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메이지 유신 일본의 근대화 초기의 절규는 손노조이, 즉 '천황을 복벽하고 이적을 추방하라'는 것이었 다. 그것은 일본을 외국에게 짓밟히지 않게 하는 것과 함께, 또 천황과 쇼군의 '이중 통치' 속에 있었던 10세기의 황금 시대로 복귀하려는 슬로건이었다. 교토에 있는 천황의 궁정은 극단적으로 반동적이었다. 천황 지지자에 있어서 존왕파의 승리란, 외국인을 굴복시켜 추방 하는 데 있었다. 그것은 전통적인 생활 양식을 회복하고, '개혁파'의 정치적 발언권을 봉쇄하 는 것이었다. 유력한 도자마 영주들, 즉 막부를 무너뜨리는 데 선두에 선 번의 다이묘들은 왕정 복고를 도쿠가와 대신에 자기네들이 일본을 지배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하고 자 한 것은 단지 사람이 바뀌는 일이었다. 농부들은 자기들이 지은 쌀을 도리 수 있는 한 많이 자기들 소유로 하기를 원했지만, 그들은 '개혁'을 매우 싫어했다. 사무라이 계급은 또 종전대로 봉급을 받고 칼로써 공명을 세울 기회가 오기를 바랐다. 존왕파에게 군사 자금을 빌려 준 상인들은 중상주의가 신장되길 원했지만, 결코 봉건 제도를 규탄하지는 않았다. 반 도쿠가와 세력이 승리를 거두어 1868년의 왕정복고에 의해 '이중 통치'가 종말을 고했 을 때, 승리자들은 우리들 서양인의 기준으로 보면, 이제부터는 놀라울 정도로 보수적인 고 립주의 정책이 실시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신정부가 취한 방침은 처음부터 그 반대 였다. 신정부는 성립 후 1년도 채 못되어, 모든 번에서 다이묘의 과세권을 철폐했다. 정부는 토지 대장을 회수하여, 이른바 '사공육민' 중 사공의 몫은 정부에 납부하도록 했다. 이 재산 몰수는 무상이 아니었다. 정부는 각 다이묘에게 그 정규 봉록의 반액에 상당하는 액수를 나 눠주었다. 동시에 정부는 다이묘의 사무라이를 부양하고, 토목 사업비를 부담하는 책임을 면 제했다. 사무라이들에게도 다이묘와 같이 정부에서 봉급을 지급했다. 다음 5년 동안에 계급 사이의 일체 법률상 불평등이 철폐되었고, 카스트나 계급을 나타내 는 징표나 차별적 복장이 폐지되고-상투조차도 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천민 계급은 해방 되고, 토지양도를 금지하는 법률이 철폐되었으며, 번과 번 사이를 격리하는 장벽이 제거되었 고, 불교는 국교의 지위에서 추방되었다. 1976년에는 다이묘 및 사무라이의 봉록은 5년 내지 15년을 상환 기간으로 하는 질록공채에 의한 일시불로 지급되었다. 이 일시불은 몰론 도쿠 가와 시대에 정해진 다이묘들의 봉급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그리하여 이 돈을 자금으로 하 여 다이묘 및 사무라이들은 새로운 비봉건적 경제하에서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도쿠가와 시대에 이미 분명해진 상업, 금융 귀족과 봉건, 토지 귀족과의 그 특수한 연합을 마침내 정식으로 체결하는 최종 단계였다." 갓 태어난 메이지 정부의 이 같은 괄목할 만한 개혁은 대중의 뜻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대중들로부터 가장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것은 1871년에서 1873년에 걸치는 조선 침략론이 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는 철저한 개혁을 단행하는 방침을 결코 굽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 라, 이 조선 침략 계획을 묵살했다. 정부의 시정 방침은 메이지 정부 수립을 위해 싸운 대다 수의 사람들의 소망과는 전혀 상반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1877년에, 이들 불편 분자의 최 고 지도자인 사이고가 반정부를 기치로 내세운 대규모 반군을 조직했다. 그의 군대는 존왕 파의, 왕정 복고 첫해부터 메이지 정부에 의해 배반당해 왔던, 봉건 제도의 존속을 그리워하 는 일체의 소망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사무라이 이외의 사람들로 구성된 의용군을 모집하여 사이고의 사무라이 군을 격파했다. 이 반란은 당시 정부가 국내에 얼마나 큰 불만 을 야기 시켰는가에 대한 하나의 증거였다. 농민의 불만도 역시 현저했다. 1868년에서 1878 년까지, 즉 메이지 초기 10년 동안에 적어도 190건의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신정부는 1877 년에 가서야 겨우 농민의 과중한 세금을 경감하는 조치를 취했을 따름이다. 따라서 농민이, 신정부가 자기들에게 아무런 이익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농 민들은 또 학교의 설립, 징병 제도, 토지 측량, 단발령, 천민들의 차별 대우 철폐, 공인된 불 교에 대한 극단적인 제한, 역법 개혁, 기타 많은 그들의 고정된 생활 양식을 변혁시키는 시 책에 반대했다. 그러면 이토록 철저하고 평판 나쁜 개혁을 단행한 '정부'는 대체 누구였는가? 그것은 특수 한 일본의 여러 제도가 이미 봉건 시대부터 육성시켜 온 하층 사무라이 계급과 상인 계급과 의 '특수한 연합' 세력이었다. 즉 그들은 다이묘의 어용인으로서 또 가로로서 정치적 수완을 닦아, 광산업, 직물업, 판지 제도 등 번의 독점 사업을 경영해 온 사무라이들과, 사무라이의 신분을 사서 사무라이 계급 속에 생산 기술의 지식을 보급시킨 상인들이었다. 이 사무라이 와 상인의 동맹이, 메이지 정부의 정책을 작성하고 그 실행을 계획한, 유능하고도 자신에 가 득 찬 위정자들을 급속히 무대 앞으로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중요성은 이 정치가들 이 어느 계급 출신인가에 있지 않고, 어떻게 그들이 그토록 유능하면서도 현실주의적일 수 가 있었는가에 있다. 19세기 전반에 겨우 중세에서 벗어난, 오늘날 타이 정도의 약소국이었 던 일본이, 어느 나라도 감히 시도하지 못한, 비범한 정치적 수완을 필요로 하는, 더군다나 놀라운 성공을 거둔 메이지 유신이라는 대사업을 계획하고 수행할 능력을 가진 많은 지도자 들을 배출한 것이다. 이들 지도자들의 장점은 물론 또 그 단점가지도 전통적인 일본인의 성 격에 깊이 뿌리 박힌 것이었다. 그 성격은 무엇이었고, 또 무엇인가를 논하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목적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지 메이지 유신의 정치가들이 어떻게 하여 이 사업을 수 행해 갔는가를 이해하는 데 그칠 수 밖에 없다. 그들은 그들의 임무를 결코 이데올로기적인 혁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하 나의 사업으로 취급했다. 그들이 머리 속에 그리고 있던 목표란 일본을 세계 열강 대역에 서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상 파괴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봉건 계급을 욕하지도 않았고 무일푼의 상태로 몰아넣지도 않았으며, 이들에게 많은 질록을 주어 그 미끼로써 메이지 정 부를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으로 농민의 처지를 개선했다. 이 조처가 10년이나 늦어진 것은 농민의 정부에 대한 요구를 계급적 입장에서 거절했기 때문이 아니 라, 그보다는 오히려 메이지 초기의 빈약한 국고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메이지 정부를 운영한 정력적이며 기략이 풍부한 정치가들은 일본의 계층제를 없 애려는 모든 사상을 배척했다. 왕제 복고는 천황을 계층제의 정점에 두고 쇼군을 제거함으 로써 계층적 질서를 단순화시켰다. 왕제 복고 이후의 정치가들은 번을 폐지함으로써 영주에 대한 충성과 국가에 대한 충성 사이의 모순을 없앴다. 이러한 변화는 계층적 관습의 발판을 없애지 않았다. 단지 거기에 새로운 위치를 주었을 뿐이다. 새로이 일본 지도자가 된 '각하' 들은 계층제를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국민에게 자기들이 솜씨 잇게 잔 전강을 강제키 위 하여 중앙 집권적 지배를 한층 강화시켰다. 그들은 위로부터의 요구와 위로부터의 은혜를 번갈아 이용함으로써 잘 조종해 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역법 개혁이나 공립 학교 설립, 천민 에 대한 차별 대우 철폐 등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 여론에 따를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했 다. 이와 같은 위로부터의 은혜 중의 g나가 1889년에 천황으로부터 백성에게 주어진 일본의 헌법이었다. 이 헌법에 의해 백성이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제국 의회가 설치되 었다. 이 헌법은 서구 여러 나라의 각종 헌법을 비판적으로 연구한 후, 각하들의 손에 의해 세심한 심사 숙고 끝에 작성되었다. 그러나 기초자들은 '백성의 간섭과 여론의 침입을 방지 하기 위한 모든 예방 수단'을 강구했다. 헌법 기초의 임무를 맡은 관청 그 자체가 궁내성의 한 부서로 그 곳은 신성 불가침의 장소였다. 메이지 정치가들은 그들의 목적을 분명히 의식했다. 1880년대에 헌법의 입안자 이토 공작 은 기도 후작을 영국에 파견하여, 일본의 앞길에 놓인 여러 문제에 대해 허버트 스펜서의 의견을 청했다. 그리하여 여러 의견이 오간 뒤, 스펜서는 그의 결론을 이토에게 써 보냈다. 계층제에 대해 스펜서는, 일본의 전통적 조직이야말로 국민 복지의 비할 바 없는 기초이기 때문에, 이것을 존속시킬 뿐만 아니라 소중히 지켜 나가야 한다고 썼다. 윗사람에 대한 전통 적 의무, 특히 천황에 대한 전통적 의무는 일본의 큰 장점이다. 이론은 이 '웃어른'의 지도하 에서 견실히 나아갈 수가 있다. 또 이것은 개인주의적인 나라들에 있어 피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곤란을 방지할 수가 있다고 스펜서는 말했다. 메이지의 대정치가들은 자기들의 신념에 이러한 확신을 얻어 크게 만족했다. 그들은 근대적 세계에 있어 '알맞은 위치'를 지킴으로써 얻는 이익을 보존하려고 기도했다. 그들은 계층 제도의 습관을 무너뜨릴 생각이 없었다. 그것이 정치이든 종교이든 경제이든 상관없이 모든 활동 분야에 있어서, 메이지의 정치가 들은 국가와 국민간의 '알맞은 위치'의 의무를 세밀히 규정했다. 그 모든 기구는 미국이나 영국의 조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어서, 우리들은 보통 그 기구의 기본적인 점을 인지 하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기 쉽다. 여론에 따를 필요가 없는, 위로부터의 강력한 지배가 행해 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지배는 계층제의 수뇌부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관리 되었다. 그리고 이 수뇌부 속에는 국민이 선거한 사람들은 결코 포함되지 않았다. 이 수준에 서는 국민은 전혀 발언권을 가질 수가 없었다. 1940년에 정치적 계층제의 수뇌부를 구성한 사람들은, 언제든지 천황을 배알할 수 있는 중신들, 천황의 직접적인 조언자 지위에 있는 사람들 및 천황의 옥새가 찍힌 사령에 의해 임명된 사람들이었다. 이 마지막 부류에는 각료, 도지사, 판사, 각국의 장관, 기타 고관이 포 함된다. 선거에 의해 뽑힌 관리는 계층 제도 속에서 그러한 높은 지위를 갖지 못했다. 예를 든다면 선거에 의해 뽑힌 의회의 의원은, 각료나 대장성 혹은 운수성의 장관을 선임하거나 인준할 때 발언권을 갖는 것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았다. 선거에 의해 구성되어 국민의 의 견을 대변하는 중의원은, 정부의 고관에게 질의를 하거나 비판을 하는 점에서는 약간의 특 권을 갖지만 임명 결정이나 예산에 관한 일들에서는 참된 발언권이 없었다. 또 스스로의 발 의에 의해 법률을 제정할 수도 없었다. 중의원은 또한 선거로 선출되지 않는 귀족원의 견제 를 받았다. 귀족원 의원의 반수는 귀족이며 4분의 1은 천황이 임명하였다. 귀족원이 법률에 영향을 미치는 권한은 중의원과 거의 같았으니, 여기에도 또 하나의 계층제 관문이 놓여 있 던 것이다. 일본은 이렇게 하여 중요한 정부의 지위를 어디까지나 그들 '각하'들의 수중에 확보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결코 그 '알맞은 위치'에 있어 자치 제도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 는다.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는 어디든지, 또 어떠한 정치 체제하에서도, 위로부터의 권력 이 아래로 미치는 도중 어느 지점에서는 반드시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지방 자치제의 힘과 마주친다. 나라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은 단지, 민주적 책임이 어느 정도까지 위로 미치고 있는가, 지방 자치 제도의 책임이 얼마만큼 많은가 적은가, 또 지방적 지도력이 어디까지 지 방 공동체 전체의 요망에 부응하고 있는가, 도 지방의 세력가들에게 농락당하여 주민의 불 이익을 얼마나 초래했는가 등등의 차이가 있는데 불과하다.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에는 중국과 같이 '도나리구미'라고 불리는 5호에서 10호씩 묶은 소 단위 조직이 있어, 그것이 주민의 최소 책임 단위가 되었다. 이 인보의 장이 인보 자체의 모 든 일을 지휘해서, 소속 주민이 나쁜 짓을 못 하도록 책임을 지며, 의심스런 행동이 있으면 보고하고, 낯선 자가 나타나면 관헌에게 고발해야만 했다. 메이지의 정치가들은 처음에는 이 조직을 폐지했으나 후에 다시 부활시켜 '도나리구미'라 이름붙였다. 도나리구미는 도시에서 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권장하여 만들었는데, 지금의 농촌에서는 거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작은 마을, '부라쿠' 단위이다. 부라쿠는 폐지되지도 않았고, 하나 의 단위로서의 행정 기구 속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그곳은 국가의 기능이 미치지 않는 지역 이었다. 15호 정도의 집으로 구성된 이들 작은 마을은 오늘날도 있을 뿐만 아니라, 매년 교 체되는 부락장의 지도하에 조직적으로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그 부락장은 "부락의 재산 을 관리하며, 사람이 죽거나 불이 났을 때 그 집에 주어지는 부락의 원조를 감독하고 농사 짓기, 집짓기, 도로수리에 있어 공동 작업을 위한 적당한 날짜를 정하며, 일정한 박자로 화 재 경종을 치거나 닥다기를 두드려서 그 지방의 축제일이나 휴식일을 알린다." 이 부락장들 은 몇몇 아시아의 나라들의 경우처럼 그들의 부락에 있어 국세를 징수하는 책임을 없다. 따 라서 그는 그 무거운 짐을지지 않는다. 그들의 지위는 조금도 이중 성격적인 데가 없다. 그 들은 민주적 책임의 범위 안에서 직무를 수행할 따름이다. 일본의 근대 정치 조직에는 시, 정, 촌의 지방 자치 제도가 공인되어 있다. 선거된 '원로' 들이 책임있는 지방의 장을 선출한다. 그리하여 이 장이 부, 현 및 중앙 정부에 의해 대표되 는 구가와의 절충에 있어서 각기 그 시, 정, 촌의 대표자로서의 책임을 수행한다. 농촌에서 그 장은 옛부터 그 토지에 살고 있는 지주농민 집안 출신이다. 촌장의 직무를 맡으면 경제 적으로는 약간 손실이 있으나 그 대신 말발이 선다. 이 촌장과 원로들이 마을의 재정, 공중 위생, 학교의 유지, 특시 재산 등기와 개인 신상 서류에 대한 책임을 진다. 마을 사무소는 매우 바쁜 곳이다. 국민 학교에 대한 국고 보조금의 지출, 그보다 훨씬 많 은 액수에 달하는 마을 자체가 부담하는 교육비의 지출, 마을 재산의 관리와 임대, 토지 개 량, 식목, 모든 재산거래의 등기 등등의 사무를 취급한다. 부동산의 거래는 이 사무소에 정 식으로 등록함으로써 비로소 법률적인 효력이 발생한다. 마을사무소는 또 그 마을에 본적을 두고 잇는 하나하나의 주민에 대한 주거, 혼인 상태, 출산, 양자 결연, 법률 위반 사실, 기타 그 밖의 사실을 기입한 최신 기록 및 가족에 대한 그 같은 자료를 나타내는 가족 기록을 보 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상 여러 사항에 관해 약간이라도 변화가 있으면, 일본 어느 지방 에서도 당자의 본적지에 보고되어 그 사람의 장부에 기입된다. 