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들려 주는 작은 철학 지은이: 롤란트 시몬 셰퍼 출판사: 동문선 봉사자: 최정미 어른들에게 드리는 서문 우리는 어린이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말한다. 이 말은 우리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어린이를 어린이로 존중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과거의 모든 시대는 어린이가 작은 어른이기를 부당하게 요구하였고, 어린이들은 작은 어른이 어린이 옷을 입은 것처럼 어른답 게 행동하여야 했다. 어린이가 어른처럼 다루어졌던 것이다. 괴테 시대의 작가 카를 필리프 모리츠가 쓴 자전적 소설 '안톤 라이저'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이러한 판단에 동 의할 것이다. 하지만 퀸틸리아누스의 글을 보면, 로마인들은 노예의 자식들이 유용한 능력을 되도록 빨리 갖기를 원하면서도 자기 자식들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오래도록 어린이답게 행동하는 것이 멋지다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또한 아이들의 놀이를 풍요롭게 묘사한 파테 르 브뢰헬의 그림을 본 사람이나, 필리프 아리에스의 '어린이의 역사'를 읽어본 사람에 게는 과거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 판단이 어느 정도는 상대화될 것이다. 그렇지만 20세기에 어린이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것을 살펴보면, 우리는 또한 여기서도 많은 것이 잘못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어린이는 어른에 대해 무방비 상태이다. 그러므로 어른들은 연약한 어린이들을 친절과 이 해심과 배려로써 대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20세기에 우리는 삶 의 친절한 측면만이 지배하고, 부정적인 요소는 최소화되거나 완전히 자취를 감춘 어린이 세계를 만들어 주었다. 이 조화로운 이상 세계에는 고통도 죽음도 악도 없다. 어린이 세계는 어른 세계의 스트레 스가 없는 낙원과 같은 세계요, 상상력과 창조력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언 젠가는 이 세계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어른들은 이 세계가 꾸며낸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어른들은 대부분 가망 없는 어른의 세계를 더 좋게 만들기를 포기하였기 때문에, 아이들에 게 현실의 모습을 가능한 한 오래도록 감추려고 한다. 현실은 아이들에게 위험하다. 이런 시 각에 민감해진 우리에게는 과거의 아이들을 위한 동화가 너무 잔인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또 손주들에게 작은 장난감 단두대를 선물했다는 괴테는 매우 비인간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그 훌륭한 괴테가!) 옛사람들의 극히 사소한 실수에 대해서도 우리가 이토록 예민하게 된 것은 아우슈비츠와 사라예보의 경악이 아직 극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성을 지키려는 우리들의 간절한 마음과 정치.경제적인 손익계산 사이의 모순을 해소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아마도 우리의 아이들이 직접 접해도 안심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듯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다. 바라건대 장차 더 현명한 어른이 될 우리 아 이들이 우리가 이 일을 하는 데 도와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이들에게 우리의 문제들을 일찍부터 설명해 주어야 한다. 철학은 그것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야이다. 그러므로 철학이 어린이들에게 더 이상 숨겨져 있어서 는 안된다. 이 책은 극히 개인적인 동기에서 씌어졌다. 나는 책을 구상할 당시 열두 살이었던 내 딸 베레니케에게 철학의 사명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고 싶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어린이용 철학이 아니라, 베레니케를 포함한 모든 아이들과 청소년들 이 철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른들은 여기서 제외되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어른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어린이들보다 앞서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 가운데 많은 것은 의견일 뿐이다. 오히려 어 린이들은 그렇게 많은 의견들을 주입받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열려 있으며, 자기들의 지식 이 적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솔직하게 물을 수 있다. 자신의 무지에 대한 인식,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어른들에게 가르치 기 어려웠던 바로 그 교훈이었다. 사랑하는 딸에게 아이들이 자랄 때는 아이들 특유의 성가신 질문, "왜 그럴까요?"라는 질문을 많이 하게 되는 나이가 있단다. "해는 왜 빛나나요?" "꽃은 왜 빨갛고, 풀은 왜 초록색이죠?" "책상을 왜 책상이라고 하는 걸까요?" "사람은 왜 죽어야 하죠?" 아이들은 이런 질문들을 해서 종종 부모를 곤혹스럽게 하는데, 그건 어른들이 대부분의 질문들에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지. 물 론 부모들은 세상에서 많은 일을 겪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아는 것은 아니란다. 하지만 모르는 것이 어른들에게 크게 지장을 주지도 않으며,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해도 살아가는 데는 그다지 불편함이 없단다. "어째서 풀은 초록색일까요?" 아이들의 이런 질문에 대해서, 부모들이 "그야 원래 초록색 이기 때문이야" 혹은 "하늘이 파랗기 때문이지"라고 대답한다면 어떨까? 그런 대답들은 '무엇 때문이다'로 끝나니까, 말의 모양만 보면 대답이라고도 할 수 있겠 지. 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뜻을 표현하고 있단다. "나 좀 가만 놔둬!" "모르겠는걸" 혹은 "세상 은 원래 그런 거지, 왜 그런지는 알 수 없는 거야"를 그런 식으로 둘러대는 것이란다. 물론 부모들 가운데는 진지하게 대답을 주려는 분들도 있단다. 어떤 부모들은 세 살짜리 아이에게 태양계나 가솔린 엔지 같은 것들에 대해서 설명을 시도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닐 거야. 아이들은 부모의 설명을 들으면서 미처 이해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또다시 많은 질문을 할 테니까. 아이들은 아직 어른들만큼 능숙하게 생각지 못 하거든. 그런데 지금, 네가 아주 어렸을 때는 나한데 어떤 질문들은 했나 돌이켜보니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르더구나. 너는 특이하게도 '왜?'라는 물음을 별로, 아니 거의 하지 않았어. 그보다는 낱말 하나하 나의 뜻을 묻는 걸 좋아했어. 한 번은 네가 '뷔르거슈타이크(Burgersteig, 인도)'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는데, 그때 나는 "그건 트로토아(Trottoir)라는 뜻이냐"라고 대답했지. 너는 내 대답을 듣고서 '뷔르거슈타이 크'가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무척 만족해했단다. 지금 너는 그 일을 특별하 게 여기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 작은 일화는 이제 우리의 철학 산책을 시작하면서, 내가 제일 먼저 제기하고 싶은 철학적 질문으로 들어가는 데 훌륭한 예가 되었단다. 1. 낱말은 어디서 왔을까? 앞의 예를 보면 독일어이긴 하지만 몰랐던 낱말 '뷔르거슈타이크(Burgersteig)'가 프랑스 어에서 온 낱말 '트로토아(trotoir)'로 설명이 되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 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독일인 부모의 아이는 거꾸로 물었을 것이다. 즉 아이는 '트로토아'의 뜻을 물었을 것이고, 그 부모는 "트로토아는 뷔르거슈타이크란 뜻이야" 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어쩌면 '뷔르거슈타이크' 대신에 그와 뜻이 같은 '게이베크 (Gehweg)'이라는 낱말을 알지 못해 설명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아마도 그 부모 는 외래어 사전을 들추어보았을 것이다. 외래어 사전에는 어떤 낱말들이 실려 있을까? 말뜻 그대로 모두 외국어에서 온 낱말들, 즉 원래는 우리말에 속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자주 사용하게 된 낱말들이 실 려있다. 낱말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우리의 첫 번째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외래어를 놓고 보면 우리는 벌써 하나의 답을 얻은 셈이다. 외래어 낱말들은 외국어에서 온다. 그렇다면 우 리말의 낱말들은 어디서 왔을까? 우리의 언어란 대체 무엇일까? 우리의 언어와 외국어 우리가 곧바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있다. 우리는 이 언어를 가지고 외국어 낱말들이나 외래어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언어를 모국어라 일컫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 사회에서는 통상적으로 아버지가 집 밖에 나가 돈을 벌어오는 반면, 어머니는 집에서 자녀를 돌보고 살림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인 모국어 낱말들을 아이였을 때 부모로부터 배운다. 부모는 이 말을 또 그들의 부모로부터 배웠고, 그들은 또 그 부모로부터 배웠고, 이런 식으로 계속하여 최초 의 인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렇다면 최초의 인간들은, 혹은 최초에 오직 한 사람만 있었다면 그 한 사람은 누구한테 말을 배웠을까? 최초의 인간에게 말을 가르쳐 줄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까 인간이 언어를 발명했거나, 아 니면 세계의 모든 사물이 이미 제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이 그것을 읽어내야 했다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만일 사물 속에 내재해 있어 우리 인간이 읽어내고 이해하 는 법을 배우기만 하면 되는 유일한 언어가 있다면, 틀림없이 우리는 지금 모든 사람이 이 해할 수 있는 일반적인 하나의 언어만을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가능한가 생각해 보자. 먼저 우리는 이 세상에 하나의 모국어가 아니 라 많은 모국어들이 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독일어를 모국어로 가진 사람에게 영어와 프랑스어는 외국어이고, 프랑스어가 모국어인 사람에게는 독일어가 외국어이다. 그것도 매우 복잡한 외국어이다. 그러므로 아이가 어떤 모국어를 배우는가 하는 것은 완전히 우연에 의한다. 만일 독일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낳자 마자 곧 일본인 가정에 입양된다면, 그 아이는 일본어를 모 국어로 습득하게 될 것이다. 한 모국어 안에서도 많은 차이가 나타난다. 앞의 예를 생각 해 보자. 베레니케에게는 외래 어인 '트로토아'가 아는 낱말이었고, 정작 모국어인 '뷔르거슈타이크'는 낯선 낱말이었다. 틀림없이 베레니케의 부모는 대화 중에 별생각 없이 프랑스어에서 온 낱말을 자주 사용했 을 것이고, 그 결과 아이는 그 말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베레니케는 ' 트로토아'가 무슨 의미인지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베레니케는 어떻게 '트로토아'라는 낱말의 의미를 배웠을까? 아이들은 어떻게 언 어를 배울까? 언어와 말하기 이 물음에 대답한다면 우리는 이와 나란히 연결되는 질문, 즉 인류 전체가 어떻게 언어를 갖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는 어떻게 언어를 배울까? 아이는 우선 부모가 말하는 것을 듣고, 도한 부모들이 말 을 하면서 어떤 행동을 하는지도 경험한다. 부모도 아이가 아직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고 있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에게 언어를, 더 정확하게는 말하기를 가르치려고 노력한다. 나는 방금 '언어'를 '말하기'로 바꾸었는데, 여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언어라고 하 는 것은 이른바 하나의 대상으로서, 한 언어의 모든 낱말들이 알파벳(혹은 가나다)순으로 정 리되어 있는 사전과 같은 것이다. 그에 반해서 말하기는 활동이다. 부모는 아이에게 사전을 건네주면서 '언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간단한 언 어 상황들을 제시하면서 '말하기'를 가르친다. 이때 부모는 종종 그들 자신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 낱말들을 가져다 쓰기도 한다. '개'를 '멍멍'이라 하고, '자동차'를 '빵빵'이라 하며, '식사'를 '맘마'라고 하는 것이다. 부모는 이렇게 특별한 목적으로 생겨난 유아 언어를 아이와 함께 말한다. 이 언어는 어른 의 언어와 비교하면 매우 단순하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아기가 '자동차'라는 낱말을 바로 따라서 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빵빵'은 발음하기가 휠씬 재미있고 쉽다. 또한 '빵빵'이 라는 낱말을 자동차가 달릴 때 나는 소리를 의성어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자동차 가 경적을 울리는 소리를 나타낸다. '멍멍'도 마찬가지이다. 어린아이에게는 항상 짖으며 '멍멍' 소리를 내는 것이 개의 특징 인 것이다. '멍멍'은 개의 특성들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지는 '짖음'을 의성어로 묘사한 것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보자면 '멍멍'이 '개'를 더 정확하게 지칭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이 '멍멍'이라는 낱말을 쓰는 것은 납득할 만하다. 하지만 만 일 어른이 개의 짖는 특성을 지칭의 척도로 삼으려 한다면, 그는 어린아이들이나 쓰는 낱 말을 사용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유아 언어와 성인 언어 어른들은 아이들과 교류하기 위해 성인의 언어보다 근본적으로 더 쉬운 언어를 생각해 낸 다. 예를 들어서 유아 언어에서는 '나'. '너'. '그'와 같은 대명사를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다. 만일 아버지와 어머니가 스스로를 매번 '나'라 하고 상대방을 '너'로 부르는 것을 알 면, 말을 배우는 아이는 혼동하게 된다. 두 사람 중 누가 '나'이고 누가 '너'인지 분간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부모가 아이를 향해 '너'라 부르고 그에 대해서 아이가 '나'로 대답해야 한다면, 이 아이는 완전히 헛갈리게 될 것이다. 