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 - 영원으로의 여행 지은이: 로제르 리슈탕베르 지음/이종인 옮김 출판사: (주)시공사 봉사자: 김기영 이집트를 여행한 옛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B.C. 5 세기의 저술에서 이 낯선 사람들은 "모든 풍습이 다른 나라와 다르다."고 썼다. 예를 들어 그리스 사람들은 시체를 화장한 반면, 이집트 사람들은 시체에 생명의 모습을 주려고 애썼 다. 이러한 저작들 덕분에, 이집트는 늘 미라의 땅으로 기억되어 왔다. 제 1장 미라의 부활 미라는 15세기에 나일강 유역을 탐험했던 최초의 유럽인들이 발견한 많은 경이 중 하나였 다. 여행자들이 조상, 부적, 그리고 시체가 든 관 등을 기념품으로 가지고 귀국하는 것이 하 나의 유행이 되었다 1605년 뒤카스텔이라는 프랑스인이 카이로에서 미라 한 구와 두 개의 석관을 사들였다. 수십 년 뒤 프랑스 시인 장 드라퐁텐은 예술애호가이며 부호인 니콜라 푸케의 집에서 그 미 라와 석관을 보고 이렇게 썼다. "케프렌 왕과 케오프스 왕비의 관 (혹은 무덤)이 이상한 나 라에서 이곳으로 황급히 운반되어 왔다. 상당한 노력과 경비가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 기에 언급된 왕과 왕비는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화가 루벤스도 미라를 한 구 가지고 있었 는데 많은 데생의 모델로 썼다고 한다. 16세기에 들어와서는 '무미야'로 알려진 파우더 바른 미라가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져 약 국의 선반에 등장하게 되었다. 미라의 매매는 많은 이익을 보장해 주는 사업이 되었고 그래 서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가짜 무미야까지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한편,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여 고대 이집트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이집트학을 정립시켰다. 179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대군을 결성하여 이집트를 침공했다. 군사작전은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원정대에 여러 부문의 전문가를 대동해 가겠다는 그의 생각은 멋진 결실을 맺었다. 이들 전문가는 이집트의 기념물, 동물, 식물 등에 대한 현지 자료를 수 집하여 1809년과 1822년 사이에 <<이집트지>>하는 책을 펴냈다. 1822년 파리에 있는 문학학술원의 종신서기인 앙드레 다시에에게 보낸 9월 27일자 편지에 서, 젊은 학자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그는 나폴레옹의 원정에 따라가지 않았다-은 자신이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했다고 선언했다. 샹폴리옹이 감행한 언어학적 돌파는 15세기 동 안 긴 침묵 속에 있던 파라오의 땅을 깨운다. 이집트학의 열풍에 휩싸인 유럽 고대 이집트에서 영감을 받은 모티브가 유럽의 장식예술, 건축, 내부장식 등에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공공 기관이나 개인의 소장품은 이집트 공예품의 수집으로 더욱 풍성해지게 되 었다. 이런 폭발적인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고대 유적에 대한 약탈이 더욱 심해졌고 미라와 석관은 정기적으로 유럽에 수송되었다. 그러나 모두 무사히 수송된 것은 아니다. 가령 제 4 왕조 파라오인 미케리누스의 석관은 영국으로 수송 도중 지중해에 수장되고 말았다. 방대한 이집트 고대 유물이 개인 수장가들의 기증으로 여러 박물관에 집결되었다. 한편, 미라의 해 외반출은 미미한 정도에 그쳤지만, 이집트에 남아있던 것들은 도굴군들의 노략질에서 무사 하지 못했다. 고대의 선조들이 하찮게 여겼던 보석과 부적만을 안중에 두었던 도굴꾼들은 미라를 분해해 버리거나 심할 경우 아예 박살을 내버렸다. 동물의 시체 또한 약탈의 대상이 되었는데, 19세기 동안 영국 한 나라가 비료를 제조할 목적으로 수입해 간 고양이 미라가 수백 톤에 달할 정도였다. 당초에 미라는 호기심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과학적 관심의 대 상이 되었다. 19세기에는 미라의 붕대를 해체하는 공식 집회도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유일한 관심사는 귀중품 수거에 있었다. 미라에 대해 간략한 보고서가 작성되는 경우도 있 었지만, 이것도 단지 그런 모임에 과학적 신뢰성을 주려는 겉치레에 불과했다.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유명한 사람들의 시체를 직접 보고 만지면서... 나는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이집트 고대유물관리국 국장으로 일했던 가스통 마스페로는 이렇게 썼다. "이름없는 왕 한 둘을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랍인들은 왕들의 시체가 가득 들어 있 는 커다란 방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유명한 왕들이었다!" 데이르엘바하리의 한 동 굴 속에서 마스페로는 신왕국(B.C. 1550~1085년)의 가장 유명한 파라오 아모시스 1세, 투트 모시스 1, 2, 3세, 아메노피스 1세, 람세스 2, 3세, 그리고 세티 1세 등의 미라를 발견했다. 게다가 그들의 왕비-네페르타리, 아호테프 등-와 수많은 왕자와 왕녀, 주요 대신들의 미라 도 함께 발견했다. 이런 놀라운 발굴은 현지 경찰의 수사와 환상적인 보물찾기의 결합이 낳 은 결과였다. 이 역사적 발굴이 있기 이미 10년 전부터 고대 유뮬 시장에 왕의 부장품이 자 꾸만 흘러 나와 현지 고고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마스페로는 룩소스로 내려가 조사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왕들의 계곡 근처인 구르나 마을에 사는 압델라술 삼형제를 용의자로 지목하게 되었다. 그 형제 중 한명이 마침내 도굴 부장품을 밀매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그 리고 1881년 7월 5일, 동굴의 위치를 밝혔다. 그곳은 암벽에서 60cm 위로 올라간 곳의 갈라 진 틈새 안에 있었다. 마스페로와 동료 고고학자들은 그 유명한 파라오의 미라들을 평범한 미라들처럼 처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데이르엘바하리 동굴에 있는 모든 유물을 카이로 근처에 있는 불라크 박물관으로 통째 옮기기로 결정했다. 마스페로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 다. "증기선은 유물을 싣고 불라크로 출발했다. 그때 나일강의 양쪽 강둑에서 머리를 풀어헤 친 농촌 여자들이 울부짖으며 배를 따라왔고, 남자들은 마치 장례식에서처럼 총을 쏘아댔 다." 유물을 싣고 카이로에 도착한 고고학자들은 건어물로 분류된 미라들에 대해 관세를 지 불해야 했다. 1898년 고고학자 빅토르 로레가 나일강 서쪽 둑, 왕들의 계곡에서 아메노피스 왕릉을 발견했다. 파라오는 아직도 관속에 들어 있었다. 이것은 왕의 미라가 고스란히 보존된 채로 발굴된 최초의 왕릉이었다. 파라오의 미라 옆 에는 파라오만이 잡아당길 수 잇는 활이 부장되어 있었다. 그 왕릉에서는 신왕국의 다른 여 덟 파라오의 미라도 함께 발견되었다. 다른 미라는 카이로로 옮겨졌으나 아메노피스(재위, B.C. 1421~1401년)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그는 짧은 안식을 누렸을 뿐이다. 왕 릉에 보물이 들어 있다는 소문에 쫙 퍼지자 무장 보초가 서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도굴꾼들 이 몰려와 약탈을 자행했고 파라오의 미라는 조각나 버렸다. 그 뒤 사건을 조사해 본 결과, 보초들도 그 약탈에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왕릉과 매장지에 대한 고고학적 탐사는 점점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되어갔다. 20세기 초 사카라에 있는 왕들의 계곡, 아비도스, 누비아 등의 대규모 매장지와 이보다는 덜 중요한 매장지가 모두 발굴되었다. 이러한 발굴로 많은 유물과 인간 및 동물의 시체들이 빛을 보게 되었다. 역시 20세기 초에 해골에 대한 최초의 인류학적 연구가 행해졌다. 1896년부터 미라에 사 용되기 시작한 엑스레이는 1930년대까지는 이렇다 할 결과는 내놓지 못했다. 또 왕이나 다 른 중요 인물이 아닌 미라들은 열성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했는데,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영국의 젊은 예술가이며 이집트 학자인 하워드 카터는 여러 해동안 왕들의 계곡을 탐사 했다. 그는 거기에 아직 비밀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1922년 11월 26일, 카터는 18왕조 말의 이름없는 파라오인 투탄카멘의 완벽하게 보존된 왕릉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고고학자가 부장품이 그대로 쌓여있는 왕릉을 발견한 것은 이 번이 처음이었다. 대단히 고급인 부장품들을 현실에서 모두 운반해 내는데에만 6년이 걸렸 다. 정치적 동요가 심했던 시기에 단기간 통치한 젊은 왕에게 그 정도의 부장품을 함께 묻 은 것을 보면, 람세스 2세 같은 강력한 왕의 부장품은 어느 정도였겠는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천일야화에 맞먹는 멋진 여행 1939년 3월 17일, 타니스 지역에서 10년 가까이 탐사작업을 벌이던 프랑스의 고고학자 피 에르 몽테가 22왕조의 파라오인 셰스홍크(<<성서>>에 나오는 시샤크)의 무덤을 발견했다. 나일 삼각주 동쪽 광대한 지역인 타니스는 신왕국 말년의 중심 도시였다. 셰스홍크의 현실 은 아문 신전의 경내에 있었다. 다른 파라오의 석관과 부장품도 함께 발견되었는데, 특히 프수세네스(21왕조, B.C. 1085~945년)의 것이 주목할 만하다. 타니스에서의 발굴작업은 투탄카멘의 왕릉의 발굴작업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세간에서 잊혀지고 말았다. 타니스 왕릉들은 이제까지 발견된 것중 가장 나중에 발견된 것이다. 약 300여 명의 왕이 고대 이집트를 통치했는데, 약 25개의 현실과 30여개의 피라미드가 발견되었을 뿐이다. 더욱 이 완전한 상태로 발견된 왕의 미라는 몇 개 되지 않는다. 비록 규모가 큰 것은 아니지만 다른 발굴사항들도 이집트 학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했다 이집트 고대유물관리국과 해외 각국 고고학회의 지원 아래 다른 매장지에 대한 발굴작업 이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아주 오래된 무덤과 후대의 무덤이 있는 것을 알려진 거대한 유 적지(약 154제곱미터에 이르는 지역)사카라에서, 최근 신왕국시대의 고관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이 발굴되었다. 비교적 관심이 덜 쏠리는 지역들이지만, 테베 지역(여왕들의 계곡), 서부 사막의 오아시스 지역(두치, 발라트, 무자와가), 중부 이집트(안티노에), 파이윰, 나일 삼각주 등에서도 발굴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그 과정에서 많은 미라가 발견되고 있다. 이들 유적지 발굴현장에서는 식물학자, 고고학자, 방사선학자 등으로 구성된 여러 연구팀이 정열적인 지원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와 같은 학제적, 종합적 연구는 체계적인 인구집단 연 구를 가능케 했다. 미라 제작은 B.C. 3000년 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라 처리 기술이 완성된 것은 B.C. 1000년 전이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시체에 살아 있는 모습을 부여하는 복잡한 기술을 터득하는 데에는 수세기에 걸친 시행착오가 필요했던 것이다. 제 2장 미라 제작 기술 B.C. 3100년 이전인 선왕조새대, 그러니까 상부 이집트와 하부 이집트가 통일되기 어전 시대에는 죽은 자를 사막에 구덩이를 파고 매장했다. 모래는 수분을 빨아들이기 때문에 모 래 속에 묻힌 시체는 원형 그대로 보존되곤 했다. 그러나 죽은 자를 더 잘 보관하고 싶은 욕망과 기술의 진보가 결합하여, 1왕조시대(B.C. 3100년에 시작됨)에는 더욱 정교한 무덤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새로운 풍속이 발생한 배경에는 시체를 그대로 보존하려는 목적만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선 왕이나 고관이 사망한 경우에는 엄격한 절차에 따른 장례의식이 치러지기 시 작했다. 중요한 왕릉에는 제물을 바칠 봉헌실이 필요했고, 부장품을 넣어 둘 현실도 있어야 했다. 마스터바라고 불리는 이런 양식을 갖춘 무덤에서는 시체를 수직갱도의 맨 밑바닥에 놓았다. 이보다 간단한 양식을 보이는 무덤의 경우에는 나무관이나 버들가지관에 안치한 시 체를 외벽을 두른 무덤에 매장했다. 그런데 어느 경우이든 모래의 사체 보존 효과가 차단되 므로, 시체를 더 잘 보존하려고 쏟아 부었던 노력이 오히려 시체를 더 빨리 썩게 하는 결과 를 낳았다. 이제 다른 방안이 모색되어야 했다. 첫 번째 실험 공기에 의한 부식을 막기 위해 시체를 천으로 친친 감는 방법이 제기되엇다. 천에 송진을 먹이는 것-그렇게 해서 시체를 뻣뻣하게 만들어 원상태를 오래 보존하려는 것이다-은 보존 효과를 높였다. 3왕조 말(B.C. 2575년경)에 방부처리사들은 시체의 내장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이 사실은 들어낸 내장을 담아 두는 돌 항아리인 카노픽 항아리의 존재를 통해 확인되었다. 방부처리 사는 소다석-인체나 동물의 표피조직에 저절로 생기는 탄산나트륨과 염화나트륨의 결합체- 이 놀라운 탈수효과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4왕조의 첫 번째 왕이며 케오프스의 아버지인 스네푸르의 아내 헤테페레스는 네 개의 방으로 나누어진 설화석고 상자 속에서 소 다석에 코팅된 채로 발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왕국(3~6왕조)의 미라들을 보면 소다석의 탈수효과가 별로 없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붕대로 시체를 감는 과정은 점점 더 정교해져서 산 자의 일상복을 흉내내 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수의 위에 죽은 자의 얼굴을 그려 넣기도 했고, 어떤 경우에는 붕 대 위에 회반죽을 덧입혀 시체의 윤곽과 곡선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기술은 곧 사용하지 않게 된다.) 소다석을 써서 탈수를 하고 내장을 들어내는 방법은 곧 널리 쓰이게 되엇다 시체를 건조하게 만들고 내장을 들어내는 것은 중왕국(B.C. 2040~1786) 때 널리 퍼진 것 같고 그 결과 보존효과는 한결 개선되었고, 이 시기에 제작된 수많은 미라들은 파손되지 않 고 현재까지 살아 남을 수 있었다. 멘투호테프 3세(11왕조) 시대의 고관이었던 '와'의 미라 는 엄청난 양의 붕대로 친친 감싸여 있는데, 그 넓이를 모두 합치면 376제곱미터쯤 된다. 