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 우주의 끝에 대한 탐구는, 말하자면 가장 큰 것을 찾는 일이었다. 그러면 반대로 가장 작 은 것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일정한 작기까지, 이를테면 모래알 정도 크기까지는 우리 눈으로 인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 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무장하지 않은' 눈으로 식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 람들은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생각한다. 고대에 사람들은 좀벌레나 그 비슷한 작은 생물들 의 극히 미세한 알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 동물들을 원초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그것 들이 흙과 오물 속에서 저절로 생겨난다고 믿었다. 그것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 텔레스가 말했던 생물의 자연발생설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현미경이 있었더라면 결 코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각의 한계에 대한 다른 예를 들어 보자. 다이아몬드는 확대해서 보아도 흠이 없어야 하 며, 바로 그 점에 다이아몬드의 가치가 있다. 이건 무슨 뜻일까? 다이아몬드를 8배 확대경의 로 조사하여 아무런 이물질이 보이지 않을 때 그것이 순정품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하지 만 10배로 확대한다면 어쩌면 이물질이나 오류가 발견될 수도 있다. 너무 작아서 눈으로 볼 수 없는 대상들을 볼 수 있도록 확대시켜 주는 확대경이나 현미경과 같은 도구들이 있는 오 늘날, 가장 작은 입자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문제를 생각하는 것은 더 이상 훌륭한 업적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것과 같은 기술적 가능성들이 없었던 고대에 그리스 철학 자들은 이미 질료에 대한 사상을 전개하였다. 철학자들은 첫 번째로, 시작에 대해서 질문을 제기했다. 종교도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철학자들이 내린 답은 달랐다. 이를테면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에서는 세계가 창조주 에 의해, 인격체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에 반해서 최초의 철학자들은 세계 의 시작을 기본 원소에서 찾았다. 물, 공기, 흙, 불이 기본 원소들이다. 어째서 이 네 가지였 을까? 그건 이 네 가지 원소가 분명히 인간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물과 공기 가 없다면 어떠한 생명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또 물의 도움으로 식물들과 생명체를 자라 게 하는 흙은 결실을 맺게 하는 것이며, 동시에 결실이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불은 열 기를 제공하는 힘이면서도 또 사물들을 소멸시킬 수도 있다. 이 원소들의 규칙에 따른 공동작용으로써 세계가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지속되는지 생 각할 수 있다면, 그 규칙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규정해야 할 것이다. 사물의 가분성 주위에서 접하는 물건들을 둘러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다고 생 각할 수 있다. 물이거나 돌이거나, 또는 사람이 만들어 낸 합성수지까지 모든 질료는 더 작 게 나눌 수 있다. 우리는 돌을 계속해서 더 작은 부스러기로 부수어서 모래알 크기까지 쪼 갤 수 있고, 혹은 그보다 더 작은 먼지 알갱이로 만들 수도 있다. 그러면 먼지 알갱이를 더 쪼갤 수는 없을까? 어느 정도까지 작게 나눌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원칙적 질문이다.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가장 작은 크기 (그리스어로 atomon), 즉 원자(Atom)는 존재하는가? 아니면 질료는 끝없이 작게 나누어질 수 있는가? 원자에 대한 표상 고대의 철학자들 가운데 잘 알려진 엠페도클레스, 레우키포스, 데모크리토스 등이 이른바 원자론자에 속하는데, 그들은 가장 작은 입자인 원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만일 하나의 입자가 어떤 조작으로도 더 이상 나눌 수 없고, 또 그것을 나눌 수 있는 힘이 자연 속에 존 재하지 않는다면, 그 입자는 파괴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원히 존재한다. 반 면 입자들이 모여 있는 것은 모두 나눌 수가 있기 때문에 그 존재는 일시적이다. 지금까지 의 이야기는 사고의 유희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원자'라는 개념의 규정이 다. 만일 내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입자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또한 그 입자가 파괴되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영원하다고 주장해야 한다. 아마도 온 세계가 존재를 마 감할 때, 그때서야 입자들도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세계가 멸망하면 모든 원자들도 파괴될 것이다. 하지만 세계는 언제 멸망할까? 세계의 멸망 내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파멸은, 우 리에게 늘 일어나는 일들로부터 찾아볼 수 없는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다. 아니, 어쩌면 이 세계는 끊임없이 멸망해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 점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것 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또 다른 의견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원자들은 끊임없이 사라지면서 존재를 마감한다. 하지만 동시에 무로부터 새로운 원자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기 때문에, 우주에 있는 원자들의 수는 항상 일정하고 세계는 멸망하지 않는다. 고대의 원자론자들에게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그들은 세계가 원자들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원자들은 텅 빈 공간에서 움직이다가 더 큰 형상으로 결합될 수도 있고, 다시 나누어질 수도 있다. 그 이론에 따르면, 육체를 가진 우리 인간까지 포함하여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들은 모두가 이 미세한 성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결국 원자론이 설명하는 것은 무엇일까? 원자론은 지극히 간단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우주 전체를 설명한다. 세계 전체의 항구성과 지속성이 원자의 불가분성으로 설명될 수 있 고, 세계 현상들의 변화는 서로 모여서 큰 구조를 형성하였다가 다시 나누어짐으로써 구조 들은 해체시키는 원자들의 능력과 운동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두 개 의 상반되는 힘들을 상정하고 각각 '사랑'과 '미움'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오늘날 그 힘들 을 '인력'과 '항력'으로 바꾸어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결합하며, '미움'은 분리 한다. 이 힘들의 세기가 언제나 똑같지는 않다고 가정해 보자. 그래야만 힘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에 따라서 힘들의 상호 관계가 달라져서 사랑이 우세할 때도 있고 미움이 우세할 때도 있다고 하면 우리는 항상 움직이고 있는 세계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다. 어떤 힘이 더 우세한가에 따라서 원자들은 서로 결합되기도 분리되기도 한다. 즉 이 세상에서 사물이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원자는 파괴되지 않으며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원자에게 시간 의 흐름에 의한 끝이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원자에게 처음은 있을까? 만일 처음이 있다 면 누군가가, 혹은 무엇인가가 어떤 시간에 원자를 생기게 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 이 곧 이 세계 전체의 시작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것이 곧 이 세계 전체의 시작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원자에게는 처음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항상 존재해 온 것이다. 모든 원자들의 총칭인 질료는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존재하지만, 원자들이 모여 서 이루어진 물체들-여기에는 물론 우리 인간도 속하는데-은 모두 시작과 끝을 가진다. 이 런 이론을 대표하는 철학자들을 우리는 유물론자라고 한다. 고대인의 사변과 현대인의 경험 고대에 철학자들은 원자론을 순수한 사유를 통해서 전개하였다. 오직 이론적으로만 머물 며 경험 과학으로 파악되지 않는 사상을 우리는 '사변적' 이라고 한다. 오늘날에는 경험과학 이 유일한 인식의 원천으로 여겨지고 있어서(어쨌든 경험과학 쪽에서는 그렇게 주장하는데), 사변적 사상이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론적인 순수사상에 대해서, 그것 이 사변적일 뿐이고 경험을 통한 검증이 결여되었다고 비난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많 은 과학자들은, 고대의 원자론은 사변적인 뿐이었지만 현재의 원자에 대한 표상들은 경험적 증거가 있고 경험과학의 실험을 통해 입증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각각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일상의 경험과 그 이론적 해석 우리의 일상적인 세계 경험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고대에도 이미 사람들은 풍부한 갖가지 재료들을 접하고 있었다. 이미 사람들은 풍부한 갖가지 재료들을 접하고 있었다. 예 를 들어 그들은 동이나 철, 은, 금 등 다양한 금속들을 알았다. 그들은 다양한 광물질들을 알았고, 광석의 종류 또한 여러 가지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이미 원소들을 가지고 새로운 소재를 만들 수도 있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 금속을 이용하여 다양한 합금을 만들 수 있었 다. 또 여러 종류의 모래를 가지고 유리를 생산하였으며, 토기를 구울 줄도 알았다. 인간은 생활에서의 경험을 통해 이미 수많은 양의 지식을 축적하였다. 이렇게 실제 경험 에서 얻은 지식으로부터 일반적인 이론을 끌어낸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모습이 될 것이 다. 기본 요소인 원소들이 존재하며, 어떤 소재가 원소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분명하 다. 원소들은 올바른 혼합 비율로 섞은 후 그것을 가열한다든가 또 어떤 조치를 취하면, 원 소들이 서로 결합하여 새로운 소재가 생긴다. 그러면 올바른 혼합 비율은 어떻게 알 수 있 을까? 물론 시행착오를 통해서이다! 그래서 중세 서양의 한 수도사는 어떤 실험을 하다가, 흔히 말하듯이 우연에 의해서 화약을 발명하기도 했다. 연금술사들은 금을 만들려고 시도했 다. 그들은 평범한 소재들을 놓고 주문을 걸면서 적절하게 조작만 하면 원하는 소재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의 연금술사들이 화학자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연금술사들은 소 재들의 변화 가능성을 연구하였지만, 그들에게는 단지 경험을 통한 지식만 있었을 뿐 질료 들의 구조에 대한 체계적 이론이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의 전체 작업을 마술이라든 가 악마 신앙과 같은 마법의 표상들과 결부시키기도 했다. 파우스투스 박사와 악마의 계약에 대한 이야기에서, 또 룸펠슈탈츠킨의 민담에서도 그런 일들이 언급된다. 이런 이야기들에서는 그리스도교적인 악마상, 미신 등이 지식과 뒤섞여서 환상의 세계를 이룬다. 화학의 발전 근대로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차츰 미신에서 벗어났다. 사람들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오늘 날의 의미로 말하면 실험을 통해서 지식을 더욱 늘려갔다. 새로운 소재들이 계속해서 만들 어졌는데, 한 예로 18세기에는 도자기가 발명되어 백금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9세기에 들어 와서 화학은 체계적인 과학이 되었다. 그래서 예를 들면 물과 공기는 물질을 이루는 기본 소재, 즉 원소가 아니라 물은 산소와 수소의 결합체이며 공기는 다양한 가스들이 섞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물론 고대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또한 개별 원소들을 정돈해 낸 것, 다시 말해서 원소들은 단순하 게 '가벼운' 것에서부터 '무거운' 것으로 순서에 따랄 배열할 수 있게 된 것은 커다란 과학 의 진보를 의미하였다. 원소들이 각기 화학적 특성에 따라 주기적으로 정돈될 수 있음을 발견한 이는 러시아 과학자 멘델레예프이다. 그는 원소들이 순서에 따라서 8족의 그룹들로 묶여진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원소의 화학적 특성이라 함은 소재들이 다른 소재와 결합하 는 방식을 말하는데, 이는 주기에 따라서 반복된다. 즉 1차 그룹의 1번 원소는, 그 화학적 특성에 있어서 2차 그룹과 3차 그룹 등 각 그룹의 1번 원소들의 화학적 특성에 상응한다. 옛날에는 체계화되지 못한 채 개별 연구들만이 풍부했지만 각각의 원소가 8개 주기 가운 데 어디에 속하는지 알게 된 지금에는 원소의 화학적 성질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화학과 물리학 : 원자 단순한 몇 가지를 예외로 하면 모든 원소들은 이같이 8족의 그룹으로 배열할 수 있다. 그 런데 어째서 그렇게 배열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아직 없었다. 이에 대한 설명은 원자론 쪽에서 제공하였다. 고대 사람들은 원자들이 공이나 정육면체와 같이 다양한 기하학적 형태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원자는 원소의 가장 작은 단위로서 더 작은 것으로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소들이 어떻게 더 큰 덩어리로 서로 결합할 수 있을까?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분명히 수많은 원자들이 단단하게 붙어 있 는 질료의 덩어리이다. 어떤 접착제가 있기라도 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원자들에 요철이 나 있어서 레고 조립처럼 끼워맞추어진 것일까? 만일 원자들에 조립할 수 있는 고리와 고리 구멍이 나 있다면, 그것은 쉽게 부서질 수도 있지 않을까? 원자의 전체 모양을 생각해 본다면, 고리는 원자의 가장 연약한 부분일 수밖 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리와 고리 구멍에 대한 생각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원자를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그 어떤 다른 것, 어떤 힘이 있어야 한다. 어떤 종류의 힘이 있을까? 먼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중력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에서 사람들은 모든 물체는 자연스럽게 한 곳을 향하고 있으며, 그곳은 '아래'라고 말했 다. 근대에 와서 사람들은 천체들이 서로를 끌어당긴다고 말했다. 그 힘이 바로 중력이다. 모든 물체는 아래로 떨어진다. 왜냐하면 이 '아래'가 지구의 중심을 향한 방향이기 때문이 다. 또 다른 힘이 있는데, 그 힘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늘 접하고 있는 것으로서 당기고 미 는 힘이다. 