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의 종말일까? 유럽에서 공산주의 국가들이 붕괴하고 나자, 어느 순진한 미국인 철학자는 근대에 발전하 였던 자유사회가 이제 승리자로 우뚝 섰다 하여 세계사가 종결되었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너무 성급한 결론이다. 시민적 민주주가들의 국이 더 우수해서 공산주의 국가들에 대해 승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국가들은 시민적 국가들보다 더 편협했기 때 문에 몰락하였다. 맹인들 사이에서는 외눈박이가 왕 노릇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가 두 눈 으로 볼 수 있다면 사정은 더 좋아질 것이다. 공산주의에 대해 승리하였다고 해서 우리의 체제가 여전히 안고 있는 난제들을 간과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 난제들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오늘날 실업은 우리를 다시 강하게 압박하는 문제이다. 소유 자본가로 불리는 고용주들은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도입된 사회 규정들의 철회를 노골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사 회적 모범으로서 우리는 아시아 국가들을 본다. 그곳 사람들은 매우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서양의 과학과 기술을 받아들여 성공적으로 더욱 발전시켰다. 하지만 서구인들의 정치적 자 유와 자기 실현에 대한 표상이 그들에게는 없다. 이 사회들은 정치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사 회가 시장경제를 구축할 경우, 경제적으로는 매우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 다. 그런데 20세기의 유럽 파시스트들도 이미 그것을 수행했었다. 만일 히틀러가 유럽을 어처 구니없는 전쟁 속으로 몰아넣지 않았더라면 유럽 사회가 어떤 모습이 되었을지 누가 알겠는 가? 경제적 무능력으로 인해 공산주의가 몰락한 것과 달리, 파시즘은 자유세계가 세계대전 에서 파시즘을 이겼기 때문에 멸망하였다. 우리는 역사에서 그 어떤 결정적인 발전도 읽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계몽 주의 이념들은 19세기에 반대 이념들에 의해 줄곧 의혹이 제기되었고, 20세기에는 완전히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 유럽에서 전체주의 체제의 종말이 곧 견고한 자유주의 국가들의 출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세계 인구의 5분의 1이나 속해 있는 중국에서 공산주의 자들이 1989년에 자유주의 운동을 저지했고, 정치적 자유를 배제한 채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성급한 역사 낙관주의는 금물이다. 유토피아 그러면 우리는 어떤 유토피아를 따라가야 할까? 이 책에서는 '유토피아'라는 새로운 낱 말이 이제야 등장하는데, 우리는 지금 제7장의 제목으로 쓰였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최선 구가의 문제에 적용시켜야 하는 지점에 닿은 것이다. '유토피아'라는 개념이 철학에 들어온 것은, 영국의 정치가 토머스 모어가 1516년에 출간 한 책을 통해서였다. 근대초, 16세기초는 유럽인들이 탐험 여행을 시작한 시대였다. 당시 많 은 여행자들이 외지 민족들의 관습을 보고하는 책들을 썼다. 토머스 모어의 책에서는, 어느 세계 여행가가 유토피아 섬의 방문을 보고하면서 그곳 국 가와 주민들의 관습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핵심은, 이 여행가를 포함하여 유토피 아나 유토피아 사람 모두가 허구라는 것이다. 모어는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이 점을 쉽게 알 수 있도록 섬의 이름을 유토피아라고 하였다. '유토피아'라는 말은 그 자체로 '어디에 도 없는 곳'을 뜻한다. 모어는 실제 여행기로 가장한 이 책에서, 플라톤이 그랬듯이 당대에 존재하는 국가들보다 더 나은 국가에 대해 숙고하였다. 모어의 이상국가의 기능은 다음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 16세기 봉건사회와 달리, 이곳에 서는 필요한 노동이 모든 인간에게 균등하게 할당된다. 모어는 봉건사회에는 영주의 측근들 이며 성직자들, 부잣집 부인네 등 놀고먹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어는 국가의 모든 인간이 필요한 일을 나누어 하게 되면 각 개인은 하루에 6시간만 일 하면 되고, 그렇게 하여 모두가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노동 후에도 완전히 지치지 않으려면 일을 너무 많이 하지 말아야 하고, 그래야만 여가에 의미 있는 일에 몰두할 수 있 는 여유와 의욕을 갖게 된다. 이를테면 취미활동을 할 수 있고, 교양을 쌓거나 친구들과 어 울릴 수도 있다. 유토피아 사람들은 거대한 부를 축적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지나치게 일하 지 않으며, 사치란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사는 집들은 호화롭지 않고, 의복도 세련되지 않지만 고전적인 디자인에 편안하고 입기에 불편이 없다. 그들은 외면적인 것에는 가치를 두지 않는다. 작업을 용이하게 하는 방법이 발명되면 그들은 그만큼 덜 일한다. 모든 기술적 진보다 더 많은 여가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들은 시간이 생기면 무엇을 새로 시작할지 알고 있으며, 우리들처럼 빈 시간을 어찌할 줄 몰라서 쓸데없이 흘려 버리거나 죽여 없애지 않는 다. 그들은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다방면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모어는 그밖에도 유토피아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 많은 것을 기록했다. 그 중에는 때에 따 른 행동양식에 대한 설명도 있는데, 그런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우스꽝스럽게 여겨질 수 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을 현대적으로 가치 있게 한 것은 인간 평등(남녀 평등)의 기본 이념 과 여가사회에 대한 표상이다. 