뻐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연출을 맡은 사람이 들어오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니일, 이걸 어쩌지 네 아버지가 오셨어." 이미 알고 있으면서 잠깐 잊고 있었던 니일이었다. 그는 체념한 듯이 가볍게 웃었 다. "괜찮아요." "정말 괜찮겠니?" 연출자는 니일의 실제사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각오한 니일이 가방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누구보다도 멤버들이었다. "여어, 니일!" 하지만 니일의 곁에는 이미 얼음장보다 더욱 몸서리쳐지게 차가운 표정의 아버지가 있었다. 멤버들은 아랑 곳 없다는 듯이 힘차게 말했다. "최고였다, 니일!" "정말 잘했어!" "넌 천재야, 니일." 그들은 진심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부담없는 개인적이면서도 인간적인, 그래서 가치있는 자신의 감명을 고백하고 있었다. 니일의 귀에는 어느덧 그런 말들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바위에 짓눌린 듯이 무겁게 입다물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 표정, 눈동자 만이 모든 것을 채우며 다가올 뿐 이었다. 오버스트릿이 축하파티를 열겠다고 소리쳤을 때 니일은 쓸쓸하게 돌아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 소용없는 일인 걸..." 그때 키팅은 다른 멤버들과 함께 강당 밖에서 니일이 나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주위에 계속 격려하고 격찬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자 니일의 아버지는 방법 을 바꾸었다. 그는 강력계 수사관이 범인을 연행하듯 거의 강제로 아들의 팔을 잡아 끌며 밖으로 향했다. 니일이 강당문을 나섰을 때였다. 처음 키팅과 멤버들은 영문몰라 어리둥절했다. 아버지한테 죄인처럼 끌려가고 있는 니일의 모습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니일은 아버지한테 팔이 끌려 한 쪽에 세워둔 자동차로 향했다. 값비싼 승용차였 다. 아들을 자동차 옆에 세워둔 아버지가 차의 문을 열기 위해 자동차 저쪽으로 갔을 때였다. 이를 지켜보던 키팅이 니일한테로 다가갔다. 그는 진심에서 니일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니일, 훌륭했다!..." 니일은 입도 열지 못했다. "훌륭했다. 감동받았어. 내가 오늘과 같은 감동을 계속 받을 수 있는 보장이 선다 면 여기서 쓰러져 죽어도 오히려 행복하겠구나..." 그때였다. 자동차 운전석의 문을 열어놓고 일어선 니일의 아버지는 갑자기 험악한 얼굴이 되 었다. 그 광경은 문 쪽에 있는 멤버들이 예의주시하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키팅 선생!" 키팅은 뜻밖의 상황에 잠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당장 내 아들 곁에서 떨어지시오!" "..." "당장" 명령이었다. 노란 교장이라 해도 함부로 내뱉을 수 없는 인격이하의 언동이었다. 키팅은 울컥 솟아오르는 분노를 느끼자 반대로 니일의 아버지가 측응해졌다. 그 광경을 현장에서 목격한 멤버들은 경악하며 가장 좋은 친구이며 지기였던 니일 을 향해 가슴 아픈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니일과 그 아버지의 관계를 수평선상에 놓고 싶었던 키팅이었 다. 그러나 학생들, 그곳도 자기 아들의 선생이자 아들과 동급생들이 지켜보는 앞에 서 그런 유치하기 짝이 없는 언동을 서슴지 않는 모습에 아연 실색했다. 폭군 네로 도 그럴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가장 비참해진 키팅이 고민에 휩싸였을 때 니일의 아버지는 강제로 아들을 자동차 안에 우겨넣었다. 그 광경을 본 랄튼이 참다 못해 소리쳤다. "페리 아저씨! 왜 그러시죠?" "너희들은 상관할 일이 아니다." 페리, 즉 니일의 아버지는 히틀러나 나폴레옹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가장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곧장 아들을 태운 차를 출발시켰다. 지금껏 가장 소극적이고 가장 망설임 많던 앤더슨조차 단두대로 끌려가는 사형수 같은 니일의 모습에 울분을 터뜨렸다. "니이일!" 소용없었다. 들릴 리 없었다. 자동차의 뒷쪽 유리를 통해 니일의 얼굴이 언뜻 비 쳤다. 죽은 시인의 사회 멤버들은 소리없는 절규와 눈물없는 슬픔으로 자신의 가슴 을 쥐어뜯고 있었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와 같은 니일의 모습은 자동차에 가려서, 그런 다음에는 멀어져 가는 거리 때문에 소리없이 울분을 터뜨리는 키팅과 멤버들의 시야에서 멀어 져갈 뿐이었다. 영원을 향하여 아버지의 횡포였다. 네 어머니를 위해서라는 이야기는 아들을 미끼로 자신의 명예를 낚으려는 아버지의 지극히 비인간적인 위선이었다. 니일의 어머니는 좀처럼 안정되지 않는 불안 속에서 초조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 다. 그녀는 아들을 잡아오겠다며 마치 불량배처럼 성내며 나가버린 남편보다는 사랑 하는 아들을 더 많이 생각했다. 그녀 자신도 하나 뿐인 아들 니일에 대해 지나치도록 욕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었 다. 그러나 남편의 모든 모습을, 여자보다도 더욱 자신의 틀 속에 아들을 집어넣고 족쇄를 채우려는, 자신이 아버지인 이상 아들을 죽으라면 기꺼이 죽어야 된다는 식으 로 의식구조가 바뀐 남편의 곁에 있는다는 것조차 등골이 오싹한 그녀였다. 그녀는 초조하게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무슨 일이 꼭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에감이 줄곧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니일을 데리러 가던 남편의 성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들에 대한 사랑은 어머 니 쪽이 더욱 강하든가 그런 의미에서는 아니었다. 남편이 아들 니일을 지나칠 정도로 사랑한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방법이 문제 였다. 아들을 낳아 주었고, 사랑하고 길러 준만큼 아들은 아버지에게 복종해야 된다 는, 아버지의 희망대로만 되어 주어야 된다는 사고 방식이 문제였다. 아들은 스스로 희망이나 이상을 가질 수 없었다.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다. 아버지 가 이미 짜놓은 틀에 맞추어 살아가야 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대들거나 반 항하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이다.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니일의 어머니는 급히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 속에 비벼서 끈다음 거실로 나왔다. 창문을 통해 자동차가 멎고 거기서 내려 들어오는 남편과 아들의 모습이 보였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대단히 화가 난 남편이었고, 끌리다시피 걸어오 는 아들의 모습은 가엾게도 잔뜩 겁을 먹었거나 혹은 반항심으로 불타고 있는 모습이 었다. 그들은 한마디도 없이 거실로 들어섰다. 곧장 서재로 향했다. 니일의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남편과 아들의 뒤를 따라 서재 로 들어가 다른 쪽 의자에 앉았다. 니일은 얼른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과 자세였다. 이윽고 아버지와 아들이 전에 없이 굳은 표정으로 마주보고 섰다. 그들은 자리에 앉 지도 않은 것이다. "니일." 아버지가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니일은 묵묵히 서 있었다. "네가 이래도 되는 거냐?" "...!" "이런 식으로 부모를 배반해도 되는 거냔 말이다." "!..." "좋다, 니일. 내 생각을 말해 주마. 난 곰곰히 생각해 봤다. 그리고 이해도 해보 려 했다, 네가 과연 이런 식으로 부모를 배반해도 되는 가에 대해서 말이다." 니일은 꼼짝도 않고 입도 열지 않았다. "네가 연극 따위를 해? 그리고, 그게 대체 무슨 꼴이냐? 강당이 온통 불량배들의 소굴처럼 들끓고, 거기서 너라는 녀석은 자랑스러운 듯이 기뻐하고 말야!" 아버지는 스스로의 말에 참을 수 없이 분노를 느끼며 소리쳤다. 열광하는 관객들을 불량배라고 몰아붙이고, 연극을 가장 저속한 행위로 매도하는 아버지한테 니일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진 심을 다시 한번 호소할 생각이었었다. "그건 네 스스로 너의 인생을 파괴하는 행위란 걸 모르니?" 갑자기 니일의 마음 속에서 거센 반발이 일어나기 시자했다. 파괴라니요, 내 인생 을 파괴하다뇨, 그게 어재서 파괴라는 거니까, 그러는 아버지가 바로 아들의 인생을 파괴하는 게 아니고 무엇입니까... "내가 분명히 경고했었지?" 어머니는 슬픈 얼굴에 어떤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두려운 표정까지 곁들여 가 만히 지켜보며 있을 뿐이었다. 남편은 아들앞에서, 네 어머니를 위해서, 라고 말할 때가 자주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마음을 미화시키거나 정당화시키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상 그 남편은 자식문제에 대해 아내와 상의하는 일 조차 지금껏 한번도 없었다. 모든 결정은 그가 내렸다. 어디까지나 일방적이고 편견적이었다. 아내에 대해서 조차 남편은 거의 폭군처럼 위압적이었다. 물론 일반적인 가정문제에 있어서는 그렇 지 않았다. 자상한 남편이고 다정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편범한 가정일이나 여타 상식적인 가 족관계만을 떼어놓고 본다면 평범한 남편이었고 남들과 다르지 않은 아버지였다. 그가 폭군처럼 군림하려는 분야는 바로 아들의 장래에 대한 문제였다. 적어도 아 들은 아버지의 희망대로 살아야 된다는, 성인이 되기까지는 전적으로 아버지한테 순 종 내지는 맹종해야 된다는 주관의 소유자였다. 그럴 때는 언제 자상한 남편이었던가, 언제 아들을 사랑하는 인자한 아버지였던가 의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다만 무섭도록 강압적이고 도저히 거역 할 수 없는 독재자 로 완전히 변하고 마는 것이다. 지금의 그의 모습이 바로 어느 때보다도 철저하고 무섭게 변해있는 모습이었다. "여러 말 않겠다. 네가 애비를 배신했고, 어머니까지 배신한 이상 내게도 생각이 있다." 드디어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무서운 말이, 니일한테는 사형선고 보다도 무서운 말이 떨어지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니일 더 이상 웰튼 아카데미에 놔두지 않겠다." "..." 