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어린아이는 배운다 일본의 갓난아이는, 사려 깊은 서구인이 상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방법으로 양육되고 있다. 미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일본의 생활에 비하여 훨씬 신중함과 극기를 덜 요구하는 생활에 대비해서 훈련시키고는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 터 그의 작은 소망이 이 세상에서 최고 지상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가르쳐 준다. 우리들은 일정한 시간을 정하여 젖을 주고 일정한 시간에 재운다. 젖을 먹이는 시간이나 자는 시간이 되기 전에는, 어떤 경우에도 갓난아이는 그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얼 마 후에는, 어머니는 손가락을 물거나 그 밖에 신체 부분을 만지는 것을 금지시키기 위해 아이의 손을 때린다. 어머니는 가끔 아이들에게서 모습을 감추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 머니가 외출한 동안에 갓난아이는 집에서 홀로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갓난아이 는 다른 음식물보다 젖을 더 먹고 싶을 때 젖을 떼이고, 혹은 분유로 자란 아이라면 우유병 을 빼앗겨 버린다. 신체에 좋다는 일정한 음식이 정해지고, 아이는 그것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정해진 대로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 미국에서조차 이러하므로, 어느 정도 자라서 사람 구실을 하게 되었을 대 자신의 소망을 억제하고, 그처럼 주의 깊게 엄격한 도덕을 실 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본의 젖먹이 아이들은, 분명히 이것보다 몇 배의 엄격한 교육을 받을 것이라고 미국인이 상상하는 것은 정말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의 양육방법은 이것과는 전혀 다르다. 일본의 생활곡선은 미국의 생활 곡선 과 정반대로 되러 있다. 그것은 저변이 얕은 큰 U자형 곡선으로, 갓난아이와 노인에게 최대 의 자유와 제멋대로 구는 것이 허락된다. 유아기를 지나면서부터 서서히 구속이 커지고, 바 로 결혼 전후의 시기에 이르면 자신의 자의대로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최저선에 달한다. 이 최저선은 장년기를 통하여 몇 십 년 계속되는데, 그 후 곡선은 다시 점차로 상승하여 60세 가 지나면 유아와 거의 마찬가지로 수치나 외부의 소문에 구애받지 않게 된다. 미국에서는, 우리는 이 곡선을 반대로 하고 있다. 갓난아이 때에는 엄한 교육을 하지만 아이의 체력이 성장함에 따라 차츰 완화되어, 드디어 스스로 생활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가족을 거느리 고 자력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나이가 되면, 거의 타인의 간섭을 받지 않게 된다. 우리들의 경우에는 장년기가 자유와 자발성의 정점이 된다. 나이가 들고 늙어서 기력이 쇠하거나 남 의 신세를 지게 되면, 다시 구속의 그림자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미국인에게는 일본인과 같 은 형으로 조직된 생활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와 같은 일생은 우리들에게는 전혀 사실 과 상반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미국인들이나 일본인들은 그들의 생활 곡선을 이상과 같이 규정함으로써, 사실상 각각의 나라에서 개인이 장년기에 마음껏 활약하여 그들 문화에 참가하는 길을 확보하여 왔 다. 미국에서 우리들은 이 목적을 확보하기 위해서, 장년기에 개인적 선택의 자유를 증대하 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본인은 개인에게 가해진 속박을 최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 인간은 그 체력이나 돈버는 능력이 정점에 도달하게 되지 만, 일본인은 자신의 생활을 자시의 취향대로 누릴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다. 그들은 속박이 가장 좋은 정신적 훈련('슈요(수양)')이요, 자유에 의해서는 달성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고 굳게 믿는다. 이처럼 일본인은 가장 활동적이고 생산적인 시기에 도달한 남녀에게 최대의 속박을 가하는데, 이것은 결코 속박이 일생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가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유년기와 노년기는 '자유로운 영역'이다. 이처럼 아이들에게 대해 정말 관대한 국민은 아이를 원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일본이 정말 그대로이다. 그들이 아이를 원하는 첫 번째 이유는, 미국의 부모들이 그런 것처럼 아이 를 사랑한다는 일이 즐겁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인이 아이를 바라는 것은 그 이유뿐이 아 니라, 미국에서는 훨씬 작은 비중밖에 안 되는 다른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다. 일본인이 아 이를 원하는 것은 단지 정서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혈통을 잇는 데 있다. 만일 혈통이 끊긴다면 그들은 인생의 실패자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일본 남자는 아들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자신이 죽은 후, 매일 불단의 위패 앞에서 명복을 빌어줄 자식을 필요로 한다. 그는 가계를 영원히 전해 가기 위하여, 또는 가문의 영 예와 재산을 유지하기 위하여 아들을 필요로 한다. 전통적인 사회적 이유로서 아버지가 아 들을 필요로 하는 경우와 거의 다름이 없다. 아들은 장래에 아버지의 위치를 이어받는데, 그 것은 아버지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를 안심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동안 아버지가 '집'의 관리자 역할을 맡는다. 그 후에는 자식이 이어 받는다. 만일 아버지가 자식 에게 호주 상속을 이어 주지 못한다면, 그가 관리자 역할을 해 온 일이 헛일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뿌리깊은 연속성의 의식 때문에 완전히 성인 된 자식이 아버지에게 신세를 지는 일 이 미국에 비해 훨씬 오래 계속되어도, 서구 여러 나라에서와 같이 부끄러운 일, 면목 없는 일이라는 느낌을 갖지 않는다. 여자들도 아이를 원하지만, 그것은 정서적 만족을 얻기 위해서 뿐 아니라, 여자는 어머니 가 됨으로써 비로소 지위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없는 여자가 가정 안에서 갖 는 지위는 대단히 불안정한 것으로서 비록 이혼 당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시어머니가 되어 아들의 결혼에 발언권을 가지며 며느리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날이 오는 걸 즐겁게 기다릴 수가 없다. 그 여자의 남편은 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사내아이를 양자로 들이게 되나, 그러 한 경우에 그 여자는 일본인의 관념에 따르면 패자가 된다. 일본의 여자들은 아이를 많이 낳기를 바란다. 1930년대 전반의 평균 출생률은 인구 1,000명당 31.7명인데, 이것은 동부 유 럽의 다산국과 비교해 보더라도 높은 비육이다. 1940년도 미국의 출생률은 인구 1,000명당 17.6명이었다. 더구나 일본의 어머니는 일찍부터 아이를 낳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19세의 여 자는 다른 연령의 여자에 비해 가장 많이 아이를 낳는다. 일본에서 분만은 성교와 마찬가지로 은밀히 행해져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진통으로 괴 로워하는 여자는 큰 소리를 내어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아이 낳는 것을 이웃에 광고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갓난아이를 위해 미리 아이의 이불이 갖추어진 작은 침상이 준비된다. 태어나는 아이의 침상은 따로 새로이 장만하지 않으면 불길하다고 생각한다. 새것 을 살 여유가 없는 가정에서도 이불보와 솜을 세탁하여 다시 만들어 '새롭게' 한다. 작은 이 불은 어른의 이불처럼 딱딱하지 않으며, 또 훨씬 가볍다. 따라서 갓난아이는 자기의 침상에 서 자는 편이 편안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갓난아이 침상을 따로 하는 마음속 깊은 이 유는 새로운 사람에게는 새로운 침상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종의 공감 주술에 기초한 것이라 생각된다. 갓난아이의 침상은 어머니의 침상 옆에 붙어 있지만 갓난아이가 어머니와 함께 자는 것은 스스로 어머니와 함께 자고 싶다는 몸짓을 할 정도로 자란 다음의 일이다. 즉, 첫돌이 지나면 갓난아이는 양손을 뻗어서 자신의 요구를 전하게 된다고 그들은 말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갓난아이는 어머니 이불 속에서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잔다. 내어난 뒤 3일간은 갓난아이에게 젖을 먹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은 산모의 모유 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 후부터 갓난아이는 때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젖을 먹기 위해서 또는 강난감 같이 가지고 놀기 위해서 엄마 젖을 만지는 것이 허락된다. 어머 니도 또한 아이에게 젖먹이는 것을 즐긴다. 일본인들은 젖먹이는 것은 여자의 가장 큰 생리 적 쾌락의 하나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갓난아이는 쉽게 어머니의 즐거움에 동참하는 것을 배운다. 유방은 영양을 줄 뿐 만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도 주는 것이다. 출생 후 1개월 동안 갓난아이는 그의 작은 침상에 눕던가, 아니면 어머니의 팔에 안기던가 한다. 아이가 태어나 고 30일 정도 지났을 때, 그 지방의 신사에 데리고 가 참배하게 되는데, 신사 참배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생명이 갓난아이의 몸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게 되어 이제부터는 밖에 데리 고 다녀도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 1개월이 지나면 갓난아이는 어머니의 등에 업힌다. 이중으 로 된 띠로 아이의 겨드랑이 밑과 궁둥이를 받친 다음 어머니의 어깨를 거쳐 앞으로 돌려 허리 앞에서 맨다. 추운 날에는 어머니는 자신의 솜옷을 갓난아이에게 뒤집어씌운다. 그 가 정의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좀더 큰 어린이가 갓난아이를 업기도 하는데, 그들은 놀 때에 도 갓난아이를 업은 채로 뛰어다니기도 하고 돌차기를 하기까지 한다. 특히 농가나 가난한 가정에서는 큰 아이들한테 아이보기를 맡기는 수가 많다. 이처럼 "일본의 갓난아이는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하기 때문에, 빨리 영리해지고 흥미 있 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자기를 등에 업고 있는 연상의 아이들의 유희를, 실제로 놀고 있 는 당사자처럼 즐기는 듯한 모습을 나타낸다." 일본에서 갓난아이를 사지를 벌린 듯한 자세 로 업는 풍습은 태평양 여러 섬, 그 밖의 곳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갓난아이를 숄 (shawl)로 어깨에 데리고 다니는 여러 섬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이를 수 동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렇게 데리고 다닌 갓난아이는, 일본인이 그렇듯이, 자라게 되면 어디에서나 어떤 자세로도 잘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띠를 매어 아이를 짊어지는 일본의 습관은 숄이나 자루 속에 넣어 운반하는 습관처럼 완전한 수동성을 기르지 않는다. 갓난아이는 "자기를 업어 주는 사람의 등에 새끼고양이처럼 매달리는 법을 배운다. (중략) 띠로 등에 묶이는 (중략) 자신이 여러 가지로 노력하여 편한 자세를 취하려 한다. 그 리하여 얼마 가지 않아서, 마치 어깨에 묶인 보따리 같이가 아니라, 대단히 교묘하게 업는 사람의 등을 타는 법을 익히게 된다. 어머니는 집에서 일할 대는 갓난아이를 침상에 놓아두고, 밖으로 외출할 때에는 등에 업 고 간다. 어머니는 갓난아이에게 말을 붙이고 콧노래를 들려주고 여러 가지 의례적인 동작 을 시킨다. 어머니는 자신이 누구에게 인사를 할 때마다 갓난아이의 머리와 어깨를 앞으로 숙이게 하여 갓난아이에게도 인사를 시킨다. 갓난아이는 항상 한 사람으로 계산되는 것이다. 매일 오후, 어머니는 갓난아이와 함께 목욕탕으로 가서 아이를 무릎 위에 올려 놓고는 장난 을 치며 논다. 3, 4개월 동안 갓난아이는 기저귀를 찬다. 이 기저귀는 대단히 무겁다. 일본인 가운데 더러 안짱다리가 있는데, 어떤 사람들 그것은 기저귀 탓이라고도 한다. 갓난아이가 3, 4개월이 되면, 어머니는 용변 훈련을 시작한다. 어머니는 적당한 때를 가늠하여 갓난아이 를 문 밖으로 데리고 나가 아이 몸을 손으로 받쳐 주고, 보통은 단조로운 휘파람을 불면서 아이가 용변을 마치기를 기다린다. 그리하여 아이는 이 청각 자극의 목적을 배운다. 이렇게 하여 중국의 경우도 그렇지만, 일본에서는 아이가 대단히 빨리 용변 가린다는 걸 배운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오줌을 싸면 아이의 궁둥이를 때리는 어머니도 있으나, 대개는 꾸지 람을 하는 정도로 그치고, 그 아이를 더욱 훈련시키기 위해서 자주 밖으로 데리고 가서 용 변을 보게 한다. 어머니들이 이처럼 용변 가리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은 갓난아이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인데, 용변의 습관이 붙으면 더 이상 두껍고 불쾌한 기저귀를 채 워주지 않는다고 한다. 어머니들은 용변 가리는 법을 아이들에게 용서없이 가르친다. 이와 같은 용서없는 훈련을 통하여 갓난아이가 배우는 일은, 성인이 된 다음, 일본 문화의 보다 복잡 미묘한 강제에 따르는 소지를 만든다. 일본의 갓난아이는 보통 걷기보다는 먼저 말을 하게 된다. 기어다니는 것은 보통 좋지 않 다고 여겨졌다. 또한 갓난아이는 만 한 살이 될 때까지는 서거나 걷도록 시켜서는 안 된다 는 생각이 전통적으로 있어서 그 이전에 모친은 갓난아이가 그런 시도를 하는 것을 일체 금 지시키려 했다. 그런데 요즘 십여 년 간 정부는 정부 발행의 값싸고, 대단히 많은 독자들에 게 읽히는 <어머니 잡지>에서 보행을 장려해야 한다고 가르쳐 왔다. 그리하여 지금은 이를 따르는 편이 훨씬 일반적이다. 어머니는 갓난아이의 겨드랑이 밑에 띠를 둥글게 매어 끌거 나 손으로 받쳐주어 보행 연습을 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갓난아이는 걷기보다는 말을 먼저 하는 경향이 있다. 어른들은 시종 갓난아이와 이야기하고 갓난아이의 흥을 돋우어 준 다. 아이의 이야기는 그가 단어를 쓰기 시작하면서 점차 분명한 목적을 지니게 된다. 일본인 은 갓난아이의 언어 습관을 우연한 모방에 맡겨 두지 않는다. 그들은 아이에게 단어를 가르 치고 문법을 가르치고, 경어를 가르친다 또한 아이도 어른과 함께 그 유희를 즐긴다. 일본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걷게 되면서부터는 여러 가지 장난을 하게된다. 손가락으로 문 의 창호지를 뚫는다든가, 방바닥의 한가운데에 마련해 놓은 이로리 속으로 떨어지곤 한다. 그러나 아이들의 장난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때문에 일본인들은 과장하여, 아이들 장난 때 문에 집이 무너진다고 한다. 문지방을 밟는 것은 '위험스럽고' 터부시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일지라도 문지방을 밟으면 집 전체가 기운다고 진짜로 믿고 있다. 그뿐 아니라 아이 들은 다다미를 이은 데를 밟는다든지 그것에 앉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다미 는 크기가 일정하여, 방은 '다다미 석 장 방'이든지 '다다미 열두 장 방'하는 식으로 불려진 다. 아이들은 때때로, 옛날 사무라이가 방 밑으로 기어 들어와서 다다미를 이은 틈으로 칼을 넣어서 방안에 있는 사람을 찔렀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다다미의 두껍고 부드러운 부분은 안전하고, 다다미의 이음새 틈은 위험한 것이다.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꾸짖을 때 쓰 는 '위험해'라는 말과 '안 돼'라는 말 속에는 이와 같은 감정이 들어있다. 세 번째로, 늘 쓰여 지는 훈계의 말은 '더럽다'는 말이다. 일본 집은 정연하게 정돈되고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며, 어린아이는 그것을 존중하도록 배우게 된다. 일본의 아이는 대체로 다음 아이를 낳을 때까지 젖을 떼지 않는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정부 발행의 <어머니 잡지>는 갓난아이는 생후 8개월에 이유시키는 게 좋다고 주장하고 있 다. 중류 계급의 어머니 중에는 가금 그대로 실행하고 있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이 일본인에 게 일반화되려면 아직 멀었다. 젖 먹이는 것은 어머니의 큰 즐거움이라고 생각하는 일본인 의 감정은 변함없지만, 서서히 새로운 습관을 따르는 사람들은 수유 기간을 줄이는 것은 아 이들의 행복은 위해 참아야 하는 어머니의 희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오랫도안 젖을 먹는 아이는 몸이 약해진다."는 새로운 설을 믿는 사람들은 젖을 떼지 않는 어머니를 자제심이 없다고 비난한다. "저 사람은 이유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건 그럴 결심이 서지 않았기 때 문이다. 단지 언제까지나 젖을 먹이고 싶은 거다. 