이런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부모는 서로를 지칭할 때나 아이와 이야기할 때는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놓고 말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아빠는 영미 가 제일 좋아요"라거나, "영미는 이제 자야지"와 같은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런 유아 언어는 어법상 옳은 것일까, 그른 것일까? 여기서는 옳고 그름의 문제를 전혀 제기할 수 없다. 유아 언어는 아무런 의심 없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아이와 부모는 서로 대 화 할 수 있다. 아이는 이 단순한 언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소원을 표현하고 부모에게 알릴 수 있다. 더 나아가서 부모는 자기 아이와 일종의 '개인 언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것 은 두 보모와 아이만 알 수 있고 외부인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이다. 무엇보다도 부모는 자기 아이와 혼동하거나 완전하기 못하게 말해도 알아듣는다. 이를테면 '두부'를 '부두', ' 고모'를 '모고'라 하고, '아주머니'를 '암찌', '할머니'를 '하미'라고 부르는 것이다. 언어 를 막 배우는 나이에 모든 아이들을 이렇게 어른 언어의 낱말들을 곧잘 혼동하는데, 그것 이 우스워서 부모들은 아이가 크면 그 얘기를 아이에게 다시 들려주곤 한다. 이제 어린아이는 처음 사용한 유아 언어에 머무르지 않으며, 계속해서 새로운 낱말들을 익히게 된다. 이는 아이의 사용 낱말수가 점점 많아짐을 더 능숙하고 정확하게 발음하는 법 도 배우고, 마침내 유아 언어를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어른들이-물론 좋은 뜻에서-계속 유 아 언어로 말을 하면 화를 내기도 한다. 내가 어렸을 적에 한 번은 친척 아주머니가 나에게 "저걸 좀 봐, 빵빵 가네"라고 하니까, 그때 내가 화를 내면서 "저건 자동차야!"라고 고쳐 말했다고 한다. 서너 살쯤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아이들은 말하기를 어떻게 배울까? 갓난아이는 대부분 최초의 낱말, 예를 들어 '아빠' 나 '엄마'와 같은 낱말들에서부터 시작한다. 어째서 이 말들일까? 왜냐하면 부모가 지속 적으로 곁에서 아이를 돌보아 주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모든 부모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 만!) 따라서 갓난아이의 세계를 이루는 것은 엄마와 아빠, 우유병, 고무 젖꼭지, 그리고 불 편하게 느껴지는 두툼한 기저귀, 꼬르륵거리는 빈 뱃속 같은 것들이다. 말하기를 배우면서 아이는 자기 세계의 몇몇 대상들을 명명하는 것도 배운다. 이리저리 기어다니며 모든 것을 쥐어 보고 입에 물어도 보면서 아이는 세계를 익혀간다. 그리하여 이 세계는 아이에게 점점 더 풍부한 형상으로 다가오게 된다. 말하기를 배움으로써 아이는 자 기의 세계에 대해 부모와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과 사물들, 무엇보다도 원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의사를 전하기 위해서 언어를 사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갓태어난 아기는 배가 고프 면 신음하고 소리를 지르지만, 조금 더 자란 아이는 아마도 "냠냠" 하고 말할 것이다. 좀더 자라면 아이는 "까까 줘"라 말하고, 더 큰 아이는 학교에 갔다 돌아와서 이렇게 말할 것이 다. "무지무지 배가 고파요. 먹을 것 없어요?" 표현은 다르지만 이 모든 상황에서 아이가 뭘 원하는지는 분명하다. 이렇게 우리 인간들은 서로의 의사를 소통하기 위해 언어를 발전시켰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사물들을 구분하기 위해 우리는 사물마다 각기 다른 이름을 붙인다. 그러니까 사물들은 원래 어떤 이름을 가지고 생겨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름을 만들어 붙인 것이고, 각각의 사물을 어떤 이름으로 부를지 정하는 것은 우리 사이의 약속이다. 이쯤에서 잠깐 멈추고, 이제는 "낱말들이 어디서 오나?"라는 질문을 놓고 지금까지 우리 가 생각한 결과를 다시 한 번 정리하기로 하자. 도구로서의 언어 낱말들 혹은 우리를 둘러싼 여러 가지 사물들에 대한 명칭들은 사물에 붙어 있는 것이 아 니다. 사물에는 원래 이름이 없다. 하지만 사물에 대하여 말할 때 사물들을 각각 구분할 수 있도록 인간이 이름을 생각해 낸 것이다. 우리 인간은 이렇게 언어를 만들었다. 언어는 우리 가 만든 것이다. 이제 우리가 언어를 도구로 규정하면, 이것은 계속해서 이어질 우리의 사고 에 대해 결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우선 우리는 일반적으로 도구들에 대해 숙고하고 그 기능 을 규정할 수 있으며, 이것과 연결하여 도구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도구로서의 언어에 모두 옮겨 적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도구의 발전 도구란 우리가 일정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대상을 말한다. 그냥 돌멩이 하나라도 우리 가 그것으로 호두를 깬다면 도구가 될 수 있다. 나뭇가지 하나도 이미 우리의 도구일 수 있 다. 굵은 가지는 몽둥이로 쓰고, 아주 가늘고 긴 가지는 그 끝을 뾰족하게 하여 창이나 화살 로 쓸 수 있다. 모서리가 날카로운 돌멩이는 긁거나 자르거나 새기는 데 사용하고, 뭉툭한 돌은 내리치는 데 쓰거나 던질 수 있다. 또 우리가 구한 돌이 처음부터 용도에 알맞지 않으 면 우리는 그것을 다듬어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돌이 쪼개지기를 바라면서 돌들 을 서로 맞부딪쳐 볼 수도 있다. 또 그런 시도를 하다가 우리는 돌에 대해 몇 가지를 배우 게 된다. 어떤 종류의 돌들은 무르고 쉽게 부서지는 반면, 또 다른 돌들은 매우 단단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도대체 도구는 무엇을 위해 필요한 것일까?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맨손이나 이를 사용할 때보다 일을 더 쉽게 해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작은 호두 정도는 이로도 깨물 수 있지만, 운이 나쁠 경우 이를 부러뜨리기도 한다. 또한 물려고 덤비는 개를 손과 발로 막을 수도 있지만, 강한 막대기를 쓰면 더 효과가 있다. 작은 식물을 심거나 씨를 뿌릴 때, 혹은 반대로 감자와 같은 열매를 캘 때 우리는 손으로 땅을 파헤칠 수도 있지만, 삽이 있다면 일 은 훨씬 쉬워진다. 우리는 손으로 물을 뜰 수 있지만, 바가지나 동이로는 더 많은 물을 길어 낸다. 그외에도 얼마든지 예를 들 수 있으나 이 정도로도 충분할 것이다. 이 예들은 우리 인간 이 어떻게 도구를 갖게 되었고, 어떻게 기계를 사용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우리는 우 리의 삶을 더 편안하게 만들기 위해서 도구를 발전시킨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인간이 도구를 발명하고 개선해 온 역사를 빈틈없이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인간이 사용한 최초의 도구는 돌과 나무 작대기였다. 역사가 진행되면 서 우리는 이런 재료들을 더 잘 이용할 수 있음을 배우게 되었다. 우리는 돌을 다듬어서 도 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돌에서 광석을 녹여내어 일정한 틀에 부어 굳힐 수 있다는 것을 알 게 되자, 금속으로 도구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계속 발전하여, 간단한 도 구에서 복잡한 도구들을 만들었고 기계도 만들었으며, 마침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기술세계를 창조하였다. 원칙적으로 언어도 그와 비슷하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대상들과 동.식물들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식물과 동물에서 양분을 취해야 하기 때문에, 사물들을 지칭함과 아울러 사물 각각에 대한 표상을 갖게 되었다. 즉 그것이 무엇이 며, 어디에는 이롭고 어디에는 좋지 않은지를 알게 된 것이다. 우리는 특정한 식물과 그 열매들을 먹을 수 있는 반면, 다른 것들은 맛이 없거나 독이 있 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또한 여러 가지 동물들의 고기가 각기 다른 맛을 낸다는 것을 배웠 으며, 경우에 따라 고기에 열을 가하면 먹기가 더 좋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서로 다른 언어들 인간이 전지구상에 흩어져 산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째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언어들을 사용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이 언어를 발전시키기 시작한 그 옛날에 이미 소수의 인간 집단들이 지구 위에서 널리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들은 동시에 모두 접촉할 수 없었으며, 사람들이 사는 공간은 사막이나 초원.원시림.더운 열대.추운 북부 등 매우 다양했다. 인간은 이렇게 다양한 삶의 공간들에 적응하여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상이한 사물들에 대한 지칭을 발전시킨 것이다. 한쪽에서는 원시림에 있는 다양한 동.식물들에 이름을 붙여야 했고, 초원에 사는 사람들은 다양한 종류의 초목들을 구분하여야 했으며, 에스키모(이누이트 족)들은 눈과 얼음의 다양한 형태들을 구분하여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언어들은 서로 다른 낱말군을 가진다. 말을 기르는 민족은 다른 민족들이 모르는 말의 다양한 종자라든가, 동물의 다양한 체격들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을 알고 있다. 사람이 무엇에 대하여 말하고 무엇에 몰두하는지는 사람이 세계의 어떤 지역에 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따라서, 이를테면 농사를 짓느냐 목축을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 지 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지역에서 함께 살아온 사람들은, 공동의 생활 속에서 많은 것을 함께 하여 그들의 생활환경이 같거나 비슷하기 때문에 일찍부터 공동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모든 인간에게 공통인 것도 있다. 이를테면 모든 인간은 알몸뚱이로 태어나서 움 직이는 법을 배워야 하고, 부모의 가르침을 받으며, 또 평생 동안 먹을 것을 걱정하고, 날씨 변화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입을 것을 걱정하다가, 반드시 언젠가는 모두 죽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다양한 언어 속에서 이런 기본적인 문제들을 낱말로 포착했을 것 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언어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먹을 것과 마실 것, 배고픔 과 목마름, 더위와 추위, 삶과 죽음 등에 대한 지칭들이 존재한다. 언어학자들은 인간이 아직 지구상에 흩어져 살지 않았던 아주 먼 옛날에 이미 의사소통을 했다는 가설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날 존재하는 언어들로부터 일종의 근원어를 찾아내려 한다. 이것은 쉽지 않은데, 오늘날의 언어들은 그 울림이 서로 같지 않고 게다가 일부 언어들은 소리가 매우 다르며, 서로 인척관계에 있는 언어들에서만 낱말들의 울림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영어 낱말인 '파더(father)'.'머더(mother)'는 독일어 낱말인 '파터(Vater)'.'무 터(Mutter)'와 거의 비슷하게 울린다. 그렇지만 어떤 외국어 낱말이 그 의미상 우리의 모국 어 낱말에 부합되는지 알려면 사전을 찾아보아야 한다. 'Vater'와 'father'의 유사는 매우 간단한 예일 뿐이다. 그러면 좀더 어려운 예를 들어서 서랍을 뜻하는 독일어 낱말 '슈 블라데(Schublade)'를 비교해 보자. 프랑스어에서 같은 뜻의 낱말을 찾아보면 '티르와르 (tiroir)'가 여기에 해당되는데, 이 낱말은 '당기다'는 뜻의 동사 '티레(tirer)'에서 파생한 것 이다. 그러니까 서랍이라는 대상을 두고 프랑스에서는 '당기는 상자'로 지칭하는 반면, 독 일에서는 '미는 상자' [독일어로 schublade는 '밀다'sms 뜻의 동사 schieben에서 온 것이 다]라고 부르는 셈이다. 분명히 똑같은 대상을 뜻하면서도 프랑스어는 당겨서 여는 동작에 서 개념을 취했고, 독일어는 밀어 닫는 동작을 언어적 지칭의 표상으로 사용하였다. 프랑스인들은 서랍 열기를 좋아하고, 독일인들은 닫아두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일까? 물론 그런 것은 아니다. 독일인이나 프랑스인이나 서랍을 열려면 잡아당겨야 하고, 서랍을 닫으려 면 밀어야 한다. 그러면 어떤 명칭이 올바른 것일까? 혹은 어떤 이름이 더 좋은 것일까? 이런 물음은 무의미하다. '미는 상자'의 뜻이건 '당기는 상자'의 뜻이건간에, 서랍은 장롱 이나 책상 밑에 있어서 당겨야 열 수 있는 기구이다. 그렇게 열고 나면 서랍 안에 무언가 를 집어넣을 수 있고, 그리고 난 후에는 다시 밀어서 닫아야 한다. 서랍은 그렇게 여기저기 널려서 방해가 될 물건들이나 파손되기 쉬운 물건들, 먼지가 앉지 않도록 잘 간수해야 하 는 물건들, 남이 보아서는 안 되는 물건들을 넣어두기 위해 필요하다. 당기거나 미는 것은 각각 서랍과 관련된 활동의 일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한 부분만 취 하고 다른 부분을 제외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서랍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안 다. 즉 서랍의 필요성과 기능에 대한 표상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상을 놓고 우리 가 하는 행동의 일부만을 명명해도 대상을 지칭하는 데는 충분하다. '슈발라데(Schublade)'와 '티르와르(tiroir),' 이 두 낱말은 각기 낱말 속에 있는 원래의 표상이 다르다 해도 동일한 대상을 가리킨다. 우리는 다양한 언어들에서 소리는 다르지만 동일한 대상을 지칭하는 낱말들이 있음을 안다. 다양한 언어들을 구성하는 낱말들은 사람들 이 세계의 대상들을 지칭하기 위해 각기 자기네 언어로 만들어 낸 다양한 이름들이다. 따 라서 옳은 이름이나 잘못된 이름이라는 것은 없다. 각 언어마다 다른 이름들은 지칭으로서 똑같이 쓸모가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우리의 숙고를 시작했던 처음의 예로 돌아가자. '트로토아(Trottoir)'나 뷔르거 슈타이크(Burgersteig)'는, 도로 옆에 보행자들을 위해 남겨 놓은 인도를 지칭하는 데 똑같 이 적합한 말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언어들에서 울림도 다르고 생겨난 방식도 다른 낱말 들이 똑같은 뜻을 지닐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한 언어로 이루어진 진술과 생각들을 다른 언어들로 옮길 수도 있다. 이때 우리는 사전을 사용하는데, 사전에는 외국어의 특정한 낱말 이 그 뜻에 있어서 우리말의 어떤 낱말과 일치하는지 명기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질문, 즉 의미의 유래에 대한 질문에 맞닥뜨리게 된다. 우리가 연구 를 시작한 것은 낱말들이 어디서 오는가 하는 질문이었으며, 우리는 언어의 음성 형태에 대 해 이야기하였다. 그래서 '트로토아'와 '뷔르거슈타이크'가 완전히 다른 소리이면서도 동일 한 대상, 즉 보행자를 위해 마련된 인도를 뜻한다는 것을 검토하였다. 새롭게 의미에 대한 질문으로 방향을 돌리기 전에 지금까지 우리가 숙고한 것의 결과를 정리하도록 하자. 