이미 고대에도 다른 금속을 잡아당기는 자석의 능력인 자력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대에는 이 현상을 단지 기술할 수 있었을 뿐이고, 그 원리를 해명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나침반 사용도 마찬가지였는데, 나침반을 그렇게 오랫동안 사용했으면서도 자석 바 늘이 항상 남북 방향을 가리키는 까닭을 안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19세기에 우리의 현 실에서 나타나는 전기현상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했을 때, 사람들은 점차로 전하, 전장, 전력 의 작용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 같은 전하끼리는 서로 밀치고, 반대의 전하끼리는 서로 당 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원자는 어떤 모양일까?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덴마크의 원자물리학자 닐스 보어는 1902년에 원자의 모형을 만 들었는데, 이는 매우 큰 결과를 남겼다. 그는 원자를 하나의 작은 태양계로 생각하였다. 원 자의 중심에는 원자핵이 있고,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들처럼 작은 위성들이 원자핵을 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결국 이론적으로 원자를 서로 다른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 원자에는 더 이상 원자라는 이름이 합당치 않게 된 셈이다. 훗날 사람들 은 실제로도 원자를 나눌 수 있었다. 전기론의 인식에서 출발하여, 사람들은 상반되는 전하를 각각 양전기와 음전기로 구분하 였다. 전기는 같은 성질끼리는 서로 밀치고, 반대 성질끼리는 서로 당긴다. 사람들은 이 결 과를 원자의 모델에도 적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원자핵은 양전기를, 작은 위성들은 음전기 를 띠었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함께 핵은 '양자(프로톤),' 작은 위성들은 '전자(엘렉트론)'라 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양자는 전자를 끌어당기고, 전자는 고정된 궤도를 따라서 양자의 주위를 돈다. 원자를 어떻게 관찰할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원자를 구성하는 부분들을 이론적으로 생각해 낸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실험을 통해 증명하였다. 다시 말해서 양자와 전자를 관찰한 것이다. 그런데 너무나 작기 때문에 시 각으로 인지할 수 없고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는 입자를 어떻게 관찰할 수 있었을까? 다른 도움을 그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관찰할 수 없는 것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간접적으로 관찰해야 한다. 과학자들도 원자와 원자의 입자들을 관찰할 때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하나의 통을 만들어서 수증기로 가득 채웠다. 안개상자라고 하는 이 장치는, 창안 한 이의 이름을 따서 '월슨의 안개상자'라고도 한다. 그렇게 설치된 상자 안에 전장을 형성 시킨다. 그러고 나면 원자의 입자들이 이 공간을 통해 날아가는데, 이때 입자들의 전하에 따 라 각기 날아가는 방향이 바뀌게 된다. 전자는 양자와 다른 방향으로 휘어 버린다. 입자들이 수증기를 통과할 때 정교한 증기의 흔적이 생기는데, 이는 입자와 부딪친 수증기의 분자가 작은 물방울로 응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흔적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관찰된 것이 어떤 입자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상자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 야 한다. 다시 말해서 상자 안에서 작용하는 전장의 세기를 알아야 하고, 또 입자가 어떤 속 도로 이 상자를 통과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이런 방법을 사용하여 양자와 전자를 실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이 입자 들을 실제로 볼 수는 없었다. 과학자들은 실험 결과를 해석하고 수학적 계산을 통해서, 이 흔적은 전자의 것이고 저 흔적은 양자의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나는 방금 보어의 원자 모델이 매우 큰 결과를 남겼다고 했다. 어떤 점에서 그럴까? 원자 를 작은 태양계로 파악한다면 우리는 간단한 체계와 복잡한 체계를 상상할 수 있다. 가장 단순한 원자는 핵(양자)과 그것을 도는 하나의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 수소가 그러한 경우인데, 수소는 가스이며 가장 단순한 원소이다. 그 다음으로 단순한 것이 헬륨인데, 이것 도 역시 가스이다. 헬륨의 경우는 두 개의 전자가 핵 주위를 돌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 다. 하나의 양자는 하나의 전자만을 당길 수 있고, 두 개는 당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원자에는 두 개의 양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문제인 것이 전기 성질이 같은 양성의 양 자들이 서로 밀쳐서 헬륨 원자의 핵이 찢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다른 입자, 즉 전 기적으로 양성도 음성도 아닌 중성의 부분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것을 '중성자(뉴트론)'라고 불렀다. 중성자에게 부여된 임무는 서로 퉁겨져 나가려는 양자들을 고정시키는 일이다. 여기서 잠시 멈추고 요약해 보자! 근대에 과학자들은 고대인들이 발전시켰던, 나눌 수 없 는 것으로서 원자의 개념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개념을 실제의 관찰을 통해 증명하려고 노력하다가 나눌 수 없고, 가장 작은 것이며,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여겼던 원자가 결국 나 누어지는 것으로 바뀌고 말았다. 자연의 블록 조립체계 사람들은 이제 다양한 원소들의 구조를 양자, 전자, 중성자로 된 일종의 조립체계로 밝힐 수 있었다. 그때그때의 원소가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은 원자핵 속에 있는 양자의 수이다. 그 리고 핵 속에 있는 양자의 수와 같은 수의 전자들이 핵 주위를 돌고 있다. 또 핵 속의 양자 들은 지탱하기 위해 그만큼의 중성자들이 필요하다. 원자와 양파 전자들은 상이한 거리를 두고 일정한 궤도를 따라 핵 주위를 돌고 있다. 핵에서 가장 가 까운 궤도에서는 두 개의 전자가 돌 수 있고 그 다름 궤도에서는 여덟 개가, 세 번째 궤도 에서도 최대 여덟 개가 돌 수 있다. 이러한 여덟 자리의 체계로써 화학에서 알게 된 현상들 을 잘 설명할 수 있었다. 화학은 이전에 8족의 그룹으로 배열된 원소들이 주기적으로 비슷 한 특성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었다. 원자이론은 이제 화학에서의 경험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제공한 것이다. 우리는 원자를 일종의 양파처럼 생각할 수 있다. 양 파를 가로로 잘라 보면 둥근 테 모양의 속이 보이는데, 이 테들은 하나하나 떼어낼 수 있다. 양파 하나는 여러 개의 껍질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작은 양파에는 껍질의 수가 적고, 큰 양파에는 크기에 걸맞게 더 많은 껍질이 있다. 이제 계속해서 원자를 양파와 닮은꼴로 살펴보면 이렇게 말 할 수 있다. 양파의 크기와 상관없이 제일 바깥쪽의 껍질 그러니까 양파의 표면에는 전자가 한 개에서 여덟 개까지 자 리 잡을 수 있다. 진짜 양파가 있다면, 양파의 껍질 위에 한 개에서 여덟 개까지 점을 그리 거나 색종이 조간의 수에 따라 양파들을 분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화학적 결합의 원리가 어떻게 실행되는지는 물분자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물분자의 화학적 이름은 H2O인데, 이는 하나의 산소 원자와 두 개의 수소 원자가 결 합되었음을 뜻한다. 어째서 그렇게 될까? 산소는 원소의 순서에서 여덟 번째 원소로서 흡사 두 개의 껍질을 가진 양파와 비슷하다. 안쪽 껍질에는 전자의 자리가 두 개 있고, 나머지 전 자 여섯 개는 바깥쪽 껍질에 있다. 그러니까 바깥 껍질에는 두 개의 자리가 비게 되는게, 이 자리가 수소 원자의 전자 두 개에 의해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바깥쪽 전자 껍질 의 빈 자리들이 고리 구멍의 역할을 하며, 여기에 다른 원소의 전자들이 걸쇠처럼 끼워질 수 있다. 분자 결합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그쳐야 한다. 우리는 물리학이나 화학을 공부하려는 게 아니라 과학에 대해 철학적으로 숙고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다음의 사실을 말해야 한다. 원자론은 사실 지금 설명한 정도로 그렇게 간 단한 것은 아니었다. 이 간단한 원자 모형도 계속해서 인정되지 않았다. 또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또다시 새로운 입자가 존재하도록 요청되어 야 했다. 이 새로운 입자들도 규칙적으로 실험적인 조치에 의해 발견되었고, 사실로 입증되 었다. 과학자들은 양자들과 중성자들로 이루어진 원자핵이 실제로 고정되기 위해서는, 핵 속에 서 어떤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밝혀냈다. 그것은 양자들이 양성의 전하를 중성적인 중성자들에게 옮기는 운동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양자로부터 중성자가 생 겨나고, 중성자에서는 양자가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교환은 쉬지 않고 반복된다. 이 일을 떠맡은 것은 일종의 심부름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새로운 입자로서 양자와 중 성자들 사이에서 번개처럼 날쌔게 왔다갔다하며 전하를 옮겨 주는 역할을 한다. 이 입자는 '양전자(포지트론)'라는 이름을 얻었다. 발견일까, 발명일까? 양전자의 발견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기능을 가진 새로운 입자들이 원자 속에서 계속 발 견되었다. 실험과정에서는 수명이 아주 짧은 입자들도 만들어졌다. 이런 입자들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원래 그 입자들은 이미 있었던 것이며, 사람들이 단지 그것들을 발견했을 뿐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원자물리학에서는 상황이 분명히 다 르다. 입자들은 너무 작아 간접적으로만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입자들에 대해서 무엇인 가 조치를 해야 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하나의 입자를 다른 입자로 쏘아(이것 을 '조사'라 한다) 안개상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할 수 있었다. 원자도 쏠 수 있 는데, 그 경우에는 핵이 터져서 각 성분들로 나뉘게 된다. 실제로 이것은 실험을 통해 시행 되었다. 독일의 과학자 오토 한은 1939년에 처음으로 실험실에서 원자를 파열시켰다. 그후 이러한 효과를 기술적으로 변환함으로써 한편으로는 핵폭탄이 발명되었는가 하면, 다른 한 편으로는 핵발전소가 건설되었다. 어떻게 핵파열의 효과에서 폭탄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과학자들이 관찰한 사실은 이러 하였다. 원자핵 하나가 입자의 침투로 인해 파열되면 수많은 새로운 입자들이 생겨나고, 이 것들은 다시 옆에 있는 원자들 속으로 파고들어서 그 핵들을 또 파괴한다. 맨 처음 파열된 원자가 약 1백 개 정도의 입자로 분산된다면, 입자들은 각각 1백 개의 다른 원자들을 파괴 하는 식으로 연쇄반응이 계속되어 결국은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이 원자폭탄 의 원리이다. 이때 완화하는 물질을 폭발하는 원소 속으로 투입하여 이 연쇄반응에 제동을 걸 수도 있다. 그렇게 핵분열을 조절함으로써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 한 진행이 통제를 벗어나게 되면 원자력 발전소는 원자폭탄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이제 응용에서 원리로 되돌아가도록 하자. 방금 설명한 응용의 가능성을 통해서, 과학자들 이 보이지 않는 작은 입자들을 서로 충돌시켜서 어떤 식으로든-위에 설명한 것처럼-그 효 과를 가시화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출발할 때는 최소한 그들의 생각이 정당했다는 사실을 분 명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물리학자들은 입자 가속기들을 만들었다. 이 기계 속에서 원자 입 자들은 전장을 지나면서 높은 속도로 가속화된다. 그리고 나서 입자들을 장애물에 부딪히게 하고, 안개상자를 이용하여 무슨 일이 생기는지 관찰할 수 있다. 입자가 파괴되면서 더 작은 새로운 입자들이 보이게 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자 특이한 결과가 나타났다. 입자 가속기를 크게 만들수록 입자의 속도를 더 빠르게 높일 수 있었고, 새로 발견되는 입자들의 크기는 더 작아졌다. 마침내, 과학자들은 전자석을 부착한 고리 모양의 거대한 터널을 만들었는데, 이 장치에서 생겨난 입자들 중 많은 수가 수명이 아주 짧아서 생기자마자 곧바로 다시 사라져 버렸다. 여기서 이제 하나의 철학적 의 문이 떠오르게 되었다. 과학자들은 조작에 의해서 자연 속에 존재하는 입자들을 발견한 것 일까? 아니면 수명이 짧고 불안정한 이 입자들은 과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까? 바람도 없고 흐름도 없어서 수면이 매끄러운 연못에 돌멩이를 던지면 파문이 생겨난다. 돌멩이가 클수록 파문은 더 뚜렷하게 보인다. 하지만 잠시 지나면 파문은 사라지고 물 속에 일어났던 동요도 잠잠해져서, 결국 수면은 다시 매끄러워진다. 이 경우 그 파문이 언제나 있 었던 것이라고 주장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 이다. 원자의 영역에서 우리가 한 실험도 그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입자로 다른 입자를 쏨으로써 일시적인 동요를 일으키고 입자 파편을 만들었다. 이 입자들은 수명이 짧 아서 곧바로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입자의 성분들을 가시화한 것인 지, 아니면 다시 잠잠해지고 마는 일시적인 동요를 야기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렇게 흥미로운 실험을 통해 사람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입자들을 발견했다. 아니 만들어 냈다. 입자의 수가 수백 개로 증가되자 물리학자들은 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 모든 사태를 '입자의 서커스'라 불렀고 완전히 질려 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자고 나누어지 지 않는 원자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그러한 물질의 가장 작은 성분이 틀림없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원자(Atom)'라는 이름이 고도 로 복잡한 체계로 입증된 구성물에 대해 이미 쓰여졌기 때문에, 그들은 이 새로운 입자를 '퀴크(Quark)'라고 불렀다. 쿼크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과학자들은 실험을 통해서 확실하 게 쿼크를 발견하였다. 그런데 또 하나의 딜레마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찾으려는 것은 가장 작은 하나의 쿼크였는데, 발견된 것은 몇 가지였던 것이다. 그 동안 발견된 쿼크의 수는 여 섯 개나 된다. 이것은 골치 아픈 일이다. 다양한 쿼크들이 생겨났다는 것은, 결국 쿼크보다 더 작은 입자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더 작은 입자들이 혼합 비율을 달리 하기 때문에 다양한 쿼크들이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작은 입자는 있을까? 이 물음을 끝으로 물리학 여행을 마치기로 하자. 그 결과로서 우리가 확인한 사실은 이러 하다. 기술적 장비가 계속 확대하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더 작은 입자를 만들어 내고 있다. 거의 모든 입자는 언젠가 가장 작은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나중에는 더 작은 입자에 의해 밀려나 고 말았다. 그런 식으로 계속 나누는 것이 가능하다면, 다시 말해서 나눌 수 없는 가장 작은 입자는 존재하지 않고 물질이 무한히 작게 임의로 나누어질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렇다면 적어도 가장 큰 것은 있을까? 다시 말해서, 세계는 그 어딘가에 끝이 있을까? 천문학자들도 물리학자들과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관측도구가 개선될수록 천문학자들 은 더 멀리 떨어진 대상들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그 끝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 시간적으 로 세계의 시작과 종말은 있을까? 