저 사람은 스스로가 즐기려고만 한다." 이 런 태도이므로 생후 8개월 만에 이유하는 풍습이 일반적으로 보급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또 하나 이유를 늦게 하는 실제적 이유가 있다. 일본인은 갓 젖을 뗀 유아에게 먹일 수 있 는 풍습이 일반적으로 보급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또 하나 이유를 늦게 하는 실제적 이 유가 있다. 일본인은 갓 젖을 뗀 유아에게 먹일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을 준비하는 관습이 없 다. 빨리 젖을 뗀 갓난아이는 미음을 먹이지만 보통은 모유로부터 갑자가 성인의 음식으로 옮겨진다. 우유는 일본인의 식사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들에게는 유아에게 먹일 수 있 는 특별한 야채가 없다. 이런 실정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젖을 먹는 아이는 몸이 약해진다." 라고 가르치는 정부의 지도가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의심을 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유는 아이들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된 다음에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 이전부터 아 이들은 식사때에 어머니의 무릎에 앉혀져 조금씩 입에 떠 넣어 주는 먹을 것을 받아먹지만, 젖을 뗀 후에는 많은 양을 먹게 된다. 아이에 따라서는 이 시기에 모유 이외의 것을 먹으려 하지 않아서 어려움을 주는 아이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새로운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에 이유를 해야 한다고 강요하면 보다 쉽게 아이를 납득시킬 수 있다. 어머니는 과자를 주어서 젖을 찾는 아이를 달랜다. 때로는 젖꼭지에 후춧가루를 바르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어 머니들이 쓰는 수단은 젖을 찾는 아이에게 아직도 갓난아이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놀려 대는 것이다. "사촌인 아무개를 봐라, 그 애는 정말 어른 같다. 너처럼 작은데도 젖 달라고는 안 한다."라든가, "이것 봐, 저 애가 보고 웃어요. 벌써 너는 형인데 아직 젖을 찾다니."하고 놀 려댄다. 두 살이 되고, 세 살이 되고, 네 살이 되어도 아직 어머니의 젖을 찾는 아이는 자기 보다 큰 아이가 가까이 오는 발소리를 들으면, 급히 엄마를 떠나 딴전을 피운다. 이처럼 아이를 놀려 대어 빨리 어른이 되는 것을 재촉하는 것은 젖떼는 경우에 한한 일은 아니다. 아이들이 자기에게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는 어떤 경우에 건 이 방법이 잘 쓰여진다. 사내아이가 울면 어머니는 그 아이에게 "너는 계집아이가 아니 야."라든가, "너는 남자다."라고 말한다. 또는 "이봐, 저 애를 봐. 저 애는 울지 않잖다."라고 말한다. 손님이 갓난아이를 데리고 온 경우는, 어머니는 자기 아이 앞에서 손님이 데리고 온 아이를 귀여워해 주는 것처럼 보여 주어, "이 애를 엄마의 아이로 삼아야겠다. 엄마는 이처 럼 똑똑하고 착한 애가 좋아. 너는 벌써 다 컸는데도 바보짓만 하고 있는걸."하고 말한다. 그러면 아이는 어머니에게로 뛰어가 어머니를 주먹으로 계속 때리면서 "싫어요, 싫어. 인젠 갓난아이 같은 건 싫어요. 나도 어마 말 잘 들을게."하고 운다. 한두 살 된 아이가 떠들거나 말을 잘 안 들으면, 어머니는 남자 손님에게 "이 애를 어디로 데려가세요, 우린 이런 애가 필요 없어요."하고 말한다. 손님은 짐짓 그 역할을 맡아 그 애를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아이는 울부짖으면서 어머니의 구원을 청한다. 어머니가 이젠 충분하다고 생각되면 태도를 부드럽게 하여, 아이를 불러들이고 아직도 심하게 울고 있는 아이에게 이제부터 얌전히 하 라고 맹세시킨다. 이 조그만 연극은 때로는 대여섯 살 된 아이들한테도 연출된다. 아이들을 노려 대는 것은 또 다른 형태로 하는 경우도 있다. 어머니는 남편 곁으로 가서 아이를 향해, "나는 너보다도 아빠가 더 좋단다. 아빠는 좋은 사람이니까."하고 말한다. 아이 는 아주 질투가 나서 아빠와 엄마 사이로 뛰어들려 한다. 어머니는 "아빠는 너처럼 집안을 시끄럽게 하거나 방안에서 뛰어다니진 않으신다."고 한다. 그러면 아이는 "아냐, 아니야. 나 도 이제 그런 짓은 하지 않아요. 나는 좋은 아이가 될 거예요. 자, 이제 예뻐해 주는 거죠?" 하고 말한다. 이제는 충분하다고 생각될 정도의 연극이 진행되면, 부모는 서로 얼굴을 맞대 고 빙긋이 웃는다. 그들은 사내아이뿐 아니라 계집아이도 이렇게 놀려 준다. 이러한 경험은, 성인이 된 일본인에게 현저하게 나타나는, 조소와 배척에 대한 공포심을 기르는 비옥한 토 양이 된다. 자신이 놀림을 받고 있다는 걸 몇 살이 되어야 하게 되느냐를 단정하는 건 불가 능하지만, 어쨌든 늦든 빠르든 아이는 자신이 놀림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번에는 조롱받고 있다는 의식과 함께 일체의 안전한 것, 익숙해져 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아이들의 무서운 공포의 하나가 된다. 어른이 된 뒤에도 타인에게 조롱을 당하게 될 경우에도 이 유아기의 공포가 어디엔가 남아 있게 된다. 이러한 놀려 댐이 두 살에서 다섯 살까지의 아이들 마음속에 큰 공포를 일으키는 이유는 가정이라는 곳이 정말 안정을 보증하며 아이들의 어리광이 허용되는 안식처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완전한 분업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부모가 아이들 눈에 경쟁자로 비치는 일은 거의 없다. 어머니, 또는 할머니가 집안 일을 담당하고 아이를 훈육한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아버지를 받들어 올려 그를 숭배하는 위치로 모신다. 가정의 계층제에서 차례의 순서는 명확히 정해져 있다. 아이들은 이미 연장자에게 특권이 부여되고 있다는 것, 남자는 여자에게 없는 특권을 가지고 있고, 형은 동생이 가지고 있지 않은 특권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유아기 동안 가족 중의 누구로 부터도 관대한 취급을 받는다. 사내아이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어머니는 사내아이에 대 해서건 여자아이에 대해서건 다 같이 언제나 어떤 일이건 원하는 걸 받아주는 사람이지만, 세 살 난 남자아이의 경우, 그는 맹렬한 분노까지도 마음대로 어머니에게 퍼부을 수가 있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반항을 나타내지 못하지만, 어머니나 할머니에게는 짜증을 폭발시켜 양 친에게서 놀림을 받았을 때 느꼈던 일체의 감정 또는 "다른 사람에게 주어 버린다."라는 말 을 들었을 때 느꼈던 울분을 발산하는 수가 있다. 물론 어린아이 사내아이 모두가 짜증을 낸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시골에서건 상류 계급 가정에서건 짜증은, 세 살에서 여섯 살까지의 아이들의 공통적 성질이라고 보고 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를 계속 때리기도 하고 울부짖기도 하는 등 난폭하기 짝이 없어, 그 때문에 어머니의 소중하고 예쁘게 빗어올린 머 리카락을 형편없이 만들고 만단. 어머니는 여자이고, 그는 비록 세 살이지만 틀림없는 남자 이다. 그는 어머니에 대해서는 제멋대로 공격을 가하는 일도 있다. 아버지에게 대해서 아이는 언제나 존경을 태도를 나타낸다. 아버지는 아이에겐 높은 계층 적 지위를 대표하는 훌륭한 모범으로서, 항상 쓰여지는 일본식 표현을 빈다면, 아이는 '예의 범절을 익히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적절한 경의를 표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아 버지는 서구의 어떤 나라의 아버지보다도 자녀의 훈육에 말참견을 하는 일이 적다. 아이의 훈육은 여자의 손에 맡겨지고 있다. 아버지가 자신의 의지를 어린아이에게 전하려고 할 때 는 대체로 그저 잠자코 노려보든가, 또는 간단한 훈계를 줄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드 물기 때문에, 아이는 곧 아버지가 하는 말을 듣는다. 아버지는 아이가 걸어다닐 수 있게 된 뒤에도 오랜 동안 때로는 아이를 안거나 업거나 하고 돌아다닌다. 이 점은 어머니도 마찬가 지이다. 그리하여 그 나이의 어린 아이를 위하여 아버지는 때로, 미국의 아버지라면 보통 어 머니에게 맡길 만한 육아상의 임무를 다할 때가 있다. 아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는 어 리광을 피울 수 있다. 조부모는 도한 아이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실제로 조부모 가 아이들을 훈육하는 역할은 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기르는 부모들의 방법이 못마땅해서 조부모 자신이 그 역할을 떠맡는 수도 없지는 않지만, 그것은 고부간에 대단한 알력을 일으 키는 원인이 된다. 할머니는 통상 하루 24시간 동안 아이들 옆에 있다. 그리하여 시어머니와 며느리간의 아이들의 둘러싼 다툼은 일본 가정에서는 아주 평범한 일로 되어 있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양쪽으로부터 귀여움을 받는 결과가 된다. 할머니는 며느리를 제압하기 위해서 가끔 손자를 이용한다. 그러나 아이의 어머니인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순종하는 것이 인생 에 있어 최대의 의무이기 때문에 조부모가 아이들을 버릇없이 키워도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아이에게 과자를 더 이상 안 주겠다고 말한 바로 직후에게 아이에 게 과자를 준다. 그리고서 "할머니가 준 과자는 독약이 아니에요."라고 빈정거린다. 많은 가 정에 있어서 할머니는 어머니가 손에 넣을 수 없는 물건을 아이들에게 준다. 또한 어머니보 다 더 많이 아이들과 놀 수 있는 시간이 있다. 형이나 누나들은 동생들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일본인은 다음 아이 가 태어나면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코가 납작해진다(nose being put out if joint : 누군가 에게 자기가 지금까지 차지하고 있던 지위에서 밀려나는 것)"라는 상태에 떨어지는 위험을 충분히 알고 있다. 소외된 아이는, 새로 태어난 아이와 어머니의 젖과 어머니와의 잠자리를 단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관련시켜서 생각하게 된다. 새 갓난아이가 출생하기 전, 어머니는 아이에게 "이번에는 가짜 아이가 아니라 진짜 산 인형이 나온다."라고 말해 준다. 또하 아이에게 이제부터 어머니하고가 아니라 아버지하고 같이 자야 된고 일러 주고, 그것 이 상당한 특권이나 되는 듯이 말해 준다. 아이는 새로운 갓난아이를 위한 여러 가지 준비 에 흥미를 느낀다. 아이는 보통 새로운 갓난아이가 태어나면 진정으로 흥분하여 기뻐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 흥분과 기쁨은 식어 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히 예기되어 있던 것으로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외된 아 이는 갓난아이를 끌어안고 어디론가 데리고 가려하면서 어머니에게, "이 갓난아이는 누구에 게 줘 버려요."한다. 그러면 어머니는 "아니야, 우리 갓난아이야. 그러니까 모두 귀여워해 줘 야해. 갓난아이는 너를 좋아해. 너도 갓난아이를 돌보는 데 도와줘야 한다."하고 대답한다. 때로는 이런 말다툼이 꽤 오래 몇 번이고 되풀이 되는 수도 있은, 어머니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아이들이 많은 가정에서는 이러한 사태를 구제하는 하나의 대책이 자동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아이들이 제각기 한 사람 건넌 형제와 특별히 친밀한 유대로써 맺어지는 일이다. 제일 큰 아이는 세 번째 아이와, 두 번째 아이는 네 번째 아이와 마음이 통하는 상 대가 되어 보호자가 된다. 동생들은 한 사람 건넌 형이나 누나를 잘 따른다. 아이들이 7, 8 세가 될 때까지는 남녀의 차이가 이 풍습에 어떤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일본의 아이들은 누구나 장난감을 가지고 있다. 부모나 많은 친척, 친지들이 아이들을 위 해 인형과 인형에 부속되는 일체의 물건을 만들어 주든지 사 준다. 가난한 사람들은 장난감 사는 데 돈을 쓰지 않는다. 어린아이들은 인형과 그 외의 장난감 사는데 돈을 쓰지 않는다. 어린아이들은 인형과 그 외의 장난감을 써서 소꿉놀이라든가 결혼식 놀이, 명절놀이 등을 한다. 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어른들이 하는 방법인가를 철저하게 의논한다. 아무래도 의논이 정리되지 않는 문제는, 어머니에게 들고 가서 판단을 받는 수도 있다. 싸움이 시작되면 어머니는 곧잘 'noblesse oblige(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덕상의 의무)' 에 호소하여, 큰 아이에게 작은 아이가 하는 말을 들어주라고 말한다. 그때 잘 사용하는 표 현은 "지는 것이 이기는 거라고 하지 않아?"라는 말이다. 어머니의 말의 의미는 세 살 난 아이도 곧 짐작하게 되는데, 큰 아이가 작은 아이에게 자신의 장난감을 양보하면, 어린아이 는 금방 그것에 싫증이 나서 다른 것에 마음을 돌린다. 그러면 큰 아이는 일단 주었던 장난 감을 되찾을 수가 있게 된다는 뜻이다. 또는 어머니의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이제부터 시작할 주인과 머슴놀이에서 설령 인기 없는 역을 맡더라도 그렇게 해서 모두가 재미있게 놀 수 있 고, 자신도 즐길 수 있기 때문에 결코 손해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 는 논리는 어른이 된 후에도 일본인의 생활 속에서 크게 존중되는 논리이다. 훈계와 놀려 댐의 수단 외에 아이들 훈육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수단은, 아이들의 마 음을 달래어 아이들의 주의를 목적물에서 다른 데로 옮기는 방법이다. 일본인은 때를 가리 지 않고 아이들에게 과자를 주는데, 그것도 일반적으로 주의를 전환시키는 수단의 일부가 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취학 연령에 가까워지면 여러 가지 '치료법'이 이용된다. 어린아 이가 짜증을 부리든지 말을 잘 듣지 않는다든지 소란스럽다든지 하면 어머니는 그 아이를 신사나 절에 데리고 간다. 어머니는 "자 함께 참배해서 치료를 받자꾸나."라는 태도를 취한 다. 아이에게 있어 그것은 정말 즐거운 소풍처럼 되는 일이 많다. 치료를 행하는 신관이나 승려는 엄숙한 어조로 아이들과 이야기하고 아이의 생일과 나쁜 점을 묻는다. 그런 뒤 그는 안으로 들어가 기도를 하고 다시 돌아와 병이 나았다고 말한다. 때로 아이가 버릇없음은 벌레가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벌레를 잡아 주었기 때문에 이젠 다 나았다고 하는 경우도 있 다. 그는 아이를 정화시키고 병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집으로 일본의 어린아이가 받는 가장 엄한 벌은 '뜸질'이라고 여겨진다. 그것은 아이의 피부 위에 '모구사'(약쑥)라고 하는 분말을 원추형으로 쏟아 놓고 태우는 것이다. 그 흔적은 일생 동안 지워지지 않는다. 뜸질은 옛부터 동부 아시아 일대에서 널리 행해졌던 민간 요법으로서, 일본에서도 전통적으로 여러 가지 병을 고치기 위하여 쓰여졌다. 뜸질은 화제 하여 어머니나 할머니로부터 치료를 받는다. 증 세가 무거운 경우에는 두 번 되풀이하여 치료하는 경우도 있으나, 아이들의 버릇을 고치려 고 '모구사'를 세 번 쓰는 일은 별로 없다. 뜸질은 이를테면 미국에서 "그런 일을 하면 뺨을 치겠어요."하는 말과 같은 뜻의 벌은 아니다. 그러나 뺨을 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단한 고통을 준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장난을 치면 꼭 벌을 받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루기 힘든 아이를 다스리는 이상의 수단 외에도 필요한 신체상의 기능을 가르치는 여러 가지 관습이 있다. 이 경우,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자신의 손으로 아이의 몸을 붙잡고 그 동작 을 하게 하는 데 큰 역점을 둔다. 아이는 시키는 대로 하는 수동적이어야 한다. 아이가 두 살이 되기 전에 아버지는 아이에게 무릎을 굽히고 발등을 바닥에 대로 앉는 정좌 자시를 취 하게 한다. 처음에는 아이가 뒤로 넘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정좌 훈련에서 빠뜨릴 수 없는 요소, 즉 몸을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것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아 이는 안달을 하거나 자세를 흐트러뜨리면 안 된다. 앉는 법을 배우려면 몸의 힘을 완전히 빼고 수동적인 자세가 되어야 한다고 일본인은 말한다. 그리고 이 수동성은 아버지가 아이 의 다리를 쥐고 올바른 위치에 놓아줌으로써 더욱 강조된다. 아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앉는 방법뿐만이 아니라 자는 방법도 있다. 일본 여인이 자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단하다. 일본인은, 정부가 외국의 승인 을 받기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서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시끄럽게 선전하기 전까지는, 나체로 목욕하고 있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지만, 자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감정은 대단히 강렬하였다. 사내아이는 아무 렇게나 잠을 자도 괜찮지만, 계집아이는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몸을 곧바로 편 채로 자 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사내아이의 예의 범절과 계집아이의 예의 범절을 구별하는 최초 의 규칙의 하나이다. 일본에서, 다른 모든 면에서의 요구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요구도 또한 하층 계급보다 상류 계급 편이 더 엄격하다. 