합의로서의 언어 우리 인간은 언어를 구성하였으며, 다양한 낱말들을 가지고 우리 주변의 사물들을 표시하 기로 약속하였다. 하지만 언어를 알지 못했을 때는 어떻게 했을까? 아주 간단하다! 오늘날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언어를 가르칠 때 그런 식으로 하고 있다. 부모는 아이에게 대상을 보 여 주고 '자동차'.'빵빵', 이렇게 낱말을 말해 준다. 언어는 이와 같이 계승되며, 또 새로 생 기기도 한다. 원시인들은 여러 가지의 소리들, 이를테면 '부부'나 '바바', 혹은 더 복잡한 소리들을 연결하여 발전시켰으며, 이 소리들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기로 서로간에 일치를 보았을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인간은 함께 모여야 한다. 그래야만 합의를 얻을 수 있다. 라틴어로는 'convenire'가 '모인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협정을 '컨벤션(convention)'이라고도 하 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가 협정에 근거한다고 말할 때, 이 말은 인간이 어떤 낱말을 어떤 사물에 부속시킬 것인가를 서로 약속하기 위하여 모여야 함을 뜻한다. 서로 다른 언어들은 바다나 사막, 산악이나 삼림에 가로막혀 서로 떨어져 살아온 다양한 인간 집단들의 '모임' 에 근거를 두고 있다. 어린아이일 때 우리가 모국어를 배우기 시작하면, 우리는 우연히 어떤 기호의 체계 속으 로 들어가게 된다. 이 체계는 얼마든지 다른 것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우연적인 것이다. 따 라서 말해진 낱말은 어떤 대상에 대한 음성적 기호이다. 그런데 이렇게 우연히 습득한 기호체계가 우리의 모국어가 된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1차 언어인 이 언어를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외국어 낱말의 의 미를 우리가 이해하는 언어, 즉 우리의 모국어로 설명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외국어 낱말 을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협정에 의한' 언어는, 사람들이 그 뜻에 대해 일치하여 합의 를 본 최초의 낱말 하나에서부터 시작되어 임의로 확장된다. 이는 우리가 언제든지 새로운 낱말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아는 낱말 두 개를 조합하여 새로 운 낱말 하나를 만들 수 있는데, 병의 입구를 막는 마개를 지칭하는 '병마개'는 '막다'라는 동사에서 온 '마개'와 '병'이라는 명사를 가지고 만든 것이다. 우리의 언어는 무한한 것이 아니며, 결국 수많은 낱말들로 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필요 에 따라 낱말수를 확장할 수 있고, 심지어 외국어 낱말을 받아들여 쓰기도 하는데, 독일에서 자동차를 이르는 낱말 '아우토(Auto)'가 그 좋은 예이다. '아우토'는 '자동차'보다 발음이 쉽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낱말에 속 한다. 어린아이들은 '아우토'가 무엇인지 알며 '오토바이'와 혼동하는 일도 없지만, '아우토' 라는 말이 원래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 '아우토모빌(Automobil)'의 축약형이고 '스스 로'라는 의미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아우토모빌'은 스스로 움직이는 탈 것을 뜻하는데, 또한 이 낱말에서 '모빌(mobil)'은 라틴어에서 온 것으로서 '움직이는'의 뜻을 가지고 있다. 마차는 자동차와 달리 말에 의해 끌려가기 때문에 '아우토모빌'이 아니다. 그러니까 '아우토'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언어를 조합한 외국어 낱말의 축약형인데, 이 사 실을 정확하게 아는 이는 별로 없으며 '장난감 아우토'를 가지고 노는 아이들에게 확실히 설명해 주지도 못한다. 이런 식으로 외국어 낱말이 익숙해지면, 우리는 그 말의 유래가 외국어라는 것을 전혀 예 측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이런 낱말들을 낯설게 느끼지 못하고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우 리말이라고 여기게 될 때, 우리는 이 낱말들을 '차용어'라고 부른다. 독일에서 가구를 일컫 는 '뫼벨(Mobel)'도 그러한 차용어이다. 우리는 집에 있는 가구를 이리저리 옮길 수 있다. 그래서 소파는 '뫼벨'이자만, 콘크리트로 만들어 고정시켜 놓은 공원 벤치는 '뫼벨'이 아니 다. 우리의 언어가 완결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든 것에서 알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언어를 1차 언어로서 계속 학습하고 말하고 변화시키는 한 이 언어는 생명이 있지만, 반대로 어떤 언어가 더 이상 모국어로 사용되지 않으면 그 언어 는 라틴어나 고대 그리스어처럼 죽은 언어가 된다. 하지만 죽은 언어도 학문 영역에서는 매우 중요할 수 있다. 우리는 자연의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것이 발견될 때 그것을 라틴어나 고대 그리스어로 명명하기로 국제적 합의를 보았 다.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것에 이름을 붙일 때 독일어로 할 것이냐, 프랑스어로 할 것이 냐, 영어.이탈리아어.스페인어.러시아어.중국어.한국어 등 어떤 언어로 할 것인가를 놓고 싸울 필요가 없다. 이것 역시 일종의 협정, 즉 '컨벤션'이다. 이 협정의 목표는 각 민족의 자신들 이 사용하는 사물의 명칭을 다른 민족들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야기될 수 있는, 저 유명한 바빌론의 언어 혼란을 저지하려는 데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이 서로 다른 언어들을 발전시킴으로서 야기되는 문제들을 조명하였 다. 따라서 우리가 남에게 제대로 이해되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생각을 이렇게 다양한 언어 들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한 언어 안에도 문제는 있다. 독일의 작센 지방 사람과 바이에른 지방 사람은 모 두 독일어로 말하지만, 그들의 방언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긴다. 한 언 어 에 포함된 상이한 방언들과 사투리는 사람들이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살아왔기 때문에 발 생한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더 가까이 교류하며 살게 된다면 다양한 방언들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한 언어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언어적 차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긴다. 이 차이는 공간 이 원인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야기된다. 한 사회 안에는 교양계층과 단순계층이 있는데, 이 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에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한 예로 경솔하게 말하는 아이에게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면 못쓴다"라고 꾸짖는 어머니가 있는가 하면, "주둥이 터졌다고 나 불대지마!"라고 하는 어머니도 있다. 이렇게 언어에는 조야한 언어도 있고, 우아한 언어도 있다. 따라서 언어를 통해 교류가 이 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 사이의 분리가 야기될 수 있다. 어떤 연설자가 외국어 를 많이 섞어서 말할 때에도 비슷한 결과가 발생한다. 이 경우에 듣는 사람은 연설을 이해 하지 못하며, 자기의 교양과 지식 수준을 자랑하는 연설자에 대해 분노하게 된다. 의도적으로 말을 어렵게 하는 사람은 언어를 그릇되게 사용하는 것이다. 모든 언어의 원 래 목적은 의사소통에 있기 때문이다. 한 사회가 결집되고 유지될 수 있는 것도 우리가 함 께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모든 인간이 고립되어 산다면, 자기 생각이나 느낌.소원 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릴 필요가 없으므로 인간에게는 언어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고립되어 살지 않으며, 다른 많은 동물들처럼 무리지어 공동체를 이루며 산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동물들이 그 러하듯이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동물들처럼 어떤 표시나 육체를 통한 몸짓도 언 어로 사용될 수 있지만, 인간의 언어는 낱말들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다른 모든 의사소통 수 단들을 능가할 만큼 발전하였다. 언어를 건설하기 시작했을 때는 모든 인간이 함께 접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인간은 서로 다른 다양한 언어들을 발전시켰다. 언어와 바벨탑 '구약성서'에는 이렇듯 상이한 언어들이 발생한 이유를 아주 다르게 설명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원래 모든 인간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였는데 인간이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을 쌓기 시작하자, 자신의 천국을 들여다보는 것을 싫어한 신이 인간의 언어 를 어지럽혔고, 그 결과 사람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서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인 간이 탑의 건설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공동의 언어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설화 내지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즉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 경우 에는 언어들의 다양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지어낸 이야기이다. 신화는 세계의 현상을 신 내 지 신들의 행위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다른 설명방식과 구분된다. 언어 혼란을 설명하는 바빌론 탑의 이야기가 비록 사실이 아니라 해도 이 이야기에는 옳 은 점이 있다. 인간들이 공동의 언어로 말하지 않으면 공동의 행위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현재 바빌론이 언어 혼란과 다름없는 위험에 처해 있다. 수많은 학문들이 있 고 또 수많은 학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각자 연구에 매진하면서도 같은 분야의 동료가 사용 하는 전문적인 표현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 의 지식 전체는 하나의 지식의 건물로 쌓아지지 못하고 공사장의 자재처럼 널려 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언어의 낱말들을 그 의미에 따라 사전에 잘 정리한다면 언어 혼란의 문 제는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잘 만든 사전이 낱말 사용에 대한 오해를 없앨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언어로 인 한 문제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를 간단히 생각해 보자. 즉 어디선가 낱말의 사용을 놓고 싸 움이 벌어질 때 그것을 쉽게 해결할 수 있다. 갑이 X라는 낱말로 어쩌구저쩌구라는 사태를 가리키며 싸울 때, 우리는 사전을 통해서 둘 다 옳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이 싸움을 조정 할 수 있다. 사전을 찾아보면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되는 낱말들이 있는데, 그로 인해서 일 어나는 오해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낱말을 사용할 때, 우리는 단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낱말과 다의적으로 쓰이는 낱말에 대 해 잘 이해해야 한다. 이는 두 가지 다른 경우들이다. 먼저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낱말들의 다의성을 이용할 수 있다. 계속해서 새롭게 바꾸어 말함으로써 우리의 생각을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교적인 언어사용에서도 우리는 이런 다의성을 의도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큰 즐거움을 준다. 농담이나 우스갯소리는 하나의 낱말이 여러 의미를 지닐 수 있 는 특성을 이용한 것이다. 과학 언어의 특수성 그렇지만 과학 영역에서는 언어의 다의성으로 인해 설명하는 데 불필요하게 많은 시간이 낭비될 수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낱말들이 오해의 여지가 없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학문적으로 사용되는 모든 낱말을 얼마든지 그 의미가 바뀔 수 있는 일상의 언어사용에서 탈피하여야 하며, 어떤 낱말 X는 다른 뜻이 아닌 오직 하나의 뜻만 갖 도록 확정되어야 한다. 이렇게 확정하는 것을 '정의'라 한다. 학자들은 이러한 처리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면서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현 명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우월감으로 그들은 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실제로 금세 기초에 몇몇 철학자들은 정확한 언어를 찾아나섰다. 그들은 올바른 언어만을 사용할 때 모 든 문제에 대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좀 흐른 후에 그들은 '정확한 언 어의 철학'이 '평범한 언어의 철학'보다 더 나을 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언어라도 다 그때그때의 과제를 위해 쓸모가 있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 없는 낱말로 인해 언어의 한계에 부딪히면 우리는 새로운 말을 도입해야 한다. 자동차가 없었을 때는 '자동차'라는 말이나 'Auto'라는 말 역시 없었다. 최초의 자동차를 만들었을 때 사람들은 이것에 이름을 부여하였는데, 이때 아무 이름이나 갖다붙인 것은 아 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이름을 통해서 '자동차'로 불리는 것이 어떤 물건인지를 분명히 알 려 주고자 했다. 이름을 통해서 그것이 일조의 탈것이라는 것, 모터가 있기 때문에 다른 것에 끌릴 필요 없이 스스로 달릴 수 있는 차라는 것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따라서 '자동차'라는 이름은 그 무엇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의 이름이 특정한 의미를 지 니는 현상은, '자동차'라는 한예에 해당되는 것은 물론 모든 낱말들에도 해당된다. 우리는 낱말들을 가지고 우리의 주변 세계에 있는 사물들을 표시한다. 