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기리'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 일본인이 잘 쓰는 말에 "기리(의리)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란 '기무 (의무)'를 갚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같이 '기리'를 갚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기리'는 ' 기무'와는 종류를 달리하는 일련의 의무이다. 영어에는 이것에 해당하는 말이 전혀 없다. 그 리고 이것은 인류학자가 세계 문화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여러 가지 별난 도덕적 의무의 범주에서도 가장 드문 것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특히 일본적인 것이다. '주(충)'와 '고(효)' 는 일본이 중국과 공유하고 있는 덕목으로, 일본은 이 두 가지 개념에 여러 가지 변화를 주 기는 했지만, 동양의 다른 여러 나라의 도덕적 명령과 어느 정도 동족적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기리'는 일본이 중국의 유교에서 받아들인 것도 아닐뿐더러 동양의 불교에서 받아들여진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일본 특유의 범주로서, '기리'를 고려에 넣지 않으면 일본 인의 행동 방침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본인은 누구나, 행위의 동기나 명성 혹은 본 국에서 사람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여러 가지 딜레마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기리'를 입에 담게 된다. 서양인의 입장에서 보면 '기리'에는, 옛날에 받았던 친절에 대한 답례에서부터 복수의 의 무에 이르는, 서로 이질적인 여러 가지 잡다한 의무(제6장의 일람표 참조)가 복잡하게 포함 돼 있다. 일본인이 지금까지 서구인에게 '기리'의 의미를 설명하려고 꾀하지 않았던 것도 무 리는 아니다. 그들 자신의 일본어 사전에도 만족하게 이 말을 정의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일본어 사전의 설명-내가 번역한-에 의하면 '기리(의리)'는 '올바른 도리, 사람이 좇아 야만 될 길, 세상에 대한 변명 때문에 본의 아니게 하는 일'로 되어 있다. 이런 설명으로는 서구인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본의 아니게(unwillingly)'라는 말이 '기무 (의무)'와의 다른 점을 보여 주고 있다. '기무'란 어떤 사람에게 그것이 아무리 곤란한 요구 라 하더라도 적어도 가까운 육친의 세계에서, 그리고 또 조국과 그의 생활 양식 및 그의 애 국심의 상징인 천황에 대해 지고 있는 일군의 의무이다. 그것은 태어나자마자 동시에 맺어 지는 강력한 고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당연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이다. 그것에 복종 키 위해 해야만 하는 특정한 행위가 아무리 마음내키지 않는 것이라도, '기무'가 '본의 아니 게'라고 정의될 수는 없다. 그러나 '기리를 갚는 것'은 불쾌한 일 투성이다. 채무자로서의 여러 가지 곤란은 '기리'의 세계에 있어 그 극한에 달한다. '기리'는 두 개의 아주 다른 부류로 나누어진다. 여기에서 '세상에 대한 기리'-문자 그대 로는 '기리를 갚는 것'-라 부르는 것은 동배에게 '온(은)'을 갚는 의무요, '이름에 대한 기리 '라 부르는 것은 대체로 독일인의 '명예(die Ehre)'와 같은 것으로서 자신의 이름과 명성이 어떤 비난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는 의무이다. '기무(의무)'는 태어나자마자 생기는 친밀한 의무의 수행이라고 느껴지는데 비하여, 세상에 대한 '기리(의무)'는 개략적으로 말하 면, 계약 관계의 이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기리'는 법률상의 가족에 대해 지고 있 는 일체의 의무를 포함하고, '기무'는 직계 가족에 대해 지고 있는 일체의 의무를 포함한다. 법률상의 아버지는 '기리'의 아버지 곧 의부라고 불리고, 법률상의 어머니는 '기리'의 어머 니 곧 의모, 법률상의 형제 자매는 각각 '기리'의 형제, '기리'의 자매라고 불려진다. 이 호 칭은 배우자의 혈족 또는 혈족의 배우자에게도 쓰여지고 있다. 일본에서 결혼은, 가문과 가 문 사이의 계약이어서 평생 동안 상대 가문에 대하여 이 계약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기 리를 다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기리'는 이 계약을 맺은 세대-어버이-에 대한 '기리'가 가 장 무겁다. 그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것이 며느리의 시어머니에 대한 '기리'인데, 그 까닭은 신부는 자기의 생가가 아닌 다른 집에 가서 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남편의 장인, 장모에 대 한 의무는 이것과는 틀리지만, 역시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다. 왜냐하면 남편은 장인, 장모가 곤궁할 때는 돈을 빌려 주어야 하고, 그 외 여러 가지 계약에 따른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일본인은, "장성한 아들이 그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은 어머니를 사랑하기 때문이므로 그것을 '기리'라고는 할 수 없다. 마음속에서 우러 나와 행한다면 그것은 '기리'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법률상의 가족에 대 한 의무를 세심하게 수행한다. 그것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기리를 모르는 인간'이라는 무서운 비난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법률상의 가족에 대한 의무를 그들이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것은 부녀자와 같 은 방식으로 결혼하는 '데릴사위'의 경우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딸들뿐이고 아들이 없는 집 안일 경우, 부모는 그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서 딸들 가운데 한 딸을 위해 데릴사위를 고른 다. 데릴사위의 이름은 생가의 호적에서 말소되고 장인의 성을 쓰게 된다. 그는 처가에 들어 가서 장인, 장모에게 '기리로(의리상)' 복종해야 한다. 그리고 그가 죽으면 처가의 묘지에 묻힌다. 어린 점은 모두 보통 결혼에서 시집가는 여자의 경우와 똑같다. 데릴사위를 맞아들 이는 이유는 단순히 자기 집안에 아들이 없는 경우에만 한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그것은 쌍방이 이익을 위한 거래로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것이 이른바 '정략결혼'이다. 여자의 집 안은 가난하지만 가문이 좋다. 그러면 남자는 지참금을 가지고 가는데 그 대가로 계급적 계 층제에 있어서의 지위가 상승되는 것이다. 혹은 여자 집안이 부유하여 사위를 교육비를 부 담할 능력이 있으면, 사위는 이 은혜를 입는 대신으로 생가를 떠나 처가에 입적하는 수도 있다. 혹은 여자의 부친이 이런 방법으로 자기 회사를 위한 미래의 공동 경영자를 얻는 수 도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데릴사위의 '기리'는 특히 무겁다. 왜냐하면 일본에서 자신의 성을 바꾸 어 다른 집의 호적에 등록한다는 것은 중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봉건 시대의 일본에서는, 설 령 그것이 자기의 친아버지를 죽이는 결과가 된다 하더라도, 전쟁 중에는 양부의 편에서 싸 워 자신이 새로운 가문의 일원이라는 것을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근대 일본에서 데릴 사위를 삼는 '정략 결혼'은 그 강력한 '기리'의 강제력을 근거로 하여 일본인이 설정할 수 있는 가장 무거운 구속력을 가지고 그 청년을 장인의 사업이나 양가의 운명에다 붙들어맨 다. 특히 메이지 시대에는 이러한 일이 쌍방 가문에 유리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데릴사위 가 되는 것에 대한 혐오감은 강렬한 것이어서, 일본인의 입에 잘 오르내리는 속담에 "쌀 3 홉이 있으면 데릴사위가 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일본인은 이 혐오를 '기리 때문'이라고 말 한다. 만일 미국에 이런 습관이 있었다면 미국인은 '남자 구실을 못 하기 때문'이라고 하겠 지만, 그들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어쨌든 '기리'는 아주 괴로운 일이요, '본의 아닌 일' 이다. 때문에 '기리 때문'이라는 표현은 일본인에게는 번거로운 관계를 표현하는데 충분한 말인 것이다. '기리(의리)'는 오직 법률상의 가족에 대한 의무만은 아니다. 아저씨와 아주머니, 조카와 조카딸들에 대한 의무까지도 같은 범주에 든다. 일본에서는 이와 같은 비교적 가까운 친척 에 대한 의무를 '고(효)'와 같은 계열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일본과 중국의 가족 관 계에서 볼 수 있는 큰 차이의 하나이다. 중국에서는, 많은 이들 친척, 그리고 이들보다 훨씬 먼 친척들도 공도 재원에서 자기 몫을 분배받는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들은 '기리'의, 다 시 말하면 '계약상'의 친척이다. 일본인은 이들이 도움을 청하는 친척에게 한번도 개인적으 로 은혜를 베푼 일이 없었던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들을 도와주는 것은 공통된 조상으로부터 받았던 '온(은)'을 갚는 것이다. 자기 아이들을 보살피는 것 또한 이것과 같은 동기이지만 그것은 물론 '기무'이다. 이에 반해서 그 동기는 같을지라도, 비교적 인연이 먼 친척에 대한 도움은 '기리'라고 생각한다. 이들에게 도움을 줄 경우에는 법률상의 가족을 도 와주는 경우처럼 "나는 '기리'에 걸려들었다"라고 말한다. 대다수의 일본인들이 법률상의 가족관계에 앞서서 생각하는, 중대한 전통적 '기리'는 가신 의 그의 영주에 대한 또는 전우에 대한 관계이다. 그것은 명예를 생명으로 하는 인간이 그 의 윗사람과 그와 계급을 같이하는 동료에 대하여 짊어지는 충절이다. 이 '기리'의 의무는 수많은 전통적 문예작품 속에서 칭송되고 있다. 이것은 사무라이의 덕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옛날, 아직 도쿠가와에 의하며 국내 통일이 이루어지기 전의 옛 일본에서는, 그것은 때때로 당시 쇼군에게 대한 의무로 생각되어졌던 '주(충)'보다 더 크고 소중한 덕으로 생각되었다. 12세기 미나모토 쇼군이 다이묘 한사람에게 그가 보호하고 있는 쇼군을 적대하는 다이묘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그때 그 다이묘가 회답을 썼는데 그 편지는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그는 그의 '기리'를 비난한 일을 크게 분하게 여겨 설령 '주(충)'의 명예에 어긋나더라도 ' 기리'를 배반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공적인 일은 저에게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명예를 존중하는 무사들간의 '기리'는 영원한 진리입니 다." 따라서 쇼군의 권력을 초월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존경하는 친구에 대한 신의를 배 신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이와 같이 옛날 일본 사무라이의 다른 무엇보다 뛰어난 덕은 지 금도 일본 어디에서나 널리 알려져 있으며, 노극과 가부키극 도는 가구라 춤으로 윤색되고 있는 수많은 역사적 민화 속에 충만되어 있다. 이들 이야기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저 위대한 무적의 로닌-주군이 없이 자신의 기 지로써만 생활하는 사무라이-인 13세기의 영웅 벤케이의 이야기이다. 놀랄 만한 힘 이외에 는 아무것도 기댈 데가 없는 벤케이는 수도원에 몸을 피해 있으면서 수도자들을 벌벌 떨게 한다. 그래서 그는 봉건 시대풍의 몸차림을 하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지나가는 사무 라이를 닥치는 대로 베어 죽여 그들의 칼을 빼앗는다. 마침내 그는 그의 눈에는 한낱 애송 이로만 보이는 가냘프면서도 맵시 있게 차린 귀공자와 싸운다. 그런데 그는 이 사람이 자기 의 호적수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청년이 그의 가문에 쇼군의 지위를 회복시키고자 꾀하 는 미나모토씨의 자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청년이 바로 일본인들이 사랑하는 영웅 미 나모토 요시쓰네이다. 벤케이는 그에게 열렬한 '기리'를 바치고 그를 위해 수많은 공훈을 세 우게 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압도적인 적의 세력에 밀려 종자들과 함께 쫓기게 된다. 일 행은 절의 건립을 위해 일본 전역을 순례하는 수도승으로 변장하는 한편, 발각되지 않기 위 해 요시쓰네도 일행과 같은 복장을 하고 벤케이는 그들의 우두머리로 차려 입는다. 그들은 길에서 적이 배치한 감시대를 만난다. 벤케이는 사원 건립을 '기부자' 명부를 날조하고는, 그 두루마리를 꺼내어 읽는 시늉을 한다. 적은 그들은 통과시키려고 한다. 그런데 그 순간 에, 적은 비천한 몸차림을 하긴 했으나 아무래도 숨길 수 없는 요시쓰네의 귀족적인 기품을 보고 의심을 품게 된다. 그들은 일행을 다시 불러 세운다. 벤케이는 재빨리 요시쓰네가 받은 혐의를 완전히 씻어 버릴 수단을 취한다. 그는 어떤 사소한 이유를 들어 요시쓰네에게 모진 욕을 하면서 뺨을 때린다. 적은 완전히 믿는다. 왜냐하면 만일 이 순례자가 요시쓰네라면 그 가신의 한 사람이 그를 때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기리 의 위반인 것이다. 벤케이의 불경한 행위가 이 작은 한 떼의 생명을 구한다. 일행이 안전한 지역에 이르자마자, 벤케이는 요시쓰네의 발 앞에 몸을 던지며 자기를 죽여 달라고 청한다. 그의 주군은 인자하게도 용서한다. 이처럼 '기리'가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고, 전혀 혐오의 정에 더렵혀지지 않았던 시 대의 옛 이야기는, 현대 일본이 꿈꾸는 황금 시대의 백일몽이다. 이 이야기들이 일본인에게 말해 주는 것은, 당시에 있어서 '기리'는 조금도 '본의 아님'이 없었다는 점이다. 만일 그것 이 '주(충)'와 충돌하면 사람들은 당당히 '기리'에 충실할 수 있었다. 당시의 '기리'는 온갖 봉건적 장식으로 치장된, 사랑 받는 직접적인 관계였다. '기리를 안다'고 하는 것은 생애를 바쳐 주군에게 충절을 다한다는 것이었고, 주군은 그 대신 가신을 보살폈다. '기리를 갚는다 '는 것은 자기가 일체의 신세를 지고 있는 주군에게 생명까지도 바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물론 환상이다. 일본 봉건 시대의 역사는, 전투중인 상대방의 다이묘에 의하여 자 기의 충성을 매수당한 가신들이 많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다음 장 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주군이 가신에게 무엇인가 치욕을 주었을 때에는 가신은 당연히, 또는 관례에 따라 자기의 봉직을 버리고, 또 적과 손을 잡는 일조차 있었다. 일본인은 복수 의 주제를 죽음을 건 충절과 마찬가지로 흔쾌히 찬양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모두 '기리' 였다. 충절은 주군에 대한 '기리'였고, 모욕에 대한 복수는 자기 명예에 대한 '기리'였다. 일 본에서, 이 두 가지는 동일한 방패의 양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성에 대한 옛 이야기들은 오늘날 일본인의 재미있는 백일몽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현재에 와서는 '기리를 갚는다'는 것은, 이미 자신의 정당한 수령에 대한 충 성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사람에 대한 온갖 종류의 의무를 이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 날 끊임없이 쓰여지는 표현은, 혐오와 함께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기리를 행하도록 강제하 는 세상 여론의 압력으로 차 있다. 그들은 "나는 오로지 '기리' 때문에 이 결혼을 결정하고 있다"라든가, "단지 '기리' 때문에 저 남자를 채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든가, "나는 오로 지 '기리' 때문에 저 사람과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기리' 에 얽매여 있다."라고 말하는데, 이 표현은 사전에서는 "I am obliged to it.(할 수 없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들은 "그는 '기리'로써 나에게 강요했다."라든가, "그는 '기리'로써 나를 몰아세웠다."라 고 말한다. 