스기모토 부인은 자신이 경험하였던 사무라이 가정의 예의 범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 고 있다. "내가 철이 든 이후로, 나는 항상 밤에는 작은 목침 위에 조용히 눕도록 신경을 썼 다. 사무라이의 딸들은 어떤 경우에도 - 가령 잠들 때에도 몸과 마음을 흐트려서는 안 된다 는 가르침을 받았다. 사내아이는 큰 대자로 몸을 벌리고 자더라도 괜찮지만 계집아이는 조 심성 있고 품위 있기 기자처럼 몸을 구부리고 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자제의 정신' 을 나타내는 것이다. 나는 일본 부인들로부터 그녀들의 어머니나 유모가 잠자는 훈련을 시 킬 때, 손발을 가지런히 모아 주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통적인 서도학습에 있어서도 선생은 아이의 손을 잡고 글자를 쓰게 했다. 그것은 아이 에게 '감촉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아이는 글을 쓰기는커녕 아직 읽을 수도 없을 때, 통제된 리듬있는 운필법을 체득하게 된다. 현대에 이르러 많은 학생을 동시에 교육 하게 된 후부터 이 교수법은 전보다는 눈에 띄지 않게 되었으나, 그래도 아직 때때로 행하 여지고 있다. 절하는 법이나 젓가락 쓰는 법, 활쏘는 법, 갓난아이 대신 베개를 등에 묶어 업고 배우는 아기 업는 법 등은 모두 아이의 손을 잡고 움직이거나 아이의 몸을 잡고 바른 자세를 취하게 하는 방법을 통해 가르친다. 상류 계급의 경우를 제외하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기 전부터 근처에 사는 아이들과 함께 자유롭게 논다. 시골에서 아이들은 세 살이 되기 전부터 패를 지어 동무들과 논다. 또한 읍 이나 도시에서는 아이들은 차가 다니는 곳이든 다니지 않는 곳이든 사람이 많이 다니는 가 로에서, 옆에서 보면 아슬아슬할 정도로 자유 분방하게 뛰어 논다. 그들은 특권이 부여된 인 간이다. 상점 앞에 붙어 서서 어른들의 말을 엿듣기도 하고 돌차기나 공치기를 하기도 한다. 그들은 또한 시골의 신사에 모여서 안전하게 수호신의 보호를 받으며 논다. 학교에 들어가 기까지는 또 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2, 3년 간은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는 함께 논다. 그러나 동성의 애들끼리, 특히 같은 나이의 애들끼리 가장 친밀한 관계가 맺어지는 일이 많다. 그러 나 동갑집단은 특히 농촌에서는 일생 동안 계속되는 것으로서 다른 모든 집단보다 영속된 다. [스레무라]에서 엠브리는, "성적인 관심이 감퇴함에 따라 동갑의 모임이 일생에 남는 진 짜 즐거움이 된다. 스에(그 마을)사람들은 '동갑은 아내보다 인연이 깊다'고 말하고 있다."라 고 적고 있다. 이와 같은 취학 전 아동의 친구들은 서로 터놓고 지낸다. 그들이 하는 놀이는 서구인이 눈으로 보면 저속한 것도 많은데 그들은 이런 상스러운 놀이를 태연하게 드러내 놓고 한다. 아이들이 성에 관한 지식을 가지로 있는 것은 어른들이 보통으로 음란한 말을 주고받기 때 문이기도 하고, 또한 가족들이 좁은 집안에서 함께 생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구나 그들 의 어머니는 아이를 목욕시킬 적에 장난삼아 곧잘 그 아이의 음부, 특히 사내아이의 음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일본인은 좋지 않은 장소나 좋지 않은 친구와 함께 행하는 경우가 아 니면, 아이의 성적 유희를 꾸짖지 않는다. 수음도 위험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더구 나 아이들 사이에는 대단한 욕 - 어른들이라면 모욕이 될 만한 욕 -을 서로 주고받고, 자기 자랑 -을 한다. 이럴 때 일본인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면서 "아이들은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 문이죠."하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 때문에 저처럼 행복한 것입니다." 라는 말을 잇는다. 이 것은 어린아이와 어른간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왜냐하면 어른에게 "저 녀석은 부끄럼을 모 른다."라고 하면, 그 사람은 완전히 파렴치한이라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 나이 또래의 아이들은 서로 상대방의 가정과 재산에 대해 욕을 주고받으며, 곧잘 자기 아버지 자랑을 한다. "우리 아버진 너의 아버지보다 힘이 세다."라든지, "우리 아버진 너의 아버지보다 머리가 좋다."라는 말을 잘 한다. 그들은 각각 자신의 아버지 편을 들어 주먹다 짐을 할 때도 있다. 이런 행동은 미국인에게는 거의 마음에 새겨 둘 가치도 없는 일처럼 생 각되지만, 일본에서의 그것은 아이들이 그들 주위에서 들을 수 있는 어른들의 대화와 큰 대 조를 이루는 것이다. 어른들은 모두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존경하여, 자기 집을 말할 경우는 '졸택', 남의 집을 말할 때는 '어존택'이라고 하고, 자신의 가족을 말할 때는 '졸가', 타인의 가족을 가리키는 경우엔 '어존가'라고 한다. 일본인은 누구나, 유아기의 몇 년 동안-같이 노 는 동무들이 생길 때부터 국민학교 3학년, 즉 아홉 살이 될 때까지-이러한 자기 본위의 주 장을 한다는 것을 한결같이 인정하고 있다. 어떤 때에는 "내가 도노사마가 될 테니 너는 부 하가 되어라." "싫어, 부하는 싫어. 내가 도노사마다."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때로는 자신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을 깔보기도 한다. "아이들은 무엇이든 말하고 싶은 말을 맘대로 한다. 그러나 점점 자람에 따라, 그들은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전부 말할 수는 없음을 알게 도 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누구에게 질문을 받기 전까지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고, 또 자기 자랑도 하지 않게 된다." 아이들은 가정에서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태도를 배운다. 신고나이나 스님은 아이를 '가르 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이들이 조직적으로 종교와 접하게 되는 것은 철따라 행해 지는 명절놀이에 가서 참예자 일동과 함께 '간누시(신주)'로부터 정화수를 뿌려 받은 경우에 한한다. 어떤 아이는 불교의 참배에 따라가기도 하나, 이것 또한 무언가 특별한 축제가 행해 질 경우에 국한된다. 아이들이 끊임없이 또한 가장 뿌리깊은 종교적 경험을 하는 것은 항상 자기 집의 불단과 '신토'의 신단(신도신단 : 가미다나)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가정 예배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족의 위패를 모신 불단으로서 그 앞에 꽃이나 어떤 종 류의 나뭇가지, 또는 향을 바친다. 거기에는 매일같이 음식이 공양된다. 가족의 연장자가 집 안에 일어났던 모든 일을 선조에게 고하고, 또한 매일 불단 앞에 머리를 숙여 절한다. 저녁 에는 작은 촛불이 켜진다. 일본인들은 가령 다른 곳에 가서 머물게 되면, 이와 같은 집을 지 켜 주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불안해져서 싫다고 말한다. '가미다나'는 보통은 이세진구(이세신궁)의 표찰을 모신 간단한 선반이다. 그 외에 여러 종 류의 공물이 여기에 바쳐진다. 또한 부엌에는 그을음으로 덮여 있는 부엌 귀신이 있고, 창과 벽에는 많은 부적이 붙여져 있다. 이것들은 모두 보호를 베풀어 집안의 안전을 지켜준다. 마 을에서는 그 동네 절이 마찬가지로 안전한 장소이다. 그곳은 자비심 많은 신들이 앉아서 수 호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안전한 절에서 놀게 하기를 좋아한다. 어린아이의 경 험 속에는 신을 두려워한다거나 혹은 공정한 감시자로서의 신들을 만족시키려고 자기 행위 를 규제하는 일은 없다. 어린이들은 신의 은총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신들은 권위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를 일본 성인 생활의 용의주도한 틀에 적응시키는 중대한 과업이 정말로 시작되는 것 은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서 2, 3년 지난 다음이다. 그때까지 아이들은 자신의 몸을 알맞게 조절, 통제하는 법을 배운다. 대단한 말썽꾸러기인 경우에는, 그의 버릇없음은 '치료'되고, 그 의 산만한 주의력은 전환된다. 그는 은근히 훈계되거나 놀림을 받는다. 그러나 그의 응석은 허용되고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조차 용서된다. 그의 작은 자아는 조장되어 온 것 이다. 아이들이 처음 학교에 가게 된 다음에도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처음 3년 간은 남녀 공학이다. 교사는 남자 선생이건 여자 선생이건 모두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하나 가 된다. 그러나 가정에서건 학교에서건 지금보다 더 자주, '곤란한' 사태에 발을 들여놓는 데 대한 위험이 강조된다.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정도까지는 이르지 않 았으나, 자신이 '곤란한; 상태에 빠지는 것을 피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테 면 늑대가 없는데도 "늑대다, 늑대다."하고 부르짖는 이야기 속의 소년은, "사람을 속였다. 만일 네가 그런 일을 하면 더 이상 누구도 너를 신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말 곤란한 일이 다."하고 가르친다. 일본인들의 경우, 대개 그들이 잘못했을 때 최초로 그들을 조롱한 사람 은 학교 친구들이지 교사나 양친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 시기에 있어서 어른들 이 하는 일은 아이들에 대해 조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한다는 사 실과 세상에 대한 '기리'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도덕적 교훈을 서서히 연결시켜 나가는 것이다. 아이들이 여섯 살이 되면 충견의 헌신적 충성 이야기로 설명된 의무가-앞에서 인용한 어 떤 착한 개가 주인의 '온(은)'에 보답한다는 이야기는 여섯 살 난 아동이 읽는 책에 나온다- 이제 점차 갖가지 종류의 구속이 되어 간다. 연장자는 아이들을 향하여 "이런 저런 일을 하 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사는 사람이 된다."라고 말해준다. 그 규칙은 각각 독립되 어 각각의 경우에 따라 정해진다. 그것의 대부분은 우리들이 에티켓이라고 부르는 일에 관 한 것이다. 이 규칙은 자신의 의지를, 점차로 증대되어 가는 가족, 이웃 사람, 나아가서는 국 가에 대한 의무에 복종하게 하는 것을 요구한다. 아이들은 자기를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자신이 채무를 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서서히, 부채를 갚으 려면 주의 깊게 세상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채무자의 지위로 옮겨져 가게 된다. 이 지 위의 변화는, 유년기의 놀려대던 형태를 새롭게, 그러나 진지한 형태로 확장해 감으로써 성 장기 소년에게 교육된다. 아이들은 8, 9세가 되면 가족으로부터 정말로 배척을 받는 수가 있 다. 교사가 아이가 불복종, 또는 불손한 태도를 취한 것을 보고하고 품행에 낙제점을 주면, 집안 사람들이 그를 따돌린다. 상점 주인으로부터 무언가 장난을 쳤다고 비난을 받으면, 그 것은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것이 된다. 가족은 한 덩어리가 되어 그 아이에게 비난과 공격 의 화살을 돌린다. 내가 알고 있는 두 명의 일본인은 열 살이 되기 전에 아버지로부터 두 번 다시 집의 문지방을 넘지 말라고 집에서 쫓겨난 적이 있는데, 부끄러워서 친척집에 갈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교실에서 교사에게 벌을 받았던 것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집 밖의 창고에서 잤다. 결국 어머니에게 들켜 어머니의 중재로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갔다. 국민 학교의 상급반 아이들은 '긴신', 즉 '회개'하기 위해서 집에 갇혀, 일본인들에게 고정 관념이 되어 있는, 일기를 쓰는 일에 전념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든 가족들은 그 소년을 이제 세상에서 그들의 대표자로 여기는 태도를 취한다. 그리하여 소년이 세상의 비난을 받 았다는 이유로써 그를 책망한다. 그는 세상에 대한 '기리'를 등진 것이다. 그는 가족의 지지 를 받을 수도 없고, 친구의 지지를 받을 수도 없다. 그의 학교 친구들은 과오를 범한 그를 같은 패에서 제외한다. 그래서 그는 사죄를 하여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겠다고 맹세함으로 써 다시금 동무가 된다. 제프리 고러(Geoffrey Gorer)는 이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 다. "특기할 가치가 있는 것은, 이상의 일이 사회학적으로 보아, 극히 드물 정도로 철저히 행해진다는 점이다. 대가족 제도나 기타 부분적 사회 집단이 활동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회 에서는, 어떤 집단의 구성원 한 사람이 다른 집단의 구성원으로부터 비난이나 공격을 받을 경우 그 집단을 일치 단결하여 보호에 나서는 것이 보통이다. 계속하여 자기 집단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는 한, 곤경에 처하거나 또는 습격을 받을 경우에 전면적인 지지를 얻 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자기 집단 이외의 모든 사람에게 대항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일 본에서는 그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다. 즉, 자기 집단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확신을 느끼 는 것은 다른 집단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동안에 한정됨으로, 만일 외부 사람 이 찬성하지 않거나 비난하였다면, 당사자가 다른 집단에게 그 비난을 철회시킬 수 있을 때 까지, 그가 속한 집단은 그에게 등을 돌려 징벌을 가한다. 이러한 사정으로 해서 '외부 세계' 의 인정은 다른 어떤 사회에서도 그 예를 볼 수 없을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계집아이의 예의 범절에 대한 훈련도 그 나이에 이르기까지는 사내아이와 별 차이가 없 다. 다만 지엽적으로는 다소의 차이가 있다. 여자아이는 가정 안에서 사내아이보다 많은 제 약을 받는다. 해야 할 일도 더욱 많다. 작은 사내아이도 아이 보는 일을 할 경우도 있지만, 계집아이는 무슨 선물을 받거나 무언가 배려를 받은 경우에는 늘 사내아이만큼 대접을 받지 못한다. 계집아이는 또한 사내아이의 특징인 울화통을 터드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아시 아의 소녀치고는 놀랄 만큼 자유롭다. 새빨간 옷을 입고 사내아이와 함께 길거리에서 놀고 사내아이와 싸운다. 더군다나 지지 않고 자기 목적을 끝까지 관철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녀 도 또한 어린아이 때는 '부끄러움'을 모른다. 대체로 계집아이들은 6세에서 9세에 이르는 사 이에 사내아이와 마찬가지로 같은 경험을 하면서, 점차적으로 '세상'에 대한 '기리'를 배운다. 9세가 되면 학급은 여자반과 남자반으로 나뉘어, 사내아이들은 새로 생긴 사내아이끼리의 단결을 중요시하게 된다. 그들은 계집아이를 제외시켜서 계집아이와 말하는 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을 꺼린다. 계집아이들도 어머니로부터 사내아이와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 는다. 이 나이 때의 소녀들은 곧잘 새침해지고 자기 안으로 움츠리게 되어서 가르치기가 힘 들다고 말한다. 일본의 부인들은 그것이 '어린이다운 장난'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시기라고 말하고 있다. 계집아이의 유년기는 사내아이의 생활에서 배척됨으로써 끝난다. 앞으로 몇 년, 아니 몇 십 년의 세월 동안 그녀들이 걸어가야 할 길로서 정해진 길은 오직 '자중에 자 중을 거듭하는' 것말고는 없다. 이 교훈은 언제까지나, 약혼이 성립되었을 때나 결혼한 뒤에 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사내아이에게는 '자중'과 세상에 대한 '기리'를 배운 것만으로는 일본의 성인 남자 가 부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를 모두 습득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일본인들은, "사내아이 는 열 살 무렵부터 이름에 대한 '기리'를 배운다."고 말한다. 그것은 물론 모욕을 당했을 때 분노하는 것이 덕이라는 것을 배운다는 의미이다. 그는 또한 어떤 경우에 적에게 직접 공격 을 가하고, 어떤 경우에 간접적 수단을 써서 오명을 씻는가에 대한 규칙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이름에 대한 '기리'를 배운다는 것은 모욕을 당했을 때 반드시 상대를 공격하는 것 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벌써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 게 심한 폭력을 가하는 것이 허락되었고, 또한 동년배의 아이들과 싸우면서 여러 가지 자다 한 비방과 항변을 해결지어 왔던 소년들이, 열 살이 되어 새삼스럽게 공격하는 것을 배울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이름에 대한 '기리'의 법도는 소년이 열 살 이후에 이 조항의 적용을 받게 되는 것과 동시에, 그들의 공격을 일정한 공인된 틀 속에서 처리하는 특정한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다.