이 사회의 사람들은 우리와 정반대로 물질적 소비를 하찮게 여기며, 자유로운 여가에 개인의 자아가 실현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물 질적으로 가난하지 않으며, 삶의 의미에 대해서도 우리와 다른 더 이성적인 표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소비세계에 사는 우리의 비이성적인 모습은, 오늘날 이 지구에 사는 부유한 소수의 소비를 유지하고, 심지어 최대한으로 장려하기 위하여 지구의 모든 비축물을 그릇되 이 남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생태학의 문제, 인간이 소모하는 것과 소모된 것을 보충하기 위해 재창조하는 것 사이의 균형 있는 관계가 우리에게는 큰 문제이지만, 유토피아 사람들에게 그런 것은 문젯거리도 아니다. 그들은 제한된 섬 영역에 살면서 자연과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데, 무한 성장의 이 데올로기 속에서 사는 우리는 우리의 지구도 역시 하나의 작은 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최 근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철학의 중요한 책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책은 많은 작가들 과 사상가들이 또 다른 '유토피아'를 생각하게 하는 데 큰 자극이 되었다. 1600년에 수도사 톰마소 캄파넬리는 '태양의 나라'를 썼다. 이 책은 개인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날 비판적으로 주시하는 플라톤의 최선 국가론의 신판 격이다. 그리고 영국 철 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한 세대쯤 후에 유토피아에 대한 가상의 여행기, '노마 아틀란티스 '를 썼다. 고대에는 큰 바다에 있는 아틀란티스 섬에 대한 신화가 있었는데-그래서 그 바 다가 애틀랜틱(대서양)이라고 불리는 것이다-이 섬의 사람들은 황금시대 같은 평화로운 조 화 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게다가 아틀란티스 사람들은 고대인들의 것보다 탁월한 기술적 지식들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는데, 예컨대 그들은 비행기를 이미 갖고 있었다. 근대 경 험과학의 기초를 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베이컨은 새로운 아틀란티스(노바 아틀란티 스)에 있는 사회에 대해 기술하였는데, 여기에서는 과학과 기술이 커다란 역할을 아니 지배 적인 역할을 한다. 그는 이곳에 있는 갖가지 연구시설들과 실험실, 교육시설, 과학연구기관 들을 묘사하였다. 말하자면 20세기 우리의 기술문명을 기술했던 것이다. 그러나 베이컨은 정 치 분야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아틀란티스의 사회 상황에 대한 그 의 설명들은 우리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유토피아인가, 노바 아틀란티스인가? 근대 초엽에는 토머스 모어의 사회적 유토피아와 기술과학적 유토피아인 노바 아틀란티 스, 이 두 개의 상이한 유토피아의 상이 형성되었다. 바라기는 하지만 (아직) 현실화되지 않 은 상태의 모습인 이 유토피아들이 우리 유럽 역사에서는 어떻게 작용하였을까 생각해 보 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근대의 경험과학들과 거기서 발전된 기술은 우리를 실제로 노바 아틀란티스로 데려다 주었다. 베이컨의 노바 아틀란티스, 그것은 우리의 현재에 대한 유토피아적 꿈이었다. 17세기에는 유토피아였던 것이 오늘의 현실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모 어의 유토피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앞서 다루었던 근대 정치사상가들의 노력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분명히 사회적 유토피아에 닿기 위해서도 갖은 애를 쓰고 있지만, 작동하는 기계들을 발명하는 것보다는 이성적인 사회를 설립하는 것이 훨씬 더 어 려운 것 같다." 18세기 계몽주의가 꽃핀 시대에 사람들은 인간성의 진보에 대해 긍지를 가 졌으며, 그들은 이 시대를 '빛의 시대(siecle de lumiere, age of enlightenment)'라고 일컬 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사람들의 머릿속은 점점 어두워져서, 전깃불의 발명은 도시들을 밝혔 지만 인간의 이성을 밝게 하지는 못했다. 20세기의 참담한 역사는, 인간이 유토피아에 이르 지 못한 채 단지 노바 아틀란티스에 도달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 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의 기술지식이 가속적으로 늘어나는 데 비하여 우리의 실천적, 정 치적 이성이 성장하지 못하면, 그러한 재앙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부정적 유토피아 철학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적절하게 반응하였다. 16,7세기에는 위에서 언급한 것 외에도 긍정적인 유토피아에 대한 글들이 많이 쓰여진 반면, 20세기에 들어서는 부정적인 유토피아 들이 제기되었다. 이 책들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책들이다. 가장 일찍 나온 것은 러시아인 예브게니 자미아틴의 책이다. 레닌의 투쟁동지였던 그는 러시아 혁명 후 곧바로 볼셰비즘에 대해 거리를 취했고, 자신의 책 '나의'에서 처음으로 스스로가 최선이고 진리의 수행자라고 주장하는 한 정치체제가 거기에서 빗나간 다른 견해 들을 어떻게 박해하는지 기술하였다. 어떠한 진리 주장이라도 독단적으로 되면 다른 사상들 을 억압하게 된다. 그것은 종교나 정치사상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다른 두 개의 유토피아는, 조지 오웰의'1984년'가 올더스 헉 슬리의 '멋진 신세계'이다. '1984년'은 오웰이 1948년에 20세기말을 예측하며 쓴 일조의 미래소설이다. 자미아틴처 럼 여기서도 전체주의 체제가 기술되는데, 이 체제는 모든 인간을 억압하면서 자유로운 의 견과 반대 의견들을 박해하며, 자신의 권력을 굳게 지키기 위해서 일련의 기관들과 메커니 즘을 개발한다. 