이 말들은 다른 관용구처럼,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전에 이러이러한 '온'을 베풀었으니 당연히 그 은혜 갚음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사람이 원치도 않는, 또는 할 생각이 없는 일을 무리하게 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농촌에서나 작은 상점의 거래에서나 재벌의 상층 사회에서나 또는 일본의 내각 안에서도 사람들은 '기리'로 강요당 하고 '기리'로 압력을 받는다. 구혼자가 장래의 장인이 될 사람에게 양가 사이의 예로부터 맺어 온 관계나 거래를 들먹이면서 '기리'를 앞세우는 수도 잇다. 또는 어떤 사람이 농민의 토지를 손에 넣기 위하여 이와 같은 수법을 쓰는 수도 있다. '기리'에 몰린 사람은 어떻게든 그것을 듣지 않을 수 없다고 느끼게 된다. 그는 "내가 나의 '온진(은인 ; 내가 온을 받은 사 람)'의 편을 들지 않는다면 나는 세상으로부터 '기리'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라고 말한다. 이런 어법은 모두 본의 아니게, 또는 일영 사전의 표현처럼 "for mere decency's sake(다만 체면 때문에)"에 '기리'를 행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기리'의 규칙은 엄밀히는 어떻게 해서든 지켜야 되는 갚음의 규칙이다. 그것은 모세의 십 계 같은 일련의 도덕 규칙은 아니다. '기리'로 강요되었을 때에는,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정의감을 무시하는 수도 있다고 가정된다. 일본인은 가끔 "나는 '기리' 때문에 '기(정의)'를 지킬 수 없었다고 말한다. 또는 '기리'의 규칙은 이웃 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것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일본인은 사람들이 진심에서 자발적으로 고나대한 행위를 하는 것을 요구치 않는다. 그들은, 사람이 '기리'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을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로부터 '기리를 모르는 인간'이라 불리고, 세상 사람 앞에서 수치를 당하게 도 리 것이다."라고 말한다. '기리'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세상의 소문이 무섭기 때문 이다. 사실 세상에 대한 '기리'는 때때로 영어에서는 "conformity to public opinion(여론에 따르는 것)"이라고 번역된다. 또 한 사전에는 "세상에 대한 '기리'이기 때문에 할 수 없다." 가 "people not accept any other course of action(세상 사람들은 그 밖의 다른 행동 방식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다.)"이라고 번역되고 있다. 빌린 돈을 갚는 데 대한 미국인의 생각과의 비교가 일본인의 태도를 이해하는 데 가장 도 움이 되는 것은, 이 '기리의 세계'의 경우이다. 우리 미국인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 았다던가 선물을 받았다던가 또는 때에 알맞은 말을 들려주었다고 해서, 이자의 지불이나 은행에서 빌린 돈을 꼭 갚아야 하는 경우처럼 엄격한 규정으로 은혜를 갚아야 된다고는 생 각지 않는다. 이러한 금전상의 거래에 있어서는 파산이 변제불능에 대한 형벌이다. 대단히 혹독한 형벌이다. 그러나 일본인은 어떤 사람이 '기리'를 갚을 수 없을 때, 그 사람은 파산 했다고 여긴다. 더구나 인생에서의 모든 접촉은 반드시 이런저런 '기리'를 초래시킨다고 생 각한다. 이것은 미국인들이 의무를 초래한다고는 전연 생각지 않고 가벼운 기분으로 하는 자질구레한 말이나 행동을 일일이 치부해 두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복잡한 세상에서 끊 임없이 방심하지 말고 걸어 다녀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인의 세상에 대한 '기리'의 관념과 미국인의 꾼 돈을 갚는 관념 사이에는 또 하나의 유사점이 있다. '기리'의 갚음은 정확히 같은 양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점에 있 어서 '기리'는 '기무(의무)'와 반드시 구별되어진다. '기무'는 가령 어떤 일을 하더라도 도저 히 완전하게는, 아니 완전에 가까운 정도까지도 갚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리'는 무한 정한 것이 아니다. 미국인에게는 이러한 은혜 갚음이 원래의 호의에 비해 터무니없이 균형 을 잃고 있다고 생각되나, 일본인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우리들은 또한, 매년 두 번씩 모든 가정이 6개월 전에 받은 선물의 보답으로서 무엇인가를 다시 보내 준다든가, 또는 식모의 고향집에서 그녀를 식모로 채용해 준 데 대한 사례로서 1년 중 여러 가지 물건을 보내거나 하는 일본인의 선물하는 습관을 괴상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일본인은 상대편에서 받은 선물 보다 더 큰 선물을 보내는 것을 터부시한다. 미국인이 말하는 소위 'pure velvet(거저 생긴 이익)'을 갚는 것도 결코 명예가 될 수 없다. 선물에 대해서 말하는 가장 심한 욕은, 증정하 는 사람이 "피라미 한 마리를 도미 한 마리로 갚는다."는 것이다. '기리'를 갚는 경우도 같 다. 가능하면 언제나 노력이든 물건이든지 간에 서로간에 주고받는 복잡한 관계를 기입한 기 록이 만들어진다. 마을에서는 이 기록의 어떤 것은 촌장이, 어떤 것은 협동 노동의 한 관계 자가, 어떤 것은 개인집 또는 개인이 보관한다. 장례식에는 '조의금'을 가지고 가는 것이 관 습화되어 있다. 친척은 그밖에도 만장에 쓰는, 색깔이 있는 천을 가져가는 경우도 있다. 이 웃 사람들은 일을 돕기 위해 모여 여자들은 부엌일을, 남자들은 무덤을 파고 관을 짜는 일 을 한다. 스에무라에서는 촌장이 이들 일을 기록한 장부를 만든다. 그것은 초상집에서는 중 요한 기록이다. 그 기록을 보면 동네 사람으로부터 어떤 선물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그 집으로서는 다른 집에서 초상이 일어난 경우 갚지 않으면 안 되는 상대방의 이름을 나타낸 명부이기도 하다. 이런 것은 장기적인 상호 의무이다. 그 외에도 마을의 장례식, 또는 여러 가지 축하연 때에는 단기적 상호 교환이 행해진다. 관을 짜는 데 도와 주는 사람은 식사를 대접받는데, 그들은 그 식사 대금의 일부로서 얼마간의 쌀을 상가에 가지고 간다. 그 쌀도 또한 부락의 기록 속에 기입된다. 축하연의 경우에도 대 체로 손님은 술잔치를 위한 지불 몫으로서 얼마의 곡주를 지참한다. 그것이 생일 잔치이건 장례식이건 간에, 또는 모내기이건 가옥 건축이건 친목회이건 어떤 경우에도 '기리'의 교환 은, 장래의 변제에 대비하여 세밀하게 기록된다. 일본인은 '기리'에 관하여 서구의 차용금 변제에 관한 관례와 비슷한 또 한가지 관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만일 갚는 일이 기한보다 늦어지면 마치 이자가 느는 것처럼 커진다. 에크슈타인(G. Ekstein)박사는 누구치 히데요의 전기 자료를 모으기 위하여 일본에 가는 여 비를 대 준 어떤 일본 제조업자와의 교섭중에 이 같은 일을 경험했다고 말하고 있다. 에크 슈타인 박사는 전기를 쓰기 위하여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드디어 다 쓴 원고를 일본에 보냈다. 그러나 받았다는 연락이나 편지가 없었다. 그 책 속에 무언가 일본인의 기분을 상하 게 하는 것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걱정하였다. 그래서 몇 번이나 편지를 냈지만 역시 답장 이 오지 않았다. 그런 몇 년 뒤에 그 제조업자가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그는 미국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일본 벚나무 수십 그루를 가지고 에크슈타인 박사 집을 방문하였다. 그 선물은 정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오랫동안 답례를 못했기 때문에 당연 히 훌륭한 선물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일본인은 에크슈타인 박사를 향하여 " 분명히, 당신은 제가 빨리 답례를 하기를 바라시진 않으셨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기리'에 몰리는 인간은 때때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커진 부채의 변제를 강요당한다. 어떤 사람이 소상인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까닭은 그 사람은 이 상인이 소년 시절에 배운 어 떤 교사의 조카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가 젊었을 때에는 그 교사에게 '기리'를 길이 없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지금까지 경과된 세월 동안에 그 부채는 점점 불어난 것이다. 그래서 이 상인은 그 부채를 '세상에 대한 변명 때문에 본의 아니게'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제8장 오명을 씻는다 이름에 대한 '기리(의리)'란 자기 자신의 명성에 오점이 없도록 하는 의무이다. 그것은 일 련의 여러 가지 덕으로 되어 있다. 그 덕 중에서 어떤 것은 서양인에게는 서로 모순되는 것 으로 생각되지만, 일본인 입장에서 보면 그것들은 어떤 것이든 남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갚 음이 아니라는 점, 즉 '온의 범위 밖'에 있다는 점에서 충분한 일관성을 지닌다. 그것은 이 전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특정한 은의에 구애됨이 없이 자기의 명성을 빛내는 여러 가 지 행위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분수에 맞는 위치'가 요구하는 잡다한 모든 예절을 계속 시 키고, 고통에 임해서는 태연 자약한 태도를 나타내며, 전문 직업이나 기능에 있어서느 s자기 의 명성을 옹호하는 일을 포함한다. 이름에 대한 '기리'는 또한 비방이나 모욕을 제거하는 행위를 요구한다. 비방은 자신의 명 예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벗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러기 위해서 명예 훼손자에 대해 복수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도 있고, 자살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도 있다. 또한 이 양극단의 중간에는 여러 가지 가능한 행동 방침이 있다. 그러나 일 본인은 자신의 명예를 손상하게 하는 일을 그저 가볍게 얼굴을 찡그리는 정도로 끝내지 않 는다. 일본인은 내가 여기에서 '이름에 대한 기리'라고 부르는 일에 대해서 특별한 용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그것을 단순히 '온'의 범위 밖에 있는 '기리'라고 말할 뿐이다. 이 점이 '기리'를 분류하는 기준이 되어, 세상에 대한 '기리'가 친절을 갚는 의무이며, 이름 에 대한 '기리'가 복수를 주로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로서 '기리'를 구별하지는 않는다. 서구 의 여러 언어들이 이 양자를 감사와 복수라는 전혀 상반된 범주로 나누고 있는 사실은 일본 인에게는 분명하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타인의 호의에 반응하는 경우와 타인의 경멸이나 악의에 반발하는 경우의 행동이 왜 하나의 덕으로 포함되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일본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다. 훌륭한 사람은 모욕에 대해서도 그가 받은 은혜만큼이나 강하게 느낀다. 어느 쪽도 그것에 보답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훌륭한 행위이다. 그들은 우리 들처럼 이 두가지를 구별하여 한쪽은 침해 행위, 다른 한쪽은 비침해 행위라고는 부르지 않 는다. 그들의 눈에서 보면 어떤 행위가 침해로 인정되는 것은, 오직 그것이 '기리의 세계' 밖에서 행해지는 경우에 한정되는 것이다. 사람이 '기리'를 지키고 오명을 씻는 한, 결코 침 해의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빚을 갚아 셈을 치르는 것일 뿐이다. 일본인은 모욕이 나 비방이나 패배가 보복되거나 제거되지 않는 한, "세상이 뒤집어졌다."라고 말한다. 훌륭 한 사람은 세상을 다시 균형 상태로 되돌려 놓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보복은 인 간의 덕행이지, 인간의 본질적인 약점에 기초한 피할 수 없는 악덕이 아니다. 유럽 역사의 어떤 시기에는, 이름에 대한 '기리'가, 그것이 일본에서처럼 언어적으로 감사 나 충성과 연결되어 있는 점에서도, 서구인의 덕이라 여겨진 시대가 있었다. 그것은 르네상 스 시대에, 특히 이탈리아에서 아주 성행했다. 또한 이것은 최성기 스페인에 있어 '스페인의 용기(el valor Espanol)'나, 독일의 '명예(die Ehre)'와도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100 년 전까지 유럽에서 행해지고 있던 결투의 관습도 그 근저에는 이와 대단히 비슷한 동기가 잠재되어 있었다. 그것이 일본이거나 서구 여러 나라거나 자기의 명예에 가해진 오점을 씻 어버리는 덕이 세력을 점하고 있던 곳에서는 어디에서고, 이 덕의 핵심은 항상 그것이 일체 의 물질적 의미에 있어서 이득을 초월한다는 점에 있었다. 사람이 그의 재산과 가족과 자기 생명을 '명예'를 위해 희생하면 할수록 덕이 높은 사람으로 여겨졌다. 이 점이 이 덕의 정의 의 일부를 이루는 것으로, 또한 이들 나라들이 항상 제창하는 '정신적' 가치라는 주장의 근 저가 되어 있다. 그것은 분명히 그들에게 큰 물질적 손실을 초래시키는 것으로서, 이해 득실의 입장에 선 다면 대체로 시인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점에 있어서 득실의 입장에 선다면 대체로 시인하 기 어려운 일이다. 이 점에 있어서 이와 같은 명예관과 미국인의 생활에 때로 나타나는 극 단적인 경쟁이나 노골적인 적대 사이에는 대단히 현격한 차이가 있다. 미국에서는 어떤 정 치상 또는 경제상 절충을 꾀하는 데는 아무런 제한이 없지만, 어떤 물질적 획득에 있어서는 전쟁이 되는 수가 있다. 미국에서 이름에 대한 '기리'의 범주에 들어가는, 명예의 다툼이 일 어나는 경우를 든다면, 켄터키 산 속 주민간의 반목의 경우처럼 예외적인 경우에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름에 대한 '기리'와, 어떤 문화에 있어서도 그 '기리'에 부수되는 온갖 적의나 조심스러운 기다림은 결코 아시아 대륙 특유의 덕은 아니다. 그것은 곧잘 표현되는 바처럼 동양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중국인이나 타이인, 인도인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중 국인은 모욕이나 비방에 대해 그처럼 신경 과민이 되는 것은 '소인', 즉 도덕적으로 보잘것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일본의 경우처럼 그들의 고결한 이상의 일부가 되지 않 는다. 중국에선 어떤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불쑥 휘두르기 시작할 때에는 불법이 되는 폭 력이, 모욕의 갚음으로 쓰여졌다고 해서 올바른 행위가 된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그렇 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을 오히려 조롱거리로 여긴다. 그들은 또한 누구에게서 나쁜 말을 들었을 때 신에게 맹세하면서 그 비방이 그릇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결심하지도 않는다. 타이 인에게서도 모욕에 대한 이같이 민감한 반응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들도 중국인처 럼 비방자를 우롱하는 것은 좋아하나, 자신들의 명예가 공격받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들 은 "상대가 비인간적이라는 것을 폭로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상대방에게 져 주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름에 대한 '기리'의 완전한 의의는,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가지 비공 격적인 모든 덕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복수는 이름에 대하나 '기 리'가 때때로 요구하는 하나의 덕에 불과하다. 이름에 대한 '기리' 속에는 복수 이외에 많은 조용하고 감추어진 행동이 포함된다. 체면을 소중히 여기는 일본인에게 요구되는 스토이시 즘(stoicism), 즉 자제는 이름에 대한 '기리'의 일부분이다. 여자는 분만할 때 큰 소리를 내 어서는 안 되고, 남자는 고통이나 위험에 직면하여 초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홍수가 마을을 덮칠 때에도, 체면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최소한의 필수품만을 챙겨서 높은 지대로 피난 간다. 그곳에는 아비규환이나 우왕좌왕, 낭패한 기색이 없다. 추분 무렵 폭풍우가 엄습해 올 때에도 같은 자제가 요구된다. 그런 태도는 설령 완전하게 그런 태도를 취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일본인의 자 존심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미국인의 자존심은 자제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다. 