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일본인은 때때로 타인에 대하여 폭력을 행사하 는 대신에, 그 공격을 자기 자신에게 행하는 일이 있다. 학교에 다니는 소년들의 경우도 그 예외가 될 수 없다. 6년제 국민 학교를 마친 후 학업을 계속하는 소년-그 수효는 인구의 약 15퍼센트인데, 다 만 남자의 비율은 조금 높다-의 경우에는, 차츰 이름에 대한 '기리'를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가, 중학교 입학 시험의 격렬한 경쟁과 모든 과목에 있어서 다른 학생의 석차 경 쟁이 갑자기 닥쳐오는 시기와 일치된다. 그들은 한걸음 한걸음 경험을 쌓아 올린 다음 이와 같은 사태에 부딪치는 것은 아니다. 경쟁은 국민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될 수 있는 한 피 하게 되어 있어 거의 없는 것과 같은 상태이다. 따라서 경쟁은 돌연 닥쳐오는 전연 새로운 경험이기 때문에, 더욱 치열한 것이 되고 걱정거리가 된다. 석차 경쟁과 함께 정실에 대한 시의가 성행한다. 그러나 일본인이 추억담 속에서 크게 취급하는 것은 이 경쟁의 문제가 아니라 상급생이 하급생을 괴롭히는 습관이다. 중학교의 상급생은 하급생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괴롭힌다. 그 들은 하급생에게 굴욕적인 일을 시킨다. 이런 일을 당한 하급생은 십중팔구 대단한 원한을 품게 된다. 일본의 소년은 이러한 일을 결코 재미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상급생 앞에 서 '엎드려뻗쳐'를 당하거나 야비한 심부름을 당한 하급생은 자신을 괴롭힌 상대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를 계획한다. 당장 보복할 수 없는 복수이기에 더욱 복수에 열중하게 된다. 복수는 이름에 대하나 '기리'로서 그들은 그것을 덕행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가족적 연고를 이용 하여, 몇 년 지나 후에 자신을 괴롭힌 상대가 어렵게 잡은 직장에서 해고당하도록 술책을 쓰는 경우도 있다. 또한 때로는 유도나 검도의 실력을 닦아 졸업 후에 도시의 가로상에서 공공연하게 상대에게 창피를 주는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언젠가 갚지 않으면 '무언가 아 직 할 일이 남은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 느낌이야말로 일본인의 보복의 핵심이 된 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소년들은 군대 교육에서 같은 경험을 하는 일이 있다. 평화시에 청년들은 네 명에 한 명꼴로 군인으로 징집되었다. 고참병이 초년병을 못살게 괴롭히는 일 은 중학교나 그 이상 학교에서 상급생이 하급생을 괴롭히는 것보다 훨씬 극단적인 것이었 다. 장교는 전혀 그것에 관계하지 않는다. 또한 하사관도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전혀 그 것에 관계하지 않는다. 또한 하사관도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관계하지 않았다. 일본인의 법도의 제1조는 "장교에게 일러바치는 것은 자신의 면목을 잃는 일이다."라는 것이다. 모든 일은 병사들 사이에서 해결 지어진다. 장교는 그것을 병사를 '단련시키는' 방법의 하나로서 용인하고 관여하지는 않는다. 1년이 지나 고참이 된 병사는 지난 1년 간의 쌓이고 쌓였던 갖가지의 원한을 이번에는 초년병을 괴롭힘으로써 해소하고, 여러 가지 교묘한 방법을 만들 어 그들을 '단련'한다. 징집병이 군대 교육을 받고 나오면, 완전히 인간이 변하여 '진짜 저돌적인 국가주의자'가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 변화는 그들이 전체주의적 국가 이론을 배웠거나, 천황에대한 '주 (충)'가 주입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가장 중대한 원인은 굴욕적인 기합을 당했던 경험일 것 이다. 가정 생활에서 일본식의 가정 교육을 받아 왔고, '자존심(amourpropre)'에 집착하는 청년은 그러한 사태에 직면하면 완전히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되기 쉽다. 그들은 조롱당하 는 것을 참을 수 없다. 그들이 배척이라고 해석하는 이러한 일은 그들의 차례가 되면 그들 을 신랄한 고문자로 만들기도 한다. 근대 일본의 중학교나 군대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사 태가 그와 같은 성격을 띠게 되는 이유는 조소와 모욕에 관한 옛날부터 일본에 내려오는 습 관에 기인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중학교나 여러 상급학교, 또는 군대가 그러한 사태 에 대한 일본인의 반응을 처음으로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일본의 전통적인 이름에 대한 ' 기리'의 법도가 아랫사람을 괴롭히는 관습을 미국보다 훨씬 심한 고통을 주는 것으로 만들 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선배에게 괴로움을 당한 집단은 뒤이어 순번적으로 다음 피해자의 무리에게 학대를 가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괴로움을 당한 소 년은 어떻게 하든지 자신을 실제로 괴롭힌 당사자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데에 열중하는 것도 옛부터 내려오는 유형에 일치한다. 울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것은 서구의 많은 나라 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풍습인데,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다. 예를 든다면, 폴란드에서는 새로 운 도제나 젊은 일꾼은 심하게 학대를 받는데, 그 원한을 학대를 가한 당사자에게 갚는 것 이 아니고 다음 차례의 도제나 일꾼에게 뒤집어씌운다. 물론 일본의 소년도 이런 방법으로 원한을 풀기도 하지만 그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직접적인 복수이다. 괴롭힘을 당한 인 간은 괴롭힌 인간에게 복수를 할 때야만 '시원한 기분'을 느낀다. 일본의 재건에 있어서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는 지도자들은 국민들이 청춘시대를 보내는 여러 학교나 군대에서의 학대와 소년들을 괴롭히는 습관에 특별한 주의를 할 필요가 잇다. 그들은 상급생과 하급생의 차별을 철폐하기 위하여 애교심을 강조하여 '그리운 동창의 인연' 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군대에 있어서도 초년병 학대를 금지할 필요가 있다. 가령 고참병이 초년병에 대하여 이전에 모든 계급의 일본 장교들이 행했던 것처럼 스파르타식 훈련을 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강제는 일본에서는 모욕이 되지 않으나, 초년병을 괴롭히는 일은 모욕이 된다. 만일 학교에서나 군대에서 나이 많은 소년이 나이 어린 소년에게 개처럼 꼬리를 흔들 게 하거나, 매미 흉내를 내도록 시키거나, 다른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는 가운데 물구나무서 기를 시키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천황의 신성 부정, 도는 교과서에서 국가주의적 내용을 제거하는 것보다도 일본의 재교육이라는 점에서 더욱 효과 있는 변화가 될 것이다. 여자는 이름에 대한 '기리'의 법도를 배우지 않으며, 사내아이처럼 중학교나 군대 교육이 라는 근대적인 경험을 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또한 그에 유사한 경험도 하지 않는다. 그녀들 의 생애는 사내아이의 생애에 비하여 훨씬 변화가 적다. 철이 든 시기부터 그녀들은 어떤 일에 있어서도 사내아이가 우선적이며, 사내아이에게는 계집아이에게 부여되지 않는 보살핌 과 선물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훈련되어져 있다. 계집아이들이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세술은 공공연히 자기 주장을 할 특권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갓난아이 적이나 유년 시절에는 계집아이들도 사내아이와 함께 일본 어린 아이의 특권적 생 활을 즐길 수 있다. 특히 어린 소녀기에는 빨간색의 옷을 즐겨 입는다. 어른이 되면 이미 그 러한 빛깔의 옷은 제2의 특권적 시기가 시작되는 60까지는 입을 수가 없게 된다. 가정 내에서 그녀들은 사내아이들처럼 반목하는 어머니와 할머니 쌍방으로부터 귀여움을 받을 때가 있다. 또한 남동생과 여동생들은 언니에게 가족의 누구에게나 그렇게 말하기는 하지만 '제일' 잘해 달라고 조른다. 아이들은 그녀에게 사이가 좋다는 증거로 같이 자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하여 때대로 그녀는 할머니한테서 받은 물건을 두 살 난 어린 동생에 게 나눠주기도 한다. 일본인은 혼자서 자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밤이 되어 아이의 이불은 마음에 맞는 연장자의 이불에 잇대어 펴는 수가 있다. '누구누구와 내가 사이가 좋 다'라는 증거로 두 사람의 잠자리를 붙이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계집아이는 아홉 살이나 열 살이 되어 사내아이들의 놀이친구로부터 제외 당하는 시기에도 그 대상이 부여된다. 그녀들 은 새로운 헤어 스타일로 머리를 땋고 좋아한다. 그리고 14세부터 18세까지의 계집아이의 머리 땋는 방식은 일본에서 가장 공들인 것이다. 그녀들은 무명옷 대신에 명주옷을 입는 것 이 허용되는 연령, 곧 용모를 돋보이도록 옷을 입게 하는 데 갖은 노력이 다해지는 연령에 도달한다. 이렇게 하여 여자아이에게도 어느 정도의 만족은 주어진다. 여자아이는 갖가지 구속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 의무를 이행하는 책임은 바로 여 자아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부모의 손에 있는 것은 아니다. 부 모가 친권을 행사하는 것은 아이에게 체벌을 주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딸은 훌륭하게 시키 는 대로 인생을 살아갈 것이라는 조용하고 흔들림 없는 기대를 갖는 것으로서 이다. 다음에 드는 예는 그런 가정교육의 극단적인 한 예이다. 비교적 고나대한 자녀의 특권을 인정하는 자녀교육의 특성이 지니고 있는, 비 권력주의적 압력이 대략 어떠한 성질의 것인가를 잘 보 여주고 있는 예로서 충분히 인용의 가치가 있다. 여섯 살 때부터 어린 이나가키 에쓰(스기 모토 부인의 전 이름)는 어느 학식이 풍부한 유학자로부터 한문 고전 읽기를 교육받았다. 두 시간의 수업 동안 선생은 손과 입술을 제외하고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선생을 마주보고 다다미 위에 선생과 마찬가지로 부동 자세로 앉아 있었다. 한번 나는 몸을 움직인 일이 있었다. 그것은 수업 도중이었다. 웬일인지, 나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약간 몸을 움직여 굽힌 무릎을 올바른 각도에서 약간 옆으로 비켰다. 희미하게 놀란 표정이 선생의 얼굴 위를 스쳐갔다. 그리고 나서 조용히 책을 덮고 잔잔하게 그러나 엄한 태도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가씨 오늘은 아무래도 공부가 하기 싫은 모양이죠. 자기 방으로 돌아 가서 잘 생각해 보세요" 나의 작은 심장은 부끄러운 나머지 멈출 것만 같았다.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먼저 공자님의 영정에, 다음에 선생에게 공손히 절을 했다. 그리고 조 용히 그 방에서 나와 아버지에게로, 늘 공부가 끝났을 때 하던 것처럼, 보고하러 갔다. 아버 지는 아직 공부가 끝날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놀라셨다. 그리고 아무 뜻도 없는 듯이 말 씀하셨다. "공부가 빨리 끝났구나." 이 말씀은 마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울렸다. 그대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상처가 쑤시듯이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스기모토 부인은 다른 대목에서 할머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는데, 그 중 에 일본의 가장 특징 있는 부모의 태도의 하나가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다. 할머니는 조용히 차분하게, 모든 사람이 할머니의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으로 기대하고 있 었다. 나무라거나 반박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할머니의 솜털같이 부드러우면서도 아주 강인한 기대가 항상 그녀의 소가족을 그녀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 이 '솜털같이 부드러우면서도 아주 강인한 기대'가 그만큼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는, 가정 교육이 그 어떠한 기술이나 방법보다도 철저하기 때문이다. 가정 교육은 '습관' 이지 규칙뿐만은 아니다. 유아기에 익히는 젓가락 사용법이나 방에 들어갈 때의 예의 범절 도 그렇고, 조금 뒤에 배우게 되는 다도나 안마의 방법도 그렇지만, 모든 동작은 글자 그대 로 어른의 직접 지도하에 자동적으로 될 때까지 되풀이 되풀이 실습을 통해 익혀진다. 어른 들은 대가 되면 아이는 올바른 습관으로 '스스로 익힐 것이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스기 모토 부인은 14세 때 약혼한 뒤, 약혼자를 위해서 가게젠(객지에 나가있는 사람의 무사함을 빌기 위해서 집에 있는 사람이 조석으로 차려 놓는 밥상)을 차린 일을 설명하고 있다. 그녀 는 그대까지 한번도 미래의 남편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는 미국에 있었고 그녀는 에치고 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어머니와 할머니의 감독하에 "나는 오빠가 우리들 에게 마쓰오(약혼자)가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일러준 요리를 내 손으로 만들었다. 남편 밥상 을 내 밥상 옆에 놓고, 항상 내 밥보다 더 먼저 그의 밥을 퍼 올렸다. 이렇게 하여 나는 미 래의 남편에게 기쁨을 주도록 끊임없이 마음을 쓰는 법을 배웠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항상 마쓰오가 눈앞에 앉아있는 것처럼 말을 걸었다. 그리고 나도 남편이 실제로 그 방에 있는 것처럼 옷차림이나 행동거지에 조심했다. 이렇게 하여 나는 차츰 남편을 존경하고, 나 자신 의 그의 아내로서의 지위를 존경하게 되었다." 사내아이도 역시 실례와 모방을 통해서 공들인 습관의 훈련을 받는다. 하기야 그것은 여 자아이의 가정교육만큼 엄격한 것이 아니긴 하지만. 습관을 '익힌' 후에는 일체의 변명은 받 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청년기 이후, 그는 그의 생활에 한 가지 중요한 분야에 있어서 는, 대부분 그 자신의 자발성에 맡겨진다. 연장자는 그에게 구애의 습관을 가르쳐 주지 않는 다. 가정은 공공연히 성애를 표현하는 일체의 행동이 금지되어 있는 세계이다. 그리고 그가 9세 내지 10세가 되었을 때부터 연고 관계가 없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와의 격리가 극단적 으로 행해져 왔다. 일본인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내아이가 성에 대해서 흥미를 갖 기 전에 양친이 그를 위해서 결혼을 결정하는 일이다. 다라서 남자아이는 여자아이를 대하 는 태도에 있어서 '수줍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골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몹시 놀려대 기 때문에 소년을 더욱 '수줍어'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소년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알려고 한다. 옛날에는 그리고 최근에도 일본의 구석진 마을에서는 많은 처녀가, 대로는 대 다수의 처녀가 시집가기 전에 임신했다. 이들에게 있어 이러한 결혼 전의 경험은 인생의 심 각한 문제가 되지 않는 '자유로운 영역'이었다. 부모는 이러한 사건을 안중에 두지 않고 혼 담을 결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스에무라에서 어떤 일본인이 엠브리 박사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하녀조차도 처녀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만큼의 교 육은 받고 있다." 중학교에 진학하는 소년이 받는 훈육도 본의 교육도 여론도 이성간의 결 혼 전의 친밀한 교제를 방지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일본의 영화를 보아도 그들은, 젊은 부인 에게 허물없는 태도를 보이는 청년은 '불량' 청년이다. '선량한' 청년은 예쁜 소녀에 대해서, 미국인의 눈으로 보면 무뚝뚝한, 아니 오히려 예의에 어긋난 것 같은 태도를 취하는 청년이 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여자에게 허물없이 군다는 것은 그 청년이 '놀고 다녔다'는 것, 곧 게 이샤(기생)나 창부나 카페 여자의 궁둥이를 쫓아다녔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이샤집(기생집) 에 다니는 것은 생정을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게이샤는 여러 가지를 가르쳐 준다. 남자는 편안한 마음으로 그저 보고 있기만 하면 된 다." 그는 자기의 꼴사나운 모습을 남에게 드러내놓지는 않을까 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도 그 게이샤와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예기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일본 청년 중에서 게 이샤 집에 갈만한 여유가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 많은 청년은 카페에 가서 남자가 여자 를 허물없이 다루는 모습을 보고 배운다. 그러나 그러한 관찰은, 그들이 다른 분야에 있어서 당연히 받을 것으로 예상하는 훈련과는 그 종류가 다른 것이다. 사내아이는 서투른 솜씨에 대한 두려움을 오랫동안 갖는다. 