그러나 값싸게 방부처리를 해야 할 경우에는 천 대신 모래를 썼다. 데이르엘바하리에서 발 견된 멘투호테프 병졸들의 미라는 모두 이 방법으로 처리되었다. '이피'라는 사람에게 사용된 방부 도구와 재료는, 현존하는 것 중에 가장 오래 된 것으 로, 이것 역시 이 시대의 것이다. 방부처리 과정에서 얻어진 부산물은 모두 시체 옆에 함께 두었는데, 그것들 모두를 사자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B.C. 1550년 18왕조와 함께 신왕국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방부기술이 개발되었으며, 이 시 기의 미라도 보존이 무척 양호한 상태로 여러 구 발굴되었다. 우리가 오늘날 미라에 대해서 알고 있는 지식은 주로 왕의 미라를 연구해 얻은 것인데, 왕의 미라는 연구과정에서 특별 대우를 받았다. '가장 좋은 방법'을 이용한 방부처리 약 2,400년 전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의 전쟁을 소재로 <<역사>>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 전쟁의 아주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잇는 이 책은 저자가 여행중에 얻어들은 이야기를 간간이 끼워 넣고 있는데, 거기에 미라 처리 과정을 자세하게 기술한 자료도 포함되어 있다.(현대의 전문가들은 이 자료의 정확성을 확인했다.) B.C. 1세 기 중반에 활동한 그리스의 여행가 디오도루스 시쿨루스의 글에서도 비슷한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초상이 나고 2~3일이 지나면 시체는 방부처리사에게 건네진다. 방부처리사는 즉시 왼쪽 갈비뼈 밑에 구멍을 내고 내장을 모두 들어냈다. 간, 위, 창자, 마지막으로 폐를 꺼낸다. 당 시에는 심장을 의식과 느낌이 이루어지는 곳(오늘날의 뇌에 해당)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육 체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 꺼내지 않았다. 콩팥, 비장, 방광, 여성의 생식기관 등은 일반적으로 무시되어 특별한 처리를 행하지 않았다. 뇌수를 꺼내는 것은 신왕국에 와서 개발된 기술이었다. 방부처리사는 왼쪽 콧구멍에 청동 꼬챙이를 쑤셔 넣어 사골(코뿌리에 놓여 코와 두개골을 분리하는 뼈)를 부수고는 그 구멍을 통해 뇌수를 꺼냈다. 그런 다음 송진을 두개골 속에다 집어 넣는데, 송진(정확한 성분은 현 재까지도 알려져 있지 않음)은 두개골과 접촉하는 순간 굳어진다. 이때 송진 대신 톱밥이나 천을 쓰기도 했다. 그런 다음 시체를 봉합하고 깨끗이 씻어서 소다석을 발라 탈수시킨다. '소다석 목욕'이라 는 용어를 감안하면 소다석을 액체상태로 쓴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실은 고체상태 로 투여했다. 헤로도토스는 이런 방부처리 과정에서 70일이 소요되었다고 전하는데, 이 정도 의 기일이라면 미라화가 이루어지는 전과정을 포함할 것이다. 그런 다음 시체를 나일강물에 다 씻고 각종 연고로 닦아 내어 피부를 부드럽게 하고, '좋은 냄새'가 나게 했고, 마지막으 로는 시체를 사자 모양의 장례침대에 올려놓고 옷을 입혔다. "땅에서 난 식물, 아마포, 회복제가 온다. 이것들은 귀중한 수의의 형태로 그대에게 오 는 것이다. 붕대의 형태로 그대를 보존한다. 아마포의 형태로 그대의 신체가 더 커지게 하는 것이다"(방부처리 의식) 붕대처리 과정은 성스러운 책에 규정된 엄격한 의식대로 집행되었고, 단계별로 입회 사제 가 의식용 주문을 외웠다. 붕대처리 과정은 우선 손가락을 하나하나 묶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러고는 사지를 묶었 고, 다시 더 큰 수의로 전체를 묶었다. 양팔은 옆구리에 가지런히 붙이거나 아니면 가슴 위 에 X자(오시리스 자세)로 놓았다. 머리는 맨 나중에 묶었다. 붕대는 가끔 송진을 발랐고 붕대의 겹겹마다 부적을 집어 넣었다. 투탄카멘의 미라에서는 143개의 부적과 다른 작은 물건들이 나왔고, 그리스-로마 시대(B.C. 332~A.D.395년)의 서민 미라에서도 40여 개의 부적이 나올 정도였다. 이제 완벽하게 보호조치가 된 시체는 입관을 하여 장례식을 준비중인 유가족에게 보낸다. <<사자의 서>>에는 이런 구절이 보인다. "축복을 받으시라, 아버지 신 오시리스여! 나는 영원히 내 육체를 소유하게 되었나이다. 나는 썩지 않을 것이며, 붕괴하지 않을 것이며, 벌 레의 밥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존재하며 살아 있으며 강합니다. 나는 깨어 있으며 그 리고 평화스럽습니다. 내 신체기관이나 눈은 파괴되지 않을 것입니다. 내 머리는 내 목위에 그대로 붙어 있습니다. ... 내 육체는 영원합니다. 그것은 썩지 않을지니, 이 영원의 땅에서 파괴되지 않을 것입니다." "값이 저렴한 방부처리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중간 방법'을 채택했다" 앞에서 설명한 방부처리 과정에는 비용이 무척 많이 들었다. 헤로도토스는 더 빠르게 그 리고 덜 비싼 비용으로 방부처리할 수 있는 다른 두 가지 방법에 있었다고 알려준다. 첫째 방법은 항문을 통해 기름을 투입하여 내장을 용해시킨 다음, 시체를 소다석으로 코팅하는 방법이다. 둘째 방법은 가장 싸구려 방법으로, 시체를 간단히 씻은 다음 소다석을 이용해 탈 수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 방법으로 방부처리된 미라들은, 정밀검사 결과, 부패의 여러 단계 에서 내장 찌꺼기가 남아 있음이 밝혀졌다. 붕대를 감는 기술도 여러 가지였다. 어떤 경우에는 손가락을 일일이 싸는 과정을 생략했 고, 또 비용이 가장 많이 드는 천을 조잡한 종류로 대체하거나 재생 아마포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일류 방부처리의 경우에는 특별히 제작된 고급 아마포를 썼다. 21왕조(B.C. 1085~945)에 외관을 좋게 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얼굴과 몸의 윤곽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피부 밑에 흙, 톱밥, 천조각을 넣기도 했다. 유리, 나무, 아마포 등으로 만든 인공눈을 안구에다 집어 넣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장식적 시도 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나, 어떤 미라는 장식이 과도하여 흉한 모습을 간직하게 되었 다. 시체를 미라 처리하는 풍속은 B.C. 1000년 이후 널리 보급되었다. 이렇게 되자 방부처리 기술이 점점 더 단순화되었다. 그리스 사람들이 이집트를 정복하고(B.C. 332년) 이어 로마 사람들이 정복한 이후(B.C. 30년 이후)에도 미라 처리는 여전히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그리 고 당시 이집트에 살고 있던 많은 외국인들도 이 풍속을 그대로 따랐으며, 어떤 미라는 정 말 놀라운 솜씨를 자랑한다. 그러나 후대에 제작된 미라들의 보존상태는 일반적으로 형편없 었는데, 아마도 비용문제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어떤 미라는 미라라기보다 종려나무 가지로 이어 붙인 팔다리 뼈를 모아 담은 가방에 불과했으며, 팔다리 뼈가 아예 없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일부 미라는 세세한 사항을 꼼꼼히 신경 써서 만든데다, 기하학적 디자인과 회반죽 장식을 쓴 붕대처리를 통해 대단히 정교한 수공을 보여 주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시기에는 방부처리 과정보다 붕대처리 과정에 더 신경을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 다. 또한 그리스-로마 시대에 들어와서는 붕대 위에 시체의 초상을 직접 그리기보다 나무판 에 초상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이 나무판은 붕대 안섶에 끼워 넣었다. 기독교인 미라 3세기와 4세기에 들어서자 이집트에 기독교가 전파되었지만, 기독교 교리도 이집트인의 미라 처리 풍속을 막지는 못했다. 교회에서 시체의 미라 처리를 금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는데, 오히려 시체의 보존은 사후의 부활을 믿는 기독 교적 신앙과도 양립될 수 있는 일면을 지니고 있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기독교인 미라들에 대한 연구는, 몇 가지 사소한 차이점 이외에 이때 의 미라 처리 기법이 전통적 미라 처리 기법과 특별히 다를게 없었음을 밝혀 냈다. 사소한 차이점이란 죽은 자를 붕대로 감는 대신 그가 입던 일상복을 입힌 것, 또는 의식용 복장을 입힌 것 정도였다. 성소 최초의 미라들은 공동묘지 근처의 텐트나 가건물에서 처리되었다. 이 시설에는 내장을 꺼 내는 방부처리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B.C. 700년 이후 점점 더 많은 미라의 방부 처리 가 필요해지면서 이들 가건물은 벽돌로 지은 영구 건물로 바뀌었고, 어떤 건물은 큰 규모를 자랑했다. 고대 이집트인은 방부처리소를 와브트(성소) 혹은 페르 네페르(아름다운 집)라 불 렀다. 이런 이름은 방부처리의 목적이 죽은 자를 정화하고 신성화하려는 데 있음을 알려준 다. 당시 사람들은 미라 처리를 해주면 죽은 자가 명계의 신인 오시리스가 될 것이라고 믿 었다. 방부처리사는 철저한 위계질서에 따라 조직되었다. 가장 중요한 지위는 비의 주관자(또는 신의 인장 보관자)와 독경 사제였다. 그들은 방부처리 과정 중 종교의식을 관장했다. 비의주 관자는 종종 미라 처리의 신인 아누비스를 상징하는 재칼의 가면을 썼다. 독경사제는 정확 한 집전을 위해 성스러운 책들을 참고하면서 필요한 주문을 외웠고 각 단계별 기술책임자를 감독했다. 시체의 일부를 잘라 내기 위해 줄을 긋는 일은 서기관이라는 사제가 맡았다. 그러면 파라 시스트(잘라 내는 사람)가 내장을 꺼내기 위해 부싯돌이나 흑요석(수입해 온 화산석) 칼로 몸에 구멍을 뚫었다. 타리체우테스(방부처리사)의 임무는 소다석을 사용하여 시체를 탈수시 키는 것이었다. 다른 기술자들은 미라의 수송과 매장을 맡았다. 장례식과 그뒤의 봉헌의식은 지정된 사제들이 집전했다. 방부처리소의 각종 기술자들은 조합에 가입되어 있었는데, 그들의 직위는 팔거나 후손, 제 삼자에게 세습시킬 수 있었다. 그들은 특정 마을이나 읍의 일정 인구에 대하여 독점적인 영 업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공동묘지는 이들의 세력권에 따라 구분되었으며, 때로는 시체처 리에 대한 관할권을 둘러싸고 시비가 붙기도 했다. 성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유가족들에게 물건으로 보수를 받았으나, B.C. 700년 이후에는 돈도 받았다. 그들은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공 동체 내에서 높은 지위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들은 일의 특수한 성격 때문에 마을 외곽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대는 '라'와 같이 되어 영원을 향해 일어서서 헤엄쳐 가리라."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죽음을 이 생에서 저 생으로 옮겨 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남자, 여자, 어린아이, 동물 할 것 없이 영원한 거처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미라 처리라는 준비단계를 마쳐야 했다. 제 3장 불멸을 향한 갈증 고대 이집트인은 모든 생물이 물질적 구조,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으며, 육체에 영혼 혹은 인성에 해당하는 '바'와, 생명력에 해당하는 '카'등 빗물질적인 요소가 부가되어 있다 고 믿었다. 그들에게 죽음은 이들 요소의 분리를 의미했다. "그대의 다리는 영원의 거처로 안내하고, 그대의 손은 무한히 지속되는 장소로 인도해 주리니" 두 번째 삶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육체는 육체에 생기를 준 정신적 요소와 재결합해야 한 다. 이것은 육신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야만 재결합이 가능함을 말하며, 미라 처리 과 정에서 사제들이 외우는 마법의 주문은 사자에게 그의 육신이 잘 보존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일깨워 주는 내용이었다. 그러니 육체는 절대로 훼손되어서는 안된다. 만약 육체가 훼손되면, 죽음 때문에 흩어진 정신과 다시 재결합할 수 없고 결과적으로 부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공포 때문에 고왕국시대부터 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에 망자의 유물-조상이나 '예비 머리'등-을 안치하는 습속이 시작되었다. 예비 머리는 파괴되었거나 파손된 신체를 대치하는 마법적 기능을 수행했다. 장례식이나 장례기념물에 엄청난 정성을 들인 이집트의 습속으로 미루어 볼 때, 고대 이 집트인이 이승에서의 삶을 대단치 않게 여겼던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 에게 인생은 가장 귀중한 선물이었다. 신왕국시대의 명문은 이렇게 전한다. "그대의 행복이 내세보다 훨씬 귀중하나니." 죽음은 한 생활에서 다른 생활로 옮겨가는 것이요, 또한 '영원 히 돌아오지 않는 곳'으로 들어가는 출발점이라고 생각되었다. 고왕국시대의 대다수 사람 들은 죽음 뒤의 삶을 모호한 모습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지만, 왕만은 그 모호함 속에서 도 특별한 운명을 향수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별의 신화는, 평소 신으로 숭상되어 왔던 왕은 사후에 '고정된' 별이 되어 신들과 함께 산다고 전해 준다. 한편, 태양의 신화에 따르면 왕은 '하늘의 바다'위를 떠오르는 태양을 따라다니면서 날마다 되살아난다고 믿어졌다. 반면 에 일반 서민들은(비록 특별한 정보가 전해져 내려로는 것은 없지만), 죽음 뒤에도 지상에서 의 삶과 똑같은 삶이 연장될 것이라고 믿었던 듯하다. 무정부상태에 빠진 혼란스런 제1 중간기(B.C. 2181~2040) 동안, 각 지방의 총독들은 자기들이 왕과 동격이라고 주장했고, 매 우 강성해진 이들 통치계급은 사후의 영원한 거처문제에서 왕과 동일한 특권을 요구했다. 이제 당초 왕의 전유물이던 미라 처리와 종교적 절차는 많은 사람들에게 개방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비도스에 있는 오시리스의 주 무덤 곁에 묻히기를 원했는데, 이곳은 1왕조의 왕들이 자신들을 위해 기념비를 세워 놓은 장소이기도 했다. 이곳에 매장될 기회를 얻지 못 한 자들은 무덤 주위에 커다란 돌기둥이라도 세워 오시리스의 보호를 보장받고자 했다. "나는 완벽하고 나는 정당하도다. 나는 또한 회춘했느니라. 왜냐하면 나는 영원의 신 오 시리스,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사루세계에 대한 관념은 신왕국시대에 더욱 구체화되었다. 죽은 자의 세계인 명계는 제왕 이며 생명력의 화신인 오시리스가 다스리는 지하왕국이다. 오시리스는 죽었다가 다시 부활 했기 때문에 망자의 신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가장 널리 전파된 신화는 오시리스를 1 왕조가 시작되기 전에 이집트를 다스린 제왕이었다고 묘사한다. 그는 동생인 세트에게 살해 되어 내장이 모두 제거되었으나, 그의 여동생이자 아내인 이시스의 힘을 빌려 환생했다. 