취직을 할 때나 재판을 받을 때, 기타 시원 증명이 필요할 때에는 본적지의 시, 정, 촌 사무소에 편지를 내든가, 본인이 직접 가서 등본을 떼어 상대방에게 제시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나 가족의 장부 에 나쁜 기록이 씌어지지 않도록 여러 가지로 몸조심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나 마을의 사무소는 커다란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 책임은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다. 1920년대 일본에 전국적인 정당이 생겼다. 그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여당'과 '야당' 간의 정권 교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일본의 지방 행정은 이 정당 정치라는 새로운 사실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여전히 공동체 전체를 위해 일하는 원로들에 의해 지휘되었다. 지방 행정 기관은 단지 세 가지 점에 관해서는 자치권이 없었다. 즉, 판사는 모두 국가에서 임명 되며 경찰관 및 학교 교원도 전부 국가 공무원이라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대개의 민 사 사건은 조정 재판이나 중재인에 의해 처리된다. 따라서 재판소가 지방 행정에 있어서 행 하는 역할은 거의 없다. 경찰관 쪽이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경찰관은 집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의 본연의 임무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며, 그들 시간의 대부분은 주민 신원 및 재산에 관해 기록하는 사무에 충당된다. 국가는 경찰관을 해당지역과는 인연 이 없는 국외자로 임명하기 때문에 종종 전임되는 경우가 많다. 학교 교원도 역시 전임된다. 학교는 구석에서 구석까지 국가의 통제를 받아, 프랑스처럼 일본의 학교는 어느 학교나 같 은 교과서로 같은 과목을 같은 날에 공부한다. 어느 학교든 아침에는 같은 시간에 같은 라 디오 반주로 같은 체조를 한다. 이처럼 시, 정, 촌은 학교와 경찰과 재판소에 대해서는 지방 자치권을 갖지 못한다. 이와 같이 일본의 정치 기구는 모든 점에서 미국의 기구와는 현저히 다르다. 미국의 정치 기구에서는 공선된 사람들이 최고의 행정적, 입법적 책임을 지며, 지방의 치안은 지방 자치 제의 지휘하에 있는 경찰과 경찰 재판소에 의해 다스려진다. 요컨대, 일본의 정치 기구는 네 덜란드나 벨기에 같은 완전히 서구적인 나라의 정치 체제와 형식상으론 조금도 다르지 않 다. 예를 든다면, 네덜란드에서는 일본에서와 같이, 여왕의 내각이 모든 법률안을 기초한다. 의회는 사실상 그 발의에 의해 법률을 정한 적이 없다. 촌장이나 시장조차도 법률상으로는 여왕이 임명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여왕의 형식적 권리는 1940년 이전의 일본보다 도 훨씬 밑에까지 지방 자치 단체가 처리해야 할 일들의 범위에까지 미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실제로는 여왕이 지방 자치 단체의 지명을 승인하는 관습이 있다 할지라도, 엄연한 진 실인 것이다. 경찰이나 재판소가 직접 군주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다는 점도 네덜란드와 같 다. 다만, 네덜란드에서는 학교만은 어떠한 종파의 단체도 자유롭게 설립할 수가 있다. 일본 의 학교 제도와 흡사한 것은 프랑스이다. 네덜란드에서는 운하나 간척지나 지방 개발 사업 등은 지방의 책임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공동체 전체의 일로서 정당에서 선출된 시장이나 관리의 일이 아니다. 일본의 정치 형태와 이와 유사한 서구 여러 나라 사례 사이의 참된 차이는 그 형식에 잇 지 않고 기능적인 점에 있다. 일본인은 과거의 체험을 통해서 만들어 냈고, 그들의 윤리체계 와 예절 속에 격식화되어 있는, 낡은 복종의 관습에 의존하고 있다. 국가는 '각하'들이 그 '알맞은 위치'에 있어 직분을 다하면, 반드시 그의 특권이 존중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것은 그 해당된 정책이 시인되기 때문이 아니라, 일본에서는 특권의 경계선을 넘는다는 것 자체 가 괘씸한 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국정의 최상층에서는 '국민의 여론'에 대한 것은 고려되 지 않는다. 정부는 단지 '국민의 지지'만을 요구할 따름이다. 국가가 그 권한의 영역을 지방 행정의 범위 내에 침범할 때에도 도한 그 지배권은 황송하게 받아들여진다. 갖가지 국내적 기능을 수행하는 국가는,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느껴지고 있는 것 같은 불가피한 필요악이 아니다. 일본인의 안목으로 보면, 국가는 지고지선에 가까운 것이다. 그 위에, 국가는 국민의 소망의 '알맞은 위치'를 인식하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당연 히 국민의 여론이 지배해야 하는 영역에 있어서는, 설령 그것이 국민 자신의 이익이 되는 일일지라도 일본 정부는 국민의 비위를 맞추듯이 그 일을 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농업 진흥의 임무를 띠고 있는 정부 관리가 낡은 농경법을 개량하려 할 때에는 미국 아이다 호 주의 농업 관리 공무원이 하는 것처럼, 될 수 있는 한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공손하게 행동한다. 정부 보증의 농민 신용 조합이나 농민 구매, 판매 조합을 장려하는 관리는, 그 지 방의 명사들과 오래도록 원탁 회의를 거듭한 끝에 결국 그들의 결정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 다. 지방에 관한 일은 지방이 처리하는 것이다. 일본인의 생활 양식은 알맞은 권위를 할당하 고, 그 각각의 권위에 알맞은 영역을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웃어른'에게는 서구 문화보다 도 더 큰 존경 -따라서 더욱 큰 행동의 자유-을 주지만, 웃어른들도 그 지위를 지키지 않으 면 안 된다. '모든 것을 그 알맞은 장소에 둔다.' 이것이 일본의 좌우명이다. 종교 분야에 있어서는, 메이지의 정치가들은 정치에 비해 훨씬 기묘한 형식적 제도를 만 들어 냈다. 그러나 그들은 역시 같은 일본의 좌우명을 실천한 것이었다. 국가는, 특히 국민 적 통일과 우월의 상징을 선양시키는 종교는 국가 관할에 속하게 하고, 다른 모든 종교는 개인 신앙의 자유에 맡겼다. 이 국가의 통제를 받는 영역이 바로 국가 신토이다. 국가 신토 는 미국에서 국기에 대해 경례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국민적 상징에 정당한 경의를 표하는 것을 기본 취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종교가 아니다."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 므로 일본은, 서양의 신앙 자유의 원칙에 조금도 저촉됨이 없이 모든 국민에게 국가 신토를 요구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미국이 성조기에 대해 경례를 요구함이 조금도 신앙의 자 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그것은 단순한 충성의 상징에 지나지 않았다.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서양인의 비난을 받을 염려도 없이 일본인은 그것을 학교에서 가 르칠 수가 있었다. 국가 신토는 학교에선 신화시대 이래의 일본 역사와 '만세 일계의 통치 자'인 천황의 숭배로 되어 있다. 국가 신토는 국가에 의해 지지되고 국가에 의해 통제되었 다. 다른 모든 종교 영역은, 불고, 기독교의 각파는 말할 것도 없고 교파 신토, 즉 제사 신토 까지 포함해서, 미국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자유 의사에 맡겼다. 이 두 개의 영역은 행정상 및 재정상으로도 확실히 구별되어 있었다. 국가 신토는 내무성의 국가 신토를 주관하는 한 국에 의해 감독되며, 그 신관이나 제식, 신사는 국비에 의해 유지된다. 제사 신토 및 불교, 기독교 각파는 문부성 종교과의 소관이었고, 그 재정은 각 교파에 속하는 신자들의 자발적 헌금에 의지했던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일본의 공식적 태도가 위와 같으므로, 국가 신토가 거대한 국립 교회라고 는 말할 수 없으나 적어도 거대한 국립 기관이라고 부를 수 있다. 태양의 여신을 제사 지내 는 이세 진구에서부터, 특별한 의식 때마다 신고나 자신이 청소를 해야 하는 작은 신사에 이르기까지 11만 이상에 달하는 각종 신사가 있다. 신관의 전국적 계층제는 정치적 계층제 에 병행하는 것이어서, 권위의 계통은 최하위의 신관에서 군, 시 또는 부, 현의 신관을 거쳐, '각하'란 경칭으로 불리는 최고의 신관에까지 미친다. 그들은 민중이 행하는 예배를 주관한 다기 보다는 오히려 민중을 대신해서 예식을 거행한다. 국가 신토는 우리들이 보통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는 것과 같은 그런 것과는 달랐다. 국 가 신토의 신관들은 -그것은 종교가 아니므로- 교의를 가르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 었기 때문에, 서구인이 생각하는 것 같은 의미의 예배 의식은 있을 수 없다. 그 대신, 종종 돌아오는 제삿날에는 지역 공동체의 공식 대표자들이 신사를 찾아와서 신관 앞에 선다. 그 러면 신관은 삼과 종이를 길게 늘어뜨린 막대기를 흔들어 그들을 정화시킨다. 신관은 깊숙 한 신단의 문을 열고 큰 목소리로 신들께서 공양 음식을 드시러 내려오십사 하고 외치고 기 도를 드린다. 참배자들은 각자의 신분에 따라 경건히 배례하고, 예나 지금이나 일본 어느 곳 에서나 있는 가느다란 흰 종이를 늘어드린, 일본인이 성스럽게 여기는 나무의 잔가지 하나 를 봉헌한다. 그러면 신관은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러 신들을 배웅하고 신단의 문을 닫는다. 국가 신토의 제삿날에는 천황도 국민을 대표하여 의식을 행한다. 이때 무든 관청은 휴무이 다. 그러나 이러한 제일은 지방에 있는 신사의 제례나 불교 제일과 같은 민중적인 큰 축제 일은 아니다. 지방의 신사나 불교 제사는 국가 신토 밖의 '자유로운' 영역에 있는 것이다. 이 영역에 있어서 일본인은 그들의 기분에 맞는 많은 유력한 종파와 축제일을 가지고 있 다. 불교는 지금도 국민 대다수의 종교인데, 각기 다른 가르침과 다른 개조를 가진 여러 종 파가 있어, 전국 어디에서나 활약하고 있다. 신토에도 국가 신토 영역 밖에 있는 각종의 유 력한 교파가 있다. 이 중 어떤 것은 1930년대에 정부가 국가주의 입장을 취하기 이전부터 이미 순수한 국가주의의 본거지였으며, 어떤 것은 크리스천 사이언스와 비교할 수 있는 신 앙 요법의 종파이며, 어떤 것은 유교의 가르침을 지키며, 어떤 것은 신들린 상태나 신성한 산 중에 있는 신사를 참배하는 것을 전문으로 하고 있다. 민중적인 축제일의 대다수도 역시 국가 신토의 영역 밖에 방임되어 있었다. 그런 축제일 엔 많은 군중이 신사에 모인다. 참배자는 각자 양치질로 입을 깨끗이 하고 손을 씻고는 방 울을 매단 줄을 당기거나 손바닥을 마주치면서 신이 하강하기를 빈다. 그는 경건히 배례한 뒤에 다시 한 번 줄을 당기거나 손뼉을 쳐서 신을 배웅한다. 그리고는 신 앞에서 떠나 그날 의 중요 행사를 시작한다. 그날의 중요 행사란 신사 경내에 가설된 노점상에서 장난감과 맛 있는 것을 사거나, 씨름판이나 액막이굿 또는 어릿광대가 나와서 우스갯짓을 하는 가구라 춤을 구경하는 등, 한마디로 말해 축제 기분을 즐기는 일이다. 일본에서 산 적이 있는 어떤 영국인은 일본의 축제일에는 항상 생각나는 시가 있다면서, 다음과 같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한 구절을 인용했다. 교회에서도 약간의 맥주가 나오고, 우리의 영혼을 데워 줄 즐거운 불이라도 있다면, 우린 온종일 찬송가를 부르기도 하고 기도드리기도 하면서, 교회를 빠져나와 방항하려는 생각은 갖지 않을 텐데. If at the church they would give us some ale. And a pleasant fire our souls to regale, We'd sing and we'd pray all the livelong day, Nor ever once from the church to stray. 전문적으로 종교적 고행에 몸을 바친 몇몇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본에서 종교란 결코 위압감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일본인은 즐겨 먼 곳의 신사나 절에 참배하러 가지만 이것 역 시 휴일을 크게 즐기는 것이다. 이와 같이 메이지의 정치가들은, 정치에 있어서는 국가의 기능이 미치는 영역을, 종교에 있어서는 국가 신토의 영역을 신중히 구획했다. 그들은 다른 영역을 국민의 자유에 맡겼다. 그렇지만, 그들의 견지에서 볼 때 직접 국가에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는 새로운 계층 제도의 최고 관리인인 그들 자신의 손에 그 지배권을 두려 했다. 육, 해군을 창설할 대에도 그들은 같은 문제에 봉착했다. 그들은 다른 분야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낡은 카스트 제도를 제거했 는데, 군대에서는 일반 시민 생활에서보다도 더 철저히 제거했다. 군대에서는 일본식의 경어 조차 폐지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물론 옛 습관이 남아 있었다. 또한 군대에서는 가문에 구 애받지 않고 본인의 실력만으로 누구든지 졸병에서 장교의 계급가지 출세할 수 있었다. 이 처럼 철저한 실력주의가 실행된 분야는 달리 없었다. 이 점에서, 군대는 일본인 사이에서는 매우 좋은 평판을 얻었는데 분명히 그럴만도 하였 다. 그것은 새로이 조직된 군대를 위해 일반 민중의 지지를 얻는 가장 좋은 수단이었던 것 이다. 또 중대나 소대는 같은 지역에서 온 인근 사람들로 편성되었는데, 평시의 병역은 자기 집 가까운 병영에서 마친다. 이것은 출신 지방과의 인연이 유지되었다는 점에서뿐 아니라, 군대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누구나, 사무라이와 백성, 혹은 부자와 빈자와의 관계를 대신하 여 장교와 병졸, 2년병과 초년병의 관계로 2년동안 생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대는 많은 점에서 민주적 평등주의의 구실을 했다. 또 많은 점에서 참된 국민의 군대였다. 다른 대다수 의 나라들에서는 군대라는 것이 현상을 지키기 위한 강력한 힘으로 작용되었지만, 일본 군 대는 소농 계급에 동정을 갖게 했고, 그 동정이 군대로 하여금 여러 차례 대금융 자본가나 생산 자본가들에 대한 항의를 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이론의 정치가들은 아마도, 국민군을 수립함으로써 나타난 이 결과를 순순히 시인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들이 계층 제도 있어서의 군부의 지상권 확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결 코 이러한 결과를 기대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최고의 영역에 일정한 조처를 강구함으로써 그 목적을 확실히 달성했다. 그들은 이러한 조처를 헌법 속에 규정하지는 않았으나, 이미 승 인되어 있는 군 수뇌부의 정부로부터의 독립을 관례로서 유지시켰다. 육, 해군 대신은 예를 들면, 외무성이나 내정을 맡은 각 성의 장관과는 달리, 천황을 직접 배알하고 상주할 수 있 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천황의 이름을 이용하여 그들의 방책을 강제할 수 가 있었다. 그들은 문관 각료들에게 보고하거나 협의할 필요가 없었다. 더욱이 군부는 어떠 한 내각도 마음대로 조종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신뢰할 수 없는 내각의 조각을, 육, 해군 장관을 입각시키지 않음으로써 간단히 방해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고위의 현역 장교 가 육, 해군 대신의 지위를 채워 주지 않으면 어떠한 내각도 성립되지 않았다. 