니일은 아버지의 얼굴을 재빨리 바라보았다. 하지만 질문조차 건넬 수 없었다. 그 표정만으로도 위압당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널 당장 브레이든 군사학교로 보내겠다. 넌 그곳에서 하버드로 진학해서 의사가 되는 거야. 무슨 뜻인지 알겠지?" "아버지!" 니일은 자신도 모르는 순간 낮게 소리쳐 아버지를 불렀다. 너무나 커다란 충격이 었다. 그럴수는 없었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웰튼 아카데미를 떠난다는 것은 그 에게는 물을 떠나는 물고기와 같은 일이었다. 그것만큼은 아무리 아버지의 명령이라고 해도 복종할 수 없다는 강력한 반발심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니일은 어느덧 애원하는 눈빛으로 아버지 를 쳐다보았다. "뭐냐, 니일?" "의사가 되라시는 말씀은 저도 알아요." "그래서?" "하지만 그건 당장 시급한 일이 아닙니다." "뭐라구?" "앞으로 10년이나 더 뒤의 일이지 않습니까." 네가 무슨 할 말이 있느냐는 듯이 노려보는 아버지한테 니일은 더욱 간곡히 덧붙였 다. "그리고 그건...그건 제가 평생 동안 해야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전 그럴 수 없습니다, 하는 말이 니일의 입안에서 맴돌았다. 무엇때문에 아들의 인 생을 독차지하려는 겁니까, 아들은 아버지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라는 등등의 과격한 저항심이 연이어 소리없이 소용돌이쳤다. "니일!" 아버지가 갑자기 소리치는 바람에 니일은 깜짝놀랐다. "내 말 심각하게 들어라!" "?..." "너, 넌 말야, 내가 평생 동안 꿈조차 꾸지 못했던 멋진 기회를 잡고 있는 거다!" 기회라뇨, 하는 외침소리가 니일의 목구멍 속으로 잦아들며 경련을 일으키도록 만 들었다. "난 네가 그런 훌륭한 기회를 연극 따위의 보잘 것없는 일에 열중해서 놓치고 말도 록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순 없다." "아버지!" 니일의 입에서 처음보다 훨씬 분명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의 입안에서는 너무나 많은 말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오려 했다. 그 자신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말 을 하지 않고는, 그 불만을 터뜨리지 않고는 심장이 파열될 것만 같았다. "뭐냐?" "..." "말해!" "전, 전..." 매우 흥분된 상태여씨 때문에 할 말이 많던 니일은 말문이 막혔다. "할 말이 있느냐?" "...!" "좋다. 들어보자, 네가 하고 싶은 변명이 뭔지." 니일은 아직도 입 속으로 우물거릴 뿐이었다. 아버지는 기다렸다. 똑바로 아들을 바라보며 그로부터의 어떤 변명을 잔뜩 기다렸다. 순간 매우 기묘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는데, 어떤 표정이 아버지의 얼굴을 스쳤다. 네가 무슨 할 말이 있게느냐가 아니었다. 너도 말을 할 수 있느냐, 네 생각이 옳다고 판단한다면 확신을 가지고 주장해 보아라 하는 것이었다. 아들한테 소신을 밝히도록 기회를 주 고 싶어진 변화가 순간적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스친 것이다. 그가 다시 말했다. "애비한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다는 거냐?" 기막힌 일이었다. 그보다 참혹한 심정이었다. 니일은 진짜로 좋은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편생에 한번 있기도 어려운 기회를, 아버지 앞에서 정정당당하게 소신을 피력할 수 있는 기회를 내던진 것이다. "전, 전..." 그는 다시 우물거렸다. "어서 말해 봐." "아닙니다. 제가..." "할 말이 없느냐?" "네, 아버지." 서있던 니일은 뒤에 있는 소파에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고개도 들지 못했다. 푹 숙인 얼ㄱ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때 아버지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역력히 스치고 지나갔다. "됐다." "?..." "할말 없으면 그만 네 방에 가서 자거라!" 아버지는 무뚝뚝하게 던진 다음 곧장 서재를 나가버렸다. 소파에 처박힌 니일의 눈에서는 더욱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느덧 어깨가 들먹이기 시작했다. 지금껏 조용히, 그리고 슬픔을 감추지 못하며 지켜보던 어미니가 급히 아들의 곁으 로 다가왔다. 그 옆에 무릎 꿇듯이 앉으며 입을 열었다. "진정해라, 얘야." 어머니의 따뜻한 말에 니일은 더욱 슬픔이 치밀어 올랐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다 잘될 거다." 어머니의 목소리에도 눈물이 섞여 있는 듯했다. "그만 가서 자거라, 응? 자고 나면 마음이 가벼워질 거다. 자, 어서 네 방으로 가 거라." 니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할말이 없었다. 하고 싶지도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그의 모든 생각과 모든 마음은 암흑으로 가득찬 상 태였다. 어떤 것도 어떤 일도 생각할 수 없었다. 오랫만에 들어와 보는 자기의 침실이었다. 니일은 침대 곁에 정성껏 접혀져 있는 자신의 잠옷을 바라보았다. 그것 역시 오래 전에 입었던 것이었다. 다른 방안의 것들은 바라보고 싶지도 않았다. 불을 켜지 않 고 침대곁의 스탠드만을 켰다. 주변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속에 있는 니일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주위 의 모든 것들이 일제히 압박을 가해 오고 있어서 였다. 웰튼 아카데미를 그만둔다는 것은 사형선고 그것이었다. 거기에는 죽은 시인의 사 회가 있다. 모임장소인 동굴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친구들이 있다. 신선한 충격과 함께 인간의 긍지를 깨닫게 해 준 키팅 선생이 있다. 그리고 무엇 보다도 참 인생의 탐구와 함께 자기 각자의 인간적인 개성을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에 서 반드시 필요한 시가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그런 모든 것들은 바로 니일 자신이다. 자신의 살아있는 생명이다. 그 것들로부터 떠난다는 것은, 그것들을 버린다는 것은 바로 귀중한 생명을 버리는 일이 다. 그럴수는 없었다. 생명을 버린 후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영혼이 남게 된다 는 종교적인 신념은 또 별개의 것이다. 아버지는 그에게 있어서 이미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어미니가, 그것도 미려 하기 짝이 없이 남편의 독선으로부터 아들을 보호조차 못해 주는 어미니가 있을 뿐이 었다. 그에게 있는 것은, 존재하는 것은 죽은 시인의 사회였고, 그 멤버였고, 키팅 선생이 었고, 시였고, 웰튼 아카데미였고, 기숙사의 자기 방이었고 룸 메이트인 앤더슨이었다. 그것들이 없어진다면 그것들로부터 떠나게 된다면, 그것들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니 일 역시 존재도 흔적도 없이 산화되어 영원히 사라지고 말게 될 16세 영혼이 어디에 선가 방황하게 될 뿐이다. 현실적으로 아버지는 실천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선포한 이상 그는 반드시 실행에 옮길 것이다. 이튿날 날이 밝으면 웰튼 아카데미 에 전화를, 어쩌면 직접 찾아가서 노란 교장한테 니일의 전학을 실현 시킬것이다. 그 럴 때의 주위의 엄청난 반응들... 안돼, 그럴 수는 없어, 난 웰튼 아카데미를 떠날 수 없고 떠나서도 안돼, 군사학교 엔 못가, 난 지금의 누구한테로부터도 떠날 수 없어, 없어 없어...내가 니일이라면, 내 가 살아있다면 난 웰틈 아케데미와 죽은 시인의 사회에 있어야만 해... 니일은 갑자기 앉았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한 여름밤의 꿈에서의 팩의 꽃관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한없이 길고 깊게 쏘아보았다. 그러자 무대에서의 팩이 다시 살아나는데, 가련하게도 그 팩한테는 정열이 식었다. 모두 말라버렸다. 그의 몸 안에는 이미 한 방울의 정열도 남지 않고 몽땅 고갈되 었다. 그는 팩의 꽃관을 머리에 쓴 다음 창가로 다가갔다. 유리때문에 드넓은 바깥 의 밤풍경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창문 하나를 위로 밀어올렸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다시 하나의 창문을 밀어 올려 열어놓자 비로소 밤하늘이 환히 내다보였다. 그와 함께 차가운 밤바람이 휘익 몰아쳐 들이닥치며 방안에 있던 것들이 잔뜩 목을 움츠리며 떨게 만들었다. 한동안 그렇게 서서 어둠의 적막 속으로 가라앉는 겨울의 밤풍경을 내다보았다. 윗옷을 벗은 맨몸에 팩의 꽃관을 쓴 채였다. 깊은 밤중 창가에서서 밖을 내다보고 서 있는 니일의 모습은 이미 현실 속의 그가 아니었다. 살갗 속으로 파고드는 겨울 밤바람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그의 맨살도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무감각해진 상태였다. 아버지로부터 웰튼 아카데미를 떠나라고 듣는 순간에 시작된 그의 체념은 거센 저 항에도 불구하고 더욱 강렬하게 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삶과 그 의미에서의 존재가치의 상실은 차라리 극단적인 선택만 못하다고 결론지어진 것이다.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러는 모습 역시 평소의, 지금까지의 니일은 아니었다. 다만 무의식적으로 움직일 뿐인 육체였다. 아직 호흡을 하고 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있는 껍데기일 뿐 그에게 는 모든 것이 공허하게 뚫려 있었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듯한, 죽은 듯한 발걸음이 침실을 떠나 계단을 향했다. 느릿 느릿, 유령처럼 아주 가볍게 그러면서도 바위처럼 무겁게 계단을 밟아 아래층으로 향 했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같은 시간 니일의 어머니는 침실에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곁에 누운 채 잠이루지 못하며 흐느꼈다. 하나 뿐인 아들의 애처럽던 모습이 그럴수록 더욱 선명하게 떠올 랐다. 그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사납고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아버지 앞에서 눈물 흘리 는 모습이었다. 그 시절의 꿈과 낭만을 무참히 짓밟히며 눈물이 가득히 고였던 눈망 울이 애타게 구원을 요청해오는 듯했다. "진정하구료." 어느새 자상한 남편으로 돌아와 있는 니일의 아버지였다. 그럴때는 상대의 마음을 넓게 헤아렸다. 