일본인의 이 자제는 '신분이 높아질수록 책임이 무거워지는 경향(nobless oblige)'이 있 다. 따라서 봉건 시대에는 서민보다는 사무라이 계급에게 더 많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이 덕 은 사무라이만큼 엄격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모든 계급에 통하는 생활 원리였다. 사무라이 가 극단적으로 육체적 고통을 초월하기를 요구 당한다고 하면, 서민은 또한 극단적인 순종 으로 무기를 지닌 사무라이의 공격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무라이의 스토이시즘에 대해서는 수많은 유명한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들은 굶 주림에 굴복하는 것을 금지 당했는데, 이것은 일부러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당연한 것 이었다. 그들은 굶주려 있을 때에도 바로 지금 식사를 마친 듯한 시늉을 해야 된다고 명령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지 않으면 안 된다. "어린 새는 먹이를 찾아 울 지만, 사무라이는 이쑤시개를 물고 있다."는 속담이 있다. 이번 전쟁에서는 바로 이 말이 병 졸들에 대한 군대 격언이 되었다. 또한 그들은 고통에 져서도 안 되었다. 일본인의 태도는, 나폴레옹에게 "다쳤느냐고요? 아닙니다, 폐하. 저는 지금 살해당하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한 어느 소년병의 응답과 비슷한 것이었다. 사무라이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고통의 표정 을 보여서는 안 되며, 눈 한번 깜박 않고 고통을 참아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은 1899 년에 세상을 떠난 가쓰 백작 이야기인데, 그는 어렸을 때 개에게 불알을 물려서 찢겼다. 그 는 사무라이 가문이었으나 집안은 구걸을 할 만큼 아주 가난했다. 의사가 수술하고 있는 동 안 그의 아버지는 그의 코앞에 칼을 뽑아 들고 "한 마디라도 우는 소릴 내면 애오라지 무사 로써 부끄럽지 않게 널 죽이겠다."라고 말하였다. 이름에 대한 '기리'는 또한 신분에 맞는 생활을 할 것을 요구한다. 만일 이 기리를 잃게 되면, 그는 스스로를 존경하는 권리를 잃는다. 도쿠가와 시대에 있어서는, 각자가 몸에 입고 소유하고 또는 사용하는 모든 것을 일일이 자세하게 규명한 사치 금지법을 자기 자존의 일 부로서 수락하는 의미하였다. 미국인은 이러한 일을 세습적인 계급적 지위에 의하여 규정하 는 법률에는 대단한 충격을 받는다. 미국에서는 자존이란 자기 지위를 향상시키는 것과 밀 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고정된 절제령은 우리들 사회의 근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우 리들은, 어떤 계급의 백성은 어린아이에게 이런저런 인형을 사주어야 한다, 또는 다른 계급 의 백성은 별개의 인형을 사야만 한다고 규정한 도쿠가와 시대의 법률에 소름끼친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규정에 의거해서 똑같은 결과를 거두고 있다. 우리들은 공장 주인의 아이는 전기 열차 세트를 가지며, 소작농의 아이는 수수깡으로 만든 인형으로 만족하는 것 을 비판없이 승인하고 있다. 우리들은 수입의 차이를 승인하고 그 차이를 당연한 것으로 생 각하고 있다. 좋은 월급을 받는 것이 우리들 자존 체계의 일부가 된다. 인형의 종류가 소득 에 의해 제한되어 있더라도 그것은 결코 우리들의 도덕 관념에 위반되지 않는다. 부자가 된 사람은 고급 인형을 아이에게 사 준다. 일본에서는 부자가 되는 것은 무언가 의심을 받지만, 가난한 사람도 역시 계층제의 관례를 준수함으로써 그들의 자존심을 확보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인에게서는 볼 수 없는 덕으로서 프랑스인 토크빌은 1830년대에 앞에서 기술 한 바 있는 책에서 이 점을 지적하였다. 18세기에 프랑스에서 태어난 토크빌은 평등의 원칙 위에 선 미국에 대해 관대한 논평을 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귀족 제도적인 생활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사랑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미국은 여러 가지 훌륭한 미덕을 지니고 있지만 진정한 존엄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존엄성이란 항상 너무 높지도 너 무 낮지도 않는 자기에게 알맞은 지위를 점한다는 일이다. 따라서 이것은 왕이나 백성이나 어떤 사람에게도 가능한 일이다." 토크빌이라면 계급 차별은 그 자체에 있어서는 결코 굴욕 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는 일본인의 태도를 이해하였을 것이다. 여러 민족의 문화를 객관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진정한 존엄성'이란 민족에 따라 그 내용도 달라진다는 것, 즉 그것은 마치 그들 각 민족이 무엇이 굴욕인가를 그 나름대로 규정하는 것이 인정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인 중에는, 일본인에게 자존심을 갖 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미국식의 평등주의 원칙을 채용하도록 해야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민족적 자기 중심주의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만일 이들 미 국인이 원하는 것이 그들의 말처럼 일본인에게 자존심을 갖게 하는 것이라면 그들은 일본인 의 자존심의 근저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들은 일찍이 토크빌이 인정한 것처 럼, 이러한 귀족 제도적인 '진정한 존엄성'이 근대 세계에서 소멸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또 다른 그보다 훌륭하다고 우리가 믿는 존엄성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 할 수 있다. 일본에도 또한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은 오늘날 우리 들의 기초 위에서가 아니라, 일본 자신의 기초 위에서 그 자존심을 재건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그것을 일본의 특유한 방법으로 순화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름에 대한 '기리'는 또한 알맞은 지위에 대한 채무 이외에 다양한 채무를 수행하는 것 을 포함한다. 돈을 빌리는 사람이 돈을 빌릴 때 이름에 대한 '기리'를 저당잡히는 수가 있 다. 2,30년 전만 해도 그것은 "만일 돈을 갚지 못하면 대중 앞에서 조롱당해도 좋다."는 문 구가 보통 씌어졌다. 다만 실제로는 돈을 갚을 수 없는 경우에도 말대로 조롱거리가 되는 일은 없었다. 일본에서는 공개적으로 웃음거리가 되는 관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빚을 깨끗이 갚지 않으면 안 되는 기한인 설날이 다가오면, 변제불능의 채무자는 '이름을 더럽히 지 않기' 위해서 자살하는 일이 있었다. 오늘날에도 섣달 그믐에는 자신의 명성을 구하기 위하여 그런 수단을 취사는 자살자가 속출한다. 모든 종류의 직업상 채무에도 이름에 대한 '기리'가 수반된다. 특별한 사정에 의하여 누군가가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게 되고 많은 사 람들의 비난을 받게 되는 경우에는 일본인은 때때로 엄청난 요구를 할 때가 있다. 한 예를 들면, 학교에서 화재가 발생해-화재에 대한 책임은 전연 없지만-모든 교실에 걸려 있는 천 황의 사진이 타 버렸다는 이유만으로 자살한 교장이 많이 있다. 교사 중에도 또한 이 사진 을 구해내기 위하여 불타는 교사로 뛰어들다가 타 죽은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이들은 죽음으 로써 그들이 이름에 대한 '기리'와 천황에 대한 '주(충)'를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는가를 증 명하였던 것이다. 또한 교육칙어나 군인칙유를 봉독하다가 중간에 잘못 읽고는, 자살을 함으 로써 오명을 씻은 사람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현재의 천황의 치세에서도 자식의 이름을 우연히 히로히토라고 지었다가(일본에서는 천황의 이름을 결코 입에 올리지 못한다)그 아이와 더불어 자결한 사람이 있었다. 전문가로서 이름에 대한 '기리'는 일본에선 대단히 엄격한 것이지만, 반드시 그것은 미국 인이 고도의 전문적 능력으로서 이해하고 있는 것에 의해서 유지될 필요는 없다. 교사는 " 나는 한 교사로서 이름에 대한 '기리'대문에도 그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이 말의 의미는 만일 개구리가 무슨 종에 속하는가를 그가 모르더라도 알고 있는 체하지 않 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 교사가 기껏 몇 년간 학교에서 배운 지식으로써 영어를 가 르치고 있어도, 그는 누가 자기의 틀린 점을 정정하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교사로서의 이름에 대한 기리'가 가리키는 것은 특히 이와 같은 자기 방어의 태도이다. 실업가 또한 실 업가로서의 이름에 대한 '기리'로, 그의 자산이 고갈되어 위기에 빠져 있다던가, 그가 자신 의 회사를 위해 세운 계획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든 알게 할 수 없다. 또한 외교관 은 '기리' 때문에 자신의 외교 방침의 실패를 인정할 수 없다. 이처럼 '기리'의 모든 용법에 서는, 공통적으로 한 인간과 그가 하는 일이 극단적인 동일시되고 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 의 행위 또는 능력에 대한 비판은 자동적으로 그 인간 자체에 대한 비판이 된다. 이와 같은 실패나 무능의 오명에 대한 일본인의 반응과 똑같은 태도가 미국에서도 가끔 발견된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으로부터 나쁜 말을 들으면 미친 듯이 화를 내는 사람이 있 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미국인들은 일본인처럼 자기 방어에 급급하는 일은 드물 다. 만일 교사가, 개구리가 어떤 종에 속하는지 모르면, 가령 자신의 무지를 감추고 싶은 유 혹에 지는 경우라도, 본심은 그가 알고 있는 체하기보다는 정직하게 알지 못한다고 하는 편 이 훌륭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실업가는 만일 전에 해 본 방침이 흡족하지 못하면 다시 새 로운 다른 지시를 내리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해 온 일이 옳았다고 말 하지 않으면 자존심을 지킬 수 없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또 만일 자기의 잘못을 인정한다 해도 사표를 내든지 은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 자기 방어라는 것이 대단히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그 면전에서 그가 직업상의 과오를 범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으로 행하여지는 예의이며 또한 현명한 사람이 취하는 태도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경 과민은 경쟁에 진 경우에 특히 현저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취직할 때 자 기 이외의 사람이 채용되었다든가, 또는 당사자가 경쟁 시험에 떨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 경 우가 있다. 그러나 패자는 그런 실패 때문에 '창피를 당한다.' 이러한 창피는 분발의 강한 자극이 되는 경우도 있으나, 많은 경우는 의기 소침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그는 자신을 잃 고는 의기소침하게 되든지 화를 내든지 혹은 동시에 이 두 가지 상태에 빠진다. 그의 노력 은 저해된다. 미국인에 있어서 특히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경쟁은 우리 자신의 생활 구조 속에서 거둬들이는 정도의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효과를, 일본에선 거둬들일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경쟁을 '좋은 일'로 생각하고 크게 의지한다. 심리 적 태스트는, 경쟁이 우리들을 자극시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 자극이 있는 경우는 작업 능률을 향상시킨다. 우리들의 경우, 혼자서 일을 하게 될 때에는, 경쟁자가 있는 경우에 달성하는 만큼의 성적을 올릴 수 없다. 그런데 일본에서의 테 스트 결과는 그 반대의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일은 특히 소년기가 끝난 뒤의 시기 에 있어 현저하다. 일본의 어린이는 경쟁을 장난처럼 생각하고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그 런데 청년이나 성인의 경우에는 경쟁자가 있으면 작업 능률이 뚝 떨어진다. 혼자서 할 때에 는 비교적 좋은 진보를 보이고 틀리는 경우도 적고, 속도도 빨랐던 피험자가, 경쟁 상대화 함께 하면 자주 틀리고 속도도 느려진 것이다. 반면 그들은 그들의 진보를 그들 자신의 성 적과 비교하여 측정할 때에 가장 좋은 성적을 올렸다. 그러나 타인과 비교 측정하는 경우에 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 실험을 실시하였던 몇 사람의 일본인 학자는 경쟁 상태에 놓인 경우에 어째서 이처럼 성적이 나쁜가 하는 이유를 올바르게 분석하고 있다.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문제를 경쟁적 으로 하려고 하면 피험자들은 질지도 모른다는 위험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 일이 손에 잡 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민감하게 경쟁을 자신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공격이라 여긴다. 여기에서 그들은 그들이 종사하는 일에 전념하는 대신에 그들의 주의력을 자신과 공격자와의 관계에 빼앗기는 것이다. 이 테스트를 받은 학생들은 실패한 경우의 치욕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 경향을 보였다. 교사나 실업가가 각각 전문가로서의 이름에 대한 '기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처럼, 그들은 학 생으로서 그들의 이름에 대한 '기리'가 명령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시합에 진 학생 팀 또한 이 실패의 치욕 때문에 상당히 극단적 행동을 하였다. 보트 선수는 노를 버리고 보트 에 탄 채로 분해서 운다. 야구 시합에서 진 팀은 한 덩어리가 되어 큰 소리로 마구 운다. 미 국에서라면 우리들은, 그것을 좋지 않은 패자의 태도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들의 예절로서는 패자는, 당연히, 역시 힘센 팀이 이겼다고 선언하는 것을 기대한다. 패자는 승자와 악수하는 게 예의로 되어 있다. 우리는 아무리 지는 것이 싫더라도, 졌다고 해서 울거나 소리지르는 사람을 경멸한다. 일본인은 옛부터 늘 무엇인가 교묘한 방법을 궁리하여 직접적인 경쟁을 피하려 하였다. 일본의 국민 학교에서는, 경쟁의 기회를 미국인에게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있다. 일본의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각자 자신의 성적을 더 좋게 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다른 아이와 비교하는 기회를 주면 안 된다는 지시를 받고 있다. 일본 국민 학교에서 는 학생을 낙제시키지 않는다. 함께 입학한 아동은 국민 학교 교육의 모든 과정을 함께 받 고 함께 졸업한다. 성적 통지표에 표시된 학생의 성적 순위는 품행을 기준으로 하는 것으로 서, 학업 성적에 따른 것이 아니다. 중학교 입학 시험의 경우처럼 아무래도 경쟁 상태를 피 할 수 없을 때에는 아이들의 긴장은 물론 대단하다. 어느 교사든지, 불합격이란 사실을 알고 자살을 시도한 소년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이러한 직접적 경쟁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는 노력은 일본인의 생활 모든 면에 나타난다. 미국인에게 가장 좋은 명령은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인 반면, '온(은)' 에 입각하는 윤리에는 경쟁을 허용하는 여지가 아주 적다. 각 계급이 준수해야 하는 규칙을 세밀하게 규정한 일본의 계층 제도 전체가 직접적 경쟁을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있다. 가족 제도 또한 그것을 최소한도로 제한하고 있다. 가족 제도 또한 그것을 최소한도로 제한하고 있다. 왜냐하면 제도상으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미국처럼 경쟁 관계에 놓여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배척하는 일은 있으나 경쟁하는 일은 없다. 일본인은, 미국인 가정에 서 아버지와 자식이 자가용을 사용하려고 경쟁하거나 경쟁적으로 어머니와 아내의 주의를 끌고자 하는 것을 보고 놀란 투로 논평을 가한다. 