이 육, 해군 대신의 의자는 문관이나 퇴역 장교가 차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군부가 내각이 취한 어떤 행동에 불만이 있으면, 그들은 내각 안에 있는 그들의 대표를 소환함으로써 내각 을 총사퇴시킬 수도 있었다. 이러한 최고의 정책 수준에 있어서는, 군 수뇌들은 어떠한 간섭도 허락하지 않는 수단을 강구했다. 만일 그 위에 또 보증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헌법 속에서 찾을 수가 있었다. 즉 "제국의회에서 예산을 의정하지 않거나 예산을 성립시키지 못했을 때는 정부는 전년도의 예 산을 시행해야 한다."는 조항이 바로 그것이다. 외무성이 결코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없게 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만주 사변을 일으켰다. 이것은 내각의 정책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겨우 군 수뇌부가 현지 사령관을 지지한 한 예인 것이다. 군부도 다른 분 야에서와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계층적 특권에 관련된 경우에는 일본인은 어떤 결과가 될지 라도 그 결과를 감수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것은 정책에 관해 의견이 일치하기 때문이 아니 라, 특권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산업적 발전의 분야에 있어서도 일본은 서구 어떤 나라에도 유례가 없는 진로를 걸었다. 여기에서도 또한 '각하'들이 계략을 세우고 순서를 정했다. 계획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그들 은 그들이 필요하다고 생각된 산업을 정부 돈으로 건설하고 자금을 공급했다. 정부 관료가 그것을 조직하고 운영했다. 외국의 기사가 초빙되고 일본인을 해외에 파견했다. 그 후 이러 한 산업에 대해, 그들은, "그 조직을 정비하여 당초 계획대로 사업이 신장함에 따라", 정부 는 그것을 민간 회사에 불하했다. 정부는 이러한 산업을 '형편없이 싼값'에, 선택된 소수의 자본가, 특히 미쓰이와 미쓰비시와 같은 저명한 재벌에게 팔아 넘겼다. 일보의 정치가들은, 산업 개발이란 것은 일본에 너무나 중요한 사업이므로, 수요 공급의 법칙이나 주요 기업의 원칙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결코 사회주의적 신조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었다. 결국 톡톡히 재미를 본 것은 재벌들이었다. 일본이 이룩한 것은, 실수와 헛 된 소모를 최소한도로 줄여 그들이 필요로 하는 산업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법에 의해 일본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출발점과 그 후 여러 단계의 일반적 순서' 를 수정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소비재의 생산과 경공업에서부터 시작하는 대신, 먼저 중요 한 중공업에 손을 댔다. 조병창, 조선소, 제철소, 철도 건설 등에 우선권이 주어져서, 급속하 게 기술적 능력이 고도의 수준이 달했다. 이들 산업이 전부 민간의 손으로 이양된 것은 아 니다. 거대한 군수 산업은 여전히 정부 관료의 지배하에 남겨 두어, 정부의 특별 회계의 의 해서 자금이 공급되었다. 정부가 우선권을 준 산업의 모든 분야에서 소상공업자나 관료가 아닌 경영자는 '알맞은 위치'를 갖지 못했다. 국가와, 신용이 있고 정치적으로 특별한 편의를 받는 대재벌만이 이 영역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일본인 생활의 다른 분야가 모두 그러한 것처럼 산업에도 자유 로운 영역이 없지는 않았다. 그것은 최소한의 자본 투자와 최대한의 저임금 노동을 활용함 으로써 운영되는 잔여의 각종 산업이었다. 이러한 경공업은 근대적 기술이 없이도 존재할 수 있었고 지금도 존속하고 있다. 이들 산업은 일찍이 미국에서 우리들이 홈 스웻 숍(home sweat-shop)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운영된다. 소위 스몰 타임(small time) 제조업자가 원 료를 사서, 그것을 가정이나 4, 5명의 직공을 가진 작은 공장에 대여하고, 회수하여 또 대여 하는 같은 과정을 되풀이한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제품을 상인이나 수출업자에 팔아넘긴 다. 1930년대에 있어서 공업 종사자 총수의 53퍼센트가, 이러한 직공수 5명 이하의 공장이나 가정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러한 직공들의 대부분은 낡은 도제 제도의 온정주의적 관습에 의해 보호되었고, 또 많은 숫자는 대도시의 가정에서, 아기를 업고 임금 노동에 종사한 어머 니들이었다. 이 일본 산업의 이원성은 일본인의 생활 양식에 있어서, 정치나 종교 분야에 있어서의 이 원성과 똑같이 중요하다. 그것은 마치 일본의 정치가들이 다른 여러 분야에서의 계층 제도 에 필적하도록 재계에서도 귀족제가 필요하다는 방침을 결정했을 때에, 그들은 그들을 위해 각종 전략적 산업을 건설하였고, 정치적으로 우호적인 상인 가문을 선택하여 다른 계층 제 도와 마찬가지로 '알맞은 위치'를 갖도록 했다. 정부가 이러한 재계의 유력 가문과 인연을 끊는다는 것은 일본의 정치가들의 계획 속에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재벌 은, 그들에게 이윤과 함께 높은 지위를 주는 일종의 계속적인 '비호 정책'에 의해 이익을 거 두었다. 종래의 일본인의 이윤 및 금전에 대한 태도를 보아, 재계 귀족이 국민의 공격을 받 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정부는 있는 힘을 다해 그 체제를 공인된 계층제의 관념 에 따라 확립하려 했다. 그 노력은 완전히는 성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재벌은 군부의 이른바 청년 장교 그룹이 나 농촌 지역으로부터 종종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인 여론 중에서 가 장 혹독한 공격의 목표는 재벌이 아니라 나리킨에게 향해진다는 사실이다. 나리킨은 종종 '누보리슈(nouveau riche:벼락부자)'라는 말로 번역되지만, 그 번역으로는 일본인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미국에서 누보리슈란 엄밀하게는 '새로 온 사람들'이란 뜻이다. 그들 이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그들이 세련되지 못하고 또 알맞은 품위를 익힐 틈이 없었기 때문 이다. 그러나 이 부정적 측면은 그들이 통나무집에서 출세한 인간이며, 노새를 몰던 신세에 서 몇백만 달러의 유전 경영자가 되었다는, 우리 마음을 감동케 하는 긍정적 측면에 의해 상쇄된다. 그러나 일본에서 나리킨이란 말은 일본의 장기놀이에서 온 낱말로서, 여왕으로 승 격된 졸을 의미한다. 이것은 거물처럼 장기판 위를 사납게 날뒤는 졸이다. 그것은 그렇게 날 뛸 수 있는 어떠한 계층적 권리도 갖지 않는다. 나리킨은 사람을 속이고 이기적으로 이용하 여 돈을 모은 것이라고 일본인은 믿고 있다. 따라서 이 나리킨에게 향해진 일본인의 비난은 미국인이 '성공한 하인'에게 대하는 태도와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일본은 그 계층 제도 속 에 거대한 부가 차지하는 위치를 주어서 그것과 제휴했다. 그러나 그 부가 그 영역 밖에서 획득된 경우에는, 일본인의 여론은 그것에 통렬한 비난을 퍼붓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인은 끊임없이 계층 제도를 고려하면서 그 사회의 질서를 다듬어 나갔다. 가정이나 개인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연령, 세대, 성별, 계급 등이 알맞은 행동을 지정한다. 정치나 종교나 군대나 산업에 있어서는 각각의 영역이 신중하게 계층으로 나뉘어져 있어, 윗사람도 아랫사람도 자기들의 특권의 범위를 넘어서면 반드시 처벌된다. '알맞은 위치'가 보장되어 있는 동안은 일본인은 불만 없이 살아간다. 그들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그들의 최대의 행복이 보호된다는 의미에서는 '안전'하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 지만, 그럼에도 역시 계층 제도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 왔다는 이유에서 안전한 것이다. 이것이 일본인의 인생에 대한 판단의 특징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평등과 자유 기업에 대 한 신뢰가 미국인 생활 양식이 특징인 것과 같다. 일본의 인과 응보는 그 '안전'의 신조를 외국에 수출하려 했을 때 찾아왔다. 일본 국내에 서는 계층 제도란 일본 국민이 상상력에 꼭 알맞았다. 왜냐하면 그 상상력 자체가 계층 제 도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야심은 그러한 세계에서 구체화될 수 있는 야시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계층 제도는 도저히 수출될 수 없는 상품이다. 보다 더 나쁜 것으로 여기고 분개했다. 그러나 이론군의 장교나 사병들은 각 점령국에서 주민들이 자기들을 환영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계속 놀랐던 것이다. 일본은 그들에게, 비록 낮은 위치이기는 하나, 어 쨌든 계층제 속에 하나의 위치를 주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계층제란 것은, 계층제의 낮은 단계에 놓여진 자에게 있어서도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라는 것이 그들의 의문이었다. 일본 군부는 자포자기가 되어 몸을 망친 중국 소녀가 일본군 병사나 일본인 기사와 사랑에 빠짐으로써 행복을 찾는다는 투의, 일본에 대한 중국의 '애정'을 그린 전쟁 영화를 몇 편 만 들었다. 이런 것은 나치의 정복관과는 현저히 다르지만, 결국 실패했다는 점에서는 같다. 일본인은 그들 스스로에게 요구한 일을 다른 나라에도 요구할 수는 없었다.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그들은 그들로 하여금 '각자 알맞은 지위를 받아들 이는' 일본의 도덕 체계는 다른 어느 곳에도 기대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른 나라드에는 그러한 도덕률이 없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일본만의 산물인 것이다. 일본의 저술가들은 이 윤리 체계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기술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앞서 먼저 그 도덕 체계를 이해해 야 한다. 제5장 과거와 세상에 빚을 진 사람 영어에서 우리는 곧잘 '과거를 물려받은 자(hiers of the ages)'란 말을 하곤 한다. 두 차 계의 세계 대전과 극심했던 경제적 위기 때문에 이 말에 표현되었던 자신감은 다소 무디어 지기는 했으나, 이 변화가 우리들에게 과거에 대해 부채를 지고 있다는 의식을 더 느끼도록 하지 않았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동양 여러 국민은 전혀 그 반대이다. 그들은 과거에 빚을 진 사람들이다. 서구인이 조상 숭배라 하더라도 전적으로 조상들에게만 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지나가 버린 과거의 일체에 대해서 인간이 지고 있는 큰 채무를 인정 하는 하나의 의식이다. 더구나 동양인이 부채를 지고 있는 것은 과거에 대해서만은 아니다. 다른 사람과의 나날 의 접촉 모두가 현재에 있어서의 그의 채무를 증대시킨다. 그의 일상적인 의사 결정과 행동 은 틀림없이 이 부채로부터 발생된다. 그것은 기본적인 기점이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이 렇게 소중히 양육되고 교육을 받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 혹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단순한 사실 자체까지도 모두 세상 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서구인들이 이 세상에 대한 부채를 극단으로 경시한다는 이유로 일본인은 위들의 행동의 동기가 불충분하 다고 느낀다. 덕이 있는 사람들은 미국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는 누구에게서 무엇 하나 은혜 를 입고 있지 않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를 도외시 않는다. 일본에서 의는 조상과 동시대인이 함께 포함되는 상호 채무의 거대한 망상 조직 속에서 자기 자신의 위치를 인지 하는 데에 있다. 이와 같이 동양과 서양과의 극단적인 차이를 말로 표현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실제 생활 에서 어떠한 차이를 나타내는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더구나 이러한 점을 일본 에서 이해하려 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전쟁 중 우리가 알게 된 그들의 극단적인 자기 희생 이나, 우리들로서는 화를 낼 필요가 없을 듯한 경우에도 일본인들이 곧잘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남에게 빚이 있는 인간은 극도로 화를 잘 내는 법인데, 일본인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이 채무가 일본인에게 갖가지 큰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다. 중국어에도 일본어에도 영어의 '오블리게이션(obligation:의무)'을 의미하는 여러 가지 말이 있다. 그 말들은 완전한 동의어가 아니며, 그 말들이 지니고 있는 특수한 의미는 문자대로는 영어로 번역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 말이 표현하고 있는 관념을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 이다. 큰 것에서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어떤 사람이 지고 있는 모든 채무를 나타내는 '오블 리게이션'에 해당하는 일본말은 '온'이다. 일본어의 관용으로는 이 말은 '오블리게이션'과 '로 열티(loyalty:충성)'에서 '카인드니스(kindness:친절)'와 '러브(love:애)'에 이르는 여러 가지 말로 영역되지만, 이 말들은 모두 원래의 오블리게이션(의무)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일본인은 어린아이에 대해서도 '온(은)'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겠지만, 그런 어법은 옳지 않은 것이 다. 또한 그것은 로열티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일본어에서는 충성은 몇 개의 다른 말로써 표현되고 있는데, 그들 충성을 의미하는 말은 결코 온과 동의어는 아니다. '온'에는 여러 가지 용법이 있는데 그 용법 전부에 통하는 의미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한 의 힘으로 짊어질 수 있는 부담, 채무, 무거운 짐이다. 사람은 윗사람으로부터 '온'을 받는다. 그리고 윗사람이 아니거나 또는 적어도 자기 자신과 동등하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온'을 받 는 행위는 불쾌한 열등감을 준다. 일본인이 "나는 누구에게서 '온'을 입었다."라고 말하는 것 은 "나는 누구에 대하여 의무의 부담을 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 채권자나 은혜 입힌 사람을 그들의 '온진(은인)'이라고 부른다. '온을 잊지 않는 일'은 순수한 헌신적 애정으로부터 나오는 경우도 있다. 일본의 국민 학교 2학년 교과서에 실려 있는 "온을 잊지 말자"라는 제목의 짧은 이야기가, 그 말을 이러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수 신 시간에 아이들에게 읽히기 위한 이야기이다. 하치는 예쁜 개입니다. 