예를 들면 비밀경찰, 간첩조직, 사생활 감시, 언론조작, 역사 왜곡, 서적 출판 의 통제 등이다. 1989년의 정치적 전환 후에 몰락한 옛 동독의 주민들이 '1984년'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들은 오웰이 자신들이 살았던 전체주의 체제의 초상을 사실적으로 정 밀하게 그려냈다는 것을 알았다. '1984년'은 이제 지나갔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과거의 일들에서 올바른 교훈을 얻지 못하면, 모든 것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서 배우기 때문이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도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부정적 유토피아인데, 이 소설에서도 우리가 원하지 않는 세계가 그려져 있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벌써 이 '멋진 신세계'에 발 을 들여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 '멋진 신세계', 이 부정적 유토피아의 야비함은 그 이름에서 풍자적으로 내비치는데, 이 세계는 플라톤의 최선의 국가를 반어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꼭대기에 자리 잡고 세계를 관 장하는 대표자는 철인군주의 현대적 형태라 할 수 있다. 그는 가장 현명한 자로서 이 체제 를 꿰뚫어보고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진실에 대해 무지한 채 자유롭지 못하다. 주민들은 그리스 알파벳 문자 에 따라 알파 플러스에서 엡실론까지, 다섯 가지의 지능 범주로 분류된다. 사회는 다양한 활 동을 위해 이 다섯 가지 인간 유형들을 적절하게 이용한다. 특히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작 업에는 단순하고 머리가 나쁜 사람들, 엡실론 인간이 이용된다. 활동의 수준이 높아지면 중 간 정도 지능을 가진 사람들(베타인, 감마인, 델타인) 이 때에 따라 사용되고, 학자나 관리 자, '우두머리'같이 가장 수준 높은 까다로운 직업들에는 알파 플러스 인간이 배치된다. 이 인간들은 거대한 인간 생산공장에서 만들어져 유리관 속에서 자란다. 태아들은 세상에 나올 때까지 호르몬 처방이나 다양한 영양 주입 등의 적절한 조작을 통해 각각 의도된 유형 으로 변화되면 자란다. 가족이라든가 가정에서의 자녀양육은 폐지되었다. 국가가 아이들을 조직 관리하기 때문에, 국가는 언제든지 각 인간 유형들에서 사회에 필요한 숫자만큼만 인간을 생산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잠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되는데, 그들은 잠자는 동안 지식과 선입견을 주입받으면서 이 '멋진 신세계'를 지상 최고의 낙원으로 여기고, 자신의 위치에서 완전히 만 족해하며 행복해할 수 있도록 세뇌당한다. 행복은 언제나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의 목표이며, 최선의 국가는 모든 구성원이 자아 를 실현하면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국가이다. 그래서 '멋진 신세계'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다. 심지어 힘든 노동을 도맡은 엡실론 인들까지도 행복한데, 그들은 자신들이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지체라고 배웠으며 게다가 엄 청난 노동 의욕을 주입받았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는 수많은 여흥거리와 오락과 환각제들이 널려 있어서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는 것을 방해한다. 가장 중요한 환각제로 쾌감을 자극하 는 '소마'라는 것이 있다. 이제 우리 사회를 살펴보자. 우리의 소비문화와 여가문화가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기분을 좋게 유지하고, 퀴즈 게임이나 십자 낱말풀이 이상의 까다로운 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사람 들이 지루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멋진 신세계'를 향해 가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인용했던 시인 고트프리트 벤의 사악한 어구를 상기해 보자. "어리석은 채 일만 하는 것, 그것이 행복이다." 이 말은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표어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왜 헉슬리의 유토피아를 플라톤의 최선의 국가의 반어적 구현이라고 말했 으며, 또 어째서 그것이 실제로 부정적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구태여 검증하지 않았는지 납득이 갈 것이다. 오웰의 경우, '1984년'의 사회가 폭력적이며 인간을 억압하고 박해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 문에 그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확실하다. 그에 반해서 '멋진 신세계'는 인간의 의식을 조종 하기 때문에 친절하다. 따라서 후자의 사회는 훨씬 더 위험하다. '멋진 신세계'는 우리가 실천적이고 정치적인 이성을 상실할 때, 기술이 우리를 얼마나 유 혹적이고 행복한 세계로 데려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유토피아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던 인간이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로 빠져든다는 사실을 자각한 20세기의 많은 철학자들은, 20세기가 과연 누구의 책임으로 이렇게 되었는지 따지 게 되었다. 그들은 죄인들을 발견했는데, 이상하게도 가장 어이없는 범죄가 자행된 그들 자 신의 시대에서 찾지 않고 지나간 세기인 계몽주의 시대에서 찾아냈다. 로크, 볼테르, 루소, 레싱, 칸트 등, 계몽주의자들이 올바르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20세기의 후손들이 그토록 어리석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상가들은 계몽주의자들이 참으로 순진 한 진보의 신봉자들이었다고 말한다. 