그는 아내가 아들 때문에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자신이 위로해 주어야 된다는 것도 알았다. 극단적이고도 치밀한 야누스적인 양면이었다. "다 잘될 테니 어서 진정하고 자도로 해." 니일의 어머니는 희미한 소리로 여전히 흐느꼈다. 그 소리가 문득 니일 아버지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 것은 확실히 이상한 현상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내의 곁에 모로 누웠다. 고민에 휩싸인 아버지의 얼굴 모습이 거기에 있었 다. 하나뿐인 아들한테, 아직 어린 그애한테, 그보다 그 아이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다는 자책감을 느끼는 듯했다. 또한 자신이 그 밤 아들한테 내렸던 결정을 재고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얼굴같기 도 했다. 비로소 니일이 웰튼 아카데미를 떠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듯한 얼굴이 었던 것이다. 같은 시간. 니일은 어떤 방에 있었다. 그는 스탠드의 불빛을 약하게 해서 겨울 앞에만 볼 수 있도록 한 상태에서 무엇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작은 물건인데, 그것은 한 개의 열쇠였다. 열쇠를 들고 있는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무엇 대문인지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니일 자신도 확연하게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손은 계속 떨렸다. 주위는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니일은 분명히 살아있는데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극도의 비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숨을 죽이는 게 아니였다. 그럴 필요가 사실상 없는데도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윽고 떨리는 손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은 열쇠를 책상서랍의 자물쇠에 꽂았다. 조용히, 아주 신중하게 옆으로 돌렸다. 어떤 금속성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찰칵, 하는 아주 미미한 소리가 살짝 책상을 진동시켰을 뿐이다. 니일의 두 손에 의해 서랍이 천천히 열렸다. 그와 동시에 나타난 것은 천으로 감싸 놓은 어떤 물건이었다. 그다지 크지는 않았 다. 약간 길쭉한 형태로 손아귀에 적당히 잡힐만 한 것이었다. 잠시도 그것을 내려 다 보던 니일이 한 쪽 손을 그리로 가져갔다. 천으로 술술말아 놓은 것은 감촉이 섬ㅉ하게 딱딱한 쇳덩어리였다. 그게 무엇인지 니일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소유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집어들었다. 주위가 캄캄했기 때문에 니일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어둠 속에 묻힌 채 음침한 괴물처럼 조금씩 움직일 뿐이었다. 희미한 불빛에 보이고 있는 것은 쇳덩 이를 움켜잡은 니일의 손이었고, 그 손이 파랗게 떨리고 있는 광경이었다. 니일의 죽음 우리는 내일을 꿈꾸는 자 하지만 내일은 와주지 않는다. 우리는 영광을 꿈꾸는 자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본심이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날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자 하지만 새로운 날은 이미 와 있고 우리는 싸움터로부터 도망치려는 자 하지만 그 싸움은 우리의 의무... 우리는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진심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래를 간절히 기다리지만 미래는 아직 사상의 누각에 불과하며 예지를 꿈꾸며 그 예지를 매일 피하기만 한다. 도움을 바라지만 그 도움은 이미 우리의 수중에 있으니... 그럼에도 우리들은 잠잔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잠잔다... 니일의 부모는 아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머니의 흐느낌 소리는 좀차 잦아들고 있었지만, 그 곁에서 눈감은 채 모로 누워 있는 아버지 역시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토록 깊고 심가한 심리적 갈등을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었다. 그들은 침실 밖으로부터의 어떤 소리도 알아듣지 못했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 열 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겨울밤 바람소리, 조용히 게단을 내려밟는 소리, 살아있는 존재 가 움직이는 소리 등을 전혀 알아 듣지 못했다. 적막한 시간이 숨죽일 듯이 지나가고 있을 때. 니일의 아버지는 겨우겨우 조금씩 잠이 들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흐느낌 소리도 침대 속으로 더욱 깊숙히 들어가더니 끝내는 아주 조그맣고, 그런 다음에는 사라져 버린 채 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때였다. 이들이 미처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어디선가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그 바람은 흔적도 없이 나타나더니 그요에 휩싸인 집안을 소리끼치게 떠돌아다녔다. 불길한 예감이 만연했다. 금방이라도 뇌성벽력이 대지 위의 생물을 짓눌러버리며 작열할 것만 같은 분위기였 다. 하늘과 땅의 자리다툼이라도 시작되려는 듯한 불길한 예감이 그렇게 형태없이 집안을 휘감으며 떠돌고 있을 때였다. 막 잠이 들었던 니일의 아버지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퍼뜩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비몽사몽간에 들은 소리가 아니었다. 분명히 고막을 짖을 듯이 날카롭게 집안 어디 에서나 울려퍼진 소리였다. 불길한 예감이 니일 아버지의 뇌리를 관통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며 소리쳤다. "무슨 소리지?" 그 바람에 역시 막 잠들었던 어머니가 어렴풋이 깨어났다. "왜 그러세요?" "무슨 소리가 났어." "어디서요?" "집안 어디에서야."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렸다고 당신은..." 니일의 어머니도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남편은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불길하게 관통했던 예감이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급히 침대에서 내려서며 벗어놓았던 가운을 걸쳤다. "무슨 일이에요?" 그의 아내 역시 새삼 어떤 커다란 불안에 사로잡히자 급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침실을 나온 그는 복도에서 귀를 기울였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죽음에 휩싸인 듯이 고요할 뿐이었다. 이번에는 니일의 방쪽으로 걸어갔다. "니일." 낮게 부르며 다가간 그는 방문이 열려있음을 발견하고 갑자기 큰소리로 불렀다. "니일!" 대답이 없었다. 방문을 활짝 열고 휘둘러 보았다. 니일의 모습은 거기에 없었다. 문득 열어젖혀진 창문에서 찬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발견한 그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 이 들렸다. "니일!" 다시 커다랗게 소리쳤지만 역시 응답이 없었다. "무슨 일이예요, 여보. 니일이 어떻게 됐나요?" 니일의 어머니도 이미 잔뜩 겁을 집어먹은 목소리였다. 그녀의 남편은 이미 급한 걸음을 아래층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불길한 예감 전과 아닌, 그보다 몇백, 몇천 배 나 더 두려운 어떤 생각이 그의 맥박을 정신없이 뛰도록 만들었다. "니일!" 다시 소리쳐 불렀다. 이번에는 사방에다 대고였다. 어디든 있으면 대답하리라는, 그보다 니일이 이미 집안 어디에도 없을지 모른다는 극조의 조바심 때문이었다. 그 것은 조바심이라기 보다 공포심이었다. "니일!" 역시 대답은 없었다. 수난 그의 뇌에 또 다른 생각이 있었다. 그는 급히 자기의 서재로 향했다. 거기에 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로 하여금 새삼스러운 조바심과 두려움으로 가슴 이 걷잡을 수없이 뛰도록 만들었다. 불안감에 쓰러질 것 같았다. 역시 문이 열려 있었다. 누군가 안에 있을 것같았다. 누군가 들어갔기 때문에 문이 열렸다는 생각은 들어 간 사람이 니일이 아니기를 바라는 것으로 바뀌려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책상 위의 스탠드가 켜져있는게 보였다. 그 불빛은 책상 뒤쪽의 바닥 한 곳을 밝 게 비치고 있었다. 유난히 그곳을 밝게 비치고 있었다. 다른 곳은 거의 보이지 않았 다. 창문을 통해 스며든 달빛 속에 희미한 그림자만 보였다. 바로 그 순간. 니일 아버지의 시선이 한 곳으로 곧장 달려갔다. 책상 저쪽 불빛이 유일하게 밝혀 주고 있는 바닥이었다. 거기서 무엇인가 또 보였다. "니일..." 그는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겁먹은 몸짓으로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와짐에 따라 그 형태가 분명해졌다. 드디어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볼 수 있게 된 순간. "니일, 니일!" 갑자기 그의 입에서 커달나 소리가 터져나왔다. 모든 것은 분명해졌다. 거기 바닥에 길게 뻗은 채 곰짝도 않는 것은 사람의 손이 었다.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몹시 가녀리게 보이는 소년의 손이었다. "니이일! 내 아들아!" 그의 입에서는 드디어 커다란 절규가 터져나왔다. 달려간 그의 눈에 쓰러져 있는 니일의 전신과 함께 권총도 보였다. 그의 아내가 정신없이 달려오며 울부짖었다. "오오, 하느님! 니일, 내 아들아!" 이들 부부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가는 니일의 시체 옆에서 짐승처럼 처절하게 울부 짖었다. "내 아들아! 안돼! 이럴수는 없어. 네가 죽다니, 죽다니이..." 반응이 있을 리 없었다. 