어떤 낱말을 선택할 것인지 는 자유이지만, 우리가 사물에 이름을 정하기 전에 사물은 이미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사 물을 구분할 때 이름을 붙이지 않고 번호를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름을 이용함으로써 그 사물이 어떤 특성을 지녔다는 것도 표현하려 했던 것이다. 의자는 의자고, 탁자는 탁자다. 이는 의자는 책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물건 하나에 이름 하나를 붙임으로써 우리는 그 물건을 같은 이름을 갖는 대상들의 집단으로 부속시키면서, 동시에 이 집단에 속 하지 않는 다른 물건들과 구분한 것이다. 이렇게 낱말은 의미를 가진다. 그러면 과연 의미란 무엇일까? 이 질문과 함께 우리는 이제 언어에 대한 새로운 테마로 들어서게 된다. 2. 낱말의 의미는 어디서 왔을까? 우리가 어떤 대상을 두고 "이것은 의자다"라고 주장하면, 나는 그것이 정말 의자인지 아 닌지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의자는 도대체 무엇일까? 어떻게 우리는 의자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간단히 의자 하나를 놓고 그것을 설명해 보자! 그러면 의자 가 무엇인지 알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앞에 놓인 대상이 의자라는 것을 또 어떻게 알았을 까? 우리가 의자를 의자라고 부르려 할 때, 우리의 머릿속에는 틀림없이 의자는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의자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하여 다시 의자를 사용한 셈이다. 우리가 의자를 의자로 인식하고, 의자 아닌 것들과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미 의자가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의자가 무엇인지 아예 모른다 면, 우리는 의자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의자를 취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의자는 인간이 필요에 따라 만든 것이기 때문에, 다행히도 우리는 의자가 무엇인 지 이미 알고 있다. 우리는 이미 의자에 자주 앉아 있었으며, 그래서 누군가 우리에게 "옆방 에 가서 의자 좀 가져다 주세요!"라고 말하면 우리는 이 부탁을 제대로 들어 줄 수 있다. 명칭과 의미 의자는 가구이다. 즉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낸 물건이다. 의자의 기능은 앉도록 사용되는 것 이다. 물론 맨바닥이나 담요.방석도 앉는 데 사용될 수 있지만 그것들은 의자가 아니다. 의 자는 우리를 어느 정도 높이 앉도록 해준다. 높이 앉기 위해서는 다리와 앉는 판이 있는 받 침대도 사용할 수 있다. 의자는 다리가 몇 개일까? 최소한 하나는 있어야 하고, 최대는 몇 개까지 가능할까? 보통은 다리가 네 개지만 다섯 개나 여섯 개라도 인정할 수 있다. 스무 개라면 어떨까? 지금까지 그 누구도 스무 개의 다리를 가진 의자를 만든 적은 없다. 그렇지 만 다리의 수 역시 의자에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지는 못한다. 다리의 수보다는 앉는 판이 더 중요하다. 의자라면 한 사람이 앉기에 적합한 판을 갖고 있어야 한다. 판의 모양은 어떨까? 둥글거나 삼각형 또는 사각형 등 모양은 여러 가지일 수 있으며, 육갑형이나 팔각형이라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면 칠각형도 괜찮을까? 앉는 판이 몇 각형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앉는 판이 넓어서 두 사람 이상 앉을 수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의자라고 하지 않고 "그건 벤치야"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의자의 앉는 판은 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보조의자도 그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둘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의자에는 등받이가 있지만 보조의자에는 없다. 팔걸이에서도 차이가 나타날까? 의자에는 팔걸이가 딸릴 수 있지만, 그것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의자에는 팔걸이가 없다. 보통의 의자의 경우 우리는 앉는 판 위에 그냥 걸터앉는데, 이와는 달리 팔걸이가 있고 또 앉는 자리와 팔걸이가 푹신푹신한 솜 으로 채워져 있어서 편안하고 기분 좋게 앉을 수 있는 의자를 우리는 안락의자라고 일컫는 다. 하지만 안락의자 가운데는 팔을 놓는 부분이 없는 것도 있다. 우리는 어째서 팔걸이가 없는 안락의자를 간단히 의자라고 부르지 않는 걸까? 왜냐하면 그것은 팔걸이만 없다뿐이지 분명히 안락의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의자와 안락의자가 다른 점은 무엇일까? 편안함의 차이일까? 일반적으로 안락의 자는 의자보다 앉는 자리가 낮다. 그래서 우리는 안락의자에 몸을 묻고 피로를 풀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의자에 걸터앉으며, 대부분은 먹거나 일하기 위해서 탁자 앞에 의자를 놓 고 앉는다. 그런데 안락의자와 어울리는 탁자도 있다. 그것은 아주 키가 작은 탁자이다. 그런 탁자의 윗면은 보통 의자의 앉는 판높이 정도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나는 이제 실제로 있었던 일 화를 하나 소개하려고 한다. 대학 시절 학교를 쾰른에서 보훔으로 옮겼을 때, 나는 보훔대학교에서 철학과 강의동을 한참 찾아야 했다. 보훔대학교는 거대하고 흉측한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건물들의 그 어마어마한 크기는 참으로 위압적이다. 끝도 없이 복도들이 얽혀 있는 이 건물 안에서 사람 들은 자칫 길을 잃고 헤매기 십상이다. 건축가가 이 점을 예상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좁은 통로의 곳곳에는 사람들이 숨을 돌릴 수 있도록 꽤 널찍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그 당시 이 공간에는 앉을 수 있는 물건들이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생겼다. 몇몇 물건들은 그 모양 새가 안락의자를 연상시켰지만 틀림없이 아주 낮은 의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얼마나 묘사하기 어려운 물건이었던지!), 그것들과 함께 용도가 무엇인지 확인하기 어려운 물건들이 거기 있었다. 다리는 네 개이고 앉는 면은 보통 의자와 같은 높이인데, 정방형의 윗면은 아 주 넓어서 몇 명이 동시에 앉을 만했다. 우리가 앞에서 의자에 대해 말한 내용을 생각해 보면 문제가 무엇인지 감지할 수 있을 것 이다. 그 물건은 보통 탁자이기에는 너무 낮았고, 의자라 하기에는 앉는 면이 너무 넓었던 것이다. 대체 이것은 어떤 종류의 가구란 말인가? 그것을 곧바로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이 공간에서 쉬려고 하는 학생들은 하나같이 먼저 와 있는 학생들에게 물었다. "실 례합니다만, 여기에 앉아도 되나요?" 만일 다른 의자들이 거기 없고, 그 물건들만 있었더라 면 아무도 그렇게 묻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 물건을 앉을 자리로 여기고, 아주 넓 은 정방형의 앉는 판이 있는 벤치라 생각하고 그 위에 앉았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분 명히 의자라고 할 수 있는 물건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 희한한 벤치들은 다시 나지막한 거실 용 탁자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우물쭈물했다. 어렸을 때 그들은 부모로부터 올바른 행동을 배웠기에, 탁자 위에 앉는 것이 무례한 짓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물건 전체가 일종의 벤치이기 때문에 앉아도 되는지, 아니면 그것은 탁자이므로 앉아서 는 안 되는지 결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60년대말 학생운동이 있고 나서 대학생들은 부모 세대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 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흥미로운 인식론적 질문을 다시는 제기하지 않았는데, 탁자에 앉는 것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어떤 철학적 내용을 배웠는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 정의 탁자는 탁자고, 의자는 의자다. 앞에서 우리는 정말 순진하게 그렇게 말했다. 이 말로 표 현하고자 했던 것은, 의자는 앉기 위한 기구이고 가구 무리에 속하며, 다른 종류의 앉는 가 구들, 즉 등상,긴의자,소파,안락의자 등과는 일정한 특징들에 의해서 구분된다는 것이다. 이 런 특징들을 열거함으로써, 우리는 의자들을 나머지 앉는 가구들과 구분하고 한계를 정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행위를 '정의'라 일컫는다. 이 낱말의 어원은 라틴어인데 '경계 설정' 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정의를 통해 우리는 다른 개념에 대해 한 개념의 경계를 정한다. 이 를 테면 '안락의자'에 대해 '의자'의 경계를 긋는 것이다. 명백한 정의를 알고 있으면, 우리는 대상에 다가가서 그것이 정의된 특징들에 부합되는지 를 검증할 수 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어떤 대상을 의자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앞의 일화에 나온 탁자의 예는 어떤가. 학생들은 그 물건이 무엇이다라고 결정하 기 어려웠다. 다리가 일반 탁자보다 짧았기 때문에, 그 물건이 탁자인지 앉는 물건인지 불확 실했던 것이다. 물론 학생들은 앉을 데를 찾고 있었으므로, 사람이 피곤하면 창턱에도 걸터 앉듯이 낮은 탁자 위에도 앉을 수는 있었다. 탁자는 탁자다. 하지만 탁자면의 높이는 제각각이다. 우리가 바닥에 앉아서 탁자를 이용한 다면, 그 탁자는 높은 의자에 앉을 때보다 훨씬 낮아야 한다. 탁자나 의자, 이들은 우리 인간이 우리의 목적을 위해 만든 기구들이다. 인간이 없었다면 이 기구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원하는 바에 따라 이 물건들을 만들었기 때문 에 또한 원하는 대로 모양을 바꿀 수도 있다. 의자의 등받이를 떼어내어 의자를 받침대로 만들 수 있다. 어린아이들은 종종 탁자를 큰 천으로 덮어 늘어뜨려서 동굴이나 집을 꾸미고 놀기도 한다. 우리가 탁자 위에 앉으면 우리는 탁자를 앉는 물건으로 사용한 것이 된다. 즉 원래의 목 적과 달리 대상을 사용한 것이다. 탁자의 원래 목적은 여러 가지 물건들을 놓는 자리, 물건 들을 바닥에서 어느 정도 높이로 올려 놓는 자리로 쓰이는 데 있다. 우리는 식사할 때 음식 을 바닥에서 직접 주워 올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데, 그것은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는 탁자를 만들어 냈다. 우리 인간이 만들 물건들은 그때그때마다 정해진 목적에 따라 사용된다. 우리가 이 물건 들을 명명할 때, 우리는 이름을 물건의 목적에 대한 표상과 결부시킨다. 그래서 의자란 낱말 에는 일정한 의미, 즉 등받이가 있는 앉는 데 쓰이는 가구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이것을 우 리는 '개념'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어떤 사물에 대해 개념을 가졌다 함은 우리가 어떤 사물 이 무엇인지, 즉 그것이 의자인지 탁자인지를 안다는 걸 뜻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알지 못하고 확인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을 그저 '물건'이라 칭한다. "그 물건 좀 이리 건 네 주세요." 우리는 종종 그렇게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의도한 대상을 가리킨다. 그러면 상 대방은 이렇게 말한다. "망치 말이야? 아니, 이것 말이로구나, 이건 집게지." 그러면서 그 역시 대상을 지시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그런 식으로 말하면서 사물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 다. 우리가 몰랐던 사물을 알 수 있게 되고 동시에 우리는 사물의 명칭을 말할 수 있게 된 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면, 우리는 그 물건이 무엇인지를 파악한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개념'이라고 일컫는다. 따라서 어떤 사태에 대해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어떤 사태 가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이다. 개념과 파악 어째서 우리는 이러한 과정에 대해 '개념'이라는 말을 썼을까? 개념의 독일어 낱말은 ' 베그리프(Begriff)' 인데, 이 말은 우리가 손으로 하는 행동을 지칭하는 '잡다(greifen)'라는 동사에서 온 것이다. 하지만 개념이라는 말은 어떤 사태를 사고나 언어로 잡는 것, 즉 사태 를 올바로 명명하는 것을 뜻한다. 이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언어능력을 갖기 전에도 우리는 현실의 사물들을 인 지한다. 어린아이들은 모든 것을 만지거나 입으로 가져가려 한다. 이것이 인간이 최초에 세 계를 경험하는 방식이다. 사물을 손에 쥐어 보면 그 대상의 어떤 점을 경험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크기와 무게를 경험하고, 또 거칠거나 매끄럽거나, 부드럽거나 단단하거나, 차거 나 따뜻하거나 등의 표면적 특성을 알 수 있다. 또한 얼마나 단단한지, 잘 휘어지는지 개개 부분의 특성을 시험할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는 어떤 대상을 손으로 직접 만져 봄으로써 대상에 대한 개념을 가질 수 있 다. 그리고 우리는 개발된 언어를 사용하여 우리가 경험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대상의 특성을 말해 주면, 그 사람은 대상을 직접 자기 손 으로 잡아 보지 않고도 그것에 대한 개념을 가질 수 있다. 이제 한 사물을 언어로 기술함으로써 손을 이용한 물리적 파악을 대실 할 수 있다. 사물 을 언어로 파악하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물을 직접 접하기 않아도 되고, 지금 우리 손으로 직접 잡을 수 없는 사물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함 으로써 우리가 이야기하는 낱낱의 상황에 더욱 구애받지 않게 된다. 그런데 '파악하다(begreifen)'라는 낱말 속에는 여전히 세계를 직접 잡아 보는 우리의 원 초적 방식에 대한 기억이 들어 있다. 잡는다는 의미에서 무엇을 파악하려는 것은 언제나 우 리의 본능에 속한다. 이 본능은 우리가 마주하는 물건들을 만져 보라고 하며, 줄곧 우리의 손끝에서 움찔거린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박물관과 전시장에는 이런 경고판이 있는 것이 다.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 어떤 사물이나 사태에 대해 올바른 개념을 가진다는 것은 곧 그 사물이나 사태가 무엇인 지 알고, 그럼으로써 적절한 방식으로 명명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의자가 무엇인지 알고 나면 나는 계속해서 어떤 대상이 의자인지 아닌지 조사할 수 있다. 우리의 목표는 모든 사물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간단하 지 않다. 우리가 만들어 낸 대상들일 경우, 우리는 이미 대상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것을 일정한 목적으로 창조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의자는 코끼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위해 앉도록 만든 가구이다. 