그들의 미래인 오늘날의 우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 사실 계몽주의자들은 과거의 참상만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종교재판, 마녀 화형, 종 교 전쟁, 비관용 등, 과거의 모든 해악이 계몽주의를 통해 극복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들은 20세기의 인간들이 내란과 독재, 고문, 집단학살 등의 문제를 들어 자신들을 반박 하리라고는 절대로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사회정치적 영역에서 우리의 행동은 분명히 하나 의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이 목표는 계몽주의가 이미 제시했던 것으로서, 남자든 여자든 모 두가 자유를 누리며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사회, 모든 사람이 지식에 참여하고 인간의 모든 창조적 가능성에서 제 몫을 취함으로써 개인적 관심과 행복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 하는 것이다. 이로써 의미에 대한 질문의 장을 끝맺을 수 있다. 우리는 의미의 질문을 통해서, 세계의 부분인 인간이 세계의 부분인 인간이 세계 전체와 세계의 목적에 대해 총체적으로 물음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세계에서 탁월한 존재가 됨을 알았다. 목적과 의미에 대한 질문 은 실존적인 질문, 인간의 기본 질문에 속한다. 그러므로 의미의 질문은 인간의 실존에서부 터 시작된다. 인간은 먼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묻고, 이 질문을 세계로 옮긴다. 그는 이 세계가 어떤 계획적인 행위의 결과일 것으로 여기고 자동적으로 그 원인이 되는 어떤 인격 의 존재에 대해, 정확히 말하면 이 세계의 창조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이미 이런 가설의 찬반에 대해 논의하였으며, 불완전한 것으로 인식된 이 세계가 완전자로 설명된 신 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를 제시하였다. 신이 마치 상인처럼 계산하여 악을 선 으로 상쇄시킨다는 답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들 가운데서 훨씬 계산을 잘 하는 컴퓨터를 가진 사람이면 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 도덕적 세계질서와 세계의 의미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면, 우리는 이제 인간의 세계를 위해 의미를 찾아나서야 한다. 우리는 선이 과연 무엇이며, 선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애써야 할 일이 무엇인지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장의 뒷부분에서 우리들이 그동안 해온 노력들의 역사를 간단하게 소개한 것이다. 여기서 나타난 사실은, 원칙적으로 우리 인간은 우리의 행동규칙들과 우리가 스스로 정한 계율들, 그리고 법들 속에서 언제나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목표를 추구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올바른 길을 찾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놓여 있다. 우리는 여전히 도중에 있을 뿐이다. 토머스 모어의 책에서 빌려온 이름 '유토피아', 우 리는 그 목표를 계속 추구해 간다. 예전에 우리가 더 나은 내세에 대한 희망을 종교에 두고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져야 하며,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러한 과제에 꼭 들어맞는 이름을 부여했다. 그것이 우리가 수행해야 할 '현대의 프로젝트'이다. 9. 마지막 고찰 우리는 작은 철학 산책을 끝났다. 다양한 영역들을 두루 거쳐온 우리는 이제 어떤 결과를 얻게 되었는지 물어야 한다. 이마누엘 칸트는, 철학이 네 가지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고 하였다. 첫째,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둘째,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셋째, 우리는 무엇을 희망해야 하는가? 마 지막으로 넷째, 이 세 가지를 종합하여 인간이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전재해 온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이 네 가지 질문에 대답해 보자!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노력하여 얻어 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지식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에 익숙해지기 위하여 모든 것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이를테면 밭농사를 지으려는데 은하 수에 대한 지식은 필요치 않은 것이다. 이를 위해서 사계절의 변화와 기상조건만 알고 있어 도 충분하다. 심지어 고대의 천동설적 천문학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우리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얼마나 넓게 추구할 수 있는가와 상관없이, 지식의 기초는 항 상 우리가 사물로부터 얻는 경험이다. 우리는 경험에 의해서 사물의 본질을 규정한다. 그래 서 경험과학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경험과학은 생활세계의 경험들에 발판을 두고 있지만 이 미 오래 전에 이 바탕을 넘어서기도 했다. 우리의 지식은 그 끝이 어디일까? 우리는 모든 사물을 그것이 다른 사물들에 끼치는 작용에 따라서 규정하기 때문에, 우리 의 지식은 현실적인 것의 연관이 닿는 데까지 때문에, 우리의 지식은 현실적인 것의 연관이 닿는 데까지 연장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경험과학들은 세계의 한계까지 이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우리가 세계의 한계라고 여기는 데를 세계의 실제 끝이라고 믿어 서는 안 된다. 우리는 네 방향으로 세계의 끝을 찾는다. 앞과 뒤, 아래와 위에 있는 끝을, 혹 은 시작과 종말을, 가장 작은 것과 가장 큰 것을 찾고 있다. 이러한 끝들이 실제로 있는지, 현재 우리는 아직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불확실성 은 모든 경험적 지식들에도 해당된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밝혀내야 하는 탐정의 모습을 상기해 보자. 그는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자기가 추측했던 것을 입증하려 한다. 