과학자들은 빛에서 관찰된 적색 이동을 우주가 확장되고 있는 증거로 보고, 현재에서부터 거슬러 계산을 하면 시간적인 시작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 라고 믿는다. 그러나 팽창하는 이 세계가 새로운 발견들에 의해 계속 커지고 있기 때문에 시작도 계속해서 더 먼 과거로 옮겨지고 있다. 이렇게 팽창하는 세계가 공간적인 끝을 갖지 않는다면, 시간적인 시작도 무한한 과거 속 으로 멀어질 것이다. 그러나 무한에서의 시작이란 결국 시작이 없음을 의미한다. 과연 우리는 시작이 없는 것 을 상상할 수 있을까? 우리가 아는 모든 사물에 한계가 있다. 그것은 무한한 크기가 아니며, 또 시간 속에서 시 작과 끝을 갖고 있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한정되어 있다고 우 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전체를 아우르는 이 세계 자체는 과연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일까? 물리학의 한계와 철학 그것은 물리학자가 대답할 질문이 아니라 철학의 질문이다. 물리학은 세계에 있는 물질 대상들을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물리학은 세계의 물체들이 서로에게 일으키는 작용 을 통해 개별 물체의 본질을 규정한다. 여기서 물리학자들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나름대로 하나의 (혹은 몇 개의)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 원인이란 것도 따지고 보 면 다시 그보다 앞서 있었던 원인의 결과이고, 그 원인도 다시 그전에 있었던 원인의 결과 로 계속해서 연결되는 것이다. 내가 시작을 묻는다면 나는 계속해서 그 이전의 원인으로 거 슬러 올라가겠지만, 절대적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최초의 원인에는 이르지 못한다. 경험과학 들이 뭔가를 알아낸 시작들은 언제나 상대적인 의미에서 시작이었다. 세계의 어떤 사물에 시작이 있다면 그것은 그 전에 있었던 사물들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어쩌면 이 과정에서 원 인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지만, 이전에 원인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무에서 생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과법칙은 이렇게 세계의 모든 현상에 해당되는 것인데, 과연 이 법칙이 세 계 전체에도 해당될까? 그것이 바로 철학이 문제삼았던 질문이다. 물론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자신들이 시작에 대 한 질문에 답을 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폭발하는 이 세계의 상태를 설명함으로써 그 들은 시작을 계산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시작을 절대적 시작으로 보았다. 이론으로 여지가 없는 한 가지는, 내가 어떤 대상을 전체적으로 조망하여 대상의 공간적 크기를 알고 그것이 언제 시작된 것인지 말할 수 있을 때, 나는 그 대상에 대해 올바르게 기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리학자들이 찾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1) 세계의 시작. 2) 하부 한계, 즉 가장 작은 것. 3) 상부 한계, 세계의 끝, 다시 말해서 우주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가장 마지막에 있는 대 상 만일 물리학자들이 의심의 여지없이 이 세 극점들 중 하나라도 발견한다면, 그들은 다른 것들도 해명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끝을 발견하면 처음을 계산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작업을 계속해서 하고 있지만, 그것은 콜럼버스의 계산처럼 언제나 일시적인 것 이다. 만일 그들이 분명히 가장 작은 입자를 발견한다면, 세계의 유한수의 입자로 이루어졌 는지 무한수의 입자로 이루어졌는지 하는 문제도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작은 것, 최초의 것, 가장 큰 것 등 현재 과학자들이 발견하는 것은 모두 일 시적이기 때문에 그들은 결정적인 지식을 말하지는 못한다. 6. 인간은 얼마나 큰가? 절대적인 크기를 규정할 수 없고 기껏해야 일시적인 크기만을 비교할 수 있다면, 우리 인 간들의 크기는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신분증에는 우리의 키가 센티미터로 표기되어 있다. 영국에서는 인치, 피트, 야드, 마일 등과 같이 우리와 다른 길이의 측정단위를 사용한다. 이 들 가운데 인치나 마일은 우리도 쓰고 있는 단위이다. 아마도 이런 질문이 나올지도 모른다. 척도에도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있을까? 킬로미터는 옳고, 마일은 그른 단위일까? 물론 그렇 지 않다. 언어들마다 사물을 지시하는 이름들이 달라도 뭐가 옳고 뭐가 글렀다고 판단할 수 없듯이 길이의 척도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우리는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처 럼 모든 측정단위를 다른 단위로 환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마일은 약 1.8킬로미터가 된 다. 그리고 바다에서 쓰는 마일, 즉 해리는 육지에서 쓰는 마일과 크기가 다르다. 그렇다면 1센티미터는 어느 정도 크기일까? 이런 질문을 받은 이는 아마도 자기가 1센티 미터라고 생각하는 만큼 엄지와 집게손가락을 벌려 보이면서 "이 정도쯤 될 거야"라고 말할 것이다. 그에게 센티미터자가 있다면 더 간단하게 자를 내보이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알고 자 한 것은 1센티미터의 크기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센 티미터자를 보여 줄 수 있을 뿐이다. 모든 센티미터자는 사람들이 이미 정해 놓은 어떤 최 초의 척도에서 온 것이다. 처음 척도를 정할 때 사람들은 지구 둘레의 4천만분의 1에 해당 하는 길이를 미터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좋은 바람이었지만, 우 리의 지구가 이상적인 공 모양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무 엇의 몇천만분의 1을 1미터로 정했는가 하는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척도를 확정했으며, 이 척도를 이용하여 모든 것을 측정할 수 있 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폴리네시아 원주민 추장의 불룩 나온 배나, 시라노 드 베르주 라크의 코를 기준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나름의 판단에 따라 마음대로 기준을 정하며, 기준만 있으면 곧바로 세계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정된 기 준점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다. 다시 말해서 그 기준점을 우리의 목적과 필요에 따라 결정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바로 그 기준점이며, 우리들이 곧 모든 사물의 척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와 상관없이 이미 고정되어 있는 어떤 기준점이 있는 것은 아닐까? 과학자들 이 그 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고의 틀 속에서 그 점이 반드시 있 어야 하고, 가장 작은 단위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믿었다. 원자의 대한 생각이 바로 이러한 확신의 표현이었다. 그렇다면 원자론이 반드시 옳아야만 하지 않을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입자를 구상하였는데, 그들은 이 생각을 단지 '사변적으로'만 전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근대 경험과학은 계속해서 새롭게 나타나는 더 작 은 후보자들은 제시하면서, 가장 작은 것인 원자의 표상을 실제로 입증하려고 했다. 그런데 만일 가장 작은 입자의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면, 물질의 최소단위란 없으며 물질이 본질적으로 무한히 나누어지는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고대에는 이런 가능성을 생각 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제시한 무한한 가분성에 대한 증거들은 이러하였다. 무한한 가분성 이탈리아 남부 엘레아 출신의 그리스 철학자 제논은 이른바 운동의 패러독스(역설)라는 것을 표명했는데, 그리스 전설에서 가장 빠르게 달리는 영웅 아킬레스가 조금 앞에서 출발 한 느림보 거북을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아킬레스는 매우 빨리 달리므 로 잠시 후면 거북이 출발한 지점에 도착하게 된다. 하지만 그 사이에 거북은 어느 정도 앞 으로 기어가 있다. 이렇게 둘 사이의 간격은 좁아지지만 없어지지는 않는다. 계속해서 아킬 레스는 거북이 이미 지나간 지점에만 닿을 뿐이다. 시간이 가면서 아킬레스와 거북의 거리 는 무한하게 작아질 뿐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제논은 이런 생각 끝에 운동이라는 것 자체가 아예 가능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생각에 반대하는 자들은 실제 경주를 통해 그를 반박하였다. 그들은 제논의 생각이 현실을 기술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 했다. 오늘날 우리는 제논이 한계치를 고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 한히 많은 발걸음 속에서 그는 아킬레스가 거북을 따라잡기 위해 무한히 많은 시간이 필요 하지 않으며, 오히려 측정된 거리들과 시간이 무한히 작아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한 가분성에 대한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나는 무한히 많은 부분들이 모인 임의의 선을 그을 수 있다. 이것을 선분 AB라 하자. 먼저 이 선을 중심에서 나눈다. 그리고 나누어진 반을 다시 반으로 나눈다. 이렇게 나누어 진 선의 부분들을 모두 더하면, 1/2+1/4+1/8+1/16+..., 이런 식이 되고 이 식은 끝나지 않는 다. 선분은 계속해서 무한분의 1 크기까지 나누어질 것이다. 선분의 길이와 상관없이 나는 모든 선분을 이런 방법으로 무한히 나눌 수 있다. 따라서 수학에는 가장 작은 크기도 가장 큰 크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에게 가장 큰 것으로 주어 진 어떤 수에 하나만 더하면, 그 다음으로 큰 수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물질의 세계로 옮겨 보면,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여 무한히 큰 크기와 무한히 작은 크기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러면 이 말은 우리 가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의 한가운데 있음을 뜻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이미 하나의 길이가 얼마이든간에 그것을 무한하게 나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 의 크기가 절대적으로 어느 정도인가에 상관없이 우리는 언제나 무한히 작은 것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히 큰 것으로 나아 갈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우리가 한 가운데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위치가 어디이든지 그곳이 우리에게는 중심인 것이다. 우리는 척도를 만들 어야 하고, 그러고 나면 큰 것과 작은 것, 빠른 것과 느린 것 등 모든 것을 측정할 수 있다. 아킬레스는 분명히 거북보다 빠르지만, 거북이 자신은 스스로를 느리다고 생각할까? 동작이 느려 보이는 파리를 손으로 치려고 하면, 대부분 우리는 파리를 놓치게 된다. 파리가 우리에 게는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파리는 우리의 손이 자기에게 천천히 다가오 는 것을 느끼고 피하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곤충들이나 벌새의 날개짓을 보지 못한 다. 우리의 시각으로 감지하기에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곤충들과 벌새는 자기들의 동작을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눈 깜짝할 순간이 다른 동물에게는 긴 시간일 수 있다. 가장 작은 시간 간격 이 있을 수 있을까? 물리학자들은 그것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이 현재 관찰하고 있는 가장 작은 입자와 관련해 보면 그들의 주장은 분명 옳다. 하지만 현재 알려져 있는 입자보 다 더 작은 것이 있다면, 지금보다 더 작은 시간단위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반대의 극단도 역시 생각할 수 있다. 여태까지는 우리가 모르고 있지만, 그들에 비해 우리가 너무 작고 우리의 수명이 너무나 짧아서 우리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생물들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몇 년 전에 나는 한 일간지의 주말판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 이 있다. 유니버스 교수는 실험실에서 새로운 유기체 표본을 만들고, 플라스크 속에서 재미있는 형 상들이 생겨나는 것을 조교와 함께 관찰한다. 교수는 이 표본에 대해 설명한다. "이것은 정 말 작은 세계로서 스스로 발전하고 있다네. 이 작은 입자를 보게나, 지금 막 작은 공에서 다 른 공으로 옮겨갔지. 이 작은 입자는 이를테면 우주 여행을 하는 것이라네." 조교는 매우 감 격해하면서 이렇게 대답한다. "그 움직임을 내일 계속해서 추적해야겠군요." 그러자 유니버 스 교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유감스럽지만 그럴 수는 없을 걸. 내일이면 이 표본을 해체되 어 없어질 테니까." 이 이야기가 참일 수 있을까? 우리의 세계에 무한히 작은 것과 무한히 큰 것이 존재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다. 이런 결론은 물리학의 발전 결과에서 얻어진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나눌 수 없는 것으로 알 았던 원자가 더 작은 입자들의 조합임을 인식함으로써 원자에서 하나의 체계를 만들었다. 매번 발견되는 것이 최소의 크기가 아니라 더 작은 것들이 조합으로 밝혀진다면, 어째서 그 와 비슷한 더 작은 구조들이 계속해서 발견되지 않겠는가? 갈릴레오는 목성과 그 위성들을 망원경으로 관찰하였고, 이 모형을 태양과 행성들의 관계로 옮겨 적용하였다. 나선 은하인 항성계들은 소용돌이 구름이나 허리케인과 비슷해 보인다. 소용돌이가 회전할 때 측정할 수 있는 은하의 수명은 어쩌면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는 것과 비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천문학자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부분의 우주 속에서 항성계들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우주 속에는 넓게 텅 빈 영역도 있고, 많은 은하계들이 모여 있는 부분 도 있다. 천문학자들은 그러한 모양이 속에 구멍나 있는 스위스 치즈를 닮았다 하여, 익살스 럽게 우주의 '스위스 치즈 이론'이라 일컫기도 한다. 우리가 오래 전에 가장 큰 구조들로 여겼던 수십억개의 태양이 있는 은하계들은 더 큰 차 원에서 보면 더욱 거대한 구조 이를테면 '스위스 치즈'를 만드는 데 쓰인 작은 성분에 불 과한 것이다. 무한히 넓고 큰 세계 속에서 우리의 은하계들은 원자만한 크기일 수도 있지 않을까? 혹은 원자보다 더 작은 입자, 쿼크 정도는 아닐까? 원칙적으로 그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의 관찰능력이 넘어 계 속해서 펼쳐져 있는 우주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무한히 거대한 우주 속에서 층층이 성립되는 구조들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학의 분과로서 오늘 날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이른바 프랙탈 이론을 통해 우리는 그러한 가능성들을 알게 되었 다. 물리학자나 천체 물리학자들은 상상하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할 때, 자신들의 사변을 정 당화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상상이 '수학적으로 옳다'는 것을 환기시키려 한다. 나도 나의 상 상을 주장하기 위해 이러한 논증을 사용하고 싶다. 