그런데 우리가 만들지 않은 사물들의 경우는 어떨까? 성서의 '창세기'에서는 신이 세계 를 창조하고 맨 마지막에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최초의 한 사람이었 던 아담이 신의 작품들을 관찰하고, 창조된 낱낱의 사물들에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이 신화는 이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의 상태를 잘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 세계를 직 접 창조하지는 않았지만 세계를 인식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중요한 철학적 질문이 새롭게 떠오른다. 우리 인간은 어떻게 지식을 얻게 되었을 까? 혹은 우리의 지식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이것이 다음 장에서 다루어야 할 테마이다. 3. 지식의 근원 이 질문에 답하는 것도 앞에서 다룬 두 가지 질문에 답을 구한 것처럼 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선 한 사람의 개인이 어떻게 지식을 얻게 되는지를 묻기로 하자. 그 답 은 간단하다.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지식을 전해준다. 물론 아이들의 복잡한 질문에 대답하 려고 애쓰는 부모들이 첫 번째로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부모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알 수 는 없고, 또 아이들에게 지식을 전해 줄 충분한 시간도 없기 때문에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 교에 보낸다. 학교에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하는 것이 직업이기 때문에 선생님이라고 불리 는 어른들이 있다. 아이들은 부모를 믿었던 것처럼 처음에는 선생님의 말씀을 모두 믿어 버 린다. 그러다가 아이들은 종종 선생님이 틀린 것을 말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놀라워한다. 그 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이들은 선생님도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지식만 을 가졌으며, 그 지식도 애매한 경우에는 책에서 확인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니까 지식은 결국 책 속에 있는 셈이다. 그리고 책은 사람들이 쓴 것이다. 이렇게 해 서는 우리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지금까지 우리는 지식이 어떻게 전달 되는가를 설명했을 뿐, 지식이 어떻게 생기는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다. 우선 우리는 지식을 얻는 과정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앞장에서 우리는 무언가 를 잡아 쥐는 행동을 '파악'이라 하였고, 어떤 대상을 우리의 손으로 충분히 조사하고 나 서, 즉 파악하고 난 후 어떤 사실이나 대상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을 바로 '개념'이라고 하 였다. 그리고 우리는 앞장에서 어떤 사물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곧 사물의 개념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시 습득과 경험 우리는 하나의 대상을 보고 머릿속에서 그것에 대한 표상을 가진다. 대상의 겉모양에 대 한 표상이 일면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가능한 한 모든 측면에서 대상을 관찰한다. 그 대상이 작은 것이면 손으로 돌려보기도 하고, 또 너무 크고 무거울 때는 우리가 그 주 위를 돌아보기도 한다. 우리는 한 채의 집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생겼는지 보기 위해 집 주 위를 빙 돌아본다. 만일 우리가 한쪽에서만 그 집을 살핀다면 일면적인 모양만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 앞에서는 궁궐같이 보이지만 뒤에서 보면 초라한 오두막인 집들 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측면에서 집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또 집 속으로 도 들어가 봐야 한다. 집이 겉벽으로만 이루어져 있을 뿐이고, 안에는 방이나 벽, 천장이 없 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집이라고 본 것이 단지 그럴싸하게 집처럼 보이게 만든 일 종의 무대 세트일 수도 있다. 우리가 눈으로 인지하는 것은 항상 특정한 관점에서 본 사물의 모양일 뿐이며, 사물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능한 한 완전하게 인지하도록 해야 하고, 때로는 시각적 인상을 느낌으로 보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벽이 벽걸이로 덮여 있다면, 나는 그 벽이 돌로 만든 것인지 판지로 만든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면 나는 그 벽을 두드려 볼 것이다. 그 때 울리는 소리와 반동으로 느껴지는 질감에 의해서 나는 벽이 두꺼운지 얇은지, 돌로 된 것인지 판지로 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불을 보기만 해서는 그것이 뜨겁다는 것을 알 수 없다. 그 열기를 피부로 느꼈을 때, 또 부주의하여 불꽃에 손이 닿았을 때 나는 아픔을 느끼면서 불이 얼마 나 뜨거운지 알게 된다. 인도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임금님이 여러 맹인들로 하여금 코끼리 한 마리를 만져 보게 하였다. 그리고 임금님은 코끼리의 다른 부분을 만져 본 맹인들이 저마다 코끼리 를 다르게 설명하면서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했다. 어떤 만화가는 이 상황을 이렇 게 익살맞게 그렸다. 이 그림을 놓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 그림 속에 경험과학의 상황이 그대로 표 현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맹인들은 바로 감각의 한계로 인하여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하지만 맹인들이 결코 바보는 아닐 것이다. 그들이 같이, 또 따 로 나누어서 코끼리를 더듬어 본 후에 서로의 생각을 나누게 되면 그들은 마침내 코끼리를 올바르게 설명할 수 있다. 그때 각자는 자신이 전체의 일부분을 붙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 닫게 된다. 각 개인이 옳다고 주장하는 '진실'을 일면적이며, 일부분을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참된 진실은 전체이다. 헤겔이라는 철학자는 이러한 인식을 그의 변증법적 사유방식을 통해 유용하게 만들었다. 변증법에는 근본적으로 대화가 들어 있다. 둘 이상의 사람들 사이에서 진행되어 그 출발과 다른 결과에 이르는 것이 대화이다. 헤겔의 생각대로 우리는 학문과 철학의 발전을, 모든 참 여자들이 각자의 특수하고 부분적인 인식들을 모아서 그 진술의 가치를 결정하고, 마침내 하나의 전체적 진술을 구성해 내는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때 모든 이가 자기 몫으로 내놓는 것은, 코끼리 이야기에서처럼 조사한 것이 그 코이든 평평한 등이든 상관없이 모두 중요하다. 맹인들의 상황과 그 가능성들로부터 우리는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다. 세계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 우리들이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인상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며, 어떤 감각을 사용했는가도 역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맹인들에게는 시각이 없지만 앞에서 말한 방법이라면 그들도 코끼리에 대한 개념을 가질 수 있다. 물론 시간만 충분하게 주어진 다면 맹인 혼자서라도 코끼리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세상 사물들에 대한 나의 지식은 이렇게 사물들과 교류하는 경험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서 내가 사물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찾아낸 것만을 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때 경험에는 내가 개인적으로 직접 겪은 것과, 아울러 다른 사람들의 경험 이 많은 부분 포함된다. 이러한 간접 경험은 말이나 글로, 이를테면 교과서 같은 책들을 통 해서 나에게 전달된다. 책 속에는 우리가 전에 알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던 사실, 혹은 책 이 쓰여질 당시에 실제로 알았던 사실들이 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 책들에서는 우리 가 오늘날 틀린 것으로 확인한 주장들도 발견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지금까지 완전하지 못했고, 현재에도 여전히 불완전하다는 뜻이다. 그렇게 때문에 인 간사회는 수많은 연구자들과 학자들에게 기존의 지식이 옳은지를 검토하고, 또 그것을 수정 하는 임무를 맡겼다. 지식에 대한 의심 우리 인간이 지금까지 계속해서 추구해 온 지식은 완벽하지 못하다. 게다가 우리가 참되 다고 여기는 것 중에서 실제로는 무엇이 틀렸는지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어째서 우리의 지 식은 완벽하지 못할까? 이 질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대답을 준비해 놓고 있다-인 간이란 그 자체가 불완전한 존재여서 인식능력에 한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참된 지식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인식능력을 그렇게 통틀어 의심하는 것은 철저하게 숙고한 결과라 할 수 없으므로 현명하지 못하다. 우리의 인식에는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한 사실들도 있기 때문이 다. 예컨대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그렇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세계는 실제 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꿈일 수도 있다. 내가 착각할 수 있기 때문에 나의 사고능력을 믿 을 수 없다"라고 하며 모든 것에 대해 의심을 시도하였다. 그렇지만 결국 그는 자신이 존재 하고 있다는 인식만큼은 절대로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의심할 수 없는 것 내 머릿속에 쓸데없는 것만 들어 있고, 내가 어리석고 그릇된 생각만 한다고 인정해야 할 때조차도, 확고하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그릇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바 로 나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런 인식 자체에서 내가 얻는 것은 그리 많지 않으며, 데카르트도 이로써 그다지 큰 성 과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얻고자 한 것은 세계의 존재와 관련하여 인식의 확실성이었 다. 그래서 그는 선한 신의 존재를 가정하고, 신이 선하기 때문에 인간이 착각하는 것을 원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진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신이 돌보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설득력 있는 논증은 아니다. 우리가 착각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착각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우리는 데카르트의 인식을 좀더 생각하도록 하자. 나는 존재한다. 의식을 가졌기 때문 에. 바꿔 말하면, 나는 생각한다 어떤 것을, 그러므로 나는 있다. 그런데 내가 무언가를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나는 또 한 가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알게 된다. 나는 존재하며, 나의 생각으로서 생각도 역시 존재하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동물인 날개 달린 말 페가소스를 생각 할 수 있고, 반인반마의 괴물 켄타우로스를 생각할 수 있고, 오늘날에 와서는 월트 디즈니 만화에 등장하는 상상 속의 동물들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다. 나는 비록 이 동물들이 꾸 며낸 것이고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있지만, 분명히 그것들을 생각할 수 있다. 나 는 구피와 미키마우스를 구분할 수 있다. 구피는 구피고, 미키마우스가 아니다. 이것을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a는 a이고, b가 아니다. 사고를 위해 필요한 규칙 a는 a이고, b가 아니다. 이 말을 의심할 이는 없을 것이다. 나는 또 저 앞의 그림은 구피 이거나 구피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a이거나 a가 아니거나, 둘 중하나이다. a도 아니요, a가 아닌 것도 아닌 제3의 것은 있을 수 없다. a는 a이다. 아무도 이 말이 옳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a라고 말할 때 나는 a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만일 a를 말하면서 a가 아닌 b를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은 나를 이해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내가 a를 말하지만 a가 아닌 것을 생각한다고 의 심하거나, 혹은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면, 그는 나에게 무슨 일이냐고,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냐고 물을 것이다. 이렇게 서로 말할 수 있기 위해, 다시 말해서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위해 필요한 전 제조건을 철학에서는 '동일성의 공리'라고 부른다. '공리(Axiom)'란 말에는 '요구'의 뜻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동일성에 대한 요구를 지키지 않는 사람의 말은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다. 그러한 공리, 즉 요구를 세 가지로 들 수 있다. 방금 이야기 했던 대로. 1) 첫째는 동일성의 공리이다.(동일률) a는 a이다. 내가 a를 말할 때, 나는 역시 a를 생각한다. 2) 둘째는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공리이다. (모순율) a는 a아닌 것이 아니다. 내가 a는 a인 동시에 a가 아니다라고 상반된 주장을 하면 대화 상대방은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a를 생각하는지 a아닌 것을 생각하는지 의문을 갖게 된 다. 