태어나자 곧 낯선 사람 손에 넘어가 그 집의 아이들처러 귀여움을 받았습니다. 그 때문에 허약했던 몸도 건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주인이 매일 아침 직장에 나갈 때에는 전차 정거장까지 배웅을 갔으며, 저녁에 돌아올 대에도 다시 정거장으로 주인 을 마중 나갔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주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치는 그것을 모르는지 날 마다 주인을 찾았습니다. 늘 정거장에 가서는 전차가 도착할 때마다 나오는 많은 사람들 속 에서 주인이 있나 하고 찾았습니다. 이렇게 날이 가고 달이 갔습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났을 대에도 여전히 자기 주인을 찾고 있는 늙은 하치의 모 습을 날마다 정거장 앞에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 짧은 이야기의 교훈은 다른 말로 애정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충성심이다. 극진히 어머 니를 생각하는 아들은 모친에게서 받은 '온'을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하치가 그 주인에게 품고 있던 순수한 헌신적 애정을 그가 어머니에게 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말은 특별히 그의 애정을 가리킨 것이 아니고, 그의 어머니가 갓 난아이 적에 그를 위해 해 준 모든 일들, 소년이었을 때 어머니의 갖은 희생, 성인이 되어서 도 그에게 이익이 되도록 해 준 모든 일, 단지 어머니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해서 그가 어머니에게 지고 있는 모든 빚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은 이런 채무를 되돌려준다는 의미 를 포함한다. 따라서 그것은 사랑을 뜻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본래의 의미는 빚이다. 그런데 우리들 미국인은 사랑이라는 것은 의무의 구속을 받음이 없이 자유롭게 주어지는 것으로 생 각한다. '온'은 첫째이며 최대의 채무, 즉 '천황의 온'에 대해서 사용되는 경우에는 항상 무한한 헌 신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천황에 대한 채무로서 사람들은 황은을 무한한 감사 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인은 이 땅에서 태어나, 이렇게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자기 신변의 크고 작은 일이 잘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기뻐할 때에는, 언제나 동시에 이것 들은 모두 어떤 한 사람으로부터 주어진 은혜라고 느낀다. 일본 역사의 모든 시기를 통해 일본인들이 빚을 지고 있는, 살아 있는 인간 속에 최고의 한 인간은 그들이 소속하는 세계 의 최고 윗사람이었다. 그것은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지방 영주, 봉건 영주, 쇼군 등으로 변 했다. 오늘날엔 그것이 천황이다. 그러나 윗사람이 누구인가보다 중대한 의의를 지닌 것은, 몇 세기란 오랜 세월에 걸쳐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인의 습성 속에 최고의 위치 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근대 일본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이 감정을 천황에게 집중하도록 해 왔다. 일본인 특유 의 생활 양식에 대하여 그들이 품고 있는 모든 편애의 정이 국민 한 사람 한사람의 황은을 증대시킨다. 즉, 전쟁 중 전선의 군인들에게 천황의 이름으로 나누어 준 한 개비의 담배에는 병사들 하나하나에게 천황에 대한 '온'을 강조하였으며, 출격에 앞서 병사들에게 분배된 한 모금의 '사케(술)'는 다시금 황은을 깊게 아로새겼다. 가미카제 자살기 조종사는 누구나, 일 본인의 말에 따르면 황은에 보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바, 태평양의 어떤 섬 을 방위하기 위해서 전원 남김없이 옥쇄한 부대의 병사들은 모두 천황에 대한 그들의 무한 한 온을 갚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천황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으로부터도 또한 '온'을 입는다. 물론 부모로부터 받는 온이 있다. 이것이 부모로 하여금 아이들에 대해서 그토록 권위적인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 게 하는, 동양의 유명한 효행의 기초이다. 그것은 아이들이 부모에게 빚을 지고 있으며, 그 것을 갚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부채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아이들로 하여금 부모에게 복종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독일에서처럼-독일도 또한 부모가 아 이들에 대해 권위를 가진 나라이다-부모가 이 복종을 요구하고 강요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 으면 안 되는 것과는 이유가 다르다. 일본인은 동양적인 효행의 해석에 있어 대단히 현실주 의적이어서, 부모로부터 받는 '온'에 대해서 "자식을 둬 봐야 부모의 은혜를 안다"라는 속담 이 있다. 즉, 부모의 '온'이라는 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보살핌과 수고인 것이다. 일본인은 조상 숭배의 대상을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최근의 조상만으로 한정하는데, 이러한 사실이 일본인으로 하여금 유년 시대에 현실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 이들 사람들에 게 신세를 졌다는 것을 한층 통절히 느끼게 한다. 물론 어떤 문화에서나, 누구든 한 번은 양 친의 보살핌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무력한 어린아이이고, 성인이 되기까지 얼마 동안 의 식주를 제공받는 것은 명백하고 틀림없는 사실이다. 일본인은 미국인들이 이 사실을 경시하 고 있다고 통감한다. 그리하여 어느 문필가는 말한 바 있다. "미국에서 보무의 '온'을 잊어버 리지 말라는 말은 기껏 부모에게 친절을 다하라는 정도뿐이다." 어느 누구도 자기 아이들에 게 온을 베풀지 않고 방임할 수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자식들에 대한 헌신적인 보살 핌은 일찍이 자신이 무력한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의 아이들을 부모가 자신을 키워 준 것과 같이 또는 그것보다 더욱 잘 양육함으로써 부모에 게서 받은 온의 일부를 갚는 것이다. 자식에 대한 의무는 '부모의 온' 속에 포섭되고 만다. 일본인은 또한, 교사와 주인에 대해서도 특수한 온을 느낀다. 그들은 모두 무사히 세상살 이를 할 수 있도록 원조해 준 은인들이기 때문에, 장래 언젠가 그들이 어려워져서 무엇이고 부탁하면 그 원하는 것을 듣고 해결해 주어야 하고, 또한 그들이 죽은 후에라도 그 어린아 이를 보살펴 주어야 한다. 사람은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일도 해야 하며, 시간이 지나갔다고 해서 부채가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해가 갈수록 더욱 불어난다. 이를테면 이 자가 붙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서 온을 받는다는 것은 중대한 일이다. 일본인이 잘 쓰는 표현에도 나타나듯이 "사람은 온의 만분의 일도 갚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단한 짐 이다. 또한 '온의 힘'은 항상 단순한 개인적인 기호를 짓밟을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가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와 같은 채무의 윤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각자가 지 고 있는 의무를 이행하는 데 큰 불쾌함을 느끼지 않고, 자신이 큰 빚을 지고 있는 자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미, 일본에 있어 계층 제도가 얼마나 철저하게 조직되어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이 계층제도의 부수적 관습들이 충실하게 지켜지고 있기 때문에, 일본 인은 그 도덕적 채무를 서양인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존중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온은 윗사람의 선의의 사람일 경우에는 한결 행하기 수비다. 일본어에는 윗사람이 사실 그 식객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흥미있는 증거가 있다. 일본에서 '아이 (애)'라는 말은 '러브(love)'를 의미한다. 지난 세기의 선교사들이 그리스도 교의 '러브'의 번 역어로서 쓸 수 있는 유일한 일본어라고 생각한 것은 이 '아이'라는 단어였다. 그래서 그들 은 이 말을 성서의 번역에 사용했고, 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 또는 인간의 신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게 하였다. 그런데 '아이'는 윗사람의 그 식객에 대한 사랑을 특별히 의미하는 말이다. 서구인은 그것은 온정주의(paternalism)의 의미가 아니냐고 느낄지 모르나, 일본어의 용법에 서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애정을 의미하는 말이다. 현대 일본에서도 '아이'는 아 직 위에서 밑으로의 사랑이란 엄밀한 의미로 쓰여지나, 일부에서는 그리스도 교의 용법의 영향으로, 또한 분명히 카스트적 차별을 타파하고자 하는 관변의 노력의 결과로, 오늘날에는 대등한 사람 사이의 사랑에서도 쓰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일본 문화의 특수성이 '온'의 부담을 가볍고, 지기 쉬운 것으로 만들고 있 기는 하지만, 아직도 일본에 있어서 감정을 상하지 않고 온을 '입는 것'은 행복한 경우이다. 일본인은 우연히 다른 사람으로부터 '온'을 받음으로써 보답의 빚을 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 는다. 그들은 항상 "사람에게 온은 베푼다."는 말을 한다. 그것은 "타인에게 무엇을 강제한 다.(imposing upon another)"라는 것이 그 가장 가까운 역어가 된다. 그런데 미국에서의 임 포징(imposing)'이란 말은 타인으로부터 무엇인가 요구하는 것인데 반하여 일본에서의 이 표현은 타인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것 또는 친절을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비교적 인연이 먼 사람으로부터 뜻밖의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일본인에게 가장 큰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일이 다. 이웃 사람들이나 예부터 정해진 계층적 관계에 있어서는 일본인은 온을 받는 번거로움 을 알고 있으며, 또한 기쁘게 그 번거로움을 받아들여 왔다. 그러나 상대가 단순히 지인이 건, 자신과 거의 대등한 인간의 경우에는 매우 불안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될 수 있는 한 온 의 여러 가지 결과에 휩쓸리는 것을 피하고 싶어한다. 일본의 거리에서 무슨 사고가 일어났을 때 모인 군중들이 수수방관하고 하고 있는 것은 단지 자발성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관헌이 아닌 사사로운 사람이 제멋대로 참견을 하 면 그 행위에 의해 그 사람에게 온을 입히는 짓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메이지 이전 의 가장 유명한 법령의 하나에 "싸움이나 말다툼이 났을 때, 불필요한 참견을 하면 안 된 다."는 것이 있었다. 그런 경우에 분명한 권한이 없이 다른 사람을 돕는 인간은 무언가 부당 한 이익을 취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받게 된다. 도움을 베풀면 상대가 크게 은혜를 입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어떻게 해서든 이 좋은 기회를 이용할 법도 한데, 반대로 원조를 베풀 지 않으려 애써 조심한다. 더욱이 형식을 차릴 필요가 없는 경우 일본인은 온에 휩쓸리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이제까지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사람으로부터 단지 담배 한 개비 얻 어 피워도 일본인은 마음이 편치 않다. 그리고 그런 경우 고마움을 표현하는 정중한 화법은 "아, 기노도쿠(독이 있는 감정)군요."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일본인이 나에게 이렇게 설명했 다. "얼마나 좋지 못한 느낌인가를 확실히 말해 버리는 편이 참기 쉬운 일입니다. 이때까지 그 사람을 위해 무엇하나 해주려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온을 입었다는 것이 부끄럽기 짝 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노도쿠'라는 말은 때로는 "Thank you.(감사하오)"(담배를 얻 어서), 때로는 "I'm sorry(유감이오)"(은혜를 입어서), 또 때로는 "I feel like a hell(면목없 다)"(이처럼 과분한 대우를 받아서)라고 번역된다. '기노도쿠'라는 일본어는 이상의 모든 의 미를 뜻하고 있지만, 또한 그 중의 어떤 말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일본어에는 온을 받음으로써 느끼는 마음이 편치 않음을 표현하는 '감사하다'라는 뜻의 많 은 화법이 있다. 그 중 일반적으로 대도시의 백화점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리가토'라는 표현이다. 이 말은 "이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Oh, this is difficult things.)"를 의미한다. 일본인은 보통, 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손님이 물건을 삼으로써 그 상점에게 주는 크 고도 대단한 은혜라고 설명한다. 이 말은 일종의 인사말이다. 이 말은 또한 선물을 받았을 때 쓰여지기도 하며, 그 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우에 쓰여지고 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보편적이고 '감사'를 나타내는 그 밖의 몇 가지 말들은 '기노도쿠'처럼 은혜를 받아 곤란하다 는 심정을 표현한다. 개인 경영의 상점 주인은 대체로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이건 끝나 지 않았습니다"라는 뜻이 되는 '스미마센'이라는 말을 쓴다. 즉, "나는 당신에게 온을 입었습 니다. 그런데 현대 경제 조직하에서 나는 당신에게 진 온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나는 이런 입장에 놓여진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라는 의미이다. '스미마센'을 영역하면 "Thank you.", "I'm grateful." 또는 "I apologize."가 된다. 이를테면, 거리를 거닐다가 바람이 불어 날아가 버린 모자를 누군가가 쫓아가서 주워 준 경우에, 다른 감사의 말보다 즐겨 쓰는 것 이 이 말이다. 그 사람이 당신의 손에 모자를 되돌려줄 때 당신은 예의바르게 그것을 받아 쥐면서 느껴지는 마음 속의 괴로움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람은 지금 나에게 이 렇게 온을 베풀고 있지만 나는 이제까지 한 번도 이 사람을 만난 일이 없다. 