이 시스와 오시리스 사이에는 호루스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호루스가 세트를 무찌르고 이집트 의 왕위에 올랐고 오시리스는 지하로 내려가 명계를 통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죽었다가 부활한 오시리스의 운명은 인간이 죽음 뒤에 걸어가야 할 운명의 모델이 되었다. 그리하여 미라 처리 과정을 통해 보존된 시체는 오시리스 신과 동일시되고, 죽은 자는 오시리스가 되 는 것이다. 무덤에 넣기 직전, 미라 처리되어 관 속에 안치된 시체는 무덤의 입구에 세워지고, 개구의 식을 통해 '생명의 호흡'이 주어진다. 이러한 상징적 절차에 따라 부활한 미라에게 갖가지 음식이 봉헌되고 그런 다음 미라는 무덤으로 들어간다. 무덤은 이제 그가 '앞으로 수백 년 동안 거처할 장소'이다. 매장과 함께 시작되는 제2의 인생은 신왕국의 화가들과 그들의 후계자들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해 놓았다. 명계의 문지기인 아누비스는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그를 오시리스의 재 판정으로 데려간다. 이 장면에서 오시리스는 아주 근엄하게 묘사되어 있다. 심판이 진행되는 동안 죽은 사람은 두 번 '부정의 고백'을 행해야 한다. 신과 인간에 대하여 특정한 혹은 일 반적인 죄를 진 것이 없다고 주장한 다음, 특히 다음과 같은 사항을 선언해야 한다. "나는 저울의 무게를 보태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린아이들의 입에서 우유를 빼앗지 않았습니다." "나는 목초지에서 풀을 뜯고 있는 가축들을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다음은 심장의 무게 달기 의식을 치러야 한다. 저울 한쪽에 올려놓은 심장은 깃털(진리와 정의의 여신인 마아트의 상징)처럼 가벼워야 한다. 만약 심장이 너무 무거우면-바꾸어 말해 서 죽은 사람의 악행이 선행보다 많으면-옆에서 입을 벌리고 있던 사람 잡아먹는 여신 아 미트가 죽은 자를 씹어 영원한 제2의 죽음으로 밀어 넣는다. 기록의 신인 토트는 오시리스 와 다른 신들이 지켜보는 데서 그 재판의 결과를 기록한다. 죽은 사람은 이제 관문을 통과하여 자유롭게 지하세계를 여행할 수 있다 죽은 자의 명계 여행길을 안내해 주기 위해 <<사자의 서>>하는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관 속 미라 곁이나 오시리스 조상의 받침대로 쓰이는 상자속에 넣어 둔다. <<사자의 서>>는 사후세계의 여러 장면을 보여 주는 그림을 담고 있다. 그림들은 사후세계가 이상하고 무서 운 존재들이 득실대는 곳임을 알려 준다. 이 책에는 죽은 사람이 여행중에 만날 장애를 극 복하는 방법과 축복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는 법을 알려 주는 마법의 주문이 들어 있 다. 이책이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미라는 사후세계에서 계속되는 생존을 보장받았다. 신 학적인 내용을 포함하는 다른 장례용 서적-<<관문의 서>><<동굴의 서>><<두아트(명계) 의 서>>등-이 왕의 무덤에 장식용으로 놓였다. 신왕국시대에 처음 나온 <<사자의 서>>는 고대의 전승을 집대성한 것이다. 여기에는 중 왕국시대 석관의 외벽에 새긴 명문에서부터, 5왕조(약 B.C. 2494~2345년) 이후 피라미드의 현실 벽에 쓰인 명문가지 모든 명문이 총망라되어 있다. 당초 왕들에게만 사용되었던 '피 라미드 비문'은 점차 내용이 일부 수정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쓰였다. <<사자의 서>>에는 많은 판본이 있어 파피루스 한 장으로는 그 많은 시를 다 적을 수 없었다. 동물의 미라 고대 이집트 무덤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들의 미라도 들어 있다. 21왕조시대에 활약한 테베 여사제의 무덤에서는 긴팔원숭이 미라가 발견되었고, 일반 서민들의 무덤에서도 개, 고 양이, 새 따위의 미라가 발견된다. 이들 애완용 동물들은 아마도 그 주인이 사후에도 함께 있기를 바랐기 때문에 넣어 주었을 것이다. 어떤 동물은 관까지 갖고 있다. 아메노피스 3세 의 맏아들인 투트모시스 왕자가 좋아했던 고양이는 석회석 석관에 넣어져 매장되었는데 석 관 바깥에는 '심판의 과정을 통과한 고양이 오시리스'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고대 이집트 인은 동물을 미라 처리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실제로 동물과 인간을 엄 격하게 구분하지 않았고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다. 신은 인간의 모습뿐 아니라 동물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동물숭배는 이집트 문명이 견지한 지속적인 특징 중의 하나이다. 신들은 역사발전의 단계 마다 각기 다른 형태를 취할 수도 있지만 그 본질적 속성은 변함이 없다. 이리하여 고대 이 집트에서 왕권의 상징이던 호루스 매는 그냥 새 모습으로 표상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 새 의 머리를 한 인간으로 표상되기도 했다. 멤피스에 있는 아피스 황소, 멘데스의 숫양, 엘레 판티네의 숫양 등은 고대 이집트 문명 내내 그 모습을 바꾸지 않았다. 살아 있는 신으로 간주되었던 이들 동물은 미라 처리를 통해 영원의 거처로 들어가게 되 어 있었다. 이들은 그만큼 독특한 존재였다. 가죽에 있는 독특한 표시로 금방 알아볼 수 있 는 아피스 황소는 딱 하나뿐이다. 이 황소는 경배자들이 경배를 올리는 예배소와 추종자들 이 알현하러 몰려오는 신성한 사당이 갖추어진 신전에서 살았다. 이 황소는 죽었을 때 당연 히 미라 처리되었고, 그 장례식은 인간의 장례식과 흡사하게 치러졌다. 황소의 시체는 거대 한 화강암 석관에 넣어져 독립된 무덤에 안치되었고, 후에 거대한 집단 현실인 사카라에 있 는 유명한 세라페움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세라페움 근처에는 아피스의 어머니, 신성한 암소 에게 헌정된 공동묘지가 있다. 헬리오폴리스의 므네비스 황소, 아르만트의 부치스 황소, 멘 데스의 숫양, 엘레판티네의 숫양 등도 살아 있는 신으로 여겨져 생시에 커다란 숭앙을 받았 고 죽어서는 장엄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파이윰과 콤 옴보에서는 악어신 소베크가 숭상되었 고 소베크 신전에는 많은 신성한 악어들이 살았다. 그리고 그중 한 악어는 신의 화신이라고 간주되었다. 헤로도토스는 테베와 파이윰의 주민들이 악어를 길들여 먹이를 주고 돌본다는 이야기를 그의 책에서 들려준다. 악어는 귀걸이를 하고 앞다리에 팔찌를 차고 또 신성한 음 식을 제공받았다. 4세기 뒤에 스트라본은 이렇게 기술했다. "신성한 악어는 호수에 혼자 살 면서 음식을 제공받았다. 사제들은 악어를 어떻게 길들이는지 알고 있었고 그를 수코스(소 베크)라 불렀다." 특정한 신을 상징하는 동물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고양이는 바스테트신을 표상했고 따 오기와 원숭이는 토트신을 나타냈다 공동묘지에서 발견되는 수십만개의 따오기와 고양이 미라는 사후세계로 떠나는 순례자가 신들에게 바치기 위해 돈을 주고 사서 미라 처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부바스티스에 있는 바스테트 여신 사당과 헤르모폴리스에 있는 토트신의 사당은 희생용으로 성스러운 따오기와 고양이를 길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B.C. 1000년 전에 널리 퍼졌던 풍습이었다. 다른 동 물들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 두치의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거세된 성인 남자 미라의 다리 사이에서는 개구리의 미라가 발견되었다. 한 신화는 세트에게 죽음을 당한 오시리스의 내장이 몽땅 들어내졌으며, 오시리 스의 성기는 나일강에 던져져 물고기의 먹이가 되어 버렸다고 전한다. 두치에서 발견된 남 자 미라는 이 신화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인다. 재생의 상징인 개구리는 이집트 사람들의 사후세계 신앙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준다. 저승에서의 삶을 이승의 삶과 같이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무덤에 많은 부장품을 넣어 주었다. 그중에는 값이 상당한 귀중품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 결과는 도굴꾼의 등장으로 나타났다. 도굴은 이집트 도처에서 자행되었고 소박한 무덤이라해도 도 굴꾼의 손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제 4장 죽은 자의 세계와 산 자의 세계 장례기념물과 부장품이 너무나 화려하여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재산의 많은 부분을 유택 을 짓는 데 사용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왕릉은 그 좋은 예이다. 왕들의 계 곡에 있는 피라미드와 현실의 건축에는 막대한 노동력과 경비가 들어갔음을 짐작할 수있다. 또한 케프렌의 밸리 신전이나 람세스 2,3세의 라메세움과 메디네트 하부 같은 장례신전을 건조하는 데에도 역시 엄청난 비용이 투입되었다. 일반 서민들의 무덤 축조에 들어간 돈도 결코 적지 않은 액수였다. 무덤의 건축양식은 수세기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무덤의 기본적인 유형은 손에 꼽 을 정도이다 무덤의 건축양식은 지리적 조건과 무덤 주인의 경제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평범한 무덤 의 구조는 시대의 변화에 상관없이 언제나 똑같았지만, 한층 복잡한 구조를 갖춘 무덤은 몇 가지 점에서 진화를 거쳤다. 마스터바-무덤의 수직갱도 위로 낮은 직사각형 건물을 세우는 것-는 고왕국과 중왕국에 주로 건립되었고, 석벽을 깎아 내는 무덤은 고왕국 말에 처음 등 장했다. 피라미드 모양의 지상구조를 가진 무덤-가장 정교한 것은 고왕국시대의 것으로서 케오프스, 케프렌, 미케리누스 등의 피라미드를 들 수 있다-은 신왕국시대에 들어서서도 개 인 무덤으로 지어졌으나 여전히 소규모였다. 누비아 상류의 메로에에서도 같은 양식이 채택 되었다. 최후로 등장한 양식은 예배소가 추가된 무덤인데 신왕국시대에 처음 축조되었다. 무덤은 죽은 자의 새로운 거처요, 마법이 지배하는 세계이며, 다른 방식의 존재가 계속 되는 곳이다 죽은 자가 이승에서 누렸던 쾌락을 즐길 수 있도록 일상생활의 환경을 여러 방식으로 무 덤 속에 전시해 주어야 했다. 전형적인 것으로는, 죽은 자가 음식이 가득 차려진 테이블 앞 에 앉아 있는 그림, 사냥하는 장면, 농사짓는 장면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그림들에 등장하는 소재는 죽은 자가 경험한 특정한 추억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이승의 생활을 그에 게 상기시켜 주기 위한 방편이었다. 같은 이유로 죽은 사람은 늘 젊고 원기왕성한 상태로 묘사되어 있다. 이 경향은 특히 파 라오의 경우에 현저한데, 이것은 파라오들이 아직 젊고 정력적인 시절, 그러니까 등극 직후 부터 무덤의 축조 작업을 실시했던 까닭이다. 중왕국시대의 일반 서민들의 무덤에서도 이승 에서의 일상생활을 일깨워 주는 물건들이나 '영혼의 집'이라 할 작은 집이 빈번히 발견된다. 이런 것들을 보면 죽은 자들이 정말로 사후에도 계속 '생활'했구나 하는 느낌을 지워 버 릴 수 없다. "제물이 봉헌되었고, 빵, 맥주, 고기, 가금, 향등도 바쳤다" 음식을 봉헌하는 것은 죽은 자에게 먹을 것을 바쳐 사후에도 살아 있기를 기원하는 마음 에서였다. 일상생활의 유용한 물품들-화장품, 옷, 천, 도자기, 돌그릇, 무기 등-도 죽은 자에 게 바쳐졌다. 예를 들어 투탄카멘 왕릉에는 무기가, 아메노피스 2세의 경우에는 활이 놓여져 있었으며, 직업에 관련된 도구들, 필기도구, 의학 관련 파피루스, 베틀의 북과 물레, 심지어 장난감 등도 부장되었다. 이런 도구들은 죽은 자가 살아 있을 적에 즐겨 사용하던 물건들이지만 순전히 장식용인 물건도 있었다. 투탄카멘의 황금 전차는 파라오가 살아 있을 때 사용하던 것이 아니었다. 무덤은 또한 다양한 의례물을 보관했다 무덤에는 카노픽 항아리와 우샤브티스 같은 물품이 들어 있었는데, 이러한 물품은 중왕국 시대 이후 널리 부장되었다. 신왕국시대에 들어와서는 400여 가지에 이르는 작은 인물상들 을 관 주위에 놓아두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1년을 365일로 잡아 하루에 한 개꼴로 인물상 이 필요했고 그 나머지는 '감독하는 사람'인 것이다.) 죽은 자의 하인인 우샤브티스는 주인 이 사후세계에서 오시리스에게 받은 명령을 수행하는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왕국에서 그리스-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 성징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체의 여자 인물상 이 남자와 여자의 무덤에 함께 넣어졌다. '죽은 자의 첩'이라고 알려진 이런 인물상은 사자 가 사후세계에서도 원만한 성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다. 미라는 각종 보호 용기 속에 안치되었다. 그 용기가 얼마나 정교한가는 사자의 재산상 태에 따라 다르다 가장 바깥에 있는 용기는 석관-왕이나 고관의 경우-이거나, 또는 대부분 목관이었다. 석 관의 형태는 직사각형이거나 인체의 윤곽을 따랐다. 석관이나 목관의 장식은 수세기에 걸쳐 많이 바뀌었으며, 주로 의식적 주문, 신화적 장면, 개인적 사항(죽은 자의 이름, 지위, 직업) 등을 새겨 넣었다. 석관은 원래 그 안에 인체의 윤곽을 한 목관을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22왕조(B.C. 945 년경)에 들어와 이 두 번째 목관은 아마포나 파피루스를 회반죽이나 풀로 굳힌 관재로 대체 되었다. 이 관재는 황금 장식으로 찬란하게 채색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관재에서는 시신의 윤곽을 알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얼굴 부분은 가발을 씌워서 고도의 표현을 기했다. 하지만 이런 표현도 정형화되어 있었다. 파라오와 부유한 개인의 미라는 제3의 관을 갖고 있었다. 파라오는 또한 견고한 황금 가면도 갖고 있었다. (프수세네스와 투탄카멘의 황금 가면이 오 늘날까지 전해진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수의와 붕대가 친친 감긴 미라가 나온다. 오로지 부유한 자만이 목관과 관재를 사용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생 략한 채 수의와 붕대에 묶여 매장되었다. (그리고 아주 가난한 사람은 미라 처리조차 하지 않았다.) 후대에 내려오면 황금 가면은 도금 혹은 채색 회반죽 가면으로 바뀌었고, 또 그리 스-로마 시대부터는 나무에 왁스로 그린 초상화를 얼굴 부분의 붕대 안섶에다 끼워 넣는 풍습이 정착되었다. 이러한 초상화는 파이윰 지방에서 처음 발견되었기 때문에 파이윰 초상 화라고 한다. 이제 미라는 사후의 세계를 시작할 모든 준비를 마치고 무덤-'앞으로 100만 년 동안의 거 처'-에 들어갈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죽은 자는 관문을 하나 더 통과해야 되었다. 