이 둘은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모순이다. 3) 셋째는 3자 배제의 공리이다. (배중률) 나는 a가 있다거나 또는 a아닌 것이 있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 a와 a 아닌 것 사이에 제3 의 것을 주장할 수 없다. a가 아닌 모든 것은 a 아닌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은 b일 수도 있 고 c나 d, 그밖의 것일 수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은 통틀어서 a 아닌 것이다. 이들은 사물에 대해 말할 때 지켜야 할 조건이기 때문에 공리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1) 내가 말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나는 이 규칙들을 지켜야 한다. 2) 내가 어떤 사물을 생각할 때, 그것이 동화 속의 존재처럼 비현실적인 것이든 실제의 생물처럼 현실적이든, 또 그 어떤 임의의 대상들이든간에 나는 그 모든 것을 오직 이 법칙 에 따라서만 생각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공리는 실제 사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상상의 사물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이 것은 중요한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은 낱낱의 사물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을 인 식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물들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우리가 사물과 교류함으로써 생겨난다. 우리는 이 세계를 공간적으로 경험하는데, 이 말은 곧 우리 자신이 공간적인 세계 안에 일정한 위 치를 차지하고 있는 생명체라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기저기 다른 장소에 동시에 있을 수 없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곳과 다른 곳에 있다고 상상할 수는 있지만, 그건 다른 의미이다. 한정된 몸을 가진 우리가 동시에 다른 두 장소에 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결론을 내리면, 우리는 어떤 대상을 생각하든지 그 대상을 공간적으로 생각해야 하 고, 또 시간에 의해 정해진 것으로서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 로 이 시점에 일정한 장소에 있는 어떤 대상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 시점이 바로 현재이며, 우리는 이 시점을 '지금'이라 일컫기도 한다. 지금 A라는 점에 있는 대상은 시간이 경과하 면서 B라는 점으로 움직여 간다. 그리하여 대상이 B점에 도달하면 이제 그것은 더 이상 A 점에 있지 않다. 세계를 생각하기 위한 필수 전제들 우리가 현존하는 모든 것을 공간적, 시간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들 자신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손으로 발을 잡아 보자. 그때 우리는 우리 몸의 일부로써 몸의 다른 일부를 느낄 수 있고, 동시에 우리가 하는 행동을 볼 수 있으며, 발이 어디에 있 는지도 알게 된다. 하지만 눈을 감는다고 해도 우리는 발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안다. 우리 가 그것을 보지 못해도 손은 발을 찾아낼 수 있다. 인식의 출발점:인간 우리 자신의 몸에 대한 인식, 그것이 모든 인식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또한 우리 몸의 바 깥에 존재하는 물체들을 조사하는데, 이때 우리는 촉각과 감각기관들을 이용하여 외부 세계 를 파악한다. 갓난아이는 작은 나뭇조각을 손으로 잡아 보고 입에 대고 핥거나 바라봄으로 써 나뭇조각이 어떤 것이라는 표상을 가질 수 있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표상은 그렇게 형 성된다. 우리는 항상 갓난아이로 머물지 않으며, 걷고 달리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래서 우 리는 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경험할 수 있는 만큼 이 세계에 대해 배울 수 있다. 실제로 아주 옛날에는 지리에 대한 인간의 지식이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 들은 지중해와 그들이 교역했던 인접국가들만 알고 있었다. 그들은 땅을 평평한 판으로 생 각했고 그 위로 천궁이, 즉 하늘이 둥글게 솟아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태양은 이 둥근 천장 을 따라 움직이면서 아침에는 동쪽에서 솟아오르고, 저녁에는 서쪽으로 진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 보는 것 그대로이다. 밤에 보이는 별들은 분명히 해가 지고 난 후 어둠을 밝혀 주는 작은 빛들이다. 그런데 자세히 관찰하면 우리는 별들이 박혀 있는 이 천 궁도 역시 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먼저 매일 아침 떠오르는 태 양이 똑같은 태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태양빛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눈으로 분 명하게 관찰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달을 볼 때, 초승달, 반달, 보름달로 그 형태는 달라지지만 얼룩덜룩한 점들이 변하지 않음을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달이 언제나 똑같은 천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매일 아침 동쪽에서 뜨고 매일 저녁 서쪽으로 지는 태양이 항상 똑같은 것임을 확신하게 되자, 이제는 자연스럽게 어떻게 태양이 밤사이에 반대편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지 의문 을 품게 되었다. 태양이 하늘을 가로질러 되돌아간다면 틀림없이 보였을 테니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태양이 땅 밑을 지나가는 수밖에 없다. 태양이 이른바 지하 세계를 가로질러 가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평평한 판으로 된 땅이 공간 속에 떠 있고, 태양 은 이 판을 도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면 태양이 한 번은 이 판의 위쪽을 비추고 또 한 번은 아래쪽을 비추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이 고대인들이 설명했던 가능성들이 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러한 설명들 모두가 온당하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어째서 사람들은 그렇게 잘못된 설명을 하였을까? 옛날 사람들이 어리석었기 때문일까? 그건 아니다! 세계에 대해 그릇된 표상을 갖는 것은 절대로 어리석음의 표시가 아니다. 그 것은 다만 무지의 표시일 뿐이다. 명석한 두뇌를 가진 사람이 그릇된 이론을 제기할 수 있다. 만일 내가 땅으로부터 달의 위치만큼 멀리 떨어져서 지구를 관찰할 수 있다면, 지구가 공처럼 둥글다고 말하는 것은 아 주 간단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지상의 일부만을 알 뿐인 내가, 날지도 못하기 때문에 땅이 구부러진 것을 본 적도 없는 내가, 빈약한 관찰자료들만 가지고 심사숙고와 추론을 통해서 지구가 공처럼 둥글다는 인식을 얻게 된다면, 그것은 엄청난 지적 노력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성과를 이미 고대 그리스인들은 실제로 이룩해 냈다. 예컨대 기원전 3세기 에 살았던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의 크기를 비교적 정확하게 계산해 내었다. 다음장에서 나는 고대 이래로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세계의 크기에 대한 표상을 차차 발 전시켜 왔는가를 기술하려고 한다. 여기서는 인간들이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일관되게 사고 해 왔으며, 그로 인하여 세계에 대한 견해들을 계속해서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도 밝혀지게 될 것이다. 4. 세계상의 발전 우리들 인간의 사고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기 위해서는 에라코스테네스가 지구의 크기 를 계산한 방법을 되새겨보는 일이 필요하다. 우선 나는 그리스인들이 수학과 기하학을 열 심히 연구했었다는 사실을 말해야겠다. 그들은 특히 삼각형에 있어서 길이와 크기의 비례를 연구하였는데, 이것은 좋은 효과가 있었다. 삼각형에서 한 변의 길이와 양끝 각의 크기를 아 면, 다음과 같이 삼각형 전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내가 선분 AB를 알고 각 A와 각 B를 알면, C의 위치를 결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제 지구가 평평한 판이라 가정해 보자. 이 경우에는 나는 판 위에서 두 점 사이의 선분 AB의 길이를 알 수 있고, 그와 함께 A와 B의 가 지점에서 태양이 보이는 각도의 크기도 알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나는 태양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다 음 그림과 같다. 하지만 태양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안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태양이 지구 위 A지점에서 정점에 떠 있을 때, 다시 말해서 태양이 똑바로 위에 와서 수 직으로 빛을 내려 그림자가 생기지 않을 때, B지점에서는 태양으로부터 수직 광선을 받을 수 없고 약간 경사진 빛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이 각도 차이를 이용하여 나는 지구의 둘레 를 계산해 낼 수 있다. 이 각도와 전체 원의 비율은, A지점과 B지점 사이 거리와 전체 지구 둘레의 비율과 같기 때문이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상당히 정확하게 남북 방향으로 떨어져 있는 두 지역, 알렉산드리아와 이집트의 아스완에서 태양의 그림자를 각각 측정하고, 기하학의 원리를 이용하여 지구의 둘 레를 거의 정확하게 계산하였다. 그가 계산한 지구 둘레는 실제 크기보다 겨우 3백 킬로미 터 정도 작았을 뿐이다. 전체가 4만 킬로미터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오차는 1%에도 미치 지 않았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지혜로운 숙고를 통해서 지구가 공같이 둥글다는 결론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면 천문학은 어떻게 전개되며 발전하였을까? 우리는 태양이 동쪽 지평선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지는 것을 본다. 그러니까 우리는 일단 관찰에 의해 경험한 이 운동을 실제의 운 동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지구가 움직이고 있음을 느낄 수 없으니까 더욱 그렇다. 지구의 자전 때문에 어지럼증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 이러한 자연의 경험에서 출발하여 사람들은 먼저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으며, 달이나 별들도 그렇게 돌고 있다고 추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천동설이라 하는데, 이 이론은 아주 오랜 세월 그 타당성을 인정받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라는 이름으로 역사 속에 들어온 이 이론은, 16세기에 외서야 천문학자인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의심을 받았고 지동설로 교체된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라는 명칭은, 천동설을 결정적인 형태로 이루어 냈 던 고대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이 체계가 그렇게 오 랜 세월 동안 인정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몇 가지 있 다. 1) 천동설은 해, 달, 별 들이 뜨고 지는 현상을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것과 어긋나지 않았 다. 2) 이 체계에 따르면, 천체가 미래에는 어떤 위치에 올지를 예견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계절과 해를 정확하게 구별하고자 했기 때문에 이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이를테면 계 절에 알맞게 밭을 갈고 씨를 뿌리기 위해서 절기를 결정하는 것은 농사를 위해서 필수적이 었다. 3) 지구 중심체계가 나중에 그리스도교와 아주 긴밀하게 결합될 수 있었던 것도 한 이유 였다. 그리스도교는 세계 역사를 원죄와 심판, 구원으로 이어지는 한 편의 연극처럼 해석한 다.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은 인간을 돕기 위해서 특별히 그 아들을 세상에 보냈는데, 이 것은 지구가 연극무대로서 세상의 중심에 있을 때에만 적합한 이야기이다. 이런 까닭에 그 리스도교 교회는 오랜 세월 동안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배척하였다. 이제 첫 번째와 두 번째로 든 이유들을 좀더 자세히 생각해보도록 하자. 이 두 가지는 지 식의 근원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우리의 목표를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연구자는 탐정이다. 나의 감각을 통해 정확한 정보를 직접 얻을 수 없다면, 나는 이제 탐정처럼 곰곰히 생각 해서 올바른 견해를 추리해야 한다. 탐정은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서 즉시 해답을 발견하지 는 못하지만 남아 있는 흔적들을 올바르게 해석함으로써 답을 찾아낸다. 우리가 탐정소설에 서 알고 있듯이 이때에도 많은 흔적들은 탐정을 오류로 이끌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흔적이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구의 움직임을 감각에 의해 분명하게 알 수 없다면 나는 탐정이 하는 것처럼 간접 증거들을 가지고 지구의 운동을 추리해야 한다. 탐정소설을 보면, 범죄나 그밖의 어떤 아리송한 일이 발생했을 때 탐정이 등장한다. 탐정 은 이 사건을 외곽에서부터 접근해 간다. 제일 먼저 그는 피상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엇인가가 이미 발생했다는 것을 안다. 그는 이제 남아 있는 흔적들만 가지고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재구성하여 범인을 찾아내야 한다. 사람들이 세계를 인식하고자 할 때의 상황도 그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세계가 창조 될 때, 혹은 생성될 때 사람들은 거기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어느 행성 위에 살면서, 우리들의 지구를 포함해서 과연 어떤 천체들이 움직이는가를 밝혀내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직접 보는 현상에 대하여 처음부터 바르게 설명할 수 없었던 사실에 대해서 간 단한 해명이 필요하겠다. 