한 방의 총소리와 함께 16세의 젊음을 산화시킨 니일은 영원히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한밤중 때아닌 통곡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며 허공을 날아갔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 가 날아갔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비통함이 너무도 처절하게 터져나왔다. 죽은 시인의 사회멤버인 니일은 실제로 죽은 시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른 새벽.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었다. 니일이 없는 방에서 룸메이트 앤더슨이 혼자 잠들어 있었다. 지난 밤 니일의 성공적인 연극 때문에 동굴에 모여 늦도로 축하하는 분위기 를 가졌기 때문에 세상모르며 잠든 것이다. 그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알아듣지 못했다. 잠겨있지 않은 문이 열리고 거기 에 나타난 것은 랄튼을 선두로 해서 오버스트릿과 믹스 세 사람만있었다. "앤더슨." 오버스트릿이 조용히 앤더슨의 어깨를 흔들었다. 반응이 없자 그는 다시 반복했다. "앤더슨, 일어나 봐." 잠결에 그 소리를 알아들은 앤더슨이 부시시 눈을 떴다. 그는 침대 곁에 서있는 오버스트릿을 보자 이상한 생각이 들어 퍼뜩 눈을 크게 떴다. "무슨...일..." 그가 더듬거릴 때였다. "불행한 소식이 있어." "뭐라구?" 울먹이는 게 분명한 오버스트릿의 말에 앤더슨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앉았 다. 오버스트릿의 뒤에 있는 친구들이 보였다. 다시 오버스트릿의 얼굴을 쳐다보던 앤더슨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버스트릿이 울먹이며 말해 주었다. 그의 두 눈 에도, 뒤에 있는 친구들의 눈에도 눈물이 가득히 고여 있었다. "니일이 죽었어..." "니일이!" 앤더슨은 숨이 콱 막혀 아무소리도 낼수 없었다. "자살 했대, 권총으로..." 앤더슨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몸도 마음도 한꺼번에 침대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서있는 그대로, 침대에 앉은 그대로 친구의 죽 음에 대한 충격으로 얼어붙고 말았다. 밖에는 여명의 빛이 밝아오기 직전의 하늘 동쪽 저쪽이 희끄무레하게 보이고 있었 다. 앤더슨, 오버스트릿, 믹스, 랄튼 등은 겨울 모자를 뒤집어 쓴 채 눈쌓인 채 드넓게 펼쳐진 캠퍼스 저쪽을 향해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 앤더슨은 아직 울지 않았다. 누 구보다도 성격이 예민한 그는 필사적으로 치미는 슬픔을 억제하고 있었다. 비할 데 없이 맑은 새벽공기와 함께 눈쌓인 경치는 한 폭의 예술작품 그것이었다. 갑자기 앤더슨이 걸음을 멈추었다. 뒤따르던 친구들도 멈추었다. 모두들 니일과 가장 친했던 앤더슨의 일거일동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들의 눈에는 니일과 앤더슨 의 다정했던 한 때가 선명하게 보였다. 걸음을 멈춘 앤더슨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참 아름답지, 새벽경치가?" 그의 말에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너무도 조용하고, 지나치게 침착한 앤더슨의 표현은 진심으로 새벽경치에 탄복한 감탄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난 아직 새벽경치가 이토록 아름다울 줄은 몰랐어...이건 바로 장관이야, 장 관..." 친구들이 의아해 하며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볼 때였다. 갑자기 앤더슨의 몸이 기우뚱 했다. 계속해서 허리를 꺾는가 싶었는데 벌써 엎드 리듯 웅크려 앉고 있었다. 그것 뿐이 아니었다. 심하게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앤더슨!" "토오드으!" 친구들이 달려들어 부축했다. "진정해!" 앤더슨은 계속 심한 구역질을 하며 쩔쩔맸다. 그가 겨우 어느 정도 진정한 것은 잠시 후였다. "니일이 죽다니 말도 안돼! 그가 왜 죽어야 해!" 앤더슨은 주먹으로 쌓인 눈을 두드리며 울부짖었다. "니일은 죽임을 당했어! 그래, 니일을 죽인 건 그의 아버지야. 아버지가 죽였다안 마알야아!" "앤더슨, 진정해." 친구들은 정신없이 앤더슨을 붙들어 일으키려 했다. 갑자기 앤더슨이 친구들의 손길을 뿌리쳤다. 이어 그는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몇 걸음 뛰더니 이내 걸음이 느려지며 엉거주춤 하늘을 쳐다보며 다시 소리쳤다. "니이일! 니일!" 앤더슨의 처절한 절규가 새벽공기를 가르며 멀리 알 수 없는 곳까지 달려가고 있었 다.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친구들 가운데 누군가 먼저 후 하고 흐느꼈다. 그러 자 이번에는 다른 친구의 어깨가 갑자기 격렬하게 들먹였다. 꿈이 있고, 존재가치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벅찬 가슴으로 내일을 바 라보던 한 친구의 죽음은 이들 세명의 친구들을 끝내 엉엉 소리내어 울게 만들어 놓 고야 말았다. 랄튼, 믹스, 오버스트릿은 서로 부둥켜 안은 채 커다랗게 소리내어 울 었다. 니일의 홀연한 죽음은 그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다. 그중에서도 키팅 선생 의 가슴 속은 형언할 수 없었다. 연극이 끝난 후 아버지한테 끌려가던 그게 마지막 모습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텅 빈 교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이윽고 천천히 책상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 갔다. 가운데 쯤에 있는 책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내려다 보는 키팅의 두 눈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감회와 고민과 고통이 뒤섞이고 있었다. 니일이 앉았던 자리였다. 금방이라도 니일이 그 특유의 귀여운 미소를 지으면서, 선생님, 하고 부를 것만 같 았다. 언젠가 캠퍼스에서, 오오 선장님, 우리 선장님(Oh Captain, my Captain)하고 부르던 낭랑한 목소리도 들려오는 듯했다. 키팅은 자꾸만 격해지는 자신의 감정을 필사적으로 억제했다. 그는 니일의 책상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한 권의 손대묻고 두터운 책이 있었다. 그것을 천천히 집어들고 살펴보았다. 표지를 펼치자 지난날 자신의 웰튼 아카데미 시절 직접했던 사인이 나타났다. <죽은 시인들>이라는 글자는 숱한 세월이 지났는 데도 아직 선명하게 보였다.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사랑한 제자 니일이 언제나 앉았던 바로 그 의자였다. 그러자 그의 눈에서도 더이상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이 한 줄기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니일! 니이일...!" 그는 마음속으로 누구보다도 더욱 처절하게 절규했다. 니일의 불행한 종말은 키팅 자신의 것이라고 느껴졌다. 모처럼 큰 뜻을 품었던 웰튼 아카데미하고의 인연도 끝 이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유난히도 추운 겨울날. 듣는 사람의 마음 속 깊이 파고들어와 끝내느 울어버리게 만들것만 같은 백파이프 연주와 함게 니일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니일의 부모는 완전히 넋나간 상태에서 아들의 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란 교장을 비롯한 전 교직원과 학생들이 침통한 빛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니일의 장례식이 끝났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멤버들은 장례식 낸 오열을 감추지 못했다. 장례식이 끝난 직후였다. 노란 교장은 학생들에게 엄숙함 표정으로 학교의 방침을 전달했다. 그들은 니일의 죽음을 다른 곳에서 정당화시키려 하고 있었다. "니일군의 죽음은 너무나 가슴아픈 비극인 바..." 노란 교장은 일단 니일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에게 웰튼 아카데미의 명예졸업장을 수여할 것이며, 가장 우수하고 모범생이던 그의 죽음을 가슴 깊히 애석하게 여긴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노란 교장은 더욱 엄중한 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이미 제군들의 부모님께 연락을 드려 전후사정을 상세히 설명드렸습니 다. 부모님들은 하결 같이 진심으로 애도해 주셨습니다. 또한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니일 가족의 요구대로 우리는 이번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할 것인 바, 여러분의 협조를 당부하는 바입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아들의 죽음에 대해 상세히 조사해 달라는 니일의 부모의 요구가 있었다는 말이 그 것을 의미했고, 그 말은 특히 앤더슨으로 하여금 심한 반항심을 느끼게 했다. 누구보 다도 니일을 잘알고 있는 그는 니일을 아버지가 죽였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집회가 끝난 다음이었다. 랄튼, 앤더슨, 오버스트릿, 피츠, 미스 등 멤버들은 기숙사 건물의 지하실에 있는 창 고 안에 모였다. 노란 교장의 경고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기 위해서였다. 앤더슨을 제외한 다른 학생들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침통한 표정이었다. "앞으로 어떡하면 좋지?" 누구나 먼저 입을 열었다.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심각할 거야." "그러니 걱정이지. 노란의 말 들었지? 이번엔 쉽게 끝나지 않을 게 분명해." "어떻게 될까?" "노란은 니일의 불행을 우리한테 씌우려 하고 있어." "말도 안돼!" "어쩌면 우리 멤버들은 몽땅 퇴학처분을 받을지도 몰라." "어째서?" "학교에서 바라는 게 그거거든." "그거?" "희생자 말야. 이런 사건이 생기면 학교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이 나빠지거든." "그래서 희새자를 내고 얼버무린단 말야?" "그런 셈이지." "희생당하는 우린 어쩌구?" "그건 윌 사정이지 하교 사정이 아냐." "기가 막히군, 교활한 늙은 망아지 같으니!" 이들은 한결 같이 학교 측의 처사에 대해 불만을 터뜨렸다. 니일이 자살한 것은 기정 사실이고, 그가 죽게 된 동기 역시 명명백백했다. 앤더슨의 주장은 바로 그것이 었다. 자라나는 꿈나무를 강제로 다스리던 아버지가 그만 꺾어버린 것이다. 사실을 밝힐 뜻이라면 그게 먼저 규명되어야 마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판이 두려워서, 니일 아버지의 비인간적인 요구가 두려워 학생들을 도 다시 희생시키려 드 는 처사가 젊은 피를 끓게 했던 것이다. 