그것은 이승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공격성과 탐욕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미라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나? 무덤의 약탈은 아주 오래 전부터 널리 퍼진 악습이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이런 도굴 꾼들을 물리치기 위해 점점 더 세련된 무덤 축조 기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무덤 축조가와 도굴꾼 사이의 소리 없는 경쟁이 1왕조에서 시작하여 고대 이집트 문명이 끝날 때까지 계속 되었다. 피라미드에 멋지 부장품이 많이 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피라미드를 노략질한다는 것 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경비를 서는 보초들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 했다. 1중간 기 동안 중앙의 왕권이 약화되고 그에 따라 사회가 불안해지자, 피라미드는 더 이상 도굴꾼 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게 되었다. 비록 경비병과 내통을 했더라도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가 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피라미드 내부의 여러 장치, 예를 들어 내리닫이 창살문, 가짜 복도, 숨겨진 입구 등은 돌더미로 막혀 있어서 돌파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모든 피라미드는 도굴되었다. 그리하여 고고학자들이 현실에 도착했을 때 그 안은 거 의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신왕국에 들어와 종교와 보안을 이유로 파라오들은 자신의 왕릉을 건설할 때, 피라미드- 그건 너무 쉽게 눈에 띄었다-방식을 버리고 보다 안전한 지하묘식을 선택했다. 왕들의 계곡 이나 왕비들의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석회석 벼랑에 거대한 무덤을 몰래 파 들어갔던 것이 다. (적어도 초기에는 그랬다.) 그리고 무덤의 입구를 교묘하게 위장했다. 그래도 도굴을 막 을 수는 없었다. 바깥에는 보초가 있고 내부는 방어장치-깊은 수직갱도, 막다를 통로, 엄청 나게 무거워 거의 뚫고 들어갈 수 없는 화강암 석관 등-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지하묘 실도 피라미드와 마찬가지로 도굴당했다. 노략질의 증거는 람세스 9세(재위, B.C. 1131~1112 년) 치세시에 약탈꾼을 치죄한 문서에 잘 드러나 있다.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도굴꾼의 진 술서에는 고위직과 내통한 사실도 암시되어 있다. 또 공동묘지를 관할하는 경비대장도 연루 되었던 것 같다. 이후 수많은 무덤이 도굴되었다. 왕들의 계곡에 있는 세티 1세와 람세스 2세의 무덤도 약 탈당했다. 그리하여 B.C. 1070~945년 사이에 아문의 고위 사제는 18, 19, 20왕조의 파라오 미라를 모두 파내어 비밀스런 동굴에다 감추어 두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들 미라가 옮겨진 위치는 19세기 말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아무튼 도굴된 미라들은 죄다 귀중품을 박탈당했고 다시 붕대처리를 한 후 재매장되었다. 두치에 있는 그리스-로마 무덤에서는 19세기에 작성된 편지(당나귀에게 건초를 주어야겠 다는 내용)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부주의한 도굴꾼이 현장에 흘리고 간 것이었다. 어떤 때는 도굴꾼이 무덤 안으로 들어갔을 때 무덤의 천장이 무너져 결국 도굴꾼의 해골이 미라들의 저승 친구가 된 경우도 있었다. 개인의 무덤도 약탈되다 도굴꾼들은 값나가는 부장품들이 많이 매장된 왕릉만을 골랐을 것이고, 그러니 일반 서민 의 무덤은 약탈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 지 않다. 람세스 9세 왕릉 도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무덤들도 모조리 도굴되 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경건한 신앙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고대 이집트인이, 사후세계에서 죽은 자들이 생존하 는 데 사용할 물건을 그처럼 노략질했다는 것이 기이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알고보 면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당시 사람들은 너무 가난했던 것이다.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 나가 기가 벅찬 사람들에게 돈이 되는 물건이 지하에 잔뜩 쌓여 있다는 사실은 물리치기 어려운 유혹이었을 것이다. 특히 경제적 어려움이 극심한 때에는 그런 유혹을 떨치기가 더욱 어려 웠으리라. 그래서 약탈자는 전문적인 도굴꾼이라기보다 공동묘지 근처에 사는 장인이나 농 부인 경우가 허다했다. 무덤의 노략질은 20세기까지 계속되어 고대 유물들이 꾸준히 암시장 으로 흘러들었고, 수많은 귀중한 고고학적 자료들이 파괴되고 말았다. 고대 무덤은 다시 사용되었다 무덤을 재사용하는 것은 널리 퍼진 풍속이었다. 특히 후대로 내려올수록 더했다. 미라들이 잔뜩 쌓인 가족용 무덤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여왕들의 무덤도 이런 불명 예를 당했다. 이럴 경우 원래의 미라가 손상됨은 물론이다. 파라오 자신들도 석관, 장례물품, 무덤까지 '재활용'하는 선례를 남겼다. 타니스에서 발굴 된, 사람의 얼굴을 한 사자의 몸에는 서도 다른 세 왕을 위한 명문이 적혀 있고, 프수세네스 1세(21왕조)는 원래 19세기 왕조의 고관 미라를 담았던 석관에 넣어져 매장되었다. 붕대와 덮개를 제거당한 미라는 보석류를 탈취당했으며, 종종 '100만 년의 거처'로부터 쫓 겨나는 모욕도 겪었다. 그렇게 거처를 옮긴 미라들이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파괴되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집트학이 정립되면서 미라는 다시금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 거나 제약원료 정도로 취급되던 미라가 현대 과학의 집중 탐구대상이 된 것이다. 도굴꾼의 손에서 미라를 구출해 낸 고고학자들은, 오늘날 첨단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아 이 귀중한 인 간 자료를 분석하고 보존하는 일에 심형을 기울이고 있다. 제 5장 과학적 연구 19세기만 해도 미라의 붕대를 푸는 일은 선택된 몇몇 사람들만 참석할 수 있는 특별 행사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그런 행사에 모인 사람들이란 과학적 탐구를 목적으로 한다기보다 는 단순히 미라를 구경한다는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1881년에 발생한 대단한 사건은 상황을 단번에 뒤집어 놓았다. 데이르엘바하리에서 왕들의 미라 저장소로 쓰 인 동둑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수천 년의 세월을 살아 남은 이 미라들은 어떠한 수단을 동 원해서라도 온전히 보존돼야 했다. 따라서 새로운 조사방법의 도입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무런 절차 없이 또한 너무나도 성급하게 붕대를 풀어내는 작업이 이루어졌음은 물론이다.) 이 미라들은 처음에는 카이로 교외의 불라크에 보관되었다가 1902년에는 새로 지어진 카이로 박물관으로 이송되었다. 이때부터 붕대를 풀어내는 과정에는 완벽한 검시과정이 첨가되었고, 이 과정으로부터 미 라 처리 과정에 대한 정보가 하나 둘 수집되기 시작했다. 또한 미라가 생존 당시에 앓았던 각종 질병이나 사고의 흔적을 찾아낼 수도 있게 되었다. 1895년, 독일의 물리학자 빌헬름 콘 라트 뢴트겐은 엑스레이를 발견했고, 같은 해 11월 8일 자기 아내의 손을 엑스레이로 찍었 다(노출 시간 30분). 영국의 위대한 고고학자 윌리엄 매튜 플린더스 페트리 경은 이집트학에 엑스레이를 동원하면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1896년에 처음으로 미라를 엑스레이로 촬영했다. 마침내 이집트학 연구자들은 미라를 손상시키지 않고 검사를 수행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엑스레이 촬영숙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엑스레이 촬영 장비와 그 기술 수준은 미라의 팔다리를 찍는 정도에 불과 했다. 1912년, 그래프턴 엘리엇 스미스가 카이로에 보관된 왕들의 미라에 대한 방대한 보고 서를 출판했을 때, 엑스레이 촬영 정보는 전체 내용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엑스레이를 이용하려면 관련 요소를 한자리에 집결시켜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고고학자, 방사선학자, 장비, 미라를 모두 한곳으로 모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투트모시스 4세의 미라는 택시에 태워져 카이로에서 최초로 방사선과를 설치한 병원까지 이송되어야 했으며, 이런 점이 엑스 레이의 미라 연구 응용에 따르는 장애요인으로 작용했다. 엑스레이 기술이 발달하면서 방사선학에 대한 관심은 점차 커졌다. 1913년, 과학자들은 미 라에서 발견된 요골-좌골 이상을 처음 보고했다. (오늘날에도 널리 발견되는 이런 유형의 아상은 좌골통과 요통을 일으킨다.) 1931년 로이 L. 무디는 17구의 미라에 대한 방사선 정보 를 기록했다. 그리고 P. H. K. 그레이는 1967년까지 유럽 여러 박물관, 특히 영국과 네델란 드에 보관된 총 133구의 미라를 엑스레이로 촬영했다. 제임스 해리스와 켄 윅스는 카이로 박물관에서 왕들의 미라를 조심스럽게 연구했다 1973년과 1980년에 발간된 이들 학자의 연구결과는 미라에서 발견되는 질병과 육체적 특 징을 확인해 주었고, 이로써 가계를 확정짓고 또 고대 문헌의 기록을 고증할 수 있었다. 예 를 들어 B.C. 16세기의 파라오 세케넨레 2세는 전장에서 장렬하게 죽은 것으로 알려져 왔는 데, 이 사실은 그의 미라 중 두개골 부분이 심하게 손상되었다는 점과 또 두개골에 가해진 심한 충격을 엑스레이가 확인해 줌으로써 검증되었다. 엑스레이 연구는 정설로 받아들여지던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투트모시스(재위, B.C. 1504~1492년)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미라의 골격을 조사해 보니 긴 뼈 끝에 연골이 달 려 있음이 밝혀졌다. 이것은 그 뼈의 주인이 죽을 무렵까지도 계속 성장했음을 알려 준다. 그렇다면 사망 당시 18세 정도였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이것은 이 파라오의 오랜 통치기간 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또 하나 의심스러운 점은 그 미라의 양손이 생식기를 가리고 있다 는 사실이다. 그런데 투트모시스의 후예 중 이런 자세로 미라 처리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늘날 미라 연구에는 다양한 기술이 사용된다 방사선 이외에도 조직학, 피와 조직 그룹의 연구, 내시경 검사, 다양한 화학, 물리적 정밀 검사법이 동원된다. 최근에는 컴퓨터 단층촬영(CT) 같은 의학적 촬영방법도 이용된다. 그러 나 수소원자에 반응하며 작동하는 고성능 장비인 핵자기 공명 단층촬영(MRI)은 사용되지 못한다. 인체에서 물분자 형태로만 나타나는 수소는 건조한 미라에서는 발견될 수 없기 때 문이다. 방사성탄소측정법도 흥미있는 정보를 제공하지만 이 방법도 인체조직의 정확한 연대를 측 정하기에는 부정확한 측면이 있다. 아미노산 연구 등 기타 방법도 미라 연구에 일정한 도움 을 줄 수 있다. 아미노산 연구가 방사성탄소측정법보다 유리한 점은 아주 작은 조직에도 적 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그 조직이 어느 온도에서 보존되었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는 단점이 있다. 최근에는 전세계적으로 여러 팀들이 귀중한 연구를 많이 했다. 예를 들면 아이단 콕번이 이끄는 펜실베이니아 대학 연구팀은 PUM(펜실베이니아 대학 박물관) I~IV라고 명명된 이 름없는 미라 네 구를 완벽하게 검사했다. 첫 세 구에 대한 연구는 실망스러운 것이었으나, 네 번째 미라 PUM IV는 여러 가지 정보, 그중에서도 인간의 피부조직에 대한 값진 정보를 제공했다. 1976년, 리오넬 발루와 콜레트 루베가 이끄는 프랑스팀은 람세스 2세의 미라를 복 원하고 정밀연구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그리고 로잘리 데이비드가 이끄는 영국의 맨체스터 대학 팀은 신왕국에서 그리스-로마 시대에 이르는 17구의 미라를 연구했다. 한편, 인류학자들은 공동묘지에서 발굴된 다수의 유골을 대상으로 연구를 계속했으며, 그 들은 박물관에 소장된 미라를 연구하는 데에는 피할수 없는 약점이 있음을 밝혀 냈다. 박물 관에 모아 놓은 미라들은 출처와 제작년대가 불확실하고, 적은 숫자에 비해 종류가 너무 다 양해, 특정 인구집단을 드러낸다고 볼 수가 없었다. 이것은 동질성을 가진 인구집단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인류학자에게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부 인류학자들 은 유적지 현장에 나가서 엑스레이를 찍는 방법을 채택한다. 그렇게 하여 통계적으로 균일 한 인구집단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미라를 연구해서 알아낼 수 있는 것 미라 처리의 실제 기술에 관한 한, 최근의 연구 결과는 헤로도토스가 말한 것-현대에 이 르기까지 미라 처리를 자세히 언급한 것 중 유일하면서도 최선의 것-이 모두 사실임을 확 인했다. 현대 고고학자들이 검토한 미라들은 작업솜씨나 품질에서 천차만별이지만, 헤로도토 스가 말한 세 범주에 모두 포함된다. 미라들은 '최일류' 기술로 처리된 것-사체가 그대로 보존되고 얼굴의 표정이 훼손되지 않은 것-에서부터, 저급한 것-어설픈 기술로 대충 해치워 서 사체가 제대로 남아 있지 않거나 파손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미라가 보여 주는 어떤 사항은 의식적 절차나 신화적 내용과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가령 양팔을 X자로 가슴위에 놓은 오시리스 자세가 그 좋은 예이다. 또 어떤 미라는 거 세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신화의 내용과 일치한다. 어떤 미라의 얼굴과 사지에는 금의 흔적 이 발견된다. 이 같은 금도금은 죽은 사람을 오시리스로 만들려는 후대의 신화과정의 일환 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이런 의식적 주문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대는 이제 금 의 권능으로 재생되었으니..." 어떤 경우 방부처리사는 최대한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부상당한 손을 잘 짜집기해서 온전한 손처럼 보이게 하거나, 이빨이 없을 경우 나무조각 위에 상아를 박은 인 조 이빨을 박아 넣기도 했다. 