나는 이 사람 에게 이쪽으로 온을 제공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런 은혜를 받아서 뒤가 꿀리긴 하지만 사죄하면 약간은 마음이 편해진다. 일본인의 감사를 나타내는 말 중에서도 '스미마센'이 가 장 보통으로 쓰여지는 말이리라. 내가 이 사람에게서 온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모자를 받았다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자, 그 이상 나로서 는 어떻게 할 수 없다. 우리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니까." 다른 사람에게서 은혜를 입었을 때 일본인의 입장에서 한층 강하게 나타내는 감사의 말은 '가타지케나이'로서, 이 말은 '모욕'. '면목없음'을 의미하는 글자로 표현한다. 이 말은 '나는 모욕을 받았다'는 의미와 '나는 감사한다'는 의미 두 가지를 지니고 있다. 일본어 사전의 풀 이에 의하면, 이 말에 의해 당신은 당신이 받은 각별한 은혜에 의하여 욕을 당하고 모욕을 받았다는-까닭은 당신은 그런 은혜를 받을 가치가 없기 때문에-사실을 의미한다고 씌어있 다. 이 표현에 의해 당신은, 온을 받음으로써 느끼는 당신의 부끄러움을 분명히 입으로 고백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치욕, '하치'라는 것은 일본인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다. '가타지케나이', 즉 '나는 모욕 당했다'는 지금도 옛날풍의 상인이 손님에게 예의를 나타낼 때 쓰고 있다. 또한 손님이 외상을 달 때 쓰고 있다. 또한 손님이 외상을 달 때 쓰여지기도 한다. 메이지 이전의 소설에는 이 말이 자주 나타난다. 궁전에서 하녀로 봉사하던 중 영주로부터 첩으로 발탁된 신분이 천한 아름다운 소녀는 영주에게 '가타지케나이'라고 말한다. 즉 "저는 황공하게 이와 같은 온을 입게 되어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습니다. 저는 영주님의 자비가 두렵습니다." 혹 은 결투를 한 사무라이가 당국으로부터 무죄로 풀려나오게 되었을 때 '가타지케나이'라고 말 한다. 즉 "나는 이와 같은 온을 입게 되어 면목을 잃었소. 이런 천한 위치에 몸을 두는 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오. 나는 유감으로 생각하오. 당신에게 정중히 감사하오."라는 의 미이다. 이와 같은 표현은 어떤 개괄적인 논의보다도 더욱더 온의 힘을 잘 말해주고 있다. 사람은 끊임없이 상반되는 기분을 품으면서 온을 입는다. 일반적으로 인정된 구조화된 관계 에 있어, 온이 내포하는 커다란 채무는 때로는 사람들을 자극시켜 한결같이 전력을 다하여 은혜를 갚게 만든다. 그러나 채무자가 되는 것은 대단히 괴로운 일이어서 쉽게 화를 내기도 한다. 은혜를 입은 사람이 얼마나 화를 내기 쉬운가는, 일본의 가장 저명한 소설가의 한 사 람인 나쓰메 소세키의 <봇창>이란 유명한 소설 속에 선명히 묘사되어 있다. 주인공 봇창은 시골의 한 작은 읍에서 처음으로 학교 교사로 취직한 도쿄 출신의 젊은이다. 봇창은 곧 동 료 교사 대부분이 속물들이어서 이들과 같이 지내기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한 젊은 교사가 있어 봇창은 이 교사와 친하게 된다. 언젠가 둘이서 거리를 거닐게 되었는데, 봇창이 고슴도치라는 별명을 붙이 이 친구가 봇창에게 빙수 한 그릇을 사 주게 된다. 고슴 도치는 빙수값으로 1전 5리-1센트의 5분의 1정도-를 지불한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다른 교 사가 봇창에게, 고슴도치가 봇창에 대하여 좋지 않게 말했다고 고자질한다. 봇창은 이 책동 가의 고자질을 정말로 받아들인다. 그러자 곧 그는 고슴도치로부터 받은 온이 마음속에 걸 리게 된다. 그런 놈에게서, 빙수 같은 하찮은 것이라도 온을 입었다는 건 내 체면이 깎이는 일이다. 1 전이든 5리이든 내가 이런 온을 입는다면, 마음 편히 죽을 순 없다...(중략)...내가 거절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서 온을 받는 건, 그를 버젓한 인간으로 여기는 호의있는 행위 탓이다. 내 빙수값을 내가 지불하겠다고 우기지 않고, 나는 온을 받고 감사해야 했다. 그것은 돈으로 는 살 수 없는 답례이다. 지위도 없고 관직도 없지만, 나도 한 사람의 독립된 인간이다. 독 립된 인간이 온을 호의로 받아들이는 건, 100만원보다도 더한 보답이다. 나는 고슴도치에게 1전 5리를 쓰게 하고는, 100만 원보다 더 값진 나의 답례를 치렀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날 그는 고슴도치의 책상 위에 1전 5리를 내던진다. 그것은 빙수 한잔의 온을 입은 것을 갚은 뒤라야만 두 사람 사이의 당면 문제, 즉 봇창에게 한 고슴도치의 모욕적인 언사 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주먹다짐이 될는지도 모르지만 그 온은 이젠 친구 사 이에는 있는 게 아니니까, 먼저 그 온을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자질구레한 일에 관한 이와 같은 신경 과민이나 이와 같이 상처받이 쉬운 생각은 미국에 서는 청년 폭력배들의 기록이나, 신경병 환자의 병력 기록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것이 미덕인 것이다. 일본인일지라도 이와 같이 극단적인 짓을 하는 자는 많 지 않다고 일본인은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야무지지 못하 기 때문일 따름이다. 봇창에 대해서 쓰고 있는 일본의 비평가들은 그를 '신경질적이고 수정 처럼 순수하고 옳은 일을 위해서는 끝까지 싸우는 인간'이라고 평하고 있다. 저자 또한, 봇 창과 자기를 동일시하고 있으며, 또 사실상 비평가들에 의하여 항상 주인공은 작자 자신의 초상화라고 인정되고 있다. 이 소설은 높은 덕에 관한 이야기로서 온을 입은 인간이 자신의 감사는 '100만원'의 가치가 있다 생각하고, 그 생각에 알맞은 행위를 함으로써 비로소 채무 자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오직 '버젓한 인간'으로부터만 온을 받을 수 있다. 봇창은 화를 내면서 고슴도치의 온과 늙은 유모로부터 오랫동안 받았던 온을 비교한다. 이 노파는 그를 맹목적으로 사랑했다. 그리고 그의 가족은 누구 하나 그의 진가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곧잘 과자나 색연필 등 자그만 선물을 살짝 그에게 갖다 주곤 했다. 한번은 3원이나 되는 큰돈을 준 일도 있었다. "그녀의 나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 은 나로 하여금 뼛속가지 오싹하게 했다."그러나 그는 3원을 받게 되어 '모욕'당하였지만 그 것을 빌리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갚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고슴도치로부터 받은 온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비교하여 독백하고 있듯 이 "나는 그려를 나의 분신처럼 생각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말은 일본인의 온에 대한 반응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아무리 착잡한 감정을 가졌 더라도 온진(은인)이 실제로 자기 자신인 한, 즉 그 사람이 '나의' 계층적 조직 속에 일정한 위치를 점하는 사람이라든지, 혹은 바람부는 날 모자를 집어 준 경우처럼 나 자신도 아마 그렇게 하였으리라 상상되는 일이든지, 혹은 나를 숭배하는 사람일 경우에 한해서는 일본인 은 안심하고 온을 입는다. 그런데 일단 이런 조건에 해당되지 않으면 그 온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 된다. 지워진 부채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불쾌하게 느끼는 것이 훌륭 한 태도이다. 일본인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어떤 경우든 온을 너무 무겁게 생각하 면 귀찮은 일이 생긴다. 그 좋은 예가 최근 한 잡지의 '신상상담'난에 실려 있다. 이 난은 미 국 잡지의 '실연자에 대한 충고(Advice to the Lovelorn)'같은 것인데, <도쿄 정신 분석 잡 지>의 인기 기사거리가 되고 있다. 거기에 씌어진 충고는 조금도 프로이트적이 아닌, 완전 히 일본적인 것이다. 제법 나이든 남자가 상담 질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저는 아들 셋, 딸 하나를 가진 아버지입니다. 아내는 16년 전에 죽었습니다. 아이들이 불 쌍해서 저는 재혼을 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그것을 아이들은 저의 미덕이라 생각했습니다. 직므은 자식들이 모두 결혼했습니다. 8년 전 아들이 결혼했을 때, 저는 얼마 떨어진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좀 말씀드리기 거북한 이야기지만, 저는 3년 전부터 밤거리 여자(술집에 계약 되어 있는 창부)와 관계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녀의 신세 타령을 듣고 불쌍해졌습니다. 그리 하여 적은 돈을 들여 몸값을 갚아주고, 집에 데리고 와서 예의 범절을 가르쳐 식모로서 집 에 머물게 했습니다. 그 여인은 책임감이 강하고 감탄할 정도로 절약하는 생활을 합니다. 그 런데 저의 아들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가 이걸 알고 그 때문에 저를 전혀 남 대하듯 합니다. 저는 자식들을 책망하지 않습니다. 모두 제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의 양친이 사정을 알게 된 듯, 어쨌든 그녀도 나이가 나이니까, 돌려보내 주었으면 하는 편지가 왔습니다. 저 는 양친을 찾아뵙고 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그 부모는 무척 가난했지만, 그녀를 미끼로 돈 을 뺏으려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벌써 딸은 죽은 셈치고 있으니까, 그녀를 이제까지처럼 두어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녀 자신은 제가 죽기까지 저의 곁에 있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나이가 아버지와 딸처럼 차이가 있고 해서, 때로는 고향에 돌려보낼가 하고 생각 하기도 합니다. 저의 자식들은 그녀가 재산을 탐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오랜 지병이 있어 이제 1, 2년밖에는 살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어떡하면 좋을지 가 르침을 받았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만, 그 여자가 이전에 한번 '밤 거리 여자'가 된 것은 환경 탓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선량하며 그녀의 부모도 절대로 돈을 바라는 사람은 아닙니다. 회답자인 일본인 의사는, 이것은 분명히 노인이 자식들에게 너무도 과중한 은을 입혔기 때문이라고 보고, 이렇게 답하고 있다. 당신이 쓰신 것 같은 사건은 거의 매일처럼 일어나는 사건입니다......제가 의견을 말하기 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편지의 내용으로 보면, 당신은 저에게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의 회답을 받고 싶으신 것 같은데, 이점에 대해선 다소 당신에게 반감을 느낍니다. 당신이 오랫 동안 독신 생활을 견디신 것에는 경의를 표하지만, 그러나 당신은 그 일을 자식들에게 온을 베푼 것으로 알고 현재 당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 점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당신이 교활한 사람이라는 말은 아닙니다만, 단지 당신은 대단히 의 지가 약한 분입니다. 만일 당신이 여자를 얻지 않으면 안 되었다면-자식들에게 분명히 여자 와 함께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걸 설명하고, 독신 생활을 계속하였다는 사실로써 자식들 에게 온을 베푸는 체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자식들로부터 불평을 듣는 것은 당신이 그 온 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했기 때문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결국 인간에게 성욕이란 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에 당신도 성욕이 일어나는 것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욕망에 싸 워 이기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자식들도 당신이 분명히 그렇게 하리라 기대를 걸 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자식들은 당신이 그들 머리 속에 그리고 있던 이상적인 아버지에 어 울리는 생활을 하리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기대가 배반당했습니다. 저는 당신의 자식들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 쪽이 이기적입니다. 그들은 결혼해서 성적인 만족을 얻고 있으면서 같은 것을 부친에게는 거부하는 것은 '자기들만 생각하는 짓'입니다. 당신도 이렇게 생각하시겠지요. 그러나 자식들은 그것과 다른 생각(위에 말한 대로)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갈래의 생각 은 아무래도 일치될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 여자나 그녀의 양친이 선량한 인간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싶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입 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인간의 선악이라는 것은 환경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 다. 현재 이익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선량한 인간'이라고 말해 버릴 순 없습니다. 저는, 자기 딸을 죽을 날이 가까운 남자의 첩으로 내어 주고 잠자코 있는 그 여자의 양친을 바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자신의 딸이 첩이 되어있는 사실을 잘 고려했다면, 반드시 그것을 이용 해서 얼마간의 돈 아니면 이익을 요구하려 할 것입니다. 그것을 그런 일이 없으리라 생각하 는 것은 당신의 망상입니다. 자식들이, 그 여자의 양친이 무엇인가 재산을 노리고 있지 않나 하고 걱정하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나도 정말 그대로라고 생각합니다. 그 여자는 젊기 때 문에 그런 생각이 없을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의 양친은 분명히 그런 속셈이 있는 게 틀림 없습니다. 당신이 취할 길은 다음 두 가지입니다. 1. '완전한 인간(완전히 완성되어 무엇 한 가지 못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서 그 여자와의 관계를 끊고 깨끗이 정리하십시오. 그러나 이것은 당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당신의 인정이 허락하지 않겠지요. 2. '범인'으로 돌아가십시오. 체면이나 겉치레를 버리십시오. 그리고 당신을 이상적 인간이 라 생각하는 자식들의 환상을 깨뜨려 버리십시오. 재산에 대해서는 빨리 유언장을 만들어 그 여자의 몫과 자식들의 몫을 정해 놓으십시오. 결론으로, 당신은 나이가 많아서 필적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차츰 어린아이처럼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의 생각은 이성적이라기보다 오히려 감정적입니다. 