그때 누군가 불쑥 말했다. "누군가 교장한테 고자질한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야." "뭣을?" "우리의 죽은 시인의 사회에 대해서 말야." "하긴..." 또 다른 학생이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맞았어. 바로 그 녀서야." "그 녀석?" "카멜론!" 이들의 마음은 일제히 그 방향으로 쏠렸다. 그동안 카멜론의 태도에 의심가는 점 들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필요에 따라서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놈야! 놈이 교장실에 달려가서 이미 다 고해바쳤을 거야."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놈을 붙잡아서 족쳐볼까?" "그런 녀석은 친구의 의리가 뭔지도 몰라.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잡종이라니 깐!" "모두들 신중히 생각해 보자. 녀석은 혼자고 우린 여럿이잖아." "숫자로 꺾어보잔 말인데, 그게 어려울 거야." "어째서?" "놈에게는 교장이 있거든." "야, 그럼 결국은 키팅 선생님도 당하게 되지 않을까?" "무사하지 못할 거야." "되게 심각하게 생겼군." 여럿 중에 앤더슨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 니일의 죽음에서 받은 충격 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생각 같아서는 니일의 아버지한테 따지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애당초 가지고 있지 못한 앤더슨이었다. "나쁜 자식 같으니!..." 누군가 다시 카멜론에 대해 욕설을 퍼부었다. 카멜론이 더욱 의심 받는 이유도 있 었다. 그들의 모임을 알려 주었지만 그는 참석하지 않았다. 믹스가 두번이나 말했지 만 얼버무릴 뿐이었다. 그것은 충분히 의심받을만한 일이었다. "이제 차례로 우릴 불러들이겠지..." 그때 문쪽에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학생들은 깜짝 놀라 피우던 담배를 비벼껐 다. 교육의 비현실 비밀회합이었다. 그것 역시 노란 교장의 귀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생기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얼 른 담배를 비벼끄던 학생들은 그만 어이가 없어졌다. 불쑥 창고 안에 나타난 것은 다름아닌 카멜론이었던 것이다. 학교 측의 누구인가 싶어 긴장했던 학생들은 순간적인 실망과 함께 또 다른 상태에 도달했다. 앤더슨을 제외한 모두가 들어서는 카멜론을 일제히 노려 보았다. 멋모르 고 들어서던 카멜론이 주춤했다. "왜들 그래?" "너 솔직히 말해." "무슨 소리야?" "시치미 뗄작정야? 우린 다 알고 있단 말야." "도대체 뭘?" "네가 교장한테 고자질 했지?" 카멜론은 비로소 상황을 알아차리며 별안간 화를 냈다.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그러나 다른 학생들의 눈에는 그러는 카멜론의 모습이 비열하고 치사하게만 보였 다. 그들은 카멜론이 죽은 시인의 사회에 대해 노란 교장한테 고자질했다고 믿는 것 이다. 그 중에서도 랄튼이 가장 흥분하고 있었다. "치사한 짜식 같으니!" 그는 대뜸 달려들어 카멜론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도대체! 니들 미쳤어?" 친구들이 허겁지겁 랄튼을 떼어 놓았다. 멱살이 잡혔던 카멜론은 분함을 참지 못 하며 씩씩거렸다. 그는 기분나쁘다는 듯이 옷매무새를 고치며 모두를 노려보았다. "너 똑똑히 들어둬. 랄튼!" "?..." "일을 분명히 하기 위해 가르쳐 주지. 이 학교에는 윤리 규정이 있단 말야. 만일 교사한테..." 어떤 질문을 받았을 경우 진실대로 대답해야 되는 의무가 주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만일 그 의무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누구나 퇴학을 맞게 된다는 카멜론의 말에 랄 튼이 또 다시 덤비려 했다. "이러지 마, 랄튼." 믹스와 오버스트릿이 얼른 랄튼을 끌어당겼다. "쟤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절대 안돼. 그건 곧바로 퇴학당하는 걸 의미한단 말 야!" "다 소용 없어. 어차피 여기 있는 우리들은 퇴학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야." 랄튼은 분해서 못견디겠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그는 계속해서 카멜론을 노려보았 다. 카멜론이 드디어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가 가소롭다는 듯이, 그렇지만 친구기 때문에 조언해 준다는 듯이 기묘한 표정을 둘러 보았다. "잘 알고 있구나." "뭐야!" "똑똑히 들어둬. 바보가 아니라면 너네들도 애당초 교장선생한테 협력하는 게 좋을 거야." "너 말 다했냐?" 카멜론은 이제 무서울 것도 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말했다. "학교가 노리는 것은 우리들이 아니란 말야. 우리들은 모두가 희생자일 뿐야. 그 것도 모르니? 니일과 우린 희생자란 말야!" "카멜론." 녹스 오버스트릿이 따져물었다. "희생자라니, 그리고 학교가 노르는 건 누구지?" "키팅." "뭐라구?" "선장이란 말야." "그래서?" "그 사람 설마 이번 일에서 책임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테지." "키팅 선생이 니일의 자살에 책임이 있다구?" "그래." "어떤 놈들이 그래?" 어찌된 영문인지 카멜론은 더욱 용기백배 하는 듯했다. 그런 모습이 친구들을 더 욱 배신감에 사로잡히도록 만들었지만, 카멜론은 마치 학교 측으로부터 비밀 카드라 도 받은 듯이 자신있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도 잘 알 거야. 학교에서 요구하는 게 누굴 것 같아? 그리고 또 있어. 우 리들이 이런 짓을 하게 된 동기가 어디 있지? 키팅 때문이었지?" 만일 키팅이 없었다면 지금 쯤 자신의 방에 얌전히 앉아 공부나 하며 <의사선생 님>이라고 불려질 날을 꿈꾸었을 거라고 했다. 니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거짓말이야!" 뜻밖에도 앤더슨이 소리쳤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흥분해서 계속 소리치고 있었다. "그건 키팅 선생 때문이 아냐! 아니라구! 니일은 자신이 선태해서 연극을 했던 거 야!" "내 생각은 니들하고 달라." 카멜론은 무언가 흥미있는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이 기회에 키팅이 학교로부터 벌칙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는데, 그래야만 자신들의 장래를 망치지 않게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이 막 끝나기 직전이었다. "나쁜놈!" 소리친 랄튼이 번개 같이 앞으로 몸을 날렸다. 어디서 그런 스피드가 나왔는지 순 식간에 그의 주먹이 카멜론의 얼굴에 강타를 먹였다. 졸지에 일격을 받은 카멜론은 저만큼이나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의 코에서는 벌써 시뻘건 피가 터지며 범벅이 되었다. 랄튼은 거기서 멈추지 않 고 또 덤벼들 기세였다. 하지만 믹스가 피츠가 재빨리 그를 붙들고 뒤로 끌어냈다. 뜻밖의 반응이었다. 얻어터진 카멜론은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일어서며 씩 웃었다. 가소롭다는 표정과 함께 랄튼을 똑바로 노려보며 정확한 반응으로 말했다. "랄튼, 분명히 알아 둬." "?..." "넌 이미 자신의 퇴학명령서에 서명했어. 넌 이제 끝장났어. 바보같으니." 랄튼이 다시 카멜론을 향해 돌진할 기세였다. 카멜론은 겁나지 않는다는 듯이 피 가 터져흐르는 얼굴을 쓱 문지르며 큰소리로 말했다. "잘못 알아도 크게 잘못알았어. 너네들." "저놈이!..." "공연히 욕지거리나 한다고 다 되는 줄 알아?" "닥쳐!" "똑똑히 들어. 니들 조금이라도 생각할 수 있는 머리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 아. 나하고 같이 행동하는 거야!" 그는 언성까지 높여가며 학교 측을 대변하듯 계속했다. "학교에서는 이미 모든 사실을 다 알고있어." "네놈 때문야!" "맘대로 생각해. 하지만 분명한 사실야. 그러니까. 일이 이렇게 된 지금 키팅은 구할 수 없어. 하지만 너네들 자신의 목은 그렇지 않아. 지금부터라도 내가 하는 대 로 따르면 퇴학을 면할 수 있단 말야!" 카멜론은 그 말을 끝으로 휙 돌아서서 문으로 걸어갔다. 뚜벅뚜벅 떨어지는 그의 구둣발 소리가 이상하게 학생들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 멤버들 중 에 니일은 이미 죽었고, 카멜론을 제외한 전원에게 퇴학명령서가 곧 날아올 것 같은 긴박감 때문이었다. 그들은 묵묵히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누구도 어떤 묘책을 생각해내지 못하고 있 는 것이다. 노란 교장의 개인적인 심문이 시작되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 참여한 멤버들을 중점적으로 찍어 놓고 한명씩 교장실로 불러 들였다. 멤버들은 카멜론 한명만 제외한 전원이 예측 불허의 긴박감과 함께 초조와 불안이 연속되는 순간이었다. 니일이 없는 방에 혼자남게 된 앤더슨은 누구보다도 불안한 상태에서 숨조차 죽였 다. 카멜론 말대로 웰튼 아카데미에서 퇴하 처분을 받으면 그것은 인생의 끝이나 다 름없었다. 니일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학생들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앤더슨의 입장이 누구보다도 절박했다. 그렇지 않아도 모범생인 형의 그늘에 묻혀 가족으로부터 소외당하는 그였다. 앤더슨은 문을 반쯤 열어놓고 복도에서의 동정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때 헤이거 박사의 모습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의 곁에서 따라오는 것은 믹스였다. 믹스는 잔뜩 풀이 죽어 어깨를 축 늘어뜨린 모습이었다. 또한 그럴 수가 없도록 얌전해서 마치 순한 양과 같아 보였다. 앤더슨으로 하여금 믹스가 노란 교장한테 어 떻게 당했는지 짐작케하는 광경이었단 것이다. 헤이거 박사는 믹스의 방문 앞에까지 걸어왔다. 믹스로 하여금 다른 ㅎ생들을 만 나지 못하도로 지켜섰다. 그는 믹스가 방안으로 들으갈 때까지 기다렸다. 방문을 약 간 열어놓고 지켜보던 앤더슨은 분명히 보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이층으로부터 내려와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고 있는 믹스의 얼굴 이었다. 그의 두 눈에서 흘러 나온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던 것이다. 그 광경 을 보는 앤더슨의 마음속에서는 또 새로운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다음은 오버스트릿 차례였다. 