또는 죽은 사람의 눈에 생기를 주기 위해 안구에다 양파를 박 아 넣었다. (이러한 미화 조치는 방부처리사 교본에 나와 있는 의식절차를 그대로 따른 것 이다.) 내장을 꺼내기 위해 옆구리의 어디 부분에 구멍을 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종교적으로 중 요한 사안이 아니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왼쪽 옆구리 갈비 아래쪽에 구멍을 냈으나, 투트모 시스 3세의 치세(B.C. 1479~1425년)때부터 치골과 평행하게 구멍을 뚫었다. 그 구멍은 일반 적으로 봉합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 아예 구멍을 뚫지 않고, 항문을 통해 내장을 끄집어 내 기도 했다. 여러 해 동안 고고학자들은 시체를 탈수시키기 위한 소다석이 액체였을까 아니면 고체였 을까 하는 문제에 정답을 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비둘기의 미라 처리 과정을 연구한 알프 레드 루카스의 연구와 오리의 미라 처리를 연구한 자키 이스칸더 박사의 연구결과는 고체상 태의 소다석이 사용되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자그마한 소다석을 많이 얺어 온몸을 뒤덮 었던 셈이다.) 고대에 저술된 서적이라도 시체를 미라 처리할 때 어떤 향유와 연고를 사용했는지 구체적 으로 명시하고 있지는 않다. 또한 미라 처리 이후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흘러 그 구성분자들 이 크게 변화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과학적 방법으로도 정확한 화학적 성분을 알아내기가 어 렵다. 그것들은 그저 '송진' 혹은 '역청'(미라를 뜻하는 머미 mummy라는 단어는 역청을 뜻하는 아랍어에서 나온 것임), 혹은 '삼나무 기름'등으로 불렸다. 한편, 미라의 몸 안이나 바깥에서 발견되는 방향성 식물의 정체는 훨씬 알아내기가 쉽다. 그것들은 주로 월계수, 후 추, 시스투스, 노간주나무 등이다. 미라는 인류학적 연구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빈 공간을 보충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기회 이다 고대 이집트인데 관련된 인류학적 연구는 대부분 유골을 바탕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미 라는 미라 특유의 정보를 제공해 준다. 머리카락, 손톱, 피부, 지문 등을 연구함으로써 우리 는 인종적 분류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게 되고 고대 이집트인이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도 확실히 알 수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제 엑스레이를 사용하여 현장에서 미라의 뼈를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방법 을 개발해 냈다. 그뿐 아니라 미라의 피부조직에 대한 연구도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들 의 발견은 고대 이집트인이 베르베르인과 셈족의 후예라는 역사적 가설을 뒷받침하며, 북쪽 의 네그로이드(흑이)족이 남쪽으로 점점 영향을 미쳤음도 알아냈다. 그리고 이집트 민족은 역사적으로 여러 시기에 걸쳐 다양한 외부 세력에 노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까지 변하 지 않는 인종적 특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이것은 정말 특기할 만한 일이다. 미라는 특정 인구집단의 건강상태를 연구할 때 유골보다 훨씬 더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 다 엑스레이 사진의 연구는 미라의 뼈에서 발견되는 가는 줄(신체의 성장이 억제되었다는 증 거)에 대한 유익한 통계를 제공했다. 질병이나 영양부족을 나타내는 이 줄은 아주 가난한 지역이었던 두치의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미라들에게서 자주 관찰된다. 또 다른 연구들은 1세기에 이집트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약 마흔 살 정도였다는 사실을 밝 혀 냈다. 이것은 1840년대를 살았던 유럽인의 평균수명보다 몇 살 적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수치는 높은 출산사망률과 영아사망률을 감안하지 않은 것이다. 치아 연구는 고대 이집트인의 치관이 심하게 마모되어 있음을 밝혀 냈다. 이집트인이 모 래가 섞인 거친 밀가루빵을 먹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이빨이 마 모되자 치주가 손상되면서 심한 화농이 따랐다. 치아질환은 이집트 역사상 후대의 일로서, 설탕을 음식에 넣기 시작하면서부터 문제가 되었다. 그나마 설탕은 통치계급이나 사용할 수 있는 귀중한 물건이었다. 반면 꿀은 이집트에서 오래 전부터 알려져 널리 사용되었고 충치 를 치료하는 주요 약재로 널리 추천되었다. 고대의 의학 관련 파피루스(일종의 의학서)는 이집트인이 흔히 앓았던 여러 가지 질병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으나, 그 내용만 가지고는 정확한 병명을 확인하기 어렵다. 미라 연구 는 파피루스가 언급해 놓은 질병의 성격을 명확하게 해주며, 또한 파피루스에 적혀 있지 않 은 다른 질병도 파악하게 해준다. 골절과 같은 질병은 간단한 검사수단을 동원해 손쉽게 밝 혀 낼 수 있다. 골관절염 같은 퇴행성 질병도 역시 손쉽게 알아낼 수 있다. 골관절염은 고대 이집트인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으며 주로 척추 부분에서 많이 발생했다. 골관절염은 척추 측만(척추가 옆으로 휘는 것)을 동반했는데, 들판에서 농사일에 너무 시달리고 무거운 물건 을 자주 들고 다녀서 발생한 질병이다. 빌하르츠 주혈흡충병이나 필라리아증 같은 기생충 질병은 엑스레이 분석을 통해 판독해야 한다. 피부조직을 과학적으로 검사하다 보면 미라에 회복 불가능한 손상을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폐결핵, 심장질환, 혈관질환 등도 발견되었으 나 암의 증거는 찾아내기가 어렵다. 암세포는 부드러운 기관만 공격하는데, 미라로 처리될 때 이런 기관이 이미 모두 제거되기 때문이다. 연구는 마을사람들 대부분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두치 마을에 사람이 살았던 기간은 B.C. 1세기부터 A.D. 5세기 사이라고 밝혀졌다. 이 마 을의 공동묘지에서 나온 200구에 가까운 미라와 유골을 검토해 본 결과, 거의 모든 사람이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마을사람들이 주로 앓았던 질병은 척추골관절염, 탈골, 영양부족 등이었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병리학적 관찰과 엑스레이 검사를 이용하여 사망의 직접 원인 을 정확하게 짚어 낼 수가 있었다. 일곱 살 난 어떤 소녀는 장티푸스로 사망했고, 또 다른 아이는 두개골이 파열되어 사망했다. 신체 발육부진, 힘든 노동, 그리고 의료조치가 전무한 상황 등이 결합되어 이 마을 사람들의 건강상태를 전반적으로 열악하게 만든 것으로 판단된 다. 과학적 탐구가 미라의 신비를 파괴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에게 미라는 언제나 공포와 매혹의 대상이었다. 그들이 불러일으키는 공포와 매력 은 우리를 죽음과 직면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후세계(비록 인공적인 것이긴 하지 만)를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또 하나 우리에게 시간을 초월한 고대로의 여행 을 가능케 해준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는 미라를 통해 수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과 대면할 수 있다. 그 미라가 투트모시스 3세나 람세스 2세와 같이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위대한 왕들일 때는 더욱더 외경심이 깊어진다. 한편, 유령이나 악의에 가득찬 존재와 동일 하게 취급당하는 미라는 인간의 집단무의식속으로 들어가 미라 특유의 영상과 문학적 이미 지를 만들어 냈다. 현대에 들어서는 미라가 옛날의 저주 때문에 살아 잇는 사람들 틈으로 되돌아와서 해꼬지를 하는 악한 존재하는 이미지가 굳어져 잇다. 이것은 기이하게도 고대 이집트인의 신념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라고 볼수 있다. 그들도 죽은 자가 살아 돌아와 산 사람에게 복수를 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미라 처리는 고대 이집트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동서양의 역사를 살펴보면 방부처리 (혹은 탈수처리)의 역사는 뿌리깊은 전통임을 알 수 있다. 방부처리 풍습은 시칠리아, 알류 션 열도, 카나리아 제도, 멕시코, 안데스 등지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 현대에는 의약품이 발달되어 사후에 시체의 부패를 중지시킬 수 있는 여러 방법이 개발되 었다. 그렇게 하여 매장을 한없이 늦출 수도 있다. 그 기술 중의 하나가 액체질소를 이용하 여 시체를 완벽하게 냉동시키는 것이다. 사망의 원인이 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되면 그때 시체를 녹여 치료한 다음 생명을 소생시킬 수도 있다. 고대 이집트인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이런 치료야말로 미라 처리의 궁극적 목표였다고 말했을 것이다. 기록과 증언 장례의식 대부분 무덤에서 발견되는 제문은 주로 종교적 내용을 담고 있으나, 장례비용 내역을 열 거한 재미있는 글도 발견되었다. <<사자의 서>> : 무죄의 선포 중왕국 동안 무덤 속 시체 옆에 일정한 텍스트를 담은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넣어 주는 풍습 이 널리 퍼졌다. 그 텍스트는 사자가 사후생활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이었다. 이런 텍스트를 모아 놓은 것을 통칭하여 <<사자의 서>>라고 하며, 중왕국의 '관 속 테스트'에서 유래했다. 이것은 사자가 사후사계에서 여행을 잘하도록 도와 주는 길안내서이며 명계를 무 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고안된 마법의 주문을 모아 놓은 것이다. <<사자의 서>>는 '심장 의 무게 달기' 의식을 기술한 제125장이 특히 유명하다. 이 의식이 거행되는 동안 사자는 오시리스에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다. 만약 이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면 사자는 '정당함을 인정받았다'고 말해진다. "오, 진리와 정의의 마아티를 관장하는 위대한 신이시여, 당신에게 경의를 바칩니다. 오, 신이시여, 나는 당신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고자 이곳까지 오게 되었나이다. 나는 당신을 알 고, 당신의 이름을 알고, 이 마아티의 신전에 기거하는 42신을 알고 있습니다. 이들 신이 죄 인들을 감시하고, 또 인간의 목숨이 운네페르신 앞에서 심판을 받는날 인간의 피를 먹고 산 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내 가족들을 괴롭 히지도 않았고, 정의와 진실을 도외시하지도 사악함을 저지르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가치 없 는 사람들을 알고 지내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신을 경멸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을 속여 그의 재산을 가로채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신들에게 혐오스럽게 보이는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주인이 종을 해롭게 하도록 방조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남을 아프게 하지도 않았고 남을 배고프게 하지도 않았으며 눈물이 나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나 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수인을 시켜 청부살인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신전의 봉헌물을 가로채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신들의 과자를 훔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간 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 나는 부정하게 땅을 늘리거나 남의 땅을 빼앗지도 않았습니다. 나 는 저울의 눈금을 속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린아이들의 입에서 우유를 빼앗지 않았습니다. 나는 목초지에서 풀을 뜯고 있는 가축들을 내쫓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깨끗합니다! 깨끗합 니다! 깨끗합니다! 깨끗합니다! ... 그러므로 이 땅에서 그리고 마아티의 신전에서 내게 죄악 이 떨어지지 않게 해주소서. 왜냐하면 나는 이 신전에 계신 신들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있으 니까요. ..." 죽은 사람은 이제 오시리스의 42평가신에게 말한다. 수텐헤넨(헤라클레오폴리스)에서 오신 뼈를 꺾는 분들이여,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 뒤로 돌아가며 또 바스트(부바스티스)에서 오신 분들이여, 나는 사태의 본질을 알아보려 하지 않았나이다. ... 사이투에서 오신 두 뿔의 신이여, 나는 절대로 수다스럽지 않았습니다. E.A. 윌리스 버지 <<사자의 서>>, 1898년 방부처리 의식의 발췌 방부처리의 기술적, 종교적 측면은 '의식 텍스트'에 아주 자세히 적힌 엄격한 규칙에 따 라 관리되었다. 이런 텍스트 중의 하나가 테베의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그리스-로마 시대의 사본이라는 형태로 오늘날까지 전해져 온다. 아마도 원본은 이보다 훨씬 오래 되었을 것이 다. 비록 완전한 텍스트는 아니지만 이 사본에는 붕대처리의 여러 과정, 방부처리의 여러 과정에 따르는 주문등이 들어 있다. 미라를 연구해 보면 현실과 이상의 현저한 차이-이 의 식에서 구체화되어 있는-가 너무나 분명해진다. VI 손발을 보호하는 고무깍지를 손과 발에다 끼우면서. 지금부터는 황금깍지를 손과 발에다 끼우라. 네 번째 손가락 끝에서 시작하여 왼쪽 엄지 (?)에서 끝내라. 사이스에서 나온 붉은 아마포를 넓적하게 끊어서 싸라. 이 절차에 따르는 주문의 말. 오시리스(죽은 사람의 이름)! 그대는 방금 황금 깍지를 받았고 그대의 손가락은 순전한 황금이 되었고 그대의 손톱은 호박금이 되었도다! 진실로 그대는 신성한 오시리스의 화신 인 '라'의 발산물을 입었도다! 