성행위는 신뢰할 수 있는 연장자가 몸소 손을 잡고 지도해 주지 않는, 뭔가 새로운 종류의 행동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그들 생활 속의 극소수의 영 역중의 하나이다. 격식이 있는 가정에서는 젊은 부부가 결혼할 때 '마쿠라소시(일종의 춘화 책)'과 갖가지 자세를 상세하게 그린 두루마리를 준다. 한 일본인이 말한 것처럼 "책을 보고 배울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정원 만드는 법을 배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버지는 일본식 정 원, 만드는 법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것은 나이가 들면 스스로 배우는 취미이다." 책을 보 고 배우는 것으로서 성행위와 정원 만들기를 결부시킨 것이 흥미롭다. 하기야 대개의 일본 청년은 책 이와의 방법으로 성행위를 배우는 것이지만, 여하튼 어른으로부터 자상한 지도를 받고 배우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훈련상의 차이가, 청년의 마음속에, 성은 연장자가 지휘통 괄하고, 또 그 때문에 힘들여 청년의 습관을 훈련시키는 인생의 중대한 일과는 관계가 없는 별개의 영역이라는, 일본인의 신조를 깊이 심어준다. 그것은 청년이 다분히 당혹스런 두려움 을 품으면서 차츰 정통해 가는, 자기의 욕정 만족의 영역이다. 이 두 가지 영역은 서로 다른 법도를 가지고 있다. 남자는 결혼 후 그야말로 공공연히 밖에서 성적 쾌락에 빠지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조금도 아내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결혼 생활의 안정을 위협하지 않는다. 아내는 이와 동등한 특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녀의 의무는 남편에게 정숙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남편 이외의 남자와 정을 통하고자 한다면 남몰래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하 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설령 유혹을 받았다 해도 남몰래 정사를 행할 수 있을 만한 생 활을 하고 있는 부인은 일본에서는 비교적 소수밖에 없다. 신경 과민에 빠져 있는, 또는 침 착성을 잃고 있다고 지목되는 부인은 '히스테리'라고 일컬어진다. "가장 빈번히 볼 수 있는 부인의 장애는 그 사회 생활이 아니라, 성생활과 관련이 있다. 많은 정신 이상 또는 대다수 의 '히스테리(신경 과민, 침착성의 상실)'는 분명히 성적 화합의 결여에 기인한 것이다. 여자 는 남편이 주는 성적 만족만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에무라의 농민들은 여자의 질병 을 대부분은 '자궁에서 시작되어' 머리로 올라간다고 말하고 있다. 남편이 다른 여자에 빠져 서 조금도 자기를 돌봐 주지 않을 때는, 아내는 일본인이 일반적으로 용인하고 있는 자위 행위의 습관에 호소할 때가 있다. 그리하여 밑으로는 농촌에서부터 위로는 고귀한 사람들의 가정에 이르기까지 부인은 이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전통적인 도구를 비장하고 있다. 그리 고 시골에서는 아내는 아이를 낳은 뒤라면 상당히 분방한 에로틱한 언동을 하는 것이 허용 된다. 어머니가 되기 전에는 한 마디도 성에 대한 농담을 하지 않지만, 어머니가 된 후에는, 그리고 점점 나이 들어감에 따라 남녀 합석의 연회석에서의 그녀의 말에는 그러한 농담이 많이 나오게 된다. 그녀는 또 외설스런 노래에 맞춰 허리를 전후로 흔들어, 몹시 개방적인 성적 무용으로 좌중의 흥을 돋운다. "이러한 여흥은 반드시 폭소를 유발한다." 스에무라에서 는 또 군대에 나갔던 사람이 제대하여 돌아올 때는 마을 사람들이 총출동하여 마을 어귀까 지 마중을 나가는데, 그때에는 남장한 여자들이 음란한 농담을 던지고, 젊은 처녀를 욕보이 는 흉내를 냈다. 이와 같이 일본의 여성은 성적인 사항에 관해서 어떤 종류의 자유가 허용되어 있다. 더구 나 출신이 천하면 천할수록 더욱 많은 자유가 인정된다. 그녀들은 그 생애의대부분을 통해 서 만혼 금제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녀들이 성적인 사항을 알고 있다는 것을 부정 할 것을 요구하는 금제는 없다. 그것이 남자를 기쁘게 해 줄 경우에는 그녀들은 음탕해진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남자를 기쁘게 해 줄 경우에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무성이 된다. 여성으 로서 무르익는 나이가 되면 금제를 내던져 버리고, 만일 출신이 천한 여자라면, 남자에게 뒤 지지 않을 정도로 음탕해질 때가 있다. 일본인은 서구에서 말하는 '순결할 부인' 도는 '음탕 한 여자'와 같은 한번 낙인이 찍히면 변하지 않는 성격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에 따라 그때 그대 변하지 않는 성격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에 따라 그때 그때의 상 황에 적합한 행동을 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다. 남자도 도한 크게 삼가야 할 영역과 함께 마음대로 행동해도 좋은 경우가 있다. 남자 친 구와 함께, 특히 게이샤를 옆에 앉히고 술을 마시는 것이 남자가 가장 좋아하는 즐거움이다. 일본인은 술에 취하는 것을 즐긴다. 그리고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법도는 없다. 그들은 두세 잔의 '사케(주 : 일본의 정종)'를 마시면 딱딱한 자세를 풀어 편안히 앉는 다. 그리고 서로 기대어 아주 친근하게 구는 것을 좋아한다. 술에 취해도 소주의 '상종하기 힘든 인간'은 시비를 걸어올지 모르지만, 대개는 난폭한 행동을 하거나 싸움을 거는 일은 좀 처럼 없다. 음주와 같은 '자유로운 영역'을 제외하고는 사람은 절대로 기대에 어긋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가 생활의 중요한 면에 있어서 기대에 어긋난 행동을 했다는 말은 '바보'라는 말을 제외하고는 일본인이 사용하는 큰 악담이다. 종래 모든 서구인이 묘사한 일본인의 성격의 모순은, 일본인의 아이를 훈련하는 방법을 보면 납득이 간다. 그것은 일본인 인생관에 그 어떤 측면도 무시할 수가 없는 이원성을 준 다. 그들은 유아기의 특권과 마음 편하던 경험에 의하여 그 후 여러 가지 훈련을 받은 뒤에 도, 다시금 '부끄러움을 몰랐던' 때의 편안한 생활이 기억에 남는다. 그들이, 인간은 본디 선 하고 신들은 자애로우며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비할 바 없이 바람직한 일이다 하고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유년 시대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다. 유아기의 경험은, 그들이 그들의 윤리 를, 모든 인간 속엔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다든가 인간은 누구든 죽음과 동시에 '가미(신'가 된다고 하는 극단적인 해석에 바탕을 두기 쉽게 해 준다. 그것은 그들에게 자신의 말을 끝 까지 주장하는 경향과 어떤 종류의 자신을 부여한다. 그것은 가끔 어떤 일인 경우에도 앞장 서서 부딪쳐 나가는 태도의 기초가 되고 있다. 그것은 또한 그들이 자기 나라 정부에 대해 서가지도 반대 입장을 취하여 싸우고, 자살에 의하여 자신의 입장을 세우는 것을 사양치 않 는 태도의 기초가 된다. 때로 그것은 그들에게 집단적 과대 망상증에 빠지게 할 가능성을 부여한다. 예닐곱 살이 지나서부터 차츰 주의 깊은 행동과 '부끄러움을 아는' 책임이 부과되는데, 그 것은 만일 그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배척된다는 가장 강력한 강제성이 따르는 것이다. 이 압력은 프로이센적인 기율의 압력 같은 것은 아니지만 면할 수 없는 것 이다. 이렇게 발전해 갈 수 있는 기반은, 특권적인 유아기 때부터 이미, 집요하게 되풀이되 어 도저히 면할 수 없었던 용변 습관과 올바른 자세에 대한 훈련에 의해서, 또 부모가 아이 를 버리겠다고 말하는 공갈에 의하여 준비되어 왔다. 이러한 유아기의 경험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웃음을 사서 눈 밖에 난다는 말을 듣게 되었 을 때,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부과된 엄청난 구속을 참고 받아들이게 하는 기반을 만든 다. 그는 어렸을 때 그처럼 삼감이 없이 표현하였던 충동을 누르게 되는데, 그것은 그 충동 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제는 정당하게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부터는 진지 한 생활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점차로 유아기의 특권이 부인됨에 따라 그는 점점 어른들 의 재미를 허락받게 된다. 그러나 유아기의 경험은 결코 정말로 사라져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인생 철학에 있어서 그 경험에 크게 의지한다 그들이 '인정'을 시인하는 태도를 위하 는 것은 다시금 유아기의 경험에 복귀하려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성년기를 통하여 그 생 활의 '자유로운 영역'에서 그것을 다시 체험한다. 하나의 현저한 연속성이 유년 시절의 전반기와 후반기를 연결한다. 그것은 친구에게 승인 된다는 점을 대단히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마음에 심어지는 것은 바로 이 점이며, 절대적인 덕의 표준은 아니다. 그것은 친구에게 승인된다는 점을 대단히 중요시한다는 것이 다. 아이들의 마음에 심어지는 것은 바로 이 점이며, 절대적인 덕의 표준은 아니다. 어린아 이 시절 전기에, 겨우 어머니에게 떼써서 요구할 수 없는 나이로 자라면, 어머니는 그를 f자 기 잠자리에서 함께 자 주었다. 그는 자신과 형제 자매가 받는 과자를 비교해 보고, 자신이 어머니에게 몇 번째로 사랑을 받는가를 판단한다. 그는 그가 관심을 받지 못하면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누나를 향해서도 "누나는 날 '제일' 귀여워 해주나?"라고 묻는다. 그러나 후기에 와서 아이는 점차로 많은 개인적 만족을 포기할 것을 요구 당하는데, 약속 되는 보상은 '세상 사람들'에게서 승인을 받고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요, 벌은 '세상 사람들 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어린아이를 훈련하는 데 있어, 대부분의 문화가 의지하는 강제력이긴 하지만, 일본에 있어서는 그것은 달리 유례가 없을 정도로 중요시된다.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는, 이미 부모가 아이를 밖에 내다 버 리고 만다는 공갈을 했을 때, 아이들 뇌리에 역력하게 남아 있다. 그의 일생을 통해서 친구 들 사이에서 배척되는 것은 폭력보다 무서운 것이다. 그는 조소나 배척의 위협에 대해, 단지 그것을 머리 속에서만 상상할 대조차 이상스러울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한다. 또한 실제로 일본 사회에서는 사생활의 비밀을 지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세상'은 그가 하 는 일을 모두 알고 있어서, 만일 나쁘다고 인정되면 배척을 당할 가능성은 결코 망상만은 아니다. 첫째로, 일본의 가옥 구조-소리가 새어 나가고, 또한 대낮에는 훤히 열리는 얇은 벽 (장지문)-만 보더라도, 담과 뜰을 두는 것뿐인 여유 없는 사람들의 경우, 사생활은 널리 공 개되어 있는 것과 다름없다. 일본인이 사용하는 두세 개의 상징적인 물건은 자녀 훈육의 불연속성에 근거를 두고 잇는 그들 성격의 양면을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을 준다. 가장 빠른 시기에 형성된 측면은 '부끄러 움 없는 자아'이다. 그들은 그 '부끄러움을 없는 자아'를 어느 정도 보존하고 있는가를 살펴 보기 위하여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본다. 그들은, "거울은 영원한 순결성을 비춘다." 라고 말한다. 그것은 허영심을 기르는 것도 아니고, '방해하는 자아'를 비추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혼의 깊은 곳을 비춘다. 인간은 그곳에서 자신의 '부끄러움 없는 자아'를 보지 않으 면 안 된다. 사람들은 거울 속에서 혼의 문인 자기 자신의 눈을 본다. 그리고 이것이 '부끄 러움 없는 자아'로서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준다. 이 목적을 위하여 언제나 몸에 거울을 지니 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있다. 그 중에는 집에 모신 불단 안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고 자신의 혼을 반성하기 위한 특별한 거울을 놓아두는 사람도 있다. 그  '자기 자신'을 받들어 모시고, '자기 자신'을 예배한다. 그것은 분명 이례적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한 일은 일본인이 보통으로 행하고 있는 것을 조금 더 발전시킨 것 뿐으로, 가정의 '가미다나'에 어 느 집에서도 거울이 예배의 대상으로서 모셔져 있다. 전쟁 중 일본의 라디오 방송은 돈을 모아 거울을 사서 교실에 비치한 여학생을 칭찬하는 노래를 일부러 제작하여 방송한 일이 있다. 그것이 허영심의 소치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끊임없이 그녀들의 마음속 깊이 있는 잔잔한 목적을 위하여 몸을 바치는 것으로 서술되었다. 거울을 보는 것은 그녀들 의 정신의 기품이 높은 것을 증명하는 외면적 행사였다. 일본인의 거울에 대한 감정은, 아직 아이들의 마음속에 '관찰하는 나'가 심어지지 않았던 시기에 발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거울 속에서 '관찰하는 나'를 보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 비추어지는 자아는 옛날 유아기에 그러했던 것처럼, '부끄러움'이라는 스승이 필요 없는 본원적으로 선량한 것이다. 그들이 거 울에 부여하는 것과 똑같은 상징적 의미가 또한 '숙달'이라는 자기 훈련에 관한 그들의 사고 방법의 근저가 되어 있다. 그들은 '관찰하는 나'를 제거하고 어린아이의 직접성으로 복귀하 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기를 훈련한다. 이처럼 특권적인 유아기의 생활이 일본인에게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치고는 있으나, 그럼에 도 불구하고 부끄러움이 도덕의 기초가 되는 이 후 시기의 구속은, 단지 특권의 박탈이라고 는 느껴지지 않고 있다.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자기 희생이라는 개념은 일본인이 때때로 공격해 온 그리스도 교적인 개념의 하나로서, 그들 자신은 자기를 희생시키고 있다라는 생 각을 거부한다. 극단적인 경우에 있어서도, 일본인은 '주'나 '고', 또는 '기리'의 부채를 갚기 위하여 '자진해서' 죽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자기 희생의 범주에 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스스로 죽음으로써 자기가 원하는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 고 그들은 말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개죽음'이 된다. 그런데 '개죽음'이란 그들에 게 있어서는 가치 없는 죽음이라는 의미로서, 영어의 'dog's death'처럼 사회의 밑바닥에 떨 어져 죽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처럼 극단적인 것이 아닌 일련의 행위로서 영어에서 'self-sacrificing(자기희생)'이라고 불려지는 것도 일본어에서는 오히려 자중의 범주에 속한 다. '자중'은 보통 자제를 의미하는데, 자제는 자중과 마찬가지로 매우 소중한 것이다. 큰 일 은 자제함으로써만 달성할 수가 있다. 미국인은 목적 달성의 필요 조건으로 자유라는 것을 강조하지만, 생활 체험이 다른 일본 인은 그것만으로는 결코 충분치 않다고 여겨 왔다. 그들은 자제에 의하여 자아를 한층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든다는 생각을 그들 도덕률의 중요한 신조의 하나로 여겼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시도 때도 없이 속박에서 벗어나 올바른 생활을 무너뜨릴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 충 동을 숨기고 있는 위험 천만한 자아를 통제할 수 있겠는가? 어느 일본인은 다음과 같이 서 술했다. 몇 년이고 걸려 나뭇결 위에 칠하는 옷칠의 층이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완성된 칠기는 고 가품이다. 민족에 있어서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 (중략) 러시아 인에 대해서 "러시아 인 의 껍질을 벗겨 보면 타타르 인이 나타난다."라고 말하지만, 일본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일본인을 깎아서 칠을 벗기면 해적이 나타난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잊어서 는 안 될 것은 일본에서의 옷칠은 값비싼 제작품으로서 수공업의 보조 수단이라는 사실이 다. 옷칠에는 속임수가 조금도 없다. 그것은 흠을 감추기 위한 덧칠이 아니다. 그것은 적어 도 미화된 나뭇결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서구인을 놀라게 하는 일본 남성의 행동의 모순은, 그들의 어린 시절 훈육의 불연속성에 서 생겨난 것으로서, '덧칠'을 한 다음에도 그들의 의식 속에는 그들이 자신의 작은 세계에 있어 작은 신이었던 시절, 마음대로 투정을 부릴 수 있었던 시절, 어떤 소망이든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시절의 깊은 흔적이 남아 있다. 이처럼 마음속 깊은 곳에 이원성이 심 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은 어른이 된 후 로맨틱한 연애에 빠졌는가 하면 갑자기 손바닥을 뒤집듯 가족의 의견에 무조건 복종한다. 쾌락에 빠져들고 안일을 탐하는가 하면, 극단적으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어떤 일도 해치운다. 신중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가정 교육이 그들의 행 동에 있어서 때때로 겁 많은 국민으로 만들고 있지만, 또한 그들은 때로는 저돌적으로 보일 만큼 용감하다. 