우리의 은하계들이 원자의 입자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대한 세계에서는, 엄청나게 크고 느린 생명체와 인간종이 있을 수도 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가 엄청나게 작고 우리의 삶이 너무 짧아서, 그 생명체들이 우리를 공간적, 시간적으로 인지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들과 접촉할 수가 없다. 거꾸로 우리 세계에 있는 더 작은 세계에 대해서도 같은 조건이 성립될 것이다. 우리에게 는 그러한 소세계 거주자들의 크기가 무한히 작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런 존재들에게는 우리가 지나치게 큰 존재이다. 우리가 그저, "얘들아, 너희들 거기 있구 나!"라고만 말해도 소세계에서는 어쩌면 2백억 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버릴지도 모른다. 그 러므로 이렇게 차원이 다른 세계끼리 서로 교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제 우주가 무한히 크다고 전제한다면, 우리는 결국 러시아의 유명한 마크료시카 인형들 이 그런 것처럼, 서로 차단된 세계들이 무한히 많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물론 마 트료시카 인형들은 수가 정해져 있지만 우주에 있는 세계들의 수는 정해져 있지 않다. 그렇 기 때문에 마트료시타 인형의 경우와 달리,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계는 아래서 세 번째다" 혹은 "우리 세계는 위에서 세 번째다"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무한성의 차원에서는 당연 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우주의 어디쯤 있든지간에 우리는 가운데 있는 것처럼 여긴다. 하지 만 유한한 것과 반대로 무한한 것에는 가운데가 없다. 물리학 비판 우리의 사고에서 조금 벗어나서 물리학자들의 사변적 세계 모형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물리학자들은 멀리 떨어진 항성계에서 빛의 적색 이동을 관찰하였다. 빛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올수록 그 빛은 더욱 뚜렷이 붉은 색으로 변한다. 그들은 이러한 관찰을 도플러 효 과라 불렀고, 우리로부터 멀어져 가는 운동의 징후로 해석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주가 계 속해서 팽창하고 있다고 결론내렸으며, 거슬러 계산하여 우주 폭발의 처음 시기를 찾아내려 고 했다. 그들은 이 폭발의 시작과 세계의 시작을 동일하게 본 것이다. 철학자를 포함하여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의문이 생길 것이다. 이 순간에도, 그리고 무한억년 전부터 폭발해 온 어떤 것이 도대체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한 물리 학자들의 설명은 불충분했다. 그들은 공간과 시간이 폭발의 시작과 함께 존재하기 시작했다 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독단이다. 독단은 다른 생각을 아예 못하게 한다. 그런데 물리학자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 속에서 이른바 '블랙홀'이라는 것을 발견하 였다. 그 속에서는 모든 물질, 별들까지도 끌려 들어가서 소멸된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질량은 인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어떤 거대한 질량이 어디선가 모이 면, 그것은 주변에 있는 모든 물체를 끌어당기게 된다. 이렇게 거대한 질량으로 돌진해 온 물체들이 합쳐짐으로써 질량은 더욱 커진다. 이 질량이 계속해서 커지면 갑자기 원자들이 와해된다. 우리는 원자를 아직은 핵(양자)과 위성(전자)들로 구성된 작은 태양계로 생각하고 있다. 원자들의 와해는 원자 속에 있는 입자 들 사이의 간격과 원자들 사이의 간격이 사라져 버림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만약 태양계의 모든 행성들이 태양 속으로 돌진해 들어가면 태양과 행성의 총질량은 그대로이지만, 체계는 태양과 같은 크기일 것이다. 원자 속에서 사이 공간들이 사라지면 그것은 엄청나게 수축된 다. 그렇게 태양과 같은 어떤 항성은 엄청나게 수축할 수 있고, 그럼에도 인력을 지닐 수 있 다. 물리학자들은 블랙홀 속에서 점점 많은 물질이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하나 혹은 몇 개의 블랙홀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시간의 차이야 있겠지만 결국 우주 전체를 '먹어치 우고' 말 것이다. 하나의 블랙홀에 있는 인력은, 심지어 빛까지 그 속에서 사라져 버릴 정도 로 엄청나게 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직접 볼 수가 없다. 우리는 단지 그리로 이끌려 갔지만 아직 채 사라지지 않은 대상들을 통해 블랙홀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볼 수 있을 뿐이다. 물리학자들이 그같은 블랙홀들을 발견했다고 믿음으로써, 우주에서는 폭발과 팽창뿐만 아 니라 붕괴와 수축도 관찰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했다. 그렇다면 결국은 우주 전체가 다시 블랙홀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또 폭발에 의해 블랙홀로부터 새로운 우주가 탄생할 수 도 있다. 우리의 세계가 맥박처럼 번갈아서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우주 모형은 사랑과 미움의 대립적인 두 힘과 몇 가지 원소를 상정했던 엠페도클레 스를 상기시킨다. 그는 우주 안에서 원소들의 결합(사랑)과 분리(미움)가 영원히 교차하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영원히 변화하는 우리의 현실이 탄생한다고 주장하였다. 우리의 우주가 얼마나 자주 그런 맥박운동을 하였는가를 물리학자들에게 묻는다면-그들 이 솔직하다면-대답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 변화는 두 차례였을 수도 있고 다 섯 차례였을 수도 있으며, 또는 헤아릴 수 없이 자주 일어났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제 몇몇 물리학자들은 아주 기가 막힌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의 우주 외에도 맥박운동을 하는 우주들이 더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나의 우주가 폭발할 때마 다 그 옆에 있던 우주는 함몰한다는 것은 가능한 얘기다. 어쩌면 이 우주들이 모여서 우주 들의 체계를 이루고 있을 수도 있고, 또 이 우주들은 이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 씬 더 큰 우주 속에서는 원자들일 수도 있다. 그래서 가상의 관찰자인 유니버스 교수는 사 실 나란히 있는 두 개의 작은 우주를 관찰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이 너무 작 아서 제대로 식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운동하는 입자 하나를 보았다 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시간 차원에서 4백억 년이 그에게는 4백억분의 1초일 것이기 때문이다. 유니버스 교수가 만일 물리학자라면, 우리의 물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분 명히 철학적인 숙고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자문할 것이다. 자기가 입자로 관찰한 것의 위치가 불분명하게 보인 것은 자신이 사용한 관측도구의 성능이 미비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입자 자체가 분명하지 않아서일까? 그는 이런 물음들을 모두 제기하면서, 우리의 원 자물리학자들이 이미 설정했던 가설들을 또다시 설정할 것이다. 여기서 잠깐만! 지금까지 우리는 무엇을 하였나? 우리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무한히 거대 한 우주의 표상을 다시 한 번 전개해 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힌트를 제공한 것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세계의 시작을 발견하고, 우리의 우주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고 믿었던 물리학자들이었다. 그런 생각은 분명히 성급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제 경험과 학자들이 과연 세계의 시작을 발견할 수 있을지 철학적으로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만물에는 원인이 있고 처음이 있다는 일반적인 주장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들에 대해서는 타당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이 세계 전체에 대해서도 옳은 것일까? 유한과 무한의 문제와 칸트 2백여 년 전에 유명한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제목의 책을 썼 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이 가진 사고능력의 가능성과 함께 그 한계를 규정하고자 했다. 그의 사고는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인간은 공간과 시간이라는 직관형식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인간에게 나타난다. 공간과 시간의 사고 범 주를 사용하여 인간은 모든 대상들을 파악하고 기술할 수 있다. 하지만 인과성 개념을 포함 하여 우리의 모든 사고형식들은, 우리의 감각들로 경험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그 타당성 이 인정된다. 그리고 우리의 세계 속에 현존하는 것들은 모두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넘어서려고 할 때, 우리의 사고범주들은 그것을 거부한다. 만일 우리가 "이 세계가 하나의 시작에서 출발한 것일까, 아니면 영원한 것일까"라는 문제를 사 고한다면, 우리는 이런저런 견해들에 대한 그럴 듯한 이유들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 인간의 사고능력을 가지고는 이 문제와 칸트가 열거한 이와 비슷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 다. 여기에 인간 이성의 한계가 있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금세기의 물리학자들은, 만일 그들이 <순수이성비판>을 읽었더라면 불가 능하리라는 것을 알았을 일을 시도한 셈이다. 그런데 칸트의 생각은 과연 얼마만큼 구속력 이 있을까? 칸트는 세계가 시작을 가질 수 없다고 설명했다. 무로부터 그 무엇인가가, 즉 이 세계가 특정한 시점에 탄생하는 이유를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시간 속에서 무한한 세계를 생각할 수 없는데, 그것은 세계 속의 모든 시점은 반드시 무한히 연 결되는 지나간 시점들을 갖기 때문이다. 칸트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시작에 대한 칸트의 논증은 우리에게 명료하게 다가온다. 우 주 폭발의 시작이 동시에 우주 전체의 절대적인 시작일 수는 없다고 우리가 물리학자들과 우주생물학자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을 때, 우리도 그런 논증을 사용한 셈이다. 과학자들은 차라리 지금 폭발하고 있는 우주가 어떻게 이러한 폭발의 상태로 빠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야 할 것이다.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맥박운동을 하는 우주의 표상이 우리에게는 더 납 득할 만한 것이다. 무한한 것에 대한 사유 그러나 무한성에 대한 칸트의 논증은 그렇게 명료하지 않다. 우리가 무한한 것을 사유하 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칸트처럼 우리의 유한성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 자신이 유한한 존재-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한한 것을 직접 체험할 수 없음을 뜻한다. 하지만 우리는 무한성이 어떤 것이라는 개념을 가질 수는 있다. 우리는 기하학에서 하나의 직선이 양방향 으로 무한히 뻗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직선을 그리는 종이의 면은 유한하 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직선의 작은 일부만을 제시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영역에서도 직선이 무한성 속에 있음을 알고 있다. 무한으로 뻗어가는 직선을 추적한다면 무한히 긴 시간이 소요될 것이고, 또 무한히 지루 한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모든 척도의 척도, 인간 우리의 우주가 공간적, 시간적으로 무한한 것이라면, 그것은 이런 의미일 것이다. 우리는 우주의 처음과 끝을 생각할 수 없고, 마찬가지고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도 생각할 수 없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자신과 관련되어 있다. 즉 우주 안에서 가장 큰 것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것 중 가장 큰 것이라는 얘기다. 가장 작은 것도, 또 가장 이른 것이나 가 장 늦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크고 작음이나 빠르고 느림, 그리고 그 밖의 것을 규정할 때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이 관련축이 되어 우리의 입장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볼 때 태 양계는 크고 원자는 작으며, 1년은 길고 순간은 짧다.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 자신과 관련시 키며, 우리가 모든 척도를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곧 모든 척도들의 기준인 것이다. 우리는 크기단위와 시간단위를 선택할 때 우리의 목적에 쓸모가 있도록, 또 우리가 그것을 감각으 로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우리는 미터단위를 고안한 것이며, 그것을 일반적으로 사 용할 수 있도록 배워서 익혔다. 다른 척도단위들을 우리는 미터로 환산할 줄 안다. 마찬가지 로 우리는 미터를 다른 단위들로 환산할 수도 있다. 그러면 1미터는 어느 정도의 길이인가? 미터자를 보면 1미터의 길이를 알 수 있다. 미터 자를 이용하여 신체의 길이를 잴 수 있고, 자신의 크기를 알 수 있다. 인간이 자를 만들어 내기 전에는 어떻게 했을까? 그때에도 자신의 키가 얼마인지 알 수 있었을까? 물론 미터자가 꼭 없더라도 인간은 자기 몸의 크기에 대한 표상을 가진다. 자신의 몸을 보고 자신의 몸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손으로 제 몸을 어루만져서 느낄 수 있다. 그러면 머리가 어디서 끝나는지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만일 문을 통과하려 한다면, 미터자로 재보 지 않아도 그 문이 충분히 높은지를 느낌으로 알 수 있다. 확실하지 않다 싶으면 고개를 약 간 숙일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자신의 크기를 이미 알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길이를 재는 자가 필요할까? 그것은 우리의 눈대중이 착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추정해 야 할 때 잘못 추정할 수도 있다. 잘못 추정하여 문의 인방에 머리를 부딪히는 사람도 더러 있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에 의해서만 사물들의 크기를 말한다면, 그 크기는 철저하게 정확 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를 만들었고, 정확하게 재기 위하여 접자를 들고 다니 기도 한다. 정확하게 비교할 수 있도록 우리는 엄밀하게 검증되고 일반적으로 인정된 척도 를 사용한다. 측정은 일조의 비교이기 때문이다. 비교의 결과 우리는 '더 크다', '더 작다' 혹은 '~만큼 크다'라고 말하며, 마찬가지로 '더 무겁다', '더 가볍다', '~만큼 무겁다'라고도 한다. 절대적인 크기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적인 크기, 결국 관계들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으로서 다른 그 무엇과 관련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서로 관련 시키는 중심점이 바로 우리 인간이다. 측정할 때 사용하는 모든 척도의 단위들을 우리의 필 요에 따라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를 관찰하며, 큰 것과 작은 것, 가벼운 것과 무 거운 것, 밝은 것과 어두운 것, 추운 것과 더운 것을 규정한다. 