그대의 다리는 영원의 처소로 데려갈 것이고 그대의 손은 무한히 지속되는 곳으로 인도하리라. 그대의 황금으로 재생되었고 호박금으로 환생하였으 므로, 그대의 손가락은 오시리스의 처소에서, 그리고 호루스 그 자신의 방부처리 작업소에서 반짝거릴 것이니... VII 두 번째 기름 바르기와 머리 감기 그의 머리와 입에 기름을 바르라. 헬리오폴리스의 레하라크티에서 난 천으로 감으라. 엘카 브의 네크메트 천은 그의 머리에 두르라. 덴데라의 귀부인, 하토르의 천으로는 얼굴을 감 고, 싸우는 사람을 뜯어말리는 토트의 천으로는 귀를 감으라. 네베트-헤테페트의 천으로는 목덜미를 감으라. ... 귀 높이를 기준으로 얼굴의 오른쪽과 왼쪽에 스물두 번씩 감으라. ... 그 리고 지금부터 손가락 두 개 넓이의 천으로 조심스럽게 감으라. ... 이 절차에 따르는 주문의 말. 서쪽의 귀부인이고 동쪽의 군주이신 대인이여, 오셔서 오시리스의 귓속으로 들어가소 서!... 그가 눈으로 보게 하고 귀로 듣게 하소서. 코로 숨쉬게 하고 입으로 말하게 하소서. 두아 트(명계) 안에 들어가 혀를 놀려 자기의 입장을 변호하게 하소서! 장 클로이드 구아용 <<고대 이집트의 장례의식>>, 1972년 하프 연주자의 노래 신왕국의 무덤 속에 새겨진 '장례 텍스트'에는 종종 하프 연주자의 노래가 들어 있었다. 무 덤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 노래는 늘 같은 주제, 특히 인생의 무상함을 되풀이 노래 하고 있다. '두번째 삶'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으나, 다시 이승으로 되돌아올 수 없음을 강조하면서 이승에 있을 때 '행복하게 살 것'을 '침묵을 사랑하는 나라'에 들어가 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승의 삶을 마음껏 즐길 것을 노래한다. 한 세대가 지나가면 다음 세대가 이승에 자리잡는다. 우리 조상들의 시대로부터 이전에 존재했던 이들 신들은 피라미드 속에 누워서 쉬네.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죽 어 이제 피라미드에 누워 있네. 거대한 예배당을 지은 사람들, 그들의 처소는 여기 더 이상 있질 않네. 도대체 그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는가? 임호테프와 호르데데프의 말을 들었다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네. 그들의 처소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의 벽은 쓰러지고 말았네. 그 들의 장소는 더 이상 여기 있질 않네. 마치 아예 여기 없었던 것처럼... 저승에서 돌아와 그 곳 얘기를 해주고, 우리를 안심시키는 이는 아무도 없다네. 우리도 단지 그들이 간 곳을 따 라갈 뿐. 그러니 그대는 이승에서 행복해지게, 망각을 그대의 축복으로 삼아서. 생전에 그대 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게! 그대의 머리에 몰약을 바르게! 멋진 아마포로 온몸을 두르게! 신성한 의식의 진정한 경이로 자신을 축성하게! 근심 걱정 말로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서 행복해지게! 지상의 많은 것을 차지하게! 비탄의 날이 그대를 찾아오리니 절대 마음을 아프 게 하지 말게나! 마음이 아픈자는 그의 비탄을 듣지 못하나니, 애도는 죽은 사람을 무덤의 구덩이에서 구제할 수 없네. 그러니 매일 즐겁게 지내고, 걱정 말라! 보라, 죽을 때 자기 것 을 가지고 가는 자가 있는가? 보라, 명계로 들어간 사람이 되돌아온 적이 있는가? 리처드 B. 파킨스 <<고대 이집트의 목소리 : 중왕국 문학선집>>, 1991년 장례비용의 내역 그리스-로마 시대의 파피루스에는 장례비용을 자세하게 적어 놓은 것이 있다. 파이윰의 어 느 마을에서 발견된 자료를 소개한다. 진흙 도자기, 붉은 페인트, 왁스, 몰약, 노래, 우지, 아마포 천, 가면, 삼나무 기름, 아마포 약 제, 좋은 기름, 터본의 임금, 램프 심지, 오래된 웃옷 비용, 달콤한 술, 보리, 효소, 개, 작은 가면, 빵, 솔방울, 우는 사람들, 당나귀 수송비, 왕겨 G. 엘리엇 스미스, 웨렌 R. 도슨 <<이집트의 미라>>, 1924년 헤로도토스가 말하는 미라 처리 방법 B.C. 5세기 중반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이집트(당시 페르시아 왕국의 한 주)를 방문했다. 그는 이집트를 샅샅이 알고자 했다. 일부 학자들로부터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지만,(어떤 비평가는 '헤로도토스는 거짓말쟁이' 라고 말했다.) 그의 여행기에는 놀라운 관찰자료가 들어 있다. 헤로도토스는 가능한 한 직접 목격한 사실을 기록하려고 노력했으며, '전문가'들에게서 정보를 빌려 오기도 했다. 그가 저술한 미라 처리 방식은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주요 1차 사료이며 현대의 과학적 조사를 통해 상당 부분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이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이 일만 하며 또 이 기술을 세습한다. 그들이 일정한 가격으로 방주처리하기로 합의하면 그들(방부처리를 의뢰해 온 사람)은 제 갈 길을 가고, 방부처리사들은 건물 안에 남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방부처리를 해 나간다. 먼저 굽은 쇠갈고리를 써서 콧구멍으로 뇌수를 꺼낸다. 쇠갈고리로 긁어내고 남은 일부는 약제를 뇌 속으로 들이부어 긁어 낸다. 이렇게 한 다음 에티오피아의 날카로운 돌로 옆구리 에 구멍을 낸 후 내장을 들어낸다. 내장을 다 꺼낸 다음에는 옆구리의 구멍을 종려나무 술 로 깨끗이 씻고 짓이긴 향료로 다시 닦아 낸다. 그리고 짓이긴 몰약, 카시아, 유향을 뺀 나 머지 향료등으로 배를 채운다. 그리고 실로 그 구멍을 기운다. 그후 시체를 소다석속에다 약 70일 동안 담궈 둔다. 이 정도 기일이 방부처리에 가장 적당한 시간이다. 70일이 지나면 시 체를 깨끗이 씻어내고 넓적하게 자른 아마포-이집트 사람들이 풀 대신 사용하는 수지가 잔 뜩 묻은-로 감는다. 그러면 유족들이 그 시체를 넘겨받아 인체형 목관 속에 넣는다. 그 다 음에는 묘식의 벽에다 이 관을 세워 놓는다. 이것이 가장 값비싸게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이 다. 최고로 비싼 것을 원하지 않고 중간 방식을 원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한다. 삼나무에서 추 출한 기름을 기다란 관에다 가득 넣어서 이 기름을 시체의 뱃속에다 주입한다. 이때 옆구리 에 구멍을 내거나 내장을 들어내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 대신 항문을 통해 삼나무 기름을 몸 안으로 주입한다. 그런 다음 항문을 막아 기름이 역류하는 것을 막는다. 그리고 이 상태 에서 방부처리에 필요한 기간 동안 보관한다. 이어 그 기일이 지나가면 삼나무 기름을 항문 으로부터 뽑아낸다. 그 기름은 물체를 녹여 버리는 힘이 대단하여 내장과 창자가 녹은 상태 로 흘러 나온다. 그런 다음 소다석으로 시체를 탈수시켜 가죽과 뼈만 남게 만든다. 이 과정 이 완료되면 더 이상의 처리 없이 유가족들에게 시체를 돌려준다. 돈이 별로 없는 사람들을 위한 제3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하제를 써서 몸을 깨끗이 씻어 낸다. 그런 다음 방부처리를 위해 70일 동안 보관한다. 이 과정이 끝나면 곧바로 시체를 유 가족들에게 돌려준다. <<역사>>, 제2권 평화롭지 못한 종말 무덤 속에 부장된 귀중품을 노리는 약탈꾼과 수집가들이 늘 있어 왔다. 유명한 미라이든 평범한 미라이든 마땅히 누려야할 사후의 평화를 끝까지 향수한 미라는 하나도 없었다. 왕릉의 약탈 람세스 1,2세 시절(19왕조) 이집트는 예전의 영화를 되찾았다. 그러나 람세스 3세 이후 20왕 조의 왕권은 서서히 약화되었고 그에 따라 사제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그러다가 람세스 9세 시대에 들어서면, 이와 같은 사회적 불안정을 틈타 도굴꾼들의 도굴행위가 더욱 기승을 부 리게 되었다. 마침내 테베 근처의 왕릉마저 노략질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당시 테베 시장이던 파세르 가 수사에 착수하여 여러 명의 도굴꾼을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했다. 다음은 파세르 휘하의 수사대가 작성한 보고서에서 발체한 내용이다. 레소베켐사프의 아들 세켐레 세드타우이 왕의 피라미드 무덤과 관련된 건이다. 도굴꾼들 은 멘케페레 왕의 곳간지기인 네바쿤의 돌무덤 외곽 벽으로부터 굴을 뚫어 피라미드의 현실 로 침입하고는 왕릉을 함부로 훼손했다. 왕의 현실에 있던 귀중품이 없어졌고, 왕비 누브카 스의 현실도 마찬가지로 약탈되었다. 고관, 귀족, 집사가 이 사건을 조사했고, 도둑들이 왕과 왕비의 현실을 침입한 이 사건의 진상이 낱낱이 밝혀졌다. 토머스 E. 피트 <<이집트 20왕조 왕릉 도굴 사건>>, 1930년 도둑들의 진술서 발췌 우리는 평소 습관대로 무덤을 도굴하려 갔습니다. 우리는 레소베켐사프의 아들 세켐레 세드 타우이 왕의 피라미드 무덤을 발견했습니다. 그 무덤은 우리가 상습적으로 약탈한 귀족들의 피라미드나 무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우리는 구리 도구를 이용하여 이 피라미드에 침투, 내부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지하의 묘실들을 발견하고 불을 켠 양초를 손에 들고 내려갔 습니다. 우리는 현실 입구의 돌무더기를 헤치고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매장지 바로 뒤 에 누워 있는 신(왕)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왕의 옆에 위치한 누브카스 왕비의 매장지도 발견했습니다. 그 매장지는 회반죽과 돌 무더기로 보호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헤치 고 그 안으로 들어가 왕비도 같은 자세로 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왕과 왕비의 미라가 들어 있는 석관과 목관을 열어젖혔습니다. 왕의 미라에는 언월도가 놓여 있었습니다. 목에는 부적과 금장식이 많이 달려 있었고 머리에는 금관이 씌워져 있었습니다. 왕의 고상한 미라는 금으로 뒤덮여 있었고 관은 안과 밖이 금과 은으로 장식되고 또 귀중 한 보석으로 상감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미라를 장식한 금, 부적, 보석들, 그리고 금과 은 등을 모두 떼어 냈습니다. 그리고 왕의 미라와 똑같이 금은으로 장식된 왕비의 미라도 약탈 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의 관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우리는 금, 은, 동이 들어 있는 가구도 가지고 나와 우리들끼리 나누어 가졌습니다. 우리 는 이 두 신의 미라에서 나온 금, 부적, 보석등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금은 총 160데벤이었 는데, 여덟 명이 나누니까 1인당 20데벤이었습니다. 이것은 가구에서 나온 부스러기 금은 계 산에 넣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테베로 돌아갔습니다. A.J. 스펜서 <<고대 이집트에서의 죽음>> 1982년 19세기 한 유럽인이 이집트 고대 유물을 수집하여 판매했다. 19세기에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 고대 유물 수집에 뛰어들어 가장 좋은 유물을 차지하기 위해 활발한 경쟁을 벌였다. 영국의 경우, 이집트 주재 총영사 헨리 솔트(1780~1872)가 특별 수집가인 조반니 벨조니(1778~1823)의 도움을 받았다. 벨조니의 도움을 받은 헨리 솔트는 3 차에 걸쳐 막대한 양의 유물을 수집했다. 그의 수집품 가운데 1차 수집품은 런던의 대영박물관에서 구입했고, 2차 수집품은 프랑스 왕이 사들여 오늘날에는 루브르가 소장하고 있으며, 3차 수집품은 솔트의 사후 소더니 경매 장에서 매각되었고 상당 부분을 대영박물관이 사들였다. 솔트의 통역 겸 대리인으로 일한 조반니 아타나시는 이집트에서의 경험을 회고록으로 남겼느넫 다음은 그 일부분이다. 아비도스 발굴에서 우리는 다양한 미라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나무 궤짝에 든, 한가지 종 류가 대부분이었다. 이 일대의 무덤들은 코팅을 한 벽돌로 테를 둘렀고 꼭대기 부분은 아치 모양으로 회반죽이 발라져 있었다. 이 일대는 깨지기 쉬운 사암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조치 가 불가피했을 것이다. 현실의 4면 벽에는 명판이나 조상을 넣어 두기 위한 석실이 있었고 바닥에는 보통 솜씨의 석회석 석관들이 있었다. 이들 현실에는 석관이 고작 두세 개 정도 뿐이었다. ... 이들 무덤에서 미라와 함께 발견된 명판, 우상, 그리고 다른 물건들은 모두 똑 같은 양식을 보여 주었다. 금과 은을 찾아서 무덤을 약탈했던 자들은 무덤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했다. 그래서 나는 이미 침입되지 않은 무덤을 단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내가 들어간 무덤들도 이전에 약탈자들이 손을 댄 것이었다. 아비도스에 머무는 동안 나는 약탈자의 손때를 타지 않은 완전한 상태의 미라는 단 두 구 를 발견했을 뿐이다. 이들 미라는 아주 평범하게 만든 궤짝 안에 들어 있었다. 이 두 구는 현재 런던에 있다. 그중 하나는 샘스가 이곳 이집트를 방문하던 도중 다른 유물들과 함께 사갔다. 아비도스 무덤에 대해서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모든 미라가 동일한 방식으로 방부 처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러 향유를 쓴 테베의 경우와 달리, 한 가지 향유만을 썼 다. 아비도스의 미라들은 일반적으로 내가 이미 언급한 검은 향유로 보존되어 있었다. 아무 튼 우리가 발굴을 해 나가는 도중에 다른 종류의 향유는 보지 못했다. 그래서 검은 향유가 시기적으로 그 어떤 방향제보다 앞선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을 갖게 되었다. 솔트의 견해는 아비도스가 테베보다 더 오래 된 도시라는 것인데 여기에 윌킨스도 동의했다. 이집트에서의 모험을 회고하면서 아타나시는 짧은 안내말과 함께 솔트의 3차 수집품의 카 탈로그를 덧붙였다. 그것은 다양한 유물들로서 총 1270점이었다. 이 3차 수집품은 총 7,168 파운드 18실링 6펜스에 팔렸다. 3차에 걸친 이집트 고대 유물의 수집은 고 솔트가 이집트 총영사로 재직하는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다. 1816년 이집트 주재 영사로 부임한 솔트는 전 이집트 주재 프랑스 영사였던 드로베티가 나일강 상류 지역을 활발히 돌아다니면서 고대 유 물을 수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드로베티는 그 유물들을 프랑스 정부에 판매할 목적 으로 몇 년에 걸쳐 수집을 하던 중이었다. 다음은 특정 품목(제150호)에 대한 아타나시의 자세한 설명이다. 보존 상태가 좋은 여자 미라, 신장 163cm이고 미라 케이스는 색채가 풍부하고 장식이 정교 함. 가겨은 105파운드. 이 미라의 가면은 대단히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음. 고대 이집트인이 사람의 얼굴을 형용 할 때 보여 주었던 예술적 우아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대표적인 미라임. 