그들은 계층 제도에 근거하여 복종이 요구되는 사태에서는 현저하게 순종하 는 태도를 나타내지만 그러면서도 위로부터의 통제에 쉽게 따르지 않는다. 그들은 대단히 은근하면서도 오만 불손한 태도를 지닌다. 그들은 군대에서도 광신적인 훈련에 복종하지만 그러면서도 순종하지 않는다 그들은 열렬한 보수주의자이지만, 그러면서도 중국의 습관이나 서구의 학문을 채용하는 데 보였던 것처럼 새로운 생활 양식에 마음이 쏠린다. 성격의 이원성은 긴장을 수반한다. 그리하여 이 긴장에 대해 일본인은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른 반응을 나타내지만, 사실 그것은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하며, 그리고 그것이 받 아들여졌던 유아기의 경험과 그 후의 생활의 안녕을 약속하는 속박을 융화시키는, 동일하나 중요 문제에 대해, 각자가 제각기 자기 나름으로 반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 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곤란을 느낀다. 어떤 사람은 도학자처럼 자신의 생활을 규칙에 맞게 규율화 하는 데 급급하여 자발적 행동을 취하기를 극도로 두려워한다. 자발성은 가공 의 환상이 아니라, 그들의 전에 실제로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그 공포는 더욱 크다. 그들은 높은 위치에 서서 그들이 스스로 만든 규칙을 엄수하는 것으로, 마치 자신이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명령하는 인간이 된 듯이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인격 분열에 빠진다. 그들은 그 들 마음속에 숨을 죽이고 있는 반항심에 두려움을 품고, 겉으로 부드러운 태도를 가장하여 그것을 숨긴다. 그들은 때대로 그들의 진짜 감정을 의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쓸데없 는 일에 몰두한다. 그들은 훈련에 의해 배우게 된, 그들에게는 실제로 전혀 무의미한 일상적 일을 단지 기계적으로 수행한다. 도한 어떤 사람은 너무 깊게 유아기의 생활 경험에 사로잡 혀서, 어른이 된 뒤에도 무엇이든 임무를 수행치 않으면 안 될 경우에 부딪치면, 몸을 깎아 내는 듯한 불안을 느낀다. 그리하여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수 없는 나이인데도 불 구하고 타인에게 더욱더 많이 의지하려고 한다. 그들은 실패하면 그것은 권위에 대한 반역 이 된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는 그들을 극심한 동요 속으로 몰아넣는다. 정해진 순서에 의하여 기계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뜻밖의 사태는 그들에게는 대단한 공포가 된다. 이상은 배척이나 비난을 지나치게 염려하는 경우에 일본인이 빠지기 쉬운 특유한 위험들 이다. 지나친 압박을 느끼지 않을 경우, 그들은 생활에 있어서 생활을 즐기는 능력과 함께, 어린아이 때 훈육으로 심어진 능력인, 타인의 감정을 해치지 않는 용의주도한 면을 나타낸 다. 이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들은 유아기에 자기 주장을 관철하는 태도를 배웠다. 마음을 괴롭히는 죄의식은 각성되지 않았다. 그 후 여러 가지 속박이 가해지지만, 그것은 친구들과 의 연대성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서 의무는 상호적이었다. 어떤 종류의 일에 이어서는 타인 에게 자기의 희망이 저지 받기도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생각한 대로 충동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영역'이 정해져 있다. 일본인은 옛부터 늘 천진한 즐거움-벚꽃이나 달, 국화, 첫눈을 바라보든지, 집 안에 벌레 장을 달고 벌레의 노래를 듣든지, 짧은 시구를 쓰든지, 정원을 가꾸든지, 꽃꽂이나 차를 탐 직하든지-을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즐거움을 즐기는 것은 깊은 불안감과 반항심 을 품고 있는 국민의 행동이 아니다. 그들은 또한 슬픈 얼굴을 하고 즐기는 것도 아니다. 일 본이 아직 그 비참한 '사명'에 매진하기 전의 행복한 시대에는 일본의 농촌 사람들은 현대의 어떤 국민에 비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기분 좋게, 그리고 쾌활하게 여가를 즐길 수 있었 다.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어느 국민보다 열심히 하였다. 그러나 일본인은 스스로에게 많은 요구를 한다. 세상 사람으로부터 배척 당하여 비방을 받는 큰 위협을 피하기 위하여 그들은 모처럼 맛을 알게 된 개인적인 즐거움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인생의 중대사에 있어서는 그러한 충동을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패턴을 위반하는 소수의 인간 들은 스스로에 대한 존경을 상실한다는 위험에 빠진다. 스스로를 존중하는(자중하는) 인간은 '선'이냐 '악'이냐가 아니라, '기대에 부응하는 인간'이 도느냐 '기대에 어긋나는 인간'이 되느 냐는 것을 목표 삼아 그 진로를 정하며, 세상 사람 일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 요구를 버린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부끄러움(하지(치))을 알고' 한없이 신중하고도 훌륭한 인간이다.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자기 가정에, 자기 마을에 또한 자기 나라에 명예 를 가져오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하여 빚어지는 긴장은 대단히 큰 것으로서, 일본을 동양의 지도자로 만들며, 세계의 일대 강국으로 만드는, 그러한 고상한 대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긴장은 개인에게는 무거운 부담이다. 그는 실패하지 않도록, 또한 많은 자기 희생을 감수하는 일련의 행위에 있어서 누구로부터도 자신이 행하는 바가 업신여겨지 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때로는 참고 참았던 울분을 폭발시켜 극도로 공격적인 행동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이 그러한 공격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미국인처 럼 자신의 주의 주장이나 자유가 도전을 받았을 때가 아니라, 모욕당했거나, 비방 당했다고 인정된 때이다. 그때 그들의 위험한 자아는, 만일 가능하다면 그 비방자에게,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향해 폭발한다. 일본인은 그들의 생활 양식 때문에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여 왔 다. 그들은 미국인이 호흡하는 공기와 마찬가지로 매우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단순한 자유를 스스로 거부해 왔다. 이제 일본인은 패전이래 민주화로 향하고 있다. 우리들은 순진 하게, 또한 천진난만하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일본인을 미치도록 기 쁘게 하는 것인가를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기쁨을 누구보다 잘 표현한 사람은 스기 모토 부인으로서, 그녀는 영어를 배우기 위해 입학한 도쿄의 미션스쿨에서, 무엇이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심을 수 잇는 정원을 배당 받았을 때의 감명를 기술하고 있다. 교사는 학생 하나 하나에게, 약간의 황폐한 땅과 학생이 원하는 씨앗을 주었다. 이 무엇을 심어도 좋은 정원은 나에게 개인의 권리라고 하는, 아직까지 경험한 일이 없는 전혀 새로운 감정을 맛보게 하였다. (중략) 그러한 행복이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할 수 있다 는 것 자체가 나에게 경이였다. (중략) 지금까지 한번도 법도를 어긴 일도 없고, 가문의 명 예를 더럽힌 일도 없고, 부모나 선생이나 마을 사람들의 빈축을 산 일도 없는, 이 세상 누구 에게도 어떠한 해도 준 적이 없는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받은 것이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 꽃을 심었다. 그런데 그녀가 심고자 했던 것은-감자였다. 이 바보같은 행위에 의하여 내가 얻을 수 있었던 무모한 자유의 감정은 누구도 알 수 없 다. (중략) 자유의 정신은 나의 문을 노크했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였다. 나의 집에는 정원 한쪽에 자연 그대로 방치된 듯이 보이는 장소가 있었다. (중략) 그런데 언제나 누군가가 소나무를 부지런히 손질하고, 생목 울타리를 잘 다듬곤 했다. 또한 매일 아 침 지야(늙은 하인)는 디딤돌을 닦아내고 소나무 밑을 청소한 뒤, 숲에서 모아 가지고 온 솔 잎을 조심스럽게 뿌렸다. 이 위장된 자연은 그녀에게 있어서는, 그녀가 그때까지 교육받아 왔던 위장된 의지의 자 유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 곳곳에 이와 같은 위장이 충만 되어 있었다. 일본 정 원의 땅 속에 반쯤 파묻혀 있는 큰 바위들은, 어느 것이건 신중하게 선택되어서 운반해 온 것으로 땅 밑에 작은 돌을 깔고 그 위에 놓여진 것이다. 돌의 매치는 연못, 건물, 나무들과 의 관계를 신중하게 고려하여 정해진다. 국화도 마찬가지로, 화분에 심어져서 매년 일본의 어디에서든 개최되는 품평회에 출품하기 위하여 손질을 받게 되는데, 볼 만한 꽃잎은 한닢 한닢 재배자의 손으로 정돈되고, 또 때때로 살아 있는 꽃 속에 작고 눈에 띄지 않는 철사로 만든 고리를 끼워서 올바른 위치를 지키게 한다. 이 고리를 뗄 기회를 얻는 스기모토 부인 의 흥분은 행복하고도 순수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작은 화분 속에 재배되어 그 꽃잎 하나하 나에 정성껏 가지런히 손질을 받은 국화가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는 데 순수한 즐거움을 발 견했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며, '하지(부끄러 움)'의 강제력에 의혹을 품는 자유는, 그들의 생활 양식의 미묘한 균형을 깨뜨릴 우려가 있 다. 그들은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강제력을 습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변화는 값비싼 것이다. 새로운 가정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도덕을 수립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서구 여러 나라는 일본 국민이 서구의 도덕을 단번에 바로 채용하여, 진정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또 일본은 결국 보다 자유롭고 보다 관용적인 윤리를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미국에 사는 일본인 2세들은 일본 도덕의 지식이나 실 천을 이미 잃어버리고 있다. 그들의 핏속에는 그들 부모의 출신국인 일본의 습관을 지키도 록 하는 어떤 한 가지의 요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일본 본국에 있는 일본 인도 새로운 시대를 맞아 옛날처럼 개인의 자제의 의무를 요구하지 않는 생활 양식을 수립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국화는 철사 고리를 떼어버리고, 그처럼 철저한 손질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게 피어 자랑스러울 수 있다. 이러한 그들의 정신적 자유를 증대할 수 있는 과도기에 처하여, 일본인은 두세 가지의 오 랜 전통적 덕에 의지하여, 평형을 잃지 않고 무사히 거센 파도를 넘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그들이, '몸에서 나온 녹'은 그들 자신이 처리한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자기 책임 의 태도이다. 이 비유는 자신의 신체와 칼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칼을 찬 인간에게 칼이 녹 슬지 않고 번쩍이게 할 책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각자 자기의 행위의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은 자신의 약점, 지속성의 결여, 실패 등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를 승인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책임이라는 것은, 일본에 있어서 는 자유로운 미국에서 보다 훨씬 철저하게 해석된다. 이러한 일본적인 의미에서, 칼이란 공 격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이상적이며 훌륭히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는 인간의 비유이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시대에 있어서, 이 덕은 가장 훌륭한 평형의 역할을 한다. 더구나 이 덕은 일본 아이들의 훈육과 행위의 철학을 통해 일본 정신의 일부로서 일본인의 마음에 심어 온 덕이다. 오늘날 일본은 서구적 의미에 있어서 '칼을 버리고 항복할' 것을 제의하였 다. 그런데 일본적인 의미에서는 일본인은 여전히 자칫하면 녹이 슬기 쉬운 마음속의 칼을 녹슬지 않게 하는 일에 마음을 쓰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도덕적인 어법에 의하면, 칼을 보다 자유롭고 보다 평화로운 세계에 있어서도 그들이 보존할 수 있는 상징인 것이다. 제13장 패전 후의 일본인 대일 전승일(VJ-Day)이해, 미국인은 그들이 일본을 관리함에 있어 행한 역할에 대해 자 랑스럽게 여길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미국의 정책은 8월 29일 라디로로 발표된 국무 성, 육군성, 해군성의 공동 지령에 의해 정해졌다. 그 후 이 정책은 맥아더(MacArthur)장군 에 의해 기술적으로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랑의 훌륭한 근거가 미국의 신문지상과 라디오에서 당략적인 칭찬이나 비난으로 자주 거론됨에 따라 매우 애매해졌다. 그리고 어떤 주어진 정책이, 바람직한가 그렇지 못한가의 여부에 확신을 가지고 판단할 만큼 일본 문화 에 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은 썩 드물었다. 일본 항복 당시 중대한 문제는 어떤 성질의 점령을 할 것인가에 있었다. 전승국은 천황을 포함한 기존의 정부를 이용해야 하는가, 아니면 타파해야 하는가? 미군정 관리의 지도하에 각 시, 현 단위로 행정 기구를 둘 것인가? 미군정 관리의 지도하에 각 시, 현 단위로 행정 기구를 둘 것인가? 이탈리아나 독일에서 사용된 방식은 전투 부대의 필수 요건으로서 각지 에 AMG(연합국 군 정부) 본부를 설치하여 지방 행정권을 연합국 행정관의 수중에 장악하 는 것이었다. 대일 전승일 당시에 태평양 지역의 AMG 담당자는 여전히 일본에서도 그러한 지배 체제를 설치할 것으로 예견하고 있었다. 일본 국민 또한 행정상의 책임이 어느 정도까 지 허락될 것인가를 알지 못했다. 포츠담 선언에는 단지 "연합국에 의해 지정되는 일본국 영역내의 모든 지점은 우리들이 여기에서 밝힌 근본적 목적을 확보하기 위해서 점령되어져 야 한다."라고 되어 있고, 또 "일본 국민을 기만하고 오도하여 세계 정복을 감행한 과오를 범한 권력 및 세력은 영구히 제거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규정되어 있을 따름이었다. 맥아더 장군에게 지시한 국무, 육군, 해군 3성의 공동 지령은 이런 일에 관한 중대한 결정 을 구체적으로 표시한 것이었고, 그 결정은 맥아더 장군 사령부의 전면적 지지를 얻었다. 그 내용은 일본 국민은 자국의 행정 및 재건의 책임을 진다는 것이었다. "최고 사령관은 미 합 중국의 목적을 만족하게 촉진하는 대 한해서, 일본국 정부의 기구와 천황을 포함한 여러 기 관을 통해서 그 권력을 행사한다. 일본국 정부는 최고 사령관(맥아더 장군)의 지령 하에 내 정에 관해서는 정상적 정부 기능을 행사하도록 허락할 것이다." 다라서 맥아더 장군에 의한 일본 관리는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관리와는 전혀 성질을 달리한다. 그것은 위에서 아래까지 일본인 관리를 이용하는 하나의 사령부 조직에 불과했다. 때문에 일본국 정부에 통첩을 할 뿐 일본 국민, 즉 어떤 시, 어떤 지방의 주민에게 직접 발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임무는 일 본국 정부의 활동 목표를 저하는 것이었다. 만일 어떤 일본 대신이 그 목표의 실시가 불가 능하다고 판단될 경우 그는 사직할 수가 있으며, 또 그의 의견이 정당하면 지령이 수정될 수도 있었다. 이러한 관리 방식은 대담한 조처였다. 미국의 입장으로 보면, 이러한 정책의 이득은 명백한 것이었다. 당시 힐드링(Hilldring)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국 정부를 이용함으로써 얻어지는 이익은 막대한 것이다. 만약 일본정부를 이용할 수 없게 되면, 우리들은 7,000만 국민을 안고 있는 나라를 관리하기 위해 필요하고도 복잡한 기 구를 모두 직접 우리들 손으로 운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인은 우리들과는 언어도 습관 도 태도도 다르다. 일본국 정부의 기구를 정하여 그것을 이용함으로써 우리들은 시간과 인 원과 재력을 절약할 수가 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들은 일본인에게 스스로의 손으로 자기 나라를 대청소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이 워싱턴에서 작성될 당시 미국인들은, 일본인은 아마도 불복종 적대 적 태도를 보일 것이며, 호시탐탐 복수할 기회를 엿보는 국민이므로 일체의 평화적 계획을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두려움은 그 후의 사실로서 미루어 보면 근거 없는 것이었다. 그러한 이유는 패전 국민이나 패전국의 정치 경제에 관한 보편적 진리에 있다기보다 오히려 일본의 특이한 문화 속에 존재했다. 일본 이외의 다른 나라 국민 이었다면, 아마도 이러한 신의에 바탕을 둔 정책은 이처럼 성공을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인의 안목으로 보면, 이 정책은 패전이라는 냉혹한 사실에서 굴욕적 상징을 제거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국책의 실시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 새로운 정책을 수용할 수 있 었던 이유는, 바로 특이한 문화에 의해 형성된 일본인 특유의 성격에 불과한 것이다. 