믹스가 방에 들어가 문을 닫을 때가지 감시하던 헤이거 박사가 큰소리로 부르자 오 버스트릿의 방문이 열렸다. 그 역시 모든 것을 각오한 표정이었다. 그는 얌전히 헤 이거 박사를 따라 이층으로 올라갔다. 앤더슨의 가슴이 요란하게 소리내며 뛰기 시작했다. 그느 헤이거 박사와 오버스트 릿의 모습이 이층으로 사라지기를 기다려 조용히 문을 열고 믹스의 방문 앞으로 다가 갔다. 조심조심 문을 두드렸다. "믹스." 대답이 없었다. "나 앤더슨야. 좀 물어보고 싶은데 괜찮겠어?" 방안에서 들려오는 믹스의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도 다른 것이었다. "돌아가 줘." "믹스." "나 공부해야 돼. "궁금한 게 있어. 누완다 말야. 어떻게 됐지?" "뻔하지 퇴학야." 앤더슨의 가슴이 또 다시 철렁 내려 앉았다. 결국 올 것이 왔구나 싶어 눈앞이 캄 캄해졌다. 그러나 그대로 돌아설 수 없었다. 극한 상황에 몰린 그로서는 지푸라기라 도 붙들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뭐래?" "말도 마." "어째서?" "다 알고 있어. 모든 걸." "정말야?" "그렇다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 줘, 앤더슨." "..." "너도 알아서 해." 앤더슨은 믹스의 충고 아닌 충고를 등으로 들으며 자기의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으로는 분명히 자기차례일 것 같아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랄튼은 퇴학처분을 받았다고 했다. 그것은 랄튼 하나만의 일이 아니었다. 비굴하게 웰튼 아카데미에 남아 있느냐, 정당하고 용기 있게 퇴학을 당하느냐의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수난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앤더슨은 어쩔 수 없이 또 문을 열고 복도를 내다보며 동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오버스트릿의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아직은 복도가 죽은 듯이 조용했다. 복도의 구석쪽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린 것이 그때였다. 이윽고 헤이거 박사와 오버스트릿의 모습이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앤더슨은 믹 스때보다도 더욱 긴장하며 똑똑히 보려고 두 눈을 문틈으로 가져갔다. 금방 알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오버스트릿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 다.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고, 무엇인가 누구를 붙들고 하소연하고 싶어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더이상 용기가 없었다. 앤더슨은 소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방문을 닫았다. 문 옆 벽에 등을 대고 기대서며 두 눈을 감았다. 머리 속에서 무엇이나 윙윙 거렸다. 태풍이 불어닥치는 것만 같았다. 오버스트릿 역시 굴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두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이, 금방 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그 표정이 그런 생각을 하돌고 해 주었다. 자신의 비겁했던 굴복을 뼈저리게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토드 앤더슨!" 헤이거 박사가 커다란 목소리로 불렀다. 앤더슨은 심호흡을 가슴 속 깊히 했다. 주목을 불끈 쥐어 보았다. 이어 두 번 부르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빨리 나가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헤이거 박사는 복도 계단 아래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마디로 하지 않았다. 설령 헤이거 박사가 말을 걸어온다 해도 앤더슨은 대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가지, 앤더슨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을, 노란 교장만이 아니 다른 사람이 기다린다는 것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사형장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형수 같은 마음으로 앤더슨이 교장실에 들어갔을 때였 다. 두려운 마음으로 안을 둘러보던 앤더슨은 의외의 광경에 깜짝 놀랐다. 뜻밖에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교장과 같이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아버지가..."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이 순간의 그는 부모의 출현에 대해 어떤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은 물론, 해가 되리라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보다는 부모의 출현이 불안함을 더욱 좌우시켜 줄 뿐이었다. 학교측에서 교활한 교장이 이미 완전하게 각본을 짜놓은 다음 통보하는 형식을 불러들인 게 분명하다는 불ㄱ나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이리와서 앉도록. 앤더슨군." 부모님 앞이기 때문인지 노란 교장은 엄숙하면서도 나름대로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 다. 앤더슨은 주춤주춤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사나운 맹수우리에 들어선 기분에 등골 이 오싹하고 다리가 후둘후둘 떨렸다. 어쩔 수 없이 약간 떨어진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싸늘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감히 부모를 거역하고, 감히 학교 당국의 규칙을 위반하고 감히 옳지 못한 서클에 가담한 아들을 엄하게 단죄하기 위한 목적으로 노란교장과 합작하고 있는 듯했던 것이다. "앤더슨군." 노란 교장은 그의 부모 쪽을 힐긋 바라본 다음 그 눈길을 앤더슨에게로 곧장 던져 왔다. "우리는 이미 모든 사실을 상세히 파악해 놓고 있다는 점을 알아주기 바란다." "..." "부모님들도 이렇게 와 계신 만큼 모든 것을 진실되게 대답해주면 좋겠다. 학교로 서도 선량한 학생은 처벌하지 않을 것이다." 앤더슨은 교장의 한마디가 끝날 때마다 그 다음으로 튀어나올 질문에 신경이 곤두 섰다. "그러면 질문하겠다. 토드 앤더슨, 너도 그 죽은 시인의 사회에 한 조직원인가?" 앤더슨은 얼른 대답할 수 없었다. 입에서 말이 되어 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도 모 르게 아버지와 어머니 쪽을 바라보았다. 다시 노란 교장 쪽을 바라보았다. 이때 그의 머리 속에서는 어떤 단호한 결정이 내려지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어느 동료 보다도 소극적이던 그였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소극적인 점을 과감히 떨쳐 버리고 용감하게 대응할 결심이었다. 앤더슨은 노란 교장의 질문에 대해 사실대로 대답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어서 대답해라, 앤더슨!" 무뚝뚝한 아버지의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예기치 못해썬 일에 앤더슨은 흠칫 놀 랐다. 아버지의 목소리 속에는 무서운 협박이 담겨 있었다. 이 수난 앤더슨으로 하 여금 가장 두려운 존재로 느끼도록 만드는 것은 노란 교장이 아닌 그 아버지였다. 세상에 태어나 철들기 시작하면서부터 한번도 사랑을 베풀어 주지 않았던 아버지였 다. 성적이 우수하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큰아들만을 편애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독촉으로 갑자기 더욱 움츠러든 앤더슨은 알아들을 수도 없게 작은 소리 로 예, 하고 대답했다. 너무 적은 소리라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갔기 때문에 앞에 앉은 교장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좀 더 큰소리로 대답해라. 들리지 않았다." "..." "좋다. 반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와 같은 사실은 이미 밟혀졌으니까." 노란 교장은 다시 앤더슨의 부모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어떤 결정이 내려지든 전적을 교장만을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아울러 앤더슨에 대해서는 굴복하지 않으면 그냥두지 않겠다는 위압적이고도 무서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노란 교장은 더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는 더 물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책상 위에 있던 서류 같은 것을 집어들었다. 앤 더슨의 두려운 눈빛이 노라 교장의 손에 들려진 서류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이것은..." 노란 교장은 다시 한번 앤더슨의 부모 쪽을 바라본 다음 계속해서 말했다, 그와 같은 그의 행동은 모든 일이 네 부모님과 합의된 것이니 알아서 해, 라는 협박이 담 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너희들의 모임인 불법 조직내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던가에 대해 세부적으로 기록 된 것이다." 앤더슨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카멜론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가 모든 사실을 상 세히 고해 바쳤으리라는 확신과 함께 있다면 자신도 랄튼처럼 때려 주고 싶어 잠깐 두 주먹을 불끈쥐었다. "너희들을 가르치는 키팅 선생이 어떤 방법으로 너희들을 유혹했고, 그리하여 불법 적인 비밀클럽을 조직하게 된 경위는 물론..."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비밀 클럽이 과연 얼마나 엄청나고 타락적인 행동을 유발시 키게 되었는가, 그 원인 및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교장의 말이었다. "더구나 키팅이라는 선생이, 제자를 선도해야될 책임과 의무가 있는 선생이 본분을 망각하고 그와 같은 일이 학부모님의 엄하신 명령에 위반되는 것임을 알면서도..." 