많은 이야기 들에서 탐정은 마지막까지 맞는 듯 보이지만 잘못된 자취를 추적하는데, 탐정소설의 독자는 바로 거기에 소설의 묘미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건 탐정이 미련해서가 아니라 결정적인 단 서가 소설이 거의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의 모든 지식은 일시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완전하도록 보완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지식 확장을 보장하는 것은 무엇일까? 지식을 얻기 위한 올바른 행동양식, 즉 과 학적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지식을 늘릴 수 있다. 과학적 방법은 모든 주장에 대해서 그것 을 뒷받침할 증거들을 찾아야 하는 데 그 핵심이 있다. 올바른 방법은 우리가 토론하고 인 정할 때 사용하는 규칙들을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해서, 사물에 대 해 하는 말이 정확하게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 우리는 필요한 규칙들을 반드시 지켜야 한 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철학 산책을 낱말의 근원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 는 개념들에 대해 공부하였고, 그리고 나서 "우리의 지식이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으 로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간은 세계의 관찰자일 뿐 아니라, 1차적으로는 행동하는 존재이다. 옛날에는 사람이 엿 새를 일하고 일곱 번째 날에는 쉬어야 하는 법칙이 통용되었다. 그것은 창조신이 인간에게 내린 법칙이 간주되었다. 우리는 인간이 평화로이 함께 살 수 있도록 행동의 규칙들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인간 역사의 모든 시대를 통해 계속 되풀이되어 온 하나의 원칙이 있으니, 바로 상호성의 원칙이 있으니, 바로 상호성의 원칙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의 이기적 행동에 의해서 희 생되지 않는 한에서, 자신에게는 이롭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해를 끼치는 행동들을 포기할 용의가 있다. 이런 전제하에서라면 인간은 희생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다. 평등과 정의, 공정함의 원칙이 한 사회조직의 토대가 될 때,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정의로 운 사회가 나타날 수 있다. 우리가 역사과정 속에서 이 원칙은 다양하게 표명되었는데, 예를 들면 "남이 너에게 행하 기 원치 않는 것을 너도 남에게 하지 말라"라든지, 혹은 "너의 행동의 원칙이 보편적 법칙 일 수 있도록 행동하라"고 한 칸트의 정언 명령이 그런 것들이다. 이 원칙은 자유와 평등의 사회에서만 완전하게 실현될 수 있다. 하지만 역사는 국가들이 이와 다른 원칙에 따라 움직일 경우에도 오랜 세월 동안 견고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중세의 귀족사회에서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한 권리를 갖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 질서가 신이 내린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사회에 순응하였고, 이를 인습으로 계 속 물려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인습적 통치라고 한다. 그러한 통치는 지배당하는 자들 이 인습을 문제삼지 않는 한 오래 유지될 수 있다. 그리고 독재체제가 역사에 등장한 20세기에는 수많은 권력자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이 얼 마나 사람들을 열광적으로 사로 잡았는지, 사람들은 무조건 "명령만 내리소서, 우리가 따르 겠나이다!"라고 외칠 정도였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흔히 카리스마라고 일컫는 강한 영향력이 있었다. 그들은 이 힘을 발휘하여, 사람들이 자신의 이성을 접고 신과 비슷한 존재로 자처하 는 지도자를 추종하도록 했다. 대부분 파멸에 이르기까지. 역사가 증명하듯이 카리스마적이고 전통적인 통치체제가 분명히 인간의 본성에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예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앞으로도 여전히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통치형태는 인간 존엄성과 정의라는 우리의 이상에는 부합되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을 희망해야 하는가? 희망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다. 인간은 무엇을 원할까? 행복이다. 그러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불행과 절망, 그리고 죽음이다. 세계의 창조자로서 신이 있다고 믿었을 때, 사람 들은 다른 사람을 서로 돕고 정의를 지키며 위안을 나누는 동반자로 기대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부모가 아이들을 지켜 주는 것과 같은 안전함의 경험을 그들이 생각한 신과 인 간의 관계로 옮겨서 생각하였다. 인류의 고대 역사에는 어머니 신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점 차 배제되었고, 서로 관련이 있는 세 일신교들, 즉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에서는 유 일하게 남성의 창조신만을 알고 있다. 근대로 들어와서 철학은 이 세 종교들의 유일신 표상 을 넘어서는 신의 표상을 구상하였다. 물론 유럽 계몽주의 운동이 그 원인이었다. 계몽주의 시대의 유럽 사회에서는 인간의 인식과 인본주의가 증가하였으며, 그것은 신에 대한 표상에 도 영향을 미쳤다. 철학자들은 신을 단지 철인군주 정도로 생각할 수 있었다. 이 신은 절대 적 지혜를 가졌고 자제할 줄 알며, 이해심이 많고 아량이 넓은 신이다. 이러한 신 앞에서 다 른 신들은 오히려 신성을 모독하는 희화들로 보였다. 하지만 이로써 딜레마가 발생한다. 사물의 작용을 통해 그 사물의 본질을 해명하는 인식 원리는 신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도 적용할 수 있다. 