미국에서 우리들은, 강화 조약을 엄격히 할 것인가, 관대히 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는 논 의를 되풀이하였다. 참된 문제는 엄격이냐 관대냐에 있지 않다. 문제는, 낡고 위험한 침략적 성격의 틀을 타파하고, 새로운 목표를 세우는 데 꼭 알맞은 적당한 양의 엄격함을 구사함에 있다. 어떤 수단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그 국민의 성격이나 그 나라의 전통적 사회 질서에 의해 정해진다. 프로이센적 강권주의가 가정 생활 속에, 또 일상의 시민 생활 속에 깊이 뿌리 박힌 독일에는 독일에 알맞은 강화 조건이 필요하다. 현명한 평화 정책이라면 일 본의 경우에는 독일과는 다른 조건이 정해져야 한다. 독일인은 일본인처럼 자기를 세상과 조상의 채무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독일인은 무한한 부채를 갚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희생자가 되기를 싫어한다. 아버지는 뛰어난 지위를 차지한 인간이 그러한 것처럼 강압적이어서, 독일인의 표현과 같이 '존경을 강제한다.'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지 못하면 그는 불안해 한다. 독일인의 생활에서 아들의 세대는 각기 청년기엔 강압적인 아버지에게 반발한 다. 그 아들은 자신도 어른이 되면, 아버지들의 생활과 같은 무미건조하며 아무런 감격도 없 는 생화에 굴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독일인이 일생을 통해 생활이 가장 활기를 띠는 것은 청년기적 반역기인 질풍 노도기(Sturm und Drang)의 몇 년간이다. 일본 문화에서는 심한 강권주의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거의 모든 서구인 관찰자가 느껴 온 것처럼, 서구의 경험 속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의 배려와 사랑으로써 자 식을 대하는 인간이다. 일본의 아이들은, 아버지와의 사이에 어떤 종류의 참된 우애 관계가 존재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또 아버지를 공공연히 자랑스럽게 여기므로 아버지 는 다만 한 번 목청을 돋우는 것만으로도 아이를 자기 뜻대로 행동하게 할 수가 있다. 그러 나 아버지는 결코 어린 아들에 대해 가차없는 엄격한 훈련을 가하는 인물이 아니며, 또 청 년기는 결코 부모의 권위에 대한 반항기가 아니다. 오히려 청년기는 아이들이 일가의 책임 을 무겁게 여겨 순종하는 대표자로서 세상의 비판 앞에 서는 시기인 것이다. 그들은 일본인 이 말하듯이 '훈련을 위해서', '연습을 위해서' 아버지에게 경의를 표한다. 즉, 아버지는 현실 의 인격을 떠난 계층제와 올바른 처세의 상징인 것이다. 아이가 아직 어릴 때 아버지와 접 한 경험으로 배운 이러한 태도가, 이론 사회의 모든 면에 통하는 하나의 틀이 된다. 그 계층 적 지위 때문에 최고의 경의를 받는 사람조차도, 그가 하고 싶은 대로 권력을 행사하지 않 으며, 계층제의 수뇌를 점하는 관리가 실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의 특이성이다. 천황을 위시하여 아래에 이르기까지 조언자나 숨겨진 세력이 배후에서 그것을 조종하고 있 다. 흑룡회와 같은 초국수 단체의 한 지도자가 1930년대 초기에 도쿄의 한 영자 신문 기자 에게 한 말은 일본 사회의 이러한 일본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사회는(물론 이것 은 일본을 의미한다) 한쪽 구석을 핀 하나로 눌러 놓은 삼각형이다." 달리 말하면 삼각형은 책상 위에 있으며 누구나 볼 수가 있다. 핀은 보이지 않는다. 어떤 때는 삼각형이 오른쪽으 로 혹은 왼쪽으로 기울기도 한다. 그것은 결코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축을 중심으로 하 여 움직이는 것이다. 모든 일이, 서양인이 가끔 사용하는 표현을 빌리면, '거울을 사용하여' 행해진다. 전제적 권력이 표면에 드러남을 극력 방지하고 일체의 행위를 언제나 실제의 권 력 행사에서 분리시켜 놓은 상징적 지위에 대한 충성의 의지 표시라는 투로 보이기 위해서 온갖 노력이 기울여진다. 그런데도 가면이 벗겨져 권력의 근원이 드러났을 때는, 일본인은 그것을 돈놀이꾼이나 '나리킨(성금)'을 대하는 것처럼 사리를 채운 자로 규정, 그들의 제도에 알맞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 일본인은 그들의 세계를 이런 식으로 보기 때문에 사리나 부정에 대해 반항하기는 하나 결코 혁명가는 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세계의 조직을 파괴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찍 이 메이지 시대에 행한 것같이 제도 그 자체에는 조금도 비난을 퍼붓지 않고도 가장 철저한 변혁을 실현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복고, 즉 과거로 '복귀하기'라고 이름 붙였다. 그 들은 혁명가가 아니다. 일본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적 대중 운동에 희망을 걸고 있던 서구의 저술자들, 전쟁중 일본의 지하 세력을 과대 평가하여 항복 직후엔 그 지하 세력이 실권을 쥘 것으로 기대한 학자들, 또 대일 전승일 이래 선거에 있어 급진적 정책이 승리할 것으로 예언한 저술가들은 크게 사태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예언은 적중하지 않았다. 보수파의 수장 시데하라 남작이 1946년 10월, 조각 당시 행한 다음의 연설에서 정확히 일본 인의 모습을 잘 전하고 있다. 새로운 일본 정부는 국민의 총의를 존중하는 민주주의적 형태를 취한다. (중략) 우리 나라 에서는 옛부터 천황은 국민의 의지를 당신의 의지로 삼아오셨다. 이것이 메이지 천황의 헌 법 정신이며, 내가 여기서 말하는 민주적 정치는 바로 이 정신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미국인 독자들이 보기에는 거의 무의미하게 보이나, 일본 이 서양적 이데올로기 위에 서기보다는 그러한 과거와의 동일시의 기초 위에 서는 쪽이 훨 씬 용이하게 시민적 자유의 범위를 확장하고 국민 복지를 세울수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 지가 없다. 물론 일본은 서구식 민주주의 정치 기구들을 실험할 것이지만, 서구적 제도가 미 국에서처럼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최선의 도구라고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보통 선거와 선거로 뽑힌 사람들로 구성된 입법 기관의 권위는 많은 난처한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지만, 그 반면에 새로운 많은 곤란을 제기할 것이다. 이러한 곤란이 발전할 때, 일본인은 아마도 우리들이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을 고치려고 하리라. 그러면 미국 인들은 떠들석하게, 그렇다면 뭣 때문에 전쟁을 했는가 라고 불평하리라. 우리는 우리 도구 의 정당성을 믿는다. 그러나 최선의 경우에도, 보통 선거는 장래 영원히 일본을 평화 국가로 재건함에 있어 그렇게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은 처음 선거를 실시한 1890년대 이래 지금까지 근본적 변화가 없었다. 당시 라프카디오 헌(Lafcadio Hearn)이 기 술한 것과 같은 낡은 곤란이 다시 되풀이 될 우려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많은 생활을 희생하며 싸우는 격렬한 선거전에는, 실은 조금도 개인적 증오는 없었다. 또 한 가금 폭력을 써서 외국인을 놀라게 하는 의회에서는 저 맹렬한 토론에도 개인적 반목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정쟁은 실은 개인 대 개인간의 싸움이 아니라, 번 상호간의, 혹은 당파 상호간의 이해 투쟁이었다. 각 번의, 혹은 각 정당의 열렬한 추종자는 새로운 정치를 단지 새로운 형태의 싸움-지도자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충성의 싸움으로밖에는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 비교적 최근인, 1920년대의 선거에 있어서도 시골 사람들은 투표에 앞서 "내 목을 깨끗이 씻어서 잘리기를 각오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말은 선거권을 옛날 특 권적 사무라이가 서민에게 가하는 공격과 동일시한 데서 연유한다. 일본의 선거 중에 포함 된 여러 가지 의의는 오늘에 있어서도 미국의 그것과 다를 것이다. 이것은 일본이 위험한 침략 정책을 수행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와는 전혀 관계없이 진실일 것이다. 일본이 평화 국가로 출발함에 있어서 이용할 수 있는 참된 장점은, 어떤 행동 방침에 있 어 "그것은 실패로 끝났다."라고 마하고, 그 뒤부터는 다른 방향을 향해 노력한다는 점에 있 다. 일본인은 양자 택일적인 윤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전쟁에 의해 '알맞은 위치'를 얻으 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들은 이제 그 방침을 포기할 수가 있다. 여태껏 받아 온 일체의 훈련 이 그들을 가능한 방향 전환에 응할 수 있는 인간으로 마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절 대주의적인 윤리를 가진 국민이라면, 우리는 이데올로기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신념이 없으 면 안 된다. 승자에게 항복했을 때 그들은 "우리의 패배와 함께 정의는 사라졌다."말 말한 다. 그들의 자존심은 그들이 다음 기회에 이 '정의'가 승리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슴을 치면서 자기 죄를 참회하다. 그런데 일본인은 그 어느 것도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항복한 지 닷새 후, 아직 미군이 상륙하기 전, 도쿄의 유력한 신 문인 <마이니치 신문>은 패전과 패전이 몰고 올 정치적 변화를 논하여, "그러나 이 패전은 일본의 궁극적 구원에 도움이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 논설은 일본이 완전히 패했다 는 것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일본이 무력 면에서 쌓아 올린 노력이 완전 히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앞에로 일본인은 평화국가의 기을 걷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 는 것이다. 또 하나의 유력한 신문인 <아사히 신문> 또한 일본 근년의 '군사력 과신'은, 일 본 국내 정책과 국제 정책에 있어 '중대한 오류'이며, "얻는 것은 적고 잃는 것은 너무 많은 지금가지의 태도를 버리고 국제 협조와 평화 애호에 뿌리를 두는 새로운 태도를 채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논평했다. 서구인은 그들 안목으로 보면, 주의의 변경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 이러한 변화를 바라보 고, 그것에 의문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 관계에서나 국제적 관계에서나 일본인 처 세법의 필요 불가결한 한 요소일 뿐이다. 일본인은 어떤 일정한 행동 방침을 취해 목표 달 성이 불가능해지면 '잘못'을 범했다고 판단한다. 그의 어떤 행동이 실패로 끝나면, 졌다고 주 장하면서 물러간다. 언제가지나 집요하게 패배했다는 주장을 고수하는 성질이 아니다. 일본 인은 "배곱을 깨물어도 아무 소용없다."라고 말한다. 1930년대에는 군국주의가 일반에게 용 인된 수단이어서, 그들은 그것에 의해 세계의 칭찬(그들의 무력에 근거한 칭찬)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러한 계획이 요구하는 일체의 일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미군의 진주를 의미한다. 여기서 자진하여 그들은 전쟁을 포기하는 헌법의 입안에 착수했다. 항복한 지 열흘 후 일본의 대신문인 <요미우리 호치>는 "새로운 예술과 새로운 문화의 발족"이라 는 사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우리들은 마음속에, 군사적 패배가 한 나라의 문 화의 가치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군사적 패 배는 하나의 전기로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일본 국민이 참으로 사 고를 세계로 뻗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 위해서는 국가적 패배라는 막대하나 희생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인의 사고를 왜곡한 일체의 비합리성은 솔 직한 분석에 의해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이 패전을 냉엄한 사실로서 직기하기 위 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내일의 일본 문화에 신뢰를 두지 않으면 안 된 다." 그들은 하나의 행동 방침을 시도하다가 패했다. 오늘부터는 하나의 평화적인 처세술을 실행해 보자는 것이다. 일본 각 신문의 논설은, "일본은 세계 각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존 경받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거듭 주장했다. 이러한 새로운 기초 위에서 존경할 만 한 인간이 되는 것이 일본 국민의 의무라고 했다. 이러한 신문 사설은 단지 소수의 인텔리층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도쿄의 가두, 또 벽지 의 황량한 마을의 일반 대중에게도 이와 같은 180도의 전환이 있었다. 일본 점령 부대 미 장병은 이처럼 우호적인 국민이, 죽을 때까지 죽창으로 싸울 것을 맹세했던 국민이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일본인의 윤리에는 미국인이 배척하는 많은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나, 여태껏 일본 점령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미국인이 얻은 여러 가지 경험은 이질적 윤리 속에 도 많은 좋은 점이 있다는 것을 참으로 잘 증명한 것이었다. 맥아더 원수 지도하에 행해진 미국의 일본 관리는 이 일본인의 새로운 진로를 받아들였다. 그는 적어도 일본인에게 굴욕 을 주는 수단을 강행하여 이 진로를 저해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서구의 윤리에 따르면, 가 령 그러한 굴욕을 주는 수단을 강행했더라도 그것은 문화적으로 용인될 수 있을 jt이다. 왜 냐하면, 모욕이나 형벌을 가하는 것은 나쁜 짓을 한 사람에게 죄를 자각하도록 하기 위한, 사회적으로 유효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죄의 자인이 그 인간에게 갱생의 첫걸 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인은 앞에서 말한대로 , 이 점을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 그 들의 윤리는, 사람은 자기 행위의 결과로 생기는 모든 사태의 책임을 져야 하며, 어떤 과오 의 당연한 결과에 의해 그 행위의 잘못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당연한 결과 속에는 총력전에 있어서의 패배와 같은 참혹한 사건까지도 포함된다. 그러나 이러한 당연한 결과는, 일본인이 굴욕이라고 분개하야 하는 그러한 사태는 아니다. 일본인의 사전에는, 어떤 개인이 나 국가가 다른 개인이나 국가에 모욕을 주는 것은, 비방이나 조소나 모욕이나 경멸이나 불 명예의 징표를 강요할 때라고 씌어 있다. 일본인은 자신이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했을 때는 복수하는 것이 하나의 미덕이다. 서구의 윤리가 이러한 신조를 아무리 맹렬히 비난하더라도, 미국의 일본 점령이 효과를 거두느냐 거두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미국이 이 점을 신중히 처리하느냐 않느냐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일본인은 그들이 모욕당하는 것과, 항복 조거에 따 라 일체의 군비를 빼앗기고 더욱 가혹한 배상 의무를 담당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당연한 결 과'를 확실히 구별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일찍이 강대국을 이긴 바 있다. 일본이 전승국으로 되었을 때, 적이 마침내 항복하 고 그 적국이 일본을 조소하지 않았다고 판단되면 세심한 마음을 써서 패배한 적에게 모욕 을 주지 않으려 애쓴 증거가 있다. 1905년 뤼순(여순)에서 러시아 군이 항복했을 때의 일본 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사진이 남아 있다. 이 사진을 보면, 러시아 군이 칼을 차고 있 다. 러시아 군인이 무기를 박탈당하기 않았기 때문에 승자와 패자는 다만 군복의 차이로써 구분할 수 있을 뿐이다. 일본인인 전하는 유명한 뤼순 함락 전투의 이야기에 의하면, 러시아 군 사령관 스토예셀(Stoessel) 장군이 일본측에서 제시한 항복 조건을 수락할 뜻을 표명했을 때, 한 사람의 일본군 대위와 통역 장교가 스토예셀 장군 사령부로 음식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 "스토예셀 장군의 말만을 남기고 모든 말을 잡아먹기로 결정한 순간이었으므로, dfl본 인이 가지고 간 50마리의 닭과 100개의 계란은 크게 환영받았다." 스토예셀 장군과 노기 장 군과의 회견은 그 다음날로 결정되었다. "두 장군은 악수했다. 스토예셀 장군은 일본군의 무 예와 용맹을 칭찬했다. (중략) 노기 장군은 러시아 군의 장기에 걸친 용감한 방어를 찬양했 다. 스토예셀 장군은, 노기 장군이 이번 전토에서 두 아들을 잃었다는 점에 대해 동정의 말 을 했다. (중략) 스토예셀 장군은, 노기 장군에게 자기가 타는 아라비아 종의 훌륭한 백마를 증정했다. 