노란 교장은 곁에 키팅 선생이 있기라도 한 듯이 점차 과격해지는 말투로 계속했 다. "교실 안팎을 구별하지 않으며 니일 페리를 유혹, 그로 하여금 연극에 집착하도록 만든 사실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말은 극단적인 내용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키팅 선생이 현직교사라는 직책을 남용, 니일 페리로 하여금 귀중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는 비극을 초래했다는 것이 었다. 그와 같이 엄청난 말이 계속되는 동안 앤더슨은 여러 차례나 심한 반발심을 느꼈 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모두 꾸며낸 모함입니다 하고 소리치고 싶었 다. 그렇지만 무섭게 노려보는 아버지, 니일의 경우와는 달리 어머니까지 합세해서 쏘 아보는 눈초리 때문에 꾹꾹 눌러 참았다. 설명을 끝낸 노란 교장은 들고 있던 서류를 앤더슨에게 건네 주며 다시 말했다. "이게 바로 그 서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일어라. 그런 후에 고쳐야 될 부 분이나 달리 보태고 싶은 내용이 없으면 서명해라. 그것으로 네 일은 끝이다." 서류를 받아든 앤더슨의 손이 파랗게 떨렸다. 노란 교장의 말이 그대로 적혀 있었 다.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 한자한자 빼놓지 않고 읽기 시작했다. 너무 어처구니 없 는 교장의 모함이 그대로 기록된 서류에 맨 먼저 서명한 것은 카멜론이었다. 퇴학처분이 내려졌다는 누완다의 서명은 없었고, 후회로 눈물을 흘렸던 믹스와 오 버스트릿의 사인이 앤더슨의 눈에 들어왔다. 그 자신은 네 번째로 서명해야 되는 입 장이었는데, 비록 아버지와 어머니가 감시한다고 해도 그럴수는 없었다. 누완다처럼 용기있고 의지력이 강해지고 싶었다. "저어..." 앤더슨은 마지막으로 하나지 물을 결심이었다. 그가 몹시 더듬거리며 질문한 것은 자신이 서명하면 키팅 선생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었다. 순간 이미 예고된 일이 발생했다. "닥쳐라, 토드!" 소리내며 벌떡 일어선 것은 앤더슨의 아버지였다. 그는 무섭게 두 눈을 뜨고 금방 이라도 달려들어 매질을 할 듯이 노려보며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다시 소리쳤다. "물론입니다. 앤더슨씨.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만 진정하고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물론 앤더슨 눈도 알아야만 합니다. 지금까지는 미처 진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키팅같은 자의 선동에 넘어갔을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앤더슨은 눈앞이 혼란해졌다. 수난적으로 의식까지 흔미해지며 정확한 사리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런 때 니일이 곁에 있어주었다면, 하는 생각이 그로 하여금 더 욱 혼돈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마지막 수업 노란 교장은 자못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키팅이 어떻게 법률에 위반되는 행위를 범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다." 법률까지 들먹이는 바람에 앤더슨은 더욱 당황했다. "만일 그와 같은 사실이 확실히 나타나게 될 경우 키팅은 기소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 제군이나 다른 학생들에 의해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키팅 같은 자는 다시 우 리 학교에 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앤더슨은 그 충격적인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니일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의 비 극이 바로 키팅 선생이 강의를 할 수 없게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이제 됐으니 어서 서명이나 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친 것은 앤더슨의 아버지였다. 순간 앤더슨의 눈빛이 번쩍했다. 비록 과격하게 맞대고 소리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할수 있는 가능한 방 법으로 이의를 제기할 결심이었던 것이다. "교육은...그건 키팅 선생님의 인생입니다...그분께는 교육만이 전부가 됩니다." 비록 더듬거렸지만 그 음성은 날카로운 것이었다. 다시 아버지가 주먹을 휘두를 듯이 하며 네가 신경쓸 일이 아냐! 하고 소리쳤을 때였다. 앤더슨은 세상에 태어나 최초로 아버지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아버지는 언제 나한테 신경 같은 걸 써 주셨나요? 그렇지만 키팅 선생님은 달라 요. 나한테 매우 신경써 주셨습니다! 아버진 항상 나 같은 건 거들떠 보지도 않고 오직 형만을 생각했죠. 그런데 지금 와서 나한테 이런..." "닥쳐!" 그의 아버지는 장소가 교장실이며, 교장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무시했다. 그 는 폭군보다도 더욱 거칠게 앤더슨의 겨ㅌ로 다가오더니 펜을 집어들었다. "어서 사인해!" "싫어요." "뭐야!" "그런 건 못하겠어요." 그때 지금껏 조용히 앉아있던 어머니조차 남편에게 동조했다. 앤더슨은 아직 버텼 다. 사실과 다른 내용에 서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노란 교장이 설득 겸 위협적인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앤더슨, 네가 그런다고 키팅을 구할 수 있다고 보나? 지금 형편이 어떤지 알겠 지? 다른 학생들이 이미 그 사실을 시인하고 모두 사인했다. 아울러 기정사실을 놓 고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지 마라. 너만 손해 볼 테니까." 거기까지 버텼던 앤더슨은 다시 아버지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교장보다 더욱 위협 적으로 서명을 강요하는 눈빛이었다. 앤더슨은 완전히 기로에 서게 되었다. 서명을 하지 않을 경우 누완다처럼 퇴학처 분을 받음은 물론 집과 부모로부터 쫓겨날 게 분명했다. 반대로 서명하면 키팅 선생 은 형사처벌을 받는 동시에 교사로서의 신분을 영원히 빼앗길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웰튼 아카데미의 총수인 노란 교장을 비롯, 집안의 총수이자 공포의 대상인 아버지 까지 합세한 분위기에서 나약한 앤더슨이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퇴학결정이 내려진 학생들에게 아직은 학교를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다. 애당초부터 몰아내기 위해 온갖 비열한 수단까지 동원했던 존 키팅한테만 명령이 내려졌다. 키팅 역시 저항하거나 하지 않았다. 니일의 죽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충 격과 비탄에 빠진 그는 스스로도 강단을 떠날 결심을 하고 있었다. 존 키팅이 자기의 방에서 묵묵히 짐을 챙기고 있을 때였다. 국어시간이었다. 학생들은 키팅의 교실에 있었다. 앤더슨은 첫날 첫 수업때처럼 조심스럽게 앉은 채 책상만을 들여다 보았다. 키팅의 축출과 함께 태풍에 휘말린 낙 엽이 된 죽은 시인의 사회 멤버들은 있는대로 잔뜩 풀이 죽은 상태였다, 멤버 중에 조금도 변함없이 태연자약한 것은 카멜론 뿐이었다. 그는 오히려 잘됐다는 듯이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즐거운 표정으로 책상 앞에 앉아 열심히 교과서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노란 교장이 그때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학생들은 놀란 토끼처럼 일제히 자리에 서 일어났따. 이번의 사건으로 교장의 위치는 훨씬 더 강력해진 상황이었다. "오늘부터 당분간은 내가 국어시간을 맡기로 했다. 새로운 국어선생을 부탁해 놨으 니까 곧 훌륭한 분이 오시게 될 거다." 교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계속되었다. 이번에도 카멜론만이 눈빛을 빛내며 교장을 바라보았다. 교장은 교과서를 교탁 위에 펼쳤다. "지금까지 이 프리차드판 교과서로 수업을 받아왔을 텐데 어디까지 진행됐지?"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여러분 중에 누가 대답해 주지 않겠나?" 교장은 새로운 진리를 학생들에게 심어주려는 듯이 자못 친절한 말투를 사용했다. 한 사람도 손을 들지 않자 그는 한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학부모로부터 특별히 부탁 을 받은 토드 앤더슨이었다. 앤더슨은 시종일관 눈을 내리깔고 있을 뿐이었다. "토드 앤더슨." 앤더슨은 깜짝놀라서 고개를 번쩍들었다. 그와 함께 더할 수 없이 당황하며 더듬 거렸다. "네, 네...저어...프리차드판 교과서가...그게..." "알아들을 수 없다. 앤더슨. 좋아. 그럼 카멜론이 대답하도록." 노란 교장은 마치 약속이라도 되어있는 듯이 그를 지명했다. 카멜론이 대답했다. 은근히 초조해진 것 역시 사실이기도 했다. "상당한 부분을 건너 뛰었습니다." 학생들이 특히 죽은 시인의 사회 멤버들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다. 다행히 노란 교장은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노란 교장은 계속해서 카멜론을 시켰다. 카멜론은 반에서 자신이 가장 모범생이 된 듯이 진지하고 열성적으로 지시에 따랐다. 어딘가 텅 빈 듯한 수업이 계속되어 있을 때였다. 교실 뒤쪽의 문으로 들어온 사 람이 있었다. "개인적인 물건을 가져가려고 왔습니다." 키팅 선생이었다. 코트를 걸친 그는 떠나기에 앞서서 사물을 가져가려고 왔던 것 이다. 노란 교장은 학생들의 표정을 재빨리 살폈고 학생들 역시 재빨리 키팅 선생과 교장 선생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까?" 키팅이 묻자 교장은 도망치듯 얼른 말했다. "그럴 필요 없소. 지금 당장 가져가시요." "그럼..." 키팅이 교실 앞쪽의 탈의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카멜론은 애써서 그쪽을 바 라보지 않으려 했고, 다른 멤버들은 갑작스러운 긴장으로 떨리는 마음을 억제하지 못 했다. 노란 교장은 키팅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인한 분위기를 재빨리 잡으려는 듯이 학 생들을 향해 말했다. "교과서 12페이지를 펴고 서문을 읽도록, 카멜론. 시를 이해하는 방법에 관한 프리 차드 박사의 훌륭한 기록을 읽어 보도록 해." 학생들이 다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키팅의 첫 수업시간에 그 페이지를 전 원이 찢어 버리지 않았던가. 