그 결과 불완전한 모습의 세계를 완전 한 창조신의 작품으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만일 신이 원래 불완전하다면 이 세 계의 불완전성을 설명할 수 있을테지만, 우리는 불완전한 신이나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신 들의 무리를 쉽게 인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애당초 신을 완전한 존재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신에 대한 최종 결정이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용서하는 신을 옛 히브리인들의 무자비한 신보다 더 인간적 존엄을 갖춘 신으로 관찰한다. 우리가 잘못을 고백할 때 인정이 있는 신이 인간의 불완전함들을 용서한다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불완전함을 시인한 신에게 용서를 베풀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아직 지구가 세계의 중심이고, 둥근 하늘 천장에 붙어 있는 별들은 우리를 위해 밝혀 주는 작은 등불들이라고-그것이 우리를 위한 별들의 유일한 기능이라고-믿었을 때, 우 리는 의심 없이 이 세계에는 어떤 의미가 있고, 우리 인간들은 이 거대한 세계 극장무대에 서 어떤 역할을 맡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연구를 통해서 우주가 점점 더 큰 것으로 밝혀지고 있는 이때, 우리 는 세계의 의미를 더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를 상실해 간다. 우리의 세계는 상대적 으로 계속 작아지고 더 무의미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우주 안에 존재하는 유일한 천체였다면, 우리는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큰 무대장치에 대해 그저 찬탄만 보내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의 세계 외에도 더 많은 세계들이 존재한다면, 세계의 의 미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그런 사실로부터 과연 어떤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까? 우리는 희망에 있어서 우리 자신에게로 되던져진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무언가를 바란다 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에게 기대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 스스로가 모든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인간의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는 뜻이다. 내세에서 얻으려고 노력하는 행복 을 우리는 현세에서 실현해야 한다. 현세는 곧 우리가 처한 현실이고, 우리가 아는 유일한 현실이며, 종교가 선포한 내세는 이에 반하여 하나의 가설일 뿐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우리가 꿈꾸는 대로 신이 정말로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에 기뻐할 이유가 있다. 그러나 신이 없다면, 우리의 세계 바깥에 혹은 저 먼 안드로메다 은하에 또 다른 지적 문명 세계가 얼마나 많이 존재하거나말거나 우리는 이 광대한 우주 속에 그저 홀로인 것이다. 그 때 우리의 조력자요, 동반자요, 위안자가 될 이는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일 뿐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고대에 철학자들은 이미 인간의 본질을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로고스(이성, 언어)를 사용 하는 생물(zoon olgon echon)이고, 이성을 타고난 생물(animal rationale)이며, 폴리스(도시) 와 국가를 이루고 사는 생물(zoon politikon)이다. 다시 한 번 에피메테우스의 신화를 생각해 보자. 동물들에게 이미 선물을 다 나누어 주었 기 때문에 에피메테우스에게는 인간에게 줄 자연적 재능들, 모피라든가 갑각, 발톱, 날카로 운 이빨 같은 것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빨 같은 것이 더 이상 남 아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인간은 동물왕국의 전문가들과 비교하면 결함뿐인 존재이다. 그래 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기술과 발명, 정치술의 신적 능력을 마련해 준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해온 철학 산책에서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 내고자 한다면, 우리는 프로타고 라스의 명제를 피해 갈 수 없다. "anthropos meson panton-인간은 세계의 창조자는 아니지 만, 만물의 척도이다." 인간은 말의 창조자이며 개념의 창조자이고, 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 하고, 공동생활을 조직하며, 선의 이념을 발전시켰고, 이와 아울러 전체 세계를 자신의 척도 에 따라 판단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세계의 중심에 있으며, 단순한 물리적 크기의 의미 에서도 중심에 있다. 인간은 자신을 출발점으로 삼아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을 찾는다. 인간의 세계, 그것은 인간 삶의 의미 있는 세계이다. 또한 인간은 '유적 존 재(Gattungswessen)'로서 자기 자신의 창조자이기도 하다. 인간은 판단할 때 기준이 되는 이상상을 스스로 설정하기 때문에, 결국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셈이다. 이는 인간의 외모에 나 내면에도 들어맞는다. 인간은 자신의 외모를 재서 알맞은 비례를 만들었으며, 인간의 내 면이 옳고 그른지 측정할 수 있는 기준으로 선의 이상을 설정하였다. 인간이 독자적인 존재이고 스스로 법을 만들기 때문에, 인간은 또한 자기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이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프로타고라스의 명제는 철학에서 가 장 내용이 풍부하고 가장 심오한 결과를 남긴 인식에 속한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더 이상 철학의 시대가 아니라 철학이 해체될지도 모르는 과학의 시대이다. 