노기 장군은, 말할 수 없이 감사하나 먼저 그것을 천황에게 헌상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반드시 천황이 다시 자기에게 하사할 것이므로 만일 자기 손에 돌아 오면 자기 애마로서 소중히 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일본인은 누구나 노기 장군이 스토예셀 장군의 애마를 위해 자택 앞뜰에 세운 마구간을 알고 있었다. 그 마구간은 종종 노기 장군 의 집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해졌다. 그리하여 노기 장군이 죽은 후 그것은 노기진자(노기신 사)의 일부가 되었다. 일본인은 러시아 항복 당시부터, 예컨대 세계가 다 아는 바와 같은 파괴와 잔학을 멋대로 자행한 필리핀 점령의 몇 년간에 이르는 동안에 그 성격이 일변해 버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일본인같이 극단적으로 기회주의적인 윤리를 가진 국민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결론이 반드시 필연적인 것일 수는 없다. 첫째로, 일본의 적은, 바타안 반도 전투 후에도 항 복하지 않았다. 다지 국지적인 항복이 있었을 따름이다. 그 후 일본군이 필리핀에서 항복했 을 때에도 일본군은 여전히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둘째로, 일본인은 결코 러시아인이 그 들을 '모욕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1920년대 및 1930년대에는, 일본인은 한 사 람도 빠짐없이 미국 정책을 '일본을 깔보는 것',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일본을 배설물로 취 급한다."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포츠머스 조약 및 두 번째의 구축 조약에 있어 미 국이 행한 역할에 대한 일본의 반응이었다. 일본인은 극동에 있어서의 미국의 경제적 역할 의 증대나 세계 속의 유색 인종에 대한 우리들의 인종적 편견의 태도까지도 같은 식으로 생 각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러시아에 대한 승리와 필리핀에서의 미국에 대한 승리와는, 모욕 이 개재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와의 일본인 행동의 가장 극단적인 양면을 분명히 보 여주고 있다. 미국의 최종적 승리는 일본인의 사태를 다시 변화시켰다. 일본인은 궁극적 패배에 직면함 으로써, 그들의 생활 관습에 따라 여태껏 취해온 방침을 포기했다. 그 독특한 윤리 덕택으 로, 일본인은 장부에서 일체의 숙원 기록을 지워 버릴 수 있었다. 미국 정책과 함께 맥아더 장군의 점령 정책은 모처럼 깨끗해진 새로운 장부에 새롭게 모욕을 기입하는 일을 피하고, 단지 일본인의 눈에 패전의 '당연한 결과'로 비춰지는 일만 이행하도록 한다는 태도를 견지 했다. 이것이 효과적이었다. 천황제의 보존은 매우 중대한 의의가 있었다. 그것은 교묘히 처리되었다. 처음에 맥아더 장군 족에서 천황을 방문한 것이 아니라 천황쪽에서 맥아더 장군을 방문했다. 이 일은 서구 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큰 효과를 일본인에게서 거둘 수가 있었던 일종의 실물 교육이었 다. 천황에게 신성을 부인하라는 권고가 있자, 천황은 처음에는 이를 거절했다. 그 이유는 그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은 신성을 포기하라는 것은 난처하다는 것이었다. 천황은 일 본인이 천황을 생각할 때 서구인이 생각하는 바와 같은 신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 다. 과연 그러했다. 그러나 맥아더 사령부는, 서구인들은 아직도 천황이 신성을 가지고 있다 고 믿기 때문에 일본의 국제적 평판이 좋지 않다고 설명했다. 천황은 쑥스러움을 참고 신성 부인의 성명을 낼 것을 승낙했다. 천황은 정월 초하룻날에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의 메 시지에 대한 세계 각국의 신문 논평을 빠짐없이 번역하여 보여달라고 했다. 그 논평을 읽은 천황은 맥아더 사령부에 메시지를 보내 만족한 뜻을 표했다. 외국인으로서는 분명히 이해하 지 못할 일이었다. 천황은 성명을 발표해서 잘 됐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정책은 또한 일본인에게 어떤 종류의 만족을 허용하고 있다. 국무, 육군, 해군 3성 의 공동 지령은, "노동, 공업, 농업에 있어서 민주적 기초 위에 조직되는 모든 단체의 발달 에 대해서는 장려하며 호의를 표시할 것이다."라고 명기했다. 일본 노동자는 많은 산업에서 조직화되었다. 또 1920년대 및 1930년대에 활발히 활동한 옛 농민 조합이 다시 조직되어 나 타났다. 많은 일본인들은 그들이 지금 이렇게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자기 생활 상태를 개선 할 수 있게 된 것은 일본이 이번 전쟁의 결과로서 무언가를 얻은 증거라고 생각했다. 미국 의 한 특파원은 한 파업 참가자가 한 미국인의 얼굴을 보며 만족한 웃음을 띄우고 "일본이 이겼다, 그렇지 않은가? (Japan win, no?)"하고 말했다고 전한다. 지금의 일본 파업은 옛날 의 농민 폭동과 많은 유사점을 갖는다. 폭동을 일으킨 농민의 탄원은 항상 그들이 물던 세 금과 부역이 생산에 지장이 되었다는 데 있었다. 농민 폭동은 서구적인 의미에 있어서 계급 투쟁이 아니며, 또 제도 자체의 변혁을 기도한 것도 아니었다. 현재 일본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파업 또한 생산 속도를 둔화시키지 않는다. "노동자가 공장을 점거하여, 계속 일을 해 서 생산을 증대하는 것으로 경영자의 면목을 잃게 한다. 파업에 돌입한 어떤 미쓰이계 탄광 의 노동자들은 경영을 담당한 직원을 전부 갱내에서 몰아내 놓고, 1일 생산량을 250톤에서 620톤까지 높였다. '파업'중 작업을 계속한 아시오 동광의 노동자들도 생산을 증대시켜 자기 들의 임금을 두 배로 올렸다. 이것이 그들이 즐겨 취하는 파업 형태이다. 물론 어떠한 나라에서도 패전국의 행정은 어려운 일이다. 수락된 정책이 아무리 사려 깊 다 하더라도 이 사정은 변하지 않는다. 일본에 있어서도 식량, 주택, 국민 재교육의 문제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문제였고 절실한 문제였다. 이러한 문제는 가령 일본 정부의 직원을 이용하지 않고 점령 행정을 했을 경우에도 거의 같을 정도로 절실한 것이었으리라. 복원 군 인의 문제는 전쟁 종료 전에 미국의 위정자들이 매우 근심한 일이었는데, 이 문제는 확실히 일본 관리가 그 지위에 없었더라면 더욱 난처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의 해결도 용이하 지 않다. 일본인은 이 곤란을 잘 알고 있다. 1945년 가을 일본 신문은, 갖은 고생 끝에 싸움 에 진 군인들에 있어 패전의 고배가 얼마나 쓰린가에 관해 감정적인 어조로 말하고 나서, 그들이 그 때문에 '판단'을 잘못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귀환 군인은, 현재 까지 매우 훌륭한 '판단'을 하고 있으나, 개중에는 실업과 패전 때문에 국가주의적 목표를 추구하는 옛날 형태의 비밀 결사에 몸을 내던지는 자도 있었다. 그들은 자칫하면 그들의 현 재 지위에 분노를 느낄 우려가 있었다. 일본은 이제 그들에게 옛날과 같은 특권적 지위를 주지 않는다. 이전에 상이 군인은 흰옷 을 입었고,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상이 군인을 만나면 절을 했다. 평화시에 입대하는 사람에 게도 마을 사람들은 환송연을 열어 주었다. 술과 음식이 대접되고 춤이 베풀어졌다. 그 속에 출정한 장정은 상좌로 모셔진다. 그러나 지금 귀환 군인은 아무도 그러한 정중한 대우를 해 주지 않는다. 그의 가족은 그를 즐겁게 환영하여 받아들이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 는 많은 도시와 마을에서 냉담하게 취급된다. 이러한 태도 변화를 안다면, 일본의 명예가 군 인 손에 맡겨졌던 옛날을 회복하기 위해, 이전의 전우들과 도당을 조직하는 데 그들이 얼마 나 만족을 느끼는가를 쉽게 상상할 수 있으리라. 또 그의 전우 중에는 그를 향해, 운 좋은 일본군은 이미 자바 섬에서 산시성에서, 만주에서 연합군과 싸우고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 으리라. "절망할 필요는 없다. 너도 곧 다시 전쟁을 할 수 있게 된다."라고 그들은 그에게 말하리라. 국가주의적인 비밀 결사는 이미 옛부터 일본에 있는 단체여서, 이러한 단체가 '일 본의 오명을 씻었던' 것이다. 완전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 또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있는 동 안은, '세상이 뒤집어진다'고, 느끼는 성격을 가진 인간이 늘 이러한 비밀 결사 가맹 지원자 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러한 단체, 예컨데 흑룡회나 현양사 따위가 행한 폭력은 일본의 윤리가 명예에 대한 '기리'로서 허용하고 있는 폭력이다. 따라서 이 폭력을 배제하기 위해서 는,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 오래도록 계속되어 온 이름에 대한 '기리'를 억제하고 '기무'를 강 조하는 노력을 지금은 물론 앞으로 몇 년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단지 '판단'에 호소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일본 경제를 재건하여 현재 2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생계의 바탕과 '알맞은 위치'를 마련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농민의 상태를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인은 언제나 경제적 곤경에 빠졌을 때는 고향인 농촌으로 귀향한다. 그러나 빚을 지고 있고 또 많은 곳에서는 소작료에 쪼들리 고 있는 협소한 땅마지기에서는 도저히 그 이상의 많은 식구를 먹여 살릴 수가 없다. 공업 도 또한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재산의 차남 이하 분할을 반대하는 뿌리깊은 감정이 있어, 그 때문에 마을에 남는 것은 장남뿐이며, 차남 이하는 성공의 기회를 찾아 도시로 나 가기 때문이다. 일본인은 확실히 그들 앞에 가로놓인 멀고 험난한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재군 비를 위해 국비를 할당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는 국민 생활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 가 주어질 것이다. 진주만 습격에 이르기까지의 약 10년 간 군비와 군대 유지를 위해 세입 의 반 정도를 써야 했던 일본 같은 나라에서, 만일 그러한 지출을 없애고 농민에게서 받는 세금을 경감시켰다면 건전한 경제 기반을 구축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일본의 농산물 분배 방식은 경작자가 60퍼센트를 취하고, 40퍼센트는 세금 및 소작료였다. 미얀마나 타이와 비교하면 매우 높다. 그런 나라에서는 90퍼센트가 경작자의 몫이다. 일본의 경작자에게 부과 되는 막대한 세금이 결국 일본의 군사 기구의 경비 지불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유럽이나 아시아의 어느 나라도 앞으로 10년간 군비를 갖추지 않는 나라는 군비를 갖추는 나라를 능가할 가능성이 있다. 그 까닭은 군비가 없는 나라는 경제 건설이 가능하기 때문이 다. 미국에서는, 우리들은 우리들의 아시아 정책과 유럽 정책 수행에 있어, 이러한 사정을 거의 안중에 두지 않고 있다. 우리들은, 우리나라에서 많은 비용을 요하는 국방 계획을 실시 해도, 그 때문에 나라가 빈곤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전화를 입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농본국이 아니다. 우리들의 중대 문제는 공업의 생산과잉인 것이 다. 우리는 대량 생산과 기계설비를 완전한 경지에 도달시켰다. 그 결과로서 만일 우리가 대 규모의 군비, 사치품 생산, 또는 복리 및 조사 연구 사업 계획을 실시하지 않으면, 국민이 직업을 얻지 못하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미국 이외의 나라에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 다. 서부 유럽에서조차도 그러하다. 아무리 배상 요구를 많이 하더라도 재군비가 허용되지 않는 독일은, 앞으로 10년 내외에 프랑스를 능가할 것이다. 만일 프랑스가 강대한 군사력을 유지하려고 하는 한에서는 프랑스에서는 아마도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건전하고도 유복한 경제의 기초를 독일을 쌓을 수가 있으리라. 일본도 또한, 중국에 대해 같은 강점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게 되리라. 중국에서는 군국화 가 당면 목표로 되어 있고, 그 야망은 미국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일본이 만일 군국화를 그 예산 속에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만일 그럴 뜻이 있다면 멀지 않아 그들 스스로의 번 영을 위한 준비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동양의 통상에 있어 필요 불가결한 나라가 될 것이다. 이 경제를 평화의 이익 위에 입각시킨다면, 국민 생활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으리 라. 그러면 평화로운 나라가 되었을 때, 일본은 국제적으로 명예로운 지위를 획득할 수 잇을 리라. 미국이 앞으로 계속 그런 세력을 이용하여 이러한 계획을 지지하게 된다면 커다란 도 움을 주게 될 것이다. 미국이 할 수 없는 것-어느 나라에서도 할 수 없는 것-은 명령으로써 자유로운 민주적 일본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러한 방법은 어떠한 피 지배국에서도 지금까지 성공을 거둔 일이 없다. 어느 외국인도 자기와 같은 습관이나 가정을 가지지 않은 국민에게 자기와 같은 생각이나 생활 방식을 따르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 법률의 힘으로써 일본인에게, 선거에 의 해 뽑힌 사람들의 권위를 인정시켜서, 그들의 계층 제도에서 이미 정해져 있는 바의 '알맞은 위치'를 무시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법률의 힘으로써, 그들에게 우리 미국인에게는 습관 이 되어버린, 허물없이 사람들과 접촉하는 태도, 아무래도 자유 독립을 요구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마음, 각자가 가지고 있는 친구들, 직업, 사는 집, 맡은 의무를 선택하는 정열을 받아 들이게끔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일본인들 자신이, 매우 명료하게 이 방향으로의 변화의 필요 성을 인정하고 있음을 기술하고 있다. 대일 전승일 이래 그들의 공직에 있는 자들은, 일본은 국민이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각기 자기 자신의 생활을 누리며 자기 자신의 양심을 신뢰하 도록 장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해 왔다. 물론 그들은 확실하게 입 밖에 내서 말하지는 않지만, 일본인은 누구나 그들이 일본에 있어서의 '부끄러움(하지)'의 역할에 의문을 품고 있 다는 것, 그리하여 그들이 국민 가운데에 새로운 자유가, 즉 '세상'의 비난과 추방을 두려워 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자라나기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일본에서는 사회적 압력이, 가령 일본인이 스스로 그것을 감수하는 경우라도, 개 인에게 너무 많은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에게, 감정을 감추고, 욕망을 버리고, 가족, 단체 도는 국민의 대표로서 세상의 비판 앞에 서도록 요구한다. 일본인은 그러한 방침 이 요구하는 일체의 자기 훈련에 감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왔다. 그러나 그들에게 과 해지는 부담은 대단히 무겁다. 그들은 과도의 억제를 하지 않으면 안 되고, 따라서 도저히 자기 행복을 얻을 수가 없다.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의 정신에 그토록 많은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생활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군국주의자에게 이끌려 끊임없이 희생이 쌓이고 쌓이는 길을 걸어왔다. 그러한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독선적인 인간이 되었고, 비교적 관대한 윤리를 가진 사람들을 멸시했었다. 일본인은 침략 전쟁을 하나의 오류 및 실패한 주장으로 간주함으로써 사회적 변혁을 향한 최초의 큰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다시 평화로운 나라들 사이에서 존 경받는 지위를 회복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 평화가 실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러시아와 미국이 앞으로 몇 년간을 공격을 위한 군비확충 속에 세월을 보낸 다면, 일본은 그 군사 지식을 이용하여 그 전쟁에 참가하리라. 그러나 그러한 확실성을 인정 한다고 해서, 나는 결코 일본이 본래 평화 국가로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는다. 일본의 행동 동기는 기회주의적이다. 일본은 만일 사정이 허락되 면, 평화로운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구하리라. 그렇지 않게 되면, 무장된 진영으로서 조 직된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찾게 될 것이다. 현재 일본인은, 군국주의를 실패로 끝난 한 줄기의 광명으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군국주 의가 과연 세계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실패한 것인가를 알기 위해, 다른 나라의 동정을 주시 하리라. 만일, 실패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일본은 스스로의 호전적 정열을 다시 불태워, 일본 이 얼마나 전쟁에 많은 공헌을 할 수 있는가를 보이리라. 만일, 다른 나라들에서도 그 군국 주의가 실패한 것으로 판단된다면, 일본은 제국주의적 침략 기도는 결코 명예에 이르는 길 이 아니라는 교훈을, 얼마나 뼈저리게 체득하였는가를 증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