우리의 크기가 바로 지금 이 정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원자는 무한히 작고, 은하계는 무 한히 큰 것으로 보인다. 물론 우리의 크기에 상관없이 우리 자신과의 비교를 통해서 아주 작거나 아주 거대한 사물들을 항상 있게 마련이고, 아주 작은 시, 공간과 엄청나게 큰 시, 공간도 존재할 것이다. 이것은 유니버스 교수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 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의 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세계가 우리에게 그렇게 보임을 뜻한다. 만일 우리가 세계의 가장자리가 어디 있는지 안다면, 우리는 세계의 절대적인 중심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연구를 통해 볼 때 그 가장자 리는 계속해서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이 절대적 중심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측정을 위한 척도를 사용한다고 말함으로써 세계의 중심에 설 수 있다. 측정 은 우리의 목적을 위한 일이므로, 우리는 필요에 알맞게 척도들을 규정한다. 즉 우리의 입장 에서 출발하여 이 세계를 올바르게 설명하고 기술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활동에 진 행 속에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아직 모든 것을 알지 못하며, 가능한 지식 전체를 두고 볼 때 우리의 현재 지식이 과연 어느 정도의 일부인지조차도 아직 모른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이미 안다고 믿었던 것조차도 솔직히 의심스러운 것이다. 우리의 낡은 표상 들을 던져 버리도록 강요하는 놀랍고 새로운 지식들이 계속해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천문학과 물리학의 발전사는 그에 대한 풍부한 예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예들 을 자세하게 기술했던 것이다. 인식의 한계는 어디일까? 우리의 인식은 어디까지 확장될까? 인식에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종종 그렇다 고 주장해 왔다.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먼저 우리가 어떤 원리에 따라서 인식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 다. 우리는 자연과학에 익숙해 있어서, 일반적으로 모든 사물을 그것이 다른 것에 미치는 영 향과 사물의 상태에 까라 규정하고 있다. 우리의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결부되어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물들의 총체이 다.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의 연관 속에 편입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은 이 세계의 모 든 사물들로 뻗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식 가능성은 세계가 끝나는 그곳에 끝난다 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세계 바깥에 존재하며, 있음을 표시해 주지 않는 사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우리의 세계가 끝이 없다면 우리의 인식도 무한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물론 우리 주변의 사물들에 대한 인식 가능성과 관련되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우리의 무한한 인식 가능성을 수용한다면, 실제로 존재하지만 우리가 절대로 알 수 없는-그것에 대해 말하고 글을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예외이고-그 무엇이 있다고 말하 는 것이 우리에게는 무의미하게 여겨질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매우 많은 것이 해명되지 않고 있다. '아직 해명되지 않았다' 내지 '현재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어떤 것이 원칙적으로 불가해하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 인 식이 세계의 한계와 맞물려 있다는 인식에 머물기로 하자. 분명히 세계에 대한 우리의 현 재 지식은 결정적인 것이 아니며,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계속해서 탐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는 역설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우리가 지식을 쌓으면 쌓을수록 지금까지 알고 있는 지식이 전체로 볼 때 극히 적은 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새 로운 인식을 하나 얻게 되면 그로부터 수많은 의문들이 새롭게 나타난다. 새로운 인식을 통해서 기존의 이론들이 틀렸거나 부정확한 것으로 입증되는 사례도 빈번해졌다. 그렇기 때 문에 우리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현 지식을 조심스럽게 살펴야 한다. 수많은 영역들에는 다 양한 이론들이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이 결정적으로 타당하다고는 현재 말할 수 없다. 또한 지금까지 옳은 것으로 인정된 이론이 있다 해도, 이 이론으로 설명될 수 없는 낯선 현상이 갑작스럽게 우리에게 나타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경험과학들을 의심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한 번 과 학적으로 밝혀진 지식은 의심할 여지없이 절대적으로 타당한 것이라고 확고하게 주장하는 일만큼은 삼가야 한다. 우리의 과학들이 흡사 벽돌과 같이 절대적으로 올바른 지식들을 우리에게 제공한다고 말 할 수만 있다면 물론 편안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가장 최초의 지식들을 토대로 하여 그 것에 완전히 의지하면서 거대한 지식의 탑을 쌓아올릴 수 있다. 하지만 실제의 모습은 다르 다. 우리는 위로 계속 쌓아올리면서 아래에서는 계속해서 기초를 다지며, 때로는 주춧돌 몇 개(그릇된 것으로 인식된 기초 이론)를 교체해야 할 때도 있다. 게다가 우리는 완성된 건물 이 어떤 모양이 될지조차도 예측하지 못한다. 다시 한 번 우리의 입장을 탐정과 비교해 보자. 우리는 현재 몹시 까다로운 사건을 수사 하는 과정에 있다. 우리는 꾸준히 학습하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어제의 가설들을 오늘은 내던져 버리고, 오늘 우리가 제기한 추측들이 올바른 것으로 남기를 기대한다. 지금까지 고찰의 요약 우리의 철학은 아이들 특유의 질문인 "왜?"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낱말들은 어디에서 왔 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하였다. 우리는 인간이 의사소통의 도구로서, 우리의 감정과 소망, 사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도구로서 언어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인간의 언어는 엄청나게 많은 표현 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생명체들, 즉 지구에 사는 동물들 의 언어보다 탁월하다. 동물들은 동료들에게 그들의 생존을 위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꿀벌들은 먹이가 있는 곳을 아주 자세하게 표현할 수 있다. 함께 사냥을 하 는 다른 동물들은 서로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 쫓기는 동물들도 서로에게 경고를 보냄으로 써 의사를 소통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결국 무리를 이루고 사는 동물들은 모두 자기의 동 료들에게 원하는 것이나 기분 등을 알려 주기 위하여 풍부한 가능성들을 발전시키는 것이 다. 그래서 동물들은 함께 놀이도 하고 구애도 하며, 서열을 정하는 싸움을 하면서 위협하기 도 하고 굴복하기도 한다. 동물들에 대해서 체계적인 연구가 시작되고 난 후, 우리 인간들은 개별 동물들의 언어를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또 집에서 애완동물을 키우면 우리는 우리에 게 친밀한 이 동물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동물들의 의사소통은 상황과 현재에 관련되어 있다. 확실히 동물들은 엊그제 자기 기분이 어땠는가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 는다. (그렇지만 동물에게 기억력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인간의 의사소통과 동물의 의사소통은 무엇이 다를까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의사소통의 다양한 주제들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과 세계'에 대해서 말한다. 하지만 동물들이 그렇게 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신과 세계에 대해 말 한다"는 것은 전체로서의 세계와, 또 이 세계의 창조자에 대해 사유한다는 뜻이다. 아울러 우리는 조물주가 무슨 의도로 이 세계를 창조하였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이 테마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다루기로 하자. 지금 확실한 것은, 우리 인간들이 임의의 주제들-가능한 모든 주제들, 그래서 무한히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는 사실 이다. 우리의 언어는 이를 위한 도구이며, 우리는 이 도구를 끊임없이 발전시킨다. 우리는 새로 발견된 사실들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면서 우리의 사용 낱말수를 늘려간다. 우리는 이미 이 세계에는 서로 다른 울림을 갖는 낱말들로 이루어진 언어들이 된 텍스트 를 다른 언어로 옮길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언어들은 세계의 사물들에 각기 다른 이 름을 부여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사태를 다양한 언어들로 기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 물들에 부여한 것이며 언어에 따라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름인 낱말들과 이 낱말들로 명명된 것, 즉 사태의 개념을 서로 구분한 다. 사람들은 종종 사태에 대한 개념도 없이 많은 낱말들을 사용하기도 한다. 어떤 사물에 대해 개념을 가진다는 것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성질인지, 어 떤 태도를 취하며 또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 등을 아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사물을 명명하 지는 못하지만 사물의 개념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언어를 아직 습득하지 않 은 아이들의 경우가 그렇다. 아이는 엄마 젖을 젖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젖이 무엇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지시할 말이 없을 뿐이지, 고양이에게도 생선에 대한 개념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래서 냉장고 안에서 팔딱거리는 싱싱한 생선을 보고 군침 흘리는 고양이가 광고 에도 등장하지 않는가. '개념'과 '파악'의 의미를 해명함으로써, 우리는 "세계에 대한 지식이 어디에서 왔는가" 라는 질문과 만나게 되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우리들 자신이 연구를 통해서 얻어낸 것이 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이러한 연구과정 속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 이 세계 전체에 대해서 결정적인 것을 말할 수 없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간절히 원한다 해도 말이 다. 지금까지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세계의 한계를 발견하지 못했다. 위와 아래, 앞과 뒤 그 어디에서도 한계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의 현상황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 전체의 상을 얻기 위해서 항상 노력하고 있다. 지구상의 어떤 다른 생명체들이 또 이와 같은 노력을 하고 있을지, 그건 모를 일이다. 하지만 동물에 대하여 우리가 아직까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우리는 동물들이 그렇게 하 지 않을 것이고 또 할 수도 없다고 추측한다. 왜냐하면 동물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총체 로서의 세계에 대한 개념을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인간과 다른 생물간의 중요한 차이를 말한 셈이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눈에 보이는 사물들의 연관 관계만을 묻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자신들의 거주 공간을 알리고, 사냥 영역을 구획짓는 동물들도 그 정도는 한다. 우리는 더 나아가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세계 뒤에 무엇이 있는가를 또 묻는 것이다. 세계 지평은 언제나 우리가 경험하는 세 계의 경계선이다. 그러므로 한계 속에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이 그 지평을 더 넓히기를 원하 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내가 모르는 세계 속에서 나의 지평을 넓히는 것, 다시 말해서 내가 활동하면서 잘 아는 영역을 확장하는 것과, 이 세계는 어딘가에 한계가 있고 그 너머엔 아무것도 없다고 세계 전체에 대해서 숙고하는 것 사이에는 물론 차이가 있다. 인간은 누구나 이런 문제를 놓고 숙고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는 않지만 원칙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그럴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하는 것, 세계를 전체 속에서 사 유하는 일은 옛날부터 철학의 과제였다. 이를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철학 산책을 시작하며 언급했다가 한참 도안 미 루어 두었던 "왜"에 대한 질문을 다시 끄집어 내야 한다. 어린아이들이 부모에게 아이들 특유의 성가신 질문,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나이가 있 다. 사실 그 때문에 나는 우리의 철학 산책을 시작했던 것이다. 왜 아이들은 "왜?"라고 물을 까? 분명히 아이들은 세계의 속성을 알고 싶어한다. "왜 풀은 초록색일까?" 참 좋은 질문이 다. 물론 풀이 노란색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 해님은 빛나나요?" 이 얼마나 훌륭한 질문 인가! 현대 물리학은 태양의 내부에서 빛을 발하게 하는 원자의 현상에 대해 복잡한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왜?"의 질문으로써 아이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세계의 속성에 대해 알고자 한 다. 우리의 경험과학들은 이런 식으로 "왜?"를 묻는 질문들에 답을 구하고 있다. 만일 누가 내게 산이 왜 존재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지각 속에서 일어나는 운동과 관련하여 산악의 형성을 설명해 주는 일반 이론을 찾아볼 것이다. 그리고 나서 산악 형성의 개별적인 역사를 아마도 이렇게 설명할 것이다. 오래 된 산악들 중에는 다시 없어져 버린 것들도 있고,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높고 가파른 산들도 있다. 그런데 내가 만일 높은 산악지대에서 조개 껍질의 화석을 발견한다면 나는 또 궁금해할 것이다. "왜 이 산속에 해양생물의 집인 조개 껍질이 있을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그런 질문을 제기하였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 조개 껍질들이 스페인의 성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순례자들이 기념품으로 가져오다가 돌 아오는 길에 잃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그와 달리 산에서 발견된 조개 껍질, 그것도 돌 속에 박혀 있는 이 조개껍질을 지표면이 극심하게 움직이는 것에 대 한 하나의 증거라고 생각했다. 