자연히 과학은 철학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다. 심리학자들이 출현하여 animal rationale, 즉 '이성을 타고난 생물'의 표상에 의심을 표명하였다. 그들은 인간이 이성적으 로 행동하는 일은 드물거나 거의 없고, 비합리적으로, 다시 말해서 순간적인 감정이나 열정, 불안감에 의해 행동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즉 인간이 충동과 성격의 노예라는 것이다. 그 렇지만 철학이 이 점을 부인했을까? 철학자들은 오직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에 대 해서만 말했지, 모든 인간이 언제 어디서나 이성적으로 행동한다고 주장한 일은 없다. 철학 자들은 보통의 경우 삶이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성적 삶의 이상을 표명했 던 것이며, 철학자는 이러한 이상을 스스로 구현하려 한 것이다. 물론 얼토당토않은 말을 해서 자신의 무지를 폭로당하는 철학자들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에는 오늘날의 철학 자들이 더욱 명심해야 할 이런 격언이 각인되었던 것이다. "Sitacuisses, philosophus mansisses-네가 침묵했다면 차라리 철학자로 남았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의 모든 약점을 제외한다면, 어쨌든 철학과 과학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에게 이성능력이 있음을 증명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 펠레스의 입을 빌려 한 말도 이와 모순되지 않는다-인간은 자기를 짐승보다 우월하게 해준 이성을 사용하여 '짐승보다 더 짐승같이' 된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우리의 20세기를 알고 있 었음에 틀림없다. 심리학에 이러 사회과학이 나타나서, 현실의 인간은 사회적 출신의 산물이라고 설명하면 서 인간의 판단능력을 의심하였다. 카를 마르크스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라는 명제를 제시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사회학자들은 이 명제를 학문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확실히 이것은 대부분의 경우 사회에서의 인간의 행동, 특히 편협하고 고루한 행동들을 설명할 수 있는 매우 유익한 추측이었다. 계몽주의, 인간의 자기 인식과 철학에 의한(!) 계몽주의는 인 간을 끄집어 낼 수 있는 수단으로 여전히 간주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으로 하여금 다양 한 모든 영역에서 현실을 조망케 함으로써 독자적인 판단능력을 가지게 하는 것은 고대 문 명 이래로 모든 교육의 이상이었다. 하지만 세계에 대한 개념이 아직 없는 어린아이가 자라 서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것(이 책 서문의 모토를 보라)처럼 결국에는 또다시 어리석은 성인 이 되고 만다면, 독자적 사고를 위한 교육은 실패한 것이다. 사회학은 인간 행동과 사고의 절대적 한계를 제시할 수 없었고, 그래서 철학자들의 의견 들을 반박했던 것이다. 사회학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누군가가 더 좋은 생각을 머릿속 에 주입하지 않으면, 경직된 사회적 역할과 천편일률적인 사고 속에서 그저 인습에 따라 아 무 생각도 없이 미몽의 상태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이다. 철학이 했던 인간 규정에 대한 마지막 공격은 생물학에서 왔다. 지난 세기에 다윈이 '조 의 기원'에 대한 저술을 발표한 후로 '진화론자'와 '창조론자' 사이에서 무의미한 싸움이 계속해서 일렁이고 있다. 진화론자는 인간이 "원숭이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인간이 동물에 서 진화되었으며 유인원과 조상이 같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한다. 따라서 진화론자들의 부수적인 주장은, 모든 것이 스스로 발전한다면 신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창조론 자들은 이를 반박한다. 인간이 신의 형상을 닮았다는 사실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들은 진 화론이 제시한 증거에서 허점과 이론상의 오류를 끈질지게 찾고 있다. 1백여 년 전부터 원숭이와 인간 사이의 중간 존재, '잃어버린 연결고리'를 둘러싸고 토론 이 계속되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원시인과 직립원인들이 인류학에 의해 발견되었지만, 진화 론의 반대자들은 예수가 다윗 가문 출신임을 증명하기 위해 제시된 예수의 계보처럼 빈틈없 는 계보를 요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진화론자들에게는 유리한 증거가 있다. 그간의 유전자 연구를 통해 인간과 침팬 지에게서 99.9%의 유전자가 일치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그런데 이 0.1%의 차이가 얼마나 큰 작용을 하는지! 두 입장은 분명히 서로에 대해 옳지 않은 기대를 갖고 논쟁을 진행시키고 있다. 거의 그 렇게 보이기도 하지만, 진화론이 사실로 입증되었다고 하자. 세계가 생길 수 있도록 진화원 리처럼 그렇게 간단한 원리를 구성한 창조신의 지혜를 유신론자들이 그래도 찬양하겠다면 무엇으로 그것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또 창조론자도 이것은 알아야 한다. 일화에 따르면, 다윈의 책이 출간되자 상류사회의 어 떤 부인이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하느님, 진화론이 참이 아니게 해주소서. 하지만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게 하소서!" 우리 인간이 동물계에서 유래하였더라도, 그 사실이 우리를 훌륭한 존재로 고양시키는 데 무슨 방해가 된단 말인가? 작가 에리히 케스트너는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시로 표현하였다. 인류의 발전 옛날에 녀석들은 나무 위에 쭈그리고 있었지 털복숭이에 험악한 낯짝을 하고. 그러다 원시림 밖으로 꾀어져 나와 세상을 아스팔트로 도배하고 층층이 쌓아올렸네 삼십 층까지. 