카멜론은 탈의실 쪽을 잠깐 바라본 다음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페이지는 찢어지고 없습니다." "찢어져? 기막힌 일이군. 그럼 옆 사람의 교과서를 빌려서 읽어라." "하지만 모두 없습니다." "뭐라구?" "이 교실안의 모든 교과서에는 그 페이지가 없습니다." 그때 탈의실 안에서 알아들은 키팅이 잠깐 얼굴을 내밀었다. 그가 입가에 나타낸 미소를 학생들 특히 앤더슨은 분명히 보았다. 카멜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선생님, 실은 그 일이..." 노란 교장이 가로막지 않았으면 카멜론은 분명히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교장은 자신이 들고 있던 교과서를 카멜론에게 가져다 주었다. "이걸 읽도록 해." 카멜론은 키팅이 있는 곳을 다시 바라본 후에 읽기 시작했다. "시를 읽기 위해서는, 문학박사 J.에반스 프리차드지음. 시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서는 먼저 운율이나 음율 그리고 비유와 같은 시어을 충분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귀에 익은 귀절이었다. 특히 키팅의 첫 수업 때의 일 때문에 학생들의 머리에 남아 있는 대목이었던 것이 다. 노란 교장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둘러볼 뿐 이제 곧 일 어나게 될 놀라운 일에 대해서는 꿈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카멜론은 계속해서 읽었다. 교과서의 그 페이지가 없는 학생들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죽은 시 인의 사회의 멤버들은 키팅의 등장으로 인해 새로운 슬픔에 잡혔다. 언젠가 니일이 그 대목을 읽던 게 기억되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앤더슨은 말할 수 엇이 불안해 하며 키팅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키팅은 용기를 주려는 듯이 한번 미소지어 보인 다음 교실을 나가 기 위해 탈의실을 나왔다. 그가 교실을 빠져나가는 길은 공교롭게도 가장자리에 앉은 앤더슨의 곁을 지나쳐야 했다. 카멜론은 계속해서 읽었다. 키팅은 앤더슨의 곁을 지나가며 다시한번 미소지어 주 었다. 그러자 앤더슨은 노란 교장의 날카로운 감시의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걸어가는 키팅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때였다. "키팅 선생님! 모두들 거기 서명한 것은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교실 안의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문쪽으로 향하던 키팅이 돌아서서 앤더슨 을 바라보았고, 학생들은 그와 앤더슨, 교장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앤더슨의 놀 라운 용기에 피츠, 랄튼, 오버스트릿 등의 멤버는 깜짝놀란 표정들이었다. 교장이 뭐라고 소리치는 것도 귀에 들리지 않는 듯이 앤더슨이 다시 말했다. "이건 진심입니다. 믿어주세요. 선생님." 비로소 키팅이 만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알고 있다, 앤더슨. 난 너희들을 믿는다." 노란 교장이 다시 키팅에게 당장 나가도록 준엄하게 소리쳤다. "그렇지만 키팅 선생님은...선생님은 나쁘지 않습니다..." "자리에 앉아라. 앤더슨!" 노란 교장은 여유를 두지 않고 전체 학생을 향해 경고했다. "모두들 정숙하도록! 이제부터 엉뚱한 말을 하는 사람은 당장 퇴학시킬테다! 그리 고 키팅, 당장 여기서 나가시오!" 노란 교장은 극도로 화가 나 있었다. 키팅은 학생들을 향해, 특히 앤더슨에게 의미있는 미소를 던진 다음 돌아서서 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때 또 다시 노란 교장을 극도의 궁지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오오 나의 선장님! 우리 선장님!" 예기치 못한 광경이었다. 어느 틈에 앤더슨이 책상 위로 올라가 두 발로 버티고 서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귀를 의심한 키팅이 돌아서는 것과 동시에 노란 교장이 깜 짝놀라며 소리쳤다. "앤더슨군!" 앤더슨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책상위에 버티고 선 채 뜨거운 존경의 눈빛으로 키팅을 곧장 바라볼 뿐이었다. "당장 내려와!" 노란 교장은 이성을 잃으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소용없었다. 키팅과 앤더슨이 그 렇게 마음의 교류와 더불어 감격적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이번에는 녹스 오버스트릿이 성큼 책상 위로 올라갔다. 더욱 당황한 노란 교장의 눈에 또 찰리 랄튼이 올라서는 게 보였다. 교장은 어쩔 줄을 모르며 고함만을 칠 뿐 어떤 제재도 가하지 못했다. 피츠에 이어 믹스가 책상 위로 올라갔고, 또 다른 학생들이 성큼성큼 앤더슨처럼 책상위로 올라갔다. 그들은 한결 같이 버티고 선 채 키팅 선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오, 선장님! 나의 선장님!" 그들이 책상 위로 오를 때마다 키팅을 향해 소리친 말이다. 그것은 단순한 부름이 아니었다. 마음과 마음의 대화였다. 새로운 이상과 ㅅ의 존재를 확인하는 대화였다. "모두들 내려와서 자리에 앉아라! 내 말 안들리나? 당장 내려왓!" 소용없었다. 노란 교장이 불 같이 화를 내도 듣는 학생이 없었다. 거의 절반이나 되는 학생들의 그런 광경은 너무나 커다란 충격적 이변이었다. 교실 문앞에서 돌아선 채 이미 제자가 아닌 지난날의 제자들을 바라보는 키팅의 두 눈에 나타난 것은 미소도 눈물도 아니었다. 가슴이 시리도록 벅찬 감동이었다. 세상 에서 가장 순수한 얼굴 그것이었다. 노란 교장조차 나중에는 넋빠진 듯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고맙다, 너희들!" 키팅이 진한 감동으로 인해 흥분항 어조로 입을 열었다. "모두들 고맙다. 정말로 고맙다..." 앤더슨, 녹스, 오버스트릿, 랄튼, 믹스, 피츠 그리고 책상 위에 올라 서 있는 모두의 눈빛이 키팅의 그 말에 답례를 보내고 있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멤버 중에서는 카멜론만이 아직 자리에 앉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오 선장님! 우리 선장님!..." 소리없는 가운데 그 외침이 어딘가 먼곳으로부터 바람결에 휩싸여 들려오고 있었 따. 그것은 학생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 터 영혼을 타고 우러나와 다시 하늘 저쪽의 니일의 영혼을 만나고 돌아오는 소리였 다. 비록 니일도 죽고, 키팅도 떠났지만 죽은 시인의 사회 써클은 학생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 떠나는 키팅의 뒷모숩에서 그들은 요정 팩의 역할을 훌륭히 해낸 니일의 모습을 떠 올렸다. 옮기고 나서 세상에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그렇게 흔하지 않다. 또는 있다 해도 그늘에 묻혀 주 위에 알려지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그렇게 묻혔던 이야기가 전 해지면 그걸 듣게되는 살마은 신선한 충격과 함께 가슴이 저리도록 깊고, 뿌듯한 감 명을 받게 된다. 이유는 아마도 모두가 공감할 수 있고, 자신의 처지에서 한번쯤은 되돌아보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생존 과정이 모두 동일하다는 논리에 이의를 달지 않는 다면 독자가 자신을 되돌아보고 거기서 감동을 느끼게 된느 경우 역시 동일할 것이 다. 오늘날과 같이 사회의 모든 분야가 급속도로 변천,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파생되 는 갖가지의 희미가 엇갈렸던 시기도 없었으리라는 것은 역시 누구나 공감하고 있을 터이다. 개인주의와 경쟁주의가 극도로 만연된 사회, 나 외에 남을 등한시하는 이기적 풍조, 자신의 꿈이나 이상 보다는 그 자식을 소유물로 치부하는 자기만족을 하는 부모들이 생각보다 의외로 많은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중에서도 경쟁사회의 커다란 부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는 일류나 명문대학에 대한 부모의 욕심은 한계를 넘어서 위험수위에 도달한 실정이다, 우리나라에서만도 매년 학업성적 때문에, 일류대학을 완강히 고집하는 부모의 편견때문에 귀중한 목숨을 스 스로 끊고 마는 불행한 청소년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문제를 놓고 볼때, 톰 슐만에 의해 구성된 본 작품 <죽은 시인의 사회> 는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메시지를 전해 주는 심각한 이야기라고 하겠다. 엄격한 규율과 더불어 개인적인 이상이나 꿈 보다는 단체를, 성적을, 명문대학만을 지상 목표로 삼고 있는 일들은 이 작품이 잉태됐던 1981년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21세기를 눈앞에 둔 오늘날에도, 그보다 어쩌면 영원히 지속될지도 모를 교육제도 및 학부모들의 욕심에 매우 심각한 경종을 울려 주고 있다. 주인공 니일 페리의 이갸기가 그렇고 거기에 존 키팅 선생의 전혀 획기적이고도 특 이한 교육방법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참교육 실현이라는 당면 과제를 안고 있는 오늘의 우리 교육계에서는 교과서적인 교육이 과연 우리 젊은이들을 어느 방향으로 가게 하는지를 실감나게 생각하게 될 것 이다. 나날이 늘어가는 재수생들과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한 청소년 범죄해결에 관한 이 책을 시기적으로 늦은감이 있으나 과보호속에 자라고 있는 청소년 및 그 부모들과 교 단에 서신 선생님들에게 감히 권하는 바이다. 1990년 6월 옮긴이 김미정 엮은이 김미정 영화 조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김미정은 1984년 경희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 한때 언론계에 투신하였으나 남달리 영화예술분야에 관심이 많아 1986년 지명호 감 독의 "신의 아들"로 영화계에 입문하였다. 1987년 임권택 감독의 "아다다"를 하면서 영화수업을 시작했다. 그후 정한우 감독의 '죄없는 병사들' 유진선 감독의 '매춘' '달아난 말' '남자시장'등 십여 작품의 조감독 생활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영화계를 기반을 다졌다. 예리한 통찰력과 유머감각을 겸비한 그녀는 이 '죽은 시인의 사회'를 번역하는 등 방화의 질적수준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에덴의 국경'으로 감독 데뷔를 준비하고 있는 영화계의 젊은 우먼파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