어디에든지 나타나는 중개자 제도는, 서로 경쟁하고 있는 두 사람이 서로 직접 얼굴을 맞 대는 것을 막는 두드러진 방법의 하나이다. 만일 실패하면 치욕을 느끼게 되는 경우에는 언 제나 중개자가 필요해진다. 따라서 중개자는 혼담, 구직, 퇴직, 무수한 일상적 사무의 결정 등 수많은 경우에 알선의 책임을 맡는다. 이 중개자가 당사자 쌍방에게 상대방의 의향을 전 한다. 결혼과 같은 중요한 거래에는 쌍방이 각기 자기측의 중개자를 내세운다. 그리하여 중 개자끼리 자세한 절충을 끝낸 후에 각기 자기측에 보고한다. 이처럼 간접적인 거래를 함으 로써, 당사자들은 혹시 직접 이야기하면 이름에 대한 '기리' 때문에 아무래도 화를 내지 않 을 수 없는 요구나 비난을 모르고 지난다. 중개자 또한 이와 같은 공적인 능력을 발휘함으 로써 신망을 얻고 알선에 성공하면 사회의 존경을 받는다. 중개자는 일을 잘 마무리짓는 데 에 자신의 체면을 걸고 있으므로 더한층 무사하게 협정이 성립되도록 노력한다. 중개자는 같은 방법으로, 취직을 부탁하는 사람을 위해 고용자의 의향을 알아내기도 하고, 혹은 퇴직 하고자 하는 피고용자의 의사를 고용자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름에 대한 '기리'가 문제가 될 듯한 수치를 발생시키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온갖 종류의 예의가 짜여져 있다. 이처럼 최소한으로 그치게 하는 이들 사태는, 단지 직접적 경쟁의 경우 뿐 아니라 그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 미치고 있다. 일본인은, 주인은 손님을 맞 아들일 때에는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일정한 의식으로써 반갑게 맞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고 생각한다. 따라서 농부의 집을 방문했을 때, 농부가 작업복을 입은 채로 있으면 잠시 기 다려야만 한다. 농부는 그가 적당한 옷을 입고 적당한 예의를 차리기까지에는 아는 체를 하 지 않는다. 그것은 주인이, 손님을 기다리게 한 방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알맞은 몸차림을 하기 전에는, 그는 그 장소에 있지 않은 것으로 되는 것이다. 또한 시골에 서는 가족이 모두 잠들고 처녀가 침상에 든 뒤인 깊은 밤에 동네 총각이 처녀를 방문하는 풍습이 있다. 처녀는 총각의 말을 들어 주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하는데, 그때 총각은 수건으 로 얼굴을 가림으로써 설사 거절을 당해도 다음날 수치를 느끼지 않도록 한다. 이 변장은 처녀에게 누구인지 발각되지 않기 위한 일은 아니다. 그것은 타조가 모래에 머리를 처박는 속임수처럼 뒤에 치욕을 당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인정하는 궁지에 빠지지 않으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어떠한 계획이건 성공이 확실해지기까지는 될 수 있는 한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는 예절을 요구한다. 결혼 중매인의 임무 가운데 하나는, 혼약 이 이루어지기 전에 장래 신랑, 신부 될 사람을 대면시키는 일인데, 이 대면을 우연한 것으 로 여겨지도록 모든 수단이 강구된다. 그 까닭은 만약 소개하는 의도가 이 단계에서 공개되 었는데 만약 파혼이라도 되면, 한쪽 집 또는 쌍방 집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 이다. 젊은 남녀가 만나는 데는 각각 부친이나 모친 또는 양친이 함께 만나게 되는데 중매 인은 주인 역을 맡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가장 편리한 방법은 연중 행사인 국화 전람회 나 벚꽃놀이, 또는 이름난 공원이나 오락장에서 우연히 일동이 '서로 만났다'는 듯이 꾸미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방법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하여 일본인은 실패로 인해 치욕을 초래하는 기회를 피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서 모욕받은 오명을 씻는 의무를 대단히 강조하 고는 있으나 실제로는 이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될 수 있는 한, 모욕을 느끼는 기회가 적어 지도록 일을 처리하게 한다. 이 점은 일본과 거의 비슷하게 오명을 씻는 데 중점을 두는 태 평양 여러 섬의 많은 부족과 비교할 때 뚜렷하게 다른 점이다. 이들 원예를 생업으로 하는 뉴기니와 멜라네시아의 미개한 여러 민족 사이에는 화를 낼 수밖에 없는 모욕이 부족 또는 개인의 행동을 촉발하는 주동력이 되어 있다. 부족적인 축하연의 개최도 이 동력이 발동되 지 않으면 행해지지 않는다. 그 방법은 어떤 마을이 다른 마을을 향하여, 너희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겨우 열 명의 손님도 대접할 수 없다, 너희들은 구두쇠이기 때문에 타로 토란이나 야자 열매를 감춰 두고 있다. 너희들 지도자는 바보이기 때문에 하려고 해도 잔치를 열수 없다는 투로 온갖 욕을 퍼붓는다. 그러면 도전을 받은 마을에서는 호화스러운 과시와 환대 로, 참석자 전원을 압도시킴으로써 그 오명을 씻는 것이다. 혼담이나 경제적 거래도 같은 방 법으로 이루어진다. 싸움을 할 때에도 비슷하여, 서로 활시위에 화살을 재기 전에 끔찍한 욕 을 퍼붓는다. 그들은 정말 보잘것없는 일로도 사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처럼 벼른다. 그것은 강력한 행동의 동기가 되며, 이러한 동기를 가진 부족은 때로 큰 생활력을 지닌다. 그러나 이들 부족을 예의바른 민족이라 한 사람은 아직 없다. 일본인은 그 반대로 예의바름의 모범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뚜렷한 예의바름은 그들이 오 명을 씻지 않으면 안 되는 기회를 얼마나 극단적으로 제한하고 있는가를 평가하는 척도가 된다. 그들은 모욕이 불러일으키는 분노를 성공의 더없는 자극제로 삼고 있지만, 그러나 그 것을 필요로 하는 사태를 제한하고 있다. 그것은 특별한 경우나 혹은 그것을 제거할 수 있 는 전통적 수단이 어떤 힘에 의해 방해되고 좌절된 경우에만 일어난다. 이러한 자극의 이용 이 일본이 극동에서 획득할 수 있었던 지배적 지위 및 최근 10년 간의 영국과 미국에 대한 전쟁 정책에 공헌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인의 모욕은, 일본보다 도 무슨 일이든지 간에 모욕을 이용하는 뉴기니의 부족에게 적절히 들어맞는 것이다. 따라 서 이번 패전 이후, 일본이 취할 행동에 관한 서구인의 대부분의 예측이 완전히 빗나간 것 은, 일본인이 이름에 대한 '기리'에 대해 가하고 있는 특수한 제한을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 이다. 일본인은 분명히 예의바른 국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인은 비방에 대한 그들의 민감성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미국인은 매우 가벼운 마음으로 서로 욕을 하곤 한다. 그것은 일종의 유희 같은 것이다. 우리들로서는 일본인이 왜 아무것도 아닌 말을 그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일본인 화가 마키노 요시오가 영어로 써서 미국에 출판된 바 있는 자서전 속에는, 그가 '조소'라고 해석한 사건에 대한, 아주 일본인다운 반응이 생생 하게 묘사되고 있다. 이 책을 쓸 때 그는 이미 그의 성년기 대부분의 생활을 미국과 유럽에 서 보낸 후이지만, 그는 이 사건을 마치 고향인 아이치현의 시골 읍에 있는 것처럼 강렬하 게 느꼈다. 그는 상당한 신분이 있는 지주의 막내아들로서, 행복한 가정에서 덧없는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겨우 유년기가 지났을 무렵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파산을 당하여 부채를 갚기 위해 재산을 몽땅 팔아버렸다. 일가는 흩어졌다. 그리 하여 마키노에겐 자신의 야심을 실현해 줄 수 있는 한푼의 돈도 없었다. 그의 야심의 하나 는 영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그는 부근의 미션스쿨에 몸을 의탁하고 영어를 배우기 위해 문 지기 일을 하였다.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그는 그때까지 두어 개의 읍밖에는 나가 본 일이 없었으나 미국에 갈 결심을 하였다. 나는 누구보다도 가장 신뢰하고 있던 선교사 한 분을 찾아갔다. 나는 그 선교사에게 미국 에 가고 싶다는 뜻을 털어놓았다. 아마도 무언가 유익한 정보를 가르쳐 줄 것이라고 기대했 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단히 실망스럽게도 그 선교사는, "뭐야? 너 따위가 미국에 가고 싶다 고?"하고 소리질렀다. 선교사의 부인도 같이 있었는데 두 사람이 함께 나를 '조소'하였다. 그 순간 내 머리 속에 있는 피가 전부 발끝까지 내려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2,3초 동안 잠자코 그 장소에 서 있었다. 그리고 나서 인사도 하지 않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나는 "만 사는 이제 끝났다."라고 나 자신에게 말했다. 그 다음날 아침, 나는 도망을 쳤다. 여기에 그 이유를 써두고 싶다. 나는 늘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불성실'이라고 믿고 있었다. 더구 나 조소처럼 불성실한 것은 없다. 나는 늘 상대의 분노를 용서한다. 곧잘 화를 내고 마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누가 나에게 거짓말을 한 경우에도 대체로 용서해 준다. 그 이유는 인간의 성격은 정말 약 하고, 곤란에 직면하면 마음을 굳게 가질 수 없어서 누구나 거짓말할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누가 나에게 대해 근거 없는 소문을 내든가 험담을 하는 경우에도 용서한다. 그 것은 누구든 다른 사람이 그렇게 설득당하게 되면, 정말 쉽게 빠지는 유혹이기 때문이다. 살 인자까지도 사정에 따라서는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조소만은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왜 냐하면 고의적인 불성실이 아니고서야 죄 없는 인간을 조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 들에게 내 나름대로 두 단어의 정의를 들려 드리고 싶다. 살인자-그는 어떤 사람의 '육체' 를 살해한 인간이다. 조소자-그는 타인의 '혼'과 '마음'을 살해한 인간이다. 혼이나 마음은 육체보다 훨씬 귀한 것이다. 따라서 조소는 가장 큰 죄이다. 실제로 그 선교사 부부는 나의 혼과 마음을 살해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에 대단한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내 마음은 "왜 '너 따위가'라고 말하는가?"라고 외쳤다. 그 다음날 아침, 그는 지니고 있었던 물건을 몽땅 보따리에 싸 가지고 떠났다. 그는, 그 선교사가 돈 한푼 없는 시골 소년이 화가가 되기 위해서 미국에 간다는 일에 대해 취한 불 신의 태도에 의해서, '살해되었다'고 느꼈다. 그의 이름에는 그가 그 목적을 수행하지 않고 는 도저히 지워질 수 없는 오점이 찍혔다. 선교사에게 '조소'를 받은 이상 그 땅을 떠나서, 훌륭히 미국에 갈 능력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 이외에 그에게는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이 다. 그는 'insincerity(불성실)'란 영어 단어를 써서 선교사를 비난하고 있지만, 우리들에게는 이 말이 이상한 느낌으로 읽힌다. 우리들에게는 그 미국인의 놀람은 우리들이 그 말을 이해 하고 있는 의미에서는 완전히 'sincere(성실한, 정직한)'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 나 그는 이 말을 일본인적인 의미에서 쓰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은 항상 별로 상대방에게 싸움을 걸 생각도 없으면서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을 성실치 못한 인간이라 생각한다. 그 러한 조소는 무엄한 것이며 '불성실'의 증거이다. "살인자라도 사정에 따라 용서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조소만큼은 전연 변명의 여지가 없 다." '용서'가 올바른 태도가 아닌 이상, 비방에 대한 유일하게 가능한 반응은 복수이다. 마 키노는 미국에 감으로써 그 오명을 씻었다. 복수는, 누구에게서 모욕이나 패배를 당했을 경 우에는 독자를 상대로 책을 쓰고 있는 일본인은 때로는 생생한 비유를 써서 일본인의 복수 에 대한 태도를 묘사하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박애심이 많았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던 니토베 이나조는 1900년에 저술한 책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복수에는 무엇인가 우리 들의 정의감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 있다. 우리들의 복수 관념은 우리의 수학적 능력처럼 엄 밀한 것으로서, 방정식의 두 변이 만족되지 않는 한, 우리들은 무언가 못다 한 것이 남은 듯 한 느낌을 덜어버릴 수 없다." 오카쿠라 요시사부로는 <일본의 생활과 사상>이란 제목의 저서 속에 복수를 일본의 독특한 하나의 관습으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일본인의 이른바 심리 특이성의 대부분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점과 표리 일체인 불결한 것을 미워하는 태도에 기인한다. 정말로 그렇게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실제로 우리 들은 집안의 명예이든 국가적 긍지이든 간에 거기에 가하여진 모욕을, 변명을 통해서 완전 히 씻어낼 수가 없으면, 본래대로 깨끗해지거나 완전히 치유할 수 없는 오점이나 상처로 여 기도록 길들여져 왔다. 일본의 공사 생활 중에서 아주 빈번하게 만나는 여러 경우의 복수들 은, 깨끗함을 좋아한 나머지 결벽이 되어 버린 국민이 행하는 아침 목욕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시금 말을 이어서, "이렇게 하여 일본인은 활짝 핀 벚꽃처럼 상큼하고 아 름답게 보이는, 맑고 더러움이 없는 생활을 한다."라고 쓰고 있다. 바꿔 말하면, 이 '아침 목 욕'은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던진 흙탕을 씻어 내는 것으로서, 조금이라도 흙탕이 묻어 있 는 동안에는 당신은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인은, 사람이란 스스로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모욕받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사람을 모욕하는 것은 '당자로 부터 나오는 것'뿐이요,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향하여 말하거나 행하거나 하는 일이 아니 라는 것을 가르치는 윤리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일본의 전통은 끊임없이 일반 민중 앞에 이 복수의 '아침 목욕'의 이상을 내세운다. 무수 한 사건이나 영웅 이야기, 그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47로닌 이야기>라는 역사물로, 누구에게나 알려져 있다. 이들 이야기는 학교의 교과서에 수록되어 읽혀지고 극장에서 상연 되며, 현대 영화로 제작되고 통속 출판물로서도 간행된다. 그것은 오늘날 일본의 살아 있는 문화의 일부분이 되어 있다. 이들 이야기의 대부분은 우연한 실패에 대한 과민성에 관한 것이다. 이를테면 어느 다이 묘가 3명의 가신들에게 어떤 명검의 제작자를 알아맞히게 하였다. 세 사람의 의견은 각각이 었다. 그리하여 그 방면의 전문가를 불러오게 되었는데, 그 칼의 제작자를 무라마사라고 옳 게 알아맞힌 사람은 나고야 산자 뿐이었다. 감정을 잘못한 다른 두 사람은 그것을 모욕으로 느끼고 산자의 목숨을 노리기 시작하였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산자가 자고 있는 틈에 쳐 들어가 산자의 칼로서 그를 찔렀다. 산자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으나 산자를 습격한 사람 은 그 후에도 복수를 하려고 전력을 다한다. 결국 그는 산자를 죽이고 그의 '기리'를 만족시 켰다. 다른 이야기들은 자신의 주군에 대한 보복의 필요성에 관한 것이다. 일본의 윤리에서 '기리'란 가신이 그의 주군이 죽을 때까지 충성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가신이 주군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느끼게 되면 갑자기 터무니없는 증오로 일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도쿠가와 의 초대 쇼군이었던 이에야스에 관하여 전해 오는 이야기 속에 좋은 예가 있다. 이에야스의 가신 한 사람이, 이에야스가 그를 '그자는 생선가시가 목에 걸려 죽을 그런 놈'이라고 말하 였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사무라이의 체면에 관계되는 품위가 없는 방법으로 죽을 것이라 는 비방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 가신은 이 모욕을 그의 생애를 통해서, 아니 죽어서도 잊지 말자고 맹세하였다. 