당신은 그 여자를 시궁창에서 구해 주고 싶다고 말씀하지만, 실은 어머니 대용으로서 그 여 자를 차지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저 는 당신에게 두 번째의 길을 선택하실 것을 권합니다. 이 편지는 온에 관해 몇 가지 것을 말하고 있다. 사람이 일단 누구에게, 설령 그것이 자신 의 자식들일지라도, 과도하게 무거운 온을 입히려는 길을 택하였다면, 상당한 장애에 부딪칠 것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방침을 변경할 수 없다. 그는 그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또한 자식에게 온을 베풀기 위해, 설령 아무리 큰 희생을 치렀다 해도, 그것을 이용해서 후일에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온을 '현재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자식들이 분개하는 것은 '당 연한' 일이다. 그들의 부친은 최초의 방침을 지켜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배반당한' 것이다. 자식이 아버지의 보호가 필요했던 동안, 완전히 한 몸을 희생하여 자식을 위해 할 일을 다했으니까, 이제는 장성한 자식들은 특별히 자기 문제를 걱정해 줄 것이라고 아버지 가 생각하였다면 그건 바보스러운 일이다. 자식들은 그 대신 다만 온을 입었다는 사실만을 의식한다. '그들이 반대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미국인은 그런 사태를 이런 식으로는 판단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어머니를 잃은 자식들을 위해 한 몸을 바친 아버지는 당연히 만년에 자식들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식들이 반대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그것을 금전상의 거래로 생각해 본다면 일본인의 생각하는 바를 잘 알게 된다. 까닭은 금전적 관계 에서라면 미국에서도 같은 태도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식으로 계약 수속을 맺어 자 식에게 돈을 빌려주고, 자식이 이자까지 물어가며 그 계약을 충실히 지킬 것을 요구하는 아 버지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그 아버지를 향해, "자식들이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틀림없이 말할 것이다. 이처럼 금전 대차로 바꿔 봄으로써, 우리들은 담배 한 개비를 받은 인간이 솔직히 고맙다고 하지 않고 '수치' 운운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있다. 우리들은 일본인 사이에서 누가 누구에게 온을 입혔다고 말할 때, 화를 내는 이유를 이해 할 수 있다. 우리는 적어도 봇창이 보잘것없는 빙수 한 그릇의 채무를 그처럼 과대시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인은 빙수가게에서 신세를 진다든지, 어머니를 일은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오랫동안의 헌신이라든지, '하치'처럼 충실한 개의 헌 신 등을 금전 대차의 척도로 재는 것에 익숙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일본인은 그렇게 한다. 사랑, 친절, 너그러운 마음 등은 미국에서는 어떤 부수적인 대가가 요구되지 않음으로 해서 한층 존중되지만, 일본에서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그런 행위를 받은 사람은 채무자가 된다. 일본인이 잘 쓰는 속담이 있다. "온을 받는 데에는 더할 수 없을 만 큼의 타고난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하다." 제6장 만분의 일의 은혜갚음 '온(은)'이란 부채이기 때문에 갚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일본에서 보은은, 온과 아주 별개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일본인들은, 우리가 윤리학에 있어서도, 또 ' 오블리게이션(obligation:의무)', '듀티(duty:책임)'같은 애매한 단어에서 볼 수 있듯이 두 개의 범주를 혼동하고 있는 우리들의 도덕을 기이하게 느낀다. 그것은 마치 우리들이 금전상 거 래에서 '채무자'와 '채권자'를 구별하지 않는 말을 쓰는 어떤 부족의 경제 거래에 대해 이상 한 느낌을 받는 것과 같다. 일본인에게는 '온'이라고 불리는 중요하고도 결코 소멸할 수 없 는 채무와, 일련의 다른 개념에 의해 이름지어진 적극적이고도 지체할 수 없는 변제와는 전 혀 다른 세계인 것이다. 사람의 채무(온)는 덕행이 아니다. 변제가 덕행인 것이다. 덕은 사람 이 적극적으로 보답 행위에 몸을 바칠 때 시작된다. 미국인이 일본인의 이러한 덕행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항상 그것을 우리의 경제 거래와 비교하여 보고, 그 배후에는 미국에서의 재산 거래처럼 채무를 이행하지 않는 데 대한 여러 가지 제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해가 쉽게 될 것이다. 경제상의 거래에 있어, 우리들 미국인은, 사람은 계약 증서의 계약을 이행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것이 아닌 물건을 취했을 대 정상을 참작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은행에서 빌린 돈을 지불할까, 지불하지 말까 하는 것이 그때 그때의 기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거기에다 채무자는 최초에 빌린 원금뿐 아니라, 그 원금에서 생긴 이자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애국심이나 가족에 대한 애정은 이것과는 전연 다른 것이라 생각하고 있 다. 우리들에게 있어 애정은 마음의 문제로서, 어떤 약속도 없이 자유로이 주어진 사랑이 최 상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애국심도, 우리나라의 이익을 어떤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시한다 는 의미에서는, 미국이 적국의 무력에 의해 공격받지 않는 한, 오히려 동키호테적인 것, 또 는 분명히 잘못을 저지르기 쉬운 인간의 본성과는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우리는 일본인의 기본적 가정인, 모든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큰 채무를 진다는 관념 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누구나 가난한 양친을 불쌍히 여겨 도와야 하며, 아내를 때려선 안 되고, 자식들을 부양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은 금전상의 부채처럼 양으 로써 계산되지 않으며, 또는 사업상의 성공처럼 보상받지도 못한다. 일본에서의 그것은 미국에 있어서의 채무 변제와 아주 흡사하게 여겨진다. 그리하여 그 배후에 있는 강제력은 미국에 있어서 청구서나 저당이자 지불의 배후에 있는 강제력처럼 강 력하다. 그것은 선전포고라든가 부모의 중병과 같은 위급시에만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은 아니다. 그것은 뉴욕 주의 가난한 농부의 저당에 대한 괴로움이나, 주식을 공매한 후 주식 시세가 상승하는 것을 쳐다보는 월 스트리트의 재계 인사의 괴로움처럼 항상 따라 다 니고 있는 그림자이다. <표> 일본인의 의무 및 반대의무 일람표 1. 온 : 수동적으로 입는 의무. 사람이 '온을 받는다', 또는 '온을 입는다', 즉 온이란 수동 적으로 그것을 받는 인간의 입장에서 본 경우의 의무이다. -고온(황은)=천황으로부터 받는 온 -오야 노 온(친은)=양친으로부터 받는 온 -누시 노 온(주은)=주군으로부터 받는 온 -시 노 온(사은)=스승으로부터 받는 온 -생애 중에 온갖 접촉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온' *자기가 누구에게서 온을 받았을 때 자기에게 온을 주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온 진(은인)이 된다. 2. 온의 반대 의무 : 사람은 온진(은인)에게 이들 '부채를 갚는다', 도는 '이들 의무를 갚는 다', 즉 이것은 적극적인 갚음이란 견지에서 본 경우의 의무이다. A. 기무(의무) :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결코 그 전부를 갚을 수 없고 또한 시간적으로도 한계가 없는 의무이다. -주(충)=천황, 법률, 일본국에 대한 의무(duty) -고(효)=양친 또는 조상(자손까지를 포함)에 대한 의무. -님무(임무)=자기의 일에 대한 임무 B. 기리(의리) : 자신이 받은 은혜와 같은 수량만을 갚으면 되고, 또한 시간적으로도 제한 된 부채 (1) 세상에 대한 기리 -주군에 대한 의무 -근친에 대한 의무 -타인에 대한 의무. 그 사람에게서 받은 온, 이를테면 금전을 받았거나 호의를 받았거나 또는 일에 도움을 받았거나 협동 노동의 경우처럼 한 경우에 기인하는 것 -먼 친척(아주머니, 아저씨, 조카, 조카딸)들에 대한 의무. 이것은 특별히 이들로부터 온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온을 받았다는 데에 기인하는 것. (2) 이름에 대한 기리 : 이 말은, 'die Ehre(명예)'의 일본식 변형이다. -사람으로부터 모욕이나 핀잔을 받았을 때, 그 오명을 '씻는' 의무. 즉 보복, 또는 복수의 의무(이 갚음은 불법적인 공격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자신의 실패나 전문적인 일에 대한 무지를 인정치 않는 의무 -일본인의 예절을 다하는 의무. 이를테면, 모든 예의 범절을 지킬 것, 신분에 맞지 않는 생활을 하지 않을 것, 함부로 감정을 나타내지 않을 것 등. 일본인은 양에 있어서나 또 계속 기간에 있어서나 무제한적인 온에 대한 보답과, 받은 분 량과 똑같이 갚고 특정한 기한에 끝나는 보답을, 각기 다른 규칙을 가진 별개의 범주로 나 누고 있다. 채무에 대한 한없는 변제는 '기무(의무)'라고 불리는데, 이에 관해서 일본인은, "받은 온의 만분의 일도 결코 갚을 수 없다."고 말한다. '기무'는 양친에 대한 보은인 '고 (효)'와, 천황에 대한 보은인 '주(충)'라는, 두 종류의 의무를 일관해서 말하는 명칭이다. '기 무'라는 이 두 개의 의무는 모두 강제적이어서 어느 누구도 면할 수 없다. 일본의 초등 교육 은 '기무'교육이라 불리는데, 이것은 정말 적절한 명칭이다. 이 말처럼 유감없이 '필수'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말은 따로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우발적 사건들이 어떤 사람의 '기무'의 말초적 부분을 다소 수정하는 수는 있으나, '기무'는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짊어지워진 것이며, 또 일체의 우발적 사정을 초월하는 것이다. 이 두 종류의 '기무'는 모두 무조건적이다. 이처럼 일본은 이들 덕을 절대화함으로써 중국 의 국가에 대한 의무와 효행의 개념에서 따로 떨어지게 되었다. 7세기 이래 중국의 윤리 체 계가 일본에 들어왔다. 따라서 '주'와 '고'는 원래 중국어였다. 중국인은 이들 덕을 무조건적 인 것으로는 생각지 않았다. 중국은, 충성과 효성의 조건이며, 충효의 위에 서는 하나의 덕 을 요청한다. 이것은 '런(인)'으로서 'benevolence(자애, 박애)'라 번역되는데, 이 말은 서양인 에게는 사람간의 좋은 관계를 뜻하는 일체를 의미한다. 부모는 '런'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지배자가 '런'을 갖추지 못하면 피지배자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 '런'은 충성의 기초 가 되는 조건이다. 천자의 제위를 유지하는 것도, 그 관료가 관직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그 들이 '런'을 베푸는 데서 비롯된다. 중국인의 윤리는 모든 인간 관계에 이 '런'이라는 시금석 을 둔다. 이 중국인의 윤리적 요청은, 일본에서는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위대한 일본인 학자 아사카와 간이치는 중세의 양국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 들 사상은 분명히 천황제와 맞지 않았다. 따라서 학설로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졌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실 일본에서 '런'은 윤리 체계 밖에 추방된 덕이었다. 그리고 중국 윤리 체 계에서 그것이 차지했던 높은 지위에서 아주 떨어지고 말았다. 일본에서는 '진(인)'이라 발음 되었는데 글자는 중국인이 사용한 것과 같이 씌어진다. '진을 행한다' 혹은 그 변혁인 '진기 (인의)'를 행한다는 것은 최상층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결코 덕으로서 요구되지 않았다. 그것 은 일본인의 윤리 체계로부터 완전히 추방되고 말았기 때문에, 무엇인가 어떠한 일이 법의 범위 밖에서 행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자선 사업에 기부를 청하거나 범죄인에게 자비를 베 푸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특이한 경우이다. 즉, 그 행위 는 아무래도 당신에게 요구되었던 행위가 아님을 의미한다. '진기(인의)를 행한다'는 말은 또 '법의 범위 밖'이란 또 하나의 다른 뜻으로도 쓰인다. 즉, 무뢰한 사이의 덕을 말할 때 쓰였다. 도쿠가와 시대에 습격과 살인을 일삼던 파락호들-그들 은 두 자루의 칼을 차고 허세를 부리던 사무라이와 달리 한 자루의 긴 칼을 차고 다녔다- 의 도적들간의 의리는 '진기를 행한다'는 것이었다. 이들 무법자의 한 사람이 다른 무리에 속하는 무법자에게 가서 장래 복수를 받지 않는다는 보증을 받고 도피처를 제공해 주어야 했다. 현대의 용법에서는 '진기를 행한다'는 지위는 더욱 저하되었다. 그것은 가끔 처벌해야 할 행위의 하나로서 논의의 대상이 된다. 일본의 신문들은 이렇게 논하고 있다. "일반 노동 자들은 아직 진기를 행하고 있는데 이것은 처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경찰은 일본의 구석구 석에서 성행하는 진기 행위를 금지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신문들이 얘기하는 진기는 공갈이나 폭력단의 세계에서 성행하는 '도적들간의 의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특히 현대 일 본의 소규모 노동 청부인이 전세기말로부터 금세기초에 걸쳐 마치 아메리카의 항구에서의 이탈리아 인 노동 청부인(padrone)처럼, 미숙련 노동자와 법률에 벗어난 관계를 맺고, 이들 노동자를 도급으로 어떤 사업장에 취업시킴으로써 사복을 채울 때, '진기를 행한다'고 한다. 인에 대한 중국적 개념의 타락은 여기에 이르러 극에 도달하였다고 할 수 있으리라. 일본인들은 이처럼 중국의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덕을 완전히 달리 해석하여 그 지위를 저하시키고 말았으나, 그 대신 '기무'를 조건적인 것으로 하는 아무런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효행이란, 가령 부모의 악덕이나 부정을 보고도 못 본 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 에 있어서도 이행해야만 하는 의무가 되었다. 그것은 천황에 대한 의무와 충돌할 경우에만 폐기할 수 있는 것으로서, 부모가 존경할 가치가 없는 인간이든가 자신의 행복을 깨뜨린다 는 이유만으로는 절대로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일본 현대 영화의 하나에, 한 어머니가 어느 마을 학교에 교사로 근무하는 결혼한 아들에게서 얼마의 돈을 훔치는 장면이 있다. 이 돈은 이 교사가 어린 여학생, 즉 흉년으로 굶어 죽게 된 그녀의 부모가 자기 딸을 창가에 팔려는 것을 구제하기 위하여 마을 사람들로부터 모금한 돈이었다. 교사의 어머니는 자신이 상당한 요리점을 경영하여 조금도 돈에 궁색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아들로부터 이 돈을 훔친다. 