원래는 바다의 밑바닥이었던 땅이 솟아올라 산이 되었을 거 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레오나르도의 설명이 옳았음을 안다. 사암이나 석회암같이 산악 에서 발견되는 많은 종류의 암석들은, 바다 밑바닥에서 퇴적되었다가 지구 내부의 힘으로 인해 높은 위치로 밀려 올라온 것이다. '왜'에 대한 질문과 그 답에 대한 예를 늘어놓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철학적 관심을 끄는 것은 '왜'에 대한 질문이 갖는 의미이다. 우리는 현상에 대한 해명을 찾 는다. 그리고 어떤 현상이 무엇으로 인해 그렇게 되었는다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현상 을 해명하였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현상의 원인을 찾는 것이다. '왜'라고 물을 때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사물에 대한 인과적 해명이다. 만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생각이 우리가 질문할 때 기본 전제가 된다. 우리는 특정한 현상들이 규칙적으로 반복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삼아 우리는 법칙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법칙은 우리가 세상을 배우고 방향을 정하며 살아가 는 것을 용이하게 해준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세계가 이루어지고 변화되는 법칙성에 대 해 가능한 한 많은 지식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낱말들은 어디에서 왔을까?"라는 질문을 제기했었다. 그 대답과 함께 오늘날 우 리가 갖고 있는 세계상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도 설명하였다. 우리 인간은 늘 세 계상을 만들고 있으며, 특히 근대가 시작된 후로는 엄밀하고도 비판적인 연구를 통해서 세 계에 대한 정확한 상을 얻기 위해 몰두하고 있다. '왜'를 묻는 두 종류의 질문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대답을 어떤 식으로 할 수 있을지 살펴보자. 산에서 발견된 조개 껍질 화석에 대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대답을 예로 들 수 있다. 해양생물의 잔해가 왜 산 에서 발견되는지를 알려면, 우리는 레오나르도처럼 그렇게 역사를 이야기해야 한다. 즉 과거 로 거슬러 올라가서 과거의 어떤 원인이 현재의 상태를 초래하였는지 규명해야 하는 것이 다. 이러한 해명을 우리는 인과적 해명이라고 한다. 원인은 그 작용보다 언제나 시간적으로 앞서 있다. 앞에서 우리는 이 세계의 시작을 찾을 때 이러한 인과법칙을 사용한 적이 있다. '왜'를 묻는 질문들은, 사물의 원인에 대해 물으면서 세계의 인과적 연관에 대한 해명을 얻고자 한다. 이 질문들은 현재의 것을 과거의 것에서 이끌어 내려 하기 때문에 과거로 되 돌아가서 묻는다. 하지만 '왜'를 묻는 질문들이 모두 이런 종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문득 나를 찾아온 친구에게 내가 "자네 어찌해서(왜) 왔나?"라고 물었을 때, 그 친구가 "그야 이 방문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이지"라고 대답했다면 어떨까? 나는 그 대답이 우습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어쩌면 약간 불쾌해져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나는 자네가 어떤 방법으로 여 기에 들어왔는지를 물은 게 아니고, 어떤 목적으로 여기에 왔는지를 물은 것일세. 내가 물 은 것은 바로 그런 뜻이었네." 나는 '왜'의 질문으로 친구의 의도를 알려고 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 친구가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무슨 할 말이 있다든지 아니면 그 친구가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무슨 할 말이 있다든지 아니면 무슨 부탁이 있어서 나를 찾아왔을 거라고 생 각했던 것이다. 물론 친구는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다. "특별한 뜻이 있어 온 건 아니네. 우 연히 자네 집 앞을 지나다가 그냥 한 번 들여다봐야겠구나 생각했지." 하지만 이것도 역시 더 넓은 뜻으로 보면 친구의 의도이자 기대하고 할 수 있다. 기대와 의도는 미래를 향한 것, 바로 목적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왜 이 일을 합니까?" 라고 물을 때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그가 하는 행위의 목적, 그가 속으로 생각하는 것, 그 의 목표이다. 그리스어에서는 '목표'를 'telos'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행위나 현상 들의 목표를 지향하는 모든 관찰방식을 목표내지 목적과 관련된다는 의미에서 '목적 론적(teleologisch)'이라고 부른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인과 작용의 관계를 연 구하면서, 작용 원인과 대립되는 것으로 목적 원인이라는 개념을 말하였다. 우리는 작용 원 인이 무엇인지는 이미 알고 있다. 세계의 인과적 연관을 해명하려고 노력하는 자연과학은 곧 작용 원인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목적 원인을 해명하는 것은 누구의 몫일까? 이 질문과 함께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철학적 질문의 장으로 들어서게 된다. 우리는 이제 우리 인간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질문, 세 계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제기할 것이다. 7. 의미에 대한 질문 우리 인간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자! 인간은 '내일'이 아직 멀기만 한 어린아이들처럼 아무 의미 없이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아주 이른 나이에 벌써 인생 계획들 속에 얽매여 버린다. 그것은 늦어도 아이가 학교를 가게 될 때 시작된다. 이른 바 '고된 삶'의 시작이다. 이는 마냥 즐겁기만 한 삶이 끝났음을 뜻한다. 이제는 일이, 무엇보다도 배우는 일이 시작되 는 것이다. 배움의 과정에는 평가도 있다. 그 전에는 칭찬만 받았던 아이가 이제는 갑자기 꾸지람도 듣게 된다. 자기 아이가 가장 예쁘고 영리하고 우수한 줄로만 알았던 많은 부모 들(거의 모든 부모들이 그렇겠지만)은 이제 자기 아이가 기껏해야 평균 정도이고, 심지어 다른 아이들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게 된다. 그것은 부모에겐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자기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머리가 나쁘면, 나중에 커서 다른 아이들만큼 인생 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돈도 많이 벌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많 은 부모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부모들은 아이들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지고 있어서 아직 아 무것도 예상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의 미래 경력을 벌써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미래를 대비할 수 있도록' 갖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좀더 자라면 아이들은 자기가 커서 무엇이 될 것인지 혼자 생각하게 된다.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사내아이들은 더 이상 대통령이나 우주인이 되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여자아이 들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없는 한 공주나 요술소녀가 되고 싶다는 꿈을 버리게 된다. 그들 대부분은 벌써 인생이 뭔가를 어느 정도 깨달았고, 저마다의 특별한 관심들을 갖게 된 것이 다. 그리고 나중에 커서 자신들의 관심에 맞는 직업에 종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 아이 들은 자기들도 머지않은 미래에 어른이 된다는 것을 안다. 또 돈을 벌기 위해서 직업을 가 져야 한다는 사실도 안다. 아이들은 직업활동이 끝난 다음의 단계인 퇴직 후의 삶에 대해서 도 알게 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아직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넌 이 다음에 커서 뭐가 될 거니?"라는 물음에, '퇴직자'라고 대답했다는 어떤 소년처럼 모든 아이들이 미래를 그렇게 환히 예측하는 것은 아니다. 또 젊은 사람을 사람이 늙으면 결국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여기 짤막하게 요약한 것처럼 반드시 그렇게 진 행되고 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 어느 날엔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또 우리의 삶이 단순하게 그럭저럭 살아지는 것이 아니며, 생계를 걱정하면서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일찌감치 알게 된다. 우리의 삶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근심 은 평생 우리를 쫓아다닌다. 우리는 미래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지 정확히 알지 못한 다. 아주 옛날에 인간은 완전히 자연에 내맡겨져 있었다. 자연은 엄청난 위력을 가진 무서운 존재로 여겨졌고, 인간의 삶은 고되었으며, 두려운 자연 재앙으로 인해 계속해서 위협받았 다. 어쨌든 오래 전에 인간들은 삶을 그렇게 느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삶이 왜 그래야만 하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들은 분명히 더 아름답고 더 편안한 삶을 상상할 수 있었 다. 고통도 없고 불행도 없고 두려움도 궁핍도 노동도 없는 삶, 늙고 병들어 죽지 않는 그런 삶을 생각할 수 있었다. <구약성서>를 보면, 맨 처음에 세계의 창조를 설명하고 나서 곧이 어 인간의 삶이 왜 소망하는 바와 같이 편안하지 못한가를 설명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신과 인가 그것은 인간의 원죄와 낙원 추방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낙원의 삶 을 누렸었는데, 인간 자신의 경솔한 죄로 인해 행복한 삶을 영원히 잃고 말았다고 한다. 이 신화에서 최초의 두 인간, 아담과 이브는 신의 계율을 어기고 선악에 대한 인식의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다. 그 벌로 그들은 낙원에서 쫓겨나 죽을 운명이 되었으며, 그때부터 인간의 삶은 고난과 근심을 짊어지게 되었다. 이 신화를 생각해 낸 것은 옛날 히브리인들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처지에 대해 다르게 설명하였다. 그들은 인간이 신들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프로메테우스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올림포스 신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올림포스의 신들이 무찔러 쫓아 버린 티탄족의 후손이다. 그는 올림포스 신들에 대한 도전으로 인간을 만들어 냈다. 게다가 그는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 인 간들에게 선사하였다. 신들은 프로메테우스를 벌하였고, 인간들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 그렇 기 때문에 인간들은 늘 신들의 미움과 사랑을 계산해야만 했다. 물론 그들은 제물을 바침으 로써 신들을 즐겁게 할 수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섬기는 신의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자 신들이 모든 신들을 알고 있는지 확실할 수 없었다. 제사를 올릴 때 혹시 실수로 어떤 신 을 빠뜨려 그를 노하게 할까봐, 아테네 사람들은 '모르는 신을 위하여'라는 비문을 새긴 제 단까지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신들을 빠짐없이 만족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리스인들은 신들의 호의를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리스인들의 격언 가운데 하나는, "죽은 이가 아니면 그 누구라도 행복하다. 찬양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사람 의 삶이 어떠하였는가는 죽은 뒤에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히브리인과 그리스인의 신화에서 철학적으로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첫 번째는 삶에서 겪는 위험들에 대한 현실적인 판단이다. 두 번째는 삶의 현상태의 원인을 설명하려 고 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신 내지 신들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신에 대해 말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신은 과연 누구인가? 우리는 신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먼저 신학자들 쪽에서(자신들은 신에 대해 말하기를 직업으로 하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당신이 신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고? 그 건 불가능한 일이다! 신은 인간의 사고를 능가하는 존재다. 인간의 사고는 유한하고 불완 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존재를 파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오성이 신에 대해 생각해 낸 것은 모두 근거 없는 것이다! 그렇게 강력한 반론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간단히 이렇게 답해 보자. 신학자 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신학자들이 가장 먼저 입을 다물고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한다! 하지 만 우리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에 대해 말 할 수 있는 다른 논거를 생각해 내야 한다. 우리의 철학을 시작했던 때로 되돌아가 생각해 보자! 낱말들은 어디서 왔는가? 언어는 우 리 인간이 만든 것이다! 그러면 개념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개념을 만든 것도 역시 우리들 이다! '신'이란 낱말도 역시 우리 인간이 만들었다. 그러면 이 낱말은 무엇을 지시하는가? 먼저 주변을 둘러보자. 그리고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 종교에서 사람들이 '신' 혹은 '신들' 이라는 말로 누구를 혹은 무엇을 뜻하였는지 살펴보자. 신은 언제나 인간보다 우월한 능력을 지닌 존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항 상 인격적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신들 중에는 몇몇 이집트 신들이나 코끼리 신 가네샤, 원숭 이 신 하누만과 같이 동물의 형상을 한 것도 있고, 그리스 신들처럼 인간의 형상들도 있으 며, 또 그리스도교 신도 있는데, 이 모든 신들은 사람처럼 행동하고 태도를 취한다. 즉 인간 은 신을 기쁘게 할-이것이 모든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데-수도 있고, 노하게 할 수도 있으며, 또한 진정시킬 수도 있다. 이것이 신과 인간이 원칙적으로 닮은 점이다. <구약성서 >에서는 신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했다고 말한다. 이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 말은 인간으로 하여금 거꾸로 신이 인간을 닮았다고 주장하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19세 기 독일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구약성서>의 문장을 뒤집어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인간은 자신의 형상에 따라 신을 창조하였다. 누가 누구를 창조했는가 하는 문제는 잠깐 미뤄 놓고 이미 주장했던 바, 신과 인간의 동 일성에 대한 문제에 머물도록 하자. 이것은 앞으로 전개될 모든 사고의 내용을 위한 열쇠이 다. 