당시 이에야스는 새로운 수도 에도에서 국내 통일사업을 진행하고 있던 때여서, 아직 적은 완전히 소탕되지 않고 있었다. 그 가신은 적군의 영주들과 내통함으로써 그는 자기의 '기리'를 만족시키고, 이에야스에게 보복한 것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본의 충성에 관한 서양인의 의론이 대개 공론이라는 점은, '기리'가 단순히 충성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배반을 명령하는 덕이라는 점을 간과한데 있다. 그들은 "매를 맞 은 사람은 모반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모욕을 당한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역사물에 나오는 이러한 두 가지 주제-자신이 잘못한 경우에 옳았던 인간에 대해 복수하 는 일, 설령 상대가 자기의 주군이더라도 모욕에는 복수한다는 것-는 일본 문학에서 가장 잘 알려진 상투적인 주제로서 여러 가지 양상으로 서술되고 있다. 그런데 현대의 신변 이야 기들이나 소설들, 그리고 실제 사건들을 조사해 보면, 일본인은 옛 이야기에서는 복수를 크 게 찬양하고 있으나, 실제 복수가 행하여지는 일은 오늘날 서구 여러 나라와 같은 정도로,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적은 것이 분명하다. 이 사실은 명예에 관한 강박 관념이 약해졌다 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실패나 모욕에 대한 반응이 공격적이 아닌 방어 적인 경우가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인은 여전히 심각하게 치욕을 느끼지만, 그 때문에 싸움을 시작하기보다는 자신의 활 동을 자제하는 경우가 더욱 많아지고 있다. 복수의 목적으로 직접 공격을 가하는 것은 법률 이 시행되지 않았던 메이지 이전의 시대에 가능성이 많았다. 오늘날에 와서는 법과, 질서와, 예전보다는 훨씬 상호 의존적이 된 경제 생활을 영위하는 곤란성 때문에 복수는 은밀한 것 이 되거나 또는 자기 자신의 가슴에 묻어 두는 경향이 많아졌다. 원수에게 똥을 먹인 옛 이 야기처럼, 슬며시 원수에게 나쁜 장난을 함으로써 은밀히 복수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이 이야 기의 주인공은 원수에게 들키지 않도록 교묘하게 좋은 음식 속에 똥을 넣어 대접하고 상대 가 알아차렸는가를 살폈다. 손님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은밀한 공격까지도 오늘날에 와서는 그 공격을 자기 자신에게 향하도록 하는 경우보다 드물게 되었 다. 공격을 안으로 향하는 것에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즉, 그것을 '불가능'의 실현에 자신 을 채찍질하는 회초리로 이용하던가, 또는 그것 때문에 완전히 마음을 썩혀 버리고 말든 가 이다. 일본인은 실패나 비방, 배척 때문에 상처받기 쉽다. 따라서 너무도 쉽게, 타인을 괴롭히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많다. 최근 수십 년 간 일본 소설 중에는, 교양 있는 일 본인이 빈번히 자기를 잃고 분노를 폭발시키기도 하고, 반대로 극단적인 우울에 빠져들기도 하는 모습이 되풀이 묘사되고 있다. 이들 소설의 주요 인물들은 권태를 느낀다. 매일의 생활 에 싫증나고 가정에 싫증나고 도시에 싫증나고 시골에 싫증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마 음에 그려져 있는 위대한 목표에 비하면 일체의 다른 노력들이 시시하게 보이는, 저 높은 이상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권태는 아니다. 즉, 그것은 현실과 이상간의 너무 큰 차이에서 생기는 권태가 아닌 것이다. 일본인은 중대한 사명을 꿈꿀 때 권태를 잊는다. 그들은 그 목 표가 아무리 원대한 것일지라도 권태를 완전히 자취도 없이 잊어버린다. 이러한 일본인 특유의 권태는 과도하게 상처받기 쉬운 국민 공통의 병이다. 그들은 배척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그들 내부로 돌려 스스로를 괴롭힌다. 일본 소설에 묘사된 권태 는, 현실 세계와 이상 세계 사이의 큰 차이가 주인공이 경험하는 여러 가지 권태의 기초가 되고 있는 러시아 소설에서의, 우리에게 친근한 권태와는 아주 다른 심적 상태이다. 조지 샌 섬(George Sansom)은, 일본인들이 이 현실과 이상의 대립에 관한 감각이 결여되어 있다고 쓴 일이 있는데, 그것은 일본인 권태의 근저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일본인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고, 인생에 대하여 어떠한 일반적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서였다. 분명히 서양인의 근본적인 관념과 대조를 이루는 이 상위점은 여기서 문제로 삼고 있는 특수한 경우를 넘어 그보다도 훨씬 광범한 범위에 미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일 본인이 자칫 빠지기 쉬운 우울과 특히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일본인은 러시아 인과 함께 그 소설 속에 곧잘 권태를 묘사하는 국민인데, 이 점에서 미 국인과 뚜렷한 대조를 나타내고 있다. 미국의 소설가를 이러한 주제를 취급하는 일이 별로 없다. 미국의 소설가는 작중 인물의 불행을 성격적 결함이나 무자비한 세상의 풍파 대문이 라고 생각하여 그 원인을 추구하나, 순수한 권태를 묘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어떤 인간 이 주위와 잘 어울릴 수가 없다는 것을 쓸 때 소설가는 상세하게 그 원인을 묘사하여, 독자 로 하여금 주인공의 어떤 성격상의 결함, 그렇지 않으면 사회 질서 속에 존재하는 어떤 해 악에 대하여도 도덕적 비난을 하도록 유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에도 프롤레타리아 소 설이 있어, 도시에서의 비참한 경제 상태나 고기잡이 배 위에서 벌어지는 무서운 사건에 대 해 항의하고 있는 것도 있으나, 일본의 성격 소설은 어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사람들의 감 정이 대개의 경우 마치 바람에 나리는 독가스처럼 솟아오르는 세계를 폭로하고 있다. 작중 인물이나 작가도 그 어두운 구름의 원인을 추구하기 위하여 주위의 사실들을 분석하거나, 주인공의 경력을 분석할 필요성을 인정치 않는다. 그것은 변덕스럽게 나타났다가는 사라진 다. 그들은 상처받기 수비다. 그들은 옛 이야기의 주인공이 적에게 가하였던 공격을 내면으 로 돌린다. 그리하여 그들의 우울은 그들에게 뚜렷한 원인이 없는 것처럼 생각된다. 우울의 원인으로서 어떤 사건을 지목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 사건은 단순한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는 기묘한 인상을 남긴다. 현대 일본인이 자기 자신에게 대하여 행하는 가장 극단적인 공격 행위는 자살이다. 그들 의 신조에 따르면 자살은, 만일 적절한 방법으로 행해지면 자신의 오명을 씻고, 죽은 후 평 판을 회복한다. 미국인은 자살을 죄악시하고 있어, 미국에서는 자살은 절망에의 자포자기적 인 굴복에 지나지 않지만, 자살을 존경하는 일본인에게 있어서는 명확한 목적을 지니고 행 해지는 훌륭한 행위가 된다. 어떤 경우에는 자살은 이름에 대한 '기리'에서 당연히 선택할 수밖에 없는 가장 훌륭한 행동방식이 된다. 설날에 빚을 갚지 못해 자살하는 채무자, 어떤 불운한 사건에 책임을 지고 자살하는 관리, 끝내 이루지 못할 연애를 동반 자살에 의해 성 취하는 연인, 정부의 대중국 전쟁 지연정책에 죽음으로써 항의하는 우국지사들 등 모두는 시험에 낙제한 학생이나 포로가 되는 것을 피하는 병사와 마찬가지로 최후의 폭력을 자기 자신에게 가하고 있는 것이다. 2, 3명의 일본인은 그 저서에서, l 자살의 경향은 일본에서는 새로운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쉽게 단정할 수 없지만, 통계는 근년의 관찰 자가 그 빈도수를 과대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지난 세기의 덴마크나 나치 이전의 독일 쪽이 일본의 어느 시대보다 자살자 수가 많았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일본인은 자살의 주제를 애호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미국 인이 범죄 사건을 크게 떠들어대는 것처럼 자살 사건을 크게 떠들어대고, 미국인이 범죄에 서 느끼는 대리 경험의 즐거움을 자살에서 느낀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살해하는 사건보다 자신을 죽이는 사건을 화제에 올리기 좋아한다. 그들은 그것은, 베이컨의 말을 빈다면, 그들 이 제일 좋아하는 'flagrant case(중대한 사건)'로 친다. 그것은 다른 행위를 논함으로써는 충족되지 않는 어떤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또한 자살은, 현대 일본에서는 봉건 시대의 역사물 속에서 나오는 자살에 비해 더욱 자학 적이 되어 가고 있다. 이들 이야기에 전해지는 사무라이는, 명예롭지 못한 처형으로부터 몸 을 지키기 위해서 공적 명령에 의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것은 서구에서 적국의 군인이 교수형보다는 총살을 원하고, 또는 적의 수중에 떨어진 경우에 당연히 받을 것으로 생각되 는 고문을 면하기 위하여 자살하는 것과 같다. 무사에게 '하라키리(할복)'가 허락되는 것은 역시 죄를 추궁 당하여 명예를 실추한 프로이센의 장교에게 때때로 비밀리에 권총자살이 허 락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프로이센 장교의 경우에는, 당국자는 그가 이제는 그 방법 외에는 명예를 지킬 희망이 사라졌다고 확신하면, 그의 거실 테이블 위에 한 병의 위스키와 권총을 얹어놓는다. 일본의 사무라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그런 사정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은 단지 수단의 선택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은 면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런데 근대에 있어서는 자살은 죽음의 선택이다. 사람은 때때로 누군가 다른 사람을 살 해하는 대신 폭력을 자기 자신에게 가한다. 봉건 시대에는 용기와 결단의 최후 표명이었던 자살 행위가 오늘날은 스스로 선택한 자기 파멸이 되었다. 최근 5,60년 간, 일본인은 '세상 이 뒤집어졌다'고 느꼈을 때, '방정식의 양면'이 맞지 않는다고 느꼈을 때, 또한 더러움을 씻어내기 위해 '아침 목욕'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때, 타인을 해치는 대신에 스스로를 해치는 일이 점점 더 많아졌다. 자기편으로 승리를 확보해 두기 위한 최후의 논거로서 쓰여지는 자살-이것은 봉건 시대 뿐 아니라 현대에도 행해지는데-까지도 이상과 같은 방향으로 변해 왔다. 도쿠가와 시대에, 막부의 고문관이었던 쇼군의 늙은 스승이, 고문관 일동과 쇼군직 대행자 앞에서 옷을 걷어 살을 내놓고 언제든지 '사라키리'를 할 자세로 시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하루 종일 이렇게 자살 위협을 계속함으로써 결국 자신이 추천한 후보자에게 쇼군직을 계승시킬 수 있 었다. 그는 그렇게 하여 목적을 관철했기 때문에 자살하지 않았다. 서양식으로 말하면, 이 쇼군의 스승은 반대파를 공갈한 것이다. 그런데 현대에서는 이와 같은 항의를 위한 자살은 협상이 아니라 자기 주장에 대한 순교적 행위이다. 그것은 어떤 목적의 달성에 실패한 뒤, 또는 이미 체결된 협정, 이를테면 해군 군비 축소 조약에 반대한 자로서 이름을 기록에 남 기기 위해서 행해지고 있다. 그것은 자살의 위협이 아니고, 실제로 결행함으로써 여론에 영 향을 미치기 위해 연출된다. 이처럼 이름에 대한 '기리'가 위협을 받을 경우, 공격을 자신에게 행하는 경향이 점차 강 해지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항상 자살이라는 극단적 수단만을 취한다고는 할 수 없다. 내면에 향해지는 공격이 단지 우울과 무기력, 교육받은 계급의 일반적 풍조였던 일본 인 특유의 권태를 자아내는 데 지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분위기가 왜 이 계급 사이에 널리 퍼졌는가에는 충분한 사회학적 이유가 있다. 곧, 지식 계급이 과잉 배출되어 그 들은 계층제 속에서 매우 불안정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때문에 그들 중에 자신의 야망 을 만족시킬 수 있는 자는 극히 소수였다. 더욱이 1930년대에는 당국이 인텔리 계급을 '위 험 사상자'로 의심을 하고 감시하여 그들은 이중으로 마음을 상하게 되었다. 일본의 지식인 들은 그들의 좌절을 일본의 서구화가 초래한 혼란에서 온 것이라 했지만, 이 설명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열렬한 헌신에서 극단적 권태로 변하는 것은 일본인 특유의 기분의 격변으로서, 많은 지 식인이 겪어야 했던 심리적 파선은 전통적인 일본인 방식에 따른 것이었다. 1930년대 중반 기, 그들의 대다수가 그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방법 또한 전통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국가주의적 목표를 위하여 공격을 자기 자신의 가슴으로부터 다시 밖으로 향하게 했던 것이 다. 외국에 대한 전체주의적 침략 속에서 그들은 다시금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들 은 불쾌한 기분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속에 새로운 큰 힘을 느꼈다. 그들은 개인적인 관계에 서는 그렇게 되지 못하였으나 정복 민족으로서는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번 전쟁의 결과로서 이 신념이 틀렸다는 것이 입증된 현재, 다시금 이러한 무기 력이 일본에 있어서 큰 심리적 위협이 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태도가 어떠하든 그렇게 쉽게 이 기분을 극복할 수가 없다. 그것은 대단히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도쿄의 한 일본 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더 이상 폭탄이 떨어질 걱정이 없어져서 정말 안심이다. 그런 데 전쟁이 끝나니까 모든 목적이 없어지고 말았다. 모두 어리둥절하고 있고 아무것도 할 일 이 없어진 듯하다. 나도 그렇고 나의 아내도 그렇고, 국민 전체가 입원 환자와 같다. 우리는 모두 무엇을 하든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어리둥절할 뿐이다. 사람들은 정부의 전쟁 후 뒤 처리나 구제 사업이 지지부진 하다고 불평을 하지만, 나는 그 이유가, 관리들도 모두 우리들 과 같은 기분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일본인의 허탈 상태는 해방 후 프랑스 에서 보였던 것과 같은 종류의 위험이다. 항복 후 처음 6~7개월 간 독일에서는 그것이 문제 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문제가 되고 있다. 미국인은 이와 같은 일본인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정말로 믿을 수 없는 것은, 이러한 태도와 함께 일본인들이 전승국에게 그처럼 친선을 나타내고 있 는 점이다.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일본인은 대단한 호의를 가지고 패전에 대한 일체의 결과 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미국인을 따뜻한 인사와 웃음으로 맞아들였고 손을 흔들어 환영하였다. 이들은 침울하거나 분노하고 있지 않았다. 항복을 고한 천황의 조서 속 의 표현을 빌린다면,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감당하고, 참을 수 없는 어려움을 참는"것이 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들은 국내를 정리하는 일이 힘쓰려 하지 않는가? 점령의 조건 속에 그들은 그것을 할 기회가 부여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마을마다 외국 군대가 점령하고 있는 게 아니라 행정권은 그들의 손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들이 해야 할 일을 버려 두고 연합군에게 환영의 뜻을 표하기 위하여 웃음을 짓고, 손을 흔드는 일에 전념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 국민이야말로 메이지 초년에 국가 재흥의 여러 가지 기적을 성취하고, 1930년대에 그처럼 정력을 쏟아 군사적 침략의 준비를 갖추었으며, 태평양 섬들마다 진격하여 그처럼 용맹하게 싸운 국민이었다. 실제로 일본인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인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맹렬한 노력과 단순한 답보 상태인 무기력 사이를, 기분이 흔들림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일 본인의 본성인 것이다. 일본인은 지금에 와서는 패전국으로서의 명예를 옹호하는 데 모든 뜻을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연합국에 대해 우호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그 목적을 가장 안전 하게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에서, "무엇을 해 보더라도 안 될 테니 잠시 제자리걸음으로 형세를 관망하는 것이 제일이다."