그것은 우리가 너무 어리석기 때문에, 우리의 감각이 못 믿을 것이 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재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천동설을 옹호했던 두 번째 이유인 예측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실생활에 중요 한 일이었다. 1년은 365일과 4분의 1일로 되어 있다. 우리는 날수를 일일이 세어 봄으로써 그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그 셈을 어떻게 할까? 한 해는 언제 시작될까? 만일 1년 중의 모든 날들이 똑같았다면 시작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날들은 낮이 더 길고, 어떤 날들은 낮이 더 짧다. 그러니까 우리는 가장 짧은 날을 기준으로 하여 셈을 시작 할 수도 있고, 가장 긴 날부터 시작할 수도 있으며, 아니면 1년 중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시점에서 시작할 수도 있다. 어쨌든 시작을 결정하려면 나는 태양이 움직여 가는 경로를 추적해야 하고, 그것을 정확 하게 관찰하고 측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하나의 막대기를 세워 놓고 계절마다 달라지는 그 림자의 길이들을 측정한다면, 나는 태양의 위치를 정할 수 있다. 한 해의 길이와 연속되는 계절들을 결정할 수 있으면, 다리 어떻게 변하는지를 관찰하고 달과 태양의 위치 변화에 주의하면, 그리고 이러한 위치 변화를 초승달에서 반달로 보름달 로 커졌다가 다시 사그라지는 달의 규칙적인 형태 변화와 관련지어 본다면, 그렇게 이 모든 현상들을 관찰하고 숙고한다면, 나는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달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보이는 달의 형태는, 지구 와 태양 사이에서 달이 어떤 위치에 오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천체의 운동에 대해 바르게 이해할 때 일식 같은 현상도 예측할 수 있다. 실제로 기원전 585년에 밀레투스의 탈레스는 그렇게 했다. 일식이 당연한 우주와 현상임을 알면 사람들은 크게 안심할 수 있다. 이제는 신이 화가 나서 갑자기 사람들에게 태양을 앗아갔다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천문학의 참된 관계들을 아는 것은 이렇게 실제적 삶에 영향을 미친다. 천문학적 지식이 인간에게 결과를 남기지 않는 일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속적인 천문학 연구를 통해서 더 많은 지식을 얻으려고 한다. 틀렸지만 영리한 이론 지구를 중심에 두는 지구 중심체계가 참된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은, 그것을 반박할 만한 경험을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천동설은 매우 복잡한 천체의 운동을 이론적으로 구성 했고, 이로써 떠돌이별이라고도 불렀던 행성들의 불규칙적인 움직임들을 설명할 수 있었다. 놀이공원에서 볼 수 있는 회전목마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생각해야 할 회전목마는 단순 한 것이 아니라 개발된 것이다. 사람들은 목마에 탄 채 원형으로만 도는 것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회전하는 원판의 가장자리를 중심으로 하여 원을 그리면서 돈다. 이런 구조로 인해 목마의 움직임이 불규칙해져서 그 속도가 빨라졌다 느려졌다 하는 것이다. 그래서 뱃속에서 는 메스꺼운 느낌이 생기는데 회전목마를 타는 사람은 바로 이 느낌을 아주 좋아한다. 공중 에서 내려다보면, 이 놀이기구의 기계 작동으로 야기되는 독특한 움직임은 다음 그림처럼 보일 것이다. 이러한 방법에 따라서 원운동들을 모두 연결하면 매우 특이한 회전운동이 그려질 수 있 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는, 관찰된 행성들의 궤도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원을 연결 한 회전운동의 모델이 80개 이상 필요했다. 태양 중심체계 16세기에 와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는 태양 중심체계를 새롭게 주장했고, 이 이론으로 그가 남기 영향은 훗날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이라 불리게 되었다. 사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지구가 움직인다고 믿는 것, 더구나 스스로 돌면서 동시에 태양 주위를 돈다고 믿는 것은 정말 엄청난 일이었다. 인간의 감각으로는 그 점에 대해서 아무것 도 인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리스도교 역시 사람들에게 다른 사실을 가르쳤다. 그리스도교에서 세계 역사는 지상에서 일어나며, 하나님은 그 아들을 지상으로 보냈다. 해, 달, 별 들은 마땅히 이 거대한 세계 무대를 비추는 배경이어야 하는데, 이들이 지구와 같은 천체이며 더 나아가 지구보다 더 크고 지구는 오히려 작아서 전체 우주 안에서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신앙의 진실마저도 의식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종교는, 다시 말해서 교회제도는 이런 문 제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로마 교회는 신도들이 코페르니쿠스 학설을 참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금지하였다.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지동설을 주장한 학자들의 생각이 옳았고, 종교관계자들이 그릇되었 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16,7세기에는 그것이 그렇게 간단히 결정될 일이 아니었다. 지구 중심체계의 옹호자들이 모두 고루하거나 무조건 꽉 막힌 사람들이었던 것도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견해의 근거를 설명하려 했고, 또 반대자들의 견해 속에서 합당하지 않은 것과 오 류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영리한 이의제기 새로운 이론의 문제는 이런 것이었다. 만일 태양이 세계의 중심에 있고 지구가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면, 지구는 별들이 붙어 있는 둥근 천궁의 주변에 서 움직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별들이 때로는 가깝고 크게, 때로는 멀리 작게 보여야만 한다. 그리고 이런 차이를 뚜렷하게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림에서와 같이 실제로 지구가 움직인다면, 태양의 주위를 반 바퀴 돈 후에는 그 전에 가까웠던 별들이 작게 보이고, 또 멀었던 별들이 크게 보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변화를 관찰할 수는 없었다. 항성들은 어떤 계절에도 변함없이 작게 보였던 것이다. 이로써 천동설의 옹호자들은 지구가 중심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고 반박하는 결론을 내렸다. 조르다노 부루노 이에 대해 당시의 유명한 철학자였던 조르다노 부루노는 간단히 이렇게 주장하였다. 항성 들은 무한히 멀리 떨어져 있고, 작은 빛들이 아니라 태양과 같은 천체들이며, 게다가 우리의 세계와 비슷한 다른 세계들이 무수히 많이 있다. 그의 주장은 단번에 세계에 대한 새로운 표상들을 열어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적대자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의 시각에 서는 조르다노 브루노가 원칙적으로 분명히 옳았다고 해야 한다. 가장 가깝게 보이는 항성 도 우리들로부터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조르다노 브루노 시대에는 별들의 거리를 측정할 수 없었다. 따라서 무한 거리에 대한 그 의 주장은, 지동설의 명제가 반박당하는 것을 막아 보려는 변명으로만 여겨졌다. 브루노는 슬픈 운명을 맞았다. 로마 교회는 그를 체포했고, 그릇된 교리를 퍼뜨린 죄로 재판에 회부된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끝내 주장을 번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1600년 공개 화형에 처해 지고 말았다. 세계의 크기에 대한 표상의 발전 사실 조르다노 브루노는 옳았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항성들, 태양계의 행성들이 아니라 태양과 유사하게 스스로 빛을 발하는 별들 중에 가장 가까운 것들도 우리와는 어마어마하게 멀리 떨어져 있다. 따라서 그 거리는 매우 면밀하게 측정되어야 했다. 우리는 기하학의 원리 를 이용하여 거리를 잴 수 있다는 사실을 오래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기하학(독일어 로 Geometrie)'이라는 낱말은, '지구를 잰다(독일어로 Erdmessung)'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는 일정한 구간의 양끝점에서 대상을 겨냥할 수 있으면, 그 대상까지의 거리를 잴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우주 안의 거리 천문학자들은 지구와 별들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는 데 이 지식을 이용했다. 그러나 우주 공간의 엄청난 거리를 측정하기 위해서 쓸 만한 기본선(AB 구간)을 정하기에는 지상에서의 거리가 너무 짧았다. 그래서 천문학자들은 지구 공전궤도의 지름을 기본선으로 잡았다. 지구 는 태양으로부터 1억 5천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므로 공전궤도의 지름은 그 배가 된다. 이 때 지구의 태양 공전궤도가 정확하게 원형을 이루지 않는다는 사실은 무시해도 된다. 이렇 게 얻어진 3억 킬로미터를 기본선으로 하여 목표가 된 별을 향한 각도를 실제로 잴 수 있었 다. 그러나 그 각도는 아주 작았으며, 다음의 그림처럼 확실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는 원을 360도로 나누고, 1도를 다시 60분으로 나누고, 1분을 또다시 60등분하여 60초로 나 눈다. 그러므로 1초각의 크기는 1/3600각도이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항성을 목표로 하여 측량한 각도는 1초를 겨우 넘는 정도였다. 이런 방법으로 4광년 이상이라는 거리를 계산해 낼 수 있었다. 1광년은 빛이 1년 동안 가 는 거리를 말하는데, 그것은 9조 킬로미터를 넘는다. 정확하게 9조 4천6백억 킬로미터이다. 그러한 숫자가 얼마만한 크기인지는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거리를 더 작 은 기준으로 바꾸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1백만 킬로미터를 1센티미터 비율로 놓고 보자. 그러면 태양은 지름이 1.4센티미터인 공이 되고, 모래알 크기 정도의 지구는 태양으로부터 1.5미터(=1억 5천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할 것이다. 태양계에서 가장 큰 행성인 목성은 약 8미터 거리에, 가장 먼 행성인 명왕성 은 약 60미터 거리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기준으로 보면,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항성은 무려 4백 킬로미터 바깥에 있게 되 는 셈이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거리는 고대에도 중세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가장 가까운 행성의 거리가 그 정도이지 그밖의 다른 별들은 모두 훨씬 더 먼 거리에 있 다. 과학자들은 다른 별들의 거리도 측정할 수 있었다. 기하학의 방법을 이용하면 약 50광년 까지의 거리를 잴 수 있다. 그 이상의 거리를 이 방법으로 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극히 미세 한 각도를 그 이상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하학의 한계를 넘어선 측정 다행스럽게도 이렇게 먼 별들의 거리를 측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방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거리를 측량할 수 있었던 별들 사이에서 중요한 차이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것 은 별들의 크기가 모두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항성들의 크기를 비교하면 우리의 태양은 오 히려 작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항성들 중에는 태양보다 1백 배, 1천 배 더 큰 것들도 있 다. 또 별들은 그 크기에 따라서 빛을 발하는 양성도 각기 다르다. 어떤 별들은 푸른빛이 감 도는 흰색을 내고, 어떤 별들은 노란빛을, 또 다른 별들은 붉은빛을 내기도 한다. 깜박거리 는 별도 많은데, 이는 별들이 일정한 리듬에 따라서 때로는 더 강하게 때로는 더 약하게 빛 을 낸다는 표시이다. 학자들은 별의 크기와 별이 발산하는 빛의 색깔간의 관계를 확정할 수 있었다. 이로써 모 든 별들의 크기를 제시하고 그 거리를 규정할 수 있었다.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서 광원의 밝기가 어느 정도로 약해지는지 간단한 물리공식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은하계 이러한 일반적 지식의 도움으로 천문학자들은 각 별들마다 거리를 규정할 수 있었다. 이 때 그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는데, 수천 광년이나 멀리 떨어진 별들이 존재한다는 사 실이었다. 우리의 태양을 포함하여 이 별들은 일종의 불바퀴 모양, 혹은 엄청난 규모의 소용 돌이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수십억 개의 별들로 이루어진 회전하는 판이다. 이 판의 지름은 거의 10만 광년에 달한다. 그래, 우주란 참 크기도 하구나! 이 대목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놀라기에 아 직 이르다!! 이 정도는 겨우 시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모양 때문에 '나선 은하(성운)'라 고도 불리는 그러한 불바퀴들은 우주 안에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망원경의 성능이 그리 좋지 않았던 18,9세기에 나선형 구조를 가진 이 은하의 모양은 우 유의 얼룩같이 부옇게 보였다. 저녁마다 텔레비전의 기상안내 방송에서 기상학자들이 우리 에게 보여 주는 소용돌이구름과 비슷한 모양이다. 우리가 속한 은하에 가장 가까이 있는 나선 은하는 안드로메다 은하이다. 그것은 1백만 내지 2백만 광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천문학자들은 점점 성능이 개선된 관측도구들, 이른바 천체 망원경을 가지고 계속해서 우 리에게서 더욱더 멀리 떨어진 새로운 은하들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관찰에서, 그들은 우윳빛 으로 흐르는 모습 때문에 '은하'라고 일컬었던 나선 은하들이 함께 모여 다시 커다란 덩어 리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세계는 얼마나 큰가? 관측도구들이 더 좋아질수록 우리는 이 우주를 더욱 멀리까지 관측할 수 있었다. 이와 함 께 우리는 계속해서 더 멀리 떨어져 있는 항성계들은 발견하게 되었고, 여태까지도 그 끝에 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러한 관찰에서 깨닫게 된 사실이 있었다. 별이 우리에게 보내는 빛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별의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그 빛이 변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별이 멀어질수록 그 빛은 단지 약해질 뿐만 아니라, 동시에 더 붉은 색을 띠게 된다. (이러한 현 상을 적색 이동이라 한다.) 