왜냐하면 신과 인간의 유사성이야말로 인간이 신에 대해 말하고, 신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막 신에 대한 개념을 취하고, '신'이라는 낱말로 무엇을 표기하려 하는지 확 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신은 우리와 비슷하다고 말하면, 그것은 신이 동물도 아니고 전기와 같은 동력도 아니며 우리와 같은 인격체로서 우리처럼 행동하고 의지를 갖고 있음을 뜻한 다. 하지만 이때 신이 우리와 구분되는 점은 우리보다 훨씬 강하고 더 현명하다는 것, 우리 인간이 힘들여 지식을 얻어야 하는데 반하여 신은 모든 것을 이미 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가능성으로만 인정하는 능력들을 신은 지고의 완성으로 지니고 있다. 이 존 재를 우리는 세계의 창조자라고 설명한다. 세계의 3대 종교인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 교에서 똑같이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세 종교는 완전히 독자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 기원에 있어서 서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에서 분리된 종교이고, 이슬 람교는 두 종교에서 자양을 얻었다. 각각 하나의 창조신을 인정하는 이 종교들을 우리는 일 신교(monotheistisch/monos: 하나의, theos : 신)라 부르고, 고대 그리스인들의 다신교 (polytheistisch/polys : 많은)와 구분한다. 우리는 먼저 일신교에 대해 생각하기로 하자. 일 신교는 몇몇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서도 주장된 적이 있었다. 일신교에서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세계와 인간을 지혜로운 창조주의 작품으로 파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경험과학들은 이런 것을 문제삼지 않는다. 경험과학은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가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 에 대하여 경험과학은 답할 수 없다. 실제로 경험과학들은 그들의 지식으로부터 서로 모순되는 철학적 결론들을 끄집어 내었 다. 근대 초기에 자연에 내재한 법칙들에 대해 최초의 지식들을 얻었을 때, 연구자들은 흥분 하여 이로써 무한히 지혜로운 창조주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발견했다고 믿었다. 그들은 신 이 정확하게 돌아가는 시계처럼 이 세계를 완벽한 기계로 창조하였으며, 이제는 이 시계가 얼마나 훌륭하게 돌아가고 있는지 관찰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이신론'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편입되었다. 훗날 과학자들이 물질 속으로 더 깊이 연구해 들어갔을 때, 그 들은 무엇보다도 이 현실이 창조된 것이 아니고 창조 이후 그대로 지속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대신 항성계를 비롯하여 삶의 형식들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형식들이 나름대로 발전해 간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자, 과학자들은 창조주의 존재를 불필요한 것으 로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 더하여 다윈의 진화론은 모든 것이 우연과 법칙의 맞물림으로 인 해 생성됨을 보여 주었다. 만일 시계가 자기 증식에 의해 생길 수 있다면, 시계공의 존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계 제조공(창조자)의 존재에 대한 가설과 추측 자체가 불필요한 것이 된다. 중세 철학자 윌리엄 오브 오컴(라틴어로는 Occam)은,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된 원칙 하나를 제기하였다. 이 원칙에 따르면, 불필요 한 주장이나 추측, 가설 등은 모두 과감하게 삭제되어야 한다. 이것은 일종의 경제원리이며 절약의 원칙이다. 그래서 자연과학자들 가운데 유물론자들은 '오컴의 면도날' 원칙의 입장을 따라서 신은 불필요한 가설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철학자들은 물론 이 문제를 그렇게 간단히 처리할 수는 없다. 어쩌면 자연과학자들이 발 견한 원리들조차도 실제로는 이 세계가 그 원리에 따라 발전하게 하기 위해 창조주가 제공 한 것일 수도 있다. 자연 속에 법칙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창조주의 존재에 대한 증거도, 그 부재에 대한 증 거도 될 수 없다. 법칙이 없는 혼돈의 세계가 신에 의해 창조될 수도 있고, 마찬가지로 혼돈 이 아닌 합법칙성의 세계가 창조주 없이도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자에게 결정적인 문제는 이런 것이다. 이 세계가 어떤 의미를 가졌다면, 다시 말해서 인간이 수긍할 수 있는 어떤 목표를 가졌다면 지혜로운 창조주의 작용이 인식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모든 것은 우주가 폭발과 함몰을 영원히 반복하듯이 그저 맹목적으 로 이루어지는 것이 된다. 이 문제를 다시 인간에서 시작하기로 하자. 모든 철학은 인간으로부터 출발해야 하기 때 문이다. 인간의 시각에서 본 의미 있는 이 세계의 목표는 과연 무엇일까? 신과 세계질서의 문제 우리는 낙원 추방의 신화를 앞에서 이미 말했다. 히브리인들은 원죄와 죄의 결과들로 삶 의 괴로움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들은 삶을 적대적인 환경과 끊임없는 투쟁으로 보았는데, 사막이나 다름없는 황량한 땅에서 일생으로 보내야 하는 민족에게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 었다. 힘겨운 삶의 반대상으로서 그들은 잃어버린 낙원, 에덴 동산의 표상를 가졌던 것이다. 무엇이 낙원과 우리 현실을 구분하는가? 낙원에는 근심이라든가 병, 죽음, 악 들 우리가 부정적으로 여기는 것 모두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에 잡아먹는 일도 잡아먹히는 일도 없 다. 영국의 유명한 자연과학자이자 진화론의 창시자인 다윈이 표현한 대로 '생존을 위한 투쟁'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정반대 삶의 양식을 상징하는 사자와 양 이 함께 평화로이 어울릴 수 있다. 틀림없이 낙원의 인간과 동물들은 채식으로 살아갈 것이 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채식주의로 살아가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자기의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다른 생명체들을 죽여야 하는, 짐승과 다름없는 삶을 혐오한다. 옛날 히브리인들은 원죄를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 사건으로 해석하였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낙원과 영원한 삶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고되 어졌고, 인간은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일해야 하며 결국에는 죽어야 한다. 죽음은 절대적인 종말이다. 육체의 죽음 이후 영혼이 계속해서는 사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히브리인들은 페르시아 종교의 영향을 받은 후 비로소 자신들의 종교적 표상을 확대하였다. 페르시아 종교에서 세계의 진행은 두 개의 대립되는 원리들간의 싸움으로 해석된다. 선한 빛의 신과 악한 어둠의 악마가 서로 싸우고 있는데, 그 중간에 있는 인간은 선한 원리의 편 을 들어 선이 승리하는 것을 돕도록 부름받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사상이 히브리인 들의 종교속으로 침투하였다. 원래 히브리인들의 신화는 인간의 삶이 고될 수밖에 없는 이 유만을 설명하였다. 현재의 세계는 변하지 않고 항상 그 상태로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페르 시아 종교로부터 자극을 받아서 이러한 세계의 진행에 변화가 일어났다. 삶의 부정적인 상 태가 이제는 악한 세력이 작용한 결과로 간주되었고, 이 악한 세력도 극복될 수 있는 것으 로 생각되었다. 이로써 원죄의 표상과 함께 미래에 가능한 구원의 이념이 나란히 제기된 것 이다. 원래 유대교의 분파에서 발생한 그리스도교는 다양한 종파들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세계 종교로 발전하였는데, 여기서는 이러한 구원 이념이 중심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교도들의 가 르침에 따르면, 신-물론 <구약성서>에서 이야기되는 옛 히브리인들의 신이다-은 인간을 구 원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낸다. 신의 아들은 인간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나고, 일 단은 사람들 사이에서 알려지지 않은 채 나자렛이라 하는 보잘것없는 장소에서 살다가 어느 시기에 대중 앞에 나타난다. 그는 '신의 말씀'을 설파하면서 주위에 많은 추종자들을 모으 고, 마침내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신을 모독한 자로 배척당하는데, 이 점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유대인들의 경전에는 신의 아들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 급이 없고, 정치적 구원자인 '메시아'가 예고되었기 때문이다. 또 로마인들은 로마인들대 로 그를 메시아로, 정치선동가로 간주하여 기존의 방식대로 그를 처형한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형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에 따르면, 신의 아들이 당하는 고난은 인간은 구원하 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신이 인간이 되어 인간과 똑같이 인간들과 함께 살면서 밀접한 결속을 맺고, 인간들에게 다가올 낙원을 선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낙원을 위하여 인간도 역시 무언가를 해야 한다. 올바르게 살아야 하고, 신에게 믿음을 고백해야 한다. 최후의 심판 때 신은 다시 돌아와서 선과 악을 심판할 것이다. 그때 악한 자들은 최종 적으로 벌을 받고, 선한 자들은 상을 받게 된다. 선한 이들은 인간의 세계 역사가 시작될 때 잃어버렸던 낙원을 다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현세에서 개별 인간들의 삶은 뜻도 없 이 그럭저럭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현세의 삶은 본래의 삶을 위한 준비이자 개개인이 이 영원한 낙원에 들어간 자격이 있는가를 알아보는 시험과정이다. 위에 언급한 대로 선한 신 이 존재한다는 주장-우리는 그 반대 입자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은, 동시에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도덕적 세계질서의 존재를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덕적 세계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이 반드시 순종해야만 하는 계율이 있음을 뜻한 다. 그리스도교는 개인들에게 매우 분명하게 행동지침들을 제공한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리스도교는 더욱 강한 의미로, 너희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이를 대할 때 너 의 신을 대하듯 공손하게 하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교가 인간에게 전하는 유일한 복음이었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리스도교야 말로 결정적으로 의미 있는 종교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이웃 사랑의 계율을 이보다 더 강도 높게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그리스도교가 불교와 대등한 것으로 입증될 수 있다. 기존 종교들의 결함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원리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각 종파들의 설명에 따르면, 그리스도교도가 된다는 것은 신과 아들, 신의 어머니, 악마 등에 관한 설화들을 모두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도들이 이야기하는 거룩한 설화들은 특별한 설득력이 없으며, 그리스도교도 외에는 아무도 그 이야기들을 믿지 않는다. 더 나쁜 것은 그리스도교도 자신들도 결정적인 하나의 교리에 대해 합의를 보지 못 한 것이다. 거의 2천 년 세월 동안 그래 왔다. 그리스도교 교리의 측면에서 보면, 그리스도 교 역사는 열광적 독단론자들간의 '피를 부르는' 끝없는 싸움이었다. 정치적으로 제도화 된, 이른바 교회는 심혈을 다하여 이교도와 이단자들을 추적하고 종교재판소로 끌고 가 살 육하였다. 외부에서 그리스도교를 관찰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광적이고 무자비한 종교는 결코 신의 작품일 수 없고, 틀림없이 악마의 작품이라고 결론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떻게 반박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너무 심한 말로 들릴 것이다. 그런데 17,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철학자들에 의해 행해진 그리스도교 비판은 바로 이런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독일 작가 고트호트 에프라인 레싱은 <현자 나탄>이라는 연극에서, 극의 주인공이 유대인 나탄으로 하여금 이른바 '반 지의 우화'를 이야기하게 했다. 그것은 어떤 가문에서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대대로 상속 되는 반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반지에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데,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대에 이르러 세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세 아들 가운데 누구에게 반지를 물 려 주어야 할지 결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몰래 반지를 두 개 더 복제하여 아들 들에게 하나씩 주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아들들은 저마다 자기가 선택된 사람이라고 생각 했다. 마침내 그들 사이에서 누가 진짜 반지를 가졌는지를 따지는 추잡한 싸움이 불붙게 된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들이 불러운 판사는 형제들에게 반지에 들어 있는 능력을 상기 시킴으로써 지혜롭게 이 사건을 해결해 주었다. 그리고 이제 형제들은 자신들이 가진 반지 들 중 그 어느것에도 그런 능력이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반지들의 역할은 그것의 소 유자가 스스로를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여기게 한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세 개의 반지 모 두가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반지들은 틀림없이 모두 가짜였고, 진짜 반지는 언젠 가 이미 잃어버린 것이 분명하였다. 마지막으로 판사는 형제들에게 반지의 힘을 믿지 말고, 오로지 자신의 선한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의 존경과 칭찬과 사랑을 얻도록 힘쓰라고 충 고한다. 만일 그렇게 되면 상황은 새롭게 논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간단한 이야기 속에는 철학과 도덕의 기본적인 인식이 들어 있다. 인간을 결정하는 것 은 신과 악마에 관한 교리들을 진실로 믿느냐 안 믿느냐가 아니라, 오로지 인간 자신의 행 위일 뿐이라는 인식이다. 나자렛의 예수가 "사람의 행위를 보아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라고 말한 것도 같은 의미였다. 세 개의 반지들은 앞서 말했던, 서로 인척관계에 있으나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세 종교들 을 의미한다. 이 세 종교들을 왜곡시킨 '원죄'는 제일 먼저 유대교에서 등장했다. 유대인들 은 열성적으로, 창조주가 모든 인간을 창조하긴 했어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하고만 특별한 결속을 맺었으며, 그밖의 다른 사람들은 거기서 배제되었다고 믿었다. 이러한 '선택받은 민 족'의 의식이 이후 세계 역사 속에서 유대 민족이 겪어야 했던 고통스런 운명의 초석을 놓 은 것이었다. 그리스도교도들은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유대인들에게는 낯선 사상을 통해 기존의 체계를 바꾸었다. 