녀석들은 벼룩떼에서 벗어나 중앙난방식 방에 살게 되었지. 이젠 전화기 옆에 앉아 있네. 그러면 아직도 그 소리가 들리지, 옛날 나무 위에 있을 때 바로 그 소리가, 그들은 멀리 듣네. 그들은 멀리 보네. 그들은 이 우주와 함께 한창 봄날. 그들은 이를 닦네. 그들은 현대적으로 숨쉬네. 변기를 물로 세척하는 지구는 교양 있는 별. 그들은 파이프를 토해 우편물을 쏘지. 그들은 미생물을 없애기도 키우기도 하지. 그들은 자연에다 온갖 편리한 장치를 하지. 그들은 하늘로 똑바로 날아 올라가 두 주 동안 거기 머물기도 한다네. 소화하고 남은 것을 가공하여 그들은 솜을 만들지. 그들은 원자를 파괴하네. 그들은 근친상간을 치료하네. 그들은 문체 연구를 통해 알아내지, 카이사르의 발이 평발이었음을. 그렇게 그들은 머리와 입으로 인류의 진보를 이루어 냈다네. 그러나 이 사실을 잠시 접어두고 빛을 밝혀 살펴보니 근본적으로 그들은 여전히 늙은 원숭이들일 뿐. 사실 우리가 이성적 존재인가, 최소한 이성적 존재일 가능성이 있는가, 아니면 원숭이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의 생물학적 기원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의 해 결정되는 것이다.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은 자율적이고 이성적인 인간 주체를 이상적 인간 상으로 구성하였으며, 20세기 인간들은 인간이 동물들보다 더 야수적일 수 있음을 보여 주 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잔학행위를 위해서 자신의 기술적, 과학적 이성을 사용할 수도 있 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짐승에서 신까지 전체 스펙트럼을 구현할 수 있는 생물이다. 틀림없이 이 점이 우리를 침팬지와 구분하는 0.1% 유전자의 작용일 것이다. 생물학은 인간 자신과 인간의 가능성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은 생물학이 인간의 본질에 대해 말한 것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만 철학 이 인간의 도덕적 책임과 의무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 이다. 후기 철학의 과제에 대하여 이 책은 아주 단순하게 "뷔르거슈타이크(Burgersteig)가 무슨 뜻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것은 낱말들의 출처와 의미에 대한 질문이었다. 낱말에서 개념으로 상승하면서 우리는 이론적 철학의 장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지식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이용하여 우리는 과학적 세계상의 생성을 기본 특성에 따라 요약하고, 여기서 철학이 담당한 중요한 몫을 조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원자론과 우주학의 발전이 언 급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나에게 중요했던 것은 경험과학들이 결코 철학을 무시하지 않으며, 여전히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고구조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동시에 모든 경험적 지식이 일시적 성격을 지녔다는 것도 지적되었다. 우리는 자랑스럽게 이야기하 는 현재의 과학이론들의 시간적인 타당성 역시 감소되고 있다. 원인을 묻는 질문, '왜'라는 질문의 인과적 측면을 고찰하고 나서 그 목적론적 측면, 현 상과 행위의 목적을 묻는 질문이 고찰되었다. 의미, 목표, 의도, 목적 등의 테마에서 도덕적 세계질서에 대한 질문이 아울러 제기되었다. 이 질문에서 다시 두 개의 부분적 질문이 생겼 는데, 세계의 질서와 세계의 목적을 보증하는 신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질문과 선에 대한 질문이 그것이다. 여기서 밝혀진 사실은 인간이 선을 엄격하게 규정하면 세계를 부정적으 로 판단하지 않을 수 없고, 이로써 상상 가능한 세계의 창조자가 비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 다. 도덕적인 이유에서 신이 신뢰받을 수 없을 때, 인간은 완전히 홀로이며 스스로 자신의 행 복을 마련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인간은 신을 의지할 수도 없고, 자신의 잘못을 악마의 탓으로 돌릴 수도 없다. 이때 인간의 과제는 자유로운 자기 규정을 통해 이 성으로써, 즉 이 맥락에서는 도덕적 이성으로써 자신의 행위법칙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가장 좋은 사회를 둘러싼 철학적 노력들을 기술하면서 절정에 다다른다. 단순한 물음으로부터 점차 더 중요한 물음을 올라가는 사고의 전개과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따른 셈이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서두에서, 모든 철학의 목표는 윤리학이 며 그 완성은 정치철학에 있다고 말했다. 언어철학이나 인식론 혹은 미학 등, 한 부분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은 철학의 의의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셈이다. 이러한 편력의 의도는 체계적 사고와 역사적 발전과정의 변화 속에서 철학이 하나의 전체 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 주려는 데 있었다. 철학은 특화된 부분 과학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질문들을 능가하는 질문, 곧 세계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는 장소이다. 이 입문 서에서 제공하는 간단한 대답은 이렇다. 의미의 질문은 바로 인간의 질문이다. 우리 인간만 이 그런 질문을 제기할 수 있고, 또 의미 있다고 여기는 것을 행동으로 실천함으로써 우리 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만일 이 책을 통해서, 철학이 인간의 활동들 가운데 가장 광범위하고 창조적이며 가장 중 요하고, 그래서 가장 흥미진진한 활동이라는 인상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리 고 독자들 마음속에 여기서 언급된 철학자들의 작품들 중 이런저런 것을 한 번 읽어봐야겠 다는 결심을 일깨우는 데 성공했다면, 이 책의 목적은 완전하게 성취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