양팔은 가슴 위에 엇갈려 놓여 있음. 왼쪽 손가락에는 홍옥수 반지와 또 다른 반지들이 끼워져 있고 오른쪽 손에도 세 개의 반지 끼워져 있음. 상체와 머리 부분은 해바라기 화관 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것은 결혼하지 않은 미라에게만 사용하는 장식임. 이 장식은 관을 처음으로 여는 순간 파손되었음. 미라 앞부분에 두 개의 명판이 부착되어 있음. 한 명판은 금과 은으로 만든 것으로서 대 위에 재칼이 새겨져 있음. 다른 명판은 한가운데에 돌로 만든 풍뎅이가 새겨져 있음. 명판에 그려진 손을 쳐든 사제 옆에는 일곱 줄의 상형문자가 쓰여 있고 윗부분에는 영혼의 상징인 새가 날개를 펼치고 잇음. 목관 안에는 죽은 여자의 꼰 머리카락이 천에 싸여 있고, 미라의 형태를 한 조그만 은제 우상이 있음.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는 물론 기타 장식물을 감안할 때, 현존하는 미라 중 가장 기 이하고 흥미로운 것임. 조반니 아타나시 <<헨리 솔트 경의 지시에 따라, 나일강 상류 지역에서 행한 조사와 발견 에 대한 소 보고서>> 1836년 획기적인 발견 두 가지 19세기에 이집트에 대한 체계적인 탐사가 진행되면서 많은 왕릉이 발굴되었다. 유명한 파 라오들이 다시 한번 햇빛을 보게 되었고 미라들은 중요 연구대상이 되었다. 데이르엘바하리의 미라 저장소 1875년 룩소스의 고대 유물 시장에는 왕릉에서 나온 것이 분명한 유물들이 암거래되고 있었 다. 고고학자들은 이 사실을 주목했고 새로 고대유물관리국 국장으로 임명된 가스통 마스페 로는 이 문제를 자세히 조사해 보기로 결정했다. 곧 구르나 마을에 살고 있는 압델라술 형 제가 도굴 용의자로 주목되었다. 집요한 수사를 견디지 못한 형제 중 한 명이 마침내 입을 열었고 이로써 미라들이 가득 들어찬 데이르엘바하리의 미라 저장소의 위치가 알려졌다. 7월 5일 수요일, 모하메드 아흐메드 압델라술은 에밀 브룩슈와 아흐메드 에펜디 카말을 매장 동굴이 위치한 지점으로 안내했다. 당초 그 동굴을 만든 고대 이집트의 기술자는 아주 정교하게 설계했음이 틀림없다. 그 어떤 은신처도 그처럼 교묘하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라 는 생각이 들었다. 수직갱도 바닥에는 폭 16.8m, 높이 9.5m의 화랑이 서쪽 벽으로 이어져 있었다. 7.3m쯤 안 으로 들어가니까 회랑은 북쪽으로 방향을 급격하게 바꾸었고, 계속해서 약 61m 더 들어갔 다. 회랑의 폭과 높이는 장소마다 달랐다. 가령 어떤 곳에서는 폭이 1.8m였지만 어떤 곳에 서는 1.2m였다. 중간쯤 가니 대여섯 개의 대충 만든 계단이 바닥쪽으로 하강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미완성의 벽감이 있었다. 아마도 또 다른 방향으로 회랑의 진행 방향을 바꾸려고 하다가 그만둔 것 같았다. 회랑은 마침내 약 76.2m 길이의 불규칙한 장방형 현실 로 연결되었다. 에밀 브룩슈가 수직갱도 바닥에 도착하여 처음 본 것은 니브소누라는 이름이 새겨진 하얗 고 노란 관이었다. 그 관은 입구에서 약 0.6m 정도 떨어진 회랑에 있었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니 17왕조 양식을 보이는 관이 보였다. 그 옆에는 티우하토르 혼토우이 여왕의 관이 있었다. 그 옆은 세티 1세의 관이었다. 관들 옆에는 작은 조상, 카노픽 항아리, 청동 헌주 그 릇 등이 널부러져 있었다. 그리고 뒤쪽, 즉 회랑이 북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생긴 공간에는 이심케브 여왕의 장례용 천막이 제멋대로 개어져 내팽개쳐져 있었다. 아마도 그곳을 황급히 떠난 사제가 그렇게 내던진 것 같았다. 주 회랑도 혼란스러울 정도로 어질러져 있었다. 그래 서 우리는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지조차 모르는 채 손발로 더듬어서 간신히 앞으로 나갔 다. 촛불에 얼핏 비친 관과 미라에는 역사적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아메노 피스 1세, 투트모스(투트모시스) 2세(계단의 벽감에 있는 것), 아모세(아모시스) 1세와 그의 아들 시아문 소크눈리(세케넨레), 아흐토트푸(아호테프) 왕비와 아흐모세노프리타리(아흐모 세 네페르타리) 등이 있었다. 마지막 현실은 가장 많이 어질러져 있었지만 한눈에도 그 양 식이 20왕조의 것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모하메드 아흐메드 압델라술의 말을 처음 듣고서 는 너무 황당해서 거짓말이라고 판단했는데, 막상 현장을 보니 과장이 아니였음을 알 수 있 었다. 기껏해야 별로 중요하지 않는 왕의 미라 한 두 구를 발견할 줄 알았는데, 압둘라술 삼 형제는 왕들의 미라가 가득 들어찬 보고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 왕들이 어디 보통 왕들인 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유명한 투트모스(투트모시스) 3세, 세티 1세, 아흐모세(아모시스) 해 방왕, 람세스 2세 정복왕 등이 아닌가. 에밀 브룩슈는 갑자기 이런 유명 미라들을 만져 보게 되자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 역시 이름으로만 들어 알던 그 유명한 왕들의 신체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면서 에밀처럼 혹시 꿈을 꾸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1차 검사를 하는 데에는 두 시간이면 충분했다. 이어 인양작업이 시작되었다. 무디르(지방 행정관)의 부하들이 신속하게 아랍인 300명을 모아 왔고 그래서 작업이 시작되었다. ... 모하 메드는 수직갱도 아래로 내려가 거기서 직접 인양작업을 지휘했다. 에밀 브룩슈와 아흐메드 에펜디 카말은 땅위로 올라오는 유물들을 챙겨 산가슭에다 옮겨 놓았다. 그들은 유물을 잘 진열하여 잃는 것이 없도록 신경을 썼다. 무덤의 유물을 다 들어내는 데에는 48시간의 중노 동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아직 일은 절반도 끝나지 않았다. 테베 평야를 지나 룩소르로 가는 강을 건너 유물들을 수송해야 되는 것이었다. 어떤 관은 12~16명이 달라붙어 들어올려야 했 고 그후에도 산에서 강까지 7~8시간 걸려 수송해야 되는 힘겨운 작업의 연속이었다. 먼지가 펄펄 날리는 7월의 땡볕에서 이렇게 움직여야 한다는게 얼마나 고역인지 금방 상상이 될 것 이다. 드디어 7울 11일 저녁, 미라와 관은 천과 매트에 싸여 룩소르에 도착했다. 사흘 뒤 박 물관의 증기선이 도착했고 왕들의 유물은 모두 남김없이 증기선에 실렸다. 이제 불라크로 떠날 채비를 모두 마쳤다.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룩소르에서 쿠프트에 이르는 동안 나 일강 양안에서 머리를 풀어헤친 농촌 여자들이 울부짖으며 배를 따라왔고, 남자들은 마치 장례행사에서처럼 총을 쏘아댔다. 가스통 마스페로 <<데이르엘바하리 발굴작업>> 1881년 투탄카멘 석관의 개봉 왕들의 계곡을 여러 해 동안 탐사하던 중인 1922년 11월 4일, 하워드 카터는 투탄카멘 왕릉 을 발견했다. 그러나 왕릉의 석관과 세 개의 목관을 개봉하는 작업은 1925년 10월 10일에 시작되었다. 이 도금을 한 목관은 길이가 224cm이며, 인체형이고, 카트 머리 장식을 썼으며, 얼굴과 손에 호박금이 입혀져 있고, 리시 타입(깃털 달린 날개를 흉내낸 장식의 이름)이다. ... 정말 흥분되면서도 조마조마한 순간이었다. 관 뚜껑이 손쉽게 열리자 두 번째 인체형의 멋진 관이 드러났다. 관은 얇고 가벼운 아마포로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그 천은 오래 되어 거무튀튀한데다 훼손되어 있었다. 이 아마포 위에는 올리브와 버드나무 가지, 그리고 푸른 수련과 수레국화 이파리로 만든 꽃장식이 놓여 있었다. 또한 규모는 적지만 똑같은 양식의 꽃장식이 이마 부분의 수의 위에 놓여 있었다. 이 수의포 밑 관의 금장식 위에 새겨진 여러 빛깔의 유리 장식이 얼핏얼핏 보였다. ... 그런 사실을 모두 기재한 다음 나는 꽃장식과 화관을 들어내고 수의포를 감아 올렸다. 또 다시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다시금 고대 관 제작자의 기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형태는 오시리스를 따른 것이었으나 장식이나 선은 대단히 미묘하고 아름다웠다. ... 그렇게 하여 세 번째 관을 열었는데 그 관도 앞의 관처럼 오시리스 형태였다. 세부장식과 수공은 붉은색이 나는 아마포로 감춰져 있었다. 이제 번쩍이는 황금의 얼굴이 그 모습을 드 러냈다. 목과 가슴에는 정교한 염주와 꽃모양 깃이 파피루스에 기워져 있었다. 그리고 네메 스 머리 장식 바로 위에는 아마포 냅킨이 있었다. 버튼은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즉시 이것들을 사진 찍었다. 이어 나는 꽃모양 깃과 아마포 덮개를 걷어 냈다. 그러자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길이가 187cm나 되는 이 세 번째 관은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 그러나 세세한 장식은 관 위에 걸쭉하게 뿌려진 액상 연고의 반짝이는 코팅에 가려져 있 었다. ... 황금 손잡이를 잡고 뚜껑을 들어올리니 왕의 미라가 드러났다. ... 황금의 관 안에 들어 있는 단정하고 깨끗한 미라에는 관 바깥에 그렇게 했던 것처럼 액상 연고가 가득 뿌려져 있었다. 그 연고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검고 딱딱하게 되었다. 연고 때 문에 전체적으로 검은색 분위기였지만 왕의 머리와 어깨를 가리고 있는 황금 가면은 대조적 으로 번쩍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연고를 뿌릴 때 머리와 발 부분은 뿌리지 않은 것 같았다. 미라는 오시리스를 상징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고대 이집트 초상의 전형인 그 황금 가 면은 일찍 죽은 젊은 왕의 슬프면서도 침착한 표정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 가슴에 X자로 놓인 황금의 손은, 가면과 별도로, 아마포 천에 기워져 있었고 오시리스의 상징인 채찍과 막 대기를 쥐고 있었다. ... 이 미라는 신들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단정하고 침착한 모습은 투탄카멘임에 틀림없엇다. 즉, 그의 조상이나 관에 그려져 있는 모습과 일치하는 것이다. ... 버튼이 사진 촬영을 끝내자, 우리는 미라의 구체적 모습과 보존상태를 좀더 자세하게 살 펴볼 수 있었다. 손에 쥐고 있는 채찍과 막대기는 거의 부패되어 가루가 되었다. 여러 장식 들과 양손을 아마포 천에다 기워 놓은 실도 썩었다. 그래서 조금만 만져도 먼지가루처럼 내 려앉았다. ... 한 단계 한 단계Tlr 정밀조사를 해 나감에 따라 수의포는 물론이고 미라 자체도 위험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의포와 미라 위에 흥건하게 뿌려 놓은 연고의 산화작용 으로 미라의 산화가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던 것이다. 하워드 카트 <<투탄카멘의 왕릉>> 1927년 미라를 검사하기 1895년, 빌헬름 코라트 뢴트겐이 엑스레이를 발견함으로써 미라를 파괴하지 않고 검사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생겼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미라, 방 사선학자, 그리고 장비를 어떻게 한 장소로 집결시키느냐하는 문제가 남았던 것이다. 엑스레이로 미라 찍기 1926년 프랑스의 인기 있는 과학잡지인 <<즈세투>>(나는 모든 것을 안다) 소속의 두 기자 는 4년 전에 발견된 투탄카멘의 미라에 대해 엑스레이 작업이 안 되어 있음을 알고 놀랐다. (4년 전의 일이니까 그리 먼 과거의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두 기자는 그 실험을 한번 해보 기로 했다. 그들은 리옹의 기메 박물관과 접촉했고, 박물관의 모레 박사는 두 기자에게 '여 자 음악사'의 미라를 소개했다. 우리는 먼저 예비실험을 해야 했다. 예비실험은 일종의 형광투시 실험으로서, 여기에 전체 실험의 성패 여부가 달려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엑스레이 이미지를 담은 감광판을 얻기 이 전에 엑스레이가 간단한 형광 스크린 위에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확인해야 했음을 말한다. ... 두꺼운 테이블과 덕지덕지 달라붙은 붕대가 장애물이 될 것 같았지만, 엑스레이는 미라를 투시하여 형광판에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불켜진 판에 두 개의 긴 줄이 나타나고 이어 짧은 줄-미라의 경골과 섬유질-이 나타났다. ... 이 작업을 하는 데에는 몇 시간이 걸렸고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해결해 나가는 시행착오 를 거듭해야 했다. 제일 먼저 미라를 단면으로 나누어 엑스레이를 찍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 냈다. 이번에는 광원을 미라의 위에서 내리비췄다. 그리고 감광판을 미라의 각 부위-머리, 목, 동체, 골반 등-로 이동해 촬영을 진행했다. 그렇지만 사소한 문제들은 계속해서 발생했 다. ... 이렇게 해서 찍은 엑스레이 사진은 외과의인 G. 라르드누아와 이집트학자인 모레 교수, 이렇게 두 분이 공동으로 해석해 주었다. 이 작업에 인류학과 이집트학 두 학문 분야가 공 동의 관심사를 표명해 주었던 것이다. ... 유명한 외과의 G. 라르드누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 이렇게 멋진 제안을 한 당신들에게 정말 축하한다는 말을 해야겠소. 이런 종류의 연구 에서는 얻을 게 대단히 많을 것 같소. 이 엑스레이 사진은 유용한 인류학적 정보를 많이 제 공하고 있어요. 이 여자의 이마는 넓고 머리는 잘 발달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틀림없이 지적 인 사람이었을 거요. 뾰도 전반적으로 보아 탈골되거나 훼손된 것이 없으므로 아주 건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아니 운동을 좋아한 여자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을 지적할 수가 있어요. 흉부가 지나칠 정도로 확장되어 있다는 것입니 다. ... 아마도 방부처리사들이 가슴 부위에 무엇인가를 너무 많이 집어 넣어서 그럴 것입니 다. 지나칠 정도로 말이에요."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인 모레 씨는 자상하게도 우리에게 이집트학의 지식을 알려 주었 다. ... 모레 교수는 미라 처리 과정에서 내장을 꺼내 텅 빈 흉부에 무언가를 가득 넣어서 채웠다 고 말해 주었다. ... "당신들이 가져온 기계에서 방출된 엑스레이는 신체의 대부부을 투시했어요. 그러나 흉부 에서는 어떤 딱딱한 물체를 만났어요. 사진에 검게 나타난 부분이 그것이지요. 도대체 검은 부분이 뭘까, 궁금할 겁니다. 이건 흙, 송진, 방향초 등이 뭉쳐 있는 거예요. 방부처리사들이 내장을 들어내고 그 대신 집어 넣은 거지요. ... 당신들이 촬영한 엑스레이 사진은 흥미로운 사실을 많이 보여 주고 있어요. ... 그래요, 고고학자들은 이 엑스레이 사진을 분석항 새로운 해명과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학문들 간에-비록 목표는 다를지라 도-점점 더 긴밀히 협조하는 계기가 될 겁니다. 