다시 말해서 선택받은 자들이 외부에 대해 차단막을 치고 자 기들끼리만 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 주자는 것이다. 그러 나 유대인들에게는 복음이 전해질 수 없다고 함으로써 그리스도교들은 특별히 유대인들의 미움을 샀다. 그 결과 그리스도교가 유럽에서 정치, 사회적으로(종교적으로가 아니라) 승리 한 이후 유대인들은 사회에서 배척되었으며,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지속적으로 방해받았고 박해를 당했다. 이 박해는 종교적 의미에서 아니라 '인종 차별적' 토대에서 조직화되어, 20세기 초반에 독일의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자행했던 인종 말살에까지 이르렀다. 그리스도교가 '이교도'와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우월감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 기 위해 줄곧 저질러 온 죄를 이슬람교도 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슬람교는 자신의 원 류인 두 종교,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를 이슬람교와 동등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지만 인척 종 교로는 인정하고 있다. 종교들의 자만에 대한 이러한 비판이 종교에 대한 결정적인 반론이 될 수는 없다. 종교를 옹호하는 이는 곧바로 문제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잘못 해석하고 잘못 계승한 것이며, 모 든 것이 인간의 잘못이지 종교의 교리 자체는 반박될 수 없다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사람들이 잘못 실천하는 것은 결함과 잘못의 요소가 이미 교리 자체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 아니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세 종교들의 결함은 과연 무엇일까? 여성 해방의 시대인 우리 시대에 와서, 우리는 이들 종교에 남성적인 요소가 지배적이라 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창조주는 두말 할 나위 없이 남자다. <구약성서>의 기록을 보면 신은 먼저 한 인간, 즉 아담을 창조하고 나서, 그가 혼자서는 아무 것도 시작할 줄 모르자 그때서야 비로소 '제2의 성인' 이브를 아담의 갈비뼈에서 만들어 낸다. 그리고 아담보다 분 명히 더 영리한 이브가 무언가를 탐색함으로써 인간의 탐구욕과, 우리의 과학문명에서 가장 뛰어난 미덕 가운데 하나인 과학적 호기심도 깨어나게 된다. 르네상스 철학자 아그리파 폰 네테스하임은 이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철학적 논증의 실마 리로 삼았다.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은 처음부터 작품이 어떻게 완성될 것인가를 예상한다. 이것이 바로 목적론적 사고이다. 그러므로 신은 창조를 시작할 때 벌써 이브를 염두에 두었 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브를 만듦으로써 세계의 창조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여성에 대한 참으로 아름다운 칭송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생각이 종교에서는 관철 되지 않았다. <구약성서>에서 여성은 근본적인 죄인으로서-선악과 딴 이가 이브이다-특히 혹독한 처벌을 받는다. 그 이후로는 남자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운명이 된 것이다. 여성 해방의 시대에 와서 유대인의 신은 여러 모로 가학성이었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 스도교에서도 여성의 처지는 더 나을 것이 없다.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려 할 때, 신은 어 머니가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도 못하고 있던 젊은 처녀를 고른다. 이 처녀에게 자신의 의지 란 없다. 그녀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순응하면서 고난을 견딘다. 그래서 결국 천국 에 성모의 자리를 얻기는 하지만, '아버지'의 옆자리에 앉지는 못한다. 여신이 될 수는 없 는 것이다. 종족과 성의 차이를 떠나서, 모든 인간을 위한 동등한 권리의 실현을 추구하고 있는 현시 대에 와서 가부장적인 종교는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이 종교들의 옹호자는, 어쩌면 가부장적 속성은 이 종교들의 발단이 된 고대 그리스가 그 원인이라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그런 이에게는 또 이렇게 응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의 종교는 수많은 여성 신 들을 알고 있었으며, 이 점에서 그리스도교보다 진보적이었다고.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는 절대 권한을 거머쥔 지배자가 아니었다. 특히 그는 아내 헤라에 대해 늘 찔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남몰래 예쁜 처녀들을 유혹했기 때문 이다. 철학에 의한 종교비판 그리스의 신들은 대단히 인간적이었으며, 우리가 즐겨 하는 표현대로 너무도 인간적이었 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이러한 신들의 모습에 등을 돌렸다. 한 집안이나 마찬가지인 데도 자기들끼리 다투면서 질투하고 복수하고 증오하고, 게다가 불의를 자행하기도 하는 신 들은 존경받을 자격이 없었다. 철학자 크세노파네스는 전설에 등장하는 신들의 모습을 거부 하였다. 그들에게는 신적인 요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 철학에는, 그리스 민족의 종교에서 계속 공경받았던 수많은 신들 대신에 유일신이 자리를 잡았다. 예컨대 소 크라테스가 가르친 신도 유일신이었다. 이 유일한 신에 대해서는 그에 얽힌 설화를 이야기 할 수 없었고, 다만 이 세계가 그의 작품이라는 것만 말할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러한 세계의 창조주를 '데미우르고스'라고 불렀는데, 이 이름은 '장인, 창조자, 예술가, 조 물주'를 뜻한다. 데미우르고스는 정신이고 또 인격이지만, 우리 인간들이 가진 특성들, 이 를테면 분노라든가 격분, 시기, 복수심, 조급함 등 인간의 불완전함을 나타내는 모든 속성 들은 이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우리가 사는 현세의 낮은 곳에 머물지 않는다. 또 그는 완전하기 때문에 인간 존재의 곤경과 근심 따위도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무엇 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부족한 것 없이 모든 사물들을 관장할 수 있다. 이것은 놀라운 일 이 아니다. 그는 모든 사물, 즉 이 세계의 창조주이기 때문이다. 무한과 태초 그리스 철학자들은 어떻게 해서 이러한 유일 창조신의 표상을 발전시켰던 것일까?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앞에서 우리가 그리스인들의 태초에 관한 질문에 대해 말했던 것을 상기해 보자. 거기서 나타났던 문제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따져도 이 세계에서는 결코 하 나의 절대적 시초에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 전엔 무엇이 있었 지?" 라고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최초의 것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왜, 도대체 왜 그때 생겨났을까? 이는 오늘날 우리의 우주학자들이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들이다. 만일 우리가 유일한 창조신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우리는 최초의 원인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 최초 원인은 그것이 선행하는 원인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 세계의 다른 원인들과 구 별된다. 그것은 마땅히 이것 원인을 갖지 않는 최초의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의 모든 존재들은 무언가 다른 것, 자기보다 선행하는 것을 원인으로 가진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 은 이미 조건이 부여된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원인이 앞에 원인이 갖지 않고 자기 자신의 원인일 때, 그것을 모든 것의 시작이 되는 최초의 원인으로 생각할 수 있다. 최초의 원인은 다른 것에 의해 조건이 정해진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조건저거이어야 한다. 또 우리 는 창조주는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창조주는 피조물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자기가 자 기의 원인은 존재는 시작을 갖지 않는다. 그가 존재할 가능성은 이미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원인으로서 이 최초의 존재자, 그것이 이 세계 전체의 원인이며 이 세계를 창 조한 데미우르고스일 수 있다. 창조는 만들어진 것으로서 시작을 갖지만, 창조의 원리는 영 원하다. 또 이 창조의 원리 내지 창조자가 이미 언제나 활동중이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가능 하다. 그러면 우리 세계의 시작은 끝없이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여하튼 이런 식의 사고로부터 다음의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우리 세기의 물리학자들 처럼 시작을 그렇게 소박하게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우주의 시간적 시작, 즉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시초는 세계에서 인과적으로 일어나는 현상들과 비교할 수 없는 매우 특수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제 중요한 일은 활동하는 인격인 데미우르고스의 표상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이다. 이 로써 데미우르고스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순수 사유를 통해 입증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 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숙고에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세계가 단순히 무에서 시작될 수는 없다는 인 식이다. 철학자들은 이러한 인식을 라틴어 문장으로 이렇게 표현하였다. "Ex nihilo nihil fit-무에서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 무에서 유로의 이행은, 이미 있는 어떤 것에서 다른 것으로의 이행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것이 자신의 원인일 때, 이 어떤 것이 무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절대적 시초는 아주 오래 전 일이고, 스스로를 창조하는 어떤 것의 구조로부터 나온 결 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어떤 것은 영원하다고 말할 수 있다. 영원히 존재하는 이 창조의 원리를 하나의 힘으로 본다면, 우리는 여기서 세계는 영원하 고 처음과 끝을 갖지 않는다는 결론을 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창조의 원리를 인격(창조신)으로 해석한다면, 우리의 세계는 처음은 물론 끝을 가질 수 있다. 왜일까? 신이 인격일 때 그에게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신은 세계를 창조할 수도 있고, 세계를 버릴 수도 있다. 우리가 신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달 라고 주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므로 세계에 대해 사고할 때 두 가지 가능성이 남게 된다. 첫째로, 세계는 변화의 원 리가 근본을 이루기 때문에 영원하다. 아니면 두 번째로, 세계는 처음과 끝을 가지며 영원하 지 않다. 그런데 두 번째 가능성은 우리가 세계를 수동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영원한 창조의 원리와 대립시킬 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두 번째 경우에서도 영원한 어 떤 것(신)의 존재는 필요하다. 그리스 철학자들 가운데 원자론자들은 첫 번째 가능성을 타진했다. 예컨대 엠페도클레스 는 세계의 영원성을 세계의 상태들이 영원히 변화하는 것으로 보았고, 이 변화는 대립하는 영원한 두 힘, '사랑'과 '미움'의 작용으로 일어난다고 했다. 우리는 이러한 세계 모델을 이 미 다룬 바 있다. 만일 이 영원한 힘들을 어떤 인격으로 설명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설정한 것처럼 영 원히 적대적으로 활동하는 두 신들을 갖게 된다. 그렇지 않고 단지 인격화한 하나의 힘으로 가정한다면, 그것은 철학에서 말하는 데미우르고스가 된다. 그리스도교들은 타락한 천사의 신화를 빌려서, 원래 유일하게 지배하는 신에게 적대자가 생긴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였다. 이 적대자는 '빛의 운반자'라는 뜻을 지닌 루시퍼라는 이름의 천사이다. 그는 타락하여 악과 어둠의 주인인 사탄이 되었다. 존재론과 형이상학 철학으로 되돌아가자. 이즈음에서 우리는 우리의 사고를 명명하는 데 중요한 두 개의 개 념을 도입해야 한다. 첫 번째는 '존재론'이라는 개념이다. 존재론이란 '존재하는 것에 대 한 학설'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세계', '우주', 또는 '코스모스'라고 부르는 존재자 전 체에 대해서 사고하였고, 존재자 전체는 시작을 가질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존재자는 생성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우리가 생성과 소멸로 경험하는 것은 존재자 전체 안에서 어떤 상태들이 생성하고 소멸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까지 존재론에 몰두한 것이었다. 존재론은 경험과학의 분과가 아니 라 논리학이나 수학과 같이 순순 이론적 분과이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방금 말했던 대로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생간을 <형이상학>이라는 제목의 저작에서 체계적 으로 논하였다. 원래 이 제목은 편찬 순서에 따라 '물리학 다음'에 오는 책이라는 뜻이었 다. 이 제목은 그저 아리스토켈레스 전집의 '2권'이라는 (혹은 3권이나 4권이라도 상관없다) 명칭이나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개념을 타당한 이유에서 달리 해석하였는데, 형이상학이 다루는 대상들은 물리학이 다루는 대상들과는 다른 종류이기 때문이다. 형이상 학은 물리학이 다루는 대상들을 다룬다. 즉 물리학은 세계의 개별 사물들을 연구하지만, 형 이상학이 연구하는 것은 모든 사물들 전체이다. 물리학은 개별 사물들의 원인을 묻고, 형이 상학은 존재자 전체의 근원을 묻는다. 그리스의 형이상학은 서양의 사유 전체와 그리스도교를 위해 매우 중요한 것이 되었다. 그리스도교에 형이상학이 중요했던 것은, 신에 대해 논할 때 형이상학의 도움으로 그 이론 적 근거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가 형이상학을 이용한 것은 그릇된 사용 이었다. 중세의 신학자들은 형이상학의 이론적 숙고를 이용하여 신을 증명하고자 했는데, 그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는 형이상학이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대답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즉 나는 세계를 그 자체로 움직이는 영원한 것으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세계를 자체 운동이 없는 제한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 나는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운동 을 설명하기 위하여 움직이지 않는 운동 주체를 필요로 하게 된다. 따라서 이 두 입장 사이 에서 반목이 일어난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 철학을 하녀처럼 데려다 사용하였다. 그리고 중세 철학자들의 표현 으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Philosophia ancilla theologiae-철학은 신학의 시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