라는 생각을 갖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다. 무기력은 퍼져 간다. 그러나 일본인은 결코 무기력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기력에서 일어서자.", "다른 사람을 무기력으로부터 일으켜 세우자."라는 말이, 일본에서는 끊임없이 쓰여지는 더 좋은 생활을 위한 구호로서, 전시 중에도 라디오 방송 진행자가 자주 입에 담은 말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방법으로 무기력과 싸운다. 1946년 봄, 일본 신문은 '세계의 눈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는데도 ' 아직까지도 폭격으로 인한 수라장을 정리도 못하고, 어떤 면의 공익 사업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얼마나 일본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인가고 끊임없이 논하고 있다. 또는 집 없는 가족들이 밤에 정거장에 모여 잠을 자는 부끄러운 모습을 미국인의 눈앞에 드러내는 것을 비난한다. 일본인에게는, 이와 같이 그들의 명예심에 호소하는 비평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그들은 또한, 장래 다시 한 번 하나의 국가로서 국제 연합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획득하기 위한 최대의 노력을 경주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하고 있다. 그것은 역시 명예를 회복하기 위 하여 노력하는 일이 되며, 다만 그 방향이 새로운 방향으로 변한 데 불과하다. 장래에 만일 큰 국가 간의 평화가 실현된다면 일본은 이 자존심 회복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인의 영원 불변의 목표는 명예이다. 타인에게 존경을 얻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목적 을 위하여 쓰여지는 수단은 그때의 사정에 따라 취해지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하는 도구들일 뿐이다. 사태가 변하면 일본인은 태도를 일변하여 새로운 진로를 향하여 걸어갈 수 있다. 우 리는 '주의'에 열중하고, 이데올로기상의 사항에 관한 신념에 열중한다. 우리들은 설령 싸움 에 지더라도 여전히 전과 같은 생각을 계속해서 갖는다. 전쟁에 패한 유럽 인들은 어느 나 라에서나 무리를 지어 지하 운동을 계속했다. 소수의 완강한 저항자를 빼고는 일본인은 미 군 점령군에 대하여 불복종 운동을 하거나 지하 운동을 할 필요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락은 주의를 고수하는 도덕적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낡은 주의를 고수하는 도덕적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점령 당초부터 미국인은 혼자서 만원 열차를 타고 일본 벽촌을 여행 해도 위험을 느끼지 않았으며, 이제까지 국가주의에 굳어져 있던 관리들에게서 정중한 예의 로써 환대를 받았다. 아직까지 한번도 복수가 이루어진 일은 없었다. 우리들의 지프가 마을 을 지나면 길가에는 어린아이들이 나란히 서서 "헬로우", "굿바이"하고 소리지른다. 그리고 혼자서 손을 흔들 수 없는 갓난아이의 경우에는, 어머니가 아이의 손을 쥐고서 미국 군인을 향하여 흔들어 준다. 패전 후 일본인의 이러한 갑작스런 전향은 미국인으로서는 아무래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 이기가 어렵다. 그것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수용소에 있던 일본인 포로의 태도 변화보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포로들은 자기들은 일본으로서는 죽은 자 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인간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본을 알고 있던 서구인 중에서 포로의 표면적 성격 변화와 똑같은 변 화가 패전 후의 일본에서도 일어나리라고 예언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일본 은 '승리 아니면 패배'밖에 모를 것이다, 따라서 패전은 일본인의 눈에는, 집요한 필사적인 폭력에 의해 복수해야하는 모욕으로 비칠 것이라고 믿었다. 어떤 사람들은 일본인은 그 국민성을 생각할 때, 어떠한 강화 조건도 수락하지 않을 것이 라고 확신했다. 이들 일본 연구자들은 '기리'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명예를 획 득하는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서, 일본인이 단 한가지, 복수와 공격이라는 두드러진 전통적 수단을 선택하리라 생각했다. 그들은, 일본인의 공격 윤리와 유럽인의 방침을 혼동하였다. 유럽인들은 어떤 개인이나 국가가 싸우는 경우에는, 먼저 그들이 내세운 주장이 영원히 옳 은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가슴속에 축적된 증오나 도덕적 격분에서 힘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일본인은 그 침략의 근거를 다른데서 구한다. 그들은 반드시 세계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을 것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대국이 존경을 얻은 것은 무력에 의해서였다고 생각하고, 이들 나 라에 필적하는 나라가 될 방침을 취하였다. 그들은 자원이 부족하고 기술도 형편없었기 때 문에, 서구 여러 나라 이상의 악랄한 수단을 쓰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들은 비상한 노력을 경주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실패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에게는 결국 침략은 명예를 위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였다. '기리'는 항상 침략 행위의 행사와 상호 존경 관계의 준수를 동 시에 의미하였다. 그리하여 패전에 이르러 일본인은, 분명히 자기 자신에게 심리적 폭력을 가한다는 의식을 전혀 지니지 않고, 전자에서 후자로 방향을 바꾸었다. 지금도 그들의 목표 는 여전히 명성을 획득하는 일이다. 일본은 역사상 여러 가지 경우에서도 같은 태도를 보여 왔다. 그것은 항상 서구인을 당혹 시키는 일이었다. 오랜 기간에 걸친 일본의 봉건적 고집이 종말을 고하고 근대 일본의 막이 오르려는 1862년에, 리처드슨(Ridhardson)이라는 영국인이 사쓰마에서 살해되었다. 사 쓰마 번은 양이 운동의 온상으로서, 사쓰마의 사무라이는 일본 안에서 제일 거만하며 호전적인 인간으로 알려져 있었다. 영국은 보복을 위하여 원정군을 파견하여 사쓰마의 중요한 항구인 가고시카를 포격하였다. 일본인은 도쿠가와 시대를 통하여 계속 화기를 제작하고는 있었으 나, 그것은 구식 포르투갈 대포를 모방한 것이었다. 따라서 사쓰마는 영국 군함의 상대가 못 되었다. 그런데 이 폭격은 의외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사쓰마 번은 영국에 대한 영원한 복수 를 맹세하는 대신에 오히려 영국과의 우호를 청하였다. 그들은 적의 강대함을 발견하고 적 의 가르침을 받으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영국과 통상관계를 맺고, 다음 해에는 사쓰마에 학 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한 일본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학교에서는 서양의 과학과 지식의 신비를 가르쳤다......나마무기 사건을 기연으로 한 우호관계는 더욱더 깊어갔다." 나 마무기 사건이란 영국의 사쓰마 보복과 가고시마 포격 사건을 말한다. 이것은 결코 고립된 사례는 아니다. 가장 호전적이고 가장 맹렬한 외국인 혐오라는 면에 서 사쓰마와 다투었던 또 하나의 번은 조슈였다. 이 두 번은 왕정 복고의 기운을 빚어 낸 선봉이었다. 그런데 공적인 권력을 갖지 못한 조정은, 1863년 5월 11일을 기하여 쇼군은 일 본 국토에서 일체의 오랑캐를 쫓아내야 한다는 칙명을 내렸다. 쇼군의 막부는 이 명령을 무 시하였으나, 조슈 번은 무시하지 않았다. 조슈는 그 연해를 항해하며, 시모노세키 해협을 통 과하는 서구의 상선을 향하여 요새로부터 포화를 퍼부었다. 일본의 대포나 탄약은 wdj말 유 치한 것이었기 때문에 외국선이 피해를 입지는 않았으나, 조슈를 응징하기 위하여 서구 제 국은 연합하여 함대를 보내 쉽게 요새를 분쇄하고 말았다. 포격은 사쓰마의 경우와 같이 기 묘한 결과를 초래했다. 서구 제국이 300만 달러의 배상금을 요구했는데도 그것이 성립되었 다. 사쓰마 사건과 조슈 사건에 관하며 노먼(Norman)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양이의 선봉이었던 이들 번이 취한 표변의 배후에 어떠한 복잡한 동기가 숨어있다 해도, 이 행동이 입증하는 현실주의와 냉정성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상황적인 현실주의는 일본인의 이름에 대한 '기리'의 밝은 면이다. 달과 같이 ' 기리'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다.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인 배척 법안을 만들게 하고, 해군 군축 조양을 크나큰 국가적 치욕으로 느끼게 하고, 마침내는 그처럼 불행한 전쟁 계획 에 내몰게 한 것은 그 어두운 면이었다. 1945년에 항복의 여러 결과를 호의를 지니고 받아 들일 수 있게 한 것은 그 밝은 면이다. 일본은 변함 없이 일본 특유의 방법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 일본의 저술가나 평론가들은 여러 가지 '기리'의 의무 속에서 어떤 것만 을 선택하여 그것을 서구인에게 부시도(무사도), 즉 문자 그대로 사무라이의 길이라 표현하 였다. 이것은 몇 가지 이유에서 오해를 가져올 위험이 있다. '부시도'라는 명칭은 근대에 와 서 처음으로 나타난 공인된 표현으로서, '기리에 몰려서'라든가, '단지 기리 때문에' 도는 ' 열심히 기리를 위하여 다한다.'라는 표현 등이 일본에서 가지고 있는 뿌리깊은 민족적 감정 을 그 배후에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기리'의 복잡성과 다양한 뜻을 포괄 하지 않는다. 그것은 평론가의 창작이다. 또한 이 말은 국가주의자와 군국주의자의 슬로건이 되었기 때문에, 이들 지도자들이 신망을 잃음에 따라 '부시도'의 개념 또한 불신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결코 일본인이 이후에는 '기리를 안다'는 것을 그만둔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오늘날처럼 서구인에게 있어 일본에서의 '기리'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이 중요한 때는 없다. '부시도'와 사무라이의 동일시 또한 오해의 근원이었다. '기리'는 모든 계급의 공통된 덕 이었다. 일본의 다른 모든 의무나 규율과 마찬가지로, '기리'는 신분이 높아질수록 '더욱 무 거워'지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모든 계층에 요구된다. 적 어도 일본인 이외의 관찰자는 그것과 정반대로, '기리'는 서민에 대해 가장 큰 희생을 요구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왜냐하면, 외국인에게는 '기리'를 지킴으로써 얻어지는 보답은 서민 쪽이 더 적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일본인으로서 보면,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에서 존경을 받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보답이 된다. 그래서 '기리를 모르는 인간'은 아직도 '비천한 놈'이 된다. 그는 친구로부터 경멸을 받고 추방된다. 제9장 인정의 세계 일본의 도덕률처럼, 그토록 극단적인 의무의 변제와 철저한 자기 포기를 요구하는 도덕률 은, 당연히 개인적 욕망은 인간의 가슴속에서 제거해야 할 죄악이라고 낙인찍을 것같이 생 각된다. 고전 불교의 가르침이 그러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본의 도덕률이 그처럼 고나대 하게 오관의 쾌락을 허용하고 있는 것은 이중으로 의외로운 느낌을 준다. 일본은 세계 유수 의 불교국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그 윤리는 이 점에서, 고타마 부다(석가) 및 불교 경전의 가르침과 두드러진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일본인은 자기 욕망의 만족을 죄악이라고는 생각하 지 않는다. 그들은 청교도적이지 않다. 그들은 육체적 쾌락을 좋은 것, 함양할 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쾌락은 추구되고 존경받는다. 그렇지만 쾌락은 일정한 한계 내에 머물게 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쾌락은 인생의 중대한 사항의 영역을 침입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도덕률은 생활을 매우 긴장된 상태에 있게 한다. 인도인은 일본인처럼 관능적 쾌락을 용인하면 자연히 그런 결과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미국인보다 훨씬 용이하게 이해할 수가 있다. 미국인은 쾌락을 일부러 배워야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들에 게 있어 사람이 관능적 쾌락에 빠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별로 배울 필요가 없는 이미 알 고 잇는 유혹을 극복하는 일일뿐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쾌락을 의무와 마찬가지로 배운 다. 많은 문화에 있어서는, 쾌락 그 자체를 가르치는 일은 없다. 다라서 사람들이 자기 희생 을 필요로 하는 의무에 헌신하는 것을 특히 용이하게 한다. 남녀간의 육체적 접촉조차 때로 는 극도로 제한되어 있어서, 가정 생활의 원활한 진행에 거의 아무런 위협을 주지 않을 정 도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 나라들의 가정 생활은, 남녀간의 애정과는 전혀 다른 기초 위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일본인은 육체적 쾌락을 일부러 함양해 두면서, 그 후에 이렇게 함양된 쾌락을, 엄숙한 생 활양식으로서는 그것에 빠져들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서 금지하는 도덕률을 설치함으로써, 인생을 곤란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들은 육체적 쾌락을 마치 예술처럼 연마한다. 그리고 나서, 쾌락의 맛을 충분히 알게 되었을 대, 그것을 의무를 위해 희생한다. 일본인이 가장 즐 기는 조그마한 육체적 쾌락의 하나는 온욕이다. 아무리 가난한 농부라도, 또 아무리 천한 하 인일지라도, 부유한 귀족과 조금도 다름없이 매일 저녁 뜨겁게 데운 탕에 몸을 담그는 것이 하나의 일과이다. 가장 흔한 욕조는 나무로 만든 통으로, 그 아래에 숯불을 지펴 물이 섭씨 110도 혹은 그 이상의 온도를 유지하도록 한다. 사람들은 욕조에 들어가기 전에 몸을 깨끗 이 씻는다. 그런 다음에 욕조에 들어가 따뜻함과 휴식의 즐거움에 몸을 맡긴다. 그들은 욕조 속에서 태아처럼 두 무릎을 세운 자세로 앉아, 턱까지 더운물에 잠기도록 한다. 그들이 매일 목욕을 하는 것은 미국인과 마찬가지로 청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밖에 다른 나라들의 목 욕 습관에서는 그 유례를 발견할 수 없는, 일종의 수동적인 탐닉의 예술로서의 가치를 부여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 말에 의하면 이 가치는, 나이를 먹음에 따라서 점점 증대해 간 다고 한다. 물을 덥게 데우는 데 드는 경비와 노력을 절감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이 고안되고 있 으나, 어쨌든 일본인은 어떻게 해서든지 목욕을 하지 않고는 배겨날 수가 없다. 도시나 시가 지에는 수영 풀장과 같은 커다란 공중 목욕탕이 있어 거기에 가서 목욕을 하고, 목욕탕에서 우연히 만난 옆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농촌에서는 이웃의 여자 몇몇이 교대로 안마당 에서 목욕물을 데워-일본인은 목욕하는 동안 남이 보아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그 여자들의 가족이 교대로 차례차례 가정 목욕탕에 들어간다. 상류 가정의 가족들은 언제나 엄격한 순번에 의해서 가정 목욕탕에 들어간다. 가장 우선은 손님, 다음으로는 할아버지, 아 버지, 장남, 이하 차차 내려가서 마지막으로는 그 집의 가장 아래 하인의 순이다. 그들은 새 우처럼 새빨개져서 탕에서 나온다. 그리고 가족이 모두 모여서 하루 중 가장 느긋한 저녁 식사 전의 한때를 즐긴다. 온욕이 이처럼 매우 소중하게 여겨지는 즐거움인 것처럼, 신체의 '단련'에는 전통적으로 매우 엄격한 냉수욕의 습관이 있다. 이 습관은 흔히 '간게이코' 도는 '미즈고리'라는 이름으 로 불리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실시되고 있지만, 옛날의 전통적인 형태와는 다르다. 옛날에 는 날이 새기 전에 나가서, 에는 듯이 차가운 골짜기의 폭포수 아래에 앉지 않으면 안 되었 다. 