아들은 어머니가 돈을 훔친 것을 알지만, 자신이 그 책임을 뒤집어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의 아내는 진상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돈을 잃은 모든 책임을 지는 유서를 남기고 어린아 이와 함께 자살을 한다. 여기에서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데, 이 비극에 있어서 어머니 의 역할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효행을 다한 아들은, 장래에도 같은 시련을 견딜 수 있는 강한 인간이 되기 위하여 혼자서 홋카이도를 향해 출발한다. 그 아들은 훌륭한 영 웅이다. 이 비극의 전체의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는 인물은 그 도둑질한 어머니밖에 없다는 나의 분명한 미국인적인 판단에 대해서 일본인 동료는 맹렬히 반대하였다.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점은 "고(효)는 때때로 다른 덕과 충돌한다. 만일 주인공이 매우 현명하였다면, 자존심 을 잃는 일이 없이 서로 모순되는 덕을 융화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 나 만일 그가 자신의 마음속에서나마, 자기 어머니를 책망하는 결과가 된다면 자존심을 앞 세우는 것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소설에서도 실생활에서도 결혼한 뒤에 무거운 효행의 의무를 지게 되는 청년의 예를 얼마 든지 볼 수 있다. 일부 '모단(modan, modern)'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양가에서는 며느리를 당연히 양친이 중매인의 알선을 통해 선택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좋은 며느리를 선택하는 데 골치를 썩이는 사람은 그 아들이 아니라 그 집의 가족이다. 그것은 단순히 금전상의 거 래가 걸려 있다는 데 있는 것뿐만 아니라 며느리는 그 집의 계보 속에 편입되어, 드디어는 그 집안의 아들을 낳아 가계를 영속시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중매인은 통례로 우연히 만 난 것처럼 꾸며, 당자인 젊은 남녀가 쌍방 양친과 함께 만나는 기회를 갖게 하는데, 이때 두 사람은 서로 말을 주고받지는 않는다. 때로는 양친은 자식에게 정략 결혼을 시키는 수가 있 다. 그런 경우에는 여자의 부친은 경제적 이익을 취하고, 남자의 부모는 명문가와 결혼함으 로써 이익을 얻는다. 때로는 부모는 당자의 자질이 마음에 들어 그 여자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선량한 아들은 부모의 온을 갚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부모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 할 수 없다. 결혼한 후에도 그의 보은의 의무는 다시 계속된다. 특히 아들이 가계 상속자인 경우 그는 부모와 함께 생활하게 되는데,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시어머니는 사사건건 며느리를 괴롭힌다. 때로는 친정으로 쫓아버리기 도 하는데, 가령 아들이 자기 처와 금실이 좋아 어떻게든 처와 살고 싶어할 때에도 결혼을 취소하여 버리는 경우가 있다. 일본의 소실이나 신변 이야기에는 아내의 고민과 똑같이 남 편의 고민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남편이 이혼에 굴복하는 것은 물론 '고(효)'를 행하기 위해서이다.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모단'한 한 일본 부인도 도쿄에 살 때, 시어머니에게 쫓겨나서 어 쩔 수 없이 슬퍼하는 젊은 남편 곁을 떠나온 임신한 젊은 부인을 자기 집에 맡은 일이 있었 다. 그 여인은 병이 들고 비탄에 빠졌지만 자기 남편을 책망하지는 않았다. 차츰 그 여인은 곧 태어날 아이에게 마음을 쏟게 되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태어나자, 시어머니는 말없이 순 종만 하는 아들을 데리고 와서 어린아이를 요구하였다. 그 아이는 물론 남편의 가족에 속하 기 때문에 시어머니는 그 아이를 데려가 버렸다. 시어머니는 곧 그 아이를 다른 집에 맡겨 기르게 했다. 이처럼 경우에 따라 여러 가지 일들이 효행 속에 포함되지만, 그 모든 일들이 자식이 당연히 지불해야 되는, 부모로부터 받은 채무에 대한 갚음이다. 미국에서는 모든 이 와 같은 이야기는 개인의 정당한 행복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간섭의 사례라고 여겨지고 있 다. 일본인은 은혜의 요청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이 간섭을 '외부로부터'의 간섭으로 보지 않 는다. 일본에서의 이러한 이야기는, 미국에서 대단한 어려움 속에도 참고 견디면서 채권자에 게 빚을 다 갚은 정직한 사람의 이야기처럼, 정말 고결한 사람, 스스로의 인격을 존중한 권 리를 힘써 얻은 사람, 또는 어떻든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개인적 소망을 기꺼이 내던 진 강한 의지의 소유자라는 것을 몸소 증명한 사람의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이 같은 소망 의 억압은 아무리 유덕한 행위라고 치부되더라도, 가슴속에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울분의 정을 남기게 마련이다. 이러한 점에서, 싫은 것에 대한 아시아 여러 나라의 속언이, 이를테 면 미얀마에서는 '화재, 홍수, 도둑, 관리, 악인'을 열거하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지진, 벼락, 오야지(가장, 아버지)'를 들고 있는 것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효행은 중국의 경우처럼, 몇 세기 동안의 역대 조상이나 그 조상의 후손인 번성하는 현재 의 넓은 종족을 포괄하지 않는다. 일본의 조상 숭배는 최근의 조상에 한정되어 있다. 묘석은 누구의 무덤인가를 명확히 하기 위해 매년 문자를 고쳐 쓰지만,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이미 사라진 조상의 묘석은 치워 버린다. 또한 그런 조상의 위패는 불단에 안치하 지 않는다. 일본인은 생생하게 기억되는 사람 이외의 조상에 대한 효행을 중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지금 여기에 있는 자에 집중한다. 많은 저서가 일본인의 추상적 사색, 또는 현존하지 않는 사물의 심상을 뇌리에 그려내는 것에 대한 흥미의 결여를 논하고 있는데, 일 본인의 효행관은 중국의 효행관과 대조할 때 역시 이 점을 입증하는 사례의 하나가 된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의 제일 큰 실제적 중요성은 '고(효)'의 의무를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에 한정하고 있는 점이다. 왜냐하면 중국이나 일본에 있어서나 모두 효행이라는 것은, 단지 자기 부모나 조상에 대 한 존경이나 복종 뿐 아니라 그것보다 훨씬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서구인이, 어머니의 본 능이나 아버지의 책임감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식을 위한 일체의 수고로움을 그 들은 조상에 대한 효심에 의존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일본은 이 점에 대하여, 대단히 분명하 게 자신이 받은 사랑과 보호를 자식에게 베풂으로써 조상의 은혜를 갚는다고 말하고 있다.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의무'를 표현하는 특별한 말은 없고 그런 의무는 모두 부모와 부모의 부모에 대한 '고(효)' 속에 포함된다. 효행은 가장의 어깨에 걸쳐 있는 수많은 책임을 하나하나 이행하는 것, 즉 아이들을 부양 하고, 자식에게 교육을 받게 하며 재산 관리의 책임을 맡고, 보호가 필요한 친척을 맡아 보 호하고, 기타 모든 일상적 일을 다할 것을 명령한다. 일본에서는 제도화된 집안의 범위를 뚜 렷이 제한하고 있으므로, 이 '기무(의무)'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수효도 따라서 분명히 한정 되어 있다. 자식이 죽은 경우에는, 효의 의무에 따라 자식의 미망인과 그 아들을 부양할 책 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남편과 사별한 딸과 딸의 자식을 맡아서 보살펴 주지 않으 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과부가 된 조카딸을 맡을 '기무'는 없다. 만일 그것을 맡는 다면, 그것은 별개의 '기무'를 행하는 것이 된다. 자신의 자식을 양육하고 교육하는 것은 '기 무'이다. 그러나 조카를 교육시키는 경우에는 조카를 법률상 정식으로 자기의 양자로 삼는 것이 보통이며, 만일 조카가 여전히 조카의 신분을 유지할 때 조카를 교육시키는 것은 '기 무'가 아니다. 효행은, 비록 상대가 가난한 비속 친족이라도 그 사람에게 베푸는 원조를 존경과 사랑으 로 할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어떤 가족에게 부양되는 젊은 과부들은 '찬밥친척(냉반친척)' 이라 불린다. 그것은 식은 밥을 먹인다는 의미로서, 그 집안의 누구에서나 시키는 대로 해야 하고, 그들 자신의 신상에 관한 어떠한 결정에도 아주 순종해야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불쌍한 친척이다. 특수한 경우 그들이 보다 좋은 대우를 받는 일이 있지만, 그것은 그 집의 가장이 '기무'로서 좋은 대우를 베풀어야 하기 때문은 아니다. 또한 형제가 서로간의 의무를 따뜻한 마음으로 수행하는 것도, 그들이 꼭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기무'는 아니다. 두 형제가 서로를 지독히 미워하는 사이지만, 동생에 대한 '기무'를 다했다는 이유로 칭찬을 받는 사람이 곧잘 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는 대단한 반목이 있다. 며느리는 바깥 사람으로서 가정에 들어온 다. 며느리는 먼저 시어머니의 살림 방식을 배워, 만사를 그 방법에 좇아서 행하도록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대개의 경우, 시어머니는 사사건건 며느리가 자기 아들의 아내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 주장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상당히 심한 질투심을 지니고 있다고 추측되는 때도 있다. 그러나 "미움받는 며느리가 귀여운 손자를 낳는다."는 일본 속담에도 있듯이, 며 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에는 항상 '고(효)'가 존재한다. 며느리는 겉으로는 한없이 유순하다. 그러나 이 순하고 사랑스럽던 사람이 세대가 바뀌는 데 따라, 이전 자기의 시어머니가 그랬 던 것처럼 가혹하고 말 많은 시어머니가 된다. 그 여인들은 젊은 아내 시절에는 반항심을 나타낼 수가 없었지만, 그러하고 해서 정말 순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만년이 되어 이른바 쌓이고 쌓인 원한을 자신의 며느리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오늘날 일본의 처녀 들은 공공연히 맏아들이 아닌 사람과 결혼하는 편이 훨씬 좋은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 게 되면 위세를 부리는 시어머니와 함께 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고(효)를 다한다'는 것은 반드시 가정내에 자애를 실현하는 것이 된다고는 할 수 없다. 어 떤 문화에서는 이 자애라는 것이 광대한 가족의 도덕률의 요점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론에 서는 그렇지 않다. 어느 일본인 저자는, "일본인은 집을 대단히 존중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 문에 가족 개개의 성원과 그 상호간의 가족적 유대를 그리 크게 존중하지 않는다."라고 썼 다. 물론 이 말은 언제나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일반적인 형편을 말해 주고 있다. 중 요한 것은 의무와 부채의 갚음이며, 연장자는 중대한 책임을 맡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들 책임의 하나는 아랫사람에게 필요한 희생을 반드시 치르도록 하는 것이다. 그들의 그 희 생에 불복한다 해도 큰 변함이 없다. 그들은 연장자의 결정에 복종치 않으면 안 된다. 그렇 지 않으면 그들은 '기무(의무)'를 태만히 한 것이 된다. 일본에 있어서의 효행의 특징인 가족 구성원간에서 나타나는 뚜렷한 원한은, 효행과 동등 하게 '기무'라고 여겨지는 또 하나의 중대한 의무인 천황에 대한 충절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 는다. 일본의 정치가들이 천황을 신성한 수장으로 받들고, 세속적 생활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는 계획을 세운 것은 정말로 타당한 조처였다. 일본에서는 다만 그렇게 함으로써 천황은 전국민을 통일하여 반감 없이 국가에 봉사하도록 하는 수단으로서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천황을 국민의 아버지로 삼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였다. 왜냐하면 가정의 아버지는 자식들이 모든 의무를 다하여 그 은혜를 갚기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존경될 수 는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천황을 국민의 아버지로 삼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였 다. 왜냐하면 가정의 아버지는 자식들이 모든 의무를 다하여 그 은혜를 갚기는 하지만, 경우 에 따라서는 '대단히 존경될 수는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천황은 일체의 세속적 고려에 서 떠난 신성한 수장이 아니면 안 되었다. 일본인의 최고의 덕인 천황에 대한 충절, 즉 '주 (충)'는 속세와의 접촉에 의하여 더럽혀지지 않는 하나의 환상적인 '선량한 아버지'를 무아경 적인 정관으로서 받들어야 한다. 메이지 초기의 정치가들은 서양 여러 나라를 시찰한 후, 이 나라들에 있어서는 모든 역사 가 지배자와 인민 사이의 투쟁에 의해 형성되어 있어, 이것은 일본 정신에는 부합되지 않는 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귀국 후 헌법에다 천황은 '신성하며 침범될 수 없는' 존재로서, 국무 대신의 어떠한 행위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내용의 조항을 삽입했다. 천황 은 책임 있는 국가의 원수로서가 아니라, 일본 국민 통합의 최고의 상징으로 필요한 존재였 다. 사실 천황은 거의 700년 간 실권을 지닌 통치자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가지처럼 천황을 무대 뒤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단지 하나, 메이지 정치가들이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은, 모든 일본인이 마음속에서 무조건적인 최고의 덕인 '주(충)'를 천황에 대하여 바치도록 하는 일이었다. 봉건 시대의 일본에 있어서 '주'는 세속적 수장인 쇼군에 대한 의무였다. 이러한 긴 역사가 메이지의 정치가들에게 그들이 목 적으로 삼은 일본의 정신적 통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되는가 를 가르쳐 주었다. 과거 몇 세기 동안이나 쇼군은 대원수와 최고 행정관을 겸하였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쇼군에게 '주'를 바쳐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쇼군의 지배권에 반항하여, 쇼군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하는 음모가 때때로 되풀이되었다. 