이렇게 간단한 확인을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훨씬 더 내용이 복잡해지지만, 구태여 거기에 구애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다만 과학자들이 그로부터 이끌어 낸 결론이다. 과학자들은 빛의 색감의 변화가 멀리 떨어져 있는 항성계들 이 우리들로부터 계속해서 멀어지고 있는 징후라고 주장하였다. 별들은 우리에게서 더 멀리 떨어질수록 더욱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서 우리들로부터 계속 멀어져 간다. 이러한 사실로부 터 과학자들은 우리의 우주가 탄약처럼 폭발하고 있다고 추론하였다. 우리 인간들은 우리가 저지른 수많은 전쟁들 덕분에 폭발하는 탄약이나 폭탄 등에 대해서는 참으로 많은 경험을 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아주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작은 언제였을까? 빛의 적색 이동이 올바르게 설명된 것이라면, 이제 중요한 문제가 하나 떠오른다. 우주의 폭발이 시작된 때는 언제일까? 과학자들은 이 폭발의 시점을 계산하려고 시도하였다. 만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파편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또 그것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폭발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지를 안다면 이 계산도 가능할 것이다. 그것을 찾아내기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망원경이 좋아질수록 우리는 더 멀리 볼 수 있고, 계속해서 또 다른 항성들과 항성계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우주는 계속 커지고 동시에 계속 늙어가고 있는 셈이다. 이 모든 사실은 "우리가 언제 세계의 끝에 이를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새로 발견되는 항성계는 우리가 더 멀리 떨어진 항 성계를 발견할 때까지는 가장 멀리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항성계가 가장 마지막에 있 는 항성계일까? 우리는 아직 모른다! 또한 우리는 이렇게 폭발하는 '탄약' 속에서 지구의 위치가 어디쯤 되는지도 알지 못한다. 지구의 위치는 우주의 중심일 수도 있고, 그 언저리 일 수도 있다. 우리는 항성계들이 우리로부터 사방으로 움직이면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것을 볼 때 우리가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폭발의 중심에 있지 않을 경우에도 우리로부터 '은하수가 달아나는'듯한 인상을 똑같이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폭발이라는 것은 모든 부분들이 서로 멀어지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어 쨌든 우리의 지구가 우주의 중심과 언저리 사이 그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 다. 우주 안에서 우리의 위치는 어디일까? 몇 개의 그림을 이용하여 이 답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이제 세 가지 가능성을 조 사하게 될 것이다. 첫째는 우리가 중심일 가능성이고, 둘째는 우리가 주변에 있을 가능성, 셋째는 지구가 중심과 언저리 사이에 있을 가능성이다. 1) 우리가 중심에 있다. 그러면 우리의 위치를 이렇게 그릴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의 관측도구들을 사용하여 어느 정도까지는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우 리가 관찰할 수 있는 한계와 우주 전체의 한계 사이가 얼마만큼 차이가 나는지는 알지 못한 다. 이런 경우를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 개연성은 매우 희박하다. 우리는 오래 전에 지구가 세계의 중심이며, 모든 별들은 인간의 삶을 위해 의미를 가진다고 믿은 적이 있었다. 오늘날 에도 실제 크기들의 비례를 알고, 다른 별들과의 거리를 알게됨으로써 우리는 이런 주장에 대해 신중해졌다. 2) 우리가 우주의 언저리에 있다. 그러면 우리의 위치는 이렇게 그려질 것이다. 이런 경우라면 우리는 점A와 점B, 점C가 이루는 영역에서는 텅 빈 공간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또 점A, 점B, 점C를 가지고 기하학의 방 법을 이용하여 지구의 위치를 규정할 수도 있고, 우주 전체의 크기도 해명할 수 있을 것이 다. 뿐만 아니라 우주가 처음 폭발한 시점도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분명히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든 방향으로 똑같이 먼 우주를 들여다보며, 모든 방향으로 우리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항성계를 볼 수 있다. 3) 그러므로 우리는 우주의 중심과 언저리 사이 어딘가에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새로운 발견이 있을 때마다 매번 우주가 더 크다는 것과, 더 나이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상황이다. 30여 년 전 내가 아직 학생이었을 때 '원자-그 최종 적 이해'라는 제목의 책을 선물 받은 적이 있는데, 나는 그 책에서 15억 년 전에 '케른브라 이(Kernbrei)'라고 하는 매우 큰 덩어리의 폭발로 인해 우주가 탄생했다고 읽었다. 서른 살 을 더 먹은 지금에 와서, 우주의 나이는 1백억 년 이상이 되었다. 물론 우주가 그 사이에 그 렇게 늙어 버린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는 우주의 나이를 1백억 년에서 2백억 년 사이로 추 정하고 있다. 계속해서 더 멀리 있는 별이 발견된다면, 이렇게 정확하지 않은 수치는 날마다 더 높게 수정될 수 있다. 경험을 통한 지식은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이는 과학자들의 지식이 궁극적인 것이 아님을 뜻한다. 그들의 지식은 모두 일시적인 것 이다. 과학자들의 행동은 언뜻 콜럼버스를 상기하게 한다. 1492년 콜럼버스가 세 척의 배를 이끌고 스페인에서 출발하여 드넓은 대양을 지나 서쪽으로 항해하였을 때, 그는 중국 황제 에서 보내는 신임장을 지참하고 있었다. 그가 계산한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거리는 완전히 오류였는데, 그는 그 거리를 너무 짧게 잡았던 것이다. 물론 그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미 지의 대륙이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항해를 해나가는 동안, 그는 자신의 예상치를 계속 해서 바꿔야 했다. 매일 저녁이면, 그는 분명히 "아시아가 생각 했던 것보다 조금 더 멀리 있구나!"라고 중얼거렸을 것이다. 긴 항해에 지친 선원들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을까 두려워 한 나머지 그는 두 권의 일기를 썼다. 그는 노골적인 속임수를 써서 공식적인 항해일지에는 실제 항해거리보다 훨씬 적은 수치를 기입하였고, 실제 항해거리는 또 하나의 비밀일기에 몰래 기록하였다. 마침내 뭍으로 올라섰을 때, 콜럼버스는 확고부동하게 자신이 드디어 아시아에 도착했다 고 믿었다. 하지만 중국 황제에게 보내는 신임장은 결코 전할 수 없었다. 오늘의 천문학과 콜럼버스의 문제 학자가 아닌 우리는 어쩌면 오늘날의 과학자에게, 의심의 여지없이 우주의 끝에 이를 때 까지는 세계의 크기에 대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제안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과학자가 이 글을 읽게 되면 노발대발하여 내게 항의를 해올지도 모르겠다. 모든 내용이 실 제로는 훨씬 더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는데, 내가 터무니없이 단순화시켜서 과학자들의 주장 들을 왜곡하였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사실 나는 과학자들이 이론으로 제기한 내용을 모두 다 설명하지는 않았고, 다만 우리가 사고를 진행시키는 데 중요한 것만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나는 많은 것을 생략하 였는데, 이를테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그의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나 는 이제 그것을 보완하려 한다. 상대성 이론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으로 우리가 위대한 자연과학자 이사악 뉴턴 이후로 가지고 있 었던 현실에 대한 전체 표상을 뒤엎어 버렸다. 그의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에 대 한 새로운 표상이다.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시간은 우리에게 때로는 엄청나게 길 게, 때로는 엄청나게 짧게 여겨진다. 지루함을 느낄 때 우리는 시간이 너무 길다고 느낀다. 그래서 시간이 좀더 빨리 가기를 바라며, 어떻게 시간을 '죽일까' 생각하고, '시간을 때울 거리'을 찾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시간을 쏜살같이 빠르게 지나갈 수도 있다. 우리는 종 종 시간이 생각보다 훨씬 빨리 흐르는 것에 대해 놀란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라도 이같이 상반된 시간들을 체험할 수 있다 그밖에 사람들의 기질의 차이에서도 시간 체험의 차이가 나타난다. 어떤 사람들은 행동이 느리고 굼뜬 반면 민첩한 사람, 또 매사에 몹시 서두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므로 시간은 주관적인 것이며, 사람들이 그때그때 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 어떤 이가 짧아서 아쉽다고 생각하는 일은 다른 이는 따분하게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시계를 이용하여 객관적인 시간을 만들어 냈다. 모든 시계는 마땅히 같 은 속도로 가야 한다. 시계들이 똑같이 가지 않는다면, 최소한 그 중 하나는 틀린 것이다. 이렇게 늘 같은 속도로 흘러가는 객관적 시간은 우리의 체험과 관련 된 것이 아니라, 시계 추의 운동과 같은 물리적 현상과 관련이 있다. 아인슈타인 이전까지 과학자들은 우리의 시 계들이 우주 안의 모든 장소에서 똑같은 속도로 움직인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반해서 아인슈타인은 시계들이 서로 다른 속도로 가며, 그것은 운동에 의해 좌우된 다고 주장했다. 움직이는 시계는 움직이지 않는 시계보다 더 느리게 간다. 어떤 우주선이 엄 청난 속도로 지구를 떠나서 다른 별로 갔다가 다시 지구로 돌아온다면, 우주선에 탄 사람들 은 지상에 잇는 사람들보다 덜 늙는다. 그러므로 만일 우주인이 빛에 가까운 속도로 우주를 여행하고 돌아온다면 그는 자신은 얼 마 늙지도 않았는데 출발할 때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손주들이 노인이 된 것을 보게 될 터이다. 그것은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이지만 현재 우리는 아직 체험할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주선이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일 수 있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우리에 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도 결국은 그 어떤 물체라도 광속으로, 하물 며 그 이상으로 속도를 내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물체의 질량은 속도가 증가함 에 따라 늘어가기 때문에 그것은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어떤 물체가 광속을 가 졌다면 그 질량은 무한한 크기가 될 것이다. 이는 분명히 불가능한 일이므로 어떤 물체도 광속으로 우주를 통해 움직일 수는 없다. 질량이란 무엇일까? 무쇠로 만들어진 무겁고 커다란 공이 아주 높은 천장에 사슬로 묶인 채 매달려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 공을 건드리려면, 공을 드는 것도 아니고 약간 건드리려 고만 해도 큰 힘을 써야 한다. 반대로 작은 공이 그렇게 걸려 있다면 손가락으로 살짝 밀기 만 해도 공을 옆으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작은 공은 질량이 작은 것이고, 커다 란 공은 질량이 큰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물건들이 질량의 차이를 알고 있기 때 문에 그때그때마다 적절하게 행동할 수 있다. 종이비행기가 날아오면 충분히 잡을 수 있지 만, 달려오는 기차를 손으로 막아 세우려는 사람은 없다. 또 우리에게 고무공이 날아오면 손 으로 받아도 바윗덩어리가 날아오면 피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질량이다. 그러니까 질량이 속도와 함께 증가해서 마침내 무한한 크기가 된 다면, 우주선과 같은 물체를 광속으로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무한하게 큰 힘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상과학소설의 작가들은, 지구 의 우주비행사들이 안드로메다 은하에서의 모험을 가능케 할 수 있는 부차적인 이론들과 기 술적 발명들을 상상으로 만들어 내야 했다. 아인슈타인 이론에 의하면, 안드로메다 은하로 여행하려면 수백만 년이 걸리는데 그렇게 오래 살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세계로 돌아오도록 하자. 우리가 일상에서 체험하는 주관적 시간의 상대성이 아니라, 시계에 객관적 시간에 대한 상대성 이론은 우리가 생활하는 데 있어 지금까지는 아 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우리들 가운데서 그렇게 빠른 속도로, 우리의 지구에서와 다르게 우주에서 움직이면서 시간의 상대성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없다. 요약 사람들은 이 세계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며 세계상을 발전시켜 왔다. 그 상은 현재까지 완 결되지 않았다. 먼 옛날에 사람들은 세계가 지평선 뒤에서 끝난다고 생각했다. 세계는 둥글게 생긴 판이 라고 여겨졌다. 이러한 생각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는 둥근 공이라는 이론으로 대치되 었고, 이 생각은 다시금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인식에 의해 수정되었다. 붙박이별이 라고도 하는 항성들은 태양과 유사한 천체들이 확인되었다. 또 항성들이 지구로부터 엄청나 게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도 인식되었다. 더 나아가 항성들이 항성계로 모여서 은하계를 이 룬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은하계는 다시 다른 은하계들과 함께 새로운 상위체계를 이루고,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다. 우주에서 가장 큰 것, 가장 멀리 떨어진 은하계를 찾 아가는 가운데 우리는 앞으로도 분명히 계속해서 놀라운 사실들을 많이 체험하게 될 것이 다. 우리는 세계의 끝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우주 에 대해서 그 어떤 결정적인 것도 아직은 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