추운 겨울밤에 난방이 없는 일본 가정에서, 얼음과 같은 냉수를 몸에 끼얹는 것만으로도 예사롭지 않은 고행일 것이다.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은 1890년대에 행해지고 있던 이 습관을 기술하고 있다. "치료 혹은 예언의 특별한 능력을 얻으려고 뜻하는 사람들-그러 나 이런 사람들은 그런 수업을 쌓은 후에 승려나 신관이 되려는 것은 아니었다-은 취침 전 에 '미즈고리'를 하고, '신들이 목욕을 하는' 새벽 2시에 일어나서 또 그것을 실행했다. 그 들은 다시, 아침에 일어났을 때와, 정오와, 일몰시에 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새벽의 고행은, 단순히 진지하게 어떤 악기 연주의 수업을 하거나, 어떤 세속적인 직업을 준비하는 목적을 위해서도, 사람들이 특히 즐겨하는 수단이었다. 신체를 단련하기 위해 혹한에 몸을 드러내 놓는 일도 있다. 습자 공부를 하는 어린이들은, 손가락이 얼어 동상에 걸리면서 그 연습기간 을 마치는 것이, 특히 효과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현대의 국민 학교에도 난방을 하 지 않는데, 이것이 아이들의 신체를 단련하고, 장래 인생의 갖가지 난관에 견디어 낼 수 있 게 한다는 이유로, 매우 좋은 일로 치부되고 있다. 그렇지만 서구인에게는 그런 효과보다도, 아이들의 끊임없는 감기와 코흘리는 것이 더 인상에 남았다. 수면 또한 일본인이 애호하는 즐거움이다. 그것은 일본인의 가장 완성된 기능의 하나이다. 그들은 어떤 자세로든, 또 우리들에게는 도저히 잠들 것 같지 않은 상황 아래서도 너끈히 잘 잔다. 이 사실은 서구의 많은 일본 연구가를 놀라게 하는 점이다. 미국인은 불면과 정신 적 긴장을 거의 동의어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의 표준으로 보면, 일본인의 성격 중 에는 매우 심한 긴장이 보인다. 그런데 그들에게 있어 숙면은 별로 힘든 일이 아니다. 그들 은 또 밤에 일찍 잠자리에 든다. 동양 여러 나라 중에서 이렇게 빨리 자는 국민은 달리 찾 아볼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해가 지면 곧 자버리는데, 그것이 이튿날을 위해 정력을 저장 한다고 하는 우리들의 처세술에 따른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런 계산을 하지 않는다. 일본인 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어느 서구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일본에 가면, 오늘밤의 수면 과 휴식으로 내일의 일을 준비하는 거의 의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수면은 피 로 회복이나 휴식, 보양 따위의 문제와는 떼어놓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수면은 노력 의 제공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활에 관계된 중대한 사실과는 전혀 관계 없니 독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미국인은 수면을 체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우리들의 대다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첫째로 생각하는 것이 밤에 몇 시간 잤는지 계산하는 일이다. 수면의 길이로 그 날에 얼마만큼 정력을 소비하고, 어느 정도 능률을 올릴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일본인이 자는 것은 이것과는 다른 이유에 의거 한다. 그들은 수면을 즐겨하고, 방해하는 것이 없으면 기꺼이 잠을 잔다. 그 증거로, 그들은 또 가차없이 잠을 희생시킨다. 시험 준비를 하는 학생은, 자는 쪽이 시 험을 치르는 데 유리하다는 생각에 구속되지 않고 밤낮을 가지리 않고 내리 공부를 한다. 군대 교육에서는, 훈련을 위해 수면을 완전히 희생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다. 1934년에서 1935년에 걸쳐서 일본 육군에 소속되어 있던 해럴드 다우드(Harold Doud)대령은 데시마 대 위와의 대담을 전하고 있다. "평시의 연습 중에 그 부대는 두 번, 10분간의 휴식이나 상황이 소강 상태가 된 짧은 시간에, 아주 잠시 잠잘 뿐 그 외는 전혀 수면을 취하지 않고, 사흘 이 틀밤을 계속 행군했다. 병사들은 때때로 걸으면서 잠을 잤다. 어떤 젊은 소위는 아주 깊이 잠들어, 길가에 쌓아놓은 제목 더미에 정면으로 부딪쳐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 가까스로 병 영에 당도한 후에도, 아무에게도 수면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채, 병사들은 모두 보초 근무 나 순시 부서에 배치되었다. 나는 "어째서 일부 병사라도 잠을 잘 수 있게 해 주지 않습니 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대위는 "천만에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놈들은 가르쳐주지 않아 도 잘 줄 알고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잠을 자지 않는 훈련을 하는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일본인의 견해를 간결한 말로 충분히 전해 준다. 먹는 것 또한,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나 잠자는 것과 마찬가지로 즐거움으로서 크게 향 락되는 휴식인 동시에, 훈련을 위해 과해지는 수업이기도 하다. 여가 행사로서 일본인은 잇 따라 요리가 나오는 식사를 즐긴다. 이때 한 번에 나오는 요리들은 티스푼으로 하나 정도의 적은 분량이다. 요리는 맛뿐 아니라 외관으로도 즐긴다. 그렇지만, 그 외의 경우에는 훈련이 라는 것이 크게 강조된다. "조반조분이라는 것이 일본인의 최고 덕의 하나가 되어 있다."라 고 에크슈타인은 일본 농민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고 있다. "식사는 중요한 행위로 간주되지 안는다.(중략)식사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 그러므로 되도록 재빨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이들, 그 중에서도 사내아이는 유럽의 아이들처럼 천천히 먹도록 충고받는 대신 에, 되도록 빨리 먹도록 독촉 받는다."승려가 훈련을 받는 불교의 승원에서 승려들은 식사 전 감사 기도에서, 음식은 바로 약이다라는 것을 상기하기를 소원한다. 그 뜻은 단련중인 인 간은 음식을 즐거움으로 여기지 말고, 그것은 부득이한 필요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인의 생각에 따르면, 먹고 싶은 것을 참고 식사를 끊는 것은 얼마나 '단련'이 잘 되어있 는가를 아는, 특히 뛰어난 감별법이라는 것이다. 따뜻함을 떠나고 수면을 할애하는 것과 마 찬가지로, 단식 또한 고난을 참고, 사무라이와 마찬가지로 '이쑤시개를 입에 물 수 있다(먹 지 않았으면서도)'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기회이다. 단식을 해서 이 시련을 견딜 수가 있다 면, 체력은 칼로리나 비타민의 결핍에 의하여 저하되기는커녕, 거꾸로 정신의 승리에 의해 높아지게 된다. 일본인은 미국인이 자명한 일로 여기고 있는 영양과 체력과의 1대1의 대응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도쿄 방송국은 전쟁 중에 방공호에 피난하고 있던 사람들을 향하여, 체조가 굶주린 사람들의 체력과 기운을 회복한다는 따위의 말을 할 수가 있었던 거이다. 로맨틱한 연애 또한, 일본인이 함양하는 '인정(humans feeling)'이다. 그것은 일본인의 결 혼 형태와 가족에 대한 의무에 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일본인의 것으로 되어 버렸 다. 일본 소설을 그것을 많이 다루고 있으며, 프랑스 문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요 인물은 기혼자이다. 정사는 일본인이 즐겨 읽고, 또 즐겨 화제에 올리는 테마다. 12세기의 <겐지 모 노가타리>는 세계의 어느 나라가 내놓은 어떤 위대한 소설에 비해 뒤지지 않는 로맨틱한 연애를 다룬 걸출한 소실이다. 봉건 시대의 다이묘나 사무라이들의 연애 이야기도, 이와 마 찬가지로 로맨틱한 것이다. 그것은 또 현대 소설의 주요한 테마이다. 이 점에서 중국 문학과 는 매우 다르다. 중국인은 로맨틱한 연애나 성적 향락을 조심스럽게 다룬다. 그렇게 함으로 써 그들은 많은 골치 아픈 문제를 면하고 있다. 따라서 그 가정 생활은 매우 평온 무사하다. 미국인에게는 물론 이 점에 관해서는 중국인보다도 일본인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 나 이 이해는 극히 표면적인 것으로,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들은 성적 향락에 관해 서, 일본인이 가지고 있지 않은 터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은 매우 엄격한 태도를 취하는 반면, 일본인은 별로 시끄럽게 따지지 않는 영역이다. 일본인은, 성을 다른 '인정'과 마찬가지로 인생에 있어서 낮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 한,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 것으로 생 각하고 있다. '인정'에는 조금도 나쁜 점이 없다. 따라서 성의 향락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까다롭게 말할 필요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그들은 오늘날에도 영국이나 미국인들이 여전히, 그들이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그림 책자중의 어떤 것을 외설적이라 생각하고, 요시와라-게 야샤(기생)나 창부가 사는 지역-를 매우 음산한 장소처럼 생각하는 사실을 문제로 삼는다. 일본인은 서구 제국과의 접촉이 막 시작된 시기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외국인의 비평에 매 우 신경을 써서, 그들의 습관을 서구의 표준에 접근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법률을 제정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법률로 단속해 보아도, 문화적 차이는 극복될 수 없었다. 교양이 있는 일본인은, 일본인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항이 서구인의 눈에는 부도덕, 외설로 보인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우리들의 습관적인 태도와, '인 정'은 인생의 중대한 사항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들 신조와의 사 이에 넘을 수 없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그렇게 뚜렷하게 의식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점이 야말로, 연애나 성적 향락에 관한 일본인의 태도가 우리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커다란 원 인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아내에 속하는 영역과, 성적 향락에 속하는 영역 사이에 울타리를 쳐서 그 둘을 명확하게 구별한다. 이 두 영역은 모두 다 공공연히 인정된다. 양자의 구별은, 미국인의 생활에 있어서처럼 한쪽은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공공연히 자인하는 것이고, 다른 쪽은 남의 눈을 피하여 몰래 발을 들여놓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한쪽이 인간의 주요한 의 무의 세계에 속하는 데 반하여, 다른 한쪽은 사소한 기분 전환의 세계에 속하는 데 반하여, 다른 한쪽은 사소한 기분 전환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구별된다. 이처럼 저마다의 영역의 '알맞은 위치'를 정해 두는 습관은, 가정의 이상적인 아버지도 혹은 풍류인도 마찬가지여서 이 두 영역을 다른 세계로 보게 한다. 일본인은 우리 미국인처럼 연애와 결혼을 동일시하는 이상을 내걸지 않는다. 우리들은 연 애를, 그것이 배우자 선택의 기초가 될 정도에 비례하여 시인한다. '연애하고 있다.'라고 하 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가장 훌륭한 결혼의 이유가 된다. 결혼 후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육 체적으로 끌린다는 것은 그의 아내를 모욕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연히 아내의 소 유로 돌아가야 할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인은 이와는 다른 견해를 갖는다. 배우자의 선택에 즈음하여 청년은 부모의 선택에 따라 맹목적으로 결 혼한다. 그는 아내와의 관계에 있어서 매우 완고한 형식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화목한 가정 생활 속에서조차, 아이들은 부모가 성애를 표현하는 행동을 볼 수 없다. 어떤 잡지에서 현대의 한 일본인은 말하고 있다. "이 나라에서 결혼의 참다운 목적은, 아이를 낳고, 이에 의하여 집안의 생명을 존속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외의 목적은 어느 것이나, 결 혼의 참다운 의미를 왜곡하는 데 도움을 줄뿐이다." 그렇지만 이 사실은 결코, 일본의 남자가 그와 같은 생활 속에만 갇혀, 품행 방정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여유가 있다면 남자는 정부를 갖는다. 단 중국과 크게 다 른 것은 반한 여자를 가정의 일원으로 맞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것은 구별해 두어야만 하는 두 개의 영역을 혼동하는 것이 된다. 여자는 음악, 무용, 안마 등 남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갖가지 예를 충분히 익힌 '게이샤'인 경우도 있고, 또 창부일 수 도 있다. 어느 경우에나 남자는 여자가 고용되어 있는 집과 계약을 맺는다. 이 계약이 여자 가 버림받는 것을 방지하고, 또 여자에게 금전상의 보수를 보증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독립 된 살림을 차리게 한다. 다만 예외적으로, 여자에게 아이가 있고 남자가 그 아이를 자기의 자식과 함께 기르기를 바라는 경우에 한하여, 여자를 자기 가정에 맞아들인다. 그리고 그 경 우, 여자는 제2부인으로서가 아니라 종의 한 사람으로 취급된다. 아이는 본처를 '어머니'라 고 부르고, 친어머니와 아이와의 관계는 인정되지 않는다. 중국에서 그처럼 현저한 전통적 습관으로 되어있는 일부 다처 제도는, 따라서 전혀 일본적인 것이 아니다. 일본인은 가족적 의무와 '인정'을 공간적으로도 구별한다. 첩을 둘 만한 여유가 있는 것은 상류 계급의 사람에 한정되어 있으나, 대개의 남자는 언 젠가 한 번은 게이샤나 창부와 논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와 같은 유흥은 아주 공공연히 행 해진다. 아내가 밤에 놀러 나가는 남편의 옷차림을 도와주는 일도 있다. 또 남편이 놀다 간 창부의 집에서 아내한테 청구서를 보내는 수도 있는데, 아내는 당연한 일로 여겨 지불을 한 다. 아내가 그 일로 고민하는 일은 있어도, 그것은 그녀 자신이 처리해야 할 사항이다. 창부 한테 놀러 가는 것보다는, 게이샤 집에 가는 것이 돈이 더 든다. 그러나 이렇게 하룻밤의 유 흥을 위해 지불하는 돈에는, 게이샤를 성행위의 상대로 하는 권리의 대가는 들어있지 않다. 그가 얻는 즐거움은 그 역할을 해내기 위해 꼼꼼히 훈련을 받은, 아름답게 옷을 차려 입고, 거동이 예법에 맞는 소녀들의 대접을 받는 즐거움이다. 특정한 게이샤와 친숙해지기 위해서 는, 남자는 그 게이샤의 서방이 되어 그녀를 첩으로 삼는 계약을 하거나, 혹은 자신의 매력 에 의하여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아, 저쪽에서 자지해서 그에게 몸을 맡기도록 유도하지 않 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게이샤와 함께 지내는 하룻밤의 유흥이 결코 애정 행위가 없 는 것은 아니다. 게이샤의 무용, 경묘한 응답, 가요, 동작은 전통적인 넌지시 깨닫게 하는 솜 씨로서, 상류 계급의 부인이 표현할 수 없는 일체의 내용을 표현하도록 주도하게 계획되어 있다. 그것들은 '인정의 세계 속에' 있는 것으로, '효의 세계'에 염증이 나고 지쳐 있는 사 람에게 위안을 준다. 도락에 빠져들 위험이 없지는 않으나, 이 두 영역은 소속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창부는 유곽에 살고 있다. 게이샤와 논 후, 다시 생각이 있으면 창부한테로 가는 사람도 있으나, 창부 쪽이 돈이 적게 들기 때문에 지갑이 가벼운 사람은 이 유흥법에 만족하고, 게 이샤와 노는 것은 단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창부가 있는 집 앞에는 창부의 사진이 나붙어 있다. 그리고 유객은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눈에 띄는 곳에서 오랜 동안 사진을 비교해 보 고, 상대를 선택하는 것이 보통이다. 창부는 신분이 낮아. 게이샤처럼 높은 지위에 놓여 있 지 않다. 그 여자들은 대개 돈이 궁했기 때문에 팔려 온 가난한 집의 딸로, 게이샤처럼 예를 교육받지 않는다. 옛날 아직 일본인이 서구인의 비난을 알지 못하고, 따라서 그 습관을 폐지 하지 않았던 무렵에는, 창부 스스로 사람들의 눈에 띄는 장소에 앉아서 인육 상품을 선택하 는 유객에게 그 무감동한 얼굴을 내놓고 있었다. 현재는 사진으로 대체되었다. 