쇼군에 대한 충절은 때로는 봉건 군 주에 대한 의무와 모순되었다. 더구나 고차원의 충의는 낮은 차원의 충의만큼의 강제력을 지니지 못했다. 어쨌든 주군에 대한 충절은 직접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주종의 인연을 기초 로 한 것으로서, 이것에 비교할 때 쇼군에게 하는 충절이 서먹서먹하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 는 아니었다. 더구나 동란 시대에는 번신들은 쇼군을 그 지위로부터 쫓아내고 그 대신에 자 기의 봉건 영주를 옹립하기 위해 싸웠다. 메이지 유신의 선각자와 지도자들은 구중 구름 속에 깊숙이 은거하고 있는 천황, 따라서 그 풍모를 각자가 제각기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이상화하여 그릴 수 있는 천황에게 '주 (충)'를 바쳐야 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1세기에 걸쳐 도쿠가와 막부와 싸웠다. 메이지 유신 을 이 존왕파의 승리였다. 그리하여 1866년은 이에 '복고'라고 이름을 붙인 사실은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천황은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그림자로 물러났다. 천황은 각하들에 게 권력을 부여하였다. 스스로 정부나 군대를 지휘하며 그때그때의 정치 방침을 지령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지난날처럼 조건자들-이전보다는 뛰어난 인물이 뽑혔지만-이 변함없이 정무를 담당하였다. 정말 큰 이변이 일어난 것은 정신적 영역이었다. '주(충)'는, 최고 사제이 며, 일본의 통일과 무궁함의 상징인 신성한 수장 곧 천황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가 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주'가 이처럼 쉽게 천황에게로 옮겨진 것은 황실을 태양의 여신의 후예라고 하는 옛 민간 신화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 신성의 전설적 주장은 서구인이 생각하는 정도로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와 같은 주장을 부정한 일본의 지식 계급도 그렇 다고 해서 천황에게 '주'를 바치는 것에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았던 것은 틀림없었고, 신의 후예라는 걸 정말로 믿었던 많은 일반 민중도 신의 후예라는 것을 서구인과는 다른 방식으 로 해석했다. '가미(신)'는 'god'으로 번역되지만,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머리', 즉 계층 제도 의 정점이다. 일본인은 인간과 신 사이에 서양인처럼 큰 차이를 두지 않는다. 일본인은 누구 든 죽으면 '가미(신)'가 된다. 사실 봉건 시대에 있어서 '주'는 전혀 신적 자격을 지니지 않았 던 계층제의 우두머리에게 바쳐졌다. '주'를 천황에게로 옮김에 있어 더욱 중대한 역할을 한 것은, 일본 역사의 모든 시기에 걸쳐 유일한 황실이 계속하여 황위에 등극했었다는 사실이 었다. 서구인이, "이 황실의 연면한 계승이라는 것은 기만이다. 왜냐하면 황위 계승의 규칙 이 영국이나 독일의 왕위 계승의 규칙과 합치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이의를 제기한다 해 도 헛수고이다. 일본에는 일본 특유의 규칙이 있었다. 그 규칙에 의하면, 황통은 '만세'일계 인 것이다. 일본은 유사 이래 서른 여섯이나 되는 다른 왕조가 교체된 중국과는 달랐다. 일 본은 이제까지 여러 가지 변천을 거쳐왔지만 그 어떤 변혁에서도 결코 그 사회조직이 지리 멸렬하게 파괴된 일이 없이 항상 불변의 형태로 지켜져 왔던 나라였다. 유신 이전 100년간에 반도쿠가와 세력이 이용했던 것은 이러한 근거에 있었지, 천황 후예 설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계층제의 정점에 서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하는 '주(충)' 는 천황에게만 바쳐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천황을 국민의 최고 사제로 받들어 올 렸지만, 그 역할은 반드시 신일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여신의 후예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근대 일본에서는 '주'를 직접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어 특히 그것을 천황 한 사람에게 향하 도록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였다. 유신 뒤 최초의 천황은 걸출하면서도 스스로 위 엄을 구비한 사람으로서, 그의 긴 통치 기간에 쉽게 자신의 몸이 국체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 신민의 찬양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드물게 공중 앞에 모습을 나타냈지만, 그의 등장은 불경이 되지 않도록 온갖 숭배 도구를 준비한 가운데서 상연되었다. 그의 앞에 머리를 숙일 때, 많은 군중들은 숨죽인 듯 고요했다. 그들은 감히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려고 하지 않았 다. 어디에서건 높은 곳에서 천황을 내려다볼 수 없도록 2층 이상의 창은 셔터가 내려졌다. 높은 지위에 있는 조언자들과 면접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계층적이었다. 천황이 그 위정 자를 불러들인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소수의 특별한 권한이 부여된 각하들만이 '배알'의 은 총을 입었다. 논쟁의 대상이 된 정치 문제에 관해서 조칙이 내려지는 일은 없었다. 조칙은, 도덕이나 절검에 관한 것이든가, 그렇지 않으면 어떤 문제가 결정이 되었다는 것을 표시하 는 경계표로서, 다라서 국민에게 안심을 주는 의도에서 발표되는 것이었다. 그가 임종의 자 리에 누웠을 때는 일본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사원으로 변하여, 국민은 그의 쾌유를 소원하 는 경건한 기도를 드렸다. 천황은 이처럼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하여 국내의 정쟁이 전혀 미치지 않는 곳에 놓여진 상 징이 되어 있었다. 성조기에 대한 충성이 일체의 정당 정치 위에, 또한 멀리 초월한 영역에 있는 것과 같이, 천황은 '침범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국기를, 만일 그것이 인간이라 면 그러한 일이 전혀 온당치 못한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정중한 예의로 다루고 있다. 그런 데 일본인은 그들의 지고의 상징의 인간성을 철저하게 활용하였다. 국민은 공경을 바치고 천황은 거기에 응답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천황이 '국민을 염려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면 황홀감에 빠져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폐하의 마음을 편안하시게 하기 위해' 한 몸을 희생했다. 일본 문화처럼 완전히 개인적 유대 위에 입각한 문화에서는, 천황은 국기 따위는 감히 미치지 못하는 충성의 상징이었다. 훈련중의 교사들이 만일 인간 최고의 의무가 조국 애라고 말했다면 그들은 낙제였다. 그것은 천황 그분에 대한 보은이다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충)'는 신하와 천황과의 관계의 이중적 체계를 부여한다. 신하는 위를 향해서는 중간자 를 거치지 않고 직접 천황을 우러러본다. 그는 그의 행동에 의해 직접 개인적으로 '폐하의 마음을 편안케' 해 드리는 데 신명을 바친다. 그러나 신하가 천황의 명령을 받을 때는 그 명 령은 그와 천황 사이에 개재하는 여러 중간자의 손을 거쳐서 중계된 것을 귀에 담는다. '이 것은 천황의 명령이다'라는 표현은 '주'를 환기하는 표현으로서, 아마도 다른 어떤 근대 국가 도 환기할 수 없는 강한 강제력을 지니고 있다. 로리(Hillis Lory)는, 평상시 군대의 훈련에 서 어떤 사관이 허가 없이는 수통의 물을 마셔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내리고 연대를 인솔하 여 행군한 일을 서술하고 있다. 일본 군대의 훈련에서는 곤란한 상황하에서 중간 휴식 없이 4,50마일을 계속 강행군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대단한 중점을 있었다. 이날에는 갈증과 피 로 때문에 낙오자가 20명이 나왔다. 그 중의 5명이 사망했다. 사망한 병사의 수통을 조사하 여 보니까, 전혀 손을 안 댄 채로 있었다. "그 사관이 그런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명령은 천황의 명령이었다." 일반 행정에서는 '주'는 죽음에서부터 납세에 이르는 모든 의무를 수행시키는 강제력이 되었다. 징세관, 경찰관, 지방 징병관은 신민이 바치는 '주(충)' 를 매개하는 기관이다. 일본인의 이장에서는 법률에 복종하는 것은 그들의 최고 의무, 즉 '고온(황은)'을 갚는 일이다. 이것처럼 미국의 풍습과 뚜렷한 대조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없 을 것이다. 미국인에게 있어서는 거리의 정지 표시등에서부터 소득세에 이르는 어떤 법률도 새로운 법률이 나올 때마다, 그것이 개인적 일에 있어서의 개인적 자유에 대한 간섭이라고, 나라 안 어디에서고 분개하곤 한다. 연방 법규는 이중으로 의문시된다. 그것은 나아가 각주 의 입법권에 간섭을 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연방 법규는 워싱턴의 관료들이 국민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리하여 많은 시민은 이들 법률에 대하 여 아무리 아우성치고 반대하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그들의 자존심을 위해서는 당연히 허락 될 수 있는 한도에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일본인은 우리 미국인을 준법 정신이 결여된 국민이라고 판단한다. 우리들은 또 윌의 관점에서 일본인은 민주주의의 관념이 결여된 굴종적인 국민이라고 판단한다. 양국 국민의 자존심은 각각 다른 태도와 결부되어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은 자신의 일은 자신이 처리한다는 태도에 의존하고 있고, 일본에서는 자신이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은혜 갚음을 한다는 것에 의존하고 있다. 이 두 가지 태도는 제각기 자체의 난점을 지니고 있다. 우리들의 난점은 법규가 국가 전체에 이익 이 되는 경우에도 국민의 승인을 얻는 것이 어렵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의 난점은 무엇이 라 하여도 어떤 한 사람의 생애 전부가 그 그림자에 의해 뒤덮이고 말 정도로 큰 부담이 되 기는 어렵다는 점에 있다. 모든 일본인들은 어떤 점에 있어서는 아마도 법률의 범위 안에서 생활하면서도 자기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을 회피하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다. 그들은 또한 미국인이라면 결코 칭찬 하지 않는 어떤 형태의 폭력이나 직접 행동, 또는 개인적 복수를 칭찬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보조건이나 다른 여러 유보조건이 강조되더라도 '주'가 일본인들 위에 아직도 큰 지배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1945년 8월 14일 일본이 항복했을 때, 세계는 이 '주'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힘을 발휘한 사실을 목격하였다. 일본에 고나한 경험과 지식을 가진 많은 서구인은 일본이 항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여겼다. 아시아 대륙과 태평양 여러 섬 곳곳에 산재한 일본군들이 순순히 무기를 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안이한 생각이라고 그들은 주장하였다. 일본군의 대부분은 아직 국지적 패배를 당하지 않았고, 그들 은 그들 나름으로 전쟁 목적의 정당성을 확신하고 있다. 또한 일본 본토의 여러 섬도 최후 까지 완강히 항전하는 군인들로 충만 되어 있다. 따라서 점령군은 그 전위 부대가 소부대가 도지 않을 수 없음으로 해서 함포의 사정권을 넘어서 진격할 경우에는 전부 살육당할 위험 이 있다. 전쟁중 일본인은 어떠한 대담한 일이라도 태연히 해치우지 않았던가. 그들은 호전 적인 국민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을 분석하고 있던 미국인은 '주(충)'를 계산에 넣지 않았던 것이다. 천황이 입을 열자 전쟁은 끝났던 것이다. 천황의 목소리가 방송되기 전에 완강한 반대자들이 궁성 주위에 비상선을 쳐서 정전 선언을 저지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 선언이 일단 읽혀진 다음에 는 모든 자가 그것에 승복하였다. 만주나 자바의 현지 사령관도, 일본에 있던 도조도, 누구 하나 그것을 거역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들 부대는 비행장에 착륙하여 정중하게 맞아들여졌 다. 외국인 기자 한 사람이 서술한 바와 같이, 아침에는 소총을 겨누면서 착륙했지만, 점심 때는 총을 치워 버렸고, 저녁때는 이미 장신구를 사러 외출할 정도였다. 일본인은 이제 평화 의 길을 따름으로써 '천황의 마음을 편안케'했던 것이다. 1주일 전까지는, 천황의 마음을 편 안케 해 드리기 위해서 죽창으로라도 이적을 격퇴키 위해 몸을 바치겠다고 했었다. 이와 같은 태도에는 조금도 불가사의한 점이 없다. 그것을 뜻밖이라고 느낀 것은 인간의 행위를 좌우하는 감정이 얼마나 다종 다양한가를 인정할 수 없었던 서구인뿐이었다. 어떤 사람은, 일본은 사실상 절멸할 수 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선언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일본 이 나라를 구할 유일한 길은 자유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아 정부를 쓰러뜨리는 것이라고 주장 했다. 어느 견해도 국민 전체가 지지하는 총력전으로 싸우는 서구의 한 나라의 경우라고 생 각한다면 이치가 통하였다. 그러나 이들 견해는 일본이 서양과 대동소이한 행동 방침에 따 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틀렸던 것이다. 몇 달이 지난 다음, 즉 무사 평온하게 점령이 이루어진 다음에도 몇몇 서구의 예언자들은 서구류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든가, 또는 '일본인은 패전한 사실을 인식하고 있지 않다' 라는 이유로 모든 것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정당한 것과 알맞은 것에 고나한 석 인의 표준에 기초한 훌륭한 서구식의 사회 철학이다. 그러나 일본은 석가 아니다. 일본은 서 구 여러 나라의 최후의 방법인 혁명을 이용하지 않았다. 일본은 또한 적국의 점령군에게 불 복종 사보타지를 쓰지 않았다. 일본은 일본 고유의 강점, 즉 아직 전투력이 분쇄되지 않았는 데도 무조건 항복을 수락한다는 막대한 대가를 '주(충)'로서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능력을 사 용하였다. 일본인의 편에서 보면, 이것은 분명히 막대한 지불임에는 틀림없었으나, 그 대신 일본인은 무엇보다 높이 평가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즉, 일본인은 비록 그것이 항 복의 명령이긴 했지만, 그 명령을 내린 것은 천황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 것 이었다. 패전에 있어서도 최고의 법은 여전히 '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