그렇게 해서 서로 더 나은 결과를 찾게 되 는 거지요." C. 를뢰, M. 구이노 <<즈세투>>, 1926년 3월, 4월 엑스레이를 이용한 미라 연구 1960년대에 P. H. K. 그레이는 유럽 여러 박물관에 있는 133구의 미라를 엑스레이로 촬영했 다. 그 엑스레이 연구 결과를 간략하게 발표하면서 그레이는 엑스레이가 아직도 잘 사용되 지 않는 방법임을 알고 놀랐다고 말했다. 본격적인 연구에서도 엑스레이가 아직 잘 동원되 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그의 연구는 지금까지도 가장 방대한 것으로 남아 있다. 엑스레이는 붕대로 감싸 놓은 미라를 손상시키는 일이 절대로 없기 때문에, 그리고 방사 선을 이용해 미라를 검사했다는 연구 보고가 별로 없기 때문에 영국과 다른 유럽 국가에 있 는 미라들을 엑스레이로 촬영해 보는 일이 보람 있는 성과를 낳겠다고 생각했다. 이 연구의 목적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미라에 인간의 뼈가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미라의 나이와 성별, 방사선을 이용해 밝혀 낼 수 있는 사실과 각종 방부처리 기술의 연계, 붕대 속에 있을 지 모르는 부적의 확인, 그리고 병리학적 변화의 유무 등. 그레이스는 엑스레이 연구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고고학. 이간의 뼈가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한다. 대영 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박물관은 19세 기 초의 탐험가나 여행가에게 많은 미라를 사들였다. 이집트인 거래상들은 '유물'이나 미라 를 판매하면 큰 이익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결과 가짜가 많이 나돌았다. 1837년 C. 로치포트 스콧은 이렇게 썼다. "온갖 쓰레기를 다 사들이니가 고대 유물 거래업이 큰 돈벌이가 되었다. 그러자 가짜가 나돌게 되었고 심지어 미라를 만즐어 내기까지 했다." 이 연구는 스콧의 주장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많은 경우 이집트 여행자들은 진짜 미라가 아니라 가짜를 사들였다. 미라의 나이와 성별. 관은 그 뚜껑에 쓰인 글씨와 양식으로 연대를 파악한다. 그러나 그 안에 든 미라가 정말 원래의 미라인지 어쩐지는 알 수 없다. 남자의 이름과 지위가 적힌 관 속에 여자 미라가 들어 있을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한 번은 붕대를 감지 않은 75세의 노파 미라가 있었는데 방사선으로 검사를 해본 결과 17 세 소녀로 판명되었다. 방사선을 이용해 밝혀 낼 수 있는 사실과 각종 방부처리 기술을 연계시키는 것. 21왕조의 미라일 경우에는 방사선을 이용한 발견사항과 방부처리 기술을 연계시키는 일이 가능하다. 21왕조 미라의 특징은 내장 주머니를 신체의 내부에다 넣는 것, 인공적으로 만든 눈, 피하에 살이 오른 것 등이다. 부적의 유무. 부적은 엑스레이가 투과하지 못하므로 금방 찾아낼 수 있다. 또 핑요할 때에 는 언제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으며 붕대를 약간 찢어 내면 손쉽게 꺼낼 수 있다. 고 병리학. 무디는 "방사선학이 고대 사람들의 신체적 질병을 알아내는 보조적 방법이다." 라고 말했다. 초창기에는 뼈의 손상에 대해서만 밝혀낼 수 있다고 생각되었으나 그것은 사 실이 아니다. 골관절염, 수직줄을 내보이는 골관절염은 흔하다. 성장이 중단된 줄. 검사된 133구의 미라 중 30% 이상에서 이 증상이 나타난다. 골절. 골절과 탈골은 무수히 발견된다. 특히 후대의 미라일수록 심하다. 그러나 이것들은 거의 모두 사후에 생긴 것이다. 다른 골절. 발의 상태 를 점검해 보니 꽉 끼는 신발은 신지 않은 것 같다. 이빨의 상태. 치아질환이나 마모는 아주 흔한 것으로 나타났다. 부드러운 조직의 손상. 레이덴 박물관에 소장된 27구 중 20구는 성인 의 것이다. 20구 중 4구는 다리 동맥의 경화가 심하다. 133구 중 1구에서 확실히 담석이 발 견되었고 다른 미라에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질병은 발견되지 않았다. 미라의 뼈에서 악성 종양 형성, 폐결핵, 매독, 문둥병 또는 구루병 등은 나타나지 않았다. P. H. K. 그레이 '고대 이집트 미라의 방사선 연구' '의학 방사선 및 사진' 1967년 파리에 온 람세스 2세 1975년, 프랑스 정부와 이집트 정부의 합의에 따라, 람세스 2세의 미라가 방사선 치료를 받 으러 파리로 건너왔다. 1912년에 엑스레이를 찍어 본 결과 이 미라의 상태가 나빠지고 있음 이 밝혀졌고, 그 뒤 65년이란 세월이 지나면서 훼손 부분이 확대됨에 따라 시급하게 손을 써야 할 필요가 생겼던 것이다. 정밀 엑스레이 결과, 다수의 병리학적 변화가 발견되었고 또 방수처리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람세스 2세의 미라는 경부척추에 골절이 가 있었는데, 이는 방부처리사들이 두개골의 빈 곳을 채우기 위해 송진을 집어 넣는 과정에 서 손상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람세스 2세가 파리에 도착하자 그를 구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주도면밀하게 작업을 시작했 다. 첫 번째 작업은 정확한 병의 원인을 규명하는 일이었다. 학자들은 벌어진 붕대 조각 틈 으로 흉곽 부위의 미세한 조직과 떨어진 머리카락의 표본을 채취하여 분석했다. ... 박테리 아? 균류? 해충? 전문가들은 모두가 각기 좀더 정밀한 현미경을 들이대고는 문제를 조사해 나갔다. ... 드디어 자연사 박물관의 은화식물 전문가인 장 무샤카 박사가 미라를 파괴하는 인자를 확인했다. 그것은 다에달레아 비엔니스 프리에스라는 이름을 가진 버섯 모양의 균류 였다. ... 미라의 해골, 대퇴부 동맥의 벽, 치아, 그리고 방부처리된 모든 부분에 대한 정밀 검사를 통해 많은 사실이 밝혀졌다. 람세스 2세는 원래 다리를 조금 절었다. 척추는 경직되어 있었 고 머리는 앞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었다. 그런데 방부처리사들이 그에게 수의를 입힐 때 머리를 약간 움직여서 똑바로 놓았기 때문에 목과 목덜미 부분에 균열이 갔다. 파라오가 잇 몸 여러 부분에 화농을 앓고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 균이 전신에 퍼져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람세스 2세가 앓았던 병의 원인을 규명하는 작업과 미라를 치료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 다. 리오넬 발루와 콜레트 루베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제 현대과학이 허용하 는 모든 방법을 이용하여 그의 병을 치료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하지만 화학요법 또는 냉 온요법은 부적절한 치료방법이라고 판단되어 배제되었다. 미라를 만들 때 사용되었던 송진 과 고무가 화학요법이나 냉온요법에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는 부작용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는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그것은 람세스 2세에게 방사선 치료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파라오의 미라에 조그만 문제라도 생길 경우 분명 이집트와 외교적 분쟁이 야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라 치료 작업의 초기부터 이집트측의 공식 대표인 사우키 나클라 박사가 수천 번도 더 조심하도록 당부하고 끊임없이 감독해 왔던 터였다. 파라오를 프랑스로 운송할 때 사용했던 목관의 바닥을 잘라 내고 거기다가 합성 재료로 만든 얇은 판자를 갖다대어, 그 판자 위로 미라를 내린 다음 다시 외과용 이동침대에 실었다. 골격에 가해질 충격을 줄이기 위해 머리 와 몸체 아래에는 작은 쿠션을 받쳤다. 그리고 과학자들의 검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꼭 필 요한 경우에만 미라를 끌어낼 수가 있었으며, 그것도 세 시간 이상 계속 그런 상태로 놔두 는 것은 금지되었다. ... 그러므로 철저하게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떤 조치를 해야 될 때가 왔다. 장 무샤카는 확신을 가지고 진단을 내렸다. 람세스 2세의 미라를 침식중인 균류가 발생시키는 병을 근절시키지 못할 경우 미라는 금세기가 끝나기도 전에 소멸될 처지에 놓여 있다는 확 신이었다. 필요한 조치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선임 학자 발루였으며, 그는 람세스 2세에 게 방사선 처리를 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 람세스 2세는 먼저 인류학 박물관의 전문가들 손에 복원되었고, 이어 루브르 박물관에서 제공한 고대 이집트의 아마포에 싸여 삼나무로 만든 원래의 관에 안치되었다. 두 번째로 생 명을 얻은 람세스 2세는 예전의 위엄을 되찾았다. 그를 치료해 준 의사들은 고대 이집트의 사제들이 수행했던 역할을 그대로 수행했다. 고대 이집트의 전통을 숭상하면서 람세스의 영 혼이 거처할 완전한 신체를 마련해 준 것이다. 제왕은 이제 그 빈약할 틀(관) 속에 갇혀 생 명의 강을 굽어보고 있다. 두치의 미라들 박물관에 있는 미라들은 대개 출처가 불분명하며, 미라 처리 솜씨와 보존상태를 판단기준으 로 삼아 무작위로 선택한 것이다. 그러므로 현장에서 미라를 연구하는 것이 전체 인구집단 을 표본조사하는 데 더 효과적이다. 1976년, 카이로에 위치한 프랑스 동양고고학 연구소의 소장인 세르즈 소네롱은 리비아 사 막의 카르가 오아시스의 남단에 위치한 마을인 두치에서 발굴작업을 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 았다. 이 마을은 19세기 초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조사가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 마을은 조사작업에 적합한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예를 들어 거의 원상태로 보존된 석조 신 전이 있었고-그 신전은 불타지 않는 거대한 벽돌담으로 둘러져 있었다-또 불타지 않는 벽 돌로 지어진 사당도 있었으며 마을의 유적도 상당수 되었다. 마을은 전성기에 인구가 5,000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광대한 공동묘지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 마을은 B.C. 1세기부 터 A.D. 5세기까지, 그러니까 로마가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사람들이 살았다. 고대 이집트사에서 볼 때 후기에 속하는 시기이지만 권력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이 작은 마 을에는 문화적, 종교적 전통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공동묘지의 발굴작업(현재도 진행중임)은 미라 상태 혹은 해골 상태의 시체를 700구 이상 인양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유골을 정밀하게 검사해 본 결과, 이들 뼈도 일반적으로 미라 처 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시체의 보존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조직적인 노략질-공동묘지 가 들판 바로 옆에 있다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과 관개운하에서 넘쳐난 물 때문이었다. 뼈 들은 전형적인 골계측 방법에 따라 연구되었지만 보존상태가 양호한 미라들이 많았던 까닭 에 현장에서 방사선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동일 인구집단에 속한 여러 구의 미라를 동시에 점검함으로써(이런 일은 이때가 최초였다.), 전체 인구의 사회적, 문화적 단면 을 그려 낼 수가 있었다. 전기나 수도 시설이 없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엑스레이 촬영을 수행해야 했으므로, 현장에 임시로 가설한 발전기에 연결된 휴대용 엑스레이기를 이용했다. 현상실의 설치가 또 다른 골칫거리였지만, 그래도 최종적으로 얻은 네가티브 필름은 좋은 환경에서 제작된 것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대부분의 미라는 붕대와 장식이 떨어져 나간 상태였고 또 많은 미라들이 모래가 잔뜩 끼 어 있어서 먼저 완벽한 청소작업을 해야 했다. 잡물들이 엑스레이에 나타나면 판독에 혼선 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청소작업 다음에는 임상적 소견을 적어 나갔다. 그리고 비교 측정 치를 보이기 위해 일련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라마다 여덟 차례 엑스레이 를 찍어 주요 부분이 모두 찍히도록 했다. 특히 두개골 부분에 신경을 썼다. ... 어떤 경우에 는 분석을 위해 머리카락, 손톱, 피부, 송진, 방부처리제의 표본을 추출했다. 이런 여러 절차 가 완료되면 미라의 일련번호를 붙여서 안전하고 접근하기가 쉬운 무덤속에 안치했다. 결과 분석 결과 두치의 주민들은 지중해 유형이었다. 몸매가 호리호리하고 평균키(남자 165cm, 여자 155cm)에, 피부가 희고... 용모는 나일강 유역에 살았던 사람들과 거의 똑같았다. 병을 앓은 증거는 꽤 다양했다. 외상에서 비롯된 치명적 골절로 사망한 경우가 여러 건이 었다. 한 노파는 넓적다리뼈가 골절되어 사망했다. 한 어린아이는 두개골이 파열되어 죽었 다. 엑스레이를 찍은 38명 중에 74%가 척추의 골관절염으로 고생했다. 이처럼 높은 골관절 질병 비율은 육체노동을 너무 많이 한 탓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84%가 척추측만을 앓았다. 연구사례들 중 약 2/3에서 성장억제를 알리는 가는 줄이 드러났다.(이것은 그레이의 수치보 다 두 배나 많다.) 아마도 식량기근이 빈번히 발생하여 영양실조가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이집트에서도 발견되는 필라리아증과 같은 기생충 질환(특히 빌하르츠 주혈흡충병)이 관찰 되었다. 전인구집단의 건강상태가 불량했음에도 불구하고, 평균수명(높은 출산사망률을 통계 에 잡지 않을 경우)은 38세였다. 사체는 거의 대부분 미라 처리를 했다. 전체 인간 유골 중 2/5가 미라였고, 대부분의 유골들도 미라 처리의 흔적이 남아 있다. 미라 주변환경이 나빠서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았으며,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미라 처리 솜씨는 좋은 편이었다. 내장 을 들어낸 미라는 별로 없었지만 뇌수를 제거한 것은 아주 흔했다. 연구대상 51개의 두개골 중 33개(65%)는 뇌수가 제거된 상태였다. 미라 처리의 상태가 다양한 것을 보면 헤로도토스 가 말한 세 가지의 미라 처리 방식이 후대에까지도 지켜졌음을 드러낸다. 가장 공을 들인 미라는 신체, 특히 얼굴에 도금을 했다. 미라 처리방식은, 부장품과 마찬가지로, 무덤 속에 묻힌 사람이 생전에 얼마나 부유했는지 를 알려 준다. 미라 연구는 문서에 기록되지 않은 작은 마을 내에서도 신분의 차이가 있었 다는 사실도 알려 준다. 프랑수아즈 뒤낭, 로저 리히텐베르크, 1991년