창부 한 사람 이 어떤 남자의 선택을 받아, 그 남자가 창부집과 계약을 맺은 남편이 되어 여자를 첩으로 삼아 독립시키는 일이 있다. 그런 여자는 계약 조건에 의해 보호된다. 그런데, 하녀나 여점 원은 따로 계약을 맺지 않은 채 첩이 되는 일이 있다. 이런 '자유 의사에 의한 첩'은 가장 무방비한 상태에 놓여있는 사람들이다. 그녀들이야말로 바로, 대개는 상대 남자와 연애에 의 해 맺어진 여자들이지만, 그녀들은 일체의 공인된 의무 세계의 바깥에 놓여 있다. 일본인은, 미국에서 연인에게 버림을 받고, '갓난아이를 무릎에 끌어안고' 비탄에 빠져 있는 젊은 여자 의 이야기나 시를 읽으면 이들 사생아의 어머니들을 그들의 '자유 의사에 의한 첩'과 동일 시한다. 동성애 또한 전통적인 '인정'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다. 구시대의 일본에서, 동성애는 사무 라이나 승려와 같은 고위에 있는 사람들의 공인된 즐거움이었다. 메이지 시대가 되어, 일본 이 서구인의 비평에 신경을 써서 많은 관습을 법률로 금지했을 때, 이 관습도 법률에 의하 여 처벌되도록 규정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관습은 심하게 비난받을 일이 아닌 '인정'의 하나로 치부되고 있다. 다만 그것은 적당한 위치에 머물게 해 두지 않으면 안 되 며, 집안을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남자나 여자가 동성애 상습자가 ' 될' 위험은 거의 생각할 수 없다. 물론 직업적으로 남자 게이샤(남창)가 되는 남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인은 특히, 미국에서 버젓한 남자가 동성애의 수동역을 한다는 데 놀라 움을 느낀다. 일본의 성년 남자는 소년을 상대로 선택한다. 성인이 수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 은 자기들의 위엄에 관계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일본인은 일본인 나름대로, 해도 좋은 일 과 해서는 안 되는 일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자중하는데, 그 경계선은 우리들의 경계선과는 다르다. 일본인은 또, 자음적 향락에 대해서도 과히 까다롭게 말하지 않는다. 일본인만큼 이 목적 을 위해 여러 가지 도구를 고안한 국민은 달리 없다. 이 영역에서도 역시, 일본인은 이들 도 구 중 너무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던 것을 추방함으로써 외국인의 비난을 피하려 했다. 그러 나 그들 자신은 이 도구들을 결코 나쁜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 수음을 비난하는 서구인의 강경한 태도-그것은 미국보다도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들 쪽이 더욱 강경하지만- 는, 우리들이 성인이 되기 전에 우리들의 의식 속에 깊이 새겨진다. 소년들은, 그런 짓을 하 면 미치게 된다든지, 대머리가 되어 버린다든지 하는 속삭임을 듣게 된다. 서구인은 유년 시 절에 어머니로부터 엄중한 감시를 받는다. 만일 그 죄를 범하면, 어머니는 크게 문제삼아 처 벌을 가하기도 한다. 두 손을 묶어 버리거나, 또는 하느님이 벌을 주신다고 말하기도 한다. 일본의 어린아이나 소년은 이런 경험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어른이 된 후에도 그들은 우리 와 같은 태도를 취할 수가 없다. 자위는 일본인이 전혀 죄악이라고 느끼지 않는 향락이다. 그리고 그들은 근엄한 생활 속에서, 그것을 하위의 지위를 점지함으로써, 충분히 그것을 통 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술에 취하는 것 도한 용서받을 수 있는 '인정'의 하나이다. 일본인은 우리 미국인의 절대 금주 서약을, 서구인의 색다른 행위의 하나로 생각한다. 그들은 또, 투표에 의해 지역 일대 에 금주령을 포고하려 하는 우리들의 지방적 운동을 마찬가지로 이상하게 생각한다. 음주는 정상적인 인간이 향유하는 마땅한 쾌락이다. 그렇지만 알코올은 하찮은 기분 전환의 한 가 지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인간은 이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들의 사고 방식에 따르면, 동성 애 상습자가 '될' 염려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알코올 중독자가 '될' 우려도 없다. 사실, 강제 조치를 필요로 하는 알코올 중독자는, 일본에서는 사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알코올은 유쾌한 기분 전환으로, 그 가족도 또 일반인들조차도 술에 취해 있는 사람을 혐오해야 하는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거의 난폭한 짓을 하지 않는다. 또 확실히, 그가 그의 아이 를 때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유쾌하게 방가 난무하는 것이 보통이며, 모두 위엄 있는 '가미시모(에도 시대의 예복)'를 벗고 완전히 편안하게 즐긴다. 도회지의 술잔치 자리에서 사람들은 서로 상대의 무릎 위에 앉기를 즐겨한다. 완고한 구식 일본인은, 음주와 식사를 엄중히 구별한다. 술이 나오는 마을의 연회에서 누군가가 밥을 먹기 시작하면, 그것 은 그 사람이 이미 술 마시기를 포기한 것을 의미한다. 그는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으로, 두 개의 '세계'를 확실하게 구별한다. 집에서 식후에 술을 마시는 일도 있지만, 술과 밥을 동시에 먹는 일은 없다. 차례로 어느 한쪽의 즐거움에 전념한다. 이상과 같은 일본인의 '인정'관은, 몇 가지 중요한 귀결을 수반한다. 그것은 육체와 정신 이라는 두 개의 힘이, 각자의 생활에서 패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고 생 각하는 서구의 철학을 근저에서부터 뒤엎는다. 일본인의 철학에서 육은 악이 아니다. 가능한 육의 쾌락을 즐기는 것은 죄가 아니다. 정신과 육체는 우주의 대립하는 2대 세력이 아니다. 그리고 일본인은 이 신조를 논리적으로 밀고 나가, 세계는 선과 악의 싸움터가 아니라고 하 는 결론으로 까지 가져간다. 조지 샌섬(George Sansom)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본 인은 그 역사의 어느 시대에서나, 이와 같은 악의 문제를 인식하는 능력이 결여되거나, 혹은 그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을 회피하는 태도를 어떤 정도로든 유지해 온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일본인은 악의 문제를 인생관으로 승인하는 것을 시종 거부해 왔다. 그들은 인간에게 두 가지의 영혼이 있다고 믿고 있는데, 그것은 서로 싸우는 선의 충동과 악의 충동이 아니 다. 그것은 '온화한' 영혼(니키타마)과 '거칠은' 영혼(아라타마)으로, 그들은 모든 인간의 생 애에는 '온화'해야 할 경우와 '거칠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고 믿는다. 한쪽의 영혼이 지옥으 로, 다른 한쪽이 천국으로 간다고 정해여 있지 않다. 이 두 개의 영혼은 모두, 저마다 다른 경우에 필요하며 선이 된다. 그들의 신조차, 마찬가지로 현저하게 선악의 성질을 겸비하고 있다. 그들에게 가장 있기 있는 신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동생, 스자노오노미코토-재빠르고 용맹한 남성 신-인데, 그 자매에 대한 그의 난폭한 행동은, 만일 그것이 서구의 신화에서라면, 아마 그는 악마라고 여겨질 것이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는 스자노오노미코토가 자기한테 온 동기를 의심하여, 그를 옥외로 내쫓으려 한다. 그러자 그는 실컷 난폭한 짓을 하고 돌아다니고, 아마테라스 오 미카미와 그의 추종자들이 니나메사이(추수감사 의식)를 하고 있는 식당에 똥을 뿌린다. 또 밭의 길을 파괴하는 죄를 범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흉악한-그리고 서구인에게는 가장 불가 해한-죄로서, 그는 누님 신의 기실 지붕에 구멍을 내어, 거기서 '거꾸로 가죽을 벗긴' 얼룩 망아지를 던져 넣는다. 스자노오노미코토는 이런 흉악한 짓을 했기 때문에, 신들의 재판을 받고 무거운 과료를 지고, '암흑의 나라(뿌리의 나라)'로 쫓겨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일 본의 판테온(야오요로즈노 가미가미:800만의 신들, 즉 수많은 신들) 속에서 가장 인기를 끄 는 스타로서, 그 나름의 숭배를 받고 있다. 그렇지만 고등의 윤기 종교에 있어서는 이 신들 은 모두 배제되고 있다. 그것은, 초자연적 존재를 흑과 백 하는 식으로 전혀 다른 두 그룹으 로 나누는 편이, 그들 종교에 있어 선과 악과의 우주 투쟁 철학에 보다 잘 합치하기 때문이 다. 일본인은 시종 덕은 악과 싸우는 것이라는 것을 극히 명료하게 부정해 왔다. 그들의 철학 자나 종교가들이 몇 세기 동안이나 끊임없이 주장을 해 온 것처럼, 그들의 철학자나 종교가 들이 몇 세기 동안이나 끊임없이 주장을 해 온 것처럼, 그러한 도덕률은 일본에 잘 맞지 않 는다. 그들은 이것이야말로, 일본인의 도덕적 우수성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목청을 높여 말한 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중국인은 런(jen, 인), 즉 공정하고도 정이 깊은 행동을 절대적 표준으로 삼고, 모든 인간 모든 행위를 그 표준에 비추어, 이에 도달하지 않을 경우 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안다라는 식으로 도덕률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 한 도덕률은 무엇인가 부족하기 때문에, 가와 같은 인위적 수단에 의하여 억제를 가하지 않 으면 안 되었던 중국인에게 꼭 적합한 것이다."라고 18세기의 뛰어난 신토가, 모토오리 노리 나가는 쓰고 있다. 또한 근대의 불교가나 국가주의의 지도자들도, 같은 제목에 대해서 글을 쓰고 있거나 강연을 하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일본에서는 인간의 성질은 태어날 때부터 선 하며,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자기의 나쁜 반절과 싸울 필요가 없다. 그것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다만 마음의 창문을 깨끗하게 하고, 경우에 따라 알맞은 행위를 하는 것뿐이다. 만일 그것이 '더럽혀졌다'하더라도, 더러움은 용이하게 제거되며, 인간의 본질인 선이 다시 빛나기 시작한다. 불교 철학은 일본에서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철저한 것으로서,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도덕률은 경전 속에서가 아니라 깨달음을 연 청정무구한 자신의 마음속에서 발견하는 것에 있다고 설명한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발견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 게 의혹을 품을 필요가 있겠는가. 악은 인간의 마음에 원래 갖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들은 시편 작가(다윗)와 같이,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 하였나이다."(시편51편)라고 부르짖는 신학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인간 타락의 가르침 을 설교하지 않는다. '인정'은 비난해서는 안 되는 축복이다. 철학자도 농민도 그것을 비난 하지 않는다. 미국인에게는 이와 같은 가르침은 결국, 방종과 나쁜 품행의 철학으로 인도하 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런데 일본인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의무의 수행을 인생 최고의 임무로 정해 놓고 있다. 그들은 '온(은)'을 갚는 일이 개인적 욕망이나 쾌락을 희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다. 행복의 추구를 인생의 중대한 목표로 하는 사상 은, 그들에게는 놀랄 만한 그리고 부도덕한 교설 이다. 행복은 사람이 그것에 탐닉할 수 있 을 때만 탐닉하는 기분 전환이지만, 여기에다 거드름을 붙여 국가나 가정을 이에 따라 판단 하는 기준으로 삼으려는 것 따위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주(충)'나 '기리(의리)'의 의무를 수행하는 데 즈음하여 사람이 자주 심한 고통을 경험한다는 사실은, 그들이 처음부 터 각오하고 있는 바이다. 그것은 인생을 곤란하게 만들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 곤란을 견디 어 낼 마음가짐이 되어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그들이 조금도 나쁘다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 은 쾌락을 단념한다. 거기에는 강한 의지가 필요하지만, 그와 같은 강함이야말로 일본인이 가장 칭송하는 미덕이다. 이와 같은 일본인의 견해와 죽이 맞아, 일본의 소설이나 연극은 해피엔드로 끝나는 것이 극히 드물다. 미국의 일반 관중은 해결을 열망한다. 그들은 극중 인물이 그 후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살게 될 것으로 믿고자 한다. 그들은 극중 인물이 그 덕행의 보답을 받는다는 것 을 알고 싶어한다. 만일 그들이 어떤 극의 종말에 울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주인공의 성격 속에 어떤 결점이 있었기 때문이거나, 혹은 주인공이 사악한 사회 질서의 희 생이 되었기 때문이거나, 그 어느 쪽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러나, 만사가 주인공에게 행복한 결과가 되는 편이 훨씬 관중의 환영을 받는다. 그러나 일본의 일반 관중은 흐느껴 울면서, 운명의 전변에 의하여 주인공이 비극적인 최후를 마치고, 아름다운 여주인공이 살해되는 것 을 지켜본다. 그와 같은 줄거리야말로, 하루 저녁 오락의 클라이맥스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 는 것을 기대하고 극장에 간다. 현대 영화조차도, 주인공과 여주인공의 고뇌를 테마로 하여 구성된다. 서로 사랑하고 있는 남녀가, 연인을 단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줄거리이거나 사이 좋게 살고 있던 부부의 한쪽이, 당연히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자 살하는 줄거리이다. 남편의 직업적 생명을 구하고, 남편을 격려하여 배우로서의 뛰어난 천분 을 연마시키기 위하여 한 몸을 바친 아내가, 남편이 마침내 성공하기 직전에 남편의 새로운 생활의 방해가 되지 않게 대도시 속으로 몸을 숨기고, 남편의 대성공을 거두는 당일에 빈궁 속에서 한 마디 불평도 없이 죽어 가는 줄거리도 있다. 해피엔딩으로 끝날 필요는 없다. 자 기를 희생시키는 주인공과 여주인공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 환기되면, 그것으로 충분히 목적 이 달성된다. 주인공의 괴로움은 그들에게 내려진 신의 심판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모든 희생을 참고 그 의무를 수행했다는 것, 어떤 불행이 닥쳐도-남에게 버림을 받거나, 병에 걸 리거나 아니 생명을 버리더라도-올바른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현대 일본의 전쟁 영화 또한 같은 전통을 따르고 있다. 이들 영화를 보는 미국인은 자주, 이것이야말로 지금까지 본 영화 중에서 가장 뛰어난 반전 선전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과연 미국인다운 반응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들은 전쟁의 희생만 고통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 다. 일본의 전쟁 영화는 분열식이나 군악대나 함대의 연습이나 거포의 자랑스러운 위용을 기세 좋게 그려내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일로 전쟁을 다룬 것이든, 중일전쟁을 다룬 것이든, 집요하게 되풀이되는 장면은 여전히 단조로운 진흙탕 속의 행군, 비참한 전투의 고통, 승패 가 정해지지 않는 작전이다. 막이 내리는 장면은 승리도 아니고, '반자이(만세)' 돌격조차 아니다. 그것은 아무런 신기할 것도 없는 깊이 진흙 속에 묻힌, 중국 어느 도시에서의 숙영 의 정경이다. 혹은 또, 세 번에 걸친 전쟁 생존자로 저마다 불구, 절름발이, 장님이 된 부자 의 3대의 일본인을 비춰 준다. 혹은 또, 병사가 전사한 후, 후방에 있는 그 가족이 남편이며 일가의 생활을 지탱해 왔던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용기를 내어 어떻게든 그 없이도 살아가 는 모습을 비춰준다. 영국과 미국의 '캐벌케이드(Cavalcade)'식 영화의, 가슴을 뛰게 하는 배경은 전혀 볼 수 없다. 그들은 상이 군인의 갱생이라는 테마를 극화하는 일조차 하지 않 는다. 그건 고사하고, 그들이 싸우고 있던 전쟁의 목적조차 말하지 않는다. 그건 고사하고, 그들이 싸우고 있던 전쟁의 목적조차 말하지 않는다. 일본인의 관중에게는 환영에 나타나는 인물이 모두, 전력을 기울여 은혜를 갚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영화는 군국주의자들의 선전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들 영화의 후원자들은, 일본 관중이 그것을 보아도 결코 반전 사상을 품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